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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강효석-조선왕조5백년의선비정신

by Casey,Riley 2022.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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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강효석


    차례

  대동기문 서

     1. 창업의 문

  이성계에게 옥새를 바친 개국일등공신 배극렴
  궁궐 공사로 손발이 갈라 터진 심덕부
  왕자의 난에 희생당한 당대의 석학 정도전
  끝내 중이 된 태조 이성계의 친구 이지란
  살아 돌아온 함흥차사 성석린
  새끼 딸린 말로 태조의 마음을 돌리고 죽은 박순
  개국공신을 조롱한 송도의 명기 설중매
  이성계가 왕이 되는 꿈을 해몽한 예언자 무학대사
  기생을 사랑하여 눈물 흘린 박신
  누런 용이 옆에 누워 자는 꿈을 꾼 박석명
  억울함을 참고 거위의 목숨을 살린 윤회
  백발백중 명사수 김덕생
  살아서는 왕의 형, 죽어서는 부처님의 형 양녕대군
  중이 되어 왕좌를 양보한 효령대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박안신
  꿈을 잘 해몽하여 자라를 살려준 권홍
  뛰어난 외교관, 두주불사의 술꾼 최치운
  "네 말도 맞고, 네 말도 맞다"의 황희
  비 새는 집에서 살았던 맹고불 맹사성
  앉아서 세종의 술잔을 받은 최윤덕
  방안에서 우산을 써야 했던 청백리 유관
  역졸들의 고통을 임금에게 낱낱이 아뢴 노한
  어린 나이에 자신의 무죄를 말 한마디 하지 않고 해결한 슬기로운 신개
  굶어 죽은 왕자 광평대군
  육신보다 격이 더 높은 사람 최덕지
  하늘의 조화를 부른 절개를 지킨 정본
  '신'자 대신 '거'자를 써서 세조에게 항거한 박팽년
  "사직이 위태로울 때는 죽는 것이 영광일세" 이개
  세조로부터 받은 봉록을 고스란히 쌓아둔 하위지
  세조의 공을 치하하는 글을 쓰고 통곡한 유성원
  서생들과는 아무 일도 도모할 수 없다고 한탄한 유응부
  태어날 때 세 번 묻더니 죽을 때도 세 번 신문 당한 성삼문
  오세 신동, 끝없는 방랑자 김시습
  육신전을 지어 충의를 세상에 알린 남효온
  호랑이를 타고 청량포를 건너가 단종의 시신을 거둔 조려
  단종 복위에 실패한 후 평범한 농부로 살았던 성담수
  강물을 피로 물들인 비운의 왕자 금성대군
  죽음으로 옥새를 지킨 혜빈 양씨
  귀머거리, 미치광이 흉내로 일관한 권절
  군자는 때에 따라 물러날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상소한 조상치
  단종의 장례를 치른 호장 엄흥도
  제주도민에게 장례법을 가르친 기건
  평생을 괴물과 함께 살았던 신숙주
  국을 식게 만드는 사람 권람
  우리 집에도 선조의 문집이 있다고 익살을 부린 강맹경
  온종일 벌주를 마신 구 정승 구치관
  남이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죽은 강순
  얼굴에 분바른 귀신 때문에 장가든 남이
  달의 이상 현상을 보고 어머니의 죽음을 안 서거정
  후원을 거닐다가 미복 차림의 왕을 만나 큰소리친 최지
  빌려온 신숙주의 책을 뜯어 벽에 바른 김수온
  글짓기에는 이기고 속임수에는 진 이석형
  점쟁이의 아들을 살려준 홍윤성
  송도계원에도 들지 못한 한명회
  오랑캐들을 벌벌 떨게 한 이징옥
  미인계를 써서 반란을 일으킨 이시애
  시로써 신숙주를 굴복시킨 윤자운
  끝내 삼림 밑에서 죽은 윤필상
  용상을 가리키며 이 자리가 아깝다고 예언한 손순효
  외손 30여 명이 규장각의 관원이 된 양성지
  어릴 때부터 대가가 될 것이라고 촉망받은 신항
  높은 벼슬에 등용되지 못하더라도 아내를 버리지 않겠다고 한 권경희
  과거에 낙방하고도 장래 대제학감으로 평가받은 김종직
  귀갑이라는 점괘가 정말로 들어맞은 김홍도
  어린 나이에 소를 올려 아버지를 구한 김규
  춘추를 잘 외워 하루아침에 대사간이 된 구종직
  명함에다 시를 써 박원형의 마음을 움직인 윤효손

     2. 사화의 소용돌이

  폐비사건을 보고 갑자사화를 예견한 이세좌의 부인
  일부러 말에서 떨어져 폐비 사건에 말려들지 않은 허종
  부인이 호랑이에게 물려가 큰 화를 면한 유순
  4대에 걸쳐 정려문이 여섯 번이나 세워진 정성근
  연산군의 청혼을 거절하여 죽은 홍귀달
  금갑옷을 바다에 던져버린 청백리 이약동
  성종으로부터 친구 대접을 받은 유호인
  평생 소학을 가까이했던 소학동자 김굉필
  신선로를 만든 은둔자 정희량
  이극돈의 죄를 사실대로 쓴 김일손
  연산군의 연회를 신랄하게 비판한 박한주
  홀아비로 살 적에 기생을 거절한 이자건
  병풍에 시를 썼다가 죽음을 당한 임희재
  연산군으로부터 큰 소인이라고 비난받고 시체가 강물에 던져진 조지서
  익살과 풍자로 연산군에게 간언한 표연말
  "한치의 땅도 더 늘리지 말라" 하며 사들인 땅을 되돌려 주게 한 윤석보
  자라 여덟 마리를 살려주고 아들 여덟을 얻은 이원의 아버지
  조의제문으로 유배되고, 지난 일로 부관참시당한 조위
  영의정의 청을 거절한 올곧은 부사 정붕
  평생 김종직을 미워하며 옛 원한을 앙갚음한 유자광
  마부의 옷을 입고 중종을 위기에서 건진 영산군
  연산군에게 극력 간하다가 호랑이밥이 된 내시 김처선
  홍귀달의 원혼을 따뜻한 술로 달래 보낸 송질

     3. 왕도정치의 시작

  영욕이 번복되는 일생을 살았던 정광필
  "젊어서 사직을 기울게 하였다"라고 시문을 고쳐 단 심정
  꿈을 빙자하여 형의 재산을 빼앗은 심의
  중국 사신을 경탄게 한 시단의 노장 이행
  고양이 덕분에 죽음을 면한 장순손
  신인에게 시를 받아 장원급제한 김안로
  산골짜기 노파와 농부들까지도 우러러보았던 조광조
  "사람과 귀신의 길이 다르다"며 귀신을 물리친 성수침
  부서진 배에다 선량한 선비를 비유한 최수성
  남이 보내오는 물건을 꼼꼼히 기록한 김안국
  신인의 현몽에 따라 소를 도로 거둔 김정국
  사필은 아무나 잡는게 아니라고 항변한 채세영
  잘린 여자 속옷을 항상 옆에 두고 후손을 경계한 박영
  관곡을 빌려 먹을 정도로 청빈했던 최명창
  홍패는 몰수되고 백패마저 도둑맞은 신잠
  유기장이의 딸을 정부인으로 삼은 이장곤
  병의 근원을 치료했던 명의 안찬
  문장에는 뛰어났으나 일처리 능력이 모자랐던 신광한
  남곤을 구부러진 매화등걸에 빗대어 시를 지은 남추
  이항복에게 귀신으로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한 복성군
  작서의 변에 옥사가 공평치 못하다며 위관을 나무란 미관말직의 허굉
  변방으로 유배가는 회재에게 옷을 벗어준 장언량
  문과급제한 뒤에 손을 펴니 손톱이 손바닥을 뚫고 들어간 양연
  기생에게 한 약속을 끝까지 지킨 박신규
  빈궁하게 40살 영달하게 40살 산 조원기
  기생의 원한을 풀어준 천추사 조광원
  황진이의 유혹에도 동요하지 않은 서경덕
  지극한 효성으로 명당자리를 얻은 김언겸
  "썩은 노끈으로 사형수의 목을 맨단 말인가" 죽음 앞에서도 호통을 친 홍순복
  돌부처에 미혹된 자들을 깨우친 이인형
  종신토록 장가를 못 들어도 김안로의 사위는 되지 않겠다고 한 정희등
  글은 배우되 과거에 응시하지 말라고 아들을 가르친 임형수
  왕희지의 필법과 한퇴지의 문장으로 일컬어진 김구
  예견과 지혜로 엄청난 화를 면한 이자
  술을 마구 마셔 위장이 못쓰게 된 유운
  조정과 저자를 숙연하게 한 대사헌 최숙생
  "남자가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하고 중종반정을 도모한 성희안
  이시애난 때 죽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은 신용개
  대사간을 시켜준다고 꾀는 심정을 꾸짖은 성세창
  천수를 다하고 부귀를 누린 사람으로 손꼽히는 소세양
  백년 후를 내다보고 소나무를 심은 황형
  관찰사를 훈계한 뒤 군수 자리를 버리고 떠난 조언형
  "직제학이 아니라 곡제학"이라고 준열하게 풍자한 주세봉
  우스갯소리로 세상을 풍자했던 어득강
  소인이란 비난을 면치 못한 주초위왕의 주인공 남곤
  청맹과니라고 칭탁하고 청렴하게 산 남포
  성균관 뜰에다 손수 은행나무를 심어 교훈을 남긴 윤탁
  인종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김인후
  아버지의 묘소에 언문으로 비를 세운 이문건
  배가 침몰되는데도 태연했던 유희춘

     4. 사림파의 수난

  김안로가 나라를 그르칠 줄 미리 알고 걱정하였던 이언적
  정미사화를 빚어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간 정언각
  남의 허물을 말하지 않은 상진
  제멋대로 권세를 휘둘렀던 명종의 외삼촌 윤원형
  누이동생 난정을 미리부터 멀리했던 정담
  귀신 같은 점을 치고도 오해받아 사형 당한 점쟁이 홍계관
  임진왜란을 예고한 남사고
  밥알을 내뿜어 나비가 되게 한 전우치
  고을의 품관들에게 나물죽을 대접했던 이지함
  천기를 누설한 정렴
  아내가 죽자 다시 장가들지 않고 천수를 다한 정작
  꿈에 과거 시험 문제를 미리 본 임백령
  구차하게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개탄한 이해
  비석을 세우지 말라고 유언으로 경계한 이황
  임진왜란을 미리 안 이이
  묘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던 허엽
  백마강부가 동방에 크게 전파된 민제인
  곤장 크기가 넓적다리만 하니 오늘 목숨이 다할 것이라고 한 박광우
  소인들이 조정에 있으면 붕당을 만든다고 임금에게 책임을 물은 임권
  영월군수가 되자 단종의 신위를 설치하여 괴상한 변고를 없앤 김륵
  무뢰배 생활을 청산하고 훌륭한 학자가 된 이항
  고집쟁이 선비 최영경
  윤원형의 패망을 미리 안 박사종
  시문을 지어 소도둑을 석방하게 한 옥봉
  소나무를 심어 관을 만든 박계현
  비오는 날의 나막신 구실을 한 정사룡
  주인의 원수를 갚은 유관의 여종 갑이
  하인에게 거지 사윗감을 골라주고 뒷일을 부탁한 이준경
  요망한 중 보우를 죽인 변협
  세도가의 상납 요구를 떳떳하게 물리친 김렴

     대동기문 서

  오확(전국시대 진나라의 역사)은 무게 천 근을 드는 장사였지만
자신의 몸은 들지 못하였으니 어찌하여 물건을 드는 데는 강하고
자신을 드는 데는 약하였던가. 이주의 시력은 가을 털끝은 살필
수 있어도 자신의 눈썹은 볼 수 없었으니 어찌하여 털끝을 보는 데는
밝고 눈썹을 보는 데는 어두웠던가. 이는 형체에 구애된 때문이다.
  초나라 무당은 남을 위하는 데는 혼령도 불러내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재앙도 물리칠 수 없었고, 진나라 의원은 남의 목숨은 살려냈지만
자신의 병은 낫게 하지 못하였다. 어찌하여 남에겐 신비한 효험을 보이면서
자신에겐 보이지 못했을까. 이는 사심에 가리워진 때문이다.
  노나라에 살면서 '춘추(노나라의 역사서)'는 읽지 않고
'승(진나라의 역사서)'이나 '도올(초나라의 역사서)'을
읽는다거나 송나라에 살면서 장보(송나라 의관)를 착용하지
않고 깃털 모자를 쓴다면, 이는 형체에 구애된 때문일까. 아니면 사심에
가리워진 때문일까. 여기에서 우리는 어리석고 미혹되기 짝이 없음을
느낄 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문제점은 어디에 있을까? 새것을 좋아하고 기이함을
숭상하며 우리 것은 업신여기고 남의 것을 배우기에 급급하다는데
문제가 있다.
  주, 진, 한, 당 등 중국 역사에 대해서는 부녀자나
아이들까지도 거침없이 설명하면서 단군, 기자 등 우리 역사에 대해서는
노숙한 선비를 자처하는 사람들까지도 상세하게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세대가 내려올수록 더욱 어둡고 우리와 가까운 일일수록 더욱 소홀하다.
의로움과 이로움을 가리지 못하여 도척을 순임금으로 잘못 아는가
하면 아름다움과 추악함을 혼동하여 은을 철이라고 우기며 옳고 그름을
구분하지 못하여 주황색을 자주색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있다. 아니
이러한 자들은 부지기수로 많다.
  사람의 이름은 알면서 그 사람이 산 시대는 알지 못하는가 하면 그
사건은 알면서 그 사건이 누구에 의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하며, 성은
알면서 본관을 알지 못하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심한 경우에는 자기
조상에 대한 역사는 캄캄하여 누가 물으면 아예 입도 벌리지 못하고 딴전만
피다가 외국 역사에 대해 말하게 되면 신바람이 나서 바다 건너
멀고먼 불모지까지도 마치 손바닥을 들여다보고 말하듯 소상하게 설명하며
그칠 줄을 모른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병폐인가? 우리들의 의문은 여기서 더욱 심하게
된다.
  나의 벗 금천자는 이 땅 대동에서 태어나 이 땅에서
늙은 사람이다. 언젠가 그는 내게 말하기를, 고려 이전의 일은 이미 기록이
정비되어 있으니 두어두고, 조선 태조부터 고종까지 사이에 일어난
기괴한 일들을 기록하여 4권 1책으로 만들어 이름을 '대동기문'으로
했다고 하였다. 또 나도 이 땅 사람이란 이유로 그는 나에게
서문을 쓰도록 하였다.
  이 책은 기이한 일을 실은 책이므로 괴이한 이야기도 있고 익살맞은
사실도 실렸으며 야인의 사적도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역사 속의 패사라면
말이 되지만 그저 평범한 일상적인 글이라고 할 수는 없다.
  또 이 속엔 이름난 공과 큰 업적에 관한 이야기며 뛰어난 충신, 효자
이야기며 숭고한 도학과 빛나는 문학 이야기가 실려 있으니 어찌 단순히
한낱 패사라고만 할 수 있겠는가. 물론 그 속엔 아름다운 이야기와
추악한 이야기가 함께 실려 있고 좋은 이야기와 나쁜 이야기가 섞여 있으니
그 가치 판단은 마땅히 독자가 해야 한다.
  만약 새것을 좋아하고 우리 것을 소홀히 여기는 자가 곁에 있다가 하하
웃으면서, 이 책이 진부하면 진부했지 기이할 게 무엇이냐고 비웃는다면
아마 자네는 틀림없이 송나라 사람은 송나라 관을 써야 되고 노나라
사람은 노나라 역사를 읽어야 하듯이 이 나라 사람은 이 나라 이야기를
알아야 한다고 말할 걸세.
  을축(1925년)년 죽취일(음력 5월 13일, 대를 심는 날)
번천 김영한이 서문을 쓰다.

     1.
     창업의 문

  어느날 밤, 태조가 정도전을 비롯한 여러 훈신들을
불러들여 술자리를 마련하였다. 술이 거나하게
취했을 때, 태조가 신하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과인이 여기까지 이른 것은 모두 경들의 힘이다.
우리들은 서로 공경하고 조심하여
자손 만세토록 변치 말자"
  "옛날 제환공이 포숙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포숙이 거땅에 있던 시절을 잊지 말라고
하였고, 제환공은 포숙에게 함거에 갇혀 있던
때를 잊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만일 성상께서 말에서
떨어지셨던 때를 잊지 않으시고, 신 또한 죄를 지어 목에
칼을 썼던 때를 잊지 않는다면 자손 대대로 번창함을
기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성계에게 옥새를 바친 개국일등공신 배극렴

  배극렴의 자는 양가이고, 본관은 성주이다.
고려 공민왕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여러 번 문하좌시
중에 이르렀고, 청렴하고 근검하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공양왕 4년(1392) 6월 16일에 조준, 정도전 등 대소
신료들과 함께 옥새를 받들고 이성계의 저택에 가서 왕위에 오르기를
권유하여, 태조가 드디어 보위에 올랐다.
  태조의 비 신의왕후는 청주 한씨이다. 6형제를 낳았는데 정종이 둘째이고
태종이 다섯째이다. 또 둘째 왕비 신덕왕후 곡산 강씨는
2남 5녀를 두었는데 방번이 일곱째 왕자이고, 방석이 여덟째이다.
  어느 날 태조가 배극렴과 조준을 내전으로 불러들여 세자 책봉을 상의하였다.
  "평화 시대엔 맏아들이 우선이고, 난세에는 공이 있는 아들이 우선입니다"
  신하들이 이렇게 진언하였는데, 갑자기 밖에서 여자의 울음 소리가
들려 왔다. 신덕왕후가 이 말을 엿들었던 것이다.
  그 뒤 어느 날 배극렴이 또 태조에게 불려 갔는데, 이때엔 맏아들이
우선이니 공로가 우선이니 하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는 물러 나와 여러
사람들과 상의하였다.
  "강씨가 자기의 소생을 세자로 삼으려고 할 것이 틀림없다. 방번은
무절제하니 막내를 세우는 것이 그래도 낫겠다"
  배극렴이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태조에게 주청하여 방석을 세자로
삼도록 하였다.
  그의 벼슬은 좌시중으로서 개국 공신 일등에 영의정으로 특진되었으며,
성산백에 봉해졌다. 시호는 정절이다.

     궁궐 공사로 손발이 갈라 터진 심덕부

  심덕부(1328-1401)의 자는 득지이고, 본관은 청송이다.
고려말 음보로 동정에 올라 부원수까지 역임하였다.
  조선 개국에 공이 커서 구공신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정몽주,
지용기, 설장수, 성석린, 박위, 조준, 정도전과 더불어 계책을 세우고
원로 종친들과 함께 궁궐로 가서 고려 왕실의 어른인 정비의 명을 받들어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세우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태조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고 궁궐과 종묘를 건축할 때 그에게 공사를
총괄하게 하였다. 건물의 위치와 모양, 넓이와 크기, 성의 둘레와
높이 등이 모두 그의 책임하에 이루어졌고, 공사는 일 년 안에 끝났다.
공사를 감독할 때 일을 너그럽게 처리하고 성의를 다해 설득하였으므로
인부들이 조금도 괴롭게 여기지 않았다. 아들들이 벼슬을 하게 되자
그는 터지고 갈라진 자신의 손발을 내보이면서 훈계하였다.
  "나는 손발이 부르트도록 열성을 다해 오늘에 이르렀다. 너희들도
벼슬아치 생활을 편안하게 앉아서 할 생각은 아예 하지 말아라"
  그는 20년 동안 정승 자리에 있었으나 살림은 항상 넉넉지 못했다.
그는 늘 집안 사람들에게 당부하였다.
  "나는 오랫동안 공직에 있는 몸이니 만약 누가 문안 올적에 선물을
가지고 오거든 절대로 받지 말아라"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고, 청성백에 봉해졌다. 시호는 안정이다.

     왕자의 난에 희생당한 당대의 석학 정도전

  정도전(?-1398)의 자는 종지이고, 호는 삼봉,
본관은 봉화이다. 이색의 문하에서 배웠고,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는 삼각산 밑에 집을 짓고 살면서 제자들을 길렀는데, 항상 여색을
멀리할 것을 가르쳤다. 성균관 좨주에 발탁되고 뒤에 자원
하여 남양 군수로 나갔다.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세울 것을 태조에게 권했으며, 그 공으로
좌명공신에 녹권되고, 정당 문학에 제수되었다. 개국하던 해인
임신년(1392) 7월에 태조의 개국을 도운 공으로 봉화백에 봉해지고,
태조의 명을 받아 한양 천도와 성 쌓는 일을 맡았다.
  어느 날 밤, 태조가 정도전을 비롯한 여러 훈신들을 불러들여 술자리를
마련하였다. 술이 거나하게 취했을 때, 태조가 신하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과인이 여기까지 이른 것은 모두 경들의 힘이다. 우리들은 서로 공경하고
조심하여 자손 만세토록 변치 말자"
  정도전이 대답하였다.
  "옛날 제환공이 포숙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포숙이 거땅에 있던 시절을 잊지 말라고 하였고, 제환공은
포숙에게 함거에 갇혀 있던 때를 잊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만일 성상께서 말에서 떨어지셨던 때를 잊지 않으시고, 신 또한 죄를
지어 목에 칼을 썼던 때를 잊지 않는다면 자손 대대로 번창함을 기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태조는 늙어서 어린 방석을 사랑하여 세자로 삼았는데, 정도전은 남은
등과 함께 방석을 옹호하면서 정안군 방원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태조가 왕위에서 물러난 무인년 8월, 정도전은 태조에게 중국의 예에
따라 여러 왕자를 각 도로 나누어 분봉하자고 비밀히 건의하였으나
태조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태조가 정안군에게 넌지시 일러주었다.
  "밖에서 논의되는 것을 알아야 한다. 너는 여러 형제들에게 조심하도록
깨우쳐 주어라"
  또 점쟁이 안식이 이방원에게 말하였다.
  "세자의 이복형제들 중에서 왕위에 오른 사례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이방원은 즉각 이렇게 응수했다.
  "정도전을 즉시 제거할 작정인데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
  태조의 병이 위독해지자 정도전 등은 왕위 계승에 관한 일을 논의한다는
핑계로 왕자들을 불러들인 뒤 틈을 보아 왕자들을 제거하려고 마음먹고
자기의 일당을 궁궐 안에 숨겨 두었는데, 전 참찬 이무가
이러한 모의를 정안군에게 밀고하였다. 정안군은 즉시 익안군
방의 등과 더불어 영추문으로 달려가서 정승 조준,
김사형 등에게 백관을 소집하도록 하였다.
  그날 밤 정도전은 이직과 함께 남은의 집에서 술을 마시며 즐겁게
놀고 있었다. 정안군은 이숙번을 시켜 남은의 집에 불을
질렀다. 정도전이 급히 뛰어나와 민부의 집에 들었다.
  "배가 하얀 놈이 들어왔다!"
  이 사실을 안 민부가 소리지르며 집을 수색하여 정도전을 찾아낸 다음
꽁꽁 묶어 정안군에게 끌고 갔다. 정도전은 정안군에게 애걸했다.
  "만약 나를 살려주면 있는 힘을 다하여 보좌하겠습니다"
  "너는 이미 왕씨를 배신하였는데 이제 또 우리 이씨를 배신하려느냐?"
  정안군은 그 자리에서 그를 죽였다.
  정도전의 저서로는 '삼봉집', '심이기편', '경제문감',
'경국전' 등이 있다. 진, 담, 유, 영 네 아들을 두었다.
  진의 아들 문형은 성품이 온순하면서도 굳세고 단아하였다.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영부사에 이르렀고 청백리에
뽑혔으며, 시호는 양경공이다.

     끝내 중이 된 태조 이성계의 친구 이지란

  이지란(1331-1402)의 본관은 청해이고, 자는 식형이다.
본래의 성명은 퉁두란이었다. 그는 용맹스럽고 힘이
셌으며, 활쏘기와 말타기에도 능했다. 대대로 여진 부락에서 살았는데,
원나라 말 나라가 매우 혼란하자 가족을 데리고 강을 건너 북청에
와서 살았다. 이성계가 임금이 되기 전에 서로 만났는데, 첫눈에 의기가
투합하여 숙식을 함께 하였다.
  고려 우왕 때 일이다. 어느 날 활쏘기로써 여러 장수들이 실력을 겨룬
적이 있었다. 세 차례 시합에서 태조가 번번이 일등을 하자 지란이
그 실력에 감탄하면서 그 실력을 함부로 남에게 보이지 말라고 당부했고,
태조도 이를 매우 고맙게 받아들였다.
  형제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이 미워서 태조가 영흥으로
갔다가 풍양으로 돌아오자 지란은 상소하여 중이 되겠다고 한 뒤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수염만은 깍지 않고 두었으니 대장부의
표시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는 두문불출한 채 여생을 보냈다. 72세 때 목욕하고 앉은 채로 죽었다.
그는 아들들이 조정에서 돌아오기 전에 화장하여 그 사리로 탑을
만들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의 아들들은 그의 의관을 가지고 장례를 치러야 했다.
  선조 25년(1592) 이전에는 아무도 소나 말을 타고 감히 그의 묘 앞을
지나가지 못하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지란이 북쪽으로 돌아가던 날 태조에게 이렇게 상소했다고 한다.
  "임금을 도와 나라를 정하니 군신의 의가 정해졌고,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으니 군신의 의가 끊어졌소"
  그 상소문 속에 자기의 상투를 잘라 바쳤으므로 태조가 도저히 만류할
수 없음을 알고 허락하였다고 한다.
  지란은 건주 정벌의 공으로 청해백에 봉해졌으며, 벼슬은
좌찬성에 이르고 개국 공신 일등에 녹훈되었다. 시호는 양렬이며,
태조의 묘에 배향되었다.

     살아 돌아온 함흥차사 성석린

  성석린(1338-1423)의 본관은 창녕이고, 자는 자수,
호는 독곡이다.
  태조의 다섯째 아들 방원은 신의왕후 한씨의 소생인데, 태조가 창업할
때 가장 공이 많았다. 계비인 신덕 강씨의 소생인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고,
정도전이 방석에게 아부하여 방원을 해치려 하였다. 이 음모를
알게 된 방원은 선수를 쳐서 군대를 동원하여 정도전을 죽이고 방석을
폐출시켰다.
  화가 있는 대로 난 태조는 왕위를 정종에게 물려주고 밤중에 함흥 관저로
떠나버렸다. 이때부터 문안사자가 잇달아 함흥으로 갔지만 가는
족족 다 죽고 돌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한번 가면 돌아오지 않을 경우에
그것을 일러 '함흥차사'라고 부르는 말은 이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더이상 함흥차사로 가겠다는 사람이 나오지 않자 성석린이 자원하고
나섰다. 태조와 친분이 있는 그는 자기가 태조의 마음을 돌리고 오겠다고
자청한 것이다. 태종은 기꺼이 허락하였다.
  그는 무명옷에 백마를 타고 떠났다. 함흥에 도착하자 그는 말에서 내려서
나그네가 하듯 밥을 지었다. 밥짓는 연기가 나자 멀리서 바라보던
태조가 그에게 환관을 시켜 물어 왔다. 성석린은 환관에게 "볼일이 있어
이곳을 지나다가 날이 저물어, 말도 먹일 겸 투숙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환관이 돌아가서 그대로 아뢰자 태조가 반갑게 그를 불러들였다.
  석린은 조용하게 인륜의 중요함을 말하고 어려움에 대처하는 방법을
개진하였다. 태조가 갑자기 얼굴빛을 바꾸며 물었다.
  "너는 너의 임금을 위하여 나를 설득하려고 왔느냐?"
  겁을 먹은 석린은 엉겹결에 이렇게 말했다.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제 말씀이 거짓이라면 제 자손은 반드시
장님이 나올 것입니다"
  어쨌든 태조는 그 말을 믿고 마음을 돌렸으며 아들 태종 임금과 화해하게
되었으나, 문제는 성린의 집에서 생겼다. 그의 맏아들 지도는
장님이고, 둘째인 발도는 자식이 없고, 지도의 아들 창산군
귀수와 귀수의 아들이 모두 뱃속 장님이었다. 성린의
벼슬은 영상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경이다.

     새끼 딸린 말로 태조의 마음을 돌리고 죽은 박순

  박순(?-1402)의 본관은 음성이다. 함흥에 가 있는 태조에게
문안 사신으로 간 사람마다 다 죽고 살아 돌아오는 이가 없던 때였다.
태종은 신하들에게 이번엔 누가 가겠느냐고 물었지만 가겠다고 나서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이때 박순이 가기를 자청하고 나섰다. 그는 떠날 때 수레를 타지 않고
새끼 딸린 말을 타고 갔다. 함흥에 들어가서 태조의 행재소(왕의 임시 처소)가
보이는 곳에서 일단 멈추고 새끼말은 거기에 매어 둔
채 어미말만 타고 가니 새끼말과 어미말이 서로 돌아보면서 우는 바람에
제자리걸음을 하게 되고 여간 지체하지 않았다.
  행채소에 도착하여 태조에게 인사를 올리자 무엇인가 이상함을 느낀
태조가 그 까닭을 물었다. 박순은 속마음으로 바로 이때구나 하고 입을
열었다.
  "길을 오는 데 방해가 되어서 새끼말을 떼어서 나무에 매어 놓았더니
그 야단입니다. 하찮은 미물인데도 어미와 새끼가 차마 서로 떨어질 수
없어서 저렇게 야단입니다"
  태조는 가슴이 찡해 옴을 느꼈다. 태조는 옛친구인 박순에게 돌아가지
말고 남아 있으라고 하였다.
  어느 날 태조가 박순과 함께 바둑을 두는데 갑자기 '털썩!' 하고 무엇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둘러보니 지붕에서 쥐 두 마리가 떨어졌는데
어미쥐가 새끼쥐를 안은 채 죽어 가고 있었다. 박순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바둑판을 밀치고 그 자리에 엎드려 태조에게 눈물로써 돌아갈 것을
호소하였다. 그는 드디어 태조로부터 한양으로 돌아가겠다는 허락을
얻어냈다.
  박순은 태조에게 인사하고 귀경길에 올랐다. 태조를 모시고 있는 신하들은
박순도 예외없이 죽여야 한다고 태조에게 강력히 요청하였다.
망설이던 태조는 박순이 용흥강을 다 건너갔으리라고 생각되었을 즈음
비로소 허락하고, 사자에게 칼을 내어 주면서 말했다.
  "박순이 용흥강을 이미 건넜거든 더이상 추격하지 말라"
  그런데 귀경길에 오른 박순은 도중에 병이 나는 바람에 속도가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추격대가 도착했을 때, 그는 막 배에 오르는 중이었고
아직 강을 건너지 못하였으므로 추격대의 칼에 맞아 허리가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그래서 "몸뚱이의 절반은 강 위에, 절반은 배 안에 있다네"라는
시가 생겨났다.
  이 소식을 들은 태조는 깜짝 놀라며 애통해 했다.
  "박순은 좋은 친구였는데, 내가 그 친구와의 약속을 저버릴 수는 없다"
  태조는 드디어 한양으로 돌아갈 결심을 굳혔다.
  이 소식을 들은 태종은 화공에게 명하여 박순의 상반신을 그려
바치도록 하였다. 박순의 아내 임씨는 남편의 부음을 받고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박순의 벼슬은 판중추에 이르렀고, 시호는 충민이다.

     개국공신을 조롱한 송도의 명기 설중매

  설중매는 송도(개성)의 이름난 기생이다.
  태조가 조선을 개국한 뒤 군신들을 위해 의정부에서 잔치를 베풀었는데,
모인 신하들 대부분이 옛 고려 왕조에서 벼슬하던 사람들이었다.
설중매는 재능과 용모가 뛰어났을 뿐 아니라 색정도 강했다.
  어느 정승이 술에 취하여 설중매를 희롱하였다.
  "내가 들으니 너는 아침은 동쪽 사내 집에서 먹고 잠은 서쪽 사내 집에서
잔다더구나. 오늘 저녁엔 나하고 자는 것이 어떻겠느냐?"
  "동쪽 집에서 밥먹고 서쪽 집에서 잠자는 저 같은 천한 기생이 왕씨를
섬기다 이씨를 섬기는 정승을 모시고 자게 되니 매우 어울리는군요!"
  설중매가 이렇게 응수하니 좌석에 앉았던 사람들이 모두 얼굴을 붉혔다.

     이성계가 왕이 되는 꿈을 해몽한 예언자 무학대사

  무학대사(1327-1405)는 안변 설봉산 토굴에서
살았으므로 산이름을 따서 호를 설봉이라 하였다. 속성은 박씨요
이름은 자초이다. 태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의 일이다. 이성계가
어느 날 무학대사를 찾아가 해몽을 부탁하였다.
  "꿈에 무너진 집 속에 들어가 서까래 세 개를 짊어지고 나왔는데, 무슨
징조입니까?"
  "경하할 꿈이올시다. 서까래 세 개를 짊어진 모양은 임금 왕자와
같습니다"
  "꽃이 떨어지고 거울이 깨진 것은 무슨 징조입니까?"
  "꽃이 떨어지면 열매를 맺을 것이요 거울이 깨지면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이성계는 매우 기뻐하면서 그 자리에 절을 세우고 이름을 석왕사라고
하였다. 석왕이란 왕이 되는 꿈이라고 해석했다는 뜻이다.
본시 그 절에는 석왕사라고 쓴 태조의 어필이 있었는데, 불에 타 없어지고
그 글씨를 새긴 현판만이 남아 있다는 기록이 서산대사가 쓴 '산수기'에 전한다.
  이 석왕사에는 좋은 배나무가 있어서 해마다 궁중에 진상되었다. 절안에
이화당이 있고, 용추 30여 군데가 있는데 주변 경치가 매우 수려하다.

     기생을 사랑하여 눈물 흘린 박신

  박신(1362-1444)의 본관은 운봉이다. 어릴 적부터 명성이
있던 그는 고려 우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는 강원도 감사로 있을 때 강릉 기생 홍장을 몹시 사랑하였다.
그가 도내 여러 군을 순시하고 돌아오자 강릉부윤 조운흘(호는 석간)이,
거짓으로 홍장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이 말을
들은 박신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운흘이 찾아와서 경포대에 뱃놀이하러 가자고 권하였다.
운흘은 오기 전에 홍장을 불러 예쁘게 꾸미고 또 호화로운 놀잇배도
따로 준비하고는, 처용을 닮은 관리 하나를 뽑아서 홍장을
태우도록 미리 일러두었다.
  박신이 운흘과 함께 경포대로 나가니 미인을 실은 호화 유람선이 호수
위에 두둥실 떠 있는데, 그 위에 채색으로 단장한 편액이 하나 걸려
있고 그 편액에 다음과 같은 시가 씌어 있었다.

  태평성대 신라에서 조용하게 늙은 이 몸
  천년세월 흘렀건만 풍류는 그대로일세
  관찰사가 경포대에 뱃놀이 나왔으나
  놀잇배에 미인을 어이 차마 태우리

  관찰사 일행이 천천히 포구로 들어가서 바닷가를 배회하던 중 갑자기
운흘이 박신에게 말했다.
  "이곳엔 전해 오는 신선 이야기가 있지요. 지금도 달 밝은 저녁이면
신선들이 나와 다니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이 가끔 있는데 그냥
바라보기만 할 뿐 가까이 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산천과 풍경이 이렇게 아름다운데 어찌 신선이 없겠는가!"
  박신이 눈물을 글썽이다가 자세히 보니 다름 아닌 홍장이었다. 좌석엔
웃음이 터져 나왔고, 이날의 놀이는 어느 때보다도 즐거웠다.
  조선조에서 그의 벼슬은 찬성사에 이르렀다.

     누런 용이 옆에 누워 자는 꿈을 꾼 박석명

  박석명(1370-1406)의 본관은 순천이고, 호는 이헌이다.
  젊었을 적에 정종과 한 이불을 덮고 잠을 잔 적이 있었다. 그날밤
꿈에 누런 용이 곁에 있는 것을 보고 놀라 잠을 깨니, 곁에 영안군(뒤에
즉위하여 정종이 됨)이 누워 있었다.
  이런 일이 있은 뒤에 두 사람의 우정은 더욱 두터워졌다. 영안군은
왕위에 즉위하자 더욱 박석명을 총애하였다. 태종 때 익대삼등 공신으로
평양군에 봉해졌으며 벼슬은 판서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숙이다.

     억울함을 참고 거위의 목숨을 살린 윤회

  윤회(1380-1436)의 자는 청경이고, 호는 청향당이며, 본관은 무송이다.
  젊은 시절에 시골길을 가다가 날이 저물어 여관을 찾았으나, 여관 주인이
투숙을 허락하지 않아서 할 수 없이 뜰 밑에 앉아 있었다. 그때 주인집
아이가 큰 진주를 가지고 마당에서 놀다가 땅에 떨어뜨렸는데, 마침 곁에
있던 흰 거위가 그것을 삼켜 버렸다.
  집주인이 진주를 찾다가 끝내 찾지 못하자, 윤회를 의심하고 그를 꽁꽁
묶어 놓았다. 이튿날 아침에 관가에 데리고 갈 작정이었다. 윤회는
변명 한마디 하지 않고 다만 주인에게 청하여 거위도 묶어서 자기 곁에
두도록 하였다.
  이튿날 아침, 거위가 눈 똥 속에서 진주가 나왔다. 주인은 너무도 부끄러워
사과하고 나서 왜 어제 진작 말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윤회가 대답했다.
  "만약 내가 어제 말했다면 당신은 저 거위의 배를 가르고 진주를 찾았을
것 아니오? 그래서 온갖 욕된 것을 참고 아침까지 가다린 것이오"
  그의 벼슬은 병조 판서에 이르렀고, 문형(대제학의 별칭)을 관장하였다.
시호는 문도이다.

     백발백중 명사수 김덕생

  김덕생의 본관은 상산이다.
  어느 날 왕이 후원에 나갔는데, 갑자기 맹호가 나타나 왕이 탄 수레에
달려들었다. 이때 김덕생이 화살 한 발로 그 호랑이를 맞추어 죽이자,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모두 그의 용기에 혀를 내둘렀다.
  그를 시기하는 자가 그를 조정에 모함하여 억울하게 중벌을 받게 되었다.
이때 덕생은 간청하여 호랑이 한 마리를 그려서 호랑이가 잡혔던
곳에 두게 하고 그 그림에 활쏘기를 하니 쏘는 족족 다 맞추고 한 발의
실수도 없었다. 그는 끝내 형장에서 죽게 되었는데 오랫동안 넘어지지
않아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다.
  세종이 왕위에 오른 뒤다. 어느 날 저녁 갑자기 발자국 소리가 들려
왔다. 세종이 이상하게 여겨 묻자 발자국 소리의 주인공이 이렇게 대답
하였다.
  "소신의 이름은 김덕생입니다. 억울하게 죽은 지가 이미 여러 해입니다.
원하옵건대 저의 뼈를 고향에 묻어 주시고, 저의 자손들을 등용하시어
억울하게 맺힌 저의 한을 풀어 주소서"
  이 말을 들은 세종은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 그를 동지중추부사에 증직하고,
그의 뼈를 고향에 묻어 주도록 하였다. 상여가 전라도 영광
낭월산 밑에 이르자 상여채가 저절로 부러져서 더이상 갈 수가 없었다.
그날 밤에 그가 또 현몽하여 자기를 그곳에 묻어 달라고 하였다.

     살아서는 왕의 형, 죽어서는 부처님의 형 양녕대군

  양녕대군(1394-1462)은 태종의 장남으로 제일 먼저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는 천품이 활달하고 문장에 능숙하였다. 그는 동생
세종이 임금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일부러 미친 척하며 함부로 행동하였다.
  드디어 태종 18년(1418), 영의정 유정현 등이 문무 백관을
거느리고 합동으로 아뢰어 세자가 덕이 없으니 폐위시켜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이에 태종이 세자의 아들 세손을 세우려 하자 여러 신하들이
또 반대하였다.
  "상께서 세자를 그토록 잘 가르쳐 길렀는데도 이러한 일이 일어났는데
이제 또 어리신 세손을 세운다면 어떻게 뒷날을 보장하겠나이까?
더구나 아버지를 폐위시키고 그 아들을 세우는 것은 의리에 마땅치 않습니다.
다시 어진 왕자를 택하여 세자로 세워야 합니다"
  "그렇다면 경들이 어진 왕자를 택하여 건의하라"
  이조 판서 황희가 아뢰었다.
  "나라의 세자는 함부로 가볍게 세울 수 없는 일입니다"
  또 이직도 불가함을 굳이 고집하였다. 태종은 화가 나서 황희
등을 문밖으로 내쫓고 재신들에게 말하였다.
  "충녕대군(뒤에 세종임금이 됨)은 천성이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며 아무리 춥고 더운 날에도 밤새워 글을 읽을 정도로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며 사리에 통달하니 나는 충녕을 세자로 삼고 싶다"
  신하들이 축하를 올리며 말하였다.
  "신들이 합동으로 아뢰어 어진 왕자를 택하라고 한 것도 바로 충녕을
두고 드린 말씀입니다"
  태종은 드디어 충녕대군을 세자로 삼고 세자 양녕대군을 폐위하여
광주로 내쫓았다. 양녕대군은 이때부터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남루한
옷에 노새를 타고 산수를 찾아 전국을 유람하니 세상 사람들이 그를 일러
태백(주나라 태왕의 장자, 태왕이 유난히 총명한 손자 창에게 왕통을
이으려고 계력을 태자로 세우려 하자 나라의 앞날을 위해 동생 중옹과 다른
나라로 떠났다)의 지극한 덕이 있다고 하였다.
  세종은 형 양녕과 우애가 극진한 사이였다. 양녕이 관서(평안도) 지방
유람을 떠날 때였다. 양녕이 세종에게 작별 인사를 하자 세종은
여색을 조심할 것을 특별히 당부했다.
  양녕이 떠난 뒤에 세종은 즉시 평안도 관찰사에게 명을 내려 "만약
대군을 가까이 한 기생이 있거든 즉시 보고하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평안도 지방의 수령 방백들은 예쁜 기생을 골라 놓고 대기하고 있었다.
  양녕대군이 정주에 도착하자, 소복을 입고 엷게 화장을 한 예쁜 기생
하나가 곡을 하는데 그 소리가 노랫소리처럼 아름다웠다.
  소리에 마음이 끌린 대군은 곧 사람을 보내어 그 기생을 불러와 함께
잠자리를 한 뒤에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읊었다.

  달빛이 베갯머리를 엿볼 일이 없는데
  바람은 무슨 일로 비단 장막을 젖히나

  이튿날 감사는 그 기생을 역마를 이용하여 서울로 보내고, 그 시도
임금께 아뢰었다. 세종은 그 기생으로 하여금 그 시를 노래로 부를 수
있도록 연습하라고 하였다.
  양녕대군이 평안도에서 돌아와 세종께 배알하니, 임금이 대군에게
물었다.
  "지난번 작별할 때 한 말씀을 잊지는 않았겠지요?"
  "신이 어찌 감히 성교를 잊었겠나이까. 삼가 받들고 있나이다"
  "형님이 비단 이부자리 속에서도 그 말씀을 지키셨다니 기쁘고도 다행한
일입니다. 그래서 예쁜 여인을 한 사람 준비시켰나이다"
  이어서 세종은 궁중에 주연을 차리고 그 기생으로 하여금 그 시로써
노래부르고 대군에게 술을 권하도록 하였다.
  그 기생과는 비록 밤을 함께 지낸 사이지만 밤에 만났던 까닭에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다가 노래의 가사 내용을 듣고서야 알아차린 양녕대군은
그 즉시 뜰을 내려와 벌받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세종 역시 뜰 밑으로
내려가 대군의 손을 잡고 웃으면서 정담을 나누었으며, 그 기생을
양녕에게 돌려주었다.
  이 기생과의 사이에 아들이 있었으나 어미의 성과 관향을 알 수 없으므로
그냥 고정정이라고 불렀다.
  고정정 역시 자유분방하게 어물과 육류를 물물교환 하면서 살았는데
교환이 이루어진 뒤에도 혹시 고기가 좋지 않으면 그 고기가 이미 삶긴
뒤에라도 반드시 되물리고야 말았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되물리는
교역을 일러서 '고정정교역'이라고 일컬었다.
  양녕대군의 후손 이명하란 사람이 어느 날 자기 부인과 더불어
장기를 두다가 떼를 써서 강제로 물리려고 하였다.
  "당신은 고정정이 아닌데 어찌하여 번번이 물립니까?"
  부인이 묻자 남편이 발끈 성을 냈다.
  "당신은 어찌하여 장기 때문에 남의 조상을 욕하는 거요"
  그 부인이 부끄러워하면서 사과하였다.

     중이 되어 왕좌를 양보한 효령대군

  효령대군(1396-1486) 보의 처음 이름은 우, 자는
선숙이며, 태종의 둘째 아들이다. 세종이 성덕이 있다고 하여 맏아들인
양녕대군은 자기의 세자 자리를 양보하려고 일부러 방탕한 행동을
하였고, 효령대군은 궐내에 있었다. 양녕대군이 저녁에 효령대군의
처소에 가보니 그는 촛불을 환히 켜고 글을 읽고 있었다. 양녕대군이
그의 귀에 대고 속삭여 물었다.
  "너는 내게 병이 있다는 것과 충녕(세종)에게 성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느냐?"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너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양녕대군이 묻자 효령대군은 합장을 하며 말했다.
  "이밖에 다른 생각이 없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양녕은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갔다. 이튿날 새벽에
효령대군이 합장을 하고 벽을 향해 앉아 있는 것을 본 궁녀가 임금에게
보고를 드렸다. 이 보고를 받은 태종이 깜짝 놀라 직접 가서 효령에게
물으니 이렇게 대답했다.
  "꿈에 부처님이 와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나의 제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으로써 마음을 정하였습니다"
  태종은 놀랍게 여기고 돌아갔다. 이후부터 효령대군은 항상 불상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예법을 갖추었다.
  맏형인 양녕대군이 술과 고기를 즐기자 어느 날 효령이 정색을 하고
말하였다.
  "큰형님, 술과 고기를 끊으세요"
  양녕대군이 웃으며 대답했다.
  "살아서는 왕의 형이고 죽어서는 부처님의 형이 될 텐데 이 어찌
기쁘지 않겠느냐?"
  효형은 절에 들어가서 하루종일 북을 쳤다. 어찌나 많이 쳤던지 북맨
가죽이 하얗게 일어났다. 그래서 부드러우면서도 질긴 물건을 가리켜
'효령대군 북가죽'이란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박안신

  박안신(1369-1447)의 본관은 상주이다. 태조 2년(1393)에
생원시에 장원하고, 정종 원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사헌부 지평으로
있을 적에 대사헌 맹사성과 함께 평양군 조대림을 국문한
일이 있었는데, 왕에게 아뢰지 않고 국문하다가 태종에게 큰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그는 맹사성과 함께 수레에 실려서 끌려갔다. 거리에서 사형을 당할
참에 이르러 맹사성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고 어쩔 줄 몰라 하였는데,
박안신은 조금도 두려운 빛이 없었다.
  그가 맹사성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나의 상관이고 나는 당신의 부하다. 그런데 이제 둘이 함께
죽게 되었으니 상관과 부하 사이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전에 나는
당신을 지조를 가진 사람으로 알았는데 어찌 이렇게도 겁이 많은가?
당신은 저 삐걱거리는 수레 소리를 듣지 못하는가?"
  또 그는 나졸에게 기와 조각을 가져오라고 하여 거기에 지남철 끝으로
긁어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너는 직무를 수행하지 못했으니 죽음이야 달게 받겠지만,
  다만 간하는 신하를 임금이 죽였다는 이름을 남길까 두렵다.

  안신은 눈을 부릅뜨고 옥리들에게 말했다.
  "이것을 그대로 상께 보고해라. 만약에 보고를 하지 않는다면 내가
악귀가 되어 한 놈도 남기지 않고 잡아먹겠다"
  이 보고를 받은 태종은 더욱 진노하였다. 그러나 하륜, 성석린,
권근 등 대신들이 힘을 다하여 그를 구제하였다. 그는
간신히 사면되어 곤장을 맞고 먼 곳으로 유배되었다.
  뒤에 안신은 사신이 되어 일본에 가게 되었는데, 뱃길에서 해적을 만났다.
그가 두려운 빛이 조금도 없이 태연하게 걸상에 걸터앉아 조용하게
상대하자, 해적들이 그의 위엄에 눌려 감히 접근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해적들에게 잡힌 일행이 모두 안전하게 풀려났다.
  벼슬은 대제학에 이르렀고, 시호는 정숙이다.

     꿈을 잘 해몽하여 자라를 살려준 권홍

  권홍(1360-1446)의 본관은 안동이고, 호는 설헌이다.
고려말에 문과에 급제하고 간관이 되었으나 정몽주의 당이라 하여
먼 곳으로 유배되었다. 나이 들어서는 산수를 찾아 유람하는 일로
세월을 보냈다.
  어느 날 밤 꿈에 한 노인이 그를 찾아와서 눈물로 호소하였다.
  "홍 정승이 오늘 우리 가족을 다 죽이려고 하니 제발 살려주시오"
  "어떻게 하면 살게 됩니까?"
  "공께서 가시지 않는다면 홍 정승도 가시지 않을 테니 그러면 우리가
살 수 있습니다"
  조금 후에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홍 정승이 보낸 심부름꾼이었다.
  "홍 정승께서 오늘 살곶이에서 자라탕을 끓인다고 오시랍니다"
  이 말을 듣자 권홍이 마음속으로 '아 조금 전 꿈속에서 본 노인이 바로
자라였구나' 하고 갈 수 없다고 사양하니, 홍 정승 또한 살곶이에
가지 않았다.

     뛰어난 외교관, 두주불사의 술꾼 최치운

  최치운(1390-1440)의 본관은 강릉이고, 자는 백경,
호는 조은이다. 태종 때 생원시와 문과에 각각 합격하여 이조 참의가
되었다. 나라일로 중국에 들어가 일을 성공시키고 돌아온 공으로
논밭과 노비를 하사했는데, 치운은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그는
즐거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서 아내에게 말했다.
  "하사하신 논밭과 노비를 받지 않으니 내 마음이 이렇게 좋소"
  "임금의 하사를 사양하다니 복도 지지리 없구려"
  그는 본시 술을 지나치게 좋아한 까닭에 이를 알고 있는 세종이 어찰(임금의
편지)을 내려 주의를 환기시켰다. 치운은 그 어찰을 벽 좌우에
붙여 놓고 들락거릴 적마다 그것을 보고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러나 워낙
술을 좋아한 최치운은 밖에만 나가면 술에 취해서 돌아왔는데, 그때마다
아내는 그의 머리를 흔들고 손가락으로 벽을 가리켰다. 그러면 치운은
취중에서도 상에 머리를 박으면서 사죄하는 시늉을 하였으며, 술을
깨면 언제나 입버릇처럼 말하였다.
  "상의 은혜에 감동되어 늘 술조심은 하고 있지만 술집 앞을 지나게
되면 그만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취하도록 마시게 된다"
  그는 최윤덕의 종사관으로 있을 때 왕명에 의하여 '무원록'을
주석 하였다.
  최치운의 아들 최응현의 호는 수재이다. 단종 2년(1454)에 생원시와
문과에 합격하고 대사헌을 거쳐 경주 부윤으로 나갔다. 이때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속세의 영욕을 그 몇 해나 겪었던가
  책상 위에 쌓인 서류 백발이 성성하네
  전원으로 돌아간다는 생각 버릇이 되었을 뿐
  아침에 일어나면 그 자리 그대로

  최응현의 아들 수성은 기묘명현 중의 한 사람이다.

     "네 말도 맞고, 네 말도 맞다"의 황희

  황희(1363-1452)의 본관은 장수이고, 자는 구부,
초명은 수로, 호는 방촌이다. 고려 우왕 기사년(1389)에
문과에 급제한 조선의 이름난 재상이다. 시호는 익성이고, 죽은
뒤에 세종의 사당에 배향되었다.
  그는 나라일에만 힘을 기울이고 집안 일은 돌보지 않았다. 어느 날 집안에
있는 여종들이 서로 싸우다가 한 여종이 와서 호소하였다.
  "저 계집종과 다투었는데 저 계집종은 매우 간악합니다"
  "네 말이 맞다"
  이번에는 다른 계집종이 와서 역시 이 계집종이 나쁘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네 말이 맞다"
  곁에서 이를 지켜보던 조카가 못마땅한 말투로 말하였다.
  "아저씨의 흐리멍텅함이 너무도 심합니다. 이 아이는 이렇게 말하고
저 아이는 저렇게 말했으니, 이 아이가 옳고 저 아이는 옳지 못합니다"
  그는 역시 이렇게 대답했다.
  "네 말도 맞다"
  황희는 때도 없이 글을 읽되 결코 자리를 구분하는 일이 없었다.
  한번은 밭에서 일하다가 왕명을 받고 궁궐에 들어갔는데, 쓰고 있던
삿갓과 작업복을 그대로 입고 입궐하였으므로 행색이 매우 초라하였다.
태종이 세종에게 위촉하기를 "나라를 다스리려면 이런 사람이 있어야
한다"며 즉시 예조 판서에 임명하였다.
  그는 정승으로 30년 동안 있으면서 이미 있는 제도를 힘써 따랐고 새로운
제도를 만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또 일을 처리할 때는 순리를
따랐고 도량이 넓어서 일을 처리함에 대신의 체모를 잃지 않았다.
세종도 그 사려 깊은 행동과 신중한 일처리를 늘 칭찬하였다. 어쩌다가
옛 제도를 변경할 경우에는 반드시 이렇게 말했다.
  "신은 임기응변의 재주가 없어 새로운 제도를 만드는 일은 감히 논의할
수가 없나이다"
  그는 이론이 공평하고 항상 일처리가 너그러웠지만 큰일을 결정함에
있어서는 시비를 가리는 데 과감하여 아무도 그의 뜻을 꺾지 못하였다.
벼슬을 내놓은 뒤에도 국가에 일이 있으면 반드시 황희에게 사람을 보내어
물은 뒤에 결정하였다고 한다.
  그는 90세의 나이에도 총명한 머리가 감퇴되지 않고 모든 제도와 문헌을
환하게 기억하고 있었으며, 도량이 너그러워 감정을 좀처럼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그의 평소 생활을 보면 자손들과 종의 아이들이 항상 모여 시끄럽게
하여도 그것을 금지하는 일이 없었으며, 어떤 때는 아이들이 수염을 당기고
볼을 때려도 그대로 다 받아 주었다.
  한번은 낮은 관리 하나를 옆에 두고 붓에 먹을 적셔 편지를 쓰는데
남자종 아이가 그 서류 위에 오줌을 쌌다. 그래도 그는 화를 내지 않고
그 오줌을 말없이 닦아 냈다.
  하루는 여자종이 반찬을 들고 공에게 기대서서 관리를 내려다보면서
물었다.
  "술상을 내오리까?"
  "천천히 차리거라"
  비스듬히 서 있던 여종은 불손하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
  "왜 그리 늦지요?"
  할 수 없이 공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면 차려 내라"
  술상이 나오자 남루한 옷과 맨발로 아이들이 몰려들어 공의 옷을 밟고
깔고 앉아 그 반찬을 손으로 다 집어먹고 어떤 아이는 손으로 공을
툭툭 치기도 하였지만 공은 "아이고 아프다. 아이고 아프다" 할 뿐이고
아이들을 꾸짖지 않았다. 그 아이들은 대부분 종의 아이들이었다.
  밥을 먹을 때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오면 공은 아이들에게 밥을 나누어
주곤 하였다. 종들이 간혹 잘못을 저질러도 매를 치는 일이 없으며
종들도 사람인데 학대하면 안 된다고 늘 말하였다.
  뜰 앞에 붉게 익은 복숭아를 이웃 아이들이 와서 따먹으면 공은 부드러운
소리로 아이들을 타일렀다.
  "애들아, 다 따지는 말아라. 나도 맛은 봐야지"
  조금 후에 나가 보니 복숭아는 하나도 없었다.
  한번은 정원을 거닐고 있는데 이웃 아이가 돌을 던져서 잘 익은 배가
땅에 가득 떨어졌다. 공이 소리쳐 종을 부르자 돌을 던진 아이는 담밖으로
도망쳐서 몰래 엿듣고 있었다. 종이 오자 그에게 떨어진 배를 주워
도망친 아이에게 주라고 하고 나무라는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
  공이 여러 재상들과 함께 공무를 보았는데 당시 김종서는
공조 판서였다. 그가 공조의 관원들을 시켜 술상을 차려 와서 대접을 하자
공이 벌컥 화를 냈다.
  공은 공조 판서 김종서를 앞에 불러 준엄하게 꾸짖었다.
  "국가가 예빈시를 정부 옆에 두는 것은 정승들을 위해서이다.
만약 우리 정승들이 배가 고프면 예빈시를 시켜 준비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거늘 어찌하여 공조가 이 음식을 차리느냐?"
  정승 김극성이 이 일을 경연석에서 임금께 아뢰니, 세종은
"대신이면 마땅히 그래야만 백관을 통솔할 수가 있다"고 하였다. 황희
또한 김종서를 무척 아끼고 사랑하였기 때문이었던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비 새는 집에서 살았던 맹고불 맹사성

  맹사성(1360-1438)의 본관은 신창이고, 자는 성지,
호는 동포이다. 효성이 지극하여 열 살 때 어머니상을 당하였는데
일주일 동안 미음도 먹지 않았고, 장례를 치른 뒤에 3년 동안
산소를 지키며 죽을 먹었다.
  묘 곁에 잣나무가 있었는데 산돼지가 내려와 잣나무에 몸을 비비곤
하여 말라 죽게 되었다. 맹사성이 통곡하니 그 이튿날 산돼지가 그만
호랑이에게 물려 죽고 말았다. 사람들은 그의 지극한 효성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하였다. 이 일이 알려지자 정려문이 서게 되었다.
  정승이 된 후에도 그의 집은 늘 가난하고 협소하였다. 하루는 병조
판서가 공적인 일을 보고하러 그 집을 방문하였다. 그때 소나기가 쏟아졌는데
집의 곳곳이 새서 의관을 모두 적시게 되었다.
  "정승의 집이 그렇게 초라한데 내가 어찌 행랑채를 짓겠는가?"
  병조 판서는 집으로 돌아와 탄식하며, 집 지을 준비를 해 두었던 것을
다 치우라고 하였다.
  맹사성의 본가가 온양에 있었는데 그는 그곳에 내려갈 때면 관청에
들르지 않고 시종 한 명을 데리고 간편한 차림으로 가곤 하였다.
  한번은 소를 타고 온양에 내려갔는데 양성, 진위 두 사또가
공이 내려온다는 것을 듣고 장호원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웬
사람이 소를 타고 지나가는 것을 보고 사람을 보내 문책하였다. 그러자
맹사성이 사또가 보낸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가서 온양 맹고불이라고 일러라"
  그 사람이 돌아가서 그렇게 말하니 이 말을 들은 두 사또가 혼쭐이
나서 도망가는 바람에 차고 있던 인끈이 언덕 아래 깊은 못에 빠지는
것도 몰랐다고 한다. 그래서 이 못을 인침연이라고 부른다.
  맹사성이 온양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용인에서 비를 만나
여관을 찾게 되었다. 이 여관에서 제일 좋은 방은 어떤 사람이 먼저
들어와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에게 딸린 하인들이 무척 많았고 그의 차림새도
무척 호화로웠다. 그는 영남에 사는 부자로서, 녹사(기록이나
문서, 전곡 등을 담당하는 관리) 시험을 보려고 서울로 가는 길이었다.
  그는 구석방에 든 맹사성을 누각으로 불러 올려 재미있는 놀이를 하자고
거만스런 말투로 제의하였다. 막힘 없이 말을 주고받되 묻는 말은
'공'자로 끝내고 대답하는 말은 '당'자로 끝내기로 약속하였다. 이 제의에
따라 맹사성이 먼저 시작했다.
  "서울은 무슨 일로 가는공?"
  "녹사 시험에 응시하러 간당"
  맹사성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공이 뽑히도록 해줄공?"
  "하하, 그렇게 못한당"
  뒷날 의정부에 그 사람이 녹사 입시생으로 들어와서 맹사성에게 인사하였다.
  맹사성이 그에게 물었다.
  "그래, 어떤공?"
  그는 엎드려 기어드는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죽어지이당"
  그 자리에 참석한 재신들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했다. 맹사성이
그들에게 지난 이야기를 해주자 좌중은 배를 잡고 웃었다.
  맹사성은 그를 녹사로 채용하였다. 그는 그 뒤 여러 고을에서 유능한
아전으로 이름을 날렸는데, 이는 모두 맹사성의 추천 덕분이었다.
  이 이야기는 '공당문답'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

     앉아서 세종의 술잔을 받은 최윤덕

  최윤덕(1376-1445)의 본관은 통천이고, 자는 여화이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 운해는 국경을 지키러
나가고 집에 없었다. 최윤덕은 그 이웃 동네 양수척(무자리:사냥과
고리를 걸어 파는 것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의 집에서 길러졌다.
그는 차츰 자라면서 힘이 세고 활쏘기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어느 날 목우산에 호랑이가 나타났다. 윤덕이 즉시 달려가서
화살 하나로 호랑이를 쏘아 죽였다.
  양수척이 윤덕을 데리고 그의 아버지가 있는 합포진으로 갔다.
운해에게 윤덕의 재능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자 운해가 "한번 시험해
보리라" 하고 사냥을 시켰는데, 달리면서 좌우로 쏘는 족족 다
맞추었다. 아버지 운해가 웃으면서 말하였다.
  "너의 손이 제법 빠르긴 하지만 아직 법도를 전연 모르는구나. 네가
보인 솜씨는 하찮은 재주일 뿐이다"
  아버지는 그 길로 아들에게 병법을 가르쳐 드디어 명장으로 만들었다.
세종 원년(1419)에 이종무와 함께 주사(해군)를 거느리고
대마도에 들어온 왜군을 토벌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전과가
보고 되자 세종은 그에게 편지를 보내어 위로하고 그를 우찬성 겸 평안도
절제사 및 안주목사를 겸직하게 하였다.
  그는 공무가 끝나는 여가여가로 관청 뒤 빈 땅에 손수 채소를 가꾸었다.
어느 날 채소밭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소송을 하러 온 백성 하나가
그가 목사인 줄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향해 "지금 사또께서 어디 계시오?"
하니, 윤덕이 시치미를 떼고 "지금 관청에 있소" 하고 재빨리 가서
관복으로 갈아 입고 그 소송을 처리하였다.
  어느 날 부인 한 사람이 울면서 고하였다.
  "지난 밤에 호랑이가 제 남편을 물어 죽였습니다"
  "내가 너의 남편 원수를 갚아 주마"
  최윤덕은 호랑이를 쏘아 죽여 그 배를 가르고 뱃속에 있는 뼈를 거두어
의복으로 싸서 관속에 넣어 주었다. 그 부인은 감사의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여진족 이만주가 국경을 침범하였다. 세종 임금이 최윤덕을
보내어 정벌하도록 하니, 최윤덕이 크게 승리하고 돌아왔다. 세종은
근정전에서 최윤덕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한 잔치를 베풀고 직접 최윤덕에게
술을 권했으며, 또 세자에게도 술을 따르도록 명하였다. 윤덕이
일어나서 잔을 받으려고 하니 임금은 일어나지 말고 앉아서 받으라고
하였다. 세종이 군관에게 춤을 추라고 하자 술에 취한 윤덕이 일어나서
그 군관과 함께 춤을 추었다.
  경원부사 송희미가 군법에 걸려 사형을 당하게 되었다. 윤덕은
송희미와 친구 사이였다. 윤덕은 그를 위하여 술상을 차리고 술을
권하면서 위로하였다.
  "상심하지 말게. 법은 피할 수 없네 우리 인생은 한번은 죽어야 하네.
나 또한 죽어서 그대 뒤를 따르겠네"
  벼슬은 영중추부사에 이르렀고 시호는 정렬이다. 세종묘에 배향되었다.

     방안에서 우산을 써야 했던 청백리 유관

  유관(1346-1433)의 본관은 문화이고, 자는 경부,
호는 하정이다. 공민왕 20년(1371)에 문과에 급제하여 우의정에
이르렀다. 유관은 그릇이 크고 너그럽되 공정하고 청렴하였으며, 남달리
총명하되 배움과 가르침에 게으르지 않았다.
  그의 집은 흥인문(동대문) 밖에 있었는데 담장도 없는 초가삼간이었다.
그것을 알게 된 태종 임금이 선공감을 시켜서 본인 모르게 집을 지어 주었다.
  유관의 생활은 늘 청빈하였다. 장마비가 한 달 넘어 계속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천장이 새서 비가 주룩주룩 쏟아졌다. 유관은 우산을 받쳐
들고 방안에 앉아서 부인을 돌아보고 말했다.
  "우산이 없는 집은 이 장마통에 어떻게 견딜까?"
  "우산이 없는 사람은 반드시 다른 준비가 있을 것입니다"
  부인이 이렇게 대답하니 유관이 웃었다.
  겨울에 유관의 집을 방문하면 맨발에 짚신을 신고 나오는 유관을 흔히
볼 수 있었고, 봄에는 호미를 들고 채소를 가꾸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세종 6년(1424)에 우의정으로 벼슬을 물러났다.
  유관은 손님이 오면 반드시 술을 대접하였는데, 막걸리 한 동이를 뜰
위에 두고 늙은 여자종을 시켜 사발로 술을 대접하게 하였으며, 술을
마시며 손님과 화락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역졸들의 고통을 임금에게 낱낱이 아뢴 노한

  노한(1376-1443)의 본관은 교하이고, 자는 유린이다.
어릴 적부터 행동이 어른처럼 점잖았다. 뒤에 여흥부원군
민제의 딸에게 장가 들었다.
  조선조에 들어와 삼도 염찰사(암행어사)가 되어 해주군에서 전함을
만드는 일을 오랫동안 감독하였다. 그는 서울로 복명할 때 전함
만드는 역졸들이 피부병에 걸려 몸에 벌레가 생겨 고생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고하였다. 보고를 들은 임금은 얼굴빛을 바꾸며 화난 어조로
말하였다.
  "그렇다면 내가 진시황이나 수양제 같은 폭군이란 말이냐?"
  노한은 갓을 벗고 머리를 조아리며 다시 말하였다.
  "신이 염찰사의 명을 수행한 이래로 오직 백성들의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하여 왔는데 삼도 해변의 역졸들이 겪는 고통은 더없이 비참하므로
신이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보고 드린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임금은 웃으며 그에게 사직하지 말라고 했다.
  그후 벼슬이 이조 판서에 올랐다. 태종 9년(1409)에 동서 민무구의
옥사가 일어나서 양주로 낙향하였다가 14년 후인 세종 4년
부인 민씨가 입궐하여 사례 인사를 올리자 임금이 말했다.
  "그것은 나의 은혜가 아니고 선왕 태종 임금의 은혜이다"
  시호는 공숙이다.

     어린 나이에 자신의 무죄를 말 한마디 하지 않고 해결한 슬기로운 신개

  신개(1374-1146)의 본관은 평산이고, 자는 자격,
호는 인재이다. 어릴 적에는 외갓집에서 자라났다.
  세 살 때의 일이었다.
  아이들이 벽에 낙서를 하여 어른들에게 꾸중을 들었다. 모두들 자기가
한 짓이 아니라고 큰 소리로 시끄럽게 변명하였는데 신개만은 한 마디
말도 없이 자기의 키와 벽 높이를 손가락으로 가리킬 뿐이었다. 낙서한
벽의 높이가 자기 키보다 한 자나 높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무죄를 슬기롭게 말없이 증명한 것이다.
  이것을 본 외갓집 원씨는 기특하게 여기면서 뒷날 신씨 문중을 일으킬
사람은 반드시 이 아이일 것이라고 하였다.
  그의 벼슬은 좌의정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희이다. 세종묘에 배향되었다.

     굶어 죽은 왕자 광평대군

  광평대군(1425-1444)은 어릴 적에 관상을 보았는데 굶어
죽을 팔자라는 것이었다.
  아버지 세종 임금은 내 아들이 어떻게 굶어 죽을 수가 있느냐며 적전(임금이
친히 경작하는 토지)을 많이 하사하였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광평대군은 생선을 먹다가 목에 가시가 걸려 그
길로 음식을 먹지 못하고 굶어 죽었다.

     육신보다 격이 더 높은 사람 최덕지

  최적지(1384-1455)의 본관은 전주이다. 선조가 당나라 청하로부터
뱃길로 와서 전주에 살게 된 것이다. 지금 전주를 객산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 최담은 문과에 합격하여 참의를 지냈으며, 광지,
직지, 득지, 덕지 사형제를 낳았다.
  덕지의 호는 연촌우수이고 권양촌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태종 5년(1405)에 생원시, 문과시를 거쳐 직제학을 지내고 남원부사로서
영암 영보촌에 눌러앉아 누각에 존양루라는 편액을 달고 살았다.
  문종 원년에 집현전 학사가 되었다가 그 이듬해 겨울에 나이 때문에
사직하였는데, 집현전의 학사들이 그를 위해 한강가에서 술자리를 베풀어
전송하였다. 이때 그를 흠모하여 부른 송가가 40여 편에 이르렀다.

  처음부터 끝까지 의리를 온전히 했으니
  공은 곧 나의 스승일세

  당시에 국가가 어려운 일을 당하여 참혹한 화를 많이 당하였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김시습은 오늘의 백이요, 육신은 오늘의 방련이요,
연촌우수는 육신에 비해서 더 높은 자다"라고 하였다.
  향년 72세이고, 시호는 문숙이다.

     하늘의 조화를 부른 절개를 지킨 정본

  정본(?-1454)의 본관은 진주이고, 자는 자외, 호는 애일당이다.
태종 16년(1416)에 문과에 급제하고 문종 2년(1452)
좌찬성에 올랐으며 곧 우의정에 올랐다.
  계유년(1453)에 황보인 등이 죽음을 당하자 정본은 낙안에
유배되었다가 곧 변방 지역에 안치되었다.
  정본이 전경체찰사(지방에 병난이 났을 때 왕을 대신하여
평정의 임무를 띤 임시 벼슬)로서 영남으로 가는 길에 용안역에 닿았는데
거기서 자기를 잡으로 온 관원을 만났다. 정본은 즉시 말에서
내려 인사하였다.
  "길에서 형벌을 받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니, 역관사로 들어가는 것이
어떻겠소?"
  관원이 말하였다.
  "귀양지까지 갑시다"
  정본은 다시 재배하고 나서 물었다.
  "그러면 나를 살려주는 것입니까?"
  "..."
  그때부터 같은 길을 가면서 열흘 동안 그들은 서로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 관원은 옛날에 함께 있던 동료였다.
  "정본과 허눌은 안평대군 용의 당 조극관과 모의하여
병권을 장악하였으니 그 죄가 황보인에 못지 않다. 마땅히 같은 법으로
다스려야 한다"
  헌납 김계우가 이렇게 주장하였으나 그대로 되지 않고
단종 2년(1454)에 사사되었다. 정본이 귀양소에 있을 때 늘 선대의
사판을 모시고 있었는데, 하루는 따라온 승려를 시켜서
밥을 짓게 하고 제사한 뒤에 그 사판을 태웠다. 그리고 곧 사약을 받게
되었다.
   죽음에 임해 아내가 그의 옷자락을 당기며 슬피 울자 정본이 아내에게
말했다.
  "조정의 명령이라 거역할 수 없소. 나 죽은 뒤의 일은 당신이 알아서
하시오"
  그는 또 사약을 마시기 전에 하늘을 바라보고 한탄하였다.
  "나에겐 두 마음이 없으니 내가 죽으면 반드시 이변이 있을 것이다"
  과연 그가 죽자 갑자기 소나기가 몰아쳤고 하늘에 흰 무지개가 섰다.
그의 아내 변씨는 정본의 오촌 조카를 데려다가 양자로 삼았다.

     '신'자 대신 '거'자를 써서 세조에게 항거한 박팽년

  박팽년(1417-1456)의 본관은 순천이고, 자는 인수,
호는 취금헌이다. 세종 16년(1434)에 문과시, 29년에 중시(이미
과거에 급제한 사람에게 다시 보이는 시험)에 각각 합격하였다.
  을해년에 단종이 선위하니 박팽년이 경회루 연못에 빠져 자결하려고
하였다. 이를 본 성삼문이 제지하며 말하였다.
  "우리 상황(단종)을 위하여 뒷날을 기약하자. 만약에 성공하지 못하면
그때 죽어도 늦지 않다"
  박팽년은 그의 말에 따랐다. 드디어 성삼문, 하위지, 유성원, 이개,
유응부 등이 단종의 복위를 모의하였다. 박팽년은 충청감사로 나갔다가
세조 2년 (1456)에 형조 참판이 되었다. 모의가 발각되어 국문 받을
적에 박팽년은 당당하게 말했다.
  "성승, 유응부, 박청이 운검이 되었다면 무슨 어려움이 있었겠습니까.
그때 장소가 좁아서 운검을 세우지 않은 까닭에 성공하지 못하고
뒷날 임금이 권농하러 가는 길에 일을 꾀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세조가 그의 재주를 사랑하여 은근히 달랬다.
  "네가 만약 나에게 돌아온다면 살려주겠다"
  "..."
  박팽년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신을 신이라고
일컫지도 않았다. 세조가 노여워하며 말했다.
  "너는 이미 나에게 신이라고 칭하였는데 이제 와서 신이라고
청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나는 상왕의 신하입니다. 전에 제가 관찰사로 있었을 적에 올린
편지에도 신이라고 칭한 적이 없습니다"
  그때의 편지를 가져와서 확인해 보니 모두 신자가 아닌 거자였다.
  금부도사인 김명중이 박팽년을 달랬다.
  "공은 어찌하여 이런 화를 자초하는가?"
  팽년은 한숨지으며 말했다.
  "내 마음이 편하지 못하니 부득이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네"
  팽년은 죽음을 앞두고 그의 아버지 박중림에게 울면서 말하였다.
  "임금에게 충성하고자 하다가 이런 불효를 저질렀습니다"
  박중림은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임금에게 불충을 하는 것은 효도가 아니지 않느냐?"
  선조 16년(1583)에 임금이 좌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옛적에 박팽년이 친구를 추천하였는데 그 친구가 은혜를 갚기 위하여
사례하자 박팽년이 거절하였다고 한다. 참으로 청렴한 사람이다"
  영조 34년(1758)에 이조 판서에 증직되고 시호는 충정이라 하였다.
동왕 51년에 정려가 세워졌다.
  박팽년의 아들 생원 헌과 순, 그 아우 분과 박팽년 부자
여덟 사람이 모두 죽음을 당하고 순의 아내 이씨는 대구 관비가 되었는데
마침 임신중이었다. 아들을 낳았는데 그때 마침 여종은 딸을 낳았으므로
서로 바꾸어 길렀다. 아들 이름은 박비라 하였다.
  성종 3년(1472)에 순의 친구의 사위 이극균이 영남 도백이
되었는데, 박비에게 권하여 자수시켰다. 성종 임금은 그를 특별히 사면
하였으며, 이름을 일산으로 고쳤다.

     "사직이 위태로울 때는 죽는 것이 영광일세" 이개

  이개(1417-1456)의 본관은 한산이고, 자는 청보,
호는 백옥이다. 세종 18년(1436)에 문과시, 동왕 29년에 중시를
거쳐 직제학으로 있었을 때 병자년 사건(단종 복위 모의)이 발각되었다.
  세조가 이개에게 말했다.
  "너는 나의 친구다. 일이 이렇게 되었지만 숨기지 말고 모두 말해야
한다"
  그러나 이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개는 몸이 허약하여 옷무새를
감당하지 못할 정도였지만, 국문을 받을 적에 얼굴빛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세조가 대군으로 있을 적에 이개의 숙부 이계전이
수양대군과 매우 가까웠으므로 이개가 늘 경계하였다. 사형을 당할
때 이개는 한 수의 시를 썼다.

  사직이 안전할 땐 사는 것이 중요하고
  사직이 위태로울 때는 죽는 것이 영광일세

  영조 4년(1728)에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충간이다.

     세조로부터 받은 봉록을 고스란히 쌓아 둔 하위지

  하위지(1387-1456)의 본관은 진주이고, 자는 중장,
또는 대장이며 호는 단계, 또는 적촌이다.
  세종 20년(1438)에 문과에 장원하여 집현전에 들어갔다. 과묵하고
조용하며 공손하고 예의가 있어서 대궐을 지나갈 때는 반드시 말에서
내리고, 아무리 비가 오더라도 길을 피해 간 적이 없었다. 시강원과
경연석에서 많은 활동을 하여 그 당시 인재를 말할 적에 하위지를 으뜸으로
꼽았다.
  김종서가 죽음을 당한 뒤 좌사간에 올랐으나 사양하여 나가지 않고
공실(왕실)을 강하게 하고 내치를 엄하게 하며 권문을 막으라는 상소를 올렸다.
  세조가 등극하여 예조 참의가 되었으나 봉록을 쓰지 않고 고스란히
쌓아 두었다. 단종 복위 모의가 발각되자 그 재주를 사랑한 세조가 은근히
타일렀다.
  "그 일에 참여한 적이 없다고 하면 용서해 주겠다"
  하위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세조가 직접 나와서 죄인들을
세 차례나 단근질을 하였다. 드디어 하위지 차례가 되었을 때 그는 말하였다.
  "이미 역적 이름에 올랐으니 그 죄는 마땅히 죽음인데 또 물을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세조는 화가 났으나 단근질은 하지 않았다. 하위지는 성삼문과 같은
날에 죽음을 당했다.
  영조 34년(1758)에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충렬이다.
하위지는 호와 박 두 아들을 두었는데 그때 박은 채 스무 살도
못되었다. 박은 조금도 떠는 기색 없이 금부도사에게 말했다.
  "어머니께 작별인사 드릴 시간을 주시오"
  그는 꿇어 앉아서 어머니에게 고하였다.
  "죽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이미 죽음을 당했는데 자식이
어찌 혼자 살겠습니까?"
  또한 누이동생을 돌아보며 단단히 일렀다.
  "몰수되어 노예가 되겠지만 여자의 의리는 마땅히 한 남자를 위하여
죽어야 한다. 절대 개돼지 같은 행동은 하지 말아라"
  그가 조금도 흔들림 없이 사약을 받자 사람들은 과연 하위지의 자식답다고
말하였다.
  하위지의 동생인 생원 강지, 기지는 형 하위지와 함께 나란히 문과에
합격하였고 소지는 생원이었는데 모두 함께 죽음을 당했다. 하위지의
아들 박은 뒤에 지평에 증직되었다.

     세조의 공을 치하하는 글을 쓰고 통곡한 유성원

  유성원(?-1456)의 본관은 문화이고, 자는 태초이다.
  당시 세종은 문치에 힘을 써서 집현전을 설치하고 문사들을 모아서
고문에 응하도록 하였다.
  집현전 남쪽에 큰 버드나무가 있었다. 경오년(1450)에 흰 까치가 와서
둥지를 짓더니 하얀 새끼를 낳았다. 계해년에 이 버드나무가 말라
죽었다. 어떤 사람이 유성원을 놀리기를 '화근은 버드나무로부터
시작될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말대로 유성원은 화를 당하고 집현전도
없어졌다.
  문종이 왕위에 오른 지 2년 만에 승하하고 단종 원년(1453)에 김종서가
죽음을 당하였다. 백관들이 이것으로써 세조의 공을 포상하여 주공에
비유하고 집현전 학사로 하여금 그 내용을 초안하라고 하자,
집현전 학사들이 모두 도망가고 유성원이 홀로 남게 되었다.
  그가 위협에 못 이겨 하는 수 없이 초안을 작성하고는 집에 돌아와
통곡하였으나 집안 사람들이 그 까닭을 알지 못하였다.
  단종이 상왕으로 밀려났을 때, 유성원은 성균관 사예로
있었다. 단종 복위 모의가 발각되자 성균관에서 말을 타고 급하게 집으로
돌아온 유성원은 아내와 함께 술을 마시고 혼자 가묘에 들어가 오랫동안
나오지 않았다. 부인이 문을 열고 보니 칼로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서생들과는 아무 일도 도모할 수 없다고 한탄한 유응부

  유응부(?-1456)의 본관은 기계이고, 자는 신지이다.
키가 크고 얼굴에 위엄이 있으며 활을 잘 쏘고 용맹스러웠다. 또한
효도가 지극하여 어머니를 위로하는 일이라면 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무과에 등과하여 벼슬이 2품 재상직에 올랐으나 풀로 엮은 자리로
문을 가리울 정도로 가난하여 고기 한번을 먹지 못하였지만 어머니를
봉양할 물건은 모두 갖추었다. 언젠가 동생 응신과 어머니를 모시고
포천에 간 적이 있는데 도중에 말 위에서 기러기를 쏘아 땅에
떨어뜨림으로써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렸다.
  세조 2년(1456)에 박팽년 등과 단종 복위를 모의할 당시 운검으로
있던 응부는 당장 거사하자고 주먹을 휘두르며 외쳤다.
  "권람과 한명회를 죽이는 데는 이 주먹이면 족하지 어찌 칼을 쓰겠는가!"
  이때 박팽년과 성삼문이 적극적으로 제지하면서 다음 기회를 보고
오늘은 그만두자고 하였다.
  "모든 일은 신속한 것이 제일이다. 오늘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없다"
  유응부는 자기 뜻을 고집하였지만 박팽년과 성삼문 등이 말을 듣지
않아서 그 일은 중단되었고, 그 뒤에 모의한 일이 발각되었다. 세조에게
추국을 당하자 유응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단종 임금을 복위하려 하다가 불행하게도 뜻을 이루지 못했으니
이제 말해서 무엇하겠소?"
  또 성삼문 등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서생들과는 아무 일도 도모하지 못한다고 하더니 과연 그 말이
맞았도다. 지난번 내가 칼을 쓰려고 할 적에 너희들이 굳이 말렸기 때문에
일이 이 지경이 되었다. 사람이 꾀가 없으면 짐승과 다름이 없다"
  그는 입을 꼭 다물고 단근질을 받으면서도 얼굴빛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너라"라고 호령하면서 끝내 입을 열지
않고 죽었다.
  무인년에 병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충목이다.

     태어날 때 세 번 묻더니 죽을 때도 세 번 신문 당한 성삼문

  성삼문(1418-1456)의 본관은 창녕이고, 자는 근보,
호는 매죽당이다. 태어날 적에 공중으로부터 아기를 낳았느냐는
물음이 세 번 이어졌기 때문에 이름을 삼문이라고 하였다. 세종 20년(1438)에
문과에 급제하고 동왕 29년(1447) 중시에 장원하였다.
  문종이 동궁 시절에 학문에 힘써서 매달 달 밝은 밤이면 손에 책을
들고 집현전 숙직실로 가서 글을 물었으므로 성삼문은 의관을 벗지 못하고
지냈다.
  어느 날 밤중에 옷을 벗고 누우려고 하는데 갑자기 신발 소리가 들려 와서
나가 보니 문종이었다. 을해년(1455)에 단종이 선위하였을 때 성삼문은
예방승지로서 옥새를 끌어안고 통곡하였다.
  세조 2년에 중국 사신을 맞는 잔칫날 단종을 복위하기 위하여 거사
하기로 하였는데, 이때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운검을 세우지 못하게 되자
성삼문은 운검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낌새를 챈 김질이
밀고하여 사건이 발각되었다.
  세조가 삼문을 불러서 세 번 심문하니 웃으면서 그 말이 다 맞다고
하였다.
  "어찌하여 너희들이 나를 배반하느냐?"
  세조가 물으니 삼문이 소리를 질러 대답하였다.
  "우리 임금을 복위하려고 하는 것이 어째서 배반이오? 천하에 자기
임금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누가 있소?"
  너는 나의 녹을 먹으면서 나를 배신하였으니 너는 이랬다 저랬다
하는 사람이다"
  "상왕이 계시는데 어찌하여 나를 신하로 여깁니까? 나는 녹을 먹지
않았으니 우리 집을 몰수하여 계산하시오"
  단근질을 당하였으나 성삼문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신숙주를
돌아보면서 질책하였다.
  "너와 내가 집현전에 있을 적에 세종 임금이 원손을 안고 뜰을 산보
하시면서 우리들을 돌아보시고 '천추만세 후에 경들은 이 아이를 잘 보
호하라'고 한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거늘 너는 잊었단 말이냐?"
  신숙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강희안을 신문하였으나 불복하자 세조가 다시 삼문에게 물었다.
  "강희안도 함께 모의하였느냐?"
  삼문이 대답하였다.
  "그는 우리의 모의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름 있는 선비를 다 죽이지
말고 남겨 두고 쓰십시오"
  이 때문에 강희안은 죽음을 면하였다. 삼문은 죽음에 임박한 순간에도
태연자약한 안색으로 사람들을 보고 말하였다.
  "자네들은 어진 임금을 잘 보좌하여 태평성대를 살게나. 나는 지하에
들어가 우리 임금을 만나겠네"
  죽은 뒤에 그 집을 몰수하고 보니 세조가 즉위한 이후로 받은 봉록을
한 방에 고스란히 모아 놓고 각각 어느 달 봉록이라고 써 놓았다. 집에
변변한 살림이라곤 하나도 없었고, 침실에 자리만 깔려 있을 뿐이었다.
성삼문이 남긴 절명시는 다음과 같다.

  북소리는 둥둥 목숨을 재촉하는데
  서풍에 해는 뉘엿뉘엿 지려고 하네
  황천에 주막집 하나 없다 하니
  오늘 저녁엔 뉘 집에서 잘꼬

  성삼문이 중국에 갔을 적에 어떤 사람이 가리개에 시를 써 달라고
청하였다. 그는 그림을 보지 않고 먼저 두 구를 썼는데, 나중에 보니
수묵도였다.

  눈같이 흰 옷에 옥 같은 발뒤꿈치
  연못 속 물고기를 얼마나 엿보았느냐
  우연히 날아서 산음현을 지나다가
  왕희지의 벼루 씻는 연못에 추락하였나

  시를 본 그 사람은 매우 감탄하였다.
  매월당 김시습, 추강 남효온이 성삼문의 시체를 수습하여 노량진
아차현 남쪽 기슭에 장례 지냈다. 성삼문이 언젠가 중국에 들어가서
백이, 숙제의 묘 옆을 지나다가 다음과 같은 시를 써
붙였는데, 비석에서 땀이 흘렀다고 한다.

  말고삐 잡고 감히 잘못을 간했으니
  그 충의 당당하여 햇빛처럼 빛나네
  초목 또한 주나라 이슬 먹고 자랐거늘
  수양산 고사리는 어느 나라 고사린가

     오세 신동, 끝없는 방랑자 김시습

  김시습(1435-1493)의 본관은 강릉이고, 자는 열경,
호는 매월당이다.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글자를 읽고 3세 때
글을 지었으며 5세에 '중용', '대학'을 배워서 신동이라는 소문이 났다.
집현전 학사 최치운이 보고 정말 기특한 재주라 칭찬하고 이름을
시습이라 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세종은 김시습을 승정원으로 부르고
지신사 박이창으로 하여금 시험을 보게 하였다.
  박이창이 먼저 써 내려갔다.
  "동자의 학문은 흰 학이 푸른 창공을 춤추는도다"
  김시습이 대구를 맞추었다.
  "성주의 덕은 누런 용이 푸른 공중에서 끔틀거립니다"
  박이창이 김시습을 무릎 위에 앉히고 여러 번 시험하였는데, 그때마다
좋은 시를 척척 지어 내었다. 세종은 직접 김시습을 보고 싶어하였으나
소문이 나는 것을 꺼려하여 소문 없이 잘 길러서 학업이 성취된
뒤에 크게 쓸 예정이었다. 세종이 김시습에게 비단 50필을 주면서 네
힘껏 가져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시습이 그 끝자락을 잡아매 그 한끝을
손에 잡고 끌고 나갔다. 이때부터 김시습의 이름은 천하에 진동하여
이름 대신 '오세 신동'으로 소문이 났다.
  13세에 김반에게 '논어', '맹자', '시경', '서경'을 배우고
윤상에게 '주역'과 '예기'와 '사기'를 배웠다.
  세종과 문종이 잇달아 승하하고 어린 단종이 등극한 지 얼마 안 되어
세조에게 양위하였다. 이때 시습의 나이 21세였다. 그는 삼각산에서 글공부를
하다가 단종의 양위 소식을 듣고 대성통곡하고, 읽던 책을 불태운
뒤에 도망쳐 나와 절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불명은 설잠,
청한자, 벽산청은, 동봉, 췌세옹이라 하였다.
  그는 작은 키에 호기가 넘치고 예의 따위는 전혀 차리지 않았다. 성격이
꼿꼿하여 남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았다. 시대의 잘못을 한탄하고
드디어 몸을 숨겨 전국을 방랑하니,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산천이 거의
없었다. 그에게 배우기를 원하는 자가 있으면 나무든 돌멩이든 잡히는
대로 던지고 때로는 활도 쏘아서 거절하였다. 산에 오르면 나뭇잎에
시를 쓰고 혼자 읊조리다가 금방 울면서 그 나뭇잎을 따 버렸다.
  비오는 밤이면 흰 종이 100여 장을 꺼내어 물가에 앉아 혼자 읊조리면서
시를 쓰고 쓴 다음엔 그 종이를 물에 던지곤 하였는데 종이가 다
없어져야 그만두곤 하였다. 때로는 나무를 깎아 농부의 모습을 만들어
책상 위에 올려놓고 온종일 지켜보며 목놓아 울다가 태워 버리곤 하였다.
벼슬한 고관을 만나면 존경받는 사람이 아니면 반드시 그 앞에서
"이 백성이 무슨 죄냐?" 하며 통곡하였다.
  달 밝은 밤이면 청초한 목소리로 '이소경'을 읽었는데 그때마다
눈물이 흘러 옷깃을 적시곤 하였다. 술을 좋아하여 자주 취했으며
취한 뒤에는 "우리 영릉(세종의 능호)을 다시는 못 뵙는구나"라고
한탄하며 슬피 울었다.
  이때는 김수온, 서거정이 국사(온나라에서 특히
높이는 우수한 선비)로 일컬어지던 시기였다. 하루는 서거정이 조정에
가는 길에 김시습을 만났다. 김시습은 끈으로 허리를 질끈 동여맨
남루한 옷차림이었다.
  "강중(서거정의 자)은 편안하신가?"
  시습이 큰 소리로 무례하게 대하였지만, 서거정은 웃으면서 대해 주었다고
한다.
  언젠가 서거정이 강태공이 낚시질하는 그림을 주고 시를 부탁하니
김시습은 이렇게 썼다.

  비바람 쓸쓸히 낚시터에 불어올 땐
  위천의 물고기랑 욕심이라곤 모르더니
  어찌하여 늘그막에 응양장이 되어서
  공연히 백이 숙제로 하여금 굶어 죽게 하느냐

  이 시가 쓰인 그림을 되돌려 받은 서거정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한다.
  세조가 내전에 법회를 열고 김시습을 초청하였는데, 그는 몰래 새벽에
도망쳤다. 사람을 보내어 뒤따르게 하자, 그는 더러운 오물 속에 들어가
얼굴을 반만 내밀고 물끄러미 앉아 있었다.
  김시습은 47세에 갑자기 머리를 기르고 결혼을 하였다. 사람들이 그에게
벼슬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끝내 뜻을 굽히지 않고 예전처럼 방랑
생활을 하였다. 어쩌다 소송의 일로 관가에 들어가면 분명한 잘못인데도
괴변을 늘어놓아 반드시 이겼으며, 재판이 끝나면 큰 소리로 웃으며
이긴 문서를 찢어 버리곤 하였다. 한번은 시장에서 아이들과 어울려 놀고
있는데 영의정 정창손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외쳤다.
  "저놈이 벼슬을 그만두어야 하는데"
  보는 사람들이 모두 꺼려하여 시습과 절교하고 상대하지 않았다.
  종실 수천부정 이정은과 남효온, 안응세,
홍유손 등은 끝까지 변치 않았다. 아내가 죽자 다시
산으로 들어가 중이 되어 강릉과 양양 사이를 오갔다. 이때 유자한이
양양군수로 있었다. 그는 김시습을 극진하게 대접하고 가정을
찾으라고 권유하였다. 이에 김시습이 사양하는 편지를 썼다.

  낙백하여 세속을 살기보다는 마음대로 소요하면서 생을 보내는 것이 낫다.

  59세에 죽었는데 화장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는 생시에 자기의
자화상 두 폭을 남기고 찬을 썼다.

  네 모양은 너무도 막연하고
  네 말은 너무도 미련하다
  언덕 밑 구렁텅이로 너를 밀어 넣는 것이 마땅하다

  숙종조에 집의에 증직되고 정조 8년(1784)에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청간이다. 홍산 무량사에서 죽었는데 절 옆에
3년 동안 묻어 놓았다가 장례할 때 보니 생시의 얼굴과 같았으므로
무량사 승려들이 부처님으로 여겼다. 화장을 하고 탑을 세웠다.

     '육신전'을 지어 충의를 세상에 알린 남효온

  남효온(1454-1492)의 본관은 의령이고, 자는 백공,
호는 추강, 또는 행우이다.
  김종직에게 글을 배웠는데 김종직은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언제나
'우리 추강'이라고 불렀다. 김굉필, 정여창, 김시습, 안응세는 남효온을
형제처럼 대해 주었다. 성종 때 공은 18세의 나이로 상소하여 소릉(문종의
비 현덕왕후의 능호)의 복구를 청하였는데, 상소가 받아
들여지지 않자 세상을 단념하고 명승지를 찾아 소요하였다.
  세속의 일에 분개하여 모악산에 올라 통곡했으며 위태롭고 과격한
말을 거리낌없이 하였으므로 김굉필, 정여창이 늘 조심할 것을 당부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김시습은 늘 남효온을 보면 이렇게 물었다.
  "나는 세종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서 이렇게 고생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공은 다르지 않은가? 어찌하여 세상을 등지는가?"
  그때마다 효온은 이렇게 대답했다.
  "소릉의 일은 천지의 큰 변일세. 소릉을 복위한 뒤에 과거를 보아도
늦지 않네"
  그 뒤로 시습은 다시 권하지 않았다. 남효온이 '육신전'을 짓자
문인들이 화를 당할까 두려워 적극 말렸으나 효온은 듣지 않았다.
  "내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여 대현 충의의 이름을 매몰되게 둘 수 있는가?"
  '육신전'은 드디어 야사가 되어 세상에 전파되었다. 뒷날 그는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과거에 응시해 성종 11년(1480)에 진사에 합격하였다.
술을 즐긴다고 어머니가 꾸짖자 그는 지주부를 짓고 10년 동안 술을 끊었다.
  성종 23년(1492)에 39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연산군 10년(1504)에
부관참시되었다. 정조조에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문정이다.

     호랑이를 타고 청량포를 건너가 단종의 시신을 거둔 조려

  조려(1420-1489)의 본관은 함안, 자는 주옹, 호는
어계이다. 단종 원년(1453)에 벼슬길에 나왔는데 명망이 매우 높았다.
  어느 날 그는 제생들을 향하여 읍하고 집으로 돌아온 이후로 과거 공부를
폐지하고 두문불출하였다. 그의 시에 백이 숙제의 뜻과 돈세무민(세상에
숨어 살아도 아무 불만이 없다는 뜻)의 뜻이 나타난 것은
김시습과 마찬가지이다.
  단종이 영월에 안치되었을 때 청량포에는 아무도 출입 못하게 뱃길을
금지하였다. 이때 공은 함안에 살고 있어 영월과는 거리가 5백여 리나
되었지만 한달에 세 번씩 단종에게 가서 안부를 물었다. 잠은 원관란의
집에서 잤는데 밤마다 단종의 만수무강을 하늘에 빌었다.
  세조 3년(1457) 1월 10일 단종이 승하하였다는 말을 듣고 정신없이
달려가 밤에 청량포에 닿았지만 배가 없어서 건널 수가 없었다. 때는
벌써 새벽이었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다가 의관을 벗어 등에 지고
걸어서 건너려고 물로 들어갔다. 이때 갑자기 뒤에서 무엇이 잡아
당기는 것을 느꼈다. 돌아보니 큰 호랑이였다. 공은 호랑이를 향해서
말하였다.
  "천릿길을 달려왔는데 이 강을 건너지 못하는구나. 이 강을 건너야
임금의 시체를 거둘 수가 있는데 불행하게도 이 일을 이루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물에 빠져 물귀신이 되고 싶거늘 어찌하여 너는 나를 잡아당기느냐?"
  이 말을 들은 호랑이는 그 앞에 엎드려 올라타라는 시늉을 하였다.
조려는 호랑이 등에 업혀 무사히 강을 건넜다. 단종의 빈소에 들어가니
두 사람이 시신을 지키고 있었다. 그가 통곡 사배하고 단종의 시신을
거둔 뒤에 문 밖을 나오자 그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호랑이가
다시 그를 등에 업고 강을 건너 주었다.
  추강 남효온이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호랑이가 청량포를 건너 주어서
  조여는 노산의 시신을 염하였네

  정조 5년(1781)에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정절이다.

     단종 복위에 실패한 후 평범한 농부로 살았던 성담수

  성담수(?-1456)의 본관은 창녕이고, 자는 이수, 호는
문두이다. 세종 32년(1450)에 문과에 합격, 교리가 되었다. 단종
때 나라일이 매우 위태롭게 되자 사촌 성삼문과 더불어 왕실을 도우면서
죽더라도 마음을 변치 말자고 서로 격려하였다. 성삼문이 죽게 되자
성담수도 무서운 국문을 받았지만 일절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았다. 김해로
귀양갔다가 3년 만에 풀려나서 공주로 돌아갔는데, 결국 화병으로 죽었다.
  성담수는 높은 식견을 가졌으며 아버지의 묘 밑에 숨어서 가난한 살림을
살았지만 마음은 언제나 태평이었다. 한번도 서울에 간 적이 없고
자신이 명문세족임을 나타낸 적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평범한
농부로 보았다.
  그의 조카 성몽정이 경기 감사가 되어 본 고을을 순시할 때
숙부 성담수의 주소를 몰라 수소문 끝에 찾았다. 그의 집을 찾아가니
쓸쓸한 초가집은 비바람을 막을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하였고, 앉을래야
앉을 만한 변변한 자리조차 없었다. 탄식하고 집에 돌아온 감사 성몽정은
숙부에게 자리를 보냈다. 그러나 성담수는 곧 자리를 돌려보냈다.
  "이런 좋은 자리는 우리 같은 가난뱅이 집에는 맞지 않지"
  이때 나라에서 죄인의 자제들을 참봉을 시키고 그 거취를 살폈는데
모두 머리를 조아리면서 관의 말에 따르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나 성담수는
끝내 벼슬하지 않고 시를 읊고 낚시로 소일하면서 유유자적하였다.
  정조 5년(1781)에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정숙이다.
언젠가 성담수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낚싯대 잡고 온종일 강변에 앉았다가
  강물에 발 담그고 곤하게 잠들었네
  꿈속에서 갈매기와 만 리를 날다가
  깨어나니 몸은 석양에 누워 있네

     강물을 피로 물들인 비운의 왕자 금성대군

  금성대군(1426-1457) 유는 세종의 여섯째 아들이다.
인품이 맑고 아량이 넓으며 말씨에 한 점의 티도 없었다.
  을해년에 우의정 한확 등이 아뢰었다.
  "금성대군이 모반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한남군, 영풍군,
영양위 정종과 서로 깊이 사귀고 있으니 서둘러서 그 죄를 바로 잡아야 합니다"
  드디어 금성대군은 삭녕으로 귀향 가게 되었다. 세조 2년(1456)에 성삼문
등이 죽고 금성대군은 순흥에 안치되고 그 집은 적몰 당했다.
  다음해에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이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금성대군은 안동 감옥에 갇혔다. 어느 날 금성대군이
옷을 발가벗은 채 도망쳤다. 관청에서 그를 잡으려고 큰 수색을 벌였지만
잡지 못했다. 얼마 후에 금성대군은 자기 발로 들어와 웃으며 말했다.
  "너희들이 아무리 많아도 나를 잡지 못하지? 그러나 내가 어찌 끝내
도망할 수가 있겠느냐? 우리 임금이 영월에 계신다"
  그는 옷을 입고 북쪽을 향하여 통곡사배하고 스스로 목을 매 죽었다.
이때 이 사건에 많은 사람들이 연좌되어 죽음을 당했으므로 죽계물이
붉게 물들었다고 한다.
  영조 14년(1738)에 예손 이진수의 하소연을 받아들여 금성대군을
복관하고 시호를 정민이라 하였다.

     죽음으로 옥새를 지킨 혜빈 양씨

  양씨의 본관은 청주이다. 현감 양경의 딸이고, 찬성사 양지수의
증손녀다. 세종 때 후궁으로 뽑혀 혜빈에 봉해졌고
세 아들 한남군, 수춘군, 영풍군을 낳았다.
  세종 23년(1441)에 현덕왕후 권씨가 단종을 낳고 9일 만에 죽었다.
세종이 빈 중에서 양씨를 택하여 원손을 기르게 하였다. 양씨는 있는
힘을 다하여 단종을 길렀다. 단종이 덕을 갖추어 잘 성장한 것은 실로
양씨의 공이 컸다.
  세종과 문종이 차례로 승하하고 을해년(1455)에 세조가 왕위에 올랐다.
세조가 혜빈에게 옥새를 바치라고 하였다.
  "옥새는 나라의 중한 보물입니다. 선왕(세종)께서 세자와 세손이 아니면
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죽으면 죽었지 옥새를 내놓을 수는
없습니다"
  혜빈은 목숨을 걸고 옥새를 지키다가 피살되었다. 그 아들 영풍군은
이때 운검으로서 입시중이었는데 동시에 죽음을 당하고 한남군은
함양에 유배되었다가 금성대군과 함께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가 피살되었다.
정조 15년(1791)에 혜빈에게 민정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귀머거리, 미치광이 흉내로 일관한 권절

  권절(1422-?)의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단조, 호는 율정이다.
어릴 적부터 얼굴이 빼어나고 힘이 장사여서 남이
장군과 함께 쌍벽을 이루었으며 많은 책을 읽어 두루 박식하였다.
세종 29년(1447)에 문과에 합격하였다.
  세종은 그의 재주가 문무를 겸한 것을 보고 활쏘기와 말타기를 더 익히게
하여 사복시 직장을 제수하고 집현전 교리로 뽑았다.
  세조가 대군으로 있을 때 자주 그의 집에 와서 장래의 일을 이야기하였는데,
권절은 귀먹은 척하고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세조가 즉위한
후 그의 재주를 아껴서 첨지중추부사로 선발하고 궁중 수의를 맡겼으나
권절은 미친 척하고 그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사람을 만나면 고개를 숙이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국가는 태평하고 성주는 만수하소서!"
  그는 일생 동안 벼슬을 하지 않고 이렇게 보냈다.
  숙종 30년(1704)에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충숙이다.

     군자는 때에 따라 물러날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상소한 조상치

  조상치의 본관은 창녕, 자는 자경, 호는 정재,
또는 단고이다. 세종 원년(1419)에 생원시를 거쳐 문과에 장원하여
부제학이 되었다.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병을 핑계하여 들어가서
축하 인사를 하지 않고 사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나아갈 줄만 알고 물러날 줄 모르는 것은 바로 군자가 경계할 일입니다"
  세조는 그의 뜻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허락하였다. 세조는 그를
예조 참의에 승진시켜 벼슬을 내렸지만 그가 다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입궐하여 인사하지 않고 곧바로 동대문 밖으로 나갔다. 박팽년이 그에게
"가신 길 바라보니 우뚝하여 따를 수 없네"라는 편지를 썼다.
  성삼문이 그에게 편지하기를 "영천의 맑은 바람이 동방의 기수 영수
되었으니 우리들은 조 선생의 죄인이다" 하였다.
  영천으로 돌아온 조상치는 서쪽을 향하여 앉는 일이 없었으며, 단종의
'자규사'를 보고 동쪽을 향하여 네 번 절하고 다음과 같이 화답하는 시를 썼다.

  소쩍소쩍
  달 뜨는 저녁 산속에서 무엇을 호소하나
  뻐꾹뻐꾹
  파잠을 바라보고 날아서 건너고 싶어라
  다른 새들 옹기종기 둥지에 모였는데
  너 홀로 꽃가지를 향해 피를 토하고 있구나
  쓸쓸한 얼굴에 초췌한 모습
  즐겨 숭배하지 않고 누구를 돌아보는가
  아! 인간의 원한이 어찌 나뿐이랴
  충신과 의사의 가슴속의 불평이
  손으로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으리라

  단종이 죽자 사람 만나기를 일체 사절하여 식구들조차 그의 얼굴을
보기가 어려웠다. 그는 밤마다 홀로 앉아 잠도 자지 않고 슬피 울었다.
그는 못난 돌을 구해다가 면을 다듬지도 않고 울퉁불퉁한 면에다
"노산군 조정 부제학 도망자 조상치의 무덤"이라고 새겼다.

