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와 판소리의 관계 재론
-- 임방울의 [수궁가]를 중심으로 --
<차 례>
1. 문제 제기
2. 판소리의 성립과 이야기
3. 판소리의 이야기적 성격
- 임방울 [수궁가]의 경우
4. 판소리 전승의 방향
- 결론을 대신하여
1. 문제 제기
판소리는 문학이면서 음악이라고 한다. 성음에 초점을 맞추어서 보면 음악으로 이해되고
사설에 초점을 맞추면 문학으로 이해된다. 성음과 사설은 판소리에서 없어서는 안될 핵심
요소이므로, 판소리는 음악이면서 문학이라는 규정은 전적으로 타당하다. 그런데 음악이면
서 문학인 예술양식은 판소리만이 아니다. 가사를 지니고 있는 모든 노래가 두루 이러한 특
성을 지닌다. 민요와 무가, 시조, 잡가 등이 모두 음악이면서 문학이며, 현대의 가곡과 대중
가요 또한 그러하다. 이에 대하여 판소리는 음악이면서 문학이되, 특히 '서사문학'이라고 규
정할 수 있겠다. 판소리는 사설이 서사적 짜임새를 갖추고 있어서 단순히 서정을 표출하는
노래나 교술적인 노래와는 구별된다는 설명이다. 그렇지만 이야기를 노래로 부르는 예술양
식은 판소리가 유일한 것이 아니다. 판소리 이외에 서사무가가 있으며, 서사민요도 있다.
그렇다면 이들과도 구별되는 판소리 양식의 고유의 특징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는 판소리
의 음악적·문학적 수준이 이들과 다르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명법이 아닌가 한다. 판소리는
음악적으로 기교가 세련된 전문적 창악이며, 문학적으로 표현과 수식이 다채롭고 현실성이
짙다는 것이다.{{ ) 이상과 같은 설명은 국문학계에서 하나의 정설로서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시각을 잘 정리해 보인 조
동일의 글을 띄엄띄엄 인용해 본다.
판소리는 이처럼 음악이면서 문학이다. 음악으로서는 민속악의 하니이고, 문학으로서도 민속문학 또는 구
비문학의 하나이다. 음악과 문학이 공연을 통해서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 (…) 판소리가 연극이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다. 서사문학의 작품을 몸짓을 하면서 노래하는 장편의 창악(唱樂)이다. (…) 판소리는 누구나 부
를 수 있는 민요, 어느 정도 수련하면 곧 부를 수 있는 시조나 가곡 등과는 다른 전문적인 광대만의 전문적
인 창악이며, 기교가 세련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독보적인 것이다. (…) 구비문학 중에는 판소리만큼 변화와
다양성이 두드러진 것이 없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단순해도 표현과 수식에 있어서는 가사나 소설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유식한 문체와 함께, 가사나 소설에서는 볼 수 없는 일상생활의 구체적이고도 발랄한 제시를
특징으로 삼고 있다. 율격에서도 우리 시가에서 가능한 율격을 두루 보여주고 다채롭게 변화시킨다. (조동일,
[판소리의 전반적 성격], {판소리의 이해}, 창작과비평사, 1978, 11-13면.)
판소리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흠잡을 데가 없을 듯하다. 판소리와 기존 양식 간에는 실제
로 상당한 수준 차이가 존재하며 그것은 예술성의 차이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 설명은
'개연성'의 차원을 넘어서 판소리의 본질을 밝히기에는 미흡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 설명의
핵심은 '노래'--음악 및 사설--의 수준 차이를 지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거니와, 거기에
앞서 주목해야 할 본질적 요소가 있다고 판단된다. 그것은 판소리 텍스트가 노래로 실현되
는 동시에 이야기로도 실현된다는 사실이다. 창 부분이 노래이고, 아니리 부분이 곧 이야기
에 해당한다. 판소리의 서사적 텍스트는 노래와 이야기 부분의 공조적 결합을 통하여 실현
된다. 판소리의 창은 독자적 서사구조를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상위의 서사적 전개의 일
부를 이루는 것이다. 대다수 서사무가 및 서사민요가 서사적 텍스트를 하나의 노래로써 실
현하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특징이다.{{ ) 서사무가 가운데는 종종 노래와 말의 교체를 통해 서사적 텍스트를 구현하는 특징을 나타내는 자료들
이 있다. 판소리와 유사한, 서로 연관되는 특징이다(서대석, [판소리의 전승론적 연구], {전통사회의 민
중예술}, 민음사, 1980, 116-120면). 그러나 판소리에 있어 노래와 이야기의 교체가 양식적으로 특화
돼 있는 데 비하여, 서사무가의 경우는 그렇다고 보기 어렵다.
그런데 그 동안 판소리의 문학예술적 성취에 대한 논의의 관심의 완연히 '노래'에 기울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판소리 사설이 노래와 함께 이야기로도 실현된다는 사실이 진지하게
고려되지 않았다. 아니리는 흔히 '이야기'가 아닌 '말'로서 받아들여져 왔고, 창을 하면서 쉬
어가는 부분, 창과 창을 연결하는 수단 정도로 치부돼 왔다.{{ ) 다시 조동일의 글에서 이와 관련되는 부분을 인용해 본다.
판소리는 아니리와 창을 섞어서 부른다. 아니리는 말로 하는 대목이다. 창만 계속하면 너무 힘이 들기 때
문에 아니리를 섞어서 광대가 숨을 돌릴 수 있는 여유를 가진다. 판소리는 민요·잡가·시조·가곡 등에 비
해서 길이가 월등히 길기 때문에 창으로써만 계속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러나 아니리는 부수적인 부분에 지
나지 않는다. (조동일, 앞의 논문, 12면.)
한편, 창과 아니리의 교체에 깊은 관심을 보인 김흥규의 시각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아니리가 "산문으로
된 요약서술이며 간혹 한두 마디의 짤막한 대사를 포함"한다고 하면서 그 역할이 창 부분의 긴장을 풀면서 다음
의 창을 예비하는 데 있다고 하였다(김흥규, [판소리의 서사적 구조], {판소리의 이해}, 창작과비평사, 1978,
116-118면). 그의 설명은 정설로서 널리 받아들여졌을 만큼 타당한 면이 있다. 그렇지만 아니리의 역할을 지나
치게 축소한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판소리의 보존과 전승 작업에 있어서도 그러했으니, 그 초점이 전적으로 창에, '노래'에 맞추어졌던 것이다. 그 결과 현행 판소리에 있어 아니리
의 역할은 현저히 약화되고 말았다.
우리는 판소리의 예술성이 '노래'에 크게 의존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노래'의 힘
만으로써 판소리의 예술성이 온전히 실현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노래와 함께 이야
기적 요소에도 깊은 관심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야기적 성격을 신중히 살펴야만 판소리의
양식적 본질과 미학적 특성이, 또한 역사적 내력이 온전히 드러날 수 있다고 본다. 이제 이
논문에서는 이러한 입장에서 판소리의 이야기적 성격을, 또는 판소리와 이야기의 관계를 새
롭게 조명해 보고자 한다. 그 일차적 관심은 판소리 가운데도 '아니리'에 놓이겠지만, 거기
머물지는 않을 것이다. 이야기적 성격은 판소리 전체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판소리와 이야기의 관계를 제대로 해명하기 위해서는 판소리가 성립 발전되던 당대의 이
야기문화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선행 과제가 된다. 그간 판소리에 대한 이야기의 기여가 제
대로 평가되지 못했던 것도 실은 당대 이야기문화에 대한 이해가 짧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조선후기 이야기문화의 실체는 충분히 재구되지 못한 상태이지만, 다행히 임형
택을 필두로 한 '이야기꾼'에 대한 일련의 연구성과가 지난 시절의 이야기문화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 임형택, "18·9세기 '이야기꾼'과 소설의 발달," {한국학논집}(계명대) 제2집, 1975.
천혜숙, "이야기꾼의 이야기연행에 관한 고찰," {계명어문학} 1, 1984.
천혜숙, "이야기꾼 규명을 위한 예비적 검토," {두산김택규박사화갑기념 문화인류학논총}, 간행위원회,
1989.
황인덕, "이야기꾼의 한 고찰--김중진의 경우," {어문연구} 23집, 어문연구회, 1992.
신동흔, "이야기꾼의 작가적 특성에 대한 연구--탑골공원 이야기꾼의 사례를 중심으로," {구비문학연구}
제6집, 한국구비문학회, 1998.
* 임형택과 황인덕의 논의는 조선후기의 이야기꾼을 직접 논의대상으로 삼은 것이며, 천혜숙과 신동흔의
논의는 현존 이야기꾼에 대한 검토를 통하여 과거의 이야기문화에 대한 이해를 지향한 것이다.
그
가
운
데
도 현존하는 전문적 이야기꾼에 대한 조사 보고 성과는 이야기꾼의 설화 텍스트에 대한 실제적·경험적 검증의 길을 열어주고 있다는 데 의의가 있다.{{ ) 천혜숙, 앞의 논문(1984,1989) 및 신동흔, 앞의 논문.
우리는 이를 바탕으로 삼아 이야기와 판소리의 관계에 접근해 갈 수 있다.
이야기와 판소리의 긴밀한 관계에 대해서는 기존에도 주목할 만한 지적이 있었다. 판소리
사설의 원천을 문헌소재 설화나 지역전설에 부회하는 '근원설화' 논의는 차치하고, 임형택과
임진택의 소론을 특기할 만하다. 임형택은 판소리 광대를 강창사(講唱師)라고 규정하고 이
야기꾼의 일종으로 규정하였는데, 조선후기 이야기문화의 발흥에 대한 인식에 기초하고 있
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 임형택, 앞의 논문, 288-290면.
