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놀룰루 영화관(1)
여행 가방에 냉국수용 국수다발을 열 다섯 뭉치나 넣어 가지고
하와이로 날아왔다. 이런 일은 그 어떤 가이드북에도 실려 있지
않을테지만─아마도 실려 있지 않겠지─하와이에서 먹는 냉국수는
정말 일품이다. 하와이에 장기간 체재하려는 분은 반드시 냉국수용
국수를 지참하십시오. 그리하여 지금 한 한 달 예정으로 호놀룰루에서
한가하게 휴양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새삼스럽게 무슨 하와이냐고 한다면 뭐라 할 말은 없지만 하루종일
해변에서 뒹굴뒹굴하면서 수영하고 싶으면 수영하고, 밤에는 술을 마시든가
영화를 보든가 하는 이외에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다면 하와이만큼
편안한 곳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거기에 냉국수까지 곁들여진다면
지상 천국이 따로 없다.
지금 이곳에서 가장 평판이 좋은 영화는 론 하워드가 감독한 <코쿤>으로
극장을 평일에도 상당히 붐빈다. <코쿤>이란 누에고치를 일컫는데, 어째서
그런 제목이 붙었는가를 설명하고 나면 영화가 재미없어지니까 설명은 삼가
하겠다. 플로리다의 고급 양로원에서 여생을 천천히(그러나 무척 쓸쓸하다)
보내고 있는 노인들과 그곳을 찾아온 우주인과의 교감을 그린 훈훈한 온정이
스며 있는 작품─대충 이런 내용인데, 뭐야 그렇다면 <E·T>하고 똑같잖아,
하고 생각하시는 분이 틀림 없이 있는 것이다. 옳은 말씀, 정말 똑같다.
내 주위에 있던 미국인 관객들은 모두 훌쩍훌쩍 울고 있었는데, 그런 점까지
<E·T>랑 진짜 비슷하다. 그러나 같은 론 하워드 감독의 작품인 <스플래쉬>와
<E·T>를 섞어 놓은 것 같은 영화라고 표현하는 게 보다 엄밀할지도 모르겠다.
무엇 보다도 <E·T>가 어린이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는 것에 반해 <코쿤>의
주인공은 쭈글쭈글한 노인네들이니, 그런만큼 이 영화의 시점이 <E·T> 쪽보다
한층 더 굴절돼 있다고 할 수 있다. 노인 역을 맡은 베테랑 배우들의 연기도
볼 만한 것으로, 특히 던 아메슈가 브레이크 댄스를 추는 장면 같은 경우
대단한 호평이었다.
론 하워드로 말하자면 <아메리칸 그래피티>에서 어딘가 모르게 연약해 보이는
남자 우등생역을 맡았던 사람인데, 감독으로서의 역량도 제법 무시 못할
것이다. <스플래쉬>는 일본에서는 그다지 흥행하지 못했지만, 이 <코쿤>은
꽤 분위기가 좋은 영화니까 일본에서도 히트를 했으면 좋겠다. 그러나
등장인물의 대부분이 노인과 우주인인 영화 따위, 일본의 영화 회사라면
기획단계에서 벌써 제작을 허가하지 않을 것이다.
이 <코쿤>을 명랑하고 긍정적인 우주인 영화라고 한다면, 토비 후퍼의
신작 <라이프 포스>는 우울하고 부정적인 우주인 영화다. 원작자는 콜린
윌슨이라고 하는데, 책을 아직 읽지 못했으니 비교할 길이 없다. 간단히
말해서 <에어리언>과 <존비>와 <고스트 바스터즈>를 뭉뚱그려서 토비 후퍼
특유의 그로테스크 지향으로 양념을 한 것과 다름없는 작품이니까, 그런
부류의 영화를 싫어하는 분들은 안보시는 게 현명하리라. 나는 이런 류의
영화를 꽤 좋아하는 편이라 지루하지 않게 즐길 수 있었지만, 얼마간 장난
같은 느낌이 있어, 한 중간쯤까지 보다 보면 싫증이 난다. 후퍼의 주무기는
적은 예산으로 만든 싸구려 영화의 악취미적인 것이니까, 이 정도의 대작을
마지막까지 구영하는 것은 좀 힘겨울 것 같은 기분도 든다. 그래도 집요하게
악취미적 경향을 살리고 있는 부분을 보면 과연 대단하다 싶다.
관객은 드문드문.
존 부어맨의 <에메랄드 포리스트>는 개봉 첫 날이라는 이유도 있어 제법
관객들로 붐볐다. '실화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전 광고가 있었는데,
줄거리가 너무 매끈하게 처리되어 있어 어디까지가 '기초'인지 잘 모르겠다.