     단종의 장례를 치른 호장 엄흥도

  엄흥도의 본관은 영월이고, 직책은 영월군 호장이다.
세조 3년 10월에 단종이 승하하였다. 엄흥도는 곧 달려와 곡을 하고 모든
준비를 하여 시신을 거두고, 다른 의논이 있을까 겁을 내어 즉시 장례 하였다.
이때 엄흥도의 일가들이 화가 미칠까 두려워 만류하자 엄흥도가 말하였다.
  "선행을 하다가 화를 입는 것은 내가 원하는 바요"
  그는 장례가 끝나자 아들 엄호현을 데리고 도망갔다. 엄흥도가
죽은 뒤에 그 아들은 몰래 영월로 되돌아왔다.
  현종 10년(1669)에 우암 송시열이 엄흥도의 자손을 쓰자고 청하자
상이 허가하였다. 영조 때 정려각이 세워지고 공조 참의에 증직되었다.
  현종이 제문을 지었다.
  "어느 때인들 충신열사가 없으리요마는 어찌 엄흥도의 충성만 하겠는가.
아! 그때의 강원도에는 감사도 있었고 수령도 있었지만 일개
호장으로서 능히 큰 충절을 세웠구나. 아! 사육신은 마음을 다해 섬겼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거니와 영월 호장 엄흥도는 무슨 요구가 있고
무슨 소망이 있기에 일가들의 만류도 아랑곳하지 않고 감히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던가. 이는 진실로 한 조각 붉은 마음 때문일 것이니, 지난
역사에도 듣기 힘든 일이구나. 백대를 전하도록 의열이라 할 만하다"

     제주도민에게 장례법을 가르친 기건

  기건(?-1460)의 본관은 행주이고, 집이 청파동 만리고
개에 있었기 때문에 호를 청파라 하였다.
  제주목사로 부임해 보니 백성들은 전복을 따먹고 밥을 먹지 않았다.
또 부모가 죽으면 장례를 치르지 않고 언덕이나 구릉에 갖다 버렸다.
이를 본 기건은 고을 사람들에게 관을 짜고 장례 치르는 방법을 가르쳤다.
제주도 사람이 부모 장례를 치를 줄 알게 된 것은 기건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어느 날 기건이 꿈을 꾸었는데, 3백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뜰 앞에
와서 절하고 사례하였다.
  "공의 덕택으로 우리의 뼈다귀를 거두었으니 은혜를 갚을 길이 없습니다.
금년에 공은 반드시 어진 자손을 둘 것입니다"
  과연 그 해에 손자를 낳았으며, 그는 문과에 합격하여 응교가
되었다. 그 뒤로 기씨 자손이 크게 번창하였으니 그 꿈이 맞은 것이다.
그의 벼슬은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단종조에 벼슬을 그만두고 문을 닫고 들어앉아 사람을 일체 사절하였다.
세조가 대군으로 있을 때 그의 집을 세 차례나 방문하였으나 기건은
자기의 눈이 청맹과니라고 핑계하였다. 세조는 사실인지 아닌지
알기 위해서 침을 들고 그의 눈을 찌르는 시늉을 하였으나 기건은 눈
한 번 깜짝거리지 않고 끝내 일어나지도 않았다.
  또한 우리 나라 풍습에 부인들이 외출할 적에 너울을 쓰지 않았는데
기건이 처음으로 너울을 만들어서 쓰도록 하였다.

     평생을 괴물과 함께 살았던 신숙주

  신숙주(1417-1475)의 본관은 고령, 자는 범옹, 호는
보한재이다. 세종 20년(1438)에 진사시에 장원하고, 그 이듬해에
문과에 합격하였다.
  세종 29년 중시에 합격한 뒤 서장관으로서 일본에 갔다. 일본
사람들은 신숙주의 명성을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시를 지어 달라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모두 신숙주의 시에 대하여 경탄해
마지 않았다. 이런 일이 있은 후로 일본 사람들은 우리 나라 사신이
일본에 갈 적마다 반드시 신숙주의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세조 6년(1460)에 강원, 함길도 절도사가 되어 국경 지방에 깊이
들어간 적이 있는데 오랑캐들이 밤에 공격해 와서 영내가 매우 소란하였다.
그러나 신숙주는 꼼짝도 않고 누워서 막료를 불러 자기가 지은 시를
받아 쓰게 하였다. 병사들은 그때서야 안정을 되찾고 차분하게 대처할
수가 있었다.
  신숙주가 젊었을 적에 경복궁 정시에 응시하러 갔는데 이른
새벽에 커다란 괴물이 입을 쩍 벌리고 대궐 문 앞에 있어서 모든
응시생들이 다 그 입을 통해 들어갔다. 이때 신숙주는 눈을 부릅뜨고 당당히
서서 그 괴물을 응시하였다. 그때 푸른 옷을 입은 동자 하나가 신숙주의
옷소매를 잡고 물었다.
  "공은 저 입을 벌리고 있는 괴물을 보았소? 그것은 내가 조화로써 만
들어낸 괴물이니 공은 잘 간직하시오"
  "너는 누구냐?"
  "나도 사람이오. 공이 앞으로 귀한 재상이 될 것을 알고 평생토록
따라다니면서 행동을 함께 하려고 하오"
  신숙주는 그 괴물과 함께 집에 돌아왔는데, 그 괴물은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신숙주가 앉으나 누우나 항상 함께 하고 곁을
떠나지 않았다. 밥을 먹을 때 그에게 자기의 밥을 나누어주면 씹는 소리는
들렸지만 밥그릇은 줄지 않았다.
  그 괴물은 신숙주의 집안에 일어날 모든 일과 과거의 합격 여부를
신숙주에게 미리 다 알려주었다. 신숙주가 사신으로 일본에 갈 적에 이
괴물을 시켜서 먼저 뱃길의 깊고 얕음과 거리를 알아 오도록 시켰기
때문에 신숙주는 먼 뱃길을 무사히 다녀올 수 있었다. 신숙주는 죽기
전에 자손들에게 유언을 남겨 부탁하였다.
  "내가 죽더라도 이 괴물에게 따로 제사를 차려 주어라"
  그 자손들은 신숙주의 유언에 따라 신숙주의 제삿날이면 반드시 따로
한 상을 차려서 괴물에게 제사지냈다고 한다.
  신숙주 생시에 세조는 늘 말하였다.
  "환공과 관중, 한고조와 장량, 당태종과 위징의 관계는 나와 숙주의
관계와 같다"
  세조 3년에 영의정에 이르고 시호는 문충이다. 성종묘에 배향하였다.

     국을 식게 만드는 사람 권람

  권람(1416-1465)의 본관은 안동, 자는 정경, 호는 소한당이다.
어려서부터 글읽기를 좋아했고 큰 뜻을 품었으며 계책이
뛰어났다. 책을 싸가지고 깊은 명산에 들어가 한명회와 함께 공부를 하였다.
  35세가 되도록 과거에 응하지 않고 있다가 세종 말년에 과거에 응시하여
잇달아 장원을 세 차례나 하였다. 세조가 대군으로 있을 적에 총재가
되어 '무경(고대의 병서)'에 주석을 달았다. 그는 수양대군의
시종이 되었는데, 대군은 그의 큰그릇을 알아주고 대우를 극진히 하였다.
  그는 수양대군의 장래 꿈이 무엇인지 알고 그의 집을 은밀하게 드나
들었으며, 한번 들어가 논의하기 시작하면 해가 늦도록 계속하였으므로
수양대군집 궁인이 공을 보면 "국을 식히는 양반이 또 온다"고 하였다.
  수양대군이 공을 내전으로 불러 위로 잔치를 베풀고 정희왕후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 사람이 옛날 국을 식히던 사람이오"
  영의정으로 길창부원군에 봉해지고, 시호는 익평이다. 세조묘에 배향되었다.

     우리 집에도 선조의 문집이 있다고 익살을 부린 강맹경

  강맹경(1410-1461)의 본관은 진주, 자는 자장이다.
벼슬은 영의정에 이르고 진산부원군에 봉해졌다. 세조 임금이 맹경의
집을 보고 말했다.
  "저 썩은 서까래를 빨리 갈아야겠다. 사람 상하겠다. 영상의 집이 이와
같으니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이계전이 중국에 갔을 적에 주객 낭중이 시를 청하였다. 갑자기
시가 떠오르지 않은 계전은 자기 선조의 문집인 '목은집' 가운데
있는 '조조대명궁시'를 써 주었다.

  활짝 열린 명당에는 새벽 공기가 차고
  우뚝 솟은 깃발은 난간에서 나부낀다.

  시를 본 주객은 칭찬을 마지않았다.
  강맹경도 중국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다. 이계전이 맹경을 보고 농담
삼아 말했다.
  "만약 중국 사신이 자네에게 시를 청하면 대책이 있는가?"
  맹경은 그 말을 받아 즉시 대답하였다.
  "우리 집에도 선조의 문집 '통정집'이 있지?"
  그 말을 들은 방안의 사람들은 배를 잡고 웃었다. 이계전은 목은의
자손이요, 강맹경은 통정의 후손이다. 맹경의 시호는 문경이다.

     온종일 벌주를 마신 구 정승 구치관

  구치관(1406-1470)의 본관은 능성이고, 자는 이율이다.
세조 13년(1467)에 영의정이 되었다.
  야인 여얼이 자주 국경을 침범하여 세조는 구치관을 정서대장군으로
삼아 방어하게 하였다. 세조는 말했다.
  "구치관은 나의 만리장성이다"
  이때 구치관은 신숙주와 더불어 세조의 신임을 받은 터였다. 신숙주는
영의정으로 있었고, 구치관은 새로 우의정이 되었다.
  어느 날 세조는 두 정승을 내전으로 불러 놓고 말했다.
  "경들에게 내가 질문을 할 테니, 경들은 바른 대답을 해야 한다. 만약
실수하면 벌주를 마셔야 한다"
  조금 후에 세조가 신 정승을 불렀다. 신숙주가 대답하자 세조는 "나는
신 정성을 불렀는데, 잘못 대답한 것이다" 하고 신숙주에게 벌주를 먹였다.
  또 구 정성을 불렀다. 구치관이 "예"하고 대답하자 세조는 "나는
구 정승을 불렀는데 경이 잘못 대답하였다" 하였다.
  이렇게 해서 신 정승과 구 정승은 하루종일 벌주를 마실 수밖에 없었다.

     남이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죽은 강순

  강순(1390-1468)의 본관은 신천이고, 자는 태초이다.
상상부원군 강윤성의 증손으로, 음직(과거에 의하지
않고 조상의 공로로 하는 벼슬)으로써 벼슬했다.
  세조 13년(1467)에 길주에서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켰다. 세조는
귀성군 이준을 도총사로 삼고, 호조 판서 조석문을 부총사로, 상중에
있는 허준을 기용하여 함길도 절도사로 삼고, 강순과 이유소를
대장으로 삼아 이시애를 토벌하게 하였다. 토벌군은 홍원에서 싸우고,
또 만령에서 싸워 반란군을 대파하고, 이시애를 사로잡아 목을 베었다.
  건주의 이만주가 반란을 일으키자 명나라는 우리 나라에 원병을
요청해 왔다. 세조는 어유소를 좌장군으로 삼고, 남이를 우장군으로 삼고,
강순을 정서주장으로 삼아 정병 2만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건주의 동북쪽을 공략하여 그들을 소탕하였다. 큰 나무를 베어
하얗게 깎은 뒤에 "모년 모월 모일에 정서주장 강순과 좌대장 어유소
등은 건주위 올미부를 토벌하고, 이에 돌아간다"고 쓰고 돌아왔다.
  그는 일등공신에 녹훈되고, 신천부원군에 봉해졌다. 세조 14년에
우의정에 오르고, 이어 영의정이 되었다.
  세조가 승하하고, 예종이 즉위하였다. 이때 남이 장군이 유자광의
모함을 입어 반란죄를 입게 되고, 국문을 받게 되었다. 강순이 영의정으로서
국문에 참석하여 남이가 정강이뼈가 부러지도록 국문을 당하는
것을 보고도 아무런 변명을 해주지 않자, 남이는 "강순이 나에게 모반을
시켰소" 하고 강순을 끌고 들어갔다.
  강순은 어이가 없어 말했다.
  "미천한 몸이 다행히 성군을 만나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고, 신의
나이 지금 칠순이 넘었거늘 무엇이 부족해서 그런 모의를 했겠습니까?"
  예종 임금이 강순의 말을 그럴듯하게 여기자 남이는 또다시 모함하였다.
  "성상께서 거짓말에 속아 죄를 면해 주신다면 무슨 방법으로 죄인을
잡을 수 있겠습니까!"
  남이의 말을 듣고, 다시 의심이 난 임금은 국문을 시작하였다. 강순은
늙은 몸에 심한 고문을 견디지 못해서 허위 자복을 하고 말았다. 이를
본 남이가 강순을 보고 비웃으며 말했다.
  "내가 불복한 것은 장래를 기대한 때문이었는데, 이제 다리뼈가 부서져서
쓸모 없는 사람이 되었으니 살아서 무엇하겠소. 나 같은 젊은 사람도
억울하게 죽게 되었거늘 살만큼 산 노인이 죽는다고 한들 무엇이 억울하오"
  드디어 남이와 함께 사형을 당하게 된 강순이 남이를 불렀다.
  "남이야, 너는 나에게 무슨 원한이 있어서 나를 모함했느냐?"
  남이가 대답하였다.
  "억울한 것으로 말하자면, 내나 대감이나 같지 않소. 당신은 수상으로서
나의 억울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 한마디 변론도 하지 않았으니,
당신도 억울하게 죽어야 마땅하오"
  강순은 어처구니가 없어 좌우를 둘러보면서 말했다.
  "젊은이를 친하다가 이런 화를 당하는구려. 반역이 어떤 죄인데 장난을
치다니..."
  강순의 아내와 자제들도 죽음을 당하고, 가산은 몰수되었다.

     얼굴에 분바른 귀신 때문에 장가든 남이

  남이(1441-1468)의 본관은 의령이다. 의산군 남휘의 아들이며,
태종의 외손이다.
  어릴 적의 일이다.  길거리에서 노는데 어떤 종아이가 봇짐을 짊어지고
가는데 그 봇짐 위에 분바른 여자 귀신이 앉아 있는데도 사람들은
그 귀신을 보지 못하였다. 남이는 이상히 여겨 그 아이가 가는 곳으로
따라갔다. 그 아이가 한 재상의 집으로 들어가더니 조금 후에 그 집에서
우는 소리가 들려 왔다. 사람들에게 그 까닭을 물으니 주인집 아가씨가
갑자기 죽었다는 것이다.
  "내가 들어가 보면 살릴 수 있다"
  남이가 이렇게 말했으나 그 재상의 집에서는 허락하지 않다가 한참
후에야 그렇게 하라고 하여 남이는 간신히 그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분바른 여귀는 장자의 가슴에 올라앉아 있다가 남이가 들어오는 것을
보자 즉시 도망가고 낭자는 깨어서 일어났다. 남이가 문 밖으로 나가자
다시 여귀가 낭자의 가슴에 올라앉았고 낭자는 다시 까무러쳤다.
남이가 다시 들어가자 여귀는 도망가고 낭자는 깨어났다. 남이가 여귀에게
물었다.
  "그 봇짐 속에 무엇이 들었는가?"
  "홍시인데 낭자가 먹고 기절한 것입니다"
  남이는 그가 본 대로 모두 말하고 귀신 다스리는 약을 써서 낭자를
살려주었다. 그 낭자가 바로 좌의정 권람의 넷째 딸이었다. 권람은 이
일을 매우 신기하게 여기고 남이를 사윗감으로 택하여 첨을 쳤다. 점쟁이가
말했다.
  "총각은 반드시 죄를 짓고 죽을 것입니다"
  자기 딸의 운명을 점쳐 보니 목숨이 매우 짧고 자식이 없지만 살아 있는
동안 복을 누리고 화는 없을 터이니 사위를 삼아도 문제가 없다고
하였으므로 그 말에 따라 권람은 남이를 사위로 삼았다.
  남이는 17세에 무과에 장원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그의 용기는
다른 사람이 감히 따를 수 없었다. 그는 북쪽에서는 이시애의 난을
평정했고, 서쪽에서는 건주위를 정벌하였는데 모두 큰 공을 세우고
훈일등에 녹훈되었다. 남이는 회군할 적에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지었다.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서 다 닳았고
  두만강 물은 말이 마셔서 다 말랐네
  사내 나이 스무 살에 나라 평정 못한다면
  후세에 누가 그를 대장부라고 하겠느냐

  그는 26세에 병조 판서가 되었다. 세조가 승하하고 예종이 즉위하였다.
  어느 날 남이가 궁궐 안에서 숙직하고 있을 때 하늘에 혜성이 나타났다.
남이는 혜성에 관해 '옛것을 없애고 새것을 펼 징조'라고 설명한
일밖에 없는데 이 말을 몰래 들은 유자광이 그 말에 다른 말을 보태어
남이가 모반을 도모한다고 무고하였다. 또 공주를 꾀어 간음하였다고
밀고하였다. 끝내 그는 모함에 걸려 죽게 되었다.
  이때 그는 28세로 병조 판서였다. 권람의 딸인 그의 부인은 그보다
몇 년 먼저 죽었다. 점쟁이의 말이 사실로 들어맞은 것이다.

     달의 이상 현상을 보고 어머니의 죽음을 안 서거정

  서거정(1420-1488)의 본관은 달성이고, 자는 강중,
호는 사가정이다. 아버지는 서미성이고, 어머니는 양촌
권근의 딸이다. 서거정은 6세에 글을 읽고 시를 지었으므로
신동으로 불리었으며 외조부 양촌의 글이 외손에게 전해졌다고 하였다.
  세조가 수양대군으로 있을 적에 명나라 사신으로 간 적이 있는데, 이때
서거정은 종사관으로 따라갔다. 압록강을 건너 파사보에서 자게
되었는데 저녁에 서거정의 어머니가 죽었다는 편지를 받게 되었다. 세조는
서거정에게 알리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때 괴상한 꿈을 꾸고 깜짝
놀라서 일어난 서거정은 땀을 몹시 흘렸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묻자
서거정이 말했다.
  "달에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달은 어머니를 상징한다. 나에게 노모가
계시는데 이렇게 꿈이 좋지 못하니 틀림없이 어머니에게 일이 있을 것이다"
  "서거정의 효심은 실로 하늘을 감동시키는구나"
  수양대군은 감탄하여 서거정을 불러 말하였다.
  "편지에 그대의 어머니가 병이 위독하시다고 하니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
  서거정은 한강을 건너와서야 그 편지가 어머니의 부고인지 알았다.
세조는 즉위한 이후에 가끔 이 꿈 얘기를 하였다.
  "내가 자네를 택한 것은 비단 자네의 재주 때문만은 아닐세"
  서거정은 문형에 뽑히고 시호는 문충이다.

     후원을 거닐다가 미복 차림의 왕을 만나 큰소리친 최지

  최지의 본관은 전주이다. 세종 20년(1438)에 문과에 급제했다.
따스한 봄날 시를 읊조리면서 대궐 후원을 산책하다가 미복을 입고
나온 세조를 만났다. 최지는 허리를 구부려 업을 하였을 뿐 공손하게
절을 하지 않았다. 세조가 물었다.
  "너는 누구이기에 감히 내지에 들어와서 이렇듯 무례하게 구느냐?"
  최지가 대답하였다.
  "나는 문사요. 궁중에는 상감 한 분만 계실 뿐인데 어찌 당신에게
특별하게 예의를 표할 필요가 있겠소?"
  이때 최지는 마음속으로 그가 왕자 중의 한 사람일 거라고 짐작했다.
최지가 길가에 걸터앉자 세조가 그에게 말했다.
  "네가 원양(공자의 옛 친구이다. 원양이 걸터앉아서 공자를 기다렸는데
그를 만나자 공자가 막대기로 정강이를 치면서 "젊어서는 무례하더니
늙어서는 죽지도 않는구나" 하고 놀려 준 고사가 논어에 전한다)이냐?
어찌하여 걸터앉느냐?"
  조금 후에 시녀와 내시가 잇따라 왔다. 최지는 놀라 떨면서 사죄하였다.
세조 임금이 그를 편전으로 불러서 경서를 강론하자 최지는 세조가
묻는 대로 척척 대답하였고 경서의 깊은 뜻을 하나하나 자세하게 풀이
하였다. 세조는 크게 기뻐하여 술을 권하였다. 최지는 술이 얼큰하게
취하였다.
  "이 선비가 성리학에 밝구나. 서로 만남이 늦은 것이 한이구나"
  세조는 즉시 최지를 성균관 사성에 임명하였다.

     빌려 온 신숙주의 책을 뜯어 벽에 바른 김수온

  김수온(1409-1481)의 본관은 영동이고, 호는 괴애이다.
문과에 합격하여 병조 정랑으로 있었다.
  하루는 그가 좌랑 김 아무개에게 말했다.
  "내가 관상을 잘 보네. 자네의 관상을 보니 오래 살 관상일세"
  김 좌랑이 기뻐하며 말했다.
  "자세히 이야기해 주십시오"
  "비법을 함부로 전할 수 있나? 술을 한턱 잘 내면 조금은 일러줄 수가
있지"
  기대에 부푼 김 좌랑은 잔치를 차려 병조의 동료들을 초청하고 그
자리에서 김수온에게 다시 청했다.
  "저의 관상이 오래 살게 생겼다고 했으니, 이제 한 말씀 해주시지요"
  "선생은 이미 50년을 살았으니 오래 산 것이오. 선생이 얼마를 더 살지는
내가 어떻게 알겠소"
  이 소리를 들은 모든 사람들이 배꼽을 잡고 웃었다.
  그는 남에게 책을 빌려 오면 책장을 떼서 도포 소매에 집어넣고 다니면서
한 장씩 꺼내어 암송하고 혹 잊어버리면 다시 꺼내서 보곤 하였으며
다 외운 뒤에는 모두 버렸다. 신숙주가 아끼는 고문책 한 권이 있었는데
그는 이 책에 책표지를 다시 만들어 애지중지하다가 김수온의 성화에
못 이겨 빌려주게 되었다. 한 달 쯤 뒤에 신숙주가 김수온의 집에
가게 되었는데 신숙주는 그 집 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자기가 그토록
아끼던 책이 모두 낱장으로 뜯기어 그 집 벽에 붙어 있었다.
  신숙주가 어이가 없어 하며 그에게 사연을 물어 보자 김수온은 태연하게
말했다.
  "벽에 붙여 놓고 드나들 적마다 읽고 외우면 참 편리하지요"
  그의 벼슬은 영중추에 이르렀다.

     글짓기에는 이기고 속임수에는 진 이석형

  이석형(1415-1477)의 본관은 연안이고, 자는 백옥, 호는 저헌이다.
  그의 아버지 이회림은 늦도록 자식이 없어 그 부인과 더불어
삼각산에서 기도하고 그를 낳았다. 그의 어머니가 임신 중에 아버지가
꿈을 꾸었다. 꿈을 막 깨자 아들이 태어났음을 알려 왔으므로
이름을 석형이라고 지은 것이다.
  공은 출산되었을 때 푸른 보자기에 싸여 나왔다. 푸른 보자기를 째고
보니 태아의 살갗이 검고 뼈마디가 늘씬늘씬하였고 전신에 털이
있었으므로 그 어머니는 상서롭지 못하다고 아이를 버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보고는 "참으로 기이한 사내아이구나" 하고 크게
기뻐하였으므로 버릴 수가 없었다.
  이석형은 볼기에 손바닥만한 검은 점이 있었는데 그 모양이 거북
모양을 닮았다. 이석형에게 좋은 일이 있을 때면 꿈에 볼기의 거북점이
거북으로 살아나 이석형의 몸을 맴돌곤 하였다. 이석형은 차츰차츰
자라나면서 모습이 씩씩하고 도량이 넓어졌으며 배움을 부지런히 하였다.
  생원시, 진사시를 거쳐 세종 23년(1441) 문과시에 장원하고 동왕 29년
중시에 합격하였다. 세종이 팔준도를 직접 만들고 그 그림에 쓸
글을 지어 오도록 신하들에게 명했다. 이때 이석형이 전의
두련을 만들었다.

  하늘이 도와 임금을 내시니 성인이 천년 운세에 감응하고
  땅의 쓰임이 말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니 신물이 있는 힘을 다 바치네

  이 글을 본 성삼문은 '이번 과장에서는 이석형의 글이 가장
우수하구나'라고 생각하고 이석형을 보고 속임수를 써서 말했다.
  "그대가 시골 학자를 본따서 이 글을 지은 모양인데 말 마자와
임금 군자를 대로 만든 것은 부당하지 않느냐?"
  이석형은 점잖은 사람이라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지어 놓은 글을
버리고 다시 시를 지었다. 성삼문이 그 글을 훔쳐서 전을 만들어 일 등을
차지하였다.
  이석형이 성삼문을 보고 말했다.
  "내 무릎은 남에게 굽힌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성삼문이 이석형에게 응수했다.
  "나는 남에게 무릎을 굽히지 않은 사람의 무릎을 굽히게 하는 사람이오"
  이 사실이 당시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점쟁이의 아들을 살려준 홍윤성

  홍윤성(1425-1475)의 본관은 회인이고, 자는 수옹이다.
천성이 사납고 잔인하여 살생을 좋아하였다. 문종 즉위년(1451)에
문과에 합격하였다.
  세조가 수양대군으로 있을 때 제천정에 놀러 갔을 때의 일이다.
수십 명의 장사들이 배에 올라가 뱃사공을 위협하여 배가 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를 본 홍윤성이 몸을 날려 배 위에 올라가 노를 부러뜨리고
그들을 모두 물에다 던져 버린 뒤 자신이 직접 배를 저어 한강을
건넜다. 이를 본 수양대군이 그를 오라고 하여 만났다. 홍윤성은
수양대군에게 절을 하지 않고 고개만 약간 숙이면서 말하였다.
  "지금 임금은 유충하고 나라는 뒤숭숭하며 대신들은 임금을 따르지
않고 백성들은 의지할 데가 없거늘, 대군께서 이렇게 뱃놀이에만 빠져
있고 부하들은 길가는 나그네를 괴롭히니 매우 한심합니다. 어찌하여
나를 불렀습니까?"
  수양대군은 그 말을 기특하게 여기고 그와 은밀하게 친분을 맺어
두었다. 뒤에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홍윤성은 정난공신이
되어 인산부원군에 봉해지고 형조 판서가 되었다.
  이보다 앞서 홍윤성은 홍계관의 점이 용하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찾아가 점을 쳤는데, 점쟁이 계관이 한참 있더니 다시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말했다.
  "매우 귀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모년 모월 모일에 형조 판서에 오를
것입니다. 그때에 저의 자식놈이 죄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할 신세가 될
터인데 제발 오늘을 잊지 마시고 저의 자식을 살려주십시오"
  계관이 자기 아들을 불러내 홍윤성 앞에서 말하였다.
  "모년 모월에 너는 죄를 짓고 감옥에 갈 것이다. 그러면 형조 판서
어른께 누구의 자식임을 말씀드려야 한다"
  이 말을 들은 홍윤성은 매우 놀라고 정신이 없어 그 말에 대답조차
하지 못하였다. 과연 그 뒤에 추국이 있을 때 스스로 점쟁이 홍계관의
아들이라고 이름을 밝히는 자가 있었다. 홍윤성은 지난 일을 잊지 않고
그를 풀어 주었다.
  세조 14년(1468)에 우의정과 영의정에 올랐으며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홍산에 살면서 백성들을 못살게 굴었고 홍산 수령 역시 괴로움을
많이 받았다. 세조가 온천에 갔는데, 홍산 사람 나계문의 아내 윤씨가
밖에서 울면서 호소하였다. 세조가 그 소리를 듣고 사람을 시켜 여인에게
그 사연을 들었다.
  "홍윤성의 집 종들이 세력을 믿고 자기 남편을 때려서 죽게 하였지만
현감 최윤은 홍윤성의 권세를 겁내어 자기 남편을 직접 때려 죽게
한 사람만 가두고 다른 사람은 불문에 부쳤습니다. 또 홍윤성 집의
종들이 와서 갇힌 죄수를 데리고 갔으며, 감사 김지경은 현감에게 부탁하여
그 죄수를 사면하라고 하고 도리어 저의 아버지 윤기에게 홍윤성을
모해하였다는 죄를 뒤집어씌워 공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이런 원통한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 호소를 듣고 난 세조는 윤씨 여인을 불쌍히 여겨 감사 김지경과
현감 최윤 그리고 홍윤성을 모두 잡아들여 국문하게 하고 윤성의 집
종들을 모두 극형에 처하였다. 얼마 후에 임금이 홍윤성을 지난 공을
참작하여 특별히 사면하고, 이어 명하였다.
  "윤씨 여인이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고 남편의 원수를 갚았으니 그
절의가 가상하다. 그 여인에게 쌀 열 가마를 주어라"

     송도 계원에도 들지 못한 한명회

  한명회(1415-1487)의 본관은 청주이다. 젊었을 적에 불우하게
살았으며 4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개성의 경덕궁 문지기가 되었다.
  명절을 맞아 관료들은 만월대에 모여 유쾌하게 놀았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모두들 언약하기를 "우리들은 모두 남쪽에서 이곳 개성으로
와서 벼슬하게 된 고향 친구들이다. 오늘 우리는 계모임을 만들어서 영원한
우의를 다지자!"고 하였다.
  외로움을 느낀 한명회도 이 계모임에 넣어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하였지만
모두들 흘깃흘깃 쳐다보기만 하고 허락해 주지 않았다. 한명회를
무시했기 때문에 끼워 주지 않은 것이다.
  그 이듬해가 되자 세상이 바뀌었다. 계유정난 때 세조를 도와 공을
세운 한명회는 일등 공신에 녹훈되었을 뿐 아니라 부원군이 되어 그
권세가 막강하게 되었는데 지난날의 송도 계원들은 모두 힘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하여 조그만 세력을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자를 일컬어
'송도 계원'이라고 부르는 말이 유행되었다.

     오랑캐들을 벌벌 떨게 한 이징옥

  이징옥(?-1453)의 본관은 양산이다.
  형 이징석은 18세, 징옥은 14세 때의 일이다. 어머니가 두 아들에게
산돼지가 보고 싶다고 하였다. 두 아들은 집을 떠났다. 형 징석은 산돼지를
잡아서 돌아왔고, 징옥은 이틀 뒤에 맨손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의아해 하며 이징옥에게 물었다.
  "사람들의 말이 형의 용맹이 너보다 못하다고들 하는데 어찌하여 너의
형은 돼지 한 마리를 잡아왔는데 너는 이틀 후에 오면서 빈 몸으로 왔느냐?"
  "어머니 문 밖을 보십시오"
  어머니가 문 밖으로 나가 보니 마당에 큰 산돼지 한 마리가 누워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징옥은 어머니가 산 산돼지를 보고 싶어할
것이라 생각하고 밤낮으로 추격하여 그 돼지가 기진맥진했을 때를 기다려
사로잡아 온 것이다.
  언젠가 이징옥은 길을 가다가 슬피 우는 젊은 부인을 만났다. 징옥이
그 까닭을 물었다.
  "저의 남편이 호랑이에게 물려 갔습니다. 그 호랑이가 지금 대밭 속에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이징옥은 팔을 걷어붙이고 즉시 대밭으로 들어갔다. 칼로
호랑이 배를 갈라 보니 고기가 아직 소화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징옥은
그 고기를 보자기에 싸서 부인에게 주었다. 부인은 감사의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하였다. 이징옥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이징옥의 아내가 집안의 가난을 견디지 못하고 떠나기를 원했으므로
이징옥은 억지로 붙들지 않고 가게 내버려 두었다. 뒤에 이징옥이 영남
절도사가 되었는데 그때 그의 아내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 시집간 지 오랜
뒤였다. 이징옥은 사냥해서 얻은 수백 마리의 짐승을 시집간 아내
집으로 보내 주었다.
  이징옥의 무용은 따를 사람이 없었으므로 중국인이나 오랑캐들이 모두
겁을 내었다. 그는 육진을 설치하는 데 큰 공을 세워 김종서에게 극진한
사랑을 받았다. 김종서가 죽음을 당하고 세조가 왕위에 올랐을 때
이징옥은 함길도 절제사로 있었다. 이징옥을 제거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세조는 이징옥에게 서울에서 내려간 박호문에게 절제사의 자리를 넘겨
주고 서울로 돌아오라는 명을 보냈다. 박호문에게 절제사의 자리를
넘겨준 이튿날 이징옥은 생각했다.
  '절제사는 무거운 책임이 있는 자리인데 박호문이 소문도 없이 갑자기
와서 그 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는 즉시 절제사가 있는 경성으로 달려갔다. 그는 박호문에게,
상의할 일이 있으니 만나자고 불러낸 뒤에 그가 나오자마자 쳐서
죽이고 자기의 부하들을 모아 남쪽으로 향하였다.
  "이제 강을 건너가 내가 대금황제가 되면 만족하겠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그 이튿날 행군을 하기로 하였다. 이때 판관 정종이
이징옥을 죽이려고 사람을 지붕 위에 매복시켜 두었다. 밤이 되어
이징옥이 의자에 앉아 잠깐 졸고 있는데 의자 밑에 있던 이징옥의 아들이
갑자기 말하였다.
  "꿈에 아버지가 머리에서 피를 흘려 그 피가 다리에까지 흘러 내려
왔습니다"
  그 말을 듣고 이징옥은 그것은 좋은 징조라고 말하였는데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종이 군사들을 데리고 돌진해 들어왔다. 이징옥이
그들과 싸워 수십 명을 죽이고 그 자신도 화살에 맞아 죽었다. 그때 그의
나이 24세였다.

     미인계를 써서 반란을 일으킨 이시애

  이시애(?-1467)의 본관은 길주이고, 벼슬은 회령부사에 이르렀다.
그는 동생 이시합과 함께 반역을 도모했다. 함길도 절도사
강효문이 길주에 도착하자 이시합은 길주의 관기로 있는
자신의 첩 소생 딸을 절도사의 침실에 들여보내어 수청을 들도록 하고
잠긴 문을 안에서 열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그 문으로 들어온 반란군들에
의하여 절도사 강효문은 피살되었고, 이시애는 길주를 발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세조는 귀성군 이준을 도총사로 삼고 조석문을 부총사로 삼았다.
귀성군 이준은 겨우 18세였지만 무술과 전략이 있다는 이유였다. 또 허종을
함길도 절도사로 삼고 강순과 어유소를 각각 대장으로 삼아 이시애
난의 토벌에 나섰다.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키자 여러 고을에서 수령을 살해하고 반란군에게
호응하는 일이 일어났다. 함흥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관청을 포위하고
관찰사 신면을 공격하였는데, 신면은 누각에 올라가 방어하다가 힘이
달려 끝내 피살되고 말았다.
  조정에서는 관서지방 출신으로 벼슬이 2품에 오른 단천 사람
최윤손을 불러 효유사로 임명하고 함길도로 내려보냈다.
효유사의 임무는 반란군을 회유하고 그곳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있었다.
그런데 막중한 임무를 띠고 내려간 최윤손이 반란군의 편이 되어
조정의 비밀을 그들에게 넘겨주는 불행한 사태가 일어났다.
  강순과 허종이 거느리는 관군은 홍원에서 그들과 격전을 벌이고
또 북청과 만령에서도 크게 싸웠다. 반란군은 높은 지역으로
달아나 진을 치고 화살을 비오듯 쏘아 대었으므로 관군이 접근할 수 없었다.
  토벌 좌장군 어유소는 작전을 바꾸었다. 정예병을 뽑아 작은
배에 나눠 태우고 풀색, 나무색으로 물들인 옷을 입혀서 보냈다. 그들은
해안을 통해 상륙하여 나뭇가지를 잡고 그들이 있는 곳보다 훨씬
높은 곳을 택하여 그들의 등뒤에서 징을 치고 북을 두드려 소란을
피우도록 작전을 짰다.
  등뒤 높은 곳에서 갑자기 북소리와 징소리가 요란하게 나자 적들은
깜짝 놀라 대오가 흐트러지고 웅성거리기 시작하였다. 이때 뒤따라
도착한 관군의 대부대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머리에 방패를 이고
개미떼처럼 언덕을 기어오르니, 반란군은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진용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시애는 급하게 길주로 도망하였다. 그는 가족과 살림을 꾸려 오랑캐
땅으로 도망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길주 사람 허유례가
적장의 부하 이주 등을 꾀어 이시애와 이시합을 생포하도록 하였다.
그들의 머리는 진중에서 끊어져 서울로 보내졌다.

     시로써 신숙주를 굴복시킨 윤자운

  윤자운(1416-1478)의 본관은 무송이고, 자는 망지,
호는 낙한헌이다. 세종 20년(1438)에 진사시, 26년에 문과에
각각 합격했다. 단종 원년 계유정난 때 수상을 지내고, 성종조에
좌리공신에 녹훈되었다. 그의 문명은 신숙주와 함께 명망이 높았다.
동년(과거에 함께 합격한 사이)모임에서 신숙주와 겨루어
대련을 짓기로 하였다.
  신숙주가 먼저 "반가운 친구는 모두가 백발이요" 하니
윤자운이 "젊은 재상은 다만 일편단심뿐"이라고
화답했다. 신숙주는 그만 탄복하여 무릎을 꿇고 윤자운을 극구 찬양하였다.
  "나는 공의 정밀하고 민첩함을 따를 수 없구려!"
  '흑두'와 '청안', '백발'과 '단심'은 멋진 대구를 이루어서 훌륭한 대련을
이루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 신숙주를 감탄시킨 것은 '단심'이란
쌍관어를 절묘하게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쌍관어'란 한 단어가 두 가지
이상의 뜻을 동시에 갖고 있는 말이며, 시작법에서 은유의 맛을 느끼게
하는 시의 기법이다. 그때 신숙주가 사랑하던 기생의 이름이 바로
'단심'이었던 것이다.

     끝내 삼림 밑에서 죽은 윤필상

  윤필상(1427-1504)의 본관은 파평이고, 자는 양경이다.
세종 29년(1447)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문종 즉위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세조 3년에 중시에 급제하였다.
  세조 9년(1463) 11월에 그는 형방승지로서 대궐에 들어가 숙직을 하였다.
그날 밤 날씨가 매우 추웠으므로 윤필상은 '날씨가 이렇게 추우니
아마도 주상께서 옥에 갇힌 죄수들을 걱정하실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고 서울과 지방에 있는 죄수들의 범죄 내용을 낱낱이 작은 책자에다
기록하여 두었다.
  밤 오경이 되자 내시가 와서 형방승지를 급히 부른다는 왕명을 전하였다.
유필상은 허둥지둥 의관을 갖추고 죄수들의 범죄 내용을 기록한
작은 책자를 소매 속에 넣고 침전 앞에 대령하였다.
  임금이 창문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일렀다.
  "오늘밤은 매우 추워 따뜻한 방에서 털옷을 껴입고 있어도 견디기
어려운데 옥중의 죄수들이 이 혹독한 추위에 얼어 죽지 않을까 염려가
된다. 먼 지방은 힘이 미치지 못하겠지만 현재 도성의 감옥에 있는
죄수가 얼마인지 속히 아뢰어라"
  "신의 직책이 형방승지입니다. 형옥에 관한 일은 신의 직무입니다"
  윤필상이 즉시 작은 책자를 가지고 숫자를 보면서 죄목별로 죄수의
수를 소상하게 아뢰자,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임금이 깜짝 놀라며 그를
기특하게 여겨 창문을 열고 침전 안으로 들어오도록 명하였다. 윤필상이
머리를 숙이고 들어갔는데 땀이 흘러 등을 적시었다. 임금은 술을
내려 주도록 명하고, 내전(왕비)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이 사람이야말로 나의 보배로운 신하요"
  그제야 윤필상은 정희왕후가 가까이 있음을 알고 황공하여
몸둘 바를 몰랐다. 이 뒤로부터 차례를 뛰어넘어 기용되었으며, 얼마
안 가서 높은 벼슬에 승진되었다. 성종 9년(1478)에 정승에 임명되어
영의정에 이르렀다. 연산군 10년에 그는 진도로 귀양갔다. 성종
비 윤씨를 폐비하는 조정 의논에 참여하였다는 죄목으로
그에게 사약이 내려졌다. 중종 때에 신원 되었다.
  윤필상이 젊었을 적에 중국에 갔을 때 유명한 점쟁이를 찾아가 자신의
운명을 점쳐 본 일이 있다. 점쟁이는 그에게 말했다.
  "수명과 벼슬은 모두 높겠지만 끝내 삼림 밑에서 죽을 운입니다"
  윤필상은 나가면 장수, 들어오면 정승이라는 찬란한 벼슬
생활을 누렸지만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폐위를 막지 못했다는 죄목으로
끝내는 진도에 유배되었다.
  어느 날 저녁, 이웃에 사는 사람이 김매는 품꾼들에게 말하였다.
  "내일 아침에 상림의 밭으로 모이십시오"
  윤필상은 이상한 느낌이 들어 그에게 물었다.
  "어느 곳을 상림이라 하오?"
  밭주인이 대답했다.
  "여기서 5리 쯤 되는 곳에 상림, 중림, 하림이란 지명이 있습니다"
  윤필상은 그제야 삼림 밑에서 죽을 것이라는 점쟁이의 점괘가
떠올랐다. 그는 낙담하여 허공만 쳐다보았다. 얼마 안 되어 연산군이 보낸
사약을 받았다.

     용상을 가리키며 이 자리가 아깝다고 예언한 손순효

  손순효(1427-1497)의 본관은 평해이고, 자는 경보,
호는 물재 또는 칠휴거사라고 하였다. 문종 원년(1451)에
생원시에 장원하고, 단종 원년에 문과에, 세조 3년에는 중시에
급제하였으며 성종조에는 벼슬이 찬성에 이르렀다. 성종이 주연을
마련하여 중신들과 술을 마시는데 술이 거나하게 되자 손순효가 입을
열었다.
  "직접 아뢸 일이 있습니다"
  성종이 앉아 있는 어탑(임금이 앉는 상탑)으로 올라오도록 명하였다.
손순효가 머지않아 연산군이 임금의 자리를 잘 지키지 못할 것을
알고 용상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이 자리가 아깝습니다"
  "나도 알고 있소"
  손순효가 또 아뢰었다.
  "부녀자가 임금의 총애를 믿고 권세를 부려 국정을 어지럽히는 일이
너무 심하고, 바른 말을 마음대로 하는 언로가 막히겠습니다"
  성종이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일들을 바로잡을 수 있겠소?"
  "임금이 만약 그런 상황을 아신다면 저절로 그런 실수는 없게 될 것입니다"
  이를 보고 연회에 참석한 재상들이 모두 놀라며 손순효가 아뢴 내용을
듣고 싶어하였으나 임금은 "내가 간하는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할
뿐이었다.
  손순효가 술을 너무 좋아하므로 성종이 만날 때마다 그를 경계하였다.
  "앞으로 세 잔 이상 마시지 마시오"
  어느 날 승문원에서 올린 외교문서의 내용이 세련되지 못하여,
성종이 편전에 나아가 손순효를 불러오게 하였다. 손순효가 저녁때가
되어서야 오기는 하였는데 머리카락이 망건 밖으로 나와 헝클어져
있고 취한 기운이 온 얼굴에 가득 차 있었다.
  성종이 노기를 띠고 말했다.
  "표문의 글이 정교하지 못하여 경으로 하여금 고쳐 짓게 하려고
하였더니 경이 이렇게 취했구려. 그리고 또 내가 일찍이 경의 면전에서
세 잔 이상은 마시지 말라고 경계하였거늘 어찌하여 그 말대로
실천하지 않는가?"
  손순효가 답하였다.
  "신에게 시집간 딸이 있사온대 못 본 지가 오래이기에 오늘 마침
지나다가 들렀더니 술상을 들여오길래 거절을 못하였는데, 다만 세
그릇을 비웠을 뿐입니다"
  "경이 마셨다는 술잔이 무슨 그릇인가?"
  "주발로 세 번 마셨습니다"
  "경은 이미 술이 취했으니 아마도 표문을 지을 수 없을 듯하오. 그러니
제학을 불러서 같이 짓도록 하오"
  "다른 사람을 번거롭게 할 필요는 없고 신이 고쳐 짓겠습니다"
  성종이 쓰던 벼루를 가져다주게 하였더니 손순효가 곧바로 표문을
지어 바쳤다. 성종이 크게 기뻐하고 사용원에 명하여 연회를
베풀어 마침내 한껏 마시며 크게 취한 뒤에야 물러났다.

     외손 30여 명이 규장각의 관원이 된 양성지

  양성지(1415-1482)의 본관은 남원이고, 자는 순부,
호는 눌재이다. 여섯 살 때에 처음으로 글을 읽었고, 아홉
살 때에는 글을 지을 줄 알았다. 세종 23년(1441)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어서 문과에 3등으로 급제하였다.
  세조가 일찍이 여러 신하들을 불러들여 조용히 주연을 마련하고 각기
마음에 품고 있는 바를 전달하게 하였더니 양성지가 나아가 말했다.
  "성상께서 대신을 두터운 예로 대우하시어 매번 술잔을 기울이며
담론하게 하시니 참으로 성대한 일이기는 합니다만 술 마시는 일을
절제하시고 옥체를 보살피시기 바랍니다"
  "오직 그대가 나를 아끼는구나"
  세조가 크게 감탄하며 칭찬하고, 홍문관 제학으로 승진시켜 임명하였다.
또 좌우에게 이르기를,
  "양성지는 나의 제갈량이다" 하며, 발탁하여 이조 판서에 임명하였다.
  성종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자 좌리공신(성종 즉위를 보좌하는
공신에게 내린 훈명)으로 기록되고, 남원군에 봉해져 대제학을
겸직하기도 하였다. 양성지는 글읽기를 좋아하여 널리 보고 잘
기억하였으며 손에세 책을 놓지 않아 상하 천년 사이의 치란흥망과
인물의 고하현부를 어제 있었던 일처럼 또렷이 알고 있었다.
  장년 시절에는 군사에 관한 논의를 즐겨 하여 관련된 소를 10여
차례나 올렸는데,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군적에게 누락되는 일이 없어야
하며, 한 집안에서 장정이 한 사람뿐인 경우에는 군역에 세우지
않아야 하며, 한 사람의 장정이라도 재능을 시험하지 않고는 병사라고
부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일평생 뜻이었다.
  처음 벼슬하면서부터 집현전에 들어간 것이 16년이고, 서적의 교감을
맡은 것이 20년이며, 사관을 겸임한 것이 34년이고, 홍문관에
근무한 것이 26년이며, 문과의 고시관을 열 여섯 번이나 맡았다.
  만년에는 벼슬을 사임하고 한가로이 날마다 친구들과 어울려 시사를
토론하고 간혹 동자 한 명과 말 한 필로 통진별장에서
놀았는데, 조용하기가 시골의 평범한 늙은이 같았다.
  일찍이 내각(규장각)의 관제 및 조례를 편집하였는데, 매우 분명하고
조리가 있었으므로 성종이 가상히 여겨 권장하고 인정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성종이 승하하였으므로 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가
정조 때에 이르러 내각을 설치하고 초계문신(당하 문관 중에서
문학이 뛰어난 사람을 뽑아서 다달이 강독 제술 시험을 보일 때의
시험관)을 선발할 적에 이 조례를 적용하였다. 내각에 명하여 문집 3권을
출간하게 하였는데, 그때 각신 30여 명이 모두 양성지의 외손들이었다.
  가집 6권이 있다. 68세에 죽었는데 시호는 문양이라고 내렸다.

     어릴 때부터 대가가 될 것이라고 촉망받은 신항

  신항(1477-1507)의 본관은 고령이고, 자는 용이이다.
열네 살에 성종의 딸 혜숙옹주에게 장가들고 고원위에
봉하여졌다. 나이 7, 8세 때부터 이미 '시경'과 '서경'을
익혔으며 겸하여 황산곡의 시를 모두 외웠다.
  하루는 아버지인 신종호가 시험삼아 외워 보라고 하였더니
한 자도 틀리지 않았다. 그래서 산수도를 꺼내어 절구를
짓게 하니 말이 떨어지자마자 소리를 내어 응답하였다.

  물은 푸르고 모래는 희어 가을 기운 드높은데
  볕을 따라 날던 기러기 갈대밭에 내리네
  다시 보니 연기 같은 비 창망히 내리는 저쪽 밖에
  털끝같이 푸른 산이 우리 집이로다

  이 절구를 들은 아버지는 매우 감탄하였다.
  "이 아이는 후일에 반드시 대가가 될 것이다"
  혜숙옹주를 출가시키려고 할 무렵 대상자를 선발하는데 성종이 신항을
한 번 보고 좋다고 하였다. 당시 점을 잘 치는 자가 수명이 길지 않다고
하였지만, 성종은 개의치 않았다.
  "사람을 취함에 있어 그가 현명한가 현명하지 않은가를 가리는 것이
마땅하지 어찌 장수하고 요절하는 것을 논하겠는가. 이 사람은 기상이
범상하지 않으니 그 마음속에 틀림없이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점이
있을 것이다"
  성종은 마침내 그를 사윗감으로 결정하였다.
  어느 날 성종이 신항에게 물었다.
  "네가 글 짓는 것을 배웠다고 들었는데 지은 것이 몇 수나 되는가?"
  신항이 몇 수를 적어서 올렸을 뿐이었는데, 이때부터 성종의 대우가
더욱 융숭하였다.
  그는 31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그는 운명할 즈음에 동생 신잠을
불러 말하였다.
  "사람에게는 근신이 첫째이고, 재예가 다음이다. 이 두
가지를 겸해서 갖지 못할 것 같으면 차라리 재예를 버리고 근신을 지켜야 한다"
  잠시 후 조용히 읊조리며 세상을 떠났다.
  "살아서 좋은 집에 살다가 죽어서 산언덕으로 돌아 가도다"
  시호는 문효이다.

     높은 벼슬에 등용되지 못하더라도 아내를 버리지 않겠다고 한 권경희

  권경희(1451-1497)의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자번이다.
세조 14년(1468)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종 9년(1478)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처음에 수찬으로 임명되자 대간이 권경희의 아내 김씨의
집안이 미천하다는 것을 들어 논박하였다. 권경희의 아버지가 그 사실을
듣고 그 며느리를 버리도록 핍박하였으나 권경희가 사직하며 말씀드렸다.
  "어찌 차마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10여 년 동안을 함께 가난한 생활
속에서 고생하며 밤낮으로 오늘이 있기를 바랐었는데, 지금에 와서
버린다는 것은 차마 하지 못할 바입니다. 그렇게 못할 짓을 해 가며 높은
벼슬에 등용될 수 있다손치더라도 그것이 어찌 못할 짓을 하지 않고
살아가는 가난한 선비보다 낫다고 하겠습니까?"
  그의 아버지가 이 말을 의롭게 여겨 역시 며느리를 버리라고 강권하지는
못하였다. 그 뒤에 대간이 또 논박을 하였으나, 임금이 감싸주며
대간의 논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권경희가 공명을 구하지 않고 그의 아내를 버리지 아니하였으니
그야말로 훌륭한 선비이다"
  그러자 권경희의 처가인 김씨 집안에서 조정에 진상을 보고하여
그들의 신분이 미천하지 않다는 것이 밝혀져 마침내 높은 벼슬에
등용되었다. 권경희의 장인은 김치운인데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언에 이르렀다.
  권경희는 하정사로 명나라에 가서 중국의 예악을 터득한
바가 많았는데 그가 돌아오자 모두들 눈을 비비고 다시 볼 정도로
학식이 부쩍 향상되었다고 하였다. 벼슬은 대사헌에 이르렀다.

     과거에 낙방하고도 장래 대제학감으로 평가받은 김종직

  김종직(1431-1492)의 본관은 선산이고, 자는 계온,
호는 점필재이다. 16세에 과거에 응시하여 '백룡부'를
지었지만 낙방하고 말았다. 그런데 괴애 김수온이
대제학으로서 낙방자의 시권(시험 답안)을 열람하다가 그 속에
점필재의 시권이 있으므로 읽어보니 매우 뛰어난 글이었다.
  "이 글은 참으로 뒷날 대제학을 맡을 솜씨이다"
  김수온이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점필재가 낙방된 것을 아깝게
여겨 그 시권을 가지고 대궐에 들어가 임금에게 아뢰었더니, 임금이
기특하게 여겨 영산 훈도에 임명하도록 명하였다.
  당시 한강가에 있는 제천정 기둥에 시가 씌어 있었다.

  눈 속에 핀 찬 매화와 비 개인 뒤의 산 모습
  보기는 쉬워도 그리기는 어려워
  시인의 눈에 띄지 않을 줄 일찍 알았다면
  차라리 연지를 가져다 모란을 그릴 것을

  어느 날 괴애가 제천정에서 유람하다가 그 글을 보고서 감탄하였다.
  "이 글은 참으로 지난날 백룡부를 지은 사람의 솜씨이다"
  김수온이 그 글을 지은 사람을 추적해 보았더니 과연 점필재의
작품이었으므로 시를 알아보는 지력이 귀신과 같다고들 하였다.
  김종직은 단종 원년(1453)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세조 5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일찍이 승문원에 들어갔는데 어세겸이
승문원의 선배로 있으면서 김종직의 시를 보고 크게 감탄하였다.
  "나로 하여금 채찍을 잡고 그의 종이 되라 하여도 달갑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성종이 그를 소중히 여겼으므로 여러 벼슬을 거쳐 형조 판서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간이라 내렸다. 그 뒤 연산군 무오사화 때에 그의
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어 시신의 목을 자르는 화를 당하였으며, 문집도
태워 버리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으나 중종반정이 있고 나서
억울함이 씻겨졌다.

     귀갑이라는 점괘가 정말로 들어맞은 김홍도

  김홍도(1524-1557)의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중원, 호는
남봉이다. 재주와 학식으로 일찍이 이름이 알려졌고
명종 원년(1546)에 진사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이어 생원시에 5등으로
합격하였는데 당시에 23세였다. 그 뒤 명종 3년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그의 아버지인 직제학 김노가 주역 점을 잘 쳤는데 김홍도가
처음 태어났을 적에 점을 쳐보았더니 이름을 귀갑이라고 하라는
점괘가 나왔으므로 어릴 적의 이름을 귀갑이라고 하였다. 그러다가
김홍도가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자, 사람들은 그가 장원할 암시였다고
좋아했다. 그러나 김노는 한창 병이 들어 앓고 있다가 그 소식을 듣고도
기뻐하지 않았다.
  "나는 곧 죽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뒤 얼마 안 되어 정말 죽고 말았다.
  그 뒤에 김홍도가 윤원형과 사이가 좋지 않아 홍문관 전한으로
갑산에 귀양가서 죽었는데 갑산으로 귀양간다는 점괘가
정말 들어맞은 것이었다. 뒤에 벼슬이 회복되었으며 아들 기수가
존귀하게 되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김홍도는 기상이 호방하고
사물을 얕잡아 보아 늘 입버릇처럼 뇌었다.
  "집의가 불의를 집행하고 지평이 공평하지 않다"
  대관들이 그 말을 듣고 좋아하지 않아 마침내 화를 당하였다고들 하였다.

     어린 나이에 소를 올려 아버지를 구한 김규

  김규(1521-1565)의 본관은 광주이고, 자는 몽서이다.
중종 38년(1543)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명종 원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홍문관 전한에 이르렀다. 성종이 친히 경회루의
못가에 나아가 비오기를 빌며 뜨거운 뙤약볕 아래 앉아 있는데 갑자기
풍악 소리가 울리는 것을 듣고 좌우의 신하들에게 까닭을 물었다.
  "방주감찰(수석 감찰)의 집이 이웃에 있는데 오늘이 연회 하는 날입니다"
  "하늘이 비를 내리지 않아 백성들이 몹시 괴로워하므로 내가 지금
수라상의 음식 가짓수를 줄이고 풍악도 걷어치우게 한 채 한데서 이렇게
빌고 있는데, 국록을 먹는 무리들이 어떻게 감히 풍악을 벌여 놓고
즐겁게 노느냐"
  임금이 모두 잡아다 옥에 가두라고 명하니 그 자리에 있었던 13명이
한꺼번에 갇히게 되었다. 이에 그들의 집에서 자제들을 시켜 글을 올려
애걸하였다.
  "저들이 어처구니없는 죄를 짓고는 또 어린 자제를 시켜 소를
올리게 하여 모면하기를 애걸하니 더욱 밉살스럽다"
  임금이 화를 내며 모두 잡아들이도록 명하자 소에 연명하였던
아이들이 모두 겁을 내어 달아나 흩어졌는데, 김규 혼자 도망하지 않고
잡혀 왔다.
  "너는 어린아이인데 어찌 혼자 도망하지 않았는가?"
  임금이 묻자 김규가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신이 아비를 구원하려고 소를 올렸는데 차라리 죄를 받을지언정 어찌
감히 도망을 하겠습니까?"
  "이 소는 누가 지었는가?"
  "신이 지은 것입니다"
  "누가 썼는가?"
  "신이 썼습니다"
  "네 나이 몇 살인가?"
  "열세 살입니다"
  "네가 소를 짓고 글씨를 쓸 수 있는가 시험해 보겠다. 만약 속이면
당장 목을 베일 것이다"
  "짓고 쓰기를 모두 신의 손으로 한 것이오니 한번 시험해 보소서"
  임금이 '가뭄을 민망하게 여긴다'는 제목으로 글을 짓게 하였더니,
그 자리에서 다 짓고 그 끝에 이렇게 덧붙였다.
  "옛날 동해에서는 원통하게 죽은 과부 때문에 3년 동안 가뭄을 불러
들였고, 은나라 임금 성탕은 천 리에 비를 내리게 하였으니, 성상께서
그런 일들을 생각해 주소서"
  임금이 매우 기특히 여기며 김규에게 물었다.
  "네 아비가 누구인가?"
  "방주감찰 김세우입니다"
  "네 이름은 무엇인가?"
  "김규입니다"
  "네가 글도 잘 짓고 글씨도 잘 쓰니, 네 글을 보아 네 아비를 석방하고
네 글씨를 보아 네 아비의 친구들을 석방하니, 너는 아비에 대한 효도를
임금에게 옮겨 충성하여라"
  임금이 어필로 써서 중관(내시)에게 명하여 의금부 감옥에 갇힌
13명을 모두 석방하게 하였다.

     춘추를 잘 외워 하루아침에 대사간이 된 구종직

  구종직(1424-1477)의 본관은 평해이고 자는 정보이다.
세종 26년(1444)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어느 날 성종이 밤에 경회루에 나아갔더니 어떤 사람이 경회루 곁에
엎드려 있었다. 성종이 누구냐고 물었다.
  "교리 구종직입니다"
  "어떻게 여기에 왔는가?"
  "초야에 있던 신이 일찍이 경회루의 요지는 천상의
선계란 말을 들었사온대 마침 대궐에 입직하였다가 감히 몰래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성종이 앞으로 나아 오도록 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대는 노래를 부를 줄 아는가?"
  "촌사람의 노래가 어찌 가락에 맞겠습니까?"
  성종이 시험삼아 부르도록 명하니, 구종직이 목청을 길게 뽑아 한 곡조
불렀는데 지붕이 진동하는 듯하므로 성종이 매우 즐거워하였다.
  "경전을 외울 수 있는가?"
  "'춘추'를 대강 기억합니다"
  성종이 외우도록 명하니 물이 흐르듯 막힘 없이 외웠다. 성종이 술을
내려 주도록 명하고 그 자리를 파하였다.
  이튿날 특별히 구종직을 대사간으로 임명하자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에서 번갈아 가며 글을 올려 적극적으로 불가함을 논하였으나
성종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며칠이 지나자 성종이 삼사의 관원을 모두 불러다 입시 하게
하고 또 구종직도 오도록 명하여 그 자리에서 대사헌 이하에게 '춘추'를
외우게 하였는데, 한 구절이라도 제대로 기억하는 자가 없었다. 성종이
구종직에게 외우도록 명하여 제1권을 다 외우고 또 다른 권에서
뽑아 질문을 하였으나 그 자리에서 대답을 못하는 것이 없을 정도로 환하게
알고 있었다.
  "경들은 한 구절도 잘 외우지 못하면서 오히려 청직에 올라
있는데 구종직과 같은 사람이 어찌 대사헌에 합당하지 않단 말인가?"
  성종이 삼사의 관원을 둘러보며 말하자 모두들 황공하고 부끄러워하면서
물러났다.
  구종직은 벼슬이 찬성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안장이다.

     명함에다 시를 써 박원형의 마음을 움직인 윤효손

  윤효손(1431-1503)의 본관은 남원이고, 자는 유경이다.
그의 아버지 윤처관이 의정부 녹사가 되어
이른 새벽에 정승 박원형의 집 문 앞에 가서 명함을 드렸는데,
문지기가 정승이 주무신다는 핑계로 명함을 들여보내지 않았다. 날이
저물어 시장한데다 피곤하여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온 윤처관은
아들을 붙잡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재주가 없는 탓으로 이와 같이 욕을 먹으니, 너는 모름지기 학업을
부지런히 하여 네 아비처럼 되지 말아라"
  이야기를 들은 윤효손이 그 명함 끝에다 아버지 몰래 시를 적어 넣었다.

  정승은 해가 높도록 단잠을 자는데
  대문 앞 명함 꼭지에는 털이 났도다
  꿈속에서 주공을 만나 보거든
  당시 어진 선비 환영하던 수고를 꼭 물어 보소서

  이튿날 아침에 윤효손의 아버지가 아들이 시를 쓴 것도 모른 채 다시
찾아가서 명함을 드렸더니 박원형이 그 시를 보고는 즉시 불러들여 물었다.
  "이 시는 네가 쓴 것이냐?"
  윤처관이 놀랍고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글자의 획을 자세히
살펴보니 바로 그의 아들 윤효손이 쓴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사실대로
대답하자 박원형이 윤효손을 불러다 보고는 극도로 감탄하며
칭찬하고 정승의 딸을 윤효손의 아내로 삼아 주었다.
  세종 32년(1450)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단종 원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세조 3년에 문과 중시에 급제하여 벼슬이 좌참찬에 이르렀고
기로소(나이가 많은 임금이나 70세가 넘은 문관 정2품 이상 되는 노인이
들어가서 대우받던 기구)에 들어갔다.


     2.
     사화의 소용돌이

  작은 임가 숭재와 큰 임가 사홍은 천고의 간웅 중에 가장 큰 간웅이네
천도가 돌아오면 갚음 응당 있으리니 네 뼈 또한 바람에 흩날려짐을 알겠도다


     폐비사건을 보고 갑자사화를 예견한 이세좌의 부인

  이세좌(1445-1504)의 본관은 광주이고, 자는 맹언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를 거쳐 판서까지 올랐다. 성종이 폐한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를 죄주어 사사할 적에 이세좌가 승지로서
사약을 가지고 갔다가 그날 저녁에 집에 돌아왔더니 그의 부인이 물었다.
  "조정에서 폐비의 처형을 논의하더니 결국 어찌되었습니까?"
  "오늘 이미 사사하였소. 부득이 내가 사약을 전달하는 사명을 맡게
되었소"
  이 말을 들은 부인은 깜짝 놀라 일어나 앉으며 탄식하였다.
  "아! 슬프도다! 우리 자손도 살아 남는 이가 얼마 없겠구려. 어머니가
죄없이 죽음을 당했는데, 그 아들이 어찌 훗날 보복함이 없겠소"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화 때에 드디어 이세좌는 동쪽 저자거리에서
참형을 당하였고, 그의 아들 수정 또한 죽음을 당했다.
부인의 선견지명에 주변 사람들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일부러 말에서 떨어져 폐비 사건에 말려들지 않은 허종

  허종(1434-1494)의 본관은 양천이고, 자는 종경,
호는 상우당이다. 세조 3년(1457)에 문과에 급제하고 동왕 13년에
북병사로서 이시애를 토벌하여 적개공신 일등에 책록되었다.
그때 나이 34세였다.
  소싯적에 벗과 같이 산중의 절에 기숙하며 글을 읽었는데, 밤에 도둑이
들어 옷과 신발을 훔쳐 가 버렸다. 도둑맞은 사실을 알고, 사람들은
모두 애를 태우며 한탄을 하는데 허종은 태연히 붓을 가져다가 벽에다
이렇게 적었다.

  이미 내 옷을 훔쳐 갔으면 내 신은 훔쳐 가지 말아야 할 것이지, 옷도
가져가고 또 신발마저 훔쳐 가니 이는 도선생의 의리에 어긋나는 일이다.

  그것을 보고 식자들은 그의 도량에 감복하였다.
  23세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24세에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그때
가뭄이 심하여 조야가 비를 애타게 기다렸다. 방방(과거에
급제한 사람에게 합격증서를 주는 일)을 하는 날 갑과 1등을
부르자마자 비가 쏟아지니 그때 모두 '상나라 장마비처럼 태평성대가
올 징조'라고들 하였다.
  하루는 임금이 그의 지조를 시험해 보기 위해 갑자기 대로하여
시신에게 머리를 꺼둘러 끌어내리게 하고 칼을 가져다가 무릎 위에
가로 걸쳐놓고 당대의 역사 최적에게 명령하였다.
  "내가 이 칼을 뽑는데 갑에서 다 나오거든 곧바로 그의 목을 베어 버려라"
  날카로운 칼날의 끄트머리가 나오자 이를 본 시자들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런데도 허종은 두려워하지 않고 묻는 대로 대답하는데 말소리가
또록또록 하고 힘찼다.
  세조가 참된 장사라고 칭찬하며 늦게 만난 것을 한탄하고 술을 마시게
하였다. 허종은 천천히 술상 앞에 나아가서 술을 마시고 물러났는데
그 태도가 참으로 안온하였다.
  성종 5년에 공혜왕후 한씨(한명회의 딸)가 승하하고
후궁인 윤씨가 원자를 낳자, 윤씨를 책립하여 왕비로
삼았다. 윤씨는 여러 후궁들을 질투하여 임금에게까지 불손한 일을
자행했다. 임금이 대로하여 폐하여 내쫓았으며, 사사하려고 신하들을
불러 전정에서 회의를 하게 되었는데 임금의 노여움이
대단하여 감히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허종은 영상이었는데, 이른 아침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가다가
그의 누이 집 앞을 지나게 되어 들어가 뵈었다.
  그 누이가 폐비 윤씨를 사사하는 일에 대해 부당함을 말하였다.
  "비유하자면 민가에서 늙은 종이 집주인의 명령을 거역하기 어려워서
함께 주인 마님을 죽이는 것과 같으니, 후일에 그 아들이 가통을
계승할 때에 어찌 화환이 없겠는가"
  허종이 크게 깨닫고 돌다리를 지나가다가 고의로 말에서 떨어져 발을
다쳤다고 핑계하고, 그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 뒤에 성종이 승하하고 연산군이 왕이 되어 어머니 윤씨를 위해
복수를 할 적에 당시 회의에 참석한 사람을 한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잡아
죽였으나, 허종은 홀로 화를 면하였다. 후인들이 그 다리를 가리켜
'허종이 빠진 다리'라 혀여 '종침교'라 하였으니, 지금 사직동에 있다.
  허종 대감은 난시에는 싸움터에 나가 장군이 되고 평시에는 내직에
들어와 재상이 되었는데, 풍채가 늠름하고 기개가 헌걸 찼으며, 신장이
12척 5촌이나 되었다. 문장도 잘 하고 활을 잘 쏘아, 조정에서 그에게
의지한 바가 매우 켰다.
  일찍이 이조 판서로 있을 적에 문장과 인물로 세상을 울리던 명나라의
동월과 왕창이 사신으로 왔다가, 12척 장신에 옥처럼
깨끗한 풍채와 의젓한 의관의 허종을 보고 감탄하여 자신들도 모르게
무릎을 꿇어 절하고 경서와 사서를 토론하였다. 동월, 왕창
두 사신이 귀국할 적에 압록강에 이르러서도 허종 대감을 사모하여
차마 헤어지지 못하였다.
  폐비 윤씨가 폐위되기 전에 친히 베틀에 올라가서 비단을 짜는데,
임금이 찾아왔다. 왕비가 베틀에서 내려와 말하였다.
  "상감께서는 어찌하여 옥체가 이다지도 크십니까?"
  "나보다 더 큰 사람이 또 있다. 불러들일 터이니 그를 한번 보아라"
  임금은 곧 명령을 내려 허종을 불러들였다.
  성종 24년(1493) 61세에 죽었다. 공훈으로 양천부원군에
봉해지고 시호는 충정이다.

     부인이 호랑이에게 물려가 큰 화를 면한 유순

  유순(1441-1517)의 본관은 문화이고, 자는 희명,
호는 노포이다. 어릴 적부터 문장을 잘 하였다. 세조 5년(1459)에
생원시에 장원했고, 8년에 문과에 급제했으며 12년에는 중시에도
급제하였다. 연산군 4년(1498)에 정승에 임명되어 그 벼슬이 영의정에까지
이르렀다.
  성종 때 연산군의 생모 윤씨에게 사약을 내릴 때에 유순은 입직승지로서
약사발을 받들고 가는 사명을 맡았다. 그런데 이날 새벽에
포천의 본가로부터 하인이 급히 달려왔다. 부인 장씨가
범에게 물려 갔다는 소식을 갖고 온 것이다. 유순이 어전에 나아가
아뢰고 포천으로 급히 가니, 그의 동료 승지 이세좌가 약사발을 대신
가지고 갔다.
  유순이 포천 본가에 이르니, 부인은 과연 범의 등에 업혀 가다가 중도에
나뭇가지를 잡고 살아나서 집에 돌아와 있었다. 유순은 매우 기뻐하였다.
  뒷날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화 때에 이세좌 부자는 모두
죽음을 당하였으나 유순은 화를 면하였다. 유순은 중종반정 때에 정국
공신 2등에 책록되어 원성부원군에 봉해졌다.
  중종이 한번은 절의로 신하들을 꾸짖으면서 중종반정 때에 녹훈된
세 승지의 공훈을 삭제하기 위해 의정부에 명하여 의논하게 하였다.
  유순이 아뢰었다.
  "당시 신이 영상으로서 변고(반정)의 소식을 듣고 창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뻔뻔스럽게 훈적에 참여했으니, 신이 세 사람과 죄가
같으므로 감히 헌의하지 못하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유순을 옳게 여겼다. 궤장을 하사
받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시호는 문희이다.

     4대에 걸쳐 정려문이 여섯 번이나 세워진 정성근

  정성근(?-1504)의 본관은 진주이고, 자는 군부이다.
성종 5년(1474)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부모가 돌아가시자 무덤 근처에 여막을
짓고 3년상을 마쳤으며 몸이 야윌 정도로 슬퍼하였다. 또 성종의
상을 당하여서는 상기가 끝난 뒤에도 슬퍼서 마음으로 상복을
입는 심상삼년을 입으니, 사람들이 모두 충효를
모두 갖추었다고 칭송하였다.
  승지로 있을 적에 강직하여 뜻을 굽히거나 흔들리지 않았다. 사명을
받들고 대마도에 들어가자, 대마도주가 그림, 부채, 호초, 향조각
따위를 예물로 바쳤다. 정성근은 일행이 대마도주에게
받은 것을 다 거두어서 한 그릇에 봉해 두었다가 귀국할 때에
접대하던 왜관 편으로 그 물건들을 도주에게 돌려보냈다. 이에
대마도주가 그 물건을 우리 나라 임금에게 보내어 정성근에게 주도록
청하였다. 임금이 대마도주의 청을 들어주려 하니, 정성근은 극구 사양하였다.
  "신이 저 대마도에 있을 적에 받지 않다가 이곳 우리나라에 와서 받으면
전후 마음이 다른 것이니 참으로 원치 않습니다"
  주상은 정성근에게 억지로 권할 수 없어 도로 대마도로 보냈다. 그의
청백함은 대체로 이와 같았다.
  성종이 승하하자 정성근이 삼년상을 행하였는데, 연산군이
갑자사화 때에 괴이한 행동을 한다 하여 그를 죽여 버렸다.
아들 주신. 매신 및 매신의 아들 원린, 원기,
원린의 아들 효성이 모두 효행으로 이름나 정려문이
여섯 번이나 세워졌다. 이는 옛날에도 없었던 바이므로 세상에서
정씨 가문을 '효문'이라 하였다. 이안눌의 시에,

  한 가문에 충신 효자 여섯 정려문이네

  라는 것이 바로 이를 두고 읊은 것이다.
  벼슬이 직제학에 이르고, 중종반정 뒤에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연산군의 청혼을 거절하여 죽은 홍귀달

  홍귀달(1438-1504)의 본관은 부계이고, 자는 겸선이며
호는 허백당이다. 대대로 함창에 살았다.
  세조 8년(1462)에 진사시를 거쳐 문과에 급제하고 예문관,
호당(독서당)의 벼슬과 이조 판서.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가 일어나던 해에 10여 조목의 상소를 올렸는데,
모두 궁궐의 비밀스런 일이었다. 반복하여 넌지시 풍자하였는데
그 내용이 매우 절실하고 곧았다. 연산군은 마음이 편치 않아 그의
벼슬을 빼앗고 경원으로 유배하였다.
  "나는 본시 함창의 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 재상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니 이 모든 것이 본래 내가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다. 성공해도
나로부터 시작한 것이고 실패해도 나로부터 비롯된 것이니, 지금 다만
옛날로 돌아왔을 뿐이다. 다시 무엇을 한탄하랴"
  홍귀달은 가족과 헤어질 때 담담히 말하고 길을 떠났다.
  얼마 뒤에 체포 명령이 내려져 의금부로 압송되어 오던 중 단천에
이르렀는데, 왕명을 받은 관리가 달려와서 책 한 권을 주었다.
홍귀달이 펴 보고 재배하며 말하였다.
  "주상이 신에게 죽으라고 명하신다"
  그는 얼굴빛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조용히 목매어 죽었다.
  중종이 반정한 뒤에 문광이란 시호를 내렸다.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언필, 현감 언승, 문과 박사 언방, 교리 언충, 참봉 언국이다.
  언방에게는 얼굴이 예쁜 딸이 있었는데, 연산군이 왕자빈을 간택할
적에 위협하여 빈으로 들이려 하였다. 홍귀달이 그 말을 따르지 않자
마침내 유배하여 사사하였고, 아들 언방도 배소에서 죽었다.
  언충이 갑자사화를 당하여 모진 고문을 받고 들것에 들려 감옥 담안에서
조금 쉬고 있는데, 그의 벗이 옷에 흥건히 묻은 피를 보고는 "너무
참혹하구나" 하며 얼굴을 돌렸다.
  "이것은 홍문관의 물에 젖은 것이다"
  언충은 유유히 이렇게 대답했다. 홍문관의 홍자는 붉을 홍의
홍자와 음이 같고, 핏빛이 붉기 때문에 그렇게 운운한 것이었다. 진보에
유배되었다.

     금갑옷을 바다에 던져 버린 청백리 이약동

  이약동(1416-1493)의 본관은 벽진이고, 자는 춘보,
호는 노촌이다. 문종 원년(1451)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일찍이 제주목사로 있을 때에 청렴하여 사냥할 적마다 항상 채찍 하나만
들고 갔다. 그는 제주목사를 그만두고 돌아올 적에 그 채찍마저
관아 벽에 걸어 놓고 왔다. 제주도 사람들이 그것을 보물처럼 간직해 두고
신임 목사가 부임 할 적마다 반드시 바람에 쐬고 볕에 내말리곤 하였다.
세월이 오래 지나 좀이 슬고 파손되자, 화공을 시켜 그대로
모사하여 관아의 벽에 걸어 놓고 후임 목사로 하여금 그 청덕을
본받게 하였다.
  이약동이 제주에서 임기가 끝나 돌아올 적에 배가 바다 한가운데
당도하여 갑자기 회돌이 물살에 걸려 나아가지 못하였다. 사공이 두려워서
얼굴빛이 새하얗게 질려 있을 때, 이약동은 홀로 의젓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한 비장이 앞에 나와 고하였다.
  "제주도 백성들이 공의 청덕에 감복하여 금갑옷 한 벌을 싸서
나에게 주면서 공이 갑옷을 입어야 할 날에 이 갑옷을 바치라고 하였습니다"
  이약동이 곧바로 갑옷을 바닷속에 던져 버리게 하자, 배가 잘 나아가
무사히 돌아오게 되었다. 후세 사람이 그의 청덕에 감탄하여, 그곳을
'갑옷을 던져 버린 바다'란 뜻으로 '투갑연'이라 이름하였다.
  김종직과 동향으로 매우 친했는데, 노년에 하로촌에 물러나
살았다. 벼슬은 지중추부사에 이르렀고 시호는 평정이다.

     성종으로부터 친구 대접을 받은 유호인

  유호인(1445-1494)의 본관은 고령이고, 자는 극기,
호는 뇌계이다. 세조 8년(1462)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종 5년(1474)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교리가 되어 홍문관에서 숙직을 할 적에,
임금이 내시 한 사람만 데리고 밤에 임어하였다.
  유호인이 깜짝 놀라 일어나자, 임금이 사모만 쓰고 앉도록 하고는
얘기를 나누었다. 그의 비단 이불이 해져 솜이 나오고 또 솜의 빛이
누렇게 바랜 것을 보고, 임금이 칭찬하였다.
  "네가 맑고 중요한 벼슬을 지내면서 청렴 검소함이 이러하니 가상하다"
  임금은 곧 내시에게 이불을 가져오게 하여 덮어 주었다. 벼슬은 합천
부사에 그쳤다.
  한번은 영남으로 어버이를 뵈러 귀향하는데, 임금이 내관을
시켜 중로에 따라가서 그의 시주머니를 뒤져서 가져오게
하였다. '조령에 올라서 읊은 시'는 이렇다.

  북쪽을 바라보니 임금과 멀리 떨어졌고,
  남쪽으로 내려오니 어머니와 가까워졌네

  주상은 감탄하며 칭찬하였다.
  "충효가 모두 구비되었구나"
  공이 일찍이 부모 봉양을 위하여 산음현감을 자청해 나갔는데,
관리로서의 일처리가 미숙하여 일반적인 문서도 잘 처결하지 못하였다.
하루는 어떤 백성이 소장을 올렸는데, 여러 날 지나도록
판결이 나오지 않자, 다시 호소하였다.
  "판결을 내려 주는 것은 감히 바랄 수 없고 오직 본 소장을 도로 찾아
가고자 할 뿐입니다"
  유호인이 답을 못하여 우물쭈물하는데 통인이 옆에 있다가 말했다.
  "부임하던 날 올린 소장도 아직까지 판결하지 못하였는데, 네가 올린
소장은 겨우 닷새 밖에 안 되었다. 어찌 그리 급히 서두르는가. 너무
심하다"
  뇌계가 그 민첩함을 보고 기뻐하였다.
  "이 통인이 참으로 영특하고 매우 뛰어나다"
  영남의 방백이 부임차 하직 인사를 할 적에 성종이 그를 인견하고
특별히 부탁하였다.
  "내 친구 유호인이 현재 산음현감으로 있으니, 경이 그를 보살펴 주구려"
  그 방백은 왕의 뜻을 거행하지 않고 끝내는 '유호인이 백성을 돌보지
않고 시만 읊고 있다'는 죄목으로 파면했다. 한다. 당시 군왕들의 넓은
기상과 도량을 여기에서 엿볼 수 있다.

     평생 '소학'을 가까이 했던 소학동자 김굉필

  김굉필(1454-1504)의 본관은 서흥이고, 자는 대유,
호는 한훤당이다. 일찍부터 김종직에게서 수학하여 평생에
'소학'을 법으로 삼으니 '소학 동자'라 불리었다.
일두 정여창과 뜻이 통하고 의기가 합치되었다.
  연소할 적부터 초립을 쓰고 연밥 갓끈을 늘이고 다녔는데, 만년에
이르러서도 그렇게 하였다. 방에 조용히 거처하면서 책상에 마주
앉아 책을 보되 밤이 깊어도 잠을 자지 않았다. 집안 식구들도 그의 하는
을 엿보지 못하였고, 이따금 늘어뜨린 연밥 갓끈이 책상을 칠 적에
쟁그랑쟁그랑 소리가 들려 아직도 책을 보고 있음을 알 뿐이었다.
  성종 11년(1480)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동왕 24년에 유일(등용되지
않아 세상에 숨어 사는 유능한 선비)로 천거되어 남부참봉에
제수되고  형조 좌랑에 전임되었다. 연산군 4년(1498) 가을에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도라 하여 장형을 맞고 희천에
유배되었다. 연산군 10년 갑자사화 때에 죄가 추가되어 사사하니,
목욕재계하고 의관을 갖추고 나와서 얼굴빛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수염을 입에 물고 조용히 말하며 죽음에 나아갔다.
  "신체와 터럭과 살은 부모에게 받은 것이니, 이것까지 손상을 받을 수 없다"
  이때가 그의 나이 51세였다. 중종 때에 우상에 특별히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경이다. 문묘에 종사되었다.

     신선로를 만든 은둔자 정희량

  정희량(1469-?)의 본관은 해주이고, 자는 순부,
호는 허암이다. 문장을 익히고 시에 능하였으며, 음양학에
통달하여 스스로 자기 운명을 점쳐 보고는 은둔하려는 뜻을 품었다.
성종 23년(1492)에 생원시에 장원하였고 연산군 원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의 검열. 봉교를 지내고 호당에 들어갔다.
무오사화 때에 의주로 귀양갔다가 내지인 김해로
옮긴 후 3년 뒤에야 풀려났다.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정성스럽게 시묘살이를 하였다.
  그는 늘 "갑자년의 화가 무오사화보다 심하여 우리들도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세상을 도피하려고 중이 내왕할 때면 서로 함께 모의를 하고
때때로 혼자 부모 묘소에 가서 배회하며 눈물을 흘렸는데, 집 식구들은
어머니를 사모하는 것으로 여겼다.
  어느 날 그는 집을 나갔다가 오래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식구들이
이를 괴이하게 여겨 종적을 찾아 물가에 이르렀는데, 짚신 두 벌과 상관이
물가에 있었다. 강물에 빠져 죽은 것으로 여기고 두루 찾았으나
끝내 그 시체를 찾지 못하였다.
  친척인 해평군 정미수가 계를 올려, 그의 생김새와
복색을 알려 찾기를 청하였으나, 연산군은 "미친놈이 도망하여
죽었는데 무엇하러 찾느냐"고 하였다.
  연산군 10년 갑자사화가 일어났으니, 그 말이 과연 징험된 셈이다.
  퇴계 이황이 산중에서 '주역'을 읽는데, 한 늙은
중이 곁에 있다가 이따금 구두의 잘못을 고쳐 주었다. 퇴계는 마음속으로
그가 허암일 것이라 여기고 물었다.
  "지금은 걱정이 없는 평화로운 때인데 정허암은 어찌하여 다시 속세에
나오지 않소?"
  "정희량은 어버이상을 당하여 시묘살이를 하다가 삼년상의 예를 마치지
못하였으니 불효요, 임금을 버리고 세상을 등졌으니 불충한 것이오.
불효하고 불충하였으니 죄가 막대한데, 무슨 면목으로 다시 인간
세상에 나가겠소"
  그는 조금 뒤에 작별 인사를 하고 어디론가 홀연히 떠났다.
  정희량이 장가를 든 뒤 아내를 멀리하여 얼굴을 대면하지 않았다.
정희량의 아내가 늙은 뒤에 단옷날을 잡아 남편의 기일로 삼고, 남겨
놓은 의복을 묻어 무덤을 만들었다.
  용재 이행이 시를 지어 조문하였다.

  비방과 칭찬 분분하게 만 사람의 입에 오르내려도
  허암공의 마음과 뜻 가늠하지 못하겠네
  고양 남강 어디메에 남긴 자취 찾으랴
  붉은 통 오색 끈을 부쳐 주기 원하노라

  정희량은 화를 피해 중이 되어 스스로를 이천년이라 하고,
산수에 노닐기를 좋아하였다. 일찍이 가천원의 벽에 시를 지어 붙였다.

  비바람 치는 전일 놀라 달아났고
  문명한 이때에도 저버렸네
  외로운 지팡이로 우주간에 노닐으니
  시끄러움 싫어져 시마저 짓지 않으련다

  그는 주역 수화기제괘(일이 이미 일정하게 되어 있는 모양)의
이치로 화로를 만들어 채소를 익혀 먹었는데, 아침, 저녁 식사할
때에도 오직 이 화로 하나뿐이었다. 그가 신선이 되어 가 버리자 세상
사람들이 이를 '신선로'라 하였다. 오늘 우리가 즐겨 먹는
신선로의 근원이 여기 있다.

     이극돈의 죄를 사실대로 쓴 김일손

  김일손(1464-1498)의 본관은 김해이고, 자는 계운,
호는 탁영이다. 그의 형 준손, 기손과 함께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에서 같이 배웠다. 성종 17년(1486)에 생원시에
장원하고, 문과에 2등을 하였으며 예문관 검열에 보직을
받아 사관으로 있으면서 이극돈의 죄를 사실대로 바로 썼다.
  연산군 4년(1498) 7월에 왕이 전지하였다.
  "김종직은 시골의 천한 선비로서 세조 때에 과거에 오르고 성종 때에
경연에 발탁되어 오랫동안 시종의 지위에 있으면서 형조 판서에
이르렀으니 은총이 더할 수 없이 지극하였다. 그가 병으로 물러간
뒤에도 소재지의 수령을 시켜 특별히 쌀을 주어 그 여생을 마치게 하였다.
그런데, 지금 그의 제자 김일손이 편수한 사초 안에 부도한
말로 선왕 세조 때의 일을 거짓으로 꾸며 말하고, 그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수록하기까지 하였다. 그 글에 '정축(세조 3년)
10월에 내가 밀양으로부터 서울로 오다가 답계역에서
하루를 묵었는데, 꿈에 어떤 선인이 훤칠한 키에 일곱 무늬가 있는 칠장복을
입고 점잖게 말하기를 -나는 초희왕의 손자 심인데
서초패왕 항우에게 시해되어 빈강에 빠졌다-하고는 언뜻 보이지 않았다.
내가 꿈을 깨고 나서 깜짝 놀라
말하기를, -초희왕은 남쪽 초나라 사람이고 나는 동방 조선 사람이다.
지역이 서로 만여리 이상 떨어져 있고 세대 또한 천여 년이나 선후가
있는데, 꿈자리에 와서 느꼈으니 이 무슨 상서로운 기미인가. 또
역사서를 고찰해 보면 서초패왕이 초희왕을 강물에 던져 넣었다는 말이
없으니, 어쩌면 항우가 사람을 시켜 몰래 그를 쳐서 그 시체를 강물에
던져 넣음인가. 이는 알 수 없는 일이다-하고 마침내 글을 지어
조문하다'(이 유명한 '조의제문'은 '점필재집'과 '탁영집'에
실려 있다) 세조의 사초에 김일손이 그 '조의제문'을 찬양하여
'충분이다' 하였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나도 모르게 참담하고
두렵다. 그 형명을 의논하여 아뢰어라"
  이윽고 7월에 그를 난역으로 처형하고 종묘에 고하였다.
  김일손의 벼슬은 이조 정랑에 이르렀다. 중종반정 후 그에게
도승지를 추증하였다.

     연산군의 연회를 신랄하게 비판한 박한주

  박한주(?-1504)의 본관은 밀양이고, 자는 천지,
호는 오졸자이다. 6, 7세가 되자 글을 짓고 시를 읊었다.
  성종 16년(1485)에 생원시를 거쳐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의 정언과
헌납을 역임하고 예천군수로 나갔는데 정사를
공평하게 하여 아전들이 두려워하고 백성들이 좋아했다. 이에 연산군이
그를 내직으로 불러들여 간관으로 임명하였다.
  박한주가 임금 앞에 나아가 말하였다.
  "종묘, 사직과 능침에는 한번도 제사지내지 않으시고
놀이와 잔치는 무상으로 베풀어서 밤을 낮으로 삼아 계속하시니
효도하는 도리에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연산군이 말하였다.
  "눈병이 있어 다닐 수 없기 때문이다"
  "후원 안에서 말달리기와 제기차기를 하며 용봉장막을 쳐 놓고
연회를 벌일 때가 그처럼 많은데 주상께서 어찌하여 눈병이 났다고
말씀하십니까"
  연산군이 발끈 성이 나서 얼굴빛이 변하였다.
  "용봉장막이 네 물건이냐?"
  박한주가 대답하였다.
  "이는 모두 백성의 재력에서 나온 것이니, 신민의 장막이라
해도 옳을 것입니다. 어찌 상감의 사사로운 물건이겠습니까"
  이어서 노사신, 임사홍의 간사함을 논하다가 마침내
모함을 받아, 점필재 김종직의 문도라 하여 무오사화 때 벽동에
유배되었다가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화 때 죽음을 당하였다.
중종반정 후에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홀아비로 살 적에 기생을 거절한 이자건

  이자건(1455-1524)의 본관은 성주이고, 자는 건지이다.
성종 11년(1480)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동왕 14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를 모시던 기생이 있었는데, 이자건이 홀아비가 되자 그의 집에
따라가겠다고 하였다.
  "집에 딸아이가 둘이 있어 기생과 함께 살 수 없다"
  이자건은 기생을 물리치며 돈과 물품을 후히 주어 돌려보냈다.
  연산군 때 직언을 하다 미움을 받아 선산에 귀양갔는데, 선산
부사가 매우 박대하였다.
  하루는 의금부의 관리가 온다는 말을 듣고 그 부사는 곧 군사를 거느리고
이자건이 살고 있는 집을 에워싸고 이자건을 불러 뜰 아래에 꿇어
앉혀 놓고 온갖 방법으로 다그치고 욕보였다.
  그런데 의금부 관리는 다른 일로 이곳을 지나게 된 것이었다. 의금부
관리가 지나간 뒤에, 부사는 열쩍어 하며 돌아갔다. 뒤에 이자건이 황해
감사가 되었는데 그 수령이 마침 안악군수로 있다가
이를 알고 사직하고 떠나려 하였다. 이자건이 안악군에 당도하여 따뜻한
말로 위로해 타이르니 그 수령이 감읍하였다 한다.
  벼슬은 공조, 형조 판서에 이르렀고, 시호는 공간이다.

     병풍에 시를 썼다가 죽음을 당한 임희재

  임희재(1472-1504)의 본관은 풍천이고, 자는 경여,
호는 물암이다. 간신 임사홍의 아들이다. 성종 17년(1486)에
진사시에 장원하고 연산군 4년(1498)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가 되었는데, 이 해에 김종직의 문도라 하여 곤장을
맞고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었다.

  요순을 본받으면 저절로 태평할 텐데
  진시황은 무슨 일로 백성을 괴롭혔나
  재앙이 집안에서 일어날 줄 알지 못하고
  오랑캐 막으려고 부질없이 만리장성 쌓았구나

  하루는 연산군이 임사홍의 집에 갔다가 병풍에 씌어 있는 시를 보고
물었다.
  "누가 쓴 것인가?"
  임사홍이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연산군이 성을 내며 말하였다.
  "경의 아들이 불충하니 내가 그를 죽이려고 하는데, 경의 생각은 어떠한가"
  임사홍이 꿇어앉아 말하였다.
  "이 자식의 성품과 행실이 불순한 것은 상감의 말씀과 같습니다. 신이
바로잡으려 했으나 미처 하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임희재는 죽음을 당했는데, 그 아비 임사홍은 희재가 사형 당한
그날도 평일과 다름없이 잔치를 베풀어 마음껏 먹고 음악을 연주하였다.
연산군이 그런 사실을 탐문해 알고는 임사홍을 더욱 총애하였다.
  임사홍의 맏아들 광재는 예종의 딸 현숙공주에게
장가들었고, 넷째 아들 숭재는 성종의 딸 휘숙옹주에게 장가들었다.
  임숭재는 남의 아내와 첩을 빼앗아다가 임금에게 바쳐 총애를 받았다.
임금이 자주 임사홍의 집에 들렀는데, 어느 날 임사홍이 울면서 고해 바쳤다.
  "폐비 윤씨가 엄 숙의, 정 숙의의 참소로 인하여 사사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연산군이 크게 노하여 엄 숙의와 정 숙의를 죽이고 조정의 선비 백여
명을 죽였다.
  시인이 시를 지어 임사홍 부자를 비방하였다.

  작은 임가 숭재와 큰 임가 사홍은
  천고의 간웅 중에 가장 큰 간웅이네
  천도가 돌아오면 갚음 응당 있으리니
  네 뼈 또한 바람에 흩날려짐을 알겠도다

  처사 조광보가, 연산군이 임사홍을 총애하여 그가 권한을
휘둘러서 조정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송당 박영에게 말했다.
  "너는 무부인데, 어찌하여 이놈을 죽이지 않느냐. 네가 죽이지
않으면 나는 너를 죽이겠다"
  "한 적을 목베어 나라의 근심거리를 제거하는 것은 진실로 마음에
달갑게 여기는 바이지만, 후일 역사에 '도적을 죽였다'라고 쓰면
어찌하겠소"
  송당이 답변하자, 조광보가 웃으며 일어났다.

     연산군으로부터 큰 소인이라고 비난받고 시체가 강물에 던져진 조지서

  조지서(1454-1504)의 본관은 임천이고, 자는 백부,
호는 지족정이다. 성종 5년(1474)에 생원시에 장원, 진사시에
2등을 하고 같은 해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동왕 10년 중시에
장원하였다. 집안 대대로 진주에 살았다.
  연산군이 세자로 있을 때에 허침은 필선으로, 조지서는
보덕으로 같이 강관이 되었다. 연산군은 날마다 놀이나
장난을 일삼고 학문에는 전념하지 않았다. 조지서는 빗대어 타이르기를
간절히 하다가 세자로부터 미움을 많이 당하였다. 세자에게 강의를
할 적마다 책을 앞에 던지면서 힘써 타일렀다.
  "저하께서 학문에 힘쓰지 않으시면 신은 마땅히 임금께 아뢰겠습니다"
  연산군은 그를 매우 괴롭게 여겨 원수처럼 대했다. 하루는 강의를
하기 위하여 동궁에 입시 하였다가 벽 쪽을 쳐다보니 다음과 같은 글이 씌어
있었다.

  조지서는 큰 소인이요 허침은 큰 성인이다

  이 말을 들은 사람은 조지서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조지서는 외직의 보임을 청하여 창원부사가
되었다. 얼마 되지 아니하여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여 지리산
아래에 터를 잡아 정자를 짓고, 편액을 '지족정'이라 하였다.
  만흥시에 다음과 같이 읊었다.

  가을이면 맑은 밤에 시간쪽지만 세고
  아침이 되면 발을 걷어 뾰족한 산 대하네
  꾀꼬리는 저녁빛 머금고 깊은 숲에서 울고
  제비는 얕은 그늘 후리치고 짧은 처마에 들어오네
  초야에 은거함은 게으름에 익숙한 것임을 알겠고
  집이 가난함은 내 청렴을 위해서가 아니네
  평생의 장대한 뜻 다 사그라져 없어지니
  거울에 늙은 수염 비춰 보니 부끄럽구나

  갑자사화 때에 정성근과 같이 참혹한 죽음을 당하여 강물에
시체가 던져지고 가산이 적몰되었다.
  조지서의 부인 정씨는 포은 정몽주의 증손녀이다.
갑자사화 때 조지서가 정성근과 함께 잡혀갈 때 스스로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술잔을 들어 부인과 작별하면서 말하였다.
  "이번에 가면 반드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오. 조상의 신주를 어찌하겠소?"
  부인이 울면서 대답하였다.
  "죽음으로써 내가 보전하겠습니다"
  조지서가 죽고 가산이 적몰되자, 조지서의 장인 정윤관이
딸에게 말했다.
  "집이 이미 패망하였는데 어찌 친정으로 돌아오지 않느냐"
  "죽은 그분이 나에게 조상의 신주를 부탁하였고, 제가 죽음으로써
보전하겠다고 승낙하였으니 어찌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정씨 부인은 아버지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초야를 떠돌아다니면서 갖은 고생을 겪었고, 손수 나무 열매를
주워서 아침, 저녁으로 곡읍하고 전을 올리면서 삼년상을 마쳤다.
  중종은 조지서를 도승지로 추증하고 그의 아들에게 벼슬을 주었다.
정려문을 지어 정씨의 열행을 표창하였다.

     익살과 풍자로 연산군에게 간언한 표연말

  표연말(?-1498)의 본관은 신창이고 자는 소유,
호는 남계이다. 성종 3년(1472)에 생원시와 문과에 급제하고 동왕
17년에 중시에 장원급제하였다. 호당에 들어가서 사가독서(젊고
유능한 문신들을 뽑아 휴가를 주어 독서당에서 공부하게 하던 제도)하고
검열이 되었다. 벼슬은 홍문관, 예문관 제학에 이르렀다.
  연산군이 하루는 강가에 나가 놀다가 배를 타고 용산으로 내려가려
하였는데, 표연말이 노를 붙잡고 간하였다.
  "육지로 해서 가면 안전하고 배를 타고 가면 위태로우니, 안전한 길을
버리고 위태로운 길로 가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연산군이 노하여 사공을 시켜 노를 빼앗게 하니, 표연말이 물속에
뛰어들었다. 연산군이 사람을 시켜 그를 건져낸 후 물었다.
  "네가 무엇하러 강물에 들어갔느냐?"
  표연말이 대답하였다.
  "초희왕의 신하 굴원을 만나려고 뛰어든 것입니다"
  연산군이 노하여 말하였다.
  "네가 과연 굴원을 보았느냐?"
  표연말이 대답하였다.
  "그를 만나 보았는데, 굴원이 시를 주었습니다"
  "무슨 시냐?"

  나는 어두운 임금 만나 강물에 빠져 죽었지만
  너는 밝은 임금 만나 무슨 일로 왔느냐

  익살로 넌지시 간한 것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뒷날 함양의 전사에 물러가 살았는데, 연산군이 군현에
명하여 역마를 주어 불러 올리니, 표연말이 시를 읊었다.

  새로 지은 서당의 벽 마르지도 않았는데
  말발굽이 나를 재촉하여 서울로 올라가게 하네
  아이 때엔 벼슬하는 것이 좋다고만 말했는데
  늙어 가니 세상살이 어려움을 알겠네
  천리 밖의 고향은 천리 밖의 꿈이요
  한번의 비바람에 한번의 추위 닥치네
  어느 때에 산림 속에 조용히 앉아
  푸른 대나무, 오동나무 자세히 살펴보려나

  김종직의 문도라 하여 곤장을 맞고 경원에 유배되어 죽었다.

     "한 치의 땅도 더 늘리지 말라"하며 사들인 땅을 되돌려 주게 한 윤석보

  윤석보(?-1505)의 본관은 칠원이고, 자는 자임이다.
풍기군수로 있을 적에 아내와 자식들은 풍덕의 시골집에
그대로 살았는데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려 스스로 살아갈 방도가 없었다.
  부인 박씨가 대대로 전해 오던 비단옷을 팔아 한 마지기의 땅을 사들였다.
윤석보가 그 말을 듣고 급히 아내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 사들인
땅을 돌려주라고 하였다.
  "옛날 사람은 한 자, 한 치의 땅도 더 늘리지 않음으로써 그 임금을
저버리지 않은 이가 있었는데, 지금 내가 대부의 반열에 있으면
서 임금의 녹을 먹고 있는데 전지와 주택을 마련하도록 해서야 되겠소"
  부인이 할 수 없이 그 땅을 되돌려 주었다.
  벼슬은 직제학에 이르렀다.

     자라 여덟 마리를 살려주고 아들 여덟을 얻은 이원의 아버지

  이원의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낭옹, 호는 재사당이다.
성종 20년(1689)에 진사가 되고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
좌랑이 되었다. 사람됨이 당당하여 절의를 위해 죽을 만큼 지조가 있고,
나이 어린 임금도 맡겨 부탁할 만한 사람이었다.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 때 점필재 김종직의 시호를 문충으로 하자고 의논했다
하여 곤장을 맞고 원지로 유배되었다가 갑자사화 때에
처형 당했다. 추강 남효온이 늘 그를 칭찬하였다.
  "익재(이제현의 호)의 후손이고 취금헌(박팽년의 호)의
외손자로 두 집의 어짊이 이 한 사람에게 모였다"
  아버지 현감 공린이 박팽년의 딸에게 장가들어 혼례를 거행하던
날 밤 꿈에, 늙은 첨지가 나타나 말하였다.
  "내 자식 여덟이 바야흐로 삶겨 죽으려 하니, 원컨대 풀어 주어 삶기지
않게 해주소서"
  공린이 꿈에서 깨어나서 이상하게 여겨 그 아내에게 묻자, 아내가 대답하였다.
  "어떤 사람이 자라 여덟 마리를 주기에 내일 아침에 국을 끓이려 합니다"
  그는 아내와 함께 자라를 강물에 놓아주었다. 그 뒤에 과연 아들
여덟을 낳았는데, 별, 귀, 오, 타, 원, 경, 곤, 용으로
모두 재명이 있었다. 오는 진사가 되었고 귀는 원과 함께 문과에 급제하였다.

     조의제문으로 유배되고, 지난 일로 부관참시 당한 조위

  조위(1454-1503)의 본관은 창녕이고 자는 태허,
호는 매계이다. 성종 3년(1472)에 생원과 진사가 되었고, 성종 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추천으로 사국에 들어갔으며, 벼슬은 이조 참판에 이르렀다.
  연산군 4년(1498)에 하정사로 중국 연경에 가서 미처
돌아오기 전에 사화가 일어났다. 그가 일찍이 김종직의 문집을 편집하면서
'조의제문'을 사초에서 뽑아 내어 '점필재집'에 수록하였는데,
그 죄목으로 연산군이 노하여 조위가 압록강을 건너오거든
즉시 목베어 죽이라고 명하였다.
  조위가 요동에 이르러 그 말을 들었는데, 일행들이 창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조위의 아우 신이 요동 지방에 유명한 점쟁이가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서 길흉을 물어 보니, 점쟁이는 오직
다음과 같은 시 한 구절을 써 줄 뿐이었다.

  천충 물결 속에서 몸을 뛰쳐나오지만 바위 아래에서 사흘 밤을 묵으리

  조신이 돌아가 그 사실을 보고하니, 조위가 말하였다.
  "첫 구절은 화를 면한다는 뜻인 듯하나, 다음 구절은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겠다"
  압록강에 당도하자, 정승 이극균이 힘을 써 죽음은 면하고
의금부 도사가 잡아가 국문 하였다. 곤장을 맞고 의주에
유배되었다가 순천에 이배되고 연산군 9년에 유배지에서
병으로 죽자 고향인 금산에 장사지냈다.
  갑자사화 때에 전의 죄를 추록하여 관을 쪼개고 시체를
목베어 무덤 앞 바위 밑에 끌어내어 두고 사흘 동안이나 바깥에 드러내
놓게 되었다. 조신이 그제서야 그때의 점쟁이의 말이 징험이 있음을 알고
신기하게 여기며 탄식해 마지 않았다.

     영의정의 청을 거절한 올곧은 부사 정붕

  정붕(1469-1512)의 본관은 해주이고, 자는 운정,
호는 신당이다. 성종 17년(1486)에 진사가 되고 성종 2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의정부 사인과 사간원 사간을 역임하였다.
  무령군 유자광이 간교하고 탐욕한 짓을 하여 방자하였는데,
정붕이 고종사촌간이라 문안하는 예절만은 폐하지 않았으나,
여종을 그 집에 보낼 적에는 반드시 감노끈으로 그 팔을 단단히
묶어서 표시를 하여 보냈다가 돌아오면 그것을 풀어 주었다. 그것은 여종이
아픔을 느껴 급히 갔다가 빨리 돌아와서 그 집에 오래 머물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화 때에 곤장을 맞고 영덕에 유배되었다.
중종반정 후 교리에 임명되어 조정에 나아가다가 중도에
병을 핑계하고 고향에 돌아와서 누차 나라의 부름이 있어도 나가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묻자, 그가 대답하였다.
  "사뭇 마음을 놀라게 하는 무서운 일이 있으니, 나의 고향 마을에
물러 나와서 내 마음을 안정하느니만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전에 교리로
대궐로 나아가는데, 서각대를 띤 재상이 앞에 있었는데, 그는
기묘사화 주모자의 한 사람인 홍경주였다. 내가 갑자기 마음이
섬뜩해서 몸을 빼 물러 나왔다"
  영의정 성희안이 임금에게 아뢰어 정송부사에 제수 하였다.
성희안이 젊은 시절에 정붕과 서로 사이좋게 지냈으므로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묻고 이어서 잣과 꿀을 요구하자, 정붕이 회답하였다.
  "잣은 높은 산봉우리 맨 꼭대기에 있고 꿀은 민간의 벌통 안에 있으니,
수령된 사람이 어떻게 그것을 구하겠습니까"
  성희안이 부끄럽게 여기고 사과하였다.
  연산군 초기에 정붕이 어떤 사람에게 말하였다.
  "내가 문묘에 있는 신주의 위판이 절로 옮겨지는 꿈을 꾸었다"
  이 말대로 연산군이 황음하고 난잡하여 성균관을 잔치하는
장소로 삼고 신주의 위패를 깊은 산중의 절로 옮겨 놓아
제사가 오랫동안 끊겼다.
  강혼과 심순문이 모두 가까이하는 기생이 있었는데
정붕이 두 사람에게 경계하였다.
  "어서 그들을 멀리하여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강혼은 그 기생을 버렸고 심순문은 정붕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뒤에
두 기생이 궁중에 선발되어 들어갔는데, 심순문은 마침내 비명에 죽었다.
사람들이 그 선견지명에 감복하였다.

