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로 풀어쓴 한국사 강의록
김기섭
제1장 우리는 왜 국사를 배워야 하는가?
1) 역사란 무엇인가?
일기와 기록
여러분은 요즘 일기를 쓰고 있습니까? 쓴다면 얼마나 솔직하게 쓰나요? 혹시 다른 사람
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순간적으로 둘러댄 일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쓰나요? 당시의 상황을
묘사한 대목이 정확하기는 한 겁니까?
요즘 일기를 쓰지 않는 사람들은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려 봅시다. 일기장을 매일, 혹은 일
주일에 한번씩 선생님께 검사받던 그 시절 말입니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 희미한 기억분이
라면 여드름과의 전쟁이 한창이던 사춘기를 떠올려봅시다. 그때 여러분은 아주 정직하게 그
날 일어난 일들을 기록했던가요/
저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제 일기장이 거짓말 투성이였던 것은 아닙니다.
그저 만약 다른 사람이 제 일기장을 읽었을 때 저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거나 도덕성에 심각
한 흠을 남길 수 있겠다 싶은 대목만 아예 빼놓았을 뿐입니다. 그래서 저의 어린시절 일기
장에는 남이 알아도 조금밖에 상관없는 저의 고민과 감정에 대한 이야기들로 꽉 차 있습니
다.
이런 경험이 있기 때문인지, 저는 다른 사람의 일기에 대해서도 자주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냅니다. 특히 책으로 출간된 일기류를 읽다 보면 마치 짙은 화장으로 자신의 기미와 주름
살을 감춘 여인을 만난 듯 연민의 정부터 느낍니다. 왜 그럴까요?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대개의 경우, 일기는 비밀을 전제로 자신과 관련된 각종 진실을 기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때로는 가장 솔질한 고백록으로 이용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중에 공개되어야 하는
상황에서 작성된 것이라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지는 이기김과 자시
보호본능이 작용할 여지가 많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왜 그토록 심하게 화를 내었는지, 왜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변명하는데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심지어 어떤 사실은 아
예 의도적으로 은폐할 수도 있겠지요.
개인의 비밀스러운 일기가 그럴진대, 다른 많은 사람들이 반드시 읽게 될 기록을 남기는
경우라면 더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다행히 자기에 관한 사항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것이라면, 상황은 많이 달라져서 어는 정도 객관적일수 있겠지만, 이제는
사건을 보는 그 사람의 능력과 성격이 문제됩니다.
같은 일을 겪고서 사람마다 다른 이야기를 할 때가 있습니다. 불순한 목적에서 어느 한쪽
이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해 말과 기록이 다른 경우도 있지만, 각자 나름대로 겪고 생각한
바를 사심없이 이야기하는데도 원인과 결과 그리고 향후 대책 등 의견이 많이 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자시중심적인 사고 때문일 것입니다.
인간의 사고 능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한계는 기혹을 통해 그대로 전달됩니
다. 그런데 역사는 기본적으로 기록 위에 서 있습니다. 우리가 역사가의 기록과 평가를 맹신
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 있습니다.
사람은 모두 주관적으로 사고한다는 사실, 그리고 객관적이며 종합적인 가호극 신봉하는
역사가의 분석... 평가 역시 절대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나면, 이제 우리의
눈은 달라집니다. 어떤 역사적 사건의 원인과 결과 그리고 의의가 단순히 단답형 끝나지 않
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기록과 역사
우리는 지금 역사라는 말을 흔히 쓰지만, 근대 이전의 동양사회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저 간단하게 사라고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전통을 되살려 요즈음도 많은 대학에서
역사학과라는 명칭 대신 사학과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는 본래 '기록하는 사람'을 뜻하는 상형문자였다고 합니다. 이는 '태사공기'('태사
공이 기록한 책'이라는 뜻으로, 태사공서라고도 하는데, 그것이 '사기'라는 명칭으로 굳어진
것은 중국의 삼국시대라고 한다. 태사공은 사마천을 가리킨다.)를 출인 것이 바로 사기라는
사실을 통해서도 재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글자의 뜻은 조금씩
변해 '사람'보다는 '기록'이라는 의미로 더 자주 쓰여졌습니다. 그 결과, 기록하는 사람을 뜻
할 때에는 가나 관 같은 글자를 덧붙여 가가 혹은 사관이라는 용어를 쓰게 되었던 것입니
다.
한편, 역사라는 단어는 중국에서 명나라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나타납니다. '역'의 뜻은
'지나다'이므로, '역사'는 '지나간 일에 대한 기록을 뜻하는 셈이 되는데, 사실 이것은 의미가
중복된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기록은 그 자체로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한 것이니까요. 그럼에
도 불구하고 중국에서 굳이 역사라는 용어를 새로이 쓰게 된 데에는 서양의 Historyfksms
단어를 의식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일종의 번역어라는 것이지요.
History의 어원은 라틴어의 Historea입니다. Historea는 '쓰다'라는 뜻의 Hi와 '이야기'를
뜻하는 Storea를 합성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야기를 쓰다'라는 뜻이 되는 것이지요. 중
국을 중심으로 한 동양의 사와 같으면서도 다른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부분입니다. 구체적
으로 무엇이 다를까요?
춘추와 춘추필법
현존하는 동양 최초의 사서는 춘추입니다. 봄과 가을을 책의 이름으로 삼은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춘추는 춘추시대 제후국의 하나인 노나라와 관련된 각종 사건을 날짜별로 기록한
책입니다. 전하는 말로는 공자의 저술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춘추는 역사서라기보다 일종의
경전으로 취급되어 이른바 오경의 한자리를 차지했던 것입니다.
춘추가 씌어질 무렵에는 아직 종이가 발명되지 않아서 나무를 알맞게 깎고 그곳에 글을
썼습니다. 그래서인지 춘추는 매우 간단한 서술이 돋보입니다. 좌씨춘추전과 같은 주석서가
후대에 필요해진 이유도 춘추의 글이 너무 짧은 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여하튼 몹시 제한
된 지면 탓에 춘추는 그저 보고 들은 사실을 짤막하게 가감 없이 기술하는 방법을 썼습니
다. 그러나 그것은 누가 읽더라도 똑같은 도덕적 평가를 내릴 수 밖에 없는 그런 내용이었
습니다.
공자가 살았던 시기는 정치...군사적으로 매우 복잡한 시기였습니다. 수백 년을 이어온 주
나라 왕실의 힘이 미약해지자 각지에서 왕을 대신해 백성을 다스리던 봉건제후들이 왕실의
권귀를 공공연히 부시하던 패자의 시대였습니다. 따라서 지금의 쿠테타와 같은 하극상이 빈
번히 일어나고, '실리'라는 이름으로 기존의 질서를 위협하는 각종 타협과 야합이 횡행하던
시기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기기를 살면서 공자가 강조한 것은 정명과 존왕양이였습니다. 정
명은 명분을 바로 세우자는 것이고, 존왕양이는 왕을 높이 받들고 도전세력을 물리치자는
뜻입니다.
공자의 이러한 사상은 춘추에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실 그대로 적는다'라는
춘추의 편찬 방침은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부도덕한 이들의 행위를 세상에 널리 알려
뭇 사람들의 지탄을 받게 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포폄(포상과
폄하. 포는 칭찬, 폄은 비방을 뜻함.)을 보이지 않는 서술의 기준으로 삼은 셈이지요.
따라서 춘추에서는 은연중 감상의 윤리가 강조되고 있으며, 그 때문에 춘추는 마치 사실
과 도덕의 결합체인 듯한 인상을 줍니다. 이러한 춘추의 서술방식을 우리는 흔히 춘추필법
이라고 하는데, 춘추필법은 중국의 송나라 때 성리학을 주도한 주희를 통해 크게 강조되었
고, 우리 나라에서는 명분론이 횡행하던 조선 후기에 맹위를 떨쳤습니다.
고대의 중국에서는 정부의 관료가 역사 기록과 역사서 편찬을 전담하다시피 했습니다. 그
리고 정부의 관직 중에는 그 일을 전담하는 자리가 있어, 그 자리를 맡아 일하는 사람을 흔
히 사관이라고 했습니다. 사관은 전문직이었습니다. 춘추가 일종의 역사서이긴 하지만, 전문
적인 역사서는 못 됩니다. 그래서 춘추의 편찬자라고 하는 공자를 일반적인 역사가로 분류
하지는 않습니다.
사기와 정통역사서
전문적인 역사가, 곧 사관이 쓴 최초의 역사서는 사기입니다. 한나랄 무제 때 사마천이라
는 사람이 아버지 사마담의 작업을 이어받아 태초부터 한나라 당시까지의 역사를 정리한 책
이지요. 사기는 당시로서는 정말 특이한 형태의 역사서였습니다. 본기...표...서...세가...열전 등
으로 구성되었는데, 본기는 제왕의 사적을 시대순으로 기록한 곳이며, 표는 제왕과 제추의
출생...즉위...중요 활동 등을 요약 기재한 곳입니다. 서에는 예법...형법...음악...경제 등 시대별
사회상을 적어놓았고, 세가에는 제후에 관한 사항을 적었습니다. 그리고 열전은 신하와 백성
중 특기할 만한 사람들에 대해 적어놓은 부분입니다. 이러한 체제의 역사 서술방식을 우리
는 보통 기전체라고 부릅니다. 본기과 열전으로 구성되었다는 뜻이지요. 풍부한 정보를 수록
한 사기의 체제...구성과 분향은 이후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편찬하는 역사서의 모델이 되었
습니다.
기전체는 정치 중심의 역사의식을 철저하게 반영한 서술방식입니다. 맨 앞을 차지하는
본기라는 단어에서도 짐작되듯이, 제왕을 세상의 중심으로 여기고, 그들의 활동을 전하는 일
에 모든 촉각을 집중시킵니다.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신하들의 각종 행위를 기록하는 데 많
은 지면을 할애합니다. 제왕과 신하, 권력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진 각종 정치적 사건
들을 기록하는 것이 역사가의 본분이요 역사서의 역할이라는 생각을 반영한 것입니다. 이렇
게 보면, 역사서란 일종의 정치 자료...기록인 셈이지요.
서기 8년에 한나라가 멸망하고, 왕망의 신나나를 거쳐서, 서기 25년에는 광무제가 한나를
재건했는데, 이를 이전의 한나라와 구분해 보통 후한이라고 부릅니다. 후한의 반고가 아버지
반표를 이어 전한의 역사를 사기와 같은 방식으로 정리한 것이 바로 한서입니다. 한서는 본
기...표...지...열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후한서는 남북조시대의 송나라 사람 범엽이 지었
고, 후한이 멸망한 뒤 전개된 삼국시대의 역사서 삼국지는 진나라의 진수라는 사람이 편찬
했습니다.
이처럼 중국에서는 한 왕조가 멸망하고 나면 왕조가 앞선 왕조의 역사를 정리하는 것을
당연시했는데, 이처럼 국가가 주도해 만든 공식 역사서를 보통 정사라고 합니다. 정사는 모
두 기전체로 되었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기전체는 사안별로 매우 자세한 기록을 남길 수 있는 편찬방식입니다. 그러나 일목요연하
게 읽어가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운 체제와 분향입니다. 따라서 이에 대한 보완책이 나오게
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지요.
송나라 때의 사마광은 읽기 편한 역사서를 만들고자 했는데, 그 결과 바로 자치통감입니
다. 역사상 중요한 사건을 날짜순으로 정리한 이른바 편년체의 역사서이지요. '자치통감'이라
는 이름에는 '(왕이 나라를) 다스리는데 도움을 주는 역사서'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말하
자면 군자의 정치적 교훈서인 셈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자치통감은 교훈적이고 실용적인 성
격을 매우 강하게 띠고 있습니다. 교훈적이기에 다분히 도적 지향적입니다. 그러면서도 편찬
자의 주관을 최대한 배제하고 있는 그대로 기술하려는 원칙을 세우고 있습니다. 즉, 사실 지
향적이지요. 앞서 말한 춘추필법의 영향일 것입니다.
동양에서의 역사 개념
지금까지의 거론한 역사서에는 몇 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특징은 이들
본뜬 후대의 동양 역사서들에서도 똑같이 발견되는 성격입니다. 이제 그 특징을 간략하게
정리해보겠습니다.
첫째, 중국을 비롯한 동양에서는 전통적으로 왕조와 지배자 중심의 역사를 서술했다는 점
입니다. 춘추, 사기, 자치통감 모두 위정자를 대상으로 했거나 그들을 위해 만든 책입니다.
또 한서, 후한서, 삼국지, 수서, 당서 등에서 보듯이 한 왕조를 단위로 삼아 역사를 정리했습
니다. 다라서 당연히 정치사 중심의 역사 인식이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동양의 역사서에서
평민에 관한 부분을 찾기 어려운 이유는 바로 여기 있습니다.
둘째, 술이부작 정신이 서술의 원칙이었다는 점입니다. '술이부작'이란 '(듣고 본 대로)기술
하기는 하되 창작하지는 않는다'는 뜻으로 논어에 나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글을
쓰는데 자기의 주관을 최대한 배제한다는 것이지요, 이처럼 객관적 서술을 지향하는 태도는
역사서를 지금 당장 이용하기보다 후손들이 과거의 사실을 정확히 알고 평가할 수 있도록
충분한 자료를 제공한다는 측면이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약 어떤 역사적 사
건에 대해 역사가가 자신의 생각을 나타내고 싶으면 사론을 이용했는데. 사론은 역사가의
생각을 논술한 것으로서, 오늘날의 평론과 유사합니다.
셋째, 유교적 역사관이 지배한다는 점입니다. 앞에서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동양의 역사
서는 도덕적 교훈을 주려는 목적이 강합니다. 그리고 역사서를 통해 포폄하려는 의도가 강
합니다. 그리고 역사서를 통해 포폄하려는 의도가 강합니다. 이른바 춘추필법이 그 대표적인
예일 것입니다. 따라서 동양의 역사서는 그 자체로 교육용 도덕 교과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신 사건의 인과관계를 밝히려는 노력은 크지 않아서 서양의 역사개념과 큰 차이를 보여줍
니다.
그리스의 역사서
서양에서는 헤로도투스(Herodotus)의 히스토리아(Historia)가 가장 이른 시기의 역사서입
니다. 히스토리아는 서기전 492~480년 사이에 벌어진 페르시아(Persia) 전쟁의 역사를 다루
었는데,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그리스(Greece) 소도시연맹이 페르시아 대제국을 이길 수
있었던 원인이 무엇인지를 구명하는 데 초점을 맞춘 책입니다.
이를 위해 헤로도투스는 전쟁이 절어진 곳의 지형과 풍물...기후 등을 직접 조사했습니다.
따라서 그 책에는 페르시아...이집트...그리스,...이탈리아 등지를 여행한 경험이 다양하게 반영
되어 있습니다. 다분히 실증적인 역사 서술태도이지요,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문학적 설화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부분도 적지 않아서 시대적 한계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
다. 여하튼 서양 사람들은 헤로도투스를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의 공적을 높이 기
린답니다.
헤로도투스의 한계를 어느 정도 극복한 사람으로는 투키디데스(Tukidides)를 들 수 있습
니다. 그는 사람들이 역사를 알면 정치에 많은 도움을 주겠다는 생각에서 히스토리아를 집
필했는데, 이 택은 투키디데스 자신이 경험한 펠로폰네소스(Peloponnesus) 전쟁사를 주로다
루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알다싶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서기전 431~404년에 그리스의
도시국가인 스파르타(Sparta)와 아테네(Athene)가 벌인 전쟁입니다. 투키디데스는 이 전쟁의
원인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신화와 전설을 배격하고 합릭적으로 각
종 자료를 검토한 것입니다. 따라서 투키디데스는 역사 사실을 초자연적인 사실과 구별하려
고 한 최초의 과락적 역사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회...경제적인 면을 도외시
함으로써 일정한 한계를 안고 있었습니다.
로마(Rome) 제국의 폴리비우스(Polybius)는 로마가 융성하게 된 원인을 추구했습니다.
그는 역사를 교훈의 원천으로 인식해 역사 지식을 인간 행위의 귀감으로 여겼습니다. 그래
서 후대의 역사가들은 폴리비우스를 서양 역사에 실용적 의미를 부여한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문헌비판학과 근대사학
서양 역사에서는 서기 4세기 말 로마 제국이 동...서로 양분된 이후를 중세로 봅니다. 여러
분도 잘 알다시피 서양의 중세는 봉건제와 농노제를 그 특징으로 합니다. 그리고 사회...종교
적인 측면에서는 기독교가 유럽 사람들의 생활과 의식을 지배하던 시기입니다. 따라서 당시
많은 사람들의 역사관도 기독교의 교리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사락이 신학에
예속되었다고나 할까요? 역사학은 기본적으로 인간에 기준을 둔 학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학문이 신에 기준을 둔 신학의 영향하에 있었으니 학문 발전에 적지 않은 제약이 가해졌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학은 조금씩 발전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와 관련
된 각종 사건과 믿음을 증명하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사료를 수비하고 정리하는 일들이 한
쪽에선 꾸준히 진행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배우고 있는 근대적 의미의 역사학은 19세기에 독일의 랑케(Ranke :
1795~1886)와 그 제자들이 주장하고 추구하던 것입니다. 랑케는 사료를 경시한 18세기의
계몽주의 역사가들을 비판하면서 사료를 비판적으로 분석...연구하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방법론은 17세기의 사료 수집...정리 경향을 이어받은 것으로서, 콩트(Conte :
1798~1857)의 실증주의로부터 영향받은 바가 크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역사서 이외에도 회
고록...일기...편지...외교문서 등을 사료로 채택함으로써 사료 부족의 골을 메우려 했습니다.
그는 역사학의 방법론과 관련해 몇 가지 중요한 말을 남겼는데, 그중 "그것이 본래 있는 그
대로"와 "사실의 엄격한 제시는 역사 서술의 최고 법률이다"라는 말이 인상적입니다. 끊임
임없이 연구해 63권의 저작을 남긴 랑케를 서양 사람들은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부릅
니다.
서양에서의 역사 개념
위에서 설명한 것을 다시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첫째, 서양의 역사학은 동양과 달리 사건의 원인과 결과를 구명하고 해석하려는 목적에서
출발했다는 점입니다. 헤로도투스와 투키디데스 그리고 폴리비우스에게서 확인되듯이 그들
의 역사서 편찬은 개인의 호기심이 학문적으로 확대된 형태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그들의
역사서는 다분히 분석적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동양처럼 당
시의 정확한 기록을 남기는 기능을 소홀히 했고, 그것이 오늘날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둘째, 문험비판적 역사학이 발달했다는 점입니다. 종말론에 입각한 중세의 기독교사관은
종래의 순환가관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가질 수 있게 했지만, 개인적 탐구열에 입각한 자유
로운 분석...연구의 기회를 제한했습니다. 그러나 14세기경에 이르러 사람들의 생각이 신 중
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변화하게 되면서 인간의 자유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 그와
함께 그 동안 차곡차곡 쌓아놓기만 했던 각종 서적들을 비판적으로 연구하는 일이 활기를
띠게 됩니다. 한 대 그 활기에 대한 반작용이 유행을 타기도 했지만, 결국 19세기 이후에는
과학적 서술을 역사학의 원칙으로 삼게 되었으며, 지금도 이러한 문헌비판학이 역사학을 주
도하고 있습니다.
2) 역사의 주인
역사학의 대상
인문학은 기본적으로 인간과 그 문화를 탐구하는 학문입니다. 그리고 역사학은 인문학의
한 분야입니다. 따라서 역사학의 중심에는 언제나 인간이 잇습니다. 인간과 고나련된 일이
아니라면 그것은 역사학자의 연구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역사학은 인간의 모든 활동을 대상으로 삼지는 않습니다. 자연적이고 생리적인 것
들은 제외하기 때문입니다. 개인 문제에 한정된 활동도 역시 제외하는 게 보통입니다. 다시
말하면, 역사학은 인간의 활동 가운데 사회적인 활동만을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지요. 인간
의 사회적 활동이 모두 역사학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시장에 가서 물건을
사고 파는 일도 사회적 활동이고, 옆집에 사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일종의 사회적
활동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역사가의 서술 범위에 들지 않는 것이 보통입니다. 왜 그럴
까요? 역사가들은 사회의 변화를 중시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활동 중에서도 사회에 변화
를 일으킬 수 있는 활동에 주목하는 것이 바로 역사학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의 실체를 '사실'이라고 합니다. 역사학은 이 사실을 밝히는 일에서부터 출
발합니다. 그러나 밝혀진 사실이 모두 역사서에 수록되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가는 인간의
사회적 활동 가운데 사회의 변화에 영향을 미친 의미있고 가치있는 사실만을 뽑아 기록하기
때문입니다. 역사서에 기록된 사실을 우리는 특별히 '사실'이라고 부릅니다. 결국, 사회적 가
치가 역사학자의 서술기준이 되는 셈이지요, 이는 아마도 '역사=교훈'이라고 하는 관념때문
일 것입니다.
역사의 주체
앞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동...서양 모두 "역사는 정치 기록"이라는 인식이 전통적 역
사관을 지배해왔습니다. 이는 기존의 역사가 지배픙 중심의 기록을 일관해온 사실에서 입증
됩니다. 다만, 동양의 경우 유교 경전의 영향으로 백성 혹은 백성의 뜻을 중시햇고, 심지어
백성을 국가의 근본으로 파악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오늘날의 민주주의에서아 같이
주권재민을 인정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백성이 통치의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백성은 조
세...군역...요역의 대상이요, 왕을 위시한 지배층의 생활 근거였으므로 무시할 수 없었던 것
이지요, 다시 말하면, 다수 혹은 집단으로서의 백성은 중시되었어도 개별화된 백성은 홀시되
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역사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일까요? 이 문제에 대해 아주 오랜동안 사람들의 의식
세계를 지배해온 사관이 하나 잇습니다. 바로 영웅사관입니다. 영웅주의 또는 영웅중심사관
이라고도 불리는 영웅사관은 어떤 한 사람을 역사의 주체로 인식하고, 그에 맞추어 해당 시
대를 설명합니다. 영웅을 시대를 대표하는 일종의 상표로 인식한다고나 할까요? 예를 들자
면, 프랑스의 '나폴레옹 시대'와 같은 용어가 그에 해당됩니다. 우리 나날의 경우에는 광개토
왕 시대, 세종대황 시대라는 용어를 지적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나아가서는 조선왕조를 일
컫는 이조라는 명칭도 이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어떤 한 사람이 아주 특별한 공적을 세우거나 특출한 지도력을 발휘했을 때
그를 부각시킬 필요는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그 사람도 사회 구성원의 하나이
며, 사회의 변화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점에서 개인의 한계를 분명히 전제해야 합니
다. 그 사람이 그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제도와 조직 그리고 인력 등의 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영웅사관은 이 점을 홀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웅사관에는 한 사람이 시대 혹은 사건에 대한 공적을 독차지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
다. 어떤 전통에서 승리하고 난 뒤, 지휘관 한 사람만 훈장을 받는 등 각종 포상을 독차지하
고 나머지 병사들의 공적이 무시된다면 이처럼 불공평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영웅
사관하에서는 이런 일이 공공연히 일어납니다. 살수대첩-을지문덕, 귀주대첩-강감찬, 한산대
첩-이순신 등의 역사 인식은 그 대표적 예라고 하겠습니다.
이처럼 시대 상황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사건들을 한 사람의 능력으로만 설명하게 되면,
우리는 역사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게 됩니다. 사회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해 왔
습니다. 거기에는 거대한 물줄기를 연상시티는 그 무엇이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
대 개인이 아닙니다. 개인의 능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어떤 흐름이 있는 것입니다.
민중사관
영웅사관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면서 주목을 받은 것이 이른바 민중사관입니다. 역사의 주
체는 민중이라는 것입니다. 역사 인식의 폭을 녋혔다는 점에서 민중사관은 영숭사관에 비해
한 단계 발전한 사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민
중'의 범위가 매우 모호하다는 것입니다.
민중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누구를 민주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사람들은 보총 민중과
피지배층을 같은 뜻으로 이해하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민중인지를 알기 위해 우리느
먼저 피지배층의 범위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피지배층을 구성하는 사람들의 주류는 일당 하층민입니다. 그리고 서기에 중류층이 포함
될 수 있겠지요. 따라서 민주이란 보통 하층민과 중류층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말뜻만으로 본다면 대부분의 상류층 역시 지배자는 아니기에 민중과 유리될 수 없습
니다. 크게 보아서는 지배층도 민중의 범위에 포함된다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오늘날 자신을
민중과 무관한 존재로 보는 사람은 없은 것입니다.
비록 분명하게 분류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역사상 누구를 민중이라 할 수 있을지 관념적
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 중심에는 일반 서민들이 자리하고 잇을 것입니다. 좋습니다.
이제 그들 서민층을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고, 그들의 역할을 강조해야 겠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마음먹을수록 한 자기 심각한 문제가 지속적으로 발생합니다. 자료가 부족하다는 것
이지요, 동...서양 모두 정치사 중심의 역사 지속되는 동안 피지배층에 대한 관심이 전무하다
시피 했고, 그에 따라 민중에 관한 문헌자료가 빈곤해진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는 단
편적인 자료를 통해 그들의 생활상을 유추할 수 있을 뿐인데 그나마도 쉽지는 않습니다.
설령 자료가 충분하다 해도 역사의 주체를 항시 민중으로 보는 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과연 그들이 인간 사회의 변화에 어느 정도나 영향력을 발휘했는가 하는 점 때문입니다. 현
대 사회에 가까워질수록 민중의 역할은 강조되어왔습니다. 그러나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수
록 그들의 덩치는 점점 작아집니다. 왜 그럴까요? 인권을 보장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정치
에 참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소수를 위해 다수가 희생되었기 때문입니다. 민중은 물론
소중한 존재이지만, 역사상 그들을 무한정 강조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3) 종말론의 비밀-필연과 우연
기독교의 종말론
20세기가 끝날 무렵이 되니까 요즘 인류의 종말에 관한 주장 등이 이곳저곳에서 우후죽순
처럼 제기되고 거의 모든 종교에는 종말에고나한 교리가 잇고 그것이 가끔 사람들에게 공포
감을 심어줍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기독교 교리에 의하면 종말에 가까우면 세상은 악의 세
력으로 가득 채워집니다. 착한 사람들은 이미 하늘로 올라가 하느님과 함께 있기 때문입니
다. 그러다 때가 되면 세상을 지배하게 된 악마의 세력들이 그리스도가 이끄는 천사의 군대
와 결전을 벌이게 되고, 결국 악마의 세력은 영원히 소멸하게 된다고 합니다. 선과 악이 충
돌해 선이 영원한 승리를 거둔다는 것이죠, 이러한 줄거리는 이미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 예
정되어 있으므로 그 누구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이 이를 믿는 사람들의 주장입니다.
기독교 교리는 기본적으로 역사의 진행 방향을 필연에 입각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이 결정해놓은 각본에 따라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역사는 필
연으로 점철되어온 셈입니다. 삼국 통일은 신라가 이룰 수밖에 없었고, 임진왜란도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겠지요, 두 차례에 걸친 세계 대전과 남북 분단 등은 이미 예정된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큰 전쟁의 시발점을 살펴보면 아주 작은 사건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리고 그 사건은 마치 우연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프랑스 대혁명 때 루이 16세의 마차가 우
연히 그 길을 지나던 시민에게 발각됨으로써 루이 16세의 망명이 실패했고, 그것이 결국 일
개 장교에 불과하던 나폴레옹의 황제등극으로 까지 연결되었다는 사실은 우연한 사건의 파
급효과가 얼마나 커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물론 이를 우연을 가장한 필연
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필연과 우연을 가늠케 하는 예가 하나 있습니다.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일요일 무심코 들은 아이의 방 침대 밑에서 수 개월이 지난
아들의 빵점자리 시험지를 발견한 뒤 아내와 심한 말다툼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원인
이 1년 전에 끊은 담배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담배를 사러 밖으로 나갔는데 가게 앞에서
그 동안 소식을 모르던 동창생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근처 술집에서 친구과 술을 거나하게
마신 남자는 집으로 돌아오던 중 무단횡단하다가 그만 교통사고를 당해 죽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 많은 대목에 우연이라는 말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수개월이나 지
난 시험지가 왜 하필 그때 거기 떨어져 있었는지, 그 날따라 아내의 신경은 왜 곤두서 있었
는지, 어쩌자고 그 차는 시내에서 과속을 했는지 등등..........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남자의 죽
음을 숙명으로 여기고 앞서의 과정을 빈큼없이 짜여진 프로그램의 일부로 이해할 수도 있겠
습니다.
필연 - 역사의 법칙성
만약 필연을 믿는다면, 역사의 진행 방향에 대해 일종의 법칙을 적용하려는 시도도 가증
합니다. 맹자라는 책에는 맹자의 역사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5백 년마다 새로
운 왕조가 탄생한다고 말한 대목입니다. 왕조의 흥망성쇠가 반복된다고 보았기 때문인데, 이
와 같은 전통 깊은 사관을 우리는 흔히 순환사관이라고 부릅니다. 단순 반복으로 보느냐, 아
니면 나선형으로 진행되는 순환으로 보느냐에 따라 순환사관을 다시 둘로 나누기도 하지만,
역사행로를 생명체와 동질시했다는 점에서는 같다고 하겠습니다.
순환사관은 신국으로의 단선 진행이라는 시각에서 역사를 이해한 기독교 사관에 의해 부
정되었습니다. 한 예로 로마 제국의 멸망을 직접 목격한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인류 역
사는 6시대로 구분되는데, (1)아담부터 노아의 홍수까지 (2)노아의 홍수부터 아브라함가지
(3)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4) 다윗부터 바빌론 유수까지 (5) 바빌론 유수부터 그리스도 탄
생까지 (6)그리스도 탄생부터 최후 심판가지라고 합니다.
그대에 들어와서 서양에서는 진보주의사관이 등장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역사는 고대에서
중세로 퇴보했지만 다시 근대로 진보했으며 앞으로는 계속 진보만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역사학에서 진보...퇴보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특히 인간의 정
신활동과 관련될 때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철학...문학...예술분야에서 진보라는 용
어는 매우 어색하다고 하겠습니다.
진보사관을 수정...발전시킨 것이 발전사관입니다. 역사는 끊임없이 발전한다고 보는 입장
인데, 헤겔과 마르크스의 이론이 대표적입니다.
헤겔에 의하면 역사란 자유가 확대되는 과정이었습니다. 고대에는 군주 한 사람만 자유로
웠던 반면, 중세에는 귀족들의 자유가 보장되었고, 그대에 이르러서는 드디어 모든 사람이
자유를 만끽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유라는 기준은 다분히 추상적이어서 명확한
실체를 제시하기가 어렵고, 구분점도 모호합니다. 보다 분명한 기준은 없을까요?
마르크스의 유물사관
마르크스는 경제라는 기준을 찾아냈습니다. 특히 생산수단에 기준을 두어 (1)원시공산체사
회 (2)노예제사회 (3)봉건 농노제사회 (4) 자본주의사회 (5)공산주의사회 등으로 도식화했습
니다. 여기에서 (2)노예제사회는 고대, (3) 봉건 농노제사회는 중세, (4)자본주의사회는 근대
와 각각 대응한다고 하는데, 이 같은 마르크스의 역사관을 유물사관이라고 부릅니다. 경제를
역사 발전의 원동력을 파악했다는 것이지요.
마르크스의 이론은 인류 역사의 핵심을 정확하게 찾아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서양 역사
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이론을 한국...중국 등의 동양 역사
에 적용한다면 평가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한국의 고대는 그리스...로마의 경제체제와는 달
라서 노예가 기본적인 생산을 담당하지 않았으며, 중세 역시 봉건영주의 존재를 인정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에 대해 마르크스의 이론을 따르는 사람들은 동양의 고대를 '아시아적
생산양식' 그리고 중세를 '중앙집권적 봉건사회'라고 명명함으로써 동...서양간의 차이를 봉합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럴 경우에는 서양 중심으로 역사를 이해해 서양은 전형, 한국들의
동양은 변형이라는 자기비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또 한 가지 마르크스의 이론에서 주목되는 것은 역사의 미래상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결국 지구상의 인구 중 절반을 사회주의 체제 속으로 인도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만, 적어도 논리의 일관성만큼은 인정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오해가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역사학은 미래를 예견하게 하는 학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역사학
은 다만 과거에 비추어 미래에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
것은 또한 시기구분이 절대성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과도 통한다고 하겠습니다.
4) 국가를 왜 배우는가?
구사란 자시 나라의 역사입니다.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우리의 조상들이 걸어돈 길을 적
어놓은 것입니다. 따라서 거기에는 기쁨과 슬픔, 만족과 분노, 성공과 좌절, 진취와 시련 등
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기쁨과 만족, 성공과 진취만 골라내어 가슴 뿌듯해 해서는 안됩니다. 또 슬픔과 분
노, 좌절과 시련 등을 은폐해서도 안되며, 오히려 과장시켜 분한 마음을 갖게 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손으로 해를 가리는 일과 같으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과 같습
니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과거의 경험을 되새김으로써 보다 밝은 미래를 열어가기 위
해서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궁극적 관심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있어어야 합니다. 미래는
항상 불투명합니다. 지금 우리가 어떤 길을 선택하는냐에 따라 전혀 다른 길이 펼쳐집니다.
그리고 그 길을 되돌리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 속에는 언제나 충분한 사고와 냉
철한 판단으로 자신의 갈 길을 선택해야 나주에 후회가 없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우
리는 항상 선택을 강요당합니다. 자신의 미래를 결정짓는 선택말입니다. 자신의 결정을 나중
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 현재 최선이 무엇인지를 정화가게 판단해내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우선 지금 우리가 어디에 서 있으며, 어떻게 이 자리에 오게 되었는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역사는 바로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줍니다.
국사는 역사의 범위를 자신의 문제로 한정시킨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거울에 비친 내 모
습과 같습니다. 내 얼굴에 흉터가 있다고 해서 나를 미워할 수는 없습니다. 도 거울의 흉터
부분을 가린다고 해서 얼굴의 흉터가 정확히 어디에 있으며, 어떤 모양이고 얼마나 깊은지
를 알아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흉터가 왜 생겼는지를 곰곰이 따져보아야 합니다. 이처럼
분석을 충실히 한 사람은 앞으로 다시는 똑같은 상처를 입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지금의
흉터마저 잘 치료해 깨끗한 얼굴, 밝은 얼굴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국사는 차가운 머리로 배워야 합니다. 역사는 사실의 기초 위에 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거를 자신의 희망대로 그릴 수는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그림을 그려야 현대의 내 위치를
정확히 알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에세 가장 필요한 덕목은 냉철한 판
단력과 분석력을 은연중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그래야만 정확한 좌표를 스스로 구할 수 있
게 될 것입니다.
단답형 사고는 금물입니다. 이완용 때문에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식의 생각은
당시의 많은 문제들을 호도할 수 있는 부정확한 판단입니다. 당시 조선의 정치...경제...사회
상 그리고 일본 내부의 정치....경제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찰한 뒤 문제에 답하려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국사를 배우는 데에는 따듯한 가슴도 필요합니다. 구사는 남의 나라 역사가 아니라 우리
역사입니다. 내 얘기인 것입니다. 내 얘기를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차분하게 말할 줄도 알아
야만 하지만, 때론 자랑스러워하고 때론 분노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국가와 민족에
대한 애착심을 함께 기를 수 있는 것입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지 않습니까?
국사는 어머니와 같습니다. 모진 풍파를 많이 겪는 우리의 어머니는 그 사이에 한족 눈과
다리를 잃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모시고 밖에 나갈라치면 가끔은 남의 눈이 신경에 거
슬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어머니를 속이고 남의 눈을 속일 수는 없는 일입니
다. 어머니의 초상화를 만들 때, 두 눈을 예쁘게 그려 넣고, 두 다리를 멋있게 그려 놓거나
긴 치마로 다리를 가리는 방법은 옳지 않은 방법입니다. 그것은 또한 역경을 이겨온 어머니
의 삶 자체에 대한 왜곡...부정이기도 하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어머니의 자식들은 모름지기 이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어머니가 남다른 여건 속에서 얼
마나 꿋꿋하게 살아오셨는지를 자랑하고, 남다른 자식 사랑을 자랑하며, 음식 솜씨를 자랑해
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짙은 화장으로 화사하게 멋을 낸 다른 사람의 어머니와 비교할
때, 눈이 성하지 못하고 다리가 성하지 못한 우리 어머니가 최선을 다해 자식들을 남부럽잖
은 어엿한 성인으로 키워온 사실을 자못 반복하지 않는 법입니다. 자부심이 깊은 사람은 그
것을 유지하기 위해 사랑하는 마음이 더욱 커지고 깊어질 것입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관련해 항상 유념해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해
야 할 '나라'의 본질과 실체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고민하면서 국사를 공부해야 gksekss 것
입니다.
근대 이전의 '나라'는 그 자제로 왕조를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하늘아래 왕의 신하가 아닌
사람이 없고,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다'는 생각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기였기 댐문입니다.
이때의 '나라'는 개인의 소유화된 영역, 개인의 노예화된 백성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
니다. 그러나 지금 이 세상에 개인의 소유로 인정될 수 있는 '나라'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결
코 존해해서도 안됩니다. 단지 시간적...공간적...부문적으로 제한을 밪는 '정권'이 있을 뿐입
니다. 정권은 국민 모두의 행복한 삶을 위해 소수가 다수를 대표하여 일할 때 비롯 정당성
을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이는 원칙입니다. 그런 점에 볼 때, 이제 우리에게는 '통치'하는
사람도, '통치받는 사람도 없어야 합니다 정권에 대한 사랑을 나라 사랑과 혼동하는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애국심 곧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더 멀리 퍼질 수 있을 것입
니다.
모쪼록 국사 공부를 통해 여러분의 진정한 애국심이 더욱 깊어지기를 바랍니다.
<참고문헌>
박성수, 역사학개론, 삼영사, 1977
이기백 외, 우리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삼성미술문화재단, 1976.(문고판)
이기백... 차하순 편, 역사란 무엇인가, 문하과 지성사, 1978.
Toynbee(저)...홍사중(역), 역사연구1...2, 동서문화사, 1978.
고려대 사학과 교수실 편, 역사란 무엇인가, 고려대 출판부 1979.
E. H Carr(저)...황문수(역), 역사란 무엇인가, 한림미디어, 1996.
차하순 편, 사관이란 무엇인가, 청람문화사, 1982.
제등효(저)... 최민(역), 역사와 역사학, 형성사, 1983.
정구복, 한국인의 역사의식,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9.(문고판)
제2장 선사시대이 모습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1) 흙은 살아 있다 - 고고학의 원리
살아 있는 흙-생토
요즘 환경에 대한 관심이 날로 높아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경제...산업 발전에만 정신을 쏟
는 사이에 우리 국토의 많은 부분이 오염되었고, 그 결과 우리의 건강은 물론 후손들의 생
활 터전가지 위협받기에 이르렀습니다. 국토의 오염원으로는 여러 가지를 꼽을 수 있겠지만,
그중 생활쓰레기와 폐수 등 땅을 병들에 하는 요소들은 우선 지적할 수 있겠습니다. 땅이
병든다? 언뜻 보기에 상당히 문학적인 표현인 듯하지만, 이건 지극히 사실적인 표현입니다.
우리 몸은 세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것들이 생동감을 유지하기 때문에 우리가 건강하
게 활동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이가 태어나 어른으로 자라는 것을 생물학적으로 표현하면
세포의 끊임없는 분열과 성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과 같은 동물만 그런 것이 아닙
니다. 풀...나무와 같은 식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생명체는 모두 세포로 구
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세포가 성장 혹은 활동을 멈추면 큰일입니다. 그것은 곧 죽음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생명체가 땅으로부터 생깁니다. 그리고 땅 위에서 생활합니다. 따은 흙알갱이
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식물의 종류가 다양한 것처럼 흙의 종류도 다양합니다. 동물의 피부
색이 다양한 것처럼 흙의 색깔도 다양합니다. 흙도 변합니다. 먼지가 날아와 모이더니 흙덩
이가 됩니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지나고 나면 흙덩이가 돌이 되기고 합니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흙을 생토하고 합니다. '살아 있는 흙'이란 뜻이죠, 생토는 자연퇴적
한 상태의 흙입니다. 그 위에 흙먼지가 날아와 덮이고, 낙엽이 떨어져 쌓입니다. 그것을 받
아들이며 생토인 흙은 마치 세포처럼 성장합니다. 그래서 생토의 색깔도 천연색 그대롭니다.
생명력이 있기에 탄력이 있습니다.
죽은 흙 - 부식토
인간의 손길이 닿은 후의 흙은 부식토 혹은 부토라고 합니다. '썩은 흙'이란 뜻이죠. 부토
는 마치 활동을 멈춘 세포와 같습니다. 다른 흙 조직으로부터 강제로 이탈되어 생명을 잃은
흙입니다. 이들은 생명체의 세포가 그렇듯이 급속히 썩어갑니다. 그리고 매생물의 온상이 되
는 것입니다. 생명을 싫고 썩어가기에 부토의 색깔은 검은색입니다. 탄력을 잃어 푸석푸석합
니다.
우리가 비옥한 땅이라고 부르는 속은 대부분 부토로 이루어진 땅입니다. 석어가기에 그것
이 자양분이 되어 식물의 성장으로 촉진시키는 것이죠. 농사를 지을 때 가래...삽...곡괭이 등
으로 논밭을 가는 이유는 흙을 썩게 해 그곳에 심을 벼와 보리가 잘 자라게 하기 위해서입
니다 따라서 비옥한 땅을 만들기 위해서는 흙을 보다 깊이 파서 더 많은 흙을 썩게 해야겠
지요. 이처럼 논밭을 깊이 사는 것을 심경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손길이 거쳐간 자연 재지는 상처를 입습니다. 그리고 한 부분은 죽음을 맞이합니
다. '흙도 죽는다.........'. 이 원리를 이용한 학문이 있습니다. 바로 고고학입니다. 역사학이 기
록에 의존해 인간의 발자취를 목원하는 학문이라면, 고고학은 남겨진 물건을 이용해 인간의
발자취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무덤...성곽...살림터...절터 등이 주요 연구대상이죠.
현행법에 의하면, 어느 한 지역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곳에 민족문화유산이 있는지
를 알아보고, 있다면 먼저 발굴을 통해 유적의 성격을 구명해야 합니다. 따라서 개발을 앞둔
지역을 반드시 고고학의 조사를 거쳐야 하는데 조사 과정에서 토기 조각이라든지 석기, 혹
은 금속기의 일부를 발견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유물이 발견된 지점을 중심으로 주변 일대
에 대한 발굴이 진행됩니다.
우선 유적이 폐기된 뒤에 쌓인 자연퇴적물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제거합니다. 그러면 유
적이 만들어질 당시의 지표면이 드러나는데, 그 중에는 다른 곳과 구별되는 특성을 보이는
부분이 있게 마련입니다. 흙의 색깔이 다르고, 성질이 다른 곳, 바로 썩은 흙이죠, 부토를 조
심스럽게 걷어내면 유적을 사용하던 당시의 땅 모습이 그대로 복원됩니다. 그리고 복원과정
에서 당시 각종 유물을 수습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은 물론 충분히 교육받은
고고학자에 의해 진행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유적이 제 모습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발굴은 또 다른 파괴다'라는 지적이 있긴 하지만.......
2) 지구와 인간
지구의 역사
우리 인간은 지구상의 한 생명체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지구는 우주 속의 수없이 많은 행
성 중 하나에 지나지 않죠. 다라서 인간은 지구가 생긴 뒤에 출현했고, 지구는 우주가 탄생
한 이후에 생겼을 것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천체과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우주는 지금부터 약 180억년전쯤에 탄생했을 것이라
고 합니다. 어떤 한 덩어리의 물질이 폭발해 팽창하면서 지금의 우주와 같은 공간이 생겨났
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지금부터 약 45억년 전쯤에 이르면 지구가 탄생합니다.
지구에 생명체가 출현하는 것은 약 40~30억년 전쯤이라고 합니다. 방상충...해면과같은 미
생물이 그에 해당하는데, 이들이 나타나 활동한 시기를 시생대라고 합니다. 그러다 지금부터
약 9억년전쯤에 이르면, 원시 조류, 박테리아 그기로 각종 단세호 동물들이 태어납니다. 우
리는 이때부터를 원생대라고 부릅니다. 세월이 흘러 지금부터 약 6억년 전쯤에는 해초와 양
치식물 그리고 무척추동물이 번성하기 시작합니다. 고생대이지요. 이무려박지 지구상의 생염
체 중 동물은 모두 물고기류였습니다. 육지동물이 나타나는 것은 지금부터 약 3억 5천만 년
전쯤이라고 합니다.
지금부터 약 3억년 전쯤에 이르면 중생대가 펼쳐집니다. 트라이아스기, 쥐라기, 백악기로
다시 구분되는 중생대에는 활엽수계의 식물과 파충류...양성류...경골어 등이 번성했습니다.
중생대 말기 곧 지금부터 9,000만년 전쯤에는 대뇌가 발달하는 대신 얼굴이 짧고 한 쌍의
유방과 손발을 가진 원시 형태의 영장류가 출현했다고 합니다.
신생대는 지금부터 약 6,500만 년 전 쯤에 시작되었습니다. 신생대는 다시 제3기와 제4기
로 나뉘어지는데, 지질학에서는 제3기를 다시 고신세, 중신세, 선신세등으로 구분하고, 제4기
를 홍적세와 충적세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출현
인류는 지구의 지각 변동이 심하고 포유류가 번성한 제 3기의 말기쯤에 출현했습니다. 남
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처음 발견된 '남쪽 원숭이 사람'이 바로 그것인데, 그들의 출현 시기에
대한 견해는 학자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대략 지금부터 400~300만년 전쯤이라고 합니다. 물
론 이들에 앞서 라마원숭이처럼 인류의 조상일지도 모르는 존재들이 이미 1,000여만 년전에
인도...케냐...터키...중국 등지에서 서식한 흔적을 찾을 수 있긴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인류의
조상이라는 확증이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화석을 조사한 결과 '남쪽 원숭이 사람'의 두뇌 용량은 평균 약 500cc로 추정되며, 성인
남자(수컷의 평균 키는 140cm, 몸무게는 52kg으로 추정됩니다. 평균 수명은 11~12살이어서,
여자(암컷)의 경우 늦어도 7~8살쯤에는 출산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남쪽 원숭이 사람'이 과
연 현생 인류의 조상인지에 대해서는 의무의 여지가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화석 구
조로 볼 때 두 발로 서서 걸었으며, 치열이 현생인류와 일치한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그들과의 관계를 쉽게 부정할 수 없도록 만듭니다. 연장을 사용한 듯한 흔적도 역시 우리의
관심을 끕니다.
아프리카의 케냐 지역에서는 지금부터 약 200만 년 전쯤에 해당하는 인류 화석이 발견되
었는데, 사람들은 이를 '솜씨 좋은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의 화석 주변에서 석기가 발견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중국 운남성에서도 돌과 나무로 된 도구를 사용했던 인류 화석이
발견되었습니다. 대략 170만 년 전 쯤으로 추정되는데, 학자들은 원모인이라는 이름을 붙였
습니다.
지금부터 약 180만년 전 쯤, 그러니까 신생대 제 3기 말엽에 이르면 지구의 기온이 낮아
지면서 남극지방과 고산지역을 중심으로 빙하가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제 4기의 홍
적세에는 한랭성 기후의 영향으로 4~5번의 빙하기가 펼쳐지고, 그 사이 사이에 3~4번의 간
빙기가 찾아옵니다. 빙하기는 지구전체가 얼음으로 뒤엎였던 시대가 아닙니다. 지금보다 평
균 온도가 약 17도정도 낮은 상태로서 극지방을 중심으로 인근지역에 빙산이 형성되던 시기
일 뿐이죠, 따라서 비록 제한을 받긴 했지만, 각종 동...식물의 번식이 여전히 가능했던 시기
입니다.
인류의 진화
정확한 시기를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지금부터 약 100만년 전쯤에는 '곧 선 사람'들이 출
현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학자에 따라서는 '곧 선 사람'의 출현 시기를 150만년 전까지 소급
시키기도 하는데, '남쪽 원숭이 사람'과는 한동안 병존했다고 합니다. 뼈의 구조 등에서 현생
인류의 조상임이 분명한 '곧 선 사람'의 초기 두뇌 용량은 성인남자를 기준으로 삼았을 때
700~800cc정도이며, 후기의 뇌용량은 1,000cc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성인 남자의 평균 키는
162.5cm, 몸무게는 76.5kg으로 추산됩니다. '곧 선 사람'의 화석 중 대표적인 예로는 50만년
전에 해당하는 북경원인과 자바원인을 들 수 있습니다. 중국의 남전인은 60만년 전에 해당
하는 인류 화석이라고 합니다.
홍적세의 중기 후반쯤, 그러니까 지금부터 약 35만년 전쯤에 이르면 '슬기사람'이 출현합
니다. 두뇌 용량이 1,300~1,400cc니까 현생인류와 비슷하며, 골격도 유사하지만, 눈두덩과 턱
이 더 크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타제석기를 사용한 이들은 기둥을 세운 집을 만든 듯하며,
원시적 종교 관념을 지녔던 것으로 알려집니다. 이라크의 한 동굴유적에서 시체 위에 꽃을
뿌리고 흙을 덮은 흔적이 발견되었다든지, 중앙아시아에서 주검 둘에 염소 두개골 6개를 뿔
을 땅에 꽂아 배치한 유적이 발견된 것에서 그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슬기사람'의 대표적인 예로는 독일에서 발견된 네안데르탈인 화석을 꼽을 수 있습니다.
20만년쯤에 해당하는 네안데르탈인 관련 유적에서는 실과 바늘을 이용한 듯한 가죽옷의 흔
적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중국에서 발견되 화석 중에는 정촌인, 장양인, 오르도스 인 등이
슬기사람에 해당합니다. 북한에서도 '슬기사람'의 화석이 발견되었습니다.
1972년 덕천 승리산에서 2개의 어금니와 어깨뼈가 발견되었는데, 이를 '덕천인'이라고 부
릅니다. 또 1977년에는 평양에서 '역포인'으로 명명된 화석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현생인류와 같은 '슬기슬기사람'은 늦어도 4만 년 전에는 지구상에 출현한 것으로 생각됩
니다. 프랑스에서 발견된 크로마뇽 인의 골격이 현재의 유럽인과 유사하며, 두뇌 용량 역시
1,500~1,600cc로서 지금의 우리들과 큰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중국에서는 산정동인, 기린
산인, 유강인 등이 같은 시기의 화석입니다. 북한에서는 덕천 승리산에서 발견된 '승리산인'
의 화석이 이에 해당합니다.
타제석기의 사용
지금까지 소개한 화석은 모두 홍적세에 살다간 인류의 흔적입니다. 이 무렵 인간은 돌을
연장 혹은 무기로 사용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자연 그대로의 돌을 사용했지만, 시
간이 지나면서 돌을 깨뜨려 더 날카롭고 편한 모습으로 바꿀 줄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돌을 개뜨려서 만든 도구를 타제 석기라고 합니다. 이를 다른 말로 구석기 혹은 뗀석기라고
도 하는데, '곧 선 사람이 활동하던 시기는 대체로 전기 구석기 시대, '슬기사람은 중기 구석
기 시대, '슬기슬기사람'은 후기 구석기 시대의 인류로 이해해도 좋을 것입니다.
