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순간의 아이디어에서 탄생한 세계적 특허발명 이야기
왕연중
제1부 누구나 발명가가 될 수 있다.
지퍼
지퍼는 지트슨이라는 사람이 처음 만든 것이다. 그는 외출할 때마다 몸을 숙여 일일이 구두끈을 매야 했던 번거러움이 너무 싫어서 지퍼를 고안하게 됐다. 지트슨의 지퍼는 1893년 시카고 발람회에 출품되어 주목을 받았다.
지트슨이 구두끈을 매기 귀찮아서 구두끈 대용으로 쓰기 위해 발명한 지퍼가 시카고 박람회에 출품됐을 때 구경꾼 가운데는 워커라는 육군 중령이 있었다. 그는 그것을 보자 곧바로 지트슨에게 달려들어 그것을 사겠다고 했다. 지퍼를 대중적으로 실용화하면 큰 돈을 벌 수 있겠다고 했다. 지퍼를 대중적으로 실용화하면 큰 돈을 벌 수 있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퍼의 편리함을 대중화하기 위해서는 지퍼의 값을 싸게해야 했고 그러자면 지퍼를 자동으로 만들 수 있는 기계를 또 발명해야만 했다. 그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지퍼는 발명되었으나 지퍼를 만들 기계가 발명되지 않아 지퍼는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였다. 워커는 지퍼 자동제조기계를 발명하기까지 19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을 소비해야만 했다.
고통의 시간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누구도 그의 기계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결국 그는 지칠대로 지쳐 버렸다.
"손해를 봐도 어쩔 수 없다. 이 기계를 이젠 더 이상 보고 싶지도 않으니까 빨리 팔아 치워야 겠어. 얼마나 정성을 쏟았고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투자된 것인데 아무도 알아 주지 않다니......"
그러나 기계를 사겠다고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브루클린에 사는 어느 양복점 주인이 이 기계를 보게 되었다.
"이거 괜찮은데? 구두끈으로만 쓰기에는 정말 아까워. 어디 달리 쓸모가 없을까? 그렇지! 복대의 지갑주머니 어귀에 붙이면 아주 제격이겠는데?"
양복점 주인은 워커를 찾아가 아주 싼 가격에 그것을 사들였다. 양복점 주인의 생각은 적중했다. 결국 발명자가 손해를 보면서 팔아 치운 것을, 그 양복점 주인은 간단한 아이디어 하나를 더해 성공을 거두게 된 것이다.
양복점 주인은 계속 아이디어를 냈고 그는 그것을 해군복에도 붙여 군대에 팔기도 했다. 그것 또한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발명가가 19년간 피나는 노력을 했어도 이루지 못한 것을 양복점 주인은 아이디어를 내어 실천하는 데 단 2시간밖에 걸리지 않은 것이다.
그 후 1921년 굿리치 회사는 이 지퍼를 점퍼에 붙여 상품화활 것을 생각해 냈다. 지퍼 달린 점퍼가 판매되기 시작하자 온 미국으로 '지퍼'가 불붙은 듯 퍼져 유행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굿리치 회사는 눈깜짝할 사이에 유명회사가 되었다.
라면
인스턴트 식품 중에서 단연 으뜸으로 손꼽히는 라면. 식품업계의 혁명으로까지 극찬받았던 라면은 1958년 일본에서 발명되어 시판되기 시작하였다.
라면의 발명가는 일본의 사업가였던 안도 시로후쿠이고, 첫 생산업체는 묘조식품이다. 1950년대는 일본에 있어서 건국 이후 최대의 고난기였다.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패배의 휴유증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식량이 부족하다 보니 당시 지구촌 대부분의 가난한 나라들이 그랬듯이 일본도 미국의 잉여농산물인 밀가루를 지원받아 빵을 만들어 먹으며 연명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쌀밥을 주식으로 하던 전통적인 식습관 때문에 빵만으로는 공복감을 만족시킬 수가 없었다. 바로 이 때 밀가루를 이용한 새로운 식품개발을 생각한 사람이 안도였다.
"밀가루를 이용하여 쌀밥 못지않은 주식을 개발할 수는 없을까?"
그러나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 달, 두 달 세월은 흘러갔고, 끈질긴 연구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언제나 실패 뿐이었다. 어느 덧 몇 년이 지났다. 그 동안 쏟아 부은 연구비 때문에 가산은 탕진되고, 거듭되는 실패에 의기소침해져서 자살직전에까지 몰려 있었다.
매사에 의욕을 잃은 안도가 찾아가는 곳은 오로지 술집.
매일같이 술에 취해 살다보니 어느 새 폐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날도 어김없이 술집을 찾았다. 술집주인은 안도가 귀찮다는 듯 등을 돌리고 서서 덴푸라를 기름에 튀기고 있었다.
순간, 안도의 눈은 오랜만에 빛나며 입에서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바로 저것이다!"
안도의 탄성에 술집주인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결국은 미쳐버렸군. 안됐어. 저만큼 쓸만한 사람도 흔치 않았는데......"
안도는 아랑곳하지 않고 술집주인의 조리 모습을 지켜보았다. 끓는 기름에 밀가루 반죽을 묻힌 생선을 넣는 순간 밀가루 속에 수분이 순간적으로 빠져나오고, 튀김이 끝난 음식에는 작은 구멍이 무수하게 생기는 것을 관찰한 것이었다.
"됐어! 덴푸라 튀기는 원리를 응용하는 거야!"
안도는 서둘러 연구실로 향했다. 어지럽게 흩어진 기구들을 대충 정리하고 서둘러 실험준비를 마쳤다.
우선 밀가루를 국수로 만들어서 기름에 튀겨 보았다. 성공이었다. 국수 속의 수분이 증발되고 국수가 익으면서 속에 작은 구멍이 무수히 생기는 것이었다. 또 이것을 건조시켰다가 뜨거운 물을 부었더니 이번에는 작은 구멍에 물이 들어가면서 먹음직스러운 국수가 되는 것이었다. 며칠을 보관해도 변함이 없었다.
안도는 드디어 라면 개발에 성공을 한 것이다. 이로써 사업가로서 명성을 되찾으며, 라면 발명가라는 명예도 거머쥐게 되었다.
물에 뜨는 비누
물에 뜨는 비누, 이것은 일본에서 비누공장을 경영하는 후지무라라는 여자가 발명한 비누이다. 그녀는 한 공원의 실수로 못쓰게 되어 버린 원료를 끈질기게 다시 연구해서 물에 뜨는 비누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어느 날 점심 시간 무렵, 대부분의 공원들이 점심을 먹기위해 자리를 비운 공장의 한쪽 구석에서 기무라라는 공원만이 큰 가마솥 앞에 혼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잠시 후 점심 시간이 끝나자 공원들이 하나 둘씩 작업장안으로 들어왔다. 갑작스런 소란에 잠이 깬 기무라는 기지개를 켜다 말고 자기 눈앞의 광경을 보고는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얌전하게 끓고 있어야 할 비누 원료가 그만 너무 끓어 솥에서 넘쳐나와 바닥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새 솥 둘레로 모여든 공원들이 저마다 안타깝게 한마디씩 해 댔고, 마침 밖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온 후지무라 사장도 그 광경을 보았다.
끓어 넘친 원료를 한참이나 지켜보고 있던 후지무라 사장은 문득 지나치게 많은 거품이 일기는 했으나 원료가 완전히 타버리지는 않았음을 깨달았다.
"어쩌면 이 원료를 다시 쓸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고 몰라. 이대로 그냥 버리면 너무 아깝지 않은가."
줄곧 한 가지 생각에 골몰해 있던 후지무라 사장은 지친 머리를 의자에 기댄 채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이 떠오른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거품 같은 비누? 그럼 가벼운 비누가 되겠지?"
후지무라는 '물 위에 뜨는 비누'라고 중얼거리다가 문득 일년 전 방콕을 여행하면서 본 모습을 떠올렸다.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강으로 쏟아져 나와 목욕을 하고 있던 모습이었다.
"강에서 목욕하다 비누를 빠뜨리면 얼마나 찾기 힘들까? 물에 뜨는 비누를 만들어 방콕으로 수출한다면 많은 외화를 벌어들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막연하게나마 기대를 갖게 된 후지무라 사장은 그 날 밤 공장에 혼자 남아 실험에 들어갔다.
후지무라는 되풀이된 실험 끝에 자신이 생각했던 비누를 겨우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늦은 오후, 후지무라 사장은 공장으로 돌아왔다. 공원들을 한 자리에 모이게 한 후지무라 사장은 비누를 물통에 던져 넣었다.
"여러분, 저 비누를 좀 보세요. 어제 기무라 군이 못쓰게 만든 그 원료로 만들어 낸 새로운 비누입니다. 저 비누는 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물에 뜨는 비누죠. 나는 저 비누의 이름을 '물에 뜨는 아이보리'라고 정했습니다."
후지무라 사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어리둥절해서 서 있던 공원들은 모두 박수를 쳤다.
컴퓨터
컴퓨터는 사람이 입력해 놓은 프로그램에 따라 자동으로 주어진 자료를 읽고 기억하며 계산, 분류, 집계하고 그 결과를 인쇄하는 전자장치이다.
컴퓨터는 '계산기'를 뜻하는 말인데, 엄밀히 말하면 '전자계산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냥 계산기로는 주판이 있는데 이것은 사람의 머릿속에서 계산되는 수를 주판알로 표시하며 기억하기 쉽도록 하는 하나의 계산 과정을 나타낼 뿐이다. 그러나 전자계산기는 계산결과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직접 계산을 하기도 한다.
조그만 탁상용 전자계산기에서부터 온갖 정보를 물리량으로 나타내는 전자계산기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도 다양하다.
미국의 매사추세츠 공과대학 교수였던 로버트 위너는 수학자였다.
위너는 어느 날 모든 교수들의 연구실을 찾아가 말했다.
"우리 모두 이제부터 문을 열고 나와 한 곳에 모입시다. 그래서 모두의 지혜를 한데 모아 봅시다."
그래서 매사추세츠 공과대학의 교수들은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그들은 인간의 뇌의 작용에 대한 토론을 벌일 것을 합의하고 나름대로 편한 자세로 앉았다. 전기공학자도, 생리학자도, 물리학자도 얼굴을 맞대고 앉아 서두를 꺼냈다.
이 일은 제2차 대전 중의 일이었다.
그 무렵 미국은 일본 비행기의 폭격에 대처하기 위하여 속을 썩이고 있었다. 비행기가 나는 고도까지 고사포의 탄환이 올라가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비행기는 지그재그 비행을 하므로 명중률이 매우 낮다. 이것을 격추하기 위해서는 복잡한 진로를 미리 예측하여 거기에 포탄을 쏘아 올려야 한다. 인간의 뇌와 같은 고도의 작용을 하는 고사포 조준장치가 필요하다고 미군 당국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군당국은 위너의 그룹에 이 연구를 요청했다.
이 그룹은 '사이버네틱스'라는 새로운 학문을 개척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 말은 '키잡이'를 뜻하는 새로운 용어이다. 키잡이는 상황에 따른 조치이어야 하며, 이것을 기계로 처리하는 것이 이른바 '자동제어'이다.
사이버네틱스는 자동제어를 중심으로 하는 학문이다. 또 상황은 정보처리를 축으로 하는 학문인 것이다.
미군 당국이 고사포 조준장치의 개발을 위해 위너의 사이버네틱스에 주목한 것은 현명한 일이었다.
사이버네틱스를 이용한 고사포는 대단히 우수해서 일본의 폭격기를 대부분 명중시켰다. 일본 비행사는 고사포의 명중률이 높아지자 아연실색하였다. 어쨌든 컴퓨터의 역사는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컴퓨터는 체스(서양장기)의 명수와 대국하여 이겼다. 또 대통령 선거 결과를 개표 중에 예측하여 맞히기도 하였다.
이 같은 경이적인 업적을 쌓아올린 컴퓨터는 그 후 차츰 그 가치를 인정되기 시작했다.
스트렙토마이신
결핵, 이질, 설사 등의 치료약으로 널리 사용되는 스트렙토마이신은 왁스만이 흙 속의 미생물에서 찾아냈다.
왁스만의 연구실은 미국 뉴저지 주의 농사시험장.
그의 연구는 배양관에서 자라는 티푸스균 등 각종 세균에다 흙용액을 섞어 관찰하는 일이었다. 남달리 연구열이 뜨거운 그의 연구실은 불이 꺼지는 밤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니, 이게 어찌된 일이지? 세균이 모두 죽어버렸잖아."
왁스만은 세균이 모두 죽어버린 배양관을 발견하고는 자신도 모르게 희망에 부풀었다.
"그래. 흙 속의 어떤 미생물이 세균을 죽인거야. 그걸 찾아내야겠다."
왁스만의 미생물 연구에 물이 붙는 순간이었다. 어떠한 작용으로 흙 속의 미생물이 세균을 죽이는가 하는 것은 그 때까지 아무도 모르고 있었기 떄문이다. 왁스만은 바로 여기에 도전, 흙 속의 미생물과 세균에 관한 연구에 깊이 빠져들었다.
마침내 포도상구균과 장티푸스균 등을 죽이는 놀라운 물질을 발견하였다. 왁스만의 기쁨은 말로 다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동물실험의 결과는 실패였다. 매우 심한 부작용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왁스만은 이에 실망하지 않고 계속해서 흙 속의 미생물을 추적했다. 이 연구에는 무려 4년이 소요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왁스만은 자신의 연구를 돕던 셔츠라는 사람이 관리하고 있는 배양관을 보고 깜짝 놀랐다. 긴장된 표정으로 셔츠에게 물었다.
"이게 어찌된 일이오? 어떤 미생물을 넣었기에 세균이 죽어 있는 거요?"
그 배양관에는 장에 병을 일으키는 세균이 모조리 죽어 있었다.
"연구실 뒤뜰 땅 속에서 채취한 미생물을 넣었습니다."
왁스만은 곧 이 미생물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 미생물이 '스트렙토마이세스 글리세우스'라는 것으로, 이 미생물을 자라게 한 액이 페니실린으로도 어쩌지 못하던 세균을 죽였던 것이다.
이 놀라운 약효에 왁스만과 연구실의 모든 연구원들은 그저 놀랄 뿐이었다. 1944년 왁스만은 이 놀라운 위력을 가진 새로운 약을 '스트렙토마이신'이라고 명명했다.
최초의 마취법
마취의 도움이 없다면 그렇지 않아도 힘겨운 수술은 엄청나게 고통스럽고 어려운 작업이 된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 수술을 받는 환자나 수술을 하는 의사가 겪는 고통 또한 마찬가지이리라.
마취제를 발견, 그것은 환자에게 사용하여 수술의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사람은 영국의 산부인과 의사였던 제임스 심프슨(1811년부터 1870년까지).
스물 아홉의 젊은 나이에 에딘버러 대학의 산부인과 교수가 된 심프슨은 당시 마취없이 수술을 받는 환자들을 보면서 매우 가슴 아파했다. 그러나 그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선배 의사들에 의해 마취제로 사용된 바 있는 이산화질소와 에테르라는 물질이 있기는 했지만, 이들 물질 역시 이를 뺄 때 통증을 줄이는 경우에 한해 사용되었고, 그나마 부작용이 심해 인체수술에 사용한다는 것은 엄청난 모험이었다. 이때부터 심프슨은 틈만 나면 새로운 마취제 발견에 매달렸다.
1874년 어느 날, 심프슨은 동료의사들을 불러 모았다. 그들 앞에는 '클로로포름'이라는 물질이 놓여 있었다.
"이 액체 클로로포름은 이미 1831년에 발견된 것일세. 그동안 아무도 이 물질의 용도를 찾지 못했지. 그런데 이것만이 부작용을 줄일 수 있는 마취제라고 확신하네. 우리가 1차 실험 대상이 되어야겠네."
순간 분위기는 숙연해졌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그러나 잠시 후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손을 마주 잡았다.
그들은 클로로포름을 동시에 코에 갖다 대고 긴 숨을 들이 마셨다. 잠시 후 그들의 눈은 빛나기 시작했다. 이어서 마치 기분 좋게 술에 취한 사람처럼 유쾌하게 웃으며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수다의 공통 내용은 "이 기막힌 향기! 세상이 온통 천국이야!"로 그들은 이미 클로로포름의 기체에 취해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 그들은 동시에 깊은 잠에 빠져 들었고, 몇 시간 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모여 앉았다.
"됐어! 바로 이것이야!"
클로로포름이야말로 가장 안정된 마취제라는 확신을 가진 심프슨은 에딘버러 왕립병원의 승인을 받아 역사적인 마취 후 수술을 할 수 있었다. 성공이었다.
환자는 잠자듯 반드시 누운 채로 고통을 느끼지 못했고, 의사는 여유 있게 수술을 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현대의 마취법
마취 및 마취제의 역사는 1847년 영국의 산부인과 의사였던 제임스 심프슨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은 의학계의 혁명이었다.
그러나 심프슨도 마취에서 깨어난 다음에 오는 환자의 통증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고, 그 이후 많은 발전을 하는 동안 마취는 기체 흡입식에서 액체 주사식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렀다.
발전에 발전을 거듭, 이제 거의 완벽하다고까지 말하지만 아직도 마취가 깨어난 다음 환자가 겪는 통증과 후유증은 겪어 본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을 정도로 심하다.
그런데 통증은 어쩔 수 없어도 후유증은 거의 없는 마취제가 발견되고, 마취방법 또한 주사식에서 옛날의 흡입식으로 바뀌어 화제가 되고 있다. 마취의 공포로부터 인류를 해방시켰다는 극찬을 받고 있는 사람은 영국의 세인트 매리 병원 론 존슨 교수.
"심프슨의 지혜는 대단했습니다."
주사식보다는 흡입식이 후유증 제거에 효과적이었다는 론 교수의 감탄.
론 교수도 심프슨처럼 수술을 받은 환자들이 마취가 깨어난 뒤 후유증과 통증에 시달리는 것이 가장 마음이 아팠다. 론 교수의 연구는 마취의 기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심프슨 이전인 18세기말경 여러 가지 물질들이 기체화되어 이를 뺄 때 사용되었다든가, 1845년 미국의 윌리암 모든(1819-1868)이 이테르라는 물질을 마취제로 사용하여 역시 통증 없이 이를 뺏다는 기록은 론 교수의 연구열을 한껏 높여 놓았다. 그리고 그는 여기에서 선인들의 놀라운 지혜에 감탄했고, 자신이 발견하는 마취제는 반드시 주사식이 아닌 선인들이 사용한 흡입식으로 결심해 버린 것이다.
론 교수는 의사이기 보다는 교수로서 대부분의 시간을 실험과 강의로 보내고 있었다. 이 덕분에 그는 수많은 물질(시약)을 마취와 관련지어 연구할 시간도 충분했다.
수많은 실험을 통하여 21세기 마취제로 결정을 내린 물질은 '데스플루란'.
"데스플루란이야말로 심프슨의 클로로포름 이후 가장 획기적인 마취제라고 확신합니다."
이미 2백 명이 넘는 환자의 실험에서 뛰어난 효과가 입증되었다는 론 교수의 설명.
데스플루란은 흡입식이므로 빠른 마취효과 못지않게 인체내 잔류시간 또한 짧아 후유증이 없다는 결론이다.
오토바이
사람이 갈 수 있는 길이면 어느 곳이든 신속하게 달려갈 수 있는 오토바이. 막힘없이 달릴 수 있어 순찰, 배달, 출퇴근 등에 적격인 오토바이의 최초 발명가는 고트리트 다이믈러이다. 가난한 빵집 아들로 태어난 다이믈러는 제빵기술을 배워 대를 이을 것을 강요하는 아버지의 성화에도 불구하고 각종 기계에만 정신이 쏠려 있었다.
다이믈러의 고집 앞에서는 그의 아버지도 손을 들고 말았다.
