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 자서전
인도인들에게는 ‘위대한 혼’(마하트마)으로, 우리에게는 ‘비폭력운동’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간디의 자서전이다. 이 책에는 비폭력, 금욕, 자치, 무소유, 공동체 등 진리에 대한 실험을 끊임없이 계속해 나갔던 간디의 삶과 사상이 잘 담겨 있다.
마하트마 간디 지음
간디 자서전 - 나의 진리실험 이야기
마하트마 간디 지음
▣ 저자 마하트마 간디
M.K.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는 1869년 10월 2일 서부의 포르반다르에서 태어나, 18세 때 런던에 유학하여 법률을 배우고, 1891년 귀국하여 변호사로 개업하였다. 1893년의 남아프리카 여행에서 백인에게 박해받던 인도인들을 보고 1915년 귀국할 때까지 인도인의 지위와 인간적인 권리를 위해 투쟁했다. 이후 아힘사(불살생), 무소유, 무집착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적 바탕 위에 사티아그라하(satyagraha, 진리에의 헌신) 운동, 아슈람 공동체 운동 등을 전개하였고, 영국에 대한 비협력 운동의 일환으로 납세 거부․취업 거부․상품 불매 등을 통한 비폭력 저항 운동을 지도했다. 인도 카스트의 최하층인 하리잔의 지위 향상을 위해서도 진력하였다. 1947년 7월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후 힌두교와 이슬람교간의 융화를 위해 활동하던 중 1948년 1월 반이슬람 극우파의 한 청년이 쏜 흉탄에 쓰러졌다. 1922년 12월 인도의 문호 타고르로부터 '마하트마(Mahatma, 위대한 영혼)'라고 칭송 한 시를 받은 뒤로 '마하트마 간디'라 불려온 그는 인도인뿐 아니라 세계인의 가슴속에 위대한 영혼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 Short Summary
인도인들에게는 ‘위대한 혼’(마하트마)으로, 우리에게는 ‘비폭력운동’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간디의 자서전이다. 인도 상인계급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유학했던 간디는 남아프리카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며 점차 인도인의 참상을 깨닫게 된다. 그 후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통해 인도 독립의 길을 밝혔고 인도인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수백 년간 다른 민족의 침략과 압박에 시달려 지치고 병들었던 민족이 새생명을 얻고 침략자들을 물리친 데에 간디의 힘이 얼마나 컸던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이 책에는, 비폭력, 금욕, 자치, 무소유, 공동체 등 진리에 대한 실험을 끊임없이 계속해 나갔던 간디의 삶과 사상이 잘 담겨 있다.
▣ 차례
제1부 성장의 시간
제2부 어둠의 땅, 남아프리카
제3부 나의 일은 인도에 있다
제4부 사티아그라하, 끝없는 진리의 실험
제5부 구원과 투쟁, 다시 민중 속으로
간디자서전 - 나의 진리실험 이야기
마하트마 간디 지음
제1부 성장의 시간
조혼
내가 열세 살에 결혼을 했다는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 것은 참 거북한 일이다. 내가 돌봐주고 있는 그 당시의 나와 같은 또래의 소년들을 보며 내 결혼을 생각할 때마다, 나 자신에 대해 불쌍한 생각이 드는 동시에, 나와 같은 운명을 피한 그들에 대해 축하하고 싶어진다. 어떤 도덕이론을 가지고도 그런 이치에 어그러진 조혼을 옳다할 수는 없다.
나는 모르고 있었지만 내가 결혼하기 전에, 아마 세 번은 약혼을 했던 듯하다. 나는 내 약혼자로 선택이 되었던 두 소녀가 차례로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므로 세 번 약혼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희미한 기억에 세 번째 약혼은 내가 일곱 살이 되던 때였던 듯싶다. 어른들은 나보다 두세 살 위인 내 둘째형과, 한 살 위인 사촌형과 나를 한꺼번에 모두 결혼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하는 데도 우리 의견은 물론 우리의 행복은 고려되지도 않았고, 순전히 그들 자신의 편의와 경제문제로 결정된 일이었다.
비극
내 친구 중에 한명은 육식을 했다. 내가 친구에게 그 까닭을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에 약한 민족이 됐다. 영국이 우리를 지배할 수 있는 것은 고기를 먹기 때문이다. 고기 먹는 사람은 부스럼이나 종기가 나는 법이 없고 또 혹시 난다 하여도 곧 나아버린다.” 사람이란 제게 없는 재주를 남이 가지고 있는 것을 볼 때는 언제나 현혹되는 법이라, 나는 이 친구의 재주에 현혹되었다. 나는 뛸 줄도 달릴 줄도 몰랐다. 그뿐 아니라, 나는 겁이 많았다. 나는 늘 도둑이나 유령이나 뱀이 무서워서 밤에는 감히 문밖을 나서지도 못했다. 어둠이 무서워서 어두운 데서는 편히 잘 수도 없었다.
육식이 좋다는, 그것이 나를 튼튼하고 담대하게 만들 것이라는, 그리고 온 국민이 만일 육식을 한다면 저 영국인을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차차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하루를 작정하고 우선 고기 먹는 실험을 시작해보기로 했다. 우리는 조용한 곳을 찾아 냇가로 가서 구운 빵과 가죽같이 질긴 염소고기를 먹었다. 그러나 도무지 먹을 수가 없었다. 그러고 나서 밤새 무서운 가위에 눌려 혼이 났다. 잠이 들락말락하노라면 곧 산 염소가 뱃속에서 매매 우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어 벌떡 일어나야 했다. 그렇게 한 1년을 지속한 후 나는 고기를 먹는 것은 필요하고, 전국적으로 음식 ‘개혁’을 일으키는 것도 필요하지만, 제 부모를 속이는 것은 고기를 안 먹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부모님이 살아계시는 동안 나는 육식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검소한 생활
나는 한 푼 쓴 것도 꼭꼭 기록을 했고, 비용을 자세히 계산해두었다가, 버스값, 우표값, 신문값으로 쓴 한 두 푼에 이르기까지 지극히 작은 비용들도 빠짐없이 적었으며, 밤마다 자기 전에 장부의 대차를 꼭 맞추었다. 그 습관은 늘 계속됐고, 그 결과 거액의 공금을 만져도 늘 틀림없이 지불을 할 수 있었다. 내가 이끄는 운동에서는 언제나 큰 빚을 지는 일 없이 늘 돈이 남아돌아갈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이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젊은이들도 나를 모범으로 삼아 주머니에 들어오고 나가는 돈의 회계를 꼭 맞추어두면 틀림없이 나와 같이 마침내는 돈을 모으는 사람이 될 것이다. 독자는 이것으로 내 생활이 비참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그런 검소함 때문에 나의 내적 생활과 외적 생활이 잘 조화되었다. 또 그것은 우리 집 형편에 맞추어가는 것도 됐다. 내 생활은 확실히 보다 진실했고, 내 혼은 무한히 기뻤다.