인류의 진화와 구석기시대에 대한 위의 지식은 모두 고고...인류학자의 발굴...조사를 통해
얻은 것입니다. 또 그중 상상부분은 단순 사실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위의 사실들은 필수조
선으로 삼아 유추의 날개를 펼치다보면 의외로 구석기인들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와 있는
때가 간혹 있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구석기인들이 사용한 타제석기는 대부분 꽤 큼지막합니다. 물론 후기 구석기 시대의 말기
쯤 오면 작고 가는 세석기가 사용되긴 하지만, 그 이전에는 주로 몸돌을 사용했습니다. 1.5
리터짜리 주스 병보다 조금 짧은 크기의 울퉁불퉁한 뾰족한 석기로 그들은 과연 무엇을 했
을까요? 사냥을 했다고 합시다. 무엇을 잡았을까요? 돌의 크기로 보아 꽤 큰 짐승을 잡았을
겁니다. 만약 토끼나 다람쥐처럼 작고 날쌘 짐승을 잡았다면 석기가 그처럼 클 필요는 없었
을 것입니다. 아니, 절대 그처럼 커서는 안되겠죠. 마침 당시의 자연환경을 조사하고 구석기
인들의 생활유적지에서 발견된 짐승의 뼈를 관찰해보니, 북반구에는 순록...매머드처럼 덩치
가 크고 피하지방층이 두터운 짐승들이 많이 살았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자연환견이 석기
의 크기를 결정지은 것이지요.
구석기인의 생활상
구석기인들은 순록 혹은 매머드를 어떻게 사냥했을까요/ 아마 혼자서는 어림도 없었을 것
입니다. 그래서 형제들과 같이 움직여야 했을 겁니다. 그러나 3~4명 혹은 4~5명만으로 순록
산양이 가능했을까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나 어머니의 형제와 그 자녀들, 그
러니까 사촌들까지 포함하고, 그것으로도 일손이 모자라면 6촌...8촌 형제들과도 함께 움직여
야 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무리지어 사냥했으리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구석기 시대에
30~40명 정도가 함께 생활한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집단의 규모는 노천에서 생
활할 때가 많았던 구석인들이 맹수의 공격으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하기에도 효과적이었을 것
입니다.
도구가 시원찮은 탓에 몇 번의 실패를 거쳐 오랜만에 사냥에 성공을 했다고 합시다. 한쪽
에서는 사냥감을 몰고, 한쪽에서는 끈으로 짐승의 다리를 잡아채고, 또 몇 사람은 달려들어
돌도끼를 던지거나 휘둘어서 함께 잡았으니, 당연히 공평하게 나누어야지요.
순록 한 마리를 잡았으나, 나누고 보니 각자에게 돌아온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순록만 잡아서야 어디 생활이 되겠습니까? 상대적으로 힘이 약하거나, 아이들을 돌보아야 g
는 사람들은 사냥에 나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냥 놀아서는 공평하지 않
지요. 그런 사람들은 다른 방법으로 먹을 것을 구해야 하겠지요. 근처의 나무열매라든가 그
밖의 먹을 만한 것들을 채집해야 했을 것입니다. 구석기인들의 생활유적지에서 각종 식물의
잔흔이 발견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순록이나 매머드는 채식을 하는 동물입니다. 그들이 일정한 지역에서 한동안 생활하고 나
면 먹을 만한 식물은 바닥나고 맙니다. 그들만이 아닙니다. 구석인들도 역시 식물을 섭취해
야 했으므로 한 자리에 오래 머물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구석기인들은 그들의 먹잇
감이 있는 곳으로, 다시 말하면 순록이나 맘모스가 움직여 가는 곳으로 끊임없이 이동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럴듯한가요? 이처럼 몇 가지 단서를 가지고 마치 탐정처럼 이리저리 상상
하다 보면 어느새 구석기인들의 숨결이 내 손을 스쳐 지나갈 수도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구석기 유적으로는 공주시 석장리와 웅기군 굴포리, 제천시 점말동굴, 단양군
금굴과 상시, 제주도 빌레못 등이 유명합니다.
세석기의 사용
지금부터 약 12,000년 전쯤에 이르면 지구의 기후가 많이 달라지게 됩니다. 후빙기가 시작
되면서 기온이 상승하게 된 것이지요. 날씨가 따뜻해지자 미생물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먹이
사슬이 풍부해지면서 몸집이 작고 재빠른 동물들이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작고 째빠른 동물
들을 쥐기조차 버거울 정도로 크고 무거운 석기로 잡을 수 있겠습니까? 어림없지요. 다라서
효과적으로 사냥하기 위해서는 사냥감에 맞춘 도구를 개발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전에 덩치가 큰 짐승들이 많을 때에는 돌을 깨어 잔편은 버리고 알맞게 다듬어진 핵심만
골라 썼는데, 작은 짐승들이 번성하게 되자 이번에는 잔편중에서 알맞은 것을 골라내어 사
냥도구로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손가락 굵기만한 작고 가는 석기 말입니다. 그래서 세석기입
니다. 잔석기라고도 합니다. 세석기를 주로 사용하던 기를 중석기시대라고 합니다.
세석기로 사냥을 한다? 그렇습니다. 세석기를 그냥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화살과 창 그리
고 작살 등을 만들어 사냥을 하는 것입니다. 가볍고 빠른 동물을 잡으려고 가볍고 빠른 도
구를 사용하게 된 것이지요. 사냥감이 작은 동물로 바뀌고, 또 더 효과적인 무기를 갖추게
되었으니 사냥방식도 달라져야 하겠지요? 이제는 예전처럼 대규모로 무리지어 사냥할 필요
가 없어졌습니다. 개별적으로 사냥하다 보면 사람마다 능력이 달라 수확에 차이가 나겠지
요? 이제 곧 재산에 대한 다툼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내 것, 사유재산이라고 하는 개념이
생겨나는 것과 함께 말입니다.
작고 가는 무기를 사용하다 보니 가끔은 상처만 조금 입었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짐
승을 잡을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또 운 좋게 생포하는 수도 있었을 테지요.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던만큼 그것을 길러 나중에 사냥이 잘 안될 때를 대비했을 법합니다. 다시 말하면, 가
축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특히 중석기기대의 생활유적에서 개의 뼈가 자주 다량으로 발견
되는 것은 개의 가축화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중석기인들은 대체로
동굴생활을 했던 것을 알려집니다.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물고기들이 번성했으니, 그냥 두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당연히 작살
등으로 어렵에 나섰겠지요. 그러나 깊은 물에서는 작살이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습니다. 그래
서 개발된 것이 그물입니다. 비록 지금의 그물과는 많은 차이가 있지만, 세석기인들은 그물
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인류 역사상 세석기를 사용했던 시기는 매우 짧습니다. 지역마다 차이가 잇지만, 유럽 일
대를 기준삼을 때, 대략 서기전 9000년경을 전후해 1,000~2,000년 정도 지속되었으니까 그
긴 구석기시대에 비한다면 찰나라고 할 만합니다. 특히 우리 나라의 경우에는 세석기 문화
에 해당하는 뚜렷한 유적을 아직 찾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저 중석기 문화와 관련되었을 개
연성이 높은 유적 몇 군데만 확인된만큼, 앞으로 한 반도에서도 발견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
입니다. 여러분도 강가나 들판을 거닐 때 주변을 유심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3)농경과 문화 - 혁명의 시대
토기 제작
짧은 중석기시대가 지나자, 신석기 시대가 왔습니다. 돌을 일정한 모양으로 깨거나 떼어낸
뒤 그것을 갈아서 만든 석기를 사용하던 시기입니다. 돌을 갈아서 만들었다 하여 간석기 혹
은 마제석기라고 합니다. 마제석기의 사용은 인류가 돌의 성질을 더 잘 이해하게 되고, 재활
동의 개념도 갖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부러지거나 날리 무디어진 석기를 다시 갈아 쓰는
일이 빈번하던 시기입니다.
신석기시대의 특징적인 요소 중 또 한 가지는 토기를 만들어 썼다는 것입니다. 흙으로 만
든 그릇 가운데 잿물이나 유약을 쓰지 않고 그냥 불에 구운 것을 토기라고 합니다. 지금가
지의 자료에 의하면 토기는 신석기기대에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따라서 토기의
제작 시점은 곧 신석기시대의 기준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중앙아시아와 서남아시아 그리고
지중해 연안에서 발견된 자료에 따르면 대략 서기전 8000년 쯤에는 토기가 이미 제작되었습
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는 서기전 6000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코기가 제작된 듯합니다. 그
런데 이웃일본에서는 서기전 1만년쯤에 만들어진 듯한 토기가 발견되어 한동안 논란이 일었
습니다. 실제로 그 시기에 이미 토기를 만든 것인지, 아니면 과학기구를 이용한 연대측정에
약간의 오차가 발생한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몇 번에 걸쳐 재검토한 그 연대가 확
실하다면 인류의 토기 제작 및 신석기시대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다소 수정되어야 하겠습니
다.
신석기시대의 토기는 후대의 토기와 달리 가마 속에서 굽지 않고 노천에서 구웠기 때문에
그리 단단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릇의 두께가 매우 두꺼우며, 면이 거친 것이 특징입니다.
그저 저장하는 데 주로 사용했을 것입니다. 신석기시대의 토기는 보통 붉은 색을 띱니다. 노
천에서 구웠기 때문에 산화작용으로 그릇의 색깔이 변한 것이지요. 물론 부분적으로는 연기
때문에 시꺼멓게 그을은 곳도 있습니다.
신석기시대의 대표적인 토기는 빗살무늬토기입니다. 토기의 표면에 빗금을 돌린 것이지요,
물론 이보다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토기도 있습니다. 원시무문토기라고도하는 '이른 민무늬
토기'와 융기문토기라고도 하는 '덧무늬토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들은 웅기군 굴포기, 양
양군 오산리, 부산시 동삼동 등지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된 곳으로 서울시 암사동, 하남시 미사리, 양양군 오산리, 무산시 동
삼동 그리고 북한의 온천군 궁산리가 유명합니다.
인류가 토기를 만들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토기를 만드는 기술에 비한다
면 돌을 갈아 석기를 만드는 기술은 한낱 잔기술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만큼 코기는 고도화
된 지식과 기술의 집적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흙에 대한 지식과 기술 그리고 불에 대한 지
식과 기술이 일정 수준에 합치되었을 때, 비로소 토기를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농경과 정착생활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토기가 제작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필요했기 때
문입니다. 무엇이 토기의 발명을 재촉했을까요? 바로 농경입니다. 신석기시대 최대의 혁명이
라고 할 수 있는 농경은 인류의 생활방식과 문화를 바꾸어 놓았던 것입니다. 농사는 주로
돌괭이와 돌삽 등을 이용했습니다. 황해도 봉산군 지탑리의 신석기시대 주거지에서는 탄화
된 '피'가, 그리고 평양시의 남경 유적에서는 탄화도니 '조'가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처
음에는 피...조와 같은 잡곡류가 많이 재배된 듯합니다. 농경에는 보통 목축이 수반된다는 사
실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한 곳에 오
래 머물러야 합니다. 이 점이 문화의 급진전을 재촉했을 것입니다. 예전처럼 떠돌아다니지
않고 한 곳에 오래 머물게 되니, 각종 편의시설을 공들여 짓게 되었습니다. 자연의 변화에
백없이 순응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도전적으로 환경을 변화시키려 노력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노력의 결실이 문화를 형성하는 원동력이었습니다. 문화란 전통위에
서는 법입니다. 신석기인들의 정착생활은 바로 그러한 전통의 기반을 형성했다고 볼 수 있
습니다. 전통을 사람의 형질적인 면에 적용했을 때, 우리는 민족이라는 개념을 만나게 됩니
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 한민족의 뿌리를 형성했던 사람들을 역사상에서 찾으라고 한다면,
당연히 신석기인들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그들이야말로 우리의 터전을 한반도와 그 인근지
역에 마련해준 한민족의 조상이라 하겠습니다.
움집 건축
신석기인들은 농사를 지었으므로, 농토 근처에 살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움집을 지었습니
다. 당을 둥글게 혹은 원형에 가까운 네모 모양으로 판 다음 그 위로 나무를 세우고 풀을
얹어 만든 집이지요, 중앙에는 화덕을 만들고 그 주변에 저장구덩을 만들었는데, 토기와 각
종 도구들이 주로 이 부근에서 수습되었습니다. 출입군ㄴ 보통 한켠의 땅을 골라 계단모양
으로 만들었으며, 간혹 나무 사다리를 이용한 흔적도 발견되는데, 남향이 일반적입니다. 출
입구 근처에 저장구덩을 만들어놓은 곳도 많습니다.
신석시시대의 주거지는 보통 강가나 바닷가에서 발견됩니다. 이는 신석기인들이 물과 싶
은 관련 속에서 생활했음을 의미합니다. 농사를 지시고, 어렵을 하는 일 등이 우선적으로 그
에 해당할 것입니다. 바닷가에서는 흔히 패총이라고 부르는 조개더미가 많이 발견되는데, 그
들이 한곳에 오랜 동안 거주하며 조개류를 많이 섭취한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일종의 쓰레
기장이지요.
강가나 바닷가는 모래 성분이 많은 흙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신석기인들은 다른
속보다는 수월하게 집을 지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들이 주로 스던
빗살무늬토기는 바닥이 뾰족하거나 둥글게 처리되어 있습니다. 밑둥이 뾰족하거나 둥글기
때문에 맨바닥에 그냥 세워 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이런 토기를 대체 어떻게 사용했을
까요?
아마도 토기의 밑둥을 땅에 묻어 세워놓은 채 사용했을 것입니다. 그냥 땅바닥을 파고 음
식물을 저장하기보다는 구멍에 토기를 끼워 세우고 그 안에 농산물을 담아놓은 것이 곤충...
습기 등의 피해로부터 식량을 지키는 좋은 방편이 되었을 것입니다. 구멍을 파는 일은 모래
성분의 흙바닥이기에 어렵진 않았을테지요. 그만큼 신석기시대의 뾰족밑토기는 당시의 여러
가지 사정을 우리에게 함축적으로 전해줍니다.
한편, 뾰족밑 토기의 탄생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단단하지 않은 그릇의 경우 억지로 바
닥을 편평하게 만드는 것보다 자연스럽게 기벽을 한 곳을 모아 뾰족하게 처리하는 것이 그
릇의 수명을 늘이는 데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이 작용했을 것입니다.
애니미즘과 토테미즘
농사를 지으면서 신석인들은 기후와 같은 자연의 섭리에 더 민감해졌을 것입니다. 특히
해의 소중합과 비의 필요성이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겠지요. 식물이 자라는 것을 보면서 생
명이라는 문제를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을 법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 산이나 나무, 강에도
정령이 있다고 믿는 애니미즘이 생겨났을 것입니다.
사람이 죽은 뒤에는 무덤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무덤이 오늘날처럼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조성되는 것이 아니라 생활터전 주변에 만들어졌습니다. 죽은 사람과 산 사람
이 같이 지내는 것이죠. 또 사람을 묻을 대에는 머리를 동쪽이난 동남쪽으로 두는 풍습이
있었던 듯합니다. 아마도 해가 동쪽에서 뜬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것이겠지요. 이러한 사실
은 신석인들이 영혼의 불멸을 믿고 이었으며, 나아가 조상숭배의식도 지니고 있었음을 의미
한다고 하겠습니다.
조상숭배의식은 혈연에 입각한 집단화를 수반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무렵 씨족 혹은 부족
단위 사회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 그것은 신석기인들의 주거지가 취락을 이루었으
며, 몇 개의 취락이 하나의 단위를 이루고 있는 사실에서도 입증됩니다. 아주 단순하게 정리
하면, 씨족은 같은 조상을 모신 직께의 혈연집단이며, 부족은 혼인 등을 통해 씨족과 씨족이
결합해 공통의 언어와 신상을 지니며 나중에는 같은 조상을 숭배하게 되는 지연 집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조상은 대부분 특정한 동...식물과 연관되어 매우 미묘한 신앙
내지 관념을 형성시키는데, 이를 토테미즘이라고 합니다. 가령, 어떤 부족에서는 소나 말을
자기들의 조상과 연관시키고, 어떤 부족에서는 범이나 늑대를 수호신으로 믿는 것 등이 이
에 해당합니다.
이상, 신석기시대의 문화에 대한 설명은 단순히 추측에만 의존한 것이 아닙니다. 19~20세
기에 활발히 활동했던 서양의 인류학자들이 아직도 원시 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가지의 씨
족...부족사회를 조사한 결과와 신석기시대의 유적...유물에 대한 고고학적 해석에 다른 것입
니다. 비록 한계는 있겠지만, 우리에게는 수천 년 전에 일어났던 상황을 현존하는 다른 사회
를 통해서 추정해본다는 것이 매력적이지 않습니까?
문화란 무엇인가? - 진화론
문화를 아주 단순하고 간략하게 정의히면, 어느 한 인간 집단의 생활 양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신앙...예술...법률...도덕...관습...상식 등이 모두 문화의 한 부분인 것입
니다. 문화는 공유되며, 학습되고, 축적되며, 변화한다는 특징을 지닙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
면, 취락을 이루고 부족 사회를 형성시킨 신석시대는 문화의 진정한 출발점이라고 해도 좋
을 것입니다.
문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그 동안 연구해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문
화인류학자들입니다. 그들 중 현대 인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영궁의 타일러를 비록해 19
세기에 활동한 대부분의 인류학자들은 문화는 진화한다고 믿었습니다. 예를 들어, 종교의 경
우에는 '에니미즘 ->(주술) ->다신교->일신교'로 발전하며. 가족제도의 경우에는 '난혼->혈
연가족->집단혼가족->대우혼가족->가부장제->단혼제'로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이들 진화
론자들은 첫째, 모든 문화는 저차원->고차원, 단순->복잡, 불완전-> 완전으로 진화하며, 둘
째, 단선...보편적 발전의 형태를 취하고, 셋째, 발전 속도에 차이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이해에는 몇가지 의문점이 있습니다. 종교...윤리 등 사상적인 분야에서도
발전이라는 개념을 적용할 수 있는가 하는 점 그리고 문화가 지역...종족마다 매우 다양하다
는 사실을 적절하게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 등입니다. 그래서 진화론은 당시 서구인들이 지
녔던 편견과 자민족중심주의를 학문에 반영한 결과가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20세기 포반에 들어서자, 진화론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고, 미국을 중심으로 독자적 기원론
(역사적 특수주의)이 제기되었습니다. 일종의 창조론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들은 문
화그들은 문화는 인종이나 지리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각 집단의 특수한 역사적 배
경에서 생성되고 역사과정에서 변화한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입장이 일제시기의 우리 나
날에 영향을 주어 일본 제국 주의에 대한 저항 의식을 고조시키고 표현하는 데 이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독자적 기원론은 진화론에 대한 비판의 도구로서는 유용하지만, 문화의 복
잡성과 유사성을 설명하고 효율적인 이론 틀을 세우는 데에는 못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파론
진화론의 대안으로 제기된 이론으로는 전파주의가 있습니다. 문화란 특수한 환경에서 단
1회 발생하며, 시간적으로 앞서고 질량면에서 우세한 문화가 사방으로 전파...차용되어 다른
지역의 문화를 형성한다는 이론입니다. 특히 영국에서는 '농경'을 중시해 고대 문화의 기원
을 이집트에서구하려는 견해가 제기되기고 했는데, 이에 동조한 사람들을 이집트 학파라고
합니다.
반면, 세계를 여러 개의 문화권으로 나누고, 문화권마다 중심부와 주변부를 설정해 문화의
일방적 전파...차용을 상정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전파주의는 우리에게 국제적인 넓은 시야에
서 문화를 이해할 것을 일깨워 주었다는 점에서 그 기여도를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화현상 배후의 시대...사회적 배경에 대해서는 그다지 고려한 것 같지 않습니다.
문화가 전파될 때 왜 모두 수용되지 못하고 거절당하거나 변형되는 것들이 생기는가하는 문
제에 대해서는 답변이 궁색하기 때문입니다. 유사한 모양이지만 지역에 따라 기능과 의미가
다른 것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전파론은 명쾌하게 설명해주지 못합니다. 또모든 문화
가 중심부에서만 발생한다는 시각은 인간의 문화창조 능력을 과소평가했기 때문이라는 점도
지적되어야 하겠습니다. 사실 이러한 시각을 문화사대 주의를 유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제
국주의적 시각을 문화에 적용한 결과하고도 할 수 있습니다.
기능주의
20세기 중반에 들어서자, 기능주의에 입각한 해석도 나왔습니다. 그에 따르면 모든 사회제
도와 문화요소는 전체를 구성하는 일부분으로서 각기 적절히 기능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기
능주의를 제창한 말리노프스키는 개인의 심리적 욕구를 중시해, "문화란 사회구성원인 개개
인의 심리와 생리적 욕수를 충족시키고 그 결과가 분배된 뒤에는 상호간 교환을 거켜 소비
가 이우러지는데 바로 그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과 충돌을 효율적으
로 통제하기 위해 각종 조직이 탄생했다는 것입니다.
대단히 매력적인 설명이지만, 의문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문화의 중요한 속성 중
하나인 변화에 대한 설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기능주의가 시간이라는 요소를 경시했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문화요소의 복합적 기능에 대한 고려가 미흡하다는 점도 지적되고
있습니다. 물론 구조기능주의라 하여 이에 대한 보완적 성격이 강한 이론이 제기되기도 했
지만, 아직 의문점이 다 해소되었다는 말할 수 없습니다.
형사취수혼과 문화이론
이상, 인류학의 중요 이론을 몇 가지 소개했습니다만, 간략히 설명하는 바람에 이해가 쉽
지는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한 가지 예를 들어서 위의 3가지 이론을 설명하도록 하겠습니
다.
진수의 삼국지에 의하면 고구려에는 형사취수혼이라는 매우 특이한 관습이 있습니다. 형
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혼인한다는 것입니다.
위의 사례에 대해 진화론의 입장에서는 강시의 고구려 사회가 적장자 상속 단계로 발전하
기 전의 사회였음을 보여주는 예라고 설명합니다. 즉 인간사회의 상속문화는 집단 상속에서
형제상속을 거쳐 부자 상속으로 발전했는데, 당시 고구려는 형이 자기 여자를 재산과 함께
동생에게 물려주었으니 형제상속 단계에 속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전파주의적 입장에서는 북방사회 문화권의 소산으로 이해합니다. 중국측의 고대 기록에
따르면, 형사취수혼과 같은 관습이 고구려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부여...고구려...흉노...
선비 등 중국의 동북방에 거주했던 북방민족 사이에는 이와 유사한 관습이 있었습니다. 예
를 들어 흉노의 경우에는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과 생모를 제외한 나머지
첩들을 모두 자시 여자로 삼았다고 합니다. 형태와 모양만 다를 뿐, 여자를 재산으로 인식하
고 상속의 범주에 포함시킨다는 점에서 같은 문화의 소산이라는 것입니다.
기능주의적 입장에서는 자기 집단의 인적...물적 손실을 방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해합
니다. 즉 목축 사회의 경우, 남편이 죽고 나면 부인이 자녀들과 재산을 이끌고 자기의 친정
집단으로 돌아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남편의 집단은 대단한 손실을 입게 될 것입니
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미망인에게 새 남편을 제공함으로써 집단의 재산을 보호하고 안
정을 모색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세 이론 모두 그럴듯합니까?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아직도
갈증이 해소되진 않았지요? 왜 그런지는 여러분 스스로 고민하면서 직접 찾아보는 것이 좋
습니다.
4) 권력과 약탈 - 국가의 탄생
청동기의 사용
신석기인들은 토기를 만들면서 불을 다루는 기술을 향상시켰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는 700~800도에 이르는 고열을 낼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 우연찮게도 청동이라는 매우 귀
중한 금속을 얻을 수 있게 된 듯 합니다. 청동은 구리에 비소라든가 주석, 아연과 샅은 이물
질이 섞여 더 단단해진 상태를 말합니다. 지중해 해안에서는 서기전 3500년경에 이미 청동
기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에는 서기전 1000년경에야 비로소 청동
기시대를 맞이한 듯합니다. 물론 이 연대는 개략적인 추정치에 불과하므로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학자들 중에는 만주와 그 인근지역을 포함해 우리의 청동기시대
가 서기전 15세기까지 소급된다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청동기시대라고는 하지만 모든 도구가 청동으로 만들어진 시기는 아닙니다. 각종 농기구
와 공구는 여전히 석기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돌괭이, 돌삽, 반달 모양 돌칼, 돌도끼 등이
이 시기의 대표적인 석기입니다.
청동기는 주로 무기와 의기에 한정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청동을 얻기가 매우 어려웠던 탓
도 있지만, 청동이 단단하지도 않아서 나무를 베거나 땅을 파는 일에는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의 청동도끼라든가 낫, 칼 등은 공구가 아닌 살상용 무기로 보아야
합니다.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유물로는 비파형 동검과 그것을 계승한 세형동검, 동모...동과 그리고
동경...동령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비파형동검을 비롯해 무기류가 많이 만들어진 것을 보
면, 이 시기에는 크고 작은 전투...전쟁이 집단간에 빈번히 발생했던 모양입니다. 집단간의
전쟁은 승리와 패배, 우위와 열등, 지배와 피지배의 결과를 가져왔을 것입니다. 단군신화에
나타난 선민사상은 바로 그러한 상황의 반영이라 하겠습니다.
청동기시대에도 토기는 계속 만들어졌습니다 당시의 대표적 토기는 민무늬토기인데, 신석
기시대의 토기보다 높은 온도에서 제작되었기 때문에 더 단단하며, 그릇의 두께도 얇습니다.
그릇의 모양은 매우 다양하지만 밑바닥은 편평하고, 색깔은 적갈색인 것이 많습니다.
지석묘와 취락
제작 기술이 향상되고, 품목이 늘었다는 것은 사회와 문화가 그만큼 복잡해졌음을 의미합
니다. 그 예로서 청동기시대로 들어서 농업과 수공업이 분리되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습니
다. 이 사실은 유적의 발굴을 통해 알려졌는데, 청동기 제작지가 한정되었다는 점에서 전문
집단이 따로 존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작업의 분화, 곧 전문직의 출현은 소유의 격차를
유발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인간 신분의 차별화를 유도합니다. 계급이 발생하는
것이지요.
계급은 권력의 기반하에 탄생하는 것입니다. 권력은 생전에 누리는 것이지만 죽은 뒤에도
과시할 수 있습니다. 무덤을 통해서이지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묘제로는 지석묘와 석관
묘를 들 수 있습니다. 특히 고인돌이라고도 하는 지석묘는 권력을 지닌 지배층의 무덤으로
많이 사용된 듯합니다.
지석묘의 형태는 지역마다 조금씩 달라서 일괄적으로 설명하긴 어렵습니다. 그러나 보통
4개의 지석과 1개의 개석으로 조성된 북방식(탁자식) 지석묘의 경우 돌의 무게가 수십 톤에
달하는 것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중국의 개평현 허가둔에서 조사된 지석묘는 개석의 무게
사 무려 70톤에 달하며, 길이는 8.4m, 폭은 5.6m에 달하는 대형입니다. 이런 지석묘를 만들
려면 적어도 수백 명이 동원되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을 묻기 위해서 말입니다.
청동기시대의 유적에서는 조...피...콩...수수...보리...벼와 같은 곡물들이 많이 발견되었습니
다. 그리고 돼지...소...말 등을 가축화한 흔적을 여러 군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농업의 발
달은 남성의 역할을 증대시켜 여성 및 모계 중심의 사회에서 남성 내지 부계 중심의 사회로
나아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추정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계...모계사회의 구체적 성격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의가 더 필요하며, 또 신석기시대를 모계사회, 청동기시대를 부계사회로
일반화시키는 것도 오해의 여지가 있습니다. 앞으로 더 싶이 연구해 밝혀내양 할 부분입니
다.
청동기시대의 주거지는 주로 야트막한 구릉에 취락을 이루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근에는
하천이 있어 식수와 농업용수를 충분히 공급할 수 있어야 하겠지요. 취락을 둘러싸고 목책
이나 호를 조성해놓은 곳도 있습니다. 아마도 맹수 혹은 다른 집단의 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입니다. 취락의 구조를 살펴보면, 개인의 주거공간 외에도 대형
창고와 공동작업장 그리고 집회용 공공건물로 판단되는 대형 건물들이 취락의 중앙부나 한
쪽에 지어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건물마다 각기 다른 유물이 발견되는 것은 해당
유물이 그 건물의 성격을 대변하기 때문이겠지요.
신석기시대 주거지의 평면 형태가 일반적을 원형이었던 데 반해 청동기시대에는 장방형이
일반적이었습지다. 화덕이 한쪽 별 근처로 물러나고, 저장구덩도 한쪽에 큼지막한 자리를 차
지하게 된 것도 달라진 풍경입니다. 저장할 물건이 많아서인지 아예 부속건물을 만들어 딸
린 방 혹은 저장공간으로 쓴 경우도 있었습니다. 특수 목적의 대형 주거지를 제회하고 대부
분의 주거지는 대략 5~6명 정도의 인원이 생활하기에 적당한 크기여서, 기본적으로 핵가족
내지 직계가족의 생활형태를 취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국가조직의 탄생
앞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청동기시대의 특징은 권력과 계급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그것
은 곧 국가조직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국가의 형성 과정에 대해서는 시대마
다 그리고 연구자마다 생각이 조금씩 다릅니다. 고대와 중세에는 국가는 모두 신의 뜻에 따
라 창조되거나, 신을 대신한 영웅에 의해 건설되는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근
대에 들어와서는 국가도 인간 역사의 진전에 따른 자연적 부산물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팽배
했으며, 그러한 인식을 입증하기 위해 몇 가지 이론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그중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계급국가론입니다. 원시공산체사회가 기술...문화의 발전에
따라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사회로 발전하게 되면 소유의 격차로 인해 평등한 인간관계가 깨
어지면서 계층내지 계급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러한 불평등 관계에 일정한 질서를 부여하고
그 관계를 조직화한 것이 바로 국가라는 입장입니다. 다시 말하면 국가란 사회...경제적 우위
계급이 자신들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만든 조직으로서, 사회가 모순에 빠지고 분열되었을
때 출현하는 일종의 권력결집체라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집단간의 전쟁과 그를 통한 정복이 국각조직을 형성 시켰다는 입장도 있습니
다. 이른다 정복국가론입니다. 이웃 집단과의 약탈전쟁이 지배, 피지배의 관계를 성립시키게
되고, 그것이 곧 계층화를 초래해 국가 형성의 요인이 되었다는 이론이지요, 그러나 정복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정복집단 내부의 사회구조라든가 정복활동의 원인과 동력에 대해서
는 상대적으로 소홀한 감이 없지 않습니다. 따라서 계급국가론과의 연계성에서 정복국가론
을 이해할 때 국가의 형성 과정을 보다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을 듯합니다.
여하튼 국가는 기본적으로 일정한 영역과 조직(관료...군대), 제도(법령), 수취체계(조세) 등
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요소들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문자가 꼭 필요한 법입니
다. 청동기시대 문자 출현이 전세계적으로 공통된 역사현상이라는 사실은 바로 이 점을 웅
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는 아직 이 시기에 독자적인 문자를 창안해 사용한 흔
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아마도 중국의 한자를 차용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대신 당
시의 자연환경과 자신들의 생활상 그리고 각종 기하학 무늬를 마치 낙서하듯이 바위에 새겨
놓은 것을 여러 군데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중 특히 고령군 양전동과 울주군 반구대의
암각화가 유명한데, 아마도 수렵...어렵...농경의 무난함과 풍요를 기원하는 주술적 의미가 담
겨 있는 듯합니다.
철기의 사용
철기를 처음사용한 사람들은 지중해 연안의 히타이트 족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늦어어 서
기전 1000년경에는 이미 철기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그보다
늦어 서기전 300년경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더욱이 서력기원 이전에
는 세형동검과 같은 청동기를 여전히 사용해 온전한 철기시대라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따라
서 서기전 300~0년 사이를 보통 초기 철기시대라고 합니다.
철기 제작은 그만큼 불을 사용한 기술이 발전했음을 의마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청동기와
마찬가지로 초기에 제작된 철기도 그리 단단한 것은 못되어서 사용하는 데 제한이 따랐습니
다. 가령, 쇠도끼의 경우나중에 단조철부가 제작되기까지 거푸집을 이용해 만든 주조철부로
는 큼지막한 나무를 베기조차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따라서 초기의 쇠도끼는 우선적으로 무
기라고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철기 제작은 1,000도가 없는 고열을 통해 이루어지므로, 청동을 만들 대보다 어려운 일입
니다만, 재료를 구하기가 훨씬 쉬워서 대량생산이 가능하는 이점이 있습니다. 특히 종래 석
기를 사용했던 농경 부분에서는 땅을 더 깊고 넓게 파면서도 힘은 덜 들게 하는 철제 농기
구를 이요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같은 인력으로 더 많은 땅을 경각할 수 있었으며,
그 결과 자연그럽게 생산력이 상승했습니다 생산력의 상승을 통해 얻은 잉영생산물이 군량
미로 이요되는 경우도 생겼을 것입니다. 그것은 곧 장기간의 전쟁이나 원거리 정복을 가능
케 했으며, 그를 통해 국가 형성과 통합...발전이 더욱 촉진될 수 있었습니다. 다음 장에서
살펴볼 대규모 고대국가의 출현은 모두 철기시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김정배, 한국민족문화의 기원, 고래대락교 출판부, 1973.
한병삼, 토기와 청동기,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4.(문고판)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론12-한국의 고고학1, 국사편찬위원회, 1983.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론13-한국의 고고학2, 국사편찬위원회, 1983.
김원룡, 한국고고학개설, 일지사, 1986.
이선복, 고고학개론, 이론과 실천, 1988.
최몽룡, 재미있는 고고학 여행, 학연문화가, 1991
국립중앙박물관...광주박물관, 한국의 청동기문화, 범우사, 1992.
최성락, 한국 원삼국문화의 연구, 학연문화사, 1992.
이광규, 문화인류학개론, 일조각, 1984.
한상복...이문웅...김광억, 문화인류학개론, 서울대학교출판부, 1995.
제3장 신화와 실제 역사는 다른 것인가?
신화란 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언뜻보면 그것은 역사학과 거리가 먼 이야기인
것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은 인간과 유리된 존재가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가장
가가운 존재입니다. 고대...중세의 신은 더욱 그러합니다. 특히 고대의 사람들은 신과 인간을
자주 일치시켰습니다. 그리스의 올림푸스 이야기, 중국의 삼황오제 이양기 등은 모두 신 같
은 인간, 인간 샅은 신들의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이들 신화를 유심히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신들의 각종 활동을 통해 고대의 자연환경과 고대인들의 생활방식 그리고 그들의 보편적인
인생관...역사관...자연관 등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개인의 사고방식만을 반영한 것은 신화가 될 수 없습니다. 신화란 사회적 의식의 반영이
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의식은 사회 공통의 경험을 바탕으로 형성됩니다. 사회 공통의 경험
과 의식, 그것은 역사학이 추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역사학에서 신화는 사료의 하나로서
존중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건국신화입니다. 신화 속에서 신인 혹은 성인이 나라를
세우고 다스리는 장면은 그 나라의 건국배경 뿐 아니라 신화를 만든 사람들의 의식구조를
이해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1) 단군신화 - 고조선
고조선과 조선 - 위만의 고향
고조선이라는 국가명칭이 처음 기록된 곳은 삼국유사입니다. 삼국유사는 고려 충렬왕 때
의 승려 일연이 쓴 책입니다. 그 책의 기이 편 첫머리에 고조선이라는 제목이 나오고, 이어
서 그에 관한 역사가 기재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위서에 이르기를 "지금부터 2000년전에 단군왕검이라는 사람이 있어 아사달에 도읍을 정
하고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고 부르니 중국의 요임금과 같은 때이다"라고 했다.
고기에 이르기를 "옛날에 환인의 서자인 환웅이 지상세계에 내려가 사람들을 잘 다스리고
싶어하니 아버지가 그 마음을 알아채고 천부인 3개를 주며 허락했다. 이에 환웅이 무리 3천
을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신시를 세웠다. 환웅천왕은 풍백...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곡식...생명...질병...형벌...선악 등의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며 사람
들을 교화시켰다. 그 무렵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동굴에서 살았는데, 항상 신웅에
게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래서 신웅이 신령스러운 쑥 한 심지와 마늘 20매를 주
며 백 일동안 해를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곰과 범이 받아 먹었는
데, 곰은 삼칠일을 잘 지내 여자가 될 수 있었으나, 범은 참지 못해 사람이 되지 못했다. 웅
녀는 혼인할 사람이 없자 매번 신단수 아래에서 임신하게 해달라고 빌었다. 이에 환웅이 사
람으로 변해 혼인하여 아들을 낳게 하고 단군왕검이라 했다. 단군완검은 중국 요임금 즈위
50년에 평양성에 도읍하고 비로서 조선이라 칭했으며, 나중에 백악산의 아사달로 도읍을 옯
겼다. 나라를 다스린 지 1,500년이 지났을 때, 주 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왕)에 봉하니, 단
군은 장당경으로 옯겼다가 나중에 돌아와 아사달의 산신이 되었다. 1,908세까지 살았다."고
했다.
위 내용에 의하면 고조선은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을 함께 가리키는 명칭입니다. 그것은 고
조선 항목에 이어 위만조선 항목이 나오는 데에서도 입증됩니다. 그러니까 '고조선이란 위만
의 '조선'이전에 존재하던 '옛날의 조선이라는 뜻이 담긴 명칭인 것입니다. 삼국유사에서 이
처럼 단군...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을 따로 구분한 이유는 위만이 중국 사람이므로 그 이전의
조선과 국가 성격이 다르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마천의 사기에 실린 조선전에 따르면, 중국의 연나라 사람위만이 진...한 교체기의 전란
을 피해 무리 1,000여명을 이끌고 조선으로 들어가니, 조선왕 준이 그에게 서쪽 변경의 수비
를 맡겼는데, 그곳에서 세력을 키운 위만이 서기전 194년에 정변을 일으켜 수도인 왕검성을
급습해 준왕을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준왕은 남쪽으로 내려가 한황
이 되었다고 합니다. 언뜻 보면 위만은 중국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한번 곰곰히 따
져보면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닙니다.
인접했던 연나라와 조선은 그리 좋은 사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충돌이 잦은 편이었지
요. 그러다가 연나라에 소왕이 재위하던 무렵(서기전 311~279)에 진개라는 장군이 이끄는 연
나라 군대의 공격을 받아 조선은 2천여 리의 땅을 빼앗기게 됩니다. 그리고는 그 휴유증으
로 국력이 많이 미약해졌다고 합니다. '2천여 리'라면 매우 넓은 땅이지요. 그런데 조선이 어
디 그 땅만 빼앗겼겠어요? 그 넓은 땅에 살던 사람들도 함께 연난라의 백성이 되어야 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당시 연나라는 중국의 변방지역으로서 주민 구성이 매우 복잡했던 것으로
알려집니다. 따라서 사기의 연나라 사람 위만이라는 문구만으로 위만이 종족적으로 중국 사
람이었는지, 아니면 중국따에 살던 조선 사람이었는지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사기에는 위만이 조선으로 들어올 때 상투를 틀고 조선의 옷을 입었다는 기사도
있습니다. 조선인의 풍속을 따랐다는 것인데, 위만이 조선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휘애서 일
부러 다른 민족의 옷을 입은 것으로 보아야 하는지, 아니면 자기 모국으로 돌아오면서 원래
의 복장으로 갈아 입었다는 뜻인지 단언하기 어렵지만, 앞서의 시대상황과 준왕이 처음부터
그를 매우 신임한 실에 비추어 보면 원래의 복장으로 되돌아온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위만이 왕위에 오른 뒤에도 조선이라는 구로를 계속 하요한 점이라든지, 나중에
볼 바와 같이 위만전권하에서도 여전히 토착인 글이 고위직을 차지했으며, 세형 동검문화를
계속 이어나간 점 역시 위만이 조선 사람이었을 개연성을 높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위만정권 이전의 조선과 이후의 조선을 따라 분리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
나 고조선이라는 명칭은 여전히 매우 유용한 용어가 될 수 있습니다. 고대의 조선과 근세의
조선을 구분하는 명치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고조선'은 바
로 그러한 구분점으로서의 편의적 명칭일 뿐입니다.
단군신화의 형성시기
다시 삼국유사의 내용으로 돌아갑시다. 삼국유사는 '위서'와 '고기'를 인용해 단군신화를
소개했습니다. 해당 기사의 공신력 높일 수 있는 방법이죠.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
다. '위서'와 '고기'가 과연 어떤 책인지도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중국에서 위서라는
제목의 역사서가 몇 번에 걸쳐 제작된 적은 있습니다. 그중 어떤 책은 지금 전하지 않지만
남아 있는 책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단군조선에 대해 언급한 대목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물
론 '위서'를 우리 쪽의 역사서로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유감그럽게도 그런 책은 아직 확
인할 수 없습니다. '고기'는 더욱 이상합니다. 그것이 책 이름인지, 아니면 '옛날 기록'이라는
뜻인지조차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런 의문점 때문에 한때 단군신화를 몽고항쟁기에 민족의식을 고양하기 위해 만든 이야
기고 치부하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환인과 같은 불교식 명칭이 차용된 것이라든지, 단군
이 요임금과 같은 시기에 즉위했다고 하여 역사의 유구함을 드러내려 한 것 등이 바로 그
증거라고 지적되었습니다. 그러나 단순신화의 내용을 살피다 보면 거기에 얼마나 오랜 동안
인간이 겪어온 경험들이 반영되어 있는지를 한눈에 알아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단군신
화의 내용의 내용을 하나하나 짚어봅시다.
신화의 상징성
환인은 인도의 신 이름을 한자로 옮긴 석제환인타라에서 따온 것으로 천제 혹은 태양신을
불교식으로 바꾼 칭호인 듯합니다. 신화는 원래 구전되어오던 것을 나중에 채록한 것이므로,
채록할 당시의 용어가 많이 차용되는데, 단군신화의 경우에도 고려시대에 채록되면서 당시
의 국교인 불교의 영향이 반영된 거이라 하겠습니다. 신화의 이러한 속성을 보여주는 대표
적인 사례로는 제왕운기에 실린 단순신화를 들 수 있습니다. 1287년 편찬된 제왕운기에는
단군신화가 유교식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대상의 줄거리를 소개하면, 상제 환인의 서자 단
웅이 귀신 3천을 이끌고 신단수 아래로 내려온 뒤 손녀에게 약을 먹여 사람으로 만든 다음
단수신과 혼인시켜 단군왕검을 낳게 했다는 식입니다. 세종실록 지리지 평양부 조에도 비슷
한 내용이 있습니다. 무릇 신화는 세월 따라 이렇게 변하는 것입니다.
신단수는 수목숭배사상을 나타낸 것으로 애니미즘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곰
과 범을 토템으로 하는 집단과 범을 토템으로 받아들이는 집단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일
수 있으며, 환웅 역시 천신족을 자처하는 집단의 상징일 수 있습니다. 물론 곰에 대한 숭배
는 동북아시아 일대에 광범위하게 퍼진 의식이므로 어느 한씨족의 상징으로만 해석해서는
곤란합니다. 그러나 곰을 숭배하던 의식이 반영된 것으로 이해할 수는 있겠습니다.
환웅이 거느린 풍백...우사...운사는 기후를 주관하는 신입니다. 특히 비와 관련된 신들이지
요. 비는 해와 함께 농사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입니다. 쑥과 마늘은 농경문화의 잔편을 반영
한 것으로 볼수 있겟습니다.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했다면서 곡식을 가장 먼저 열거
한 것도 농경문화의 반영으로 생각됩니다. 백일 동안 해를 보지 말라고 한 것이라든지 삼칠
일 만에 곰이 여자가 되었다는 것을 갓난아잉 대한 어른들의 금기와 우려를 달리 표현한 것
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단군신화에는 신석기시대 이래의 경험이 많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단군의
자손은 곧 하느님의 자손이라는 선민의식도 작용하고 있습니다. 청동기시대 이래의 계급의
식이 작용한 결과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의식은 중세인 고려시대에 창작된 것으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낡아 보입니다.
그런데 중국 산동성 가상현에 위치한 무시사당의 화상석에는 단군신화와 유사한 내용의
그림이 그려져 있어 우리의 누길을 끕니다. 물론 내용이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은 아니어ㅓ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비록 다른 신화를 형용한 것이라 하더라도, 과거 동이
족이 활동하던 지역에 동이족을 대표하는 집단(조선)의 건국신화와 유사한 내용의 신화가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주목받기에 충분합니다. 석실로 된 무시 사당ㅇㄴ 서기 147
년을 전후한 무렵에 건설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하면, 단군신화는 청동기시대에 고조선이 형성되고 성장하는 과정으로
보여주는 건국신화임에 틀림없습니다. 고조선은 농경 문화를 기반으로 한 사회였으며, 제정
일치의 사회엿을 것입니다. '단군'은 무당을 의미하고, '왕검'은 정치적 지배자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무당을 고상하게 표현하면, 제사장이지요. 따라서 단군왕검은 제사와 정치가 한 사
람에게 맡겨졌기 때문에 나온 명치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제사와 정치가 따로 분
리되지 않았던 시기의 지배자가 바로 단군황검이라는 것입니다.
한 제국과의 전쟁
고조선에 관한 기록은 중국측에 오히려 더 많이 전합니다. 특히 사기 조선열전은 위만 조
선과 한 나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던 당시를 살았던 사마천이 남긴 기록이기에 매우 자세
하고 생생합니다. 주로 서기전 109년에 양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의 원인과 과정 그리고 결
과를 기록했는데, 그것을 간단하게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조선의 우거와은 주변의 진국 등이 중국과 교통하려는 것을 자꾸 막을 뿐 아니라 한 나라
에 대해서도 제후의 예를 다하지 않았다. 그러다 양국간의 몇 가지 사소한 다툼을 계기로
전쟁이 벌어졌는데, 한나라의 무제가 보낸 5만여명의 군대는 한 차례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수도인 왕검성을 포위했고, 1년 가까이 대치 상태를 거친 뒤 서기전 108년에 내분을
이용해 조선을 멸말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그곳에 4개의 군을 설치했다.
이에 앞서 한나라 군대와 조선의 군대가 대치할 때, 조선에서는 태자를 화의 사절로 보내
말 5천 마리와 군량을 바치려 했으나, 태자를 수행하던 만여명이 지닌 무기를 처리하는 문
제로 국경인 패수 근처에서 시비가 일어 그만 평화제의 가 무산된 덕이 있다.
지나치게 간추린 내용이어서 입체적인 전달은 불가능하지만, 조선의 수도가 왕검성이었고,
중국과의 경계를 이루던 것이 패수였다는 단순 사실만큼은 분명히 전달되었을 것입니다. 또
태자의 사절단이 만여명에 달했으며, 말 5천 마리를 한나라에 보내려 했을 정도로 인적...물
적 자원이 풍부하고, 군사 기반이 튼튼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소개하지는 않았지만, 조선
상...니계상...상...장군...대신 등 다양한 관료조직을 암시하는 명칭들을 자주 접할 수도 있습니
다.
한서 조선전에도 사기와 거의 같은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다만, 지리지에 낙랑...임둔...현
도...진번 등이 이른바 한사군에 대한 설명이 덧붙여져 있어, 조선 멸망 이후의 상황을 추정
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해 줍니다. 그리고 이어서 기자가 조선으로 가서 사람들을 교화시킨
이야기를 전하면서 당시의 형법 8개 조목 가운데 3개 조목을 소개했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죽인 자는 그 즉시 사형에 처하고, 다치게 한 자는 곡물로 배상하게 하며, 도둑질한 자는 노
비로 삼되 벗어나고 싶은 사람은 50만(전?)을 물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율법이 적용된
시점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고조선의 사회상과 문화 수준의 단면을 알려주는 매우 유용
한 자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삼국지의 위서 동이전에도 고조선의 역사와 사회상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들이 전합니다.
그중에는 위략이라는 책을 인용한 부분도 있는데 그곳의 기록에 의하면, 중국 연나라의 베
후가 스스로 왕을 칭하며 조선을 치려 하자 조선의 제후로 역시 스스로 왕을 칭하면서 연나
라를 공격하려 했으나, 조선의 대부 예가 설득해 두 나라 모두 그만 두었다는 것입니다. 연
나날의 제후가 왕을 칭한 시기는 역왕 때이니, 서기전 332~321년경입니다. 그리고 그후 소왕
대인 서기전 311~279년 사이에는 연나라의 장군 진개가 군사를 이글고 고조선을 공격해 2천
여 리의 땅을 빼앗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또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조선왕 부는 진나
나라가 습격할 것을 걱정해 진나날에 복속했지만, 조회에는 참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기
의 부는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긴 준왕의 아버지입니다. 모두 서기전 4~3세기경 고조선의 군
사력이 매우 강했음을 암시하는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환국과 배달국
고조선과 관련해 우리 나라에 전하는 사서로는 규원사화와 환단고기를 들 수 있습니다.
규원사화는 조선시대 숙종 2년(1675)에 북애거사가 편찬한 것이고, 환단고기는 각종 고서를
계연수라는 사람이 1911년에 새로이 편집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두 책 보두 20세기에
들어와서야 처음 간행된 생소한 책입니다. 그중 환단고기에 실린 삼성기에 의하면, 우리의
고대사는 7대에 걸친 환국시대와 18대 1,565년간 이어진 배달시대 그리고 47대 2,096년간에
걸친 조선시대로 전개되었다고 합니다. 고조선 이전에 환국과 배달국이 더 있었다는 것입니
다.
그러나 오늘날의 역사학적 지식에 근거하면, 위와 같은 전언은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습
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국가의 출현은 청동기시대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고 생각
되는데, 우리의 경우 청동기시대는 아무리 소급해도 서기전 1500년 이상은 거슬러 올라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요임금과 같은 때(서기전 2333년경)라고 한 단군신화
의 내용도 매우 과장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과장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아마도 국가와 민족이 어려운 상황에
서일 것입니다. 삼국유사는 대몽항쟁기에 씌어졌으며, 규원사화와 환단고기는 잉제 식민지하
에서 처음 출간되었다는 점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실제로 규원사화에는 한말의 상으로 보
이는 부분이 있습니다. 물론 일부에서 주장하듯이, 이들 사서가 고조선시대의 기록에 근거했
을 가능성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자료에 의한다면, 고조선측이 남긴 기
록의 흔적은 거의 없는 듯합니다.
고조선은 대제국?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의견이 조금씩 다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한반
도 서북부의 대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고조선의 세력범위를 상정합니다. 특히 지금의 평양
지역에 주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위만은 준왕을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 때 한나라는 고조선을 멸망시킨 뒤 한사군을 설치했지요. 그중 낙랑
군에는 조선현이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고조선의 중심지가 낙랑군에 편재되었다
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그런데 지금의 평양지역에서는 한나라 시기의 유적과 유뮬이 대향으
로 발견 조사된 바 있습니다. 그러니 고조선의 중심지와 강역을 한반도의 서북부지역으로
이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요.