후일 자동차의 대부가 된 칼 벤츠가 어떻게 해서든지 자전거에 내연기관을 장치하려고 심혈을 기울이고 있을 무렵 다이믈러도 자동 2륜차(오토바이)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1885년의 봄, 벤츠는 자기집 마당에서 4사이클 석유엔진을 단 자동 2륜의 시운전에 성공했다. 뒤질세라 그 해 가을 다이믈러는 벤츠를 능가하는 성과를 올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약 10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살았던 두 사람은 전혀 모르는 사이였고, 또 한평생 얼굴을 마주칠 기회조차 없었다.
다이믈러가 오토바이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872년. 다이믈러는 니클라우스 오토라는 기계기술자를 만나 함께 일하고 있었는데 그 무렵 오토가 4사이클 고정 내연 가스엔진을 개발하고 있었다.
이에 자극을 받은 다이믈러는 자신도 자동 2륜차 연구에 전념하기로 했다. 그는 오토의 엔진을 분석하여 이것보다 뛰어난 내연기관을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몇 달의 세월이 흘렀으나 달리 뾰족한 방안이 없었다. 끙끙 앓으며 또 다시 몇 달의 세월이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그 동안의 연구결과를 정리하며 희망에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렇다. 연료는 석탄가스 대신 석유의 증기를 쓰고, 점화는 영구불꽃 대신 공기식 점화장치를 쓰는 거야."
다이믈러의 생각은 적중했다. 오토의 특허를 교묘히 피하면서 성능은 오히려 앞선 내연기관 개발에 성공한 것이다.
내연기관 발명에 이어 2륜차 제작에 들어갔다. 그의 2륜차는 튼튼한 구조로서 바퀴는 나무로 만들었으며 내연기관은 탑승자의 좌석 바로 밑에 장치했다. 다이믈러는 이 자동 2륜차(오토바이)가 시골 우체부에게는 최고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우체국에서 거들떠 보지도 않아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바로 이 오토바이가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제1차 세계 대전 전후. 무엇보다 값이 싸다는 것과 주행비용이 저렴하다는 점에서 자동차의 인기를 앞지르게 된 것이다.
전쟁이 계속되자 다이믈러의 오토바이는 헌병 및 연락병용으로 채택되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그 인기가 치솟아 오토바이 문화 시대를 활짝 열어 놓았다.
수중익선
물 위를 스치듯 달려가는 배, 수중익선.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낯선 이 배를 물과 공기가 접촉하는 경계를 달리는 것이 특징이다.
보통의 배는 물과 공기의 저항을 극복하며 달린다. 그러나 수중익선은 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배를 수면에서 가능한한 들어 올리도록 날개, 즉 수중익을 사용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베행기처럼 수면에서 완전히 들어 올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엉뚱하고 신기한 아이디어가 실물, 즉 발명으로 이어지는 데는 60여 년의 세월과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이 요구되었다.
최초에 이 아이디어를 생각한 사람은 19세기 중반의 러시아 태생 프랑스인 람벨.
그는 그 무렵 발명된 석유 연소기관을 이용하면 물 위를 달리는 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연구에 착수했다.
몇 년 동안 고생한 결과, 1890년 람벨은 드디어 생각했던 배를 완성하여 센 강에서 시험에 들어갔다.
결과는 실패였다. 그의 배는 수면을 달리기는커녕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람벨에 이어 수중익선에 도전한 사람은 이탈리아의 비행선 설계자 엔리코 폴라니니였다. 일이 풀리지 않을 때마다 호숫가를 산책하던 폴라니니는 물 속에 잠겨 저항 때문에 속도가 느린 배를 바라볼 때마다 오히려 더 가슴만 답답함을 느꼈다.
비행선 설계를 하는 그에게 그 정도는 아무 일도 아니었다. 서둘러 연구를 마치고 실물을 만들어 이 배의 성능을 과학적으로는 물론 공학적으로 입증했다.
특허출원 당연한 것. 이러나 실물을 직접 보지 않은 사람들은 저혀 믿지 않았고, 실물을 본 사람들까지도 속임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폴라니니는 기발한 묘안을 떠올렸다.
"그래. 방법은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의 인정을 받는 거야!"
전화기를 발명하여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벨이 성능을 인정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믿을 것이라고 확신한 폴라니니는 서둘러 산뜻한 모양의 수중익선을 제작했다. 1911년 드디어 새롭게 만들어진 수중익선이 시운전을 하는 마지올레 호숫가에는 특별히 초청된 벨과 신기한 배의 시운전을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폴라니니의 수중익선은 수면을 날 둣 달려갔다.
"원더풀!"
벨의 탄성과 동시에 수많은 사람들의 박수소리가 호수 전체를 뒤흔드는 듯했다. 잠시 후 폴라니니는 벨과 단둘이 마주 앉았다. 평을 듣기 위해서였다.
"폴라니니 씨! 대단했습니다. 제가 당신의 특허를 바탕으로 다시 설계하면 어떨까요?"
폴라니니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자신의 특허가 벨을 통해 실물로 만들어진다는 것보다도 더 큰 영광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수중익선은 1918년까지 시속 113킬로미터를 달리며 수상 스피드 기록을 달성했다. 폴라니니가 세계적인 발명가로 평가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레이더
2차 세계 대전 중에 연합군의 승리에 큰 몫을 한 레이더는 전파를 이용한 물체탐지장치로 영국의 윗슨 와트를 중심으로 한 레이더 연구진에 의해 발명된 것이다.
1943년 어느 날, 영국 공군성에 소속된 과학 연구부의 윈페리스 연구부장실에 연구부원인 로가 들어왔다.
"윗슨 와트 박사로부터 온 보고서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래? 어서 이리 주게."
윈페리스 박사는 로가 들고 있던 큰 봉투를 가로채듯 받아 들었다. 보고서의 내용을 한참 읽고 난 윈페리스 박사의 얼굴은 심각해졌다.
"지금까지의 연구만으로는 살인광선의 발명이 불가능하단 말이지."
윈페리스 박사의 침울한 표정을 본 로는 와트 박사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덧붙여 전했다.
"저, 박사님. 그런데 와트 박사께서는 전파로 비행기를 떨어뜨릴 수는 없지만 비행기가 어디로 날고 있는지는 쉽게 알아낼 수가 있답니다."
"와트 박사가 그런 말을 했다는 말이오?"
"네.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전파를 이용하면 하늘을 나는 비행기의 위치를 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로는 어느 새 흥분한 어조로 계속 말을 했다.
"박사님, 이것이 성공하면 영국 영공에 침입한 적기는 모두 발견되어 격추당할 것입니다. 따라서 영국의 영공 방위는 거의 완전해질 것입니다."
얼마 후 영국 공군성은 비밀리에 완성된 레이더의 실험에 착수했다. 노잔프턴이라는 마을의 도로 위에 포장을 친 평범한 트럭 한 대가 고장난 듯이 서 있었다. 바로 이 트럭의 포장 속에는 복잡한 장치를 한 기계들과 함께 와트 박사를 비롯한 연구자들, 그리고 공군성 소속의 장교들이 긴장한 채 기계를 응시하고 있었다.
"바로 이 시간입니다."
이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브라운관의 옆에 놓인 발신기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전파는 안테나를 통해 사바으로 발사되어 갔다. 얼마 후 틀림없는 비행기의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이 때 와트 박사가 "됐어, 붙잡았어."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바로 그 때 브라운관의 가로로 곧게 뻗은 빛 위에 곡선이 뚜렷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곡선은 조금씩 가운데 쪽으로 옮겨지고 있었는데, 이것은 발사된 전파가 실험용 비행기에 닿아 다시 반사되어 기계로 돌아온 증거였다.
와트 박사를 비롯한 레이더 연구팀은 연구를 거듭한 결과 1936년 1월에는 120킬로미터 떨어진 먼 하늘에서 비행하는 비행기의 동작을 포착하는 레이더를 만들게 되었다.
입체화면 시스템
입체영상의 세대가 열릴 조짐이 있다. 특수한 안경을 써야만 하는 번거로움 없이도 입체화면을 즐길 수 있는 발명이 나온 것이다.
발명가는 호주 사람인 도널드 마틴.
이전에도 특수안경이 필요 없는 입체화면 시스템이 개발되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지만 이 시스템은 화면이 흔들리거나 흐리고, 특정 각도에서만 입체화면을 볼 수 있어서 입체화면을 즐기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많은 아쉬움을 주고 있다.
그러나 마틴에 의해 새롭게 개발된 입체화면 시스템은 기존의 여러 단점들을 한꺼번에 보완하는 획기적인 발명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놀라운 입체화면 효과에 제 자신도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이 입체화면 시스템은 어떤 각도에서나 선명한 입체화면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이 시스템은 화면 앞쪽에 수직선들을 채택하고, 한 장면을 두 대 이상의 카메라고 찍어 각각의 화상을 겹쳐서 비추도록 되어 있다. 이 외에 특수한 장치를 첨가해서 원하는 입체영상을 얻어낼 수 있도록 하였다.
"놀라운 발명입니다. 드디어 입체영상의 시대가 활짝 열릴 것 같군요. 좀더 구체화하여 상품화로 서둘러 보십시오. 틀림없이 성공할 것입니다."
이 시스템을 개발한 마틴은 자신의 발명품을 평가받기 위해 입체화면 전문가인 IBM사의 제임스 립스콤 박사에게 보여 주었는데, 립스콤 박사는 '놀라운 발명'이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립스콤 박사의 격려에 자신을 얻은 마틴은 특허출원을 마치고 상품화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특수한 안경을 쓰고 그것도 특정한 장소에서만 시청을 해야 하는 일반인들은 앞으로 가까운 미래에 안방에서도 쉽게 입체영상을 즐길 수 있게 될 것이다.
입체화면은 우리 나라에서도 이미 오래 전부터 연구되어 온 것으로 이 사례의 입체영상보다 빨리 상품화될 수도 있음을 밝혀둔다.
얼굴감식방법
지구촌 어디에도 지문이 같은 사람은 없다. 얼굴모습도 예외가 아니다. 같은 날 비슷한 시간에 태어난 쌍둥이까지도 다른 것이 지문이고 얼굴 모습이다.
아무리 똑같은 모습도 조금만 세밀히 보면 다른 곳을 쉽게 찾아낼 수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 중에서 특정인을 찾아낼 때 쓰이는 가장 과학적인 방법이 지문감식이었고, 범죄 수사에 지문감식처럼 중요하게 취급되는 것도 흔치 않다.
지문감식이 이처럼 위력을 발휘하자 등장한 것이 감쪽같은 신분증 위조. 남의 신분증에 사진을 교묘히 바꿔 붙여 저질러지는 범죄가 매년 증가하고 있는 것이 이를 입증해 주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쐐기를 박는 발명품이 등장, 신분증 위조도 머지않아 사라지게 되었다. 이름하여 '얼굴감식방법'.
발명가는 미국 뉴욕에 사는 기술자 출신의 피터 탈. 피터는 간단한 수학방식에서 힌트를 얻어 이 발명을 하게 되었고, 이미 특허까지 받아 놓았다.
"이 수학방식의 원리는 우선 영상프로세서가 얼굴의 흑백사진을 찍은 뒤, 이 사진을 디지털 부호로 옮기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지요."
즉 코 밑과 입술 중앙의 그늘진 곳 등 입술 주위의 특징만도 100만 가지 이상이 있는데, 이 특징들을 50개 정도의 정보로 압축하는 것이다. 이어서 이 압축된 정보를 또다시 간단한 숫자로 압축하여 신분증에 내장된 자기테이프에 입력하면 되는 것이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주요국가의 세관검역소에서 문의전화가 빗발쳐 상품화 또한 시간문제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금자동지급기와 비슷한 컴퓨터를 세관검역소에 설치하고 여행자의 신분증을 밀어넣으면 고유의 숫자가 나타나게 되고, 동시에 컴퓨터가 촬영한 여행자의 얼굴에서 나타난 숫자가 일치하면 본인임이 확인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과정 또한 단 1초면 족하므로 여행자는 자신의 신분이 검증되는 것도 알지 못한다.
따라서 여행자의 신분을 확인한는 번거로운 작업이 필요하지 않고, 여행자에게는 고품질 서비스의 통관이 가능한 것이다. 머지않아 돈방석에 앉을 것이 확실한 피터의 얼굴감식방법은 범인검거는 물론 신용카드업계에도 일대 혁신을 가져올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치아를 광내 주는 추잉껌
세계인의 기호품인 껌에도 발명시대가 열렸다. 요즘에는 여러 종류의 껌이 나와서 소비자들에게 팔리고 있다.
치아를 깨끗하게 해 주는 껌 등 다양한 기능의 껌이 TV같은 대중매체를 통해 광고되고 있는데 이제 근본적으로 다른 기능의 껌이 개발되어 껌을 생산하는 회사들에게 큰 바람을 일으킬 것으로 예상된다.
치아를 반짝반짝 빛내 주는 추잉껌이 등장한 것이다.
발명가는 퍼듀 대학의 과학자인 칼 클레버. 칼이 발명한 이 추잉껌은 치아의 표면에 달라 붙은 프라그도 제거하고 광도 내줄 수 있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 추잉껌에 들어가는 원료나 재료는 다른 추잉껌과 같지 만 카오린이라고 불리는 재료는 다른 추잉껌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기능을 가지고 있지요."
칼에 따르면 카오린은 진흙을 높은 온도에서 처리하여 정제한 것으로서 에나멜, 즉 치아의 외피는 다치지 않게 하고, 프라그만 제거해 주며, 깨끗하게 보이도록 윤이 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카오린이 들어 있는 추잉껌에 대한 임상실험이 현재 몇몇 회사들에 의해 진행 중인데 앞으로 몇 개월이면 이 회사들에 의해 대규모로 쏟아져 나올 것으로 여겨진다.
이 껌은 종래의 칫솔질을 대신하기 보다는 칫솔질을 보완하는 데 목적이 있다는 것이 칼의 설명.
그러나 앞으로 이 추잉껌과 카오린을 더욱 발전시킨다면 칫솔질이 필요없는 때가 올 수도 있을 것이고, 이에 따라 칫솔과 치약을 만드는 회사들은 껌을 만드는 회사로 점차 업종이 바뀌어 갈 것으로 전문가들은 전망하고 있다.
바이메탈
기계를 더 효과적으로, 그리고 안전하게 이용하기 위해서는 속도조절 외에도 증기의 압력 등을 조절하는 것도 중요하다.
와트의 조속기 발명에 이어 '온도의 조절'에 대한 자동화의 연구가 진행되었다. 이것은 와트가 조속기를 발명한 후 42년이 지난 1830년에 이루어졌는데 영국인인 엔드류 유어에 의해 멋지게 해결되었다.
유어는 두 장(bi)의 금속(metal)을 서로 버티게 해서 '바이메탈'이라는 온도 조절기를 발명해 낸 것이다.
이 두 장의 금속 가운데 한 장은 안바(불변강)라는 금속이었는데, 이것은 36퍼센트의 니켈과 64퍼센트의 철로 이루어진 합금이다. 안바라는 이 금속은 팽창률이 매우 적었기 때문에, 온도가 변화해도 별로 신축을 하지 않는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반대로 팽창률이 매우 커서 약간의 온도 변화에도 민감하게 신축하는 특징이 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성질을 지닌 두 종류의 금속을 서로 한곳에서 버티게 하면 어떤 결과가 생길까 자못 궁금해진다. 온도가 오르게 되면 신축성이 큰 금속은 다른 쪽의 금속보다 빨리 팽창하기 때문에, 전체는 한쪽으로 굽어지는 결과가 생긴다. 반대로 온도가 내려가면 또 신축성이 큰 금속이 빨리 줄어들게 되기 때문에 온도가 올라갔을 때와 반대로 굽어지게 된다. 바로 이런 성질을 이용하여 만든 바이메탈을 전기의 회로판에 넣고 그 끝을 접점으로 삼으면 굉장한 일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온도가 오르면 바이메탈이 굽어서 접점이 떨어지고 전기회로가 열리며, 반대로 온도가 내려가면 접점이 붙어서 전기의 회로를 닫는다는 식의 이론이 성립된다.
사실 그것은 대단히 기발한 착상이다. 이것은 곧 실험을 통해 실용성이 입증되었고, 여러 가지 전자제품에 활용될 수 있었다. 이것을 이용하면 전기난로나 실내 등의 온도를 자유로이 조절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자면, 전기스토브 같은 제품의 회로에 바이메탈을 넣는다. 그리고 사람이 가장 쾌적하다고 느낄 수 있는 적정 온도(섭씨 18도)를 넘으면 접점이 떨어지도록 해 놓는다. 그러면 바이메탈이 장치된 전기스토브는 실내의 온도를 언제나 18도 정도로 유지시킬 수가 있는 것이다.
연료전지
새로운 기술적 착상 중에는 '문제 없는 해답'이 있다. 그러다 해답이 발견되면 곧바로 문제가 나오기 마련인 것이 세상의 이치. 이와 같은 케이스의 발명이 연료전지이다.
1백 년 이상 수많은 과학자들이 이 발명에 도전했다. 그러나 이 발명의 실용화까지 성공한 사람은 단 한 사람. 케임브리지의 젊은 영국인 과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이 행운의 주인공이다.
때는 1959년. 많은 과학자들이 연료전지에 도전하기 시작한 것은 전기를 발생기키거나 비축하는 데 쓰이는 세 가지의 기본방법이 정립된 19세기 초. 연료전지는 그 네 번째 방법으로, 그 역사는 영국의 과학자였던 험프리 데이비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그는 전기분해 실험을 통해 전류를 물 속에서 흐르게 하면 전류가 물을 수소와 산소로 분해하는 것을 발견했다.
또 1932년 영국의 과학자 그로브는 데이비의 실험과정을 역전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즉 수소와 산소가스를 상호작용시켜 전류를 발생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얻은 전기의 양은 무시할 만큼 미약해서 '역전의 전기분해'라는 그로브의 발명은 90년 동안이나 방치되어 있었다.
이 발명, 즉 역전의 전기분해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바로 연료전지의 실용화 시대를 연 베이컨. 1932년 베이컨은 그로브의 연구논문을 보는 순간 연료전지 발명을 확신했다.
그는 실로 신중하게 연료전지의 연구계획을 세웠다. 과학자로서 또 다른 할 일이 많아 시간이 모자라는 것이 문제였지만, 연료전지의 발명이 산업발전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여 보다 시급하다고 판단했기 때문.
그러나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1년 2년도 아닌 10년 20년의 세월이 흘렀는 데도 가닥조차 잡히지 않았다.
시도한 실험만도 수백 가지를 넘어섰다. 그런데 바로 그중에 해답이 있었다. 연구시작 27년만의 결과였다.
그것은 셀(전지의 한 구성단위)마다 가루로 된 다공장 평판의 두 개 전극이 여러 개 모여서 한 개의 전지를 구성한 것이었다. 그것들은 수산화칼륨의 40퍼센트 용액 속에 매달려서 1제곱인치당 수백 파운드의 압력과 섭씨 수백도의 온도 하에서 수소와 산소가 공급되었다. 그 결과 24볼트의 전류 5킬로와트를 얻었는데, 이 정도면 제재용의 둥근 톱이나 용접기계를 운전하기에는 충분했다.
여기에서 자신을 얻은 베이컨은 연료전지의 효율을 80퍼센트까지 증가하는 데도 성공할 수 있었다. 이것은 1파운드의 가스가 발생시킬 수 있는 전류에 해당하는 것으로, 당시로서는 믿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베이컨의 연료전지 발명소식이 전해지자 제일 먼저 관심을 가진 곳은 미국의 제너럴 일렉트릭. 이 회사는 이 연료장치를 차량에 사용하여 장치의 간소화에도 성공했다.
제 2 부 순간의 아이디어로 큰 발명
내 시 경
수술을 하지 않고도 인체의 내부를 속속들이 볼 수 있는 작은 카메라. 이름하여 내시경으로, 이것은 현대 의학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인 위대한 발명품이다.
