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신열전
서론
간은 국가와 민족의 생사존망에 관한 중대한 역사 현상으로서, 정치적 색채를 띤 도덕윤
리의 범주이다. 수천년의 역사에서 간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그것을 통제하는 방법을
마련하지 못해 국가와 민족을 멸망으로 이끈 보기는 적지 않았다. 따라서 선악을 가려내고
충간을 판별하는 것은 국가흥망의 소재가 됨은 물론, 백성의 안위와도 관련되며, 사업의 성
패에도 영향을 미친다. 역사의 경험은 주목할 만한 값어치가 있다. 지난 일을 살펴 현재와
미래를 생각하듯, 간을 살피고 구별하며 간과 싸워 간을 제압하는 일은 확실히 심각한 현
실적, 역사적 의의를 가진다고 하겠다.
지금으로부터 약 900년 전인 송나라 신종 9년(1076)10월. 지칠 대로 지친 노인이 서쪽에
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무거운 걸음을 끌고 있다. 노인은 관을 짊어지고 있다. 종산
근처에서노인은 힘겨운 걸음을 멈춘다. 관 속의 시체는 노인의 아들이었다. 그날 이후 아침
저녁을 알리는 종과 북 소리 그리고 불경만이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의 고독한 인생
의 벗이 되었다. 노인은 늘 혼자 소나무 숲을 배회하거나 초가집에 혼자 앉아 말없이 알
듯 모를 듯 '복건자'라는 세 글자를 계속해서 써내려 갔다.
달이 지고 별이 가라앉았다. 바뀔 것은 바뀌고 옮겨갈 것은 옮겨갔다. 가을이 한 번 지
나갔다. 그리고 또 가을이 왔다. 어느 날 저녁 오인은 종산에 올라 멀리 아래를 내려다보았
다. 눈 아래로 보이는 맑은 강물은 흰 명주필 같았고, 푸른 산봉우리는 떼지어 모여 있었
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풍경도 노인에게는 보기 좋을 수 없었다. 왕년의 화려했던 시절과
지금의 처량한 저녁 풍경이 한데 어우러져 가슴속에서 회한이 되어 한꺼번에 솟아올랐다.
대체 이 노인이 누군가? 소순이란 이름으로 쓰여진 <변간론>에서 이 노인은 '크게 간
사한' 자로 욕을 먹었다. 그러나 아주 먼 훗날 레닌으로부터는 개혁가라는 칭찬을 들었다.
이 노인은 바로 송나라 때의 개혁 정치가 왕안석이었다. 왕안석은 학자풍의 관료 집안에서
태어났다. <송사>의 <왕안석전>에 따르면 그는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좋아해 한번 책을
붙들었다하면 모든 것을 잊을 정도였다. 문장과 글을 날아갈 듯했으며, 처음에는 경전의 뜻
을 몰랐으나 커가면서 보는 즉시 그 오묘한 뜻을 모두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의 학문과 재능은 당시 문단을 이끈 주도적 인물이자 조정의 중신이었던 구양수를 비
롯해서 많은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이들은 왕안석의 재능을 아주 높이 평가하며 그의
이름을 널리 알렸다. 이 때문에 왕안석은 스물을 갓 넘은 약관의 나이에 진사에 급제하여
관직을 받았다. 이때부터 사대부로서의 그의 출세 길은 활짝 열렸고 그의 앞날은 완전히 비
단길이었다. 그러나 왕안석은 중국 역사상 국력이 아주 약했던 북송 시대에 살았다. 북송
왕조는 건국한 이래 오랫동안 대관료, 대지주 계층을 비호하고 눈감아주는 정책으로 일관하
여, 땅을 마구 차지하는 것도 막지 않았고 토지제도도 세우지 않았다. 그래서 저들끼리 농
민의 땅을 서로 차지하려고 다툼으로써 권세 있는 관리가 부강해지고 땅을 무한대로 차지하
는 심각한 상황이 초래되었다. 게다가 가혹한 세금과 고리대금은 농민을 생존조차 힘든 극
한 빈곤으로 몰아넣었다. 중소 지주 역시 대관료, 대지주의 토지 확대와 무거운 세금 때문
에 속속 파산했다.
동시에 북송 왕조는 병권을 변방의 장수들에게 넘겨주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군대를 서
울인 개봉 부근에 배치했다. 이는 중앙집권제를 강화하고 튼튼히 하는 데는 유리했지만, 변
방을 극도로 약화시켜 북방과 서북방의 외환은 갈수록 심각해졌다. 이 때문에 매년 요와 서
하에 백은 수십만 냥과 비단 수십만 필을 바쳐가며 구차하고 일시적인 안정을 꾀하지 않
을 수 없었다. 이 돈과 비단은 물론 농민들이 부담했다. 국가 재정도 갈수록 엉망이 되었다.
영종 치평 2년인 1065년, 국가의 빚이 약 1,500만 냥에 이르러 북송 왕조는 이미 내외적으
로 심각한 지경에 빠졌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살았던 왕안석은 어려서부터 백성과 세상을 구제하리라는 청운의
뜻을 품었다. 특히 훗날 지방관으로 지내면서는 북송 왕조의 허약한 모습을 자기 눈으로 직
접 보았다.
왕안석은 의연희 법과 제도를 바꾸어 나라를 강하게 해야 한다는 노선을 정하게 되었다.
세력가들의 토지 겸병을 막고 백성의 힘을 아껴 국가의 근본을 튼튼히 함으로써 위기에 처
한 사직과 조국 강산을 구하고자 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보국의 뜻을 품고 왕안석이 실
시한 희녕 연간의 '변법'은 대지주, 대관료를 중심으로 한 수구해가 절대적 우세를 차지하고
있던 북송 왕종에서 그 출발부터 낙관할 수 없었다. 더구나 인재 등용에서 드러난 치명적인
실수는 그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는 데 장애가 되었다.
'당송 8대가'의 한 사람이었던 왕안석은 당나라 시인 장적의 시에 대해 "언뜻 보기에는
예
사로우면서도 기발하고 특출한 것 같지만, 완성된 글을 쉬우면서도 오히려 고생스럽다."라고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장적의 사람 됨됨이는 왕안석을 평가하고 생각하는 데 있어서 매
우 중요하다. 장적은 어려서부터 집을 떠나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니며 인심과 세상 풍파를
흠씬 맛보고 겪었다. "가족과 고향 사람 모두가 명예를 얻기를 바랐지만" 그는 동서남북으
로 떠돌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초췌한 목로"이 되고 말았다. 그 뒤 맹교 등의 한유에
게 장적의 시를 칭찬하여 한유가 장적을 집으로 초대하였다. 장적에게 감찬한 한유는 장적
으로 하여금 집에 몽무르면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했다. 이듬해 가을 변주에 진사 시험이
있었따. 한유는 주시험관이었고 장적은 장원급제했다. 이어 그는 다시 장안으로 올라가 정원
213년 진산 시험에서 급제했다.
장적과 평소 교분이 없던 한유가 이렇게 장적을 힘껏 밀어주었으니, 다른 사람이 보기에
한유는 장적에게 생명의 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몸과 마음을 다 배쳐 은혜를 갚는
다 해도 모자랄 판이었다. 그러나 장적은 한유를 칭찬하지도, 그 흠을 감추지도 않았다. 장
적은 한유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의 새 가지 결점을 신랄하게 지적했따. 첫째, 당신은 도박을
좋아한다. 둘째, 당신은 황당무계한 소설울 숭상한다. 셋째, 당신은 말로써 사람을 굴복시키
기를 좋아한다. 게다가 차분히 학문에 힘꺼 자기 학설을 세우려 하지 않고 후세에 이름만
남기려 하다고 비판했다.
구당서와 신당서는 이 일을 서술하면서 장적을 칭찬하고 있따. 당연하겠지만 이런 태도는
세상 사람들에게 경고와 반성의 뜻을 전하기 위한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적어도 다음
과 같은 점을 일깨워준다. 진정한 친구는 서로 잘잘못을 지적하지만, 거짓된 친구는 서로를
치켜주기만 한다. 진정한 친구는 은혜가 있다고 해거 결점을 못 본 체하지 않지만, 거짓된
친구는 친구가 잘못했을 때 그 잘못을 나무라기만 한다. 그러나 장적의 시와 문장을 너무도
잘 이해했던 왕안석이 바로 이점에서 실수를 저질렀다. 그는 재상으로서 '변법'을 주도한 후
제대로 하는 일 없이 늘 일을 그르치지만 하는 등관과 같은 부류들을 중용하였다. 이로써
권세를 좇고 권세에 빌붙어 출세하려는 무리들이 '새로운 정치'라는 허울을 쓰고 '변법'의
주
도 집단에 마구 섞여 들어갔다.
왕안석이 잘 나가던 시절, 사마광은 장적이 한유에게 그랬던 것처럼 왕안석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내 그를 주엄하게 꾸짖었다. 사마광이 왕안석의 정적이었기 때문에 다소 편파적이
라고 한다면 여기서 왕안석의 동생 왕안국이 혀에게 한말을 들어보자. 송사에 따르면 왕안
석은 재상이 된 뒤 서경에서 국자교수로 있으면서 "가무와 여색에 빠져 있는"동생에게 더
이상 "방탕한 짓을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러자 동생 왕안국이 답장을 보내 "소인, 아첨
배들을 멀리하십시오!"라고 점잖게 충고했다. 또 한번은 신종이 왕안국을 불러 "경의 형님이
정치를 맡은" 이래 여론이 어떠하냐고 물었다. 그러자 왕안국은 거리낌없이 "모두들 사람들
제대로 볼 줄 모르고, 세금이 너무 가혹하다고 원망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정상에 올라 있는 왕안석에게 귀에 거슬리는 이런 충언은 이미 들리지 않았다.
훗날 왕안석이 궁지에 몰려 재상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을 때, 그를 "공자에 버금가는
성인"이라고 떠받들던 여혜경 무리는 그를 돕기는커녕 즉시 낯을 바꿨고, 심지어 "어떤 일
은 성상께서 알면 안 된다."는 사사로운 편지까지 들추어내 왕안석을 공격했다. 이런 정쟁
속에서 왕안석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도 타격을 견디지 못하고 몸져눕더니 끝내 아비보다 먼
저 죽고 말았다. 이 때문에 왕안석은 강릉으로 은퇴한 후, 혼자 쓸쓸히 울적한 마음을 달랠
길 없어 '복건자'라는 세 글자만 반복해 쓰면서 여혜경의 기용을 후회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 왕안석은 회한을 가득 품은 채 세상을 떠났다.
이 사건에 대해 소철은 여혜경의 간행을 분노에 찬 목소리로 꾸짖었다.
"여혜경은 장탕의 간사한 말솜씨와 노래의 사악함을 갖추었으니... 여혜경에게 있어서 왕
안석은 자신을 길러준 은인이자 스승과 부모처럼 모셔야 할 사람이었다. 출세하기 위해 찰
싹 달라붙더니 알력이 생기자 돌연 원수와 적으로 변해 사사로운 편지를 폭로하는 등 할 수
있는 짓은 뭐든지 다 했다. 개, 돼지도 못할 짓을 여혜경은 한 것이다. 여혜경의 악행은 여
태껏 법으로 다스려지지 못했으니, 왕명으로써 죄인을 나라 끝으로 유배하는 것이 옳을 것
이다."
사실 역사상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해서, 사람을 잘못 써서 집안과 나라를 망친 사건들은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당나라는 한때 찬란한 황금기를 누렸다. 현종은 유능한 인재
를 뽑아 쓰고 좋은 의견들을 받아들여, 이른바 '개원의 치'라는 전성기를 만들어냈다. 그러
나
그 뒤 이임보를 재상으로 등용하고 장구령을 파면하여, 건전하고 비판적인 언론를 끊어 버
렸다. "그로부터 조정의 대신들은 너나할것없이 자기 몸과 자리만 지키려 했지. 더 이상 바
른 소리는 하지 않았다." 당나라는 빠른 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더구나 그 뒤 다시 양국
충을 기용하고 안록산을 귀여워하다가, 마침내는 '안사의 난'을 초래하여 안팎으로 고통스러
운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참으로 안타깝고 가슴아프지 않을 수 없다.
당 현종 이융기는 예종의 둘째 아들로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믿음직스러웠다. 26세
때 임치왕이 되었고 노주별가를 지내기도 했다. 그러다 위 황후의 모함을 받아 관직에서 파
면된 후 서울로 돌아와 한가하게 지내는 동안 위 황후의 왕권 찬탈 음모를 지켜보게 되었
다. 백성과 나라를 재앙으로 몰아넣는 것을 보고 분노한 그는 충성스럽고 곧은 사람들과 사
귀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물들을 모았다. 그리고는 위 황후가 중종을 독살하고 자신
의 황제 자리에 오르려는 찰라, 군가를 일으켜 단숨에 위 황후 일당을 제거했다.
그 후 그는 황태자가 되었다가 마침내 당나라 천자의 보좌에 올랐다. 그리고 정변을 꾀하
던 태평 공주 일당을 진압한 뒤 낡은 정치를 버리고 새로운 정치를 선언함으로써, 마침내
당나라는 개원, 천보의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그는 창업과 수성의 어려움을 몸소 느끼면서 자신을 잘 다스렸고, 예리한 눈빛
과 맑은 두뇌로 가짜와 진짜, 충신과 간신을 한눈에 가려냈다. 개원 후반기에는 한휴를 재상
으로 기용했는데, 한휴는 매우 강직하여 현종이 잘못을 하면 그 잘못을 면전에서 서슴없이
지적했다. 이 때문에 현종의 마음은 늘 편치 못했다. 심지어는 사냥이나 놀이를 나갔다가 때
가 지나면 깜짝 놀라 좌우에게 "한휴가 알면 어쩌지?"라고 말할 정도였다.
언젠가는 어떤 이가 "한휴가 조정에 들어온 뒤로는 폐하께서 단 하루도 즐겁게 보내신 것
이 없습니다. 그렇게 안절부절 못 하시면서 왜 한휴를 내치시지 않는 것입니까?"라고 물었
다. 그러자 현종은 뜻 밖에도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말랐지만 천하가 살찌지 않았는가? 내숭은 모든 일을 내 뜻대로 따라 했지만, 정사
를 끝내고 자리에 누워 천하를 생각하면 편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러나 한휴는 내 앞에
서 솔직하고 딱부러지게 바른 소리를 해도, 자리에 누워 천하를 생각하면 편안히 잠을 이룰
수 있다."
이런 현종이었기에 충성스럽고 현명한 신하들로 하여금 폐단을 바로잡고, 나라와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리도록 맡기는 하편, 교활하고 간사한 무리들은 단호하게 물리치고 멀리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현종의 이종 사촌 동생인 설왕의 장인 왕선동이 백성을 괴롭히자. 설왕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법대로 처분하니 "그로부터 귀족, 친척들의 손이 묶였다."고 한다. 또 황
후의 제부 장손흔이 어사대부 이걸을 두를겨패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조정에서 장손흔을
쳐죽이게 함으로써 이걸에게 사과했다. 그리고는 조서를 내려 이걸을 위로했다. 이렇게 해서
당나라는 보기 드문 태평성세를 맞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융기는 이런 업적을 이룬 다음
부터 점차 달라지기 시작했다. 대신들의 충성 어린 직언을 들으려 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뜻에 영합하는 자들만을 불러들여 중용했다.
이임보는 배운 것이 보잘것없는 위인이었지만 아첨이란 수단으로 최고의 자리까지 올랐
다. 그가 궁 안의 지, 환관들과 내통하면서 수시로 황제 이융기의 눈치를 살펴 언제든지 그
의 비위를 맞추니 황제는 너누나 좋아했다. 그리하여 이융기는 이임보를 재상에 앉혔다. 그
로부터 이임보는 장장 19년 동안 재상 자리를 꿰찼다. 그러면서 정직하고 능력 있는 대신들
을 모조리 내쫓고 간신, 소인들만 중용하여 당 왕조를 어두운 길로 몰아넣었다.
이임보가 죽은 뒤 이융기가 몹시 아끼던 양귀비의 먼 친척 오빠 되는 양국충이 재상 자리
를 어받았는데, 이 인간 역시 간신이었다. 사사로운 은혜나 원한 관계를 따져 사람을 쓰고
일을 처리했다. 또한 이때 호인으로 범양 절도사까지 된 안록산도 황제의 귀여움을 차지했
다. 안록산은 뚱뚱하고 배가 툭 튀어나왔는데, 한번은 화제 이융기가 농담으로 "대체 그대
뱃속에는 무엇이 들었기에 그렇게 툭 튀어나왔소?"라고 물었다. 그러자 안록산은"폐하에 대
한 일편단심이 가득 차 있을 따름이옵니다."라고 대답했다. 현종은 몹시 기뻐하며 그를 나라
를 지킬 대들보라 칭찬하면서 양귀비로 하여금 양아들로 삼게 했다. 그러나 뱃속에 오로지
"페하에 대한 일편단심이 가득 차 있을 따름이옵니다."라던 바로 그 안록산이 755년 15만
대군을 이끌고 범양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 소식을 들은 현종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 반란
군은 낙양을 차지하고 동관을 돌파한 다음 곧장 장안으로 쳐들어왔고, 현종은 사천으로 도
망쳤다. 엉겁결에 길도 제대로 잡지 못했으며,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비통함을 누를
길 없어 눈물만 하염없이 앞을 가렸다. 이때 곽종근이라는 백발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현종
이 탄 수레 곁으로 다가와서는 수레 난간을 붙든 채 이렇게 말했다.
"안록산이 나쁜 마음을 품은 것이 어제 오늘 일에 아니었건만 폐하께서는 그놈에게 속아
지금 이 지경에 이르셨습니다. 당초 송경이 재상으로 있을 때는 바른 말을 모두 받아들이셨
기에 천하가 태평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조정에 현명한 신하는 없고, 간신, 아첨배들이 득
실거리며 폐하 주위를 에워싸고 있으니 폐하께서 궁 밖의 일을 들으실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처럼 촌구석에 사는 촌놈들도 진작에 천하가 어지러워지리라는 것을 알았으나 안타깝게
도 폐하를 뵙고 말씀드릴 길이 없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현종은 "내가 너무 어리석었도다. 이제 와 후회한들 이미 늦은 일"이라며
길게 탄식했다.
'안사의 난'이 평정된 뒤 현종은 757년 12월 장안으로 되돌아왔다. '개원, 천보의 치'라
는
40여 년 간의 전성기를 연출했던 당나라의 황제 이융기는 이제 황제 자리를 잃고 말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한가한 은퇴 같아 보였지만 사실은 바로전에 연금되었다. 눈앞의 처량함을
직접 목격한 그는 지난날의 영광을 떠올리며 우울과 상심에 빠져 병을 얻더니 얼마 있지 않
아 영영세상과 이별했다.
역사는 거울과 같다. 숱하게 벌어졌던 사건의 성패에는 다 까닭이 있기 마련이다. "무릇
성인군자는 반드시 번영과 쇠퇴의 근원을 밝히고, 성공과 실패의 저짐을 꿰뚫으며, 다스림과
혼란함의 낌새를 살펴서 나아가고 물러남의 시기를 명쾌하게 알아야 한다." 그래서 역대로
성인군자는 모두 현명한 인물을 가까이하고, 아첨배를 멀리하며, 충, 간을 식별하는 일을 나
라를 다스리는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다. 양심있고 식견 있는 모든 정치가, 사상가들은 특히
그것을 국가 흥망과 백성 화복의 근원으로 보았다. 진나라가 불과 2세 황제로 망했으며, 한
나라도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당 천하는 번영에서 쇠퇴로 치달았다. 이 모든 것들이 역사가
남긴 뚜렷한 증거가 아니고 무엇인가? "국가에 있어 정사의 판별은 신중하지 않을 수 없
다."
'간'은 국가와 민생에 관련된 매우 중대한 역사 현상이자, 정치적 색채를 띤 도덕윤리의
붐주에 속한다. 수 천년의 역사 속에서 간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그것을 제압하는 방법을
마련하지 못해 간신들이 권력을 마구 휘두름으로써, 국가와 민족 그리고 백성을 멸망과 고
난으로 이끈 보기는 적지 않다.
"천하의 다스림은 군자가 여럿이 모여도 모자라지만, 망치는 것은 소인 하나면 족하다."
그래서 아주 오래 된 역경에서조차 "나라를 열고 집안을 잇는 데 소인을 써서는 안 된
다."라고 했다. 제갈량은 북벌에 나서지 전 유선에게 이런 글을 올렸다. "현명한 신하를 가
까이하고 소인을 멀리한 것, 이것이 전한이 번성했던 까닭이옵니다. 소인을 가까이하고 현명
한 신하를 멀리한 것, 이것이 후한이 무너진 까닭이옵니다."
제갈량은 자신이 죽은 뒤 어리석고 마음 약한 유선이 간신들의 손에 놀아나지 않을까 걱
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충, 간을 가려내지 못하는 실수를 반복해서 저지른 사람이 그 얼마이
던가! 이름난 사상가, 정치가들조차도 이 문제에서만큼은 거듭 실수를 범한 후, "진작에 이
인간을 몰랐던 것이 한스럽다."고 탄식했다. 그래서 진나라 때의 유의는 일생 동안의 정치
경험을 마무리하면서 매우 심각하게 "벼슬살이에는 세 가지 어려움이 있으니 인물을 알기
어렵고, 애증을 막기 어려우며, 정과 위선을 분별하기 어렵다."고 털어놓았다.
바로 이런 점을 거울삼고 느끼는 바가 있어 우리는 역사적 사명감을 품고 이 책을 쓴 것
이다. 사실 수 천년의 역사 속에서 충직한 인물들은 간신들에게 맞서 싸우며 대단히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 그들은 간신을 가려내고 물리치기 위한 이론상의 탐색과 실천을 게을리 하
지 않았다. 이는 후세 사람들에게 경고와 반성의 기회를 준 것이었으며, 세상과 사람을 이해
하고 논하는 데 아주 중요한 본보기로 작용하도록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도 자신의 계급,
사회, 여사적 한계 때문에 대부분 만족스러운 결과를 낳지 못했고, 이론적 성과도 단편적이
며 얕은 수준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오랜 사색을 통해 '간'이라는 역사 현상에 대해 전면적
인 분석을 시도하여 비교적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이론을 세우려고 했다. 물론 지금으로서는
이책이 실용적이거나 학술적 가치를 가진다고 말할 수 없다. 더욱이 이것이 당장 커다란 반
응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간'이라는 문제가 충분히 주목
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일깨우고 싶을 뿐이다. 즉 이 문제를 가볍게 보거나 그 의미를
소홀히 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
이 책은 서론을 포함해 모두 13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국역사르 배경으로 간신, 소인과
혼군, 탐관오리들의 굴욕사, 국가의 암흑사, 백성의 고난사 및 사회적 혼란사를 서술해 나가
면서 앞사람들의 간신에 대한 변별 활동과 이론 탐색을 총괄했다. 이러한 기초 위에서 간신
을 살피고 가려내는 입장과 관점을 제기했다. 그런 다음 '간신'에 대해 전면적인 분석을 시
도했다. 그리하여 봉건적 사유지는 간신이 생겨나는 토양이며, 봉건 전제정치는 간신을 기르
는 산실이고, 썩은 도덕의식은 간신을 키우는 온상이며, 사회적 혼란은 간신을 성장시키는
요람이 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아울러 간의 현대적 의미, 간과 악의 차이, 간과 호의 연원을
논의하고 규정해 보았다. 간에도 도가 있음을 지적했고, 간심을 가지고 간술을 펼쳐 간행을
저지르는 생생한 모습도 보여주었다. 또 간신을 살피고 가려내는 과정에서 간신들이 간행을
감추기 위해 꾸미는 각종 허상과 연막을 제거해야 할 필요성도 제기했다. 간신과 위선, 간신
과 속임수의 결합을 잘 살펴 한순간 또는 한 사건의 허상에 미혹되어서는 안되며, 간신, 소
인을 얕보아서도 안 되고, 그들의 '남다른 점'을 바로 보아야 한다는 점을 일깨우려 했다.
그
들은 세상 인심을 노련하게 파악하고, 권모술수와 임기응변에 능하며, 사람을 잘 구슬리고,
말재주라 뛰어나며, 분위기를 살피는 데 능하다. 이것이 그들의 특징이다. 따라서 간신, 소인
과 싸우기 위해서는 변별 능력을 높이는 외에도 자신과 싸워 이기고, 자아를 초월하며, 자신
이 지닌 인성의 약점과 싸워 이김으로써 자신의 자질을 전면적으로 높여야 한다는 점을 지
적했다. 쉽게 간신을 믿지 않으면 간신을 방비하는 마음이 생겨나며, 사사로이 간신을 따르
지 않으면 간신을 거절할 수 있는 덕이 굳어진다. 자비로움으로 간신을 키우지 않음으로써
간신을 제압하는 기술을 터득하게 될 것이며, 간신을 겁내지 않고 간신과 싸우는 용기를 키
울 것이다. 또 섣불리 간으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점도 지적했다. '간'과 수단, 책
략을 구별해야 하며, '간'과 결점을, 실수를 구별해야 하고, 그것을 총명, 재능과 구별해야
하
며, 병가의 권모술수와도 구별해야 한다. 결코 선량한 사람을 간으로 오인하지 않도록 주의
해야 한다.
끝으로 '역사로 하여금 미래를 말하게 하라'는 장으로 결말을 지으면서 간신을 제압 내
지
소멸시키는 근본적인 출발점이 사회의 진보, 역사의 발전, 민조 법제의 완비에 있음을 얘기
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이 추악한 현상을 역사의 쓰레기 더미에 던져넣어 영원히 역
사의 유적으로 남도록 해야 할 것이다.
시대는 벌써 21세기를 행하고 있다. 오늘날의 숱한 문제는 이미 '충, 간'만으로 뭉뚱그
려
거론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이 책의 목적은 주로 역사와 사회를 이해하고 인식하여 사
상 수준을 높이고 도덕의식을 자극하는 데에 있다. 그러나 이런 점들 외에 다른 현실적 의
의가 없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이 책의 현실적 의의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점들에 있을 것이다. 첫째, 이 책은 어두웠던 과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그에
따라 이 사회에 대한 우리의 애정을 깊게 하여 건전한 사회 수호를 위해 투쟁하려는 신념을
자극할 것이다.
오랜 봉건시대를 통해 간신들은 서로 의기투합해서 사나운 이리 떼처럼 정의를 짓밟으며
충직하고 선량한 관리와 백성을 모함하고 착취했다. 이로써 억울한 일들이 무수히 생겨났고
통곡 소리가 천하를 뒤덮었다. 수천년 지속되어온 봉건사회의 잔재를 짧은 시간에 해소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사회 내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불합리하고 불평등하고 추악한 숱한
현상들을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그러한 현상들이란 예컨대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부정직
하고 비정상적인 출세욕, 명예욕, 부의 추구욕 등을 말한다. 우리 사회와 우리들의 마음 속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이런 모순과 문제점들을 심각하게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인식은
과거에 대한 명확한 인식에 바탕을 두고 본질적인 변화를 추구해야한다.
현재 우리의 임무는 원망도 아니며 탄식도 아니다. 강한 사회적 신념을 수립하고, 피 흘리
며 희생한 뜻있는 사람들에 대해 올바로 인식하여, 사회의 발전을 이루어내는 것이 우리의
임무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당연히 고군분투하여 역사의 진보를 계속 추진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이 책이 갖는 가장 기본적이고 현실적인 의의일는지 모른다.
둘째, 이 책은 우리가 덕과 재능을 겸비한 지도자를 선발하고 인재를 식별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간신은 봉건제의 산물로서 일정한 사회, 역사의 발전 단계와 관계가 깊다. 오늘
날의 사회 체제는 간신의 발생을 가능한 최대한으로 제약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
도 봉건적 독소는 아직도 우리 사회 전반에 두루 남아 있다. 그렇다면 간신의 출현은 피할
수 없다. 간신이나 정치적으로 자질이 나쁜 자들이 국가의 주도권을 장악하면 제멋대로 권
력을 휘둘러, 다른 사람을 배척하고 정치를 그르쳐 사회 혼란을 조성하고 말 것이다. 그로
인해 국민의 생활과 생업은 타격을 받고 생간. 발전은 저해되어 국가와 국민에게 재난이 닥
칠 것이다.
오랫동안의 역사 경험과 민중의 자각, 투쟁을 통해 우리는 지도자와 인재를 살피고 가려
서 그들이 자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주어야 함과 동시에, 특히 야심가와 음모가를 경계하
여 이런 자들이 국가의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은 새
로운 역사 조건에서 인물을 판단, 선택하는 기준을 오라로 세워, 애심가, 음모가와 같은 부
류들과 맞서 싸울 수 있는 능력을 높이고, 국가 정치 권력의 도덕성을 유지하는 데 기여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셋째, 이 책은 이상, 도덕, 문화, 규범에 따른 건전한 사상과 도덕을 갖추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간신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애심가, 음모가들 또한 하느님이 이 세상사에 내려가
나쁜 짓을 하라고 정해주신 자들이 아니다. 단지 봉건제의 독소라는 껍질 속에서 알을 깨고
나온 존재들이다. 오늘날과 같은 민주 사회라 하더라도 우리가 사상과 덕성의 수양을 게을
리 한다면, 간신들과 같은 부류로 타락하기 십상이다.
개인의 변화에는 과정이 있기 마련이다. 자신을 닦으며 자신을 이겨내려 하지 않고 분위
기에 영합하거나 비바람에 맞서 쉽게 좌절해 버리면 사사로운 욕심이 커져 타락의 골짜기로
떨어지고 만다. 실제로 오늘날 사람들 사이에는 극단적 이기주의가 고개를 힘껏 쳐들고 있
다. 물질 숭배와 권력 숭배가 판을 치고, 권력자의 문을 들락거리는 공명과 부귀를 탐하고
탈취하는 추악한 현상마저 나타났다. 남을 짓밟고서라도 일어서려는 이런 기슴 아픈 형상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도덕은 사회의 주춧돌이다. 도덕이 없으면 그 사회는 튼튼하게 버티고 서 있을 수 없다.
계층, 계급이 함께 모이지 못하고 민족이 협력할 수도 없다. 민주주의의 실행, 건전한 법의
집행 등은 모두 도덕이란 힘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으며 도덕의 보증 없이는 제대로 될
수 없다.
우리는 이 책 곳곳에서 남을 구별하는 일과 자신을 살피는 일의 관계를 분명이 서술했고,
충에서 간으로 가는 과정을 밝혔으며, 또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고 자신을 이겨내는 일의
중요성과 극복해야 할 인간의 약점도 함께 서술했다. 우리는 이를 통해 타인을 인식하고 변
별하는 능력을 높이는 동시에 자기 반성력을 높이고자 했다.
넷째, 과학적 세계관과 방법론으로 인간을 이해함으로써 쓸데없는 번거로움을 줄이고 피
라는 데 이 책이 도움을 줄 것이다.
오늘날 사회 환경과 역사 조건은 본질적으로 변했다, 따라서 봉건시대의 철학을 가지고
항상 살얼음 위를 걷듯 경계심을 잔뜩 돋운 채 매사를 의심하고 산다면, 그런 사람은 설사
어두운 마음을 가지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적어도 신경과민이거나 속 좁은 사람일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옳지 못한 현상이 적지 않게 존재하며, 새로운 사회에 어울리지 않
는 사람들도 많다. 이러한 현실은 우리에게 보다 냉정하고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 모두가 좀 더 과학적으로 사고하며 맹목성과 편파성을 줄여 사기나 협잡 같은
추악한 현상이 발붙이지 못하게 한다면, 우리 사회가 순수성과 건강을 유지하고 진보하는
데 보다 유익하지 않겠는가?
이 책은 '간'을 살피고 가려내는 데에 기준이 될 만한 관점을 제공하며, 또 세상과 인간을
알고 논하는 데 휘할 만한 입장과 태도를 제공할 것이다. 이는 과학적으로 인간과 세상을
인식하는 사상을 세워, 쉽게 믿고, 가볍게 행동함으로써 빚어지는 각종 불필요한 고통과 거
추장스러운 일들을 피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이 책이 과학적인 것이라고는 감히 말할 수 없지만 책을 쓰는 과정에서 우리는 이런 점에
역점을 두었다. 우선 관점이 선명하도록 힘썼다. 또 문장의 요점과 논리가 치밀하도록 신경
을 썼으며, 지나친 설교와 틀에 박힌 형식은 되도록 피했다. 동시에 엄숙하지만 생동감 넘치
도록 힘을 썼고, 과학적 초혼의 성격을 가짐과 동시에 감정적 색채도 풍부하게 드러나도록
했다. 읽을수록 흥미가 넘치는 책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물론 이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그저 우리의 마음과 바람이 진실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간신'이라는 심각하고도 두려운 역사, 사회 현상에 대해 드러내지 않는다면, 가슴속에
맺
힌 응어리를 토해내기 어려울 것이며, 마음속의 분노도 가라앉히기 힘들 것이다. 또 선현들
과 후세의 기대와 바람을 저버리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렇다!
이제 이 책은 이미 독자들 앞에 섰다. '이 종이 누구를 위해 울리는지 절대 묻지 말라. 종
은 당신을 위해 울린다.' 우리 모두 함께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생각하자. 우리는 믿는
다.
그러한 생각과 함께 건실한 인성을 갖춘 사람들이 새로운 세상을 행해 걸어갈 것이라는 사
실을.
역사의 심판은 영원하다
기나긴 역사 발전의 과정에서 민족을 부흥시키고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사회의 진보와
발전을 위해, 백성의 풍요로운 생활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피와 땀을 흘리고 충성을 대해
왔다. 그러나 간신들은 사리사욕을 위해 임금의 포악함을 부추겨 백성을 재앙에 빠뜨린다.
그리하여 민족의 굴욕사, 백성의 고난사, 국가의 암흑사, 사회의 혼란사를 촉진한다. 그들은
국가와 민족 그리고 백성들에게 더할 수 없는 죄인들로, 그 죄상은 천하의 종이를 다 모아
도 그 행적을 다 기록할 수 없으며, 동해의 몰로 먹을 갈아도 모자랄 정도다.
역사상 민족의 독립과 존엄을 위해, 사회의 진보와 발전을 위해, 백성의 부와 문명을 위해
헌신한 뛰어난 인물들이 많이 출현했다. 악비나 춘문상 같이 한마음으로 보국하고 장렬하게
죽어간 민족 영융, 황소나 이자성 같이 천하를 깜짝 놀라게 호령했던 호걸지사, 해서나 포증
같이 악을 원수처럼 미워하고 강직함을 굽히지 않았던 청렴한 관리, 굴원아니 위징같이 나
라와 백성을 위해 바른 도를 행했던 충신, 장형이나 이시진 같은 과학계의 거목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과 민중의 힘겨운 분토, 그리고 피땀 흘린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들의 오늘이
있게 된 것이다. 역사는 국가의 진보와 번영을 위해 헌신한 사람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며,
민족은 그들의 아름다운 이름을 금자탑에 새겨 영원히 보전할 것이다. 그러나 대단히 유감
스럽게도 역사의 긴 흐름 속에는 백성과 나라를 재난으로 몰아넣은 폭군, 간신, 탐관오리도
끊임없이 나타났다. 백기, 조고, 진회, 엄숭과 같은 간신들이 끼친 피해는 그 악랄한 마음만
큼이나 엄청나게 컸다.
그들은 군주를 포악하게 만들고, 나라와 권력을 훔쳐 농락했으며, 충신을 모함했고, 종정
의 기강을 문란하게 만들었으며, 백성을 도탄에 빠뜨려 신음하게 만들었다. 군주는 살해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처자식과 부모도 서슴지 않고 죽였다. 그들은 조국과 백성을
팔아 버린 사회의 기생충들이었다. 교활하기 짝이 없는 간신 매국노들이 저지른 엄청난 죄
악으로 국가, 민족, 백성은 심각한 재난을 겪어야만 했다.
인류 사회의 발전은 매우 복잡하다. 따라서 역사의 잘못을 모조리 몇몇 간신, 소인, 난신
적자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물론 비과학적이다. 그러나 우리가 깊이 있게 역사를 고찰한
다면 간신들이 인류의 가장 더러운 일부분임에 틀림없다는 사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
이다. 그들은 모두 독버섯처럼 부패한 정치제도에 빌붙어 수천년 동안의 부패하고 암울하며
굴욕스러웠던 역사를 촉진했다.
굴욕스러운 민족사
수천년 중국 역사에서 특히 최근 백년의 역사는 민족의 굴욕사라 할 수 있다. 외적의 말
발굽이 끊이지 않고, 제국주의 열강들이 강산을 박 쪼개 둣 나누어 가지니, 나라는 마치 끓
는 기름 속의 물고기처럼 이리저리 찢어지고 흩어졌다, 코 큰 서양인들이 공공연히 안방으
로 성큼 들어와 중인인 양 마구 사람을 부리며 백성을 들풀이나 개, 돼지처럼 여겼다. 그들
은 멋대로 강산을 짓밟았다. 제2차 아편전쟁을 틈타 러시아 한 나라만도 중국 동북쪽 약
100만 KM2의 땅을 강제로 차지했다. 이에 대해 엥겔스는 "중국으로부터 빼앗은 땅은 프랑
스와 독일 두 나라를 합친 면적의 땅, 그리고 다뉴브 강만큼이나 긴 강과 맞먹는다."며 분노
했다.
부서지고 깨진 산하를 바라보는 모든 양심 있는 사람들은 찢어지는 가슴으르 부둥켜안고
고통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영토를 온전히 지키기 위해, 조국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
해 많은 사람이 책상을 박차고 일어났다. 그들은 "내 강산의 주인은 바로 나이거늘 어찌 칼
꽂친 산과 불바다를 외면하리요. 황제가 외적에 굴복했다고 해서 두려워 할 소냐! 양놈을
죽이지 않으면 우리의 맹세는 완성되지 않으리라!"라는 굳센 용기와 일편단심으로 용감하게
싸워 나라에 몸을 바쳤다.
임칙서는 호문에서 아편을 불태웠으며, 관천배는 전쟁처에서 전사했다. 진화성은 오송에서
순절했으며, 등세창은 용감하게 적의 군함에 뛰어들었다. 이 모두가 비장하기 이를 데 없는
충절의 몸부림이자 울부짖음이었다. 청나라 도광 20년인 1841년 1월 7일, 이보다 앞서 12월
15일 새벽, 영국군 약 2천 명과 대포를 장착한 군함 20여 척이 호문을 향해 쳐들어왔다. 오
십이 넘은 포대 지휘관 진련승은 관군 수백 명을 이끌고 적과 격렬한 육박전을 벌였다. 그
러나 수가 워낙 모자라 전군이 사망하고 말았다. 진련승이 장렬하게 죽은 뒤 그가 타던 적
살색의 준마가 진련승의 시체 곁에서 목을 숙인 채 슬프디 슬프게 울며 움직이지 않았다.
영국침략군이 준마의 늠름한 모습을 보고는 잡아다 홍콩으로 끄고 갔다. 그러나 "피땀 흘려
달리며 전공을 세운" 이 준마는 주인 못지않게 꿋꿋했다. "주는 음식도 먹지 않았으며, 접근
하면 발로 차고 올라타면 흔들어 떨어뜨려 버렸다." 심지어는 "칼로 위협해도 말을 듣지 않
았다." 하는 수 없이 황산 바닷가에다 놓아주고 말았다. 준마는 바닷가에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날마다 북쪽 대륙을 향해 슬피 울며 두고 온 땅과 자기 주인을 그리워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결국은 슬픔과 배고픔으로 죽고 말았다.
"나라가 어지러워지면 유능한 신하가 생각나고, 집안이 가난해지면 현모양처가 생각난다."
나라와 집안이 망하는 생사의 문턱에서 얼마나 많은 관리들이 3군을 호령하며 나라의 수
치를 씻고 백성을 구하고자 애를 썼던가! 그러나 높은 자리에 오른 간신들은 근본적으로 달
랐다.
그들이 떠받드는 것은 오로지 하나! "젖을 먹여주는 사람이 곧 내 어미다." 자신들의 부귀
영화를 지킬 무나 있다면, 국가는 조금 참고 견디어 자신들의 단지가 깨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들에게는 구차하게 훔친 안락함만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국가가 안정되어 있을 때는 다투어 애교와 아첨을 떨며 자리와 지위를 얻으려 하
고 군주의 귀여움을 차지하여 설친다. 그러나 일단 국가가 위기에 처하면 그들은 적을 호랑
이보다 더 무서워하며 항복부터 서두른다. 전쟁으로 인해 자신들의 안락함이 깨질까 겁을
먹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가 위급한 상황에 처했어도 서슴없이 바람이 부는 쪽으로 방향을
돌려 새 주인에게 몸을 맡긴다. 처음에는 은근히 추파를 던져 서로 결탁하고, 최후에는 단단
히 뿌리를 내려 죽을힘을 다해 그 자리를 지킨다. 동포를 해치고 군주를 죽여 나라를 마친
공로로 부와 은총을 구걸한다.
이 방면에서 누구보다도 먼저 물꼬를 튼 시조는 춘추시대의 백지이다. 기원전 494년 오왕
부차는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갚기 위해 월나라 정벌에 나섰다. 그 결과 부차는 회계 전투
에서 월왕 구천의 군대를 거의 전멸시키다시피 했다. 이 생가 존망의 위급한 상황에서 백비
는 월나라로부터 뇌물을 받고 구천의 숨통을 틔워주었다. 다 잡은 호랑이를 산으로 돌려보
낸 셈이다. 백지는 그 후로도 월왕 구천을 비호했고, 이로써 구천은 한숨을 돌리고 와신상담
끝에 나라를 두시 강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 백비는 오왕 부차를 부추겨 충신 오자서를 죽이게 했다 오자서는
간신이 나라를 팔아 결국은 오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사실이 너무도 가슴 아르고 한스러워,
죽기 전에 침통한 목소리로 "내가 죽거든 내 두 눈알을 고소성 동문 위에 걸어 월나라 군대
가 언젠가 이 성문을 통해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과연 얼마 되지
않아 오자서의 예언은 증명 되었다. 구천은 10년 동안 인구를 늘리고 군사를 길러, 마침내
단숨에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지난날의 치욕을 씻었다. 부차와 백비는 혼군과 간신으로 목숨
을 부지하지 못했다.
국가와 민족의 이익과 자신의 이익이 충돌할 때 죽을힘을 다해 자신의 이익을 도모했던
인물 가운데 두르러진 인물로 진화가 있다. 진회는 강년 출신으로 ,송나라 휘종 정화 5년 진
사에 급세했다. 그가 벼슬길에 들어섰을 때 북송 정권은 이미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었
다. 그가 어사중승이란 자리에 있을 때 금나라 군대가 황하를 건너 수도를 공격, 휘종화 흠
종을 잡아가고 북송의 신하들을 협박하여 장방창을 꼭두각시 황제로 세웠다.
이때 진회는 이니 금나라에 은밀히 추파를 던지고 있었다. 당시 진회는 단독으로 금나라
군영에 절자를 보내 다음과 같은 점을 깨우치게 했다고 한다. 즉 송나라는 건국된 지 이미
100년이 넘어 천하를 호령하고 있으니 장방창을 황제로 세웠다간 천하가 모두 일어나 그를
죽일 것이다라는 요지였다. 그러면서 진회는 흠종을 다시 세우는 것이 좋다고 건의했다. 그
렇게 하면 "주인에게 충성할 뿐만 아니라 대금에 실로 천년 만년 이윽이 될 것"이라는 이유
도 함께 밝혔다.
금나라는 그의 건의를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진회의 속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훗날
을 위해 진회를 남송으로 돌려보냈다. 남송으로 돌아온 뒤 진회는 있는 힘을 다해 금나라와
친해지려고 애썼다.
소흥 3년 악비는 대군을 이끌고 빼앗긴 땅과 성을 차례로 수복하여 금나라의 간담을 서늘
하게 만들었다. 특히 주선진의 일전으로 금나라의 사기는 급히 떨어졌고, 부장마저도 악가군
의 칼날 아래 쓰러졌다. 금나라의 장수 금올술은 싸울 의욕을 잃고 그저 안전하게 북방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악비는 "자, 여러분들과 함께 통쾌히 술을 마시리
라!"라며 곧장 황룡뷰로 돌진하였다. 당시 백성들도 스스로 무기와 식량 따위를 챙겨 "산을
뒤흔들기는 어렵다."라고 함성을 지르며 너나할것없이 악가군을 따라 참전했다. 그러나 진회
는 금나라 군대가 무너져 금나라와 강화가 성하되면 다져진 자신의 위세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두려웠다. 또 휘종과 흠종이 정말로 되돌아오는 날에는 총애를 잃지 않을까 두려웠
으며, 악비가 자신의 '명성'과 지위를 뛰어넘을까 겁이 났다. 그리하여 진회는 고종을 중용,
12도 금패까지 발동하여 악비의 회구을 재촉했다.
악가군이 회군한다는 소식은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가듯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이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악비의 말을 붙들고 실성한 목소리로 통곡했다.
"우리들이 식량을 나르며 악가군을 맞이한 것을 그마나 도적들이 낱낱이 알고 있습니다.
헌데. 지금 상공께서 떠나시면 우리는 어떻게 하람 말입니까?"
악비는 눈물만 철철 흘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악비는 회군 하자마자 병권을 박탈
당했다. 그러나 진회는 이 정도로 만족하지 못했다. 또 다시 이런 위기가 닥칠까 봐 악비에
게 이른바 '막수유', 즉 '옥 있을지도 모르는 ' 모반죄를 씌워 처형했다. 이때 악비의 나이
서
른 아홉이었다.
국가와 민족의 이익을 팔아 먹은 인물들로는 진회 말고도 기선, 목창아 이홍장 등이 결코
진회에 못지 않은 후배들로 꼽인다. "외적이 쳐들어오는 것은 겁나지 않아도 자기 자리가
흔들리는 것은 겁난다." 그 당시 상황을 잘 반영하는 말이리라.
목창아와 기선은 모두 국가의 중신으로서, 대대로 황제의 은총과 국록을 받았으면서도 은
혜를 갚을 생각은 않고 나라를 저버렸다. 아편 초역으로 부당한 이득을 챙겼을 뿐만 아니라,
서양인으로부터 죄물을 받는 등 국가와 민족을 배신하고 내팽개쳤다. 임칙서의 아편 그미
조치를 백방으로 훼방놓고 도광제 앞에서 여러 차례 임칙서를 헐뜯었다. 임칙서가 호문에서
아편을 불태운 것을 구실로 서양인들이 땅을 떼어줄 것과 배상할 것을 위협조로 요구하자,
이 간신들은 임칙서의 아편 금지가 큰 화를 불러일으켰다며 비방하고 임칙서의 양심이 불량
하다고 무고해서 애국자를 관지에서 내쫓아 버렸다.
"군대에 나가 공을 세우기도 전에 몸이 먼저 죽고, 영웅의 옷소매에는 눈물만 젖는구나!"
가련한 애국충신은 나라에 보답하려는 마응을 가지고도 어쩔 수가 없이 벗었다. 충신은
늙은 나이에 신강성 이리로 쫓겨났다. 더욱 끔찍한 일은 서양 상인들이 임칙서가 재기할 것
이 두려워 임칙서의 주방장을 뇌물로 매수한 것이었다. 돈에 눈이 먼 이 천박한 소인은 임
칙서에게 약을 탄 타두를 먹였고, 임칙서는 멈추지 않는 복통과 설사로 병이 나서 끝내 일
어나지 못했다.
수천년 동안, 특히 최근 백년 동안 암울한 구름이 나라의 대지를 뒤덮었다. 나라의 딸들은
능욕을 당했다. 당당한 문명국가가 화약으로 인해 몸이 찢어지고 비늘이 벗겨졌다. 수천년
역사를 자랑하는 훌륭한 조상의 자손으로서, 조상에가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남기고 말았다.
제국주의의 군함이 차례차례 땅을 짓밟았다. 그 따 구석구석에 "중국인과 개는 들어올 수
없다!"는 팻말이 높이 걸렸다. 이 얼마나 쓰라린 치욕인가! 이모든 일이 어떻게, 왜 일어났
단 말인가? 대체 어디로부터 비롯되었단 말인가? 봉건 통치의 부패로 빚어진 것임에는 틀
림없지만, 자신의 이익을 국가와 민족의 이익에 앞세워 나라를 팔아 부귀영화를 탐한 몰염
치한 간신 역시 절대 책임을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반드시 그들을 역사의 심판대로 압송하
여 역사의 치욕스러운 기둥에 못박아야 한다.
암울한 국가 정치사
봉건사회에서는 군주의 똑똑함과 어리석음, 정치의 잘잘못이 정치의 청명 여부, 사회의 안
정 여부, 생산의 발전 여부, 백성의 안락 여부를 크게 결정했다. 봉건사회였던 한나라 문제,
경제 때 이 마음을 함쳐 힘써 나라를 다스렸지 때문에 정치는 비교적 깨끗했고, 사회는 안
정되었으며, 생산은 발전했다. 때문에 고대의 비교적 정직한 지식인과 사대부들은 신하로서
의 가장 큰 충성이 군주로 하여금 현명함을 유지케 하여 국가 통치의 핵심이 부패하지 않도
록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순자 신도에서는 다음과 같은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명령을 따르고 군주를 이롭게 하는 것은 순이라 한다.
명령을 따르고 군주를 이롭지 못하게 하는 것을 아첨이라 한다.
명령을 거스르고 군주를 이롭게 하는 것을 충이라 한다. 명려을 거스르고 군주를 이롭지
못하게 하는 것을 찬이라 한다.
군주의 명예나 치욕, 그리고 나라의 흥망을 독보지 않고 구차하게 영합하여 녹봉만 받으
며 사교에만 힘쓰는 것을 국적이라 한다.
따라서 고대 봉건사회에서 정직한 사대부들은 부지런하고, 군주에게 좋은 말로 권하며, 필
요한 때에는 서슴없이 군주 앞에서 바른 말을 하려고 애썼다.
한서에 기록된 일화를 보자. 한나라 성제 떄 주운은 성제의 사부 손우의 목을 베어 아첨
하는 신하를 경계하는 표본으로 삼으라고 요청했다. 이 말에 성제는 크게 성으로 내며 주운
을 당장 죽이라고 했다. 오사가 활급히 주군을 밀어내렸다. 그러나 주운이 난간을 붙들고 놓
지 않는 바람에 난간이 떨어져 나갔다. 성제는 죽음을 무릅쓴 주운의 직간에 감동하여 죄를
면해주었을 분만 아니라 떨어진 난간을 고치지 말고 그대로 보존해 "곤은 신하를 본받도록"
했다. 이를 두고 훗날 장무순은 "난간을 끊어가며 군왕에게 바른 소리를 할 사람이 그 누구
인가!"라며 탄식했다. 그러나 군주에게 죽음을 무릅쓰고 기꺼이 바른 소리를 한 사람은 많이
있다. 송사에 나오는 일화를 한번 보자. 송나라 개국공신으로 재상이 된 조보가 관직에 등용
토록 태조에게 어떤 사람을 추천했으나 태조는 등용하지 않았다. 조보는 다음날에도 다시
그 사람을 추천했다. 태조도 마찬가지로 등용하지 않고 맞섰다. 어느날 조보는 또 그 사람을
추천했다. 마침내 태조는 참지 못하고 버럭 성을 내며 조보의 추천서를 발기발기 찢어 바닥
에 던져 버렸다. 그러자 조보는 찢어진 종이를 일일이 주워서 집에 돌아와 본래대로 깨끗하
게 분인 다음 다시 태조에게 올렸다. 태조는 하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또 이런
일화도 전한다. 일을 잘 해내 승진해야 마땅할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러나 태조는 그 사람
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승진건을 처리하지 않고 질질 끌었다. 조보는 승진시킨 것을 강
력히 주장했다. 화가 난 태조가 "내가 승진시켜 주지 않겠다면 어쩔 셈이요?"라며 고함을
질렀다. 조보도지지 않고 당당하게 말했다.
"형벌은 잘못을 응징하기 위한 것이고, 상은 공에 대한 보답이라는 것은 고금의 당연한
이치입니다. 어찌 좋고 싫음에 처리할 수 있단 말입니까?"
태조는 더욱 화가나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그럼에도 조보는 전혀 겁먹지 않고 태조의 뒤
를 계속 따라다녔다. 이쯤 되자 태조도 하는 수 없이 조보의 말을 듣고 말았다.
북위의 이름난 대신 고필도 이와 같았다. 위서의 기록을 한번 보자. 고필이 한번은 백성의
땅을 빼앗는 관의 부정을 보고했으나 태조는 바둑만 두며 도무지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
자 고필은 머리끝까지 화가 나 태무제와 바둑을 두던 유수의 멱살을 잡고 "조정 일이 제대
로 다스려지지 않는 것은 바로 네놈 때문이다!"라고 욕을 했다. 그 뒤 고필은 자신의 경솔함
을 깊이 뉘우치고 궁에 들어와 태무제에게 사죄했다. 태무제는 대의에 밝은 인물이었던지라
그를 용서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로 사직과 백성을 이롭고 편안하게 하는 것이면 다시 때
리고 걷어차 괜찮으니 경이 하고 싶은 대로 하시요."라며 격려까지 했다. 그 뒤로 또 이런
일 이 있었다. 태무제가 항상 사냥을 가면서 좋은 말을 기수들에게 공급하라고 지시했다. 그
러나 고필은 비쩍 마른 형편없는 말을 보냈다. 이 때문에 여러 사람 앞에서 체면이 구겨진
태무제는 화가 머리끝까지 뻗쳐, "이 빌어먹을 작자를 당장 처형하겠노라!"고 맹세까지 했
다. 그러자 고필과 함께 일을 했던 다른 관원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러나 고필은 조
금도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이렇게 말했다.
"사냥은 오락에 지나지 않는다. 죄가 있다 해도 작은 죄이지만, 적을 막는 일을 그르치면
큰 죄다. 지금 외부의 적이 국경을 엿보며 상 침략을 노리는 어려운 상황에서 만약 무슨 일
이라도 틈이면 어떤 말을 군대에 내보내야 하겠는가? 국가에 이득이 된다면 죽음도 피하지
않겠다."
이 말을 들은 태무제는 "역시 나라의 보배로다!"라며 깊이 탄복했다.
역사적으로 고찰해 볼 때 봉건사회에서 개국 창업 군주들은 통제력을 잃은 왕조가 붕괴되
는 준엄한 현실을 자기 눈으로 직접 봐왔기 때문에 성실하게 그리고 몸소 나라를 다스리는
데 정성을 쏟는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이루어 놓은 안정을 이어받은 군주들의 상황은 후대
로 내려갈수록 달라진다. 그들은 대부분 깊은 궁중에서 태어나 여자들 틈에서 자란다. 그러
다 보니 세상사에 어둡고 인정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교만하고 음탕하며 사치스럽고 탐욕
스러울 수밖에 없다. 따라서 좌우에서 늘 지적하고 제약하여 바른 길을 걷도록 돕는 일이
적대적으로 필요하다. 설사 개국 군주라 해도 현명하고 훌륭한 신하의 보좌 없이는 옳지 못
한 길로 금세 빠져들고 말 것이다. 그러나 간신, 소인들은 군주의 주위를 맴돌며 군주의 환
심을 사기 위해 아첨하고 군주가 자기 멋대로 하고 싶은 것을 하도록 부추긴다. 또한 그들
은 끊임없이 군주와 충신 사리를 이간질해 충신을 배척한다. 그 결과는 정치를 암흑의 구렁
텅이로 몰아넣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들은 이 과정에서 군주의 뜻을 아주 잘 헤아려 저기에
만추지 때문에 출세와 부귀영화로 오르는 사다리를 찾게 된다.
명나라 무종 주후조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말타기와 활쏘기도 잘 했으며, 일 처리도 시
원스러웠다. 만약 잘 이끌었더라면 아주 괜찮은 황제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 효종
은 자기 일에만 신경 쓰고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 뿐더러 적당한 선생을 구해주지
도 않았다. 그 결과 일찌감치 유근이나 강빈과 같이 아첨이나 떨며 귀여움을 차지하려는 간
신, 소인배들 손아귀에 놀아나, 나라 일을 아이들 장난 뿐으로 여기고 놀기만 좋아하는 황당
한 황제가 되고 말았다.
무종 주후조는 홍치 18년인 1505년, 불과 열 다섯의 나이에 황제 자리에 올랐다. 정상대로
라면 한 창 발전하고 성장하기 위해 분발할 나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팔호'로 불리던
유근, 마영성, 곡대용 등이 춤과 노래와 갖가지 오락으로 무종의 환심을 샀으며, 심지어는
한밤중에 미복을 입고 밖으로 나가 밤새 놀다라 돌라오는 것도 잊도록 꼬드겼다. 그들은 민
간의 아녀자들을 강탈했다. 또 무종을 위해 기표방이라는 것을 만들어 호랑이와 표범 등의
맹수와 싸우게 해, 심한 경우 무종은 조회에 나가지고 못할 정도로 부상을 입기도 했다.
정덕 12년인 1517년 8월, 간신 강빈은 무종에게 끊임없이 선부 지방의 악공을 추천하면서
동시에 그곳의 미인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그러면서 그곳에 가면 외족과 서로 진짜 싸
우고 죽이고 할 수 있어 궁궐 안에서보다 훨씬 더 재미있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리
하여 무종은 몰래 황궁을 빠져나와 곧장 선부로 달려갔다. 다음날 대신들이 궁에 들어와 보
니 황제가 보이지 않았다. 이에 서둘러 뒤쫓아가 간신히 부종 일행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무종은 막무가내로 궁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떼를 썼다. 서로 밀고 당기는 사이에
어느새 거용관에 이르렀다.. 거용관의 순관어사는 상황을 파악한 후 문을 걸어 잠그고 열어
주지 않았다. 황제의 명령을 거역한 것이다. 무종은 하는 수 없이 북경으로 발걸음을 되돌렸
다. 그리고는 즉시 거용관의 순관어사를 파직하여 불러들이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
람을 그 자리에 앉혔다. 그로부터 며칠 뒤 무종은 다시 밤을 틈나 슬그머니 황궁을 빠져나
와 곧장 선부로 내달았다. 간신 강빈은 행궁으로 아녀자들을 들여보내 밤새 어울려 놀도록
했다. 또 남의 집 규방으로 쳐들어가 마음에 드는 부녀자가 보이면 강제로 행궁으로 끌고
와 욕보였다. 그런데 그때 마침 몽고인이 쳐들어와 변방 수비군과 충돌하였다. 무종은 즉시
부대를 이끌고 가서 싸움을 구경했다. 작은 전투였지만 변상 수비군 수백 명이 사상하는 패
전으로 끝났다. 반면 적은 16명만 사망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무종은 결과에는 전혀 아랑곳
하지 않고 명령을 내려 적군을 크게 물리쳤다고 서울에 알리도록 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이
름을 주수로 고치고 스스로에게 대장군이라는 직함을 내렸다. 그는 이 직함을 승리를 알리
는 보고서에 함께 써넣어 서울로 발송하게 했다. 그리고는 서둘러 서울에 명령하여 속히 은
100만 냥을 순부로 보내게 해서는 물 쓰듯 써 버렸다.
이후로 무종은 군대를 이끌고 외부로 나갈 때면 대장군으로 자칭하며 수시로 주수라는 이
름으로 황제에게 글을 올리기도 했다. 이에 대해 군신들은 관직의 서열과 황제의 존엄성이
제대로 서지 않는 행동이라며 들고 일어났다. 그러나 무종은 끄떡도 하지 않고 한 술 더 떠
'위무대장군' 도장을 만들게 해서 주수에게 차도록 주고, 선부의 자신이 머무는 곳을 진국주
로 부르게 했다. 그는 툭하면 대장군 주수의 이름으로 자신이 세운 공을 앞세워 황제에게
글을 올렸고, 그러면 또 자기가 주수라는 관직을 올리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는 마치 진짜
주수하는 인물이 있는 것처럼 이 일에 아주 진지하게 매달렸다. 자신을 진국공으로 봉할 때
그 칙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총족군무위무대장군총벼오간 주수는 몸소 육사를 이끌고 변경을 조용하게 했으므로, 특
별히 진국으로 봉하고 매년 쌀 5천 석을 녹봉으로 주도록 할 것이니 이부에서는 받들어 행
할지라."
일년 녹봉의 수량도 정하고, 또 이부로 하여금 받들어 행하게 하는 등, 그 자신은 사뭇 진
지하기도 했겠지만 진짜 웃기고 황당한 짓이 아닐 수 없었다.
정덕 14년, 주수는 다시 자신을 태사로 봉했다. 나라 일을 장난처럼 여기는 이런 작태에
대해 정직한 신하들은 그래서는 안 된다며 강력하게 직간했으며, 오히려 무종은 그들을 옥
에 가두거나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칼을 씌우고 곤장을 때렸다. 그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기까지 했다.
정덕 15년 8월, 무종은 신호를 친다는 구실로 1년 가까이 놀다가 남경을 거쳐 돌아오는
길에 청강포에 들러 연못에서 낚시를 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배가 뒤집히는 바람에 그만
못에 빠지고 말았다. 재빨리 구해 내긴 했지만 찬물 때문에 그만 병이 나고 말았다. 무종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강빈 등이 선부로 놀러 가자고 꼬드겼지만 병세가 심각해진 무종
은 더 이상 놀러 다닐 수 없었다. 정덕 15년인 1521년 3월, 끝내 깨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뜨
니 그때 나이 서른 하나였다.
명나라 천계 황제 역시 무종 못지 않은 경우였다. 물론 그 전에는 간신이 있었다. 천계는
어린아이 때 황제 자리에 올랐고, 조정은 위충현이 장악했다. 이 간신을 갖가지 요상하고 간
교스러운 짓거리를 생각해 냈다.
천계는 유별난 취미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늘 혼자서 집 모양의 작은 건
물을 만들며 노는 것이었다. 이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어울려 주는 사람이 없어 늘 혼자서
놀던 습관 때문이었다. 황제라 되고 난 다음에도 피곤한 줄 모르고 이 놀이에 빠졌다. 한참
정신없이 빠져 있을 때는 아무것도 돌보지 않았고, 또 아무 생각도 없었다.
위충현은 황제의 이러한 습관을 간파하여 혼자 처리할 일이 있을 때면 늘 천계가 놀이에
빠져 있을 때 보고를 올렸다. 그러면 천계는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으며 "가서 마음대
로 처리하시오. 더 이상 귀찮게 하지말고!"하며 위충현을 내쳤다. 이렇게 해서 위충현은 자
기 뜻대로 일을 주물렀다.
위충현과 같은 환관들은 군조를 유혹하는 술수에 매우 능통했다. 천계가 정사에 신경 쓰
지 않도록 여색으로 어린 황제를 유혹했으며, '천로음'이라는 미약을 바치기도 했다 이 약을
복용한 천계는 갑자기 힘이 솟구치는 느낌이 들어 지칠 줄 모르고 여색을 탐했으며, 그에
따라 미약의 복용도 점점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끝내는 온몸이 붓고 종가가 돋아 꼼짝도
못한 채 스물 셋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전국시대 말에 한비자는 <한비자>에 세난이란 글을 남겼다. 이글은 말로 남을 설득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토로한 것으로 한비자의 전체 문장 주에서도 대단히 심각하고 섬뜩
한 편이라 할 수 있다. 이 글에서 한비자는 신하가 어떻게 하면 제왕의 뜻을 잘 헤아려 환
심을 살수 있는가에 대해서 대단히 조리 있게 서술하고 있다. 몇 구절 예를 들어보면 이렇
다.
"상대가 사사로운 욕심으로 일을 하고자 할 때는 공명정대하다고 격려하여 그 날을 하게
해야 한다. 상대가 속으로 천하다고 느껴 스스로 어쩌지 못하고 있을 때는 그 의도를 적극
칭찬하며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유감이라고 말해준다. 상대가 자신이 내린 결단이 아주 과감
했다고 여길 때에는 굳이 그의 실수를 끄집어내서 화나게 할 필요가 없다. 또 상대가 자신
의 계획이 훌륭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가 실패한 경우를 꼬집어 곤란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
세난편을 꼼곰히 읽다 보면 아음이 섬뜩해지고 양손에 땀이 날 정도다. 이 세상에서 대
체 어떤 사람이 이토록 음험하고 은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
해 서슴없이 남을 유인하고, 다스치고 때로는 격려한다. 간신들이 바로 그러한 존재들이다.
북제의 간신 화사개는 놀은 자리에 노른 후 자리를 지키지 위해 갖은 궁리를 다 짜내 무
성제 고담의 비위를 맞추었다. 그는 고듬을 꼬드겨 날이 새는 줄도 모르게 쾌락에 빠뜨렸다.
그는 고담에게 마음놓고 실컷 놀아 보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엣 제왕들치고 재가 되지 않은 사람이 어디있습니까? 요순과 걸주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뭐가 다르겠습니까. 폐하께서는 젊고 건장하시니 마음껏 즐기십시오. 단 하루에도 천년의 쾌
락을 누리실 것입니다. 나라 일은 대신들에게 맡기시면 됩니다. 무엇 때문에 몸소 힘들게 나
서 십니까? 신경쓰지 않고 내버려 두셔도 그만입니다."
고담을 조정 일은 아예 돌보지 않고 음탕한 짓거리에만 푹 빠졌다 조정 일은 화사개가 멋
대로 주물렀다. 조정의 기강은 무너졌고, 관료들은 부패했다. 끝내는 나라가 망하고 말았다.
북제의 또 다른 간신 목제파도 마찬가지였다. 수양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후주
는 안절부절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자 목제파는 후주를 다음과 같이 달랬다.
"황하 이남의 땅을 모두 잃는다 해도 가주국이 있지 않습니까? 더욱이 인생이란 본디 의
지가지없는 것이데, 제때에 즐기면 그만이지 무슨 걱정이십니까?"
송나라 휘종 때 왕조는 안팎으로 쇠약해 져 망국의 징조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휘
종은 쓰러져 가는 나라를 붙들기 위해 없는 힘까지 짜내도 모자랄 판이었다. 그러나 채경
부자는 다음과 같은 말로 휘종을 흐리게 만들었다.
"인생이란 사해가 내 집이요, 태평이 즐겨야 하거늘, 세월이 얼마나 남았다고 사서 고생을
한단 말입니까?" 그리하여 고삐 풀린 미친 말처럼 대토목 공사를 일으키고, 기이한 물건이
있으면 깡그리 읽어 모으며, 즐기지 않는 오락이 없을 정도로 쾌락에만 머리를 파묻었다. 자
업자득이라 했던가! 그러다 결국은 나라를 망친 망국의 군주로 영원히 역사에 더러운 이름
을 남기고 말았다. 북송 정권은 안팎으로 곤경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역사의 무대 뒤로 쓸쓸
히 사라졌다.
송사 휘종기는 북송이 망한 원인을 다음과 간이 지적하고 있다. "휘종이 나라를 잃은 까
닭을 따져보면 진혜의 어리석음, 손호의 포악함도 아니오, 조, 마의 찬탈도 아니다. 오로지
그 개인의 보잘것없는 꾀만 ale맏고 마음을 한쪽으로만 치우치게 써서 정직한 인물을 배척
하고 간신, 아첨배를 가까이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채경이 그 천작하고 간사한 재주로 교
만하고 사치스러우며 음탕한 뜻을 부채질할 수 있었던 것이다. 허무주의에 빠져 백성의 힘
을 바닥나게 했다."
"국정을 게을리 하고 포기했으며, 날마다 황당무계한 짓만 일삼다가" 어느 날 "나라는 깨
어지고 치욕을 당하고" 만 것이다. 송사의 지적이 자못 일리가 있다. 간신들은 군주 몸 가까
이에 있는 특수한 지위를 이용하여 귀여움을 독차지하려고 갖은 꾀로써 온갖 몹쓸 짓을 저
지른다. 군주를 현혹하여 속이며 더러운 짓을 일삼게 한다. 그리하여 끝내는 조정을 부패하
게 만들고 선량하고 충직한 사람을 내쫓는다. 조정의 기강은 어느새 흐물흐물 느슨해지고
만다. 간신들은 실권을 쥐고 흔들면서 자신들과 뜻이 다르면 배척하고 측근들만 마구 끄어
모은다. 또한 백성을 마구 착취한다. 그들의 짓거리는 세상 천지가 암흑이 되고 하늘과 백성
이 노할 때까지 계속된다.
바로 이것이 봉건 정치를 암울하게 몰고 간 중요한 근원이며, 역대 봉건 왕조가 무너진
직접적인 원인이다. 수 양제의 걷잡을 수 없는 방탕, 당 현종의 타락과 대당 왕조의 몰락,
북송 정원의 멸망... 이 모든 것이 서로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 바로 간신배들이 하늘과 해를
가리고 비바람을 몰고 와 평지풍파를 일으켜 어리석고 포악한 군주를 극단으로 몰고 감으로
써 암울한 국가 정치사를 연출했던 것이다. 정직하고 선량한 사람들이 결코 잊을 수 없는,
아니 잊어서는 안 되는 사실이다.
고난의 민중사
간신배들은 윗사람에게는 눈웃음을 치고 꼬리를 흔들어 아첨을 하지만, 아랫사람들은 잔
혹하게 다룬다. 윗사람의 눈에 들고 자신의 부를 채우기 위해 그들은 뇌물을 받고, 백성의
피와 땀을 쥐어짠다. 백성의 살을 뜯어먹으니 백성들은 숨이 막힌다.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빼앗는 등 나쁜 짓만 골라서 한다. 참으로 사회의 기생충이며 백성의 공적이 아닐 수 없다.
백성의 피와 땀으로 공을 세우려 하며, 백성의 목숨을 들풀만도 못하게 여긴다 .이는 간신,
소인배들의 공통된 특징이다.
주면은 숭녕 4년 '화석강' 사건을 주도한 이래 오로지 윗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민중
의
사활은 아랑곳하지 않고 노동력을 마구 징발하여 수많은 백성을 파탄으로 몰고 갔다. 한번
은 황제의 명령을 위조해 소주 손가교 내의 수백 가구에 말하는 땅과 재산을 모조리 자기
소유로 만든 후, 그 안에 있는 집들은 5일 이내에 다른 곳으로 이사가도록 명령을 내렸다.
지방 관리들은 주면에게 빌붙어 그 앞잡이가 되어 백성들을 내몰았다. 소주성 안의 백성들
이 갈 곳을 잃고 길거리에서 목놓아 통곡하니 그 비통함이 하늘을 찔렀다.
탐욕스럽지 않은 간신, 사치스럽지 않은 간신은 없다.
명나라 간신 엄숭의 전성기 때에는 별장만도 몇 군데가 있었다. 그 중 서울에 있는 별장
에는 널찍한 꽃밭과 수천 평에 달하는 인공 호수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그리고 꽅 밭에는
각종 진기한 짐승과 나무 등 없는 것이 없었다. 또한 지방 곳곳에 몇 채의 별장이 더 있었
는데, 그 웅장함과 화려함이 궁정 못지 않았다. 그의 아들 엄세번은 작은 마누라만 그물 일
곱이었다. 이런 국도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은 닥치는 대로 뇌물을 삼키
고 갖은 방법으로 백성을 쥐어짰다.
엄숭이 정권을 잡고 있던 그 당시에 관리의 승진과 좌천은 그 사람의 자질이 아니라 뇌물
의 액수에 따라 결정되었다. 재당군 구란은 원래 감숙총병이었는데, 하도 포악하게 굴다가
죄를 짓고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가 황금 3쳔 냥을 엄숭에게 뇌물로 갖다 바쳤더니
옥에서 풀려났음은 물론, 대동 선부총병이라는 요직까지 얻었다.
왜구와 싸운 명장 유대유는 성품이 강직하여 엄숭의 비위를 맞추지 않았다. 그러자 엄숭
은 패거리를 시켜 그를 모함하여 옥에 가두어 버렸다. 조정 대신들은 유대유의 사람됨됨이
를 잘 아는지라 은자 3쳔 냥을 모아 엄숭의 아들 엄세번에게 갖다 바쳤다. 이로써 유대유는
간신히 목숨을 보전하고 대동 변방에 배치되었다.
채경이 권력을 휘둘렀을 때에는 첨이 떼거리를 지었고, 그가 소유한 땅은 51만 무 이상이
었다. 전국의 관리들이 너나할 것 없이 그의 눈에 들려고, 아니 그의 눈밖에 나지 않으려고
뇌물을 갖다 바쳤다. 매년 그의 생일이 되면 전국의 지방관들은 돈이나 보물 등을 갖다 바
쳤는데, 그 물량이 너무 엄청나 운반을 전담하는 조직이 필요할 정도였다. 세상 사람들은 이
를 '생진강'이라 불렀다. 언젠가 채경의 생일에 손님 식사를 대접하는데 꽃게 알을 넣어 만
든 만두 한 가지에 전 1,300관 이상이 들었고, 채경이 마시는 메추라기탕 한 그릇을 만드는
데 수백 마리의 메추라기가 비명에 죽어갔다.
청나라 때 화신의 재산을 조사하여 모조리 압수해 보니 집 2천여 채, 논밭 8천여 겅 에
이르렸다. 이밖에 은호가 열 군데에 자본금은 60만 냥, 전당포 열 군데에 자본금은 은 80만
냥이었고, 금고에 순금이 5만 8천 냥, 은고에 은덩이인 은원보가 895만 5천 개에 달했다. 보
물, 비단, 인삼 창고는 언제나 넘쳐흐를 정도였다.
훗날 관에서 몰수한 109호 은호에 예치되어 있던 액수는 두 차례 외국으로부터 밀려 쓴
차관의 총액과 맞먹을 정도였다. 완전한 통계는 아니지만 화신이 재상으로 있었던 약 20년
동안 긁어모은 재산은 무려 8역 냥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액수는 청나라 조정의 0년 수입
액보다 많은 액수였다. 그 때문에 화신이 실각한 뒤 "화신이 쓰러지자 가경이 배불리 먹었
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1627년 간신 위충현에 의해 짓밟힌 대지는 가뭄과 해충으로 시달려야만 했다. 백성들은
사망의 기로에서 헤매었다. 당시 섬북 지구의 백성들은 산속의 나물을 뜯어 먹으며 목숨을
부지했다. 10월이 되자 나물도 모두 바닥이 났다. 백성들은 이제 나무껍질을 멋겨 먹어야만
했다. 그 중이서도 느릅나무 껍질이 가장 맛이 좋았는데 그밖에 다른 나무껍질도 한께 섞어
먹었다. 겨울이 되자 나무껍질도 바닥나 산 속의 관음토를 파먹어야만 했다. 관음토는 맛이
비리고 조금만 먹어도 배가 불렀다. 그러나 소화가 안돼 대변을 불 수 없어 며칠이 지나면
쓰러져 죽고 말았다.
이것을 차마 먹을 수 없었던 백성들은 한데 모여 식량이 조금이라도 있는 집을 약탈해였
다. 더욱 가슴 아픈 일은 안새성 서쪽 일대에 매일 한두 명의 어린애가 버려진다는 사실이
었다. 아이들은 엄마 아빠를 애타게 찾으며 울부짖다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땅 위의 대변을
주워 먹기까지 했다. 성을 나갔다가 실종되는 사람이 늘어갔고, 실종된 지 며칠 뒷면 성 밖
의 빈민들이 사람 뼈를 장작으로 쓰고 인육을 삶아 먹는 광경이 목격되었다. 모두 굶주림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잡아먹혔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 고기를 먹은 사람도 오래 버지 못했
다. 며칠 되지 않아 머리가 부어오르고 온몸에 열이 나면서 죽어 갔다.
간신배들과 어리석은 군주, 포악한 관리가 합작해 백성들에게 저지른 천하의 대죄는 잔혹
한 통치에서 보다 집중적으로 드러났다.
명나라 때의 초 거물급 간신 왕진, 유근, 왕직이 저지른 짓거리를 보라. 그들은 고문, 살인
전문적으로 일삼는 '동창'과 '서창'을 창설했다. 무자비한 탄압 기구였다. 억울한 사건을 수
없
이 날조해 많은 사람을 모진 고분과 살인으로 죽여 없앴다. 동창과 서창에 잡혀와서 살아
나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형벌은 가혹하고 너무 악랄해서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칠 정도
였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광경이 매일 벌여졌다.
그 뒤 유근은 탄압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금의위, 진무사, 동창, 서창 외에 또 내창이라는
것을 만들어다. 피비린내로 가득한 이 다섯 가지 탄압 가구를 통해 자신들에게 반대하거나
협력을 거부하는 관민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그 잔혹함이란 상상을 초월한다.
유구는 '황제권의 하락'을 반대하는 글을 올렸다가 금의위로 끌려가 난도질을 당해 죽
었
다. 시체는 다시 여러 토막으로 갈기갈기 찢겼다. 국자감 지주 이시면은 시찰을 나온 왕진에
게 극진한 공경을 표시하지 않았다고 해서, 나라 재산인 나무를 훔쳤다는 죄목으로 탄핵하
여 칼을 차고 3일 동안 대중 잎에서 욕을 당했다. 그의 학생 천여 명이 울며 달려와 간신히
구해낼 수 있었다. 대리사 소경 설선은 왕진에게 예를 갖추지 않았다고 목이 잘리는 참형
판결을 받았다. 처형 전날 저녁 왕진의 늙은 노복 하나가 주방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기에
왕진이 그까듥을 물으니, 그 노복은 설선과 자신이 같은 고향 사람으로 설선의 사람됨을 잘
알고 있다며 살려줄 것을 부탁하자 그제야 왕진은 설선을 풀어주었다. 봉건사회에서 크고
작은 간신들이 저지른 갖가지 피비린내 나는 죄악으로 인해 민중은 고난을 면치 못했던 것
이다.
혼란의 사회가
국가의 흥망, 백성의 안락, 생산의 발전과 역사의 진보는 정치와 사회의 안정에 크게 의존
할 수밖에 없다. 평화롭고 안정된 상황이 아니라면 생산의 발전은 불가능하며 백성도 편안
하게 생업에 종사할 수 없다. 그러나 역사속에서 간신들은 서로 권력을 다투면서 자신의 야
심을 실현시키기 위해 백성을 혼란이라는 깊은 연못으로 서슴없이 떠밀었다. 그로 인해 생
산력은 크게 파괴되었고, 백성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했다.
중평 6년인 189년, 한나라 영제가 죽자 외척과 환관이 권력을 다투었다. 이 싸움에서 장
량, 조충을 우두머리로 하는 환관 집단과 하진 동탁을 우두머리로 하는 외척 집단은 한치의
양보도 없는 대규모 살육전을 벌였다.
그 뒤 중랑장 원술은 하진이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궁전으로 쳐들어와 궁에 불
을 질렀다. 원소 등도 군대를 이끌어 와 조충을 주기옥 북문으로 진입하여혀 환관들을 닥치
는대로 죽이니 그 수가 2,0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로써 100여 년 동안 온갖 비행을 저질러온
환관 집단은 전멸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군벌이 할거하여 전쟁이 끊이지 않는 결과가 초래
되었다. 그 발단은 동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정권을 한손에 쥐려는 그의 의도는 일부의 불
만을 샀으며, 동시에 일부의 야심에 부채질을 했다. 그리하여 군웅이 서로 권력을 다투니 천
하가 크게 어지러워졌다. 대지는 연기로 불타올랐고, 병사들의 피와 살이 사방으로 튀었으
며, 백성은 살 곳을 잃고 정처 없이 헤매었다.
군벌의 혼전은 수십년 동안 계속되었다. 이로 인해 생산력은 심각하게 파괴되었고, 백성은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정말이지 "서울의 관저마다, 그리고 군, 현의 길거리마다 죽은 자가
서로를 베고 누워 있는"상황이었고, "중원이 쥐죽은 듯 조용하요. 천리에 밥 짓는 연기하나
피어오지 않았으면, 추위와 배고픔에 떠돌다 너나할것없이 구렁텅이로 빠져드는" 현실이었
다.
북위의 효명제 원허 이래로 해마다 계속된 정국의 혼란은 대간 원차와 이주영의 야심 때
문에 빚어진 것이었다. 원차는 호 태후의 제부라는 구실로 정치에 간섭했다. 그는 영군 장군
이 되었으나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이내 정치를 장악하고 있던 원역과 충돌을 일어켰다.
원역은 효문제 원굉의 아들로서, 당당한 풍채와 지위로 인해 북위 통치 집단 내에서도 상당
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호 태후는 이런 원역을 끌어들여 정사를 보좌하도록 했다. 그런데
호 태후가 그의 풍채와 재능에 반해 그와 정을 통했다. 원차는 이를 놓칠세라 대대적으로
이일을 떠벌리고는 궁정 정변을 일으켜 원역을 죽이고 호 태호를 감금해 버렸다. 이렇게 해
서 잔혹하고도 기나긴 싸움이 시작되었다.
몇 차례의 피 튀기는 싸움 끝에 호 태후는 원차를 죽이고 다시 정원을 잡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광정에서 또 다른 애심가 이주영을 끌어들였다. 이주영은 효명제 원허의 사인을
조사한다는 구실로 낙양으로 쳐들어 가서 호 태후와 유주 원쇠를 자방 황하에 던져 죽여 버
렸다. 이주영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동요하는 인심을 누르고 후환을 없애기 위해 문무
백관을 하음 도저로 유인하여 재상 원옹을 포해 무려 2천여 명의 왕공과 대신을 모조리 죽
였다.
530년, 이번에는 효장제 원자유가 이주영을 황궁으로 유인하여 죽여 버렸다. 그러나 이주
영의 처자식들이 옛 부하들을 소집하여 다시 낙양을 공격했다. 그들은 효장제 원자유의 사
면령에 대해 코방귀를 뀌며, 맹령하게 공격하여 낙양을 함락시키고는 원자유를 목졸라 죽였
다. 그러자 이번에는 고환이 반역자를 토벌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이주영 가족과 격전을 벌
였다. 참으로 그칠 길이 없는 피바람의 연속이었다.
당나라 현종은 만년에 주색에 빠져 나라 일을 게을리 함으로써 국운이 점점 기울기 시작
했다. 군대의 기강은 느슨해지고 지방 세력이 갈수록 위세를 떨쳤다. 이런 상황에서 양국충
과 안록사은 나라일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야심을 위해 한치의 양보도 없는 싸움을
벌였다. 그들의 야심을 혼란을 자극하고 혼란에 불을 붙이는 도화선의 역할을 했다. 양국충
은 외척으로 시작해서 재상으로 나라를 주물렀지만, 안록산이 외부의 군사력을 끼고 있고
거기에다가 현종의 귀여움까지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언젠가 자신을 뛰어넘지나 않을
까 몹시 불안했다. 그리하여 양국충은 사사건건 안록산을 몰아 붙이고 공격을 가했다. 결국
은 이것이 안록산의 반란을 재촉했다.
사실 안록산이 난을 일으키기 전, 양국충은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낌새를 채
고 여러 차례 현종에게 이 점을 지적했다. 그러나 양국충의 이런 지적은 국가와 민족을 위
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정적을 무너뜨리려는 사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양국충은
현종이 자신의 말을 믿지 않자 고의로 반란을 자극하여 안록산으로 하여금 당 왕조로부터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양국충은 자기의 문객을 시켜 안록산의 반란 증거를 수집하게 하는 한편, 각 지방에 명령
하여 안록산의 관저를 포위해서 그의 심복을 잡아죽이고 부하들을 대대적으로 내쫓았다. 이
러한 조치는 안록산의 반란 의지를 더욱 굳혀 주었고, 당 현종으로부터 등을 도리게끔 자극
했다. 이 얼마나 비열하고 악독한가!
조여드는 포위망 속에서 위기감을 느낀 안록산은 15만 대군을 이끌고 양국충을 제거한다
는 명분을 앞세워 공개적으로 반란의 기치를 드높였다. 이 반란은 전후 8년간 계속되다가
광덕 원년인 763년에야 비로소 평정되었다. 그러나 그 동안 백성의 생명과 재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당 왕조의 국세도 돌이킬 수 없이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이로써 역사상 참으
로 보기 드물었던 번영의 시대는 마감되었다.