그러나 고조선의 문화와 깊이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비파형 동검과 지석묘...적석총의 분
포 범위를 생각한다면, 고조선의 세력 범위는 훨씬 넓어져야 합니다. 요동반도를 비롯해 요
하 동쪽은 물론 요하 서쪽에서도 고조선의 문화와 관련된 유적과 유물을 발견할 수 있기 때
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중국의 대능하 혹은 난하에서부터 한반도의 예성강 혹은
청천상에 이르기가지의 지역으로 모두 고조선의 강역으로 보기도 합니다. 고조선은 대제국
이엇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만약 기록 속의 조선이 연나라와 인접한 나라였으며, 2천여 리를
빼앗기도 여전히 국가 규모가 작지 않았던 점을 상기한다면, 그것의 높은 개연성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두 가지 견해가 모두 나름의 근거를 확보하고 있으므로 시비를 가리기가 쉽지 않
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 견해 모두 홀시하고 잇는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시기입니다. 고조
선이 언제 건국해서 언제 멸망했는지, 또 어떤 역사적 변천을 겪었는지를 먼저 감안해야 할
것입니다. 초기의 패수는 대능하에 비정될 수도 있습니다. 인근지역에서 고조선과 관련된 문
화유적이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고선을 대제국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문화유적의
해당 시기가 지역데 따라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가령 비파형 동검의 경우, 요서...요동...한
반도에서 모두 발견되지만, 시기는 각기 달라서 요서 지역이 가장 빠르고, 한반도의 유적 편
년이 가장 늦습니다. 이런 경우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좋을까요? 그렇습니다. 고조선이 이동
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요동반도의 남담인 여순에서 늦어진 서기전 6~4세기에 조영된 대규모의 적석총이 발견된
것을 보면 한동안 고조선의 중심지는 요동 지역에 있었을 개연성이 높습니다. 한변의 길이
가 20여 미터에 달하는 적석총 묘역에서 23기의 묘곽과 144명분의 인골이 비파형 동검...동
경 등 다량의 청동유물과 함께 발견되었는데, 그중 많은 인골을 순장된 사람의 것으로 보기
도 합니다. 그렇다면 당시 무덤의 주인은 대단한 권력의 소유자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요동의 요양...무순 등지에서는 전국시대의 장성유적도 발견됩니다. 연나
라 혹은 진나라가 적어도 이곳까지는 진출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딸사서 고조선의 강역과
중심지는 그보다 훨신 동족에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연나라 장군 진개가 있는 군대가 고조
선으로부터 2,000여 리를 빼앗았다는 기록을 상시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 기록을 고소
선이 최소한 2,000여 리 이상의 땅을 가졌던 증거로 이용할 수도 있지만, 그만큼 동족으로
밀려났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기자가 동쪽 조선으로 갔다는 전설
을 기자의 후예를 자처하는 집단이 동쪽으로 이동한 시실의 반영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고
조선의 이동은 더욱 실감납니다. 역사학이란 이처럼 미궁 속을 걸을 때가 많습니다.
2) 동명신화 - 부여
동명신화의 내용과 분석
우리는 흔히 부여를 고조선의 후손이 세운 나라쯤으로 알고 있지만, 역사상 부여라는 명
칭이 출현한 것은 이미 고조선의 당시의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고조선과 함께 중국측 기
록에 실려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부여의 국가적 성격을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서기 1세
기경에 이미 부여에서 왕호를 사용했고, 중국과도 외교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을 참고하면 부
여의 국가 형성은 생각보다 이른 시기에 있었을 개연성이 높습니다.
부여를 건국한 사람은 동명이라고 합니다. 그의 건국 과정에 대해 후한서 동이전은 이렇
게 전하고 있습니다.
옛날 북쪽 색리국(한원에는 탁리국으로 나오며, 삼국지에 인용된 위략에는 고리국으로 되
어 있다.)의 국왕이 출장을 나가 있었는데, 그 시녀가 임신을 했다. 왕이 돌아와 시녀를 죽
이려 하니, 시녀가 말하기를 "전에 하늘에서 이상한 기운이 일더니 계란 크기만한 것이 저
에게 내려온 적이 있는데, 그 뒤로 임신을 하게 된 것입니다."라고 했다. 왕이 시녀를 죽이
지 않고 가두어 두매, 나중에 드디어 사내아이를 낳았다. 왕이 아이를 돼지우리에 버려두데
했으나, 돼지들이 입김을 불며 보호해 죽지 않았으며, 마구간에 버리자 말들도 역시 그러했
다. 왕이 기이하게 여겨 어미가 기를 것을 허락하고, 아이의 이름을 동명이라 했다 동명은
커서 활을 잘 쏘았다. 왕은 그가 용맹해지는 것을 염려해 다시 죽이려 했는데, 동명이 달아
났다. 남쪽으로 가다가 엄호수에 이르러 활동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모두 모여 동명을
건네주었다. 마침내 부여에 와서 왕노릇 했다.
위의 신화에서 하늘의 이상한 기운이란 해 혹은 햇빛과 관련된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대체로 몽고와 만주 지역에 널리 퍼져 있는 설화들 중에는 햇빛에 감응되어 임신...출산했다
는 식의 내용이 많기 때문입니다 모두 주인공의 비범함을 드러내기 위한 과장된 표현일 것
입니다.
동명이 물고기의 도움을 받아 건넜다는 엄호수는 지금의 송화강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동명은 송화강의 북쪽에 살던 사람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화 속의 개인은 종종 집
단을 대표하기도 합니다. 그 것은 이미 단군신화를 통해 확인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동명
의 남하는 동명집단 혹은 동명의 후예를 자처하는 집단의 남하로 바꾸어볼 수도 있겠습니
다. 왕이 죽이려 하자 남하했다는 내용으로 보아 북방의 어떤 세력 혹은 집단에 밀려 송화
강을 건너 남하한 것이 아닌가 짐작해 봅니다.
동명이 부여를 건국한 곳이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신화에 아무런 언급도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중국 길림성의 길림시 일원일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특히 서단
산과 동단산일대에서는 석관묘(흔히 따을 판 다음 그 안에 넙적 편평한 돌로 바닥과 벽을
만들고 시체를 안치하는 방식의 무덤을 가리킨다. 머리 쪽과 발 쪽의 벽은 판석 1장을 사
용하며, 양 협의 긴 벽은 여러 장의 판석을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 뚜껑 돌 역시 넙적한 판
돌을 사용한다. 석관묘가 발전한 것이 바로 지석묘라는 견해로 있다.)... 토광묘(땅을 파서 광
을 만든 다음 시체를 묻는 방식의 무덤을 가리킨다. 관 없이 시체를 직접 흙으로 덮는 방식
을 순수토광묘라고 하며, 나무로 만든 관속에 시체를 넣은 다음 묻는 방식을 토광목관묘라
고 한다. 또 토광 안에 관보다 더 넓고 큰 형태의 곽을 만든 다음 시체 또는 관을 안치하는
방식은 토광목곽묘라고 한다. 토광묘는 지금도 흔히 사용되고 있을 정도로 인류 역사상 가
장 보편적인 무덤형태이다.)...옹관묘(독무덤이라고도 하며, 항아리 속에 시페를 넣어 땅 속에
묻는 방식의 무덤을 말한다. 땅속에 항아리를 세워 놓고 그 안에 시체를 쭈그려 앉게 만드
는 경우에는 항아리를 하나만 사용하고, 시체를 길게 드러눕게 하는 경우에는 보통 2개 내
지 3개의 항아리를 길게 연결해서 관처럼 이용했다. 전세계적으로 널리 분포한 무덤 형태로
서, 우리나라에서는 영산상 유역의 대형 옹관묘에서 금동관 등의 화려한 유물이 출토되기도
했다.) 등의 고분과 산성유적이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서단산 문화유적에서 발견된 유물로는
비파형 동검과 같은 청동제 무기류와 반월형 석도 그리고 조...기장 등의 추위에 강한 곡물
을 들 수 있습니다. 농업과 목축의 증거일 것입니다. 방사선 탄소 연대 축정법(1940년대에
미국의 물리학자 리비가 개발한 방법으로서 목탄...뼈등 생명을 읽은 유기물질이 지닌 탄소
량을 확인함으로써 해당 유적의 조성연대를 알아내는 데에 주로 사용된다. 자료 분석결과는
1950년을 기준삼을 때 시간적으로 얼마나 거슬러 올라가는가 하는 뜻에서 BP로 표시된다.
즉, 만약 BP 1,1550+-100으로 표시되었다면 서기 400년을 전후한 시기로서 오차의 폭은 전
후 100년이라는 뜻이다) 후석산유적에서는 서기전 1000+-100년 장사산 유적에서는 서기전
405+-85년이라는 자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동단산 문화의 남성자 유적 인근을 부여의 왕
성지로 보기도 합니다.
부여가 처음부터 끝까지 길림시 인근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모용씨가 침입하는 서기
3세기 후반에 이르면, 부여가 분열하면서 일부 세력이 두만강 유역으로 옮겨가 또 하나의
국가를 세우게 되는데 이를 동부여라고 합니다. 그리고 4세기 초에 이루면 원래의 부여(북
부여) 역시 서쪽의 농안...장춘 방면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고구려의 영향권이 확대되었기 때
문입니다.
여섯 살 어린왕과 사출도
삼국지 동이전에 의하여 부여시는 늦어도 2세기경부터 부자 상속제가 실시되었다고 합니
다. 위구태 - 간위거 - 마여 - 의려 - 의라로 이어진 왕위 계승에서 마여는 서얼이었기 때
문에 제가가 함께 옹립했으며 의라는 불과 6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세상 물
정도 모르는 어린 아이를 왕위에 앉힐 수 있었던 것은 아이의 아버지, 곧 전왕의 권위를 인
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단지 전왕의 아들이라는 한가지 이유만
으로 아무런 반대없이 왕위에 오른 시기를 학자들은 보통 왕권 안정기로 이해하고 있습니
다. 그러나 부여의 왕권이 처음부터 안정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 전에는 가뭄이나 장마가
계속되어 오곡이 영글지 않으면 그 허물을 모두 왕에게 돌려 '왕을 바꾸어야 한다' 고 하러
나 죽여야 한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오기도 했답니다.
부여에는 사출도라는 군사...행정체계가 있었습니다. 왕 밑에 있는 마가...우가...저가...구가
등이 각각 한 지역을 맞아서 다스리며 방위를 담당하는 체계입니다. 일종의 지방자치이지요.
가는 몽골 계통어의 한...가한 그리고 고조선 등의 한...간...한...금 등과 통하는 말로서, 귀인...
대인을 뜻합니다. 이들 가가 다스리는 지역은 큰 곳이 수천 가, 작은 곳이 수백 가였다고 합
니다. 이러한 사출도가 부여의 전 시기에 걸쳐 시행되었는지를 알려주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만약 서기 2세기경에 부여의 왕권이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면,
사출도와 같은 체게는 더 이상 시행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부여 사람들은 평소 흰색 옷을 많이 입었으나 외국에 나갈 때는 수를 놓은 비단옷이나 모
직옥을 즐겨 입었다고 합니다. 은 나라 정월에 영고라는 제천행사를 지냈으며, 전쟁을 벌일
때에는 소를 잡아 발굽의 모양을 보고 실흉을 점쳤다고 합니다. 은나라 정월은 축월로, 음력
12월입니다. 따라서 고구려의 동맹, 도예의 무천과 같은 추수감사제는 아니었음을 알 수 있
습니다. 여름에 사람이 죽으면 얼음을 넣어 장사를 지냈으며, 지위가 놓은 사람이 죽으면 아
랫가람을 죽여 함께 묻는 순장을 했는데, 많을 때에는 백 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형벌은 매우 엄격했는데, 그중 몇 가지가 중국측 기록을 통해 전합니다. 첫째, 살인한 사
람은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는다. 둘째, 도둑질을 하면 12배를 갚게 한다. 셋째,
간음한 사람은 남녀를 모두 죽인다. 넷째, 부인이 투기하면 죽인 다음 시체를 남산에 버려
썩게 하되, 친정에서 가져가고자 하면 소와 말을 내게 한다. 이와 같은 형법은 아마도 관습
법이었을 것입니다. 그중 여자의 투기를 미워한 대목은 가부장적인 관념의 표출로 해석됩니
다.
부여의 충속 중에는 형사취수제가 있습니다.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에게 장가드는 풍습
이지요. 이에 대해서는 앞의 제 2장에서 이미 다룬바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다시 다
루지 않겠습니다만, 이 풍습은 고구려에서도 널이 행해진 풍속이라는 사실만큼은 상기해야
하겠습니다. 부여와 고구려의 문화적 친연성을 알려주는 자료가 되기 때문입니다. 부여와 고
구려가 매우 밀접한 관계였으리라는 생각은 양국의 건국신화를 비교하고 나면 더욱 굳어지
게 됩니다.
3)주몽신화 - 고구려
주몽신화의 내용과 분석
고구려를 건국한 사람은 주몽입니다. 그의 시호는 동명성왕입니다. 시호란 정승처럼 지위
가 높은 사람이 죽었을 때 다른 사람들이 고인의 행적을 기려 새로이 붙여 주는 이름입니
다. 아마도 눈치가 빠른 사람은 곡려 건국자의 동명성왕이라는 시호에 대해 무언가 석연치
않다는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앞에서 살펴본 부여 건국자의 이름
과 같기 때문입니다. 비록 고구려의 동명성왕에는 성이라는 글자가 덧붙여져 있긴 하지만,
그것이 주몽의 신성함을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에서 부가된 수식어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알
아챌 수 있습니다.
부여와 고구려의 건국신화는 이름만 같은 것이 압니다. 내용도 유사합니다. 다음은 삼국사
기에 실린 고구려의 건국신화를 대략적으로 소개한 것입니다.
부여의 왕 해부루는 늙어서 아들이 없으므로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산천에 제사를 지냈는
데, 왕이 탄 말이 곤연에 이르렀을 때 큰 돌을 보더니 마주서서 눈물을 흘렸다. 왕이 괴이하
게 여겨 돌을 치우게 하자 금색 개구리 모양을 한 아이가 있었다. 왕이 기뻐하며 "하늘이
나에게 준 자식이다."하고는 데려다 길렀다. 이름을 금와라 하고 장성하자 태자로 감았다.
나중에 재상인 아란불이 부여왕 해부루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제 하느님이 나에게 내려와
'장차 내 자손으로 하여금 이곳에 나라를 세우도록 할 것이니 너희는 피하거라. 동쪽 바다
근처에 가섭원이라는 곳이 있는데, 땅이 비옥해 오곡이 잘 자라니 도읍할 만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아란불이 마침내 왕에게 권해 그곳으로 도읍을 옯기고 나라이름을 동부여라고
했다. 예 도읍지에는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나 자기를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하는 가람이
와서 도읍했다.
해부루가 죽자 금와가 왕위를 이었다. 이때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여자를 데려와 물으
니, 여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하백의 딸로서 이름은 유화입니다. 동생들과 나와 노는
데, 어떤 남자가 자기를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하면서 나를 웅심산 아래 압록수 가의 집
안으로 유혹해 정을 통하고는 가버렸습니다. 부모는 내가 중매도 없이 안을 좇아갔다고 꾸
짖고는 우발수로 쫓아냈습니다." 금와가 이상히 여겨 방 안에 가두어놓았는데, 햇빛이 비추
므로 몸을 피했으나 햇빛이 따라다니며 비추더니 임신을 해 다섣 되 크기의 알 하나를 낳았
다.
왕이 알을 버려 개...돼지에게 주었으나 모두 먹지 않았고, 길 가운데에 버렸으나 소와 말
이 피했다. 나중에 들에 버리니 새가 날개로 덮어주었다. 왕이 쪼개려 했지만 깨뜨리지 못하
고 마침내 어미에게 돌려주었다. 어미라 물건으로 싸서 따뜻한 곳에 두니사내아니 하나가
껍질을 깨고 나왔는데, 골격과 외모가 빼어나고 이이했다. 나이가 겨우 7살이었을 때 남달이
뛰어나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매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의 속어에 활을 잘 소는 것을
주몽이라고 했으므로, 이름을 그렇게 불렀다.
금와에게 일곱 아들이 있어서 항상 주몽과 함께 놀았는데, 그 기예와 능력이 모두 주몽에
게 미치지 못했다. 맏아들 대소가 왕에게 말하기를 "주몽은 사람이 낳은 자가 아니어서 그
사람됨이 용감하니 만약 일찌감치 도모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따 두렵습니다. 청컨대 없애
버리십시오"라고 했다. 왕이 듣지 않고 말 기르는 일을 시켰느데 주몽이 날 말을 알아보고
먹이를 적게 주어 수척하게 만들고 둔한 말은 잘 먹여 살찌웠다. 왕은 살진말을 자기가 타
고 말은 말을 주몽에게 주었다. 나중에 들판에서 사냥할 때 주몽은 활을 잘 쏜다 하여 화상
을 적게 주었으나, 주몽은 짐승을 매우 많이 잡았다. 왕자와 신하들이 또 주몽을 죽이자고
모의하니, 주몽의 어머니가 눈치채고 말하기를 "나라 사람들이 너를 해치려 한다. 너의 재주
와 지략으로 어디로 간들 안되겠느야? 머뭇거리다가 욕을 당하느니 멀리 가서 사는 것이 낫
다."고 했다.
주몽은 이에 오이...마리...협보 등 3명과 함께 가다가 엄시수에 이르러 건너려 했으나 다리
가 없었다. 추격병에게 잡힐까 염려해 물에 고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자
인데, 오늘 도망가매 추격병들이 쫓아오니 어지하면 좋겠는가?"라고 했다. 이에 물고기와 자
라가 떠서 다리를 만들어 주몽이 건넌 뒤 흩어져 추격병이 건널 수 없었다.
주몽이 모둔곡에 이르러 3명을 만났는데, 한 사람은 삼베옷을 있었고, 한 사람은 승려복을
입었으며, 한 사람은 마름옷을 입고 있었다. 주몽이 묻기를 "자네를 어디 사람인가? 성은 무
엇인가?"하니, 삼베옷을 입은 사람이 말하기를 "이름은 재사입니다."라고 했고, 승려복을 입
은 사람은 "이름은 무골입니다."했으며, 마름옷을 입은 사람은 "이름은 묵거입니다. "라고 했
으나, 성은 말하지 않았다. 주몽은 재사에게 극씨, 무골에게 중실씨, 묵거에게 소실씨라는 성
을 주고 그들에게 "내가 하늘의 명령ㅇ르 받아 나라의 기틀을 열려고 하는데 마침 이 세명
의 어진 사람들을 만났으니, 어찌 하늘이 주신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했다. 마침내 그들의
능력을 살펴 각각 일을 맡기고 함께 졸본펀에 이르렀다.
그 땅이 기름지고 아름다우며 산하가 험하고 견고한 것을 보고는 마침내 도읍하고자 했으
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이 단지 비류수 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그로써 고를 성으로 삼으니, 당시 주몽의 나이는 22세였으며, 한나라 효워제 건소 2년이요,
신라 시조 혁거세 21년 갑신년이었다.
고구려의 건국설롸는 대체로 이와 비슷한 내용인데, 위에 인용한 삼국사기외에 광개토왕
릉비문과 모두루 묘지명, 삼국유사, 동명왕편, 위서 등에도 혹은 길게 혹은 짧게 실려 있습
니다.
고구려의 건국신화에서 우선 주목되는 것은 주몽이 북부여에서 남하해 서기전 37년에 건
국하는 과정이 부여의 건국신화인 동명신화와 흡사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고구려가 부여와
같은 문화배경 하에서 성장했음을 알려주는 부분입니다. 또한 신화의 내용을 통해 고구려의
건국주도 세력은 부여에서 분파해 나온 집단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고구려의
언어와 각종 풍습이 부여와 같다는 당시 중국측의 기록을 통해서도 입증됩니다.
위의 삼국사기에서는 주몽이 엄시수를 건너 졸본천 가에 건국했다고 했으나, 광개토왕를
비문에서는 엄리대수를 건너 비류곡의 홀본서성산 위에 도읍을 세웠다고 하여 약간의 차이
가 있습니다. 여기의 엄리대수는 엄시수...엄호수...시엄수...엄체수... 등으로도 표현된 지금의
송화강일 것입니다. 또 홀본서성이 위서에는 홀승골성으로도 되어 있는데, 남아 있는 유적
등으로 볼 때, 아마도 중국 요녕성 환인 지방의 오녀산성 일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고구
려는 유리명왕 때 지금의 길림성 집안현에 위치한 국내성 일대로 도성을 옮기게 됩니다.
부족연맹채제 - 5부
신화에 따르면 주몽은 남하할 때 3명의 부여인과 동행했으며, 엄시수를 건던 뒤에도 다시
재사 등의 3명을 만나 수하로 거느리게 되었습니다.
앞에서 이미 설명했듯이, 설화 속의 개인은 종종 집단을 상징하므로, 부여로부터의 남하집
단이 비교적 큰 규모였으며, 남하하는 과정에서 또 다시 여려 부족을 병합한 사실에 대한
상징적 표현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실제로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주변지역을 빈번히 공
격해 많은 성과를 거둔 것으로 알려집니다. 그중 가장 큰 성과는 동명성황 재위 2년에 비류
국을 병합한 것인대, 비류국은 당시 그 일대에 분포한 여러 소국들을 이끌던 주도세력이었
던 듯합니다. 따라서 고구려는 비류국을 병합함으로써 신흥 중심세력으로 부상한 셈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묘사한 듯한 기록이 중국측의 역사서에는 다소 짧고 건조하게 실려 있습니
다. 즉, 삼국지 동이전에 따르면, 고구려에는 연노부...절노부...순노부...관노부...계루부 등의 5
개의 부족이 있어서 그중 연노부 사람들이 왕위에 올랐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연노부가 점
점 힘이 미약해지더니 지금은 계루부가 대신 왕위에 오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왕의 종족
으로서 대사인 사람들만 고추가라는 칭호를 가질 수 있었는데, 유독 연노부의 적통대인만큼
은 고추가라는 칭호를 얻을 뿐 아니라 종묘와 영성사직에 제사 지낼 수도 있었다고 합니다.
연노부가 후한서에는 소노부로 나옵니다. 한편 왕은 대대로 절노부의 여자와 혼인했다고 합
니다. 따라서 우리는 절노부를 왕비족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위의 중국측 기록을 보노라면, 혹시 비류국이 연노부(소노부)에 해당하는 것이 아닌가 하
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비류국의 왕으로서 주몽에게 항복한 송양의 이름이 소노부의 소노
와 유사하다는 점이 지적되기도 합니다. 고구려에서는 물가 혹은 계속 등에 해당하는 지역
을 나...노...내라든지 양...양...양으로 표현했다는 사실이 참고가 됩니다. 그런데 고구려의 5부
가 삼국사기에는 연나부...환나부...관나부...비류부 등의 명칭으로 나와 혼란을 줍니다. 어느
쪽이 원래 명칭인지는 정확이 확인할 수 없으나, 연나부는 절노부, 환나부는 순노부, 관나부
는 관노부, 비류부는 소노부를 각각 달리 표현한 것인 듯합니다.
한원..통전 등 중국측 사서에 의하면, 계루부는 나중에 내부 혹은 황부로 칭해졌으며, 절노
부는 북부...흑부...후부, 순노부로 칭해졌으며, 절노부는 북부...흑부...후부, 순노부는 동부...청
부...상부...좌부, 관노부는 남부...적부...전부, 소노부는 서부...백부...하부...우부 등으로도 불려
졌습니다. 그중 왕을 배출한 계루부의 명칭은 국호에까지 영향을 주었는지도 모릅니다. 고구
려라는 국호가 초기에는 중국측에 구려로 표기된 적도 있는데 이것이 성을 뜻하는 고구려어
구루에서 왔다면, 계루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사와 순장
5부의 대사는 각자 사자의...선인과 같은 관직을 따라 두고 왕에게는 그 명단만 보고하면
그만이었다고 합니다. 부족 차지 혹은 지방차지적 성격을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습니다. 적어
도 3게기경의 고구려에서는 일하지도 않고 지내는 자만 1만여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들
을 위해 하호는 멀리로부터 쌀과 생선...소금 등을 운반해야 했다고 하니, 당시 고구려가 전
투집단적 성격을 띠었으며, 많은 국민들이 전사로서 활동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고구려 사람들의 성격이 "흉악하고 급하며 노략질하기를 좋아하고" 사람마다 무기를
지니며 집집마다 부경이라는 창고가 있다는 중국측의 기록을 통해 더욱 분명해집니다. 같은
기기의 부여 사람들에 대해서는 "용감하다고 온후하다"고 평가했으면서도 고구려 사람드르
이 성격을 흉악하다고 표현한 것은 그만큼 고구려가 중국특과 군사적 마찰을 자주 일으켰기
때문일 것입니다.
서기 3세기경에는 고구여레 이미 상사...대로...채자...고추가...주부...우태승...사자...조의...선인
과 같은 관직이 설치되어 국가적 면모를 분명하게 갖추었으나, 감옥은 없으서 wlh 지은 사
람이 있으며 제가 의논해 죄인을 죽이고 그의 처자를 노비로 삼았다고 합니다. 관습법과 연
좌제를 시행한 것이지요.
삼국지 동이전에 의하면 고구려 사람들은 가무를 좋아했으며, 10월에는 동맹이라는 제천
행사를 벌였다고 하는데, 동맹은 아마도 추수감사제의 성격이 강한 축제이자 정치행사였던
듯합니다. 고구려에서는 데릴사위제가 널리 행해졌던 모양입니다. 양쪽 집안이 혼인하기로
합의하고 나면, 여자 집안에서는 뒤뜰에 서옥이라는 작은 선물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러면
사위가 여자 집 대문 밖에서 자기 이름을 대면서 재워줄 것을 무릎꿇고 비는데, 그러기를
몇 번 반복해야 여자 집에서 사위를 맞아들였다고 합니다. 이후 사위는 여자 집에서 몇 년
을 살다가 둘 사이에 낳은 아이가 크면 비로소 부인을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고 합니
다. 이 같은 데릴 사위제는 장차 남자 집안에 기여하게 될 여자의 노동력과 생산력에 대한
보상적 의미가 강한 것으로서, 일종의 신부값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독특한 혼인방식
의 하나로서 형사취수제도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앞장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습니다.
부여와 마찬가지로 고구려에서도 순장이 실시되었습니다. 그에 대한 기록이 삼국사기에
실려 있는데, 동천왕이 죽자 그의 은덕을 사모한 나라 사람들이 매우 슬퍼하고 가까운 신하
가운데 자살해 순장 당하겠다는 사람도 여럿이었으나, 다음 왕(중천왕)이 순장을 막았으므로
공식적으로 순장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왕명으로 막았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
들이 묘 앞에서 가서 자살하매 다른 사람들이 나뭇가지 등으로 시체를 덮어주었는바, 그후
동천왕의 묘가 있는 곳을 시원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고구려의 무덤은 대체로 4세기경까지
는 적석총을 많이 사용했으며, 평양천도(427)를 전후한 무렵부터는 봉토석실분을 많이 조영
했습니다. 물론 이 같은 무덤을 만들이 위새서는 많은 인력과 재물을 들여야 하므로, 그곳에
묻힌 사람은 일단 당시의 중...상류층에 속한 사람으로 보아야 합니다.
4) 온조실화 - 백제
삼국의 건국신화 가운데 가장 특이한 것은 백제의 온조설화입니다. 여기에는 묘하게도 신
이라든가 기적과 관련된 부분이 전혀 없습니다. 매우 사실적이고 소탈한 방법으로 백제 건
국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백제의 건국설화가 뒤늦게 채록되었거나 중국화된 합리
주의적 시각에서 채록되었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건국과 관련해 다
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백제 시조 온조왕의 아버지는 추모로서 주몽이라고도 하는데, 북부여로부터 난을 피해 졸
본부여에 이르렀다. 졸본부여의 왕에게는 아들이 없고 단지 딸만 셋이 있었다. 왕이 주몽을
보더니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둘째딸을 시집보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졸본부여의 왕
이 죽자 주몽이 왕위르 fdlt고 두 아들을 낳았다. 맏아들을 비류라 하고 둘째아들을 온조라
고 했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매,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
지 못할까 두려워하다가 마침내 오간...마려 등 10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으로 가니 백성가운
데 따르는 자가 많았다. 드디어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 살 만한 땅을 바라보았는데,
비류는 바닷가에서 살고 싶어했다. 10명의 신하가 간언하기를 "생각컨대 이곳 하남의 땅은
북쪽으로 한수를 끼고, 동쪽으로 높은 산악에 의지하며, 남쪽으로 기름진 들을 바라보고, 서
쪽으로 큰 바다에 막혀 있으니, 그 천혜의 험준함과 땅의 이로움은 좀체 얻기 어려운 지세
입니다. 이곳에 도읍을 만드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했다. 비류는 신하들의 간언을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서 살았다.
오조는 하남위례성에 도읍했다. 10명의 신하로 하여금 돕게 하고 나라이름을 십제라고 하
니, 이때 전한 성제의 홍가 3년이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히 살 수 없
었는데, 위례성으로 돌아와 보니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편안했다. 마친내 비류가 부끄러
워하고 후회하다 죽으니, 그 신하와 백성이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백성들이 올 때 즐거
이 따라왔다. 하여 나중에 국로를 백제로 바꾸었다. 그 세계가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
서 나왔으므로 부여를 성씨로 삼았다.
이처럼 백제의 건국설화는 상당히 현실적이고 사실적입니다. 그래서 고구려에서는 처제의
아들 내지 손자라고 소개한 주몽을 백제에서는 부인 덕에 왕위를 계승산 비범한 일물 정도
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백제인의 고향
그런데 더욱 주목되는 것은 고구려의 건국시조를 백제에서도 역시 건국시조화라고 있다는
점입니다. 고구려와 백제가 상당히 치열하게 다투던 경쟁 상대였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
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백제에서는 자존심 상하게 고구려의 건국시조를 백제 건국시조의 아
버지로 모시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아마다 백제의 건국집단이 고구려 지역에서 남
하한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날 남아 있는 백제의 유적을 통해서도 입증됩니다. 지금의 서울시 송파구 석
톤동에는 대규모의 적석총 유적이 있습니다. 적석총은 고구려의 특징적 묘제입니다. 그러네
그것이 백제의 수도, 특히, 지배계급의 공동묘지로 추정되는 곳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1~2기
가 아닙니다. 그 사이 도시개발 등으로 밚은 고분이 파괴되어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원래
는 수십기의 적석총이 석촌동 일대에 조영되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중 어떤 것은 왕릉
일 개연성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백제는 고구려에서 나왔다고 확정적으로 말해도 좋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위의 설화에 의하면 주몽은 어디까지나 북부여 출신의 졸본부여 사람이었습니다. 백제왕의
성도 부여씨입니다. 그래서인지 백제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나왔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백제는 부여계승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서기 528년에 백제의 성왕이
사비로 도읍을 옮긴 뒤남부여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도 부여계승의식의 강력한 표출이라고
하겠습니다. 실제로 백제 초기의 묘제 가운데 하나인 토광묘는 부여지역의 토광묘와 축조방
식 등이 매우 흡사하다고 합니다. 지금까지의 자료에 의하면 백제에서 고구려식의 적석총이
축조되는 시기는 아무리 빨라도 3세기 이후이기 때문입니다.
유리왕 - 고구려의 실질적 건국자
주몽을 부여 출신의 고구여 건국자로 설명하지 않고 졸본부여의 계승자로 소개한 백제의
온조설화가 어떤 면에서는 고구려의 건국신화보다 주묭의 입지에 때해 더 정확하게 묘사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 한 가지 예로서, 고구려의 유리왕에 대한 설화를 들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소개된 유리왕의 설화에 따르면, 유리는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얻은 부인이
주몽의 독신 남하 후에 낳은 아들입니다. 부여에서 아비 없는 자식이라고 멸시를 당하던 유
리는 아버지가 낸 수수께끼를 풀어 주춧돌 아래 숨겨진 칼 조각을 찾아낸 위 남녘에서 왕이
된 아버지 주몽을 탖아갔다고 합니다. 아버지 주몽과 마찬가지로 유리도 옥지...구추......도조
3명과 함께 남하했으며, 주몽을 만나 태자에 책봉된 뒤 왕위를 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규보의 동명왕편에 실린 고구려의 건국신화에는 한 매목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칼을 맞대어본 주몽이 "너는 진짜 내 아들이다. 무슨 신성한 것이 있느냐?"하고 물었더니,
유리가 몸을 날려 공중에 솟아서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을 타는 재주를 보였다는 것입
니다. 아버지 주몽의 능력에 육박하는 실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삼국사기보다는 동명왕편에
인둉된 설화가 원형에 더 가깝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실제 고구려의
건국신화는 주몽의 건국에서 끝나는 것이 유리명왕의 출현과 즉위로 종결되는 셈입니다. 다
시 말하면 고구려의 건국은 유리명왕의 즉위를 통해 완성되었다는 것입니다.
백제의 온조왕은 건국하자마나 동명왕묘부터 세웠다고 합니다. 위패를 모셔두고 제사지내
는 곳을 묘라고 합니다. 여기의 동명왕이 부여의 건국자를 말하는지, 아니면 고구려의 주몽
을 지칭한 것인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온조왕이 주몽의 아들을 자차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
마도 주몽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백제인들은 왜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왕을 제사지냈을까요? 주몽은 졸본부여의
계승자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백제인에게 주몽은 고구려의 시조가 아닌 졸분부여의
계승자로서만 인식되었기 때문에 동명왕묘를 세우게 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
해 '유리왕의 고구려'와 경쟁적인 계승의식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낸다고 하겠습니다.
비류전승 - 부여계승의 건국실화
여하튼, 온조실화에서는 백제와 고구려가 이복형제의 국가로 묘사되는 친밀감이 나타납니
다. 그러나 백제에는 온조설화 이외에 또 다른 건국설화가 있습니다. 이른바 비류설화라고
하는 것인데, 내용상 온조설화와 약간의 차이를 보입니다. 삼국사기에 조그맣게 실린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백제의 시조는 비류왕으로서 그의 아버지인 우태는 북부여와 해부루의 서손이며, 어머니
인 소서노는 졸본 사람 연타발의 딸이다. 소서노가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가서 두 아들을 낳
으니, 맏아들이 비류이고 둘째아들이 온조이다. 우태가 죽자 소서노는 과부가 되어 졸본에서
살았다.
나중에 주몽이 부여에서 용납되지 않자 전한 건소 2년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해 졸보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고구려라고 불렀다. 주몽이 소서노에게 장가들어 왕비로 삼았는데, 소
서노가 국가의 기틀을 열고 자지는 데에 자못 내조가 컸으므로, 주몽이 소서노를 특히 두텁
게 총애했고 비류 등을 자기 아들처럼 대했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에게서 낳은 아들인 유유가 오자 그를 세워 태자로 삼고 왕위
를 잇게 했다. 이에 비류가 아우인 온조에게 이르기를 "처음에 대왕께서 부여의 난을 피해
이곳을 도망왔을 때 우리 어머니가 집안의 재산을 기울여가며 도와 방업을 이루니 그 노고
가 많았다. 그런데 대왕께서 돌아가시자 국가가 유유의 소유로 되었으니 우리가 이곳에서는
한낱 혹과 같아서 답답할 뿐이다.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땅을 택해 따로 국도를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했다. 드디어 아우와 함께 무리를 이끌고 패구와 대수를 건너
미추홀에 이르러 살았다.
앞에서 본 온조 설화와 달이 비류를 중심으로 한 비류설화는 주봉과의 연계가 매우 약합
니다. 비류설화에서 주몽은 단순히 비류 형제를 예뻐해 준 의붓아버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비류형제의 친아버지는 주몽과 마찬가지로 북부여 출신의 졸본 사람 우태입니다 우태 역시
남하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주몽에 대한 비류 형제의 감정은 매우 우호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강하진 않으나마 주몽과 백제의 연계는 비류설화레서도 여전히 인정되
고 있는 것입니다.
백제는 연맹왕국?
비류설화에서는 비류와 온조와 함께나라를 세운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미추홀이
수도로 등장합니다. 이러한 차이점은 온조설화와 비류설화가 각지 다른 경로로 전승되어 왔
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즉, 온조설화는 하남위례성 지역에서 비류설화는 미추홀
지역에서 각각 전승되어온 설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설화 모두 온조와 비류를 형제로
설정한 점은 똑같습니다.
우리는 또 다시 이즘에서 신화속의 개인은 집단을 상징한다는 말을 상기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온조집단과 비류집단은 형제라는 말이 됩니다. 집단과 집단간의 형제관계? 다소
어색한 이 말은 집단과 집단 사이의 연명관계라는 말로 바굴 수 있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어느 시기 온조 집단과 비류집단 사이의 연맹관계를 이야기로 만든 것이 바로 온조설화와
비류설화라고 하겠습니다. 설화에 따르면, 비류는 미추홀 온조는 하남위례성에 자리잡앗습니
다. 미추홀의 위치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세간에서는 흔히 지금의 인천이라고
이해하지만 그 증거는 매우 미약합니다. 오히려 각종 자료를 분석해보면, 지금의 경기도 양
주...파주...연천을 잇는 지역일 개연성이 높습니다. 반면, 하남위례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학자
들의 생각이 어느 정도 일치되고 있습니다. 지금의 서울시 송파구 일대, 특히 풍납동토성과
몽촌토성을 포함하는 지역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설화에서는 비류가 형이며, 온조가 동생입니다. 왕위를 계승하는 원칙에 따른다면
형이 우선입니다. 그러나 백제에서는 동생인 온조가 시조로 존숭되었습니다. 비류의 현명하
지 못한 판단 때문이라는 것이 설화의 입장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형이
란 먼저 태어난 사람입니다. 다라서 이것ds 비류집단이 먼저 한강 유역에 자립잡은 사실을
상징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뒤이어 온조 집단이 남하해 한강 유역에 정착했는데, 온조딥단
의 경제...군사력이 비류집단을 압도한 결과 자중에는 비류집단의 구성원까지 흡수하게 되었
다는 것이 온조설화에 숨은 속뜻이 아닐까요?
지금까지의 간략한 분석을 종합하면 부여에서 고구려 방명으로의 주민 이동과 부여...고구
려 방면에서 한강 유역으로의 주민 이동이 여러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는 사실 그리고 한
강유역에 여러 집단이 공존하다가 하나의 정치체제 속으로 통합된 역사적 사식이 백제의 건
국설화에 반영되었다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한편 백제의 건국설화로는 도모라는 사람이
백제를 세웠다는 이야기와 구태라는 사람이 백제의 시조라는 이야기가 각각 일본과 중국측
의 역사서에 전하기도 하는데, 그만큼 백제를 건국하고 발전시키는 데 참여한 집단이 다양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백제국과 백제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의 처음 국호는 십제였다고 합니다. 온조왕이 나라를 세울 때 10
명의 신하가 도왔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비류가 죽고 미추홀의 주민들이
위례성으로 이주할 때 즐거이 따라왔으므로 국호로 백제로 고쳤다는 것입니다. 한편, 중국측
사서인 수서 백제전에는 처음에 백여 호가 바다를 건너 남하해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백제
라고 했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3세기 후반에 편찬된 산국기 한전에 마한 54개국의 국명을 열거하던 중 백제국이
라는 구로를 소개한 대목이 있어 우리의 눈길을 끕니다. 백제와 백제는 한자만 약간 다를
뿐 같은 음으로 된 글자이며, 또 백제국의 위치가 한강유역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여러 모로
백제와 일치하고 있습니다. 즉, 백제국이 국력을 신장한 결과 국호를 한 뜻이 더 좋고 세련
된 백제로 바꾸었다는 것이지요.
그러고 보면, 삼국사기에 거론된 십제라는 구로는 어딘지 어색합니다. 나라가 성장함에 따
라 '십'에서 '백'으로 나라이름을 바꾸었다는 설명은 마치 '백'을 염두에 두고 숫자논리에 입
각해 지어낸 듯한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여하튼, 백제는 서기 538년 성왕이 웅진에서 사비
로 도읍을 옮기면서 국호를 남부여로 또 한번 바꾸었으며, 얼나 지나지 않아 다시 백제로
환원시킨 것을 알려집니다.
백제의 건국 시기와 풍속
백제가 건국한 해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에 전한 성제의 홍가 3년 곧, 서기전 18년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 중에는 나중에 지어낸 듯한 부분이 없지 않
아서 그대로 믿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다른 자료를 통해 검증할 필요가 있는데, 중국측의 당
시 자료와 남아 있는 유적...유물을 검토해보면, 한강 유역에서 백제가 건국한 시기는 대략 2
세기 무렵의 일이 아닌가 짐작됩니다. 백제의 건국 및 성장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되 유적으
로는 춘천시 중도의 적석총, 가평군 마장리의 주거지, 양평군 대심리의 취락지, 양평군 문호
리의 적석총, 하남시 미사리의 주거지와 밭 유적, 서울시 송파구의 석촌동...가락동 백제고분
군, 풍납동토성 몽촌토성등이 대표적입니다.
배겢의 주민으로는 왕실을 차지하고 귀족층이 주류를 이룬 부여...고구려계 남하민과 마한
의 구성원이던 토착민이 주류룰 이루었으며, 그 밖에 낙락...대방군이 멸망하면서 백제에 흡
수된 중국계와 교류를 통해 백제에 거주하던 일본계 백제인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지리적
조건과 중국계 백제인들의 활동 때문인지 백제는 중국 문화의 영향을 비교적 빨리 그리고
많이 받은 국가에 속합니다. 백제인들은 일직부터 유학을 널리 배우고 익혔으며, 혼인 충습
이 중국과 같고, 부모가 돌아가시면 3년 상을 치르는 등, 중국의 예법에 따르는 경우가 많았
다고 합니다. 그러나 언어와 의복은 고구려와 같았으며, 말 타고 활 쏘는 것을 중시하는 등
의 풍습 또한 고구려와 같았다고 합니다. 백제의 여자들은 시집을 가시 전에는 머리카락을
한 살래로 땋았지만 시집을 가면 양 갈래로 땋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역시 고구려의 풍습과
같은 것이 듯합니다. 그리고 절을 할 때에는 양 손을 바닥에 대어 존경을 표시했으며, 투호
와 저포 등의 놀이와 바둑...장기를 즐겼다고 합니다. 투호란 멀찍이 서서 항아리 안에 화살
을 던져 넣는 놀이이며, 저포는 주사위로 하는 놀이를 말합니다.
5) 박...석...김 3성 신화 - 신라
고구려의 경우, 처음에는 해씨가 왕위에 올랐으나, 나중에는 고씨가 왕위를 차지했습니다.
백제에서는 분명하진 않지만 아마도 해씨가 왕위를 차지하다가 부여씨에게 빼앗긴 듯합니
다. 그런데 신라에서는 매우 특이한 현상을 보입니다. 물론 그렇게 설명한 삼국사기와 삼국
유사의 기록을 믿지 않고 달리 해석하는 학자도 적지 않습니다만, 아직은 이른바 3성 교립
자체를 부정하지는 못합니다. 따라서 신라의 건국신화는 위의 3성을 중심으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박혁거세 신화
심라를 건국한 사람든 박혁거세라고 합니다. 그에 고나한 이야기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에서 찾아낸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됩니다.
옛날 산골짜기에 고조선의 유민이 내려와 여섯 개의 촌을 이루고 살고 이썽T다. 알천 양
산촌, 돌산 고허촌, 자산 진지촌, 무산 대수촌, 금산 가리촌, 명활산 고야촌 등이 그것이다. 6
촌에는 촌장이 있었으나 이들 통합해 다스리는 왕은 없어 사람들이 걱정했느데 마친 양산
아래 나정 부근에서 흰 말이 무릎을 꿇고 울고 있기에 가서 보니 말은 하늘로 올라가 버리
고 붉은 빛의 큰 알 하나만 남아 있었다. 이에 알을 쪼개니 사내아이가 나왔으므로 고허촌
장 소벌도리가 거두어 길렀다. 아이가 나온 알이 마치 박 크기만 하다고 해서 박을 성으로
삼고, 아이를 목욕시키고 난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이 춤을 추며 하늘과 땅이 진
동하고 해와 달이 청명해졌으므로 이름을 혁거세라고 했다. 혹은 불구내라고도 하는데, 광명
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위호는 거서간이라 했다. 한편, 사량리의 알영정에서는 계
룡이 나와 왼쪽 겨드랑이로 여자아이를 낳았느데 입이 닭의 부리같았다. 물에 아이를 씻기
니 부리가 떨어져나가고 수려한 용모가 드러났다. 우물 명칭을 따서 이름을 알영이라 했다.
사람들이 두 아이를 잘 기른 뒤 13세가 되던 해에 혼인시키고 왕과 왕비로 맞이했으며(서기
전 57), 두 사람을 두 성인이라고 일컬었다.
위의 축약된 설화를 통해 우리는 먼저 신라가 여러 개의 씨족 혹은 부족집단을 기반으로
형성된 국가였음을 시사받을 수 있습니다. 일종의 명맹 혹은 연합적 성격을 띠는 정치제라
는 것이지요, 삼국유가의 기록에 따르면 앞의 6촌 중 양산촌은 급량부로 바뀌었으며, 고허촌
은 사랑부, 대수촌은 점량부, 진지혼은 본피부, 가리촌은 한기부, 고야촌은 습비부로 각각 바
뀌었다고 합니다. 6촌의 성격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의견이 달라서 명확히 정의하기 어렵지
만, 아마도 씨족집단일 개연성이 높은 듯합니다.
6촌이 6부로 바뀌었다는 것을 자연촌락 혹은 족단적 성격을 지닌 사회가 하나의 행정구역
을 편제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신라가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거
쳐야 하는 길이기도 했습니다.l 다만 그러한 변화가 언제 일어났는지에 대서는 아직 분명하
게 말하기 어렵습니다. 일부에서는 기록에 준하여 유리니사금 9년(32)이라고 주장하기도 하
지만, 신라의 국가 형성 및 발전단계로 볼 때 너무 이른 듯합니다. 또 dfl부에서는 왕도의
행정구역 명칭을 정한 자비마립간 12년(469)경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그보다 조금 더 늦은
소지마립간 무렵(479~500)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여하튼 위 신화의 주인공은 박혁거세입니다. 그는 알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알은 새가
낳는 것입니다. 새는 하늘을 날아다닙니다. 하늘은 우리의 삶을 좌우하는 해와 하느님이 있
는 곳입니다. 그러니가 새는 하늘과 인간을 연결해 주는 매개체요,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전
령사입니다. 따라서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는 하느님이 보낸 사람, 곧 하느님의 대리인이라
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신라인들은 아마도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떤 학자는
박혁거세 신화와 같은 난생설화를 남방계설화로 분류하면서, 부여...고구려에서처럼사람이 햇
빛 등에 감응되어 알을 낳는 식의 감정형 난생설화와는 성격이 다르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
다.
신화에 의하면, 박혁거세가 태어난 알은 붉은 색이었다고 합니다. 붉은 색은 타오르는 불,
나아가 하늘의 태양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더욱이 박혁거세를 목욕시키니 그의 몸에서 광태
가 나고 해와 달이 청명해졌다고 합니다. 광명천지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붉고 밝은 현상즐
을 이른에 적용한 것이 바로 '박'과 '력'이요, '불구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태양신 숭배사상
이 반영된 이름이지요, 거기에 덧붙여진 거세는 거서간의 '거서', 거슬한의 '거슬' 그리고 백
제의 길지...길사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을 의미하는 옛 말입니다. 우리말
을 중국문자인 한자 가운데 비슷한 음이 나는 글자에 맞추어 표현하다 보니 이렇듯 각기 달
라진 것이지요, 따라서 박혁거세란 '밝은 임금'이라는 보통명사를 이름처럼 사용한 거이라
하겠습니다.
신라의 건국시조인 박혁거세는 '거서간'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거서'가 군장처
럼 정치적 지위가 높은 사람을 뜻한다는 것은 '거세'를 통해 이미 알았습니다. 그리고 간 역
시 정치적 지배자를 뜻하는 용어입니다. 따라서 '거서간'은 정치적 수장을 중복 존칭한 것에
지나지 않다고 하겠습니다.
신라느이 건국 시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실린 박혁서세 신화에서 신라의 건국은 서기전 57년으로 전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간지로 나타내면 갑자년이 됩니다. 갑자년을 간지가 시작되는 첫 해입니다.
그래서 참위설에서는 혁명이 일어나는 해로 꼽아왔습니다. 바로 그러한 갑자년에 신라가 건
국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신라 중심의 역사관을
반영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고려시대에 편찬된 사서인바, 신
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에 과거의 역사를 신라 중심으로 서술하고, 그것이 다시 삼국사기와
같은 후대의 역사서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으하면, 신라는 서기
전 57년에 건국했고, 고구려는 서기전 37년, 백제는 서기전 18년에 건국한 것으로 전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중국측 사서를 검토해보면 오히려 고구려...백제...신라 순으로 건국한 듯
한 인상을 받게 됩니다. 즉, 3세기 후반에 편찬된 삼국지 동이전에는 '부여전'과 '고구련전'이
있는데, 거기에 고구려는 당시 상당한 국력을 지닌 국가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반면, '백제
전'과 '신라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신 '한전'이라는 항목에 마한 54개국 중 하나로서 백
제국이 있으며, 진한 12국 중 하나로서 사로국이 들어 있을 뿐입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백
제국이 백제의 초기 단계, 사로국이 신하의 초기 단계 명칭일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이처럼
국가의 발전단계가 서로 다를 경우 아직 초기단계에 머물러 있는 쪽(백제...신라)보다 국가의
면모다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 쪽(고구려)이 더 일찍 건국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겠습니다.
또한 중국측의 당시 역사 기록을 통해 백제와 신하의 건국의 순서를 추정해 볼 수도 있겠습
니다. 송서는 남제의 심약이 488년경에 편찬한 역사서입니다. 그런데 그 책에는 고구려전과
백제전이 전합니다. 북제의 위수가 554년경에 편찬한 위서에도 고구려전과 백제전만 전합니
다. 신라전이 처음 보이는 것은 양서 단계에 와서의 일입니다. 양서는 당나라의 요사렴이
636년경에 편찬한 사서입니다 그만큼 신라는 국가의 수숮능 가늠하는 척조의 하나인 외교
면에서 백제에 현격하게 뒤져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중국 사서에 기재되었느냐 아니냐가
두 나라의 국가 수준이라든가 건국순서를 결정짓는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
러나 당시 중국은 한반도의 국제정세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므로 그들의 기록 유무를 일종의
차고자료로 삼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백제와 신라의 국력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기준을 통해 평가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불교의 전래 시기라든가 율령 반포시기 그리고 군사력의 비교 등입니다. 특히 4세기경의 군
사력을 비교해보면 백제와 신라의 차이는 비교적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당시 고구려와 백제
는 황해도 일대를 놓고 일진일죄의 호각세를 보일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같은 시기 신라는
고구려의 영향력하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고구려에 인질을 보내고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전진에 사신을 보낼 정도였습니다. 문화 수준에서도 많은 차이가 났음은 물론입니다.
바로 이 같은 측면 때문에 삼국사기 등의 기록에도 불구하고, 현재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고구려...백제...신라 순으로 건국되었으리라 추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접근하면 신라가 서긴전 57년에 건국되었다는 기록이 반드시 틀렸
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즉, 조양동 고분군 등 경주지역에서 조사된 각종 유적을 통해 서
기전 2~1세기경에 이미 정치체로 보아도 좋을 정도의 세력이 성장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 것
입니다. 따라서 연맹왕국이사의 국가와 서기전 57년경에 건국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성
읍국가 단계에 해당하는 구가로서의 사로국의 출현은 오히려 그보다 더 빠를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기에 신란의 건국 연대에 대한 삼국사기 등의 기록을 단순히 후대의 조작으
로만 보아서도 곤란하다고 하겠습니다.