     평생 김종직을 미워하며 옛 원한을 앙갚음한 유자광

  유자광(1441-1468)의 본관은 영광이고, 자는 우복이다.
부윤 유규의 서자이다. 날쌔고 힘이 세며
어려서부터 무뢰한 행동을 잘 하여 유규가 그를 자식으로 여기지 않았다.
근본이 미천한데다가 방종하고 패악스러웠다.
  애초부터 갑사 무리에 속해 있었는데, 임금에게 상소를 하여
스스로를 천거하자 세조가 그 기개를 장하게 여겨 그를 발탁하여 병조
정랑으로 삼았다. 세조 14년(1468)에 문과에 장원하고, 또 남이가
역모한다고 고발한 공으로 훈작을 받아 무령군에 봉해져서 1품에 뛰어올랐다.
  천성이 음흉하고 잔악하였다. 한명회의 왕성한 활약을 시기하고,
또 성종이 간언 받아들이기를 좋아하는 것을 보고는 소를
올려 한명회가 권세를 휘두르는 정상을 고자질하였는데, 성종이 그것을
죄주지 않았다.
  뒤에 임사홍, 박효원 등과 현석규를 모함하려다가
모의가 실패하여 동래로 귀양갔다.
  한번은 함양에 놀러 갔다가 시를 지어 군수에게 부탁하여 나무판에
새겨 걸어 두었다. 그 뒤 김종직이 이 고을의 군수로 와서는 "자광이
어떤 놈이기에 감히 이 시를 판에 새겨 건단 말인가" 하고는 화를
내며 떼내어 불태워 버리니 유자광이 분히 여기며 이를 갈았다.
  그러나 감종직에 대한 임금의 총애가 융숭하던 때라 도리어 교분을
맺었고, 그가 죽자 만사를 지어 애도하면서 당나라 한유와
수나라 왕통에 견주었다.
  김일손이 김종직에게 수업했는데, 소를 올려 이극돈을
논박하였다. 사국(사관이 사초를 꾸미는 곳)을 열게 되자,
이극돈이 당상관이 되어 김일손의 사초를 발견하고는 유자광과
함께 노사신, 윤필상을 찾아가 밀고를 기약하고 밤낮으로
죄안을 짜내어 일망타진할 계획을 세웠다. 무릇 김종직의 글을
간직한 사람은 모두 자수하게 하여 빈청 앞에서 불태워 버리고,
각 도의 관청에 걸려 있는 현판을 모두 뜯어버리게 함으로써 함양
관청의 옛 원한을 보복하였다.
  중종반정 후, 유자광이 훈적에 기록되었다. 얼마 못 가 대간이
번갈아 소를 올려 탄핵하니 드디어 귀양을 갔는데, 두 눈이 전부
어두워진 지 수년만에 죽었다.

     마부의 옷을 입고 중종을 위기에서 건진 연산군

  영산군 전은 성종의 열 셋째 아들이다. 중종이 진성대군으로
있을 때에 연산군을 따라 곰 사냥을 했는데, 폐주 연산군이
진성대군에게 말하였다.
  "나는 홍인문으로부터 들어오고 너는 숭례문으로부터
들어오되, 만일 나보다 뒤에 들어오면 마땅히 군법으로 다스리겠다"
  중종이 크게 두려워하자 영산군이 비밀히 고하였다.
  "걱정하지 마시오. 내 말이 임금의 말보다 훨씬 빠른데, 내가 아니면
몰지 못합니다"
  그가 드디어 마부의 옷으로 바꾸어 입은 뒤 말고삐를 잡고 따라가니
말이 나는 듯이 달렸다. 대궐에 이른 지 조금 뒤에 연산군의 말이 이르러
진성대군이 마침내 죽음을 면하였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영산군과 말이 모두 중종을 위하여 때를 맞추어 나왔다"

     연산군에게 극력 간하다가 호랑이 밥이 된 내시 김처선

  김처선(?-1505)은 내시이다. 연산군은 그가 간할 적마다
노여웠으나 겉으로 나타내지는 않았다. 한번은 궁중에서 연산군이 처용
놀이를 하며 음란하게 춤을 추고 있었다. 김처선이 집안 식구에게 말하기를,
  "오늘 내가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고, 들어가서 거리낌없이 극력 간하였다.
  "늙은 놈이 네 임금을 섬겼고, 경서를 대강 통했지만, 고금을
통해 상감처럼 하신 분은 없습니다"
  연산군이 크게 노하여 활을 한껏 당겨 김처선의 갈빗대를 쏘아 맞추자,
김처선은 말하였다.
  "늙은 내시가 어찌 감히 죽음을 아끼겠습니까. 다만, 상감께서 오래도록
임금 노릇을 하실 수 없는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연산군은 화살 하나를 또 김처선에게 쏘아 맞히고 나서 그 다리를
잘라 버리고, 일어나 걸으라고 하였다. 김처선이 연산군을 쳐다보면서 말하였다.
  "상감은 다리가 잘려지고서도 다닐 수 있으십니까?"
  연산군이 그 혀를 잘라 버리고 친히 그 배를 갈라 창자를 끄집어내고
그 시체를 범에게 먹이로 주었다. 그리고 조정과 민간에 명령을 내려
'처선' 두 글자를 입에 담지 못하게 하였다.
  연산군 10년에 갑자정시에 충정공 권벌이
책문시험에 합격하였는데, 얼마 뒤에 시관이 시권 안에
'처'자가 있음을 깨닫고 아뢰어 삭제해 버렸다.
  그후 한 내시가 금강산에 놀러 갔다가 절에서 잤는데, 밤중에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깜짝 놀라 일어서자 한 늙은 내시가
고개를 들고 들어오는데, 자세히 보니 곧 김처선이었다. 놀랍고 두려워서
연유를 물었더니, 김처선이 말하였다.
  "내가 원통하게 죽은 뒤로부터 혼백이 죽지 아니하여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이 산에 붙어 노닐고 있다. 갑자사화와 무오사화 때의 제현이
모두 억울함을 풀었으나, 홀로 나에 대해서는 충심을 밝힐 수
없어 아직까지 신설되는 은혜를 입지 못하니, 그대는 이를 어여삐 여겨 주게"
  그 내시가 조정에 돌아와서 임금에게 아뢰어 중종 2년(1507)에 정려를
세워 표창하였다.

     홍귀달의 원혼을 따뜻한 술로 달래 보낸 송질

  송질(1454-1520)의 본관은 여산이고 자는 가중이다.
성종 8년(1477)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영상에 이르렀다.
  연산군 갑자사화 때 문광공 홍귀달이 사사의
명을 받았다. 이때 송질이 용천역에서 유숙하였는데, 밤에 갑자기
차가운 기운이 멀리서 달려와 말하였다.
  "가중은 자는가?"
  송질이 그 소리를 듣고 홍귀달임을 깨닫고 물었다.
  "겸선(홍귀달의 자)인가?"
  그렇다고 대답하며 홍귀달이 창문을 열고 들어와서 말하였다.
  "나는 이미 죽었는데 날씨는 춥고 시체는 얼었으니, 따뜻한 술이나
한잔 주게"
  송질이 곧 술을 따뜻하게 데워서 앞에 놓아두었더니, 훌쩍훌쩍 둘이
마시는 소리는 들리나 술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추운 기운이 조금 풀리었으니 매우 고맙네"
  이윽고 홍귀달이 작별하고 떠나갔다.


     3.
     왕도정치의 시작

  기묘사화가 일어나 채세영이 임금의 명을 받들어
조광조 등 당인들을 죄주는 전지를 쓸
적에, 채세영이 조광조 등의 처벌이 부당함을 극력
간하니, 승지 김근사가 채세영이 쥐고 있는 붓을
빼앗아 멋대로 쓰려고 하였다. 그러자 채세영은 그를
몸으로 막으며 큰 소리로 항언하였다.
"이것은 역사를 기술하는 붓이오. 다른 사람이 함부로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오"


     영욕이 번복되는 일생을 살았던 정광필

  정광필(1462-1538)의 본관은 동래이고, 자는 사훈, 호는 수천이다.
  성종 23년(1492)에 진사가 되고 문과에 급제하였다. 처음에 성균관
학유에 보임되고 녹사, 직장 등의 벼슬에 임명되었는데, 작은 벼슬도
하찮게 여기지 않고 더욱 부지런히 직무에 이바지하였다.
좌의정 이극균이 그를 한번 보고 재상의 재목으로 기대하였다.
이극균이 성종실록 총재관이 되자 정광필을 도청으로 발탁하여
편찬에 관한 일을 전적으로 위임하였다. 이로부터 출세의 길이 크게 열렸다.
  정광필이 탁영 김일손과 함께 호남, 영남 어사의 명을 받고 용인을
지나면서 같은 여관에서 묵게 되었다. 탁영이 시사를 강개히 비판하는데
과격한 말이 많으므로, 공이 누차 그를 말렸다.
  "그렇게 과격하게 말하면 안 되네"
  탁영이 분연히 말했다.
  "사훈이 이런 비열한 논의를 하다니. 어찌 갑자기 기개와 절조가
없는 썩은 선비가 되려는가"
  정광필이 암행하여 진도에 도착했는데, 벽파정에
이르러 짐짓 느긋하게 지체하며 해가 저물었음을 핑계하고 나룻가
여관에 유숙하였다. 나룻가 백성이 정광필이 비상한 인물임을 정탐해
알고 관아에 달려가서 이를 알렸다. 진도 군수는 각 담당 아전에게
명령하여 밤새도록 장부를 정리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그 이튿날 저녁 무렵에서야 천천히 진도군 관아에 들어간 정광필은
오직 공용의 숟갈 몇 벌을 조사하고 돌아왔을 뿐이었는데, 그 군수는
죄를 받아 파면되었다.
  어떤 사람이 암행어사가 조사를 천천히 시행한 까닭을 물으니,
정광필이 말했다.
  "진도군이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섬이고, 군수 또한 무관이므로
반드시 법규 이외에 횡령한 것이 많을 것이다. 만일 곧바로 관아에
들어가서 문부를 수색하여 잡아내면 저 군수의 죄가 반드시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니, 이는 내가 차마 하지 못할 바이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그 아량에 감복하였다.
  연산군 때에 소를 올려, 여색과 사냥이 너무 과도함을 간하였는데
기탄없이 범하는 말이 많았다. 연산군이 그를 불러들여 물었다.
  "네가 어찌 나를 망국의 임금에 비하느냐?"
  연산군이 역사에게 명하여 정광필의 머리를 꺼둘러 내려서 그를
치게 하고, 자신은 칼집에 든 칼을 가져다가 무릎 위에 얹어 놓고 명하였다.
  "내가 칼집에 든 칼을 다 뽑는 것을 보거든 곧 처형하도록 하라"
  이어서 천천히 칼을 뽑는데, 서릿발 같은 칼날이 사람을 비추어서
번쩍번쩍하며 거의 다 뽑혀 나오니 옆에서 왕을 모시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벌벌 떨었고, 역사는 바야흐로 도끼를 들고서 그 칼을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정광필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하는 것이
한치의 착오도 없었다. 연산군은 칼을 도로 집어넣으며 감탄하였다.
  "참으로 열사로다"
  연산군은 그를 마침내 아산으로 귀양보냈다. 이때 법령이 준엄하여
귀양간 사람은 자유롭게 행동할 수가 없었다. 정광필은 빗자루를
들고 관청의 문을 지키는 일을 하면서 싫어하거나 괴로워하는 빛이 없었다.
  중종 즉위년(1506)에 함경도 관찰사로서 찬성이 되었다가 얼마
안 가서 정승이 되었다. 동왕 14년 겨울에 공이 북문의 변고(기묘사화)를
혼자 당하여, 벽력 같은 임금의 위엄을 범하여 가면서 형벌을
완화하도록 간청하였다. 그 때문에 사림이 어육이 되는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기묘사화의 하루 전 새벽에 남곤이 해진 갓과 거친 베옷을 착용하고
발에는 짚신을 신고 정광필의 집에 와서 문지기를 불러 말하였다.
  "급히 들어가서 손이 왔다고 말하여라"
  문지기가 남곤임을 알고 들어와서 고하였다.
  "손이 문 앞에 당도하였기에 그 얼굴을 보니 남 판서입니다.
그런데 의복과 갓이 초라하여 천인처럼 보입니다"
  정광필이 나가서 보니 과연 남곤이었다.
  "공이 어찌하여 이런 모습이오?"
  이상히 여긴 정광필이 묻자, 남곤이 그런 차림을 하고 온 까닭을 다
말하였다.
  "이 신진사류들을 만일 한 사람이라도 남겨 두면 그 해독이
한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 주상께서 반드시 공을 불러 의논할 것이니,
공은 주상의 뜻을 힘써 따라서 그들을 남김없이 제거하도록 하십시오.
그런 뒤에야 국가의 형세가 안정될 것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가 있을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위협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달래기도 하였다. 정광필은
정색을 하며 말하였다.
  "그대가 재상으로 천인의 복장을 하고 거리를 지나서 왔으니, 아주
놀랄 만한 일이오. 또한 사림을 해치기를 도모하는 것은 본디 내 의사가
아닌데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는 거요"
  남곤이 크게 노하여 소매를 떨치고 일어났다. 그날 밤 2고에 임금이
신무문을 열고 여러 재신들을 불러들였다. 정광필은
수상으로 부름을 받고 궁궐에 들어가 왕을 대할 적에 눈물을
흘리며 극진히 간하였다.
  "젊은 선비들이 시의를 알지 못하고 망령되게 옛일을 인용하여
오늘날에 시행하려 하였을 뿐이지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너그러이
용서해 주소서"
  말할 적마다 눈물이 흘러 옷자락을 적시니, 임금이 벌떡 일어나 내전으로
들어갔다. 정광필은 왕을 따라가서 어의 자락을 끌어당기고
머리를 조아렸는데, 계속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공은 또 남곤 등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공들이 성주를 보필하면서 어찌 유자광의 일을 행하려 하는가"
  정광필은 정승 신용개와 친밀한 금란지교였다. 주상이 정광필에게 물었다.
  "경에게 벗이 있소?"
  정광필이 대답하였다.
  "신은 다른 벗이 없고 오직 신용개 한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후일 신용개가 왕에게 들어가 대할 적에 임금이 또 그에게 물으니
신용개가 대답하였다.
  "정광필이 곧 신의 벗입니다"
  "두 사람은 지기지우라 할 만하다"
  기묘사화 때에는 신용개가 이미 죽고 없었으므로 정광필이 탄식하였다.
  "만일 신공이 있었으면 반드시 이 화를 진정할 수 있었을 것인데, 그가
일찍 죽어서 나로 하여금 혼자 담당하게 하였다"
  당초 현량과를 설치하려 할 때에 정광필이 홀로 불가하다고 하였다.
  "현량과의 명목이 좋기는 하나, 삼대(하, 은, 주) 이후에는 진실로
시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종이 듣지 않고 시행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온 조정이 그 현량과 파하기를 청하되, 정광필이 홀로
파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아뢰자 임금이 물었다.
  "경의 소견이 매양 시의와 서로 반대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신이 당초에 굳이 불가하다고 말하였는데, 지금 이미 현량과를
설치하여 홍패(대과의 합격증서)를 주고 벼슬을 제수하였으니 어찌
파할 수 있겠습니까. 과거를 설치하고 파하는 것은 국가의 정령이니
이처럼 전도되게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임금은 끝내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어 정광필은 정승의
직에서 파면되었다.
  중종 22년(1527) 남곤이 죽자, 다시 정승이 되었다. 김안로가
정권을 잡자, 정광필을 죄를 얽어서 죽이려는 속셈으로, "정광필이
일찍이 희릉총호사(희릉은 인종의 어머니 장경왕후의 능임)가
되어 선후(장경왕후)를 좋지 못한 곳에 장사지냈다"고 얽어
죄를 만들어 중형에 처하기를 청하자 임금이 김해로 귀양 보내도록 명했다.
  정광필이 이보다 앞서 이미 벌을 받아 파직되어 회덕현에
돌아가 있었는데, 뜻밖에 의금부 도사가 급히 달려왔다. 집안 식구들이
모두 놀라 눈물을 흘렸지만, 정광필은 바야흐로 손님과 육박(쌍륙) 놀이를
하면서 호로를 그치지 않았다. 육박놀이를 마치자, 유배의 명을
반포하니,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성상의 은혜가 지극하십니다"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자 코고는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이튿날 행장을
꾸려 길을 떠날 적에도 말이나 얼굴빛에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다.
  정광필이 젊을 적에 꿈에 시를 지었다.

  비방이 산더미처럼 쌓였으되 마침내 용서받았으니
  이승에서는 임금 은혜 보답할 길 없구나
  높은 재 열 번 넘으니 두 줄기 눈물이요
  큰 강 세 번 건너니 홀로 혼이 끊어지네
  아득히 높은 산에는 검은 구름 피어오르고
  망망한 큰 들판에는 항아리 쏟듯 비가 오네
  저물녘에 바닷가 동쪽 성 밖에 투숙하니
  초가집은 쓸쓸하고 대나무로 문 만들었네

  비가 오는 가운데 유배지에 당도해 보니 그 정경들이 모두 꿈에 지은
시의 내용과 같았다.
  유배지에서는 화가 조석 사이에 박두해 있어 자제들은 다 공의 배소에
문안을 오고 오직 부인이 집에 있어 울부짖으며 여종을 시켜
원계채에게 소식을 탐문하게 하였다. 원계채는 곧 연혼한
처지이다. 원계채는 알아볼 방법이 없어서 점쟁이 김효명을 불러 점을 쳤다.
  "아직 10여 년의 복록이 있으니 조정 의논이 준엄하기는 하나,
마침내는 반드시 무사할 것이다"
  점쟁이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어떤 사람이 와서 고하였다.
  "처벌을 주장하는 대간의 논의가 이미 오래되었다"
  그 여종이 점쟁이를 붙들고 가슴을 치며 부르짖었다.
  "일이 이미 이와 같은데 네 말은 무슨 뜻인가?"
  "나의 술법대로 추산해 보면 이런 이치는 만에 하나도 없는데, 벌써
이렇게 되었으니, 난달 어찌하겠는가"
  감효명은 재빨리 달아났다. 조금 뒤에 어떤 사람이 와서 고하였다.
  "대간의 계청이 윤허를 받았는데, 대간이 이미 흩어진 뒤에
'죽음에서 감형하라'는 전교가 특별히 내렸습니다"
  중종 32년(1537)에 김안로가 세력을 잃자 임금이 공을 영중
추부사로 불렀다. 하인이 저보(관보)를 가지고 급히
달려 밤중에 배소에 이르렀는데, 발이 부르트고 입이 말라서 쓰러진 채
말을 하지 못하였다. 자제들이 두려워하며 주머니를 뒤져서 글을 보니
기쁜 소식이었다.
  곧바로 아뢰니, 공은 다만 "그러냐?"라고 할 뿐, 그대로 코를 골며
달게 잤다. 이튿날 아침에 그 글을 보고 도성으로 돌아오니, 도성 사람이
이마에 손을 얹고 반기며 기대하였다.
  정광필은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어, 식사할 적마다 그 남은 밥상을
오직 손자 유길과 증손자 지연에게만 주어 먹게 하고
다른 자제들은 끼지 못하게 하였다. 가까운 친척 조카인 이헌국이
문안을 드리자, 공이 바야흐로 식사를 마치며 자세히 살펴보고
그에게 거두어 주었다. 여종이 눈짓을 하며 말했다.
  "이분도 정승이 될 것인가"
  과연 뒤에 그도 정승의 지위에 이르렀다.

     "젊어서 사직을 기울게 하였다"라고 시문을 고쳐 단 심정

  심정(1471-1531)의 본관은 풍산이고, 자는 정지,
호는 소요당이다. 진사시에 합격하고 연산군 8년(1502)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중종반정 때에 정국공신 3등에 책록되어
화산부원군에 봉해졌으며, 대배하여 좌상에 이르렀다.
  기묘사화(1519) 뒤에 소요정에 물러나 있을 적에 시를 지어
판에 새겨 정자 문미에 걸었다. 거기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젊어서 사직을 붙들었고
  백수에 강호에 누웠도다

  어느 날 밤 꿈에, 젊은 협객이 문을 열고 들어와서 심정의
머리카락을 꺼두르고 죄목을 열거하며 꾸짖었다.
  "네가 사화를 일으켜 착한 선비들을 거의 다 죽여서 종묘 사직이
쓰러질 뻔하였는데, 네가 어찌 감히 '사직을 붙들었다'느니 '강호에
누웠다'는 등의 말로 시를 지어 건단 말인가. 네가 만일 '부'자와
'와'자를 빨리 고치지 않으면 내가 네 목을 벨 것이다"
  심정이 엎드려 사죄하면서 말하였다.
  "'부'자는 '위태롭다'는 '위'자로, '와'자는 '엎드려 숨어 있다'는
'칩'자로 고치는 것이 어떻겠소?"
  젊은 협객은 안 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무슨 글자로 고쳐야 하는지 그것을 가르쳐 주기 바라오"
  "'부'자는 '기울어져 망하다'는 '경'자로 고치고, '와'자는
'더럽히다'는 '오'자로 고치라"
  "명령대로 따르겠소"
  심정은 협객이 말한 그대로 고쳐 놓았다.

  심정의 5세손 노가 지은 '소요정감고시'의 한 연구에

  옛 한은 바닷물도 씻기 어렵고
  새 시름은 술로 풀려 한다

  하였으니, 대개 선조(심정을 말함)의 허물을 생각하면서 한탄의
뜻을 담은 것이다.

     꿈을 빙자하여 형의 재산을 빼앗은 심의

  심의(1475-?)는 좌상 심정의 아우이다. 자는 의지이고 호는
대관재이며, 문장에 능하였다.
  중종 2년(1507)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벼슬은
이조 좌랑에 그쳤다.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바보로 자처하며 자기 재능을 숨기고 삶으로써
화를 면하였다. 한번은 형 심정의 집에 이르러 쥐구멍을 보고
손가락질하며 형에게 말하였다.
  "형이 훗날 이 쥐구멍으로 나가려 하여도 잘 안 될 것이니, 오늘
시험삼아 나가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심정이 대답하지 않았다. 뒤에 심정이 복성군 옥사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하자, 심의가 와서 울며 말하였다.
  "쥐구멍이 저기 있는데 형은 어디로 갔습니까"
  심정이 비록 남을 시기하고 해치기는 했으나, 형제간의 우애는 천성으로
지극하였다. 심정이 한번은 남곤과 조그마한 정자에서 무슨
일을 상의하고 있는데, 심의가 창문을 밀어젖히며 말하였다.
  "두 소인이로다"
  남곤이 크게 노하여 얼굴빛이 변하였으나 심정은 태연히 말하였다.
  "내 아우가 본디 천치이니, 공은 용서하시오"
  심의는 형이 지위가 높고 권세가 성대하여 전지와 동산을 많이 지닌
것을 보고 마음으로 매우 좋지 않게 여겨 꾀를 내어 속임수로 뺏으려
하였다. 하루는 심의가 새벽에 일어나서 울며 말하였다.
  "꿈에 부모님을 뵈었는데,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작은
아들이어서 아무 데에 있는 전지와 아무 종을 너에게 주려 하였는데 미처
조치하지 못하고 죽었으니 이 일이 가슴에 맺혔구나' 하시므로 제가
돌아가신 아버님 때문에 슬피 웁니다"
  "부모님이 너를 생각함이 지극하셨는데, 내가 어찌 이 재산들을 아껴
지하의 부모님 영혼을 위로하지 않겠느냐"
  심정이 크게 감동하여 즉석에서 문서를 만들어 심의에게 주었다.
심정이 뒤에 심의에게 속임을 당한 것을 알고 심의의 뜻을 시험하고자 하여
또한 새벽에 일어나서 거짓 슬퍼하는 체하면서 말하였다.
  "꿈에 아버님께서 말씀하기를 '전지와 집, 노비를 너에게 모두 부쳐 주려
하였는데, 미처 조치하지 못하고 세상을 마쳤다' 하시니, 내가
이 때문에 슬피 운다"
  "봄꿈을 어찌 다 믿을 수 있겠습니까"
  심의가 말하자 심정은 크게 웃을 따름이었다.
  심의가 서경덕, 성세창과 벗이 되었는데, 성세창은
그의 이웃에 살고 있었다. 심의가 그의 정원에서 세 필의 명주를 볕에
바래는 것을 보고 몰래 가져가자, 성세창의 여종이 소리를 쳤다.
  "심 좌랑이 명주를 다 가져갔습니다"
  성세창의 부인이 재빨리 다른 명주 세 필을 보내면서 말하였다.
  "그것은 웃옷을 만들려 하던 것이니, 이것으로 바꿉시다"
  "이미 웃옷감을 얻고 또 속옷감마저 얻었으니, 부인이 내 마음을 압니다"
  심의가 짐짓 사례하고, 대여섯 몫으로 갈라 길가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중국 사신을 경탄케 한 시단의 노장 이행

  이행(1478-1534)의 본관은 덕수이고, 자는 택지,
호는 용재이다. 연산군 10년(1504)에 문과에 급제하고 중종 26년(1530)에
좌상에 이르렀다. 이행은 신장이 10척이고 얼굴이
네모지고 얼굴에 수염이 더부룩하였는데 시문에 뛰어났다. 남산
아래 청학동에 집을 짓고 자호를 '청학도인'이라 하였다.
복숭아나무와 버드나무를 심어 놓고 퇴청하고 나서는 지팡이를
짚고 거니는데 그 쓸쓸한 모습이 마치 시골 늙은이와도 같았다.
  어느 날 의정부의 아전인 녹사가 어둠을 이용하여 기별을 전할
적에 어떤 사람 하나가 짚신을 신고 허름한 옷차림으로 어린 동자를
거느리고 청학동 어귀에서 나오므로, 말을 타고 지나면서 물었다.
  "정승이 있는가?"
  "기별을 전하려는 것이냐? 내가 여기에 왔노라"
  녹사는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말에서 떨어졌다.
  이행이 한번은 중국 사신을 영접하는 원접사가 되었다. 중국
사신이 이행의 못생긴 모습을 보고 예를 잘 갖추지 않다가 그가 화답한
시를 보고서야 비로소 깊이 감복하였다. 그가 자기 부사에게
편지를 써서 주며 당부하였다.
  "이 사람은 시단의 노장이니, 절대로 가벼이 시를 짓지 말라"
  김안로가 모함하여 함종으로 귀양보내어 유배지에서
죽으니, 나이 57세였다. 시호는 문헌이다.

     고양이 덕분에 죽음을 면한 장순손

  장순손(1457-1534)의 본관은 인동이고 자는 자호이다.
성종 16년(1485)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하였다.
  젊을 때에 얼굴 모양이 돼지 머리와 닮아서 동류들이 그를 '저두'라고
놀렸다. 연산군이 성주 기생을 귀여워하였는데, 하루는
종묘 제사를 마치고, 궁중에 음복을 올릴 적에 돼지 머리를 바쳤다.
성주 기생이 보고 피식 웃자, 연산군이 그 웃는 까닭을 물었다.
  "성주에 사는 장순손은 얼굴 모양이 돼지 머리 같아서 사람들이 모두
장저두라고 부릅니다. 그 생각이 나서 웃었던 것입니다"
  연산군은 벌컥 화를 냈다.
  "장순손은 반드시 네 사랑하는 지아비였을 것이다. 속히 '저두(장순손)'를
목베어 바쳐라"
  장순손은 그때 벼슬에서 물러나 집에서 쉬고 있었다. 잡아오라는
임금의 명을 받아 길을 떠나 함창 공검지 아래에 이르자
갈림길에서 한 고양이가 길 앞을 뛰어넘었다. 장순손이 자기를 잡아가는
의금부 도사에게 청하였다.
  "내가 평소 과거에 응시하러 갈 적에 고양이가 길 앞을 건너가면 반드시
과거시험에 합격하였소. 오늘 또 갈림길에서 고양이를 보았는데,
이 길로 해서 가면 매우 빠른 길이니 이 길로 가겠소"
  도사가 그 청을 들어주었다.
  이때 선전관이 또 연산군의 명령을 받들고 저두 장순손의
목베는 것을 재촉하기 위한 일로 내려왔는데, 선전관은 큰길로 내려오고,
도사와 장순손은 갈림길로 가서 상주에 이르렀다. 도사가 상주에서
비밀히 중종반정 소식을 듣고 천천히 길을 가서 조령에
이르렀을 때, 이미 중종이 즉위하였다.
  장순손은 죽음을 면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병조 판서까지 되었다. 이후,
감안로와 같은 동아리가 되어 대간의 탄핵을 받아 벼슬이 삭탈되었다가
얼마 뒤에 다시 우상에 등용되어 영상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숙이다.

     신인에게 시를 받아 장원급제한 김안로

  김안로(1481-1537)의 본관은 연안이고 자는 이숙,
호는 보락당이다. 연산군 7년(1501)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고 중종 원년(1506)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젊은 시절에 관동에 유람을 갔었는데, 어떤 신인이 나타나 시를 읊조렸다.

  봄은 우임금 구주 산천 밖에 무르녹고
  음악은 순임금 조정 금수 사이에 연주된다

  신인은 이어서 말하였다.
  "이것은 곧 네가 후일 출세할 길을 얻는다는 말이다"
  이듬해에 정시에 들어가니, 연산군이 율시 여섯 편을
내어 시험을 치렀는데 '봄날에 이원의 제자들이 침향정 가에서 악보를
본다'란 제목으로, 압운은 '간'자였다"
  김안로는 그 신인에게서 들은 시구가 합치된다고 생각하고 곧 그 글귀를
사용하여 써서 제출하였다. 고시관인 강혼이 대단히 칭찬하고
그를 뽑아 장원으로 삼았다.
  모재 김안국이 시험관으로 참여하는 참시관이 되어 그 글을 보고 말하였다.
  "이 시구는 귀신의 말이지 사람이 지은 시가 아니다"
  김안로에게 그 까닭을 묻자 그는 사실대로 설명했다. 사람들은 김안국의
시를 보는 눈에 감탄하였다.
  김안로가 소싯적에 중국 점쟁이에게 운명을 점쳐 보았다. 그 점쟁이가
이렇게 말했다.
  "아주 귀하게 되기는 하나 다만 갈자 지명에서 죽게 될 것이다"
  김안로는 중종 32년(1537)에 문정왕후의 폐위를 도모하다가
배척을 받아 진위현 갈현에 이르러 사사되었으니 과연 그 말이 맞았다.

     산골짜기 노파와 농부들까지도 우러러보았던 조광조

  조광조(1482-1519)의 본관은 한양이고, 자는 효직, 호는 정암이다.
  17세에 아버지 원강이 어천 찰방이 되었는데, 이때
한훤당 김굉필이 희천에 귀양와 있었다. 조광조가 그를
좇아 노닐면서 학문하는 큰 방법을 터득하였다. 김굉필이 햇볕에
꿩을 말려 제사에 쓰려고 뜰에 두었는데, 지키던 자의 부주의로
고양이에게 도둑을 맞고 말았다. 김굉필이 몹시 화를 내며 지키던 자를
꾸짖자 옆에 있던 조광조가 말하였다.
  "조상을 받드는 성의는 비록 간절하시나, 군자는 말씨와 기색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김굉필이 조광조의 손을 잡고 사과하였다.
  "나도 몹시 성을 내고는 곧바로 뉘우쳤는데, 네 말이 또 이러하니 나도
모르게 부끄럽고 감복되는구나. 그리고 네가 나의 스승이요 내가 네
스승이 아니다"
  그 뒤 중종 5년(1510)에 진사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하였다.
중종 14년에 대사헌이 되어 반열에 나아가는데 백관들이
그 위의와 풍채를 바라보고는 모두 감탄하여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대사헌에 임명된 지 사흘 만에 사람들이 예법을 지켜 남자와
여자가 길을 달리하여 다니었으니, 온 세상이 그를 우러르고 복종함이
이와 같았다.
  그해 10월에 기묘사화가 일어나 능주에 유배되고 12월 20일에 사사되었다.
  그가 38세로 목숨이 끊어질 때에 절명시를 지었다.

  나라 근심을 내 집처럼 근심하고
  임금을 아버지처럼 사랑했네
  하늘의 해가 이 충심을 비추어
  환하게 아래의 땅 굽어보리

  정암이 사사될 적에 그의 아우 숭조가 급히 달려가서 길옆에서
우는데 어떤 노파가 산골짜기로부터 슬피 울며 와서 물었다.
  "대인은 어찌하여 우십니까?"
  "나는 형님을 잃었으므로 울지만 노파는 어찌하여 우는고"
  "조정에서 조광조를 죽였다 하니, 현인이 죽었으므로 백성들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웁니다"
  황해도 강령군에서 세 사람이 들에서 같이 김을 매다가, 한 사람이 말했다.
  "가뭄이 심하여 금년에는 곡식이 제대로 익지 않을 것이다. 근년에
조광조가 아주 청렴 간명하여 각도의 주군이 소환 당하는 편지가 전혀
어졌는데, 이 때문에 고을에 고함치고 호통치는 아전이 아주 없어졌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조광조가 유배되었다가 이미 죽었다 하니, 가뭄이
드는 이 천재는 아마도 조광조 같은 현인이 죽은 연유에서 생기는 듯하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서울에 올라와서 이 말을 전하니, 곧바로 그 사람을
잡아와서 극형을 가해 죽였다. 같이 김매던 사람은 '고발하지 않은 죄'를
받았으며, 고발한 사람에게는 무명을 상으로 내렸다.
  영상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정이며 문묘에 종사되었다.

     "사람과 귀신의 길이 다르다"며 귀신을 물리친 성수침

  성수침(1493-1564)의 본관은 창녕이고, 자는 중옥, 호는 청송이다.
  풍채와 자품이 화기롭고 순수하며 학문과 행실이 순진하고 모든 것을
두루 갖추었다. 대신이 세속을 떠나 고상하게 사는 그의 청덕을
천거하여 여러 차례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사대부들이 당세의 운둔한 현인인 일민(학문과 덕행이 있으면서도 세상에
나타나지 않고 파묻혀 사는 사람)을 논할 적에 성수침을 으뜸으로 삼았다.
벼슬은 적성현감에 이르렀다.
  백악산 밑에 살 적에 황혼 무렵 혼자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어떤 물체가 집의 한쪽 구석에 와 서 있었다. 그 물체는 몸에 검은 무명
이불을 둘렀는데 그 길이가 발꿈치에 이르고, 풀어헤친 머리카락이 땅에
드리워서 바람에 따라 들쭉날쭉하고, 어지러운 머리카락 사이에 옥고리
같은 두 눈이 번쩍번쩍 빛나 두려움을 느끼게 하였다. 성수침이 물었다.
  "너는 누구냐?"
  묵묵히 있으며 대답하지 않자, 성수침이 다시 말하였다.
  "앞으로 오너라"
  마침내 그 물체가 창 앞에 가까이 왔는데,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네가 만일 도적이라면 우리 집에는 물건이 없고 네가 만일 귀신이라면
사람과 귀신의 길이 다르니 속히 가거라"
  그가 말을 마치자, 그 물체가 바람소리를 일으키며 가 버렸다.
  72세에 죽으니 좌상에 추증하였다. 시호는 문정이다.

     부서진 배에다 선량한 선비를 비유한 최수성

  최수성(1487-1521)의 본관은 강릉이고 자는 가진, 호는
원정이다. 19세에 속세를 떠나 멀리 유람하며 좋은 산수를 두루
구경하였다. 가는 곳마다 소나무를 켜서 거문고를 만들어 타다가
떠날 때에는 이를 부숴 버렸다. 시풍은 속세를 떠난 높은 격조가 있었으며,
또 글씨와 그림에 능하였으니 참으로 절대기재라 할 수 있다.
  김식이 조광조, 김정, 김구와 모여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최수성이 갑자기 밖에서 들어와서 오랫동안 읍을 하더니 서둘러 말했다.
  "노천(김식의 자)은 나에게 술 한잔 주게"
  김식이 그에게 술을 주었더니 쭉 들이켜고 나서는,
  "내가 부서진 배를 탔다가 하마터면 물에 빠질 뻔하였네. 가슴이 매우
두근거렸는데 지금 술을 마시고 나니 속이 확 풀리는 듯하군" 하고
인사도 없이 가 버렸다.
  좌중의 사람들이 모두 그를 괴이하게 여기자, 조광조가 말하였다.
  "부서진 배의 비유는 우리들을 가리킨 것이네. 다만 자네들이 몰랐던
것뿐이네"
  남곤이 산수도 한 폭을 김정에게 보내어 화제를 요청하였다.
  최수성이 마침 김정을 방문했다가 그것을 보고 그 산수도 위에 글을 썼다.

  지는 해는 서산으로 내려오고
  외로운 연기는 먼 나무에서 나오네
  은사의 차림 복건 쓴 서너 사람
  망천장의 주인은 누구이냐

  남곤이 그 화제를 보고 원한을 품었다.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최수성이 시국에 대해 분개하여 시를 지어 숙부
최세절에게 올렸다.

  해 저문 창강 위에
  날은 차고 물결은 절로 이네
  외로운 배 일찌감치 대어야지
  밤이 되면 풍랑 응당 높아지리

  중종 16년(1521)에 승지 최세절이 동료에게 말했다.
  "조카 수성이 나에게 벼슬에서 물러나라고 권하는데 떠나가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최세절이 그 시를 외어 전하였는데, 최수성을 꺼리는 자가 이 사실을
남곤에게 말하였다. 남곤이 안처겸 옥사의 추관이 되어 임금에게
최수성도 아울러 국문할 것을 청하였다. 국청에 나온 최수성은 떳떳하게 말했다.
  "사림이 불화하여 조정에 화가 생길까 두려웠으므로 숙부에게
벼슬을 버리고 은퇴하게 하였을 뿐입니다"
  남곤이 마침내 극형에 처해졌다. 평소에 친하게 놀던 벗 이달형
등이 발로 최수성의 시체를 거두어 싸서 빈 골짜기에 임시로 장사지냈다.
  영상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정이다.

     남이 보내 오는 물건을 꼼꼼히 기록한 김안국

  김안국(1478-1543)의 본관은 의성이고, 자는 국경, 호는
모재이다. 연산군 7년(1501)에 진사시에 1등, 생원시에
2등으로 합격하고, 9년(1503)에 문과에 급제했으며 중종 2년(1507)에
중시에 급제하였다.
  중종 26년(1531)에 일본 사신 붕중이 왔는데, 김안국이 선위사로서
영접을 주관하였다.
  "노생이 중국에 두 번 조회하러 갔고, 유구에 두 번 사신으로
갔으며 귀국에 세 번 와서 외국 사람을 많이 만났으나 공과 같은
사람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붕중은 탄복해 마지않았으며, 귀국할 때에는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아우 정국과 함께 유림의 종장으로서 김안국은
이천에 물러나 살고, 김정국은 고양에 물러나 살고 있었다.
하루는 김정국이 이천 형의 집에 가니, 마을 사람들이 풋콩을 삶아
오기도 하고 혹은 오이를 따 가지고 와서 김안국에게 바쳤는데, 김안국은
그것을 모두 또박또박 책에 기록하였다.
  김정국이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형은 이런 물건들을 무엇에 쓰려고 받으며, 어찌하여 그것을 책에
기록합니까"
  "사람들이 성의로 보내 오는데 내가 어찌 그것을 물리치겠으며, 책에
기록해 두지 않으면 내 마음에서 곧 잊어버리게 된다. 어찌 남의
은혜로운 뜻을 버리겠는가"
  시골에 살 적에 김정국은 간소하고 담박하여 나물과 잡곡밥도 이어
가지 못하였으나, 김안국은 전원을 장만하여 양곡을 쌓아 두고,
나누어주었다가 또 거두어들이며, 고을의 모임에는 꼭 참여하였다.
  김안국이 전라감사가 되었을 적에 마침 전주에 있는 경기전을
중창하는 날을 당하여 경기전 대문 밖 조금 가까운 곳에 별도로
별당 두세 칸을 건축하였다.
  인조 1년(1623) 계해반정 뒤에 정승 원두표가 정사공신으로
방백이 되어 경기전에 이르러 태조의 영정을
배알하였다. 이때 경기전 참봉이 기생을 불러 이 별당에서 같이 자고
있었다. 원두표는 그 별당을 철거해 버렸다. 그 뒤 나이 젊은 경기전
참봉들이 집을 떠나 객지 생활을 할 적에 무료함을 견디지 못하였다. 그러나
기생을 묵게 할 곳이 없어서 혹 재실에 몰래 끌어들여 같이 자기도 하였다.
  김안국과 원두표 두 사람의 일처리에 대하여 잘하고 잘못한 것에 대해서
반드시 분별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벼슬은 좌찬성에 이르고 시호는 문경이다. 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신인의 현몽에 따라 소를 도로 거둔 김정국

  김정국(1485-1514)의 자는 국필, 호는 사재이며,
김안국의 아우이다. 중종 2년(1507)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중종 4년에는 문과에 장원하였다.
  황해감사로 있을 적에 남곤, 심정이 간사하게 사람을 모함한
정상과 정암 조광조 등 여러 현인이 자기 일신을 버리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충성한 사실을 극진히 진술한 수천 자에 달하는
소를 작성하였다. 마침 막료인 도사 남씨가 남곤의
일족으로서 사간원 헌납에 발탁되어 상경하게 되었다.
김정국이 그 소를 남씨에게 주면서 말했다.
  "그대가 서울에 당도하거든, 이 소를 올리게"
  남씨 또한 거절하지 않고 소를 가지고 길을 떠났다. 그런데 김정국의
꿈에 신인이 나타나 말했다.
  "공이 만일 이 소를 올리면 사림이 어육이 될 것이니,
지금 사람을 급히 뒤쫓아 보내면 도로 찾아올 수 있을 것이오"
  김정국이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나 곧바로 역졸을 보내어 도로
찾아오게 하였더니, 역졸이 벽제관에 이르러 남씨를 만나 도로 찾아 왔다.
  남씨가 서울에 왔을 적에 어떤 사람이 그 소의 내용에 대하여 묻자,
남씨는 "그런 사실이 없다"고 대답하고, 다시는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그를 뜻이 높은 이로 여겼다. 남씨는 뒤에 벼슬이
판서에까지 이르렀다.
  모재 김안국은 매양 일렀다.
  "이 소가 만일 올라갔으면 사람들이 어찌 내가 몰랐다고 말하겠는가.
우리 형제는 마땅히 죽었을 것이요, 이밖에 죽은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를 일이다"
  그때 모재는 파직만 되었을 뿐이고, 사재는 벼슬이 삭탈되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사재가 모재보다 중한 죄를 받은 것은, 그 소가 궁내에 들어가지는
않았으나, 사람들이 그가 소를 올리려 한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말했다.
  "남지정(남곤의 호)이 주청사로서 중국에 갔다가 돌아올 적에
김정국이 황해감사로 있으면서 황주 초지정에 나가 만나 보고는
'사류를 사랑하지 않는다'라고 말함으로써
그의 노여움을 건드려 죄가 가중되었을 것이다"

     사필은 아무나 잡는 게 아니라고 항변한 채세영

  채세영(1490-?)의 본관은 평강이고, 자는 영지,
호는 임진당이다. 중종 2년(1510)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동왕 1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에 보임되고 사관을 겸하였다.
  기묘사화가 일어나 채세영이 임금의 명을 받들어 조광조 등 당인들을
죄주는 전지를 쓸 적에, 채세영이 조광조 등의 처벌이
부당함을 극력 간하려 하자, 승지 김근사가 채세영이 쥐고
있는 붓을 빼앗아 멋대로 쓰려고 하였다. 채세영은 그를 몸으로 막으며
큰소리로 항언하였다.
  "이것은 역사를 기술하는 붓이오. 다른 사람이 함부로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오"
  채세영의 말과 기운이 곧아서, 좌우가 있는 조신들이 숙연하였다. 벼슬을
좌참찬에 이르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잘린 여자 속옷을 항상 옆에 두고 후손을 경계한 박영

  박영(1471-1540)의 본관은 밀양이고, 자는 자실,
호는 송당이다. 아버지는 수종인데, 벼슬은 이조 참판에
이르렀다. 양녕대군의 딸에게 장가들어 박영을 낳았다.
박영은 재주와 도량이 넓고 컸다. 성종 22년(1491)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어느 날 그가 궐내에 들어가 숙직을 하다가 탄식하였다.
  "말을 달리고 칼을 시험하는 것은 한 용부의 일일 뿐이다. 사람으로서
학문을 하지 않으면 어찌 군자가 되겠는가"
  그는 드디어 결단을 내려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다. 낙동강 가에 집을
짓고 신당 정붕에게 수학하였는데, 마음을 가라앉혀 깊이
생각하고 몸소 실천하며 두문불출한 지 수년이었다.
  어느 날 신당이 손을 들어 냉산을 가리키며 박영에게 물었다.
  "저 산 밖은 어떠할까?"
  "외면이 바로 전면이니 저것이나 이것이나 매한가지일 것입니다"
  신당이 웃으며 말하였다.
  "오늘에야 그대가 책을 읽은 공효가 있음을 알겠도다"
  그대로 수개월 동안 머무르면서 부지런히 강구하였다.
  한번은 김해부사로 있을 적에 이웃집 여자의 곡소리를 들었다.
급히 형리를 시켜 데려와 "어찌하여 우느냐?"고 물으니,
그 여자가 대답하였다.
  "우리 남편이 아무 병도 없이 갑자기 죽었습니다"
  박영이 사람을 시켜 그 남편의 시체를 메어 오게 하고 힘센 군교를
시켜 시체를 반듯하게 누인 다음, 손에 힘을 주어 시체를 가슴에서부터
아랫배까지 누르게 했더니, 드디어 배꼽 속으로부터 손가락 만한
대나무 가지가 뚫고 나왔다. 박영이 그 여자를 결박해 놓고 심문하자
그 여자가 다 실토하였다.
  "마을의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같이 살기로 약속하고, 제 남편이 술에
취해 자는 틈을 이용하여 그런 일을 저질렀습니다"
  박영이 곧 군사를 풀어 그 사나이를 급히 잡아다 물으니 그 말이 모두
부합되므로 법에 따라 처벌하였다.
  하루는 들새가 관아 후원에 날아와서 놀란 소리로 세 번 울고 서남쪽으로
가 버렸다. 박영이 가족들을 불러 급히 행장을 꾸리도록 했는데,
행장을 미처 꾸리기도 전에 금부도사가 와서, 반역을 도모했다는
죄목으로 그를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다. 심문을 받을 적에 뼈마디가
모두 부서질 정도였다. 박영이 큰 소리로 추관에게 물었다.
  "누구의 고발이오?"
  "아무의 고발이다"
  "만일 그렇다면 그 사람과 원한을 맺은 사람으로는 경주부윤
유인숙이 나보다 심하였다. 유인숙도 잡혀 왔다면 무고임이
분명하니 나는 살아날 수 있겠다"
  중종이 바야흐로 국정을 베풀고 친히 국문하다가 이 말을 듣고
그 까닭을 물었다.
  "그 사람이 문서를 위조하여 남의 전지를 빼앗으려고 김해부에
소송을 했다가 사리가 틀려서 배척을 당했으며, 또 경주부에 소송했더니,
경주부에서는 그 간사한 짓에 분노하여 감사에게 보고해서
형벌을 받았으므로 원한이 나보다 심할 것입니다. 저놈이 내가
반역을 도모한다고 먼저 고발하였으니 경주부윤 유인숙도 그 다음에
고발할 것입니다"
  임금이 드디어 유인숙에게 물으니, 유인숙의 진술이 박영의 진술과
같으므로, 고변한 자를 반좌율(무고한 사람에게 무고 입은
사람에게 부과한 죄와 동일하게 부과함)에 적용하여 처단하였다.
  박영이 선전관에 임명되었을 적의 일이다. 어느 날 준마를
타고 화려한 옷을 입고 저녁 무렵에 수문동을 지나는데,
동네 어귀에서 꽤 아름다운 여인이 손짓하며 불렀다. 박영이 말에서 내려
종에게 "내일 아침 일찍 오라"고 이르고는 그 여인을 따라가니 사람이
없는 깊숙하고 외진 곳에 집이 있었다. 박영이 그 집에 이르자, 날은
이미 저물어 캄캄하여졌다. 그 여인이 박영을 대하고는, 갑자기 눈물을
주르르 흘리므로 그 까닭을 물었다. 여인은 곧 손을 들어 말소리가
나지 않도록 중지시키고, 낮은 목소리로 귀에 대고 말하였다.
  "공의 풍채를 보니 필시 보통 사람이 아닌데, 나로 말미암아 비명에
죽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슬퍼합니다"
  박영이 괴이하게 여겨 다시 묻자 여인이 말하였다.
  "도적들이 나를 미끼로 삼아 사람을 유인하여 죽이고 그 의복과 타고온
말, 말안장 등을 나누어 가진 지 여러 해 되었습니다. 내가 날마다
탈출할 것을 생각해 왔으나 그들이 죽일까 두려워 감히 탈출할 계책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공은 나를 살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박영은 칼을 빼앗아 들고 앉아서 기다렸다. 밤중에 방 위의 다락에서
도적들이 여인에게 큰 밧줄을 내려보내 "그자를 묶어 올려 보내라"고
하였다. 박영은 몸을 솟구쳐 벽을 차 무너뜨리고 급히 여인을 업고
탈출하여 담을 뛰어넘었다. 여인이 가지 말라며 붙잡자 그는 속옷 자락을
잘라 버리고 떠나왔다. 그 이튿날 벼슬을 사직하고 선산으로 돌아와서,
무인 노릇을 버리고 글을 읽어 생각을 바꾸고 세상의 순수한
유학자가 되었다. 평소에 앉은 자리 옆에 항상 잘린 여자
속옷을 두고서 자제들에게 보이면서 경계하였다.
  중종 16년 신사옥사에 무고를 당하여 혹독한 형을 받고 얼마
뒤에 방면되었다. 70세에 별세하였다. 이조 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목이다.

     관곡을 빌려 먹을 정도로 청빈했던 최명창

  최명창(1466-1536)의 본관은 황주이고, 자는 여신,
호는 송석이다. 성종 20년(1489)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연산군 10년(1504)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사헌부, 사간원의
관직과 홍문관의 전한을 역임하고 지방의 수령을
여러 번 지냈는데, 이삿짐 보따리가 늘 단출하였다. 황해감사를
지냈고 청백리에 뽑혔다.
  그는 집이 없어 항상 남의 집을 빌려 살았고, 만년에 지은 쌍계의
집 또한 겨우 비바람을 가리울 정도로 초라했다.
  벼슬에서 파면된 뒤로부터는 해마다 양주 창고에 있는 관곡을
꾸어다 먹으니, 사람들이 '관곡 꾸어 먹는 재상'이란 뜻으로
'적창재상'이라 불렀다.
  71세에 '기묘당인'으로 몰려 죽었다. 벼슬은 참판에 이르렀다.

     홍패는 몰수되고 백패마저 도둑맞은 심잠

  신잠(1491-1554)의 본관은 고령이고, 자는 원량,
호는 영천자, 아차산인이다. 시와 글씨와 그림에
능하여 세상 사람들이 '시서화 삼절'이라고 불렀다.
  중종 8년(1513)에 진사시에 장원하고 동왕 14년에 현량으로
천거되어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에 보임되었다가 얼마 뒤에 과거의
방을 파하여 홍패(문과 합격증)를 몰수당하고, 곧 장형을 받은
후 장승으로 유배되었다. 17년 동안 배소에 있다가 양주로
배소가 옮겨져 편한 대로 살게 하니 아차산 아래에
집을 짓고 살았다. 그곳에서 또 백패(진사시의 합격증)를 도둑맞았다.
신잠은 시를 지어 읊었다.

  홍패는 이미 뺏기고 백패마저 잃었으니
  한림과 진사가 모두 이름뿐이로구나
  이제부터 아차산 아래에서 묻혀 살 것이니
  '산인' 두 글자야 어느 누가 뺏을꼬?

  그 뒤 특별히 음직으로 상주목사가 되었다.

     유기장이의 딸을 정부인으로 삼은 이장곤

  이장곤(1474-?)의 본관은 성주이고, 자는 희강,
호는 금재이다. 연산군 원년(1495)에 생원시에 장원하고 연산군
8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교리 때에 왕의 비위를 거슬려
거제에 귀양갔다. 연산군은 이장곤이 일을 도모할까 의심하여
다시 포교를 보내어 잡아오게 하였다. 이장곤은 죄를 더 받을까
두려워하여 함흥으로 도망을 갔는데, 도중에 목이 몹시 말랐다. 마침
물을 긷는 처녀가 있어 물 한 바가지만 주기를 청했더니, 그 처녀는
물바가지에 버들잎을 띄워 주는 것이었다. 이장곤이 괴이하게 여겨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 처녀가 말했다.
  "목이 몹시 말라 급히 마시면 체할까 염려되어 천천히 마시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장곤이 그 지혜로움에 놀라 다시 물었다.
  "너는 누구의 딸이냐?"
  알고 보니 건너편 유기장 집 딸이었다. 그는 곧 처녀의 집으로
따라가서 사위가 되어 몸을 의탁하였다. 이장곤 같은 서울의 귀한
손이 어찌 유기(고리) 짜는 것을 알겠는가. 그는 날마다 낮잠만
자고 지냈다.
  "내가 사위를 맞이한 것은 유기 만드는 일을 돕게 하기 위해서인데,
오직 밥만 먹고 밤낮 잠만 잘 뿐이니, 이는 곧 하나의 밥통이로다"
  유기장 부부가 노하여 아침, 저녁의 밥을 반으로 줄여 버렸다. 그의
아내가 그를 불쌍히 여겨 매양 솥바닥의 누룽지를 긁어 더 먹여 주었다.
  이렇게 지낸 지 수년이 되었는데, 중종이 반정하고 조정이 일신되어
연산군 때에 죄를 얻은 사람을 모두 사면하였다. 이장곤의 관직도 도로
주어 팔도에 명령하여 찾게 하니, 소문이 널리 퍼졌다.
  이장곤이 풍문에 그 소문을 듣고 장인에게 말하였다.
  "관가에 매달 바치는 이번 유기는 내가 져다가 바치겠소"
  "자네 같은 잠꾸러기가 동서의 방향도 모르는데, 어찌 관가에 상납
할 수 있겠는가? 내가 직접 바치더라도 번번이 퇴짜맞기 일쑤이다.
당치 않은 말은 아예 하지 마라"
  곁에 있던 그의 아내가 말하였다.
  "시험삼아 한번 보내 보도록 하시지요"
  그러자 장인이 비로소 허락하였다. 이장곤은 등에 유기를 짊어지고
관아의 뜰로 바로 들어가서, 큰 소리로 외쳤다.
  "아무 데 사는 유기장이 유기를 바치기 위해 와서 기다립니다"
  마침 그때 함흥부윤은 이장곤과 친했던 무관이었다.
그 무관이 이장곤의 얼굴을 보고 크게 놀라 섬돌을 내려와서 손을
잡고 자리에 올랐다.
  "공은 어디에 숨어 있다가 이런 모양으로 나타나셨소? 조정에서
찾은 지 오래되었소"
  이어서 술과 음식과 옷과 갓을 챙겨 주었다.
  "죄를 짓고 있는 사람이 유기장의 집에 몸을 의탁하여 구차스럽게
목숨을 연명하다가 뜻밖에 다시 밝은 세상을 보게 되었소"
  함흥부윤이 순찰사영에 급히 보고하여 곧 역마를 내어
상경하도록 재촉하였다.
  "유기장의 집에 3년 동안 주객의 처지로 있었으므로 돌아보지
않을 수 없고 겸하여 조강지처의 의리가 있소. 지금 가서 작별을
고할 것이니, 그대는 내일 아침에 나를 찾아와 주시오"
  이장곤이 이렇게 말하고 유기장의 집으로 돌아왔다.
  "이번 달 유기를 무사히 갖다 바쳤습니다"
  장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하였다.
  "이상하다. 옛말에 '올빼미가 천년 묵으면 꿩 한 마리는 잡는다' 하더니,
그것이 헛말이 아니다. 오늘 저녁밥은 조금 넉넉히 차려 주어라"
  이튿날 아침에 이장곤이 일찍 일어나서 뜰을 청소하니, 장인이 좋아했다.
  "우리 사위가 어제 유기를 잘 바치더니, 오늘 아침에 집 뜰을 청소하네.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도다"
  이장곤이 뜰에 짚자리를 까니, 장인이 의아해 하였다.
  "어찌하여 자리를 까는고?"
  "오늘 사또가 행차하실 것입니다"
  장인이 비웃으며 말했다.
  "자네는 잠꼬대 같은 소리 하지 말게. 사또가 어찌 우리 집에
행차하겠는가. 이제 와서 생각하니 어제 유기를 잘 바쳤다는 것도 필시 길에
버리고 집에 돌아와서 허세를 부려 큰소리친 것이로구나"
  그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함흥부의 아전이 채색 자리를 가지고
헐레벌떡 와서 방안에 깔았다.
  "사또의 행차가 곧 당도하십니다"
  유기장 부부는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사색이 되어 울타리 사이에
피해 숨어 있었다. 조금 뒤에 수령의 앞길을 인도하는 전도 소리가
문 앞에 들리고 본관 사또가 당도하여 인사를 한 다음, 이어서 물었다.
  "아주머니는 어디에 계시오? 청컨대 상견례를 행하겠습니다"
  이장곤이 아내를 불러내어 절하게 하였는데, 의복은 비록 남루하나
의용이 매우 안온하고 예절이 발라 천한 상민 여자의 촌스런 태도가
없었다. 본관 사또가 경의를 다하여 말하였다.
  "이 학사(이장곤을 말함)가 어려운 처지에 있을 적에 아주머니의
힘으로 오늘이 있게 되었으니, 비록 의기의 남자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소"
  또 사또가 유기장을 불러 술을 권하고 따뜻한 말로 위로하였다.
  이웃 고을 수령이 잇달아 오고 감사도 막료를 보내어 전갈하니,
유기장의 집 문밖이 사람과 말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이장곤이 본관 사또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비록 천한 상민이나, 내가 이미 아내로 삼았으니 버리는
것은 불가하오. 원컨대 가마 한 채를 빌려주어 같이 가게 해주시오"
  본관 사또가 그 말대로 들어주었다.
  이장곤이 상경하여 임금에게 사은하니, 임금이 그에게 떠돌아
다니던 전말을 물으므로 이장곤이 그 사실을 갖추어 아뢰었다.
  "이러한 여자를 천첩으로 대우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임금은 새삼 감탄하며 특별히 후부인으로 올려 주었다.
  이장곤은 벼슬이 우찬성에 이르렀다.
  이장곤은 갑자사화 때 망명한 지 수개월 만에 한번 집에 와서 본부인을
보고 떠나갔는데, 하루는 집에 이르니 마침 먼동이 트고 있었다.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대숲에 숨어 있었다. 부인은 1년이 지나도 남편이
오지 않자, 죽었을까 의심하여 무당을 불러 점을 쳐보았다. 무당의 답이
"죽지 않고 그림자가 뜰 가운데 있다" 하였다.
  이장곤이 그 말을 듣고 그 뒤로부터 감히 다시 집에 오지 못하였다.
이장곤은 만년에 항상 "무당의 말도 헛말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병의 근원을 치료했던 명의 안찬

  안찬 (?-1519)의 본관은 순흥이고, 자는 황중이다.
의술에 정통하고 이학에도 정밀하여 사류들과 많이 벗하였다.
  어떤 사람이 새벽에 나갔다가 도중에 갑자기 두 눈이 모두 딱 붙어
뜰 수가 없었다. 손으로 문질렀더니 마치 아교풀을 붙인 듯 딱 붙어서
그대로 장님이 되어 버렸다. 사람들이 모두 그 병의 원인을 알지 못하였다.
안찬이 처방을 해주며 말했다.
  "눈이란 폐에 속한다. 폐에 병이 들었기 때문에 눈이 꼭 붙은 것이니,
폐를 다스리는 약을 쓰도록 하라"
  그 사람이 약을 먹은 지 얼마 안 돼 눈이 점차 뜨이어 평상시처럼
완쾌되었다.
  또 어떤 여인이 하루는 음문이 갑자기 아프더니, 얼마 뒤에 쇠털과
같은 검고 누른 털이 음문으로부터 쏟아져 나왔다.
  "비록 여자의 음문에서 나오는 것일지라도 털이란 피의 나머지다.
피에 병이 들었기 때문에 이런 괴이한 일이 있는 것이니, 먼저 피를
다스리도록 하라"
  여인이 안찬의 처방대로 약을 먹었더니 털이 나오는 증세가 그쳤다.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 때에 대사헌 이항이 조광조 등 당인들과
교제하고 결탁했다는 죄목으로 잡아다가 국문하고 곤장
1백 대를 때려 외방에 유배하였다. 연서역에 이르러 죽으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문장에는 뛰어났으나 일처리 능력이 모자랐던 신광한

  신광한(1484-1555)의 본관은 고령이고, 자는 한지,
호는 기재이다. 영상 신숙주의 손자이다.
  문장에는 능했으나 일처리 능력이 부족하였다. 형조 판서로 있을 때에
소임을 빨리 처결하지 못하여 죄수들이 많이 적체되어 옥에 모두
수용할 수가 없게 되었다. 신광한이 옥사를 더 넓게 지어 죄수를
수용하기를 청하였다.
  "판서를 바꾸느니만 못하다. 옥사를 어찌 다시 짓는단 말인가"
  중종은 허락하지 않고 허자를 대신 임명하였다. 허자가 지체없이
처결을 다하니 옥사가 텅텅 비어 새로 지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역시 문장에는 어릴 때부터 뛰어났다. 고집이 센 종 하나가
신공을 바치지 않자 곧 시를 써서 짐짓 타일렀다.

  평해군에 사는 종 막동이가
  해마다 신공을 못 들은 척 바치지 않네
  관청의 위엄으로 잡아오는 것 어려운 일 아니나
  모름지기 내년 2월까지 바쳐야 하리

  신광한이 소싯적에 채색 새가 입으로 날아 들어오는 꿈을 꾸고 이로부터
재치 있는 생각이 날로 늘었다. 장성하여 문형을 맡게 되자,
또 채색 새가 입으로 날아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이것은 나함이
꿈에 오색 새를 삼킨 것과 같은 유라 하겠다.
  중국 사신 장승헌이 왔을 때에 공이 원접사가 되어
주고받은 창화시가 있는데, 장승헌이 크게 칭찬을 하였다. 이듬해에
중국 사신 왕학이 공을 보고 치사하였다.
  "'황화집'을 보니 중국 사신 장승헌이 공에게 뒤진 바가 많았습니다"
  인종 때에 대제학을 지내고 시호는 문간이다.

     남곤을 구부러진 매화 등걸에 빗대어 시를 지은 남추

  남추의 본관은 고성이고, 자는 계응, 호는 서계,
또는 선은이다. 중종 9년(1514)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어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에 들어가 사가독서하고 전한을 지냈다.
  문장에 능하고 풍채가 선풍도골처럼 뛰어났다. '촉영부'를
지어 온 세상에 명성이 자자하였는데 남곤에게 미움을
받아 영광의 삼계로 물러가 살았다. 그때 나이 28세 였다.
  남곤이 남추를 가까이 할 생각으로 그를 초청하였다.
  "내가 듣건대, 그대의 문장이 남보다 뛰어나다 하니 시 한 수를 보여 주게"
  남곤이 화분에 심은 매화를 가리키며 시를 읊으라고 하자 남추가 즉시
응하여 시를 지었다.

  한 그루 분에 심은 줄기 약하지만
  천추에 눈처럼 깨끗한 자태 씩씩하구나
  구부러진 네 몸을 뉘 능히 펴 주어
  높이 낀 저녁 구름 곧바로 헤치랴

  남곤이 그 시의 뜻이 자기를 풍자함을 알고 크게 노하여 드디어 그를
끊어 버렸다.
  남추의 누이가 또한 시에 능하였는데 한번은 남추가 그에게 눈을
소재로 시를 짓게 하되 녹자와 홍자를 운으로 부르니,
그 누이가 즉시 응하였다.

  땅에 떨어지니 소리는 누에가 푸른 뽕잎 먹는 것처럼 바스락거리고
  공중에 흩날리니 모양은 나비가 붉은 꽃을 엿보는 것 같다

  남추가 소싯적에 학업을 닦지 않고도 세상일에 능하였다. 그의 아버지가
글읽기를 권하면, 남추는 번번이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글을 읽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하루는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끼었다가 조금 뒤에 안개가 갠 뒤에
보니 남추가 점잖은 어른들과 함께 바위 위에 앉아 강독하고 있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이상하게 여겼다.
  한번은 그가 손수 편지를 써서 집 하인에게 주며 말하였다.
  "지리산 청학동에 가면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을 터이니,
너는 모름지기 회답을 받아 오너라"
  하인이 남추의 말대로 그곳에 가서 보니 과연 화각 두세 칸이
바위 골짜기에 가로 걸쳐 있는데 깨끗하고 고운 것이 비할 데가 없고,
한 도인이 노승과 마주 앉아 바둑을 두고 있었다. 하인이
그 편지를 올리니 도인이 웃으면서 말하였다.
  "내가 이미 네가 올 것을 알았다"
  바둑을 다 두고 나자, 편지 한 통과 청옥으로 만든 바둑알을
주어 보냈다. 하인이 청학동에 올 때는 9월 무렵이어서 낙엽이 길에
흩날리고 가는 눈발이 공중에 뿌렸는데, 하직하고 돌아올 때에 배가 고픈
것도 깨닫지 못하고 오직 신발 밑에는 묵은 풀이 싹트려 하는 것이
보여 의아하게 여겼다.
  청학동 밖으로 나오니 날씨가 따뜻하고 초목이 싱그럽게 자라나서
곧 인간 세상의 3월이었다.
  남추가 죽은 뒤에는 바둑알조차 잃어버렸다 한다. 말하기 좋아하는
호사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도인은 바로 최고운이고 노승은 바로 금단선사이며
남추 또한 신선 중의 한 사람이다"

     이항복에게 귀신으로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한 복성군

  복성군 미(?-1533)는 중종의 아들인데, 경빈 박씨의
소생이다. 중종 27년(1532)에 세자가 거처하는 동궁 근처에
쥐를 불태우고 흉악한 물건을 묻어 저주하는 변고가 있고
또 세자(인종)의 가상을 만들어서 나무패를 걸고 거기에 부도덕한
말을 써 놓은 사건이 있었다. 의심할 만한 사람을 잡아 국문할 적에,
경빈이 한 일이라 지목되어, 경빈을 폐하고 서인으로 삼고
모자를 함께 국문 하였는데, 얼마 뒤에 모두 사사되었다.
  백사 이항복이 소싯적에 친구의 집에 가서 학업을 닦고
있었는데, 이웃에 사는 젊은 여자가 날마다 자기가 묵고 있는 집에
출입하며, 자기를 쳐다보곤 했다. 하루는 공부하던 친구들이 모두 외출
하였는데, 때마침 큰비가 내렸다. 이항복이 혼자 앉아 있는데, 그 여자가
또 찾아와서 쳐다보는 것이었다. 이항복이 그를 불러 앞에 나오게
하여 물었다.
  "네가 날마다 와서 나만 유심히 쳐다보는데, 무슨 까닭인가?"
  그 여인이 꿇어앉아서 말하였다.
  "저는 본래 무당입니다. 저에게 의지한 신이 있는데 낭군(이항복의
지칭)을 뵙고자 하므로, 먼저 허락 얻기를 바랐으나 감히 아뢰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그와 함께 오너라"
  "감히 낮에는 뵐 수가 없습니다"
  밤이 되어 비는 그치고 달이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이항복이 등불을
켜 놓고 기다렸더니 여인이 와서 말하였다.
  "귀신이 왔습니다"
  문을 열고 보니, 소년의 외모는 옥설처럼 깨끗하고, 미목이
그림 같았으며, 남색 도포에 붉은 띠를 두르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항복이 관복을 입고 나가 맞이하여 읍을 하고 인도해 들어와서
좌정한 뒤에 물었다.
  "저승과 이승은 길이 다른데, 어찌하여 서로 만나려 하오?"
  이 말을 듣자 귀신이 크게 탄식하였다.
  "나는 왕자 복성군입니다. 참혹한 화를 만나 집이 멸망하고
구천에서 원통함을 삭이지 못해 인간 세상의 공의가 어떠한지
들으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들은 기백이 나약하여
귀신인 나에게 접근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공은 비록 나이가 젊으나
뒷날 반드시 크게 귀히 될 것이요, 기백이 능히 서로 접근할 수 있으며,
그 말이 또한 믿을 수 있으므로 한마디 가르침의 말씀을 받고자 합니다"
  "원통함을 푼 지 오래되었는데, 어찌 듣지 못하였습니까?"
  "제사의 고함으로 인하여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특별히
친족을 친애하는 은의에서 나왔을 뿐입니다. 듣고 싶은 것은 공의입니다"
  이항복이, 세상 사람들이 그의 지극히 원통함을 불쌍히 여기는 것을
갖추어 말하니, 귀신이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말하였다.
  "참으로 그렇다면 비록 아홉 번 죽음을 겪더라도 여한이 없습니다"
  복성군이 무당을 시켜 과일 몇 가지로 예를 올리게 한 다음, 하직하고
떠났다. 이항복이 나가서 그를 전송하였는데 몇 걸음을 가다가 곧
사라졌다. 이항복이 허망한 일에 가깝다 하여 종신토록 말하지 않았는데,
만년에 북청으로 유배 갔을 적에 비로소 동악 이안눌에게 이 말을 전하였다.

     작서의 변에 옥사가 공평치 못하다며 위관을 나무란 미관 말직의 허굉

  허굉(1471-1529)의 본관은 양천이고, 자는 굉지,
호는 징와이다. 진주의 별장에서 출생했는데, 어떤 중이
지나다가 들러 말하였다.
  "내일 이 집에 반드시 귀한 아들이 태어나고 장차 명신이 될 것입니다"
  이튿날 과연 허굉이 출생하였다. 백부인 충정공 허종이
매우 중히 여기며 말하였다.
  "나의 뒤를 이어 훌륭히 될 자는 반드시 이 아이다"
  성종 23년(1492)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연산군 10년(1504)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에 보임되고 중종반정(1506) 때에는 사인으로
승진하였다. 이때 이우, 윤장, 조계형이 승지로
있었는데 반정하던 날 정원에 입직하고 있다가 개구멍으로 도망쳐
나와서 공신에 기록되기를 요구하니, 사람들이 모두 더럽게 여겼다.
허굉이 곧 항론하여 훈권을 빼앗아 버리니 모두들 다시 논의를 통쾌하게 여겼다.
  쥐를 잡아 불로 지져서 세자(인종)를 저주한 적서의 변(1527)에
허굉이 임금에게 아뢰었다.
  "근일 옥사가 공평하게 판결되지 못한 것이 많습니다"
  송질이 나서서 항변했다.
  "신이 위관(재판관)인데, 무슨 일이 공평하게 판결되지 않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임금은 그저 빙긋이 웃기만 하였다.
  송질이 허굉을 자기 집에 불러 꾸짖었다.
  "옥사를 의논하는 것은 수상의 일인데, 그대가 어찌 미관으로 감히 말하는가"
  "미관은 수상의 말을 할 수 없단 말입니까?"
  허굉이 반문하자 송질이 매우 기이하게 여겼다.

     변방으로 유배 가는 회재에게 옷을 벗어준 장언량

  장언량(1491-1560)의 본관은 풍덕이다. 중종 9년(1514)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청백한 관리로서 벼슬은 정2품의
한성판윤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공무이다.
  중종 때에 명 나라가 건주위를 치려 할 적에 우리 나라에서
군사를 징발하니, 이기를 도원수로, 장언량을 부원수로
삼고, 이조의 낭관인 임형수를 종사관으로 삼았다.
  임형수가 도원수인 이기를 찾아가 보고 어버이가 늙은 것을 이유로
종사관의 직을 사양하니, 이기는 "부원수 장언량에게 말하라"고 답하였다.
임형수가 곧 장언량에게 가서 뵈니, 장언량은 융복(군북)으로
청사에 나와서 교의에 자리잡고 앉아 있었다. 임형수가
급히 융복을 갖추어 입고 다른 종사관과 함께 서서 예를 행하고
감히 한마디 말도 못하고 물러났다. 얼마 뒤 명나라에 파병하는
일이 중지되어 가지 않게 되었다.
  뒤에 임형수가 장언량을 찾아가니, 중문에 나와 맞이하여 읍하고
사양하며 자리에 인도하고 술을 베풀어 기쁨을 다하고 파하였다.
  회재 이언적이 북방 변경인 강계로 유배되어 갈 적에
날씨는 춥고 옷을 얇았다. 장언량이 그를 길에서 만나 여우갖옷을
벗어 주었다.
  을사사화 때에 이기가 사람을 시켜 장언량에게 말하였다.
  "만일 내 말을 따르면 마땅히 큰 훈작을 얻게 될 것이오"
  "선인(아버지)의 정국훈(중종반정 때의 공훈)이 있으니
이것으로 이미 족하다"
  장언량은 끝내 그를 따르지 않았다.
  아버지 정이 중종반정 때의 원훈으로 하원군에 봉해졌다.

     문과 급제한 뒤에 손을 펴니 손톱이 손바닥을 뚫고 들어간 양연

  양연(?-1542)의 본관은 남원이고, 자는 거원, 호는
설옹이다. 문양공 성지의 손자로 중종 19년(1524)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동왕 32년(1537)에 대사헌으로 있을 적에
참판 윤안인의 말을 듣고 하루 세 번 임금에게 아뢰어 김안로,
채무탁, 허항의 간사함을 배척하여 김안로 등이 사사되었다.
  영상 윤은보가 "종묘사직이 위태로울 뻔하다가 다시 편안하게
되었으니, 치하해야 합니다"라고 청하자, 논상하여 자급을
올려 주었으며 벼슬은 좌찬성에 이르렀다.
  양연이 젊을 때에 천성이 뛰어나 세속에 얽매이지 않았다. 마흔 살에
처음으로 글을 배울 적에 분발하여 결심했다. 그는 왼손을 꽉 움켜쥐고
"문장가가 되지 않으면 맹세코 손을 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맹세했다.
북한산 중흥사에 들어가서 글을 읽었는데 한 해 남짓하여
문리가 관통하고 시격이 청고하였다. 그는 장인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부쳤다.

  글방에는 둥불빛이 어둡고
  연지에는 물빛이 맑도다
  붓은 내가 원하는 바이고
  종이도 겸해 바라노라

  이 시는 문방사우를 청하는 뜻이다. 그의 장인이 그 만학이
빨리 성취된 것을 아름답게 여겨 장난 삼아 답하였다.
  "양충의(충의는 양연의 애칭)가 마흔 살에 산사의 당에서
글을 읽으니 아! 너무 늦도다"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미담으로 전하였다.
  뒤에 과거에 급제하던 날 비로소 손을 열어 보니 손톱이 손바닥을 뚫고
들어갔다. 영조가 '양충의가 마흔 살에 산사의 당에서 글을 읽으니
아 늦도다'라는 글을 호당에 써서 걸었다.

     기생에게 한 약속을 끝까지 지킨 박신규

  박신규의 본관은 밀양이다. 급제하기 전에 전주를
지나는데 마침 감사가 큰 잔치를 베풀었다. 박신규는 지나가는
유생으로 말석에 참여하였는데, 도내의 병사, 수사와 수령들이 다 모였다.
  잔치를 파하려 할 무렵에 모든 기생들이 잔치에 참석한 수령에게
분분하게 물품 지령서인 체하를 올리니 수령들이 앞을 다투어
써서 주었는데, 한 기생이 유생인 박신규 앞에 와서 꿇어앉았다.
  "나는 가난한 선비로 마침 지나가다가 성대한 잔치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어찌 너에게 줄 물건이 있겠느냐"
  박신규가 웃으며 말하자 기생이 대답했다.
  "제가 그것을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상공은 귀인이므로 앞길이
크게 열릴 것이니 미리 체하를 후하게 써 주십시오"
  박신규가 웃으면서 수량을 많이 써서 주었다. 그 뒤에 박신규가 전라
감사가 되자 그 기생이 체하를 바치므로 기꺼이 그 물품을 챙겨 주었다.

     빈궁하게 40살, 영달하게 40살 산 조원기

  조원기(1457-1533)의 본관은 한양이고, 자는 이지,
호는 돈후재이다. 미천할 때에 시문에 능하고 음양학에
밝은 허암 정희량과 교분이 깊었다. 허암이 예문관
검열이었을 때 하루는 조원기가 그를 찾아가 함께 잤다.
이튿날 높은 소리로 불러 대며 길을 메우고 찾아오는 명관달사가
매우 많았다. 손들이 떠나간 뒤 정희량이 물었다.
  "명사의 무리들이 부러운가?"
  "빈한함이 이와 같으니, 관문을 지키는 낮은 벼슬도 나보다는
나은데, 하물며 저 금마문 옥당의 선비이겠는가"
  "그대는 부러워하지 말게. 저들은 다만 아침 이슬처럼 잠시일 뿐이네.
그대 같은 사람은 빈궁하게 40살 살고 영달하게 40살 살 것이니,
장수는 그 속에 있네"
  정희량과 만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조원기가 한강을 건너는데,
배가 부서져서 물밑으로 가라앉는 것이었다. 조원기는 문득 "빈궁하게
40살, 영달하게 40살 산다"는 정희량의 말을 떠올렸다.
  "정희량군이 어찌 나에게 거짓말을 하겠는가"
  그는 그대로 산발한 채 눈을 감고 엉금엉금 기어서 언덕에
도달하였으나, 그것이 육지인 줄을 미처 깨닫지 못하였다.
  길가는 사람이 괴이하게 여기며 말하였다.
  "저 손발로 기어다니는 사람이 누구지?"
  조원기가 드디어 눈을 떠서 살펴보니 이미 한강 모래톱을 건너온
것이었다.
  조원기는 40살이 되어 문과에 처음 급제하여 벼슬은 찬성에
이르고, 나이도 80을 넘겼다. 시호는 문절이다.

     기생의 원한을 풀어준 천추사 조광원

  조광원(1492-1573)의 본관은 창녕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돈령부사에 이르렀다. 조광원이 중국 태자의
탄생일을 경축하기 위한 천추사의 사명을 띄고 연경으로
가는 도중에 평안도의 한 큰 주에서 자게 되었는데, 전도가
별사로 인도하였다. 조광원이 안내하는 관리들에게
따져 물으니, 그 관리가 아뢰었다.
  "객관에 요귀가 있어 사신이 누차 죽음을 당하였으므로
이 객관을 폐쇄한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왕명을 받드는 사신의 체통에 마땅히 객관에서 자야 하는데, 어찌
요괴로 인해 객관을 폐쇄하였는가"
  조광원이 서둘러 명하여 객관을 수리 청소하고 숙소를 옮기도록
하였다. 그 고을의 수령이 나와 뵙고 객관에서 자는 것을 간절히 말렸으나,
조광원은 끝내 듣지 않고 그 객관에 들어가 자기로 했다. 밤에 촛불을
밝혀 놓고 잠자리에 들어 자는 척하니, 담당 방의 기생 및 대령하는
하인들이 "요귀가 들이닥쳐 사신이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 하며 모두
달아나 피해 버렸다.
  밤이 이슥해지자, 갑자기 한 줄기 음산한 바람이 불어와서 장막을
걷어올리고 촛불이 깜박깜박 거리며 거의 꺼지게 되었다. 조광원이 언뜻
깨닫고 일어나 앉으니, 들보 사이 판자에서 삐걱삐걱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마치 판자를 걷어 내는 상황과도 같았다.
  얼마 뒤에 사람의 사지가 차례로 내려오는데, 가슴과 배가 머리와
얼굴에 이어져 잇달아 내려와 서로 이어 붙어서 한 여인의 몸이 되었다.
그 여인은 살갗이 눈처럼 희고 피가 묻은 흔적이 낭자하였다. 그
여인은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친 알몸이었는데 온몸이 비단처럼 얄팍하게
붙어 있었다. 그 여인은 얼굴을 감싸고 흐느껴 울며 잠깐 나왔다가
다시 물러나곤 하였다.
  조광원이 정색을 하고 호통을 쳤다.
  "너는 어떠한 요귀냐? 듣건대, 일찍이 왕명을 받든 사신을 여려 차례
해쳤다 하니, 그 죄가 이미 크다. 그런데 또 감히 내 앞에서 당돌함이
이와 같단 말인가. 만일 호소할 일이 있으면 그만이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마땅히 중형으로 다스리리라"
  요귀가 흐느끼며 입을 열었다.
  "첩이 하늘처럼 끝없는 혹심한 원통함이 있어 호소하려고 오면 사신이
곧 지레 서거하였사옵지, 첩은 실로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하늘의 은택을 입어 오늘을 만나게 되었으니, 어찌 원통함을 풀
수 있는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첩은 본주의 기생 아무입니다. 아무 해
아무 날에 아무 사신을 이 방에서 뫼시었습니다. 밤이 깊은 뒤에 소피로
인해 바깥 섬돌로 나갔더니, 관노 아무가 기둥 아래에
누워 있다가 마침 달빛 아래에서 첩이 오는 것을 보고 뛰어와서 겁탈하려
하므로 첩이 죽음으로써 거절하고 따르지 않았습니다. 관노 아무는
본래 힘이 세기로 유명했는데, 옷을 찢어 입을 막아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하고 안고서 동산의 큰 돌 옆으로 가서, 손으로 그 돌을 들고 첩을
그 돌 밑에 넣고 눌러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사지가 가루처럼 부서져서
이러한 꼴이 되었으니 어찌 천하의 지극한 원통이 아니겠습니까?"
  조광원이 다 듣고 나서 곧 명령을 내렸다.
  "마땅히 처결함이 있을 터이니, 속히 물러가거라"
  그 여인이 다시 울며 사례하고는 그림자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조광원이 시험삼아 모시는 하인을 불러 보았더니 응답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므로 마침내 옷을 벗고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이 되어 본주에
들어가서 기안을 이름마다 점열하고, 아무 관노의
이름을 가리키며 즉시 포박하여 대령하게 하였다. 이어서 많은 사람을
시켜 간밤에 여인이 말한 대로 그 돌을 들어 살펴보니, 그 여인의 살갗이
지금까지 조금도 썩지 않았다.
  기생의 시체를 뜰에 내놓고 그 관노를 심문하니,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모두 승복하였다. 곧장 곤장을 쳐서 죽이고 그 주의 수령으로 하여금
관을 짜고 염을 하여 후하게 장례를 치르게 하였는데, 그 뒤로
드디어 요귀가 없어졌다.
  창양군에 습봉되고, 시호는 충경이다.

     황진이의 유혹에도 동요하지 않은 서경덕

  서경덕(1489-1546)의 본관은 당성이고, 자는 가구,
호는 화담으로, 개성 사람이다. 집안이 대대로 가난하여
농사와 누에치기를 업으로 삼고 지냈다.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썼다.
  아버지의 명으로 과거에 응시하여 진사시에 합격한 뒤로는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화담 가에 집을 짓고 도의를 깊이 연구하였다.
그의 학문하는 방법은 오로지 이치를 깊이 연구하는 것으로 일을
삼아, 혹 말없이 여러 날 동안 마냥 앉아 있기도 하였다. 만일 하늘의
이치를 깊이 연구하려면 '천'자를 벽에 써서 깊이 연구하고, 다시
다른 글자를 써서 정밀히 생각하고 연구하여 밤이 새는지 해가 지는지
모르고 골똘히 연구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여러 해 지나 모든 세상의
이치가 환하게 된 뒤에 글을 읽어 그것을 증명하였다.
  그는 항상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스승을 얻지 못했으므로 공부를 한 것이 지극히 깊었지만,
후인이 내 말대로 하면 나처럼 힘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 논설은 송대 장횡거(이름은 재임)의 학설을 주장한
것이 많았다. 마음에 스스로 터득하여 만족하게 스스로 즐기고, 세상의
시비, 득실과 영욕은 추호도 마음에 개의치 않았다.
집에 끼니 꺼리가 여러 번 떨어졌으되 늘상 태연하였다.
  하루는 문생 강문우가 와서 뵈니, 화담 선생이 못가에
앉아 있었는데, 이미 한낮이 되었다. 그와 더불어 강론하였는데 조금도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강문우가 부엌에 들어가서 그 집 식구들에게
물어 보니 "어제부터 양식이 떨어져서 밥을 짓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못가를 산보하며 놀다가 종이를 한 치쯤 잘라 몇 글자를 써서 물속에
던져 넣으니, 한 쌍의 잉어가 물에서 뛰어나와 돌 위로 올라왔다. 화담
선생이 손으로 잡아서 살펴보고는 웃으면서 물에 도로 던져 넣고 말하였다.
  "좌도(바르지 못한 도)를 하는 사람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구나"
  중종 때에 참봉에 제수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선조 때에
영상에 증직되었으며, 시호는 문강이다.
  겨울에는 화롯불을 쬐지 않고 여름에는 부채질을 하지 않았으며
밤에도 잠자리에 쉬이 들지 않았다. 일찍이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글 읽던 당시에는 세상 다스리는 경륜 뜻했는데
  노년에는 도리어 안자의 가난 달게 여기네
  부귀는 다툼이 있어 손을 대기 어렵고
  산수는 금함 없어 몸을 편히 할 수 있네
  산의 나물과 물의 고기로 이 배를 채울 수 있고
  달을 읊조리고 바람을 노래하니 정신을 상쾌하게 하네
  학문이 의심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 참으로 쾌활하거니
  헛되이 백년의 인간이 되는 것 면하게 되리

  그를 추종하여 옷자락을 걷어올리고 수업한 사람이 날로 문에 가득하였다.
  송도에 인물이 많아서 차오산(이름은 천로임)의
문장, 한석봉(이름은 호임)의 명필 등 이름을 떨친 사람들이
모두 이곳 출신이다. 또한 명창 진이란 기녀가 있어 얼굴이
아름답고 노래를 잘 부르고 거문고를 잘 타며 시에 능하였는데, 또한
여자 중의 호걸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일컫기를 "송경에 삼절이 있으니, 그 첫째는
박연폭포이고 그 둘째는 화담 선생이고 그 셋째는 곧 황진이다"라고 하였다.
  진이는 화담 선생이 고상하게 살며 벼슬하지 않고 학문에만 정진한다는
말을 듣고, 그를 시험해 보고자 하여 거문고를 메고 술을 걸러 들고
실띠를 매고 '대학'을 끼고 가서 절하였다.
  "소첩이 듣건대 '남자는 가죽띠를 매고 여자는 실띠를 맨다" 하였습니다.
소첩도 학문을 알므로 실띠를 매고 왔으니 원컨대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화담 선생은 웃으면서 그를 가르쳤다. 진이는 밤을 이용하여 접근하되,
마치 마등이 아난타에게 달라붙는 것처럼 여러 날 동안
접근하였으나, 화담은 끝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진이는 부끄러움과
한을 견디지 못하여 드디어 화담을 하직하고 금강산으로 향하였다.
칡적삼과 베치마차림에 짚신을 신고 명아주 지팡이를 짚고 국내의
명산을 두루 유람하고 돌아왔다. 진이는 늘 말하였다.
  "지족 노선이 30년 동안 벽을 쳐다보고 수도했어도 나에게
지조가 무너졌는데, 오직 화담 선생은 여러 해 동안 가까이 지냈으되
끝내 난잡한 데에 이르지 않았으니 참으로 성인이다"
  화담이 시냇가에 작은 정자를 짓고 '서사정'이라는 현판을
걸고서 그 위에서 즐겁게 놀았다. 하루는 문도들과 '주역'의 이치를
설명하고 있을 적에 홀연히 늙은 중이 와서 섬돌 아래에서 절하였는데,
무성한 눈썹에 고리눈이며 상모가 흉악하고 사나웠다. 화담이 물었다.
  "너는 여기 무슨 까닭으로 왔느냐?"
  "빈도가 마치 갈 곳이 있어 집 앞을 지나는 길에 잠시 뵙기를 청합니다"
  "내가 죄없이 죽음에 나아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너는 놓아
줄 수 있겠느냐?"
  "이는 천명에 관계되니 진실로 어기기 어렵습니다"
  중이 절하며 하직하고 가 버리자, 화담이 탄식하여 마지않았다. 문도들이
모두 당황하여 서로 돌아보면서 그 까닭을 궁금해하자 화담이 말하였다.
  "그 중은 아무 산의 신호이다. 오늘 저녁 아무 마을, 아무
집에서 장차 사위를 맞이하여 폐백을 받는데, 처녀가 해를 당하게 될
것이니 어찌 참혹하지 않겠느냐"
  무도들이 말하였다.
  "선생께서 이미 환하게 아시면 어찌 구제하려 하지 않으십니까. 유곤이
특이한 공적이 있자, 범이 그 아들을 업고 하수를 건너갔고,
황공이 적도를 외자 범이 사람을 해치지 못하였으니,
지금 만 가지 경우에도 두루 통하는 선생의 도로써 어찌 눌러 이기는
술법이 없으시겠습니까?"
  화담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긴 뒤에 말하였다.
  "내가 조금 시험해 보려 하나, 다만 시킬 만한 사람이 없을 뿐이다"
  한 문생이 자기가 가겠다고 자청하자, 화담은 기뻐하면서 책 하나를
주며 말하였다.
  "이것은 '연화경' 안의 보현품이다. 옛날 고환국
손모가 이 경문을 외어 액화를 면하게 되었으니,
불가에서 '고왕관음경'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네가
그 집에 가서 모름지기 기밀을 누설하지 말고 다만 대청 위에 상탁과
향, 촛불을 갖추어 차려 놓고 그 처녀를 방안에 가둔 뒤 문을 굳게
잠그고 건장한 여종 5, 6인을 시켜 단단히 붙잡고 놓아주지 말도록
하라. 너는 대청 위에 앉아 이 경만 외우되 구두를 그르치지
말고 닭이 울 때까지 끌어가면 저절로 무사하게 될 것이니, 경계하고
조심할지어다"
  그 문생이 화담의 가르침을 받고 그곳에 가니, 곧 산골 마을의 부잣집
민가였다. 집들이 즐비하고 노적가리가 담장 높이 솟았으며, 마당에는
차일과 장막이 여러 군데 쳐져 있고 문밖에 신발이 가득하였다. 방안에
들어가 주인을 만나 보니, 풍채와 인품이 좋은 노인이 물었다.
  "손은 무슨 일로 밤에 여기로 왔소?"
  그 문생이 대답하였다.
  "저는 과객이 아닙니다. 주인집에 큰 일이 있는데 화를 바꾸어
복이 되게 할 수 있어서 일부러 왔습니다"
  "무슨 일이오"
  "오늘밤 주인집에 큰 액이 있으니, 만일 내 말대로 이렇게 이렇게 하면
거의 재앙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인 노인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쳐다보며 말하였다.
  "어디서 온 풍객이 미친 헛소리를 하오?"
  "나는 뜻만 커서 큰소리치는 초나라의 접여가 아니라, 계책이
초나라를 위하는 데에 있는 조나라의 모수입니다. 우선
앞으로의 일을 보고 나서 내 말이 속인 것이라면 곤장을 쳐서 쫓아
내면 될 것입니다"
  주인 노인이 마음으로 매우 의아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어떻게 되는지
보겠다 하고 하인을 시켜 일체 손의 말대로 대청을 청소한 다음, 상탁을
설치하고 처녀는 방안에 깊이 숨겨 놓았다.
  그 문생은 곧 옷을 가다듬고 대청 위에 단정히 앉았다. 안팎이 조용하고
등불, 촛불이 환하게 밝았다. 그는 상탁 앞에서 불경을 외웠다.
삼경 때쯤 되자, 벽력 같은 소리가 들리면서 지붕의 기와가 모두
진동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벌벌 떨며 숨어서 보니, 이마가 흰 큰 범이
뜰 가운데로 뛰어내려 왔는데, 눈은 번개처럼 번쩍이고 소리는 뇌성같이
웅장하였다. 그 범은 멋대로 날뛰며 물어뜯고 으르렁거렸는데, 그
형세가 매우 사나왔다. 문생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불경을 끊임없이
읽을 뿐이었다.
  이때에 처녀가 변을 보겠다는 핑계로 나가려 했으나 여종들이 좌우에서
그를 포박한 것처럼 단단히 붙잡으니, 처녀는 손발을 어지럽게 흔들며
몸부림을 쳤다. 이윽고 범이 홀연히 번개처럼 잽싸게 떨쳐 일어나서
크게 울부짖고 창문 앞 기둥 나무를 물어뜯었는데, 이렇게 세 번 하였다.
조금 뒤에 마을의 닭이 '꼬끼오' 하고 울자, 범은 갑자기 보이지
않고 처녀는 까무라쳐 버렸다. 이윽고 집안 식구들이 정신을 수습하고
따뜻한 물을 처녀의 입에 넣으니 조금 뒤에 깨어났다.
  그 문생이 불경 읽는 것을 끝내고 밖으로 나오자, 주인이 절을 하고
사례하였다.
  "공은 신인인데, 내가 눈이 있으되 태산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원컨대 천금을 올려 공자를 위해 축수함으로써 만분의
일이나마 은혜를 갚고자 합니다"
  "내가 우연히 남의 위급함을 구제하는 의리로 인하여 잠시 술법을
시험해 본 것이지, 애당초 술법을 팔아 이익을 도모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문생이 물러가기를 고하니, 주인 노인이 재삼 굳이 만류하였다. 이에
옷소매를 뿌리치고 돌아와 화담에게 고하였다.
  "너는 어찌하여 세 곳을 잘못 읽었느냐"
  화담이 웃으며 말하자 문생이 대답하였다.
  "잘못 읽은 곳이 없습니다"
  "조금 전에 그 중이 또 들렀다 가면서 나에게 사람을 살려준 공을
사례하고 또 '경문 세 곳을 잘못 읽어서 기둥 나무를 물어뜯어서
표시하였다'고 하였다"
  그 사람이 다시 생각해 보니 과연 잘못 읽었던 것이다.

     지극한 효성으로 명당자리를 얻은 김언겸

  김언겸의 본관은 김해이다. 대대로 고양에 살면서
곤궁함을 견디어 내며 유학을 업으로 삼았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는데, 어머니가 서울에 있으면서 병으로
죽자 언겸이 그 관을 모시고 돌아와 고향 선산에 장사지내려 하였다.
상여가 신원에 당도하였을 때 상여의 수레바퀴가 부러지고 말았는데
언겸이 어찌할 바를 몰라 길 옆에서 슬피 울었다. 인근 마을의
주민들이 다투어 와서 도와주어 길 옆의 높은 곳에 임시로 장사지내고 곧
선산으로 이장하려 하였는데, 집안 형편이 어려워 언겸이 친히
잔디와 흙을 져다가 묘역을 만들었다. 이때 나라의 능을 개수하는
일로 어떤 지관이 지나다가 돌아보고 말하였다.
  "이 새 무덤을 누가 잡았는지 모르지만, 참으로 길지이다"
  언겸이 그 말을 듣고 뒤따라가서 절을 하고 사정을 말하는데, 말할
적마다 눈물이 같이 떨어졌다. 지사가 측은히 여기며 말하였다.
  "산의 형세를 두루 살펴보니, 왼쪽의 청룡과 오른쪽의 백호가
너무 가깝고 명당이 좁아서 비록 대지는 아니다.
그러나 산의 형세가 멀리 뻗어나서 격국이 절로 이루어졌으니,
금방(과거)에 급제하는 귀인이 두 대를 연달아 나올 것이다"
  이어서 김언겸의 성명과 족계를 묻고 감탄하며 말하였다.
  "상주는 효성이 있는 사람이오. 나는 젊을 때부터 산을 보아서 이 길을
지나간 것이 몇 번인지 모르건만, 10보 안에 이런 좋은 묘지가 있는
줄 몰랐으니, 참으로 인력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오. 절대로 이장하지
마시오"
  김언겸이 그 지사의 말을 따라 영구히 안장하였다. 장사지낸 지
3년 뒤에 언겸이 과연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냈다.
그의 아들 현성은 호가 남창인데, 문과에 올라 벼슬이
동지돈령부사에 이르렀다.
  김현성은 관리로서 몸가짐을 청고하게 하여 얼음과 황경나무처럼
맑다는 명성이 있었으나 백성들을 잘살게 하지는 못하였다. 마침
어느 고을의 수령이 되었는데, 한 유생이 글로 그를 조롱하였다.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였으나 온 고을이 못살아 원망하였으며,
조금도 재물을 범하지 않았으나 관의 창고가 텅비게 되었다"
  김현성이 그 말을 듣고 크게 웃으며 말하였다.
  "이것은 나의 실제 행적이다"

     "썩은 노끈으로 사형수의 목을 맨단 말인가" 죽음 앞에서도 호통을
친 홍순복

  홍순복의 본관은 남양이고, 자는 자유, 호는 고암이다.
김식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기묘사화가 일어나던
날 홍순복이 남원에 있으면서 행장을 차려 장차 떠나려는 참인데,
아내 김씨가 띠를 잡고 그를 말리므로 홍순복이 분연히 칼을
뽑아 띠를 끊어 버리고 떠났다. 드디어 관학유생과 함께
궐문을 지키며 소를 올렸는데, 체포되어 갇혔다가 곧바로 석방 되었다.
  중종 15년(1520)에 이신이 "김식이 도망 중에 있으면서
문도를 거느리고 집정을 제거하기를 도모하려 한다"고 고발하였다.
홍순복이 김식의 제자로서 연루 체포되어, 국문을 당할 때 승복하여
장류를 당하게 되었다.
  대간이 "공사가 공손하지 않고 시정을 많이 헐뜯었다"
하여 사죄의 율로 치죄할 것을 청하였다. 그가 처형을 당할 적에
썩은 노끈이 두 번이나 끊어졌다. 홍순복이 감형관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그대가 왕명을 받들어 처형을 감독하면서, 썩은 노끈으로 사형수의
목을 맨단 말인가"
  호통을 칠 적에 그의 말과 얼굴빛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는 아들을
돌아보고 이렇게 말했다.
  "고암으로 신주를 쓰라"
  홍순복은 타고난 자질이 개결하였다. 처조 김맹유가
고을 수령이 되었는데, 홍순복이 우연히 그 고을에 들렀다. 김맹유가 물었다.
  "그대가 그리도 궁핍한데, 어찌 하나도 구하는 것이 없는가?"
  "공이 관물을 주는 것도 부당하고 내가 받는 것도 부당합니다"
  "사소한 노자가 의리에 무슨 해로울 것이 있겠는가"
  "그만 둘 수 없다면 꿀 5합, 개가죽 반 벌이면 족합니다"
  김맹유가 이 물건들을 싸서 주었다. 홍순복은 집에 돌아와서 다시
돌려주며 말하였다.
  "개가죽은 말 안장이 끊어지는 근심이 있을 것을 염려한 때문이고
꿀은 먼 길에 갈증을 두려워한 것이었는데, 지금 다행히 면하였으니
그것을 집에 두는 것은 의리에 옳지 못하므로 돌려보냅니다"

     돌부처에 미혹된 자들을 깨우친 이인형

  이인형(1436-1497)의 본관은 함안이고, 자는 공부이다.
세조 14년(1468)에 진사를 거쳐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벼슬은
대사헌에 이르렀다.
  일찍이 금산군수로 있을 적의 일이다. 성종 13년(1482) 무렵에
개령현 송방리에 사는 어떤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오래되어 눈, 코, 귀, 입이 모두 마모된 돌부처 하나를 얻어, 이를 밭가에
방치해 두었다. 우연히 천식증을 앓는 사람이 그 돌부처에
절을 하고 나서 병을 고쳐 영험이 있다고 여기게 되었고, 어떤 사람은
"빛이 비치었다"고 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남자 여자가 분잡하게 이르고 쌀, 베, 종이, 돈, 향, 초, 꽃, 과일을
가지고 오는 자가 밤낮 끊이지 않았다. 어떤 중이 와서
향화를 주관하자, 시주자가 기와집을 짓고 또 큰 사찰을
짓고자 하였다. 사족의 부녀들도 친히 와서 기도하고 개령현감,
금산훈도가 모두 그 아들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빌기도 하고 혹 자식을 점지해 주기를 빌기도 하였다.
  이때 이인형이 그 소문을 듣고 유생 및 사령군사를 보내어
그 중과 시주자를 잡아 쫓아 버렸다.
  이를 문간공 김종직이 시로 축하하였다.

  쑥대밭에 버려진 지 몇 해나 되었던가
  미련한 돌덩이가 무슨 신이 있으랴
  처음에는 나무 거사가 먹이 구하는 것 같더니
  점차로 돈 부수는 지방 사인 되었네

     종신토록 장가를 못 들어도 김안로의 사위는
되지 않겠다고 한 정희등

  정희등(?-1544)의 본관은 동래이고, 자는 원룡,
사간 구의 아들이다. 구의 호는 괴은이다.
조광조 등과 함께 기묘사류에 속했는데,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문을 닫고 틀어박혀 병을 핑계하고 자리에 앉아 18년이나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새며느리를 맞아 예를 드리는 날에 일어나
다니기를 평시처럼 하니, 집안 식구들이 비로소 병 때문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정희등은 조행이 독실하고 식견이 매우 넓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면
반드시 옷깃을 가다듬고 단정히 앉아 한차례 글을 읽되 비록 시간이
급하더라도 중지하지 않고 날마다 법도로 삼아 깊이 자득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중종 23년(1528)에 진사가 되고 중종 29년에 문과
급제하여 교리, 필선을 지냈다.
  정희등이 상처를 하자, 김안로가 딸의 배필로 삼으려 했다.
  "차라리 종신토록 장가를 들지 않더라도 권세가의 사위는 되지 않겠다"
  정희등이 끝내 끊어 버리고 응답하지 않자 김안로가 매우 유감으로
여겨 벼슬길이 막혔다. 김안로가 망하자 비로소 청직에 선발되었다.
  정희등이 본디 진복창의 사람됨이 간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구수담이 진복창의 재주와 기예를 크게 인정하여
극력 천거 발탁하므로, 정희등이 큰 소리로 반대하였다.
  "훗날 나라를 그르칠 수도 있는 간인을 시론에 참여하게 해서는 안 되오"
  진복창이 정희등에게 유감을 품은 것이 이때부터 비롯되었고, 구수담도
정희등이 너무 너그럽지 못한 것을 그르게 여겼다. 명종 즉위년(1545)에
정희등이 지평의 직에 있으면서 아뢰었다.
  "구수담, 박광우, 김저가 일찍이 옥당에 있으면서
신과 함께 이조에서 대간을 뽑을 때에 잘못 선발한 실수를 논하였습니다"
  이것은 오로지 간신 진복창을 지칭한 것이었다. 명종이 크게 성내어
정희등을 죄주려 하니, 대신이 회계하였다.
  "정희등이 강직하게 직언한 것을 죄주어서는 옳지 못합니다"
  이에 사헌부와 사간원의 양사 관원이 모두 교체되었다. 정희등이
출사하여 진복창이 앉았던 자리를 걷어내 불태우며 말하였다.
  "사군자가 간인이 앉던 자리에 앉을 수 없다"
  그 말을 듣는 사람은 모두 숙연해 하였다. 정희등이 용천으로
유배되어 갈 적에 어머니 김씨가 길까지 쫓아와 말하였다.
  "네가 젊을 때부터 정직하게 살아왔으니, 죄를 얻은들 무슨 부끄러울
것이 있겠느냐. 지금 영결하게 되니 나는 실로 할 말이 없다"
  길에서 그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정희등은
이날 밤에 곤장 맞은 여독으로 죽었다.
  뒤에 구수담이 죄를 받아 죽을 적에 탄식하며 말하였다.
  "내가 진복창의 간사함이 이에 이를 줄 몰랐으니, 장차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 가서 원룡(정희등의 자)을 만나겠느냐"
  정희등이 죽게 되자, 가산은 관에 몰수되어 염습할 수조차 없었다.
가족들은 시체 옆에서 울고 있을 뿐이었는데, 한밤중에 도성 사람들이
모여들어 무명 3백 필을 거두어 모아 주면서, "누구인지 묻지 말라" 하였다.
  장사지내는 날 영남에서 선비 1백여 인이 와서 조문하였는데, 모두
부의를 냈지만 성명을 말하지 않고 갔다.

