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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한권으로 읽는 천지 창조의 세계사

by Casey,Riley 2022.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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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권으로 읽는 천지창조의 세계사
오카자키 가츠요

  
        프롤로그
      미켈란젤로가 그린 뱀
  아담과 이브가 금단의 나무 열매를 먹고 에덴의 낙원에서 추방되는 얘기는 기독교적인 역
사 서술에서 보면 인류사의 첫 출발점에 놓여지는 사건이다.
  시스티나 성당에는 미켈란젤로(Buonarroti Michelangelo, 1475~1564)가 그린 '아담과 이브
의 원죄와 낙원 추방'이라는 천장화가 있다.  그 그림에는 뱀의  권유로 사과 열매를  따려
는 장면과 두 사람이 칼을 든 천사들에게 쫓겨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
다.
  이 그림에서 눈에 띄는 것은, 이브에게 열매를 주려는 뱀을 위는 여성의 모습으로 아래는 
뱀의 모습으로 그려놓았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형상을 단순히 예술가에게 허용된 자유로운 
공상의 산물이라고 볼 것인가?
  구약성서 제3장에 기록되어 있는 이  이야기는 원죄라는 기독교적 인간관의 기초가  되는 
사고방식을 기록하고 있는 부분인 만큼, 여러 각도에서 주의 깊게 논의되어왔다. 그  문제의 
하나로 르네상스 시대에는 뱀의 모습에 대해서도 논쟁이 벌어졌다.
  성서에는 두 사람이 죄를 범한 사실을 알고 난 다음에 하나님이 진노하여 나무 열매를 먹
도록 꾄 뱀에 대하여 "배로  기어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창세기 3:14)고  선고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하나님이 벌을 준 결과 뱀이 배로 기어다니는 지금의 모습이  된 것이므로, 이 선고가 있
기 전의 뱀은 지금과는 다른 모습에 움직이는 방법도 지금과는 달랐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이전이나 이후에도 뱀의 모습은  한결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
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에도 서서 걸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서 있
었을까?
  17세기 영국의 유명한 시인  밀턴(John Milton, 1608-1674)은  이브에게 접근하려는 뱀을 
"꼬리 부분을... 몇 겹으로 똬리를 틀고 그 둥근 아랫부분을 땅에 붙이고 선 채로 우뚝 서서 
앞으로 나아갔다. 머리는 높이 쳐들고 눈은 홍옥같이 빛나고 있었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한편, 이브는 아무런 겁도 없이 뱀과  이야기를 하고 있다. 과연 오늘날의 우리라면  뱀을 
보고도 무서워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보다도 이 뱀은 '사람의   말'을 하고 있다. 뱀의 
갈라진 혀를 가지고 '사람의 말'을 할  까닭이 없다. 그래서 이 뱀은 사람이,  특히  이브가 
무서워하지 않는 처녀의 머리를 하고 있다는 주장도 있었다.
  이와 같은 주장은 상당히 오래 전부터 있었으며, 이 책에도 등장하는 영국의 베다가 처음
이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굳이 머리만 처녀일 필요도  없지 않을까? 그래서 어
디까지가 사람이었고 어디까지가 뱀의 모양이었는가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의견이  나오게 
되었다.
  미켈란젤로가 그린 뱀은 이와 같은 여러 의견들 가운데에서  '가장 사람에 가까운 모습을 
한 뱀'을 채용하고 있다. 그가 그린 뱀의 모습은 그  나름대로 성서에 기초를 둔, 다만 르네
상스 시대의 논쟁을 의식한 표현이었다는 결론이 내려지는 것이다.
  
      성서에 기초를 둔 세계사의 서술, 보편사
  성서의 서술에 기초하여 씌여진 세계사는 '보편사'라고 불린다. 이 책의 테마는 이 보편사
의 변천을 살펴보는 데에 있다.
  보편사는 그것이 기독교적 역사인 이상, 당연히 성서에 나오는  모든 말씀이 결정적인 역
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변함없는 말씀을 근거로 한다 하더라도, 앞에서 말한  뱀의 모습을 둘러싼 논쟁과 
마찬가지로 실제로는 다양한 의견들이 형성되었다. 그것은 성서의 말씀들이 각 시대 사람들
의 문제의식이라는 필터를 통해서 해석되는 데에 연유한다.
  미켈란젤로의 천장화를 포함한 시스티나 성당(Sistine  Chapel, 바티칸 궁궐에 있는  성당, 
교황 식스투스 4세를 위해 지오바니  데 돌치가 1473년에서 1481년에 걸쳐  건축)의 그림은 
천지창조에서 시작하여 최후의 심판까지를 그리고 있으며, 보편사를 시각화한 것이다.  그러
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르네상스 시대에 있어서의 보편사의 시각화라는 시대적 특징을  지니
고 있다.
  보편사의 역사는 기독교가 성립된 고대 로마  시대에서 비롯된다. 여기에서 성립된 '고대
적 보편사'를 중세 세계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고대적   보편사'의 
기본구조는 그대로 계승하면서도 다시 이론적으로 확장되어 '중세적 보편사'가 형성된다. 그
러나 중세적 보편사는 르네상스, 종교 개혁, 대항해 시대와 과학 혁명 시대의  틈바구니에서  
차차 위기에 처해진다. 그리하여 계몽주의 시대인 18세기에 마침내  역사적 생명을 잃게 된
다.
  이 책에서는 이와 같은 보편사의 역사를, 특히 각 시대마다의  '세계'의 내용,  시간 측정
법(연호), 성서의 해석과 그 위치의 변화 등에 주의하면서 살펴보고자 한다.
  
        제1장 보편사의 성립
      성서가 묘사하는 인류사
    성서의 구성
  보편사는 기독교 성서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각 시대마다 그  시대 특유의 해석이 
이루어지며, 경우에 따라서는 성서를 크게 고쳐 읽은 다음에 기술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 책
의 출발점으로서 성서에 묘사된 인류사를 정리해두고자 한다.
  기독교의 구약성서는 '모세 5경', '역사서', '문학서', '예언서'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구약성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모세 5경'이다.
  '모세 5경'은 구약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창세기Genesis>, <출애굽기Exodus>, <레위기
Leviticus>, <민수기Numbers>, <신명기Deuteronomy> 다섯 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역사서'는 프로테스탄트Protestant에서는 여호수아Joshua에서  에스겔Ezekiel까지의 12편
을 말하며, 카톨릭에서는 여기에 네 편이  더해진다. 이들 여러 성서가 그려내는 것은  모세
Moses 사후 히브리인의 역사이다.
  보편사에서는 이 부분이 근간을 이루고 있으며, 세부에 이르기까지 커다란 역할을 해냈다. 
'문학서'는 <시편Psalms> 제90편의 '모세의 기도'  이외에는 보편사와  그다지 깊은  관계
가 없다. 마지막 예언서 가운데에는 <다니엘서Daniel>가 매우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신약성서는 네 편의 복음서와 역사서, 편지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히 보편사에 깊은  영
향을 미친 것은 편지들  가운데 채록되어 있는 <요한계시록The  Revelation of Saint John 
the Divine>이다.
  이와 같은 여러 책을 통해볼 때 기독교의 성서에는 어떠한 인류사가 서술되어 있는가? 성
서는 인류사를 크게 3기로 나누어 서술했다고 말할 수 있다.
  제1기는 아담에서부터 노아의 홍수까지이다.
  제2기에서 인류는 여덟 명의 인간으로 재출발한다. "노아와 그의 아들인 셈Shem, 함Ham, 
야벳Japheth, 노아의 아내, 그리고 세 아들의 아내들도 방주로 들어갔다"(창세기  6:13)고 되
어 있기 때문이다. 이 제2기는 유대왕국의 멸망으로 끝이 난다.
  제3기는 유대왕국을 멸망시킨 칼데아Chaldea인들의 제국인  제1왕국에서 최후의 '4세계제
국'까지이다. 4세계제국이 멸망할 때에는 인류사도 역시 종말을  맞는다고 되어 있기  때문
이다.
  
    인류사의 제1기 - 노아의 홍수까지
  미켈란젤로도 그림으로 묘사하고 있듯이 구약성서에는 아담과 이브가 낙원에서  추방당한 
것을 지상에서의 인류 역사가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창세기>에는 아담의 두 아들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카인이 아벨을 살해한 다음 에
덴의 동쪽에 있는 놋Nod으로 이주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카인의 자손들 가운데 라멕Lamech은 보편사에서 반드시 언급되는  인물이다. 두 명의 아
내를 취한 그는(창세기 4:19) 일부다처제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또한 그의 두 아내가 낳은 자식들에 의하여 인류는 목축, 야금술, 예술, 수공업 등 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기예들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라멕의 자손만이 문명의 출발점이라고 말
하는 셈이다.
  결국 기독교의 구약성서는 문명을 일원적 발생론으로 보고 있다.
  한편 아담은 아벨이 죽음을 당한 후인 130세 때 다시 셋Seth이라는 아들을 낳았으며, 930
세에 죽는다. 셋은 105세에 에노스Enos를 낳았고 912세에  죽었다. 창세기에는 그후에도 아
담의 계보가 똑같이 서술되어 아담의 제10대손으로 노아가 태어나게 된다(창세기 5:29).
  그들은 지금의 서양인들과 마찬가지로 만으로 나이를 세었는데,  모두 900세 전후의 장수
를 누렸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가장 오래 산 사람은 므두셀라Methuselah로 969년을 살았
다고 되어 있다.
  창세기에는 노아의 홍수가 천지창조 후 몇 년, 몇 월, 며칠에 일어났는지 자세하게 기록되
어 있다. "노아가 600세 되던 해의 2월, 즉 두 번째 달의 17일"(창세기 7:11)이다.
  한편 아담이 130세 때 셋이 태어났다고 되어 있는데, 그것은 당연히 천지창조로부터 세어
도 130년 후가 된다.
  셋 이후의 자손에 대해서도 모두 출생 때 부모의 나이가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것을 노아
가 태어났을 때가지 계산하고, 여기에 앞서 말한 600이라는 숫자를 더하면 된다.
  그 결과는 1656이라는 수가 나온다. 즉 성서에서는 천지창조  후 1656년에 노아의 홍수가 
났다고 말하고 있다.
  
    제2기 - 유대왕국의 멸망까지
  제2기는 '모세5경' 이외에 여호수아 이후의 '역사서'에 서술되어 있다.
  처음에 나오는 것은 여러 민족의 계보에 관한 설명이다.  창세기 제10장에는 노아의 아들 
셈, 함, 야벳의 자손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다. 또한 제11장에는 아브라함에까지 이르는 셈
의 직계 자손들이 자세한 탄생 연도와 함께 기록되어  있어서, 노아에서 아브라함에 이르기
까지의 연수 계산이 가능하다.
  '민족표'는 기원전 600년경에 성립된 것으로, 당시의 유대인들이 알아낸 세계 여러 민족을 
설명한 것이다.
  '민족표'에 나와 있는 사람들의  이름 가운데에서 셈의 자손으로는  아시리아인의 조상인 
아수르Asshur와 바벨탑 사건 당시의 직계  자손인 벨렉Peleg, 함의 자손으로는  이집트인들
의 조상이 된 미즈라임Mizraim, 군주가 된  사상 최초의 인물이자 바벨탑을 세운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 님롯Nimrod 등이 보편사에서 반드시 등장하는 인물이다.
  이 민족표에 관해 성서는 "이들에게서 땅의 열국 백성이 나뉘었더라"(창세기  10:32)고 말
하고, 제11장에서 바벨탑 사건과 여러 언어의 성립, 여러 민족들이 세계로 흩어지게 된 이유
에 관한 서술을 계속하고 있다.  셈의 자손들은 아시아로, 함의  자손들은 아프리카로, 야벳
Japheth의 자손들은 유럽과 북아시아로 퍼져나가 여러 민족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창세기는 인류사의 초기에 대한  서술을 제11장에서 마치고,  제12장부터는 히브리인들의 
조상이 되는 아브라함Abram, 이삭Isaac, 야곱Jacob  이 세 사람의 족장을 둘러싼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야곱은 얍복Jabbok 나루에서 하나님과 씨름을  하여 이김으로써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창세기 23:22-23). 이어서 야곱의 열두 아들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의 아들 중 하나인 요셉Joseph이 이집트로 팔려가서 마침내  국왕(파라오)의 총리가 되
는 이야기, 이집트로 이주하는 이스라엘(야곱) 일가와 요셉의 죽음에 이르기까지가 서술되어 
있다.
  모세에게 인도된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탈출한 다음, 이들은 40년 동안 아라비아의 
사막을 방황한다. 그 동안에 이들에게 주어진 '십계명'을  비롯한 갖가지 율법들이 출애굽기 
이후의 여러 구약성서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그리고 모세가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눈앞
에 두고 네보산에서 120년의 생애를 마치는 데에서 '모세 5경'은 끝이 난다.
  오늘날 '역사서'로 분류되고 있는 여러 성서에서 묘사한 것은 가나안 땅으로 침입해 들어
간 이스라엘 민족의 왕국 건설, 다윗과 솔로몬의 전성시대,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왕국과  유
대왕국으로의 분열, 아시리아에 의한 이스라엘의 멸망과 칼데아에 의한 유대왕국의 멸망 등
이다.
  그 동안 히브리인(이스라엘 민족)  중심의 이야기 가운데에서 이집트와  아시리아에 대한 
서술이 이루어졌으며, 이들을 통해  당시의 '세계'에 대한   묘사가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
다. 단, 구약성서에서 아시리아는 아수르 이후 공백이 있으며, 그  이후 푸르(티글라트 필레
세르 3세, 기원전 8세기 중반) 시대부터 다시 등장한다.
  이 공백을 포함하여 아시리아의 역사를 어떻게 설명하는가는 후세의 역사가들을 괴롭히는 
커다란 문제가 되므로 앞으로 자주 언급하게 될 것이다.
  
    제3기 - 4세계제국의 시대
  인류사 제3기의 골격이 되는 것은 <다니엘서>에  근거를 둔 '4세계제국론'이다. 칼데아의 
왕이었던 느부갓네살Nebuchadnezzar이 꾼 꿈을 선지자 다니엘이 해몽했다는 이야기가 나오
는데, 이것이 '4세계제국론'의 근거가 되고 있다.
  왕이 꾼 꿈에는 각기 다른 소재로  이루어진 거대한 인물 조각이 나타난다. 머리는  순금, 
가슴과 팔은 은, 배와 넓적다리는 놋, 무릎 아래는 철이고, 발은 일부는 철, 일부는 진흙이었
다(무릎 아래와 발은 제4의 부분).
  그러고는 사람의 손에 의하지 않은 뜨인 돌이 나타나서 이  조각의 발을 친다. 그러자 이 
조각 전체가 박살이 나서 땅에 흩어지는 한편, 돌은 커다란  산이 되어 온 땅으로 퍼져나갔
다고 하다.
  왕이 숨기고 있던 이 꿈의 내용을 알아맞혔을 뿐만 아니라, 해몽까지 한 사람이 다니엘이
었다. 그는 머리는 느부갓네살의 칼데아왕국이고, 이어 각 부분에 해당하는 세 개의  나라가 
일어나는데, 제4의 제국은 이 세상 최후의 제국이 된다고 했다. 돌이 상징하는 것은  하나님
의 나라이고 이것이 영원히 계속되는 나라가 된다는 것이 꿈의 참된 뜻이라고 풀었다.
  같은 성서의 제7장에서도 독수리의 날개를 가진 사자, 곰, 머리와 날개를 각기 네 개씩 가
진 표범에 이어 제4의 짐승이 나타났는데 그 짐승에게 눈과 입이 달린 열한 번째 뿔이 돋아
났다고 한다.
  이어지는 제8장에서는 뿔이 두 개인 숫양을 한 개의 돋보이는 뿔을 가진 숫염소가 쓰러뜨
리는 환상이 서술되어 있다. 숫염소의 뿔은  숫양을 쓰러뜨린 뒤에는 곧 부러지고, 네  개의 
뿔이 새로 돋아났다고 한다. 그리고 그 네 개의 뿔  가운데 하나에서 '작은 뿔'이 돋아 자라
서 '하늘의 군대와 별 중의 몇'을 짓밟고 '그 성소를 헐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환상의 의미에 대해서  "두 개의 뿔을 가진 숫양은  곧 메데와 바사 왕들이요, 
털이 많은 숫염소는 곧 헬라-그리스-왕이요(다니엘서 8:20-21)"라고 그 의미를 해설하고 있
다.
  이 해설과 앞의 제2장을 합하면, 제1의  세계제국은 칼데아(신바빌로니아)이며, 이어서 메
데Mede와 바사Parthia(곧 페르시아)로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처음 한 개의 뿔을 가진 숫염
소란 알렉산더인데, 앞에서 말한 거대한 조각에서는 종아리의 철 부분에 해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에 이어지는 네 개의 뿔은 철과 진흙 부분에 해당하며 이것은 알렉산더 대왕 이
후 분열된 그리스인의 여러 나라를 가리킨다.
  즉 '제4의 나라'란 그리스인의 제국이며,  이 예언은 '헬레니즘제국' 다음에  종말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약속하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오늘날 이 예언서, 즉 <다니엘서>는 기원전 166년에 씌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 
유대인들은 여기에서 열한 개째의 뿔-작은 뿔-로  표현되어 있는 셀레우코스 왕조Seleucus 
Kingdom의 안티옥스 4세Epiphanes Antiochus 4에 의해 예루살렘  신전이 더렵혀지고 심한 
종교 탄압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었다. <다니엘서>는 이  와중에서 유대인들의 신앙을 고무
시키기 위해 씌어진 계시문학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따르면 구약성서는 결국 지상에서의 제4제국을 그리스인의 제국이라고 하는  셈이지
만, 현실의 역사는 그리스인의 제국으로 끝나지는 않았다. 그후 로마제국이 성립되어 유대인
들도 그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한편으로 기독교가 성립된다.
  그 기독교인들이 제4제국론을 어떻게 해석하는지는 다음에 보기로 하자.
  
    '종말'과 <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은 후세 인류의 역사관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여기에서는 일곱 개의 봉
함이 차례로 뜯기고, 일곱 번째 봉함이  뜯긴 뒤에는 천사들이 차례로 나팔을 분다.  그리고 
그때마다 놀라운 천재지변이 일어나고 세계가 한걸음 한걸음 종말로 다가가는 것이다.
  이러는 동안에 상징적인 '여자'와 <다니엘서>의 '제4의 짐승'을 닮은 짐승이 세 번 등장
한다. '태양을 입고 발 밑에 달을 밟고  있으며, 그 머리에 열두 개 별의 관을   쓰고 있는' 
여자와 이것을 공격하는 일곱 개의 머리와 열 개의 뿔을 가진  붉은 용, 이어서 열 개의 뿔
과 일곱 개의 머리를 가진 짐승과 두 개의 뿔을 가진 짐승(13, 14장).
  마지막에는 '대음부 the great whore'를 태운 열 개의 뿔을 가진 붉은 짐승이다(17장). 그
리고 일곱 번째 나팔이 울렸을 때,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된다.
  대음부와 붉은 짐승이 멸망하여  재림하신 그리스도의 나라인  '천년왕국'이 실현되고, 그 
뒤 최후의 심판이 이루어져서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는 것이다.
  이 책은   1세기 말에  도미티아누스  황제(Caesar  Domitianus Augustus,   원명 Titus 
Flavius Domitianus, AD 51-96)의 탄압 하에서 씌어진 계시문학으로서, 로마의 멸망과 인류
의 종말을 겹치게 하면서 재림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열렬한 희구를 나타내고 있다.
  그렇지만 여기에 등장하는 '여자'나 '짐승'들은  과연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보편사와 
관련된 해석에 관해서는 뉴턴을 다루는 데서 그 예를 찾아보기로 한다.
  <요한계시록>이 묘사하고 있는 인류의 종말에 이르는 과정은 보편사뿐만 아니라  유럽인
들의 예술이나 사상, 그리고 행동 등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베아투스Beatus 
사본의 삽화나 뒤러의 '묵시록' 판화 등이다.
  또한 이것은 중세 말기 이후의 '천년왕국 운동Millennialism'의 확실한 근거가 되었다.
  카톨릭 정통파는 '천년왕국'은 카톨릭 교회가 성립된 이후의  시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
석했다. 그러나 문장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머지않아 재림 예수가 나타나면서  가까운  
장래에 '천년왕국'이 실현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이것을 세상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다양한 운동이 발생했던 것이다(이 운동은 오늘
날까지도 일부 프로테스탄트의 종파들, 예수 재림론자들이나  여호와의 증인 등에게 계승되
어 오고 있다.)
  봉함이 뜯어지고 나팔이 울려 퍼질 때마다  일어난다고 하는 천재지변에 대한 언급도  이 
세상에서 커다란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사람들에게  기억되어, 유럽인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1755년에 있었던 에스파냐 리스본의 대지진, 핼리혜성의 출현, 1986년 러시아  체르노빌의 
원자로 사고 등이 좋은 예이다. 체르노빌이  '아르셈(쑥,  wormwood의 일종)'을 뜻하는 말
이라는 것을 알게 된 유럽인들 중에는 세상의 종말이 가까워진 것으로 생각한 사람들이 많
았다고 한다.
  그것은 제3의 나팔이 울리면 하늘에서 별이 떨어지면서 물의 3분의 1을 쓰게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별 이름은  쑥이라(요한계시록 8:11)"고 서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서의 종류
  지금까지 보편사는 성서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 성서는 한 종류만이 아
니었다. 게다가 이와 같은 일은 앞으로의 보편사의 전개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여기에서 문제로 사고 있는  것은 구약성서인데, 그 중에서도  원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었다. 히브리어 성서,  그리스어 성서, 그리고 사마리탄판 성
서라고 불리는 것들이 그것이다.
  히브리어 성서는 그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원전이다. 기원전 5-4세기에 성립된 것으로 알
려져 있으며, 앞에서 노아의 홍수에 대한 연대 계산을 한  것도 사실 히브리어 원전에 의한 
수치이다.
  그리스어 성서는 기원전 3세기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2세(Ptolemy Philadelphus,  BC 
308-246, 재위 BC 286-246)의 부탁을 받아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이다.  번역한 사람들의 수
가 70명이라 '70인역 성서'라고도 불린다.
  신약성서의 원전은 그리스어로 기록되었다. 로마 시대의 기독교인들은 신약성서뿐만 아니
라 구약성서도 그리스어로 번역된 성서를 사용했다.
  사마리탄판 성서(사미리아 5경)는 기원전 2세기에서 1세기 사이에  성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사마리아인'들이라고 불렸던 유대교의 한 그룹이 전한 것이다.
  참고로 라틴어로 번역된 성서(우르가타라고도 불림)인 카톨릭 교회의 정전은 AD 382년에
서 406년에 성립되었다. 나중에 이 책에서도 다루게 되는 유세비우스Dusebius와 히에로니무
스(Hieronymus, 성 제롬, 347-419/420)가 히브리어, 그리스어 등의 원전을 라틴어로  번역한 
것이다.
  히에로니무스는 히브리어 원전만 번역하자고 주장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실제로는 그렇
게 되지 않았다. 70인역 성서의 일부와 오늘날에는 '외전'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도 번역에 
포함되어 있었다.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에서 구약성서를 구성하는  여러 성경의 숫자가 다
른 것도 그 때문이다.
  '우르가타'가 완전히 보급된 것은 겨우 8세기에서 9세기 사이의 일이며,  그 뒤에도 '우르
가타'의 내용에 관한 논쟁이  계속되었다. 오늘날과 같은 모습이  된  것은 이탈리아의  트
렌트Trent에서 있었던 종교회의(1545-1563)에서 1546년에 결정된 것이다.
  보편사의 커다란 골격과 내용에 관해서 말한다면, 기본을 이루고  있는 성서에는 다른 점
이 없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큰 테두리와 중요한 내용에 대해서만 한정된다.  세사한 
자구나 특히 보편사에 있어서의 연호 계산에서는 커다란 차이점을 갖는다.
  족장들의 나이 등에까지 시야를 넓힌다면, 이 성서들 가운데에서도  서로 다른 점들이 많
이 발견된다. 이와 같은 일은 이 책 전체의 테마에 관계되는 문제이기도 하여, 앞으로  여러 
측면에서 소개도 하고 검토도 해보려고 한다.
  
      기독교 연대학과 보편사의 성립
    기독교의 성립
  로마 제정을 개시한 아우구스투스 황제(Octavius Augustus, 재위 BC 27-AD  14)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났고  제2대  티베리우스  황제(Tiberius  Caesar  Augustus,  원명 
Tiberius Claudius Nero, BC 42-AD 37, 재위 BC 14-AD 37) 시대에 기독교가 성립되었다. 
이후 기독교는 점차 그 세력을 제국 전역으로 넓혀나간다.
  그러나 그 확대의 시대는 64년의  네로 황제(Nero Claudius Caesar Drusus  Germanicus, 
37-68, 재위 54-68)에  의한 제1차  박해를 시작으로  303-304년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Gaius Aurelius Valerius Diocletianus, 245-316, 재위  284-305)에 의한 최후의 대박해까지 
긴 박해의 시대이기도 하였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Flavius Valerius Constantinus, 280?-337, 재위 306-337)의 기독
교 공인은 기독교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그 결과가 392년의 테오도시우스  황제(Flavius 
Theodosius, 347-395, 재위 379-395)에 의한 기독교의 로마 국교화이다.
  이 직후인 395년 로마제국은 분열되었고,  476년 서로마제국은 멸망하고 만다. 그러나  이 
사이에 로마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교회 조직을 정비한 카톨릭 교회는 사회 속에 확고한 지
위를 축조함으로써, 중세에 있어서의 지배적인 지위의 기초를 확립하게 되는 것이다.
  이 박해 시대에는 '교부'라고 불리는 기독교 지도자들이  나타난다. 이들은 기독교의 교리
를 정비하고 박해자들이었던 로마인들에 대하여 기독교를 변호하는 호교 활동을 했다. 이같
은 교부들의 논쟁을 집대성한 사람은 교부 중 한 사람인 성 아우구스티누스(Saint Aurelius 
Augustinus, 354-430)였다.
  로마 시대에는 그들의 지배하에 있던 유대인들 역시 박해를 받아 두 차례의 대반란을 일
으켰다. 135년   오현제 가운데   하나인 하드리아누스  황제(Caesar  Traianus  Hadrianus 
Augustus, 76-138, 재위 117-138)에 의해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이를 어기는 유대인들은 사형을 당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고국을 떠나 20세기까지 계속
되는 방황, 이른바 '디아스포라Diaspora'의 시대로 들어간다.
  성서에 의해 인류사를 서술하려는 성서 연대학은 이처럼 박해를 당하고 있던  유대인들에
게서 비롯되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요세푸스(Flavius   Josepus, 원명   Joseph Ben 
Matthias, 37-100)였다. 앞에서 보았듯 노아의 홍수나 아브라함의 탄생과 같은  천지창조 이
후의 연수는 구약성서를 토대로 계산이 된다.
  그는 로마의 역사를 성서 연대학에 끼워넣어 로마인들의 역사도 구약성서에 의해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유대교의 하나님 섭리에 로마제국도 들어가 있음을 논리적으로 
증명함으로써,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를 중지하라고 호소했던 것이다.
  박해를 당하고 있던  기독교인들 또한 이들과  같은 전술을  채택했다. '기독교 연대학의  
 

버지'로 불리는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Sextus Julius Africanus,  180-250)가 처음으로  시
도한 사람이다.
  이미 요세푸스 같은 유대인들은 '세계의 해에Anno Mundi,  AM'라는 말을  숫자에 붙여
서 연호를 나타내고 있었다. 이것은 천지창조를 기원으로 하고 있어 '창세 기원' 또는   '세
계 연대'라고도  불린다.   아프리카누스는  이러한    유대인들의  연구를   계승하면서  
'연대지Chronographiai'를 썼다. 그는 '아담으로부터ab Adam'라는 연호를  사용하면서 기독
교인으로서는 최초로 연대 연구를 했다.
  이와 같은 일은 결국 그를 보편사 서술의 출발점에 서게 하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의 저작은 인용이라는 형식을 통해 단편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아프리카누스와 공통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연대학을 발전시킨 학자는  유세비우
스이다. 유세비우스를 통해 기독교 연대학과 보편사의 발자취를 알아보기로 한다.
  
    유세비우스와 히에로니무스
  로마 시대의 기독교 연대학 가운데 서유럽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교회사의 아버지
'인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rea 또는 Eusebius Pamphili, 263경-339)와 성 제롬으로 알
려진 히에로니무스(331경-420)의 연대학이다.
  유세비우스는 그리스어로 '연대기, Chronicle'을 썼으나 원전은 망실되었다. 오늘날 전해지
는 것은 아르메니아어Armenian로 번역된 것과 라틴어 번역판이다. 히에로니무스는 당시 교
황의 요청으로 카톨릭 교회의 정전인 라틴어 성서를 집대성한 학자이기도 하다.
  아르메니아어역에 의하면, 유세비우스의 '연대기'는 2부로 구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1
부는 '칼데아인', '히브리인', '이집트인',  '그리스인', '로마인' 등의 항목에  각각의 역사와 
성서의 역사 서술이 비교되어 있다. 제2부는 '캐논Canon'이란 제목으로, 창세 기원을  토대
로 한 '아브라함 기원ab Abraham'의 연호가 시간의 척도로  채용되고  있다. 그리고 제1부
에서 다루어진 각 민족과 여러 국가의 병존 관계를 1년씩 상세한 연표로 정리했다.
  히에로니무스는 이 연표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가필하면서 번역했던 것이다. 서유럽에서는 
이와 같은 히에로니무스의 연표가 퍼졌고 중세를 통하여 기독교적 연대학의 기초로  되어갔
다.
  표3은 '캐논'을 요약한 것이다. 이 표에 나와 있는 연호 가운데 창세 기원, 아브라함 기원, 
올림피아드Olympiad 기원의 세 종류는 유세비우스가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BC란  연호는 
편의상 필자가 덧붙인 것이므로 이 점에 주의하기를 바란다.  이것을 보면 유세비우스가 묘
사하고 있는 인류의 역사는 오늘날의 그것과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첫째, 시간적인 골격이 천지창조로부터 고려되고 있다. 노아의  홍수가 2242년, 예수 그리
스도의 탄생이 5199년에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둘째, 세계사를 구성하는 요소가 오늘날의 것과 크게 다르다. 히브리인의 역사가 연호  산
정과 구체적인 서술의 기둥이 되는 것은, 그것이 구약성서에  기초하는 역사이기 때문에 이
해가 간다.
  그러나 아시리아의 역사나 그리스의 역사 등에서는 오늘날의 역사책에서는 전혀 볼 수 없
는 사람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다. 이 옛 시대에 관해서는 큰 문제가 있다고 여겨진다.
  
    칼데아인의 연원 문제
  먼저 '칼데아인'의 항목을 검토해보기로 하자. 유세비우스가 맨  처음에 부딪힌 문제는 칼
데아인(바빌로니아인)들의 역사가 얼마나 오래되었는가 하는 점이었다.
  문제의 판단이 된 것은  기원전 3세기 초에 바빌론의  신 말듀크의 신관이었던 베르소스
(Berosos 또는 Berosus)가 바빌로니아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그리스어로 집필한 세 권의 책
들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215만 년 전에  하늘과 바다가 분리되었다고 했으며,  반인반어의 몸을 한 
오아네스Oannes와 다른 신들이 그들의 문명을 연  이후, 인류 최초의 왕조는 아로루스로부
터 제10대인 시수트로스 왕(Xisuthros 또는 Ziusudra)에 이르기까지의 왕조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시수트로스 왕의 시대에 커다란 홍수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이 왕조의 존속 기간
이 120사르스(43만 2천 년) 동안이었다는 것  등을 기록해놓았던 것이다(1992년간 브리태니
커 백과사전 영문판 23권 p862-867에 의하면 베로소스가 18사르스, 즉 6만 4천8백년 또는 7
만 2천 년으로 기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역자 주).
  유세비우스는 이 방대한 연수에 대해서는 베로소스가  칼데아인들이 사용했던 단위인 '사
르스Sars'의 환산을 잘못한 것이라고 하여 상대를 하지 않았다.
  한편, 베로소스가 전하는 큰 홍수 이야기는 시수트로스 왕에게  한 신의 예고, 배의 건조, 
그의 가족과 동물들의 승선, 그리고 홍수가 멎었는가를 살펴보기 위해  새를 날린 일 등 노
아의 홍수 이야기와 그 구조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왕은 노아와 마찬가지로 
제10대째였다.
  유세비우스는 '시수트로스는 히브리인들이 노아라고 부른 인물과  같은 사람'이라고 결론
지었다. 그리고 칼데아인들이 주장하는 역사의 연원은  아담으로부터 노아의 홍수에 이르는 
시대를 칼데아인들이 나름대로 옳지 못하게 서술한  데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
었다.
  오늘날의 우리들이 본다면 오히려 바빌로니아인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홍수 설화 쪽이  훨
씬 더 오래된 것이며, 따라서 그 논의는 뒤바뀐 것이다.
  그러나 유세비우스에게는 칼데아인들의 전설이 오히려 구약성서에 의한 역사의  진실성을 
보여주는 유력한 무기로 사용되고 있다.
  
    아시리아의 문제
  큰 홍수 이후 칼데아인의 역사에서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아시리아Assyria이다. 유세
비우스의 아시리아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아시리아의 문제에  대해 설명해두기로 하자. 그것
은 간단히 말하자면 고대 그리스인이나 로마인들이 믿고 있던 아시리아와 기독교의  구약성
서에 나오는 아시리아를 어떻게 종합적으로 자리매김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성서에서는 그 조상으로서 아수르의  이름이 드러난 후 푸르Pur에 이르
기까지 공백이 있으며, 그  다음에는 오늘날의 우리가 보더라도  정확한 아시리아의 역사가 
서술되어 있다.
  이에 대해 고대의 그리스인들이나 로마인들은  성서가 전하는 아시리아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그들이 알고 있었던 것은 그리스의 역사가인 크테시아스(Ctesias, BC 405-359)
나 헤로도토스(Herodotus, BC 484?-425),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로마 역사가인  폼페이우스
Pompeius, 트록스 등이 전하는 아시리아에 대해서였다.
  거기에는 인도를 제외한 아시아를 지배하던 초대의 니누스Ninus에서 시작하여, 그의 아내
이면서  인도에까지  쳐들어갔고  또한  수도  바빌론을  건설한  제2대  여왕  세미라미스
Semiramis에 관한 이야기 등 갖가지 설화로 채색된 여러 왕들이 등장하고 있다.
  오늘날 이 전설은 부분적인 사실에 상상이 가미되어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기
도 하다. 그리고 이 아시리아는 들라크루아의 명화로도 유명한 사르다나팔루스Sardanapalus
가 왕궁에 불을 지르게 함으로써 멸망할 때까지 약 1천3백 년간이나 존속한 것으로 전해지
고 있었다.
  그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그러면서도 인도에서 아프리카까지를 지배한 세계제국이었
다. 그리고 유세비우스가 칼데아인 역사의 첫머리에 올려놓고 있는 아시리아는 실제로는 로
마인들이 믿고 있었던 이 아시리아였던 것이다.
  '칼데아인의 역사'에서 유세비우스가 아시리아 다음에 두고 있는  것은 역시 고대 로마인
들과 마찬가지로 메디아(또는 메데)이다. 아시리아를  멸망시킨 것은 알바케스이지만, "그는 
이렇게도 장기간에 걸친 아시리아인의 지배권을 메디아로 옮겼다."라고 한다.
  메디아인들이 아시리아의 패권을 계승하고 다른 나라들은  이에 종속되었다는 것이다. 그
리고 그는 세계의 지배권이 298년간 메디아에 의해 유지된 이후, 키루스에 의해 페르시아로 
계승되어, 알렉산더 대왕에게 멸망될 때까지 세계를 지배한 것으로 생각했다.
  여기에서는 기원전 8세기 중엽,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Tiglath pileser 3 시대에 일어나 기
원전 612년에 멸망한 고대의 세계 제국 아시리아가 완전히 빠져 있다. 그리고 몇 번이나 말
했듯이 열왕기 하(제15장)에 나오는 푸르야말로 진정으로 이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가 분명
하다. 유세비우스는 이와 같은 아시리아를 무시하고 있다.
  유세비우스는 왜 성서에 나오는 아시리아를 무시한 것일까?  이에 대해 추리를 해본다면, 
그는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 이후의 아시리아를 최초의  아시리아와는 다른, 메디아에 종속
된 소왕국으로 생각했던 것이라고 보는 수밖에 없다. 연대적으로 본다면, 이 새로운  아시리
아도 다시 유대왕국을 멸망시킨 느부갓네살의 칼데아(신바빌로니아)와  함께 메디아가 패권
을 장악하고 있었던 기간 안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제1의 세계제국을  칼데아로 명기하고 있는 구약성서의  내용에 위배된다. 
왜 이와 같은 일이 행해졌을까? 그에 관해서는 유세비우스의 아시리아론을 승계한 아우구스
티누스 장에서 생각해보기로 하자.
  