신라의 여성과 골품제
박혁거세 신화에서 특이한 점은 알영에 대한 부분입니다 왕비에 대한 신화를 따로 만들
고, 왕비를 왕과 함께 '성인'이라고 칭송한 예는 우리 역사상 매우 흐귀한 경우에 속합니다.
출생 방식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알영은 결코 박혁거세에 뒤지지 않습니다. 계룡이란 닭을
닮은 용이란 뜻이겠는데, 나중에 알게 되듯이 닭은 김씨족의 토템이자 국가의 상징으로 작
용한 동물입니다. 따라서 알영은 장차 국가의 주인이 될 김씨들의 원조로 보아도 무방한 일
물이라 하겠습니다.
알영신화를 통해 받는 신라의 국가 이미지는 성차별이 적은 사회입니다 가부장적인 권위
가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 사회, 나아가 남성과 여성이 비교적 대등한 지위를 누리는 사회라
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유독 신라에서는 3명이 여왕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신
라가 현대사회처럼 자유주의에 입각한 개방적인 문화를 지녔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혈
통을 기준으로 그 사람의 위치를 평가하는 철저한 시분제 사회였기 때문입니다 철저한 신분
제란 바로 골품제를 지칭한 것입니다.
골품제는 성골...진골로 나뉘는 골과 육두품...오두품...사두품 등의 품으로 구성되어 있었습
니다. 왕위는 물롬이고 정부의 각 부서 장관과 군부대 지휘관의 지위에 오를 수 있는 사람
은 '골' 신분을 지닌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품'에 속하는 사람들은 그들 '골'신분을
지닌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품'품에 속하느 사람들은 그들 '골'족을 보좌하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적어도 7세기전까지 성골은 왕실의 구성원에 한정되었고, 진골은 그밖의 귀족층에게 적용
되었다는 기록도 있지만, 성골이 과연 실제로 존재했는지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
다. 진골은 박...석...김씨에 한 정되었습니다. 진골이 되기 위해서는 부모가 모두 진골이어야
합니다.
만약 부모 가운데 한명이 6두품이라면 자식은 당연히 사회적 지위가 6두품으로 강등되어
신라의 17개 관등 중 제 6등급인 아찬의 지위보다 더 높아질 수가 없었으며, 그 결과 정부
의 각 부서에서 차관이상의 지위로는 오를 수 없었습니다. 각 부서의 중간관리자이자 일선
책임자에 해당하는 대사가 대부분 육두품에 속한 사람들의 일자리였던 듯합니다.
오두품은 더 낮은 지위인 제10등급의 대나마가 한계였습니다. 그들은 주로 의한 등의 기술
직에 종사했으며, 각 부서의 실무진에 해당하는 사지의 직위에 오르는 것이 최고의 출세였
을 것입니다. 사두룸 역시 대부분 기술직이나 각 부서의 말단 실무진이었던 사로서 활동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제 12등급인 대사까지만 승급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태어나면서부터 그 사람의 지위가 결정되는 체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혈동입니
다 누구의 피를 이어 받았느냐 하는 것이 최대의 기준이지요, 그런데 만약 한쪽의 혈통만을
중시한다면 지배층의 수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늘어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지배층의 권
위는 물론 그들 내부의 이익 역시 현저하게 감소될 것입니다 따라서 지배층이 자신들의 기
득권을 최대한 유지하기 위해서는 양쪽의 혈통을 모두 중시해야 하는 것입니다.
혈통 중시는 보통 여자의 입지를 한껏 올려놓을 수는 있는 최상의 여건입니다 그래서 유
산 상속도 똑같은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왕위도 상속의 개념이 적용되는 부문입니
다. 왕위의 경우에는 가능한 한 남자가 계승하는 것을 원틱으로 했지만 일정한 범위 안에
남자가 없을 경우 다른 혈동의 남자를 계승권자로 인정하기보다 여자로 하여금 계승토록 하
는 방식을 택한 것입니다.
골품제와 같은 엄격한 신분제는 필연적으로 족내혼을 수반하게 됩니다. 혈통을 중시하므
로 근친혼이 성행하게 되는 것이지요. 한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법흥왕에게는 지소라는
딸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딸을 법흥왕의 동생, 그러니까 자기의 삼촌인 입종에게 시집을 갔
고, 그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는데, 그가 바로 법흥왕의 뒤를 이은 진흥왕입니다. 이처럼
가장 가까운 사람끼리 혼인시킴으로서 혈통의 순수성을 이어가겠다는 새 각, 그것이 바로
신라 골품제의 핵심입니다.
석탈해 신화
박혁거세를 이어 왕위에 오른 사람은 남해입니다. 박혁거세와 알ㅇ영릐 아들인 남해는 차
차웅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는데, 그것은 무당을 의미하는 방언이었습니다. 고급스럽게 표현하
면 제사장이지요. 신라의 왕이 아직 제사장적인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차차웅은 자충으로도 기재되었는바, 이것이 불교 승려를 가리키는 '중'이
라는 말과 통한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그렇하면, 신라에서 기존의 무당이 누리던 지위가 불
교가 전래된 뒤에는 불교 승려에게로 계승되었다는 추측이 가능하겠지요? 무론 그렇더라도
신분과 정치적 기능은 많이 달라졌겟지만..........
여하튼, 탈해신화는 남해 차차웅 때를 배경을 산고 있습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재
된 신화를 간략하게 간추리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됩니다.
왜국에서 동북쪽으로 1천여 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다타나국의 왕이 여왕궁의 왕녀에게
장가들어 임심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은 사람이 알을 낳는 것은 상서로운 일이 아니
라고 하면서 알을 버리게 했으나 왕비는 차마 그러지 못하고 각종 보물과 함계 알을 독 속
에 놓은 후 배에 태워 바다로 떠나 보냈다. 배는 물길을 따라 처음에 금관국의 해변에 도착
했으나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다시 길을 떠나 진한의 아진포에 도착했
다. 어느 날 해변에 살던 노파가 하늘에 가치가 모여 울고 있는 것을 이상히 여겨 가보니
배에 궤짝이 있고, 그 속에는 단정한 사내아이가 있었다. 노파가 아이를 거두어 이름을 탈해
라 하고, 까치 작자에서 조를 빼낸 석을 성으로 삼았다. 탈해는 그러던 어는 날 성장하여 키
가 9척이나 되었으며, 학문에 힘써 지리가지 통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탈해가 토함산에 올
라 경주 지역을 내려다 보더니 양산 아래에 있던 호공의 집이 길지입을 아아채고 내려가서
는 그 집이 자기의 집이라고 우겼다. 시비가 일자 관가에서 재판하게 되었는데, 탈해는 미리
그 집 따에 숯을 묻어놓은 뒤 '그 집은 대장장이였던 우리 선조의 집이다'라고 주장했다.이
에 사람들이 호송의 집 한켠을 파보니과연 숯이 나오는지라 탈해의 말을 인정했다. 호공의
집이 있던 곳은 나중에 월성이 되었다. 탈해가 집을 빼앗는 과정을 지켜보고, 또 그가 매우
어질다는 소문을 들은 남해왕은 탈해에게 자기의 맏딸을 시집보내는 한편, 대보로 삼았다.
남해왕이 죽을 때 '아들이냐 사위이냐를 따지지 말고 나이 많고 어진 사람이면 누구나 왕위
를 잇게 하라'고 유언했으므로, 남해왕의 아들인 유리와 탈해 가운데 한 사람을 다음 왕으로
모시게 되었다. 이에 '성스럽고 지혜로운 사람은 이가 많다'는 속설에 따라 떡을 깨물게 하
여 비교하니, 유리의 잇금이 더 많았다. 그래서 유리가 왕위를이었으며, 칭호를 이사금이라
했다. 유리는 34년간 재위하다가 탈해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석탈해의 고향
위의 설화는 고구려의 주몽설화와 매우 유사한 구성을 보여 주목을 맏아왔습니다. 우선
사람이 낳은 알을 통해 태어난다는 점에서 똑같으며, 어머니가 물과 관련된 인물이라는 점
에서도 연관성이 인정됩니다. 또한, 자신의 출생지를 떠나 따른 곳에 정착할 때 기지로써 근
거를 마련한다는 발상도 같습니다. 즉, 탈해가 꾀를 내어 호송의 집을 빼앗는 장면은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뒤 비류국과 서로 우열을 겨룰 때 어느 쪽이 더 전통 깊은 국가인가 하는 문
제가 제기되자 궁실의 기둥과 자재를 마치 오래된 것인 양 변조시킴으로써 비류국왕의 양보
와 항복을 받아냈다는 이야기와 같은 발상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습니다.
더욱이 삼국유사에는 탙해가 궤짝에서 나오자마자 토함산 꼭대기로 올라가 석총으로 만들
어 놓고 그안에서 7일 동안 머물다 나왔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여기의 석총이 고구려식의
적석총을 의마하는 것이라면 탈해집단이 혹여 고구려계가 아닌가 생각해 볼수도 있습니다.
마침 탈해는 자신의 조상이 대장장이라고 했으므로, 이를 선진적인 철기문화를 지닌 북방계
이주민의 상징적 표현으로 해석해봄 직합니다.
물론 탈해가 바다를 이용해 신라로 이주했다는 신화의 일부 내용을 참작하면, 탈해를 해
양계 이주집단의 상징으로 풀이할 수 있으며, 이후 신라의 수준 등과 바다와 관련된 일에
많이 종사한 탓인지도 모릅니다. 또한, 그 과정에서 금관가야국과 충돌한 것이 설화에 반영
되었을 개연성이 있습니다.
탈해가 호공에게서 빼앗은 집이란 지금의 월성입니다. 월성은 신라의 왕성이었던 곳입니
다. 다라서 탈해가 호공의 집을 빼앗는 대목은 장차 일어날 왕위계승을 암시하는 것인지 모
릅니다. 그러나 탈해는 왕위를 탈취하지는 않았습니다. 남해왕의 딸롸 혼인함으로써 왕위에
오른 것입니다. 그것은 탈해집단이 무력으로 경주 지역으로 제패한 것이 아니라 토착집단과
의 제휴를 통해 정치권의 중심세력으로 부상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김알지 신화
산국사기 등의 기록에 따르면, 탈해니사금은 서기 57년에 즉위했다고 합니다. 물론 기록
그대로 믿기에는 여러 가지 의문점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연대를 무시하는 학자들도 적
지 않습니다. 한국고대사, 특히 신라 초기사에서 연대 문제는 매우 복잡한 부분이므로, 여기
에서는 따로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따라서 일단 미흡하나마 삼국사기의 기록에 준하여 설명
하겠는데, 나중에 경주 김씨는 물론 신라의 국조로까지 추앙되는 김알지는 탈해니사금 9년
에 탄생했다고 합니다. 삼국사기에 실린 알지신화의 내용을 그대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
다.
탈해니사금 9년 봄 3월이었다. 왕이 밤에 금성 서쪽의 시림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날
이 새기를 기다린 다음 호공을 보내 살펴보게 했더니, 나뭇가지에 금빛 나는 조그만 궤짝이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아뢰자, 왕이 사람을 시켜 궤짝
을 가져와 열게 했더니, 그 속에는 조그만 사내아이가 있었는데, 자태와 용와가 기이하고 컸
다. 왕이 기뻐하여 주위를 둘러보며 "이는 어찌 하늘이 나레게 보낸 아늘이 아니겠는가?"라
고 말하고 거두어 길렀다. 성장하자 총명하고 지략이 많으므로 이름을 알지라 하고, 금빛 궤
짝에서 나왔다 하여 김을 성으로 삼았다. 시림이 명칭이라는 명칭을 바꾸어 계림이라 하고,
그것을 국호를 삼았다.
김알지의 탄생과정은 박혁거세의 탄생과정과 매우 흡사합니다. 다만 흰 말이 흰 닭으로
바뀌고, 붉은 색 알이 금빛 궤짝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삼국유사에 기재된 알지신
화를 참고하면 박혁거세와 김알지의 공통점은 더 많아집니다. 삼국유사의 내용을 일부 인용
하면 이렇습니다.
영평 3년(60) 8월 4일이었다. 호공이 밤에 월성 서쪽 마을을 지나다가 시림 속에서 매우
밝은 빛이 비추는 것을 보았다. 붉은 구름이 하늘에서 땅으로 드리우고 구름 속에는 황금빛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는데, 빛은 궤짝에서 나오고 있었으며, 또한 흰 닭이 나무 아래
에서 울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왕에게 아뢰자 왕이 숲으로 행차하여 궤짝을 열어보니 사
내아이가 누워있다가 곧 일어나 혁거세의 고사처럼 했다. 그래서 그 말에 따라 알지라고 이
름지었다. 알지는 그곳 말로 어린아이를 가리킨다. .........(중략)......... 왕이 길일을 택해 알지
를 태자로 책봉했으나 나중에 파사에게 양보해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금빛 궤짝에서 나왔
으므로 김을 성으로 삼았다. 알지가 세한을 낳고 세한이 아도를 낳고 아도가 수유를 낳고
수유가 욱부를 낳고, 욱부가 구도를 낳고, 구도가 미추를 낳았는데 및가가 왕위에 올랐다.
신라의 김씨는 알지에게서 시작되었다.
삼국유사의 알지신화는 마치 삼국사기에 생략된 부분을 보충 설명하는 듯한데, 붉은 구름
운운한 대목과 밝은 빛 운운한 대목은 태양신 숭배사상의 반영으로 생각됩니다. 혁거세의
고사라는 것은 사람들이 알을 깨뜨리니 알 속에 있던 박혁거세가 사람들을 처음 보고 "알지
거서간이 한번 일어났다"고 말했다는 대목을 가리킨 듯 합니다. '알지'가 어린아이를 가리킨
다고 설명한 부분도 참고가 됩니다 어린아이를 지역에 따라 '아기' '애기' '아지' 등으로 부른
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알지를 '낟알'과 연관된 것으로 보아 곡
령신앙의 표현으로 보기도 합니다.
신라와 계림
신화에 따르면 김알지는 신라 김씨, 곧 경주 김시의 시조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태어난 숲을 신성시해 시림 혹은 계림이라 했고 계림ㅂ은 국가의 별명으로까지 이용된 덧입
니다. 가만히 따져보면, 신라의 국호화 별명은 참을 많습니다. 먼저, 국내 기록에서 신라의
국호와 관련된 명치을 찾아보면, 서벌...서나벌...서야벌...서라벌...사로...사라...시라...계림...계
귀...추림...신로......구구타예설라 등이 있습니다. 중국측 기촉에는 사로...사라,,,계귀...신로...신
라...구구타예설라 외에 설라라고 적은 곳이 있습니다. 일본 기록에서는 신라...신량...사라.계
림...지라기 등의 명칭이 나옵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를 국호로 사용한 것은 지증왕
4년(503)의 일이라고 합니다. 한편, 알지가 신라 김씨의 시조라는 기록은 약간의 검토를 필
요로 합니다. 신라 흥덕왕릉비문에 '태조 성한'이라는 표현이 있기 때문입니다. '태조'란 시조
왕을 뜻합니다. 신라의 김씨는 자신들의 시조를 성한으로 믿었기 때문에 이처럼 표현했으
것입니다. 흥덕왕에 앞선 문무왕릉비문에는 '15대조 성한왕'이라는 대목도 있습니다. 비문은
당시의 기록입니다. 따라서 신라인들은 고연 누구를 자기들의 조상으로 여겼는지 가장 분명
하게 알려 줄 수 있는 자료입니다. 그런데 신라 당시의 자료에서는 한결같이 '알지'에 대한
언급을 찾을 수 없습니다. 다만 '성한'이라는 인물이 나올 뿐인데 여기의 성한이 알지와 동
일인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고 보면, 알지라는 인물의 실존여부는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신화이외에 별다른 기록
이 없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그가 탈해왕 때의 인물인지 그리고 알지 - 세한 - 아도 - 수유
- 육뷰 - 구도 - 미추왕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시실인지를 달리 확인할 길도 아직 묘연합니
다. 그래서 신화를 동반한 족보를 볼 때는 매우 신중해져야 합니다. 신화를 그대로 믿어 역
사에 반영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무책임한 태도입니다. 특히 신화 속의 '신간을 그대로 믿
어서는 곤란합니다. 그 이유는 단군신화의 내용을 검토하는 가운데 이미 분명하게 드러났다
는 사실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겠지요?
<참고문헌>
김재원, 단군신화의 신연구, 정음사, 1947.
윤내현, 고조선 연구, 일지사, 1994.
김열규, 한국의 신화, 일조각, 1983.
이홍직, 한국소대사의 연구, 신구문화사, 1971.
김철준, 한국고대사회연구, 지식산업사, 1975.
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천관우, 고조선사...삼한사 연구...일조각, 1989.
이현혜, 삼한사회형성과정연구, 일조각, 1984.
사회과학출판부, 고구려문화사, 논장, 1988.
김정배 편, 북한의 우리 고대사 인식1, 대륙연구소 출판부, 1991.
노중국, 백제정치사연구, 일조각, 1988.
신형식, 백제사, 이화여대 출판부. 1982.
이종욱 신라국가형성사연구, 일조각, 1982.
신형식, 신라사, 이화여대 출판부, 1985.
이기백...이기동, 한국사강좌 - 고대편, 일조각, 1982.
제4장 중국의 삼국시대와 우리 삼국시대
1) 솥의 다리는 세 개 - 삼국지의 무대
삼국지와 삼국지연의
삼국지통속연의를 읽은 적이 있습니까? 중국의 원나라 말기와 명나라 초기를 살았던 나관
주이나를 사람이 쓴 책이지요. 청나라 때 모종강이라는 사람이 다시 정리한 후로는 삼구지
연의 혹은 그냥 소설 삼국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후한 영제의 중평 원년(184)부터 이야기
를 시작해 진 나라 무제의 태강 원년(280)가지 약 97년에 걸틴 역사를 소설로 꾸민 책입니
다. 진수가 편찬한 역사서 삼국지를 저본으로 했으나, 역사를 보는 시각은 여러 모로 다른
점이 많습니다.
삼국지통속연의의 장면 장면을 읽고 있노라면, 그것의 사실 여부를 떠나서, 또 등장인물의
좋고 나쁨, 행동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용기와 지략, 관용과 믿음, 천운과 무욕 등에 감탄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 책 곳곳에서 펼쳐지는 정치술과 전략...전술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 흥미
진진해 읽는 이의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책에는 과장이 너무 심하며,
역사를 보는 시각도 매우 편파적이라는 단점이 있습니다. 소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삼국지통속연의는 물로닝고, 그 책의 저본인 삼국지는 위...촉...오 3국의 역사에 대한 책입
니다. 위나라는 그 유명한 조조라는 가람과 그의 아들 조비가 세운 나라로서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이른바 화북 지방 대부분을 차지했던 대국이며, 촉나라는 후한의 왕족이던 유비가
양자강 상류 지역에 세운 나라로서 지금의 사천성과 부근 일대에 위치했습니다. 그리고 손
권이 세운 오나라는 양자강 남쪽을 다스렸습니다. 이처럼 세 나라가 중국 전역을 나누어 통
치하던 시기를 가리켜 후대 사람들이 '삼국시대'라고 불렀고, 그 시대에 대한 역사서를 삼국
지라고 했던 것입니다.
정립
세 나라가 공존했던만큼 경쟁도 치열했습니다. 촉나라가 오나라를 거세게 공격하면 위나
라가 오나라를 도와주고, 위나라가 촉나라를 공격하면 오나라가 촉나라를 도와주어, 어느 한
나라가 다른 한 나라를 완전히 정복하는 일을 막았습니다. 만약 촉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
켜 자기 땅으로 삼게 되면 촉나라의 국력이 배가되어 그대로 있던 위나라는 상대적으로 불
리해지며, 또 위나라가 촉나라를 멸망시키면 가만히 있던 오나라도 나중에 위헙해지기 때문
입니다. 따라서 두 나라가 싸울 때 그중 약한 나라를 응운한 것은 자기 나라를 안전하게 보
전하는 방책의 하나였다고 하겠습니다. 그 결과 위...촉...오 3국은 후한인 멸망한 후 수십년
간 서로를 경계하며 공존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화을 한자용어로 정립이라고 합니다.
솥 정, 설 립. '솥이 서 있다.' 즉, 솥의 다리처럼 세 개가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뜻입니다.
솥의 다리? 그것도 세 개? 이렇게 의아해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둥그런, 둥그런 솥의 다리는 세 개였습니다. 예날 중국의 청공기시대에 만들어진 솥에는 모
두 다리가 붙어 있는데, 세 개입니다. 그 세 개의 다리가 감각구도를 이루어서 솥이 쓰러지
지 않게 버텨주는 것입니다. 만약 다리 하나를 나머지 두 개 중 어느 한쪽에 가까이 배치한
다면, 솥은 제대로 서있지 못하고 제풀에 쓰러지거나 작은 충격에도 금방 넘어져 버릴 것입
니다. 중국 삼국시대의 정치가들이 한때나마 결쟁국가를 도와준 것은 바로 솥이 넘어지는
장면을 연상했기 때문입니다.
하 은 주와 봉건제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중국의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의 역사는
중국의 역사와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국가는 하
왕조라고 합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왕은 있었으나, 국가라고 하기에는 어색한 단계였다고
합니다. 바로 3황 5제의 시대인 것입니다 3황은 보통 수인씨(백호통 등에 기록된 중국의 전
설에 따르면, 사람들이 음식을 날 것으로 먹는 바람에 병에 걸리는 일이 잦던 시절, 문득 어
떤 성인이 나타나더니 나무를 부비고 부싯돌을 때려서 불을 피유는 방법을 고안했다. 이로
써 사람들이 음식을 익혀 먹게 되니 병이 깨끗이 나았다. 이후 사람들은 그의 은혜에 감사
하며, '불을 얻어 낸 가람'이라는 뜻으로 수인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역사와 같
은 다른 기록에는 불을 발견한 사람이 복희씨로 기재되어 있다. 복희는 포희 혹은 포희로도
불렸는데, 그것은 '희생물을 부엌에 채운다' 또는 날고기를 익힌다'는 뜻이라고 한다.)...복희
씨(복희시에 대한 전설은 지역과 기록에 따라 각기 다르지만,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상반신
은 사람이며 하반신은 뱀 또는 용의 모습을 한 성인이라는 것이다. 복희는 포희...포희...복
희...복희 등 다양하게 표기되었다. 복희씨는 자연을 살펴 건(하늘)...곤(땅)...감(물)...리(물)...간
(산)...진(천둥)...손(바람)...태(늪)로 이루어진 팔괘를 만들었는데, 이로써 사람들은 점을 쳐서
신의 의지를 알아내고 자연에 순응하며 살게 되었다고 한다. 또 복희씨는 사람들에게 노끈
을 짠 다음 그물을 만들어 고기잡는 법도 가르쳐 주었다고 전한다. 그림에서는 부인인 여와
와 함께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신농씨(백호통이라는 기록에 따르면, 먼 예날 사람들은 주
로 고기를 잡아먹었으므로 항상 먹을 것이 부족했는데, 어느 날 소머리에 사람 몸을 한 성
인 나타나더니 사람들에게 밭 갈고 곡식 심는 법을 가르쳐 주어 사람들의 음식 걱정을 해결
해 주었다. 이에 사람들이 그 성인을 신농이라고 높여 불렀다고 한다. 신농씨는 또 태양이
충분히 빛나게 하여 사람들의 농사를 도와주었으므로 '태양의 신'이라는 뜻에서 염제라는 별
명을 갖고 있으며, 의약의 신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리하여 중국 사천성 지역의 전설에 따르
면, 신농씨가 사람들을 위해 각종 약초를 일일이 맛보다가 단장초라는 독초를 먹는 바람에
창자가 끊어지고 썩어서 죽었다고 한다.) 등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신과 인간의 중간적 존재
로서, 자신의 초인간적인 지혜와 능력으로 사람들의 생활을 향상시켰다고 합니다. 그 뒤를
이은 황제(염제 신농씨와 싸워 이겼다는 하늘나라 중앙의 상제이다. 황제의 어머니는 처녀
의 몸으로 황제를 낳아 희수라는 물가에 키웠다고 한다. 황제는 4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어
서 사방을 살폈으며, 신들의 나라의 최고 통치자 그리고 신들의 싸움을 중재한 재판관으로
유명하다. 황제는 발명도 많이 했는데, 수레...솥...시루...축구와 집 짓는 법을 고안했다고 한
다. 그중 특히 수레를 발명했다고 하여 황제를 헌원씨라고도 부른다. 황제라고도 하며, 서방
주나라에서 섬기던 상제로 전한다.)...전욱(황제의 손자(사기) 혹은 증손자(산해경)로서, 황제
를 이어 하늘나라 중앙 상제의 지위에 오른 뒤 하늘과 땅의 통로를 끊어버림으로써 신의 세
계와 인간세계를 보다 분명하게 구별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각종 재난 속에서 고통
받게 되었다. 또한 전욱은 질서와 예법을 중시했는데, 여자를 경시했기 때문에, 여자가 길에
서 남자를 만나면 얼른 길을 양보해야 하는 법을 제정하기도 했다. 이 빡에 전욱은 음악을
좋하했으며 죽은 뒤에는 반은 사람, 반은 물고기의 모습으로 부활했다고 한다.)...제곡(황제의
자손으로 인간세계를 다스렸다는 반인반신의 존재이다. 음악을 무척 좋아했으며, 하늘의 상
제인 제준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제준은 동방 은나라에서 섬기던 상제이다.
또 다른 전설에 따르면, 제곡에게는 4명의 아내가 있었는데, 첫째 부인은 후직을 낳았고, 둘
째부인은 설을 낳았으며, 셋째 부인은 제요 그리고 넷째 부인은 제지를 낳았다고 한다. 여기
서 후직은 주나라의 시조이며, 설은 은나라의 시조이다.)...요(제곡의 아들오서 인간세계를 다
스린 성인이며, 제요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는 엉성한 초가에 살면서 거친 옷을 입고 흙으로
빚은 그릇에 거친 밥과 야채만 담아 먹었을 정도로 근검 소박하고 백성들을 사랑한 매우 모
범적인 왕으로 전한다. 요는 훌륭한 신하를 많이 두었는데, 사위인 순은 교육을 담당하는 사
고였고, 설은 구사를 담당하는 사마였으며, 후지은 농가, 고요는 법을 담당했다고 한다. 아들
인 잔주의 성품이 교만하고 포악하자, 백성들에게 해를 끼칠까 염려하여 왕위를 사위인 순
에게 물려주었다고 한다.)...순(고수라는 눈먼 사람이 봉황의 꿈을 꾸고 낳은 아들로서 눈의
눈동자가 각각 두 개씩이었다고 하여 중화라고도 부른다 고수는 순을 낳은 지 얼마 안가 아
내를 잃고, 새 아내를 맞아 다시 상이라는 아들과 과수라는 딸을 낳았는데, 그는 성질이 고
약한 후처와 후처의 자식만을 예뻐하여순을 미워하고 죽이려 했으나, 순은 끝까지 효도하고
형제간의 우애를 지켰다고 한다. 순은 농사와 고기잡이 그리고 그릇 만들기를 차례로 하는
동안 크나큰 덕행으로 사람들을 감화시킨 공이 인정되어 요임금의 두 딸 아황...여영과 혼인
했으며, 요임금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수십년간 다스리다가 상균을 비롯한 9명의 아들
대신 홍수를 잘 다스려 큰 공을 세운 신하 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고 한다.) 등의 5제는
정치...경제...사회 각 부문에 걸쳐 각종 문물을 마련하고 발전시켰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뒤
를 이은 것이 하왕조라는 것이지요.
하왕조를 처은 연 사람은 우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순임금의 신하였는데, 홍수를 잘 처리
해 신임을 얻고는 왕위를 이어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임금은 신하들 중 어진 사람을 뽑
아서 왕위를 물려줌으로써 이후 5백년 가까이 그의 자손이 대대로 왕위를 계승하게 만들었
습니다. 왕조를 연 것이지요. 하왕조는 서기전 1700년을 전후한 무렵에 동쪽에서 일어난 은
나라의 공격을 받고 멸망하게 됩니다.
중국의 옛 문헌에 동이적의 국가로 소개되기도 한 은나라는 원래 상이라는 국호를 사용했
습니다. 또한 그것은 도시의 이름이기도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은나라는 도시국가적 성격을
띠었다고 할 수 있지요. 은이라는 명칭은 그 뒤를 이은 주왕조 때 붙여진 것입니다. 은나라
의 수도는 몇 번에 걸쳐 바귀었으마 멸망하기 전 3백년 가까운 기간은 지금의 하남성 안양
현의 소둔촌 일대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20세기초에 그곳을 발굴하자 갑골문자를 비롯해 각
종 유물이 쏟아져 나왔고, 그로 이해 소둔촌 일대를 은허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사실 중국사에서 은나라 이전의 역사를 그대로 인정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그 동안 많
은 논란이 있었으며,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왕조가 존재했다는 시기의
대부분은 신석기시대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하왕조와 관련된 듯한 유적에서 정치체
의 출현을 암시하는 요소들이 발견되긴 하지만, 확정지어 말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닙니다. 그
러나 은나라의 경우는 다릅니다. 그들은 대단히 발달된 청동기문화를 갖춤으로써 국가로서
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은허를 조사하는 과정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도시
국가적 성격이 강한 은나라는 농경문화를 기반으로 한 가부장제 사회였으며, 은나라의 왕은
제사장적 성격이 강했다고 합니다. 신권정치를 한 것이지요.
서기전 1100년경에 이르러 은나라는 봉건제하에서 자주권으 뱅취하려는 부녀 세력들의 도
전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 서방을 제패한 주 왕실에 의해 멸망되고 말았습니다.주왕
조는 처음 약 300년간을 지금의 섬서성 위수지역에 있던 호경에 도읍했으나, 거시전 770년
에 북방족 견융의 침입을 받아 국가 멸망의 위기에 봉착하자 도읍을 하남성의 낙양으로 옮
겼는데, 호경에 도읍하던 시기를 서주시대라 하고, 낙양으로 천도한 후 약 550년간을 동주시
대하고 합니다. 왕실의 권위가 실추된 동주시대는 다시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로 구분됩니다.
춘추...전국시대와 통일왕조
존왕양이의 기치 아래 제후들이 각자 패권을 추구하던 춘추시대는 진...제...진...초의 4강
구도로 진행되면서 약육강식에 의한 정복전쟁이 끊임없이 되풀이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춘추
초기에 170여 개국에 달하던 제후국이 춘추 말기에 이르자 10여개국정도로 정리되었고, 진
이 자체 분열을 일으키면서 시작된 전국시대에는 조...한...위...제...진...초...연 등 7국으로 압축
되었습니다.
열국이 치열한 경쟁을 치르는 사이에 중국의 정치...경제...문화는 급속히 변화했습니다. 각
자 최종 승자가 되기 위해 부국강병을 추구하면서 실리에 입각한 제도개혁이 이루어 졌으
며, 영토를 비롯한 정치 범위가 크게 확대되었습니다. 합종...연횡과 같은 외교정책, 관료제에
입각한 군현지배체제, 제자백가의 출현 등이 모두 이 무렵의 특징적인 요소들입니다.
전국시대는 상앙의 변법이래 꾸준히 국력을 키워온 진나라가 나머지 6개국을 차례차례 멸
망시킴으로써 서기전 221년에 막을 내렸습니다. 당시 진나라의 왕은 정이라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통일하자마자 왕이라는 칭호를 버리고 대신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하면서 자신을 첫 황
제, 곧 시황제라고 부르게 했습니다. 또한 법가인 이가의 건의를 받아들여 기존의 봉건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36개 군으로 나눈 다음 중앙집권적 관료정치를 시행했으며, 도량형과 화
폐...문자를 통일하고 사상조차 통제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진나라의 정치...제도 개혁은 너무나 급격해 불만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불거져 나
왔습니다. 게다가 만리장성 축조 등 대규모 토목공사가 빈번히 시행되면서 농민들의 부담이
매우 커졌습니다. 그러던 중 서기전 210년에 시황제가 죽자 정치 혼란마저 더해져 서기전
206년에는 결국 진나라가 멸망하고, 반란세력을 주도하던 유방과 항우의 패권다툼이 시작되
었습니다.
거대한 중국 - 한
농민 출신인 유방은 귀족계급을 이끌던 항우의 군대를 격파하고 서기전 202년에 한나라를
세우니, 이 사람을 고조하고 합니다. 제국을 형성한 한나라는 진나나의 제도를 대부분 계승
했으나 급하게 서두르지는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군현제의 경우에도 그것을 그대로 시행하
는 것이 아니라 예저의 봉건제적 요소를 덧붙임으로서 군국제도라고 하는 새로운 제도를 탄
생시켰던 것입니다.
중앙집권체제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한나라는 실리를 추구하는 법가 위주의 정치에서 벗너
나 유교의 통치이념을 채용하는 등 새로운 가치관과 관료제도 구축을 모색했습니다. 그리고
정권이 어느 정도 안정된 무제 때에는 주변지역 정벌에 나서 남쪽으로 베트남 북부지역에까
지 이르렀으며, 동쪽으로는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4군을 설치함으로써 중국의 정치 범위를
확대시켰습니다. 그러나 애제때인 서기전 1년경 신하인 왕망이 길권을 차지하더니, 급기야
서기 8년에는 스스로 왕위에 올라 활제를 칭하고 국명을 고쳐 신이라 했습니다. 서기 14년
익구에서 일어나 반란과 북방의 대기근을 계기로 곳곳에서 반란이 줄을 이었고, 그 결과 왕
망은 서기 23년에 전사했습니다. 홍란을 수습한 것은 유수라는 호족이었습니다. 그는 한나라
의 왕족임을 내세우며 서기 25년에 낙양에서 한나라를 재건했는데, 이 사람이 바로 후한의
첫 임금 광무제입니다.
국호에서도 드러나듯이 광부제가 세운 한, 곧 후한은 전한시대의 정치기구와 제고응 거의
그대로 답습했습니다. 다만, 징병제도를 페지하고 전문적인 병사제를 두는 등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후한에서는 유교를 더욱 중시해 통치의 원리로 이용했습니다.
그러나 후한은 건국된지 불과 100년도 지나지 않아 외척과 환관의 득세로 부정부채가 만
연하고, 그로 인해 크고 작은 반란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던 중 서기 184년에 폭발한 농민봉
기, 곧 황건적의 난능 후한 왕도에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실권 없이 명백한 유지하
던 후한 왕실은 결국 서기 220년에 마지막 왕인 헌제가 조조의 아들 조비에게 선양함으로써
종막을 고했습니다. 조비는 국호를 위로 고치고 낙양에서 즉위했다고 합니다.
삼국시대와 서진...동진
서기 184년에 일어난 황건적의 난은 곧 조조가 이끄는 정부군에 진압되었지만 그 과정에
난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비장에서 병사를 모아 강대한 세력을 형성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서두에 소개한 삼국지통속연의의 주인공인 유비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서기 221년에
성도를 중심으로 한나라를 재건했는데, 사람들은 이 나라를 보통 촉한 혹은 촉이라고 부릅
니다. 한편, 회하 유역과 양자강 중...하류역에서 호족세력들을 통합하며 세력을 확장한 손권
은 건업에서 오나라를 세움으로써 삼국시대의 한 축을 형성했습니다.
삼국 중 가장 강성한 국가는 중원지역 대부분을 차지한 위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위나라
왕실은 얼마 안가서 군대를 장악하고 쿠데타를 일으킨 사마 씨의 영향력하에 놓이게 되었으
며, 결국 서기 265년에 협박을 받은 원제가 사마염에게 왕위를 물려줌으로써 진나라가 서게
되었습니다. 그 사이 263년에 촉나라는 위나라의 공격을 받아 이미 멸망했으며, 280년에는
위나라를 이은 진나라가 오나라마저 멸망시킴으로써 중국은 다시 통일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나라의 통일기간은 잠시였습니다. 300년경에 일어난 사마윤의 쿠데타를 계기로
왕실 내부의 공육상쟁이 벌어지자, 혼란을 틈타 흉노...선비...저...강...갈 등 북방의 이른바 5
호가 반란을 일으켜 화북 지방을 경쟁적으로 장악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진나라는 서기
316년에 민제가 수도인 낙양에서 흉노족이 세운 한 나라의 공격을 받고 체포...살해됨으로써
멸망했는데, 다음해인 317년에 양자간 남쪽의 건업에서 사마씨의 일족인 사마예가 진나라를
재건하니, 이를 동진이라 부릅니다.
이상 간단하게 정리하는 가운데 드러난 바와 같이, 중국의 감국시대는 불과 50년 정도의
매우 짧은 기간입니다. 그 기간에 삼국의 계속된 저쟁으로 인구는 크게 줄었으며, 경제...문
화의 발전 역시 부분적으로 다소 저해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삼국간의 치열한 경쟁
은 각국을 국력 배양에 힘쓰게 했으며, 그 결과 중국의 정치...군사적 영향권이 외부로 크게
확대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역사와 관련된 사건으로는 서기 245년에 위나라의 관구검이 이
끄는 군대가 고구려의 환동성을 함락시킴으로써 요동을 확보하고 고구려를 위축시킨 사건을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중국의 삼국시대는 춘추...전국시대의 분위기와 일부분 통하는 면이
있는 듯합니다. 한족의 활동범위가 중원지역을 벗어나 지금의 중국과 같은 광대한 지역데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은 춘추...전국시대의 경쟁에서 비롯되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시대 배
경과 상황은 다르지만 살아남기 위해 무한히 경쟁해야 하는 시대였다는 점에서 춘추...전국
시대와 삼국시대는 닮은꼴이라고 하겠습니다.
2) 고구려는 남성, 백제는 여성?
고구려인의 기상
삼국시대를 보는 사람들의 시각은 매우 다양해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가 어렵습니다. 그
러나 몇 가지 문제에 대해서는 대체로 의견이 합치하는 듯합니다. 그중 한 가지가 삼국의
통일에 대한 것입니다. 즉, 신라가 안니 고구려가 통일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만약 고구려가
통일했다면 우리도 매우 넓은 땅을 가질 수 있었을 텐데...하는 아쉬움의 표현들입니다. 이렇
게 아쉬움을 표현하는 사람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면 십중팔구는 고구려의 강인함과 씩씩
함을 거론합니다. 한마디로 고구려에게서는 남자다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편, 백제에 대해서는 매우 세련된 사회라는 인상을 갖고 있지만, 어딘가 연약한 국가인
듯한 느낌도 함께 가지고 있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세련된 사회라는 표현 뒤에는
사치스럽다는 기분이 깔려 있고, 그런 부분들이 한데 어우러져, 백제는 전체적으로 마치 곱
게 화장한 여자 혹은 예쁘장한 미소년의 분위기를 자아낸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신라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도 꽤 있는 듯합니다. 그리하여 신라의 삼국
통일을 똑똑하지도 건강하지도 성실하지도 않은 사람이 잔꾀 하나로 건강하고 솔직하고 따
뜻한 사람을 짓밟으며 자신의 이익을 챙긴 사건처럼 평가하기도 합니다. 이는 물론 대다한
적대감을 드러낸 표현입니다만, 그만큼 고구려에 대한 애착과 사랑이 크고, 고구려의 멸망에
대한 아쉬움이 짙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고구려'하면 으레 ' 기상'이라는 단어를 뒤따라 붙이고는 흐뭇한 감
회에 젖곤 합니다. '기상'이란 '사람의 타고난 성질'을 뜻하는 평범한 단어에 불과하건만 '고
구려의 기상'하면 무언가 거친 숨결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고 그 숨결 속에는 투발한 손길
과 함께 끝없는 도전의식, 개척정신 등을 담아 놓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구려를 정
치...군사적인 면으로만 바라볼 뿐, 사회...문화적인 측면에서는 별다른 인상을 갖지 못하는
것도 사실 그 때문인 듯합니다. 그것은 마치 바깥 일을 잘하는 남자는 집안 일에 소홀할 수
밖에 없다는 식의 다분히 개인화된 국가관이 반영된 결과라 하겠습니다. 너무다 대범하기
때문에 꼼꼼한 면이 부족한 문화를 소유했던 국가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고구려는 단지 군사력만 갖춘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칼과 창을 앞세워 이웃 나라
와 집단을 노략질함으로써 제 배를 채우는 그런 호전적이고 비정치적인 집단이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그들은 효율적으로 짜여진 관제 조직을 운영했고, 초기부터 적극적으로 중국 등의
이웃나라와 교류하면서 건강하고 다양한 문화를 형성했던 국가입니다. 그러면서도 중심은
잃지 않았습니다. 그랬기에 창의적인 문화를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자와 교육
고구려 사람들은 나름의 문자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단지 중국인의 한자를 사용했을 뿐입
니다. 그러나 그것을 그대로 사용하기보다는. 자기 풍토에 맞추어 매우 독특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사람이름이라든지 땅이름과 같은 고유명사 그리고 각종 말을 나타내기
위해 한자의 외양만 빌리는 차자표기법을 개발한 것입니다. 고구려의 차자표기법은 신라에
전해져 이두를 성립시켰으며, 또 그것이 일본의 음절문자인 가나 성립에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신라의 이두는 7세기 후반에 설총이 정리했습니다.
고구려의 문화 수준은 소수림왕 2년에 태학 혹은 대착이 설치된 사실을 통해서도 어느 정
도 엿볼 수 있습니다. 태학(대학)은 중앙의 귀족 자제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기관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곳에서는 사서 오경과 사기 등의 역사서를 교과서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한편, 지
방에는 경당을 설치해 지방민의 자제들에게 독서와 활쏘기 등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습니
다. 광개토왕릉비와 중원고구려비 그리고 각종 벽화고분에 발견된 묵서명 등은 4~5세기 당
시의 높은 한문 수준을 반영해줍니다.
고구려 사람들의 교육에 대한 지대한 관심은 역사서 편찬사업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
다. 그리하여 국초에 이미 유기라는 역사서를 만들었으며, 영양왕 11년(600)에는 이문진을
통해 신집을 편찬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유기를 만든 국초란 소수림왕대일 것으
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율령제도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는 소수림왕 3년(373)에 율령을 반포했다고 합니다. 율령이란 지
금의 형법에 해당하는 율과 토지...관제등 국가제도 전반을 규정한 영 그리고 시행규정에 해
당하는 격...식을 총칭한 것입니다. 아주 단순하게 정리하면, 율령이란 금지법과 명렬법의 합
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야 사회가 매우 복잡해지고 문화 수준도 크게 높아져서 조그마한 모임에 회칙을
두고 또 규정을 두는 것도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권력이 소수에게 집중되고 정치...경제...사
회...문화가 제대로 분화되지 않은 단조로운 사회에서는 그저 관습에 따른 단간한 약속이 있
으면 그만인 것입니다. 따라서 율령 반포는 사회가 이미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단계로 돌입
했음을 알리는 증표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율령은 법전으로 완성됩니다. 그래서 '율령을 반호했다'는 표현은 보통 '법전을 만들어 공
표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렇다면 고수려가 과연 4세기 후반에 법전을 반포했을까
요? 이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그들중 어떤 이들은 고대의 율
령 반포를 단순히 공복 제정에 불과한 것으로 보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성문화되지 못
한 법체계를 상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정도라면 고구려는 3세기 이전에 이미 충분히
경험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삼국지에 의하면, 고구려는 중국의 현도군으로부터 매년 조복과 의책을 당어갔다고 합니
다. 그리고 왕과 제가는 각각 사자...조의 ...선인과 같은 가신을 둘 수 있었는데, 왕의 가신과
제가의 가신 사이에는 지위상의 격차가 있었다고 합니다. 늦어도 3세기 중엽경의 일입니다.
매년 가져갔다는 조복과 의책을 고구려의 관제와 연결시켜보면, 고구려에서 공복제의 시
행은 생각보다 일찍 시행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 흔적의 하나로 지적될 수 있는 것이 바
로 조의라는 관직명입니다. 조의란 '검은 옷'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 말이 관직의 명칭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물론 이를 역설적으로 해석하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조의'가 검은
색 제복에서 나온 것이라면 다른 색깔의 제복도 상정할 수 있겠습니다. 제복이 모이면, 그것
이 공공 복장, 곧 '공복'입니다.
고구겨는 3세기 중엽에 이미 적어도 9개 이상의 관직을 설치할 정도였으므로 그에 따른
법체계도 상당히 복잡해졌을 것입니다. 그것은 고조선이 멸망하고 낙랑군이 설치된 뒤 얼마
안 가서 법 조항이 최소한 60여개로 늘어났다는 중국특의 기록을 통해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구려에서는 태학이 설치되고 역사서를 편찬하던 무렵에는 법전을
편찬했을지도 모릅니다.
소수림왕 3년에 율령을 반포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그러한 법전편찬을 전한 것으로 생
각됩니다. 다만 이때 고구려에서 반포한 율령은 비교적 단순한 법체계이거나 남의 것을 그
대로 모방한 것일 개연성이 높습니다. 만약 남의 것을 모방한 것이라면, 진 나라에 무제의
태시 3년(267)에 집대성된 태시율령이 모본으로 이용되었을 것입니다.
불교의 전래
곡려의 소수립왕대는 불교의 전래라는 측면에서도 주목할 만한 시기입니다. 서기 372년에
승려 순도를 통해 중국 화북 지방의 패자로 등장한 전진으로부터 불상과 경전을 받았고,
374년에는 승려아도가 들어왔으며, 375년에는 고구려에 초문사와 이불란사를 에숨으로써 순
도와 아도가 본격적으로 포교활동을 벌이도록 적극 후워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흔
히 고구려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시기를 소수림왕대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록상에 드러나는 것일 뿐, 실제로는 이보다 더 빨리 불교가 고구려에 소
개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합니다. 즉. 정치적 교섭에 구애받지 않은 민간에서의 포교는 생
각보다 더 이른 시기에 전해되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지요.
여하튼 고구려의 불교는 호국적 성격을 띤 것으로 알려집니다만, 그렇다고 불교 자체가
정치성이 강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고구려에서 비교적 일찍부터 삼론종의 기반
하에 공사상이 유행한 사실이라든지, 6세기 이후에는 천태종과 열반종이 활발하게 연구되는
등 교리 탐구가 넓고 깊게 이루어딘 사실을 통해 시사 받을 수 있습니다.
특히 5세기 말에 양나라에 유학해 삼론종의 대가로 활동한 승랑과 7세기 초에 일본으로
건너가 성덕태자의 스승이 된 혜관은 일본 삼론종의 시조라고 합니다. 이밖에 일본에서 활
동한 인물로는 혜자와 담징 등이 재표적입니다.
도교의 유행
고규려 후기에는 도교가 크게 성행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도교는 영유왕 7년에 당나라
의 고조가 도사와 천존상 그리고 도법을 보내온 것이 계기가 되어 고구려에 전래되었고, 이
후 연개소문이 도교 진흥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쳐 나중에는 절 일부를 도관으로 바꾸게 했을
뿐 아니라 유교학자보다 도사를 윗자리에 앉힐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는 물론 보장왕과 연
개소문 등의 개인적인 호감도 적지 않이 작용했겠지만, 유교와 불교 세력을 약화시킬 목적
도 있었던 듯한데, 그 결과 보덕과 같은 승려는 신라 등지로 망명하게 됩니다.
한편, 도교와는 별도로 신선사랑은 일찍부터 있었을 것으로 새각됩니다. 그것은 고분벽화
의 천인상...선인상 등 장생부로를 나타내는 그림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상 간략하게 고구려의 법제...학술 수준을 소개했는데, 그 사이 우리는 고구려가 단지 말
타고 활 쏘는 일에만 치중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면, 이러한 법제...학술 수준은 반드시 기술적인 부분을 동반한다는 사실이 지적될 수 있겠습
니다. 가령 불교가 전래되면 부처 신앙만 들어오는 것은 아닙니다. 불교의 교리를 따르기 위
해서는 부처의 사리가 내장된 탑을 세우고 불상을 만들면 절을 건축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어지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다라서 불교 전래를 통해 고구려는 건축...조각...금속공예 등
에 관련된 각종 기술도 함께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한 가지 더 지적할 것은 이러한 문화 수입이 외교활동과 긴말히 연계된다는 사실입
니다. 고구려가 중국으로부터 유...불...도교를 받아들이고 율령제도를 배우기까지는 수많은
사람들이 중국과 고구려 사이를 오가야 했을 것입니다.
문화 교류와 파생은 끊임없는 인적 교류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고
구려는 상당히 개방적인 사회였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 개방성은 광대한 영토를
유지...운영하는 데 매우 유효한 기반이 되었을 것입니다. 개방적인 사회는 보통 건강한 법입
니다.
백제의 국가 성장과 근초고왕
사회의 개방성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백제만큼 두드러진 국가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우
선 백제는 부여...고구려계, 한계,낙랑...대방군 및 중국계, 왜계 등 많은 종족들이 함께 꾸려
가는 국가였기레 종족의 다양성만큼이나 문화도 다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양성은 외부
에 대한 흡입력으로 작용할 때가 많은데, 그래서인지 백제는 한강유역에서 급속히 성장하게
됩니다. 그래서 4세기경에는 백제는 이미 북쪽으로 고구려의 고국원왕을전사시키는 승리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백제사에서 근초고왕대는 매우 중요한 시기입니다. 이 무렵에 백제는 정치...군사...문화적
으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으로는 관제를 정비하고 지방 세력을
적절히 통제하는 동시에 대중국 외교를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며, 군사적으로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연승함으로써 북방 영토를 크게 넓혀놓았을 뿐 아니라 남쪽으로도 주변의 소국들
을 병합하면서 충청도 일원을 영유했고, 문화적으로는 서기를 장성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
던 것입니다.
서기 313년경 고구려는 낙날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었으며, 이듬해에는 대방군마저 멸망
시킨 것으로 알려집니다. 그런데 낙랑...대방군의 멸망은 고구려와 백제의 영역이 맞닿는 결
고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고구려와 백제와 기나긴 혈투가 시작되었지요, 영역의 크기로만
본다면 고구려의 우세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근초고왕과 그의 아들 근구수왕이 재위하던 무
렵에 벌어진 전투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몇 번에 걸쳐 백제가 대승을 거두고, 그로 인해 고
구려의 남진은 한동안 꺽이게 되는 것입니다. 고구려 세력을 물리치고 황해도 일대를 확보
한 백제는 과거 낙랑...대방군을 통해 이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중국과의 교류를 더욱
깊게 해 372년에 동진으로부터 '진동장군 영낙랑태수'라는 작호를 받았는데, 이는 해당 지역
에 남아 있던 낙랑인들의 민심을 수습하고 그들에 대한 백제의 지배를 공고히 함으로써 고
구려 세력의 남하는 억지하기 위한 방책의 하나였을 것입니다.
백제의 역사서
낙랑...대방군 지역에 대한 백제의 유화책은 매우 성공적이었던 모양입니다. 백제인 중에는
낙랑...대방군계로서 중국과 교류하는 데 일익을 담당한 것으로 생각되는 사람들이 적지 않
기 때문입니다. 근초고왕대의 인물인 고흥도 그중 한 명이었을 것입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 근초고왕 30년(375) 조에는 '왕이 돌아가셨다'라는 기사에 이어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습
니다.