     글은 배우되 과거에 응시하지 말라고 아들을 가르친 임형수

  임형수(1504-1547)의 본관은 평택이고, 자는 사수,
호는 금호이다. 중종 26년(1531)에 생원이 되고 중종 3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에서 사가독서한 뒤에 설서를
지냈다. 수찬으로 회령 판관에 임명되어 임지로
나가는데, 어떤 때는 이틀에 한 끼만을 먹고 어떤 때에는 수일의
분량을 한꺼번에 먹으면서 말하였다.
  "장수가 되는 사람은 이러한 습성을 들이지 않을 수 없다"
  변방의 오랑캐를 잘 어루만져 그들의 환심을 얻고, '오산가'
수백 구를 지어 북방의 풍물을 기록하였다.
  명종 2년(1547) 양재역 벽서사건이 일어나 사사
당할 때 의기양양함이 평일과 같았다.
  그는 태연히 안뜰에 들어가 부모에게 두 번 절하고 나왔다. 임형수는
채 열 살이 못 된 아들을 불러서 경계하였다.
  "절대로 글을 배우지 말아라"
  아들이 돌아서자, 다시 불러 말하였다.
  "만일 글을 배우지 않으면 무식한 사람이 될 터이니, 글은 배우되 과거
시험에는 응시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그는 사약을 끌어다가 끓어 앉아 마시었다. 어떤 종이 울면서 안주를
올리니, 임형수가 그것을 물리치며 말하였다.
  "상여꾼들이 벌을 줄 때에도 안주를 쓰지 않는 법인데, 이것은 어떤 술이냐"
  임형수는 호당에 있을 당시 퇴계 이황과 같이 있었는데,
이황에게 사나이의 호쾌한 취미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큰 눈이 산에 가득히 쌓일 때 검은 돈피 가죽을 입고 흰 깃이 달린
긴 화살을 허리에 차고, 어깨에는 천근 짜리 센 각궁을 걸고 철총마를
타고 채찍을 휘두르며 골짜기로 달려들어가면, 큰 바람이
골짜기에서 일어나고 천만 그루의 나무가 진동한다. 그런데, 느닷없이
큰 멧돼지가 놀라 일어나서 길을 헤매며 달아날 때에 곧 활을 한껏
잡아당겨 쏘아 맞히고는 말에서 내려 칼을 뽑아 그 돼지의 멱을 딴 다음,
고목을 베어 불을 피워 놓고 긴 꼬챙이로 그 고기를 꿰어서 구우면
기름과 피가 뚝뚝 떨어진다. 이때 호상(걸상)에 걸터앉아 고기를
저며서 먹으며 큼직한 은대접에 술을 가득히 부어 따뜻하게 데워서
시원하게 마신다. 얼큰히 취할 때에 하늘을 쳐다보면 골짜기의 구름이
눈이 되어 비단처럼 펄펄 내려 취한 얼굴에 흩날리게 된다. 이것이 장쾌한
일이네"
  그 말을 들은 이황은, 임형수의 인품을 말할 때면 언제나 그가 하던
말을 뇌었다.
  "그 기상의 호탕함을 지금도 상상하겠다"

     왕희지의 필법과 한퇴지의 문장으로 일컬어진 김구

  김구(1488-1534)의 본관은 광주이고, 자는 대유,
호는 자암이다. 예조 판서 김예몽의 증손이다. 16세에
한성시에 장원하고, 중종 2년(1507)에 생원, 진사시에 모두
장원하였으며, 동왕 8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기묘사화 때에 부제학으로서 개령으로 귀양갔다가 남해로
옮겨 섬 속에서 13년을 지내는 동안 부모가 모두 세상을 떠났다.
중종 26년에 임피로 옮겼다가 동왕 28년에 석방되자, 예산으로
달려가서 부모의 분묘에서 곡하고 추모의 정을 펴기
위해 아침, 저녁으로 분묘에 올라 눈물을 흘리니, 그 자리에 있던 풀과
나무가 다 말라 버렸다. 그로 인해 병이 들어 1년 만에 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쳤다.
  김안국이 소싯적에 생원, 진사의 회시에 모두 장원이
되었는데, 방을 발표할 때에 "한 사람이 두 장원이 될 수 없다"
하여 진사는 2등이 되니, 평생 그것을 한으로 여겼다. 김안국이
시관이었을 때 김구가 생원, 진사시에 모두 장원이 되자, 모든 시관이
"한 사람이 두 장원이 될 수 없다" 하였지만, 김안국이 분연히 말하였다.
  "왕희지의 글씨와 한퇴지의 문장으로 무슨 불가함이 있겠는가"
  그리하여 김구는 드디어 두 장원이 되었다.
  기묘사화가 일어난 그 이듬해인 중종 15년(1520) 봄에 김구의 부인이
말 한 필에 짐 한 바리를 싣고 종 5, 6명을 데리고 김구의 적소를
따라갔다. 그때 김식이 도망 중이어서 현상을 걸고 그를 체포하는
영이 매우 엄하여, 갈림길에 나졸들이 늘어서서 지키며 여행자는
모두 수색 검문한 뒤에야 보냈다. 경상감사 반석평이 노상에서
한 부인의 행차가 붙잡혀서 가지 못하고 길가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보고 측은하게 여겨 양곡을 주고 또 감영의 소속 아전을 시켜 그
일행을 호송하도록 하였다. 김구는 마침내 죽림에 집을 짓고 살았다.
  김구는 문장이 기이하고 필력이 굳세어서, 위의 종유와
진의 왕희지의 필법을 사모하여 본받았다. 중국 사람이
자기 글씨를 귀중하게 여긴다는 말을 들은 뒤로 글씨를 쓰지 않아서
필적이 세상에 전하는 것이 드물다. 김구의 필법을 '인수체'라
했으니, 이것은 김구가 인수방에 살았기 때문이다.
  김구가 한번은 옥당에 당직하고 있을 때이다. 달밤에 촛불을
밝히고 글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므로 나가
보았더니, 임금이 걸어서 옥당까지 오고 별감이 술을 가지고
따라왔다. 김구가 종종 걸음으로 나가 엎드리자 임금이 말했다.
  "달이 이처럼 밝으므로, 글 읽는 소리를 듣고 내가 이곳에 이르렀다.
어찌 임금과 신하의 예로 대하랴. 마땅히 벗으로 서로 대해야 한다"
  이조 판서에 증직되고 시호는 문의이다.

     예견과 지혜로 엄청난 화를 면한 이자

  이자(1480-1533)의 본관은 한산이고, 목은 이색의
후손이다. 연산군 7년(1501)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3년 뒤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좌참찬에 이르렀다. 중종 14년에
음성으로 물러나 살면서 호를 음애라 하였다. 그 뒤 충주의
토계로 이사하여 집 이름을 몽암이라 하고, 호를 몽옹이라
하기도 하였는데, 54세에 죽었다. 그곳에 서원이 있다.
  이자가 중종 13년(1518)에 조선 개국 이래로 말썽이 되었던 이씨
왕조의 조상이 명나라 서적에 잘못 기재된 것을 바로잡는 임무를 띤
종계변무주청사로 한충, 남곤과 함께 연경에
갔다. 그곳에서 남곤이 병에 걸리자, 한충은 간호할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말하였다.
  "저놈이 죽지 않으면 반드시 선비들의 씨를 없애고 말 것이다"
  이자는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어 지성으로 간호하였다.
  "이 간사한 인물이 죽는 것은 아까울 것이 없지만 만리나 되는 타국에
함께 와서 죽어 가는 꼴을 어떻게 앉아서 보기만 하고 구원하지 않는단 말이오"
  이자는 끝까지 남곤을 돌보아 죽지 않도록 하였다. 그 뒤 기묘사화
때에 이자가 잡혀갔다가 석방이 된 것은 남곤이 지난날 간호 받은 일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자가 김안로와는 인척 관계가 있고, 또 주계군 이심원에게
같이 글을 배운 사이이지만 두 사람이 평생토록 행한
일들은 선행과 악행이 서로 반대가 되었으니, 김안로는 언제나 남을
해치려는 마음이 있었다.
  기묘사화 뒤에 이자가 용궁으로 쫓겨나 있었는데 중종 27년에
김안로가 좌의정으로 함창에 있는 자기 선산에 성묘하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용궁을 지나면서 이자를 찾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자를 꺼려하고 미워하기 때문에 시험삼아 동정을 탐지해
보려는 뜻에서였다. 하지만 이자는 그의 마음 속을 먼저 환히 들여다보고
김안로가 그곳으로 올 때쯤 되어 홰나무꽃을 달인 물에 얼굴을 씻고
이불을 두르고 앉아 김안로를 맞았다. 김안로가 이자의 손을 잡고 은근히
눈물을 흘리면서 작별하고 나와서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다.
  "음애공은 이제 끝장이 났다. 염려할 게 없다"

     술을 마구 마셔 위장이 못쓰게 된 유운

  유운(1485-1528)의 본관은 문화이고, 자는 종룡,
호는 항재이다. 연산군 7년(1501)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3년 뒤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기묘사화 때 조광조를 변호하다가 배척을
당하여 파직되었으며, 2년 뒤에는 벼슬과 품계를 빼앗기고 관원의
명부에서 삭제되었다. 유운은 성격이 활달하고 조행에 유의하지
않아 당시 집권 세력의 논의에 용납되지 않았다.
  외직으로 나가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단양군의 객사에다
시 한 편을 써 놓았다.

  흉측하고 미련한 돌 모두 주워다
  깨끗한 물 흐르는 데다 고루 깔아나 볼까
  바람도 잡고 바다신마저 가두고서
  그 뒤에야 나의 배를 띄우리

  간교한 무리들이 그 시를 외워 권하면서 유운이 신진 사류들의
고상하고 깨끗한 언론에 용납되지 않아 이런 시를 지은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그러다가 중종 14년에 대사헌으로 발탁되자 그날로 임금에게 취임
인사를 하고 곧장 의금부로 달려가서 감옥의 문틈으로 그곳에
갇혀 있는 조광조의 자를 부르며 그의 손을 잡고 통곡하였다.
  "오래 전부터 일이 있으리란 것을 알았으나 이런 극한 상황에까지
이를 줄을 어찌 상상이나 하였겠나"
  그는 조광조를 극력 비호하다가 탄핵을 당하여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권세를 잡고 있던 자들이 없는 사실을 꾸며 해치려고 하여
일이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지경에 놓이자 세상을 한탄하며 술을
하도 많이 마셔 위장을 버려 죽음에 이르렀다.
  중종 13년 무렵에 독서당 관원과 선배들이 모여 연회를 베풀었다.
연회가 끝난 뒤에 조광조가 유운과 함께 자게 되었다. 밤중에 유운이
술이 다 깨지 않아 벗은 채로 일어나 조광조를 밟고 넘어갔다. 난간에
서서 소변을 보고 돌아올 때도 그렇게 하자, 조광조가 준엄하게 말했다.
  "종룡(유운의 자), 이게 무슨 꼴인가?"
  "이게 좋은 걸세. 자네가 부르짖는 '소학'의 도리는 본받고 싶지 않네"
  유운이 부끄러움 없이 이렇게 말하자 조광조 또한 어찌 할 수가 없었다.
그의 풍채와 인품을 아껴서 단지 언행을 단속하도록 권면할 뿐이었다.

     조정과 저자를 숙연하게 한 대사헌 최숙생

  최숙생(1457-1520)의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자진,
호는 고재이다. 성종 23년(1492)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우찬성에 이르렀다. 중종 14년(1519)에 벼슬과 품계를 빼앗기고 관원의
명부에서 삭제되었으며 이듬해에 죽었다.
  최숙생이 사헌부 대사헌이었을 적에 서울 사대문 안의 무당들을
모두 내쫓아 동활인서(도성의 의료기관)와 서활인서(도성의
의료기관)에 모이도록 명령을 내리고, 성남에 있는 비구니들이
사는 건물을 철거시켰으며, 불상을 헐어 버리고 중들이
서울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사대부들의 집 가운데
규정을 위반하고 멋대로 지은 칸살은 철저히 수색하여 죄를 다스리는
동시에 위반한 칸살은 여지없이 철거시키는 등 무너진 기강을 다시
일으키는데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자 조정과 저자가 숙연해져 범법 행위를
수치로 여겼다.
  그 무렵 이세정이 경서의 뜻을 연구하는 학문에는 정통하고
능숙하였으나 여러 차례 과거에 실패하였다. 제자들을 가르치는데
힘써 이장곤, 성몽정, 김세필, 김안국, 김정국 등이
모두 그에게 배웠다. 이세정은 성품이
치밀하지 못하고 산만하며 옹졸하고 우직하여 재간이 없었으나, 같은
시기에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힘을 모아 조정에 추천하여 청양헌감에
임명된 일이 있었다.
  그런데 마침 그 시기에 최숙생이 새로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하게 되자,
이세정의 여러 제자들이 남대문 밖까지 나와 전송하면서 청양헌감에
대하여 넌지시 부탁하였다.
  "우리 스승에게는 학문과 깨끗한 지조가 있으니 조심스럽게 대하고
고과를 함부로 깎아 내리지 마시오"
  "그렇게 하겠소"
  최숙생이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고 떠났다. 그러나 최숙생이 충청
감영에 도착하자마자 청양현감을 근무평점을 꼴지로 매겨 파직시켜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뒤 최숙생이 갈려서 중앙으로 돌아오자
김정국 등 세 사람이 최숙생을 찾아가 따졌다.
  "충청도 한 도 안에 교활한 관리로 주민을 해롭게 하는 자가 그렇게도
없어서 하필이면 조세징수 실적이 부진한 자의 고과에 꼴지를 매겼단
말이오. 당신의 성적 고과가 잘못된 것 아니오?"
  "다른 고을 수령의 경우는 비록 교활하다 하더라도 도적은 제 하나
뿐에 불과하므로 주민들이 오히려 견뎌 낼 수 있소. 청양현감 자신은
비록 깨끗하긴 하지만 통제불능의 큰 도적인 고을의 여섯 아전이 그 밑에
있으니 주민들이 견딜 수가 없소. 그리고 또 뱃속이 텅빈 사람이 어떻게
한 고을을 다스리겠소?"
  "스승님의 뱃속에는 육경이 꽉 차 있는데 어찌하여 텅비었다고 말하시오?"
  김정국이 묻자 최숙생이 대답하였다.
  "당신들이 스승 뱃속의 육경을 모두 가져다 나누어 자신들의 창자와
뱃속에다 가득 채워 가지고 그것으로 과거에 합격하고 출세를 하였으니,
당신 스승의 배가 아무리 크더라도 거기에 남은 것이 무엇이 있겠소"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큰 소리로 웃었다.

     "남자가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 하고
중종반정을 도모한 성희안

  성희안(1461-1513)의 본관은 창녕이고, 자는 우옹,
호는 인재이다. 판관이었던 아버지 성찬이 덕천군
이후생의 딸에게 장가들어 희안을 낳았다. 그의 어머니가
희안을 낳을 무렵 꿈에 신인이 와서 지팡이 하나를 주면서 말하였다.
  "이 지팡이를 짚고 다녀 너의 집안을 번창하게 하라"
  그런 일이 있고 난 후에 태어난 성희안은 20세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성종 16년(1485) 21세 되던 해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2년 뒤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시묘하면서 동생
희옹과 같이 산 속에서 마를 캐어 아침, 저녁의 제물로 드렸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 피곤해서 동생과 함께 바위 위에서 졸고
있었는데, 꿈에 그의 아버지가 나타나 도적이 온다고 소리치므로 깜짝 놀라
깨어 보니 큰 호랑이 한 마리가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희안이 즉시
손을 휘두르며 돌을 던져 호랑이를 쫓았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들의
효성에 감동되어 위험에서 벗어났다고 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성종이 그를 불러다 위로하고 새매를 내려 주었다.
  "너에게 늙은 어머니가 있지만 맛있는 음식을 제공할 수 없을 것 같기에
이를 특별히 내려 주니 사냥하는 도구로 삼으라"
  희안이 임금의 은총을 받으면 항상 골수에 새겨 두고 목숨을 바쳐
충성하기로 다짐하였다.
  연산군이 양화도의 망원정에서 놀이할 때에 희안이
이조 참판으로 그 행차에 수행하였다. 연산군이 여러 신하들에게 시를
짓도록 명령하자 희안이 이렇게 지었다.

  성상의 마음은 원래 맑은 물이 흐르는
  강가의 경치를 좋아하지 않는다

  연산군이 자신을 은근히 비난하며 풍자하는 내용이라고 하여 몹시
화를 내며 그의 벼슬을 파면하고 기용하지 않았다.
  연산군의 음탕하고 포악함이 날로 더 심해져 종묘와 사직이
위태롭게 되자 희안이 매우 분개하며 어지러운 정국을 안정시켜
질서가 있는 세상으로 되돌리려는 뜻이 있기는 하였지만, 함께 일을
계획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박원종이 무사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와 같이 도모하고 싶었으나 만에 하나 뜻이 같은 사이가 아니면
어쩌나 하고 그에게 말을 꺼내기가 무척 어려웠다. 그런데 우연히도 같은
동리에 사는 신윤무란 사람이 박원종과 매우 가까운 사이임을
알았다. 희안이 그 사람을 시켜 은밀한 뜻을 시험하게 하였더니
박원종이 옷깃을 떨치고 일어나며 말했다.
  "내가 울분을 쌓아온 지 오래이다"
  희안이 그제야 밤낮으로 원종의 집에 가서 통곡하며 말했다.
  "남자가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는데 종묘와 사직이 위태롭게
된 꼴을 어찌 보기만 하고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소?"
  그들은 마침내 반정할 결심을 하였다. 이조 판서인 유순정이
당시에 인망이 있었고 그도 반정 거사에 참여할 뜻이 있음을 알고서
연산군 12년 9월 2일에 충성심으로 분기한 인사들이 앞장서서 임금을
폐위시켜 연산군으로 삼고, 지성대군을 추대하였다. 그가 곧
조선조 11대 임금 중종이다.
  그 뒤 국가를 안정시킨 1등 공신으로 공훈명부에 기록되고 창산부원군에
봉하여졌다. 박원종, 유순정 등과 나라의 어지러움을 평정시킨 뒤에
서로 번갈아 가며 임금을 보필하였으니 세상에서 일컫는 반정삼대신이다.
  중종이 삼대신을 대우하기를 보통 신하들과 다르게 하여 조정에서
물러 나갈 경우는 그들을 위하여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이 문을 나간 뒤에야
도로 자리에 앉았다고 하는데, 삼대신은 그런 사실을 몰랐다. 성희안이
노쇠하고 병이 들어 조정에서 물러나올 때에 매우 느린 걸음으로
문에 이르자 중종이 말하였다.
  "정승은 성상께서 기립하여 계심을 모르십니까? 걸음걸이가 어찌
그리도 느립니까?"
  성희안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늙은 것이 죽을 곳을 몰랐습니다. 옛날 한나라 때 곽씨 일족이
죽음을 당한 화가 곽광이 선제를 모시고 수레를 탄 시점에서
싹텄으니, 신하로서 임금이 두려워하는 위엄을 지니고서 처음부터
끝까지 잘 보전한 자는 없었습니다"
  중종 2년에 정승에 임명되어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53세에 죽었다.
시호는 충정이고 중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이시애난 때 죽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은 신용개

  신용개(1453-1519)의 본관은 고령이고, 자는 개지,
호는 이요정 또는 송계이며, 신숙주의 손자이다.
성종 14년(1483)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5년 뒤에 문과에 합격하였다.
연산군 때에 영광으로 귀양갔다가 중종반정이 성공하자
형조 참판으로 불려 왔고, 대제학에 올랐다.
  신용개는 타고난 자질과 인품이 너그러웠으나 언뜻 바라보면 범할
수 없는 의젓한 위엄을 지녔다. 이시애의 난리에 그의 아버지
신면이 함길도 관찰사로 갑자기 닥친 변고에 대응하지 못하여
대청 위의 후미진 다락 틈에 숨어 있었다. 적도들이 그를 찾다가
찾지 못하고 막 돌아가려고 하는데, 어느 아전이 그가 숨어 있는 곳을
알려주어 마침내 살해되고 말았다.
  신용개가 장성하자 그 원수를 기어이 갚고야 말겠다고 하여 홍유손과
교유하면서 여러 차례 함길도에 가서 그 아전의 얼굴 생김새와
성명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아전이 서울에 왔는데
신용개는 당시 의정부 사인이었다. 그래서 홍유손과
함께 어둠을 틈타 도끼를 끼고 그 아전이 머물고 있는 곳을 찾아갔다.
그는 홍유손을 시켜 마치 관청의 일로 서로 알려야 할 사안이 있는
것처럼 하여 불러내게 하고는 뒤에서 도끼로 찍어 죽였다.
  신용개는 술을 좋아하는 성격이어서 가끔 늙은 여종을 불러 서로 큰
술잔을 기울이며 취하도록 마셨다. 국화 여덟 분을 길렀는데, 마침
가을철이어서 국화가 활짝 피었으므로 마루에 들여놓았더니 높이가
대들보에 닿을 듯하였다. 신용개가 그 향기를 사랑하고 완상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하루는 그가 집안 사람들에게 일렀다.
  "오늘은 여덟 분의 훌륭한 손님이 찾아올 터이니 술과 안주를 장만해
두고 기다리라"
  그러나 해가 지려고 하는데도 조용하기만 하고 손님은 오지 않았다.
집안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기자 신용개가 말하였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그러는 사이 달이 떠서 빛이 방안으로 들어오니 꽃빛은 난만하고
달빛은 희고 깨끗하였다. 신용개가 그제야 술을 내오라 하였다.
  "이것이 나의 아름다운 손님이다"
  그가 여덟 개의 국화 화분을 가리키며, 각각 앞에다 좋은 안주를 놓았다.
  "내가 마땅히 술을 권하리라"
  그가 국화 앞에 은도배로 각기 두 잔씩 따라 주고 자신도 취하였다.
중종 11년에 정승으로 임명되어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57세에
죽었다. 시호는 문경이다.

     대사간을 시켜 준다고 꾀는 심정을 꾸짖은 성세창

  성세창(1481-1548)의 본관은 창녕이고, 자는 번중,
호는 둔재이다. 예조 판서 성현의 아들이며, 김굉필의
제자이다. 연산군 7년(1501)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중종 2년(1507)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동왕 23년에 국문을 받고 평해로
귀양갔다가 김안로가 처벌받은 뒤에 불려 왔다. 인종 원년에
정승이 되어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이듬해 장연으로 귀양가서
그곳에서 죽었다.
  이보다 앞서 중종 14년에 승지로 있으면서 시국이 위태롭게 될 기미를
알았다. 오래 전부터 김정, 이자와 친하였는데 매번
그들에게 서슬이 너무 날카롭다는 것으로 경계하였다. 그 이듬해에
일정한 직무가 없는 벼슬에 임명되어 집에 있었는데, 심정이 그가
청류들과는 뜻이 다르다고 여겨 성세창의 집을 찾아와 사간원
대사간을 시켜준다고 꾀었다. 성세창은 자신을 더럽힐까 염려하여 사양했다.
  "용렬하고 우둔한 사람이 어떻게 그 직책을 감당하겠습니까마는
지난날 국가에서 백면서생들을 처벌한 것은 실제로 애매하며
그들을 처벌하자고 북문으로 들어가 비밀리에 아뢴 것은 매우
올바르지 못하오. 언관(간관)의 직책에 있는 자는 비록 이미 지나간
일이라 하더라도 의당 바로 간하여 그 잘못을 규명해야 할 것이오"
  심정은 얼굴빛이 변하여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이 일로 당시
재상들의 비위를 크게 거슬렀다.
  남곤이 죽자 정광필이 다시 정승이 되었다. 중종 23년에
기묘사화에 화를 당한 사람들을 조정하려는 의논이 있었는데
이때 성세창이 이조 참판으로 있었다. 성세창은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학식이 뛰어났는데, 그의 문장은 매우 법도가 있고 우아하였다. 오랫동안
예문관에 있다가 대제학을 맞게 되자 여러 선비들의 모범이 되었다.
필법, 서화와 음률에도 정통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삼절이라고 지목하였다.

     천수를 다하고 부귀를 누린 사람으로 손꼽히는 소세양

  소세양(1486-1562)의 본관은 진주이고, 자는 언겸,
호는 양곡이며 도사 소자파의 아들이다. 중종
4년(1509)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어서 문과에 급제하여 독서당에
들어갔다. 정언으로 임금을 알현하고 모시면서 현덕왕후의
위호를 회복시켜야 한다고 주청하였는데, 말씨가 의분에 차 있으므로
즉시 중종의 윤허를 받기도 하였다.
  신광한, 정사룡과는 같은 시기의 인물이었으며, 이행이
소세양을 가장 칭찬하고 마음을 터놓았다. 그가 여러 번 임금에게 아뢰었다.
  "소세양은 당연히 대제학이 되어야 할 인재인데 하위직에 두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통정대부에서 자헌대부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행이
주청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소세양이 부모를 봉양하려고 청원하여
홍주목사에 임명되었는데, 부임한 지 몇 달이 채 안 되어 이행이
또 아뢰었다.
  "문장이 뛰어난 인재를 외직에서 근무하게 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임금이 즉시 다시 불러들이도록 명하였다. 벼슬은 판중
추부사 대제학에 이르렀으며, 문장과 필법은 모두 당세에 이름이 났다.
일찍이 관직에서 물러나 집에 있으면서 맑고 한가한 복을 누린 지 20년에
이르르니, 근세에 글 잘하는 사람 치고 천수를 다하고 부귀를 누린
이로 그보다 나은 자가 없었다.
  소세양이 우찬성이었을 때에 동료였던 상진은 오히려 벼슬이
소세양보다 낮았었다. 그러다가 상징이 정승으로 임명됨에 이르러 학을
그린 두루마리를 가지고 소세양에게 시를 써 주기를 요청하자
소세양이 한 편의 절구를 써 주었다.

  쓸쓸하고 외로운 그림자에 강가는 어둠이 깔리고
  붉게 시든 여귀꽃은 양쪽 언덕을 음산하게 하네
  부질없이 가을 바람을 향하여 옛 짝을 불러보건만
  정처 없는 구름과 물 만겹으로 깊숙이 흘러간 줄 모르는구려

     백년 후를 내다보고 소나무를 심은 황형

  황형(1459-1520)의 본관은 후창이며, 자는 언평이다.
성종 11년(1480)에 20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고 6년 뒤에
중시에 장원하여 승지를 역임하고 벼슬이 공조 판서에 이르렀다.
  황형의 시골집이 강화도의 연미정에 있었는데, 그가
그곳에 소나무 수천 그루를 심었다.
  사람들이 의아해 하며 물었다.
  "대감께서 이미 늙었는데 무엇하러 그렇게 많이 심으십니까?"
  "세월이 지나면 저절로 알게 될 것이오"
  그러다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에 김천일, 최원이
들어와서 강화도를 보전하는데, 배와 기구를 만들 때 모두 그때 심었던
나무를 베어다 쓰고도 남았다. 그리고 정유재란 때에 양호가
선조대왕을 모시고 강화도로 가려고 할 적에 관에서 그 소나무를
베어다 행궁을 짓고 집과 성책을 만들었다. 사람들이 그제야 황형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
  황형이 박원종을 대신하여 함경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임지로
떠나던 날 박원종이 술을 가지고 동쪽의 교외까지 나와 전송하면서
'나라에 큰일이 있으니 장군은 잠깐 머무는 것이 좋겠소'라는
여덟 글자를 손바닥에 써서 술을 권하는 틈에 가만히
보여주었는데, 이것은 반정 계획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황형은
취한 것을 핑계로 못 본 체하고 갔다가 포천에 이르러 반정된
것을 들었다.
  강화도에 있던 옛 집이 지금은 월곶진의 관사가 되었는데
건물을 지은 구조가 튼튼하여 새 것처럼 전해지며, 그 집을 고치려고
하면 문득 재변이 생긴다고 한다. 그 집의 뜰 아래 무더기로 된 대나무가
있는데 이것은 그가 대마도에서 회군할 때에 가지고 와서
손수 심은 것이라 한다.
  62세에 이르러 죽었으며, 시호는 장무이다.

     관찰사를 훈계한 뒤 군수 자리를 버리고 떠난 조언형

  조언형(1469-1526)의 본관은 창녕이고, 자는 형지이다.
연산군 10년(1504)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낭관을 역임하였다.
조언형의 성품은 악한 것을 미워하고 착한 것을 좋아하여 적당히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행동을 같이할 수 없어 이조 낭관을
거처 집의에 이르기까지 여러 번 좌절하였다가 다시 일어났다.
  강혼과는 어려서부터 가까운 사이였는데, 자라서도 우정이
변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강혼이 연산군 때에 하는 짓을 보고는 분하게
여기며 미워하기를 마지않았다. 중종반정 초기에 단천군수로
있었는데, 강혼이 당시 함경도 관찰사로서 단천 고을에 순시하러 온다는
말을 듣고, 조언형이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갈 행장을 꾸리게 하고
집안 사람에게 말하여 탁주 한 통을 준비하라고 하였다.
  "관찰사가 곧 오실 터인데 나가서 정중히 맞이하는 것이 예의에
걸맞습니다"
  아전이 와서 아뢰었으나 조언형은 병을 핑계 대며 나가지 않았다.
날이 어두워지자 조언형이 감색의 직령에다 분투를
끌고 종 하나를 시켜 술통을 메게 하고, 바로 상방으로 나아갔다.
  "혼지(강혼의 자) 어디 있는가?"
  강혼이 그 목소리를 듣고 얼른 일어나 문을 열고 그를 맞이하였다.
  "나 여기 있네"
  "날씨가 차가운데 자네 한잔 마시려나?"
  조언형이 자리에 앉아 안부도 묻기 전에 먼저, 스스로 큰 잔을 들어
마시는데 안주가 없었다. 강혼 역시 제 손으로 술을 부어 마셨다. 세
순배가 지났을 때에 조언형이 말문을 열었다.
  "지난날 자네가 한 짓은 개나 돼지만도 못하니 자네가 남긴 것을 누가
먹겠나. 자네가 젊었을 적에는 총명하고 민첩하여 사귈 만하다고
여겼는데 어찌 조그마한 재주를 가지고 보잘것없이 처신하기가 이렇게
극도에 이른단 말인가. 살아 있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겠기에 내가
편지를 보내어 절교하려 하다가 한번 만나 나무라려고 하던 터였는데,
이제 이미 서로 만나 보았으니 나는 내일 당장 떠날 것이네"
  다시 한잔 더 마시자고 하며 또 석 잔을 잇달아 주니 강혼은 고개를
떨군 채 말없이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이튿날 조언형이 마침내 벼슬을
버리고 떠났다. 뒤에 벼슬이 판교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이 바로 남명 조식이다. 조식의 의기가 격양하는
기풍은 대체로 물려받은 데가 있다고들 하였다.

     "직제학이 아니라 곡제학"이라고 준열하게 풍자한 주세붕

  주세붕(1495-1554)의 본관은 상주이고, 자는 경유,
호는 신재이다. 중종 17년(1522)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어
문과에 급제하였다.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가 독서당에 들어갔으며,
부제학을 역임하였다. 3년 뒤에는 헌납으로 김안로를 탄핵하였다.
  주세붕이 그의 어머니의 병이 위독하자 향을 피우고 하늘에 기도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날 밤 꿈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 흰 실 여덟 타래를
주면서 병이 곧 나을 것이라고 했다.
  그 뒤 정말 어머니의 병이 낫고 80일을 더 살다가 죽었는데, 그제야
그 여덟 타래가 80일 동안 목숨을 연장시켜 준 징조였음을 알았다.
  주세붕이 일곱 살 때에 그의 어머니가 오랫동안 병석에 있어 빗질을
못하자 자신의 머리를 감고서 기름을 바른 뒤 그의 어머니 머리카락에다
갖다 대어 이가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건너오게 하니, 주위 사람들이
모두 그의 효성을 기특하게 여겼다.
  그 뒤 그의 아버지상을 당하여 산소 앞에 여막을 짓고 그곳에서
거처하였는데 3일에 한번씩 내려와서 어머니를 뵈면서도 자기 방에는
한 차례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의 집에 개가 한 마리가 있었는데 주세붕이 출입할 때마다 따라다녔다.
그런데 주세붕이 상주가 된 뒤로는 그 개에게 고기를 주어도 먹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주세붕의 효성이 짐승까지 감동시켜 그렇다고들
여겼다.
  주세붕이 홍문관에 있을 때에 직제학이 바르지 못한 의논을
하므로 주세붕이 면대하여 공박하기를,
  "귀하는 직제학이 아니라 곡제학이오" 하니, 그 사람이 매우 부끄러워하였다.
  중종 36년(1541)에 풍기군수가 되어 문성공 안유가
살던 옛 터에다 사우를 지어 봄가을로 제향을 지내며
백운서원이라고 불렀다. 백운서원은 좌우의 질서가
정연하였다. 주민들 가운데 준수한 자를 모아서 학문을 강론하며 연습하게
하였고, 곡식을 저축하고 남은 것을 가져다 학생들의 숙식 자료로
제공하였으며, 녹봉에서 얼마를 떼어 경전과 사기 등의 서적을
구입하여 강독하는 데 대비하도록 하였다. 서원 터를 처음 닦을
때에 그 터에서 구리로 된 그릇 3백여 근을 얻게 되어 그것을 팔아
경비로 썼다.
  그 뒤 명종 5년(1550)에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백성의
교화는 임금을 경유라지 않으면 뒷날 반드시 퇴폐한다는 취지로
감사에게 편지를 보내어 임금에게 보고를 드리되, 송나라
백록동 서원 학규에 의거하여 임금이 서원 이름을
짓고 편액을 써 주며 겸해서 전토와 노비를 내려 주어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열심히 공부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원하도록 하였다. 감사
심통원이 그의 말대로 임금에게 보고하여 소수서원이란
이름을 지어 내려 주고, 대제학 신광한에게 서원 기문을
짓도록 명하였다. 또한 그 일로 인하여 사서와 오경
'성리대전' 등의 책을 내려 주었으니, 사원에 임금이
이름을 지어 주고 편액을 써서 내려 주는 일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명종 5년에 대사성으로서 불교를 배척하는 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주세붕은 조정에서 벼슬한 30년 동안을 한결같이 가난한 선비처럼
지내며 산과 못가에서 노니는 것을 좋아하여 지금까지 경치가 좋기로
이룸난 곳에는 가끔 그가 남긴 자취가 있다.
  60세에 죽었으며, 벼슬은 호조 참판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죽계지'와 '무릉지'가 있고 합천에 그를 제향하는
서원이 있다. 형의 아들 주박을 후사로 삼았는데,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를 지냈다.

     우스갯소리로 세상을 풍자했던 어득강

  어득강(1470-1550)의 본관은 함종이고, 자는 자유,
호는 관포 또는 혼돈산인이라고도 하였다. 성종 23년(1492)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연산군 2년(1496)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어득강은 우스갯소리를 잘하고 문장에 능하였다. 그는 영남 진주에
살았는데 학문을 좋아하고 우아한 운치를 즐겼다. 과거에 급제한
뒤로 외직을 자청하였고, 성품이 영리에는 담박하고 물러나는
데는 미련이 없었다. 벼슬하는 데 뜻을 두지 않아 조정에서 좋은
벼슬로 그를 불렀지만 모두 물리쳤다. 그는 조그마한 초가집을 산수
사이에다 지어 가족들과 함께 기거하지 않고 아이 종 하나만을
데리고 간단하게 아침, 저녁으로 밥을 지어 먹었다. 그의 생활은 담담하기가
속세를 떠난 중의 생활과 같았다. 그는 평소에 우스갯소리를 잘했다.
  어느 날 여러 사람들과 마주 앉아 있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전하였다.
  "도사 정만중이 세자시강원의 문학으로 갈려갔다"
  어득강이 문득 그 소리에 맞추어 대뜸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일찍이 문학이 되었는데 어째서 정만중이 문학이 되었다고 하는가?"
  좌우의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 물었더니 어득강이 대답하였다.
  "'논어'에 문학에는 자유(공자의 제자)와 자하(공자의
제자)라고 하지 않았던가"
  듣는 자들이 허리를 잡고 웃었는데, 어득강의 자가 자유였기
때문에 그렇게 우스갯소리를 한 것이었다. 벼슬은 대사간에 이르렀으나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간 뒤에는 조정에서 여러 번 불렀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특별히 가선대부로 증직되었으며, 저서에는 '동주집'이 있다.

     소인이란 비난을 면치 못한 주초위왕의 주인공 남곤

  남곤(1471-1527)의 본관은 의령이고, 자는 사화,
호는 지정이다. 고려 말엽에 참지문하를 지낸 남을진의
증손이다.
  김종직에게 글을 배워 시문을 잘 짓는다는 명성이 크게
떨쳐 박은, 이행, 홍언충 등과 더불어 명망이
높았다. 금남 최보는 그를 인재라고 칭찬하기도 하였다.
그의 눈은 생김새가 특이하여 눈동자가 겹으로 되어 있고, 용모와 거동은
단정하고 아담하였다. 성종 25년(1494)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어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이 되었고, 연산군 때에는 부제학으로 왕의
뜻을 거슬러 평안도 변방으로 귀양갔다.
  중종 2년(1507)에 남곤이 상중에 있으면서 박경이 반역을
도모한다고 무고하여 죽게 하였으며, 그 공로로 이조 참판에 승진되고
외직으로 나가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다가 정광필이 크게
기용할 만한 인재라고 추천하여 그를 불러다 대사헌에 임명하였다. 그런데
조정과 재야에서 오래도록 분하게 여겼던 공론에 따라 현덕왕비의
위호를 회복시키는 내용의 글을 올려 왕의 윤허를 받기는
하였으나 당시 사람들이 그를 경멸하여 대제학의 자리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안당이 그를 적극 추천하였다.
  "옛날부터 재주와 행실을 겸비한 인물은 많지 않았다. 남곤의 문장은
버릴 수 없다"
  마침내 남곤이 신용개를 대신하여 대제학이 되었다. 남곤은
한편으론 기뻐하고 한편으로는 유감을 품었다.
  그 무렵 조광조가 대사헌으로 남곤과 같이 경연에서
임금을 모시게 되었는데, 남곤이 조정의 의논을 회피하기 위해 능헌관이
되어 그 자리에 나오지 않았다. 그 일로 조광조가 그를 가볍게
보았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서울과 지방에 큰 지진이 있었으므로
임금이 걱정이 되고 두려워하여 심기가 편치 않았다.
  남곤이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위태로운 말로 불안해하고 있는 임금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하여 몰래 사람을 시켜 대궐 동산에 있는 나뭇잎에다
꿀물로 '조씨가 왕이 된다'는 네 글자를 쓰게
하였는데, 동산의 벌레들이 꿀물이 묻은 부분을 갉아먹어 '주초위왕'이란
글자 모양을 이루게 되었다. 이것이 훗날 큰 빌미가 되었던 것이다.
  중종 14년(1519) 11월 15일에 이장곤, 홍경주, 고형산을
꾀어 초저녁에 대궐의 북문인 신무문으로 들어가
왕에게 조광조 등이 당파를 만들어 과격한 일을 자행하고 정치를
어지럽히니 처벌해야 한다고 비밀리에 아뢰어 기묘사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는 모두 남곤이 주장한 것이었다.
  그 뒤 중종은 정광필을 갈아치우고 남곤을 승진시켜 좌의정으로
삼고, 김전을 영의정으로, 이유청을 우의정으로 삼아
세 정승의 자리를 채웠다.
  2년 뒤에 송사련의 옥사가 이루어지자 스스로 소장을
짓는데, 일부러 죄인을 다스리는 행정이 엄중하지 못한 것과
조정의 기강이 풀렸다는 몇 가지 조목을 거론하며 당인들을 얽어
모함하고 교묘하게 꾸며 자기 주장을 늘어놓고 반역에 동조하였다고
지목하여 되도록 엄중한 형벌과 준엄한 법을 적용하도록 힘을 써서
당시 사람들로 하여금 변론하거나 구원하지 못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중종 18년에 영의정으로 승진하였는데 5, 6년 사이에 그와
같이 일을 했던 사람들이 서로 잇달아 죽게 되자 인심은 속이기 어려운
터라 공론이 저절로 과격해졌다. 이러한 상황을 읽고 있던 남곤은 항상
불안하여 진나라 은호처럼 허공에 글씨를 쓰면서 근심을 품고
즐거운 빛이 없었다.
  "남들이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하더냐?"
  그가 친족들에게 묻자, 그들이 입을 모아 대답하였다.
  "반드시 소인이라는 비난을 모면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남곤이 마침내 집안 사람을 시켜 자신이 평생 동안 쓴 문고를
가져다 모두 태워 버리게 하였는데 '유자광전'만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중종 22년 57세로 죽었는데, 시호는 문경이다. 선조
초에 그의 벼슬을 깎아 없앴다.

     청맹과니라고 칭탁하고 청렴하게 산 남포

  남포(?-1540)는 지정 남곤의 동생이고, 자는 사미,
호는 지지당이다. 연산군 7년(1501)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에 문과 별시에 급제하여 벼슬이 직제학에
이르렀다. 그러나 나라일이 날마다 잘못되어 가는 것을 보고 세상일에
뜻을 끊고 청맹과니(당달봉사)라 칭탁하며 벼슬하지 않고 적성의
감악산에 숨어 항상 무명베 갓에다 해진 옷을 입고 국내의
산천을 두루 유람하면서 스스로 창랑거사, 소요자라고
일컬었으며, 가는 곳마다 자신의 성명을 말하지 않아 세상에서
그의 얼굴을 아는 이가 없었다.
  중종 16년(1521)에 비로소 감파동의 재사로 돌아와서
19년 뒤에 죽었는데 나이 82세였다. 그가 병이 나서 앓자 그의 아들
장령 남정진이 근무지인 곡산에서 돌아와 모셨다. 남포가는
아들에게 경계하였다.
  "네가 여덟 번 고을 수령으로 임명받아 세 번은 사양하고 다섯 번 
나갔던 것은 부모가 있음으로 해서 뜻을 굽힌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
집에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토지와 집이 있다. 집은 바람과 비를 가리기에
충분하고 토지는 죽이나 밥을 이어가기에 충분하니, 내가 죽은 뒤에는
다시 벼슬길에 나갈 계획을 하지 말아라. 그리고 묘갈에는 단지
공조의 옛 직함만 써야 한다. 전한과 직제학은 살아서 취임하지
않았는데 죽어서 어찌 묘에다 쓰랴"
  명종이 특별히 치하하며 옷감을 내려 주었다.
  "고 직제학 남포는 평생토록 영리는 멀리하고 물러나는 데는 미련이
없었다. 그 절개를 이미 가상히 여겼거니와 그의 아들 남정진 또한 이와
같이 청렴결백하니 비록 옛날의 훌륭한 관리라 하더라도 이 사람들보다
뛰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성균관 뜰에다 손수 은행나무를 심어 교훈을 남긴 윤탁

  윤탁(1472-1534)의 본관은 파평이고, 편감 윤사은의
아들이다. 자는 언명, 호는 평와이다. 연산군 7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어서 문과에 급제하였다.
  주계군 이심원에게 글을 배웠는데 주계군은 종실의
자제로서 성리에 관한 학문을 앞장서서 제창한 분이다.
윤탁은 갑자사화 때에 귀양갔었는데 중종이 왕위에 올라 그를 방치된
가운데서 기용하여 대사성에 임명하였다. 당시 정암 조광조와
여러 어진 이들이 모두 조정에 모여 도학을 제창하고
천명하면서 자신들이 강학하던 자리를 치워 버리고 모두 윤탁을
선생으로 추대하였다. 윤탁은 가르치기를 곡진하게 하고, 부지런한 것을
즐겁게 여겼다.
  퇴계 이황이 매양 선생에게서 들은 것이라고 하면서 그
내용을 열거하였으므로 배우는 자들이 윤탁을 윤 선생이라고 일컬었다.
그가 이야기하는 바 '대학'의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지식을
넓히는 학설도 송나라 주희가 연구하여 물려준
취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남곤, 심정 등이 기묘사화를 일으키려고 도모할
적에 윤탁이 죄정을 의논하는 일을 맡게 되었는데, 그는 즉시
사퇴하고 나가지 않았다. 그 일을 계기로 뭇 소인들이 윤탁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아 마침내는 파직되고 물리침을 당하였다.
  지금 성균관 뜰에 그가 손수 심은 은행나무 몇 그루가 있다. 윤탁은
매양 학생들에게 말하였다.
  "뿌리가 깊은 나무는 마지막에 틀림없이 무성하게 된다"
  때문에 그에게서 배운 이들은 모두 근본을 돈독하게 하고 실학을
힘쓰며 정정당당하여 그 스승의 명예를 떨어뜨리지 않았다. 중종 29년
개성유수로 임지에서 죽었다.

     인종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김인후

  김인후(1510-1560)의 본관은 울산이고, 자는 후지,
호는 하서이다. 중종 26년(1531) 22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하고 9년 뒤에 문과에 급제하여 독서당에 들어가 학업을 닦은 뒤
정자 겸 설서를 역임하였다.
  인종이 동궁으로 있을 때에 김인후를 만나 보고 크게 기뻐하여
은사와 예우가 날마다 융숭하였다. 그래서 간혹 김인후가 숙직하는
곳에 직접 찾아가서 조용히 어려운 데를 묻기도 하고 특별히 서책을
내려 주기도 하였으며, 또 대나무 묵화를 그려 주어 은미한 뜻을
내비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김인후가 어버이 봉양을 위해 외직으로 나가기를 청원하여
옥과현감이 되었다. 그 무렵 인종이 승하하였는데 부음이 전해지자
김인후는 놀랍고 슬퍼서 기절하였다가 다시 깨어났으나 그 일로
인하여 병이 들었으므로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뒤로는 어떤 관직에 임명되어도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선산 곁에다
재실을 짓고 '잠재'라 편액하고 그것으로 호를
삼았다. 송강 정철이 시를 지었다.

  동방에 처세하는 근본이 없더니
  유독 잠재옹이 있구려
  해마다 7월이 오면
  깊은 산중에서 통곡하도다

  이 시는 김인후가 매년 7월 1일 인종의 기신을 당하면 번번이
산골짜기로 들어가 밤새도록 통곡하다가 돌아오곤 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김인후는 천문, 지리, 의약, 산수, 율력에 환하여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가 일찍이 시를 지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위대한 두 분이 있으니
  원기로 뭉쳐진 공자와 진실로 다져진 주자이네

  시호는 문정이며 문묘에 종사되었다.

     아버지의 묘소에 언문으로 비를 세운 이문건

  이문건(1494-1567)의 본관은 성주이고, 자는 자발,
호는 점재 또는 휴수라고도 하였다. 중종 8년(1513)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5년 뒤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승지에 이르렀다.
이문건은 그의 중형 눌재 이충건과 정암
조광조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그러다가 조광조가 화를
당하게 되자 당시의 인사들이 겁에 질려 감히 조문조차 못하였지만
이문건은 그의 중형 및 문하생 한 사람과 같이 가서 조광조의 장례를
의식대로 지냈다. 그리고 인종이 동궁으로 있을 때에 이문건이 가까이서
오래도록 모셨으므로 가장 후한 예우를 받았으며, 어찰과
갓끈을 내려 주면서 총애하였다.
  중종이 세상을 떠나자 이문건이 빈전도감의 집례관으로서
명정과 시책 그리고 신주의 글씨를 모두 썼는데, 그의
전서는 세상에 널리 이름이 알려졌다. 그 뒤 을사사화가 일어났을
때에 승지로서 공신명부에 기록되었다가 뒤에 조카인 수찬 이휘의
화에 연좌되어 성주로 귀양갔다. 그곳에서 퇴계, 남명, 율곡 등
여러 선생들과 주고받은 글이 매우 많다.
  이문건이 운명할 무렵에 족보를 만들어 자손들의 이름을 미리 지어
놓았는데, 10여 대에 이르도록 적손과 지손으로 더러는 많기도
하고 더러는 적기도 하며 더러는 없기도 한 것이 한결같이 미리
만들어둔 족보와 들어맞았으며, 출생하였다가 일찍 죽은 자에 대해서는
곁에다 동그라미 표시를 해두었으니 대체로 미리 알았던 일들이 많았다.
그가 살아 있었을 적에는 그의 특이함을 아무도 몰랐다.
  그의 아버지 정자 이윤탁의 묘가 양주 노원에
있는데 그곳에 세운 비의 비문과 글씨는 다 이문건의 솜씨로 이루어진
것이다. 후손들이 먼 곳에 살고 있어 오래도록 성묘를 못하게 되자,
아무개가 그 주변을 점유하게 되었다. 근래 그 아무개가 묘 주변의 소나무를
베어내 이윤탁의 묘갈이 드러나게 되었는데, 완연히 새로한
것과 같았다. 그래서 산 밑에 사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아무개가 남의 선대의 묘가 있는 곳을 차지하고서 어떻게 비석과
무덤은 훼손하지 않았소?"
  "신령한 비석 때문입니다. 산 밑에 살고 있는 주민 가운데 질병에 걸린
자가 그곳에 기도하면 효험을 보게 되고, 나무하는 아이들이 혹시라도
그 비석에 흠집을 내기라도 하면 재앙이 따르게 되어 그 신령함이
이와 같은데 누가 감히 훼손하겠습니까?"
  이에 그 비문을 고찰하여 보니 앞면과 뒷면은 일반 비석과 같고 양쪽의
측면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한 문자가 있었다. 대체로 몇백 년 전에
언문으로 비석에 기록하였다는 것은 특이한 일이다.

  차마 어떻게 못할 비
  부모를 위하여 이 비를 세운다.
  누구인들 부모가 없을쏘냐.
  그렇다면 어떻게 차마 훼손하겠는가.
  비석도 차마 침범하지 못할 경우이면
  묘를 훼손하지 못한다는 것은 명백하니
  만대 후에라도 모면하게 될 줄 알리라.
  신령한 비
  신령한 비석이다.
  건드리는 사람은 앙화를 입으리라.
  이를 글 모르는 사람에게 알리노라.

     배가 침몰되는데도 태연했던 유희춘

  유희춘(1513-1577)의 본관은 선산이고, 자는 인중,
호는 미암이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게 총명하여 처음 글을
배울 적에 눈에 한번 거치면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였다. 신재
최산두의 가르침을 받았다. 모재 김안국의 문하에 종유하였는데,
모재가 그를 공경하여 제자로 대우하지 않았다.
  중종 33년(1538)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어서 문과에 급제하여
춘방과 홍문관의 관원을 역임하였다. 을사사화 때에는 정언의
자리에서 파직되었다. 명종 2년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됨으로써
죄가 추가되어 처음에 제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종성으로
옮겨지는 길이었다. 뱃길이 험하여 바람과 파도가 갑자기 일어 함께
가던 세 척의 배가 모두 침몰되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슬피 울먹였지만 유희춘은 얼굴빛이 태연하였다. 종성에서 19년
동안 있었는데 어려운 생활 속에 온갖 고생을 겪으면서 만 권의 책을
모두 읽고 '속몽구'를 지어 배우는 이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그의 부인 또한 문장에 능숙하였다. 혼자서 머나먼 길을 걸어
종성으로 남편을 따라올 때에 마천령을 지나게 되자 시를 읊었다.

  걷고 또 걸어 드디어 마천령에 이르니
  끝이 없는 동해가 거울처럼 평평하구려
  머나먼 길 아녀자가 무슨 일로 왔던고
  삼종의 의리는 중하고 나 한 몸은 가벼워서이네

  이 시를 보면 성정의 올바름을 얻었다고 할 만하다.
  선조가 처음 왕위에 올라 유희춘을 불러다 대사성에 임명하였으며,
벼슬이 부제학에 이르렀다.


     4.
     사림파의 수난

  임권이 언제인가 경연에 나아가 아뢰었다.
  "김안로가 조정에 있게 되자 소인으로서
일정한 주관이 없는 자들이 붕당을 만들어서 못된
짓을 하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것이겠지만, 전하께서
붕당을 만들게 하여 그들에게 못된 짓을 마음대로
하도록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중종의 대답하였다.
  "내가 그 책임을 핑계댈 수 없다"
  임권이 기뻐하며 말하였다.
  "융성하도다 임금의 말씀이여! 참으로 만세 제왕의
본보기이다. 신하의 바른 말을 수용하고 과실을
자신에게 돌리니 한 가지를 거론하여 두 가지의
아름다움을 갖춘 격이다. 만일 임금이 자신이 옳다고
하면서 바른 논의를 듣기 싫어한다면 누가 기꺼이 바른말을
발설하여 화의 함정으로 빠져들려고 하겠는가?"


     김안로가 나라를 그르칠 줄 미리 알고 걱정하였던 이언적

  이언적(1491-1553)의 본관은 여흥이고, 자는 복고,
호는 회재, 자계옹, 자옥산인이라고 하였다.
처음 이름은 이적이었는데, 중종이 언자를 더하도록
명하였다. 중종 8년(1513)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듬해에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당시 나이 24세였다.
  사간이 되었을 때에 김안로는 유배된 상태에 있은 지 오래였다.
어느 날 심언광이 이언적에게 물었다.
  "김안로가 소인임을 어떻게 알았소?"
  "김안로가 경주부윤으로 있을 적에 본인이 마침 경주 훈도가
되었소. 그의 마음가짐과 하는 일을 꼼꼼히 관찰하니 정말
소인의 마음과 모습이었소. 그 사람이 원하는 바를 이루게 되면 반드시
나라를 그르칠 것이오"
  심언광이 화를 내며 조정에서 정식으로 표명하였다.
  "이 아무개가 조정에 있으면 김안로가 조정에 들어올 수 없다"
  얼마 뒤 이언적이 마침내 탄핵을 받고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김안로는 조정으로 다시 돌아와 이언적이 자신을 공격하였다는 사실을
듣고도 심하게 화를 내지 않았다. 또 경주 사람으로서 김안로에게 뇌물을
주면서 벼슬을 구한 자가 있었는데, 김안로가 그 사람에게 말했다.
  "이언적이 이 사실을 알지 못하게 조심하라"
  이언적의 친구로 경주에 살았던 진해현감 김세량이 꿈에
이언적을 보았는데, 그가 시를 지어 주었다.

  신발을 평상 아래에다 던지고 떠나니
  정기는 하늘과 통하네 그려
  담담히 한 초가 속에 있다가
  혼자 신선봉에서 노니도다

  놀라 깨어 그의 아들에게 선생이 돌아가셨다고 말하였는데, 뒤에
들으니 정말로 선생이 죽은 날이었다. 그의 아들 이전인이 귀양지에서
관을 가마에다 얹어 고향으로 모시고 오는데, 관 앞의 길가에
엎드려 있으므로 보는 이들마다 눈물을 흘렸다.
  마침 한겨울이라 얼음과 눈이 산에 가득하여 길이 막혔는데 나무꾼들이
흙을 져다가 길에 뿌려 주어 편안히 떠나게 하였다 한다. 시호는
문원이며, 문묘에 종사되었다.

     정미사화를 빚어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간 정언각

  정언각(1498-1556)의 본관은 해주이고, 자는 근부이다.
진사 정희검의 아들이고 허암 정희량의
조카이다. 중종 11년(1516)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7년 뒤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명종 2년(1547)에 정언각이 부제학으로 있으면서 그의 딸이
제 남편을 따라 시댁으로 돌아가는데 전송하러 양재역을
지나다가 벽에 붙어 있는 불온물을 보니 이름은 숨긴 채 붉은 글씨로
씌어 있었다.

  여자 임금(문정왕후를 가리킴)은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
등은 밑에서 권력을 농락하니 국가가 망할 것은 서서 기다리는
격이니 어찌 한심스럽지 않겠는가?

  정언각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매우 즐거워하며 벽에 붙어 있은 글을
그대로 오려 가지고 대궐로 들어가 임금에게 아뢰며 그것을 봉하여 올렸다.
  "이것은 소원을 이루지 못하여 임금을 원망하는 자들이 한 짓이다"
  명종이 명을 내려 세 정승을 불러들이도록 하였다.
  삼정승인 윤인경, 이기, 정순봉이 아뢰었다.
  "이 글을 보니 아무것도 모르는 자가 한 짓이 아닙니다. 지금 이 벽에
붙었던 글을 가지고 증거를 삼기에는 부족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보면
올바르지 못한 논의가 돌아다니고 있다는 사실만은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을사사화 때에 당연히 처벌받았어야 할 대상 인물들의
죄의 경중을 순서대로 적어 올렸다.
  "지금 적어서 올리는 것은 이번 양재역의 벽에 붙어 있던 글을 보고서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애당초 죄를 결정할 때에 가볍게 처벌하여
형률대로 적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올바르지 못한 논의가 이렇게 일어나는
것이니 이는 화근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입니다. 그러니 다시 죄를
정한다는 뜻을 교서로 만들어 중앙과 지방에 유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임금이 답을 내렸다.
  "봉성군 원, 송인수, 이약빙은 사형에 처하고, 이언적, 정자, 이염은
먼 변방에 가두어 두며, 임형수, 노수신, 정황, 유희춘, 김난상은
먼 섬에다 가두어 두고, 권응정, 권응창, 정유침, 이천계, 권물, 이담,
한수, 안경우는 먼 지방에 부처하며, 권벌, 송희규, 백인걸, 이언침, 민기문,
황박, 이홍남, 김진종, 윤강원, 조박, 안세형, 안함, 윤충원은 중도부
처하라"
  그러자 정언각이 또 혼자서 아뢰었다.
  "임형수는 윤임과 같은 마을에 살면서 그의 심복으로 수족처럼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매번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큰 소리로
윤원형을 죽여야 된다고 떠들어댔으니, 그가 윤임과 마음을
같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단지 귀양만 보내는 것은
너무 가벼운 듯합니다"
  "양재역의 벽에 붙어 있는 글을 본 사람이 한 사람뿐만이 아닐 터인데
그대가 혼자 와서 아뢰었으니 신하로서의 도리에 당연하도다. 임형수는
죄는 같이 짓고 벌을 달리 가볍게 받았으므로 내가 매우 이상스럽게
생각하였다"
  문정대비가 그를 칭찬하고 임형수에게 사약을 내려 자진하게 하였다.
  향윤온이 윤임에 연좌되어 해남으로 유배되었는데,
그 무렵 정언각이 전라 감사가 되어 양윤온이 죄인의 신분으로 관사에
드나든다는 보고를 받고 그를 잡아다 곤장을 치게 하였는데 양윤온이
매를 못 이겨 죽었다. 뒤에 정언각이 경기 감사가 되어 말에서 떨어졌는데,
한쪽 발이 등자에 걸려 벗겨지지 않은 채 말이 마구 달렸으므로
머리통이 박살이 난데다 뼈가 부서지고 짓이겨져 죽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들 통쾌하게 여기며 말하였다.
  "하늘이 무심하지 않았다"
  그의 아들 정척이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가 되었으나 소인의
자식이라 하여 버림을 받았다.

     남의 허물을 말하지 않은 상진

  상진(1493-1565)의 본관은 목천이고, 자는 기부,
호는 범허정이다. 중종 11년(1516)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3년
뒤 문과에 급제하였다. 검열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어떤 농부가
두 마리의 소를 데리고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두 마리 중 어느 놈이 일을 더 잘 합니까?"
  그 농부가 선뜻 대답을 하지 않고 상진의 귀에다 입을 바짝 대고
나직하게 말하였다.
  "저 짐승의 마음도 사람과 마찬가지여서 평가하는 말을 듣게 될 경우
잘한다고 하면 좋아하고 못한다고 하면 화를 내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작은 놈이 낫습니다"
  "귀하는 숨은 군자입니다. 삼가 가르침을 받들겠습니다"
  상진은 농부에게 사죄하고 이때부터 남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한쪽 다리가 짧아 절뚝거리자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절뚝발이라고 하였지만 상진은 다르게 말했다.
  "그 사람의 짧은 다리는 보통 사람들과 똑같지만 한쪽 다리가 길어서
그렇다"
  이와 같이 그는 평생토록 남의 단점을 말하지 않았다.
  그가 젊었을 적에 점을 잘 치는 홍계관에게 점을 친 일이 있었다.
홍계관이 그때 그의 일생 동안의 길흉화복과 죽는 연월까지 알려
주었는데, 상진이 지나간 세월 속에 벌어졌던 일들이 홍계관의 말과
조금도 틀리지 않았으므로 홍계관이 죽는다고 말한 그 해에 이르러 미리
수의를 준비하고 죽기를 기다렸지만 한 해가 지나도 죽지 않고
아무런 탈이 없었다.
  그 소식을 들은 홍계관이 매우 이상히 여겨 상진을 찾아 뵙고 인사를
하니, 상진이 물었다.
  "내가 자네의 점을 믿고 스스로 금년에 명이 다할 줄 알았는데 맞지
않는 것은 무슨 조화요?"
  "예전 사람이 남모르게 적선한 탓으로 수명을 연장한 이가 더러
있었는데 대감께서 혹시라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어찌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겠는가마는 내가 수찬으로 있을 적에
퇴근하여 집으로 돌아오는데 길바닥에 붉은 보자기가 하나 있기에 주워
보니 순금으로 된 술잔 한 쌍이었네. 그래서 그 보자기를 가만히 보관해
두고 방을 붙여 주인이 찾아오기를 기다렸다가 주인에게 돌려준
일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대전의 수랏간 별감이 마침 자질의
혼인이 있어 몰래 대궐 주방에 있는 금잔을 빌려 내왔다가
공교롭게도 길에서 잃어버린 것으로 죽을죄를 지었다고 하면서 수없이
사죄하고 간 일이 있었네"
  "대감의 수면이 연장된 것은 바로 그런 일들 때문입니다"
  상진은 15년 뒤에 죽었는데 벼슬은 영의정에 이르렀고, 시호는 성안이다.
그는 타고난 기품이 넓고 커서 남의 장점과 단점을 말하지
않았다. 판서 오상이 시를 지었다.

  복희와 황제의 음악과 풍속 이제 쓴 듯이 없어지고
  단지 봄바람만 술잔 사이에 있도다

  상진이 그 글을 보고서 어찌 말을 이렇게 각박하게 할까 하며 다시
고쳐 지었다.

  복희와 황제의 음악과 풍속 아직도 남아 있으니
  봄바람을 술잔 사이에서 얻어 볼 수 있도다

     제멋대로 권세를 휘둘렀던 명존의 외삼촌 윤원형

  윤원형(?-1565)의 본관은 파평이고, 자는 언평인데
문정왕후의 오라버니이다. 중종 23년(1528) 생원시에
합격하고 5년 뒤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명종 6년에 정승이 되어
영의정에 이르렀다. 그리고 윤임은 인종의 모후인 장경왕
후의 동생이었으니, 여기서 대윤(윤임), 소윤(윤원형)이란 칭호가 있었다.
  윤원형이 병조 판서로 있을 때에 어느 무인을 함경도의 권관으로
임명되도록 해주었는데, 그 무인이 부임하여 화살통을 선물로 보냈다.
  "나는 활쏘는 것을 배우지 않았는데 화살통을 어디다 쓸 것인가?"
  윤원형이 화를 내며 그 화살통을 다락 안에 던져 버렸다. 그리고는 그
무인을 파직시켰는데, 그 무인이 파직되어 돌아와 윤원형을 찾아보고
물었다.
  "앞서 보내드린 화살통을 보지 않으셨습니까?"
  윤원형이 불현듯 의심이 생겨 다락에 던져둔 화살통을 가져다 잠가
놓은 화살촉을 뽑자 담비 가죽이 와르르 쏟아졌다. 그것을 본 윤원형이
좋아하면서 그 무인을 다시 살기 좋은 고을의 수령으로 임명하였다.
  또 이조 판서로 있을 적에 어떤 사람이 고치 수백 근을 바치고 참봉에
임명되기를 소원하였는데, 마침 윤원형이 피곤해서 졸고 있느라 장시간
임명 대상자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므로 교지를 쓰던 이조
낭관이 붓을 쥐고 재촉하였더니 윤원형이 낭관의 재촉하는 소리에
맞추어 졸면서 "고치"라고 대답하였다.
  고치란 견을 세속에서 부르는 이름이었다. 그리하여 임금의 최종
임명 결재를 받음에 이르러 이조의 서리가 고치 바친 사람을 아무리
찾았지만 찾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먼 시골에서 올라온 가난한 선비의
이름이 고치였으므로 그 사람을 임명하기는 하였지만 윤원형은
감히 분변하지 못하였다.
  명종이 당시 권세를 믿고 횡포가 심했던 윤원형을 죽이려고 마음먹고,
어느 날 경연에 나아가 중신들에게 한나라 문제가
그의 외삼촌인 박소를 죽인 일에 대하여 물었다. 여러 신하들이
그제야 임금의 뜻을 알고 마침내 윤원형을 탄핵하여 관직을 삭탈하고
도성의 사대문 밖으로 내쫓기를 주청하니, 명종이 그대로 시행하게 하였다.
  윤원형이 쫓겨나자 백성들이 기왓장과 돌을 던지며 심지어 활로
쏘아 죽이려는 자도 있었다. 윤원형이 몰래 강음으로 가서 그의
첩 난정과 날마다 마주 앉아 울었다.
  이때에 윤원형의 전처 김씨의 계모 강씨가 난정이
김씨를 독살한 사실을 고발하였다. 조정에서 관련자를 잡아다 처결해야
한다는 논의가 제기되자 난정과 윤원형이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
지은 죄가 하늘에 사무치면 저절로 처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누이동생 난정을 미리부터 멀리했던 정담

  정담의 호는 구재이고, 청계군 정윤겸의
서자이며 찬성 정종영의 서숙이다. 그의 동복
누이 난정이 윤원형의 첩으로 계교를 부려 문정왕후의
명으로 부인에 봉해졌다. 난정이 정실로 자처하고
나서자 다른 사람들 또한 화를 당할까 두려워서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정담은 누이인 난정의 그러한 짓들이 기필코 화의 빌미가 될 것임을
미리 짐작하고 스스로 소원하게 지내면서 청탁하러 왕래하는 일이 없었다.
또 살고 있는 집의 대문 안에 양의 창자처럼 꼬불꼬불한 담장을
쌓아 뚜껑이 달린 가마가 드나들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에 난정이 또한
가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드러나게 거절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누이와의 인연을 끊겠다는 마음만은 깊이 자리잡고 있었던
터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윤원형이 패망하고 난정이 죽는데 이르렀지만
정담은 연루된 바가 없었다.
  정담은 문장에 능숙하고 고금의 이치에 통달하였으며 '주역'의
이치를 깊이 알아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마음을 지녔으므로 사람들이
이 때문에 그를 더욱 현명하게 여겼다.

     귀신 같은 점을 치고도 오해받아 사형 당한 점쟁이 홍계관

  장님 홍계관은 귀신처럼 점을 잘 친다고 이름이 알려졌다.
하루는 자신의 수명을 계산해 보니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에 반드시
비명으로 죽을 운명에 놓여 있었다. 곧 죽게 된 가운데서 살아남기를
구하는 점괘를 뽑아 풀어 보니, 임금이 앉아 있는 용상 아래 숨어
있으면 모면할 수 있다고 되어 있으므로, 그 사실을 임금에게 아뢰었더니
임금이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였다.
  그날을 당하여 용상 아래 숨어서 엎드려 있었는데, 그때 마침 쥐 한
마리가 난간 앞으로 지나가는 것을 보고 임금이 홍계관에게 말했다.
  "쥐가 이곳을 지나갔는데 몇 마리인지 네가 시험삼아 맞추어 보아라"
  "세 마리입니다"
  임금이 그의 터무니없는 말에 노여워하여 즉시 형관에게 압송하여
참형에 처하도록 명하였다. 그 당시 죄인을 사형시키는 장소가
당고개 남쪽 강변의 백사장에 있었다. 홍계관이 사형장에 이르러
다시 한 괘를 뽑아 보고 사형 집행관에게 간곡히 사정하였다.
  "한 끼의 음식을 먹을 만한 시간만 집행을 지연시켜 주면 살아날 길이
있습니다"
  형관이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였다.
  한편 임금은 홍계관을 압송하게 한 뒤에 그 쥐를 잡게 하여 배를
가르게 하고 보았더니 새끼 두 마리가 뱃속에 있으므로 크게 놀라며
이상스럽게 여겨 중사(왕명을 전달하는 내시)에게 급히 따라가서 사형
집행을 정지시키도록 명하였다. 종사가 빠르게 말을 달려 당고개 위에
이르러 바라보니 한창 사형을 집행하려는 참이었다. 그가 집행을 중지하라고
큰 소리로 외쳤지만 그 소리가 미처 형관에게 들리지 않는 것
같아 급히 손을 저으며 중지시키려고 하였다. 형관이 멀리서 그 광경을
보고 빨리 집행하라고 재촉하는 신호인 줄 잘못 알고 그만 목을 베고
말았다.
  중사가 돌아와서 그런 사유를 아뢰었더니, 임금이 "아차 아차" 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당고개의 형장을 아차
고개라고 고쳐 불렀다.

     임진왜란을 예고한 남사고

  남사고(1508-1571)의 본관은 영양이며, 호는 격암이다.
그는 풍수, 천문, 복서, 상법에 있어서 유전되지
않은 비결까지 모두 터득하였다.
  그가 젊었을 때에 울진에 있는 불영사로 가다가 길에서
전대를 짊어지고 서 있는 어떤 중을 만났다. 그 중이 지고 있는 짐을
남사고가 타고 있는 말에다 얹어 달라고 애원하므로 남사고가 허락하여
얹어 주었다. 함께 불영사에 이르러 부용봉에서 놀다가 소나무
아래에서 장기와 바둑을 두는데 중이 갑자기 외마디 소리를 크게
지르고는 모습을 감추었다. 한참 지나자 그의 코 끝부분이 처음으로
드러나더니 점차로 온 몸이 드러나면서 말하였다.
  "두렵지 않은가?"
  "무슨 두려움이 있겠소"
  "그대가 겁을 내지 않으니 가르칠 만하다"
  중이 그에게 비결을 주며 말하였다.
  "그대는 비범한 골격을 지녔으니 힘쓸지어다"
  중은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어디론지 떠나 버렸다. 남사고가 이때부터
천지 조화의 심오한 비밀을 환히 보게 되었다. 만년에는 천문학 교수로
서울에 있었다. 그런데 마침 태사성 주위에 테를 두른 모양의
빛이 보여 불길한 징조를 예고하였다. 관상감 정 이번신이
모든 일을 자신이 떠맡겠다고 하였다. 남사고가 웃으면서,
  "떠맡을 사람이 따로 있습니다"
하고는, 서둘러 고향으로 돌아가다가 도중에서 죽었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손곡 이달이 통곡하며 시를 썼다.

  난새와 봉새 같은 인물이 저승으로 훌쩍 떠났는데
  그대가 다듬어 놓은 장막 아래 다시 누가 있는가
  사위와 제자들 유고를 수습하니
  옥골의 복숭아꽃은 만세토록 봄이구려

  격암이 일찍이 새벽에 동쪽을 향하여 주문을 외며 사람들에게 말했다.
  "살기가 등등하다. 임진년에 왜적이 반드시 크게 이를 터인데
나는 미처 보지 못하겠지만 그대들은 조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서울의 지형을 이렇게 논하였다.
  "동쪽에는 낙봉이 있고 서쪽에는 안현이 있어 서로 다투는
형상이니 틀림없이 동쪽, 서쪽의 다툼이 있을 것이다. '낙'자를
풀어 보면 '각마'가 되니 반드시 분열되어 제각기 설 것이고, '안'자를
풀어 보면 '혁안'이 되어 위태로웠다가 편안해지니 서인은 처음에는
위태롭다가 나중에는 편안해질 것이다"
  뒤에 그 말이 과연 들어맞았다. 격암이 또 예언했다.
  "사직동에 왕기가 있어 종묘사직을 중흥시킬 임금이
반드시 그 구역에서 나올 것이다"
  그 말대로 선조가 그곳에서 살다가 명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고, 임진왜란을 평정하여 종묘사직을 중흥시킨 임금이 되었다.
  남사고가 자기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기 위하여 명당을 구해서 장사를
지낸 뒤에 그 묘터를 보니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묘자리를
여러 번 옮기게 되었다. 그러다가 맨 마지막으로 한 묘터를 얻게
되었는데 명당 중의 명당이라 할 수 있는 용이 날아서 하늘로 올라간다는
비룡상천의 형국이었다. 남사고는 너무 좋아 그의 아버지
유해를 그곳으로 옮겨다 장사를 지내며 흙을 퍼다가 봉분을
쌓았다. 이때 일을 거들던 한 일꾼이 노래를 불렀다.
  "아홉 번을 옮기고 열 번 장사지내는 남사고야 용이 날아 하늘로
올라가는 형국만 생각하지 마라. 말라 죽은 뱀이 나뭇가지에 걸린 형국이
여기가 아닌가"
  남사고가 듣고서 놀랍고 이상하여 산 형세를 다시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과연 죽은 내룡이었다. 급히 그 일꾼을 따라나섰지만 갑자기
보이지 않고 어디로 떠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명당이란 제각기 주인이 따로 있는 법이어서 억지로 차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제야 남사고가 탄식하고, 겨우 피해가 없는 정도의 묘터를 가려 다시
옮겨 장사지냈다.
  남사고가 젊었을 적에 여러 번 향시에는 합격하고서도 회시에는
낙방을 하므로 어떤 사람이 물었다.
  "자네는 왜 남의 운명은 잘 맞히면서 자신의 운명을 잘 맞히지 못하여
부질없이 해마다 헛걸음을 하는가?"
  "개인적인 욕심이 발동하면 술수가 도리어 어두워지는 법일세"

     밥알을 내뿜어 나비가 되게 한 전우치

  전우치는 본관이 담양인데 대대로 송도(개성)에서
살았다. 전우치가 언젠가 기재 신광한의 집에 갔더니
규암 송인수가 미리 와 있었다. 기재가 전우치에게 말했다.
  "어찌 장난을 하지 않는가?"
  조금 있다가 그 집에서 볶음밥을 대접하였는데 전우치가 한창 그 밥을
먹고 있다가 입 안에 든 밥을 뜰 쪽으로 내뿜으니 밥알이 모두 흰 나비가
되어 이리저리 날아가 버렸다.
  차식이 아들 차천로에게 말하였다.
  "하루는 전우치가 와서 두시 한 질을 빌려 갔는데 나는 그가
죽은 줄 모르고 빌려주었으나 나중에 알고 보니 죽은 지가 이미 오래이더라"
  그 뒤 전우치는 옳지 못한 도술을 부려 사람들을 현혹시킨다는 구실로
신천 감옥에 갇혀 있다가 마침내 옥중에서 죽었다. 신천
태수가 사람을 시켜 그의 시체를 꺼내다가 임시로 매장하게 하였는데,
얼마 뒤에 친척들이 이장하려고 널 뚜껑을 열어 보니 널 속이 텅 비어 있었다.

     고을의 품관들에게 나물죽을 대접했던 이지함

  이지함(1517-1578)의 본관은 한산이고, 자는 형중,
호는 토정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그의 형 이지번에게 글을 배웠다.
  장성하여 모산수 이성랑의 사위가 되었다. 결혼식을
올린 이튿날 외출하였다가 날이 저물어서야 돌아왔는데 그가 입고
갔던 명주 도포가 없어진 것을 알고 집안 사람이 물으니 대답하였다.
  "홍제원 다리를 지나다가 거지 아이가 추위에 얼어 신음하는
것을 보고 찢어서 세 아이에게 나누어 주었다"
  어느 날 자기 형에게 말하였다.
  "제가 저의 처가를 관찰하였더니 길한 기운이 없습니다. 그곳을
떠나지 않으면 장차 재화가 미칠 것입니다"
  그가 처자를 데리고 서쪽으로 갔는데, 이듬해에 정말 재화가
일어났지만 모면하게 되었다.
  이지함은 또 배를 잘 부려 넓은 바다를 평지처럼 다녔으며, 국내의
산천은 거리가 멀다고 하여 안 간 곳이 없었다. 그리고 여러 해 동안
떠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는 또 평상시 자제들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여색을 경계하라. 여색에 대한 경계를 엄격히 하지 않으면 그
나머지는 볼 것이 없다"
  이지함은 배고픈 것을 참아 보려고 열흘 동안 불에 익힌 음식을 먹지
않았으며, 목마른 것을 참아 보려고 한더위에 물을 끊기도 하였고, 고달픈
것을 참아 보려고 발이 부르트도록 걷기도 하였다.
  그는 화담 서경덕에게 글을 배우기도 하였다. 그는 늘
무명옷에다 짚신 차림으로 솜옷을 짊어지고 다니며 사대부의 집에 가서
어울려 놀면서 곁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기탄 없는 언행을 하였고 여러
방면의 잡술에 환하게 통달하였다. 큰 박을 네 모서리에 매단
거룻배를 타고 노도 사용하지 않은 채 세 번이나 제주에 들어갔지만,
풍파의 위험을 겪지 않았다. 그때마다 장사를 하여 맨손으로 경영한
사업이 몇 년 사이에 수천 석의 곡식을 축적하여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에게 모두 나누어주고는 소매를 털고 떠났다.
  또 섬에 들어가 오이를 길러 그것으로 곡식을 샀으며, 또 여러 척의
배로 경강(한강)에 이르러서는 낮고 습기가 있는 곳에다 흙으로
축대를 쌓았는데 높이가 수십 자나 되었다. 거기에다 흙집을 지어 밤에는
흙집에서 자고 낮에는 흙집 위에 올라가 지냈는데, 그 흙집을 토정이라
하였다. 그곳에서 얼마 동안 살다가 버렸다.
  그는 또 쇠로 갓을 만들어 쓰다가 벗어서는 거기에다 밥을 지어 먹기도
하였으며, 끝나면 씻어서 다시 쓰곤 하였다(지금의 벙거지가 이것이다).
더러는 패랭이를 쓰고 거친 칡옷에다 나막신을 신고 팔도를 두루
돌아다니며 스스로 천한 사람의 일을 하여 밑바닥 생활까지 모르는
것이 없었다.
  그는 일생 동안 남에게 맞아본 적이 없었다. 그가 하루는 느닷없이
민가에 침입하여 어느 부부 곁에 앉아 있었다. 주인이 크게 화를
내어 그를 때리려고 하다가 그가 늙은 사람이라 온화한 말로 내쫓기만
하였다. 또 볼기 맞는 형벌을 받아 보려고 일부러 높은 관원이 지나가는
앞길을 범하였더니 그 관원이 화를 내어 볼기를 치려고 하다가 자세히
살펴보고는 그 모습이 이상하므로 볼기치려던 것을 그만두었다.
  그의 할아버지 장례를 치르는데 장사지낼 묘터를 보니 자손 중에
반드시 두 사람의 정승이 나올 터이기는 하지만 막내아들에게는
불길하다는 터였는데, 막내아들이란 바로 이지함 그였다. 그러나 이지함은
스스로 그 불길한 것을 떠맡겠다고 하였는데, 뒤에 그의 조카 이산해는
정승이 되었고, 이산보는 벼슬이 1품이었지만 그의 아들은 현달하지 못하였다.
  포천현감이 되어 다갈색 무명 베옷에다 짚신을 신고 부임
하니 딸린 관속들이 음식을 차려 올렸는데, 이지함이 눈여겨 자세히
보고는 수저를 들어보지도 않고 말하였다.
  "먹을 것이 없다"
  아전들이 뜰에 꿇어앉아 아뢰었다.
  "고을에 토산물이 없어 차린 음식에 특별한 것이 없었으니 다시 차려
올리겠습니다"
  조금 있다가 진수성찬을 차렸지만 이지함은 또 앞서와 같이 말할 뿐이었다.
  "먹을 것이 없다"
  아전들이 겁을 내어 벌벌 떨면서 죄주기를 바라므로 이지함이 말했다.
  "우리 나라 백성들의 생활이 어렵고 고달픈 것은 모두 먹고 마시는데
절제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음식을 차릴 때에 소반 사용하는
것을 몹시 싫어한다. 오곡을 섞어서 지은 밥 한 그릇과 나물을
넣어 끓인 국 한 그릇을 갈모나 갑에 담아서 올리라"
  이튿날 포천 고을 안의 품관이 인사하러 찾아오자 말린 나물로
죽을 쑤게 하여 그 죽을 들도록 권하였다. 품관들은 갓을 나직이 내려
숟가락을 들고서 조금 먹다가 조금 토하곤 하였는데 이지함은 한 그릇을
다 먹었다. 그러다 얼마 있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니
고을 사람들이 길을 막으며 만류하였지만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집안 살림이 너무 가난하여 끼니를 잇기가 어려웠다. 어느 날
내당에 앉았노라니 부인이 말하였다.
  "남들은 모두 당신을 비범한 사람이라고 여기는데 어찌 저를 위해서는
조금도 시험을 하지 않으십니까"
  "내가 곧 나비를 만들어 낼 터이니 구경하겠소?"
  "지금은 깊은 겨울인데 어찌 나비가 있단 말입니까. 당신 말씀이 너무나
허망할 뿐입니다"
  "구경만 하시오"
  이지함이 곧장 옷을 꿰매는 재료며 용기를 담아 둔 데로 가서 여러
가지 색깔의 재단하고 남은 비단과 명주 조각을 가져다 손에 쥐고
무어라고 중얼중얼 주문은 외우고는 조금 있다가 공중으로 던져서 흩으니
나비가 분분하게 방 안에 가득하고 오색이 찬란한데, 각기 재단하고 남은
본바탕의 색깔을 따라 나비가 되어 오락가락 날며 춤을 추는데
현란스러움이 헤아리기 어려웠다. 부인이 그 광경을 보고 놀라자, 이지함이
다시 공중을 향하여 손바닥을 펴고 주문을 외웠다. 나비가 모두 즉각
손바닥으로 도로 모였는데 조금 있다가 쥐었던 손바닥을 펴니 비단과
명주 조각이 그전처럼 있었다.
  "지금 식량이 떨어져 밥을 지을 수 없는데 어찌 신기한 술수를 부려
이렇게 급박한 형편을 구제하지 않으십니까?"
  "그쯤이야 어려울 것이 없지요"
  이지함이 즉시 계집종에게 놋그릇 한 개를 주면서 말했다.
  "이 그릇을 가지고 경기 감영의 다리 앞에 가면 한 노파가 백전을
주며 사려고 할 것이니 팔아 오너라"
  계집종이 명을 받고 갔더니 과연 그릇을 사려는 사람이 있었고 모두
가르쳐준 그대로였다. 그래서 그릇을 팔고 값을 받아 오니 또 명하였다.
  "네가 이 돈을 가지고 서소문 밖의 저자 가에 가면 대나무를 결어 만든
삿갓을 쓴 사람이 급히 수저를 팔려고 할 터이니 사가지고 오너라"
  계집종이 또 가서 보니 과연 말한 그대로였으므로 수저를 사다가
바쳤는데 은으로 만든 수저였다.
  "네가 이 수저를 가지고 경기 감영 앞으로 가면 어느 하인이 금방
은수저를 잃어버리고 같은 색깔의 은수저를 구하려고 할 터이니 이것을
보이면 열 다섯 냥의 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팔아 오너라"
  계집종이 가보니 모두가 가르쳐준 그대로이므로 열다섯 냥을 받아다
바쳤다. 이지함이 다시 한 냥의 돈을 주면서 말했다.
  "그릇을 샀던 노파가 처음에는 그릇을 잃어버려 그것을 대신하려고
샀다가 이제는 그 그릇을 찾게 되어 샀던 자에게 도로 물리려고 할 것이니
도로 물려주고 오너라"
  계집종이 또 가서 보니 과연 그 말과 같으므로 그릇을 도로 가지고
와서 바쳤다. 이지함이 그 남은 돈과 그릇을 부인에게 주어 아침, 저녁의
끼니를 잇게 하였다. 부인이 더 많은 양을 청하였더니 이지함이 웃으며 말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오. 재물이 많은 자에게는 반드시 재앙이 따르게
마련이니 더 보탤 필요가 없소"
  그 뒤에 그가 아산현감이 되었는데, 어느 늙은 아전이 죄를 범하였다.
  "네가 비록 늙기는 하였으나 마음은 어린아이와 같다"
  이지함이 나무라며 그의 갓을 벗기고 센 머리를 땋아 애들 머리처럼
만들게 하고 벼루를 들고 책상 앞에서 시중들게 하였다. 그 늙은 아전이
원한을 품고 있다가 몰래 지네 즙을 가져다 술에 타서 올린 것을 이지함이
마시고 죽었는데, 나이 60세였다.
  이조 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강이다.

     천기를 누설한 정렴

  정렴(1506-1549)의 본관은 온양이고, 자는 사결,
호는 북창이며 정순붕의 아들이다. 그는 남달리 총명하여
어릴 적에 벌써 흩어진 마음을 가다듬고 신명과 통할 수 있어
가까이는 여염집 거실의 은미한 것과 멀리는 네 종류의 이족과
여덟 종류의 만족들의 각기 다른 풍속과 기질 그리고 개를 부르는
소리며 백로의 울음소리를 귀신처럼 알았다.
  14세에 중국에 들어가니 유구국 사람이 특이한 기상의 정렴이
도착하는 것을 바라보다가 와서 두 번 절하고 배우기를 청하였다.
  "제가 점을 쳐보았더니 그 점괘에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에 중국으로
들어가 틀림없이 진인을 만날 것이라고 하였는데, 당신이 바로
진인이 아닙니까?"
  이에 외국 사람들이 모두 다투어 찾아와서 배우려고 하므로, 정렴이
사방 이족의 말로 유창하게 응답해 주었다. 모인 사람들이 모두 크게
놀라고 이상스럽게 여겼으며, 그를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라고 불렀다.
  정렴은 19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서는 다시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양주의 괘라리에다 살 곳을 정하였다. 어느 해 9월 하순에
늦게 핀 국화를 두고 시를 읊었다.

  십구 이십구 모두 구로 된 숫자여서
  구월이라 구일이 일정한 때가 없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모르지만
  뜰에 가득한 국화만은 알도다

  그의 동생 고옥이 화답하였다.

  세상 사람들 중양절을 가장 소중히 여기지만
  중양절에만 흥취를 길게 할 필요는 없어
  언제나 국화를 마주보며 막걸리 마시면
  구십 일 간의 가을 어느 날인들 중양이 아니랴

  정렴이 본래 휘파람을 잘 불었다. 그의 아버지 정순붕이 강원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하루는 금강산에 놀러 갔다. 북창이 따라갔더니 정순붕이
말하였다.
  "사람들이 네가 휘파람을 잘 분다고 하였으나 내가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는데 이런 경치 좋은 곳에 와서 한 곡조 불어 보는 것이 좋겠다"
  이튿날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 일찍 떠나려고 하니 중이 만류하였다.
  "오늘은 비가 내려 높이 올라갈 수 없습니다"
  "오후 늦게는 틀림없이 날씨가 갤 것이다"
  정순붕이 이렇게 말하고 마침내 청려장(명아주 대로 만든 지팡이)을
짚고 갔는데, 한낮이 되자 정말 날씨가 개었다. 정순붕이 중을
따라 올라가는데 산꼭대기에서 피리 소리가 울려 바위 골짜기가 모두
진동하는 듯하였다. 중이 깜짝 놀라며 말하였다.
  "깊은 산속 더할 나위 없는 뛰어난 지경에 누구의 피리 소리가 이렇게도
맑고 웅장한가. 틀림없이 신선이 부는 것이리라"
  정순붕은 속으로 누 분다는 것을 알고 올라가서 보았더니 피리 소리가
아니고 정렴이 부는 휘파람 소리였다.
  정렴이 불교에 마음으로 통하는 술법이 있기는 하지만 그 요점이 되는
관건을 얻지 못하여 한탄하더니 어느 날 절에 들어가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히고 사물을 관찰한 지 3, 4일 만에 문득 환하게 깨우치고 백리
밖의 일을 곧장 알아맞추기가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맞아떨어져 백
가지에 한 가지도 어긋나지 않았다.
  어느 날 그곳에 살고 있는 중이 찾아왔다. 정렴이 그를 보며 말했다.
  "오늘 집에 있는 종이 술을 가지고 올 것이오"
  잠시 후 그가 다시 놀란 얼굴로 다시 중에게 말했다.
  "이상하기도 하군. 술을 마실 수 없게 되었소"
  얼마 있다가 종이 와서 말했다.
  "술을 지고 오다가 고갯마루에서 바위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술병이
모두 깨졌습니다"
  정렴이 항상 조용한 방에 거처하면서 장생불사하는 선약을
불을 때 만드는 법을 익히기도 하였다. 그 무렵 손님 한 분이
왔는데 가난한 선비였다. 한창 얼어붙는 겨울이어서 그 선비가 몹시
추워했다. 북창이 창고 곁에 있는 차가운 쇳조각을 가져다 겨드랑이 밑에
끼고서 다리미질하듯 왔다갔다 하다가 꺼내어 그 손님에게 주었더니
마치 활활 타오르는 화로같이 더워서 땀이 흘러 그 손님의 온 몸을
젖게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이 고질병을 앓은 지 몇 달이 되어 침과 약을 두루
써 보았지만 낫지 않았다. 그 말을 들은 북창이 앉아 있던 자리의 잔디 한
움큼을 뜯어다 손으로 문지르고 입으로 불어 따뜻하게 한 뒤 그것을
복용하게 하였더니 병이 금방 나았다.
  또 절친한 친구 한 사람이 병에 걸려 거의 죽게 되었는데 의원이
지어준 약이 효험이 없으므로 그 사람의 아버지가 북창에게 신기하고
특이한 술수가 있음을 익히 알고 북창에게 아들의 명수를 캐어 물었다.
  "정해진 햇수는 이미 다 끝이 나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친구의 아버지가 울면서 구원의 손길을 뻗어 주기를 바라므로
북창이 그 정의를 가련하게 여겨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정 그러시면 저의 10년의 수명을 줄여서 어르신 아들의 나이에다
보태 드리겠습니다. 이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어르신께서 내일밤
삼경에 혼자 남산 꼭대기에 올라가면 틀림없이 붉은 옷을 입은
중과 검은 옷을 입은 중이 서로 마주보고 앉아 있을 것입니다. 그 앞에
가서 애절하게 간청을 하면서 어르신 아들의 목숨을 연장시켜 달라고
애원하되 중이 아무리 욕을 하며 내쫓더라도 물러나지 말고 아무리
지팡이로 때리더라도 싫어하거나 피하지 말고 정성을 들여 천번 만번
간곡히 빌면 소원을 풀 수 있을 것입니다"
  친구의 아버지가 북창의 말대로 밤이 되어 달빛을 의지하여 혼자
남산의 누에머리 봉우리에 올라가니 과연 두 명의 중이 있었다.
그들 앞에 나아가 공손히 절을 하고 울면서 사정을 고해 바치니 두 중이
깜짝 놀라며 말하였다.
  "지나가던 중이 이곳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당신은 어떤 사람이기에
이렇게 허망한 짓을 하시오. 당신 아들의 수명이 길고 짧은 것을 내가
어찌 알겠소. 빨리 물러가시오"
  그 친구의 아버지는 못 들은 체하며 두 손을 모으고 이마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며 간절히 빌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 사람은 미친 사람이니 때려서 쫓아 버리자"
  중이 화를 내며, 마침내 지팡이를 들어 마구 두들겨 패므로 그 아픔을
참을 수가 없었지만 죽기로 버티면서 물러서지 않고 땅에 엎드려 울면서
애걸하였다. 그러기를 한참하고 있으니 검은 옷을 입은 중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이는 틀림없이 정렴이 가르쳐 주고 인도한 것이다. 그 아이가 한 짓이
한심스럽기는 하지만 저의 수명 10년을 줄여서 이 사람의 아들 수명에다
보태는 것은 해로울 것이 없다"
  붉은 옷을 입은 중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하였다. 두 명의 중이
그제야 그 사람을 부축하여 일어나게 하고 위로하였다.
  "잠깐 당신을 시험했을 뿐이오"
  검은 옷을 입은 중이 소매 속에서 책 한 권을 꺼내어 붉은 옷을 입은
중에게 전해 주니 그 중이 받아서 달빛에다 대고 붓을 들어 글자를 쓰는
듯하더니 곧이어 말했다.
  "당신의 아들은 지금부터 수명이 연장되었으니 돌아가거든 정렴에게
다시는 천기를 누설하지 말라고 전하여 주시오"
  그리고는 갑자기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붉은 옷을
입은 중은 남두였고, 검은 옷을 입은 중은 북두였다.
  그 사람이 집으로 돌아오니 아들의 병이 점점 나아 정말 10년을 더
살았고, 북창은 세상에서 44년 동안 살았다.

     아내가 죽자 다시 장가들지 않고 천수를 다한 정작

  정작(1533-1603)의 자는 사경, 호는 고옥이고,
정렴의 동생이다. 어렸을 적에 강가의 정자에서 놀다가 멀리 보이는
백사장 위에서 어떤 사람이 가로로 부는 피리를 불고 있는 것을
보고 즉시 시를 읊었다.

  멀고 먼 모래 위에 있는 사람
  처음엔 한 쌍의 백로로 의심했지
  불어오는 바람결에 갑자기 가로 부는 피리 소리 들리니
  해맑은 가락에 강과 하늘이 저무네

  정작은 깨끗한 것을 좋아하여 금강산에 들어가 수련하는 방법을
터득하였으며, 중년에 아내가 죽자 다시 장가들지 않고 정욕을 끊은
지 36년 만에 타고난 수명을 다하고 죽었다.
  정작은 사람의 외모를 보고 그 사람의 성격을 감별하는 기술을
통달하여 기이한 경험이 많았고, 초서와 예서를 잘 쓰고 시 읊기를
좋아하였다. 세상에 전해지기로는 정작은 백일하에서도 그림자가 없다고
하였다. 벼슬은 사평에 이르렀으며, 술을 즐기며 시를 잘하였고 또
의술에도 조예가 깊어 신기한 효험이 나타난 적이 많았다. 어떤 사람이
우연하게 사기의 빌미로 고통스러운 병에 걸려 며칠 만에 고질이
되었는데 고옥이 약으로 치료를 하였더니 그 증세가 다섯 번 변하므로
그에 대응하는 약 또한 다섯 번을 변경하여 모두 효험을 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 고옥에게 청원하였다.
  "내가 당신이 병을 고쳐준 그 사람과는 대대로 쌓인 깊은 원수 관계여서
이미 옥황상제에게 고하여 반드시 죽이고야 말겠다고 작정하고서
내가 다섯 번이나 그의 증세를 변경시켜 가며 당신의 약을 회피하였소.
그런데 당신은 줄곧 다섯 번이나 그 약을 변경시키면서 그를 낫게 하였으니
내가 앞으로는 당신을 이기지 못할 듯하오. 그렇지만 반드시 여섯  번
그의 증세를 변경시킬 터인데 당신이 만약 다시 새로운 약으로 그를
치료한다면 나는 당장 그 원수를 당신에게로 옮겨 당신을 따라다니며
빌미가 되겠소"
  고옥이 깨어나 이상하게 여기고 있는데 조금 있으니까 환자의 집안
사람이 급히 왔으므로 그 까닭을 물어 보았더니 그의 병 증세가 정말
변경되었다는 것이었다. 고옥은 꿈에 나타났던 징조를 염려하지 않고 또
증세에 따라 투약하도록 명하여 마침내 그 사람의 병이 낫게 되었다.
대체로 사기가 사람에게 빌미가 된다고는 하지만 반드시 몸을 보양하는
혈기가 허약함을 틈타서 그 사기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것이며, 사람이 좋은 약으로 잘 막아내기만 하면 사기가 그 틈새로
들어올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다 고옥은 보통 사람과 다르기 때문에
사기가 감히 원수의 대상을 옮겨 정기를 침범하지는 못하였다.
  고옥이 일전에 친구 서너 명과 여름에 모여서 대화를 하였는데, 짧은
처마로 내리쬐는 햇볕에 더운 기운을 견디기 어려웠다. 그 중 한 사람이
말했다.
  "만약 호수 위에 있는 높은 다락에 앉아서 옷을 벗어 흔들며 발을
씻는다면 더위를 잊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별로 어렵지 않으니 당장 자네들을 위하여 그렇게 해보겠네"
  고옥이 곧장 문 밖으로 나가 세숫대야에다 물을 붓고 부적을 넣은
다음 무어라고 중얼중얼 주문을 외더니, 조금 있다가 뒤편의 창문을 열어
젖히고 친구들에게 그쪽을 보라고 하였다. 친구들이 그쪽을 보니 집
아래에 갑자기 호수가 생겼는데 너비는 1천 이랑쯤 될 정도로 넓고 아득하여
끝이 없었으며, 푸른 물결이 일렁이는 가운데 섬이 솟아 있는데,
채색을 한 다락집이 아스라하게 보이고 무지개 다리로 육지와 통하게
하여 완연히 그림 속의 거울 같았다.
  고옥이 친구들을 데리고 무지개 다리를 거쳐 다락집으로 올라가니
연꽃 향기가 풍겨 오고 느릅나무와 버드나무 사이로 바람이 솔솔 불어와
황홀하기가 신선이 살고 있다는 낭원에 올라 시원한 바람을
타고 공중에 날아오르는 듯하여 청량관에서 한번 씻고 그치는데
비교할 것이 아니었다. 조금 있으려니까 선경에 있는 아이가
술잔과 소반을 받들어 올리는데, 좋은 안주와 맛있는 술이었다. 모두
실컷 마시고 취하여 조용히 할 이야기도 결렬하게 하며 술이 몇 순배
돌자 그대로 물 밑에서 잠이 들었는데, 서로 다락 속에서 상대방을
베고 날이 저무는 줄 몰랐다. 그러다가 깨어 보니 바로 낮에 앉아 있었던
조그마한 집이었으므로 친구들이 일제히 떠들면서 흩어졌다.
  또 한번은 고옥이 그의 형 북창을 따라서 고향으로 가는데, 어느
산골 마을에 이르러 어떤 집 앞을 지나다가 나쁜 기운이 서려 있는
것을 보았다.
  "애석하기도 하다. 저 집안이여"
  북창이 타일렀다.
  "어찌 그리 경솔하게 말을 하는가. 잠자코 지나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지금 이미 말을 내뱉었으니 그 집안에 재앙이 그치도록 해주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군자가 인을 베풀고 널리 구제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자네 말이 옳으네. 나는 먼저 떠날 터이니 자네 혼자 가 보게"
  고옥이 마침내 그 집에 들어가서 지나가는 나그네로 길을 잃고 날이
저물었음을 핑계 대며 하룻밤 묵어 가기를 요청하였다. 주인이 고옥의
외모가 헌걸차고 장자의 기풍이 있어 보이므로 즉시 허락하였다.
밤이 이슥하자 고옥이 주인에게 넌지시 말했다.
  "아까 주인집 문 앞을 지나다가 마침 상상하기 어려운 큰 재화가
닥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주인을 위하여 그 재해를 없애 주고자
합니다. 만약 내 말을 허탄하고 망령되다고 하지 않는다면 재화가 바뀌어
복이 될 것이니 주인께서 기꺼이 따라 줄 수 있겠습니까"
  주인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그렇게 보셨다니 감히 명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빨리 백탄 수십 석과 큰 나무궤 하나를 장만하십시오"
  주인이 즉각 그대로 따랐다. 그러자 백탄을 뜰 가운데다 쌓고 궤는
그 곁에다 두고서 관솔불로 백탄에다 불을 붙이니 타는 불꽃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이때에 그 집안 사람과 이웃 사람들이 모두 모여 구경을 하는데 나이
가 6, 7세 쯤 되어 보이는 주인의 아들도 그 틈에 끼여 불꽃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옥이 재빠르게 그 주인의 아들을 잡아 궤 속에 집어
넣고 궤 뚜껑을 닫아 버렸다. 그러자 주인과 구경하던 사람들이 놀라
허둥대며 어쩔 줄 몰라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고옥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빨리 궤를 끌어다 이글거리는 백탄 위에 처넣게 하였다.
주인의 온 가족들은 가슴을 치고 발을 동동 구르며 모두 고옥을 향하여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나 이미 어쩔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러 단지
울부짖으며 통곡할 뿐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불길이 그 궤를 태워
터지게 하였는데 비린내가 사람들의 코를 찌르므로 타는 궤 쪽을 보니
큰 구렁이 한 마리가 불에 타 꿈틀거리더니 조금 있다가 몸을 휘감은
채로 죽고 말았다.
  고옥이 종에게 명하여 타다 남은 불은 치우고 타고 남은 백탄의 재를
쓸어 모으게 하고는 몇 치쯤 되는 낫의 끝부분을 찾아내어 주인에게
보이며 말하였다.
  "이 물건을 기억하겠소?"
  "기억하고 말고요. 제가 10년 전에 연못을 파서 물고기를 길렀는데
날이 가고 달이 가도 물고기의 숫자가 불어나지 않고 점점 줄어들어
이상히 여겨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큰 구렁이란 놈이 물고기를 잡아먹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본 순간 화가 치밀어 그 요물을 없애 버리려고 큰
낫을 휘두르자 구렁이도 성이 나서 대가리를 쳐들고 요동하다가 낫의
끝부분이 구렁이의 몸통을 찔렀는데 구렁이가 버둥대는 바람에 낫 끝이
부러지고 구렁이도 죽었습니다. 이 쇠숱이가 그때 부러졌던 낫의
끝부분이 아닙니까?"
  주인이 종을 불러 창고 속에 꽂아둔 끝이 부러진 낫을 가져오게 하여
맞추어 보니 바로 그 낫의 끝부분이었다. 그제야 주인은 자신의 어리석음에
놀라고 정작의 기이함에 감탄하였다.
  "주인의 아들은 바로 구렁이의 독과 정기로서 원수를 갚으려고 했던
것이니, 만약 며칠 더 지났으면 주인의 집안에는 엄청난 재화를 미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쁜 기운은 먼저 드러나기 때문에 차마 그냥 지나쳐
버리지 못하고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만 이제는 염려할 것이
없으니 이해를 하신다면 다행이겠소"
  고옥이 옷깃을 여민 뒤 작별하자, 주인이 고맙다는 인사를 수도 없이
하였다.

     꿈에 과거 시험 문제를 미리 본 임백령

  임백령(?-1546)의 본관은 선산이고, 자는 인순이다.
그의 어머니 박씨는 성품이 엄하고 의젓하였다.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임백령이 셋째이다. 형 임억령과 함께 눌재
박상에게 글을 배웠다.
  박상이 임억령에게 '장자'를 가르치면서 말했다.
  "너는 틀림없이 문장이 될 것이다"
  임백령에게는 '논어'를 가르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관각(홍문관과 예문관)을 맡을 만한 문장이 되기에 충분하다"
  중종 11년(1516)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3년 뒤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좌찬성에 이르렀다. 명종 즉위년에 충순당에서 모의하여
대윤 일파를 제거한 공신으로 기록되어 숭선부원군에
봉해지고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며 선조 때에는 을사사화의 당인이라
하여 공신록과 관원 명부에서 추삭(죽은 뒤에 삭제됨) 되었다.
  그는 젊었을 때에 과거 공부만 하고 경학은 익히지 않았는데,
어느 날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서 알려주었다.
  "이름을 괴마라고 고치는 게 좋을 것이며, 또 강독할 때에 경서는
어느 장에서 출제될 것이다"
  꿈에서 깨어난 후에 그 일을 낱낱이 기억할 수 있었으므로, 즉시
촛불을 밝히고 일어나 노인이 가르쳐준 그 장을 뽑아 내어 따로 책자를
만들어 읽고 익혔다. 그리고 이름을 괴마로 고치려 하였지만 별다른 뜻이
없음을 싫어하여 별호로 삼았다. 그러다가 과거에 응시하여 강독하러
들어가서 문제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대답을 하였더니, 시험관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이 수험생은 괴마가 틀림없다. 내가 어젯밤에 꿈을 꾸었는데 머리가
허옇게 센 늙은이가 말하기를, '이번 과거 시험의 수험생 가운데
괴마라는 이름을 가진 이가 있는데 틀림없이 한 세대의 걸출한 인물이 될
것이오. 그리고 또 경학의 정밀함이 뛰어나 그와 유가 될 사람이 없을
것이오' 하였기에, 그 때문에 물어 보는 것이라오"
  임백령이 절을 하며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호를 괴마로 하였다고
대답하니, 여러 시험관이 모두 인재를 얻었다고 축하하였다. 그러다가
그가 출세함에 이르러서는 행동하는 바가 그와 같았으니 여기에서 소인이
태어나는 것도 역시 시기와 운명에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구차하게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개탄한 이해

  이해(1496-1550)의 본관은 진보이고, 자는 경명,
호는 온계이다. 중종 20년(1525)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3년 뒤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글씨를 잘 썼다. 대사헌이 되어서는 이기를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젊어서는 김안로와 이웃에 살았고 또 인척 관계가 있었다.
그래서 김안로가 권력을 잡고 있으면서 여러 차례 그를 도와주는
뜻에서 등용하려 하였지만 이해는 끝까지 그 농락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구수담과는 같은 해 과거에 급제하기는 하였으나 서로
오간 적이 없었는데 구수담이 대사간이 되어 이해를 탄핵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그 해 여름에 대신이 임금의 명령을 받아 구수담을
논박하여 죽게 하였다. 이무강이 이해와 같이 사국(예문관, 춘추관의
별칭)에 근무했는데 지나는 길에 자기 집에 들러 달라고
요청했으나 여러 차례 그 집 앞을 지나면서 들어가지 않았다. 이무강이
이해를 중상하여 이기에게는 환심을 사고 자신의 분함을 풀려고
그가 구수담과 한 패거리가 되었다고 무고하여 옥사가 더욱 급박하게
되었다. 어떤 사람이 허위로 자백하면 모면할 수 있다고 이해를 꾀었다.
  "허위로 자백하여 구차하게 사는 것은 죽는 것만 못하다"
  이해가 탄식하며 스스로 상소문을 초하여 올리려고 하니 취조관이
이기를 두려워하여 들어주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장형을 받고
갑산에 유배되었는데 유배 도중 양주에 이르러 죽으니 나이
55세였다. 퇴계 이황이 그의 동생이다.