    이집트 역사의 연원 문제
  '이집트인'의 항목에서 유세비우스가 봉착하고 있는  것도 이집트 역사의 '연원'을  기독
교 성서가 보여주는 시간적 테두리 안에 모순 없이 수용해야 한다는 문제였다.
  그의 연대학에 따르면 노아의 홍수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까지는 2957년이 걸린다. 
칼데아인과 같이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이집트의 역사를 구약성서의 역사적 테두리 안에 잘 
짜맞출 수만 있다면 구약성서가 보여주는 시간을 넘어서서 존재하는 인류의 역사는  존재하
지 않게 된다. 거꾸로 말하면 기독교의 성서야말로 모든  인류의 역사를 포괄하는 보편사를 
제시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마네토Manetho of  Sebennytos였다. 마네토는 기원전 
3세기 초엽에 히네로폴리스 신전의 고관을 지냈던  이집트 사람으로서, 프톨레마이오스 2세
(혹은 1세)의 명령에 따라 그리이스어로 된 '이집트지Aegyptiaca'를 저술하였다.
  '이집트지'는 이집트 역사의 시작에서 알렉산더 대왕의 이집트 정복에 이르기까지 이집트 
31왕조에 대해 서술되어 있다. 오늘날 고대 왕국, 중기  왕국, 신왕국이라고 하는 이집트 역
사의 시대구분이 마네토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마네토에 따르면, 이집트에는 신들과 죽은 자의 영혼들과 반신들이 지배했던 시대가 있었
다. 신들이 통치한 시대가 1만 3천9백 년간, 그리고 반신들과 죽은 자의 영혼이 지배했던 시
대가 약 1만 1천 년간  있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 인간들이  통치하는 시대가 메네스로부터 
시작된다.
  마네토는 메네스 이후 31개 왕조가 그 숫자가 표시하는 순서대로 이집트 전 영토를 통치
한 것으로 보았으며, 왕의 명칭, 수도의 위치, 왕조의 존속 연수를 갖추어서 서술하고  있다. 
그 수치의 합계는 5268년 8개월이 된다. 이것이 알렉산더 대왕이 이집트를 정복하고 페르시
아의 세계 지배권을 빼앗은 기원전 331년까지의 연수이다.
  유세비우스의 계산대로 예수 탄생이 창세기로부터 5199년이  지난 뒤의 일이라면, 마네토
가 말하는 메네스는 이보다도 오래되었음을 의미하는 셈이다. 즉 그는 기독교 구약성서에서 
기술하고 있는 천지창조보다 4백 년 이상 앞선 시기에 이집트를 통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집트인들은 메네스에 의한 인간의 통치 시대 이전에,  보다 장기간에 걸친 신들
과 반신, 그리고 영혼들에 의한 통치 시대를 두고 있었던 것이다.
  유세비우스는 이러한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이집트인의 달력이 과거 마네토 시대의  것과 
다르다고 추정한다. 신들의 시대라고 칭하는  시대에는 '우리가  한 달이라고 부르는  기간
을 한 해로서 사용했었고' 반신 이후의 시대는 3개월을 일 년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신들이 지배한 기간과 반신들과 죽은 자의 영혼들이 지배하는 기간을 이 기
준에 의하여 태양년으로 환산을 하면, 합계 2206년이라는 수치를 얻게 되다. 이 수치는 창세 
기원에 의한 대홍수가 있기까지의 기간인 2242년보다 적다.
  따라서 그는 이 두 개의 시대는 바빌로니아인들과 마찬가지로 이집트인들이 노아의  홍수 
이전 시대를 변형하여 전한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결국 유세비우스는 성서에 있는 대로 미
즈라임이야말로 이집트인들의 조상이라고 해석했던 것이다.
  신들과 죽은 자의 영혼들, 그리고 반신들에 의한 통치  기간이 유세비우스가 주장하는 대
로였다고 하자. 만약 이 '해결 방식'이 옳은 것이라 하더라도,  아직도 여전히 남아 있는 메
네스 이후의 기간 초과분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앞에서 말했듯이 유세비우스가  주장하
는 노아로부터 예수에 이르기까지 2957년간에 비해  마네토가 기술하고 있는 기간은  2천6
백여 년이 길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관해 그는 "그래도 오히려 연수가 남아돌아간다면, 아마도 당시에는 몇몇 왕들
이 동시에 통치하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31개의  왕조 가운데 몇몇이 
이집트의 세 지역 또는 두 지역에 공존하고 있었다는 식으로 역사를 재편성함으로써 기간의 
단축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유세비우스의 '연대기' 연표에서는 니누스, 아브라함의 시대에  이집트에
는 갑자기 제16왕조가 들어선 것으로 되어 있으며, 이후로는  모든 왕조를 마네토와 마찬가
지로 차례로 배치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전의 시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
다. 다시 말해 마네토의 기술에  따르면, 메네스로부터 제15왕조의 멸망에 이르기까지  이미 
3732년이 경과하고 있는데, 이 기간 계산은  유세비우스에 의한 대홍수에서 아브라함까지의 
기간인 942년과 동떨어진 연수가 되기 때문이다.
  이 모순이 해결되지 않는 한, 이집트인들은 기독교 성서에 등장하는 미즈라임의 자손이라
고 말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유세비우스의 '연대기'에서는 그 논증이 이루어
지지 않고 있다.
  결국 그는 엉성한 형태로 해결책을 제시한 채, 이집트 역사의 연원 문제에 대한 보편사적 
해결을 후세에게 떠넘긴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후세 유럽의 연구가들은 이 문
제 때문에 매우 고민을 하게 된다.
  '그리스인의 역사'에 관해서도 유세비우스의 관심은  고대로 향해져 있었다.  그의  '연대
기'에 따르면, 당시 그리스 최고의 왕국으로 치부되었던 시큐온 왕국 이후의 그리스 역사도 
유대의 아브라함 이후의 연대 속에  자리매김되어 있다. '로마제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
다. 
'연대기'에는 이집트의 역사처럼 문제의 소지를 남겨두고 있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전체로 본다면 그의  '연대기'는 공간적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포함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각 민족이 전하는 태고의  전설적 역사까지를 수록한 포괄적인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하여 그는 기독교 성서가 전하는 역사만이 세계 모든 민족의 역사를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목적은 이와 같은 서술을 통해 고대의 그리스인들이나 로
마인들에 대해 기독교적 세계관의 우월성을 보여주고 그들에게 기독교를 수용하도록 설득하
는 데에 있었던 것이다.
  다음 장에서 보는 바와 마찬가지로  유세비우스의 '연대기'는 히에로니무스의 라틴어판뿐 
아니라 아우구스티누스를 통해, 중세 이후의 유럽에 지속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것
은 유세비우스가 이처럼 포괄적인 보편사를 서술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하나님의 나라'
  고대의 기독교 신학을 완성시킨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Saint Augusine of 
Hippo, AD 354-430)는 396년에서 430년 사망할 때까지 로마령 아프리카  히포의 주교를 지
냈을 뿐만 아니라 고대적 보편사를  완성한 사람이기도 하다. 대표작인 '하나님의  나라The 
City of God'는 로마 시대에 있어 가장 체계적인 보편사를 제시한 기술이기도 하다.
  그는 우선 전체적인 인류의 역사가 지닌 의미를 묻고, 이에 대해 기독교적 해답을 제시하
였다. "하나님은... 시간을 처음으로 만들어내셨고... 그 시간 속에서 인간을 만드셨다. 그러나 
이 일은... 불변하고도 영원한 당신의 의지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하나님의 나라' 제12권 
15장)."
  이 '당신의 의지'란 인간이 원죄를  범하고 죽어야만 하게  된  뒤에 회개하여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평화를 누리기에 합당한 가치를 갖게 될  때까지 하나님이 인간을 인도하
는 일이다. 역사는 인류의 구제를 향하여 나아가는 하나님에 의한   인류 교육의 과정에 불
과하다. 이러한 그의 역사관을 구제사관이라고 한다.
  그는 구제사관의 기본 구조도 만들었다.  인류 구제를 향한 도정을  그는 '하나님의 나라
(천상의 나라)'와 '지상의 나라' 사이의 대립과 항쟁의 과정으로 다룬다.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바탕을 두는 데에 반하여, '지상의 나라'는 인간 자신을 향한 사랑을 
기초로 하며 지배욕, 명예욕, 교만과 같은  인간의 욕심과 욕망에 의해 지배된다고 본  것이
다. 이 두 개의 나라는 모두  하나님께 죄를 지어 낙원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의 자손인 
인간, 즉 태어날 때부터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원죄를 짊어진  존재인 인간의 본질에 기인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인류사의 시작과 동시에 발생한 것이다. 즉,  '지상의 나라'는 아담의 맏아
들이며 동생 아벨을 죽인 카인에서  비롯되었고, '천사의 나라'는 형에게  죽음을 당한 아벨
과 그의 사후에 태어난 셋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이들 이후의 인류사는 두 개의 나라가 '뒤
섞여 존재하는' 상태로 진행한다.
  현실의 역사는 부정적인 가치밖에 생산하지 못하는 '지상의  나라' 가운데에서 이들과 대
립하면서 '이 세상에서 순례의 여행을  계속하는 천상의 나라'가 하나님의  가르침을  이어
받고 발전시켜가는 과정이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시 인류사를 구제라는 목적을 향해 가는 발전의 단계라고 자리매김하
였다. 시대 구분이란 원래 '발전'이라는 관념이 있어야 성립되는  것이지만, 그는 성서를 기
준으로 하여 인류사의 발전을 8개, 실질적으로는 6개의 시대로 구분했다.
  '하나님의 나라' 제22권 말미의 문장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성서의 표현에 따라 여러 시
대를 하루로 계산하여 그에 따라 시대 구분을 한다"고 하고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제일 첫 번째 시대를 아담으로부터 노아의 홍수에 이르기까지로 보고  이것을 제1일이라
고 본다. 제2의 시대는 대홍수로부터 아브라함에 이르기까지이다. 이것들은... 세대별 길이에 
관하여 말한다면 각각 10세대 정도라고 볼 수 있다. 복음서를 기록한 마태가 구분했듯이 그 
시대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에 이르기까지는 3개의 시대가  있는데, 각각의 시대가 14
세대씩으로 설명된다.
  제1시대는 아브라함으로부터 다윗까지이고, 제2시대는 다윗으로부터 바빌론 유수까지, 제3
시대는 거기서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을 가진 인간으로 탄생하기까지이다. 이와 같이 우
리는 다섯 개의 시대를 가지는 것이  된다. 우리는 지금 제6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되지만 
세대의 수에 의해 측량할 수는 없다... 이후 이른바 제7일에  이르러 하나님은 쉬시게 될 것
이다... 이 제7일은 우리들의 안식일이며, 그 끝은 저녁때가 아니라 말하자면 주님의  영원한 
제8일이다."
  제1기는 '유년기'라고도 불리며, 아직 인간들이 육신의  만족만을 추구하던 시대이다. 제2
기는 '소년기', 제3기부터 제5기까지는 '성년기'라고도 불린다. 노아에서부터 예수에 이르기
까지의 이 시대는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하여 '율법'을 제시한다는 형식으로, 인간에게 원죄
와 구제에 관한 교육을  베푼 시대이다.  여기까지가 구약성서의  시대이다. 이 구약시대를  
통하여 지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짊어진 자는 이스라엘의 백성-유대인들뿐이었다.
  예수의 탄생으로 인류사는 신약시대, 즉 노년시대로 들어가게 된다. 이 시대는 그  이전의 
5개의 시기와는 결정적으로 다른 단계이다.  왜냐하면 이 시대는 온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그리스도의 도래에 의해 성취되었고, 인류의 교육 또한 율법이 아니라 '복음'에 의해 
이루어지는 최종 단계로 들어간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시기에 '하나님의 나라'를 짊어지는 자야말로 다름 아닌 카톨릭 교회인 것이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현실적인 인류사는 이 제6기로  끝이 나고 다가올 '종말'과 '최후
의 심판'을 거쳐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제4의 나라 - 로마제국
  그런데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나라'는 현실적으로는  항상 온갖 '지상의 나라'에  둘러싸
인 채로 그것과 '혼재'하고 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위의 시대 구분에  근거하여 '지
상의 나라'의 발전도 서술한다.
  '지상의 나라'의 역사 전체에 테두리를 주고 있는  것은 역시  <다니엘서>의 '4세계제국
론'이다. 여기서 그는 유세비우스와 히에로니무스의 사고방식을 수용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이들 네 개의 왕국을 아시리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로마를 지칭하는 것
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은 해석이 적절한 것인가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매우 박식하고 
그러면서도 자세하게 기록된 히에로니무스 사제가 저술한 '다니엘서  주해'를 읽을 것을 권
하는 바이다"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아시리아와 로마를  특별히 중시하는 점에서도 마찬가
지이다.
  "이 세상의 나라 가운데에서 두 개의  나라가 다른 모든 나라보다 뛰어나게 명성을  얻은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 그 가운데 먼저가 아시리아이며, 다음은 로마이다... 그리고 한 나라
가 시작된 것은 다른 나라의 종말에 바로 이어지는 형식을  취한 것이다. 다른 왕국이나 왕
들은 모두 이들 왕국의, 말하자면,  부수적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고 기술하고 있다
(제18장 2절).
  결국 아시리아를 '최초의 로마인 바빌론'이라고 칭하며, 또는  '로마는 제2의 바빌론'이라

도 칭하고 있다. 또 양자의 중간에서 조정을 한 것이 페르시아(메디아를 포함)와 마케도니아
였다고 말하는 셈이다.
  이와 같은 사고방식은  한편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두  개의 나라의 역사'라는  관점에  
잘 합치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아브라함에 의해  새로운 단계에 이르렀을 때, '지상의  나
라'도 첫 번째 제국 아시리아의 성립이라는 획기적인 단계를 맞이한다. 로마에 대해서도 마
찬가지이다.
  "로마인들의 믿음 가운데에는 나라의 체제에 변화가 일어나 황제의 통치로 인해 세계적인 
평화가 확립되었을 때 미리 행해진 예언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의 베들레헴에서 태어
났다는 것이다(제18장 46절)."
  말하자면 '하나님의 나라'의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  탄생이라는 결정적 단계를   맞이했
을 때, '지상의 나라'도 또한 최후의 제4제국의 단계를 맞이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미리 정해놓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이 아시리아론은 아구스티누스도 유세비우스가  안고 있었던 것과 똑같은  문제를 
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그는 "모든 왕국 가운데에서 가장 컸던  아시리아는... 니누
스의 아버지인 베르스의 시대를 계산에 넣을 수 있다면 약 1305년 만에 메디아Media인들에
게 지배권을 넘겨주게 되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유세비우스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왕국을 멸망시킨 아시리아와 유대왕국을 
멸망시킨 느부갓네살 왕의 신바빌로니아(칼데아)에게도 성서 속에 있는 지위를 부여하지 않
았던 것이다.
  
    고대적 보편사의 집대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대홍수 이전에는 거인들이 살고  있었으나 홍수로 모두가 멸망한  결과 
오늘날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유세비우스의 주장도 이어받고  있다. 그리스 역사의 자리매
김이나 이에 관한 서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에서 가장 오래된 왕국인 시큐온의 국왕들로부터  시작하여 아르고스Argos나 아테
네의 역사도 끌어들이고 있으며, 프로메테우스나 헤라클레스와 같이 신화적인 인물들까지도 
역사상의 인물로 전하고 있다.
  로마사의 자리매김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기독교의 우위성을 보여주
려 하고 있다. 이상은 거의 대부분이 유세비우스 그대로이며, 따라서 고대의 보편사가  지닌 
공통점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유세비우스와 서로 다른 점도 있다.  대표적인 예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이집트론이
다. 그는 유세비우스와는 다른 각도에서 이집트  역사의 연원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표5를 
보면 아르고스의 왕 이나고스의 딸 이오Io가 이집트로 건너가서 이시스 여신이 되었다는 기
록이 채록되어 있다.
  이것은 유세비우스도 이미 서술하고 있었지만, 아우구스티누스의 경우에는 이집트의 역사
가 오래되었음을 부정하기 위해서 이 전설을 이용하고 있다. 이집트인들은 자신들의 역사가 
10만 년이 넘는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신 자체가  이같이 새로운 시대의 인물을 
신격화한 결과라는 것이 그의 견해이다.
  또한 그도 비록 수치는 다르지만 유세비우스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의 창세 기원의  연호를 
사용하고 있다. 즉 그는 '70인역 성서'를 기초로  하여 유세비우스와 히에로니무스의 연대학
에 의지하면서, 대홍수는 아담 이후 2262년의 사건으로, 아브라함의 탄생에는 홍수가 난  뒤 
1072년 이후와 같이 연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보편사 서술에는 나중에 보게  되는 갖가지 문제점을 포함하여  고대적 
보편사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가 논의되고 집대성되어 있다.
  
    기독교 호교활동으로서
  아프리카누스에 의해 출발, 유세비우스와 히에로니무스를  거쳐 아우구스티누스에 이르는 
기독교 연대학과 보편사의 발전은 원래 로마 세계에 대해서 행한 기독교인들의 기독교 호교 
활동과 연결되어 있었다. 영국의 저명한 역사가인 버터필드에 의하면 당시의 교부들이 중시
한 문제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 문제는 기독교가 당시 갓 시작되었을 뿐인 신흥 종교라고 하는 이교도들로부터의 
비판 문제였다. 이에 대해 기독교인들은 구약성서의  가르침과 기독교의 연속성을 보여줌으
로써 오래됨과 정통성을 주장하게 되었다. 구약성서가 그리고 있는 인류사나 연대의 테두리
에 칼데아나 이집트, 그리스, 그리고 로마의 역사를 짜맞추어 넣으려는 논의는 이러한  방향
의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제1의 세계제국을 성서의 내용에 없는 아시리아로 하고 성서에 나와 있는 아시리아 쪽은 
무시하는 해석도 당시의 그리스인들이나 로마인들에게 가장 오래된 대제국으로 믿었던 아시
리아쪽을  보편사에 짜넣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이해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두 번째 문제가 발생했다. 기독교와 유대교가  서로 다른 점을 설명해야
만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 문제를 우선 제4의 세계제국을 로마제국으로 해석하고, 더구나 
로마제국이 성립된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그리스도가  나타나 '하나님의  나라'를 짊어지게  
될 자가 유대인에서 그리스도 교회로 이행했다는 논리로 설명하려 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전체로서는 기독교인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의 섭리가 로마 사회에 사는 모든 사람
들의 역사를 꿰뚫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을 설득하려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보편사는 당시 기독교인들이 이교도와의 싸움의 무기로  만들어낸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몇 번이나 지적한 바 있는 그들의 성서 바꿔읽기나 내용을 무시하는 등의 문제점도 이 목적
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시작과 끝이 있는 시간
  보편사는 기독교 성서의 천지창조로 시작되고 하나님 나라의 실현으로  끝이 난다. 그 시
간은 시작과 끝이 분명하지만 오늘날 우리들이 느끼고 있는  시간과는 매우 다른 시간이다. 
이러한 시간의 관념은 보편사에 독특한 흔적을 남겨놓게 되었다.
  이 가운데 첫 번째 것이 지금까지 여러 번  등장한 '창세 기원'이다. 아우구스티누스 부분
에서 인용된 바와 마찬가지로 시간 자체가  천지창조 당시 하나님에 의해 시작되었던  것이
다.
  창세 기원은 천지창조를 시작으로 종말까지의 유한한 기간을 새기는 눈금으로 시간을  사
용하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편의상의 눈금이 아니라,  보편사의 본질을 구성하는 눈금이다. 
물론 그것은 성서에 기초하여 구체적으로 계산되었다.
  로마 시대의 교부들이 기본 성서로 삼고 있었던 것은  '70인역 성서'였다. 그들은 이 창세 
기원을 근본으로 그리스의 올림피아드 기원, 로마의 건국 기원을 여기에 짜맞추어 서술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일들은 그들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낯익은 '그리스도  기원'의 연대를 일체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에게는 처음부터 '그리스도 기원'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창세 기원이 있는 이상 
그런 것은 필요조차 없었던 것이다.
  
    종말관과 인류사 6천 년 사이의 관념
  시간에 일정한 폭이 있다면, 그 길이에 대해 구체적인 수치를 얻고자 하는 것은 필연적인 
추세이다. 더욱이 현실 세계의 종말과 교인들이 소망하는 지복이 실현되는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시간의 종점에 놓고 있는 기독교에서는 더욱 그렇다.
  특히 박해를 받고 있던 기독교인들에게는 이 세상의 종말에 대한 바람이 매우 강했다. 그
러했던 시대, 즉 AD 70년에서 140년 사이에 씌어진  예수의 제자들이자 기독교의 교부들이
었던 사람들이 보낸  편지들의 사도교부문서  중에 '바르나바의  편지(Dpistle of Bamabas. 
Codes Sinaiticus에 포함되어 있음)'가 있다.
  여기에는 세상의 종말이 가깝다고 강조하면서 하나님이 6일동안 창조를 완성하셨음을  증
거로 하여 다음과 같이 써놓았다.
  "하나님의 아들, 딸들이여. 하나님이 이 세상을 엿새 동안에 완성하셨다는 것이 무엇을 의
미하는가에 주의하십시오. 이것은 주님은 6천 년 동안에 모든 것을 완성하실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에게 하루는 인간 세상의 천 년을 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 
자신이 나에게 '보라, 주의 하루는 천년과 같도다(시편 90:4)'고 말씀하시며,  그 일을  증언

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아들, 딸들이여. 엿새 동안에, 즉 6천년 동안에 모든 것이 완성될  것
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완성'이 세상의 종말을  뜻하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인간의 역사는 
아담 이후 6천 년 만에 종말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인용되어 있는 시편의 구절은  '하나님
의 사람인 모세의 기도' 중 한 구절이다.
  아라이 겐 씨의 말에 따르면, 사도교부문서는 '전통적으로는 물론, 시대적으로나 사상적으
로도 신약성서에 다음가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 문서들'이다(<사도행전>'성서의 세계 별
권 4, 신약' 일본 고단샤. 1974년 49쪽).
  그중에서도 이 '바르니바의 편지'는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나 신약성서   정전과 동등
하거나 거의 같은 지위에 놓여진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인류사 6천 년이라는 관념은  여
기에서 출발하여 로마시대의 기독교인들을 사로잡았다. 뿐만  아니라 그뒤로도 계속 유럽인
들을 사로잡는다.
  그런데 아프리카누스는 예수의 탄생을 창세 기원으로는  5500년의 일로, 유세비우스와 히
에로니무스는 5199년의 일로 보고 있었다. 로마 시대 말기에 살고 있던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세상의 종말은 코앞에 와 있다는 결론이 자연스레 나오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제6기에 관해 '세대의 수로 측량할 수는  없다'고 하면서  종말
의 
시기를 결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소관이므로 자신이 그 시기에 대해 말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나 그러한 그도 자신이 살고 있던 시대를  인류사의 최후 단계로 자리매김하
고 있다.
  이와 같이 그들이 세상의 종말이 매우  가까운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도  보편사에 
지울 수 없는 흠집을 남겼다. 보편사는 항상 종말을 의식하면서 서술되는 세계사인 것이다.
  
    세계는 세 개의 편평한 대륙으로 이루어졌다는 기독교적 세계관
  보편사가 우주론을 포함하고는 있지만, 이에 관해서는  천동설에 기초한 우주관에 입각했
다는 정도만 이해하기로 한다. 여기에서는 고대 보편사가 전제로 하던 땅과 그 위에 거주하
던 인간들의 세계에 대한 관념을 보고자 한다. 사실 이 점에서 고대의 보편사들은 한결같이 
고대적인 소박함을 보여준다.
  세계를 아시아, 유럽, 리비아 셋으로 구분한 것은  고대 그리스인들이었다. 그리고 리비아 
대신 '아프리카'라는 호칭을 사용한 것은 고대 로마인들이다.
  원래 '아프리카'라는 지명은 카르타고  근방을 가리키는 로마어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카르타고를 정복한 이후, 로마는 이 땅을 아프리카 주로 삼아 총독을 보내어 지배하기도 했
다. 그 뒤 로마는 점차 영토를 확장하여 이집트에까지  이르는 북아프리카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
  로마의 지배 지역의 확대와 동시에 '아프리카'도 확대되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아우구스티누스 시대에는, '아프리카'라는 이름은 이미 대륙전체를  지향하고  있었다. 세
계를 구성하고 있는 대륙들에 관하여 그는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가  그 전부이다"라고 서
술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세계의 동쪽 절반에는 아시아가 있으며, 서쪽에는 지중해를  사이
에 두고 유럽과 아프리카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지구 구체설'을 부정했다는 사실은 후세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만일 
땅이 구형이라면, 우리의 아래쪽에는 우리에게 발바닥을 향하고 서 있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당시 사람들은  '지구 구체설'을  인정하고 있었으므로,  이  사람들을 대척인
(antipodas)이라고 불렀다. 대척인의 존재에 대한  개념은 피타고라스학파로까지 거슬러올라
가는 사고방식이었다.
  이에 맞서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것을 믿을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다"며 대척인의 존재
를 전반적으로 부정하였다. 결국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한  기독교의 교부들은 지구의 형태
를 세 개의 대륙이 전체적으로 편평하게 늘어서 있으며, 큰 바다가 그것들을 둘러싸고 있는 
모습으로 보는 세계관을 중세에 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세계 괴물지'의 계승
  고대인들 거의 모두가 그랬듯이 아우구스티누스 또한 괴물 같은 인간들의 존재를 믿고 있
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괴한 인간의 기원에 관하여' 서술했다.
  그는 사람들이 전하고 있는 외눈박이, 머리가 없는 사람, 남녀 양성을 함께 지닌 사람, 외
다리를 한 사람 등의 예를 들면서 이 모든 형태를 한 사람들의 존재를 믿어야 할 까닭은 없
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 존재는 '하나님의 지혜'에  의한 것이며 "인류 전체  가운데  어떠한 기괴
한 모습의 종족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불합리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그들 역시 보편적  인간에 관한 '이성적이며 죽어야  할 동물'이라는 정의에 
들어맞는다면, 그들 또한 아담의 자손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세상에는 이와 같이 기괴하게 생긴  인간들이 많이 존재한다는 사고방식은  그리스인이나 
로마인에게 공통된 생각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그들의  존재를 믿었기에 그들을 아담
의 자손이라고 했던 것이다.
  이 점에서도 고대 로마의 기독교인들은 고대 로마인들과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 결과 고대의 기독교인들은 마스다 요시오 씨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럽 중세시대의 공상
적인 세계관의 산물인 '세계 괴물지'('신세계의 유토피아', 일본  겐큐사 발행, 1971년) 탄생
의 가교 역할을 하게 되었다.
  
        제2장 중세 보편사의 전개
      그리스도 기원의 발생
    여러 가지 연호
  창세 기원은 초기 기독교 교부들의 필요에 의해 비롯된 것으로, 실제 이것을 사용한 것은 
소수의 저술가들뿐이었다. 로마인들의 실생활에는 카이사르가  도입한 율리우스력이 사용되
었고 연호를 세는 방법도 여러 종류가 있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될 무렵, 당시 역사가들이 널리 사용한 연호에는 기원전 776년에 
시작된 올림피아드 기원과  기원전 753년에  시작된 로마  건국 기원(anno urbis  conditae, 
AUC)에 따른 연호 등이 있었다. 이것은 유세비우스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예에서도 쉽게 알 
수 있다.
  사회 생활면에서는 콘술Consul이라는 공화정 시대 이래의 연호가 사용되었으며, 그밖에도 
AD 284년을 원년으로 하는 디오클레티아누스 기원 및 AD 313년을 원년으로 하는 로만 인
덱션Roman Indexion이 있었다.
  앞의 것은 당연히 황제의 즉위 연도에서부터 연수를 세는  방법이고, 뒤의 것은 올림피아
드 기원의 연수 계산법과 마찬가지로 15년을 주기로 하여  연수를 세는 방법이었다. 이것은 
세금을 부과하기 위해 15년마다 재산 평가를 개정하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정한  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연호들은 모두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널리 사용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AD 525년에 그리스도 기원이 발생하게 된다. 6세기 초에 들어서 그리스도 
기원이 생겨나게 된 원인은 카톨릭 교회의 행사 중 하나인 부활절Easter을 언제로  할 것인
가를 결정하는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부활절은 -현대의 기독교인들도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날짜가 정해져 있지 않은 이동
기념일로서- 3월 21일 이후 최초의 만월 다음에 오는 첫 번째  일요일이다. 이 규정이 정해
진 것은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개최한   니케아의 종교회의(the  Cousncil of 
Nicaea, AD 325)에서였다.
  해마다 날짜가 변하는 부활절의 특성상, 카톨릭 교회에서는 일찍부터 부활절의 날짜에 대
하여 계산이 이루어졌고 그것을 표로 정리해놓고 있었다.
  6세기 초까지 사용되고 있었던 부활절 표는 알렉산드리아의 큐릴로스(444년 사망)가 산정
한 것이었으나, 525년에는 이 표도 6년을 남겨놓고 마지막이 되는 데까지 와 있었다. 새로운 
부활절 표를 작성해야만 하는 시점이었던 것이다.
  
    디오니시오스 엑시구스
  새로운 부활절표의 산정을 실행한 사람은  스키타이 태생인 로마의 수도사  디오니시오스 
엑시구스(소디오니시오스, Dionysius Exiguus,  영어로 Denis the  Little의 뜻,  ?-540 또는 
550년 사망)였다. 그리스도 기원의 발안자가  된 것이다. 디오니시오스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긴 세월을 셀 때  우리는 이제까지 경건하게 믿는 마음을 가지  못한 
박해자의 이름과 결부시켜온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
도가 육신으로  태어나신 때로부터 해를 세는 방법을 택했다(피네건 '성서 연대학')."
  이 말에 관해서는 설명이 필요하다. 앞에 언급되어 있는 큐릴로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 기
원으로 연호를 기록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최후의 대박해를 감행했던 
황제이다. 기독교인들은 이 연호를 '순교자의 기원'이라고  불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톨
릭 교회는 6세기가 되어서도 카톨릭 교회는  6세기가 되어서도 여전히 이 기원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디오니시오스는 새로운 부활절 표를 만드는 데 이  연호를 부정하고, 이에 대치할 
만한 것으로 '주께서 육신으로 태어난 때로부터ac incamatione Domini'의 연호 산정법을 만
들었다. 이것이 그리스도 기원이 발생한 경위이다.
  
    디오니시오스의 산정 방법
  디오니시오스가 그리스도 기원의 연호를 결정한 방법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으로  추정
되고 있다.
  그는 역사적 사실을 탐구하지 않았다. 그는, 예수가 무덤에서 부활한 날이 3월 25일  일요
일이며, 예수가 만 나이로 30세 때의 일이라고 하는 당시의 통념을 출발점으로 했다.
  참고로 말하면, 3월 25일은 당시에는 매우 중요한 날이었다. 이날은 예수의  수태고지일이
며, 더욱이 천지창조의 날로도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근거는, 당시에는 부활절이 532년이란 기간을  한주기로 하여 일순한다는 설이 
널리 퍼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추정을 해보자면, 디오니시오스는 우선  자신의 시대에서 3월 25일의  일요일에 부활절에 
해당하는 해를 찾아간다. 그것은 디오클레티아누스 기원의 279년에 해당한다. 이 해는  부활
절의 이동이 꼭 한 바퀴를 돌아온 해에 해당하기도 한다. 그래서 한 바퀴를 도는 데에 소요
되는 532년에 예수가 탄생한 해로부터 살아온 나이 31을 더하면 563년이 된다.
  결국 디오클레티아누스 기원 279년은 그리스도 기원  563년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다음
은 이 등식을 출발점으로 해서 다른 연호를 결정해가면 된다.
   그리고 디오니시오스는 그  당시 '주께서 육신으로  태어난 때로부터'라는  말로 연호를  
표시했으나, 나중에는 '주의 해anno domini, AD'라는 말도 함께 사용하게 되어 현대에 와서
는 후자를 널리 쓰고 있다.
  또한 예수가 탄생한 날 역시 통념에 따라 12월 25일로 정했지만, 기원의 시점은 그해의 1
월 1일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만든 것도 디오니시오스이다.
  
    영국 교회의 역할
  그리스도 기원이 단기간 내에 널리 퍼지지 않았다는 점과 그리스도 기원이 서유럽으로 퍼
져가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영국의 교회였다는 점은 모든 학자들이 인정하는 사실이
다.
  영국은 게르만인들을 기독교인들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 
기원을 서유럽으로 확대하는 역할과도 관련이 있다. 이 지역의 카톨릭화는 교황 그레고리우
스 1세(재위 590-604)에서부터 시작되어 8세기 말에는  거의 완료되었다. 또한 이를 계기로 
대륙에서 건너온 학승들에 의해 로마 문화가 이식되어 각지의 교회 부속학교나 수도원을 거
점으로 앵글로색슨인들 스스로 새로운 문화적 활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성  베다(Beda the  Venerable, Bede  또는 Baeda  등으로도 표기, 
672/3-735)이다. 베다로 대표되는 영국 카톨릭 교회의 '르네상스'는 대륙으로 파급되어 독일
의 기독교화나 '캐롤린지언 르네상스Carolingian Reneissance'로 이어졌다.
  대표적인 인물은 바이에른 지방과 중부 독일을 비롯한 독일  전역에 기독교를 포교한 '독
일의 사도' 보니파키우스(Bonifatius, Banint, 675-754)이다. 그는 본명이  윈프리드였으며 영
국 웨섹스 지방 출신이었다. 샤를마뉴 대제가 캐롤린지언 르네상스를 개시했을 때,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아르킨을 비롯한 인재들 역시 영국 교회가 배출한 사람들이었다.
  디오니시오스의 그리스도 기원은 먼저  이러한 영국 교회에 수용되어갔다.  그리고 664년 
노섬브리아Northumbria에 위치한     위트비Witby에서 개최된     종교회의(Synod of     
Witby, 663-664)에서 디오니시오스가 계산한 부활절표를 사용하자고 결정되었다.
  이 결정은 영국 교회  전체를 구속하는 것이었으며, 이제까지의  개별적인 사용과는 달리 
디오니시오스의 그리스도 기원이 최초로 커다란 거점을 가지기에 이른 것이다. 베다를 비롯
한 권위자들이 그들의 저작에 그리스도 기원을 사용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게다가 이미 말했듯이, 영국 교회에서 길러진 인재들은 대륙에서도 커다란 구실을 했는데, 
그들은 모두 한결같이 베다의 저작물이나 디오니시오스의 그리스도 기원을 지니고 갔다. 결
국 유럽 대륙에서도 8세기에 들어서면서  점차로 그리스도 기원을 사용하기 시작하게  되었
다.
  
    그리스도 기원 사용의 일반화
  그리스도 기원의 사용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람은  샤를마뉴 대제(Charlemagne, 또는 
Charles 1, 742-814,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의 황제)였다.  그는 랑고발트에 관한 한 칙령에 
그리스도 기원에 의한 연호와 다른 세속적  문서의 전통적인 연호를 짜맞추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태어난 때로부터 801년, 인덱션 제9년, 우리들의 프랑
크 통치로부터 33년, 이탈리아 통치로부터 18년, 그리고 우리 콘술 재위 제1년."
  이후 시대가 지나감에 따라 세속의 정치  쪽에서는 샤를마뉴 대제의 아들인 루이나  샤를 
같은 왕들도 이 형식을 답습해갔다. 또한 10세기 후반부터는  이제까지 교황 재위년을 사용
해오던 교황청의 문서에 그리스도 기원도 함께 기록하게 되었다.
  그리스도 기원이 고안되었던 것이 525년이었음을 감안하면, 매우 느린 걸음걸이였다. 그러
나 10세기 말까지는 대체로 서유럽에 그리스도 기원이 정착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필자가 마지막으로 강조해두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  기원의 사용이 이와 같
이 확대되어가기는 했지만, 여전히 보조 수단으로서의 위치밖에 부여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
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 기원은 그리스도  탄생 이후의 사건에 관하여 그것도  창세 
기원과의 병용이라는 형식으로밖에 사용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일은 중세의 
보편사에 '그리스도 탄생 이전BC'이라는 연호가 없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고대적 보편사에 그리스도  기원이 필요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중세에서도 '그리스도  
 
탄생 이전'이라는 연호는 필요가 없었다. 그 시대는  창세 기원으로 표시하면 충분했기  때
문이다.
  
      중세의 보편사 서술
  중세 유럽의 대표적인 세계가 서술가 두 사람의 작품을 살펴보기로 하자. 한 사람은 앞에
서도 소개한 베다(673-735)이며, 다른 사람은 오토 폰 프라이징(Otto von Freisingm, 1111경
-1158)이다.
  이 두 사람을 선택한 이유는, 카네이와 마사오씨가 자신의 저술인 '서양 중세의 역사가'속
에서 한 말을 인용한다면, 베다에 관해서는 "중세 초기의  세계 연대기는 베다에 의하여 완
성되었고 샤를마뉴 시대, 오토 시대의  세계 연대기는 모두 그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
다."
  또한 오토 폰 프라이징에 관해서는 "중세의 세계 연대기의 완성기는 12세기이며, 가장 대
표적인 작품은 프라이징의 '연대기Chronica'이다."라고 일컬어지기 때문이다.
  
    베다의 연대기
  베다는 놀라울만큼 방대한 저작을 남겼다. 그는 9세기부터 '성자'라는 칭호로 불릴만큼 커
다란 영향을 끼친 사람이지만, 인간적인 그의 생애는 매우 단순했다.
  일찍 부모를 여읜 그는 일곱 살에  웨어머스에 있는 베네딕트파의 성 베드로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열세 살에 재로Jarrow에 새로 생긴 성 바오르 수도원으로 옮긴 이후로는 몇 번에 
걸친 두 도시로의 여행을 제외하고는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기도와 연구, 저술과 후진 양성
을 계속하면서 나날을 보냈다. 병상에서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에는 요한복음서의 영어 번
역을 계속하다가 이 일을 마친 직후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가운데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고 전해지고 있다.
  그에게는 보편사에 관한 저작이 두 편 있다. 하나는 '시간론De Temporum Ratione,  영역 
On the Reckoning of Time'(대연대기, 725년)이다.
  '시간론'에서는 시각과 일, 주, 월, 연,  하지, 동지, 춘분, 추분 등  천문학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시간을 논하는 한편, 고대 이후의 자연과학적 지식을 간결하게 정리했다.
  그리고 기독교적 시간으로 나아가는데, 거기에서는 앞에서도 말한 이동축제일인 부활절과, 
마지막으로 '세계연대'라는 제목 하에 천지창조에서부터 인류의 종말에  이르는 시간에  대
해서 고찰하고 있다.
  우리들의 문제와 관계되는 것은 이 마지막의 '세계 연대'에 관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세계사는 여섯 시기로 나누어진다.  제1기는 아담에서부터 노아까지(유년기), 
제2기는 노아로부터 아브라함에  이르기까지(소년기), 제3기는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청년
기), 제4기는 다윗에서부터 바빌로니아로의 포로로  가는 시기, 즉 바빌론  유수에 이르기까
지, 제5기는 바빌론 유수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태어나기까지(노년기), 제6기는 
주 예수가 육신으로 태어난 이후이다. 그는 로마 황제의 재위년을 쓰면서 자신과 같은 시대
에 있던 동로마제국의 황제에 이르기까지 다루고 있다.
  그의 인류사적 시대 구분은 앞에서 소개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시대 구분을 채용한 것이다. 
이들 여섯 시기에 대한 각각의 내용은 거의가 유세비우스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소
개는 생략하겠다.
  그런데 그가 유세비우스의 내용에 덧붙인 것이 있다. 예수의 탄생은 히브리어 성서에서는 
'아담 후' 3952년, 70인역 성서에서는 5199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이 두 가지 설, 즉 히
브리어 성서에 의한 연호를 추가하여 수록하는 양론병기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의 '시간 계산론'은 서적의 쪽수가 많아진 만큼 상세하게 되어 있기는 하지만,  내
용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첫 번째의 '시간론'과 같다. 다만 두 가지 변화가 있을 뿐이다.
  그 변화란, 아브라함까지는 70인역 성서와 히브리어 성서가 사용하는 연호를 병기하고 있
으나, 그후로는 히브리어 성서의 연호만으로 기술한 점이다. 예를 들어 예수 탄생년을 '3952
년, 아우구스투스 황제 제42년... 제193 올림피아드 제3년'으로 한 것이다.
  또한 예수 이후에 대해서도 동로마의 레오 3세까지, 모든 황제의 즉위년을 히브리어 성서
에 의한 창세 기원의 연호로 기록해간다.
  두 번째 변화는 예수 이후의 서술 가운데에는 기본적으로 히브리어 성서에 의한 창세 기
원의 연호를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밖에도 '주의 수난' 또는  '주께서 육신으로 태어나
신 때로부터'라는 연호도 가끔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베다의 역할
  앞에서 유세비우스에 관해 살펴보면서, 유세비우스와 히에로니무스에 의한 연대학이 서유
럽에 매우 큰 영향력을 주었다고 말한 바가 있다. 그 한 가지 예가 이 베다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연호의 사용과 로마 이후의 시대를 제외하면, 베다가  저술한 책들의 구체적인 내용은 
모두 히에로니무스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본 베다의 역할로 보아, 그의 작품을 통해 그들  두 사람의 영향력이 더욱더 커져
간 것으로 보여진다.
  베다는 확실히 유세비우스와 히에로니무스의 연대학과,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완성된 고
대적 보편사의 계승자이며, 또한 이것을 서유럽으로 보급시킨 중심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거기에 머무른 것만이 아니다. 그것도 그가 사용한 연호에 나타나 있다.
  최초의 '시간론'에서는 히브리어 성서에 의한 연호와 70인역 성서에서 유세비우스가 계산
한 연호를 병기하고 있었다. 베다는 이 가운데 어느 쪽도 옳다고 판단을 하고 있지 않다. 그
러나 제2의 '시간 계산론'에서 그는 결국 유세비우스의  연호가 아닌 히브리어 성서에 의한 
연호를 채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로 오랫동안 그를 계승하는 사람은-종교 개혁의 시대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여기에서 시작한-예수 그리스도 이후의  시대에 관해서는 창세 기원의 연호에 
덧붙여 그리스도 기원의 연호를 병기하는- 방법은 고대에는 없었던 새로운 방법이었다., 뿐
만 아니라 그의 방법은 그 뒤 모든 사람들에게 계승되어가게 되었다.
  
    오토 폰 프라이징과 중세 보편사의 완성
  프라이징은 오늘날 뮌헨의 위성도시에 불과하지만, 한때  이곳에 설치되었던 사교좌는 남
부 독일의 종교적, 문화적 중심지 중 하나였다.
  프라이징의 사교좌를 이같은 지위로 높인 사람은 황제 하인리히 5세의 조카이자 황제 프
리드리히 1세(발바로사)의 숙부인 오토 폰 프라이징이었다.
  그는 1137년 이후 그곳의 사교를 지냈다. '연대기'는  그의 대표작이다. 이 책은 저작하던 
당시에 이미 높이 평가받았을 뿐만 아니라, 16세기의 종교 개혁 시대 이후에는 오히려 카톨
릭 정통파의  최고봉을 차지하는 역사서로서 계속 읽혀왔던 작품이다.
  그의 '연대기'는 이미 제1장에서 말한 바와 같이  로마 시대의 기독교인들이 제시한 보편
사를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 이 점에 관해서는 오토  자신도 "교회의 훌륭한 인도자 가운데
에서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와 오로시우스를 따랐다"(서문)고 언명하고 있다. 특히 고대  로마
까지의 내용은 거의 그대로 베꼈다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그렇다면 오토의 독자성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의 독자성은 서유럽제국 멸망  이후의 
역사를 보편사의 논리로 설명하는 것에 도전한 데에 있다.
  고대의 사람들이 생각한 '로마제국'은 어디까지나  고대 라틴인들의 로마제국이었다. 더욱
이 그 나라는 최후의 세계제국이며, 그 나라가 멸망할 때 인류사도 종말이 온다고 믿었다.
  하지만 서로마제국 멸망 후의 12세기에 살고 있었던 오토에게는 이 사고방식이  그대로는 
통용되지 않았다. 오토의 배후에는 사를마뉴 대제에 의한  '서로마제국의 부흥'과 오토 대제
에 의한 '신성로마제국' 건설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있었다.  게다가 오토가 살았던 12세기는 
그의 일가인 황제들 스스로가 한쪽의 당사자였다.
  당시는 그레고리우스 개혁이 이루어지던 시대였다. 중세적 로마제국을 어떻게 자리매김하
느냐가 첨예한 현실적 문제로 다루어지던 시대였던 것이다. 따라서  카톨릭 교회의 고위 성
직자이기도 했던 오토에게는 이와 같은 여러 문제에 대하여 논리적이면서도 통합적인  설명
을 할 의무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과제에 대한 해답에 전거를 부여한 것은  <다니엘서>였다. 그는 프리드리히 1세에 대
한 <헌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세계가 시작되고 나서 지금까지  4개의 발군의 대제국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이 
세상의 정함에 따라 이어가서 세계의 종말에 이른다는 것은 여러 가지 근거에서-특히 다니
엘이 본 환상으로부터- 도출할 수가 있다.
  따라서 나는 이들 여러 제국의  통치자들을 기록하여 연대순으로 나열하였다.  맨 처음은 
아시리아인의 제국, 이어서 역사가들이 굳이 제국 가운데에 넣지 않았던 칼데아인의 제국을 
제외하고는 메디아인과 페르시아 제국, 그리스인의 제국, 그리고 로마인의 제국이며, 그리고 
오늘날의 황제에 이르기까지 그 이름을 기록했다."
  그는 유세비우스나 아우구스티누스와 마찬가지로 아시리아,  페르시아(메디아도 포함), 그
리스(마케도니아), 로마를 4개의 세계제국으로 생각했다. 성서에 정금의 머리 부분에 해당한
다고 씌여 있는 '칼데아인의 제국을 제외'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제4의 제국인 '로마'가 '오늘날의 황제'에 이르기까지 존속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에 의하면 "주님이 육신을 가지고  태어나신 때로부터 801년, 로마 건설로부터  1552년, 
그 통치의 제33년 카를 황제는 교황에 의해 파트로키우스란 칭호를 받고 아우구스투스 이후 
제69대째의 황제가 되었으며, 아우구스투스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콘스탄티누스  대
제 이후 콘스탄티노플에 설치되어 있던  로마인의 통치권이 프랑크인에게로 옮겨졌던  것이
다."
  즉 서로마는 멸망했으나, 황제권은 동로마제국(그리스인)을 거쳐 프랑크인인 샤를마뉴  대
제에게로 옮겨지는 것으로 되었다. 그리고 그 사이, 제4의 제국인  '로마제국'  자체는 멸망
하는 일이 없었으며, 지금은 신성로마제국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결국 오토는 고대적 보편사를  확장하여 중세까지 포함하는 보편사,  즉 중세적 보편사로 
변혁했던 것이다.
  