"고기에 이르기를 백제는 개국한 이래 문자로 사건을 적은 적이 없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박사 고흥을 얻음으로써 비로소 서기가 있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고흥은 다른 책에 나온
적이 없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
고흥에게 '박사'라는 칭호가 붙은 것으로 보아 그는 유교 경전에 대한 지식이 매우 탁월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이 백제에서 덩은 칭호라면 당시 백제에 태학이 설치되었
을 개연성이 높습니다. 또 태학이 설치되었을 정도라면, 고구려의 예로 보아 역사서 편찬이
이루어졌을 터이고, 따라서 '서기'를 역사서의 이름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러나 윗글의 내용이 다소 애매해 '서기'가 과연 책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즉, "백제는 개국한 이래로 문자로 사건을 적은 적이 없었는데"라는 표현은
근초고왕 때부터 기록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는 뜻으로 풀이될 여지도 있어서, '서기'를 단
순한 기록물 정도로 이해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서기를 단순한 기록물 정도로 보게 되면, 이번에는 또 다른 의문점을 낳습니다.
근초고왕 이전의 백제는 기록을 남길 정도가 못될 만큼 문화 수준이 낮았는가 하는 의문입
니다. 당시 백제가 남긴 문화유적과 유물을 감안하면, 그렇게 볼 수는 없겠지요. 따라서 '서
기'에 대해서는 다른 각도의 이해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서기'가 역사서는 아니지만 그
에 준하는 기록물이라든지, 역사서에 기재될 초안에 해당하는 기록이라는 식의 해석말입니
다. 여하튼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연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백제 사람들이 남김 대표적인 역사서로는 일본서기에 인용된 이른바 백제 3서를 들 수 있
습니다. 일본서기는 거시 720년에 일본 정부에서 편찬한 관찬사서입니다. 그런데 그 책에 백
제기, 백제신찬, 백제본기의 3책이 인용되어 있는 것입니다. 인용된 시기는 대체로 3세기 중
엽부터 6세기 중엽까지인데, 아무도 백제가 멸망한 후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이 가겨간 책
의 일부이거나 그 사람들이 정치적 목적에서 새로이 편찬한 책일 것입니다. 따라서 위의 3
서에는 백제사를 연구하는 데 매우 귀중한 사료도 많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적
목적이 강하게 개재됨으로써 사료의 공정성과 정확성을 의심케 하는 부분도 적지 않습니다.
역사서가 기본적으로 정치적 사건을 피해가서는 곤란합니다. 그렇다고 정치적 의도를 띠어
서는 더욱 곤란합니다. 역사서와 역사가는 정치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되 가장 먼 곳을 지
향해야 하는 것입니다.
백제의 해외 진출
근초고왕대에 백제는 북쪽으로 고구려를 연파하고, 남쪽으로 마한의 여러 세력을 병합했
으며, 가야 지역과 군사...문화적으로 교류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또한 동진과 같은 중국세력
과 연계를 가졌으며, 일본과도 교류했습니다. 이 모두를 종합하면, 백제사에서 근초 고왕대
는 그야말로 가장 탄력 넘치는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인지 백제가 이 무렵에 중국의 요서...산동 지역에 정치...군사적으로 진출했고, 일본
열도에도 세력을 뻗친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송서, 양서, 남제서, 통전 증에는
백제가 요서 지방을 경략했다는 기록(송서 이만전 : 백제국은 고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천
여리 바깥에 있었다. 그후 고려가 요동을 공략하여 차지하자, 백제는 요서를 차지했다, 백제
가 다스리는 곳을 진평군 진평현이라 한다. 양서 제이전 : 그 나라(백제)는 본래 구려와 함
께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 진나라 때 구려가 이미 요동을 공략하자 백제도 역시 요서...진평
2군의 땅을 점거하고 스스로 백제군을 설치했다.), 그리고 동성왕대에 백제신하들 중 상당수
가 남제로부터 광릉...청하...성양의 지명이 붙은 태수호를 받았으며, 위덕왕은 동청주 자사를
받았다응 기록이 있는데, 이들 지명을 산동 지역과 발해 연안에 위치한 도시의 이름으로 본
다면, 백제가 이들 지역에 진출한 증거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보기에는 반대 증거가 매우 뚜렷합니다. 우선, 광릉...청하등의 지명이 그것
을 준 남제왕조와는 전혀 상관없는 국토 바깥의 지명이어서 실질적이지 못했다는 지적이 있
습니다. 도한 후대에 작성된 위의 역사서들과는 달리 백제 당시에 중국의 양나라에서 만들
어진 양직공도에는 조금 다른 기사가 실려 있어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즉, 위의 송서
의 내용 중 "백제는 요서를 차지했다"라고 한 대목이 양직공도에는 "낙랑은 또한 요서 진평
현을 차지했다."(직공도 백제국사 : 백제는 옛날 동이족의 마한에 속하던 나라이다. 진나라
말기에 구려가 요동을 경략하자, 낙락은 또한 요서 진평현을 차지했다.)로 기재된 것입니다.
낙랑이 요서를 차지했다? 그렇습니다. 대동강 유역에 있던 낙랑군이 고구려의 공격을 받
고 멸망할 무렵(313년경)낙랑군민 중 1천여 가구가 요서 지역으로 이주한 적이 있는데, 그
사실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진도 모릅니다 모용씨 세력의 통제 아래 요서 지역(요녕성 조양
시 부근)에 새로이 설치된 낙랑군은 이후 5세기 전반기에 하북성 일대로 자리를 옯겼으며,
그곳에서 6세기 중엽까지 존손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그렇다고 송서와 양서의 기록 가운데 '백제의 요서 경략'이 모두 '낙랑의 요서결략'을 잘못
기재한 것이라고 단언해서는 곤란합니다. 양나라 직공도의 백제국사 조에서 왜 낙랑의 요서
지역 진출을 언급했는지가 더욱 큰 의문거리이기 때문입니다. 왜 직공도는 백제와 아무 상
관도 없는 낙랑의 요서 진출을 백제국을 소개하는 자리에 끼어 넣었을까?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서기 314년경에 고구려가 낙랑을 멸망시키고 이듬해에 대방군마저
멸망시키자, 고구려와 백제는 이제 영토를 맞대면서 군사적 치열히 경쟁하게 되엇슷ㅂ니다.
그리고 그 결과 4세기 후반에는 백제가 대동강 유역까지 영토를 넓힐 수 잇었습니다. 바야
흐로 옛 대방군의 영토 전부와 낙랑군의 영토 상당 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영통반이
아닙니다. 그곳에 살고 잇던 낙랑...대방군의 유민들까지 통제하에 두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백제에 흡수된 낙랑유민 둥에는 요서 지역으로 이주한 낙랑세력과 연계해 활동하던 사람들
도 있었을 것입니다. 해양을 통해 요서 지역의 낙랑과 연계한 채 무역활동을 벌이고 대 고
구려 견제정책을 벌인 백제! 백제의 그 같은 활동을 지칭한 것이 바로 이른바 요서경략설의
진원이 아닐까요?
여하튼, 백제는 지금의 황해도 일대를 놓고 고구려와 정면으로 맞서는 가운데 그들의 군
사적 역량을 충분히 과시할 수 있었는데, 지리적 특성과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 수륙 양면의
활동이었을 것입니다. 특히 고구려와 적대적이었던 탓에 중국과의 교류에는 반드시 해웅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으며, 일본과의 교류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따라서 백제는 일찍부터
해상활동이 활발했고, 그에 따라 항해와 관련된 기술이 매우 발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점에 착안해서인지 어던 사람들은 백제의 지방 행정단위인 담로가 중국의 해안 일대는
물론 일본과 동남아 지역에도 설치되었으며, 이를 통해 백제는 해상왕국을 건설했다고 주상
하기도 합니다. 백제인의 후예임이 분명한 우리 한민족으로서는 듣기에 매우 흐뭇한 추론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듣기 좋다고 해서 쉽게 말하고, 듣기 나쁘다고 해서 감추
는 학문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역사학은 이미 학문의 범주를 벗어나 3류 소설로 전락하
게 되는 것입니다. 다라서 그런 추론에 합당한 근거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하는데, 현재로서는
불가능합니다.
간혹 중국 남부지역에서 발견된 백제현을 해외 담로의 증거로 제시하기도 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더 세심한 연구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백제가 멸망한 후 의자왕을 비롯
해 적어도 1만 2천 8백명 이상의 백제 사람들이 당나라로 끌려가 당나라의 변방지역 등에
집단적으로 배치되었는데, 이들 백제 유민의 집단 거주기 가운데 하나가 바로 앞서의 백제
현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백제가 해외에 식민지를 개척했는지의 여부는 아직 불분명하지만, 백제의 군사력이 그런
활동을 충분히 사능케 할 정도엿음을 비교적 분명합니다. 그래서 중국의 남조 국가들은 대
대로 백제와의 교류에 열중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백제가 단지 해상활동에서만 두각을 보인 것은 아닙니다. 흔히 고구려의 상징처럼
인식되는 말타기와 활쏘기가 백제에서도 매우 중시되었다는 주서의 기록은 백제군이 어떤
방식으로 고구려와 대적했는지를 충분히 짐작하게 해줍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우리는
'백제인의 기상에서도 역시 고구려에 못지 않은 거친 숨결과 개척정신을 느낄 수 있겠습니
다.
3) 무한경쟁의 시대 - 삼국시대가 남긴 것
경쟁이 국력 배양과 외부 진출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중국의 춘추시대와 삼국시대를 통해
분명히 입증됩니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선 고구려...백제....신라...가야 등이
경쟁하는 사이에 우리 민족의 활동 범위는 매우 넓어졌으며, 기술 수준도 급속히 향상될 수
있었습니다. 불과 금속을 다루는 기술, 돌과 나무를 다루는 기술 등이 발달했고, 활동 영역
만큼이나 지식의 폭과 깊이도 더욱 화대되었습니다.
매우 단순하고 주고나적인 편가일 수 있지만, 후대의 역사와 비교할 때, 삼국시대의 역사
가 상대적으로 더 활기차고 역동적이라는 인상을 주는 이유도 아마 치열한 경쟁에 있을 것
입니다 부국강병이 최고의 미덕이던 시대. 조금만 주의를 게을리 해도 국운 절멸의 위기를
맞게 되며,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는 부단히 자기 발전을 이룩하고 단결해야 하는 무한경쟁
의 시대. 허례보다는 실질을 숭상하고, 명분마저도 실질에 맞추었던 시대, 삼국시대의 분위
기는 꼭 그러했습니다.
삼국시대는 우리에게 경쟁의 미덕이랄까 장점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리고 경쟁에서 최종
승자로 살아 남을 수 있는 방법을 시사해주었습니다. 비록 상황은 많이 달라졌지만, 삼국시
대가 주는 교훈은 지금 후한경쟁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좋은 약이 될 수 있습
니다. 그리고 그 시대가 남긴 각종 유적과 유물은 우리 역사와 문화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
고 있습니다.
삼국시대의 문화와 기술 수준을 알려주는 유적...유물로는 흔히 고분...성곽...주거지...사지...
불상...토기...장신구 등이 거론됩니다. 특히 고분은 피장자의 신분과 활동시기가 비교적 분명
하게 드러나는 유적일 뿐 아니라, 축조방식과 부장품 등을 통해 해당 시기의 시대상을 암시
합니다. 또한, 성곽은 일종의 군사시설이므로 당시의 전투방식과 영역 그리고 건축술 등을
시사해 줍니다. 탑과 불상은 당시의 신앙체계를 알져주는 자료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미의식
을 드러내는 미술품이기도 합니다. 이제, 삼국시대의 문화유산을 간략히 살펴보겠습니다.
(1) 고구려
제 3장 3저에서 이미 소개한 바와 같이 고구려는 요녕성 환인 지방에서 건국한 뒤 곧 압
록강변의 집안 지역으로 천도했으며, 이후 다시 대동강변의 평양으로 도읍을 옯겼습니다. 따
라서 고구려 지배층의 무엄으로 보이는 고분들이 위의 세 지역에 각기 무리를 이루며 남아
있습니다. 먼저, 환인 지방에서는 적석총 700여 기와 봉토석실분 30여 기가 조사되었고, 집
안 지역에서는 5,000기에 달하는 적석총과 8,000기에 가까운 봉토석실분이 고구려 무덤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또 평양에서는 봉토석실분이 1,000여 기에 이르는 대신 적석총은 희귀한 편
입니다.
돌을 쌓아 만든 무덤 - 적석총
적석총이란 말 그대로 돌을 쌓아 만든 무덤입니다. 우선 바닥에 돌을 몇 겹 깐 다음 구획
된 장소에 시체를 놓고 다시 돌을 쌓아 완성하는 형식의 무덤인데, 강이나 하천에서 사람
머리 혹은 소머리 크기의 돌을 구해 쓰는게 보통이지만. 대형 석재를 가공해 사용하는 경우
도 있습니다. 무덤의 양식은 시기별로 조금씩 변해 일정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대부분 기
단이 없거나 있더라도 1단에 그쳤지만, 나중에는 평면 사각형의 기단을 3층이상 계단식으로
올림으로써 마치 피라미드의 한 부분을 연상시킵니다.
적석총의 대표적인 예로는 집안 지역에 남아 있는 태왕릉과 장군총을 들 수 있습니다. 특
히 태왕릉은 밑변의 길이가 60m를 넘는 대형의 계단식 적석총으로서 맨위의 7층에 묘실을
만들어서 시체를 안치했는데, 무덤의 돌무더기에서 "태왕릉이 안정되고 단단하기가 산 같기
를 바랍니다."라는 명문이 새겨진 벽돌이 발견되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명문의 이
른바 '태왕'은 **대왕의 약칭일 수 있지만, 광개토왕의 시호인 호태왕의 약칭일 개연성이 무
엇보다 높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태왕릉은 광개토왕릉비와 불과 500m 정도밖에 떨어져 있
지 않으므로, 이를 광개토왕릉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습니다.
한편, 태왕릉이 조사되기 전까지 광개토왕과 관련된 무덤으로 알려져 온 장군총은 밑변의
길이가 30m이며 높이는 14mdlsep, 전체 7단 중 제 5단째에 횡혈식 석실을 만들었습니다.
횡혈식 석실이란 돌로 무덤 안을 마치 방처럼 만들고 거기에 바같으로 통하는 길 혹은 복고
를 낸 무덤 형태로서, 시체를 방에 옆으로 놓는다 하여 횡혈식이라 부릅니다. 그렇지 않고
시체 혹은 관을 위에서 아래로 안치하는 방식은 수혈식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요즘의 무
덤은 모두 수혈식이라 할 수 있겠지요?
흙으로 덮은 돌방무덤 - 봉토석실분
봉토석실분은 돌로 만든 방을 흙으로 덮은 무덤입니다. 고구려의 봉토석실분은 대체로 따
을 파지 않고 지표 위에 석실을 마련한 다음 읅을 씌우는 방식을 택했는데, 위에서 내려다
본 무덤의 외형이 둥근 이른바 원령분도 있지만, 그보다는 네보진 방대형이 더 많습니다. 대
부분의 봉토석ㄱ실분은 5세기 이후에 축조되었으나, 압록강 유역의 심귀리 89호분이나 대동
강 유역의 안악 3호분처럼 3세기대에 해당하는 고분들도 있습니다.
봉토석실분의 내부 형태를 관찰해보면, 초기에 만들어진 것은 시체를 안치한 현실 이외에
도 전실이라는 도 하나의 방을 만들어 놓아 대체로 복도...전실...현실의 구조를 보이며, 후기
에 축조된 고분은 비교적 단촐해 복도와 현실만으로 구성된 것이 많습니다. 즉, 이른바 다실
묘에서 단실묘로 바뀌는 것입니다. 바뀌는 시기는 일정치 않으나 대체로 6세기경이 기준이
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고구려의 봉토석실분은 귀죽임천정이라 하여 천장의 높이를 한
층 높이면서 천장 구조를 튼튼하게 하는 방법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기도 합니다. 여하튼 고
구려 지배층의 무덤은 초기의 적석총에서 후기의 봉토석실분으로 무덤 양식이 바귄다고 생
각하면 큰 잘못이 없을 것입니다.
고분벽화
봉토석실분 중에는 석실 내부에 벽화를 그린 이른바 벽화고분이 꽤 발견됩니다. 앞에서
거론한 안악 3호분은 그중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벽화 고분으로 손꼽히는데, 연도(연
실)..전실...측실...현실...회랑 등으로 구성된 매우 호화로운 무덤입니다. 그래서 이 고분은 마
치 대문과 행랑채(연실), 사랑채(전실), 안채와 부속건물(측실), 사당(현실) 등으로 구성된 살
림집을 옮겨다 놓은 듯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실제로 전실 벽에는 노래하고 춤추는 그림,
서쪽 측실에는 주인 부부의 초상화와 시종들 동쪽 측실에는 부엌과 마구간 등이 그려져 있
으며, 현실과 회랑에는 250여 명의 대행렬도가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서쪽 측실 입구의 왼편 그려진 인물상 머리 위에 67자에 달하는 묵서가 잇으며,
그 내용이 전연의 장수였다가 고구려에 망명한 뒤 대동강 유역에 거주했던 동수가 서기 357
년에 죽자 만들어 준 무덤이라는 견해와 고분의 규모라든가 묵서명의 위치 및 행렬도의
soeye 등에 주목하여 안악 3호분은 미천왕이나 고국원왕의 무덤일 것이라는 주장이 대립하
고 있는 것입니다. 양쪽 모두 나름대로의 합리적 근거를 갖추고 있어 쉽게 단언하기는 어려
우며, 앞으로의 연구가 기대됩니다.
고구려 벽화고분의 내용은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벽화가 이제막 그려지기 시작한
시기, 곧 4~5세기에는 피장자의 생전 모습을 그린 생활풍속화가 많으며, 후기로 갈수록 사신
도처럼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그림들이 많이 그려졌습니다.
고구려 사람들의 벽화를 자세히 관찰해보면, 몇가지 특징적인 표현법을 찾아낼 수 있습니
다. 먼저, 장소에 따라 그림의 내용을 맞추는 방법입니다. 벽면에는 현세적인 그림을 그리고,
천장에는 해...달...별이라든지 내세적인 상상도를 그리는 방법을 사용하거나, 연도와 같은 입
구에는 현세적인 그림, 관이 안치될 현실에는 내세적인 상상도를 그리는 방법응ㄹ 사용한
것이 이에 해당합니다.
다음은 사람의 지위를 나타내는 방법으로서, 지위가 높은 사람은 크게 그리고, 지위가 낮
은 사람은 작게 그리는 방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근법에 의한 거리감이라든지 입체감은
전혀 찾을 수 없습니다. 대신, 채색을 통해 입체감을 표현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며, 그림에
힘과 생동감이 넘치는 것이 고구려 벽화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힘과 생동감이라고 하면, 집안지역에 남아 있는 사신총이 대표적입니다. 4신은 청룡...백
호...주작...현무를 가리키는데, 이들을 각각 동...서...남...북의 벽에 하나씩 그려놓은 것입니다.
사방을 지켜 가운데에 있는 피장자를 보호하라는 뜻이지요. 사신도에서 드러나듯이 파랑...하
양...빨강...검정색은 각각 방위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중앙은 노랑색이었습니다. 이
러한 관념은 고구려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중국르로부터 들어온 것입니다.
고구려의 건국지 - 오녀산성
고구려가 건국한 곳은 기록에 따라 달리 전해집니다. 삼국사기에는 비류수가 궁실을 지었
다는 대목이 있는가 하면, 광대토왕릉비문에는 홀본서성에서 건국했다는 기록이 있고, 중국
특의 위서에는 홀승골성이 건국지로 전하는 것입니다. 그중 홀본서성과 홀승골성은 같은 곳
을 달리 표현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대부분의 학자들은 환인 지방의 오녀산성이 그에 해당
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해발 820m인 오녀산은 혼강의 서쪽 인근에 있는데, 정상부를 둘러싼 돌담이 곧 오녀산성
입니다. 돌의 크기와 모양은 각기 다르지만, 대체로 가로 길이가 40~50cm 내외인 장방형 석
재를 많이 이용했으며, 아랫부분 곧 기단부에는 길이가 2m에 가까운 석재를 사용한 곳도
있습니다. 돌사이의 틈새에는 작은 쐐기돌을 박아 놓어 압력으로 성돌이 어그러지는 것을
방지했습니다. 성벽의 높이는 바깥에서 볼 때 4~6, 안쪽엣는 1~2m정도이며, 서쪽의 절별 부
분은 아무런 시설 없이 자연 그대로 놔두었습니다. 오녀산성의 전체평면은 장방형에 가까워
서 동서 길이가 대략 300m, 남북길이는 1,000m정도입니다. 성문은 남쪽에 하나만 있다고 합
니다. 성안은 넓고 평탄하며 중앙부에 샘이 있는데, 사람들은 보통 소천지라고 부릅니다.
국내성과 위나암성
고구려가 오녀산성을 중심으로 활동한 기간은 매우 짧습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
는 유리명왕 22년(3)에 국내성으로 천도하고, 또 위나암성을 쌓았다고 하는데, 국내성은 지
금의 길림성 집안현성이고, 위나암성은 국내성 북쪽 2.5km지점에 위치한 산성자산성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압록강변의 통구 분지에 쌓은 국내성은 안팎을 모두 장형 돌로 쌓은 도시형 석성입니다.
여러 번 고쳐 쌓았기 때문에 원형을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최근의 조사결과 동서 길이 약
700여m, 한북길이 약600m 내외인 방형의 평지성으로 밝혀졌습니다. 성벽은 잘 가공한 방형
및 장방형 석재를 교차하며 편평하게 쌓아 대략 6m 높이까지 올렸는데, 기저부에서는
10~15cm 씩 뒤로 무러나며 쌓는 방식을 사용해 4~11층의 기단을 형성했고, 그 위로는 대체
로 곧게 쌓았습니다. 기단의 폭은 10m 내외라고 합니다. 성벽을 따라가다 보면 바깥으로 돌
출된 부분을 만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치 혹은 치성입니다. 주로 성벽에 달라 붙은 적을
공격하는 데 이용되는 곳이지요, 국내성에서는 도합 14개의 치성이 확인되었습니다.
성문은 남...북벽에 각각 1개씩, 동...서벽에 각각 2개씩, 도합 6개가 있었다고 한. 동쪽과
서쪽에 주 통행로가 있었음과 알 수 있습니다. 성안에서는 성문 사이를 잇는 큰 도로의 흔
적이 발견되었고, 중부와 북부에서는 건물지가 다수 발견되었습니다. 건불지는 규모로 보아
일반 민가라기보다 궁전이나 공공건물 그리고 지배층의 주거공간이었을 개연성이 높습닏.
성벽 바깥으로는 폭이 10m에 달하는 호 혹은 해자가 있었습니다. 깊이는 잘 알 수 없지만,
큰 골에 물을 채워놓음으로써 적인 달려들지 못하게 하는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국내성은 원래 돌로 만든 성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석성 아래에서 발견된 토성
흔적이 그 증거인데, 그곳에서는 중국의 전국시대에 해당하는 배수구 유적과 유물들이 다수
발견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한사군의 하나인 현도군에 고구려현이 소속되어 있었다는 사
실이 기억나는군요. 다시 말하면, 고구려현(토성) 자리에 고구려국(석성)이 들어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삼국사기에는 산상왕 13년(209)에 환동성으로 천도했다는 기사가 있습니다. 여기의 환도성
은 아마도 앞에서 소개한 위나암성 곧 지금의 산성자산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
데, 원래 산성자산성은 평지성인 국내성과 세트를 이루어 유사시를 대비한 성으로 알려집니
다. 동...서...북쪽의 산능선과 남쪽의 계곡에 대개 4m 높이로 돌을 쌓아 만든 산성으로서, 저
체 길이는 7km에 달하며, 성 안쪽의 가장 넓은 부분의 직경은 2km에 가깝다고 합니다. 성
안네는 궁전...창고...장대...연못 등의 흔적이 있으며, 5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봉토석실분도 5
기나 남아 있습니다. 환도성은 동천왕 21년(247)에 관구검이 이끄는 위나라 군대의 침입으로
환란을 당한 적이 있으며, 고국원왕 12년(342)에는 전연의 공격을 받아 궁전이 불타고 성이
허물어지는 치역을 당하기도 한 곳입니다.
평양성
환도성이 함락되고 폐허로 변하자 고국원왕은 343년에 평양 동황성으로 잠시 거처를 옮겼
는데, 이곳이 지금의 어지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고구려가 지금의 평양 지역으로 도읍을
완전히 옮긴 것은 장수왕 15년(427)의 일입니다. 당시의 수도 평양성은 지금의 평양시 동북
쪽 7km 지점에 위치한 대성산성과 극 기슭의 안학궁성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입지..규모...축조방식 등이 산성자산성과 비슷한 대성산성은 대동강 북쪽의 산 능선을 동...
서...북벽의 기반을 이용한 전체 길이 7kmwjd도의 석성입니다. 대성산서으이 출입구는 가장
낮은 지대인 서남쪽의 계곡에 위치한 남문관 북족 국사봉에 위치한 북문 등 2곳뿐이어서,
군사적 목적의 성곽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대성산성을 발굴 조사한 북란 락자들
의 보고에 따르면, 축조 연대는 4세기 말이나 5세기 초라고 합니다.
대성산의 남쪽 기슭에 안학궁성 유적이 있습니다. 궁성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규모
가 매우 작아서 전체 길이가 610m에 불과한 방형의 석성입니다. 성벽을 쌓는 방법은 대체
로 국내성지와 같지만, 안팎의 표면은 돌로 쌓되 그 사이의 공간에 홁을 다져 넣었다는 점
에서 약간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성벽의 높이는 4m 정도입니다. 성문은 동...서...북족에 각각
1개씩 그리고 남쪽에 3개를 설치해 도합 6개를 배치했으니, 규모에 비한다면 많은 것이라
할 수 있지요. 궁성 안에는 대규모의 궁전과 회랑, 연못 그리고 호화롭게 구며진 정원 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장안성
평원완 28년(589)에 고구려는 다시 장안서으로 도읍을 옯겼으니, 지금의 평양성이 바로 그
곳입니다. 대동강 북쪽 연안에 디대어 쌓은 석성으로서, 내성...중성...외성으로 구성되었으며,
전체 길이는 무려 23km에 달한다로 하니 고구려 최대의 도성임이 분명합니다. 북족의 산지
에 위치한 내성은 구성이었을 것이고, 그 남쪽의 중성은 관아 건물 지역으로 장안성의 중앙
부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남쪽에 위치한 외성에는 일반 민가가 들어섰을 텐데, 돌로와 배수
로 등이 비교적 정연한 점에서 볼 때 도시계획에 의거했던 듯합니다. 한편, 내성과 연접해
북쪽의 험한 산지에는 북성이라는 작은 산성이 덧붙여져 있는데, 조선왕조 숙종 때 쌓은 성
이라는 지적이 있습니다.
평지성과 산성의 결합체인 장안성은 국내성과 산성자산성에서 보여준 고구려 사람들의 석
축 기술을 더욱 발전시켜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한 성곽으로도 유명한데, 핵심은 아무래도
자연지형을 적절히 이용할 줄 하는 감각에 있는 듯합니다. 천연암반을 성벽의 일부로 이용
한 것이란든지 강변지역에서는 지반을 다진 다음 축성한 것 등이 바로 그러한 사례의 하나
가 될 수 있겠지됴. 장안성은 아마도 내성...중성...외성 순으로 오랜 기산 축성되었을 것입니
다. 장안성은 아마도 내성...중성...외성 순으로 오랜 기간 축성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양원
왕 8년(522)에 이미 장안성을 쌓기 시작한 사실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데, 장
안서의 규모로 보아 축조기간 30년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유적을 보는 우리의 눈
오늘날 우리는 이들 유적을 매우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으로 손꼽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
게 훌륭한 유산을 물려준 고구려 사람들의 지혜와 솜씨 그리고 감각에 칭찬을 아찌기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유적의 이면에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거친 숨과 땀만 흘려야
했던 일반 백성과 노예들의 고통이 배여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
들 중 일부는 아마도 돌을 자르고 나르는 사이에 각종 사고로 피를 흘려야 했으며, 심지어
목숨마저 잃었을 것입니다. 그 대사를 누린 것은 오히려 그들이 피땀을 흘리고 있을 때 호
의호식하던 지배층이었을 것입니다. 모순임에 틀림없지만, 이러한 모순이 당시의 고구려 사
람들에게는 도리어 순리로 받아들여졌을지 모릅니다. 약육강식의 논리가 인간의 사고를 비
배하고, 그것이 신분제로 포장되었던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대결과 비교의 구도에서 벗어나 전체 혹은 개인의 입장으로 돌아오게 되면
노역에 대한 우리의 시각은 다소 달라지게 됩니다. 즉, 성곽처럼 공공 목적을 지닌 시설에
쏟은 자신의 피와 땀이 다름아닌 이웃과 자손의 안녕을 위한 기반으로 쓰인다는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피와 땀의 양을 따져 그만큼의 이익과 안정을 보장해주진 않을지라도, 결국
'나'를 포함한 '우리'를 구하는 데 쓰인다는 점에서 그 가치에 대해 인색하게 평가해서는 곤
란하겠지요.
노동은 그것이 어디에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얼마든지 달라집니다. 고분 건
축에 쓰인 힘은 소수의 개인을 위한 사치의 성격이 짙은 반면, 성곽은 나와 우리를 위한 공
익시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고분은 그 웅장하던 모습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한낱 폐허로
변하거나 심지어는 도굴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성곽은 끊임없이 보수되며 많은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아이러니컬하게도 오늘날 고분은 고고학의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고분 조사를 통해 그것을 만든 사람들의 건축술과 공예기술을 알아내고, 그들의 사상과 미
의식을 유추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구려의 고분벽화는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미술 이상의
그 무엇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술은 여유와 사치 속에서 꽃핀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게 해줍니다.
(2) 백제
백제의 초기 수도가 한강 유역에 있었음은 비교적 분명합니다. 그것은 오늘날 서울시 송
파구에 남아 있는 풍납리 토성과 몽촌 토성을 그리고 석촌종...가락동...방이동에 분포한 고분
을 통해 충분히 입증됩니다. 백제가 지금의 천안 직산 지역에서 건국했다는 주장이 있기도
하지만, 설득력이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교통이 불편하던 고대에 수도는 지위가 높은 사람들의 거주지였습니다. 그렇기에 당시의
수도는 정치의 중심지인 동시에 경제...문화...예술 등 모든 분야의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수도에는 지배층이 생전에 거주했던 도시와 성곽이 있는가하면, 죽어서 묻힌 호사스
헌 무덤이 있는데 당연합니다. 그리고 성곽에는 한 사람만 살았던 것이 아니므로, 무덤도 무
리를 이루는 게 당연합니다. 그런데 천안 지역에서는 백제와 관련해 그런 흔적을 아직 찾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회...집단과 관련된 유적이 다수 발견될 뿐입니다.
흙의 문화 - 풍납리 토성과 몽촌토성
앞에서 살표본 고구려의 성과은 초기부터 돌을 상하 만든 석성이었습니다. 그런데, 백제의
성곽은 흙을 쌓아 만든 토성이라는 특징을 지닙니다. 물론 5세기경에 이르면 백제에서도 석
성을 쌓기 시작하지만, 그 이전에 축조된 성곽은 거의 대부분 토성이었습니다. 토성을 만드
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그 다양한 방법을 단순화시켜 두 가지로 나누면 흙을 쌓아 만드는
방법은 보통 평지에서 많이 이용되었는데, 판축이라 하여 흙을 10~50cm 의 일정한 두께로
깐 다음 발과 각종 도구를 이용해 다짐으로써 단단하게 만드는 방법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흙을 깎아 만드는 방법은 산성을 만들 때 많이 이용되었는데, 사느이 경산면 중 일정부분을
돌아가면서 'ㄴ'자 모양으로 깎아낸 다음 그 흙을 위로 퍼올려 절벽의 높이를 더하는 방법
이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이렇게 만든 토성은 석성에 비해 성벽이 가파르지 못해 방위상 다
소 불안할뿐더러 튼튼하지도 못해 자주 보수해야 하는 약점이 있지만, 적은 인력을 단시간
에 완성할 수 있으며, 석공처럼 전문적인 기술자를 많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경제
성이 매우 뛰어난 건축물입니다.
토성은 중국에서 흔히 사용된 방위용 건축물입니다. 따라서 백제의 토성은 아마도 중국
토성의 영향을 받았을 개연성이 높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풍납리 토성입니다. 풍납리
토성은 서울시 송파구 풍납동에 위히한 토성으로 워래는 전체 둘레 3.5km의 방형내지 타원
형 평지성이었으나 홍수와 도로...주택 건축 공사로 인해 대부분이 파괴되어 wlma의 동벽과
북벽의 극히 일부분만 남아 있습니다. 성벽 가운데 가장 높은 곳은 약 26m에 달하며, 성벽
기저부의 폭은 약 30m 정도로서 백제 최대의 토성이라 하겠는데, 내부에서는 과거 일제시
기에 청동제 초두와 금반지 유리구슬 등이 우연히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초두는 마치 국자
처럼 생긴 냄비에 세 개의 발이 달린 그릇으로, 음식을 조리하거나 술...약 등을 데우는 데
사용한 듯합니다.
풍납리 토성이 언제 축조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학자들은 이구
동성으로 백제 초기의 성곽임에 틀림없다고 말합니다. 성의 규모라든가 축조시기 그리고 내
부에서 발견된 유물 등에 근거해 이곳을 백제 초기의 도읍지인 하남위례성으로 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이곳이 백제가 서기 475년 공주 지방으로 천도하기 전에 도성으로 이용
했던 중국식으로 고친 이름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풍납리 토성지의 동남쪽 인근, 곧 지금의 올림픽공원 내에는 몽촌 토성이 있습니다. 지금
은 도시개발로 인해 주변 환경과 지세가 많이 달라졌지만, 원래 몽촌토성이 있는 곳은 남한
산과 연결된 저산성구릉이 형성되었던 곳입니다. 따라서 몽촌 토성은 원래 산성에 가까운
형태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자연구릉의 능선을 성벽의 일부로 이용했기 때문에 평면 형태는
무어라 형용하기 어렵지만, 울퉁불퉁한 마름모에 가깝다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성벽의 길
이는 2,285m 이며, 내부 면적은 67,000평이라고 합니다.
몇 차례의 발굴을 통해 몽촌 토성 안에서는 각종 건물지와 연못, 망대 등의 유정이 확인
되었고, 토기를 비롯해 다양한 종류의 유물이 수습되었으나, 토성이 처음 축조된 시기라든지
성격을 분명하게 알려줄 만한 유물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라고 지금가
지의 조사를 통해 몽촌 토성이 4~5세기에 주로 사용되었으며, 백제의 전기 도성과 매우 밀
접히 관련된다는 사실 정도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상당수의 학자들이 이곳을 백제의 왕성
이었던 곳으로 보고 있습니다.
흙무덤과 돌무덤 - 토촉묘 적석총
몽촌 토성의 남쪽 방이동...가락동...석촌동에는 백제의 초기 고분들이 분포하고 있습니다.
고분의 성격은 크게 2가지로 구분되는데, 하는는 흙을 쌓아 만든 무덤이고, 다른 하나는 돌
을 쌓아 만든 무덤입니다. 물론 토광묘처럼 흙을 파서 만든 무덤도 있고, 또 돌로 곽을 만든
무덤도 있지만, 이들은 모두 백제의 특징적인 무덤이라기보다 우리 고대사회의 보편저인 무
덤양식에 속합니다.
토축묘는 백제의 세력 범위가 아직 한강 유역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시기의 무덤으로서,
먼저 지표에 흙을 쌓아 봉토를 만든 뒤 그곳의 일부를 파서 시체를 안치하는 방법이 사용되
었습니다.
적석총 외에 석적토축묘라고 하여, 외부는 적석총이지만 시체가 잇는 내부는 토축묘인 일
종의 변형이 있고, 또 흙무덤의 봉분 표면에 돌을 2~3겹 얹은 즙석봉토분이 있어 다양한 편
입니다. 백제의 중심지역에서 순수 적석총이 처음 조영된 시점은 아직 분명하게 정리하기
어려우나 대체로 4세기경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백제의 초기 문화는 고루려와 여러 모로 흡사한 점이 많습니다. 그중 한 가지는 무덤을
하천근처에 만들기를 좋아했다는 점인데, 이는 당시의 신라...가양와 비교할 때 더욱 두드러
지는 특징입니다.
신라의 초창기 무덤은 평지에 있긴 하지만, 하천 근처라는 공통점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또 가야 제국은 일찍부터 산기슭이나 능선 근처에 무덤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고구
려와 백제는 하천변 혹은 하천과 가까운 구릉에 많은 무덤을 만들었으니, 그 문화의 기반이
랄까 정서가 서로 통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무령왕릉과 중국 남조문화
그러나 5세기 후반이 되면 백제인의 묘지 선정 사상에 약간의 변화가 오는 듯합니다. 특
히 서기 475년에 웅진 곧 지금의 공주 지역으로 천도하면서부터는 지배층의 무덤이 모두 산
의 능선이나 그 주변에 조영되어 후대의 묘지선정 관념과 매우 유사한 면을 보여주고 있습
니다. 그런데 이처럼 산맥을 중시하는 관념은 중국에서 전래된 풍수지리 사상에 기초한 것
입니다. 웅진시대에 백제가 중국으로부터 받은 문화적 영향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주는 사례
로는 무령왕릉이 대표적입니다.
1971년에 발굴 조사된 무령왕릉은 화려한 문양의 각종 벽돌로 만든 전실묘입니다. 방처럼
꾸민 내부는 아치 형 천장에 동...서...북벽에는 등잔을 놓는 감실과 가짜 창문이 있고 남...북
벽에는 벽화를 그린 흔적도 남아 있어, 호사스럽고 아름답습니다. 무덤 안에서는 '영동대장
군 백제 사마왕'으로 시작되는 지석 1매와 '백제국 왕태비'에 대한 지석 1매 그리고 돌짐승...
청동거울...머리베게...다리베게...도자기류를 비롯한 각종 유물이 발견되었습니다. 화려하게 치
장한 왕과 왕비는 일본 남부지방산 금송으로 만든 관 속에 누웠던 흔적만 남겼는데, 왕이
오른편 왕비가 왼편에 누웠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백제에서 벽돌로 만든 무덤은 무령왕릉 외에도 이웃한 송산리 6호분을 비롯해 공주 지역
에 몇 기가 더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전축분은 대부분 중국 남조의 영향 혹은 기술지원 아
래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것은 당시 양자강 유역에서 조영된 무덤들과 무령
왕릉의 입지...구조...재료...축조방식 등이 매우 유사할 뿐 아니라 부장품에서도 중국 남조의
영향이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백제는 동진...송...남제...양으로 이어지는 남조 국가들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했고, 그 결과 무령왕은 양나라로부터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라는
작호를 받았던 만큼 중국식 백제 무덤의 출현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남자
가 오른편, 여자가 왼편으로 자리가 고정되는 것도 중국 가부장제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됩
니다.
절터 - 사비시대의 유산
충청남도 공주시에는 공산성과 송산리 고분군이 있습니다. 공산성은 왕성이었을 개연성이
높은 곳이며, 송산리 고분군은 무령왕이 포함됨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핵심 지배층의 공
동묘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성격의 유적이 이웃한 부여군에도 있습
니다.
부여는 백제 당시에 소부리 혹은 사비라고 부르던 곳입니다. 그곳에는 부소산성과 능산리
고분군이 있어, 공주시에서의 구조와 비슷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그렇습니다. 서기 538년
에 백제의 성황이 사비로 도읍을 옮겼기 때문입니다. 비록 왕궁이 부소산성의 바깥쪽에 있
었을 개연성이 높으며, 대규모의 나성이 부여시내를 감싸고 있다는 점에서 공주시와는 차이
가 나지만, 규모가 확대되었을 뿐 도시의 구조에 대한 기본적인 관념은 크게 바뀌지 않은
듯합니다.
공주와 비교해 부여에서 눈에 띄는 것은 절터가 비교적 많다는 것입니다. 그중 시내에 위
치한 대규모의 정림사지는 백제시대에도 중심부에 해당하는 곳이어서 이 무렵 백제가 불교
를 얼마나 숭상했는지를 짐작케 합니다. 절을 가람이라 이르기도 하는데, 승려가 생활하는
곳을 가리키는 범어에서 나온 말이라고 합니다.
지금의 절은 그 규모와 건물 배치가 매우 다양하고 자유분방하지만, 적어도 조선시대 이
전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특히 우리 역사상 불교가 처음 전래된 삼국시대의 가람은 그 건물
배치가 일정한 원칙에 입각해 이루어졌지요. 물론 신라 말기에 선종 불교가 유행해 사찰이
산간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그 원칙이 흔들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일정한 기준은 있었던 것
으로 보입니다.
가람배치
복잡한 학설이 분분하지만, 아주 단순하게 정히하면, 절 곧 가람의 중심은 원래 탑이었습
니다. 물론 종교란 어디까지나 사람이 주도하는 것이므로, 승려 역시 당연히 그 중심의 한자
리를 차지하겠지만, 경배의 대상이라는 점에서만 본다면, 부처의 사리를 모신 일종의 상징적
무덤, 곧 탑이 핵심을 차지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북한의 평양 지역에서 조사된 청암리사지가 팔각형 목탑을 가운데 놓고 동...남...북쪽에 각
각 1개씩의 금당을 배치한 형태인 것음 비교적 초기의 가림이기때문이라고 합니다. 건물 배
치는 다르지만 경주의 황룡사지도 1탑 3금당식입니다. 금당이란 불상을 모셔두는 곳으로서,
그 뒤에서는 보통 설법장소인 강당이 설치되는데, 청암리 사지에서는 북쪽 금당 뒤에 강당
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부처님을 형상화한 불상의 가치가 점점 높아짐에 따라 탑과 금당
의 비율이 1대 1의 양상을 띠게 됩니다. 보통 남쪽에서 중문을 들어서면 탑이 하나 있고, 그
뒤에 다시 강당이 있는 가람 배치를 지향하게 된 것이지요. 부여 지역에서 조사된 감국시대
가람은 대개 1탑 1금당의 건물 배치를 보입니다. 다만 궁남지 근처에 있는 군수리사지를 1
탑 3금당식으로 보는 견해도 있어, 아직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1탑 1금당식은 나중에 2탑 1금당식으로 변화합니다. 금당 하나에 탑이 두 개있는 구조로
바뀐 것입니다. 금당은 하나인데, 탑이 2개이다 보니 탑은 금당 앞의 양 옆에 각각 한식 서
있게 됩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절의 큰 문(중문)을 들어서면 예전에는 제일 먼저 탑과 만났
으나, 이제는 중앙의 탑이 양 옆으로 비껴 섰기에 금당 안에 놓인 부처님(불상)을 우선적으
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야흐로 탑보다는 오히려 불상이 경배의 주된 대상으로 떠
오른 것이지요. 이와 같은 가람 배치를 쌍탑식이라고도 하는데, 삼국통일 이후에 지은 신라
의 감은사와 불국사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1탑 3금당, 1탑 1금당, 2탑 1금당 등을 시간적
변화보다는 각각 고구려...백제...신라의 특징적 가람 재치로만 이해하기도 합니다.
여하튼 앞에서 말한 정림사지도 1탑 1금당의 범위를 벗아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무왕이
건설한 것으로 알려진 익산 미륵사지는 다소 특이한 예를 보여줍니다. 탑이 3개이고 금당도
3개였던 것입니다. 하긴, 어찌 보면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1탑 1금당식의 가람
3개를 나란히 배치한 것에 불과하니까요. 실제로 조사 결과 탑과 탑, 금당과 금당 사이에는
회랑이 남-북으로 나 있어서 3개가 각각 구획을 달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개의 가름을
나란히 연결해 놓은 미륵사지, 그것만 보더라도 미륵사의 원래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충분
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탑 - 백제인의 미의식
미륵사지의 구모는 지금 남아 있는 탑에도 반영되어 있습니다. 미륵사지의 서쪽 한켠에는
높이 14.2m의 대규모 석탑이 반 정도만 남은 채 위태로이 서 있는데, 7세기 초의 건축물이
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미륵사지서탑을 자세히 들여다 보노라면 마치 7층내지 9층 목조건
물을 돌로 표현한 듯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분위기만 그런 것이 압니다. 실제로 목
조건축의 배불림기둥이 그대로 표현되고 지붕과 구동, 문짝과 문고리마저 표현되어 있으니
까요. 미륵사지 서탑이 그런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삼국시대에 전래된 탑은 원래 목탑이
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사상 탑에는 목탑, 전탑, 모전석탑, 석탑 등이 있었습니다. 목탑은 나무로 만든 탑
이며, 전탑은 벽돌로 만든 탑, 모전석탑은 돌을 벽돌 모양으로 깎아서 쌓은 탑 그리고 석탑
은 돌로 만든 탑을 말합니다.
그런데 초기에 들어온 탑은 중국 문화의영향으로 목조건물이었습니다. 고구려의 청암리사
지, 백제의 군수리사지, 신라의 황룡사지 등에 목탑 흔적이 있는 것도 바로 그래서입니다.
이들 목탑은 전란 등으로 모두 소실되어 지금 남아 있지 않지만 그 양식만큼은 속리산 법주
사의 팔상전 등에 전해져 오고 있어 참고가 됩니다.
전탑은 예가 많지 않은데 안동 조탑동의 5층 전탑, 여주 신륵사의 다층탑등이 대표적입니
다. 전탑은 삼국통일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집니다.
석탑은 가장 많은 예가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지금 당장 근처의 절터에 답사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미륵사지에서 확인된 3개의 탑지 가운데 중앙의 것은 목탑 흔적이라고 합니다. 기둥을 세
우기 위해 바닥에 깐 초석의 전체 구도를 잘 살펴보면 목탑의 규모라든지 대체적인 모양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목탑의 양 옆에는 석탑을 세웠는데 그것이 목탑을 그대로
훙내낸 석탑이었던 것입니다.
백제의 석탑은 처음에는 목탑을 그래도 본떴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새약이 되는 부분이
많아지고 돌의 특징을 살리는 쪽으로 건축기법에 변화가 옵니다 그리하여 부여의 정림사지
5층 석탑과 같은 모습을 띠게 되는데, 기중이 보다 간소해지고 지붕이 길고 날렵해지며 1층
에 비해 2층 이상의 탑신이 훨씬더 작아지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백제탑의
기본 특징, 곧 낮은 기단 위에 여러 개의 석재를 가구 조립하듯이 짜올려 목조건축의 느낌
을 최대한 유지하려고 한 점, 2층 이상은 1층에 비해 폭과 높이가 비교적 급격히 줄어드는
점, 건물 지붕에 해당하는 옥개석의 두께가 비교적 얇고 지붕의 네 귀퉁이가 가볍게 반전하
는 점 등은 여전히 지켜지고 있습니다.
한편, 신라 탑의 특징은 백제 탑의 특징을 뒤집어 생각하면 크게 틀리지 않을 읏합니ㅏ.
즉, 기단부가 비교적 높으며, 큼지막한 석재에 기둥 등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듯한 인상 그리
고 1층부터 꼭대기까지의 체감률이 비교적 낮고 옥개석이 두툼하다는 인상을 준다는 것입니
다.
백제는 고구려난 신라와 달리 돌을 많이 사용한 나라는 아니었던 듯합니다 토성과 토축
묘, 전축분 등이 그런 분위기를 은근히 우리에게 전해주며, 마지막으로 석탑이 확인시켜 줍
니다. 돌마저도 나무처럼 다루려 했던 백제 사람들은 과연 어떤 미의식을 가졌던 것일까요?
요란하지 않은 가운데 화려함을 추구한 사람들. 거칠고 큼지막한 물건을 만들어내기 보다
는 작지만 세심한 주의가 깃들인 물건을 만들려고 노력한 사람들. 효율성이라는 찬단 기준
에 입각해 사고하고 행동했던 사람들. 제가 생각하는 백제인들든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
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3) 신라
경주에 가면 시내 곳곳에 봉긋봉긋 솟아 있는 작은 언덕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언덕
이라 하기에는 너무 작고 경사가 가파르며, 흙무더기라고 하기에는 너무 크고 일률적이라서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분구말입니다. 평지에 만들어진 이 분구들은 단지 한 사람을 위한
무덤에 불과해 규모에 비해서는 실속이 없는 편이지만, 나름대로는 그렇게 된 불가피한 이
유가 있습니다.
적석목곽분의 출현
4세기초에 이르면 이제까지 통광묘와 소형 석곽묘가 주류룰 이루던 경주 분지에 새로운
방식의 무덤이 출현하는 것으로 알려집니다. 바로 적석목곽분이지요.
먼저, 땅을 편평하게 고르거나 돌을 깐 다음(적석목관분 중에는 땅을 얕게 판 것도 있습니
다. 그러나 적석목곽분의 전형을 보여 주는 대형 고분들을 보면, 모두 매장주체부 곧 관과
지상에 놓인다는 것이 공통된 특징입니다.), 그 위에 나무로 만든 곽을 세워놓고, 그 속에
다시 나무 관을 넣습니다. 관은 시체를 보호하는 상자 그리고 곽은 관을 보호하는 나무상자
인 셈이지요. 그러나 관 안에도 각종 부장품을 넣지만, 보통의 경우 대부분의 부장품은 관
바깥, 곧 곽 안에 넣기 때문에 곽은 관을 보호한다기보다는 부장품을 격납하는 공간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곽은 다시 돌로 덮습니다. 그리하여 외양은 마치 고
구려나 백제의 적석총과 같은 모습을 띠게 되는 것입니다. 돌 무더기 위로는 흙을 덮습니다.
마로 dln로는 진흙처럼 찰기가 있는 흙을 덮고, 그 다음에 맨 흙을 덮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상을 정리해보면, '목관+목곽+적석+봉토'의 구조가 되겠군요. 위의 네 가지 요소 가운데
목곽과 적석을 가장 중요하며 특징적인 요소라고 생각해 적석목곽분이라는 명칭을 붙인 것
입니다.
상당수의 사람들은 이 적석목곽분이 북방아시아의 묘제로부터 영향받은 것이라고 믿고 있
는 듯합니다. 특히 카자흐 공화국과 중국의 접경지대에는 쿠르간이라고 불리는 무덤등이 분
포하고 있는데, 그들 역시 '목곽+적석+봉토'로 구성되어 있어서 신라의 적석목곽분과 매우
유사하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이 쿠르간을 만들던 기마 집단 혹은 기마문화가 4세기 포 무
렵에 이동한 중 한 부리가 경주까지 내려옴으로써 신라에 쿠르간을 닮은 적석목곽분이 출현
하게 된 것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기마민족에 의한 기마문화. 그 강력한 힘이 반영된 용어
가 바로 신라의 최고 지배자를 지칭하는 '마립간'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마침 적석목곽
분은 4~5세기의 마립간의 시대에 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주목한 때문이지요.
