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연금술과 복잡계의 출현
(Alchemy and the Emergence of Complex Systems)
William Dembski
연금술은 한 가지 특정한 논리를 따르고 있고 이것은 연금술의 논리의 고유한 오류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것이다. 연금술이 갖고 있는 문제는 변형transformation의 원인이 되는 인과적인 과정을 이해하는 것에 대한 연금술 자체의 실패가 아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일차원의 폴리펩티드가, 기능을 가진 삼차원 구조의 단백질로 접히게 될 것이라 주장하는 것은 연금술이 아니다. 폴리펩티드가 단백질을 형성하기 위해서 어떻게 접히는가는 생물학에서는 열린 문제이다. 삼차원의 단백질들은 일차원의 폴리펩티드들로부터 소위 출현emerge한다. 이것은 반복적으로 그리고 믿을만하게 일어난다. 우리는 그 변형을 묘사할 수는 있지만, 아직 우리는 어떻게 변형이 발생하는지는 설명할 수 없다. 변형의 원인이 되는 메커니즘의 기초를 이루는 것에 대한 무지는 변형을 연금술로 만들지는 않는다.
어떤 것들이 다른 것들로 변형된다. 때때로 우리는 그 변형을 일으킨 원인이 되는 과정을 설명할 수 있다. 어떤 때에는 설명할 수 없다. 때때로 그 과정들은 지적인 작인agent을 필요로 하지만, 어떤 때는 어떠한 지적인 작인도 요구되지 않는다. 그래서 단어 조각scrabble piece(scrabble은 비슷한 단어 만들기 놀이의 상표명; 옮긴이)의 무작위적인 집합체를 배열해서 의미있는 영어 문장으로 바꾸는 과정은 지성의 인도를 필요로 한다. 반면에 물이 얼음으로 결정화되는 것은 지성의 인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단지 온도를 충분히 낮추는 것만이 필요한 전부이다. 물을 얼음으로 바꾸는 것은 연금술이 아니다. 단어 조각들의 무작위적인 집합을 의미있는 문장으로 바꾸는 것 또한 연금술이 아니다. 그 문제에 관해서는, 단백질을 접게 만드는 일반적인 법칙에 대한 우리의 무지에도 불구하고 일차원의 폴리펩티드를 기능을 갖는 단백질로 바꾸는 것 또한 연금술이 아니다.
그러면 연금술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무엇인가? 연금술의 문제는 인과적인 한정성 causal specificity의 부족이다. 인과적인 한정성은 문제의 발생을 설명하기에 충분한 한 가지 원인을 상술하는specify 것을 의미한다. 종종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그 원인이 그 현상을 일으켰는지를 설명할 수 없을지라도, 어떤 현상의 원인을 상술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나는 기체로 채운 닫혀있는 용기container를 흔들면 기체의 온도가 증가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경험으로부터 알고 있다. 그래서, 인과적인 선행자들을antecedents 상술하는 것에 의해서(즉, 기체로 채운 닫혀 있는 용기와 내가 그 용기를 흔들었다는 것) 나는 용기의 온도 상승을 설명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온도가 상승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을 갖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 볼츠만Boltzmann의 동력학 이론kinetic theory는 나에게 온도가 기체를 이루고 있는 입자들의 평균 운동 에너지에 상응하기 때문에, 그리고 용기를 흔드는 것에 의해서 내가 그 입자들에게 추가적인 운동 에너지를 공급했기 때문에 기체의 온도가 상승하는 것이라고 말해 준다. 볼츠만의 이론은 나에게 왜 온도가 상승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온도가 상승하는 것을 설명하는 원인을 상술하는specify 데에 볼츠만의 이론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과적인 선행자(즉, 기채로 채운 닫혀 있는 용기와 그 용기를 내가 흔든 것)를 상술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연금술은 인과적인 한정성을 의도적으로 피했다. 연금술적인 변형의 전형적인 예인 납 에서 금으로의 변형을 생각해 보라. 초기의 1회 분량의 시료와 노(爐;furnace)를 가지고서 납에 작용을 시켜서 납을 금으로 바꾸는 것을 금지하는 논리적인 불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서의 인과적인 선행자들은) 아마도 우리가 훑어 봤던 납이 금으로 변형되도록 해 주는 납의 어떤 성질들이 될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연금술사들은 결코 납이 금으로 변화되도록 하는 정확한 인과적인 선행자를 상술하려 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변환이 가능하다고 하는 어떠한 관심을 끄는 증거가 부족했다. 오늘날의 입자 물리학자들은 납을 보다 기본적인 구성요소로 분해한 후에 그것들을 금으로서 재구성함으로써 입자물리학자들의 입자 가속기 속에서 납을 금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에 주목하라. 그러나 여기에는 인과적인 선행자가 상술되어 있고, 이것은 연금술사들이 고려했던 것들과는 매우 많이 다르다. (입자 가속기는 연금술사들의 도구 상자의 일부가 아니었다.)