독일의 크스마울이 1869년에 만든 금속제 막대기 모양의 내시경이 바로 그것.
"세상에 이런 것이 있다니....... 이것을 입 속으로 집어 넣어 뱃속을 들여다 본단 말이지? 정말 놀라운 일이야."
미국인 허쇼위츠는 가늘고 기다란 쇠막대를 보며 눈을 빛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다지 쓰이지 않았다.
그 꼬챙이를 뱃속에 집어 넣으면 환자들이 무척 고통스러워했기 때문이다.
"사람의 배를 가르지 않고도 위장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다니! 몇 가지 결점만 보완한다면 정말 멋진 의료기구가 되겠는걸!"
그의 목표와 신념은 확고했기에, 조만간에 좋은 결과가 나올 것만 같았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그에게 잔혹하게 굴었다. 연구의 진전은 지지부진했고, 그는 많은 것은 잃어야 했다.
"정녕 내 목적을 이룰 방법을 없단 말인가?"
그는 창을 등지고 앉아 두 팔에 얼굴을 묻었다. 오랫동안 손보지 않아 제멋대로 자란 머리카락들이 그의 손 안으로 엉켜들었다.
아주 가늘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이었다. 그는 무심코 몇 가닥의 머리카락을 모아 힘을 주어 보았다.
"응? 끊어지지 안잖아?"
그는 다시 한번 강하게 머리카락을 잡아 당겼다. 그제서야 머리카락은 굴복하고 끊어졌다. 매우 당연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은은 흥분되기 시작했다.
"바로 이거야! 이제서야 내 문제가 해결됐어!"
그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기뻐했다.
"화상을 전할 수 있는 유리섬유를 사용하는 거야. 가느다란 수만 개의 유리섬유를 한데 묶는다면 유연하고도 강한 수신관이 탄생하잖아!"
허쇼위츠는 이 실마리를 잡은 뒤로는 활발하게 연구를 진행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1958년에 파이버스코프라 불리는 내시경을 완성하였다. 이것이 지금 널리 쓰이는 내시경의 형태이다.
그것은 직경 10-20미크론의 유리섬유 10만 개 이상이 한데, 묶인 것으로, 이 섬유의 끝에 연결된 카메라를 통해 인체 내부의 상태를 화상으로 전달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이 밖에도 위의 관찰을 손쉽게 하기 위해 내장벽을 확장시키는 송기공, 기구의 끝을 씻어내리는 송구공 등이 부착되어 있었다.
이것은 위 등의 소화기관뿐 아니라 식도, 소장, 기관지, 방광까지 관찰할 수 있도록 개발되어 있고 그 크기도 2미터에 달하는 것까지 세분화되어 있었다.
이 파이버스코프의 발명으로 현대의학은 사후치료의 단계에서 조기발견, 예방의학의 단계로 발전하게 되었고, 좀더 정확한 진단이 가능하게 되었다.
레인코트
사람들은 바바리하면 대부분 봄, 가을에 입는 가벼운 코트를 생각한다.
그러나 바바리는 레인코트(비옷)를 만드는 옷감인 개버딘을 발명해 특허를 받은 발명가의 이름이자 상표이고, 레인코트가 변하여 바바리라는 코트가 탄생된 것이다.
따라서 언제부터인가 많은 사람들이 즐겨 입는 바바리라는 코트가 본래는 레인코트 였던 것이다.
발명가인 토머스 바바리는 영국사람으로, 당시 수십 가지의 발명에 도전하여 특허를 받았으나 어느 것 하나 상품화에 이르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해 봄날, 이 날은 봄을 재촉하기라도 하듯 봄비가 하루 종일 내리고 있었다. 바바리는 이 날 따라 할 일이 많았다. 어쩔 수 없이 자동차 튜브 같은 고무로 만든 레인코트를 입고 하루종일 돌아다녔다. 여간 무겁고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하루일을 마치고 나니 온몸이 비와 땀에 젖어, 한 마디로 기진맥진이 되어 버렸다.
"레인코트를 꼭 고무로만 만들어야 되나? 좀더 가벼운 방수옷감으로 만들면 한결 가볍고 편리할텐데......."
순간 바바리는 방수옷감을 만들면 틀림없이 성공할 것 같은 확신이 섰다.
"레이코트의 생명은 비만 스며들지 않으면 되는 것이고, 그렇다면 방수가 되는 옷감을 만들면 되지 않을까?"
바바리의 생각은 일사천리로 이어졌고, 그 생각은 어김없이 적중했다. 바로 인공고무섬유로 짠 방수옷감인 개버딘이 발명된 것이다.
1910년 바바리회사가 설립되고 레인코트가 등장하자 시장이 발칵 뒤집혔다. 방수가 되는 옷감으로 만든 레인코트의 출현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레인코트를 사려는 사람들로 시장마다 긴 행렬을 이루었다.
이 무렵,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레인코트는 군인들이 참호에서 입는 트렌치코트로까지 채택되어 그 인기는 실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그 높은 인기 속에서 레인코트는 자연스럽게 비가 오지 않는 날에도 입는 코트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바바리회사는 발빠르게 새로운 색상과 모델을 선보여 코틀로서의 자리 또한 굳혀 버렸다.
이후 바바리회사는 세계 각국 시장에 진출하여 바바리하면 레인코트와 가벼운 코트의 대명사로 부상했고, 그 인기는 오늘날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볼펜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는 필기도구라 하면 단연코 볼펜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편리하고 실용적인 필기구는 여러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탄생되었다.
헝가리 사람으로 교정 일을 하던 빌로는 만년필에 몇 번씩이나 잉크를 보충하며 교정하고 있었다.
"한두 번도 아니고 계속해서 잉크를 넣어 쓰는 것은 너무 불편해. 만년필 말고 좀더 편리한 필기도구는 없을까? 그러면 일하기가 훨씬 편할텐데.......좋아, 한번 만들어 보자."
그날부터 빌로는 동생과 함께 새로운 필기구 발명에 몰두했다.
한편 미국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시카고의 밀턴레이놀즈라는 사람이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판매 여행을 하던 중 빌로의 펜촉이 없는 펜을 보게 되었다.
"야, 그것 참 편리하겠네!"
레이놀즈는 그것을 가지고 곧 미국으로 돌아왔다. 미국 정부는 취급이 간단한 이 필기구를 10만개나 구입하였다. 따라서 레이놀즈의 볼펜은 전쟁터를 식권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미국인 존라우드라는 사람이 이미 1888년에 볼펜을 발명하여 특허를 취득했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훨씬 실용적이었던 만년필 때문에 빛을 보지 못한 채 80년간이나 이용되지 못하고 버려져 있었던 것이다.
볼펜이 오늘날과 같은 형태가 된 것은 끈기가 있는 잉크를 사용하면서 부터였다. 이것은 오스트리아에서 온 화학자 프란츠 제이크가 캘리포니아의 자기 집 무엌에서 합성한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뉴욕에서 '물 속에서도 쓸 수 있는 펜'이라는 광고 표어를 내걸고 민간 시장을 겨냥, 색다른 무대를 마련하였다.
사람들은 너도 나도 이 신기한 실연을 보고자 여기 저기서 모여들었다. 이윽고 막이 올라가자 무대 위엔 커다란 수조가 보였다. 사방이 유리로 되었기 때문에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는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은 웅성거리다가 실연자인 짐벨이 나오자 조용히 수조를 주시했다. 짐벨은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는 여유 있는 표정으로 수조 속으로 들어가 종이와 볼펜을 꺼내 낙서를 해 보였다.
사람들은 모두 신기해 하며 일제히 박수를 쳤다. 수조 주위에서 이를 지켜보던 5천여 명의 사람들은 각자 3파운드씩 지불하고 이 볼펜을 사가지고 갔다. 이렇게 해서 볼펜은 사라져가는 연필과 값비싼 만년필 사이에 끼어들어 어떤 필기구보다도 널리 이용되고 있다.
발모 촉진제
"벼로부터 추출해낸 발모 촉진제!"
1986년 일본을 들썩이게 한 사건이다. 많은 탈모증 환자들을 설레이게 한 이 발모 촉진제의 발명은 다름 아닌 평범한 농민인 이토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
"오호, 이것 보게. 이 녀석들의 뿌리가 얽히고 설켜서 꼭 수세미 같구만......"
그는 벼들의 뿌리를 보다가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되었다.
"이 얽힌 뿌리들을 목욕 타월 대신에 쓰면 어떨까? 억세지도 않고, 부드러워 보이는데......"
그는 이 개구쟁이 같은 생각을 그대로 실천해서, 당장 집에서 목욕타월 대신에 벼 뿌리를 쓰게 되었다. 감촉도 생각보다 좋아 이토도 나름대로 꽤 만족하였다.
"아니, 이토 씨. 우유목욕이라도 했어요? 살결이 소년처럼 뽀얗게 돼선......"
이웃집 남자의 악의 없는 농담에 이토는 슬그머니 웃었다.
"대머리가 되는 것은 두피가 건조하기 때문이라니까, 혹시 두피가 부드러워지면 머리카락이 나게 될지도......."
이토는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드물게 남아 있는 정수리를 조심스럽게 매만지며 정성스럽게 벼뿌리로 문질렀다. 그러는 동안 그의 마음은 점점 간절해져 갔다.
"제발 아주 조금이라도 머리카락이 났으면......."
그의 간절한 기도 때문일까? 한달 후에 그는 이발사로부터 반가운 인사를 듣게 되었다.
"축하해요, 이토씨. 청춘이 돌아오는가 보군요. 머리카락이 조금씩 나기 시작해요."
물론 이토는 이 말에 뛸 듯이 기뻐했다. 아마도 그는 이 순간에 새로운 인생 사업의 시작을 계획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토의 대머리 치료에 대한 소문은 여름 북풍만큼이나 빠르게 일본열도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벼로부터 추출한 대머리 치료약에 대한 소문도 함께 퍼졌다. 약의 효능을 경험한 사람들이 속속 나타나면서, 탈모증 환자들에게 한가닥 희망을 갖게 했다.
드디어 이토의 대머리 치료약은 일반 대중에게는 물론, 각계 전문인사들에게까지 알려지고 급기야 화장품 회사에 의해 상품화되기에 이르렀다. 이토 자신도 미처 생각지 못했던 엄청난 결과인 것이다.
벼의 뿌리 엑기스를 원료로 한 이 발모제는 1986년 5월 21일부터 본격적으로 상품화되어 판매되고 있다.
평범한 한 농부의 화려한 변신이 눈부시게 펼쳐진 것이다.
아직 머리가 돋는 약은 없다. 다만 방지제는 세계각국에서 활발히 연구 중이며, 이 사례도 그 일환으로 평가될 따름이다.
시멘트
1755년 당시 30세의 영국인 청년 조 스미튼이 에디스턴 로크라는 섬을 찾아왔다. 존 스미튼은 토목 기사로서 등대를 재건하라는 정부의 명령을 받았던 것이다.
에디스턴 로크는 영국 본토의 남단 플리머스 항 앞쪽의 바위섬이었다. 1699년 바로 이 곳에 세계 최초로 본격적인 등대가 세워졌다.
그러나 이 등대는 목조였기 때문에 오래 가지 못했다. 3년 뒤에 바람에 넘어져 다시 세웠으나 이번에는 화재로 전부 타버렸다.
스미튼은 중요한 등대의 재건 임무를 맡고 고민에 빠졌다.
"종전과 같은 목조로는 튼튼한 등대를 만들 수가 없다. 거센 물결과 바람에 견디고, 화재의 염려가 없게 하려면 어떤 재료로 어떻게 지어야 할까?"
스미튼은 이내 시멘트를 떠올렸다.
"아무래도 시멘트로 만드는 수밖에는 없다. 그런데 잘 될까?"
스미튼은 시멘트를 사용해 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고대 알렉산드리아 항 입구에 있었다고 하는 유명한 파로스 등대를 본떠서 등대를 설계했다.
스미튼은 초조하게 시멘트의 원료인 흰 석회석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기다리던 시멘트의 재료가 도착했다. 그런데 도착한 것은 흰 석회석이 아닌 검은색의 석회석이었다.
하지만 그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그래. 검은 석회석이라고 해서 시멘트가 되지 말란 법도 없을 것이다. 한번 테스트를 해 보자. 그리고 흰 석회석으로 만든 시멘트와 비교해 보고 센 쪽을 사용하도록 하자."
스미튼은 두 종류의 석회석을 실험해 보았다. 그 결과 검은 석회석으로 만든 시멘트 쪽이 훨신 단단히 굳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검은 석회석 속에는 점토가 들어 있었다. 이 점토로 인해 석회석이 검은 빛깔을 띠었고 또 매우 단단히 굳어지는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새로운 시멘트는 공기 속에서나 물 속에서나 쉽게 굳어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스미튼은 이 새로운 시멘트를 사용해 등대를 짓기 시작했다. 3년 뒤인 1757년, 마침내 에디스턴 등대는 먼 길에서 돌아오는 배들을 위해 밝은 불빛을 비출 수 있게 되었다.
1824년 11월 21일에는 영국 중부에 있는 리즈 시의 벽돌직공 조지프 아스프딘에 의해 '인조석 제조법의 개량'의 특허가 나와 '포틀랜드 시멘트'가 판매되기 시작했다.
백자기 제조법
영국의 스태퍼드셔의 스토크와 벼슬름 근처. 이 곳은 옛날부터 도기제조로 잘 알려진 지역이다. 이 스태퍼드셔에 애스트베리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눈병에서 힌트를 얻어 백자기의 새로운 제조법을 발명한 것으로 유명하다. 처음에는 데븐이나 도세트에서 나는 흰 점토를 파이프 점토라 불리는 점토와 섞어서 백자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애스트베리는 도자기의 색깔에 만족하지 않았다.
"좀더 깨끗한 색을 띠게 할 수는 없을까?"
그는 더욱 좋은 제품을 만들 수는 없을까 늘 고심하였다. 1720년의 어느 날, 애스트베리는 벼슬름에서 런던을 향해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도중에서 그의 말이 그만 눈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는 뱀버리에 숙박하면서 여관의 마부에게 의논하였다.
"아, 그 문제라면 제게 좋은 방법에 있습니다."
마부는 그 즉시 근처에 흔히 있는 조그만 플린트(Flint:불순한 석영을 부싯돌로 사용한다.) 조각을 가져왔다.
그리고 나서 그 플린트 조각을 방 안의 난로 안에 넣어 새빨갛게 될 때까지 달구었다. 마부는 그 조각을 부수어 가루로 만든 다음 빨갛게 짓무른 말의 눈에 가루를 불어 넣었다. 그러자 금방 준의 아픔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게 아닌가? 얼마후 눈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 애스트베리는 마부가 하는 일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다가 한 가지 사실에 깜짝 놀랐다. 빨갛게 구운 플린트 덩어리가 빛나는 흰가루가 되었던 것이다. 또한 말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고름은 마치 점토와도 같았다. 그런데 플린트 가루는 바로 말의 눈에서 나오는 그 점토같은 고름을 흡수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혹시....... 그래. 이 물질을 이용해 보자."
애스트베리는 곧 플린트 한 마차분을 운반하였다. 그런 다음 셜톤에 있는 자기 공장으로 플린트를 솥에 넣고 새빨갛게 될 때까지 달구었다. 플린트가 새빨갛게 달구어지자 뱀버리에서 본 것처럼 식힌 다음 부수어 가루를 만들었다.
"플린트 가루를 어느 정도 점토와 혼합하면 좀더 나은 자기를 만들 수 있을까?"
애스트베리는 이 질문의 답을 얻기 위해 같은 실험을 여러번 되풀이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 마침내 양질의 백자기를 만들기 위해서 플린트 가루, 점토, 파이프 점토, 모래를 어떤 비율로 혼합하면 좋은가를 확실히 알아냈다. 그냥 무심코 지나쳐 버릴 수도 있었던 말의 눈병을 고치는 방법이 더 좋은 도자기를 만드는 열쇠가 되었던 것이다.
구멍뚫는 기계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격언은 발명가나 발명가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가장 명심해야 할 생활철학이다.
우표를 한 장씩 손쉽게 자를 수 있는 '구멍뚫는 기계'의 발명도 이 격언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이처럼 간단한 발명으로 발명사에 기록되고 있는 사람은 바로 헨리 아처.
이 이야기는 185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루에도 수백장의 우표를 가위로 잘라 파는 우체국 아가씨를 지켜보며 아처는 가슴이 아팠다. 우체국 아가씨의 손에 파란 멍이 가실 날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우표라는 것이 지금처럼 사이사이(자름선)에 바늘구멍이 없어 한 장씩 가위로 잘라 팔았었기 때문.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일 같은 일을 하는 모습을 지켜 보는 아처는 그 일이 남의 일이 아닌 자기 일 같은 착각을 일으키기도 했다.
날이 갈수록 가슴이 답답해왔다. 그래서 그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해 바늘로 죄없는 종이에 구멍을 뚫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무심코 구멍뚫린 종이를 집어들고 조금 힘을 주자 종이는 사르르 잘라졌다.
'이럴수가! 그렇다면?'
아처는 순간 우표 자름선에 바늘 구멍을 뚫어 놓으면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기계의 '기'자도 모르는 아처에게는 허망한 꿈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처는 그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잊으려 하면 할수록 바늘구멍의 편리함이 그를 유혹했다.
또다시 얼마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아처는 양복점 앞을 지나다가 열린 문 사이로 재봉사가 돌리는 재봉틀을 발견했다.
"저 재봉틀에서 실을 빼내고 돌리면 구멍만 뚫리겠지!"
서둘러 집으로 돌아온 아처는 재봉틀의 원리를 응용하여 구멍뚫기 기계를 설계해 보았다.
기계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그에게는 벅찬 일이었으나 그의 집념 앞에는 불가능이 있을 수 없었다. 드디어 설계도면이 완성되고 특허청에 등록이 이루어졌다.
세계 각국의 우체국에는 더없이 반가운 소식이었고, 아처는 로열티(특허권 사용료)만으로도 부와 명예를 거머쥘 수 있었다.
이후 이 발명품은 사무용지와 메모지 자름선 등에도 사용되어 사무자동화의 원조로 기록되고 있다.
영구대전 방지도료
한 가지의 발명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수십, 수백 가지의 실험방법들이 동원되곤 한다. 발명가들은 실험 도중에 갖가지 시행착오를 범하게 되는데, 때로는 이 시행착오가 뜻밖의 결과를 가져올 때로 있다. 실험 도중의 실수라든가 실패한 실험들이 오히려 새로운 성공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일본 사람 노구치 유키오가 만들어낸 영구대전 바지도료가 대표적인 사례.
1950년, 노구치 유키오는 정밀주조용 조형제로 쓰이는 콜로이드 용액을 실험하고 있었다. 그런데 실험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발을 헛디뎌 들고 있던 콜로이드액을 바닥에 있는 플라스틱 상자에 쏟아버렸다.
"할 수 없지. 다시 만들어야지."
노구치는 체념하고 다시 실험에 몰두하였다. 한참 후 저녁 시간이 되자 그는 자리에서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아니, 이럴 수가! 이렇게 아름다운 광택이 나다니! 놀라운 일인 걸. 게다가 바닥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는데도 먼지 하나 묻지 않았잖아!"
콜로이드 액이 묻은 플라스틱 상자는 반짝반짝 광택이 나고 매끈거렸다. 순간 그의 눈이 빛났다.
"아무도 대전 방지제를 개발할 엄두도 못 내고 있다. 이런 때에 내가 개발에 성공한다면......."
눈 앞에 찬란한 미래가 펼쳐지는 것 같았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대전 방지제를 개발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러나 실험은 계속 실패였다. 계속되는 실패로 노구치는 막대한 손해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실패를 발판으로 새로운 실험을 계획하곤 하였다.
"이것도 적당하지 않군. 그렇다면 사염화규소는 어떨까?"