방패가 된 나의 수줍음
내가 집행위원으로 일하던 채식회의의 한 만찬에서 연설을 하게 된 적이 있다. 나는 공들여 생각해서 짤막한 연설을 준비했다. 그러나 첫마디 이상을 나갈 수 없었다. 말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고 우스운 연설을 하려다가 나 자신이 웃음거리가 돼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따금 나는 남의 웃음거리가 되기는 하지만, 타고난 이 수줍음이 내게 손해를 끼쳤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은 그와 반대로, 내게는 아주 유익했다고 볼 수 있다. 말하기를 꺼리는 것이 한때는 고민거리였지만, 지금은 나의 즐거움이다. 가장 큰 유익함은 그것이 내게 말을 경계하기를 가르쳐주었다는 것이다. 자연히 나는 생각을 제어하는 버릇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나 자신의 생각 없는 말이 새어나오는 일은 혀로나 붓으로나 별로 없다는 증명서를 기꺼이 써줄 수 있다. 나는 내 말이나 글에 별로 후회했던 기억이 없다. 그렇게 해서 많은 화를 면하고 시간의 낭비를 피할 수 있었다. 경험은 나에게 진리의 숭배자에게는 침묵이 정신적 훈련의 한 부분이란 것을 가르쳐주었다.
변호사 면허와 나의 고민
내가 영국에 간 목적은 변호사 면허를 얻는 데 있었다. 한 학생이 정식으로 변호사 면허를 얻기 전에 갖추어야 할 두 가지 조건이 있다. ‘학기를 마치는 것’, 즉 열두 학기, 곧 3년에 해당하는 기한을 마치는 것과 시험에 합격하는 일이다. 공부하는 과정은 쉬웠고, 변호사들에겐 ‘만찬 변호사’라는 익살스런 별명이 붙었다. 누구나 시험은 실상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시험을 위하여 미리 지정된 교과서가 있어서 제 방에 가지고 갈 수도 있었지만, 그것을 읽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두어 주일 동안 로마법 노트와 씨름을 하고는 시험에 합격하고, 2, 3개월 동안 관습법 노트를 읽고는 시험에 합격한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시험문제는 쉬웠고 시험관은 너그러웠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어려운 것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나는 모든 교과서를 다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읽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나는 시험에 합격했고, 1891년 6월 10일에 변호사 면허를 얻었다. 그리고 11일에 고등법원에 등록했으며, 12일에 귀국길에 올랐다. 공부는 했건만 나의 무력과 두려움에는 끝이 없었다. 내게 변호사 노릇을 할 자격이 있다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면허 얻기는 쉬웠으나 법정에서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는 배우지 못했다. 흥미를 가지고 『법률 금언집』을 읽었으나, 그것을 내 직업에 어떻게 적용할지는 몰랐다. 그뿐 아니라 나는 인도법에 관해서는 전혀 배운 것이 없었다. 또한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법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터럭만큼도 아는 것이 없었다. 소송장 쓰는 것조차도 배우지 못해서 앞이 캄캄했다. 도대체 이 직업으로 밥을 먹을 수 있을지가 걱정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법률을 공부하는 동안 나는 이런 의심과 걱정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몇몇 사람들과의 면담을 통해 실망 속에 조그만 희망의 누룩을 넣어가지고 나는 영국을 떠나 기선 아삼 호로 뭄바이에 상륙했다.
제2부 어둠의 땅, 남아프리카
생애 첫 충격
1893년 나는 소송사건을 의뢰받아 1년간의 계약으로 아내와 함께 남(南)아프리카 연방으로 가게 되었다. 당시 남아프리카에는 약 7만 명의 인도 사람이 이주해 있었는데 백인에게 심한 박해를 받고 있었다. 나는 뭄바이를 떠나 라지코트로 가서 사무소를 차렸다. 여기서 나는 괜찮게 지냈다. 신청서나 진정서를 써서 매달 평균 3백 루피의 수입을 올렸다. 이것은 내가 능력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배경 때문이었다. 이렇게 하여 수지를 맞추기 시작했으나, 이 무렵에 나는 내 일생에 처음으로 충격을 받았다. 형은 포르반다르의 라나 사헤브가 가디(gadi: 왕의 자리)에 오르기 전에 그의 비서 겸 고문으로 있었던 일이 있는데, 이 즈음에 와서 그가 그 자리에 있을 때 옳지 못한 조언을 했다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이 문제가 내 형에 대해 그렇잖아도 편견을 가지고 있던 주재관 -내가 영국에 있을 때 알게 된 관리관이었다- 에게로 넘어갔다. 형은 내가 그와 친분이 있는 것을 이용하여 그 주재관의 편견을 풀도록 해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나는 형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마음에도 없으면서 그에게로 갔다.
그러나 그는 “설마 그때 알고 지낸 것을 악용하러 여기 온 것은 아니겠지요?”라는 듯한 굳어진 태도를 보였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본론을 끄집어냈고, 결국 그를 노하게 만들었다. 그는 경호원을 불러 나를 내보내라고 명령했다. 나는 화가 나 어쩔 줄을 모르며 그곳을 떠났다. 나는 그를 고발하고자 했으나 아는 변리사에게 독약같이 쓴 조언을 듣고 그것을 삼키는 수밖에 없었다. ‘다시는 절대로 그런 잘못된 자리에 나 자신을 두어서는 아니 되며, 다시는 절대로 우정을 그런 식으로 이용하려 해서도 아니 된다.’ 그렇게 나 자신에게 다짐했고, 그 후 나는 이 결심을 깨뜨린 일은 한 번도 없다. 이 충격은 내 인생을 바꾸어놓았다.
쿨리의 신세
오렌지 자유주 안에서의 인도인들은 1888년에, 또는 그전에 제정한 특별법에 의하여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고 말았다. 그들이 만일 머물러 살기를 원한다면 그들은 호텔의 짐꾼이나 그렇지 않으면 그와 같은 천한 직업에 종사해야만 했다. 상인들은 명목뿐인 보상금과 함께 내쫓기고 말았다. 청원도 했고 탄원도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트란스발에서도 상황은 비슷하여 1885년에 매우 가혹한 법안이 통과되었는데 그에 의하면, 모든 인도인은 트란스발에 들어올 때 입국료로 3파운드의 인두세를 내야 했다. 또 그들은 특별히 제정된 지역을 제외하고는 토지를 점유할 수도 없었고, 그 점유조차도 인정되지 않았다. 또한 그들에게는 선거권이 없었고, 공용도로로 걸을 수도 없고, 허가 없이는 오후 9시 이후에 외출을 할 수도 없었다.