사회 혼란은 간신, 소인배들의 등장을 부추긴다. 또 간신, 소인배들은 극렬한 사회 혼란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사회 발전사를 들추어보며 사회 혼란은 예외 없이 간신들에 의해 조성
되었거나 가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거시에는 복잡한 사회, 역사적 원인이 있다.
간신, 소인들의 권력 쟁탈과 상호 알력은 사회를 혼란으로 몰아 넣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
을 뿐 아니라, 잔혹한 통치는 늘 농민 봉기를 유발시켰다. 상대적으로 안정된 평화로운 기간
이라 해도 그들의 잔악한 행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집을 버리고 강호를 떠돌다 결국은 이
른바 '도적'이 되어 벌떼같이 일어났다. 이런 점에서 간신배들의 죄악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다.
지나간 수 천년의 여사에서 숱하게 많은 애국자와 양심있는 인물들이 출현했음에도 불구
하고 제국 중의의 능욕을 막지 못했다. 광할한 땅과 넘치는 자원데도 불구하고 경제적으로
오랫동안 낙후와 빈곤을 면치 못 했다. 그리하여 결국은 근대의 낙오자가 되고 말았다. 제국
주의의 말발굽이 중국 땅을 짓밟았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근본적 원인은 사회제도의 부패에 있었다. 이 때문에 민족의 흥망이 걸려 있는 결정적인
시기에 간신이 정권을 장악했다. 이들은 선진 문물에 대해서는 치를 떨며 싫어한 반면, 부패
에 대해서는 눈썹을 휘날리며 달려들어다. 그들은 고대사회를 음모와 살기로 충만하게 했으
며, 암울한 분위기가 세상을 지배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무수한 영웅들을 짓눌렀으며, 민족
의 진취적 정신을 말살했고, 민중 속에 자리잡고 있는 무궁한 창조력의 발휘를 방해했다. 이
에 대해 한 차례 시원스러운 청산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시대적 유감
현명하고 지혜로운 선인들은 간을 가려내고 제압하기 위해 실천적 노력과 이론적 탐색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들은 논리와 분석을 통해 후세에게 값어치있는 본보기를 남겼으며, 또
깊이 있는 반응을 서로 촉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봉건시대와 같은 부패한 정치제도 하에서
는 계몽적인 변간 이론을 평정하기가 불가능했으며. 또 간신을 철저하게 뿌리뽑는 실천적
행동도 불가능했다. 뿌리가 튼튼하지 못하면 꽃이 피지 못하며, 꽃이 제대로 피지 못하면 열
매를 맺을 수 없다. 시대적 한계이자 유감이 아닐 수 없다.
고대의 변간 이론
역사는 공정하다 . 불의를 저지른 자는 반드시 자멸한다. 일찍이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얼마나 많은 간신 소인들이 죄과를 치렀던가! 생전에 한때 득세했더라도 그들에게 내려지
는 엄정한 역사의 심판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기원전 475년, 월왕 구천은 10여 년의 '와신상담' 끝에 대군을 이끌고 오나라를 공격했
다.
그로부터 장장 2년에 걸친 전투 끝에 오나라를 멸망시겼다. 오나라 대신 백비는 자신이 지
난날 구천에게 베풀었던 은혜만 믿고 유쾌하게 입궁하여 구천에게 축하를 드렸다. 그러나
뜻밖에도 구천은 백비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오나라의 태자인데 내가 어찌 감히 이래라 저래라 하겠는가? 너의 왕이 양산에
있으니 그를 따라 가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는 명령을 내려 가차없이 목을 베고 아울러 가족을 몰살시켰다.
초평 년인 192년, 군주를 멋대로 세우고 내쫓는 등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며 설치던 동탁
이 피살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길거리로 쏟아져 나와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장
안의 남녀들은 거리를 가득 메운 채 패물이며 옷가지 따위를 팔아 술과 고기를 사서 먹고
마시며 기뻐했다."동탁의 시체를 지키던 병사가 살찐 동탁의 시체를 보고는 배 위에다 등
심지를 꽂고 불을 밝혔더니 이틀 동안이나 거뜬히 탔다.
정강 원년 2월, 송나라 흠종은 황제 자리를 공고히 하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감찰 어사
장짐으로 하여금 추방된 동관을 쫓아가 그를 그 자리에서 처치하도록 했다. 장짐은 동관이
란 위인이 음흉하고 꾀가 많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먼저 부하를 보내 동관의 행차를
막도록 했다. 부하는 남웅주에서 동관을 따라잡아 황제가 당신을 서울로 다시 오라고 했으
며, 아울러 하북선무사에 임명했기에 특별히 먼저 달려와 축하를 드린다고 했다. 동관은 "보
아하니 난 아직 멀었군!" 하며 의기양양해 했다. 그리고는 곧 행차를 멈추고 사신을 기다렸
다. 다음날 오전, 과연 어사 장징 일행이 도착했다. 장징은 동관 혼자서 조서를 받도록 했다.
그 순간 전날 미리 와 있던 부하들이 쏜살같이 달려들어 동관의 목을 가차없이 베어 버렸
다.
덕우 원년(1275),재상 가사도 는 나라에 욕을 보였다. 원나라 군대가 대대적으로 쳐들어왔
고 남송 왕조는 크게 기울었다. 안팎으로 분노가 극에 달해 조정에서는 마침내 가사도를 무
주로 유배했다. 무주 사람들은 가사도가 유배 온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가사도가 들어오는
것을 결사 반대했다. 조정에서는 하는 수 없이 가사도를 순주로 보냈다. 이때 무사 정호신이
가사도를 압송하는 임무를 맡았다. 장주 목면암에 이르러 정호신은 천하를 위해 이 간신을
없애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자기 손으로 가사도를 죽여 버렸다. 한때 가사도의 문객으로 있
었던 장주 태수 조개여가 달려왔지만 정호신은 시체도 못 보게 하며 이렇게 말했다.
"천하를 위해 내 손으로 이 간신 도적을 없앴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 당신이 감히 나를
어쩔 셈이냐?"
간신들의 범행이 낱낱이 밝혀져 죽음을 당하고 나면 지난날 그들을 따랐던 일당들도 하나
하나 붙잡혀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실로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요형중은 진상 급제한
뒤 대리승, 지주 등의 관직을 거쳤다. 그러나 그는 모두 사양하고 기꺼이 재상가사도 집의
노예가 되기를 원했다. 그는 가사도를 위해<복화편><기기집>을 편찬하여 가사도의 공적을
노래했으며, 또 <부화각첩><강첩><오판란정><전당시화>를 펴내고 13왕조의 역사적 사건
을 뽑아 <열생당잡초>를 편집하는 등 권력자에 빌붙어 지식을 팔았다. 가사도가 파면되자
주변의 문인, 문객들이 바람에 구름이 흩어지듯 모두 뿔뿔이 흩어졌는데도 오직 요형중만
을 가사도의 별장에 남아 떠나지 않았다. 어느 날 요형중은 실컷 술을 퍼마신 다음 자기
방으로 돌아와 애첩에게 차를 다리게 해서는 빙뇌을 한 움큼 입에 털어 넣었다. 약효가 신
통치 않자 요형중은 애첩에게 더운술을 가져오게 한 다음 빙뇌를 몇 움큼 더 털어 넣었다.
애첩은 큰 소리를 내어 울었다. 오형중은 애첩을 달래며 이렇게 말했다.
"울지마라. 내가 재상을 20년 동안 따랐지만 하루아침에 무너질 줄 누가 알았겠느냐? 늙
어서 이런 신세가 되었으니 감옥살이나 형벌을 견디지 못할 것 아니겠느냐? 그러니 차라리
독약을 먹고 죽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니라."
비바람 몰아치는 처량한 밤, 천박하기 짝이 없었던 한 문인은 이렇게 부끄러운 일생을 마감
했다.
마순은 우너래 금의위 진무사 아문의 지휘사였다. 왕진에게 꼬리쳐 그와 결탁한 뒤로는 귄
세만을 믿고 나쁜 짓을 일삼았다. '토목보' 사건으로 왕진이 죽자 의지할 곳을 잃은 마순의
기세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꺾였다. 그러나 똥개는 똥 먹는 습성을 못 버리는 법.
어느 날 마순이 궁전에서 당직을 서고 있을 떄, 그날따라 많은 사람들이 궁으로 몰려왔다.
그들은 땅을 치고 통곡을 하며 성왕에게 왕진의 가족을 몰살시켜 백성의 울분을 조금이나마
풀어 다라고 요구했다. '토목보' 사건으로 포로가 된 영종의 동생 성왕은 어찌할 바를 모르
고 그저 손을 휘두르며 사람들을 돌려보내라고 했다.
이 모습을 본 마순은 성왕도 영종처럼 왕진을 총애하는 것으로 오해하여, 그의 비위를 맞추
려고 조정 신하들을 향해 저들을 내쫓으라고 고함을 지르며 좌충우돌했다. 그의 이런 행동
은 가뜩이나 화가나 있던 사람들을 극도로 자극했다. 누군가가 뛰어들어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는 "이 간신놈아! 너같이 죽어 마땅한 놈이 어떻게 아직도 감히 이럴 수가 있느냐."
라며 욕을 퍼부었다. 그 사람은 욕설을 퍼부으며 마순을 때리다 마순의 귀를 물어뜯어 버렸
다. 그러자 나머지 사람들도 우르르 몰려가 고함을 지르며 마순을 마구 짓밟기 시작했다. 실
로 눈 깜짝할 사이였다. 마순은 피를 절명하고 말았다. 마순을 때리다 마순의 귀를 물어뜯어
버렸다. 그러자 나머지 사람들도 우르르 몰려가 고함을 지르며 마순을 마구 짓밟기 시작했
다. 실로 눈 깜짝할 사이였다. 마순은 피를 흘리며 절망하고 말았다. 마순을 때려 죽인 군중
은 아직도 분이 덜 풀렸는지 일제치 ㅎ마성을 지르며 왕진의 또 다른 일당 모쉬와 왕장수의
이름을 부르면서 궁전으로 달려갔다. 이 뜻하지 않은 사태에 크게 놀란 성왕은 즉시 두 사
람을 끌어내 군중들에게 넘겨주었다. 성난 군중들은 이들을 좌순문으로 끌고 가 닥치는 대
로 때리고 짓밟았다. 두 사람은 온몸이 완전히 문드러진 채 죽었다.
좌순문에서 이 세 사람이 잇달아 밟혀 죽은 사건을 후세 사람들은 '좌순문 사건'이라 불
렀
다. 명나라의 법률은 전례를 매우 중시했다. 그래서 이 사건 이후 좌순문은 군중들이 간신을
없애는 장소가 되었다. 이곳에서 군중들은 모두가 죽어야 마땅하다고 하는 간신을 때려 죽
였다. 그리고 전례에 따라 죄를 받지 않았다. 위충현에게 빌붙어 설쳤던 간신 최정수의 죽음
역시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위충현이 쫓겨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
렵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래서 그는 첩들과 기생들을 모조리 불러모으고 진기한 보물들을
깡그리 펼쳐놓은 다음 미친 듯 술을 마시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여사는 엄격하고도 내정하다. 역사가 인간을 징벌할 때는 인정 사정없다 모두가 반드시 단
단히 기억해야 할 진리이다.
그러나 역사의 공정한 심찬은 늘 긴 시간을 필요로 하며 커다란 대가를 요구한다. 간신들의
잔혹한 짓거리와 끊임없는 악행은 국가 사회 민중에게 커다란 고통을 가져다준 다음에야
비로소 인식되고 드러난다. 때때로 일부 간신들은 죽어서도 나쁜 자로 인식되지 않고 유유
히 역사의 법망을 빠져 나가기도 한다.
따라서 수천 수 백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이에 대해 유감을 표시해왔다. 뛰어난 사상가나
정치가들은 한결같이 간신의 행태와 그들이 걷는 길을 제대로 살펴 간신들로 인한 피해를
막고자 고심해왔다 그것을 위해 그들은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 책을 쓰고 갖가지 주장을 펼
쳤다. 그리하여 후세 사람들이 본받을 만하고 깊은 반성을 촉구하는, 지극히 타당하고도 정
교한 이론을 남겨놓았다.
육도
<육도>는 아주 오래 된 병법서다. 강태공의 이름을 빌리고는 있지만 실제로는 전국시대
무명씨가 지은 책일 것이다. 이 책은 선진시대의 군사사상을 집대성한 뛰어난 병서일 뿐만
아니라, 일찌감치 '사람을 알고 세상을 논한다.'는 '지인론세'의 문제를 제기한 자못 생각해
볼
점이 많은 책이기도 하다.
<육도>는 사람의 겉모습과 속마음이 때로 크게 다를 수 있음을 말한다.
겉모습은 어진 사람 같지만 속은 어질지 않은 자
겉으로는 온화하고 착해 보이지만 실제는 도둑질하는 자
겉으로는 공경하는 태도를 짓지만 마음은 교만한 자
겉으로는 겸손하고 근신하는 체하지만 속은 그렇지 않은 자
치밀하고 주의력이 깊어 보이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은 자
겉으로는 중후한 듯이 보이지만 실은 성의 없는 자
꾀를 좋아하면서도 결단력이 없는 자
과감한 것 같으면서 실은 무능한 자
매우 근신하는 것 같지만 믿음이 없는 자
겉보기에는 정체를 파악할 수 없을 것 같지만 실은 충실한 자
성격이 이상하고 언동이 과격하지만 일을 맡기면 효과를 내는 자
겉으로는 용감하게 보이지만 속은 비겁한 자
삼가는 척하면서 도리어 남을 얕잡아 보는 자
엄하고 냉혹하게 보이면서 도리어 차분하고 성실한 자
기세는 허약하고 외형은 못생겼으나 밖에 나가면 못 가는 데가 없고 못 이루는 일이 없는
자
그래서<육도>는 만약 사람의 겉모습이나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면
틀림없이 실수를 법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훗날의 수없이 많은 역사적 사실들은 <육도>의
지적이 정확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1856년 태평천국의 혁명군은 파죽지세로 전국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
중요한 시기에 태평천국의 지도자 집단 내부, 특히 홍수전과 양수청 사이에 권력투쟁이 벌
어짐으로써 혁명 전체에 커다란 틈이 생기고 말았다. 태평천국 지도자 집단 안에 섞여 들어
간 지주 계급 위창휘는 이 틈을 이용하여 자기의 속셈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위창휘는 지주
출신이었으나 자기 지역의 권력자에 의해 배척 당하자 사제회에 가담했다. 그리고 천왕 홍
수전과 동왕 양수청에 대해 더할 나위 없이 유슌하고 충성스러운 태도로 그들을 모셨다. 머
리는 있는 대로 숙이고 귀는 늘어뜨린 채 비굴하게 굽실거렸다. 평소 그는 양수청을 극진히
떠받들었는데 양수청의 가마가 눈에 띄기만 하면 총총걸음으로 쪼르르 달려가 양수청을 맞
이했다. 양수청이 몇 마디 하면 황망히 땅에 무릎을 끓고는 "사형의 가르침이 아니었더라면
소인이 어찌 지금과 같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알랑거렸다. 양수청에 대한 위창휘의 태도는
참으로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극진했다.
한 번은 위창휘의 형과 양수청의 처형이 집을 놓고 다툰 적이 있었다. 양수청은 이 사건을
위창휘로 하여금 처리토록 했다. 그러자 위창휘는 서슴지 않고 자기 형에게 '오마분시'의 혹
형을 내림으로써 양수청에 대한 절대 충성을 표시했다. 그러면서 위창휘는 "이렇게 하지 않
으면 여러 사람들에게 경고가 되지 못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한 상식을 벗어난 태도는 표
면상 양수청에게 절대 굴복하는 것 같았지만, 속으로는 화근이 되어 자라고 있었다.
비교적 식견이 있었던 중국번은 이를 간파하고 위창휘의 태도를 겉으로는 그렇지 안은 척
하지만 속으로는 귄력을 탈취하려는 것이라 단정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홍수전과 양수
청은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고 또 주의하지도 않았다. 홍수전이 위창휘에게 지도자 집단
간의 갈들을 해결하라고 했을 때, 오랫동안 기다리던 위창휘는 대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하여
미친 듯이 칼을 휘둘렀다. 그의 사악함이 남김없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9월1일 깊은 밤, 위창휘는 친위군 3천여 명을 이끌고 동왕부를 포위, 동왕부로 통하는 모든
길을 봉쇄했다. 이날 새벽 위창휘는 일당을 이끌고 동왕부로 들이닥쳐 닥치는 대로 죽이기
시작했다. 날이 밝을 무렵 동왕부 안팎은 시체로 가득 찼고, 피는 하천을 이룰 정도로 철철
흘러넘쳤다. 양수청과 그 가족 그리고 관병이 남김없이 피바다 속으로 엎어졌다.
무고한 사람까지 닥치는 대로 죽이는 위창휘이 만행에 홍수전은 강한 불쾌감을 표시했다.
그러자 위창휘는 참으로 교활하게도 스스로 곤장형을 자청하며 자신의 형을 받는 모습을 보
러 오도록 양수청의 부하들을 유인했다. 위창휘는 이미 지난날의 위창휘가 아니었다. 양수
청을 제거하고 난 위창휘에게는 더 이상 꺼릴 것이 없었다. 홍수전의 말 따위에는 코방귀도
꾸지 않았다.
그는 '곤장형을 받는' 자신의 모습을 보러 온 양수청의 부하들을 무장 해제시킨 뒤 또 한
차
례 무자비한 대학살을 저질렀다. 살아 있는 생명체는 모조리 다 없애 버릴 기세였다. 이렇게
해서 양 2만 여명에 이르는 뛰어난 장수와 병사들이 위창휘의 독수 아래 처참하게 죽어갔
다. 지난날 그러게 온순했던 위창휘는 이에 그치지 않고 그날 밤으로 익왕 석달개 일가마저
몰살시켰다. 이로써 태평천국의 기운은 크게 꺾이기 시작했다.
피와 눈물로 범벅된 역사적 사건을 되돌아본 다음 다시<육도>를 읽으면 그 의미가 심각함
을 어렵지 않게 느낄 것이다. <육도>는 사람을 가볍게 믿지 말라고 주장한다. 겉모습만 보
지 말고 여러 방법으로 보다 깊게 살피고, 보다 멀리 내다볼 것을 권한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여덟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어떤 문제를 내어 그 이해의 정도를 살핀다.
자세히 꼬치꼬치 캐물어 그 반응을 살핀다.
간접적인 탐색으로 충성 여부를 살핀다.
솔직 담백한 말로 그 덕행을 살핀다.
재무관리를 시켜 청렴과 정직 여부를 살핀다.
여색을 미끼로 그 품행(정조)을 살핀다.
어려운 상황을 만들어 그 용기를 살핀다.
술에 취하게 하여 그 자세를 살핀다.
요컨데 <육도>는 사람을 경솔하게 쓰지 말고, 사람을 이해함에 있어서도 천박하면 안 된
다고 주장한다. 여러 방법으로 여러 방향에서 살펴 깊게 이해할 것을 제안한다.
또한<육도>는 우리에게 사사로운 감정이나 일시적인 표면적 현상으로 쉽게 사람을 쓰거나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충성스럽고 믿음을 지키는 사람을 쓰고, 위선적인
무리를 물리치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따라서 '육적칠해',즉 여섯 종류의 나쁜 일과 일곱 종
류
의 나쁜 자를 경계하고 물리쳐야 한다.
여섯 가지 나쁜 일, 즉 '육적'이란 다음과 같다.
신하가 대규모로 궁실 누각 정자를 짓고 노래와 춤으로 즐기게 하여 임금의 덕을 손상
시키는 일
백성이 농사짓고 누에치는 일에 힘쓰지 않고, 제멋대로 방탕하게 놀며, 국법을 위반하면서
관리의 지도에 따르지 않아 임금의 교화를 손상시키는 일
신하가 붕당을 만들어 어진 자와 지혜 있는 사람을 가로막고 임금의 총명을 가려 임금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일
선비가 반항하는 뜻과 위세로써 다른 나라의 군주들과 교제하면서 자기의 임금을 중하게
여기지 않아 임금의 위엄을 손상시키는 일
신하가 벼슬과 지위를 경시하며 관리를 천하게 여기고 임금을 위해 어려운 일을 행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공신의 노고를 손상시키는 일
종친이 가나하고 약한 자들의 재물을 빼앗고 그들을 업신여겨 서민의 생업을 손상시키는
일
다음으로 일곱 가지 나쁜 자, 즉 '칠해'란 다음과 같다.
아무런 지략이나 책략도 없으면서 상과 높은 벼슬만을 탐내 경솔하게 저재을 벌여 요행으
로 승리하기를 바라는 자
헛 이름만 있고 실질은 없으며, 나갈 때와 들어올 때의 말이 다르고, 어진 사람은 덮어 버
리고 악한 사람은 추켜세우며, 나아가고 물러감을 교묘히 하는 자
자기의 몸을 검소하게 하고 의복을 남루하게 하여 이름을 구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이익
도 바라지 않는다고 말하는 위선자
기이한 차림새를 하고, 말재주로 헛된 논의만 일삼으며, 선한 얼굴로 위장하여 궁벽한 곳
에 거처하면서 사회를 비방하는 자
참소와 아첨으로 관직을 얻고, 죽음을 무릅써가면서까지 녹봉과 관직을 탐하며, 큰일은 도
모하지 아니하나 이익이 있으면 움직이고, 고상한 말과 헛된 논의로써 임금께 이야기하는
자
장식을 하고 갖은 기교로 호화롭게 꾸며 농사에 지장을 주는 자
허위의 방술, 이상한 기술, 방자한 방법 등으로 남을 저주하며, 사악한 도술과 상서롭지
않은 말로 선량한 백성들을 현혹시키는 자
위의 분석에 따르면 <육도>는 높은 곳에서 먼 곳을 내려다보며 보다 깊고 세밀하게 살피
고 들을 것을 제안한다. 아울러 이를 바탕으로 성낼 때는 성내고 죽여야 할 때는 죽여서 다
시는 간신으로 하여금 간행을 저지르지 못하게 해야 한다. 자칫 잘못하여 호랑이를 놓아주
는 우를 범해서는 절대 안 된다.
사기
고대사회에서 이와 비슷한 논의는 적지 않았다. <사기>이 <위세가>에 이런 이야기가 보
인다. 위문후가 이극에게 "선생께서 일찍이 광인을 가르치시며 말씀하시기를 '집안이 가난
해
지면 현모양처가 생각나고, 나라가 어지러워지면 훌륭한 재상이 아쉬워진다.'라고 하셨습니
다. 지금 위나라의 재상감으로 성자와 적황이 있는데, 두 사람이 어떠합니까?'라고 물었
다.
이극이 대답하기를,"제가 듣기로는 비천한 자가 존귀한 사람을 평하지 않고, 소원한 사람이
가까운 사람을 평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궐 문 밖에 있는 제가 어찌 왕의 명을 받들 수
있겠습니까?"라며 논평을 피했다. 그러자 문후는 다시"선생께서는 부디 이 일을 사양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이극은 평소 세밀히 살피지 않은 까닭이라고 지적하면서 사람
을 택하는 다섯 가지 표준을 열거한다.
"평소에는 그와 가까운 사람을 살피고, 관직에 있을 때에는 그가 천거한 살마을 살피고,
부귀할 때에는 그와 위아래가 있는 사람을 살피고, 곤궁한 상황에서는 그가 하지 않는 일을
살피고, 어려울 때에는 그가 취하니 않는 것을 살피십시오. 이 다섯 가지만 살피면 얼마든지
인선을 하실 수 있으신데 무엇 때문에 저의 조언을 기다리십니까!"
이에 문후는 "알겠습니다. 재상은 정해졌습니다."라고 하였다. 이극이 물러나와 적황의 집
을 방문하자 그가 물었다.
"듣자 하니 왕께서 선생을 불러 재상 선임 문제를 물었다고 하는데, 도대체 누구를 재상
으로 정하였습니까?"
이에 이극은 "성자가 재상이 되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적황이 화를 내며"귀로
듣고 눈으로 볼 때 제가 어디가 성자만 못합니까? 왕께서 내심 업의 땅 때문에 근심하실
때, 제가 서문표를 추천하였습니다. 왕께서 중사을 정벌하려고 하실 때, 제가 악양을 천거하
였습니다. 중산을 토벌한 후에는 이를 지킬 사람을 찾지 못하여 제가 선생을 추천하였습니
다. 이러한테 제가 어찌 성자만 못하단 말입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이극이 반문했다.
"그대가 나를 그대의 왕에게 추천한 것이 장차 큰 벼슬을 구하기 위해서 였더란 말입니
까?"
이극의 말에 적황은 마침내 자신이 '못난 사람' 임을 깨닫고 평생토록 이극의 학생이 되기
를
자청했다. 여기서 이극이 문후에게 제시한 다섯 가지 표준을 좀더 얘기해보자.
첫째,'평소에는 그와 가까운 사람들을 살피고'는 평소 그 사람이 어떤 인물들과 가까이 지
내는가를 살피라는 말이다. 만약 그가 건달패들이나 소인배들과 어울려 다닌다면 그는 써먹
을 수 없는 사람이다. 반대로 어떤 상황에서도 바르고 깨끗한 사람과 교제한다면 그는 성인
군자라 할 수 있다.
둘째, '관직에 있을 때에는 그가 천거한 살마을 살피고'는 우두머리 자리에 있으면서 권력
을 행사할 때 어떤 살마을 추천하여 기용하는지를 보라는 말이다. 추천하여 기용한 자들이
하나같이 아첨이나 일삼는 덕 없고 능력 없는 무리들이라면 그는 바른 삶이 못 된다. 반대
로 현명하고 선량한 인물을 추천하여 등용했다면 사고방식이 비교적 옳은 사람이다.
셋째, '부귀할 때에는 그와 위아래가 있는 살마을 살피고' 는 귀한 자리에 있을 때 그 사
람이 교제하는 스타일을 살피라는 말이다. 오로지 관직이 높고 귀한 자들과 교류하느냐 아
니면 가난하지만 깨끗한 사람들과 사귀느냐는, 그 사람의 사상적 품질을 가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될 수도 있고 또 그 내면을 깊이 살필 수도 있다.
넷째, '곤궁한 상황에서는 그가 하지 않는 일을 살피고'는 운이 따르지 않아 어렵고 힘든
처리에 빠졌을 때 그 사람이 곤경 속에서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않는지를 살피라는 말이
다. 지조를 지키며 총애와 굴욕에 흔들리지 않느냐, 아니면 꼬리를 흔들며 동정을 구걸하고
몸을 팔아 의지할 곳을 찾느냐를 지켜보라는 것이다.
다섯째, '어려울 때에는 그가 귀하지 않은 것을 살피고'는 사람을 흔히 곤궁에 빠지면 뜻
이 초라해지므로 그런 상황에서 그가 무엇을 하지 않는지 살피라는 말이다.'말이 마르면
꼬
리만 길어진다.'고 했듯이. 가난하면 흔히 비굴한 마음이 생겨나 남의 도움을 바라기 쉽
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몸을 깨끗하게 지키고 궁할수록 더욱 굳게 뜻을 버리지 않으며, 던져
주는 것을 받아먹지 않고, 바른 길에 따라 사악한 마음을 품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의 기개
와 지조의 표현인 것이다.
여씨춘추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책 <여씨춘추>를 보자. 이 책에서 우리는 시를 번득이는 견
해들을 발견할 수 있다.<사기><여불위전>에 따르면 이 책은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가 제
각기 재능을 자랑하던 시기, 문인들이 정치에 참여하면서 비교적 개방적인 사상을 배경으로
하여 쓰여진 것이다.
<여씨춘추>를 완성한 뒤 여불위는 이 책을 함양 성문 위에 높이 걸어놓고 단 한 자라도
바꿀 수 잇는 사람에게는 천금의 상을 내리겠다며 자신만만하게 천하에 선포했다. 그러나
그 상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야 물론 재상의 위세에 겁을 먹은 탓도 있겠지만, <
여씨춘추>에 후세의 본보기가 될 만한 관점들이 적지 않은 것만은 틀림없다 하겠다.
<의사>라는 글에서는 본질과 현상의 관계를 인식하여 구별하고 있다. 본질적으로 다른
것일지라도 현상적으로는 왕왕 비슷한 점이 있다는 인식을 보인다. 예컨대 돌을 보석으로
본다든지, 무딘 검을 '간장'이나 '막야'와 같은 명검으로 본다든지, 나아가서는 '망국의 임
금
이 지혜롭게 보이고, 망국의 신하가 충성스럽게 보인다든지'하는 특수한 현상을 인용하고
잇
다. 겉모습이 비슷하다고 해서 가볍게 믿지 말고, 우선 의심을 가지고 조사한 다음 다시 결
론을 내려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른바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으면 살피지 않을 수 없
다."는 말이다. <여씨춘추><논인>에서는 이렇게 지적한다.
"인간은 종류는 같지만 지능은 모두 다르며, 똑똑하고 못나고의 차이도 뚜렷하다. 모두가
교묘한 자기 변명의 말로 스스로를 방어한다. 이것이 바로 못난 군주가 혼란스러워지는 까
닭이다."
우둔하고 못난 군주가 흐리게 되는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설명이다. 따라서<여씨춘
추>는 인간을 여러 방면에서 살필 것을 주장하면서, 이른바 '팔관육험법'을 제기한다. '팔
관
법'이란 다음과 같다.
순조로울 때 그가 어떤 사람을 존중하는가를 살핀다.
높은 자리에 있을 때 그가 어떤 사람을 추천해 기용하는지를 살핀다.
부유할 때 어떤 사람을 접촉하는지, 즉 어진 사람을 기르는지 간사한 자를 기르는지를 살
핀다.
무엇을 말하는지 듣고, 무엇을 하는지 살핀다.
한가할 때 그가 무엇을 즐겨 하는지를 살핀다.
친해진 다음 그가 말하는 중에 드러나는 뜻에 주의한다.
실의에 빠졌거나 좌절에 빠졌을 때 그의 지조를 본다.
가나할 때 그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않는지, 가난 때문에 이리저리 휩쓸리지 않는
지를 살핀다.
'육험법'이란 다음과 같다.
그를 기쁘게 하여 정상적인 상태를 잃고 천박하게 흐르지 않는지를 살핀다.
즐겁게 해서 그의 취향이나 나쁜 버릇 따위를 살핀다.
화를 돋구어 통제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를 살핀다.
두렵게 만들어 그것을 견딜 수 있는지를 시험한다.
슬프게 만들어 스스로를 지탱할 수 있는지를 살핀다.
힘들게 만들어 그의 의지를 시험한다.
<여씨춘추>에서는 '팔관육험' 외에도, 환경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 등을 고려해서 그 사
람의 '육척사은'을 살릴 것을 제안하고 있다. '육척'이란 아버지 어머니 형 동생 아내
아들을 말한다. '사은'이란 좋은 친구, 오래 사귄 사람. 고향 사람. 가까이 지내는 사람을
망
한다. 이런 주위의 환경을 통해 그 사람의 성질에 대해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씨춘추>에서는 안으로는 '육척사은',밖으로는 '팔관육험'을 통해 그 사람의 정직과 위
선
과 탕욕 따위를 낱낱이 통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맹자
<맹자><양혜왕>에서도 사람을 뽑아 쓸 때는 신중에 신중을 기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좌우 측근들이 누가누가 좋다고 하더라도 가볍게 믿어서는 안 된다, 여러 대부들이 누가누
가 좋다고 하더라도 가볍게 믿어서는 안 된다.
나라 사람 전체가 누가 누가 좋다고 한 다음에야 가서 살펴보고 진짜 좋으면 기용한다.
좌우 측근들이 모두 누구는 좋지 않다고 하더라도 들은 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대부들이
누구는 좋지 않다고 하더라도 들은 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나라 사람 전체가 누구는 좋지
않다고 한 다음에야 가서 알아보고 진짜 좋지 않으면 조치한다. 좌우 측근들이 모두 누구는
죽어 마땅하다고 하더라도 믿어서는 안 된다. 대부들이 모두 누구는 죽어 마땅하다고 하더
라도 역시 가볍게 믿어서는 안 된다. 나라 사람 모두가 누구는 죽어 마땅하다고 한 다음에
야 가서 살펴보고 진짜 죽어 마땅하면 그때 죽인다. 이렇게 하면 나라 사람 자체가 죽였다
고 할 수 있다. 그래야 비로소 백성의 어버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로 사람을
취하거나 버리면 의심할 바 없이 신중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한비자
충, 간을 가려내는 데에 있어서 또 하나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책에 바로 <한비자>이다.
<한비자>는 통치술과 제왕학에 관한 전문서라 할 수 있다. 이 책의 상당 분량은 사람을 인
식하고 사람을 쓰는 방법을 연구, 종합한 것이다.
이 책의 <비내>라는 장을 보면 사람을 섣불리 믿음으로써 초래되는 문제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군주가 환난을 당하게 되는 까닭은 남을 너무 믿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너무 믿어 버
리면 그에 의해 지배받게 된다."
아울러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들, 처와 간신이 결탁하여 아비와 남편을 살해하는 경우까지
있다고 분석한다.
"군주가 자기 아들을 지나치게 신뢰하면, 간신들은 태자의 후광을 업고서 그들의 사리사
욕을 채우고자 할 것이다. 또 군주가 자기 부인을 지나치게 총애하면, 간신들은 역시 이를
이용해 자신의 사욕을 채우고자 할 것이다."
아내와 자식조차 믿을 수 없는데 그 나머지 사람이야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신하는 군주와 골육의 친분을 맺은 것이 아니고, 단지 군주의 위세에 속박되어 섬기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다. 따라서 신하는 늘 군주의 심기를 엿보고 살피느라 잠시도 쉬지 않
는다. 그래서 신하의 조종을 받거나 심지어 시해 당하기까지 하는 것은 군주가 잠시나마 게
으르고 교만하게 처신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군주를 시해하기까지 하는 간신' 이란, "모두가 군주의 뜻에 순종함으
로써 총애와 신임을 얻으려고 하며, 그래서 군주가 누구를 좋다고 하면 그 사람을 칭찬하는
말만 하고, 반대로 누군가를 미워하면 그를 마구 비방하는" 존재들이다.
<한비자>는 간신이 간행을 저지르는 방법과 술책에 대해 분석하면서 간신의 여러 술책들
을 지적해내고 있다.
금과 옥 같은 패물을 군주를 모시는 비빈이나 미녀들에게 주어 군주의 마음을 현혹시키게
한다.
늘 군주를 가까이 모시면서 군주가 명을 내리기도 전에 "예예" 하며, 시키기도 전에 "네
네" 한다.
신하들은 좋은 음악과 아름다운 여자를 서얼 공자에게 바치며, 한편으로는 감언이설로 조
정 중신들을 설득한다.
자신의 욕심과 사사로운 이득을 채우려는 속셈으로 대대적으로 백성을 동원하여 궁실을
짓고 누각을 시우는 대규모 공사를 일으킨다. 아니면 군주를 즐겁게 하고자 막대한 세금을
징수하여 미녀들을 호화롭게 꾸민다.
공적인 재물을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면서 민심을 사로잡는다. 이렇게 작은 은혜로써 백성
들의 마음을 취하여 조정 관리와 시정의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을 칭송하게 함으로써 군주를
현혹한다.
각국에서 변론에 뛰어난 자는 찾고, 안으로는 유세에 뛰어난 자를 양성하여, 교묘한 말과
세상에 유행하는 말로써 그 말에만 따르면 유리한 것처럼 보이도록 현혹한다.
검을 갖고 다니는 협객들을 모으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무사를 양성해 자신의 우세를
과시한다.
백성들에게서 빈번히 세금을 걷고 창고의 재물을 가져다가 대국을 섬기는 데에 쓰며, 대
국의 위세를 업고 자신의 군주를 협박한다.
<한비자>의 간신과 간술에 대한 독특하고도 정교한 분석은 참으로 심각하고도 실감나는
것이어서 절로 무릎을 치며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한비자>의 매력은 이에 그치지 않고 간신과 간행을 살피고 제압하는 방향에까지 나아가
있다는 점에서 더욱 빛난다. <내저설>을 보면 간신, 간행을 살피고 제압하는 방법을 종합적
으로 논술하고 있다. 예컨대 '관청법'은 그 사람에 대한 전면적인 관찰, 판단법이다. '일청법
'
은 머리 수만 채우는 사람을 조심하라면서, 진주와 물고기 눈깔을 혼돈하지 않도록, 또 용과
피라미가 한데 섞이지 않도록 방지하는 방법을 말하고 있다. 또 '도언법'은 황당한 말로 상
대방을 시험해보는 방법이다. 이밖에도 '반찰법' 등등이 있다.
수 천년 전의 <한비자>가 간신 현상에 대해 이렇듯 전면적인 분석을 가하고 아울러 심각
하게 변간론을 추구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보기 힘든 귀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인물지
인간과 세상을 논한 많은 책이나 글들 중에 유소의 <인물지>는 그 중요성에 비해 지금까
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삼국시대 사람이었던 유소는 동한 영제 때 태어나 조위 정시 연
간에 세상을 떠났다. 관직은 산기상시에 이르렀고 관내후한 작위를 받았다. 그에게서 가장
두드러진 점은 역시 평생 많은 저술을 남겼다는 것인데, 가장 중요한 것이라면 아무래도 <
인물지>를 들어야 할 것이다.
<인물지>는 체계적으로 세상과 인심을 논한 비교적 이른 시기의 저작이다. 이 책은 인간
의 재능과 성품에 근거하여 인간의 신, 정, 근, 골, 기, 색, 용 등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통
해 인간을 크게 세 부류 열 두 가지로 나누고 있다. 그 중에는 고상한 덕과 성품을 지니 '
겸
덕'한 인물, 덕과 재능을 겸비한 '겸재'한 인물, 재주는 있지만 덕이 모자라는 '편재'한 인
물
등이 있다.
그렇다면 이들을 어떻게 감별하는가? 유소는 팔관, 오시의 방법을 제기하면서, 그 사람의
성품, 기질, 정감, 취향, 지식, 능력을 비롯해 평소 언행과 생활 태도에 대한 종합적인 분석
을 주장하고 있다. 유소는 또 특히 집권자가 흔히 사사로운 감정으로 일을 처리하기 때문에
사람의 식별에 왕왕 편견과 오류가 발생한다고 강조하면서, 그러한 편견과 오류는 주로 다
음과 같은 일곱 가지로 나타난다고 했다.
행동거지를 살피는 대 편견의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사물을 접함에 있어 좋고 싫음의 감정이 생길 수 있다.
마음을 헤아리는 대 크고 작은 착오가 생긴다.
본질을 논함에 빠르고 늦음의 의혹이 있을 수 있다.
종류가 다른 데도 같다고 보는 혐의가 있을 수 있다.
재목을 논함에 과장이나 억압의 잘못이 있을 수 있다.
기이한 것을 보고 극단적으로 치우치는 실수가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인재를 뽑을 때는 반드시 공정한 마음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사로운 마
음을 가져서도 안 되고 편견을 가져서도 안되며 개인의 좋고 싫음을 가지고 선택해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인물지>는 앞사람들의 저술을 바탕으로 하여 여러 요소를 집대성한 책이다. 물론 당시
사회, 역사적 조건의 한계로 인해 편견이 없을 수 없다. 예컨대 관상을 통해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으며, 외모를 관찰하여 내면의 정신까지 알 수 있다고 한 것을 들 수 있다.
간단하게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긍정할 수도 없는 논리다. 보다 깊이 있는
연구와 검토가 필요하다.
설원
고대의 변간 이론은 많은 정치가와 사상가들이 자신의 정치 생애와 사회적 실천을 통해
절실하게 느낀 경험을 토로한 것이다. 서한의 경제학자이자 목록학자이며 문학가인 유향은
일찍이 간의대부로 관직 생활을 했다. 그는 정직하게 일했고 바른 말을 서슴지 않았다. 음양
과 재난 그리고 기이한 현상을 잘 살펴 시정의 득실을 논했으며, 여러 차례 글을 올려 외척
의 발호를 탄핵했다. 그는 자신의 정치 생애에서 느꼈던 점과 아쉬웠던 점을 <설원> 등의
저서를 통해 남겼다. 그 중에서도 간신, 아첨배의 특징을 묘사한 글은 비교적 실제에 접근하
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간행이며 간신의 특징은 어떠한 것인가? 유향은 <설원> <신술>에서 간
신의 종류를 나열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자리만 구하고 녹봉만 기다리며, 사사로운 이익만을 꾀하여 공적인 일은 상관하지
않고, 지혜 있는 자와 능력 있는 자는 동요하지 않으려 하며, 임금이 신하의 좋은 견해를 갈
망하는데도 여전히 자기 직책을 다하려 하지 않고, 구차하게 영화만을 구해 이리저리 쫓아
다니며 주관 없이 좌우만 관망학 자리만 채우는 신하를 간신이라 한다.
둘째, 임금의 말은 모두 좋다 하고, 임금의 행동은 모두 옳다 하며, 은밀히 임금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알아내서 갖다 바치며, 임금의 눈과 귀를 한순간의 쾌락에 빠지게 하고, 임금
의 뜻에 영합하여 결과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임금과 함께 쾌락을 누리는 신하를 유신이라
한다.
셋째, 내심은 음흉하면서도 겉으로는 마치 근면하고 조심스러운 척 좋은 말만 하고 좋은
표정만 지어 임금의 임용 기준을 상실하게 하며, 상벌이 옳지 고 명령도 실행되지 않게 하
는 신하를 간신이라 한다.
넷째, 지혜는 죄를 감추고도 남고 말재주는 사람을 감동시켜, 말을 나오는 대로 이리저리
뒤바꾸면서 안으로는 골육의 정을 이간시키고 밖으로는 조정을 어지럽히는 신하를 참신이라
한다.
다섯째, 오로지 권세를 믿어 국가의 대사를 가지고 자기 집안의 권세를 높이며, 당파를 지
어 집안을 부유하게 만들고, 임금의 명령을 빌어 자기를 빛내 위세를 더 높이려는 신하를
적신이라 한다.
여섯째, 사악한 말로 임금에 아첨하여 임금을 의롭지 못하게 이끌고, 임금의 눈과 귀를 가
려 임금 앞에서는 듣기 좋은 소리만 하고 임금이 없으면 말이 변하며, 흑백을 가릴 줄 모르
고 시비가 분명치 못하며, 기회를 틈타 임금의 허물을 사방 국가와 백성들이 죄다 알게 하
는 신하를 망국신이라 한다.
유향의 '육사론'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일찍이 위징은 이 문장을 당 태종에게 올리
면서 관리를 선발할 때 "육정을 모범 삼아 살피고, 육사를 참고하여 경계하십시오."라고 하
여 태종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고대 변간 이론의 한계
오랜 기간에 걸쳐 간신들과 싸워온 역사적 실천이 있었기에 풍부하고 다채로운 변간 이론
이 나올 수 있었다. 이는 전문적인 논술이 아닐지라도 각종 시와 문장 속에 숱하게 들어 있
다. 그것은 현실에 발을 디딘 채 민중을 향하고 있고, 시류의 폐단을 똑바로 쳐다보며 급소
를 노리는 강력한 실천력과 적용성을 갖춘 것이다. 그것은 당대의 사회, 정치 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며 후세에 심각한 계몽 작용을 하는, 나라를 다스리고 세상을 구하는 깨달음이
라 할 수 있다. 참으로 귀중한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역사의 고도에 서서 지난날을 되돌아보고 경험을 종합할 때 우리는 또한 과거의
변간 이론들에 몇 가지 뚜렷한 결함이 있다는 사실도 볼 줄 알아야 한다.
첫째, 뚜렷한 계급적 한계를 보인다.
고대 변간 이론은 봉건 사대부의 손에서 나왔다. 이런 입장은 그들의 이론에 계급적 낙인
을 찍을 수밖에 없게 만든다. 따라서 계급과 입장에서 오는 편파성이 뚜렷하다. 예컨대 그들
은 충, 간 여부를 통치 계급의 이익이라는 입장에서 황실 제왕에 이로운지에 따라 논한다.
제왕이 잘났건 못났건, 바르건 바르지 못하건 상관없이 그저 제왕에게 복종하고 그를 지키
는 것이 곧 '충'이다. 반대로 조금이라도 불만을 나타내거나 다른 태도를 취하면 곧 '간'이
다.
이것이 바로 '관리의 방화는 허용되어도 백성이 등잔에 불을 붙이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는 논리다. 이 어찌 볼공평하지 않은가!
<육도>에서도 '높은 절개와 지조를'가진 사람을 간인으로 열거하고 있으며, 현실에 불만
을 드러내는 사람도 간인으로 분류하고 있다. 계급적 편견의 두드러진 본보기라 할 수 있다.
사실 천자란 옳은 길을 걸으면 추대해서 주인으로 삼고, 그 반대면 내치는 것이 옳은 길을
걸으면 추대해서 주인으로 삼고, 그 반대면 내치는 것이 역사 발전에 있어서 진보적 관점과
부합한다. 고대 정치를 암흑으로 이끈 중요한 오류가 바로 이 점에 있다.
북제의 후주 고위는 음탕하고 잔인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황제였다. 한번은 잡담을 나
누다가 정주에 있을 때 무엇이 가장 즐거웠냐고 물었다. 동생 고작의 대답은 이러했다.
"전갈은 큰 그릇에 넣은 다음 그 석에 구더기를 잔뜩 담아 구더기가 전갈에게 쏘여 쉴 새
없이 버둥거리며 꿈틀대는 것을 보는 것이 제일 신났죠."
이 말을 들은 고위는 전갈을 욕탕 속에 넣고는 구더기 대신 사람을 발가벗겨 욕탕에 처넣
었다. 그러자 전갈들이 벗은 몸에 달라붙어 마구 물어뜯었고, 처절한 비명 소리는 천지를 진
동했다. 그러나 고위는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좋아했다. 그러면서 동생 고작에게 "이렇게
신나는 일을 왜 진작 말해주지 않았는가?" 라고 나무랐다.
북제의 고양도 잔인하기가 누구 못지 않았다. 그는 술만 취했다 하면 사람을 마구 죽이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시종들을 죽이더니 이어 사형 판결을 받은 죄수들을 죽였다. 너무 많이
죽여 죽일 사람이 모자라자 심문 중인 피고들까지도 마구 잡아다 죽였다. 한번은 어렸을 때
자신에게 그다지 공손하지 못했던 재상 고륭지의 20여 명에 달하는 아들들을 불러들여 모조
리 죽여 버렸다. 무사들의 칼이 난무하고 땅에는 머리가 나뒹굴었다.
재상 이섬이 병으로 죽자 고양은 조문을 가서 그의 아내에게 "남편 생각이 나는가?"라고
물었다. 이섬의 아내가 그렇다고 하자 고양은 "그렇게 보고 싶다면 왜 따라가지 않느냐!"며
차고 있던 칼을 뽑아 그녀의 목을 잘라서 담 밖으로 던져 버렸다.
술이 취하면 고양은 친어머니도 알아보지 못했다. 친어머니를 떠밀어 상처를 입히는가 하
면, 선비족에게 노비로 시집 보내겠다며 욕을 해댔다. 장모의 얼굴을 향해 활을 쏘지 않나,
채찍으로 100대 때리면서 "네년은 대체 뭣 하는 물건이냐!"며 욕을 했다. 평소 그에게 충고
하던 두 동생 고준과 고환을 지하 철창에 가두고는 창으로 마구 찌르게 했다. 무사들의 창
에 찔려 두 동생은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채 철창과 함께 불에 타 죽었다.
고양은 559년에 죽었는데 죽기 전에 그가 마지막으로 저지른 일은 북위의 원성 황족을 몰
살한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고양은 어린애를 공중으로 던진 다음 창으로 찔러 죽이기까지
했다.
손호도 역사상 악명 높은 폭군으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사시중랑장 진성은 어느 날
손호의 애첩이 시장의 물건을 마구 빼앗는다는 고발장을 접했다. 진성은 이 사실을 손호에
게 보고하면서 애첩을 법에 따라 처벌하라고 강경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손호는 오히려 진
성을 자바들이게 해서 벌겋게 불에 달군 쇠톱으로 진성의 머리를 잘라 버렸다.
이러한 폭군에 대해서도 그 악행을 감추고 찬양해야 한단 말인가? 또 불만이나 이의를 제
기해서도 안 된다는 말인가? 이런 폭군에 대해서조차 아무렇지도 않게 마음 편히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실의 사직은 보존하기 위해 군주에게 남을 믿지 말라고 한다면, 이는
부패하고 타락한 봉건 계급의 통치술로서 당연히 버려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그 이론은 암
울한 봉건 통치를 강화하는 실질적인 작용을 하게 된다. 이처럼 계급적 한계를 지닌 변간
이론은 여러 가지 점에서 근본적인 오류를 발생하게 만든다.
둘째, 불완전하고 체계적이지 못하다.
수 천년 동안 간신들이 득세함으로써 백성은 심한 고통 속에서 허덕였고, 국가는 유린되
었다, 그러나 이런 심각한 현실에 비해 고대의 변산 이론들은 빈약하고 무기력하기 짝이 없
었다, 현실에 맞설 수 있는 방대하고도 체계적인 인식과 논술이 모자랐다. 무수히 많은 저작
과 시문 등이 있었지만 그것은 그저 개인적이고 단편적인 것들로, 완전하고 체계적이지 못
하다. 그러다 보니 간신의 발생, 표현, 특징, 본질, 해악과 그에 대한 변별, 제압의 입장과 방
법을 제대로 확립시킬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짧은 작살로 거대한 고래를 잡으려는 것과
같다. 때로 어느 한 부분을 적중시킬 수는 있겠지만 전체에는 영향을 미칠 수 없는, 한잔의
물로 달구지에 붙은 장작불을 끄려는 무모한 행동이다.
이쯤에서 우리가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이름이 하나 있다. 그 이름은 다름 아닌 '당송
8
대가'의 한 사람이자 소동파의 아버지인 소순이다. 바로 그의 이름으로 <변간론>이란 문
장
이 남아서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변간론>이란 제목으로만 보면 간신에 대해
비교적 전면적이고 심각한 인식이 담겨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못
하다. 그 전문을 아래에 소개한다.
"일에는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이 있고, 이치에는 시로 당연한 바가 있다." 천하의 차분한
사람만이 미세한 것을 살펴 훗날 뚜렷이 드러나는 것을 알 수 있다.
달무리가 지면 바람이 불고, 주춧돌에 물기가 서리면 비가 온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러
나 인간사의 추이와 그 이치는 엉성하면서도 막막해 알기 어렵고 변화무쌍해 예측할 수 없
거늘, 누가 천지, 음양의 일을 함께 하겠는가? 현명한 사람이라도 모르는 것이 있는 것은 무
슨 까닭인가? 좋고 싫음이 속마음을 어지럽히고, 이해관계가 겉모습을 빼앗지 때문이다.
일찍이 산거원이 왕연을 만나보고서 "천하의 창생을 그르칠 자가 바로 이자로구나!"라고
했다. 관분양이 노기를 보고는 "이 자가 뜻을 이루는 날에는 내 자손이 씨도 남지 않겠구
나!"라고 했다. 지금으로 보면 실로 옳은 이치가 아닐 수 없다.
왕연이란 자는 진나라 혜제 때의 인물로, 그 용모와 언행으로 세상을 속여 명성을 훔쳤다.
그러나 남을 해치지도 않았고, 탐욕스럽지도 않았으며 세상 물정에 따라 처신했다. 따라서
진나라에 혜제는 못 되더라도 그저 평범한 군주라하도 있었다면 왕연 같은 자가 수백 수천
이 있다 한들 어찌 천하를 어지럽힐 수 있었겠는가! 노기의 간행은 나라를 낭패로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고, 생긴 것도 보잘 것 없었으며, 언행
도 세상을 현혹하기에는 모자랐다. 따라서 덕종의 어리석음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등용될 수
있었겠는가? 이렇게 보면 산거원과 곽분양의 왕연과 노기에 대한 예측이 꼭 맞다고만 할 수
는 없겠다.
그런데 지금 어떤 자는 입으로는 공자의 말씀을 뇌까리고 백이, 숙제의 행동을 본받는다
고 하면서 명성을 탐내며, 뜻을 얻지 못한 자들을 불러모아 함께 유언비어를 날조하고 사사
로이 이름을 앞세워 안연과 맹자가 다시 나타났다고 떠들어대고 있다. 그러나 이 음흉하고
이리와 같은 도적은 왕연과 노기를 한데 합쳐놓은 것보다 더 지독해 그 미치는 화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다.
얼굴이 더러워지면 씻고 옷이 더러워지면 빤다. 이는 사람의 당연한 심리다. 그런데 지금
은 그렇지 않다. 신의 옷을 입고 개, 돼지의 음식을 먹으며, 죄수와 같은 더벅머리에 상을
당한 사람같이 더러운 얼굴을 하고도 시서를 떠드니 이 어찌 인가의 마음이라 하겠는가? 무
릇 모든 일에 있어서 인정에 접근하지 않는 자치고 크게 간사하지 않은 자는 드물었다. 수
조, 역아, 개방 등이 바로 그런 자들이었다. 세상을 뒤덮은 명성으로 아직 드러나지 않은 근
심을 구제한다고 하니, 비록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는 군자가 유능한 인재를 등용한다 해도
천하의 근심이 될 것은 의심할 바 없다.
손자는 "용병에 능한 자는 큰 공이 없다."라고 했다. 그 자를 기용하지 않으면 내 말이 지
나쳤다 할 것이고 그 자는 '불운하다'고 한탄을 들을 것이며, 그렇지 않고 그 자를 기용하면
천하가 장차 화를 입을 것이고, 나는 '예언이 옳았다.'는 명성을 얻을 테니. 슬프도다!
이렇게 몇 단락의 문장으로 중국 역사상 유일한 <변간론>은 끝을 맺고 있다. 물론 의미
의 깊고 얕음은 문자의 많고 적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반드시 문제에 대한
설명이 전제되어야 한다.
물론 이 <변간론>에 나름대로 독특하 면이 있음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왕연이란
자는 그 용모와 언행으로 세상을 속여 명성을 훔쳤다. 그러나 남을 해치지도 않았고, 탐욕을
구하지도 않았으며, 세상 물정에 따라 처신했다. 따라서 진나라에 혜제는 못 되더라도 그저
평범한 군주라도 있었다면 왕연 같은 자가 수백 수천이 있다 한들 어찌 천하를 어지럽힐 수
있었겠는가!"와 "노기의 간행은 나라를 낭패로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제대
로 배우지도 못했으며, 생긴 것도 보잘 것 없었고, 언행도 세상을 현혹하기에는 모자랐다.
따라서 덕종의 어리석음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등용될 수 있었겠는가?"라는 대목은 확실히
문제의 핵심을 간파한 명석한 논리다. 또 "무릇 무든 일에 있어서 인정에 접근하지 않는 자
치고 크게 간사하지 않은 자는 드물었다." 등은 위선적 군자, 두 얼굴의 인간들이 갖는 특징
을 지적한 대목으로 사람과 일을 알고 논평하는 데 나름대로의 의의를 가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걸로 그만이다. 무엇이 '간'이며, '간'은 어디로부터 나오고, '간'을
어
떻게 변별할 것이냐에 대한 분석이 없다. 이렇게 되면 <변간론>은 마땅히 있어야 할 내용
과 질을 갖지 못한 글이 될 뿐만 아니라, 경솔하고 편파적인 글이 되어 버린다. 예를 들어,
"얼굴이 더러워졌는데도 씻지 않고, 옷이 더러워졌는데도 빨지 않는" 것을 간신의 표식이자
특징으로 인식한 것이 그 뚜렷한 증거다.
물론 <변간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토론할 필요는 없다. 또 지나치게 요구할 필요도 없
다. 왜냐? 설에 따르면 이 문장 자체가 원래 소순이란 이름을 빌려 쓴 것에 지나지 않기 때
문이다. 송나라 때의 이름난 정치가 왕안석은 깨끗한 인물로, 그의 문장은 조정 안팎으로부
터 높이 평가받았다. 그러나 그가 집정하여 '신법'을 추진하자 대지주, 관료, 보수 세력의 반
대에 부딪쳤다. 이때 누군가가 소순이란 이름을 몰래 빌려 왕안석에게 인신공격을 가했다.
그것이 바로 이 <변간론>인 것이다.
그러다 보니 문장 속에 개인적인 공격과 비난의 색채가 아주 농후하게 반영되어 있다. 상
대적으로 논리적 분석은 빈약하다. 작자가 간신을 변별하겠다는 것은 구실일 뿐, 실은 왕안
석의 신법을 공격하려는 것이었음을 볼 수 있다. 고대의 변간 이론들 중에는 이와 유사한
것이 적지 않다. 그러다 보니 고대의 변간 이론이란 것들이 어려 가지 측면에서 지리멸렬하
고 체계적이지 못하며, 전체적으로도 솔깃한 인상을 주는 우수한 글이 드물다.
셋째, 비과학적이다. 즉 과학성이 부족하다.
고대 변간 이론은 뚜렷한 계급적 편향을 보일 뿐만 아니라 체계적이지 못하고 완비되어
있지 않아 여러 가지 점에서 과학성이 결핍되어 있다. '간'은 정치와 도덕, 윤리적 색채를
아
울러 갖춘 엄숙한 개념이다. '간'을 변별하고, '간'을 반대하며, '간'을 제압하는 것은 고대
사
회에서 중요하고도 엄숙한 임무였다. 여기에는 얼렁뚱땅이란 있을 수 없으며, 애매함도 용납
되지 않는다. 경솔하게 판단해서도 안 되고, 개인의 좋고 싫음을 평가 기준으로 삼아서는 더
욱 안 된다. 그러나 사뢰적, 역사적, 사상적 한계 때문에 고대 변간 이론 중에는 편향적이고
천박하며 심지어는 잘못된 흔적까지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예를 들어 <육도>에서는 "기이한 복장을 하고 조용하고 외진 곳에 거처하는 " 사람을 간
인이라 여겼으며, 고담준론을 나누고 변론에 능한 사람도 간인이라 했다. 진짜 그렇다면 호
복을 입고 전통적인 정차부대와 보병을 기병부대로 개편하는 이른바 '호복기사'의 개혁정
치
를 단행한 조나라의 무왕이나, 웅대한 재능과 담략을 품고 뛰어난 변론으로 이름을 떨치며
어려 유학자들과 설전을 벌인 제갈량도 모두 간인이란 말인가?
다시 <변간론>의 관점에서 보아, 자질구레한 예의범절에 얽매이지 않고 "얼굴이 더러워
도 씻지 않고 옷이 더러워도 빨지 않는" 사람이 '대간신'이라면, 예로부터 입는 것에 신경
쓰지 않았던 많은 대학자들과 사상가들이 모두 대음모가들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의관을 번
지르르하게 차리고 기름기가 흐르는 얼굴을 한 고관대작과 같은 부류들은 또 무엇이란 말인
가?
간신을 알고, 간신을 살피며, 간신을 가려내는 일은 매우 신중해야 한다. 올바른 입장과
관점에서 출발하여 정확한 방식과 방법을 취해야 한다. 얄팍한 재주나 이단적인 방법을 동
원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자체가 부정확한 방법이 되어 버린다. 고대의 변간 이
론은 바로 이 점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
또 잘못된 주장도 적지 않다. 예컨대 <한비자>에서 말하는 '협지이문'은 교활한 음모이자
얄팍한 재주에 지나지 않는다. 비바람이 사정없이 몰아치는 정치투쟁에서 그것은 근본적으
로 실용성을 갖지 못한다. 사람을 쓰는 데 오로지 이 같은 얄팍한 기교로만 살펴서 표면만
중시하고 실제는 중시하지 않으며, 말만 중시하고 행동은 중시하지 않는다면, 편협함을 면키
어려울 뿐만 아니라 소인배들이 뜻을 얻을 것이고, 공평무사하고 충직한 인물들은 의심받고
당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한 현명한 정치가가 일찌감치 이의를 제기한 바 있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누군가가 당 태종에게 아첨하는 신하를 제거하라는 글을 올렸다고 한다. 당 태종은
글을 올린 인물에게 아첨하는 신하란 누군가 물었다. 그러자 그 자는 <한비자> 등에서 말
하는 아론과 비슷한 이론을 꺼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소신은 초야에 묻혀 있는지라 폐하 주변에 있는 자 중 어떤 자가 그런 자인지 잘 모릅니
다. 폐하께서 군신들과 이야기를 나누시다가 일부러 화를 내어 그들을 시험해 보십시오. 진
리를 지키며 굴복하지 않는 사람이면 충직한 신하라 할 수 있고, 폐하의 위엄에 눌려 폐하
의 뜻에 순종하는 자는 바로 아첨배일 것입니다."
이런 비과학적이고 얄팍한 꾀에 대해 총명한 당 태종은 코웃음을 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군주가 물줄기의 근원이라면 신하는 물의 흐름이다. 근원이 흐리면서 흐름이 맑기를 바
라는 것은 안 될 말이다. 군주가 속임수를 써 놓고 어떻게 신하의 정직 여부를 책망한단 말
인가! 짐은 바야흐로 천하를 진실되게 다스리려 한다. 지난날 제왕들이 즐겨 속임수로 신하
를 대한 것을 나는 늘 부끄럽게 생각해왔다. 경의 말이 좋긴 하나 짐은 그렇게 할 수 없노
라."
당 태종은 걸출한 정치가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다. 그는 풍부한 정치 경험과 높은 학식으
로 고대 변간 이론에 대해 도전하고 있다. 깊이 생각해 볼 만한 대목이다. 그의 도전에 변간
이론의 대부분은 단 일격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버린다. 그런 이론으로 세상과 사람을 논
하다간 문제 해결은커녕 오히려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뿐이다. 심하면 적은 친구로, 충
을 간으로 잘못 오인하는 황당한 경우까지 생긴다.
위에서 말한 것들을 종합해 보자. 고대 변간 이론의 전원에는 아름다운 꽃들도 적지 않게
피었다. 그러나 봉건 통치 계급의 부패성, 봉건시대 인물이 가지는 한계성 그 자체의 나약함
때문에 '간'을 가리고 제압할 수 있는 날카로운 무기가 되지는 못했다. 그래서 '간신'은 뜻
을
얻고, 영웅은 단명하는 일들이 반복되어 왔다. 후세 사람들도 똑같은 실수를 저질렀다.
첫째, 적을 친구로 오인하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춘추시대 제나라 환공은 역사상 자못 두드러진 인물이었다. 현자를 등용하고 각종 건전한
건의를 받아들여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으며, 끝내는 패업을 달성한 똑똑한 군주였다. 그러
나 만년에 수조역아, 개방 등과 같은 간신들을 가까이 했다. 그 결과 병으로 자리에 누운 이
후 높은 담으로 막힌 어두운 골방에 갇혀 뜨거운 국 한 사발 얻어먹지 못하고 끝내 굶어 죽
고 말았다. 이러한 경험을 교훈 삼아 후세 사람들은 '현명한 신하를 가까이 하고 소인을
멀
리하라.'는 주장을 수도 없이 제기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떠했나?
명나라 때의 환관 왕진은 자신의 재산을 불리고 군공을 세우며 임금의 은총을 과시하기
위해 50만 대군은 전멸시킨 것은 물론, 영종마저 이민족의 포로가 되게 만들었다. 영종은 왕
진 때문에 황제 자리를 잃고 타국에서 말못할 치욕을 맛보아야만 했다. 게다가 거의 살아
돌아갈 가망도 없어 보였다. 상황이 그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영종은 전혀 정신을 못 차리고
오로지 왕진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황제 자리에 되돌아온 뒤 영종은 죽은 왕진을 위해 제물
을 내리고 제사를 지내주는 것은 물론 초혼제까지 올렸다. 게다가 왕진이 세운 지화사를 왕
진의 제사지내는 사당으로 바꾸고, '정충'이라는 이름까지 붙여주었다. 이 정도면 똥오줌
도
못 가리는 지경을 넘어서고 있다.
수천 수 백년 동안 사람들은 끊임없이 간신을 욕하고 배척하고 증오해왔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코앞에 간신을 두고도 그를 가려내지 못했다. 제갈량이 유선에게 "어진 신하를
가까이하고 소인을 멀리하십시오."하고 간곡히 충고했으나 유선은 나라를 그르친 대간 황호
를 친한 친구처럼 여겼다. 그 결과 '망국노'가 되고 말았다. 왕안석이 '변법'을 주도할 때
사
마광은 왕안석에게 편지를 보내 아첨배들을 경계하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이
집권한 뒤에는 채경 같은 간신을 입이 마르고 닳도록 칭찬하고 있으니, 정말이지 어처구니
없다.
이런 면에서 가장 불쌍한 인물로는 강유위를 꼽을 수 있다. 강유위는 학식이 풍부한 유학
자였다. 그는 나라가 피폐해지고 사직이 흔들리는 침통한 상황을 목격하고는 개혁정치를 호
소하며 그에 온 힘을 다 바쳤다.
그러나 그는 문장은 흘러 넘쳤지만 필요한 정치투쟁의 경험이 모자랐다. 광서제 앞에서
원세개를 높이 칭찬하며 개혁 정치의 대계를 그가 집행하게 넘겨주었다. 그 결과 교활한 원
세개는 죽음으로 황제에게 충성하겠노라는 맹세가 채 끝나기도 전에 이 사실을 나랍씨에게
밀고했고, '유신변법'은 깡그리 수포로 돌아갔다.
둘째, '충'을 '간'이라 손가락질해왔다.
적을 친구로 오인하는 한편, 충을 간이라 손가락질해왔다. 이는 변간 이론이 생겨난 이래
보편적으로 존재했던 우울한 현실이었다.
847년 당나라 선종 이침이 황제 자리에 올랐다. 인사 문제를 고려하면서 그는 먼저 백거
이를 생각했다, 그는 백거이를 뛰어난 재능을 가진 재상감으로 생각하여 그를 재상에 임명
하고자 했다. 그러나 조서가 내려간 그때, 백거이는 이미 8개월 전에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그러나 백거이는 생전에 어려 차례 좌천과 사직을 거듭하는 등 남들에게 이해받지 못했고
허용되지 못했다. 자신의 처지를 통해 그는 남에게 이해받거나 남을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
나 어려운 것인가를 뼈 져리게 느꼈다. 암울한 관료 세계, 인정과 세태의 냉랭함, 이어지는
굴욕과 오해, 그리고 억울함과 충격... 이 모든 것들이 그의 마음속에서 한시라도 떠난 적이
없었다. 이 때문에 그는 56세 때 소주자사 자리를 물러나면서 무거운 부담에서 풀려나는 느
낌을 받았다.
봉건사회에서 '충, 간'을 변별하는 이론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악을 선이라 하고,
충을 간이라고 하는 일들은 수도 없이 일어났다.
한유는 평생을 깨끗하게 후진을 키우며 산, 봉건사회에서는 참으로 보기 힘든 사대부였다.
그런 그가 헌종이 불교를 지나치게 숭상해 나라 일을 그르치자 분연히 <논불골표>라는 글
을 올려 헌종에게 힘껏 충고했다. 그러나 힘없고 늙은 나이에 멀리 조주로 쫓겨나고 말았다.
자신의 충심이 이해되기는커녕 오히려 박해를 받아 객지에서 한평생을 마감 할 생각을 하니
절로 눈물이 흘렀다. 이렇듯 충신이 쫓겨나고 선량한 사람이 배척당하는 일이 봉건사회에서
흔히 있어왔다.
셋째, '충'과 '간'을 확정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다.
구시대에서는 적을 친구로, 충을 간으로 잘못 아는 일들뿐만 아니라, 충간을 명확히 단정
할 수 없는 현상들도 생겨났다. 너는 나를 간이라 손가락질하고, 나 또한 너를 간이라 손가
락질한다. 오늘은 네가 간이고, 내일은 내가 간이 되는 일도 흔히 볼 수 있었다. 흥안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계림 용은암에 '원우당적비'가 서 있다. 그 비문을 보면 사마광을 우두머리
로 한 309명에 이르는 '당간'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그 비석을 세운 목적은 '후세에 보
여
그 자손들도 치욕을 맛보도록'하려는 데 있었다.
사실상 왕안석과 사마광을 대표로 하는 '충, 간' 논쟁은 오랫동안 계속되어 지금까지도 명
확한 결론을 보지 못하고 있다. 오늘 이 황제가 즉위하면 사마광이 간신이 되고, 내일 저 재
상이 정권을 장악하면 이번에는 왕안석이 간신이 된다. 보수파는 <변간론>을 끌어내서 왕
안석을 공격했다. 그러나 '변법파'도 만만치 않았다. 상소 등 여러 경로를 통해 보수파를
맹
렬하게 공격했다.
송나라 신종이 세상을 떠난 뒤 사마광을 우두머리로 하는 보수파가 정권을 잡자 신법은
전부 폐기되었다. 이때 범순인, 소식, 소철 등 원래는 사마광과 같은 입장에 서 있던 사람들
이 사마광으로부터 떨어져나와 사마광을 비판하고 나섬으로써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원
우 8년 철종이 몸소 정치를 보면서 장돈, 증포, 채변 등을 기용하여 다시 신법을 밀고 나갔
다. 그리고는 사마광과 입장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간으로 지목하여 조정하여 내쫓았으며, 심
지어 죽은 지 7~8년이 지난 사마광의 관작은 박탈하기도 했다. 또 누군가가 사마광의 무덤
을 파헤쳐 시체에 채찍질을 하고 <자치통감>의 서판을 부수었다.
당나라 때의 우승유와 이덕유 사이의 '우이당쟁'도 이와 같았다. 그들은 서로를 간이라 손
가락질하며 한치의 양보도 없이 치고 받았다. 많은 사람, 심지어는 능력 있고 재능 있는 사
람, 아주 정직한 사람들도 그 싸움에 휘말렸다. 무종 때 이덕유의 당이 집권하자 우승유 일
파의 주요 인물들은 모조리 영남으로 귀양갔다. 선종 때 우승유 일당이 권력을 잡자 이번에
는 이덕유가 애주로 귀양가 끝내 죽고 말았다.
두 당파의 싸움은 무려 40년 이상 계속되었다. 그 싸움이 얼마나 치열하고 혼란스러웠던
지 당사자들끼리도 서로 어느 편인지 몰랐고, 방관자들도 도대체 누가 누구 편인지 모를 지
경이었다. 누가 충신이고 누가 간신인지, 어떤 자가 좋은 자고 어떤 자가 나쁜 자인지 전혀
알 수 없는 완전한 혼란 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다이곤도 이런 상황에 있었다. 다리곤은 청나라 태조 노이합적의 열 넷째 아들이었다. 태
조가 세상을 떠난 뒤 여덟 번째 아들 황태극이 즉위했다. 당시 다이곤의 나이는 겨우 열 다
섯이었다. 그 뒤 다이곤은 황태극과 함께 생사를 같이하며 남북을 정벌했다. 그 과정에서 여
러 차례 큰 공을 세워 청나라가 전국을 통일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런데 숭덕 8년 황태극이 갑자기 죽고 말았다. 생전에 후계자를 정해 놓지 않았기 때문
에 황위 계승 문제를 놓고 귀족들 사이에 첨예한 대립이 발생했다. 다이곤을 핵심으로 하는
파와 황태극의 맏아들 호격이 중심이 된 파가 격렬한 다툼을 벌였다. 그 결과 다이곤이 계
략을 써서 이제는 정적이 되어 버린 조카 호격을 물리치고 '섭정왕'의 지위를 꿰어찼다. 아
울러 '언사패망' '죄과다단'이란 구실로 호격을 죽음으로 몰았다. 복감이 밥을 먹지 않고
눈
물로 호소하는 바람에 호격은 간신히 죽음을 면하고 평인으로 격하되었다.
봉건 정치제도의 규율에 따르자면 다이곤은 당연히 황자 호격을 황제로 추대했어야 하며
개인의 정권 찬탈은 용납될 수 없다. 그러나 다이곤의 행위는 객관적으로 볼 때 청나라의
발전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다이곤은 정권을 장악한 이후 혼란을 수습했다.
정치. 경제 등 여러 방면에서 만주족과 한족의 모순을 완화시켜 인심을 안정시켰다. 가혹한
정치를 중단시키고 뇌물과 부정부패를 근절시켜 나갔다. 환관 세력도 억제했다. 특히 중국을
통일하는 데 탁월한 정치적 역량과 식견을 발휘했다.
그러나 그런 그가 세상을 떠난 뒤 겨우 두 달, 그의 시체는 파헤쳐져 매질과 채찍질을 당
했고, 끝내는 목까지 잘려 저잣거리에 내걸렸다. 그의 측근들 대부분이 '황제 자리를 빼앗으
려 모의하고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참람된 행동을 저지른' 죄목으로 죽거나 귀양 갔다.
그러나 건륭 42년 황제 홀력은 다이곤의 '공적'을 다시 인정하는 한편, 억울하게 반역죄를
뒤집어썼다며 그의 모든 지위를 회복시켜 주었다. 5대손까지 작위를 세습하게 했고, 대묘에
서 제사를 지내게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이 인물에 대해서는 말들이 많다.
위에서 살펴본 몇 가지 사례의 원인은 물론 사회제도라는 면에서 먼저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비과학적이고 완전하지 못한 이론에도 그 원인이 있다.
5천년의 역사를 훑어볼 때 우리는 앞서 살았던 현인들이 간신을 변별하는 일에 눈부신 유
산을 남겨 놓았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를 올바르게 계승하고 드높여 오늘에 쓸모가 있
도록 해야 한다. 또한 부패한 봉건 통차 제도하에서는 그 자체가 지닌 한계 때문에 진짜 쓸
모 있고 보편적인 '변간 이론'이 형성될 수 없었으며, 충, 간을 가리는 공정한 표준이 확립
될
수 없없고, 간신이 출현하는 사회적, 역사적 근원을 지적할 수 없었으며, 또 간신의 발전을
누르지도, 간신의 출현을 근절시킬 수도 없었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참신한 변간 이론을 세우고 이를 실천에 옮기는 일, 이 위대한 역사적 사명은 다름 아닌
우리 어깨 위에 얹혀 있다.
위대한 좌표
역대의 많은 철학가들과 실천가들은 이류 사회의 모든 과학적 성과와 실천적 기초를 결합
하여 각종 사회 현상을 가늠할 수 있는 좌표를 만들었다. 그들이 제기한 계급, 민족, 국민,
역사, 사회 진보, 생산 발전의 관점은 우리가 충간과 선악을 가리는 데 객관적 표준으로 작
용할 것이다. 이는 지난날의 비과학적이고 공허한 변간 이론의 잘못을 피할 수 있게 하고,
또 지난날 황제의 권력에만 의지한다거나 현명한 군주만이 가을 제압할 수 있다는 단점을
폐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과학적 변간 이론이 수립될 것이다.
무엇이 충이고 무엇이 간인가? 어떻게 해야 충, 간을 변별하는 표준을 세울 수 있는가?
이것이야말로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근본적인 문제이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거나 제대
로 해결되지 못하면 근본적인 오류가 발생하고 만다. 지난날 변간 이론을 가지고도 충, 간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고 흑백이 뒤집히는 지경에까지 아른 까닭의 하나는 바로 이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어떤 정확한 해결책을 내지도 않았고, 또 낼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지난 1세기 동안 많은 실천적 이론가들에 의해 마련된 인류 사회에 대한 과학
적 연구 성과와 실천의 기초가 주어져 있다. 우리는 그 이론들과 실천을 통해 '변간'의 열쇠
를 찾을 수 있으면 간신을 살피고 변별하여 그들을 제압할 수 있는 과학적 이론 체계를 수
립할 수 있다.
봉건사회에서는 통치 계급의 '충, 간 관념' 외에도 계급, 사회, 역사적 한계 및 인식 능력
의 차이 때문에 형형색색의 '충, 간 관념'이 존재했다. 따라서 당연하겠지만 매우 심각한 편
파성을 띤다. 만약 이런 입장에 서서 이런 표준으로 충, 간을 가리려 한다면 가리려 할수록
더 큰 혼란에 빠질 것이다. 심하면 시비가 뒤바뀌고 흑백이 뒤섞이는 잘못이 초래될 것이다.
모든 사물에는 객관적 표준이 있기 마련이다. 객관적 사실을 존중하고 정확한 입장에서
출발하여, 객관적 현실과 맞아떨어지는 관점과 방법으로 과학적 결론을 내려야 한다. 객관적
현실에 부합하는 과학적이며 완전한 이론 체계와 인식 도구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충, 간의 변별을 위해서 우선 다음과 같은 주요 관점을 파악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계급적 관점
"사회 발전사는 동시에 물질 생산자 자신의 역사이다. 즉 사회 발전을 낳는, 사회 생존에
필요한 물질을 생산하는 농민, 근로자의 역사이다."
"계급이 출현한 이래 노동 계급 없이 존재할 수 있었던 시기는 없었다. 생산에 종사하지
않는 사회 상류층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든 간에 생산자 계급이 없으면 사회는 생존할 수 없
다."
인류 사회의 발전사는 이상과 같은 과학적 논단을 충분히 증명하고 있다.
수천 수백년 동안 농민, 노동자는 해가 뜨면 나가 일하고 해가 지면 돌아와 휴식을 취했
다. 그들은 대대로 말없이 힘들게 봉사하며 인류 사회의 생존과 발전에 필요한 물질을 창조
했으면 또 인류사회를 끝없이 진보시킨 정신문명의 창조자였다. 농민, 노동자 계급의 위대한
노력이 없었더라면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공허한 것이 되었을 것이며, 심지어 우리의 생존
을 책임지고 있는 이지구도 암흑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농민, 노동자 계급은 인류
사회의 의식주를 책임지는 부모이자 우리들의 하느님이다.
<사기>와 <한서> 그리고 <논형>에 보면 이런 기록이 있다. 두광국아란 자가 집이 가난
하
여 4,5세 때 누군가에게 팔려 10여 집을 전전하다가 의양에 이르렀다. 그는 의양의 한 집에
서 주인을 우해 산에 들어가 석탄을 캐는 일을 했다. 날이 저물고 추워지자 석탄 밑에서 잠
을 잤다, 그러다 석탄 더미가 무너지는 바람에 백여 명이 깔려 죽었다. 두광국은 간신히 살
아 나왔다.
여기서 우리는 수천년 전에 탄광부가 노동 계급의 일원으로서 얼마나 힘들게 일했는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그들은 햇빛도 들지 않는 굴에서 힘들게 탄을 캤고, 추운 밤에 굴 안에서
자다가 굴 천장이 무너지는 바람에 산채로 깔려 그곳에서 영원히 잠이 들고 말았다. 이 얼
마나 우울한 이야기인가! 대략 그 시기로부터 또는 그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탄광부는 사회
를 위해 석탄을 캤다. 그들은 몇 년 또는 몇십 년을 하루같이 지하에서 노동하며, 그들이 당
연히 누려야 할 햇빛을 희생해가면서 암흑과 추위 속에서 광명과 따뜻함을 사람들에게 제공
했다. 그들은 말없이 자신들의 땀과 청추는 나아가서는 생명까지 바쳤다. 죽고 나면 사람들
은 이내 그들을 잊을 것이다.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들처럼.
누구도 거친 그들의 두 손이 이 세계를 위해 얼마나 많은 따스함을 제공했으며, 얼마나
값어치 있는 일을 했는지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인류를 먹여 살리고 사회를 지탱했던 사람
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들이 보여준 의지와 그들이 남긴 성과를 에누리없이
드러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봉건 계급의 인물로 하여금 노동 계급의 이익을 대변
하라고 하고, 노동 계급에 충실하라고 하는 것은 사실상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노동 계급
에 대해 이해하고 동정하며, 너그러운 태도로 노동 계급의 이익을 지키고, 노동 계급에 유리
한 정책을 실행한 인물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왕안석은 대지주들이 "연약한 백성을 마구 집어삼키고" 정부가 무거운 부역으로 농민의
어깨를 짓누르는 현실을 목격하고, 분연히 일어나 '변법' 개혁정치를 시행했다, 장거정은 관
리와 부호들이 농민을 멋대로 쥐어짜고 무거운 부역으로 농민을 짓누르는 현실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고 '일조편법'을 추진했다. 모두가 노동 계급을 고려한 행동이었다.
동한 말기 영제가 재물을 탐하자 장양과 조충 등 환관 집단은 영제의 비위를 맞추려고 각
종 구실을 붙여 세금을 마구 긁어들였다. 그러면서 자신들도 교묘하게 재산을 긁어모았고,
급기야는 드러내놓고 관직을 돈 받고 파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 뒤에는 다시 관리를 압
박해 돈을 짜내기 시작했는데, 그 돈은 결곡 모두 백성들의 부담으로 돌려졌다. 당시 깨끗하
기로 이름이 나 있던 거록의 태수 사마직도 돈을 할당받았다. 그러나 그는 차마 백성을 괴
롭힐 수 없었다. 그는 "백성의 부모 된 자가 오히려 백성을 벗겨먹다니, 아무리 시기적으로
필요한 때라고 해도 나는 차마 못하겠다."라고 말하면서 독약을 마시고 자살해 버렸다. 이
얼마나 빛나는, 높은 절개인가!
역사상 백성들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던 모든 충신과 선량한 재상들은 노동 계급의
이익을 돌아보고 생각했다. 백거이도 그랬고, "먼저 천하의 근심을 돌보고, 천하의 즐거움은
나중에 누려야 한다."고 주장했던 범중엄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몸을 던져 법을 구하고 백
성으로 위해 목숨을 바쳤던 해서도 그했다. 힘있고 포악한 자를 징벌하고 호족들을 억제했
던 포청천 포증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악독한 대간들은 노동 계급과 선량한 백성의 이익을 희생시켜 윗사람을 기쁘게 했
다. 시라시욕을 꾀하다 그들은 백성들로부터 버림받았다. 온갖 세금을 걷고 대대적인 토목공
사를 일어켰던 조고가 그러했으며, 교묘하게 백성의 재물을 강제로 빼앗고 끊임없이 세금을
거두어들였던 장양과 조충도 마찬가지였다. 백성을 못 살게 굴고 백성의 땅을 빼앗으며 부
역에 마구 동원했던 주면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노동 계급에 대한 태도는 충, 간을 가려내
는 중요한 표준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민족적 관점
기원전 628년 진나라의 배리맹명은 정예부대를 이끌고 정나라를 기습하기 위해 출병했다.
대군이 정나라에서 100리 떨어진 활나라에 이르렀을 때, 마침 주에 가서 팔기 위해 소를 몰
고 가던 정나라 상인 현고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현고는 다급한 중에도 지혜를 내서 곧
장 소를 몰고 진나라 군영으로 들어가 정나라 임금을 대신해서 진나라 군대에 소를 제공하
기 위해서 왔노라 큰소리를 쳤다. 뜻인즉, 정나라에서는 이미 싸울 준비를 갖추고 있다는 암
시였다.
백리맹명은 기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서둘러 이번 출정은 정나라를 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활나라를 치기 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리고 자신의 말을 증명하기 위해 활나라
를 멸망시키고는 철수했다.
예로부터 "간 아닌 장사꾼은 없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민족이 위기에 처한 중해한 시기
에는 장사꾼 횬고도 이렇둣 열렬한 애국심을 발휘했다. 엄격히 말해 민족이 존망의 시점에
놓이면 어떤 계급, 어떤 민중, 어떤 사람도 모두 민족의 대의를 모든 것에 우선하지 않을 수
없다. 국난과 흥망을 함께 짊어져야 하는 것이다.
민족은 역사상 형성된 같은 언어, 지역, 경제생활을 갖추고 있는 공동체이다. 그리고 공동
의 문화를 지닌 안정된 공동체이다. 간단하게 말해 민족은 바로 조국이다. 그렇다. 민족, 즉
조국은 우리 조상들이 태어나 번식하고 일하며 살아온 토지와 산하를 포함하며, 문화와 우
수한 전통, 특히 백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민족 감정은 사실 자신의 고행 땅을 지키고 자
기의 백성을 기르는 열렬한 애정이다. 이 열렬한 애정은 민족이 침략받고 간섭받는 상황에
서 더욱 강렬해질 수 있다.