드디어 오랜 연구 끝에 그의 노력이 결실을 맺었다. 대전 방지제 발명에 성공한 것이다. 노구치는 서둘러 특허출원을 마치고 대전 방지제의 대량 생산에 들어갔다.
해를 거듭할수록 그의 발명품을 원하는 기업이 늘어갔다. 이 발명과 때를 같이하여 일본의 고도성장이 이루어졌고, 플라스틱 제조업이 전성기를 맞게 된 때문이었다.
그의 사업은 급성장하였고, '노구치'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귀에 꽂는 전화기
이어폰처럼 귀에 꽂는 작은 전화기가 개발되어 화제가 되고 있다.
일명 '휴대용 전화기'로 불리우는 이 전화기를 개발한 사람은 엉뚱하게도 전자기술과는 거리가 먼 일본 대학 입시센터 특별시험연구반에서 일하는 오노 히로시 교수.
"이 전화기는 휴대에 따른 불편함이 전혀 없지요. 이어폰과 비슷한 크기의 수신기를 귀에 꽂는 것만으로 전화통화가 가능하기 때문이지요."
오노 교수는 휴대용 전화기 시장의 추세가 나날이 소형화 되는 것에 착안, 어떻게 하면 좀더 작게 만들어 휴대를 편리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학생들이 귀에 이어폰을 꽂고 공부한는 것을 보고 귀에 꽂는 전화기를 개발하면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결코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첫 번째로 시도한 일이 관력 자료수집 및 분석.
난생 처음 대하는 기술내용이 대부분이었으나 막상 수집한 자료를 분석하고 나니 자신감이 생겼고, 이때부터 연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관련되는 자료는 모조리 수집했지요. 그리고 한편의 논문을 쓰는 마은으로 정리해 나갔지요. 어려움이 있기는 했지만 이미 개발된 기술과 정립된 이론을 분석하여 결과(결론)를 정리해 보니 해답은 의외로 가까운 데에 있더군요."
오노 교수에 따르면, 사람이 말을 할 때는 귀뼈와 귓구멍에서 진동이 일어나는데, 이 전화기 없는 전화기를 귀에 꽂고 말을 하면 원통형의 진동탐지센서가 진동을 음성으로 바꾸어 상대방에게 전달할 수 있다는 것.
또 상대방의 음성은 이어폰 마이크에 내장된 미니 스피커에서 울려 나오기 때문에 통화에 전혀 지장을 받지 않는다.
이에 따라 전화를 하면서 다른 일을 할 수도 있고, 공사현장같이 시끄러운 곳에서도 통화가 가능한 이점이 있다.
"이 전화기 없는 전화기는 아무리 작게 얘기해도 음성을 판별해 내기 때문에 음악회 같은 곳에서 주위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도 마음 놓고 전화통화가 가능하기 때문에 그야말로 신의 전화라고 말할 수 있지요."
이미 일본의 관련회사가 이어폰 마이크를 상품화하기 위해 설비투자와 각종 준비를 마무리 한 상태이기 때문에 가까운 날에 이 획기적인 전화기를 사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닭털 유류 제거기
해상에 누출된 유류를 제거하는 데 닭의 깃털을 사용하는 방법은 1967년에 발명되었다. 이 방법은 닭의 깃털을 가득 담은 네모난 주머니를 누출유류로 오염된 수역에 던져 두면 신기하게도 유류를 깨끗이 흡수해 이를 회수하여 매몰 또는 소각처리 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원래 런던을 사업본거지로 하고 있는 미국의 국제변호사 알 크로티가, 유조선 좌초로 엄청난 유류가 누출되어 심각한 해상오염을 일어켰던 지난 1967년의 영국서남부 콘월주 토리협곡 사건에 관한 사진들을 들여다 보다가 흐르지 않고 괴어 있는 물에서 사는 새들이 기름에 젖어 끈적끈적해진채 더러운 해변에 몰려 있는 것을 본 후 착안하게 된 것.
크로티가 그 같은 묘안에 따라 어디서나 손쉽고 값싸게 수집할 수 있는 닭의 깃털을 넓적한 베개처럼 생긴 백색주머니에 담아 만든 시클린이라 명명한 이 해상누출유류 청소기구는 미시시피 강 하류에서 누출유류 3만 1500갤런을 수거하는 작업에 시험적으로 사용되었다. 미국의 멕시코만 연안 5개 주의 해상오염 유류수거작업을 하는 회사 중 최대규모인 피터슨 해상용역회사가 벌인 이 시험작업에서 인부들이 타고 시클린 1백 개를 유류오염수역에 던지자 빠른 속도로 기름 찌꺼기들이 시클린에 달라 붙기 시작했고 15부 후 이를 모두 건져 올렸을 때 놀랍게도 이 시클린에서는 기름이 전혀 없는 맑은 물이 흘러내리고 주머니에는 기름 찌꺼기만 남았다.
이 발명품은 사용 후 깃털을 깨끗이 정제하여 반복 사용하려 했으나 처음처럼 제대로 효과를 내지 못해 크게 히트하지는 못했지만 아지곧 소규모 누출유류 제거에는 가장 효과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톱밥으로 해양유출기름 수거
유조선 같은 대형선박이 태풍이나 기타 사고를 당하면 인명구조가 첫 번째 문제이고 사고선박에서 흘러나온 기름의 수거가 두 번째 문제이다.
인명구조를 제외하면 이 기름유출문제가 가장 큰 문제인데 대형선박이 사고가 나면 전세계가 기름수거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것은 지구 전체의 환경에 막대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이렇듯 마다 위를 떠 다니는 기름이 환경에 큰 피해를 주고 이것이 어느 한 국가의 문제가 아닌 지구촌 전체의 문제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유출기름의 제거방법이 연구되기 시작했고 그 성과도 차츰 나타나고 있다.
그 중에 대표적인 방법이 톱밥으로 유출기름을 청소하는 방법인데 이것을 개발한 사람은 미국 콜로라도 광산대학 연구 교수인 토마스 리드.
"술집 주인이 마닥에 엎지른 맥주를 톱밥을 뿌려 제거하는 것을 보고 힌트를 얻어 이 연구에 착수했지요."
원리를 알아낸 토마스의 연구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보통의 톱밥을 특수하게 열처리하여 물은 흡수하지 않고 기름만 흡수할 수 있도록 만들었는데 이 특수톱밥은 톱밥 부피의 80%까지 기름을 빨아들인다.
"시 스윕이라는 이름의 이 톱밥을 사고지역의 상공에서 뿌려준 후 이것을 흡입관으로 건져내면 유출기름의 회수가 가능하지요."
또한 기름을 흡수한 톱밥을 재처리하면 원유를 거의 모두 추출해서 산업용 원료로 다시 사용할 수 있는 등 경제성 또한 뛰어나 머지않아 실용화될 수 있을 것이라는 토마스의 자랑.
토마스는 이미 모 기업과 손잡고 생산을 서두르고 있다.
연필
연필의 역사는 대체로 16세기 무렵부터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알반화된 것은 19세기 들어서부터이다. 그리고 연필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795년 프랑스의 화가이자 과학자인 콘테에 의해서였다.
어느 화창한 오후였다. 공원에는 많은 사람들이 나와 모처럼의 햇빛을 즐기고 있었다. 정말 평화로운 한때였다. 그러나 단 한 사람, 공원 한구석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남자만은 예외였다. 그는 얼굴을 심하게 일그러뜨린 채 아주 큰 소리고 짜증을 내고 있었다.
"이러! 또 부러졌군. 이래서야 스케치를 할 수가 없잖아!"
그는 몹시 화가 난 듯 손에 들고 있던 숯덩이를 내던졌다. 당시에는 밑그림을 그리는 데 숯을 많이 이용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콘테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 한동한 그대로 앉아 있었다.
"흐음......, 그런 방법이 있었군."
콘테는 독일 콘라트 퐅 게스너의 논문을 읽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공원에서 스케치를 한 그 날 이후로 줄곧 새로운 미술도구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다. 그는 콘라트의 논문에서 흑연을 넣어 필기구로 사용했다는 대목에 흥미를 느꼈다.
"흑연을 이용한 필기구라....... 그것 정말 괜찮군. 미술도구로서 뿐만 아니라 새로운 필기도구로 쓸 수도 있겠어."
그는 곧바로 실험에 착수했다. 그의 작은 화실이 연구실로 이용되었다. 콘테는 우선 심을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 처음에 흑연을 모아서 막대 모양으로 만들어 여러 날을 말려보았으나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쓰기에는 부적합하였다.
제일 중요한 문제는 흑연에 일정한 강도를 주는 것이었다. 그는 매일 새로운 방법을 시도해 보았으나 결과는 항상 실패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콘테는 저녁식사 도중 무심결에 접시를 만져 보았다. 그리고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접시를 만지는 순간 문제의 해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흙을 불에 구우면 이 접시처럼 단단해진다. 만약 흑연을 흙과 섞어 반죽해서 굽는다면 어떨까?"
그는 식사를 하다 말고 바로 연구실로 달려가 며칠을 실험에만 집중했다. 추측대로 실험은 대성공이었다. 그는 가마에서 검게 빛나는 단단한 흑연 막대기들을 집어냈다. 손은 기쁨으로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이것을 미리 준비한 나무막대의 홈 속에 차근차근 끼워넣고 적당한 크기로 잘라냈다. 완성된 연필이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이 때가 1796년 이었다.
초음파 탐지기
한 점의 빛도 없는 어두운 동굴 안에서 박쥐는 어떻게 활동할까? 해답은 간단하다. 바로 초음파를 이용한 것이다. 박쥐는 스스로 초음파를 방사하여 어둠 속에서도 장애물과 먹이를 손쉽게 찾아낸다.
이 초음파를 인간 생활에 적용하려 한 시도는 제1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에 다다를 무렵부터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 노력에서 최초로 성공을 거둔 사람은 프랑스의 랑즈벵이었다.
그 무렵 프랑스는 엄청난 혼란 속에 있었다. 독일과의 오랜 전쟁은 프랑스는 물론 온 유럽은 공포와 낙담으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전세를 뒤바꾸어 놓을 만한 일이 없을까?"
랑즈벵은 조국의 앞날이 이 전쟁과 직결되어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전쟁에 관한 일에는 항상 촉각을 세우고 있었다.
"아무래도 전쟁에 이기긴 틀렸나봐요. 물 속으로 다니면서 우리 배를 부수는 무기가 있대요."
"네, 잠수함이라고 하더군요. 정말 걱정돼요."
랑즈벵은 젊은 여자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 섬뜩함을 느꼈다.
'아니! 우리 국민들이 이렇게까지 자신감을 잃었단 말인가?'
그는 몹시 당황해서 얼른 자리를 피했다. 그러나 그 뒤로도 계속 그의 귀에 독일 잠수함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왔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그 신출귀몰한 잠수함을 격퇴시킬 방법을 찾아야 해."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 우리 국민에게는 자신감을 심어 주고 적국 독일에게는 큰 충격을 줄 수 있을 거야."
그러나 그럿은 마음 먹은 것과 같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치 장님이 퍼즐을 조립하듯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 일이었다. 이렇게 며칠이 흘러갔다. 그 동안에도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늘어만 갔다.
어느 날 그는 정원을 왔다갔다 하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몹시 초조했기 때문에 발 끝에 닿는 돌들을 신경질적으로 차내며 걷고 있었다. 바로 그때, 그의 발에 채인 작은 돌 하나가 물뿌리개에 맞아 날카로운 금속성 소리를 내었다. 그 소리에 놀라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에 문제의 해결책이 떠올랐다.
"바로 이거야.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물체에 부딪혀 반사되어 오는 초음파! 그것은 물 속에서도 충분히 사용할 수 있어. 적에게 발각될 염려도 없고......."
그는 곧바로 국방성을 찾았고, 이것은 독일과의 싸움에서 아주 유용하게 쓰였다. 그리고 얼마 후 전쟁은 끝났다. 그의 바람대로 프랑스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이후로 초음파에 대한 연구는 더욱 활발해졌다. 의료계에서는 초음파를 이용해서 병을 진단하고 치료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수산업에서 초음파의 이용은 더욱 두드러졌다. 요즘은 어업이 기업적으로 행해지고 있으며 규모가 놀라울 정도로 큰데 이것은 모두 어군 탐지기의 덕분이다. 이렇듯 초음파를 이용한 많은 탐지기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사카린
세계 발명사를 살펴보면 엄청난 노력과 자본이 요구되는 발명품이 실로 우연한 기회에 얻어지는 경우도 있다.
1970년대까지 단맛의 황제로 불리던 사카린도 실험도중 우연히 발명된 걸작 중의 걸작으로 손꼽이고 있다.
발명가는 화확자였던 팔벨.
모든 화확자들이 그렇듯이 팔벨도 새로운 물질을 발명하기 위해 매일같이 각종 시약의 합성실험에 정성을 쏟고 있었다. 이 때가 1879년.
그러던 어느 날, 실험에 열중하던 그에게 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손에는 합성 중이던 시약이 묻어 있었다. 그러나 손을 씻을 겨를도 없이 수화기를 들었다. 그 순간 손에 묻은 시약이 입에 닿았다.
"야! 기막힌 단맛이야! 세상에 이렇게 기막힌 단맛이 있었다니........"
갑작스런 팔벨의 탄성에 전화를 건 사람은 당황하여 무슨 일이냐고 다급하게 물어왔으나 그는 처음 느껴보는 기막힌 단맛에 감탄하여 전화를 받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단맛을 내는 것은 설탕뿐이었고, 생산 또한 식물에서 채취한 단물을 끓여서 가루로 만드는 원시적인 수단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생산량이 적어서 그 값이 엄청나게 비쌌고, 따라서 돈많은 부자들이나 맛볼 수 있는 귀한 식품이었다.
"단맛을 내는 감미료를 화확적인 합성으로 생산할 수 있다면 이것은 시대를 바꾸고도 남을 대발명인데......."
순간 팔벨은 사카린의 대량 생산 시대를 열어야 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서둘러 조금 전 실험에 사용되었던 시약들의 성분을 분석해 보았다.
'사카로 미터'라는 검당계에 나타난 감미도가 설탕의 수백배나 되었고, 그 성분은 '톨루엔'이었다.
실험결과가 여기에 이르자 사카린의 대량 생산은 시간문제였다.
"무색 반투명 결정체인 기막힌 단맛의 값싼 인공감미료가 나왔데요."
소문은 전파를 타고 순식간에 5대양 6대주를 강타했다. 발명가 팔벨이 황금방석에 앉게된 것은 당연한 결과.
우리 나라에서는 최초 최대의 밀수사건을 일으키며 상륙한 사카린. 첨단기술에 의해 속속 탄생한 새로운 감미료들에 밀려 지금은 그 모습을 서서히 감추어 가고 있지만, 사카린의 발명은 분명 신이 내린 선물이었다.
톱니 달린 꽃삽
정원을 손질할 때 흔히 쓰는 톱니 달린 꽃삽. 삽의 양쪽이 톱니 모양으로 생겨 제초 작업등을 할 때 매우 편리한 도구이다. 이것을 발명해 낸 사람은 고마다라는 일본 사람이었다. 고마다는 어느 날 모종삽으로 정원의 잡초를 뽑고 있었다. 그런데 잡초라는 것은 넓게 뿌리를 뻗고 있어서 좀처럼 쉽게 뽑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쉽게 잡초를 뽑아낼 수 없게 되자 고마다는 짜증이 났다. 그러나 그는 곧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불편함 때문에 화가 났을 때, 바로 거기에 발명의 씨앗이 있는 것이다."
고마다는 이렇게 고쳐 생각한 뒤, 어떻게 하면 멋지게 뿌리를 자를 수 있을까 궁리하기 시작했다.
"잡초의 줄기가 여기저기 퍼져 있고 또 억센 것도 있어서 일일이 뽑아 내기란 매우 불편한 일이다. 그렇다면 삽의 모양을 톱처럼 변형시켜 보면 어떨까? 흙을 퍼내면서 동시에 작은 뿌리들도 파낼 수 있을거야."
이렇게 하여 생각해 낸 것이 그림과 같이 삽의 양쪽에 톱니를 다는 것이었다. 고마다는 즉시 가는 줄로 삽에 톱니를 내었다. 그랬더니 생각했던 것처럼 가장자리의 뿌리가 잘 끊어져서 제초 작업도 능률이 올랐다. 이 발명은 유명 농기구 회사에 팔려 100만 엔의 로열티를 안겨 주었다.
통풍장화
무슨 일이든 목표가 분명해야 성공할 수 있다. 발명도 마찬가지이다. 생선장수에서 발명가가 된 일본인 아라이가 그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지독하게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아라이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기가 무섭게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만 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시키시는 일은 최선을 다해 하겠어요. 자신 있습니다."
아라이는 이곳 저곳을 다니며 취직을 부탁했으나,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이고 나이가지 어린 그에게 어느 곳에서도 선뜻 일자리를 주지는 않았다.
몇 날 며칠을 돌아다닌 끝에 겨우 얻은 일자리가 바로 생선가게였다. 그가 하는 일이란 어름 창고에 생선을 나르는 것이었다. 섭씨 30도가 넘는 여름에도 얼음 창고에서는 두꺼운 방한복을 입고 장화를 신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견디기 힘든 엄청난 추위였다.
"어휴, 추워. 이러다가 꽁꽁 얼러버리겠어. 하지만 이 정도로 물러설 내가 아니지."
아라이는 두 손으로 입김을 호호 불어가며 생선은 열심히 날랐다. 어려서부터 온갖 고생을 하며 자란 아라이에게 이 정도의 추위는 문제되지 않았다. 정작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바로 장화였다. 얼음 위를 걸을 때 장화 안팎의 온도가 차이가 나서 장화 안의 습기가 생기는 것이었다. 그 습기로 인해 장화 속에선 찌근덕 찌근덕거리다가 나중엔 미끌거리며 심한 불쾌감과 함께 악취까지 났다.
이렇게 며칠 동안을 하다보니 아라이는 무좀에 걸리고 말았다. 아무리 발을 깨끗이 닦아도 소용없었다. 무좀은 점점 심해질 뿐이었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야지 이래서는 안 되겠어. 그렇다면 장화 속에 습기가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아무리 끙끙 앓으며 머리를 쥐어짜도 묘안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여름 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생선을 얼음 창고로 나르던 아라이는 우연히 생선가게 주인이 신고 있는 그물망 가죽 구두를 보았다.
"야, 참 좋겠다. 저런 그물망 가죽 구두는 통풍이 잘 되어 발도 상쾌하고 땀이 나지도 않을텐에......."
물끄러미 주인의 그물망 구두를 바라보던 아라이는 갑자기 엉뚱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맞아. 바로 구멍이야, 구멍. 내 장화에도 구멍은 내면, 습기가 차도 통풍이 잘 되니까 쉽게 말라버리겠지? 어디 한 번 해 보자!"
아라이의 생각은 적중했다. 장화 바닥 위쪽 앞과 뒤에 작은 구멍을 뚫어 통풍이 되게 해 보았더니 습기가 감쪽같이 사라져 기분이 무척 상쾌했다.
"야, 정말 좋은데. 이렇게 간단한 걸 모르고 그 고생을 하다니......."
아라이는 곧 특허청으로 달려가 실용신안 출원을 했다.
제 3 부 작은 아이디어로 큰 발명
포스트 잇
포스트 잇. 노랑색의 조그마한 접착성 종이 쪽지가 바로 이것으로, 보고서의 가장 자리를 장식하기도 하고, 때로는 전화 수화기에도 붙어 있고, 책상의 결재함에서 불쑥 튀어나와 잠깐 잊고 있던 사실을 상기시켜 주기도 하는 히트 상품이다.
그런데 이 발명품이 처음 발명될 당시만 해도 쓰임새가 없어 겨우 특허출원을 마친 상태에서 방치되어 버렸다.
발명가는 '쓰리엠'이라 불리는 미제소타 마이닝 엔드 매뉴팩처링사 중앙연구소 연구원이었던 스펜서 실버.