나는 이 두 법의 효력을 체험해야 했다. 한번은 경찰관 하나가 아무런 경고도 없이 나를 떠밀고 발길로 차서 거리로 내몰았다. 내가 왜 이러느냐고 항의하기도 전에, 마침 말을 타고 그곳을 지나던 코츠씨가 소리쳐 나를 불렀다. 그는 경찰관을 고소하고자 했으나, 나는 그런 사람들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경찰관을 꾸짖었다. 경찰관은 내게 사과를 했으나 그럴 필요는 없었다. 나는 이미 그를 용서해주었다. 그 사건으로 인도인에 대한 나의 동정은 더 깊어졌다. 이 법규 문제로 후에 영국 주재관을 만난 다음, 필요하다면 하나의 시험 케이스를 만들어볼 만하지 않느냐는 토론을 했던 일이 있다. 나는 이와 같이 인도인들의 어려운 사정을 글을 통해, 귀를 통해 들었을 뿐 아니라 체험으로 잘 알게 되었다. 나는 자존심이 있는 인도인에게는 남아프리카는 살 곳이 못 된다는 것을 알았고, 내 마음은 점점 더 갈수록 어떻게 하면 이러한 사태를 개선해 나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나탈 인도 국민의회
나탈에 머무는 것을 당당한 심정으로 하려면 공공사업에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선거권 박탈 법안에 대한 탄원서의 발송은 그 자체만 가지고는 부족했다. 식민지 담당 국무장관에게 깊은 인상을 주려면 계속적인 시위운동이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설기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나는 압둘라 셰드와 또 그 밖의 친구들과 상의하여 영구적인 성격을 가지는 공공단체를 조직하기로 결정하였다. 새로 조직되는 단체에 붙일 명칭에 신경을 많이 썼는데, 의회(Congress)라는 명칭이 영국 보수당에서는 평이 좋지 못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인도 국민의회는 바로 인도의 생명이다. 나는 그것을 나탈에서 일반화시키고 싶었다. 그랬기 때문에 나는 그 이유를 충분히 설명한 다음 그 단체를 ‘나탈 인도 국민의회’라고 명명할 것을 제의하여서, 드디어 1894년 5월 22일에 나탈 인도 국민의회가 발족하게 되었다.
나는 첫 출발에서부터 공공사업은 빚을 지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른 일은 다 그렇지 않았는지 몰라도 금전에 관해서만은 누구든 약속을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나는 이때까지 자기 입으로 내겠다고 한 회비를 곧 내는 사람을 본 일이 없는데, 나탈 인도인들도 그 법칙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서 수중에 자금이 없이는 사업을 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나탈 인도 국민의회는 빚을 진 일이 없었다. 회의는 보통 매달 한 번, 필요한 때면 매주 한 번씩 열리곤 했다. 전 회의의 회의록을 읽고, 여러 가지 문제를 토론했다. 사람들은 공식 토론에 참여해본 경험이 없었고, 말을 간단하고 요령 있게 할 줄도 몰랐다. 나는 회의 진행의 규칙을 설명해 주었고, 그러면 그들은 잘 지켰다. 식민지 출생의 교육받은 인도인에 대한 봉사와 남아프리카와 영국에 있는 영국인과 인도 국내에 있는 인도인들에게 나탈의 실정을 알려주는 등의 의회의 활동의 결과로 남아프리카에서 수많은 인도인 친구를 얻게 되었고, 인도 각계각층에서 활발한 동정을 얻기에 이르렀다. 또한 남아프리카의 인도인 앞에 하나의 분명한 행동노선을 제시해주었다.
3파운드의 세금
1894년, 나탈 정부는 계약노동자에게 매년 25파운드의 세금을 부과하려는 꾀를 쓰고 있었다. 그 계획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그 사건을 의회에다 토의 안건으로 내놓고서 즉시 반대 작전을 펴기로 결의했다. 우리는 이 세금에 반대하는 치열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만일 나탈 인도 국민의회가 그 문제에 대해 잠자코 있었더라면 총독은 아마도 25파운드까지도 승인했을 것이다. 25파운드에서 3파운드로 감소된 것조차 완전히 국민의회의 시위 때문이었을 것이다. 국민의회로서는 세금을 25파운드에서 3파운드로 감소시킨 것을 큰 성공으로 생각할 수는 없었다. 계약노동자의 이익을 철저히 옹호하지 못한 것은 유감이었다. 세금을 철폐시키자는 결의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결의가 실현된 것은 20년이 지난 후였다. 또 그것이 실현된 것은 나탈의 인도인만이 아니라 남아프리카에 있는 전 인도인의 노력의 결과였다.
진리는 끝내 이기고야 말았다. 인도인의 고난은 그 진리의 한 표현이다. 그러나 물러설 줄 모르는 신앙에 대한 비상한 인내, 부단한 노력이 아니고는 그같은 승리가 있을 수 없었다. 공동체가 만일 그 투쟁을 중단했더라면, 국민의회가 투쟁을 그만두고 세금을 불가피한 것으로 알고 항복해버렸다면 이날까지도 원한의 세금은 계약노동자에게 부과되었을 것이고, 남아프리카의 인도인과, 그리고 전체 인도인의 영원한 치욕으로 남았을 것이다.
제3부 나의 일은 인도에 있다
자녀 교육
1897년 1월, 더반에 상륙했을 때 나는 세 아이들을 데리고 있었다. 누나의 열 살짜리 아들과, 아홉 살짜리와 다섯 살짜리 내 아들 둘을 데리고 있었다. 나는 물론 그애들을 유럽인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 보낼 수 있었지만, 그것은 다만 호의와 예외로써만 되는 일이다. 다른 어떠한 인도 아이들도 거기는 다니지 못한다. 인도 아이들을 위해 기독교 선교회에서 세운 학교가 있었지만, 나는 우리 아이들을 거기 보낼 마음은 없었다. 그 학교에서 하는 교육을 나는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저런 불편을 그대로 둘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내가 가르쳐보려고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리 해도 규칙적으로 할 수가 없었고, 또 그럴듯한 구자라트어 선생을 구할 수도 없었다. 영국인 여자를 가정교사를 채용해보기도 했고, 조카와 큰아들을 몇 달 동안 인도에 있는 기숙학교에 보내보기도 했으나 이 모든 실험들은 다 불충분한 것들이었다. 나는 그들을 위해 내가 해주고 싶은 만큼 많은 시간을 바칠 수가 없었다. 그들을 충분히 보살펴줄 능력이 내게 부족하기도 했고 또 다른 불가피한 원인도 있고 해서 내가 원하는 것만큼 그들에게 학문적인 교육을 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그 점에 대해 아이들은 모두 내게 불평을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만일 아이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공립학교에서 교육시키기로 했다면 그애들이 오직 경험의 교육, 즉 부모와의 끊임없는 접촉에서 얻어지는 훈련은 얻지 못하고 말았을 것이다. 또한 내가 현재처럼 그들의 일에 대해 아무 걱정도 하지 않고 지낼 수는 없었을 것이고, 또 그들이 내게서 떨어져 나가서 영국이나 남아프리카에서 인위적인 교육만을 받았더라면 그들이 오늘날 그 생활에서 보여주는 듯한 그러한 소박함과 봉사의 정신을 가르쳐주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비록 학문 교육은 그들이나 내 마음에 흡족하지 못하다 하더라도, 나의 지나간 날들을 돌이켜볼 때 그들에 대한 내 의무를 충분히 다하지 못했다는 생각은 절대로 하지 않으며, 또한 그들을 공립학교에 보내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지도 않는다.