     비석을 세우지 말라고 유언으로 경계한 이황

  이황(1501-1570)은 이해의 동생이고, 자는 경호, 호는 퇴계이다. 12세에
숙부인 송재 이우에게서 '논어'를 배웠다. 이우가 늘 그를 칭찬하였다.
  "집안의 명성을 유지시킬 자는 이 아이이다"
  중종 23년(1528)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6년 뒤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선조 원년에 대제학 박순이 아뢰었다.
  "신이 대제학이 되고 이 아무개가 제학이 되었는데, 나이가 많은 큰
선비에게 도리어 작은 임무를 맡게 하고 신진 초학의 선비에게 중요한
직위를 차지하게 하는 것은 조정의 인재 기용이 이보다 더 전도될 수
없습니다. 교체시켜 임명하시기 바랍니다"
  임금이 대신들에게 물어 보니 모두 박순의 말이 옳다고 하였다. 그러자
임금이 이황과 박순의 관직을 서로 바꾸도록 명하였다.
  이황이 대제학이 되어 '성학십도'를 올리고 선조 3년에
죽으니, 나이 70세였다. 비석을 세우지 말라고 유언으로 경계하였으며,
단지 조그마한 돌에다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라고
쓰게 하였다. 이황은 항상 도연명의 시를 애송하며 그의
사람 됨됨이를 사모하며 야당시를 읊었다.

  이슬 젖은 고운 풀이 물가에 둘렸는데
  연못의 활수는 모래 없이 깨끗하네
  구름 날고 새 지나니 원래 서로 얽매어라
  때때로 물결 차는 제비가 두렵다네

  이황이 예조 판서의 임명을 받았으나 병으로 사직하니, 이이가
찾아 뵙고 말하였다.
  "어린 임금이 처음 즉위하여 국가에 어려운 일이 많으니 분수와
의리를 헤아려 보면 물러나는 것이 옳지 않습니다"
  "도리로 보면 물러날 수 없다고 하겠지만 내 몸을 볼 것 같으면
물러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성혼이 참봉에 임명되었는데도 나오지 않으므로 어떤 사람이 물었다.
  "성혼은 왜 나오지 않소?"
  이이가 대답했다.
  "성혼은 병이 많아 감히 벼슬에 종사할 수 없을 것이오. 만약 그더러
억지로 벼슬하라고 하면 이는 그를 괴롭히는 것이오"
  선생이 웃으면서 말하였다.
  "숙헌(이율곡의 자)이 어찌 성혼은 후하게 대접하면서 나에게는
그리 박하게 대접하오"
  "그렇지 않습니다. 성혼의 벼슬이 선생과 같다면야 일신의 사사로운
계책을 염려해 줄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성혼을 말단의 벼슬에
나아가게 한들 국가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선생께서 높은
벼슬에 계신다면 국가에 보탬이 매우 클 것입니다. 벼슬이란 남을 위하는
것이지 어찌 자신을 위한 것이겠습니까?"
  이황이 답하였다.
  "벼슬은 진실로 남을 위하는 것이오. 그러나 만약 이로움이 남에게
미치지 않으면서 자신에게 병통이 절실하게 되면 할 수 없는 것이오"
  이황이 서울에 임시로 살 때에 이웃집에 밤나무 몇 그루가 있었는데
그 밤나무 가지가 담장을 넘어와 밤이 달리고 영글어 뜰에 떨어지자
선생이 혹시 아이들이 그 밤을 주워 먹을까 싶어 주워서 담장 너머로
던져 버렸다. 그의 청렴결백함이 이와 같았다.
  여러 차례 임금이 부르는 명을 내렸지만 진출과 은퇴를 의리로
하였으며, 벼슬은 좌찬성에 이르렀다. 세상에서는 동방의 주자라고
칭송하였다. 선생은 타고난 자질이 매우 고상하고 도덕이 순수하게
갖추어졌으며, 주자를 높이고 믿어 학문의 오묘한 이치를 깊이 체득하였다.
  그리하여 제자들과 도산서당에서 유고를 강론하여 성취한
이가 많았고, 동방학자들의 학설을 모으고 크게 완성하여 우뚝한 이학의
마루가 되었다. 특별히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순이고
문묘에 종사되었다.

     임진왜란을 미리 안 이이

  이이(1536-1584)의 본관은 덕수이고, 자는 숙헌,
호는 율곡이다. 이이는 강릉부에서 태어났는데, 어머니인
사임당 신씨의 꿈에 검은 용이 방에 들어와 아이를
품안에 껴안는 꿈을 꾸었으므로 어릴 때의 자는 견룡이라 하였다.
이이는 말을 배우면서 곧 글자를 알았으며, 그가 죽을 때에는 집안
사람의 꿈에 황룡이 그의 침실에서 나와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였다.
13세에 진사 초시에 합격하였고, 명종 19년(1564)에는 생원시와 문과
초시, 복시, 전시에 모두 장원하여, 호조 판서, 대제학, 병조 판서를
지냈다. 영특하고 총명하며 온화하고 낙천적이었다.
  다섯 살 때에 그의 외할머니가 석류를 보여주며 물었다.
  "이것이 무엇과 같으냐?"
  "석류 껍질 속에 붉은 구슬이 부서졌네"
  즉시 이렇게 대답할 정도로 사물을 꿰뚫어 보는 총명이 있었다.
  이이는 타고난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는데 16세에 어머니 사임당
신씨의 상을 당하였다. 19세에 금강산으로 들어갔으며 그곳에서
불교에 깊이 빠져 스스로 이름을 의암이라고 하였는데, 산속에서는
덕행이 높은 중이 세상에 출현하였다고 떠들썩하였다. 이듬해가
되자 다시 불교의 그릇됨을 깨닫고 즉시 절에서 내려와 성리학
연구에 전심하였다.
  사계 김장생이 한번은 이이에게 넌지시 물었다.
  "선생님께서 금강산에 계실 적에 머리를 깎고 모습을 바꾸지 않으셨습니까?"
  이이가 빙긋이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이미 속세를 떠나 중이 되었으니 아무리 모습을 바꾸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마음이 불교에 빠져 버렸는데야 무슨 보탬이 있겠느냐?"
  그가 일찍이 경연에서 아뢰었다.
  "미리 군사 10만을 양성하여 돌발 사태에 대비하여야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10년 안에 흙이 무너지듯 걷잡을 수 없는 화가 있게 될 것입니다"
  "아무런 일이 없는데 군사를 양성하는 것은 바로 화를 양성하는 것이
됩니다"
  서애 유성룡이 군사 양성을 반대하였다. 당시 오래도록
태평을 누려온 터여서 경연에 참여했던 중신들 모두가 이이의 말을
지나치다고 하였다. 그러자 이이가 나와서 유성룡에게 말했다.
  "국가의 형세가 달걀을 포개 놓은 듯 위태로운데 속된 선비들은 시대적
급선무를 모르니 그들에게는 기대할 것이 없지만 그대마저 이런 말을
하는가? 지금 미리 양성하지 않으면 뒷날 반드시 후회하여도 미치지
못할 것일세"
  그 뒤 임진왜란 때에 서애 유성룡이 사람들에게 말했다.
  "당시에는 나도 소요를 우려하여 군사를 양성하자는 주장을 그르게
여겼는데, 이제 와서 보니 율곡은 참으로 성인이다"
  선조 17년 정월에 서울에 살고 있는 선비 아무개가 마침 무슨 일
때문에 강릉 지방으로 가게 되었는데 야윈 말 한 필과 종 한 명을 데리고
깊은 산골짜기에 이르러 사방을 분간하지 못하고 길을 잃어버렸는데
날은 저물고 주막은 멀어 어디로 향해 가야 할지를 몰랐다. 그러던 차에
갑자기 한 나무꾼을 만나 길을 물었더니 그 나무꾼이 건너편 산등성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를 넘으면 집이 한 채 있을 것이오"
  선비가 그 산등성이를 넘어서 보니 정말 몇 칸 되는 초가 한 채가 있을
뿐이고 다른 촌락은 없으므로 곧장 그 집을 향해 가서 사립문을
두드렸더니 조금 있다가 동자가 나와서 물었다.
  "이렇게 깊은 산골에 손님께서는 무엇하러 오셨습니까?"
  선비가 그 연유를 죄다 말하였다. 그 말을 들은 동자가 안으로 들어간
지 반 시간쯤 지난 뒤에야 다시 나와서 손님을 맞이하였다. 방으로
들어가 주인을 보니 나이는 60세 남짓 되어 보이는데 해진 털모자를 쓰고
청려장을 짚고서 억지로 일어나 손님을 맞으며 인사하였다.
  "오늘밤에 마침 경영하는 일이 있어 정말 손님을 맞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이 깊은 산골에 날이 저물었는데 하룻밤 묵기를
허락하지 않는다면 결코 인정이 아니겠기에 하룻밤 묵도록 하였습니다만
불편한 것이 너무 많을 것입니다"
  그대로 조용히 앉아 더이상 말을 하지 않는데 깊이 생각하는 바가 있는
듯하므로, 선비 또한 한쪽 구석에 묵묵히 앉아 있었다. 조금 있으니까
밥상을 올리는데 그때는 이미 해가 지고 어둑어둑하였다. 그러자
주인이 심부름하는 동자에게 명했다.
  "벌써 해가 지고 어스레한데도 아직 오지 않으니 너무나 이상스러운
일이다. 네가 문 밖에 나가 내다보고 오는 것이 좋겠다"
  심부름하는 동자가 주인의 명대로 문 밖에 나갔다가 돌아와 고하였다.
  "방금 앞 내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주인이 그 선비에게 말했다.
  "반드시 잠자코 앉아 있기만 하고 절대로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얼마 안 되어 두 사람이 왔는데, 한 사람은 시골 서생이었고
한 사람은 늙은 중이었다. 서로 안부를 물은 뒤에 다시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고 심부름하는 동자에게 명하여 정화수 한 그릇을 길어다 소반
위에 올려놓고 향로에다 향을 피우고는 세 사람이 함께 북쪽을 향해
꿇어앉아 한참 동안 주문을 외다가 주인 늙은이가 심부름하는 동자를 불렀다.
  "네가 문 밖에 나가서 우러러 하늘의 기상을 살펴보아라"
  조금 지나자 동자가 들어와 고하였다.
  "별 하나가 금방 동쪽에서부터 떨어졌는데 그 광선이 땅에 비추어
환하였습니다"
  세 사람이 갑자기 서로 쳐다보며 길게 탄식하였다.
  "모두가 하늘에서 타고난 운명이니 어찌하겠소"
  두 사람 모두 처참한 얼굴로 나가 떠나가 버렸다. 그러자 선비가
의심스럽고 이상함을 견디지 못하여 물었다.
  "여러분이 탄식한 것은 무슨 일 때문입니까?"
  "숙헌이 장차 죽게 되었으므로 내가 그 두 사람과 약속하고,
경문을 외우며 재앙을 물리치도록 기도하여 그의 목숨을 조금이
라도 연장시키려고 하였는데, 큰 운명에 관계되는 것이어서 끝내 효과가
없었습니다. 조금 전에 별이 떨어졌으니 벌써 구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숙헌이 누구입니까?"
  "이율곡입니다"
  "내가 서울을 떠나올 때에 이 아무개가 바야흐로 병조 판서의 직임을
맡아 조금도 질병이 없었는데 이게 무슨 말이오?"
  "앞으로 7, 8년 있으면 왜병이 크게 침입할 터인데, 숙헌이 세상에
살아 있으면 거의 난리를 미리 막을 수 있겠지만 이제는 끝장이
났습니다. 온 나라가 허둥대며 모두 참살 당할 것이니 장차 어찌해야 하겠소?"
  "국가의 운명이 이와 같다면 나와 같이 가난한 선비는 어떻게 하여야
보존할 수 있겠소?"
  "충청도의 당진과 면천 사이로 향할 것 같으면 거의 모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비가 또 물었다.
  "두 분의 손님은 누구입니까?"
  "선비의 의관을 갖춘 분은 성명을 드러낼 수 없고, 중의 옷을 입은
이는 바로 금단대사이니, 그대가 산을 떠난 뒤에 행여라도
소문을 퍼뜨리지 말도록 하시오"
  그 뒤에 선비가 서울로 돌아와서 물어 보니 율곡이 정말 아무 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바로 그 세 사람이 별에게 기도하던 밤이었다. 선생이
젊을 때에 꿈에 어느 관부에 들어갔는데 그곳의 관리가 장부를
점검 열람하고 있으므로 무슨 장부냐고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수명의 길고 짧음이 모두 여기에
적혀 있다" 하면서, 한 글귀를 베껴서 주었다.

  용이 새벽 골짜기로 돌아가니 구름 아직도 젖어 있고
  사향노루가 봄 산을 지나가니 풀이 저절로 향기롭네

  그것은 대체로 그가 세상에 머물러 있는 것은 마치 용이 깊은 골짜기로
돌아가는 듯하며, 사향노루가 산을 지나가는 듯하여 머무는 곳마다
명성을 드날린다는 것이었는데 춘추가 겨우 49세였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뒤에 해주의 사람들이 매번 기일이 되면 자기
어버이의 기일을 받드는 것처럼 하여 부녀자에게 이르기까지 고기
반찬을 먹지 않았으며, 그날은 결혼도 하지 않았다. 세월이 오래
지났는데도 그렇게 하고 있으니 이는 옛날 성현에게도 없었던 일이다.

     묘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던 허엽

  허엽(1517-1580)의 본관은 양천이고, 자는 태휘,
호는 초당이다. 중종 35년(1540)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명종 원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을 지냈다. 광해군 15년에 아들 허균이
반란을 계획하다가 잡혀 죽음을 당하자, 그 화가 죽은 허엽의 시체를
톱으로 자르는 데 이르렀다. 그 뒤에 사간 심대부가 그 산을
지나다가 울음소리를 듣고 이상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대답하였다.
  "허엽의 무덤에서 시체가 톱으로 잘리는 화를 당한 뒤에 밤마다
울음 소리가 들립니다"
  심대부가 그 이야기를 듣고 돌 위에다 시를 썼다.

  못난 자식 두기보다는 차라리 없는 것이 나으니
  빈 산 속에 백골이 쓸쓸하구려
  밝은 영혼이여 밤에 울지를 마소
  순장 때 쓰는 기물 역시 인간이 만들었다오

     '백마강부'가 동방에 크게 전파된 민제인

  민제인(1493-1549)의 본관은 여흥이고, 자는 회중,
호는 입암이다. 중종 15년(1520)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어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좌찬성에 이르렀다.
  젊어서부터 재주와 지혜가 뛰어나 '백마강부'를 지어 자부하는
마음을 가지고 선배에게 품평을 구하였는데 선배가 차중(네
등급 중의 둘째)으로 등급을 매기자 만족하지 않은 표정으로
즐거워하지 않았다. 때는 바야흐로 봄이어서 꽃과 버들이 도성에
가득하므로 남쪽 성곽을 산보하다가 남대문 위에 올라가 자기가 지은
'백마강부'를 낭랑하게 읊으니 그 소리가 남대문의 다락과 들보를
진동시켰다.
  그때 마침 장안의 이름난 기생인 성산월이 장차 남대문을
나가 어느 재상이 강가에서 베푸는 잔치에 가려고 하다가 민제인이
시 읊는 소리를 듣고 다락에 올라가서 보니 어느 젊은 유생이
두건을 벗고 이마를 내놓은 채 글을 외고 있으므로 다 듣고
난 뒤에 경멸하는 어조로 말했다.
  "어떤 서생이기에 가사가 그리도 맑고 그리도 낭랑하시오?"
  "이것은 내가 지은 것으로 마음에 항상 좋게 여겼다가 선배에게
욕을 당하였기에 큰 소리로 외어 본 것이오"
  "서생은 함께 이야기할 만하니 저와 함께 누추한 저의 집으로 가기를
바랍니다"
  마침내 그와 함께 집으로 가서 3일 동안 머문 뒤 청하였다.
  "엊그제 외던 백마강부를 한 본 나에게 주시기 바랍니다"
  민제인이 써서 주었더니 성산월이 그 부를 사인의 연회
자리에서 펼쳐 놓았더니 자리를 가득 메운 고관들이 똑같은 목소리로
감탄하며 칭찬하고, 어디서 이런 절창을 얻었느냐고 물었다.
성산월이 대답하였다.
  "이는 첩이 마음 속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지은 것입니다"
  이로부터 백마강부가 동방에 크게 전파되었다.
  백마강부의 끝에 가사가 없었는데 어떤 문사가 가사를
지어 붙여 놓았더니, 중국의 학사가 그것을 보고 탄복하여 말하였다.
  "아깝다. 이 가사는 부를 지은 이의 솜씨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곤장 크기가 넓적다리만 하니 오늘 목숨이
다할 것이라고 한 박광우

  박광우(1496-1545)의 본관은 상주이고, 자는 국이,
호는 혁재 또는 잠소당이라 하였다. 중종 14년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6년 뒤에 문과에 2등으로 급제하였다.
  박광우의 어머니 장씨가 네 아들을 기르면서 한결같이 예제를
따라 서실 세 칸을 짓고, 별도로 길다란 베개와 큰 이불을
만들어 밤낮으로 형제가 함께 거처하도록 하였다. 또 한 벌의 옷과
한 개의 갓으로 손님이 오면 교대로 착용하고서 영접하고 전송하게
하여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노는 것을 막으니, 여러 아들들도 그와 같은
어머니의 교훈에 감동하여 학문과 덕행이 성취되었다.
  박광우는 더욱 어린 나이로 빛나는 재주를 발휘하여 오로지 성리학
연구를 일삼았다. 정암 조광조가 맹자 어머니와 같은 가르침을 다시
보겠다고 자주 칭송하였다.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박광우가 대궐 뜰에 들어가 울부짖으니, 임금이
몰아내도록 명하였다. 박광우가 상처를 입어 피가 흐르자 옷을 찢어
머리를 동여매고 의정부 행랑에 나와 앉았으니 도성 안 방리(행정
구역)의 약도(향약 회원)들이 원통함을 풀어 달라는 소를 올리려고
박광우에게 글을 지어 달라고 요구하는 자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참판 이해와 김노는 모두 나이가 젊고 글씨를 잘 썼으므로
박광우가 두 사람에게 종이를 앞에 놓고 붓을 잡게 한 다음 좌우로
글을 불러 대는데 문장이 샘물이 솟는 듯하여 이해와 김노가 미처
받아쓰지 못하였으며, 같은 시간에 지은 것이 10여 건이나 되었지만 문장
내용이 간절하였다.
  그 뒤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박광우가 사간으로서 논쟁하기를 그치지
않아 잡아다 옥에 가두었다. 그가 범죄 사실을 진술한 것에 이런 내용이
들어 있었다.
  "곤장 크기가 넓적다리만하니 오늘 목숨이 다할 것이다. 어진 삶을
구하다가 어진 삶을 얻었으니 또 누구를 원망하며 탓하리오"
  봉산으로 귀양가게 되었는데 겨우 돈의문(서대문) 밖에 나가서 죽었다.

     소인들이 조정에 있으면 붕당을 만든다고
임금에게 책임을 물은 임권

  임권(1486-1557)의 본관은 풍천이고, 자는 사경,
호는 정용재이다. 중종 2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6년 뒤 문과에 급제하였다.
  을사년(1545) 7월의 인종 상사에 조정 신하들 중 절반이 평상복
차림의 옥관자를 썼으나 유관과 임권만은 유독 소복을
입었었다. 그리고 인종의 위패를 별묘인 연은전에다
모시려고 할 때에, 임권이 인종은 위로 중종을 계승하고
아래로 명종에게 물려 주었으니 실제로 대통을 이은 군주인데,
별도로 연은전에서 모시게 하는 것은 남에게 붙여서 먹는 그런 임금과
같다는 의견을 제시하면서, 혼자서 정론을 가지고 항거하며 사사로운
의논에 따르지 아니하였다. 임권이 언제인가 경연에 나아가 아뢰었다.
  "김안로가 조정에 있게 되자 소인으로서 일정한 주관이 없는
자들이 붕당을 만들어서 못된 짓을 하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것이겠지만 전하께서도 붕당을 만들게 하여 그들에게 못된 짓을
마음대로 하도록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중종이 대답하였다.
  "내가 그 책임을 핑계댈 수는 없다"
  임권이 기뻐하며 말하였다.
  "융성하도다 임금의 말씀이여! 참으로 만세 제왕의 본보기이다. 신하의
바른 말을 수용하고 과실을 자신에게 돌리니 한 가지를 거론하여
두 가지의 아름다움을 갖춘 격이다. 만일 임금이 자신이 옳다고 하면서
바른 논의를 듣기 싫어 한다면 누가 기꺼이 바른 말을 발설하여 화의
함정으로 빠져들려고 하겠는가?"
  벼슬은 좌참찬에 이르렀고 시호는 정헌이다.

     영월군수가 되자 단종의 신위를 설치하여
괴상한 변고를 없앤 김륵

  김륵(1540-1616)의 본관은 예안이고, 자는 희옥,
호는 백곡이다. 퇴계에게 글을 배웠다. 명종 19년(1564)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선조 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홍문관의
청환직을 지냈다. 어느 날 차자를 올려 임금의 덕성이 매우
절실함을 논하였더니, 임금이 그를 앞에다 불러 놓고 책망하였다.
  "그대가 나더러 영민하고 슬기로움이 너무 지나치다고 하였는데
무엇을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가?"
  "오늘날 처리하는 일들이 바로 그 근거입니다"
  임금이 더욱 노여워하다가 깨닫고서 신하를 통하여 김륵에게 사과하고
술을 하사하면서 그 자리를 파하였다. 동왕 17년에 영월군수가 되었는데
이보다 앞서 영월군에 괴상한 변고가 있어 수령이 부임하였다가
번번이 죽어 나가는 일이 있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맨 먼저 용기를
가지고 그 동안 아무도 하지 못했던 노산군(단종)의 묘를 찾아
배알하고 신위를 설치하여 송 부인(단종 비 송씨)을 배향하게
하고는 제수와 예물을 갖추어 정성스럽게 받들었더니 3년
동안 영월군에 아무런 변고가 없었다. 그 뒤 임진왜란 때에는 영남 안
집사의 명을 받았으며, 이듬해에는 경상우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가
내직으로 들어와 대사헌이 되어 국가를 부흥시키는 열 여섯 가지의
계책을 진달하였다. 그 후 영천의 귀학정으로 은퇴하여 마음이
가는 대로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다가 77세에 죽었다.

     무뢰배 생활을 청산하고 훌륭한 학자가 된 이항

  이항(1499-1576)의 본관은 성주이고, 자는 항지,
호는 일재이다. 타고난 기상과 용력이 범상하지 않아, 어려서부터
장난할 때에 동리 아이들이 겁을 내어 굴복하였다. 자라서는 놀기를
좋아하며 협기가 있어 만 리를 달리려는 뜻이 있었고, 씨름, 활쏘기, 
말타기에서는 한 패의 으뜸이어서 억센 적과 주인을 배반한 종이
있으면 반드시 가서 그들을 눌러 이겼다.
  무과 준비를 하면서 남치조, 남치근, 민응서
같은 무리와 서로 어울려 따르니 사람들이 미치광이로 지목하기도
하였지만 역시 비상한 사람임을 아는 이가 있었다. 어느 날 달이 휘영청
밝은 깊은 밤에 남대문에 올라가 기와가 덮인 처마 끝부분을 잡고
나는 듯이 몇 바퀴 돌기도 하였다.
  하루는 그의 친구 남씨가 과실로 사람을 죽여 의금부의 관원이
시체를 검사하는데, 이항이 주위의 사람들을 헤치고 시체를 조사하고
있는 가운데로 느닷없이 들어가 시체를 움켜쥐고 나는 듯이 달아나
강물에 던져 버리고 그날로 비호같이 달려 전라도 관찰사를 찾아가 뵙고서
그날에 서울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하게 하였다.
  한편 시체를 조사하던 관원은 갑자기 시체를 잃어버리고 그것이 이
아무개가 한 짓임을 들어서 알고는 호남에다 파발을 띄워 체포하도록
요청하였다.
  "이항은 그날 전라도 감영에 있었다"
  전라도 관찰사가 이렇게 회보하여 이항과 연루된 자들이 모두 모면할
수 있었다. 대체로 그의 뛰어난 용맹이 이와 같았다.
  30세 이르러 그의 백부가 경계하는 말을 듣고 즉시 뉘우치며
반성하여 그 자리에서 같이 어울리던 무리들과 사절하였다. 그리고는
'대학'을 소매 속에 넣고 도봉산 망월암으로 가서 마음을 단단히 하고서
공부를 열심히 하여 마침내 큰 유학자가 되었다.
  그 뒤 남명 조식, 퇴계 이황과 함께 언관으로 훌륭한 계책을
진언한 것이 많았다. 임금이 진언하는 것마다 아름답게 여겨
받아들이고 차례를 뛰어넘어 임천군수에 임명하자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뒤 장령에 임명하여 여러 번
불렀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고집쟁이 선비 최영경

  최영경(1529-1590)의 본관은 화순이고, 자는 효원, 호는 수우당이다.
처음 남명에게 배우기를 청할 적에 당시 국상중이었으므로 죽순을
예물로 바치고 와서 제자가 되었는데, 남명이 한번 보고 그를 특이하게
여겨 세상에서 뛰어난 인물이라고 마음을 허락하였다.
  최영경은 청렴하고 깨끗함이 세상에서 제일이었다. 그는 의로운 일이
아니면 털끝만큼도 취하지 아니하였으며, 어버이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다. 어버이가 돌아가시자 가산을 기울여서 장례를 지냈으므로
마침내 집안 형편이 어려워졌다. 그의 집이 성중에 있었으나 남과
교제하기를 일삼지 않아 그를 아는 자가 별로 없었고 그 마을 사람들이
모두 '고집쟁이 선비'라고 하였다. 안민학이 처음으로 방문하였다가
그 말을 듣고 그에게 특이한 점이 있음을 알고 성혼에게 말하였다.
  "우리 마을에 특이한 인물이 있었는데도 몰랐다가 지금에야 서로
알았으니 어떻게 가서 보지 아니하겠소"
  성혼이 성중에 들어와서 일부러 찾아가 문을 두들기니 한참만에
맨발의 어린 여종이 나와서 맞이하므로 집안으로 들어갔더니 뜰에는
방초가 가득하였다. 조금 있으려니까 최영경이 나오는데 베옷에다
떨어진 신을 신은 궁색한 차림이기는 하지만 그 얼굴은 위엄이 있어
보이고 정중하여 남이 함부로 할 수 없는 기상이 있었다. 서로 앉아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한 점의 속된 티가 없었으므로 성혼이 매우
좋아 하였다.
  그가 물러 나와서 백인걸에게 말하였다.
  "내가 아무개를 보고 돌아올 적에 홀연히 맑은 바람이 소매에 가득함을
깨달았다"
  백인걸도 크게 놀라고 특이하게 여겼으며, 이때부터 그의 명성이 사림
사이에 널리 퍼졌다. 그러다가 선조 6년(1573)에 뛰어난 행실로
추천되어 6품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으며, 또 8년 뒤에
지평으로 임명되었지만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던 차 동왕 22년에
일어난 정여립의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고 조금 있다가
풀려났는데, 대간의 계달로 재차 체포되어 국문을 받다가 이듬해에
옥중에서 죽었다. 뒤에 대사헌에 추증되었다.

     윤원형의 패망을 미리 안 박사종

  박사종(1513-1579)의 본관은 밀양이고, 자는 공계, 호는 읍청인데
과거 공부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오로지 실천하는 데 힘을 썼다.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항상 천장을 쳐다보고 탄식할 뿐 세상에 나아갈
뜻은 없었으며, 비록 강호에 머물기는 하였지만 세상일을 잊지는
않았다. 조정의 정치가 온편하지 못하다는 소문이 있으면 하루 종일
눈살을 찌푸리기도 하였으며, 만년에 봉사(밀봉하여 임금에게
올리는 글) 열 조목을 올렸는데, 내용이 모두 절실한 것이었다.
  어느 날 고래 한 마리가 한강을 지나다 어부에게 잡힌 일이 있음을
듣고 말하였다.
  "바다에서 강으로 왔으니 이는 고기가 떠난 것이다. 고기가 떠나서
죽는 곳으로 나아간 격이니 윤원형이 모면 하지 못할 것이다"
  과연 이듬해에 윤원형이 패망하였다.
  "수십 년 뒤에 국가가 반드시 어려움이 많게 될 것이다"
  그는 또 이렇게 예언하고 군사에 관한 책을 널리 읽으며 마치 장차
난리를 평정할 듯이 하였다. 비록 난리 전에 죽기는 하였지만 그의 말은
징험이 되었다.
  선조 15년(1582)에 학문과 덕행이 순수하고 올바르다는 것으로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였다가 사직하고 즉시 고향으로 돌아와서
죽었는데, 67세였다.

     시문을 지어 소도둑을 석방하게 한 옥봉

  옥봉 이씨는 첨지중추부사 조원의 첩이다(조원은 본관이 임천인데
진사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를 지냈으며 호는 운강이다). 어느
시골 마을의 아낙네가 그의 남편이 억울하게 소를 훔친 혐의로 구속되어
있었으므로 관아에다 탄원서를 올리는데 옥봉 이씨가 그 탄원서의 끝에다
이렇게 써 주었다.
  "첩 자신이 베를 짜는 직녀가 아닌데 낭군이 어찌 소를
몰고 가는 견우이겠습니까"
  고을의 수령이 그 글을 보고서 기이하게 여기고 마침내 석방시켜 주었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이 여강으로 떠나는 것을 전송하는 시를 지었다.

  신륵사 앞엔 안개낀 물결 일렁이고
  청심루 가에는 눈 속의 달 밝구려

  또 어떤 사람이 찾아준 데 대하여 고맙게 여긴 시를 읊었다.

  음수는 음률을 좋아하던 탁문군의 집이고
  청산은 시 잘하던 사조의 움막이네
  뜰에 빗속의 나막신 흔적 남았는데
  문에는 눈 가운데 나귀가 왔구려

  음수는 바로 그가 살고 있는 곳이었다. 또 노산군 묘에도 시를 지었다.

  닷새는 서울에서 사흘은 영월에서
  애처로운 노랫소리 노릉 위 구름 속으로 잦아드네
  첩의 몸 또한 왕손의 딸이라
  이곳의 두견새 울음 차마 듣지 못하겠네

     소나무를 심어 관을 만든 박계현

  박계현(1524-1580)의 본관은 밀양이고, 자는 군옥, 호는 관포이다.
늘그막에 어린 소나무를 정원에다 심었더니 어떤 손이 장난 삼아 말하였다.
  "소나무 심어 장자 짓는다는 말을 세상 사람들이 모두 비웃는데 이렇게
어린것을 심어 무엇하려 하오?"
  "내가 죽으면 널 재목으로 쓰려고 하오"
  "그때는 내가 응당 조문객이 될 것이오"
  그 손이 응수하자, 곁에 있던 목공이 앞으로 나서며 말하였다.
  "소인이 그때 널을 만들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비오는 날의 나막신 구실을 한 정사룡

  정사룡(1491-1570)의 본관은 동래이고, 자는 운경,
호는 호음이다. 시문은 잘하면서도 경학을 익히지
않아 응교로 있으면서 매번 임금 앞에 나아가 글을 강론할
때를 당하면 얼굴을 찡그리고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차라리 열 번 중국
학질에 걸릴지언정 한 차례 경연에 나가지 않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정사룡이 홍주목사 시절에 사달정을 짓고 그곳에서 날마다
시 읊는 것을 일삼으며 영을 내려 주민들 가운데 소송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살아 있는 메추라기를 갖다 바쳐야만 사건의 심리를
허락한다고 하였다. 어떤 주민이 소송을 하려고 관아의 문에 이르자
메추라기가 죽어 벼려 문지기가 받아 주지 않으므로 주민이 관아에 들어
가서 소송을 하였지만 정사룡이 허락하지 않고 내쫓아 버렸다.
  중종 32년(1537)에 명나라 사신 공용경이 올 때 소세양은
원접사가 되었고, 정사룡은 가선대부로 평양 영위사가 되었다. 그런데
공 사신의 문장이 광대하여 연로에서 지은 작품이 먼저 조선에
퍼졌다. 조정 의논이 모두 소세양이 그를 당해낼 수 없을 것이라고
하자, 소세양이 의주에 있으면서 병으로
사임하고, 정사룡을 자헌대부로 승진시켜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
  "조정에서는 나를 비오는 날의 나막신으로 삼는구나"
  정사룡이 웃으며 이렇게 말했는데 그것은 평상시에는 아무렇게나
내버려두었다가 어떤 일이 닥쳤을 때 활용함을 이르는 것이었다.

     주인의 원수를 갚은 유관의 여종 갑이

  유관(1484-1545)의 본관은 문화이고, 자는 관지,
호는 송암이다. 진사시에 합격한 뒤 중종 2년(1507)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명종 즉위년(1545)에 정승이 되어 좌의정에 이르렀고
시호는 충숙이다.
  을사사화 때에 억울하게 죄를 받았는데, 정순붕이 유관을
역적 모의를 하였다고 터무니없이 얽어서 위조된 공훈을 공신녹권에
기록하려고 도모하니, 유관의 가속 및 종들은 모두 몰수되어 정순붕
집안의 노비가 되었다.
  그 가운데 갑이란 이름을 가진 여종이 있었는데 나이 겨우 14, 5세쯤
되었으며 총명과 지혜가 뛰어났다. 정순붕이 매우 아끼며 어여쁘게 여겨
의복과 음식을 마치 어미가 자식에게 하는 것처럼 주었다. 그러자
갑이 또한 정순붕이 생각하기도 전에 눈치 빠르게 비위를 맞추며 일마다
정성을 다하고 매번 옛날 주인에 대한 말이 나올 적마다 반드시 헐뜯으며
욕하였다.
  "저들이 항상 나를 구박하면서 인색하게 대했으므로 내가 그 때문에
설움을 갚는 것이다"
  정순붕이 더욱 그를 신임하고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갑이가
값진 그릇을 숨겼다가 들켰다. 정순붕이 갑이에게 힐문하자, 갑이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다.
  "제가 이곳에 와서 주인이 주는 옷을 입고 주인이 주는 밥을 먹으며
은혜와 대우가 견줄 데가 없는데 무엇이 괴로워서 물건을 훔치겠습니까?"
  정순붕이 의심을 하면서도 그를 풀어 주었다. 이보다 앞서 갑이가 그
집의 젊은 종과 정을 통하고는 그 종에게 말했다.
  "주인이 만약 나를 다그치면 회초리의 독을 견디지 못하여 장차
너를 끌어들여 증거로 삼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겠는가?"
  "내가 액땜을 하려고 하니 반드시 죽은 지 얼마 안 된 사람의 팔이나
다리를 구해 가지고 오라"
  종이 갑이의 말대로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의 팔 한쪽을 잘라다 주었다.
그러자 갑이가 정순붕의 베개 속에다 몰래 잘라 온 팔을 넣어 두어
얼마 안 가서 정순붕이 전염병에 걸려 죽었다.
  그 뒤에 정순붕의 집안에서 그 사실을 알고 조사를 하자 갑이는
태연하게 반문했다.
  "너희들이 우리 상전을 죽였으니 바로 나의 원수이다. 내가 죽으려고
한 지가 오래였는데 이제 원수를 갚았으니 죽을 곳을 알았다. 그런데
무엇을 물으려 하는가?"
  갑이는 마침내 곤장을 맞고 죽었다.

     하인에게 거지 사윗감을 골라 주고 뒷일을 부탁한 이준경

  이준경(1499-1572)의 본관은 광주이고, 자는 원길,
호는 동고이다. 중종 17년(1522)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9년
뒤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준경은 몸가짐이 청백하고 검소하며 기국이 방정하고 엄격하였으며
후덕과 중망이 평소 사람들을 감복시켰다. 그러나 후배들과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당시에 미움을 받기는 하였는데, 정승으로서의
업적을 말한다면 이준경이 제일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어머니 신씨가 입으로 '대학'과
'효경'을 가르치면서 늘 타일렀다.
  "과부의 자식과는 사귀지 말라고 하였으니 반드시 학문을 부지런히
하기를 남보다 열 배나 더하여 옛날의 집안 명성을 떨어뜨리지 말아라"
  이준경이 그의 형 정헌공 이윤경과 어머니의 뜻을 공경히 받들어 종형인
탄수 이연경의 문하에서 글을 배우며 학문에 힘을 썼다.
  어렸을 적에 남명 조식과 산중에서 같이 글을 배우면서
장난을 칠 때면 항상 사직을 편안하게 하는 것으로 자신을 기약하였으며,
남명에게는 "너는 바위굴에서 말라 죽을 인물이다"라고 놀렸다.
이준경이 정승이 되자 남명이 편지를 보내어 경계하였다.
  "바라건대 공은 위로 솟기를 소나무와 같이 하여도 아래로 뻗기를
칡넝쿨과 같이 넝쿨지지 마시오"
  이준경이 동부승지였을 때에 홍섬이 도승지였다. 홍섬이 일찍이
이름난 기생 유희를 가까이 했었는데, 유생 송강 역시 유희와 정을
맺어 매우 가까이 지내는 터였다. 그런데 어느 날 홍섬이 승정원에서
여러 동료들에게 말하였다.
  "송강이 죽었다. 나와는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 같은 시각에 태어났는데도
먼저 죽어 곤궁하고 통달한 것이 같지 않으니 어찌 이상하지 않은가"
  이준경이 그 말을 받았다.
  "도승지 영감께서도 유희를 사랑하였고 송강 역시 유희를 사랑하였으니
운명이 같을 뿐 아니라 행한 일도 같지 않습니까?"
  여러 승지들이 서로 돌아보며 놀라서 얼굴빛이 변하였고 여러 서리들은
놀라 눈을 휘둥거리며 그전에 없었던 큰 변고라고 하였다. 승정원
고사에 여러 승지들은 도승지를 공경하여 감히 농담을 하지 못하며,
불경한 자는 벌연을 베풀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준경의
집에서 벌연을 베풀기를 무릇 일곱 차례를 한 뒤에야 그만두었다.
  이준경은 이 일을 두고 이렇게 말하였다.
  "나로 하여금 이 일 때문에 가산이 거덜난다 하더라도 이야기의
실마리가 너무나 멋지니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준경의 집에 피성을 가진 하인이 있었는데, 사람 됨됨이가
조심성이 있었으므로 이준경이 그를 매우 아꼈다. 그런데 그 하인이 늘
이준경에게 청원하였다.
  "소인에게는 단지 딸자식 하나밖에 없으니 장차 좋은 사람을 데릴사위로
맞아다 늘그막에 의탁했으면 합니다. 대감께서 신랑감을 골라 주시기를
감히 바랍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준경이 대궐에서 돌아와 피성의 하인을 불러 말하였다.
  "오늘 아침에 비로소 너의 사윗감을 얻었으니 빨리 불러오는 것이 좋겠다"
  "그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한성부 앞에 어떤 총각이 거적으로 몸을 가리고 앉아 있는데 바로
그 사람이다"
  피씨 하인이 사람을 시켜 가서 보게 하였더니 과연 그런 사람이 있으므로
정승의 명령이라 하면서 그를 불렀다. 그러자 그 총각이 말하였다.
  "정승은 어떤 벼슬이며 나를 불러다 무엇을 맡기려 하시오?"
  총각이 굳게 거절하며 오지 않으므로 피씨 하인이 따라왔다. 위협하고
공갈을 쳐보았지만 만 마리의 황소 같은 고집을 돌리기 어려웠다. 하는
수 없이 이런 사실을 돌아와 고하였더니 이준경이 말하였다.
  "그 사람이 반드시 이와 같이 하리라는 것을 나도 알았다"
  다시 문을 지키는 하인 몇 명을 보내자 그제야 심부름간 이준경이
총각에게 물었다.
  "장가 들고 싶으냐?"
  "장가는 들어 무엇합니까"
  이준경이 여러 번 타이르고 권하자 억지로 허락을 하니, 이준경이
기뻐하며 하인에게 일렀다.
  "내일 혼례를 치르도록 하라.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기회를 잃게 된다"
  하인이 곁에서 그 총각을 보니 남루하고 멍청한 모습이 바로 누더기를
걸친 거지 아이에 불과할 뿐이었다. 놀랍고 괴상한 마음을 감당하지
못하였으나 감히 명령을 어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데리고 나가 그의
머리를 빗기고 몸을 씻게 한 뒤 새 옷을 내주었다.
  이튿날 초례를 치르는데 온 집안 사람이 코를 가리며 웃어대었지만
그의 사위는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가 한번 처가살이를 한
뒤로는 두건도 쓰지 않고 버선도 신지 않은 채 잠자는 것을 일과로
삼아 문밖을 엿보지 않은 지가 3년이 되자 집안 사람들이 모두 어리석고
게으른 사람으로 지목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세수를 하고 의관을 갖추므로 그의 아내가
이상하게 여겨 물으니, 그가 대답하였다.
  "오늘 틀림없이 대감께서 찾아오실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그를 비웃었다. 그런데 조금 있으려니까
문 밖에서 갑자기 고관을 모시고 다니는 하인의 잡인 통행을 통제하는
우렁찬 소리가 들리더니 과연 대감이 찾아와서 곧장 방으로 들어가
그의 손을 잡고 말하였다.
  "장차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장차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늘의 운수인데 어찌하겠습니까?"
  하인의 사위가 대답하니 이준경이 말하였다.
  "이 뒤의 일은 전적으로 너에게 맡긴다"
  "재능을 인정해 주시고 대우하여 주시는 은혜를 어찌 감히 잊겠습니까.
다만 앞으로의 일의 형세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관찰할 것이며 결정지어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몇 마디 주고받고 하다가 대감이 떠나니, 온 집안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기며 그제야 그가 범상한 사람이 아닌 줄 알고 이때부터
앞서보다 대접이 조금 나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에 그 하인이 이준경의 처소에서 돌아오자 그의
사위가 말하였다.
  "옷을 벗지 말고 다시 빨리 가셔서 대감께서 세상을 떠나시는데
임종하십시오"
  "무슨 말을 하는가? 내가 방금 대감을 뵈었더니 손님과 이야기를
주고받으시면서 조금도 불편한 기색이 없으셨는데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긴 말씀 마시고 빨리 가십시오"
  하인이 다시 가서 뵈었더니, 이준경이 바야흐로 수건으로 낯을 닦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가 겨우 눈을 떠서 하인을 보고 말하였다.
  "네가 어떻게 알고 갔다가 곧장 왔는가?"
  "쇤네의 사위가 말해 주었으므로 오기는 하였습니다만 어떻게 해서  대동기문 완역본
  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하)


 강효석

         차례

    대동기문 서

    1. 예론이 당쟁으로

  노정승의 몸으로 아버지의 치매를 간병한 효자--조익
  친구간이라도 주지 않는 것은 절대 강요하지 말라고 훈계한--심지원
  신의를 잃으면 세상에 설 수 없다고 혼인 약속을 지킨--박서
  승문원 정자에게 종이와 벼루를 갖고 오게 한--정태화
  어여뿐 기생의 유혹으로 인생의 진로가 바뀐--오성군
  국수로서 시골 하수에게 당한--덕원령
  임금이 내린 명을 받들 수 없다고 한--이경휘
  효종의 제삿날 하루 종일 통곡한--송 장군
  의로운 신하의 울음소리에 여름서리가 내린다고 한--김홍욱
  심양에서 봉림대군의 시중을 든 영리한--논학
  불상에 고기를 문지르고 그날 밤에 죽은--어느 선비
  꿈을 통해서 전생의 인연을 만난 평안 감사--유심
  천문을 잘보아 경술년 기근을 재상에게 당부한--김시진
  살아서 백도요, 죽어서 대제학이 된--정두경
  꿈에 신덕왕후 강씨를 만난--권유
  한 쌍의 학이 양 어깨에 내려앉은 꿈의 주인공--신천익
  늦팔자가 좋은--조계원
  계속 일곱 대가 골고루 수를 누린--이의전 집안
  복이 과하면 반드시 재앙이 따른다고 경고한--정유성
  국법에 따라 연좌되어 죽는 것이 옳다고 한--허적
  금관자 대신 쇠뿔로 된 관자를 한 재상--송시열
  태어날 때 천인이 산구를 보내 온--송준길
  산적 두목으로부터 목숨과 재물과 여인을 얻은--이완
  순가의 재치로 평안 병사까지 한--이무
  병사의 청을 군명으로 들어주지 않은--조석윤
  두 아들로부터 술주정 행패를 당한--민정중
  나이 겨우 일곱에 피난길의 식구를 모두 살림--민유중
  목소리만 들어보고도 죽음을 예견한--심만
  앞을 내다보고 난세에 신중한 처신을 한--신정
  재주가 없어 백이전을 10만 번 읽은 억만재의--김득신
  시재가 뛰어나 까다로운 운자에 강한--홍석기
  전서에 동방 일인자--허목
  원혼들로부터 철저히 복수당한--김석주
  신분이 천한 무인에게 큰 교훈을 얻은--정재숭
  유응부의 계시를 받은 숙종조의 충신--오두인
  친국을 받으면서 임금에게 간한--이세화
  '공의 힘으로 윤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을 면했다'고 칭송받은--박태보
  한번 내뱉은 '말'은 달리는 '말'로도 못 따라 잡는다고 한--이현조
  지혜로운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았던--윤휴
  과거 급제를 기뻐하다 장인으로부터 크게 꾸중을 들은--권변
  꿈에 생사당을 가느라고 임금 앞에서 졸았던--이민서
  한쪽 다리가 잘린 뒤 더욱 출세한--윤지완
  시골 선비에게 속아 급제시킨 상사관--김진규
  기생들로 하여금 누추한 이름을 남기게 한--한지
  남을 돕는 일로 즐거움을 삼은--임준원

    2. 기사환국과 신임사화

  일본 땅에서 제주 귤을 먹은--신유한
  남한산성이 함락되자 배나무를 안고 통곡한--유혁연
  상복 차림으로 밭을 간--최신
  서북인 출신으로 최초로 충청 병사가 된--전백록
  늦게 글을 배워 출세한 무인--전종영
  대를 이어 학업을 연마하여 훌륭한 선비가 된--윤거형
  제비를 시제로 하여 대제학에 뽑힌--권유
  숨차 헐떡이는 소를 보고 일평생 소고기를 먹지 않은--김주신
  착한 끝은 있는가? 늦팔자가 활짝 핀--김우항과 권 참봉
  시를 보고 작자의 미래를 점친--남용익
  귀양가면 그곳에 술이 있느냐고 물은--오도일
  덕천에 귀양 가서 관아의 뜰을 청소한--이관명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 있다고 할 만한--윤지술
  의사의 피로 죽어서 사람을 감복시킨--임창
  황룡이 버드나무에 걸려 있는 꿈을 꾸고 장원 급제한--이만성
  관상을 보면 기이하게 들어맞는--김창흡
  거짓말을 한 아전을 도와준--조태채
  '양'자 때문에 화를 당한--이이명
  참형당할 때 휜 기운이 목에서 나와 하늘에 뻗친--이건명
  백수의 노신으로 죽음을 무릅쓰고 세제책립을 반대한--조태구
  학질이 떨어질 정도로 위엄이 높던--이광좌
  왕의 총애를 받는 후궁의 욕심을 꺾은--신임
  목호룡의 기를 꺽은 비파의 명인--김성기
  몹시 어둔하여 서당의 스승조차 포기하려 했던--윤봉구
  꿈에 하늘로부터 난초화분을 받고 출세한--이재
  숙질이 변란에 항거하여 나라를 위해 몸바친--이봉상
  30년 묵은 옥사를 처결하고도 애통해 한--황인검
  거지와 어사를 분별할 줄 아는 어린 기생에게 감동된--이광덕
  체통과 예법을 잃은 감사를 탄핵한--김굉
  대나무 찍은 뾰족한 끝을 분별하여 잃은 돈을 찾아준--고유
  담을 뛰어넘게 하여 폐세제 전교를 거두게 한--송인명
  선정을 펴 삼한을 이룬--최규서
  끝내 이름을 고치지 않은--정호
  돈피갖옷을 벗어 정순왕후에게 바친--이사관

    3. 탕평과 선비들의 의리

  사적으로 원수지간이나 공적으로는 도움을 준--이종성
  소를 타고 온 객을 보고 초헌에서 내린--윤급
  영조의 육상궁 참배를 반대하다 처형될 뻔한--조중회
  관아에 불을 질러 잃어버린 병부를 찾은--이만원
  삼종제수의 꿈 징조로 문과에 급제한--이태중
  원수에게 은인이 된--박문수
  어영대장의 마부를 가둔 성균관 장의--서유망
  임금이 신하에게 농을 하는 것은 불가하다는--송명흠
  눈과 코가 베어졌어도 역신을 꾸짖은--이술원
  막하의 비장으로 인하여 아들 하나를 보전한--이사성
  못쓰게 된 한 푼을 위하여 두 푼을 들인--정홍순
  윗사람의 부당한 지시를 완강히 거절한--양완
  하찮은 물건에도 정해진 운명이 있다는 것을 깨우친--이성원
  기생 덕분에 화를 면한--조운규
  나무를 실은 남의 소를 타고 가서 급제한--윤필병
  처자가 정절을 지킨--김하재

    4. 변란과 풍운의 국운

  교만한 종사관을 반란을 평정시킨 인재로 만든--이창운
  '꽃이 진 뒤에 그 위에 다시 피는 꽃'의 뜻을 알고 있었던--채제공
  어머니의 병구환 때문에 벽파를 붙좇은--심환지
  해흥군의 넋을 머리에 인--김이소
  큰 뱀이 배 위에 서려 있었던--김종수
  벼슬길에 오르는 것을 비난한 갈처사를 의로운 친구로 사귄--김유근
  얼굴은 지독히 못생겼어도 복이 많았던--윤명렬
  임금이 내려준 집을 거절한--윤득부
  스승의 꿈대로 우부빈객이 된--이의철
  성실과 솔직함으로 끝내 아내를 효부로 만든--이규복
  귀신도 꺼려하는 억센 기상의--김정묵
  과장의 문란함을 보고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은--이직보
  사치하고 망하지 않은 사람 없다고 책망한--김용겸
  제자에게 좌우명이 될 시를 지어 경계한--정종로
  술과 시를 즐기며 경치 좋은 곳에서 숨어 산--이양연
  수절하는 기생 무운을 사랑한--이경무
  순라군으로 시문을 잘하여 어전에까지 불려간--왕태
  도둑에게 해진 갓을 되돌려 받은--정민수
  소탈한 천성을 타고난 화가--김홍도
  산은 그리고 물은 그리지 않은 산수화가--최북
  대나무와 난초를 잘 그린--임희지
  닥쳐 올 일을 미리 짐작하고 대처한--이서구
  장례 때 백학이 상여를 인도한--이제로
  도둑도 감복하여 종이 되겠다고 자청하게 한--홍기섭
  용호영의 장교를 곤장으로 다스린--임익상
  솔개가 병아리 채가는 것을 보고 운명을 점친--임치종
  관서지방에 발길을 끊었던--김삿갓
  의주에서 꿈에 선조대왕을 본--임백수
  필명은 천하에 떨쳤으나 운명이 기구했던--김정희
  노루가 간 길을 따라가서 사형을 면한--이인응
  자식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홍순목
  외국과의 개방과 통상 논의를 맨 먼저 꺼낸--박규수
  효성으로 돌아간 아버지의 초상화를 얻게 된--이희익
  민 중전을 변장시켜 장호원까지 피신시킨--홍계훈
  피묻은 옷 곁에 대나무가 돋아났던--민영환

    이 책을 읽고

      대동기문 서

  오확(전국시대 진나라의 역사)은 무게 천근을 드는 장사였지만 자기의 몸은 
들지 못하였으니 어찌하여 물건을 드는데 강하고 자신을 드는 데는 약하였던가. 
이주의 시력은 가을 털 끝은 살필 수 있어도 자신의 눈썹은 볼 수 없었으니 
어찌하여 털 끝을 보는 데는 밝고 눈썹을 보는 데는 어두웠던가. 이는 형체에 
구애된 때문이다.
  초나라 무당은 남을 위하는 데는 혼령도 불러내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재앙도 
물리칠 수 없었고, 진나라 의원은 남의 목숨은 살려냈지만 자신의 병은 낫게 하지 
못하였다. 어찌하여 남에겐 신비한 효험을 보이면서 자신에겐 보이지 못했을까. 
이는 사심에 가리워진 때문이다.
  노나라에 살면서 "춘추"(노나라의 역사서)는 읽지 않고 "승"(진나라의 역사서)을 
읽는다거나 송나라에 살면서 장보(송나라 의관)를 착용하지 않고 깃 털모자를 
쓴다면 이는 형체에 구애된 때문일까, 아니면 사심에 가리워진 때문일까. 여기에서 
우리는 어리석고 미혹되기 짝이 없음을 느낄 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문제점은 어디에 있을까? 새것을 좋아하고 기이함을 
숭상하며 우리 것은 업신여기고 남의 것을 배우기에 급급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주, 진, 한, 당 등 중국 역사에 대해서는 부녀자나 아이들까지도 거침없이 
설명하면서 단군, 기자 등 우리 역사에 대해서는 노숙한 선비를 자처하는 
사람들까지도 상세히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세대를 내려올수록 더욱 어렵고 우리와 가까운 일일수록 더욱 소홀하다. 
의로움과 이로움을 가리지 못하여 도척을 순임금으로 잘못 아는가 하면 
아름다움과 추악함을 혼동하여 은을 철이라 우기며 옳고 그름을 구분하지 못하며 
주황색을 자주색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있다. 아니 이러한 자들은 부지기수로 많다.
  사람의 이름은 알면서 그 사람의 산 시대는 알지 못하는가 하면, 그 사건은 
알면서 그 사건이 누구에 의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하며, 성은 알면서 본관을 알지 
못하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심한 경우에는 자기 조상에 대한 역사는 캄캄하여 
누가 물으면 아예 입도 벌리지 못하고 딴전만 피다가 외국 역사에 대해 말하게 
되면 산바람이 나서 바다 건너 멀고먼 불모지까지도 마치 손바닥을 들여다보고 
말하듯 소상하게 설명하며 그칠 줄을 모른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병폐인가? 우리들의 의문은 여기서 더욱 심하게 된다.
  나의 벗 금천자는 이 땅 대동에서 태어나 이 땅에서 늙은 사람이다. 언젠가 
그는 내게 말하기를, 고려 이전의 일은 이미 기록이 정비되어 있으니 두어두고, 
조선 태조부터 고종까지 사이에 일어난 기괴한 일들을 기록하여 4권 1책으로 
만들어 이름을 "대동기문"으로 했다고 하였다. 또 나도 이 땅 사람이란 이유로 
그는 나에게 서문을 쓰도록 하였다.
  이 책은 기이한 일을 실은 책이므로 괴이한 이야기도 있고 익살맞은 사실도 
실렸으며 야인의 사적도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역사 속의 패사라면 말이 되지만 
그저 평범한 일상적인 글이라고 할 수는 없다.
  또 이 속엔 이름난 공과 큰 업적에 관한 이야기며 뛰어난 충신, 효자 이야기며 
숭고한 도학과 빛나는 문학 이야기가 실려 있으니 어찌 단순한 한낱 패사라고만 
할 수 있겠는가. 물론 그 속엔 아름다운 이야기와 추악한 이야기가 함께 실려 
있고 좋은 이야기와 나쁜 이야기가 섞여 있으니 그 가치 판단은 마땅히 독자가 
해야 한다.
  만약 새것을 좋아하고 우리 것을 소홀히 여기는 자가 곁에 있다가 하하 
웃으면서 이 책이 진부하면 진부했지 기이할 게 무엇이냐고 비웃는다면, 아마 
자네는 틀림없이 송나라 사람은 송나라 관을 써야 되고 노나라 사람은 노나라 
역사를 읽어야 하듯이 우리나라 사람은 노나라 역사를 읽어야 하듯이 우리나라 
사람은 우리나라 이야기를 알아야 한다고 말할 걸세.

  을축년(1925) 죽취일(음력 5월 13일, 대를 심는 날) 번천 김영한이 서문을 쓰다.

      1. 예론이 당쟁으로

  효종이 승하하자 현종 원년에(1669)에 효종의 어머니인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로 
예론이 일어나자 기년설(만 1년)로 해야 하는지 3년설로 해야 하는지를 놓고 
남인과 서인 사이에 예론이 일어나 당쟁과 정권 다툼이 치열해졌다.

     노정승의 몸으로 아버지의 치매를 간병한 효자--조익

  조익(1579__1655)의 본관은 풍양이고 자는 비경, 호는 포저다. 어렸을 때 월정 
윤근수에게 글을 배웠으며, 특히 예학에 조예가 깊었다. 선조 35년(1602)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효종 원년(1649) 우의정에 올랐으며, 벼슬에서 
물러난 뒤 기로소에 들어갔다. 77세에 죽었으며, 시호는 문효다.
  그는 50년 동안 벼슬을 하였지만 변변한 집간과 토지가 없을 정도로 
청렴하였다. 89세의 고령으로 치매에 걸린 아버지 영중이 늘 변비로 
고생하였는데, 나이 60이 넘은 노정승의 몸으로 그는 손가락에 꿀을 발라서 
아버지의 변을 직접 긁어내곤 하였다. 그는 병중에 있는 아버지와 한방을 썼으며, 
치매에 걸린 아버지는 그 아들을 보고 항상 사촌이라고 불렀다. 또 아버지가 자리 
밑에 감추어 두었던 약과를 꺼내어 주면 조익은 더러움도 개의하지 않고 주는 
대로 받아서 먼지도 한번 터는 일 없이 맛있게 먹어 아버지를 기쁘게 하였다.

     친구간이라도 주지 않는 것은 절대 강요하지 말라고 훈계한--심지원

  심지원(1593__1662)의 본관은 청송이고 자는 원지, 호는 만사다. 광해 
3년(1617)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장원을 한 이영구가 재생(성균관이나 
향교에서 숙식을 하며 학업을  닦던 유생)들을 협박하여 인목대비 폐비를 
주장하려는 음모를 미리 알아차리고 고향 영천으로 낙향하였다. 그는 대북의 
영수인 이이첨과는 절친한 관계였으나 인목대비 폐위의 일엔 결코 찬동하지 
않았기 대문이다. 이 때 수몽 정엽 역시 벼슬에서 물러나 한마을에 은거하던 
중이었다. 정엽은 그를 한번 만나 보자 즉시 마음을 허락하는 친분을 맺게 
되었다.
  인조반정이 일어나던 날 밤에 심지원은 정엽과 더불어 언덕에 올라가서 서울 
쪽을 바라보았다. 타오르는 불빛이 온통 하늘을 뒤덮자 심지원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탄식하였다.
  "우리 임금은 지금 어디에 계실까?"
  이 때 정엽은 약간 놀랍다는 표정으로 말하였다.
  "그대의 충의가 이렇게 돈독한 줄은 미처 몰랐구려!"
  그 뒤에 심지원이 남상(홍문관 정자(정9품의 벼슬)의 별칭)으로 천거되었는데 
사실은 정엽의 추천이었다고 한다.
  언젠가 심지원은 자제들을 모아 놓고 당부하였다.
  "내가 홍문관 교리로 있을 적에 동료의 집에 놀러 간 일이 있는데, 그 친구의 
책상 위에 달력 백 부가 쌓여 있는 것을 보자 미처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수십 
수를 얼른 집어 내 소매 속에 집어넣고는 친구를 보고 '이 달력을 갖고 가서 
마을  사람들이 달라고 하면 주어야지' 하고 얼떨결에 이야기하였더니, 그 친구는 
얼굴이 상기 된 채 어떨 줄 몰라 했다. 아마도 안 된다고 즉시 빼앗기도 난처하고 
그렇다고 그냥 빼앗기기도 아깝고 한 그런 복잡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실은 그 때 
나도 마찬가지였다. 도로 책상 위에 내려놓기도 어렵고 그대로 갖고 가지도 
어려워 실로 난감한 순간을 겪어야 했다.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등에서 식은 
땀이 날 지경이란다. 그런 일이 있은 뒤로 나는 남이 주지 않는 물건은 절대로 
갖는 일이 없었다. 너희들도 내가 겪은 이 일을 거울 삼아 행동하기 바란다.

     신의를 잃으면 세상에 설 수 없다고 혼인 약속을 지킨--박서

  박서(?__?)의 본관은 밀양이고 자는 상지, 호는 현계다. 박서에게는 어릴 적에 
이미 혼인을 언약한 처녀가 있었는데 열병을 앓고 난 뒤에 그만 실명하여 장님이 
되었다는 소문이 났다.
  끔찍한 소문에 놀란 박서의 부모는 혼약을 파기하고 다른 규수를 물색하기로 
하자, 정작 박서는 부모를 설득하였다.
  "병 때문에 실명한 것은 본인의 잘못이 아닙니다. 비록 장님이 되었지만 약속은 
지켜야 합니다. 차라리 장님 아내와 함께 사는 것이 낫지 신의를 잃으면 세상에 
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들 박서의 말을 기특하게 여긴 부모는 박서의 청을 받아들여 혼약을 파기하고 
않고 혼례를 치르게 되었는데, 이 어찌된 일인지 초례청에 들어 선 신부는 장님이 
아니지 않은가! 두 집의 혼인을 막으려는 자가 퍼뜨린 헛소문이었던 것이다.

     승문원 정자에게 종이와 벼루를 갖고 오게 한--정태화

  정태화(1602__1673)의 본관은 동래이고 자는 유춘, 호는 양파다. 인조 
2년(1624) 진사시, 6년(1628) 문과에 각각 급제하였으며, 문과엔 아우 치화와 
나란히 합격하여 장안에 화젯거리가 되었다. 1635년에 북방 경비를 위해 설치된 
원수부의 종사관이 되고, 이듬해인 병자년 정월에 토산에 진을 치고 청나라 
군대와 접전하였다. 이때 원수는 청나라 대군의 위세에 겁을 먹고 도망하고 
아군의 진영은 형편없이 무너졌다. 정태화는 패잔병을 수습하여 사력을 다해 
싸움으로써 적에게 많은 타격을 가했다. 전공이 조정에 알려지자 그는 사헌부 
집의로 승진하였다.
  평안 감사로 있을 때의 일이다. 연위사(중국 사신이 오갈 때 그들을 접대하는 
사신) 최내길(최명길의 형)이 교자를 타고 평양에 왔다. 정태화는 즉시 이 사실을 
위에 보고하고 교자를 타고 역을 통과하도록 묵인한 관리들을  
문책하였다(병자호란으로 말미암아 극도로 궁핍해진 지방 재정 형편을 감안, 
연위사의 교자 사용을 금지하던 때였다).
  우의정 최명길이 정태화의 처사에 매우 화가 치밀어 불만을 토로했다.
  "공이 우리 형님에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조금 후엔 생각을 고쳐서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가 조금 후엔 생각을 고쳐서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가 행한 일은 공적인 처사요 내가 화를 낸 것은 사적인 감정이다. 사적인 
감정으로 공적인 처사에 성을 내는 일이 말이 되겠는가!"
  그 뒤로 최명길은 이 일을 다시 거론하는 일이 없었다.
  정태화가 정승으로 있고 이세화가 승문원 정자로 있을 때의 일이다. 공무로 
정승을 방문한 이세화가 정승화가 정승이 보는 앞에서 종이와 벼루를 갖고 오도록 
하인에게 시켰다. 이를 본 정태화는 정자 이세화에게 명했다.
  "하인에게 시키지 말고 정자가 직접 가지고 오라!"
  이세화의 얼굴엔 모욕당한 기본 나쁜 기색이 역력하였다. 훗날 이세화는 
정태화의 조카인 정재해에게 그 당시의 섭섭했던 심정을 토로하였다.
  "상공이 나에게 하인의 할 일을  시키다니 그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그러자 정재해가 상세히 해명하여 주었다.
  "상공의 지위란 일반 백관들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네. 내 예를 하나 들지. 
병조판서나 호조판서 자리가 비게 되면 이조 판서가 직접 추천서를 가지고 와서 
대신에게 결재를 올리는데 이 때 벼루는 이조판서가 손수 들고 온다네. 정승의 
지위란 이러한 것이거늘 불과 9품직을 벗어나지 못하는 승문원 정자가 붓과 
벼루를 좀 들고 온들 그것이 무슨 큰 대수인가. 이 사람아!"
  정재해의 설명을 듣고 난 이세화는 깜짝 놀라면서 말했다.
  "시골에서 생장한 촌놈이라 조정의 예의를 알 턱이 있는가? 만약 오늘 이러한 
설명을 듣지 않았던들 끝내 내 잘못을  깨닫지 못할 뻔하였네."
  이세화는 극구 사과하였으며 그 뒤부터 조종의 모든6 예절과 전례를 두루 익혀 
몸소 모범을 보였다.

     어여뿐 기생의 유혹으로 인생의 진로가 바뀐--오성군

  오성군(?__?)은 종실로서 주색으로 일생을 보낸 당대의 호걸로 이름난 
사람이다. 그러나 그런 향락생활도 젊은 시절 한때일 뿐 그도 이제 80 고령의 
늙은이가 되어 지난날을 조용히 돌이켜볼 때가 되었다. 누군가 그에게 물었다.
  "젊은 시절을 조직 술과 여자로 일관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유혹에서 도저히 
벗어나지 못한 때문인가, 아니면 천성이 그것을 좋아한 때문인가?"
  묻는 말에 대답 한참 동안 잠자코 있다가 긴 한숨을 푸욱 내쉬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나는 본시 어릴 적부터 20여세가 될 때까지 계집아이처럼 얌전하기만 하였지. 
혹시 누가 쳐다만 보아도 나는 공연히 얼굴이 빨개지고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네. 어느 날 잘 아는 무인이 나를 속이고 유인하는 바람에 그 무인을 
따라가보니 그 집은 기생이 있는 술집이었네. 시끄러운 노랫소리, 오고가는 술잔을 
보고 심기가 불편하여 나는 즉시 되돌아오려고  했으나 기생들이 애교를 떨며 
만류하는 바람에 그만 돌아올 용기를 잃고 말았지. 어여쁜 기생 하나가 나의 눈을 
응시하면서 입고 있던 저고리를 벗지 않겠나. 우유빛 같은 속살과 꽃봉오리 같은 
그의 유방을 본 나는 그만 정신이 몽롱해져서 결국 그 여인과 잠자리를 함께 하고 
말았네. 그런 일이 있은 후로 나는 오로지 주색에 빠져 끝내 헤어나지 
못하였다네. 지금 생각하면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은 그 무인  친구 때문에 보게 된 
그 여인의 젖가슴 때문일세.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나를 본보기로 삼아 
청소년들을 가르쳐서 유흥에 빠지지 않도록 미리미리 조처하는 일이라네."

     국수로서 시골 하수에게 당한--덕원령

  덕원령(?__?)은 종실로써 바둑에 남다른 재능이 있어 국수의 호칭을 얻었다. 
하루 어떤 사람이 마당에 말고삐를 매고 있었다. 덕원이 누구냐고 물으니 그가 
대답하였다.
  "저는 번을 서려고 올라온 향군입니다. 저도 바둑을 무척 좋아합니다. 
나으리께서 국수라는 소문을 듣고 이렇게  찾아왔으니 물리치지 마치고 한번 
대국해 주시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덕원이 그렇게 하라고 허락해 주니 그 사람은 덕원에게 조건을 제시하였다.
  "대국에 아무것도 걸지 않으면 재미가 없습니다. 만약 나으리가 지면 소인에게 
봄철 양식을 대주시고, 소인이 지면 저기 마당에 매어 둔 말을 나으리께 
바치겠습니다."
  덕원도 그가 제시한 내기 조건을 쾌히 수락하였다. 첫번째 대국에서 덕원이 한 
점을 이기고 두번째 대국에서도 또 한 점을 이겼다. 그 사람은 군말 없이 자기의 
말을 내놓았다. 덕원은 그 말을 선뜻 받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약속 이행이라 
하지만 명색이 국수라 불리는 고수가 하수에게 말을 받는다는 것이 체면이나 
자존심에 걸리기 때문이다. 덕원은 웃으면서 말하였다.
  "내가 농담으로 한 약속이니 그 말을 받을 수 없네."
  덕원이 받기를 꺼려했지만 그 사람은 정색을 하며 고집하였다.
  "나으리께 소인이 감히 식언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끝내 고집하고 자기의 말을 두고 떠나갔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갔다. 
어느 날 그 사람은 다시 화서 또 내기 바둑을 간청하였다. 덕원은 할 수 없이 
대국을 시작하였는데 이게 어찌 된 노릇인가. 아무리 정신을 차려서 두었지만 
그의 수를 알 도리가 없었다. 불계패를 당하고 말았다. 바둑은 졌지만 영문이나 
알고 싶어서 그에게 자초지종을 말하라고 청하니 그는 죄송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저는 저 말을 무척 좋아합니다. 그러나 제가 번을 서는 동안 저 말을 먹여 줄 
데 가 없어 결국 제 말은 굶어 죽게 될 형편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소인은 그 
말을 살릴 욕심으로  조그만 바둑 재능으로써 감히 나으리를 기만하게 된 
것입니다. 저의 죄를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덕원은 국수라고 알려진 자신의 소문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임금이 내린 명을 받들 수 없다고 한--이경휘

  이경휘(1617__1669)의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군미, 호는 춘천이다. 인조 
11년(1633)에 진사가 되고, 22년(1641) 정시문과에 아우인 이경억(1620__1673)과 
함께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들 형제가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 이시발은 태양 두 
개가 떠오르는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 이경휘가 6세 때 "항우전"을 애독하였지 
이시발이 이경휘에게 나와서 감사에게 절을 하라고 시키자 이경휘는, '제가 들으니 
감사는 많은 사람을 죽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포악한 사람에게 어떻게 절을 할 수 
있습니까' 하며 거절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경휘가 이조 함의로 있을 때의 일이다. 현종이 의관으로 있는 양제신을 지방 
수령으로 보내라는 명을 내렸으나 듣지 않았다. 현종이 정청(인사권을 가진 
병조나 이조의 관원들이 집무하는 궐내의 사무실)에 다음과 같이 힐문하였다.
  "양제신을 수령으로 의망(관원 임명시 이조, 병조에서 세 명의 후보자를 
추천하던 일)하라고 명한 지가 언제인데 지금까지 의망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
  이경휘는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의관이 수령에 제수되는 일은 전례에 없는 일입니다. 어명은 이미 받았으나 
감히 그 명을 들을 수는 없습니다."
  화가 난 현종은 이경휘의 직을 갈고 양제신은 양천 현감으로 제수하였다. 
언젠가 현종은 정승 정태화에게 이경휘 형제 중 누가 더 나으냐고 물었다. 이 때 
정태화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들 형제는 난형난제라 누가 더 나은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현종은 말하였다.
  "내가 보기엔 이경휘가 장자 재목이다. 이상진(우의정을 역임, 청백리에 뽑힘)이 
전에 그의 막료로 있을 적에 자신의 진가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때였는데 
이경휘만은 알아보고 많은 다른 추천을 배제하고 그를 적극 천거한 것을 보았다."
  이경휘의 추천을 받은 이상진은 뒤에 명재상이 되었으며 사람을 알아보는 
이경휘의 안목이 사람들에게 인정받게 되었다.

     효종의 제삿날 하루 종일 통곡한--송 장군

  송 장군의 본관이 광주라는 사실만 전할 뿐 이름은 알 수 없다. 병자호란에 
대해 복수의 일념을 불태우고 있던 효종은 인재를 전국에서 구하였다. 각 도의 
감사에게 명을 내려 천근을 들어올릴 수 있는 장사가 있으면 역마를 태워 서울로 
보내라고 하였다.
  송 장군은 광주에 있는 공조라는 사람의 집에서 품팔이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공조가 마당 한구석에 있는 큰 바위를 가리키면서 들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송 장군은 그 바위를 번쩍 쳐들었다가 가볍게 다시 
내려놓았다. 깜짝 놀란 공조는 이 사실을 즉시 광주부에 고하였고, 광주 유수는 
즉시 그의 힘을 시험하여 공조의 말이 사실로 입증되자 송 장군을 깨끗이 
목욕시키고 새옷으로 갈아입힌 뒤에 서울로 올려보냈다.
  금원에서 활쏘는 연습을 하고 있던 효종은 급히 송 장군을 입궐시켜 그의 힘을 
시험하여 보니 광주 유수가 올린 내용과 일치하였다. 효종은 우선 그의 힘을 
칭찬한 귀에 그에게 많은 음식을 하사하였다. 많은 양의 음식을 그 자리에서 
거뜬히 먹어 치우는 것을 본 효종은 그에게 의관을 내려 주고, 또 금호문 밖에 
그의 집을 마련해 주도록 조처하였다.
  송 장군은 효종의 특별한 배려로 궁중의 한 여종과 혼인도 하였다. 효종은 
그에게 작은 고을을 맡겨 보라고 여러 번 이조에 명하였다. 그러나 아직은 그에게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경륜과 지식이 부족하다는 이유를 들어 우선 변방의 
수비를 맡겨서 그의 능력을 시험해 보자는 이조의 청이 받아들여져 송 장군은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의 북로 진장이 되었다.
  송 장군이 멀리 임지로 떠난 뒤에도 효종은 그를 잊지 않고 이따금씩 그에게 
물품을 하사하며 기회가 닿는 대로 서울로 불러 올려 다른 벼슬을 준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중 1659년 음력 5월에 갑자기 승하하게 된다.
  효종의 승하 소식을 들은 송 장군은 정신없이 서울로 와서 대궐문 밖에 엎드려 
눈물이 말라 피눈물이 나오도록 울고 울고 또 울었다. 효종의 특별한 은혜를 입어 
혼인한 것을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며 살아온 장군의 아내는 국상이 끝나자 그만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북병사는 임지를 마음대로 이탈한 죄를 물어 송 장군을 군법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조정의 의논 또한 그의 처벌을 주장하였는데, 효종에 대한 
그의 충심을 참작한 현종의 특별한 배려로 석방되었다.
  석방으로 인해 죽음은 겨우 면하였으나 의지할 곳을 찾지 않고 남루한 차림으로 
용인 등지를 전전하면서 거지 노릇을 하였다. 해마다 효종의 제삿날이 되면 그는 
산중으로 들어가 온종일 목이 쉬도록 통곡한 후 돌아오곤 하였다. 그는 기골이 
장대하고 음식을 멱을 때면 마치 호랑이가 짐승을 잡아먹는 모양과 
비슷하였으므로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으며, 이런 점 때문에 그의 걸식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의로운 신하의 울음소리에 여름서리가 내린다고 한--김홍욱

  김홍욱(?__?)의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문숙, 호는 학주다. 인조 초에 진사시, 
인조 13년(1635)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전적, 지평, 수찬 등 삼사의 벼슬을 
역임했다. 황해 감사로 있을 때 날씨가 몹시 가물어 효종은 국정 전반에 대한 
솔직한 비판과 건의를 전국에 널리 구하게 되었다. 이것은 대개 천재지변이 있을 
때 하늘의 노여움을 풀어서 재난을 면한다는 염원으로 왕부터 몸과 마음가짐을 
경건히 함은 물론, 온 나라안에 널리 알려 정치에 대한 좋은 의견이나 솔직한 
비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행한 왕가의 관례로 기우제를 지내는 일과 
흔히 병행하는 것이 상례였다.
  이 때 김홍욱은 왕이 금기하는 민회빈 강씨의 일을 구언상소장에 다음과 같이 
새삼 거론하여 노여움을 샀다.
  "한 여인에게 원한을 사면 3년간의 가뭄을 불러오고 슬피 우는 의로운 신하의 
울음소리에 여름 서리가 내린다고 합니다. 지난날 강씨 일문의 억울한 죽음이 
어찌 한 사람의 원한에 그치겠습니까. 천지의 온화한 기를 손상하고 지금 전에 
없는 가뭄을 겪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입니다."
  극도로 화가 난 효종이 친국하였다. 본시 몸이 허약한 김홍욱이었으나 가혹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 임금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하였다.
  "옛적에 훌륭한 임금들이 바른말 하는 신하를 벌주지 않은 것은 다름이 
아닙니다. 임금이 선비를 죽였다는 후세의 비판을 두려워한 때문입니다. 신의 
소망은 지하에 가서 옛 충신 용강과 비간을 만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효종은 분을 참지 못하며 말하였다.
  "옛날의 용강과 비간이 너처럼 역적을 옹호하는 말을 했다더냐!"
  그리고 끝내 김홍욱을 죽게 하였다. 사람들은 그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 서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직언한 김홍욱을 장하게 여겼다 뒤에 신원되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심양에서 봉림대군의 시중을 든 영리한--논학

  논학은 박노(1584__1643)의 종이다. 병자호란 때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잡혀 심양에 갈 때 세자빈객으로 간주인 박노를 따라가 봉림대군의 시중을 많이 
들었는데, 그 때 논학의 영리함이 봉림대군에게 인정되어 사랑을 받았다.
  봉림대군에게 아들이 태어나자 봉림은 논학을 시켜 아기의 사주를 보아오게 
하였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점을 보고 돌아온 논학이 평소와는 달리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궁금해진 봉림대군이 몸이 달아서 점을 본 내용을 다그쳐 묻자 
논학은 봉림을 귀를 빌려 귓속말로 보고하였다.
  "아기가 앞으로 임금이 된답니다."
  이 말에 깜짝 놀란 봉림이 논학에게 점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말 것을 
신신 당부하였음은 물론이다. 볼모에서 풀려나 귀국한 뒤에 세자 소현이 죽자 
자연 봉림이 세자에 오르고 왕위를 잇게 되어 결국 점괘대로 그 때의 아기는 뒤에 
현종이 된다.
  봉림이 등극하여 임금(효종)이 되자 지난날의 정을 잊지 않고 논학을 불러 
무슨 벼슬을 하고 싶으냐고 물었다. 그러나 논학은 아무 벼슬도 원하지 않는다고 
대답하였다. 효종은 그에게 담비 가죽을 하사하였다. 논학은 술먹는 일로 낙을 
삼았다. 돈이 떨어지면 하사 받은 담비 가죽을 잡히고 술을 마셨다. 그리고 술을 
마신 후엔 그것이 왕의 하사품임을 밝혀서 도로 찾곤 하였다.

  심양에 있을 때의 일이다. 청나라에 귀순하여 부귀를 누리고 있는 정명수, 
김돌의 처벌을 청나라에 강력히 요구하다가 도리어 청나라에서 사형된 
정뇌경(1608__1639)을 구명하지 못한 책임을 주인 박노에게 돌려 비난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는데, 이번엔 의주 부윤 황일호(1588__1641)가 명과 청의 
싸움에서 명나라 편을 들어야 한다고 주장한 사실이 청에 알려져 또 사형을 받게 
되었다. 이날 박노의 무능함을 욕하던 관원들이 속수 무책으로 있자 논학은 이 
때를 놓치지 않고 대신들의 앞에 나가 지난날 주인이 받은 수모를 앙갚음하였다.
  "지난번에 우리 영감님이 필선(세자시강원의 정4품 벼슬. 정뇌경을 일컬음)을 
구하지 못한다고 그렇게들 탓하더니 어찌하여 이 많은 나으리들께서 의주 부윤의 
목숨 하나를 못 구한다지요?"

  효종 2년(1651)에 청나라의 강요로 금안군의 딸을 공주로 속여 청나라 왕실로 
시집 보내게 되었다. 이 때 논학이 배행하게 되었는데 도중에 통역 정명수의 
횡포가 심하였다. 이를 보고 참지 못한 논학은 공주의 가마 앞에 서서 공주의 
명을 받아 정명수를 치니 정명수는 꼼짝 못하고 고개를 떨군 채 매를 맞는 수밖에 
없었다.

    불상에 고기를 문지르고 그날 밤에 죽은-- 어느 선비

  이 이야기는 참봉 송덕기가 한 이야기다. 인조 때 선비 수십 명이 어느 
산사에서 과거 공부를 하고 있었다. 소고기를 구워 먹다가 한 선비가 구운 고기 
한 점을 집어 불상의 입에 문지르면서 '자 너도 한 점 먹어야지'하 고 불경한 
장난을 쳤다. 아침에 그 사람은 일어나지 못하였다. 아마도 밤에 무서운 꿈을 
꾸고 가위가 눌려서 죽었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 선비의 죽음이 혹 우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이천 선생도 일생 동안 
불상을 등지고 앉은 적이 없다고 한다. 이를 보면 부질없는 그런 행동은 결코 
선비가 취할 바가 아님을 잘 말해 준다.

     꿈을 통해서 전생의 인연을 만난 평안 감사--유심

  유심(1608__1667)의 본관은 전주이고 자는 정보, 호는 도계다. 전창위 유정량의 
아들이다. 6세 때 계축옥사로 가산이 적몰되고 귀양지로 떠나는 아버지를 따라가 
있다가 인조 반정으로 풀려났다. 나이 13세에 유수증에게 글을 배웠는데 스승으로 
'유씨가 훌륭한 자식을 두었다'는 칭찬을 들었다. 1635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승문원 사관을 거쳐 참판에 오르고 전창위에 습봉되었다.
  유심은 어릴 적부터 자주 꾸는 이상한 꿈이 하나 있었다.
  어느 동네 골목에서 제사를 지내는 장면이 나오고 또 웬 부부가 슬피 곡하는 
그런 꿈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꿈이 만년에 가서는 조금 바뀌어 곡하는 
사람이 부부에서 노파 한 사람으로 바뀐 점이다.
  유심이 평안 감사로 나갔을 때다. 그 날도 유심은 그 꿈을 꾸었는데 꿈을 깨고 
난 다음에도 그 노파의 곡소리가 귀에 쟁쟁하게 남아 있었다.
  유심은 사람을 시켜 꿈속에서 본 그곳을 상세히 설명해 주고 찾아보게 하였다. 
유심의 명으로 다녀온 사람은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자세히 일러주신 대로 가서 찾아보았더니 어떤 노파 한 사람이 그 때까지도 
울고 있었습니다. 우는 사연을 물은즉 노파의 이야기는 대개 이러하였습니다. 그 
노파에게는 열 살 멱은 아들이 있었는데  총명하기가 남다르고 글공부를 부지런히 
하였답니다. 언제인가 감사께서 이곳에 부임하는 것을 본 그 아이는 부모에게 
자기도 글공부를 많이 하면 감사가 될 수 있느냐고 물었답니다. 부모는 아이에게 
너는 출신이 미천하기 때문에 공부를 아무리 잘해도 결코 감사가 될 수 없다고 
알려 주자, 그날부터 그 아이는 밥을 먹지 않고 굶으면서 그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죽겠다고 말만 하다가 끝내 굶어서 죽었답니다. 그 충격으로 남편마저 
죽고 외롭게 홀로 남았으며 오늘 저녁이 바로 그 아이의 제사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감사는 직접 그곳으로 가서 보고 그 장면들이 그 동안 자기가 
오랫동안 꿈속에서 보아 오던 장면들과 어쩌면 그렇게 일치할 수 있는지 우선 
놀랐다. 죽은 아이의 생년월일을 따져보니 자신의 생년월일과 똑같았다.
  그 뒤 유심은 평안 감사직을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났다. 유심의 전생 인연이 
바로 그 아이의 일생이고 그 아이의 소원이 바로 유심의 생애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은 아닌지?

     천문을 잘보아 경술년 기근을 재상에게 당부한--김시진

  김시진(?__?)의 본관은 경주고 자는 백옥, 호는 반고다. 좌의정을 지낸 김명원의 
증손이다. 인조 22년(1644)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 지평을 거쳐 
전라도 관찰사, 한성부 좌윤, 수원 부사 등을 역임했다.
  천성이 강직하여 편당을 만들어 옳고 그름이 뒤바뀌는 세상에 대해 불만이 많고 
비판적인 태도를 취한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흔히 따돌림을 받았다. 그러나 
신축년에 큰 별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중국 연지방에서 사건이 일어날 것을 
예언했는데, 바로 그 해에 청나라에 국상이 일어났다. 또 을사년에 하늘에 
살별(혜성)이 나타났을 때, 10년 후에 중국에 병난이 일어날 것을 예언했는데 
갑인년에 과연 오삼계에 의한 삼번의 난이 일어났다.
  언젠가 김시진은 정태화를 보고 다음과 같은 말을 주고받은 적이 있었다.
  "경술년(1670)이 돌아오면 큰 기근이 들어 많은 사람들이 죽을 터인데 그 때 
상공께서는 그들을 구제할 방안이 있습니까?"
  "그런 것이 아니오라 그 때 저는 이미 이 세상에 없게 될 테니 저의 걱정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하는 말씀이지요."
  현종 11년 경술년(1670)이 되자 과연 전국에 큰 기근이 들어 굶어 죽는 사람이 
팔도에서 속출하는 사태가 생겼으며, 김시진은 3년 전인 1667년에 이미 죽고 
없었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 정태화는 김시진의 예언에 감탄한다는 말을 자주 하였다고 
한다.

  김시진은 언젠가 바위틈에 꼬부라져 자란 소나무를 보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바위틈에 자라나는 외로운 저 소나무
  나이도 들었지만 게다가 꼬부라졌네
  언제쯤이면 하늘 끝까지 죽죽 자라
  햇빛을 가리우는 저 구름을 쓸어낼까

  자라나는 소나무마다
  기둥감을 기약하랴
  오직 귀한 것은 곧은 마음 지니고
  추운 이 겨울에 푸르름을 지님일세

  이 시를 본 사람은 지은이의 마음이 잘 실려 있다는 평을 하였다.

     살아서 백도요, 죽어서 대제학이 된--정두경

  정두경(1597__1673)의 본관은 온양이고 자는 군평, 호는 동명이다. 인조 7년 
별시문과에 장원하고 홍문관 등 여러 청환직을 지내는 동안 훌륭한 글솜씨로 
이름을 날렸다. 명나라 문장 강일광이 왔을 때 김유가 접반사였는데 이 때 
강일광을 대접하기 위해 시문의 대가를 전국으로 널리 구하였다. 당시 정두경은 
아무 벼슬도 없는 백도로 응하였는데 당당하게 선발되어 유례가 드문 일로서 
당시에 큰 화젯거리가 되었다.
  계곡 장유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정두경의 솜씨를 찬양하였다.

  백두의 신분으로 나라를 빛낸 것은
  세상에서 보기 드문 희귀한 일
  그 사람의 시문을 보면
  온통 심장 전체가 비단인가 봐

  또 현종은 그의 시를 다음과 같이 읊조렸다.

  나라 안에서는 왕이 으뜸이요
  하늘 밑에선 부처님이 높다네

  그의 시를 읊고 난 왕은 다음과 같이 전교하였다.
  "김종직 같은 사람이 문형(대제학)을 잡지 못한 일이 국조의 잘못된 사례로 
남았는데, 오늘날 정두경 역시 끝내 대제학이 되지 못하였으니 어찌 원통한 일이 
아니냐? 그는 생시에 예조 참판을 지냈으니 대제학에 증직하라!"

     꿈에 신덕왕후 강씨를 만난--권유

  권유(?__?)의 본관은 안동이다. 정릉 참봉으로 있을 때 왕릉에서 숙식을 하는데 
꿈에, 왕비의 복색을 한 어떤 부인이 나타나 왕릉 앞에 있는 정자각에 앉더니 
급히 참봉을 불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나는 3백 년 전에 폐비된 강씨(이태조의 계비. 방번, 방석의 생모)로서 회덕의 
큰 선비(송시열을 일컬음)의 덕을 입었는데'우암의 청으로 현종 10년에 
순원현경의 휘호를 추상받았음' 앞으로 그에게 닥칠 화(제주도로 유배되어 가던 중 
사약을 받음)를 막아 줄 수 없으니 참으로 안타깝다..."
  이미 죽은 사람도 은혜를 잊지 못하고 있다.

     한 쌍의 학이 양 어깨에 내려앉은 꿈의 주인공--신천익

  신천익(1592__1661)의 본관은 거창이고 자는 백거, 호는 소은이다. 아버지 
신인이 영광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아직 자식이 없었으므로 아내 이씨와 더불어 
신에게 자식을 점지해 줄 것을 빌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한 쌍의  
학이 날아와 양 어깨에 앉아 있다가 한 마리는 하늘로 날아 올라가고 한 마리는 
바다로 날아갔다.
  이런 일이 있은 뒤에 얼마 안 가서 두 아들을 얻었는데, 이름을 천익과 
해익이라 지었다. 신천익은 광해 4년(1612)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부제학을 지냈고, 아우 신해익은 자는 증거, 호는 호산병은이며 광해 5년에 문과 
급제, 좌랑을 지냈으나 불행하게도 25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장례를 치르던 
날 보랏빛 기운이 하늘을 귀덮었다고 전한다.

     늦팔자가 좋은--조계원

  조계원(1592__1670)의 본관은 양주이고 자는 자장, 호는 약천이다. 인조 
6년(1628) 별시문과 을과로 급제, 정언을 거쳐 1636년에 형조 정량이 되었는데, 
그해 겨울에 병자호란이 일어나 청의 명으로 소현세자가 명나라 정벌에 참전하게 
되자 보덕으로서 세자를 수행하였다.
  이 때 조계원은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명하여 가죽주머니와 베주머니 하나씩을 
빠짐없이 각자 준비하도록 하였다. 도대체 그 용도를 알지 못한 사람들은 의아해 
하였지만 조계원은 무조건 시행하게 하였다.
  세자 일행이 면과 청이 싸우는 접전지에 도착하니 화살이 비오듯 쏟아져 몸을 
둘 만한 곳이 없어 모두들 당황해 할 뿐 대책이 없어 막연하였다. 그 때 조계원이 
모든 베주머니에 흙을 담아 쌓게 하고 가죽 주머니로 물을 운반하여 그 위에 붓게 
하니 물이 얼어붙어 훌륭한 성이 되었다. 덕분에 세자 일행은 화살로부터 무사할 
수 있었다.
  조계원은 집이 몹시도 가난하여 상툰 신흠의 사위가 된 뒤에 처가살이를 하면서 
많은 자식을 낳았다. 처가에서 얻어먹는 생활을 하다 보니 자연 천덕꾸러기가 
되어 처갓집 노비들로부터 '돼지 조 생원'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온갖 수모를 
받았다. 돼지처럼 많이 먹고 여러 명의 자식을 낳았다고 붙여진 별명이다.
  그러나 조계원만큼 늦팔자가 좋은 사람도 흔치 않다. 남보다 늦게 과거하여 
벼슬이 정경의 지위에 올랐으며 70세를 넘게 살았다. 또 아들 5형제가 모두 
출세하여 장남 진석은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였을 뿐 아니라 필법으로 이름을 
얻었고, 차남 귀석은 감사를 지냈고 삼남 희석은 음보 (과거에 의하지 않고 
조상의  덕으로 하는 벼슬)로 첨지중추부사를 하였고 사남 사석은 우의정을 
지냈으며, 오남 가석은 이조 참의를 하였다. 명문거족의 연안 이씨 신랑감을 
마다하고 하필 가난한 서생 조계원을 사윗감으로 고집하여 선택한 신흠의 안목에 
사람들을 탄복하였다. 연안 이씨도 문장과 절의로 이름을 얻었지만 50세를 념기지 
못하고 일직 죽었다.

     계속 일곱 대가 골고루 수를 누린--이의전 집안

  이의전(1568__1647)의 본관은 전주고 자는 의중이다. 오리 이원익의 아들이다. 
나이 30세에 음보로 벼슬 생활을 시작했으나 양근(지금의 양주) 군수로 있을 때 
치적이 뛰어나 인조로부터 표리(옷감의 안감과 겉감)를 하사 받았으며, 벼슬이 
자헌대부로 완선군에 습붕되어 80세를 살았다. 그의 아들 수천군은 87세를, 다음 
세대 청기군은 83세를, 그 다음 세대 성천군은 84세를 살았다. 오리 이원익은 
88세요, 완선군은 80세요, 그의 아들 수약은 79세를 살았으니 270년 동안 7대가 
이렇듯 골고루 수를 누린 집안은 실로 드물다.

     복이 과하면 반드시 재앙이 따른다고 경고한--정유성

  정유성(1596__1664)의 본관은 연일이고 자는 덕기, 호는 도촌이다 포은 
정몽주의 9세손이다. 그는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고 손자 정제현이 숙휘공주에게 
장가 들어 인평위에 봉해졌지만, 정유성은 몸가짐을 더욱 조심하고 생활을 더욱 
검소하게 하였다.
  하루는 손자며느리인 공주를 보고 말하였다.
  "공주는 이 시할아버지로 하여금 손자와 함께 오래 같이 살게 해줄 수 없소?"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는 공주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복이 과하면 반드시 재앙이 뒤따르는 법이오. 우리 집은 대대로 청빈한 
집안인데 공주의 씀씀이를 보니 과한 듯하오. 부디 절약하도록 하시오."
  얼마 후에 손자 인평위가 죽자 방안에 들어가 궁중에서 내사한 의복 둥을 보고 
다음과 같이 탄식하였다.
  "저렇게 사치하고서야 내 손자가 어찌 죽음을 면할 수 있었겠는가! 피할 수 
없는 일이었구나."

     국법에 따라 연좌되어 죽는 것이 옳다고 한--허적

  허적(?__?)의 본관은 양천이고 자는 여거, 호는 묵재 또는 휴옹이다. 인조 
11년(1633)에 진사시를 거쳐 1637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 부수찬을 지낸 
뒤 평안 감사를 두 번 역임하고 북경에 세 차례나 다녀왔으며, 1671년엔 영의정을 
지내고 궤장을 하사받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숙종 6년(1680), 서자인 견이 역모로 
사형되자 허적은 성 밖에 나가 왕명을 기다렸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권하였다.
  "이제 공은 체포되어 죽는 것이 시간문제이니 차라리 자결하는 것이 낫지 
않겠나?"
  이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자식을 잘못 두었으니 국법에 따라 연좌되어 죽는 것이 마땅하다. 극형을 
면하기 위해 스스로 죽는다면 이것은 임금의 명을 공경함이 아니다."
  한숨을 돌린 다음 허적은 계속 이야기를 하였다.
  "내가 사헌부 지평으로 있을 적에 길에서 한 청년을 만났는데 그 복장이 너무 
사치하여 상인의 신분에 맞지 않기에 잡아 가두고 그 죄를 물었다. 구 뒤에 웬 
여자가 와서 욕지거리를 한다기에 그 여인을 가두고 보니 그 연인은 바로 청년의 
아내였고 복색 역시 사치스러웠으므로 두 남녀를 모두 곤장을 심하게 때리도록 
하였더니 남녀가 다 장살되고 만 일이 있었지. 우리 아이 견이 태어나던 날 밤에 
꿈을 꾸었는데, 한 노인이 나타나서 이렇게 말했다네. '몇 년 전에 청년 부부를 
장살한 적이 없느냐? 나이 어려서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 어찌 법을 알 리 
있겠느냐? 반드시 죄를 주어야 될 입장이라면 차라리 그의 부모를 벌했어야 
마땅한 일이 아니냐? 남의 외동아들과 외동딸을 한꺼번에 죽이다니! 그러고도 
어찌 복 받기를 바라느냐? 하늘이 너에게 벌을 내리려고 못된 자식 하나를 주어 
너의 집을 망치게 할 것이니 너는 그렇게 알라!' 이런 나쁜 꿈을 꾸고 난 나는 
처음에 아이를 기르지 않으려고 하다가 다시 생각하니 허왕한 꿈을 믿고 그렇게 
할 수야 없지 않는가 하여 그럭저럭 오늘까지 온 것이다 오늘 당하는 이런 재앙은 
다 내가 이미 지은 업보로 받은 것인데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금관자 대신 쇠뿔로 된 관자를 한 재상--송시열

  송시열(1607__1689)의 본관은 은진이고 자는 영보, 호는 우암이다. 태어날 때 
그의 아버지 꿈에, 공자가 집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고 하여 소자를 성뢰라 
하였다. 사계 김장생에게 사사하여 율곡의 학문을 간접적으로 전수받았으며, 또 
주자의 저서를 많이 읽어서 일가를 이루었다.
  인조 11년(1633)에 생원시에 장원하고, 1636년 병자호란 때 왕을 남한산성으로 
호종하였으며 청과 굴욕적인 화의가 이루어지자 통곡하고 성을 나왔다. 지평 
벼슬에 두번째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다가 효종이 즉위하자 장령, 진선, 집의, 
승지, 찬선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정이며 효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효종과의 사이는 특별히 긴밀하여 모두들 한소열과 제갈량의 관계에 
비유하였는데 불행하게도 효종이 죽자 효종과 의논하던 긴밀한 뜻도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현종이 즉위한 뒤에 좌의정이 되었으며, 숙종 15년(1689)에 
제주도로 귀양가는 도중 정읍에 이르러 사약을 받고 죽으니 이때 송시열의 나이 
83세였다. 그가 죽기 전날 밤에 백색의 기운이 하늘을 가로질렀고, 또 그날 밤에 
규성(이 별이 밝으면 천하가 태평하다고 함)이 땅에 떨어졌으며 붉은 기운이 지붕 
위에까지 뻗쳤다고 그 고을 사람들이 전한다.

  우암이 생전에 겪은 일인데,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길에 양양 물치란 
마을을 지나다가 갑자기 소나기를 만나 정립이란 사람의 집에 들어가 비를 
피하면서 보니 그 집 기둥에 다음과 같은 한시가 씌어 있었다.

  시장에 호랑이 나왔다는 거짓말도
  세번째는 사람들이 믿기 마련
  벌떼에 쏘일까 치마 걷어 쓴 것인데
  지아비는 정조를 의심한다네

  세상 공명이란 모두가
  나무 기러기처럼 하찮은 것
  웃고 떠드는 좌석에서도
  항상 입조심은 해야 한다네

  그런데 이 시의 윗구는 바로 썼는데 아래구는 거꾸로 붙여 있었다. 누구의 
시냐고 주인에게 물으니, 이 시를 쓴 사람이 떠날 때 한 말이, 내년에 이 날이 
돌아오면 다시 오겠다고 하면서 갔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대답하는 것이다.
  어느 외서(유가: 경전 이외의 책)에 나타난 입조심의 출처는 이렇다.
  어떤 해동 사람이 신비한 거북 한 마리를 잡았는데, 그 거북이 하는 말이, 이 
세상 나무를 다 불태워서 물을 끓인다 해도 나를 삶아 죽이지는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한 도인이, '마른 뽕나무로 불을 때도 네가 죽지 않는단 말이냐'고 
다그치자 거북은 결국 눈물을 흘리면서 시인했다고 한다. 오늘 이 좌중에서 
담소하는 여러분들도 이 거북 이야기에서 입조심하는 경계심을 배워야 한다.
  화양동 초당에 매화나무가 많았는데 숙종 15년(1689) 봄에 다 말라죽었다가 
1694년 봄에 다시 살아나 잎이 나고 꽃도 피었다고 한다.
  우암은 재상을 지낸 신분인데도 금관자를 달지 않고 쇠뿔로 만든 관자를 달고 
있었다. 문인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나와 초야에 있으니 초야에 맞는 복색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
  문인들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서울에서 벼슬할 때는 왜 그리 하셨습니까?"
  우암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 때는 나의 위아래 옷이 맞지 않은 때문이었지. 그 때 나는 명주를 살 돈이 
없어서 면포로써 관복을 만들었으니 면포에 금관자가 맞을 수가 있겠느냐? 그래서 
금관자를 쓰지 않은 것이다. 다만 하사하신 금관자를 받는 일은 예에 속한 
일이므로 공손하게 받아서 망건에 달아 두었다가 사례가 끝난 뒤엔 즉시 떼어 낸 
것이다.
  우암은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중국 사람들은 신분의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쇠뿔 관자를 쓰고 있더라. 언젠가 
동월이 우리나라 풍속을 기록한 글을 본 일이 있는데 관자로써 신분을 구분하는 
우리의 풍습을 비웃는 내용이었지."
  그제야 문인들은 우암이 금관자를 쓰지 않고 쇠뿔 관자를 쓰는 까닭이 바로 
중국의 제도를 옳게 본뜬 것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태어날 때 천인이 산구를 보내 온--송준길

  송준길(1606__1672)의 본관은 은진이고 자는 명보, 호는 동춘당이다.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인조 2년(1624)에 생원시에 합격했다. 우복 정경세의 딸에게 장가 
들어 우복의 사랑을 받았다. 1630년에 세마 벼슬이 내려졌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1665년에 대사헌이 되고 또 원자보양관이 되었다.
  이웃집에 한 벼슬아치가 살았는데 그는 다음과 같은 꿈이야기를 하였다.
  "어떤 사람이 산구를 들고 하늘로부터 내려오면서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천인인데 이 산구를 송씨 집에 전하려고 내려왔노라'고 하더라."
  어릴 적부터 글읽기를 좋아하여 어쩌다 선생이 무슨 일로 그 날 공부를 
가르치지 못하게 되면 송준길이 오히려 선생에게 가르쳐달라고 청하였으며, 그 날 
공부를 못하게 되면 밤중이라도 반드시 배우고서야 잠을 잤다고 한다. 또 글씨 
쓰기를 좋아하여 글씨로 이름이 있는 죽창 이시직이 그의 글씨를 보고, '네 글씨는 
이미 나보다 낫다'고 극구 칭찬하였는데 이 때 준길의 나이 열 살 정도밖에 안 된 
때였다. 사계 김장생에게 "소학"과 "가례 고증"등을 배웠다.
  숙종 13년(1687)에 아버지 상을 당했는데 법도에 맞게 상례를 치러 칭찬을 
들었으며, 혹 예에 대하여 조그만 의문이 있어도 반드시 스승인 김장생에게 
물었으므로, 앞으로 예학에 대가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효종이 이원(여승방) 두 채를 헐자 이를 축하하고 또 다음과 같이 건의하였다.
  "옛날 주자도 절을 헐어 서당을 지으면 일거양득이라서 좋다고 하였습니다. 
뜯은 헌 재목과 기와로 북학 서당을  지으면 좋겠습니다.
  효종은 이 의견을 받아들여 성균관의 동재와 서재를 지었다. 67세를 살았고 
시호는 문정이며 문묘에 배향되었다.