다만 판소리의 이야기적 성격에 대한 구체적 논증이 제시되지 않았다는 아쉬움이 있다. 한편 임진택은 판소리의 예능적 바탕을 이야기에 두는 입장에서 판소리의 형성·발전과정을 재구하는 논의를 펼쳤는데, 경청할 만한 내용을 많이 담고 있다.{{ ) 임진택, [살아있는 판소리], {민중연희의 창조}, 창작과비평사, 1990.
그
러나 주로 경험과 직관에 힘입고 있는 그의 논의는 역시 구체적 논증을 거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이제 원론적이고 추정적인 차원을 넘어서 이야기와 판소리의 관계에 대한 인식을 진전시
키기 위해서는 텍스트 분석을 통한 논증이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요구에 부응하
여 이 논문에서는 이야기 텍스트 및 판소리 텍스트에 대한 구체적 분석을 통해 문제에 접근
하고자 한다. 먼저 현존 이야기꾼의 이야기 텍스트를 통해 과거 이야기문화의 실체를 재구
하고 그 바탕 위에서 판소리의 성립 과정을 재구하고자 한다. 그 다음에는 이야기 텍스트와
판소리 텍스트의 비교분석을 통해 판소리의 이야기적 성격을 더욱 실제적으로 검증하고자
한다. 그 구체적인 논의대상으로는 이야기 쪽에서 서울 탑골공원의 김한유·봉원호씨와 대
구 달성공원 심종구씨의 자료를,{{ ) 이 세 화자는 현재 조사 보고된 이야기꾼 가운데 가장 특출한 분들로서 전문가적 수준의 구연능력을
나타내고 있다. 심종구씨는 천혜숙이 보고하였으며(천혜숙, 앞의 두 논문), 봉원호·김한유씨의 사례는
필자가 조사 보고하였다(신동흔, 앞의 논문). 김한유씨의 경우는 최근에 필자가 새롭게 채록한 자료들
도 논의에 포함시킬 예정이다.
판
소
리
쪽
에서 임방울의 [수궁가]를 다루기로 한다.{{ ) 임방울의 [수궁가] 대본은 천이두, {판소리 명창 임방울}, 현대문학사, 1986에 수록돼 있으며, 김진영
외 편저, {토끼전전집} 1, 박이정, 1997에도 수록되었다. 그리고 음반은 아세아레코드에서 두 개의 테
이프로 제작한 것이 있다.
필
자
는
임
방
울의 [수궁가]가 판소리의 본령을 근사하게 보여주는 자료라고 믿고 있는바, 이를 통해 판소리의 이야기적 성격이 단면적으로 드러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2. 판소리의 성립과 이야기
판소리가 어디에서 기원하여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하는 것은 국문학계의 대표적 쟁점 가
운데 하나로서 수많은 논의가 간단없이 제출돼 왔다.{{ ) 최래옥, [판소리 연구의 반성과 전망], {한국학보} 35, 일지사, 1984 및 정병헌, [판소리의 발생],
{한국문학사의 쟁점}, 집문당, 1986에 당시까지의 논의의 경과가 잘 정리돼 있다.
그 경과를 거칠게 요약하자면, 초창기에 '근원설화론'의 형태로 설화
와
의
연
관
을
찾던 것이 뒤에 와서 노래와 연희 쪽에서 근원을 찾는 쪽으로 방향전환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서사무가 기원설이 유력하게 제기되어 정설로서의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 판소리의 무가 기원설은 이혜구와 이보형의 음악적 논의를 거쳐, 서대석에 이르러 서사무가 기원설로
정립되었다. 이혜구, [송만재의 관우희], {중앙대 30주년 기념 논문집}, 중앙대, 1955; 이보형, [무가
와 판소리와 산조에서의 엇모리가락 비교], {음악학논총}, 국악학회, 1969; 서대석, [판소리 형성의 삽
의], {우리문화} 3, 우리문화연구회, 1969; 서대석, [판소리와 서사무가의 대비 연구], {논총} 34, 이
대 한국문화연구원, 1979 참조.
그러던 중 최근에는 창우집단의 소리로서의 영산이나 타령에서 판소리
가
기
원했다는 설이 새롭게 제기되고 있다.{{ ) 이보형, [창우집단의 광대소리 연구], {한국 전통음악 논구},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1990.
백대웅, [판소리 무가 기원설의 재검토 1], {한국음악사학보}, 한국음악사학회, 1993.
손태도, [판소리의 기원으로서의 타령], {판소리연구} 제8집, 판소리학회, 1997.
이
는
'음악'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서, 서사무가설보다도 더 이야기기원설에서 멀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뭏든 판소리의 기원과 형성에서의 '이야기'의 역할에 대한 관심은 현재 완연히 퇴색된 상황에 있다.{{ ) 중간에 임형택이나 임진택 등이 이야기를 판소리의 바탕으로 보는 견해를 제시하기도 했으나 논의의
물줄기를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 논의는 임형택, 앞의 논문 및 임진택, 앞의 논문 참조.
판소리의 성립에 관한 논의에 있어 이야기가 중시되다가 뒤에 그것이 관심 밖으로 사라진
데는 이유가 있다. 첫째, 판소리의 근원설화로 제시된 자료와 판소리 작품 사이의 시간적·
공간적 거리다. 고문헌에 있는 설화, 또는 지방 마을의 전설이 판소리로 채택됐다는 식의
입론은 무리한 부회의 소지가 있다. 둘째, 더욱 중요한 이유로서 설화 텍스트와 판소리 사
설 간의 양적·질적 차이를 들 수 있다. 그 풍성하고 다채로운 판소리 사설의 바탕으로 인
정하기에 설화 자료는 거칠고 소략하기 짝이 없다. 양자 사이에 연관이 있다면 소재 차원의
초보적 연관에 불과하다. 셋째, 판소리의 본질이 '이야기'보다는 음악에 있다는 관점의 영향
이다. 이야기를 아무리 잘 구연한들 판소리가 될 수는 없다는 논리다.
이에 대하여 필자는 판소리와 '근원설화' 사이의 거리와 질적 차이를 인정한다. 그렇지만
판소리와 근원설화 간의 거리가 판소리와 이야기 전체의 거리로 확대해석되는 것은 수긍할
수 없다. 구비설화에는 일반적 통념처럼 스토리 중심의 거칠고 단순한 자료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가운데는 디테일이 풍성하고 표현이 다채로운 것들이 포함돼 있다. 특히 남다른
구연능력과 창조적 기량을 갖춘 이야기꾼이 엮어낸 설화 텍스트는 일반 화자의 설화와는 질
적으로 다른 자질을 지니고 있다.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판소리가 성립된 조선후기는 민간예능이 크게 발흥했던 시기다. 그것은 노래(소리)와 춤, 재
주, 연극, 소설 강독 등 다방면에 걸쳐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또한 '이야기'가 포함된다. 이야
기를 장기로 삼는 예능인들, 곧 이야기꾼들이 있어 큰 활약을 했던 것이다. 그 이야기꾼들에 대
한 정보를 우리는 일부 문헌자료를 통하여 엿볼 수 있다. 임형택이 정리하여 소개한 오물음(청
구야담), 김중진(이향견문록), 김옹(초재집), 민옹(민옹전){{ ) 임형택, 앞의 논문, 286-288면.
과
{열하일기} [옥갑야화]의 윤영 등이 그들이다. 이 이야기꾼의 능력에 대하여 문헌은 아래와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1) '이야기주머니'(說囊) 김옹은 이야기를 아주 잘 하여 듣는 사람들은 누구없이 포복절도하였다.
그가 바야흐로 이야기의 실마리를 잡아 살을 붙이고 양념을 치며 착착 자유자재로 끌고 가는 재간은
참으로 귀신이 돕는 듯하였다.{{ ) 조수삼, {추재집} 권 7, 紀異 說囊(임형택, 앞의 논문, 287면에서 재인용).
(2) 익살과 이야기를 잘하여 인정물태를 묘사함에 당해서 곡진하고 섬세하기 이를 데 없었다.{{ ) {이향견문록} 권3, 金中眞(위의 논문, 287면에서 재인용).
(3) 그는 나에게 허생의 이야기와 염시도(廉時道), 배시황(裵是晃), 완흥군부인(完興君夫人) 등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되, 잇달아 몇 만언(萬言)으로써 며칠 밤을 걸쳐 끊이지 않았다. 그 이야기가 거
짓스럽고 기이하고 괴상하고 휼황하기 짝이 없어서, 모두 들음직하였다.{{ ) 박지원, {열하일기}, [옥갑야화]의 허생후지. {국역 열하일기}, 고전국역총서 19, 민족문화추진회,
1966, 313-314면.
현재 이들의 이야기를 직접 경험할 길은 없으나, 소개한 내용을 볼 때 이들이 뛰어난 이야기
능력으로 듣는 이들을 사로잡았음을 알 수 있다. 즉흥성이 가미된 뛰어난 재담 표현의 능력(김
옹), 탁월한 묘사능력(김중진), 풍부하고 다양한 이야기 문서(윤영) 등이 확인된다. 윤영이 들
려주었다는 허생 이야기나 염시도 이야기{{ ) 허생 이야기는 연암의 [허생전] 이외에 조선후기의 여러 야담집에 실려 있으며, 염시도(또는 염희도)
이야기 또한 주요 야담집에 수록돼 있다.
를
통
해 볼 때 동시대적 삶의 문제가 정면으로 다루어졌다는 것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문헌기록을 통해 과거 이야기꾼의 존재양상과 특성을 짐작해 볼 수 있으나, 그것은
그리 흡족지 못한 것이다. 기록에 남은 이야기꾼들은 주로 양반가 사랑을 드나들던 이들로서,
일반 시정공간(장터거리 등)에서 활동한 이야기꾼들의 실체가 제대로 확인되지 않는다. 그리고
당시 이야기꾼이 구연한 이야기 텍스트의 온전한 실체와 접할 수 없다는 점이 결정적인 문제점
이다. 그래서인지, 임형택은 이야기꾼(강담사)의 예능이 소설 낭독꾼(강독사)이나 판소리꾼(강
창사)에 비하여 비전문적이고 단조로운 편이었다고 추단하기도 하였다.{{ ) 임형택, 앞의 논문, 287면.