그런데 일부에서는 이러한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우선, 중앙아시아의 일부지
역에서 쿠르간이 만들어지던 시기와 경구 지역에서 적석목곽분이 만들어지던 시기 사이에는
400년 가까운 시기 차이가 있어서 문제가 되며, 또 중앙아시아의 쿠르간이 축조되던 지역과
경주 지역사이에는 중국대륙이 가로놓여 있을 정도로 두 지역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데
중간의 그 넓은 공간에서 적석목곽분과 유사한 고분들이 아직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도
이상하는 것이지요. 쿠르간은 목곽이 지하로 깊이 내려가 있는데 반해 적석목곽분은 대형일
수록 목곽이 모두 지상에 놓이는 등, 세부적으로는 서로 다른 점이 적지 않다는 사실도 의
문점으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만약 신라의 적석목곽분이 쿠르간과 우연히 닮은 묘제라면, 즉 서로 전혀 상관없는 묘제
라면 어떻게 해서 경주지역에 적석목곽분이 출현하게 된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이렇게 이해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먼저, 낙랑 지역, 곧 대동강 유역에서 유행했던 목곽묘가 경주지역에 전해져 조영되고 있
던 중, 고구려계 집단의 이주로 인해 적석총 문화가 함께 전래되면서 문화결합이 이루어졌
고, 그 결과 목곽을 사용하는 적석통 곧 땅에 목관과 목곽을 놓고 그것을 돌로 덮은 해로운
형태의 적석총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후 눌지 마립간 19년(435)경, 그러니까 5
세기 전반기에 기존의 적석총에 새로 봉토를 입히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한편으로는 아P 처
음부터 봉토를 씌운 형태의 적석목곽분이 축조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의 하나로서 적석목관분 중에 목곽이라든가 부장품이 심하게 부식된 고분들이 있
는 점을 들수 있는데, 진흙을 동반하는 봉토가 처음부터 있었다면 목곽부가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어 부식이 완만하게 진행되었겠지만 원래는 적석총이었기 때문에 돌 사이로 공기와
빗물이 흘러 들어 시체와 부장품이 급속히 부식되는 적석총의 특징을 그대로 지니게 되어삳
고 합니다. 그렇다면 적석목곽분의 특징을 크게 부각시키는 요소로서 목곽보다는 오히려 봉
토가 적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 이러한 생각을 용어에 반영한다면 적석봉토분이
라고 부를 수 있겠지요. 실제로 그러게 부르기도 합니다.
횡혈식 석실분의 장점
6세기에 들어서면, 경주지역에 새로운 묘제가 등장해 적석목곽분을 대체한 것으로 알려집
니다. 횡혈식 석실분을 소개하면서 이미 설명한 바 있습니다. 횡혈식 석실분은 기존의 적석
목곽분에 비해 만흥ㄴ 장점을 지닌 무덤이기에 경주 지역에 소개되자 마자 금방 유행했는
데, 장점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합장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죽어서도 함께 있고 싶어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래서 요즘에도 결혼한 사람이 죽으면 부부를 나란히 묻어주는 게
아닌가요? 적석목곽분 중에는 2개의 고분을 나란히 세워놓아 옆에서보면 마치 표주박을 엎
어놓은 듯한 모습으로 만든 것이 있느데, 이를 표형분이라고 합니다. 표형분은 보통 부부의
무덤으로 해석되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황남대총으로서, 북쪽의 무덤에는 여성, 남족의
무덤에는 왕인 듯한 남성이 묻혀 있었습니다. 작은 동산만한 무덤을 나란히 붙여 놓은 의도
는 죽어서도 같이 있으라는 뜻에서일 것입니다. 그런데 횡혈식 고분은 적석목관분처럼 남자
와 여자를 수 십미터씩 떨어뜨린 채 나란히 묻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손을 뻗으면 바로
옆에서 만져질 수 있도록 가까이 눕혀놓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얼마나 획적입
니까. 이런 방식의 무덤을 신라인들이 거부할 이유가 없지요.
둘째, 기술만 있다면 노동력과 재료가 적게 들고도 훨씬 더 견고하다는 점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적석목곽분은 사람이 죽고 난 위에야 비로소 만들 수 있는 무덤입니다. 관과 곽을
놓고, 그 위에 돌을 덮고, 또 흙을 덮는 방식인데, 직경이 수십 미터에 달하고, 높이 역시 최
소한 심여 미터를 넘으니, 만들기가 쉽지 않았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하지요? 더군다나 다 만
들고 나면, 위에서 누르는 돌과 흙의 압력 때문에 속에 공간이 있는 관과 곽은 썩으면서 금
방 내려앉아버리는 단점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경주를 방문하게 되면 적석목과분의 꼭
대기를 자세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근래 새로이 보수한 것이 아니라면 중앙부가 살짝 내려앉아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
으니까요. 시체가 돌과 흙에 깔린다고 생각하면, 보는 사람 마음이 좋을 리 없겠죠? 그런데
석실분은 수십톤에 달하는 흙무더기의 압력쯤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을 정도로 매우 튼튼하
답니다. 그렇다고 만들기가 상대적으로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적석목곽분과 비교할 때 그저
석재 약간과 석공 및 건축기술자 약간 명 그리고 땅을 파고 흙을 덮을 단순 노동자 약간명
만 있으며 멋있고 견고한 횡혈식 석실분을 만들 수 있으니까요.
셋째, 축조 경비가 비교적 저렴하며 여러차례 이용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적석목곽분을 만
들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을 동원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 사람밖에 묻을 수 없었습
니다. 그러나 횡혈식 석실분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몇 명의 기술자만 있으면 만들 수
있는 무덤이기에 인력 절감의 효과가 높으며, 한 사람만 묻는 것이 아니라 여러사람을 시간
에 관계없이 한 공간에 묻을 수도 있기에 경제적 효율도가 무척 높은 무덤입니다.
넷째, 언제든지 드나들며 관리할 수 있고, 내부가 위생적이며 깔끔하다는 점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다른 특징들을 설명하는 가운데 이미 시사되었을 터이니 다실 설명할 필요
가 없겠지요?
횡혈식 석실분과 풍수지리사상
횡혈식 석실분은 고구려...백제...신라가 모두 사용한 무덤입니다. 그런데 고구려는 이미 4
세기에 횡혈식 석실분을 사용했으며, 백제는 늦어도 5세기에 그리고 신라는 앞에서 말했듯
이 6세기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축조하기 시작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신라의 지배층이 횡혈
식 석실분을 사용함으로써 삼국은 이제 횡혈식 고분시대를 맞이했다고 할 정도로 횡혈식 석
실분은 향후 수백년간 유행하게 됩니다.
놀라운 속도로 번져나간 횡혈식 석실분은 단순히 무덤을 만드는 방식이나 시굴의 문제만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하에 전해진 횡혈식 석실분은 그 축조방식 속에 작지만 위
력적인 관념을 감추고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풍수지리사상입니다. 물론 횡혈식 석실분을 채
용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풍수지리사상의 수용으로 연결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횡혈식
석실분을 만드는 사이에 사람들은 서서히 풍수지리사상의 수용으로 연결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횡혈식 석실분을 만드는 사이에 사람들은 서서히 풍수지리설에 가까워졌고, 결국에
는 그에 얽매이기 시작했습니다. 신라의 왕릉이 초기의 것은 평지에 축조된 데 반해,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산기슭으로 옮겨가고, 나중에는 산의 중턱에 자리잡게 되는 것은 바로 그러
한 상황을 반영한 구체적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가만히 따져보면, 횡혈식 석실분은 불교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는 무덤인 듯 합니다. 우선,
석실을 만드는 기술은 가람 건축에 필요한 각종 기술의 한 부분을 원용한 것일 개연성이 높
으며, 부장품의 양이 예전의 적석목곽분에 비해 많이 간소해진 것도 불교사상의 영향이라고
하겠습니다.
불교의 전래와 유행 그리고 문무왕
불교가 신라에 처음 전해진 시기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만, 대체로 눌지마립간의
재위 무렵(417~458)일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고구려...백제와 달리 신라에서는 불교
가 처음에는 환영을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불교의 포교활동을 반대하는 사랍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법흥왕 14년(527년)에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가 공인되었으며, 그
뒤 불교신앙은 신라 전역의 급속히 확산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왕실의 적극적인 개입이 있었
던 것으로 알려집니다. 즉, 여러 가지 이유로 왕실은 불교계를 적극 지원하고 불교 유행을
조장했다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7세기에는 이미 불교가 신라의 국교로서 확실히 자리잡게
되는 것입니다.
불교 신앙은 내세에 대한 사람들의 관념을 바꾸어 놓았고, 또 매장 습관, 곧 장례 관습네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화장인데, 육체에 얽매이지 않는 불교의 인간관
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서기 681년에 세상을 등진 문무왕도 그랬습니다. 문무왕이 누구입니
까? 서기 661년 왕위에 오른 뒤 668년에 드디어 고구려를 멸망시킴으로써 삼국을 통일하고,
이후 10년 가까이 당나라 축출작전에 돌입하여 성공을 거둔 입금입니다. 국가에 이익이 되
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누구보다 실질을 숭상했던 임금입니다. 그런 임금이었기
에 그는 죽어서 한줌 재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문무왕은 불교의 공력을 독실하게 믿은 왕이었습니다. 당나라와의 전쟁이 한창일 때 승려
명랑의 건의에 따라 전쟁 승리를 기원하기 위해 사천왕사를 지어 서기 679년에 완공했으며,
죽어서는 시신을 화장해달라고 유언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는 단지 화장만 원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 뼈를 '동해의 입구'에 뿌려 달라고 한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삼국유사에 따
르면, 죽어서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뜻에 따른 것이라고 합니다.
문무왕이 말한 '동해의 입구'란 토함산에 발원해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에서 바다로 들어사
는 대종천의 하구를 가리킵니다. 그곳에는 대왕암, 즉 현지 주민들이 '뎅바위'라고 부르는 큼
지막한 암초가 있는데, 많은 사람들은 그 바위 중앙부에 문무왕의 뼈가 수장된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호국불교와 감은사
동해의 용이 되려고 한 문무왕, 그는 과연 누구로부터 나라를 지키려 했을까요? 그 이유
를 알기 위해서는 신라의 역사를 잘 살표볼 필요가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는 시조인 혁거세왕 때부터 왜인들의 습격과 약탈의 대상이 되어
왔는데, 대개의 경우는 동쪽 해변지역의 피해가 컸습니다. 이때의 왜인이 곧 지금의 일본이
라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해적의 성격이 강했다는 것만큼은 비교적 자신있게 말
할 수 있습니다. 7세기 후반에 삼국을 통일하고 당나라 세력까지 몰아낸 신라로서는 이제
평화로운 세상은 꿈꿀 수 있게 되었지만, 6세기 이후로 잠잠한 가운데 여전히 나라의 우환
덩어리로 남아 있는 해적과 바다 건너 일본열도의 국가세력에 대한 경계를 늦추기는 어려웠
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문무왕은 죽어서 바다의 용이 되어 그들 해양세력의 침탈로부터 신
라를 보호하려 했던 것입니다.
문무왕의 이러한 생각은 즉흥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만년에 '국가를 보호한
다'는 뜻을 지닌 진국사를 동해안에 창건한 사실을 통해서도 입증됩니다. 당시 호국불교의
성격이 짙던 신라 불교계에서 사찰은 단지 승려들이 수도하며 염불만 외우는 장소가 아니었
습니다. 그곳은 종교적인 측면 외에도 평소 교통..통신의 중요 거점역할을 했으며, 유사시에
는 국토방위의 전진기지로서 기능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동해안에 지은 진국사는 호국적 성
격이 가장 강한 사찰 가운데 하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문무왕은 진국사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등졌습니다. 진국사
가 완공된 것은 신문왕 2년(682)이었습니다. 사찰을 완공한 신문왕은 아버지 문무왕의 뜻에
감격하고, 그 은혜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그 뜻을 사찰 명칭에 반영시켜, 진국사라는 이름
대신 새로이 감은사라는 이름을 붙이니, 그곳이 바로 장중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2기의 삼
층석탑으로 유명한 감은사인 것이다. 감은사만으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다 표현하기 어
려웠는지, 신문왕은 해안가 고갯마루에 이견대라는 축대를 세웠습니다. 이곳에 서면 문무왕
의 뼈와 뜻이 잠긴 대왕암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동해의 용 - 효성왕
그런데 죽어서 동해의 용이 된 임금은 비단 문무왕만이 아닙니다. 삼국사기에는 서기 742
년에 효성왕이 죽자, 유언에 따라 법류사 남쪽에서 화장한 뒤 뼈를 동해 뿌렸다는 기사가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의 제 37대 임금인 선덕왕도 죽은 뒤 화장하여 그 뼛가
루를 동해에 뿌렸다고 한다.)
효성왕이 과연 어떤 내용의 유언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으므로 알 수 없지만, 이
런 식으로 추정해볼 수는 있습니다. 즉, 삼국유사의 기이편 효성왕조에는 개원 10년(722) 10
월 경주 동남쪽의 모화군에 관문을 쌓아 일본의 침입을 막는 요새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는
바, 효성왕도 문무왕처럼 나라를 지키는 동해의 용이 되기 위해 일부러 화장을 택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이해할 경우, 한 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서기 722년은 효성왕대가 아니라
효성왕의 아버지인 성덕왕 재위 21년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효성왕은 서기 737년에 즉위
해 742년에 죽었으로 모화군의 관문 축성은 절대 효성왕 때의 일일 수 없습니다. 실제로 삼
국사기에는 성덕왕 21년에 모벌군성을 쌓아 일본 도적들의 침입로를 막았다는 기록이 있습
니다. 이처럼 두 기록이 서로 다를 경우, 학자들은 어느 기록이 더 정확한지를 가려낼 의무
가 있습니다.
'개원'은 당나라의 현종이 서기 713년부터 741년까지 사용한 연호입니다. 따라서 개원 10
년은 서기 722년임에 틀림없습니다. 만약 이 연대에 잘못이 없다면, 효성왕이 관문을 쌓게
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믿을 만한 것이 못됩니다. 그러나 만약 연대에 착고가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질 것입니다. 어느 쪽일까요?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삼국사기의 성덕왕 21년조 기사로 보아, 삼국유사의 기록에는 착오가 있는 듯합니다. 그러
나 단순히 연대를 잘 계산해 성덕왕때의 관문 축조 사실을 효성왕 때 의 일로 적었다기보다
모벌군(모화군)의 관문과 효성왕 사이에, 혹은 일본과 효성왕 사이에 무언가 밀접한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삼국유사의 착오가 유발된 것이 아닐까요? 이러한 생각을 앞에서 소개한 효
성왕의 장례방식과 연계지어 보면, 효성왕의 유언 역시 문무왕과 마찬가지로 외적의 침입을
물리치고 나라를 보호하기 위해 용이 되겠노라는 뜻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불국사와 석굴암
효성왕은 재위 6년만에 세상을 등지고, 그의 동생인 경덕왕이 즉위했습니다. 경덕왕이 즉
위했습니다. 경덕왕이 즉위하던 해에 일본국에 사신이 왔으나, 받아 들이지 않았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습니다. 아마도 아들 없이 세상을 의형을 의 듯을 선양하려는 경덕왕 9년
(750), 김대정이 관직을 사임하자, 그로 하금 나라의 영산인 토함산에 불국사와 석불사를 짓
게 한 것입니다. 김대정은 삼국유사에 김대성으로 나오는 인물입니다. 그는 서기 751년부터
24년간 두 사찰의 건축을 지휘...감독하다가 세상을 떠났으며, 그것을 정부가 마무리했다고
합니다.
불국사...석굴암의 창건 이유와 관련해 삼국유사에는 역사 기록이 아닌 민간의 이야기가
채록되어 있는데, 김대성이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는 불국사를 짓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불사를 지었다는 내용입니다. 석불사는 석굴암의 원래 이름입니다. 아마도 김대정(김대성)
이 두 사찰의 창건에 처음부터 깊이 관여해 20여년을 한결같이 봉직했기 때문에 마치 개인
의 사찰인 양 서민들이 오해한 데에서 비롯된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이야기
속에서 불국사는 현생의 부모를 위한 것이고, 석불사는 전생의 부모를 위한 것이라는 대목
에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두 사찰의 성경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지요. 특히 전생의 부모를
위해 지었다는 석불사(석굴암)에 주목해 봅시다.
토함산의 동쪽 산마루에 위치한 석굴암은 인도나 중국에서처럼 자연 암벽을 뚫어서 석굴
을 만드는 방법을 쓰지 않고 거대한 암반 위에 평탄한 터를 닦는 뒤 각종 석재를 쌓아올려
서 만든 인공 석굴입니다. 구조는 크게 보아 전실과 후실이 있는데 전실의 평면형태는 방형
이며, 후실은 원형입니다. 후실의 정가운데에는 본보인 아미타여래좌상(종래 석굴암의본존불
은 석가모니불상이라고 전해져 왔다. 특히,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는 점이라든지 10대 제자
가 둘러싸고 있는 점 그리고 신체 각 부분의 크기가 중국마하보리사의 본존불과 쪽같다는
점에서 석굴암의 본존불이 석가여래를 형성화한 것이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불국사와 석굴
암(석불사)의 관계에 주목하고 본존불이 서쪽에서 동쪽을 향하고 있는 점, 본존불 바로 뒤에
현세에서 중생 구제를 실현하는 관음보살상이 부조되어 있는 점, 신라에서 7~8세기에 아미
타신앙이 크게 유행한 사실 그리고 불상의 모양은 같더라도 그 명칭은 불교의 발달과 함께
변화했다는 점등을 감안하면, 석굴암의 본존불은 아미타불일 개연성이 높은 듯하다.)이 결가
부좌를 한 채 연꽃무늬가 아래 위로 조각된 대규모의 원형 대좌 위에서 동남쪽을 향하고 있
습니다.
아미타불은 서방의 극락정토를 주재하는 부처라고 합니다. 그런에 이 아미타불이 향하고
있는 동남쪽, 더 정확히 말하면 동동남쪽은 놀랍게도 앞에서 소개한 '동해구' 곧 대왕암이
위치한 곡이어서 우리의 비상한 관심을 끕니다. 우연일까요? 아닙니다. 의도적인 배치라고
믿는 사라들이 많습니다. 아미타불이 어떤 부처입니까? 그가 언제 만들어졌습니까? 그가 바
라다보는 곳은 어디입니까? 이 세가지 물음에 대한 답을 연결시켜보면 전생의 부모를 위해
만들었다는 석굴암은 용이 되기를 소망했던 그리하여 호국신이 되고자 했던 두 대왕의 명복
을 빌고, 그들의 바람대로 나라가 항상 평안하기를 기원하는 뜻이 담긴 곳이었다고 결론지
을 수 있겠습니다.
뜻이 크고 아름다워서일까요? 불국사와 석굴암은 신라의 건축...미술 수분이 가장 고조되
었던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특히 석가탑은 삼층석탑의 완성이라고 평가받을 정
도 단아하면서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으며, 다보탑은 당시 건축...조각의 발달된 기교를 온
몸으로 웅변하고 있습니다. 석굴암의 전체 구조는 보는 사람마다 감탄하지 않을 수 없게 합
니다. 후실에는 아미타불을 둥글게 감싸며 십일면관음과 문수.보현보살, 10대 제자, 제석천...
범천 등이 부조되어 있고, 전실에는 팔부신장과 2구의 금강역사가 부조되었습니다. 그리고
전실과 후실 사이의 통로에는 사천왕상이 지키고 서 있습니다.
문화재에는 선조의 뜻과 솜씨가 담겨 있습니다. 세상을 향한 그들의 지혜가 담겨 있습니
다. 그 지혜가 탐난다면, 또 선조의 뜻이 궁금하다면, 경주에 다녀오십시오, 공주에, 붕여에
다년오십시오, 그리고 주변을 돌아보십시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문화재인지..........
4) 전삼국과 후삼국
후삼국시대란?
삼국유사에는 전백제라는 표현과 후백제라는 용어가 자주 나옵니다. 후고구려 내지 후고
려라는 국명도 있습니다. 삼국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라 진성여왕 6년(892)에 견훤이 완
산주 곧 지금의 전주에 근거를 두고 '후백제'를 칭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효공왕 5
년(901)에는 궁예마저 송악 곧 지금의 개성에서 왕을 칭했다고 하는데, 삼국유사에는 이때
구예가 고려라는 국명을 사용한 것으로 적혀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보통 '후고구려'
라고 불러 왕건이 세운 나라와 구별합니다.
견훤과 궁예가 각각 백제와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명분 아래 신라 왕실과는 전혀 다른 독
립정권을 세움으로써 통일 신라의 영토는 크게 3구역으로 구분되었습니다. 한반도 중부지역
을 차지한 궁예정권과 서남부 지역의 견훤정권 그리고 동남부의 신라로 나뉜 것입니다. 그
것은 마치 7세기 중엽에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전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구도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서기 935년에 신라 경순왕의 항복...선양을 받은 왕건이 이듬해인 936년에 대
군을 이끌고 후백제를 멸망시킴으로써 종결되었는데, 9세기 말부터 왕건의 통일까지 반세기
에 가까운 기간을 우리는 보통 후삼국시대라고 부릅니다.
후삼국시대는 앞에서 살펴본 삼국시대와 여러모로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얼핏 보더라도
국명과 정국 구도가 같으며, 생존이 걸친 치열한 전쟁을 벌인 점이 같습니다. 특히 궁예는
'고려'라는 국호를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고구려 계승의지를 분명히 드러내었습니다. 그리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은 아닙니다만, 고구려는 광개토왕 내지 장수왕 때에 국명을 '고려'로 바꾼
바 있습니다. 그래서 중국특의 역사서에는 장수왕 이후의 고구려를 모두 '고려'로 지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궁예와 완건이 사용한 '고려'라는 국호가 고구려에서 '구'자를
뺀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하지만, 옳은 설명은 아닙니다.
백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젼훤은 백제를 대신해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에
원수를 갚겠다고 공원했습니다. 그것은 백제 계승의지의 강력한 표현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렇다면 견훤은 예전의 국명 앞에 굳이 '후'자를 새로이 첨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실제로
어떤 사료에는 '견훤의 백제'라는 표현이 아주 많이 나옵니다. 따라서 국명으로만 본다면, 고
구려...백제...신라의 감국시대가 다시 한 번 열린 것입니다. 10세기 전반기의 정국 상황은 감
국시대와 비교해 별반 다를 바가 없지만, 사회의 분위기와 정권의 성격은 꽤 만은 차이가
있습니다.
궁예정권의 한계
9세기 후반에 들어서자 신라의 지방에서는 각종 반란이 줄을 이었습니다. 특히 사회...경제
적인 문제로 인해 많은 농민들이 근거지를 떠나 유랑하게 되면서 도적화하는 현상이 발생했
습니다. 그러자 이들의 규합해 세력화하는 사람도 나타났는데, 죽주의 기훤, 북원의 양길등
이 재표적이며, 원래 군인 출신으로 도적 무리를 모아 나라를 세운 견훤도 이에 속하는 사
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궁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원래 승려 출신으로서 무리를 모아 처음에는 기훤의 휘
하에 들어갔다가 나중에 다시 양길의 휘하로 옮겼으며, 결국 강원 지역에서 독립한 사람이
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훤...양길 등과 달리 점차 약탈적 성격을 벗어나 행정조직을 갖추는
정치력을 발휘했으며, 그 결과 경기 지역의 각종 세력을 병합하고 기훤...양길의 세력까지 격
파함으로써 '고려'라는 국가를 건설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른 궁예는 원래 신라의 왕자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출생시의 조
짐이 좋지 않자 버림을 받게 되었으며, 그 와중에 한쪽 눈이 멀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신라 왕실에 대한 궁예의 개인적인 원한이 대단했기 때문에 궁예정권은 시종일관 신라에 대
해 적대적이었다는 것이 사가의 설명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을 곧이 곧대로 믿는 사람
은 지금 그리 많지 않은 듯합니다. 궁예는 기존 질서에 도전한 사람인데다 나중에 부하인
왕건의 쿠데타로 실각한 사람이기에 고려시대 및 조선시대에 편찬된 사서에는 매우 부정적
인 인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궁예는 기존 질서에 도전한 사람인데다 나중에 부하인 왕건
의 쿠데타로 실각한 사람이기에 고려시대 및 조선시대에 편찬된 사서에는 매우 부정적인 인
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인상을 간접적으로 반영한 것이 바로 위의 인물 설
명이라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궁예의 '고려'국가 건설은 '고구려 재건'으로 받아들여졌고, 그를 통해 그의 세력은 급속히
증대되었습니다. 궁예가 고려를 건설한 것은 고구려가 멸망한 지 200년도 더 지난 때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고려'재건이 폭발적인 힘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은 신란의 삼국 통일이 그
다지 실질적인지 못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신라의 골품제라고
하는 특징적인 신분질서에 큰 원인이 있었던 듯합니다. 혈통제일주의에 입각한 신라의 신분
질서는 경쟁이 사라진 상황에서 고구려...백제의 유민들을 소외시킬 수 밖에 없었을 것이며,
그것이 기본적으로 신분제 사회가 안고 있는 허약한 지서의식과 맞물림으로써 결국 국민 전
체의 결속력을 해쳤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하튼, 고구려 계승을 외치던 궁예는 구가의 기반이 어느 정도 갖춰진 서기 904년에 돌
연히 마진으로 국호를 바꾸었으며, 무태라는 연호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서기 910년에는
국호를 태봉, 연호를 수덕만세로 고쳤습니다. 고구려 계승이라는 명분에 변화가 온 것입니
다. 도한 그것은 자신의 권력기반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
한 자신감은 오히려 궁예로 하여금 독선적인 태도를 견지하게 했으며, 그로 인해 권력기반
이랄까 입지가 약화되어갔습니다.
한편, 연호 사용 역시 궁예의 자신감이 표출된 결과라고 할수 있겠는데, 궁예정권의 외교
정책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도움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연호 사용은 당시 동아
시아의 정세를 주도했던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에서 스스로 이탈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의 시각에서 본다면 궁예정권의 연호 사용은 매우 주
체적인 행동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도 있지만, 그에 걸맞는 힘을 아지 배양하지 못한
당시의 상황에서는 독선적 정국 운영과 맞물려 민심을 잃기 쉬운 소재로 작용했던 것입니
다. 그것은 나중에 고려 태조 왕건이 연호를 사용한 것과는 도 다른 입장의 표명이었다고
하겠습니다.
궁예의 자신감은 신라 곧 기득권 세력에 대한 극단적 멸시로 나타났습니다 궁예가 부석자
에 그려진 신라왕의 벽화를 칼로 긁었으며, 경주를 멸도로 부르게 하고, 신라로부터 오는 사
람을 모두 죽였다는 등의 기록은 다소 과장된 것이겠지만, 궁예의 신라에 대한 반감을 상징
하는 좋은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신라, 곧 기득권세력에 대한 궁예의 이러한 반감 표출은 사
실 궁예정권의 포용성 부족을 그대로 드러낸 것으로서, 결국 궁예정권의 성장에 장애가 되
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국익을 군사...외교정책의 절대 기준을 삼았던 (전)삼국시대의 상황과
비교하면 매우 개인적인고 편협한 국가관이 가져온 일종의 족쇄였던 셈입니다.
견훤정권의 한계
견훤은 상주 출신의 이씨로서 서남해안에서 비장으로 근무하다가 서기 892년에 무리를 모
아 무진주를 습격한 후 독립정권을 세웠으며, 효공왕 4년(900)에는 드디어'벡제왕'을 칭하고
관직을 마련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월에 사신을 보내 조송하고 관작을 받는 정치.외교력을
발휘했습니다. 거시 925년에는 후당에 사신을 보내 제후를 칭하며 조공하고, 백제왕의 작호
를 받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점들을 감안할 때 견훤은 궁예에 비해 배우 세련된 정치감각을 지닌 인물이엇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서기 918년에는 왕건이 쿠데타를 통해 궁예를 몰아매고 왕좌를
차지하자 곧바로 사람을 보내 축하하며 선물을 전한 것은 당시의 정국을 정치논리로 풀어가
려는 의도가 드러난 행동이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서기 925년에는 백제와 고려가 서
로 인질을 교환하는 우호를 과시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견훤의 신라에 대한 반감은 궁예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듯합니다. 사실 어지 보면
구예와 견훤의 반 신라 감정은 그들이 신라 왕실을 부인하고 독자정권을 세운 이상, 그 정
당성을 주장하기 위해서라고 당연히 취해야 할 태도였는지 모릅니다. 또 신라의 지배층이
사회 혼란을 자초한 사실이 분명히 인정되는만큼, 그들의 반신라 감정은 한 부분 민심을 모
으는 방편이 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감정 표출이 지나치게 되면, 필요이상으
로 과격해지거나 폭력적인 성향을 띠기 쉬우며, 그 결과 또 다른 모순을 낳게 되는 법입니
다. 대내...외적으로 뛰어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던 견훤이 신라에 대한 반감을 끝내 억제하
지 못한 것은 차라리 그의 한계였다고 해야겠습니다.
견훤정권의 흥망
신라의 경애왕 4년(927) 가을 9월에 견훤의 군대는 신라를 파죽지세로 몰아붙여 경우 근
처까지 진격했습니다. 그러자 신라에서는 고려의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이에 왕건이 출
병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신라의 구원 요청은 오히려 신라측의 동태를 살피던 견훤을
자극했던 모양입니다. 공격의 고삐를 늦추고 있던 견훤의 군대가 10월에 갑자기 경주를 습
격한 것입니다.
이때 경애왕은 왕비와 궁녀 그리고 신하들과 함계 포석정에서 술을 마시며 놀고 있다가
황급히 별궁으로 돌아왔으나 끝내 포로가 되어 견훤 앞에서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런
데 견훤은 단지 경애왕만 죽인 것이 아닙니다. 궁중에 들어가 거처하면서 왕비를 능욕하고
군사를 풀어 약탈을 자행했던 것입니다. 견훤의 이러한 행동은 나중(931)에 왕건이 경주를
방문했을 때 신라왕에게 예의를 다하고 군대의 규율이 엄격했던 것과 대비되어 신라인의 반
백제 감정을 고양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견훤은 경애왕의 집안 동생인 김부로 하여금 신라의 왕위를 잇게 한 뒤, 국가 창고의 진
귀한 보물과 무기를 압수하고 퇴각했습니다. 돌아오던 길에 견훤의 군대는 지금의 대구 팔
공산 아래에서 왕건이 이끄는 기병 5천명과 전투를 벌여 크게 승리하게 됩니다. 이대 왕건
은 휘하의 장군인 심승겸이 목숨을 바치며 군사를 이끌던 가운데 혼자서 몸만 빠져 나올 정
도로 대패했다고 합니다. 이후 백제는 한동안 고려의 군대가 전투를 피할 정도로 확실한 군
사적 우위를 확보했던 것으로 알려집니다.
그러나 신라의 지배층과 백성은 이미 회복 불가능 상태에 빠진 자국의 운명을 백제보다는
고려에게 맡기고자 했습니다. 자신들의 왕을 죽이고 보물을 약탈한 사람을 새로운 지배자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갈가리 뜯기고 찢긴 자신들에게 따듯한 시선을 보내 위로하고 겸손한 태
도로 손을 내미는 사람에게 왕관을 씌워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신라의 태도는 군사
적으로 열세에 처해있던 왕건에게 큰 힘이 되었고, 그 힘을 기반으로 왕건은 다시 힘차게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그 힘이 백제를 멸망시킬 정도로 컸던 것은 아닙니다.
백제의 멸망 원인은 밖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안에 있었습니다. 견훤의 겨듭되는 전투승
리에도 불구하고 왕건에게 귀순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던 것입니다. 그것은 견훤의 포용성 부
재와 독선적 정국 운영에서 나온 결과일 개연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백제 멸망의 결정적인
원인은 내부이었습니다.
견훤에게는 아들 10명이 있었는데, 견훤은 그중 넷째 아들인 금강을 특별히 사랑해 그에
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습니다. 그러자 맏아들인 신검이 서기 935년에 쿠데타를 일으켜견훤
을 금산사에 유폐시키고 귀순했는데, 왕건은 견훤을 후하게 대접하며 존대했다고 합니다.
견훤에 대한 왕건의 후대는 백제인을 비롯해 고려에 적대적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습
니다. 더욱이 견훤이 고려에 귀순한 직후 정통왕조임을 자부하던 신라의 왕마저 스스로 왕
건에게 왕위를 물려주자 내외의 민심은 이제 급격히 고려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그리하여
서기 936년에 왕건이 견훤을 앞세우고 백제를 공격하자, 백제의 군대는 저절로 무너졌으며,
그 결과 후삼국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혼돈의 시대가 요구한 가치관
가만히 생각해보면, 후삼국시대는 정치논리보다 개인의 감정이 우선한 시대인 듯합니다.
힘이 일종의 기준인 동시에 절대적 가치로 작용한 시대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군사력이
지배의 근거이자 논리마저 되었던 시대입니다. 그렇기에 후삼국시대는 보통 혼란의 시대로
인식됩니다. 혼란은 욕심과 옥선을 부르게 마련입니다. 궁예의 고려...마진...태봉이 그랬고,
견훤의 백제가 그랬습니다. 그들은 비록 사회의 모순, 지배층의 부패를 규탄하며 호기있게
일어섰지만, 지나치게 가격한 개력과 개인적 욕심 그리고 독선적인 태도로 인해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후삼국시대의 최종 승자는 욕심과 독선을 누른 사람, 그리하여 관용과 포용으로 무장한
사람, 바로 왕건이었습니다. 혹여 그가 보인 관용과 포용이 위선에 찬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런 위선은 궁예와 견훤의 독선보다 나았다고 하겠습니다. 그가 보인 포용은 중세를 여는
출발점인 동시에 통치자의 덕목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포용성으로 인해 기득권층의 상당수는 여전히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
다. 특히 신라의 평화적 항복은 신라의 지배층이 고려 왕조 개창에 자연스럽게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했으며 이를 통해 기득권층의 전체 구도는 큰 변화를 기대할 수 없게 되었
습니다. 역사란 그런 모양입니다. 정권 교체를 통한 기득권층의 대대적인 몰락이란 결코 성
립될 수 없는 허상일 지 모릅니다. 그저 점진적인 개혁, 순차적인 변화...발전이 있을 뿐입니
다. 그것은 아마도 역사가 항상 다수의 움직임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참고문헌>
이홍직, 한국고대사의 연구, 신구문화사, 1971.
김철준, 한국고대사회 연구, 지식 산업사, 1975.
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한국고대사연구회, 한국고대국가의 형서, 민음사, 1990.
사회과학 출판사, 고구려문화사, 논장, 1988.
유원재, 중국정사 백제전 연구, 학연문화사, 1993.
강인구, 백제고분연구, 일지사, 1977.
윤무병, 백제고고학연구, 충남대 백제연구소, 1992.
이기백, 신라정치사회사연구, 일조각, 1990.
신형식, 통일신라사연구, 삼지원, 1990.
황수영, 석굴암, 열화당, 1989.
이기백...이기동, 한국사강좌 - 고대편, 일조각, 1982.
강인구, 삼국시대 분구묘 연구, 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 1984.
강인구, 고고학으로 본 한국고대사, 학연문화사, 1997.
송상석 편, 알고보는 문화재, 학연문화사, 1994.
최근영, 통일신라시대의 지방세력 연구, 신서원, 1990.
신호철, 후백제 견훤정권의 연구, 일조각, 1993.
구총무수(저)...이용범(역), 중국의 역사(상)...(중), 중앙신서, 1980.(문고판)
제 5장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지 못했다?
1) 북한의 교과서 - 역사교육의 특징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서기 660년, 백제의 의자왕은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과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의 무력을
당해내지 못하고 무릎을 끓었습니다. 그리고 태자 효, 왕자 태...융...연과 신료 88명, 백성
12,807명과 함께 포로가 되어 당나라로 끌려갔습니다. 이에 백제에 남아 있던 귀족 복신은
승려 도침등과 함께주류성을 근거지로 삼아 백제 재건투쟁을 벌였으며, 나아가 왜국에 볼모
로 가있던 부여풍을 맞아 왕으로 감시까지 했습니다. 나...당 연합군에 의해 짓밟히던 백제인
들이 재건투쟁에 호응하자, 백제는 다시 일어설 듯한 지세여Ttmqslke. 그리하여 당나라의
장군 유인원이 주군하고 있던 사비성을 포위했는가 하면, 유인궤가 이끌던 군사를 1만여명
이나 몰살시키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기세를 올리던 백제부흐군은 상황이 유
리해지자 다시 내분에 휩싸이기 시작했습니다.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부여풍이 복신을 죽이
는 복마전이 펼쳐졌으며, 결국 그 틈을 노린 나...당 연합군의 총공격을 받아 서기 662년에
대패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흑치상지와 지수신 등이 임존성에 웅거하며 저항했으나, 흑치상
지는 자진해 항복하고, 지수신은 흑치상지가 이끄는 당군에 의해 격파됨으로써 백제의 명맥
은 완전히 끊기고 말았습니다.
서기 668년, 고구려도 나...당 연합군의 공세를 이겨내지 못하고 무너졌습니다. 영양왕 23
년(612)에 수나라의 양제가 이끄는 113만 대군을 무리치고, 이듬해의 전쟁에서도 승리를 거
둔 고구려입니다. 보장왕 4년(645)에는 당나라의 태종이 이끄는 대군마저 물리친 고구려입니
다. 그리하여 당나라 태종은 물론 그 뒤를 이은 고종까지도 신하들의 명분론에 입각한 고구
려 정벌 주장은 부담스럽게 여기도록 만든 나라입니다. 그런 고구려가 조심스럽게 군사를
움직인 당나라와 그에 응한 신라의 협공을 받고 무기력하게 무너진 것입니다. 불과 20년만
에 고구려는 이미 예전의 고구려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고구려가 이처럼 허무하게 무너진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동...서양의 고금을 통틀어 멸
망하는 집단이 공유했던 특징, 바로 내분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서기 666년, 고구려의영유왕
을 죽이고 보장왕을 세울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막리지 연개소문이 병으로 죽었습
니다. 그리고 그의 장남인 남생이 뒤를 이어 막리지의 지위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남생이 잠
시 출장을 나간 사이에 아우인 남건과 남산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남생을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러자 남생은 국내성은 날아나 웅거하다가 끝내 아르 헌성과 함께 당나라에
망명하고 말았습니다. 예전의 고구려가 아님을 알게 된 당나라는 서기 667년부터 신라를 동
원하며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고, 이듬해인 서기 668년 여름 9월에는 마침내 수도 평양을 함
락시켰습니다. 중국측의 오랜 숙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당나라는 고구려 사람 38,300호를
중국의 서쪽과 남쪽 변방으로 이주시키고 고구려 땅에 9개의 도독부를 설피함으로써영구 지
배를 획책했습니다.
한편, 평양이 함락된 뒤에도 고구려 사람 중에는 계속 저항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우선,
왕족인 안승(안순으로 기록된 곳도 있다. 안승의 출신에 대해서는 기록에 따라 설명이 달라
분명치 않은데, 보장왕의 서자, 보장왕의 외손, 연개소문의 동생인 연정토의 아들 등으로 전
한다.)은 고구려의 대형 검모잠과 함께 한성 곧 지금의 황해도 재령 지방에서 고구려 재건
투쟁을 벌였으며, 지방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이에 호응했습니다. 고구려인들의 재건투쟁에는
당나라의 야욕을 간파한 신라의 지원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집니다.
그러나 나라가 한번 쓰러지면 다시 세우기 어려운 법입니다. 더욱이 당나라는 당시 최고
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무렵이었습니다. 크고 작은 싸움에서 연패하면서 고구려 유민들의 세
력은 점점 작아져 갔습니다. 그리고 항상 그렇듯이 상황이 어려워지자 내부의 의견충돌이
발생해, 안승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도망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시성을 비롯해 지방세력 중에는 여전히 당나라의 지배에 끈질기게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당나라 군대에 의해 차례로 격파됨으로써 고구려 재건
은 이제 점점 더 어려워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고구려 사람들의 저항을 부담스럽게 여긴
당나라는 거시 677년 보장왕을 신성으로 보내 안동도호부를 통치하게 하는 등 고구려인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형태의 회유책잉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었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적
어도 국가 재건이라는 당토의 목표는 끝내 달성되지 못했습니다.
신라와 당나라의 전쟁 그리고 통일신라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키자마자, 당나라는 그 지역에 대한 직접 지배는 물론 신
라까지도 직접 통치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백제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하고, 고구려에 안동도
호부를 설치한 것처럼, 신라에는 계림도독부를 설치했던 것입니다. 비록 결과적으로는 문서
상의 통치조직에 불과했지만, 신라인들이 당나라의 야욕을 확인하는 증거로서는 충분했습니
다. 서기 670년, 신라는 4천여 호를 이끌고 신라에 망명한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삼은 다음
금마저 곧 지금의 익산 지역에서 살게 했는데, 이는 백제왕자 부여융을 통해 옛 백제 지역
을 통치하려는 당나라의 의도를 분쇄하기 위한 방책이었던 듯합니다. 즉, 고구려 유민과 합
세한 뒤 옛 백제 지역에 남아 있는 당나라 군대와 대적하려는 의도였다는 것이지요.
여하튼, 신라 문무왕 10년(670)에 예T 백제 지역에서는 신라와 당나라 상이의 전쟁이 본
격적으로 벌어졌습니다. 그리하여 이듬해에는 신라가 사비성을 함락시켰고, 그 다음해에는
한반도 서남부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확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자 이제는 한상...임진강
유역이 주된 전쟁터로 변했고, 그곳의 매초성에서 치열한 싸움 끝에서 서기 675년 신라군이
당나라의 20만 대군을 격파함으로써 전쟁은 막바지로 치달았습니다. 그리고 문무왕 16년
(676), 마침내 당나라는 안동도호부를 지금의 요녕성 요양시에 위치한 요동성으로 옮겼으며,
신라는 대동강과 원산만을 잇는 선의 남쪽 지역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이후의 신라를 우리는 통일신라라고 불러, 이전 시기의 신라와 구분하고 있
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통일신라'는 용어에 대해 불만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은 듯합니다.
그중 상당수는 신라의 통일이 지니는 의의를 폄하하거나 아예 통일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도
합니다. 특히 북한에서는 그런 경향이 더욱 강해 신라의 삼국통일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역
사학계의 공식 입장이 되어온 지 오래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의 '통일신라'를 '후기 신
라'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신라의 통일에 대한 불만 - 북한 역사교육의 특징
1982년에 발간된 북한의 고등중학교 3학년 교과서 조선력사(상권)에는 다음과 같은 표현
이 있습니다.
"신라의 통치배들이 당나라 침략자들의 힘을 빌어 제놈들의 정치적 야욕을 실현해보려고
한 것은 아주 어리석고 옳지 못한 생각이었다."(70쪽)
"신라의 나약성과 비굴한 사대 존중사상으로 인해 이전 고구려 따에서 당나라 침략자들을
완전히 몰아내기 위한 투쟁을 중도에서 포기하고 말았다."(72쪽)
신라에 대한 혐오감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대단히 비판적인 시각입니다.
위에서 보듯이, 북한의 역사학계에서 신라의 통일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
로 정리됩니다.
첫째, 신라가 외세를 글어들여 동족 국가인 고구려...백제를 멸망시켰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반민족적이라는 것이지요.
둘째, 고구려의 영토를 다 차지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신라는 대동강-원산맘의 남쪽지
역만 영유함으로써 고구려 영토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 만주지역을 상실랬는데 이처럼
고구려 영토의 9할 이상을 잃고 단지 1할 정도만 병합한 신라에게 어떻게 '통일'이라는 용어
를 적용할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그래서 북한에서는 우리 민족 최초의 통일 왕조 고려로
보로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고개가 끄덕여지나요? 제 생각으로는, 위의 지적이 어느정도의 설득력을 가
지고 있긴 하지만, 반드시 옳은 평가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잠시 후에
밝히기로 하고, 우선 북한의 역사학계가 왜 신라의 통일 전쟁에 대해 위와 같은 극단적으로
비판했는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북한의 역사교육의 특징이 되
겠군요.
먼저, 북한에서는 철저하게 현재적 관점에서 과거를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교
과서나 각종 서적의 머리말과 장...절마다 본문에 앞서 제시한 김일성 교시라든지 김정일 유
시의 영향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직접적 원인이 어디에 있든 간에 궁
극적으로는 경직된 유물사관과 주체사상으로 연결되며, 그것은 또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예속된 역사학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역사학이 '교훈'을 목적으로 하는 이상, 어느 정도의 현재적 관점이랄까 현실 반영은
필요하고, 또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당시의 상황을 무시한 것이어서는 곤란합니다. 가
령, 앞에서 소개한 조선력사에서는 발해와 통일신라의 통치기구 및 군사제도 정비를 인민들
에 대한 봉건적 지배와 착취를 강화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설명하고, 유교와 불교에 대해서
도 "돈 있고 권세 있는 놈들이 인민을 착취하고 남의 나라를 침략하는 데 써먹는 아편"이라
는 논리로 일관함으로써 그것이 우리 문화 발전에 미친 영향을 배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는 과거의 사실을 선과 악이라는 현재의 절대기준 아래 평가하려는 시각이 개재되어 있는
듯합니다. 그리하여 일단 악한 인물로 분류된 이성계의 경우에는 왜구를 소탕하는 데 큰 공
을 세운 사실조차 거론하지 않는 편파성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둘째, 피지배층 중심의 역사관을 지향한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시각은 "인민대중은 사회역
사의 주체"이며, "사회역사적 운동은 인민대중의 창조적 운동"이라는 논점 속에 그대로 담
겨져 있습니다. 그리하여 지배층에 대해서는 시대를 막론하고 비판적으로 시각을 견지하고
있는데, 그것은 "한 놈의 죽은 노예소유자""권세 있는 놈들""왕과 지주놈들""반동적인 양반
지주놈들""관리놈들" 등의 용어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용어만이 안닙니다. 국가의 성
립과 변천 과정을 다룰 때에도 특정한 왕명을 거론하지 않고 단지 서기 연도만 거론한 것은
지배층에 대한 극단적 반감때문인 듯합니다.
그 결과, 고구려의 영토 확장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도 광개토왕...장수왕...문장명왕 등의
역할은 전혀 언급하지 않으며, 조선시대의 한글창제에 대해서는 그것을 조선인민들의 창조
적 활동의 결과라고만 하여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사들의 역할을 무시했습니다. 왕의 이름을
거론하는 경우는 각 왕조의 건국자, 의자왕와 같은 국가 멸망 당시의 왕 그리고 연산군과
같은 폭군에 한정되고 있습니다.
반면, 일반 서민과 천민의 활동에 대해서는 상당히 우호적이고 관심 깊은 태도를 견지해
부족한 사료헤도 불구하고 많은 분량을 할애했는데, 예를 들면 망이...망소이의 난(무신란이
일어난 뒤 사회가 혼란한 틈을 타서 고려 명종 6년(1176) 1월에 공주 명학소의 천민이던 망
이와 망소이가 굶주린 무리를 이끌고 일으킨 민란을 말한다. 그들은 공주를 함락시키고 예
산을 공략하는 등 세력을 떨쳤으나, 이듬해 정월에 정부군에 항복했다. 정부는 망이와 망소
이를 처벌하지 않고 곡식을 주어 고향으로 돌려보냈는데, 그들은 돌아간 지 한달 후에 다시
난을 일으켜 충남 일대를 휩쓸다가 7월경에 정부군에 격파당했다.), 김사미의 난(고려의 무
신집권기인 명종 23년(1193)에 김사미를 미혹하여 불평불만자들이 경북 청도와 경남 밀양
사이에 있는 운문산을 근거지로 삼아 일으킨 난을 말한다. 김사미의 세력은 나중에 효심이
이끄는 집단과 결합하여 각지를 돌며 약탈하다가 정부군에게 격파되었다.), 만적의 난(고려
무신정권기에 최충헌의 노비인 만적 등이 일으켰다가 실패한 노비해방운동이다. 신종 원년
(1198)에 만적을 비롯하여 도성에 거주하던 노비들이 "왕이나 장군은 본래 정해진 것이 아
니라 누구나 때가 오면 할 수 있는 것"이라면서 정해진 일시에 폭동을 일으켜 각각 주인을
죽이고 노비문서를 불살라 없애기로 약속했으나, 율학박사 한충유의 노비인 순정이 밀고함
으로써 실패했다. 이후 순정은 은 80냥을 받고 양민이 되었으나, 만적 등의 백여 명은 처형
되었다.), 임꺽정의 활동(조선시대 중엽에 경기도 양주의 백정이던 임꺼정이 명동 14년
(1559)부터 수년간 무리를 이끌고 경기도와 황해도 일대에서 산적으로 지내다가 정부군에
의해 토벌된 사건을 가리킨다. 임꺽정은 탐관오리를 혼내고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하여 의
적의 대명사로 손꼽힌다.), 장영실의 발명활동(조선시대 세종 때의 과학자로서, 측우기를 발
명하고 양부일구...자격루 등의 제작을 지휘감독했다. 세종의 신임을 얻어 벼슬이 정3품 무관
인 상호군에 올랐는데, 원래는 천출이었다고 한다.) 등을 자세히 서술한 것이 그에 해당합니
다.
셋째, 전쟁사 중심으로 역사를 기술했다는 점입니다. 여기에는 외세와의 전쟁(대외투쟁)과
내부 세력간의 충돌(계급투쟁)이 모두 포합됩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 나라의 력사는 우리
인민이 반동통치배들의 억압과 예속을 반대하고 외래 침략자들의 침입을 쳐물리친 투쟁의
력사"임을 천명한 데에서 분명하게 예고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전쟁에 관한 서술이 매우자세
하며, 많은 분량을 차지합니다. 특히 고구려와 수...당나라 사이의 전쟁, 고려와 요나라 사이
의 전쟁, 고려와 몽고사이의 전쟁, 조선시대의 임진왜란...병자호란 등이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는데, 각종 지도를 제시하며 마치 일지를 작성하듯이 서술한 부분이 많습니다.
계급투쟁에 대해서는, 시종일관 봉건통치배들의 수탈로 비참한 생활을 하던 인민대중이
결국 봉기하게 된다는 논리를 견지함으로써 피지배층이 다수 참여한 반란...민란을 예외 없
이 옹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절대적으로 부족한 사료에도 불구하고 천민...노비...농민군의
활동상을 최대한 자세히 다루면서 반봉건적 계급투쟁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넷째, 우리 역사의 중심 무대를 평양 지방에 두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입장은 1970
년대 주체사상을 강조하게 되면서부터 매우 뚜렷하게 나타났는데, 심지어 3...1운동이 평양지
역에서 시작되었다고 서술할 정도로 전 시기의 역사 해설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1972년에 평안난도 덕천순 승리산의 동굴유적에서 구석기 시대 중기에 속하는
사람의 어금니 2개가 발견되었으며, 1977년에는 평양시 력포구역 대현동의 석회암 동둘에서
도 사람 머리뼈의 파편이 발견되었습니다. 각각 '덕천인''력포인'이라고 부르는 이들 화석은
구석기 시대 중기의 한반도에 사람이 살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가장 뚜렷한 증거하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이에 앞선 1972년에는 위의 승리산 동국유적 상픙부에서 구석기시대 후기에
해당하는 사람의 아래턱뼈가 출토되었는데, 이 화석을 '승리산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평
양시 승호구 만달이의 동굴유적에서도 구석기시대 후기에 속하는 사람의 머리...어깨...다리뼈
와 각종 도구가 발견되어, 이를 '만달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묵한에서는 이들
'만달인'과 '승리산인'을 한민족의 직접적인 조상이라고 단정지음으로써 한민족의 기원을 평
양 지역의 선사시대 사람에게서 찾고 있습니다.