상상하기도 싫지만 우리의 땅과 백성을 멋대로 유린하고 짓밟는 행위를 보고도 못 본 체,
듣고도 못 들은 체 아무런 느낌도 없는 자들은 도대체 어떤 자들이란 말인가? 그렇기에 역
사상 어떤 민족이 되었건 간에 민족의 이익에 충성하고 또 그것을 지키려 한 사람은 늘 조
국에 충성한 전사로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한편 민족의 이익을 팔아먹고, 민족이 생사
존망의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 변절하며 적에게 몸을 맡긴 자들은 개만도 못한 간신이자 매
국노로 욕을 먹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내 민족을 침략하는 것은 내 어머니인 조국
을 짓밟는 것이다. 이런 때 올바른 판단을 가진 사람이라면 결단을 내리는 데 결코 주저하
지 않는다. 그 선택은 어려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민족에 대한 감정, 즉 어머니 조국에 대한 감정은 매우 숭고하고도 신성한 감정이다.
서한시대의 소무는 명을 받고 흉노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숱한 유혹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조국을 배반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사람이 살지도 않는 망망한 북해로 추
방되었다. 망망한 초원에 외로운 그림자 하나가 비바람과 추위 그리고 배고픔에 한없이 시
달렸다. 그는 들쥐와 풀씨를 먹고 배고픔을 이겨냈으며, 양떼 틈에서 잠을 자면서 추위를 견
뎠다. 아득한 이국 땅에서 소무는 무려 19년을 그렇게 지냈다. 그 19년 동안 그는 단 한시도
자신의 조국을 잊은 적이 없으면, 단 하루도 자기를 키워준 자기 땅을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한서>의 기록에 따르면, 하늘과 맞닿은 아득한 이국 땅에서 한 무제가 세상을 떠났다
는
소식을 듣고 하루 종일 "남쪽을 향해 통곡하다가" 끝내는 "피까지 토했다."고 한다. 흉노의
선우는 흉노에 항복한 이릉을 보내 투항아라고 설득했다. 그러자 소무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본래 일찌감치 죽었어야 할 몸이다. 나를 굳이 투항시키려 한다면 오늘 실컷 즐긴
다음 당신 앞에서 죽게 해 달라."
소무는 천신만고 끝에 19년만에 마침내 조국의 품으로 되돌아왔다.
송나라 때의 문천상도 이와 비슷했다. 항전에 실패한 후 그는 원나라의 수도로 끌려가 3
년을 그곳에 잡혀 있었다. 홀필열이 갖은 방법으로 항복을 권유했지만 그는 죽음을 무릅쓰
고 따르지 않았다.
"예로부터 사람으로 태어나 죽지 않은 자 누가 있었던가? 일편단심을 남겨 청사를 비추리
라."
그가 남긴 장렬한 시다.
역사상 수많은 애국지사들은 외적이 침입해와 "땅덩어리는 박 쪼개지 둣 갈라지고 참화가
눈앞에 닥쳤을" 때, 모두 "애국심으로 서로를 격려하고 멸망의 구원을 자기 일로 여겨" 사
방을 뛰어다니며 호소하고, 옷깃을 피로 물들여갔다. 그들의 일편단심은 영원히 천지와 함께
할 것이며, 일월과 함께 빛날 것이다. 그들의 빛나는 높은 절개는 민족의 역사에 영원히 기
록될 것이다.
그러나 민족의 위기 앞에서 어떤 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가신의 안위를 위해,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 민족의 기개와 이익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변절하여 적에 투항하고,
나아가서는 이리를 안방까지 끌어들였다. 진회, 엄승, 목창아. 기선이 모드 그런 자들이었다.
이 자들은 간신 중에서도 가장 악랄한 부류로, 우리는 그 자들을 '나라 도적놈' 또는 '매국
노'라 부른다.
조국은 우리를 기르는 토지이며, 조국의 백성은 우리를 기르는 어머니이다. 우리들의 조상
은 조국이라는 어머니의 품속에서 성장하고 번성했다. 사람들은 바로 여기에서 자랐고, 여기
에서 기술을 익혔으며, 여기에서 사랑을 키웠다. 한 오라기의 의심도 없이 우리 모두는 자신
의 조국에, 자신의 민족에 충성해야 한다. 따라서 내 조국, 민족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
가는 개인의 충, 간을 판단하는 표준이 될 수밖에 없다.
당연한 이치 아닌가? 이는 모든 계급이 인정하는 표준이다. 특정한 계급, 특정한 인물만
떠드는 말이 절대 아니다. 한 개인이 자신의 어머니인 조국마저도 사랑하지 않고 민족의 이
익을 팔아 개인의 이익을 사려했다면, 그런 자에게 '충'이란 형용사를 붙일 수 있겠는가?
민중적 관점
민중은 역사적 범주에 속한다. 어느 국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노동자, 농민은 민중의
주체였다. 따라서 민중은 노동자, 농민 계급과 본질적으로 일치한다. 그러나 민중은 서로 다
른 이익을 추구하는 각 계급과 사회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민중은 노동자, 농민
계급보다 휠씬 넓으며 규정성도 더욱 넓고 느슨하다.
맹자는 봉건주의 사상가였지만 "민이 가장 귀하고 사직은 그 다음이며 군주는 가벼운 존
재다."라는 인식을 보여주었고, 당 태종은 봉건시대의 군주였지만 "군가 되는 실은 백성이
먼저 존재해야만 한다."는 인식을 보였다. 가장 낮은 표준을 가지고 가늠해보더라도 이것은
분명하다. 즉 모든 개인이 서로 다른 계급에 속하고, 서로 다른 세계관, 가치관을 가질 수
있지만, 민중을 사랑하고 그들에 충성해야 한다. 왜냐하면 역사는 민중이 창조했으며, 사회
는 민중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민중은 가장 존경받아야 하며, 가장 사랑받아야 하고, 또
가장 불쌍하며, 가장 무섭다.
"민중, 민중이야말로 세계 역사를 창조하는 원동력이다."
"민중이 나이고 내가 민중이다."
이는 최소한의 도덕 표준이다. 인간의 고상함은 민중을 위해 일하는 데에 집중적으로 표
현되어야 한다. 따라서 민중에 대한 태도가 어떠한가, 즉 민중을 사랑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민중에 충성하는가 그렇지 않는가는 충, 간을 판단하는 가장 기본적인 표준이다.
역사상 윗사람에게 오로지 충성하며, 오로지 명령에만 따르는 자들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입으로는 달콤한 말을 내뱉지만 뱃속에 칼을 품고 있었던 '구밀복검'의 이임보,
온
갖 나쁜짓만 골라서 했던 양국충, 특수 임무대의 우두머리 왕직, 갖은 꾀를 짜내 건륭 황제
의 비위를 맞추었던 회신 등이 모두 그런 자들이었다.
이 자들은 위에서 '사당'하면 잽싸게 절을 하고, '등잔' 하면 얼른 기름을 붓는 그런 자
들
이었다. 위에서 주색잡기를 하겠다면 그들은 마구 세금을 거두어들였다. 위에서 어디를 가겠
다고 하면 그들은 꽹과리를 치고 나발을 불며 앞장섰다. 아방궁을 수리하고, 대운하를 열었
으며, 화석강을 징발하고, 문자옥을 일으켰다. 그들은 항상 황상의 의지를 적극적으로 옹호
하고, 있는 힘을 다해 그 의지를 추진하는 자들이었다.
당나라 때의 어조은은 대종이 불교를 독실하게 믿는 것을 보고 자신의 별장을 절로 고쳐
장경사라는 이름을 붙여 대종에게 바치고자 했다. 이미 고인이 된 대종의 생모 오씨, 즉 장
경 태후를 기념하며 명복을 밀라는 것이었다. 대종은 어조은의 충성어린 행동에 좋아 어쩔
줄 몰라하며 즉시 어조은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어조은은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일으켰다. 절은 엄청난 규모에 화려하기 짝이 없
었다. 장안 시장의 재료로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양의 재료가 필요했다. 그래서 공
공연히 미련한 정자와 집을 뜯어내 재료로 보충할 정도였다. 비용은 억을 넘어섰고 백성과
국가가 모두 커다란 고통과 손해를 입었다.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면 따라다니면서 매질을
해대니 고통스러운 비명이 길에 흘러 넘쳤다." 이 자의 행위를 충으로 평가해야 하는가, 아
니면 간으로 평가해야 하는가?
일찍이 해서는 상고를 올려 "가정아, 가정아! 집안에 쌀 한 톨 없을 정도로 가난하구나!"
라며 가정 황제를 욕했다. 그는 어리석은 군주에게 충성하지 않았다. 그러나 민중은 그를
'깨끗하고 충성스러운' 인물로 평가했다. 그가 죽자 "백성들이 하던 일을 그만 두고 강 위로
장례식에 참석했다. 좁은 강둑을 따라 소복을 입은 사람들이 술을 땅에 뿌리며 통곡을 하는
데, 그 행렬이 100리가 넘었다."
혹자는 악비의 '충'에 이의를 제기하며, 그의 충성은 어리석은 충성이었다고 한다. 그러
나
민중들은 여전히 끊임없이 악비를 칭송하며 일부 사학자의 말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왜?
그 원인은 악비의 보국충정한 '청'이 결코 단순한 조정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자기 조국
과
민중에 대한 충성이기 때문이다. 그의 충은 역사에 의해 테두리가 정해진 것이며, 민중에 의
해 인정받은 것이다.
당시 강산은 무너지고, 민중은 끊이지 않는 전란 속에서 살 곳을 잃고 이리저리 헤매었다,
비바람 속에서 그들은 생계조차 꾸리기 힘들었다. 그들은 조국이 하루빨리 회복되어 포근한
집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원했다. 더 이상 외적의 침략과 유린을 당하지 않기를 두 손 모
아 기도했다. 그렇기 때문에 악기군이 가는 곳에는 시키지 않아도 사람들이 알아서 조직을
만들어 양식과 각종 물품을 모아 악가군을 맞이했던 것이다.
진회는 송 고종의 강화 노선에 충실했다. 그런데 왜 진회에 대해서는 죽어 썩어서도 세상
의 비난이 그치지 않는단 말인가? 그 까닭은 그가 고종이라는 군주 개인의 이익을 지키려
했지 때문이다. 고종 일당이 한 귀퉁이에서 편안하게 지내는 데에만 힘을 쏟았기 때문이다.
수많은 민중의 생활은 아랑곳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려서 역사와 민중은 영원히 그리고
단호하게 그를 천공의 간신이자 만세의 죄인으로 단정하는 것이다.
봉건사회에서 통치계급은 민중의 이익과 늘 상호 모순된다. 때때로 이 모순은 격렬하면서
도 결코 조화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지주 계급의 농민에 대한 잔혹한 경제적 착취
와 정치적 압박은 여러 번 농민으로 하여금 지주 계급의 통치에 반항하는 봉기를 자극했다.
때문에 안목이 있는 봉건 통치자는 늘 이런 모순을 완화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봉건 통
치 집단의 이익과 민중의 이익이 어느 정도 일시적으로 일치하거나 걸음걸이를 함께 할 수
있도록 신경을 썼던 이다. 봉건 통치자의 요구와 민중의 이익 이에 모순이 발생했을 때 통
치자는 늘 어느 정도 악제의 태도를 취하기를 요구받는다. 이러한 '백성을 위하고 군주도
위
하는' 행위도 충의로운 행동이라 할 수 있다.
백성에 대한 그들의 태도가 오늘날 우리가 요구하는 수준에까지 이를 수 없음은 물론이
다. 기껏해야 동정, 연민에 지나지 않는다. 민중의 '청천'으로 자처하거나 고난을 구제하는
보살을 자처할 따름이다. 그러나 많건 적건 어느 정도의 민중성은 갖추고 있는 것도 사실이
다. 계급적, 사회적, 역사적 한계에 비추어볼 때 그들에게 지나친 기대를 거는 것은 금물이
다.
민중은 세계의 주인이며, 역사의 주인이다. 민중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며, 사상적으로
민중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한 개인의 사상적, 도덕적 정조에 대한 중요한 기준이다. 민중
에 대해 아무런 감정없이 민중의 이익을 희생시켜 윗사람의 환심을 사고 사리사욕을 채우려
는 자가 충인지 간인지 아직도 분명하지 않단 말인가?
역사적 관점
한 아이리가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들으며 다섯 살 때 학교에 들어갔고, 열 살 때 6경
의 뜻에 통달했다. 열 두 살 때는 본적인 강릉현에서 형주부로 와서 수재 시험에 응시해 시
험관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듬해는 무창에서 향시에 응시했다. 당시 호광순무 고린은 이름
난 천재였는데, 그의 문장을 보고 재상감이라 칭찬하여 그를 붙잡아놓고 침식을 제공했다.
그러나 그는 열세 살 난 어린아이가 시험에 합격하면 자만에 빠져 더 이실 발전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에서 그에게 한 차례 좌절을 안겨주는 쪽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의견을 시험관에게 전했고, 결국 열 세 살 난 신동은 뽑히지 않았다. 그로부터 3년 뒤 이 소
년은 다시 향시에 응시해 합격했다. 합격 후 그는 고림을 찾았다. 그제야 고린은 소년에게
지난날 자신의 행동을 고백했다.
"지난번 과거 때는 내가 풍어사에게 부탁하여 자네를 3년이나 썩혔다네. 그러나 나는 자
네가 이름난 소년 수재로만 머물러 있기를 바라지 않았다네. 이윤이나 안연 같은 인물이 되
기를 바라네."
고린은 그가 큰그릇이 되기를 바랐다. 어려서부터 이름을 얻어 시와 술 그리고 풍류로 세
월을 헛되게 소비하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다. 소년은 고린의 가르침을 평생 잊지 않았을 분
만 아니라 과연 고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몇 십년 뒤 소년은 고공의 뒤를 이어 수상
격이 수보가 됨으로써 역사상 아주 중요한 인물의 하나가 되었다. 그가 바로 '일조편법'을
실행에 옮긴 장거정이었다.
장거정은 수보를 맡은 뒤 당시 속속 드러나는 명 왕조의 각종 폐단을 고치기 위해 큰칼과
도끼를 휘두르듯 기강을 엄하게 바로잡고, 관리의 비리를 처단하는 등 개혁법을 실행했다.
개인이나 소수의 이익은 일절 돌아보지 않았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와 동시에 토지를 재
측량하여 호족들에게 타격을 가했으며, 황하의 수리 공사를 감독했고, 재정과 변방을 정돈해
나갔다.
이러한 개혁적 조치는 탐관오리가 설치고 무사안일에 빠져 있던 관료 사회와 생계조차 꾸
리기 힘들었던 민중의 생활에 변화를 가져왔다. 명나라 중엽 이후 경제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도 장거정의 이러한 개혁정치에 자극받은 바 크다. 각종 폐단으로 신음하던 사회, 경제가
상대적인 회복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10년에 걸친 노력 끝에 녕 왕조의 상황은 크게
개선되어 국세도 날이 갈수록 향상되었다.
그러나 누가 알았겠는가? 장거정이 세상을 떠난 지 9개월 뒤 그는 정권을 혼자 주무르며
정치를 어지럽히고 나라에 불충한 죄를 뒤집어쓰고 관직과 시로를 박탈당한 것은 물론 가산
도 몰수당했다. 아들딸들은 죽기도 하고 군대에 끌려가기도 했다. 개혁 조치가 폐지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봉건시대의 인물로서 장거정에게 나름대로의 약점은 없을 수 없었다. 집정하는 동안 그는
오로지 자신과 가까운 인물을 임용했으며, 세 아들이 연속 과거에 급제했다. 심지어 하인들
까지도 관복을 입고 공공연하게 사대부의 대열에 끼어들 정도였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그의
일생을 살펴볼 때 그가 과연 충이었나 아니면 불충이었나? 장거정이 이 같은 처지가 된 이
후로 전력을 다해 진심으로 일을 수행하려는 인물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명
왕조는 급전직하로 쇠퇴의 길을 걸었다.
희종 천계 2년에 이르러 나라가 갈수록 어려워지자 그제야 이 공신이 다시 생각났던지 장
거정의 관직을 회복시켜 주고 후하게 제사를 지내는 한편 재산도 돌려주었다, 물론 이 조치
는 관리들과 백성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명 왕조는 더 이상
회복되기 힘든 상태였다.
역사적 관점은 매우 복잡한 문제다. 후대 사람이 앞사람을 고찰하고 평가함에 있어 후대
사람은 반드시 특정한 역사 조건과 환경을 고려해야 한다. 오늘날의 사상을 척도로 삼아서
는 안 된다. 전체 역사와 전체 발전 과정 속에서 인물과 사건을 고찰해야 하며, 또 서로 다
른 시기의 발전과 변화를 모아야 한다. 이물이 처한 역사상의 입장을 고려해야 하며, 또 그
들의 주관적 동기와 객관적 성과를 고려해야 한다.
역사적 관점은 반드시 전체 역사를 내려다볼 수 있는 높이에 서서 문제를 관찰하고 처리
하고 파악할 것을 요구한다. 또 당시의 능력을 고려해야 하며, 역사에 끼친 영향과 결과를
고려해야 한다. 역사에 대하 책임 있는 태도를 취해야지. 개인의 성과나 일시적인 성공, 몇
몇 사람의 종고 싫음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역사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은 틀림없이 역사 위에 굳건히 발을 디딜 것이다. 그러나 역
사에 부끄러운 자들은 역사의 치욕스러운 기둥에 못 박힐 것이다.
어떤 사회, 어떤 계급, 어떤 민중이라도 미래를 내다보는 먼 이익, 근본적인 이익, 일시적
인 이익, 그리고 부분적이 이익을 두루 갖고 있다. 근본적이고 먼 이익과 부분적이고 일시적
인 이익 사이에 모순과 충돌이 일어났을 때, 국가와 민족의 머나먼 이익을 위해 원칙과 정
의를 귿게 지키느냐, 아니면 윗사람을 기데 하고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아부하며 인심을 농락
하기 위해 작은 은혜를 베푸느냐? 이 준어만 과제 앞에서 역할에 대해 책임있는 태도를 취
하느냐 취하지 않느냐의 여부는 개이의 사상과 정조에 대한 중요한 기준이다/
역사상으로 볼 때 간신, 소인들치고 놀은 자리로 올라가지 위해 닭의 배를 갈라 알을 꺼
내고, 못을 말려 물고기를 잡으며, 눈앞의 이익만 추구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내가 잘 살
기만 하면 뒷사람은 어떻게 되든 다."는 악덕 투기꾼이 아닌 자가 없었다. 그들은 그저 일시
적인 여론만 중시하고 자기 한 몸의 공과와 영욕만을 돌본다. 장래가 어떻게 되건, 전체 국
면 어떻게 되건, 그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충, 간의 변별을 위해서는 우리가 역사의 고도에서야 하며, 역사적 눈빛을 갖추어
야 한다. 근본을 볼 수 있어야 하며, 미래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작은 울타리에서 벗어나 대
세를 내려다 볼 수 있어야 한다.
인류 사회의 역사는 끊임없이 발전하는 역사다. 무거운 역사적 책임감과 사명감은 개인의
높은 도덕과 아름다운 정조로 체현된다. 역사에 대해 책임감 있는 태도를 갖고 있느냐 없느
냐는 완전히 한 개인이 어떠한가를 가늠하는 척도가 될 수 있다.
사회 진보적 관점
예로부터 '천하는 공적인 것이다.'라는 '천하위공'의 사상이 있었다. 한 개인인 y사회 전
체
의 진보와 발전을 자신의 일로 여기느냐, 아니면 개인이나 일부 사람의 이익만을 취해 서슴
없이 역사를 퇴보 쪽으로 끌고 가느냐는 아주 중대한 정치 입장의 문제다.
사회는 '인간 상호 작용의 산물'이며, 사회 진보는 사회, 정치, 경제 제도의 진보 및 다수
의 이익에 부합하는 사상과 도덕의식의 제고와 완비를 포함한다. 사회가 진보하면 할수록
또 완전해질수록 인간의 생활도 보다 행복해진다.
따라서 한 개인의 도덕 수준, 그가 지닌 사회적 이상, 그리고 그가 느끼는 사회적 책임감
은 그 사람의 사상, 도덕, 정조에 대한 중요한 검증 표준이 된다.
사회적 책임감은 터럭만큼도 없이 개인 의 이익이 사회 전체의 이익을 md가하는 것, 이
것은 모든 간신, 소인을 두드러져 보이게 하는 표시의 하나다. 그들은 어떤 문제를 생각하고
처리할 때 항상 개인의 이익을 기분 삼아 처리하지 사회 진보와 발전을 기준 삼지 않는다.
EO로 사라을 추천하기도 하지만 자기 패거리를 심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또 어쩌다
'좋은 일'도 하지만 인심을 기만하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파벌을 만들어 현명하고 유능한 사람을 공격하고, 충성스럽고 선량한 사람을 배척
하고 모함한다. 군주를 포악한 쪽으로 이끌며 내분을 조장한다. 멋대로 협박하고 강탈하며
악랄하게 착취한다. 그들은 그런 짓들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며, 사회에 어떤 결과를
가져다주는지는 개의치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은 공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사리를
위해서다.
당나라 중엽 이후, 특히 '안사의 난' 이후 지방 절도사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번진 세력들
이 여기저기서 둥지를 틀고 세력을 떨침으로써 국가의 화근이 되었다. 번진의 우두머리들은
자기 군대를 키우는 것은 물론, 각종 수단을 동원해 지식인과 중앙 관리들을 끄어들여 자기
세력을 넓히고자 했다, 불우한 지식인들과 뜻을 얻지 못한 관리들이 왕왕 그들에게 빌붙어
출세를 추구했다.
당시 관직은 별 볼일 없었지만 유능한 인물로 꼽혔던 장적도 포섭의 대상에 끼여 있었다.
그때 번진의 하나였던 평노치 절도사이자 검교사공, 동중서문하평장사라는 거창한 벼슬을
뒤집어쓰고 있었던 실력자 이사도가 장적에게 함께 손잡고 '대업'을 이루어보지 않겠느냐
며
유혹했다. 그러나 번진의 할거 때문에 나라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는 현실을 바로 보고
있던 장적은 위협과 회유에 맞서 단호한 결단을 내림으로써 또 한번 그의 고상한 인품을 발
휘했다.
사회는 인류가 생존하고 발전하는 요함이며, 인간의 정치, 경제, 문화 생활의 기초 단위이
다. 사회는 인간의 상호 관계를 제약하며, 때로는 인간의 길흉화복을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
친다.
수백년 동안 현실 사회보다 더욱 이상적인 사회를 추구하기 위해, 대다수 사람의 이익에
부합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사회적 공공 도덕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
이 자신의 몸을 바쳐 진리를 추구해 애쓰며, 민중을 위해 운명을 받아들였고, 거친 들판에
피를 흘렸던가?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을 희생시키는 것은 물론, 심지어 자
기 계급의 이익을 희생시켜 가며 대다수 사람의 추구했던가? 그들의 고상한 사상적 경지와
아름다운 도덕, 정조는 영원히 역사책에 실려 천고에 그 향기를 전할 것이다.
물로 흉악한 원흉과 간신, 소인들도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서슴없이 음모를
꾸몄다. 도살용 칼을 마구 휘둘러 사회의 발전을 막았다. 윗사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극단
적인 죄악도 서슴없이 저질렀다. 군주를 포악한 방향으로 이끄는 데 열을 올렸다. 뒤에 벌어
질 심각한 결과는 안주에도 두지 않고 난을 일으켜 민중을 불 속으로 떠밀었다. 사회 진보
를 가로막음으로써 개인의 부귀영화를 지켰다. 그들은 법을 무시하고 못대로 온갖 나쁜 짓
을 저질렀다. 그들은 사회의 좀벌레이자 민중의 공적이자 역사의 죄인으로서, 영원히 더러운
냄새를 풍기며 욕을 먹을 것이다.
그들의 무덤과 얼굴에 역사의 침을 뱉어라!
생산 발전적 관점
어떤 사회의 발전도, 민중의 진보도, 관념의 변화도 생산의 발전과 떨어질 수 없으며, 일
정한 새로운 경제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인류 사회의 문명을 진보시키는 가장 근본적인 동
력은 사회 생산력이다. 사회 혁명과 기술 혁명을 포함한 세계의 모든 혁명은 모두 생산력을
해방시키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생산력의 총량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사회 안정을 꾀하려면 설교에만 의존해서는 불가능하며, 외적의 침략을 막는 네는 열정만
으로는 안 된다. 생산력의 발전을 떠나서는 어떤 민중도 강해질 수 없으며, 어떤 계급도 제
능력을 발휘할 수 없고, 어떤 고상한 논의도 공허해지고 만다.
따라서 사회 생산력의 발전을 촉진하느냐, 아니면 개인적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미친
듯 사심을 드러내 사회 생산력의 발전을 희생시키고 방해하고 심지어는 파괴하느냐 하는 것
은 선악과 시비를 가지는 분명한 표준이 된다. 사회 진보와 민중의 행복에 관심을 가지고
천하의 흥망을 자신의 일처럼 여기는 사람이, 개인의 이익을 위해 생산력의 발전을 파괴하
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은가?
고대에 공의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노나라 재상으로 있으면서 아주 양심적인 인물로
전국에 이름을 떨쳤다. 한번은 자기 집 정원에 심은 야채를 뽑아 먹었는데 그 맛이 너무 좋
았다. 그러자 이 재상은 서둘러 채소밭을 모조리 갈아엎어 버렸다, 또 한번은 자기 집안에서
짠 베가 아주 훌륭한 것을 보고는 그 즉시 베 짜는 아낙을 내쫓고 배추을 모조리 불태워 없
앴다.
역사책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기록하면서 그가 왜 그렇게 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
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분명히 알 수 있다. 즉 관직에 있는
사람이 저마다 채소를 다까고 베를 짜서 자급자족한다면 농부와 베 짜는 사람들의 노동 가
치가 제대로 실현되지 못해 다른 사람들의 노동에 영향을 줄 것이고, 결국은 생산 발전에까
지 영향을 미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백성과 이익을 다툴 것이냐 아니면
박서을 이롭게 할 것이냐를 놓고 그러한 선택을 한 것이다.
생산 발전의 관점에서 보면 역사상 여러 차례 시행되었던 변법들과 각종 개혁 및 유능한
인재 기용, 여론 수렴 등 맑고 투명한 정치는 당시 사회 생산력의 발전에 아주 큰 추진력으
로 작용했다. 그리고 또 어느 정도 긍정적인 결과를 얻었다.
범중엄이 추진한 '경력신정'은 간신 일당에 의해 중단되었다. 그러나 쓸데없는 관리를 줄
이고, 탐관오리를 제거하며, 농사와 누에치기를 장려하고, 요역을 가볍게 한 정책이나, 경제
에 대해 교육시키고 경제와 관련한 유능한 인물을 배양하려 한 조치가 생산력 발전을 촉진
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왕안석은 '변법도강' 때문에 일부 사람들로부터 '대간'이란 욕을 먹었지만, 그가 제정하
여
추진한 '균수법'은 공급과 판매의 모순을 완화하고 재정 수입을 늘렸다. 또 수리법을 추진하
여 비교적 큰 규모의 수리 공사를 만여 군데에서 벌임으로써 약 3천만 무의 토지에 물을 대
줄수 있었다. '청묘법'은 씨 뿌리고 수확할 때 부족한 씨앗과 양식 문제를 해결해 주었
다.
'모역법' 은 노동력을 증가시켰다. '방전균세법'을 세금의 부단을 투지 수유와 일치시켜 주
었
다. '시역법'은 공평한 매매와 물가 안정을 보증하는 법이었다. 백성의 고통을 제거하고, 부
호들의 토지 겸병을 억제하는 일련의 조치들은 15년간의 실천을 통해 생산 발전에 유익하다
는 것이 증명되었다.
장거정은 자신의 측근만을 기용하는 바람에 적지 않은 비난을 받았지만 봉건 사다부의 입
장에서 보자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가 실행한 '일조편법'은 농민의 부담을
줄이고 함부로 농민을 착취하는 것을 막음으로써 명나라 중기 이후 경제의 발전을 촉진시켜
상대적이나마 당시의 경제를 회복시켰다. 이럼에도 '간'이란 글자를 그들의 이마에 갖다 붙
일 수 있겠는가? 진짜 간악한 자가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고, 백성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생산 발전의 문제에 그처럼 정열적일 수 있겠는가? 또 개인의 안위나 사악한 세력의 위협도
돌보지 않고, 그렇게 큰 소리로 개혁과 변법을 외칠 수 있겠는가?
이와는 대조적으로 진짜 간신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변법 같은 것에는 관심조차 없
다. 개혁을 위해 모험한다는 것은 더억더 상상할 수 없다. 그들드은 죽자살자구시대의 썩고
낡은 제도에 목을 매달고 자신의 이익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그 어느 것보다 소중하다고 생
각한다. 물어볼 것도 없지만 그런 부패한 정치제도가 생산력 발전에 얼마나 방해가 되는지
에 대해서는 애당초 관심조차 없다.
이뿐만이 아니다.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고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민심은 아랑곳
하지 않는다. 애당초 자신의 짓거리가 생산력의 발전을 얼마나 심각하게 파괴하는지 생각조
차 않는다. 그들은 사회 발전, 국가 부강, 백성의 행복과 관계되는 생산력 발전이라는 중대
한 문제에 직면해서 이리와 같은 야심과 추악한 영혼을 남김없이 고스란히 드러낸다.
우리는 수천년의 역사에 대해 깊이 있게 분석하고 고찰한 기초 위에서 충간, 선악, 시비,
곡직을 제대로 가릴 수 있는 정황한 입장과 객관적 표준을 제거고자 했다.
고대의 충간관과 현대의 충간관 사이에는 이런저런 모순과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예컨대
구대의 충은 결코 현대의 충과 같을 수 없다. 군주와 부모에 대한 충을 조국과 민중에 대한
충과 분리하기도 하고 때로는 한데 섞어 거론해왔다. 그러나 모든 사회 현상에 대해 과학적
인 세계관과 방법으로 분석하고 고찰할 때, 그러한 입장과 관점은 현재에도 적용될 뿐만 아
니라 나아가서는 미래에도 적용될 것이다. 계급적 관점, 민족적 관점, 민중적 관점, 역사적
관점, 사회 진보적 관점과 생산 발전의 관점은 인류 사회가 가장 이상적인 사회 형태로 나
아가는 과정에서 영원히 필요한 기본적 입장이자 관점으로서, 이 입장과 관점을 떠나서는
누가 옳고 누가 그르며, 누가 충신이고 누가 간신인지 등의 문제를 제대로 밝히고 가릴 수
없게 된다.
물론 위에서 말한 관점들에만 의존해서는 간신을 살피고 변별하는 목적을 완전히 달성할
수 없다. 이는 '간신'이 대단히 특수한 역사 현상으로서, 충과도 다르지만 악과도 구별되
기
때문이다.
간신, 소인이 국가를 어지럽히고, 백성을 헤치며, 사회를 파괴하고, 생산 발전을 방해하는
범죄 행위는 구체적이면서도 특수한 나름대로의 표현 형식을 갖고 있다. 그들은 품행과 마
음이 바르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의 사리사욕을 위해서라면 국가, 민족, 백정의 이익 따위는
뒤돌아보지도 않는다. 뿐만 아니라 나름대로의 특수한 활동 규칙과 탐욕, 교활, 비굴, 음흉
그리고 파벌 조성 등을 한 몸에 갖추고 있다.
따라서 진정으로 간신을 살피고 변별하지 위해서는 지금까지 말한 원칙과 표준을 견지해
야 함은 물론, 한 걸음 더 나아가 문제를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방법 등을 전면적으로 장악
하여야만 한다. 아울러 이런 입장, 관점, 방법을 간신을 살피고 변별하는 실천 석에서 운용
해야 하며, 또 이를 운용하여 간신이라는 사회, 역사적 현상에 대해 전면적이고도 객관적으
로, 신중하고도 철두철미하게 분석해야 한다.
이렇게 과학적 이론으로 과학적 분석을 진행할 때 비로소 간신의 본질, 특징 및 그 활동
규율을 장악할 수 있고, 그에 따라 간신을 변별하고 제압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우리는 이 밖에 다른 지름길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정확한 입장에 서서 전면적으로 분석하여 과학적인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 이것이 바로
이 책이 지난날의 '변간론'과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
간의 근원 탐색
나무에는 뿌리가 있고, 물에는 근원이 있다. 간녕은 수 천년 동안 창궐해 왔으니 만치 그
자체로 계급적, 사회적, 역사적 근원이 있기 때문이다. 그 두드러진 점을 골라보면 다음과
같은 점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봉건적 사유제는 간이 태어나는 토양이다. 둘째, 부패한
도덕의식은 간을 싹틔우는 온상이다. 셋째, 어두운 정치제도는 간을 기르는 산실이다. 넷째,
혼란한 사회 정세는 간을 키우는 요람이다.
역사상 크고 작은 간신들이 수도 없이 나타났다. 그들이 청한 지위로 보면 간민, 간상, 간
신, 간군으로 구분할 수 있고 그들이 저지른 죄악의 정도로 보면 또 소간, 중간, 대간, 거간
으로 구분할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그들이 저지른 행위의 성질로 보아 붕간, 정간, 권간,
매국간으로 구분할 수도 있다. 이처럼 크고 작은, 그리고 형형색색인 간신들이 모든 영역에
분포하며 몸을 숨긴 채 각자의 역할에 때라 '자기의 특기인' 간상을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
면 이러한 각종 간신들은 도대체 어디로부터 나오는 것일까?
간신들은 대대로 근심거리였기 때문에 봉건시대를 포함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고심하면서
그 근원을 탐색해왔다. 그들은 간신이 군주의 눈에 들어 권력을 잡고 천하를 좌지우지하는
데에는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군주가 어리석으면 신하도 어리석다.'
는 표면적인 결론 외에 더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사회적, 계급적, 역사적 한계 때문에 그들
은 간신이 출현하는 근본적 원인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가 만약 간신이 출현하는 근본적 원인을 찾지 못해 간녕의 '출신'을 밝혀내지 못한다
면, 간신을 근본적으로 인식할 수 없음은 물론 간신의 본질을 파악할 수도 없다, 따라서 간
신을 살피고 변별하는 큰 문을 열 수 없게 된다.
간신을 변별하고 살피는 좌표를 확립한 후에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 바로 간신의 근원을
드러내 가장 근본적인 곳에서부터 간신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를 위해서는 자신의
안목을 동시에 갖춘 이론의 힘을 빌려야 한다. 역사의 거대한 흐름을 파악하고 있는 이론으
로 문제를 고찰해야 한다. 아는 간단히 말하자면 역사관이다. 이 역사관은 막연하고 추상적
인 역사관과는 다르다. 그것은 시종 현실 역사의 기초 위에 서 있는 것이다. 그것은 관념으
로써 실천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에서 출발하여 관념적인 것을 해소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입장과 관점 그리고 원칙으로 간신이라는 이 사회, 역사 현상을 진지하게
고찰한다면 어렵지 않게 다음과 같은 점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봉건적 사유제는 '간'이 생겨나는 토양이다.
'간'과 '사'는 자연스러우면서도 본질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간'은 또 의문
의
여지없이 '봉건적 사유제'에서 기원한다. 봉건적 사유제 아래에서 물질은 사람의 귀천 여부
를 결정한다. 또한 착취와 피착취 같은 불평등한 상황도 생겨난다. 동시에 이러한 불평등한
상황은 극도의 금전, 권력 숭배를 유발하여 갖은 수단과 방법으로 금전과 권력을 차지하려
는 이기주의와 개인주의 사상을 싹틔운다.
송나라 태조 조광윤은 '진교병변'으로 곤룡포를 몸에 두른 다음 자기 부하들도 자기처럼
정변을 일으키지 않을까 두려워 어느 술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
"만약 그대들이 나를 추대하지 않았더라면 어찌 오늘의 내가 있었겠는가? 그런데 천자도
사실 알고 보니 절도사보다 훨씬 못한 것 같다. 편치도 않고 즐겁지도 않으니, 요즘 나는 잠
도 편히 못 잔다."
그러자 그의 부하들은 깜짝 놀라 그 까닭을 물었다. 그의 대답은 이러했다.
"지금 내 자리를 누군들 앉고 싶어하지 않겠는가? 그럴 누가 알겠는가?"
조광윤의 이 말에 부하들은 또 한번 깜짝 놀라며 서둘러 이렇게 말했다.
"폐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천명이 이미 결정되었거늘 누가 감히 딴 마음을 품는
단 말입니까?"
그러자 조광윤은 이렇게 반박했다.
"그대들은 딴 마음을 품지 않을 모르나 그대들의 부하들이 부귀를 탐내 어느 날 갑자기
그대들의 몸에 곤룡포를 두르게 할지 누가 아나? 그때 가서도 그대들이 하고 싶지 않다고
거절할 수 있겠는가?"
당연한 말이겠지만 봉건 사유제의 상황에서 조광윤의 이런 걱정은 전혀 일리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조광윤의 대답에 부하들은 머리를 조아리고 눈물을 흘리며 "저희들이 어리석어
미처 그 점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무쪼록 폐하께서는 저희들을 불쌍하게 여기시어 살
길을 열어지시기 바랍니다."라고 애원했다. 그러자 조광윤과 반단은 이렇게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인생은 짧다. 병권을 내놓고 많은 재산을 자손에게 물려준 후 노래와 춤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또 우리 군신간의 의심을 없애고 서로 편하게 지내는 것이 한
결 좋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이튿날 측근 부하들은 모두 사직했다. 그리하여 이른바 "술잔을 돌리며 병권을
풀어놓았다"는 '배주석병권'의 역사적 사건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봉건 사유제 아래에서 조
광윤의 말은 상당히 옳고, 또 '확실한 행동'이었다.
명나라를 세운 개국 황제 주원장은 통일이란 대업을 완성한 뒤 점점 간군으로 변해갔다.
떠돌이 거렁뱅이에서 일약 황제가 된 주원장은 문신들은 자신을 까보고, 부신들은 천하를
탈취하려 한다고 의심했다. 그리하여 그는 의심 많고 냉혹하게 변해갔다. 주씨 강산을 보전
하기 위해 그는 충신, 명장들을 대량으로 죽여, 지난날 그와 함께 생사를 같이했던 측근 부
하들도 대부분 그의 악랄한 독수를 벗어나지 못했다.
재상 이선장은 개국 공신 주에서도 첫번으로 꼽히는 인물이었다. 그는 또 주원장의 딸과
혼인까지 했다. 일찍이 주원장은 자기 입으로 그를 소하에 비유될 수 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음은 물론 '고명철권'까지 내려주었다.
그러나 그 뒤 이른바 '모역'이란 죄명으로 늙고 지칠대로 지친 77세의 오인은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집안 식구 70여 명도 모조리 처형당하는 참으로 끼가
막힌 꼴을 당했다. 처형되던 말 이선장은 떨리는 손으로 주원장이 직접 건네주었던 '고명칠
권'을 보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하늘을 우러러 통곡했다.
우기는 뛰어난 지혜를 가진 인물로서 주원장은 이런 그를 '나의 자방'이라고 칭찬할 정도
였다. 유기는 홍무 초에 나이를 핑계로 낙향했다. 그는 깊은 산 속에 틀여 박혀 외부, 특히
관부와의 왕래를 일체 끊고 그저 바둑과 술로 나날을 보냈다. 청전의 수령이 여러 차례 그
를 만나려 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해 뜻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렇게 몸을 숨긴 채 조심하고 또 조심했음에도 주원장의 마음을 놓게 하지는 못
했다. 결국 주원장은 그의 정적을 이용해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런데 유기는 죽은 뒤
의 안녕을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주원장의 의심을 풀고 집안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는
지, 가족들에게 자신이 죽고 나면 시체를 땅에 묻지 말고 지체없이 불에 태워 버리라고 부
탁했다.
이외에도 비참하게 죽어간 공신들이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불쌍한 인물은 송렴이었
다. 송렴은 말 그대로 성인군자로서 덕과 문장을 천하에 떨친 인물이었다, 언젠가 한번은 주
원장이 송렴에게 조정 대신들 주에서 어떤 인물이 좋으며 어떤 인물이 나쁘냐고 물었다. 그
러자 송렴은 유능한 대신들만을 거론하고 누가 나쁘다는 말은 하지 않으면서 "착한 사람은
신의 친구이기 때문에 알고 있지만, 착하지 못한 자는 알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에 주원장은 크게 감동하여 이렇게 말했다.
"짐이 듣기에 가장 높은 경지는 성이요, 그 다음은 현이며, 그 다음은 군자라 했다. 송렴
은 짐을 19년 동안 섬기면서 한번도 속인 적이 없고, 남의 단점을 비난한 적도 없으니 군자
로는 부족하고 현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이러했던 송렴도 검은 그물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나이를 핑계로 낙향한 뒤 자칫
목이 잘릴 뻔했으며, 끝내는 박해를 받아 죽고 말았다.
10여 년에 걸친 대숙청의 결과 공신, 제후로 멸족을 당한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무장은 거의 전부 몰살당하다시피 했다. 주원장의 숙청은 먼저 문신을 죽이고 그 다음에 무
장을 살육하는 수순을 거쳤다. 그의 아들인 진황, 진황, 연왕이 변방을 지킬 수 있을 정도고
성장하자 몽고와 싸우고 있던 몇몇 장수를 최후로 처치해 버렸다. 주원장의 부인인 효자 황
후 마씨가 여러 차례 그를 말렸다. 한번은 주원장에게 마 황후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신첩이 듣기에 부부는 서로를 지켜주기 쉬우나 군주와 신하는 그것이 어렵다고 했습니
다. 폐하께서 신첩과 동고동락하던 시절을 잊지 않고 계시다면 신하들과 고생을 같이했던
어려운 시절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나 주원장의 귀에 이런 충고가 들릴 리 있겠는가?
송나라 고종이 금나라 군대에 승승장구하던 악비의 군대를 출수 시킨 데 대해 어떤 이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 그 까닭은 고종이 타고난 매국노였기 때문이
아니라, 악비가 구해올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는 날에는 자신의 황제 자리가 위
험했던 것이다. 악비가 무고하게 모함을 받아 죽었던 원인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즉 사람은
이해관계에 따라 천박하게 변해 나라까지 팔게 되는 것이다.
명나라 정토 14년인 1449년 8월 '토목보 전투'에서 명나라 50만 대군이 왕자에 의해 전멸
하고 명나라 영종 주기진은 포로로 잡혔다. 영종의 동생 주기옥이 대리로 조정을 다스린다
는 명분으로 황제가 되었다, 그 후 그는 간신들을 제거하고 군대를 정비하여 전투를 잘 이
끌었다. 말하자면 그는 대리였지만 황제 노릇을 그런 대로 잘 했다.
그러나 그는 영종이 다시 조정으로 되돌아온다는 사실이 못 마땅하는 했다. 그래서 백방
으로 영종의 귀환을 방해하고, 영종의 귀환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박해했다. 심지어는 야선에
게 선물을 갖다 바치며 차마 눈뜨고는 못 봐줄 정도로 비굴하게 굴었다.
그러나 영종은 결국 돌아왔다. 영종이 돌아오자 주기옥은 자신의 형을 외부와 철저하게
격리시켰다. 영종을 남내라 불리는 궁에 감금하다 시피하고 많은 환관과 금의위 병사들로
하여금 감시하게 했다. 신하들 누구도 영종을 만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뜻밖의 사건이 발생했다. 자신과 뜻이 맞는 환관 완랑에게 영종이 금으로 수를
놓은 주머니와 금도금을 한 칼을 주었는데, 경솔한 완랑은 그것을 그만 왕요라는 자에게 건
네주고 말았다. 이 사실이 고평이란 자의 귀에 들어갔고, 고평은 이 기회에 돈돈 벌고 승진
도 할 생각으로 이 사실을 금의위에 밀고했다. 요컨대 완뢍과 왕요가 그 예물을 이용하여
복위를 꾀하려 한다는 것이다.
보고를 받은 경제 주기옥은 즉시 완랑과 왕요를 옥에 가두었다. 이 일을 핑계로 영종을
사지로 몰겠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완랑과 왕요는 모진 고문에도 불구하고 헛소리를 하지
않았다. 저잣거리로 끌려나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때까지도 황상을 연루시키지 않았다.
주기옥과 주기진의 권력 암투는 끝내 형제간에 죽고 죽이는 '문지역'을 연출하였고, 그 권
력 투갱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겸과 같은 충신들도 비명에 죽고 말았다.
"물질생활은 자체가 사회생활과 정치생활, 그리고 경제생활을 지배한다. 인간의 의식이 인
간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인산의 사회 존재가 인간의 의식을 결정한다."
봉건적 사유제는 소음을 내면 돌아가는 거대한 기계처럼 쉬지 않고 사심과 사욕을 생산한
다. 이런 사심과 사욕은 또 수많은 간심과 간행을 낳는다. 따라서 봉건적 사유제라는 토양을
없애야만 비로소 간신이라는 이 추악한 사회, 역사 현상을 마침내 소멸시킬 수 있다.
낡고 썩은 도덕의식은 '간'을 키우는 온상이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역사를 창조한다. 그러나 마음 내키는 대로 창조하는 것은 결코
아니며, 자신들이 임의로 선정한 조건하에서 창조하는 것도 결코 아니다. 이미 정해져 있는,
과거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조건하에서 직접 부딪치며 창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이어져온 '사유의 보물 창고'에 진귀한 유산이 만드는 것을 알아야 한
다. 예컨대 강렬한 민족 자존심과 굳센 애국주의 사상, 백성이 으뜸이고 사직은 그 다음이며
군주는 오히려 가볍다는 민본 이념, 개인의 욕심을 이기고 명예를 받들어 청렴 결백을 실천
하는 도덕의식, 진실과 참을 추구하며 자신을 버려서라도 바른 법을 추구하는 정신, 믿음과
성실을 말하고 정과 의리를 중히 하며 정직을 귀하게 여기고 양보를 숭상하는 사회 풍조,
유능한 인물을 아끼고 스승과 윗사람을 존중하며 사람들과 착하게 어울려 지내고 악을 원수
처럼 미워하는 사회 행위의 준칙, 공명정대하게 중립을 지키며 자신의 행동에 부끄러움은
없었는가를 외치는 용기, 떳떳하게 사람 도리를 다하는 도덕적 자존심, 부귀해도 음탕하지
않고 가난하다 해서 뜻을 바꾸지 않으며 무력 앞에서 굴복하지 않고 위기에 처해서 구차해
지지 않는 절조 등등, 이러한 우수한 문화 전통은 사람들의 사상과 행위에 영향을 미쳐 악
비, 춘문상, 해서, 포증과 같은 영웅과 청렴결백한 관리들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고대의 윤리 도덕이나 가치관이 사유제를 기초로 한 정치, 강제적
조건하에서 생산된 사회 의식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회 의식
은 여러 방면에서 착취계급의 이익을 지키려 하기 때문이다. 설사 고대의 노동자, 농민이라
할지라도 그 의식은 보수성과 편협성을 띨 수밖에 없다. 따라서 고대의 도덕의식이나 가치
관도 부패한 측면을 갖고 있을 수밖에 없다.
봉건적 사유제를 기초로 한 정치, 경제 제도하에서는 모든 것들이 인간의 사상과 영혼을
해치고, 인간을 크게 부패, 타락시킨다. 이런 상황에서 가람들이 만약 자신을 억제하고 통제
라지 못하면, 사악하고 간사한 길로 들어서기란 아주 쉽다. 따라서 어떤 제도 아래에서든지
간에 사상과 인품의 수양은 처세술의 으뜸가는 항목으로서 매우 중시되는 것이다.
송나라 때의 송교, 송기 두 형제는 보잘 것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어렵게 공부
하여 한꺼번에 과거에 급제함으로써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그 후 두 사람의 사상과 태도는 뚜렷한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다. 형 송교는 재상
이 된 뒤 스스로를 격려하여 깨끗하게 살았다. 그러나 한림학사였던 동생 송기는 밤새 기생
을 옆에 끼고 술과 노래로 세월 가는 줄 몰랐다.
어느 정원 대보름날 밤, 송교는 동생이 술과 여자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인편에 이
런 말을 흘렸다.
"그 옛날 어느 해 정월 대보름날 우리 둘이서 부추전을 부쳐먹던 일이 생각나지 않는가?"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송학사는 뜻밖에도 크게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부디 재상께 이 말을 전해주게. 그 해 그곳에서 함께 부추전을 부쳐먹은 것이 무엇 때문
인지 모르시냐고?"
보라! 똑같은 처지, 똑같은 조건, 똑같은 출신으로 함께 급제하여 관리가 되었으며 그그
옛날 함께 부추전을 부쳐먹었지만, 뜻이 다르면 사람됨도 이렇게 큰 차이가 나지 않는가!
요나라 때 간신의 우두머리 야율을신은 별 볼일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요사>의 기
록
에 따르면 을신의 어머니가 그를 배었을 때 숫양과 싸워 양의 뿔과 꼬리를 뽑는 태몽을 꾸
었다고 한다. 꿈에서 깨어난 뒤 점을 쳤더니, 점쟁이는 "좋은 꿈입니다. '양'자에서 뿔과 꼬
리를 떼면 '왕'이 아닙니까? 사내아이를 낳으면 장차 왕이 될 것입니다.!"라고 예언했다.
야율을신이 어느 정도 자란 후 한번은 양을 치러 나갔다가 날이 저물었는데도 집으로 돌
아오지 않았다. 아버지가 나가보았더니 풀밭에 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아버지가 흔들어 깨
우자 야율을신은 아버지에게 버럭 화를 내며 냅다 소리를 질렀다.
"누가 내 잠을 깨우랬어요! 방금 좋은 꿈을 꾸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해와 달을 먹으라고
갖다 주기에 달은 다 먹고 해는 반쯤 먹었는데 날깨웠잖아요!"
야율을신의 아버지는 아들이 정말 부귀한 운명을 타고난 인물이라 여기고는 양치는 일을
그만두게 하고 공부에만 열중하게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을신은 남보다 뛰어나야 한다
는 사고방식을 형성해갔고, 그 뒤 태자와 황후를 살해하고 황손을 해치는 등 간신으로서의
변신 과정을 완성해 나갔다.
봉건적 사유지의 존재는 그에 상응하는 의식을 생산해낼 수밖에 없다. 이런 의식은 또 사
유제에 적응하는 영화을 길러낸다. 이 때문에 실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부귀영화를 꿈꾸며
권력을 쟁탈하고, 남보다 잘나야 한다는 생각에 얽매여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죄악을 저
질렀다. 이는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암울한 정치제도는 간신을 기르는 산실이다.
고대사회는 봉건 관료제와 세습 군주제가 시작되었다. 이런 제도하의 정치는 개인의 독재정
치였고, 이것의 기능은 착취와 계급의 이익을 지키는 데 있었다. 따라서 정권을 지키기 위해
서는 난폭한 탄압과 잔인한 통치를 실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원나라 지원 23년 8월, 주원장은 자신의 측근 송렴에게 칭찬하는 시를 한 수 지어주었다.
그리고 이듬해 4월 주원장은 또 한수의 시를 송렴에게 내려 그를 칭찬하였다. 송렴에 대한
주원장의 신뢰와 사랑이 얼마나 지극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명사>의 기록에 따르면 주원장의 눈에 그처럼 충실하고 박학다식하고 성현에 가
까운 송렴은 친구들과 어울려 술 먹는 것조차 주원장에 의해 낱낱이 파악되고 있었다. 송렴
이 친구 몇몇과 술자리를 한 다음날 주원장은 송렴에게 "어제 술을 마셨다면서? 누구와 마
셨으며 안주는 무엇이었나? 라며 꼬치꼬치 캐물었다. 송렴이 하나하나 꼬박꼬박 대답하자
주원장은 그제야 "그랬어군. 경이 날 숙일 리 없지, 암!"하며 만족해했다.
주원장의 야만적인 통치는 명 왕조를 역대 봉건 왕조 중에서도 가장 암울했던 왕조로 만
들었다. 감시 기관인 금위위진무사문 외에 동청과 서청을 설치했다. 이 기관들은 각종 잔혹
한 고문으로 악명을 떨쳤는데, 그 중에는 끔찍한 고문도 있었다. <명사><형법지>에 따르
면
탄비파는 금의위의 형벌 주에서도 가장 잔혹한 것이었다. "매번 백골이 다 빠져나가고 땀이
비오듯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길 두세 창례 반복했다. 이런 혹독한 상황에서 어찌 사건
이 해결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당시 평범한 백성들은 물론 조정의 대신들, 변방의 고관들도 모두 전전긍긍하며 불안에
떨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모습을 감춘 채 편안히
생을 마치기를 바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공을 세운 뒤 은퇴한 범려, 관료 사회를 멀찌감치 피
했던 도연명 등의 행동은 모두 이점을 고려한 끝에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런 생황에서는 필연적으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윗사람의 뜻을 거스
르지 않으려고 자신의 뜻을 굽히는 사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조정에는 썩은
나무처럼 벼슬살이를 하고, 주는 대로 녹봉만 받아먹고 사는 개나 이리 같은 무리들이 설치
고 다니며, 노예처럼 비굴한 자들이 너나할것없이 권력을 쥐고 흔드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
았다. 이른바 간심과 간행도 이로부터 생겨났다.
<신당서>에 간신으로 분류된 양재사는 재상 자리에 10년 년 간 있으면서 "의견을 올려본
적도 없고" 도 "뜻을 거스른 적도 없이" 모든 일을 윗사람의 안색을 살펴 처리했다. "군주
가 좋지 않다고 하면 헐뜯고, 좋아하고 하면 치켜세웠다." 누군가가 "공은 높은 자리에 계시
면서도 왜 그렇게 굽실거리십니까?"라고 물었다. 이 물음에 양재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세상의 도가 어렵고 힘들 때는 곧은 자가 먼저 화를 당한다. 그러니 이렇게 하지 않고서
무슨 수로 내 한 몸을 보전하겠는가?"
선량한 사람으로 하여금 몸을 팔도록 강요하는 암울한 정치제도하에서 어쩔 수 없이 비굴
하게 살얼음을 걷듯 몸을 도사리며 한시도 편치 못하게 산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당
시의 간신들이란 얼마나 가련한 존재들이었는가!
봉건 전제주의 정치제도가 간신을 키우는 산실이 된 까닭은 그것의 암울성 때문만이 아니
라 그것의 부패성 때문이기도 하다. 이 제도는 봉건 적 세습제이기 때문에 지혜가 모자라는
어린아이라도 좋고, 어리석고 노망난 노인네라도 상관없었다. 그런 황가의 핏줄만 흐르면 만
인의 위에 군림하는 천자가 될 수 있었다.
동한의 상제 유융은 태어난 지 100일 만에 황제가 되었다가 1년을 미처 채우지도 못하고
죽었다. 통계에 의하면 중국 역사상 열 살이 채 안 되어 황제가 된 인물은 모두 29명이었다.
이러니 어찌 조정이 혼란에 빠지지 않을 수 있으며 간사한 저들이 생겨나지 않을 수 있었겠
는가?
사서에 의하면 남당의 중주 이경은 잘 생기고 우아했으며, 눈과 눈썹은 마치 그린 것 같
았다고 한다. 게다가 책 읽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치적 재능은 전혀 없어 나라 일
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숨어 살기를 좋아해 여산 폭포 앞에다 집을 짓고는 평
생 산수와 더불어 시나 읊으며 살고 싶어했다.
그가 충신과 간신을 구별 못하고, 상벌도 제대로 시행하지 못해 충신, 명장들이 수난을 당
했다. 포부와 식견을 가진 강직한 인물들이 속속 모함 당하고 배척 당했다. 반면 송제구, 진
각, 풍연사 같은 간신들은 그 틈을 타고 벌떼 같이 일어나 나라를 말아먹었다. 유능하고 충
성스러운 인재들은 이런 상황에 크게 실망해 숨어 버리거나 심지어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했다.
그의 아들인 후주 이욱도 그에 못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는 궁궐 깊은 곳에서 시와 주색
에 빠져 살았다가 형인 문헌 대자가 일찍 죽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그 뒤를 이어 군주가
되었다. 그는 23년 간 나라를 다스리면서 하루 종일 글이나 짓고 춤과 노래로 세월을 보냈
다. 또 불교를 숭상해 불경을 외다가 송나라 대군이 국경으로 밀려오는 줄도 몰랐다. 두 눈
을 벌겋게 뜨고 나라가 망하는 꼴을 보아야 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얼마나 아팠겠는
가!
이때 임인조라는 대신이 후주 이욱에게 은밀히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송나라는 촉을 멸망시키고 지금 다시 군대를 남한으로 동원했으니 힘을 크게 소모한 상
태입니다. 따라서 양주 일대의 병력은 허약합니다. 저에게 병사 몇 만을 주시어 강북의 땅을
수복하게 해 주십시오. 송의 원군이 오더라도 회수 일대를 굳게 지키면 아무 일 없을 것입
니다. 신중을 기하기 위해 폐하께서는 제가 반란군이라고 선포하십시오. 성공하면 나라에 유
리할 것이며, 실패하더라도 반란죄를 씌워 저의 가족을 몰살하시면 송에 대해 딴 마음을 품
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 표시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일편단심으로 나라를 위하는 인물도 정치적 두뇌라곤 전혀 없었던 이욱이
송나라의 간첩계에 빠지는 바람에 하릴없이 죽음을 당했으니, 이 어찌 한탄스럽고 슬픈 일
이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간신들은 자연스럽게 꿈틀꿈틀 피어올랐다. 송나라 군대가 금릉
을 압박하자 황보계훈 등은 후중 이욱을 북 속에 숨겼다고 한다. 결국은 낙화유수 꼴이 되
어 나라를 망친 군주로 부끄러운 이름을 남기고 말았다.
이욱은 정치면에서 촉한의 유선이나 진숙보와 마찬가지로 정치를 게을리 하고 나라를 망
치는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수세 사람들은 이욱을 두고 본래는 천재 시인이었는데, 그런 그
가 황제가 된 것이 참으로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이 아니냐고 평하기도 한다. 봉건적 사유
제의 기초 위에서는 봉건 전제주의의 정치체제 및 독재정치가 생각된다. 이 정체체제와 정
치는 또 필연적으로 간신을 생산했다.
어지러운 사회 정세는 간신이 성장하는 요람이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현상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채경, 왕보와 같은 간신, 소인배들은 어째서 대부분 조정이 어지럽고 정세가 혼란한 시기
에 출현하는가? 또 대부분 역대 왕조의 후기에 전염병처럼 퍼지는가? 간신의 생산은 어지
러
운 정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우리가 깊이 생각차지 않을 수 없는 문제들이다.
북위 왕조는 태조 탁발규 이래 효 정제에 이르러 동위, 서위로 갈라지기까지 140여 년 간
북방을 통치했다. 이 140여 년 중에 효 문제 때가 비교적 안정된 시기였고, 그 이후 정권은
하강 곡선을 긋기 시작했다. 효 명제 초에 오면 북위의 통치는 이미 안팎으로 난맥상을 드
러내 정치는 거의 붕괴되었다. 귀족 관료는 앞을 다투어 사치와 부귀영화를 추구했고, 지방
관리들은 끝도 없이 백성의 피와 땀을 빨아먹었다. 권력자의 매관매직은 보통이었고, 이부는
매관매직이 벌어지는 시장 바닥이 되어 버렸다.
효 명제 정과 4년 부위 왕조를 두려움에 떨게 한 '육진기이'가 폭발했다. 이어 더 큰 규모
의 '정룡기의'와 하북 농민의 대봉기가 일어났다. 효창 3년인 527년 막절염생은 군대를 이끌
고 낙양 서쪽 관문인 호동관을 돌파하여 단숨에 낙양을 위협했다. 무태 원년인 528년 갈이
이끄는 하북 봉기군 백만 대군이 상주를 포위함으로써 낙양은 또 한번 위기에 처했다.
이 무렵 북위 통치 집단 내부의 투쟁은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었다. 효 명제 정광 원년인
520년, 금군을 장악하고 있던 북위의 종실 원차와 환관 유등은 서로 모의하여 궁정 정변을
일으켜 호 태후가 신임하던 실권자인 태부와 시중 원역을 살해하고 호 태후를 감금했다. 정
광6년인 525년 역시 북위 왕조의 종실인 승상 고양왕 원옹과 호 태후, 그리고 명제가 함께
모의하여 원차의 병권을 해제함으로써 실권은 다시 호 태후에게 돌아갔다.
다시 권력을 잡은 호태후가 남총 정엄과 간신 서홀을 등용하니, 그들은 "중서, 문하의 사
무를 모조리 손아귀에 넣었고, 군대와 국정의 모든 명령은 그들의 손을 거치지 않는 것이었
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무자간의 세력 투쟁이 벌어졌다. 두 세력은 격렬하게 투쟁했고, 효
명제가 독살당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주영, 고환 같은 정치적 야심가들이 꿈틀꿈틀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먹을 것과 말을 제공하여 용병들을 모아" 빠른 속도로 북방에서 세력을 일으켰다.
북위 정권은 불안을 감추지 못했으나 그들 세력의 성장을 막을 길이 없었다. 그저 추운 겨
울날 언 발에 오줌 누듯, 독약으로 갈증을 일시 해결하듯, 그들에게 끊임없이 관작은 더 얹
어주어 달래는 수밖에 없었다.
무태 원년 2월 호 태후는 정엄, 서흘과 짜고 효 명제를 독살했다. 진작부터 호시탐탐 노리
고 있던 이주영은 이를 구실로 진양에서 군대를 일으켜 간신 정엄, 수흘을 없애 효 명제의
원수를 갚겠노라고 선포했다. 그리하여 파죽지세로 한 달만에 낙양을 함락하는 이른바 '낙
양의 정변'을 성공적으로 달성했다. 이 과정에서 2천 명이 넘는 애꿎은 사람이 비명에 죽어
갔다. 왁자지껄하던 낙양성은 살아있는 것이라곤 열에 하나도 남지 않을 정도로 황폐해졌다.
이주영의 정치 행각은 그 후로도 늘 피비린내를 동반하였다. 이 시기에 북위에서는 적지
않은 대간들이 출현했는데 그 대표적인 자들이 원차, 이주영, 고환 등이었다.
당나라 천부 15년인 756년 7월, 안사의 난이 일어난 후 현종은 허겁지겁 도망쳤고, 이형이
영무에서 즉위하니 이가 바로 숙종이었다. 어조은은 줄곧 이형의 좌우를 따르면 간신으로서
의 일생을 시작했다. 안사의 난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전투에 패하면 어조은은 그 잘못을 다
른 사람에게 뒤집어 씌었고, 이기면 그 공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임금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낙양이 다시 수복된 뒤 그는 그 공으로 개부의 동삼사 에 풍익군공이란 간작을 받았다.
광덕 원년 7월, 토번이 침입해 하서, 롱우 지역을 모조리 빼앗았다. 그러나 정원진은 이러
한 사실을 보고하지 않고 감추었다. 토번의 군대를 계속동쪽으로 진군해 왔고, 수도는 공포
로 떨었다. 10월 7일 대종은 허겁지겁 도망쳤고, 관리들은 겁먹은 쥐새끼마냥 숨어 버렸으
며, 군대도 모조리 흩어졌다.
어조은은 신책군을 이끌고 섬주에서 나와 대종을 맞이했다. 대종 일행은 편안하게 섬주에
이르렀다. 12월 26일 대종은 어조은이 이끄는 군대의 호송을 받아 서울로 돌아왔다. 어조은
은 황제를 잘 모신 공으로 천하관군용선위처치사라는 거창한 직함을 받아 금위군을 몸소 이
끌며 전국의 군권을 손아귀는 거창한 직함을 받아 금위군을 몸소 이끌며 전국의 군권을 손
아귀에 넣었다. 이로써 그는 거침없이, 겁 없이 큰 죄를 저지르기 시작했다.
당나라 때의 또 다른 대간 구사량은 20년 동안 포악하게 권력을 마구 휘둘렀다. 조정 일
에 사사건건 간섭하여 국사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위로는 천자를 끼고, 아래로는 재상을 능
멸했다. 생사 여부를 개인적인 감정으로 처리했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 조정의 혼란에 완벽
하게 기여했다.
보력이 살해되었다. 환관 왕수징이 이앙을 황제로 내세우니 문종이었다. 한순간 왕수징은
천하의 권력을 쥐고 위로는 천자를 억누르며, 아래로는 신하들을 짓밟았다. 문종은 덕종 이
래 환관들이 함부로 군주를 세웠다가 내쫓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하는 상황 속에서 두려
움과 분노로 떨고 있었다. 이 당시 조정도 당파를 지어 서로 싸우고 있었다. 특히 이덕유와
이종민 간의 싸움은 모두지 꺼질 줄 모르는 불과 같았다. 그러니 제대로 일어나 했겠는가?
바로 이런 상황에서 "왕수징을 누르기 위해 보잘 것 없었던" 구사량을 기용, 독으로 독을
공격하여 마침내 왕수징을 제거했다. 이리하여 구사량은 금군을 장악하고, 그를 우두머리로
하는 환관 집단이 형성되었다. 종정은 환관들에 의해 장악되었고, 그 후 20년 이상 나라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역사는 증명한다. 간신이 혼란을 일으키는 근원이라는 사실을. 그러나 반대로 사회적 혼란
또한 간신이 마구 생산되도록 촉진한다는 사실도. 마음 씀씀이가 바르지 못한 자가 늘 기회
를 엿보며 기다리다 혼란을 틈타 권력을 빼앗는 것은 하나의 규칙이다. 간신들을 이 보다
한술 더 뜬다. 그들은 물을 흐려 물고기를 잡는 데 훨씬 더 익숙해 잇다. 그리하여 혼란스러
운 사회에서는 각양각색의 혼세마왕과 간신, 도적들이 생산된다. 오랜 장마가 독버섯을 키우
듯, 오랜 전쟁으로 전염병이 유행하듯.
이때는 한편으로 "집안이 가난해야 효자가 나오고, 나라가 어지러워야 충신이 나온다."는
말과 같이 국가와 백성을 구할 수 있는 인물의 출현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피라미와 용이 마구 뒤섞인 어지러운 상황이 초래되어 충, 간을 구별하지 못하는 상황도 쉽
게 벌어진다.
사회 질서가 문란해지면 평소에는 뜻을 펴지 못하던 야심가와 음모가들이 우리를 뛰쳐나
온다. 이들은 하늘이 내린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나라가 편안할 때는 실현할 수 없었던 자신
의 야심과 목적을 실현시켜 나간다. 동시에 이런 때는 왕왕 사상과 도덕을 교육시킬 겨를이
없고, 감독 기관은 마비되며, 선악과 시비가 뒤바뀌고, 사람들의 도덕 수준은 떨어진다. 게다
가 각종 파벌과 유언비어가 난무하여, 명소에는 고개를 쳐들지조차 못했던 이단 종교나 사
이비 종교들의 사악한 교리와 설법들이 위선의 탈을 뒤집어쓰고 여기저기서 설쳐댄다. 따라
서 행동이 바르지 못한 자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사슴을 보고 말이라고 우겼던 조고, 죽
어도 죄가 남아 넘쳤던 석현, 권세를 훔쳐 세상을 어지럽혔던 동탁, 나라를 팔아 영화를 추
구했던 진회 등은 모두 사회 혼란의 와중에서 기세를 틈타 간신이 된 자들이다.
사회의 혼란은 간신을 생산하고 간신으로 하여금 뜻을 얻게끔 부추긴다. 또 뜻을 얻은 간
신은 다시 사회의 혼란을 더욱 부채질한다. 이는 무수히 많은 사례들이 증명하는 중요한 역
사의 경험이자 교훈이다.
간신의 출현은 절대로 사회, 역사, 정치, 경제적 원인과 분리될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간
신의 출현에 대해 구체적으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이런 점들을 보다 깊이 고려해야 한다.
이론은 가장 본질적인 것이라야 하며 살아 있는 영화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구
체적인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이 가능하다. 추상적인 개념으로 구체적 현상을 대체할
수는 없다. 현재의 공식으로 각종 역사 현상을 칼로 무를 베듯 자를 수도 없다. 특수한 역사
적 상황 하나하나에 대해 구체적인 분석을 가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심오한 이론과 사상만
이 역사 연구에 제대로 적용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이론과 사상을 이용해 우리의
연구를 이끌 수 있다면, 간신의 출현에는 사회, 역사, 정치, 경제적인 큰 배경이 자리잡고 있
을 뿐만 아니라, 개인, 가정, 사회, 환경과 같은 구체적 조건도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모든 간신의 뒤에는 거의 예외 없이 혼군이 자리잡고 있다. 이는 하나의 공식이라고도 말
할 수 있다. 봉건적 사유제를 기초로 한 군주정치 제도에서 황제는 국가 최고 권력의 상징
이다. 따라서 군주 개인의 사상적 수준, 덕과 학식의 정도는 국가의 흥망, 정치의 명암에 결
정적인 작용을 한다. 똑같은 봉건사회였지만 당나라 태종은 신하들의 충고를 잘 받아들여
정치를 높은 수준에 올려놓았는데, 그 당시 간신배나 아첨배들이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사실
이 유력한 증거가 될 것이다.
남북조시대 때 소작이란 인물이 있었다. 그는 군주와 신하, 군주와 백성의 관계에 대해 이
런 말을 남겼다.
"겉모습이 바르지 못하면 그 그림자가 바를 수 없다. 과녁이 분명하지 못하면 과녁을 명
중시킬 수 없다. 군주가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서 백성이 다스려지길 바란다면 그것은 삐
딱한 겉모습을 가지고 바른 그림자를 바라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군주가 자신의 행동을
올바로 하지 못하면서 백성을 바르게 하려는 것은 있지도 않은 과녁을 명중시키려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는 군주의 솔선수범을 특별히 강조하면서 군주 된 사람은 '팔요'와 '이칙'을
반
드시 실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따라서 군주 된 사람은 마음이 물처럼 깨끗해야 하며,
겉모습은 백옥처럼 맑아야 한다. 몸소 인의, 효, 충, 예, 겸손, 절약을 실천하면서도 게으름
피우지 않고 제대로 살펴야만" 비로소 "백성을 가르쳐" 신하와 백성들을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하고 본받도록"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춘추시대 때 제나라 환공은 보라색 옷을 즐겨 입었다. 그러자 신하와 백성들이 너나할것
없이 따라 입는 바람에 다른 색 옷감은 도무지 팔리지 않았다고 한다. 초나라 장왕은 허리
가 가는 여자를 좋아했다. 그러자 아녀자들이 앞을 다투어 가는 허리를 만들려고 굶기를 밥
먹듯이 했다.
군주가 어떤 사람에 대해 불만스러운 감정을 드러내면 즉시 누군가가 그 사람을 헐뜯을
것이다. 제왕이 강직한 신하를 좋아하지 않으면 아첨하는 무리들만 생겨날 것이다. 그러나
군주가 힘써 바른 도를 실천하려 애쓴다면 아랫사람들도 자신의 언행을 삼가 조심하여 함께
노력할 것이다.
<산정소>에 보이는 일화다. 언젠가 당나라 태종이 궁중을 산책하다가 큰 나무 앞에 서
서
"참 나무 좋다!"라고 감탄하며 나무를 칭찬했다. 이때 우문사급이란 이송이 얼른 dub으로
다
가와 그 나무를 칭찬했다. 그러자 태종은 안색을 바꾸며 이렇게 말했다.
"위징이 늘 아첨배를 멀리하라고 충고할 때에는 어떤 자가 아첨배인 줄 몰랐는데 오늘에
야 그의 말뜻을 알겠구나."
역시 <신당서>의 기록이다. 왕규는 일찍이 이전 왕조의 관리로, 태자 이건성과 사이가 좋
았다. 당 태종이 즉위한 후 태상소경 조효손으로 하여금 궁중 음악을 가르치게 했다. 그러나
실력이 그다지 늘지 않자 태종은 여러 차례 조효손을 나무랐다. 그러자 왕규와 온언부자 태
종에게 "혼손은 충실한 인물입니다. 폐하께서 자꾸 그를 나무라시면 천하 사람들이 폐하께
서 인재를 경시한다고 여길 것입니다."라고 직언했다. 이 말에 태종은 화를 내며 "경들은 모
두 짐의 심복들인데 어떻게 아랫사람에게 붙어 짐을 기만한단 말이오?"라고 나무랐다. 온언
부는 겁을 먹고 서둘러 사죄했으나 왕규는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
"신은 본래 전 왕조를 섬겼습니다. 그 죄는 죽어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보잘
것없는 목숨을 어여삐 여기시고 신에게 중책을 맡기셨습니다. 지금 신을 의심하시는데 이는
폐하께서 신을 저버리신 것이지, 신이 폐하를 저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에 태종은 부끄러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음날 태종은 방현령을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예로부터 제왕이 신하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란 참으로 어렵구료. 어제 왕규 등을 나무랐
다가 아주 후회했소이다. 그대들은 그 일 때문에 할 말을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당태종에 관해서는 이런 이야기도 전해온다. 제주 지방에 단원충이란 젊은이가 있었는데
사람이 재능이 모자란지라 정관의 다스림으로 천하가 태형한데도 불구하고 불만을 잔뜩 품
고 있었다. 어느 날 주점에서 술을 잔뜩 퍼마시고는 갑자기 신경질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는
젓가락을 사납게 내던지고는 욕을 하며 당 태종을 비판하는 의견서를 쓰기 시작했다.
이 사건은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모두가 단원충의 목을 베어 모두에게 경고해야 한
다고 열을 올렸다. 신하들의 열띤 논쟁을 듣고 있던 태종은 단원충의 의견서를 집어들고 다
음과 같은 글을 썼다.
"그의 말이 옳다면 그것은 충성심에서 나온 것일 테고, 그의 말이 틀리다면 그것은 미친
소리다. 충성에서 나온 말을 원수로 삼아서는 안 되며, 미친 소리를 가지고 비교해서야 되겠
는가. 이는 마치 안개가 하늘을 다 가릴 수 없고, 구름이 밝은 기운을 손상시킬 수 없는 것
과 같은 이치이다. 단원충에 대하서는 더 이상 죄를 묻지 말고 용서하도록 하라."
윗사람이 진실된 말을 들을 줄 알면 아랫사람들도 진실된 말을 하게 된다. 윗사람이 너그
러우면 아래 사람이 편해진다. 윗사람이 비판을 두려워 하지 않으면 아랫사람이 아부하지
않는다. 당 태종이 바로 이러했기 때문에 당시에는 충신과 어진 신하들이 적지 않게 출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는 전 왕조의 간신들조차도 정직하게 변했으니 이 얼마나 흥미로
운 사실인가!
한번은 원나라 영종이 대신 배주와 이야기를 나누다 이런 말을 던졌다.
"지금 우리 시대에 당나라 때의 위징같이 과감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소?"
"그야 황제가 어떤 황제내에 따라 달라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둥근 그릇에 물를 담으면
둥글게 되고 네모난 전에 물을 담으면 네모난 모양이 되지요. 당 태종에게는 바른 말을 받
아들일 만한 도량이 있었기 때문에 위징이 용감하게 바른 소리를 할 수 있었던 겁니다."
배주의 대답은 그럴 듯했고, 영종도 옳은 말이라 여겼다.
이런 점에서는 송나라 태조 조광윤도 거론할 만하다. 조광윤은 정변으로써 곤룡포를 걸쳤
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부하들도 똑같은 일을 일으키지나 않을까 몹시 걱정했다. 그러나 그
는 술자리에서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털어놓음으로써 부하들의 병권을 회수했다. 이로써 조
정의 혼란과 어두운 장래를 해결했다.
조광윤은 무인이었지만 비교적 뛰어난 정치적 견해와 행동을 창업 단계에서 보여주었다.
그는 책읽기를 너무 좋아해서 손에서 책을 놓는 적이 없었다. 행군을 하거나 전투를 벌일
때도 틈만 나면 공부했다. 어디에 귀한 책이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돈을 아끼지 않고 사서
보아야 직성이 풀렸다. 장수들은 대체로 전투가 끝나면 금은보화에 관심을 기울였지만 그는
오로지 각종 서적을 수집하는 데 관심을 쏟았다.
언젠가 후주의 세종 시영을 따라 회남으로 출정했을 때의 일이었다. 조광윤이 크고 작은
상자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을 본 누군가가 시영에게 조광윤이 제물을 약탈했다고 보고했
다. 세종은 곧 사람을 보내 조사하게 했다. 그 결과 보물이라고는 단 한 점도 발견하지 못한
반면 책이 나왔다. 세종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여 조광윤을 불렀다.
"너는 나의 중요한 장수로서 군사들을 강하게 훈련시키고 영토를 넓혀 공을 쌓아야 하거
늘 그렇게 많은 책은 어디다 쓰려느냐."
이에 조광윤은 뛰어난 지략으로 폐하를 돕지도 못했는데 무거운 임무를 맡아서 늘 마음에
걸렸다면서, 책을 많이 구해 식견을 넓혀보다 큰 공을 세우려 했다고 대답했다.
조광윤은 특히 역사책을 좋애했는데 진나라의 대장 백기가 수십만에 이르는 조나라 병사
를 파묻어 족인 사실에 대해 격렬하게 비판했다.
"조나라 군대가 이미 행복했으니 무력을 쓰지 않는 것이 옳았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는 늘 자신의 부하 장수들에게 함부로 죽이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당 태종은 일대의 영명한 군주로, 호심 탄회하게 신하들의 바른 소리를 받아들였다. 그러
나 조광윤은 군주란 먼저 자신의 몸을 바르게 해야지, 다른 사람의 말에 의지해서는 안 된
다고 생각했다. 그는 독서를 통해 사색하고, 실천을 통해 몸소 경험하며 깨달았기 때문에 비
교적 깨우친 군주가 될 수 있었다. 정치적 수준도 그런 대로 갖추었고, 민본주의 사상도 갖
추고 있어 세금을 가볍게 하고 관리의 청렴을 강조했다. 이를 위해 군신이 서로 도울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언젠가 술좌석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원래 후주의 신하였던 왕저가 술에 취해 불현듯 옛 주인이 생각났던지
목놓아 통곡을 하면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다른 신하들은 새파랗게 질려 식은땀을 줄줄 흘
렸다. 그러나 조광윤은 그를 나무라지 않고 사람을 시켜 그를 데리고 나가 쉬도록 했다. 그
런데도 왕저는 나가지 않고 병풍 뒤에 숨어 대성통곡했다. 이때 누군가가 왕저가 여러 사람
앞에서 우는 것은 후주 세종이 그리워 그런 것이니 마땅히 엄벌로 다스려야 한다고 했다.
"취해서 그러네. 세종 때 나는 그와 같은 후주의 신하였네. 그의 성격은 내가 잘 알지. 그
는 글 배운 서생으로 옛 주인이 생각나 우는 것일 뿐이지, 큰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
니 그냥 놔두게."
조광윤의 대답은 참으로 뜻밖이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진교의 정변'을 일으킨 후 황궁으로 진입한 조광윤은 후궁이 어린애를
안고 있는 것을 보고 누구의 아이냐고 물었다. 후궁은 후주 세종의 아들이라고 대답했다. 당
시 범질, 조보, 반미 등 측근들이 모두 그 자리에 있었다. 조광윤은 이들에게 어떻게 처리해
야 할지를 물었다. 조보가 대답했다.
"당연히 없애야지요. 그래야 후환이 없습니다."
그러나 조광윤의 생각은 달랐다.
"내가 다른 사람의 자리를 빼앗았는데, 게다가 그 사람의 자식까지 죽이는 일은 차마 할
수 없소."
그리고는 아이를 반미에게 맡겨 기르게 했다. 아이는 성인이 된 후 자사라는 관직에까지
올랐다. 이런 행동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역시 조광윤이 진교의 정변을 일으켰을 때의
일이다. 진교를 지키고 있던 수문관이 문을 굳게 걸어 잠구고 조광윤의 군대를 들여보내지
않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봉구 쪽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봉구의 수문관은 즉시 문을 열어
조광윤의 군대를 통과시켰다. 황제 자리에 오른 뒤 조광윤은 즉시 진교의 수문관을 자신의
임무에 충실했다고 칭찬하며 승진시켰다. 그러나 봉구의 수문관에 대해서는 위기 때 자신의
직책을 수행하지 않았다며 나무라고는 목을 베었다. 이는 새 왕조를 튼튼히 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기는 했지만 객관적으로 보아 충성을 격려하는 조치였다.
정변을 일으키고도 조광윤은 함부로 반대파를 죽이지 않았다. 따라서 북송이 후주를 대체
하는 과정은 비교적 평화로웠다. 당시 어떤 사람이 조광윤 집안과 원수가 졌던 집안의 명단
을 작성해서 모조리 죽일 것을 권햇다. 그러나 조광윤은 평상시에 앞으로 나올 천자나 재상
을 알기란 불가능하지 않느냐며 숙청하지 않았고, 관용으로 전 왕조의 유능한 신하들을 중
용했다.
조광윤은 후원에서 새 잡는 것을 좋아했다. 어느 날 새 잡기를 하고 있는데 한 신하가 긴
급한 일이라며 만나기를 청했다. 조광윤은 그를 맞아들여 그가 올린 주장을 훑어보았는데
별일이 아니었다. 조광윤은 화를 내며 그 신하를 나무랐다. 그러자 그 신하의 대답은 이러했
다.
"신은 이 작은 일이 새를 잡는 일보다는 더 급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대답에 조광윤은 화가 머리끝까지 미쳐 단숨에 도끼로 신하의 이빨을 때련 이빨 두 개
를 뽑아 버렸다. 그러나 신하는 비명도 지르지 않고 이빨을 주워 자신의 품에 간직했다. 신
하의 침착한 행동에 조광윤은 더 화가 났다.
"이빨은 잘도 챙기는구나. 그래 내게 뭔가를 충고할 생각인가?"
"폐하에게 충고할 권리가 제게는 없습니다. 다만 사관이 오늘의 일을 기록할 테니까요."
이 말에 조광윤은 순식간에 기세를 꺾었다. 그가 정말 충신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조광윤
은 그에게 큰상을 내리도록 명령했다.
조광윤은 군신들에게 모범을 보이며, 충직한 자를 표창하고 헐뜯는 말들을 물리쳤다. 충직
하고 신의 있는 인물을 알맞은 자리에 기용하고 간신배들을 멀리했다. 이로써 조광윤은 국
력을 상승시키고 통일이라는 대업을 이룰 수 있었다.
대개 창업 군주는 전 왕조가 농민 봉기의 쇠주먹을 맞고 쓰러지는 것을 직접 자기 눈으로
목격한다. 따라서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배를 엎을 수도 있다."는 이치를 알고 있었
다. 개인의 자질로 볼 때 그들 대부분은 큰 뜻과 재능을 지닌 인물들로서, 용맹한 장수와 강
직한 신하를 부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보잘 것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고
생고생 끝에 성장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교만하고 사치스러운 마음을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남북조시대의 송나라 고조 유유가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왕위에 오르자 그에
게 호화스러운 잔치를 벌이고, 금으로 장식한 침상을 쓰라는 자들이 있었지만 그는 단호히
물리쳤다. 광주에서 매우 화려한 옷감을 바친 적이 있었다. 유유는 그런 화려한 옷감으로 옷
을 해 입는 것은 낭비라며 옷감을 되돌려 보내고, 관련 부서로 하여금 광주 태수를 탄핵하
게 했다. 이러했기 때문에 간신 무리들이 몸을 움츠리고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개국 황제라 해도 끝이 좋았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리고 수성 단계의 군주에 이르
면 서서히 아래로 미끄러지기 시작한다. 부귀하게 태어나 영화 속에 성장하면서 말 한마디
면 무엇이든 가능한 존엄한 존재가 되어간다. 그리하여 기회를 엿보던 간신 무리들이 생겨
나고 허점을 틈타 파고든다. "위에서 눈을 치켜뜨면 아래서는 위에서 부는 곳을 치장한다.