인과적인 한정성은 먼저 고찰한 예들 중에서도 분명하다. 해수면에서 섭씨 0도 이하로 냉각된 물은 물이 얼음으로 바뀌는 것을 설명하는 데에 충분한 것이다.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 즉 장애가 없는 영어 사용자의 손에 있는 단어 조각들의 무작위적인 집합은 단어 조각들이 조리가 있는 영어 문장을 이루는 것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펩티드 결합으로 연결된 주어진 L형 아미노산의 시퀀스는 그것이 기능을 가진 단백질(cytochrome C와 같은)로 접히는 것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각각의 경우에 인과적인 선행자가 상술되었고 문제의 현상을 설명한다. 어떻게 그 상술된 원인들이 그 현상을 만들어내는지를 우리가 설명할 수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원인은 그러한 현상을 일으킨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세상에서 우리가 납과, 분젠 가스 버너와, 일회분의 시료와, 결국에 금으로 만드는 주문(呪文)과 같은 것들로부터 인과적인 선행자를 어떻게 얻겠는가? 연금술사들의 신념은 납을 구성하는 올바른 구성성분들을 찾을 수만 있다면 납은 금으로 바뀔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 이후에 변형은 뜻대로 이뤄질 수 있을 것이고 변형의 비밀을 발견한 연금술사는 부유해 지게 될 것이다 (즉 비밀이 밝혀진 후에 금 또한 흔한base 금속이 될 정도로 매우 보편적으로 될 때 까지는) 변형의 비밀을 밝히는 것은 연금술사들의 깊은 소망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목적상 관심이 있는 질문은 그러한 희망에 대한 연금술사들의 동기였다. 왜 연금술사들은 흔한 금속에서 귀한 금속으로 변형시키는 것이 정말로 달성될 수 있는 것으로 그토록 확신했던 것일까? 우리의 유리한 위치를 바탕으로 우리는 그들의 체계가, 실패한 체계라는 것과 성공의 가능성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판단한다. 그러나 어째서 그들 스스로도 인정하는 매우 보잘 것 없는 수단을 가지고서(입자 가속기는 그들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흔한 금속에서 귀한 금속으로 바꿀 수 있다는 그들의 확신이 흔들리지 않았던 것일까?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인과적인 한정성이 부족한 상태에서 그들은 왜 그 변환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인과적인 한정성이 없이는, 어떠한 변환이 일어날 수 있다고 단언하는 것에 대해서 어떠한 경험적인 정당성도 획득하지 못한다. 동시에 인과적인 한정성이 없이는, 그 변환이 일어 날 수 있다는 것을 거부하는 것도 경험적인 정당성을 획득하지 못한다. 어떠한 상술되지 않는unspecified 과정에 의해서 지킬Jekyll 박사가 하이드Hyde 씨로 바뀔 수 없다고 논증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과적인 한정성의 부족은 원하는 변형이 발생할 수 있는지, 아니면 발생할 수 없는지를 판단할 수단이 없도록 만든다. (확신은) 훨씬 덜 필연적인 것이기 때문에, 원하는 변형이 가능하리라는 어떠한 확신은 인과적인 분석이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 도출되어져야만 한다. 그러나 어디에서?