실버는 당시 접착성 중합제의 신소재로 불리우는 '모노머'를 구입하여 새로운 접착제를 연구하고 있었다.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던 어느 날, 실버는 '모노머를 다량으로 반응혼합물 속에 넣으면 어떻게 될까?'하는 엉뚱한 생각과 함께 실험에 착수했다.
엉뚱한 생각인 만큼 결과에는 별다른 기대를 걸지 않았다. 그러나 신기한 결과가 나타났다. 접착성이라기보다는 응집성 정도의 신기한 접착제가 탄생한 것이다.
"접착성이 약해 붙었다가도 떨어져 버리는 이것을 어느 짝에 씁니까?"
쓰리엠사는 특허출원만 하고 생산은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5년 후인 1974년. 쓰리엠사의 제품사업부에서 일하던 아서 프라이는 교회 합창단에서 찬송가를 부르는 도중 새로운 쓰임새를 떠올렸다. 다음에 부를 찬송가의 페이지를 '포스트 잇' 같은 쪽지를 붙여 두면 편리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프라이의 제안을 받아들여 쓰리엠사는 '포스트 잇'의 생산을 시작했다.
결과는 실패. 소비자의 반응이 전혀 없어던 것이다.
보다 못해 중역인 제프리 니콜스와 조셉 테미가 나섰다. 이들은
"홍보로는 안 된다. 직접 써 보게 해야 한다."는 전략으로 영업을 지휘했다. 성공이었다. 한번 사용한 사람은 마약중독자처럼 말려 들었고, '포스트 잇'은 일약 히트상품이 되어 전세계에서 불티나게 팔려 나갔던 것이다.
냉장고
냉장고는 누가 발명하였는가? 여러 주장이 있으나 가장 먼저 특허를 받은 사람은 미국인 여콥 파킨스였다. 야콥은 본래 미국인이었으나 인생의 대부분을 영국에서 보냈고, 냉장고 원리의 특허도 영국 특허청에서 받았다.
그의 특허명세서를 살펴보면 냉장고의 원리에 대해 '공기압축 사이클'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사이클에서 휘발성 액체의 증발에 의해서 냉각이 이루어지고, 동시에 그 휘발성 액체를 항상 응축하며, 손실 없이 되풀이하여 운전에 이용한다."
그러나 야콥의 특허는 모델 이상의 상품으로 생산되지는 못했다. 후원자도 없었지만 야콥이 너무 늙어 더 이상 활동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냉장고를 처음으로 상품화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사람은 스코틀랜드인 제임스 해리슨이다.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하여 인쇄공으로 일하고 있던 제임스 야콥이 누구인지도 몰랐고 그가 냉장고 원리를 발명한 것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에테르의 이 뛰어난 냉각효과를 달리 이용할 방법은 없을까?"
제임스는 활자의 세척에 에테르를 사용하면서 그 뛰어난 냉각효과를 이용할 방법을 벌써 몇 년째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막막하기만 했다. 그러나 몇 년 동안 인쇄기를 수리하면서 스스로 터득한 지혜로 급기야 냉장고를 설계하는 데 성공했다.
특허로 등록되고 다니엘 지버라는 후원자에 의해 생산이 시작된 것은 1862년.
때마침 열린 국제박람회에 전시되면서 팔려 나가기 시작했다. 이것이 시판된 세계 최고의 냉장고로서 제임스는 냉장고의 아버지로 불리우게 되었다.
석유풍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해군의 포대사단장으로 용맹을 떨쳤던 이데. 우리에게는 악명 높은 왜장이지만 일본에서는 용장으로 이름 떨쳤던 이데.
이데는 장군 출신이지만 석유풍로의 유면(석유의 표면) 조절기 발명가 겸 기업인으로도 유명하다.
제2차 세계 대전 말엽, 이데의 포대 사령부에는 이제 막 생산한 성능 좋은 대포가 들어왔다. 연일 연합군에게 참패를 당하여 침체된 분위기가 감돌던 포대 사령부에는 오랜만에 활기가 넘치고 소장까지도 새로 들어온 대포의 성능을 실험하며 흥분하고 있었다.
대포의 이곳 저곳을 세밀히 살펴보며 검토하던 이데는 대포의 발사대에 장착된 나사를 좌우로 돌려 보았다. 느슨하게 장착된 나사는 반회전만 해도 위로 쑥 올라갔다가 다시 아래로 내려 왔다.
"으음, 여간 편리한게 아니군. 간단하지만 매우 편리한 장치야!"
훗날 이데는 바로 이 때 발명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전쟁이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가 발명가가 될 것을 결심했다고 회고했다.
2년 후, 전쟁은 일본의 완패로 막을 내렸고, 무장 해제된 이데는 군복을 벗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처음엔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막막했다. 고민 끝에 이데는 석유풍로 공장을 세웠다. 전쟁 직후였기에 석유풍로 같은 인기상품도 흔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석유풍로는 유면조절 장치가 없는 재래식이라 불꽃을 높일 수도 줄일 수도 없었다.
"유면조절이 가능한 석유풍로가 발명된다면 굉장히 편리하겠지? 좋아 한번 해 보자. 내가 직접 만들어 보는 거야."
이데는 스스로 유면조절기를 만들기로 결심하고 계속해서 흘러갔지만 이데의 연구는 좀처럼 진전이 없었다.
"유면의 높낮이를 간단하게 조절하는 방법이 없을까? 번잡하지 않고 누구나 손쉽게 할 수 있는....... 분명 방법이 있을 텐데."
이데는 몹시 안타까웠다. 그러던 중 문득 전쟁 중에 살펴본 대포의 발사대에 느슨하게 장착된 나사가 떠올랐다.
"그래, 바로 그거야! 그것을 이용해서 유면을 조적하자."
이데는 곧 나사의 원리를 이용하여 유면조절기를 만들어 보았다. 성공이었다. 마침내 그는 훌륭한 석유풍로를 발명해 낸 것이었다. 이데는 이 발명으로 전세계에 '이데 석유풍로'의 선풍을 일으켰다. 이것은 다른 종류 가운데 같은 계통의 것을 이용하여 실용신안을 취득한 예이다.
지우개 달린 연필
수학에서 1+1=2이다. 하지만 발명에서는 하나에다 하나를 더한 것이 때때로 무한대를 만들기도 한다.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지우개가 달린 연필'이 바로 이런 발명의 대표적인 예이다. 가난한 화가지망생이자 15세짜리 소년가장이었던 하이만이 이 작품을 고안해 낸 것은 1867년 7월의 일이다.
당시 미국 필라델피아에 살고 있던 하이만은 지독한 궁핍 속에서 병든 홀어머니를 간호하며 먹고 살기 위해 그림 그리기에 몰두 했었다. 그러나 대화가의 꿈은 자꾸만 사그러들고 냉혹한 현실만이 그를 몰아세웠다.
어느 추운 겨울날 마침 그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일찍부터 열심히 데생작업을 하고 있었다. 오전 중으로 그림을 완성해 내다 팔아야 끼니를 이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작은 사고가 생겼다. 데생이 잘못돼 지우고 다시 그려야겠는데 도무지 지우개를 어디에 두었는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온 방 안을 샅샅이 뒤졌으나 지우개는 끝내 찾을 수 없었고, 결국 한 장의 그림도 그려내지 못했다. 유난히 건망증이 심했던 하이만에게 종종 일어나는 일이었다.
다음 날부터 그는 지우개를 실을 꿰어 연필에 매달아 사용해 보았다. 잃어버릴 염려는 없었지만 연필을 사용할 때마다 지우개가 덜그럭거려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외출을 하기 위해 모자를 쓰는 순간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반짝이는 영감을 얻는다.
"지우개를 연필의 머리부분에 모자 씌우듯 고정시키면 잃어버릴 염려도 없고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겠구나!"
서둘러 양철조각을 구해 연필과 지우개를 접속시켜 보았더니 고민이 말끔히 해소되었다.
친구의 도움으로 특허출원을 마친 하이만은 리버칩 연필 회사 사장을 찾아갔다. 사장은 10년 동안 매년 5천 달러씩 주는 조건으로 하이만의 특허를 사들였다.
지우개가 달린 연필은 나오기가 무섭게 날개돗친 듯 팔려 나갔다. 하이만은 이 작은 '1+1의 발명철학'으로 아틀리에를 세우고 마음껏 그림을 그려 드디어 국전에 입선했다. 또 노하우를 사들인 리버칩 연필회사는 단비 맞은 죽순처럼 쑥쑥 자라서 가내공업 수준의 회사에서 일약 세계 제일의 연필회사로 변신할 수 있었다.
지하철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발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모방능력 때문.
새의 비행능력, 박쥐의 레이더 능력, 거미의 공학적 능력, 식물의 광합성 능력 등 자연의 능력을 모방한 발명품들이 인간의 만물의 영장 자리를 지켜 주고 있다.
지하철도 자연의 모방에서 비롯된 것 중의 하나이다.
수송의 역사상 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처음 낸 사람은 영국인 찰스 피어슨.
찰스가 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떠올린 것은 두더지 구멍 때문이었다.
"모든 동물은 지상의 길로 다닌다. 그러나 두더지는......."
1843년 찰스는 런던 시의회에 세계 최초의 지하철도 시스템을 제안했다.
"미친 사람!"
런던 시의회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찰스는 지하 철도의 중요성을 끈질기게 제안했고, 10년 후 런던 시의회는 찰스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세계 최초의 지하철도가 뚫린 곳은 파딩턴의 패린던과 비숍스를 잇는 6킬로미터.
우여곡절 끝에 1863년 개통식이 성대하게 베풀어졌다.
새까만 연기를 자욱이 뿜어내면서 석탄 연료의 증기기관차가 달리고, 메트로폴리탄 디스트릭트 철도의 상업운전이 개시되었다.
첫해만 해도 950만 명의 승객을 운송했다.
이어서 1890년에는 런던에서 처음으로 전기구동의 지하철이 생겨서 시내 어디에서나 2펜스면 탈 수 있게 되었다.
현재 런던시 지하철이 거미줄처럼 발달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제 지하철은 도시인구의 폭발적인 증가와 함께 세계 각국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깨끗하고 우아한 지하철역은 모스크바로 시원스럽게 넓고, 전체가 화강암으로 만들어져 있다.
또 가장 정중한 역은 뮌헨, 가장 체계적으로 설계된 역은 도쿄, 가장 난폭한 역은 뉴욕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 나라 지하철역은 어디에 해당하는가?
표백법
옛날에는 무명이나 삼의 피륙을 하얗게 하는 데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다. 특별한 표백 방법이 없었던 그 당시에는 피륙을 깨끗하게 강물에 담갔다가 햇빛을 쬐어 색이 하얗게 되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도 오래 걸리고 매우 불편한 작업이었다.
얼마 뒤 잿물을 이용한 좀더 좋은 방법이 발명되었다. 피륙을 잿물(재를 물에 풀어 가라앉히고 웃물을 뜬 것)에 담그면 훨씬 빨리 표백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유럽에서는 썩어서 시큼해진 우유와 비누로 되풀이해서 씻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렇게하자 전보다 빨리 표백이 되었지만 아직 천을 희게 하는 표백작업은 몇 달이나 걸리는 큰 일 이었다.
이러한 방법은 우유가 많이 나오는 네덜란드에서 발명되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사람들은 그 방법을 비밀로 했기 때문에 피륙을 표백하기 위해서는 일부러 네덜란드까지 보내어 표백해 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특히 마직물의 경우는 모두 네덜란드로 보내졌다.
18세기가 되면서 네덜란드의 표백기술자들이 영국으로 건너왔다. 그리하여 영국에서도 표백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표백작업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1754년 프란시스 홈이란 화학자에 의해서 새로운 표백법이 발명되었다. 그것은 썩은 우유 대신에 묽은 황산을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그로 인해 표백작업은 한층 더 수월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곧이어 방적기계와 직물기계가 발명되어 실이나 직물이 마구 쏟아지게 되자 다시금 더욱 새로운 표백법의 발명이 절실해졌다.
표백점 앞에는 날마다 산더미 같은 직물이 쌓여갔다. 손님들은 저마다 자기의 천을 표백해 달라고 외쳐댔지만, 그 많은 주문을 다 감당해 낼 수가 없었다. 이렇게 표백기술자들이 곤란을 겪고 있을 무렵 때마침 새로운 발명이 탄생했다.
발명자는 영국의 표백기술자인 찰스 테난트.
그는 소석회에 염소를 흡수시켜 표백분을 발명하였다. 표백분은 아주 짧은 시간에 천을 표백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햇빛에 쪼일 필요도 없기 때문에 넓은 뜰도 필요 없었다.
"이제 얼마든지 손쉽게 천을 표백할 수 있겠구나." 표백기술자들은 모두 한시름 놓게 되었다고 기뻐하였다. 그러나 비록 표백분이 발명되었어도 그것을 싼 가격에 대량으로 생산할 수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원료가 모자라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표백분을 만들기 위해서는 소석회와 염소가 필요하고 염소를 만들기 위해서는 식염과 황산이 필요하였다. 식염은 간단하게 얼마든지 입수할 수가 있었지만 문제는 황산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1736년에 로백과 볼튼이라는 두 영국인에 의해 해결되었다. 그들 덕분에 황산은 매우 싼 가격으로 제조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영국은 산업혁명 이후 대단한 기세로 잇따라 제조되는 직물의 표백에 필요한 황산을 충당할 수 있었다.
최근에는 표백분 대신에 과산화수소수(옥시풀)를 사용하는 방법이 고안되었다. 또한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독일이나 영국에서 형광표백제가 발명되어 피륙을 매우 희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방법은 현재 와이셔츠의 클리닝 등에 많이 쓰이고 있다.
전열매체
일본의 대표적 화학기술 회사로는 쇼켄 화학을 들 수 있다. 이 회사는 규모는 작지만 세계적 화학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쇼켄 화학이 지금의 수준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 회사의 사장 나카지마 도시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신기술을 적극 개발함으로써 전후 일본 경제에 막대한 이익을 안겨 주었다.
"일본이 다시 일어서려면 공업이 성장해야 한다. 그러자면 원가절감이 제일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는 갑자기 군 복무 시절에 인조석유 연구에 몰두하던 일을 생각해 냈다.
"그래 맞아. 전열매체가 매우 중요했어. 더구나 지금은 합성섬유 공업이 발전하고 있는 때가 아닌가. 전열매체는 이 섬유공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야."
당시 일본의 전열매체유는 모두 수입품이었다. 따라서 가격이 너무 비쌌고 공급 또한 원활하지 못했다.
"전열매체유를 우리 손으로 직접 만들 수만 있다면 좋을텐데....... 모든 섬유의 값이 싸질거야. 그래, 한번 해 보자. 성공할 수 있어."
나카지마는 전열매체유를 자체 개발하기로 결정하고 연구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거듭된 실험 끝에 나프탈렌을 매체유의 재료로 결정하였다.
그는 야하타 제철소에 근무하는 기사의 도움으로 나프탈렌을 대량 생산하였다. 그리고 이 나프탈렌을 재료로 하여 새로운 전열매체유를 완성하는 데 성공했다. 그 때가 1952년이었다.
"드디어 해냈구나. 내 소원이 이루어졌어.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다."
나카지마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 때로부터 약 보름 후에 그는 제품 설명회를 개최하여 전열매체유를 홍보하였다.
"이 매체유는 수입 전열매체유 보다 가격이 매우 쌉니다. 그러므로 생산원가를 절감하는 효과를 가져옵니다."
설명회가 진행됨에 따라 참석자들은 점점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쇼켄 회사의 규모가 작기 때문에 우습게 생각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신개발품에도 별로 기대를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새로운 전열매체유의 효능에는 모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신문의 경제란에는 쇼켄 화학의 전열매체유에 대한 기사가 크게 실렸다. 이를 본 기업들은 앞다투어 전열 매체유를 주문하였다. 반응이 너무 대단해서 나카지마 자신도 놀랄 정도였다. 이를 계기로 쇼켄 회사는 일본에서 중견 기업으로 도약하게 되었다.
혈당측정장치
인간의 생명과 직결된 의료기기의 발명은 전기, 전자는 물론 물리, 화학 등의 모든 기술이 뒷받침될 때 가능한 것이다. 의학, 그 한가지만으로 인간의 생명을 다룰 수는 없는 것이다.
최근 미국에서 선보인 피를 뽑지 않고도 혈당측정이 가능한 의료기기가 그 좋은 예.
휴대까지 가능한 이 획기적인 혈당측정장치를 발명한 사람은 뉴멕시코 대학 의과대학의 로빈슨 박사팀과 미국 샌디아고 연구소의 의료기기 연구팀.
"당뇨병 환자들이 겪는 여러 가지 고통 중의 하나가 매일 혈당검사를 위해 피를 뽑는 일이지요, 검사를 위해 빼는 피의 양은 소량이지만 날마다 손가락을 찔리는 것은 큰 괴로움이 아닐 수 없지요."
두 연구팀을 이끌어 성공적인 결과를 얻어낸 로빈슨 박사의 발명동기는 평범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놀라웠다. 작은 계산기 크기의 기기 속에 손가락 하나만 넣으면 고통 없이 혈당측적이 이루어 지는 것이다. 이 의료기기는 오래된 핵무기 내부의 화학적 변화를 탐지하는 데 사용하는 기술을 응용한 것이 특징.
"환자의 손가락이 기기 안에 들어오면 적외선 펄스가 손가락 조직으로 침투하여 스펙트럼으로 바뀌고, 이 스펙트럼을 화학계량 분석방법으로 평가하여 혈액 속에 흡수된 포도당의 양을 측정하는 것입니다."
로빈슨 박사에 따르면, 이 때 분석되는 수치는 환자의 손가락 두께와 피부의 색소 등 개개인의 차이를 모두 감안한 것으로 그 오차는 제로(0)에 가깝다는 것.
현재 특허출원 및 시작품 제작 단계에서 지속적인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는 이 의료기기는 특히 수술할 때 심장박동을 측정해 주는 장치와 마찬가지로 수술이나 산모가 아이를 분만하는 동안에도 계속 혈당수치를 측정할 수도 있다.
로빈슨 박사는 이 의료기기의 원리는 응용범위 또한 실로 넓다고 자랑한다.
즉 이 원리를 응용하여 적외선을 이용, 혈액 속의 콜레스테롤과 알코올을 측정할 수 있는 의료기구도 연구하고 있는데 이미 완료단계에 있다는 것.
하이테크 자장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아기가 울기 시작하면 경험이 없는 엄마들은 당황하게 된다. 또한 주변의 사람들에게는 심각한 소음공해를 줄 수도 있다.
그 동안 갓난아기를 잠재우기 위해 젖을 주기도 하고 자장가를 불러 주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했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그러나 이제 희한한 자장가가 판매되기 시작해서 아이를 낳게 될 산모들의 마음을 설레이게 하고 있다.
영국의 학교 교사인 로저 와넬이 이 신제품을 개발한 장본인.
와넬은 음악을 듣다가 기계가 고장이 나서 지직거리는 소리가 나자 연장을 들고 손수 고치지 시작했다.
기계를 분해하려는 순간 옆에서 울던 아기가 울음을 그치고 잠이 들어있는 것을 보고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전축고치는 작업을 중단하고 엉뚱한 실험을 하게 되었다.
옆집에서 우는 아이를 부모의 허락을 얻어 자신의 방에 눕히고 고장난 전축의 리듬 있는 소리를 들려 주었다. 그 결과 20초도 안 되어 막무가내로 우는 아이가 울음을 멈추고 새근새근 잠을 자는 것이었다.
와넬은 다시 여러 아이들에게 똑같은 실험을 했는데 30초내에 10명의 우는 아기 중 9명을 조용히 잠들 수 있게 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빅터음악공사는 와넬과 계약을 체결하고 이 리듬 있는 소리를 카세트 테이프에 담아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 리듬 있는 소음은 아기가 엄마의 자궁 속에서 듣는 소리와 비슷하다고 말한 와넬은 태어난 지 10주 이내의 아기에게 적용해야만 효과가 있다고 설명했다.