     산적 두목으로부터 목숨과 재물과 여인을 얻은--이완

  "마침 사냥을 나가고 없는데 밤이 깊어야 돌아올 것입니다. 손님과 내가 한방에 
있는 것을 본다면 우리 둘은 단칼에 죽을 것입니다. 나야 어차피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지만 손님이야 보아하니 어느 댁 귀공자 같은데 무엇 
때문에 헛된 죽음을 자초하려 하십니까? 속히 이곳을 피하여 끔찍한 변을 당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여인의 말에 이완이 답하였다.
  "죽을 때 죽더라도 허기나 면해 봅시다. 배가 몹시 고프니 찬밥 덩이라도 
있으면 좀 주시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여인은 부엌으로 달려나가 밥을 짓고 고기를 장만하여 
밥상을 차려 내왔다. 술병도 함께 내왔다.
  "그렇게 시장하신 줄도 모르고 저는...."
  여인은 얼굴에 약간의 홍조마저 띠고 상머리에 앉아 반주를 권했다. 이완은 
주는 대로 받아 마셨다. 고기도 밥도 실컷 먹었다. 술기운이 돌자 이완은 여자에 
대한 욕망이 솟구쳤다. 그는 여인의 얼굴을 응시하였다. 조금 전과는 달리 여인은 
매우 행복한 얼굴이었다. 이완은 그녀의 허벅지를 잡고 당겼다.
  "이러시면 안되는데...."
  "죽는 것이 그렇게 두렵소? 우리가 아무 일이 없다고 해도 그것을 누가 믿어 
주겠소? 또 사람의 목숨은 그렇게 간단하게 죽는 것도 아니니 안심하시오."
  이완의 손은 이미 여인의 젖가슴을 매만지고 있었으며, 남녀의 얼굴은 마냥 
행복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일 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진동이 
몸으로 전달되었다. 순간 여인은 소스라치게 놀라 반사적으로 일어나며 말했다.
  "이제는 죽었네요. 이렇게 하지요?"
  여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완은 더욱 태연한 목소리로 우선 
여인부터 안심시킨 뒤에 바깥을 힐끔 쳐다보았다. 한 사나이가 잡아온 짐승들을 
뜰에 내려놓고 이제 막 허리를 펴고 방문 쪽으로 다가서는데 키가 8척은 되어 
보이는 우람한 체격이었다 벌컥 방문을 열며 들어서는 사나이를 보니 털이 
수북하고 험상궂게 생긴 얼굴이었다. 그러나 이완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자리에 누운 채 사나이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화가 치민 도둑은 성난 
눈을 부라리며 호통을 쳤다.
  "너는 웬 놈이냐?"
  겁내는 기색이라곤 조금도 없이 조용히 대답했다.
  "짐승을 쫓아 산으로 들어왔다가 날이 저물어서 길을 잃고 헤매던 중 여기까지 
온 것이니 너무 허물치 마시오."
  "이놈 봐라,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나. 그래 길을 잃고 집을 찾아 들어온 
놈이라면 저 바깥 사랑방에 있어야지 남의 안방에 들어와 남의 유부녀와 간통을 
한단 말이냐? 또 게다가 한술 더 떠서 주인이 들어오는데도 인사 한마디 없이 
자빠져서 남의 얼굴을 훑어보고 있단 말이냐? 이놈이야 말로 간 큰 놈이 아니냐!"
  험상궂은 얼굴은 더욱 험악해지고 칼을 잡은 오른손에 힘을 불끈 주면서 이완을 
노려보며 씩씩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완은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미소까지 
머금고 조용하게 이야기하였다.
  "내가 설령 사랑방에 있다고 한들 깊은 밤 산 속에서 남녀가 한집에 있었는데 
설령 피차 모두 결백하다고 한들 당신이 믿어주겠소?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는 
것, 뭐 그렇게 겁낼 게 무엇이요. 내 목숨은 그대 손에 달려 있으니 처분대로 
맡기겠소."
  도둑은 킬로 치지 않고 두선 새끼줄로 이완을 꽁꽁 묶어 천장 대들보에 
매달았다. 그리고는 여인에게 안주와 술을 갖고 오라고 시켰다.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서 있던 여인은 부엌으로 나가 고기를 굽고 술상을 차려서 내왔다. 도둑은 
목이 탔던지 우선 술항아리에서 술 한 사발을 들이마시더니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통째 삶아 온 노루의 뒷다리를 차고 있던 칼을 뽑아 칼끝으로 뭉텅 베어서 
씹어 먹다가 말고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아무리 곧 죽을 놈이지만 곁에 두고 혼자 먹으니 술맛이 나야 말이지."
  그는 칼끝에 고기 한 점을 찍어 들보에 묶여 있는 이완의 코앞에 바짝 
들이댔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무슨 배짱으로 고기를 받아 먹으랴 싶어서 한 
행동인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이완은 얼른 입을 벌리고 고기를 맛있게 
받아먹고는 술도 한 잔 달라는 것이 아닌가!
  이완의 대담성에 놀란 것은 도둑이었다. 도둑은 이완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중얼거렸다.
  "과연 장사로군!"
  이완은 이 때를 놓치지 않고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죽을 사람 앞에 웬 농담이시오. 옛적에 항우가 번쾌를 보고 장사라고 했다더니 
이제 공은 그 말을  네게 써먹는 것이오? 내가 번쾌라면 당신은 초패왕이란 
말이지요?"
  도둑은 '우하하...' 하며 입이 찢어질 정도로 한바탕 웃고 나서 땅바닥에 칼을 
놓고 벌떡 일어나 이완의 결박을 풀어 주고 손까지 잡으면서 말했다.
  "천하의 기남자를 몰라보고 내가 너무 무례했네. 장차 나라의 간성이 될 재목을 
내가 어떻게 해치겠나? 어처구니없는 몇 마디를 주고받았지만 나는 그대를 이미 
나의 지기로 여기고 나의 남은 재산을 모두 그대에게 양도하니 그렇게 알게나. 
남자가 무슨 일을 하려면 어느 정도의 재산은 반드시 필요한 법이니 나의 청을 
거절하지 말게."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이완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실로 어색한 입장이 되었다. 
그리고 도둑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 여자 말인데, 나와 정식 혼례를 치른 사이도 아닐 뿐 아니라 공과 
이미 만리장성을 쌓았을 테니, 내가 데리고 갈 이유가 없지 않은가? 자 이제 한잔 
술로 석별의 정을 나누어야지!"
  몇 순배의 술잔이 오고가자 두 사나이는 술이 거나하게 취했다. 누구의 제의로 
맺어졌는지 두 사람은 어느새 결의 형제가 되어 형님 동생 하면서 분위기가 자못 
화기애애하였다.
  "이봐 동생! 먼 후일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내 목숨이 동생 손에 달려 있을 때가 
반드시 올 걸세. 동생! 설마 그 때 오늘의 내 부탁을 잊지는 않겠지? 동생! 그럼 
잘 있게."
  이 말을 남기고 어디로 간다는 말도 없이 도둑은 훌쩍 떠났다. 이완도 그의 
말대로 그가 남긴 재산들을 모두 정리하여 여자를 데리고 산을 내려왔다.
  그 후 많은 세월이 흘렀다 이완은 무관으로 출세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포도대장이 되었다 어느 날 산골로부터 산적 두목이 잡혀 왔는데 자세히 보니 
지난날 결의 형제를 맺은 바로 그 사람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장 이완은 
그와의 지난날의 인연을 효종에게 자세히 아뢰고 특별한 윤허를 받았다.
 드디어 산적은 석방되고 무관의 한 직책을 맡아 일하게 되었으며 맡은 바 직책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얼마 뒤엔 무과에 대비하여 과거 공부를 열심히 하더니 
마침내 합격하고 나중엔 병사의 지위에까지 올랐다고 한다.

  이완이 효종의 신임을 받고 북벌에 대한 깊은 생각을 주고받을 때의 일이다. 
국가 간성지재를 구할 목적으로 무예가 뛰어나거나 기골이 장대한 사람이 있으면 
언제 어디서건 조정에 추천하던 시절이었다 이완이 훈련대장이 되어 
수분(경사스런 일이 있을 때 조상의 묘에 가서 제사를 지내는 일)하기 위해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훈련대장의 행차가 용인 어느 주막에 
다다랐을 때였다. 주막 마루에 키가 10척, 얼굴이 한 자나 되어 보이는 수염이 
텁수룩한 청년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옷은 남루하고 살은 없이 바싹 말랐지만 
기골은 장대하고 번쩍이는 두 눈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탁주 한 동이를 
꿀꺽꿀꺽 다 마시는 것을 보고 이완은 말에서 내려 사람을 시켜 그 청년을 
불렀다.
  불려 온 그 청년은 이완 대장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돌 위에 거만스레 
걸터앉아서 이완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례는 탓하지 않고 그와 대화를 시작하였다.
  "자네 성명이 뭔가?"
  "박탁입니다."
  "무엇 하는 사람이냐?"
  "본시 사족인데,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편모슬하에 자랐으며 산에 
가서 땔나무를 해서 팔아 그것으로써 노모를 봉양하고 있습니다."
  "술을 더 마실 수 있느냐?"
  "아, 남아가 되어서 어찌  잔술을 사양하겠습니까!"
  이완은 돈 100문(1돈에 상당함)으로 술 한 동이를 사서 자신이 한 사발만 마신 
뒤에 나머지는 모두 박탁에게 주니 '벌컥벌컥' 순식간에 술 한 동이를 다 마셔 
버렸다.
  "너 혹시 이완 대장이라고 들어본 적이 있느냐? 내가 바로 이완이다. 지금 
조정이 널리 인재를 찾는 길이니 너는 나를 따라 한양으로 가겠느냐?"
  "노모가 계시니 저 혼자서 결정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겠구나! 그러면 내가 너의 모친을 만나 볼 터이니 앞장서서 너의 집까지 
길을 인도하라."
  이완은 박탁을 따라 시골길 10여 리를 가서 낡은 초가집으로 들어갔다. 이완은 
박탁이 사립문 밖에 깔아 주는 자리에서 아들을 따라 나온 그의 어머니의 인사를 
받았다. 입은 옷은 초라했지만 말씨나 행동은 양반집 아낙의 품위를 잃지 않은 
60세쯤 되어 보이는 단정한 부인이었다.
  "저는 훈련대장 이완이란 사람입니다. 길에서 우연히 자제를 만났는데 첫눈에 
인걸임을 알았습니다. 훌륭한 자제를 둔 것을 경하합니다."
  부인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인 채 옷깃을 여미고 대답했다.
  "개돼지처럼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자란 아이를 그토록 과찬해 주시니 이 
촌부는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지금 조정에서는 인재를 널리 구하는 중입니다. 이번에 자제를 우연히 만나 
보고 그냥 두고 가기는 너무 아까운 인재 같아서 한양으로 데리고 가고 싶은데 
부인께서는 허락하실는지요?"
  "저 아이가 독자로 태어난 후, 남편을 사별하고 오직 모자가 외롭게 서로 
의지하여 살아왔습니다. 황송한 말씀이지만 장군의 명에 따를 수 없습니다."
  부인의 거절이 완강하자 이완은 재삼 간청했다. 이완의 간곡한 청에 
감동되었는지 드디어 부인이 입을 열었다.
  "남자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큰 포부와 뜻을 품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하물며 장군의 간곡하신 권고가 이러한신데 아녀자의 구구한 사정에 얽매여 
장군의 말씀을 저버리겠습니까?"
  이완은 부인의 용단에 감사한 뜻을 표하고 박탁을 데리고 발길을 한양으로 돌려 
대궐로 향하였다. 이완은 효종은 박탁을 대면하고 몇 마디 물었다. 임금 앞에 나온 
박탁은 절도 하지 않은 채 앉았다. 효종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웃는 수밖에 
없었다.
  "너는 몸집은 그렇게 큰데 어찌 그렇게 말랐느냐?"
  "대장부가 때를 만나지 못했으니 어찌 안 그럴 수 있습니까?"
  "하하하! 그래 그래, 그 말이 맞다. 네 대답이 마음에 드는구나."
  효종은 박탁과의 첫 대면에서 매우 만족한 표정으로 이완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 자에게 무슨 벼슬을 내려야 마땅하겠느냐?"
  "우선 신이 데리고 가서 대략 가르친 뒤에 직책을 내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
  그 날부터 이완은 박탁을 가까이에 두고 좋은 음식과 옷을 주고 병법과 무예를 
하나하나 가르쳤다. 또 예의 범절도 가르쳤다. 어찌나 머리가 영리하던지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성과를 보였다. 또 효종의 관심도 매우 높아 박탁의 무예 
공부를 자주 물었다. 혹 이완이 북벌에 대해 박탁에게 상의하면 이에 응답하는 
박탁의 지모는 매우 우수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1년이 되어 가는 어느 날 국상이 
났다. 효종이 승하한 것이다. 1659년 5월 4일의 일이었다.
  효종의 인산이 끝나자 박탁은 작별을 고하러 왔다. 이완은 깜짝 놀라 
만류하였다.
  "이게 무슨 말이냐? 나와 너 사이는 피가 섞이지 않았을 뿐 정의는 부자간과 
같은 사인데 네가 어떻게 차마 나를 버리고 떠난단 말이냐?"
  "제가 여기에 온 것은 먹고 살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하늘이 돕지 않아 
갑자기 국상을 당했으니 이제 큰일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할일 없이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은 옷과 밥만 축낼 뿐이며 이런 낭비는 결코 옳지 못합니다."
  박탁은 손으로 눈물을 닦고 하직을 고하고 떠나갔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노모를 
모시고 다시 산골로 들어간 이후로 아무도 소식을 모른다고 한다.

  이완의 집은 서울 동부 낙봉 밑에 있었는데 인평대군(1622__1658, 인조의 셋째 
아들)의 집이 바로 이웃에 있었다. 이완은 대장으로 승진하자 급히 서둘러 
안국방으로 이사하였다. 병권을 가진 신하가 왕자와 한마을에 사는 것은 옳지 
않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러한 판단은 사려 깊은 행동으로 인정받았다.

  이완이 훈련대장으로 있을 적 때의 일이다. 밤중에 입궐하라는 어명이 내렸다. 
사모 관대의 복장으로 서둘러 말에 타려고 하자 이완의 첩이 가로막고 섰다. 
잠시도 지체할 수 없는 것이 왕명인데 이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설명을 듣고 난 이완은 첩의 사려 깊은 행동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대장의 신분이면 마땅히 속에 갑옷을 입어서 만약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었다. 이 유비무환의 조처는 적중하였다. 이완이 입궐할 때 궐내의 모든 
등은 꺼져 있었고 사방에서 화살이 비오듯 날아왔다. 그러나 갑옷 덕분에 상처 
하나 입지 않고 임금 앞에 설 수 있었고, 효종으로부터 과연 대장의 재목이라는 
칭찬도 받았다. 바로 이 첩에게서 태어난 아들 인준이 뒤에 이완의 적통을 이었다.

     순가의 재치로 평안 병사까지 한--이무

  이무(?__?)의 본 관은 성주다. 대사헌 이의의 증손으로서 무과에 급제한 뒤 태안 
방어사가 되어 임지로 내려가던 중 마침 한양으로 올라오는 우암 송시열과 같은 
주막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다. 그런데 방어사의 관노와 우암의 노복 사이에 
사소한 다툼이 생겨 서로 티격태격하는 중에 관노가 우암을 알아보고 이무에게 
알려주었다. 비로소 그가 우암임을 눈치 챈 이무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출세를 
한번 해보려는 생각이 들었다. 이무는 방으로 들어가 우암에게 일부러 시비를 
걸었다.
  "누구시오?"
  "예, 나는 송시열인데 왜 그러시오?"
  "무엇이 어쩌고 어째? 도덕과 문장이 당대에 으뜸인 우암 선생을 철모르는 
아이들까지도 다 알아서 아무도 그 어른의 이름을 감히 부르지 못하거늘, 하물며 
당신 같은 시골 선비 따위가 감히 우암 선생을 사칭하다니! 애이! 내가 이런 
자와 한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도 창피한 노릇이다."
  그는 짐짓 화난 얼굴로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 우암은 '그놈 꽤 쓸만한 
놈이구나' 하고 잊지 않고 있었다. 그 뒤 이무는 평안 병사에까지 특진되는 행운을 
얻었다.

     병사의 청을 군명으로 들어주지 않은--조석윤

  조석윤(?__?)의 본관은 배천이고 자는 윤지, 호는 낙정이다. 인조 4년(1626) 
별시문과에 급제했으나 파방(취소)되었고, 인조 6년(1628) 별시문과에 다시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어느 날 그는 동방(같은 종이에 기록된 합격자 발표)에 급제한 자들로부터 하례 
인사를 받게 되었는데 머리털이 하얗게 센 한 급제자와 인사를 나눌 차례가 
되었다. 인사를 치르고 난 노인 급제자는 얼굴을 들어 빤히 쳐다보고는 깜짝 
놀라며 혼잣말처럼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아하! 이제야 내 의문이 풀렸구나. 그러면 그렇지! 이런 장원급제 한 사람을 
길러내고 난 뒤에야 내 차례가 돌아왔으니 내가 그 동안 번번이 낙제할 수밖에."
  영문을 모르는 조석윤이 그 사연을 묻자 그 노인 급제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호남 사람인데 과거 보는 일로 일생을 보낸 사람이오. 과거를 보려고 
서울로 올라올 때 진위 갈원에 이르면, 그날 밤 꿈에 한 아이를 보게 되고 그 해 
과거는 영락없이 낙방하게 됩니다. 어떤 때는 그 아이를 만나지 않으려고 숙소를 
옮겨도 보았지만 소용없었습니다. 그 미운 아이는 에누리 없이 나타났고 과거는 
영락없이 낙방이었는데 천만 뜻밖에도 이번에 급제하게 되어 불행중 다행으로 
여기면서도 그 이유가 몹시 궁금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장원을 만나고 보니 그 
동안에 쌓였던 의문들이 한꺼번에 풀리게 되어 실로 감개가 무량합니다. 번번이 
꿈속에 나타나던 그 아이가 바로 오늘의 장원일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세상 
모든 일이 힘만 쓴다고 되는 것이 아니며 그저 묵묵히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답니다."
  조석윤이 진주 목사로 있을 때였다. 목사는 경상좌병사의 하관도 되므로 
조석윤은 날마다 새벽이면 병사에게 안부 인사를 갔다. 새벽 문안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이루어지니 도무지 귀찮은 점은 고사하고라도 매일매일 하는 접대가 
여간 신경이 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이런 상관의 귀찮은 점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의 고집은 보통이 아니었다. 어느 날 병사가 이제 새벽 문안을 그만두라는 
간청에 조석윤은 이렇게 답할 뿐이었다.
  "제가 이렇게 하는 것은 병사를 위해서 하는 일도 아니며 군명을 존중하기 
때문이니 아무리 상관의 명이라 하더라도 들을 수 없습니다."

  조석윤의 집은 금천 우파리에 있었으므로 노량진을 거쳐야 서울을 오가게 되어 
있었다. 어느 해 여름날 이웃 사람이 헐레벌떡 뛰어와서 급히 비보를 전하였다.
  "지금 한강에 풍랑으로 배가 전복되어 사람들이 몰살하였는데 그 배에 대감의 
자제가 탄 것을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속히 사람을 시켜 시신을 
찾아야 합니다."
  조석윤은 조금도 놀라는 기색이 없이 태연하게 말했다.
  "우리 아이가 돌아올 날짜가 오늘인데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으니 걱정은 
되네마는, 우리 아이는 풍랑으로 전복될 위험한 배에는 아마도 타지 않았을 
것일세. 틀림없이 자네가 우리 아이를 잘못 본 것일 걸세."
  그날 밤에 조석윤의 아들은 돌아왔다. 그는 다음과 같이 살아 돌아온 내력을 
설명하였다.
  "배를 막상 타고 보니 그 배엔 소가 많이 실려 있는데 바람은 세차게 불어 
배가 흔들렸으므로 안전하게 갈지 의문이 들어 다시 내려서 배를 
타고 오느라 이렇게 ㄴ었습니다."
  이 남다른 부자간의 믿음에 대하여 경탄을 금치 못했다.

     두 아들로부터 술주정 행패를 당한--민정중

  민정중(1628__1692)의 본관은 여흥이고 자는 대수, 호는 노봉이다. 인조 
27년(1649) 정시문과에 장원하였다. 대사간으로 있을 때 당시의 금기사항으로 되어 
있던 강빈의 일(소현 세자빈이었던 강씨에게 세자를 죽였다는 무고로 사약을 내린 
사건)을 거론하여 그 억울함을 풀어 주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림으로써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그의 충성을 알고 있는 숙종은 그에게 죄를 주지 않았다.
  민정중이 대사헌으로 있을 때 전라 감사로부터 땀이 나는 불상이 있다는 부고 
가 올라왔다. 민정중은 민심이 동요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즉시 그 불상을 
부수게 하였다.
  민정중이 대사간이 된 뒤에 절 두 채를 헐고 그 재목으로 태학 제사(성균관의 
동재와 서재)를 짓게 하였다. 민정중은 아우 민여양과 더불어 우애가 남달랐고 
형제가 모두 술을 좋아하였다.
  그의 아버지 민광훈이 강원 감사로 있을 때의 일이다. 형제가 다 아버지를 뵈러 
와서 달포 동안을 함께 지낸 적이 있었는데 그 동안에 형제에게 경사스런 일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민정중에겐 이조 정랑 벼슬이, 아우에겐 부제학이란 교지가 
같은 날 내려온 것이다. 평소 아들들에게 술을 엄금하던 아버지 민광훈도 이 
날만은 술마시기를 허락하였다. 두 형제는 오래 참아 왔던 목마름을 술로 풀다 
보니 자연 정도가 넘게 되었다. 취한 뒤에도 계속 술을 더 가지고 오라고 하자 
하인들은 아버지 민광훈의 분부라며 이제 더 이상은 주지 못하겠다고 
거부하였다. 만취한 형제는 고함을 벼락같이 질렀다.
  "너의 순상(감사, 곧 아버지인 민광훈을 말함)이 암행어사 대접을 이렇게 
밖에 못한단 말이냐, 응? 술 더 가져와라. 술!"
  두 형제는 술주정을 실컷 부리다가 그 자리에 쓰러졌다.
  이튿날 술에서 깨어난 형제는 지난밤의 실수를 듣고 깜짝 놀라 아버지 민 
감사의 방문 앞으로 달려가 석고대죄 하였는데 그렇게 엄하던 민 감사도 웃기만 
하고 꾸짖지 않았다.

    나이 겨우 일곱에 피난길의 식구를 모두 살림-- 민유중

  민유중(1630__1687)의 본관은 여흥이고 자는 지숙, 호는 둔촌이다. 민정중의 
아우다. 인조 26년(1648) 진사시에, 효종 원년(1650) 문과에 각각 급제하였다. 그의 
딸이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에 봉해졌다. 노론의 중진으로 경서에 밝다는 평을 
받았다.
  병자호란 때의 일이다. 전국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집집마다 피난길을 떠나기에 
정신이 없었다. 조정이 수도를 강화로 옮기려 하자, 대부분의 백성들도 '강화는 
천연의 요새라 믿을 만한 곳이니 피난을 강화로 가자'고 하였다. 그러나 아직 
나이 어린 민유중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임금님이 가시는 곳에는 으레 적군이 따르기 마련이라고 들었습니다. 강화로 
가는 것은 반대입니다."
  이 때 민유중의 나이 겨우 일곱 살이었다고 한다. 결국 민유중의 집은 피난을 
영남으로 갔고 일가가 모두 안전할 수 있었다.
  민유중이 사서로 있을 때의 일이다. 글을 읽기 위한 휴가를 청하는 소를 올리니 
임금이 공부에 독실한 그의 성의를 아름답게 여겨서 수년 동안 발령을 유보하여 
주었다.
  어릴 적에 동춘 송준길에게 글을 배우고 뒤에 그의 사위가 되었으므로 
사람들로부터 송나라 때 주자(이름은 희)와 황면재(이름은 간)의 사이와 
흡사하다는 말을 들었다. 민유중은 또 우암 송시열의 문인이 되어 우암과 여러 
면에서 처신과 입장을 함께 하였으며 길흉영욕을 함께 나누었다.
  민유중이 황해도 관찰사로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밤 꿈에, 전에 의술로 
궁중에서 이름을 얻은 안씨 노인이 찾아와서 식구 백 명이 흉년으로 굶어 죽게 
생겼으니 쌀을 좀 달라고 하였다. 그 안 노인이 의술로 이름을 떨칠 때 민유중의 
집안도 그의 치료를 받아 많은 효과를 본 적이 있었으므로 그의 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집은 어디에 있는가?"
  "저의 손자놈 이름이 세원이며 재령 유동에 살고 있습니다."
  꿈이었지만 그 꿈 내용이 너무도 생생하여 즉시 붓을 들어 '재령 유동 
안세원'이란 글자부터 기록해 두고, 그 이튿날 아침에 재령으로 관문(조선조 때 상급 
관청에서 하급 관청으로 보내는 공문)을 보내어 유동에 사는 안세원을 즉시 
보내라고 지시하였다. 안세원이 해주로 재빨리 압송되어 왔다. 재령 군수는 
안세원이 혹 범죄인이 아닌가 의심하고 신속하게 압송한 때문이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과연 식구 백여 명이 아사 직전에 있음이 확실하므로 감사 
민유중은 그에게 쌀 50곡(50곡은 15__20말)을 주었다. 안씨는 그 쌀 때문에 식구 
백 명의 목숨도 건지고 조상의 제사도 지낼 수 있었다. 이 때부터 안씨 집안은 
특이한 식사 의식이 생겨났다. 즉 식사가 시작되기 전에 제일 어른이 이렇게 
묻는다.
  "이 밥 누가 주었지?"
  그러면 무든 식구들은 한꺼번에 대답한다.
  "민대야! 민대야!"
  이렇게 소리친 뒤에 밥을 먹는 의식이 생겨나서 자손 대대로 가법으로 
전해졌다.

  민유중이 효종 때 경성 판관으로 특별보직되었을 때의 일이다. 민공이 
북병사에게 문안을 하루도 빼지 않았다. 북병사는 그만두기를 간절히 청했지만 
민공의 문안은 하루도 거르지 않게 되자 북병사는 다른 수를 썼다. 자기의 첩을 
시켜 하루도 빼지 않고 정성껏 술상을 차리도록 했다. 미안한 쪽은 이제 
민공이었다. 술상 차리는 일을 제발 그만두라고 사정하니 북병사는 다음과 같이 
응수하였다.
  "판관이 내 청을 들어주지 않는데 내가 왜 판관의 청을 들어줍니까?"
  판관은 하는 수 없이 매일 새벽에 하던 문안을 격일제로 줄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그 곳 북쪽지방의 한 미담으로 전해졌다.

     목소리만 들어보고도 죽음을 예견한--심만

  신만(?__?)의 본관은 평산이고 자는 만청, 호는 주촌이다.
  아홉 살에 정조부 신흠으로부터 제경편을 지으라는 지시를 받고 이 글을  
지어서 칭찬을 받았다. 성장한 뒤엔 송시열의 문인이 되었다. 병자년 난리에 
어머니 한씨와 아내 홍씨가 모두 절개를 위해 죽게 되자 통분한 마음을 참을 수 
없어 하늘을 두고 맹세하였다.
  "만약 용정(청나라 조정을 의미. 본뜻은 흉노 선우가 천지신에게 제사 지내는 
곳)에서 사생 결단의 한판 싸움을 붙지 못한다면 죽는 날까지 시골에 묻혀서 
썩으리라."
  그 뒤로 신만은 병서를 열심으로 공부하면서 때때로 칼을 쓰다듬으며 복수의 
결심을 다지곤 하였다.
  1688년에 ㄷ유산에 들어가 해를 념기고 돌아오기도 하였다.
  신만은 성격이 호방하여 얽매임을 싫어하였으며 의술에 능통하여 얼굴빛만 
보고도 몇 달 뒤에 죽는다는 것을 알아맞히기도 하였다.
  어느 해 정초에 고모부 되는 이항의 집에 인사를 갔는데 때마침 그 집에 세배 
온 이씨의 일가라는 사람이 객청 마루에 저만큼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심각한 
진단을 하였다.
  "저기 저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다가오는 4월에는 틀림없이 죽을 
것입니다."
  신만의 말에 놀라고 당황한 사람은 그의 고모였다.
  "예끼, 이 사람아! 정초부터 그 무슨 불길한 소리인가?"
  고모는 객청을 향하여 미안한 얼굴로 어색한 변명을 하였다.
  "저 사람의 미치광이 같은 말을 개의치 말게나."
  객청에 앉은 사람도 기분은 몹시 나빴지만 겉으로는 태연함을 보이기 위해 
억지로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 저 사람이 바로 그 신생이 아닙니까?"
  곁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열 살짜리 이 집 손자가 신만을 쳐다보고 
이렇게 말했다.
  "조금 전에 아저씨가 한 말이 심상치 않던데, 왜 약을 써서 살려주지 않지요?"
  신만은 웃으면서 그 아이에게 말했다.
  "너 참 신통하구나! 너 그 사람 살리고 싶으냐? 약 화제를 쓸 터이니 너 빨리 
가서 의감을 갖고 오너라!"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날 그 책이 없었고 장본인도 언짢은 표정으로 그 즉시 
떠나갔으므로 약 처방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해 4월에 그 사람은 정말로 죽고 
말았다. 그 사람이 무슨 병이기에 그렇게 죽느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신만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그 사람 얼굴빛을 살피고 목소리를 들어보니 산증을 앓고 있었는데 그 때 벌써 
말기라 날수를 계산해 보니 4월을 넘기지 못하겠기에 그렇게 말한 것뿐입니다."
  그의 고모부 이항은 또 이렇게 말했다.
  "글쎄 그 사람이 신의를 만났으면서도 살려달라고 청하지 않았으니 죽을 수 
밖에 더 있는가!"

  언젠가 우암 송시열이 신만을 보고 말했다.
  "자네 같은 재주로 만약 학문에 정진한다면 크게 성공할 터인데 자네의 생각이 
문제일세."
  우암의 말을 듣자 신만은 즉시 대답했다.
  "예! 이제부터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겠나이다."
  신만은 앉음새를 즉시 고쳐 공손하게 꿇어앉았다. 그러나 오래 견디지 못하고 
뒤로 벌렁 드러누우면서 말했다.
  "다리가 아파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습니다."
  우암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껄껄 웃고 말았다.
  우암이 신만과 친교를 맺은 뒤로 조정에서의 화려했던 우암의 정치적 술수는 
바로 신만의 머리에서 많이 나왔다고 한다.
  당시에 병조 판서로 있던 홍중보와는 내외종간이었다. 어느 날 홍중보의 집에 
가서 하룻밤을 함께 잔 적이 있는데, 이튿날 아침에 외사촌 형 홍중보가 외출한 
틈을 타서 신만은 그의 침구에다 똥을 싸 놓고 간다는 말도 없이 도망쳐 
돌아왔다.

     앞을 내다보고 난세에 신중한 처신을 한--신정

  신정(?__?)의 본관은 평산이고 자는 인백, 호는 분애다. 신흠의 손자다. 인조 
26년(1648)에 진사가 되고, 현종 5년(1644)에 문과에 급제했다.
  이 때 공서파 김자점은 인조의 후궁 조씨와 결탁하여 손자인 김세룡을 조씨의 
딸 효명옹주에 장가 들여 왕실의 외척이 되었다. 병조판서,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라 낙홍 부원군에 봉해져 굉장한 세도를 누리는 것을 신정은 의구심을 
가지고 바라보았다. 이 때 신정의 누이동생이 조씨의 자부가 되자 신정과 그의 
아버지 신익전은 처신을 더더욱 조심하였다.
  1651년 김자점이 역모에 걸려 인조의 후궁 조씨와 더불어 처형될 때, 신정의 
종형인 신면이 김자점과 친밀하다는 이유로 곤장을 맞고 심문 도중에 죽었으나 
신정의 집안은 안전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앞을 내다보고 신중하게 처신한 그의 
사려 깊은 행위에 모두 감탄하였다.
  그러나 신정은 결코 틀에 얽매인 답답한 유학자가 아니었다. 느긋한 마음으로 
세상을 넌지시 구경하는 여유 자적한 그는 방외지인 같은 멋을 지니고 있어 
풍류가 넘치는 멋도 있었다. 그의 시 중에는 매우 뛰어나다는 평을 받는 작품이 
적지 않으며, 그가 병석에 누워 있을 때 문장의 대가인 호곡 남용익(1628__1692) 
이 내방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주고받았다.
  "공께서 곧 "기아"를 간행하신다고 들었는데 그 책을 저의 시도 한 편 
들었는지요?"
  신정의 물음에 남용익이 답하였다.
  "아니, 아직 넣지 못했네."
  그러자 신정이 다음과 같이 말한 후에 시 한 수를 읊었다.
  "제가 영남에서 매화 한 그루를 갖고 온 적이 있어 이렇게 한번 지어 보았는데 
한번 보아주시지요."

  조그만 매화 한 그루
  고개 넘어 나 따라왔네
  내가 앓아 누운 줄 알지 못하고
  내 베갯머리를 향해 꽃을 피웠네

  눈을 지그시 감고 몇 번이고 읊조리던 남용익은 돌아가서 이 시를 "기아"에 
실었다.

     재주가 없어 백이전을 10만 번 읽은 억만재의--김득신

  김득신(1604__1684)의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자공, 호는 백곡 또는 
귀석산인이다. 감사 김치의 아들이다. 현종 3년(1662)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가선대부에 올라 안풍군으로 습봉되었다. 81세에 화적을 만나 부상을 입고 상처로 
죽었다.
  글재주가 워낙 둔하여 글을 읽을 땐 언제나 남보다 배를 읽어야 했다 한퇴지와 
유종원의 글을 골라서 1만여 번을 읽었으며, 그 중에도 백이전을 더욱 좋아하여 
1억 1만 3천 번(당시 1만을 1억이라고 하였음)을 읽었으므로 드디어 자기의 
서실을 억만재라고 이름하였다. 현종 11년(1670)에 조선 팔도에 흉년이 들고 
이듬해 역질이 만연하여 도시나 시골 할 것 없이 시체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이런 와중에도 다음과 같이 농담을 하는 자가 이었다.
  "금년에 죽은 사람의 수와 자네가 글 읽은 수를 견주어 보면 어느 것이 
많겠나?"

  시재가 있어 좋은 시를 많이 남겼다. 절구 몇 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충청도길이 끝이 나자
  경기도 길로 접어드니
  가도 가도 길은 멀어
  잠시도 쉴 수 없네
  나귀등에 앉아 졸다가
  잠이 깨어 바라보니
  저녁 나절에 잔설이 남아 있는
  저 산 이름이 무엇이더냐

  해는 뉘엇뉘엇 갯벌 너머로 지고
  새들은 둥지를 찾아 멀리 날아가네
  석양판 느즈막히 나귀탄 저 나그네
  앞산에 비묻어올까봐 마음이 조급하네

  저녁 노을은 강모래에 내려앉고
  가을 소리는 숲에서 울려오는데
  소를 몰고 돌아온 목동의 옷이
  앞산에 내린 비에 촉촉히 젖어 있네

     시재가 뛰어나 까다로운 운자에 강한--홍석기

  홍석기(1606__1680)의 본관은 남양이고 자는 원구, 호는 만주다. 인동 부사, 남원 
부사 등 외직을 지낸 뒤 사직하고 청주에 살면서 화양에 있는 송시열과 교우하며 
학문을 닦았다. 본시 시재가 뛰어나 강운(시를 짓기에 까다로운 운자)으로 시를 
짓는 데 매우 능하다는 평을 들었다.
  어느 날 친구와 동행하다가 소나무에서 까마귀가 우는 것을 보고 그 친구는 
침, 금, 심 3자의 강운을 주고 시를 짓기를 요구했다. 그러나 홍석기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서 그 친구를 놀라게 했다.

  시어머님 화좀 참으소 바느질하기 정말 싫소
  꿈도 많고 시름도 많아 이불 안고 뒹군다네
  누가 정말 시어머니 모진 마음 이해한다면
  골방 속에 며느리 속마음 쪽집게로 집어내리

     전서에 동방 일인자--허목

  허목(1595__1682)의 본관은 양천이고 자는 화보, 호는 미수 또는 대령노인이다. 
현감 허교의 아들이며 오리 이원익이 그 사람됨을 기이하게 여겨 손녀 사위로 
삼았다. 처음에 제자백가서를 공부하다가 다시 경서에 전심했으며 예학에 깊고 
특히 전서에 동방 일인자라는 평을 들었다.
  50여 세가 되도록 세상에 알려지지 않다가 은일(속세를 떠나 숨어 살다가 
임금이 특별히 벼슬을 내린 선비)로 천거되어 크게 등용되기 시작, 81세에 
우의정에 올랐다. 시호는 문정이다.
  허목은 태어날 때 손과 발에 특이한 손금도 발금이 있었는데, 손바닥에는 '글 
문'자, 발바닥에는 '우물 정'자 모양의 금이 뚜렷하였고, 눈썹이 길어 눈을 덮었다. 
아홉 살 때부터 글을 배웠는데 그 날 배운 글을 백 번을 읽고도 외지 못하였다. 
그래서 허목은 자봉산에 들어가 나오지 않고 수십 년 동안 독서에 몰두하였다.
  인조 4년(1626) 박지계(1573__1635)가 원종(인조의 아버지)을 왕으로 추승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와 인조가 기뻐하였으나 허목은 이를 반대, '임금으로 하여금 
예를 어지럽히는 행위'라고 맹렬히 반대 하다가 인조의 노여움을 얻어 정거(일정 
기간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하는 법)를 받았다. 효종 원년 참봉에 제수 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뒤에 지평, 장령이 되었다.
  효종이 승하하자 현종 원년(1669)에 효종의 어머니인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로 
예론이 일어나자 송시열 등이 주장하여 채택한 기년설(만 1년)을 반대하고 
3년설을 주장하다가 삼척부사로 좌천되었다. 이로써 서인과 남인 사이의 당쟁과 
정권다툼이 치열하였다. 동해에 해일이 있을 땐 수해가 있어 주민들의 피해가 
매우 컸는데 허묵이 동해를 찬미하는 비석(일명 동해척조비라고 부름)을 세운 
뒤로부터 해일이 없어졌다고 한다.
  숙종 1년(1675) 왕명으로 연천에 집을 지어 살게 하자 허묵은 그 집에 
은거당이란 편액을 달았다. 전서체는 신우비를 본으로 삼았는데 필력이 매우 
굳세다는 평을 들었다.
  어느 날 판서 이정영이 허목에게 전서체를 그만 쓰라고 농담을 하였는데 그 말을 
들은 허목은 대답 대신 다음과 같이 시 한 수를 지었다.

  아침해가 동상에 떠오르니
  연기와 노을이 창문에서 모락모락
  저 창문 바깥일은 알 수가 없고
  갈필로 과두문자만 쓴 다오.

  허목이 죽기 2, 3일 전 밤에 이상한 짐승이 내려와 지붕에 누워 있었는데 그 
짐승이 눈에서 나오는 불빛이 멀리까지 비추었으므로 이를 본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허목이 죽던 날 어떤 사람이 그를 조려에서 만났는데, 초립을 쓴 시종이 
따른 것은 평상시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지만 허목이 이상한 짐승을 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날이 바로 허목이 죽은 날임을 그 뒤에 알았다고 한다.

     원혼들로부터 철저히 복수 당한--김석주

  김석주(1634__1684)의 본관은 청풍이고 자는 사백, 호는 식암이다. 잠곡 
김육(1659__1658)의 손자다 효종 8년(1662) 증광문과에 장원하였다. 서인 중의 
한당에 가담하여 집권 세력인 산당의 미움을 사서 중용되지 못하였다. 자의대비 
복상문제로 2차 예송이 일어나자 남인인 허적 등과 손잡고 송시열, 김수항 등 
산당을 숙청하고 수어사, 도승지 등 요직에 등용되었다.
  남인들의 세력이 강화되자 이번엔 산당과 손잡고 남인 제거에 앞장섰다. 허적이 
유악사건으로 실각한 틈을 타서 허적의 서자 허견이 역모를 꾀한다고 고변하여 
남인에게 큰 타격을 가하고 그 공으로 보사공신 일등에 청성부원군이 되었다.
  김석주가 죽은 지 6년 뒤에 남인들의 그의 훈작은 삭제되고, 아들 김도연은 
자결하고, 부인 황씨는 변방으로 떠도는 불운을 겪었다. 그런데 우상에 
청성부원군이란 훈작을 받은 김석주의 집이 이렇게 몰락하게 된 것은 김석주가 죽자 
김석주 때문에 억울하게 죽은 원혼이 평안도 무인 모갑에게 붙어서 전에 받은 
원한을 철저히 복수했다는 이야기라고 전한다.

     신분이 천한 무인에게 큰 교훈을 얻은--정재숭

  정재승(?__?)의 본관은 동래이고 자는 자고, 호는 숭와다. 영의정 정태화의 
아들이다. 효종 1년(1651)에 진사가 되고 현종 1년(1660)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숙종 11년(1685)에 우의정에 올랐다.
  정재숭이 산사에서 글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무인 최씨를 만났다. 이 최씨는 
신분이 미천한 무인이지만 가정의 법도가 엄하기로 이미 소문이 나 있던 터였고, 
어릴 적에 한번 안면이 있었으므로 어떻게 가정을 다스렸기에 마을 선비들의 
입에도 오르내릴 정도인가 그 내력을 알고 싶던 차였다. 마침 비가 연일 오고 
그와 한방에서 묵게 되어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그대는 활쏘기와 말타기로써 발신한 몸으로 글을 배우지 못했을 터인데 마을 
선비들로부터 집안을 잘 다스린다는 칭찬이 자자하다. 도대체 무슨 비법이 
있는가?"
  그 무인은 즉시 대답을 못하고 얼굴만 붉히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소년 시절의 일입니다. 산골에 사는 종매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마침 다른 사람은 없고 종매 혼자 있었습니다. 몇 마디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갑자기 달려들어 저를 안았습니다. 제가 그 때 벌떡 일어나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종매의 얼굴이 보기 흉하게 못생긴 덕이었으며, 만약 그 여자의 자태가 
요염했던들 저는 그 때 틀림없이 짐승같이 욕망을 채웠을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 마음 한쪽에 늘 부끄러운 구석이 있었는데, 언젠가 아이들이 글을 
배우고 있는 서당 옆에서 화살을 만들고 있을 때 귀에 들려온 서당 훈장님의 
말씀이 저를 크게 감동시켰습니다. 남녀칠세부동석이 무슨 뜻인가 묻는 아이들의 
질문에, '남녀가 같이 만났을 때 일어나는 성욕은 억제하기 힘든 것이므로 아예 
어릴적부터 남자와 여자는 엄격하게 구분해서 앉는 것이 좋다'는 내용의 
설명이었습니다. 저는 그 때 '내가 진작 이런 말을 들었던들 혼자 있는 종매의 
집에 가지 않았을 터인데'하고 크게 속으로 뉘우쳤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즉시 그 
훈장님께 간청하여 그 말 언문으로 받아 와서 집에 붙여 두고 그대로 집안을 
다스렸습니다."

     유응부의 계시를 받은 숙종조의 충신--오두인

  오두인(1624__1689)의 본관은 해주이고 자는 원징, 호는 양곡이다. 어릴 적부터 
총명하여 나이 겨우 열 살에 시를 지어 명나라 사신 정룡을 놀라게 했다. 인조 
26년(1648) 진사시에 장원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또 장원하였다.
  숙종 15년(1689) 기사환국(원자정호 문제로 남인이 송시열 등 서인을 몰아내고 
집권한 일)으로 서인이 실각하고 인현왕후 민씨가 폐위되자 오두인은 눈물을 
흘리면서 다짐하였다.
  "내가 조정의 은혜를 입고 벼슬이 경상의 지위에 올랐는데 어찌 자리에 
연연하여 입을 다문단 말인가!"
  오두인은 박태보, 이세화와 함께 반대 상소를 하여 국문을 받고 의주로 
압송되기 위해 의금부에서 출옥하자, 사람들은 충신의 얼굴을 보겠다고 장안 길을 
메웠다. 의주로 가는 도중 파주에서 죽었다.
  그가 죽기 전에 꿈을 꾸었는데, 유응부라고 쓴 쪽지를 받고 그를 만났는데 그는 
오두인을 보고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대감도 오래지 않아 우리 있는 곳으로 올 터이니 그 때 만납시다."

     친국을 받으면서 임금에게 간한--이세화

  이세화(1630__1701)의 본관은 부평이고 자는 군실, 호는 쌍백당 또는 칠정이다. 
이이재의 아들로 이희재에게 입양되었다. 효종 8년(1657) 생원으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황해도, 평안도, 전라도 등 5개도의 관찰사를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숙종 15년(1689) 기사환국 때 오두인 등과 함께 인현왕후 
폐비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친국을 당하고 정주에 유배되었다.
  친국받을 때 반대 상소문을 누가 썼느냐는 질문에 이세화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여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박태보는 붓만 잡았을 뿐이고 내용은 제가 만들었습니다."
  그 말에 숙종은 진로하여 고문을 더욱 심하게 하였다. 이세화는 가물거리는 
정신을 가까스로 수습하여 항변하였다.
  "신은 평소에 항상 죽을 땐 국사를 위해 죽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이제 저의 
원을 풀게 되었으니 여한은 없사오나 성덕에 누가 될까 두렵습니다. 신의 죄가 
비록 크지만 담당 옥리에게 맡겨 다스려도 충분할 터인데 이렇게 밤에까지 친국을 
하시니 옥체에 해가 되지 않을까 심히 걱정입니다."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이를 형간(고문을 받으면서 임금에게 간함)이라고 
하였다. 그 이튿날 이세화는 정주로 유배의 길을 떠났다.
  1694년 갑술옥사롤 이세화는 유배에서 풀려나 대사간이 되었고 이어서 
호조, 공조, 형조, 병조, 이조 판서를 역임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공의 힘으로 윤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을 면했다'고 칭송받은--박태보

  박태보(1654__1689)의 본관은 나주이고 자는 사원, 호는 정재다. 박세당의 
아들이다. 숙종 3년(1677) 알성문과에 장원한 뒤 전적, 예조 좌랑 등을 역임했다.
  인현왕후가 폐위되자 마침 파직되어 집에 있던 박태보는 오두인, 이세화와 
더불어 반대 상소를 하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서 친국을 받았다. 심한 고문을 
받고 살이 찢기고 피가 흘렀으나 끝까지 흔들림이 없었다. 진도로 유배 가는 도중 
노량진에 이르러 숨이 끊어졌다. 이때 박태보의 나이 겨우 36세였다.
  박태보는 윤선거의 외손으로 유생 시절에 올린 상소문에서 송시열의 아버지 
송갑조를 호되게 비판했다는 이유로 송시열에게 원한을 사고 있었는데, 인현왕후 
폐위를 반대하다가 목숨을 잃자 송시열은, '공의 힘을 입어 윤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을 면했다'고 찬탄하고 이미 써 놓았던 자신의 글 가운데 박태보에 관한 것은 
모두 삭제하였다.

     한번 내뱉은 '말'은 달리는 '말'로도 못 따라 잡는다고 한--이현조

  이현조(1654__?)의 본관은 전주이고 자는 계상, 호는 경연이다. 영상을 지낸 
이성구의 손자다. 숙종 7년(1681)에 진사가 되고 이듬해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검열, 대교를 거쳐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 인현왕후가 폐위될 때 이현조는 궐문 
밖에서 자리를 깔고 목놓아 울면서 폐위 중지를 호소했으며 그가 정청할 때 재신 
민종도가 얼굴을 붉히면서 말했다.
  "사람들이 폐위의 일을 목숨을 걸고 간쟁하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어찌 의리에 
맞는 일인가?"
  이현조는 민종도의 말에 화를 내며 말했다.
  "한번 입에서 나온 말은 달리는 말도 못 따라잡는 법이오! 말하기 쉽다고 
함부로 말하는 것이 아니오. 군부가 허물이 있으면 신자된 도리에 어떻게 간쟁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이오."
  이현조는 승지를 거쳐 강원 감사를 지냈으며 통천 임소에서 죽었다.

     지혜로운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았던--윤휴

  윤휴(1617__1680)의 본관은 남원이고 자는 희중, 호는 백호다. 효종 때 재학과 
행의로 천거되어 세자시강원 자의, 종부시 주부, 지평 등 여러 벼슬이 재수 
되었으나 교지를 모두 반려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정진했다. 그러나 송시열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이유태에게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윤휴의 고고한 자세를 
우려하였다.
  "윤휴가 고고함을 굽히지 않고 교명을 모두 반려한 것을 보면 이 세상을 온통 
벌레처럼 가볍게 보고 있음이 틀림없다."
  송시열이 윤휴의 집에 들르면 며칠씩 묵으면서 침식을 잊을 정도로 
담소하였다. 그것을 안 윤휴의 어머니는 아마도 송시열이 보통 손님이 아닐 
것이라고 여겨 문틈으로 엿보고 나서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아들을 불러 
신신당부하였다.
  "내 그 사람을 보았는데 심술궂고 엉큼하며 그 말씨 또한 안정되어 있지 않고 
아마도 속마음이 어질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조심하여라!"
  그러나 어머니의 염려를 이해 못한 윤휴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 손님은 큰 선비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어머니의 염려는 적중하여 윤휴는 사문난적(유교의 교리를 마음대로 해석하여 
비난받은 사람)으로 몰렸으며, 허견의 역모에 관련되었다는 혐의로 끝내 
사사되기까지 송시열의 영향력이 작용한 것을 안 뒤에야 사람들은 윤휴 어머니의 
선견지명에 감탄하였다. 경신대출척(1680년 허견의 역모 등으로 남인이 실각한 
사건) 때 남인들이 서리를 만나 대거 몰락하게 되었으며, 이 때 윤휴의 형제들 중 
다섯은 유배되고 한 명은 배소에서 죽었다.

     과거 급제를 기뻐하다 장인으로부터 크게 꾸중을 들은--권변

  권변(1623__1726)의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이숙, 호는 수초당이다. 숙종 7년 
(1681) 사마시에 합격하고, 1689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하필 
창방일(합격자 명단을 붙이고 발표하는 날)이 인현왕후 민씨가 폐위되는 
날이었다.
  "대과에 급제한 기쁨을 안고 그의 장인 되는 소두산에게 인사를 갔으나 
문전에서 거절당하고 돌아왔다. 영문을 알 수 없어 사람을 시켜 알아보니 
소두산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내가 자네에게 거는 기대가 얼마나 큰데, 기껏 한다는 짓이 중궁이 폐위되는 
슬픈 날 자네는 과거 합격의 기쁨을 즐기다니, 그래서야 어찌 사군자의 처신이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 날 내가 자네를 만나지 않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일세."
  이 말에 충격을 받은 권변은 즉시 달려가 문밖에 꿇어앉아 사과하였다.
  "장인의 말씀을 듣고 이미 제 잘못을 뉘우쳤습니다. 이제부터는 벼슬길에 결코 
나가지 않고 근신하는 일로 일생 동안 지킬 법으로 삼겠습니다."
  소두산은 그제서야 비로소 권변의 문안인사를 받고 엄하게 한번 꾸짖은 뒤에 
'수당초(처음 마음을 끝까지 간직하라는 뜻)'이란 글자 석자를 써 주었다. 권변은 
그 당부를 일생 동안 가슴에 새기며 살았다. 조정에서 부제학 벼슬을 내렸지만 
끝내 결심을 굽히지 않고 살았다. 시호는 문정이다.

     꿈에 생사당을 가느라고 임금 앞에서 졸았던--이민서

  이민서(1633__1688)의 본관은 전주이고 자는 이중이다. 영의정 이경여의 
아들이다. 효종 1년(1650)에 진사가 되고 2년 후에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숙종 
14년(1688) 동경연(동지경연사)으로서 야강에 참여했는데 갑자기 얼굴이 
붉어지면서 졸기 시작했다. 임금을 모신 자리에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참석한 대신들이 황공하여 그를 논죄할 것을 청하였으나 뜻밖에도 숙종은 그를 
깨우지도 못하게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는 본시 술을 마시는 사람이 아니니 술이 취했을 리는 없고.... 어쨌든 졸게 
된 사연을 먼저 본인에게 들어보는 것이 좋겠다."
  밤이 깊어서야 잠에서 깨어난 이민서는 황공하여 몸둘 바를 몰라 하면서 땅에 
엎드려 벌을 청하고 자초지종을 임금께 아뢰었다.
  "신이 지난해 정사년(1677) 광주 목사로 있을 때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장인 
박광옥의 사당을 중수하고 김덕령을  함께 제향하도록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에 갑자기 피곤해지면서 졸음이 덮쳐와 꿈을 꾸었는데 그 꿈에, 
신이 광주에 초청되어 갔습니다. 새로 지은 사당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신은 
그들에게 후한 음식 대접을 받는 꿈이었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숙종은 평소에 그가 지방 수령으로 나가면 선정을 베푼다는 소문을 익히 
들은지라 즉시 그 날 광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도록 명하였으며 조금 
후에 그 보고가 올라왔다. 예측했던 대로 광주 사람들이 그가 목사로 있을 적에 
베푼 선정을 잊지 않고 그를 위해 생사당(지방관이 선정을 했을 때 그 지방민이 
은혜를 잊지 않고 그가 죽기 전에 세운 사당)을 세웠다는 보고였다.
  이민서가 사국(실록청)에 있을 때 영유 군수로 있는 백씨, 중형인 죽서(이민적의 
호)와 함께 동산에 올라가서 놀곤 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그곳을 학사대라고 불렀다. 
또 신정은 서하옹(이민서의 호)을 설봉고송(눈 덮인 봉우리에 외롭게 서 있는 
소나무)이라면 그의 고고한 인품을 평하였다.

     한쪽 다리가 잘린 뒤 더욱 출세한--윤지완

  윤지완(1653__1718)의 본관은 파평이고 자는 숙린, 호는 동산이다. 판서 윤강의 
아들이요 좌의정 윤지선의 아우다. 효종 8년에 사마시, 현종 3년(1662)에 
증광문과에 그의 형 윤지선과 나란히 합격하였는데 형보다 윗등급인 을과로 
급제하였다.
  윤지완이 여덟 살 때 지었다는 다음과 같은 시가 전한다.

  눈이 나리니 온 산천이 하얗고
  하늘이 높다라니 해와 달이 밝구나

  글재주를 본 어른들은 그의 장래에 기대를 걸었다. 언젠가 중국인 점쟁이에게 
점을 치니 그 점괘 풀이로서 단지 '무족가관(발이 없어야 볼 만하다는 뜻)' 이라는 
네 글자만을 써 주었다.
  그의 재주가 그렇듯 높은데도 별로 알려지지 않았는데 병으로 인해 한쪽 다리를 
자른 뒤에야 비로소 현달하여 병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을 역임했으며 청백록에 
기록되었다.

     시골 선비에게 속아 급제시킨 상사관--김진규

  김진규(1658__1716)의 본은 광산이고 자는 달보, 호는 죽천이다. 김만기의 
아들이자 인경왕후의 오빠다.
  비가 오는 어느 날 김진규가 집으로 돌아오는데 아버지 광성부원군이 우의와 
말을 보내 주었다. 그러나 김진규는 그것을 이용하지 않고 비를 맞으며 걸어서 
돌아왔다. 그 꼴을 본 아버지가 까닭을 물었다.
  "아비가 보내 준 말과 우의는 어떻게 하고 지금 너의 그 꼴이 무엇이냐?"
  김진규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아버지가 보내 주신 것이 너무 사치스러워 저의  신분엔 맞지 않아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난 아버지 김만기는 오히려 자식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꼈다.
  김진규는 시관으로도 이름이 나 있었으므로 과거를 준비하고 있는 거자(입시 
지만생)들에게도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언젠가 고향으로 성묘를 갔다가 
회시(초시에 합격한 사람이 보는 과거, 복시라고도 함)가 임박하여 그 시험을 
감독하기 위해 서둘러 돌아오는 길인데, 말을 타고 줄곧 책을 보면서 같은 
방향으로 가는 시골 선비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김진규가 점심을 먹기 위해 
주막에 들렀을 때도 조금 전에 보았던 그 시골 선비를 만났다.
  책을 그렇게 열심으로 보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지 궁금한 생각이 들어서 
누구냐고 묻자 다음과 같은 대화가 오고 갔다.
  "저는 부모를 모시고 사는 사람인데 과거운이 없는지 아무리 열심으로 
공부하여도 번번이 낙방이어서 참으로 형편이 말이 아닙니다."
  "보고 있는 그 책은 무슨 책이기에 줄곧 손에서 떼지 않지요?"
  "제가 지은 글의 초고인데 요즈음 제 정신이 흐려져서 잘 잊어버리므로 늘 
보아야 합니다."
  김진규가 양해를 얻어 그 책을 펴 보니 글솜씨가 보통이 아니었으므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과거 공부가 이런 수준인데 여러 번 낙방을 하였다니 이것은 전적으로 유사 
(담당 시험관)의 책임이오."
  "예. 하도 여러 번 낙방을 하고 나니 이제는 과거 공포증이 생겨서 
과장(시험장소)에만 들어가면 정신이 오락가락하여 모두 잊어버리므로 이렇게 항상 
눈에 익혀 두어야만 한답니다. 사실은 이번에도 저는 응시하지 않으려고 하였는데 
노친의 청이 간절하시어 부득이 내키지 않는 걸음을 하게 된 것입니다."
  선비의 말을 들은 김진규는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 한 번만 더 노력해 보시오 공든 탑이 무너질 리 있겠소?"
  그들은 길을 재촉하여 서울에 당도했으며 선비는 과장으로 들어가고 김진규는 
상사관을 맡았다. 그 선비의 시권을 훑어보니 그 가운데 글자를 잘못 쓴 자가 
많이 눈에 띄었다. 김진규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면서 생각했다.
  '틀림없이 그 선비의 것이다.'
  김진규는 상시관으로서 다른 시관들을 향하여 말하였다.
  "이 시권을 살펴보니 늙은 선비의 글솜씨가 분명하다. 이번에 우리 시관들이 
적선 한번 합시다."
  다른 시관들의 동의를 얻어 김진규는 그 사람을 발탁하였다. 방을 붙이기 
위하여 봉한 부분을 뜯어보니 나이가 별로 많지 않았다. '혹시 내가 엉뚱한 사람을 
뽑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하고 속으로 의아해 하다가 신은례(새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ㅊ아다니며 하는 인사)를 하러 왔을 때 물어 보았다.
  "여러 차례 낙방 끝에 이렇게 급제한 것을 거듭거듭 축하하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노릇인가! 그의 말이 전과 달랐다.
  "아닙니다. 저는 이번에 처음 응시하였는데 요행으로 급제한 것입니다."
  김진규가 다시 말하였다.
  "이제 양친 봉양을 잘하게 되었으니 무척 다행일세 그려!"
  "아닙니다. 저는 양친이 다 안 계십니다."
  지난번 길에서 만났을 때와는 너무도 다른 대답이어서 김진규는 불쾌한 
표정으로 따져 물었다.
  "어찌하여 지난번엔 나를 속였느냐?"
  그때서야 그는 머리를 숙여 사죄하였다.
  "이번 회시에 대감께서 상시관을 맡을 것이라고 짐작되어 이번 기회에 어떻게든 
급제를 급제를 놓치지 않으려는 욕심으로 그만 저지른 일입니다. 저의 죄를 잘 
알겠으니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해명을 듣고 난 김진규는 어처구니가 없어 한참 동안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어설프게 웃고 마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기생들로 하여금 누추한 이름을 남기게 한--한지

  한지(1675__?)의 본관은 청주이고 자는 석보, 호는 월악이다. 집의 한태동의 
아들이다. 숙종 25년(1699)에 생원이 되고, 1705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한지가 충청도 감사로 있을 때 공무로 청주에 간 적이 있는데 천주에서 묵은 지 
3일째 되는 날 밤이었다. 자다가 손끝에 뭉클하고 부드러운 물체가 와 닿는 
감촉을 느꼈다. 표동표동한 여인의 살결이었다. 재색을 두루 갖춘 천주 관기 
강도가 감사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있더니 그날 밤에 몰래 이불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강도는 모기 소리 만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저는 사또의 명을 받고 왔습니다. 만약 감사 나으리의 사랑을 입지 못하면 
벌을 면치 못한다고 하시기에 부끄러움도 무릅쓰고 이렇게 들어온 것이어요."
  "아, 그러냐? 그것 어려울 것 없다. 어서 이불 속으로 들어오면 될 것 아니냐."
  그 날부터 13일 동안 한 이불 속에서 잤지만 두 사람 사이엔 아무런 일이 
없었다. 한지가 일을 마치고 청주를 떠나던 날, 기생 강도는 눈물을 흘렸다.
  "왜 우느냐? 아직도 나에게 정이 남았느냐?'
  강도는 눈물을 훔치면서 대답했다.
  "감사 나으리와 무슨 정이 있겠습니까? 명색이 기생으로 끝내 깊은 인연 한 번 
맺지 못한 것을 생각하니 속이 상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니까 울지요."
  곁에 있던 천주 목사가 한 마디 거들었다.
  "강도는 누추한 이름을 남기었고 감사는 꼿꼿한 이름을 남겼도다."
  한지는 수많은 기생들의 시중을 받았지만 한 사람의 기생도 범한 적이 없었다. 
언젠가 한가한 날 막장을 불러 조용히 물어 보았다.
  "사실대로 말해 보아라. 자네는 객고를 풀기 위해 다른 여자를 건드린 적이 
있느냐?"
  그 막장이 이실직고하자 한지는 웃으면서 말했다.
  "내 몸이나 단속해야지, 내가 무슨 수로 다른 사람까지 막겠느냐. 다만 지나친 
것만 삼가라!"

     남을 돕는 일로 즐거움을 삼은--임준원

  임준원(?__?)의 자는 자소다. 인품이 잘나고 기상이 늠름하며 말솜씨가 있었으나 
살림은 가난하고 부모는 연로하여, 오랜 생각 끝에 뜻을 꺾고 내수사(궁중에서 
쓰는 물자와 노비에 관한 사무를 말아보던 관아)의 벼슬아치가 되어 많은 재산을 
모아 부자가 되었다.
  수천 냥 부자가 되자 임준원은 새로운 결심을 하였다.
  "내 재산도 이만하면 부모를 봉양하고 조상 제사를 모시는 데 충분하니 이제 이 
자리를 떠나자!"
  임준원은 그날로 그 벼슬을 그만두고 들어앉아 읽고 싶었던 글도 읽고 친구들과 
사귀면서 자신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의 친구들을 보면 유찬홍, 홍세태, 최대립, 
최승태, 김충렬, 김부현 등이었는데 유찬홍은 바둑과 시로 유명했고 호는 
춘곡이며, 홍세태는 시로 이름이 나 있었고 호는 창랑이다. 나머지 다른 친구들도 
모두 당대의 명사들이었다.
  유찬홍은 술을 즐겨 마셨고 주량이 두어 말은 되는 대주객이었고, 홍세태는 
양식이 자주 떨어지는 가난한 살림을 하였다.
  임준원은 유찬홍을 자주 불러 술을 양껏 대접하였고, 홍세태에게는 굶지 않도록 
양식을 대주었다. 또 좋은 날 좋은 경치는 빼놓지 않고 친구들을 초청하여 시를 
짖고 읊조리며 풍류를 즐겼다.
  임준원의 생활은 남을 위해 베푸는 일에 즐거움을 찾으면서도 본인은 항상 
모자람을 느꼈다. 가난한 친척이나 친구들은 혼사나 장례를 치를 때는 으레 
임준원의 도움을 믿게 될 정도였다.

       2. 기사환국과 신임사화

  숙종15년 서인과 남인과의 피비린내 나는 대결에서 희빈 장씨 소생의 원자정호 
문제를 계기로 중전 민씨가 폐위되었으며, 노론의 영수 송시열이 유배, 사사되고 
서인이 대거 축출되어 남인 정권이 등장하였다

  경종 취임직후인 신축년과 임인년에 장희빈의 소생인 경종을 보호하는 소론과 
연잉군(뒤의 영조)의 왕세제 책봉 및 추대를 대의명분으로 내세운 노론의 
당인들이 정권을 획득하여 부귀를 누리고자 국왕을 선택하고 음모로써 반대파를 
축출하여 당쟁이 국에 달하였다.

     일본 땅에서 제주 귤을 먹은--신유한

  신유한(1681__?)의 본관은 영해이고 자는 주백, 호는 청천이다. 숙종 39년(171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제술관으로서 통신사 홍치중을 따라 1719년에 일본에 
갔다.
  신유한은 일본의 접빈관인 아메노모리 호슈(일본의 대학자로서 조선어와 
중국어에 능통하여 조손 사신의 접대를 전담했음)와 마주 앉아 귤을 먹으면서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우리나라도 남쪽 해안지방에서 귤이 나지요. 특히 제주에서 많이 생산되는데 
맛은 이 귤만 못합니다. 귤에도 좋고 나쁜 종류가 있나 보지요?"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맛이 좋고 나쁜 것은 그 나라 토질에 따라 다른 것이지 
종류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옛날 우리나라 남도에 조선 선박이 표류하여 떠내려 
온 적이 있었는데, 그 때 그 배에 탔던 사람과 물건은 거의 침몰되고 거의 침몰되고 
귤 한 상자와 문서 하나가 갑판 한쪽에 남아 있어 그 귤이 바로 제주 목사가 대궐로 
보내는 공물임을 알았지요. 그 섬사람들은 그 귤이 외국산이라고 귀하게 여겨 그 
씨를 받아 퍼뜨리고 제주귤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귤이 바로 그 제주귤이랍니다."
  이처럼 신유한은 이웃 일본과의 교유와 문물에 밝았으며 시문에도 능하였다. 
신유한이 지은 촉석루 시에 다음과 같이 시구가 전한다.

  천지는 임금을 위해
  삼장사를 보내었고
  강산은 나그네를 위해
  여기 촉석루를 남기었네

     남한산성이 함락되자 배나무를 안고 통곡한--유혁연

  유혁연(?__?)의 본관은 진주이고 자는 회보, 호는 야당이다. 어릴 적부터 
출중하여 뒤에 장인이 된 당시 병마절도사 남이흥의 눈에 띄었다.
  어린 시절에 해미에 살 때였다. 동네 앞에 큰 나무가 있고 나무 아래 제단이 
있었는데 항상 그 제단 위에 올라앉아 마치 대장처럼 아이들을 지휘하곤 하였다. 
어느 날 한 아이가 대자의 명을 어겼다고 군령을 집행한다며 그 아이를 낫으로 
혼내 주려는 것을 본 아버지가 깜짝 놀라 그 낫을 빼앗았다.
  유혁연은 독서도 좋아하여 병서를 즐겨 읽었으며 제갈량의 출사표와 
"악무목전"(송의 충신인 악비의 전기)을 읽을 때는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형제간에 우애 또한 남달라 큰 베개를 만들어 함께 사용하였다. 병자호란 때 
아버지 유효걸이 안주에서 전사하자 형제가 함께 출전하여 싸웠으며, 남한산성이 
적에게 함락되자 집에 돌아와 집 뒤에 있는 배나무를 안고 북쪽을 향해 통곡하니 
마을 사람들이 그 배나무를 '유혁연 나무'라고 불렀다. 이듬해 세자가 청나라 
심양으로 볼모로 잡혀가자 유혁연은 모화관(조선조에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기 
위해 세운 집)에 들어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남겼는데, 사람들은 이 시를 
읊조리며 눈물을 삼켰다고 한다.

  서쪽 강에 내리는 부슬비는
  군신간의 눈물이요
  대궐 위에 모여 있는 구름은
  부자간의 정일세

  인조 22년(1644)에 무과에 급제, 덕산 현감을 거쳐 선천부사로 나갔다. 이 때 
유혁연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사나운 북풍이 눈을 몰고
  새벽에 닥치니
  살을 저미는 추위가
  앓아 누운 이불 밑으로 스며드네
  아침에 기를 쓰고 일어나
  활을 잡고 앉았으니
  적병을 모조리 잡는 사냥
  오직 그 마음뿐이라네

  삼도수군통제사, 훈련대장 등의 요직을 지냈으나 경신대출척으로 남인들이 대거 
축출될 때 영해로 유배되고, 이어서 대정으로 옮겨 위리 안치되었다가 곧 
사사되었다.

     상복 차림으로 밭을 간--최신

  최신(1642__1708)의 본관은 회령이고 자는 자경 호는 학암이다. 민정중이 함경도 
감사로 있을 때 육진을 순회하다가 상복 차림으로 들에서 밭을 갈고 있는 사람을 
보고 이상히 여겨 그를 불러서 이야기해 본 뒤에 그를 발탁하였다.
  최신은 민정중의 주선으로 송시열의 문인이 되어 더욱 학문을 익혔으며 그 
인연으로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두 사람의 관계를 중국의 
곽임종과 모계위의 관계에 비유했다. 최신은 시골 출신으로 부모상을 맞아 성심껏 
예를 지킨 연유로 민정중에게 발탁되어 인재로 성장했으니 후세에 모범이 될 만한 
일이다.
  최신은 현감으로 있을 적에 윤휴의 작용에 의해 유필명과 더불어 의금부에 
하옥되어 형신을 받고 사천에 유배되었으며,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제거되자 풀려 나와 제릉 참봉, 사옹원 직장, 광흥창 주부를 역임했다. 숙종 
15년91689)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다시 제기되자 윤휴의 당 김몽양에 의해 
송시열의 심복으로 단죄되어 광양에 유배되었다. 숙종 20년(1694)에 석방되었는데 
이 때 최신은 고향 회령을 떠나 남쪽으로 아예 집을 옮겨왔다.
  숙종 31년(1705) 송시열의 문인 유필명의 말을 듣고 남에게 변무하는 글을 
의뢰하였는데 그 사람이 변무문에 중국의 고사인 태정과 태갑의 이야기를 
인용하여 준 것을  그대로 유필명에게 준 일이 있었다. 유필명이 이 변무문으로 
말미암아 의금부에서 추국을 받는 도중에 최신을 끌어들인 때문에 최신은 변무문 
사건에 연루되어 가혹한 추국을 받아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으며 유필명과 함께 
유배되었다가 광주에 은거했다.

     서북인 출신으로 최초로 충청 병사가 된--전백록

  전백록(?__?)은 온성의 토병이다. 그의 어머니의 꿈에 흰 사슴을 보고 낳았다고 
하여 이름을 백록이라고 하였는데, 뒤에 벼슬길에 올라 옴은 그대로 주고 뜻이 
다른 글자로 고쳐 백록이라 하였다.
  전백록이 경흥부사로 있을 적에 경성을 지나다가 당시에 북평사(정 6품 무관직. 
함경도 병마절도사의 보좌관임) 이동언(1662__1708)을 만났다. 이동언은 사헌부 
지평으로 있다가 북평사로 온 사람이며 사헌부에 있을 적에 직간으로 이름을 얻은 
때였다. 이 때 전백록도 북방 호걸이란 명성을 얻고 있었으므로 그를 만난 
이동언은 단도직입적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내가 이곳 북평사로 부임한 이후로 나의 시책에 대한 솔직한 평가를 부사에게 
듣고 싶소. 들은 것이 있으면 숨김없이 말해 주시오."
  "이 북쪽지방이 비록 한양에서 멀다고는 하지만 공이 사헌부에 있을 때 보여준 
기탄 없는 비판으로 떨친 명성을 못 들을 리 있겠소? 그런데 막상 겪어 보니 공이 
부임한 뒤로부터 날마다 기악을 잡히고 별로 하는 일이 없으니 처음에 떨치던 
병마절도사의 위신이 이제는 말이 아닙니다. 대저 풍류와 여자는 사람의 마음을 
방탕하게 마들기 쉬운 것이오. 공은 아직 앞길이 창창하니 특별히 조심하여 
자중하시오. 만약 앞으로 풍류와 여색을 멀리할 자신이 없거든 다시는 전처럼 
남의 잘못을 비판하지 마시오. 비웃음을 살 뿐이오."
  아무도 예상 못한 일이었다. 비수 같은 날카로운 비판에 이동언은 할말을 잊고 
있다가 정신을 차려 옷깃을 여미고 정중하게 사과하였다. 나중에 조정에 돌아온 
이동언은 전백록의 당당한 위풍과 과감한 성격 등을 조정에 널리 알리고 그를 
크게 등용할 것을 적극 주장하여 전백록의 앞길을 열어 주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서북인도 지방 감사에 써야 한다는 논의만 있을 뿐 아직은 
시행되지 않았는데 전백록이 처음으로 충청수사에 발탁되었다.

     늦게 글을 배워 출세한 무인--전종영

  전종영(?__?)의 본관은 강계다. 무예가 뛰어나 창주진첨사가 되었으나 본시 
글을 배운 적이 없어 무식하였다. 첨사로 부임한 뒤에 감영(감사의 집무처)과 
병영(병영절도사가 있는 곳)에 올리는 보고서를 쓸 수 없어 늘 아쉬운 소리를 
하며 군관의 손을 빌려 작성하는 실정이다.
  이런 연유로 후에 전종영은 크게 발분하여 글을 배우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향리에서 사략 초권을 빌려다 두고 글을 잘 나는 졸병 한 사람을 불러 선생으로 
삼고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글줄 곁에 그 글자의 뜻과 음을 모두 언문으로 
써 놓고 부지런히 외고 썼다. 그는 배운 것은 반드시 다 왼 뒤에야 새로 배웠는데 
워낙 열심으로 글을 읽은 덕분에 얼마 안 가서 사략 초권을 떼고 석 달을 넘기지 
않고 사략 전질을 다 뗐다. 그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다음엔 통감을 읽기 
시작하여 전질을 다 읽었다.
  기간은 불과 1년 남짓하지만 워낙 억척스레 글을 읽고 나니 이제 상부에 
보고하는 공문은 더이상 남의 손을 빌리는 일이 없게 되었다. 전종영의 이 결심과 
끈기는 그가 평소에 불안해 하고 있던 부족한 점을 거뜬히 해결한 셈이다.
  이 때 도암 이재가 어사로서 강계를 순시하기에 앞서 먼저 공문을 보내어 
전종영을 미리 대기하게 하였는데 막상 와서 그를 접견해 본 이재는 그 풍채와 
기상과 언변을 보고 그가 비상한 인물임을 알았다.
  전종영은 어사가 준 지필묵으로 그 지방의 문제점을 명쾌하게 지적하고 그 
대책도 조목조목 열거하여 보고서를 작성하여 보였더니 여사 이재가 그만 
감동하고 말았다. 뒤이어 조정으로부텨 숨은 문무 인재를 추천하라는 명이 있자 
어사 이재는 문인에 유생 황순승을 추천하고, 무인에는 서슴없이 전종영을 
추천하였다. 그리하여 전종영은 일약 벽동군수로 발탁되고 계속 승차하였다. 한 
인간의 결심과 끈질긴 노력이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라 할 수 있다.

     대를 이어 학업을 연마하여 훌륭한 선비가 된--윤거형

  윤거형(?__?)의 호는 송파거사다. 만호(종4품 무관직)로서 영변에 살면서 더이상 
높은 벼슬엔 뜻을 두지 않고 오직 글읽기를 좋아하고 행동을 바로 하여 온 마을 
사람들로부터 두터운 신임과 칭송을 받고 있었다.
  당대에 학문과 인품이 높았던 도암 이재가 암행어사로서 그곳을 순회할 적에 
인연이 없어 상면하지 못한 것을 일생의 한으로 여겼다. 윤거형의 아들 윤제세도 
아버지를 닮아 학업을 이었다. 윤제세에게 참봉 벼슬이 내려졌지만 이를 받지 
않고 학문에만 매진하던 중 도암 이재의 칭찬을 받았다. 아버지의 원을 아들이 
풀어 준 셈이다. 윤제세의 호는 취암이며, 아버지와 함께 평안도 일대에서 선비 
중의 선비라는 평을 들었다.

     제비를 시제로 하여 대제학에 뽑힌--권유

  권유(1633__1704)의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퇴보, 호는 하계다. 현종 6년(1665)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대제학 추천이 있을 때 민점(1614__1680)이 권유를 
추천하려고 하였는데 당시의 여론에 이서우(1633__?)도 만만치 않았으므로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민점은 어느 날 여러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제비를 시제로 하여 운을 내고 말했다.
  "오늘 제비에 대한 시로써 여러분들의 시재를 시험하겠으니 속히 짓도록 
하시오."
  다른 선비들이 막 시상에 잠기는데 권유는 벌써 시를 완성하여 좌중을   
압도하였다.

  부리에 진흙을 물고
  두보의 뱃전을 몇 번이나 스친 뒤에
  한나라 궁궐에 들어가
  우물(뛰어난 미인)이 되었느냐

  나도 만약 너처럼
  제비나 되었던들
  모름지기 이 붓을 던지고
  봉후나 찾을텐데

  이 시가 나오자 모두 붓을 놓고 일어섰고 민점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권유를 
일차로 추천하였다. 남인들은 명기(벼슬자리)를 아끼기 때문에 을사년 이후로 
대제학은 오직 권유 한 사람뿐이었는데 서인은 대제학이 수도 없이 많이 나왔다. 
바로 이 점이 서인이 남인을 못 따르는 일단이라 할 수 있다.

     숨차 헐떡이는 소를 보고 일평생 소고기를 먹지 않은--김주신

  김주신(1661__1721)의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하경, 호는 수곡이다. 다섯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 슬하에서 자랐다. 김주신은 아버지가 없는 것을 항상 
한으로 여겨 어머니의 가르침을 따라 남달리 부지런하였다. 밤이 늦도록 글을 
읽는 것을 안쓰럽게 여긴 어머니가 밤늦도록 글 읽는 것을 금하자 김주신은 밤이 
늦은 시간엔 목소리를 낮추어 읽어서 어머니의 귀에 들리지 않도록 하였다.
  언젠가 김주신은 아버지의 비석을 소등에 싣고 재를 넘은 일이 있었는데 , 소가 
숨이 차서 혀를 빼물고 헐떡이는 것을 보고 너무도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이 때 
그는 다음과 같이 한탄하면서 결심하였다.
  '사람이 이토록 잔인할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소의 힘을 다 빼앗고 또 그것도 
부족해서 그 고기마저 먹어 치우다니 말이 되는가!'
  김주신은 그 뒤로 소고기를 먹지 않았다.
  숙종 22년(1969)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자원서별검이 되었는데 딸이 숙종의 
계비(인원왕후)가 되자 돈령부도정을 거쳐 영돈령부사에 이르고 경은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장악원 제조와 호위대장을 겸임했다. 시호는 효간이다.

     착한 끝은 있는가? 늦팔자가 활짝 핀--김우항과 권 참봉

  김우항(1649__1723)의 본관은 김해이고 자는 제중, 호는 갑봉이다. 현종 
10년(1669)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숙종 7년(1681) 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휘릉별검이 되었다. 이 때 함께 봉직한 참봉은 안동 권씨였다. 권 참봉은 나이 
50에 살림은 넉넉했으나 홀아비였다. 김 별검과 권 참봉이 함께 번을 들었는데 
마침 능침의 나무를 도벌하다가 잡혀 온 청년을 심문하였다. 잡혀 온 사람은 
남루한 복장에 20여 세쯤 되는 청년이었다.
  먼저 도끼와 낫, 지게부터 빼앗은 뒤에 매를 치려고 하니 그 청년이 울먹이면서 
말했다.
  "저에겐 70세의 노모와 과년한 누이동생이 있습니다. 날씨는 추운데 식량은 
없고 눈은 쌓여 나무를 팔아 양식을 사려는 욕심으로 잘못하여 능침을 
범했습니다."
  권 참봉은 본시 후덕한 사람이어서 청년의 말을 듣고 나니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어 김우항을 돌아보고 말했다.
  "사정이 딱하니 용서해 주는 것이 어떻겠소?"
  권 참봉의 제의에 김우항도 별로 반대하지 않았다. 권 참봉은 청년에게 오히려 
엽전 10꿰미를 내어 주고 압수한 연장과 지게를 돌려주면서 단단히 타일렀다.
  "이 돈으로 양식을 사서 노모와 누이동생을 잘 봉양하고 다음부터는 능침을 
침범하여서는 안 되네."
  그 청년은 몇 번이나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떠났다. 그런데 보름이 채 안 
되어서 그 청년은 다시 붙들려 왔다. 권 참봉은 화가 많이 났지만 무슨 벌을 
줄지는 내일 결정하리라 생각하고 그날 밤에 김 별검과 의견을 나누었다. 그런데 
김 별검이 엉뚱한 의견을 제시하고 권 참봉에게 강요하였다.
  "동관(동료)께서는 늙지도 젊지도 않은 연세에 벌써 상처를 하셨습니다. 옛말에 
사람이 아내가 없는 것은 대들보 없는 집과 같다고 했습니다. 조금 전에 그 나무 
도둑을 유심히 보았는데 결코 상놈이 아닌 것 같고, 또 그에게 과년한 누이동생이 
있다고 했으니 참봉께서 만약 속현(아내가 죽은 사람이 다시 장가 드는 것)할 
생각이 아주 없지만 않다면 내가 중매를 서리다. 동관의 의향이 어떻습니까?"
  이 말에 권 참봉은 한참 동안 말이 없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맘에 없는 것은 아니나 내 나이 많다고 거절한다면 봉변만 
당하는 것 아니오?"
  "그 문제는 내게 맡겨 두시고 잠이나 자고 내일 아침에 봅시다."
  이튿날 아침이 되자 김 별검은 하인을 보내어 그 청년을 데려와서 마루 위로 
올라오게 한 뒤에 그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재범에겐 용서하는 법이 없다. 그러나 어제 밤이 늦도록 권 참봉과 상의한 
결과 너를 용서하기로 했으니 특별히 놓아준다. 그건 그렇고 듣자 하니 너에겐 
시집 보낼 누이동생이 있다고 했는데 마침 권 참봉께서 상처하여 홀로 지내고 
있으며, 살림 형편도 넉넉하여 두 집이 먹고 살 만할 뿐더러 근력이 아직은 
건강하니 너의 의향이 어떠하냐?"
  청년은 귀가 번쩍 뜨였지만 침착성을 잃지 않고 차분히 대답했다.
  "집에 노모가 계시니 가서 여쭈어 보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의를 달 수 없는 대답이니 도리 없지 않은가? 김 별검은 맞장구를 쳤다.
  "암! 그래야지. 속히 가서 노모의 허락을 얻어 오게나."
  김 별검은 청년에게 엽전 5꿰미를 주어서 보냈다. 청년은 가면서 생각하였다.
  '우리 같은 알거지가 살판나게 생겼는데 들어온 복을 찰 수야 없지. 또 권 
참봉이란 분이 후덕한 군자니 얼마나 잘된 일인가!"
  청년은 생각만 해도 신바람이 났다. 집에 닿기가 무섭게 노모에게 사연을 
이야기하였다. 노모 역시 좋아하기는 아들과 마찬가지였다. 죽기보다 더 싫은 
배고픔을 면하게 되었으니 망설일 리가 없다. 청년은 즉시 재실로 돌아가 김 
별검에게 노모의 승낙을 전달했다 혼인은 재빨리 이루어졌다. 혼인에 따르는 
일체의 비용을 권 참봉이 도맡은 것은 물론이다.
  권 참봉은 재임기간이 만료되자 벼슬에 더 이상 생각이 없었다. 그는  새색시를 
데리고 고향인 안동으로 돌아가서 살았다. 아들 형제를 낳았는데 형제가 다 
글재주가 있어 나이 겨우 17,8세에 향시에 나란히 합격하고 서울의 회시에 
응시하여 형제 모두 합격했다.
  한편 별검 김우항은 그 동안 삼사와 이조참판을 거쳐 경상감사로 부임했다. 김 
감사가 안동지방을 순시하는 길인데 어떤 사람이 쪽지를 넣고 면회를 요청해서 
만나 보니 옛 동관 권 참봉이었다. 김 감사는 옛날 휘릉에 있을 때를 생각하고 
급히 만나 주었다. 두 사람은 반갑게 손을 마주잡고 해묵은 우정을 나누었다. 권 
참봉은 김 감사의 손을 흔들면서 말했다.
  "그 때 공이 아니었던들 이 늙은이는 오늘날까지 홀아비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그 후에 난 아들 형제가 진사시에 합격하고 내일이면 금의 환향하는 
날입니다. 감사께서는 옛정을 생각하여 내일 그 자리에 왕림해 주신다면 우리 
집으로서는 더없는 영광이요 세상에서 기이한 인연이 될 것입니다."
  김 감사는 축하한다는 말을 계속하면서 흔쾌히 허락하였다.
  이튿날 김 감사는 약속을 지켜 많은 관료들을 대동하고 권 참봉의 집으로 가서 
두 사람의 신은(과거에 합격한 사람이 선배관료에게 하는 신고)을 청해 받고 
운집한 손님들과 어울려 온종일 잔치를 즐겼다. 희색이 만면하여 입을 다물 줄 
모르는 주인 권 참봉은 김 감사에게 손가락으로 한 사람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공은 이 사람을 기억할 수 있습니까? 옛날 우리가 죄를 다스리던 바로 그 나무 
도둑이오. 지금은 장가도 들고 아들도 있고 살림도 먹고 살만은 하답니다."
  김 감사가 감영으로 돌아갈 뜻을 비추자 주인은 극력 만류하면서 간청했다.
  "오늘의 이 잔치는 다 공으로 인해서 차려진 잔치이니 제발 하룻밤만 
유숙하면서 옛 우정을 나누어 봅시다."
  주인의 청이 너무도 간곡하였으므로 김 감사는 그 청을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이튿날 아침이 되었다 주안상이 들어와서 술이 한 순배 돌았을 때 권 참봉은 
무슨 말인지 할 듯하다가 말고 할 듯하다가 말고 하므로 궁금한 생각이 든 김 
감사가 물었다.
  "주인장은 분명 내게 하시고 싶은 말이 있지요? 서슴지 말고 어지 한 번 
해보시지요."
  "예, 그러면 제가 이야기를 하지요. 저의 아내는 사실 오래 전부터 김공에게 
결초보은할 은인이라고 늘 말해 왔지요. 뜻밖에도 김공께서 감사가 되어 이런 
누추한 집에 오시게 되었으니 저의 아내로 하여금 직접 존안을 뵐 수 있도록 잠시 
내당(안방)에 들러 주시면 어떻겠소?"
  부득이 그 청을 받아들인 김 감사는 주인의 뒤를 따라 내당으로 들어갔다. 그 
곳에 벌써 주안상이 차려져 기다리고 있었다. 자리에 앉자 권 참봉의 부인이 
나와서 공손히 절을 하였다. 김 감사도 정중히 맞절을 하였다. 뒤이어 곱게 차려 
입은 두 젊은 색시가 나와서 인사를 하였다. 이 집의 며느리들이었다.
  김 감사는 다시 주인에게 인도되어 후원으로 돌아갔다. 후원엔 매우 조용하고 
깨끗한 방이 있는데 머리가 백발인 노파가 손으로 문지방을 잡고 앉아서 무슨 
말인지 같은 말을 자꾸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자세히 들어보니 무슨 
축원을 드리고 있는데 그 축원은 바로 김 감사가 정승이 되도록 해 달라는 
축원이었다.
  김 감사는 놀랍고도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그 사연을 주인 권 참봉이 
설명하였다.
  바로 내 장모요. 이 집에 이사온 뒤로 이곳에 제단을 차려 놓고 지금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축원을 하였는데, 이제는 너무 늙어 제단까지 갈 기력이 없어 
잠자는 시간을 빼놓고는 방안에서 저렇게 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김우항은 그들의 축원대로 몇 년 뒤에 우의정에 올랐다.

     시를 보고 작자의 미래를 점친--남용익

  남용익(1628__1692)의 본관은 의령이고 자는 운경, 호는 호곡이다. 어릴 때부터 
시명을 날렸다. 언젠가 어떤 노장이 누에를 시제로 하여 시를 지어 보라고 하자 
남용익은 즉석에서 다음과 같이 함련(한시의 앞의 연)과 미련(한시의 끝 연)을 
지었다.

  오릴 적엔 검은 입술로
  푸른 잎을 먹더니
  늘그막엔 누런 배로
  푸른 사다리를 오르네

  본래의 몸을 벗고
  나비가 되었으니
  장자의 꿈속에 들어가
  그를 헷갈리게 한 것은 아닌지

  시를 본 노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보통 시재가 아니다. 하지만 장래에 이 아이는 초년에 요직을 거쳐 늘그막엔 
대관이 되겠지만 이 시의 끝구를 보면 말년에 부귀를 보존하지 못할 상이다." 
  남용익의 일생을 보면 이 노장의 시참이 들어맞은 세이다. 그는 21세(1648)에 
대과에 급제한 뒤 삼사의 요직을 두루 거치고1656년 문과 중시에 장원, 대제학을 
거쳐 이조판서에 올랐으나 숙종 15년 기사환국으로 명천 배소에서 죽었다.
  남용익이 정언으로 있을 때 몹시 앓은 적이 있었는데 이 때 꿈속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는데, 배소에서 외롭게 죽은 남용익의 말년 운을 말해 주는 듯하여 
역시 시참을 생각하게 한다.

  변방에 행인의 발길은 드문데
  나그네 사름 얼굴에 가득하네
  쓸쓸한 비는 십리길에 부슬부슬 내리는데
  밤이 되어 귀문관을 건넌다네

     귀양가면 그곳에 술이 있느냐고 물은--오도일

  오도일(1645__1703)의 본관은 해주이고 자는 관지, 호는 서파다. 현종 14년(1673)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예문관 대제학을 하였다. 시문의 
솜씨가 뛰어나다고 하여 사람들로부터 동이  삼학사의 한 사람이라는 평을 
받았으나 술을 지나치게 좋아하였다. 언제가 숙종은 다음과 같은 전교를 내렸다.
  "오도일은 술을 너무 좋아하여 고질병이 되었는데 도 깨닫지 못하니 안타깝다. 
예로부터 전해 오는 계주시(술조심을 깨우치는 시)를 소개한다."

  성군의 은총이 지극하여
  급제의 영광을 받았고
  어머니의 자애가 깊어
  오래오래 수하시네

  임금의 은혜와 어머니의 사랑을
  어느 한쪽도 갚지 못하였는데
  만약 술 때문에 병이 난다면
  뉘우친들 돌이킬 수 있으랴

  계속하여 숙종이 하교하였다. "이 계주시를 늘 읽고 정신을 차린다면 어찌 술에 
실수할 일이 있겠느냐?"
  이러한 전교를 받은 오도일은 깊이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리면서 술을 끊겠다는 
결심을 하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고질이 된 술버릇을
  지금까지 끊지 못하고
  무릎 끊고 전교를 읽으니
  눈물만 흐른다네

  뼈에 맺힌 깊은 은혜
  무엇으로 갚을까
  죽기 전에 오로지
  지은 죄나 반성해야지

  숙종 28년(17020 민언량의 옥사에 연루되어 장성으로 유배 가게 되었다. 귀양 
가던 날도 오도일은 만취가 되어서 자신을 호송하려 온 의금부 나졸들에게 
말했다.
  "장성에 가면 소주가 있느냐?"
  "소주야 어디에 간들 없겠습니까."
  나졸들이 대답하자 오도일이 말했다.
  "그래? 그래! 소주만 있으면 됐다."
  천안역을 지날 때 천안 군수가 술을 가지고 와서 위로하니, 오도일은 술이 
거나하게 취하자 작별의 정으로 시 한 수를 지어 읊었다.

  달랠 길 없었는데
  마침 이곳 천안 군수가
  술병을 갖고 왔네

  나는 술이 좋아
  이날까지 평생을 마셨지만
  오늘 마시는 이 술은
  영원히 못 잊겠네

  오도일은 장성까지 가는 동안 음식은 먹지 않고 오직 술만 먹었다. 정작 
귀양지에 도착한 그는 며칠 못 가서 죽었다.
  시인 유도삼이 다음과 같은 만시를 썼다.

  대사마1)가 가셨으니
  그 시혼은 어디에 노니실까
  멱라수2)로 머리를 돌리니
  맑은 바람이 잇달아 불어오네

  1) 대사마:병조 판서, 즉 병조 판서를 지낸 오도일을 일컬음.
  2) 멱라수:중국 호남성 북쪽에 있는 강. 초나라 삼려대부인 굴원이 혼탁한 
세상을 비관하여 물에 빠져 죽은 곳으로 유명함. 여기서는 오도일을 굴원에 
비유함.

  유도삼이 강원도 관찰사로 있던 어느 날 밤에 낙산사에서 시를 짓고 노는데 
갑자기 절 밑에서 말소리가 들려 왔다.
  "시를 잘한다는 감사의 시솜씨가 가소롭구나!"
  이상하게 여긴 유 감사가 속으로 놀라면서도 억지로 태연한 척하고 이어서 시를 
읊조리자 또 같은 소리가 들려 왔다.
  다시 놀란 유 감사는 즉시 하인을 보내어 찾아보게 하였더니 하인은 돌아 와서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다른 사람은 없고 웬 소금 장수가 돌멩이를 베고 누워 잡니다."
  유 감사는 즉시 소금 장수를 데려오게 한 뒤에 물었다.
  "너는 어찌하여 감히 나를 비웃느냐?"
  "예 사또께서 좋은 시를 짓지 못하시고 끙끙대기만 하기기에 웃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무엇이 어째? 좋다! 그러면 네가 한번 좋은 시를 지어 보아라. 만약 당장 좋은 
시를 짓지 못한다면 관장을 비웃은 죄로 곤장을 면치 못할 것이다."
  유 감사의 말 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소금 장수는 한 구절을 지었다.

  큰바다는 동남쪽으로
  하늘에 떠 있고
  일만 이천 기이한 봉우리는
  대지 위에 꽂혔네

  그의 시솜씨에 깜짝 놀란 유 감사는 그의 손을 덥석 잡으면서 말했다.
  "과연 기재로다. 성명이 무엇이오?"
  "천인의 성명을 알릴 필요야 없지요. 제 성은 오가입니다."
  오도일의 혼이 소금 장수로 나타났음을 은근히 나타내고 있다.

     덕천에 귀양 가서 관아의 뜰을 청소한--이관명

  이관명(1661__1733)의 본관은 전주이고 자는 자빈, 호는 병산이다. 숙종 13년 
(1687)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세마에 보임되고 외직으로 함열군수가 되었다. 
숙종24년(1698)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관명이 옥당의 교리로 당직하고 있을 적에 그의 아우 한포재 이건명이 
강화유수에 발탁되어 사은(임금의 은혜에 사례함)한 뒤에 금관자를 달고 옥당에 
들렀을 때 동료들이 그의 형을 놀리며 말하였다.
  "아우는 재상이 되었는데 형은 아직 옥당에서 당직을 하고 있다니, 어찌하여 
태어나기는 먼저 태어났는데 벼슬은 뒤진단 말인가?"
  이관명이 태연하게 말하였다.
  "우리들이 다른 욕심 없이 오직 벼슬살이만 한다면 나의 교리 벼슬이 어찌 
유수만 못하겠는가. 단지 죽은 뒤에 명정이나 자손들의 영화를 뽐내는 데 쓰일 
뿐이지!"
  경종 2년(1722)에 아우 이건명이 극형을 받자, 그도 연좌되어 덕천에 유배되어 
종의 신분으로 패랭이를 쓰고 베옷을 입고 날마다 관아의 넓은 뜰을 깨끗이 
비질을 하고 물러나와서는 종일토록 관문을 열심히 지키고 있었다. 군수가 
그만두기를 청하였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의 직분을 다하였다.
  영조 1년(1725)에 방면되어 돌아와서 정승에 임명되어 좌의정에 올라 기로소에 
들어가고 대제학을 지냈다. 시호는 문정이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 있다고 할 만한--윤지술

  윤지술(1697__1721)의 본관은 칠원이고 자는 노팽, 호는 북정이다. 진사가 되어 
성균관의 장의로 경종 1년(1721)에 상소를 올려, 대행왕(승하하여 묘호가 정해지기 
전의 임금, 여기서는 숙종을 일컬음)의 묘지문을 지은 이이명의 잘못을 탄핵하다 
화를 당하게 되었다. 숙야재 민익수, 정암 민우수가 윤지술이 죽은 후의 뒷일에 
대한 수습에 대해 큰 걱정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숙야재는 그 딸을 윤지술의 아들 윤일복에게 시집 보내고, 정암은 그 
부인을 보내어 윤지술의 부모를 끝까지 봉양하게 하였다. 또 윤일복에게 글을 
가르치려 하였으나 그가 글을 배우려 하지 않으므로 정암은 그를 가르치기 위해서 
멀리 떨어진 지방에 우거하여 그의 집에 가서 가르쳤다. 이와 같이 이 두 사람은 
죽은 사람이 가히 다시 살아 있는 것과 다름없이 하였다.
  이 때 병계 윤봉구가 문화현령이 되었는데, 윤지술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옛날 책["맹자"의 이루 편]에 이르기를, '까닭없이 선비가 죽으면 대부는 
떠나가야 한다' 하였다. 내가 비록 대부는 못될망정 때를 보아 떠나가야 겠다."
  그 후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의사의 피로 죽어서 사람을 감복시킨--임창

  임창(1653__1723)의 본관은 풍천이고 자는 회이, 호는 강개옹이다. 어려서부터 
의리와 절개를 매우 높이 생각하였다. 숙종 15년(1689)에 인현왕후(숙종 계비 
민씨)가 중궁의 자리를 내놓았다는 말을 듣고 비분에 겨워 걸어서 서울로 
올라와서 궐문을 지키며 통곡하니 보는 사람들은 모두 그의 충절을 의롭게 
여겼다.
  숙종 27년(1701)이 되어 계부인 지중추부사 흥망이 소사에서 술자리를 베풀고 
조카 임창과 화합하였는데, 술을 마시면서 임창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는 눈물을 
흘렸다.
  "오늘의 이별이 어찌 천고의 영결이 되지 않을 줄 알겠느냐."
  임창이 용감히 나아가서 자신을 돌보지 않고 소를 올려 민씨의 죽음을 다시 
토의하자는 의논을 개진하니 교리 이탄이 괴이한 소라 일컫고 처벌을 주청하여 
남쪽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경종 2년(1722)에 심단이 판의금부사로서 임금을 대면하고 곧바로 그를 
처형하였으니 그의 죄가 죽어 마땅한 것이 아니므로 지사가 한을 품은 것이 
세월이 갈수록 더욱 깊어졌다. 당시 어떤 고사의 가죽주머니에 피가 물든 흔적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묻자, 그 고사가 대답하였다.
  "이것은 의사 임창의 피다."
  그가 사람을 감복시킴이 이와 같았다. 촉 땅의 사람이 진나라 충신 장홍의 피를 
간직한 것과, 당나라 충신 안노공(이름은 진경이 우혁의 피를 혓바닥으로 핥은 
것들이 모두 고심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다.
  윤지술, 이의연과 함께 신임사화의 삼포의로 불린다.

     황룡이 버드나무에 걸려 있는 꿈을 꾸고 장원 급제한--이만성

  이만성(1636__1708)의 본관은 우봉이고 자는 사추, 호는 귀락당이다. 숙종 
8년(1682)에 진사가 되고 22년에 문과에 장원하였다.
  그의 과거시험성적을 매길 때의 일이다. 대제학 최석정(소론)이 시관 이세재를 시켜 
대독하게 할 적에 그 글귀에 비점(시문이 잘된 곳에 찍는 둥근 점)을 하고 이의가 
있을까 염려하여 말아서 무릎 앞에 두니, 김진규(노론) 등 여러 사람이 그를 의심하여 
나아가서 보기를 청하고 문제를 삼으려 하다가 그 글이 아름답기 때문에 실행하지 
않았다. 시험 답안지의 이름을 열어보게 되어서는 곧 기뻐하며 말하였다.
  "사람을 지나치게 의심하여서는 안 된다. 참다운 인재를 잃을 뻔하였다."
  초방(급제자 명단을 기초한 것)이 새벽에 나붙었는데 이만성이 2등이었다. 
이만성이 믿지 않으면서 말하였다.
  "과거시험을 응시하지 않았다면 그만이려니와 응시한 이상 반드시 장원일 
것이다."
  무릇 이만성의 꿈에 황룡이 문앞 버드나무에 걸려 있었는데, 손안에 있는 푸른 
매를 놓자 매가 멀리 위에 올라가 그를 쪼으니 피가 흘러 자기 옷에 
가득하였으므로 매우 자신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정방이 이르자 과연 장원이 
되었다.
  천성이 강직하고 엄숙하여 그의 조카 도암(이름은 재임)을 엄격하게 가르치고 
조그마한 잘못이라도 용납하지 않았다. 하루는 도암의 어머니 민 부인이 그에게 
떡을 사서 먹이니. 이만성은 이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겨 마침내 가르치는 것을 
그만두었다. 민 부인이 그 까닭을 물으니, 이만성은 말하였다.
  "어린아이에게 자정이 깊다고 하여 떡을 사서 먹이면 아이의 습관이 어떻게 
되겠으며, 앞으로 어떻게 사람다운 사람이 되겠습니까? 가르쳐도 쓸데없을 
것이므로 가르치지 않겠습니다."
  민 부인이 그만 사과하고 매우 부끄럽게 여겼다.

    과객의 풍자시를 보고 술자리를 거둔--김창집

  김창집(1648__1722)의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여성, 호는 몽와이다. 현종 14년 
(1673)에 진사가 되고 숙종 6년91680)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강화유수로 있을 때의 일이다. 문루를 중수하고 낙성연을 베풀 적에 그의 아우 
삼연 김창흡이 좌중에 있으면서 시를 읊으려 하는데, 갑자기 누 아래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리므로 그 이유를 물으니, 한 유생이 누에 올라와서 
참여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김창집이 그 유생에게 술자리로 올라오게 하니, 그의 
옷과 갓이 때가 묻고 해어졌으며 행색이 걸인과 같았다. 김창흡이 말하였다.
  "그대는 시를 지을 줄 아느냐?"
  이어서 운자를 보이고 술을 대접했더니 그 유생이 말하였다.
  "갈 길이 바쁘오."
  그리고 곧 율시를 읊었다.

  한 줄기 장강은 만석문을 둘렀는데
  하늘이 형승으로 동쪽나라 보호케 했네
  지난날 병자호란 그때의 일 생각하면
  완손이라 변방의 혼 얼마나 애끓게 했더뇨
  오늘날 제공들은 술잔을 들지 마오
  당시의 대장들도 술 마시기 좋아했다오
  서생의 소매 속에 삼척검이 우노니
  북산 향해 옛 원한 씻으려 하도다

  시를 다 읊고 난 유생이 자리를 떠났다. 그러자 김창집이 말하였다.
  "이 시는 나를 깨우치는 것이다."
  곧 술잔치 지리를 거두었다.
  숙종 32년(1706)에 정승에 임명되어 영의정에 이르렀다.
  숙종이 승하하고 3년이 지난 경종 2년(1722) 4월에 성주의 적소에서 사약을 
받았다. 사약을 받아 죽을 때 민진원과 술잔을 주고받으며 옛사람이 절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일을 논하고 웃고 말하는 것이 평소와 같았다. 시 여섯 
수를 지었는데, 그 중의 한 수는 다음과 같다.

  등잔불 깜빡깜빡 몇 경이 지났느냐
  운명에 다다르니 생각이 자연 화평하기 어렵구나
  이웃집 닭 울어대니 밤은 어이 짧은고
  성 모퉁이 노랫소리 먼동이 이미 밝도다
  좋은 소식 잠시 전하는 것 어찌 다시 기뻐하랴
  흉한 소식 잇따라 와도 놀랄 것이 없도다
  저승으로 이번에 떠나 여러 아우 상종하니
  이숭에서 홀로 구차히 사는 것보다 낫도다

  또 읊었다

  임금 사랑 아버지처럼 사랑했으니
  하늘의 해가 이 충심을 알아주리
  선현(조정암을 일컬음)의 이 시구의 말은
  비절하기 예나 지금이나 같도다

  문충공 이이명, 충익공 조태채, 충민공 이건명과 같이 화를 당하였는데, 세상에 
노론 사대신이라 일컫는다.

     관상을 보면 기이하게 들어맞는--김창흡

  김창흡(1653__1722)의 자는 자익이고 호는 삼연이다. 몽와 김창집의 아우다. 
현종, 숙종, 경종의 세 왕조를 섬겼는데 덕업과 명절로 사림의 영수가 
되었다.
  숙종 15년(1689) 기사환국 이후 명산을 두루 유람하면서 장사꾼과도 어울려 
다녔다. 설악산으로 들어가려는 도중에 소낙비를 만났다. 잠시 바위 밑에서 쉬는데 
그곳에는 한 노인이 먼저 와서 앉아 있고 중 한 사람이 자고 있었다. 김창흡은 
시상이 호연히 일어나서 흥얼흥얼 읊조려 마지 않았다. 노인이 말하였다.
  "서생은 무슨 좋은 시구가 있기에 기쁨이 얼굴에 나타나는가?"
  그러자 김창흡이 말하였다.
  "노인이 만일 시를 안다면 내가 그 시구를 말하리다."
  이어서 시를 읊었다.

  선산을 한번 보는 것이 분수에 없음을 알겠거니
  가을비 쓸쓸히 내려 짐짓 마가 되었네

  "이 어찌 아름답지 않소."
  김창흡이 말하니, 노인이 대답하였다.
  "시구가 사뭇 아름답기는 하나, '알다'의 '지'자는 온당하지 못하다."
  이에 김창흡이 말하였다.
  "생각해 봐도 그보다 나은 다른 글자가 없었소."
  노인이 말하였다.
  "시험 삼아 '아니다'의 '비'지로 쓰면 이미 유원하고 뜻도 심후하다."
  그러자 김창흡이 깜짝 놀라 말하였다.
  "당신이 이미 시를 아니 반드시 아름다운 시구가 있을 것이므로 외어줄 수 
있겠소?"
  노인이 말하였다.
  "비가 이미 그쳤고 갈길이 또한 바쁘니 길게 이야기할 수가 없소. 저 중이 시에 
매우 능하니 그와 더불어 담론하도록 하오."
  곧 옷을 떨치고 떠나버렸다.
  김창흡이 자고 있는 중을 불러 일으켜 말하였다.
  "그대는 시에 능하다 하니 듣기를 청하오."
  중이 말하였다.
  "서생이 이처럼 굳이 요구하니, 서생을 위해 한 수 읊겠소."
  중은 다음과 같이 읊고 곧 떠나갔다.

  늙은 중은 바랑을 베고 누워
  금강산 길을 꿈속에 누비는데
  쓸쓸히 뚝뚝 잎지는 소리에
  해지는 가을 하늘에 놀라 깨었네

  김창흡은 그 시에 감탄하면서 외우고 또 외었다.
  삼연이 사람의 상을 보면 이따금 신기하게 그 사람의 신수를 맞히곤 하였다. 
마전군수 정야가 김창흡과 봄을 찾아 풍계의 깊숙한 곳에 이르러 풀을 깔고 
한담을 나누었는데, 이 때 김창흡이 말하였다.
  "우리 형제 중에 나와 내 아우들은 모두 운명이 곤궁하니 말할 거리도 
못되거니와 둘째형(김창협을 일컬음)은 평소 문명을 날렸고, 새로 문과에 급제하여 
앞길이 확 트이니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그 골상이 중요한 일을 
맡을 수 없고 정력이 부족하고 약하여 큰 그릇은 못 된다. 우리 백형(김창집을 
일컬음)은 음덕의 길로 진출하여 세상 사람들이 모두 평범한 인물로 보나 실은 
참으로 대신의 그릇이다. 하는 바의 모든 일이 섬세하고 민첩하여 우리 형제 중에 
제일일 뿐만 아니라 훗날 찾아봐도 형만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후일 내 말을 
마땅히 믿게 될 것이다. 다만, 위세를 부리면 험난한 일을 많이 만나 마침내 
어떻게 될지 모를 뿐이다."
  훗날 그의 말이 그대로 맞았다.
  김창흡의 벼슬은 진선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강이다.