    타원 유럽
  그는 다시 확장된 의미로서의 로마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로마의 역사를 크게 
두 시대로 구분했다. 첫 번째 시대는 아우구스투스로부터 콘스탄티누스까지이다. 이것은  지
상의 나라이며 이교를 신봉하는 로마제국과 하나님의 나라, 교회와의 대립 항쟁의 시대이다.
  두 번째 시대는  콘스탄티누스로 시작하는  그리스도교 로마제국  이후이다. '주민들뿐만  
 
아니라, 소수를 제외하고는 황제도  카톨릭교인이었으므로 두 나라의 역사가  아닌 한 나라
의 역사'가 된 시대이다.
  그는 "하나님의 교회에는 2개의 역할, 즉 승려적 역할과 군주적 역할이 있다"고 하며 "이 
시대의 역사는 두 나라의 역사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교회의-물론 혼합 상태의 교회의- 
역사이다"라고 말했다.
  즉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의 그리스도교 로마제국의 시대를 황제와 교황이, 국가와 교회
가 하나님이 주신 신성한 역할을 분담해서 '혼합 상태'를  이루고 있는 시대라는 것이다. 이 
시대의 유럽 세계를 말하자면 양자를 초점으로 하나의 타원적 세계라고 규정지었던 것이다.
  따라서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의 기독교 로마제국의 역사는 이  타원 유럽이 성립, 발전
하고 붕괴로 향하는 시대로 그려지게 된다.
  제1단계는 콘스탄티누스로부터 클로비스까지이다.  이 시기는 라틴인이  황제로 군림했던 
로마제국 시대지만, 타원 유럽의 원형이 성립되는 시대이다.
  제2단계는 클로비스로부터 하인리히 4세와 그레고리우스 7세  시대까지이다. 라틴인에 의
한 로마제국이 멸망하고 한동안 그리스인들에게 황제의 자리가 넘어갔으나 샤를마뉴 대제에 
의해 새롭게 프랑크인들에게 황제의 권좌가 옮겨갔다. 그리고 이 프랑크인들에 의한 로마제
국하에서 '혼합 상태의 교회' 즉 타원 유럽이 완성을 맞게 된다.
  오토의 이상은 세계의 평화가 교회와 국가의 협조에 의해  실현되는 것이었는데, 이와 같
은 정점의 시대를 쌓은 것은 하인리히 3세 시대였다.
  그러나 하인리히 3세의 아들이자 오토의 할아버지이기도 한 하인리히 4세 시대에 이미 그 
조화는 붕괴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교회 서품의 임명권, 즉 서임권 투쟁이 지속되는  시대를 
맞게 된다. 이런 시대에 살고 있던 오토였지만, 그는 그 시대를 급속하게 종말로 향하는  시
대라고 생각했다.
  "제4의 제국의 시대 말기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인류의 종말에 관해 예언된  것들을 경험
하고 있으며, 따라서 머지않아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그
는 수록하고 있다.
  그는 <다니엘서> 제2장에 나오는 '돌'이 교회를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서임권 투쟁
의 시기가 바로 그 돌이 거대한 조각(제국)의 발을 친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리고 이 투쟁을 종결시킨 월무스의 협약에 관하여 "교황 칼릭스투스Calixtus 밑에서 교회는 
거대한 산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종말에 관한 <다니엘서>의 예언은 이미 성취된 것이다. 이와 같이 그의 
보편사는 지극히 가까운 미래에 인류의 종말을 상정하고 있던 보편사였다.
  
    오토가 사용한 연호
  다음으로 오토가 서술한 보편사에서의  시간, 즉 연호에 대해  특징적인 점을 살펴보기로 
하자. 물론 여기에는 창세 기원이 기초가 되어 있다.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 탄생의 해는 "아우구스투스 대제  통치 제42년, 로마 건국 기원 
제752년, 올림피아드 기원 제193년,  아담으로부터 5500년 이후의  일이며, 다니엘에 의하면 
안티파로스의 아들이며 이방인인 헤롯이 유대를 66주간 통치하고 있던  때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창세 기원뿐만 아니라 로마 황제의 통치년, 올림피아드 기원, 로마 건국  기원 
등과 같은 로마 시대 이후의 전통적인 연호들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오토가 사용한 연호는 이것들뿐만이 아니다. 실제로 그가  가장 자주 사용한 것은 
첫째가 니누스 기원, 두 번째가 그리스도 기원에 의한 연호이다.
  니누스는 아브라함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사람으로서, 제1의 세계제국인 아시리아를 건국
한 사람이다. 그는 창세 기원 3292년의 니누스 즉위를 기원으로  하는 이 연호를 창세 기원 
5500년으로 하는 예수 기원이 개시될 때까지, 그 시간 전체를 새기는 눈금자로 사용했다.
  그가 니누스 기원을 중시한 것은 4세계제국론에 기초하는 역사의 이해를 연호에도 반영하
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제1의 세계제국이었던  아시리아로부터 제3의 세계제국이 끝
나는 때까지만 니누스 기원으로 표시하고, 제4의 제국인 로마제국의 시작, 즉 예수 그리스도
의 탄생 이후는 그리스도 기원에 의한 연호를 썼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네 개의  세계제국들 가운데에서 신약시대에 대응하는  제국으로서의 '로마'의 
위치가 연호 자체에 의해 확실하게 나타나게 되는 셈이다.
  오토는 이와 같이 두 개의 기원과  창세 기원을 조합하여 기록함으로써 전체적인  인간의 
역사를 지배하고 있는 하나님의  의지와, 보편적 인류사의 내용인  하나님의 나라와 지상의 
나라와의 관계 등을 연호 자체를 통해 나타내려고 한 것이다.
  
    12세기를 대표하는 세계사
  오토는 세계에 대해서는 앞에서 언급한  아우구스티누스 등 고대인들의 세계관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세계는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며, "인도는 동부가 
대양에 면하고 있어 세계의 끝이 되고 있다"고 말한 것을 보면 이 점에 대해서도 고대의 관
점과 다름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또한 '세계 괴물지'의 관점 역시 계승했다. 죽은  사람의 소생에 관해 말한 부분에서
는 "괴물이나 태아에 대한 나의 생각은, 그것들이 이성적이며 필멸의 생물이라는 정의에 해
당되는 것은 모두 논의의 대상이 되며, 그것들이 죽는 것들인가 죽지 않는 것들인가를 결정
해야 한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또한 오토의 서술은 공간적으로 많은 괴물들이 살고 있는  인도까지 포함하고 있다. 이러
한 서술이 시작되는 에덴 동산은 인도의 동쪽에 있었는데, 그 이유는 다시 말하지만 고대의 
아시리아인들이나 페르시아인들 등의 활동 무대가 인도에까지  넓혀져 있었기 때문이다. 오
토 자신은 세계의 주요한 역사적 사건들을 모두 다 기록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결국 그의 '연대기'는 독자적인 내용을 더하여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나아가서 저자의 
주관적 확신으로 미루어보더라도 12세기를 대표하는 세계사의 서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오토는 마지막 저술인 '황제 프리드리히전'에서 자신의 소망대로  황제가 다시 교황과 나
란히 서는 존재로 그 지위를 회복하고 또한 양자의 협조에 의한 평화가 다시 찾아왔다고 생
각하고 있었다.
  그에게 인류의 종말은 연기된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프리드리히 1세(발바로사)에 의한 질
서회복을 확인하고 일종의 안도감 속에서 숨을 거두었다.
  물론 역사적 사실로도 종말은 '연기'되었다. 그리고 황제의  권력이나 교황의 권력도 모두 
유럽 전역에 대한 영향력을 잃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 뒤의 역사 가운데에서 그의 타원 유럽이란 이념은 로마 교황과 로마 황제의 양 진영에
게 있어서 자신들의 지배권에 대한 사상적 지주로서 더욱더 그 가치를 높여가게 되었다.
  
      중세의 세계 괴물관과 보편사
    TO그림
  12세기와 13세기를 중심으로 한 중세 유럽에서 한창 유행했던 도식적인 지도로 'TO그림'
이 있다. 영문 알파벳의  T와 O를 짜맞추어  세계가 표현되어 있어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 
TO그림은 중세 유럽인들이 세계에 대해 가지고 있던 개념을 잘 나타내고 있다.
  O는 세계가 대양, 즉 오케아노스oceanos로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표시한다. 또한 O의 내
부에 있는 T는 세계가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세 대륙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표시하
는 것이다.
  세 대륙으로 나누고 있는 것은 타나이스(돈) 강과 나일강, 그리고 지중해이다.
  여기까지만 말한다면 TO그림은  그리스인이나 로마인들의  세계지도를 그대로 물려받은 
데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세의 유럽인들은  여기에 그들다운 내용을 첨가하고 
있다. 원의 중심에 해당하는 장소에 성지 예루살렘이 들어서고 원의 정점에 에덴 동산이 놓
여진 것이다.
  구약성서의 <창세기>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의  동산을 창설하시고"(2:8)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에스겔서>에는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것이  곧 예루살렘이라. 
내가 그를 이방인 가운데 두어  열방으로 둘러 있게 하였거늘"(5:5)이라고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성서의 말씀이 이 세계지도의 기초가 되어 있는 것이다.
  
    '헬레포드 그림'에 의한 보편사의 도식화
  이같은 TO그림의 연장선상에 '마파 문디(Mappa Mundi,  세계지도)'가 있다. 이것도 엄밀
히 말하면 지형을 나타낸다기보다는 그들의 세계관을 상세하게 표현한 그림이다.
  현재 존재하는 가장 대표적인 예가  '헬레포드 그림'이다. 가로  1.65미터, 세로  1.34미터
의 송아지 가죽에 그려져 있으며 내용 또한 풍부하다.
  영국 서부에 위치한 헬레포드 시에 있는 대성당의 제단을  장식하기 위해 1,300년경에 그
려진 것이라고 한다. 세계지도 그 자체는 지름 1.32미터의 원형 안에 그려져 있으며, 기본적
으로는 TO그림과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책에 소개된 그림 2가 바로 그것이다.
  이 그림에는 성서에 기초하는 인류사가 시각화되어 있다. 맨  윗부분에는 에덴 동산과 낙
원에서의 추방이 그려져 있으며, 가운데 부근에는 노아와 방주와 바벨탑이 그려져 있다.
  울에는 아브라함의 얼굴이 그려져 있으며,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아내, 그리고 나일강 오른
편 기슭에는 이집트의 총리가 된 요셉이 가뭄에 대비해 세운  곡물 창고인 피라미드(당시에
는 피라미드를 곡물 창고라고  생각했다)의 그림, 모세에게  인도되어 이집트의 람세스에서 
출발한 이스라엘인들이 여리고Jericho에 도달할 때까지 더듬어온  길 등의 인류사가 시간의 
축에 따라 서술되어 있다.
  그 다음에는 고대 그리스 이후에 믿어온 공간적 세계를 그리고 있다.
  유럽에서부터 보기로 하자. 거기에는 런던,  로마, 파리, 콘스탄티노플, 아테네, 프라하  등 
192곳에 달하는 도시들이 그려져 있고, 산맥과 하천에 대해서도 중요한 것들은 거의 정확하
게 그려져 있다. 노르웨이라고 씌어진 스칸디나비아 반도에는 "물 위를 달린다"라는 설명으
로 스키를 신은 사람의 모습까지 있다. 헬레포드의 그림은 스키가 그려져 있는 사상 최초의 
그림이기도 하다.
  아시아는 어떤가? 예전부터 알려져 있는 오리엔트의  지역들에 대해서는, 메소포타미아에
서부터 소아시아, 이집트에 걸쳐 여러 도시가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결국 '바이블랜드(성서
상의 지역들)'나 로마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소아시아의 지역, 나아가서 북아프리카까지는 인
간이 사는 지역으로 그 나름대로 커다란 오류 없이 그려져 있다.
  
    세계 괴물지
  그러나 그밖의 아시아에 관해서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이미 그리스인들과 로마
인들 사이에는, 아시아에는 각양각색의 모습을 한 이상한 인간들과 동물들이 존재하고 있다
는 믿음이 있었다. 특히 인도는 그들에게 신비로 가득 찬 나라였다. 헬레포드 그림은 이러한 
괴물들의 도감으로 되어 있다.
  인도(에덴 동산의 아래쪽 부분)에는 어른의 키가 아이들의 키 정도  밖에 안 되는 소인족
과 개의 머리와 꼬리를 가지고 있는 거인인 아마존이 있다.
  더욱 걸작인 것은 다리가 하나밖에 없으면서도  굉장히 빨리 달린다는 스키아포데스이다. 
스키아포데스는 거대한 발을 마치 삿갓처럼 펼쳐 그 그늘에서 쉰다고 설명했다.
  또한 인도는 공상적인 동물들로 가득 찬 곳이기도 하다. 드레곤(동양의 용과는 달리 부정
적인 개념을 가진 괴수)과 유니콘unicorn, 붉은 몸에 전갈의 꼬리를 가진 흉폭한 사람  얼굴
을 한 사자 만티코라, 그리고 몸은 말이고 꼬리는 코끼리에  염소의 턱을 가졌으며 몸의 앞
과 뒤에 거대한 뿔이 하나씩 달려 있어 싸울 때는 앞의 뿔 하나만으로 싸운다는 에아레  등
이 대표적인 동물이다.
  중앙아시아에는 입이 없어 사과  냄새만 맡고 산다는 강기네스가  있다고 했는데, 그들은 
사과 이외의 다른 냄새를 맡으면 당장 죽어버린다고도 했다.
  인도의 북쪽에는 셀리카(Celica, 중국)가 조그맣게 그려져 있다. 설명문에는 인도의 북쪽에
는 사막이 있으며, 그 "사막을 넘으면 처음 만나게 되는  것이 셀레스(Celes, 중국인)들인데, 
그들은 비단옷을 보내온다"고 적혀 있다. 그렇지만 그  셀리카가 사마르칸트의 바로 동쪽에 
놓인 작은 지역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이들이  지리적 위치나 넓이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중국의 동쪽에 있는 작은 섬은 위치로 보아 일본을 그려놓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거기
에는 말의 발을 가진 히포포데스, 엄청나게 커다란 귀를 가지고 추울 때에는 그것으로 몸을 
싸서 따뜻하게 한다는 장이인(귀가 큰 민족) 등이 그려져 있다,.
  중국에서 서쪽으로 가면, 새의 머리와  다리를 가진 키코네스(황새인간)와 반은  사람이고 
반은 황소인 미노타우루스가 그려져 있다. 그 북쪽에는 곡과 마곡이 유폐되어 있는 것을 그
려 놓았다. 성서에 "북쪽 끝에 살며 '종말'  때에 나타난 사탄의 앞잡이로 살육을 자행한다"
고 예언되어 있는 무서운 민족이다(<에스겔서> 38:16,  18, <요한계시록> 20:1,8). 알리마스
비는 눈이 하나밖에 없는데, 이들은 그리핀과 싸워 그들이  지키고 있는 황금을 빼앗아온다
고 한다.
  이런 식으로 아시아에는 괴물 같은 인간들과 공상적인 동물들이 많이 그려져 있다.
  아프리카의 사하라 이남에 해당하는 지역은 어떤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유잘레산맥
이 그려져 있고 그 남쪽에는 나일강, 다시 나일강과 바다와의 사이에 갖가지 괴물들이 그려
져 있다.
  동쪽에서부터 차례대로 보면, 귀가 없으면서 다리가 꼬여 있는 앙바리, 눈과 다리가  하나
씩밖에 없는 인간, 입이 너무 작아서 액체를 빨대로 빨아마실 수밖에 없는 인간(구세인), 남
녀 양성을 갖춘 허마프로디어, 네 발로 걷는다기보다는 미끄러져 나아가는 히만트포데스, 태
어난 아기를 뱀에게 주어 아내의 정조를 시험하는 부슈리족, 머리가 없이 가슴에 눈과 입이 
달려 있는 흉폭한 식인종인 브레미에, 네 눈이 달린 에티오피아인 등이 계속되고 있다.
  나일강의 북쪽에는 "입술이 튀어나와 태양을 가린다"고 설명되어 있는  거대한 입술을 가
진 인간, "매우 열등하여 동굴 속에서 거주하며, 야수의 등에 매달려 뱀을 잡아먹는다"고 되
어 있는 트로그로듀테스(혈거인)등도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에덴 동산의 윗부분에 최후의 심판이 그려져 있다. 즉, 이 그림에서는 
현재를 거쳐 최후의 심판까지 그려져 있는 셈이다. '헬레포드 그림'은 이렇게 도상화된 보편
사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와 같은 갖가지 괴물들 역시  보편사의 한 요소로 받아들였음이 
표시되어 있는 것이다.
  
    이시도루스 '어원론'의 세계
  헬레포드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세계 괴물지'는  지도의 세계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은  
아니었다. 사실 중세에서 이와 같은 '세계 괴물지'가 퍼지는 데 가장 커다란 구실을 한 사람
은 에스파냐   사람인 세빌리아의   이시도루스(Isidore  of   Seville,  라틴명  Isidorus 
Hispalensis, Saint, 560-630)였다.
  그는 중세 초기를 대표하는 기독교의 이론가로, 그의 저서 중 일종의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어원론Etymologies'이 있다. '어원론' 제20권은 세계지지, 민족지로 되어 있으며, 당시 
세계와 관련된 내용이 전개되어 있다.
  여기에는 유럽이나 지중해에 관해서는 착실하다고 평가할 수 있는 보고가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그밖의 지역에 대해서는 별다른 점이 없다.
  아프리카의 남부에는 목이 없는 사람과 그밖의 괴물이 있으며,  또한 인도에는 개의 머리
를 한 견두인, 외눈박이 거인 등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셀레스 지방에는 식인종이 있고, 그 동쪽으로 가면 입술이  이상할 정도로 큰 대순인들과 
스키아포데스, 구세인이 살고 있다는 등이다.
  '헬레포드 그림'과 그 위치가 조금 다른 점을 제외하고는 똑같은  요괴 인간들의  카탈로
그가 완성된다.
  이시도루스 자신은 '어원론'을 크테시아스나 메가스테네스, 헤로도토스와 같은 그리스인들
과 플리니우스Plinius, 솔리누스와 같은 로마인들에 기초를 두고 기술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마스다 요시오 씨에 따르면 이시도루스의 이 저술,  특히 아프리카나 아시아를 다
룬 제20권은 '7세기에 성립되고 나서 13세기경까지'는 '절대적인 전거로  다루어졌다'는 것
이다.
  이시도루스가 활동했던 7세기는 서유럽에서는 고대 로마의 문화적 전통이 끊어지고  교회
에만 그것들이 보존되어 있었던 시대였다.
  그는 이처럼 교회가 지식을 독점하고 있던 시대에 가장  훌륭한 라틴어 저술가로서, 라틴 
문화에 가장 정통한 권위자로서, 앞에서 언급한 베다와 나란히 당시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
던 저술가 중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당시 유럽은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유라시아대륙의 북서쪽 한 구석에 봉쇄된  상태
라 유럽인들 스스로가 이슬람교도들의 지역을 넘어서 아프리카나 아시아로 가는 일이  불가
능했다. 사실 인도, 셀리카(중국), 아프리카에 관해서는 고대 그리스인들이나 로마인들이  전
하는 간접적인 정보로밖에는 알 길이 없었다.
  그와 같은 유럽인들의 상황을 종합해볼 때, 이시도루스의 저술이 오랫동안 절대적인 전거
로 되어 있던 것도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동서 교류의 재개
  그렇지만 이시도루스의 영향력을  '13세기까지'로 한정시키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가?  
그것은 13세기가 되면 유럽인들이 실제로 아시아를 찾아가 현지의 상황을 스스로의  눈으로 
보고 그 결과를 유럽에 보고 했기 때문이다. 13세기 이후  그들의 세계 인식에 대해 살펴보
기로 하자.
  이제까지의 전통적 세계관이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된 것은 11세기 이후의 세계사적 동
향 때문이었다. 11세기 말에는 십자군의  원정이 있었고,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에서  지중해 
무역이 재건되었다.
  그 결과 유럽과 아시아의 직접적인 관계가 이루어진다. 더욱이 13세기에 들어서면 몽골안
에 의해 거대한 제국(원나라)이 형성되고 동서교류가 한층 대규모화한다. 이런 움직임 속에
서 직접 이슬람권에, 더  나아가 아시아 깊숙이까지 발자취를  남기는 유럽인들이 등장하게 
된다.
  교황 이노센티우스 4세Innocentius 4의  명으로 몽골에 파견되었던  프란체스코회 수사인 
지오바니 카르피니(Giovanni da Pian del Carpini,  1180-1252)는 1245년 카라코룸 부근에서 
구유크Guyuk 칸과 회견을 가졌다. 그는  유럽 침략을 중지해달라는 요청과  기독교 포교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교황의 편지를 건네주고 답장을 받아왔다.
  그는 귀국한 뒤 '우리가 달탄인이라 칭하는 몽골인의 역사 Historia Monglaorum quo nos 
Tartaros appellamus'와 '달탄기Lober Tatarorum'를 썼다.
  또한 1253년에 교황 이노센티우스 4세와 프랑스 루이9세의 편지를 가지고 대한의  궁궐을 
찾아갔던 프랑스의 프란체스코회의 기욤 드 류블류키도 '여행기'를 남겼다.
  그후 많은 사절과 기독교인들이 몽골로 여행했다.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상인들은 중동과 
중앙아시아는 물론 중국의 원나라까지 진출하여 그곳에서  활약했다. 이러한 사람들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은 마르코 폴로이다.
  
    마르코 폴로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가 아버지와 숙부를 따라 베네치아를 출발한 것은 열
일곱 살 때였다. 그런 그가 고향으로 다시  돌아온 것은 1295년, 그의 나이 마흔한 살  때였
다.
  그후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전쟁에서 적에게 잡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약 일 년에 걸친 
이 옥중 생활중 그는 같은 방에 갇혀 있던 피사의 소설 작가인 루스티첼로에게 25년 동안의 
동방여행 체험을 이야기해주었다.
  이것이 마르코 폴로의 '동방 견문록 2 Milione, 영어명 The Traverls of Marco Polo'이다.
  '동방 견문록'에는 아르메니아에서 실크로드를 거쳐 중국에 간 것, 17년 동안 원나라의 황
제 쿠빌리아 칸을 섬긴 일, 그리고 남해 항로를 따라  귀국할 때까지의 체험이 생생하게 묘
사되어 있다.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궁중 생활과 당시 유럽인들에게 있어서의 미지의 대국인 중국의 모
습뿐만 아니라 황금의 나라 지팡그(일본)를 비롯하여 각종 진귀한 동물과 풍물 등을 상인답
게 자세히 소개했다.
  또한 마르코 폴로는 이와 같이 새로운 정보들과 함께 당시 유럽인들이 믿고 있던 공상적
인 동물들의 진실된 모습을 폭로하고 있다.
  수마트라 섬에 대한 서술에서 "코끼리보다 약간 작은 뿔이 하나 달린 짐승이 많이 서식하
고 있다. 이 일각수는 털은 물소 비슷하고 다리는 코끼리를 닮았으며, 이마 한복판에 굉장히 
크고 검은 뿔이 나 있다"고 했으며, "유럽 등지에서 공상으로 전해지듯 스스로 처녀의 무릎
에 몸을 던져 사로잡힌다는 식의 일각수 등과는 전혀 비슷하지도 않은 것이다"고 말했다.
  또 불 속에서 서식한다는 불도마뱀(사라멘더)에 대해서도 사실 이것은 광물이라는 것, 그
리고 "불 속에 던져놓고 한참 지나야 눈처럼 희게 된다"는 사라멘더의  천에 대해서도 설명
하고 있다. 전자는 '코뿔소'를, 후자는 '석면'을 가리키는 게 분명하다.
  '동방 견문록'은 당시의 상식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이었을까? 이같은 관점에서 다시 읽
어보면, 다음과 같은 서술과 부딪히게 된다.
  수마트라 섬의 랑블리 왕국에 관한 서술에서 "이 나라의 남성들은 대부분 길이 한  뼘 정
도의 꼬리를 정말로 달고 있다... 그러나 이런 남자들은  도시에는 살지 않으며 산간의 분지
에서 살고 있다. 그 꼬리는 거의 개의 꼬리만한데 털이 없다"라든가, 앤더먼 제도에 대한 기
록에서의 '이 책에서 특기할 만한  종족'으로 "섬 주민들은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로 머리
도 이빨도 개를 닮은 데가 많다. 머리 부분은 특히 심하여 아주 사나운 개모습 그대로이다... 
토인의 성질은 매우 잔인하여 사람을 사로잡으면 같은 종족이 아니면 통째로 먹어버린다."
  이와 같은 서술은 마르코 폴로  자신에 의한 것일까? 아니면,  전해들은 부정확한 소문에 
의한 것일까? 그도 아니면 마르코  폴로에게서 이야기를 전해듣고 글로 옮긴  루스티첼로가 
제멋대로 써놓은 것인지 지금으로선 알 길이 없다.
  다만 여기에서는 전통적인 요괴들도 이처럼 기록되어 당시 사람들에게 읽혀졌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동방 견문록' 자체도 그것을 누가 어떻게  하여 들여왔든지 간에 전통적인 '세계 
괴물지'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던 것 같다.
  
    '세계 괴물지'에 사로잡힌 새로운 정보
  마르코 폴로의 '동방 견문록'은 현존하는  사본만 해도 130여점에 달한다고 한다.  이것은 
유럽에서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 한자 한자를 손으로 베끼던  시대의 서적으로서는 매우 많
은 수량이다.
  마르코 폴로로 대표되는 사람들의 아시아에 대한 보고는 그런 의미에서 분명  유럽인들의 
폐쇄적이면서 독선적이기도 했던 전통적 세계관의  수정을 강요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분명 이시도루스적인 '세계 괴물지'에 큰 변화를 몰고 올 것이다.
  그러나 마르코 폴로의 보고 역시  전통적인 '세계 괴물지'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
했다. 따라서 그 당시 유럽인들의 상식을  완전히 뒤엎는 것도 아니었다. 또 다른  사람들이  
가져다준 정보들 역시 전통적인 세계관을 뒤엎을 수는 없었다.
  지오바니 카르피니의 '달탄기' 역시 그와 마찬가지였다. 루이 9세를 섬기고 있던 도미니크
회 수사였던 보베의 뱅상Vincent  of Beauvais의 '세계  고찰Speculum Mundi'에서도 역시 
여러 군데에 걸쳐 '세계 괴물지'가 인용된 형태로 남아 있다.
  당시에 크게 유행했던 뱅상의 이 백과사전적 저서는 그 대부분을 앞에서 말한 이시도루스
나 플리니우스, 솔리누스에게 의지한 저술이었다. 카르피니의 저작도 이와 마차가지로 '세계 
괴물지'에 사로잡힌 형태로 남아 있었다.
  '동방 견문록'이 씌여졌던 1298년경의 역사를  여기에서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그때는 
이미 십자군의 시대가 끝이 나고 있었다. 14세기로 들어서면, 유럽은 내부 문제의 해결에 바
빠서 바깥 세상에 대한 관심을 잃어가게 된다.
  프랑스와 영국의 백년전쟁이 시작되고, 1347년 이후에는 흑사병(페스트)이 유럽 전역을 엄
습하여 대외 진출은커녕 많은 사람들이 죽음과  맞닥뜨리면서 하루 하루를 보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동서 교류의 한쪽 극이었던 원 왕조가 1368년에 멸망했다. 15세기에 들어서면
서 오스만터키제국이 급속히 팽창하기 시작하여, 1452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 마
침내 비잔틴제국을 멸망시켰다. 그들은 점차 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에 걸친 대제국
이 되어간다.
  오스만터키제국은 동서 무역을 금지시킨 적은 없지만,  유럽과 아시아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지리적 특성상 강력한 벽으로서 가로막고 있는 형편이 되었다.
  그리하여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열렸던 통로도 다시 막혀버렸다.  그런 가운데 한때는 마
르코 폴로도 거의 망각되고 류블류키의 '여행기'는 훨씬 더 불행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의 저작은 영국의 철학자이며 교육개혁가였던 로저 베이컨(Roger Bacon, 1220-1292)의 
대저작 중에 일부가 남아 있기는 했지만, 19세기까지는 잊혀져 있었다.
  
    맨드빌의 '동방 여행기'
  모처럼 동서의 세계  사이에 놓였던 다리도  유럽인들의 '세계 괴물지'를  뒤엎는 데까지  
이르지도 못한 채 막혀버린 셈이다.
  그 결과를 우선 맨드빌(Mandeville, 원명  Johan Maundeville, Chevalier)의 '동방  여행기
The Voyage and Travels of Sir John Mandeville, Knight'에서 확인해보자. 작자에 대해서
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처음에는 프랑스어로 기록했던 것을 맨드빌 자신이 라틴어로 고쳐 
썼다.
  이 책은 15세기 이후 영국과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  그리고 스위스 등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더욱이 마르코 폴로의 경우와는 달리 인쇄술에 의해 출판되어 유럽의 전지역으
로 퍼져갔다(그가 실제로 여행을 한  사실이 의심을 받게 세계적  거짓말쟁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된 대항해 시대 이후에도). 영어판의  경우에는 1725년이 되어서도 여전히 출판되면서 
몇 번이나 판을 거듭할 정도였다.
  이와 같이 널리 또 오래도록 유럽인들에게 읽혀왔다는 것이 그의 '동방 여행기'를 검토하
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여행기는 동방 여행을 안내하는 형식으로 씌여져 있다. 영국을 출발하여 예루살렘,  이
집트 그리고 인도에서 중국(카타이)에 이르기까지를 그리면서, 모두 저자가 직접 했었던 세
계 여행의 기록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몇 번씩이나 실제의 체험임을  강조하며 로마 교황에게도 제출했는데  교황으로부터 
"모두가 진실이다"라는 말씀을 받았다는 것 등도 써놓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아시아에  관해서
는 그의 말이 100퍼센트 거짓은  아니다. 그는 마프코 폴로나  보베의 뱅상을 통해서이기는 
하지만, 카르피니나 그밖의 아시아를 찾았던 사람들의 저작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
들을 바탕으로 서술한 데에는 진실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에티오피아를 서술한 대목 중에 "이 나라에는... 다리가 하나뿐인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한 다리로 놀랄 만큼  빠르게 달린다. 더욱이 하나뿐인 발이  엄청나게 크기 때문에 
몸 전체를 덮어 햇빛을 가릴 수 있을 정도이다"라는 기록이 있다(제7장).
  또 앤더먼 제도에 대한 기록에서는 "이 섬에는 여러 모습을 한 여러 형태의  인간들이 있
는데, 그 하나는 흡사 거인  같은, 보기만 해도 무섭고 못생긴  거대한 남자들이 살고 있다. 
그들은 눈이 하나뿐인데, 더구나 그 눈은 이마 한가운데에 붙어 있다. 그리고 짐승의 날고기
와 물고기를 먹고 산다.
  또 하나의 섬에는 머리가 없는, 기분 나쁜 인간들이 살고 있다. 눈은 양쪽 어깨에 붙어 있
고, 입은 말발굽같이 둥글며, 그것이 또 가슴 한복판에 붙어 있다...
  또 다른 한 섬에는 윗입술이 굉장히 커서 보기 흉한  인간들이 살고 있는데, 양지 쪽에서 
잠을 잘 때는 그 입술로 얼굴 전체를 가려버린다.
  또 소인(난쟁이)와 같이 키가 작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섬도 있다. 진짜 난쟁이보다 약간 
큰 정도이다. 입은 없으나 대신 작은 구멍이 붙어 있어서 무엇을 먹을 때에는 갈대 같은 것
으로 만든 대롱으로 빨아먹어야 한다"(제22장)고 되어 있다.
  이것말고도 귀가 무릎까지 늘어져 있는 인간, 말다리를 가지고 있는 인간, 남녀 양성을 모
두 갖춘 인간 등에 대한 언급도 이어져 있다.
  다른 곳에서도 개의 머리를 한 사람이나 동굴에 살면서 뱀을 잡아먹는 인간 등 비록 사는 
장소는 다른 곳으로 바꾸어놓았지만,  '헬레포드 그림'에서 언급된  전통적인 요괴 인간들을 
그대로 채록해놓았다.
  
    '카탈로니아 그림'의 세계
  다음으로는 '카탈로니아 그림'을 보기로  하자. 마르코 폴로의 '동방  견문록' 이후 1세기 
정도 지나서 나타난 이 그림은 '세계지도에 '동방 견문록'을 최초로 적용한 것'으로 되어 있
어, 중세적 세계에서 대항해 시대Exploration Period로의 과도기를 대표하는 세계지도라고도 
불린다.
  '헬레포드 그림'이 전통적인 세계관을 근거로  한 세계지도인 데 비해,  이 그림은 13세기 
이후의 동향을 기초로 한 새로운 세계지도를 대표하는 것이다.
  이 '카탈로니아 그림'은 1375년경에  마요르카 섬에서 활동하고 있던  유대인인 아브라함 
크레스케스에 의해 작성되었다. 아라곤의 왕 페드로 3세가 프랑스의  왕 샤를 5세에게 증정
한 것으로, 현재 파리의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세계지도는 그림3에서는 생략했으나 몇 개의 나침반에서 각 방향으로 방위선이 뻗어나
가 전체가 이것들이 만드는 그물눈으로 덮여 있다. 이것은 중세의 지도에는 없는  특징이며, 
또한 위도와 경도에 의해 구분되는 대항해 시대 이후의 세계지도와도 다르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지도는 '포르틀라노형의 지도'라고 불린다. 방위선에  의해 목적으로 삼은 항구
를 향하는 방향을 손쉽게 읽을 수 있도록 연구되어 있는 것으로서, 당연히 거기에는 나침반
의 사용이 전제되어 있으며 또한 북쪽이 위쪽에 놓이게 되어 있다.
  지도에 기재된 내용은 여러 가지 의미로 과도기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첫째로, 중세적인 기독교적 세계지도에서 벗어나 있다. 예루살렘은 사원으로 표시되어  있
으나, 세계의 중심이라고 표시되어 있지는 않으며 에덴 동산도 그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기
독교적 서술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아 바벨탑과 노아의 방주도 그려져 있다.
  둘째로, 특히 지중해와 흑해 연안의 지형 등은 매우 정확하다. 이 지역만을 본다면 오늘날
의 지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아시아의 동해안은 어떤가? 단순한 원호를 이루는 해안선과 그  바깥쪽의 대양(오
케아노스)은 평평한 형태이 대지라는 관념상의 잔상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셋째로, 북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서술에는 새로운 지식이 담겨 있다. 북아프리카에  관해서
는 이븐 바투타의 정보가 채택되어 있으며, 아시아에 대해서는 마르코 폴로의 예가 많이 인
용되고 있다.
  중앙아시아에는 중국으로 가는 니콜로 형제도 그림에  나타나 있다. 또한 아프리카에는 '
헬레포드 그림'에서 볼 수 있었던 요괴 인간이  하나도 그려져 있지 않다. 그렇지만 중앙아
시아에는 소인족, 타블로바나 섬에는 거인이 있다는 등의 내용이 있다.
  중국의 지명은 마르코 폴로가 알려준 정보에 따라 기입했으나, 항주나 복주가 두 군데 있
기도 하고, 면적도 이베리아 반도와 두 배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새로운 정보가 담겨 있다고는  하지만 북아프리카와 지중해, 흑해  연안의 지형과 서술의 
정확성에 비해서 아시아에 대한 부정확성은 지극히 대조적이다.
  끝으로 대서양 쪽으로 눈을 돌려보자. 아일랜드와 영국을 비롯하여 북부의 지형은 부정확
하고 또 가상의 브라질 섬이 두 군데나 그려져 있는 등, 대서양은 여전히 반쯤은 전설의 세
계에 묻혀 있다.
  아프리카 서해안은 어떤가? 일반적으로는 1419년에 발견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마딜라 제
도, 1424년에 처음으로 통과했다고 일컬어지고 있는 난곶이 정확하게 그려져 있으며, 포자돌
곶, 카나리아 군도도 올바르게 그려져 있다.
  그리고 포르투칼이 '발견'하기 1세기나 앞서 이와 같은 탐험을  했다고 하는 마요르카 사
람인 페레엘의 이름이 명기되어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대항해  시대의 여명기 시대를 쉽게 
엿볼 수 있다.
  
    요괴와 변화로 가득 찬 세계
  14세기에서 15세기의 양상을 전체적으로 본다면, 유럽에는 마르코 폴로 등에 의해 전해진 
정보가 어느 정도는 퍼졌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아직도 전통적인 '세계 괴물지'가 막강한 힘
을 유지하고 있던 시대였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세계를 맨드빌은  산문으로, 
크레스케스는 당시의 최첨단 지식을 담은 세계지도로 보여주었다.
  유럽인이 세상에서 괴물을 추방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긴  시간을 필요로 했다. '세계  괴
물지'가 최종적으로 유럽에서 자취를  감추는 것은 계몽주의 시대인  18세기 후반이 되어서
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의 체계'(초판 1735년, 10판 1758년)로 오늘날  동식물 분류학의 기초를 확립
한 린네(Carl von Linn, 1707-1778)조차 그 분류학에 사튜로스를 남겼으며,  또한 사람과 원
숭이의 중간종으로 '호모 트로그로듀테스(혈거인)'를 상정하고 있었다. 또  한 가지  덧붙인
다면, 이 혈거인은 오늘날에도 침팬지의 학명인 팬트로그로듀테스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일본의 아라마타 히로시씨는 "뷔퐁(1749-1804)의 '박물지'에 이르러서야 괴물은 현
실적 생물 분류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고 말하고  있다. '세계 괴물지'는 이렇게 고집
스럽게 살아남아왔던 것이다.
  앞에서는 오토 폰 프라이징 같은 사람들이 서술한 '보편사'의 내용을 보았다. 말하자면 그
것은 방패의 앞면이고, 여기에서 보아온 것은 뒷면이라고 할 수 있다.
  중세적 보편사가 전제로 하고 있던 세계에서도 온전한 인간이 사는 곳은 고작 유럽에서부
터 북아프리카와 바이블랜드, 즉 성서상에 등장하는 지역 정도였다. 그 동쪽이나 남쪽은  괴
물이나 요괴들 또는 이상한 모습을 한 동물들로 가득 찬 장소들이다.
  더욱이 '헬레포드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괴물 인간의 세계까지  포함한다 하더라도  
그들이 생각한 세계는 오늘날의 세계와 비교할 때 아프리카에서는 그 북부까지가, 아시아에
서는 인도와 중앙아시아 부근까지밖에 퍼져 있지 않았다.
  또한 마르코 폴로 등에 의해 전해진 새로운 지식은  느리기는 해도 확실히 퍼져나갔지만, 
보편사와의 관계에서 볼 때 그것이 결코 기존의 좁은 세계를 뒤엎은 것은 아니었다.

        제3장 보편사의 위기 시대
      르네상스와 보편사의 위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마키아벨리
  이탈리아   플로렌스의    외교가이자   정치가였던    니콜로   마키아벨리(Nicolo    
Machiavelli, 1469-1527)가 저술한 [군주론principe,  영역 The  Prince]은  근대 사회과학의 
출발점으로 여겨진다. 또한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의 역사Istorie fiorentine](1525)에  의해 근
대 역사학의 개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도 꼽힌다.
  먼저 [군주론]을 살펴보기로 하자. 여기에서 그는 이탈리아의 통일을 희구하여 그 실현 방
법을 '새로운 군주'의 탄생에서 구하고,  '새로운 군주'가 국가를 유지하는  데 주의해야 할 
여러 가지 점들을 고찰하고 있다.
  이 논의에서 유명한 것은 군주와  도덕의 관계를 논한 부분이다.  마키아벨리는 여기에서 
군주는 덕이 있는 존재라야만 한다고 함으로써 전통적인 견해를  부정한다. 또한 기존의 군
주에게 요구되던 '틀이 크고 호탕하기'를 바라는 미덕을  부정하고 "현명한  군주는 인색하
다는 평판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고 했다.
  항상 자비로움을 보여주고 존경받는 군주가 되라는 전통적인 요구에 대해서도, "매정하다
는 비판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또는 "사랑받기보다는 무서움의 대상이 되는 쪽이 보다 안
전하다"고도 했다.
  "신의를 지키고, 간교한 지혜에 의지하지 말고 공정하게 처신한다"는 덕목에 관한 의논은 
훨씬 과격하다. 그에 의하면, 처음부터 투쟁 수단은 두  가지가 있는데, 그 하나는 '법'에 의
한 인간의 고유한 방법이며, 다른 하나는 '힘'에 의한 짐승들 특유의 방법이다.
  그리고 "군주는 짐승과 사람을 잘 구분하여 방법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여우의 
길'이란 '독살에 의한 암살과 같이 교활한 지혜를   쓰는 방법'이고, '사자의 길'이란 '눈에 
띄는 폭력을 사용하는 방법'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신의를 지킬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서도 결론은 분명하다. "현명한 군주는, 신
의를 지키는 것이 자신에게 불리하고 약속할 당시의 근거가  없어졌을 경우에는, 신의를 지
킬 수가 없으며 지킬 필요 또한 없다"고 한다.
  나아가서 군주가 기존에 주창되어오던 미덕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군주에게 해로운  일이
지만 "그것을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라고도 적고 있다. 속으로는 
'짐승의 길'을 따르고 있더라도 겉으로는  여러 가지 미덕을 실천하고  있는 것처럼 꾸미고 
있으라는 말이다.
  "군주는 자비, 신의, 성실, 인간성, 경건함의 화신인 것처럼 보여주기에  충분한 배려를 해
야 한다. 그리고 특히 이와 같은 종류의 자질을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여주는 일이 무엇보
다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모든 인간의 행동, 특히 군주의 그것처럼 호소할 재판소가 없는 경우에는 결
과를 주목하게 된다. 그 때문에 군주는 승리를 얻고,  권력을 유지하도록 힘써야 한다. 그러
면 그는 언제나 존경받고 사람들의 칭찬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권력 유지라는 결과 또
는 목적이 좋으면 거기에 이르는 수단이 인정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정치적 세계'의 발견
  군주와 도덕과의 관계를 서술한 이 부분은 훗날  그가 비판을 받게 되는 중심 부분이 된
다. 그렇지만 마키아벨리가 가장 주장하고 싶었던 것이 과연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
지 않아야 한다는 권모술수로서의 '마키아벨리즘'이었을까?
  마키아벨리의 말을 빌린다면 [군주론]의 테마는  '통치arte, 군사dello,  외교stato'를 규명
하는 것이다. 외교를 의미하는 이 스타토stato가 '국가state'라는 말의  어원이 된 것을 보아
도 알 수 있듯이, [군주론]은 근대 국가의 원리를 해명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그리고 앞부분은 인간 일반의 행동  원리가 아니라 근대 국가의  '새로운 군주'와 기존의 
도덕과의 관계를 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정치적인 존재로서, 또는 그 한계  내
에서 군주가 규범으로 삼을 만한 새로운 원리라는 것이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그의 논의를 다시 살펴보면, 이 논의의 중점은 결코 '마키아벨리즘'의 
주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마키아벨리가 가장 중요하게 다루고자 했던 것은 전통적, 
종교적 세계와는 다른 새로운 정치적 세계가 성립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정치적 세계는 종교적 원리와는 다른, 그가 분석한 것과 같은 독자적인 원리와 논리가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인간의 발견
  정치적 세계의 성립 근거에 대해서는 [군주론]의 제25장에 서술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전
통적인 견해, "이 세상의 일들은  운명과 하나님에 의해 지배되고, 인간은  스스로의 사고와 
행동을 통해 그 움직임을 변경할 수 없고, 이에 대해서는  손을 쓸 방법이 전혀 없다"고 하
는 견해가 비판되고 있다.
  만일 이 견해가 옳은 것이라면, 독자적 논리를 가진 정치적  세계 따위는 있을 수가 없으
며, 정치적 세계 모두가 종교적 논리에 포섭되어갈 것이 분명하다.
  이와 같은 논의에 대해 마키아벨리는 "인간의  자유의사는 소멸하지 않으며, 운명은 우리 
행위의 절반 정도는 정해놓고 있지만, 나머지 절반 또는 절반 가까운 부분은 우리들 자신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그는 "운명은 여신이니, 그것을 자신의 지배하에 두고 한다면, 쳐서 쓰러뜨리거
나 무찌를 필요가 있다."고까지 말했다. 그리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 자유의사에  근거를 
두고 행동하고자 하는 능동적인 활동력을 마키아벨리는 '역량(virtu)'이라고 불렀다.
  정치적 세계가 성립하는 것은 이처럼  '역량'을 지닌 인간들의 주체적  행동이 그 세계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마키아벨리가 정치적인  세계를 종교로부터 독립된 독자
적인 논리를 지닌 영역으로서 주장하는 그 근본에는 이와 같이 운명에 도전하고 운명을 지
배하려고 노력하는 의욕과 행동력을 가진  '인간의 발견'이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
고 이 점에서 그는 전형적인 르네상스 시대의 인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마키아벨리는 르네상스인의 한  사람으로서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인간의 발견'을 
실천하면서, 그것을 기초로 '국가학',  '정치학, 넓게는 '사회과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의 출
발을 하게 된 것이다.
  