잠수함
잠수함의 시초가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220년 전에 발명되었다. 미국의 독립전쟁 당시 예일 대학에 다니던 데이비드 브슈넬에 의해 만들어진 '터틀'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 영국은 대영제국이란 이름에 걸맞게 세계 도처에 식민지를 두고 있었다. 미국도 영국의 식민지였다.
1755년에 마침내 전쟁이 일어났다.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고자 했던 미국은 영국과의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전쟁은 치열했다. 산업혁명 이후 공업국가로 발전을 이룬 영국은 최신무기와 무적 함대를 이용해 미국 독립군을 전멸시키려 했다.
뉴욕 항구의 부두에 서 있던 데이비드 브슈넬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오직 자유를 위해 목숨도 버린 젊은 병사들의 주검이 즐비한 길에서 영국의 많은 군함들이 바라보며 울분을 삼켰다.
"군함! 군함을 없애야 해."
그러나 해안을 정복한 영국군을 그 곳에 포대를 구축하고 있어서 보통의 배로는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바닷속을 뚫고 들어가 적의 군함을 폭파시킬 수는 없을까? 바닷속으로 숨어 움직이는 배가 있다면 좋을텐데......."
물 속을 다닐 수 있는 배에 관한 생각을 거듭하다 브슈넬은 무심히 물 위를 떠가는 술통을 보았다. 통 속에는 약간의 물이 들어 있어서 파도에 밀리며 물 위로 뜨기도 하고 가라앉기도 하면서 떠다녔다.
"바로 저런 나무통에 사람이 들어갈 수 있다면...... 물 속으로 가라앉고 싶을 때는 통 속에 물을 넣고 물 위에 뜨고 싶을 때는 물을 빼면 될거야."
브슈넬은 곧바로 연구를 시작했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만들어진 브슈넬의 잠수함은 달걀을 세워놓은 것 같았으며, 크기는 술통만한 것이었다.
마치 장난감처럼 조그만 이 배는 안쪽과 위쪽에 스크루(추진기)를 달고 있고, 그 속에서 사람이 그것을 조종하게 되어있었다. 배의 뒤쪽에 달려 있는 키를 움직여 방향을 조종하고, 두 발로 배 밑바닥의 핸들을 돌려 물의 양을 조절해 배를 뜨게 하거나 가라앉게 했다.
1776년 완성된 브슈넬의 1인용 잠수함 터틀호는 지금 보면 허술하기 이를데 없지만 영국군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데 한몫을 했다.
초고속 제빙기
아무리 좋은 냉장고라도 얼음을 만드는데 드는 시간은 최소한 20분에서 1시간까지 소요된다.
그렇기 때문에 집에 갑자기 손님이 왔을 때나 급하게 얼음이 필요할 때는 속수무책이었다.
하집만 이제 단단한 얼음을 5분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한 기업이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
화제의 기업은 미국의 가전업체인 록키 리서치사.
"엄청난 첨단기술 같지만 실은 종래의 냉동기 원리를 조금 개선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열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기 위해 냉매의 응축과 증발이라는 과정을 거치는 것까지는 똑같다. 그러나 이 기술이 종래의 방법과 다른 점은 기계적인 압축장치나 냉매를 사용하지 않고 대신 화학반응으로 처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존층을 파괴하는 프레온가스나 그 비슷한 물질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이른바 '역 마이크로웨이브'라는 이 방법은 열을 가하면 기체모양의 암모니아가 방출되는데 방출된 암모니아는 응축기로 들어갔다가 다시 본래 위치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이렇게 암모니아를 순환시키면 냉각장치 속의 온도를 영하 15도까지 떨어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때 드는 시간은 5분도 안되는 짧은 순간이다.
"이 기술은 얼음을 만드는 냉장고에만 이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술개발팀에 따르면 가정용 냉장고는 물론이고 산업용 냉장고, 에어컨 등 이용할 수 있는 제품은 수없이 많다.
아직 제품으로 나와있는 것은 없지만, 조만간 이 기술을 이용한 각종 에어컨, 냉장고 등이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프레온 가스를 먹는 미생물
1996년부터 오존층을 파괴하는 물질인 프레온 가스의 사용이 전면 금지된다. 이 때문에 비상이 걸린 곳은 프레온 가스를 사용하는 에어컨 및 냉장고 제작업체.
제작단가가 높아지기는 하지만 대체 물질이 개발되었다. 그러나 산 너머에는 또 다른 산이 있는 법. 이미 생산되어 판매된 에어컨과 냉장고 속의 프레온 가스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로 또다시 큰 산에 부딪쳐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관련 제작업체만의 문제가 아닌 지구촌의 문제. 오존층 파괴도 문제지만 사람들에게는 암까지 유발하는 유해물질로 손꼽히는 프레온 가스.
그런데 이 유해물질을 기분 좋게 포식하는 미생물, 즉 발테리아가 발견되고, 이것을 대량으로 번식할 수 있는 방법까지 발명되어 화제가 되고 있다.
지구 수호신으로까지 극찬받는 화제의 발명가는 미국 국립지질연구소에서 일하는 미생물학자 데릭 러블리.
"지구의 오존층을 파괴, 지구가 멸망한다는데 작은 편리(냉장 및 냉방)를 위해 더 이상 사용할 수는 없지요."
지극히 평범한 동기에서 시작한 연구가 뜻밖의 결실을 맺었다며 기뻐하는 데릭이 발견한 미생물의 이름은 '클로스트리듐 파스퇴르아늄 박테리아'.
긴 이름을 가진 이 미생물은 이미 대기 중에 흩어진 프레온 가스까지 먹어치우지 못하지만 에어컨이나 냉장고를 폐기할 때 나오는 프레온 가스는 순식간에 먹어치우는 완성한 식욕을 자랑한다.
"이 미생물을 발견하고, 번식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데 특별한 비결은 없었지요."
데릭은 많은 국내외 기자 및 관련인들의 비결을 묻는 질문에 시달리면서도 미생물학자로서 지구수호에 일조를 한 것에 대단한 긍지를 갖고 있었다.
그의 연구과정은 여느 학자와 다른 것이 없다.
직극히 평범한 동기, 학자 본연의 꾸준한 연구, 미생물학자라면 누구나 느껴야할 사명감 외에 무슨 비결이 있겠느냐는 반문 외에는 말이 없다.
미국 국립지질연구소의 의욕도 대단하다. 세계 각국에서 연구되고 있는 어떤 물질보다도 뛰어난 효과를 몰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이에 따라 프레온 가스 사용이 전면 중단되는 1996년부터는 세계 각국의 기술 수입이 쇄도할 것으로 보고, 그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다.
매독 치료제
1910년까지만 해도 매독은 불치의 병이었다. 요즘의 에이즈만큼이나 무서웠던 병으로, 그 발병원인이나 결과도 거의 비슷했다.
이 무서운 병의 치료제를 발명한 사람이 폴 에르리히이다. '살바르산'으로 불리는 이 기적의 약품은 에르리히가 606번째의 실험에 성공하여 얻은 것이라 해서 '606'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는 다른 생체조직은 생하지 않고 병원균만을 죽이는 화학약품의 발명에 힘을 기울였다. 즉 그가 원하는 것은 실험동물에는 아무 해가 없이 오직 병원균만을 죽이는 화학약품을 얻는 것이었다.
에르리히는 이 화학약품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와 실험에 열중하였다. 그가 실험에서 얻은 화학약품의 수도 계속 늘어갔다.
화학약품이 1호에서 시작하여 121, 122, 290, 300호로 늘어갔다. 그렇지만 신통한 효과를 얻지는 못했다. 화학약품이 418호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비소화페닐글리신이 만들어졌다.
이 비소화페닐글리신에는 아프리카의 수면병을 일으키는 트리파노솜균을 죽이는 강력한 힘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418호에 그치지 않고 실험을 계속했다. 화학약품의 수도 600을 넘어서 601, 602, 606호에 이르렀다.
606호는 디하이드록시디 아미노 벤젠(염화수소)이었다. 이 화합물은 처음에는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로부터 2년 뒤의 어느 날. 606호의 재실험에 하던 에르리히 박사는 감짝 놀랐다.
"이럴 수가! 스피로헤타 병원균이 이렇듯 깨끗하게 살균되다니! 이건 정말 놀라운 일이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606호 화학약품이 지독한 매독균인 스피로헤타 병원균을 강력한 힘으로 살균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매독이라면 변변한 치료약 하나 없이 한번 걸렸다 하면 고생 끝에 죽고 마는 그런 병이었다. 매독에 대한 두려움은 요즈음 사람의 에이즈에 대한 공포와 다를 것이 없었다.
에르리히는 확신을 얻기 위해 수없이 실험을 거듭했다.
1910년 드디어 에르리히는 606호의 효과를 세계에 발표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세계는 놀라움과 기쁨을 금치 못했다. 가장 비극적인 불치병이라 하던 매독이 정복되었던 것이다.
얼음톱
'얼음톱'을 발명하여 훌륭한 기업인이 된 마치다 세시로.
그는 일본 우라와시의 작은 제빙공장 사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복한 환경에서 너무 귀엽게만 자란 마치다는 결국 허영꾼이 되어버렸다.
바탕은 착하고 헌량한 그였지만, 허영기가 있어서 밤낮으로 노는 일에만 정신을 쏟았다. 온종일 마치다가 하는 일이란 카바레나 다방으로 친구들을 불러내 한턱을 내고 노는 일. 그리고 나면 그 모든 비용은 언제나 아버지인 얼음공장 사장의 몫이었다.
그렇게 놀면서 허송세월을 하다 보니 마치다의 나이도 어느덧 28세가 되었다. 제 또래의 젊은이들이 저마다 열심히 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점점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가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이런 식으로 살아간다면 나는 인간쓰레기가 될거야. 무언가 새로운 결심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마침내 마치다는 일본발명학회 회장인 도요자의 도요를 찾아가 인생 상담을 요청했다.
그런데 그의 한 마디가 마치다의 인생 전환점이 될 줄이야! 전직 교사 출신인 도요자와의 한 마디는 구제불능의 허영꾼이던 마치다를 크게 감동시켰다.
"마치다군! 진정한 즐거움은 항상 열심히 연구하는 데 있네. 스스로 훌륭한 인물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게나. 카바레나 다방의 향락은 물거품과 같은 걸세. 만약 진정으로 자네가 새 사람이 되고 싶다면 부친의 얼음공장에 개선할 것이 없는가 하는 것부터 찾아보게나."
"감사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회장님"
마치다는 날아갈 듯한 기분으로 도요자와의 사무실을 나왔다.
여름이 되자 얼음공장은 눈코 뜰 새가 없을 정도로 바쁘게 돌아갔다. 일손이 모자라 마치다까지 톱으로 얼음을 잘라야할 형편이었다. 그는 이른 새벽부터 서너 명의 젊은 공원들과 함께 얼음을 잘랐다. 바위덩이만큼이나 큰 얼음을 알맞은 크기로 자른다는 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었다. 힘이 센 젊은이라도 2-3시간이면 솜처럼 몸이 나른해질 정도로 고된 작업이었다.
"이처럼 기계 문명이 발달한 시대에 톱으로 자르는 기계라........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훤씬 경제적이고 편리할텐데."
마치다는 스스로 얼음 자르는 기계를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그 날 이후 마치다는 매일 제재소를 견학하고, 그 원리를 토대로 얼음 자르는 기계톱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마치다는 나무를 자르는 톱의 원리를 응용한 얼음용 톱을 발명했다. 방법은 간단했다. 제재소 톱과 비슷하고 단지 톱날만을 쉽게 녹이 슬지 않는 특수 강철로 바꾼 것이었다.
비타민
1734년 여름, 그린랜드를 항해 주잉던 영국배에서의 일이다. 항해를 하던 선원들 가운데 한 사람이 괴혈병에 걸려 신음하고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괴혈병은 죽음과 직결된 무서운 병이라고 생각했게 때문에 선원들은 아직 죽지도 않은 환자를 항해 중에 발견한 섬에 홀로 남겨놓고 떠나버렸다.
얼마 후, 환자는 의식을 되찾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아침 햇살의 영롱한 빛을 받아 더욱 탐스럽게 빛나는 과실과 아침 이슬이 채 마르지 않은 싱싱한 풀들이었다.
환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손을 뻗어 그것들을 입으로 가져갔다. 풀과 과실로 허기를 채운 환자는 다시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고, 그가 눈을 떴을 때는 이상하게도 몸이 가뿐하며 고통도 훨씬 덜 하였다.
며칠 동안을 그렇게 풀과 과실을 먹으며 지낸 화자는 괴혈병이 말끔하게 나아 드디어 사람들에 의해 구조되었다.
그는 자신을 구해 준 사람들에게 자초지종을 자세히 설명했으나 믿어 주는 사람이 없었다.
"혹시, 저 사람 정신이 돈 게 아니야? 섬에 혼자 있더니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이야!"
사람들은 오히려 그를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며 비웃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유난히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있었다. 영국 해군의 제임스 린드라는 의사였다.
"그래, 그의 이야기는 정신이 돈 사람의 헛소리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야. 분명 그가 섭취한 음식물 가운데 괴혈병을 치료하는 특효약의 성분이 있을 거야."
린드는 여러 종류의 식물을 분석한 끝에 야채와 레몬의 즙에 그 물질이 있음을 알았다. 그는 곧 그 레몬즙을 괴혈병 환자들에게 먹여 보았다. 며칠 동안 계속하니 괴혈병 환자들은 거짓말같이 깨끗하게 회복되었다.
린드는 곧 실험 결과와 레몬즙의 중요성을 적은 보고서를 들고 상관에게 갔다.
"아니, 자네가 이런 어리석은 말을 하다니, 도대체 괴혈병이 어떤 병인데 레몬즙으로 고칠 수 있고 더군다나 예방이 가능하단 말인가! 다시는 그런 말 입밖에 꺼내지도 말게. 알겠나?"
린드는 크게 실망했으나 그들의 무지 앞에서 달이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그 후 5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사람들은 점점 린드의 말을 믿기 시작했고, 영국 해군도 이 사실을 받아들여 군함에 승선하는 모든 승무원에게 레몬즙을 공급하여 이 병을 예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괴혈병의 원인이 밝혀진 것은 아니었다. 괴혈병이 비타민 C의 결핍으로 인한 병인지는 모르고 19세기 말엽에는 괴혈병을 일종의 전염병으로까지 단정해 버렸다.
벤츠의 삼륜차
1970년대 초반까지만해도 세 개의 바퀴가 달린 소형트럭. 이름하여 삼륜차라는 것이 짐을 실어 날랐다.
뒤뚱뒤뚱 걷는 아이 같은 불안감이 없지 않았지만 좁은 골목길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어 더없이 편리한 운반수단이었다.
어느덧 자동차의 역사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골동품이 되어버렸지만 자동차의 아버지로 불리는 벤츠는 이 발명으로 부와 명예를 동시에 거머쥘 수 있었다.
작고 가벼운 자동차를 발명하여 판매한 사람으로도 유명한 벤츠는 엔진발명에도 손을 대고 있었다. 성능 좋은 엔진의 발명이 곧 성능 좋은 자동차 발명의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보다 앞서 오토와 랑겐이 발명하여 특허를 받은 엔진 때문에 손 쓸 틈이 없었다.
오토와 랑겐이 발명한 엔진과 다른 원리로서 성능 또한 뛰어난 엔진을 발명해야만 특허를 받아 상품으로 생산할 수 있는데 그것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물러설 벤츠는 아니었다.
"두 사람의 특허기술을 피하고 여기에 또 다른 기능을 추가하기만 하면 되는데......"
벤츠의 첫작업은 오토와 랑겐이 발명한 엔진을 분해하여 그 구조와 역할을 분석하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엔진을 주물러 온 그에게는 낯선 일이 아니었다.
교묘하게 구조를 바꾸고 전기점화장치를 붙여 보았다. 성공이었다. 오토와 랑겐의 특허기술을 그럴싸하게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엔진으로 만든 자동차는 허약하고 힘이 모자라 상품화에는 미흡했다.
바로 여기에서 생각한 것이 삼륜차였다.
"그래, 이 엔진을 좀더 개량하여 삼륜차를 만드는 거다."
벤츠의 생각은 적중했다.
1887년 마차가 달리는 거리에 등장한 벤츠의 삼륜차는 구경꾼들을 열광시켰다. 삼륜차가 모습만 드러내면 거리는 눈깜짝할 사이에 구경꾼들로 가득 차 버렸다.
1888년에는 프랑스에도 조립공장이 세워지고 그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이 때 조립된 '프랑스 벤츠'는 지금도 런던 과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1958년에 있었던 공개 시운전에서 평균 시속 13.6킬로미터로 런던과 브라이튼 사이를 달려 또다시 많은 사람들을 열광시켰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우리 나라를 비롯한 개발도상국 및 후진국 시장에까지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리기도 했다.
와트의 증기기관
전력의 단위를 나타내는 데 쓰이는 기호 'W(와트)'는 증기기관을 발명한 영국의 발명가 와트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와트는 증기기관을 발명한 사람으로 유명하지만 그가 발명한 것은 증기기관 외에도 많다.
그는 특유의 끈기와 집념으로 영국의 산업 혁명을 주도한 대표적인 발명가로 손꼽히고 있다.
와트는 1736년 영국의 북부 스코틀랜드 서해안의 항구 도시 그린녹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와트의 형제들은 몸이 약해 어려서 모두 죽었기 때문에 와트의 부모는 어린 와트를 화초처럼 곱게 키웠다.
그는 학교 성적도 신통하지 못했다. 그의 아버지는 여러모로 생각한 끝에 와트가 산수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닫고 그를 학교의 산수반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그것은 와트에게는 정말 행운이었다.
산수반에 들어간 그는 놀랍게도 변해 갔다. 학교에도 즐거운 마음으로 갔고 학과공부도 열심히 했다. 그는 더 이상 어리광쟁이. 게으른 와트가 아니었다. 그의 산수 실력은 학교에서 가장 우수했고 그 외의 다른 모든 학과에도 흥미를 붙여 열심히 했다. 또한 와트는 관찰과 실험을 좋아하며 틈만 나면 아버지의 작업장으로 달려가 직접 손으로 실험을 하고는 했다.
실제로 그가 만든 도르래며 기증기, 아코디언 등은 어찌나 정교한지 보는 사람마다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감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와트는 늘 자신을 걱정하고 따뜻하게 보살펴 주던 어머니를 잃는 슬픔을 맛보아야 했다.
와트의 아버지는 더 이상 와트를 이대로 시골에만 둘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를 런던으로 보낼 결심을 하게 됐다. 아버지를 홀로 남겨 둔다는 것이 마음에 거렸지만 와트는 아버지의 간곡한 부탁을 저버릴 수 없었다. 결국 와트는 훌륭한 기술자가 되기 위해 런던으로 떠났다.
1755년, 런던에 도착한 와트는 수학기계공장의 견습공이 될 수 있었다. 와트는 신입견습공이 되어 온갖 고생을 격으면 남보다 몇 배나 더 열심히 일을 배워갔다.
처음 와트가 만들어 낸 것을 놋쇠로 된 평행자였다. 그리고 뒤이어 다른 사람들이 2년에 걸려서 만드는 상한의(사분의라고도 함. 천체의 높이를 재는 것)를 한 달 정도에 만들었다.
1756년 8월 와트는 마침내 런던에서 시작했던 견습공 생활을 끝냈다. 기술자가 되기 위해서는 보통 7년 정도의 기산이 걸렸지만 와트는 1년에 다 배울 수 있었다.
와트는 1757년 글래스고 대학의 수학기계 기술자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와트는 뉴커먼의 배수기관 모형수리를 의뢰 받았다. 그는 기관의 열효율이 나쁘다는 것을 알아채고 콘덴서를 분리하는 착상을 얻었다. 뉴커먼의 기관에서 착상을 얻게 된 와트는 1769년 로버크의 원조를 얻어 증기기관에 관한 최초의 특허를 얻었다.