위에서 귀를 쫑긋거리면 아래서는 위에서 듣기 좋게 말을 꾸민다. 위에서 허전해 하면 아래
에서는 번잡한 말로 비위를 맞춘다. 위에서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아래에서는 그것을 위해
법석을 떤다."
채경은 황제에게 흘러 넘치는 즐거움을 안겨줌으로써 귀여움을 받았다. 주면은 화석을 바
쳐 영화를 누렸다. 왕보는 아부를 잘해 자리를 얻었다. 이 모든 경우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여씨춘추>를 보면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춘추전국시대에 제나라가 송나라를 공격
했
다. 송나라 왕언은 사람을 보내 제나라 군대가 어디쯤 왔는지 알아보게 했다. 파견됐던 사람
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제나라 군대가 이미 바짝 다가와 있어 나라 사람들이 모두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언은 벼락같이 화를 내며 그 자의 목을 베어 버렸다. 그
리고는 다시 사람을 보내 정탐하도록 했다. 그 자의 보고도 전과 똑같았다. 언은 또 그 자의
목을 베었다. 이렇게 잇달아 세 사람을 처형했다.
마지막으로 또 한 사람이 정탐을 위해 파견되었다. 상황은 마찬가지였으나 죽음이 겁난
이 자는 자신의 형과 상의했다. 그의 형은 이렇게 말했다.
"이전의 경우로 보아 사실대로 보고했다간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돌아와 이렇게 보고했다.
"제나라 군대는 애당초 있지도 않았습니다. 천하는 태평합니다. 앞사람들의 보고는 모두
헛소리였습니다."
언은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많은 재물을 상으로 주었다. 제나라 군대가 수도로 접근할 무
렵 이 자는 재물을 챙겨 다른 나라로 달아나 잘 살았다.
이와 비슷한 경우는 또 있다. <사기>의 기록을 한번 보자. 조고가 난을 일으켜 진 2세를
죽이려 할 때 진 2세 곁에는 어린 태감 하나가 남아 있었다. 2세는 태감에게 "상황이 이 지
경이 되도록 왜 진작에 내게 알리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태감은 몸을 떨며 "일
찍 말씀드렸더라면 지금 제 목은 붙어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군주가 어리석으면 신하는 어두워진다. 주인이 아첨을 좋아하면 신하는 간신이 된다. 지극
히 당연한 이치다. 사실 혼군과 간신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그들은 모두 봉건적 사
유제의 산물이다. 혼군은 자신을 대신해서 백성을 탄압하고 충직한 인물을 제거하며, 진리를
감추고 정의를 파묻음으로써 자신의 통치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충성스러운'
간신을 필요로 한다. 또 두루두루 살펴 자신의 비위를 맞추며, 은근히 자신을 돌보고, 심리
적 만족과 생리적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간신을 필요로 한다.
한편 간신도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보호막과 높은 자리로 올라가는 데 필요한 사다리로
서의 혼군을 필요로 한다. 그들은 정치에서 서로 의지하며, 생활에서 서로 의기투합하고, 사
상에서 서로 통한다. 혼군과 폭군은 간신이 설쳐댈 수 있는 가능성을 높였으며, 간신들은 또
혼군, 폭군을 위해 충직한 개와 노예로 있는 힘을 다했다. 그들은 본래 일맥상통하는 존재들
로서 공통의 이익과 공통의 섭리적 본질을 갖고 있다. 간신은 대단히 복잡한 사회, 역사 현
상이자 경제적 현상이다. 이는 마치 <신당서><혹리전>에서 "관리가 감히 가혹해지는 것
이
아니라 시대가 가혹함을 유혹하는 것이다."라고 진단한 것과 같다.
이러한 인식과 이해가 있어야만 보다 높은 차원에서 간신을 인식하고 간신의 본질을 파악
할 수 있다. 의심할 바 없이 간신은 썩은 나무에서 자라나는 독버섯과 같다. 그들은 봉건적
사유제라는 토양에서 싹을 틔워, 썩은 정체제도 하에서 퍼져나가며, 혼군을 업고 혼란한 사
회 정세 속에서 마음껏 설쳐댄다. 이에 대해 우리는 역사적이고도 전면적인 고찰과 분석을
거쳐 간신의 출현과 성장 및 소멸을 파악해야 하며, 그래야만 비로소 간신의 본질과 활동
규칙 등에 대해 비교적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간의 성격 분석
부귀영화를 탐내 나라를 기왓장처럼 내던지고 백성을 들풀만도 못한 존재로 여긴다. 권력
을 위해서는 부자지간이라도 양보가 없고 형제라도 서로 죽인다. 현명하고 능력 있는 자를
시기하여 죽음으로 몰고, 군주를 포악하게 이끌어 사악한 방법으로 백성을 다스리게 한다.
책임과 죄는 다른 사람에게 뒤집어씌우며, 세상 속이고 명예를 도적질한다. 자기와 다른 자
를 배척하고 선량하고 뛰어난 인물은 조정에서 내쫓는다. 겉으로는 떠받들지만 돌아서서는
배반하며, 등뒤에서 화살을 쏘아 헤친다. 바로 간성을 증명하는 것들이다.
간신들이 저지르는 죄악은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현되며, 따라서 그 행동들이 가지는 특징
을 파악하지 않고서는 간신이라는 판단을 내릴 수 없다. 즉 말보다는 실제 행위를 보아야
하는 것이다. 사실 기꺼이 간신이 되려 한 자는 많았지만 간신이란 오명을 쓰고 싶어한 자
는 없었다. 왜냐하면 일단 '간'으로 지목되면 후대까지도 멸시와 수치를 맛보아야 하기 때문
이다.
청나라 건륭 연간에 장원급제한 항주 사람 진간천이 역사의 대간 진회의 무덤을 보며 치
밀어오르는 수치심과 감정을 참지 못하고 다음과 같은 글로써 참담심정을 전했다. 진간천,
그는 다름 아닌 진회의 후손이었다.
"사람들은 송나라 이후부터 회라는 이름을 부끄러워했고, 나는 지금 그 무덤 앞에서 진이
라는 성에 참담해 하는구나."
대개 이러했기 때문에 예로부터 간신의 길로 빠지는 것을 크게 두려워했으며, 간신이란
오명을 쓰는 것이 겁나 죽을힘을 다해 간신 부류에서 빠져 나오려고 발버둥을 쳤던 것이다.
진회 같은 분명한 거간조차도 역사를 개찬하고, 실록을 날조하려 했으며, '문자옥'을 일
으
켜 자신을 칭찬하는 자는 살려두고, 솔직한 붓을 휘두르는 자는 제거하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간'자로부터 몸을 빼려 했다. 이 때문에 후세 사람들은 진회가 재상이 된 이후
의 기록은 모조리 "아부를 일삼는 간신의 기록"에 지나지 않는, 근본적으로 "천하 후세에
믿을 만한 자료로 전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기기까지 했다.
따라서 우리가 간신을 가려내기 위해서는 그들의 실제 행동을 장악하여 그 특징을 밝혀
내야만 한다. 그렇다면 간신들의 행동에는 어떤 특징이 있어 그들의 간성을 증명할 수 있는
가? 몇 가지를 열거해보자.
첫째, 부귀영화를 위해 국가를 기왓장처럼 버리며, 백성을 들풀만도 못하게 여긴다.
간신은 일이 닥치면 먼저 자신을 의해 주판알을 굴린다. 모든 것이 개인적인 득실에 따라
좌우된다. 그들의 누에 나라와 백성은 헌신짝이나 썩어빠진 풀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이 철
석같이 떠받드는 철학은 '젖 주는 사람이 곧 나의 어미', 바로 이것이다.
서진시대의 왕연은 돈을 말하지 않는 고고한 인품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이러했기 때문에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졌고, 관직도 날로 높아져 중서령, 사도, 사공, 태위의 중책을 거쳤다.
그러나 과연 정말 그랬던가?
당시에는 가 황후가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는데, 사구 부인의 소생인 태자 사마휼을 해치
려 했다. 왕연은 중령군 상서령에 있었고, 그의 딸이 태자비였다. 왕연은 이런 상황에서 자
신에게 화가 닥칠까봐 굳이 딸을 태자와 이혼시켰다. 그로부터 얼마 뒤 태자는 자리에서 쫓
겨났고 곧 살해되었다. 왕연은 그의 딸이 이미 태자와 이혼하여 '경계선을 명확히 그었기
때
문에' 자리를 보전할 수 있었다.
그 뒤 성도왕 사마영, 하남왕 옹, 동해와 월이 잇달아 권력을 휘들렀다. 왕연은 그 와중에
서도 재보라는 요직을 지키면서 오로지 어떻게 하면 난세에서 자신을 보전할 수 있을까만을
생각했다. 그는 두 동생을 형부자사와 청주자사로 발탁했는데, 두 동생과 함께 한 자리에서
의기양양하게 이런 말을 했다.
"소주는 강한의 견고함이 있고, 청주는 바다를 뒤로 한 험준한 곳이다. 두 동생께서 그 곳
에 있고, 나는 여기에 있으니 세 개의 굴이 되기에 족하지 않은가?"
오직 자신의 잡안과 목슴만 돌보고, 국가의 안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왕연의 이러한 간사
스러움은 점차 세상 사람들에게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성인군자'의 가면을 벗어 던지
기 시작한 것이다.
영가 5년, 서진 왕조가 멸망의 위기에 처했다. 낙양성은 석륵에게 격파 당했다. 갈 사람인
석륵은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대의명분이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
가 왕연에게 진이 패망한 까닭을 묻자 왕연은 자기 한 몸 빠져 나오기 위해 자신의 정사에
참여한 적이 없다며 책임을 이리저리 미루는 한편, 극진한 아부로 석륵에게 꼬리를 쳤다.
왕연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석륵은 벼락같이 소리를 지르며 왕연을 추궁했다.
"천하에 이름이 알려져 있고 높은 자리에 오른 자로서 일찍부터 조정에 들어와 머리가 허
옇게 셀 때까지 있었던 자가 정사에 간여한 적이 없다는 게 말이 되는가! 천하가 파괴된 것
은 바로 너의 죄로다!"
석륵은 왕연의 사람됨을 멸시하면서 담을 무너뜨려 깔려 죽게 함으로써 이 자갈같이 쓸모
없는 간신을 징벌했다.
당이 망하고 송이 서기까지 50여 년 동안 천하는 5대 10국의 난세였다. 군벌이 서로 다투
고 군웅이 세력을 나누어 가진 채 너나할것없이 천자가 되려고 각축을 벌였다. 왕조가 수시
로 바뀌는 이 시대에 스스로를 '장락노'라 불렀던 풍도라는 자는 이렇게 허풍을 떨었다.
"집에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아들, 형제, 신하, 스승, 남편, 아비로서의 자손이 있구나.
수시로 책을 펼치고, 내킬 때 먹고 마시며, 소리와 색을 멀리하면서 당대를 편안하게 늙는다
면 이보다 더한 즐거움이 있으랴?"
풍도는 영주 경성 사람으로 책을 많이 읽고 색을 멀리하며 고행에서 살았다. 일찍이 당나
라 말년에 유주참군에 임명되었고, 그 뒤 후당에서 재상까지 지냈다. 그러나 그는 조정의 대
신으로서 군주에게 직간하지 않았으며, 백성을 구제하지도 않았다. 물론 관리를 깨끗하게 다
스리지도 않았다. 국가와 민족이 멸망에 빠질지도 모르는 긴박한 순간에 그는 끊임없이 자
신의 영혼을 내다 팔았다. 처음에는 노왕에게 항복하더니 다음에는 석경당에게, 다시 거란에
게, 또 다시 후한, 후주에 투항했다. 그는 언제든지 백관을 이끌고 성을 나와 새 주인을 기
꺼이 맞이했다. 거란을 제외하고도 수십년 동안 그는 모두 네 왕조, 아홉 군주를 섬겼다.
<신오대사>에 따르면 거란이 진을 멸망시키니 풍도는 다시 야율덕광을 서울로 맞아들여
거란을 섬겼다. 야율덕광이 풍도에게 진을 섬기면서도 공이 없었다고 질책했다. 그리고는 또
"왜 (나를) 섬기려 나왔는가?"라고 묻자, 풍도는 "성도 군사도 없는데 어떻게 감히 나오지
않을 수 있습니까?"라고 대답했다. 두사람의 대화를 좀더 들어보자.
"당신이 뭐 노자라면서?"
"재주도 덕도 없는 아둔한 늙은이일 따름입죠."
이 말에 야율덕광은 껄걸 웃으며 좋아라 했다. 그리고는 그를 태부로 삼았다. 보아가! 바
로 이것이 '젖 주는 자가 어미'라고 생각하는 자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인가? 여기 그 어디
에
인간의 양심과 감정이 있는가?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서라면 국가와 민족과 백성을 돌보지
않는 것, 바로 이것이 모든 간신의 두드러진 표식이자 큰 특징이다. 그들에게 애국심이나 인
간적 양심이라고는 터럭만큼도 없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깝게도 품안에서 이런 간신을 길러
내지 않은 민족은 없었다.
둘째, 이권 싸움에서는 부모와 자식 사이라도 양보하지 않는다. 야심이 발동하면 형제 사
이라도 서로 죽인다.
권력을 바라 권력을 다투고, 권력을 얻어 권력을 어지럽힌다. 간신들의 정치생활, 사회생
활을 구성하는 전부다. 그리고 또한 그들을 그들답게 만드는 두드러진 특징이기도 하다. 그
들은 부귀영화가 권력, 지위와 얽혀 있지 않은 것이 없다고 믿는다. 권력이 있으면 모든 것
을 가질 수 있고, 권력이 없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고 여긴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영
혼은 물론 친구도 내다 판다. 심지어는 아내와 자식, 아비와 임금까지도 죽인다. 형제끼리
싸우며 부모와 자식이 서로를 죽인다. 천륜을 저버리고 인륜을 뒤집는다. 이로써 그들이 끼
친 해악은 자손만대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북제서>에 실린 간신 화사개에 관한 기록에 따르면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거간 화
사개가 권력을 쥐고 한창 잘 나가고 있을 때 화사개에게 접근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한 자들
이 있었다. 한 자리 하기 위해 나이도 얼마 되지 않은 화사개를 아버지로 모신 사대부들도
있었다. 한번은 화사개가 병이 났다. 의사는 병이 심각해 황룡탕을 마셔야 나을 수 있다고
했다. 황룡탕이란 다름 아닌 오줌 끓인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화사개는 난처하기 짝이 없었
다. 이 때 어떤 선비놈 하나가 화사개의 환심을 사려고 스스로 '와을 위해 먼저 맛본다'는
식으로 자신도 그렇게 하겠다며 용감하게 나셨다. 그리고는 오줌 한 사발을 숨도 안 쉬고
깨끗하게 비웠다. 권력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이렇듯 자신을 천박하고도 비굴하게 만드는
간신들이 적지 않았다.
간신은 권력을 얻기 위해서라면 자는 것도 먹는 것도 잊고 그것만을 집요하게 추구한다.
모든 생각을 거기에 집중시키고 혼신의 힘을 다한다. 부자 형제간이라도 양보란 있을 수 없
다.
<송사><채경,채유전>울 한번 보자. 채경의 아들인 채유는 아비 채경 못지 않게 음흉하고
꾀 많은 자였다. 휘종이 아직 황제에 오르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휘종이 조정에서 물러나올
때마다 매번 조정에서 일하고 있던 채유와 맞닥뜨렸는데. 그때마다 채유는 반드시 말에서
내려 몸을 굽힌 채 극진하게 인사를 올렸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 휘종은 채유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좌우에게 저자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채경의 아들 채유라고 일러주었
다. 그때부터 휘종은 채유에게 자못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황제가 된 후 휘종은
채유를 아주 총애했다. 자리가 높아짐에 따라 채유는 보다 막강한 권력을 얻고 싶어졌다.
그러더니 마침내 그 아비와 권력을 놓고 서로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아비와
자식이 문 앞에 서서 서로 원수 대하듯 싸우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한번은 채유가 아비
채경의 집을 찾아와서 느닷없이 채경의 손을 잡고 맥을 짚어본 다음, "대인의 맥박이 느린
것을 보니 틀림없이 몸이 불편하지요?"라고 했다. 채경이 아니라고 대답하자 채유는 돌아갔
다. 당시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 채경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들은 잘 모를 게요. 그 아이가 병을 구실로 나를 파면시키려는 것이요."
며칠 뒤 아니나다를까 채경은 파면되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인가! 가장 풍자적인
경우는 이임보의 경우였다. 그는 평생을 "오로지 남을 모함하는 대 힘쓰다가" 끝내는 그 자
신이 "남의 모함을 당하고" 말았다. 그를 모함했던 자는 다른 사람 아닌 그의 측근 길온이
었다. 당초 길온은 이임보에게 붙었으나 "부림을 당하고도 끝내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자"
마침내 이임보를 배반하고 양국충에게 몸을 던져 끝내는 이임보로부터 당 현종의 총애를 빼
앗았다. 이임보는 "어찌 된 일인지 몰라 끙끙 앓다가" 천보 11년 파란만장한 간신의 일생을
마쳤다.
"한 사람 앉아 있는 황제요, 한 사람은 서 있는 황제라. 한 사람은 주씨 황제요, 한 사람
은 유씨 황제로구나."
이 말은 명나라 무종이 황제로 있을 때 서울 안팎에 떠돌던 참으로 웃지 못할 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앉아 있는 황제와 주씨 황제'는 다름 아닌 무종 주후조를 가리키며, '서 있
는 황제와 유씨 황제'란 대간 유근을 가리킨다. 유근이 당시 얼마나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
었는지 잘 보여준다. 그러나 이런 유근을 제거한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동료이자 '팔호'
중 하나였던 태감 장영이었다. 장영과 유근은 원래 아주 가까운 사이였으나 유근이 권력을
독점하는 데 불만을 품게 되면서 점점 멀어졌다. 그 뒤 유근이 무종에게 장영은 쓸모없어
졌다며 그를 내쫓자고 말했다. 그런데 이 일이 장영에게 알려졌다. 장영은 유근에 의해 관
직을 박탈당했던 양일청과 연합하여 유근이 저지른 죄를 정리해서 그를 탄핵했다. 그와
동시에 유근의 집에서 갑옷과 활과 늘 몸에 지니고 다니던 아주 예리한 비수를 숨긴 부채를
찾아냈다. 무종은 지금까지 줄곧 자신의 머리 위를 왔다갔다하던 부채를 보고는 간담이 서
늘해졌다. 무종은 유근을 능지처참한 후 목을 저잣거리에 내걸어 모두에게 보이도록 했다.
권력! 모든 간신의 행위는 권력을 둘러싸고 진행되기 마련이다. 모든 것을 권력과 관련지
어 생각한다. 마치 술에 취한 듯, 정신이 나간 듯 권력에 빠져 자나깨나 권력을 꿈꾸고, 권
력을 얻기 위해 싸우고 모함하며, 권력을 지키기 위해 권력을 휘두른다. 이런 자는 원래 간
신이 아니었더라도 끝에 가서는 결국 간신의 길로 떨어진다. 선량한 사람들이여, 절대 그들
과 가까이하지 말지어다.
셋째, 충성스럽고 선량한 사람을 배척하고 모함하여 반드시 목적을 이룬 다음에라야 그만
둔다. 현명하고 유능한 인물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죽음으로 몰아넣은 다음 통쾌해 한다.
현명하고 유능한 인물을 시기, 질투하고, 충직하고 착한 사람을 배척, 모함하는 것은 간신
의 탐욕스럽고 비굴하며 부끄러움을 모르는 본성에 따른 것이다. 이런 본성은 겉으로 강렬
한 배타성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충직하고 유능한 사람들은 덕성이란 면에서는 물론 재능
이란 면에서도 그들을 초라하게 보이게 만들고, 그들의 야심을 실현시키는 데 가장 큰 장애
물이 된다. 이 때문에 그들은 장애를 제거하는 데 아낌없이 힘을 쏟는다. 자기와 다른 사람
들을 배척함으로써 자아를 실현하고, 남에게 타격을 입힘으로써 자신을 높이며, 충성스럽고
착한 사람을 모함하여 높은 곳으로 기어오르는 길을 닦는다. 따라서 현명하고 유능한 사람
을 시기, 질투하는 것은 간신들의 공통점이 된다.
북주의 우문호는 민제, 명제, 무제를 잇달아 옹립했다. 황제를 통제하고 은총을 유지하기
위해 황제와 친하려는 사람 또는 황제가 친하게 지내려는 사람은 눈에 가시오, 몸 속에 박
힌 못처럼 여겼다. 우익이 무제의 신임을 얻어 심복이 되려 하자 우문호는 그를 무제 곁에
서 떼어놓기 위해 겉으로는 치켜세우면서 속으로 끌어내리는 계략으로 그를 소사도로 승진
시키는 한편, 주국이라는 명예 관직도 주었다. 겉으로는 이를 대 없이 존중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멀리하고 배척한 것이었다.
하약돈은 북주의 용감한 장수로서 그 영웅적이고 높은 기개로 이름을 떨쳤다. 우문호는
하약돈이 자신을 뛰어넘을까 두려워 그를 꺼리고 해침으로써 마흔 다섯의 젊은 나이에 그러
하여금 한을 품고 구천을 떠돌게 만들었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두치와 함께 황제를 수행하여 사냥을 나갔다. 두치는 모두 토끼 열
일곱 마리를 잡은 반면, 우문호는 열 한 마리를 잡았다. 황제 앞에서 자기보다 뛰어난 능력
을 발휘한 두치에 대해 우문호는 걷잡을 수 없는 질투심에 사로잡혔다. 그는 이때의 일을
19년 동안 마음에 새기고 있다가 권력을 손아귀에 넣은 다음 즉각 두치를 의주자사로 좌천
시켜 버렸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입으로는 달콤한 말을 하면서 뱃속에는 칼을 품고 있다.'는 '구밀
복검'의 대명사 이임보의 꿍꿍이 속은 도무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고 한다. 그는
늘 번지르르한 말로 상대를 끌어들인 다음 몰래 중상모략하여 해쳤다. 황상이 가까이하는
사람이 있으면 먼저 그와 아주 친하게 지내다 그 위세가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위협이 된다
고 느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거해 버렸다. 제 아무리 노련하고 교활한 자라도 그 술
책에서 빠려 나가지 못했다.
어느 날 현종이 긑정루 창가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풍채가 남다른 병부시랑 노현
이 때마침 그 아래를 지나갔다. 현종은 풍류적 기풍이 넘쳐흐르는 그의 모습에 연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현종의 마음을 읽은 이임보는 노현의 아들을 불러들여 이렇게 말했다.
"자네 부친께서 맑고 깨끗함을 존중하시어 지금 성상께서는 자네 부친을 외지의 자리로
내보내시려 하는데 괜찮겠나? 만약 괜찮지 않다면 말 그대로 맑고 깨끗한 한직이랄 수 있는
빈객허사를 요구할 수도 있는데 어떤가!"
이 말을 전해들은 노현은 겁이 더럭 나 빈객허사를 자청했다. 이임보는 사람들이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을까봐 노현을 일단 화주자사로 임명했다. 그리고는 얼마 후 노현이 병이 있
어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다며 더 작은 자리로 내쫓았다.
이런 일도 있었다. 한번은 현종이 이임보에게 "엄정지는 지금 어디 있는가? 그 사람 쓸
만하던데."라며 엄정지의 근황을 물었다. 엄정지는 원래 중서 시랑이었는데 이임보를 천박한
인물로 여기다가 이임보에 의해 강주 자사로 좌천된 인물이었다. 그런데 현종이 엄정지를
찾은 것이다.
이임보는 곧 엄정지의 동생 엄손지를 불러 황상이 엄정지를 무척 보고 싶어하시니까 이
틈에 중풍에 걸려 경성으로 돌아와 병을 치료하고 싶다고 황상에게 청을 드리라고 일러주었
다. 동생의 말을 들은 엄정지는 이임보의 말대로 현종에게 글을 올렸다.
"정지는 이미 늙은데다 중풍까지 들었으니 한직으로 물러나 요양아니 했으면 합니다."
그리하여 엄정지는 첨사라는 보잘것없는 자리로 쫓겨났다. 이임보는 황제를 기만하고, 아
랫사람을 억누르며, 멋대로 권력을 휘둘렀다. 재상으로 있었던 19년 동안 그는 아무도 자신
을 뛰어넘지 못하게 했다. 오로지 극진한 아부와 절대 순종하는 자만이 액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사마광은 <자치통감>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현종은 만년에 평화로운 분위기만 믿고, 천하에 더 이상 근심거리는 없다고 여겼다. 그리
하여 궁궐에 깊숙이 틀어박혀 여자와 놀이로만 세월을 보내고, 정사는 몽땅 이임보에게 맡
겨 버렸다. 이임보는 좌우를 아첨으로 섬기고, 황상의 뜻에 비위를 맞추며, 자신에 대한 황
상의 귀여움을 확고히 했다. 언론을 막고 총명함을 가렸다. 현명하고 능력 있는 자를 시기하
고 질투했으며,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배척함으로써 자기 자리를 지켰다. 여러 차례 큰 사건
을 만들어 귀한 신하들을 죽이고 내쫓음으로써 그 세력을 확장했다. 황태자 이하 모두가 두
려워했다. 재상으로 있었던 19년 동안 천하를 어지럽혔으나 황상은 깨닫지 못했다."
참으로 비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역사의 기록을 들추어보면 간신들이 자리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유능하고 충직한 인물
들을 시기, 질투, 배척, 모함한 일은 셀 수 없이 많다.
<명사>의 기록에 따르면 명나라 세종 때의 이름난 재상 하언은 "호방하고 준수한 인재로
서 종횡으로 웅변과 반박을 늘어놓으면 아무도 굴복시킬 수 없는" 세종의 오른팔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 점이 간신 엄숭의 질투심에 걷잡을 수 없는 불길을 당겼다.
엄숭은 하언이 그를 도와준 은혜마저도 저버리고 자신의 출세에 장애가 되는 하언을 쓰러
뜨리리라 결심했다. 그리하여 엄숭은 하언의 약점을 간파한 후, 그 약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그와 대조되게 행동했다. 하언은 성질이 불같았으나, 엄숭은 그 반대로 부드럽고 은밀한 아
첨으로 대했다. 아랫사람을 매섭게 다스리면, 엄숭은 겸손을 떨며 공경하는 척 기꺼이 아랫
자리를 자처했다. 물이 불을 끄고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고 했던가. 과연 시간이 흐를수
록 엄숭은 세종을 포함한 상하 모두에게 호감을 사기에 이르렀다. 모두들 하언의 행위에는
불만을 터뜨렸지만 엄숭에 대해서는 좋은 말을 했다. 끝내 하언은 관직에서 쫓겨나 죽음으
로 내몰리고 말았다.
"물에 수달이 있으면 연못의 물고기가 고달파지고, 나라에 강력한 방해 세력이 있으면 백
성이 줄어든다. 따라서 숲이 우거진 곳에는 풀이 크게 자라지 못하고, 큰 덩어리 사이에서는
좋은 묘목이 자랄 수 없다."
예로부터 얼마나 많은 충신들이 억울하게 죽어갔던가! 또 앞에서 날아오는 화살과 창은
거뜬히 피하면서 등뒤에서 날아드는 화살을 피하지 못해 죽어간 영웅호걸들은 또 얼마나 많
았던가? 충직하고 현명하며 유능한 인재를 배척하고 공격하는 것은 간신이 반드시 거치는
길이다. 간신치고 이 방면에서 자신의 능력을 남김없이 발휘하지 않은 자는 단 한 명도 없
었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은 공교롭게도 그들의 간행을 증명하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
넷째, 윗사람의 비위를 맞추고 교태를 부려 귀여움을 차지하며, 군주를 포악하게 이끌고
사악한 방법으로 사람을 해친다.
자기 한 몸의 사사로운 욕심을 위해, 군주의 비위를 맞추어 군주로 하여금 나쁜 일, 추악
한 일을 저지르도록 부추긴다. 문득 <한비자>의 <세난>편이 생각난다. 한비자는 전국시대
말기의 유명한 철학가로서, 한나라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이사와 함께 순자를 스승으로
모셨다. 한비자는 말더듬이 병을 앓는 바람에 말을 잘 못했다. 그러나 묵묵히 공부에 힘써
'제왕학'에 정통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역사상 수많은 인물들의 운명이 그의 주의를 끌었
고, 이에 대해 그는 깊이 있게 사색했다.
정나라 무공은 호를 정벌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호 군주의 관심으을 대로 돌리고자
딸을 그에게 시집 보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의도를 정나라의 대신인 관기사가 알아챘다.
어느 날 무공이 조회석상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내가 군대를일으켜 누군가를 정벌하려 한다
면 그 대상이 누구겠소?"라고 물었다. 대부관기사가 눈치 없이 곧이곧대로 대답했다.
"그야 호가 아니겠습니까?"
그러자 무공은 불같이 화를 내며 즉각 관기사를 죽여 버리고는 "호와 정은 형제와 같이
우호 관계를 맺고 있는데, 관기사가 호를 정벌하라고 부추기니 그 마음 씀씀이가 어찌 이다
지도 독할 수가 있단 말인가!:라고 말했다. 그러나 무공은 기다렸다는 듯이 갑자기 호를 공
격하여 멸망시켰다. 한비자는 관기사가 한 말이 모두 사실이고 또 좋은 말이었는데 왜 그
런 불미스러운 일을 당했을까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밤낮으로 심혈을 기울여 제왕의 심
리를 파악하려고 했다. 오랜 시간 관찰하고 분석하고 연구한 끝에, 그는 마침내 천하를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세난>이란 글을 완성하여 제왕의 미묘한 심리를 제대로 분석해냈다. 한비
자는 이렇게 말한다.
무릇 남을 설득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 어려움은 상대방에게 내가 알고 있
는 것을 납득시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고, 또 내 말의 조리가 내 뜻을 분명하게 전할 수
있느냐에 있는 것도 아니며, 언변으로 내 뜻을 다 보일 수 있는가 하는 데에 있는 것도 아
니다. 설득의 어려움은 바로 설복하려는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나의 언변을 그의 마음에 맞
출 수 있는가 하는데에 있다. 설득하려는 상대는 명예에 마음을 두고 있는데, 그에게 이익을
내세워 설득하려 한다면 유세하고 있는 사람을 범속하다 여겨 필경에는 멀리 내쳐질 것이
다. 반대로 상대가 이익을 추구하고 있는데 엉뚱하게 명예로써 설득하려 한다면, 현실에 어
두운 자라고 여겨 필시 거두지 않을 것이다.
한편 설득하려는 대상이 속으로는 이익을 쫓으면서도 겉으로는 명예를 따르는 척 행동할
때에 이를 헤아리지 못하고 명망을 높일 수 있는 방책이 있으니 거두어 쓰십시오 하고 유세
한다면, 상대는 겉으로는 그를 거둘지 모르나 속으로는 늘 소원함을 털어 버리지 않을 것이
다. 반면에 그에게 이익 되는 바를 들어 유세를 할 경우, 속으로는 나의 말을 받아들여 쓰기
로 결정하였음에도 겉으로는 자신의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유세하는 자를 물리쳐 버릴 것
이니, 이런 상황들을 살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무릇 일이란 은밀해야 이루어지며, 말이 새면 실패한다. 자신이 일부러 상대가 감추고 싶
어하는 점을 누설하고자 한 것은 아니지만, 대화를 나누다가 은연중에 가려야 할 부분에 말
이 이르는 경우가 있다. 이렇게 되면 신변이 위험하다. 상대가 겉으로 어떤 일을 하는 척하
지만 실제로는 마음속으로 기도하는 바가 따로 있을 때, 유세객이 겉으로 나타난 일뿐만 아
니라 그렇게 양면적인 행동의 까닭을 폭로하면 또한 신변이 위태로울 것이다. 군주를 위해
서 중요한 계획을 제기하여 그의 마음에는 들었으나 또 다른 지략가에 의해 간파 당해 도모
하고자 하는 일이 외부에 알려지게 되면, 군주는 반드시 안을 제기하였던 자가 누설하였다
고 여길 것이므로 잃게 되면 신변이 위태롭다.
두터운 은혜를 입은 바도 없고 군주와 가깝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건의가 실행되어 효력이
있게 되면 남의 투기를 받게 될 것이며, 실행되지도 못하고 실패에 이르게 된다면 능력에
대한 의심을 받을 것이므로 이와 같으면 목숨이 위태로울 것이다. 군주에게 잘못이 있을 때,
유세객이 공개적으로 그 잘못을 드러내면 곧 생명이 위험하다. 군주가 좋은 계책이라고 생
각하여 자신의 공적이라 자랑하고자 할 때, 유세객이 그 내막을 알고 있다면 곧 위험에 빠
질 것이다. 군주로 하여금 억지로 그가 할 수 없는 일을 강요하거나 그칠 수 없는 일을 저
지하려 한다면 생명이 위험할 것이다. 유세객이 원로 대신들에 관해 언급하면 군주는 군신
의 관계를 이간하여 한다고 생각할 것이라 의혹을 살 것이다. 또 만일 군주가 총애하는 자
를 대화 중에 거론하면 군주 자신의 속뜻을 시험하려는 것이라 여길 것이다. 모해할 만치
상세한 주장은 말만 많고 조리가 없다고 평가될 것이다. 간략하게 일에 대해서만 의견을 내
고 만다면 겁이 많아 할 말을 다 하지 못한다는 소리를 들을 것이며, 일을 헤아림이 넓어도
혹 지나치면 촌스러우며 오만하다고 말할 것이다. 이것이 유세하는 데 있어서 어려운 점이
니 몰라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하여 한비자는 이런 인식을 보여준다.
남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힘써야 할 점은 상대가 자랑스러워하는 바를 더욱 칭찬해주고,
또 상대가 부끄러워하는 부분을 덮어주는 것이다. 상대가 마음속에 급히 하고자 하는 사적
인 일이 있을 때, 그 일이 모두에게도 마땅한 바가 있음을 보여주어 꼭 하도록 강조해야 한
다. 한편 그가 마음속으로 비천하다고 느끼지만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을 가지고 있을 때, 유
세객은 그에게 그 일을 미덕이라 하며 용기를 북돋우고 만일 하지 않는다면 유감이라고 표
해야 한다. 또 그가 마음속에 고상한 일을 계획하고 있지만 그것이 실제 이룰 수 없는 일인
경우에, 유세객은 그에 대한 과실을 거론하고 그 일의 해악을 설명하여 하지 않는 것이 좋
다고 해야 한다. 그리고 상대가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 때, 그에
게 다른 비슷한 상황의 일을 들려주어 많은 참고가 되게 하고, 유세객 자신의 의견을 채택
하도록 하되 짐짓 모르는 체하면서 지혜를 빌려주어야 한다.
남과 자신이 함께 공존하여야 한다는 말을 설득하고자 할 때에는 반드시 훌륭한 명분을
세워 이를 밝히면서 은연중에 군주 자신의 이득도 함께 얻어진다는 것을 암시해야 한다. 어
떤 일이 위험과 해가 된다는 것을 진언하고자 할 때에는 이 일은 반드시 세상의 비난이 있
을 것이란 말을 주지시키되 은연중에 그것이 당사자에게도 해가 된다는 점을 암시해 주어야
한다.
상대가 특히 군주일 경우 칭찬하고자 할 때는 그와 같은 행위를 했던 다른 사람을 거론하
여 칭찬할 것이며, 반대로 잘못을 지적하고자 할 때는 그와 비슷한 다른 일을 가지고 잘못
을 깨닫게 해야 한다. 만일 그와 마찬가지로 불미스런 일을 당한 사람이 있을 때 그 일에는
아무런 해가 없었음을 힘써 수식해야 하며, 또 똑같이 실패를 겪은 자가 있으면 그 일에는
실수가 없었다고 공개적으로 밝혀주어야 한다. 상대가 자신의 능력이 아주 크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보았을 때, 굳이 그가 할 수 없는 일을 찾아내어 그의 능력이 남과 다름이 없음을
밝힐 필요가 없다. 또한 맡은 일에 대한 결단이 아주 과감했다고 여기고 있을 때, 굳이 그가
실수한 일을 골라 그를 화나게 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상대가 자신의 계획이 아주 훌륭하
다고 생각할 때, 가가 실패한 경우를 꼬집어 그를 곤란하게 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하여야
설득 과정에서 의도한 대로 상대의 뜻을 거스르는 바가 없을 것이고, 언사도 상대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을 것이니, 그런 후에야 자신의 지혜와 말재주를 맘껏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야 겨우 군주가 유세객을 의심 없이 가까이 할 것이므로 하고자 하는 일을 뜻대
로 할 수 있는 것이다.
<세난>편을 읽노라면 정말이지 심장이 두근거리고, 정신이 어지러워지며, 등골에서는 식
은땀이 흐른다. 대체 한 인간의 속마음이 어떻게 이다지도 어두울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그 어두운 마음을 오로지 다른 사람의 약점을 살피는 데 집중하여 그 비위를 맞추고, 심지
어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릇된 짓을 하도록 아양을 떨어 귀여움을 차지한 다음 자기 목적
을 달성하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그러나 간신들이 바로 이런 내면을 가진 자들인데 어떡하
랴. 그들은 나라 일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으며, 백성을 생각하지 않는다. 오로지 어떻게 하
면 윗사람의 심리와 생리를 만족시켜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킬 것인가 만을 생각한다. 그들
은 이런 면에서 <세난>편에서 말하는 '설자'와 조금도 다를 바 없다.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모자라지 않는다.
당 현종이 우선객이라는 내력도 분명치 않은 도사를 상서라는 직책에 봉하려 하자 재상
장구령은 우선객이 "글도 모르는데 큰일을 맡겼다가 여러 사람의 기대를 저버릴까 걱정됩니
다."라며 힘껏 반대했다. 그러나 이임보는 "천자가 사람을 쓰는데 그 누구인들 안 되겠는
가?"라며 현종의 비위를 맞추었다. 또 현종이 무혜비를 총애하여 태자를 폐하고 혜비의 아
들을 태자로 세우려 하자, 장구령은 "이 일은 신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폐하께서 정이 그
렇게 하시겠다면 신은 감히 명령에 따를 수 없습니다."라며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이임
보는 "이는 황가의 일이거늘 어찌 외부인이 감 놔라 대추 놔라 한단 말입니까?"라며 꼬리를
쳤다.
개원 24년인 736년, 현종은 동도 낙양을 순시하고 장안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배요경과
장구령은 계절이 가을 수확기라 황제의 행차가 농민들에게 크게 부담을 줄 것이 걱정되었
다. 그래서 황제에게 "농민들의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므로 겨울이 된 다음 돌아가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라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두 사람이 물러가는데 이임보는 거짓으로
발이 저린 척하며 뒤쳐졌다. 현종이 왜 그러냐고 묻자 이임보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말
했다.
"발이 저려서 그런 것이 아니라 폐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입니다. 장안과 낙양은 폐하
의 동서쪽 궁입니다. 폐하께서 행차하시는데 때를 택한다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농민들의
수확에 방해가 된다면 지나가는 곳의 세금을 조금 줄여주면 그만입니다."
이 말을 들은 현종은 크게 기뻐하며 "즉시 서궁으로 행차하자."면서 농번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장안으로 되돌아왔다.
<순자><신도>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다.
"명령에 복종하되 군주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순이라 하고, 명령에 복종하되 군주에게 이
익이 안 되는 것을 아첨이라 하며, 군주의 이익을 위해 명령을 거역하는 것을 충절이라 하
고, 명령을 거역하되 군주에게 이익이 안 되는 것을 찬탈이라 한다."
명나라 선종이 세상을 떠나고 그 뒤를 이어 황제에 오른 자가 그의 큰아들 영종 주기진이
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겨우 일곱 살이었다. 그는 매일 자기와 함께 마음껏 놀아주는 왕진
에게 절대적으로 의지했다. 그러나 왕진은 이를 이용하여 조회에 임해서 어떻게 자신의 잘
난 점을 과시하는지, 어떻게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신하들에게 벌을 주는지, 어떻게 하면 자
신을 보기만 해도 두려워하게 만드는지, 권위는 어떻게 부리는지 따위만 가르쳤다. 이 때문
에 정통 원년에서 6년에 이르는 초기 5,6년 사이에 그는 우선 병부상서 왕기, 병부시랑 광
야, 예부상서 호형, 호부상서 유중부, 형부상서 위원, 우도어사 육지, 병부시랑 우겸등 숱한
대신들을 옥에 가두었다. 6부상서 중 이부와 공부만 화를 면했을 뿐이다.
정통 3년 영종은 호부상서 유중부를 옥에 가두었는데, 태황 태후가 나서서 말리는 바람에
간신히 풀려났다. 이 사건이 있은 뒤 3년이 지난 정통 6년, 유중부는 다시 체포되었다. 이번
에는 좌우시랑도 함께 체포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장안문 앞에서 '하교'라는 형벌을
받았다. '하교'란 왕진이 생각해낸 대신들을 징벌하는 새로운 방법이었다. 왕진은 무게가
다른 '가'를 많이 만들었는데 이를 '교'라 불렀다. 이 '교'는 무게가 10~80근에 이르고 더
무거운 것은 100근이 넘었다, 이 칼을 목에 걸어 세워놓는 것이었다. '하교'의 가장 악랄한
점은 세워놓는 시간에 있었다. 며칠에서 십여 일을 세워놓기도 했으며, 그보다 더 길게는 한
달 가량 세워놓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경우는 서서 죽는 것이 보통이었다.
호부상서와 좌우시랑 세 사람은 장안문 앞에서 십여 일 동안 '하교'를 당했다. 다시 태후
하 나서는 바람에 간신히 직책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복위된 지 불과 한
달 반만에 세 사람은 또 옥에 갇혀 유중부는 파면됨과 동시에 평민으로 신분이 깎였으며,
좌우시랑은 변방으로 유배되어 힘든 노동에 시달렸다. 이번에는 태후가 병에 걸려 죽는 바
람에 그들을 구할 수 없었다.
간신은 아첨꾼일 뿐만 아니라 교사범이기도 하다. 충, 간을 변별하려면 이 점을 완전히 이
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섯째, 은혜와 의리를 저버리고 양심을 팔아 버리며, 강을 건너고 나며 다리를 부숴 버리
는 등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짓을 서슴없이 저지른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정이 중요하며 의리가 먼저다. 정을 중시하지 않고 의리를 무시
하는 민족은 결코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 일찍이 한신은 어려울 때 밥 한 그릇 준 동네 아
주머니에게 천금으로 보답했으며, 유비의 삼고초려에 제갈 공명은 죽음도 아끼지 않았다. 은
혜를 잊지 않고 그에 보답한 아름다운 전설이 민간에서는 지금도 수없이 전해져 내려온다.
거기에는 노동자, 농민의 감정이 깃들어 있으며, 민족의 전통적 미덕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
나 간신, 소인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정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신의를
모르는 자들이다. 오늘 당신으로부터 뭔가 얻을 것이 있다면 눈물을 질질 짜며 감격스러워
한다. 그러나 내일 당신이 쓰러 없어지면 찬바람이 돌도록 외면하며, 은혜를 원수로 갚고,
우물에 던진 다음 돌을 떨어뜨리길 주저하지 않는다. 이런 자들은 어제 어디서든지 냉정하
게 얼굴을 바꾼다. 그들은 이리의 본성에 독사, 전갈의 심성을 갖고 있는 극단적인 이기주의
자들이다. 이들의 이런 특징을 장악하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간신을 제대로 인식하는 중요한
관건이다.
춘추시대의 백비는 그 집안이 초왕에 의해 죽음을 당한 후 도망쳐 나와 오갈 데 없는 신
세가 되었다. 그러다 오자서의 도움으로 오왕에게 추천됨으로써 어려움에서 벗어나 편안하
게 살게 되었다. 그러나 백비는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 오자서가 베푼 은혜를 외면한 채
아첨과 모함으로 끝내 오자서를 죽음으로 몰았다.
북송시대 '육적'의 하나였던 왕보는 진사에 급제한 뒤 하집중에게 꼬리를 쳐서 교서랑, 부
보랑, 좌사간을 역임했다. 그 뒤 왕보는 채경이라는 보다 큰 권력자를 찾아내자 하집중을 언
제 봤냐는 듯이 걷어차 버렸음은 물론, 스무 가지에 달하는 죄목을 나열하며 상소하기까지
했다. 영문도 모른 채 죄를 뒤집어쓴 하집중은 그래도 끊임없이 왕보만 찾다가, 진상을 알고
난 후 왕보에게 개만도 못한 짐승이라고 욕을 퍼부었다 한다.
은혜와 의리를 저버리는 점에서 보면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은 단연 으뜸이다. 그는 황제
가 된 후 함께 힘겹게 싸웠던 공신들을 무수히 죽여 없앴다. 천하의 대업을 꿈꾸고 있던 주
원장은 뛰어난 경륜과 재능을 지니 유기의 명성을 들은 뒤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극진한
예의와 예물로써 유기를 산에서 끌어내는데 성공했다. 유기가 도착하자 주원장은 즉각 그에
게 "나는 천하를 위해 그대를 불러냈으니 진정으로 그대를 따르겠소이다."라고 말했다. 이래
서 공손한 태도로 유기에게 원을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가르침을
청했다.
유기는 즉시 '시무18책'을 올려 정세를 상세히 분석하고 통일을 위한 대계를 풀어놓았다.
주원장은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며 일찍 만나지 못한 것이 너무 안타깝다고 호들갑을 떨었
다. 그리고는 즉시 예현관을 짓도록 하고 자신 가까이에 머무르게 하며 국가의 기밀과 중요
한 일에 참여하도록 했다. 유기는 과연 기대에 어긋나지 않고 주원장의 사업에 중요한 역할
을 해냈다.
주원장은 그를 한나라의 장량에 비유하며 이름을 부르지 않고 '노선생'으로 높여 불렀다.
그러면서 항상 나라의 큰일을 상의했다. 중요한 결정을 내릴 일이 있을 때마다 그를 불러
은밀히 상의하는 등 유기에 대한 주원장의 의존도는 매우 컸다. 유기가 모친상을 당해 상을
치르고자 고향에 돌아가려 했을 때도 주원장은 한사코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 뒤 하는
수 없이 유기의 청을 들어주긴 했지만 수시로 편지를 보내 정책을 자문했고, 끝내는 그를
다시 불러 올렸다.
명나라가 개국된 뒤 주원장의 사람됨을 잘 알고 있던 유기는 화를 피하기 위해 나이를 핑
계로 여러 차례 고향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청했다.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외부와의
왕래를 일체 끊고 매일 술과 바둑과 시와 독서로 세월을 보냈다. 당시 그 지방 수령이 여러
차례 유기를 만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평민복으로 갈아입고 그를 찾아왔다. 이야기에
따르면 그때 유기는 발을 씻고 있었는데 수령이 왔다는 말에 깜짝 놀라 일어나며 공손하게
평민으로 행세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조심했던 그도 화를 피하지 못했다. 홍무 7년, 주
원장은 명령을 내려 그의 녹봉을 빼앗았다. 그리고 곧이어 유기의 정적을 이용해 그를 박해
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화병이 난 유기는 끝내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울분을 가득
품은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의리를 저버리고 인재를 시기하는 주원장의 이런 성품에 대해 그의 아내 효자 고 황후 마
씨는 늘 고난을 같이했던 군신들과 그때를 잊지 말라며 여러 번 충고했다. 주원장이 '막
수유'의 죄명으로 '모반사건'에 연루된 공신 송렴을 극형에 처하려 하자 마 황후는 이렇게
말했다.
"민간에서도 선생을 모실 때는 끝까지 예의로 대하거늘 하물며 천자야 오죽하겠습니까?
송 선생은 태자와 여러 왕을 가르치는 스승인데 어찌 차마 죽일 수 있습니까?"
그러나 주원장은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고 자신의 결정대로 밀어 붙였다. 마 황후가 끝까
지 말리자 그때서야 비로소 그를 무주로 유배 보내는 선에서 그쳤다. 송렴은 평생을 나라를
위해 충심을 다 바쳤건만 결국은 이런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는 비분함을 견디지 못하고
유배 가는 도중에 허물어진 한 사당에서 잠이 들었다가 일어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먹는 것도 거부한 채 한숨만 내쉬었다.
"불경에 인과응보라 했거늘 보아하니 순전히 사람을 속인 것이로구나!"
이윽고 그는 쓸쓸히 인생을 마쳤다.
'인심이란 살찐 것이다.' 이 말은 정직하고 선량한 사람에게만 해당한다. 간신들은 정과
의리를 끊어 버린 무뢰한 자들고, 그들의 처세는 언제나 자기 이익에서 출발하며 사람으로
서 갖추어야 할 도덕과 양심은 근본적으로 없다. 이것이 그들 '간성'의 중요한 표현이다.
여섯째, 신의와 약속을 저버리고, 변덕이 죽 끓듯 하며, 맹세해 놓고도 뒤돌아보지 않는다.
어느 민족이건 신의를 중시해야 한다. 신의가 있느냐 없느냐, 약속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
냐는 역대로 인격 평가의 중요한 표준이 되어왔다. 물론 충, 간을 가리는 중요한 기준이기도
하다.
옛날에 기둥을 끌어안고 죽은 사람 이야기가 전해온다. 미생이란 처녀는 오지 않았다, 그
때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며 물이 불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이 총각은 기둥을 부둥켜안고
그곳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물은 갈수록 불어나 그는 그만 물에 잠기고 말았다. 물이 빠지
고 난 뒤에 보니 총각은 여전히 기둥을 꽉 부둥켜안고 있었다. 이미 숨진 채로.
풍몽룡의 <유세명언>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과거에 응시하려 가던 수재 범거
경이란 젊은이가 도중에 동상에 걸려 얼어죽게 되었다. 이때 역시 과거에 응시하러 가던 또
다른 수재 장려가 범거경을 보게 되었다. 장려는 그와는 초면이었지만 자신의 앞길은 돌아
보지 않고 그를 정성껏 돌보아 범거경을 구해냈다. 두 사람 모두 시험 날자를 놓쳤지만 서
로 너무 마음이 맞아 의형제를 맺었다. 그리고는 두사람은 내년 9월9일 중양절에 다시 만나
기로 약속하고 눈물로 헤어졌다. 이듬해 중양절에 장려는 집을 깨끗이 치우고 닭을 잡아 음
식을 만들어놓고 범거경을 기다렸다. 그러나 날이 다 가도록 범거경은 오지 않았다. 장려의
어머니는 지난해 약속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하고 했다. 그러나 그는 "거경은 신의를
아는 선비입니다. 틀림없이 약속을 지킬 것입니다."라며 계속 기다렸다. 밤이 얼마나 깊었을
까? 누군가가 바람을 타고 장려가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바로 거경이었다. 그러나 거경은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말도 못했다. 몰골은 초췌했고 수심에 가득 찬 표정이
었다.
사정은 이러했다. 사실 범거경은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약속 날짜 깜빡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러나 중양절이 되어 주위 사람들이 부산을 떠는 모습을 보고는 약속이 생각났던 것이다.
그러나 장려가 있는 곳까지는 천리 먼 길, 하루만에 갈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그러나 친구
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대서야 다른 일은 오죽하겠는가? 그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나
문득 옛 사람의 말이 생각났다. 사람이 하루만에 천리를 갈 수는 없지만 귀신은 마음대로
갈 수 있다고 했지! 그리하여 거경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귀신이 되어 바람을 타고 날아와
장려와의 약속을 지켰던 것이다.
그 뒤 장려는 '한번 약속을 목숨을 바쳐 지킨' 친구의 정에 보답하기 위해 친구의 관 앞
에서 그 자신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얼마나 애절하다 못해 처절한 이야기인가? 물론
범거경의 어리석음에 탄식할 수도 있지만 그들의 진실된 우정은 감동적인 것임에 틀림없다.
지난날 우리는 신의 문제에 대해서 봉건적 찌꺼기라는 점에 주의를 많이 기울였지만 정작
그것이 지닌 합리적 요소에 세계관의 중요한 표현이자 사회생활의 주춧돌이기도 하다. 신용
이 없으면 사람들은 그를 따르려 하지 않는다. 사회가 믿음이 없으면 정책과 법령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다. 그러나 간신들은 인간의 품격과는 거리가 먼 자들이다. 그들은 사람과 교
제하거나 일을 할 때 철저히 실리적인 태도만 취한다. 득이 되면 취하고 득이 되지 않으면
버린다. 당장 필요하면 하늘을 빌어 온갖 미사여구로 맹세하지만, 내일 쓸모가 없어지면 언
제 그랬냐는 듯이 믿음과 약속을 내팽개친다. 이익을 보면 의리를 잊어버리고 복을 보면 마
구 달려들지만, 화가 닥칠 것 같으면 쥐새끼처럼 숨는다. 이랬다 이랬다 변덕이 죽 끓듯 한
다. 정치적으로는 완전한 철새들이며 감정적으로는 사기꾼이다.
현실 속에서 진짜 악독한 대간이나 거간임이 드러나는 가장 뚜렷한 표식은 그 사기성이
다. 약속을 내팽개치고 신의를 저버리는 것들은 모두 이 사기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나라를
훔친 큰 도적 원세개는 바로 이 사기성으로 출세한 자이다.
1898년 9월, 광서제는 변법자강 운동이 수구파, 특히 자희 태후의 신경을 건드려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은밀히 강유위 등에게 글을 내렸다.
"황제 자리를 더 이상 보전하기 힘들게 되었으니 강유위 등은 속히 은밀하게 자구책을 강
구하라... 일이 제대로 이루어질지 초조한 마음을 차마 견딜 수 없노라."
관서제의 글을 받아 든 강가유위는 통곡했다. 그는 최후로 단사동 등과 함께 원세개에게
군대를 일으어켜 "황제를 보호하고 대권을 수복하여 조정을 깨끗이 숙청하도록" 권했다. 원
세개는 죽을힘을 다해 황제를 구하겠노라 철석같이 맹세했다. 그러나 교활하고 간악한 원세
개는 약속을 이행하기는 커녕 그날 밤으로 영록에게 쪼르르 달려가. 강유위와 양계초 등이
군대를 일으켜 화원을 포위하고 서 태후를 죽이려 한다고 밀고해 버렸다. 그리하여 유신변
법 운동은 피비린내 나는 탄압과 파멸적인 타격을 받았다.
'간'은 필연적으로 속임수를 동반할 수밖에 없으며, 속임수 또한 언제나 '간'과 긴밀히
연결되어 영원히 한데 얽혀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일곱째, 공을 탐내고 잘못은 숨기며 죄와 책임을 남에게 미룬다. 세상을 속여 이름을 훔치
며 공로는 자기 것으로 만든다.
<신당서>가 완성되고 난 뒤의 일이다. 관계에 따라 관직이 가장 높은 한 사람만의 이름
을 대표로 서명하게 되었다. 당시 구양수는 송기보다 지위가 높아 <신당서>에는 구양수 한
사람만의 이름을 서명해야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다른 사람도 아닌 구양수가 단호히 반대
하고 나섰다.
"송공은 열전 편찬에 공이 가장 크며, 또 많은 시간을 들였소. 그런데 어찌 그 사실을 감
추고 그의 공을 빼앗을 수 있단 말이오?"
구양수의 강력한 반발에 <신당서>의 서명은 관례를 깨고 구양수, 송기 두 사람이 함께하
게 되었다. 이에 대해 송기는 크게 감동했다.
"자고로 글 배운 자들은 양보를 모르고 서로 무시하기 일쑤인데, 이런 일은 전에 듣도 보
도 못한 일이로다!"
이와 비슷한 일이 역사에는 결코 적지 않았다. 그러나 간신은 공명에 대해서도 죽을힘을
다해 욕심을 부린다. 잘못을 남에게 떠넘겨 죄를 덧씌우고, 남의공을 탐내 빼앗는다. 이는
간성의 두드러진 표현이다. 그들은 남의 공을 탐내며 명예를 훔친다. 잘못을 저지르면 안 보
이는 곳에 꼭꼭 숨어 깨끗한 척한다. 그러나 일단 공을 세우면 동네방네 떠벌리고 다니며,
남의 공은 철저하게 파묻으려 한다. 더러운 영혼과 저질스러운 인품의 표출이 아닐 수 없다.
명나라 가정, 정여기가 병부상서에 임명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외구의 침입을 받았다. 황제
는 장수들에게 급히 나가 싸우라고 명령했다. 정여기는 수보 엄숭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
다. 엄숭은 패전의 책임이 자신에게 돌아올까 겁이 나 "먼 변방에서 싸우면 설사 패하더라
도 그 사실을 숨길 수 있지만 지금은 황상이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있는 상황에서 싸워야 하
기 때문에 만에 하나 실패하면 누가 책임을 지겠소?"라며 정여기에게 출전하지 말라고 했
다. 이 바람에 외구는 고삐 풀린 말처럼 마음껏 사방을 노략질하며 다녔다.
외구가 물러간 뒤 정여기 등은 나가 싸우지 않은 죄목으로 옥에 갇히고 말았다. 이때 엄
숭은 정여기에게 "내가 있는데 공을 죽게 내버려두겠소?"라며 그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화
가 머리끝까지 뻗친 황제의 기세에 눌려 엄숭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구석에 처박혀
나서지 않았다. 그리고는 책임을 완전히 다른 사람에게 미루고 자신은 멀찌감치 숨어 버렸
다. 그 결과 정여기는 억울한 귀신이 되고 말았다.
역사상 이와 비슷한 간행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북송 '육적'의 하나인 동관은 남의 공을 빼앗고 자신의 잘못은 떠넘기는 수법으로 입신
출세한 자의 본보기라 할 만하다. 숭년 2년인 1103년 2월, 동관은 감군에 임명되어 서북의
소수 민족인 강을 정벌하고 청당을 수복하는 원정에 나섰다. 사실 동관은 용병이나 전투에
는 까막눈이었다. 일부 장수가 병사를 한데 모아 곧장 황주로 진격하자고 하자 동관은 멋도
모르고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주장 왕후는 병사를 둘로 나누어 남북에서 협격하자고 주장
했다. 왕후는 간신히 동관을 설득해 강족을 남북으로 협공함으로써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
나 이 과정에서 동관은 다른 장수의 공로를 전혀 보고하지 않았다. 그 자신은 승지에 승
진을 거듭하여 검교사공, 봉영군절도사를 거쳐 다시 극밀원을 관장하고 거기에다 태부, 경
국공이라는 작위까지 받았다.
선화 원년인 1119년, 동관은 희하경략사 유법을 보내 서하의 삭방을 공격하도록 했다. 유
법은 적진 깊숙이 들어가서는 승리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동관은 막무가내로 윽박
질렀다. 유법은 하는 수 없이 10만 병력으로 소관을 나와 싸웠으나 패배하고 자신도 전사하
고 말았다. 유법은 서북 변경의 명장으로서 많은 전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그의 전사 소식을
들은 병사들은 모두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다. 심지어는 서하 사람들조차 못내 아쉬워했다.
그러나 동관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의 명망에 영향이 있지나 않을까 걱
정하여 패배했다는 소식을 감추고는 참으로 뻔뻔하게도 승리했노라고 떠벌려, 백관들이 입
궁해 너나할것없이 축하를 드리는 웃지 못할 상황까지 벌어졌다.
송 왕조는 서북쪽의 군사 일에 해마다 많은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군사 일을 맡은 동관
은 덕도 재주도 없는 자가 대책을 세울 줄도, 군대를 어떻게 배치하는지도 몰랐다. 그저 하
는 짓이라곤 남이 승리하길 기다렸다가 그 공을 가로채고, 패배하면 그 잘못을 남에게 뒤집
어씌우거나 거짓으로 보고를 올리는 등 오로지 공만을 탐냈다. 수천 수만에 달하는 병사들
의 시체를 밟고 출세 길을 달렸으니 이 얼마나 악독하지 짝이 없는 자인가!
동관의 이런 짓거리는 결국 망국의 화근을 묻어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선화 4년인 1122
년, 휘종은 동관을 하동 하북로선무사로 삼아 요를 치게 했다. 원래 군사적 식견이나 대책이
라곤 전혀 없는 동관인지라 두 차례나 크게 패하여 많은 군사가 사망하거나 다쳤고, 사람과
말이 서로를 밟아 죽이는 등 혼란이 발생했다. 신종과 왕안석이 변법을 통해 쌓아놓았던 군
수를 거의 전부 잃어버리는 엄청난 피해였다. 이 상황에서 동관은 패전의 책임을 면하려고
금나라에 도움을 청했다. 이리를 내쫓으려고 호랑이를 불러들인 꼴이었다. 이 때문에 때마침
상승세를 타고 있던 야심만만한 금나라는 송의 약점과 허점 그리고 부패한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바로 망국의 화근을 만든 셈이었다. 그로부터 불과 2, 3년 뒤 금나라는 대대
적으로 송에 쳐들어왔다. 이윽고 북송 왕조의 종말을 알리는 조종이 울렸다.
여기 공명심 때문에 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인물이 또 있다. 그가 누군가? 바로 왕진이란
자였다. 정통 14년인 1449년, 야선이 변방의 여러 번 세력들과 연합하여 쳐들어왔다. 이 소
식이 북경에 전해지자 왕진은 매우 기뻤다. 자신의 바람을 이룰 기회가 온 것이다. 왕진은
영종에게 선조들을 본받아 몸소 정벌에 나설 것을 권했다. 대신들은 사소한 일까지 일일이
야선을 상대하는 것은 그렇게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왕진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두 자신이 공을 세우는 것을 방해하려는 자들이라 여기고는 전혀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왕진은 서슴없이 국가의 운명을 도발판 위에 내던졌다. 50만 대군이 소집되었다. 그리고는
즉시 출정이 시작되었다. 오랫동안 깊은 궁궐에서만 살아온 왕진에게 무슨 군사적 책략이나
판단력이 있었겠는가? 아니나다를까! 군대는 지용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비바람 속을 쉬
지도 않고 진군해야만 했다. 병사들의 고통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정작 병사들
을 괴롭힌 것은 앞날에 대한 불안감, 바로 그것이었다.
가까스로 선부에 도착한 다음 대동으로 접근할 무렵, 왕진의 생각은 처음과 완전히 달라
져 있었다. 당초 왕진은 영종과 다른 사람들 모두에게 자기가 웃으면서 적을 격파하는 모습
을 보여 주려고 했다. 그러나 전쟁의 참상을 자기 눈으로 보고 난 다음부터는 전쟁이 결코
장난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왕진은 앞 뒤 재지도 않고 철군을 결정했다. 왕진은 허영심
이 아주 강한데다 자기 과시욕이 강한 자였다. 당초 철군 노선이 자기 고향과 멀지 않자 생
각을 바꾸었다. 황제를 자기 고향집으로 모셔 오늘날 자신의 부귀영화를 이웃에 뽐내고 싶
어졌던 것이다.
갑작스런 철수 명령에 당황해 하던 군사들은 철수 노선을 바꾼다고 하자 더욱 놀라 두려
움에 휩싸였다. 그 결과 마치 전쟁에 패하여 도주하는 병사들 마냥 너나할 것 없이 빨리 후
퇴하려다 보니 군대는 혼란에 빠졌고, 지나가는 마을은 수십만 군대에 마구 짓밟혀 엉망이
되어 버렸다. 왕진이 연신 명령을 내려 안정시키려 했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남에게 뽐내
려 했다가 도리어 역효과만 나고 말았다.
약삭빠바른 왕진은 이대로 고향집에 갔다간 자신의 명성이 도리어 깎이겠다고 판단하여
다시 원래대로 길을 바꾸었다. 죽 끓듯 하는 변덕에 병사들이 원망은 분노로 치달았다. 그러
는 사이 야선이 이끄는 대군은 벌써 뒤를 쫓아와 명나라 군대를 완전 포위했다. 이틀 뒤 명
나라 주력군은 야선에게 맥없이 무너지고 영종이 포로로 사로잡히는 어처구니없는 결과가
나타났다. 50만 대군도 무사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이 전쟁으로 인해 명 왕조
의 전성기가 마감되고 쇠퇴기로 접어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극단적인 공명심과 이기심은 권력욕과 마찬가지로 모두 간신들을 유혹한다. 한 몸의 명예
와 이익을 위해 그들은 수백 수천만 명의 목숨과 국가 전체의 이익을 아낌없이 내다 버린
다. 역사가 증명하는 엄연한 사실이다.
여덟째, 자신과 뜻이 다르면 배척하고, 어질고 뛰어난 인물을 조정에서 내쫓는다, 사사로
이 자기 측근을 기용하고 범과 이리를 아무데나 끌어들인다.
간신은 자신을 기준으로 삼아 모든 사물을 판단하기 때문에 자기를 따르는 자는 번창하지
만 거슬리는 자는 망해야 한다는 논리를 갖고 있다. 그들에게 진리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으
며, 민중은 안중에도 없다. 그러 개나 하이에나 같은 무리들을 긁어모아 패거리를 짓고 간악
한 짓을 일삼으며 뜻을 얻으려 한다. 자기 뜻과 다르면 배척하고 공격한다. 따르면 끌어들여
당파를 짓고 측근을 기른다.
"좋은 옷과 금은보화를 자기 손발과 심복들에게 마구 뿌리며, 자신에게 아부하는 자는 승
진시키고, 뜻을 거슬리는 자는 쫓아낸다."
<신당서><이덕유전>을 보면 소인이 어떻게 패거리를 짓는가에 관해 이덕유가 무종에게
올린 글이 있다.
"무릇 정인은 소인을 사악하다 하고, 소인 역시 정인을 사악하다 합니다. 이를 어떻게 가
리겠습니까? 사물을 빌어 비유해보겠습니다. 소나무나 전나무는 그 어떤 것에도 기대지 않
고 저 홀로 푸르고 당당하게 자랍니다. 그러나 칡넝쿨은 그렇지 못해 다른 나무에 빌붙지
않으면 살지 못합니다. 따라서 정인은 오로지 한마음으로 군주를 섬기지 다른 도움을 바라
지 않습니다. 사악한 자는 패거리가 있어 서로 감싸주고 속여야만 합니다. 군주가 이를 가리
면 미혹되는 바가 없는 것입니다."
도를 얻으면 돕는 자가 많고, 도를 잃으면 돕는 사람이 적어진다. 간신은 그 간사함으로
인해 자신의 세력이 빈약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지위를 튼튼히 하고 세
력을 키우기 위해 관직과 녹봉을 미끼로 패거리들을 끌어 모으고 측근들을 곳곳에 심는다.
패거리들은 끼리끼리 짝을 지어 갖은 나쁜 짓을 다 저지르고 다닌다.
북제의 대간 화사개는 그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북서><풍자종전>에 따르면 "안팎의 모
든 벼슬이 대부분 화사개를 거쳐 임명되었다."고 할 정도였다. 그는 이런 기회와 지위를 한
껏 이용하여 더러운 짓을 저질렀다.
하남왕 고효유가 화사개와 호 황후의 음란한 짓거리를 알고는 무서제에게 화사개와 황후
가 마주 앉아 악삭 놀이를 못하게 하도록 권하면서 "황후는 천하의 어머니호서 신하와 어울
려 놀 수 없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화사개는 틈만 나면 무성제 앞에서
고효유의 약점을 헐뜯었고, 결국은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조정이란 자는 비파를 잘 타 무성제의 귀여움을 받았다. 화사개는 조정이 자신의 자리를
빼앗을까봐 수완을 발휘해 그를 안덕 태수로 내보내 버렸다. 고원해, 고건, 필의운, 이 세사
람이 화사개를 탄핵하려 하였다. 이 사실을 미리 안 화사개는 한 발앞서 이 세 사람이 붕당
을 짓는다는 구실로 모조리 귀양을 보내 버렸다. 화사개는 자신과 뜻을 달리하는 사람을 배
척하는 한편 자기 측근을 마구 기용했다. 그를 떠받드는 자라면 "자질을 따지지 않고 모조
리 발ㄹ탁했다." 유적감과 같은 화사개의 앞잡이는 중서시랑이란 직을 맡은 뒤 계속 승진의
길을 밟았다. 유덕선은 별다른 재주도 없는 관상쟁이에 지나지 않았는데 화사개의 관상을
보는 기회에 꼬리를 쳐서 일약 부참군에 임명되었다. 공안광이란 자는 북제시대의 또 다른
이름난 간신이었는데, 화사개에게 죽자살자 꼬리를 친 덕에 달라붙은 자로 무슨 일이든 화
사개의 얼굴만 올려다보며 굽실굽실 비위를 맞추었다. 그 결과 화사개의 측근이 되어 순풍
에 돛을 단 듯 출세했다.
채경은 권력의 핵심에 오른 뒤 "나라 돈을 좀벌레가 좀먹듯이 함부로 쓰며, 작위와 녹봉
을 마치 개인이 베풀 듯 마구 내다 팔아" 자기 측근 패거리를 모조리 중요한 자리에 갖다
앉혔다. 채경이 칭찬한 바 있는 등순무한 자는 상서우승, 중서시랑에 임명되었으며, 채경이
뒤에서 힘을 써준 장강극이란 자는 복건전운판관에 임명된지 3년이 채 안 되어 한림에 들오
와 승지가 되고 부사에 임명되었다. 인척인 호사문은 먼저 우운사로 출발했다가 호부시랑으
로 껑충 뛰었으며, 아들 채유는 관직이 삼공의 대역에 오랐으며, 채소는 예부로부터 밖으로
는 수시, 감사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채경의 인척과 패거리에서 나온 꼴이었다.
춘추시대부터 명, 청에 이르기까지 역대 간신들 치고 자기 뜻과 다른 사람을 배척하고 사
사로이 측근을 끄어다 나쁜 짓을 저지르지 않은 자는 없었다. 또 이것이 그들의 두드러진
특징이기도 했다. 모든 간신들이 자신들의 간심과 간행을 감추기 위해 무진 애를 썼지만 이
문제만큼은 그들의 특징이 유감없이 다 드러나 있다.
아홉째, 흉악함은 이리나 범도 따르지 못하며, 잔인하고 음흉함은 독사나 전갈도 미치지
못한다.
'악'은 '간'과 같지 않지만, '간'이 '악'인 것만은 틀림없다. '간과 '악'은 뗄 수 없는 혈
육의 관계다. '간악'은 '흉악'보다 더 흉측하고 잔인하다.
간신에게는 미치광이에 가까운 권력욕이 있다. 자신들의 권력과 이익을 탈취하고 지키기
위해 그들은 미친개처럼 사람을 물며, 정신나간 이리처럼 사람을 해친다. 필요하다면 독을
타고 불을 지르며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러고도 그들은 절대 두
려워하지 않으며 절대 손을 놓지 않는다. 심지어는 자기 처자식과 부모형제마저도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한 제물로 삼는다. 그러나 그들은 살인마처럼 드러내놓고 일을 저지르지는 않
는다. 그런 접에서 그들은 더욱 음흉하고 교활하다.
춘추시대 제 환공은 역아가 요리를 잘 한다는 말을 듣고 그를 불러 "듣자 하니 요리를 잘
한다며?"라고 물었다, 역아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환공은 농담으로 이런 말을 던졌
다.
"과인이 이 세상의 맛있는 요리라면 먹어보지 않은 것이 없는데 단 한 가지 사람 고기느
못 먹어 보았다. 사람 고기의 맛은 어떤가?"
환공은 별 뜻 없이 말했는데 역아는 그냥 넘기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역아는 환공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세 살 난 자기 아들을 죽여 요리로 만들어서 환공에게 갖다 바쳤다. 처음
에 환공은 역아의 이런 행위에 마음이 언짢았지만 역아가 자기 자식보다 자기를 더 사랑한
다고 여겨 역아를 총애하였고, 나아가서 명재상 관중을 대신해 나라를 다스리도록 맡기기까
지 했다.
동한의 질제는 황제가 되었을 때 겨우 아홉 실이었다. 당시는 양기가 권력을 휘두르고 있
었는데, 절제가 나이는 어렸지만 총명하고 예리하여 제멋대로 설치는 양기에 대해 불만을
품었다. 한번은 대신들이 가득 모인 조정에서 양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 자가 겁 없
이 멋대로 설쳐대는 장군이로구나!"라며 창피를 주었다. 이 때문에 양기는 원한을 잔뜩 품게
되었다. 그리하여 내시로 하여금 병에다 독약을 넣어 질제에게 보내도록 했다. 그것을 약인
줄만 알고 몇 알 삼킨 질제는 배가 뒤틀려 얼마 되지 않아 죽고 말았다.
명나라 때의 유구는 선비 기질이 대단한 지식인이었다. 영락 19년, 진사에 급제한 뒤 벼슬
에 나아가지 않고 집으로 돌아와 10년을 더 공부하고서야 비로소 관직에 나갔다. 그의 깊은
학문에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며 그의 문하로 들어갔다. 정통 6년, 왕진은 변방에서 공을 세
우려고 영종에게 운남의 녹천을 원정하도록 부추겼다. 유구가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나서자 왕진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정통 8년, 봉천전에 천둥과 번개가
치는 사건이 일어났다. 영종은 이 일과 관련하여 신하들에게 글을 올리도록 했다. 유구는 10
여 가지를 들어 글을 올렸는데 그 중에 군주의 권력이 아랫사람에게 옮겨져서는 안 된다는
내용도 있었다. 글을 올리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기 때무에 자세히 살펴볼 겨를 없이 그냥
대충 챙겨 관계대로 조정의 논의에 붙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유구의 상소문이 흠천감이란
자리에 있던 팽덕청의 눈에 띄었다. 팽덕청은 유구와 같은 고향이었지만 평소 유구에게 원
한을 품고 있었다. 유구의 상소문을 본 팽덕청은 유구에게 타격을 줄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
했다. 그래서 지체 없이 왕진에게 쪼르르 달려가 유구의 상소문을 보이며 특히 "군주의 권
력이 아랫사람에게 옮겨져서는 안 되나."는 대목을 트집잡았다. 이 대목은 그냥 해본 소리가
아니라 등뒤에서 몰래 황제를 비방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왕진은 버럭 화를 내며 즉시 유구를 잡아 감옥에 가두게 한 다음, 자신의 심복 마순을 불
러 유구를 제거하도록 했다. 명령을 받은 마순은 깊은 밤을 틈타 부하 한 명을 데리고 감옥
으로 들어가 누워 있던 유구를 단숨에 죽여 버렸다. 그리고는 시체를 토막내서 그 자리에다
파묻었다.
유구에게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겼음을 안 가족들이 몰려왔지만 시체조차 찾지 못했다. 백
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팔 한쪽과 피 묻은 바지 일부를 찾아냈다. 유구의 죽음은 많은 사람
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심지어는 왕진이 통제하고 있는 사람들조차 들고일어나 왕진의 죄
상을 폭로하였다. 왕진은 이들에 대해 전차도 거치지 않고 즉각 저잣거리로 끌어내 목을 베
어 버렸다. 음흉하고 악랄한 마음은 간신의 중요한 특징으로, 누구든지 조금이라도 그들의
심가를 건드리면 절대 그냥 두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죽음으로 내몬
다음에 라야 후련해 한다.
열째, 두 얼굴에 세 개의 칼을 품고 다니며, 음모로 귀여움을 얻으려 한다. 겉으로는 떠받
들지만 돌아서면 거슬리고 등뒤에서 화살을 쏘아 사람을 헤친다.
간신들은 면전에서와 등뒤에서가 다르다. 마주 보면 사람 같지만 등 뒤는 귀신이다. 동서
고금을 통해 간신치고 이를 입신출세의 법으로 삼지 않은 자 없으며, 이를 집안을 일으키는
근본으로 여기지 않은 자 없었다.
원나라 때의 대간 합마는 원래 탈탈과 아무런 원한이나 선입견이 없는 사이였다. 그러나
탈탈이 여중백이란 자를 자기보다 더 신임하자 이내 뼈에 사무친 원한을 품고 늘 복수할 틈
만 노렸다. 그러다 탈탈이 외지로 원정 나간 기회를 이용하여 순제의 황후 기씨 앞에서 탈
탈에 대해 나쁜 말을 늘어놓았다. 기 황후는 순제가 여러 사람의 반대를 무릅쓰고 황후로
책립한 고려 출신의 여인이었다. 다른 황후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가 낳은 아들이
태자로 책봉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황태자 책봉 의식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황태자 자리가 진작에 정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책봉 의식이 아직 거행되자 못하고 있는
것은 모두 탈탈 형제의 반대 때문입니다."
합마는 기 황후의 치명적인 부분을 탈탈과 연결시켰다. 이 때문에 기 황후는 탈탈 형제에
게 깊은 원한을 품게 되었다. 합마는 또 황태자 앞에서도 탈탈 형제를 헐뜯었다. 그러자 황
후와 태자는 황제의 귀에다 탈탈에 관해 좋지 않은 말들을 속삭였다. 순제도 자연 탈탈 형
제에게 불만을 갖고 결국 탈탈의 병권을 몰수해 버렸다. 그리고 합마의 동생 설설을 추밀원
사에 앉혔다. 병권을 몰수당한 탈탈은 회안로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합마 형제는 그 정도로
그치지 않고 후환이 남을 것이라 걱정하여 어사대에 지시해서 갖가지 죄명을 날조, 탈탈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리하여 가짜 성지와 독약을 든 사신이 탈탈 형제에게 파견되었고,
두 형제는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원나라 말기의 비교적 뛰어난 정치가였던 탈탈은 이렇게
간신의 음모에 걸려들어 비참하게 죽고 말았다. 음모와 계략이란 면에서는 당나라 때의 허
경종, 이의부, 이임보도 결코 뒤지지 않는 고수들이었다.
<신당서><이의부전>에 따르면, 이의부는 늘 쉽게 가까워진 수 있는 사람으로, 다른 사람
들과 잘 어울리며 항상 얼굴에 미소를 띤 채 공손하기 짝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내심은
음험하고 교활하며 시기와 질투심에 사로잡혀 있는 자였다. 조금이라도 그의 뜻에 따르지
않는 자는 반드시 몰래 중상모략으로 해쳤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그를 '웃음 속에 칼
을 수기고 있다.'는 뜨싀 '소중도'라 불렀다. 그런가 하면 그의 특기가 '부드러움으로 사람
을 해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 살쾡이'라고도 불렀다. 당시 그의 음모에 피해를 입은 사
람은 수도 없이 많았다.
이임보는 이의부에 비해 한술 더 떴다. <신당서><이임보전>에 따르면 이임보는 "성격이
음흉하고 치밀했으며 사람을 죽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등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고 한다. 사람들과 사귄 때는 더할 수 없이 친근하다가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표면
적으로는 여전히 은근하고 듣기 좋은 말을 하지만 "은밀히 몰래 그 사람을 해치고도 표정
하나 달라지지 않았다." 이임보는 배운 것도 보잘것없어 "간신히 붓을 잡을 정도며 말도 천
박하기 짝이 없어 듣는 사람이 돌아서서 웃었다." 그러나 그런 그가 요직에 올라 무려 19년
동안 재상 자리를 움켜 쥘 수 있었던 것은 "아첨으로 입신하여 음모로 총애를 튼튼히 하는"
정치적 술수와 수완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입으로는 달
콤한 말을 쏟아내지만 뱃속에다가는 칼을 품고 있는" 대간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정
치적 술수는 이니 최고봉의 경지에 올라 일반 선량한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것
은 물론, 노련하고 교활한 거간조차도 그 술수에 말려들어 많은 사람들이 그와 함께 일하기
를 꺼리며 그의 암수에 걸려들지나 않을까 두려워했다.
개원 24년, 현종은 변방의 장수 우선객이 삭방 절도사로 공적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그에
게 봉지와 조세권을 내려주려 했다. 장구령은 찬성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임보와 함께 현종
앞에서 단단히 반대하기로 약속했다. 이임보는 그 자리에서는 동의를 표시했지만 막상 현종
앞에서는 꿀 먹은 벙어리 마냥 끙끙거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개인적으
로 이일을 우선객에게 알려 우선객을 선동했다. 우선객은 황제를 만나 울면서 관직에서 물
러나겠다고 어린양을 부렸다. 이 일이 있은 뒤로 현종은 장구령을 점점 멀리하다가 끝내는
그를 재상 자리에서 내쫓았다.
형부상서 이적지는 당 태종의 증손자로서 "일을 미루지 않고 정확하게 신속히 처리하는"
인물이었다. 천보 원년, 우선객이 죽자 그의 자리를 이어받아 좌상이 되었다. 그러자 이임보
는 이적지가 자신의 총애를 빼앗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여 은밀하게 함정을 팠다. 그는 이적
지를 만난 자리에서 "화산에 금광이 있는데 채굴하면 나라를 부유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
오. 그러나 황상께서는 아직 모르고 계시오."라고 말했다. 이적지는 그것이 음모인 줄도 모
르고 이 이야기를 현종에게 해주었다. 현종은 매우 기뻐하며 이임보이게 어떻게 하면 좋겠
냐고 물었다. 그러자 이임보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저도 그 금광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화산이 폐하의 천명과 왕기
가 서린 곳이기 때문에 개발해서는 안 되기에 지금까지 말씀드리지 않은 것입니다."
이 때문에 현종은 이적지에게 큰불만을 품은 반면, 이임보야 말로 충직하여 믿을 만하다
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현종은 이적지에 대해 "앞으로 보고할 일이 있으면 먼저 이
임보에게 알리고 그렇게 경솔하게 굴지 말라!"며 면박을 주었다. 이후 이적지는 이임보와 함
께 일하기가 몹시 겁이 나 재상 자리를 사퇴해 버렸다.
몰래 등뒤에서 화살을 쏘아 사람을 해친다. 음모로 정적을 해친다. 권모술수와 못된 계략
을 부린다. 이런 것들은 간신들의 가장 두드러진 표현 형태이다. 또 수없이 많은 정직하고
선량한 사람들이 그들에게 당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의 하나이다. 수 백년 동안 간신들은 나
라와 백성을 그르쳤으며, 현명한 인재를 해치고 정치를 망쳤다. 그 과정에서 간신들은 가장
기본적인 수법으로 음모와 계략을 동원했다. 이는 그들의 음흉하고 야비하며 교활한 본성에
서 나온 간성의 집중적 표현이었다.
내재된 본성은 늘 외재적 특징으로 표현되며, 외재적 특징은 또 왕왕 내재적 본성을 반영
한다. 먼저 간신의 특징을 움켜쥐고 그들이 저지른 짓거리를 증명해야만 간신을 잡을 수 있
다.
간에도 도가 있다.
간심이 없으면 간은 싹트지 못한다. 간행이 없으면 간은 성장하지 못한다. 간술이 없으면
간은 쓸모가 없다. 간신은 대부분 간심을 쌓아 간을 싹틔우고, 간행을 실천하여 간을 키우
며, 간술을 베풀어 간을 펼치는 과정을 거친다. 자신을 알리고 신임을 얻어야 할 때, 겉으로
는 크게 충성스러운 것처럼 보인다. 세력을 확장하고자 할 때, 은혜를 베풀어 민심을 얻으려
한다. 앞길에 놓인 장애를 제거할 필요가 있을 때, 이간질과 무고로 사람을 해친다. 이 방면
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창조성은 실로 변화무쌍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도적에게
도 도가 있듯 간에도 도가 있다.
간사한 마음이 없으면 간사한 행동이 싹틀 수 없고, 간사한 마음이 있더라도 간악한 술책
을 통하지 않고서는 간사한 행위를 저지르기 힘들다. 도둑에게도 도가 있듯이 간신에게도
도가 있다. 간신들이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저지르는 술수는 변화무쌍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나름대로의 틀을 갖추고 있다. 우리는 그들의 행위에서 대체로 몇 가지 활동 규칙을
엿볼 수 있다.