    새로운 역사관
  이와 같은 그의 기본적인 인간관은 그의 역사  서술의 기초로도 되어 있다. [피렌체의 역
사]에는 게르만 민족의 이동에서 시작하여 대로렌초(Lorenzo  de Medici, 통칭 Lorenzo the 
Magnificent, 1449-1492)가 세상을 뜬 1492년까지의 역사가 서술되어 있다.
  로마 공화정 시대에 로마의 식민 도시로 출발한 피렌체는 프랑크왕국, 신성로마제국 시대
를 거쳐 차츰 발전하여, 13세기 이후에는 이탈리아에서 제일 가는 유력한 도시 공화국의 하
나가 되었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귀족과 일반 시민들과의 대립, 구엘프당(교황을 지지하는 당)과 기벨린
당(황제를 지지하는 당)의 대립, 유력한 시민들 사이에 대립과 항쟁을 계속하면서 오히려 이
것을 계기로 발전시켰다.
  또한 황제와 교황, 이웃나라 등 국외로부터의 압력과 이에 호응하는 국내 반대 세력의 움
직임에 고민하면서도 동시에  이것들에서도 지렛대를  삼아 코지모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 1389-1464) 이후 메디치 가문의 주도하에서  전성기를 맞이하기에 이른다고 서술되
어 있다. [피렌체의 역사]의 서술은 이것을 축으로 하여 생생한 이탈리아 역사의 서술까지도 
가능하게 하고 있다.
  그가 묘사하고   있는 세계는  철두철미  정치적인 세계이다.   그것은 '역량(virtu,  영어 
virtue)'의 보유자로서의 인간들의 세계이며,  이러한 인간들의 대립과  항쟁 속에서 자유가 
전개 되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군주론]에서 그가 주장한, 종교적 세계로부터 독립한 정치적 세계의 역사가  서술되어 있
는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근대 역사학의 시조의 한 사람으로 불리는 까닭이 바로 이것이다.
  그는 세계사의 서술은 하지 않았으므로 기존의 보편사를 그가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이 르네상스 시대의 가운데에서 보편사가 전제로 삼고 있던 인간
관이 부정되고 종교적 세계로부터 자립한 정치적 세계의 논리와 역사를 밝히려는 태도가 생
겼다는 것은 보편사의 기초를 근본적으로  무너뜨리게 되는 움직임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한
다.
  
    이집트사의 망령
  중세의 보편사에서는 이집트사의 문제를 의식하지 않았다. 오토 폰 프라이징의 경우, 아우
구스티누스를 기초로 하고 있었던 만큼 이집트사의 연원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또한 당시는 이집트가 이슬람 세력하에 있었기 때문에 유럽 사람들에게는 이집트에  대한 
관심도 엷어져 있었다.
  그 결과 오토뿐만 아니라 중세 유럽  사람들에게는 대체로 이집트는 단순히 성서에  실려 
있는 이야기들이 전개되는 장소에  불과했다. 헬레포드 그림에서처럼  피라미드마저 요셉이 
세운 곡물 창고라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유세비우스처럼 보편사에 있어서 이집트사의 연원이 차지하는 심각한 
문제점을 의식하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고전의 '재생'운동의  하나로 15세기  말에 헤로도토스나  시칠리아의 디오도루스  
등이 라틴어로 번역되었고, 16세기 초에는 그리스어 원전도 출판이  되어 연구 대상에 들어
갔다.
  그후 종교 개혁이 일어나 성서 연구가 성행하면서, 그리스  역사나 오리엔트 역사의 연구
가 불가결한 요소로 생각되었다. 이러는 가운데 성서 속에 여러 차례 나오는 이집트의 역사
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집트사의 연원 문제는 이러한 고전 연구나  성서 연구를 하는 가운데 일종의  부산물로 
발생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이  문제는 르네상스 이후의 움직임 가운데  예상 밖인 곳에서 
되살아나서 후세 사람들을 괴롭히게 된 것이다.
  
    헤로도토스가 묘사하는 이집트 역사
  우선 헤로도토스(Herodotus, BC 484-430/420)의 경우를 보기로 하자. 그의 이집트론이 기
술되어 있는 것은 [역사History](BC 430경) 제2권이다.
  당시 가장 높이 평가되고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역사]에 기술된 내용 중 하나가 이
집트사였다. 헤로도토스의 이집트사는 성서가 그리는 것과, 오늘날의  역사 내용, 그리고 유
세비우스와 비교되는 마네토와도 크게 달랐다.
  헤로도토스가 말하는 이집트사는 크게 '신들의 시대'와  '인간의  시대'로 나뉜다. 밑으로
의 시간의 한계는 페르시아 왕 캄비세스의 이집트 정복까지이다.
  그는, 고대 이집트사를 이야기해주던 멤피스 프타 신전의 신관의 말에 의거해, 신들이  지
배하던 시대를 이집트사의 출발점으로 보았다.
  신들의 지배의 마지막이 된 것은  "오시리스Osiris의 아들 호루스Horus인데, 이 호루스는 
그리스에서 아폴로라고 부르는 신이다. 이 신이 튜폰을 쓰러뜨리고 이집트에 군림했던 마지
막 신이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또한 이집트의 신 오시리스를 그리스인들의 디오니소스와 동일시하였으며, "디오니소스뿐 
아니라 거의 모든 신들의 이름이  이집트로부터 그리스로 들어간 것이다"라고도 말하고  있
다.
  '인간의 시대'의 최초의 왕은 민(Min, 또는 메네스Menes)이었다. 신관은  헤로도토스  앞
에서 두루마리를 펴고 "메네스 이후의 330명의 왕들의 칭호를 차례대로 읽었다."
  이 가운데 열여덟 명의 에티오피아인들과 여왕인 니토크리스를 빼면 모두가 이집트의  남
성들이었으나, 기록할 만한 사적을 옮겨놓은 왕은 모이리스 호수를  판 최후의 왕 모이리스 
뿐이었다고 말했다.
  이후에 이집트에는 세소스트리스Sesostris라는 대왕이 나타나서 유사 이래 처음으로 함대
를 이끌고 홍해 연안의 주민들을 정복하였으며 다시 "대군을 소집하여 대륙을  석권하고 진
로를 가로막는 민족들을 모두 평정했다."고 한다.
  동쪽은 인도, 북쪽은 트라이키아, 남쪽은 에티오피아에 이르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및 유
럽에 걸치는 대제국을 세웠다는 것이다.
  동생이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정복사업에서 돌아온 다음, 그는  데리고 온 많은 포로들
을 사역하여 국토 전역에 운하를 건설하고 이집트인 모두에게 같은 넓이의 반듯한 땅을 준 
뒤 세금을 부과하여 나라의 재원을 확보했다고도 한다. 그는 이집트 내정의 기초도 만든 셈
이다.
  그러나 세소스트리스라는 왕은 실재하지 않았으며, 또한  이 시대에 이집트인이 인도에까
지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는 일도 오늘날에는 인정되지 않고 있다."
  마네토도 제12대 왕조 제3대 국왕을 세소스트리스로 하여 헤로도토스와 같은 활동 내용을 
기록해놓았지만, 오늘날에는 사료적으로  확실한 제12왕조의 세네슬레트  3세가 모델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혹은 이집트 고유의 땅에서 나서 대외를 지배했다는 데에서 제19왕조의 람세스 2세를 모
델로 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날의 논의일 뿐이다.  헤로도토스
가 이집트의 역사를 재생했던 당시에는 그의 기술이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이어서 그는 세소스트리스  이후 기원전 6세기에  페르시아의 캄피세스 2세Cambyses2에 
의해 이집트가 정복되기까지를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두 가지만 소개한다.
  첫째는  피라미드를  건설한  파라오들인   케옵스Cheops, 케프렌Chephren,   미케리누
스Micerinus를 트로이 전쟁보다 뒤에 두고 있으며, 매우 새로운 시대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26왕조 제2대의 네코Necho인데, 헤로도토스의 기록에서는 페니키아인에게 아프리
카 일주 항해를 시킨  파라오지만, 구약성서에서는 유대의 왕  요시야를 죽이고 여호야김을 
이름뿐인 왕위에 오르게 한 파라오로 등장한다.
  헤로도토스에 관해서는 최후에 이집트 역사의 연대적 틀짜기가 중요하다.
  '신들의 시대'에 관해서는 명확하게 되어 있지 않지만,  '인간의 시대'  즉 메네스 왕에서
부터 세토스 왕까지는 합계341세대라고 하고, 그 기간을 다음과 같이 계산하고 있다.
  "3세대가 1백 년이므로 3백 세대면 1만 년이다. 더욱이... 나머지 41세대가 1340년이 된다. 
이리하여 합계 1만 1340년이 된다."
  사실은 헤로도토스가 잘못 계산하고 있는데, 정확히는  1만 1366년과 8개월이라는 숫자가 
나온다. 어쨌든 이것은 굉장한 숫자임에 틀림없다. 더구나 여기에는  '신들의  시대'에는 포
함되어 있지 않다.
  헤로도토스 재평가의 시대 중에서 이 수치가 보여주는 이집트 역사의 연원 문제가 보편사
에서 매우 중요한 것으로 여겨진 것이 분명하다.
  
    디오도루스가 그리는 이집트 역사
  기원전 1세기경에 살았던  시실리 태생의 디오도루스Diodorus  Ciculus가 쓴  [역사 문고
Bibliotheca historica]도 당시의 헤로도토스와 나란히 이집트 역사 연구에 필요한 기본 문헌
의 하나로 다루어졌다.
  이집트사는 [역사 문고] 제1권에 수록되어 있는데, 그 구조는 기본적으로 헤로도토스와 동
일하도고 해도 좋다. 그 이유는 이집트인들 자신에게 있었을 것이다. 글도 헤로도토스와  마
찬가지로 이집트의 신관에게서 역사를 구술해 받았기 때문이다.
  [역사 문고]에서 주의할 것은 두 가지 점이다. 첫째는  '신들의 시대'  가운데에서 오시리
스가 인도에서 아시아, 유럽의 모든 지역을 정복하고 각지에 기념비를 남겼다고 하는  점이
고, 이시스와 함께 전지역에 농업을 가르쳤다고 기록한 점이다.
  그리고 세소스트리스의 부분에서도 또다시 헤로도토스와  같은 세계 정복이 서술되고  있
다. 말하자면 이집트인은 모두 두차례에 걸쳐서 대세계제국을 건설했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디오도루스의 이집트사의 시간적 틀짜기에 대해서이다. 그는 '신들의 시대'에 관
해서는 1만 8천 년간으로, 메네스 이후 그의 시대까지를 5천 년 이하로 하고 있다.
  첫째는 뒤에 소개하는 뉴턴의 기술과 관련되므로 특별히 다루었지만,  중요한 것은 이 두 
번째이다. 그가 이집트를 방문했던 때인 제180올림피아드는 기원전 60년에서 56년에 해당하
기 때문에, 이 수를 더하면 그는 메네스 이후  예수 그리스도까지의 기간을 거의 5천년으로 
보고 있다는 결과가 나온다. 수치로는 유세비우스가 마네토 연구로부터 이끌어낸 5천6백 년
간이라는 숫자에 가깝다.
  헤로도토스보다는 대폭 단축되었다고는 하지만, 역시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보편사가 부
여하고 있는 노아 이후의 기간을 크게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마네토의 재생
  16세기 말에 이르면 마네토 역시 되살아나게 된다. 그리고  마네토의 부활로 인해 유세비
우스가 고민했던 이집트 역사의 연원 문제도 완전히 부활하게 된다.
  이 문제를 부활시킨 것은 네덜란드의 스칼리게르(Joseph Justus Scaliger, 1540-1609)라고 
하는 연대학자인데, 그는 '연대학  논쟁'의 출발점에  선  인물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서는  
그 부분에서 다시 이야기하기로 한다.
  제2장에서도 말했듯이 이집트 역사의 연원 문제는 이에 대해 고민했으면서도  해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유세비우스 시대부터 기독교적 세계사의 목구멍에 깊이 박혀 있는 가시처럼 
존속해왔다.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으로 인한 새로운 조류가 뜻밖의  계기가 되어 다시 움직
이기 시작한 것이다.
  더욱이 그것은 유세비우스에서 보았던 것처럼 경우에 따라서는 보편사의 생명을 위협할지
도 모르는 커다란 위험성을 가진 것이었다. 실제로 이 이집트사의 연원 문제는 18세기에 이
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유럽의 학자들을 괴롭힌다.
  
      종교 개혁과 보편사의 위기
    요하네스 슬레이다누스
  종교개혁에 착수한 사람들이 당시의 전통적  세계사 기술이었던 보편사와 어떠한  관계를 
가졌던가를 검토해보기로 하자. 이 검토에서 가장 좋은 자료를  제공해주는 사람이 바로 종
교 개혁기의 독일을 대표하는 역사가인 요하네스 슬레이다누스(Johannes Sleidanus, 1506경
-1556)이다.
  그는 칼뱅(Jean Calvin, 1509-1564)와도 가까운  사이로, 1541년에는 프로테스탄트로 개종
했다. 이후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의  동맹인 슈말칼덴  동맹(Schmalcaldic League, 
1531-1547)의 대사가 되어 프랑스와 영국에서 외교관으로 활약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동맹 그 자체는 1547년에 붕괴되었으나, 동맹은 그에게 종교  개혁을 둘러싼 상황에 대한 
서술을 위탁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그가 완성한  것이 [황제 카를 5세  시대의 종교와 국
가](1555)인데, 이 책은 1786년까지 80판을 넘길 만큼 뛰어난 글로 널리 받아들여졌다. 그는 
이 책으로 인해 독일의 근대적 역사학의 창시자로 평가되고 있다.
  한편 제2의 주된 저서인 [4세계제국론](1556)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프로테스탄트적인 
세계사를 대표하는 것으로 역사 교육의 기초가 되었던 이 책 역시 1786년까지 70판을 헤아
리게 되었으며, 18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커다란 역할을 계속해왔던 것이다.
  
    프로테스탄트의 대변자로서
  [4세계제국론]은 다섯 부분으로 되어 있다. 제1부는 노아의 홍수에서 '신아시리아(또는 유
대왕국의 멸망)'까지, 제2부는 최초의 세계적 제국인 '바빌로니아',   제3부는 페르시아, 제4
부는 그리스, 그리고 제5부가 로마제국으로 되어 있다.
  구성과 내용으로 보아, 이제까지 몇 번씩이나 보아온 보편사에 속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
러나 보편사의 유형에 속한다고는 하지만, 거기에는  슬레이다누스 나름대로의 독자성이 존
재한다. 여기에서는 그 독자성 쪽에 주목하면서 보기로 하자.
  제1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연호이다. 히브리어 성서에 기초하는 창세 기원이 사용된 
것이다. 따라서 노아의 홍수는 1656년으로 되어 있으며, 바벨탑은 1787년에 칼데아를 출발하
는 기념으로 건설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후의 히브리인 역사에 관해서는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모두 성서를 따른 형식으로  서
술되어 있다.
  다만, 아시리아에 관한 서술만은 전통적인 서술과는 상당히 다른 데가 있다. 그는 '구아시
리아'와 '신아시리아' 두 개의 아시리아를 설정했다.
  구아시리아는 유세비우스 이후 제1의 세계제국이 된 아시리아에  해당한다. 그 시조를 성
서에 나오는 님롯으로 하고, 여기에 베로소스 이후의 그리스인들이 전하는 아시리아의 여러 
왕들, 즉 베르스, 니누스, 세미라미스 등에서부터 1천3백 년간 존속한 뒤의 왕 사르다나팔루
스Sardanapalus까지 연결시키고 있다.
  신아시리아는 푸르(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 때에 강성해진,  성서에 등장하는 아시리아로, 
이스라엘 왕국을 멸망시킨 것도 이 아시리아이다.
  앞에서 필자는 유세비우스나 아우구스티누스가 <열왕기  하>에 나오는 아수르(아시리아)
에 관해 이것을 메디아가 패권을 잡은 시대에 존재했던 종속국가 가운데 한 왕국으로 생각
하여 무심코 넘긴 것은 후세에 큰 문제를 남긴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슬레이다누스는 이에 대해 푸르  이후의 아시리아를 성서에서의  기술대로  '신아시리아'
로 부활시켰던 것이다.
  슬레이다누스는 또 제1의 세계제국을 아시리아로  하는 히에로니무스 이후의 사고방식을 
배척했다. 그리고 그것은 성서에 나와 있는 대로 '바빌론의  제국'이며, 그 나라는 느부갓네
살 때 이집트에서 페르시아에 이르기까지의  지배를 실현하여 최초의 세계제국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다니엘서>의 기술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이다.
  제2와 제3의 세계제국에 관해서는 다른 주장들과 마찬가지로 페르시아제국 및 그리스제국
으로 하고 있다.
  전자는 세계적 제국으로서의 로마제국의 전사에 해당하는 것으로, 창세 기원 3212년의 로
마 건국으로부터 시작하여, 왕정시대, 두 사람의 콘술 시대, 포에니 전쟁이나 카이사르의 정
복사업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이 전사를 이어서 '제4의, 또한 최후의 제국'을  건설한 것은 아우구스투스였다. 아우구스
투스 이후는 각 황제마다 황제 개인과 그 치세 기간 동안에 생긴 일들을 서술해간다. 그 서
술은 슬레이다누스가 살았던 시대의 황제인 카를5세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된다.
  여기에서는 슬레이다누스의 역사 서술의 특징을 생각할 경우에 필요한 것 두 가지만 지적
해두고자 한다. 우선 첫 번째는 그의 '로마제국'이 고대의 로마제국과 중세의 로마제국을 통
합한 것이라는 말이다. 샤를마뉴 대제의 자리매김까지 포함하여, 이 점에 있어서는 오토  폰 
프라이징의 로마제국론을 계승한 셈이다.
  두 번째는 신성로마제국에 대한 그의  독특한 태도이다. 그 당시의  황제였던 카를 5세는 
카톨릭 교회와 결탁하여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종교 개혁을 탄압하려고  했다. 
이에 반해 슬레이다누스는 프로테스탄트측 제후들의 대변자였다.
  그러나 그는 로마 교황과 카톨릭 교회들이 황제권의 약화를 초래했음을 이유로  부정하지
만, 로마 황제권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 이유를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왜냐하면 제5의 제국을 건설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진실은 독일만이 제국의 
명칭과 지위를 소유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제4의 제국이 멸망하는 때는 종말이 오는 때이므로, 종말까지
는 제4제국의 시대가 계속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의 역사 서술은 한편으로는 중세적, 카톨릭적 보편사를 계승하고 있다. 성서에 기초하는 
역사 서술이라는 기본 성격도 변함이  없다. 로마제국의 평가에 대해서도, 고대  로마제국과 
중세 로마제국을 하나의 제4세계제국으로 일괄하고 있으며, 이것을 최후의 제국으로 전망했
다는 점에서도 변함이 없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는 여러 군데에서 로마 교황에 대한  비판이 전개되고 있다. 프로테스
탄트의 근본적 교리인 성서 중심주의도 현저하게 나타난다.
  아시리아론이나 제1의 세계제국이 느부갓네살의 칼데아라고 하는 점, 전통에 이의를 제기
하고 있는 점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그가 사용한 연호에도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프로테스탄트는 히브리어  성서를 
원전으로 삼았다. 70인역 성서에 의지해온 전통적인  연대학에 비하여 슬레이다누스는 히브
리어 성서에 기초하는 연대를 채용했던 것이다. 이것은 카톨릭적  연대학에 대한 명확한 비
판이며 하나의 혁신을 의미했다. 그리하여 프로테스탄트적 보편사는 중세적, 카톨릭적  보편
사의 비판적 후계자라는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성서를 둘러싼 논쟁의 시대
  [모세 5경]에는 분명히 모세가 주요  등장인물이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저자가  당사자인 
모세라고 써 있는 데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교에서는 물론 기독교에서도 모세가 5
경 전부를 쓴 것으로만 믿어왔다.
  그러나 조금만 주의해서 읽는다면, 모세 한 사람이 쓴  것으로 보기에는 이상하게 느껴지
는 데가 여기저기서 나타난다. <창세기>를 예로 들어보기로 하자.
  노아의 방주에 태울 짐승에 관하여 한편에서는 암수 "각기 둘씩"(6:20)을 넣도록 하나님이 
명하셨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
씩"(7:2)을 태우도록 명하셨다고 되어 있다.
  도대체 어느 명령이 옳으며, 노아는 어떤 명령을 따랐던 것인가?
  또한 아브라함에 관한 기록 가운데에 "아브라함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게 땅 모레 상수리
나무에 이르니, 그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12:6)고 씌어 있는데, 모세는  가
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죽었었다.
  그가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는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역사까지 어떻게 알 수가 있었을
까? 이것은 그가 선지자였기 때문에 알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하자.
  그렇지만 왜 '그때에'라는 말을 사용했을까? 여기 말고도 성서에는  '그때 그곳에는'이라
는 식의 어구가 여러 군데에서 나온다. 그것들 모두를 포함하여, 이 어구는 후세의 누군가가 
해설을 위해 삽입한 것이라는 편이 앞뒤가 맞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신명기>에는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벧보올 맞은편 모압 땅
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 묘를 아는 자 없느니라"(34:5, 6)라고 씌어 있다. 
그리고 "그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34:10)라고 되어 
있다.
  도대체 어떻게 모세가 자신이 죽은 뒤 자기 무덤의 위치에  관해 언급을 하며, 또 자신이 
죽은 뒤 어느 시점에서 '오늘까지' 또는 '그후에는'이라고 쓸 수 있었단 말인가?
  이와 같은 문제는 이미 고대에도 많이 지적되었고 논쟁도 벌어졌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논
쟁은 원천적으로 봉쇄를 당해버렸다.
  기독교의 지도자들이나 유대교의 율법학자인 랍비들도 가끔씩 논리가 통하지 않는 억지나 
강변을 늘어놓으며 모세가 5경의 저자라고 주장하는 전통을 지켜왔다.
  물론 중세에 들어와서도 유대교, 기독교인들을 불문하고 논쟁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것
들은 모두 교회 내부에서 억압당했으며, 공공연한 논쟁이 이루어지는 일은 없었다.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은 성서를 둘러싼  논쟁에 새로운 전기를 가져다주게  되었다. 특히 
프로테스탄트측의 성서 중심주의는 필연적으로 왕성한 성서  연구를 발생시키게 되었다. 그
러나 이 성서 연구의 발전은 보편사에 이중의 의미로 커다란 위기를 초래하게 되었다.
  
    연대학 논쟁과 성서의 비판적 연구 개시
  첫째는 이 성서 연구가 '연대학 논쟁'에 불을 붙이는  촉매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성서를 연구해가는 과정에서, 구약성서의 원전적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히브리어 성서 하나
뿐만 아니라, 앞에서도 말한 70인역의 그리스어  성서와 사마리아인들이 전해온 사마리아판 
성서가 있다는 것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더욱이 세 가지 계통의 성서 어느 것에서도 마찬가지로 그것들이 베껴지는 과정에서 온갖 
종류의 이본들이 생겨났던 것이다. 이것은 고대의 기독교 교부들도 알고 있었던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때는 그렇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라틴어로 된 우르가타에서는 노아의 홍수 같은 것들의 여수를 적는 부분은 히브리어 성서
를 번역해서 쓰고 있었다. 그러나 카톨릭 교회의 중요 문서인 순교자록은 그리스어로 된 70
인역 성서에 근거하여 연대를 계산했던 것이다. 그렇게 하는  쪽이 전통적 연대학으로 여겨
졌던 것이다.
  카톨릭 교회가 강력한 지도력을 지니고 있었던 시대에는 이와 같이 모순된 상황도 표면화
되는 일이 없었으나, 교회 자체가 분열된 종교 개혁 이후의  시대가 되어서는 더 이상 교회 
내부에 감추어놓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이 성서들이 모두 똑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었다면,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보편사에서 가장 중요한 연호에 대해 이들 세 가지 성서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들이 존재하
고 있었다.
  세 종류의 성서가 기록해놓은 연호가 서로 다른 가운데에서 보편사는 도대체 어느 연호를 
채용해야 하는가? 여기에서 뒤에 말하는 '연대학 논쟁'이 발생하게 되었다.
  두 번째로, 성서 연구의 발전은 그것이 차차 비판의 정도와 과학성을 높임으로써 역시 보
편사에 커다란 위기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프로테스탄트는 히브리어 성서를 원전으
로 하였고, 또한 이 원전을 각국의 언어로 번역해나갔다.
  그러나 히브리어를 정확하게 번역하기 위해서는 또다시 몇 종류나 되는 성서들을  연구하
지 않으면 안 되었다. 더구나 이같은  작업은 지극히 방대한 비교, 교정의 작업을  수반하는 
연구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성서 중심주의라고 하는 프로테스탄트의 교리상, 이와 같은  모든 작업을 통해 성
서에 씌어진 말씀을 비교, 검토하여  참된 하나님의 말씀을 결정해 가는  일은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작업이었다.
  그리고 사제들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이 곧 사제라고 주장하는 프로테스탄트의 교리에  비
추어볼 때, 이 작업은 성서에 의거하여 생각하도록 요구되는 프로테스탄트들 한사람 한사람
에게 부과된 과제이기도 했던 것이다.
  더욱이 르네상스 이후는 사제들만이 이와 같은 작업을 하는  시대가 아니게 되었다. 라틴
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같은 언어들을  익한 학자들과 지식인들이 널리 등장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제들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직업의 사람들이 연구를 담당하게 되는 까닭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움직임이 서로 연결되어 성서 연구가 왕성해지고 또한 그 연구가 서로를 자극
하여 차츰 성서의 비판적 연구가 진행되어나가게 되었다.
  이렇게 됨에 따라 17세기에 들어서면서, 그 논쟁이 일반  대중들 앞에서 공공연하게 이루
어지게 되었다.
  
    토머스 홉스
  공공연한 논쟁의    방아쇠를  당긴  것은   영국의   철학자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였다.
  그는 [리바이어던Leviathan, 1651]에서 "5경이 [모세 5경]이라 불린다고 해서 모세에 의해
서 씌어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충분한 논리적 근거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책에서 앞에서도 말한  <신명기>의 모세의 죽음에 관한 기사  이외에도 "그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라는 보기를 들어 주장하고, "따라서  [모세 5경]은 확실
하게 얼마나 뒤인지는 모르지만 모세 시대 이후에 씌어졌다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했던 것
이다.
  또 [모세 5경] 이외의 여러 성서에도 '오늘에 이르기까지...'라는  표현이 많이  있음을 언
급하면서 그 각각의 문서가 특정한  어느 시대에, 여러 사람들의 손에  의해 편집된 것이라
고 주장했다.
  
    스피노자
  17세기 후반에는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활동한  유대인 철학자   스피노자(Benedict de 
Spinoza, 1632-1677)가 [모세 5경]의 비판적 연구를 한층 더 추진했다.
  그는 [신학 정치론Tractatus Theologico-Politicus](1670)에서 앞에서도 말한 '이후 모세와 
같은 선지자는 나오지 않았다'와 같은  예를 들면서 "[모세 5경]은  모세에  의해서 씌어진 
것이 아니라 모세보다 몇 세기 이후의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씌어진  것이 명약관화하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모세 5경] 이외의 다른 성서들에  대해서도 원저자에 대한 탐구를 추구하여 
"나는 그가 에즈라Ezra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고 주장했다.
  에즈라는 기원전 444년경 포로로 잡혀갔던 땅 바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이방인과 
혼인한 사람들을 이혼시키는 등의 조치를 취하여 유대인의 민족적, 종교적 순수성을 유지하
기 위한 개혁을 단행했던 제사장이자 율법학자였다.
  성서에는, 그가 이때 모세의 율법 서적을 가지고 돌아와서 사람들에게 읽어주었다고 기록
되어 있다. 이때의 문서가 오늘날의 [모세 5경]의 원전이  아닐까 하는 추측은, 중세의 유대
교 성서학 등에서도 이루어져 당시 몇몇 선구자가 있었다. 그는 이 흐름을 계승하고 그것을 
문헌 비판의 방법에 근거하면서 전개했던 것이다.
  
    리샤르 시몽
  성서를 비판적으로 연구하는 스피노자 이상으로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오라토리오파  수도
회에 속해 있던 신부 리샤르 시몽(Richard  Simon, 1637-1712)이었다. 그는 [구약성서의 비
판적 역사](1678)에서 스피노자가 주장하는 문헌학적 비판을  바탕으로 철저한 연구를 추구
했다.
  그는 선지자란 서기(기록하는 사람)였다고 생각하고, 그들은  유대인들의 역사를 기록, 보
관, 편집하는 임무를 띤 사람들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모세의 율법'이라고 불리고 있는 부분 등 [모세  5경]의 일부는 모세에 의해 기록
된 것이지만 다른 역사적 서술을 한 부분은 이 선지자들,  즉 서기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지 
것임을 주장했던 것이다.
  선지자가 서기라는 생각은 시몽의 독단적인 생각이었으며  받아들이는 사람도 적었다. 그
러나 시몽의 논증의 매우 철저하여  그 이후로는 [모세 5경]의 전부가  모세에 의해 기록된 
것이 아니라는 것과 어떤 형식이든 간에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손질이 가해졌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쪽이 이미 움직일 수 없는 정설로 되어갔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성서에 바탕을 두고 연대 계산을 하는 것 또한 잘못이 된다.  선지자
가 서기였다는 그의 설로 본다면, 이 서기는 당연히 유대인의 역사와 관계되는 것만 기록해
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구약성서에는 페르시아의 왕 이름이 세  사람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유대인을 '
바빌론의 유수 생활'에서  해방시킨 키루스,   유대인의 제2신전 건설을  도와준  다리우스  
1세Darius 1, 다니엘이 활동했을 때의 왕 페르샤자르(아르타크 세르세스?) 세 사람이다.
  이 세 명의 페르시아 왕은 모두 다 유대인의 역사와 관계가 깊은 왕들이라 기록에 남겨진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페르시아에는 세 명의 왕밖에 없었다고 한다면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실제로는 13명의 왕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성서 이외의 여러 역사 서적에 나타나 있
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연구를 왜 카톨릭의 사제인 시몽이 한 것일까? 그것은 심술궂게도 그가 열렬한 
카톨릭교인이었다는 데에 기인했다고 한다. 그 까닭은, 그의 이러한 주장에는  프로테스탄트
의 교리를 비판하고자 하는 의도가 숨겨져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성서 중심주의는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에 반하여 
그 성서가 인간에 의한 기술도 포함하고 있음을 드러낸다는 것은 프로테스탄트의 기본 전제
를 파괴하는 것으로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시몽은 주관적으로는 카톨릭 진영을 위해 싸웠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결국 카톨릭의 기
반까지도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실제로 카톨릭측의 반응도 재빨랐다. 시몽의 저술은  발간과 
동시에 발매 금지를 당하고 남은 것은 압수되었으며, 그는 소속되었던 오라토리오회에서 제
명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통파로 자처하면서 카톨릭의 교리에 충성을 맹세한 그의 신념은  변
하지 않았다. 그는 이후 프랑스에서의 출판이 불가능하게 되자  네덜란드에서 이 책을 출판
했고, 다시 신약성서 본문과 번역서, 주역서 등에 관해서도 차례대로 비판적 연구를  발표했
다.
  시몽의 주장은 그때까지 1천 년 이상 동안 서술되어온 보편사에 대한 놀라운 도전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이제까지 기독교 연대학이 성서의 기술 전체에 부여해왔던 절대적인  권위를 
크게 흔들고, 그로 말미암아 성서 연대학을 근본에서부터 무너뜨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시몽이 행한 성서의 비판적 연구의 추진으로 말미암아, 보편사는  매우 중대한 국면에 서
게 되었다. 보편사의 위기가 문헌  비판의 등장에 의해 불러설 수  없는 사태까지 발달하게 
된 것이다. 더욱이 그에 의해 확립된  '비판'은 그후 더욱더  강화되어, 18세기와  19세기까
지 이어지는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대항해 시대와 보편사의 위기
    콜럼버스에 의한 '인간'의 발견
  이탈리아의 항해가였던 콜럼버스(Columbus, 1446?-1506)가 1492년에 발견한 것은 단순한 
'신대륙'만이 아니었다. 첫 번째 항해에서  돌아오는 배 위에서 쓴  편지에서 그는 오늘날의 
쿠바, 아이티 같은 섬들을 발견한 사정을 보고하였다.
  "나는 이제까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과 같은 괴물들을 이 섬에서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누구나 다 모습도 좋고 피부 색깔  또한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 말
고는 기니아의 사람들처럼 검지도 않습니다."라고  쓰고 있다. 콜럼버스는 거기에서  괴물이 
아니라 '인간들'을 발견했던 것이다.
  콜럼버스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 견문록]과 함께 맨드빌의 책도 읽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의 머릿속에는 '세계 괴물지' 속의 괴물들로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그를 이어 '신대륙'에 들어갔던 사람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1518년에 쿠바의 초대 총
독이었던 벨라스케스(Diego Velasques de Cuellar, 1465-1524)가 코르테스(Hernando Cartez, 
1485-1547)에게 준 명령서가 남아 있다.
  "크고 폭넓은 귀를 가진 사람들, 또 개의 머리를 한 사람들이 있다고 하므로 그것을 찾아
낼 것과, 귀관과 동행하는 인디오들에 의하면 '그 근처에  산다'고 하는 아마존들이 어느 지
방에 살고 있는지를 조사할 것"이라고 되어 있다.
  1년 뒤인 1519년에 코르테스는 이와 같은  괴물들이 아닌 아스텍Aztec 왕국과 수도인 테
노치티틀란(Tenocititlan, 지금의 멕시코시티)을 만나게 된다.
  그래도 이들의 후계자들은 아마존의 거주지 탐색을 계속했다.  16세기 중엽에 '아마존 강'
이나 '캘리포니아'가 발견된 것은 이와 같은 경위에서였다.
  '캘리포니아'는 당시 아마존의 여왕 칼리파가 살고 있는  것으로 믿어왔던 섬의 이름이었
다. 태평양을 북상하여 처음으로  이 반도와 맞닥뜨렸던  에스파냐 사람들이 '이곳이야말로 
칼리파가 살고 있는 섬'이라고 생각한 것이 이 반도의 이름이 캘리포니아가 된 이유였다.
  콜롬버스의 편지에 나오는 말은, 유럽인들 스스로가 그  당시까지의 '세계 괴물지'를 타파
해가는 첫걸음이 되었지만 빠르게 진전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인식은 기존의  '
세계 괴물지'와 공존해가면서도 아스텍 왕국의 정복(1519),  잉카제국의 정복(1521) 등 에스
파냐인들의 '신대륙'에 대한 진출이 확대되면서 착실하게 퍼져나갔다.
  
    신대륙의 발견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콜럼버스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발견한 지역을 인도
의 일부로만 생각했다. 그는 결코 그곳이 '신대륙'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탈리아의 상인이자 항해가였던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 1454-1512)가 포
르투갈 왕의 요청에 따라 세 번째 항해에 나섰다. 이때 남미 대륙의 대서양 연안을 대략 남
위 50도 부근, 오늘날의 마젤란 해협 바로 가까이까지 탐험하여, 거기까지 육지가 이어져 있
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은 모두 남위 35도 이북에 있는데 만일 적도의 북쪽에서 남
위 50도 이남까지 이어져 있는 땅이 있다면 그것은 이 세 대륙 이외의 다른 대륙임에  틀림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항해 뒤 1503년경까지 쓴 편지들에서,  이것을 세계의 '제4의 부분'(네 번째 편
지)이라고 하기도 했고, 또 '신세계mundus novas'(다섯 번째 편지)라고도 일컫었던 것이다.
  그의 편지는 그 즉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507년 [세계지리  입문]이라는 제목의 
서적이 출판되었다. 그 책의 제9장에는 "바야흐로 세계가  다 알고 있는 부분은 광범위하게 
탐험되어 있으나, 또 하나의  제4의 부분도 아메리쿠스  베스푸티우스(Americus Vesputius, 
아메리고 베스푸치)에 의해 발견되었다. 유럽도 아시아도  여성의 이름이 붙여져 있는 것처
럼, 이것 역시 그 발견자이자 총명한 아메리쿠스와 관련해서 아메리카... 즉 아메리쿠스의 땅
이라 부르지 못할 까닭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세계지리 입문]에는 그밖에도 마르틴 발토제  뮐러의 '프톨레마이오스의 전통과  아메리
고 베스푸치의 항해에 의한 세계도'라는 제목이 붙은  세로 1.36미처, 가로 2.43미터의 거대
한 지도가 부록으로 딸려 있었다.
  이 지도에는 남아메리카  부분이 섬 대륙으로  그려져 있고 거기에  '아메리카'라고 씌어  
있다. 이에 비해 북아메리카는 훨씬 작은 섬으로 그려져 있다. 이 세계지도는 그 뒤 '신세계
의 세례 증명서'라고도 불리면서 옛 지도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에 속하게 되었다.
  결국 아메리카라는 호칭은 현재의 남아메리카를 가리키는 말로 처음  등장했다. 그 뒤 이
것이 북아메리카에도 적용되는데, 이와 같이 북미 지역이 뒤늦게 아메리카라고 불려지게 된 
것은 탐험이 늦게 이루어졌던 데에 그 이유가 있다. 북미 대륙의 대서양 연안이 영국인들에 
의해 버핀만 부근까지 밝혀지게 된 것은 1576년에서 1586년 무렵이다.
  그러나 태평양 연안의 경우 캘리포니아 이북은 오랫동안 탐험이  진전되지 못했다. 이 지
역이 최종적으로 밝혀질 때까지는 2백 년이나  흐른 뒤였다. 즉, 겨우 1728년에  이르러서야 
베링이 아메리카와 아시아가 다른 대륙임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당면하고 있는 16세기로 되돌아가보며 북아메리카 서해안의 모습이 분명치 않은 채  그것
이 작은 섬이 아니라는 정도만 알게 되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막연한 형태로 그 크기가  알려지자 오히려 콜럼버스가 상상했듯이  북아메리카는 
아시아 대륙이라는 생각도 부활되었던 것 같다. 1590년 뮬리티우스의 세계도처럼 이와 같은 
생각에서 그려진 세계지도에서는 -북아메리카와 아시아가 붙어  있게 되는 바람에- 지팡그
(일본)가 없어져버리기까지 한 것도 있다.
  
    메르카토르의 세계지도
  북부 대륙까지 아메리카로 보는 사고방식은 영국이나 네덜란드 등지에 나온 것으로  보인
다. 영국에서는 1519년 존 라스틀이라는 사람의 '4대  원소의 성질'이라는 연극에서 이 말이 
북부 대륙을 포함하여 사용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북미 지역을 아메리카라는 명칭으로 사용한 최초의 지도는 16세기에 가장 뛰어난 네
덜란드의 지도학자였던 게라르두스 메르카토르(Gerardus Mercator,  1512-1594)가 1538년에 
출판한 세계지도라고 일컬어진다.
  그는 또 1569년에 출판한 유명한 세계지도  가운데에서 "신인도(아메리카)가 아시아와 같
은 대륙을 형성한다는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는 점은 명백하다"는 주석을 달고 있다.
  결과적으로 보면 메르카토르의 인식이 옳았다. 그후  세계지도의 역사는 세부적으로는 여
전히 수정이 필요했지만 큰 테두리는 메르카토르의 세계지도가 승리를 차지해가는 과정이라
고 할 수 있다. 또한 그 과정은 유럽의 세계관이 전환되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유럽인들이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세 대륙 이외에 또 하나의 대륙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
닫고 인정했다는 것은 보편사에 커다란 타격이 되는 사건이었다.
  둥근 공 모양의 대지와 그 위에 있는 네 개의 대륙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세계로의 전환은 
보편사를 근본적으로 흔들어놓은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우리가 오늘날 친숙하게 대하고 있는 메르카토르 도법으로 그려진 세계지도는 세계사  서
술의 역사에서도 커다란 역할을 해낸 것이었다.
  