브라마차리아
나는 결혼 이후 일부일처의 이상을 죽 지켜왔고, 아내에 대한 성실은 내 진리 사랑의 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자기 아내에 대해서까지도 브라마차리아를 지킬 필요가 있다는 것을 남아프리카에 와서 깨달았다. 어떤 사정이, 또 어떤 책이 내 생각을 이런 방향으로 이끌었느냐 하는 것은 명백히 말할 수 없으나, 내 기억으로 그 주된 요인은 레이찬드바이의 영향이었다. 그와의 교제와 대화를 통해 나는 나와 내 아내의 관계는 어떠해야 할까 하고 자신에게 물었다. 나의 아내에 대한 성실은 내 아내를 정욕의 도구로 만들자는 것이 아니었을까? 내가 정욕의 종인 한, 나의 성실은 아무 가치가 없다. 내 아내를 공정히 평한다면 그녀는 결코 요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브라마차리아의 맹세를 하는 것은 내게는 극히 쉬운 일이었다. 장애가 된 것은 나의 약한 의지와 또는 정욕에 대한 집착이었다.
나는 극기에 힘쓰기 시작했다. 그것은 한없이 어려운 일이었다. 우리는 따로 자기 시작했다. 나의 결심을 말했을 때 아내는 반대하지 않았다. 나는 하루 일로 기진맥진한 후에야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최종 결심은 1906년에 가서야 겨우 되었다. 나는 단식을 하였는데, 브라마차리아를 외적으로 돕는 데 단식은 음식을 선택하고 제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필요한 것이다. 감각이란 너무도 저항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통제하려면 사방에서 완전히 포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이 음식을 먹지 않고는 힘을 못 쓴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감각을 제어할 목적으로 단식을 하는 것은 의심 없이 매우 유효한 것이다. 아기 낳는 것, 그리고 그 결과로 오는 자녀 양육과 공공 봉사는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 점점 내 확신이 되어갔다. 그로부터 20년, 지난날을 돌이켜볼 때 내 마음은 기쁨과 놀라움으로 가득 찬다.
보어 전쟁
전쟁(1899년에 영국이 남아프리카의 금을 획득하기 위하여 보어인이 건설한 트란스발공화국과 오렌지 자유국을 침략하여 벌어진 전쟁)이 선포되었을 때 내 개인적인 동정심은 완전히 보어인 쪽이었다. 그러나 그때 나는 이런 경우에 아직 내 개인적인 확신을 강조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영국 통치에 대한 나의 충성심 때문에 그 전쟁에서 영국 편을 들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내가 영국의 한 시민으로서 내 권리를 주장하였다면, 영제국을 방어하는 일에 참가하는 것 역시 내 의무라고 느꼈다. 나는 그 당시 인도가 완전한 해방을 얻으려면 오직 영제국 안에서, 또 영제국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동지를 모아서 환자수송병 의용대에 지원했고 겨우 허가를 얻었다.
부대는 6주간 복무 후 해산되었다. 우리의 일은 보잘것없는 것이었으나 그 당시 많은 칭찬을 받았고, 인도인의 위신은 올라갔다. 신문들은 “우리도 제국의 아들이로다”라는 후렴구가 붙은 칭찬의 노래를 실었다. 불러 장군은 자기가 위급했을 때에 우리 부대가 한 일을 칭찬했고, 지휘관들은 훈장까지 탔다. 백인들의 태도도 눈에 띄게 달라진 것 같았다. 전쟁 중에 맺어진 백인과의 관계는 참 아름다웠다.
시련에 처한 신앙
나는 성안에 사무실을 얻어놓고 기르가움에 집을 한 채 세내기도 했지만, 하나님은 내가 거기 주저앉는 것을 원하시지 않았다. 새 집으로 이사를 하자마자 둘째아들 마닐랄(Manilal)이 급성 장티푸스에 걸렸다. 그 애는 몇 해 전에 천연두를 몹시 앓은 일이 있는데 이번에는 폐렴까지 겹쳐 밤에는 헛소리까지 했다. 나는 이런 경우야말로 사람의 신앙이 시험을 받는 때이며, 옳건 그르건 사람은 고기나 계란, 그런 등속을 먹을 수 없다는 것이 내 신앙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우리가 목숨을 지켜가는 방법에도 어느 한계가 있어야 하며, 생명 그 자체까지를 위해서도 해서는 안되는 어떤 것이 있는 법이다. 이런 나의 신앙을 바탕으로 약은 별 소용이 없다고 하면서 계란과 닭국을 먹이는 것이 좋을 거라고 말하는 의사의 처방을 정중히 거절했다.
나는 쿠네의 치료법에 따라 마닐랄에게 하반신 목욕을 시키기 시작해서, 목욕통 안에 3분 이상 두지 않고 계속 오렌지 주스에 물을 타서 먹이며 사흘 동안을 계속했다. 그래도 열은 내리지 않고 40도까지 올라갔으며, 밤에는 계속 헛소리를 했다. 나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계속하며 나만의 치료를 고수했으며, 그 애는 40일 동안을 물 탄 주스와 과일즙으로 지냈다. 이제는 겁날 것이 없었다. 그것은 아주 악성 열병이었는데도 휘어잡을 수가 있었다. 지금 마닐랄은 우리 아이들 중에서도 가장 튼튼하다. 그 애가 완쾌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 때문인지, 물 치료법 때문인지, 아니면 음식을 주의하고 간호를 잘했기 때문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 누구나 제 믿음에 따라 결정할 것이다. 나라면, 분명히 하나님이 내 명예를 건져주신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은 오늘까지도 변함이 없다.
