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책이야기
우리 집에 책이 너무 많아져서 며칠 전 책장을 새로 사들였다. 직업상 어쩔 수 없 다고는 하지만 책이란 점점 늘어나기 마련인 그런 것이다. 짜증이 나서 1/3 정도는 팔아 치우자고 아침부터 선별 작업에 착수했는데, 막상 처분을 하려고 하니 '이건 이미 절판된 책이고' '또 언제 읽을지도 모르니까' '팔아 봤자 싸구려인데'하는 생 각이 들기 시작하자, 전혀 숫자가 줄지 않는다.
제일 화가 나는 것은 신간 하드커버 원서를 사 두었는데 읽지도 않은 사이에 번역 본이 잽싸게 나와 버린 예로, 번역본이 있는데 힘들게스리 영어로 책 읽을 기분도 나지 않고, 영어책 따위 팔아봐야 돈도 안되고, 이런 경우엔 정말 울고 싶어진다.
그리고 보존해 두어서 도움이 될지 않될지 잘 분간이 안가는 잡지도 처치 곤란이 다. 예를 들어 <유레카>라든가 <키네 旬>이라든가 <뮤직 매거진> <미스테리 매거진> <스튜디오 보이스> <광고 비평> 같은 것은 버리고 나면 나중에 후회할 것만 같아 그 냥 나두지만 아직까지 도움이 된 기억이 별로 없다.
그러나 아무런 생각도 없이 보존해 두었던 오오하시 아유미 시대의 <헤이본 펀치> 삼십 권이나, <영화예술> 삼년치, 창간 당시의 <앙앙> 오십권 등은 지금도 제법 유 용하게 써먹고 있으니, 정말 판별하기가 힘들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잡지가 차지하 는 공간도 무시할 수 없다.
요리 페이지를 좋아해서 <가정화보>는 보존하고 있지, <에스콰이어> <뉴욕커> <피 플>은 직업상 필요하니까 쌓아 두지 등등을 생각하면 실로 짜증이 난다. 특별히 물 욕·소유욕이 왕성한 것도 아닌데, 어째서 이렇게 물건만 늘어나는 건지!
그 점 <아르바이트 뉴스>나 <피아> 같은 타입의 정보지는 정말이자 부담이 없다. 그 기간이 지나면 아무 미련없이 휙 내 버릴 수 있으니 말이죠.
하루키-훌리오 이글레시아스
속아서 모기향을 빼앗긴 뒤, 우리한테는 바다거북의 습격에서 몸을 지킬 만한 것이 더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전화나 우편으로 통신 판매 회사에서 새 모기향을 주문하려고 시도해 보았지만, 짐작했던 대로 전화선은 끊겨 있었고, 우편 배달도 보름 전부터 끊겨 있었다. 생각해 보면 저 교활한 바다거북이 그런 일을 쉽사리 하도록 놓아둘 리가 없다. 그 녀석은 여태까지 우리들이 갖고 있던 모기향 때문에 실컷 쓴맛을 보았었다. 지금쯤 틀림없이 푸른 바다 밑바닥에서 득의에 찬 미소를 짓고, 밤을 대비해서 낮잠을 자고 있을 것이다.
"우린 이제 끝장이네요."
그녀가 말했다.
"밤이 되면 둘 다 바다거북에게 먹혀버릴 거에요."
"희망을 버려서는 안 돼."
내가 말했다.
"지혜를 짜내면 절대로 바다거북 따위에 지지 않을 거야."
"그렇지만 모기향은 바다거북이 몽땅 훔쳐가 버렸잖아요."
"원리적 사고를 하도록 노력하는 거야. 바다거북이 모기향을 싫어한다면, 그밖에도 틀림없이 녀석이 싫어하는 것이 무언가 있을 거야. 이를테면 훌리오 이글레시아스."
"왜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에요?"
하루키-스웨터
스웨터를 입은 무리들을 좀처럼 볼 수 없었다. 나는 어느 겨울밤에 우연히 그들을 관찰했던 일이 있었다. 그것은 아름답고 따스한 풍경이었다.