간신, 소인들은 간사한 마음을 품은 채 얼굴을 알리고 신임을 얻어야 할 필요가 있으면,
늘 은근한 태도로 윗사람의 바위를 맞추고 충성심을 과장하여 드러내며 말할 수 없이 알랑
거려 귀여움을 얻는다. 모든 간신이 동정과 신임을 얻는 과정에서 흔히 써먹는 수단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첫째, 은근하게 떠받들어 친근함을 얻는다.
"바람과 힘을 잘 빌려서 나를 푸른 창공으로 올려보낸다." 누가 되었건 내게 쓸모가 있다
면 나의 흔적을 남길 수 있는 대상과 의지할 수 있는 산이 될 수 있다. 그렇기에 몸과 마음
을 다해 떠받들고 은근하게 대하며 감정상의 거리를 감축시키려 한다. 그리하여 그로 하여
금 나를 친근하게 보고 느끼도록 만드는 것, 이것이야말로 간신, 소인의 진짜 솜씨다.
수조는 보잘것없는 환관으로서 제나라를 혼한으로 몰아넣은 대간이었는데, 그 역시 처음
에는 은근하고 비굴한 태도로 입신했다. 수조는 어렸을 때 제 나라 궁으로 들어가 환공의
시중을 들었다. 그는 약삭 빠르게 환공의 생활을 유심히 관찰하여 환공의 습관과 각종 기호
를 알아냈다. 그리하여 항상 환공보다 앞서 생각하고 행동했다. 환공이 바라는 것, 좋아하는
것을 놓치지 않고 맞추었고 만족하게 했다. 자신의 손발처럼, 또 마음처럼 움직이는 수조가
하루라도 없으면 환공은 살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이런 수조에 대해 관중은 죽음을 앞두
고 이런 충고를 했다.
"수조라는 자가 넘치는 홍수와 같다면 저는 그 홍수를 막는 둑입니다. 제가 죽고 나면 둑
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므로 홍수가 사방으로 넘쳐 재난이 초래될 것이니 그 자를 멀
리하십시오."
그리고 관중의 절친한 친구 포숙아도 재상 자리를 이어받는 조건으로 수조의 축출을 요구
했다. 그러나 수조를 내쫓고 난 다음 제 환공은 마치 넋이 나간 사람처럼 하루하루를 우울
하게 지냈다. 얼굴에는 웃음이 사라졌고, 모습도 추췌해져 갔다. 끝내 수조를 다시 불러 들
였다. 그리하여 이들의 간행은 더욱 노골화되었고, 환공 자신도 그들의 소에 죽고 말았다.
역사상 많은 간신들은 일정 기간 남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입신한 경험을 갖고 있다. 명
나라 때의 대간 왕진은 어려서부터 영리하여 동궁에서 태자 주기진을 모시도록 선발되었다.
그는 몸과 마음을 다해 주기진을 모셨고, 마침내 그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다 들어줄 정도로
주기진과 가장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왕진 때문에 '토족보'에서 적의 포로가 된 뒤에도 주
기진은 왕진을 잊지 못하고 그에게 '정충'이란 명예를 내렸을 정도니, 참으로 어리석은 군주
에 어두운 신하요, 그 나물에 그 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 좋아하는 것에 비위를 맞추어 귀여움을 차지한다.
650년 당 고종 이치가 황제 자리를 이었다. 이때 이의부는 허경종과 결탁하여 사악함을
감춘 채 자신의 뜻을 굽히고 아부로 처신하고 있었다. 장손무기는 고종에게 그를 벽주의 사
마로 좌천시킬 것을 주장했다. 임금의 명령이 미처 하달되기도 전에 이의부는 그 소식을 탐
지하고 중서사인 왕덕검에게 쪼르르 달려가 대책을 물었다. 왕덕검은 허경종의 손아래 처남
으로 생김새는 보잘 것 없었으나 꾀가 아주 많은 자였다. 그는 이의부에게 이런 꾀를 일러
주었다.
"무소의가 지금 황상의 귀여움을 받고 있고, 황상께서도 황후로 삼고 싶어하시는데 재상
의 반대로 아직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고 계십니다. 이 문제를 그대가 꺼내 건의하면 전화위
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의부는 즉시 행동으로 옮겼다. 고종에게 글을 올려 "무소의를 황후로 삼는 것이 여러
사람의 뜨이오니 지금 황후는 폐하고 무소의를 세우십시오."라고 부추겼다. 이 수는 과연 적
중했다. 고종은 당장 이의부를 불러들였다. 좌천 명령이 취소되었음은 물론, 상으로 보석까
지 받았다. 게다가 무소의도 사람을 보내 감사의 뜻을 표시해따. 이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이의부는 파격적으로 중서시랑 자리에 올랐고, 다시 중서문하 3품을 받음과 동시에 작위도
받았다. 이렇게 간단히 임금에게 아부하여 이의부는 위기에서 벗어나 출세가도를 달렸다.
간신은 힘있는 자에게 꼬리치기 위해서 심지어는 자신의 취미와 기호마저도 그 사람과 일
치시켜 그와 함께 이리저리 구른다. 왕보 간은 간신은 농담을 좋아하는 송 휘종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국가 중신의 신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늘 "짧고 좁은 적삼을 입고 얼굴에는 무
르고 붉은 분을 바른 채 거리에 널리 퍼져 있는 음담패설로 기쁘게 만들었다."
북제의 후주 고담은 음탕하기 짝이 없는 인물로 술, 여자, 춤, 노래, 놀이에 푹 빠져 있었
다. 간신 화사개는 자신의 장기인 '주사위'놀이와 비파 타기로 그의 비위를 맞추었다. 그리
하여 두 사람은 절친한 친구처럼 함께 어울려 마시며 놀았다.
한번은 화사개가 고담에게 이런 말을 건넸다.
"전하께서는 하늘나라 사람이 아니라 하늘나라 황제이십니다."
그러자 고담은 이렇게 응수했다.
"경은 세상 사람이 아니라 세상의 신이오."
두 사람이 이렇게 찰떡처럼 궁합이 잘 맞았다.
화사개는 또 황후의 귀여움을 차지하려고 부끄러움도 잊은 채 그녀와 사통하며 긴밀한 관
계를 유지했다. 군주가 미녀를 좋아한다고 하면 놀리 미녀를 구해다가 바쳤으며, 군주가 사
치를 좋아하면 토목 공사를 대대적으로 일으켰고, 군주가 사탕 발린 헛소리를 듣기 좋아하
면 귓가에다 대고 갖은 아부의 말을 속삭였으며, 군주가 재물을 좋아하면 백성들로부터 가
혹하게 세금을 긁어들였다. 이런 일이 역사상 결코 드문 것은 아니었다. 상대가 좋아하는 것
에 비위를 맞추는 것, 이것이야말로 간신배의 무기이다!
셋째, 겉으로 충성심을 나타내어 신임을 얻으려 한다.
간사하면서도 충성스러워 보이는 것, 이것은 간신의 기술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신임을 얻을 수 없다. 간신 무리들은 주인의 면전에서는 항상 성실하고 충성심 넘치
는 모습을 보이며, 또 기회 있을 때마다 '일편단심으로 하늘을 모시는' 모습을 연출해 주인
의 신임을 얻는다. 그리하여 주인은 그를 크게 발탁해서 마음놓고 부린다. 역아가 자기 자식
을 죽여 요리를 만들어 환공에게 갖다 바친 일이나 사인이 화사개를 위해 오줌을 마신 것
등은 모두 이런 기술을 취한 것이었다. 세상에는 이런 '충심(?)'에 속아 일을 그르치는 사
람
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관중은 중병을 앓으면서도 나라 일이 걱정되어 환공에게 수조,역
아,개방과 같은 간신,소인배들을 멀리하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환공은 역아를 위해 역성을
들었다. "역아는 자기 자식까지 죽여 과인의 입을 즐겁게 해주었으니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
보다 과인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크지 않은가? 그 충성심을 어찌 의심한단 말인가?" 요나라
때 간신배의 우두머리 야율을신은 그 간행이 들통나 조정에서 쫓겨난 후, 원망을 가득 품고
은밀히 자신의 말을 황제에게 전해줄 수 있는 사람을 매수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보기
에 간신들이 조정에서 황상을 포위하고 있으니 폐하의 처지가 외롭고 매우 위험하오. 내 비
록 몸은밖에 있지만 마음은 언제나 황상을 위해 손에 땀을 쥐지 않은 적이 없었소." 그 사
람은 이 말고 함께 나라를 걱정하는 야율을신의 충심 어린 모습을 도종에게 속닥거렸다. 오
래지 않아 이 멍청한 황제는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야율을신을 복직시켰다. 화사개는
군주를 포악하게 이끌고 조정을 어지럽히면서 정직한 조정 신하들을 분통 터뜨리게 만들었
다. 568년 겨우 32세의 태상황고담이 병으로 죽자 조군왕이 죽음을 무릅쓰고 후주에게 상소
했다.
"화사개는 선제께서 내다 버린 자인데 권세를 빙자하여 나쁜 짓을 일삼고 뇌물을 주고받
는 등 궁궐을 더럽히고 어지럽혔습니다. 따라서 신 등은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그러자 대신들이 모두 들고일어나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화사개를 내
쫓지 않는 한 조야가 안정될 수 없습니다.!" 이런 분위기를 탐지한 화사개는 불안,초조에 떨
다가 입궁하여 태후와 후주 앞에 무릎을 끓고 되지도 않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신이 쫓겨
나면 반드시 큰 변란이 일어날 터인데 지하에서 선제를 무슨 낯으로 다시 뵈온단 말입니
까?" 뜻인즉 자신이 자리에서 쫓겨나면 후주 당신도 장차 조군왕 고예에게 쫓겨날지 모른다
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화사개는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나라를 걱정하는 양 충성스러운
모습을 연출했다. 아니나다를까 태후와 후주는 화사개의 연기를 진짜로 믿고 오히려 고예를
불충죄로 몰아 망나니의 도끼 아래 처참하게 죽도록 했다. 이 일에 연루되어 많은 사람이
죽었고, 이 사건은 불제시대 최대의 억울한 사건으로 남았다. 고예와 누공원, 원문요 등 힘
있는 신하들이 힘을 합쳐 화사개를 축출하려 했고 이는 많은 대신들의 지지를 얻었다. 풍익
왕 고윤, 안덕왕 고연종 등과 북제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개국 원로 단운 등도 찬성하고 나
서 성공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화사개의 궤변과 교활한 수단 때문에 마지막 한 삽을 마
저 뜨지 못하고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충성스러운 모습을 보여 신임을 얻는 것, 이는 간
신,소인들의 살인 무기 호신부이다. 이를 위해 그들은 때로 하늘에 두고 맹세를 서슴없이 하
며, 또 처자식을 죽이는 등 '실제 행동'을 취하기도 한다. 쉽게 믿어서는 결코 안 된다.
넷째, 간사한 아부로 환심을 얻는다.
송사<구준전>에 보면, 역사에서 '오귀'라고 부르는 간악한 권력자들 중 하나인 정위가 구
준의 수하에 있을 때는 구준을 지극히 공경하게 모셨다. 한번은 모두들 관저에 모여 밥을
먹고 있었는데 국을 마시던 구준이 국물을 자기 수염에다 흘렸다. 곁에 있던 정위가 후다닥
일어나 구준의 수염을 닦아주었다. 그러자 구준은 싱긋이 웃으며 "정사에 참여하는 국가 대
신이 어떻게 장관의 수염을 닦을 수 있소?"라고 말했다. 이때부터'수염을 쓸고 말 엉덩이
를
두드린다'는, 즉 '알랑거린다'는 뜻이 '유수박마'라는 성어가 널리 유행하기 시작했다. 간신
들
은 초기 단계에서 상사와 동료는 물론, 심지어 부하에 대해서도 소름끼칠 정도의 아부로 일
관하여 다른 사람의 환심을 산다. 당 태종 때의 악사 고최외란 자는 귀신이나 백치 분장을
잘 했다고 한다. 한번은 태종이 그의 머리를 물 속에 처박도록 했다. 잠시 후 그는 물 속에
서 머리를 빼내며 싱긋이 웃었다. 태종이 왜 웃는냐고 묻자 고최외는 이렇게 대답했다. "제
가 방금 전 물 속에서 굴원을 만났사온데, 그가 제게 말하길 '나야 초나라 부왕이 하도 무
도
하여 골라수에 몸을 던졌지만, 너는 성군을 만났는데 왜 여기까지 왔느냐?'라고 하더이야."
이 말에 대종은 한참을 소리내어 웃었다. 간신들은 이처럼 기가막히고도 교묘하게 드러내지
않고 아부하여 듣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다. 이런 일도 있었다. 남조의 송나라 문제
가 낚시를 했는데 한나절이 지나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그러자 왕경이란 자가 이렇게
말했다. "고기를 났는 사람이 너무 깨끗해서 미끼를 탐내는 물고기란 놈이 감히 물지 못하
기 때문입니다." 역사상 이처럼 싸구려 알랑거림에 정신 못 차리다가 끝내는 크게 당하고
후회한 자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엄숭은 벼슬에 오른 지 20여 년 동안 보잘것없는 존재였
다. 그는 남보다 두드러지기 위해 줄곧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는 문과 길을 찾았다. 그러다
가 마침내 같은 고향 출신의 내각 수보 하언을 찾았다. 하언은 명 무종 진사에 급제했는데
엄숭보다 12년이나 늦게 급제한 셈이었다.
과거로 말하자면 엄숭은 하언에 비해 한참 선배였다. 그러나 직무로 말하자면 하언이 엄
숭보다 높았으며, 또 세종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엄숭은 하언의 도움과 후원을 얻기 위해
선후배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하언에게 꼬리를 쳤다. 물론 엄숭의 아첨술은 다른 조무래
기들에 비하여 훨씬 수가 높았다. 언젠가 한번 엄숭이 술자리를 마련해 하언을 초청했을 때
의 일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하언이 엄숭의 초대를 거절했다. 엄숭은 몹시 당황했다. 하언을
집으로 초청하지 못하면 그와 통할 수 있는 길이 끊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엄숭은 몸소 하언의 집으로 달려가 직접 초청했는데 그 목소리가 은근하고 애절했으며, 또
아주 진지해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자기 집 앞에서 오랜 시간 꿇어앉아
있는 엄숭을 보고 하언은 그의 태도가 너무 공손해서 자목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마침내
나아가 엄숭을 부축해 일으키고는 엄숭의 초대를 받아들였다. 연회석상에서 엄숭은 필생의
솜씨를 발휘하여 하언을 기쁘게 하려고 갖은 애를 다 썼다. 그리하여 하언은 아주 기분 좋
게 늦도록 놀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이날 이후 엄숭읜 하언의 호감을 사서 그의 추천을 받
아 승승장구 승진에 승진을 거듭했고, 오래지 않아 황제에게 직접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예부우시랑이란 요직에 앉게 된다. 그는 또 같은 술수를 부려 세종을 기쁘게 하는 데 있는
힘을 다했다. 이 때문에 엄숭은 60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하루 종일 세종의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며 참으로 눈물겹게 세종을 떠받들고 아첨을 떨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
가? 마침내 세종도 엄숭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고, 엄숭은 내각에 참여하기에 이르렀다. 간
신, 소인들은 사오항에 따라 각각 다른 수단을 쓴다. 그들이 처음 간사한 술수를 부릴 때 그
간심을 간파하여 유혹과 술수에 빠지지않고 통제하는 것이야말로 간신을 변별하고 제압하는
가장 기본적인 단계라 하겠다. 간신, 소인들은 간사한 세력을 확장하여 지지와 측근을 얻기
위해, 늘 은혜를 베풀고 권세를 자랑하며 일벌백계하는 권위술을 동원한다. 간신배들이 단숨
에 정상에 오른 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 대부분은 패거리를 지어 지지와 신임을 얻고, 또 측
근을 긁어모아 세력을 형성하는 과정을 밟았다. 이를 위해 그들은 늘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수단을 동원하였다.
첫째, 은혜를 베풀어 지지를 얻는다.
인자함과 의리를 가장하여 여론의 지지를 구하며, 작은 은혜를 베풀어 사람들의 호감을
얻는다. 인심을 얻기 위해 이들은 윗사람에게 굽실거리고 아부랄 뿐만 아니라, 동료 부하들
도 자기 몸처럼 아낀다. 엄숭은 본래 사람을 죽이고도 눈 하나 깜찍 않는 간적으로, 그에게
가담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살해당했다. 그런 그가 양계성이란 인물을 자기편으로 끌어들
이기 위해 1년 사이에 네 차례나 그를 승진시켰다. 그러나 양계성은 엄숭이 충직하고 선량
한 사람을 해치는 등 국가와 백성을 재앙으로 몰아넣는 것을 두 눈으로 보고, 엄숭이 조정
에 있는 한 나라가 단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을 것이라는 점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리하여
양계성은 백송과 국가를 위해 이 간신을 제거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는 엄숭의 죄상을 10대
항목으로 나열한 상소문에서 대담하게 세종을 향해 이런 질문을 던졌다. "폐하께서는 어찌
하여 도적 같은 신하 하나를 떼내어 버림으로써 만백성의 재앙을 돌보려 하지 않으십니까?"
애국, 충절의 마음이 문장마다 흘러넘치는 글이었다. 그러나 엄숭은 이를 구실로 삼아 양계
성을 옥에 가두고 자기 수족들로 하여금 혹독하게 고문하도록 했다. 고문이 얼마나 혹독했
던지 양계성의 몸뚱이는 살과 뼈가 완전히 분리될 정도였다. 너무나 극렬한 고통에 못 이겨
그는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 사기그릇을 깨뜨려 그 조각으로 자신의 썩어 분드러진 살접
과 피를 긁어냈다. 옥졸들은 차마 그 처참한 광경을 눈뜨고 보지 못했다.
가정 34년(1555), 도어사 장경, 이원총이 왜구 사건으로 세종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이 일
어났다. 엄숭은 세종이 이 두 사람을 죽이고 싶어한다는 낌새를 알아채고 궁리에 궁리를 거
듭한 끝에, 심문하는 과정에서 양계성이란 이름을 장경, 이원총과 함께 갖다 붙여서 세종에
게 보고를 올렸다. 멍청한 세종은 꼼꼼히 살펴보지도 않고 즉시 주필을 휘둘러 처리를 비준
했다. 그해 10월 양계성은 처형되었다. 이 과정에서 형부낭중 사조빈과 병부 무선사낭중 주
면지가 양계성을 위해 바른 소리 몇 마디 했다가, 엄숭의 미움을 받아 하나는 관직에서 쫓
겨나고 한사람은 옥에 갇혔다. 충독시랑 왕여는 양계성의 죽음을 동정했다가 엄숭의 원한을
샀다. 엄숭은 그 일이 있은 뒤 구실을 붙여 그를 죽여 버렸다. 이처럼 인간의 탈을 뒤집어쓴
야구와 같은 자도 처음 그 세력을 확장할 때는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럽고 친근하게 굴었다.
태감들이 그를 찾아올 때면 그는 언제나 즉시 몸을 일으켜 그들의 손을 꼭 잡과 자리에 앉
힌 다음, 얼마나 부드럽고 너그러우면서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모른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이렇게 착한 사람도 없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들 정도로 친근하게 대했다. 그리
고 떠날 때면 잊지 않고 금은 따위를 한 움큼 그들의 옷자락 속에 찔러넣었다. 이쯤 되는
태감들이 황제 앞에서 엄숭에 대해 좋은 말을 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엄숭이 권력을 장
악하는 데 있어 이것이 중요한 작용을 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남송시대 최후의 대간 가
사도도 이와 비슷했다. 가사도는 언제나 밝고 친근한 모습을 연출해냈다. 관리 수를 늘이고,
태학의 식비를 올려주며, 과거시험 선발자의 정원을 확대하는 등의 방법으로 세상을 속이고
인심을 훔쳤다.
둘째, 자신의 권세를 과시하여 패거리를 끌어모은다.
자랑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성현이라 해도 이 욕망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는 힘들다. 그러나 간신들은 그것을 정치 수단과 권모술수로 발전시킨다. 그들은 자신의 권
세와 자리, 그리고 자신이 받는 은총 정도를 한껏 과시하여 다른 사람을 질리게 하고 놀라
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이 자신을 존경하고 두려워하게 만든다. 그것은 곧 다른 사람을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는 수단이기도 하다.
동한시대의 대환관 장량의 권세가 조야를 좌지우지하고 있을 무렵, 맹타라는 무자가 장량
에게 줄을 대기 위해 장량의 감노에게 거액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맹타의 정성이 통했던
지 이 감노는 맹타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물었다.
"당신이 나한테 절을 한 번 하길 바랄 뿐이오".
맹타의 대답은 엉뚱했다. 알고보니 원래 맹타는 관직 하나를 얻을까 했는데 길이 없었다. 그
래서 이감노와 연을 맺어 그가 자신에게 절을 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명성을 높이고자 했던
것이다. 당시 장량을 만나러 오는 사람이 매일매일 끊이지 않고 문 앞에서 북적대는 바람에
길이 막혀 도무지 접근조차 힘들었다. 그런데 감노가 맹타를 안내하여 길거리에서 여러 사
람들이 보는 앞에 아주 공경스럽게 절을 하고는 수레에 태워 안으로 들어갔다. 문 앞에 모
인 사람들이 모두들 깜짝 놀라 장량과 맹타가 아주 친한 사이인가 보다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너나할 것없이 앞을 다투어 맹타에게 꼬리를 치며 금은 보화를 갖다 바쳤다. 맹타
는 자기 재산보다 몇 배나 되는 재물을 모았고, 이로 인해 양주자사에 임명되기까지 했다.현
실생활에서 이처럼 호랑이 가죽을 뒤집어쓰고 큰 깃발을 흔들어 보이며 자신의 힘을 떠벌려
권세가에 아부하려는 경우는 얼마든지 많다.
<송사>의 기록을 한번 보자. 간신 황경신은 실세 동관에게 꼬리를 쳐서 높은 자리에 오른
자였다. 이 때문에 그는 늘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으면 어쩌나걱정했다. 그래서
자신의 지위와 은총을 받는 정도를 과시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높이려 했다."입만 열었다
하면 황제의 명령이 모두 내 손에서 나가며, 황제가 누구를 기용하거나 무슨 일을 벌이기
위해 조서를 내리면 모두 내가 말한 것과 같았다."고 떠벌렸다.
간신의 이러한 술수는 때때로 아주 유효하여, 진상을 잘 모르는 사람들의 존경을 얻을 수
을 뿐만 아니라 그 세력에 달라붙으려는 자들의 아첨을 끌어들일 수도 있다. <<명사>><양
계성전>에서 양계성이 엄숭을 탄핵하면서 제기한 '오간십죄'중 하나가 바로 황상이 누구를
기용하면 엄숭이 자기가 추천한 사람이라 말하고, 황상이 누구를 욕하면 엄숭은 자신이 좋
지 않다고 말했기 때문이라 떠벌리며, 황상이 누구를 용서하면 엄숭은 자기가 그 사람을 구
했다고 큰소리를 치고, 황상이 누구를 징벌하면 엄숭은 자기에게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열을 올렸다는것이었다. 엄숭은 이런 수단으로 자신의 정치적 자위를 공고히 하여 정치적
목적을 달성했다.
셋째, 살인으로 권위를 세움으로써 존경과 두려움을 얻는다.
사람을 죽여 권위를 세우는 것은 간신들이 자신의 통치를 확고히 하기 위한 것으로, 부끄
럽고 분한 나머지 성이 나거나 다급해 갈팡질팡할 때 쓰는 최후의 술수다. 북주의 대간 우
문호는 권력을 쥐자마자 따르지 않는 자는 누구든 제거하려 했다. 그는 먼저 '반역죄'를 뒤
집어 씌워 공신조귀를 죽이고 막바로 왕룡인등을 처형했다. 온 집안식구의 재산을 몰수하는
것은 물론 모조리 함께 죽여 버렸다. 우문호가 이렇게 한 것은 이들 노장 원로들이 그의 행
동에 불만을 품고 평소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조정 중신의 하나였던 후막진
숭은 우문호의 횡포가 눈꼴사나워 부하들에게 불만을 드러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우문호
는 무제를 끼고 기어이 그를 제거해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무제는 강압적으로 대덕전
에다 공경대신을 소집해놓고 여러사람 앞에서 후막진숭을 문책했다. 그러나 음흉하고 악랄
한 우문호는 이 정도로 끝내지 않았다. 그는 여러 공경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그날 밤으로
당장 군대를 보내 후막진숭의 집을 포위하여 그를 자살로 몰아넣었다. 간신들은 자신의 위
신과 지위를 그 어떤 것보다 높고 중요하게 여긴다. 따라서 그들의 권위가 일단 도전을 받
으면 그들은 열 배 백 배로 잔인해져 미친 듯이 공격을 가하고 심지어는 살인도 서슴지 않
는다. 산을 울려 호랑이를 떨게 함으로써 자신의 위신과 지위를 세우고 지키려는 것이다. 이
를 위해 조고는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우기는 함정을 하 그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를 살펴
가며 자신의 위신을 세우려 했다. 양기는 자신의 단점을 들추어내어 자기 직속 상관에게 보
고한 낙양현령 여방을 잔인하게 죽였다. 청대의 대간 오배는 더욱 잔인했다. 자기와 의견이
다르다고 보정대신 소극할합 및 그 받아들인 내대신 사극사와 세 아들, 손자 한 명, 형제 두
병을 죽여 버렸으니, 흉악의 극을 치달았다고 할 수 있다. 간신, 소인들은 장애를 제거하고
자 할 때 흔히 이간,모함,음모의 술수를 발휘한다. 사람을 해치지 않는 자는 간신이 아니다.
사람을 조종하지 않는자는 간신이 아니다. 그들이 국가와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고, 조정의
기강을 어지럽히며, 천륜과 인간의 도리를 파괴하는 등의 짓거리도 사람을 해치고 사람을
조종하는 데 집중적으로 표현된다. 이 방면에서 그들은 검은 심장과 야수와 같은 잔인힘을
가지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음으로써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취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누구도 따를 수 없으리만치 조예가 깊고 무궁무진한 창조력을 발휘한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들의 술수를 한두 가지만 살펴보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첫째, 이간질을 밥먹듯 하고 거짓말로 사람을 해친다.
간신들이 자신을 높이는 기본 방법은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타격
을 가하는 유효한 수단은 이간질이다. 송사의 기록을 보자. 간신 만사설은 애당초 악비에게
몸을 의지해 출세하려고 했다. 그래서 악비에게 "병사를 늘리고, 군수를 충분히 확보하며,
권위를 세우고, 사람을 심어라."라는 제 가지 대책을 제안했다. 그러면서 악비에게 조정의
명령에 따르지 말고 군비를 확충하고 그 군대를 바탕으로 한 지역을 차지하여 독립하라고
했다. 그러나 민족의 모순이 전에 없이 치열하고 백성은 전란의 고통 속에 허덕이고 있는
사오항에서, 악비는 국가와 민족을 중시하여 만사설의 분열책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를 심하
게 나무랐다. 만사설은 '닭은 훔치려는 뜻은 이루지 목하고 공연히 모이만축낸' 꼴이 되고
말았다. 분노와 수치심에 사로잡힌 만사설은 조정에 글을 올려 악비가 반란을 꾀한다며 이
렇게 말했다. "양한 지방은 국가의 목구멍과 같은 요충지로, 악비가 장기간 이 지역을 확보
하여 민심을 얻는 날에는 언제든지 조정을 배반할 수 있으니 주의 깊게 방비해야 할 것입니
다." 훗날 '막수유'란 죄명을 씌워 악비를 해치기 위한 복선을 까는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
다.
사실 이간질은 독하기는 하지만 회고의 술수는 아니다. 기껏해야 '소아과' 정도라 할 수 있
다. 이 방면에서 나름대로 성공을 이루고 깊은 조예를 가진 자들이 많았다.
명나라 때의 서유정, 석형, 조길상은 역사상 그다지 이름나 인물들은 아니었지마, 그들 사
이에서 벌어진 상호 투쟁과 음모는 아주 흥미롭다. 서유정, 석형, 조길상은 모두 영종의 복
위를 추진한 공으로 중용된 인물들이었다. 이 세 사람은 처음에는 서로 돕고 이해하는 사이
였지만, 성공한 다음에는 이내 격렬하게 싸우기 시작했다. 서로 힘을 겨루는 중에 가장 먼저
우세를 차지한 자는 서유정이었다. 서유정은 지략이 뛰어나고 결단력이 있는데다 천문지리
나 음양술 등에도 조예가 깊었기 때문이었다. 영종이 복위한 다음 여러 대신들은 함께 상의
하여 복위 조서를 작성했다. 이를 본 영종은 미우 만족스러워했다. 그런데 서명자들 가운데
서유정만 빠져 있었다. 영종은 마음이 영 언짢았다. 그래서 서유정을 불러 그 까닭을 물었
다. 서유정은 아무 말 없이 소맷자락에서 그가 작성한 복위 조서를 꺼내 올렸다. 조성를 읽
고 난 영종은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구구절절이 자신의 심경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이
여러 신하들이 공동으로 작성한 복위 조서보다 훨씬 강력했다. 이후 그는 영종이 가장 신임
하는 인물이 되었다. 조정의 모든 일이 모두 그의 손에서 처리되었다. 석형과 조길상은 본래
영종의 복위 과정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여 공으로 말하자면 서유정과는 비교가 안 될 정
도였다. 그런데 지금 서유정이 오히려 그들을 뛰어넘었으니 생각할수록 울화가 치미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이런 심정을 늘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로써 쌍방의 갈등은 갈
수록 격렬해져 갔다.
당시 영종은 툭하면 다른 신하들은 물리고 서유정만 불러들여 은밀히 의논하곤 했다. 이
를 본 조길상은 바로 그 점을 이용하면 서유정을 거꾸러뜨릴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그리
하여 그는 수시로 태감으로 하여금 두 사람의 이야기를 몰래 엿듣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조길상과 석형은 영종이 다른 사람은 모르길 원하는 은밀한 정보를 적지 않게 빼낼 수 있었
다. 그런 다음 조회석상에서 수시로 그 점을 들추어냈다. 영종은 의아해서 두 사람에게 누
구한테서 들었냐며 다그쳤다. 두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서유정이 알려주었노라 대답하면서,
아울러 서유정이 자신들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불고 다니는 바람에 바깥이 이미 시끄럽다고
덧붙였다. 본디 어리석기 짝이 없었던 영종은 이 말에 서유정을 믿을 수 없다고 느끼고 그
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서유정이 자신들을 해치려 한다며
울면서 호소했다. 그리하여 서유정은 투옥되었다가 조정에서 쫓겨나 광동참정으로 좌천되었
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다. 몰래 사람을 시켜 궁중으로 익명의 투서
를 하게 했다. 투서 내용은 온통 영종이 남에게 알려지기 꺼려하는 비밀스러운 일들뿐이었
다. 두 사람은 조정 내의 평지풍파는 모두가 원한을 품은 서유정이 자신의 문객을 시켜 비
밀을 퍼뜨렸기 때문이라며 영종을 부추겼다. 화가 머리끝까지 뻗친 영종은 서유정의 관직을
완전히 박탈하고 평민으로 낮추어 요동 지방으로 내쳐 버렸다. 동서고금을 통해 볼 때 간신
들은 괴가 많아 왕왕 충간과 시비를 구별하기가 어렸다. 무고를 당하고도 그 억울함을 밝히
지 못하는 군자들도 적지 않았다. 굴원은 간신의 무고 때문에 골라강에 몸을 던졌고, 가의는
조정 대신의 비방 때문에 장사로 유배당했다. 간신, 소인들이 참언으로 이간으로 도발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을 족였던가?
둘째, 겉으로는 치켜세우지만 속으로는 끌어내리고 음모로 사람을 해친다.
간신은 음흉하고 악독한 무리다. 이들은 진실을 왜곡하며 사람을 조종하고 해치는 데에
그야말로 일가견을 갖고 있다. 고충이 있어도 말 못하게 만들고, 억울함이 있어도 하소연하
지 못하게 만든다. 송사를 들춰보자. 송나라 때 양대이는 진사에 급제한 다음 사천제치사참
으관에 임명되었다. 북방에 난리가나 오랑캐가 성도에 쳐들어왔을 때 그는 비록 서생의 몸
이었지만 몸을 아끼지 않고 분전하다가 온몸을 검에 찔렸다. 그런데 하늘이 도우셨는지 죽
은 줄 알았던 양대이는 살아났고, 부하가 몰래 그를 업고 빠져나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의 가족은 난을 피하지 못했다. 상처가 나은 후 지방관에 임명되 그는 재임 기간 중에 깨끗
하게 일하여 조정에서 대리사승으로 발탁했다. 부임지로 떠나는 날 "남녀노소 할 곳 없이
손을 붙들고 그를 못 가게 하는" 바람에 "옷을 갈아입고 몰래 떠나야만 했다." 바로 이런
사람이 국정의 잘잘못을 신랄하게 논하다가 조정의 승상에게 잘못 보여 그만 조정에서 쫓겨
나고 말았다. 어느 날 오랬동안 양대이기 보이지 않는 것을 알게 된 이종이 "사천에서 죽었
다 다시 실아난 그 양대이는? 솔직하고 간절하게 일을 논하는 것이 쓸 만한 인재인데 어째
서 갑자기 안보이는가?"라며 궁금해 했다. 그러자 재상을 "그는 백성을 잘 다스리기" 때문
에 지방관으로 발령내 자신의 장기를 발휘하도록 했다고 대답했다. 보라! 이들 간신배들이
얼마나 음흉한지! 다행스럽게도 이종은 음흉한 마음을 간파하고 끝내 양대이를 조정으로 다
시 불러들이기는 했다. 겉으로는 치켜세우지만 속으로는 몰래 깎아내리며 살기를 감추고 있
다. 보기에는 한 조각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엄청난 것을 노리고 있다. 허점 없는 구실로
음모를 감추고 있다. 진 왕조 때 효무 황제는 왕국보, 왕아 등을 가까이 했다. 술자리를 베
풀어도 이들이 도착하지 않으면 먼저 잔을 들지 않을 정도였다. 왕아가 황제에게 왕순을 추
천하자 황제는 왕순을 꼭 만나보고 싶어졌다. 어느 날 밤 황제는 왕국보, 왕아와 함께 술을
마셨다. 술이 약간 오르자 황제는 왕순을 불러들이도록 혔다. 이때 왕국보는 이런 생각이 들
었다. 자기 재능은 왕순에게 못 미치는데 왕순이 황제를 만나게 되면 틀림없이 자신의 총애
를 빼앗아갈 것이다. 그래서 왕국보는 황제에게 이렇게 말했다. "왕순은 당대의 명사이니만
치 폐하께서도 그를 존중하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니 주색으로 그를 만나시는 것은
적절치 않은줄 아옵니다." 왕국보의 말에 황제는 그가 정말 자기에게 충성을 다한다고 여겨
그의 말에 따라 왕순을 불러들이지 않았다. 양 머리를 내걸어놓고 기고기를 팔며, 슬그머니
쥐도 새도 모르게 칼을 갖다 댄다. 이보다 음흉하고 악독한 경우는 없다. 진상을 모르는 사
람을 그를 아주 자비로운 보살로, 하늘의 도를 대신 실해하는 영웅으로, 또 중생을 구제하는
천사로 생각할 태니까.
셋째, 죄를 뒤집어씌우고 함정을 파서 사람을 해치며 악독한 말로 중상모략한다.
자기의 적수를 거꾸러뜨리려면 구실과 증거가 필요하다. 그러나 구실과 증거가 없을 때는
철저히 날조할 수밖에 없다. 상대방의 잘못을 유도하거나 죄를 뒤집어씌워 상대를 해치는
짓이 간신배들에게는 손바닥 뒤집듯 아주 간단하고 쉬운 것이다. 사진의 혜제는 역사상 이
름난 백치 황제였다. 지능이 모자라고 어리석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가 황제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조정의 대권을 황후 가남풍이 손에 넣었다. 태자 사마휼은 아버지의 첩인
사구의 몸에서 태어났는데, 자신과어울리지 않는다 해서 가남풍은 그를 없애기로 결심했다.
어느 날 가남풍은 황제의 이름을 빌려 태자를 입궁케 하고는 술 한 병을 주며 한 방울도 남
기지 말고 다 마시라고 했다. 술이 세지못한 태자는 한 병을 다 마시자 취해서 정신을 차리
지 못했다. 이 틈에 가남풍은 태자의 말투를 흉내내어 황제를 내친다는 격문을 읊으면서 그
것을 태자로 하여금 받아 적게 했다. 정변을 일으키면서 내거는 격문을 제 손으로 쓰게 한
것이다. 가남풍은 그것을 혜제에게 갖다 주었다. 태자의 필적임을 확인한 혜제와 대신들은
즉시 태자를 자리에서 내쫓았다. 역사상 이와 비슷한 경우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았으나 착
한 사람들은 그것을 미리 막지 못했다. 수호전에서 임충이 함정에 빠져 백호절당으로 잘못
들어간 것이 그런 경우가 아니고 무엇인가? 참으로 천고에 억울하고 또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착한 사람은 늘 이렇게 생각한다. 사람이 그렇게 나빠서야 어디가서 또 나쁜 짓을
할 수 있겠냐고, 내 몸이 바르면 무엇이 두려우며, 또 그런 자들이 내게 무슨 짓을 가하겠냐
고. 너무도 순진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욕망을 이루기 위해, 때로는 자기 신변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간신들은 무슨 짓이든 한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고 진실을 호도한다. 당신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짓거리를 그들은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눈 한번 깜짝
않고 해치운다. 춘추시대 진 헌공의 귀여움을 차지하고 있던 여희는 자기가 낳은 아들을 태
자로 세우고 싶었다. 그래서 태자 신생에게 이런 술수를 쓰기 시작했다. "왕께서 어젯밤 꿈
에 태자의 모친 제강을 보았다 하니 빨리가서 제사를 드리는 게 옳지 않겠소?" 태자는 고마
운 마음으로 곧 알려가 어머니에게 제를 올렸다. 제를 끝내고는 제사용 고기를 아버지 헌공
에게 올렸다. 헌공이 고시레를 위해 술을 땅에 뿌렸더니 땅이 부글부글 끓었고, 고기를 개에
게 주었더니 먹자마자 죽어 버렸다. 시종들에게 먹으라고 주었더니 시종도 죽어 버리는 것
이 아닌가? 그러자 곁에 있던 여희가 통곡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태자기 대왕을 독살하
려는 것 아닙니까?" 이에 태자 신생은 신성으로 도망갔다가 그곳에서 목을 매어 죽었다. 사
람은 이럭헤 악할 수 있다. 좀더 확실하게 말하자면, '이렇게 악독한 사람도 있다.!'
넷째, 잘못을 폭로하고 못난 점을 떠벌리며 기회를 엿보아 사람을 조종한다.
누군가가 순조롭게 발전하면 사람들은 그를 칭찬하고 떠받든다. 그러나 그 사람이 잘못을
저질러 좌절에 빠지면 그를 칭찬하던 사람들은 그를 떠난다. 그를 싫어하며 떠나기도 하고,
'경계를 분명히 긋고' 떠나기도 한다. 이런 자들은 충분히 비열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간
신
들은 이들보다 훨씬 더 야비하다. 그들은 평소에도 주구를 조종하고 싶은데 손댈 길이 없어
고심한다. 그러나 일단 상대의 허술한 틈을 찾아내거나 상대가 쓰러지는 것을 보면, 남의 불
행이 곧 나의 행복이라는 기세로 달려들어 영원히 일어나지 못하도록 밟아 버린다. 그리하
여 그는 평소 이루지 못했던 목적을 달성한다. 당나라 때의 노기는 간사한 짓을 저지르고도
그것을 모르게 만든 대간 중의 대간이었다. 그가 양염과 함께 재상으로 있을 때, " 당시의
폐단을 고치는 등 그 명성을 자못 드날렸던" 양염은 노기를 무시해서 심지어 그와 함께라면
밥도 먹지 않을 정도였다. 이 때문에 노기는 이를 갈며 양염을 미워했다. 줄곧 기회만 노리
며 반드시 양염을 없애겠다고 다짐했다.
그 뒤 양염의 아들이 법을 어기는 일이 일어났다. 게다가 양염이 자신의 집을 관가에다
파는 일까지 겹쳤다. 이런 기가 막힌 기회를 노기가 놓쳤겠는가? 노기는 즉각 대대적인 공
격을 가해 양염을 애주사마로 좌천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뿐만 아니라 쫓겨가는 도중에 목
을 졸라 죽였다. 명나라 영종 때의 양사기, 양영, 양박이 '삼양'은 당시 현명한 재상으로 꼽
혔다. 간신 왕진은 조정을 손아귀에 넣기 위해서 반드시 이 세 사람을 없애 버려야만 한다
고 생각했다. 여러 차례 손을 썼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얼마 뒤 양영이 세상을 떠나고 양
사기는 골치 아픈 문제에 부딪치게 되었다. 왕진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원래 양사기의
아들 양직은 고향에서 행패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사람까지 족였다. 왕진은 이런 점
들을 구실로 삼아 양사기의 약점을 폭로하고 공격함으로써 양사기를 정신 못 차리게 만들었
다. 양사기로서는 도저히 왕진과 맞설 수 없었다. 왕진은 이렇게 해서 내각을 장악했다. 북
외 제 9대 황제 원후는 황제 자기에 오를 때 겨우 여섯 살 이었다. 그 당시는 호 태후가 권
력을 쥐고 있고 원차가 정치를 어지럽게 만드는 등 나라가 매우 혼란스러웠다. 오로지 태부
이자 청하왕 원역만이 있는 힘을 다해 충심으로 황제를 보좌했다. 오랫동안 원역의 자리에
침을 흘려왔던 원차는 사사건건 자신의 단점을 꼬집는 원역에 대해 엄청난 증오심을 품었
다. 그러나 구실 없이 손을 쓸 수는 없기에 속만 태우고 있을 뿐이었다. 이때 마침 호 태후
의 강압에 못 이겨 원역이 호 태후와 음란한 짓을 한 스캔들이 발생했다. 원차는 이 일을
빌미로 대대적인 공격을 가했다. 사건을 한껏 확대하고 자신의 조무래기들에게 명령하여 원
역이 반역을 꾀하고 있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도록 했다. 원역의 위신과 명성은 이로써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고, 원차는 다시 정세를 틈타 궁정 정변을 일으켜 원역을 없애 보렸다.
인간이 성인이 아니고야 누구든 잘못이 없을 수 없다. 설사 성인아라 해도 날못을 면하기란
쉽지 않다. 가만히 틈을 엇보다 들고 일어나 정확히 상대를 노려 때려 죽이는 것, 이는 간
신,소인만이 가질 수 있는 잔인한 본성이다.
다섯째, 일부러 사건을 일으켜 남의 손으로 상대를 죽인다.
그들은 이간질과 거짓말로 사람을 해치는 짓을 아주 쉽게 저지르는 것은 물론, 일부러 일
을 일으켜 남의 손을 빌어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남의 손을 빌어 사람을 죽이는 술수의 장
점은 자신의 목적을 남을 통해 실현시킬 수 있다는 데 있다. 또 자신을 드러나지도 않고 손
해를 보지 않아도 된다. 이임보는 두선객을 재상으로 삼으려는 현종의 조치에 반대하는 장
구령의 뜻을 우선객에게 알려, 우선객으로 하여금 조정을 발칵 뒤집어놓게 함으로써 장구령
에게 보복했다. 남의 손을 빌어 상대를 해치는 매력이 바로 이런 데 있다. 노기의 간사한 짓
을 어째서 사람들은 몰랐을까? 그 이유는 그가 흔히 써먹는 수법이 바로 남의 칼을 빌어 상
대를 해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안진경은 곧은 성품으로 거리낌없이 바른 말을 하는 일물이
었따. 그런 그가 노기를 건드리는 바람에 노기는 황제파들을 부추겨서 그를 반란군의 장수
이희역에게 사신으로 보내 협상하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 역사상 위대한 서예가이자 깨끗하
고 곧음의 상징이었던 안진경이 잔인한 이희열의 손에 취후를 맞이해야만 했다. 간신, 소인
들이 나므이 칼을 빌어 사람을 죽이는 일은 실제로 셀 수도 없이 많았다. 또 그들은 자기들
끼리의 싸움에서도 늘 이 수단을 밥 먹듯 써먹었다. 명나라 숭정때의 일이다. 주연유와 온체
인은 처음에는 서로 쿵짝이 맞아 함께 간사한 짓을 저지르며 다녔다. 그러나 권력을 놓고
두 사람은 서로 몰래 밀고 당기며 힘겨루기를 했다. 숭정 5년 산동진수 이구성이 난을 일으
켜 등주를 손에 놓고 자립했다. 병부시랑 유우열이 병사를 이끌고 토별에 나섰으나 별다른
공을 세우지는 못했다. 이 무렵에는 또 농민 봉기가 각지에서 일어나고 후금이 끊임없이 세
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이 통에도 탐관오리들은 자신들의 배 채우기에만 급급해서 나라와
백성은 켜다란 어려움에 빠졋다. 많은 사람들이 재보를 잘못 기용했다며 주연유의 '비리'를
들어 공격하기 시작했다.
때가 왔음을 눈치챈 온체인은 어부지리를 얻고자 다른 사람을 시켜 주연유의 '사사', 즉
네 가지 비리를 공격하도록 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비리가 '폐하를 희황상인으로 보았
다.'
는 것이었다. 주연유는 이 말이 대역무도죄에 걸리는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변명하려 했으나, 증인이 나서는 바람에 꼼짝달싹 못하고 파면당해 고향
으로 되돌아갔다. 온체인은 이렇게 남의 손을 빌어, 또 숭정황제의 손을 빌어 자신의 정적을
쓰러뜨렸다. 원나라 때 관직이 국자제주에까지 이르렀던 허형은 간신의 수치를 모르는 비열
한 본성과 간사하고 교활한 술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생동감 넘치게 그려낸 바 있다. "간사
한 자들은 그 마음 씀씀이도 음험하고, 그 부리는 술수도 교묘하다. 그 엄험함은 천태만사잉
어서 사람들이 알 길이 없고, 그 교묘함은 천 갈래 만 갈래여서 도저히 막을 길이 없을 정
도다. 삐딱한데도 곧은 것 같고, 속이는데도 믿음직한 거 같다. 군주의 희로애락을 잘 살펴
그 기분을 맞추고, 군주의 권세를 훔쳐 자신의 위엄을 세우려 하며, 군주의 욕망을 채워 군
주의 귀여움을 차지하려 한다. 위로는 귀여움을 구걸하고, 아래로는 위엄을 떨친다. 대신들
이라도 감히 의논하지 못하고 가까운 사람이라도 감히 말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 독이 온
천하에 퍼져도 임금은 알지 못한다. 이러니 그런 자들을 제거하기란 매우 어렵다." 참으로
일리 있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병가의 속임수와 권모술수를 채집하여놓은 오랜 병서로 <36계>란 것이 있다. 그러나 간
신, 소인들의 보물 상자에는 어디 3계뿐이겠는가? 모르긴 해도 360계로도 그들의 수를 따르
지는 못할 것이다. 자신들의 야심과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들은 다음과 같은 술수들을 부린
다.
겉으로는 부서진 길을 수리하는척하면서 몰래 목적지인 진창을 건넌다 (명수잔도 암도진
창)
물을 일부러 흐린 다음 고기를 잡는다(혼수모어)
불난 틈을 타 도둑질을 한다. (진화타겁)
위를 포위해 조를 구한다.(위위구조)
동쪽이서 소리를 지르고는 서쪽을 친다.(성동격서)
웃음 속에 비수를 감추고 있다.(소리장도)
가까운 쪽은 공격하고 먼 쪽은친하게 지낸다.(원교근공)
시체를 빌어 혼을 대신한다.(차시환혼)
남을 대신 희생시킨다.(이대도강)
길을 빌리는 척해놓고 괵나라를 정벌해 버린다.(가도벌괵)
되려 주인 노릇을 하려고 한다.(반객위주)
강 건너 불 구경한다.(격안관화)
끓는 가마솥 밑에서 장작을꺼내 버린다.(부저추신)
하늘을 속이고 바다를 건넌다.(만천과해)
대들보를 훔쳐 기둥과 바꾼다.(투량환주)
그들은 이런 술수들을 신출귀몰하게 운용한다. 필요하다면 그들은 그 극단까지 써멱지 않
는 것이 없다. 어진 사람으로 가장하고, 때로는 숨어 버리며, 거짓으로 황제의 명령을 빌리
기도 한다. 간신, 소인들의 이런 음모와 간사한 꾀를 인식하지 못하고서는 간신을 가려낼 길
이 없다. 그들의 비열한 기술을 제대로 밝히지 못하면 그들을 제압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진짜 간신들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게 되고, 나쁜 짓을 다 저지르고 난 다음에도 여전히
그들을 보통 사람들 사이에 섞일 수 있게 한다. 심하면 그들을 선량한 사람 속에 집어넣기
까지 한다. 그런 사이에 진정한 충신과 양심 있는 관리들은 하나 둘씩 화살에 맞아 말에서
떨어진다. 그러면서도 그 화살이 어디에서 날아왔는지, 누가 쏘았는지도 모른다. 이런 이치
는 참으로 간단하지만 그 속의 교훈은 심각하고도 심각하다!
7.가식과 허상의 짙은 안개를 걷어내라
가식은 간녕의 본질적 특징 중 하나이다. 그들은 남들의 믿음을 얻기 위해 거짓 인의를
표방한다. 남에게 박해를 가하기 위해 거짓 증거를 내세우며, 인간과 사물을 대함에 있어서
는 거짓된 마음에 의지한다. 그들은 거짓 행동으로 일을 처리하며, 가상으로 남의 환심을 사
혀 한다. 따라서 그들은 항상 자신을 위장한다. 정직과 성실함을 위장하고, 너그러움을 위장
하고, 박학다식함을 위장하고, 충성을 위장한다. 우리는 민중의 관점, 실천의 관점, 역사의
관점으로 그 가식과 허상을 낱낱이 들추어내고 그 진면목을 밝혀내야 할 것이다.
간신이 저질렀던 간행에도 불구하고, 충성스럽고 선량한 시하들조차 흔히 그들에게 홀려
서 조정의 중요한 자리에 그들을 추천하고 끌어들였다. 또한 간신들은 오랜 시간 동안 일부
또는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존재였다. 한휴눈 당나라 때의 이름난 정치가였으나 대간
이임보를 추천하면서 제때 기용되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했고, 뛰어난 재상이었던 구준은 자
신이 한사코 추천한 정위에게 모함당해 유배되었다가 객사했다. 대체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나는가? 그 이유는 간신이 간행을 저지르는 과정에 두꺼운 거짓이 자리잡고 있어
이 거짓이 그들을 충성스럽고 현명하게 보이도록 하기 때문이다. '거짓'은 간신의 가장 본질
적 특징 중 하나이다. '간'과 '거짓'은 직접적이고 본질적이며 필연적인 관계이다. 왜냐하
면
'간' 자체가 '거짓'을 포함하고 있으며, '거짓'은 또 몸을 돌려 '간'을 위해 봉사하기 때문이
다.
'간'은 '거짓'의 핵심이며, '거짓'은 '간'의 필연적 껍직이다. '거짓'이 없으면 '간'은 적나
라한
'악'이 되지, '간'이 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간신,소인치고 거짓 행위를 하지 않는 자는 하
나
도 없었으며, 거짓에 익숙하지 않은 자도 없었다. 그들은 거짓 인의로 신임을 얻고, 거짓 증
거로 사람을 해치며, 거짓된 마음으로 사람과 사물을 대한다. 거짓말을 밥 먹듯 하며, 거짓
으로 일을 처리하고, 가짜로 진짜를 속이며, 거짓된 모습으로 세상을 속이고 명성을 훔친다.
역사상 수 양제가 아비와 군주를 죽인 반안륜적이고 음탕하며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였다
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런 그도 태자 자리를 빼앗고 곤룡포를 두를 때까
지는 청저하게 자신을 위장했다. 첫째, 태자 양용이 많은 첩을 거느리고 여자와 노래를 밝히
는 약점을 간파한 후 자신은 여색에 전혀 관심이 넚는 것처럼 꾸몄다. 많은 첩을 갖고 있었
지만 소비 한 사람만을 정식 배우자로 삼았다. 둘째, 양광(양제의 이름)은 또 자신이 유능한
선비를 존중하고 사람들과 쉽게 가까워질 수 있는 성격임을 표현하기 위해 애썼다. 귀천을
막론하고 만나는 사람 누구에게나 인사를 했으며, 손님은 반드시 소비와 함께 몸소 맞아들
이고 배웅했다. 그 태도는 너무도 공손하고 철저했다. 셋째, 양광은 허름하게 꾸미고 늙은
하녀가 일하는 집 한 칸을 구해 살았다. 그리고 일부러 부서진 악기를 한쪽 구석에 놓아두
고 그 위에 먼지를 쌓아 타지 않는 것처럼 꾸몄다. 자신이 놀이나 주색과는 거리가 먼 성인
군자임을 은근히 내비치려 했다. 넷째, 하루도 거르지 않고 황제와 황후에게 문안을 드렸으
며 좌우에서 보살핌으로써 효성스러움을 과시했다. 양광의 이러한 위장술은 확실하게 효과
를 보았다. 수 문제의 신임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황후의 마음도 얻었다. 또 궁중의 왕공,대
신은 물론, 노비들까지도 그의 인자함과 효성스러움을 아낌없이 칭찬했다. 이에 따라 태자
양용의 자리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마침네 양광이 그 자리를 대신하기에 이르렀다. 1898년 6
월 11일, 광서제는 국시를 바르게 정한다는'명정국시' 조서를 발표하며 '변볍'을 추진하기
시
작했다. 이에 완고한 봉건 게력들은 극두의 원한을 품고 반발하기 시작했다. 6월 15일, 자희
태후는 변법을 파괴하고 광서제의 날개를 자르기 위해, 광서제에게 압력을 넣어 그러 하여
금 변법을 지지하는 황제파의 인물 옹동화를 고향으로 돌려보내게 했다. 동시에 영록으로
하여금 직예총독 겸 북양대신을 임시로 맡게 하는 동시에 북양삼군을 이끌도록 했다. 이렇
게 해서 수도 및 수도권의 청나라 군대 주력이 모두 영록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
때 영록은 그렇듯한 송별회를 연출했다. 그는 관직에서 파면당해 고향으로 돌아가는 옹동화
에게 많은 은을 건네주면서 그의 손을 붙잡고 실성한 듯 통곡했다. 그러면서 어쩌다 황제에
게 죄를 지어 이 지경이 되었느냐며 동정과 연민의 정을 한껏 표시했다. 사실 우신변법에
대해 영록은 뼈에 사무치는 원한을 갖고 있었고, 옹동화 제거는 그 첫걸음일 뿐이었다.
그들의 음모는 10월 천진에서 거행될 열병식에서 대대적으로 실행될 예정이었다. 그 음모
란 열병식에 사희 태후와 광서제를 초청하여, 자희 태후가 영록의 군영에 들어가고 나면 즉
각 광서제의 축출과 새로운 군주의 즉위를 선포하고 유신파들을 잡아 죽인다는 것이었다.
이런 살기를 일찌감치 품고 있으면서 '송별회'를 연출했으니 그 음흉함과 교활함이 어느정
도
인지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그 뒤로도 영록은 계속 사람들을 속였다. 9월 초, 영록은 서
태후와 자신으로 대표되는 완고한 수구파에 더할 수 없이 충성스러운 동복상의 감군을 북경
창덕문 밖 40리 지점인 장신점에 배치했다. 이 행동은 광서제와 유신파에게 창 끝은 바로
겨눈 것으로 정변을 향한 움직임이 이미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에 광서제는 두려
움과 초조에 휩싸였고, 밀지를 내려 강유위 등에게 자신을 구할 방도를 은밀히 준비하라고
했다. 곤경에 몰린 유신파는 담사동을 몰래 원세개에게 보내 광서제 편에 서서 새 정치를
실행하는 데 도움을 주라고 권했다. 원세개의 무위우군을 이용해 영록과 맞서게 하는 한편,
이화원을 호위하자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일이 추진되기도 전에 원세개에게 배신당하고 말
았다. 영록은 9월 20일, 원세개의 은밀한 보공를 받았다. 영록은 매우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지껄였다. "영록이 만약 터럭만큼이라도 뒷사람(광서제)의 마음을 범하려 했다면 하
늘이 나를 죽일 것이다." 그러나 영록은 원세개에게 사람을 보낸 뒤 그날 밤으로 북경으로
달려가 이화원의 자희 태후에게 이 사실을 일러바쳤다. 다음날 영록의 친위병이 광서제를
영대에 가두고, 자희 태후는 훈정을 선포했다. 영록은 이때 하늘을 우러러 "맹세컨대 죽음으
로 황상을 지키겠노라."고 철석같이 다짐했다. 그러나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은 그가 유신하
지사의 붉은 피로 자신의 높고 화려한 관을 물들였다는 것이다. '장자' '열어구'에서는 "무
릇
인간의 마음이란 산천보다고 위험하며, 하늘을 아는 것보다 헤아리기 어렵다."라고 했다. 인
심이 럼악한 세상에서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 하늘을 아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인식하고 있
다. "하늘에는 훈하추동 사계절 및 아침과 저녁, 추위와 더위"가 있어 기후의 변화와 시간의
이르고 늦음에 다라 식별할 수 있지만, 인간은 어떠한가? 거직으로 그 실질을 감추고 가리
며, 때로는 너무 깊이 감추어 도저히 헤아릴 수 없다. 성실해 보이는 사람이 내심은 교만하
고 허영심이 넘친다. 내면은 순박하고 넉넉하지만 품행이 안 좋아 보이는 사람도 있다. 겉모
습은 급하고 초조해 보여도 내심은 사리에 통달해 있는 사람도 있다. 튼튼하고 굳세게 보여
도 내심은 사리에 통달해 있는 사람도 있다. 튼튼하고 굳세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주 성기
고 느긋한 사람도 있다. 모습은 편안해 보이는데 내심은 사납고 급한 사람도 있다. 금세 인
의에 목말라 애를 태우던 사람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입을 싹 씻고 인의를 내팽개쳐 버린
다.
이러하기에 절대 거짓과 가싱에 홀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우쳐준다. 그렇지 못하면
일이 코앞에 닥치고 나서야 후회하며 눈물을 처절하게 흘리게 될 것이다. 그때는 도망갈 문
도 없다. 따라서 거짓과 허울의 안개를 걷어내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간'을 가리고 살치는
데에 아주 중요한 열쇠가 된다. 그렇다면 간신은 왜 위장이라는 겉옷을 뒤집어쓰는가? 자세
히 분석해보면 그 까닭은 다음 두세 가지를 벗어날 수 없다.
첫째, 환심을 사기 위해서다.
봉건 전제시대에서 봉건 군주의 의지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갖는다. "군주가 신하더러 죽
으라고 하면 신하는 어쩔 수 없이 죽어야 한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이상을 실현
하기 위해 자신의 본모습을 숨기고 봉건 군주의 의지에 맞추어 자신을 위장할 수밖에 없다.
즉 공경, 온순, 충성으로 가장하여 환심을 사고 목적을 이룬다. 간신은 대부분 야심만만한
무리다. 그들은 관직이 없을 때는 관직을 바라고, 작은 관직을 얻으면 큰 관직을 구하며, 높
은 관직에 있으면 황제가 되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 그들은 윗사람의 심리를 자세히 파악해
자신의 행동을 위사람에게 맞추려고 무진 애를 쓴다. 조조는 자기 뒤를 이을 사람을 고르는
일에 매우 신경을 썼다. 작은아들 조식은 문장이 뒤어나고 교제도 폭넓아 조조의 사랑을 듬
뿍 받고 있었다. 그러나 순리대로라면 큰아들을 세워야지 작은아들을 세울 수는 없는 노릇
이었다. 이 때문에 꾀 많고 결단력 뛰어난 조조도 무척이나 망설였다. 이때 왕궁의 중랑장으
로 있던 큰아들 조비는 자신의 세자 자리를 동생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몰래 대
신 가푸에게 자신에 대한 아버지의 믿음과 사랑을 다질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가후는 조
빙게 이렇게 일러주었다. "장군께서는 덕을 넓히시고 법도를 존중하시어 몸소 선비의 자질
을 닦으십시오, 아침 저녁으로 거리지 말고 자신의 도리에 어긋나지 않게 처신하는 길뿐입
니다." 기록에 따르면 조비는 이 말을 듣고 "열심히 스스로를 갈고 닦으면서" 거짓으로 스
스로를 꾸몄다.
한번은 조조가 원정을 떠나려 할 때 이런 일이 있었다. 아들들이 모두 나와 아버지의 무
사함을 빌며 인사를 드렸다. 조식은 아버지의 공덕을 기리는 씩씩한 문장을 지어 여러 사람
앞에서 낭랑하게 읊었다. 조조와 문무 대신들이 크게 기뻐하며 탄성을 올렸다. 조비 차례가
되었다. 거르나 어찌 된 일인지 조비는 글을 지어오지도 않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러더니 땅에 엎드려 그저 닭똥 같은 눈물만 뚝뚝 흘리며 아버지의 안전을 걱정했다. 대세는
눈깜짝할 사이에 뒤바뀌었다. 조조는 물론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작은아들 조식이
재주는 있으나 겉으로만 화려하고 건실하지 못해 조비의 효성스러운 마음을 따르지 못한다
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조비는 걸국 세자 자리에 올았다. 조비가 간사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아버지의 귀여움을 차지하려고 자신을 위장한 이일은 아주 전형적인 본보기다.
봉건 전제시대에 봉건 군주는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다. 따라서 야심가와 음모가들이 그
권력에 비위를 맞추고 환심을 사서 야심을 실현하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둘째, 인심을 얻기 위해서다.
시대가 어떻게 발전하든 간에 인간의 마음은 영원한 숙제다. 인심을 얻는 자 천하를 얻을
것이요, 인심을 잃은 자 천하를 잃을 것이다. 물은 배를 띄우지만 동시에 배를 엎을 수도 있
다. 간신들은 백성을 해치고 애꿎은 목숨들을 도탄에 빠뜨리지만, 뜻을 이루기 전에는 인심
을 얻는 데에 매우 신경을 쓴다. 일찌감치 악명이 퍼져 사람들의 원성을 사면 앞날에 지장
이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이 바로 간신과 단순한 악인의 차이점이다. 당나라 중엽 황제를 끼
고 포악한 짓을 일삼았던 이보국은 초기에 사람들의 호감을 사기 위해 늘 염주를 들고 다니
면서 구운 고기나 귀한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또 모든 일에 조심스러운 척, 성실한 척하
며 인심을 속였다. 이임보와 이의부는 더했다. 늘 조심하면서 웃는 얼굴로 사람을 대했다.
'주서' '효민제기'의 기록을 보면 우문호에대한 행적이 있다 우문호는 처음 조정을 장악했
을
당시에는 법대로 일을 처리하여 위엄을 세웠다. 이에 "한마음으로 힘을 다해 함께 천하를
다스리고 서로 돌아가며 도우니 모두가 원망이 없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그는 왕명을 혼
자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기초를 닦아 나갔다. 간신은 인심을 얻기 위해 아낌없이 자신
을 굽혀 공경, 온순,충성,선량, 현명의 모습을 보인다. 그러싸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방심하
게 만든 후 자신의 목적을 하나하나 실현시켜 나간다.
셋째, 못된 마음을 포장하기 위해서다.
때로 간신이 자신을 위장하는 것은 목된 마음을 포장하기 위해서다. 간신,소인은 한시도
쉬지 않고 음모를 부리낟. 그러나 음모가 들통나면 인심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
문에, 그런 일은 근본적으로 못하는 척 위장하거나 아예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은 양
꾸민다. 활시위를 이미 팽팽하게 당겨놓고는 전혀 마음이 없다는 듯이 꽃이나 가꾸는 척한
다. 일찌감치 번쩍번쩍 칼을 갈아놓고도 점잖을 빼며 사당이나 절을 찾는다. 언제라도 사람
을 죽일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추어놓고도 시나 읊고 난초를 친다. 누구의 머리를 반
드시 베어 버리겠노라 이빨을 갈면서도 측은한 표정을 지으며 그 사람의 건강을 묻는다. 이
런 음흉한 이리떼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눈을 현혹하여 그들의 목을 자르고 자기 배를
살찌웠는지 모른다. 반란을 일으키기전 안록산의 태도는 얼마나 충정에 넘쳤던가? 반란의
날짜가 다가오며 다가올수록 더울 머리를 조아리고 알랑거리지 않았던가? "신은 변방의 오
랑캐로 태어나 분에 넘치는 영예와 사랑을 받았사오니, 원하옵건대 폐하를 위해 이 한 목숨
바치고자 합니다." 안록산의 말이다. 그는 또 불룩 튀어나온 자기 뱃속에는 폐하에 대한 일
편단심이 가득 차 있다며 능글거렸다. 그러나 악랄한 칼날을 장안을 향해 들이댔을 때 그
얻서 충성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있었던가? 야심, 탐욕은 사람을 미치게도 하지만, 반면 고
도의 자제력을 보이게 할 수도 있다. 그것을 위해 인간은 모든 것을 돌보지 않고 위험속으
로 달려달기도 하고, 치욕을 견디며 목숨을 보전한 채 기회를 기다리기도 한다. 자신이 정말
로 원하지 않는 일이라도 하게 만들 수 있다. 간신은 목적을 위해 자신을 감추고, 자신의 뜻
을 꺾는다. 길고도 힘든 여정에서 그들은 늘 세상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표준으로 자
기를 위장(개조가 결코 아니다)하여 자기를 더 많은 사람들이 받아 들이도록 애쓴다. 야심을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자는 월계관을 쓰기힘드나, 몰래 힘을 기르는 야심가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자진해서 월계관을 갖다 바치게 만든다. 이는 실현될 확룰이 높다. 그래서 이 세계에
위장술이 나타났고, 세상을 속이는 자가 나타난 것이다.
왕망은 서한 원제 유석의 황후 왕정군의 조카다. 아버지가 일찍 죽는 바람에 집안이 기
울었다. 왕망은 가난 속에서 열심히 공부했으며, 처신도 근면하고 신중했다. 그가 18세 되던
해 왕정군의 오빠와 남동생들이 줄줄이 고위직에 올랐다. 왕봉이 대사마대장군에 오른 것을
비롯하여 완담, 왕상, 왕운, 왕근, 왕봉이 모두 제후에 봉해지니 세상 사람들은 이들을 '왕후
'
라 불렀다. 이들은 너나할것없이 교만하고 방자했으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일삼았다. 그러나
왕망은 이들과 달리 성실하게 본분을 지켰다. 그들처럼 사치스럽게 수레나 말 따위를 뽐내
고, 노래와 여자를 밝히며 어울려 놀지 않았던 것이다. 이로써 왕망은 모두로부터 호감을 샀
다. 특히 왕봉이 큰 병에 걸렸을 때는 "몸소 약을 맛보며 세수도 않고 머리는 풀어헤친 채"
달포 이상을 옷도 갈아입지 않고 왕봉을 돌보았다. 왕봉이 크게 감격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왕봉은 죽기 전에 특별히 왕망을 황후 왕정군에게 부탁하여 황제를 곁에서 돌보며
황제의 명령을 전달하는 황문랑이 되게 했다. 이어 황후의 보삻핌 덕에 기도위광록대부시중
으로 승진했따. 이때부터 왕망의 지위는 날로 높아져갔다. 왕망은 평소에도 근검절약하며 청
렴하게 살았다. 겉을 돌아보지않고 효의 길을 지켜 나갔다. 언젠가 큰 연회가 열렸을 때도
여러 차례 자리를 뜨면서 병든 어머니의 약을 챙겨야 한다며 자신의 '효심'을 과시했다. 그
는 또 틈만 나면 조카의 공부방을 찾아 선생을 위로했고, 심지어는 재산을 털어 가난한 서
생들을 도와줌으로써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마침내 왕망을 다사마에 올랐다. 기
원전 7년, 성제가 병으로 죽고 애제가 황제 자리에 올랐다. 새로운 외척이 정치를 보좌했고
왕망을 물러나야만 햇다. 자신의 봉지로 돌아온 왕망은 계속해서 민심을 긁어모았다. 한번은
그의 아들 황획이 노비를 죽인 일이 발생했다.왕망은 즉시 자살케 함으로써 목숨으로 보상
했다. 또 재산을 털어 가난한 사람과 이재민을 구제했다. 많은 사람들이 왕망을 다시 대사마
에 기용해야 한다는 글을 올렸다.
기원전 년, 애제 역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태황 태후는 대신들에게 대사마가 될 만한
사람을 추천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대사도 공광을 비롯한 대신들은 너나할것없이 왕망을 추
천했다. 오직 장군 하무와 좌장군 공손록만이 외척 세력이 너무 커지는 것을 염려하여 반대
했다. 태황 태후 왕정군의 지지 아래 왕망은 다시 대사마에 임명되어 상서의 일을 통솔하였
다. 이로부터 서한의 역사는 외척이 모든 권력을 휘두르며 국가를 존망의 위기로 몰아가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후 태황 태후는 왕망을 태부로 봉하면서 안한공으로 부
르게 하는 한편, 2만 8천 호의 식읍을 추가로 내려주었다. 왕암은 한사코 사양하면서 병을
핑계로 나오지도 않았다. 대신들이 모두 나서서 두 번 세 번 권유하자 그때서야 비로소 받
아들였다. 그러면서 왕망은 이익을 함게 나누고자 태황 태후에게 글을 올려 종실과 공신 자
손 및 조정 대신들을 대대적으로 포상하도록 요청했다. 그리하여 36명이 제후로 봉해졌고,
수백 명의 측근이 귀족으로 상승했다. 죄를 지어 황족에서 제외되었던 자들도 황적을 회복
할 수 있었다. 나이가 들어 스스로 물러난 관리에게는 녹봉의 3분의 1을 평생 지급하도록
했다. 동시에 태학생의 수를 1만여 명으로 늘여 천하의 선비 수천 명을 수도로 불러들였다.
왕망의 이러한 조치로 조정과 재야 할 것 없이 모두가 안한공의 은혜에 감격하며 침이 마르
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왕망은 또 메뚜기떼로 인해 농사에 피해가 크자 자발적으로 백
만전과 밭 1만 경을 내어 피해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의 주도하에 조정 대신 230명도
논과 밭과 돈을 내어 피해민을 도왔다. 이로 인해 왕망의 명성은 일반 농민 사이에서도 크
게 떨치게 되었다. 평제가 점차 커가면서 항후 간택이 시작되었다. 황후 후보의 절반은 대개
왕가 여자들이었다. 왕망은 이 사람 저 사람이 마구 섞이는 것을 막기 위해 후보 명단이 적
힌 책을 들고 태황 태후를 찾았다. "신은 본디 덕이 없고 신의 딸자식 역시 재주가 없어 후
보에 드는 것은 마땅치 않으니, 명단에서 이름을 삭제하는 것이 옳을 줄 아옵니다."
그런데 이 한마디로 오히려 왕망의 딸은 여러 왕가 여자들 중에서 두드러지고 말았다. 태
황 태후는 이러한 왕망의 속셈을 모르고 왕가 여자를 모두 명단에서 삭제해 버렸다. 그러자
대신들이 우르르 들고 일아나 안한공 왕망의 딸을 황후로 삼아야 한다고 아우성을 쳤다. 왕
망은 이번에도 극구 사양했으나 태황 태후의 완강한 고집에 못 이기는 척 받아들였다. 그리
하여 왕망은 국장이 되었다. 평제는 이 일로 왕망에게 기름진 땅 2만 5천 경을 내렸으나 그
는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이로써 왕망은 또 한번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왕망의
명성이 천하에 떨쳐지면서 권력이 그에게로 모아지고 있을 즈음, 소름끼치는 사건이 왕망의
집안에서 발생했다. 어느 날 밤 그의 집안에서 피비린내 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핏자국
이 온 집안을 더렵혔고, 왕망의 방문 앞에도 온통 핏자국이었다. 왕망은 즉시 사건을 해결하
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이 사건의 범인이 다름 아닌 왕망의 큰아들 왕
우일 줄이야! 왕망의 큰아들 왕우는 아버지가 점점 조정의 권력을 장악해가면서 다른 사람
이 발을 들이미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는 불안을 느꼈다. 이렇게 가다가는 언젠
가 큰 화가 닥칠 겻이라 생각하고 여러 차례 아버지에게 이야기했으나 왕망은 듣지 않았다.
더 이상 말려보았자 소용없다고 판단한 왕우는 엉뚱한 방법을 생각해냈다. 평소 귀신 따위
를 잘 믿었던 그는 괴이한 사건으로 아버지 왕망을 놀래준 다음 다시 충고하면 자기 말을
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건은 싱겁게 해결되었고, 왕우는 사형에 처해졌다. 아니는 임신중이었기 때문에 아이를
낳을 때까지 수감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당하거나 집안이 몰살당하
는 화를 입었다. 그러나 왕망은 그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와 맞지 않는 원제의 여동생
경무장 공주, 홍양후 왕립. 평아후 왕인 및 그를 따르지 않는 하무, 코선, 왕상의 아들 악창
후 왕안, 신경기의 세 아들 등을 자살케 하거나 사형에 처했다. 이 사건은 천하를 두려움에
떨게 했다. 그토록 인자하던 ㅗ앙망이 하루아침에 잔인하게 돌번한 모습에 사람들은 몸서리
를 쳤다. 화가 자신에게도 미칠까봐 겁이 나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간 대신도 있었다. 열 네
살의 평제는 점차 왕망의 독단에 큰 불만을 품었다. 특히 황실 친척을 여러 명 죽인 것에
대해 앙심을 품었다. 이를 눈치챈 왕망음 보복당할 것이 두려워 "끊어야 할 것을 끊지 못하
면 오히려 난을 당한다."는 판단 하에 평제에게 초주를 마시게 하여 병이 나게 만들었다. 누
가 았었겠는가? 초주에다 독을 넣었을 줄을! 평제가 병석에 눕자 왕망은 당황해 어쩔 줄 몰
라 하며 하루 종일 근심에 찬 표정으로 평제의 병을 돌보는 척했다. 심지어는 하늘에 평제
를 대신해 자기가 병이 나게 해 달라고 기도까지 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평제는 열 네
살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평제가 죽은 뒤 두 살짜리 어린에 유영이 황태자에 올랐다. 이때부터 왕망은 온갖 괴이한
수단을 동원해 자신이 황제가 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우물을 팠더니
흰 돌이 나왔는데 그 위에 "안한공 왕망이 황제가 됨을 아리노라." 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는 등 갖가지 괴이한 현상을 조작해냈다. 그리하여 마침내 가황제가 되었다. 초시 원년인 기
원 8년 11월, 왕망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조회를 열어 왕정군에게 옥새를 내놓도록 협박하
고 유시 황제를 폐하여 스스로 황제가 된 뒤 나라 이름을 신이라 했다. 성실과 인자함 그리
고 현명함이라는 가면을 뒤집어쓰고 행세해왔던 왕망의 진면목이 만처하에 드러나는 순간이
었다. 역사학자 반고는 왕망이 서한 정권ㅇ르 탈취할 수 있었던 것이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
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적절한 때를 만났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 역시 그
럴듯한 논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생각한다. 왕망이 비록 처음부터 황제가
되겠다는 야심을 가진 곳은 아니었고 또 바르게 행동했을지도 모르지만, 그의 영혼 깊숙한
곳에는 진작부터 남보다 두드러지려는 야심이 숨겨져 있었을 것이다. 상황이 발전해가멩 따
라 그의 야심도 부풀어갔고 마침내 가면을 벗어 던지고 진면목을 드러낸 것이 아니겠는가?
이 역시 하나의 주장일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인물, 사마의를 떠올리게 된다. 사
마의는 거짓된 모습으로 사람을 속이는 방면에서 누구 못지않은 고수였다. 위나라 명제는
병으로 가망이 없자 아들 조방을 사마의에게 맡겼다. 명제는 사마의의 손을 잡고 이렇게 당
부했다.
"보아하니 내 병은 더 이상 가망이 없을 것 같소. 오늘 그대를 만나 뒷일을 맡길 수 있으
니 죽어도 여한이 없소이다.!" 명제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사마의는 감격해서 머리를 조
아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조예는 힘없이 제왕 조방을 앞으로 부른 다음 사마의에게 이렇
게 말했다. "얘가 디를 이을 자식이니 경이 잘 살펴서 아무쪼록 위나라의 대사를 그르치지
않도록 하시오." 사마의는 감동의 눈물을 펑펑 쏟으며 조예에게 이렇게 다짐했다. "폐하께서
는 마음놓으소서! 일찍이 선제께서 승하하시면서 폐하를 저에게 부탁하신 그 일을 어찌 잊
을 수 있으오리까?" 이 말에 조예는 마음이 놓이는 듯 차분히 말을 이었다. "경과 조상이
함게 이 일을 도와주면 짐은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오." 그런 다음 조방을 황태자로
삼고, 조상을 대장군에 임명했으며, 사마의는 원래의 직책인 태위로서 동궁을 보좌케 했다.
조예가 죽자 조상과 사마의는 여덟 살 난 태자 조방을 황제 자리에 앉히고 황후 곽씨를 황
태후로 높였다. 조상과 사마의는 각각 3천명을 거느리고 돌아가면서 궁중을 지켰다. 아직 젊
고 연륜이 모자라는 조상은 벌써 몇 대째 왕을 모셔온 원로대신 사마의를 깍듯이 모셨고 여
러 가지를 사마의로부터 배웠다. 사마의 역시 겸손하게 조상을 대했다. 따라서 두 사람은 별
탈 없이 서로 편히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고요함'은 상대적이고 일시적이며, 또 조건적
이
기 마련이다. 병주자사인 동평 사람 필궤, 남양 사람 하안, 등양, 이승, 패 사람 정밀은 모두
가 재능이 뛰어난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권세에 빌붙어 남보다 빨리 부귀를 누리려는 자들
이었다. 이 때문에 조예가 살아 있을 때는 그들을 겉만 번지르르한 자들로 평가하여 크게
쓰지 않았다. 본디 인재를 아끼던 조상이 평소 그들과 가까이 지내다 그들로 하여금 자신ㅇ
르 보좌하게 했다. 그 중 정밀이 조상에게 이런 계책을 올렸다.
"나라의 막중한 권한을 함부로 외부인에게 맡겨서는 안 됩니다. 천자에게 말씀드려 사마
의를 태부로 삼게 하여 겉으로는 중용하는 척하면서 안으로는 막아야 합니다. 이후 모든 일
은 대장군께서 먼저 확인함으로써 사마의의 견제를 피하고 대권이 엉둥한 데로 떨어지는 것
을 막아야 합니다." 조상도 본래 전권을 휘두르고 싶었던 차라 정밀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조상 형제가 핵심 권력을 모두 장악하여 막강한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조상의 심
복인 하안, 등양, 정밀, 필궤 등은 요직으로 승진했다. 따르는 자는 승진시키고 거슬리는 자
는 쫓아내는 이런 현명하지 못한 행동에 대해 황문시랑 부하가 다음과 같은 비판적인 의견
을 제기했다. "하안이란 자는 겉으로는 조용한 것 같지만 안으로는 이곳 저곳을 헤집고 다
니면서 본분에는 힘쓰지 않고 이익만 노리는 사람이오. 내가 걱정하는 것은 이런 자들이 당
신 형제들을 홀리고, 어진 인물들이 당신들을 멀리함으로써 조정이 엉망이 되지 않을까 하
는 것이오!" 그러나 하안을 자기 심복으로 여기고 잇는 조상의 귀에 다른 사람의 충고가 들
릴 리 있겠는가! 그는 부하의 사소한 잘못을 끄집어내서 그를 파면시켜 버렸다. 조상의 이
런 행동은 평소에 일거수일투족을 침착하게 지켜보고 있는 사마의에 의해 낱낱이 파악되고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펴오하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사마의는 끊임없이 대응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오나라 병사가 쳐들어왔다는 소식이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평정을 깨뜨렸다. 이 소식을
접한 조상은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하안을 비롯한 심복들도 뾰족한 수를 생각해내지
못했다. 그저 사마의를 찾아가 상의해보라고 재촉할 뿐이었다. 이 중요한 순간에 사마의는
병을 핑계로 입조조차 하지 않았다. 번성과 상중이 위금하다는 보고가 잇달아 날아들자 사
마의는 비로소 몸소 출정했다. 그리고는 단 한 달 만에 두 지역의 포위를 풀고 서울로 돌아
왔다. 이 사건은 사마의의 명성을 크게 높였다. 반면에 조상은 상대적으로 위축되어 명성에
큰 손상을 입고 말았다. 구겨진 체면을 만회하기 위해 등양과 이승은 조상에게 촉을 정벌하
여 공을 세우면 사마의와 맞설 수 있을 것이라고 권했다. 사마의의 만류 때문에 2, 3년 지연
되었지만, 정시 5년인 244년 조상은 마침내 장안을 출발하여 촉을 정벌하러 나섰다. 먼 길을
온데다가 군량 보급에 어려움을 겪은 조상의 군대는 도중에 수많은 병사와 말이 죽어 자빠
졌다. 쌍방은 한달 가량을 대치했다. 양식이 다 떨어진 조상의 군대는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
다. 그런데다가 뜻밖에 촉의 군대가 뒤쫓아와 맹공을 가하는 바람에 10만 대군 중 반 이상
이 죽거나 다치고 각종 무기와 군사 물자들을 대부분 다 버리고 말았다 조상은 낭패가 되어
장안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책임을 지려 하기는커녕 전보다 더욱 방자하게 굴었다. 이
때 사마의는 또 병을 핑계로 몇 달 동안 문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남윤 이승이 조상의 추천
을 받아 고향인 형주자사로 임명된 것을 구실로 인사차 사마의를 방문하였다. 이에 앞서 조
상은 이승에게 사마의의 동정을 살피라고 시켰다.
사마의는 침상에 누워 눈을 감고 입은 다문 채 마치 인사불성인것처럼 보였다. 이승이 몇
차례 부르자 사마의는 아주 힘겹게 입을 열어 "뉘신가?"라고 묻고는 이내 눈을 감아 버렸
다. 이승이 서둘러 "하남윤 이승이 형주자사로 발령이 났기에 특별히 인사르리러 왔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사마의는 가쁜 숨을 몰아쉬더니 "병주 뭐라고...? 그곳은 변방과 가까워 조심
해야 할뗀데... 그 주에 임명 되었다고?"라며 횡설수설했다. "병주가 아니라 형주이옵니다."
이승이 바로잡아 주었다. 그러나 사마의는 일부러 "병주에서 왔다고?"라며 계속해서 딴전을
피웠다. "지금 형주자사로 임명되었습니다." 이승이 또 한번 반복하자 그제야 사마의는 알아
들었다는 듯 싱긋이 웃으며 이렇게 둘러댔다. "나이가 들면 귀가 어두워지지, 그래, 그곳에
가서 공을 많이 세우시게. 안타깝게도 나는 오래 못 살고 다시는 그대를 못 볼 것 같으이!"
말을 마치기 무섭게 사마의는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 이승은 허둥지둥 사마의를 위로했다.