형이상학을 생각해 보자. 연금술 뒤에 있는 동기가 결코 과학적이지(우리가 오늘날 쓰는 용 어대로의 의미) 않고 형이상학적이다는 데에는 아무런 비밀도 없다. 연금술은 신플라톤주의 형이상학의 하나의 따름정리corollary이다. 신플라톤주의는 모든 실재는 신으로부터 발산되어 나오고 궁극적으로 신에게로 다시 돌아가는 존재의 위대한 고리a great chain of being라는 개념을 갖고 있다. 존재의 위대한 고리는 완전히 계층적이어서 그 고리에 있는 어떤 두 개의 구분되는 항목들 중에서 하나는 다른 것보다 더 우위에 있는 것이다. 이제 납과 금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그 고리에서 금은 납보다 더 우위에 있다.(납은 흔한 금속이고, 금은 귀금속이다). 게다가, 모든 것이 신에게로 되돌아 가기 때문에, 납도 신에게로 되돌아가게 되고 신에게로 가는 길에서 금을 통과하게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신에게로 가는 납의 여정에는 납이 금으로 되는 자연적인 힘이 존재한다. 모든 납은 금이 되기 위해서 자극을 받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납에서 금으로의 변형을 이루기를 희망했던 연금술사들의 적당한 수단들은 전적으로 합리적인 것 같아 보인다. (입자 가속기가 필요하지는 않다)
따라서 여기에 연금술의 논리의 오류가 있는 것이다. 연금술은 인과적 한정성을 포기했지만, 상술되지 않은 인과적인 과정이 원하는 변환을 산출할 것이라 주장했다. 인과적 한정성이 부족했기 때문에 연금술사는 원하는 변환이 달성될 수 있다는 신념을 소유할 경험적인 기반을 갖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험적인 형이상학적 믿음이 어떠한 인과적인 과정이(지금 상술되지는 않았지만) 원하는 변환을 달성해야만 한다는 것을 보증했기 때문에 연금술사들은 변환이 달성될 수 있을 것으로 계속해서 확신했다. 간단히 말해서 경험적인 증거가 그것에 반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형이상학이 변환을 보증했다는 것이다.
갱신되고 자연화된 연금술
ALCHEMY, UPDATED AND NATURALIZED
연금술은 과학안에서 계속해서 번창하고 있다. 연금술의 현대적인 형태는 출현emergence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전통적인 연금술은 기본적인 금속을 귀금속으로 바꾸는 것에 관심이 있었던 것에 반하여, 출현emergence은 간단한 시스템을 복잡한 시스템으로 바꾸는 것에 관심이 있다. 복잡 시스템들은 간단한 시스템들의 조합으로부터 출현한다고emerge 말한다. 복잡계complex systems 이론에서 출현emergence은 근본적인 개념이다.
여기서 출현emergence이 불명예스러운 개념이라는 인상을 주는 것은 내가 원치 않는 일이다. 문제는 그 용어가 쉽게 남용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의 사용은 전적으로 결백한 것이다. 예를 들어서 Bernard 세포 대류(Bernard cell convection)를 생각해 보자. [모래위의 패턴들Patterns in the Sand]에서 보소마이어Bossomaier와 그린Green은 다음과 같은 현상을 기술했다. Bernard 세포 대류에서 끓는 액체는 "육각형의 세포 기둥을 형성한다(organises [sic]). 어떤 기둥들에서 액체는 인접한 기둥들에서의 액체가 아래쪽으로 이동하는 동안 용기(vessel)의 밑바닥에서부터 위까지 이동한다. 이것이 얼마나 특이한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액체에는 고유의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 기둥들은 자발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분명한 기하학적인 형태, 다시 말해서 초기의 장치에서부터 결코 당연하지 않은 어떤 것을 가지고 있다."(p. 39).