제4부 사티아그라하, 끝없는 진리의 실험
반성의 결과
나는 이미 『기타』(Gita: 힌두교의 중요한 경전의 하나인 『바가바드 기타』의 약칭)를 믿고 있었고, 거기에 매혹되어 있었다. 이제 나는 더 깊이 파고 들어갈 필요를 느꼈다. 한두 가지 번역본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것을 이용하여 산스크리트 원전을 이해해보려고 힘썼다. 매일 한두 구절을 따로 외우기로 결심을 하고 그것을 위해서는 아침 목욕시간을 이용하기로 했다. 이렇게 『기타』를 읽는 것이 남들에게 어떤 감회를 주었느냐 하는 것은 그들 자신만이 알 수 있는 것이지만, 나에게 『기타』는 완전한 행동의 지침이 되었다. 이것은 내가 날마다 찾아보는 사전이 되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영어가 있을 때면 영어 사전을 찾듯이, 내 모든 난문제와 시련에 대해 미리 준비되어 있는 해답을 얻기 위해 나는 이 행동의 사전을 찾았다.
아파리그라하(aparigraha: 무소유)나 사마바바(samabhava: 한결같음, 평등관) 같은 낱말들이 나를 괴롭혔다. 평등한 마음을 어떻게 길러가며 지켜가느냐가 문제였다. 대답은 즉시 왔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지 않는 한 나는 ‘그이’를 따를 수 없다. 법을 존중해야 된다는 내 생각이 더욱 깊어졌다. 나는 그것을 종교 안에서 발견했다. 나는 무소유에 대한 『기타』의 교훈을 이런 의미로 이해했다. 즉 구원을 얻고자 하는 자는 관리인처럼 행해야 한다. 그는 막대한 재산을 관리하면서도 피천 한 푼도 제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무소유나 평등관은 심정의 변화, 태도의 변화가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청천백일같이 내 마음에 명확해졌다.
흙, 물 치료법의 실험
나의 생활이 점점 더 간소해짐에 따라 의약을 싫어하는 생각이 더욱 심해졌다. 더반에서 개업하고 있을 동안 기능 쇠약과 류머티즘성 염증으로 앓은 일이 있는데, 마침 나를 찾아왔던 의사 메타가 치료를 해주어서 나았다. 그 후로는 인도에 돌아올 때까지 이렇다할 병에 걸려본 일이 없다. 그러나 요하네스버그에 있을 때는 변비와 두통으로 고생을 했다. 나는 매일 세 끼씩을 꼬박꼬박 먹었고, 그 위에 또 오후 4시엔 차를 마셨다. 나는 결코 아껴 먹는 사람이 아니었고 양념 없는 채식으로 맛있는 것을 많이 먹었다. 6시나 7시 전에 일어나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침 먹기를 그만둔다면 두통이 없어질 것이라 생각하고 실험을 시작했다. 며칠 동안은 좀 어려웠지만 두통은 씻은 듯이 가셔졌다. 그 결과 나는 내가 이때까지 필요 이상으로 먹고 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는 동안에 채식식당을 운영하던 한 친구가 내 손에다 저스트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를 쥐여주었다. 그 책에서 나는 흙 치료에 관한 것을 읽고 즉시 실행해 보았는데, 놀라운 효과가 있었다. 이 치료법은 깨끗한 흙을 찬물로 이겨서 깨끗한 베 헝겊에다 넓게 펴 가지고 그것을 배에다 붙이는 것이다. 이것을 나는 잘 때에 붙이고 밤중이나 아침에 깨게 되면 떼어냈는데, 그 효과는 아주 근본적인 것이었다. 나는 일생에 두 번 아주 중병을 앓아본 일이 있기는 하지만, 사람이 약을 먹을 필요는 없다고 믿는다. 1천에 999는 음식 조절, 흙, 물 치료, 또는 그와 비슷한 가정요법으로 나을 수 있다. 조금만 아프면 곧 양의요 한의요 하며 의사에게 달려가고 식물성, 동물성의 가지가지 약을 삼키는 사람은 스스로 제 목숨을 단축시킬 뿐 아니라, 몸의 주인 노릇을 못하고 종 노릇을 하는 동안에 자제하는 힘을 잃어서 사람 노릇을 못하게 되고 만다.
<인디언 오피니언>
인쇄소를 경영하고 있던 마단지트 씨가 <인디언 오피니언>을 내보면 어떻겠느냐면서 내 의견을 구했다. 나는 그 제의에 찬성했다. 신문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 1904년인데, 시간의 대부분을 그 신문을 위해 써야 했다. 발행인인 만수클랄 씨가 그것을 운영해나갈 수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는 내가 거기 있는 한은 복잡한 남아프리카 문제에 대해 결코 글을 쓰려 하지 않았다. 그는 나의 통찰력을 최대한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 논설란을 채우는 일을 다 내게 맡겼다. 나는 이 신문에 투자를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나의 재정적 원조 없이는 계속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계속해서 돈을 거기 쏟아넣었다. 결국에 가서는 사실상 내 저금을 몽땅 털어넣은 셈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오늘날 다시 생각하면 그 신문은 사회를 위해 훌륭한 봉사를 했다. 이것을 장사로 해보자는 생각을 한 일은 없었다. 그것이 내 관할 아래 있는 한 그 신문의 어떤 변화는 곧 내 생활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었다.
<인디언 오피니언>은 내 생활의 일부요 거울이었다. 매주 나는 신문의 기고란에 심혈을 기울였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사티아그라하’의 원리와 실천에 관해서 해설을 했다. 10년 동안, 그러니까 1914년까지 내가 감옥에서 억지로 쉬게 된 것을 제외하고는 내 논설을 싣지 않고 발행된 <인디언 오피니언>은 한 호도 없었다. 실로 그 신문은 나에게는 자제의 수련장이 되었고, 친구들에게는 내 사상과 끊임없는 접촉을 해나가는 매개체가 되었다. 사티아그라하 운동은 아마 <인디언 오피니언>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발행인과 독자 사이에 긴밀하고도 순수한 유대를 맺어놓자는 것이 내 목적이었기 때문에 이 신문은 내게 계급과 인종을 초월한 인간성 연구의 기구가 되었다.
사티아그라하의 탄생
요하네스버그에서 되어가는 형편은, 내 편에서 하고 있는 자기 정화를 사티아그라하(satyagraha: 진리에의 헌신)를 위한 준비로 만들고 있는 듯이 보였다. 나는 이제 브라마차리아의 맹세로 그 절정에 달하는 내 생애의 모든 주된 시간들이 암암리에 이것을 위해 나를 준비시키고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사티아그라하라 불리는 것의 원리는 그 이름이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있었다. 사실 그것이 탄생된 때에도 나는 그것을 무엇이라 할지 몰랐다. 나는 아무리 해도 새 이름을 발견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인디언 오피니언>을 통해서 광고를 냈고, 그 결과 마간랄 간디가 ‘사다그라하’(Sadagraha: 진리 파악)란 말을 새로 지어내어서 상을 탔다. 그러나 그 뜻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여, 내가 그것을 ‘사티아그라하’로 고쳤다. 그래서 그후 이것이 투쟁의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투쟁의 역사는 실제적으로는 남아프리카에서의 나의 남은 생애의 역사요, 특히 아프리카에서 한 나의 진리 실험의 역사다. 그 역사의 주요 부분은 내가 예라브다 감옥에 있을 때에 썼고, 완성은 석방된 후에 됐다.