    인디언 역시 아담의 자손
  1537년, 로마 교황 바오로 3세는 교서를 통해 다음과 같은 선언을 했다.
  "인디언도 우리들과 똑같이 진정한 인간이다. 그들은 카톨릭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수용하기를 열망하고 있다."
  도대체 왜 이러한 교서가 나오게 되었을까?
  콜럼버스 이후 16세기 중반까지, 유럽인들 사이에서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인디언들이 기
독교를 이해할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유럽인들과 같은 이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인가 등의 
문제였다.
  여기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괴물적 존재들에 관한  논쟁을 다시 한 번  상기해보자. 그는 
인간을 '이성적이며 죽어야만 하는 동물'이라고 정의하고, 괴물의  모습을 하고 있든 아니든 
간에 이 정의에 들어맞으면 아담과 이브의 자손이라고 단언했었다.
  이것을 거꾸로 말한다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라면 아담
과 이브의 자손, 즉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 된다.
  만일 인디언이 기독교를 받아들일 만한 이성을 지니지 못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바로 
인디언이 인간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 되는 것이 아닐까?
  윌무센이라는 학자는 "초기 에스파냐 이주자들이 제일 선호하던 견해는  인디언은 진정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즉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의미에서 인디언은 진정한 인간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었던 것
이다.
  그러나 진정한 인간이 아니라면, 인디언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와 같은 논쟁이 벌
어지고 있는 와중에 발표된 것이 로마 교황 바오로 3세의 교서였다.
  그 교서를 발표하고 나서야 비로소 인디언들은 공식적으로 '진정한 인간', 즉 아담과 이브
의 자손이라고 인정받게 되었던 것이다.
  
    바리아드리의 논쟁
  이 교서로 논쟁은  그쳤을까?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이것을 입증하는  흥미있는 사건이 
1550년에 일어났다. 에스파냐의 바리아드리에서 공개적인 논쟁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한쪽은 아메리카 인디언의 보호법 제정 활동과 [인디아의 역사](1559) 등으로 유명한 바르
톨로메 데 라스카사스(Bartolome de Las Casas, 1474-1566)였고, 이에 맞서는 쪽은 당시 아
리스토텔레스학의 권위자였던 후안 히네스 데 세풀베다(Juan Gines de Sepulveda)였다.
  논쟁의 중심은 인디언이 유럽인들과 같이 인간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가지고 있는가를  둘
러싸고 이루어졌다. 이것을 긍정한 것은  당연히 라스 카사스이며, 부정한 쪽이  세풀베다였
다. 재미있는 것은 세풀베다의 논리이다.
  그는 인디언을 '이성을 갖추지 못한 짐승과 다름없는  야만인'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아리
스토텔레스가 [정치학]에서 전개한  '선천적 노예설'에 의거하면서,  인디언은 인간이라고는 
하여도 오히려 선천적으로 모자라는 인간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인디언은 인간적인 각종 권
리를 행사할 수 있는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제도를 옹호하는 논쟁에서 이  '선천적 노예설'을 전개하고 있었다. 
세풀베다의 이 주장도 에스파냐인들이 신대륙에서 추진한  엔코미엔다 제도를 옹호하고, 그 
곳에서의 인디언들에 대한 노예 같은 혹사를 옹호하려는 정치적인 의도도 있었던 것으로 생
각된다. 동시에 전통적 세계관을 고집했던 당시 유럽인 대부분의  심리도 배경이 됐다고 생
각한다.
  보편사적인 관점에서는 유럽 이외의 땅은 요괴나 괴물 같은  인간, 즉 그들보다는 모자라
는 인간들이 살고 있는 세계일 뿐 유럽인들과 동등한 인간들이 사는 곳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전통적인 세계관에 대한 집착 역시 세풀베다에게 또 하나의 심리적 배경이 되지 
않았을까.
  
    몽테뉴
  이 문제는  16세기 말  프랑스의 정치가이며  사상가였던 몽테뉴(Michel  de Mantaigne, 
1533-1592)에 의해 겨우 해결을 보게 되었다.
  그는 [수상록Essais](1588)에서 "신대륙의 국민들에 대해서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그들
에게는 야만스러운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누구나  자신의 습관에 없는 것을 
야만이라고 부른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그러나 저 신대륙에도  역시 완전한 종교와 정치가 
있으며, 모든 것에 대해서 충분히 온전한 습관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유럽인들은 그를 통해서야 겨우 '신대륙'을 인간이 사는 지역으로 인정하고,   '완전한 종
교와 완전한 정치'를 가진 세계로 인식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와 동시에 중세적인 세계관을 
스스로 파기하고 유럽을 세계 속의 한 지역으로 의식하게  된다. 이것은 유럽만을 절대시해
온 전통적인 보편사의 세계가 그 근본부터  부정된 것을 의미한다.  보편사는  이런 측면으
로도 위기를 더해간다.
  
    다양한 인디언 기원론
  마젤란의 세계일주가 신대륙의 인지에 커다란 영향을 준 것이 1522년, 바오로 3세의 교서
가 나온 것이 1537년, 메르카토르가 '아메리카' 대륙을 아시아에서 분리해 그린 최초의 세계
지도를 출판한 것이 1538년이었다.
  보편사적인 논쟁도 이와 거의 같은 시기에 시작하고 있다.  1530년대부터 누가 신대륙 최
초의 주인이고, 그들이 누구의 자손이며, 어디에서 왔느냐 하는 논쟁이 벌어졌다.
  그 논쟁을 시작한 문헌상의 최초의 예는 카리브 해 지역을 널리 여행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던 에스파냐의 역사가 곤잘로 페르난데스 데 오비에도(Gonzlaos Fernandez de Oviedo)였
다. 그느 1535년에 출판된 [신대륙 자연일반사] 가운데에서  주민의 기원에 대하여 '고대 에
스파냐인설'과 '카르타고인설'을 짜맞추어 말했다.
  '고대 에스파냐인설'이란 기원전  1658년경에 고대  에스파냐인들이 대서양에서  저 멀리  
서쪽에 있는 섬을 발견하고, 여기에 당시 왕의 이름을  따서 에스페리데스 제도라고 명명했
다는 전설에 의거한다.
  '카르타고인설'도 비슷한 전설에 의한 것으로, 이에 따르면 카르타고인들이 옛날 아틀란티
스Atlantis 저쪽에 있는 섬을 발견하고 정착했다고 전해져왔다.
  오비에드는 최초로 고대 에스파냐인들이 섬에 정착하고 이어서 카르타고인들이  옮겨와서 
그 지역의 인구 증대에 기여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바리아드리의 논쟁이 벌어졌던 1550년이 지나면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이 빠른 속도로 확대
하여,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설 이외에도 다양한 인디언 기원설이 쏟아져나온다.
  그중 라사 카사스가 처음으로 생각했던 '동인도 기원설'과  플라톤이 전한 아틀란티스 주
민들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들이 그들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틀란티스 기원설'이 주목을 받
았는데, 이 설은 16세기에 가장 인기가 있는 설이었다. 또한 고대 그리스의 시인이었던 호메
로스Homeros의 시로 잘 알려진  오디세우스Odyseus가 에스파냐 남단은  지브롤터Gibraltar  
서쪽까지 흘러 떠내려갔을 때에  표착하여 남기고 온 사람들의  자손이라고 생각하는 '그리
스인 기원설'도 있었다.
  그리스도교의 성서에 의해 설명하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스라엘인 기원설'과  '오빌 기
원설'이 그것이다.
  전자는 이스라엘 왕국이 살만에셀에게 멸망당했을 때 왕국을 구성하고 있던 열 개의 부족
이 아수르(아시리아)로 끌려갔다는 성서의 기록(열왕기 하 17:6)에 의거한 것이다.
  이 10부족은 역사에서 모습을 감추어버리는데, 현재 성서의 정전에서 제외된 '에즈라  제
2서'에는 그 전설이 수록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이  10부족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앙과 율
법을 지키기 위해 동쪽 땅으로 떠나갔다고 한다.
  그들은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일  년 반의 거리에 떨어져  있는 '아자레스'에 도착했다고 
되어 있다. '이스라엘인 기원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아자레스'야말로  신대륙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는 인류의 종말이 매우 가깝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 이유는 '에즈라 제2서'에는 최후의  심판이 이루어질 때, 그들이  '아자레스'에서 모습을 
나타내어 심판을 받는다고 적혀 있기 때문이다. 그 아자레스인들이 발견되었으니 예언이 성
취된 것이고 따라서 머지않아 종말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오빌 기원설'이란 창세기(10:29)에 있는 함의 자손이며 욕탄의 손자인  오빌을 이들의 조
상으로 보는 것이다. 이 설을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페루인을 오빌의 자손들로,  그리고 
유카탄 반도의 사람들을 욕탄의 후손으로 여기는(발음이 비슷해서일까?) 경우도 있었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설들은 모두  16세기 후반 카톨릭의 나라인 에스파냐에서  주창되었
다. 그 설들은 한 가지 설을 단독으로 주창한 경우도 있고, 둘 이상을 짜맞추어서 주창한 경
우도 있다. 또한 둘 이상의  설을 짜맞출 경우에는 오비에도 같이  시대를 앞뒤로 움직여서 
짜맞추기도 하고, 유카탄이나 뉴에스파냐 사람들은 그리스인의 자손이며 페루인은 아틀란티
스인들의 자손이라는 식으로 장소를 바꿔 짜맞추기도 했다.
  17세기 초까지는 위와 같은 에스파냐 학자들이 논쟁을 주도했다.  그들의 특징은 어느 것
이나 인디언들의 조상을 그리스, 로마의 고전이 전하는 전설이나  성서상의 기록 등에서 구
하여 유럽인들이 익히 알고 있는 민족과 결부시키려고 한 것이다.
  여기에서 언급해두고 싶은 것은 이들 여러  가지 설들은 모두 궁극적으로는 성서  기록의 
진실성을 옹호하는 결과가 된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이들의 설에서 나오는 여러 민족들은 모두 어떤 형태로든 제1장에서 말했던 창
세기의 '민족표'에 연결하여 설명을 마친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한 각종의 시도
는 한결같이 전통적인 보편사에 신대륙을 짜넣으려는 논쟁이었다는 것이다.
  
    아코스타의 아시아 기원설
  에스파냐 학자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은 호세 데 아코스타(Jos de Acosta, 1539-1600)
의 과학적인 아시아 기원설이다.
  그는 예수회의 선교사가 되어 남아메리카의 페루를 중심으로 활동했었다. 그리고 그 동안
의 경험을 바탕으로 1590년에 [신대륙 자연문화사Historia  naturaly moral de las Indias]를 
에스파냐어로 출판했다.
  아코스타가 훌륭했던 점은, 이제까지의 여러 가지  설이 오직 인디언이라는 인간들에게만 
국한해서 추론과 주장을 했던 경향에서  벗어난 점이다. 그는 동물들에게까지  시야를 넓혀 
서식 동물들의 형태가 아시아와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는  데에 착안하여, 이들 인디언
의 아시아로부터의 도래를 추정했다. 그의 결론을 인용해보자.
  "인간의 계통은 조금씩 이동하여 신세계에 이르렀다...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의 요점은 
신대륙의 땅이 세계의 다른 대륙과 이어져 있거나 또는 매우 근접해 있는 것이 신대륙에 사
람이 살게 된 주된, 그리고 진정한 이유였을 것이라는 점이다. 또한 나는 신세계와 서인도에 
사람들이 살게 된 것은 그렇게 몇만 년이나 과거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제1권 24장).
  물론 그가 이와 같이 생각하는 밑바탕에는 역시 성서가 있었다. 즉 인간과 동물의 양쪽을 
생각하는 발상은 "모든 생물들의 번식은 방주의 바닥이 육지에 닿은 아라랏  산에서 방주로
부터 떠나간 자들에게 국한해야"(창세기 9:18-20) 한다는 신념에서 온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의 사고방식을 당시의  상황 속에서 생각한다면, 오히려  시대를 훨씬 초월한 
과학적인 것이었다. 아코스타의 주장은 결과적으로 옳았을 뿐만 아니라 지리학적,  역사학적
인 방법과 훌륭한 과학적 논리의  근거에 있어서 새로운 시대를 개척한  것이었다. 그 결과 
그 주장은 유럽 전역에서 널리 인정을 받게 되었다.
  
    위기를 극복한 보편사
  이와 같은 움직임은 보편사의 위기와의 관계에서 최종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일까?
  보편사가 치명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수많은 상처를 입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대지가 공 
모양이며 그것도 세 개의 대륙이 아니라 네 개의 대륙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또한 이들 
여러 대륙의 어디에도 괴물들은 없으며 모두 정상적인 인간들이  거주하고 있다는 것, 그리
고 지구상에는 여러 개의 독자적인 세계가 있어서 유럽은 이와 같은 여러 지역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 등. 이러한 일들이 밝혀진 것은 어느 것이나 보편사의 기초를 파괴하는 것이
었기 때문이다.
  다만 최후에 신대륙에 살고 있는 인디언들은 동물들과 함께 아시아에서 건너간 것이 확실
해졌다. 그리고 이 사실은 보편사에 있어서는 숨을 되돌릴 수 있는 요소가 되었다. 아시아인
은 이제까지 아담과 이브에 계보에 연결되어왔으므로,  인디언의 조상이 아시아인이라면 결
국은 인디언도 성서에 바탕을 둔 인류사에 위치를 부여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신대륙'을 하나의 세계로  인정했다고는 하지만 유럽인들은 여전히  자신을 잃지는 
않았다. 이미 몽테뉴는 "우리들의 세계는 최근 다른 세계를 발견했다. 이 세계는  우리의 세
계에 못지 않게 크고  튼튼하며 손발도 건장하지만,  너무나도 새롭고 어리기  때문에 아직
도 ABC를 배우고 있다"고 했다.
  세계 그 자체는 지금까지의 구조를 바꾸었으나, 신대륙을  '어린 세계'로 치부하고 유럽을 
어른의 세계로 봄으로써 유럽은 새로운 세계에서  간신히 우월적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보편사는, 비록 자기수정은 불가피하게 되었지만 존망의 위기에까지 몰리는 
일은 없었다.
  
      중국사의 연원 문제와 보편사의 위기
    포르투갈인과 중국
  유럽과 중국의 직접적인 관계는 13세기에 성립되기는 하였으나, 14세기 전반에는 다시 관
계가 두절되었다. 마르코 폴로와 같은  사람들에 의해 소개된 중국에  대한 '부귀와 영화'의 
이미지가 계속 유럽에 남아 있기는 했지만, 중국의 문화에 관한 정보는 거의 없었다.
  따라서 그 이후는 앞에서 소개한 여행기들 가운데에서 맨드빌이 기술한 '호화스러운 궁중 
생활을 영위하는 대한의 나라'는 환상적인 중국에 대한 인상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고 해
도 과언이 아니다.
  그후 직접 중국에 발자취를 남기는 유럽인이 나타나는 것은 대항해 시대로 접어들고 나서
의 일이다. 1517년에는 광둥부근에 포르투갈인이 모습을 나타냈고, 1557년에는 그들이  아모
이(Amoy, 샤먼, 중국 남동부의 항구 도시)에 거주하는 것을 허락 받았다.
  이때를 전후하여 중국을 찾아간 초기 사람들로는 밀무역에 가담하였다가 1549년에서 1552
년까지 중국 남부에서 구금되었던 여행가 갈레오 데 페레이라, 도미니크회의 수도사인 가스
파르 다 쿠르스 같은 포르투갈인, 1575년에  에스파냐 아우구스티누스회의 수도사로서 기독
교 포교단장으로 푸젠을 찾아갔던 마르틴 데 라다 등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짧은 
기간의 중국 경험을 바탕으로 나름대로의 여행기를 남겼다.
  또한 1576년에는 아모이에 사교좌가 설치되었다. 포교에는 별로 공헌하지 못했지만,  교역 
활동에는 성공하여 아모이는 포르투갈의 중요한 거점으로 발전해간다.
  이와 같이 16세기 후반부터 몇몇 유럽인들이 중국을 찾아갔다고는 해도 그들의 중국 체험
은 여전히 일시적이고 단편적인 것에 불과했다.
  
    예수회의 중국 포교
  유럽과 중국의 교섭이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서는 것은 예수Jesuit회의 활동에 의해서이다. 
그 실마리가 된 것이 프란시스코 자비에르(St. Francisco Xavier, 1507-1552)였다.
  그는 1541년에 리스본을 떠나 1549년에는 일본에서 전도를 했다. 일본에서의 활동중에 그
는 이  나라에 거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중국의 존재를  깨닫고, 일본에서의 포교 활동의 
발전을 위해서는 우회하는 듯한 감이 있어도 먼저 중국에 대한 전도가 지름길이라고 생각하
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스스로 중국으로 갔으나 광둥 부근의 상촨섬에서 열병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중
국 본토 상륙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뜻을 이어 예수회의 수사들이 중국 포교를 시도하게 되었다.
  1601년, 17세기가 시작되던 해에 이탈리아인  예수회 수사이던 마테오 리치(Mateo  Ricci, 
1552-1610)는 북경으로 들어가 명나라의  만력 황제를 배알하기까지 했다.  이 일은 유럽과 
중국과의 관계에 역사상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후 예수회 수사들이 차례로  중국으로 들어갔고, 이들은 유럽의  과학 문명을 배경으로 
그들이 지니고 있던 천문학, 수학, 과학 기술 등을 무기로 삼아 중국에서의 포교 활동에  힘
쓰게 된다.
  
    멘도사의 [중국대왕국지]
  1637년경에 예수회의 선교단이 자신들의 활동을  위해 중국에서 70인역 성서에  의거하는 
연대학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를  얻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장의 연대학 논쟁에서 
상세히 언급하겠지만, 당시에는 카톨리 교회도 연대학의  기초를 히브리어 성서로 옮겨가고 
있었다. 그 중에서 왜 이런 논쟁이 일어났을까?
  그 사정을 전해주는 것이 서양에서 가장 일찍 중국의 국정 전반에 관해 출판된 서적이라 
일컬어지는 후안 곤잘레스 멘도사(Juan Gonzales Mendoza)의 [중국대왕국지]이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파의 선교사로 중국 포교의 명을 받고 1581년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
가 명나라 황제에게 보내는 친서를 가지고 멕시코로 갔다.
  그러나 거기서 마르틴 데 라다로부터 중국의 국내 사정을 듣고 명나라로 가는 것을 단념
했다.
  하지만 그는 이때 라다에게 전해들은 정보를 바탕으로 이  책을 저술하였다. 처음에는 에
스파냐어로 출판하였으나 독일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그리고 영어로도 번역되어 17세기 
중엽까지 널리 읽혔다고 한다.
  여기에서 멘도사는 '이 나라의 연원에 관하여'라는 장을  만들어 "이 나라의 영토와 백성
들은 제1대 황제인 비티 이래, 국왕의 권력에 귀속되어  현재 통치하고 있는 왕까지 면면히 
이어져왔다"고 서술하고 있다.
  역대 왕들에 관해서도 비티에서 시작하여 명조 제12대 황제에 이르기까지 자세하게  연수
를 적고 있다. 그 숫자를 합하면 4269년 7개월이라는 숫자가 된다.
  제12대 만력 황제가 황제의 지위에 오른 것이 1573년이다. 즉 멘도사는 비티가 즉위한 시
대를 그리스도 기원으로 기원전 2700년대에 자리잡은 것이 된다.
  이 숫자가 갖는 의미는 다음과 같다. 노아의 홍수는 히브리어 성서(라틴어 성서도 동일)에
서는 기원전 2350년경의 일이며, 70인역 성서에서는 기원전 3000년경의 일이다.
  멘도사가 전한 중국 최초의 왕조 성립을 기원전 2700년대로 잡는 연호는 히브리어 성서에 
의한 연호로 보면 노아의 홍수  이전의 연호가 되고, 70인역 성서를  기본으로 하는 연대를 
이용하면 노아의 홍수 이후의 사건이 된다.
  노아의 홍수로 인류는 8면으로 되돌아가서 새롭게 출발했다. 중국 왕조 성립의 연호는 70
인역 성서를 이용하면 성서의 역사기술과 서로 모순없이 설명이 가능하다.
  중국의 예수회 수사단이 70인역 성서에 의한  연대학을 사용할 수 있는 허가를  얻었다는 
것에는 이와 같은 사정이 얽혀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중국에서 포교를 진행시키려고 노력한 예수회 수사들이 불가피하게 중국인
들에게 이처럼 커다란 양보를 할 수밖에 없었던 사실을 입증해준다.
  맨도사의 저작이 널리 읽혔다고는 하지만 간접적 정보에 의존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유럽
에서 이 문제는 심각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또한 그 이후에 나타난 비슷한 책들 
역시 근거가 애매하여 중국의 연원이 커다란 문제로까지 발전하는 일은 없었다.
  
    마르티니의 [중국 고대사]
  이 중국 역사의 연원 문제가 유럽에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된 것은 1658년의 일이었
다. 마르티노 마르티니(1614-1661)의 [중국고대사]가 출판된 것이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티롤 태생인 예수회 수사로, 명나라 말기에 중국으로 건너가 명나라가 
무너지고 청나라가 건국되는 혁명 과정을 목격한 후 일시 귀국, [달탄전쟁기]를 저술하여 그 
형편을 유럽인들에게 알렸다.
  또한 도중에 기착한 네덜란드에서 저술한 [중국 신도](1655)는 유럽에서 최초로 나온 중국
의 지도와 지지를 기술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청나라로 되돌아갈 때  열일곱 명의 예수회 수사들을 동반한  것으로도 
중요한 일을 또 해냈다. 이들 열일곱 명  가운데에는 유명한 페르비스트 외에도 [대학], [중
용], [논어]를 라틴어로 번역하고 공자의 전기인 [중국의 철인 공자](1687) 등을 저술한 페르
디난도 크플레와, 유교 사상을 유럽에  소개한 프로스페로 인토르체터, 프랑수아 드  루즈몽 
등이 있었다.
  마르티니의 [중국 고대사]는 중국 최고의 시대부터 예수 그리스도(한)의 시대까지를  다루
는 역사서지만, 유럽 사람들에게 가장  커다란 충격을 준 것은 복희씨  이후의 시대를 의심 
없는 역사적 사실로 인정한 것이었다.
  복희씨란 '삼황 오제'의 첫머리에 해당하는 사람이다. 더욱이  마르티니는 이 복희씨의 통
치를 기원전 2952년으로 계산하였다. 그리고 복희씨, 신농씨의 삼황으로부터 기원전  2207년
에 건국하는 하, 은, 주의 오제 이후로도 면면히 이어져가는 중국의 여러 왕조들을 의심  없
는 사실로 인정했던 것이다.
  히브리어 성서에 의한 연호와 대조해본다면, 마르티니는  앞에서 언급한 멘도사보다 훨씬 
오래 전인, 노아의 홍수를 거슬러올라가 약 600년경의 시점을 중국 왕조의 출발점으로 인정
한 것이 된다.
  사실 그는 노아의 홍수를 오제  가운데에서 요 임금 시대의 사건으로  하고, 요 임금보다 
앞선 여섯 명을 홍수 이전에 두고 있으며, 홍수 때의 연호도 기원전 2349년으로 했다.
  이와 같은 기록은 노아의 홍수로 인류가 여덟 명으로 되돌아갔다는 성서의 기록과 정면으
로 대립하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까?
  마르티니는 이 문제로 고민하다가 한 가지 해결책으로 중국에도 기원전 3000년경에 요 임
금 시대와는 달리, 또 하나의 커다란 홍수가 있었다고 전해오고 있음을 지적했다. 이것이 만
일 노아의 홍수라면 문제는 쉽게 해결된다. 하지만 그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히브리어 
성서를 버리고 다시 70인역 성서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마르티니는 다시 생각을 계속한다. 그러면 복희씨 이전의  중국은 어떤 상황이었을까? 갑
자기 복희씨라는 군주만 출현할 리가 없다. 당연히 그 이전에 오랜 역사가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마르티니의 결론은 홍수 이전 가장 고대의 아시아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중국에는 노아의 홍수가 미치지 못했다고 하
는 결론과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 아닌가?
  고토 마츠오씨는 그의 명저인 [중국 사상의 프랑스 서점]에서 "마르티니는 오랫동안 중국
에서 산 결과, 중국 문명의 한 패거리라고는 하지 않더라도  이와 같은 이교도 문명의 지지
자가 되었던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일은 오히려 중국 문명이 유럽인들에게 압도적인 힘으로 다가왔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로 생각된다. 물론 오랫동안 익숙해진 문명으로 기울어지는  것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지만, 기울어지게 만드는 중국 문명 쪽에 그만한 역량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 전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소개했듯이 마르티니의 이 자세는 중국 현지에서 활동한 선교사들의 공통적인  태도
이기도 했다. 이것은 공자나 조상에 대한 제사, 그밖의 중국 습관들과 타협하면서 포교를 진
전시켜나간다고 하는 예수회만이 취한 독특한 포교 방법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할지도  모른
다.
  그러나 멘도사와 그에게 정보를 준 라다는  아우구스티누스파였다. 그리고 이후에도 예수
회 선교사가 아니면서도 중국사가 오래되었음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
회의 독특한 포교 방법 때문이라기보다는 현실적으로 맞닥뜨린 중국 문명을 보고 중국 역사
가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고토 씨에 의하면 마르티니의 중국사는 "유럽에서 처음으로 출판된 가장 신뢰할  만한 중
국사였다." 그런 만큼 이 정보는 유럽인들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가 소개한 중국의 역사책은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그리스, 로마의 문제에서 볼 수 있는 
공상적인 얘기를 전혀 포함하지 않았다. 더욱이 그 기록은 중단되는 일이 없어 당시까지 연
속되고 있으며, 또한 가끔씩 천문학상의 기록까지 기재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유럽인들은 여전히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모두 역사상의 사건으로  받
아들이고 있었다. 그러한 유럽인들의 사고방식으로도 마르티니가  전한 중국 기록의 진실성
은 도저히 쉽게 부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파스칼과 중국
  놀랄 만큼 오래된 중국의 역사에 대해, 유럽인들은 어떠한 태도를 보였을까? 크게 구분하
여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잇다. 첫째는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로 대표되는 유
형이다.
  그의 대표작인 [팡세Pensee](1670) 가운데 '중국의 역사'라는 장에서 그는 "죽음을 돌아보
지 않을 정도의 증인을 가진 역사밖에 나는 믿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그는 하나님의 진리를 증언하면서 죽어간 선지자들이나 순교자들을 가지고 있는  것
은 기독교인들뿐이라고 생각했다.
  즉, 첫째 유형은 기독교인으로서의 종교적 입장에서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전면적으로 부
정하거나 송두리째 무시하는 태도이다.
  
    라이프니츠와 중국
  그러나 기독교인의 입장을 유지하면서도 중국 문화를 높이 평가하는 태도도 존재할 수 있
다. 이러한 두 번째 유형에  대해서는 독일의 철학자이자 수학자, 정치가였던  라이프니츠와 
포시우스 두 사람을 살펴보기로 하자.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는 일찍부터  중국에 대해 뜨거운 관심
을 쏟고 있었다. 중국에 관한 그의  지식은 예수회 수사들의 정보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유럽에서 '전례 문제'가 일어나서 예수회가 곤경에 빠졌을 때에도 그는  일관성 있게  이것
을 지지했다.
  이와 같은 그의 사고방식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것은 당시 최신의 중국 정보를 수집한 
서적인 [최신 중국정보](1699)이다. 그는 이 책의 서문을 통해, 유럽과 중국의 문화적 교류의 
필요성을 격조 있게 호소했다.
  "청나라 제국은 경지 면적에 있어서 유럽 전체에 필적하고, 인구에 있어서도 오히려 능가
하고 있다. 또한 기타 많은 분야에서 우리와 자웅을 겨룰만한 힘을 지니고 있다."
  유럽이 우위에 있는 것은 형이상학, 신학, 수학, 천문학 등인 반면에, "실천 철학의 면에서
는 유럽이 청나라에 뒤지고 있다. 즉... 윤리학과 정치학 면에서는 우리가  그들만 못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여러 가지 학문, 특히 우리가 절실히  바라고 있는 실천 철학의 응용 
부문과 지극히 이성적인 생활습관을 배웠으면 한다. 우리 유럽인들에게는 도덕적 황폐가 심
각하게 진행되고 있으므로, 우리가 중국인들에게 계시  신학을 가르칠 사람들을 파견했듯이 
이번에는 자연 신학의 응용과 실천을 가르칠 수 있는 중국인 선교사들이 부디 유럽으로 파
견되어 와주기를 바란다"고까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중국사의 연원 문제에 있어서는 마르티니를 지지한 듯하다. 그에게는 <0과 1만을 사
용하는 이진법 산술의 해설과 이 산술의 효용, 중국  고대로부터 전해져오는 복희씨의 그림 
해독에 대한 이 산술의 공헌에 관하여>(1703)라고 하는 긴 제목의 논문이 있다.
  이 논문에서 그는 중국의 역의 64괘를 자신이 확립한 이진법으로 서명할 수 있다고 하면
서, 복희씨를 이진법의 창시자로 높이 평가했다.
  여기에서 그는 복희씨를 '4천 년 이상 이전의 인물'이라고 했다.  이 수치는 미묘하여, 히
브리어 성서에서는 노아의 홍수가 라이프니츠의 시대로부터 약 4천   년 전이 된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4천 년 '이상' 이전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와 같은 점으로 보아 복희씨를 4천6백 년 전의 임금이라고 주장했던 마르티니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생각해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포시우스의 문제 제기
  파이프니츠와 마르티니의 설을 공공연하게  주장한 사람은 네덜란드의  역사가이자 '중국 
미치광이'로 잘 알려져 있는 이삭포시우스이다.
  그는 마르티니의 저서가 출판된 다음해에 [세계의 진실한 나이에 관하여](1659)라는  책을 
내었다. 포시우스는 마르티니의 설을 따라서  중국의 역사가 당시 히브리어  성서에 의해서 
생각되고 있던 대홍수의 연대보다 더 거슬러올라가고 그 이후에도 문명이 중단된 일이 없었
으며, 더욱이 대홍수의 기록이 없었다고 생각했다.
  인류사는 히브리어 성서에 의한 연대보다 1440년이나 더 오래되었다는  것, 그리고 이 새
로운 연대는 70인역 성서를 따르면 바르게 설명될 수 있으므로 연대학은 70인역 성서를 바
탕으로 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노아의 홍수가 중국의 기록에 남아 있지 않은 이상, 대홍수는 전세계적인 것이 아
니라 국지적인, 즉 유대 역사의 내부에서 일어난 작은 사건에 불과하다고 논술했던 것이다.
  포시우스의 이러한 주장은 라크에 의하면 "마르티니의 역사적 자료에서 서구적 사고에 대
해 품을 수 있는 전후의 사정을 검토한 최초의 시험적인 논의였다"고 한다.
  즉 마르티니가 말한 중국사의  연원에는 보편사에 대한 파괴적인  힘이 내재되어 있는데, 
그것을 유럽인들에게 구체적인 문제로 제기한 셈이다.
  그 결과 중국사를 기준으로 성서가 판단되면서, 성서는 지역적인  사건을 기술한 한 권의 
역사책에 불과한 위치로 전락하는 상황에 이르렀던 것이다.
  
    게오르그 호른의 해결책
  이와 같은 '중국 미치광이'적 태도를 비판하면서 등장하는 것이 첫째 유형이다. 이 입장을 
대표하는 사람은 1648년 이후로 네덜란드의 라이덴 대학에서 역사학 교수를 지냈던  게오르
그 호른(Georg Horn)이었다. 호른은 [노아의 방주](1666)라는 책을 써서 포시우스가  제기한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했다.
  여기에서 그는 아일랜드의 장로파 연대학자였던 애셔(Jacob ben Asher,  1269-1340)의 연
대학을 채용하고 있다. 애셔는 천지창조를 그리스도 기원으로 환산하면 기원전 4004년 10월 
23일이 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호른은 이것을 인정한 데 덧붙여, 요 임금 시대에 일어난 것으로 상정하고 있던 대홍수도 
승인한다. 이것들은 물론 히브리어 성서에 바탕을 둔 연대이다. 그는 이러한 시간적  테두리 
안에서 중국인의 연대기가 전하는 역사를 설명하려고 했다.
  이 세 번째 입장은 앞에서 말한 고대 이후 선배들의 길을 따르는 것이다. 즉 호른은 창세
기와 중국인의 전승이 동일한 사실을 전하고 있다고 보고,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는 가부장
들과 중국 초기의 여러 왕들이 같은 인물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했던 것이다.
  "복희씨는 아담이다. 왜냐하면 양자는 다 함께 흙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농씨는 카인이다. 왜냐하면 두 사람은 다 농업의 조상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로 황제는 에녹이다. 이 두 사람은 다 함께 하나님에 의해 죽지 않는 존재로 되어 있으므로, 
또 요 임금은 노아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둘 다 큰 홍수 때에 살고 있었으며 신을 경배하
는 사람들이라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등등.
  이와 같이 호른은 <창세기>와 중국의 연대기는 같은 역사를 다르게 기록한 두 종류의 기
록이며, 양자의 차이는 중국인이 히브리인으로부터 갈라진 다음의 시간의 길이에 의해 생긴 
것이라고 생각했다.
  
    호른의 후계자들
  호른의 이러한 사고방식에는 그 뒤  많은 추종자들이 나타났다. 예를 들어  영국의 존 햄
(John Webb)은 1669년 노아, 요 임금설을 수용한 다음, "노아와 그 아들들은 홍수 이전부터 
중국에서 살았으며, 방주를 만든 것은 중국에서였다. 노아 또는 셈은 바벨탑 사건이  일어나
기 전에는 중국에서 살고 있었다."는 생각을 발표했다.
  당시에는 가장 오래된 인간들이 사용했던 언어가 무엇이었는가가 문제였는데, 웹은 "노아 
시대의 언어를 전하고 있는 것은 중국어이다"라고도 주장했다.
  도미니크파의 중국 선교자였던 도밍고 나바레티는  1676년 복희씨를 중국 최초의  왕으로 
인정하고, 그 연대도 기원전 2957년이라는 마르티니의 연호를  인정하고 나서, 복희씨, 조로
아스터설을 주장했다. 그는 도미니크파로서, '전례  문제'에서는 예수회 비판의  논지를  펴
서 지도적 역할을 해내었다.
  그러나 그 역시 중국 연원의 오래됨을 인정하는 점에서는 예수회의 수사들과 같은 입장을 
취했으며, 연대학 역시 70인역 성서에 따를 것을 주장했다.
  아타나시우스 킬리어는 '경교 유행의 기념비'를  연구한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히에로글리
프(상형문자) 해독에 힘쓴 것으로도 저명한 예수회 소속의 학자였다.
  그는 히에로글리프와 한자가 동일한 성질을 가진 것 같다는  것을 근거로, 중국인은 그곳
에 정착한 이집트인을 기원으로 한다는 설을 제창했다.
  예수회 계통의 신중파는  '중국사에서 확실한 것은  셈의 자손인 요  임금부터'라고 하여  
히브리어 성서와의 정확하고 합리적인 성격을  부각시키는 태도를 취했다. 이와  같은 공론
은 18세기에도 여전히 계속된다.
  복희씨=아담, 신농씨=셋, 황제=노아라는 설(바이어), 도 반고=노아라는  설(풀먼), 초대 황
제인 요임금=욕탄이라는 설(랑베르), 복희씨=아담, 신농씨=노아, 황제=함=이집트의 세라피스
라고 하는 설(브라이언) 등 이와 같은 예들은 얼마든지 있다.
  중국사의 연원 문제는 결국 보편사에 있어서 일종의 사활  문제가 되었다. 문제의 대응에 
고민한 것은 중국사가 아니라 보편사  쪽이었다. 중국인들이 전해오는 역사가  의심을 받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는 중국사를 설명하기 위해 성서의 해석이 고쳐지고 있었기 때문이
다.
  더욱이 공론이 진전됨에 따라 본래 성서에 의해 설명되어야 할 중국사가 오히려 히브리어 
성서와 70인역 성서 가운데 어느 쪽이 옳은가 하는 공론의 근거가 되기에까지 이른다.
  중국사의 연원 문제는 이리하여 이집트 역사의  연원 문제와 나란히 보편사에 있어  풀기 
어려운 문제가 되어 이를 해결하지 못한 채, 혼미의  깊이를 더해가면서 18세기로 들어가게 
된다.
  
      과학 혁명과 보편사의 위기
    뉴턴의 세계사 서술
  '과학 혁명의 세기'라고도 불리는 17세기에 유럽의 과학 문명은 장족의 발전을 한다. 여기
에서는 중심 인물이었던 뉴턴에게 초점을 맞추어 과학 혁명과 보편사의 위기 문제를 생각해
보기로 한다.
  독자들 중에는 이미 뉴턴(Sir Issac Newton, 1642-1727)의  전기를 읽어본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와 같은 책들을 통해  이야기되어온 뉴턴은 한결같이 [프린키피아Principia](1687, 
영어판은 1729)나 [옵틱스Opticks](1704)의 저자 또는  미적분의 창시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즉 근대 합리주의의 확립자로서의 뉴턴이다. 물론 이것이 그의 중요한 측면이기는 하다.  그
러나 이와 같은 면만을 본다면 '과학의 세기'인 19세기적 입장에서  그를 과학자의  원형으
로만 판단하는 편파적인 견해가 된다.
  실제로 뉴턴은 물리학, 수학뿐만 아니라 화학 연구에도 몰두하였으며, 이 방면에서는 연금
술과 오컬트 사상과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또한 그는 평생을 통해 기독교 연구를 계속했다. 고대 로마의 교부들에서 시작하여,  고래
의 기독교 이론가들의 서적을 총망라하여 연구하고 다양한 언어로  번역된 성서를 비교, 연
구하는가 하면, 성서의 내용 중 예언  부분들에 관해서는 아주 상세한 연구도 했다.  그것은 
결코 단순한 취미 정도가 아니었다. 자연에 관한 연구나 성서에 대한 연구 모두가 그에게는 
똑같이 하나님의 섭리를 해명하는 것으로  동일하게 다루어졌다. 이와 같은  기독교 연구의 
일환으로 그는 역사 연구도 했다.
  뉴턴의 역사 연구의 결과는 다음 두 편의 저작을 통해 그 윤곽을 알 수가 있다. [개정 고
대왕국 연대학The Chronology of Ancient Kingdoms  Amended](1728)과 [다니엘서와 요한
계시록의  예언에  관한  연구Observations  Upon  the  prophecies  of  Daniel  and  the 
Apocalypse of St. John](1723)가 그것이다.
  전자는 그가 죽은 후 출판되었는데, 간행을 목표로 죽기 직전까지 가필을 하는 등 만년의 
그가 가장 노력을 기울인 작품이다. 그 책은 노아  시대로부터 페르시아까지의 고대 역사를 
다루고 있다.
  후자는 결국 그가 공표하지 못한 논고이지만, 고대 로마  이후 뉴턴의 시대까지를 대상으
로 하고 있다.
  이들 두 편을 종합하면, 뉴턴의 세계사의 전체적  윤곽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이 두  편의 
골격을 소개하면서 고찰한 것이다. 필자가  정리한 전체적인  모습과 뉴턴이 작성한  '소연
대기'의 요약을 참조하면서 읽기 바란다.
  