그러자 사마의는 아주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 법, 다만
내 아들 사마사와 사마소가 재주도 없고 식견도 짧으니 그대가 나와의 옛 정을 생각해서 앞
으로 잘 좀 돌봐주시게." 말을 마치면서 사마의는 두 시녀에게 손가락으로 자기 입을 가리
켰다. 그러자 한 아낙네가 물을 가져다가 사마의에게 먹였다. 사마의는 물조차 제대로 못 마
시고 입가로 줄줄 흘려 앞섶을 축축이 적시기까지 했다. 이승은 대충 작별 인사를 올리고
즉시 조상에게 달려가 본 대로 전한 다음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사마공은 이미 반구신이나 다름없으니 더 이상 신경 쓰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조상
등은 이 말에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정시 9년인 248년 정월, 어린 황제 조방은 낙양에서
90리 떨어진 명제의 무덤 고평릉을 찾았다. 조상 형제와 그 일당들도 황제의 가마를 호위하
며 도성을 빠져나갔다. 사마의만 가지 않았다. 죽은 사람이나 마차나가지라며 조상은 사마의
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대규모 행차가 도성에서 멀어지자 사마의는 자리에서 벌
떡일어나 아들들과 함께 전격적으로 정변을 일으켰다. 그는 우선 황태후의 명을 빌어 각 성
문을 봉쇄했다. 아울러 황문을 시켜 어린 제 조방에게 글을 전하도록 했다. 그 글에는 조
상이 "선제의 명을 저버리고 나라의 정치제도를 어지럽히며, 안으로는 멋대로 권력을 휘둘
러 군영을 파괴하고 금병을 혼자 차지했으며, 요직과 각종 자리에 측근을 배치하고, 궁중의
숙위를 자기 사람으로 바꾸었다."는 등의 죄목이 낱낱이 열거되어 있었다. 글을 다 본 조방
은 조상에게 넘겨주었다. 조상은 얼굴이 흑샐으로 변하면서 아무 말도 못했다. 그제야 그는
사마의가 거짓으로 주위를 속여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이때 환범
이 군대를 동원하여 반역을 토벌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조상은 "셩안에 있는 가족들이 살
해될 것이 틀림없고 또 내가 관직만 내놓으면 부귀는 잃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즉시 투
항해 버리고 말았다.
이때까지도 조상은 "병권만 넘기면 신변의 안전은 보장하겠다."는 사마의의 말만 믿고
"태부는 명망이 높으니만치 헛소리는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심복들인
하안, 등양, 정밀, 필궤, 이승, 한범 등이 모조리 모반죄로 옥에 갇히고 삼족이 몰살당했다.
조상도 예외일 수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한 사람, 완안량이란 이눌을 불러낼 필요가 있
다. 완안량은 자신을 위장한 채 정권을 찬탈하는데 있어서 큰 선생이었다. 금나라 천회 13년
정월 26일, 금나라 태종 완안성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에 앞서 황제는 '형제 상속'이
라
는 구제도를 개혁하여, 한족의 제도에 따라 태조의 손자인 완안단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준
다는 유언을 남겼다. 다음날 정월 27일, 완안단은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가 바로 희종이다.
황제 자리에 오른 뒤 완안단은 선조의 업적을 이어받아 대신을 예의로 존중하는 한편 완안
종필 등에게 군대를 맡겼다. 이렇게 해서 국력은 강해졌으며 대외적으로도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다. 유예를 폐하고 남송의 섬서와 하남 두 곳을 빼앗아 송나라 고종으로 하여금 머
리를 숙이고 신하로 자처하도록 만들었다. 금나라는 계속 강성해지는데 유독 한 사람만이
갈수록 불안에 떨었다. 그 사람은 바로 태조의 손자인 완안량이었다. 완안량은 성질이 급하
고 잔인하기 짝이 없었다. 당초 태종 완안성이 완안단으로 하여금 황제 자리를 있게 하니,
완안량은 아비 종간이 태조의 맏아들이고 자신 역시 태조의 손자라는 생각에서 야심을 품기
시작했다. 그러나 완안단이 많은 인물을 거느리며 상당한 위세를 떨치는 것을 보고 쉽게 손
을 쓰지 못했다. 그 대신 태도를 바꾸어 아주 공경스럽고 충성스러운 모습으로 가장하여 황
안단의 눈에 들려고 무진 애를 썼다.
완안단은 점점 교만해져 술에 취해 사람을 마구 죽이고 마침내는 자신에게 충성을 대하는
동생 조왕 완안원이 딴 마음을 품었다고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완안량은 이 틈을 타 이 사
건을 맡고 있는 당고변, 소이 등을 매수하여 완안원을 모함했다. 포악한 완안단은 화를 못
이기고 동생을 죽였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이 사건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했다. 그런데
도 "완안단은 완안량을 충성스럽다고 여겨 더욱 그를 믿었다." 이로써 완안량은 용호위 상
장군이 되어 중경을 지키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다시 서울로 불려와 동판대종정
사가 되어 황족의 일을 관장하게 되었다. 이어 다시 상서좌승으로 승진했다. 완안량은 칩거
하는 동안 권력의 핵심을 고스란히 자기 손에 넣어 자기 심복을 정부 요직 곳곳에 심어놓았
다. 또 충성심을 가장하여 계속 완안단을 곳였다. 하루는 완안단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태조가 창업할 당시의 어려움을 이야기하자, 완안량이 갑자기 통곳을 하며 눈물을 흘려 또
한번 완안단으로 하여금 그의 '충성심'을 더욱 믿게 만들기도 했다. 완안량의 공들인 연기
덕분에 아첨배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파리떼가 썩은 냄새를 맡고 몰려들 듯 완안량의 주
위로 몰려들었다. 특히 소유라는 자는 완안량과 접촉하면서 완안량이 남의 빝에서 일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며 반역의 뜻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완안량을 부추겼다. "대이께서는
태사의 아드님이자 태조 황제의 장손으로 평생 뛰어난 공을 세워 덕과 명망이 누구보다 높
습니다. 따라서 하늘과 백성의 뜻에 따라 큰일을 한번 하셔야 합니다." 이말은 완안량의 가
려운 곳을 정확하게 긁었다. 그러나 교활한 완안량은 정색을 하며 이렇게 대꾸했다. "지금
황상께서는 어질고 현명하시며 주위에는 뛰어난 문무 대신들이 보좌하고 있소. 우리는 그저
신하로서 맡은 자리에 충실하면 그만이오. 그런데 대체 모슨 소리를 듣고 이런 말을 하는
게요?"
그러나 소유는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이듯 말했다. "대인께서는 나라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못 들어셨단 말입니까? 지금 황상이 늘 술에 취해 잔인한 행동을 일삼는 바람에 백
성들이 불안에 떨고 이쓴ㄴ데, 누군들 영명한 주인에게 몸을 맡겨 단 며칠이라도 편안하게
지내려 하지 않겠습니까? 대인께서는 덕과 명망이 높으시고 인심과 하늘의 뜻이 있으니 당
연히 그 뜻에 따라야 할 것입니다. 큰일을 도모하시겠다면 저는 온 힘을 다 바쳐 대인을 따
를 것입니다." 소유의 사주로 완안량의 반역 의지는 더욱 굳어졌다.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
리지 않고 측근을 긁어모으고 일당을 곳곳에 심어 언제든지 내왕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런
다음 황통 9년 12월 9일, 마침내 희종을 내궁에서 살해했다. 간신들은 남의 환심을 사고 인
심을 얻기 위해 불순한 마음을 감춘다. 야심을 실현하고 비열하고 더러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언제든지 사태의 변화에 따라 각양각색의 거짓을 만들어낸다. 한마디로 말해 특별한
'위장' 능력이다. 그 능력의 몇 가지를 본보기로 들어본다. 첫째, 충성스럽고 성실한 척한
다.
몸에다가는 용을 벨 수 있는 검을 지니고 가슴에는 반역을 품고 있으면서, 하늘과 땅에 충
성을 맹세하고, 분에 넘치게 충성의 뜻을 표현하려 한다. 근본은 성실하지 않으면서 그런 척
하기 위해 불성실한 자와 어울리지 않는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또 다투지도 않는다. 윗
사람은 무조건 따르고 아랫사람에 대해서도 순종한다. 사당이라고 말하면 머리를 조아리고,
등불이라고 하면 기름을 붓는다. 때가 아니면 손을 거두어들인 채 기다린다. 작은 일을 참지
못하면 큰 일을 망쳐 버린다는 거을 잘 알기에 고생을 꾹 참고 남의 밑을 자처한다. 그러나
상ㅇ황이 변하면 즉시 비수를 드러낸다.
둘째, 점잖고 너그러운 척한다. 속으로는 색을 밝히고 놀러 다니기 좋아하면서도 입으로는
공자와 맹자를 들먹거린다. 표면상으로는 도가 높고 고상한 뜻을 가진것같이 보인다. 시기나
질투의 기색을 나타내지 않는다. 속으로는 사무치는 원한을 품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늘 부
드러운 얼굴로 대한다. 등 뒤에서는 칼날을 겨누고 있으면서도 한 마디도 내뱉지 않는다. 설
사 잘못을 하더라도 따지지 않는다. 그들이 굳게 지키는 행동 준칙은 "군자의 복수는 10년
후라도 늦지 않다."는 것이다. 그들의 신조는 "당나귀를 타고 노래책을 보며", 바로 이것이
다. 즉 '두고보자'는 것이다. 셋째, 멍청하고 어리석을 척한다. 천하를 자기 손에 넣지 못하
는
것을 늘 한스러워하지만 겉으로는 늘 멍청하게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처럼 지낸다. 시비를
가려야 할 때는 길을 돌아가고, 자기와 상관없는 일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는다 말을 건
네지도 않고, 비평도 하지 안흥며, 인심에 어긋나지도 않고, 상대의 뜻을 거슬리지도 않는다.
어쩌다 말을 해도 더듬더듬거리고 일 처리를 우물쭈물한다. 큰 뜻도, 쓸 만한 꾀도 없어 남
의 주목을 받지 못하며 남의 경계 대상도 되지 못한다. 심지어는 바보처럼 행동한다. 예리한
칼을 숨겨놓고는 다른 사람이 야심을 헤아리지 못하게 한다. 이렇게 해서 다른 사람으로 하
여금 경계심을 늦추게 한다. 그래서 진짜 간신은 어리석어 보인다. 말은 더듬거리고 일 처리
는 늦다. 천진난만한 척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은 은밀히 검을 몇 자루나 감추어두고 있
다. "그냥 보아시는 보이지 않지만 어쩌다 날카로움을 드러낸다."
넷째, 때로는 똑똑하고 많이 아는 척한다. 책도 읽지 않고, 신문도 안 보며,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니고, 일을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며, 능력껏 밥 벌어먹을 생각도 하지 안흔ㄴ다. 그
러나 겉으로는 재주 많고 많이 아는체한다. 동서남북 천하를 두루두루 끌어대어 모르는 것
이 없으며, 못 깨우치는 것이 없는 양 행세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경외감을 갖게 한다. 어수
룩한 사람들은 그런 그를 학문이 깊고 여러 방면에 걸쳐 아는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러
나 사실은 주둥이로 세상 사람을 속이는 데 지나지 않는다. 이밖에도 얼마든지 있다. 그들의
보따리에는 업슨ㄴ 것이 없다. 참으로 기마힌 배우이며, 천재적인 마술사다. 평생을 연기 속
에서 살며 언제든지 역할과 모습을 바꾼다. 그러나 그들은 언젠가는 진면목을 드러내기 마
련이다. 사람들은 솔직히 이런 꾀 많은 세력이 얼마나 사악한지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그래
서 예로부터 사람들은 이를 막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지 않았던가? 고대의 '육도'와 '장자'
에
서 제기한 구징, '여씨춘추'에서 말한 팔관육험과 육척사은, 제갈량이 제기한 칠관등등이
모
두 이러한 노력의 산물들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크게 유용했다고 말하기 어렸다. 단단한
껍질은 열어젓히기 위해서는 보다 날카로운 칼이 필오하다. 허상과 가상의 안개를 걷어내기
위해서는 당대 최고 수준의 세계관 위에 서 있어야 한다. 그리고 민중으로 하여금 평가하게
하라. 실천으로써 검증하라. 전면적으로 고찰하라. 역사로 하여금 증명하게 하라. 그리고 나
서 남은 문제는 우리의 실천적 노력이다.
8. 간녕을 절대 얕보지 말라
간녕, 소인들이 계속 득세하여 그 폐가 극심한 까닭은 그들에게 '남다른 점'이 있기 때
문이다. 그들은 일의 벼노하를 포착하는 데 노련하며, 남의 생각을 살피는 데 재빠르며, 계
략을 세우는 데 정성을 들이며, 권모술수에 정통하며, 임기응변에 뛰어나며, 교제술에 능숙
하며, 기꺼이 도박하며, 모험을 마다 낳으며, 속임수에 능하며, 말을 교묘하게 잘한다. 특히
거물급 간신은 성품이 못됐으면서 지위가 높고 재능과 학식이 남다른 자로, 그 피해가 깊을
수밖에 없다. 결코 마음을 놓아서는 안될 것이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호걸들에게는 반다시 남다른 절개와 용기가 있었다. 필부는 모욕을
당하면 칼을 빼들고 달려들어 온몸으로 싸우는데, 이는 용기라 할 수 없다. 천하에 용기 있
는 자는 의연하게 놀라지 않으며 아무 까앍 없이 화를 내지 안흔ㄴ다. 이는 그의 속마음과
생각이 깊고 아주 멀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금도 사람들의 입에 널리 오르내리는 '유휴론'
중에서 천하의 용기 있는 이들에게 소동파가 내린 주석이다. 그러나 천하의 간신들도 마찬
가지로 "생각과 뜻이 남달리 깊고 아주 먼 곳까지 내다보는 남보다 뛰어난 점"을 많이 갖고
있다. 이런 점은 우리가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었다. 사실 간신, 소인이 짧은 시간에 신임을
얻고 오랫동안 중용되는 까닭이나, 그들이 저지른 죄악으로 인한 피해가 그처럼 엄청난 까
닭은, 그들의 비열한 간심이나 교활한 간술 되에 객관적 현실에 영합하는 일정한 소질이 있
기 때문이며, 또 일반인으로서는 따르지 못할 '총명한 재주와 지능'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가
절대 이 점을 얕잡아 보아서는 안 된다. 이 점을 인정하고 똑바로 쳐다보아야만 간신아린
역사 현상에 대해 과학적이고 전면적이며 사실에 부합하는 해석을 내릴 수 있다. 또 그래야
만 보다 깊은 차원에서 간신, 소인의 특징을 파악하여 간신을 제압하기에 충분한 준비를 갖
출 수 있다. 역사상 거자나 대자를 붙일 수 있는 간신들은 모두 얕볼수 없는 무리들이다. 진
나라 말기의 조고는 법률에 정통하였고, 당나라 때의 이의부는 재주가 남달라 입만 열었다
하면 시가 줄줄나왔다. 송나라 때의 채경은 글과 그림에 정통하여 그 이름이 한림에 올랐고,
그 죄악이 만 가지 죄악으로도 다 감쌀 수 없는 진회는 글이 자못 뛰어났다. 명나라 때의
엄숭은 문단의 칭찬을 한 몸에 받았고, 역시 명나라 만력 연간의 주연유는 스물을 갓 넘은
나이에 잇달아 장원급제하여 그 이름을 장안에 떨쳤다.
종일 마시고 놀면서 귀뚜라미 싸움이나 구경하고, 아름다운 기녀를 옆에 낀 채 산수를 유
람하면서 온갖 나쁜 짓을 저질렀던 가사도 머저리는 아니었다. 그는 말하는 것이 시원시원
하고, 일 처리가 과감했으며, 꾀가 많았다. 한번은 임안성에 불이 난 적이 있었다. 그때 가사
도는 임안성 20리 밖에서 돌아오던 중이었는데 돌아와보니 불이 맹렬하게 타오르며 태묘에
까지 옮겨붙을 판이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당황하여 태묘에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가사도는 사람들을 진정시킨 다음 만약 태묘가 타 버리면 책임자의 목을 베어 버리겠다!"는
한마디만 했다. 그러자 병사들이 우르르 나서서 책임자를 따라 용감하게 불을 껐다. 주연유
는 심각한 정치적 타격으로 목숨까지 왔다갔다할 판에도 결코 의기소침하지 않았다. 당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정치적 역량을 갖고 있었던 동림당 인사들과 왕래하면서, 몇 년이라는
긴시간에 걸쳐 교활한 수단과 쉴 줄 모르는 노력을 기울여 마침내 동림당의 양해와 동정을
얻기에 이르렀다. 드디어 숭정 14년 2월, 주연유는 동림당의 추천을 받아 다시 조정의 문턱
을 넘게 되었다. 동림당과 복사의 원수이자 명나라 말기의 대간으로 꼽히는 원대성도 이와
비슷했다. 원대성은 위충현에게 붙어 동림당을 잔인하게 박해하는 등 용서받을 수 없는 죄
를 저질렀다. 천계 7년, 숭정 황제 주유검이 황제자리에 올라 위충현 일당의 몇몇 핵심 인물
을 단번에 제거해 버렸다. 교활한 원대성은 죽음은 면했지만, 그 이름도 당당하게 '역안'
에
올라 "평생 관직에 오르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13년 뒤 이미 60이 넘은 원대성은 불굴의 의지로 초인적인 활동을 펼쳐 '역안'
을
뒤집었다. 그는 황제의 명에 따라 병부시랑에 기용되었다. 요기서 또 한 사람을 기억해둘 필
요가 있을 것 같다. 바로 강빈이다 강빈은 명나라 무종이 아끼고 믿었던 마지막 인물이었다.
그는 선부에서 태어난 무관으로서 전쟁에서 아주 사납고 용맹스러운 인물이었다. 어느 전투
에서는 화살을 세발이나 맞았는데, 그중 한 발은 얼굴에 밎아 화살축이 귀 뒤쪽으로 뚫고
나올 정도로 심각한 상처였다. 그런데도 그는 싸움을 계속했다. 이일이 안팎으로 알려졌고
무종도 듣게 되었다. 그 뒤 전영이 강빈을 데리고 와 표방에서 무종에게 인사를 시켰다. 가
빈은 간신배들과 함께 금세 무종의 귀여움을 받게 되었다. 무종은 놀기를 여간 좋아하지 않
았는데 용기를 과시하는 놀이라면 목숨까지도 돌보지 않기로 이름난 황제였다. 그는 호랑이
몇마리를 각기 다른 우리에 넣어 기르고 있었다. 언젠가 한번은 갑자기 호랑이 우리에 들어
가 호랑이 한 마리를 잠아 가지고 나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전영을 불러 함께 호랑이 우
리로 향했다. 잔뜩 겁에 질린 전영은 무종의 뛰를 따릘는 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무
종이 잡으려는 호랑이는 으르렁거리며 무종 쪽으로 다가왔다. 이만저만 위급한 상황이 아니
었다. 그런데도 겁에 질려 정신이 나가 전영으로서는 전혀 손을 쓸 수 없었다. 이때 강빈이
달려와 호랑이를 막아서서는 물러나게 했다. 이로써 무종은 아무 일없이 우리를 빠져나올수
있었다.
이 일이 있은 뒤 무종은 체면을 세우려고 강빈에게 "사실 말이지 당신이 오지 않았어도
나 혼자 처리할 수 있었는데..."라며 우물거렸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강빈에게 아
주 고마워했다. 이와 비슷한 예는 얼마든지 있으므로 더 이상 꺼내지 않는 게 좋겠다. 그리
고 이런 예들이 무엇을 설명하는지도 굳이 논평할 필요가 없겠다. 역사상 뛰어난 사상가, 정
치가, 영웅호걸들이 대부분 간신들을 안중에도 두지 않고 그들을 아주 깔보았다. 깔보는 것
은 좋다. 그러나 만약 깔보는 것이 지나쳐 경계심마저 없애 버린다면 그 결과는 상상하기조
차 어려울 정도로 엄청날 것이다. 하언은 호탕한 인물로서 거침없이 쏟아내는 웅변으로 굴
복시키지 못할 사람이 없을 정도였으며, 또 용모가 뛰어나고 위풍당당하여 모든 정치가 그
의 입에서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결국은 엄숭에게 걸려들어 그를 내각에 끌어들이고 자신
은 파면되어 쫓겨났다. 그리고는 결국 사지로 내몰리고 말았다. "몸과 뼈가 부서져 가루가
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청렴결백으로 남은" 우겸은 군대가 패하고 나라가 위
기에 몰린 상황에서, "남쪽으로 도망가자."는 서유정을 당당하게 꾸짖으며, 수도를 지키는
전투를 이끌었다. 그리하여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빛나는 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의 최후는
어떠했던가? 다름 아닌 서유정의 손에 죽지 않았던가? 그대의 뛰어난 재상들 중에세 구준
도 한 인물이라 할 만하다. 그는 여러 사람 앞에서 조금도 거리낌없이 그를 위해 수염을 닦
아주었던 정위를 비웃었다. 그러나 그 뒤 바로 그 정위에 의해 당했고, 결국은 뇌주에게 객
사하고 말았다.
비참하기로 말하자면 당나라 때의 명재상 장구령을 따를 사람이 없다. 그는 재능으로 추
천을 받고 학문으로 존경을 받은 뛰어난 식견의 소유자였다. 그는 이임보의 간사한 마음을
일찍부터 꿰뚫어보고 이임보가 장설을 탄핵할 때 장설에게 주의를 환기시켰으며, 현종이 이
임보를 기용하려 하자 현종에게 바른 말로 제지했다. "재상은 국가의 안위와 관계되는 자리
이온데 폐하께서 이임보를 쓰려 하시니 신은 종묘사직에 걱정이 되지 않을까 두렵사옵니
다." 그러나 이러했음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훔치려는 이임보의 발걸음을 막지 못하고 오히
려 자신이 당했다. 역대 왕조의 역사를 훑어보면 이와 비슷한 일은 실로 헤아릴 수 없이 많
다. 세상의 흐름을 따라 흐르지 못하고 홀로 깨어 있었던 굴원은 골라강에게 만고의 슬픔만
을 얻었을 뿐이다.끓어오르는 충정으로 나라에 보답했던 악비는 간신으로 인해 풍파정 앞에
서 천년의 억울한 혼백으로 남았다. 총명하기 그지없었던 탈탈은 합마에게 당했으며 비교될
인물이 없을 정도로 강직했던 오원은 백비의 모함으로 죽었다. 이렇듯 끝없이 반복되어온
역사상의 비극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역대 왕조의 충신과 뛰어난 재상들이
간신, 소인배와 싸워 실패한 원인을 좋합해보면 아마 적을 가볍게 여겼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일 것이다. 간신의 '남다른 점'을 소홀히 하거나 경시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체계적
인
변간 이론을 세우는 데 없어서는 안된다. "나를 알고 남을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
게 된다." 이 구절을 여기에서 인용해도 전혀 어색하지 안흥ㄹ 것이다. 자신의 적수를 제대
로 인식해야만이 비로소 적을 쓰러뜨릴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눈을 감고 참새를
잡으려는 것고 다름없으며, 호랑이를 잡으려다 도리어 호랑이에게 물리는 꼴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간신은 도대체 어떤 저이 남다른가? 자세히 분석해보면 다음 몇 가지 점을 귀납해
낼 수 있다.
첫째, 세상 돌아가는 일에 아주 밝다. 간신은 일반적으로 세상사에 밝다. 그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잘 다독거리고 비위를 잘 맞춘다. 바람에 따라 아주 능숙하게 배를 움직일 줄 안다.
자기들이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 마음과 뜻을 어기지 않으며, 비평도 하지 않는
다. 정을 알고 냉정함을 안다. 당 현종의 사랑을 독차지한 미녀 무혜비가 있었다. 그러나 황
태자는 이미 이황이 되었고, 그녀의 두 아들 수왕과 성왕은 그저 영원히 왕으로 남아 있어
야지 황제가 될 수 없는 팔자였다. 이때 이임보는 환관을 통해 무혜비에게 "수왕을 황제 자
리에 오르게 할 수 있는 계책이 있습니다."라는 의사를 전달했다. 이 말에 크게 감격한 무혜
비는 현종 앞에서 이임보의 칭찬읓 수시로 늘어놓았다. 그리하여 이임보는 황문시랑에 임명
되어 현종의 홍애를 받았다. 얼마 있지 않아 예부상서에 동중서문하 3품으로 승진하여 조정
의 세 재상 중 한 자리를 꿰어찰 수 있었다. 청나라 건륭제는 문학과 역사를 좋아해서 그
정리 작업에 많은 열을 쏟았다. 당시 24사를 간행하는데 건륭이 친히 교정을 보았다. 잘못된
글자를 찾아내면 마치 큰일이나 한 것처럼 기뻐했다. 화신 등은 이러한 건륭의 심리를 파악
하고 쉽게 찾아낼 수 있는 곳에다 일변칙으로 건륭을 기쁘게 하고 환심을 샀다. 이는 면전
에서 당신의 학식이 깊고 높다고 칭찬하는 것보다 훨씬 큰 효과를 가져다주었다. 감정에 따
라 좋은 말만 골라 하는 아첨꾼들은 거의 욕을 하지 않는다. '인정과 세상사 돌아가는 것'에
통달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뜻을 거슬리지 않고, 사람들을 즐겁고 편안하게 만든다. 이는
간신의 지극히 중요한 '소질'이다. 황제가 한휴를 재상으로 기용하려 한다는 낌새를 챈 이임
보는 이 사실을 서둘러 한휴에게 알려주었다. 곧기로 이름난 한휴도 이임보에게 아주 감사
해 했으며, 재상에 임명된 뒤 곧장 현종에게 이임보를 재상으로 추천하기까지 했다.
둘째, 생각이 민첩하고 눈치가 빠르다. 건륭제는 막내딸인 열째 공주를 가장 아끼고 사랑
했다. 이 딸을 너무 좋아해서 늘 "이 아이가 크면 나를 앎어 틀림없이 복이 넘칠거야."라고
말했다. 틈만 나면 이 딸과 함께 장난치며 놀아주었다. "네가 남자로 태어나지 못한 게 안타
깝구나. 남자였다면 볼 것도 없이 너를 태자로 삼았을 텐데." 열째 공주의 말이라면 건륭제
는 백이면 백 다 들어주엇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건륭제가 원명원으로 놀러 나갔는데
환신이 수행했고, 열째 공주도 남장을 하고 함께 가게 되었다. 때는 새해라 원명원 안에 시
장 거리가 만들어졌다. 이 거리에는 먹을 것, 장난감, 술집, 식당 등 없는 게 없었다. 모두
황궁에 물건을 대는 장사꾼들이었다. 열째 공주는 신이 나서 이것저것을 구경하다가 한 점
포에 걸려 있는 진홍색 옷을 보고 두 눈을 반짝였다. 모두 황궁에 물건을 대는 장사꾼들이
었다. 열째 공주는 신이 나서 이것저것을 구경하다가 한 점포에 걸려 잇는 진홍색 옷을 보
고 두 눈을 반짝였다. 그 순간 공주의 지극히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화신은 놓치지 않았다.
그는 지체 없이 그 점포로 달려가 28금이란 높은 값을 주고 그 옷을 샀다. 물론 공주에게
바치기 위해서였다. 아니나다를까, 공주는 뛸 듯이 기뻐했다. 간신들은 바로 이렇다. 그들은
사람의 심리를 잘 포착하고 파악한다. 평범한 동작 속에서도 그 사람이 무얼 좋아하고 싫어
하는지 알아낸다. 무심코 내뱉은 말 속에서 그 사람의 취향과 마음을 읽어낸다. 심지어는 단
헌 번 보고도, 단 한 번 이야기를 나누고도, 단 한번 만져보고도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
하며, 약점이 무엇인지 짐작한다. 상대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추구
하는지 대체로 파악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상대의 필요에 따라 증상에 맞추어 약을 처방하
듯 상대에게 미끼를 던진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이 약점을 잡히고 심리를 파악당해 결국은
걸려들고 만다. 엄숭의 아들 엄세번은 이 방면에서 아비보다 열 배 백 배 뛰어났다. 엄숭의
나이 70이 지나자 판단력이 흐려지기 시작햇다. 세종이 무엇을 물어도 전과 달리 그 속뜻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다. 그러나 간교하기 짝이 없는 엄세번은 단번에 세종의 속내를 알아
채고 세종의 환심을 샀다. 그래서 엄숭은 아들 몰래 서원에 숨겨놓고 무슨 일이 있으면 자
기 대신 처리하도록 했다. 엄숭의 결재를 필요로 하는 일이 있으면 엄숭은 늘 "내 아들과
상의한 후 다시 결정하겠소."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당시 조정 안팎에 '황상은 엄숭
이 하루라도 없으면 안되고, 엄숭은 그 아들이 하루라도 없으면 못산다.'라는 말까지 나돌았
다. 어떤 사람은 내놓고 그들 부자를 '대승상, 소승상'이라 불렀다. 이런 자들에게 자신의 욕
망을 손톱만큼이라도 드러내면 그 즉시 이용당한다. 무수한 역사적 교훈이 입증하는 사실이
다.
셋째, 마음 씀씀이가 여간 아니다. 마음을 쓰는 데 공을 들이며 계산에 아주 밝다. 그들이
말도 않고 소리도 못 지른다고 생각하지 말라. 정위나 서유정은 조롱을 당하고도 한마디도
불평하거나 싸우지 않았다. 그러나 속으로는 죽을 힘을 다해 갈고 닦으며 저울질한다. 사실
그들은 하루 종일 사람과 일을 놓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다. 어떻게 하면 기회를 잡아 파
고들 수 있는지, 방해가 되는 사람을 없애거나 조종할지, 온갖 머리와 생각을 다 짜낸다. 그
들은 보통 사람들처럼 되는 대로, 입에서 나오는 대로, 아무 생각 없이 신나게 내뱉거나 함
부로 행동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저질러 놓고 생각하지만, 이 자들은 늘 생각하고 꾸민
다음 움직인다. 그렇기 때문에 승산이 있는 것이다. 석현은 높은 자리에 오른 뒤 자신이 인
심을 얻지 못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노려보며 조그마한 잘못이라
도 있으면 모두 들고일어나 공격할 기세였다 생각 끝에 그는 원제에게 자신에 대한 신임을
튼튼하게 하고, 사진에 대한 다른 사람의 공격이나 불리한 말을 듣지 못하도록, 또 설사 듣
는다 하더라도 믿지 않도록 예방 조처를 취하기로 했다. 고민고민 긑에 석현은 이런 일을
벌였다. 한나라 황실의 제도에 따르면 저녁이 되어 궁 문을 닫은 후에는 아무도 드나들 수
없엇다. 어느 날 궁밖에 볼일이 생긴 석현이 나가기 전에 원제에게 "돌아올 때 궁 문이 닫
혀 있을지 모르오니 폐하께서 수문을 담당하는 자에게 명령을 내리시어 문을 열어주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청했다. 원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했다. 그날 석현은 일부러 밤늦게 돌아
와서 궁 문 앞에서 큰 수리로 황제의 명령이니 문을 열라고 외쳤다. 문이 열리자 석현은 기
세 당당하게 거들멱거리면서 궁 안으로 들어왔다. 이 일이 있은 뒤 얼마 되지 않아 석현이
황제의 명령을 빙자해 성문을 열게 했다는 고발장이 원제 앞으로 날아들었다. 이를 받아 본
원제는 한바탕 웃고 난 다음 석현에게 건네주었다. 글을 다 읽고 난 석현은 원제 앞에 두
무릎을 꿇고 울기 시작했다.
"폐하께서는 소신을 아끼시어 일을 맡기셨습니다. 한데 여러 사람들이 저를 시기하고 질
투하여 모함하는 일은 이번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원하옵건대 자리를 사퇴하고 후궁 청소라
도 하면서 지낼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모쪼록 가엾게 여기시어 신이 온전히
살아갈 수 있게 해주업소서." 석현의 이 행동은 원제의 나약한 심성을 흔들었다. 원제는 어
려서 궁형을 받고 환관이 되어 부모와 처자식되 없이 살아온 석현에게 무슨 나쁜 마음이 있
을 깨 생각했다. "여러 신하들이 석현을 이렇게 대하는 것은 모두가 시기와 질투일 것이다.
이번 일이 좋은 증거가 아니겠는가?" 한번 쏟아진 동정심은 균형을 잃고 걷잡을 수 없게 되
었다. 그리하여 원제는 몇 차례나 석현을 다독거리면서 후한 상까지 내렸다. 이 사건으로 석
현을 고발하거나 탄핵하는 어떠한 말과 글도 들으려 하거나 믿으려 하지 않게 되었다. 자신
을 지키고 자리와 재물을 위해서라면 간신들은 갖은 며리를 다 짜내며 온갖 꾀를 생각해낸
다. 그 마음 씀씀이와 계산은 보통 사람으로서 절대 따를 수 없는 경지다.
넷째, 권모술수에 정통하다. 위나라가 조나라 수도 한단을 포위하여 공격했을 때 한나라
의 신석해는 당초 왕에게 두 나라 중 하나와 연합하여 득을 취하라고 건의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한왕의 생각이 어떤 지 몰라 건의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조탁과 한황에게 "당신
들은 나라의 대들보이자 신하로서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꺼지리 말고 바른 말을 해야 할 것
아니오?"라며 부추겼다. 그러자 조탁과 한황은 각기 이번 싸움에 대한 각자의 의견을 왕에
게 건의했다. 이 과정에서 신석해는 왕이 어느 쪽 의견으로 기우는 지를 은밀해 탐색하고는
그에 맞추어 왕에게 강력히 건의했다. 그러자 왕은 신석해를 칭찬했다. 이와 비슷한 경우가
또 있었다. 초나라 왕후가 죽었다. 그래서 뒤를 이을 왕후 자리가 비게 되었다. 누군가가 재
상 소어에게 "어째서 다시 왕후를 얻으라고 대옹께 말씀드리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다. 그
러자 소어는 "내 의견을 말했다가 왕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장차 새로 들어설 왕후가 나를
원망할 게 분명하지 않은가?"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그렇다면 이렇게 하시지요.
귀걸이를 몇 쌍 사십시오. 물론 그 중에는 가장 예쁜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그것들
을 대왕께 갖다 주십시오. 다음날 가장 예쁜 귀걸이를 달고 나오는 사람을 왕후로 추천하시
면 됩니다."라고 꾀를 일러주었다. 소어는 그 꾀에 따랐고, 초왕의 미음을 정확하게 짚을 수
있었다. 멀리 내다보지 못하면 근심이 닥치기 마련이고, 용기만 있고 꾀가 없으면 뒷날 걱정
거리를 불러들이기 마련이다. 간신은 용기만 앞세우는 교만한 장수나 쓸데없이 덤벼드는 보
통 사람과는 절대 다르다. 또 한 순간의 통쾌감을 위해 칼을 마구 휘두르는 도살꾼도 아니
다. 그들은 "단 네 푼으로도 천근을 압도할 수 있는" 쾨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
들은 권모술수와 모략을 열심히 배우고 또 능숙하게 운용할 줄 안다. 그들은 꾸미고 생각한
다음 움직이며, 꾀로 얻고자 하는 것을 선에 넣는다.
서한 때 경방이란 자가 있었는데 재난과 기이한 현상을 잘 맞추는 '역'에 능햇다. 이 자가
당시 석현이 권력을 휘두르며 정치를 엉망으로 만드는 것을 보고, 관리들을 바로잡을 수 있
는 이른바 '고공과리법'이란 것을 지어 올렸다. 사실은 석현을 겨냥한 것이었는데 원제로부
터도 긍증적인 반응을 얻엇다. 그러자 석현은 참으로 교활하게도 그 법을 경방에게 먼저 적
용하여 시험해 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원제에게 건의하여 그를 멸찌감치 쫓아냈다. 또 진함
이란 유능하고 강직한 젊은이가 여러 차례에 걸쳐 석현이 함부로 권력을 휘두르며 조정의
기강을 무너뜨린다고 탄핵했다. 석현을 겉으로는 모르는 척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몰
래 당시 재상으로 있던 위현성에게 진함이란 자가 재상을 아무 짝에더 쓸모 없는 인간이라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정말로 무능하기 짝이 없었던 이 재상은 자리에서 쫓겨날까봐
당장 진함을 옥에 가두고 머리를 박박 밀어 버리는 형벌에 처했다. 석현은 이렇게 이간질로
일을 일으킨 다음 자신은 강 건너 불 구경하며 어부지리를 얻는 비열한 목적을 달성했다.
꾀로 사람을 얻고 해친다. 욕을 보더라도 그 자리에서 칼을 뽑아들고 달려들어 싸우지 않는
다. 그 대신 머리를 굴려 교묘하게 자신의 목적을 이룬다. 얕볼 수 없는, 아니 얕보아서는
안 되는 간신의 '장기'다.
다섯째, 임기응변에 능하다. 임기응변이 있느냐 없으냐, 일을 당황하지 않을 수 있느냐 없
느냐, 어떤 변화에도 놀라지 않고 태연자약할 수 있느냐 없느냐? 이런 것들은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지극히 중요한 능력이다. 간신들 역시 항상 이 점에서 남다른 면을 보
여준다. 그들의 목에는 베어링이 박혀 있고, 허리는 스프링 허리다. 등에는 풍향계까지 꽂혀
있다. 그래서 반응이 잽싸며 생각이 빠르다. 바람의 방향에 따라 키를 자유자재로 조종하며
앞 뒤 좌우를 빈틈없이 살필 수 있다. 그래서 왕왕 패배를 승리로, 흉을 길로 바꾸어놓기도
한다. 이 방면에서 우문사급은 전형적인 본보기였다. 신당서 <우문사급전>을 들춰보자. 어
느 날 궁중을 산책하던 당태종이 어떤 나무를 보고는 "좋은 나무로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졑에 있던 우문사급이 잽싸게 그 나무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태종은 근엄한 표
정으로 "위징이 늘 아첨꾼을 멀리하라고 했는데, 그 아첨꾼이 누군가 했더니 오늘에서야 알
겠구나!"라며 우문사급을 나무랐다. 이에 우문사급은 황급히 이렇게 대꾸했다고 한다. "조정
에서 여러 신하들이 얼굴 맞대고 논쟁을 벌이는 것이야 폐하께서 아무런 신경을 안 쓰셔도
되지요. 그러나 지금같이 산책을 하러 나왔을 때 곁에서 수행하는 제가 폐하의 말씀에 고분
고분 따르지 않는다면, 폐하께서 아무리 귀하신 몸이라 해도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조정에서 여러 신하들이 얼굴 맞대고 논쟁을 벌이는 것이야 폐하께서 아무런 신경을 안 쓰
셔도 되지요. 그러나 지금같이 산책을 하러 나왔을 때 곁에서 수행하는 제가 폐하의 말씀에
고분고분 따르지 않는다며, 폐하께서 아무리 귀하신 몸이라 해도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풍몽룡은 지낭이란 책에서 진회의 임기응변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진획다 정권을 잡고 있
을 때 한번은 경성 시장에 갑자기 현금이 모자리는 사태가 일어났다. 시장 사람들은 당황했
고, 인심을 흉흉해졌다. 어느 날 진회는 이발사를 불러 자기 머리를 다듬게 한 다음 두 냥이
면 될 이발값으로 5천 전을 주며, 이 돈은 며칠이 지나면 쓸모가 없게 될 것이니 빨리 써서
없애라고 일러주었다. 이발사는 돈을 쓰면서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했다.
그 결과 며칠 사이에 경성 시장에는 현금이 넉넉하게 돌게 되었다. 이런 것들이야 보잘것없
는 기교라 하겠지만 간신의 임기응변 능력을 믿지 않을 수 없다.
여섯째, 부지런히 뛰어다니며 주선한다. 송나라 때 사람 왕당이 쓴 당어림에 이런 이야기
가 나온다. 언젠가 이백이 재상을 찾아가 오늘날로 말하자면 명함 같은 것을 내밀었는데, 시
인, 작가, 교수 따위가 아니라 글씨도 또렷하게 '해상조오객이백' 이라고 쓰여 있었더란다.
'바다 위에서 거북을 낚는 나그네 이백'이란 뜻이었다. 그러자 재상이 이렇게 물었다. "선
생
이 푸른 바다 위에서 그 커다란 거북이를 낚는다면 낚시 바늘은 어떤 것이며, 낚시줄은 어
떤것이고, 미끼는 또 무엇이요?" "무지개가 낚싯줄이요, 밝은 달이 바늘이며, 천하에 의기
없는 대장부가 미끼로소이다." 이 얼마나 산뜻하며 기개 넘치는 말인가!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면 산뜻함은 산뜻함일 뿐이며, 기개는 기개일 뿐이다. 그런데도 재상은 섬뜩했다
고 한다. 이처럼 미친 듯한 사람을 기용할 재상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에
게 복종하기는커녕 그 반대가 될 것이다. 그러나 세상 어디에 상관이 부하에게 복종한단말
인가? 그러나 간신들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들에게 이태백 같은 광기란 전혀 없으며, 정
판교의 오만함도 없고, 원적의 게으름도 없으며, 유령의 방탕함도 없다. 그들은 사람의 뜻과
마음을 잘 이해하고 따르며, 일을 조심스럽고도 아주 근면하게 한다. 기꺼이 머리를 숙이며,
수고로움도 마다하지 않는다. 자질구레한 일도 뿌리치지 않는다. 높은 사람의 곁에 있을 수
만 있다면 전후, 좌우, 내외를 빠짐없이 구석구석 챙긴다. 다른 사람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
던 것을 그들은 일찌감치 생각하고 있으며, 생각했던 것은 벌써 눈앞에 대령해놓고 있다. 그
들은 오만하고 자존심 강한 사람과도 다르고, 길이 아니면 가지 않는 사람과도 다르며, 일이
아니면 하지 않는 사람과도 다르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늘 일이 있으며, 눈은 늘 번득인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있으면 몸과 마음이 편해진다. 이것이 그들이 '크고 중요한 일은 아랑
곳
하지 않더라도' 신임과 귀여움을 얻는 중요한 원인이기도 하다.
일곱째, 기꺼이 도박(모험)을 한다. 간신은 초기 단계에서는 매우 조심스럽고 신중하며, 그
저 '예예'하면서 상대의 눈치를 살피고 앞뒤를 살핀 다음 행동하지만, 절호의 기회를 눈앞에
둔 상황에서는 절대 위축되지 않으며, 기꺼이 목숨을 걸기까지 한다. 어떤 일이라도, 아무리
위험한 일이라도 용감하게 달려든다. 임금을 죽이는 엄청난 모의에도 기꺼이 가담하여 눈
하나 깜짝 않고 군대를 동원한다. 금나라 때의 거간 소유는 처음부터 완안량을 부추겨 임금
을 죽이고 일어선 인물이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반란을 시도하다가 피살되었을 정도였다.
소유는 원래 보잘것없는 지방관에 지나지 않았으나 완안량이 투자 가치가 있는 인물임을 알
고는 지체 없이 그의 품안으로 달려들어 "하늘과 백성의 요구에 따라야 한다." 면서 그를
선동하였다. 그리하여 희종을 죽이기에 이르렀다. 금사 영행전에 따르면 완안량이 희종을 살
해한 것은 완전히 "소유가 이끌었기"때문이었다. 이 과정에서 소유는 먼저 병부시랑으로 발
탁되었다가 완안량이 황제에 오른 다음 비서감이 됨으로써 명실상부한 제2의 황제가 되었
다. 그는 자기와 뜻을 달리하는 사람들을 배척하고, 측근들을 모조리 긁어모아 온갖 나쁜 짓
을 저질렀다. 조정에서 소유는 어사대부 고약사와 사이가 가장 좋았다. 고약사는 소유와 접
촉하면서 그가 황제에게 원한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 사실을 황제에게 일러바쳤
다. 그러나 황제는 그의 말을 믿지 않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러자 불만을 품은
신하들이 들고 일어나 소유의 전횡을 탄핵했다. 이에 황제 환안량은 대신들의 의심을 풀기
위해 일부러 소유의 동생 소조, 매부 야율벽리자를 서울에서 내쫓았다. 그러나 소유는 자신
을 보호하려 한 완안량의 고민스러운 결정을 이해하기느커녕 오히려 완안량이 자신을 의심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소유는 또다시 반역을 꾀하다 실패하고 체포되었다. 소유는
결국 법에 따라 처형되었다. 역사상 유명했던 모험가는 이렇게 최후의 모험을 감행하다 자
신의 일생을 마감했다. "담이 큰 사람은 부딪쳐 죽고, 담이 작은 자는 굶어 죽는다." 이말은
간신들의 입에 발린 말이다. 많은 간신의 활동사는 한 편의 모험사이다. 그들은 영원히 멈추
지 않고 쉴 줄 모르는 욕망 속에 있다. 그리고 이 욕망이 때로는 그들로 하여금 천하의 큰
죄악을 감행하도록 충동질한다. 이를 위해 그들은 생사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든 것을 아낌
없이 쏟아붓는다. 간신이 갖춘 아주 중요한 소질이다.
여덟째, 감추기를 잘 한다. 간신, 소인은 자기 통제에 능하다. 그들은 굽혔다 폈다를 자유
자재로 구사하며 모욕도 잘 참는다.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서도 끈질기게 버티면서 변화를
기다릴 줄 안다. 절대로 사소한 일 때문에 큰일을 그르치지 않으며, 쥐새끼 한 마리 때문에
천 근의 물고기를 낚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안흔ㄴ다. 그들의 자제력과 인내력은 확실히
'후안무치'의 경지에 올라 있다. 하연은 엄숭에 의해 내각에서 쫓겨나 한직을 떠돌다 얼마
뒤 다시 내각으로 복귀했다. 관례에 따라 다시 내각에 들어온 하언은 수보가 되고, 엄숭은
차보로 물러나야 했다. 따라서 모든 일을 하언의 분부에 따라야 했다. 엄숭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있던 하연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심하게 엄숭을 몰아 붙였다. 마치 엄숭을 천적처럼
여겨 내각의 어떤 일에도 엄숭이 끼여들지 못하게 했다. 엄숭이 일이 있어 하언에게 가면
그는 일찍이 '문단의 영수'자리까지 올랐던 엄숭에게 참기 힘든 모욕을 주고, 그가 올린 보
고서를 정신없이 듣어고치는가 하면, 심지어 말이 안 되는 다시 지어 오라며 내던져 버렸다.
하언의 보복은 엄숭이 심허놓은 사람들에게까지 미쳤다. 하언은 그들의 세세한 잘못을 들추
어 손톱만큼도 용서하지 않고 모조리 숙청해 버렸다. 파면을 당하거나 감옥에 갇히는 등 모
두 처벌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러한 굴욕을 당하고도 엄숭은 웃음을 잃지 않고 하언
의 말을 따랐다.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으며, 논쟁을 벌이지도 않았다. 이런 놀라운 자
제력으로 그는 또 한번의 좋은 기회를 잡아 하언을 거꾸러뜨린 다음, 철저하게 그를 죽음으
로 몰아넣었다. "보통 사람이 치욕을 당하면 칼을 빼들고 달려들어 싸우는데 이것은 용기라
할 수 없다." 소동파의 말이 실감난다.
아홉째, 말을 교묘하게 잘 한다. 신당서 허경종전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다. 당 고종 이
치가 태산에 제사를 지내고 돌아오는 길에 복양을 지나게 되었다. 도중에 고종이 두덕현에
게 "복양 지방을 왜 제왕의 땅이라고 부르는게요?"라고 물었다. 갑작스런 질문에 두덕현은
대답을 못했다. 이때 신당서에 간신으로 올라 있는 허경종이 "신이 조금 아옵니다만" 하며
나섰다. 허경종이 전설 속의 제왕 전욱이 복양 땅에 살았던 고사를 청산유수처럼 한바탕 늘
어놓자 고종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허경종은 의기 양양하게 "대신이라면 학문이 깊어야
하는 법, 그 정도도 대답하지 못하면 나 같으면 부끄러워 견딜 수 없을게야."라며 우쭐거렸
다. 간신, 소인은 대부분 말재주가 뛰어났다. 그래서 말을 교묘하게 잘 하고, 늘 선량한 얼굴
을 하고 다니는 무리라 하지 않는가? 그들은 혀와 입술을 놀려 헛된 말을 지어낸다. 그럴
듯하고 교묘한 구실로써 남을 모함한다. 현란한 말솜씨로 사람들을 어지럽히고 귀여움을 차
지한다. 고금의 사례들을 종횡으로 끌어대며 자신의 학식을 뽐낸다. 다른 사람과 일을 꾀할
때는 하늘과 땅에 단단히 맹서한다. 혓바닥은 그들이 남을 해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날카
로운 무기이다. 그러나 숱한 경험들이 증명하듯 교묘한 말재주를 가진 자들이 말만 잘하는
무리들은 결코 아니다. 역사상 거간, 대간으로 불릴 만한 자들은 적어도 다음 몇 가지 조건
들을 갖추어야만 한다. `심성이 악해야 한다. `미치는 화가 엄청나게 커야 한다. `맡은 일이
커야 한다. `솜씨가 대단히 좋아야 한다. 배우지 않으면 해로움을 끼치기에 부족하며, 재주
가 없으면 간신짓거리도 쉽지 않다. 역사상 이러한 예는 매우 많다. '오귀'로 불리던 송나
라
때 왕흠약, 정위등은 꾀가 남다르고, 유달리 민첩하며, 하루 종일 일거리를 들여다보고 있어
도 피곤해 하지 않고, 수천 자나 되는 글이라도 한번 보고 나면 줄줄 외는 자들이었다. 아무
리 복잡하고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일이라도 단번에 처리하여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들었
다. 명나라 인종 때의 태자태보, 예부상서로서 역사책에 "아첨을 기막히게 잘하는" 것으로
기록된 여진은 정력적이고 대단한 기억력을 가진 재주가 뛰어난 인물이었다. 조회 때 상소
문을 올릴 경우 남들은 보통 원본을 베낀 후 좌우시랑의 도움을 받아가며 보고를 올렸으나,
여진은 상소문이 아무리 많아도 "한 자도 틀리지 않고 유창하게 내용을 줄줄 아뢰었다."
한번은 황제와 함께 사냥을 나갔다가 우연히 비석 하나를 발견하여 임금과 신하가 사냐을
나갔다가 우연히 비석 하나를 발견하여 임금과 신하가 사냥을 잠시 멈추고 그 비문을 읽는
일이 있었다. 그로부터 1년 뒤, 황제는 문신들과 그 비문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예부에 명하
여 비문 기록을 가져오게 했다. 그때 여진이 나서며 사람을 보낼 것 없이 종이와 붓만 가져
오게 했다. 그리고는 황제 앞에서 1년 전에 보았던 비문의 내용을 막힘 없이 줄줄 단숨에
써내려갔다. 모두들 못 믿겠다는 표정이었다. 그 뒤 황제는 몰래 사람을 시켜 비문과 대조하
게 했는데, 놀랍게도 여진이 기억해 쓴 것과 한 자도 어긋남이 없었다. 군자의 재능만 보고
소인의 재능은 보지 못한 채 그저 군자만 책을 읽을 뿐 소인은 읽지 않는다고 무시해 버리
는 것이 그 동안의 보편적인 평가이자 심리였다. 간신, 소인의 단점만 보고 그들의 '남다른
점'은 보지 않은 채 그들을 모두 무식한 것들이라 여기고 방심하여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
면,
그 결과는 간신들로 하여금 자기들 멋대로 그 결과는 간신들로 하여금 자기들 멋대로 설치
게 하는 것밖에 없다. 오랫동안 간신을 가려낼 방법과 그들의 술수를 제압할 대책을 강구하
지 못했던 것도 간신을 얕보는 이런 경향과 밀접한 관계가 있지 않겠는가? 요컨대 간신에게
무슨 대단한 것이 있겠느냐며 방심해 버린 것, 이것이 바로 실패를 거듭해온 중요한 원인이
다!
9.인성의 약점을 이겨내라
간신이 간을 부릴 수 있는 데에는 주관적, 객관적 조건이 있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점
은 그들이 사람의 마음, 즉 인성의 약점을 잘 이용한다는 것이다. 자고이래로 가볍게 간을
믿은 자, 욕심 때문에 간을 따른 자, 겁이 많아 간을 무서워한 자, 어리석어 간을 날뛰게 한
자, 자비심으로 간을 기른 자는 실로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우며, 그것이 주는 교훈은 심각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인성의 약점을 이겨내고, 간을 방지하는 마음을 기르며, 간을 거
절하는 덕을 키우고, 간을 살피는 지혜를 갖추며, 간과 싸우는 용기를 북돋워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약점을 가지고 있다. 미국의 카네기는 인성의 약점이란 책을 썼다. 이 책은
14대 국어로 번역되어 1천만 부 이상 발행되었다. 이 책이 이렇게 큰 성공을 거둔 비력은
어떻게 하면 사람의 약점을 잡아 그것에 맞출 수 있는가를 가르치는 면이 많은 비중을 차지
했기 때문이다. 간신이 나라에 해를 끼치고 세상에서 뜻을 이룰 수 있었던 데에는 물론 사
회적 원인도 있고, 또 개인적 자질에도 원인이 있다. 그러나 우리들이 지닌 약점 때문에 늘
그들이 쉽게 들락거릴 수 있는 문을 열어준 것 또한 사실 아닌가? 왕안석은 장적의 시와 문
장을 극찬했으나 정작 장적과는 전혀 다른 사람을 기용했고, 사마광은 왕안석의 결점을 알
았으나 정작 자신은 채경을 치켜세우며 칭찬하지 않았던가? 원우 연간 사마광이 정권을 잡
고 신법을 폐지하자 본래 신법파에 몸을 담고 있던 채경은 잽싸게 얼굴을 바꾸어 구법파의
적극적인 지지자가 되었다. 사마광이 차역법의 재시행을 주장하면서 5일 안에 모든 조치를
완성하도록 했다. 모두들 기간이 너무 짧아 완성하지 못했는데 채경만이 정해진 기간 내에
완성했다. 사마광은 "하나도 어김없이 모두 고쳐왔다."고 크게 기뻐하면서 "모두가 당신처럼
만 하면 무슨 일인들 안 되겠소?"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하여 적극적으로 그를 중
요한 자리에 앉히려 했다. 만약 대신들이 들고 일어나 반대하지 않았더라면 채경은 일찌감
치 최고의 자리에 올랐을 것이다. 사람아, 어리석은 사람아! 무서운 것은 적이 아니라, 우리
들 자신의 연약함이다. 송사 한헤종전에 의하면 악비가 억울하게 옥에 갇혔을 때 아무도 나
서서 한마디 말도 못했는데, 오직 한세충만은 용감하게 나서 진회에게 맞섰다.
신당서에 기록된 당나라 때의 명신 이필에 관한 이야기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기 짝이 없
었던 이필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당시 재상 자리에 있던 장류령도 이 신동을 사
랑하여 늘 가까이 두었다. 당시 장루령은 엄정지, 소성과 잘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엄정지
는 소성이 아부를 일삼는 인물임을 알고 장구령에게 그와 너무 가깝게 지내지 말라고 충고
했다. 엄정지가 돌아간 뒤 장구령은 환자말로 "엄정지는 사람은 후덕하고 충실한데 너무 꼬
장꼬장해서 틀렸어. 하지만 소성은 부드러운 것이 마음에 들어."라고 중얼거렸다. 이 말을
곁에 있던 아홉 살 난 이필이 듣고 곧 이렇게 물었다. "공이시여! 당신께서는 원래 평범한
백성으로, 바른 도를 행함으로써 오늘날 이렇게 재상 자리에까지 오르신 것 아닙니까? 한데
지금 왜 부드럽게 떠받드는 사람을 좋아하신단 말입니까?" 이필의 말에 장구령은 깜짝 놀라
며 자신을 깨우쳐주어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는 이필을 '꼬마친구'라고 불렀다. 수천년 동
안
의 변화무쌍했던 역사의 풍운을 훑어보면 간신은 거짓과 참언으로 벼슬을 얻고 아첨으로 추
천을 받은 반면, 성실하고 선량한 사람은 늘 그들에게 속고 당했다. 간신을 가려내는 기술이
모자랐거나. 간신과 싸우는 힘이 달렸거나. 간신을 제압하는 방법을 강구하지 못했거나 간에
모두 우리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화은 마치 두목이 아방궁부에서 "여섯 나라를
멸망시킨 것은 여섯 나라 자신들이지 진나라가 아니다. 진나라를 죽인 것은 진나라 자신이
지 천하가 아니다. 여섯 나라가 각각 자기 백성을 사랑했더라면 진나라를 충분히 물리칠 수
있었다. 진나라가 여섯 나라의 백성을 사랑했더라면 3세가 아니라 만세까지 임금 노릇을 한
다 해도 누가 그를 멸망시킬 수 있었겠는가? 진나라 사람은 스스로 슬퍼할 겨를이 없겠지만
후세 사람이 그를 슬퍼해주며, 후세 사람이 슬퍼는 해도 그를 본받지는 못하니, 또다시 후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슬퍼하게 한다."라고 한 것과 참으로 다를 바가 없다. 그러지 않은
가? 과연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자못이 없었던가 곰고이 생각해보자.
첫째, 가볍게 간신을 믿어 버린다. 경솔함은 처세에 있어서 치명적인 약점이자, 남에게 속
는 중요한 원인이다. 의로움, 호탕함, 막강한 권세, 인자함, 이런 것들을 가지고도 막상 일에
부딪치면 충동적이고 단순하게 행동하는 사람은 모두 경박한 부류에 집어넣을 수 있다. "세
번 생각한 다음 움직여라."라는 옛말도 있지 않는가? 일하기에 앞서 생각해보지도 않고 순
간적인 용기, 순간적인 자비심, 순간적인 감정, 순간적인 공로만을 드러냈다가는 당하지 않
으면 귀신이 되기 십상이다. 백비는 가족을 잃고 오나라로 도망쳐서 같은 나라 출신인 오자
서를 찾아갔다. 오자서는 백비의 처지가 딱해 그를 오왕에게 추천했다. 오자서는 백비와 교
류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은원 관계가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자신과 같은 초나라
출신이고, 또 자기처럼 가족이 초나라의 박해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즉 순간적인 울분 내
지는 동정심에서 경솔하게 백비를 오왕에게 추천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백비는
곧장 대부에 임명되어 오자서와 함께 조정 일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는 끝내 오자서를 죽음
으로 몰아넣고야 말았다. 이렇게 보면 오자서를 해친 것은 백비가 아니라 오자서 자신이었
다. 이리를 방 안으로 끌어들여 놓고 사람을 해친다고 나무랄 수 있는가? 이적지가 처음 재
상이 되었을 때 맹목적으로 이임보의 말을 듣고 신임했다. "화산에 금광이 있어 채굴하면
나라를 부유하게 할 수 있다."는 이임보의 말을 철석같이 믿은 그는 앞 뒤 생각도 없이 즉
각 아뢰었다가 현종으로부터 미움을 사고 말았다. 하는 수없이 스스로 한직을 자원하여 의
춘 태수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이임보는 그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다. 천보 6년, 이임보는 어
사들을 각지로 보내 유배당한 관원들을 조사하게 했다. 물론 목적은 그들을 보다 확실히 해
치우는 데에 있었다. "유배당한 자들을 죽이니 군현이 두려움에 떨었다." 많은 사람이 죽음
에 처해졌고. 어떤 사람은 "독약을 먹고도 죽지 않아" 다시 목을 매어 목숨을 끊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적지는 "두려움에 몸서리를 치다가 독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
다." 그의 아들 이잡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동경으로 오다가 이임보의 모함으로
하남부에서 몽둥이에 맞아 죽었다. 이 얼마나 천추에 남을 한이가! 만약 이적지가 공을 세
우려 급급해 하지 않고 조금만 깊이 생각했더라면 그런 꼴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재상
자리에 오래 앉아 있었던 이임보가 화산의 금광을 캐면 나라를 부유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
을 알고도 왜 그 공을 이적지 자기에게 양보하려 한단 말인가? 참으로 어리것기 짝이 없는
일 아닌가? 봉건 관료 사회는 어느 날 무슨 사건으로 인해 신세를 망칠지 모른다. 그렇기에
재능 있고 열정적인 숱한 인물들이 멀리 산 속에 숨어 자연에 몸과 마음을 맡긴 채 일생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한시라도 한눈을 팔지 못한 채 앞뒤를 돌아다보며
살얼음 위를 걷는 듯한 나날을 보내야 한다. 이것을 그저 인간들의 자승자박으로만 돌릴 수
있겠는가?
둘째, 사사로운 욕심 때문에 간신을 따른다. 간신의 속임수에 걸려들어 화근을 만드는 가
장 큰 까닭은 '경박함'보다는 '사사로움'에 있다. 구시대에 있어서 높은 관직과 많은 녹봉
의
유혹이나 명예의 추구, "이 모든 것들은 마치 꿈속에서 가위눌리듯이 살아 있는 사람들의
머리 속을 휘감고 있다." 모든 비극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사는 고대
의 이름난 정치가다. 그는 진시황을 도와 여섯나라를 통일하는 등 진나라를 통일하는 등 진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부귀를 탐내는 욕심 때문에 간신을 두
려워하여 따랐다. 그 결과 군주는 어리석어지고 신하들은 아첨만 일삼게 되었다. 천하에 큰
난리가 일어났고, 진시황이 세운 업적은 2세를 버티지 못했다. 이사 또한 이 때문에 자신의
무덤을 파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진시황 37년인 기원전 210년, 순시에 나섰다가 사구를 거쳐
돌아오던 진시황이 갑자기 병을 얻어 죽었다. 죽기에 앞서 그는 큰아들 부소로 하여금 군대
를 옹염에게 넘겨주고 하루빨리 수도인 함양으로 돌아와 장례를 치르고 황제 자리를 이으라
는 조서를 남겼다. 조서를 보관하는 일을 맡은 간신 조고는 자신을 좋지 않게 보고 있는 부
소가 황제 자리에 앉으면 자기 못이 달아날까 두려웠다. 그래서 부소의 동생 호해를 꼬드겨
조서의 내용을 고치고 호해를 황제 자리에 앉히려 했다. 그런데 그러려면 승상 이사를 거치
지 안으면 안되었다. 그를 속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에 조고는 부귀를 탐내는 이사의 약
점을 이용하여 갖은 감언이설로 그를 회유하고 협박했다. 조고는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이
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묭염은 태자 부소가 매우 아끼고 의지하는 인물이오. 하나 재주로
따져서 당신이 몽염만 하요? 또 공적을 따져보아 당신이 몽염을 뛰어넘을 수 있겠소? 태자
와의 관계나 태자의 신임도는 말할 것도 없지 않소이까? 태자가 권력을 쥘 경우, 당신과 몽
염 중 누가 잘 나갈 것인가는 뻔하지 않소?" 조고는 계속해서 지껄였다. "20여 명에 이르는
진시황의 자식들에 대해서는 당신이 나보다 더 잘 알 것이오. 태자 부소는 강직하고 재능이
뛰어나 신망이 아주 높소. 그가 황제 자리에 오르면 틀림없이 몽염을 재상 자리에 앉힐 것
이오. 그렇게 되는 날에는 당신은 모든 것을 다 잃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소. 그러나
호해는 성격이 듬직하고, 재물을 아끼지 않으며, 지식인을 존중하지요. 누구를 따를 것인가
는 당신이 결정하시오." 조고의 교활한 말은 이사의 마음을 흔들었다. 이사는 자신이 처음
진나라에 들어올 때를 떠올렸다. "더럽기로는 비천함만한 것이 없고, 비참하기로는 춥고 배
고픔만한 것이 없었다." 이사는 자신이 일생동안 쌓아올린 부귀영화가 하루아침에 사라진다
고 생각하니 탄식과 울적함을 금할 수 없었다.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 끝에 이사는 마침내
조고에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 "모든 것을 당신이 시키는 대로 하지." 그리하여 조고는 몃대
로 진시황의 유언을 바꾸어 호해를 태자에 앉히고 변방에 주둔해 있던 태자 부소와 대장군
몽염을 죽여 없앴다. 이로써 무능한 호해가 진나라 황제가 되었고, 이때부터 나라 꼴은 날이
갈수록 엉망이 되어갔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이사마저 조고의 계략에 걸려들어 죽음
에 이르렀다. 이사는 분하고 침통한 상태에서 지난날 부귀를 탐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후
회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얼마 뒤 이사는 함양에서 허리가 잘리는 형을 받아 죽었다. 그
와 동시에 진나라를 강하게 만들었던 공신으로서의 명예도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이제 그
에게 남은 것이라곤 얼룩질 대로 얼룩져 버린 누더기 같은 일생과 간신을 도와 나라를 그르
쳤다는 오명뿐이었다. 훗날 이사를 평가한 많은 사람들이 그의 '구차한 순종과 영합'을 매우
애석해 하면서 지나치게 사사로움을 추구했던 문제점을 지적했다. 간신배들은 늘 당신의 사
사로운 욕심을 이용하여 미끼를 던진다. 그렇지 않고서야 영리하고 노련한 이사가 어떻게
환관 소인배인 조고의 손아귀에 놀아나 억울하게 죽을 수 있단 말인가?
셋째. 겁이 많아 간신을 두려워한다. 명나라 때의 사례감은 내감 24아문 중에서도 으뜸이
었다. 궁중 황족의 크고 작은 일을 모두 관장했으며, 모든 재감들도 그곳에서 통제했다. 어
려서 거세를 당하고 궁에 들어온 왕진은 진작부터 사례제독 자리에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모시던 태자 주기진이 즉위하기를 기다렸다가 사례제독 자리를 놓고 태
감과 쟁탈전을 별였다. 당시 그 자리에 있던 태감은 김영으로서 입궁한 햇수도 가장 오래
되었고, 경력도 단연 최고였다. 선던 초년에 그는 사례감을 장악했고, 선덕 7년에는 선종으
로부터 '면사조'까지 받는 은총을 누렸다. 이 조서는 '반역죄' 외에는 어떤 죄를 짓더라도
용
서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영은 겁이 많고 약했다. 일찍이 왕진이 동궁에서 태자를 모실
때부터 그가 악랄하고 꾀가 많아 언젠가는 자신을 해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왕진이 사례감을 빼앗으려고 싸움을 걸자마자 얌전히 자리를 내놓고는 물러나 버렸다. 왕진
은 힘 하나 안들이고 태감 자리에 앉아 조정의 건력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겁이 많아 간신
을 두려워하고, 사사로운 욕심 때문에 간신을 따르는 것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사
사로운 욕심이 없어야 두려움이 없는 법이다. 간신을 따르고 간신을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모두 사사로운 욕심을 표현한 것에 다름 아니다. 간신을 두려워하는 나약함은 대의보다 자
기 한 몸의 안전만을 중시하는 심리에서 나온다. 더구나 벼슬이라도 한 자리 얻고 나면 자
리를 지키려는 본능이 발동하여 정직한 사람도 닳고 닳게 되며, 악을 원수처럼 미워하던 사
람도 앞뒤를 재게 된다. 이런 상황은 특히 정치가 암흑기인 시기에 더 심하게 나타난다. 대
사상가, 학자들조차도 자기 한 몸 지키는 것이 최선이라고 여겨 좋은 게 좋은 거라 주장하
고, 참는 게 최고라고 말한다. 어떤 경우는 박해를 피해 산 속으로 숨어 버리거나 머리 깎고
중이 되기도 한다. 모두가 사람과 다투기 싫고 세상과 싸우기 싫다는 마음의 표현이다. 이런
연약하고 의지가 모자라는 심성이 바로 간신을 들끓게 하는 원인의 하나다. 그것은 또 민족
적 비극의 소재이기도 하다. "악비 장군이 억울하게 옥에 갇혀 죽게 되었는데도 어느 누구
하나 나서지못하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간신들이 제몃대로 설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넷째, 어리석음 때문에 간신을 함부로 날뛰게 한다. 어리석음과 멍청함은 간신, 소인배를
키우고 급기야 난을 일으키게 만드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 한나라 원제가 바로 그런 어리석
은 황제였다. 애초 원제 유상이 태자로 있을 때 선제는 태자가 성격이 나약하고 무능력해
태자를 바꿀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자신과 오랫동안 함께 고생한 태자의 생모 허씨를 저
버릴 수 없었다. 결국 선제는 "유씨 황실을 어지럽힐 자가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태자일
것이다!"라고 탄식하며 태자 유상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주었다. 선제의 예측은 맞았다. 원제
는 즉위한 뒤 간신을 제멋대로 설치게 놓아두어 조정 대신들은 너나할것없이 만신창이가 되
도록 싸움을 벌였다. 그런데도 원제는 도무지 누가 충신이고 누가 간사한 자인지 가리지 못
했으며, 결국은 조정을 내우외환의 깊은 구렁으로 빠뜨지고 말았다. 원제 밑에는 명망이 높
은 소망지란 대신이 있었다. 소망지는 원제에게 간신, 소인배를 멀리하는등 좋은 충고를 많
이 했다. 원제도 그런 소망지를 중용하여 전장군에 임명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바로 이 일이
사고와 석현의 심기를 건드렸다. 두 사람은 담합하여 소망지를 제거하기로 했다. 그때 정명
이란 자가 글을 올려 사고의 비리를 폭로하면서 이를 계기로 소망지와 친분을 맺으려 했다.
정명을 만나본 소망지는 이 자의 마음 씀씀이가 바르지 못한 것을 알고 다시는 왕래를 하지
않았다. 뜻밖의 벽에 부딫친 정명은 소망지를 원망하면서 몸을 돌려 사고를 찾아갔다. 그리
고는 거꾸로 소망지를 헐뜯는 상소를 올렸다. 석현은 이를 근거로 삼아 소망지가 다른 대신
들을 모함하고 다닌다면서 원제에게 정위로 하여금 이 일을 조사케 하라고 부탁했다. 공문
서 용어를 제대로 모르는 멍청한 원제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결재했다. 며칠 뒤 원제는 일
이 있어 소망지를 찾았다. 좌우 신하들이 소망지가 벌써 명령을 받아 감옥에 갇혀 있다고
대답하자 원제는 깜짝 놀라며 "정위에게 조사케 하라고 했을 뿐인데 어째서 감옥에 있단 말
인가?" 라고 물었다. 이때 소망지가 다시 복위될 것을 두려워한 사고는 "황상께서 즉위한
소기라 아직 큰 덕을 천하에 알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이번에 폐하의 넓고 크신 덕으로
소망지의 직무를 면하시고 그를 석방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라는 교활한 말로 원제를 달
랬다. 멍청한 원제는 어물쩍 사고의 말에 동의하고 말았다.
소망지는 지난 8년 동안 원제의 스승 노릇을 해왔다. 그래서 원제는 소망지를 잊지 못하
고 이내 다시 소망지를 불러들이려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때 소망지의 아들이 아비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글을 올렸다. 석현 등은 상서 중의 몇 구절을 트집잡아 소망지가 황상
에게 원한을 품고 아들을 시켜 상서하게 했으니 옥에 가두어 소망지의 오만방자한 기를
꺾어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석현 등은 잘 알고 있었다. 황제의 스승인 소망지는 덕망이
매우 높고 성품이 강직하기 때문에 그를 잡아 옥에 가두면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이라는 점을. 원제는 이번에도 그렇게 하라고 했다. 아니나다를까, 석현 등
이 소망지를 잡으러 소망지의 집을 에워싸자 그는 한숨을 내쉬며 "장상을 지낸 내 나이 이
미 60을 넘었는데 이제와 옥에 갇혀 구차하게 산다는 것이 어찌 치욕스럽지 않겠는가!" 라
고 말하고는 독약을 멱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렸다.
이때가 초원 3년, 기원전 47년 12월이었다. 당시 원제는 밥을 먹고 있었는데 소망지가 자
살했다는 보고를 받고 꿀 먹은 벙어리마냥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밥상을 물리고 눈물을 주
룩주룩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 본래 그가 옥에 갇히는 치욕을 견디지 못할 줄
알면서도 옥에 가두라고 했으니 내가 스승을 죽인 꼴이 되었구나!" 이에 원제는 석현을
불러 일을 제대로 살피지 못해 훌륭한 스승을 죽게 만들었다며 나무랐다. 석현이 자신을
내치라며 사죄하자 원제는 용서하고 말았다. 원제가 얼마나 속이 없고 두뇌가 모자라는 인
물인가는 넉넉히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래도 흥. 저래도 흥, 누가 이것이 옳다면 그렇다
고 끄덕끄덕, 저것이 옳다면 그것도 맞다고 끄덕끄덕,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었다. 그 뒤
로도 여러 사람이 그에게 충고했으나 죽을 때까지 깨닫지 못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석현 등
이 나라에 엄청난 해를 끼치는 대간으로 발전하게 만들었다. 반고는 "한나라는 원제와 성
제 때 쇠퇴해져 애제와 평제 때 무너졌다."고 평형가했다. 어리석고 멍청해서 간신이 멋대로
설치게 함으로써 충성스럽고 선량한 사람을 구렁텅이로 몰아 넣은 경우는 역사상 결코 드문
일일 아니다.
다섯째. 자비심 때문에 간신을 키운다. 동곽 선생과 이리 이야기, 농부와 뱀 이야기를 들
어본 적이 있는가? 이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이리와 뱀과 같은 악인을 동정하가가 되려 모
함을 당하고 피해를 입지 말라는 교훈을 준다. 명나라 때 황제에 버금가는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인물은 왕진이 처음이었다. 선덕 10년 정월, 서른 여덟의 선종 황제가 건청궁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태자 주기진이 겨우 아홉 살의 나이로 황제 자리에 오르니, 그가 역
사에서 말하는 영종이었다. 당시 영종은 영락없는 어린아이였다.
그러다 보니 거의 모든 일이 사례감이 왕진에 의해 처리되었고, 왕진은 이로부터 간신으
길을 걷는다. 환관이 조정 일에 끼여들지 못하게 한 것은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이 정한 원
칙이었다. 교활하고 꾀 많은 왕진이 한발 한발 정사에 간섭하기 시작하는 것을 바라보는
태황 태후 장씨의 마음은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명사기사본말에 따르면 정통 2년 정월 어
느날, 태황 태후 장씨는 어린 황제를 데리고 편전에서 원로 대신들을 만났다. 영국공 장보,
대학사 양영, 양사기, 양부, 상서 호형 등이 부름을 받고 입조해 있었다.
태황 태후 장씨는 무거운 심정으로 영종에게 말했다. "여기 다섯 원로 대신들은 모두 선
왕께서 신중하게 발탁하신 분들이니만치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함께 의논해서 결정하
도록 하시오. 이 분들이 찬성하시지 않는 일은 절대 하시면 아니 되오." 영종은 거침없이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이어 왕진을 불러들이게했다. 태황 태후를 본 황진은 서둘러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장씨는 엄한 목소리로 앙진을 꾸짖었다. "너는 궁중에서 황상을 모시
는 몸으로서 본분을 지키지도 않았으며, 또 궁중의 법도에 따라 일을 하지도 못했으니 내
오늘 너를 죽여 없애야겠다." 이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시녀 몇이 달려들어 시퍼런 칼을
왕진의 목에 갖다 댔다. 얼굴빛이 흙빛으로 변한 왕진은 온몸을 사시나무 떨 듯 떨었다.
이때 그 자리에 있던 원로 대신들이 모두 무릎을 꿇고 자비를 베풀어 목숨만은 살려주십
사 청했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훗날 왕진은 조정의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넣을 수 있었
고, 그런 그를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그리고 그를 위해 목숨만은 살려주십사 간청했던 조정
대신들도 하나하나 왕진에 의해 제거됬다.
역사상 이의를 내세워 섣불리 선심을 베풀며, 자비심 때문에 호랑이를 풀어놓아 버리고,
간신을 용서하는 바람에 되려 자신이 화를 입은 사람이 적지 않았다. 악한 자에게 너그러
움을 베풀어 큰 근심을 만든 교훈으로는 조순이 도안고에게 자비를 베푼 경우보다 더 좋은
본보기가 없을 것이다. 도안고는 춘추시대 진나라 사람으로, 아첨으로 영공을 즐겁게 하여
영공의 귀여움을 산 인물이었다. 그는 영공을 부추겨 음탕함에 빠지게 만듦으로써 나라를
그르치게 했다. 한번은 이런 일까지 있었다. 기생들을 옆에 끼고 도원에서 춤추고 마시며
질탕하게 놀고 있는 영공의 모습을 향주 경성의 백성들이 도원을 빙 둘러싼 채 구경하고 있
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영공은 도안고에게 활을 가져오게 해서 그와 함께
구경하고 있던 백성들을 향해 화살을 쏘며 기뻐 날뛰었다. 급기야는 누가 더 잘 맞추는지
내기까지 했다. 눈을 맞추는 사람이면 벌을 면해주기로 했다. 영공과 도안고는 화살을 피해
허둥거리는 백성들의 모습을 보면서 손뼉을 치고 길길이 뛰며 좋아했다. 그리고는 옆에 있
던 시위들에게도 활을 주며 닥치는 대로 백성을 향해 화살을 쏘게 했다. 순식간에 화살이
비오듯 백성들을 향해 날아들었고, 화살을 맞고 피를 흘리며 나뒹구는 백성들의 모습은
차마 눈뜨고 못 볼 지경이었다. 피와 살이 튀고, 백성들은 우왕좌왕 비명을 지르며 달아니
기에 바빴다. 얼마 뒤 상구 조순과 그 조카 조천이 영공을 죽이고 성공을 세웠다. 성공은
국정을 조순에게 모두 맡겼다. 이때 조천은 간신 도안고를 죽여야 한다면서 "이 자를 없애
지 않으면 우리 조씨 집안의 화근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조순은 자신과 일가 친족이 모두 귀한 자리에 올랐고, 또 조장 신하들과 더 이상
원수지지 않고 화목하게 지내고 싶은 생각에 조카 조천의 의견을 물리쳤다. 그러나 그 결
과는 진나라에 화근을 남긴 꼴이 되고 말았으며, 끝내 조순의 자손에게도 그 화가 미쳤다.
조순이 죽고 성공도 진나라를 정벌하던 도중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경공이 뒤를 이었으
나 영공처럼 어리석은 군주였다. 그는 간신 도안고를 다시 불러들였다. 어느 날 심산이 무
너져 돌과 흙이 하천을 막아 버리는 천재지변이 일어났다. 미신을 믿는 경공은 태사를 불러
길흉을 점치게 했다. 이보다 앞서 도안고는 태사를 매수하여 그로 하여금 심산이 무너진 것
은 형벌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변고라고 말하게 했다. 태사는 그대로
말했고, 영문을 모르는 경공은 도안고에게 무슨 말인지 물었다. 때를 놓칠세라 도안고는 이
렇게 말했다.
"형벌이 바르게 시행되지 못했다는 말은 벌을 주어야 할 자에게 벅ㄹ을 주지 못했다는 것
입니다. 지난날 조순이 영공을 살해한 것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였습니다. 그런
데도 성공은 그에게 벌을 내리기는커녕 나라 일을 그에게 맡겨 지금까지도 반역자의 자손이
조정에 가득하니, 이 어찌 후세 사람에 대한 경고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조삭등은 집안
의 권세를 믿고 난을 일으키려 합니다. 심산이 무너져내린 것이 영공의 억울한 죽음을 슬피
여겨 조씨의 죄를 밝히라는 하늘의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멍청한 경공은 앞 뒤 재
지도 않고 그 일을 도안고에게 처리하도록 맡겼다. 도안고는 즉각 군사를 이끌고 조씨 집안
을 포위한 채 반역을 토벌하러 왔다면서 조순의 아들 조삭, 조동, 조괄을 포함한 집안 사람
모두를 닥치는 대로 죽였다. 그리고 조씨 집안에 남은 유일한 혈육을 없애기 위해 몸소 사
병 3000명을 이끌고 수양산을 뒤지게 했다. 정영이 자기 아들을 조씨 집안의 혈육과 바꿔
치기함으로써 간신히 조씨 후손을 살릴 수 있었다. 쓸데없는 자비와 관용은 간신을 기른다.
끊어야 할 것을 끊지 못하면 거꾸로 난리가 일어난다. 역사의 엄중한 경고이다.
여섯째, 자신을 이기지 못해 간신을 받아들인다. "좋은 약은 입에 쓰지만 병에 잘 닫고,
충성스러운 말은 귀에 거슬리지만 행동에 유익하다." 인성의 약점은 늘 나약함 위에 집중
적으로 표현된다. 쓸데없이 강한 자존심, 지나친 자비심, 전혀 의미없는 허영심 등은 늘
손톱만큼의 비판이나 책임 추궁, 심지어는 정당한 반대 의견조차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다.
좋은 말만 듣고 나쁜 말은 듣지 못한다. 귀에 거슬리는 소리는 단 한마디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자기에게 고분고분한 사람, 자기를 치켜세우고 떠받드는 사람, 자기에게 아부하는
사람만 좋아한다. 이런 병폐는 상당히 깨우친 사람, 심지어는 위대한 인물에게서도 흔히 발
견되는 고질병이다. 당 태종 이세민은 이런 말을 남겼다.
"현명한 군주는 단점을 생각해서 더욱 나아지려 하지만, 어리석은 군주는 단점을 감춤으
로써 영원히 어리석어진다." 한기는 송나라 때의 명재상이었다. 그러나 송사의 기록에 따르
면 풍경이 한림학사가 된 뒤 그에게 인사드리러 가지 않았다고 해서 못마땅해 했다고 한다.
그래서 한기는 부칠에게 풍경이란 자가 아주 오만하기 짝이 없다고 말했다. 사실 풍경은 이
렇게 생각했다. "공은 당당한 재상이기 때문에 부하가 된 사람으로서 함부로 집을 찾아가
번거롭게 하지 않는 것이 옳지 않은가? 사실 재상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지, 결코 오만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보면 아부와 아첨에 익숙해져 있고, 간사스러운 행동이 뚜렷하여 가
려내기가 결코 어렵지 않은 간신들이 어떻게 그토록 두터운 신뢰를 받고 귀여움을 차지했는
지 쉽게 이해될 것이다.
그래서 자치통감에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군주가 오떤 말을 해놓고 스스로 옳다고 여
기면 신하들로서는 감히 그 말을 벗어나지 못한다. 신하들이 어떤 말을 해놓고 스스로를 옳
다고 여기면 백성들은 감히 그 말을 반박하지 못한다. 군주와 신하들이 스스로를 잘났다고
하면 나머지 아랫사람들은 일제히 한 목소리로 잘났다고 맞장구쳐야 한다. 그래야만이 순종
한다고 한 복이 돌아오지. 겨슬렸다간 화를 입기 십상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현안하게 잘
사는 길이다." 춘추시대 노자는 고대의 이름난 사상가이자 철학가로서, 그의 철학 사상 중
일부는 우리에게 귀감이 될 만한 중요한 것들이다. 그는 도덕경에서 "남을 아는 자를 지혜
롭다 하며, 스스로를 아는 자를 현명하다 하고, 스스로를 아기는 자를 강하다 한다."라고 말
했다. 참으로 옳은 말이다. 옛날과 오늘을 두루 훑어보노라면 간신이 뜻을 이룰 수 있었던
원인은 간신이 그처럼 강했다거나 혹은 간신을 감당할 수 없었다는 데에 있지 않고, 사람들
의 연약함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간신을 가려내어 막으려면 자신과 싸워 이기고 자신을 뛰어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
을 깨달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다음 몇 가지 면에서 수양을 강화하고, 경계심과 주의력을
북돋우어야만 한다.
첫째, 간신을 막겠다는 마음을 길러야 한다. 간신을 막으려면 경계하는 마음을 길러야 한
다.
경각심을 잃는 것이야말로 간신에게 당하는 가장 흔한 원인이다. 그렇다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신경과민이 될 필요는 없다. 신경 쓸 일 안 쓸 일을 죄다 경계하다 보면 바람만 불어
도 혹 적이 아닌가 긴장하게 되고, 나무와 풀만 보아도 적으로 착각하게 된다. 그러나 필요
한 이성과 경각심은 갖추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냉정함과 이성이 모자라 상대를 깊게
살피지도 못하고,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그저 한순간, 한 가지 일, 또는 겉으로 보이
는 인상만 가지고 그에게 중요한 일을 맡긴다. 신중한 태도가 아님은 물론 과학적인 자세도
아니다. 송나라 황제 중에 태종은 비교적 안목이 높은 인물이었다. 처음 태종은 여단을 재상
으로 삼으려 했는데 누군가가 다른 의견을 내세우며 "여단은 작은 일에 대해서는 그럴지
모르나, 큰일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라고 말했다.