경험상 '실화에 기초를 두었다'는 헐리우드 영화만큼 그 사실 여부가
수상쩍은 게 없기 때문이다.
아마존의 원주민에게 아들을 납치당한 아버지가, 십 년에 걸쳐 아마존
정글을 헤매며 아들의 행방을 찾아 다닌다는 얘기인데, 부어맨 류의 원시적
폭력성이 여기저기에 드러나 있어 그 나름으로 박력은 있다. 그러나 얘기의
흐름이 너무 매끄러워 도중에는 '뭐야 뭐야.' 하는 식이 됐다가, 결국
마지막 부분에는 서둘러 얘기를 후딱후딱 끝 마치는 꼴이 되어 버린다.
부어맨으로 말하자면 뭐니뭐니 해도 <포인트 블랭크> <탈출> <엑스칼리버>
이 세 작품이 최고의 영화이고 나도 굉장히 좋아하는데, 그 나머지는 약간
격이 떨어진다.
식인종들이 모두 보조를 맞추어 정글 속을 '우호, 우호, 우호.' 하고 행진을
하는 장면은 타잔 영화 같기도 한 게 아주 재밌다. 부어맨이라고 하는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영화를 만드는 건지 잘 알 수 없어 찜찜하다.
그러나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잘 알 수 없다는 점에서는
<레드 소냐>를 감독한 리차드 프래이셔 쪽이 한술 더 뜨는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는 <코난 더 그레이트>와 <코난 더 디스트로이러>하고 계속된
라우렌티스의 로버트·E·하워드*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인데, 한 작품이
나올 때마다 전압이 약해진다. 나 개인적으로는 이런 류의 영화를 좋아하는
터라, 그래도 호의적인 안목으로 보고 있는 편인데, 그럼에도 <레드 소냐>는
좀 심한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터미네이터>로 평판이 쑥 올라간 아놀드
슈왈츠제네거도 <레드 소냐>에서는 전혀 빛이 나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지만
관객석 쪽도 그다지 흥이 나지 않는 듯 박수도 없다. 로버트·E·하워드의
원작 중에는 훨씬 더 스릴이 있고 와일드한 작품이 얼마든지 있는데, 어째서
이렇게 평범하고 시시하기 짝이 없는 작품을 영화로 만들지 않으면 안되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페일 라이더>와 <실버래드> 이 두 흥미진진한 서부극에 대해서는 내주에
말씀드리겠습니다. COMING S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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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버트·E·하워드(Robert Erving Howard) : 미국의 작가.
호놀룰루 영화관(2)
지난 주에 이어 영화 이야기.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페일 라이더>는 오래간만의 대형 서부극이라는
이유로 업계의 주목을 모았는데, 개봉 첫 주에 벌써 흥행 순위 넘버
원으로 치솟았다. 이스트우드의 인기는 과연 놀랄 만한 것이다.
관객 쪽의 반응도 활기차고, 작품의 완성도도 꽤 높다. 스토리는
대충 <쉐인>하고 비슷하다. 그렇다고 해서 <쉐인>의 팬들이 <페일 라이더>를
탐탐해 할까 하면, 전혀 그런 일은 없을 것 같다.
<쉐인>과 <페일 라이더>는 줄거리가 비슷한 반면 내용상의 차이가
두드러지는 기묘한 상관관계에 있는 영화다. <쉐인>의 알란 랏드가
전후의 민주주의적(이건 물론 일본의 영화 관람법이지만) 모랄리즘의
분위기를 띠고 있었음에 반해, 이스트우드는 슈퍼 내츄럴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무기적인 마초 역을 맡고 있어, 까끌까끌한 감촉이 무척
재미있었다. 대부분의 비평도 <페일 라이더>에 대해서는 호의적이어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 장르에서 한 작품을 낼 때마다 세련미를 더해
가고 있다.' 라든가,
'과거 십 년 동안 최고로 완성도가 높은 웨스턴 무비.' 라는 의견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언제나 그렇듯 카메라는 블루스 새티스가 맡았는데, 영상은 <타이트 로프>
때처럼 극단적으로 어둡지는 않다. 이스트우드의 영화는 뉴욕에서는 웬지
흥행에 실패한다는 정설이 있는데, 이번에는 내용이 좋다는 평판이 나
뉴욕 동부에서도 크게 성공했다.
같은 마초 영화이면서 <람보 2> 쪽은 비평가들에게 곤죽이 되도록 혹평을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억 달러나 수익을 올려, 올 여름 최고의
대 히트작이 되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이 다음에 인질 사건이 일어나면 미국이 취해야 할 길은 이미 결정돼
있다.' 고 말했다고 한다.