나와 애인은 동쪽 코엔지에 있는 조그만 아파트에서 살았 다. 섹스를 한다거나 포테이토 칩을 먹거나 하고 있었다. 당시 나는 열 아홉살이었다. 열 아홉살 나이의 남자로서 처음 그 날, 여자를 만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밤늦게 까지 있어주면, 정말로 진짜 애인처럼 생각되었다.
나와 애인은 정말로 애인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두 사람이 함께 지하철을 탔다. 그 날 확실히 아홉시쯤이었다. 갈색 종이봉지에서 라임쥬스, 얼음, 진토닉을 꺼냈다. 그 리고 유리잔을 두 개 준비했다. 수도꼭지를 틀었다. 찌이익-. 날카로운 소리가 조용한 아 파트에 울렸다. 우리들은 마치 의식을 치루는 것처럼 진라 임을 마셨다. 브라운관을 빼고 전체를 빨갛게 칠한 텔레비젼에 스위치 를 넣었다. 텔레비젼 화면빛을 조명 대신으로 우리들은 창 가로 다가갔다. 옆집 아파트 학생이 수도꼭지를 틀었다. 우리들 방까지 찌이익- 하고 울렸다.
우리들은 '애인이 되려는 시간'을 일단 연장했다. 그리고 잠시 친구처럼 지내기로 했다. 텔레비젼 화면은 칙칙거리는 소리만 났다. 아무 프로도 나오지 않았다. 서로의 말들을 브라운관에 비추고 있었다. 그 풍경에 반 사시키고 있었던 나와 애인은 직접 마주보면서 얘기했다. 나는 텔레비젼 볼륨마저 낮추었다. 아무 소리도 안났다. 스위치만 켜져 있는 화면을 그대로 놔뒀다. 조작은 발로 했다.
그리고 나와 애인은 섹스를 했다. 아침이 다가왔다. 우리는 겨울 바람을 쐬기 위해 창문을 열어놨다. 신주쿠쪽에서 형형색색의 스웨터 무리들이 마치 춤이라도 추듯 다가왔다. 이것은 내가 먼저 발견했다. 기류와 기후와의 관계에서 스웨터 무리들은 주로 겨울에, 그것도 심야에 나타났다. "멋있어요. 우리들은 운이 좋아요." 약 삼십분 후 스웨터 무리들은 오기쿠보 방향으로 사라졌 다.
우리들은 가까운 곳에 있는 친구들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 려고 했다. 그러나 전화부스가 너무 멀어 우리들만 즐기기 로 했다. 그때의 무수한 스웨터 무리들, 마치 밤하늘을 날아오르는 듯한 풍경은 지금도 확실히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애인 얼굴은 이제 완전히 잊어버렸다.
그녀가 물었다.
"모르겠어. 지금 갑자기 머리에 떠올랐어. 뭐 일종의 육감 같은 것이지."
나는 육감이 이끄는 대로 스테레오 턴테이블 위에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의 '비긴 더 비긴' 을 맞춰 놓고, 날이 저물기를 기다렸다. 날이 저물면 틀림없이 바다거북은 습격하러 올 것이다. 그 때 모든 일이 결정난다. 우리가 먹히느냐, 바다거북이 우느냐, 이다.
한밤이 되기 조금 전에, 문 근처에서 철퍼덕 철퍼덕 하는 습습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을 때, 나는 잽싸게 레코드에 바늘을 올려놓았다. 훌리오 이글레시아스가 설탕물 같은 목소리로 '비긴 더 비긴' 을 노래하기 시작하자, 그 발걸음 소리는 딱 멈추었고, 대신에 괴로운 듯한 바다거북의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우리가 바다거북한테 이긴 것이다. 그날 밤 훌리오 이글레시아스는 '비긴 더 비긴' 을 126번이나 노래했다. 나도 훌리오 이글레시아스는 싫어하는 편이지만, 다행히도 바다거북 만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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