그 뒤 여단은 태종의 말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태종이 큰 병을 앓자 태자를 미워하던 내
시 왕계은은 맏아들 호왕을 태자로 세우려는 음모를 꾸몄다. 태종이 죽자 황후는 왕계은으
로 하여금 여단을 불러들이게 했다. 혹 어떤 속임수가 있지 않을까 경계한 여단은 사람을
시켜 왕계은을 감시하게 한 다음 황후를 만나러 갔다. "맏아들을 태자로 세우는 것이 이치
에 맞는 일 아니겠소?" 황후는 자신의 속셈을 넌지시 내비쳤다. "태자는 돌아가신 선제께서
세우셨습니다.
지금 막 선제께서 세상을 뜨셨는데 어찌 그 뜻을 저버린단 말입니까? 여단의지지 하에 태자
가 황제 자리를 잇게 되었다. 즉위하는 날 새 임금을 뵙기 위해 여단은 조정 대신들을 모두
거느리고 대전 아래에 섰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여단은 새 황제에게 절을 올리지 않
았다. 그 까닭을 묻자 여단은 천자를 가린 발을 걷도록 요청했다. 그리고는 뚜벅뚜벅 걸어가
태자가 틀림없는지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신하들을 데리고 큰절을 올렸다.
이 일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과 의미는 결코 심상치 않다. 간신을 경계하는 마음을 키우라
는 말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남을 살피라는 것뿐만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자신을 튼튼히
무장하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간신이 빈틈을 노리고 달려든다. 이 점에서는 훗날 수나
라 양제가 된 양광에게 황제 자리를 빼앗긴 양용이 아주 심각한 교훈을 남겨주고 있다. 양
용은 성격이 솔직담백하여 남을 속이거나 가식으로 대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언젠가 누
군가가 촉에서 나는 갑옷을 선물로 보내왔다. 양용은 아주 좋아라 하며 별다른 일이 없을
때면 갑옷 위에다 무늬나 도안 따위를 새겨넣으며 시간을 보냈다. 보기에도 아주 화려한 갑
옷이 되었다. 어느 날 아버지 수 문제가 태자 양용을 찾아왔다가 그 갑옷을 보고는 몹시
언짢아했다. 북주 정권이 음탕함과 사치로 멸망해간 모습을 직접 눈으로 지켜보았던 수
문제인지라, 황제가 된 뒤 다시는 그런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근검절약을 강조해오던 터였
다. 문제는 양용을 불러다놓고 이렇게 주의를 주었다.
"예로부터 사치스럽지 않고 부패하지 않아야 나라를 오래도록 편안하게 다스릴 수 있는
법이다. 더욱이 너는 태자의 몸이니 남보다 더 근검절약해야 한다. 위로 천심을 얻지 못하
고, 아래로 인심을 잃고서야 어떻게 황제의 업을 이을 수 있겠느냐?" 그리고는 지난날 자
신이 입었던 헌 옷 몇 가지를 양용이 거처하는 곳에 두게 하여 수시로 경계하는 마음을
갖도록 했다.
그러나 양용은 그런 것에 별로 마음을 두지 않았고, 얼마 가지 않아 문제가 했던 말을 까맣
게 잊어버렸다. 구름이 잔뜩 끼더니 서설이 흩날려 장안이 온통 은백색으로 뒤덮인 어느 해
겨울날이었다. 동궁전에서 설경을 감상하고 있던 양용은 갑자기 문무 백관들이 인사를 드
리러 온다는 보고를 받았다. 준비가 없던 양용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해 하다가
별 생각없이 옷을 갈아입고 관원들에게 명령을 내려 음악을 연주하여 환영의 뜻을 표시하게
했다. 대신들은 음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양용에게 인사를 올렸다. 이 일이 곧 수 문제의
귀에 들어갔다. 문제는 대신을 모아놓고 이렇게 물었다. "듣자 하니 동지 때 내외 관원들이
모두 동궁으로 몰려가 태자를 조견했다던데 그게 과연 무슨 예절이오?" 태상시소경 신단이
대답했다. "문무 관원이 동궁으로 가서 태자를 뵌 것을 절기가 바뀌었기 때문에 인사를 드
리기 위한 하견이지, 정사를 논하기 위한 조건이 아니었사옵니다." "절기가 바뀌어 인사를
드리러 간 것이야 뭐 잘못될 게 있겠는가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갔고, 또
태자는 옷을 갈아입고 음악까지 연주하게 했다 하니, 그것은 국가의 예제에 어긋난 것이 아
닌가?" 그러부터 얼마 뒤 수 문제는 조서 하나를 내렸다. "예절에는 등급이 있고 군신간에
는 구별이 있는법, 태자가 나라를 물려받을 사람이기는 하나 아직은 신하의 대열에 속해
있어 백관의 조하를 받을 수는 없다. 앞으로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면 엄한 벌로 다스리겠
노라!" 양용에 대한 노여움을 표시였다.
이 무렵 황룽에 또 하나의 사건이 터졌다. 어느날 문제는 궁성 각처로부터 호위 군사들
을 선발하여 황제의 경호를 강화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명령이 막 전달되려는데 예부상서
고경이 한 장의 글을 올렸다. 의문을 잔뜩 품은 투의 이런 구절이 있었다. "황제가 건장한
호위 병사들을 다 뽑아가 버리면 동궁 태자의 경비력이 크게 약화되지 않겠습닉까?" 수 문
제는 화가 나서 즉시 고경을 어전으로 불러들여 나무랐다. "나는 황제로서 늘 외출하거나
움직여야 하는 몸인지라 호위 병사가 용감하고 건장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그러
나 태자는 동궁 깊숙이 머무르고 있고, 또 나이도 젊거늘 강력한 호위병이 무슨 소용인가?
보아하니 지금 몇몇 사람들이 사사로이 당파를 지으려하는 모양인데 그대는 그들과 어울이
지 마라." 원래 고경의 아들이 태자 양용의 사위였던지라, 문제는 고경이 태자에 대해 별스
런 마음을 갖고 있는 것으로 의심했던 것이다. 문제가 화가 나 고경을 꾸짖은 것도 바로 이
런 심리의 노출이었다. 그러나 이런 것들도 전혀 양용의 경각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
는 여전히 평소대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거리낌없이 했다.
이런 상황에서 양광이 그 틈을 파고들어 태자 자리를 빼앗으려는 음모를 펼쳤다. 개황 20
년 겨울 어느 날 오전, 북풍이 몰아치고 검은 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었다. 태자 양용은 무
억전으로 불려나갔다. 문제는 전신을 갑옷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무사들이 좌우로 문무
백관이 동서로 늘어서 잇었다. 날씨만큼이나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였다. 문제는 대신 벽도형
으로 하여금 양용을 태자 자리에서 폐한다는 조서를 읽게 했다. "태자라는 자리는 실로
나라의 근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난 사람이 아니고서는 폐할 수 없다. 그러나 황태자 양용은 어질지도,
효성스럽지도 못하고, 소인을 가까이하여 간신배들에게 일을 맡겼으므로 태자에서 폐하여
서인으로 삼는다." 조서를 다 듣고 난 양용은 눈물을 적시며 총총걸음으로 무덕전을 떠났
다. 폐위당한 양용은 억울함을 이기지 못해 여러 차례 문제를 만나 자신의 억울함을 해명하
려 했으나, 그때마다 양광에 의해 제지당했다.
하다 하다 안 되자 양용은 동궁 안에 잇는 큰 나무 위에 올라가 수 문제가 있는 인수전
을 향해 큰 소리로 울부짖듯 외쳤다. 외침 소리는 처절하게 공중으로 울려 퍼졌다. 행여
문제가 자신의 비통한 외침을 듣고 불러주길 애타게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이
미 물 건너간 뒤였다. 양용이 쫓겨나고 양광이 뜻을 이룬 사정을 종합해보면 우리는 이런
역사적 비극의 원인이 매우 복잡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런 양용 자신의
허술함과 게으름도 그냥 보아 넘길 수 없다. 태자라는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자기의 덕행을
수양하지도 않았으며, 자신의 언행을 되돌아보지도 않았다. 장차 나라를 다스릴 사람의 입
장에서 간신들을 막지도 못했다. 이 때문에 양광에게 공격할 틈을 주었던 것이다. 역사가 후
세 사람들에게 남긴 심각한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사람들이 모두 정직하고 진실되
게 살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냉정한 두뇌와 과학적 태도를 유지해 자신의 생활
과 타인을 진지하고 엄숙하게 대하길 바란다.
둘째, 간신을 물리칠 수 있는 덕을 키워야 한다. 간신을 물리치는 덕은 간신을 가려내는
근본이다. 근본을 버리고서는 간신을 제압할 수 없다. 제나라 환공은 한때 영명한 군주 소
리를 들은 인물로서, 유능한 인재를 뽑아 함께 정치에 힘써 끝내 춘추시대 최초의 패자가
되었다.
그러나 간신 수조가 갖다 바친 사람 고기를 먹고 아부하는 말을 흘렸다. 이사도 당대에 으
뜸가는 명재상이었으나 부귀영화를 잃어버릴까 두려워하다가 조고의 덫에 걸려들어 신세를
망치고 말았다. 제 아무리 총명하고 위대하며 학식이 뛰어나고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라도
해도, 덕성을 잃으면 밝음에서 어둠으로, 현명함에서 어리석음으로 빠져 시비를 가릴 수 잇
는 힘을 잃는다. 재물과 지위를 탐내고 명예와 향락을 추구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성의 가
장 큰 약점이다.
간신들은 대부분 돈과 미녀 그리고 자리를 미끼로 사람을 꼬드긴다. 이 문제에 있어서 명
확한 입장을 견지하지 못하면 누구라도 깊은 함정에 빠져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석현이 권
력을 휘두르던 시대에 공우라는 간의대부가 있었다. 이 사람은 박학다식할 뿐만 아니라 품
행도 고상하여 무슨 일이든 바른 말을 서슴지 않고 하는 인물로 경성 일대에 그 이름을 크
게 떨치고 있었다. 석현을 이런 공우의 명성을 빌려 자신의 간사한 짓을 덮기로 결심했다.
그는 먼저 공우에게 사람을 보내 그를 은근히 치켜세우며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뜻을 전달
했다. 그런 다음 몸소 공우를 찾아가 공겅한다는 뜻을 극진히 표시했다. 그 다음 석현은 공
개적으로 공우를 추천하여 공우를 순식간에 광록대부로 승진시킨 다음, 이어 장신소부에까
지 오르게 했다.
그리고는 불과 3년 만에 3공의 대열에 속하는 어사대부가 되게 했다. 이쯤 되자 바른 말
잘 하기로 이름난 공우도 석현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의 싫은 소리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사마광은 위대한 역사학자였다. 그는 편년체 역사서의 대작인 자치통감을 주도적으로 편찬
하여 가치 있는 사료를 많이 남겼으며, 아울러 심각한 견해도 많이 남겼다. 자치통감의
106편에 달하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평론들 중 102편이 사마광이 직접 쓴 것인데, 그 중에
는 덕과 재능의 문제에 관한 평론이 상당히 많다. 덕이란 무엇이며, 재능이란 무엇인가? 또
이 둘은 어떤 연관이 있는가? 이런 문제들에 대해 사마광은 이렇게 말한다. "총명하게 살
피면서도 강인한 의지를 재라 하고, 정직하면서도 조화될 수 있는 것을 덕이라 한다. 재는
덕의 자질이요, 덕은 재를 이끈다." 또 이런 말도 한다.
"운몽의 대나무는 천하가 알아줄 정도로 단단하다. 그러나 곧게 바로잡지 않고 한데 묶
지 않으면 단단해질 수 없다. 당계의 철은 날카롭기가 천하 제일이다. 그러나 녹여서 거푸집
에 넣어 모양을 떠내고 두드려 갈지 않으면 강한 것을 때릴 수 없다." 재능이 뛰어날 사
람이라도 덕의 수양과 제약이 없으면 어진 인재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자신
의 마음이 바르지 못한데 어떻게 충간, 선약을 가려낼 수 있겠는가? 따라서 간신을 가려내
고 제압하는 데 있어서 자신을 이겨내는 것과 자신을 닦는 것은 가장 관건이 되는 전제조건
이다.
셋째, 간신을 살피는 지혜를 갖춰야 한다. 간신들은 결코 바보가 아니다. 그들이 남에게
해를 끼치고 난을 일으킬 때는 반드시 책략을 쓴다. 수단과 방법이 교묘하며, 거짓된 모습
을 잘 꾸민다. 간신을 가려내는 재능과 간신을 살피는 지혜를 갖추지 못한다면 그들의 귀신
같은 솜씨를 간파하기가 매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도리여 그들의 음모와 함정 그리고 독수
에 걸려들기 심상이다. 왕안석, 사마광, 하언은 결코 어리석거나 무능한 인물이 아니었다. 모
두가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재능과 경륜을 갖춘 인재들이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 간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물론 그 까닭은 여러 가지일 것이나 그들의 지혜가 인간을
알고 세상을 논하기에는 모자랐다는 점도 그 까닭 중 하나이다. 물론 모든 것을 그들의 탓
으로 돌릴 수는 없다.
수백년 동안 간신, 소인들이 엄청난 죄악을 저질렀고 그 피해가 참으로 컸음에도 부구하고,
지금까지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간신을 가려내고 살피는
것에 대한 연구는 줄곧 지리멸렬한 상태에 있었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해 정확한 입장, 관점, 방법을 견지하지 못한 채 그저 각자의 감가,
학식, 소질에만 기대어 사람을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인식상의 편차와 오류를 면하
기 어려워 한때의 인상이나 기인적인 이해관계, 남의 말 따위에 근거하여 사람을 평가하려
는 경향이 나타났다. 심각하고도 꼼꼼하고, 전면적이고도 역사적이며, 민중적이면서도 실천
적인 관점이 모자랐던 것이다. 인간을 인식하고 평가하며 나아가서 그와 관련한 문제를 제
기하려면 실천 속에서 힘겹게 배우고 연구하는 자세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간신
을 가려내고 간신을 살피는 길이다. 그리고 그것을 진정으로 없어서는 안 될 학문으로 대
해야 한다. 장완은 삼국시대 촉나라의 재상으로서, 제갈량이 생전에 그를 후계자로 점찍은
인물이었다.
제갈량이 죽자 그는 제갈량의 뒤를 이어 익주자사, 대장군, 상서사, 안양후의 직함을 가지
는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모든 권력을 쥐고 최고의 자리에 오른 뒤에도 다음
과 같이 행동하고 처신했다. 우선 자신이 그 자리에 오르게 된 까앍을 잊지 않았다. 싸우지
도, 위엄을 부리지도 않았다. 권세로 남을 누르거나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자리는 달라졌
지만 마음과 행동을 바꾸지 않았다. 그리고 남을 시기하지 않고 이해하는 넓은 마음을 지켰
다. 늘 남의 입장에 서서 문제를 생각하려 했다. 자리가 달라지고 나면 흔히 저지르기 쉬
운 시기와 질투, 오해와 모순 같은 잘못을 피할 수 있었다. 동조연 양ㅊ는 성격이 내성적
이라 장완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때때로 대답을 안 하는 경우가 있었다. 누군가가 장완에게
양희의 그런 태도는 당신을 무시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장온은 사람의 마음은 모두가 다 다르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내 생각대로 맞추
라고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가 그런 태도를 취하는 데는 그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
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참으로 소중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제갈량의 스타일을 많이
물려받았다. 항상 공평하게 일을 처리했으며, 설사 자신을 거슬리는 사람이 있도 늘 공적인
마음을 가지고 대했다. 사적으로 분을 터뜨리거나 보복을 가하지 않았다. 독농 양민이 장완
을 두고 "일을 흐리멍덩하게 처리하는 등 앞사람에 미치지 못한다."고 비판한 적이 있었다.
누군가가 이 말을 장완에게 전하며 양민의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장완은
"내가 앞사람만 못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 아니오?"라고 반문했다. 그 뒤 양민이 죄를 지어
옥에 갇히게 되었다. 사람들은 모두 볼것도 없이 양민이 사형에 처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장완은 지난날의 개인적 감정 때문에 양민에게 벌을 더 보태지는 않았다. 촉나라
재상으로 몇 년을 지내는 동안 장완이 별다른 국면을 창출해 내지는 못했지만, 역사가 증명
하듯이 제갈량의 뒤를 이은 인물로는 적당한 인물이었다.
넷째, 간신과 싸우는 용기를 키워야 한다. 명나라 사람 양계성은 나라를 잘못 이끌고 있
는 구란의 죄를 폭로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지방의 말단 관리로 좌천되었다. 그 뒤 구란의
간행이 드러나 부관참시했을 때 엄숭이 양계성을 병부 무선원외랑으로 발탁했다. 그러 조증
을 어지럽히는 업숭의 죄행을 목격한 양계성은 개인적인 은원을 돌보지 않고, 부임한지 1
개월 만에 엄숭의 '도간십대죄'를 상소했다.
엄숭은 엄연히 한 나라의 재상으로 자처하는 자입니다. 백관들은 무슨 일이 있으면 시장
에 난리라도 나 듯 그에게 달려갑니다. 천하에 엄숭만 있줄 알고 폐하가 계신 줄은 모릅니
다. 이는 조종의 법을 해치는 큰 죄입니다. 폐하께서 어떤 사람을 기용하시면 엄숭은 "내가
추천했다."고 말합니다. 폐하께서 어떤 사람을 용서해주시면 엄숭은 "내가 구했다."고 말합니
다. 이는 군주의 대권을 훔치는 큰 죄입니다. 사람들에게 '주상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실
리 있나? 내가 말씀드려 성사된 것이지.'라고 말하게 합니다. 이는 군주의 공을 가리는 큰
죄입니다. 엄숭은 신하로서 군주의 권한을 훔치고, 엄세번은 또 아들이라는 명목으로 아비
의 권력을 훔치니, 서울에는 '대승상 소승상'이나 하는 노래가 유행입니다. 이는 간신의 아
들이 몰래 권력을 훔치게 멋대로 풀어놓은 큰 죄입니다. 사당을 지어 그 자손을 관직에 끌
어들이고 다시 그 자손으로 하여금 사당을 짓게 하니, 이는 조정의 공에 대디는 큰 죄입니
다. 역신 구란은 도적을 끌어들이고, 엄숭과 그 아들 세 번은 다시 구란을 끌어들이니, 이는
역적 간신을 끌어들인 큰 죄입니다. 건에 외적이 깊이 쳐들어왔을 때 병부상서 정여기가 엄
숭에게 대책을 묻자 엄숭을 싸우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뒤 정여기가 잡혀와 죽기 전에 큰
소리로 "엄숭이 나를 그르쳤다."고 울부짖었으니, 이는 국가의 군사를 그르친 큰 죄입니다.
낭중 서학시가 엄숭을 탄핵하다 파면당했고, 다른 중신도 엄숭을 탄핵하다 죄천되는 등
내외 신하들이 무수히 중상모략으로 해를 입었습니다. 이는 신하를 내치는 대권을 자기 먹
대로 주무른 큰 죄입니다. 무릇 문무 관리의 승진에 대해 가부를 논할 수 없거늘, 엄숭은
뇌물의 많고 적음으로 결정했습니다. 오늘의 근심이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지
않나 합니다. 이는 천하의 인심을 잃은 큰 죄입니다.
엄숭이 일을 처리하면서 풍속이 크게 변했습니다. 엄숭이 재물을 밝히는바람에 천하가 모
두 탐욕을 숭상합니다. 엄숭이 아첨을 일삼는 바람에 천하가 모두 아첨을 떠받듭니다. 윗물
이 흐린데 어찌 아랫물이 맑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천하의 풍속을 흐린 큰 죄입니다. 엄숭
은 이상 말씀드린 열 가지 죄악뿐만 아니라, 또 다섯 가지 간사한 행위를 저질렀습니다. 폐
하께서는 어찌하여 한 명의 간신을 사랑하시어 만백성이 깊은 재앙의 구렁에서 신음하는
것을 차마 보려 하십니까? ...원하옵건대 폐하께서는 부디 신의 충언을 듣고 엄숭의 간사함
을 살피십시오. 내부의 도적을 제거하면 외부의 도적은 절로 없어집니다...
양계성의 이 글은 구구절절 정곡을 찌르는, 참으로 충심이 흘러넘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리석고 무능한 가정제는 엄숭을 감싸고 돌았고 양계성을 옥에 가두어 버렸다. 양계성의
아내가 대궐 앞에 엎드려 글을 올려 지아비를 대신해 죄를 받길 청했으나 엄숭은 이를 숨
기고 보고하지 않았다. 가정 34년 10월 초하루, 서시에서 양계성은 처참하게 상해되었다.
당시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은 모두가 탄식했고, 엎드려 우는 사람도 많았다." 7년 뒤,
엄숭은 관직에서 쫓겨냐고 가산을 몰수당햇다. 아들 세 번은 사형을 당했다. 목종은 엄숭을
탄핵하다 수난을 당한 여러 신하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면서 맨 먼저 양계성을 꼽았고, 그를
태상소경에 추증하는 한편, 충민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보정부에 사당을세워 그 뜻을
기리며 추모하게 했다.
간신은 일반적으로 특수한 지위를 갖고 있다. 권력자의 친척이거나 권력자의 총애와 신
임을 받는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들 '잡귀'에게 미움을 사려 하지 않는다. 일단 작은 일이라
도 그들을 건드렸다간 그들이 '특수한 지위'를 이용해 악랄하게 헐뜯고 해치기 때문이다. 그
래서 간신이 권력을 잡으면 많은 사람들이 자리와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명철보신의 태도
를 취한다.
따라서 간신을 가리고 살피는 일 다음으로 관건이 되는 문제는 간신과 싸우는 용기를 갖출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송경, 왕정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우리
의 모범이 된다. 송경의 일생은 늠름하게 대의를 지키며 간신 등 사악한 세력들과 힘껏 싸
운 일생이었다.
신당서의 기록을 중심으로 그의 삶을 따라가보자. 측전 무후 때 장역지, 장총창이 은총
을 믿고 조정의 기강을 어지럽히는 등 악독한 짓을 일삼았다. 그러나 조야는 물론 양공 대
신들조차도 그들의 세력이 무서워 그들에게 순종했다. 심지어는 관직 이름을 부르지 않고 '
오랑'이니 '육랑'이니 하며 치켜세웠다. 그러나 송경만은 이 사악한 세력들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그들의 노비도 아닌데 어째서 그들을 낭이라 부른단 말인가?" 그리고는 그들의 범죄 사실
을 캐내어 측전 무후의 비호에도 불구하고 죽을 각오로 끝까지 그들의 죄상을 뒤쫖아 법으
로 다스렸다. 두 사람을 측전무후의 특별 사면령으로 간신히 풀려날 수 있었다. 그 뒤 측
전무후는 그 두 사람에게 송겅을 찾아가 인사를 드리게 했다. 그러나 송경은 문을 걸어 잠
그고 그들을 들이지 않았다. "공적인 일이라면 몰라도 개인적인 만남이라면 법을 들이대도
안된다." 그러면서 송경은 옆에 있던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탄식조로 예견했다. "내가 저
두 사람의 머리통을 박살내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저들은 분명 계속해서 나라에 화를 미
칠 것이다." 두 장씨는 송경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수차례에 걸친 모함으로 그를 해치려 했
다. 심지어는 자객을 보내 그를 암살하려 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송경은 꿈쩍도 하지 않았
다. 그 뒤 중종이 즉위한 후 송경은 중종의 신임을 깊게 받던 무삼사와 격렬한 투쟁을 벌
였다. 무삼사는 송경에게 잘 보이려고 무던 애를 썼지만 송경은 정색을 하며, 자기 분수에
만족하지 못하고 조정에 간섭하면 서한시대의 여시들과 같은 최후를 맞을 것이라며 준엄하
게 경고했다.
공명정대하고 정직한 송경은 간신에게 머리 숙이지 않았고, 사악한 세력에 굴복하지 않았
다 수없이 죄천당하고 협박과 위협에 시달리는 등 고통스러운 삶이었지만, 그는 끝내 자신
의 뜻과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봉건 관료 사회에서는 참으로 보기 드문 관리가 이닐 수 없
다. 그가 있었기에 간신의 간사한 짓은 어느 정도 통제될 수 있었다. 청나라 때 왕정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나라가 암울하고 정부가 썩은 사오항에서 간신배들에게는 불구 대천
지 원수와도 같은 존재엿다. 목숨을 내놓고 바른 소리를 해서 세상 사람들의 눈과 귀를 밝
혔다. 그의 충정은 하늘도 감동시키고 귀신도 울릴 만했다. 왕정은 섬서성 포성 사람으로
진사에 급제한 뒤 공부, 호부, 형부시랑을 거쳐 하남순무에 이르렀다.
도광 5년에는 군기대신에 호부상서, 동각대학사 태자태사가 되었다. 목장아가 임칙서를
모함하여 해친 뒤로 목창아와 첨예한 투쟁을 벌였다. 목창아는 두 왕조에 걸쳐 권세를 휘두
르던 인물로, 높은 지위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문하생과 전직 관리들이 늘 그의 밑에 들끓
는 등 정국을 죄우할 수 있는 '목당'을 형성하고 있었다. 목창아는 아편전쟁의 와중에 아편
금지를 늦추자는 파의 우두머리로서, 임칙서를 모함하여 차면시키고 이리로 귀양 보냈다. 목
창아의 이런 짓거리는 정의로운 대신들로부터 음흉한 수단으로 유능한 인물을 모함하고 나
라를 병들게 하는 간신 짓거리라 비난받았다.
그러나 권력을 쥐고 있는지라 "세상이 모두 나쁜 놈이라 미워하면서도" 분노만 할 뿐,
감히 입을 열어 비난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왕정은 그와 맞서 싸웠다. 어느 날 두 사람이
함께 도광제에게 불려갔다. 왕정은 황제 앞에서 준엄하게 목창아를 나무랐다. "임칙서와 같
이 바른 사람을 어째서 먼 신강까지 내쳤단 말이오? 그런 짓은 송나라 때의 진회나 명나라
때의 엄숭과 같은 간신들이나 하는 짓이오, 천하의 일이 ㅎ아가는 꼴을 보면 모두가 그대의
손에서 형편없이 어그러지고 있지 않소!" 이처럼 기세 당당한 꾸짖음에 목창아는 풀이 죽어
"아무런 변명도 못하고 입을 닫았다." 그러나 충간을 가릴 줄 모르는 도광제는 웃으면서 왕
정에게 "경이 취했나 보오."라고 말하고는 내시에게 부축해 모시도록 했다. 다음날 조회에
서 왕정은 도광제의 면전에서 다시 임칙서의 억울함을 강격하게 호소했다. 이에 화가 난 도
광제는 휭하니 자리를 뜨고 말았다.
왕정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목숨을 걸고 사람들의 맹성을 촉수했으며, 끝
내 옛 사람의 '시간'의 의의를 분받아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그는 죽기에 앞서 유서를
남겨 목창아의 간행을 강력하게 탄핵하고 임칙서의 유능함과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의 행동
이 도광제를 깨닫게 만들지는 못했지만, 후세의 정직하고 선량한 사람들에게 본보기로 남
아 진리를 추구하고정의에 몸바치도록 자극하였다.
다섯째, 간신을 제압하는 기술을 익혀야 한다. 송나라 고종 때 추밀사 장준은 환관 풍익
의 목을 베어 백성의 분통을 풀어 달라는 청을 황제에게 올렸다. 이에 반해 조정은 풍익을
외지로 내보낼 것을 건의했다. 고종은 풍익을 절동으로 내보내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했다.
장준은 몹시 성이 났다. 그러자 조정이 장준에게 이런 말을 했다. "예로부너 소인을 처리
할 때 너무 서두르면 그들 모두가 위기의식을 느껴 붕당을 만듭니다. 그러면 문제는 더 커
지기 마련이오, 한걸음 늦추어 서로 다투게 하면 치지 않아도 저절로 깨져요. 지금 풍익을
죽였다간 환관들이 위기를 느끼고 모두 패거리를 지어 그를 보호하려고 나설 것이오. 그
러니 귀양 보내는 것이 낫고. 그러면 그 자도 손발을 쓰지 못할 것이고, 다른 패거릳 자신
들이 승진할 기회가 생기겠다는 욕심으로 그를 도와주지 않을 것 아닙니까?"
장준은 조정의 이런 분석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명나라 때의 대간 왕진이 조정에서 두
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면서 내각 전체를 자신의 사람으로 채우려는 욕심을 품었다. 어느 날
왕진이 양사기와 양영 두 사람에게 아주 의미심장하게 "조정 일이 두분 선생에게는 몹시
힘들 텐데, 이제 나이도 드시고 했으니 쉬시는게 어떨는지요?"라고 말을 건넸다. 양사기는
무슨 말인지는 알았지만 속샘을 모른 채 "죽는 날까지 나라를 위해 있는 힘을 다 쏟을 뿐
이지."라고만 말했다. 그러나 양영은 양사기와 달리 왕진의 말을 받아들여 우리들은 확실히
늙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니 젊고 건강한 사람을 골라 그들에게 일을 맡기는 것이 조정과
황상의 성은에 보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양영의 말에 왕진은 몹시 만족해 하면서 그 자리
를 떴다. 왕진이 가고 나자 양사기는 못마땅한 투로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냐고 다그치
듯 물었다.
그러자 양영은 이렇게 대답했다. "왕진은 진작부터 우리를 싫어해서 손을 쓰려 하지 않
았던가? 그가 황상에게 말해 각료들의 나이를 핑계로 자기 사람을 데려다 앉히면 어찌하는
가?" 그래서 두 사람은 장원급제한 마유와 조내를 추천하여 내각을 손아귀에 쥐려는 왕진의
음모를 부분적으로나마 좌절시켰다. 간신들과 싸우려면 용기뿐만 아니라 투쟁 기술도 갖추
어야 한다.
간신, 소인은 대단히 음츙하고 교활하며 비열한 무리들이다. 그들의 속마음은 검과 갖은 계
략으로 가들 차 있다. 염치를 모르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들에 대한 인식이 충
분하지 못하여 투쟁 책략과 기술을 강구하지 못한 채 그저 경솔하게 용기만 갖고 달려들거
나, 그들을 상대할 가치도 없다며 무시한다면, 그것은 간신에 대한 심각한 인식과 정확한 평
가를 잃은 태도로서 그들과 싸워 이기기는커녕 도리어 처참한 패배를 맛보고 말 것이다.
명나라 때 악정은 충직한 선비였다. 명사에 따르면 그는 "무슨 일이든 솔직하게 말했으
며, 황제가 내려준 옷조차도 거들떠보지 않을" 정도였다. 내각에 들어간 뒤 석형, 조길상이
지나치게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보고는 걱정이 되어 영종과 더불어 그들을 처리할 방도를
상의하다가, 실천에 옮기기도 전에 역공을 받아 입각 28일 만에 쫓겨나 평민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반면에 서계는 엄세번을 제거해 뜻한 바 목적을 이루었다. 알다시피 엄숭의 아들 엄
세번은 아버지를 본받아 아비와 함께 간악한 짓을 마구 일삼았다. 그 뒤 탄핵을 받아 옥에
갇힌 뒤 옥에서 조정 신하들이 제기한 자신의 죄상을 듣고는 도리어 기뻐하며 자기 패거리
들에게 "걱정하지 마라, 조만간 풀려날 테니."라고 말했다고 한다.
법사 황광승 등이 공소장을 재상 서계에게 올렸다. 노련한 서계는 공소장을 본 뒤 "여러
분들은 그를 살리려는 거요, 아니면 즉이려는 거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한결같이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서계는 날카롭게 상황을 분석해가며 이들을 나무랐
다. 지금 너희들은 엄세번을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살리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너희들
이 하는 말은 모두가 엄숭 부자가 짜놓은 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이렇게 했
다간 엄세번은 기세등등하게 감옥 문을 나설 것이 뻔하다. 그리하여 거셰는 황실의 주의를
끌 수 있도록 공소장의 방향을 바꾸었다. 왕기가 서린 땅에다 집을 지은 일을 비롯하여, 도
망쳐 나온 무리들을 모아 패거리를 짓고 일본과 몰래 내통하여 명나라 조정을 뒤엎으려 한
일등, 요컨대 엄숭 가문이 반역을 도모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엄세번은 새파랗게 질려 "이제 죽었구나."라며 고개를 떨구었다. 결
정은 즉시 내려졌다. 엄세번의 목은 마침내 잘려 나갔다. 간신을 가려내고 제압하는 일은 대
단히 복잡한 투쟁이다. 실제 투쟁 중에 끊임없이 능력을 키우고 투쟁 기술을 장악해야만 간
신의 약점을 정확하게 집어내서 그들을 제압하고 승리를 거둘 수 있다. 경솔함, 사사로운
욕심, 두려움, 어리석음, 자비심, 나약함 등은 인간들이 보편적으로 가진 약점들이다. 이 약
점들이 간신들에게 이용당하면 나라와 백성을 망치고 자시노가 남을 그르치게 되는 것이
다. 따라서 인성의 약점과 싸워 이기는 것이야말로 입신처세의 근본이며 간신을 가리고 살
펴서 그 자들을 제압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이다. 누구든 이런 약점과 싸워 이기지 못하면 간
신을 가려내고, 싸우고 하는 따위는 한낱 사치스러운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10. 간인을 가려 자신의 잘못을 살핀다.
지난 일을 생각해서 다가올 일을 알고, 간인을 번별하여 자신의 잘못을 살핀다. 실로 호
인이 되려면 늘 자신을 아는 현명함과 자신을 격려하는 마움과 자율적인 행동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군자와 소인의 행위를 분명하게 구분하고 인식할 줄 알아야 한다. 군자는 공도를 내
세우며, 소인은 사사로움을 내세운다. 군자는 단결을 이야기하고 소인은 결탁을 말한다. 군
자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완성하며 소인은 인간의 잘못을 촐로한다. 사심을 버리고 공도를
세워 자신이 간사한 길로 빠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
우리가 간신들이 역사에 끼친 재난과 상처를 돌이켜볼 때, 과연 우리는 지난날 우리의 생
각과 행동에 대해 점검해보고 반성해본 적이 있는가? 그것은 간신을 가려내는 일과 결코 무
관하지 않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과 사물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사회의 모든현상은 조건적
이며 가변적이다. 따라서 충과 간, 선과 악, 미와 추, 진짜와 가짜 사이에도 불변의 경계는
없으며, 변화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수많은 간신들을 떵ㄲㄹ 때
우리는 침ㅋ통함을 금할 수 없다. 비록 그들의 간행을 용서할 수는 없어도 그들의 마지막
운명에 대해서는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이의부는 처음 태자사인에 숭현관직학사로 있으
면서 남다른 재능과 특기를 아낌없이 발휘햇다. 사람 됨됨이도 그런대로 괜찮았다. 당시 그
는 승화잠이란 글을 올려 태자에게 "사소한 선행이라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작은 것
이 쌓여 이름을 나게 하는 것입니다. 작은 행동이라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미미한 것
이 쌓여 몸을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권유하긷 했고, 또 "교묘한 아첨은 그 방법이 여
러 가지라서 그 싹을 끊을 수 없으며, 치해 또한 큽니다."라고도 했다. 그가 타고난 간신배
가 결코 아니었음을 말해주며, 오피려 간신이 끼친 피해와 그들의 기량에 대해 깊은 증오
를 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그가 훗날 좌천당하는 것이 두려워 몸을 돌리고, 이후 다시는 헤어날 수 없
는 간신의 길로 빠져들었다. 엄숭은 평생 동안 공명심을 꿈꾸었으나, 다 늙도록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아보지를 둔 보잘것없는 집안 출신이엇다. 아들 엄숭은 아버지의 한 맺힌 기대
를 저버리지 않고 스물 다섯에 진사에 합격했다. 그러나 당시 권력자였던 대간 유근이 싫
어 영산당에 숨어서 독서로 나날을 보냈다. 그러면서 그는 조정의 폐단을 지적하는 등 나라
를 걱정하는 정의로운 마음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정직이 득보다는 실이 많으며, 심지어는
목숨까지도 위협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는 "지난날의 언행을 모조리 바꾸어 버리고"
기꺼이 간신의 대열에 함류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
고, 그 어떤 간신보다도 훨씬 앞서나갔다. 양심적인 지식인이 간신으로 타락하는 과정을 지
켜보노라면 착잡함을 지울 길 없다. 분하기도 하고, 한스럽기도 하며, 안타깝기도 하다.
사실 구시대에는 충에서 간으로 길을 바꾼 사람도 있고, 반대로 간에서 충으로 돌아선 사
람도 있었다. 또 간보다는 충이 우위인 사람도 있었고, 충보다 간이 우위인 사람도 있었다.
완벽한 사람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보다는 불완전한 사람이 훨씬 많았다. 구준은 역사상 충
성스럽고 정직하기로 이름난 인물이다. 그러나 그에 관한 기록을 꼼꼼히 살펴보면 그에게
도 모자란 점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을 차라리 간신의 행위에 가까울 정도였다. 송
사에 따라 그부분을 살펴보자. 구준이 왕당과 함께 일을 하게 되었는데 왕단은 구준의 능력
을 매우 칭찬하며 아낌없이 그를 추천했다.
그러나 구준은 사사건건 왕단의 단점만을 꼬집었다. 그 뒤 진종조차도 구준의 언행이 마
음에 안 들었던지 왕단에게 "경은 늘 그 자를 칭찬하는데 그 자는 오로지 경에 대한 악담
만 늘어놓소."라고 말할 정도였다. 왕단은 담담하게 이렇게 응수했다. "신은 재상 자리에 오
래 있었고, 또 일에도 실수가 많습니다. 구준은 거리낌없이 바른 말을 하는 충직한 인물입
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그를 더욱 중시하는 겁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왕단이 이
끄는 중서에서 밀원으로 문서를 보냈는데 문서상 약간의 잘못이 있었다. 밀원에 있던 구
준은 즉각 이 일을 황제에게 보고했고, 황제는 왕단을 심하게 나무랐다. 며칠 뒤 이번에는
밀원에서 보내온 문서에서 잘못이 발견되었다. 왕단의 부하들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문서
를 왕단에게 보여주면서 앙갚음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좋아라 했다.
그러나 왕단은 문서를 밀원으로 되돌려 보내 고치도록 했다. 그 뒤 구준은 황상께 말씀
을 잘 두려 재상에 오를 수 있게 해 달라고 왕단에게 부탁했다. 그러자 왕단은 구준을 날
카롭게 꾸짖었다. "재상 자리를 어찌 구걸한단 말이오! 나는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지 않소이
다." 구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그 자리를 물러나야 했다. 그로부터 얼마안 되어 구준이 재상
에 임명되었다. 감격한 구준은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폐하께서 신을 알아주시지 않
았다면 어찌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감사드렸다. 그러자 황제가 구준 당신이
재상이 된 것은 오로지 왕단이 적극 추천했기 때문이지 황제인 내 마음이 아니었다고 일러
주었다. 그제야 구준은 왕단의 높은 뜻과 넓은 가슴에 뼈저리게 탄복했다. 당나라 때 충신,
명재상의 찬란한 별들 중에서도 눈부신 별, 오숭이 있었다.
언젠가 부하 관료들에게 그가 "재상으로서 나란 사람은 역사상 어떤 인물과 비교될 수 있
겠소?"라고 물었다. 부하들은 선뜻 대답하기 못했다. 그러자 요숭은 "관중이나 악의에 비
할 수 있겠소?"라고 물었다. 부하들은 그제야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관중과 악의의 정치
는 후세에까지 시행되지 못했지만 그들이 죽을 때까지는 시행되었습니다. 그런데 재상의 정
치는 수시로 바뀌니 어찌 그들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요숭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어떤 재상과 비교할 수 있겠소?" "어떤 순간에 필요한 구시재상 정도에
비교할 수 있겠지요." 이 평가에 대해 요숭은 자신을 깎아내린 것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아주 기뻐했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붓을 땅에 내던지며 "구시재상은 어디 쉬운가?"라고 했
다고 한다.
참으로 진실된 말이 아닐 수 없다. 예종 경운 2년, 태평 공주가 정치에 간섭하여 여러 왕
들과 짜고 태자 현종을 모함했다. 재상으로 있던 요숭은 은밀히 태평 공주를 낙양으로 보
내고 여러 왕들은 자사로 내보내 근심거리를 미리 방지하라고 아뢰었다. 그러나 예종은 태
평 공주의 편을 들었고, 태자 현종도 왕실을 이간시킨다면 그를 신주자사로 좌천시켰다. 현
종 선천 2년, 태평 공주와 왕들이 반란을 꾀하다 죽음을 당하자 현종은 요숭의 선견지명에
감탄하며 그의 충성스러운 뜻을 칭찬했다. 그리고는 사냥을 핑계로 요숭을 만났다. 이 만남
에서 요숭은 형벌을 가볍게 하고, 가까운 신하에게는 엄격하며, 환관과 외척을 멀리하고, 훌
륭한 신하를 예로 모시며, 언론을 개방할 것 등 열가지 힘쓸 일을 건의했다. 현종은 대단히
기뻐하며 즉시 그를 서울로 불러들여 재상 자리에 복귀시켰다.
당시 재상이 여럿 있었지만 현종은 요숭하고만 상의했다. 요숭이 편전으로 들어오면 일어
서서 맞이했고, 물러갈 때에는 난간까지 나와 배웅했다. 요숭이 집이 좀 멀어서 조회에 참석
하기가 불편한 것을 알고는 귀한 손님을 접대하는 사방관으로 거처를 옮기라고 했다. 요숭
이 너무 호화스러워 머물기가 그렇다고 하자, 현종은 "그게 뭐 대단하다고 그러시오. 그대를
궁궐로 모시지 못하는 게 한스러울 정도인데."라고 했다고 한다. 요숭이 병이 나 나오지 못
할 때에도 현종은 반드시 대신을 그에게 보내 의논하도록 했다. 대신들이 제안한 의견이
훌륭하면 현종은 기분 좋게 "분명 요상공이 생각해낸 것일 게야."라고 말했다. 또 의견이 신
통치 않으면 못마땅하다는 투로 "왜 요상공과 의논하지 않았는가?"라고 다그쳤다. 그럴 때
는 실제로 요숭과 상의했어도 그렇지 않다고 해야 넘어갈 수 있었다. 이쯤 되니 요숭은 포
부를 마음껏 펼칠수 있었다. 현종이 즉위할 당시 정국은 혼란스러웠고, 여러 가지 폐단이 불
거져 나왔다.
요숭은 현종을 도와 여러 왕들의 권한을 제약하고, 관리를 엄격하게 선발했으며, 불법과
부정부패에 대해서도 사정없이 칼날을 들이댔다. 그리하여 국가는 안정을 되찾아 이른바 '
개원의 전성기'를 열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두고 '한 시대를 구한 재상'이란 뜻의
'구시재상'으로 불렀다. 그가 죽은 뒤로도 사람들은 그를 잊지 못했다. 원진은 연창궁사란
글에서 "개원 말기에 요숭과 송경이 죽자 조정은 점점 왕비의 손에서 놀아나기 시작했다."
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구시재상'에게도 칭찬할 수 없는 점이 적지 않았다. 특히 그는 그다지 후덕
스럽지 못했고, 처음과 끝이 똑같지도 못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역사책에서는 그를 권모술
수를 잘 부리고 작은 일에도 발끈한다고 해서 '권휼'이라고 비판했다. 요숭이 처음 재상에
임명되려 할 즈음 이미 재상 자리에 있던 장설이 질투심에서 요숭의 재상 임명에 찬성하지
않고 여러차례 방해 공작을 펼쳤다.
우여곡절 끝에 요숭은 재상이 되었고, 장설은 보복이 두려워 현종의 동생인 기왕 밑으로
들어가 몸을 보전하려했다. 이 일을 알아챈 요숭은 이를 빌미로 보복을 하기로 했다. 그러면
서도 당장 폭로하지는 않았다. 어느 날 조정 일을 마치고 대신들이 모두 물러가는데 요숭
혼자만 다리를 질질 끌며 어디가 아픈 듯한 모습을 보였다. 이를 본 현종이 그를 불러 왜
그러냐고 물었다. "다리가 불편합니다." "많이 아픈 것 아니오?" "마음에 걱정되는 것이 있
어 다리 아픈 것은 느끼지도 못하겠습니다." 현종은 그게 무슨 소리냐고 다그치듯 물었다. "
기왕은 폐하께서 아끼시는 동생 분이고, 장설은 폐하를 보좌하는 대신이옵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이 몰래 서로의 집을 드나들고 있으니 혹 불경스러운 일을 꾀하고 있지나 않은지,
그것이 여간 마음에 걸리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장설은 상주자사로 좌천되었다. 사실 장
설도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끝까지 서로를 헐뜯으며 싸웠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요숭은 죽음을 앞
두고 장설이 자기 자식들에게 보복할 것이 두려워 아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장설과 나는 오랫동안 서로를 몹시 미워해왔다. 내가 죽은 뒤 예의상 틀림없이 문상을 올
것이다. 그때 너희는 내가 평생 아끼던 귀한 그릇들을 내다 보이거라. 그 사람은 그런 물건
들을 몹시 좋아하니까. 만약 그가 본체만체하면 멸문지화가 장차 닥칠 것이니 일찌감치 준
비하는 게 좋을 게다. 그렇지 않고 그가 그 물건들에게 눈길을 준다면 아무 일 없을 게다.
그러면 그 물건들을 그에게 갖다 주고 틈을 봐가며 내 비문을 써 달라고 해라. 비문을 얻으
면 지체없이 돌에 새겨 내 무덤 앞에 세워야 한다. 그는 나보다 좀 느리기 때문에 며칠이
지난 다음에야 아차 하고 후회할 거다. 사람을 보내 비문을 되돌려 달라고 하면, 황상께 이
미 허락을 얻었다고 말하고 잘 탁본한 비문을 그에게 주도록 해라." 요숭은 죽었고 장설은
예의상 조문을 왔다.
아니나다를까 장설은 요숭이 쳐놓은 그물에 걸려들고 말았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안 장설
은 애써 분을 삭이며 "죽은 요숭이 산 장설을 더 잘 레아리고 있었구나."라고 말했다. 한다.
역사서에 따르면 요숭은 유유구에 대해서도 평소 질투심을 가지고 있었다. 장설이 상주자
사로 좌천될 무렵 또 다른 재상 유유구도 면직당했다. 자신의 파면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유
유구는 다소 골치 아픈 말들을 늘어놓으며 다녔다. 유유구가 '원망의 소리'를 하고 다닌다
는 이야기가 나돌았고, 현종이 그 진상을 조사하도록 했다. 이에 요숭 등은 짐짓 사건을 원
만하게 마무리하려는 듯한 태도로 현종에게 이렇게 권햇다. "유유구 등은 모두 공신들인데
갑자기 한직에 임명되고 보니 기분이 상해 다소 원망의 뜻을 표현한 것 같습니다. 인지상정
이라 할 수 있지요.
그들은 공도 크고 지위도 놓았던지라 감옥에 가두면 안팎으로 큰 반응을 불러일으킬까 두렵
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유유구를 위하는 말 같지만, 사실은 유유구의 '원망하는 말'을 인
정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유유구는 경성에서 쫓겨나 목주로 좌천되었다. 위지고와의 관계도 이와 비숫했
다.
위지고의 공로, 지위, 명성은 당시 요숭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았으며, 훗날 요숭과 함께 재
상의 대열에 올랐다. 그러나 요숭은 그를 동도 낙양으로 내보내 그곳의 이부일을 관장케
하려 햇다. 위지고는 이에 대해 몹시 불만을 품었다. 당시 요숭의 두 아들이 동도 낙양에서
관직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자기 아버지가 위지고를 추천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위지고를
찾아가 사적인 이익을 챙기려 했다. 장안에 올라온 위지고가 이 일을 현종에게 모조리 보고
해 버렸다.
어느 날 요숭과 한담을 나누던 현종이 느닷없이 "경의 자식들이 재능이나 인품은 어떻
소? 그리고 지금 어떤 관직에서 일하고 있소?"라고 물었다. 눈치 빠른 요숭은 현종이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알아차리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들 셋이 있는데 두 놈은 동도에 있
습니다. 그런데 이 두 놈이 욕심이 많고 부지런하지도 못합니다. 모르긴 해도 틀림없이 위
지고에게 달려갔을 겝니다. 다만 아직 기회가 없어 물어보지는 못했습니다." 당초 아들을
위해 진상을 숨길 것으로 예상했던 현종은 요숭이 솔직하게 나오자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
러면서 그걸 어찌 아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요숭은 이렇게 대답했다. "위지고가 낮은 자리에
있을 때 소인이 그를 돌보며 추천했사옵니다. 못난 아들놈들이 위지고가 그 때문에 자신들
의 나쁜 짓을 용서 할 것이라 여기고 그에게로 달려가지 않았겠습니까?"
이 말에 현종은 요숭의 인품은 고상하고, 위지고는 경박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위지고
가 은혜도 모르고 요숭을 배반했다고 여기고는 위지고를 파직시키려 했다. 그러자 요숭은
현종에게 다시 이런 청을 드렸다. "아들놈이 못나 죄를 지었으나 폐하께서 용서하신다면 천
만다행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위지고를 파면시키면 세상 사람들은 폐하께서 저와
의 사적인 감정 때문에 그러신 것이라고 여길 것이니 이는 폐하의 명예에 누가 되는 것입니
다." 그러나 위지고는 공부상서로 좌천되었다. 역사서를 통해서 보면 요숭과 자리를 함께하
기란 매우 어려웠던 것 같다. 그는 권력을 혼자 휘두르기를 좋아했으며, 속임수도 마다하
지 않았고, 사람들을 그다지 호용하지도 못했다.
이렇게 보면 여러 사람들이 떠받들고 역사 속에서 충신, 재상으로 인정받는 사람이라 해
도 간악한 일면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실 속에서 우리는 늘 이런 현상들을 본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신을 뛰어넘을까봐, 누군가가 두각을 나타낼까봐 두려워한다. 그래서
늘 사람을 의심하며 작은 일도 크게 떠벌린다. 권력은 오직 자신을 위해서만 존재해야 한다.
주인공만 하려 하고, 조연이나 극을 뒷받침하는 어떤 역할도 맡으려 하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늘 도발적이고 사람들을 이간질시켜 시비를 일으키는 사람도 있다. 사람들의 영혼 깊
숙한 곳에는 조건만 무르익으면 언제든지 사악하고 간악해질 수 있는 그 무엇인가가 자리잡
고 있다.
그러나 역사가 증명하듯 남의 간악한 행위를 가려내기는 쉬워도 자신의 그것은 살피기 어
렵다. 또한 불우한 처지에 있을 때에는 늘 사회의 잘못된 일들에 대해 분통해 하면서, 일단
높은 자리에 오른 뒤에는 얼굴을 완전히 바꾸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앞사람의 그릇된 길을
그대로 되풀이하며 다른 사람을 짓밟는 사람도 있다. 그러고 보니 여황이란 사람이 생각난
다. 그는 모함을 받아 군대에 나가게 된 아버지를 따라서 울분과 치욕을 참아가며 변방에
서 10년을 보냈다. 그 뒤 진사에 급제하여 경현의 현령이 된 다음 대청에서 "일찍이 억울
하게 당한 일, 어찌 그 일을 잊을쏘냐? 그러나 기회가 왔다고 해서 이기려 다투지 말아라.
그 폐해는 결국 자신에게 돌아오니까."라는 글을 크게 써서 걸어두었다고 한다.
사마광이 주도해서 편찬한 자치통감은 오늘날까지도 가장 가치있는 사서 중 하나이다. 특
히 그가 손수 썼다는 평론들이 뛰어나다. 400만 자에 이르는 거대한 저서에서 사마광은 높
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반드시 넓은 가슴을 가지고 다른 의견과 듣기 싫은 소리를 받아들여
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런 그가 일단 대권을 잡고 난 다음에는 그런 큰 가슴을 펼
쳐 보이지 못했다. '배부르니까 마음 변한다.'고 했던가? 권력은 즉시 그의 본성을 폭로해
버렸다. 반대파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모역법'을 철폐하려 했을 때 소동파는 "지난날 나
는 당신이 어느 누구 앞에서도 바른 말을 하며 이치를 따지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었소.
그런데 지금 재상이 되고 나니까 다른 사람의 입을 막으려 하는구려."라며 실망했다. 또 다
른 대신 범순인도 '모역법'은 대다수에게 이익이 되므로 바꾸어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러자 사마광은 즉각 안색을 바꾸었다. 그러자 범순인은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사나운
표정을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입을 막아 버리려는 것이다. 일이란 허심탄회하게 여러 사
람의 의견을 듣고 하는 것이지 꼭 자기 혼자 하려 해서야 되겠는가?"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사마광으로 하여금 지난날 자신이 생각했던 것의 만분의 일이라도 다시 생각하게 하지는 못
했다. 한 사람이 자아를 인식하고 극복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잘 보여주는 사
실이다. 거기에는 남다른 경지의 용기와 각성이 요구된다. 길고 긴, 고통스러운 자아 각성과
극복의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스스로를 아는 현명함이 필요하다.
서진시대의 주처란 인물은 성급하고 난폭하여 아무에게나 주먹을 휘두르는 등 젊었을 때
부터 악명이 높았다. 어느 날 시골 마을에서 한 노인을 만났다. 노인은 잔뜩 인상을 찡그리
고 있었다. 주처는 호기심 반 의구심 반으로 물었다. "올해는 날도 좋고 오곡도 풍년이 들었
는데 왜 그렇게 울상을 하고 계시오?" 그러자 노인은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대답했다. "세
가지 해로움이 없어지지 않고 있는데 뭐가 기분이 좋겠소?" "세가지 해로움이라뇨?" 주처
는 노인 곁으로 바짝 다가서며 다그쳐 물었다. "남산 위에 사는 흰 얼굴의 맹호가 그 하나
요, 장교 밑에 사는 교룡이 그 둘이요, 나머지 하나는 멸리는 하늘에 있고 가까이는 바로 눈
앞에 있지." 이 말을 들은 주처는 활과 화살을 둘러메고 큰 도끼를 움켜쥐고는 곧장 남산
으로 달려가 맹호를 죽였다. 그리고는 다시 물 속으로 뛰어들어 교룡과 사흘 밤낮을 싸웠
다. 사흘이 지나도 주처는 물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주처가 죽은 줄 알고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그런데 뜻밖ㅇ 죽은 줄 알았던 주처가 교룡을 죽이고 마
을로 돌아왔다. 주처는 마을 사람들이 자기가 줄은 줄 알고 기뻐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
이 몹시 혼란스러웠다. '사람들의 눈에 내가 마치 사납고 악한 호랑이나 악어처럼 비쳤단
말인가?' 그는 육기와 육운을 찾아가 "이제부터라도 내 자신을 수양하려 해도 나이가 들어
이루지 못할까 겁이 나오."라며 심정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육운은 이렇게 충고해주었다. "아침에 도를 깨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아고 했소. 만
약 진정으로 뜻을 세우 좋은 사람이 되려 한다면 좋은 명성을 못 듣는다고 겁내서야 되겠
소?" 그 후 주처는 지난날의 잘못을 뼈저리게 뉘우치고 믿음과 충심으로 사람을 대하니 마
침내 모두가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지만, 특히 주
의해야 할 짐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자신의 모습이 일치하지 않거나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
나가 자신을 가장 쉽게 이해하고 용서한다. 따라서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는 그에 알맞는
이유를 찾아내며, 적당한 해석을 가해 심리적 평형을 유지하려 한다. 편견과 착각은 바로 여
기에서 비롯된다. 자신도 더 이상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당 태종 이세민 손거울로 옷매무새를 바르게 하고, 역사를 거울삼아 흥망의 이치
를 알려 했으며, 사람을 거울삼아 득실을 밝히려 했다. 아울러 "항상 이 세가지 거울을 가지
고 다니며 자신의 잘못을 막으려 했다." 명재상 위징이 죽자 태종은 "거울 하나를 잃었구
나!"라며 가슴 아파했다. 폐문운부엣 보면 이란 구절이 있다. "사람의 눈으로는 자신의 모습
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거울을 빌어 모습을 보는 것이다." 역사상 당 태종 같은 명군조차도
늘 거울을 빌어 자신의 모습을 보며 잘못을 막으려 했거늘, 우리가 자신에 대해 바르게 인
식하고 늘 진지하게 점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실 무슨 일이든 늘 자기가 옳다고 여기
는 사람은 대체로 좋은 사람이 아니다. 아니 절대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다. 소크라테스는 2
천년 전에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아, 네 자신을 알라." 괴테는 이렇게 말했다. "남의 잘못
을 알아채기란 결코 어렵지 않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을 알기란 어렵다. 거기에는 크나큰 깨
달음이 요구된다." 역사상 숱하게 많은 사람이 저지른 잘못의 근본적 원인은 지나치게 강
했던 자존심, 자만심, 자애심에 있었다. 그런 것들로 인해 자아에 대해 올바로 점검하지 못
라고, 정확한 평가를 내리지 못했던 것이다. 자신의 잘된 면만 보고 잘못된 면을 보지 않았
으며, 자신의 고상한 면만 보고 비굴한 면은 보지 않았다. '사람이 자신을 바르게 안다는 것
이 얼마나 귀중한가!' 스스로를 갈고 닦아야 한다.
현실 생활에서는 흔히 이런 상황이 벌어진다. 당초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겠
다는 생각을 가졌던 사람도 몇 차례의 시련에 좌절하고 나면 날카로움이 무뎌져 점차 시류
에 영합하기 시작한다. 또 처음에는 아주 깨끗하고 공명정대했던 사람도 다른 사람이 부정
을 저지르고도 잘사는 꼴을 보고 나면 자신도 참지 못하고 나쁜 구렁텅이에 머리를 처박고
만다. 또 이런 사람들도 있다. 본래는 정파였으나 정파가 늘 당하기만 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을 보고는 지난날의 모습을 바꾸어 아부하고 속이는 기술을 터득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누가 뭐라 해도 존경을 받는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을 바꾸지 않고 자신을
수양하며 덕을 쌓아가는 사람이다. 자신과 싸워 이기고 공명정대하게 살아가는 데 있어서
귀중한 것은 그 자세를 오래도록 지키는 것이고, 스스로를 갈고 닦는 것이다. 사람이 좋은
일 하기란 결코 어렵지 않다. 정작 어려운 일은 평생 나쁜 일을 하지 않고 좋은 일만 하는
것이다. 명나라 홍무 연간에 왕부라는 인물이 있었다. 명사에 따르면 그는 깨끗하게 관직생
활을 했다고 한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동생이 고향에서 왕부를 찾아왔다. 오는 도중
에 동생은 마침 형의 부하와 한 배를 타게 되었다. 바람이 심했던지라 형의 부하가 동생에
게 옷을 돌려주라고 하면서 "옷가지 하나야 사소한 것이지만 그래도 삼가지 않을 수 없
다. 작은 일이 점점 쌓여 몸을 욕되게 하는 법"이라고 말했다.
그 뒤 무고를 당해 옥에 갇혀서도 지조와 절개를 끝내 버리지 않았다. 부하들이 필요한
물건을 넣어주었으나 일절 받지 않았다. "내 어찌 어려움이 있다 해서 쉽게 마음을 바꿀
수 있으랴!" 사마천의 사기를 보면 주보언이란 인물이 나온다. 그는 젊어서부터 땀흘려 노력
하고 공부한, 재능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러나 남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대우받지 못해 제
몸 하나 오갈 데 없는 어려운 신세가 되었다. 그 뒤 가까스로 출세하고 나자 그는 아주 나
눅하게 변했다. 사람들은 모두 그를 겁냈다. 애때 누군가가 그에게 "당신은 너무 제멋대로
야!"라고 충고했다. 그러자 주부언은 "나는 40년간을 공부에 힘썼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부모도 나를 아들로 취급하지 않았고, 형제들도 나를 외면했다. 친구들은 나를 버렸다. 나는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이제 거꾸로 급하고 난폭해진 것이다." 주부언처
럼 더 이상 좋은 사람이 될 마음이 없는 사람을 어떻게 하랴!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
아홉 번 죽어도 휘회하지 않는' 정신이 필수적이다.
스스로를 꾸짖을 수 잇어야 한다.
"추위를 막는 데는 옷을 두껍게 입는 것만한 것이 없고, 헐뜯는 말을 멈추는 데는 스스로
를 수양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는 옛 말이 있다. 진정으로 좋은 사람이 되려면 자신을
다스리는 데 엄격해야 하며, 그 중점은 '엄격함'에 두어야 한다. 자신을 다스리되 엄하지 않
으면 다스리지 않는 것과 같고, 자신을 나무라되 철저하게 나무라지 않으면 나무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점에서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춘추시대 진 문공의 대법관이었던 이리
라느 인물로, 역사상 그리 이름난 사람을 아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엄격하고. 자신을 꾸짖는
데 용감했으며, 자신의 잘못을 이리저리 변명하지 않고, 남에게 잘못을 미루지 않은 점에서
이리는 단연 두드러진 인물이었다. 사기 순리열전을 따라가보자.
한번은 이리가 증거도 불충분한 말만 믿고 한 사람에게 사형 판결을 내린 일이 있었다.
뒤늦게 이를 깨달은 이리는 즉시 자신을 구속하게 한 다음 스스로 사형 판결을 내렸다. 이
소식을 들은 진 문공은 깜짝 놀라며 "관직에는 귀천이 있고 죄에는 가볍고 무거운 것이 있
는 법, 아랫사람의 잘못이지 그대의 잘못이 아니잖는가!"라며 이리를 용서해주었다. 그러자
이리는 침통한 목소리로 자신을 꾸짖었다. "신은 한 부서의 우두머리이지만 그 자리를 부하
들에게 내준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신은 녹봉을 가장 많이 받지만 한 번도 그들에게 나누
어준 적이 없습니다. 지금 잘못으로 사람을 죽여놓고 그 죄를 부하에게 미룬다면 말이나
되겠습니까?" 이리를 너무도 아끼던 진 문공은 이렇게까지 말했다. "그대가 자신의 죄를 인
정한다면 나 역시 죄가 없다고 하겠는가?" 그러면서 사면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리는 사면령을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스스로를 다스리되 엄격
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꾸짖되 철저하지 못한 데 문제가 있다.일이 생기면 늘 위사람을 원망
하고 아랫사람에게 채김을떠넘겨 결국 다른 사람에게 해가 돌아가게 한다. '종종 나한테
도 문제가 있어, 나도 책임이 있지.' 따위의 말은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냥 해보는 소리
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은 엄격하고 진신해야 한다. 엄격함과 진실함이 없는 태도로는 바른
사람이 되기 힘들다.
간악한 길로 빠지지 않으려면 자신을 아는 현명함, 자신을 갈고 닦는 마음, 스스로를 꾸짖
는 엄격함이 잇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것과 아울러 무엇이 군자의
모습이고, 무엇이 소인배가 하는 짖거리며,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를 반드시 일아야 한다. 그리고 그를 통해 끊임없이 깨우치면서 자신을 점검해야만 비로소
착각과 잘못을 제대로 막을 수 있다. 그렇다면 군자와 소인은 어떻게 무엇으로 구별하는
가? 대체로 다음 몇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다.
첫째, 군자는 공익을 앞세우고 소인은 사익을 앞세운다. 공과 사는 군자와 소인을 구별하
는 가장 기본적인 분수령이자 시금석이다. 군자의 사람 됨됨이와 처세는 모두 공정한 마
음에서 나온다. 군자는 사사로이 적을 심지 않는다. 군자는 개인적인 원한을 맺지도 않고,
갚지도 않는다. 군자는 개인적인 정에 얽매이지 않는다. 군자는 사사로운 집단에 몸을 맡겨
당파를 만들지 않는다. 군자는 개인의 울분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소인은 다르다. 그
들의 모든 행동은 개인의 욕심에서 출발한다. 그들은 사사로이 당파를 지어 공적인 것을
빌어 사적인 일에 낭비한다. 권력을 이용해 기인의 욕심을 꾀하고, 공공의 이익을 저버리며,
사적인 감저응로 사람을 대하고 일을 처리한다. 어쩌다 좋은 일을 하기도 하지만 그것 역
시 사심에서 나왔거나 인심을 기만하고 진짜 모습을 위장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늘 자신에게 사사로운 마음이 싹트지 않나 경계해야 한다. 사람을 대하거나 처세
함에 있어서도 공정한 마음을 세워야지, 사사로운 뜻이 드러나거나 끼여들게 해서는 안 된
다. 이 점이 최대의 관건이다. 남송시대의 이름난 역사학자 원추는 국사원 편수관으로 있을
때 송사 간신전에 장돈을 집어넣었다. 같은 고향 사람에다가 나이도 많은 장돈은 원추를
찾아가 자신의 악명이 추세에 전해지지 않도록 몬장을 고쳐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원추
는 정색을 하며 "자후께서 재상으로 계실 때 나라를 저버리고 군주를 속였습니다. 저는 사
관으로서 그것을 감출 수 없니다. 차라리 고향 사람을 저버릴지언정 천하의 바른 논의를 저
버릴 수 없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모두 그의 정직함에 감탄하며 "옛 훌륭한 사관을 부끄
럽게 하지 않는구나."라고 칭찬했다.
그러나 비슷한 사오항에서 허경종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구당서 허경종전을 보면 허경종
을 두고 "국사를 편찬하는 일을 맡으면서 아부와 왜곡을 일삼았으며, 좋은 일은 과장하고
나쁜 것을 감추었다."고 평가했다. 봉덕이가 허경종의 못난 행동을 폭로하자 허경종은 봉덕
이가 멍청하고 속이 시커멓다고 썼다. 전구롱은 허경종의 딸과 친척이엇는데 허경종은 그
의 공적을 조작해 진짜로 공적이 두드러진 인물들 속에 넣었다. 그런가 하면 돈 때문에 죄
악을 숨겨주기도 했다. 그래서 역사는 그를 간신으로 지목한다. 이 점에 있어서는 제갈량도
두드러진 예이다. "천하에 이름을 드리울 수 있다면 삼베옷이라도 어떤가? 산천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다면 허름한 집인들 무슨 상관인가?" 제갈량은 실로 가난한 선비로서 그 이
름을 청사에 길이 남기는 공을 세워 후세 사람들이 두고 두고 칭찬하고 흠모하는 인물이
다. 군사적 재능은 물론 나라를 다스리는 책략에서도 그는 단연 두드러지 안물로 존경을 받
는다.
그러나 실은 그도 여러 번 전투에서 패했고, 용병에서도 번번이 실수를 저질렀다. 그의 죽
음도 알고 보면 "밤낮없이 힘겹게 애쓰다" 절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로 하여금 역사상
뛰어난 인물로 남게 한 것은 다름아니라 공명정대한 마음으로 바른 길을 걸었다는 사실이었
다. 이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관건이다. 진수는 삼국지에서 제갈량의 일생을 다음과 같이 종
합적으로 평가했다. "제갈량은 자신의 마음을 경계해가며 공명정대한 길로 정치를 이끌었
다. 충성을 다하여 보탬이 된 사람은 원수라도 반드시 상을 주었고, 법을 어기고 게으름을
부린 자는 가까운 사이라도 반드시 벌을 주었다. 죄를 인정하고 뉘우치는 자는 그 죄가 무
겁더라도 풀어주었고, 교묘한 말로 변명을 늘어놓은 자는 죄가 가볍더라도 엄벌에 처했다.
착한 일을 하고도 감추지 않으면 상 주지 않았고, 나쁜 짓을 하고도 흔들리지 않으면 나무
라지 않았다." 제갈량이 그러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두려워하면서도 그를 사랑했고 형벌이
엄했어도 원망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몸소 처벌하여 졸병으로 강등시킨 다음 내쫓은
이엄과 요립조차도 그가 족었다는 소식에 대성통곡을 했으며, 그 중 한 사람은 병은 얻어
죽고 말았다.
둘째, 군자는 단결을 말하지만 소인은 결탁을 말한다. "군자는 조화를 이룰 뿐 패거리는
짓지 않으며, 소인은 패거리는 지어도 조화를 이루지는 못한다." 공자의 말씀이다. 훗날 구
양수는 붕단론이란 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군자는 도를 같이하는 사람과 사귀지만 소인
은 이익을 같이하는 자와 사귄다고 지적했다. 군자는 단결을 이야기한다. 분열하지 않기에
당파를 끌어들이지 않는다. 자신은 물론 모든 이에 대한 책임 소재를 명확하게 하기에 무원
칙의 혼란이 없다. 일치단결을 주장하면서도 타인의 결점과 잘못을 그냥 놔두지 않는다. 늘
공공의 이익을 위한 단결을 기초로 삼는다.
그러나 소인은 다르다. 자기와 다르면 배척하고 공격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패거리를 끌어
모은다. 단결과 안정을 파괴한다. 패거리를 끌어모아 갖은 악행을 저지른다. 저희들끼리 서
로 치켜세우고 추천한다. 위충현이 권력을 휘두른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가 권력의 정
상에 있었던 기간은 단 몇 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패거리는 순식간에 천하로
퍼져나갔다.
숫자도 많았고 영향력도 엄청났다. 그러다 보니 그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다. 악명 높았던 패
거리들만해도 '오호', '오표', '십구', '십해자아', '사십손' 등드이 있었다. 이른바 '오호'는
최정수를 우두머리로 하여 그 밑으로 전길, 우순부, 이기룡, 예문환이었다. 이들은 문관들로
위충현의 머리 역할을 했다. '오표'로 불린 자들은 전이경을 비롯해서 허현순, 손운학, 양쇠,
최응원이었다.
이 자들은 모두 무관으로 금의위진무사 또는 동창 등에 배치되어 위충현의 공격수 노릇을
했다. 그들은 공갈, 협박, 암살을 전문으로 담당했다. '십구'에는 문무관이 섞여 있었는데
그 중 가장 두드러진 자가 이부상서 주응추, 태복소경 조흠정 등이엇다. 이 자들은 위충현
의 눈, 코, 입, 귀가 되어 위충현을 대신해 온갖 나쁜 짓을 저질렀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자들은 어떻게 결탁했는가? 위충편이 그 누구보다도 자신의 취고 심
복으로 생각했던 최정수를 예로 들어보자. 이자는 만력11년에 진사에 급제했다. 천계 초년
에 순무어사에 임명되었지만 뇌물을 받아 챙기는 바람에 어사 고반룡과 조남성의 탄핵을 받
아 파면될 상황에 몰렸다. 위급한 상황에 몰린 최정수는 두려움과 고빈에 휩싸여 백방으로
해결책을 모색했다. 그러다 조남성과 고반룡이 모두 동임당 사람으로 위충현과 대립하고 있
다는 사실을 생각해냈다. 그는 우충현을 찾아가기로 결정했다. 가서 위충현에게 날로 세력
이 커져 조정의 논의를 좌우하고 권신들은 공격하여 어느새 대신들의 진퇴를 결정할 수 있
게 된 동림당을 공격해야 한다고 권할 셈이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어려운 상황을 면해
보자는 것이었다.
그는 이리저리 줄을 놓아 위충현을 만났다 그는 무릎을 꿇고 위충현을 아버님으로 모시겠
다며 절을 했다. 그런 다음 세력이 날로 커지고 있는 동림당에 대해 손을 쓰지 않으면 그들
에게 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동림당 때문에 여러 차례 하고자 하는 일이 방
해를 받아 분노하고 있던 위충현에게 최정수의 말은 안성맞춤이엇다. 게다가 최정수는 한때
동림당에 몸을 맡기려 했던지라 그곳의 사오항을 비교적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최정수는 위
충현에게 보배와도 같았다. 위충현은 사람을 시켜 최정수의 파면이 억울하다는 상소를 올리
게 하고, 또 다른 패거리를 시켜서 최정수를 복직시켜야 한다는 글을 올리게 했다. 이로써
최정수는 고민을 깨끗이 해결하고, 위충현의 양아들이 되어 승승장구했다. 이것이 그들이
결탁하게 된 과정이다. 우충현이 거두어들인 다른 자들도 최정수와 거의 비슷했다. 절망에
빠진 자에게 손을 내밀어 살려준 다음 자신에게 목숨을 바쳐 충성하게 한다. 그 자들은 시
키는 대로 사람을 물고 죽인다. 이 자들은 또 위충현을 위해 찬양의 노래를 부르며 사당을
짓고, 공적을 외치며 비를 세우며, 전기를 쓰기도 한다. 위충현에 디핸 숭배는 갈수록 극에
달해, 심지어는 그를 '창신'이라 부르며 성도 이름도 부르지 못하게 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산동은 순무 이정백이란 자가 자기가 다스리는 지역에서 기린이 발견
되었다는 보고를 올렸다. 그러자 황입극이란 자는 황제가 내리는 유지에다 "창신께서 덕을
닦았기에 어진 짐승이 나타났다."라고 글을 썼다. 천자는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또 어떤
자는 위충현을 공자와 비교했다. 즉 공자는 춘추를 지었고, 창신은 요전을 지었으며, 공자는
소정묘를 죽였고, 창신은 동림당을 죽였다는 것이다. 전국 각지에 살아 있는 위충현을 위한
사당이 세워졌다. 이른바 생사가 순식간에 천하에 퍼졌다. 구양수가 붕당론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실로 소인배들이 좋아하는 것은 이익이요, 탐내는 것은 재물이다. 같이 이익을 누릴 때
는 서로 친구입네 하며 등을 토닥이지만, 이익이 다하면 등을 돌려 서로를 해친다. 위충현
일당이 하루아침에 풍비박산이 난 사실은 그를 증명하고도 남든다.
천계 7년 8월, 지나치게 주색잡기에 빠져 있던 황제가 갑자기 세상을 달리했다. 그 뒤를
이은 것이 명나라 마지막 황제, 연호를 숭정이라 한 사종이엇다. 숭정제는 줄곧 궁에서 살
았기 때문에 위충현의 죄상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말썽 많은 이 무리
를 없애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위충현 일당의 세력은 전국적으로 퍼져 있고, 그 힘도
막강했다.
그래서 황제는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 몇 년에 걸쳐 싸울 작정을 하고 준비를 갖추어 나갔
다.
그런데 뜻밖에도 위충현 일당이 단 일격을 견디지 못하고 이내 낙화유수 꼴이 되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당초 숭정제는 이들에 대해 활시위만 당려놓고 쏘지는 않는, 아주 조심스러
운 태도를 취했다. 말하자면 완전히 몸을 숨긴 채 조용히 변화를 살폈다. 그리기를 한참,
어느 날 최정수를 탄핵하는 상소문이 올라왔다. 모두들 황제의 눈치만 살피고 아무런 반대
가 없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위충현을 탄핵하는 상소문들이 눈송이처럼 쏟아졌다. 그 중에서도 공사
전가정의 상소문이 가장 날카롭고 상세했다. 그의 상소문에는 위충현이 범한 큰 죄목들이
여러 가지 열거되어 있었다. 모두 참수형에 해당되는 죄목들이었다. 우선 위충현이 감히 황
제와 나란히 자신을 거론한 '병제'라는 죄목이 지적되었다. 황제는 '만세'라고도 부르는데,
위충현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구천세'라 부르게 했던 것이다. 또 늘 '창신'이란 표현으
로 천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려 했다는 지적도 빠지지 않았다. 행차나 경비는 천자와 다를
게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다음으로 황후를 멸시했다는 '멸후'가 거론되었다. 이 죄목은 더
욱 분명했는데, 장 황후가 위충현 일당의 짓거리에 불만을 품었다는 이유로 황후의 폐위를
꾀하는 한편, 황후 좌우의 태감과 궁녀를 모두 그들 편으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성인을 무
시했다는 '무성'도 지적되었다. 즉 위충현을 공자에 비교했다는 것이다. 또 작위를 함부로
주었다는 '남작'도 빠지지 않았다. 내신 몸으로 스스로를 상공에 봉한 것을 비록하여 그 패
거리들이 너나할것없이 감투를 썼다.
전가정의 상소문을 본 숭정은 준엄한 문장에 만족해 하며 이것으로 위충현을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숭정은 곧 사람을 시켜 위충현을 불러들인 다음 한 대목 한 대목 또박또박 읽
었다.
위충현은 이 일격으로 완전히 휘청거렸다. 대전을 내려오는 그의 모습은 어찌할 바를 몰라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고심을 거듭한 끝에 위충현은 만력 연간에 써먹었던 방
법을 생각해냈다. 즉 보물을 갖다 바쳐 곤경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을 써보기로 결정했다. 그
때 숭정을 모시고 있던 내감은 서응원이란 자로 전에 위충현의 도박 친구였다. 위충현은 그
를 찾아가 진귀한 보물을 잔뜩 건네며 숭정제에게 갖다 바치라고 했다. 그러나 이것이 오
히려 숭정으로 하여금 위충현에게 더 이상 다른 수가 없다는 것을 간파하게 만들었다. 숭정
의 움직임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먼저 서응원에게 엄벌을 내린 다음 위충현을 봉양으로 보
내 황릉을 지키게 하는 조치를 취했다. 사실 이 조치는 가벼운 처벌이었다. 숭정은 여전히
위충현 일당이 매우 많기 때문에 상황이 언제 어떻게 급변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떨쳐 버
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신중을 기할 수밖에.
그런데 뜻밖에도 위충현 일당들은 너나할것없이 자기 한 목숨 부지하기에만 급급했지, 아
무도 위충현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치지 않았다. 그러자 숭정은 대담하게 밀어붙였다. 위충
현을 다시 불러올려 죄를 다스리기로 했다. 서울로 돌아오는 위충현의 처지는 말 그대로
낙화유수였다. 이번 소환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고 느낀 위충현은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서 대들보에 목을 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위충현이 자살했다는 소식에 최정수는 자신
도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최정수는 자기 집에서 술에 잔뜻 취해 목놓아 울
며 그 많은 보물과 그릇을 박살내 버리고는 역시 목을 매어 자살했다. 다른 패거리들도 차
례차례 치루어야 할 최후를 치렀다.
셋째, 군자는 현명한 사람을 보면 함께하지만, 소인은 현명하고 유눙한 사람을 시기하고
질투한다. 현명한 사람과 함께하느나, 아니면 시기하고 질투하느냐는 군자와 소인의 중요한
차이다. 현명한 사람과 함께하면 그를 추천할 수 있다. 반면 시기, 질투하면 반드시 그를
해친다.
고대에 이 두 경우에 관한 고사가 많았다. 가장 유명한 것이 관중과 포숙에 관한 고사다. 사
기 관안열전을 들추어보자. 춘추시대 이름난 정치가 관중은 젊은 시절 포숙과 사귀었다. 그
와 함께 장사를 했는데 번 돈을 나눌 때면 항상 관중이 많이 가져갔다. 그러나 포숙은 관중
이 재물일 탐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집이 가난하기 때문이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관
중이 포숙을 위해 어떤 일을 괴하다가 오히려 포숙을 곤경에 빼뜨렸는데도, 포숙은 일이란
순조로울 때도 있고 그렇지 못할 때도 있다며 관중이 어리석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관중이 여러 차례 관직에서 쫓겨났지만 포숙은 관중이 좋은 기회를 쫓지 않았을 뿐
이지 재능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관중이 전투에 참가했다가 몇 번인기 도
망쳤을 때에도 포숙은 관중이 겁이 많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집에 늙으신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이라고 했다. 관중은 공자 규를 모시고 있었는데 공자 규가 장치 싸움에서 실패하는
바람에 관중도 옥에 갇히는 수모를 당했다. 이때 포숙은 관중에게 수치를 견뎌내고 언젠가
는 그 이름을 떨칠 것이라고 했다. 관중은 공자 소백과 원수지간이었으나 포숙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했다.
게다가 포숙은 공자 소백, 즉 환공에게 관중을 적극 추천함은 물론, 자신의 상 자리까지 양
보하며 기꺼이 관중의 밑에서 일하기를 원했다. 그렇게 해서 관중의 능력을 마음껏 펼치게
했다.
이에 관중은 "날 낳아주신 분은 부모이며 날 알아준 이는 포숙이로다!"라며 훌륭한 친구에
대해 감격 어린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이와 다른 소인들의 고사를 보자. 전국시대 오늘날 하북 대명의 동남쪽에 천연의
요새를 이루고 있는 마릉이란 곳이 있었다. 이곳은 일찍이 위나라의 대장 방연이 자살한 곳
이다.
방연은 시기와 질투 때문에 뛰어난 재능의 손빈을 해쳤다가 끝내는 스스로 명망을 자초했
다.
위나라 사람 방연과 제나라 출신 손빈은 모두 귀곡자 밑에서 공부했다. 산을 내려온 방연
은 자기 나라의 혜왕 밑에서 일하며 위와 송등 열 나라를 잇달아 물리쳐 대장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 아들 방영과 조카 방총, 방모등도 장군에 임명되어 일가가 부귀와 명예를 누
렸다. 얼마 후 그의 동학 손빈이 묵자의 문하생인 금활리의 추천을 받아 위나라로 왔다.
손빈을 만나본 혜왕은 병법에 정통하고 학문이 깊은데다 춘추시대 군사 전문가로 이름을 떨
친 손무의 후손인지라 단번에 그를 부군사로 임명하려 했다. 손빈의 재능이 자신보다 뛰어
나다는 것을 잘 아는 방연은 손빈 때문에 자신이 밀려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과 걱정으
로, 몰래 혜왕을 만나 "손빈은 제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아직은 대왕을 위해 쓸모가 있는지
확실치 않사오니 우선 객경에 임명하는 것이 어떠하올는지..."라며 손빈을 경계했다. 그러
나 정작 손빈을 만나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그럴 수 없이 다정하게 맞아주었다. 손빈은 방
연을 좋은 친구로 여겼다.
얼마 뒤 느낫없이 정의 라는 사람이 사람이 손빈을 찾아와 편지 한통을 건네주었다. 뜯어
보니 숙부가 돌아가셨다는 전갈이었ㄷ. 손빈은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당시
는 위나라와 제나라가 긴장 관계에 있어 위나라 객경의 몸인 손빈은 이러지도 조러지도
못하다가 먼저 편지 한 통을 써서 고향에 부치기로 했다. 편지에는 부모를 그리워하는 간
절한 마음과 숙부의 죽음을 애도하는 정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손빈은 편지를 정의 편에
보냈다. 손빈으로서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집으로 보낸 그 편지가 자신을 깊은
고통의 구렁으로 빠뜨릴 줄을!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저의라는 자는 방연이 보낸 자였다.
손빈의 편지는 당연히 방연의 손에 들어갔다. 방연은 이를 가지고 혜왕에게 손빈이 적과
내통한 혐의를 잡았다며 모함했다. 혜왕은 크게 성을 내어 당장 손빈을 사형에 처하려 했다.
그러자 오히려 방연이 나서서 목숨만은 살려주십사 요청했다. 그러나 손빈은 무릎뼈를 모
조리 발라내는 빈형을 받았고 얼굴에는 죄인을 나타내는 글자를 새겼다. 이제 손빈은 기
어다닐 수밖에 없는 불구자가 되어 버렸다.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참을 수 없었지만 그리도 손빈은 자신의 못숨을 구해준 방연의 우
정(?)에 감격해서 선주가 전한 병법 30편을 방연에게 써주기로 했다. 극렬한 고통 속에서도
방연이 보낸 동자의 도움을 받아가며 손빈은 일을 시작했다. 죽간에 한 글자 한 글자 정성
스럽게 써내려가는 손빈의 심정은 뭐라 말할 수 없는 감회에 휘싸였다. 손빈이 받은 형벌
이 워낙 지독한 것이어서 하루에 몇 글자밖에 쓸 수 없었다. 그런데도 방연은 사람을 보내
계속 재촉했다. 어느새 손빈도 조금씩 의심을 품게 되었다. 손빈을 돌보는 동자가 손빈의
성품을 알고 나서는 자신이 일고 있는 모든 것을 손빈에게 털어놓으며 "선생님께서 병서를
다 쓰시고 나면 틀림없이 선생을 죽일 겁니다!"라고 말했다. 그제야 손빈은 모든 것을 깨달
았다.