기록의 한계를 넘어서 당시 이야기꾼의 살아있는 모습에 다가서는 길이 없지 않다. 과거 이
야기문화의 연속선상에서 활동하고 있는 현존 이야기꾼이 그 통로가 되어 줄 수 있다. 그러한
이야기꾼들이 실제로 조사 보고된 사례들이 있으니, 앞서 언급한 김한유·봉원호씨와 심종구씨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전문적인, 또는 전문적 수준의 이야기꾼들로서 과거 이야기판을 주름잡
았던 이야기꾼들의 면모를 가히 짐작케 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활동해온 이야기판이 대도시의 공원이라는 점이다. 그 중 탑골공원을
보면, 이곳은 매일마다 천 명이 넘는 수많은 노인들이 모여들어 유동하는 전형적인 시정공간이
다. 그 안에는 약을 늘어놓은 좌판, 음식 나누어주는 곳, 이발하는 곳, 침 놓는 곳 등이 있으
며, 짝(?)을 물색하는 정체불명의 부인네들이 있다. 말하자면 이곳은 옛날 '장터거리'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 ) 위의 논문 2.2절. (*현재 이 논문이 인쇄중에 있어 정확한 면수를 밝히지 못함. 이하 같음.)
우
리
는
이 이야기판을 통해, 거기 활약하는 이야기꾼을 통해 과거 장터거리 이야기문화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그 이야기판의 성격과 관련하여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자발적 청중의 숫자다. 탑골공
원에는 정해진 이야기 장소가 있어 매일마다 그곳에서 이야기판이 벌어지는데, 일단 이야기
꾼이 구연에 나서면 보통 수십명에서 백명에 이르는 청중이 자발적으로 모여들어 이야기를
듣는다. 가장 인기있는 이야기꾼인 김한유씨(금자탑) 같은 화자가 나서면 그 숫자는 더욱
늘어 금세 150명 내지 300명의 청중이 운집한다. 그들은 이야기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
울이면서 재미있는 내용이 나올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린다. 이야기가 끝나면
박수를 보내면서 치사하는 것이 격식이다. 어디 그뿐이랴? 화자에게 음료수를 사서 바치는
사람들이 적지 않으며, 지폐를 꺼내서 주머니에 넣어 주는 사람도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야기를 통한 흥행의 문제다. 지금은 그만두었지만, 김한유씨는 이
야기 구연이 끝나면 모자를 벗어서 사람들에게 이야기값을 받곤 하였었다.{{ ) 들리는 바에 의하면 돈 받기를 그만둔 것이 그 사실을 목격한 자손들의 만류 때문이라고 한다. 한편,
김한유씨는 이야기를 하고 모은 돈을 자신이 쓰지 않고 불쌍한 노인들 밥을 사주었다고 하였다.
짐짓 불쌍한 체하며 사람들의 동정을 이끌어
내는데, 그 수법이 보통이 넘는다.
(4) 그런디, 여기 오먼 빵도 주구 라면도 줬대요. 예. 근디 오늘은 빵도 안 주구 라면도 안 주
네요. 어제 일곱시 사십육분에 공항뻐스를 타고 종로3가에 가 내렸는데, 내가 놀던 공원이라고 와
보니 사람이 하나도 웂어, 여덟신데. 주머니 돈은 일전두 웂에요. 내 재산목록 1호는 단장(短杖)
하나 뿐이요. 그래서 저 화장실에서 잤어요. 아침 굶었죠 어제 저녁 굶었죠. 즘심은 여태 구경두
못했에유. 이 불쌍한 늙은이 여러분, 돈 쫌 쓰다 남응 거 있거든 쪼금씩 보태주세요. 나가서 짜장
면 한 그릇만 먹으먼 해결되는디, 낭중(囊中)에 무일푼이요. 일전두 돈을 몰라. 여러 선생님, 많은
돈은 안 바래요. 내가 이 모자를 벗는디 이 모자 속에다가 짜장면 한 그릇을 먹을 것을 여러분이
좀 보태 주시먼 오늘 살어야 내일 또 나와서 얘길 허죠.{{ ) 1997.3.29(토) 서울 탑골공원에서 김한유(86세; 조사 당시) 구연.
한번 이렇게 너스레를 떨면(그것은 하나의 프로적인 연출이다) 주머니 사정에 여유가 있는
청자들이 모자에 돈을 넣는 것인데, 위 이야기를 한 날은 청중이 적었는데도 순식간에 2,3만원
이 넘어 보이는 돈이 모였다. 한 시간의 이야기로 하루 용돈에 충분한 돈을 번 셈이다. 우리는
이 사례를 통해 과거 장터거리의 유능한 이야기꾼들이 이야기로써 충분히 생활을 유지해 나갈
수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 이야기꾼의 직업적 흥행과 관련해서는 달성공원 심종구씨의 사례도 주목할 만하다. 심종구씨는 전문적·
직업적 이야기꾼으로서, 한때 연예적 집단에서 이야기를 장기로 삼아 무대에 선 경력이 있으며 오랫동안 달
성공원에서 사주관상과 함께 이야기로써 생계를 유지해온 것으로 보고돼 있다(천혜숙, 앞의 논문, 1989,
456면). 이 화자의 사례 또한 이야기꾼의 이야기가 흥행이 됐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야기꾼의 이야기 구연능력은 어떠 수준인가? 한마디로 이들의 이야기 능
력은 일반 화자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이들은 자기 나름의 특화된 레파토리를 가지고 있으며,
한 시간 내외의 길고 복잡한 이야기를 막힘없이 유창하게 구연한다. 작중인물과 상황을 섬세하
고 구체적으로 묘사해내며, 여러가지 관습적 표현과 다양한 서술기법--예컨대 창조, 사설조, 대
화체, 담화체 등--을 활용하여 이야기의 실감을 높이고 청자의 흥미를 유발한다. 예상치 않았던
뜻밖의 엉뚱한 표현--예컨대 갑작스런 육담표현--으로써 청중들을 웃기며, 상황에 맞춘 기지로
써 폭소를 유발한다. 이들은 전해들은 이야기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 식으로 이야기를 개편하며,
스스로 이야기를 창작하기도 한다. 그 이야기에는 현대적 소재 내지는 현재적 삶의 양상이 다
양하게 반영된다.{{ ) 각 이야기꾼의 특성에 관한 상세한 논의는 천혜숙, 앞의 논문(1984, 1989) 및 신동흔, 앞의 논문 참
조. 본문의 내용은 이 논문들에 소개된 내용에 필자의 경험을 종합하여 요약 정리한 것이다.
이들 이야기꾼이 구연한 이야기를 몇 부분만 옮겨 본다.
(5) "아이고 이것이 왠일이요, 죽은 줄 알았디만 살아오니 왠 말이요, 하늘에서 떨어졌나, 땅에
서 솟아났나." (…) 울너메 담너메 물 이러 갔던 여자도 울고, 오는 여자도 울고 가는 여자도 울
고, 마당아 종늠 마당 씨다가 울고, 청 밑에 강아지도 울고 마판에 망아지도 울고, 오는 사람 가는
사람 얼매나 울어났던지 마아 눈물바다가 돼가주고 낙동강 기리이(기러기)가 시바리(세마리) 날라
왔더란다. 이 이건 거짓말이다.{{ ) 심종구 구연 설화의 한 대목. 천혜숙, 앞의 논문(1984), 104면에서 재인용.
(6) 그 이 아들이 어떤 사람이냐? 키가 1메타(미터) 95요. 2메타가 쪼금 못돼요. 이 가슴 싸이
즈가 4메타요. [청중:웃음] 딱 벌어진 늠인디, 씨름판에 천하장사 이만기 같응 건 거기 가도 못해
요. 게다 대면 새끼여. 그 무지무지헌 늠이 궐 궁뜰에 가 엎드려 있단 말예요.
"여봐라! 농촌의 초부라 헐지언정 성명 삼자가 있을 게 아니냐? 성명을 대라."
말이 웂어요.
"귀머거리냐, 벙어리냐? 우째 대꾸가 없는고?"
그러니께 이 예조판서 문교부장관이 오더니,
"야 이늠아. 어전이여, 얼릉 얘기헤여. 안허먼 모가지 떨어져 이 자식아." [청중:웃음]
그때에 이 엎드렸던 이 촌부가
"아뢰오." 헸는디,
이늠우 '아뢰오' 소리가 을마나 컸든지, 경복궁 대궐 기왓장이 몽창 떴어요. [청중:웃음] 대궐
기둥나무가 반은 돌어갔어. [청중:웃음] 남산의 꼼방울(솔방울)이 한 개 안 남고 다 떨어졌어.
[청중:웃음] 도봉산 인왕산 삼각산 북한산성에 바위돌이 막 떼굴떼굴 둥굴어요, '아뢰오' 소리 한
마디에. [청중:웃음] 만조백관은 물론이려니와 숙종대왕이 그 소리에 놀래서 벌렁벌렁 자빠지는디
궁녀가 얼른 와서 붙들었어. 안 붙들었으먼 숙종대왕 그때 뇌진탕으로 죽었어요. [청중:웃음]{{ ) 1998.3.17. 서울 탑골공원에서 김한유 구연.
(7) 아 그러니께 이 기생년이 그런 줄만 알구서,
"아 그러시먼, 그럼 시방 내우분이 양친해 계슈?"
그라니께 이눔이 하는 소리가,
"우리 마누라 죽은 지가 삼년채유. 그래서 내 시방 홀애비루 있우." 이라거든.