근래에는 평양 지역에서 단군의 무덤으로 전해오는 횡혈식 석실분을 발굴한 뒤, 이를 '단
군릉'으로 단정하고 성역화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따라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를 요동 지역에
서 찾던 과거의 입장을 다소 수정해 고조선은 평양 지역에서 건국하고 요동 지역으로 천도
했다가 나중에 다시 평양 지역으로 옮겨온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삼국시대는 고구려사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특히 평양성 건설과 천도를 중시
해 "평양이 세계적인 도시이며, 평양성 건설이 고구려가 강대국가이며 경제 문화가 발전된
국가였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러한 입장은 고구려의 후계 국가로 인식되는
발해라든지, 오늘날의 개성과 평양을 2도 체제로 운영했던 고려 왕조에 대한 시각에도 반영
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고조선-고구려-발해-고려로 이어지는 왕조사에 정통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땅과 사람 그리고 국가
신라의 통일과 민족의식
신라의 통일전쟁에 대한 북한 역사학계의 부정적 시각은 나름대로 일정한 설득력을 지니
고 있습니다. 특히 고구려 공격에 신라가 소극적이었다든지 그 영토의 대부분을 상실한 것
등은 통일의지를 의심케 하는 요소임에 틀립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의 삼국통일이라는 결과를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
다. 앞에서 소개한 두 가지의 비판적 시각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반론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신라가 외세(당나라)를 뜰어들여 동족국가인 고구려와 백제를 명말시키는 반민족적
행위를 자행했으므로 '통일'이라는 신성한 용어를 사용할 수 없다는 입반에 대해서입니다.
사실 결과가 아무리 좋더라도 원인과 과정이 옳지 않다면 긍정적인 평가를 얻기 어려운 것
이 역사입니다. 더욱이 우리처럼 단일민족임을 강조해 온 나라에서 반민족적인 해우이를 통
해 자시의 이득을 취했다면 당연히 비판받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입증해야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당시 고구려...백제...신라의 사람들이 삼국을
과연 동족국가로 인식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반민족적'이라는 용어를 당시의 신라에 적용하
려면, 우선 '민족적'이라는 용어가 성립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그들이
'같은 민족' 혹은 '동족'이라는 개념을 가졌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물론 삼국은 혈동과
언어라는 측면에서 어느 정도의 동질감을 가졌던 듯합니다. 그러나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생
가하는 것과 같은 짙은 동족의식, 민족의식은 아니었습니다. 어찌보면 그것은 구속력이 전현
없는 다소 막연한 느낌에 불과했습니다.
삼국은 수백 년동안 100여 회가 훨씬 넘을 정도로 치열하게 다투었습니다. 그 사이 적과
우방은 수시로 바뀌었습니다. 백제의 세력 팽창에 대항해 고구려와 신라가 연합했고, 고구려
의 남하정책에 대항해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맺었습니다.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뒤에
는 고구려와 백제가 연계해 양공작전을 펼쳤습니다. 이처럼 급변하는 정체속에서 끊임없이
싸워야 하는 삼국의 목표는 오직 하나, '생존'이었을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살아 남으려는 동
물적 본능이 정치...군사논리를 지배하고, 국가의 모든 정책을 좌우했을 것입니다. 서기 660
년, 황산벌 전투에서 장군 김흠순이 아들 반굴을 그리고 장군 품일이 아들 관창을 적진으로
뛰어들어 죽게 한 것은 바로 그 같은 이데올로기에 충실히 따른 것이라 하게Ttmqslke. dEo
신라인에게 백제는 반드시 쓰러뜨려야 내가 사는 원수국가에 불과했을 뿐입니다. 그것은 지
난 수백 년동안 끊임없는 싸움이 만들어낸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더욱이 우리의 삼국은 중국의 삼국시대처럼 하나였던 나라가 나뉘어서 형성된 것이 아닙니
다. 따라서 다시 하나로 만들어야 한다는 목표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삼한시대
이래로 끊임없이 이웃의 작은 나라들을 병합하면서 국력을 키워온 것이 곧 고구려...백제...신
라로 정리된 삼국입니다. 이들에게 민족이라는 개념이 있었을 리 만무합니다. 상황이 이러한
데, 민족의식이라는 오늘날의 잣대를 신라인들에게 들이대는 것은 공정하지 못합니다. 아니,
달리 생각해보면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 유민들을 흡수함으로써비로서 우리
역사상에 민족이라는 개념, 동족이라는 개념이 탄생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해석일 것
입니다.
삼국시대 사람들이 동족의식, 민족의식을 지녔는지에 대해서는 후삼국시대가 일종의 시사
점이 될 수 있습니다. 궁예가 기치로 내세운 명분은 고구려를 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
한 기치가 해당지역 사람들의 많은 공감을 불러왔고, 엄청난 폭발력과 파괴력을 지니게 되
었던 것입니다. 이는 곧 신라에 병합된 지 200여년이 흘렀는데도 고구려는 신라와 구별된다
는 의식, 백제 사람은 신라사람과 다르다는 의식이 여전히 존재했음을 의미한다고 하겠습니
다. 이러한 의식은 아마도 혈통을 특히 중시하는 골품제적 사고방식의 영향 때문이기도 하
겠는데, 고려 중기에도 신라 재건 움직임이 한반도의 동남부 지역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오늘날에 준하는 민족의식이 분명하게 자리잡게 된 시기는 아마도 고려 후기쯤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고려 후기를 다루면서 다시 언급하기로 하겠습니
다.
신라의 통일과 만주
다음으로 신라가 만주 지역을 상실하는 등 고구려 영토의 대부분을 당나라에 빼았겼으므
로 통일이라고 하기 어렵다는 지적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사실 그렇습니다. 백제의 영토는
모두 신라 차지가 되었지만, 고구려 땅의 대부분은 당나라에 귀속되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
가 멸망한 지 30년 이 지난 후, 당나라에 귀속된 땅의 상당부분은 다시 발해라는 새로운 왕
조의 영토로 변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라고 말합니다. 그렇다
면 고구려는 신라에 통합되었다고 말하기 어려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 역시 당시의 상황을 홀시한 패 현재의 가치관과 판단기준으로 과거를
재단한 결과라 하겠습니다. 역사의 발전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먼저 당시의 영토 의식, 영토
개념에 접근해야 합니다. 신라의 만주지역 병합은 지금 우리의 소망일 뿐입니다. 고구려는
광개토왕 때 신라를 도와 신라 영토 내에서 장기산 군사활동을 벌였으며, 또한 신라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또 장수왕 때에는 신라의 수도에 고구려 군사
가 주둔할 정도였다고 일본거시 웅략기는 전합니다. 이러한 상황은 삼국이 어느 정도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상시의 국가와 영토 개념이 지금 우리의 생각과는 많
이 다르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신라에게 만주 지역은 애초부터 관심 밖이었습니다. 신라의 관심은 오로지 국가보존에 있
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가능하다면 신라로서도 더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이라고 하는 중국 최대의 제국과 국운을 걸고 정면 대결해야 하는 일이었
습니다. 한반도의 중...서부지역에서 당나라 군대를 몰아내는 것만으로도 힘에 겨웠던 신라입
니다. 그런 신라에게 만주 지역 병합은 너무 지나친 요구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준 삼아
신라의 통일 전쟁을 평가하는 것은 너무 인색한 태도라 하겠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나라'란 곧 왕조를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왕조의 기준은 영토가 아닙니
다. 사람입니다. 왕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왕이 죽고, 왕실이 몰락했다면, 그것은 곧 나라
의 멸망을 의미합니다. 중국 한나라의 왕실과 성이 다른 왕망이 즉위해 신을 세웠다가 다시
왕족인 광무제가 한을 재건했는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후한이라 하여 전한과 구별했습니다.
삼국시대에 체제...세력...지리적으로 중심이 되었던 왕조는 위나라였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
람들은 단지 한나라 왕족의 일파인 유비가 세운 나라라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촉한을 정통
왕조로 여겨왔던 것입니다. 이처럼 고대의 국가 개념의 핵심은 왕실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라는 비록 고구려의 영토를 모두 병합하진 못했지만, 고구려의 왕족인 안승과 고구려 재
건 투쟁의 주역들을 흡수함으로써 적어도 이념적으로는 고구려를 신라에 병합했습니다. 그
것은 발해가 지리와 문화적으로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라는 사실과 또 다른 측면에서 큰 의
리를 지니는 것입니다.
우리는 7세기 후반 이후의 신라가 과연 통일 왕조인가를 논하기 전에 먼저 끊임없는 대립
과 경쟁이 불러온 피해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물론 삼국의 경쟁은 정치...경제...사회...군
사...문화적으로 발전 속도를 배가시키는 데 기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정 기간
의 긍정적인 측면일 뿐입니다. 삼국의 정립이 고착화하고 서로간의 견제가 심해지면서 서로
의 불이익을 초래하는 일도 적지 않습니다. 우선, 중국의 역대 왕조는 동북아시아에 새로운
통합왕조가 등장하는 것을 원치 않았고, 그래서 삼국이 서로 다투지 않고 친하게 지내기를
고대했습니다. 동이족의 힘을 최대한 분산시킴으로써 자기들에게 감히 도전할 수 없는 집단
으로 남게 하려는 계획이었지요.
또한 삼국 중 고루려와 백제에서는 내부적으로도 이미 심각한 문제가 노정되고 있었습니
다. 군사적 대치 상황은 군사독재정권의 탄생과 부정부패를 엄호...은폐하고 호도하는 데 이
용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기강이 해이해지고, 그것이 결국 내분으로 이어지고 말았습
니다. 이러한 상황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신라의 통일전쟁에 대해 인색하게 평가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누르고, 당나라 군대를 몰아낼 수 있었다는 사실
에 높은 점수를 주며 박수를 보내야 할 것입니다.
신라의 삼국통일이 지니는 의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지는 했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불완전한 것이었습니다. 앞에서의
지적과 같은 여러 가지 한계가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
리 민족사에서 신라의 삼국통일이 지니는 의의는 매우 높다고 하겠습니다.
먼저, 고구려...백제...신라로 나뉘어 각기 다른 체제 속에서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던 사람
들이 신라의 통일을 계기로 하나의 체제, 하나의 문화를 누리는 가운데 뚜렷한 국가 공동체
내지 민족공동체를 형성했다는 점입니다. 그리하여 나중에 통일 신라의 지배체제가 붕괴되
면서 고구려와 백제를 재건하려는 움직임으로 인해 또 한 번의 삼국시대를 맞이하기도 했으
나, 이번에는 (후)삼국 모두 통일을 당연한 과제로 인식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둘째, 정복전쟁이 일단락됨으로써 국력이 배가되어 국제사회에서의 국가 경쟁력이 높아졌
다는 점입니다. 과거 고구려의 경우에도 중국측의 왕조가 부담스럽게 느길 정도로 강한 군
사력을 자랑했고, 또 실제로 수차례의 대귬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그 힘을 실증해 보이기
는 했으나, 그것은 지리적 조선과 전략...전술에 의존한 군사 분야에서의 힘에 한정괸 것이었
습니다. 그러나 신라의 통일 이후에는 평화로움 속에서 전쟁으로 인한 인적...물적 피해가 최
소함으로써 정치...경제가 매우 안정되었으며, 그것은 곧 국제 사회에서 신라의 위상을 높이
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셋째, 하나의 국가 체제 속에서 국민의 응집력을 기반으로 자랑스러운 문화를 꽃피웠다는
점입니다. 서로 비슷하면서도 각기 독특한 기술...문화를 가꾸어온 삼국의 사람들이 하나의
체제하에서 결속됨으로써 이제 더욱 세련되고 풍요로운 문화를 꽃피울 수 있게 된 것입니
다. 더욱이 통일이 가져다준 평화를 한동안 기술...문화의 발전을 가속시키고 신라 사람들로
하여금 다양한 문화를 향유할 수 있도록 유도했습니다.
"신라가 아니라 고구려가 통일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적
지 않은 듯합니다. 시계를 되돌려, 만약 고구려가 통일을 했다면 이후의 우리 역사는 어떠했
을까요? 그러나 역사에서 가정이란 통하지 않는 법입니다. 아무리 고매한 가정이라도 그것
은 무의미한 넋두리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고 또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가정
을 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가정을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가슴깊이 새겨두어
야 하겠습니다.
정작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신라가 어떻게 통일할 수 있었는지, 다시 말하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랄까 비결은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일입니다. 시대
가 아무리 달라져도 원리는 같은 법입니다. 그런 점에서 남북으로 분단된 우리에게 신라의
삼국통일이라는 사건이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고 하겠습니다.
3) 신라는 어떻게 통일할 수 있었는가?
서기 660년 백제 멸망, 668년 고구려 멸망, 676년 당나라 군대 퇴각 등의 대규모 정세 변
동을 거친 후, 드디어 우리 역사상에도 정복전쟁의 종식이라는 평화가 찾아 왔습니다. 그 평
화를 가장 자랑스러이 만끽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물론 신라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4~5세기경까지만 하더라도 신라는 삼국 중 가장 후진적이고 가장 군사력이 약
한 나라였습니다. 심지어 내물와 때에는 신라의 사신이 고구려 사신을 따라가서 전진에 조
공했을 뿐 아니라 고구려에 인질을 보내고 정치적 간섭을 받을 정도였으며, 실성왕과 눌지
왕 때에도 역시 그런 상황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집니다.
신라가 대외적으로 크게 팽창한 시기는 법흥왕과 진흥왕의 재위 무렵입니다. 이 시기에
신라는 금관가야를 병합하고(532), 대가야를 멸망시키는(562) 등 가야지역 정복작업을 성공
적으로 진행시켰습니다. 그리고 서기 551년에 백제와 힘을 합쳐 고구려로부터 한강 유역을
탈취했으며, 553년에는 다시 백제로부터 한강하류역을 빼앗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이처럼 명
분에 얽매이지 않고 철저히 실리를 추구하면서 차근차근 세력을 양쪽으로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국력을 갖추게 된 것입니다.
신라의 국력이 성장했다고는 하지만 고구려 내지 백제를 압도할 정도는 결코 아니었습니
다.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여전히 열세라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불안한 모습을 보인 적이
많습니다. 그런데도 신라는 삼국간 경쟁의 최종 승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일
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건강한 문화 - 화랑도
먼저, 신라인의 결집력과 문화적 건전성이 삼국 통일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고 봅니다. 당
시 고구려...백제에 비해 신라의 기술...문화는 후진적 상태였다는 것이 많은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입니다. '후진'이라는 말은 남보다 뒤떨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뒤떨어져서 좋을 리 없지
요. 그러나 가끔은 촌스럽고 거칠고 단순한 것이 고급스럽고 세련되고 복잡한 것보다 나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것이 필요한 순간도 있습니다. 사회의 분위기가 고급스럽고 사치스럽게
되면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만연한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그것은 반대로 촌스러운 사회는 집
단화하는 경향이 잇다는 말로 대체 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인지 불교만 하더라도 교리의 이론...법제화에 치중한 고구려의 삼론종, 백제의 율종
에 비해 신라에서는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화를 추진하는 데 사상적으로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화엄종이 유행했습니다.
신라인의 결집력을 과시하는 단적인 예로는 화랑도를 들 수 있습니다. 화랑도는 귀족 자
제로부터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일종의 청년전사단을 조직해 평상시에는 일정 기간(3년?)
을 함께 수련하고, 유사시에는 정규 군부대에 배속되어 전투에 참여했던 무리를 말합니다.
이것은 누가 시켜서 억지로 운영하는 지단이 아니며, 구성원 모두가 자발적으로 참여했다는
데에 더 큰 의의가 있습니다. 그리고 골품제 사회가 수반하는 필연적 모순, 곧 신분계층간의
갈등을 완화하는 사회적 기능도 충실히 수행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화랑도의 사회적 기능은 6세기 말에 원광법사가 화랑 및 낭도가 지녀야 하는 덕목을 제시
했다는 이른바 '세속오계'를 통해서 더욱 긍적정으로 평가될 수 있습니다. 5가지 덕목은 다
음과 같습니다.
(1) 임금에게 충성한다.
(2) 부모에게 효도한다.
(3) 벗과는 믿음으로 사귄다.
(4) 싸움에서는 물러서지 않는다.
(5) 생명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요구되는 위의 5가지 덕목이 화랑도를 통해 신라 사회의 절대 가치와
규범이 되었기에 귀산...사다함...해론...소나...취도...핍실...관창...김흠운...비령자...합저...죽죽...필
부...녹진...검군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충신과 의인, 용사를 배출하고 자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위에 열거한 사람들의 행적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열전을 참고하시기 바
랍니다.
외교전의 승리
신라의 삼국통일은 외교전의 승리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신라의 외교역량이 발휘된
작품이었습니다. 신라의 국내...외 상황에 대한 능동적 대처와 외교 역량은 김춘추의 행적을
통해 퉁분히 시사받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배경이랄까 연원은 진흥왕대의 한강유역 점령
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따져볼 수도 있지만 폭을 좁혀 설명해보겠습니다.
거시 642년은 백제의 의자왕 2년이자 신라의 선덕왕(선덕여왕)11년 그리고 보장왕이 즉휘
한 해입니다. 이 해 7월에 백제는 왕이 직접 신라를 공격해 40여개의 성을 빼앗았으며, 8월
에는 장군 윤충이 거느리는 군대가 신라의 대야성(기금의 경상남도 합천 지방을 가리키는
데, 대량주 혹은 대향주로도 표기된다.)을 함락시켰습니다. 그리고 항복한 성주 품석과 그의
가족을 모두 죽인 다음 머리를 베어 수도인 사비성으로 보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김춘추
는 망연자실 기둥에 기대어 서서 하루 종일 꼼짝도 하지 않았다고 삼국사기는 전합니다. 대
양성주 품석은 김춘수의 사위였고, 춤석의 아내 고타소랑은 김춘추의 딸이었기 때문입니다.
백제에 대한 김춘추 개인의 원한도 그리려니와 백제의 신라 공습이 확대되고 거세지면서
당장 신라의 대중국 교통로인 한강 유역이 위협받게 되자, 김춘추는 고구려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보장왕을 만나 백제 협공책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보장왕은 오히려 예전에 신라가
빼앗아간 죽령 이북의 땅을 되돌려 달라면서 김춘추를 억류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습니
다. 고구려-신라 사이에는 한 차례 긴장이 조성된 끝에 무사히 귀환한 김춘추는(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상)>조에 의하면, 김춘추가 억류되었을 때 고구려왕의 총애를 받는 신하인 선
도해에게 뇌물을 주고 풀어줄 것을 요청하자 선도해가 술좌석에서 '용왕 딸의 심장병을 고
치기 위해 뭍으로 온 거북의 꼬임에 빠져 용궁으로 끌려가던 토끼가 거짓말로 거북을 속인
뒤 숲으로 되돌아 올 수 있었다'는 내용의 이야기를 들려 줌으로써 김춘추에게 도움을 주엇
다고 한다. 사실 여부를 떠나 오늘날의 수궁가와 비슷한 내용의 고려왕조 이전에 이미 민간
에 널리 회자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한다.) 서기 648년에는 당나라로 건너가 고구려
문제로 고심하던 당 태종에게 백제를 정벌한 후 고구려를 정벌하자고 제의해 성공했습니다.
더욱이 그는 자신의 셋째아들인 김문왕을 당나라에 남겨 숙위(궁궐을 숙직하여 지킨다는 뜻
으로, 당나라의 주변 나라들이 왕자나 귀족 자제를 보내 당나라에 머물게 함으로써 인질은
물론 조공...문화사절 그리고 당나라 황제의 고문 역할이 되게 한 데어서 나온 말이다.)하게
함으로써 양국의 결속을 굳게 다지고 당나라의 약속이행을 재촉하기까지 했습니다. 또한 일
본서기에는 김춘추가 당나라로 가기 전인 서기 647년에 일본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전하는
데, 사실 여부를 떠나 당시 신라가 기울인 다각적인 외교정책을 짐작케 하는 대목입니다.
당나라에 대한 신라의 외교정책은 대략 두 가지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바야흐로 백제가
신라를 공격해 국가 절멸의 위기에 처해 잇다는 것 그리고 백제는 당나라가 몹시 실어하는
고구려와 내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배제가 고구려와 내통하며 신라의 조공을 방해한
다는 호소는 당나라를 자극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실제로 백제와 고구려가 내통했는지는 정
확히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위와 같은 신라의 간절한 호소에 대해, 당시 백제와 고구려
는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을 뿐더러 적극적으로 대처하지도 못했습니다.
김춘추가 당나라를 다녀온 뒤에도 고구려와 백제는 적어도 각각 3회와 2회 이상은 당나라
에 조공했으나, 신라의 외교전략을 꺾지 못하는 소극적인 외교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당나라 태종이 김춘추에게 '평양 이남의 땅은 모두 신라에게 주겠다'고 호언한 바를
실행하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당나라의 패권주의가 강하게 작요해 고구려...
백제가 운신할 수 있는 촉이 처음부터 좁긴 했지만..........
주체적 군사활동
신라의 삼국통일은 군사적 측면의 매우 효율적인 전략...전술에 기인한 바도 적지 않습니
다. 국내...외 상황에 대한 신라의 능동적 대처는 비단외교 부분에만 한정되지 않았습니다.
우선, 진흥왕 12년(551)에 백제와 연합해 고구려를 공격, 죽령 이북지역을 탈취했고 깉은 왕
14년에는 백제와의 연맹을 파기하며 한강 하류역에 진출했는데, 이로써 신라는 정치...경제...
군사...문화적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대 신라인의 기준이 되었던 것은 물
론 실리였습니다. 이후 신라는 백제와 치열하게 경쟁하는 사이에 고구려와의 관계는 비교적
운만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김춘추가 고구려에 억류되었을 때에는 김유신이
1만여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위협함으로써 무사히 귀환시키는 단호함을 보이기도 했습니
다.
신라의 실리에 입각한 능동적 전쟁...외교 수행은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뚜렷하게 부각되었
습니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 당나라가 야욕을 드러내자마자 신라는 과감히 당나라 군대를
공격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당 태종의 약속을 상기시키면서 전쟁이 신라의 본의
가 아니라는 뜻을 끊임없이 당나라에 전달했습니다. 그것은 매우 공손하고 겸손한 태도였지
만, 절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강렬한 투지의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모든 것은
신라의 뜻대로 되었습니다.
호국의지
신라 사람들의 호국의지와 자신감 역시 삼국통일의 원동력이었습니다. 그것은 신라 불교
의 특징인 불국토 사상을 통해 어느 정도 드러나기도 했지만, 구체적인 사례로는 선덕왕 14
년(645)에 승려 자장의 건의로 창건한 활용사 9층 목탑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황룡사 9층 목캅은 9한의 복속을 기원한 것인데, 1층은 일본, 2층은 중화, 3층은 오월, 4층
을 탁라, 5층은 응유, 6층은 말갈, 7층은 단국, 8층은 여적, 9층은 예맥을 의미했다고 합니다.
더욱이 '9'라는 숫자는 보통 '많다' 혹은 '극을 의미하며 중구의 선진 시대에는 천하...세계를
의미하기도 했으니, 황룡사 9층 목탑은 결국 신라 중심의 세계관...우주관을 표현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신라 사람들의 자신감은 통일 이후에 오악 정신으로 구현되었습니다. 국토 안에
있는 명산 중 5곳을 지정해 국가적 제사를 지낸 것인데, 동쪽의 토함산, 서쪽의 계룡산, 남
족의 지리산, 북쪽의 태백산 그리고 중앙의 부악을 가리킵니다. 5악은 국토를 굳건히 지키고
자 하는 의지의 표현인 동시에 신라를 중심으로 한 세계관의 분출이며왕권의신성함을 만방
에 과시하는 방편이기도 했습니다.
이상은 제가 배우고 생각한 것을 정리한 것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절대성을 갖는 것은 아
닙니다. 만약 여러분 중에 따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다른 각도에서 새롭게 정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꼭 지켜야 하는 규칙 혹은 원칙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근거를
충분히 제시할 수 있어야 하며, 그를 통해 다른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입니다. 제 말에 수긍이 간다면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과 느낌을 다시 하번
정리해 보시기 바랍니다. '근거'와 '공감'이라는 원칙에 주의하면서..........
4) 닮은 꼴 - 고려의 후삼국 통일
우리 역사상 (전) 삼국시대와 후삼국디새가 있으며, 그 두 시대의 상황이 여러모로 닮았다
는 점은 앞에서 이미 간략하게 설명한 바 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전)삼국시대는
신라가 통일했으며, 후삼국시대는 고려가 최후의 승자로서 재통일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물
론 이때의 고려는 궁예가 세운 고려가 아니라 왕건이 다스리던 고려를 말합니다. 왕건은 어
떤 사람이었을까요?
고려의 건국설화
삼국사기와 고려사 등의 사서에 의하면, 고려 태조 왕건은 송악 곧 지금의 개성 지방에서
행세하던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신라 말기에 지방에서 행세하던 사람 내지 집안을
우리는 흔히 호족이라고 부릅니다. 나중에 제 7장에 보게 될 바와 같이 신라 하대에는 중앙
의 세력 다툼이 계속되면서 신라 정부의 공권력이 약해지고 사회 기강이 헤이해졌으며, 그
결과 지방에서는 호족들이 독자 세력을 구축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왕건의 집안도 그중
하나였던 듯합니다. 조금 더 알아볼까요?
옛날 스스로 성골 장군이라고 칭하던 호경이라는 사람이 백두산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부
소산 왼편 골짜기에 정착해 살다가 평나산 여신의 눈에 들어 산신이 되었는데, 그후 밤마다
예전 부인의 꿈에 나타나 합방하더니 강충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강충은 용모가 단정하고 재주가 많은 사람으로서, 서강 영안촌의 부잣집 딸 구치의에게
장가들어 갈다가 "부소군을 부소산 남쪽으로 옮기면 삼한을 통합할 사람이 태어나리라"는
풍수가 팔원의 말을 듣고 그대로 따른 뒤 송악군으로 이름을 바꾸고 드디어 상사찬이되었
다. 제물을 많이 모은 강충은 두 아들을 낳았으니, 큰 아들은 이제건이고, 작은 아들은 손호
술이다. 손호술은 나중에 보육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보육은 이제건의 딸인 덕주에게 장가들어 두 딸을 얻었는데, 그중 작은딸이 진의로서 아
름답고 재주와 지혜가 많았다. 어느날 언니가 오관산의 꼭대기에 올라 오줌을 누매 그것이
흘러 천하에 넘치는 꿈을 꾸었는데, 진의가 비단을 주고 꿈을 쌌다. 그후 당나라의 숙종이
아직 왕자일 때 신분을 속이고 동쪽으로 유람하다가 보육의 집에 들러 두 딸을 보고는 마음
에 들어 옷을 꿰매달라고 했다. 보육이 손님의 비상함을 알아채고는 큰딸을 들여보냈으나
문지방을 넘는 순산 코피가 터져 그냥 물러나오고, 대신 작은 딸인 진의가 모셨다. 숙종이
한달간 머무르는 사이에 진의에게는 태기가 있었다. 숙종이 길을 떠나면서 "나는 당나라의
귀한 집안 사람인데,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이 활과 화살을 주시오 하고는 다시 돌아오지 않
았다. 진의는 사내아이를 낳아 작제건이라고 했다. 작제건은 나중에 보육을 국조 원덕대왕응
로 그리고 진의를 정화왕후로 추존했다.
작제건은 16세가 되어 어머니인 진의로부터 활동 화살을 붇자, 아버지를 찾아서 중국으로
행했다. 상선을 타고 가던 중 서해 용왕의 부탁을 받아 도술을 부리는 늙은 여우르 대신 죽
이고 용왕의 장녀인 저민의와 혼인한 후 다시 돌아왔다. 저민의를 그냥 용녀라고 부르기로
한다. 자손이 동방의 왕이 되리라는 예언을 듣고 돌아온 작제건은 개주...정주...염주...백주와
강화...교동...하음현 사람들의 영점을 받고 그들이 지어둔 영안성의 궁실에서 살았다. 작제건
은 나중에 의조 경강대왕 그리고 용녀는 원천왕후로 추존되었다.
작제건과 용녀는 사내아이 넷을 낳았는데, 장남이 용건으로서, 나중에 이름을 융으로 바꾸
었으니, 이 사람이 바로 태조 왕건의 아버지 세조이다. 세조는 체격이 크고 도량이 넓은 사
람으로서, 삼한을 병탄할 뜻을 품고 있었다. 세조는 꿈속에서 매번 어떤 아름다운 여인과 만
나 부부되기를 약속했는데, 어느 날 송악에서 영안성을 가던 중 꿈속의 여인과 똑같이 생긴
여자를 만나 혼인했다. 여자의 이름과 출신을 전혀 알지 못했으므로, 사람들은 그 여인을 몽
부인이라고 부르고 나중에 삼한의 어머니가 되었다 하여 한 씨를 성으로 감았다. 이 사람이
곧 위숙왕후이다.
어느 날 풍수지리에 밝은 승려 도선이 찾아와 풍수에 맞추어 새로 집을 지으면 왕자가 태
어난다는 것과 앞으로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왕건이라 할 것을 세조(용건)에게 일러주고 떠
났다. 도선의 말대로 아이가 태어나 17세 되던 해에 도선이 다시 찾아와 왕건에게 용병술과
지식에 관한 지식 등을 가르쳐주었다.
이상은 고려사의 고려세계편에 실린 내용을 간추린 것입니다. 위의 내용을 그대로 믿을
수 없음은 물론입니다. 거기에는 전래의 신화 내지 설화를 참고한 듯한 흔적이 이 매우 많
기 때문입니다. 가령, 호경이 백두산에서 부소산으로 이주하는 대목이라든지 작제건이 용녀
와 혼인하는 대목 등은 고구려의 주몽설화를 연상케하며, 동생 진의가 언니의 꿈을 산 뒤에
당나라 숙종과 맺어지는 부분은 김유신의 둘째 뉴이동생인 보희가 언니의 꿈을 산 뒤 김춘
추와 맺어졌다는 이야기와 매우 흡사합니다. 이러한 짜깁기는 왕건의 출생신분을 신성하게
꾸밈으로써 왕실의 권위를 높이려는 고대...중세적 사유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습니다.
건국설화에 담긴 사회상 - 근친혼과 균분상속
여하튼, 위의 고려 세계에는 당시 사람들의 관념과 풍습, 사회상이 반영되어 있어서 우리
의 흥미를 자아냅니다.
우선 손호술(보육)이 자기 친형의 딸인 덕주에게 장가든 것은 근친혼 풍습의 반영으로서,
혈통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신라...고려사회의 특징을 대변한 것입니다. 앞에서 잠시 소개한
바 있지만, 신라에서는 골품제에 입각해 적어도 상류층에서는 근친혼이 일반적인 혼인형태
였습니다. 그것은 고려왕조도 마찬가지여서 원나라 간섭기에 이를 때까지 왕실 내부의 혼인
이 다반사로 이루어졌습니다. 신라의 신분질서가 고려시대에 그대로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관념상으로는 여전히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호경이 성골장군을 칭했다
는 대목은 바로 그러한 분위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작제건을 기준으로 외조부인 보육과 외증조부인 간충 그리고 자제건의 외고
조부인 호경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가계가 매우 중시되고 있다는 접입니다. 이는 조선 중기
이후로 굳어져버린 엄격한 가부장제 내지 직계가족제와는 전혀 다른 혈통관념으로서, 여성
들의 지위와 역할이 후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매우 놓았음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그 한가지
사례로서 충렬왕때 박유가 "우리 나라 사람들은 지금 모두 처를 한 명만 두고 있기 때문에
아들이 없어도 감히 첩을 둘 생각을 못하고 있다."면서 축첩제를 건의했다가 뭇부녀자들의
항의와 지탄을 받고 곤경에 처했었다고 하는 고려사의 기록을 들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고려말기만 하더라도 여자가 호주로 기재된 예, 호적에 딸과 사위가 기재된 예,
호적에 아들과 딸을 구별 않고 나이순으로 기재한 예, 시집간 딸이 재산을 상속받는 예 등
을 부지기수로 찾아낼 수 있습니다. 특히 상속은 당시 사람들의 일반화된 관념을 가장 분명
하게 표현해주는 것이라 하겠는데, 남자와 여자, 형과 아우의 차별이 없었던 것으로 알져집
니다. 이른바 균분상속이었기에 제사도 무론 똑같이 돌아가며 차례대로 지냈고, 나아가 인지
되는 친족의 범위도 후대에 비해 상재적으로 더 넓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평등권은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되지 않고 독립 개체로서 인정되었기 가능했습니
다. 그래서 당시의 여서들은 정조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얼마든지 재혼할 수 있었던 것입니
다. 문덕왕후 유씨와 성종의 결합은 재혼이었으며, 순비 허씨의 경우에도 충선왕과의 혼인이
재혼이었다고 합니다. 고려시대의 여성들이 누렸던 자유의 일단을 짐작케 하는 사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또 하나, 고려세계를 일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왕건의 집안이 바다와 깊이 관련이 되었
을 가능성입니다. 강충이 서강 곧 지금의 예성강 근처에 살던 여자와 혼인한 것, 작제건이
서해 용왕의 사위가 된 것 등은 바로 그런 점에서 주목되며, 정주(풍덕)...염주(연안)...백주
(배천)...강화...교동 등지의 사람들이 작제건과 용녀를 환영하고 궁실을 지어주었다는 대목은
작제건이 예성강과 강화도 부근의 서해 연안 지역에서 크게 활동한 대표적 해상세력이었음
을 시사하는 것을 볼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왕건은 신라 말기에 개성을 중심으로 황해도
및 경기도의 일부 지역을 정치...경제...군사적으로 장악했던 호족이라고 정리해도 무발할 것
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왕건의 집안이 예성강 유역과 강화도에 설치되어 있던 패강진...
혈구진 등의 군지 세력과 연계되어 있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습니다. 어쩌면 작
제건의 아버지를 당나라 숙종 운운한 것은 왕건의 집안이 중국과의 무역에 고나여했던 경험
을 반영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도선이 왕건의 탄생을 예언했을 뿐만 아니라 왕건에게 각종 능력을 전수했다는 대목은 신
라 말에 크게 유행한 풍수지리설의 영향임이 분명합니다. 실제로 도선과 왕건이 만났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왕건이 고려왕조를 세우고 민심을 신라로
부터 멀어지게 하는 데에 풍수리지설을 적극 이용했으며, 또 이후에도 각종 국가행사와 왕
실의 내규에 풍수지리설을 많이 반영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도선이 고려왕조를 개창한 태
조 왕건의 스승으로 묘사된 점을 통해 그 무엇보다 뚜렷하게 시사되어왔습니다.
왕건의 즉위와 고려 건국
고려사에 의하면, 진성여왕 10년에 (896)에 송악군의호족인 용건은 아들 왕건과 함께 궁예
의 휘하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궁예에게 요청해 당시 20세이던 왕건을 개성에 새로 쌓은
발어참성의 성주로 임명케 했습니다. 그후 왕건은 각종 전투를 통해 곡적을 쌓았는데, 특히
해상활동이 두드러집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신라 효공와 7년(903)에 후백제의 허를 찔러
한반도 서남부의 나주...광주 지역과 진도 등지를 점령한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왕건이 수군
을 이끌고 금성군을 비롯한 10여개 군은 공격해 점령함으로써 후백제의 해상교통로를 차단
하는 배후의 군사거점을 확보한 것입니다. 궁예의 막료로서 해상대장군을 거쳐 수상인 시중
의 지위에까지 오른 왕건은 서기 918년에 홍유...배현경...신승겸...복지겸 등의 투재를 받아
궁예를 몰아내고 왕위를 오른 다음 국호를 고려, 연호를 천수로 고쳤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에는 자신의 본거지인 개성으로 도읍을 옮김으로써 자신에게 도전하는 세력들을 견제했습니
다.
새로운 왕조를 건설한 왕건은 개성과 평양을 새롭게 단장함으로써 고구려 계승의지를 kd
하게 표현했으며, 오월...후당 등과 교류해 국가의 위상을 높이는 한편, 군사적으로 곤경에
처한 신라를 자주 도움으로써 신라와의 우호를 대외에 과시하기도 했습니다. 대신 후백제에
대해서는 다소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이러한 정책은 신라 사람들의 호감을 얻는 데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듯합니다. 어찌 보면, 견훤의 신라에 대한 적대감은 고려의 친 신라정택
때문에 더 고양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서기 935년 고려의 신라 병합 그리고 이듬해의 후백제 멸망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대해서
는 앞에서 이미 간략하게 설명한 바 있으므로 다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반
드시 지적해두고 싶은 것은, 고려의 후삼국 통일은 처음부터 의도된 것이었으며, 또한 같은
시대 사람들에 의해 당연시되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라의 통일로 인해 하나의 국
가 안에서 함께 생활해온 사람들이기에 비록 각각 고구려와 백제의 재건을 부르짖긴 했지만
다시 하나의 국가로 환원되어야 한다는 생각만큼은 공유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신라의 삼국통일은 다시 한번 그 큰 의의를 인정받을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당연시되
던 통일을 마침내 아무런 분열없이 성공적으로 실현시켰다는 점에서, 고려의 재통일 역시
그 의의는 매우 크다고 하겠습니다.
통일을 이룬 사람 - 왕건의 매력
그러면 고려는 과연 어떻게 통일을 이룰 수 있었을까요? 이 물음을 영웅사관에 입각한다
거나 '왕실=나라'로 인식했던 고대...중세적 관점에서 다시 표현한다면, 아마 이런 물음이 될
것입니다. 도대체 왕건의 어떤 면이 그로 하여금 후삼국 통일의 주역이 되게 했을까요?
우선, 왕건의 관용과 겸손 그리고 인내심을 장점으로 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타
도해야 할 기득권 층의 표상인 신라의 경순왕 귀족층에 대해서, 또 생존을 걸고 다투어야
했던 적국의 왕 견훤에 대해서 그는 항시 겸손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경순왕과 신라의 왕실
이 포로와 다름없는 상화에 처했을 때에도 왕건은 그들이 스스로 왕관을 벗어 자기들에게
씌어 줄 때까지 기다릴 줄 알았습니다. 물론 한편으로는 다른 경로를 통해 그들을 협박하고
회유했을지라도, 상대방을 완전히 굴복시키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차지하는 데에 가장 평화
적인 방법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견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견훤이 누구입니까? 왕건의 입장에서 보면, 고려왕조
의 원수국인 후백제의 괴수요, 공산 전투에서 자기를 죽음의 코앞에까지 몰아넣었던 사람이
며, 자신의 수족인 신승겸과 그 밖의 많은 충신들을 죽인 원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데도 왕건은 그가 자기에게 귀순한 뒤에도 상보라고 부르는 겸손함을 과시했습니다. 비록
그것이 가식적인 겸손함에 불과했다 할지라도, 승리감에 도취되어 잠시의 섣부른 권위를 누
리기보다는 더 큰 승리를 위해 관용하고 인내할 줄 알았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왔던 것
입니다. 이러한 왕건의 관용과 겸손은 고려왕조에적대적인던 호족세력들의 귀순을 재촉했습
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왕건의 통일을 앞당기는 촉매제가 되었습니다. 고려 태조 왕건의
통일과정을 관망하면서, 우리는 새로운 새대를 열어가는 지도자의 덕목을 배워야 하겠습니
다.
다음으로, 그는 자신의 한계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각지에서 반독립
적으로 활동하는 호족들과의 관계를 항상 원만하게 유지했습니다. 그가 재지 호족들과의 관
계를 항상 원만하게 유지했습니다. 그가 재지 호족들과의 유대를 공고히 하는 방법으로서
즐겨 이용한 것은 혼인과 사성이었습니다.
궁예의 휘하에 있을 때 왕건은 정주 호족가문의유씨와 나주 호족가문의 오씨에게 차례로
장가들었는데, 이는 모두 그의 군사활동 중에 이루어진 것으로서, 그의 왕성한 해상활동의
기반이 된 듯합니다. 정변(쿠데타)을 통해 궁예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뒤에는 자신의 불안
한 입지를 보강하기 위해 거경에 거주하던 행파의 두 딸과 혼인한 것을 비롯해 홍유...유금
필...박수경...왕유...왕규 등을 비롯한 무인...무인의 딸들과 혼인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박수경
은 누이...질녀...달을 차례로 왕건에게 시집보냈으며, 아 규는 두 딸을 시집보냈다고 합니다.
후백제를 멸망시킨 이후에는 박영규의 딸을 19번째 비로 삼았는데 박영규는 견훤의 사위였
습니다. 이처럼 혼인을 통해 세력간의 유대를 모색한 결과, 왕건은 왕후 6명과 부인 23명을
두었으며, 더 많은 수의 자녀를 얻었습니다. 리러한 혼인정책은 나중에 왕위쟁탈전을 유발할
소지가 매우 높았으므로, 나중에 고려 왕실은 내부의 분열을 방지하기 위해 근친혼을 적극
권장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왕건이 자신의 맏딸 낙랑공주를 경순왕에게 시집보냄으로써
경순황의 양위를 재촉한 것도 혼인을 이용한 심리적 압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혼인 이외에 유대를 맺는 방법으로는 성씨를 하사하는 방식을 이용했습니다. 명주 곧 지
금의 강릉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김순식이 서기 922년에 d아들을 보내 항복하자 그에게 자
신의 왕씨 성을 줌으로써 의제적 친족관계를 맺었으며, 청주의 대표적인 호족인 이가도에게
도 역시 마찬자지였습니다. 이처럼 서로 스스럼없이 성시를 주고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만
큼 당시 사람들이 명분과 위세보다는 실리를 중시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곰곰히 따져보면,
새로운 세상을 주도적으로 열었던 사람들은 모름지기 소탈한 실리를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
겼던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참고문헌>
이기백, 신라정치사회사연구, 일지사, 1974.
이만열, 삼국시대사, 지식산업사, 1976.
이기동, 신라 골품제 사회와 화랑도, 일지사, 1984.
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경상북도, 통일기의 신라사회 연구, 1987.
이호영, 신라삼국통합과 려...제 패망원인 연구, 서경문화사, 1997.
김갑동, 나말려초의 호족과 사회변동 연구,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1990.
한국고대사 연구회, 신라말 고려초의 정치...사회변동, 신서원, 1991.
이병도, 고려시대의 연구, 아세아 문화사, 1980.
박용운, 고래시대사(상), 일지사, 1985.
문경현, 고려태조의 후삼국통일 연구, 형서출판사, 1987.
하현강, 한국중세사연구, 일조각, 1988.
정용숙, 고려시대의 후비, 민음사, 1992.
제 6장 발해는 과연 우리의 역사인가?
1) 발해의 건국과 성장
고려의 멸망과 주민 이주
발해의 건국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구려의 멸망을 이야기 해야겠습니다. 발해가 건
국한 곳은 바로 고구려의 옛 터전이기 때문입니다.
서기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자 고구려 사람들은 대부분 당나라의 통치를 받게 되었습니
다. 물론 이에 저항하며 고구려 재건 투쟁을 벌인 사람도 적지 않았지만, 이미 대세가 기울
어진 뒤였기에 그 웅대한 목표에 도달하지는 못했습니다. 재건 투쟁에서 실패한 사람들 중
상당수는 신라로 망명하거나 당나라의 통치권 밖으로 빠져나가는 길을 택했습니다.
반면, 당나라의 통제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당나라의 포로가 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중
에는 자기의 터전을 떠나 당나라 각지로 강제 이주된 사람도 적지 않았는데, 기록에 나타난
것만 세어도 3만여 호를 넘습니다. 이를 인구로 환산하면, 보통 1호를 다섯 명 정도의 핵가
족 내지 직계가족으로 따지는 계산법에 의거할 때, 일단 15만 명 정도였다고 말할 수 있습
니다. 이들의 대부분은 수도권에 거주하던 사람이거나 당나라에 끝까지 저항한 지역에 살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당나라에 끌려간 사람들 중에는 다행히 요서의 영주, 곧 지금의 요령
성 조양시 근처에 정착한 사람도 잇지만, 서북쪽의 감숙성이라든지 산서성...안히ㅜ성 등 중
국의 선...남쪽 외곽지역에 배속되어 영영 되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옛날 정복전쟁이 한창이던 때에는 어느 지역을 정벌하고 나면 그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
의 일부 혹은 전부를 전혀 동떨어진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킴으로써 반란의 소지를 없애는
방법이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당나라는 비단 고구려만이 아니라 주변 각지의 소수
종족 내지 국가를 자주 정복했고, 그 중 상당수를 고구려...백제 사람들처럼 수만 리 먼 곳으
로 이주시켰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7세기 후반 무렵 대릉하의 중...상류지역에 위치한 영주
지방에는 고구려 상층부를 형성했던 사람들 이외에도 말간..거란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
었습니다. 말간은 송화강 인근, 곧 지금의 흑룡강성과 길림성의 북부지역에서부터 백두산 인
근지역에 걸쳐 거주하던 사람들을 가리키던 부족 명칭으로서, 거주지역에 따라 대략 속말
부...백돌부...안거골부...불열부...오실부...흑수부....백산부 등으로 구분되는데, 그중 흑수부가 가
장 강했다고 합니다. 이들 중 불열부와 흑수부를 제외한 나머지 부족은 고구려의 영역 속에
포함되어 고구려의 구성원으로서 활동했거나 예속되었던 것으로 알려집니다. 특히 이들은
매우 용맹하고 사냥을 잘했기에 고구려의 전위부대로서 이름을 떨쳤다고 합니다. 따라서 고
구려가 멸망하자 대부분의 말갈족은 큰 타격을 입었으며, 일부는 강제 이주의 대상이 되었
던 것입니다.
거란은 서요하 상류, 곧 지금의 내몽고 자치구에 있는 시라무렌강 인근지역에서 유목생활
하던 종족을 말합니다. 이들 역시 말갈족처럼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살고 있었는데, 고구려
의 광개토왕...장수왕 때 일부가 정복되어 고구려에 예속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당나라의
세력 팽창에 대항하다가 실패함으로써 당나라의 직...간접적인 지배를 맏게 되었으며, 일부는
영주 등지로 끌려가 생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대조영의 귀한
한편 요동 지역에서는 고구려 유민의 저항이 계속되었던데다가 서기 676년에 새로이 설치
한 요동성의 안동도호부와 건안성의 웅진도독부 운영마저 신통치 않아서 이 지역에 당나라
의 통치력은 매우 미약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던 중 서기 696년 5월에 영주에서는 거란족의
이진충이 무리를 이끌고 일종의 독립투쟁을 일으켜 당나라를 매섭게 공격하자, 인근지역이
매우 큰 혼란에 휩싸였다고 합니다. 같은 해 9월에 이진충이 죽은 뒤로는 그의 처남인 손만
영이 거란의 군대를 이끌고 지금의 북경 근처까지 진격했습니다. 그러나 당나라와 결탁한
돌궐에 의해 배후의 근거지가 함락됨으로써 이듬해 6월경 완전히 궤멸되고 말았습니다. 이
러한 거란족의 독립투쟁을 사람들은 보통 중국측의 기록에 의거해 '이진충의 난'이라고 부릅
니다.
난이 평정된 뒤에도 일부는 당나라에 대항하는 군사활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이
진충이 군사를 일으킬 당시 강제로 끌려와 생활하던 다른 종족 집단들도 일부 난에 참여하
거나 당나라의 통제를 벗어난 것으로 알려지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걸사비우와 걸걸중상이
이끄는 무리였습니다. 이들은 혼란을 틈타 자신들의 본거기가 있는 동쪽으로 이동했으며, 요
동 지역에서 각각 정착했습니다.
이때 당나라는 측천무후가 나라이름을 주로 바꾸어 다스리고 있었는데 걸사비우에게 허국
공, 걸걸중상에게 진국공이라는 작호를 주면 회유했습니다. 그러나 걸사비우가 이를 거절하
자, 이진충의 부하였다가 항복한 거란의 장군 이해고 등을 시켜 공격하게 했습니다. 이해고
의 군대는 먼저 걸사비우가 이끄는 무리를 격파한 다음 걸걸중상의 무리를 뒤쫓았다고 합니
다. 그런데 이때 걸걸중상은 이미 병으로 죽은 뒤였고, 그의 아들인 대조영이 아버지를 대신
해 무리를 이끌고 있었습니다.
구당서...신당서...오대회요 등의 중국측 기록에 따르면 재조영의 무리가 천문령을 넘어 피
신하자 이해고의 군대가 뒤쫓아가 공격했는데, 이 싸움에서 이해고는 간신히 빠져나올 정도
로 대태했다고 합니다. 천문령의 위치에 대해서는 정확하지 않지만, 대체로 길림성의 혼하와
휘발하 사이에 놓인 지금의 합달령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발해의 건국
이해고의 군대를 물리친 대조영은 거사비우의 휘하에 있던 무리가지 한데 모은 다음 동모산
에서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진국의 왕이라 칭하며 촌통이라는 연호를 사용하니, 이때가 서
기 698연으로서 고구려가 망한 지 꼭 30년이 지난 해였습니다. 동모산은 지금의 길림성 돈
화시 현유향에 위치한 산으로 이곳에는 해발 정상부에 성산자산성이 남아 전합니다. 그러나
대조영은 이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곧 주변의 평지로 내려와 도시로 건설한 것으로 알려집
니다. 그 도시가 지금의 어디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선사자산성에서
동쪽으로 목단강을 건너 약 5km쯤 간 곳에 위치한 영승 유적일 개연성이 높다고 말합니다.
마침 영승유적의 북쪽 인근에는 발해의 초기 무덤으로 알려진 육정산 고분군이 분포하고 있
어서 학자들의 추정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각종 역사 기록에서는 발해의 건국지인 이곳이
구국으로 칭해져 왔습니다.
고왕 대조영은 구국에서 주변의 여러 집단을 흡수하며 세력을 키우는 한편, 서북방의 돌
궐, 남방의 신라와 교류했습니다. 그리고 서기 705년에는 측천무후가 죽고 중종이 집권하게
되면서 당나라와의 관계도 다소 호전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서기 713년에는 당나라로부터 대
조영이 발군왕 홀한주도독에 책봉되었습니다. '발해'라는 국로가 국제적으로 통용되기 시작
한 것도 바로 이때부터입니다. 그 이전에는 중국측에서 단지 '말갈'이라고 부름으로써 국가
임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서기 719년, 고왕 대조영의 뒤를 이어 아들인 대무예가 즉위하니, 이 사람이 바로 무왕입
니다. 무왕은 죽위하자마자 인안이라는 연호를 사용하면서 고구려 영토 회복을 목표로 세력
확장에 주력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흑수말갈 공격계획을 반대하던 아우 대문예가 당나라
로 도망가자 그의 처벌문제로 당나라와 언쟁이 붙었고, 그결과 무왕은 거시 732년에 군사를
보내 바다 건너 당나라의 등주 곧 지금의 산동성 지역을 공격했습니다. 이 전쟁은 발해의
군대가 등주에 주둔하던 당나라 군대를 격파한 뒤 그대로 돌아가고, 또 당나라의 반격이 실
패함으로서 더 이상 확대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음해인 서기 733년에 당나라의 요청
에 확대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음해인 서기 733년에 당나라의 요청에 따라 신라가 발
해 공격군을 출동시켰다가 폭설로 실패한 후로는 발해와 신라 사이의 외교 관계가 매우 악
화되고 말았습니다.