    천문학에 의한 연대 결정
  [개정 고대왕국 연대학]의 테마는 그리스, 이집트, 아시리아, 그리고 페르시아의 고대 왕국
들의 연대를 확정하는 것이다. 특히 거기서 자세히 연구되고 있는 것은 이집트 역사의 연원 
문제 해결이다.
  뉴턴이 연대학에서 가장 특징적인 역할을 해낸 것은 천문학이었다. [프린키피아]의 저자답
다고도 할 수 있다. 그 천문학이 동원되는 것은  구체적으로는 아르고나우타이 원정의 연대 
결정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흑해 연안의 골키스에 있는 보물인 금으로 만들어진 양가죽을 구해 이
아손을 중심으로 한 영웅들이 아르고선을 타고 갔다고 하는 원정담을 전해주고 있다. 이 이
야기에는 원정 때의 별자리가 전해져오고 있다. 뉴턴은 그  별자리를 바탕으로 원정이 이루
어진 연대를 결정하려고 했다.
  뉴턴은 전설을 검토하고, 이 원정 때에 처음으로 천구의를  만들어 춘분점이 백양자리 중
심에 놓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한편 춘분점은 황도 위를 72년에 한 번씩 이동한다.
  이 운동을 '세차 운동'이라고 하는데 자전하고 있는 지구가 팽이처럼  머리를 흔드는  데
서 일어나는 운동이다. 이 운동에 수학적인 증명을 한 사람은 다름 아닌 뉴턴이었다.
  춘분점이 백양자리의 중심에서 얼마나 이동했는가는 천체  관측으로 실측하면 되므로, 그 
수치로 춘분점에 중심이 놓여진 연대를 정밀하게 역산할 수 있는 셈이다.
  결과는 "우리들은 아르고나우타이 원정은 솔로몬의 사후에 이루어졌다는 것과  가장 개연
성이 높은 것은 사후 43년이라고 안심하고 결론지을 수  있다"고 하게 되었던 것이다. 솔로
몬의 사후 43년은 기원전 937년에 해당한다.
  뉴턴의 시대에 확실한 연호를 전해주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에는 올림피아드 기원과  로마 
건국 기원이 있었으나, 그 올림피아드 기원도 기원전 776년이 시점이다.
  그에 비해 그가 구한 연호는 그보다 훨씬 오랜 연호이다. 게다가 이 연호는 다른 사건 등
과의 비교로 정해진 상대적 연호가 아니라 천문학이라는 자연 과학에 의해 엄밀하게 결정된 
연호였다.
  뉴턴은 이 기원전 937년이라는 연호를 정점으로 이집트 역사를 비롯하여 그리스사나 로마
사 같은 다양한 연호를 결정해간다.
  그리스사에서 트로이 전쟁은 이아손 1세대 이후의 영웅들이 벌인 전쟁이므로 기원전  904
년으로 본다. '헤라크레다이의 귀환(도리아인의 펠로폰네소스 정복)'은 4세대  이후의  사건
이므로 기원전 825년으로 정하는 등이다.
  그 결과, 그리스사는 전체적으로 크게 단축되었다. 유세비우스가 산정한 연대와 비교하면, 
시큐온이나 아르고스, 아테네 등의 건국도 125년 단축되어 각각 기원전 1085년, 기원전  627
년이라는 연호가 부여되고 있다. 이리하여 그리스사, 로마사는 전체적으로 상당히 새로운 시
대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집트사의 단축
  최대의 문제였던 이집트 역사에 관해서도 뉴턴은 마네토를 전혀 다루지 않은 채 헤로도토
스와 디오도루스, 그리고 성서의 이집트사 기록을 자료로 생각해나갔다.
  이 뉴턴의 공론에서 초석이 된 것은 앞에서 소개한  세소스트리스, 오시리스 같은 사람들
이 했다고 하는 세계 정복 사업이었다. 그의  결론부터 먼저 소개한다면, 그것은 "오시리스, 
바커스, 세소스트리스 세 사람이 실제로는 동일한 이집트 왕이며, 나아가 시샤크임이 분명하
다"는 것이다.
  그는 오시리스, 바커스(디오니소스), 세소스트리스에 관한 전승이  정복 사업과 아우의 반
란에 의한 귀국, 또 귀국 후 내정의  정비, 기타 세부까지 같은 내용이라는 데에서 세  명의 
이집트 왕은 결국 동일 인물이라고 단정한다. 그리고 그  인물을 성서에 나오는 '시삭'과 동
일시한다. 시삭은 <열왕기 상>(11-14장)에  등장하는 왕으로서, 유대왕국  초대의 르호보암 
때에 "예루살렘으로 쳐들어가 주의 신전과 왕국의 보물을 빼앗아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시
샤크를 성서에 나오는 시삭과 동일시하는 이유를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성서가 이 왕 이전의 어떤 이집트  왕이 팔레스티나를 정복한 일도 시인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집트 밖으로 나온 최초의 왕으로서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시삭이 바로 시샤크라는 것이 
결정적 논거인 것이다.
  더욱이 그에 따르면, 이 시샤크의 시대가 이집트사의 획기적인 전기가 되었다고 한다.  시
샤크는 죽은 뒤 오시리스로 신격화되었다. 그러나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오시리스는  아들인 
호루스와 함께 신격화한 파라오들의 최후에 위치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뉴턴은 이집트인들이 말하는 '신들의 시대'란 사후에 신격화한  파라오들의 시대라고  생
각하고 있지만, 그의 이론대로 생각하다면 결국 '신들의 시대'는 끝나게 된다.
  이집트인 자신이 그들의 역사를 '신들의 시대'나  '인간의 시대'로 구분하고 있다는 것은 
앞에서도 말했다. 그러나 뉴턴은 '신들의 시대'를 이와 같이  새로운 시대로 봄으로써, 안심
하고 성서에 기술된 내용과 이집트의 역사를 결부시킬 수 있었다.
  뉴턴에 따르면 이집트인의 역사는 성서에 있는 대로 바벨탑  사건 이후에 시작되었다. 따
라서 이집트인들의 역사는 히브리인들의 역사보다  새로운 것이 된다. 문자를  발명한 것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최초이며, 이집트인들은 다윗 시대  이후에 유대인들로부터 배운 것이라
고까지 말하고 있다.
  그런데 시샤크=오시리스가 르호보암 시대에  자리하고, 그것이  '신들의  시대'의 마지막
에 해당한다는 것은, 즉 메네스로부터 시작되는 '인간의 시대'가  여기에서 시작된다는 뜻이 
된다. 앞에서 아르고나우타이 원정이 있었던 기원전 937년이  솔로몬의 사후 43년에 해당된
다고 결정해놓았기 때문에, 르호보암과 시샤크,   그리고 메네스의 연대는 이것으로 계산할   
수 있다. 결국 메네스가 왕조를 연 시대가 기원전 946년이라는 새로운 시점으로 끌어내려진
다.
  이렇게 새로운 시대의 파라오라면, 헤로도토스가 전한 메네스로부터 세토스까지 1만 1340
년간이라는 방대한 연수는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이에 대해 뉴턴은 "기록할 만한 사업을 
이루지 못한 왕은 기록에서 삭제한다"고 말하여, 헤로도토스가 전한 기록할 만한 사적을 남
기지 못한 초기의 329명이나 되는 파라오들을 한꺼번에 말살해버렸다.
  이와 같은 파라오에 대한 기록상의 대학살에  의해 메네스 이후의 이집트사도 큰  폭으로 
단축되어 여기에서도 성서가 전하는 히브리인의 역사에 대비시킬 수 있었다.
  그에 의하면 메네스(아메노피스)는 멤피스를 건설하고 이집트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시
켰다. 이때, 다나오스가 혼란을 피해 이집트에서 그리스로 이주했는데, 그가 전한 조선 기술
로 그리스인들은 아르고선을 건조할 수가 있게 되었다.
  더욱이 아르고나우타이의 원정은 시샤크=오시리스가 수립한 이집트인들의 대외적 지배권
에 타격을 주어, 이후 이집트인들이 고유의 땅에 칩거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의 이집트사에 관해서는,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이유로, 뉴턴은  모이
리스와 피라미드를 건설한 것으로 전해지는 케옵스, 케프렌, 미케리누스 등 헤로도토스가 실
제의 이름들과 사적을 전한 바 있는 여러 왕들만은 실재의 파라오로 승인한다.
  이상이 뉴턴의 이집트사 개요이다. 당시 보편사가 위기를 맞이한 가운데 뉴턴은 천문학을 
이용하기는 했지만 결정적으로는 성서에 의거하여 이집트사의 시간적 길이를 대폭 단축시킨 
것이다.
  그 결과 이집트사는 문화적, 정치적으로  히브리인의 역사보다 짧은 것이 되었다.  뉴턴은 
이집트사의 연원의 깊이를 부정하면서 이를 재편하여 보편사의 테두리 안에 수용한 것이다. 
오늘날의 입장에서 본다면, 당치도 않은 이집트사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집트의  히에로글
리프(상형문자)가 해독되지 않고 있었다.
  현재의 지식을 일단 잊어버리고 책을 읽어보면, 그 나름대로 줄거리가 통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뭔가 그럴 듯한 모방품을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공론이기는 하다. 그러나 뉴
턴에게는 농담은커녕, 성서의 진리와 보편사를 옹호하는 중요한 논쟁이었다.
  
    예언에 대한 연구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의 예언에 관한 연구]의  내용을 들여다보자. 여기에서 그는  로마 
시대를 대상으로 논의하고 있다.
  뉴턴은 먼저도 소개한 <다니엘서> 제2장의 거대한 조각상의 환상에 관해 "이 네 가지 금
속으로 된 조각상의 환상에 다니엘의 예언의 기초가 있다. 그것은 꼬리를 물고 지배하게 될 
4대 민족, 즉 바빌로니아인, 페르시아인, 그리스인, 로마인을 상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로마제국은 <다니엘서> 제7장의 '제4의 나라'이자 열 개의  뿔을 가진 무섭고 놀라
운 '제4의 짐승'에 해당한다. 한편 <요한계시록>에는 이미 소개한 바와 같이, 세 번에 걸쳐 
'제4의 짐승'과 흡사한 모습의 짐승이 환상으로 나타난다.
  뉴턴은 이 짐승들을 <다니엘서>의 짐승과 동일한 것, 즉 로마제국을 상정하고 있는 것으
로 해석한다. 단, <다니엘서>에서는 로마제국 전체가 짐승 한 마리로 나타나 있으나, <요한
계시록>의 '짐승', '붉은 짐승'의 세 가지 모습으로 보여지고 있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는 최초의 '붉은 용'은 통일 시대의 고대  로마제국을, '큰 음녀(매우 음탕한  여자)'는 
교회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다. 또 열 개의 뿔은 머지않아  열 개의 지역으로 분열할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어서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열하는 시대를 상징하는 것이 바다와 육지에서 나타나는  두 
마리의 짐승이라고 한다. 바다에서 올라온 열 개의 뿔을 가진 짐승은 라틴인의 제국(서로마
제국)을 의미한다. 육지에서 나타난  짐승은 그리스인들의 교회이며, 그것은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동로마제국으로 건너가서 그리스정교회가 되어 이 제국의 기둥이 된다고  한
다.
  열 개의 뿔 가운데 하나는 라베나의 총독과 로마의  원로원이지만, 이에 의해 서로마제국
의 전통이 간신히 계승되어간다. 그리고 이것이 역시 열 개의 뿔 가운데 하나였던 프랑크인
의 왕국과 연결되어 로마제국이 부흥하게 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프랑크인들에 의한 로마제국을  세 번째 나타나는  '붉은  짐승'
의 모습으로 보여준 것이라고 그는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그 등에 타고   있는 음탕한 여
자를 로마 교황으로 본 것이다.
  이 로마 교황은 피핀의 교황령 기증에 의해 세속적인  권력자로 타락했다고 말하고, 교황
과 카톨릭 교회를 맹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교황령이야말로 <다니엘서> 제7장에 서
술되어 있는 열 한번째의 뿔(제8장의 작은 뿔)이라고도 말한다.
  뉴턴은 이와 같은 예언의 해석에 관한 논의를 통해서 보편사의 이론적 지주 중 하나인 '4
세계제국론'의 테두리가 그의 시대에 오히려 유효하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여기에서
도 그는 보편사의 옹호를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인 것이다.
  
    프로테스탄트적 보편사
  스스로의 연대 결정에 크게 자신감을 가졌던 그는, "5년이나 10년 또는 20년 정도의 오차
는 있어도 그 이상의 오차는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오늘날 보면, 그의 주장은 대부분 잘
못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그 시대의 공통 의식으로 살필 경우에는 반드시 잘못되었다
고만은 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는 점이다.
  [개정 고대왕국 연대학]을 둘러싸고, 당시 프랑스로부터  강력한 비판이 일어났다. 거기서
는 예를 들면 아르고나우타이 원정의  연대가 지나치게 새롭다는 것, 그  전거가 되는 문헌 
비판에 있어 뉴턴이 잘못하고 있다는 등의 소문이 나돌았다.
  그러나 이 원정이 과연 역사적인 사실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의심을 하지 
않았다.
  또 프랑스에서는 18세기의 위대한 저술가였던 볼테르(Voltaire, Francois-Marie  Arouet의 
가명, 1694-1778)가, 그리고 영국에서는 대다수의 학자들이 뉴턴을 옹호했다.
  그러나 옹호의 논리를 펼 수 있었다는 것 또한 그의 논의가 시대의 공통 인식으로 보았을 
때 결코 엉뚱한 것이 아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뉴턴의 역사  서술은 당시로 볼 때 충분히 
수용이 가능한 세계사 기술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공간적으로 확대해가는 면에서 본다면, 그의 서술에는 고대의 아시리아, 페르시아, 사라센
제국과 함께 현대의 터키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중국이나 신대륙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당시에는 마르티니 이후로 이미 중국의 
문제가 커져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파스칼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중국을 무시하는 것이 가능
했던 시기이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뉴턴의 세계사 서술은 중국 문제가 어쩔 수 없는 것이 되기 직전의 위태로
운 시점에서 서술된 프로테스탄트적 보편사였다고 할 수 있다.
  
    뉴턴의 시간과 세계
  뉴턴은 예언 연구 가운데에서 <요한계시록>에서 예언된 제7의 봉함이 뜯어졌을 때  로마
제국이 분열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첫 번째 나팔이 울렸을  때 고트족과 훈족의 침입이 
일어났다고 해석하고, 다섯 번째 나팔이 울렸을 때 사라센의 칼리프가 나타났으며, 여섯  번
째 나팔이 울렸을 때 나타난 것이 터키제국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뉴턴은 일곱 번째 나팔에 
의해 종말이 오기를 기다릴 뿐이라고 하는 시대에 살고 있었던 것이 된다.
  그리고 인류사의 종말도 기원 2015년으로  계산되는 것이다. 그것은 로마  교황이 세속적 
지배권을 얻어 열한 번째의 뿔이 된 것이 755년,  그 다음으로 로마 교황이 "1260년간 살아
가게 된다"고 하고 있으므로, 이 두 가지 수를 더한 숫자가 종말의 연호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미처 발간하지 못한 원고 가운데에서 그는, "성서에 기초한 전통적 연대학은 하루를 
천 년과 같은 것으로 하고 있어, 천년왕국과 최후의 심판을 날을 고찰하는 기초를 제공해주
고 있다. 그리고 이것으로 창조가 6천 년간을 필요로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라고 기술하
고 있다. 그가 재구성한 인류사 특유의 시간이 존재하는 셈이다.
  한편 뉴턴은 그 자연철학의 기초에  '절대적 시간'을 놓고 있었다.  [프린키피아]의  서두 
부분과 정의에 뒤를 이은 주해에서 "절대적이고 참인 수학적 시간은 자체의  본성으로 말미
암아, 저절로 외계의 어떠한 것과도 관계없이 균일하게 흐르는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 '절대적 시간'은 추론으로 산출된 하나의 중성적인 시간이다.  그 가운데에서 천지가 창
조되고, 이윽고 최후의 심판에 이른다는 등의 의미를 박탈당한 시간인 것이다.
  공간 또한 뉴턴에 의해 의미를 박탈당했다. 그것은 '절대적 공간'이며 역학적인 여러 법칙
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인간이 세계의 중심적 존재라든가, 혹은 인간이  사
는 지역의 주위에 괴물적인 존재들이 살고 있다든가, 더 나아가서 이와 같은 인간들이나 괴
물적 존재가 사는 대지를 중심으로 질서 있는 전체로서의 우주가 존재한다든가 하는 전통적
으로 유럽인들이 부여해온 여러 가지 의미가 모두 박탈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뉴턴이 행한 이 '시간, 공간의 무의미화'는 지금까지 말해온 보편사가 전제로 하는 시간이
나 공간의 관념과도 정면으로 대립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리우스파였던 뉴턴
  뉴턴 자신은 보편사적인 시간, 공간이 '절대적'시간, 공간과 서로  모순이 되지 않는 것으
로 생각하고 있었다. 도덕계(인간계)와 자연계가 함께 하나님에 의해 통치되고 있는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프린키피아]의 일반 주석에서 "태양, 혹성, 혜성의  장엄하기 짝이 없는 체계는 전지전능
한 사고와 통제에 의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면 달리 설명될 수가 없다. 또한 만일 항성이 이
와 같은 또 다른 체계의 중심이라면 이것들도 같은 전지한 존재의 의도하에 형성된 것이며, 
모두 유일한 존재의 지배에 복종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이  지고한 존재는 모든 사물을 통
치하는 것이다. 세계 정신으로서가 아니라 만물의 주인으로서 말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유일한 존재'란 과연 창세기 제1장에  나와 있는 것과  같
은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완전히 일치하는 신일까?
  뉴턴은 열여덟 살부터 쉰세 살까지의 기간을 케임브리지에서  보냈다. '경이의 해'라고 일
컬어지는 1666년, 그의 나이 스물세 살 때에 '미적분'과 '만유인력의 법칙', '빛의 스펙트럼'
이라는  3대   발견을  하고,   1687년에  [프린키피아  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 영어로는 Natural Principles of Natural Philosophy]를 출판하기까지의   20년 
가까운 세월을 연금술, 즉 화학에 대한 연구와 동시에 종교 연구에 몰두했다.
  이 연구는 공표되지 않은 채,  '포츠머스 컬렉션'이라는 제목의 원고로 남아  있었다.  이 
미발표 유고의   일부를 20세기    영국의 유명한  경제학자인  케인스(John   Maynard 
Keynes, 1883-1946)가 입수한 것이 1936년이었다. 그후 비판적인 역사학적 수법으로 뉴턴에 
대한 연구가 시작된 것은 겨우 1960년대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이 유고 속에서 뉴턴은 아타나시우스와 히에로니무스 등의 카톨릭 정통파 교부들을  맹렬
히 비판하고, 삼위일체설에 대해서도  그 근거가 되어 있는  성서의 어구는 히에로니무스가 
행한 성서의 개찬 이전에는 없었던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즉 성서의 비판적 연구의 형식
을 취하면서 삼위일체설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뉴턴은 알렉산드리아의 카톨릭 신부였던 아리우스(Arius, 250-336)파의 이단설-정통 카톨
릭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인 아리아니즘Arianism을 옳은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아리우스파
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아니며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하다고 하여 카톨릭의  삼위일
체설을 부정하는 입장이다. 아리우스파는 아타나시우스파와 논쟁을 벌인 다음, 니케아  공의
회(AD 325)에서 이단으로 지목되었다.
  이것은 케인스가 말했듯이 '무서운  비밀'이었다. 당시의  영국은 '비국교도'를  공직에서 
배제하고 있었으며 이단설의 신봉자에게는 너그럽지 못한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가 매우 조심해서 읽어보면, 그는  공식적으로 출판한 서적의 내용에도   그의 생각을 은연
중에 드러내고 있다.
  이를테면 [프린키피아]의 인용문에 있는 '유일한 존재'는 삼위일체설에서의 하나님으로 받
아들인다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보다는 당시에 그렇게 받아들여졌으며, 뉴턴 역시 그렇게 받아들이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뉴턴 스스로는 이와 같은 말 속엔 아리우스파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로마 교황을 <다니엘서>에  나타나 있는 '매우 음탕한 여자'로  해석하고  그 
타락을 적극 비판하고 있었다. 이것도 영국의 국교도, 즉 성공회의 교인으로서 본다면  프로
테스탄트적인 관점에서의 비판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 타락을 '대대적인 이교'
로 보는 뉴턴 자신은 프로테스탄트마저 받아들이고  있던 삼위일체설 자체를 비판하고  있
었던 것이다.
  그의 하나님은 '유일한 존재'이며, 자연세계의 법칙을 정하고  또한 인간 세계도 지배하는 
신이지만, 삼위일체의 신은 아니었던 것이다.
  볼테르를 비롯한 많은 계몽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했지만 인격을 갖춘 신은  인
정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한 다음 세계는 독자적인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고 함
으로써 기적 같은 것을 부정했다.
  이와 같은 입장을 '이신론'이라고 하는데, 뉴턴의 하나님은 오히려 이 이신론적인 신에 거
의 부합되는 것이다. 결국 그는 이단으로 규정된 아리우스파에  속함과 동시에 이신론의 출
발점에 서 있었다.
  
    역사학에 있어서의 위치
  뉴턴의 역사 연구 방법이나 역사  서술에 나타난 새로움에 관해서도  언급해두고자 한다. 
우선 첫 번째는 천문학을 연대 결정에 이용한 것이다.
  이 점은 그가 비록 최초는 아닐지 몰라도 과학 혁명의 세기를 대표하는 뉴턴다운 새로움
이다. 그렇지만 그 적용 대상을 아르고나우타이 원정으로 한 점에서, 시대적 제약을  극복하
지 못했다는 것은 이미 살펴본 바와 같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뉴턴이 자신의 [개정  고대왕국 연대학]에서 모든 연호에  '그리
스도 전, 즉 BC'만을 사용하고 있는 점이다.
  '그리스도 전'을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사용한 사람은 뒤에  소개하는 예수회의 수사 페타
비우스이다. 그러나 그는 창세 기원에 의한 연호와 병행하여  기록하는 형태로 이것을 사용
했다.
  뉴턴도 미공개 원고에서는 창세  기원을 사용했고, 또한 그가  기술한 역사가 보편사라는 
것을 보더라도 결코 창세 기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출판된 서적에서
는 철저하게 '그리스도 전'만으로 연호를 기록한 것은 시간적으로 매우 이른 예이다.
  이 점에서는 19세기 이후의 연호 표기를 뉴턴이 먼저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9세
기의 그리스도 기원에 의한 연호는  뒤에도 기술하듯이,  기독교적인 의미를 상실한  '무의
미한' 시간의 척도로 사용된다.
  그의 신은 이신론적인 신이었으며, 이 신 아래에서 그의 '절대적 시간'은 정말로 무의미한 
것이었다. 창세 기원에서 외따로 떨어진  그리스도 기원의 사용은, 뉴턴의  '절대적 시간'을 
역사의 장에 적용했다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뉴턴이 그리스도 기원만으로 연호를 표기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생
각한다.
  케인스는 1946년에 행한 유명한 강의 '인간 뉴턴'에서   케임브리지 시대의 뉴턴을 '최후
의 마술사'라고 부르고, "한 발은 중세에  두고, 다른 한  발은 근대 과학으로의  길을 밟고 
있었다"고 규정하였다. 이 케인스의 평가는 역사 연구가로서의  뉴턴에 관해서도 적절한 것
으로 생각된다.
  그는 한편으로 보편사적인 시간과 공간을 믿고 있으며, 그것을 옹호하는 논진을 폈다.  그
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 배후를 지탱해야 할 신에 대한 개념 자체가 이미 형태 변화를 이
루고 있었다. 자연 철학이 전제로  하는 '절대적' 시간, 공간의 개념과  보편사의  그것과의 
사이에는 날카롭게 대립하는 요소가 잉태되어 있기도 했다.
  뉴턴 자신은 양자 사이의 모순을 느끼지 않았다 하더라도, 양자간의 균열은 이미 뉴턴 자
신에게 '그리스도 기원'만의 사용이라는 형태로 나타나 있었다.  그리고 이 균열은 18세기에 
이르러 그의 '절대적' 시간, 공간을 받아들인 사람들에 의해 더욱 확대되어간다.
  이와 같이 과학 혁명은 뉴턴이 제시한 새로운 시간과 공간의 개념에 의해 근본적 차원에
서 보편사에 위기를 가져오게 된다.

      연대학 논쟁
    스칼리게르의 '시간 수정론'과 연대학의 형성
  보편사는 여기까지 서술해온 갖가지 요소에 의해 더욱더 위기를  키워온 셈이지만, 
이 위
기는 보편사 자체에서는 필자가 '연대학 논쟁'이라고 부르는 논쟁의 형태로 나타났다.
  보편사의 근본을 지탱해온 창세 기원에 바탕을 둔 연호의  체계가 새삼스런 문제가 
되어, 
연호의 재구축을 둘러싸고 다양한 연대학의 체계가 제기된 것이다.  그러나 논쟁 이전
에 먼
저 연대학이라는 학문이 형성되어 있어야만 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것이 네덜란드 라이덴 출신의  요셉 스칼리게르(Joseph Justus Sca
liger, 
1540-1609)이다. 스칼리게르는 프랑스의 아장Agen에서 이탈리아의 군인이자 의사이며 
훌륭
한 학자이기도 했던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로부터 직접 라틴어와 당시의 최신 지식을 배우고, 그  뒤 그리스어를 비롯한 
모든 
유럽의 언어와 히브리어는 물론 동양의 여러 나라 말에도 정통하여, 이십대 전반에 벌
써 사
람들의 주목을 끄는 문헌학자가 되어 있었다.
  한편, 그는 스물 세 살 때에 칼뱅파로 개종하였고, 이후 평생을 칼뱅주의자(프로테
스탄트)
로서 싸워나간 신앙인이기도 했다.
  그가 살았던 시대에 프랑스는 위그노 전쟁으로 인해 종교적으로 소란했다. 유명한 
바르톨
로뮤Bartholomew의 대학살 때는 난을 면했지만, 1년 반  동안 칼뱅주의자들의 아성으
로 되
어 있던 제네바에 피해 있어야 했다.
  그러나 학문의 세계에서 칼뱅주의의  대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그는, 프랑스로 
다시 
귀국한  다음에도 많은 친구들의 지원을 얻어 연구를 계속했다. 그리고 연대학을 하나
의 학
문으로 출발시켰다.
  이에 대한 뒷바라지를 마지막으로 맡아준  것은 네덜란드였다. 그는 1593년  당시 
창설된 
지 얼마 안 된 라이덴 대학 University of Leiden으로 초빙되었는데, 강의를 하지 않
아도 좋
다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죽을 때까지 왕성하게 연구 활동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푸로 글로
티우스
를 비롯한 많은 제자들을 육성하여 라이덴 대학을 키워낸 공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
다.
  대표작 중 하나인 '시간 수정론'(1583)은 그가 프랑스에 살고 있던 시대에 발표된 
것이다. 
이것은 그의 놀라운 어학력으로 비로소 가능했던 획기적인 저술이었다.
  여기에는 고대 바빌로니아인이나 이집트인의 달력, 이슬람력과  인도력 등 당시에 
알려져 
있던 모든 달력이 총망라되어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  대하여 정확한 복원 작업이 
수행
되고 있다.
  여러 민족들이 근거해서 살아온 시간에 대해 이만큼 체계적이고 방대하게 연구한  
서적은 
그때까지 존재한 적이 없었다. 스칼리게르의 전기를  쓴 버네즈는 그를 '연대학의 발
견자이
자 창시자'라고 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고대의 동양을 비롯하여 고대 그리스, 로마의  달력에 관해 유럽인들
이 제
공해준 연호를 편안하게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모두 스칼리게르가 새로운 학문으로서
의 연
대학을 '발견'하고 '창조'해준 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율리우스 주기
  '시간 수정론'에서 가장 독특한 것은  '율리우스 주기'의 창안이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
한 바와 같이 온갖 종류의 달력을 정확하게 판단하기 위한 공통의 척도로서 고안되었
다.
  그는 기초가 되는 세 가지 주기를 곱해서 매우 긴 하나의 주기를 설정한다.
  태양장 28년x태음장19년x로만 인덱션 15년=율리우스 주기(Julian Period, 7980)가 
되는 것
이다.
  율리우스력에서는 28년을 주기로 해서 같은 달, 같은 날, 같은 요일의 조합이 순환
되어 가
는데, 이것을 태양장이라고 한다. 다음 태음력에서는 1년이 354일이 되어 대개 태양력
과  11
일의 차이가 생긴다.
  이 태양력과의 오차를 수정하기 위해 삼 년에 한 번식 윤달을 삽입하는 것이 여러 
민족들
의 태음력에서 시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해도 약간의 오차는 여전히 남게 된
다.
  기원전 432년, 그리스의 천문학자 메톤이 태양력과의 엄밀한 대응을 구한 결과 19년
간 일
곱 번의 윤달을 두면, 태양력과의 관계가 다시 일치됨을 발견했었다.
  이 사이클이 태음장인데, 발견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메톤  주기'라고도  불린다. 
마지막
의 로만 인덱션은 제2장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스칼리게르는 태양장, 태음장, 그리고 로만 인덱션의 공배수인 7980이라는 장대한  
주기를 
설정했다. 그는 여기에서 다시 세 가지 주기를 동시에 출발시켜, 또 한 번 313년이 인
덱션 1
년째가 되는 등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시점을 수학적으로 구했다. 그리고 그리스도 기
원으로 
표현하면, 율리우스 주기 제1년은 기원전 4713년이라는 수치를 정했다.
  기원전 4713년을 시작점으로 하여 하루씩 눈금이 새겨진 7980년의 길이를 가진 자를 
상상
해보면 된다.
  그러나 스칼리게르가 역사는 기원전 4713년에 시작되었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이 시
작점은 위에서 말한 여러 조건을 충족시켜주는 것으로 단지 수학적으로 정해놓은 시점
에 불
과한 것이다. 천지창조 자체는 율리우스 주기 765년(기원전 3949년)에 놓여져 있다.
  이 율리우스 주기는 내부에 태양력이나 태음력, 태음, 태양력 등의 기초가 되어 있
는 주기
들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어떤 것을 사용하는 민족의 달력이나 그에 따라 표시된 
연호도 
이 선분의 어딘가에 대응하는 위치가 주어진다.
  이 대응 관계를 결정할 때 커다란 역할을 한 것은 각 민족들이 남겨놓은 일식과 월
식, 만
월과 신월 등의 천문학적인 기록들이었다.
  이러한 현상들의 천문학적인 계산에 의해 율리우스 주기 위에 정확하게 자리잡을 수 
있으
므로, 스칼리게르는 위의 기록과 이러한 계산들을 결부하여 각  민족이 기록한 연호의 
위치
를 정해갔던 것이다.
  율리우스 주기를 공통의 척도로 하여, 그는 당시에 알려져 있던 고대 이후의 모든 
민족들
이 사용해온 달력과 거기에서 사용된 연호를 결정하는 작업을  했던 것이다. 그의 결
론으로
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많은 점들이 수정되어 왔다. 그러나 아직도 살아 있는 것들
도 있
다.
  이 율리우스 주기의 통신 일수를 '율리우스일(Julian  Day, JD)'이라고도 부른다. 
이 율리
우스일은 멀리 떨어져 있는 기간의  일수 계산이나, 특정한 날의 요일이나  간지의 계
산 등 
여러 가지 계산에 이용된다.
  그 때문에, 오늘날에도 천문학자나 연대학자 같은 사람들은 율리우스 주기를 사용하
고 있
다.
  
    스칼리게르의 연호 체계
  그는 '시간 수정론' 제5권에서 역사상의 획기적인 대사건에  대해 연대 결정을 하는 
작업
을 전개하고 있다. 전투적인 위그노였던  그답게 그의 시간 계산의 기초에  놓여 있는 
것은 
히브리어 성서이다. 그리스도 기원 1년은 창세 기원으로 환산하면 3950년이 된다.
  그러나 그는 이 디오니시오스의 그리스도  기원 제1년과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한 
해와의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수의 탄생은 기원전  2년(AM 394
8)이 
되었다.
  인류사 전체의 시간은 천지창조로부터 스칼리게르의 시대까지 5천백 년쯤의 폭밖에  
없는 
것이 된다. 그는 이 짧은 시간의 테두리 안에 인류  역사상 중요한 여러 사건들을 재
배치해
갔던 것이다.
  그 결과를 개략적으로 표9에 정리해놓았다. 표는 '시간 수정론'과 그의 만년의 대작
인 '시
간론의 보고'의 기술을 그리스도 이전의 항목에  대해서만 정리한 것이다. 여기에서는 
표의 
왼쪽 반만을 다루기로 한다.
  고대 이집트에 대해서는 검토가 되어 있지 않지만, 그 시야의 넓음은 당시로서는 매
우 놀
랄 만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하나하나의 연호를 결정하는 데  있어 일찍부터 높이 평
가되고 
있었던 문헌학자로서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여  꼼꼼한 자료 검토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것 또한 획기적인 작업이었다.
  스칼리게르에 대한 현대의 연구가인 그라프톤에 따르면, 이전에도 이와 같은 연표들
이 있
기는 했지만 그것들은 "대부분 초보적인 학생들이 성서나 고대의 역사가들의 저서들을 
읽을 
때 참조하기 위해 쓰인 것"에 불과했다.
  그에 비해 스칼리게르에 대해서는 "천지창조 이후  중세까지의 획기적인 사건들에 
관해... 
모든 사료의 비판적인 검토에 의해 그 각각을 확정하고, 그것들의 일시를 표시한 사람
은 오
직 스칼리게르뿐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역시 스칼리게르를 "연대학 자체를 
창조
한 사람이다"라고 평가했다.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의 '시간'을 둘러싼 다툼
  스칼리게르가 연구 대상을 문헌학에서 연대학으로 바꾼  것은 1570년대의 후반이다. 
그리
고 그가 '시간 수정론 Study on the Improvement of Time'(1583)을  집필하고 있던 무
렵의 
유럽에서는 '시간'의 문제가 커다란 논쟁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직접적인 원인은 율리우스력과 계절의 차이에 있었다. 춘분을 3월 21일로 정하
고, 부활
절을 이날 이후 최초의 만월 다음의 첫째 일요일로 정한 것은 니케아 종교회의에서였
다. 이 
회의가 열렸던 것은 AD 325년에는 그것으로 계절과 일치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율리우스력의 일 년과 태양년으로서의 일 년에는  해마다 0.9978일의 오차가 
있어
서 180년마다 하루씩 달력 쪽이 앞서게 된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1570년대에는 실제의 춘분은  3월 11일로서, 달력에서의 춘
분보다 
열흘이나 빨라 큰 차이가 생겼던 것이다.
  부활절은 달력에서의 춘분을 기초로 계산하기로 되어 있었으므로, 뻔히 그런 줄을 
알면서
도 원래 지내야 할 기간에서 동떨어져 있는 날에 부활절에 지내지 않을 수 없게 되었
다.
  이와 같은 논쟁은 결국 당시의 로마 교황이었던 그레고리우스 13세에 의한 달력의 
개정이
었다. 교황은 1582년의 10월 4일 바로 다음날을 15일로 하여, 한꺼번에 열흘을 단축시
킴으로
써 계절과 달력의 차이를 바로잡았다.
  또한 율리우스력을 개량하여, 이후 유년에 대해서는  100으로 나누어지되 400으로 
나뉘지 
않는 해는 평년으로 하기로 정하여, 3천 년 동안  하루의 오차밖에 생기지 않는  '그
레고리
우스력'을 제정했다. 이 그레고리우스력은 오늘날에도 사용되고 있다.
  스칼리게르가 '시간 수정론'을 출판한 것은 그레고리우스력이 제정된 다음해에  해
당한다. 
스칼리게르는 교황에 의한 달력의 개정을 반대했다. 그는 평생토록 이것을 두고 천문
학적으
로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여기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은 그가 반대했던 배경에 있는 문제이다. 프랑스는 
이것
을 곧바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네덜란드나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은 1700년까지, 
 그리
고 역사 프로테스탄국인 영국은 1752년까지, 그레고리우스력의 채택을 계속해서 거부
했다.
  여기서 스칼리게르가 위그노를 대표하는 이론가였다는 것을 상기하지 않으면 안 된
다. 즉, 
그레고리우스력을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 하는 문제는,  단순히 계절과 달력
을 일
치시킨다는 것이 핵심적인 문제는 아니었다. 당시의 시점에서는 오히려  그 배후의 로
마 교
황권의 세계 지배 또는 그 세계지배의 일환으로서 '시간'의 지배를  수용하는가 하지  
않는
가가 논쟁의 초점이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시간 수정론'이 출판된 시점은 종교 개혁  이후의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의 투
쟁에 있어서 달력의  개정을 둘러싼 논쟁이라는  형태로 '시간'을 지배하는  문제가 
초점이  
되었다. 이제 앞에서 소개한 그의 연호 체계를 상기해보자.
  그의 연호 체계는 카톨릭 연대학이 베다 등을 예외로 하고 70인역 성서에 의해 시간
을 계
산해온 것에 반대하고 있다. 즉, 인류사에 있어서의  카톨릭적인 시간을 부정하고, 프
로테스
탄트적인 시간에 의한 인류사 바꿔쓰기를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스칼리게르가 이 책을 통해 제시한 '수정'된 시간은 비록  그 자체가 학문적 
연구
의 결과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프로테스탄트의  시간'의  정확성을 주장하는 이데올
로기적 
성격도 짊어지고 있는 셈이 된다.
  스칼리게르가 왜 학문으로서의 연대학을 창시했는가 하는 문제는, 물론 그 자신의 
훌륭한 
자질과 독창성에 힘입은 바가 크다 하더라도 역시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과 연결시켜
서 이
해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근대적 연대학의 발생에는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 교회간
의 이
데올로기적 대립도 깊은 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시간론의 보고'와 이집트의 문제
  스칼리게르에게는 또  하나 '시간론의  보고 Thesarus  temporum, compelectens  Eu
sebi 
Pamphili Chronicon.   영어로는 The   Thesaurus of   Time,  Including  the Chroni
cle   
of Eusebius Pamphilus'(1609)라는 제목의 만년의 대저서가 있다.
  이 저작에서는 '시간 수정론'에서 연구한 연호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연
도 등을 
수정하고, 또 새로운 항목을 추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표에는'가정의 율리우스 주기'라고 하는 기묘한  틀이 첨부되어 있다. 거
기에서 
이 문제, 즉 그 원인이 된 이집트사의 연원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앞에서 언급했던 
 마네
토가 보여준 이집트사 연원의 문제점을 그가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제기하였기 때문이
다.
  그는 이미 1598년에 마네토의 '이집트지' 발췌를 출판하였다. 이것은 유럽에서  최
초로 마
네토를 소개한 책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불완전했기 때문에 그는 훌륭한  마네토의 
사본을 
찾고 있었다.
  한 친구의 도움으로 마침내 마네토 사본의 발굴에 성공한 스칼리게르는 거기서 발견
한 유
세비우스와 아프리카누스에 의한 마네토의 발췌를 이 '시간론의 보고'에서 공표한 것
이다.
  유세비우스와 이집트의 연원 문제는 앞서 소개한 바가 있다.  스칼리게르도 그와 아
주 똑
같은 문제에 직면한다. 더욱이 곤란한 일은 마네토가 기술하고 있는 이집트 31왕조  
가운데, 
그가 고안한 율리우스 주기의 범위에 들어가 있는 것은  제5왕조 시대 이후로서, 제1
왕조는 
율리우스 주기의 시점보다 오히려 약 900년 정도 오래된 것이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본래 그가 '시간 수정론'에서 천지창조 이전의  위치에 율리우스 주기의 기점을 둔  
것은, 
이것으로 모든 민족의 시간을 율리우스 주기 안에 담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
문이
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에 그 기점마저 넘어버리는 예가 코앞에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스칼리게르는 마네토의 기록에 진실성이  보인다고 생각해서 함부로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가 제안한 해결책은 율리우스  주기 앞에 다른 하나의  '가정의 율리우스 
주기'를 
두고, 거기에 이집트사의 기점을 두는 것이었다.
  기원전 4713년이라는 율리우스 주기의 기점 자체도 수학적인 기점에 불과했다. 따라
서 스
칼리게르는 이번의 조치도 일종의 수학적 처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결국 스칼리게르
에 따
라 말한다면, 이집트의 연원 문제는 '수학적 처리'에 의해 해결된 셈이 되었다.
  표 9를 보면, 이 '가정의 율리우스 주기'에는 비잔틴  기원, 70인역 성서의 기원도 
기입되
어 있다. 그러나 이 두 개의 기원은 사실 스칼리게르가 잘못되어 있는 것들이라고 생
각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설혹 여기에 표기되어 있더라도 그것은 단순히  계산상의 일에 불과
한 것
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집트 제1왕조의 항목은 어떠한가? 이 항목에 대해서는 그것이 역사적 사실
인가
의 여부가 문제이며, 더욱이 스칼리게르 자신도 사실성을 부정하지 못했던 것이다.
  참된 시간의 시작인 천지창조(율리우스 주기 765년, 기원전 3947년) 이전에 이집트
사의 시
점을 둔다는 것은 아무리 그것이 '수학적 처리'에 불과하다고 하더라도  역시 이상하
지  않
은가?
  그러나 스칼리게르 같은 대학자  역시 이집트사의 연원을 부정하지  못한다면, 그 
연원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이것이 매우 어려운 문제가 되었다는 것은 이미 몇 번이나 
말해온 
그대로이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위에서 말한 중국의 문제, 과학 혁명이나 성서의 비판적 연구에 
의해 
보편사가 기초부터 흔들리게 되는 시대 직전에  해당한다. 이미 스칼리게르에게도 이
집트의 
연원 문제가 그의 연대학을 위협하는 망령으로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 갓 태어난 이 
연대
학은 그 이후 점점 더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는 운명에 놓여 있었다.
  연대학은 보편사의 위기 가운데에서 중심적인 문제로 다루어져나갈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
이다. 결국 스칼리게르는 연대학을 창조함과 동시에 '연대학 논쟁'의 출발점에 서게 
된다.
  