아 그러는데 이게 워트게 반가운지 몰러. [청중:웃음]
"아 그러면 아까 나 얘기한 게 그짓말입니다." 여자가 하는 소리가, "내가 이 나이 이쩍 돼두
정한 냄편 없구 앞에 크는 자식이 하나두 없우. 그래서 내가 나스기는 여 시굴에 친가두 읎구, 아
까 그 내가 얘기항 게 그짓말인데, 당신과 같은 남자를 하나 골르러 나슨 사람유. 그런데 당신두
홀애비 나두 과분데 좌우간 하늘에서 지시를 했는지 우리가 연분이 있어 그런지 이 정자나무 밑에
서 홀애비 과부찌리 만냈이니, 당신 머리가 새카만데 그 껌은 머리가 하얗게 배꼿이 피두룩 나허
구 같이 평생을 같이 살먼 워떻겄우?" 여자가 이려.
그러니께 아 이 이선달뇜이 또 얘길 하네.
"나두 아까 얘기한 게 발간 그짓말유. [청중:웃음] 당신이 나하구 산다구 하니께 내 실제적 얘
기유. 당신이 나하구 산다면 오늘 저녁에 밥 두 상거리가 있어야, 두 상 사서 당신 한 상 먹구 나
한 상 먹구, 그 살기루 작정이먼 방은 워디 남우 동 서포(?)래두 하나 읃어 산다구 하지만..." 옛
날에 솥도 안 나올 때, 탕반 나왔지, 저 탕반솥, "그게 탕반 하나 사야지, 숟갈 두 개 사야지, 사
발 두 개 사야지, 대접 두 개 사야지, 뭐 종발 두 개 접시 두 개 사야지, 이건 고사해 놓구 오늘
저녁 밥 두 상 거리두 웂구, 나 시방 가진 것이 뭐냐먼 부랄 두 개허구 좆밲이 웂다"능겨. [청중:
웃음]{{ ) 1987.9.8. 서울 탑골공원에서 봉원호(70세) 구연.
거두절미한 것이지만, 잘 음미해 보면 이야기꾼들이 구연한 텍스트가 유별난 것임을 충분
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이야기 구연은 스토리를 진행해 나가는 데 급급한 일반
화자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이들은 이야기를 '맛있게' 엮어 나간다. 정서적으로 와닿
는 율조(5), 웃음을 절로 일으키는 익살과 골계적 과장(5,6), 소설을 연상시키는 곡진하고
흥미진진한 장면 묘사(6,7) 등이 이야기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 그리하여 그것은 청자
들에게 있어 어떤 드라마나 코미디가 따를 수 없는 훌륭한 파적거리로서의 소임을 다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이런 이야기를 즐기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 이 이야기꾼들에 대한 더 자세한 사항은 천혜숙과 신동흔의 앞의 논문 참조. 거기에는 여러 구체적
자료와 함께 이들의 다양한 이야기 기법에 대한 분석이 제시돼 있다.
위 이야기를 구연한 이야기꾼들은 이미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노인들이다. 또한 생존경
쟁 차원에서 이야기에 매달릴 정도로 절박한 사정에 있는 분들이 아니다. 이들의 이야기가
이 정도라면, 지난 시절 장터거리에서 수많은 동업자(다른 이야기꾼) 및 유사 업자(강독사,
소리꾼, 재주꾼 등)와 경쟁하면서 직업적으로 이야기를 구연했던 이야기꾼들의 이야기 수준
이 어떠했을까는 가히 상상이 가고도 남음이 있다. 계속 새로운 레파토리를 개발하고 구연
기법을 갈고 닦지 않으면 버티기 힘든 상황, 이야기는 나날이 새롭고 풍성하게 살아났을 것
이다. 위에 든 사례들은 그 이야기문화의 희미한 흔적일 뿐이다.{{ ) 사진실은 이 시기 이야기꾼의 재담이 흥행적·연희적 공연물로 자리잡고 있었음을 논증하였거니와,
지난날 이야기문화의 활력을 시사하고 있다. 사진실, [18-19세기 재담 공연의 전통과 연극사적 의의],
{한국연극사연구}, 태학사, 1997.
앞서 설화 텍스트와 판소리 사설 사이의 질적 차이를 지적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야기문
화의 주역이었던 전문적 이야기꾼의 이야기 텍스트를 놓고 볼 때 판소리와의 간격은 아연
좁혀진다. 그것은 거의 판소리 사설에 근접한 수준을 보이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조선후기
시정(장터거리)에 있어 이야기와 판소리가 그리 먼 거리에 있지 않았음을, 이야기가 판소리
에 단순히 소략한 소재만을 제공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판소리라는 특별한
서사양식의 실질적인 밑바탕이 될만한 자질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판소리는 이야기 이상의 것이다. 이야기를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그것이 곧 판소리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이야기가 판소리와 무관하다고 하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
다. 이야기가 곧 판소리일 수는 없지만, 판소리에 아주 근접한 것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러한 이야기는, 질적 변환의 계기가 주어질 경우, 판소리로 발전할 수 있다.
그 계기는 실제로 주어졌다. 이야기에 노래를 도입하는, 또는 이야기를 노래로 부르는 시
도가 그것이었다. 이야기의 재미와 소리의 흥취를 결합하려는 전향적이고 파격적인 시도는
성공했고, 그를 통해 판소리는 성립되었이다. 그 과정을 상상을 보태어 재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시정공간에 많은 예능인들이 활동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소리꾼과 재주꾼, 이야기꾼에다
가 전기수 같은 소설 낭독꾼이 가세하였다. 이들은 서로 경쟁하면서 자신의 예능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방법을 활발하게 모색하였다. 그때 노래에도 능한 이야기꾼--또는 이야기꾼이자
소리꾼인 예능인--이 있었다. 그는 이야기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방편으로 자신의 이야기에
노래를 한번 가미해 보기로 하였다. 이야기 속에 세간에 유행하는 노래--예컨대 타령--를
넣어 불러 보았고, 이야기 대목에 율조를 실어서 창조로 구연해 보았다.{{ ) 이야기 중간에 노래를 가미하는 예는 현존 이야기꾼에서도 종종 발견된다. 앞서 든 심종구씨도 그러
한 특징을 보이고 있다. 천혜숙, 앞의 논문(1984), 109면 참조.
무
당
들
이
신
의
내력을 구연하면서 종종 활용하는 방법이었다.{{ ) 판소리는 음악적 특성 및 연행방식과 서술구조 등에서 서사무가(특히 연희창본)과 유사성이 있거니
와, 여기에 무당 집안에서 예능인들이 많이 나왔던 점을 고려하면 서사무가가 판소리의 모태 내지는 배
경이 됐을 가능성이 크다(서대석, [판소리의 전승론적 연구], 116-120면). 그러나 주술적 신가로서의
서사무가 텍스트가 바로 판소리로 전변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연행방식은 몰라도 판소리의 텍스트만
큼은 시정의 이야기 종목으로부터 발전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새
로
운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이야기와 노래를 함께 즐기게 된 청중들이 좋은 반응을 나타냈다. 그는 이야기와 노래를 더욱 효과적으로 결합하는 방식을 개발해 나갔고, 노래에 자신있는 다른 예능인들이 또한 그 길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오래지 않아 이야기와 노래를 긴밀히 결합하여 상승적 효과를 실현하는 예능이 정착하여 사람들의 인기를 모아 나가기 시작했다. 판소리의 시작이다.
이상의 내용은 정확히할 수가 없다. 다양한 가능성이 있다. 그 과정을 주도한 것은 이야
기꾼일 수도 있고, 소리꾼일 수도 있으며, 양자를 겸한 예능인일 개연성도 크다. 한 예인이
그 과정을 주도했을 수도 있고, 여럿이 계기적으로 개입하였을 수도 있으며, 예능인 집단의
합작일 수도 있다. 그 예능인은 창우집단이나 연희패의 구성원일 수도 있고, 시정에서 개인
적으로 활동하던 사람일 수도 있다. 무당집안 출신일 수도 있고, 관노 출신일 수도 있으며,
일반 평민 출신일 가능성도 있다.{{ ) 판소리를 이룬 음악적 바탕이 어떤 것이었던가 하는 것도 확실히 말하기 어렵다. 무가였을 수도 있고
창우집단의 타령이었을 수도 있으며 둘 다일 수도, 그 이상일 수도 있다. 굳이 노래의 종류에 제한을 둘
필요가 없었으리라고 본다면 초창기 판소리를 구성한 음악적 원천은 다양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
러
나
그
어느 쪽이든, 문제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 본질이란 판소리가 조선후기 시정 연희공간에서의 이야기문화와 노래문화의 상승적 결합의 소산이라는 사실이다. 그러한 결합은 민간 예능의 발흥에 따른 역사적 필연이었다.{{ ) 한 가지 주목할 사항은 민간 예능 사이의 결합이 단순히 이야기와 소리 사이에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
라는 사실이다. 이야기와 연극의 결합이 시도되었고, 또한 노래와 춤·재담의 연극적 종합이 이루어졌
다. 전자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재담 공연을 들 수 있으며(사진실, 앞의 논문 참조), 가면극과 인형극,
무극이 후자에 해당한다.
이미 널리 알려져 있듯이, 판소리는 일단 성립된 이후 사람들의 폭발적 관심 속에 질적·
양적 발전을 거듭해 왔다. 그 변화는 이야기와 노래, 연행방식 등에 두루 걸친 것이었다.
새로운 레파토리들이 마련되었으며, 이야기와 노래를 교체하는 방식 및 연행의 형태와 몸짓
표현 등이 가다듬어졌다. 문학적으로 부분의 장면화와 사설의 운문화, 시제의 현재화, 이면
의 형상화, 상황의 정서화 같은 다양한 변화를 거쳤다. 음악적 변화 또한 두드러졌다. 애초
에 굿거리나 타령 장단 등을 기초로 했던 것이 점차 잦은몰이, 중중머리, 엇머리, 중머리
등의 장단이 분화됐고 뒤에 진양조와 휘몰이 장단이 개발되었다. 자연과 인간의 소리를 곡
진하게 표현하는 발성법이, 비장과 골계 등의 다양한 상황을 효과적으로 살려내는 음악적
기법이 다양하게 개발되었다.{{ ) 판소리의 문학적·음악적 변화의 과정에 대해서는 수많은 논의가 나와 있다. 그 중 그 총체적 과정을
요령있게 정리한 것으로서 임진택의 소론을 들 수 있다. 본문의 내용은 그의 정리를 많이 원용한 것임
을 밝혀 둔다. 임진택, 앞의 책, [살아있는 판소리], 205-210면 참조.