제 4 부 작은 아이디어로 황금방석
워크맨
소형 카세트 플레이어의 대명사가 된 워크맨. 일본 기업을 서구에 뿌리 내리도록 한 일등공신 워크맨은 어떻게 태어났을까? 그 놀라운 성능만큼 홍미로운 발명 일화가 숨어 있다.
거리를 소리 없는 음악으로 가득 메우고 있는 워크맨은 실상 실패한 아이디어로부터 비롯되었다.
처음 워크맨의 본체를 개발한 사람은 소니의 연구개발원인 이라 미츠로. 그는 당시에 유행하던 테이프 레코더인 프레스 맨을 개조해서 신상품을 만들 작정이었다.
크기가 아담하고 스테레오 음을 내는 테이프 레코더를 만들겠다는 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애초의 계획은 간데없이 녹음기능이 빠진 이상한 형태의 제품이 나오고 말았다.
당시의 테이프 레코더들은 신문기자들이 거의 인터뷰 녹음용으로 활용하던 것이었기 때문에 녹음기능이 없다는 것은 알맹이가 빠진 격이나 다름 없었다. 결국 이라 미츠로의 역작은 사라질 위기에 놓이고 말았다.
바로 이 때 우연히도 이 작은 물건이 소니의 명예 회장인 이부카에 눈에 띄었다. 그는 여기서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테이프 레코더라고 녹음하는 데만 사용하란 법이 있을까? 음질만 좋다면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 사용할 수도 있을 거야!"
이부카는 카세트 플레이어가 내는 훌륭한 음질에 착안하여 상식을 뒤엎는 아이디어를 배출한 것이다. 그는 당시 함께 연구 중이던 헤드폰을 이 플레이어와 연결하여 새로운 상품을내도록 지시했다. 정말 파격적인 시도였다.
처음 이 사실이 알려졌을 때 관계자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실험실에서도 실패작이라고 낙인 찍힌 물건이 대중에게 대접을 받을 수 있겠느냐며 냉소를 머금었다. 녹음이 안 되는 카세트 플레이어는 있을 수 없다고 그들은 차갑게 장담했다.
그러나 대중의 반응은 놀라웠다. 시장에 나오자마자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심지어는 외국에서 이 제품을 사기 위해 일본을 찾을 정도였다. 이 덕분에 소니는 당당 세계 일류기업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이라 미츠로의 발명정신과 이부카의 상식을 뛰어넘는 아이디어의 개발. 시대의 명물 워크맨은 이 두 사람의 능력이 하나가 되어 탄생했다.
"구태의연한 자세로는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다. 도전하는 자세만이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이부카와 이라 미츠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카뷰레터
자동차의 연료 절약, 열효율 향상, 품질개선에 일대 혁명을 부러일으킨 카뷰레터도 생활 주변의 사소한 현상에서 탄생되었다.
발명가는 찰스 듀리어. 듀리어는 몇 년에 걸쳐 연료 절약형 자동차를 연구하고 있었다. 자동차를 분해하여 조립하기를 수백 번. 그러나 그럴수록 연구는 미궁으로 빠져 들었다.
"혹시 이 일은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아냐, 불가능이란 결코 있을 수 없어. 내가 해 내겠어."
듀리어는 몇 벌이고 자기 자신을 채찍질하며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문제의 실마리가 풀렸다.
"여보, 저 좀 나갔다 올게요."
그날 따라 듀리어의 부인은 한 껏 모양을 부리며 외출 준비룰 했다.
듀리어는 옷매무새를 고치는 부인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함참을 다듬던 부인은 마지막으로 분수식 향수병을 집어들고는 가볍게 뿌려 주었다.
분무식 향수병은 안개처럼 향수를 내뿜으며 주위를 그윽한 분위기로 바꾸어 놓았다.
향수를 찍어 바를 때에 비해 반도 안 되는 양이 뿌려졌는데도 효과는 몇 배나 나타나는 듯 했다.
순간 듀리어의 머리에 번개처럼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다.
'이 원리를 이용해 보는 거야. 어디 한번 해 보자.'
원리를 깨닫자 연구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듀리어는 엔진의 실린더에 가솔린을 안개처럼 불어 넣는 방법으로 카뷰레터를 선보였다.
발명에 성공을 거둔 듀리어는 서둘러 특허출원을 했고, 얼마 후 카뷰레터는 당당히 특허로 등록이 되었다. 이렇게 되자, 세계 각국의 자동차 메이커들은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실로 간단한 원리의 첨단 기술이었기 때문에 손쉽게 모방할 수도 있었으나, 특허라는 무서운 무기가 버티고 있어 모든 자동차 회사들은 꼼짝 없이 듀리어에게 로열티를 지불하고서야 카뷰레터를 만들 수 있었다.
이로 인해 듀리어는 세계적인 발명가로 그 명성을 떨치게 되었으며, 아울러 엄청난 부와 명예를 동시에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알루미늄 제련법
알루미늄처럼 널리 쓰이는 금속도 흔지 않다. 그러나 1888년까지만 해도 은보다도 비싼 귀금속에 속했다.
이 때문에 많은 과학자와 발명가들이 알루미늄 제련법에 도전하기도 했다.
최초의 발명가는 덴마크의 물리학자 외르스테드로 1825년 알루미늄을 만들었고, 1827년 독일의 뵐러도 외르스테드의 제련법을 개선하여 알루미늄을 만들었으나 두 사람 모두 실험실의 수준에 그쳐 버렸다.
대량생산이 가능한 알루미늄 제련법의 발명에 성공한 사람은 미국 오하이오주 출신인 찰스 마틴 홀.
"알루미늄이 뭐길래 은보다도 비싸단 말인가?"
대학에서 금속공학을 공부하는 홀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홀은 이때부터 창고에 임시 연구실을 차리고 알루미늄 제련법 연구에 착수했다.
'금속이라는 것은 자연상태로는 많은 화합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이 화합물에서 금속을 끄집어 내려면 다른 비금속의 물질을 분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산화철은 코크스(탄소)와 함께 데우면 산소와 쇠를 분리할 수 있다. 이것이 제철의 원리이다. 보크사이트는 불순한 산화알루미늄이다. 그러므로 산소와 알루미늄으로 분리해야 한다. 그러나 알루미늄과 산소의 결합은 매우 강력하다.'
홀의 머리는 금속공학도답게 매우 빠르게 돌아갔다.
그러나 산화알루미늄인 보크사이트는 코트스를 사용해도 산소가 분리되지 않았다. 물에 녹여 전기분해를 시도하려 했으나 물에 녹지도 않았다.
홀의 연구는 벽에 부딪쳐 버렸다. 그렇다고 물러설 홀은 아니었다. 홀의 연구는 더욱 활기를 띠었다.
"어쩌면 천연의 광물 속에 보크사이트를 녹이는 것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야. 그렇게만 된다면 전기분해도 알루미늄을 만들 수 있는데......."
홀은 수많은 광물을 대상으로 실험에 착수했다. 그러나 번번히 실패였다. 그러던 어느 날 빙정석이라는 유백색의 유리 덩어리와 같은 광물을 실험대상으로 한 것이 행운을 안겨다 주었다.
빙정석을 계속 태우다 보니 섭씨 1000도 가까이에서 녹기 시작했다. 이것에 소량의 보크사이트를 넣어보니 빙정석은 보크사이트를 탐나는 것처럼 녹여갔다.
"됐다. 성공이야!"
홀은 이 데워진 액체 속에 전극을 넣어 직류 전류를 흘러 보았다..
잠시 후에 금속 알루미늄이 음극에 반짝 반짤 비치면서 모여들었다. 마침내 알루미늄 제련법이 발명되는 순간이었다.
홀이 대학을 졸업한지 1년 뒤인 1886년의 일로 당시 홀의 나이 22세였다.
인공조미료
약방의 감초라는 말이 있다. 한약을 지을 때 빠지지 않고 꼭 들어가는 것이 감초라 해서 생겨난 말인데, 요즘은 음식에도 약방의 감초처럼 꼭 들어가는 것이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미원이나 미풍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아지노모토라는 화학조미료가 바로 그것인데, 이는 음식물의 맛에 혁명을 불러일으키기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조미료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이 아지노모토는 저녁 식탁에 오른 하찮은 다시마 국물에서 힌트를 얻어 발명된 것이어서 더욱더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발명가는 맛의 연금술사로 불리는 일본의 이케다 박사.
1908년의 어느 날 저녁이었다. 저녁 식사를 사던 이케다 박사가 갑자기 아내에게 물었다.
"이 국물 맛이 아주 기가 막히구려. 도대체 이것이 무슨 국물이요?"
"아, 네 이거요? 이건 다시마 국물인데요, 맛이 괜찮죠?"
음식의 맛을 보면서 이케다 박사는 머릿속으로 기발한 착상을 번개처럼 떠올리고 있었다.
"일류가 아직까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어떤 기막힌 맛이 다시마 속에 숨어 있는게 분명해."
박사다운 그의 호기심은 결국 그 맛의 정체를 밝혀 내기로 마음먹게 하고 말았다.
이케다 박사는 우선 다시마를 물에 삶아 다시다 국물을 한솥 만들었다. 이런 천 절타는 박사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니만큼, 그는 다량의 다시마를 구해 요리를하듯 많은 다시마 국물을 만드는 데 정성을 쏟았다. 그리고 난 후 그 국물에 계속 열을 가해 수분을 완전히 증발시켰다.
몇 시간이 지나자 수분은 완전히 증발하고 하얀 소량의 침전물이 솥에 남아 있었다. 그 침전물은 다시마의 표면에 붙어 있던 흰 가루로 밝혀진 것이다.
이케다 박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솥에 열을 가했다.
그것은 소금이었다.
"그래. 이렇게 조금씩 단계를 밟으면 결국 그 맛의 정체는 드러나고 말거야. 여기서 중단하는 것은 말도 안 되지."
흰 가루와 소금을 제거하고 또 다시 솥에 열을 가했다. 계속 여러 가지의 요소로 분류하기를 수차례나 거듭했다. 그리고 나서 맨 마지막으로 남은 쌀 모양의 결정체.
그는 즉시 이 쌀모양 결정체의 성분을 화학적으로 분석해 보았다. 글루타민산 소다. 맛의 비밀은 다름 아닌 글루타민산 소다였던 것이다.
박사였던 이케다에게 그루타민산 소다를 만드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밀 등에 들어 있는 단백질을 염산으로 분해하면 되는 것이었다.
비디오 게임
우리는 십대의 어린 발명가를 볼 수 있었던 반면, 육칠십대 노령의 발명가도 볼 수 있었다. 우리가 지금 즐기고 있는 비디오 게임의 창시자도 67세의 노인이었다. 그의 이름은 랄프 H. 베어이다.
그는 유햄프셔 주 나슈아 시에 자리잡은 방위산업회사인 샌덜즈사에 다니는 기술자였다.
"이봐! 자네 집에서는 텔레비전을 어디에 쓰나?"
"보는 거죠. 뭐, 달리 쓸 데가 있겠어요? 텔레비전은 텔레비전일 뿐이잖아요."
베어의 엉뚱한 질문에 동료 직원은 당황해 하며 말끝을 흐렸다.
"미국의 가정에는 집집마다 텔레비전이 있다. 심지어 한집에 텔레비전이 두세 대씩 있는 집도 있다. 이렇게 많은 텔레비전들로 뭔가 다른 일을 할 수는 없을끼?"
베어는 항상 이 문제를 골똘하게 생각했다. 밥을 먹을 때도 길을 걸을 때도, 심지어는 화장실에 앉아 있을 때에도 베어는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뭔가가 꼭 있을 거야. 600만 대가 넘는 텔레비전. 이것을 잘 이용한다면 멋진 사업을 할 수 있어."
이렇게 몇 달이 흐른 뒤였다. 뉴욕의 어느 정류장에서 베어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뉴욕의 어느 정류장에서 베어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앞에는 자신의 손자뻘 되는 아이들이 뛰어 다니고 있었다. 그는 그 아이들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갑자기 무릎을 탁 쳤다.
"맞아! 게임을 하는 거야. 텔레비전으로 하는 게임. 얼마나 멋진 생각인가? 텔레비전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고 싶어할거야. 빨리 시작해야지!"
베어는 기쁨에 넘쳐 격양된 어조로 외쳤다.
뉴햄프셔로 돌아온 베어는 틈틈이 텔레비전 앞에 앉아서 게임을 만드는 데 열중하였다.
그의 작업실에서는 늦은 밤에도 항상 불빛이 새어 나왔다. 이렇게 열심히 일한 덕에 1967년에는 패드볼 게임과 하키 게임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5년 후인 1972년 4월 25일, 그는 특허청으로부터 특허로 등록되었다는 통지서를 받게 되었다.
그 해 봄에 마그나복스사를 통해 '오디세이'라는 가정용 비디오 게임을 보급했고, 약 10만개가 팔렸다. 베어가 상당한 부자가 된 것은 당연하였다.
아이스크림 제조기
기존 발명품의 용도, 즉 쓰임새를 바꿔도 훌륭한 발명이 될 수 있다. 소재회사로서 산업용 제품만 생산하던 '일본경금속주식회사'는 '칠퍼스트'라는 냉축제의 용도를 바꿔 '돈비에'라는 아이스크림 제조기를 만들어 이 분야의 세계시장을 석권했다. 경금속 분야에 이어 생활용품 분야까지 석권한 것이다.
발명가는 이 회사 상품개발부장 우에사카.
우에사카가 칠퍼스트라는 냉축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80년.
"당시 칠퍼스트는 식품창고와 대형냉장고의 냉축제로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었지요. 알루미늄 캔 속에 들어 있는 액체 상태인 칠퍼스트가 하도 신기하여 집안의 냉장고에 넣어 두고 시간이 있을 때마다 꺼내보곤 했지요."
우에사카는 아무도 모르게 칠퍼스트의 또 다른 용도를 연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이 날도 칠퍼스트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고 새로운 용도를 생각하고 있었다.
바로 그 때, 옆에서 우유팩을 뜯던 아들이 칠퍼스트에 우유를 떨어뜨렸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우유방울은 금방 얼어 붙어 버렸다.
"그래, 바로 이거다. 아이스크림 제조기를 만드는 거다."
우에사카의 탄성에 영문을 모르는 아들은 어리둥절해 했다.
우에사카는 서둘러 칠퍼스트 둥근 캔을 이중으로 만들어 아이스크림 재료를 담아 보았다.
조금 후 아이스크림이 만들어진 것은 당연한 결과.
직무발명으로 회사에 신고되자 특허출원과 함께 생산설비 공사가 시작되었다.
첫 생상은 1984년. 눈 깜짝할 사이에 130만 개가 팔려 나갔고, 세계시장 석권도 시간문제 였다. 미국에서는 워크맨 다음가는 히트상품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교류자선기
우리가 하루에도 수십 톤씩 버리는 여러 가지 쓰레기들에는 다시 쓸 수 있는 자원이 많이 있다. 이 자원을 효과적으로 분류할 수 있다면 여기서 절약되는 비용만도 수백억에 이를 것이다. 이 때문에 과학자들은 오랫동안 자원재활용이라는 측면을 연구해왔다.
일본 자력선광(주)를 설립한 하라다 겐자부로도 이런 작업에 성공한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1941년.
일본 본토를 비롯한 일본의 식민지에서는 철광 확보작업이 적극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미국에 선전포고를 감행한 일본이 군수물자를 충당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쇠붙이를 긁어 모으고 있었던 것이다.
만주에 자리잡은 오쿠라 광업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원들은 철광을 개발하여 인이 적게 함유된 고품질의 철을 생산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철광석으로부터 인을 제거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당시에 최고로 알려진 스웨덴의 직류자선기로도 속수무책이었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
오쿠라 광업 기술자인 하라다는 막 캐내온 철광석을 보며 생각을 거듭했다.
이렇게 며칠이 흐른 뒤였다. 하라다는 늦은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바로 그 때였다. 하라다에게 불현 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교류를 이용한 자선기는 어떨까?'
그는 곧 소형 모형을 제작하여 실험에 들어갔다.
"성공이다!"
하라다는 기쁨에 넘쳐 소리를 질렀다.
그는 곧 자선기의 실물 제작을 서둘렀다. 그러나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하라다는 하는 수 없이 하던 일을 멈추고 일본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1947년, 하라다는 다시 취직한 야하타 제철소의 폐기물 처리장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는 산같이 쌓인 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가만, 골라낸다......... 맞아! 내 자선기를 여기다 쓰는 거야!"
2년 뒤인 1949년에 그는 자력선광(주)를 설립하고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져 왔던 슬래그나 가스, 재 등의 쓰레기에서 고품질의 철을 골라냈다.
이를 통해 그가 벌어들인 이익금이 수백억 엔에 달했다. 하라다는 쓰레기로 황금을 만들어낸 것이다.
납가루
물렁물렁한 금속인 납을 미세한 가루로 만드는 데 성공한 사람은 일본전지의 시마즈 겐조였다.
1918년 10워 어느 날 밤, 전보배달원이 황급히 일본전지의 사장실 문을 두드렸다.
"좋은 축전지를 제조하려면 양질의 납가루가 필요하다. 지금 이것이 독일에서 만들어지고 있는데, 그들은 4억 엔의 로열티를 요구한다."
독일에 파견한 이와시로라는 기사가 보낸 전보였다. 회사에서는 곧바로 중역회의를 소집하였고, 중역 대부분은 그것을 사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시마즈 겐조의 의견은 달랐다.
"납가루 제조방법에 4억 엔이라는 막대한 자금을 투자한다는 건 무리라고 생각됩니다. 생산원가가 너무 많이 들면 그만큼 축전지의 가격도 높게 책정돼야 하는데, 그것은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한번 독일과 다른 방법을 연구해 보겠습니다."
시마즈 겐조는 서둘러 연구에 착수했다.
그는 도자기 시험소에 가서 돌을 가루로 만드는 기계를 빌려다 납을 찧기 시작했다. 그러나 납을 무른 금속이라서 떡처럼 될 뿐 가루는 되지 않았다. 그의 친구였던 우에다 박사는 시마즈의 그런 행동을 보고 걱정스럽게 말했다.
"시마즈, 그건 무리일세. 납을 가루로 만들려면 화학적으로 산화시켜야 하네."
그러나 시마즈는 직접 실험을 해 보지 않고서는 그 누구의 말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3주에 걸쳐 밤낮 없이 계속 납을 찧는 데 열중했다. 결과는 물론 실패였다. 그러나 주의 깊게 살펴보니 절구의 안쪽 벽면에 납가루가 조금 묻어 있었다. 그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꼼꼼하게 스푼으로 긁어모아 우에다 박사에게 보여 주었다.
"상당히 놀라운 일일세. 가만있자. 그러면 찧을 때의 마찰에 의해 납이 열을 내고, 그것이 공기 속의 산소와 결합해서 가루가 된 것인지도 모르겠군. 그러나 3주간이나 찧어서 겨우 스푼 하나 정도의 잡가루를 얻었다면 많은 문제가 있지 않겠나?"
그러나 직감력이 강한 시마즈는 '마찰열과 공기 중의 산소의 화합'이라는 두 가지 사실만을 단단히 명심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우선 마찰열을 많이 내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를 고심했다. 그 때 문득 생각난 것이 어릴 때 감자를 나무통에 넣고 빙글빙글 돌려서 씻던 기억이었다.
"그래, 바로 그거야!"
그는 당장 드럼통 같은 것에 작은 납덩이를 많이 넣은 후 돌렸다. 납과 납이 서로 부벼지면서 섭씨 200도나 되는 온도를 냈다.
"마찰열은 이미 충분하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공기 중의 산소와 화합시킬 수 있을까?"