    페타비우스
  스칼리게르가 쌓아올린 연대학을 계승하면서 그 토대 위에서 어떤 논쟁이 전개되어
갔는가
를 네 명의 연대학자를 통해서 보기로 하자.
  먼저 다루어야 할 사람은 스칼리게르의 엄격한 비판자로 등장하는 디오니시오스 페
타비우
스(1583-1652)이다. 그는 오를레앙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공부했으며, 약관 열  아홉 
살에 부
르제Bourget에서 철학 교수가 되어 2년간 여기에서 지냈다.
  그후 파리로 돌아갔으나, 거기서의 커다란 사건은 예수회에 입회했다는 일이다. 그
는 이를 
계기로 하여 신학 연구를 하게 되었다. 1621년에는 파리대학의  신학 교수가 되었다가 
1644
년에 물러나 예수회 콜레지오의 사서가 되었는데, 그는 죽을 때까지 이 자리에 있으면
서 정
력적으로 저술 활동을 하였다.
  또한 그는 많은 나라의 언어에 능통한  학자였다. 그는 신학자, 역사학자, 웅변가,  
문헌학
자, 그리고 시인으로서 폭넓은 활동을 하여 스칼리게르에 못지 않았다.
  그의 학식은 그가 추기경이 되기를 바랐던 교황 우르바누스 8세와 그를 프랑스에 머
물러 
있게 하려 했던 루이 13세 사이에 일대  소동이 일어날 정도로 당시에 높이 평가되고 
있었
다.
  그러나 추기경 임명 건은 이 다툼으로 말미암아 페타비우스가 병으로 쓰러져버려  
소동이 
끝났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는 병약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예수회의 진정한 명예'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온후한 인품으로  칭송 받았던  페타
비우스
는 다른 한편으로는 "특히 프로테스탄트에 대해서는 전혀 참을 수가 없었다"고 소개될 
만큼 
심한 감정의 대립을 죽을 때까지 지속했다. 그리고 그에게 맹렬한   비판의 대상이 된 
사람 
가운데 하나가 스칼리게르였다.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해서이기는 하지만, 그의 '연대표'(1633)의  맨 끝에는 본문의 
기술에 
입각한 연표가 정리되어 있다. 이 표를  보면, 거기에는 율리우스 주기에 의한 연호가 
 모든 
연호와 나란히 기록되어 있다. 그 또한 다양한 민족들이 가졌던 시간에 대한 공통의 
척도로 
율리우스 주기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스칼리게르의 맹렬한 비판자이기는 했지만 연대학을 창시한 존재로서의  스칼
리게르
마저 부정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비록 종교적 대립과 무관한 것은 아니었다 
하더라
도, 학문으로서의 연대학은 종교적 대립을 넘어서서 계승되었다고 할 수 있다.
  페타비우스가 보여준 각 사건의 연도는 노아의 홍수 연도를 제외하고는 모두  스칼
리게르
의 수치와 다른 수치로 되어 있다. 그러나 수치를 도출하는 과정에서 그는 스칼리게르
가 개
발한 방법에 의거하여 연구를 추진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스칼리게르의 이론이 
페타비
우스로 대변되는 카톨릭측을 압도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그후 중국에 대한 문제가 커질 때까지는 카톨릭측 연대학자도 히브리어 성서
에 의
한 연대학을 사용하게 된다. 물론  창세기 제5장은 라틴어 성서도  히브리어 성서에 
기초를 
두고 있었으므로, 이 점으로 말하자면 카톨릭측도 순교자나 전통적 연대학의 입장에서 
의거
해야 했던 라틴어 성서로 되돌아왔다는 결론이 될지도 모른다.
  연대학 논쟁에 있어서의 페타비우스에 관해서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이 있다. 마
이어의 
백과사전을 보면, "기독교 기원의 예수 그리스도 탄생 이전의 시대에 대한 적용은 17
세기에 
페타비우스가 창시하여, 18세기 일반에 사용되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사용하고 있는 '그리스도 이전 BC'이라는 연호는 페타비우스의 
창시
에 의한 것이며, 실은 매우 새로운 연호인 것이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 기원 1년의 전
년을 0
년이 아닌 그리스도 탄생 전, 즉 기원전 1년으로 하고 있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 
전'에 관
한 연호 산정과 표기 방법은 모두 그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제까지 어느 누구도 이것을 사용하지 않았는지의  여부에 관해서는 이론도 있을 
수  있
다. 이미 베다나 슬레이다누스 같은 사람들이 개별적인 연호에  그리스도 이전을 사용
한 예
가 있다. 또 1474년 쾰른의 한 수도사가 사용하고 있었다는 실례도 알려져 있다. 그러
나  이
러한 예는 부분적이거나 고립된 예에 불과했었다.
  그에 비하여 페타비우스의 경우는 체계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더욱이 그는 유럽 
전체에 
널리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연대학자였다. 따라서 그를 창시자로  보는 것은 잘못이 
아니라
고 생각된다.
  단 그의 '그리스도 이전'  연호의 사용에 대해서는  주의해야 할 중요한 점이  있
다. 그의 
'연대표'에서는 창세 기원, 율리우스 주기에 의한 연호와  조합하여 '그리스도 이전'
의 연호
를 사용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 기원은  결코 그 자체로서 독립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세 종류의 연호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창세 기원에 의
한 세
계 연대 쪽이다.
  '그리스도 이전'의 연호는 그에 비하여 단순히 실용적 편의를 위하여 발명된 것이
며, 세계 
연대에 대해 어디까지나 보조적 지위에 만족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정은 결코 페타
비우스
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이미 뉴턴의 부분에서  뉴턴이 '그리스도 이전'만으로  연호를 쓴 것을  예외적으로 
빠른  
예로 삼았었다. 실제로 18세기에 이르러서도 아직 그리스도 기원은  창세 기원과 함께 
병용
되면서 보조적 지위에 만족하고 있었던 것이다.
  
    애셔
  다음으로는 영국의 청교도들을 대표하는 연대학자로 제임스 애셔(1581-1656)를 들고
자 한
다. 그는 아일랜드로 이주한 영국인 앵글로 아이리시의 자손으로 더블린에서 태어났
다. 아버
지는 아일랜드 재판소의 직원이었다.
  그의 나이 일곱 살 때에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와  영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영국이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격파한 전쟁이다.
  전쟁 후 엘리자베스 여왕은 카톨릭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아일랜드가 에스파냐와  
결탁
할 것을 두려워하여 아일랜드의 영국화 정책을 추진했다. 그 일환으로 1594년에 아일
랜드의 
더블린에 프로테스탄트 상류 계급의 자제들을 교육할  대학을 건립하기로 결의했다. 
아일랜
드의 명문 대학인 트리니티 칼리지가 개교되었다.
  당시 열세 살이었던 애셔는 이  학교의 개교와 동시에 입학하여, 스물  여섯 살인 1
607년 
모교의 신학 교수 지위에 올라 1621년까지 근무했으며, 두 번에 걸쳐 부학장도 지냈
다.
  그러나 그의 활동이 연구의 영역에 한정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1615년에 아일랜
드 교
회 회의에서 '아일랜드 신앙개조'가 결의되는데, 거기에서  중심적 역할을 한  사람이 
그였
다. 그 내용은 로마 교황을 '죄인'이라 부르고 미사를 전면 부정하는 등 강한 칼뱅주
의적 색
채와 강경한 반카톨릭주의로 일관되어 있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뒤를 이어 1603년 스튜어트 왕조의 제임스 1세가 왕위에 올랐는
데, 그
는 왕으로부터 1621년 미스의 사교로, 다시 1625년에는 아머의 대사교, 아일랜드의 수
석  사
교로 임명되었다. 또한 1640년에는 영국으로 가서 찰스 1세의 조언자로 활동했다.
  같은 해인 1640년 그는 장로파의  입장에서 장로제도와 국교회의 감독제도를  통합
하도록 
제안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결실을 이루지 못했다. 이는 1642년에 청교도 혁명이  
시작되
었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왕당파였던 그는 왕당파들과 행동을 같이  했다. 1643년에 의회파가 개
최한 '
웨스트민스터 회의'에 초청되었던 그는 당당히 회의의  비합법성을 주장하여 즉석에서 
축출
당하기도 했다.
  그가 왕당파였음에도 불구하고, 깊은 학식과 평소 반대파에 보여주었던 관용의 자세
로 얻
어진 그의 명성은 혁명 후에도 떨어지지 않았다. 죽은 후 그는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서 국
민장으로 장례를 치렀는데, 이 조치를 명령한 것은 크롬웰이었다.
  스칼리게르의 연대학적, 역사학적 저작이 가장 일찍 받아들여진 나라는 영국이었다. 
 위그
노와 청교도간의 종교적인 연계가 그 원인이 되었다.
  17세기 영국에서는 스칼리게르가 뿌린 씨앗이 차례로  싹을 틔워갔다. 그리고 스칼
리게르
의 계승자들 가운데에서 영국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사람이 애셔였다.
  신학자로서의 애셔는 특히 소아시아의 초기 교부들과 교단의 연구로 유명하다. 뛰어
난 어
학력을 뒷받침으로 한 그의 연구와 간행 자료집 등은 오늘날에도 높이 평가를 받고 있
다.
  그의 연대학도 히브리어 성서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그것은  '율리우스 주기 710
년  10
월 23일', 즉 기원전 4004년에 천지창조를 위치시키는 하나의 체계로 되어 있다.
  애셔의 이 연대학에는 또 한 가지, 종말론적 역사관이  가로놓여 있다는 것도 지적
해두고
자 한다. 그는 뉴턴과 마찬가지로 '인류사 6천 년'이라는 고대 이후의 관념을 수용하
고 있었
다.
  청교도 혁명과 천년왕국론의 결부는 오늘날  영국 혁명 연구에서 주목되고  있다. 
당시는 
종말론적 사고방식이 강했던 시대였다.
  애셔도 그러한 가운데에서 연대학의 기호에 이 사고방식을 고착시켜놓고 있다. 그에 
의하
면 우리는 대단한 시대에 살고 있다. 그의 연대학에 따르면 1996년에는 종말이 찾아와 
세상
이 멸망하기 때문이다.
  그의 연대학은 칼뱅주의라는 채널을 통해 네덜란드나  프랑스를 비롯하여, 미국에도 
퍼져
나갔다. 네덜란드에 관해서는 이미 호른의  예에서 보았다. 미국에 관해서는 나중에  
보기로 
하자.
  여기에서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것은 그의 연대학에 의한 연표가 영국 흠정역 
성서에 
기록되어 발매된 사실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가 그의 
연구
를 인정하여 그의 연대학을 받아들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애셔의 체계는 단순히 영국의 청교도 연대학을 대표할 뿐만 아니라 영국 국교회가 
공인한 
것이기도 했던 것이다.
  
    보쉬에
  프랑스의 카톨릭계를 대표하여 보쉬에(Jacques-Benigne Bossuer, 1627-1704)를 보기
로 하
자. 그는 프랑스 동부의 디종Dijon에서 태어났다. 그 시의 시장을 지내던 삼촌  댁에
서 자란 
그는 열 살 때 이미 성직에 입문했다. 파리의 나바르 신학교College de Navarre에 들
어가서, 
1652년에는 신학박사와 동시에 사제가 되었다.
  그는 그때 이미 파리에서는 지도적 신학자로  널리 알려져 유명한 랑부이에 후작  
부인의 
살롱에도 자주 드나들었다. 카톨릭 교회의 지도자로서  수도회나 교회뿐만 아니라 궁
정에서
도 설교를 하고 젊은 루이 14세에게 왕으로서의 의무를 가르치기도 했다. 더욱이 루이 
14세 
왕자의 교육관이 되는 등(1670-1681) 궁중에서도 신뢰와 존경을 받고 있었다.
  1681년에는 모어의 사교가 되어 '모어의 독수리'라고도 불렸으나, 이는 프랑스 문학
사에서
도 제일로 평가되는 그의 웅변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정치면에서도 그는 커다란 역할을 담당했다.  프랑스는 종교 개혁 시대  이후에도 
카톨릭 
진영에 머물렀다. 프로테스탄트 제국의 교회들이 그 나라의 군주들에게 복종했듯이,  
프랑스
에서도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에는 복종하면서도 로마 교황으로부터는 독립성을  획득
하려는 
움직임이 강해져가고 있었다.
  이와 같은 움직임을  골리카니즘(Gaulicanism, 프랑스 국교회주의)이라고  부르는
데, 1682
년, 보쉬에가 중심이 되어 정리한 '프랑스   성직자 선언(4개조)'은 '골리카니즘의 마
그나카
르타'라고도 불리고 있다.
  로마 교회에 대하여 프랑스 교회의 자립성과  프랑스 왕권 정치에 있어서의 절대적  
독립 
등이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루이 14세에 의해 완성되는 프랑스 절대왕정에 대해 그
는 이
것을 교회의 측면에서 떠받치는 역할을 감당했던 것이다.
  보쉬에게는 또한 종교 이론가로서의  무거운 임무도 부여되어  있었다. 프로테스탄
트와의 
논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으며, 여기에 더해 과학 혁명의  세기가 진행되어 가는 
가운데 
'자유 사상가'라고 불리는 사상가들이 나타나 카톨릭에 대항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이러한 반카톨릭적 조류에 대한 이론 투쟁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카톨릭 
교회내부의 동요를 진압하는 역할도 요구되었던 것이다.
  이 책에서 다룬 '세계사론'(1681)은 직접적으로는 당시 담당하고 있었던 왕자의  교
육관으
로서의 임무를 다하기 위한 교과서로 저술한 것이었다. 그러나 결코 이런 목적만으로 
쓴 것
은 아니었다. 이 저작에 착수하는 커다란 계기가 된  것은 제3장에서 소개한 리샤르 
시몽이
었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사실 시몽의 '구약성서의 비판적 역사'(1678)라는 책의 발매를 금지시킨 것은 보쉬
에였다. 
시몽은 출판에 앞서 이미 국왕의 허락이나 검열관의 승인은 물론 자신이 속해 있었던 
오라
토리오회 총회장의 허가까지 받아놓고 있었다. 보쉬에가 조금만 늦게 발견했더라면,  
국왕에
게서조차 '헌정사'를 받았을지도 몰랐던 일이다.
  보쉬에는 마침 사적인 서클의 회원을 통하여 시몽의 저서  목차를 구경했던 것이다. 
한눈
에 그 책이 지니고 있는 뜻을 알아차린 보쉬에는 당장에 대법관의 집으로 달려가서 그
를 강
제로 설득하여 이 책의 발매를 중지시켰다.
  그날은 '성 목요일'로 교회의 의식과 회개에 충당된  엄숙한 날이었다. 그러한 날이
었음에
도 불구하고 그는 이 조치를 취하기 위해 뛰어다녔던 것이다. 그만큼 위기감이 강했다
는 의
미이다.
  그는 당시의 사상적 상황에 항상 주의를 기울여 몇 차례나  '자유 사상가'들과 논쟁
을 벌
였었다. 이처럼 단련된 그의 시각이 시몽의 이론에 잠재되어  있는 위험성을 놓치지 
않았다
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출판금지 조치만으로 시몽의 논의를 누를 수  없다는 것 또한 그는 잘 알고 
있었
다. 그래서 보쉬에는 카톨릭 정통파의 입장에  선 역사관을 보여줄 필요를 느껴, 스스
로  이 
책을 저술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 연구를 통해 얻어진 그의  연대에 관해서는 기묘한 일이 있다.  세계 연대표를 
자세히 
관찰한 독자라면 알아챘을 것이다. 그것은 보쉬에와 애셔의 연호가 거의 일치한다는 
것이다. 
보쉬에 또한 히브리어 성서에 기초한 연호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아의 홍수의 연호 이외에는 여러  대가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일반적이라는 것은 그대로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일치를  도저히 우연이
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물론 시대의 전후 관계로 보아 이치를 시킨 것은 보쉬에 쪽이라고 
할 수 
있다.
  존슨이라는 학자는 이와 같은 사정을 '완전히 구약성서의 연호에 따랐다기보다는 다
른 여
러 가지 이유 때문에'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더 이상 깊이 있는 설명은 아니다. 당시
는 아직
도 낭트 칙령이 폐지되지 않았으며, 프랑스에는 광범위한 위그노들이 존재하고 있었
다.
  그들을 중심으로 애셔의 연대학이 프랑스에서도  널리 수용되고 있었다는 상황이  
배후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 상황을 판단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정보를 아직 얻
지 못
하고 있다.
  그러나 어쨌든 신, 구 교회 거두들의 의견이 일치했다는 것은 연대학 논쟁의 시대에 
커다
란 의미를 지녔을 것으로 보인다. 천지창조를 기원전 4004년으로 하는 연대학을 프로
테스탄
트와 카톨릭 교회가 동시에 공인한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연대학 논쟁은 종결된 것일까? 사실 보쉬에의 세계사에서는 중국의 연원 
문제가 
무시되었다. 그것은 보쉬에가 취한 방법으로는 당연한 결과였다. 성서에 따라 세계사
를 서술
했으므로  이와 같은 전통적인 보편사의 세계에는 중국이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
다.
  그러나 그가 '세계사론'을 저술한 1681년에는 이미 마르티니의 '중국  고대사'(165
8)도, 포
시우스의 '세계의 진정한 나이에 관하여'(1659)도 출판되어 있었다.
  중국의 연원 문제에 접근하는 태도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었다고 말해두었었다. 보
쉬에는 
그 가운데에서 첫째 유형, 즉 파스칼과 마찬가지로 이 문제를 무시하는 유형에 속한
다.
  그러나 중국의 연원 문제가 점점 더 커지게 되면서 이와 같은 입장이 허락되지 않으
리라
는 것은 쉽게 짐작이 간다.
  
    페즈론
  마지막으로 폴 페즈론(1639-1706)의 연대학을 보기로 하자. 그는 브르타뉴의 소도시 
출신 
프랑스인으로서, 스물 두 살 때 시토파 수도회에 입회한 뒤 파리의 베르나르 신학원에
서 공
부하였으며 뒷날 그 원장이 되기도 했다.
  51세로 원장의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는 수도원의 심사관고 수도원 관계의 직무들을  
맡아
왔다. 이런 직무들을 맡는 한편, 그는 문헌학과 역사학을 중심으로 활발한 연구 활동
을 계속
한 결과 시토파를 대표하는 연구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그의 연대학의 특징은 노아의 홍수의 연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70인역 성서를 
기초
로 삼고 있는 데에 있다. 그는 히브리어 성서가  1세기경의 유대인들에 의하여 개찬된 
것이
라고 주장했다.
  당시의 유대인들이 자신들이 믿고 있었던 연대학의 논리에 따라 족장들의 나이를  
마음대
로 줄였다는 것이다. 즉, 그로 인해 아직 메시아가 출현하지 않았음을 표시하는 것이 
목적이
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위조 행위를 감행한 유대인들은 개찬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고대
의 히
브리어 텍스트 전부를 조직적으로 파괴했다고 한다. 따라서 파괴되기 이전의 오래된 
텍스트
에 가까운 성서가 지금까지 존재한다면, 그것은 70인역 성서밖에  없다는 것이 페즈론
의 주
장이었다.
  페즈론이 이 논쟁에서, 원전으로 삼아야 하는 성서에만 관심을 쏟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그 배경 쪽을 중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그의 저작인 '고대 복원'
(1687)
이 보쉬에의 주장과는 달리, 마르티니나 포시우스의 주장을 의식해서 씌어져 있기 때
문이다.
  예수회의 중국 습속에 대한 타협적인 방법과 이에 반대한 프란체스코회나 도미니크
회  등
의 논쟁(전례 문제)이 1643년에 로마 교황에  제소하는 데까지 발전한 이후로, 중국  
문제는 
유럽에서 커다란 문제가 되었다.
  예수회의 수사들은 스스로의 입장을 선전하기  위해서도 적극적으로 중국 문화의  
소개에 
나서고 있었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서 차차 중국의 문제가 유럽인에게 있어서 진퇴
유곡의 
문제로 의식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시대 배경 속에서 생각한다면 페즈론의 주장은  예수회 쪽을 지지한 내용
이며, 
그 중점은 70인역 성서를 따르게 되면 중국(이집트를 포함하여) 역사의 연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데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필자만의 해석이 아니다.
  이미 그 당시에 보수파들은 이집트인들이나 중국인들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성서
의  텍
스트를 고른다는 것은 부당한 일이라고 주장하면서 페즈론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으
로  비
판했기 때문이다.
  보수파들의 비판으로 페즈론의 '모독 행위'가 사람들에게 신용을  잃었을까? 그렇게 
되지
는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이 사실을 입증해주는  것이 앞에서 말한 보쉬에이
다. 페즈
론의 '고대 복원'이 출판된 후인 1700년에 보쉬에는 '세계사론' 제3판을 출판했다.
  여기에서 그는 "만일 독자들이 이집트의 역사나 중국의 역사 가운데 여러  사건을 
수집함
에 있어 라틴어로 번역되어 있는 우르가타 성서에 의한 연대 기록법으로 불충분하다고 
생각
한다면, 70인역 성서의 연대법을 사용해도 상관없다"고 의식적으로 추가하여 기록했
다.
  이런 사실을 소개하고 있는 아자르는 "페즈론 신부와 마찬가지로 보쉬에는... 순수
하게 연
대상의 이유로 성서의 두 가지 번역 가운데 한쪽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도 
이만
큼 당혹스러웠던 적은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고 말하고 있다.
  당연히 최고 지도자의 '당혹'은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게  된다. 보쉬에가 애셔의 연
대학에 
자신의 설을 일치시키는 것으로 일단 수습된 것으로 보였던 연대학 논쟁은 당사자인 
보쉬에
의 동요로 인해 한층 더 혼미한 상황이 된다. 그  동요를 가져다준 것이 이집트사와 
중국사
의 연원 문제였다.
  연대학의 창조자인 스칼리게르에서 시작하여 17세기 말까지의 연대학 논쟁을 살펴보
았다. 
이 논쟁이 지향한 바는 -보편사가 각양각색의 압력을 받고 있는 가운데- 연호의 수정
을 통
해 보편사의 시간적 테두리를 지키고, 나아가 보편사 자체를 지키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보편사를 옹호하기 위한 가장 중심적인 역할은 자연스레 연대학이 담당하
고  있
었던 것이다.
  이와 동시에 연대학은 그 자체가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이데올로기 투쟁의 일부
였다. 
맨 처음에는 프로테스탄트가 우세한 입장에 선 것으로 보인다.  이는 스칼리게르 이후 
학자
라면 누구나 히브리어 성서에 기초를 둔 연대학을 전개해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집트사나 특히 중국사의 연원 문제에 도달하면, 또  다시 70인역 성서의 
지위가 
되살아나게 되었다.
  이러한 논쟁이 진전되는 한편, 성서에 대한 비판적 연구가  진행되어 보편사의 기초
가 되
어 있는 성서의 지위 자체가 동요를 더해가고 있었다.  '과학 혁명'의 진행 속에서 이
신론이 
등장하여 신에 대한 개념도 모습을 바꾸어가기 시작했다. 또한 '자유 사상가'들에 의
해 기독
교 자체에 대한 비판도 높아져갔다.
  이와 같이 복잡한 상황이 진전되는 가운데 다양한 측면에서 다양한 의견들이 등장하
는 것
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이러한 의견들을, 여러 가지 예에서처럼 서로 관련되거나 대립
하면서 
각자의 입장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통해 대략 살펴본 셈이 된다.
  그런 과정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다양한  의견들이 일치를 보아가기는커녕, 
점점 
더 혼란이 심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혼미는 18세기까지 지속되어간다. 표1
에 채록
한 최후의 예인 가테러가 18세기 후반의 독일 역사가라는 것으로도 이 혼란성은 쉽게 
이해
될 것이다.
  
        제4장 보편사에서 세계사로
      계몽주의적 세계사의 형성
    볼테르에 의한 역사학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연대학 논쟁은 계몽주의 시대인 18세기에 마지막 국면을 맞게 된다. 그 원인 가운데 
하나
는 계몽주의자들의 보편사 비판이다. 여기에서는 계몽주의자의 대표로, 역사학에 있어
서 '코
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을 초래했다고 일컬어지고 있는 볼테르를 예로 들어 그들의 주장
을 살
펴보기로 하자.
  볼테르(Voltaire, 1694-1778)는 '루이 14세의 세기Le Ciecle de Louis 14'(1751)에
서 세계사
에 관한 기본 인식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세계사상 특기할 만한 것으로서는 네 개의 세기를 세는 데 불과하다."
  이 네 개의 세기에 대해서 그는 "먼저...'필립과 알렉산더의 시대(그리스', 다음은 
'두 번째
는 시저(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시대(로마)', '세  번째는  콘스탄티노플이 모하
메드 2
세의 손으로 들어간 직후의 시대',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사람들이 부르기를 
루이 
14세의 세기'라고 한다. 이 마지막 시대는 아마도  네 시대 가운데에서 가장 원전에 
가까울  
것이다. 앞에 든 세 시대의 소산을 이어받았으며, 분야에 따라서는 이 세 시대를 합한 
것 이
상의 진보까지 보여주었다... 대체로 이지 그 자체가   완벽에 다가선 것이다"라고 서
설에서 
말하고 있다.
  그의 역사 서술은 우선 첫째로, 오늘날  말하는 '문화사' 또는 '정신사'에 해당한
다. 또한 
그가 말하는 '네 개의 세기' 가운데 앞의  세 개는 오늘날의 그리스 고전문화, 로마  
고전문
화, 르네상스이다. 이 네 개의 세기는 보편사에서처럼 기독교적 관점에 가려진 것은 
아니다.
  이것은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역사의 바탕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여기
에서 말하는 이성이란, 르네상스를 통해 신앙에서 독립하여  '과학적 혁명'을 산출해
낸 이성
이다. 볼테르는 '이지' 또는 '문화'를 처음으로 역사의 주요 테마로 하고, 이에 의해 
역사학
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가져다준 것이다.
  오늘날 융성한 문화사, 정신사는 계몽주의가, 직접으로는 볼테르가 그 출발점을 부
여한 것
이다.
  둘째로, 이 네 개의 시대는 조악하나마 인류가 점차적인  완성으로 향하는 진보의 
단계로 
선정되어 있다. 볼테르는 이와 같은 의미에서의 이성을 가진 인간을 역사의 기초에 두
고 그 
위에서 이 진보관을 기둥으로 하는 세계사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보편사도 역시 일종의 진보사관을 기초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신에 의
한 인
류 교육의 발전 과정으로서의 역사를 평가하고, 그 진보를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볼테르의 진보사관은 이성적 인간이 활동하는 세속적 세계에 주목하여, 
그  정
신과 문화의 진보 과정을 서술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류의 자기 계몽의 발전 
과정이
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테르의 진보사관은 기독교적 진보사관을 세속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
다. 그리고 이 세속화를 대담하게 행함으로써,  그는 새로운 역사 서술을 위한 길을  
열었던 
것이다.
  
    뉴턴의 물리학적인 시간
  계몽주의자에게 있어서 시간이란 이미 보편사에서와 같은 짧고 유한한 시간이 아니
다. 볼
테르에게서 이 점을 살펴보자. 그는 이신론자였다. 또한 뉴턴을 최초로 프랑스에 소개
한  사
람 가운데 하나였고, 열렬한 뉴턴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당연하게 뉴턴의 물
리학적
인 시간 위에서 역사를 포착해갔던 것이다.
  '역사 철학'(1765)에서 그는 역사의 기술에  대해 '지구상의 제반  변화'에서부터  
개시하
고 있다. 물론 아담과 이브, 에덴  동산 같은 보편사에서 낯익은 기술은  전혀 없다. 
초기의 
인간은 오랫동안 '야생의 동물들과 같은 상태'로  지내왔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겨우 
 "몇
천 년, 몇만 년이 지난 뒤에 몇몇 사회가 형성되었다"고 하고 있다.
  문명이 발생하는 것은, 훨씬 다음의 일이다. 인간이 "우선 최초에 알아야 할 일은, 
호구지
책을 강구하고 생계를 꾸려가는 것이다... 둘째는  말을 만드는 일로서, 이것은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 분명하다. 셋째는 몇 개의 움막을 세울 필요가 있다. 넷째로는 옷을 만들어 
 입을 
재주가 필요하다. 이어서 쇠를 단련하기 위해, 혹은 그 대신이 될 수 있는 물건을  찾
아내기 
위해 실로 많은... 노력과 세월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그는 우주나 인류사의 시점에 관해서는 언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칼데아인이 인류 
역사의 
기간으로 전하고 있는 47만 년이라는 수치에 대해서는 "우주 전체로 본다면 대단한 것
도 아
니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그는 당시로서는 놀랄 만큼 장구한 시간을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하자
면, 인류사의 연원을 성서가 가리키고 있는 시간으로 재는  것에 대한 비판이나 부정
까지도 
의미하는 것이다.
  
    연호 표기의 문제
  그러나 볼테르가 여기에서 직면하고 있는 문제에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이
와 같
은 새로운 시간을 어떤 수단에 의해 표기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그는 '역사  철학'에서   '세계 연대'를  일체   사용하지 않았으며,   '그리스도  
이전 
avant Jesus-Christ'도  쓰지 않았다.   일본의  역사가인 마에카와씨도  '역사를   
생각한
다'(1988)에서 지적하고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그에 대신하여  우리들의 '통속   
기원전
avant notre ere vulgaire'으로 연호를 표기하고 있다.
  예를 들면 "중국에서는 '5경'이 우리들의 통속 기원전 2300년에 씌어졌다"고 하는 
식이다. 
또 기원 후의 연호에 관해서도 AD를 사용하는 대신 주(Dominus)라는 말을 뺀 상태에서 

자만을 표기했다.
  '통속 기원'이라는 말은, 제2장에서 얘기한  디오니시오스에 의한 기독교  기원의 
별칭이
다. 따라서 오늘날의 그리스도 기원의 연호와 수치는 다를 것이 없다.
  그는 왜 굳이 '그리스도'나 '주'라는 말을  빼고 이와 같은 연호를 사용한 것일까?  
그것
은 기독교적인 시간은 부정했지만 새로운 시간에 대한 적절하고 새로운 표기 수단을 
강구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종교적인 의미를 박탈하고 난 다음
의 그
리스도 기원의 연호를 채용하게 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스도 기원을 처음으로 '예수 이전'으로 연장시킨  페타비우스는 어디까지나 '창
세 기
원'을 연호의 기초로 하고 있었다. 한편,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 기원을 사용할 때, 
우리는 
아무런 기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위와 같은 형태의 볼테르의 '통속  기원' 사용은, 그 중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그리스도 기원과 페타비우스의 창세  기원의 가운데, 말하자면 징검
다리로
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볼테르는 창세 기원과 분리한  다음에 페타비우스의 '그리스도 이전'에까지  연장한 
연호 
체계를 채용하고, 거기에서 '그리스도'와 '주'라는 단어를  제외함으로써 연호 표기의 
'세속
화'를 도모한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보편사적 세계의 부정
  그는 '역사 철학'의 처음 몇 장에서 지구상의 여러 가지 변화, 즉 원시 시대의 사
람, 사회, 
종교 등을 다루고, 그 다음으로는 아메리카인, 칼데아인, 페르시아인, 아라비아인, 인
도인, 중
국인 등의 문화에 대해 다루었다. 그리고 후반부에서는 이집트인, 그리스인,  유대인, 
로마인
에 대해 자세하게 논하고 있다.
  볼테르가 묘사하고 있는 세계는 이와 같이 지구 크기의 규모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앞장
까지의 대항해 시대에서의 세계의 확대에 부응하고 있으며, 이것으로 전통적인 보편사
의 세
계를 결정적으로 타파하고 있다.
  더욱이 세계가 확대된 것만이 아니다. 중국, 인도, 이슬람 등 보편사에서는 이제까
지 거의 
언급조차 하지 않았던 여러 종류의  문명을 들추어 그들 모두를 높게  평가하고, "칼
데아인, 
인도인, 중국인은 가장 일찍부터 개화한 문화 민족인 것으로 생각된다"고 총괄했다.
  그는 이리하여 문명의 일원적 발생을 주장하고 있는 성서에 반대하여 다원적 발생론
을 주
장하고 있다.
  그리고 보편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히브리인(유대인)에 관해서는, "이 
 민족
은 가장 새로운 부류에 속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더욱이 그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하
나님은 
유대 민족 이외의 사람들이 숭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배타적인 민족신임이 분명
하다는 
것을 여러 군데에서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구약성서는 가장 새로운 민족 가운데 하나인 유대인들의, 그것도 편협
한  민
족 종교의 교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주장 역시 구약성서를 기초로 하고 있는 보편사에 대한 강렬한 비판이라는 것은 
재론
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중국 문제의 의미 변화
  볼테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연대기가 중국의 것이라는  사실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이 중국의 연대기는 중단되는 일없이 계속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중국 역사의 오
래됨을 
승인하고 있는 것이다.
  이 중국의 연원에 대한 승인은 보편사 비판으로까지 연계되어간다.
  "이 오랜 민족은 지구상의 물리적 대변화, 즉 대홍수라든가  큰 화재와 같은 사건의 
어느 
한 가지도 역사에 기록된 바가 없었다... 그런 까닭에  중국의 풍토는 이와 같은 재해
로부터 
지켜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노아의 홍수가 지구 전체를  뒤엎었다는 구약성서의 기록을 공격하는  
근거로 
중국 역사가 이용되고 있다.
  이 비판은, 당연히 노아의 홍수의 연호 부정으로 연결되어 간다. 원래 보편사적인 
짧고 유
한한 시간을 부정한 계몽주의는,  중국 역사의 오래되었음을 인정하는  데에 아무런 
장애도 
없었다.
  그리고 중국 역사의 연원 문제는, 오히려 노아 이후의 시간의 범위내에 중국 역사를 
수용
하려고 노력하고 있던, 보편사의 입장을 공격하는 강력한 무기가 된 것이다.
  그러나 중국 문명을 높이 평가하는 일과 그의 진보사관과의 관계에 주목한다면, 볼
테르에
게 있어서 중국에 대한 평가 문제가 새로운 양상을 보여주고 있음도 관찰할 수가 있
다.
  볼테르에게 있어서 중국 문제는 보편사의 경우와 같이 연원이 오래되었는가 오래되
지  않
았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문제는, 이와 같이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
는  중
국을 어떻게 자신이 주장하고 있는 진보사관과의 관계로 평가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
다.
  이 문제에 대해 '루이 14세의  세기' 가운데에서 학문의 세계와  도덕이나 치안의 
세계를 
구별한 다음에, 중국인을 "도덕이나 치안의 점이라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었으며 또
한 가
장 뛰어난 국민"이라고 했다. 한편 학문의 면에서는 "선철들을 존경하는  나머지, 여
기에 주
어진 한계를 넘을  수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결국에는 라이프니츠와 마찬가지로 실천면에서는, 중국이 오히려 정치, 도덕 등이 
세계 최
고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 수준은 "2천 년 이상 전에 발전의  최종 단계에 도달하고, 거기에서 머물
러 있
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서, 중국은  '학문에서는  뒤져' 
있는 상
태라고 하는 것이다.
  한편, 앞에서 들었던 '네 개의 세기'론에서는,  진보의 단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예
를  들
고 있는 사건들이 모두 유럽에서의 사건이다.
  이 문제에 대한 볼테르의 해답은 중국 문명의 특징을  '정체'라고 하고, 유럽의 그
것은 진
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 사고방식은 계몽주의 시대 유럽에서 일반화되어 중국과 동양에 대한 기본적인  
견해로 
정착되어 간다.
  
      보편사의 붕괴
    캘러리우스와 '고전적 3구분법'
  보편사의 붕괴와의 관계에서 먼저 말해두고 싶은 것은, 17세기  말에 제안된 새로운 
시대 
구분법, 즉 오늘날 '고전적 3구분법'이라고 불리는 고대, 중세,  근대라고 하는 세 시
대로 구
분하는 법에 관해서이다.
  이 3구분법을 맨 처음 역사 기술에 채용한 사람은 독일의 역사학자인 크리스토프 켈
러(켈
러리우스, 1638-1707)였다. 그는 대대로 많은 학자를 배출한 프로테스탄트의 명문 집
안 출신
으로 바이마르, 메르세부르크 등에서 김나지움의 교수, 교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훌륭한 교육자라는 명성을 얻어 1693년 할레 대학의 창립과 동시에 이 대학 철
학부
의 역사 교수로 초빙된 사람이다.
  그는 역사학뿐 아니라 지리학과  고전에도 능통했으며, 이 분야들에  관한 다수의 
저작과 
교과서를 집필하였다. 또한 독일 전역에 떨친 명성으로 인해  많은 학생들을 할례로 
끌어들
인 유명한 교수이기도 하였다.
  그는 이와 같은 활동중에 세 권으로 된 신서판 크기의 세계사 교과서를 썼다.
  '고대사 Historia aniqua', 1685년
  '중세사 Historia meii aevi', 1688년
  '근대사 Historia nova', 1696년
  먼저 고대로부터 보아간다면, 켈러리우스는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님롯이 건설한 칼
데아인
의 소왕국에서 시작한다. 아담과 이브로부터 시작하지 않은 점은  그의 식견을 나타내
고 있
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후의 내용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어서 니누스로부터 사르다나팔루스에 
이르
는 아시리아로, 다시 최후의 로마까지, 전통적인 보편사에서 낯익은 제국들을 서술했
기 때문
이다.
  그는 좀처럼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으나, 그것을 사용하고 있는  데에서는 노아의 
홍수를 
1646년, 님롯을 1770년으로 하는 등 역시 창세 기원을 사용했다.
  고대에서 중세로 이행하는 지표가 되어 있는 것도 이교  시대에서 기독교 시대로의 
이동, 
즉 콘스탄티누스 대제이다. 이어서 중세로 들어가는데, 여기에서는 콘스탄티누스 대제
의 4세
기에서부터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1453년까지 세기마다 장을 따로 하여, 각 세기에 
있어서
의 기독교인 세계의 움직임이 정리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근대는 1453년 이후에 대해 역시 세기마다 장을  따로 하여, 정치사를 
중심으
로 17세기까지 유럽 세계의 움직임이  서술되어 있다. 중국이나 아시아에  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켈러리우스의 서술은 내용적으로 새로운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지
만 켈
러리우스의 이 저작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고대, 중세, 근대라고 하
는 시대 
명칭이 역사의 서술에 등장한 최초의 일이었다.
  
    가테러와 괴팅겐학파
  보편사는 마침내 붕괴하지 않을 수  없는 시점에 와 있었다.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가테러이다. 요한 크리스토프 가테러(1727-1799)는  1759년 이후 그가  죽을 때까지 
괴팅겐 
대학에서 역사학 교수로 지냈으며, 그 동안에 이 대학을 독일 역사학의 중심적 위치로 
끌어
올렸다.
  1737년에 갓 창설된 괴팅겐 대학은 당시 독일에서 가장 자유로운 대학이며, 여러 가
지 새
로운 시도를 하고 있었다. 그  한 가지 예가 세계사의 강의를  신학자가 아닌 역사학
자에게 
맡겼다는 점이다.
  덕분에 그는 그때까지 연구하던 독일 중세에서  떠나 처음으로 세계사 연구에 손을  
대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가테러의 강의는 그 참신성으로 인해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
켜,  교
실만으로 부족하여 창 밖에서라도 강의를 듣기 위해 학생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역사학자로서 그의 활동은 역사학을 하나의 전문적인  학문으로 육성하기 위해 바쳐
졌다. 
괴팅겐 대학은 1766년에 '역사학  연구실'을 설립하여, 역사학을  전문적인 학문으로 
인지한 
독인 최초의 대학이 되었다. 이 연구실을 설립한 사람이 바로 가테러였다.
  그는 여기에서 세미나를 통해 제자들을 육성하고 사료의 수집과 저서의 편찬을 해나
갔다. 
그리고 독일에서 최초로 역사학 전문 잡지를 발간하고 이 잡지를 무대로 역사학의 독
자적인 
성격과 임무를 둘러싼 이론적 고찰과 비평 활동을 전개했다. 또 본업인 역사서의 출판
뿐 아
니라, 역사학 보조과학의 정비에 관한 일도 했다.
  그는 문장학, 고문서학, 계보학, 지리학, 연대학의 교과서도  썼다. 그리고 이와 같
은 다방
면에 걸친 정력적인 활동에 의해 가테러는 '괴팅겐학파'의 창시자가 된다.
  그는 거의 십 년마다 네 종류의 범주가 다른 세계사에 대한 저서들을 집필하고 있
다. '보
편사 교과서'(1761), '보편사 서설'(1771), '세계사'(1785),  마지막으로 '세계사 시
론'(1792)이 
그것이다.
  앞의 두 책에는 '보편사Universalhistory'라는 이름이 붙어  있으나, 뒤의 두 책에
는 '세계
사Weltgeschichet'라는 명칭이 사용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명칭의 변경은 가테러의 입장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그 변화의 내용
을 전
기의 '보편사 서설'에서부터 후기의 '세계사'로의 이행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보편사 서설
  가테러의 출발점은 보편사였다. '보편사 서설'은 18세기라는 시대에 보편사를  대응
시키려
는 그의 노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인류사는 크게 4기로 구분되며, 제1기는 천지창조(아담과 이브)로부터 서술이 시작
되고 있
다(창세 기원). 1656년에 전세계를 뒤엎은 노아의 홍수를 거쳐,  여덟 명에서 새로이 
인류사
가 재출발한다는 것 등 지금까지의 보편사와 다름없는 내용들이 서술되어 있다.
  제2기의 시점도 펠레그의 시대와, 1809년의 바벨탑의 사건에 두어져 있으며 이를 여
러 민
족의 발생기로 삼고 있다. 여기까지는 완전히 구약성서 그대로이다.
  그러나 이 이후에 관해서 가테러는  '여러 민족 체계'가 계승하는  시대로 그려간
다. 그는 
'세계제국'이라는 기존의 개념을 사용하지 않는다.  특정의 지배적 민족, 그리고  그
와 어떤 
형태로든 관계를 맺은 여러 민족으로 형성되는 역사적 세계를 '여러 민족 체계'라고 
불렀다.
  처음의 세 가지, 즉 아시리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적 민족 체계까지는,  전세계사
가 단일 
체계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와 파르티아(Parthian Empire, BC 247-AD  224)의 시대가 되면 아시아와 

럽이 분리되어, 세계에 두 개의 민족 체계가 병존하는 시대로 이행하는 것으로 보았
다.
  제3기에 대해서는 먼저 이 시대가 전체로서 '중세  Mittlere Zeit'라고 불리는  점
에 주의
해야 한다.
  이 기간에는, 아시아와 유럽 각각에 복수의 민족 체계가 나타나는 것으로 되어 있
다. 이와 
같이 많은 민족 체계를 인정하면서도 하나의 시대로 표현하기  위해, 중세라는 시대명
을 사
용한 것이다.
  그에 의한 중세의 기간은 민족 이동기인 5세기로부터 신대륙의 발견(1492)까지로서, 
 앞에
서 소개했던 켈러리우스의 구분 그대로는 아니더라도, 이  3분법의 사용에는 주의해두
고 싶
다.
  그 이후 시대의 서술 내용에 관해서는, '민족 이동기'  가운데에서 그 계기를 부여
한 훈족
이 중국사에 등장하는 흉노족일 것이라는 추정을 실마리로 하여 중국사가 기술되어  
있다는 
것, 조선사나 일본사 등 몇몇 아시아 나라들의 역사가 제4기의 '비유럽 제국'의 항목
에서 서
술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와 같은 기술은, 유럽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들에  대해서는 유럽인이 처음 
만났던 
시점으로 그 나라들의 역사를 다시 서술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방법
을 채
용함으로써, 중국이나 일본, 한국 등을 하나의  '여러 민족 체계'로  평가할 것인가의 
 여부
에 대한 문제를 피하고자 했던 의미도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까지 간단하게 전체의 구조를 보았다.  가테러가 지구 규모의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역사 기술을 시도하였고, 그로 인해 전통적인 4세계제국론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
던 것, 
또한 그 대신 시대 구분에 새로운 3구분법을 도입해야만 했던 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
다.
  그러나 연호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전체의 기초를 부여하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
나 성
서였다. 이는 18세기라는 시대에 부응하여 지구 규모의 세계 역사를 체계적으로 서술
하고자 
하는, 보편사의 테두리 안에서의 새로운  세계사가 되었다. 가테러의 강의가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원인은 바로 이 새로움이었다.
  