Bernard 세포 대류에서 간단한 국부적인 효과의 연합 작용으로부터 기대하지 않은 전체적인 행동이 출현한다. 그러한 간단한 국부적인 효과의 연합 작용에는 어떠한 중심적인 계획이 지배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기치 않은 전체적인 행동은, 단순히 바른 조각들이 제자리에 위치하는 것에 의해서 발생한다. (Bernard 세포 대류의 경우, 스토브 위의 프라이팬에 있는 얇은 물막을 가열하는 것만으로도 이 현상을 발생시키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문제가 없다는 관점에서의 출현emergence은 동력학 계의 자기 조직화에서부터, 생태계의 자기 조절기능이나 시장 경제의 최적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곳에서 일어난다.
그들 경우 각각에서 출현emergence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들이다. 왜? 인과적인 한계성 때문에. 예를 들어서 Bernard 세포 대류는 적절한 용기(vessel)속에서 적절한 유체가 충분히 가열될 때에는 언제든지 반복적으로 신뢰성있게 일어난다. 우리는 유체가 스스로를 육각형의 세포로 조직하도록 만드는 유체의 성질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육각형의 세포들을 만들어내는 인과적인 선행자가 분명하게 상술되어야 한다. 우리가 인과적인 한정성을 갖는 한은, 출현emergence은 완전하게 적법한 개념이다.
그러나 인과적인 한정성이 없는 출현emergence의 경우는 어떠한가? 예를 들어서 생명의 기원을 생각해 보자. 복잡계 이론에서의 생명의 기원에 대한 가정은, (자연을) 설계하는 지성체와는 거리가 먼 화학적인 수단들을 통해서 생명이 스스로를 조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Bernard 세포 대류에서의 인과적인 한정성과는 달리 복잡계 이론은, 아마도 생명을 만들어 낼 순수하게 화학적인 경로를 아직 상술하지 않고 있다.
폴 데이비즈Paul Davies의 최근의 저서 [제5일의 기적 Fifth Miracle]을 보자. 그 제목은 생명의 기원을 언급하는 Davies의 특이한 방식이다. Davies가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를 세어 보았더니, 창조 이야기의 제5일은 생명의 창조에 관한 것이다. 데이비즈Davies는 우리가 어떻게 생명이 기원하는지에 대한 "이해로부터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고 주장한다. "이해에 있어서의 이 심연(深淵)은 단순히 특정한 기술적인 세부사항들에 대한 무지가 아니라, 주된 개념의 공백이다.... 진위는 알 수 없으나 다만 그대로 말하자면, 나의 개인적인 믿음으로는 생명의 기원에 대한 전적으로 만족스러운 이론을 위해서는 어떠한 혁명적인 새로운 사상이 필요하다"(p. 17). 그러나 데이비즈Davies는 또한 혁명적인 사상의 끝부분이 어딘지를 분명히 했다. "나는 생명의 기원이 초자연적인 사건이라고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전체적인 계획에서 아주 근본적인 어떤 것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이다"(p. 17). 특히 데이비즈Davies는 " 종교적인 근본주의자들과 그들의 간격의 하나님이라는 가짜 설명들"(p. 18)에게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내 자신의 관점으로는 데이비즈Davies는 충분하게 혁신에 가깝지 못하며, 생명의 기원은 지적 설계(이것은, 종교적인 근본주의자들 또는 간격의 하나님이라는 가짜 설명들이라는 Davies 의 비난을 피하도록 (필자는) 명확히 나타낼 수 있다)의 산물로서만 충분하게 이해될 수 있다. 연금술적인 변형과 출현emergence은 관계 있는 개념이다. 어떤 것이 출현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인가로부터 출현한다는 것을 말한다. "X가 출현한다"는 불완전한 문장이다. "X가 Y로부터 출현한다"로 읽음으로써 완전해질 필요가 있다. 게다가, X가 Y로부터 출현한다는 주장은 Y가 상술되기 전까지 무의미한 채로 남아 있다.