서
사
적
곡
절
이 있는 장편의 이야기를 음악적으로 살리기 위한 노력의 결과였다.
이야기와 노래를 한데 결합한 양식으로서의, 또는 노래를 활용하면서 이야기를 연출하는
양식으로서의 판소리의 특징은 현전 자료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이에 대한 구체적 검토
로 넘어갈 시점이 되었다.
3. 판소리의 이야기적 성격
- 임방울 [수궁가]를 중심으로
앞서 판소리의 역사적 변화 과정을 간단히 살폈거니와, 그 과정에서 판소리의 이야기적
성격도 적지않은 변모를 겪은 것으로 추정된다. 본래 이야기였다가 창으로 바뀐 부분이 커
다란 변화를 겪었을 뿐 아니라, 이야기로 남은 부분(아니리)에서도 변모가 감지된다.
그러나 판소리의 이야기적 성격 자체는 판소리의 발흥-전성기인 18-19세기를 관통하면서
뚜렷이 지속돼 왔다고 판단된다. 그러던 것이 20세기 들어 창극화 및 음반 제작 등 근대화
의 와중에서 음악적 요소가 일방적으로 부각되면서 이야기적 성격이 완연히 약화되는 상황
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는 오늘날에까지도 강하게 미치고 있으니, 판소리의 본령은 음
악성에 있다는 관점이 널리 퍼져 있다. 오로지 창을 잘해야 '명창'으로 인정되며, 이야기 능
력은 관심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야기에 치중하면 '아니리광대'라는 폄하를 감수해야 한다.
근대에 들어서 음악 중심으로 재편되기 이전의 본래의 판소리가 이야기적 성격을 짙게 지
니고 있었음은 현전하는 오래된 창본들을 통하여 그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아니리의 비중
이 그 단적인 징표가 된다. 먼저 [춘향가]를 보면, 박순호 99장본(1917)과 장자백 창본
(1925) 등 창과 아니리가 명시된 초기 창본들에 있어 아니리 부분이 현행 춘향가에 비하여
훨씬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 김진영 외 편저, {춘향전 전집} 1-3, 박이정, 1997에 실린 여러 창본들을 비교하면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전
체
사
설에서의 비중이 클 뿐 아니라 골계적 재담을 잘 활용하면서 생동감있게 살아나고 있다. [수궁가] 또한 사정이 비슷하여, 초기 창본인 심정순·곽창기 창본(1912)에 아니리가 당당히 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며, 우리의 고찰대상인 임방울 창본 또한 후대 및 현행 작품에 비하여 아니리의 비중과 역할이 높게 나타나고 있다.{{ ) 김진영 외 편저, {토끼전 전집} 1, 박이정, 1997에 실린 여러 창본을 비교하면 이러한 사실을 금세
확인할 수 있다.
이
상
여
러 자료 가운데 임방울의 수궁가는 구연현장에서 녹음된 창이 전해지고 있어 그 이야기적 성격을 온전히 검증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 이제 그 양상을 살펴볼 차례다.
임방울의 [수궁가]에 있어 아니리는 창에 덤으로 붙어 있는, 창을 하면서 쉬기 위한 부분
이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예능성과 재미를 갖추고 있다. 한 대목을 보기로 한다.
(8) 아 이 퇴끼란 놈이 상좌를 앉더니 몸을 폈다 오구렸다 좌우진퇴(左右進退)를 허고 제 장단
노래를 부르고 발로 귀를 떨고 [청중:웃음] 이 놈이 아 재미있게 노는디, 아 저 아래 골목에서는
여러 날 굶은 호랭이 하나가 배가 딱 고파서 올라오는 판인디 뭣을 하나 먹을라고 아무리 찾아봐
야 있어야제. 거기가 모도 모야 갖고 있는디,
[아 이놈들이 하나나 눈에 띌 것인디 어디로 갔어.]
아 이 여호가 이 방정맞은 놈이 거기서 빽 소리를 질렀든가 딱 쳐다보닝개 오목헌 디 가서 옴빡
모얐는디 참 좋게 되얐든가 보더라. [청중:웃음]
[아 저놈들이 저그 쏵 모야갖고 있으니 내가 볼 수가 있어. 내 저그 가서 내 살 좋은 놈으로 하
나 훑어 놓고 요량헐밖에.]
노는 좌석으로 달라들며 으르르르렁허고 달라들어 논 것이 이 놈들이 놀다가 으찌 놀랬던지 한
편으로 모도 몰리며 똥 오좀을 질질질, [청중:웃음] 모두 불쌍한 상호가 딱 되야 가지고,
[아이고 장군(將軍)님 어디 갔다가 말석(末席)에 참례가 되시오니까.]
[오 이놈 내 요리 지내다가 하도 시장해서 너희들 중에 살 좋은 놈으로 시방 요기(療飢)헐라고
내가 요렇게 들렀다]
딱 쪼구려 앉었는디 아랫배가 딱 들어붙고 눈구녁이 퍼런 것이 한 놈뿐만 아니라 여러 놈 상
(傷)허게 되얐던가 보더라. [청중:큰 웃음] 그양 노는 좌석이 아니라 그양 고름 되야 부렀든가 보
드라. 그러나 멧돝이란 놈허고 고라니란 놈허고 이 두 놈이 안심(安心)이 못 되야서,
[아이구 장군님 우리 둘 중에 누구를 몬야 요량허실라우.]
[아 거 물어볼 거 뭐 있냐. 멧돝 너 몬야 내 먹어야제. [청중:웃음] 네 이놈 내 배가 고파 거기
까장 갈 수도 없고 이놈 너 내 앞으로 좀 오니라.]
아 되야지란 놈이 아니 갈 수도 없고 [청중:웃음] 호랭이 앞으로 인자 죽으러 들어가는디 두
눈에 눈물이 맺거니 듣거니 유언을 허는디,
[네 이놈들 내가 오늘 죽은 이후에 우리 아들놈보고 제사(祭祀)는 알아서 지내라고 그러고 또
한 말 부탁(付託)은 명년 봄에 또 이런 잔치가 있을 것인개 우리 큰아들놈보고 부디 부조(扶助)만
주고 그냥 참석 말라고 그 말 허드라고 그려.] [청중:큰 웃음]{{ ) 김진영 외 편저, {토끼전 전집}, 144-145면. 인용자가 음반에 의거하여 어구를 조금 수정한 부분도
있다. 청중의 반응 부분은 인용자가 나타낸 것이다.
이는 길짐승들이 모여 상좌 다툼을 하고 모여 노는 자리에 굶주린 호랑이가 당도하는 대
목이다(이 아니리 대목은 상당히 긴데 편의상 앞뒤를 생략하고 중간부분을 옮긴 것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이 대목이 이야기적 재미와 흥취를 생동감있게 살리고 있음을 주목할 필
요가 있다. 창자, 아니 '화자'는 작중상황을 섬세하고도 요령있게 묘사함으로써 청자의 관심
과 흥미를 유도한다. 굶주린 호랑이가 짐승들을 발견하고 좋아하는 모습, 뜻밖에 호랑이를
만난 짐승들, 특히 멧돼지가 안절부절하는 모습 등이 눈에 잡힐 듯이 생생하다. 화자는 재
기 넘치는 서술적 묘사와 더불어 인물들의 대화를 성음에 변화를 주면서 연극적으로 재현하
는 방식을 활용하여 작중상황을 아주 효과적으로 살리고 있다. 그 결과 공연 현장에는 흥취
와 웃음이 만발한다. 이 대목에서 관객들이 보인 열띤 반응은 어떤 창 대목 못지 않은 것이
었다.
요컨대 이 대목은 완연히 이야기의 한 부분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 이야기 구연
수준은 물론 일반 화자의 그것을 뛰어넘는다. 특출한 이야기꾼, 전문적 이야기꾼의 수준을
나타내고 있다. 상황의 포인트를 잡아 가며 펼쳐나가는 재기 넘치는 묘사적 서술, 인물 대
화의 현장감 넘치는 연극적 재현--이는 특출한 이야기꾼이 이야기를 생동감있게 살리기 위
하여 흔히 쓰는 수법이다. 앞 절의 (7)대목에서 섬세한 재현적 묘사의 단면을 볼 수 있거니
와, 연극적 재현의 특성을 잘 살린 예를 하나 더 들어 본다.
(9) 아 이 홍대권이 엎드려서, 그저 말없이 엎드려 있죠.
"여봐라. 네가 그와 같은 착한 심성을 가진 백성이 있다니 과인이 진심이 심히 기쁘도다. 여봐
라, 너 글공부헸니?" 그런단 말여.
베슬 줄라고요. 맘이 착허니께. 대답이 웂어요.
"네가 만약 천자만 뱄(배웠)다도 한 자리 네리겄는디, 그래 천자(천자문)두, 시골에도 서당이 있
다는디 천자두 안 뱄니?"
"예, 천자는 배웠습니다."
"됐다. 천자를 배웠으면 됐어. 천자라능 게 동양문학의 한문의 기본 문자여. 하늘천 따지 검을현
누루황 집우 집주 이끼야까지 천 잔디, 천자 속에는 천문 지리 과학 예술 문화 종교 법이 그 속에
다 있어. 천자만 뱄으면 돼. 베슬 한 자리 내리고 말고. 게 더 밴 게 없느냐?"
"예, 계몽편에 동몽선습을 읽었사옵니다."