    '세계사'에서의 변화
  그의 세 번째 세계사 서술은 '세계사'라고 이름이  붙여져, '보편사'라는 명칭이 떨
어져나
가게 되었다. 이밖에도 '세계사'에서는 많은 점에서 가테러의 입장이 변화되어 있다.
  무엇보다 성서에 대한 입장이 바뀌었다. 이전까지의 그는 성서에 기술되어 있는 한  
마디, 
한 문장에 하나님의 영감이 깃들어 있다는 사고방식, 즉 축어적 영감 위에 서 있었다. 
 그러
나 여기에서는 성서를 여러 사람들이 남긴 기록을 편찬한 것으로 생각했다.
  이 변화는 당연히 그의 역사 서술에도 반영되었다. 이전의 시대 구분의 제1기는 지
금까지
도 성서에만 의존하여 기록해온,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의 시대로 충당되어 있었다.
  여기에서 그는 이것을 '가장 오래된 전통적 역사'라는 명칭으로  묶어놓고 있다. 
즉, 이제
까지는 확실한 역사적 사건이라고 믿어왔던 창세기 등의  기술을 '전설'이라고 생각하
게 된  
것이다.
  나아가서 그 '전설'에 대해서도 "히브리인의 전승은 노아 집안의 조상에 대한 것, 
즉 셋을 
시조로 하는 대민족 중의 한 줄기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고까지 한정을 
해버렸
다. 따라서 성서는 '셋을 시조로  하는 대민족의 한 줄기'인 히브리인의  '전설'만을 
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노아의 홍수까지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이에  대해서도 홍수가 전세계를 뒤엎
었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고, 실은 인더스 강 상류에서 일어난 국지적인 홍수였다고 한다. 방
주에 탔
던 것도 노아 일족과 그 지방의 동물에 불과했고, 성서에는  씌어 있지 않지만 다른 
지방에
서는 홍수와 상관없이 살아남은 사람들이 많았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보편사에서 항상 이야기되어왔던,  노아의 홍수에서 살아남은  여덟 명에
서부터 
인류사가 재출발한다는 주장을 부정해버렸던 것이다.
  그밖에도 변화는 더 있다. 표 2의 시대 구분으로는 뚜렷하게 보이지 않지만, 연호  
체계를 
바꾸었던 것이다. 이제까지 그는 페타비우스의 연호 체계를 채용해왔었다. 그러나 이 
세  번
째의 '세계사'에서는 노아의 홍수로부터 예수 그리스도  탄생까지의 기간을 198년간이
나 연
장했다. 그 원인은 두 가지가 있었다.
  이집트의 역사와 중국 역사의 연원 문제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제까지는 그도 대홍
수로부
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까지를 1656년에서  3983년까지로 하는 페타비우스의 연호  
체계에 
어떻게 해서든지 양자를 밀어넣으려고 노력해왔다.  그러나 끝내 이를 체념하고  연호 
쪽을 
바꾸었던 것이다.
  당시의 독자들은 무척이나 놀랐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창세  기원에 의한 연호가 
지녔
던 숙명이기도 하다. 중간의 어딘가에서 계산이 바뀌면 그 다음에 있는 연호들은 모두 
변하
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연구자들마다 다른 연호 체계를 제출하는 처지가  된다는 것은 표1에서 보
는 바
와 같다. 물론 그도 가능하면 연호체계를 바꾸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가테러의 
이러한 
변화는 이집트와 중국의 연원 문제가 보편사 쪽을 궁지에 빠뜨렸던 증거라고 생각할 
수 있
다.
  가테러는 '세계사'의 구성 자체도 바꾸었다. '세계사'에서는 '보편사 서설'과는  전
혀 다른 
원리에서 시대 구분을 6단계로 했던 것이다.
  앞에서 말한 책, 즉 '세계사'에서 시대를 구분한 원리는 정치사적인 관점에서였으
나, 이번
에는 문화적인 관점에서 시대를 구분한 것이다. 그리고 각  장에서는 각각의 문화적 
단계에
서 지구상의 여러 민족들이 어떠한 공헌을 했는가를 각 민족별로 서술해놓았다.
  모세나 소크라테스와 나란히 공자나 조로아스터(Zoroaster,  BC 10세기경, 고대 페
르시아
의 국교였던 조로아스터교의 교주)와 같은 사람들의 공헌을 설명해나갔다.
  여기에서는 중국인의 문화 역사상의 영웅들에게 히브리인이나 그리스인, 그리고 로
마인들
과 동등한 지위가 부여된 채 서술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계몽주의적인 진보사관에 
기초
하는 세계사 서술을 향한 가테러 나름대로의 접근이며 수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본다면, 이 책에서 가테러는 보편사의 입장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
다.  그
렇지만 서술의 내용은 이미 전통적 보편사의 입장으로부터 크게 벗어나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이 책에 '보편사'라는 이름을 버리고,  '세계사'라는 이름을 붙
인 원인
이라고 생각된다. 보편사의 테두리 안에서이기는 하지만  그는 계몽주의적 세계사로 
향하여 
크게 변화한 것이다.
  
    보편사의 자기 부정의 발자취
  이러한 변화는 그후로 한층 더 추진되었다. 그의 마지막 저서인 '세계사 시론'에서
는 일본
이나 중국, 아라비아와 인도 등 아시아 전체의 여러 나라들을 포함한 계몽주의적 문화
사, 혹
은 오늘날의 '사회사'적인 기술이 되어 있다.
  더욱이 창세 기원을 사용했다는  점을 제외하면, 보편사적인 요소들은  이미 거의 
자취를 
감춘 것에 가깝다. 예를 들어 가테러는 이 책에서도 여전히 인류사의 제1기로 아담에
서부터 
님롯Nimrod까지의 시대를 설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대에 관해서는 모두가 '전설적인 역사'로 치부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861쪽
에 달하는이 책의 분량 가운데 여기에 관해서는 불과 2쪽밖에 없다.
  결국 가테러는 연구자로서의 생애를 통하여 전통적인 보편사의 기본적 요소를 거의 
다 부
정해버렸다. 처음에는 4세계제국론을 포기했고, 이어서 노아의 홍수를 국지적인  천재
지변으
로 파악했으며, 기독교의 구약성서는 히브리인 가운데 노아의 자손들에 대한 역사밖에 
기술
하지 않았다는 것을 주장함으로써, 무엇보다도 성서 자체를 몇몇  인간 집단이 남긴 
역사적 
문서로 만들어버린 셈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평생 창세 기원을 버리지 않았다. '전설'이라고  말했지만,  마지막 저
서에서
도 아담으로부터 세계사 서술을 시작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를 보편사의 부정자라고는 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는 매우 진지한 
프로
테스탄트였다. 원래부터 보편사적인 입장에서  출발했던 가테러가 보편사를  거의 부
정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된 데야말로 그의 역사적 위치가 잘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
다.
  18세기라는 계몽주의 시대 가운데에서 프랑스의 계몽주의자들과 같은 외부로부터의  
공격
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보편사는 내부로부터도  자기 부정을 향한 발걸음을 옮겨갔던  
것이
다. 가테러는 이 보편사의 자기 부정의 발걸음을 대표하는 역사학자였다고 말할 수 있
다.
  
    슐레처와 세계사
  가테러를 괴팅겐학파의 시조라고 한다면, 제2세대의 대표자는 아우구스트 루드비히 
폰 슐
레처(1735-1809)이다. 그는 괴팅겐 대학에서 다음에 언급하게  될 미하엘리스에게 배
웠으며, 
1769년 이후 1805년까지 모교에서 후진들을 가르치는 한편 다방면으로 활동을 전개했
던  사
람이다.
  북유럽과 러시아의 역사를 비롯하여 상업사와 경제사,  나아가서 정치 평론에 이르
기까지 
매우 폭넓은 활동을 했다. 그는 비판 정신이 왕성하여, 그 당시 가장 대표적인 계몽주
의자의 
한 사람으로 다방면에 걸쳐 전투적인 논쟁을 펼쳤다.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가 하면 마리 테레사(Marie-Louise-Therese, 1791-1847)
가  개
혁 사업을 입안할 때마다 슐레처가 어떻게 비판을 할까 하고 신경을 썼다고 전해질 정
도이
다.
  역사가로서 그는, 초기에는'보편사의 관념'(1775)이라는 제목의 책을 내고 있으며,  
아직도 
'보편사'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곧 이에서  탈피하여 명확하게 보편사를 부
정하기
에 이르렀다.
  그의 보편사 비판의 논의를 '세계사Weltgeschichte'(1785)에서 보기로 하자.
  그는 우선 서문 첫머리에서 "보편사는... 성서 문헌학과  세속적 문헌학의 보조 과
학에 불
과했다"고 말한다. 역사학을 독립된 학문이라고 보는 그의  입장에서는 이와 같이 종
속적인 
지위에 안주하는 보편사를 긍정할 수 없었다.
  그는 독립된 학문인 역사학은 보편사가  아니라 '세계사'의 서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
였다. 그리고 '세계사'란 모든 사실의 계통적인 집대성인 동시에,  그것들을 통해 대
지와 인
류의 현상을 근본부터 이해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여기에서는 역사가 '모든 사실'에 기초하고, 성서에 입각한  역사 이해라는 보편사
의 입장
을 확실하게 포기하고 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가테러와 마찬가지로 슐레처도 보편사에서 세계사로 전환한 셈이지만, 그는 이와 같
이 세
계사로의 전환을 소리 높여 선언했던 것이다.
  "중요한 변혁을 가져온 모든 사건들이 세계사에 있어서는 유익한 것들이다.  이를테
면, 천
연두나 집시gypsy, 그리고 담배의 유럽 전래  등도 자마의 싸움이나 예루살렘의 파괴  
또는 
베스트팔렌 조약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사건이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주장하고 있는 세계사의 내용은 가테러와 같이 계몽주의적 문화사라고 하
기보다
는 현대에 있어서의 '사회사'에 가깝다.
  다음에 그 세계사의 구성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는 인류사를 6기로 시대를 구분하고 
있다. 
이 시대 구분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  그의 세계도 역시 지구 크기의 세계로 
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세계의 문화적 발전 단계를 나타내는 말로서 제4기, 제5기, 제6
기에다
가 각각 고대, 중세, 근대라는 명칭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고대는 키루스(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로부터라고  했으며, 그 이전의  아담으
로부터 
사르다나팔루스(아시리아)까지의 시대와 구별하고 있다.
  확실한 사료에만 입각한 역사 서술을  주장하던 그가, 이와 같은 역사를  서술할 수 
있는 
것은 키루스 이후의 시대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키루스 이전의 세계는 시원세계, 무명세계, 전세계로 구분되어 있으며, 여기에서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보편사적 요소도 살펴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것들은 어디까지
나  '

설'이라는 전제하에 이야기되고 있다.
  
    창세 기원의 부정
   시간에 관한 슐레처의 논의도 중요하다는 것은, 그가 연호 표기의 문제에 있어서도 
전통
으로부터의 이탈을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키루스 이후는 모든 연호를 '그리스도 
이전'
으로 쓰기로 하고, '천지창조로부터 행하는 보기 안쓰럽고도  부정확한 산정'은 하지 
않는다
고 천명한 것이다.
  또한 키루스 이전에 대해서는 군데군데에서 창세 기원의 연호를  쓰는 일도 있으나, 
그것
은 다른 책에도 나와 있어서 사용하고 있을 뿐 모두 불확실한 연호에 불과하다고 미리 
말해
두기도 했다.
  그는 인류가 탄생한 것을 그다지 오래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인류사는 
적어
도 6천 년간이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시간은 이미 보편사의 그것은 아니라는 점에도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
다. 그
는 엿새 동안의 천지창조를 명확히 부정하고, 지구의 역사  쪽은 '몇만 년이나 되는 
길이'를 
가졌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물지'(1749-1804)로 유명한 뷔퐁은 박물학의 세기이기도 했던 18세기에 커다란 
영향력
을 지닌 과학자였다.
  그는 <지구와 혹성의 냉각에 관한 연구>(1775)라는 논문 가운데에서 지구가 형성되
고 나
서 현재의 온도가 되기까지를 7만 4832년간이라고 계산하고 있었다. 또 그는 인류의 
탄생은 
6천 년에서 8천 년 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즉 슐레처는 뷔퐁의 설을 받아들인 것
이다.
  
    그리스도 기원의 자립과 '고전적 3구분법'
  이것은 그의 '시간'이 자연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얼마든지 과거를 향하여  연장할 
수  있
는 시간을 의미하는 것을 뜻한다. 또 마찬가지로 창세 기원으로부터 단절된 그의 '그
리스도  
이전'이라는 연호도 확실한 사실이 해명됨에 따라서 키루스 이전으로  연장될 수 있는 
성격
을 획득하고 있는 것이다.
  그와 함께 고대라고 하는 시대도 키루스 이전으로 확대되어  전세계 또는 무명세계, 
심지
어는 시원세계까지도 구축해갈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졌다.
  그리스도 기원은 앞에서 소개한 볼테르를 계기로 슐레처에 의해 독립된 지위를  부
여받게 
되었다. 창세 기원으로 표시되는 그리스도교적인 시간과는  상관없이 확실한 사실의 
범위의 
확대와 함께 '그리스도 이전'으로 얼마든지 거슬러올라가, 연장되어가는 시간의 눈금
으로 향
하는 변모를 이룩한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 이전'으로 향하여 얼마든지 연장할 수 있는  시간과 결부하여  
켈러
리우스의 3구분법이 사용되는 것에도 주목하고자 한다.   켈러리우스의 3구분법은 가
테러도 
이미 채용하고 있었다.
  거기에서는 가테러가 4세계제국론을 표기한 일과의 관계로 켈러리우스의 3구분법의  
의의
를 지적해두었다 .그러나 3구분법의 의의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이와 같이 보편사적인 시간을 표기하는 것에 의해서도 그에 대신하는 새로운 시대 
구분법
이 요구되었고, 이러한 요구와 결부되어 3구분법이 채용된 것이다.
  고전적인 3구분법은 18세기를 통하여 일반화되었다는 것은 흔히 지적되는 일이다. 
거기에
는 켈러리우스 자신이 당시의 독일에서 널리 알려진 역사가였다는  것도 한 원인이다. 
그러
나 그 일반화에 커다란 구실을 한 사람들은 오히려 두 사람의 괴팅겐 대학의 역사가들
이라
고 생각하고 있다.
  새로운 가죽부대를 만들어낸 것이 켈러리우스였다면  새로운 술을 빚어낸 것은  가
테러와 
슐레쳐였다. 또한 새로운 술을 담을 그릇으로서 켈러리우스의 주장을 선택하고 이 가
죽부대
의 성능을 보여준 것도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창세기원의 무게
  가테러와 슐레처의 발걸음을 앞에서  언급한 '연대학 논쟁'과의  관계로 고찰해보
자. 이미 
이 논쟁을 통해서 혼미 상태가 점점 더 깊어갔다고 말했지만 혼미 상태라는 말만으로
는 상
황을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한 점이 있었던 것이다.
  표 13은 표 1에 나오는  같은 연호를 필자가 '그리스도 이전'으로  환산한 것이다. 
양자를 
비교해보면, 창세 기원에 의한 연대표에서는 숨어 있던 측면이 보인다.
  즉 시대가 새로워질수록 오늘날 생각하고 있는 연호와 거의 다름없는 연호가  나타
난다는 
것이다. 천지창조나 대홍수는 별도로 하더라도 아브라함의 소명과 출애굽 부근은 아직
도 세
자리 숫자의 차이가 있지는 하지만, 새로운 연호가 되면 한자리나 아니면 두 자리에서
도 고
작 10-20년 정도의 오차밖에 없다.
  이것은 어느 연대학자에 대해서도 할 수 있는 말이다. 즉, 현실의 역사적 사건의 자
리매김
에 관해서는 존재의 과정에서 실제로 어느 연대학자의 의견도 크게 다른 데가 없는 데
까지 
와 있었던 것이다.
  이 성과는 19세기로 승계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혼미의 참된 원인은 천지창조로부
터 연호
를 세웠던 데에서 기인하는 것이라 천지창조에서부터  연호를 세는 한 혼미는 깊어갈  
뿐이
다. 물론 이와 같은 일을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그리스도 이전'이  고안되었다는 
것과 그 
사용이 넓어져갔다는 사실이 이것을 입증하고 있다.
  그런데 왜 이런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천지창조에서 연호를 세우는 것을 고치려  
하지 
않았을까? 근본적 이유는 창세기원(세계 연대)이 천지창조로부터 종말에 이르는 기독
교적인 
시간, 즉 보편사를 지탱하는 시간의 눈금이었기 때문이다.
  '연대학 논쟁'은 '연대'를 둘러싼  논쟁이라기보다는 '기독교적 시간'을 지키려는  
논쟁이
었다. 그리고 논쟁이 이 테두리 안에서 행해지는 한, 혼미한 상태에서 벗어난다는 것
은 불가
능했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생각해보면, 가테러가 끝까지 창세 기원에 집착했던 이유를 알 수 있
다. 진지
한 종교인이기도 했던 그는 그리스도적 시간마저 역사에서 추방하는 데에는 끝내 결단
을 내
릴 수 없었던 것이다. 창세 기원을 포기한다는 것은 동시에 전통적인 기독교적 시간과 
역사
적 시간을 분리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이전'을 포함하는 그리스도 기원만을 시간의 눈금으로  한다는 것은, 예
수 기원
이 지니는 종교적인 의미를 폐기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결정적 
발걸
음을 내디딘 사람은 독일의 볼테르라고  일컬어졌던 슐레처였다. 그 결과  그리스도 
기원은 
아이러니하게도 종교적 의미를 포기하는 것으로 새로운 보편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비판적 성서 연구의 새로운 전개
  가테러가 차례로 보편사적인 요소를 폐기하고 슐레처가 창세기원을 폐기한 근본적인 
동기
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 두 사람에 의해서 보편사에서 세계사로의 전환이 이루어진 
이유
는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그 근본적인 이유는 성서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의 발전에  있다. 이에 대해서는 무
엇보다 
잔 아스트류크의 이름을 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모세 5경'을 연구했는데, 여기
에서 그
는 야훼나 엘로힘이라는 두 종류의 하나님의 이름이 사용되고 있는 데에 주목했다.
  그리하여 그는 5경을 서로 다른 호칭으로 하나님을 불렀던 서로 다른 그룹에 의한 
기록을 
통합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이 1753년의 일이었다.
  성서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는 이렇게 하여 성서가 복수의 인간 집단이 계속하여 기
록해온 
여러 가지 문서를 편집한 것이라는 결정적 증거를 발견한 것이다.
  이와 같은 흐름은 독일에서 '신교의파'라 불리는 새로운 신학의 조류를 낳게 되었
다. 카시
러가 '신교의파의 참된 교사들'(1970)이라고 불렀던 모하임, 미하엘리스, 에르네스티, 
제믈러 
등의 활동이 특히 1760년대에서 1770년대에 걸쳐 전개되었다.
  신교의파 사람들에게는 성서가 서로 다른 시대에 그때 그때의 특정한 상황에 부응하
여 기
록된 여러 문서들을 어떤 시기에 편집한 것이라는 생각이 이미 공통된 인식이었다. 이
제 성
서는 비판적으로 연구되어야만 하는 '문헌'이 된 것이다.
  더욱이 가테러의 활동 무대였던 괴팅겐 대학에서 이 신교의파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
하고 있었다. 괴팅겐 대학 자체가 종교적 논쟁을 금지하거나  신학부가 다른 학부를 
지배하
는 것을 금지하는 등의 조치를 강구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대학의 관용적인 조치
의 실
행은 '신교의파'인 모스하임의 조언에 따른 것이었다.
  모스하임은 1747년에 스스로 괴팅겐 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8년간 신학부장과 대학장
을 겸
직했다. 또한 철학부에서는 미하엘리스가 1745년 이후 그 활동을 개시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괴팅겐 대학은 대학의 원칙 결정 그 자체에 있어서는 물론, 실제의 활동면
에 있
어서도 신교의파에게 커다란 역할을 했던 것이다.
  
    미하엘리스
  그 가운데에서도 커다란 구실을 해낸 것은, 요한 다비드 미하엘리스(1717-1791)였
다. 영국 
유학을 마친 그는 스물여덟 살에 괴팅겐 대학으로 초빙되었다. 모스하임도  마찬가지
였지만, 
당시 독일 사상가의 대다수는 영국의 사상에 강한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영국에서는 일찍부터 로크를  출발점으로 하고 뉴턴의 물리학과도  결
합되어 
전개되고 있었던 이신론이 커다란 영향을 주어 많든 적든 간에 신교의파 사람들은 그 
영향
하에 있었던 것이다.
  특히 미하엘리스에게는 더욱 그러하였다. 그가 신학부에서 행한 교의학 강의는 이 
대학에
서조차도 너무 튀는 내용이었다. 때문에 처음 10년 가까이는 개강하자마자 소송이 제
기되어, 
정부에 의한 강의 금지 조치로 끝나는 일들이 되풀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탁월한 교육자이기도 하여, 각지로부터  많은 학생들을 괴팅겐으로 끌
어들였
을 뿐 아니라  슐레처나 '근대 제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종교학자  아이히호른을 
비롯한  

많은 제자들을 육성하여 이 대학의 지위를 높이는 데 많은 공을 세운 사람이기도 했
다.
  미하엘리스의 사상의 일단을 1770년에서 1775년에 걸쳐 발표한 그의 대표작인 '모세
의 율
법'에서 찾아보자. 우선 이 책의  첫머리에서 그는 모세의 율법 연구를  '몽테스키외
가 행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 행한다고 선언하였다. 모세의  율법을 무엇보다 이스라엘 백성들
이 처
했던 풍토나 역사적 조건 속에서 관찰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는 이것을 '민족의 유년 시대의 오래된  법'이라고 관찰했다. 게다가 
사막지
대라는 특수한 풍토  속에서 아브라함 이후  '유목민적인 유래'나 이집트에  있어서의 
국가  
생활을 경험한 뒤에 농사를 짓게  되었으며, 그 다음에 국가를 건설해간  역사 속에서 
모세
의 율법을 관찰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오는 중요한 결론은 "모세의 율법은 이스라엘 민족의 환경 속에서는 옳
다. 그
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것은 다른 환경에 있는 민족에게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었다.
  이제까지 가장 중요한 예언이며 전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보편적인 명령으로 전해내
려왔던 
모세의 율법이, 유목민의 단계에서 새롭게 태어나고 또 그  사회에만 적합한 법으로 
역사적
인 평가가 내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성서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는 독일에 혁명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가테러
는 미
하엘리스의 동료이자 친구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슐레처는 그의 제자였다. 앞에서 
 말한 
가테러의 성서에 대한 태도 변화나 슐레처의 보편사에 대한 태도는 미하엘리스의 이 
혁명적 
영향의 실제 사례였다고 할 수 있다.
  볼테르 같은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은 기독교 자체를 공격하는 가운데, 보편사를  비
판했다. 
외부에서 보편사의 파괴에 진력한 셈이다.
  이에 비해 가테러와 슐레처는 같은 계몽주의자이면서도 다 함께 프로테스탄트로 출
발했으
며, 처음에는 그것이 보편사의 입장에 서는 것과 결부되어 있기도 했다. 그러나 성서
의 비판
적인 연구가 진전되는 영향을 받아 두 사람은 결국 계몽주의적인 역사학의 입장으로 
옮아가
게 되었으며, 그와 함께 '세계사'의 서술을 실행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신앙까지 버렸던 것은 아니다. 그들이 '세계사'로 옮아간 것은 역
사 서술
과 신앙을 떼어놓음으로써 비로소 가능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오랫동안 신앙을 직접적인 기반으로 삼고 그에 종속되어 발달되어온 역사학이 이 
시점
에서 독립된 하나의 과학으로서 첫발을 내딛기 시작한 것이다.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보편사를 비판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 비판
이 얼
마나 날카로운 것이었든지 간에 그것만으로 1천 년 이상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보편사
가 붕
괴될 이유는 되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보아왔듯이 이미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 대항해 시대, 과학 혁명 등의 시
대를 거
쳐 그 과정은 진행되어왔다. 역사학의 분야에서는, 이미 '연대학  논쟁'으로  그것이 
나타나
고 있는 것을 보았다.
  가테러와 슐레처의 시대는 이 움직임의 마지막 단계였다. 슐레처에  의해 마침내 창
세 기
원 그 자체가 부정되었을 때, 보편사는  최후의 보루마저 잃고 만 결과가 되었다.  보
편사의 
자기 붕괴의 과정이 완료되었고, 슐레처는 보편사에 대한 '죽음의 천사'가 되었던 것
이다.
  
        제5장 보편사와 만국사
      일본의 '사략'과 '만국사략'
    메이지 유신 초기의 세계사 교육
  끝으로 보편사와 일본의 세계사 교육의 관련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메이지 정부의 문부성(교육부에 해당)이 편집, 간행한 최초의 역사 교과서는 '사략'
이라는 
소학교(초등학교) 교과서이다.
  일본 정부는 1871년에 문부성을 설치하고, 다음해 8월에  '학제'를 발령 포고하였으
며, 다
시 9월에는 소학 교칙을 제정하여 4,4제 소학교를 발족시킨다.
  이러한 움직임 가운데에서 문부성이 그 역사 교육의 방침과 내용을 밝히기 위해 187
2년에 
발행한 것이 이 책이다.
  이 책에는 일본의 역사와  세계사가 함께 실려 있었으나,  1874년에 '만국사략', 다
음해인 
1875년에는 '일본 약사'가 문부성에서 발행되어 세계사와 일본  역사가 분리되어 체제
가 정
비되었다.
  메이지 정부는 1880년이  되자 '교육령',  다음해에는 '개정  교육령'을 발표하여  
학제를 
3,3,2제의 소학교로 변경하였다. 당시의 역사 교육에 있어서의 최초의  획을 그은 해
가 1881
년이다. 이해에 이루어진 교칙 개정으로 세계사는 소학교 역사   교육에서 벗어나 중
학교로 
옮겨지게 되었고, 동시에 소학교에서는 수신 교육과 황국사관의 주입에   중점을 두는 
시대
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사략'과 '만국사략'(그리고 '일본 약사')은 역사 교육이 근본적인 변화를 이룩한 1
881년까
지 일본의 소학교에서 이루어진 역사 교육의 근본을 규정한 교과서였다. 또 이 두 교
과서는 
구성이나 내용 면에서 다른 점이 없었다. 다만 후자 쪽이  양이 많아 상세하게 서술되
어 있
었을 뿐이다.
  
    기원전 약 4천 년경에 있어서
  '만국사략'에서는 지역별로 보면 아시아 주, 유럽 주, 아메리카 주로 크게  구분되
었고, 각 
지역별로 역사 기술이 이루어져 있다. 아시아 주는  중국, 인도, 페르시아 및 아시아
터키(오
리엔트)로 나뉘어져 각 지역의 역사가 각 나라별 역사의 형태로 서술되어 있다.
  한편 구라파(유럽) 쪽은 로마제국 멸망을  한 획으로 하여, '구라파  주 상'과 '구
라파 주 
하'의 두 시기로 시대를 구분하였다(이하는 '일본 교과서 대계' 고단샤, 제20권).
  먼저 오리엔트에 관한 기술을 살펴보자. 첫머리에 세계의  개벽과 인간의 생성에 대
해  '
서양의 설'이라고 미리 말해놓은 뒤,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기원전 약 4천 년경에... 메소포타미아의 중앙, 유프라테스라는 커다란 강  근처에
서 남녀 
두 사람이 처음으로 태어났다. 남자를 아담이라 하고 여자를 이브라 했으며, 이들을  
인간의 
시조라 한다."
  이어서 "기원전 '2340년경'에 있었던 노아의 대홍수  사건과 또 대홍수까지를 '대략 
1650
년간의 세상을 전세계'라고 부른다"고 했다.  그리고 노아의  일족이 아시아,  유럽, 
아프리
카로 확대되어갔음이 기술되어 있다. 이들의 연호는 이미 독자에게 낯익을 것이다.
  그 이후에 대해서는 노아의 자손 아수르가 '비로소 그 나라의  왕이 되어' 아시리아
가 건
국되었고 마침내 님롯이 바빌론을 건설했다는 것, 그리고 사르다나팔루스 때에 이 아
시리아
가 멸망한다는 것, 바빌로니아의  국왕이었던 느부갓네살이 유대왕국을  멸망시킨 사
실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페니키아, 유대인의 역사를 대략적으로 살피고, 또 소아시아에 대해서는  마
호메트
의 등장에서부터 몽골인의 활동까지를 기술하는 것으로 이 항목은 끝을 맺는다.
  '구라파 주 상'에서는 먼저 고대 그리스에 관해 기술했다. 그리스인은  '기원전  18
40년에
서 1890년경, 백성들이 차차 나라를  이루기'  시작하여 '아테네, 테베'  등이 성립되
었다고  
한다. 그리고 '기원전 1200여 년' 테베를 칠방이  포위하는 전쟁이 일어났으며,  '이
어서 트
로이전쟁이 일어났다'고 하고, 그 원인과 전쟁이 10년간에 걸쳤다는 것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로부터 수백 년 뒤 아테네, 스파르타가 일어났으며, 그들은 페르시아 전쟁을 극복
했지만 
서로 전쟁을 시작하고 나서부터 쇠퇴하기 시작하여, 마케도니아에게, 이어서 로마에게 
 복속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과 그 경과가 기술되어 있다.
  로마에 대해서는, 기원전 1180년경 '명장 이니어스'가 함락된 트로이를 빠져나와서 
이탈리
아로 왔는데 그 자손인 로물루스가 기원전 753년에 로마를 건국했다고 기록했다.
  이 다음은 7대에 걸친 244년간의 왕정 이후에 공화정으로 이행하였으며, 그때 정복
사업이 
진행되어 기원전 207년에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통일한 일, 3차에 걸친 '카르타고'와
의 전
쟁, '폼페이 세자르 크라수스'와의  싸움, 그리고 세자르의  조카인 '옥타비우스토 안
토니와 
빌레피듀스'의 싸움, 끝으로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한 제정의 개시 이
후 476
년  서로마제국의 멸망까지를 간단히 더듬고 있다.
  이름이 등장하고 있는 황제는 티베리우스, 네로, 타이투스, 안토니우스, 디오클레시
아누스, 
콘스탄티누스, 테오도시우스, 그리고 마지막 황제인 아우구스튜루스이다.
 '만국사략'의 제2권은 최초의 '인민의 이전'에서  민족 이동을 다룬 것을  빼면, 모
두 유럽 
여러 나라의 역사에 대한 개별적인 서술에 충당되어 있다.
  다루어지고 있는 나라들은 프랑스, 영국,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한 독
일, 에
스파냐, 포르투갈, 네덜란드, 벨기에, 스위스,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러시아, 이
탈리아, 터
키, 그리고 미합중국 등이다. 미합중국 이외에는 모두 다 간단한 왕조사를 다루고 있
다.
  
    '만국사략'의 대본
  만국사를 가르쳤던 메이지 초기는 '번역 교과서 시대'라고도 불린다. 일본어 교육을 
할 때
조차 교재의 '괘도'를 미국에서 들여올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서양 역사의 기술
에서는 
그 내용이  거의 다 직수입의 형식을 취한 것도 부득이한 일이었다 하겠다.
  '만국사략'의 편찬을 맡았던 오쓰키 후미히코 씨는 '예언'에서  "한토(중국)의  역
사는 원
문을 가지고 바로 사용할 수 있지만, 서사(서양의 역사)는 번역을 거쳐서  문장을 만
든다"고 
말하고 있다.
  이 글은 직접적으로는 동양사와 서양사에 따라  문체가 다르게 되어 있는 이유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문체의 차이만이 아니라 양자의 내용상의 차이점을 지적한 것
이기도 
하다.
  그러면 '만국사략'(그리고 '사략')은 어떤 서적에 의거하여 편집한  것일까? 두 권
의 교과
서는 모두 다 미국의 굿리치(Samuel  Griswold Goodrich, 가명 Peter Parley,  1793-1
860)의 
'팔리의 만국사'를 대본으로 삼고 있다고 한다.
  '팔리의 만국사'는 메이지 초기에 있어서는 매우 인기가 높은 책이었다. 사실 이 책
은 '사
략'과 '만국사략'의 '대본'이 되었을 뿐 아니라 또 다른 역사학자들의 저서들보다 상
세한 만
국사용 교과서의 대본으로도 이용되었다. 또한 그 책도 일어로  번역이 되어 문부성에 
의해 
간행되고 있는 형편이었다.
  서문에 의하면, 원래 굿리치의 '팔리의 만국사'는 그 목적이 '어린이들에게 보편사
의 윤곽
을 제공하기 위해 씌어진 교과서'였다. 그러므로 이 책은 쉬운 영어로 씌어져 있다.
  그렇지만 이 책의 진짜 필자는 문학가인 나다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e, 1804-
1864)
이라는 설이 나올 정도의 명문으로 되어 있었다 .새뮤얼 굿리치는 미국의 저술가로서, 
 보스
턴에서 <토큰 The Token>이라는 잡지(1826-1842)를  출판하면서 새로운 작가들을 원조

었다. 그 가운데에 호손도 있었기 때문에 그도 이 책의  집필을 어느 정도는 거들었던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사정으로 굿리치의 저작은 다른 영국사나 미국사의  저작을 포함하여, 메이
지 초
기에 가장 많이 채용된 영어 '텍스트'가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광범위한 독자를 확보함으로써, '팔리의 만국사'는 특히 메이지  초기에
는 당시 
사람들의 세계 인식에 매우 커다란 역할을 한 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팔리의 만국사'의 위치
  '팔리의 만국사'의 내용에 대해 소개할 필요는 없다. '만국사략'과 내용이 거의 같
기 때문
이다.
  다만, 그 책의 성격을 살펴보는 데 필요한 연대적인 테두리만을 살펴보자. 이 책에
서는 천
지창조가 그리스도 기원전 4004년으로 되어 있고, 창조 이후  1656년에 일어난 노아의 
대홍
수를 거쳐서 19세기에 이르기까지의 역사가 서술되어 있다. 이  시간적 테두리는 앞에
서 언
급한 바 있는 성서 연대학자들 가운데 애셔의 연대학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할 수 있
다.
  애셔의 연대학이 미국으로 건너간 사정에 대해서는 '팔리의  만국사'를 쓴 굿리치가 
보스
턴에서 활동한 사람이었다는 데 커다란 힌트가 있다. 보스턴을 비롯한 뉴잉글랜드 지
방에는 
원래 많은 프로테스탄트들이 정착해 있었는데,  이들은 본국(영국)의 퓰리턴 혁명과도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그들이  식민지에 정착할 당시, 영국에서는 애셔의  연
대학이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미루어보면, 신대륙에  영국의 식민지를 건설한  프로테스탄트들을 
통해 
애셔의 연대학이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 이식된 것으로 추측할 수가 있다.
  '팔리의 만국사'가 성서에 바탕을 둔 세계사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책은  
앞에서 
다루어온 보편사와는 많은 점에서 차이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 책은 창세 
기원
에 집착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애셔의 연대학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점으로 볼 때에 창세 기원이 부정되고 있는 것
은 아
니더라도, 구체적인 기술에서는 모두 '그리스도 이전'을 포함한 그리스도 기원만으로 
표시되
어 있다. 또한 4세계제국론도 다루어져 있지 않다.
  그리고 고대 로마 이후의 시대에 관해서는 각국의 역사라는 형식을 채용하고 있다. 
그 각
국의 역사들도 유럽의 여러 나라들뿐만 아니라 아시아와 아프리카, 미국, 그리고 오세
아니아
의 여러 나라들까지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 결과 19세기의 세계를 구성하는 여러 나라들의 역사 기술을 가능하게 하는 문자 
그대
로의 '만국사'가 되어 있다. 그렇지만 아담과 이브에서 시작하여 아시리아, 페르시아, 
그리스
를 거쳐 로마에 이르는 고대사 부분은 보편사 구조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결국 '팔리의 만국사'는 크게는 보편사적인  토대와 그 위에 세워진  각국의 역사라
는 두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앞에서  전통적인 보편사는 18세기에 붕
괴되었
다고 말했으나, 미국에서는 아직도 보편사가 마지막 숨을 지탱하고 있었던 셈이 된다.
  그렇지만 전통적인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구조 전환을 한 
다음
에 살아남았던 것이다. '팔리의 만국사'의 구조는 나름대로 19세기라는 세계를 전제로 
하고, 
이에 부응하는 보편사로 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19세기 초 유럽에서는 신성로마제국이 멸망하고 전통적인 보편사  가운데의 '로마'
의  존
속이라고 하는 전제 자체가 무너져버렸다.
  한편 19세기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국민 국가로서의 독자적인  발전을 추구하면서, 
이와 
동시에 세계 시장으로서 세계의 일체화를 추진해가고 있었다. 또한  이와 같은 유럽 
나라들
의 진출에 대해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의 저항도 높아져가고 있었다.
  '팔리의 만국사'는 세계사의 구조에 이와 같은 상황을  반영하기 위해 전통적인 보
편사에 
각국사를 접목했던 것이다. 아시아 역사의 특징을 정체로 보고  유럽 역사의 특징을 
진보로 
보는 사고방식도 19세기 유럽의 일반적인 관점이다.
  다시 말해 구조 전환이라는 19세기의 세계 현실과 유럽적 의식에 적합하게 만든 국
민 국
가 집합체로서의 세계 역사, 즉 만국사로서의 전환이 분명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팔리의 만국사'는 '19세기적 보편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
다.
  
      일본의 메이지 정부와 만국사
    양학의 상황
  메이지 정부는 왜 이와 같은  성격을 가진 '팔리의 만국사'를  교과서의 대본으로 
삼았을
까? 당시의 일본 정부가 세계사 교과서의 모범으로 삼은 이유는 무엇보다 일반적인 시
대 배
경으로서 당시 일본에서의 양학(서양의 학문)의 상황에 있었던 것이다.
  당시 일본에서는 이미 난학(네덜란드의  학문)의 시대가 끝나고 영어권  국가의 학
문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자국어의 교육 방법까지  미국에서 직수입하는 방법이 채택되는 등, 
 역사 
이외에도 여러 가지 측면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았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더욱이 그 미국에서 장기간에 걸쳐 폭넓은  지지를 받았던 것이 '팔리의 만국사'였
다.  이 
책이 '만국사략'(사략)의 대본으로서 채용된 하나의 이유였다고 생각된다.
  일본에 '팔리의 만국사'를 가져온 사람은  후쿠자와 유키치였다. 양학의 지도자로  
활동을 
시작하고 있었던 그가 막부 말기인 1867년, 세 번째 양행(서양 여행) 때에 보스턴에서 
많은 
서적들과 함께 이 책을 구입해왔던 것이다. 이때를  회상하여 그는 이것을 '고금을 통
해 여
지껏 보지 못했던 진기한 책'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유는 이러한 일반적인 상황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내용 자체에
도 있
었을 것이다. 필자는 두 번째 이유로 앞에서 말한 '만국사'로서의 이 책의 성격과 형
식 자체
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나토베 이나조의 '귀안의 갈대'에는 "'팔리의 만국사'를 읽은 사람은  세계의 사정
에 정통
한 사람으로 간주된다"고 했다.
  오랜 쇄국정책을 철회하고 개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대에  '만국'들이 만들어낸  
세계
를 눈앞에 두고 강대국의 지위를 구축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정부  당국자뿐만 아니라 
민간
인들도 세계 각국에 대한 개별적인 인식을 포함하여 세계사를 인식해야 할 필요성이 
절실한 
형편이었다.
  '팔리의 만국사'는 논리정연한 각국사의 서술로 인해 그  나름대로 충분히 이러한 
요구에 
부합되는 내용을 갖춘 책이었음이 분명하다.
  19세기적인 보편사는 오직 한 군데 미국에서만 살아남아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도 
덧붙
여야겠다. 네덜란드나 아일랜드에서도 가정용이나 초등교육용  서적으로서 19세기적 
보편사
가 살아남아 있었다. 그리고 메이지  정부 초기에는 이들 서적  또한 '만국사'라는 이
름으로 
번역되어 그 시대 사람들에게 널리 소개되어 읽히고 있었다.
  이와 같은 '만국사'의 유행은 메이지 초기 일본인들의 세계사 인식에  대한 욕구의  
표현
이었다. 19세기적 보편사의 내용은 어느 것이나 그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내용을 갖추
고 있
었던 것이다. '팔리의 만국사'는 이처럼 서양의 19세기적 보편사를 대표하는  것으로
서 받아
들여졌다.
  
    정신 구조의 일치
  '팔리의 만국사'는 보편사라는 뒷받침을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그것은 기독교적 세
계관에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프로테스탄트적 세계관에- 기초하는 역사 서술임이 분명했
다.
  무엇보다도 성서에 바탕을 둔 역사 서술이라는 점에서부터, 필연적으로 신화가 사실
로 이
야기되고 있을 뿐 아니라 더욱이 커다란 의미가 부여되어 있었다.
  실제로 '팔리의 만국사'에서도 아담과 이브와 같은 성서의 신화는 물론,  그리스사
나 로마
사의 초기에 있어서도 신화가 모두 아무런 비판 없이 역사적인 사실로 서술되어 있다.
  이와 같이 이 책이 지니고 있는 보편사적인 요소는 당시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었
을까? 
이 점에 대해 말한다면 '사략'이나 '만국사략'도 이것을 수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두 그대로 계승했던 것은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만국사략'의 저자
가 아담
과 이브에 대하여 '남녀 두 사람이 비로소 태어나'라고 했다는 점이다. 기독교인들에
게 가장 
긴요한 하나님에 의한 인간의 창조라고 하는 기록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있는 것이
다. 기
독교적 세계관을 배제하면서 신화는 삽입한 것이다.
  '만국사략'에서는 서양사에 관해 "번역을  거쳐 문장을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결코 단순한 번역은 아니었다.
  다만 이처럼 기독교적인 부분을 골라내어 고치기만 하면 '팔리의 만국사'는 오히려 
'일본
사략'과 공통된 구성을 가지는 것이 된다는 쪽이 여기에서는 중요할 것이다.
  신들이 시대로부터 기술하기 시작하는 일본사의 기술과 '팔리의 만국사'는 신화를 
역사에 
섞어넣었다는 점에서는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양자는 공통의  정신 구조에 기
초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양자의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공통적인 정신 
구조 
또한 '19세기적 보편사'가 일본에 받아들여진 세 번째 요인이 된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은 이와 같은 여러 사정으로 인하여 '과학의 세기'이며 '역사학의  세기'였던 1
9세기
말에 오히려 교과서에서 보편사를 가르치게 되었던,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실례가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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