복잡계 이론에 따르면, 생명은 순수하게 물리적인 선행자로부터 (자연을) 설계하는 지성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 출현했다. 그러나 각각의 경우에 그들 물리적인 선임자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제안은 안타깝게도 없다. 어떤 제안도,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RNA 세계RNA worlds, 점토 형판clay templates, 열수 분출공hydrothermal vents, 그리고 수많은 다른 자연주의적인 시나리오들이 생명의 출현을 설명하기 위해서 제안되어 왔다. 그러나 그들 시나리오들 중 어떤 것도 진지하게 비평받거나 시험받기에 충분할 정도로 구체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 간단히 말해서 그들은 모두 인과적인 한정성이 부족하다.
인과적인 한정성이 부족한 상태에서, 순수하게 물리적인 원인들이 생명을 일으키는 일을 달성했다고 무엇이 우리를 확신시키는가? 우리가 연금술과 신중하게 비교를 한다면, 우리는 원하는 변형을 달성시켜야만하는 순수하게 물리적인 원인들(비록 지금은 상술되지 않 았지만)을 확실하게 만들어 주는 선험적인 형이상학적 위탁commitment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연금술의 경우에는 선험적인 형이상학적인 위탁은 신플라톤주의였다. 출현하는emerging 복잡계의 경우에는 선험적인 위탁은 자연주의이다. 자연주의는 어떠한 인도하는 지성에 의해서 방향설정이 되지 않은, 순수하게 물리적인 원인들이 세계를 완전히 통치한다는 관점이다. 선험적인 형이상학적인 위탁으로서의 자연주의가 있을 때에는, 생명은 순수하게 물리적인 원인으로부터 출현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런 위탁은 연금술사들의 신플라톤주의처럼 의심스러운 것이다.
생명의 기원은 인과적인 한정성이 없는 출현emergence의 한 가지 예에 지나지 않는다. 신경생리학으로부터의 의식(consciousness)의 출현emergence도 또 다른 예이다. 단순한 생명의 형태에서 복잡한 생명의 형태로 점점 더 출현emergence하는 것도 또 다른 예이다. (다윈적인 돌연변이-선택 메커니즘이 이러한 emergence의 상태를 다루는 것으로 가정되고 있지만, 내가 META에 보낸 최근의 나의 두개의 글에서 주장한 것처럼 이것 또한 인과적인 한정성이 부족한 것이다.)
생명의 기원과 의식의 기원, 그리고 단순한 생명 형태에서부터 보다 복잡한 것의 기원 은 복잡성 이론이 직면한 커다란 열린 문제들이다. 그들 시스템들이 지성적인 조절에 지배 받지 않는, 순수하게 물리적인 선행자로부터 출현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인과적인 한정성이 없다면, 과학과 형이상학(이 경우 자연주의적인 형이상학이다.)을 혼합시키는 것이 된다. 복잡성complexity 이론가들은, 변형에 관련된 인과적인 선행자들을 자세하게 기술하기도 전에 원하는 변형이 발생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연금술사들보다, 결코 더 많은 경험적인 기반을 갖고 있지 못하고 있다. 인과적인 한정성은 신플라톤주의건 자연주의이건 형이상학의 동전으로는 회수할 수 없는 것이다.
결론
CONCLUSION
나는 이 글의 대부분을 연금술과 복잡성 이론사이를 평행하게 그리는데 사용했다. 생명의 기원이나 의식의 기원과 같은 커다란 열린 문제들에 대해서, 복잡성 이론은 연금술과 동일한 인과적 한계성의 부족을 보여준다. 인과적 한계성이 없기 때문에 복잡성 이론은 원하는 변형이 발생할 수 있다는 생각을 소유할 어떠한 경험적인 기반도 존재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복잡성 이론가들이 인과적 한정성이 없는 채로 어떤 변환이 일어날 수 있다고 계속해서 확신한다면, 그것은 어떤 순수하게 물리적인 과정이(비록 지금은 상술되지 않았지만) 원하는 변환을 발생시켜야만 한다는 것을 보증하는 자연주의에 대한 선험적인 형이상학적 위탁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형이상학은 그것이 경험적인 증거에 반대가 된다고 하더라도 변환을 보장해 준다.