정신적 딜레마
아힘사는 포괄적인 진리다. 우리는 힘사(himsa: 살생)의 불길 속에 갇힌 무력한 인간들이다. 사람은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외견상으로 살생을 범하지 않고는 한 순간도 살 수 없다. 사람이 산다는 사실 그 자체, 즉 먹고 마시고 움직이는 그것이, 비록 매우 작을지는 몰라도, 필연적으로 어떤 힘사, 곧 생명의 파괴를 가져오게 한다. 그러므로 아힘사의 신자는 그의 모든 행동의 원천이 자비심에 있기만 하다면, 그의 있는 힘을 다하여 지극히 작은 생명 하나라도 살해하지 않고 그것을 구해주려고 애쓴다면, 그리하여 그 무서운 살생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지 않으려 끊임없이 노력한다면 그는 변함없이 제 신앙에 충실할 수 있을 것이요, 부단히 자제와 자비 속에서 성장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완전히 외적인 살생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또 그뿐 아니라 아힘사의 밑바닥에는 모든 생명의 통일성이 높여 있으므로, 하나의 잘못은 전체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살생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사회적 존재로 계속되는 한 온갖 사회적 존재가 연루된 살생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대영제국을 통해서 나와 내 동포의 지위를 향상시키려고 했다. 전쟁에 종군하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결론을 내렸다. 오늘날로 나는 그러한 견해에 결코 모순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 진리에 헌신하는 사람은 무슨 일이나 관습에 따라서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는 언제나 스스로 수정할 태세를 갖추고 있어야 하고, 자신이 잘못임을 알았을 때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것을 고백하고 속죄해야 할 것이다.
제5부 구원과 투쟁, 다시 민중 속으로
아슈람의 창립
우리의 신조는 진리에 헌신함이요, 우리의 할 일은 진리를 찾고 주장하는 일이다. 나는 내가 남아프리카에서 시험해보았던 방법을 인도에 잘 알려주고, 그것을 가능한 한 인도에서 시도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내 동지들과 나는 우리의 목적과 봉사의 방법을 다 나타내는 말로 ‘사티아그라하 아슈람’이라는 이름을 골라냈고 1915년 5월 25일 아메다바드에서 창립했다.
겸손이 속에 품고 있는 참뜻은 자기 말살이다. 자기 말살은 곧 모크샤(Moksha: 구원)이다. 그러니 그 자체만으로는 지킬 조건이 못 되는 동시에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지켜야 할 다른 계율들이 있을 것이다. 만일 모크샤를 향해 정진하는 사람이 겸손, 즉 무사(無私)한 마음이 없다면, 그것은 이미 모크샤를 갈망하는 마음, 곧 봉사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다. 겸손 없는 봉사는 이기주의요, 자기 중심주의다. 우리는 남자와 여자를 합해 스물다섯 명이었다. 이것이 시작 당시의 아슈람의 모습이었다. 밥은 모두 공동취사장에서 먹었고, 한가족으로 살려고 애를 썼다.
파업과 단식
파업을 하게 된 아메다바드의 방직공들은 처음 두 주일은 대단한 용기와 자제력을 발휘했고, 매일 대집회를 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들에게 맹세를 다시 일깨웠고, 그러면 그들은 또 나를 향해, 차라리 죽을지언정 자기네가 한 약속을 어기지는 않겠다고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침내 맥이 빠지기 시작했다. 매일 갖는 모임에 나오는 사람 수도 점점 줄었고, 출석한 사람들도 낙담과 절망의 빛이 역력했다. 결국 파업자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내 마음은 말할 수 없이 괴로웠다. 그러던 어느날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저절로 내 입에서 말이 나왔다. “파업자들이 한데 뭉쳐서 해결이 날 때까지 파업을 계속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한 사람도 남김없이 다 공장을 떠나든지 할 때까지 나는 아무 음식도 입에 대지 않겠습니다.” 나는 사람들을 향해 선언했다.
그렇게 한 결과 사방에 선의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공장주들도 이에 감동되어 해결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아나수야벤의 집이 토의장소가 됐다. 아난드샨카르 드루바가 이 사태의 중재자로 지명됐다. 그리하여 내가 단식을 시작한 지 사흘 만에 파업은 중지되었다. 파업을 시작한 지 21일 만에 해결을 보았다. 공장주들은 그것을 축하하는 의미로 직공들에게 과자를 나누어주었는데, 21일 동안 엄격한 규칙을 지킨 사람들이 과자 분배과정에서 무질서함을 보이는 희극적인 일이 발생했다. 우리나라는 너무 혹독한 가난과 기근 속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해마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을 거지로 만든다. 먹을 것을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경쟁을 벌이는 그들은 체면도 자존심도 돌아볼 줄 모른다. 그런데 우리 자선가들은 그들에게 일거리를 주어 제 손으로 밥을 벌어 먹도록 할 생각은 않고 동냥만 주고 있다.
히말라야적 오산
아메다바드의 집회가 끝난 바로 직후 나는 나디아드로 갔다. 후에는 널리 유행이 된 말이지만 내가 ‘히말라야적 오산’이란 표현을 처음으로 쓴 것은 여기서였다. 아메다바드에 있을 때도 내 잘못을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지만, 나디아드에 와서 사태의 진상을 내 눈으로 보고 케다 지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체포됐다는 소식을 듣고 나니, 문득 내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렇지만, 케다 지방과 그 외 지방의 씨(민중 중에서도 순수한 사람됨을 지향함)들을 불러일으켜 시민의 불복종에 나서게 한 것은 시기상조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로 사람들은 법을 어겼을 때의 벌이 무섭기 때문에 그 법을 지킨다. 도덕률에 관계되지 않은 법인 경우에 특히 그렇다. 그러나 그렇게 마지못해 하는 복종은 사티아그라하를 하는 데 필요한, 자발적인 순종은 아니다. 사티아그라하를 하는 사람은 사회의 모든 법을 이지적으로, 또한 자기의 자유 의지로, 그렇게 하는 것이 신성한 자기 의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킨다. 이와 같이 사회의 모든 법을 성실히 지키고 난 후에야 사람은 누구나 특정한 법은 선하고 옳으며, 어떤 것은 부당하고 사악한 것이라고 능히 판단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오직 그런 다음에야 어떤 특정한 법에 대해 명확한 조건 아래서 시민의 불복종을 할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된다.