"무엇이 어째여? [청중:웃음] 아 계몽편에 동몽선습을 읽었어? 어 그 많이 뱄구나. 또 밴(배운)
게 있느냐?"
"예, 통감 일곱째 권에 명심보감을 배운 줄로 아뢰오."
고만 만조백관 숙종대왕이 정신이 막 오락가락해요.
"야- 많이 뱄구나. 더 밴 게 있거든 모조리 아뢰라."
여기 홍대권이가 아뢰는디 뭐라고 아룁니까?
"아뢰오. 소학 대학 논어 맹자 사서삼경 주역 열두 권을 다 배우고 배운 책을 가마솥에 넣고 물
세 동이 붓고 사흘 과서 그 건덕지 국물할라 다 먹은 줄로 아뢰오." [청중:웃음]
김한유씨는 연극적 기교가 뛰어난 이야기꾼으로서 상황을 현장감있게 재현함으로써 청중
들의 흥을 돋구는 것을 장기로 삼고 있다(때로 젊은이 담배 피는 흉내 내기나 외제 담배를
국산 담배로 만들기 같은 연극적 퍼포먼스를 보이기도 한다). 그는 인물의 대화를 구분하여
서로 다른 목소리로 실감있게 재현하거니와, 위 인용문을 보면 숙종대왕과 홍대권이 서로
다른 말투(예컨대 경어법)로 대화를 진행해 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재기
발랄한 재담식 표현과 더불어 (8)의 호랑이와 멧돼지 대화 장면과 흡사한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이와 같은 범상치않은 유사성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이야기꾼으로서의 수련과 경
험의 결과라고 할 것이다.
임방울 [수궁가]에서 이야기꾼의 텍스트와 아주 유사한 모습을 보이는 대목을 하나 더 들
어 본다.
(10) 앞으로 바짝 다가들면서 그 자래 앞니 단단헌 놈으로 호랭이 알불을 딱 물어 탁 채놓은
것이 으떻게 뜨겁던지, 그 짓이 어디서 났는고허니 저 전라도 해남 관머리 제주 들어가는 데 거그
서 났는디 거그서 호랭이란 놈이 떼 내불고 어떻게 도망을 했던지 숨 좀 쉴라고 가서 딱 보니 의
주 압록강에를 가 있던가 보더라. [청중:웃음] 아 이놈이 좀 술라고 그래서 시방 헐떡거리고 시방
앉었는디 아 저 바우틈에서 남생이 하나가 뾰쪼쪼름허니 호랭이란 놈 눈에 비쳤던 모양이라.
[아 이거 그냥 그 새 저그 쫓아왔네!] [청중:웃음]
거그서 또 디립다 뺀 것이 함경도 세수랑 고개에 가서 썩 불거졌던가 보더라. [청중:웃음]{{ ) {토끼전전집} 1, 148면.
이 대목은 과장적 표현이 웃음을 자아내고 있는데, 그 과장의 정도가 매우 심하여 폭소를
자아낸다. 이야기꾼이 흔히 사용하는 전형적인 재담 표현의 방법이다. 앞의 예문(6)에서 진
진한 과장적 표현의 예를 볼 수 있거니와, 다음 대목은 예문(10)과 더욱 흡사하다.
(11) 냅다 쳤는디, [화자가 지팡이를 휘두르자 핀마이크가 나가 떨어졌다. 청중 웃음] 쳤는디,
박장수의 칼이 반도막이 쨍그랑 부러져요. 쭈욱 날렀는디 남산을 넘어가지고 한강을 근너 제주 한
라산 백록담에 가 뚝 떨어졌어. [청중:웃음] 칼이 반 도막이. [청중:웃음]{{ ) 1998.3.17. 서울 탑골공원에서 김한유 구연.
이 또한 우연의 일치가 아님은 물론이다.
그렇지만, 판소리의 아니리와 이야기꾼의 이야기가 그 특성이 정확히 일치하는가 하면 그
렇지는 않다. 판소리 아니리는 이야기꾼의 이야기에 비하여 좀더 격식을 갖춘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한 느낌은 무엇보다도 율조와 연관이 있다고 여겨진다. 보통의 이야기가 자연스
러운 산문을 지향하는 데 비하여, 판소리는 창 부분 외에 아니리 부분에서도 일정하게 율조
를 살리고 있는 것이다. 한편, 판소리의 아니리에서는 일반 이야기에 비하여 고사를 포함한
문자쓰기의 사례가 풍부하게 나타나며, 열거식의 장식적·관습적 표현을 많이 사용하는 양
상을 나타내고 있다. 이 또한 판소리 아니리가 뭔가 격식을 갖추고 있다는--달리 표현하면
틀에 맞추진 것 같은--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12) 자 별주부나리 문자통 궁굴러 가니 착실히 좀 들어보시오. [보면 홍안이요 홍안백발이요
홍불감장이요 아가사창이요 당구삼년이요 이불가독식이요 전불궤면이요 탄탄대로요 어동육서 좌포
우혜요 홍동백서 분향재배요 오육칠 두루숭이요 일삼오 대감이요 명기위적은 전라감영이요.] 아
이놈이 문자를 갖다가 엎어 썼다, 뒤집어 썼다 가관이 없던 것이었다. [청중:웃음]{{ ) {토끼전전집} 1, 150-151면.
만만찮은 문자속에다가 열거식의 장식적 표현을 통해 율조를 잘 살려내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물론 즉흥적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랜 수련을 통해 틀을 갖추어진 것이
라 할 수 있다. 위 대목만 하더라도 임방울 외의 다른 판소리꾼(정광수, 박봉술 등)도 비슷
하게 보유하고 있는 것을 보면 예전부터 있던 것이 전수돼 왔음을 알 수 있다. 판소리의 아
니리도 수련의 대상이라는 것, 그리고 그 수련이 아니리의 흥취를 독특하게 살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위 인용에 보이는 바와 같은 음영조의 율조라든가 열거식·장식적 표현은 설화에서는 보
기 힘든, 판소리 특유의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이는 특출
한 이야기꾼들이 일반 화자에 대한 차별적 장기(長技)로서 흔히 활용하는 기법인 것이다.
먼저 율조를 보면 앞의 인용(5)에 화자가 이야기의 율조를 잘 살리고 있음이 단적으로 드러
나고 있다. (6)의 뒷부분에서도 다소간의 운율감을 느낄 수 있다. 다음, 이보다 더욱 특징
적인 국면이라 할 열거식의 관습적·장식적 표현은 앞의 (9)의 끝부분("소학 대학 논어 맹
자 사서삼경 주역 열두 권……")에서 엿볼 수 있다. 다른 예를이 또한 많이 있다.
(13) 입성 해 논거 (…) 가오는 데 보이 통냥깃에다가, 외오리 망건에다가 호박 풍잠에다가 지
꼬리 당좌에 밍지 후두루막에 삼성버선에 노방지 바지저고리에다 한 불 떡 갈아입히가주골당 (
…){{ ) 심종구 구연. 천혜숙, 앞의 논문(1989) 458면에서 재인용.
(14) 만날 조당수만 먹던 사람네가 하얀 쌀밥에다 미역국에다 쇠괴기국을 끓여가지구 먹으니께
섯바닥이 장구 열채 돌리듯 하고, 목젓이 여기 오너라 하구, 배꾑이 해해 웃도록 앉어 먹었수그랴.
[청중:웃음]{{ ) 1987.9.8. 서울 탑골공원에서 봉원호 구연.
(15) 그짓말을 한 해 두 해 했느냐? 해방후로 48년 동안 그짓말만 해먹고 삽니다. 거 팔자가
아주 사나워요. 그럼 이 파고다 공원, 탑동 공원 여기서만 그짓말을 허느냐? 전국을 다 댕깁니다.
지방 방방곡곡에 노인대학 웂는 디가 웂어요. 노인대학 복지회관 부녀회관, 경로당 노인회관, 여름
이먼 해수욕장, 때로는 가을에 어느 곳에 가먼 난장이 서요. 그 난장 바닥에 가서 그짓말을 시작
헙니다. 게 파고다공원 남산공원 우이동 정릉 효창공원 사직공원, 인천에 만국공원 대전에 보문산
공원 대구 달성공원, 제주도 서귀포 흑산도 울릉도 거제도, 연포 대천 만리포, 음성 증평 괴산, 충
주 청주 예·덕산 홍·광천-, 여기 소사 부평 동인천 주안 월미도루, 의정부루 해서 강원도 속초
까지, 이게 지가 댕기머 그짓말 허는 무대예유.{{ ) 1997.4.14. 서울 탑골공원에서 김한유 구연.
율조까지 가미된 이러한 열거식의 장식적 표현은 이야기를 아주 흥취있게 만드는 구실을
한다. 청중들은 이런 대목에서 화자의 구연능력에 경탄하면서 흠뻑 이야기의 맛을 느끼게
된다. 그러한 효과 때문이겠지만, 위에 보듯이 여러 이야기꾼들이 이러한 표현기법을 활용
하고 있다. 청중과 만나는 현장에서 터득한, 그리고 수련--판소리꾼의 수련과 질적으로 다
르지 않은--을 통해서 얻게 된 남다른 기교이자 능력이다.
이야기꾼이 구연한 이야기와 판소리 속의 이야기(아니리)는 이와 같이 여러 측면에서 유
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앞에서 지적했듯이 우연의 일치일 수 없다. 양자는 서로
실제적 연관을 맺고 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그렇다면 그 관계는 어느쪽에서 어느쪽으
로 영향을 준 것인가? 일방적 논단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것은 이야기꾼의 이야기 기법
이 판소리에 옮겨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 한 예로 인용(15)에서 볼 수 있는 김한유씨의 표현법은 판소리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없다(이
분은 판소리와 아무 관계가 없는 분이다). 이야기의 맛과 효과를 높이는 방안을 찾는 과정에서 터득한
표현법인 것이다. 과거의 전문적 이야기꾼이 이와 같은 표현법을 두루 활용했을 가능성은 극히 높다.