     거짓말을 한 아전을 도와준--조태채

  조태채(1680__1722)의 본관은 양주이고 자는 유량, 호는 이우당이다. 숙종 12년 
(1686)에  문과에 급제하고, 43년(1717)에 우의정까지 이르렀다.
  조태채가 부인 심씨의 상을 당하여 슬픔을 견디지 못하였는데, 한성판윤으로서 
마침 공무가 있어 새벽에 일어나서 한성부의 아전이 와서 청하기를 기다렸으나, 
그림자조차 나타나지 않고 해가 돋을 때까지라도 오지 않았다. 조태채가 크게 
노하여 곧 공청에 나아가서 해당 아전을 잡아들여 장차 곤장을 치려 하자 아전이 
울며 대답하였다.
  "소인이 아주 슬픈 사정이 있으니 한 말씀 아뢰고 죽겠습니다."
  조태채가 노여움을 참고 물었다.
  "네가 할 말이 무엇이냐?"
  아전이 대답하였다.
  "소인이 아내를 잃었는데 집에 어린 자식 셋이 있습니다. 맏자식은 나이 
5세이고, 둘째 자식은 겨우 3세이며, 딸 하나는 태어난 지 이제 막 6개월이 
되었습니다. 소인이 그 어미의 일을 겸하여 양육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새벽에 
일어나려는데, 어린 딸이 어찌나 울어대는지, 이웃집 여자를 청하여 젖을 
먹였습니다. 조금 뒤에 둘째 자식이 또 배고프다고 울부짖어 소인이 돈으로 죽을 
사서 먹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는 사이에 자연 때가 늦었습니다. 소인이 이미 
공적인 일을 알고 또 대감의 위엄을 알고 있는데, 어찌 감히 고의로 죄를 
범하겠습니까?"
  조태채는 그 말을 듣고 슬프게 여겨 눈물을 닦으며 말하였다.
  "네 사정이 나와 흡사하다."
  조태채는 아전을 곧바로 석방하고 쌀과 베를 넉넉히 주어 자식 양육하는 데 
크게 보태 쓰도록 하였다. 그 아전은 상처를 한 적도 없으며 다만 조태채의 
사정을 알고 짐짓 거짓말을 꾸며 죄를 면하고 도움을 얻었던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군자는 속을 수 있는 방법으로 속인다'는 것이다.

  홍동석은 조태채의 하인으로 선혜청의 서리로 있었다. 경종 1__2년(1721__22)에 
소론의 대관이 조태채를 비방하는 계를 내어 짐짓 홍동석을 시켜 쓰게 하였다. 
홍동석이 붓을 던지며 말하였다.
  "자식이 그 아버지의 죄를 손수 쓰지 못하는 것과 같이, 하인이 상전에게는 
부자의 의리와 같습니다. 소인은 이 계사를 쓸 수 없습니다."
  모든 대관이 노하여 그를 하옥시키고 매우 혹독한 형벌을 주었으나, 홍동석은 
끝내 쓰지 않았다.
  조태채가 제주로 유배되자 홍동석은 아전의 직을 사퇴하고 따라갔다. 
조태채에게 사사의 명이 내려질 무렵에 조태채의 둘째 아들 회헌 조관빈이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 유배지로부터 30리 거리에 와서 미처 당도하지 못하였는데, 
금부도사가 먼저 와서 약사발을 올리고 조태채에게 사약을 마시라고 재촉하였다. 
홍동석이 옆에서 금부도사에게 청하였다.
  "죄인의 아들이 오래지 않아 당도한다 하니, 시간을 조금만 연기하여 부자가 
마지막 상면하도록 하소서."
  금부도사가 허락하지 않았다. 홍동석이 그만 약사발을 차서 엎어버리니,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서 사색이 되었다. 도사가 부득이하여 '약사발이 
바닷물에 떠내려 갔다.'고 계를 지어 올렸고, 그 사이에 조관빈이 당도하였다.
  의금부에서 약사발을 다시 보내는 데 한 달 남짓 걸렸는데 사약을 받아 죽을 때 
조태채가 조관빈을 돌아보고 말하였다.
  "동석을 너는 동기로 보아야 한다."
  홍동석은 조태채의 상을 따라 올라와서 다시 선혜청의 아전이 되어 대대로 
세습하고 그 자손은 조씨 가문에 출입하며 사이좋게 지냈다.
  조태채가 제주의 적소에 있을 때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등 3대신이 화를 
당하였다는 말을 듣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선조의 세 원로 재상이 원통한 눈물 흘리시니
  한밤중에 슬피 노래하는 한 외로운 신하 있네

  이 시가 도성에 흘러 들어가자 반대파 소론 사람들이 더욱 미워하여 마침내 
사사하기에 이르렀다 한다.
  이른바 노론 사대신의 한 사람이고, 시호는 충익이다.

     '양'자 때문에 화를 당한--이이명

  이이명(1658__1722)의 자는 양숙, 소자는 지인, 호는 소재이다. 민적의 아들로 
지평 민채의 후사로 출계하였다 숙종 6년(1680) 나이 23세 때 문과에 2등으로 
급제하고, 12년(1686)에 중시에 급제하였으며, 30년(1704) 대제학에 추천되고, 
32년(1706)에 정승에 임명되어 영의정에 이르렀다.
  어릴 적에 한번은 옥당에서 숙직하는 아버지를 따라갔다. 식사를 마치자 
아버지는 그에게 달리는 연습을 하게 하되 상번의 방에서 하번의 방 중간 청사에 
이르기까지 수십 보를 달리게 한 뒤에 말하였다.
  "밥이 내려 갔느냐?"
  그리고 곧 글을 읽도록 하여 잠시라도 놀지 못하게 하였다. 이마가 넓게 
트였으며 말소리가 매우 힘찼다.
  숙종 43년(1717) 독대를 할 때 동궁(뒤의 영조)을 보호하기를 아뢰었고, 
46년(1720)에 세제책봉의 고명을 받을 적에 김창집, 조태채, 이건명과 함께 
세제(뒤의 영조)를 세우기를 미리 청하고 빈청에 모여 각각 손바닥 속에 써서 
보였으니 곧 '양(養)'자였다. 이는 곧 영조 잠저 때의 호인 양심헌의 '양'자를 
가리킨 것이다. 마침내 대책을 결정하고 경종에게 아뢰어 세제를 세웠다. 경종 
1년(1771)에 당인(소론)이 무함하는 소를 올려 손바닥에 써서 보인 '양'자는 곧 이이명의 
자인 양숙의 '양'자라 하여 불궤로 탄핵을 받아 남해에 유배되었다가 경종 
2년(1722) 신임사화 때 체포되어 와서 한강에 이르러 화를 당하였다. 영조 
1년(1725)에 복관 되었으며, 시호는 문충이다.

     참형당할 때 휜 기운이 목에서 나와 하늘에 뻗친--이건명

  이건명(1633__1722)의 본관은 전주이고 자는 중강, 호는 한포재다. 민서의 
아들이다. 숙종 10년(1684)에 진사가 되고, 12년(1686)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44년(1718)에 정승에 임명되어 좌의정에 이르렀다.
  경종 1년(1721) 세자를 세울 적에 왕세제(뒤의 영조)를 책립하는 일로 세자책봉 
주청사의 사명을 받들고 연경에 갔다가 임무를 완수하고 경종 2년(1722)에 
환조하여 신임사화 때 홍양에 유배되었다. 얼마 뒤에 사자에 의해 처참되고 
처자식까지 죽음을 당하였다. 그가 죽기 전에 다음과 같은 절필시를 지었다.

  나라에 목숨 바치는 단심 있으니
  죽고 사는 것은 저 하늘에 맡기네
  외로운 신 오늘날의 슬픔은
  선왕을 뵈올 면목이 없는 것일세

  참형당할 적에 목에서 흰 기운이 나와 무지게처럼 하늘에 뻗쳤다.

     백수의 노신으로 죽음을 무릅쓰고 세제책립을 반대한--조태구

  조태구(1660__1723)의 본관은 양주이고, 자는 덕수, 호는 소헌이다. 숙종 9년 
(1683)에 생원이 되고, 12년(1686) 종제 조태채와 문과에 동방급제하고, 46년 
(1720)에 정승에 임명되어 영의정에 이르렀다.
  경종 1년(1721) 이복동생인 연잉군(뒤의 영조)의 세제책봉을 정할 때 조태구는 
앞서의 노론 사대신이 연명으로 차자를 올렸다는 말을 듣고 창황히 입궐하여 
선인문으로부터 청대하니 최석정, 이광좌, 이조, 한배하,  
김연, 이태좌 등이 뒤따라 당도하여 같이 입시하였다. 조태구가 나아가 
아뢰었다.
  "백수의 노신이 살아 있은들 또한 무엇을 하겠습니까? 세제 세우는 명을 
거두어들이지 않으시면 신 등은 죽기 전에는 물러나지 않겠습니다."
  이어서 눈물이 얼굴을 뒤덮었다. 이 때 소론과 노론의 당쟁은 극에 달하였다.

     학질이 떨어질 정도로 위엄이 높던--이광좌

  이광좌(1674__1740)의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상보, 호는 운곡이다. 백사 
이항복의 현손이다. 숙종 24년(1694)에 장원급제하고 대제학을 지냈으며, 경종 
2년(1722)에 정승에 임명되어 영의정에 이르러 나이 많은 이유로 벼슬을 
그만두었다.
  효행이 뛰어나 부모의 병환에 부모의 똥을 맛보고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부모의 입에 넣어드리기도 하였다. 부모의 상을 당하게 되자, 죽으로 연명하고 
여묘살이를 하였다. 송인명이 정려문을 세웠다.
  인품이 장중하고 위망이 있어 조정이나 초야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고 
두려워하여, 소민으로서 학질을 앓는 자의 등에 그의 성명을 써서 붙이면 학질이 
곧바로 나았을 정도라고 한다.

     왕의 총애를 받는 후궁의 욕심을 꺾은--신임

  신임(1622__1678)의 본관은 평산이고 자는 화중, 호는 한죽당이다. 효종 8년 
(1657)에 진사가 되고 숙종 12년(1686)에 문과에 급제하여 연안부사로 나갔다.
  연안부의 남쪽에 큰 못이 있는데 그 밑에 일반 백성의 토지가 3천 평이 되었다. 
당시 어느 후궁이 욕심을 내어 그 땅을 떼어 받으려고 내수사의 사람들이 임금의 
분부라며 와서 협박하였다. 부사가 이를 불가하다고 고집하니 서너 차례나 문서가 
왔다갔다 하였다. 이에 임금도 억지로 강요하지 못하고 말았다.
  경종 2년(1722)에 좌참찬으로 소를 올려 임금과 신하의 의리를 아뢰고 이어서 
동궁(영조)을 보호하기를 청하였으나 이사상이 갖은 방법으로 얽어 무함하여, 
마침내 사형만을 면하고 제주에 위리안치 되었는데, 이 때 그의 나이  68세였다.
  영조 1년(1725)에 가장 먼저 사면하여 석방을 명하니, 3월에 처음 배에 올랐다가 
비바람이 몹시 휘몰아쳐 겨우 5월에 육지에 내렸는데 병이 심하여 남해에서 그만 
세상을 떠났다.
  조정에서 벼슬살이한 지 40년 동안 온집안에 남은 것이라고는 화로와 등잔 등 
몇 가지로 쓸쓸하기 짝이 없었다. 조정의 대소 관리 임면을 관장하는 이조판서의 
자리에만 10년 동안 있었으면서도 청탁하거나 뇌물을 바치는 자들을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여 집안이 물처럼 맑았다. 시호는 충경이다.
  신임은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뛰어났다. 외아들인 판관 신사원이 먼저 세상을 
떠나고 유복녀가 있었는데 시집 보낼 나이가 되었다. 그 과부된 며느리가 매양 
시아버지에게 청하였다.
  "이 딸아이의 신랑감은 아버님께서 관상을 잘 보신 후 가려 주소서."
  신임이 말하였다.
  "수 80세에 부부가 해로하고 벼슬자리는 상신에 이르며 아들을 많이 두면 
다행이겠습니다."
  신임이 웃으며 말하였다.
  "세상에 어찌 그처럼 겸비한 사람이 있겠느냐? 네 소원대로는 필시 얻기 어려울 
것이다."
  그 뒤로부터 신임은 출입할 때마다 반듯 합당한 신랑감을 물었다.
  하루는 초헌을 타고 한 곳을 지나가는데, 아이들이 장난하며 노는 속에 한 
아이가 눈에 띄었다. 그 아이는 쑥대처럼 흐트러진 머리에 쑥 튀어나온 턱의 
생김으로 뛰어 돌아다니고 있었다. 신임이 초헌을 멈추고 자세히 보니, 의복은 
남루하나 골격이 범상하지 않았다. 그 아이를 물러 성명을 물으니, 모의 
아들이라고 대답하였다. 곧바로 그 아이의 집에 가서 보니 삼간 초가에 겨우 
비바람을 가릴 정도였으며, 혼자 사는 부인이 있을 뿐이었다. 신임이 여종을 불러 
전갈하였다.
  "나는 아무 동에 사는 신 판서이다. 손녀가 있어 바야흐로 혼처를 구하던 
중이었는데 댁의 도령과 정혼하고 간다."
  그리고 돌아와서 그 며느리에게 일렀다.
  "오늘에서야 정혼하였다."
  며느리가 어느 집이냐고 묻자, 신임은 말하였다.
  "뒤에 알게 될 것이다."
  폐백을 받던 전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정혼한 집을 말하니, 며느리가 급히 늙은 
여종을 보내어 그 가세 및 신랑감을 살펴보게 하였는데, 여종이 돌아와서 
보고하였다.
  "가세는 아무 것도 없는 가난뱅이고 신랑감의 얼굴을 아주 추합니다."
  며느리는 그 말을 듣고 상혼 낙백할 정도로 실망하였으나 이미 어찌할 수 
없었다. 혼인날이 되어 그 신랑을 보니 과연 여종의 말과 같으므로 매우 
못마땅하였다. 사흘이 지난 뒤에 신랑을 그 집에 보냈는데 저녁 때 다시 왔다. 
신임이 물었다.
  "너는 무엇 때문에 다시 왔느냐?"
  신랑이 대답하였다.
  "집에 돌아가니 저녁밥이 준비되자 않았고 또 돌아오는 하인과 말이 있으므로 
도로 왔습니다."
  신임이 웃으며 그를 머물러 있게 하였더니 집에 돌아가려 하지 않고 매일 
안방에서 자는 것이었다. 하루는 신임이 말하였다.
  "남자는 사랑방에 거처하고 안일을 말하지 않는 법인데, 날마다 안방에서 
잠자는 것은 매우 불가하다. 오늘밤부터 나와 같이 자는 것이 좋겠다."
  신랑이 대답하였다.
  "삼가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밤이 되어 신임의 옆에 자는데 신임이 잠들려고 눈을 감으면 신랑이 손으로 
신임의 가슴을 쳤다. 신임이 놀라 말하였다.
  "이게 무슨 짓이냐?"
  신랑은 말하였다.
  "잠버릇이 좋지 못하므로 용서하여 주십시오."
  눈을 감으려면 또 이와 같이 하였다. 신임이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곧 
말하였다.
  "너는 안방에 가서 자는 것이 좋겠다. 나는 같이 잘 수가 없구나."
  신랑이 곧 침구를 말아서 안방으로 들어가니, 그 때 잔치에 온 신임의 일가 
부녀자들이 신부의 방에 모여 있다가 놀라 일어나서 피하니 신랑은 큰소리로 
말하였다.
  "다른 분들은 급히 나가고 색시만 남는 것이 좋겠소."
  이 때문에 처가의 위아래 사람들이 모두 싫어하고 괴롭게 여겼다.
  신임이 황해 감사로 부임할 적에 신랑도 따라갔다. 황해도의 먹을 조정에 
진상할 때 신임이 신랑을 불러 물었다.
  "네가 먹을 쓰려느냐?"
  신랑은 대답하였다.
  "좋습니다."
  신임이 가리켜 보이며 말하였다.
  "네 마음대로 골라 가져 가거라."
  신랑은 큰 먹 5백 동을 가져다가 해당 창고에 별도로 놓아두니, 비장이 앞에 
나와 고하였다.
  "만일 이와 같이 하면 진상품이 모자랄까 염려됩니다."
  신임은 말하였다.
  "급히 다시 더 만들도록 하라."
  신랑이 책실로 돌아와서 친지 및 하인들에게 모두 나누어 보내고 나니 하나도 
남는 바가 없었다. 이 신랑은 다름 아닌 유척기이며, 호는 지수재이다. 수가 
80세에 이르고 부부가 해로하고 벼슬이 영상에 이르렀으며 아들 넷을 두었으니, 
과연 그 자부의 소원처럼 되었다.
  유척기가 뒤에 황해 감사가 되어 사위 윤랑을 데리고 갔는데, 또한 먹을 진상할 
때를 당하여 윤랑을 불러 그에게 마음대로 골라 가게 하였더니, 윤랑은 
대절, 중절 합하여 2동을 골라서 별도로 보관해 두었다. 유척기가 말하였다.
  "어찌하여 더 골라 갖지 않느냐?"
  윤랑이 말하였다.
  "모든 물건은 한량이 있는 것인데 제가 만일 더 가져가면 아마도 국고에 해가 
있을 듯합니다."
  유척기는 웃으며 말하였다.
  "사람의 의량도 대소가 매한가지다. 너의 그릇됨이 또한 정승에 이를 수 
있겠다."
  윤랑이 과연 정승이 되었으니, 바로 방원 윤시동 우상이다.

     목호룡의 기를 꺾은 비파의 명인--김성기

  김성기(?__?)는 처음에 상방(궁중에서 쓰는 물품을 만들던 곳)의 궁인이었는데, 
얼마 뒤에 활 만드는 일을 그만두고 거문고를 배워 거문고를 잘 타기로 이름났고, 
또 퉁소와 비파에 능하여 스스로 매우 높은 단계의 음률까지 새로운 소리를 
만들어 내었다. 교방(장악원의 아악과 속악을 맡아보던 곳)의 자제들이 가서 그 
악보를 배워 이름을 드날린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모두 김성기를 능가하지 
못하였다.
  이에 김성기는 이미 그 뛰어난 재능을  자부하고 아내와 자식의 생활을 위해 
축재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사람들이 재물로 교제하는 자가 있으면 이를 
구차하게 여겼으니 가세는 날로 더욱 기울어졌다.
  서호 위에 작은 배 하나를 사서 손수 낚싯대 하나를 들고 오가며 고기를 낚고 
드디어 자호를 조은이라 하였다. 강물은 조용하고 달빛이 밝을 때를 만나면 노를 
저어 중류에 가서 퉁소를 끌어 서너 차례 부는데 소리가 매우 비장하여 강 위의 
기러기와 따오기도 날며 슬피 울고, 갈대 사이로 오가던 배에 탄 사람들도 모두 
일어서서 떠날 줄을 몰랐다.
  이 때 목호룡이 고변을 올려 이미 노론 사대신을 죽이고 점차 동궁(뒤의 
영조)까지 흔들어 놓으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도리어 그 
공훈으로 동성군에 봉해졌다 하여 공경으로부터 이하 사람들이 감히 그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그 무리를 이끌고 술을 마시고 풍악을 울리는데 
준마를 갖추고 하인들을 시켜 김성기를 청하며 말하였다.
  "오늘 술자리에 그대가 아니면 즐거움을 누릴 수 없으니 그대는 조금 나를 
돌보아 주게."
  김성기가 병이 들었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가지 않자, 심부름하는 자들이 와서 
굳이 청하였으되 김성기가 굳이 가지 않으니, 목호룡이 매우 부끄럽게 여겨 그 
수하들을 시켜 위협하였다.
  "오지 않으면 재가 장차 너를 크게 괴롭힐 것이다."
  김성기가 바야흐로 손들과 비파를 타다가 수염을 뽐내고 비파를 심부름 온 
사람의 앞에 던지며 말하였다.
  "나를 위하여 호룡에게 말하라. 내 나이 70이다. 어찌 너(목호룡)를 두려워하랴. 
너는 고변을 잘하니 가서 나를 고하라. 나는 한번 죽는 이외에 무슨 죄를 가하랴."
  목효룡이 그 말을 듣고 기운을 잃어 그로 인해 잔치를 파하였다.
  그 뒤부터 김성기가 도성에 들어가지 않으니 놀기를 좋아하여 곧 술을 싣고 강 
위에 가서 퉁소를 즐겼다.

    몹시 어둔하여 서당의 스승조차 포기하려 했던--윤봉구

  윤봉구(1681__1767)의 본관은 파평이고 자는 서응, 호는 병계 또는 구암이다.
  아버지 명운은 벼슬이 사재감청점에 이르렀다. 두번 상처하고 세번째 마음씨 고운 
완산 이씨에게 장가 들었다. 어느 날 이씨의 꿈에, 한 여자가 사당으로부터 와서 
말하였다.
  "나는 곧 가옹(집주인, 남편)의 전실이다. 전번의 계실(두번째 들어온 아내)이 내 
아이를 매우 박하게 대우하고 조상을 받드는 데 성의가 없으므로 내가 그를 
죽였다. 그러나 그대는 아름다운 덕이 저승에까지 미쳐 감동을 주어 반드시 귀한 
자식 두 사람을 낳을 것이니 잘 가르치도록 하라."
  그 뒤에 과연 아들 둘을 낳았다. 맏이는 봉구인데, 유일(학문과 덕망이 높으면서 
숨어 있는 사람)로 벼슬은 판서에 이르고 시호는 문헌이며, 둘째는 봉오인데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에 이르렀다.
  윤봉구가 어려서 서당에 입학하였는데 말이 둔하여 구두를 잘 떼지 못하니, 
서당의 스승이 떠나가려 하였다. 이에 윤봉구가 그만 눈물을 흘리며 잠을 자지 
않으니, 스승이 그 뜻에 감동하여 다시 가르치고 또 가르쳤다. 윤봉구 또한 열심히 
노력하여 마침내는 학업에 성공하게 되었다. 장성하고 나서 수암 권상하의 
문하에서 계속 공부를 하여 학문 또한 일가를 이루었다.

    꿈에 하늘로부터 난초화분을 받고 출세한--이재

  이재(1680__1746)의 본관은 우봉이고 자는 희경, 호는 도암 또는 한천이다.
  숙종 28년(1702)에 문과에 급제하고, 33년(1707)에 중시에 급제하여 대제학, 
이조판서를 지내고 시호는 문정이다.
  이재가 지은 "삼관기"에 이렇게 씌어 있다.
  "내가 알성시에 급제하여 급제자의 이름을 부르던 날 어전에 이르니 한 노인이 
먼저 와서 옆에 있었다. 괴이하게 여겨 물었더니 그는 바로 임방 공이었다. 대개 
태어나던 해에 임공은 41세가 된 사람으로 나와 동방급제가 되었으니, 어찌 
희귀한 일이 아니겠는가.
  뒤에 들은 이야기이다. 임방이 숙종 6년(1680)에 장차 정시에 응시하려 할 적에 
그날 밤 꿈에, 하늘로부터 난초 화문 두 개가 내려와서 하나는 어떤 사람이 그의 
집에 와서 전하고, 화분 하나는 이미 아현이 감사댁에 전해 주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 때 선인(이재의 아버지, 곧 이만창임)이 문장의 명성이 매우 
성대하여 사람들이 멀지 않아 급제할 것이라 여겼으므로 임방의 생각으로는 혹 
이만창과 동방급제할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하늘이 그해 새로 태어난 
아이(이재)를 지루하게 기다려 23년 뒤에 동방급제하게 할 줄이야 누가 
생각하였는가. 과거시험 제목도 또 의란조였으니 그 또한 기이 하도다."
  이 때 서덕수의 집이 혹독한 화를 입어 문호가 탕패하고 아이들과 과부들이 
외지를 떠돌아다녔다. 이 때 화의 기색이 하늘에까지 덮어 이글거리고 사람과 
물자의 모든 내왕이 끊여져 살아 있는 사람도 굶어 죽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홀연히 밥과 국 등 먹을 것을 사지고 와서 문밖께 두고 고하지도 않고 가는 자가 
있으므로 그 집에서 두려워서 감히 나가서 응하지 못하다가 오랜 뒤에 가져다가 
먹었는데, 이와 같이 한 것이 여러 차례여서 그 덕택에 겨우 연명하게 되었다. 
뒤에 그 음식을 가지고 온 자의 뒤를 밟으니 바로 도암의 행적이었다.

    숙질이 변란에 항거하여 나라를 위해 몸바친--이봉상

  이봉상(1676__1754)의 자는 숙의이다. 충무공 이순신의 5세손으로서 큰 키에 
수염이 아름답고 목소리가 우렁찼다. 숙종 18년(1692)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총융사 형조참판, 금위대장, 훈련대장을 지냈다.
  영조 3년(1727) 김일경의 당이 뜻을 얻어 집권하데 되자, 충청병사로 내쫓기게 
되었다. 역적 필명 등이 그 당이 집권 등과 몰래 결탁하여 안팎으로 내통하여 
불궤한 일을 도모하니, 중외(서울과 외방)의 인심이 들끓고 있어서 염려스러움과 
두려움이 매우 컸다. 이러한 위구스러움을 걱정하면서 임금에게 하직인사를 
드리고 떠나왔다.
  무신년 곧 영조 4년(1728) 3월 15일에 이인좌 등이 변란을 일으켜 송장을 
가장하고 병기를 상거 속에 몰래 숨겨 두어 어둠을 이용하여 충주성에 들어왔다. 
밤 4고에 하늘에서는 큰 바람이 불고 눈이 내렸다. 이들이 크게 고함을 지르며 
병영에 다가오니, 병영의 비장 양덕부가 적의 유혹을 받고 성문을 열어 끌어들여 
곧바로 이봉상의 침소에 들어왔다. 이봉상이 창졸에 칼을 뽑아 들고 나가서 그들과 
서로 맞부딪쳐 싸우다가 손에 큰 상처를 입었으나 더욱 분발하였다. 적에게 
포박당하게 되어서는 적이 횃불로 그 입을 지지고 목에 칼을 대며 말하였다.
  "경성이 이미 함락되었다. 만일 나를 따르면 부귀를 함께 누릴 것이다."
  이봉상이 꾸짖어 말하였다.
  "우리집은 대대로 충의를 지켜왔는데, 어찌 너희 역적들의 반란에 따르겠느냐."
  적을 계속 꾸짖다가 죽었다.
  이봉상의 계부 홍무도 병영 안에 있다가 적에게 잡히게 되자 적이 위협하여 끓어 
앉게 하니, 홍무가 이에 대항하여 꾸짖었다.
  "내 조카가 이미 나라를 위해 죽었다. 죽었으면 죽었지 어찌 너 같은 자에게  
무릎을 끓겠느냐."
  적이 병부를 찾으니, 홍무는 말하였다.
  "본지 알지 못하고, 알아도 말하지 않으리라."
  적이 이름을 물어도 대답하지 않으니 적이 크게 성내어 몽둥이와 칼로 교대로 
위협하였으나 끝내 굽히지 아니하고 수금된 지 6일 만에 마침내 죽었다.
  이봉상의 어머니 정씨가 이봉상의 죽음에도 울지 않고 말하였다.
  "내 아이가 나라를 위해 죽었으니 그 조상을 욕되게 하지 않았는데 내가 어찌 
한스럽게 여기랴."
  이봉상이 순국한 사실이 나라에 알려지자 좌찬성을 증직하고 충민이란 시호를 
내리고 정려문을 세웠다.
  영장 남연년과 비장 홍림이 아울러 목숨을 잃었다.

    30년 묵은 옥사를 처결하고도 애통해 한--황인검

  황인검(1711__1765)의 본관은 창원이고 자는 경득이다. 영조 23년(1747)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소시에 절에서 글을 읽을 적에 어떤 중이 성의를 다해 심부름하여 시종 
게을리하지 않고, 양식이 떨어지면 쌀을 빌어다가 밥을 지어 올렸다. 황인검이 
뒤에 귀하게 되어서는 전혀 서로 찾아보지 못하였다. 뒤에 경상감사가 되어 
열읍을 순시하다가 노상에서 그를 우연히 만나 매우 반가워서 그와 함께 감영으로 
돌아와 밤마다 같이 자며 매우 후하게 대접을 하였다.
  하루는 황인검이 중에게 일렀다.
  "내가 어려서 너의 신세를 크게 진 바 있으므로 네가 만일 머리를 기르고 
속인으로 돌아오면 살림을 넉넉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출세 길을 터 주겠다."
  중이 이를 고맙게 여기며 말하였다.
  "소승은 본래 속인으로 우연히 산골짜기 속에 새로 만들어 놓은 무덤 앞의 
소복한 미인을 보고 홀연히 음탕한 마음이 생겨 겁탈하다가 그만 죽게 
하였습니다. 그 뒤로부터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전의 죄를 속바치려 맹세하고 
오늘날에 이르렀습니다. 어찌 공의 후한 뜻 때문에 본래 먹은 마음을 다시 바꿀 
수 있겠습니까."
  황인검이 마침 도내 살인사건의 의안을 보니 이 옥사가 있어 거의 30년이 
되어도 원범을 아직 잡지 못하고 있던 터다. 그래서 그 연월일을 물어보니 그대로 
맞았다. 이에 탄식하며 말하였다.
  "내가 너와 정의가 비록 절친하나 공법은 폐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중을 잡아다가 처형하고, 장수를 후히 주고 무덤에 가서 비통해 
하였다.
  조선조 선비들이 공과 사를 분별함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거지와 어사를 분별할 줄 아는 어린 기생에게 감동된--이광덕

  이광덕(1690__1748)의 본관은 전주이고 호는 관양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에 이르고 대제학을 지냈다.
  북관(함경도)에 어사로 나갔을 때의 일이다. 어사의 신분을 숨기고 갖은 고생을 
겪으면서 각 고을 수령의 잘잘못과 각 지방마다 풍속의 순함과 그렇지 못한 점, 
그리고 백성들의 생활형편 등을 두루 탐지하고, 마침내 해질녘에 하인과 함께 
함흥 땅에 이르러 어사의 신분을 드러내려고 하는 터에 성내에 주민들이 분주히 
오가며 부르짖었다.
  "수의사또가 장차 당도하게 되었다."
  이광덕이 의아하게 여겨 말하였다.
  "열읍을 두루 다녔으되 아는 자가 없었는데, 지금 이처럼 소문이 파다하니 필시 
종자가 누설함이 있었을 것이다."
  이에 성밖으로 도로 나와 종자에게 따져 물었으나 그 단서를 발견하지 못하고 
수일이 지난 뒤에 다시 성내에 들어가서 비로소 출도하여 공무를 판결하고, 또 
군의 아전에게 물었다.
  "너희들이 어떻게 내가 온 것을 알았느냐?"
  아전이 말하였다.
  "온 성안이 자자하여 말의 출처를 모르겠습니다."
  이광덕이 그 말의 출처를 따져 묻자, 아전이 집에 물러와서 자세히 탐문 
하였더니, 7살 먹은 어린 기생 가련이 맨 먼저 주창한 것이었다. 아전이 들어가 그 
사유를 고하니 이광덕이 가련을 불러 앞에 가까이 오게 하고 물었다.
  "포대에 싸인 아직 어린아이가 어떻게 내가 오는 것을 알았느냐?"
  가련이 말하였다.
  "소녀의 집이 거리 머리에 있습니다. 전일 창문을 열고 엿보니, 거지 두 사람이 
길가에 나란히 앉았는데, 한 사람은 옷과 신이 해어지기는 하였으나 두 손이 매우 
희고 고왔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생각하기를, '얼고 굶주린 사람이 어떻게 이처럼 
살결이 윤택하고 희단 말인가' 하고 의아하게 여기던 즈음에, 그 사람이 옷을 벗어 
이를 잡아다 곧 도로 입으려 할 때 옆에 있던 한 사람이 옷을 추스려 입히고 예를 
지킴이 매우 공손하여 신분의 존비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 때문에 
수의사또임을 알고 집안 사람에게 이를 알렸는데 , 잠시 사이에 이런 사실이 
전해져서 온 성안이 어지러워졌습니다."
  이광덕이 그의 영특함을 매우 기이하게 여겨 사랑을 지극히 하고 돌아 올 적에 
시 한 수를 지어 주었다. 그 기생도 이광덕의 문장에 감복하여 그 시를 몸에 
간직하고 자기 일신을 의탁하려는 뜻을 두었다. 시집 갈 나이가 되자 한결같이 
절개를 지키며 맹세코 다른 사람에게 몸을 허락하지 않았으나 이광덕은 이미 그를 
잊어 버렸다.
  그 뒤에 이광덕이 어떤 사건으로 벌을 받게 되어 관북지방에 유배되어 함흥에 
우거 하였는데, 그 기생이 와서 뵙고 아침저녁으로 공손히 모시기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이광덕도 그 성의에 깊이 감동하였다. 그러나 자신이 유배생활을 하고 
있는 처지에 여색을 가까이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으므로 그와 같이 생활한 지 
4__5년이 되어도 어지러운 지경에 이른 적이 없었다. 기생도 그의 인격에 
마음으로 감복되어 이광덕이 다른 사람에게 시집 가도록 하였으되 한사코 듣지 
않았다. 가련이 또한 제 갈공명의 출사표를 즐겨 외어서 달이 밝은 밤마다 
이광덕을 위해 한번 외면 맑은 소리가 마치 학의 울음과도 같았다. 이광덕은 그 
출사표 외는 소리를 듣고 눈물을 흘리며 이어서 절구시 한 수를 읊었다.

  함경도의 여자 협객 흰머리 가득한데
  나를 위해 전후출사표 낭랑하게 외누나
  낭송 소리 삼고초려 그 대목에 이르면
  축출된 신 맑은 눈물 마냥 줄줄 흐르네

  하루는 이광덕이 석방되어 돌아올 적에 비로소 정을 통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광덕은 그에게 타일렀다.
  "내가 갈길은 정해진 날짜가 있으니 비록 너와 같이 가고 싶으나 죄를 사면받아 
돌아가는 사람이 뒷수레에 기생을 싣고 가는 것은 하지 못할 바이다. 집에 돌아간 
뒤에 반드시 불러오게 할 것이니, 한스럽게 여기지 말고 조금 기다리라."
  그 기생은 기쁨이 눈썹에 나타나서 개연히 허락하였다.
  이광덕은 돌아온 지 몇 달이 못 되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기생은 부음을 
듣고 통곡한 뒤 자결하여 죽으니, 집안 사람들이 길 옆에 장사 지냈다. 뒤에 영성군 
박문수가 함경도관찰사로 나가 그의 무덤 있는 길을 지나다가 그 얘기를 들어서 
알고 비석을 세우고 다음과 같이 썼다.

  "함관여협 가련지비"

     체통과 예법을 잃은 감사를 탄핵한--김굉

  김굉(?__?)의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대서, 호는 독관재다. 영조 9년(1773)에 
진사가 되고, 11년(1735)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필선에 이르렀다. 천성이 
강직하고 과감히 말하므로 사람들이 철공이라 불렀다.
  송순면이 평안감사로 조정을 하직하고 서문 밖에 나가니, 이때 전별하는 자들이 
있어 술상을 한판 요란하게 벌였다. 김굉이 마침 그 술자리에 있으면서 같이 술을 
마셨다. 술상을 거둔 지 얼마 되지 않아 송순명이 말하였다.
  "우리 고모의 집이 근처에 있으므로 잠시 뵙고 오겠으니, 제공들은 조금 쉬며 
잠시 기다려 주는 것이 좋겠소."
  이어 문을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돌아와서 곧바로 떠나려 하니, 자리에 
있던 손들이 모두 작별하였다. 그러자 김굉은 정색을 하며 말하였다.
  "공은 떠나갈 것 없이 모름지기 여기서 조금 지체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송순명이 그 까닭을 물으니, 김굉은 대답하였다.
  "공은 주인으로서 좌석의 손님들을 돌아보지 않고 사사로이 문을 나섰으니 손과 
주인의 예를 크게 잃었고, 음식을  하인에게 내어주고 곧바로 문밖으로 나가려 
하니 하인이 어느 겨를에 나머지 음식을 먹을 수 있겠소. 체통과 예법을 크게 
읽소 아랫사람의 사정에 통하지 못한 것이니, 어찌 방백의 책임을 받아 열읍의 
수령을 통솔하겠소. 내가 바야흐로 돌아가서 탄핵하겠소."
  이어서 일어나 나가니 송순명은 농담으로 여기고 길을 떠났다. 김굉이 소를 
올려 그를 탄핵하였다.
  "신니 신임 평안감사의 사석에서 한두 가지의 일을 목도한 바 있는데, 그는 
체통과 예법을 크게 잃었고 아랫사람의 사정에 통하지 못하였으므로 방백의 
소임에 둘 수 없으니 고쳐 임명하소서."
  주상이 그대로 시행하도록 비답을 내렸다. 송순명은 겨우 고양에 이르러서 
체직을 당하였다.  조선왕조 시대에 관직에 대한 올바른 경계가 이와 같았다.

     대나무 찍은 뾰족한 끝을 분별하여 잃은 돈을 찾아준--고유

  고유(1722__1779)의 본관은 개성이고 자는 순지, 호는 추담이다. 추담이 어렸을 
때, 나무하는 아이가 땔나무를 하여 힘에 부쳐 젊어지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에게 
물을 띄워놓고 물 아래에 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가져가도록 할 만큼 영특하였다.
  영조 17년(1741)에 생원이 되고, 19년(1743)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가 되었다.
  영조 19년(1743)에 창녕 현감이 되었는데, 이 때 한 상인이 여점에서 자다가 
그가 가지고 있던 조그마한 금덩이를 잃고 뒤를  추적하니 도둑이 대나무 
울타리를 찍고 나갔다. 상인이 그런 사실을 고유에게 고하니, 고유는 말하였다.
  "무릇 대나무를 찍는 자가 밖에서 찍었으면 그 뾰족한 끝이 밖에 있고, 안에서 
찍었으면 그 뾰족한 끝이 안에 있는 것이다."
  그를 살펴보게 하였더니, 대나무의 뾰족한 끝이 과연 안에 있었다. 여점 주인을 
잡아다가 한 차례 심문하여 승복받고 급을 상인에게 돌려주었다. 정조 3년(1779)에 
안주의 임소에서 죽었다.
  고유의 장인 김광제도 영조 19년 (1743)에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사위 고유와 
동방급제하였다.

     담을 뛰어넘게 하여 폐세제 전교를 거두게 한--송인명

  송인명(1689__1746)의 본관은 여산이고 자는 성빈, 호는 장밀헌이다. 숙종 39년 
(1713)에 생원이 되고, 45년(1719)에 문과에 급제하고 영조 11년(1735)에 정승에 
임명되어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충헌이다.
  소시에 집이 가난하여 비록 배를 채우지 못하였으나 태연하였다. 집이 양주에 
있었고, 부모의 산소는 장단에 있었다. 하루는 묘지기 종이 와서 다급하게 
고하였다.
  "아무 댁에서 바야흐로 선친의 묘소 섬돌 아래에 투장(몰래 남의 산소 가까이 
장사 지내는 것)하려 하는데 명일 묘시에 하관하게 되었답니다."
  이른바 아무 댁은 당시 권세 있는 재상이었다.
  송인명은 그 부인에게 말하였다.
  "한 말 밥을 오늘 저녁에 마련할 수 있겠소?"
  부인이, '좋습니다' 하고 곧 밥을 지어 올리자 송인명은 두 손으로 소금을 발라 
뭉쳐서 입에 넣으니 조금 뒤에 한 말의 밥이 금새 다 없어졌다. 이에 부인이 
비로소 송인명의 배가 큰 것을 알았으니, 대개 예전에는 가난하여 배고픔을 
참았던 것이다. 식사를 끝내고는 곧바로 걸음을 재촉하여 도보로 도성에 들어가서 
밤중이 되어 그 재종형인 판서 성명을 찾아가서 그 연유를 대강 말하니 성명이 
다음과 같이 마지 못해 말하였다.
  "여기에서 장단까지는 백여 리고 또 그 집안의 투장이 명일  아침에 있으니, 
비단 권세도 미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어찌 그 시간에 급히 당도할 수 
있겠는가?"
  이에 송인명이 대답하였다.
  "저에게 나름대로 계책이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 파하여(통금해제) 성문이 열리기를 기다려 곧 나가서 묘소 아래에 
이르니, 먼동이 이미 밝았다. 그 재상이 막 하관하려 하고 장사에 모인 사람이 수백 
명이었다. 송인명이 곧바로 상인의 앞에 당도하여 큰 소리로 꾸짖었다.
  "무수한 청산에 어느 곳인들 장사 지낼 땅이 없어 피혐의 땅에 장사 지내려 
한단 말인가?"
  그러자 그 상가의 측근 사람들이 풍색이 좋지 못한 것을 보고 송인명을 
포박하려 하였다. 송인명이 두 손으로 관을 들고 말하였다.
  "만일 손대는 자가 있으면 곧 이 관을 때려 부숴버릴 것이다."
  이어서 관을 들고 천천히 논으로 걸어 들어가니, 여러 사람들이 깜짝 놀라 감히 
손을 대지 못하였다. 이 때 큰 비가 동이로 쏟아 붓듯이 내려 평지의 수심이 한 
자 남짓하였다. 상인이 여러 종자들과 '아이고, 아이고' 호곡하며 진흙 수렁길로 
관을 따라왔다. 송인명이 논 가운데 높고 조금 마른 듯한 곳에 이르러 그 옆의 
마른나무를 뽑아 꺾어서 굄목을 만들고 그 위에 관을 놓아두고 말하였다.
  "여기서 장사 지낼 만한 곳이오."
  그리고 서서히 걸어서 돌아오니 그 재상이 그의 신력을 두려워하여 다른 곳에 
옮겨 장사 지냈다.

  신축, 임인년 정변에 조정에서 노론 사대신, 곧 
김창집, 이이명^5,23조태채, 이건명을 유배시키고, 당시 당권파(소론)에서 
마음대로 방자한 짓을 하여 이미 세제(영조)가 왕에게 문안하는 길을 끊어버리니 
화가 장차 헤아릴 수 없었고, 인원왕후(숙종 계비 김씨)는 온 조정이 누란의 위기에 
처한 것을 안타깝게 여겨 조정에 애통전지를 내렸는데, 소론측에서 비밀로 하고 
반포하지 않으니 인원왕후도 어찌할 수 없었다.
  어느 날 세제가 핍박을 견디다 못하여 세제의 자리를 사양하고 물러나려 하니, 
소론 일당이 거짓으로 간하여 말렸으나 역모는 더욱 급하게 움직였다.
  하루는 김일경 등 소론 일당이 모두 주상의 앞에 이르러 바야흐로 '세제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는다.'는 글을 초하여 다음날 반포하려고 하였는데, 주상이 
그만 정신이 혼수상태에 빠져 잠이 든 사이 이를 몰랐던 것이다. 이 때 환관 
장세상이 그것을 보고 급히 달려가서 고하니, 세제가 그 말을 듣고는 주상에게 
나아가 그 정상을 이루 다 아뢸 겨를이 없이 화가 매우 급박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폐세제가 되면 죽게 되면 죽게 될 것이 뻔하므로 그만 독약 두 그릇을 
만들어 손수 가지고 빈궁의 침실로 들어가서 서빈에게 울며 말하였다.
  "지금 화가 목전에 임박하였소. 천안(임금)을 한번 뵙고 위급함을 호소하려 
하였으나 나아가 뵐 길이 없으니 명일에 화가 반드시 일어날 것이오. 그 욕을 
참고 저들의 손에 죽느니보다는 이 약을 마시고 스스로 죽는 것이 낫지 않겠소."
  이에 빈이 울며 대답하였다.
  "주상이 어질고 우애로우시나 병환에 계신 까닭으로 역적 무리들이 이와 같이 
일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지금 만일 이 약을 마시고 함께 죽는다면 이 무리들이 
장차 죽은 뒤에 또 무슨 악명으로 가할지 모르오니, 이러한 사정을 자전(숙종 
계비 김씨)께 다 아뢰느니만 못합니다. 만일 자전께서 어여삐 여겨서 구해주시면 
다행이고, 만일 힘이 미치지 못하면 그 때 죽어도 늦지 않습니다."
  세제가 그 말을 따라 앉아서 새벽이 되기를 기다려 드디어 빈과 샛길로 
나서려는 때 송인명이 설서로 숙직을 하다가 그 사실을 알고 나아가 아뢰었다.
  "아침저녁 문안하는 길에 복병이 있다 하는, 동궁의 작은 담을 넘으소서, 작은 
담을 넘으면 바로 자전께서 계시는 곳입니다.
  영조가 그 말을 따라 빈과 청휘문에 이르니, 문이 과연 닫혀 있었다. 드디어 
담을 뛰어넘으려 하였으나 담이 높아 자신의 힘으로는 넘을 수가 없었다. 
송인명은 팔힘이 뛰어나서 급히 두 손으로 세제와 빈을 떠받들자 비로소 담을 
넘어설 수 있었다.  세제가 담에 기대어 물었다.
  "네가 어떻게 담을 넘으면 자전이 계심을 알겠느냐?"
  송인명이 황공하게 아뢰었다.
  "신의 아비가 호조낭관으로 궁궐을 수리하였는데 신이 어릴 때 아비를 따라 
이곳에 왔으므로 궁정을 자세히 압니다."
  세상에 전하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송인명이 급제하기 전 꿈에, 어떤 사람이 붉은 옷을 가지고 다섯 가지 채색 
무지개를 타고 하늘을 오르려다가 반공에 이르러 앞으로 떨어지려 하기에 급히 
손으로 받들어 올리니 이에 훌쩍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꿈을 깨고 나서 
이상히 여겼는데 이 때 와서야 그 꿈의 뜻을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이 때 자전이 새벽에 일어나서 머리를 빗다가 세제와 빈이 오는 것을 보고 손으로 
머리털을 움켜잡고 머리 빗는 일을 정지하고 분부하였다.
  "그대들이 어찌하여 이처럼 일찍 오는가?"
  빈이 앞에 나아가 울며 세제가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려 한 정상을 고하며 
아뢰었다.
  "화가 촌각에 달려 있어 마마께 고하고 물러가 죽으려 합니다."
  자전이 깜짝 놀라 빗을 던져버리고 불끈 성을 내며 분부하였다.
  "이 무리들이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한단 말인가? 나는 막연히 알지 못하였다."
  머리를 미쳐 다 빗어 올리지도 못한 채 일어나 신도 신지 않고 전정에 걸어 
내려가서 세제에게 명하여 앞에 인도하여 가니, 궁인이 급히 대비(숙종 계비 김씨)를 
받들어 업었다. 그러나 대조전에 이르니, 문이 다 닫혀 있고 안에서 어떤 사람이 비밀히 
속삭이는 말이 들렸다. 세제가 문을 흔드니 문고리가 저절로 열렸다. 드디어 
대비를 받들어 안으로 들어서는데, 환관 박상검이 홍수(궁녀)의 무리들과 창 
앞에서 전교를 비망지에 쓰다가 갑자기 세제가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이에 
무리들이 깜짝 놀라 급히 비망지를 거두어 뛰쳐나가 섬돌을 맴돌며 달아나는데, 
세제가 펄쩍 뛰어 옷소매를 잡아 그 종이를 빼앗으니 박상검이 한사코 놓으려 
하지 않아서 각각 한쪽 끝을 잡고 당기니, 종이는 한가운데가 찢어지고 박상검은 
그만 몸을 뿌리치고 달아나버렸다. 세제가 그 전교의 반쪽을 보니, 
'제위서인(제를 서인으로 삼는다')'이라는 네 글자가 있었으니, 대개 세제를 
폐하여 서인으로 한다는 전지였던 것이다.
  대비가 이를 보고는 크게 노하여 약방에 일러 언문 전교를 내렸다.
  "이달 초엿새 이후의 일은 모두 대전의 처분이 아니고 두 환관이 병약한 주상의 
왕명을 사칭한 데서 나온 것이다. 이번 조정의 관료를 유배하는 일은 오로지 
대전의 장번내관(늘 모시는 내관) 박상검, 승전색 문유도, 대전상궁 필정, 석열 
등이 결탁하여 번갈아 올린 데서 나온 것으로 나라를 위태롭게 할 뻔하였고, 
나와 세제를 외롭고 위태롭게 한 정상은 천만 번 몹시 통분하다...."
  이 날 세제(영조)가 화를 면하게 된 것은 대체로 송인명의 도움으로 말미암은 
것이라 한다.

     선정을 펴 삼한을 이룬--최규서

  최규서91650__1735)의 본관은 해주이고 자는 문숙, 호는 간재 또는 소릉이다. 
현종 10년(1669)에 진사가 되고 숙종 6년(1680)에 문과에 급제하여 삼사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이조판서, 대제학을 지내고, 경종 1년(1721)에 정승에 임명되어 
영상에 이르고 기로소에 들어가 벼슬을 그만두었다. 영조 4년(1728) 무신란 때 
주상이 그에게, '한 올의 실로 나라를 부호하였다'라는 친서를 하사하였다. 나이 
81세에 죽었으며, 시호는 문충이고, 영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전라 감사로 있을 때 명곡 최석정이 그 지역 사람에게 그의 정사에 대해 
물으니, 다음과 같이 그가 조용한 가운데 선정을 펴고 있음을 일러주었다.
  "특별히 다른 일은 없고 오직 세 가지 한가로운, 즉 삼한으로 일컬을 뿐이니 
주부들의 부서가 한가롭고, 공방이 한가롭고, 기방과 풍악이 한가로운 것을 
말합니다."

  최규서는 일찍이 말하였다.
  "소시에 길에서 여인을 만나 한번 돌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 때면 눈을 감고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 마음이 장차 나를 죽이게 되는구나'하고 두 번 세 번 
생각하였다."
  최규서가 사리사욕을 이겨내는 극기공부는 젊었을 때부터 이와 같이 하였다.

     끝내 이름을 고치지 않은--정호

  정호(1648__1736)의 본관은 연일이고 자는 중순, 호는 장암이다. 숙종 
8년(1684)에 문과에 급제, 영조 1년(1725)에 정승에 임명되어 영상이 되고 
기로소에 들어 갔으며 시호는 문경이다.
  급제하기 전 꿈에, 시인이 나타나 말하였다.
  "네 이름이 좋지 못하니 마침내 과거에 급제하지 못할 것이다. 만일 이름 
글자에서 '물 수'와 '흰 백'을 떼어버리면 반드시 급제할 것이다."
  정호는 꿈에서 깨어나 말하였다.
  "과거에 급제하고 급제하지 못하는 것은 나의 학문에 달려 있지, 이름에 달려 
있겠느냐."
  신인이 세 뻔 고하였으나 정호는 끝내 고치지 않았다. 끈질긴 노력 끝에 드디어 
뒤에 과거에 올랐다.
  집이 충주에 있었는데 나이 많고 할 일이 없어 배나무 수십 그루를 밭 사이에 
심었다. 이 때 참판 이형좌가 도승지로 왕명을 받들고 정호를 부르러 왔다. 정호가 
친히 배나무를 접목하는데 큰 나무가 한 자 남짓하였다. 이형좌가 빙긋이 웃으며 
말하였다.
  "이렇게 어린 나무가 언제 열매 맺기를 기다리겠습니까?"
  이 때 정호의 나이 80세였으므로 그가 늙어서 그 배의 열매를 맛보지 못할 
것임을 풍자한 것인데, 정호도 웃고 말았다.
  뒤에 이형좌가 충청감사로 부임하여 정호를 찾아가니, 정호가 술상을 간단히 
차리고 배 10여 개를 같이 내놓았는데 감미로운 맛이 특이하였다. 이형좌가 
물었다.
  "이 배는 참으로 맛이 좋은데 어디에서 구했습니까?"
  정호가 웃으며 말하였다.
  "이것이 바로 연전에 내가 친히 접목한 것이네. 그대는 내가 열매를 따 먹지 못할 
것이라 근심했는데 지금 열매를 따먹은 지 이미 수년이 되었네."
  정호는 나이 89세에 죽었다.

     돈피갖옷을 벗어 정순왕후에게 바친--이사관

  이사관(1705__1776)의 본관은 한산이고 자는 숙빈, 호는 장음이다. 영조 13년 
(1737)에 문과에 급제하고 48년(1772)에 정승에 임명되어 좌상에 이르고 시호는 
효정이다.
  영종의 계비 정순황후 김씨가 어릴 때 서산에 살았다. 지극히 가난하여 
정순왕후의 아버지 김한구가 일찍이 친척의 집에 우거하고 있었는데 이 때 
돌림병이 크게 성하여 온 마을 이 모두 전염되자, 야외에 초막을 지어 피하였다. 
정순왕후와 그의 모부인이 나가 피하였는데 정순왕후는 그 때 겨우 3세였다. 
도깨비들이 정순왕후가 묵고 있는 초막 밖에 떼를 지어 와서 말하였다.
  "곤전(왕비)이 임어하셨으니 시끄럽게 떠들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모두 흩어져 가므로 모부인이 사뭇 이상하게 여겼다.
  영조 23년(1747) 정월, 정순왕후가 3세 때 김한구가 가족을 데리고 서울로 
돌아오고 있었다. 이 때 이사관이 호서 지방의 수령으로 부임하는 도중에 
여관에서 만났는데 예전에 이미 서로 아는 처지였다. 눈바람이 휘몰아치는 매우 
추운 날씨였다. 이사관이 김한구에게 말하였다.
  "날씨가 이처럼 추운데 그대의 딸이 추위에 고생이 없을 수 있겠소."
  그리고 드디어 돈피갖옷을 벗어 그에게 주었는데, 김한구가 그것을 매우 고맙게 
여겨 항상 정순왕후에게 익히 들려주었다.
  김한구가 서울에 와서는 남촌의 학주 김홍욱의 옛집에 우거하였다.
  정순왕후가 15세 되는 영조 35년(1759)에 이르러 정성왕후의 상기가 이미 
다하자, 영조가 친히 왕비감을 간택할 적에 사대부의 딸을 궁중에 모았는데, 
정순왕후가 홀로 지정된 자리를 피하여 앉았다. 영조가 물었다.
  "어찌하여 피해 앉는가?"
  정순왕후가 대답하였다.
  "아비의 이름이 여기에 있는데 어찌 감히 그 자리에 앉겠습니까."
  대개  왕비를 간택할 때 그 아버지의 이름을 방석 끝에 썼기 때문이다.
  영조가 여러 처녀들에게 물었다.
  "무엇이 가장 깊은고?"
  그러자 어떤 처녀는 산이 깊다고 말하고, 어떤 처녀는 물이 깊다고 말하여 
중론이 일치하지 않았는데, 정순황후는 홀로 말하였다.
  "사람의 마음이 가장 깊습니다."
  주상이 그 까닭을 물으니, 정순왕후는 대답하였다.
  "사물의 깊이는 헤아릴 수 있거니와 사람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주상이 또 물었다.
  "무슨 꽃이 가장 좋은가?"
  그러자 어떤 처녀는 복숭아꽃이 좋다고 말하고, 어떤 처녀는 모란꽃이 좋다고 
말하고, 어떤 처녀는 해당화가 좋다고 말하여 대답하는 바가 일치하지 않았다. 이 
때 정순왕후가 홀로 말하였다.
  "목화(면화)가 가장 좋습니다."
  주상이 그 까닭을 물으니, 정순왕후는 대답하였다.
  "다른 꽃은 일시의 좋은 데 지나지 않고 오직 목화는 천하 사람에게 옷을 지어 
입혀 따뜻하게 해주는 공이 있습니다."
  이 때 마침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주상이 물었다.
  "월랑의 기왓골이 몇 줄인지 세어보아라."
  처녀들이 모두 손가락으로 하나, 둘, 셋, 넷 하며 세었으되, 정순왕후는 머리를 
숙이고 침묵하고 앉아 있다가 줄 수를 말하였다. 주상이 물었다.
  "어찌하여 기왓골이 몇 줄인 줄 아느냐?"
  정순왕후가 대답하였다.
  "처마의 낙숫물을 세어 보았으므로 알았습니다."
  주상이 깜짝 놀라며 그를 기이하게 여겼다.
  그 이튿날 아침에 채색 무지개가 대궐로부터 일어나서 정순왕후의 세수하는 
그릇에 꽂히니, 후비의 덕이 있다 하여 특별히 정궁으로 간택하였다. 장차 
입궁하려 할 적에 여관(상궁)이 옷 치수를 재기 위하여 정순왕후에게 돌아앉기를 
청하니, 정순왕후가 정색을 하며 말하였다.
  "너는 돌아앉을 수 없느냐?"
  여관이 황공하게 여겼다.
  정순왕후가 궁궐에 들어오게 되자, 주상이 말하였다.
  "옛날 후가 곤궁할 때 돌봐준 사람이 없었는가?'
  정순왕후가 대답하였다.
  "옛날 정묘년(영조 23, 1747)에 서울로 들어오는 도중에 마침 극심한 추위를 
만나 장차 동상을 입게 되었는데, 만일 이사관이라는 사람이 돈피갖옷을 벗어 
주지 않았으면 지탱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이에 영조가 그를 발탁해 썼는데 그 뒤 14년 만에 덕망이 높아 정승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3. 탕평과 선비들의 의리

  "그와 우리 집안은 원수지간인 데 어찌하여 우리집에 오겠습니까?" 
  "공사는 사적인 혐의를 피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이 온 까닭은 무엇이오?" 
  "지금 변무사의 임무를 띠고 연경에 들어가는데 어떻게 하면 무함을 
변명하겠소?" 
  그러자 이종성이 해결책을 일러주었다. 
  비록 당파는 다를망정 당시 국사의 비중을 쫓아 이종성은 모든 경륜과 지혜를 
동원하여 변무사 유척기를 도와주었다.

     사적으로 원수지간이나 공적으로는 도움을 준--이종성

  이종성(1692__1759)의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자고, 호는 오천이다. 숙종 37년 
(1711)에 진사가 되고 영조 3년(1727)에 문과에 급제하고 영조 28년(1752)에 
정승에 임명되어 영상에 이르렀다.
  영조가 만년에 정순왕후로부터 후사를 이으려는 희망이 간절하여 회임에 
도움이 되는 보약을 정순왕후에게 자주 올리도록 하였다.
  정순왕후는 성덕이 있어 스스로 생각하기를, '자신이 애기를 가지면 혹 
세손(정조를 가리킴)이 임금의 사랑을 잃게 될 것을 염려하여 몰래 약을 다른 
곳에 버리고 들지 않았는데 주상은 실로 그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당시 영조가 문씨 성을 가진 후궁을 귀여워하고 있었는데 이 여자가 몰래 
임금의 총애를 독차지할 계략으로 옷으로 배에 덧붙여 마치 아기를 밴 것처럼 
꾸미고 아기를 가졌다고 드러내 놓고 말하였다. 그 산월이 되어 몰래 친족에게 
부탁하여 민간의 갓 태어난 아이를 구하여 궁중에 들여오게 해서 자기가 낳은 
것으로 말하려 하였으니, 그 흉악한 음모는 장차 헤아릴 수 없었다.
  한편 이종성이 고향인 장당의 오촌으로 가려 하다가 그 기미를 넌지시 살피고 
대삿갓과 도롱이 차림으로 날마다 용산강가에 가서 낚시를 드리우고 있었다. 
하루는 석양 때 먼 시골의 무부가 이곳을 지나다가 이종성이 낚시를 드리우고 
있는 것을 보고 옆에서 귀고 있는 것이었다. 이종성이 물었다.
  "그대는 뉘시오?"
  시골 무부가 대답하였다.
  "나는 아무 고을 사람인데, 무과에 급제한 시 10년이 되어도 아직까지 다리 
뻗을 길이 없으므로 서울에 올라와서 벼슬을 구하려 합니다."
  이종성이 말하였다.
  "내가 듣건대, 저동 이영부사가 나라의 공권을 장악하였고, 또 남을 구제하는 
풍도가 있다 하니, 이번 걸음에 가거든 곧바로 그 집을 찾아가서 그 하인을 찾아 
'용산강에서 고기 낚는 노인이 얘기해 보냈다'고 말하면 반드시 유숙시켜줄 
것이고, 또 출세하는 길이 열릴 것이다."
  그 사람이 기뻐하며 사례하고 곧바로 저동으로 들어가서, 그 노인의 말대로 
전하니 모든 것이 조금도 틀림이 없었다. 해가 저문 뒤에 이종성이 집에 돌아와서 
그 사람을 불러 만나 보았는데, 그 사람이 그제서야 이종성 대감인 줄을 알고 
부복하며 황공하게 여겼다. 이종성이 좋은 말로 타이르고 수일 동안 유숙시킨 뒤에 
통화문을 수문장을 시켰다.
  하루는 이종성이 무장을 불러 신신당부하였다.
  "오늘밤 누가 파하고 궁문을 열 적에 반드시 궁비(궁중의 여종)가 붉은 포대기로 
함지를 싸서 음식물처럼 이고 들어올 것이다. 네가 곡직을 묻자 말고 수색해 보면 
반드시 어린아이가 있을 터이니, 모진 마음을 먹고 손을 대어 한칼에 두 동강이를 
내어야 한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네가 죽게 될 것이다."
  그 무장이 그날 밤에 명심하고 기다리고 있었더니, 과연 이종성의 말대로 한 
궁비가 함지를 이고 들어오므로 불문곡직하고 칼을 휘둘러 죽이니, 온 궁중이 
놀라 동요하였다. 이튿날 아침 전정의 국문에 드디어 후궁 문씨의 간악한 계책이 
발각되어 같이 모의한 문씨 집안의 족속을 모두 귀양 보내어 죽이고 세손의 
자리를 보전하게 되었다.
  이종성이 죽은 뒤, 정조가 지어 내려 보낸 제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용산강가에 낚시 드리울 제
  기다린 사람 누구였더뇨

  또 이러한 구절이 있다.

  오월 강가에서 누구를 위하여
  지루하게 기다렸던가

  이종성이 장단의 오촌에 물러나 있었는데 오촌은 중국으로 가는 사신이 
경유하는 곳이었다. 하루는 이종성이 정원을 청소하며 말하였다.
  "오늘은 유척기가 오게 될 것이다."
  자질이 물었다.
  "그와 우리집안은 서로 원수지간인데 어찌하여 우리집에 오겠습니까?"
  이종성이 대답하였다.
  "공사는 사적인 혐의를 피하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자 동구 밖에 벽제 소리가 들리더니, 유 정승이 과연 이르렀다. 
이종성이 병풍으로 마루 사이에 가로막아서 서로 얼굴은 보지 않고 물었다.
  "공이 온 까닭은 무엇이오?"
  유척기가 대답하였다.
  "지금 변무사의 임무를 띠고 연경에 들어가는데 어떻게 하면 무함을 
변명하겠소?"
  그러자 이종성이 다음과 같이 일러 주었다.
  "내가 항상 제삿밥을 좋아하고 있어 아는데, 이웃집에 재가한 여자가 있어 전 
남편의 제사를 매우 정성스럽게 지내니 뒤에 얻은 남편이 시기하여 그것을 
꾸짖었소. 그 여자가 말하기를, '당신의 말이 잘못되었소. 당신이 불행하게도 죽고 
내가 생활이 어려워서 또 개가하면 당신의 제사를 이와 같이 지내지 않겠소'하니, 
그 남편이 그 말을 그럴싸하게 여겨 전 남편의 제사를 지내게 하고, 나에게 
제삿밥 한 그릇을 주면서 그 사실을 모두 말하기에 나도 그 여자를 기특하게 
여겼소."
  이종성은 또 말하였다.
  "내가 금관조복 한 벌을 새로 지은 것을 공에게 줄 터이니, 공은 그 뜻을 
유의하기 바라오."
  유척기가 그제서야 이종성의 뜻을 알아차리고 떠났다.
  연경에 이르러 미리 금관조복으로 갈아입고 청나라 건륭제를 뵈니, 황제가 
노하여 물었다.
  "너희 나라가 대보단(조선시대에 명나라의 태조, 신종, 의종을 제사 
지내던 사당으로 숙종 31년 창덕궁에 설치하여 지금까지 전하고 있음)  을 세우고 
공복을 아직도 명나라 조정을 잊지 못하니, 어찌 이러한 도리가 있단 말이냐?"
  유척기가 이종성의 말대로 비유하여 대답하고, 또 입고 간 금관조복을 가리키며 
부복하여 말하였다.
  "명제의 공복이 이와 같으며 또한 옛말 근본을 잊지 못하므로 폐하지 못합니다."
  건륭제가 명제의 금관조복이 화려하고 정제하며 패옥이 쟁그랑쟁그랑 울리는 
것을 보고 이어서 분부를 내렸다.
  "너희 나라가 본디 예의의 나라로 일컬어서 옛 임금을 잊지 않으니 그 뜻이 
가상하고 의관문물이 옛날부터 소중화라 일컬어 졌는데, 그 의복을 보니 참으로 
거짓말이 아니로다."
  건륭제가 특별히 상으로 천리나귀 한 필을 하사하였다.
  유척기가 사신의 소임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이종성의 뜻에 감사하여 
그 당나귀를 오촌 어귀에 매어놓고 알리지 않고 서울에 올라와서 복명하였다.
  그 날 이종성은 하인에게 명하여 몇 시경에 동네 어귀에 가면 나귀 한 마리가 
매어 있을 테니 끌고 오도록 일렀다. 이종성 대감의 신명함은 온 세상이 
경탄하였다. 시호는 문충이다.

     소를 타고 온 객을 보고 초헌에서 내린--윤급

  윤급(1679__1770)의 본관은 해평이고 호는 근암이다. 오음 윤두수의 후손이며,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풍채가 좋고 문장을 잘하며 뜻이  또한 높아서 일찍이 
남과 가벼이 사귄 적이 없었다.
  그가 한성판윤으로 있을 때 한성부의 예하관속들이 모두 말하였다.
  "오늘날의 세상에 처지나 풍채, 문장과 언론에 있어서 우리 대감보다 앞서는 
이가 없다."
  하루는 관아의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해진 옷과 허름한 도포차림의 소를 
탄 한 사람을 만났는데 두 사람이 서로 만나보게 되자, 한 사람은 초헌에서 
내리고 한 사람은 소에서 내려 손을 잡고, 올라온 연유를 물으니 소를 탄 객이 
말하였다.
  "미중(정언 이언세의 자)이 끼니를 거른 지가 이미 사흘이 되었다 하여 어제 
우리집에서 마침 환자 받은 쌀이 있으므로 싣고 와서 주었소."
  격의없이 환담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하도 의연하여 한성부의 아전들이 모두 
경탄하였다. 그런데 소를 탄 객은 곧 부제학 윤심형이었다.
  윤심형은 포음 윤봉조의 조카이고 호는 임연이다. 윤급은 벼슬이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영조의 육상궁 참배를 반대하다 처형될 뻔한--조중회

  조중회(1711__1782)의 본관은 함안이고 자는 익장이다 도암 이재의 문하에서 
수업하고 나이  26세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영조가 세초에 먼저 육상궁(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 등을 모신 사당)에 거동하려 
하였다. 조중희가 대신으로 상소하였다. 
  "새해에 태묘를 배알하는 예를 행하지 않고 사묘(사친의 사당)에 먼저 
거동하시는 것은 예법에 불가합니다...."
  그러자 영조가 크게 노하여 도보로 곧장 홍화문을 나갔다. 이때 창졸간에 
당하여 시위와 모시고 따르는 관속과 필요한 준비를 모두 갖추지 못하여 야현을 
거쳐 육상궁에 이르러 눈물을 흘리며 하교하였다.
  "불초한 나 때문에 별세한 어버이에게 욕이 미쳤으니, 무슨 면목으로 다시 
신민을 대하겠는가. 내가 자결하겠노라. 군병으로 하여금 창을 잡고 빙둘러 
호위하게 하여 대신 이하 조신들을 일체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 만일 그들을 
들어오게 하면 어영대장은 중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또 이어서 혼자 말하였다.
  "80 노인이 만일 얼음판 위에 앉아 있으면 오래 못 가서 죽게 될 것이다."
  이어서 손발을 눈과 얼음이 얼어붙은 앞 연못의 물에 담갔다. 때가 정월 초라 
얼음과 눈이 풀리지 않고 북풍이 매우 차갑고 매서웠다. 백관들이 뒤따라왔으나 
군병들의 저지를 받아 들어가지 못하였다. 정조가 당시 세손으로 혼자 모시고 
서서 머리를 조아리고 눈물을 흘리며 간하였으나 끝내 듣지 않았다. 조금 뒤에 
영조의 옥체가 덜덜 떨리므로 세손이 눈물을 흘리며 다시 간하니 주상은 
말하였다.
  "조중회의 머리를 베어 가지고 오면 내가 환궁하겠다."
  세손이 급히 문밖에 나가서 대신을 불러 명을 내렸다.
  "조중회는 죽을 만한 죄가 없으니 어찌 엄명에 부대끼어 죄없는 신하를 죽일 수 
있겠습니까. 저하께서는 애써 성의를 다하여 하늘의 뜻을 돌리시도록 하소서."
  그러자 세손이 발을 구르고 울며 말하였다.
  "종사의 위태로움이 목전에 임박했는데, 대신이 어찌 신하 한 사람을 아껴서 
명령을 봉행하지 않소?"
  세손과 김상복이 서로 버티고 있는 동안 주상이 냉기를 견디지 못하여 다시 
하교하였다.
  "조중회의 문제는 차치하고 먼저 정청(세자나 의정이 백관을 거느리고 궁정에 
이르러 큰일에 대하여 하교를 기다리는 일)을 열어 계사(논죄에 관하여 임금에게 
올리는 글)를 들이도록 하라."
  대신이 제신들과 함께 계사를 초록하여 드리니, 주상이 그 계사를 보고 찢어서 
땅에 던지며 말하였다.
  "이것은 바로 조중회의 행장이로구나."
  제신들이 계사의 초를 고쳐 입계하였다.
  "어서 나라의 형벌이 바르게 시행되도록 하소서."
  그러자 주상이 명하기를 조중회를 멀리 흑산도로 재촉하여 위리안치하게 하고 
그날로 떠나보내게 한 후, 이어서 환궁하였다. 그러나 배소인 흑산도에 이르기 
전에 조중회를 석방하라는 명이 있었다.
  정조가 즉위하자, 특별한  배려로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시호는 충헌이다.

     관아에 불을 질러 잃어버린 병부를 찾은--이만원

  이만원(1651__?)의 본관은 연안이고 자는 백춘, 호는 이우당이다.
  평안감사로 있을 적에 서윤(한성부와 평양부에 두었던 종4품의 벼슬로 
좌, 우윤보다는 아래임)과 서로 화합하지 못하였다. 하루는 병부(군사의 
움직임을 신중히 하기 위하여 임금과 지방관이 나누어 가졌던 신표)가 없어졌는데 
그 어머니에게 고하였다.
  "제가 병부를 잃었으니 그 죄가 죽음에 해당합니다. 어찌하겠습니까?"
  이를 듣고 어머니가 대책을 일러 주었다.
  이튿날 서윤, 도사와 더불어 연광정에서 풍악을 울려 잔치를 벌였는데 
갑자기 감영 내아에서 불이 일어났다고 보고하는 것이었다 일어나서 보니, 
연기와 불꽃이 이미 하늘에 자욱하였다. 감사가 급히 병부 주머니를 끌러 
서윤에게 주며 말하였다.
  "내가 먼저 불난 곳에 가서 불을 꺼야 할 것이니, 이 병부를 함께 태울 수 
없으므로 귀관에게 특별히 부탁하는 것이다."
  말을 마치자 곧바로 가버리니, 서윤이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감사가 감영에 
돌아와서 불을 껐는데, 이 불은 일부러 질러서 끈 것이었다. 이어 서윤을 불러 
병부 주머니를 찾으니 병부가 과연 들어 있었다. 감사는 태연히 통인을 시켜 
병부를 내어 다시 봉하며 말하였다.
  "이것은 지극히 중요한 것이므로 아무렇게나 관리해서는 절대 안 된다."
  그러자 그만 서윤의 얼굴빛이 질려 버렸다 한다.

     삼종제수의 꿈 징조로 문과에 급제한--이태중

  이태중(1694__1756)의 본관은 한산이고 호는 삼산이다.
  평안도관찰사로 부임하였을 때의 일이다. 최진해는 현임 선천부사이고, 이인강은 
현임 중화부사였는데, 최진해는 영조의 외가이고 이인강은 정조의 외가였다. 이 
태중의 행차가 중화에 당도하니 중화부사가 들어와 뵈었다. 이태중이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고?"
  이인강이 대답하였다.
  "동궁(정조를 가리킴)의 외사촌입니다."
  이태중이 눈을 부릅뜨고 말하였다.
  "누구의 누구라고?"
  이인강은 또 전처럼 대답하는 것이었다.
  이어서 이인강을 물러나게 하고 곧 장계를 써서 아뢰었다.
  "중화부사 이인강은 아직 철이 들지 않아 세상 물정을 분별하지 못하니 
파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평양에 당도한 뒤에 선천부사 최진해가 나와 뵈었다. 이태중이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고?"
  최진해가 대답하였다.
  "하관은 선천부사입니다."
  이태중이 목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내가 어찌 선천부사인 줄 모르는가. 그대가 어떠한 사람인지 묻노라."
  최진해가 대답하였다.
  "하관은 문벌이 낮고 미약하되 나라의 후한 은혜를 입어 이에 이르렀으니 이 
소임이 하관에게는 분에 넘칩니다. 사또께서는 선천부사 최진해를 아시면 될 
뿐이옵지, 그 나머지는 물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관의 일족과 친척이 시정의 
사람이 아니면 곧 서리의 무리입니다. 비록 누구 누구 이름을 들어 대답하더라도 
사또께서 어떻게 아시겠습니까."
  이태중이 빙긋이 웃고 속으로 흡족하여 후하게 대접하여 보냈다. 그리고 다른 
수령과 달리 돌봐주어 일마다 말하는 것은 들어주었으니, 한마디로 뜻이 맞았던 
것이다. 이인강과 최진해 주 사람의 사람됨을 알 수 있다.

  이태중이 문과에 급제하기 전에 결성에 우거하였다. 삼종제 이덕중이 서학현에 
살았는데, 집이 가난하였다. 이튿날 새벽에 정시의 과장에 나가게 되어 새벽밥을 
준비하기 위해 그 부인이 이웃집에서 쌀을 꾸었는데 한 되가 차지 못하였으므로 
나무합 안에 넣어 두었다. 그날 밤 부인의 꿈에, 그 쌀을 쌀알마다 모두 작은 용이 
되어 나무합 속에 가득 차는 것이었다. 다음날 그 부인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끼어 일어나서 쌀을 씻어 정성껏 밥을 지을 무렵에 밖에서 문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이태중이 들어왔다. 이덕중이 놀라 일어나서 맞이하며 말하였다.
  "형님이 어디에서 이렇게 일찍 오십니까?"
  이태중이 말하였다.
  "결성에서 도보로 오다가 해질녘에 성밖에 이르러 여관에서 자고 이제서야 
도착했네."
  이덕중이 안에 들어가서 부인에게 부인에게 말하였다.
  "밥을 지어 사랑으로 내와서 결성의 형님과 같이 나누어 먹게 하오."
  그러자 부인이 말하였다.
  "밥이 적어서 한 사발도 되지 않고 또 이 밥은 결코 나누어 먹을 수 없소."
  이덕중이 그 까닭을 물으니, 부인이 간밤의 꿈에 있었던 일을 고하였다.
  이덕중이 부인을 꾸짖으며 말하였다.
  "어찌 이 때문에 밥을 혼자 먹고 형님을 배고프게 할 수 있소. 만일 이와 같은 
마음이 있으면 천신이 반드시 돕지 않을 것이니, 밥을 내오도록 하시오."
  부인이 부득이 밥을 사랑에 내보내고 창문 틈으로 엿보니 이태중이 그 반을 
이덕중에게 주어 나누어 먹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 과장에 들어갔는데, 방을 부를 적에 두 사람이 함께 급제하였다. 
이덕중은 벼슬이 부제학에 이르고 이태중은 벼슬이 호조판서에 이르렀다.

     원수에게 은인이 된--박문수

  박문수(1691__1756)의 본관은 고령이고 자는 성보, 호는 기은이다. 문과에 
급제하였다. 영조 4년(1728) 무신란(이인좌의 난)에 종사광으로 나가 훈이등으로 
공을 세워 영성군에 봉해졌으며 벼슬은 판서에 이르렀다. 시호는 충익이다.
  일찍이 신임사화 때 이우당 조태채와 반대당이 되었다. 노론과 소론의 당쟁이 
조금 수그러지자 영조가 화해시키기 위해 탕평론을 내놓고 대신들로 하여금 
화합하게 하였다.
  박문수가 한번은 금중에 입직하여 회식할 적에 반찬에 콩나물이 있자, 반드시 
콩나물 머리를 잘라 버리고 먹으며 말하였다.
  "콩나물의 머리를 잘라 버리지 않을 수 없다."
  콩나물의 태채가 조태채의 태채와 음이 같기 때문에 조태채를 빗대어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 뒤 조태채의 아들 조관빈도 또한 조정에서 벼슬하면서 비록 서로 
만나보지는 않으나 박문수가 평소 조태채의 충절을 흠모하여 조관빈에게 항상 
은은한 정을 두고 있었다. 조관빈을 질투하는 자가 모함하여 장차 극형에 처하려 
하니 박문수가 그를 구원하고자 하여 주상에게 아뢰었다.
  "조관빈이 아주 흉악한 죄가 있으니 죄는 진실로 참형에 해당합니다만, 지금 
운운하는 이 일은 죽일 만한 죄가 아닙니다."
  주상이 말하였다.
  "이는 네 원수가 아니냐?"
  박문수가 아뢰었다.
  "사적으로는 원수이나 공적으로는 합당한 죄가 아닙니다. 전하께서 조관빈을 꼭 
죽이시려면, 신이 원수를 갚기 위해 청한 것으로 안팎에 포고하고 죽이소서."
  주상이 이에 크게 감동하고 그를 사면하였다.
  조관빈이 판서의 지위에 이르렀다가 갑자기 죽게 되자 박문수가 그 집에 가서 
사람을 시켜 그 아들에게 일렀다.
  "내가 존옹(상대방의 아버지)과 살아서는 원수지간이었다. 그러나 일찍이 
동료로서 옛 친분이 있으니 죽음에 임하여 어찌 일곡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대에게 감히 청하네."
  그 아들이 박문수가 곡하는 것을 허락하면서도 끝내 나와 맞이하지 않았다. 
박문수는 몹시 섧게 울고 곡을 마치자 사람을 시켜 그 관을 뜰에 내어 관을 
쪼개어 보려 하였다 집안 사람들이 깜짝 놀라 조관빈의 아들에게 고하니 그 
아들이 말하였다.
  "상관없다. 박공이 비록 서로 원수이기는 하나 반듯 우리 선인을 욕보이지는 
않을 것이요, 응당 생각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박문수가 이에 관을 쪼개어 위끝의 나무를 찍어내니 그 안에 낫 쇠끝이 있는데 
길이가 한 치 남짓하였다. 무릇 나무를 찍을 적에 낫 쇠끝이 부러져 나무 속에 
들어가서 세월이 오래되 것이었다. 박문수는 이에 목공을 불러 꾸짖었다.
  "일국의 중신의 관을 네가 주의하지 않고 낫 쇠끝이 관의 나무 속에 들어가게 
하였으니, 만년의 유택(무덤)에 어찌 후한이 되지 않겠느냐."
  이에 관을 다시 짜서 장사 지냈다. 그 뒤로부터 두 집 자손이 비록 서로 만나 
보지는 않으나 무릇 환난이 있으면 극력 도와 주었다 한다.

     어영대장의 마부를 가둔 성균관 장의--서유망

  서유망(1766__1813)의 본관은 달성이고 약봉 서성의 후손이다. 영조 때 진사를 
거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성에 이르렀다.
  태학(성균관)의 장의가 되었을 때의 일이다. 고사에 임금이 문묘에 참배할 적에 
성균관의 의식 절차를 장의가 주관하였고, 백관이 하마비(관리는 말에서 내리라고 
쓴 비석)가 있는 곳에 이르러 모두 말에서 내렸다. 그 때 어영대장 아무가 말이 
뛰어 말고삐를 제어하지 못하여 하마비 안쪽 수십 보까지 넘어 들어갔다. 장의인 
서유망이 관례에 의거하여 그 마부를 가두니, 어영대장이 책임을 느껴 군사를 
아장에게 넘겨주고 이웃집에 물러나 있으면서 임금의 처분을 기다렸다.
  이 일을 임금의 행렬을 인도하던 장수가 이 일을 임금에게 아뢰니, 임금은 
도승지 서유문을 돌아보고 말하였다.
  "어영대장이 본디 경솔하였지만 그 자리는 매우 중요한 자리다. 앞에 인도할 
사람이 없을 수 없으며, 대장은 노상에서 임명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네가 
서유망에게 가서 타일러 그 마부를 놓아주고 어영대장으로 하여금 그대로 직무를 
봉행하게 하라."
  서유문과 서유망과 4종형제간이었다. 서유문이 임금의 뜻을 사적으로 말하니, 
서유망이 듣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수행하던 대신 서매수를 돌아보고 말하였다.
  "경이 그에게 한마디 말을 해주게."
  서매수가 아뢰었다.
  "이 사람은 신의 삼종질이나 천성이 강직하고, 또 관례에 비추어 법을 지키는데 
신이 어찌 감히 강요하겠습니까. 그러나 다만 가서 말은 해보겠습니다."
  서매수가 가니, 서유망이 화를 내어 말하였다.
  "한 장의가 법을 집행한 것 때문에 승지와 대신이 서로 잇따라 임금의 뜻에 
아첨해 따르니, 법을 시행할 수 없습니다. 장의직을 사양하겠습니다."
  서매수가 깜짝 놀라며 말하였다.
  "내가 어지 그대에게 강요하겠는가. 다만 소회를 말했을 뿐이네. 지금 주상께서 
명륜당에 임어하셨는데 그대가 어찌 사직할 수 있으랴."
  서매수가 드디어 임금에게 아뢰어, 임금도 어찌할 수 없어서 좌상으로 하여금 
어영대장의 직무를 임시 관장하게 하였다.

     임금이 신하에게 농을 하는 것은 불가하다는--송명흠

  송명흠(1795__1768)의 본관은 은진이고 자는 회가, 호는 역천이다. 동춘 
송준길의 현손이다. 도암 이재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유일로 천거되어 벼슬이 
이조판서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원이다.
  영조 38년(1762) 곧 임오년을 당하여 뭇 소인들이 세자(사도세자)를 매우 
다급하게 모해하여 장차 사사하려 하였다. 고사에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시임, 원임의 대신과 문무관 3품 이상 및 재야의 유현을 불러 전정에 모아 
논의하게 하였다. 이때 모인 신하들은 모두 임금의 뜻에 따라 감히 직언을 하지 
못하였는데, 오직 송명흠 만이 아뢰었다.
  "걸주 같은 포악한 임금도 자식을 죽인 악행이 없었는데 전하께서 어찌 차마 그 
자식을 죽이신단 말입니까?"
  임금이 크게 노하여 드디어 내쫓아 버리고 선전관에게 칼을 주며 말하였다.
  "네가 송명흠을 따라가서, 만일 도중에 남의 집에 들어가 숨거든 그 주인까지 
아울러 죽여 버리고 만일 남의 집에 들어가지 않고 곧바로 그 집네 돌아가거든 
네가 가서 목을 베려 하되, 그가 목을 늘이고 죽을 각오가 되어 있거든 목을 벨 
필요가 없고 만일 변명함이 있거든 반드시 목을 베고 오라."
  무릇 당파가 있음을 의심했기 때문이다. 송명흠은 이미 임금의 뜻을 알아채고 
지팡이를 짚고 집에 돌아와서 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선전관이 이르자, 
송명흠이 말씨나 얼굴빛을 변하지 않으며 말하였다.
  "임금께서 신하에게 죽음을 내리시는데 어찌 감히 죽지 않겠는가. 가묘(조상의 
위패를 모신 사당)를 참배하고 오겠노라."
  드디어 다음과 같이 상소를 올렸다.
  "아버지가 자식을 죽이는 것은 옳지 못하고, 임금이 신하에게 농담을 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이는 직신이다."
  주상이 그를 아름답게 여기며 죄주지 않았다.
  그러나 마침내 세자를 사사하여 뒤주 속에 넣어 죽도록 하였으니, 곧 
임오년(영조 38년, 1762) 윤 5월 21일이었다.
  세자의 아들 정조를 세손으로 삼으니, 뭇 소인들이 또 논쟁하여 말하였다.
  "죄인(사도세자를 가리킴)의 아들을 종묘에 들어가게 할 수 없다."
  정조가 이미 세손이 되어서 지극히 공경하고 지극히 효성스러우니, 뭇소인들의 
참소를 면하게 되었다. 고종 16년(1879)에 왕명으로 신주를 영구히 종묘에 모시고 
제사 지내게 하는 특전인 부조지전을 시행하게 하였다.

     눈과 코가 베어졌어도 역신을 꾸짖은--이술원

  이술원(1679__1728)의 본관은 연안이고 자는 선숙, 호는 화촌이다. 부사 
이중길의 손자이다.
  영조 4년(1728)에 거창의 좌수로 있었다. 동계 정온의 종손 정희량이 처음에 
이름 난 조상의 후손으로 학행이 있다고 일컬어져서 사뭇 경상우도에서 명성이 
있었다.
  그는 효경(어미 잡아 먹는 올빼미와 아비 잡아 먹는 파경 짐승, 악인의 비유)의 
성품으로 감히 하늘을 쏘는 계획(역모)을 내어 군사를 일으켜 이인좌에게 
호응하였고, 먼저 흉칙한 격문을 띄워 거창에 출병하였다. 현감 신정모가 이술원을 
추천하여 고조로 삼았는데, 이튿날 적(정희량)에게 포박당하였다. 이술원이 분하게 
여기며 꾸짖어 말하였다.
  "네가 이름 있는 조상의 후손으로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입었는데, 나라가 
너에게 무엇을 저버렸기에 이 역모를 거사한단 말인가?"
  정희량이 노하여 칼을 휘두르니 이술원의 눈과 코가 함께 떨어져 나갔으되 
꾸짖는 말이 임에서 끊이지 않고 죽었다.
  그의 아들 이우방이 그 시체를 거두어 염을 하여 침류정에 안치하고 울며 
말하였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내가 어찌 살겠는가."
  이어서 백의로 군사를 일으켜 적과 우두령 아래에서 싸울 적에 이우방이 
앞장서서 힘껏 싸우고, 밤에 언덕에 올라 소리쳐 부르며 말하였다.
  "거창의 군사와 백성들아! 나의 말을 들으라. 너희들이 만일 나라의 적을 따르면 
며칠 못 가서 망할 것이고, 너희들 중에 적을 포박하여 우리 진에 바치는 자가 
있으면 이전의 죄를 용서하고 공훈을 책록할 것이다."
  이렇게 두로 다니며 소리 높여 외치니, 적의 장교 수삼 명이 마침 적의 진영에 
있다가 밤에 정희량을 포박하여 진중에 바쳤다. 여러 사람들의 의논은 다음과 
같았다.
  "가두어서 서울에 보내는 것이 가하다."
  그런데 이우방이 울며 말하였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와 어찌 일시인들 같이 살 수 있겠는가."
  이에 칼로 그 배를 갈라 간을 내어 자기 아버지의 널 앞에서 제사 지냈다.
  이 일이 나라에 알려지자, 임금이 감탄하여 말하였다.
  "이술원이 안녹산에게 포박당하여 항복하지 않고 안녹산을 욕하며 죽은 당의 
충신 안고경의 일을 능히 행하였다."
  집의의 벼슬을 추증하고 정려각을 세워 표창하였으며, 본군 웅양면에 사당을 
세워 표충사라는 편액을 하사하였다.
  이우방은 승전(선전관)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현감에 이르렀다.

     막하의 비장으로 인하여 아들 하나를 보전한--이사성

  이사성(?__?)은 영조 4년(1728) 무신란의 적당 중의 한사람이다. 반역을 
꾀하려는 뜻이 있어서 자청하여 평안 병사가 되었다. 임지로 떠나려 할 적에 당시 
여러 사람이 앞을  다투어 막하의 비장을 추천하니 이사성이 그 자리에서 
취사하기가 어려워서 모두 추후에 병영으로 보내게 하였으니, 사람을 가려 쓰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병영에 이르자 추천한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차례로 추천된 사람에게 물으니, 
각각 천주(추천한 사람)를 말할 적에 모두 당대의 유력한 재상이었다. 홀로 뒤에 
한 사람이 말하였다.
  모는 가난하고 또한 미천하여 시로 추천해줄 사람이 없어서 자천하여 
왔습니다."
  이사성이 자세히 보고 말하였다.
  "전국시대 조나라의 인걸 모수가 자천한 것이 참으로 옳다."
  드디어 그 사람을 호비(호조에 관한 일을 맡은 비장)로 삼고 오래도록 그를 
살펴보니 사뭇 일을 처리하는 재간이 있어 하는 일마다 법도에 맞았으므로 
손발처럼 신임하였다.
  이인좌의 역모가 밝혀지고, 역적의 초사에 이사성이 자주 나오자 의금부는 
금부도사를 보내어 이사성을 잡아 오게 하였다. 여러 막하의 비장은 그 소문을 
듣고 서로 몰래 달아났으되, 호비만은 남아 있었다.
  밤에 이시성에게 물었다.
  "지금 듣건대 나명(체포 명령)이 장차 떨어지게 되었다 하는데, 공이 과연 죄를 
지은 바가 있습니까?"
  이사성이 말하였다.
  "과연 그렇다."
  호비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공은 장차 죽게 될 것입니다. 뒤에 혹 신원할 길이 있습니까?"
  이사성이 말하였다.
  "그 일 또한 어렵구나."
  호비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공은 과연 역적입니다. 남아가 천지간에 태어나서 어찌 손을 
묶어두고 포박을 당하여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겠습니까. 이 평안 병영이 비록 
작기는 하나 오히려 휘하의 군사가 5백여 명이 있으니, 도사가 병영에 도착하거든 
먼저 그 도사의 머리를 베어 성문에 걸어 보이고 군사를 일으켜 동쪽으로 향해 
곧바로 서울을 범하면 서남지방이 호응하여 열읍이 바람에 따라 휩쓸리게 될 
것입니다. 공의 의향은 어떠합니까?"
  이에 이사성이 말하였다.
  "힘도 모자라고 담력도 작아서 이 일을 거행할 수 없으니 차라리 앉아서 
죽느니만 못하다."
  호비가 말하였다.
  "슬프다, 공이여! 소인은 이제 공을 위해 일을 도모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공에게 은혜를 받은 것이 많으니 마땅히 공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아들 하나를 보전해 주겠습니다."
  마침내 호비가 이사서의 아들을 업고 밤을 틈타 성문을 나가 간 곳을 모르게 
어디론가 가버렸다.
  당시 역적의 집에 오직 이사성의 아들만 그 목숨을 보전하였다 한다.

     못쓰게 된 한 푼을 위하여 두 푼을 들인--정홍순

  정홍순(1720__1784)의 본관은 동래이고 자는 의중, 호는 호천이다. 영조 21년 
(1745)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정홍순은 언제나 갈모(입모라고도 함. 비가 올 때 갓 위에 덮어 쓰던 기름종이로 
만든 것임) 두 개를 가지고 다녔는데, 하나는 자신이 비를 맞지 않기 위한 
대비였고, 하나는 다른 사람을 위한 여벌이었다. 그가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 당시 
임금인 영조가 동구릉에 행차한 일이 있었다. 그 때 정홍순도 동대문 밖에 나아가 
임금의 행차를 구경하다가 임금이 탄 수레가 대궐로 돌아간 뒤에 구경하던 
사람들이 제각기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데, 마침 비가 내렸다. 곁에 있던 젊은 
사람이 갈모가 없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기가 막힌 듯 혀를 차므로, 정홍순이 
여벌로 가지고 있던 갈모를 주고 함께 걸어오다가 회동의 병문에 이르러 그 
사람에게 갈모를 되돌려 달라고 하였더니, 그 젊은 사람이 말하였다.
  "비가 아직 개지 않았으니 내일 당신 집으로 꼭 갖다 드리리다."
  정호순이 자기 집의 위치를 상세하게 가르쳐주고, 또 그가 혹시라도 갖다주지 
않을까 싶어 그의 주소를 물으니, 남대문 밖의 어느 동네라고 대답하였다. 이튿날 
그 사람이 끝내 나타나지 않으므로 괘씸한 생각이 든 정홍순은 그가 가르쳐 준 
곳으로 가서 그의 집을 찾아보았으나 허사였다.
  세월은 흘러 20여 년 뒤에 정홍순이 호조 판서가 되었는데, 좌랑 한 사람이 
새로 임명되어 인사차 왔기에 정홍순이 그 사람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말하였다.
  "자네가 그전에 임금의 동구릉 행차 때 나에게 갈모를 빌려 갔었는데 기억나지 
않는가?"
  좌랑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놀라면서 말하였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정홍순이 이렇게 말하였다.
  "자네가 선비의 갈모 하나도 돌려주지 않았으니 신의가 없다는 것은 알만한데 
어떻게 나라의 관직을 차지할 수 있겠는가? 곧장 사직서를 올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사람은 그만 그 길로 벼슬을 하지 못하였다.

 영조의 효성이 지극하여 육상궁(조선조 역대 왕 중, 정궁 출신이 아닌 군주의 사친을 
모신 궁정동의 사당)을 창건하게 되었는데, 정홍순이 당시 호조 판서로 있었으므로 
임금이 하교하였다.
  "궁문의 궤도는 한결같이 종묘와 같게 하라."
  정홍순이 육상궁의 궁문터를 깎아 내려 평평하게 하여 문을 세웠으므로 지세가 
낮고 우묵하여 문이 다소 초라하게 보였다. 공사가 모두 끝난 뒤에 영조께서 
그곳에 행차하여 궁문의 모양이 너무 낮게 보여 종묘의 문과 같지 않음을 보고 
급히 정홍순을 불러 물었다.
  "궁문 모양이 종묘의 문과 비교하여 매우 낮은데 경이 어떻게 감히 나의 뜻을 
거역하는가?"
  정홍순이 부복하여 이렇게 아뢰었다.
  "전하께서 당장 가까이 있는 신하를 시켜 종묘로 달려가서 재어보고 비교하게 
하소서."
  영조가 그의 말대로 그렇게 하였더니 정말 틀리지 않았으므로 영조의 노여움이 
그제야 풀렸다.
  그가 호조 판서로 있으면서 예조 판서를 겸임하게 외었는데, 
장헌세자(사도세자)의 상사를 당하여 초상 때부터 졸곡 때까지의 모든 절차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수의에서부터 두건 그리고 대와 신발의 자질구레한 물품에 
이르기까지 각각 한 조각씩 베어 그 당시 사용한 장부와 함께 단단한 궤짝 속에다 
넣어 조심스럽게 봉하고는 담당 관리에게 말하였다.
  "이 궤를 잘 간직하라. 그렇지 않으면 후일 큰 화가 미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궤를 여는 열쇠는 정홍순이 항상 지니고 다녔다. 몇 해가 지나 정조가 
즉위한 이듬해에 이르러, 임금의 생부인 장헌세자의 초상과 장례를 후하게 
치렀는지 박하게 치렀는지를 알고 싶어 하문하였다.
  "그 당시 예조 판서가 누구였는가?"
  좌우에서 이렇게 아뢰었다.
  정홍순이었습니다."
  정조의 생각으로는 초상과 장례에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야박하고 소홀히 한 
데가 있으면 즉시 국문하여 죽이려고 정홍순을 불러다 물었다 그러자 정홍순이 그 
자리에서 담당 관리에게 분부하여 깊이 숨겨두었던 그 궤짝을 대궐 뜰로 가져오게 
하여 차고 있던 열쇠로 궤를 열어 임금 앞에 보였다. 임금이 낱낱이 점검해 보니 
물자와 의식이 흠잡을 데가 없었으므로 정홍순을 대단히 칭찬하고 즉시 
우의정으로 임명하였다.

  정홍순에게 못쓰게 된 돈 한 푼이 있었는데, 주조하는 사람을 시켜 그것을 녹여 
다시 만들게 하니 그 삯이 두 푼이 되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두 푼을 들여 한 푼을 얻었으니 한 푼이 오히려 손해인데 대감께서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가 대답하였다.
  "나는 한 푼을 손해보았지만 나라로서는 한 푼을 덕보게 되었으니, 국록을 먹는 
자로서 나라에 보탬이 되는 일을 게을리 하겠는가."
  사람들이 그의 넓은 도량에 탄복하였다.
  정홍순에게 과년한 딸이 있었다. 장차 시집 보내려고 하면서 부인에게 물었다.
  "포백이며 써야 할 돈이 얼마면 되겠소?"
  "8백 냥은 필요합니다."
  또 물었다.
  "잔치 비용은 얼마나 들겠소?"
  "4백 냥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정홍순이 말하였다.
  "내가 며칠 후에는 장만하겠소."
  그 며칠이 되었으나 표백이 장만되지 않자, 정홍순이 말하였다.
  "내가 벌써부터 장사꾼에게 부탁을 해놓았는데 장사꾼이 따라주지 않으니, 내가 
정승의 지위에 있으면서 이 일을 가지고 어떻게 장사꾼을 죄줄 수 있겠소. 차라리 
그 전에 입던 옷을 세탁하고 입혀서 시집 보내야겠소."
  그럭저럭 혼례일을 하루 앞두게 되었는데 잔치 비용도 준비되지 않자, 정홍순이 
또 이렇게 말하였다.
  "장사꾼이 내가 청구한 것을 또 따라주지 않으니, 도리어 서민들이 제 나름대로 
물건을 사고 팔고 하는 것만 못하니, 술과 안주를 조금만 준비하는 것이 낫겠소."
  부인도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따랐다.
  그의 사위는 명문 재상의 자제였는데, 장인의 고집이 세고 인색함을 이상하게 
여기다가, 어느 날 아침에 장인을 찾아뵈었다. 그런데 마침  비가 주룩주룩 내리자, 정홍순이 사위
에게 삿갓과 나막신을 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자네는 자네 집에 가서 밥을 먹게. 우리 집에는 자네를 위해 준비한 밥이 
없다네. 자네 집에는 이미 지어 놓은 밥이 있을 터이니 지어 놓은 밥을 놔두고 
아직 준비도 되지 않은 밥을 기다릴 필요는 없네."
  사위는 그 길로 원망하며 돌아가 다시는 처가에 가는 일이 없었다. 몇 해가 
지난 뒤에 정홍순이 그 사위를 불렀지만 오지 않으므로, 마침 내 사돈에게 편지를 
보내고서야 찾아온 사위와 딸을 맞이할 수 있었다. 인사를 마치고 사위와 딸을 집 
뒤편의 깊숙한 정원으로 데리고 갔는데, 그곳에 아담한 집 한 채가 있고 방이며 
창문이 말끔하고 가재도구들이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정홍순이 그 딸에게 
말하였다.
  "지난날 너를 시집 보낼 떼 혼수 비용을 네 어머니에게 물었더니 1천 2백냥이 
든다고 대답하였다. 어떻게 엄청난 액수의 돈을 쓸모없는 비용으로 내버리면서 
남의 이목을 위해 꾸밀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내가 그 돈으로 해마다 이자를 늘려 
이 집을 짓게 하고 또 시골에다 전지를 사두었으니 해마다 상당한 수확을 할 수 
있을 것이고 일생동안 굶주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이곳에서 
살도록 하여라."

  정홍순이 평안 감사가 되었을 적에 수청 들던 기생이 감사가 감영에 나간 틈을 
엿보아 합 속의 담배를 조금 꺼내어 피웠다. 정홍순은 평소에 사물을 정확하게 
헤아렸는데, 감영에서 돌아와 담배가 줄어든 것을 보고는 그 기생을 잡아다 태형 
30대를 때리게 하였다.
  그 뒤에 통인들이 감사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그만 장난을 치다가 체경을 
깨뜨리고 말았다. 통인들이 앞서 수청 들던 기생이 태형 당한 일을 생각하고 덜컥 
겁이 나서 도망쳐 버렸다. 감사가 돌아와 보니 체경은 깨지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감영의 종들을 시켜 통인들을 모두 불러오게 하여 온화한 말로 
타이르고는, 체경 한 조각씩 나누어 주고 죄주지 않았다. 그를 지켜 보던 비장 
정기가 말하였다.
  "오늘 동인들이 체경을 깨뜨린 사건은 지난날 기생이 담배를 몰래 꺼내어 피운 
것보다 죄가 무거운 듯한데, 지난번에는 처벌하고 이번에는 처벌하지 않는 것은 
어째서 입니까?"
  정홍순이 대답하였다.
  "기생의 경우는 고의로 범한 것이고, 지금의 경우는 우발적으로 일어난 
과실인데 어떻게 처벌할 수 있겠는가?"
  그가 10년 동안 호조 판서로 있으면서 국가의 재산에 대해서는 아주 작은 
것까지 반드시 몸소 살펴보고 챙겨서 국고가 채워졌다. 그러다가 정승이 되어 
자기 집을 수리하면서 수리공들과 노임을 다투니, 그의 자제들이 민망하게 여겨 
여쭈었다.
  "아버지께서 정승의 지위에 계시면서 미천한 수리공들과 노임을 가지고 
다투시니 체면이 손상되지 않겠습니까?"
  그가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다. 한 나라의 정승으로서 모범이 되어야 하니 내가 노임을 올려 
주게 되면, 그만 그것이 나라의 기준이 되어 나라의 다른 일에서나 백성들이 일을 
시킬 때 노임이 올라 그만큼 서민들이 고통을 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윗사람의 부당한 지시를 완강히 거절한--양완

  양완(?__?)의 본관은 남원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수군 절제사에 
이르렀다.
  일찍이 거제 부사에 임명되었는데, 당시 통제사 이득제가 한산도에 가서 사냥을 
하려고 군정을 동원하게 하였다. 그러자 양완이 농사일이 한창 바쁜 때 백성들을 
동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겨, 아무리 윗분이 지시한 일이라도 이는 
불가하다는 완강한 뜻을 다음과 같이 상부에 전달하였다.
  "장수는 군막을 떠나서는 아니되고 군사는 행오를 이탈해서는 아니됩니다. 
그런데 지금 대장께서 호랑이를 잡는다는 핑계로 한산도에서 군사를 동원하여, 
거제부로 하여금 그 군사들을 먹이도록 하니 무엇을 하려는 의도에서입니까?"
  이득제가 그 보고한 내용을 살펴보고서 자신의 잘못을 크게 뉘우치고 서둘러 
사사로이 편지를 보내어 정중히 사과하였다. 그 뒤로부터 한산도에서는 사냥하는 
페단이 없어졌다.

     하찮은 물건에도 정해진 운명이 있다는 것을 깨우친--이성원

  이성원(1725__1790)의 본관은 연안이고 자는 선지, 호는 호은이다. 영조 30년 
(1754)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39년(1763)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4년 뒤에 중시에 
장원하였다. 강원도 관찰사가 되어 순찰하는 길에 금강산으로 들어가 구룡연에 
이르러 돌에다 이름을 새기려 하니, 글자를 새기는 중이 모두 외출하고 없었다. 
그러자 고성 군수가 이렇게 말하였다.
  "이 아래 민촌에 어떤 사람이 와서 머물고 있는데, 솜씨가 있어 글자를 새길 
만하다고 하였습니다.
  이 감사가 그를 불러오게 하여 글자를 새기도록 하였다 그런데 그 사람이 끼고 
있는 안경이 보기 드문 절품이었다. 감사가 평소 좋은 안경을 보면 감사가 평소 
좋은 안경을 보면 가지고 싶어하던 중에, 그것을 가져오게 하여 이리저리 
만져보며 구경하다가 그만 실수로 바윗돌에다 떨어뜨려 깨뜨리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어이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감사가 깜짝 놀라면서 그 사람에게 
안경값을 물어주려 하였더니, 그 사람이 사양하며 말하였다.
  "물건이 생겨났다가 없어지는 것 역시 그 물건의 운수에 달려 있으니 조금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감사가 그에게 말하였다.
  "그대는 산골에 사는 가난한 백성인데 어떻게 이런 안경을 다시 살 수 
있겠는가?"
  그 값을 억지로 주려하자, 그 사람이 안경집을 풀어 보이면서 말하였다.
  "이것을 보면 그 연유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감사가 그 안경집을 가져다 보니 거기에 이렇게 씌어 있었다.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일에 사또의 순행을 만나 구룡연에서 깨어질 것이다."
  감사가 몹시 놀라며 그 사람에게 물었다.
  "이 글은 그대가 쓴 것인가?"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애당초 이 안경을 살 적에 이 글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기생 덕분에 화를 면한--조운규

  조운규(1714__1774)의 본관은 양주이고 자는 사형이다. 영조 16년(1740)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전라도 관찰사로 재임하던 중 어느 날, 밤이 깊어진 뒤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어렴풋이 꿈속에, 곁에 있는 기생이 흔들며 깨우기에 감사가 놀라 깨어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대답하였다.
  "사또, 어서 창문 밖을 내다보소서."
  그 순간 환하게 비치는 달빛이 대낮 같기에 그대로 문틈을 통해 내다보니, 
8척이나 되는 건장한 사나이가 휜 눈빛 같은 비수를 휘두르며 금방 감사의 침실로 
뛰어들 기세를 하고 있기에, 온몸이 오싹하여 어쩔 바를 몰랐다. 기생이 나지막한 
음성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소녀가 곧장 비장청에 알릴 터이니 사또께서는 가만히 뒷문을 열고 이곳을 
벗어나소서."
  감사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혼자 있게 되면 아마도 재앙이 닥칠 것 같아 기생을 
따라서 몰래 뒷문으로 나가기는 하였으나 몸을 숨길 만한 곳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부엌 아래로 들어가니 그 곁에 지를 담는 빈 가마니가 있기에, 그것을 
머리에 뒤집어쓴 채로 가만히 피했다. 조금 있으려니까 칼을 쥔 놈이 부엌 쪽으로 
다가오고 있기에 머리끝이 쭈뼛해져 숨을 죽이고 엎드려 있는데, 갑자기 감영 
안이 물끓듯이 왁자지껄하고 불빛이 여기저기서 밝게 비치자, 침입했던 적이 
칼로 부엌의 기둥을 내리치며 중얼거렸다.
  "모두가 운명이다."
  그리고는 뒤편의 담장을 뛰어넘어 도망쳐 버렸는데, 사방에서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소리 가운데 모두들 외쳐대는 것이었다.
  "사또는 어디에 계십니까?"
  "사또는 여기에 있다."
  감사가 말하자, 비장과 감영의 종들이 소리를 듣고 감사가 있는 곳으로 우르르 
몰려와서 그를 부축하여 선화당으로 돌아갔다. 곧 이어 조 감사가 승차되어 
서울로 돌아오면서 그 기생에게 후하게 사례하였다.