일본의 신라정토계획과 발해의 호응
신라와의 관계는 소원했던 대신 서기 727년에 개시된 일본과의관계는 발해가 멸망할 때까
지 매우 우호적이었습니다. 발해와 일본의 외교사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8세기 중엽
에 일본에서 입안된 이른바 '신라정토계획'입니다. 서기 758년, 등원중마려의 지원하에 효겸
천황을 하야시키고 왕좌에 오른 순인 천황은 즉위하자마자 신라를 공격한다는 계획을 세운
뒤 발해에 사신을 파견했습니다. 발해를 끌어들여 협공 또는 양동작전을 펴기 위해서지요.
일본의 사신은 다음해인 759년과 761년에도 빈버니 발해를 오가는 열의를 보였습니다. 이에
대해 처음에는 발해도 깊은 관심을 표명해 답례 형식으로 사신을 즉시 일본에 보내 세부계
획을 논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몇 년 지나지 않아 발해는 신라정토계획에 매우 소극적
인 입장으로 바뀌었습니다.
여기에는 당시 발해의 국내...외 사정이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서기 758년은
당나라에서 저도사 안록산과 사사명이 반락을 일으킨 해입니다. 흔히 '안사의 난'이라고 부
르는 이 반란은 사사명이 그의 아들에게 피살된 763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진압되었을 정
도로 당나라를 혼란 속에 빠뜨린 큰 사검이었습니다. 그런데 안사의 난이 발발한 지점이 발
해와 가까운 지역이었으므로 발해로서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또, 당나라 정
부에서는 발해가 반란세력과 연계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서기 762년에 문왕을 '발해국왕'에 책
봉하는 선심을 쓰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복잡한 상황으로 인해 발해는 신라협공계획을 더
이상 진전시키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사실 그것은 당시 일본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본이 신라를 정벌하려고 한 표
면적인 이유는 신라의 '예의없는 태도'때문이었습니다. 즉, 서기 753년에 일본의 사신이 신라
를 방문했을 때 사신의 태도가 오만...무례하다고 하여 경덕왕이 접견을 거부한 적이 있는데,
이것이 일본정부를 매우 불쾌하게 만들어, 아예 신라정토계획을 세우도록 만들었다는 것입
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그 같은 이유에 대해 쉽게 수긍하지 않고 있습니다. 당
시 일본정부는 '신라정토'라는 거 한 계획에 비해 실질적인 준비는 그다지 서두르지 않았으
며, 더욱이 동쪽의 하이를 정벌하는 데에 군사력을 적잖이 투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래서 일부에서는 당시 일본 정부의 신라정토계획이 실은 순인천황의 즉위와 등원중마려의
집권에대한 반박을 무마시키기 위해 고안한 국내 선전용일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그
리고 여기에는 안사의 난 등으로 중국의정세가 불안해지자, 그 파장이 바다를 건너 일본으
로 건너올 것에 대비하려는 목적도 개재되지 않았을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이른바 바다를
건너오는 파장으로서는 대표적인 것이 해적들의 활동이라고 하겠습니다.
여하튼, 순인천황이 실각하고 등원중하며의 반란이 실패한 서기 764년, 효겸천황이 다시
아 위에 오름으로써 '신라정토계획'은 전면 백지화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발해와 신라 사
이에도 우려하던 군사적 충돌이 전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8세기 중엽에 있었던 발
해와 일본 사이의 빈번한 사신 왕래는 신라를 자극하기에 충분했고, 그것은 거시 762년에
신라가 서흥...봉산...고간...수안...해주...재령 등 서북쪽의 변경지대에 성을 쌓고 태수를 배치
하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발해의 도성과 5경
발해의 세 번째 왕인 문왕 대흠무는 무완의 아들로서, 서기 737년에 즉위해 793년에 죽을
때까지 무려 56년을 재위했습니다. 그 사이에 그는 세 번을 천도했는데 우선 즉위한 후 얼
마 지나지 않은 742년경에 중경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756년경에는 상경으로 그리고 790년
무렵에는 다시 동격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합니다. 문왕이 죽은 뒤 혼란 속에서 데 4대 왕
대원의를 몰아내고 서기 793년에 추대된 성왕 대화여는 즉위하자마자 상경으로 다시 도읍을
옮겼으며, 이후 발해는 서기 926년에 거란의 공격을 받아 멸망할 때까지 천도하지 않았습니
다. 따라서 위에서 밝힌 연도는 대략적인 추정치에 불과합니다.
발해는 늦어도 9세기경에는 5경제도를 실시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5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1)상경은 지금의 흑룡강성 영안현에 위치한 동경성 발해진 (2) 중경은 길림성 화룡현의 서
고성자 (3)남경은 함경남도 신창군 토성리에 위치한 청해토성 (4) 동경은 길림성 혼춘시의
팔련성 (5)서경은 길림성 혼강시의 임강진에 비정하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5경이외에 발해의 전 국토는 일단 15부...62주의 행정구역으로 나뉘어졌으며, 그 아래에느
s사시 100여개의 현이 설치되었습니다. 25개의 부 가운데5부는 5경에 중복 설치되어 있었습
니다. 예를 들면 상경에는 용천부, 중경은 현덕부, 남경은 남해부, 동경은 용원부, 서경에는
압록부가 설치되었던 것입니다. 15부의 장관을 도독이라고 부렀으며, 62주의 장관은 자사 그
리고 100여개에 달하는 현의 장관은 현스이라고 불렀습니다. 도독은 관할하의 자사를 지휘...
감독했던 것으로 알려집니다.
그런데 이러한 행정구획은 사실 대부분 자연 촌락으로 한 것이었으로, 촌락민을 이끌던
수령들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이들 수령이 각 행정구
역의 군사...행정 책임자로서 적극 이용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2) 대조영의 고향
지금가지 우리는 보통 발해가 고구려의 후신임을 굳게 믿어왔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우선
발해의 영토가 과거 고구려의 영토와 대부분 일치한다는 점, 고와 대조영이 고구려의 장군
출신이라는 점, 문화적으로도 고구려 문화를 상당 부분 계승했다는 점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발해의 지배층은 소수의 고구려 유민이며, 피지배층은 다수의 말갈족이라고
이해해왔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중국 사람들은 우리와 매우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말에 따
르면, "발해는 당나라 때 속말말갈 사람이 서기 698년부터 926년까지 우리 나라(중국) 동북
지방과 소련의 연해주에 걸치 광대한 지역에 건설했던 지방 봉건정권"에 불과하다는 것입니
다. 위의 인용문은 그들의 공식적인 입장입니다. 이러한 견해의 밑바닥에는 55개에 달하는
소수민족을 모두 보듬어야 하는 중국의 현실이 작용하고 있는 듯합니다. 다시말하면, 현재
중국의 영토에 포함된 지역의 역사는 모두 중국의 역사에 귀속된다는 일종의 원칙이 작용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우리 역사의 일부임이 분명한 고구려조차 중국의 지방정
권쯤으로 간주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발해의 역사적 성격에 대한 이해가 사람마다 전혀 다른 이유는 발해 지배층의 종
족계통에 대한 구명이 미흡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왕실과 국가를 동일시하는 고대...중세적
역사가 에입각한다면, 발해의 건국주체인 대조영의 출신지는 발해의 국가 성격을 규정지을
수도 있을 정도로 매우 중요한데, 그 중요도에 비해 연구자들의 해석은 여전히 제각각이어
서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대로, 중
국은 중국대로, 또 러시아는 러시아대로 각각 자기들에게 유리하도록 발해 사람들의 종족계
통과 문화문제를 이해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이는 매우 이기적이고 비학문적인 태도라고 하겠습니다. 학문은, 특히 인문과학은
진리르 목적으로 탐구하는 것입니다. 다라서 탐구결과를 어떻게 이해하고 이용할 것인가는
나중의 문제이며, 우선은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 곧 객관적인 연구가 이루어져하는 것입니
다. 이러한 노력과 연구가 선행되지 않은 그리하여 자신의 현재 입장만을 고려한 이기적인
해석과 이해는 결국 학문의 존재 이유마저 뒤흔들어놓게 될 것입니다.
발해 왕실의 조상인 대조영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어디에서 태어나 어떻게 자랐고, 또
어떤 사람들과 함께 나라를 세웠을까요? 이러한 물음에 대해 간단 명료하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직 없습니다. 자료가 워낙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발해말갈과 말갈발해
발해사를 연구할 때 자주 이용되는 역사서로는 구당서와 신당서...오대회요...책부원구 등의
중국측 사서와 속일본기...유츼국사와 같은 일본측 기록을 우선적으로 들 수 있습니다. 그리
고 우리의 역사서 중에는 삼국유사를 비교적 자주 거론한는 편입니다. 그런데 위에서 거론
한 역사서는 모두 발해의 역사 가운데 일부분만 전할뿐더러 각기 다르게 기록된 부분도 적
지 않아서 혼동을 일으키기 쉽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대조영의 출신에 관한 기록입
니다.
(1) 10세기 엽에 편찬된 구당서는 발해의 건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발해말갈의 대조영은 본래 고려의 별종이다. 고려가 멸망하고 나서 대조영은 집안 식구들
을 이끌고 영주로 옮겨와 살았다. 만세통천중에 거란이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키니 재조영이
말갈 사람걸사비우와 함께 각각 무리를 이끌고 망명해 동쪽으로 달아나 험한 곳을 차지하고
수비를 굳혔다. .........대조영이 굳세고 용맹스러우며 용병술에 뛰어나자, 말갈무리와 고려의
남은 무리가 점점 모여들었다. 성력 연간에 스스로 진국왕에 오르고, 사신을 돌권에 보내 통
교했다. (구당서 북적전 발해말갈)
(2) 서기 961년경 송나라의 왕부가 편찬한 오대회요는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발해말갈은 보내 고려종이다. 당나라 총장연간에 고종이 고려를 평정하고 그 나라 사람들
을 중국에 분산시켜 살게 했으며, 요외에 주와 현을 설치하고 평양성에는 안동도호부를 두
어 다스리게 했다. 만세통천 연간에 이르러 거란인 이만영이 반란을 일으켜 영부를 공격...함
락시키자, 고려 별종인 대사리 걸걸중상이 말갈 반란자 걸사비우와 함께 요동으로 달아나
고려의 옛 땅에서 나뉘어 왕위에 올랐다. .........이때 걸걸 중상이 이미 죽고, 그의 아들이 대
조영이 뒤를 이어 걸사비우의 무리를 아우르니, 병정을 배출할 수 있는 집이 40여만 호를
넘었다. 읍루의 옛 땅에 근거를 보전했으며, 성력 연간에 신하를 칭하며 조공했다. (오대회
요 발해전)
(3) 12세기 중엽에 편찬된 신당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서 고려에 부속되어 있었는데, 성은 대씨이다. 고려가 멸망하자,
무리를 이끌고 읍루의 동모산을 차지하니, 땅이 바로 영주 동쪽 2천리쯤에 있다. 남쪽으ㅗ는
신라와 니하를 경계로 삼으며, 동쪽으로는 바다에 닿고 서쪽에는 거란이 있다. 성곽을 쌍호
사니, 고려의 남은 무리들이 점점 모여들었다. 만세통천 연간에 거란인 이진충이 영주도독
조훼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자, 사리 걸걸중상이라는 자가 말강의 추장 걸사비우 및 고려
의 남은 무리와 함께 동쪽을 도망가 요수를 건너 태백산 동북쪽을 차지하고 오루하에 의거
해 성벽을 쌓고 굳게 지켰다. ...... 이때 걸걸중상이 이미 죽고 그 아들 대조영이 고려...말갈
병으로 이해고의 군대를 물리치니, 이해고가 져서 돌아왔다. 이에 거란이 돌궐에 붙어 당나
라 군대의 길이 끊겨 토벌할 수 없게 되자, 대조영은 곧 걸사비우의 무리를 합한 다음 거칠
고 먼 것을 믿고 나라를 세워 스스로 진국의 왕이라 부르며 사신을 보내 돌궐과 교류했다.
(신당서 북적전 발해)
(4)우리의 삼국유사에는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통전에 이르기를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서, 그 추장인 대조영 때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
고 스스로 진단이라고 불렀다. 선천연간에 비로소 말갈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오로지 발해라
고 부르기 시작했다. .........'라고 했다. 삼국사에 이르기를 '의봉 3년 곧 고조의 무인년에 고
려의 남은 무리가 모여 북쪽으로 태백산아래에 의지해 나라이름을 발해라고 했다. .........'라
고 했다. 도한 신라고기에 이르기를 '고려의 옛 장군인 대조영의 성은 대씨이다. 그는 남은
병사를 모아 태백산 남쪽에서 나라를 세우고 나라이름을 발해라고 했다.'고 했다. 위의 여러
글을 조합해보건대 발해는 바로 말갈의 별종으로서, 단지 그 갈라지고 합한 것이 같지 않을
뿐이다.(삼국유사 기이 말갈발해)
위 기록을 통해 우리는 대조영의 출신 성분이 두 가지로 달리 전해져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구당서...오대회요...신라고기처럼 고려의 별종 내지 옛 장군으로 전하는 입장과
신당서...통전처럼 속말말갈사람으로 전한 입장입니다. 어느 쪽이 옳을까요? 이에 대한 답변
은 매우 까다롭습니다.
고려의 별종
먼저 위의 기록에서 '고려'라는 나라이름을 자주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이 고구려의 후기
국호임은 앞장에서 임 설명한 바 있습니다. 따라서 혼동을 피하기 위해 '고려의 별정'은 '고
구려의 별종'으로 다시 바꾸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고려의 별종'은 '고구려의 별종'
으로 다시 바꾸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고구려의 별종'이란 과연 무슨 뜻일까요?
왜 대조영을 그냥 '고구려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고구려의 별종'이라고 소개했을까요? 제
생각에는 대조영이 보통의 고구려 사람과는 다른 어떤 특징을 지녓기 때문인 듯합니다. 즉
고구려 사람이기는 하지만, 고구려 왕실처럼 토종이랄까 뼈대있는 가문에서 태어나지 못한
사람을 가리킨다는 것이지요, 여기에는 고구려의 5부를 형성햇던 집단 이외의 사람들이 포
함되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말강...옥저...동예 사람들이 해당되겠지요. 그리고 나중에 병합
된 부여 사람중 일부도 이에 포함되었을지 모릅니다.
대조영이 말갈 출신일 가능성을 높여주는 사례로는 그의 아버지 걸걸중상의 이름을 지적
할 수 있습니다. 앞에 제시한 인용문에서도 보았듯이 처음에 걸걸중상은 말갈 사람임이 분
명한 걸사비우와 함께 행동했습니다. 걸걸중상과 걸사비우, 이 두 사람의 이름에서 우리는
막연하지만 어딘가 보이지 않는 끈이 연결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물론 객관화
를 추구하는 학문 연구에서 느낌을 운위한다는 자체가 매우 어색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완
전히 무시되어서도 곤란하다고 봅니다.
그러고 보면 구당서의 "발해말갈의 대조영은 본래 고려의 별종"이라고 한 대목은 신당서
의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서 고려에 부속되어 있었는데, 성은 대씨"라고 한 대목과 서로
통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고려의 별종이 곧 '고려에 부속되어 있던 속말말
갈'의 도 다른 표현이라는 것이지요, 바로 이런 점에서 구당서와 오대회요에서도 발해를 가
리켜 발해말갈이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조영이 속말말살 출신이었다고 해도, 극것은 그의 가계에 대한 생물학적 접근상
의 문제일 뿐입니다. '고려 별종'내지 '고려의 옛 장군'이라는 표현은 그의 관념이랄까 의식
이 '말갈 사람'보다는 '고구려 사람'을 지향하고 이성T다는 듯으로 받아들여질 수 잇기 때문
입니다. 그것은 걸사비우에 대해서는 꼬박꼬박 '말갈 사람'혹은 '말갈 추장'이라는 말을 붙엿
으면서 걸걸중상에 대해서는 전혀 그런 표현을 적용하지 않았을뿐더러 은연중 '고려의 남은
무리'와 연계시킨 사실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시사 받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걸걸중
상)과 비교할 때, 훨씬 더 고구려화 내지 중국화한 이름9대조영)도 역시 그러한 의식의 일면
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발해 왕실의 고구려 지향성
대조영과 그 후손들의 고구려 지향성은 일본과의 외교 과정에서 매우 뚜렷하게 드러났습
니다. 속일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서기 759년에 발해의 문왕은 일본에 사신을 보내면서 스스
로를 '고려국왕 대흠무'라고 부렀으며 일본에서도 발해의 왕을 '고려국왕'으로 불렀던 것입니
다. 뿐만 아니라 '발해'를 가리켜 자주 '고려'라고 불렀으며, '발해의 사신'을 '고려의 사신'으
로 표현한 사례가 일본측의 기록에는 꽤 많은 편입니다.
이처럼 생물학적 출신과 관념성의 출신이 각기 달랐기 때문에 발해와 남북으로 정립했던
신라측의 기록은 다소 혼동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신라에서 9세기 말엽에 활동한 최치원의
경우 "발해의 원류는 고구려가 멸망하기 이전 본래 보잘 것 없던 부락인 말갈의 족속이 번
성해져 속말소번이라 불리다가 일찍이 고구려를 따라 당나라로 옮겨와 살았는데, 그 수령인
걸사비우와 대조영 등이 측천무후 때에 이르러 영주에서 죄를 짓고 달아나 문득 거친 땅을
차지하고 비로소 진구이라 칭하게 된 것이다."라고 말했는가 하면, "옛날의 고구려가 곧 지
금의 발해"라고 하여 말갈과 발해에 대한 이중적 잣대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대고영과 그의 후손들이 고구려 지향성을 띠게 된 데에는 과거 고구려의 핵심 지배층이던
사람들이 발해의 건국과정에 깊이 참여하고 이후 정계에서 활발히 활동한 사실도 적잖이 작
용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고구려 왕실의 성씨였던 고씨가 발해 역사상 대씨의 다름의 대성
으로 등장한다는 연구 결과를 통해서도 어느 정도 입증될 수 있습니다. 즉 발해사와 관련된
각종 기록을 검토한 결과, 발해의 대회사절단의 대사와 부사에는 대씨 다음으로 고시가 많
이 임명되었으며, 특히 고씨는 발해 관료사회에서 중추 역할을 담당했을 개연성이 높은 것
으로 밝혀진 것입니다.
이상 간략히 살펴본 바와 같이, 발해는 말갈 출신의 고구려 사람인 대조영을 중심으로 과
거 고구려의 핵심 지배세력들이 대서 참여해 건국한 나라이며, 나라 안팎으로 고구려 계승
을 표방한 나라였다고 하겠습니다.
3) 발해가 남긴 것 - 문화유산
정리되지 못한 발해의 역사
서기 926년 정월 14일, 발해의 왕 대인선이 수도인 홀한성에서 거란군에게 항복함으로써
발해는 완전히 멸망했습니다. 그 전해인 925년 12월 16일에 거란의 태조가 발해 공격을 공
식 발표하고 군대를 출정시킨 순간부터 발해왕의 항복에 이르기까지의 한달에 걸친 전쟁과
정은 요사에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사는 거란이 세운 요나라의 역사를 기록
한 책으로 원나라의 탁극탁 등이 정리했다고 합니다.
요나라는 거란 사람 야율아보기가 서기 907년에 세운 나라로서 1125년에 멸망할 때까지
중국의 하북성 이북지역을 포함해 동북 3성(길림...요녕...흑룡강성)과 내...외몽고 자치구, 소
련의 연해주 그리고 지금의 몽골까지 차지한 대제국이었습니다. 태조(야율아보기) 당시의 국
호는 거란이었으나, 그의 아들인 태종이 즉위한 후 곧바로 나라이름을 '요'로 바꾸었다고 합
니다.
요나라는 발해의 역사를 정리하지 않았습니다. 발해를 그들의 선행국가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나중에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패권을 넘겨 받은 금나라의 경우에도 마찬
가지였습니다. 서기 1115년에 건국해 1234년에 멸망한 금나라는 여진족의 국가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발해 사람들이 직접 남긴 기록이 전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역사
를 미처 정리하지 못하고 거란에 멸망당한 것입니다. 이럴 경우, 발해의 뒤를 이은 나라가
발해의 뒤를 이은 나라가 발해의 역사를 정리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후속 왕조가 불분명해
정리해주지 못한 듯합니다. 즉 발해의 왕자를 비롯해 많은 유민이 고려로 망명함으로써 형
통과 관념이라는 측면에서는 고려가 계승국가라고 할 만하지만, 영토를 모두 거란과 여진에
게 빼앗기는 한계를 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발해에 대한 공식 역사기록은 구당서
와 신당서 등의 외국열전에 실린 간략한 소개가 전부인 것입니다.
우리의 역사 기록에서도 발해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대표적 고대사서인 삼국
사기에서는 기록이 편린마저 찾기 어려운 형편이며, 삼국유사에 전하는 단편적인 기록도 몇
몇 사료의 소개에 불과한 형편입니다. 아마도 관련 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인 듯
한데, 그나마 삼국유사와 고려사등에 편린이라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발해와 고려의 연계
성이 작용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한 연계성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
조선시대의 유득공은 발해고라든가 이십일도회고시와 같은 글을 통해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
가 우리 역사의 중요한 축임을 강조하기까지 했습니다.
여하튼, 발해 사람들이 밟던 땅의 대부분은 지금 우리 소유가 아닙니다. 그해서 우리가 발
해 사람들의 발자취를 조사하고 느끼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욱이 발해사에 대한 현지 사람
들의 조사...연구는 아직 미진한 상태인데다 발해의 국가 성격을 한쪽 방향으로 끌고 가려는
의도가 강해서 그들의 조사...연구 결과를 이용할 때에는 조심성이 요구됩니다.
발해의 고분문화
발해 사람들의 정체을 보다 분명하게 차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고분문화에 관심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인간사회에서 장례의식과 무덤만큼 전통을 중시하는 부분도 그리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고학자들이 어떤 시대와 집단의 문화적 특성을 고찰한다고 할 때, 여러 가지
문화유산 중에서 우선적으로 고분에 주목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 지니는 짙은 보수성 때문
입니다.
발해 시대의 고분은 각지에서 발견되지만, 특히 주목되는 곳은 구국의 소재지였던 길림성
돈화시 일대와 화룡현 일대 그리고 상격이 있던 지금의 흑룡강성 영안현일대입니다. 북한의
함경도 일대에서도 발해 고분이 확인...조사되었는데, 그 수가 대략 1,000여 기를 넘는다고
합니다. 고분은 크게 토광묘...석실묘...전실묘로 나뉘어지며, 그중 발해 지배층의 무덤으로는
석실묘와 전실묘가 자주 거론됩니다.
발해 건국 초기의 무덤 떼로 알려진 돈화기의 육정산 고분군에서는 지금가지 80여 기의
무덤이 확인되었는데, 그중 1949년에 발국...조사된 정혜공주묘는 당시 핵심 지배층의 문화적
분위기를 전해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정혜공주묘는 편평한 대지의 일부를 골라 얕게 찬 다음 현무암 판석과 장대석을 이용해 반
하의 횡혈식 석실을 만들고 흙으로 덮은 이른바 봉토석실분입니다. 현실의 규모는 대략 남
북2.0m 내외, 동서2.7m 내외이며, 말각조정식 천장 때문에 높이는 2.7m에 달한다고 합니다.
무덤앞에는 벽을 깐 묘도가 11m 정도로 길게 조성되어 있고, 여기에서 남벽 중앙부에 배치
된 연도를 통해 현실로 들어가는 구조입니다. 무덤안에서는 묘지명 1점과 암수 돌사자 한쌍
그리고 목관 조각 등이 발견되었는데, 묘지명의 내용을 통해 피장자가 문왕 대흠무의 둘쩨
딸인 정혜공주이며, 서기 777년에 40세의 나이로 사망해 780년에 진릉의 서쪽에 배장된 사
실을 알 수 있습니다. 진릉은 보통 정혜공주의 할아버지인 무왕 대무예의 무덤으로 알려지
고 있습니다.
서기 1980년에는 중경, 곧 지금의 서고상자 근처에 위치한 용두산 고분군에서도 묘지명이
있는 무덤이 조사되었습니다. 땅을 4m 깊이까지 깊게 판 다음 바닥과네 벽면을 모두 벽돌
로 쌓아올린이른바 전실묘인데 천장만은 판석으로 편평하게 조성했습니다. 현실의 규모는
남북 길이 3.1m 너비 2.1m 높이 1.9m 내외이며, 현실의 남쪽 벽 중앙부에는 실이 1.9m 규
모의 연도가 있고, 그 바깥으로 다시 7.1m 정도로 길게 조성된 계단식 묘도가 있습니다. 현
실 안에서는 부부로 보이는 남녀 한 쌍의 인골이 수습되었으며, 모두 12명의 인물을 그린
벽화가 확인되었는데, 주인공의 초상화는 없었다고 합니다. 현실 위의 지표면에는 벽돌로 탑
을 세워 불교의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했으나, 일찌감치 파괴된 탓에 원래의 형태는 정확히
알기 어렵습니다. 무덤 앞에는 조그마한 건물 터가 있어 관리원의 숙소로 추정되고 있으며,
산 아래에는 바닥 위에 세워져 있던 묘지의 내용에 의하면 피장자는 문왕의 넷째딸인 정효
공주로서 서기 792년 6월에 죽어 11월에 염곡의 서쪽대지에 배장되었다고 합니다.
위와 같은 간략한 검토를 통해 우리는 고구려의 봉토 석실분이 발해 핵심 지배층의 묘제
로 계승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덤 위에 건물을 짓던 고구려의 풍습도 여전히
행해지고 있었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의 변화에 따라 발해의 문화는 당나라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돌 대신 흙을 구워 만든 벽돌을 사용하는 예가 늘어나
고, 인물 벽화를 그릴 때에는 살이 쪄서 둥근 하얀 얼굴에 작은 눈, 가는 눈썹, 작고 붉은
입술 등이 특징적으로 부각되는 당나라식의 인물상을 많이 따르게 된 것입니다.
도성 방위체제와 당나라 문화의 영향
이러한 문화 흐름은 발해의 성곽을 통해서도 알아낼 수 있습니다. 발해 초기에는 산성을
매우 중시하는 군사체계를 갖추었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도시 중심의 광역 방어망
을 구성했던 것입니다.
구국에 도읍하던 시절의 방어체계를 살펴보면, 영승유적과 성산자산성 주변에 석호고성...
흑석고성...마권자고성...통구령산성을 비롯해 각종 보루를 배치함으로써 고구려 국내성과 그
주변의 산성...보루 배치구조를 연상케 합니다. 그리고 서고성자에 도읍했던 중경 시절에는
장항고성...요천고성...홍성고성...하남둔고성 등으로 구성된 방어망을 구축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방어망 구축은 발해의 도성 방위체제의 근간이기에 쉽게 변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
지만, 상경을 도읍으로 삼은 시절부터는 일단 당나라의 수도 장안성을 그대도 본떠 평지 방
어형 도성을 건설하게 되었습니다.
상경 시절의 도성은 추정되는 동경성은 전체 둘레 16km가 넘는 장방형 평지성으로 외
성...내성...궁성 등 3겹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성의 서남쪽에는 경박호가 있는데, 그곳에서
흘러나온 목단상이 동경성의 서쪽과 북쪽을 감싸며 지나가기 때문에 도성방어에도 도움이
될 뿐아니라 주변에 펼쳐진 비옥한 평야를 이용할 수 있어서 매우 좋은 입지입니다.
외성의 성벽은 먼저 돌로 일정한 높이의 담을 쌓고 그것을 흙으로 덮은 이른바 석심토축
으로 되어 있습니다. 외성의 동벽과 서벽은 길이가 대략 3.4km 정도미여, 남벽과 북벽은 각
각4.9km 내외라고 합니다. 성문은 남벽과 북벽에 3개씩 그리고 동벽과 서벽에 2개씩 배치해
모두 10개이며, 성벽 바깥으로는 해자를 돌렸습니다.
외성 내부의 북부지역에는 서쪽으로 약간 치우친 곳에 전체 둘레 4km에 달하는 내성이
있습니다. 황성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돌로 샇은 석성인데, 동...서...남벽에 각각 1개씩 문이
설치되었습니다. 내성(황성)의 북부지역 중앙에는 돌로 쌓은 궁성이 있습니다. 이속에는 7개
의 궁전이 있었으며, 남벽과 북벽에 각각 1개식의 문이 설치되었다고 합니다.
궁성의 남문과 내성(황성)의 남문 사이에는 큰길이 나 있고, 그 길 양쪽에서 각종 건물지
가 발견되었는데, 관아가 있던 곳으로 알려집니다. 내성의 남문과 외성의 중앙 남문 사외에
도 속칭 '주작대로'라고 부르는 큰길이 조성되었는데 너비가 110m에 달하는 초대형입니다.
이밖에 외성 동문과 서문을 잇는 도로 그리고 북문과 남문을 잇는 도로의 경우 너비가 50m
에 달했다고 하니, 그 규모의 방대함을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당나라의 문화가 발해에 급속히 영향을 미친 이유는, 비록 주민 구성이라는 측면
에서는 고구려 계승성이 강했으나, 고구려의 문화와 체제가 온전히 전달되지 못해 당나라의
정치...행정체제를 그대로 모방했기 때문인 듯합니다.
발해의 3성 6부제도는 당나라의 것을 본뜬 것입니다. 다만, 당나라에서는 6부 아래에 24사
를 둔 반면, 발해에서는 12사를 두어 규모를 줄였을 뿐입니다. 위에서 소개한 상경의 외성만
하더라도, 전체 둘레 36km가 넘는 당나라 장안성의 규모를 절반 정도로 줄여놓은 것에 불
과합니다. 그러나 당나라의 제도와 문화를 발해가 무조건 따라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모
방하는 가운데 새로운 형태의 독특한 문화를 창출했던 것입니다.
발해의 불교와 이불병좌상
발해는 불교국가하고 해도 좋을 정도로 불교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나라입니다. 그것은
우선 발해의 제 3대 왕인 문황의 존호가 '대흥 보력 효감 금휸 성법대왕'이라는 사실을 통해
서 충분히 눈치챌 수 있지만, 정효공부묘에서 모듯이 무덤 위에 아예 탑을 만들어놓을 정도
로 부처와의 일체를 꿈꾸었다는 점에서도 충분히 인정됩니다.
발해 지역에서는 지금까지 40여 곳에서 절터가 조사되었습니다. 그중 수도권에 위치한 것
만 골라 보면, 구국에서는 1곳, 중경 일대에서는 12곳, 동경에서는 9곳, 상경 일대에서는 10
여곳이 확인되었습니다. 특히 상격의 도성 내부에서는 최소한 8곳이상의 대형 절터가 확인
되어 불교의융성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금당의 양족 옆에 별도의 건물을 두고 회랑을 돌이
는 다소 특이한 형태의 가람 배치 속에서 사리탑이 발견되기도 했는데, 1975년에 동경성의
한 절터에서 수습된 사리함은 사리 5과가 든 유리병을 정교한 조각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은
합과 칠갑 등 7겹으로 싼 것이었습니다. 또한 상경 내부의 어떤 절터에서는 용암으로 만든
6m 높이의 거대한 석등이 발견되어, 절의 규모를 가늠케 해줍니다. 석등이란 탑 앞에 세워
놓는 돌로 만든 등을 말합니다.
발해의 불교와 관련된 유뮬 가운데 가장 독특한 것이 불상입니다. 지금까지 1천개 가까이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재료에 따라 석불...철불...금동불...도불...소조불...칠불등으로 나뉘어집니
다. 그중 니불 혹은 전부이라고도 하는 도불은 흑으로 빚은 뒤 북에 구워 만든 불상으로서,
상경과 동경에서 대량으로 출토되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도불은 중국과 일본에서도 발견된
바 있으므로 새삼스러울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중국과 일본에서 발견된 도불은 모두 납작
한 판의 형태였지만, 발해의 도불은 둥글고 입체적이어서 큰 차이를 보입니다.
한편, 동경과 서경 지역에서는 2개의 불상을 나란히 붙여 놓은 독특한 형태의 쌍둥이 불상
이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대부분 나란히 결가부좌한 상태에서 왼편 부처의 오른손을 오른편
부처의 왼손 위에 올려놓은 모습인데, 양 옆에 협시보살을 둔 것도 있습니다.하나의ㅡ커다란
광배를 공휴하는 이러한 쌍둥이 불상을 보통 이불병좌상이라고 합니다 이불병좌상은 보통
석가모니불과 다보불로 구성되며, 법화사상을 표현한다는 해석이 일반적입니다.
4) 사대 외교 - 평화공존의 원리
간지와 연호
앞에서 소개한 정혜공주와 정효공주의 묘지명에는 그들의 아버지인 문왕을 가리켜 성인,
대왕, 황상 등으로 부른 대목이 있습니다. 또한 8세기 후반에 일본과 교류하는 과정에서는
발해의 문왕이 천손을 자칭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발해의 왕이 대왕이니 천손이니하는 명
칭을 사용한 것은 과거 고구려의 왕이 대왕...태왕...성왕...성상 등의 용어를 사용한 것과 거
의 같은 취지에서 나온 행동으로 판단됩니다. 다만 자주적이랄까 스스로를 높인다는 측면세
서 본다면, 발해가 더 강한 자신감으로 보였다고 평가할 수도 있을 듯합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예 때문입니다.
먼저, 발해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왕이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습니다. 연호란 어느 한해를
부르는 명칭입니다. 왜 연호가 필요했을까요?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연대는 서양의 달력에 따른 것입니다. 그래서 서기입니다. 서기는
예수의 탄생을 기준으로 삼은 연대계산법입니다. 그러니가 서기 2000년이라면, 예수의 2,000
번째 생일이 든 해인 셈이지요. 동양에서 서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서양의 문물을 받아
들인 근대 이후입니다.
그러면 동양에서는 어떻게 연도를 계산했을까요? 중국에서는 간지라는 것을 만들어 사용
했습니다.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로 구성된 10간과 자...축...인...묘...진...사...오...
미...신...유...술...해로 구성된 12지를 짜맞추어 만든 것이 바로 간지입니다. 예를 들면, 10간의
'갑'과 12지의 '자'를 합해 갑자년(쥐띠)을 만들고, '을'과 '축'을 합해 을축년(소띠)을 만듭니
다. 또 '병'과 '인'을 합해 병인년(범띠)이라 불렀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정묘년(토끼띠)...무진
년(용띠)...기사년(뱀띠)...경오년(말띠)...신미년(양띠)...임신년(원숭이띠)...계유년(닭띠) 등이 이
어지며, 계속해서 갑술년(개띠)...을해년(돼지띠)...병자년(쥐띠) 등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이렇
게 10간과 12지를 줄줄이 연결하다보면 61년째에 처음의 갑자년이 다시 돌아오게 되는데,
이를 회갑 또는 환간이라고 합니다.
간지를 이용하게 되면서부터 사람들은 수백년전의 어던 사건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었
습니다. 가령, 당나라 고종 때의 '경신년'이라고 하면 서기 660년 이외에는 달이 그에 해당하
는 연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만약 왕의 통치기간이 60년을
넘는다면? 간지의 명칭이 겹치게 되어 혼동을 일으키기 쉬운 것입니다. 물론 첫 번째 경신
년, 두 번째 경신년등으로 구별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매우 불편한 구분법에 불과합니다 또
다른 문제점도 있습니다. 왕의 생존시에는 아직 시호를 사용할 수 업어 혼동이 불가피하고
왕이 죽은 뒤로 하더라도 감히 시호를 마구 부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더욱이 새로이 즉위한 왕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즉위를 세상에 널리 알려 새로운 시대가
열렷음을 홍보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는 교통이 불편한 시절이었으므로, 자기가
새로이 만든 달력, 자기의 즉위를 알리는 문구가 들어간 달력을 사용하게 하는 것이 무엇보
다 빠르고, 또 정확한 홍보방식이었습니다. 즉위했을 때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국가의 정
치제도를 혁신한다든지 분위기를 새롭게 한다는 측면에서도 새로운 이름을 간지 대신 달력
에 붙여 사용하게 함으로써 그의 의지를 세상에 널리 드러내었던 것입니다. 예컨대, 서기
649년에 즉위한 당나라의 고종은 영위하는 연호를 사용하다가 656년 1월에 현경이라는 이름
으로 바꾸었으니, 서기 660년(경신년)은 현경 5년에 해당합니다.
연호 사용에는 실용적인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국의 황제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지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국의황제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지상에 있는 모든 사람을 대
신 다스리는 존재로 자처했습니다. 따라서 주변에 위치한 여러 나라의 왕들오 중국 황제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 대신 해당지역을 다스리는 신하에 불과했습니다. 주변 나라의 정치에
대한 중국 사람들의 간섭은 바로 그러한 입장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기에 주변 나라에서
중국 황제가 정한 달력을 사용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것은 반대
로 주변 나라의 왕이 독자적인 달력을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연호 사용은 천자로서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었던 셈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연호를 발해의 왕이 사용한 것입니다. 이는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거부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물론 고구려에서도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도
한 신라에서도 연호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정된 시기의 일이었습니
다 예컨대 신라의 경우에는, 법흥왕이 서기 534년에 처음으로 건원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이
래 진덕여왕 때가지 개국...건국...대창...홍제...건복...인평...태화 등의 연호를 사용하다가 여러
차례에 걸쳐 당나라특의 항의 도는 책망을 들었는데 연호가 자꾸 외교상의 걸림돌로 작용하
자 서기 650년(태화 4년)부터는 결국 당나라의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후 멸망할 때가
지 중국측의 연호를 사용했던 것입니다. 고구려의 경우에는 광개토왕 때 영락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사실만 확인됩니다.
발해는 문왕이 인안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이래 말기가지 대흥...보력...중흥...정력...영덕..주
작...태시...건흥...함화 등의 연호를 계속 사용했습니다. 심지어 나중에 발해가 멸망한 뒤 그
유민이 세우 s작은 나라 정안국마저도 원흥이라는 연호를 사용할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연
호 사용이 매우 자연스러웠던 것입니다.
발해 조정의 자연스러운 연호 사용은 중국측에서 정한 각종 용어의 사용 제한규정마저 무
시하게 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중국측의 용어 사용법으로 보면, 그 사라므이 신분에 따라 적
용되는 용어가 달라집니다.
황제의 명령은 조...제...칙...책으로 표현하며, 태자의 명령은 영, 그밖의 왕자...공주 그리고
주변 속국의 왕이 내린 명령은 교라고 했습니다. 황제는 자신을 가리킬 때 짐이라고 하며,
제후인 주변국의 왕은 자신을 과인이라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후대의 사례이긴 하지만, 신하들이 황제를 부를 때에는 폐하라고 하고, 제후인 왕을 부를
때에는 전하라고 했습니다. 태자와 세자 역시 품격의 차이를 그러낸 용어라고 합니다. 그런
데 발해는 이러한 규정에 구애받지 않고 조라는 용어를 마음대로 사용했으며, 심지서 선조
성이라른 관청까지 두었던 것입니다.
발해가 이처럼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과연 무엇일
까요? 학자에 따라서 이렇게 정리하기도 합니다.
첫째, 고구려에서 사용하던 용어를 계승함으로써 고구려 중심의 독자적인 세계관도 함께
계승했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천손...대왕...성왕 등의 용어가 그 증거입니다.
둘째, 지리적으로 당나라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들의 견제를 상대적으로 덜 받고 있었
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길제로 발해보다 더 멀리 떨어딘 곳에 있던 일본은 훨신 더 강하
고 분명한 일본 중심의 세계관은 지니고 있었습니다.
셋째, 주변의 말갈부족 등을 통제하거나 복속시킴으로써 한편으로는 번국을 거느린 중심
국, 곧 활제 나라로서의 지외를 누렸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대와 조공 - 실리외교의 단면
나름의 독자적 세계관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발해는 여전히 중국 중심의 세계질
서를 벗어나지 못하는 조공국이었습니다.
조공이란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게 일정한 세금 내지 특산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국가간
불평등관계의 상징적 표현인 조공은 이른바 사대의 중요한 표징이 되어 왔습니다.
사대란 (작은 것이) 큰 것을 섬긴다는 뜻입니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사대는
비교적 일찍부터 평화로운 국제관계를 형성시크는 요인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그렇기에 정치...경제...군사...문화적으로 상대적 후진성을 면치 못한 발해에게 당나라에 대
한 조공은 현실 직시의 당연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실 직하는 측면에서 보면, 발해의 사대는 조선시대의 명분론에 입각한 관념적 사대주의
와 마땅히 구별되어야 합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발해의 사대는 자기중심적 세계관을 유지하
는 가운데 현실의 상황을 감안해 대처하는 이른바 실리외교의 한 가지 방법에 불과했기 때
문입니다. 따라서 당나라에 대한 발해의 조공은 선진문물의 수입을 목적으로 계획된 실리외
교 방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발해의 실리외교는 일면 삼국시대의 외교방식과 통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자기 나
라에 이익이 된다면 수십...수백 년 동안 대치해온 적국과도 기꺼이 동맹을 맺고, 필요하다면
어제의 우방에게 칼을 들이대기도 하는 그야말로 철저히 실리를 추구하는 외교가 삼국시대
에 펼져졌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4세기에는 백제에 대항해 고구려와 신라가 긴말한 우호를 유지했고, 5...6세기에
는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대항해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맺었으며, 6...7세기에 신라가 한강유
역을 차지하고부터는 고구려와 백제가 연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중국과의 외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고구려의 대중국외교 - 유연한 4세기
다 알다시피 고구려는 압록강변의 국내성을 중심으로 만주 지역 그리고 요동 지역으로 그
세력권을 점차 넓혀 나갔습니다. 그리하여 4세기 중엽경에는 요동 지역에서 전연이라고 하
는 매우 강력한 국가와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전연은 요서 지역에 기반을 두고 활동하던 선
비족이 4세기에 들어와 중구의 북부지역을 호령하게 되면서 세운 나라입니다.
당시 중국의 화북지역에는 전연 이외에 후조라고 불리는 나라가 있어 서로 경쟁했는데,
서기 38년에 후조는 전연의 수도인 극성 곧 지금의 요녕성 조양형을 공격했다가 실패한 것
이 있습니다. 그후 후조는 전연을 공격한는 일이 여의치 않자, 30만 섬의 곡식을 고구려로
보내 전연을 양쪽에서 공격하는 방안을 모색했고, 이에 고구려도 응한 듯합니다. 그래서인지
는 분면하지 않지만, 다음해인 339년에 전연의 왕인 모용황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의
신성으로공격하며 고구려를 압박했고, 싸움에서 진 고구려는 왕자를 보내 모용황에게 맹서
함으로써 전연의군대를 철수시켰습니다.
그러나 이후 고구려의 태도가 분명치 않자 전연의 모용황은 서기 341년에 직접 4만 대군
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해 수도인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고국원왕은 이듬해인 342년에 전연
으로 사신으로 보내 조공하며 자신이 전연의 신하임으로 인정함으로써 겨우 이천왕의 시신
을 되찾아 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용준이 새로운 왕으로 즉위한 349년에는 십 여년 전
에 전연에서 반란에 가담했다가 고구려로 도망해온 장군 송황을 송환시킴으로써 전연의 환
심을 샀습니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서기 355년에는 드디어 왕의 어머니가 돌아올 수 있
었습니다.
왕의어머니가 무사휘 귀환하자, 고구려는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전연과의 관계를 끊은 것입
니다. 그리하여 전연이 멸망하는 370년까지 단 한번의 조공사절도 보내지 않았습니다.
당시 전연은 추조를 깨뜨리고 화북지역 대부분을 지배할 정도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
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는 목표가 달성되자마자 전연에 대해 매우 냉담한 반응을
보였던 것입니다.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대외 관계, 그것이 4세기 무렵 고구려
외교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고구려의 양속 외교
중국에서 5...6세기는 양자강을 기준으로 남쪽과 북족에 각각 다른 왕조가 서서 대립하던
시기입니다. 즉, 북쪽에서는 북위...서위...북주...북제...수나라로 이어지며, 남쪽에서는 동신을
이어서 송...남제...양...진왕조가 차례로 섰다가 수나라에 의해 통일된 것입니다.
이처럼 화남과 화북의 두 세력으로 나뉘어 경쟁하던 시기, 특히 북위가 북량을 멸망시키
고 화북 지역을 제패한 거시 44년 이후를 남북조시대라고 합니다. 남북조시대에 고구려는
주로 북조 국가들과 그리고 백제는 남조 국가들과 교류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서기 433년 무렵, 화북 지방 제패를 눈앞에 둔 북위가 북연 마저 격파하면서 요동 지역에
관심을 보이자, 중국의 정세변동을 예의 주시하던 고구려는 일찌감치 조공하여 북위와의 마
찰을 피했습니다. 그리하여 435년에는 장수왕이 북위로부터 '요동군 개국공 고구려왕'이라는
작호를 받았으며, 이후 해마다 조공하는 친밀감을 과시했습니다. 물론 서기 436년경 고구려
로 방명한 북연 왕의 송환을 둘러싸고 북위와의 사이에 외교마찰이 빚어졌으며, 그로 인해
전쟁 직전가지 가는 험악한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지만, 남조의 송나라와 대치해야 했던 북
위의 현실을 고구려가 적절히 이용함으로써 우려하던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440년부터 고구려와 북위 사이의 외교 관계는 단절되고 말았습니다.
고구려가 다시 북위로 사신을 보낸 조공한 것은 거시 462년입니다. 그런데 일단 외교가
재개되자 고구려는 전에 없던 매우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특히 472년부터는 한 해에
도 2!3회나 사신을 보내 조공할 정도로 친밀한 국교를 과시했습니다. 고구려의 태도가 이렇
게 돌변하게 된 에는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먼저, 백제와의 외교전쟁을 벌인 것입니다. 백제는 4세기 이후 줄곧 남조세력과 교류해왔
습니다. 그러던 중 472년에 백제가 갑자기 북위로 가신을 보내 고구려와 남조와 내통하고
있다면서 고구려를 토벌하겠으니 원병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던 것입니다. 백제측의 이러한
요청은 북위측의 완곡한 거절로 무산되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고구려를 자극해 서기 475년
에 고구려의 대대적인 침공을 불러왔지만, 여하튼 백제가 계속해서 북위를 부추기게 된다면
고구려로서는 언제든지 매우 위험한 상황이 닥쳐 올 수 있으므로 미연에 방지해야 했을 것
입니다. 그리하여 백제의 움직임이 완전히 둔화되는 478년까지 고구려는 해마다 2!3회식 북
위로 사신을 보내 긴밀한 유대관계를 도모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다음으로는 중국 내부의 상황이 고구려와 북위의 관계를 더욱 가깝게 했을 것입니다. ,
450~452년경 북위와의 전투에서 빈번이 패한 송나라는 이후 내분에 휩싸임으로써 30년가가
운 시간을 혼란 속에서 보냈습니다. 그러나 같은 기산에 북위는 오히려 정치...군사적,d로 안
정되었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의 소박한 북방계 문화대신 사치스러운 중국계 문화에 흠뻑 빠
져들고 있었습니다. 다라서 당시 고구려로서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강대둑과의 긴장을 피하
고 선진적인 문화를 보다 쉽게 많이 수입하기 위해서라고 반드시 북위와 긴밀히 교륙해야
했을 것입니다.
북위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중에도 고구려는 북위의 경쟁국인 남조세력과의 관계를
게속 유지했습니다. 이러한 고구려의 이중적인 태도는 사실 당시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부
도덕하며 반인륜적인 행위를 비난받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고구려가 북위에 신하를 칭하
며 조공하는 이상, 다른 나라 특히 북위의 적대국에 조공한다는 것은 마치 한 삶이 두 임금
을 섬기는 것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5세기 말엽에 남제로 가던 고구려의 사신이 북위의 군사에게 체포되는 사태가 벌
어졌습니다. 현장을 목격한데다가 물증이 분명하기에 변명의 여지가 없으며, 따라서 군사적
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북위의 효문제는 남제와의 교류가 옳지 못함
을 지적하는 원론적인 책망에 그칠 뿐이었습니다.
서기 520년에는 남조의 양나라에 다녀오던 고구려의 사신이 다시 한번 북위 군사에게 체
포되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이번에는 고구려의 안장왕이 양나라로부터 받은 작호가 각종
선물이 증거물로 압류되었습니다. 바야흐로 험악한 분위기가 감돌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
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고구려가 중국의 남조와 북조 모두에게 조공하던 이중외교를 우리는 흔히 양속
외교라고 부릅니다. 양속외교는 유교적 이데올로기가 국제관계의 원리로 작용하던 당시의
관점에서 본다면 도저히 정당화될 수 없는 부도덕한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입장에
서 보면, 양속외교는 정확한 자기 인식과 상황판단이 낳은 실리외교, 자주 독립외교의 전형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발해의 대중국외교의 한계
발해의 당나라 이하 중국 왕조에 대한 입장도 기본적으로는 고구려의 태도와 크게 달았다
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상황은 달아서 이번에는 발해와 신라가 당나라를 사잉에 놓고
경쟁을 벌이는 듯한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문화란 물과 같아서 고이면 썩는 법입니다.
따라서 항상 이웃과 교육하며 다른 문화, 새로운 문화를 많이 접해야 자기의 문화를 더 탄
력있고 건강하게 가꿀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발해와 신라가 당시 초고의 선진국이
던 당나라와 열심히 교류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자기발전방법이었다고 평가할 수 잇습니다.
그러나 발해와 신라는 상호간의 은밀하고도 치열한 경쟁 그리고 당나라의 거대하고도 안정
된 국력 등으로 인해 외교의 주도권을 당나라에 일임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발해와 신
라는 당나라 조정에서 의전 상의 서열을 다투는 데 몰두했던 것입니다.
당시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열쇠를 쥐고 있던 당나라는 9세기 초엽에 설치한 빈공과라는
과거시험을 통해 주변국들에 대한 자기 나라의 우월한 지휘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홍보했
습니다. 빈공진사과의 준말인 빈공과는 당나라가 외국인 학생을 대상으로 따로 설치한 과서
시험입니다. 빈공과 합격자의 이름은 국내 ㅂ격자의 임름을 적은 방의 말미에 붙였을 뿐
아니라 합격된 뒤에도 비천하거나 한가로운관직을 주는 정도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당나라
입장에서 보면, 한마디로 그리 대단치 핞은 시럼이었던 것이지요. 그런 일단 합격한 사람이
자기 나라로 돌아가게 되면, 상황은 전혀 달라졌습니다. 발해...신라 모두 합격한 사람에게
큰 특전을 주며 우대했기 때문입니다.
신라는 서기 821년에 김운경이 처음으로 빈공과에 급제한 이후 멸망할 때까지 90명 가까
이 급제했으며, 9세기 중엽부터 참가한 발해는 10명 가까운 숫자가 급제했다고 합니다. 그런
데 빈공과와 관련된 여러 가지 단편적인 기록을 읽다 보면, 발해와 신라는 자기 나라 학생
의 빈공과 급제수 내지 장원을 놓고 경쟁한 듯한 인상을 받게 됩니다. 그것은 곧 당나라가
빈공과를 이용해 발해...신라 등의 주변국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습
니다. 말하자면, 당나라의 빈공과설치는 발해...신라와 같은 주변국들을 중국적 사고...고나념,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 속으로 깊숙이 끌어들이는 도 하나의 덫이엇던 셈입니다. 물론 거기
에는 '당나라 = 군사...문화적 선진국'이라는 강력한 무기와 유혹이 작용하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