이
야
기
가 판소리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에서 이야기꾼의 효과적 표현법들이 두루 채택되었고, 그후 판소리꾼들이 그 기법을 더욱 특화시켜 확대 재생산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상 우리는 이야기꾼의 이야기와 판소리 아니리를 비교하면서 그 유사성 및 연관성을 확
인해 보았다. 이제 이 지점에서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는 의문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
니리 아닌 창에 관한 의문이다. 아니리가 이야기와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다면 창은 어떠한
가? 판소리의 창 부분 또한 이야기꾼의 이야기와 일정한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 판소리와 이야기의 연관은 단순히 아니리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창 부분 또
한 거기서 열외일 수 없다. 일단 텍스트를 먼저 보기로 한다.
(15) 자라는 앞에서 앙금앙금 퇴끼는 뒤에서 깡짱깡짱 원로수변(遠路水邊)을 내려갈제 건넌산
바위틈에 여우란 놈이 나앉이며, [여봐라 토끼야] [오야.] [너 어디 가느야?] [나 수국(水國) 들
어간다.] [수국은 무엇허로 가느냐?] [오위대장(五衛大將) 살로 들어간다.] [허허 자식 실없은 놈
녹록한 네 놈 마음을 말려 무엇허랴마는 고인(古人)이 이르기를 토사호(兎似狐)니라 하였으니 너
와 나와 이 산중의 암혈에 길들이고 비 오고 안개 긴 날 발자취 서로 찾아 동성(同姓)삼아 동기상
통(同氣相通) 일시 이별을 마잤더니마는 저 지경이 웬일이냐. 가지 말고 이리 오너라. 가지 말고
이리 와. 수국이라 허는 데는 한번 가면은 못 오느니라. 이리 오라면 이리 와.{{ ) {토끼전전집} 1, 155면.
(16) 용왕이 그제는 토끼한테 넘어가는디 [그러하면 간 출입하는 표(表)가 있느냐.] [예 있지
요.] [어디 보자.] [자 보시요] [빨그란 궁그가 서이 늘어 있으니 저 궁그가 모두 다 어전 내력으
로 뚫어졌느냐.] [예 소퇴(小兎)가 아뢰리다. 한 궁그로는 대변을 보고 또 한 궁그로는 소변을 보
고 남은 궁그로는 간을 내고 딜이고 임의로 출입하나이다.] [그러하면 간을 어디로 넣고 어디로
내느냐.] [입으로 넣고 밑궁그로 내오니 만물시생(萬物始生)이 동방삼팔목(東方三八木) 남방이칠
화(南方二七火) 서방사구금(西方四九金) 북방일륙수(北方一六水) 중앙오십토(中央五十土) 천지음
양 오색광채 아침 안개 저녁 이슬이 화합하여 입으로 넣고 밑궁기로 내오니 만병회춘(萬病回春)
명약이라 으뜸약이 되나이다. 으뜸약이 되나니다.]{{ ) 위의 책, 163-164면.
이는 중몰이로 부른 '창' 부분이다. 그렇지만 글자로 옮겨진 텍스트만을 놓고 보면 창인지
아니리인지 쉽게 분간하기 어렵다(운율감이 느껴지지만, 그것은 아니리 또한 마찬가지다).
나아가 판소리의 한 대목인지 이야기꾼 이야기의 한 대목인지도 분간하기가 쉽지 않다. 이
야기꾼이 인물의 대사를 연극적으로 재현한 것과 차이를 발견하기 어렵다. 앞에 인용한 (9)
와 서로 비교해 보면 금방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15)와 (16)은 창으로 부른 대목이며, 음반을 틀어서 들어 보면 그 느낌이 이야기
와는 크게 다르다. 이야기 아닌 노래가 특유하게 유발하는 흥취와 정감이 있다. 그러나 그
것은 일반적인 노래와 크게 다르다는 점 또한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따로 앞뒤 이야
기 맥락 속에서 존재하는, 그 맥락의 일부를 이루는 노래다. 그 자체 서사의 한 대목인 것
이다. 그리하여 이 노래가 살리고 있는 것은 일반 가요에서와 같은 서정적 정감이 아니다.
이 노래들은 이야기의 맛을 살리도록 구성돼 있으며, 실제로 이야기를 흥취있게 실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 판소리에서 장단과 음악적 기교가 유난히 발달한 것은 이처럼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
과 깊은 연관이 있으리라고 본다. 그것은 보통의 서정·교술적 노래로써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고, 그
리하여 새로운 기법의 개발이 활발히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것
은
'특별한 형태의 이야기 구연'이라고 규정될 수 있다.
임방울의 [수궁가]의 창 부분은 주로 이와 같은 성격의 노래들로 채워져 있다. 그리하여
전체적으로 노래의 흥취와 이야기의 흥취가 상승효과를 낳고 있다. 그렇지만, 단지 이러한
노래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와는 성격이 꽤 다른 것들도 있다.
(17) 범피중류(泛彼中流) 둥덩둥덩 떠나간다. 망망한 창해이며 탕탕한 물결인데 백빈주(白
洲) 갈매기는 홍요안(紅蓼岸)으로 날아들고 삼강(三江)의 기러기는 한수(漢水)로 돌아든다. 요랑
헌 남은 소래 어적(漁笛)이 그언마는 곡종인불견(曲終人不見)의 수봉(數峯)만 푸르렀다. 애내성중
마고수( 乃聲中萬古愁)는 날로 두고 이름인가. 장사(長沙)를 지내가니 가태부(賈太傅)는 간곳없
고 멱라수( 羅水)를 바라보니 굴삼려(屈三閭) 어복충혼(魚腹忠魂) 무양(無恙)도 하돗든가. 황학
루(黃鶴樓)를 다다르니 일모향관하처시(日暮鄕關何處是)요 연파강상사인수(煙波江上使人愁)는 최
호(崔灝)의 유적(遺蹟)이라. (…) 한 곳을 다다르니 금계(金鷄) 소리가 쨍기랑쨍 들리거늘 눈을
들어 살펴보니 백옥 현판에 황금 대자(大字)로 남해용궁 수정문(水晶門)이라 뚜렷이 새겼거늘 토
끼가 보고 좋아라고 허는구나.{{ ) 위의 책, 158-159면.
진양조로 불리는 창 대목이다. 한눈으로 보아도 앞서 본 이야기 대목과는 텍스트 구성이
다름을 알 수 있다. 경치와 그에 따른 정감에 치중하고 있는 이 노래는 본질적으로 서사적
이라기보다 서정적이다. 게다가 이 노래는 그 사설이 특별하게 가다듬어져 있으니, 고사와
한시를 활용한 열거식의 장식적 표현이 이야기의 형태로는 실현되기 힘든 수준으로 길고 복
잡하게 이어져 나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목조차도 이야기와 무관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
다. 앞서 지적했듯이 열거식의 장식적 표현은, 그 정도에는 차이가 있지만, 이야기꾼의 이
야기에서도 종종 볼 수 있는 것이다. 고사와 한시 등이 채용되는 예들 또한 이야기에서 어
렵지 않게 볼 수 있다.{{ ) 앞서 따로 설명하지는 않았으나 이야기꾼 가운데는 문자와 고사를 폭넓게 활용하는 이들이 있다. 한
예로, 필자가 보고한 탑골공원의 조재의씨 같은 분은 한시를 포함한 문자속을 활용하는 것을 자신의 장
기로 삼고 있다(신동흔, 앞의 논문, 3.1절). 한문이 널리 쓰이고 있던 지난 시절에는 이러한 기법을 잘
활용하던 이야기꾼이 더 많이 있었으리라고 추정해 볼 수 있다.
위 대목의 두드러진 특징은 서사를 구성하는 한 장면이 전체적 맥락에서 벗어나 대폭 확대
되
면서 자족적 의미를 시현한다는 것인데, 비록 그 정도와 방법은 다르지만, 이 또한 이야기꾼의 이야기에서도 종종 볼 수 있는 특징이다.
(18) 아 그런 농부들이 나오는데 보니께, 이 서울 기생년이 보니께 사람두 같구 아닌 것두 같다
이게여. [청중: 웃음] 그래 시커먼 것들이 나오는데, 떡허니 옆에 와 있더니만 그 옛날에 담뱃대
두 안 나올 시절여 그때는. 담뱃대두 웂던 시절에 여 산천에 가먼 곱돌, 저 조대흙이라는 게 있우.
조대흙으루다가 담뱃댈 손수 맹글어서 질이가 요만한 곱돌대라능겨. 그걸 맹글어가지구서 담배를
피우는데, (…) 이늠을 여기다 담배쌤지를 저저마다 하나씩 찼는데, 이게 뭐냐하먼 문 창호지를
지름을 멕여가지구 주머닐 하나 이만큼 다 찼우. 그래 씀스리 말려서 한 담배쌤이란 말여. [청중:
웃음] 그늠을, 그걸 떡 차구서는 이 사람네가 나온단 말여. 아 나오더니만 그 도룅이 데미 속에
곱돌대라는 걸, 요만큼한 걸 끄내더니만은, 그 옆에 찬게 뭔가 했더니 그눔을 끄내더니, 아 이렇게
차구서 엎드렸으니께 태양이 빨아들여서 이느무 담배가 바싹 말렀거든. [청중:웃음] 그래 요놈을
꺼내더니 바싹 말렀으니께 요기다 놓구는 토 토 침을 뱉으먼 이게 눌어. [청중:그렇지] 그러니께
그 곱돌대를 하나씩 끄내더니만 요놈을 담어가지구서는 화룃불로 가더니 거기다 대고 뽀끔뽀끔 빠
는데, 아 그때서 그게 담뱃불루 알었어, 이 기생년이. [청중:웃음]{{ ) 1987.9.8. 서울 탑골공원에서 봉원호 구연. 이런 예는 김한유씨가 구연한 설화에서도 발견되며, 탑골
공원의 또다른 이야기꾼 조일운씨가 구연한 이야기에도 이런 대목이 포함돼 있다. 신동흔, [역사인물담
의 현실대응방식 연구], 서울대 박사논문, 1993, 164-166면 참조.