무작정 공기를 불어넣어 보기로 했다. 그는 드럼통에 공기를 불어넣는 장치를 부착했다. 한 시간 운전한 후 결과를 보니 놀랍게도 많은 양의 납가루가 만들어져 있었다. 이렇게 간단하고도 쉬운 발명은 전세계 물리학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는 곧 세계 각국에 특허로 출원, 등록을 받았다.
나중에서야 확인한 일이지만 독일이 4억 엔에 팔려고 한 기술도 드럼통에 넣어서 돌리는 방법으로, 이보다 능률이 훨씬 떨어지는 것이었다.
파일링 시스템
지금은 컴퓨터로 각종 정보처리를 하고 있지만 약 20년 전만 해도 모두 손으로 해야 했다. 따라서 서류를 효과적으로 정리하기 위해 파일링 시스템이라는 것이 등장하였다.
일본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야 비로소 사무 정보 정리 시스템이 도입되었다. 이 파일링 시스템을 도입하여 발전시킨 선구자는 바로 사무용 가구 제조회사 고베이의 창업자 다카하시 야스모토이다.
1946년, 다노 제작소에서 정년퇴임을 앞둔 다카하시 야스모토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갈까?'
그는 한숨을 쉬었다. 그의 머릿속에 이제까지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당시 일본에는 미국으로부터 막 파일링 시스템이 도입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관공서를 비롯하여 대기업 등에서 점차 활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파일링 시스템을 전문 제작하는 기업은 아주 극소구에 불과했다.
"그래! 이 문서 보관 시스템은 널리 유행하게 될 거야. 서류를 취급하는 곳에서는 어디서든지 이것을 사용하겠지, 많은 서류를 쉽게 찾는다면 시간이 많이 절약될테니까."
야스모토는 문서 보관 시스템 제작 사업을 해 보기로 결심하였다. 그래서 그는 1948년 6월에 고베이라는 회사를 설립하고 사무용 가구를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지금 시중에 나와 있는 사무용 가구들은 모두 정밀도가 떨어지는 것들 뿐이다. 서랍은 너무 빡빡해서 열고 닫기가 힘들고......, 문제 투성이군. 이런 나쁜 점들을 고칠 방법이 없을까?"
야스모토는 제작하고 있는 파일 캐비닛을 살펴보았다. 부품들이 너무 많았고 때문에 용접을 해야 할 곳이 많았다.
"용접을 많이 하면 모양이 좋지 않아요. 게다가 정밀도도 많이 떨어지지요. 어떻게 하면 부품 수를 줄일 수 있을까? 해답은 바로 여기에 있어요."
그는 기술자들을 불러서 자신의 생각들을 설명하고 그들의 어깨를 일일이 두드리며 격려했다. 사원들은 그의 말을 듣고 힘을 얻었다.
이들의 노력은 곧 결실을 맺어서 새로운 사무용 가구가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1960년에는 파일링 시스템 제품으로는 최초로 일본공업표준규격 제품으로 선정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야스모토는 더욱더 신기술 개발에 힘썼다. 그 결과 일본 최고의 사무용 가구 제조회사로 자리잡게 되었다.
팥빵
'장사는 자본이 제일이다. 자본 없이는 장사로 성공할 수 없다. 이것이 자본주의인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고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틀린 생각이다.
아무리 많은 자본을 가진 사람이라고 자본의 효율적인 관리나 사업의 아이디어가 없다면 그 사람은 성공할 수 없다. 그러나 자본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아이디어만 뛰어나다면 사업을 성공시킬 수가 있다.
일본의 기무라 야스베라가 처음 제과점을 개업했을 때 아무리 애써도 장사가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았다.
'이렇게 장사가 안 되면 나는 곧 망하고 말거야.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는 궁리 끝에 다른 제과점에서는 구할 수 없는 새로운 과자를 개발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래, 새로워야 돼. 그렇지만 사람들이 누구나 좋아할 수 있는 그런 것이어야 해. 그런 것은 무엇일까?"
그는 며칠 동안이나 새로운 빵에 대한 연구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만두를 먹던 기무라는 기막힌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래, 만두처럼 빵 안에 속을 넣는 거야. 일본 사람이 좋아하는 단팥을 넣으면 아주 맛있을 거야."
그는 즉시 연구해서 단팥을 넣은 빵을 만들어 가게에 내놓았다. 그랬더니 팥빵은 나개돋친 듯 팔려나갔다. 팥빵의 인기는 날로 상승했고 기무라는 이것으로 큰 부자가 되었다.
이것이 팥빵의 시초이며 기무라가 유명해진 것은 아이디어 덕분이었다. 그 후에도 그는 이러한 작은 아이디어를 계속 고안해 냈고 마침내 일본 제일의 제빵업자가 되었다.
적외선식 버너
일본의 가스기구 전문 제작업체 린나이. 이 회사의 성장과정은 일본 업계에서는 거의 신화처럼 이야기되고 있다. 이 회사의 사장이었던 나이토 스스무는 남보다 뛰어난 판별력과 결단력으로 오늘날의 린나이를 탄생시켰다.
초창기의 린나이는 규모가 매우 작은 보잘 것 없는 공장에 지나지 않았다.
"한 종목에 집중하여 새로운 기술을 개발해야 해.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어."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당시의 기술수준으로는 새로운 기술개발은 어림도 없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새로운 기회가 그에게 찾아왔다. 1955년이었다. 나이토는 산업시찰단의 일원이 되어 서독을 방문하였다.
나이토는 독일의 발명가 슈방크가 고안해낸 표면 연소식 가스 버너 발표회에 참석하였다. 그는 그 자리에서 슈방크의 가스 버너가 우수성을 깨닫고 바로 그 기술을 도입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돈이 얼마가 들든지 간에 저 기술을 도입해야겠어.'
그는 발표장을 빠져나오면서 굳게 결심했다. 그러나 기술 도입 과정은 까다롭기만 했다. 슈방크는 기술이전 대가로 약 2억 엔의 로열티를 요구했다. 이 금액은 린나이사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거액이었다. 게다가 정부 시책에도 어긋나는 액수였다. 이 때문에 주변에서는 모두들 이 결정에 우려의 뜻을 나타냈다. 하지만 나이토의 생각은 아주 단호하였다.
결국 기술도입을 반대하던 사람들도 그의 결정에 따르게 되었다. 이리하여 1957년 극적으로 기술도입 계약이 체결되었다.
슈방크의 가스 버너는 아주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기존의 점화식이나 분젠식 버너의 결함을 모두 개선한 제품이었다. 하지만 이 기게 또한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슈방크 버너느 공업용으로 개발된 것이어서 가정용으로 사용하기에는 매우 부적합했다. 따라서 시중에 내놓기 위해서는 많은 개선이 필요하였다. 바로 이 과정에서 나이토의 기술개발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그는 스토브에 사용되는 세라믹 플레이트를 개전하여 강도를 높이고 복사열의 효율을 놓였다. 또한 공기 보급률을 적절히 조절하여 점화 후 최대한 빨리 필요한 열을 낼 수 있도록 고안했다. 이것은 가스 버너 기술에서 올린 또 한번의 개가로서 적외선식 버너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것이었다.
산토닝
무슨 일을 할 때 벽에 부딪치면 포기해 버리는 사람이 있다. 이처럼 쉽게 포기하는 사람은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이 세상에서 벽에 한번 부딪치지 않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발명으로 성공하려면 끈기 있게 도전할 줄 아는 자세부터 길러야 한다.
인류를 기생충으로부터 구원시켜준 일본 신약의 시야가 발명하여 히트한 산토닝이 대표적인 사례.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인류는 기생충에 의해 목숨을 잃기까지 했다.
"기생충으로 사람이 죽어가다니, 말도 안 돼."
시야는 구충제를 만들기고 결심하고 자료수집에 착수했다. 조사결과 '알데미인 시나'라는 식물에서만 원료를 추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이 식물은 소련에서만 재배되고 있는데 외국으로의 유출이 금지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러 경로를 통해 수입하려 해 보았으나 번번이 실패였다.
"그 식물이 소련에만 있으라 법은 없다. 지구 전체를 뒤져서라도 찾아내고 말 것이다."
시야는 전세계를 대상으로 이 식물을 찾아나섰고, 드디어 북유럽에서 같은 계통의 식물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원초가 확보된 만큼 산토닝의 생산은 시간문제였다.
일본 신약은 크게 발전하였도, 기생충으로부터 일류를 구해낸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소형 영사기
소형 영사기 시대를 연 사람은 일본의 목공이었던 사카키 히데노브였다.
1919년 어느 화창한 여름 날이었다. 목공소 주인은 사진기를 만지고 있었다. 사카키는 그 앞을 지나가다 사진기에 눈이 멈추었다.
"사카키, 이 사진기에 관심이 많은가 보구나. 이리 들어오너라."
사카키는 몹시 기뻐하며 아주 즐겁게 사진기에 대해 배웠다. 그는 총명하고 진지해서 주인이 놀랄 정도로 빠르게 이해했다.
"사진기란 것은 정말 신기해. 아주 섬세하기도 하고. 이것을 내가 직접 만들 수는 없을까?"
사카키의 열정은 사진기를 직접 만들어 보겠다는 생각에가지 이르렀다. 어느 새 그것은 그의 소중한 꿈이 되었다.
"지금 당장은 사진기를 만들지 못하니 먼저 사진 용구를 제작 해 보자."
이렇게 다짐하고는 각종 사진 용구를 제작하여 시중에 내다 팔았다. 1921년에는 사카키 상회를 세우고 본격적으로 사진 용구 제조업을 시작했다. 사업은 나롤 번창하였지만 사카키는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내가 사진업을 하면서 쌓은 이 기술을 이용하면더 독창적인 사업을 할 수 있을 거야."
그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다짐하며 새로운 기술 개발에 힘을 쏟았다. 바로 이 때를 맞추어 무성영화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새로운 기술을 애타게 기다리던 사카키로서는 정말 좋은 기회였다.
"영사기라, 정말 좋군,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이용하는 것도 좋겠어."
생각이 이에 이르자 사카키에게는 기막힌 사업계획이 떠올랐다.
"그래 맞아! 어느 장소에서도 상영할 수 있도록 작은 영사기를 만드는 거야."
그는 명쾌하게 결정하고 일을 추진해 나갔다. 여러 가지 사전 지식과 사진기에 대한 기술을 터득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카키는 자신있게 사업을 진행시킬 수 있어싿. 그리고 결국 1926년에 소형 영사기를 생산하는 데 성공하였다.
사카키가 만든 35밀리 영사기는 세계시장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작품이었다. 그의 영사기는 세계 각국으로 팔려 나갔고, 그의 기업은 소형 영사기 제조업체로 명성을 날렸다.
사카키는 스물아홉 살의 젊은 나이로 일본에서 알아 주는 기업인으로 성장하였다.
로보꾼
프레스란 철판을 강한 압력으로 때려서 일정한 모양으로 만드는 작업을 말한다. 우리가 가끔 볼 수 있는 손가락이 잘리는 사고는 대부분 이 프레스 기계에서 생기는 것이다.
이런 사고가 자주 일어나자 여기저기서 이 불행을 막을 방법을 고안하기 시작했다. 나가오의 로보꾼은 바로 이러한 요구에 의해 탄생한 것으로 프레스 가공에 일대 혁신을 일으킨 발명품이다.
발명가는 일본에서 프레스 가공업체를 운영했던 나가오.
"프레스 기계 때문에 생긴 사고가 벌써 다섯 건이군. 더 이상 희생자가 생겨서는 안 되는데......."
나가오는 프레스 기계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는 다음날부터 프레스 가공 기계를 개선하려는 노력을 시도했다. 그가 제일 먼저 착안한 것은 기존에 개발된 작업 보조 로보트를 프레스 가공 기계에 부착시키는 방법이었다.
"가공물을 기계에 집어넣고 빼내는 작업을 프레스 기계가 동시에 해 낼 수 있다면, 다른 기계를 더 설치할 필요도 없고 사람도 안전할 수 있을텐데........"
그의 생각은 프레스 가공을 혁신적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었지만 그 작업은 생각보다 힘든 것이었다. 게다가 이것을 제품화하려면 다른 경쟁회사보다 더 빨리 개발해야 하므로 나가오의 마음은 초조했다.
그거나 아무도 나가오의 결심과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마침내 새로운 성능의 프레스 기계를 만들어 냈고, 덧붙여 소형화에까지 성공했다.
"이것을 로보꾼이라 불러야겠어. 이 기게가 앞으로는 프레스 작업을 도맡아서 할 거야. 그리고 우리에게 많은 돈을 가져다 줄 것이고......"
나가오는 완성되 기계 앞에서 미소를 지었다. 나가오의 새 프레스 기계는 이전의 프레스 공작 기계의 한계점을 모두 개선한 새로운 것이었다. 그것은 사람이나 다른 기계의 도움 없이 혼자서 철판을 집어넣고 또 빼낼 수 있었다. 또한 다른 로보트를 설치할 필요가 없으니그만큼 공간을 활용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작업의 완전 자동화가 이루어져 숙련공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작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여러 장점들이 소개되자 새 기계의 수요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따라서 나가오 제작소는 비약적인 성장을 했고, 나가오 자신도 엄청난 부와 명예를 동시에 얻었다.
자원 재생용 분쇄기
"쓰레기 속에서 황금을 얻는다."
바로 산업 폐기물의 재활용으로 이것은 자연울 오염시키는 물질을 줄임과 동시에 새로운 자원을 만드는 이중 효과를 낳고 있다.
일본 호라이 철공소의 스즈키 요시후미는 이 분야에서 획기적인 발명을 하여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스즈키가 새로 공장을 세운 곳은 플라스틱 성형공장이 밀집된 지역이었다. 그는 이들 공장의 부탁을 받아 기계를 수리하러 플라스틱 가공 공장에 들른 스즈키는 공장 뒷마당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 그의 앞에는 플라스틱 폐품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기계는 다 고친 건가요?"
스즈키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긴 공장 직원이 다가와서 일부러 말을 걸었다.
"아뇨, 아직 못했어요. 그보다 궁금한 것이 있는데, 저 플라스틱 폐품을 다시 사용할 수는 없나요?"
"분쇄기가 없어요. 아깝지만 버릴 수밖에 없죠."
스즈키는 그의 대답을 듣고는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이것을 재생할 수 있다면 정만 좋을텐데......."
그 생각은 집에 돌아와서도 끊이지 않았다. 그의 눈 앞에 산처럼 쌓여 있던 플라스틱 폐품들이 자꾸 생각났다. 그는 몹시 안타까운 마음에 계속 분쇄기에 대해 생각했으나 도무지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주 엉뚱한 곳에서 문제의 해결책이 발견되었다. 바로 마을의 작은 영화관에서였다.
"맞아! 바로 저거야."
스즈키는 영화를 보다 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극장의 스크린에는 빨간 장미 꽃잎이 바람에 흩날려 빙빙 도는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에게는 그 꽃잎들 하나 하나가 칼날들로 보였다.
곧바로 집으로 돌아와 자신의 생각대로 분쇄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주일 후에는 한 대의 분쇄기에 플라스틱 파편을 밀어넣었다. 그러자 곧 기계에서는 플라스틱 가루가 쏟아져 나왔다. 실험은 대성공이었다.
얼마 후 이 분쇄기를 한신백화점이 개최한 플라스틱 전시회에 출품하였다. 여기서 호평을 받자 많은 사람들이 이목이 그에게로 쏠렸다.
이것을 계기로 재활용 기계 개발에 더욱 매진한 그의 회사는 이 분야에서 가장 선두를 달리는 기업으로 성장하였다.
인조견사
누에는 입에서 끈끈한 액체를 뱉는다. 그것이 공기를 쐬고 굳어지면 바로 명주실이 된다. 명주실로 짠 옷은 비단이라 해서 예로부터 가장 아름다운 옷으로 여겨왔다. 이런 명주를 누에에서 얻지 않고 화학적인 힘을 빌려 인공적으로 만든 것이 인조견사이다.
이 인조견사는 프랑스의 화학자 샤르도네가 사진에 대한 연구를 하다가 힌트를 얻어 발명한 것이다.
프랑스의 유명한 생물학자이자 화학자인 파스퇴르의 제자였던 샤르도네는 당시 프랑스에서 유행하던 누에병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었다. 그는 토목기사가 되는 것이 굼이었으나 누에병을 비롯한 여러 가지 전염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보고 그 꿈을 버렸다.
오랜 시간을 누에의 미립자병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샤르도네는 누에에 의지하지 않고 명주를 만들 수는 없을까 고심하기도 했다. 누에를 키우지 않고 명주를 만든다면 명주 직물업자들은 누에병에 걸리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화학자였던 샤르도네는 누에병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당시의 큰 관심의 대상이었던 사진에 대해 흥미를 느껴 그 재료인 콜로디온에 대한 연구를 병행하고 있었다.
사진 건판의 원료로 쓸 생각으로 콜로디온을 한참 연구하고 있던 어느 날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하게 되었다. 콜로디온을 작은 구멍을 통해 밀어내자 누에가 내뱉은 명주실처럼 가늘게 되어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래, 이것이다. 이것이 어쩌면 누에명주를 대신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생긴 샤르도네는 인공적으로 견사를 만들기 위해 모든 시간을 투자했다. 그는 콜로디온 용액을 만들고 이것을 가는 구멍에 밀어넣어 응고시켜 실모양으로 재생시키는 몇 차례에 걸친 확인실험을 계속했다. 모두 성공이었다.
그렇지만 원료가 화공약품이었던 이 인조견사는 불에 약한 것이 단점이었다. 망치 같은 것으로 조금만 세게 두들겨도 폭발했고, 담뱃불에도 옷이 불타는 등 위험하기 그지없었다.
샤르도네는 다시 연구를 계속해서 불에 안전한 새로운 인조견사를 만드는 데도 성공했다. 제1차 세계 대전까지는 이 샤르도네는 인조견사를 발명한 업적으로 백작의 작위를 받는 행운까지 누렸다.
모발용 세척제
최근들어 공해의 주범으로 지목되어 역사의 뒷장으로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 모발세척용 샴푸. 그러나 이 샴푸도 세계적인 발명품으로 일본의 여류 중소기업인 '다케우치 고도에'를 중견기업인의 대열에 올려 놓았다.
다케우치는 양털 세척액을 제조, 판매하는 작은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열성 주부였다.
쫓기는 생활 속에서도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책임도 잊지 않은 현모양처형 기업인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양털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그녀의 사업도 활기를 띄었다.
양털은 깨끗이 세척하여 오물을 완전히 제거해야 상품으로 인정받을 수 있으므로 세척액은 생산되기가 무섭게 팔려 나갔다.
그녀의 양털 세척액 공장은 원료를 혼합하는 혼합기계와 혼합된 완제품을 담아 포장하는 몇 명의 공원이 전부. 그녀는 공장관리와 영업활동으로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그러나 아이들을 돌보고 남편을 내조하는 것은 피로 속에서도 즐거움이었다.
아침이면 어김없이 가정주부로서 손색이 없었고, 낮이면 기업을 운영하는 경영인으로서, 퇴근 후면 또다시 가정주부로서 완벽하게 임무를 해 내는 아이들이 돌같이 단단한 비누로 머리를 감는 것을 본 다케우치의 머릿속에 기발한 착상이 떠올랐다.
'양털처럼 물로 된 세척제로 감는다면 얼마나 편리할까?'
'그녀의 머리는 급속하게 돌아갔다.
'그래, 가능한 일이야.'
그녀는 자신이 만들고 있는 양털 세척액의 성분을 분석해 보았다.
세척은 손색이 없었지만 문제는 인체에 해로운 소량의 독성이었다.
"독성을 제거하고 향료만 첨가하면 되겠구나."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다음 단계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전문서적 속의 지혜만으로도 독성제거 및 향료첨가는 가능했다.
"모발용 세척제 탄생!"
샴푸의 발명을 알리는 기사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샴푸는 생산되기가 무섭게 팔려 나갔다.
다케우치가 중견기업인으로 부상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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