내 잘못은 이러한 필요한 한계들을 잘 알지 못한 데 있었다. 나는 씨들이 이러한 자격들을 스스로 갖추기 전에 시민의 불복종에 나서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잘못이 내가 보기엔 히말라야같이 큰 것이었다. 씨들이 시민의 불복종을 할 수 있는 자격을 얻으려면 그것이 속에 품고 있는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고 난 다음이라야 된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적 규모로 시민의 불복종을 다시 행하려면 먼저 사티아그라하의 엄격한 모든 조건을 철저히 이해하는, 잘 훈련되고 순결한 심정을 가진 사람의 무리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들이 씨들에게 이 모든 조건을 설명해주고 불철주야로 경계해야만 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않게 될 것이다.
안녕히
이제부터 내 생활은 세상이 모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만큼 공적인 것이 됐다. 그뿐 아니라 1921년 이후로는 국민의회의 지도자들과 아주 가깝게 관계했으므로, 그 이후의 내 생활은 어떤 일화 하나라도 그들과의 관계를 언급하지 않고는 말할 수 없게 되었다. 국민의회 역사는 아직도 형성 과정에 있다. 그리고 지나간 7년 동안의 나의 중요한 실험들은 모두 국민의회를 통해서 행해진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내 실험을 계속 써나간다면 지도자들과의 관계를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현재의 나의 실험에 대하여는 아직도 결정적 결론이 얻어졌다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맺는 것이 분명한 내 의무 같다. 사실 본능적으로 내 펜이 더 써 나가기를 거부하고 있다.
내 경험은 내게 진리 외에 다른 신은 없다는 확신을 주었다. 내가 아무리 진지하게 아힘사의 실천을 위해 지금까지 노력해왔다 하더라도 그것은 아직도 불완전하고 불충분한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잠깐 볼 수 있었던 잠시 동안의 진리의 광선으로는 형언할 수 없는 진리의 광채를 도저히 짐작도 할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날마다 우리 눈으로 보는 저 태양 빛의 광휘보다 가늘고 희미한 빛뿐이다. 그러나 내 모든 실험의 결과로 이것만은 말할 수 있다. 즉 진리의 완전한 모습은 ‘아힘사’의 완전한 실현이 있은 후에야 나타난다.
본 도서요약본은 원본 도서의 주요 내용을 5%정도로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원본 도서에는 나머지 95%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보다 많은 정보와 내용은 원본 도서를 참조하시기 바라며, 본 도서요약본이 좋은 책을 고르는 길잡이가 될 수 있기 바랍니다.
생명 가진 모든 것을 평등하게 대하는 것은 자기 정화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자기 정화의 길은 좁고 험하다. 완전한 정화에 이르려면 생각으로나, 말로나, 행동으로나 절대적으로 정욕을 버려야 한다. 사랑과 미움, 친밀함과 소원(疏遠)함의 대립이 이어지는 세속의 흐름을 초월해야 한다. 나는 내가 끊임없이 쉬지 않고 노력은 하면서도 아직도 내 속에 그 세 겹의 정결이 되어 있지 못함을 안다. 세상의 칭찬이 내게 달갑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가슴을 찌르는 때가 많다. 교활한 정욕을 정복하기란 내가 보기에는, 무력을 가지고 세계를 정복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나는 나를 무(無)에까지 내리지 않으면 안된다. 사람이 스스로 자기를 피조물 중의 맨끝에 세우지 않는 한 구원은 있을 수 없다. 아힘사는 겸허의 궁극점이다.
▣ 더 깊이 있게 알기 위하여 - 간디의 생애
간디는 인도 민족 운동의 지도자․사상가로 ‘마하트마(위대한 혼, 큰 성인)’라는 존칭으로 불리는 인도 건국의 아버지이다. 그는 영국의 지배를 받던 포르반다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유능한 행정가였고, 어머니는 비폭력을 중시하고 도덕적으로 매우 엄격한 종교를 믿는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이런 가정 환경 속에서 그는 아힘사(살아 있는 모든 것의 불살생)와 채식주의, 자기 정화의 단식, 그리고 모든 종파의 상호 관용을 배우며 자랐다. 어려서는 인도에서 교육받았으나 1887년 런던에 있는 이너템플 대학에 입학하였다. 영국 체류 3년 동안의 생활은 그의 인격과 정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1891년 변호사의 자격을 얻어 귀국하였으며, 1893년 소송 사건을 의뢰받아 1년간의 계약으로 부인과 함께 남아프리카 연방의 더반으로 건너갔다. 이 남아프리카 여행은 간디의 생애에 커다란 전기를 가져왔다. 당시 남아프리카에는 약 7만 명의 인도 사람이 이주해 있었는데 백인에게 박해를 받고 있었다. 이에 그는 거기에 사는 인도 사람의 지위와 인간적인 권리를 보호하고자 결심하고 남아프리카 연방 당국에 대한 인종 차별 반대 투쟁 단체를 조직, 1914년까지 그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이 때에 처음으로 사티아그라하(진실에의 헌신)가 생겨났다. 이는 적대자들에게 원한과 투쟁, 폭력을 쓰지 않고 저항해 그것으로 그들의 잘못을 바로잡는다는 새로운 방법이다. 이후 사태가 보여 주듯 그는 아프리카의 인도인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하지는 못했지만, 감춰진 특별한 능력을 찾아냈으며 일약 세계의 간디가 되었다.
1915년에 모국에 돌아온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인도의 독립을 촉진하기 위하여 영국의 입장을 지지하였지만 정치 활동에는 잘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1919년 민중 탄압법인 롤라트 법이 제정되자 영국의 지배에 반기를 들기 시작하였다. 1919년 봄 그는 사티아그라하 투쟁을 선언했고, 곧 봉기가 일어나 펀자브에서 400명에 달하는 인도인이 영국군에게 학살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잠시 움츠러들었지만, 다시 투지를 갖고 일어나 1920년 인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적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인도 국민 회의를 민족주의의 효율적인 정치 기구로 바꿔 놓아 대도시의 중산층부터 시골의 작은 마을에 이르기까지 대중 조직을 갖추게 하였다. 그는 영국 정부에 대한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전개했다. 이 운동으로 인도 민중이 갖고 있던 외국 지배자에 대한 공포심을 없애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인도 각지에서 유혈 사태가 일어나자, 1922년 간디의 호소로 운동은 잠시 중지되었다. 그 동안 간디는 투옥되었다가 풀려 나왔으며, 1924년부터 1년간 국민 회의파의 의장으로 있으면서 인도인이 자력으로 농촌 구제에 나설 것을 역설하며 전국을 돌아다녔다.