이 대목은 남편감을 구하러 나선 기생이 정자나무 아래서 쉬다가 농부들이 담배를 태우는
것을 구경하는 대목이다. 이 대목의 농부들은 이야기의 전체적 맥락과 아무 상관이 없는 인
물인데, 화자는 그 모습을 상세하고도 흥취있게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이야기의 재
미를 배가시키고 있다.
위 (18)대목이 다시 본래의 서사의 맥락 속으로 돌아가듯이, 수궁가의 (17)대목 또한 큰
서사의 맥락 속에 포함돼 있으면서 그 맥락으로 돌아간다. 이야기를 더욱 기름지고 풍부하
게 하는 역할을 다한 채로. 이 어찌 이야기의 소중한 일부가 아니겠는가?{{ )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자연스러운 이야기 형식으로부터 멀어지면서 노래 자체의 자족적
특성이 강화된, 특히 서정적 특성이 강조된 이런 창 대목들이 대체로 후대적 산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 대목들에는 대개 수많은 한시구절과 고사들이 얽혀 있거니와, 이런 노래가 판소리사의 초창기부터
존재했을 가능성은 아주 적다. 이들은 판소리가 양반 좌상객들의 애호를 받으면서 '품위'를 상승시켜 나
가던 과정에서 추가된 것들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이제 논의를 정리해 본다. 판소리는 노래와 말이 결합된 문예양식이라는 표현은 수정돼야
한다. 판소리는 노래와 '이야기'가 결합된 문예양식이다. 한편 판소리의 본령은 노래에 있다
는 관점도 수정돼야 한다. 판소리의 본령은 노래와 이야기가 상승적으로 결합된 데 있다.
그 가운데 어느쪽이 더 중요한가 묻는다면 그것은 둘로 나누어 대답할 수 있다. 노래로서의
구연과 이야기로서의 구연을 비교하면 아무래도 노래로서의 구연의 비중이 크다고 할 수 있
다(예외가 없지 않지만).{{ ) 임방울 [수궁가]의 경우 호랑이와 자라 대목 및 자라와 토끼 대목에 있어 이야기 구연이 노래 구연보
다 강조되는 양상이 보인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역시 노래 구연의 비중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그
러
나
또
달
리 보면 판소리는 그 텍스트 전체가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판소리는 그것을 한편으로는 노래로써(창), 한편으로는 이야기로써(아니리) 구현하면서 문학적 효과를 극대화한다. 물론 그 이야기 텍스트는 평범한 것이 아니다. 조선후기 이야기문화 발흥의 소산인, 전문적 예능성을 담지한 특별한 텍스트다. 설화를 넘어서 소설의 수준에 이른…….{{ ) 설화와 소설의 본질적인 차이로는 여러 가지 사항이 거론되고 있지만, 필자는 스토리에 대한 의존도
가 그 중요한 판별 기준이 된다고 보고 있다. 스토리를 중심으로 하여 작중상황이 엮어지고 의미가 구
현되는 것이 설화라면, 스토리에 의존하지 않고 작중상황이 자족적으로 살아나며 그 작중상황들이 서로
결합되면서 스토리 차원을 뛰어넘는 구체적이고 총체적 미적 경험과 의미를 구현하는 양식이 소설이라
는 입장이다(신동흔 [정수경전을 통해 본 고전소설의 장면구현 방식], 애산학보 12집, 1990). 보면, 일
반 화자의 이야기 구연이 소설의 수준에 미치는 예는 거의 없다. 그러나 특출한 이야기꾼의 텍스트는
간혹 소설 수준에 육박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탑골공원의 봉원호·김한유 등. 앞의 인용(18) 참조).
그러한 이야기 텍스트는 판소리로 변전하면서, 즉 주요 부분이 노래로 엮어져 자족적으로 확장되면서
설화의 수준을 아연 뛰어넘어 소설의 경지에 들어서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판소리는 그 자체 '구비 소
설'로서의 성격을 지니는바, 글로 옮겨지기만 하면 곧바로 소설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판소리계 소설
의 성립은 이와 같이 설명된다.
4. 판소리 전승의 방향
- 결론을 대신하여
앞서도 언급했듯이 그 동안 판소리는 노래로서의 특징이 중시되면서 이야기적 성격이 외
면을 받아 왔다. 이에 이 논문에서는 판소리의 이야기적 성격을 조명하는 작업을 수행하였
다. 그 결과 이야기와 판소리가 역사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야기적 요소가 판
소리의 문예적 본질을 규정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이야기와 판소리의 역사적 관계를 논증함에 있어 필자는 그 전제로서 이야기꾼이 주도했
던 조선후기 시정의 이야기문화를 새롭게 재구하는 작업을 수행하였다. 현존하는 몇몇 특별
한 이야기꾼의 사례가 과거의 모습을 되살리는 유용한 통로가 돼 주었다. 그 작업의 결과
우리는 과거 이야기꾼이 형성한 이야기문화가 판소리 성립의 바탕이 되기에 충분한 것이었
음을 알 수 있었다. 이야기의 경쟁적 발흥은 마침내 이야기와 노래의 결합이라는, 노래를
통한 이야기 구연이라는 새로운 길을 열었고, 그 시도는 훌륭히 성공하여 판소리 양식이 산
출되었다. 요컨대 판소리는 조선후기에 크게 발흥한 이야기문화(+노래문화)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판소리의 이야기적 성격을 구체적으로 검증하는 작업은 임방울의 [수궁가]를 대
상으로 하여 진행하였다. 먼저 [수궁가]의 주요 아니리를 검토한 결과 그것이 단순한 '말'이
아니라 '이야기'로서 그 구체적 속성 면에서 이야기꾼의 이야기 텍스트와 흡사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필자는 그러한 유사성을 이야기꾼의 이야기가 판소리로 수용된 데 따른
것으로 해석하였다. 한편, 아니리뿐 아니라 창 부분에서도 또한 이야기꾼의 이야기 텍스트
와의 유사성 및 연관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흔히 판소리 특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여러가지 표현법들이 실은 이야기꾼들에게서 선례를 찾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판소리의 창
은 그러한 이야기 텍스트를 적절히 변개하고 확장하여 노래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이야기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이야기의 맛을 실현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말하자면
판소리의 창은 '특별한 형태의 이야기 구연'으로서의 특징을 지닌다. 판소리가 그 문예적 바
탕을 이야기에 두고 있다는 징표다.
판소리는 이야기에 기반을 두고 있는 양식이다. 이야기 텍스트를 한편으로는 노래로 한편
으로는 이야기로 구연하면서 그 상승적 결합을 통해 공감과 흥취를 자아내는 문예양식이다.
판소리를 단순히 노래 양식으로, 음악 양식으로 편향하여 보는 시각은 재고돼야 한다.
이제 눈을 현재 판소리의 전승 상황으로 돌려 보자. 현재 판소리는 어떻게 보존 전승되고
있는가? 앞서도 언급하였지만 그 초점이 오로지 음악에, 노래에 맞추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판소리 전승자들은 이른바 명창이 되기 위하여 피나는 연습을 거치면서 창을 수련한
다. 그러나 아니리는, 이야기는 어떠한가? 아니리는 창에 덧붙은 들러리에 불과하다. 창을
하다가 잠시 쉬어가는 부분이며, 창과 창 사이의 내용을 연결해 주는 매개체일 뿐이다. 이
렇게 아니리가 죽으면서 판소리의 이야기적 성격이 대폭 감퇴하였다. 그리고 판소리 전체가
하나의 장대하고 스펙터클한 이야기로 살아나지 못한 채 노래들의 집합체로 변질되고 말았
다. 비유하자면 날개 한쪽이 꺾이고 척추가 힘을 못 쓰게 된 상황이다.
판소리를 활력있게 살리기 위해서는 창과 함께 이야기를 살려야 한다. 판소리꾼은 단순한
소리꾼이 되어서는 안되며, 소리꾼인 동시에 이야기꾼이 돼야 한다. 소리를 수련하듯이 이
야기를 수련해야 한다. 그리하여 양자를 조화롭게, 상승적으로 실현해내야 한다.
판소리라고는 곡조와 장단도 제대로 모르는, 귀명창과도 거리가 먼 문외한의 무책임한 발
언이 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어쩌면 그런 미숙자의 입장이기에 보통사람의 감각과 통할 수
가 있다고도 생각한다. 알아듣기도 힘들고 때로는 부담스럽기까지 한 창에 비하면 이야기는
훨씬 더 쉽고 친근에게 사람들에게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이야기가 살아나
면 창 부분까지도 함께 살아날 길이 열린다고 본다. 필자 자신 이런 저런 판소리를 들으면
서도 편안하게 빠져들기가 어려웠던 것인데, 임방울의 [수궁가]는 듣고 또 들어도 여전히
즐겁고 좋았던 것이다. 아니리는 물론이고 창까지도. 현재 활동하는 많은 명창 가운데 이야
기꾼으로서의 재능을 잘 발휘하고 있는 박동진옹이 폭넓은 대중적 호응을 받고 있다는 사실
을, 그리고 많은 창작 판소리 가운데 이야기적·재담적 재미를 살린 김지하·임진택의 [오
적]과 [똥바다] 정도가 그나마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 ) [오적]이나 [똥바다]의 이야기구조와 재담은 거듭 들어도 재미가 우러나는 전통 판소리의 경지에 미
치지 못하고 있다. 현대의 고전으로서 힘있게 살아나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라고 할 것이다.
을
가
볍게 볼 일이 아니다.
필자의 주장은 판소리를 시세에 맞춰 변형하자는 것이 아니다. 판소리 본래의 모습에 충
실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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