이 글을 결론지으면서 나는 연금술과의 이런 공통점이 왜 복잡성 이론의 장애가 되는지를 분명히 하기를 원한다. 완고한dyed-in-the-wool 자연주의자들은 이러한 공통점에서 아무런 문제도 보지 못한다. 생명의 기원을 고려할 때 자연주의자들은 단지 생명이 여기있다는 것과, 생명이 언제나 여기에 있던 것이 아니라는 것에 주목한 후, 무생물non-life로부터 생물로의 어떠한 변환이 일어나야만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우리가 생명이 발생하기 위한, 정확한 경험적인 선행자를 완전히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을지라도, 생명은 출현했다. 생명의 기원은 매우 큰 풀리지 않은 문제이고 복잡성 이론은 훌륭하게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그래서 나에게는 복잡계의 emergence를 연금술과 비교하는 것이 자연주의자들을 근거가 없고 대단치 않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공격하는strike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난이 멈추지 않는 이유를 보기 위해서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자연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생명이 순수하게 물리적인 원인들에 의해서 발생했다고 말하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생명의 기원이 열린 문제이기 때문에 "순수하게 물리적인 원인들"로 제한하는 것은 인과적인 한정성이 부족하다. 동시에 이러한 제한은 한 가지 숨겨진 제약조건을 강요한다. 생명이 순수하게 물리적인 원인들로부터 출현했다고 주장하는 것의 문제는, 풀리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 무지를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의 해답에 숨겨진 제약조건을 놓는다는 것이다. 생명이 순수하게 물리적인 원인들로부터 출현했다---어떻게 우리가 그것을 아는가? 예를 들어서 어떻게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는 생명의 기원이 설계하는 지성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과 다른 곳에서 생명의 기원 의 해답을 찾아야하는 것을 알고 있는가? 일반적으로 말해서 X가 Y로부터 출현했다고 가설을 세우는 것은 아주 좋고 잘하는 것이지만 Y가 인과적으로 상술되기 전까지는 Y로만 제한 시켜 놓는 것은 적법하지 않은 일이다.
이런 점에서 복잡성 이론은 연금술보다 더욱 비난을 받아야 한다. 연금술은 납에서 금 으로의 변환 방법을 찾았지만, 변환이 일어날 수 있는 수단에 대해서는 열어 놓았다. (비록 실생활에서의 연금술사들은 변환이, 그들이 갖고 있는 그들의 수수한 기술적인 수단을 통해서 발생하기를 희망하기는 했지만) 반면에 복잡성 이론은 무생물에서 생물로의 변환을 찾고 있지만, ---그 변환이 자연주의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고---그 변환에서의 지적설계나 목적론을 위한 어떠한 자리도 제외시키고 있다. 생명의 기원을 설명하는 데에 복잡성 이론의 인과적인 한정성이 부족한 상태에서 이런 제약조건은 철저하게 근거없는 것이다. 아마도 자연주의가 결국에는 진실이 입증되고, 복잡성 이론의 커다란 열린 문제가 순수하게 자연주의적인 해법을 따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과적인 한정성이 부족한 상태에서 자연주의가 우리의 과학적인 이론화 작업에 숨겨진 제한을 가하도록 두어야할 아무런 이유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숨겨진 제약조건들은 형이상학적인 동기부여를 받은 것이고, 자유로운 과학적 탐구를 이상하게 만드는 것이며, 언제나 과학에게 가장 큰 위험을 안겨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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