1929년의 연차 대회에서 국민 회의파는 창립 이래 처음으로 완전 독립을 선언하였고, 61세가 된 간디는 1930년 3월 소금세 신설에 반대하여 사티아그라하 운동을 시작하였다. 영국 통치에 대한 간디의 비폭력 운동 중 가장 성공적이었던 이 운동에서 6만 명 이상이 투옥되었다. 1년 뒤 간디는 어윈 총독과 협상하여 반영(反英) 불복종 운동을 중지하였다. 그러나 간디-어윈 협정에도 불구하고 다시 탄압 정책을 쓰는 영국 당국에 항의하기 위한 불복종 운동을 재개하여 투옥되었다가 1932년 석방된 이후부터 인도 카스트의 최하층인 하리잔의 지위 향상에 진력하였다. 1934년 국민 회의파의 지도자 자리를 사임하고, 세바그람에 가서 살면서 농민을 교육하고, 하층민을 위해 투쟁하며, 교육 체계를 개선하기 위해 애썼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영국은 인도의 찬성을 얻지도 않고 인도를 전쟁에 투입하였다. 이에 인도 국민 회의는 자치 정부 수립을 조건으로 영국에 협력하고 간디는 1942년 영국에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했다.
일본과 전쟁이 심각해지자 영국은 간디와 국민 회의파를 탄압했고 이에 대항하여 폭동이 발생, 영국과 인도의 관계는 최악의 상태에 빠졌다. 이로 인해 간디는 73세의 노령으로 다시 체포되어 1년 9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전쟁이 끝난 후 국민 회의파, 이슬람 동맹, 영국 정부 간의 3자 협상이 벌어졌으나 협상 중에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에 유혈 충돌이 계속 일어났다. 1947년 간디의 뜻과는 달리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 독립이 결정되었고, 양쪽으로부터의 비난을 무릅쓰고 두 종교의 갈등을 해결하고자 간디는 단식에 들어갔다. 간디의 단식에 의해 1947년 9월 캘커타의 폭동이 가라앉았고, 1948년 1월에는 델리에서 휴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불과 며칠 뒤인 1월 30일 나투람 고드세라는 반(反)이슬람 힌두교 광신자에게 암살당했다.
인도인 가운데서도 정파와 계층, 종교에 따라 간디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간디는 다양한 성향을 지닌 많은 남녀노소 그리고 서구의 많은 종교인과 인도의 거의 모든 종파로부터 애정과 충성을 받았다. 그는 분명히 정치 지도자였지만 그의 생애의 주된 동인(動因)은 종교였으며 평생 평등과 비폭력의 사상을 일관되게 지켰다. 간디의 저서 『인도의 자치(自治)』에서 표현되어 있는 서구의 물질주의와 식민주의에 대한 비판, 근대 국가에 대한 불신, 폭력에 대한 전면 거부는 기술 문명의 폐해와 평화의 위협으로 가득찬 현대 세계에서 점차 높이 평가되고 있다.
▣ 간디 연보
1869년 10월 2일,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구자라트 주 포르반다르(카티아와르)에서 출생.
1882년 13세 때 카스투르바이 마칸지와 결혼.
1888년 9월 4일,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영국 유학길에 오름, 『바가바드 기타』와 『성경』을 읽음.
1891년 런던 이너 템플 법학원을 수료함으로써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인도로 귀향. 뭄바이와 라지코트에서 법률사무소 개업. 유럽의 복장과 생활 양식을 즐김.
1893년 남아프리카로 향함. 인도 이주민들의 정치적 지도자로 부상.
1894년 나탈 인도인 의회를 설립. 인도인 선거권 박탈 법안에 대한 반대투쟁 개시.
1899년 보어 전쟁에서 영국인을 위해 인도인 위생병 부대를 만들어 종군.
1903년 요하네스버그에서 법률사무소 개업. 러스킨의 『이 나중 온 자에게도』를 읽고 크게 감명받음.
1904년 피닉스 정착촌 설립. 주간신문 <인디언 오피니언> 창간.
1906년 남아프리카 정부의 인종 차별적인 입법에 대항해 수동적 저항을 조직화하면서 비폭력 투쟁을 실시. 수차례에 걸쳐 투옥(~1914년).
1909년 7월 10일, 아시아인법 문제로 런던에 감. 11월, 남아프리카로 돌아옴. 첫 번째 저서 『힌드 스와라지』(인도의 자치) 발행. 몰리-민토개혁법 발표. 1910년 11월 20일, 톨스토이가 사망할 때까지 그와 서신을 교환함.
1910년 요하네스버그 교외에 톨스토이 농장을 만들고 이상적 공산주의식 공동체 실험을 함. 번창하는 변호사 일을 포기하고 이 농장으로 이주.
1912년 모든 개인 재산을 포기하는 맹세를 함.
1915년 1월 9일, 22년 만에 귀국. 타고르로부터 마하트마로서 환영을 받음. 5월 20일, 아메다바드에서 사바르마티 아슈람을 건립. 의복과 생활 양식을 부득이한 것만 제외하고 인도식으로 바꿈.
1920년 회장으로 피선되어 의회를 이끎. 남아프리카에서 전개했던 방법으로 영국의 지배에 대해 비폭력 투쟁 실시. 인도 가정의 물레 사용을 촉진하여 영국 직물을 배척(홈 스핀 사상). 비협조 운동을 벌임. 칼리프 복권 운동에서 이슬람교도와 협력함(~1934년).
1924년 1922년 선동죄로 6년형의 선고를 받고 복역중 병으로 조기 석방됨. 칼리프 복권 운동이 와해됨. 힌두교와 이슬람교 사이에 긴장 상태가 고조됨. 두 종교 사이의 화해를 위해 21일 동안 단식.
1932년 1월 4일, 발라브바이 파텔과 함께 예라브다 감옥에 투옥. 힌두교인과 불가촉천민을 분리시킨 선거에 반대하며 ‘죽을 때까지’ 한다는 각오로 단식에 돌입. 9월 26일, 단식한 지 6일 후에 영국의 동의 아래 힌두교인과 불가촉천민 사이에 이른바 예라브다 협정이 체결되어 단식을 끝냄.
1934년 5월, 시민 불복종 운동 완전 정지. 국민의회의 지도부 자리를 사직. ‘건설적 프로그램’ 운동에 전념.
1935년 관직 없이 민중 운동 건립에 전념(~1939년).
1940년 6월, 간디, 국민의회에서 물러났다가 8월에 다시 복귀. 참전 반대와 개인적 불복종 운동 전개. 군비 계획을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
1943년 영국 통치로부터 인도의 자유를 얻기 위해 찬드라 보세는 일본과 연합하여 ‘인도 국민국’ 창설.
1947년 6월 3일, 영국 총리 클레멘트 애틀 리가 파키스탄과 인도의 분리를 발표. 국민의회와 이슬람 동맹이 이에 동의. 간디는 이를 ‘정신적 비극’이라고 칭함. 8월 15일, 두 국가는 분할 독립을 획득. 9월 1일, 칼리카타에서 이슬람교와 힌두교의 화해를 위해 단식.
1948년 1월 20일, 뉴델리에서 간디를 노리는 폭탄 테러 발생. 1월 30일, 힌두교 광신자인 나투람 고드세에 의해 뉴델리에서 암살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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