     나무를 실은 남의 소를 타고 가서 급제한--윤필병

  윤필병(1730__1810)의 본관은 파평이고 자는 이중, 호는 무호당이다.
  진사로 포천에 살면서 과거에 응시하려고 하는데, 마침 이웃집에서 나무를 팔러 
서울로 떠나는 자가 있기에 윤 진사가 나무를 실은 길마 위에 앉아 새벽녘에 
동대문 밖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때가 너무 일러서 성문을 열지 않았으므로 주막에 들어가 잠시 쉬려고 
하는데, 주막의 주인이 나와서 맞이하며 물었다.
  "생원님께서 지금 과거 보러 가는 길이며 성은 윤씨입니까?"
  윤필병이 대답하였다.
  "그렇소."
  주인 이렇게 말하였다.
  "지난밤 꿈에, 어떤 사람이 나뭇짐을 실은 소를 끌고 오는데 나뭇짐 위에 
오색이 영롱한 한 괴물이 앉아 이 길을 따라와서 우리 주막으로 들어오기에, 그 
나뭇짐 위에 실은 물건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그 소를 끌고 온 사람이 말하기를, 
'이 소가 새끼를 낳았는데, 그것이 송아지가 아니고 용같이 생겼으므로 서울의 
장터에 내다 팔려고 하오' 하는 것이었습니다. 놀라서 깨기는 하였습니다만 
마음속으로 너무나 의아하게 여기던 차에 생원께서 이미 이 길을 따라 오셨고, 또 
짐을 실은 소의 길마 위에 앉으셨고, 성씨 또한 윤씨라고 하셨는데, 일찍이 들은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윤씨를 가리켜 소라고 하며 용은 바로 과거에 급제할 
징조라고 하였으니, 과거 급제를 하례할 만합니다."
  윤 진사가 웃으며 그가 함부로 장난한다고 나무랐는데, 그 길로 가서 정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뒤에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다.

     처자가 정절을 지킨--김하재

  김하재(?__?)의 본관은 광주이다. 영의정을 지낸 김양택의 아들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 참판에 이르렀으나, 정조 8년(1784)에 임금을 향하여 직접 
흉악 무도한 욕설을 적은 쪽지를 승지에게 건네준 사건으로 사형에 처해졌다.
  그의 후처는 어느 집안의 딸인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남편의 죄에 연루되어 
처음 흑산도엣 종이 되었다가, 마침내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교수형을 집행할 때 
의금부의 하인이 형장인 백사장으로 끌고 가려 하자 그 여인이 준엄한 말로 
항거하였다.
  "비록 죄인의 신세가 되기는 하였지만 나는 당당한 사대부 집안의 출신인데, 
어찌 너희에게 끌려 가겠느냐. 내 손이 잘릴지언정 종들의 손에 잡힐 수는 없다."
  자신이 직접 목에다 밧줄을 걸어 조용히 사형을 당하자, 흑산도 사람들이 
칭찬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의 아들은 진도에서 종이 되어 옥사 곁에 살면서 짚신을 삼아 생계를 꾸려 
나갔다. 그러나 그는 상스러운 말은 입에 담지 아니하고 앉을 적에는 반드시 끓어 
앉으며, 대인 관계에 있어서는 공손하고 조심하여 털끝만큼이라도 의롭지 않은 
일을 가지고 남에게 요구하지를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를 아껴주며 가련하게 
여겼다. 관비를 아내로 맞아 아들 하나를 얻어서는 가르치고 타이르기를 자세히 
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집안이 비록 이 지경에 이르기는 하였지만 어찌 도리가 아닌 일을 행하여 
조상을 욕되게 할 수 있겠는가?"
  그의 누이가 어린 나이에 나주의 관비로 배속되었다가 장성하여 신분이 미천한 
상인의 아내가 되었는데, 집안 살림이 조금 여유가 있었기에 새 옷 한 벌을 지어 
오라비인 그에게 보내어 도우려 하니, 그가 그 옷을 받아 눈물을 흘리면서 불에 
채워 버리고 다시는 아는 체하지 말고 살라며 경계하였다. 김하재가 비록 
미치광이처럼 한때 본성을 잃고 흉칙한 짓을 하여 스스로 이런 흉화를 불러오기는 
하였으나, 그의 집안이 대대로 이어왔기 때문에 그의 처자들이 정절을 지킴이 
많은 사람의 본보기가 되었다.

       4. 변란과 풍운의 국운

  어영대장이 정승 아들을 종사관으로 삼았으나 교만하고 방자하여 군율로 참형에 
처하기 위해 잡아 가두었다. 종사관이 그 아비에게 살려줄 것을 호소하니 할말이 
없다는 뜻으로 백지로 된 편지를 대장에게 전했다. 종사관이 크게 깨닫고 뒷날 
서북지방의 변란을 목숨을 걸고 평정하고 모든 공을 이미 돌아간 어영대장에게 
돌렸다.

     교만한 종사관을 반란을 평정시킨 인재로 만든--이창운

  이창운(1713__1791)의 본관은 함평이고 자는 성유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어영대장과 총융사에 이르렀다. 그는 닥쳐올 운수를 미리 헤아리는 식견이 
뛰어났으며 장신다운 기풍이 있었다.
  그 무렵 김재찬이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이창운이 그를 불러다 종사관으로 
삼았다. 그러나 김재찬이 늘 교만한 마음을 품고 여러번 불렀지만 나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창운이 군중에 이런 명령을 내렸다.
  "오늘 종사관 김재찬을 군율로 참형에 처할 터이니 빨리 잡아오도록 하라."
  김재찬이 그제야 몹시 두려워서 눈물을 흘리며 정승인 그의 아버지 김익에게 
구원을 여쭙자 김익이 말하였다.
  "네가 체통과 예의를 무시하고 교만 방자하게 굴다가 장막의 규율을 
위반하였으니 난들 어쩌겠는가?"
  한참 있다가 편지 한 장을 아들인 김재찬에게 건네주므로 김재찬이 그것을 
가지고 군문으로 나아가니, 벌써 어영대장이 자리에 나와 있고 칼과 창을 든 
군사가 정렬하여 위엄이 서릿발 같았다. 그런 가운데 군법을 집행하려 하므로 
김재찬은 혼백이 흩어지는 듯 몹시 놀라고 당황하며 겁에 질려 엎드려 있다가, 
그의 아버지가 준 편지를 간신히 대장에게 올렸다. 이창운이 그 편지를 뜯어보니 
한 장의 공지로 아무 글자도 씌어 있지 않았다. 이는 바로 대장에게 할 말이 
없다는 뜻이었다. 이창운이 뜻을 정하고 이렇게 영을 내렸다.
  "내가 그대 아버지의 체면을 보아 목숨만은 살려 주니 크게 반성하라."
  그를 영창에다 가두었다. 그리고는 이날부터 이창운이 밤이면 영창에 나아가 
김재찬에게 평안도 안에 있는 군, 읍의 생긴 모양과 산천의 험준하고 
막힘이며, 도로의 트임과 환곡의 총계 숫자며 표와 식량이 얼마인 것과 인구가 몇 
만이나 되는 것, 그리고 군대 정원이 몇천 명이나 되는 것들을 낱낱이 빠뜨리지 
않고 강독하도록 하고, 그 이튿날 밤에 다시 와서 그 전날 저녁에 안 말을 
강론하게 하기를 비바람을 피하지 아니하고 한결같이 하였더니, 40여 일 동안 
갇혀 있으면서 평안도 40여 고을에 대한 제반 사정에 능통하여 손바닥을 펴보듯 
환하게 알 수 있었다. 이창운이 그제야 김재찬의 손을 잡고 말하였다.
  "늙은 사람이 국가의 중대한 일을 자네에게 부탁하니 자네는 충성을 다 하도록 
노력하여, 국가로 하여금 위태로운 지경에서 벗어나 안정을 되찾게 하여야 하네. 
내가 죽고 난 30년 뒤에 틀림없이 평안도 지방에서 변란이 있을 터인데, 국가에서 
군대를 동원하지 않은 지가 이미 2백 년이 되었다. 태평 성대가 오래 지속되었기 
때문에 만약이라도 뜻밖의 변고를 당하게 되면 흙더미가 무너지듯 기와가 
산산조각이 나듯 걷잡을 수 없는 형세가 전개될 것이다. 내가 온 조정을 두루 
살펴보아도 세상을 제대로 다스려 변란을 안정시킬 인재로는 자네보다 나은 이가 
없으니, 자네는 신중을 기하여 이 늙은 사람의 말을 잊지 않도록 하게."
  그리고 난적을 막는 계책까지도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평소 뛰어나게 
총명하고 글을 잘한 김재찬이 그의 말을 하나도 빠뜨리자 않고 마음속에 깊이 
새겨 두었다.
  얼마 뒤에 이창운은 세상을 떠나고 김재찬은 승진을 거듭하여 정승에 
임명되었다. 그러던 순조 11년(1811)에 이르러 평안도 역적 홍경래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급보가 전해졌다. 조정에서 놀라 술렁거리자 도성 안이 들끓는 
듯하므로, 순조가 대신들을 불러다 반란군을 섬멸할 대책을 강구하도록 명하였다.
  김재찬의 집이 신문 밖에 있었는데 사자가 급히 말을 타고 달려와 빨리 대궐로 
나오라는 왕명을 전하고 아울러 재촉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김재찬은 
천천히 일어나 완만한 동작으로 아침 식사를 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좀도둑은 응당 저절로 멸망할 터인데 하필이면 놀라고 소란을 떨어야 하는가?"
  집안 사람이 가마를 내어 신속하게 대궐로 나가게 하니, 김재찬이 끝내 
덮개가 있는 수레로 바꾸어 타고 일부러 빙둘러 남대문을 경유하여 종로에 
이르러서는 하인들에게 더 천천히 가도록 경계하였다. 김재찬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도성의 사람들이 손을 이마에다 갖다 대고 서로 말하였다.
  "정승이 저렇게 한가롭고 편안하게 생각하니 우리들에게는 아무런 염려 할 일도 
없을 듯하다."
  도성 안팎이 드디어 안도하게 되었다. 김재찬이 대궐에 도착하여 여러 
원로들에게 말하였다.
  "지금 성상께서 옥체가 불편하신 지 한 해가 지났습니다. 그러므로 영이 
임금에게서 나오면 백성들이 반드시 믿으려 들지 않을 터이니 왕대비(효의왕후 
김씨)의 전지로 도성의 백성들에게 유시하고, 급히 진무대장을 정하여 도성 안에서 
진영을 개설하고 우선 선봉장을 보내어 관서의 대장과 힘을 합쳐 역적을 
격파하여야 합니다."
  곧바로 낭관을 불러 방책과 전략을 상세히 일러주고 관서지방의 모든 정세와 
사정을 막힘이 없이 도로와 산천, 인물, 풍토, 봉수, 성보, 군민의 많고 적음과 
강하고 약함을 촛불로 비춰보듯이 척척 알아맞히니 지휘하는 손에 바람이 일 
정도여서 반나절이 채 안 되어 모든 계략과 대비가 끝이 났다. 여러 원로들이 
어안이 벙벙하여 잠자코 보기만 하다가 말을 꺼냈다.
  "각하께서 미리 이런 변란이 일어날 줄 알고서 익숙하게 연습해둔 것이 있는 
듯합니다. 어찌하여 이처럼 신속하고 적절히 대웅하게 합니까?"
  김재찬이 이렇게 대답하였다.
  "이미 30년 동안 미리 외우고 익혔습니다."
  좌우에서 어리둥절해하며 그 까닭을 물었더니, 김재찬이 마침내 이창운의 일을 
말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모두가 우리 사또께서 가르쳐 주신 덕분인데, 어찌 실낱 같은 공이라도 
있겠습니까?"
  물론 홍경래의 반란은 얼마 가지 않아 마침내 평정이 되었다.

     '꽃이 진 뒤에 그 위에 다시 피는 꽃'의 뜻을 알고 있었던--채제공

  채제공(1720__1799)의 본관은 평강이고 자는 백규, 호는 번암이다. 영조 
19년(1743)에 문과에 급제하고, 정조 12년(1788)에 정승에 임명되어 영의정에 
이르렀다.
  정조가 늘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이면서 가끔 흔하게 읽혀지지 않는 책 가운데서 
제목을 내어 선비들의 학문 역량과 정도를 나름대로 재어 보곤 하였다. 정조는 늘 
'꽃이 진 뒤에 그 위에 다시 피는 꽃'으로 글 제목을 내어 선비들을 시험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온 조정의 신하들은 모두 그 뜻을 모를 것 같았으나 오직 
채제공만은 틀림없이 알고 있을 것이라고 여겨 그 제목을 내놓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채제공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정조는 이제는 되었다고 생각하며 그 
제목으로 선비들을 시험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영남의 어떤 선비가 과거에 응시하려고 길을 떠났는데 어느 산 속을 
지나가다가 그곳에서 키가 큰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되었고, 그 사람이 자기 집에서 
묵고 가라고 하기에 그대로 따라가 그 집에서 묵게 되었다. 밤에 그 사람이 
선비에게 말하였다.
  "이번에 보이는 과거의 글 제목은 바로 '꽃이 진 뒤에 그 위에 다시 피는 꽃'일 
것이니 그대는 미리 대비하시오."
  선비가 그 사람에게 물었다.
  "꽃이 진 뒤에 그 위에 다시 피는 꽃이란 어느 책에 나오는 글귀입니까?"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이는 어느 책에서 나온다느니 할 것 없이 그저 알기 쉬운 것일 뿐이오. 지금 
성상께서 이 제목으로 많은 선비들의 공부한 정도를 가늠해 보려고 하는데, 꽃이 
진 뒤에 그 위에 다시 피는 꽃이란 바로 목화인 것이오."
  선비가 그제야 크게 깨달았다. 그 이튿날 선비가 그 사람에게 사례하고 다시 
길을 떠나 마침내 과거에 응시하게 되었다. 그런데 글 제목을 보니 바로 산 속에 
만난 그 사람의 말대로였다. 시험장을 가득 메운 전국 방방곡곡의 수많은 
선비들이 글 제목을 이해할 줄 몰라 마음을 졸이고 애를 태우면서도 붓을 대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선비만은 거침없이 답안을 써서 갖다 올리는 것이었다. 
임금이 이상하게 여겨 그 선비를 불러다 물었다.
  "누가 이 제목의 뜻을 가르쳐 주던가?"
  선비가 과거 보러 오는 도중에 있었던 일을 상세히 아뢰었더니, 임금이 이렇게 
감탄하였다.
  "이 사람이 죽어서도 재주를 부리는구려."

  채제공은 남중(남인을 가리킴)의 뛰어난 인물이다. 젊어서 집안이 가난하였으며, 
산사에서 글을 읽을 적데 부유하고 존귀한 집안의 자제들이 모두 그를 예우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 해가 저물어 제각기 집으로 돌아갈 때 이르러 서로 어울려 
시를 읊으며 회포를 푸는데 채제공의 시는 이러하였다.

  가을바람 불 제 해묵은 잣나무엔 새매가 새끼를 치고
  눈 내린 달 빈 산에는 호랑이가 정기를 기르도다

  모두들 특별한 의미가 없다고들 비웃었는데, 어느 재상이 그 시를 보고서 그의 
아들에게 말하였다.
  "네가 이 시의 뜻을 알기나 하느냐? 새매는 가을에 새끼를 치지 않는 법인데 
새끼를 쳤다면 그 모양은 범상하지 않을 터이니, 너희들이 매우 볼품없이 용렬함을 
비유한 것이고, 눈이 내린 달 빈 산에 호랑이가 정기를 기른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비유한 것이다. 이 사람은 반드시 높은 벼슬에 올라 드러날 것이다."

  채제공이 과거에 응시하려고 하는데 붓과 먹이 없어 현직 재상에게 도와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 말을 들은 재상이 후하게 붓과 먹을 그의 앞에 내놓았더니 
채제공이 이렇게 말하였다.
  "아무개가 비록 가난하여 의지할 데가 없다고 해서 각하께서 나로 하여금 손수 
이 물건을 들고 들어가게 하십니까?"
  이에 그만 현직 재상이 그에게 사과하고 하인을 딸려 보내어 필묵을 들고 
가도록 하였다. 그런데 채제공이 문 밖까지 나오려고 하는데 그만 개가죽이 자기 
옷 속에서 떨어져 나오고 말았다. 개가죽은 대체로 가난하여 솜옷이 없는 사람이 
남에게 빌려서 등에다 대고 추위를 막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잘못되어 땅에 
떨어진 것이었다. 채제공이 조금도 부끄러워 하거나 난감해하는 기색이 없이 
재상댁의 하인을 불러 이렇게 말하였다.
  "네가 이것을 내 등에다 떨어지지 않게 잘 꽂아 주게."
  이를 지켜본 많은 사람들이 모두 놀라며 반드시 높은 벼슬에 오를 것이라고 
여겼다.

     어머니의 병구환 때문에 벽파를 붙좇은--심환지

  심환지(1730__1802)의 본관은 청송이고 자는 휘원, 호는 만포이다. 영조 
38년(1762)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부조의 공덕으로 세자 익위사 부솔에 
보임되고, 영조 47년(1771)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정조 22년(1798)에 정승으로 
임명되어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충헌이다.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 몹시 가난하여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했으나 지조가 있어 
교유를 아무렇게나 하지 않았다. 당시 임금의 장인이었던 오흥 부원군 김한구의 
아들 참판 김귀주가 그와 교유를 맺고 싶어했으나 기회를 얻을 수 없었다. 그 
무렵 심환지의 어머니가 편찮아서 피성의 의원을 데려다 진찰을 하였더니 그 
의원이 이렇게 말하였다.
  "산삼 한 근을 쓰지 않으면 병이 나을 수 없습니다."
  심환지가 한창 가난에 찌들어 거친 음식도 이어댈 수 없는 형편이었다. 
김귀주가 그 소문을 듣고 그의 아버지에게 말씀을 드려 공금 1천금을 차용하여 
피성 의원을 시켜 산삼을 사다가 치료하게 하면서 자신이 돈을 준 사실을 말하지 
않도록 단단히 당부하였다. 그러자 피성 의원이 우선 산삼 몇 편을 사다가 
심환지에게 주었더니 그가 놀랍게 여기고 기뻐함 산삼을 가져오게 된 자초지종을 
묻자 그 의원이 이렇게 말하였다.
  "마침 친족이 산삼을 캐어다 팔기에 몇 편을 샀으니 잘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심환지가 매우 감사하게 여겼다. 이 때부터 그 어머니의 병은 차도가 있더니 
마침내 회복되었다. 심환지가 그 의원의 은덕에 감격하여 조촐하게 술과 안주를 
장만하여 대접하게 되었는데, 술을 마시는 중간에 그 의원이 말하였다.
  "나 역시 가난한 의원입니다. 그런데 산삼 한 근 값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는 
바로 진흙골 김 참판께서 당신이 가난하여 어머니의 병을 치료하여 드리지 
못한다는 소문을 듣고 나에게 돈을 주면서 산삼을 사도록 했던 것이다."
  심환지가 아무 말도 않은 채 잠자코 있었지만 대단한 은덕을 입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끝내 그 일을 가지고 한 번도 찾아가서 사례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남에 이르러 가난해서 염습하고 장례 치를 
꺼리가 없어 울부짖기만 할 뿐이었다. 김귀주가 또 그 소문을 듣고 사람을 시켜 
조문하게 하고 상사의 절차를 물어 모든 비용을 마련해주도록 하니, 경재와 
비교할 정도로 제수가 풍족하므로 이를 보고 모두 빈정대었더니, 심환지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가 그분에게 이미 마음을 허락하였으니 이런 도움을 받는다 하여 거리끼지 
않는다."
  김귀주가 이러한 일로 결사적인 힘을 얻게 된 것이었다. 풍은 조만영이 정승 
김도희에게 말하였다.
  "내가 들으니 오흥이 본래 깨끗하고 검소하였는데, 지금 금위영의 빚장부에 3천 
금이나 되는 많은 빚이 적혀 있으니, 어찌 그렇게도 남용을 하였단 말이오?"
  김도희가 웃으며 이렇게 말하였다.
  "그것은 남용한 것이 아니고 사우지간에 구휼하였기 때문이요."
  김귀주가 이런 방법으로 당시의 명사들을 망라하여 벽파의 세력을 늘려 
나갔으며, 심환지 역시 이때부터 김귀주를 붙좇아 뒷날 시파의 반대와 탄핵의 
대상 인물이 되었다.

     해흥군의 넋을 머리에 인--김이소

 김이소(1735__1798)의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유안, 호는 용암이다. 영조 
40년(1764)에 문과에 합격, 정조 16년(1792)에 문과에 합격, 정조 16년(1792)에 
정승에 임명되어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익헌이다.
  동지사로 청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손가참에 이르러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밤중이 되어 비몽사몽간에 갑자기 한 재상이 나타났는데 옥으로 된 
고리를 단 채로 서각으로 만든 띠를 두르고 늠름하게 방으로 들어오기에 김이소가 
물었다.
  "공은 뉘시오?"
  그 재상이 대답하였다.
  "나는 해흥군(이련)이오."
  김이소가 다시 물었다.
  "각하의 유해를 이미 고국으로 옮겨다 장례를 지냈는데 어찌하여 지금까지 
이곳에 머물고 있습니까?"
  몇 해 전 해흥군이 동지사로 갔다가 이 손가참에서 객사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해흥군이 대답하였다.
  "내가 뭇 귀신들에게 가로막힘을 당하여 산해관을 벗어날 수가 없소. 그래서 
혼자 이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날마다 고국의 전원을 바라보니 만리나 되는 거리인 
데다 산이 막혀 있어 자손들의 제사도 받을 수가 없다오. 그런데 다행히 각하를 
만나게 되었소. 각하의 기개는 남들보다 뛰어나 귀신이 감히 범접하지 못할 
터이니 나를 인도하여 산해관을 벗어나도록 해주겠소?"
  김이소가 대답하였다.
  "제가 어떻게 산해관을 벗어나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해흥군이 말하였다.
  "공의 기백은 모두 머리에 모여 있으니 나의 혼백이 공의 머리에 붙으면 나를 
가로막는 귀신들을 피해갈 수 있을 것이오. 그렇지만 이곳과 산해관과의 거리는 
하룻길이 넘으니, 공이 고통을 잘 견디러 신음하는 소리를 내지 않아야만 귀신이 
범접을 못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 귀신들에게 저지당하여 산해관을 빠져나갈 
수 없게 될 것이오."
  김이소가 감히 거절하지도 못하고 억지로 그렇게 하겠노라고 허락하고 새벽이 
되어 출발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머리에 큼 돌을 얹어 놓은 듯한 느낌이 들고 
몸이 쑤시고 아파 고통을 감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억지로 혼신의 힘을 
다하여 가마를 타고 산해관까지 이르나 마치 태산이 머리를 짓누르는 것 같아 
자신도 모르게 '아야!' 하는 통성이 저절로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랬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머리와 이마가 매우 홀가분하게 여겨지면서 곧바로 쑤시고 아픈 
고통이 사라지므로, '아차!' 하고 수없이 후회하면서 돌아와 이 사실을 해흥군의 
집안에 나타나기를 매우 신령하게 하고, 제사 때마다 의자에 앉아 제사 음식의 
기를 마셨는데, 만일 불결함이 있으면 번번이 그 여종에게 벌을 내리므로 온 
집안이 두렵게 여겨 조금이라도 게을리함이 없었다. 수십 년이 지나서야 그의 
영험도 점점 줄어들었다고 하였다.

     큰 뱀이 배 위에 서려 있었던--김종수

  김종수(1723__1799)의 본관은 청풍이고 자는 정부, 호는 진솔 또는 몽촌이다. 
영조 26년(1750)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44년(1768)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정조 
13년(1789)에 정승에 임명되었다가 벼슬에서 물러나 기로소에 들어갔다. 시호는 
문충이고, 정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그가 일찍이 어떤 사건으로 남쪽 지방에 귀양 가서 그 고을 이방의 집에 우거한 
적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마루에서 낮잠을 자는데 큰 뱀 한 마리가 그의 
배 위에 서려 있었으나 김종수는 그것도 모른 채 자고 있었다. 곁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 허둥대면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마침 그 고을 수령의 잔심부름을 
하는 열세 살 된 이방의 아들이 점심을 먹고 관아로 나가다가 그 광경을 보고는 
얼른 달려가 큰 개구리 10여 마리를 잡아다 뱀 앞에 던지자 뱀이 개구리를 
잡아먹으려고 김종수의 배에서 스르르 내려왔다. 김종수가 그 사실을 알고 그 
아이를 몹시 기특하게 여기고, 사면되어 서울로 돌아올 적에 그 아이를 데리고 
같이 왔다.
  그가 평안 감사로 있다가 가시 조종으로 돌아오게 되자, 여러 고을의 수령들이 
대동강에서 전성하는 뜻으로 기생에게 춤과 노래를 크게 벌이게 하였다. 김종수도 
흥겨워 담뱃대로 뱃전을 두드리며 소동파의 적벽부를 외우는데 잘못하여 담뱃대가 
그만 강물 속으로 떨어지자 웃으면서 말하였다.
  "내가 평안 감사로 있은 지 2년 동안에 이 담뱃대도 평안 감영의 물건이었는데, 
지금 대동강의 신이 내가 갖고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강물에 떨어뜨리게 한 
것이오."
  그의 청렴 결백함과 풍류가 이와 같았다.

     벼슬길에 오르는 것을 비난한 갈처사를 의로운 친구로 사귄--김유근

  김유근(1785__1840)의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경선, 호는 황산이다. 순조 10년 
(1810)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직언하기를 좋아하여 그 때문에 여러 차례 영남의 바닷가로 귀양 갔었다. 
임금이 그의 그런 경력을 생각하여 다시 불러다 이조 판서에 임명하였다.
  그에게는 도의로 사귄 친구가 남산 아래 살고 있었는데, 갈처사라고 불렀으며, 
세상에서는 그를 아는 이가 없었다. 그 무렵에 갈처사가 김유근이 외출한 틈을 타 
시 한 수를 써서 벽에다 걸어두었는데 그 시는 이러 하였다.

  눈서리를 견뎌낼 대쪽 같은 지조
  서릿바람 겪은 꽃처럼 우아한 모습
  고요한 물에서 무한한 바다의 이치를 알게 되는 법
  어찌하여 다시 풍파를 일으키려 하오

  성명을 밝히지 아니하고 떠나버렸다. 김유근이 돌아와서 그 시를 보고 말하였다.
  "이 시는 틀림없이 갈처사가 내가 이조 판서가 되는 것을 비난하는 것이다."
  사람을 시켜 그를 찾게 하였지만 이미 살던 집을 버리고 떠난 뒤였다.

     얼굴은 지독히 못생겼어도 복이 많았던--윤명렬

  윤명렬(1762__1832)의 본관은 해평이고 자는 언국, 호는 석유이다. 얼굴이 
지독하게 못생겼다.
  정조 13년(1789) 삼일제에 장원급제하였으므로 임금이 그에게 전시에 곧장 
응시하도록 명하였다. 그런데 그 당시 상신 채제공이 윤명렬의 제술(시나 글을 
지음)은 고상한 품위가 없고 또 얼굴조차 못생겨 임금을 가까이서 모실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과거 급제자 명단에서 삭제할 것을 주청하자 임금이 
그 주청대로 윤허하였다.
  그것은 지난번 채제공의 종질이 상신 윤시동의 주청 때문에 과거 급제자 
명단에서 삭제되었다는 오해가 있던 터에 윤명렬이 윤시동의 가까운 친족으로 
잘못 알고 이런 주청이 있게 된 것이었다. 세월이 흐른 뒤에 임금이 말하였다.
  "윤 아무개의 아비 면동은 글을 잘 못한다는 비난은 이상스럽다."
  마침내 과거 급제자 명단에서 삭제한 것을 원상대로 회복시키도록 명하였다.
  언젠가 윤명렬이 여러 재상의 자제들과 나란히 앉아 점쟁이에게 운명을 점친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그 점쟁이가 윤명렬을 보고 말하였다.
  "이 분은 아주 가난하고 궁색한 형상이니 함께 논의할 필요조차 없소."
  그 말을 들은 윤명렬이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 나가 버렸다. 그 이튿날이 되자 
전날 상을 봐주었던 점쟁이가 윤명렬을 찾아와서 말하였다.
  "당신은 매우 존귀하게 될 상이며, 특히 등허리상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하게 
될 상이오. 내가 이 세 꾸러미의 돈을 당신에게 건네주겠는데, 한 꾸러미는 곧장 
술과 안주를 마련할 비용으로 주는 것이며 두 꾸러미는 당신이 몹시 가난하니 
지금 당장 땔감과 양식을 사는 데 쓰시오. 그리고 뒷날 틀림없이 존귀하게 될 
터이니 20년 뒤에 되돌려주는 것으로 3천 냥짜리 물표를 만들어 나에게 주시오."
  윤명렬이 흔쾌히 그 제의를 허락하였다. 뒤에 청나라에서 조선의 
노론, 소론에 대한 곡해가 생겨 그 사실을 밝히기 위하여 윤명렬이 사명을 
받들고 연경에 가서 잘 수습하고 돌아오자 그 공로가 인정되어 강원 감사로 
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전에 그의 상을 봐준 점쟁이가 그때서야 찾아와서 
물표를 내놓으며 돌려주기를 청하므로 서슴없이 즉각 물표에 적힌 대로 내주었다.
  윤명렬의 부인은 학주 김홍욱의 후손이며 역시 못생겼다. 네 나들을 두었는데 
윤치승은 판관이고, 윤치응은 목사이며, 윤치의, 윤치영은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으므로 한 집안이 크게 드러났다.
  윤명렬이 일찍이 그의 부인에게 장난 삼아 이렇게 말하였다.
  "만약 내가 없었다면 부인의 그런 얼굴로 시집 갈 수 없었을 것이고, 나의 이 
얼굴로도 부인이 아니었다면 장가 들 수 없었을 것이오."
  시호는 충헌이고,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임금이 내려준 집을 거절한--윤득부

  윤득부(1723__1799)의 본관은 해평이고 자는 사휴, 호는 신암이다.
  평생동안 구차한 일은 한 번도 하지 않았고 의롭지 않은 방향으로는 한 
발자국도 떼어놓지 않아 명성과 의리 그리고 풍채와 절조는 당대 제일의 
풍류였다. 이 때문에 전조로부터 인정을 받아 성균관에서 유생을 지도하는 책임을 
맡는 등 은혜와 예우가 융숭하고 극진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줄어듦이 없었다. 
그래서 만약 당시 조정에서 아무런 결점이 없는 완벽한 인물을 꼽는다면 그보다 
앞설 이가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였다.
  그가 처음에 세자 시강원의 유성으로 임명되어 임금이 반현에 집을 마련하도록 
명령하고 집을 마련할 돈을 내려 주었더니, 윤득부가 사양하며 이렇게 아뢰었다.
  "강가에 오두막집이 있는데 그 값도 상당하여 그 집을 팔아 적당한 새집을 
마련하려고 합니다. 감히 돈을 내려 주시는 명령은 받들 수 없습니다."
  임금이 여러 번 유시하였지만 끝내 명령을 따르지 않으므로 대궐 안의 일을 
맡은 관원에게 엄밀히 영을 내려 강가에 있는 윤득부의 집을 후한 값으로 
사들이게 하여 그 돈으로 집을 사서 살도록 하였는데, 반현의 초라한 집이 바로 
그 집이었다.

     스승의 꿈대로 우부빈객이 된--이의철

  이의철(1703__1778)의 본관은 용인이고 자는 원명, 호는 문암이다.
  도암 이재 문하의 선각자로 그와 비교될 만한 인물이 없었다. 그래서 도암이 
언제나 글을 지을 적이면 번번이 그와 상의하곤 하였다. 어느 날 도암이 문암에게 
말하였다.
  "지난밤 꿈에, 자네 등 뒤에 '우부빈객 이의철'이라고 씌어 있는 것을 보았네. 
나는 헛된 꿈을 꾼 적이 없었는데 혹시라도 그 전처럼 맞히려는지?"
  그러던 차에 정말로 문암에게 경전의 학문이 뛰어나다고 하여 우부빈객 홍문관 
제학을 제수한다는 어명이 떨어졌다. 과연 스승의 꿈대로였다.

     성실과 솔직함으로 끝내 아내를 효부로 만든--이규복

  이규복(?__?)의  는 송석이다. 처음 도암 이재를 찾아갔을 때 도암이 그의 집안 
내력을 묻자, 이규복이 시를 지어 이렇게 대답하였다.

  삼대에 걸쳐 기마병의 신역 대신 포목을 바치는 자이고
  일생동안 산골 향교의 심부름하는 신세입니다

  자신의 미천한 처지와 신분을 숨기지 않는 솔직한 사람으로 이미 분수를 알고 
있었기에 그로 인하여 그의 성실한 마음도 알게 되었으며, 학문의 조예 역시 매우 
뛰어난 선비였다.
  그의 아내가 처음에는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았는데 이규복의 훌륭한 행실을 
보고, 항상 다투며 갈등을 빚던 마음이 감화되어 마침내 효부가 되었다.
  이규복이 강원도 정성의 송석에 살았기 때문에 스스로 호를 송석으로 지었다고 
한다.

     귀신도 꺼려하는 억센 기상의--김정묵

  김정묵(?__?)의 본관은 광주이고 호는 과재이다. 
스무 살이 되었을 무렵, 종가의 부인이 무당에게 미혹되어 대대로 전해오던 많은 
재물을 모두 없앴다는 소문을 듣고, 김정묵이 몸소 그 무당의 집으로 찾아가 그의 
늠름한 기품으로 자초지종을 물으려 하는데 무당이 파초를 쥐고 방울을 아무리 
흔들어 대도 신이 내리지 않아 그의 술수를 행할 수가 없었다.
 대체로 억센 남자의 기상은 귀신도 꺼려하는 것이었으므로, 과재의 행적이 우암 
송시열의 어렸을 적 일과 비슷하였다.

     과장의 문란함을 보고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은--이직보

  이직보(1738__1811)의 본관은 연안이고 자는 유종, 호는 중주이다.
  젊어서는 과거 공부에 힘쓰기도 하였다. 그런데 매번 과거 시험장에 가보면 
요로의 인사에게 청탁하는 규격화된 서신, 즉 관절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이직보는 번번이 그 관절을 받지 않았다. 그러자 종형인 판서 이익보가 그에게 
관절을 받아 오도록 권하였으나, 이직보는 그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지암 
김양행을 따라 여주에다 살 곳을 정한 뒤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이익보가 이렇게 책망하였다.
  "선비가 과거 공부를 하여 벼슬하기를 일삼지 않으면 자신을 내버리는 것이다."
  그는 관절을 하면서까지 벼슬길에는 나아가지 않겠다는 소신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으니 그의 조용하고 욕심이 적었던 것은 타고난 성격 때문이었다. 그의 종질 
이술원은 늘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종숙은 바로 옛날에 이른바 속세를 떠나 은둔 생활하던 신선 같은 
선비올시다."

     사치하고 망하지 않은 사람 없다고 책망한--김용겸

  김용겸(1702__1789)의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제대, 호는 교교재다.
  예에 밝아 매번 사대부 자제의 관례 때 갓을 씌워 주며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경계하는 빈의 자격으로 초대되어 의식을 진행하면서 사소한 실수도 없었다.
  언젠가 이우당 조태채 사손의 관례에 초대받아 갔다가 그 물건들이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것을 보고는 그만 그 집에서 나오자, 그 집 주인이 왜 그러시냐고 
물으니 김용겸이 이렇게 꾸짖었다.
  "사치하고 안 망한 사람은 없으니 나는 이런 관례 의식에 참여하고 싶지 않소."
  주인이 무릎을 끊고 무수히 사죄한 뒤  즉시 꾸밈없이 검소하게 바꾸니, 
김용겸이 그제야 의식을 진행하며 거듭 경계하고 돌아왔다. 벼슬이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제자에게 좌우명이 될 시를 지어 경계한--정종로

  정종로(?__?)의 본관은 진주이고 자는 사앙, 호는 입재다. 우복 정경세의 
사손으로 집안에 전해오는 학업을 잘 계승하여 상주 우상의 옛집에서 경서를 
강론하니, 영남의 선비들이 그를 따라 배운 사람이 많았다.
  일찍이 그가 제자 최상룡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주었다.

  천리 길 멀다 않고 찾아온 자네가 가련한데
  석실에서 얼마 동안이나 글을 읽었던가
  약석은 준걸들이 뒤끓는 곳에서 만들어지고
  젊었을 때 재덕을 고상하게 닦아야 하네
  학문은 세밀하게 철저히 하며
  일 처리는 나무 다리를 건너듯 조심해야 하네
  다시 소강절처럼 운명을 추산할 수 있다면
  마음대로 초어편에 화답해도 무방하다네

  역시 젊은 선비들을 경계하는 채찍이 되어 두고두고 암송할 만하다.

     술과 시를 즐기며 경치 좋은 곳에서 숨어 산--이양연

  이양연(1771__1853)의 본관은 전주이고 자는 진숙, 호는 임연 또는 산운이다.
  여덟 살 때 동그라미 하나를 그리고, 동그라미 속에 네모를 그리고 그 네모 
안에 '인'자를 썼는데, 그것은 하늘과 땅과 사람, 즉 삼재를 상징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장성해서는 성리에 대한 학설을 강론하여 밝히니, 홍석주가 그를 충청도 
도사로 추천하여 임명되었으며, 헌종조에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다.
  그는 술을 마시고 시 짓기를 즐겼으며 풍광이 뛰어난 곳에서 놀기를 좋아하여, 
일찍이 당나라 때의 학자 부혁이 자신을 '높은 산의 구름이 끼는 곳에 숨어 사는 
사람'이라고 한 것을 모방하였으므로, 고향에서는 그를 산운으로 불렀다.
  어느 날 율곡 선생의 문집을 읽다가 어슴푸레 깨닫고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지향하는 도가 여기 있다."
  이어서 송나라 때 이연평이 세상과 단절하고 풀로 지은 옷을 입고 나무 열매를 
먹으며 은둔 생활했던 일을 자신의 공부하는 목표로 삼고, 마침내 온돌을 없애고 
이불을 덮지 않으며 배고프면 솔잎을 씹고, 입으로 글을 외고 손으로는 글을 
베끼기를 병이 들거나 먼 길을 갈 때도 중단하지 않았다.

     수절하는 기생 무운을 사랑한--이경무

  이경무(1728__1799)의 본관은 전주이고 자는 사직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금위대장, 훈련대장을 거쳐 형조 판서를 지냈다.
  그가 강계부사가 되었을 적에 그 고을에 무운이란 기생이 있었는데, 용모와 
재능이 뛰어나 당시에 명성이 자자하였다. 이보다 앞서 서울에 사는 성 진사란 
자가 우연히 강계에 왔는데 무운이 그와 잠자리를 같이하고는 애정이 매우 
깊어졌다. 성 진사를 전송한 뒤로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로 몸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쑥으로 뜸을 떠서 종기가 난 것처럼 하고는 몹쓸 병이 있다고 
핑계를 대었다.
  그런 일이 있은 뒤에 이경무가 부임하여 그를 불러다 보고는 가까이하려고 
하였더니, 무운이 종기 난 곳을 풀어 보이며 이렇게 말하였다.
  "첩에게 이런 종기가 있어 감히 사또를 가까이서 모실 수 없습니다."
  이경무가 이렇게 말하였다.
  "그렇다면 너는 내 앞에서 잔 심부름이나 하는 것이 좋겠다."
  이 때부터 무운은 낮이면 청지기 노릇을 하고 밤이면 그의 처소로 돌아가곤 
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4,5개월이 지나자 어느 날 밤에 무운이 갑자기 이경무 앞에 
나와서 말하였다.
  "오늘 밤에는 사또를 잠자리에서 모실 수 있겠나이다."
  이경무가 되물었다.
  "네가 몹쓸 병이 있다고 하였는데 어찌하여 그런 말을 꺼내는가?"
  무운이 대답하였다.
  "첩이 성 진사를 위하여 수절을 하였기 때문에 제가 일부러 쑥으로 뜸을 떠서 
종기가 난 것처럼 하여 다른 사람의 접근을 막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또를 모시고 몇 달을 지나면서 사또의 동정을 지켜보았사온데 참으로 훌륭한 
대장부이십니다. 첩이 아무리 식견이 없는 비천한 기생이기는 하오나 어떻게 
사또를 흠모하여 존경하는 마음이 없겠나이까?"
  이경무가 빙긋이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네 마음이 그와 같다면 잠자리를 함께 할 수 있겠다."
  그 후에도 여느 때처럼 대해주며 유달리 가까이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다가 
임기가 차서 서울로 돌아오려고 하는데, 무운이 따라오기를 바라므로 이경무가 
말하였다.
  "나에게는 본처와 첩까지 있으니 너를 데리고 가는 것은 편안하지 못하겠구나."
  무운이 말하였다.
  "만약 그러시다면 첩은 수절을 하겠나이다."
  그러자 이경무가 다소 비웃는 투고 말하였다.
  "네가 말하는 수적이란 성 진사를 위함이냐 아니면 나를 위한 것이냐?"
  무운이 갑자기 안색이 변하더니 즉시 단도를 가져다가 자신의 왼쪽 손가락을 
내리치는 것이었다.
  이경무가 깜짝 놀라 데려가겠다고 하였지만 그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작별하고 말았다.
  10여 년이 지난 귀에 이경무가 훈련대장이 되어 성곽과 나루를 보수하고 
정비하던 무렵의 어느 날, 무운이 찾아와서 뵙기를 청하므로 이경무가 기뻐하며 
불러다 보고 그와 거처를 함께 하면서 밤에 그를 가까이하려고 하였더니 있는 
힘을 다하여 완강히 거절하는 것이었다. 이경무가 그 까닭을 물으니, 무운이 
대답하였다.
  "사또를 위해서 수절하기 때문입니다."
  이경무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이미 나를 위하여 수절한다면 어찌하여 나마저 거절한단 말인가?"
  무운이 말하였다.
   "그 뜻은 이미 남자를 가까이하지 않겠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맹세하였기에 
감히 사또의 명령도 따를 수 없나이다."
  1년 동안 함께 거처하면서 서로 가까이하지 않았다. 그 뒤 이경무의 처가 죽자 
무운이 상중에 달려와 서울에 머물다가 장례를 치른 뒤에 되돌아갔으며, 
이경무가 죽었을 때도 그렇게 하였다. 스스로 운대사란 호를 짓고 그대로 자기 
집에서 일생을 마쳤다. 이경무의 시호는 무숙이다.

     순라군으로 시문을 잘하여 어전에까지 불려간--왕태

  왕태(?__?)의 일명은 한상이고 자는 보경, 호는 수리이다. 고려 왕씨의 후손이다.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생계를 꾸려가기 어려워 나이 스물 넷에 김성을 가진 
노파의 주막에서 술상 나르는 일을 거들면서 얻어먹고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술상 나르다가도 틈만 나면 책을 앍으므로 처음에는 노파가 그러지 말라고 
꾸짖자, 그 뒤로는 책을 품고 다니면서 읽기도 하고 간혹 밥을 짓는 불빛으로 
책을 보기도 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노파가 그의 뜻을 갸륵하게 여겨 날마다 초 
한 자루씩을 사주어 밤에도 열심히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해주었더니 이 때문에 
문장이 크게 향상되어 그를 몰라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언젠가 금호문(창덕궁 돈화문의 서쪽문) 밖에서 징발된 병졸 대신 보초를 
서는데, 이 날 따라 달빛이 유난히도 밝기에 움막 속에서 나와 "상서" 한 장을 
외우니 그 목소리가 쇠붙이와 돌을 치는 것처럼 낭랑하였다. 마침 그 때 대사간 
윤행임이 그곳을 지나다가 그 소리를 듣고 이상하게 여겨 수레를 멈추고 그를 
불러 보았더니, 더벅머리에다 의복은 남루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윤행임은 
놀라면서도 그를 알아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자네가 '강물이 맑아 밤이면 안개 끼는 때가 적다'고 시를 지은 왕상한이 
아닌가?"
  그 뒤에 소문이 대궐의 임금에게까지 알려지자 임금이 그를 불러다 시를 짓게 
하였더니, 몇 걸음 옮겨 놓으면서 이렇게 읊었다.

  따뜻한 바람은 신하들의 검은 장막에서 일고
  아침 햇살은 대궐의 붉은 문에 비치도다.

  어떤 사람의 이야기는, 왕태가 정조 77년(1787)에 경점졸(북과 꽹과리를 쳐서 
시간을 알리는 군졸)로 복무하면서 틈만 나면 대궐 밖 순라군이 머물러 있는 
곳에서 글을 읽었는데, 임금이 그 소문을 듣고 매우 기특하게 여겨 불러오도록 
명하여 그의 용모가 건장함을 보고 경서와 사기를 강독하게 하였더니, 임금이 
명이 떨어지자마자 외우기를 물이 흐르듯 거침없이 하였다 한다.
  그는 또 시를 지었으므로, 임금이 차례를 뛰어넘어 발탁하여 우림장으로 삼고, 
잇달아 큰 철장을 하사하여 야간에 궁성을 순찰하게 하였으며, 조령별장에 
임명하였다.

     도둑에게 해진 갓을 되돌려 받은--정민수

  정민수(?__1830)의 본관은 월성이고 자는 기범, 호는 벽산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에게 효성을 다하여 섬겼지만 집안이 워낙 
가난하여 거친 음식마저도 거르기가 예사였다. 걸칠 옷이 없어 맨발에 왼쪽에는 
짚신을, 오른쪽에는 나막신을 신고 시장에 낙 물건을 팔아 그날그날 어머니를 
봉양하곤 하였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초하루와 보름달에는 반드시 
제물을 갖추어 메고 가서 성묘를 하고 제사를 지냈는데, 그렇게 하기를 삼년상을 
마칠 동안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거나 날씨가 춥거나 덥거나를 가리지 않았다.
  그가 본래 의술을 배웠지만 이루지 못하고 시 읊기를 좋아하였다. 그러다가 
나이 마흔 다섯이 되어서야 겨우 장가를 들었는데 배는 불룩하고 머리칼은 
짤막하였다. 그는 마침내 아내를 데리고 책을 자루에 넣어 적성의 암거천 가로 
가서 살았다. 그런데 그 무렵에 큰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을 구하러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무리 수십 명이 몽둥이를 들고 밤에 그 집으로 들어가 식량을 
빼앗으려고 위협하였다. 정민수가 마침 울타리 틈에 숨어 있다가 불쑥 나타나 
짤막한 작대기를 내보이며 이렇게 말하였다.
  "누구는 뭐 무기가 없겠는가? 도대체 너희들이 나를 어쩌겠다는 것이냐?"
  도적이 하도 어이가 없어 크게 웃자 정민수도 따라서 크게 웃고는 사립문을 
활짝 열어젖혀 그들을 모두 들어오게 해놓고 이렇게 말하였다.
  "남은 물건이 있거들랑 모두 가지고 가지고 가거라."
  관솔에 불을 붙여 집안이 환하게 보이도록 해 주었다. 그런데 방안에는 단지 
물러나는데, 그 중 한 명이 정민수의 갓을 가져가는 것이었다. 정민수가 도둑을 
꾸짖으면서 이렇게 타일렀다.
  "해진 갓을 아깝게 여기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찌 나로 하여금 갓도 없이 
민둥 머리로 제사를 받들고 손님을 맞이하게 하는가?"
  이에 그만 도둑도 미안해 하면서 그 갓을 되돌려 주었다.

     소탈한 천성을 타고난 화가--김홍도

  김홍도(1745__?)의 본관은 김해이고 자는 사능, 호는 단원이다. 그림 솜씨가 
뛰어나 산수, 인물, 화조, 영모 그림은 신묘한 경지에 이르지 않은 
부분이 없을 정도였다.
  정조 때 대궐 안에 그림을 그려 바쳤는데 그림 한 폭이 올려 질 적마다 임금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였다. 임금이 어느 날 대궐의 벽에다 흰색의 칠을 하게 하고 
거기다 바다 위의 모든 신선을 그리도록 명하였다. 그러자 그는 내시를 시켜 진한 
먹물 몇 되를 받들게 하고 그림 폭에서 비켜나 옷을 걷어 올리고 서서 붓을 휘둘러 
대는데 마치 폭풍우가 휘몰아치듯 비가 쏟아지듯 하더니 몇 시간이 채 안 되어서 
완성시켰다.
  그가 조상의 공덕을 관원이 되어 연풍현감에 이르렀다. 임금이 금강산 네 고을의 
산수를 그리도록 하면서 여러 고을에다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게 명하였으니 
모두가 특별한 은혜였다. 그러나 집안이 가난하여 간혹 끼니를 잇지 못하는 때도 
있었다. 언젠가는 어떤 사람이 매화 한 그루를 팔려고 하는데 매우 아름답고 
탐스럽기는 하였지만 가진 돈이 없어 그 매화를 구입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마침 
단원에게 그림을 그려 달라고 부탁하는 자가 있어 매화를 그려주고 그 대가로 3천 
전을 받았다. 그 중에서 2천 전은 떼어다 매화를 사고, 8백 전은 떼어다 술을 
사다가 뜻을 같이하는 친구를 불러모아 매화시를 지으며 마시고, 나머지 겨우 2백 
전으로 쌀이며 땔감을 사들일 생활 밑천으로 접어두고 하루 앞의 생활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았으니 그의 소탈함이랄까, 천성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의 아들 김양기는 호가 긍원인데 그도 역시 그림을 잘 그려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내력과 법도가 있었던 것 같다.

     산은 그리고 물은 그리지 않은 산수화가--최북

  최북(?__?)의 본관은 무주이고 초명은 치이며, 자는 칠칠이다. 세상에서 그의 
가계에 대해서는 아는 이가 없고, 이름 자인 '북'자를 파자하여 '칠칠'이란 자를 
쓰며 당시에 행세하였다.
  그는 그림을 잘 그렸는데 한쪽 눈이 멀어서 항상 안경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술 마시기를 즐기고 놀기를 좋아하여 한번은 금강산 구룡연에 들어가 술에 몹시 
취하여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다가 큰 소리로 이렇게 부르짖었다.
  "천하데 유명한 최북이 천하의 명산에서 죽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드디어 몸을 던져 물 속으로 뛰어들었는데, 때마침 이를 보고 구원해 준 사람이 
있어 살아날 수 있었다. 그는 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말술을 마셨으므로 저자 
안의 술심부름꾼이 술병을 가지고 오면 그가 번번이 모두 마셨기에 집안 살림은 
더욱 어려웠다.
  그가 평양과 동래, 두 곳을 유람하였는데, 비단과 명주를 가지고 그가 머무는 
집의 문 앞까지 따라와서 그림을 그려 달라고 청하는 자가 잇달았다. 어떤 사람이 
산수화를 그려 달라고 간청하자 그가 산만 그리고 물은 그리지 않으므로, 그 
사람이 이상하게 여겨 물었다.
  "물은 왜 그리지 않습니까?"
  최북이 쥐고 있던 붓을 내던지며 대답하였다.
  "허허 이 종이 밖에는 모두가 물로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린 그림이 자신의 드는데도 값을 적게 주면 번번이 성을 내어 꾸짖으며 그 
그림폭을 찢어버리고 남겨 두지 않으며, 간혹 그린 그림이 자기의 마음에 들지 
않는데도 그 값을 지나치게 많이 주면 큰 소리로 껄껄 웃다가 그 사람을 툭툭 
치면서 그 돈을 되돌려 주고, 문 밖에 나가 다시 사람을 불러다가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녀석은 값도 제대로 모르는 멍청이야."
  스스로 호를 호생자라 하였다. 그는 성격이 오만하여 남이 하려는 대로 
고분고분 따라 하지 않았다. 한번은 서평 공자와 1백 금을 걸고 내기 바둑을 
두었다. 그가 한창 우세한 국면을 이끌어가고 있는데 서평 공자가 한 수만 물러 
달라고 하자, 최북이 바둑판을 쓸어버리고는 두 손을 마주 잡고 단정히 앉아 
말하였다.
  "바둑은 본래 장난 삼아 두는 것인데 되물러 주기를 중단하지 않는다면 평생 
동안 한 판도 둘 수 없게 됩니다."
  그 뒤로 다시는 서평 공자와 바둑을 두지 아니하였다.
  또 언젠가 정승의 집을 찾아갔는데, 그 집 문지기가 그만 그의 성명이나 호를 
부르기가 거추장스러워 주인에게 최 직장이 오셨다고 적당히 고하였더니, 최북이 
화를 내며 이렇게 말하였다.
  "어째서 정승이라고 부르지 아니하고 직장이라고 부르는가?"
  그러자 문지기가 물었다.
  "언제 정승이 되셨습니까?"
  최북이 또 되물었다.
  "내가 언데 직장이 되었는가? 직함을 빌려서 나를 높이 불러 주려고 한다면 
어찌 정승이란 호칭은 놔두고 기껏 직장으로 부른단 말이냐?'
  정승을 만나지도 않고 그대로 되돌아 가버렸다.
  최북의 그림이 세상에 전하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최산수라고 불렀다. 금릉 
남공철이 이단전의 소개로 산방에서 최북을 알게 되었다. 최북이 남공철에게 
말하였다.
  "국가에서 수군 몇 만 명을 요소에 배치한 것은 장차 왜적에 대비한 것이긴 
합니다만 왜적은 해전 연습만 필사적이 데 비하여 우리나라 풍속은 해전 연습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왜적이 쳐들어오더라고 우리가 바다로 나가 응전하지  
않고 내버려 두면 저들은 저절로 물에 빠져 죽을 터인데, 무엇 때문에 삼남의 
백성들을 괴롭히면서 소란을 떨게 합니까?"
  다시 술을 가져다 새벽녘이 되도록 마시면서 대화를 계속하였다 세상에서는 
최북을 술꾼이니 그림 그리는 아전이니 하기도 하고, 심한 경우는 미치광이로까지 
여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말은 조리가 있고 넌지시 비꼬는 내용이 많았다. 
이단전이 말하였다.
  "최북은 글 읽기를 좋아하면서 경저에서 죽었는데, 그의 나이가 얼마인지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

     대나무와 난초를 잘 그린--임희지

  임희지(1765__?)의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경부, 호는 수월도인이다. 그의 
사람됨이 기개가 높고 지조가 있었으며 술을 좋아하여 여러 날을 술에 취한 상탤 
지내기도 하였다. 그는 특히 대나무와 난초를 잘 그렸는데, 대나무를 그리는 
솜씨는 표암 강세황과 명성이 비슷하였지만 난초 그림은 단연 그보다 뛰어났다.
  그가 그림을 그리고는 번번이 '수월'이란 두 글자를 써서 그것이 그림의 내용과 
연결이 되게 하고, 간혹 그림에다 글씨를 쓸 경우에는 마치 도교에서 전하는 
부록(예언서)처럼 이해하기 어렵게 하고, 글자의 획도 기이하고 고색을 띠게 하여 
다른 사람이 쓴 글자와는 특이하게 하였다.
  그는 또 피리를 잘 불었으므로 그에게 배우는 자가 많았다. 집안에 남은 
물건이라고는 없었고 한 명의 첩을 데리고 있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정원에다 꽃을 가꿀 형편은 못되지만 이 계집이 좋은 꽃 한 떨기 구실은 
제대로 한다오."
  거처하는 집은 몇 칸에 지나지 않고, 반 이랑도 채 안 되는 빈 터에다 못을 
파서 사방 몇 자 정도 되기는 하였으나 물을 얻을 수가 없으므로 쌀 일은 물을 
모아 그곳에다 부으니 조그마한 연못이 꾸밈없이 커 보였다. 그리고는 그 
못가에서 휘파람 불고 노래하며 말하였다.
  "나의 호를 수월도인이라고 한 뜻을 저버리지 않으려는 뜻에서이니, 달이 
어떻게 물을 가려가며 비추겠는가."
과히 그의 풍류가 어느 정도인지 알 만하였다.
  그가 다른 책은 가진 것이 없고 오직 "진서" 한 부만 가지고 있었다. 일찍이 
배를 타고 교동으로 가려고 하는데 바다 가운데 이르러 갑자기 거센 비바람을 
만나 거의 건널 수 없게 되었다. 배 안의 사람들이 모두 부처와 보살을 불러대자, 
임희지가 느닷없이 큰 소리로 껄껄 웃으며 일어나 시커먼 구름과 흰 파도 
사이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는 것이었다. 얼마를 지나 비비람이 잠잠해지자 곁에 
있던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하였다.
  "사람이 한번 태어났다가 죽는 것은 정해진 이치인데, 바다 가운데서의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는 기이하고 장엄한 진풍경은 아무나 구경할 수 없으니 춤을 안 
추고 배길 수 있겠는가?"
  그가 거위의 깃을 엮어  옷을 만들고는 달 밝은 밤에 두 개의 상투를 틀고 
맨발에 거위 깃옷을 걸치고 생황을 가로로 불면서 걸어가니, 보는 이들이 정말 
귀신이 나타난 줄 알고 모두 도망쳤는데, 그의 미치광스럽도록 꾸밈없는 행동이 
대체로 이런 정도였다.

     닥쳐 올 일을 미리 짐작하고 대처한--이서구

  이서구(1754__1825)의 본관은 전주이고 자는 낙서, 호는 척재 또는 강산이다. 
영조 50년(1774)에 문과에 급제하고, 순조 25년(1825)에 우의정으로 임명되었다. 
시호는 문간이다. 그가 정승에 임명되자 판서인 풍석 서유구가 좌객들에게 
말하였다.
  "강산이 정승이 되리라는 것은 그가 약관 때부터 우리 선친께서 이미 
짐작하셨던 바다. 강산이 약관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우리 선친과 규장각의 
관원으로 함께 대궐에 들어가 임금을 알현하고 계실 적에, 그 아뢰는 것이 
상세하고 분명하며 행동거지가 무게가 있어 사람들이 그를 대단한 인재로 지목하고 
모두들 그가 삼공이나 보상의 지위에 오를 것을 예견했었다. 언젠가 우리 
선친께서 혼자 남산 밑 조그마한 집에 살고 있는 강산을 찾아가신 적이 있었다. 
인사가 끝나자 갑자기 행랑 아래서 떠들썩한 소리로 강산의 성명을 불러대며 
욕설을 퍼붓는 자가 있었다. 그러나 강산은 목소리며 얼굴 표정이 조금도 
동요됨이 없이 종을 불러 이렇게 말하였다. '저 놈이 강상의 죄를 범하였는데 다시 
그 죄를 용서해 줄 것 같으면 또다시 멋대로 못된 짓을 저지를 것이다. 저렇게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데도 만약 용서한다면 앞으로 법을 시행할 수 없게 되고 
사회기강이 허물어질 터이니, 너는 저놈을 수구문 밖으로 끌고 가서 없애 버리고 
오너라.' 그 종이 명을 받고 떠났는데, 우리 선친께서 그 일의 시종을 알아보려고 
점심을 함께 하며 하루 종일 이야기하고 있었다. 해가 질 무렵에 수구문으로 갔던 
종이 돌아와 그 놈을 그만 죽였다고 고하자, 강상이 이렇게 말하였다. '그 놈이 
비록 큰죄를 범하여 법대로 죽이기는 하였지만 우리 집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자이니 매장은 후하게 해주어라.' 종이 응답하고 나가므로, 우리 선친께서 그래도 
미심쩍게 생각하여 그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데, 종이 다시 와서 고하기를, 
'형조의 서리가 뵙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강산이 서리를 불러들여 연유를 
물었더니 서리가 대답하였다. '형조 판서 재감께서 지금 등청하여 계시면서 수구문 
밖에 피와 살점이 난자한 시체 한 구가 있다는 보고를 받으셨는데, 바로 본댁의 
종이었습니다. 관아에 통고하지 않고 사사로이 사람을 때려 죽였으니 이는 법을 
벗어나 처벌한 것이기 때문에 특별히 소인에게 탐지하여 보고 오라고 
명하셨습니다.' 그 당시 형조 판서는 바로 채제공이었다. 강산이 조용히 서리에게 
말했다. '그 자는 우리 집의 사노이며 강상의 죄를 범하였기에 법으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고 또 관아에 통고할 것 같으면 역시 수치스러운 일이 되겠기에 
그리한 것이네.' 젊고 명망이 있는 인사로 목소리와 얼굴빛이 전혀 동요됨이 없이  
차분하게 일을 처리하였느니 어찌 원대한 인물이 아니겠는가?"
  이서구는 닥쳐 올 일을 미리 알아맞히는 때가 많았다. 순조 때 두번째로 전라 
감사에 임명되어 적폐를 바로잡고 선정을 펴니 온 도가 그를 신뢰하고 있었다. 
임기가 끝나 서울로 돌아올 무렵에 호적을 가져다 여러 서리에게 나누어 주며 다시 
베껴 오도록 하여 어느 창고에다 별도로 보관하게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호적 창고에 불이 나서 다른 장부는 하나도 남김 없이 모두 타버렸지만 새로 
베껴다 따로 보관해 둔 호적은 아무런 탈이 없었다. 자기가 떠난 후 이러한 일이 
저질러질 것을 짐작한 바 있었다.
  또 다른 일로는 그가 전라 감사로 있을 때 어느 날, 하늘의 북두칠성이 
나주지방에 광채를 내며 떨어지는 것을 보고 감영에서 부리는 하인을 불러 단단히 
일렀다.
  "네가 지금 당장 나주의 아무개 집에 가면 그 집 며느리가 틀림없이 아이를 
낳았을 것이다. 태어난 아이가 사내아이거든 반드시 죽여 버리고 계집아이거든 
죽이지 말고 돌아오너라."
  한참 뒤에 감영의 하인이 돌아와 이렇게 보고하였다.
  "정말 계집아이를 낳았더이다."
  이서구가 이렇게 말하였다.
  "만약 사내아이가 태어났다면 틀림없이 국가의 운명을 어지럽힐 존재였겠지만 
하찮은 계집아이인데 무엇을 해낼 수 있겠는가? 그러나 반드시 권세가의 첩실이 
되어 그 세력이 한 시대를 기울일 것이다."
  그 계집아이가 과연 커서 하옥 김좌근의 첩이 되었는데 바로 나합이었다.

     장례 때 백학이 상여를 인도한--이제로

  이제로(?__?)의 본관은 전주이다. 겨우 스무 살에 글 짓는 솜씨가 뛰어났다.
  어느 날 그의 아버지인 석견루 이복현의 꿈에, 붉은 색의 종이가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 종이에 '이제로를 불러 들인다'는 글자가 씌어 있었다. 이복현이 
꿈에서 깨어 매우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말은 일체 하지 않았다. 이제로 역시 아무 
탈이 없었다. 그런데 그 이튿날 이제로가 갑자기 그의 아버지 이복현 앞에 
꿇어앉아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소자의 운명이 이미 다하여 슬하에 더 이상 머물 수 없나이다."
  이어서 울먹이며 제 방으로 돌아가더니 조금 지나서 죽고 말았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이상한 향기가 그의 방에 가득하고 느닷없이 수백 마리의 백학이 그 집에 
날아와 떼를 지어 쫓아도 떠나지 않았다. 발인하는 날이 되자 사방에 운무가 끼어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더니만 백학이 상여에 모여 앞뒤에서 인도하기에 백학을 
따라갔는데, 도착한 곳은 바로 제천 의림지 위의 모산리 뒷산 기슭이었다.
  그 산 위에다 널을 멈추게 하였더니 갑자기 운무가 갈라지는 것이 마치 칼로 
자른 듯하기에 드디어 그 갈라지는 곳을 따라 묘자리를 파기 시작하였다. 파 
들어가다보니 구덩이 가운데 경쇠돌이 있으므로 두드리자 '공공' 하는 소리가 
나기에 일하던 사람이 이상하게 여겨 괭이로 조금 비집고 보니까 그 밑에 두 마리 
백학이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중 한 마리가 날아가려고 하므로 엉겁결에 덮어 버렸는데 그 한 
마리가 다친 듯이 부르짖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마침내 그 위에다 장례를 
지냈다. 그 뒤에 어느 중이 그 묘 아래를 지나다가 그곳을 가리키며 중얼거렸다.
  "저기가 아주 좋은 묏자리다. 저 곳에 묻힌 이의 손자가 틀림없이 스무 살 전에 
옥관자를 두르는 재상이 될 것이다. 그렇기는 하나 정기가 좀 새는 듯한데 꼭 
들어 맞을는지?"
  그 뒤에 정말로 손자 이인응이 태어나 열 아홉 살에 풍계군의 후사로 출계하여 
경평군에 봉하여졌으므로 1품 관원이 되어 옥관자를 두르게 되었다. 그러다가 
중간에 당시 외척을 비난하였다 하여 작호를 삭탈당하고 먼 섬으로 귀양갔다가 
돌아왔다.
  이인응의 동생 이택응은 젊은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승지에 
이르렀다가 요절하였으니, 그 묘터의 운세와 그 중의 짐작이 틀리지는 않았다.

     도둑도 감복하여 종이 되겠다고 자청하게 한--홍기섭

  홍기섭(?__?)의 본관은 남양이다.
  처음에 참봉으로 임명되어 계동의 윗마을에 살았는데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집에는 네 벽뿐이었다. 어느 날 밤에 도둑이 그 집에 들어가 두루 살펴보니 단지 
밥솥 한 개가 있을 뿐 다른 물건은 없었다. 도둑이 너무 가련하게 여겨 가지고 
있던 일곱 꾸러미의 돈을 솥 안에 넣어 두고 가버렸다.
  홍기섭은 본래 출입하기를 좋아하여 아침에 일어나면 찬물로 세수하고 친척과 
친구의 집을 두루 찾아다니기 일쑤였다. 비록 가난하게 살면서도 선대로부터 부려 
온 여종이 있었다. 그 여종이 홍기섭의 세숫물을 준비하려 부엌에 들어가 
솥뚜껑을 열어보니 솥 안에 돈이 가득 들어 있었는데 마치 누런 용이 서려 있는 
것 같았다. 그 여종이 기쁨에 찬 소리로 그렇게 된 까닭을 이런 투로 고하였다.
  "이는 하늘이 불쌍하게 여겨 내려 준 것이 분명하니 우선 땔나무와 식량이며 
고기를 사다가 한때  굶주렸던 배를 채워야 하겠습니다."
  홍기섭이 이렇게 타일렀다.
  "이것이 어찌 하늘이 내려 준 것이겠는가? 틀림없이 이 돈을 잃어버린 자가 
있을 터이니 오늘은 내가 집에 있으면서 동의 주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가 돌려 
주리라."
  드디어 대문에다 글을 이렇게 써서 붙였다.
  "돈을 잃어버린 자가 있으면 찾아가시오!"
  해가 질 무렵이 되어 그제 밤의 그 도둑이 동정을 살펴보려고 왔다가 대문에 
써붙인 글을 보고 이상한 생각이 들어 그 집의 여종을 불러 물었다.
  "이 집이 위 집이오?"
  그 여종이 대답하였다.
  "홍 참봉댁이오."
  그 도둑이 또 물었다.
  "대문에 써붙인 방은 무슨 뜻이오?"
  여종이 그 까닭을 상세히 설명하자 그 도적이 물었다.
  "나으리는 어디 계시오?"
  그 여종과 함께 들어가 홍기섭에게 인사를 마친 뒤에 이렇게 여쭈었다.
  "소인은 도둑입니다. 어제 밤에 밥솥을 훔쳐 가려고 들어와 나으리 집안의 
형편을 살펴보고는 도리어 훔친 돈이 있기에 솥안에 넣어 두고 떠났습니다. 
그러하오니 나으리께서는 이 돈으로 며칠의 생활 밑거리를 삼도록 하소서."
  홍기섭이 대단히 노여워하며 그로 하여금 그 돈을 받아가게 하자, 그 도둑이 
거절하며 말하였다.
  "오늘에야 처음으로 제대로 양반을 보았습니다. 이 뒤로는 맹세코 도둑질하는 
습관을 고치고 나으리 댁의 하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어서 돈을 받아서 가더니만 그 이ㅌ날부터 매일 홍기섭을 찾아왔는데 매우 
영리하였다. 이 사람의 집안은 본래 가난하지 않아 자주 급박한 형편에 처한 
사람을 구제하므로 그의 진실된 마음에 감동되어 홍기섭 역시 사양하며 물리치지 
못하였다.
  뒤에 홍기섭의 손녀가 헌종의 계비가 되고 아들 홍재룡이 익풍 부원군이 되자, 
홍기섭의 벼슬도 감사에 이르렀으며 드디어 크게 드러나게 되었다. 그 도둑의 
성은 유씨로 세상에서 유 군자라고 불렀다. 그는 자손들에게 대대로 옛날의 
정의를 기억하게 하였는데, 그 뒤로도 익풍 부원군 집안의 하인들이 유 군자의 
손자를 보고 도둑의 손자라고 놀려 대었다고 한다.
  홍기섭은 체구가 작고 야위었지만 외모가 깔끔하였다. 그가 가난에 쪼들릴 적에 
가끔 영안 부원군 김조순을 찾아가 문안을 드렸다. 영안 부원군이 평소 남의 상을 
보는 지혜가 있어 홍기섭이 귀하게 될 상이 있음을 알았다. 그런데 마침 영안 
부원군의 집에 나이 서른 살이 안 된 과부인 침모가 있었다. 그는 인물도 반반한 
데다 집안 형편 또한 넉넉하였으므로 영안 부원군이 그를 시집 보내려고 하였다.
  어느 날 영안이 그 여인으로 하여금 몸 단장을 화려하게 하고 술과 음식을 차려 
놓고 그의 집에서 기다리게 하고는 홍기섭이 오기를 기다려 잘 꾸민 안장을 
푸른 갈기의 당나귀 등에다 얹고 나이 어린 상노를 시켜 홍기섭에게 당나귀를 
타도록 권하게 하였더니, 홍기섭이 물었다.
  "어디로 가는 것인가?"
  그 상노가 대답하였다.
  "아무 곳의 경치가 뛰어나서 구경하실 만하기에 아무아무 영감 나으리께서도 
오셔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좌우에서도 떠나기를 권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군자를 그럴 듯 하게 속인다는 
것이다. 드디어 당나귀를 타고 떠나서 어느 곳에 이르니 몇 칸의 초가집이 깨끗이 
정돈되어 먼지 한 점 없었다. 상노가 말에서 내리기를 고하기에 홍기섭이 말에서 
내려 집 안으로 들어가니 묘령의 여인이 구름같은 머리칼을 살그머니 반쯤 들고 
마루에서 내려와 영접하여 들이거늘 홍기섭이 드디어 놀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평생 처음으로 당하는 일이로군."
  소매를 털고 돌아오려고 하였더니, 그 여인이 두세 번 들어가기를 권하는데 흰 
벽과 깁으로 바른 창문 등이 매우 범절이 있어 보였으며 한쪽에서는 차와 과일을 
올리면서 여인이 이렇게 말하였다.
  "소녀가 나이 젊은 과부로 재가하려고 하여 나으리의 높은 명성을 익히 
들었습니다. 첩이 되어 섬기게 해 주십시오."
  홍기섭이 대답하였다.
  "나는 본래 가난한 데다 처자가 딸려 있어 식구가 모두 십여 명이 되므로 거친 
음식도 잇대기 어려운데 네가 나의 첩이 된다면 무엇을 먹고 살아가겠느냐?"
  그 여인이 이렇게 말했다.
  "나으리에게 딸린 가족이 비록 많기는 하지만 첩에게 조금의 자산이 있사오니 
구제할 수 있습니다. 염려하지 마소서."
  홍기섭이 강직하기는 하나 평소 가난에 쪼들려 마음이 상하였던 터라 못이기는 
체 허락하고 몇 해 동안 함께 살면서 의지하는 바가 많았다. 그 뒤 홍기섭이 
영안의 예측대로 현달하게 되자 그 연인도 함께 복을 누리면서 오래도록 살았다.

     용호영의 장교를 곤장으로 다스린--임익상

  임익상(?__?)의 본관은 풍천이고 자는 경문, 호는 현계다.
  헌종 때 용호영을 새로 설치하여 정벌에 관한 일을 논의하게 하자, 거기에 
소속된 장교들이 교만하고 방자하게 불법을 자행하는 자가 많았다. 임익상이 금천 
수령으로 재직할 때 용호영의 장교가 무슨 일로 금천 고을에 와서 평민들을 
침탈하고 사납게 굴므로 임익상이 몹시 화가 나서 곤장으로 그 장교가 분을 품고 
돌아가 그의 대장에게 보고하자, 그 대장이 곧장 임금에게 아뢰었다. 임금이 듣고 
매우 좋아하면서 말하였다.
  "용호영은 내가 직접 설치하게 한 것이다. 소속 장교들이 폐단을 일으키리라는 
것은 짐작은 하였지만 어디를 통해서 확인할 수 없었는데, 이제 임익상을 통하여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그 장교를 해임시키고 대장에게는 부하들의 그런 행위를 금지시키도록 
엄중히 문책하였다. 그리고 임익상을 불러다 근밀한 자리에 배치하려고 하였더니 
어느 재상이 이렇게 아뢰었다.
  "임익상에게는 심장병이 있으므로 전하를 가까이서 뫼실 수 없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임금은 그를 바로 안주 목사에 임명하여 그의 현명함을 
칭송하였다. 임익상은 평소 간질이 있어 그 병이 발작할 때면 의관을 바로하고 
꿇어앉아 두 손을 꽉 쥐고 이를 깨물며 진정시키는데, 상하의 치아 사이에 베 
조각을 넣어두어 이를 깨무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하였으므로 발작이 멈추면 그 
베 조각은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다. 이 때문에 그 병이 발작하지 않아 벼슬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1년 동안에 몇 차례 발작할 때가 있는데 그 때는 항상 똑바로 
앉아 그 고통을 혼자의 힘으로 정말로 이를 악물고 견뎌내었으므로 세상 세상 
사람들은 그에게 그런 병이 있는 줄도 몰랐다.

     솔개가 병아리 채가는 것을 보고 운명을 점친--임치종

  임치종(?__?)은 의주에서 살았는데 젊어서 몹시 가난하여 남의 집에 고용살이를 
하게 되었다. 의주의 풍속에 남의 집 고용살이를 하게 되면 임금은 주지 않고 5년 
또는 10년이 지날 경우 상점 주인이 몇천 금의 자본을 대어 고용당한 사람에게 
문상이 되도록 하였다.
  그 당시는 조선과 중국이 서로 통상은 하지 아니하고, 사신이 왕래할 때 비로소 
국경의 관문을 열어 조선 상인과 중국 상인들끼리 서로  물건을 교역하게 
하였는데 그것을 가리켜 문상이라고 하며, 자본금에 해당하는 이익금은 모두 
고용한 사람의 소득으로 되돌려 주게 된다. 이렇게 한 뒤로는 자립해서 주상이 
되는 그런 풍습이었다.
  임치종이 마흔 살에 처음으로 문상이 되어 저자 거리에 나갔더니 한 곳에 
청루(기생집)가 있는데, '만금루'란 간판이 걸려 있는 것이었다. 영문을 몰라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장사꾼이 대답하였다.
  "새로 나온 기생의 미모가 당대에는 견줄 사람이 없을 정도로 뛰어나서 
하룻밤을 같이 지내는데 만금을 내놓아야 한다오. 그래서 중국의 부자 상인이라 
하더라도 그 기생과 친하게 지내기는 어려울 정도라오."
  그 말을 들은 임치종이 이렇게 생각하였다.
  '조선 사람으로 만약 이 기생에게 선수를 쳐서 친하게 될 것 같으면 중국 사람의 
콧대를 꺾어 놓을 수 있겠군.'
  마침내 많은 재산을 털어서 그 기생에게 주고 잠자리는 함께 하지 아니 하였다. 
그랬더니 돌아올 때가 되자 그 기생이 그의 성명을 물었다. 빈털털이가 되어 
돌아온 임치종을 보고 고향 사람들은 비웃었다. 몇 해를 사는 동안 너무나 
가난하여 스스로 생계를 꾸려 갈 방도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지난날의 그 기생이 어느 부유한 상인의 아내가 되어 장사꾼을 
통하여 임치종의 행방을 널리 수소문하였다. 마침내 어렵게 사는 그를 찾아내어 
10만 금을 주고 장사를 하도록 권유하여 임치종도 끝내 1백만 금을 소유하게 되는 
거부가 되어 그의 호기와 명성이 온 나라에 알려지고, 드디어 벼슬이 곽산 군수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에게는 지혜가 있어서 도모하는 일은 틀림없이 이룩하였으며, 또한 
계획을 잘하여 그 당시만 해도 전신과 우편이 없는 상태였는데도 천리 밖에까지의 
돈 운반을 잘하였고, 타고난 기개도 호탕하여 남에게 베풀어 주기를 
좋아하였으므로 호걸로 알려졌다. 어느 날 은덩이를 뜰에다 내놓고 바람을 쐬며 
햇볕에 쬐고 있는데, 가난하게 사는 어떤 사람이 그 많은 은덩이를 보고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지자, 임치종이 서슴없이 한 덩이를 집어 주었다. 곁에 있던 사람이 
이상하게 여겨 그 연유를 물었더니, 임치종이 대답하였다.
  "나도 옛날에는 놀라던 사람처럼 가난했던 신세였는데 어찌 동정하는 마음이 
없겠는가."
  그의 호걸스러움이 이와 같았다. 그 무렵 충주 어느 아전이 관아의 돈을 
횡령하여 축을 내었는데, 임치종의 소문을 듣고는 그를 속여 돈을 뜯어내려고 
찾아가 말하였다.
  "아무개는 충주에 살고 잇는 사람으로 농사가 극심한 흉년이 들어 구휼할 
방법이 없기에 그대에게 1만 전을 꾸어가려 하는데 꾸어 주겠소?"
  임치종이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대답하였다.
  "꾸어주리다. 하지만 여기서 충주까지는 1천 3백 리나 되는데 그 많은 돈을 
어떻게 운반하려 하오?"
  그 아전이 말하였다.
  "인부를 교대로 바꾸어 가면서 운송할 것이오."
  임치종이 비웃으며 대꾸하였다.
  "그대가 어찌 나를 속여가며 포탈한 돈을 채우려 드는가?"
  그 아전이 깜짝 놀라며 이렇게 사죄하였다.
  "정말 그대의 말과 같이 그대를 속이려고 하였습니다. 허나 그대가 어떻게 그 
사실을 알게 되었는지 그것이 궁금하오."
  임치종이 대답하였다.
  "지금은 2월이라 만약 그 돈을 인부를 교대로 바꿔가며 운송한다고 하더라도 
틀림없이 4월이라야 찾을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백성들은 모두 굶어 죽고 말 
터인데, 어찌 내가 그대가 나를 속이려 드는 것을 모르겠소. 그리고 또 지금은 
돈을 운반하는 일이 아주 어려운데, 내가 그대에게 선뜻 돈을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허락했을 적에 그대가 돈을 운반하는 계책에 대해서는 전혀 묻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만으로도 그대가 속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소."
  그 아전이 다시 물었다.
  "만약 그러하다면 그대는 빨리 운반하는 계책이 있소?"
  임치종이 빙긋이 웃으며 대답하였다.
  "나의 돈이 전국에 두루 퍼져 있어서 1만 전쯤 운반하는 데는 한 달도 걸리지 
않소."
  이어서 그 아전에게 1천 전을 주면서 말하였다.
  "그대의 말이 비록 거짓말이기는 하지만 천 리나 되는 험하고 먼 길을 
찾아왔는데 그 뜻을 저버릴 수 없어서요."
  그 아전이 사례하고 떠났다.

  임치종이 또 닭을 기르는데 직접 모이를 줘가며 길렀다. 그러던 어느 날 
병아리들이 뜰에서 모이를 쪼면서 쫑쫑거리고 있는데, 난데없이 솔개가 나타나 
그중 한 마리를 낚아채 가버리자 임치종이 집안 사람을 불러다 놓고 말하였다.
  "내가 멀지 않아 죽을 것이니 서둘러서 장부를 정리하도록 하여라."
  집안 사람들이 놀라며 그 까닭을 물었더니, 임치종이 대답하였다.
  "내가 십수 년 동안 지내오면서 나를 해롭게 하는 상대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솔개가 병아리를 낚아채 갔으니 운수가 장차 쇠퇴해질 것이고 운수가 
쇠퇴해지면 내가 죽게 된다."
  과연 임치종은 자신의 말대로 몇 달 만에 죽었다. 임치종이 그의 손자가 재산을 
잘 관리할 수 없음을 알고 천 석 정도의 토지를 궁궐에 맡겨 미리 부탁해 
두었는데, 갑오개혁 뒤에 황실의 재산을 정리하면서 그 토지를 그의 자손들에게 
되돌려 주어 그 집안의 넉넉함이 옛날과 같았으니, 그것은 대체로 임치종에게 
미리 내다보는 식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관서지방에 발길을 끊었던--김삿갓

  김병연(1807__1863)의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성심, 호는 난고이다. 그의 
할아버지 김익순이 선천 부사로 있으면서, 순조 12년(1812)에 관서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역적 홍경래에게 항복하였다가 마침내 형법으로 처형되고, 그의 집안은 
그 사건으로 폐문이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김병연은 스스로 하늘과 땅 사이의 죄인이라고 여겨 감히 태양을 
쳐다볼 수 없다고 하여 언제나 삿갓을 쓰고 다녔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그를 
김삿갓이라고 불렀다. 그는 특히 공령시(과거 볼 때 쓰는 시체)를 잘하기로 세상에 
명성을 떨쳤다.
  그가 일찍이 관서지방을 유람하였는데 관서에 노진이란 사람 역시 공령시를 
잘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김삿갓을 따라갈 수 없었다. 그래서 그가 김삿갓을 
쫓아보낼 생각으로 김익순을 비웃는 시를 지어 세상에 명성이 자자하였는데, 그가 
지은 시 가운데 더욱 김삿갓의 집안을 잘 비유하여 표현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대대로 국록을 받았던 선천부사 김익순아
  정시는 벼슬이 가산군수에 불과했어
  집안은 장동 김씨로 으뜸가는 명문이고
  이름은 장안에서 떨치는 순자 항렬일러라
  장군의 말 없는 긍지는 농서에서 항복하므로 추락하였고
  열사들의 공명은 능연각 초상화 끝에서 빛나도다

  김삿갓이 이 시를 보고 가져다 큰 소리로 한 번 읊고 이렇게 말하였다.
  "참으로 훌륭한 작품이다."
  이어서 피를 토하고 나서 다시는 관서지방의 땅을 밟지 않았다. 그가 늘 
황해도를 왕래하였는데, 그의 구월산 시는 다음과 같다.

  지난해 구월에 구월산을 지나갔고
  올해 구월에도 구월산을 지나게 되어
  해마다 구월이면 구월산을 지나게 되니
  구월산 빛은 언제나 구월일레라

  기상이 크고 의분에 북받쳐 슬퍼하고 한탄하다가 세상을 풍자하는 수 없는 
시문을 남기고 어느 주막에서 객사하였다.

     의주에서 꿈에 선조대왕을 본--임백수

  임백수(1797__?)의 본관은 풍천이고 자는 치호이다. 순조 25년(1825)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조상의 공덕으로 세자 익위사의 부솔에 보임되었으며, 헌종 5년(1839)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가 동지 부사의 중책을 맡아 의주에 도착하였으나 병이 자주 위독해서 압록강 
건너는 날짜를 세 차례나 물리기까지 하였다. 하루는 그가 목침을 베고 누워 그의 
셋째 아들 임경준에게 말하였다.
  "내가 꿈에 선조대왕을 배알하였더니, 당시의 명망이 대단했던 백사 이항복, 
한음 이덕형이 모두 대왕을 뫼시고 서 있었는데, 대왕의 말씀은 온순하고 
주고받는 이야기 소리가 울리는 듯하여 꿈에서 깨어났는데도 오히려 귀에 남아 
있으니, 이것은 그저 부질없는 일만은 아니다. 기록하여 두도록 해라."
  임경준이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런데 조금 지나서 임백수가 갑자기 
일어나 두건을 씻고 띠의 먼지를 털어낸 뒤 가마를 타고 곧장 취승정으로 갔는데, 
그곳은 바로 선조대왕께서 잠시 머무신 곳이었다. 임백수가 며칠 동안 병으로 
앓으면서 누워만 있었던 터에 갑자기 이런 우발적인 행동이 있었으므로 
좌우에서는 놀라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래서 번갈아가며 찾아가 중지할 것을 
간청하였으나 모두 들어주지 않고 마침내 행동으로 옮기고 말았지만 모두들 그의 
기력이 손상될까 염려해서였다. 그러나 아무런 탈도 없이 돌아왔고 이튿날은 
그대로 병을 참으면서 압록강을 건넜는데, 그의 병이 점차 회복되는 것이 마치 
신명이 돕는 듯하였느니, 어찌 선조대왕의 혼령이 그에게 이르렀던 탓이 
아니겠는가?
  그 뒤 임백수가 권세 있고 지위가 높은 사람을 탄핵한 이로 평안도 중화군에 
귀양 가서 주 첨지의 이웃집에 붙어 지내다가 한달 만에 풀려나 집으로 돌아와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5년 전의 꿈에, 어느 곳에 이르러 판서 신석우, 조석우와 함께 셋이서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가 돌아왔는데, 꿈에서 깨어났어도 너무나 또렷이 기억이 
되기에 그 연유를 몰랐더니만 이번에 주 첨지의 집에 가서 보니 문이며 대청이 
영락없이 꿈속에서 두 분의 판서와 이야기하였던 그곳이었다. 모든 일은 다 
까닭이 있어 정해지는 법이니 남을 탓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그의 벼슬은 이조 판서에 이르렀고, 나이가 많아 벼슬에서 물러나서는 봉조하가 
되었다.

     필명은 천하에 떨쳤으나 운명이 기구했던--김정희

  김정희(1786__1856)의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원춘, 호는 완당 또는 추사이다. 
순조 9년(1809)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0년 뒤인 순조 1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다.
  그가 일곱 살 때 입춘첩을 써서 대문에 붙였는데, 번암 채제공이 그 집 앞을 
지나다가 그 글씨를 보고 누구의 집이냐고 물었더니 참판 김노경의 집이라고 
하였는데, 참판은 바로 추사의 아버지였다. 채제공이 김노경의 집안과는 대대로 
전해오는 혐원이 있어서 서로 만나지 않는 처지였다. 그러나 그런 감정을 떠나 
특별히 그 집을 방문하자, 김노경이 몹시 놀라며 말하였다.
  "각하께서 어인 일로 소인의 집을 찾아주십니까?"
  채제공이 대답하였다.
  "대문에 붙여 있는 글씨는 누가 쓴 것이오?"
  김노경이 응대하였다.
  "소인의 아이가 썼습니다."
  채제공이 말하였다.
  "이 아이가 틀림없이 명필로 한 시대에 명성을 떨칠 것이오. 그러나 만약 
글씨를 잘 쓰게 되면 기필코 그 아이의 운명이 기구해질 터이니 절대로 붓을 잡게 
해서는 안 되오. 그러나 만약 문장으로 세상을 울리게 되면 반드시 크고 존귀하게 
될 것이오."
  김정희의 아버지 김노경이 평안 감사가 되었을 때의 일이다. 당시 조진관(조엄의 
아들)이 광주 부윤으로 있었는데 관할 지역 내인 남한산성의 군량미를 향리가 사취한 
사실이 드러나 그 책임자로서 파직된 일이 있었다. 김정희가 비록 명필로 세상에 
알려지기는 하였지만 익종(헌종의 아버지)이 조진관의 손녀에게 장가 들어 
세자빈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듣고 조정에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렸다.
  "장리의 손녀를 어찌 한 나라의 국모로서 모범을 삼을 수 있겠습니까?"
  이 상소로 조정에 상당한 파문을 일으키고 결국 이 사건 때문에 김정희도 
제주도로 귀양 가서 10년을 지내고서야 돌아와 벼슬이 겨우 참판에 이르렀으나 
후사가 없었다.

     노루가 간 길을 따라가서 사형을 면한--이인응

  이인응(?__?)의 본관은 전주이다. 인조의 동생인 능원 대군의 후손이다. 
상계군(이담)의 후사로 입양하여 이름을 호로 고치고 경평군에 대물림으로 
봉해졌다. 그러나 철종 11년(1860)에 외척을 비난한 사건으로 귀양 가게 되어 
작호가 환수되고 본 이름인 이세보로 불리다가 흥선 대원군이 정권을 잡고 나서 
조선조 왕실 및 그 일족의 족보를 통합할 때 이름을 인응으로 다시 고쳤다.
  처음에 이인응의 동생 이택응이 철종 때 충량과에 발탁되어 특명으로 한림에 
임명되었으나, 그 당시 외척으로 권력을 잡은 신하들이 부당하다고 아뢰고 
탄핵함으로써 그 특명을 받들지 못하였다. 그러자 철종이 크게 노여워하게 
되었는데, 임금의 노여움이 무서워 떨 정도로 대단해지자, 여러 신하들이 모두 
이인응이 그의 동생 이택응을 위하여 임금에게 몰래 호소하여 그렇게 된 것이라고 
여겨, 일제히 도성 밖으로 나가 대죄하였다.
  신하들의 집단 행동에 몹시 놀란 임금이 여러 차례 타이르는 유시를 내렸으나 
그들은 도성으로 들어오지 아니하고, 대간의 공론은 잇달아 발의되어 이인응을 
만약 사형에 처하지 않으면 나라 구실을 할 수 없다고 하면서 매우 격렬하게 
탄핵하자, 임금도 어쩔 수가 없어서 이인응을 신지도에 귀양 보내고 위리안치하게 
하고 소나무를 베어다 그 집 앞에 심게 하였다. 그런데 그 베어다 심은 소나무가 
모두 살아나 잎새가 푸르디 푸르고 그 이듬해 봄에는 송화가 활짝 피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그 뒤 4년 만인 철종 14년(1863)에 권력을 잡은 신하들이 다시 임금에게 
이인응을 잡아다 국문하기를 권하고 이어서 사약을 내리도록 명하게 하여 
금부도사가 이인응을 결박하여 호송하는 도중 천안 지역의 갈림길에 이르게 
되었다. 그 때 마침 노루 한 마리가 샛길로 넘어가거늘 이인응이 도사에게 
청원하였다.
  "방금 노루 한 마리가 샛길로 넘어가는 것을 보았는데 이는 좋은 징조인 듯하며, 
이 쪽으로 가는 것이 훨씬 더 빠를 것 같으니 이 길을 따라서 가게 해 주시오."
  도사가 그 길로 가도록 허락하였다. 한편 사약을 가지고 내려 온 금부도사는 
큰길을 따라갔었기 때문에 길이 서로 어긋나게 되었다. 그럭저럭 과천읍에 이르니 
그렇게 늦은 시간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인응의 신병이 갑자기 발작하여 한 
걸음도 떼어 놓을 수 없게 되었다. 하는 수 없이 도사가 그곳에서 하룻밤 묵어 
가도록 하였는데, 그날 밤에 철종이 승하하고 이튿날 그를 용서하는 왕명이 내려 
마침내 사형을 모면하고 곧바로 차례를 뛰어넘어 당상관에 임명되었으며,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고 승록대부로 승진하니 그의 나이 65세였다. 그 뒤 고종 
32년(1895)에 명성왕후의 참변을 듣고 통곡하다가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났다.

     자식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홍순목

  홍순목(1816__1884)의 본관은 남양이고 자는 희세, 호는 분계이다. 헌종 10년 
1844)에 문과에 급제하고, 고종 6년(1869)에 정승에 임명되어 영의정에 이르렀다. 
항상 근신하는 자세로 자신의 지조를 지켜 고인의 풍도가 있었다.
  그에게 영식이란 아들이 있었는데, 처음 태어날 적에 피가 묻어 있는 태를 
얼굴에 뒤집어쓰고 태어났으므로 홍순목이 상서롭지 못하다고 여겨 그 아이를 
키우지 않으려고 하자, 집안 사람들이 간곡히 만류하는 바람에 마음이 풀려 
그만두었다. 그리하여 그는 고종 10년(1873)에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규장각 
직각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갑신정변을 주도하는 개화당의 핵심 인물이 되어 활약하던 중 실패로 
돌아가 위병에게 살해되었다. 홍순목이 그 비보를 듣고 독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지만 곧바로 그의 관작도 삭탈되었다.
  홍영식의 형 홍만식은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다. 그러나 동생은 
갑신정변의 실패로 살해당하였고 아버지마저 자결하였다. 그 자신도 자진하려 
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지만 폐인으로 자처하였는데, 
갑오개혁 뒤에 모두 관직이 회복되었다. 고종 광무 9년(1905)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독을 마시고 자결하여 시호가 내려지고 벼슬이 추증되었다.

     외국과의 개방과 통상 논의를 맨 먼저 꺼낸--박규수

  박규수(1807__1876)의 본관은 반남이고 자는 환경, 호는 환재이다. 헌종 
14년(1848)에 문과에 급제하고 고종 9년(1872)에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그의 
조부는 연암 박지원으로 문장과 재학이 한 시대에 칭송되었다. 그러나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홍국영과 사이가 좋지 않아 그를 피하여 금천에서 살았다.
  얼마나 뒤에 홍국영이 패망하자 그제야 벼슬길에 나서기는 하였지만 
천문, 지리, 병법, 농업 그리고 경제에 대한 학술과 서양의 학문까지 
환하게 알았던 그의 지위는 군수에 그치고 말았다. 어쨌든 그런 연암의 손자 
박규수도 소년 시절에 재주가 있다는 명성이 더욱 높아 계동에 살 적에 익종이 
세자로 있으면서 변장을 한 차림으로 그를 찾아가자 그 일을 영광스럽게 여겼다.
  그가 평안 감사로 있을 적에 미국의 배가 삼화항에 정박한 일이 있었는데, 
민심이 놀라 동요할까 겁이 나서 하루 종일 연광정에서 풍악을 울리게 하면서, 
미국의 배를 얕은 여울로 유인하여 불태우게 하였다. 그러다가 고종 11년(1874) 
이후에 이르러서는 박규수가 나라 안팎의 사정이 급변하는 것을 보고, 마침내 
외국과 문호를 개방하고 통상을 하여야 한다는 논의를 처음으로 제기하자, 조정의 
많은 관원들이 떠들며 그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가 2년 뒤인 고종 13년(1876) 병자년 6월 20일에 이르러 일본의 전권대신 
구로다, 부대신 이노우에와 조선 대신 신헌, 부대신 윤자승이 강화도에서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는데, 이는 모두 박규수가 주선한 힘이었다. 그리고 또 일본에 
통상사절을 보내도록 임금에게 주청하여 참판 김기수를 선발하여 보냈으며, 또 
조선의 신진 문관으로 재능과 명망이 있는 18명을 뽑아 일본에 보내어 실정을 
시찰하게 하였다.
  그의 지위가 정승에 이르기는 하였지만 집안은 몹시 가난하여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집이 계동에 있었는데, 가난한 선비의 생활과 같았으며, 뜰앞에 한 그루의 
키가 작고 가지가 가로로 뻗어서 퍼진 소나무만 있어 박규수의 청렴한 풍채를 
연상하게 하였다.
  그가 평안 감사의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자 집안 사람이 절약해서 쓰고 남은 
재물로 3백 석을 수확할 수 있는 정도의 토지를 사들였는데 박규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땅 주인의 마음이 고약하여 이미 다른 사람에게 
팔아넘긴 토지를 이중으로 팔아먹은 셈이었다. 그렇게 되자 앞서 토지를 사들인 
자가 박규수에게 호소하였더니, 박규수가 말하였다.
  "일이 그렇게 되었는가? 이것은 그대의 전토인데 우리 집에서 잘못 사들인 
것이네."
  그 토지 문권을 가져오게 하여 불에 태워 버렸다. 집안 사람들이 몹시 놀라며 
그 값을 토지 원주인에게서 받아내려 하자, 박규수가 말하였다.
  "그렇게 하지 말라. 감사로 있다가 내직으로 들어와 정승이 되고 토지를 
사들였으니 이는 실제로 나의 명예를 손상시킨 것이다. 그리고 또 어떻게 정승이 
되어 백성과 송사로 다툼질을 할 수 있겠는가?"
  일체 없었던 일로 하고 더 이상 문제 삼지 못하게 하였다.

     효성으로 돌아간 아버지의 초상화를 얻게 된--이희익

  이희익(1844__?)의 본관은 연안이고 자는 치용, 호는 경당이다. 고종 11년 
(1874)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29년(1892)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승지에 
이르렀다.
  그는 효도와 우애가 남달리 뛰어나 성균관 대사성 정기회가 그의 효행을 
추천하였고, 김기수는 그의 학술을 추천하였다. 그의 아버지 이승우는 장악원정을 
지냈는데, 호는 석운으로 매산 홍직필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으며, "송서백선"을 
편찬하여 세상에 펴냈다.
  이승우가 세상을 떠났을 적에 아들 이희익이 그의 아버지 초상화를 그려 두지 
못했던 것을 한탄하면서 어느 화가를 대하여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으나, 그 
화가도 섭섭한 표정을 지으며 하직하고 돌아갔다. 그런데 3일 만에 그 화가가 
찾아와서 이희익에게 말하였다.
  "내가 집으로 돌아간 날 밤의 꿈에, 그대의 선공께서 나를 찾아오셔서 
말씀하기를, '자네가 특별히 내 모습을 그려주어 내 자식의 진심에서 우러나온 
정성을 저버리지 말기를 바라네' 하시면서 또렷하게 말씀하시기를 3일 밤을 
잇달아 그렇게 하셨기에 그 모습이 내 눈에 완연히 남아 있다오."
  그 자리에서 초상화를 그렸는데, 그 그림을 보더니 생전의 이승우의 모습과 
조금도 틀리는 데가 없었으므로 모두들 효성에 감동되어 이루어진 것이라고 
여겼다.

     민 중전을 변장시켜 장호원까지 피신시킨--홍계훈

  홍계훈(?__1895)의 본관은 남양이고 초명은 재희이며, 자는 성남, 호는 규산이다.
  고종 19년(1882) 임오년 6월이 되어 훈련도감 군졸에게 여러 달 밀린 봉급미 
가운데 겨우 한 달 치를 지급하면서 선혜청 산하의 창고 관리인이 교활하게 
농간을 부려 수량도 기준치에 미달되고 품질마저 나쁜 대다 돌과 모래 등이 섞인 
쌀을 지급하자, 군졸들이 혈기를 이기지 못하고 마침내 창고 관리인을 때려 
죽였는데, 그 창고 관리인은 바로 선혜청 당상인 민겸호가 사사로이 부리는 
하인이었다. 몹시 화가 난 민겸호는 마침내 주모자 2명을 체포하여 아침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처형하려고 하였다.
  이런 상황에 난군이 큰 소리로 한 번 외치자 쌓였던 원한이 격렬하게 일어나 
군영 안으로 마구 뛰어들어가 제각기 무기를 가지고, 한 부대는 먼저 민겸호와 
영의정 이최응 그리고 경기 감사 김보현을 죽이고, 한 부대는 의금부의 감옥문을 
마음대로 열어 죄수들을 내보냈다. 또 군졸을 서울 근처의 산으로 나누어 보내어 
모든 절을 불태우게 하였는데, 그것은 대궐에서 절에다 공양을 드리며 치성을 
드리느라 군졸과 백성을 돌보지 않아 창고의 곡식이 바닥이 났다고 여겨서다. 
그리고 한 부대는 곧장 훈련도감의 본영인 하도감으로 가서 일본인 교련관 
호리모또를 찔러 죽이고, 한 부대는 줄곧 대궐 안으로 들어갔는데, 무기를 든 
군졸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일시에 많이 몰려들어 궁궐 안으로 화가 밀어닥칠 
기색이 역력하였으며, 그들의 내심은 모두 중궁전인 내전을 겨냥하고 있었다.
  이런 다급한 와중에 홍계훈이 무예별감으로 교묘히 변장한 중궁을 호위하여 
세자 익위사 찬선 민응식의 장호원 고향집으로 피신하게 하였다. 그 뒤 중궁전의 
신임을 얻어 동학농민운동 때는 장위영의 영관이 되어 전주성을 회복하는 데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듬해인 고종 32년(1895) 을미년 8월에 내각 안에서 시국 수습에 대한 국론이 
나뉘고 정국이 혼란에 빠져들자 당시 집권세력에 밀려 뜻 있는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이렇게 한탄하며 생각하였다.
  "요즈음 임금의 권한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는 무리들이 있는데, 이것은 성상 
혼자서 국정을 운용하는 것이 아니고 중궁전에서 너무 지나치게 관여하여 개혁을 
하려던 정치가 날마다 잘못되어 가고 있어 나라의 앞일이 큰일이다."
  이런 와중에 백성들 상호간에 서로를 의심하여 남을 해치려는 마음이 크게 
싹트고 있었는데, 특히 이 때 훈련대 대대장 우범선은 바로 흉도 가운데서도 더욱 
사납게 날뛰는 자였다. 그는 이두황과 함께 못된 짓을 하면서 서로 도와 거느리고 
있던 훈련대를 일본 자객의 앞잡이로 삼을 것을 모의하고, 이두황이 광화문을 
따라 군사를 정돈하여 진격하려고 하였다. 이 때 홍계훈이 연대장으로 대궐 안에 
있다가 한쪽 손으로 그들을 가로막으면서 말하였다.
  "한밤중에 대궐로 침범하여 장차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냐? 나를 죽이지 않고는 
결코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흉도들의 탄환을 맞고 숨이 넘어갈 때까지 그들을 
꾸짖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우범선은 건청궁의 후문을 지키던 자들을 모두 
베어 버리고 침입하여 군사를 진두 지휘하며 곤령각에 이르렀다. 칼을 빼들고 
앞장 서서 계단을 지나 올라가니, 궁내부 대신 이경직이 큰 소리로 물러나라고 
꾸짖자, 우범선이 그 자리에서 그의 목을 베고 곧장 옥호루로 무단 침범하여 
중궁전을 시해하는 데 적극 도왔다. 연기와 불꽃이 가득한 속에 중궁전은 옥체가 
온전하지 못한 상태로 힘 없는 나라의 한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났다.

     피묻은 옷 곁에 대나무가 돋아났던--민영환

  민영환(1861__1905)의 본관은 여흥이고 자는 문약, 호는 계정이다. 호조 판서와 
선혜청 당상이었던 민겸호의 아들이다. 고종 15년(1878)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돈령부사에 이르렀다.
  고종 광무 9년(1905) 을사년 11월에 조선 정부와 일본 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 
사이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때 민영환이 소를 올려 그 부당함을 
간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곧바로 칼을 빼어 자결하였다. 10여 일이 
지난 뒤에 그의 피묻은 옷을 간직해 둔 곳에서 푸른 대나무 몇 줄기가 난간 
틈으로 돋아났는데, 그 기상이 하도 늠름하여 감히 범하지 못할 자태를 지니고 
있었다. 시호는 충정이고 정려되었다.

     이 책을 읽고

  "형님이 훗날 이 쥐구멍으로 나가려 하여도 잘 안 될 것이니 오늘 시험 삼아 
나가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 말은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 등 신진사류들을 모두 죽인 당대의 권신 
심정의 아우 심의가, 권세에 눈이 어두워 날뛰는 
병환의 진행이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르도록 위독해지셨는지를 모르겠습니다"
  "너의 사위는 범상한 인물이 아니니 너는 그가 하는 말은 굽혀서 따르고
어기지 말라"
  이 말을 마치고 이준경은 세상을 떠났다.
  이준경의 다른 호는 남당 또는 청련거사라고 하였으며,
74세에 죽었다. 시호는 충정이고 선조묘정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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