신문에는 바주카포를 맨 레이건을 그린 만화가 실렸는데, 표제에는
<레간보 2>라고 씌어 있었다. 베이루트 사건에 대한 미국의 일반인들이
품고 있는 욕구 불만은 우리가 상상하고 있는 이상으로 심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실로 타이밍이 딱 맞아 떨어지게 개봉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많은 비평가들은 이 작품이 담고 있는 우익적 정치 메시지에 대해 생리적인 불쾌함을 표명하고 있다. 스텔론 자신도
'다시 한번 전쟁이 일어난다면, 우리가 이긴다.' 라고 말했을 정도니까
과연 상당하다.
'그렇다면 스텔론 씨는 베트남 전쟁 당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나?' 하고
어느 신문이 지당한 의문을 제기했다.
이 신문에 의하면 그는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매일 체중 조절을 하면서
(그의 어머니는 트레이닝 센터를 경영하고 있었다) 열 아홉 살 때는 부잣집
자식들만 모아 놓은 스위스의 어떤 미국대학에 입학했는데, 거기에서는
여학생들에게 체조를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했고, 그런 후에 마이애미
대학 연극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베트남 전쟁은 종결되고 말았다.
이런 남자가 베트남 전쟁을 다시 한번 하라는 따위의 말을 내뱉을 자격이
있는가 하는 게 그 글을 쓴 컬럼니스트의 의견이다. 뭐 그건 그렇다치고,
작품 자체는 지극히 평범하여 딱히 평을 하고 자시고 할 만한 영화도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서부극이라면 <페일 아리더>가 개봉되고 일주일 후에 개봉된 로렌스 캐스던
제작, 감독, 각본의 <실버 래드>가 정말 멋진 서부극으로, 내 자신의 취향으로
하자면 <페일 라이더>보다 이 쪽이 몇 배나 더 재미있다. 간단히 말해,
지금까지 히트한 서부극의 재미있는 부분을 전부 긁어모은 데다, <스타워즈>나
<레이더스>적인 속도감을 가미하여 보는 이들을 스크린 속으로 쭉쭉 빨아들이는
타입의 작품으로, 저거야 바로 저거. 하는 사이에 두 시간이 지나가 버린다.
과연 로렌스 캐스던이다 라고 할까, 정말 대단하다.
스토리 자체는 이른 바 '흔히 있는 얘기'인데, 연출도 카메라의 움직임도
홀딱 반할 정도로 섬세하면서도 신선하여, 지루한 부분이 한군데도 없다.
캐스팅도 절묘. 신문은 '만약 이 영화가 서부 영화를 부활시킬 수 없다면,
이후 어떤 영화도 서부극의 부활을 가능케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라고
절찬을 했는데, 나 역시 동감이다.
스필버그가 프로듀서를 맡고 스토리를 쓴 <구니스>는 완전히 기대에 어긋났다.
공전의 양식이 활력을 잃기 시작하던 무렵의 디즈니 영화와 실로 비슷하다.
스필버그도 이쯤에서 조금 자세를 바로잡지 않으면 팬들에게 싫증을 줄 것
같다.
신문에 의하면 올 여름 시즌의 영화는 흥행이 상당히 저조하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작년 여름에도 나는 미국에 있으면서 한 달 반 정도 영화를
마구 봐댔는데, 그에 비하여 올해의 작품군에는 어쩐지 활기가 부족하다.
무조건 재미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실버래드> 정도이고, 그 영화도 영화관이
터져나갈 듯 만원은 아니었다.
작년에는 <고스트 바스터즈> <크레믈린> <가라테 기드> 등, 영화관이 시끌법석한
영화가 줄지어 있었다.
미국인들의 견해로는
'작년에는 올림픽도 있었고, 마이클 잭슨의 투어도 있었고, 대통령 선거도
있었고 해서, 그런 상승 효과가 작용했지만, 올해는 축제가 다 끝난 뒤니까.'
라서 그렇단다.
영화뿐만 아니라 올 미국의 여름은 상당히 저조하다.
그것만 저조한 게 아니다. 나의 서핀 솜씨도 몹시 저조하다.
중고 서핀보드를 사서 매일 바다 한 가운데로 나가는데, 이 부근 소년들처럼
재주 좋게 파도를 타기가 꽤 힘들다. 파도에 혼쭐이나 이 원고를 쓰고 있는
지금도 몸이 울렁울렁하는 지경이다.
쿠게누마 해안*과는 몹시 다르게 생겨 먹은 모양이다.
파도에 관한 한 권위자인 안자이 미즈마루 씨에 의하면 '한 달쯤 지긋하게
들여다 보고 있지 않으면 못탄다.' 는데, 한 달이나 파도를 보고 있다가는
그것만으로 휴가가 끝나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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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게누마 해안 : 후지사와의 앞 바다, 사가미만에 있는 해안. 에노시마의
오른쪽이다. 왼쪽이 시치리가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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