죽음을 면키 어렵겠다고 판단한 손빈은 지금까지 쓴 병서를 모조리 없애 버리고 미친 듯
이 울며불며 발작을 하기 시작했다. 되지 우리를 엉금엉금 기며 온몸에 똥오줌을 두집어쓴
채 울부짖었다. 처음에는 의심을 품었던 방연도 마침내 손빈에게 속고 말았다. 제나라에서
이런 사실을 알게 되자 금활리를 보내 몰래 손빈을 제나라로 데리고 오게 하여 그를 군사
로 삼았다.
기원전 342년, 혜왕은 태자 신과 방연으로 하여금 10만 대군으로 한을 공격하게 했다. 한은
즉시 제나라에 도움을 청했다. 제나라는 대장에 전기를, 군사에 손빈을 임명하여 위나라 공
격에 나섰다. 이듬해 전기는 손빈이 건의한 '날마다 취사용 솥을 줄인다'는 '죽일감조'의
전략을 받아들여 거짓으로 계속 도망가는 작전을 써서 적을 유인했다. 아니나다를까, 손빈
의 예상은 적중했다. 방연은 군대를 재촉하여 밤낮으로 물러가는 제나라 군대를 뒤쫓았다.
손빈은 어두워질 무렵 마릉에 도착했다. 마릉산은 길이 험하여 매복하기에 좋았다. 손빈은
큰 나무의 껍질을 벗긴 다음 그 위에 '방연이 이 나무 아래에서 죽는구나.'라는 글을 새기게
했다.
방연이 이 나무 앞에 와서 보니 무언가 희미하게 나무에 흰 줄 같은 흔적이 눈에 띄어 자
세히 보려고 병사로 하여금 불을 밝히게 했다. 이때 갑자기 화살이 비 오듯 쏟아졌다. 위나
라 군대는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다. 병사들이 자기 눈앞에서 쓰러져가는 모습을 보면서 방
연은 패배를 시인하며 "손빈이란 놈으로 하여금 이름을 날리게 하는구나!"라고 탄식했다. 그
리고는 검을 뽑아 스스로를 찔러 죽었다. 네나라 군대는 위나라 군을 대파하고 위나라 태
자 신까지 포로로 잡았다. 이로써 위나라의 세력은 더 이상 떨치지 못하고 시들어갔다. 이것
이 역사에서 말하는 '마릉전투'이다. 포숙아는 자기보다 나은 관중을 추천하고 자리를 양보
하여 길이길이 존경을 받고 있다. 그러나 방연은 어질고 능력 있는 손빈을 시기하고 질투하
여 비열하고 잔인한 수단으로 그를 해쳤다. 그 결과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을 뿐만 아
니라 악명을 후대에까지 남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넷째, 군자는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을 완성하고, 소인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떠벌린다. 남
송 개희 연간, 영종은 방신유를 금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강화를 추진하도록 했다. 방신유는
생사를 돌보지 않겠다는 정신으로 강력한 금나라에 굴복하지 않고 당당히 맞섰다. 그 때문
에 금나라의 분노를 사서 강화는 이루어지지 못했고, 방신유는 관직을 박탈당한 채 유배되
었다. 그 뒤 왕남을 다시 금나라로 보냈고, 그는 임무를 완성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자
신의 수고와 공로를 절대 입밖에 내지 않았음은 물론, 오히려 방신유를 글그 칭찬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강화가 성공한 것은 모두 방신유가 위험을 무릅쓰고 길을 닦아놓은 덕분
입니다. 나는 그저 그 사람 덕분에 일을 성사시켰을 뿐입니다." 또 이런 말도 했다. "방신유
는 아주 어려운 가운데서도 적을 분석하고 적의 사기를 꺾어놓았습니다. 따라서 강화가 이
루어진 데에 방신유가 어려운 부분을 담당했다면 저는 쉬운 일만 했을 뿐입니다. 제가 금
나라에 있을 때 만나는 사람마다 꼭 방신유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옳고 그른 이야기는 비록
적이라 해도 감출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방신유의 공을 인정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렇게 해서 방신우는 우배에서
풀려났고 관직을 회복했다. 왕남의 행위는 사람들을 감동시켰으며 "조정에서는 왕남이 남
이 잘 한 일을 자기 것보다 더 많이 드러냈다고 했다." 남의 잘 하는 일을 드러내느냐 아
니면 잘못을 떠벌리느냐 하는 것은 역대로 자와 소인을 가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어왔
다. 군자는 인품과 덕을 바탕으로 모든 일을 공명정대하게 처리한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공적에 대해서도 진심으로 인정하고 아낌없이 칭찬한다. 반면 소인은 다른 사람의 공적을
애써 감추려 하며, 결점과 잘못은 굳이 들추어내서 까발린다. 이는 남을 공격하여 자신을높
이려는 소인배들의 본성에서 나온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정확하게 알아야 할 점이 있다. 즉
남의 미덕을 감추지 않고 남의 잘못을 떠들어대지 않는 것이야말로 자신을 저질로 타락시
키지 않는 기본이라는 점을.
소순, 소식, 소철 세 부자가 보잘것없던 시절, 그들은 미주에서 성도로 올라와 당시 지방관
이었던 장안도에게 한자리 마련해주기를 바랐다. 힘이 없던 장안도는 구양수를 찾아가보라
고 권했다. 장안도는 구양수와 함께 벼슬살이를 한 적은 있어도 정치적 주장은 서로 달랐다.
장안도의 추천을 받고 찾아온 소씨 부자에 대해 구양수는 결코 사사로운 감정으로 일을 처
리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의 시와 문장을 본 구양수는 "장차 문장으로 당대에 이름을 떨
칠" 것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마다 그들을 추천했다. 이로써 소
씨 부자의 명성은 천하에 떨치게 되었다.
다섯째, 군자는 사람이 위기에 빠지면 달려가 구하지만, 소인은 우물에 돌을 던진다. ㄴ주
군가 어려움에 빠졌을 때 어떤 사람은 습관적으로 그 사람을 경멸하여 침을 뱉고 발로 차
며 오물을 뒤집어씌워 자신의 깨끗함을 과시하려 한다. 이와는 달리 어떤 사람은 쓰러진 사
람을 일으켜 세우서는 따뜻한 마음으로 그들의 몸에 묻은 오물을 씻어준다. 서한시대의 명
장 이광은 전투에서 패해 관직에서 쫓겨나 평민이 된 적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마을
에 내려가 술을 마시고 패릉정으로 되돌아왔다. 그런데 패릉정을 지키는 정위가 이광을 막
고는 문을 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이광은 말에서 내려 "나는 전임 이 장군이다."라
며 자신을 밝혔지만 장위는 짐짓 모르는 체 "현임 장군도 야간에는 통과할 수 없거늘 하물
며 전임이야!"라며 거드름을 피웠다. 이광은 패릉정 밑에서 날이 밝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
다.
그 뒤 전투 상황이 긴박해지면서 이광은 다시 우북평 태수에 기용되었다. 떠나기에 앞서
이광은 채릉정의 정위를 데려가겠다고 요구해서는 군중 앞에서 그의 목을 베어 버렸다. 사
기에 보면 어사대부 겸 재상 대리로 있었던 한안국이란 인물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한안
국이 한때 어떤 사건에 휘말려 옥에 갇힌 적이 잇었다. 그때 전갑이란 옥리가 온갖 수단으
로 한안국에게 모욕을 주었다. 이에 한안국이 "꺼진 재에 다시 불이 붙을 수 없다고 생각하
나?"라고 묻자, 그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불이 붙으면 오줌을 갈기면 그만이지."라고
대답했다. 그 뒤 한안국은 다시 조정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한안국은 그 자를 어떻게 하지
는 않았다. 간신, 소인배는 극단적으로 사리사욕만 추구하는 세력이다. 누가 권세가 있고 뜯
어먹을 만하다고 판단되면 죽을힘을 다해 그에게 달라붙어 아부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고 판단되면 어떤 구실을 붙여서라도 그의 곁을 떠난다. 싫어져서 떠나기도 하고, 더 이상
이용 가치가 없어져 버리기도 하며, '분명한 경계선을 그어' 자신의 깨끗함을 과시한 다음
떠나기도 한다.
그러나 진정한 인간은 그 사람이 쓰러지거나 잘못을 범했을 때라도 떠나지 않는 사람이
다.
그런 사람이 큰 사람이다. 친구의 잘못을 눈감아주지는 않더라도 친구를 미워하거나 친구
의 구원을 외면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있는 힘을 다해 친구를 돕는다. 그는 원칙을 지키지만
전대 남의 불해이나 재앙을 보고 즐거워하지는 않는다. 잘못은 비찬해도 우정은 변치 않는
다. 진정한 사람은 이렇듯 영원히 진실과 동정으로 상대를 대한다.
여섯째, 군자는 큰 마음으로 살며, 소인은 밴댕이 속으로 산다. 전체를 보아 단결을 중시
하교 이해와 관용 그리고 화합을 이야기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가슴이 넓으냐 좁으냐 하
는 문제에만 한정된 것은 결코 아니다. 간신, 소인들은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에서
출발하여 자신의 존엄, 자신의 권위, 자신의 위신, 자신의 이익을 맨 윗자리에 올려놓는다.
사사로운 은혜와 원한을 그 어떤 것보다 우선시한다. 이런 자들의 품성은 저질스럽기 짝이
없어 사사로움으로 다른 사람에게 앙갚음할 생각만 한다. 너그러움이나 큰 마음은 애당초
기대할 수 없다.
오늘 내가 여기서 그를 난처하게 만들었다면, 내일 그는 저기서 나의 얼굴을 붉히게 만든
다.
오늘 내가 그를 내 문 앞에서 가로막앗다면, 내일 내가 그의 문 앞을 지나가지 못한다. 그들
은 근본적인 시시비비를 상관하지 않으며, 사물의 본질과 공사를 따지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자기에게 섭섭하게 하면 그보다 몇십 배 더 크게, 더 독하게 복수하려 든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상대를 죽음으로까지 몰아넣은
다음에라야 후련해 한다.
신당서 적인걸전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축천무후가 적인걸에게 "경이 여남에
서 정치를 잘 했는데도 경을 헐뜯는 자가 있소. 그 자가 누군지 알고 싶지 않소?"라고 대
답했다.
송나라 때도 여몽정이라는 적인걸과 비슷한 재상이 있었다. 여몽정이 처음 조정에 들어와
일을 하게 되었을 때 어떤 관리 하나가 그를 가리키며 "이런 풋내기도 정사에 참여한단
말인가?"라고 비웃었다. 여몽정은 못 들른 척 지나쳐 버렸다. 그러자 함께 있던 동료들이 씩
씩거리며 저 자가 대체 누구냐고 열을 올렸다. 그러자 여몽정은 서둘러 "일단 그 사람의
이르을 알고 나면 평생 못 잊을 걸세. 차라리 모르는 게 좋아."라며 동료들을 말렸다. 명사
의 기록도 한번 보자. 육광조란 인물도 이와 비슷했던 모양이다. 어사 손비양이 그를 탄핵하
여 한직으로 내몰린 적이 있었는데, 다시 이부로 돌아와서는 손비양을 적극 추천했다. 조용
현, 심사효와도 의견이 맞지 않았지만 마음에 두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해 그들을 추천했다.
어사 채시정, 진등운도 그를 탄핵했지만 육광조는 진등운을 자신의 친구로 만들었다.
채시정이 어떤 일에 말려 파직되자 간신이 그 틈에 채시정을 헐뜯으며 공격했다. 당시 육
광조는 남경 형부상서로 있었는데, 자신을 탄핵했던 채시정을 공격하기는커녕 오히려 공정
한 입장에서 채시정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모함한 자를 엄한 벌로 다스렸다. 이런 일들이
보기에는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사기 범수채택열전
을 한번 보자.
진나라 재상인 범수는 원래 위나라 사람이었다. 당초 그는 위나라 중대부 수고 밑에서 일했
다.
범수도 수고를 수행했다. 평소 범수의 재능을 높이 쳐주던 위나라 양왕은 사람을 시켜 범수
에게 황금 열 근을 보냈다. 이 일을 안 수고는 범수에게 '간접죄'를 씌워 위나라 재상 위제
에게 보고했다. 위제에게 보고했다. 위제는 가신들을 시켜 범수를 모욕하고 고문을 가했다.
심지어는 그의 몸에 오줌을 갈기기까지 했다. 범수는 변장을 하고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
었다. 그는 이름을 장록으로 바꾸고 진나라로 가서 재상이 되었다. 그 뒤 진나라가 위나라를
공격하려 했다. 깜짝 놀란 위나라는 서둘러 수고를 진나라로 보내 용서를 빌게 했다. 그런
데 위세 당당한 진나라 재상 장록이 다름 아닌 자기 밑에 있던 범수가 아닌가? 소구는 당
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 수고는 그대가 스스로 청운의 꿈을 이루리라고는 미처 생각지못했소. 다시는 감히 천
하의 글을 읽지 않을 것이며, 천하의 일에 참여하지 않겠소." 그러면서 수고는 자신의 죄가
"머리털 수보다 더 많으니 실리든지 죽이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범수는 수고를 살려
보내기로 하고 떠나기에 앞서 모든 제후의 사신들을 불러 크게 잔치를 벌였다. 잔치에서
범수는 수고를 당 아래에 앉혔다. 그리고는 꼴에 콩을 섞은 마소의 먹이를 그의 앞에 던져
놓고 죄수 두 사람으로 하여금 범수를 양쪽에서 붙들고 마소초럼 그것을 먹게 했다. 그와
함께 여러 사람 앞에서 죄목을 하나하나 들멱이며 꾸짖어 욕을 보였다. 그 뒤 범수는 누가
자신을 한번 노려보기만 해도 반드시 보복을 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간에 이 지경에 이
르면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없다. 물론 범수를 진짜 간신, 소인배라고는 할 수 없다.
진짜 간신, 소인은 이보다 훨씬 더 악독하다.
일곱째, 군자는 정의를 지키며, 소인은 사사로운 정에 매여 부정을 저지른다. 엄숭은 일찍
이 양계성을 순식간에 세 차례씩이나 승진시켜 병부 무선원외랑이 되게 했다. 그러나 양
계성은 나라일을 그르치는 엄숭의 죄상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는 사사로운 정을 돌보지
않고 분연히 상소를 올렸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역시 명나라 때 사람이었던 유태도
그러했다. 유태가 진사에 들었을 때 장거정이 총재로 있었다. 구 뒤 다시 장거정의 추천으
로 어사가 되었다. 그러나 조정의 폐단을 목격한 유태는 개인적인 은혜는 과감히 버리고 용
감하게 글을 올려 자신의 은사이자 수보라는 최고 벼슬에 있던 장거정을 탄핵했다.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이용해 사사로이 은혜를 베출고 이익을 갈취한 사례를 낱낱이 꼬집었다. 명
나라 조야는 이일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장거정 자신이 말한 대로 "200년
이래 처음으로 문생이 스승을 탄핵한"일이었다. 사람들은 배은망덕하고 대역무도한 짓이라
며 비난의 화살을 유태에게 돌렸다. 이 때문에 유태는 광서로 귀양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죽
었다. 여기서 우리는 유태가 장거정을 탄핵한 것이 사실이냐 아니냐, 또는 이치에 맞는 것이
었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잠시 접어두자. 다만 진리를 굳게 지키고 정의를 붙들고자 했던
그의 정신만은 칭찬받아 마땅하고, 또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아니겠는가. 간신, 소인들은
절대 그렇게 못한다. 그들은 오로지 이익만을 꾀해 이익을 보면 의리를 깡그리 잊는다. 탐욕
때문에 법을 왜곡하며 정에 얽매여 부정을 저지른다. 때때로 생사의 기로에서 또는 길흉화
복의 면전에서 진리를 고수하느냐 그렇지 못하냐, 정의를 지키느냐 지키지 못하느냐를 보면
그 사람의 마음과 품성을 가장 잘 볼 소 있으며, 그 사람의 절개와 기질을 가장 잘 확인할
수 있다.
여덟째, 군자는 공명정대하게 일을 처리하며, 소인은 사사로운 선심을 베풀어 인심을 기만
한다.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느냐 인심을 기만하여 인정을 베푸느냐? 군자와 소인을 가르
는 또 하나의 경계선이다. 명상의 기록을 보자. 성화 연간에 병부상서 여자준은 대동과 선
부의 총독으로 있었다. 재임 기간 그는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렸으나, 일부 사람들의 이익을
건드리는 바람에 적지 않게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태도를 :더욱 굳게 지
켜 마침내 몇 대에 걸쳐 이롭게 하는데 서옹했다."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라의 일을 하는
신하가 이해를 앞두고 어찌 사소한 원망을 피하려고만 할 수 있단 말인가?" 사소한 원망을
피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원망이나 시비를 일으킬 만한 일은 피하고, 상대의 환심을 살
수 있는 일만 한다는 뜻이다. 진나라 때 순욱은 오랫동안 중서에 있으면서 기밀을 점문적으
로 담당했다. 진서에 따르면 그는 성격이 신중하고 치밀했다고 한다. 많은 일들을 누구보다
도 먼저 알고 있으면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듯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언젠가 동생이
그렇게 살다가는 세상 사람과 멀어지고 말 것이라며, 승진 같은 좋은 소식을 미리 그 사람
에게 알려주면 틀림없이 형님에게 "은혜를 품게 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에 대해
순욱은 이렇게 말했다.
"신하 된 자로서 일을 치밀하게 하지 못하면 본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고, 사사로운 감
정으로 일을 처리하면 공정하지 못한 것이다. 바로 이것을 가장 경계해야 한다." 송나라 때
의 명재상 왕단도, 사람들에게 얄팍한 은혜를 베풀어 인심을 기만하는 자를 가장 첨박하게
여긴 사람이었다. 그는 평생 아무도 모르게 많은 사람을 추천하여 조정에 기용했다. 그가 세
상을 떠난 후 사관이 진종의 실록을 정리하다가 왕단이 올린 많은 글을 봄으로써 비로소 "
숱한 대신들이 그의 추천을 받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와 같은 시기의 재상 이항도 그랬다.
중서로 있으면서 그는 인물 발탁에 관한 청탁을 단호히 거절하기로 이름이 나있었다. 그러
나 그 중에서 유능한 인물은 추천하여 발탁했다. 그 아들이 그렇게 하는 까닭을 묻자 이항
은 이렇게 대답했다. "인재를 쓰는 일은 군주의 일이다. 청탁을 받아들이는 것은 사사로이
은혜를 파는 일이기 때문에 단호히 거절한 것이다. 그 은혜는 군주에게 돌려야 한다." 그러
나 간신들은 영 다르다. 그들의 행위는 간사하고 교활하다. 상대를 기쁘게 하고 비위를 맞
추며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한다. 이임보는 현종이 한휴를 재상으로 삼으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잽싸게 이 소식을 한휴에게 알려 환심을 샀다. 엄숭은 조정에서 누가
기용되면 반드시 자신이 추천했다며 떠벌리고 다녔다. 송나라 때 반양귀가 좌사로 있을 때
재상 여이호가 그의 순을 은밀히 잠아끌며 "내가 장차 자네가 승진하도록 추천할 생각이라
네."라고 속삭였다. 반양귀는 정색을 하며 "저는 마침 외직으로 내쫓아 달라고 부탁하려던
참이었는데 승진이라니 당치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자리를 물러 나오면서 반양귀는 "
사람을 기용할 수 있는 재상 자리에 있으면 유능한 사람을 발탁하면 그만이지, 왜 남의 손
은 잡고 은밀히 속삭이면서 사사로이 은혜를 베출려 한단 말인가!"라고 말했다. 상대의 마
음을 사려고 사사로이 은혜를 베푸는 척하는 간신, 소인배들에 대한 참으로 통렬한 풍자가
아닐수 없다.
아홉째, 군자는 진리를 위해 몸을 바치며, 소인은 보신을 위해 약삭빠르게 처신한다. 진리
를 추구하고 진리에 몸을 바치느냐, 아니면 보신을 위해 약삭빠르게 처신하느냐? 한 개인의
사상과 인품에 대한 유용한 잣대이다. 진정한 군자와 대장부는 자기 몸을 죽여서라도 인을
성취하고, 자기 몸을 던져서라도 의리를 지키는 것을 귀결점으로 안다. 간신, 소인배는 자
신의 못굼과 부귀영화를 하늘보다 더 중하게 여긴다. 국가의 위기, 백성의 고통에 대해서는
고개 한 번 돌리지 않는다. 사회와 백성에 손해를 입히고도 한마디 말도 하지 않는다. 내몸
의 털 하나를 뽑아 천하를 이롭게 하는 일이라도 나는 하지 않는다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자
들이다. 후한서에 따르면 순제때는 환관과 외척이 설쳐대며 권력을 주무르던 정치의 암흑기
였다. 당시 어사였던 장강은 "더럽고 악독한 기운이 조정에 가득 찼으니, 내 몸을 하나 바쳐
나라의 어려움을 쓸어 버리지 못하면 살더라도 그것은 내가 바라지 않는 바이다."라며 탄실
했다.
한안 원년, 조정에서는 민간의 풍속을 교화하기 위해 여덟명을 뽑아 순행하게 했다. 모두
가 명신이고 중신이었지만, 장강은 나이도 가장 어리고, 또 지위도 가장 낮았다. 모두가 명
을 받고 떠날 준비를 했지만 장강은 자신의 수레바퀴를 땅 속에 파묻고는 자신은 순행에 나
서지 않을 것임을 널리 알렸다. "범과 이리가 길에 넘쳐흐르는데 무슨 여우와 이리를 찾아
다닌단말인가?" 최고 통치자에 대한 강렬한 항의에 다름 아니었다. 그 뒤 장강이 세상을 떠
나자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백성들이 서로 손을 붙들고" 나와 그의 죽음을 슬퍼했는
데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굴원은 간신, 소인배와 어울리지 않으며, 악의 무리에게
머리 굽히지 않고 죽을 때까지 진리를 추구했다. 사기에 따르면 쫓겨난 굴원이 혼자서 강가
를 거닐고 있었다. 어부 하나가 꼴이 말이 아닌 궐원을 보고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냐고
물었다. "세상이 모두 흐려 있는데 나만 홀로 맑고, 모든 사람이 취해 있는데 나만 홀로 깨
어 있소." 굴원의 대답이었다. 그러자 어부는 물 흐르듯 따라가며 살지 그러냐고 했다. 굴
원은 상강에 뛰어들어 물고기 밥이 될지언정 어찌 멀쩡하게 세속의 먼지를 뒤집어 쓸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굴원의 일생은 2천여 년 전에 초나라 땅을 울렸으며, 또 지금까지도 우
리의 가슴에 ㄲ늫임없는 여운을 남기고 있다. 그런데 간신, 소인배들은 어떤가? 그들은 진리
를 감추고 정의를 박해한다. 관직과 목숨과 부귀영화만을 지키며, 국가, 민족, 사회에 대해
서는 터럭만큼의 책임감도 갖지 않는다. 사회의 기생충이 아닐 수 없다. 명나라 명나라 때
위기라는 인물은 "시비를 가릴 줄 아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말이
아니더라도 한 인간으로서 어떠해야 하는지는 너무도 분명하지 않은가?
열째, 군자는 떳떳하게 일을 꾀하지만, 소인은 등 뒤에서 음흉하게 일을 꾸민다. 공명정대
하냐 아니면 몰래 흉계를 꾸미느냐, 말과 행동이 한결같으냐 아니면 다르냐, 겉과 속이 하
나냐 아니면 겉으로는 떠받드는 척하면서 곳으로는 어기느냐? 이상은 군자와 소인을 구분하
는 뚜렷한 표식이다. 할 말이 있어도 면전에서는 하지 못하고 등 뒤에서 이러쿵저러쿵 지
껄여댄다면, 이것은 이미 인격의 문제이다. 그것이 더 나아가 등 뒤에서 일을 꾸며 몰래 사
람을 해치고 음흉한 권모술수로 발전한다면 그것은 완전히 간시, 소인의 행렬에 들어간 것
이다. 양서의 기록을 보면, 양나라의 태자 세마 유포는 "성품이 온화하고 정직하여 사람과
사귀면서 잘못은 그 자리에서 지적하고, 물러나서는 그 사람의 장점을 칭찬했다."고 한다.
또 신당서를 보면 측천무후가 '어떻게 하는 것이 충성인가'를 놓고 여러 사람을 시험한
적이 있었다. 나름대로 의견을 내놓았지만 모두 무후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로지 어사대
부 정유츙만이 "물러나와서는 군주의 잘 하는 일을 칭찬하고, 조정에 들어가서는 군주의 잘
못을 바로잡는 것"이라고 대답하여 무후의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간신, 소인은 이와 반대
다. 그들은 사람을 보는 자리에서 칭찬하고 뒤돌아서서는 욕을 한다. 그 앞에서는 떠받들지
만 등 뒤엣는 해코지한다. 겉 다르고 속 다르며, 볼 때 다르고 안 불 때 다르다. 바로 1분
전에 입에 거품을 물어가며 마구 욕하다가도 그 사람이 들어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세
웃는 낯을 하고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다. 나아가 음모와 흉계 등 갖은 방법으로 사
람을 모함하고 해친다.
송사 채확전의 기록을 보자. 채확과 왕규는 함께 일하는 사이였다. 채확이 왕규 앞에서 "공
은 재상 자리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틀림없이 중서령이 될 겝니다."라고 말했다. 중서, 문하,
상서를 합쳐 삼성이라 하는데, 그 중에서도 중서령이 가장 중요한 자리였다. 황규는 채확
의 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채확은 황제 앞에서 "삼성의 장관들은 그 자리가 높기
때문에 굳이 중서령이니 하는 자리를 따로 둘 필요가 없습니다. 좌우복시가 각기 두 성의
시랑을 겸하면 충분합니다."라며 전혀 딴 소리를 했다. 채확은 갖은 수단과 방법 그리고 음
모로 황규가 중서령이 되는 것을 막았다. 볼 때 다르고 돌아서서 다르며, 볼 때는 사람인데
돌아서면 귀신과 같은 존재들이다.
등 뒤에서 수군거리지 않고, 등 뒤에서 욕하지 않으며, 등 뒤에서 해치지 않는 것, 이것
은 인격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사람 축에 끼지도 못하는 '두 얼굴'의 음
모가가 되지 말라! 사실 현실 속에서 군자와 소인의 행위는 곳곳에서 구별되기 마련이다.
간신으로 떨어지지 않고 소인의 대열에 끼이지 않으려면 가장 중요하고 관건이 되는 핵심
을 사사로운 욕심을 버리고 공명정대한 마음을 세우는 것이다. 송나라 때 사람 양만리는 답
진국재서에서 "사람의 마음에 병든 것치고 사리사욕만큼 심한 것은 없다."라고 했다. 뜻인
즉 인간의 사상에 든 병으로는 사리사욕이 가장 크다는 것이다. 사심을 가지고 있으면 무슨
일이든 저지른다. 사람이 사사로운 마음을 품으면 나쁜 말, 헐뜯는 말, 모함하는 말을 서슴
지 앟고 한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고, 자기와 다른 사람을 배척하며, 동지를 해치기도 한
다. 공은 탐내고 잘못은 감추며 자기보다 잘난 사람을 시기하고 질투한다. 강자 앞에서는 허
리를 굽히고 무릎을 꿇는다.
권력자 앞에서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다. 못하는 일이 없으며 하지 않는 일이 없다. 따
라서 '사'는 역대로 충성스럽고 성실하며 정직한 사람의 가장 큰 '적'이었다. 원나라때 장
양호는 목민충고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가난해도 떳떳하게 사는 게 낫지, 사리사욕을 채워 부귀하게 살고 싶지 않다. 내가 손해
를 보고 양보해야지, 남에게 손해를 끼쳐서는 안된다." 역사상 사리사욕을 위해 영혼을 팔아
치운 소인들은 숱하게 많았다. 물론 정직하고 공평무사한 인품의 성인군자도 적지 않았다.
백거이의 일생은 여러 차례 귀양을 가는 등 기구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청운의 뜻
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음은 물론, 그 뜻을 더울 굳게 다졌다. 산과 들을 날아 다니는 학의
모습, 얼마나 고고하고 깨끗해 보이는가! "배가 고파도 썩은 쥐는 쪼지 않으며, 목이 말라도
도적의 샘물은 마시지 않는 학." 그러나 그것도 잠시, 탐욕스러운 부리에 큰 변화가 일어난
다. "작은 연못 속에서 몸을 움츠리고, 닭들의 앞에서 먹이를 다툰다." 이 얼마나 가슴 아
픈 일인가! 밥 한 그릇을 위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하물며 높은 자리와 후한 녹봉이야!
사람들아, 경계할지어다!
11. 애매함은 신중히 살펴야 한다.
'간'은 엄숙한 개념이다. 이 개념은 그 자체로 특정한 포용성을 갖고 있으며 엄격한 규
정성도 갖고 있다. 멋대로 축소할 수도, 확대할 수도 없다. 애매함은 신중히 살펴야 한다.
'간'에 과학적인 한계를 그을 때는 '간과 방법, 책략을 구별해야 하며, '간'과 결점, 착오를 구
별해야 하고, 그것을 총명, 재능과 구별해야 하며, 병가의 권모술수와도 구별해야 한다. 그리
고 개인적인 감정으로 누구를 간으로 의심해서도 안 되고,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고 간으로
배척해서도 안 되며, 원한 관계라고 간으로 깎아내려서도 안 되고, 순간적 잘못이나 작은 단
점으로 간으로 몰아서도 안 된다.
기원전 99년 이릉은 5천의 보병을 거느리고 흉노를 치기 위해 출정했다. 30여 일을 행군
한 끝에 준계산에 이르러 흉노 차제후 선우의 3만 군사와 맞닥뜨렸다. 접전 끝에 이릉의 군
대는 흉노군을 수천 명 죽였다. 차제후 선우는 원군을 불렀고 이내 8여만여 기병이 달려왔
다. 이릉은 후퇴하는 수밖에 없었다. 흉노군은 양군으로 나누어 이릉의 군대를 가운데로 몰
았다. 싸우면서 후퇴하고 후퇴하면서 싸우길 며칠, 이름을 알 수 없는 계곡으로 후퇴한 이릉
은 세 차례 이상 부상당한 병사는 수레에 앉는 것을 허락하고, 두 차례 이상 부상당한 병사
는 수레를 끌도록 했으며, 한 차례 부상당한 병사는 계속 싸우도록 해 다시 3천여 명의 흉
노병을 죽였다. 그러나 이미 고립된 이릉의 군대를 흉노군이 놓아줄 리 만무했다. 퇴로는 끊
어졌고 화살은 비 오듯 날아들었다. 항복하라는 목소리가 점차 커졌다. 이릉의 군대는 하루
만에 50만 개의 화살을 날렸고 마침내 화살은 바닥이 났다. 이릉은 수레 등 무거운 장비를
버리고 전진하게 했다. 이때 남은 군사는 3천 명 정도.
또 다른 이름 모를 계곡으로 들으선 이릉의 군대. 흉노는 계곡의 입구를 막았다. 밤에 진
영을 돌던 이릉은 "우리에게 각각 10개씩의 화살만 있더라도 변벙을 지탱할 수 있을 텐데!"
라고 탄식했다. 그러나 화살은 없었다. 밤중에 이릉은 북을 울리며 포위를 뚫으라고 명령했
다. 그러나 북은 이미 찢어져 소리가 나지 않았다. 이릉은 사방팔방으로 부딪쳤다. 적의 주
의를 흩어좋는 한편, 누군가 빠져나가 이 상황을 알리기를 바랐다. 이릉과 장군 한연년은 말
에 올라 고개를 넘어 남쪽으로 달아났다. 흉노병은 추격을 멈추지 않았다. 이릉의 몸에는 짧
은 병기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점점 좁혀 들어오는 적의 포위망에서 벗어날 길은 없었다.
마침내 한연년은 화살에 맞아 전사하고 이릉은 포로가 되었다. 이릉이 포로가 됨으로써 오
랫동안 지속되었던 비장한 전투가 끝났을 뿐만 아니라, 또 한 사람 위대한 역사가이자 중국
역사학의 아버지 사마천이 궁형을 당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한 문제는 이릉이 자살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대선들마저 무제의 비위를 맞추느
라 한결같이 이릉은 자살해야 한다고 목총을 드높였다. 그러나 사마천의 생각은 달랐다. "이
릉은 평소 늘 적을 죽여 나라에 버답하는 것을 최대의 바람으로 알았다 한데 지금 불행하게
도 적에에 패했다. 그런데도 대신들은 이릉을 비방하기만 하니 실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릉은 5천 보병만으로 사막 깊숙이 들어가 8만여 기병과 맞서 싸웠다. 화살은 떨
어지고 힘도 다했지만 백병전으로 반격을 가했다. 그런데도 부하들의 마음은 하나도 흩어지
지 않았으니 자고로 명장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비록 포로가 되어 강한 적에 굴복했지만
그는 여전히 천하에 이름을 남기기에 충분하다." 요컨대 사마천은 이릉이 자신의 책임을 다
했으며, 치욕을 견딘 것은 결코 본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틀림없이 다른 계획이 있어 결
국은 조국에 보답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것이었다.
얼마 뒤 흉노는 19년간 억류되어 있던 than를 석방하여 한나라로 돌려보냈다. 이때 than
는 이릉에게 함께 돌아가자고 권했다. 그에 대한 이릉의 대답은 이러했다. "당시 내가 죽지
않은 것은 앞선 영웅들의 행동을 본받으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큰 뜻을 이루기도 전에 전
가족이 유철에게 몰살당했고, 늙으신 어머니마저 불행을 면치 못했다. 하늘을 우러러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렸는데 그것이 피가 되어 흘렀다." 치욕을 참고 견딘 큰 뜻을 소인들이 어찌
느낄 수 있을 것이며, 그 침통한 심정을 가볍고 교활한 무리가 어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어쩌면 바로 여기에 이릉과 사마천의 비극이 자리잡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마천과 이릉은 평소 어떤 교류도 갖지 않았다. 함께 술을 마신 적도, 대화를 나눈 적도
없다. 사마천은 이릉을 "늘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국가가 위급할 때 죽을 수 있는" 인물
이라 생각했다. 실제로 이릉은 화살아 떨어지고 군사들은 기진맥진한 절대절명의 상황에서
도 있는 힘을 다해 적과 싸웠다. 이릉의 지휘 아래 병사들 모두 눈물을 흘리며 부상당한 몸
으로 화살 없는 활을 치켜들고 적의 칼날을 향했다. 사마천은 감동했다. 이는 언제 어디서든
지 자랑스럽게 말 할 수 있는 경우라 생각했다. 그러나 개인의 부귀영화만 추구하고 자기
목숨만 보전하려는 대신들은 모두 소리 높여 비방과 중상을 일삼았다. 사마천은 분개했고,
또 상심했다. 어쩌면 사마천이 이릉의 투항이 갖는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
렇다고 해도 그토록 가혹한 형벌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그가 '인간은 언젠가 한 번은 죽는다'는 이치를 몰랐을 리 없다. 그러나 "지난 일을 서술
하고 미래를 생각하기" 위해, "하늘과 인간의 사이를 추구하고 고금의 변화를 소통시켜 일
가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 그는 살아남아야만 했다. 사기를 완성할 때까지. 이 억울한 역사
적 사건은 죽음을 무릅쓰고 적과 싸운 이릉을 억울하게 왜곡했을 뿐 아니라,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을 비명에 죽을 위기에 몰아넣어 자칫 사기가 세상 빛을 못 보게
만들 뻔했다. 이 얼마나 침통한 일인가!
이 때문에 우리는 이 책을 끝맺으면서 몇 마디 더 보태 섣부른 판단을 경계하고자 한다.
'간'은 엄숙한 정치적, 윤리도덕적 개념으로서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이 개념을
사용할 때에는 다음과 같은 점에 주의해야 한다.
간과 방법, 책략은 반드시 구별해야 한다. 960년 후주의 전전도점검 벼슬에 있던 조광윤은
진교역에서 송 왕조를 세웠다. 그러나 이 왕조 역시 다른 왕조와 마찬가지로 언제 거꾸러질
지 몰랐다. 이때 조광윤의 측근으로서 갖은 지혜를 짜낸 재상조보가 조광윤에게 참언 비슷
한 말을 속삭였다. 조보는 석수진 등 몇몇 고위 장군들을 잠재적인 위험 인물로 지적했다.
그러자 조광윤은 "그들에게 태산과도 같은 은혜로 대하였기에 절대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오."라며 보증했다. 그러자 조보는 "후주 황제 시영 역시 폐하께 태산과 같은 은혜로 대
했지만 지금은 이오 같습니다. 그리고 지금 당장 그들이 반역을 주동한다는 말이 아니라, 저
들이 제대로 통제할 수 없는 인재들이라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만일 부하들이 부귀
영화에 눈이 멀고 또 황제의 옷을 걸치고 싶어하는 날에는 반역할 생각이 없어도 어쩔 수
없을 것이라는 말입니다."라고 말했다.
조보의 이 말은 조광윤의 정신을 번쩍 들게 했고, 그로 인해 얼마 뒤 '배주석병권'의 사건
이 일어났다. 전체적인 배경을 생각하지 않고 본다며, 조보는 궁색학 어첨을 일삼는 인물로
조광윤에게 목적을 이룬 뒤 도와준 사람을 저버리라고 종용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
이다. 그러나 이후의 과정으로 볼 때 그 조치는 조씨 정권을 공고히 해서 군벌이 여기저기
서 날뛰는 혼란한 국면에 종지부를 찍은, 확실히 적절한 책략이었다.
때로는 전체적인 국면을 안정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투쟁적 책략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강경한 수단이 될 수도 있고, 또는 우회적이거나 타협적인 방법과 방침이 될
수도 있다. 전체적인 상황을 고려하여 분석해야지, 개별적 현상 자체만을 가지고 간으로 찬
단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예이다. 역사는 단순하게 보아서는 안 된다.
월왕 구천을 예로 들어보자. 기원전 494년 오와 부차는 월나라를 격차하고 구천을 포로로
잡았다. 오왕 부차는 구천에 대해 두 가지 처리 방식을 놓고 고민했다. 과감하게 없애 버리
느냐, 아니면 인질로 남겨놓느냐. 그런데 구천은 전적으로 아첨과 뇌물에 의지해 목숨을 보
전했다. 구천의 무기는 아첨과 인내였다.
한번은 오왕 부차가 병이 넜다. 구천은 몸소 부차를 찾아 부차의 대변 맛을 본 다음 기쁜
목소리로 "환자의 대변이 향기로우면 목숨이 위태롭고, 구리면 곧 낫는다고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만약 구천이 뒷날 재기하지 못했더라면 당시의 그런 행동은 그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구차스러운 행동밖에는 안 되었을 것이다. 심하면 후안무치한 행동으로 만고의 웃음거
리가 되었거나, 촉한 유비의 아들 우선아두나 송 휘종만도 못한 가련한 기생충 같은 존재라
고 놀림을 당했을 것이다.
간과 결점, 착오를 구별해야만 한다. 사람은 성현이 아닌 이상 잘못이 없을 수 없다. 설사
성현이라 하더라도 잘못을 저지를 때가 있다.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는 것, 이것은 어찌 보면
매우 정상적이다. 이러한 정상적인, 고의가 아닌 결점과 착오를 저지른 사람은 간인에 포함
시키면 안 된다. 위장은 일찍이 태자 이건성의 세마였던 적이 있었다. 신당서에 따르면 진왕
이세민이 큰 공을 세우고 명망이 높아져 태자 이건성의 자리를 직접 위협할 가능성이 있자,
위장은 이건성에게 일찌감치 손을 써서 위협을 제거하라고 은근히 권했다.
뒷날 이세민이 '현무문 정변'을 성공으로 이끈 다음, 위징에게 "어째서 우리 형제 사이를
이간질하려 했는가?"라고 물었다. 위징은 단호한 어조로 "태자께서 일찌감치 내 말을 들었
더라면 오늘과 같은 화를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오."라고 대답했다. 이세민은 '각자의 주관적'
사고에 잘못이 있는 것이지, 도덕적 품성에 문제가 있는 것이 결코 아님을 간파하고 그를
용서해서 간의대부로 삼았다. 명나라 때의 '삼양', 즉 양사기, 양영, 양부는 명나라 대신들 중
에서도 명상으로 잡혀온 인물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입신 과정을 보면 오점이 없었던 것이
결코 아니다. 예를 들어 이 점을 밝혀볼까 한다. 그러니까 영락 15년, 영락제는 사랑하는 황
태손을 위해 낙녕 호씨를 비로, 추평 손씨를 빈으로 간택하여 혼인시켰다. 빈으로 간택된 손
씨는 용모가 빼어나게 아름다웠을 뿐만 아니라 꾀도 이만저만한 것이 이나었다. 호씨는 비
로, 자신은 빈으로 각각 달리 궁으로 들어온 이상, 뒷날 황태손이 즉위하면 황후와 귀비로
갈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손씨는 늘 불만이었지만 겉으로는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용모는 물론, 여러 가지 점에서 호씨는 손씨를 따라갈 수 없었다.
그 뒤 선종이 황제가 되자 손귀비는 자신의 욕망을 서서히 실현시키고자 했다. 그런데 최
대의 장애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손귀비 자신을 몸소 골라 입궁시킨 선종의 생모 장태후였
다. 장태후는 식견이 남다른 인물이었다. 손씨는 처음 그녀의 눈에 들어 궁에 들어왔지만,
장태후는 호씨의 현명함을 더 좋아했다. 그리고 손씨의 속셈을 일찌감치 알아채고 있었다.
따라서 손귀비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는 선종도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손
귀비를 위해 선종은 언젠가는 태후라는 장벽을 넘으리라 생각했다. 선종은 태후가 여론을
가장 중시하며 여러 사람의 뜻을 거슬리기를 꺼린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군신
들로 하여금 손빈을 세우고 호황후를 내치자는 주장을 끊임없이 하게 한다면 태후도 여러
사람의 뜻을 거슬리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군신들로 하여금 그런 얘기를 꺼내게 하려면 호황후의 두드러진 단점을 찾아내고,
아울러 손비에게는 그와 대비되는 정점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호황후를 압도할 후 있다.
호황후의 단점이라면 뭐니뭐니 해도 다년간 왕손을 낳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세가지
불효 중 후손이 없는 것이 가장 큰 불효'라고 하지 않았나. 그러나 사정은 손비도 마찬가지
여서 다른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선종은 심복 태감과 은밀히 상의한 끝에
선덕 2년 11월, 손귀비로 하여금 순조롭게 왕자 주기진을 출산케 하는 데 성공했다. 이 아이
는 물론 손귀비 소생이 아니었지만 선종의 혈육임에는 틀림없었다. 비밀리에 일을 깨끗이
처리하기 위해 증거를 없앴다. 그러나 아무리 빈틈없이 울타리라고 바람이 새어 들어가는
법, 그 당시조차도 왕자가 손비의 소생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어쨌든 이는 계획을 행동으로 옮길 때가 되었다는 분명한 신호였다. 현명한 재상으로 칭
찬이 자자했던 양사기, 양영마저도 이 일에 적지 않은 힘을 보탰다. 그 중에서도 양영은 앞
장서 나섰다. 폐립에 대한 논의가 바로 그에게서 나왔으니까. 명나라 사람 담천은 그의 저서
국각에서 양영을 두고 "앞장서서 허튼 소리를 올려 임금의 덕을 거듭 더럽힌"자로, 임금을
도와 포악한 짓을 저지르게 한 어첨배로 보았다. 양사기는 양영처럼 노골적이지는 않앗지만
그 역시 뒤처리를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해 선종을 가렸으니 역시 아첨배 신하의 행동에 가
까웠다 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각에서의 양사기에 대한 비평은 한결 부드러워 그저 양사기는
"그 잘못을 메우려 했으니 역시 구범에 따랐다."고만 했을 뿐이다. 사실 봉견사회의 도덕으
로 보아 아리따운 비를 총애하여 황후를 폐하는 것은 여간 덕을 잃은 처사일 뿐만 아니라,
자칫하면 음탕무고도하다는 평가를 들을 위험이 있다. 현명한 신하로서 이런 것을 보고도
아무 말 하지 않은 것 자체가 이미 바르지 못한 처신이거늘, "앞장서서 허튼 소리를 올리거
나" "그 잘못을 메우려 했으니" 어디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삼양'이 당대의 잘난 재상으로
껍히면서도 그렇지 않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주로 위와 같은 사건 때문이다. 그들은
선종의 마음을 따라 왔다갔다했지, 황제의 덕에 먹칠을 하는 바르지 못한 행위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직언하지 않았고, 더군다나 진리와 정의를 견지하지도 못했다.
선종의 노력과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거대한 압력을 받은 호황후는 병을 핑계로 몇 년 동
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특히 황후 자리에서 물러나 일찌감치 나라의 근본을 세우겠
노라 자청했다. 손비는 진심인 척 한 차례 사양한 다음, 선종 3년 3월에 황후의 보좌에 올랐
다. 명사에서는 이를 두고 "황후가 아무 잘못도 없는데 폐비가 되었다. 천하가 이 소식을 듣
고는 가련해 했다."고 적고 있다. 실로 도덕적 정서를 정확히 반영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
렇다면 이 사건의 전모를 알고 난 우리는 도대체 '삼양'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여기서
잠시 "앞장서서 허튼 소리를 올린" 양영은 접어두고, "그 잘못을 메우니 또한 규범에 따랐
다."는 선종의 부덕이 드러나지 않게 뒤에서 은근히 도운 양사기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사실
이런 사람이나 이런 일은 현실 생활에서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그가 현명한 재상이었냐 아
니냐를 따로 논하는 것이 옳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때문에 그를 '간
상'에 밀어넣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목욕을 하는데 강물이나 바닷물이 다 필요하지는않다. 때만 씻으면 되니까. 말이 굳이 천
리마일 필요는 없지 않는가? 달리기만 하면 되니까. 선비라고 해서 꼭 현명한 선비라야 하
는가? 도만 알고 있으면 되었지. 여자가 꼭 귀한 집 출신이어야 하나? 정숙하면 그만이지."
인간에 대한 평가는 "한 가지 실수로 큰 덕을 가릴 수 는 없는것"이다. 물론 큰 덕에 있다
고 해서 그 한 가지 실수를 감추어서도 안된다. 이래야 비교적 공정해지는 것이 아닐까?
간과 총명, 재능은 반드시 구별되어야 한다. 곽자의는 당나라 때 3군을 호령하며 그야말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중신이었다. 신당서와 자치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그의 넷째 아들
곽난은 당나라 대종 이예의 승평 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한번은 곽자의의 생일 때 아들,
며느리들이 모두 짝을 지어 축하를 드리러 왔는데 공주만 빠졌다. 이 때문에 곽난 부부는
입씨름을 벌였다. 곽난은 화가 나서 "당신 아버지가 황제라고 해서 대단하게 생각하지 마시
오. 내 아버지가 황제가 되고자 했다면 못했을 줄 아시오?"라고 쏘아붙였다.
이 말에 교만한 공주는 발끈해서 곧장 수레를 타고 궁으로 들어가 아버지 대종에게 분풀
이를 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대종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아직 몰랐더냐? 그 사람 아버
지는 확실히 그랬다. 만약 그가 황제가 되고 싶었다면 이 천하가 어찌 우리 집안의 것이 되
었겠느냐?"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공주를 다시 곽씨 집안으로 돌려보냈다. 이를 안 곽자의는
즉시 아들을 옥에 가두고 몸소 입조하여 대종에게 벌을 내려주십사 요청했다. 그러자 대종
은 그를 달래며 "듣고도 못 들은 척 보고도 못 본 척할 줄 모르고서야 어떻게 집안 어른 노
릇을 할 수 있엤소? 젊은 애들의 사소한 이야기를 심각하게 받아들여 어쩌겠단 말이오?"라
고 말했다.
그 뒤 대종이 세상을 뜨고 덕종 이괄이 즉위했다. 이때 우금오 장군 배서가 곽자의가 금
령을 어겼다며 그를 고소했다. 누군가가 "어쩌자고 곽공을 고발한단 말입니까? 그의 지위를
모르는 건 설마 아니겠죠?"라고 했다. 그러자 배서는 "바로 그의 지위 때문에 그렇게 한 것
이다. 곽공의 명망은 너무 높고 권세는 너무 막강하다. 황상이 막 즉위했으니 틀림없이 여러
사람들이 곽공에게 붙어 말을 제대로 듣지 않을 게야. 지금 내가 곽공을 고발 한 것은 황상
의 의심을 풀기 위한 것이야."라고 말했다. 자치통감에는 이런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위나
라 문후가 악양으로 하여금 중산국을 공격하게 하여 점령했다. 그리고는 자기 아들 위격을
그곳 영주로 삼았다. 그러던 어느날 문후는 좌우 대신들에게 "나는 어떤 군주요?"라고 물었
다. 대신들은 모두 어진 군주라고 말했다. 이때 임좌만은 "중산국을 얻은 다음 동생을 그곳
에 봉하지 않고 아드님을 봉했으니 어찌 어진 군주라 할 수 있습니까?"라고 말했다. 문푸는
버럭 화를 냈고, 임좌는 서둘러 그 자리를 물러나왔다. 문후가 이번에는 적황에게 물었다.
그러자 적황은 "어진 군주이십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대가 그걸 어찌 아오?" 화가 덜 풀
린 문후는 다그치듯 물었다. 그러자 적황은 이렇게 대답했다.
"신이 듣기에 군주가 어질고 후덕하면 대신들이 솔직해진다고 했습니다. 방금 전 임좌는
솔직하게 자신의 견해를 말했고, 저는 바로 이 점에 근거하여 어진 군주라는 것을 안 것입
니다." 문후는 매우 기뻐 적황으로 하여금 임죄를 다시 불러들이게 해서 몸소 그를 맞이해
상객으로 우대했다. 이와 비슷한 경우는 현실 생활에서 아주 많다. 사기에는 "우맹이 초나라
장왕에게 간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초나라 장왕은 어떤 말 한 필을 특별히 사랑하여 비
단을 덮어주고 호화스러운 방에 장막이 없는 침대에서 자게 했으며, 달콤한 대추를 먹이로
주었다. 그 결과 극진한 대우를 받은 이 말은 비대증으로 죽고 말았다. 장왕은 너무 가슴이
아파 신하들로 하여금 염을 하고 관곽을 마련해 대부의 의례에 따라 장례를 치르게 했다.
우맹이 이 소식을 듣고는 궁으로 달려와 하늘을 우러러 대성통곡을 했다. 장왕은 깜짝 놀라
왜 우냐고 물었다. 그러자 우맹은 "그 말은 대왕께서 몹시 사랑하신 말입니다. 당당한 초나
라가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대부의 의례에 따라 장례를 지내는 것은 너무 빈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마땅히 국왕의 예의에 따라 장례를 지내주어야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장왕은 의아해서 물었다. 그러자 우맹은 "저는 꽃으로 수놓은 아름다운 옥으로 관을 삼고,
각국 대표를 초대해 조문하도록 했으면 합니다. 또 사당을 지어 만호 정도의 큰 현을 골라
매년 거리지 않고 제사를 지내게 하여, 대왕께서 사람은 경시하고 말은 중시한다는 사실을
천하가 알게 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자왕은 우맹의 말뜻을 알아채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
쳤다. 원래의 생각을 바꾼 것을 물론이다. 총명과 재능은 인간에게 귀한 재산이 되어왔다.
그것은 모순을 해결하고 문제를 푸는 데에 효과적이고 적극적인 작용을 한다. 그러나 사람
들의 인식 능력에는 편차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교활함, 심지어는 간사함에 포함시키기가
아주 쉽다. 말을 잘 하면 교언영색으로 몰리고, 재치있게 일을 처리하면 투기취교로 몰리며,
민첩하게 두뇌를 굴리면 속임수로 몰리고, 우회적으로 돌려 말하면 아첨한다고 몰아붙인다.
그 까앍은 사람들이 간신의 특징과 변간의 표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을 잘 하고, 두뇌가 총명하며, 일을 잘 처리하고, 생각과 판단을 잘 하는 것을 간으로 모
는 것은 큰 착오다. 우리는 영원히 멍청함을 '충직함으로 착각하지 않길 바란다. 물론 총명
함과 재치가 간으로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아울러 지혜의 꽃을 보다 아껴서 우리 생활
에 생기가 넘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간과 병가의 권모술수는 반드시 구별해야 한다. "병이란 나라의 큰일이자, 존망의 근거이
므로 제대로 살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병법의 군모술수는 그 근원이 멀고도 깊으며,
또한 넓고 정교하다. 그리고 병서는 그것을 집중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병서는 전쟁의 산물
이자 고대 군인의 피와 땀 그리고 지혜의 결정체이다. 병서에는 예지와 총명에 대한 칭찬으
로 가득 차 있으며, 어리석음에 대한 채찍질도 잊지 않고 있다. 유치하고 무지함에 대해서는
경고를 아끼지 않는다. 많은 경구와 장점은 고대인의 총명함과 지혜를 충분히 표현하고 있
다. 군사학자들은 이런 것들을 배워 군사학의 보물 창고로 걸어 들어가며, 그를 통해 승리술
을 깨우치고, 그를 통해 지혜의 성스러운 불을 태운다. 동서고금을 통해 얼마나 많은 모신과
장수들이 병법의 권모술수로 적을 제압했으며, 또 그를 통해 파란만장한 활극이 얼마나 연
출되었던가?
악의는 전쟁사에 있어서 자못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연나라 소왕이 유능한
인재를 발탁하는 과정에서 상장군이 되었다 .그로부터 5년 동안 악의의 지모와 선전으로 보
잘것없었던 연나라는 제나라의 70여 개 성을 차지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소왕이 죽고
난 다음 제나라의 장수 전단이 은밀히 연나라로 첩자를 보내 다음과 같이 이간책을 썼다.
"제나라의 성 중에 연나라에 항복한 것이라곤 두 군데밖에 없다. 진작 공격하여 차지하지
못한 까닭은, 악의와 새 임금 사이에 틈이 벌어져 악의가 전쟁을 질질 끌려 하고 또 자신은
제나라에 남아 임금이 되려 하기 때문이다." 멍청한 새 임금 혜왕은 제나라의 이간책에 빠
져 기겁을 보내 악의의 자리를 대신하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 악의가 조나라로 투항한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군사적 두뇌라곤 전혀 없는 기겁은 계속 패해 70여 성을 모조리 다시 빼
앗겼고, 수년간 힘을 들여 쌓은 공든 탑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사기에는 또 진평이 법증에 대해 사용한 계략이 나온다 항우 진영에서 범증은 큰 뜻과 신
견을 갖춘, 항우가 가장 중시하는 유일한 지혜의 보따리나 마찬가지였다 .유방으로서는 범증
을 제거하지 않으면 패업을 달성하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진평의 계략을 받아들여 그와 하
웅 사이를 이간시키기로 했다. 한번은 항우가 보낸 사자가 유방 진영에 왔을 때의 일이다.
유방은 진수성찬을 차려놓은 후 사신을 만난 다음, 의외라는 표정으로 "범증이 보낸 사자인
줄 알았더니 항왕의 사자였군." 하며 진수성찬을 치우고 보잘것없는 식사로 바꾸게 했다. 사
신이 돌아가 이 사실을 항우에게 보고하자 속 좁은 항우는 즉시 그 말을 믿고 범증을 의심
하여 그때부터 범증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범증은 항우와 더불어 일을 꾀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는, "천하의 일이란 대체로 정해진
것, 이제 군주가 알아서 하라."며 훌쩍 떠나 버렸다. 범증을 잃은 항우는 결국 해하 전투에
서 패해 자살하고 말았다. 훗날 유방은 항우를 물리치고 천하를 통일한 경험을 자랑스럽게
늘어놓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군영 안에서 천리 밖의 승부를 결정짓는 것은 나보다 자방이
낫고, 국가를 진정시키고 백성을 달래며 군량미를 끊임없이 공급하기로는 나보다 소하가 낫
고, 백만 대군을 이끌고 싸웠다 하면 반드시 이기고 공격했다 하면 반드시 취하는 것이야
나보다 한신이 훨씬 낫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인걸이지만 모두 내가 기용했기 때문에 천하
를 얻었다. 항우는 범증이 있었지만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천하를 잃은 것이다."
"병이란 속임술이다." 손자의 이 명언은 어떤 의미에서는 군사 투쟁의 근본적 특징을 표
현한 것이다, 군사 모략의 중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군사상의 속임수를 간과 함께 놓고 이야
기할 수는 없다. 적과 내가 싸우는 마당에는 솔직히 계략과 모략에 익숙하면 익숙할수록, 또
치밀하면 치밀할수록 좋은 것이다. 전쟁에서 일부러 모습을 꾸민다거나 적을 속이는 일은
실로 무궁무진하게 나타난다. 지혜가 바닥나고 용병술이 달려 군사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
던 송나라 양공이나 마속같은 인물은 늘 병가의 멍청이, 소인배로 평가받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병가의 권모술수를 간신의 도와 혼동해서는 절대 안 된다. 이를 좀더 확대시켜 보자
면, 한 개인의 일이나 생활 속의 지혜를 간과 동일시해서도 안 된다. 또 한 개인의 군사, 전
략상의 모략을 그 성품과 한데 섞어서도 안 된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이다.
우리는 간신을 가려내고 제압하는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첫째, 개인적인 좋고 나쁨으로 간을 지목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사상, 감정, 스타일은
제각각이다. 어떤 사람은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고 바른 소리하기를 좋아하며, 어떤 사람은
침묵을 지킨다. 어떤 사람은 직선적인 것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완곡한 것을 좋아한다.
시끌벅적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차분하고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
다. 그 중에는 우리의 감정과 맞는 사람이 잇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마음에
맞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도 있다. 눈에 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눈에 거슬리는 사람도 있다. 만약 이런 것으로 충,간을 판별하려 한다면 편견을 면키 어려울
것이며, 오류가 발생할 것이다. 우리가 천채의 행성이 제각기 다른 궤도를 따라 운행하고 있
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각기 다른 생활방식과 사유방식도 인정해야만 한다. 누가 말을 잘
한다고 해서 교언영색이라 해서는 안된다. 지도자와 가까우면 아부한다고 하고, 군궁에 접근
하면 인심을 사기 위해서라고 하는 등등은 모두 편견이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 머릿속
에서 이런 완고한 편견과 단편성을 제거하여 보다 폭넓은 잣대로 애체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사는 간축객서라는 글에서 "태산은 보잘것없는 흙이라도 사양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높은 것입니다. 강과 바다는 보잘것없는 개천의 물이라도 거부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그토록 깊은 것입니다. 진나라 사람이 아니면 모두 국경 밖으로 내쫓은 것은 군대
를 다른 나라에 주는 것이자 양식을 적에게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둘째, 자기 마음을 기준으로 누구를 간으로 의심해서는 안 된다. 열자 설부에 보면 "도끼
를 훔쳐갔다고 이웃을 의심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옛날에 어떤 시골 사람이 도끼 한 자루
를 잃어버렸는데 그는 이웃집 아들이 훔쳐갔다고 생각했다. 그 뒤 잃어버린 도끼를 찾았다.
알고 봤더니 며칠 전 산에서 나무를 하고는 잊어버리고 산 속에 놔두고 왔던 것이다. 도끼
를 찾은 뒤 이웃집 아들을 다시 보니 모든 언행이 도둑 같아 보이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아주 간단한 것이지만 그 의미는 대단히 심각하다. 간의 개념은 매우 엄숙한 것이다. 누군가
를 간신으로 지목하려면 증거가 있어야 한다. 신중하고 성실하게 과학적으로 판단해야만 한
다. 그렇지 않으면 "바람소리와 학이 우는 소리를 모두 적병으로 의심하고, 허수아비를 모두
병사로 여기거나, 술잔에 비친 활을 뱀으로 보는" 착오를 범하기가 너무 쉽다. 심지어는 심
각한 착오를 범해 선량한 사람을 도둑으로 몰거나 충신을 간신으로 지목할 수도 있다.
전단은 전국시대의 이름난 정치가로, 제나라가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처했을 때 군민을
잘 이끌어 함께 연나라에 대항함으로써 위기를 승리로 바꾸고 나라를 다시 강하게 만들었
다. 그 때문에 그는 제후에 봉해졌고 재상 자리에 올랐다. 어느 날 전단은 양공과 함께 순시
를 나갔다가 치수가에서 한 노인이 걸어서 물을 건너려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때는 마침
겨울이라 물이 차서 약한 노인은 견디지 못하고 물가에 이르러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전단
은 이 모습을 보자 서둘러 자기 옷을 벗어 노인을 덮어주고는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백성들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했던 양왕은 전단의 이런 행동을 보고 거부감을 느꼈다. "전단
이 저러는 것은 민심을 매수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저런 자는 믿을 수 없으니 일찌감치 제
거하여 후환을 막는 것이 낫겠다." 양왕은 속으로 이런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평소 늘 그렇
게 해오던 전단으로서는 양왕이 자신을 싫어하고, 또 그 대문에 골치를 썩히리라고 어찌 생
각이나 했겠는가?
얼마 뒤 초발이란 현자가 양왕에게 이런 말을 했다. "대왕께서는 자신을 주나라 문왕과
비교해 어느 쪽이 낫다고 생각하십니까?" "그야 당연히 주 문왕이지." "그렇다면 폐하와 환
공을 비교하면요?" "그야 물론 선왕께서 나보다 훨씬 영명하시지." "대왕께서 주 문왕과 환
공만 못하시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그러면 어디가 그분들만 못하신 줄 아십니까?" "..." "주
문왕께서는 여상을 얻은 다음 태공이라 높여 부르셨고, 환공께서는 관중을 얻으시고도 중보
라 높여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대왕께서는 안평군을 얻으시고도 이름을 부르시니 대왕께서
인재를 얼마나 존중하지 않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인재를 존중하지 않는 것은 나라가 망할
징조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자고이래로 신하들 중 누가 안평군만큼 공을 세웠으며,
또 대왕께 충성했습니까? 당초 지칠 대로 지친 7천 군사를 데리고 사방이 연나라 군사로 포
위당한 즉묵성을 거수하면서 끝내는 연을 대파하여 나라를 수복한 사람이 바로 안평군 아닙
니까? 당신 안평군 자신이 제나라 왕이 되려고 했다면 모르긴 해도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설사 반대하더라도 막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산중으로 피해 있던 왕을
모셔왔고, 왕께서는 비로소 왕위에 편히 앉으실 수 있었습니다. 지금 나라가 안정되자 왕께
서 오히려 그를 의심하시니, 이 어찌 여러 신하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겠습
니까?"
양왕은 이 말에 정신이 번쩍 들어 크게 깨달았다. 보라! 의심은 실로 사람을 해치는 병이
다! 의심은 심하면 군주를 간군으로 만들며, 신하를 간신으로 변질시킨다. 남을 간으로 의심
하면 끝내는 자신이 간이 되어 버린다.
셋째,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고 간으로 배척해서는 안된다. 사람은 사상, 가치관에 따라 문
제를 보는 방법과 각도 등이 다르기 때문에 사물에 대한 인식도 다르게 나타난다. 인식상의
갈라짐, 정치적 견해의 차이는 매우 정상적인 일로, 음모를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도덕적 품성과 연계시켜서는 안 된다. 정치적 견해의 차이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도
있다. 그것은 사상의 문제일 수도 있고, 정치적 입장의 문제일 수도 있으며, 문제를 보는 각
도의 문제일 수도 있다. 따라서 견해가 다르다고 해서 마음대로 그 사람을 간으로 배척해서
는 안 된다. 유가 학파는 이분법으로 인류를 두 계통으로 나눈다. 하나는 군자계통이며, 또
하나는 소인 계통이다. 이런 분류법은 본래는 경제적인 것에서 출발했으나 점점 윤리적으로
발전했고, 그 다음에는 정치, 도덕적인 것으로까지 발전했다. 군자와 소인이라는 두 개의 울
타리는 무엇이든지 집어넣을 수 있는 것이 되어 버렸다.
황안석의 '변법'이 바로 그랬다. 풍몽룡의 삼언에 보면 요상공음한반산당이란 편이 있는데,
왕안석을 개의 피를 뿜는 자라고 욕하고 있다. 왕안석을 간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 뒤 사
마광도 '간당'으로 분류되었는데, 사실 문제의 성질에 대한 규정이 잘못되어 '형량'아 적절치
못했다. 그의 정치적 입장이나 정치 태도의 문제는 그의 개인적 인품과는 별로 관계가 없다.
한기 역시 그러했다. 그는 변법에 찬성하지 않고 상소하여 간사한 자를 멀리할 것을 요청했
다. 즉 왕안석을 멀리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충성스러운 인물을 등용하십사" 했다. 즉
그와 사마광을 등용하라는 것이었다. 변법의 추진과 실패에 따라 그는 한때는 군자 계통에
들었다가 한때는 소인 계통이 들기도 했으니, 실로 황당무계하지 않을 수 없다. 정견의 차이
는 정견의 차이일 뿐이며 견해 차이는 견해 차이일 뿐이다. 물론 그것이 간과 전혀 무관하
지는 않지만, 그 관계를 혼란시켜서는 안 된다. 인식상의 차이가 품성의 차이는 결코 아니
다. 품성이 나쁘지도 않은데 인식상 차이가 있다고 해서 마음대로 소인 계통으로 분류할 수
는 없는 것이다.
넷째, 개인적 또는 집안의 원한 때문에 간으로 깎아내려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을 충신이
냐 간신이냐 평가하는 문제에서 핵심은 뭐니뭐니 해도 공과 사의 문제다. 남을 충과 간으로
평가할 때는 흔히 자신의 충과 간이 반영된다. 진짜 간신들은 늘 남을 간신으로 지목한다.
이는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람을 평가할 때 절대 개인적인 마
음이나 잡념이 끼여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집안이나 개인이 지닌 감정상의 불화 때문
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어떤 일에서 자기에게 잘못한다고 그 사람을 배척할 수
는 없다. 이 점은 절대 주의해야 한다.
구양수는 범중엄의 개혁정치를 지지하다가 응천부로 좌천되었다. 가던 도중에 진주를 거
치게 되어 그곳의 지주 진집중을 만나보려 했다. 그러나 진집중은 문을 걸어 잠그고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그 이름도 쟁쟁했던 구양수의 당시 심정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상상하고
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그 뒤 구양수는 조정으로 복귀해 한림학사가 되었다. 이미 재상이
되어 있던 진집중은 재상 자리에서 쫓겨날 판이었다. 한림학사는 천자의 명령을 기초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진집중은 자신에 대한 구양수의 '감정'이 틀림없이 좋지 않을 것이라 생
각했다. 그러나 막상 나온 '내제'를 보니 그 뜻을 너무도 공평하고 합당했다. 특히 진집중을
언급하면서는 "문을 닫고 만나기를 사절한 것은 권세 있는 자를 가까이한다는 혐의를 피하
려 한 것이리라. 한결같은 마음으로 일을 처리한 것은 일을 이리저리 바꾸어 명예를 훼손하
지 않기 위해서였으리라."고 하면서 진집중의 처세를 높이 평가했다. '내제'를 다 읽고 난 진
집중은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와 서로 깊이 알지 못하고서는 이렇게 말할 수 없으리라. 이는 나의 진심을 알았기 때
문이다." 이렇게 말하고 진집중은 '내제'를 한 부 더 베낀 다음 친한 친구인 이사중에게 보
내면서 "이 사람을 진작 알지 못한 것이 한스럽소이다."리는 말을 덧붙였다. 진정한 군자는
모두 공심에서 출발한다. 소인배들은 보복심을 가지고 자기를 따르지 않거나 자기에 찬성하
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이를 갈고 원통해 하며 간신으로 배쳑한다. 남을 간으로 배척할는
순가, 자신이 먼저 덕을 잃고 간이 된다.
다섯째, 우언비어를 가지고 간으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 고대로부터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아름다운 전설들이 많이 전해져 온다. 그러나 그 중에는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이야기들도 적
지 않다. 한비자 내저설좌하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실려있다. 서문표는 업 지방의 지방관이
었다. 그는 청렴결백하고, 사리사욕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곤리였다. 그래서 위 문후의 측근
들에게 뇌물을 갖다 바치지 않았고, 아부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위 문후가 서문표에
관해 듣는 이야기라곤 한결같이 나쁜 것뿐이었다. 1년 뒤 서문표가 서울로 올라와 업무 보
고를 할 때 위 문호는 그의 관인을 거두어 버렸다. 그 까닭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서문표
는 위 문후에게 다시 1년만 더 일하게 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위 문후는 그의 청을 받아들였다. 다시 업 지방으로 돌아온 서문표는 갖가지 명목으로 무
거운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등 백성들을 착취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모은 돈을 위 문후
의 측근들에게 잽싸게 갖다 바쳤다. 이렇게 하길 1년, 서문표가 다시 서울로 올라와 업무 보
고를 하자 위 문후는 몸소 자리에서 내려와 아주 다정스럽게 그를 맞이했다. 서문표는 감개
무량한 심정으로 위 문후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난날 신은 임금을 위해 업을 다스렸는데
임금은 신의 도장을 빼앗아갔습니다. 지금 신이 임금의 좌우 측근들을 위해 업을 다스렸더
니 임금이 신에게 절을 합니다. 이러니 신을 어떻게 백성을 다스리겠습니까?"
그러면서 서문표는 도장을 내던졌다. 아무리 말려도 그는 듣지 않았다. 당 태종 이세민은
관료 사회라는 것이 서로 세력을 다투고, 이권을 놓고 싸우며, 능력 있는 자를 질투하고, 자
기편을 끌어들이려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것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
러니 황제가 중심 없이 흔들리거나 조금이라도 신중하지 못했다가는 도발을 받거나 눈과 귀
를 차단당하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당태종은 이렇게 말했다. "임금은 오로지 한마음인데 그
마음을 공략하려는 자는 너무나 많다. 힘으로, 말재주로, 아첨으로, 간사함으로, 임금이 좋아
하는 것으로 무차별 공략하여 서로 귀여움을 차지하려 든다. 임금이 조금이라도 해이해져
그 중 하나라도 받아들였다가는 당장 위기와 망조가 뒤따른다. 바로 이것이 어려운 점이다."
그래서인지 당 태종은 비교적 충언을 잘 받아들이고 참언을 믿지않았다. 예로부터 '입이
여럿이면 쇠도 녹인다.'는 말이 있듯이 유언비어는 실로 무서운 것이다. 증삼은 알아주는 효
자로 품행과 덕이 아주 높았다. 그의 어머니는 그런 아들을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
나 세 사람이 잇달아 "증삼이 사람을 죽였다."고 하자 어머니는 앉아 있지 못하고 "들고 있
던 베틀 북을 내던지고 담을 넘어 도망갔다." 뒷날 사람들은 이를 두고 "증삼의 어짐으로
그 어머니의 믿음이 깊었으나, 세 사람이 의심하자 어머니도 믿지 못했다."고 평했다. 기원
전 308년, 진나라 혜왕은 감무에게 한나라를 치라고 명령했다. 감무는 "한나라는 천리 멀리
떨어져 있어 저로서는 그런 무거운 임무를 감당하기 어렵습니다."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용
감하게 잘 싸워온 감무가 왜 이번에는 주저하는 것일까? 혜왕은 그에게 솔직히 말해보라고
했다.
감무는 바로 여기서 '증삼이 사람을 죽였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런 다음 "신은 증삼
만큼 잘나지 못했고, 왕께서도 증삼 어머니만큼 저를 신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을 의심
하는 자들이 어찌 세 사람뿐이겠습니까? 신은 왕께서 베틀 북을 내던질까 두렵습니다."라고
덧붙였다. 그러자 혜왕은 "걱정하지 마시오. 절대 다른 자의 참언을 믿지 않을 테니. 그대에
게 맹서라도 하겠소."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믿음으로 맹서했다. 감무가 선양을
공격하고 있을 때 병력 부족으로 5개월이 지나도록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국내에서는
좌승상 저리질을 우두머리로 하는 몇몇 대신들이 혜왕에게 감무를 헐뜯는 말을 쏟아내기 시
작했다. 감무의 지휘력이 달린다는 사람도 있었고, 감무가 딴 생각을 품고 있다고 헐뜯는 자
도 있었다.
혜왕은 소인배의 말에 혹해서 감무를 소환했다. 감무는 즉시 회군하지 않고 혜왕에게 편
지 한 통을 보냈다. 편지에는 "지난날의 맹서를 잊으셨단 말입니까?"라는 말뿐이었다. 편지
를 받아본 혜왕은 즉시 대대적을 구원병을 보냈고, 선양성은 이내 함락되었다. 자기의 귀를
믿지 말고, 자신의 눈을 믿어라. 남의 주둥이를 믿지 말고, 목 위에 달려 있는 머리를 쭉 뽑
아라. 유언비어로 시비를 가리지 않는 것, 아마 위정자가 갖추어야 할 필수 자질일 것이다.
여섯째, 순간적인 단점을 가지고 간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강감역지록에 보면 이런 이
야기가 나온다. 자사가 위후에게 구변을 추천하면서 50량 전차를 제대로 이끌 수 있는 대장
군감이라며 칭찬을 했다. 그러자 위후는 "그가 그런 재목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가 지방관으
로 일할 때 백성들의 세금을 올렸고, 남의 집 계란 두 개를 먹은 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인
품이 좋다고는 할 수 없소. 그러니 그런 중책을 맡길 수 없지."라고 말했다. 그러자 자사는
이렇게 응수했다.
"관리를 뽑는 것은 마치 목수가 나무를 고르는 것과 같아 좋은 점은 취하고 모자란 점은
버리는 것입니다. 지금과 같은 전국시대에 충성스럽고 용감한 신하를 고르시면서 달걀 두
개 때문에 나라를 지키는 장수를 버리시려 하니, 이 이야기가 새어나가기라도 하면 세상의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실소를 머금게 한다. 그러나 실제로
'달걀 두 개 때문에 나라를 지킬 장수를 버리는' 일은 적지 않았다. 인간은 대단히 복잡한
동물이다. 때로는 본의 아닌 말과 행동을 하기도 한다. 누군가 말을 잘못했다고 해서, 어떤
일을 잘못 처리했다고 해서, 또는 어떤 부분이 잘못되었다고 해서 쉽게 그에게 '간'이란 딱
지를 붙여서는 안 된다. 이는 사람들이 저지르기 쉬운 오류이다.
한나라 건안 5년인 서기 200년, 조조는 철갑군 1만으로 원소의 10만 정예병과 관도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조조는 원소의 대군을 대파했다. 원소의 10만 정예군은
대패를 맛보고 줄행랑을 쳤다. 전투가 끝난 다음 조조는 뜻밖의 편지 한 통을 손에 넣게 되
었다. 조조 진영의 몇몇 사람이 원소와 내통하려 한 편지였다. 이때 좌우축근들은 씩씩거리
며 "이름대로 찾아내 모조리 죽여 버려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조조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는 "원소가 막강할 때는 나 역시 스스로를 보호하기 힘들었는데 하물며 다른 사
람이야 말해서 무엇 하는가?"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그 편지를 불태워 버렸다.
생각해보자. 만약 조조가 그렇게 하지 않고 철저히 조사했거나, 조사는 하지 않을지라도
분노를 드러냈더라면 어떤 결과가 일어났겠는가? 모르긴 해도 모두 다 위기감을 느끼고 각
자 살 길을 찾느라 조조 진영은 난리가 났을 것이다. 조조는 확실히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정치가였다. 그 자신도 지키기 힘든 상황에서 일부가 그런 상홍으로부터 압박을 받은 것을
이해했던 것이다. 또 때를 기다리면 흔들리던 민심과 떠나간 마음들이 굳건한 충성심으로
변할 것이라는 것도 알았으며, 의심이 들면 쓰지 말고 썼으면 의심하지 말라는 이치도 잘
알고 있었다. 동한 초평 3년, 사도 왕윤, 중낭 장 여포 등이 몰래 모의하여 동탁을 죽였다.
그들은 미앙궁에서 군신들이 모여 조회할 때 뒤어들어 동탁을 찍었다. 동탁은 살려 달라며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이에 여포는 큰 소리로 "동탁만 치고 나머지는 모두 불문에 붙이
라는 어명이다."라고 선포했다. 그러자 아무도 동탁을 위해 움직이지 않았음은 물론 만세까
지 불렀다.
그러나 안타깝께도 좋은 장면은 오래 가질 못했다. 왕윤은 동탁의 부하는 물른 동탁과 가
깝게 지낸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동탁의 부하들은 몹시 두려웠다. 그래서
그들은 불과 며칠 만에 양주에 10만 이상이 결집하여 장안으로 쳐들어가 왕윤을 죽이고 헌
제를 포로로 잡아버렸다. 만약 동탁이 죽은 뒤 왕윤이 모두를 단결시켰더라면 형세는 호전
되고 안정을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왕윤은 극단적인 길을 택했다.
"산은 아무리 높아도 마다하지 않으며, 바다는 아무리 깊어도 마다하지 않는다. 주공이 밥
을 먹다 말고 하루에 세 번이나 손님을 받고, 또 머리를 감다가 젖은 머리를 움켜쥐고 하루
에 세 번씩이나 손님을 맞이하니, 천하의 인심이 그에게로 돌아갔다." 예로부터 충성스럽고
선량한 인물을 간신으로 잘못 판단했다가 진짜 간신을 높은 관직으로 승진시켜 큰 화를 부
른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가? 또 얼마나 많은 충성스럽고 정직한 인재들이 수난을 당해 쓸쓸
히 초야에서 일생을 마쳤던가? 이런 생각을 하노라면 하늘을 우러러 탄식을 금할 수 없다.
그저 영원히 역사가 되고 과거가 되길 바랄 뿐.
12. 역사로 하여금 미래를 말하게 하라.
수천년 동안의 비바람 속에서 인류는 숱하게 많은 고통과 고난을 겪고 점차 크게 깨닫기
시작했다. 우리는 역사의 실천을 통해 광명이 암흑을 이기며, 정의가 사악을 물리친다는 것
을 인식했다. 인류는 진보된 문명의 역사를 향한 발걸음을 멈출 수 없다. 그리고 그 길을 아
무도 막을 수 없다.
흔들릴 수 없는 위대한 진리
정치의 암흑, 도덕의 상실, 사회의 혼란은 간신을 생산하는 중요한 환경이자 조건이다. 이
모든 것은 봉건적 사유제라는 토양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역사상 당나라 순종은 비교적 괜찮
은 황제였다. 그러나 그는 병신 황제로 일어설 수도, 말을 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나라 일을
특수한 형식으로 처리했다. 그가 거주하는 곳에는 장막이 드러워져 있고, 환관 이충언과 미
인 우소용이 좌우에서 그를 보살폈다. 백관들이 의견을 올리면 장막 안에서 우소용을 통해
승낙 여부를 전달했다. 모든 일은 대개 왕숙문이 왕비에게 알리면 왕비는 이충언에게 알리
고 이충언은 다시 우소용에게 전달한다. 그러면 우소용이 다시 순종에게 아뢴다.
이 때문에 순종은 황제 자리에 오른 지 여덟 달 만에 환관들이 일으킨 궁정 정변으로 하
야를 강요받았다. 정치를 쇄신하기 위해 일으킨 영정혁신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죽을 사
람은 죽고 쫓겨날 사람들은 쫓겨나 중국은 다시 전보다 더 깊은 암흑시대로 빠져들었다.
명나라 때에 오면 중국의 정치는 가장 암울한 장을 열게 된다. 황제는 늘 궁궐 깊숙이 숨
어살다시피 하며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재상 자리에 있는 대학사조차도 심지어 수십년 동
안 황제의 그림자도 보지 못하는 해괴한 현상마저 벌어졌다. 그저 주절을 통해서만 국가 정
치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이 주절이란 것이 환관에 의해 전달되었고, 황제 앞에서 내용을 설
명한 후 그의 명령을 받아오는 자도 환관이었기 때문에, 권력은 자연스럽게 환관들의 손에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무종의 뒤를 이은 세종 주후총은 환관이 이끄는 대로 도교를 신봉했는데 이만저만한 광신
도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제단을 세워 제사를 지내고, 있지도 않은 신선과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생활의 전부였다. 1540년부터 156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27년 동안 세종은 신하들을
단 네 번 만났으니, 7년에 한 번 꼴로 조회에 참석한 셈이었다. 바로 그 때문에 그가 재위한
시기에 엄숭 같은 간신 무리들이 그 틈을 타서 천하를 해쳤던 것이다.
봉건적 사유제는 정치를 암흑으로 이끌 뿐만 아니라, 도덕의 타락도 가져온다. 봉건적 사
유제 아래에서는 인간의 존엄성이 그가 가지고 있는 재부와 돈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다 보
니 부귀를 서로 다타며 끝내는 서로를 죽이는 엄청난 사회 상황을 초래한다.
348년 후조의 황태자 석도가 동생 석도가 자기 자리를 빼앗을까봐 사람을 시켜 동생을 찔
러 죽이고, 내친 김에 아버지 석호마저도 제거하여 일찌감치 황제가 되리라 마음먹는다. 그
러나 일이 들통나 석선은 아버지 석호에게 붙잡히고 만다.
석호는 먼저 석선의 머리를 박박 밀어 버린 다음 혀를 잘라 버렸다. 그리고는 손발을 자
르고 눈알을 파낸 다음 불에 태워 죽여 버렸다. 석선의 모든 처첩과 아들딸들도 남김없이
죽음을 당했다. 태자궁의 환관과 담당 관리들은 찢어 죽이는 형벌을 당했다. 태자궁을 지키
던 위사 10만여 명은 전부 1,200리 밖의 금성으로 쫓겨났다. 당시 석선의 다섯 살 난 어린
아들은 할아버지 석호가 몹시 귀여워해서 늘 품에 안고 다니다시피 했는데, 형 집행관이 아
이를 석호의 등에서 떼어내려 하자 아이가 울면서 할아버지의 옷을 붙들고 높지 않는 바람
에 옷이 다 찢어질 정도였다. 그러나 그 아이 역시 끌려나와 죽음을 당했다.
이러한 엄청난 살육에도 불구하고 반역을 막지는 못했다. 석호가 죽은 뒤 그 아들 석세가
등극했으나 33일 만에 또 다른 아들 석준에게 피살되었다. 석준은 등극한 지 183일 만에 또
다른 아들 석감에게 피살되었다. 석감은 재위 103일 만에 대장 염민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봉건사회에서 부자지간과 형제지간의 죽고 죽이는 살육이나 부부간의 반목·질시 현상은
셀 수 없이 많아 도덕의식을 마비시켰다. 군위신강이니 부위자강이니 부위부강이니 하는 '삼
강오륜'은 물론, 인·의·예·지·신도 모두가 허울 뿐인 듣기 좋은 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측천무후는 자신의 통치를 유지하기 위해 간혹한 관리들을 선발했다. 그렇게 해서 뽑힌
주흥·내준신과 같은 잔인한 관리들은 다시 가혹한 형벌을 만들어냈다. 그 형벌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떨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봉황이 날개를 펼친다.'는 뜻의 '봉황전시'은 사람을 기둥에 묶고 밧줄로 목을 걸어 앞으
로 천천히 잡아당기는 형벌이었다. 제때에 자백하지 않으면 목이 끊어지고 만다. 때로는 형
을 받는 사람의 머리를 쇠로 만든 바구니 속에 처넣기도 했는데, 그 안에는 온통 쇠못이 거
꾸로 박혀 있었다. 거꾸로 매달아놓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머리에 무거운 돌을 매달아 밑으
로 끌어당기게 만들었다. 식초를 코에 부어 질식해 죽도록 만들기도 했다. 철망을 머리에 뒤
집어씌우고는 틈 사이로 쐐기를 박는 형벌도 있었다. 자백하지 않으면 머리통이 찢기고 구
멍이 나는 것은 물로, 처절한 고통 속에서 죽어야만 했다.
이런 잔혹하기 짝이 없는 형벌이 몇날 며칠 계속되기도 했다. 그러니 한 사람 입에서 천
여 명에 달하는 연루자가 줄줄이 나올 수밖에. 그러나 형벌은 마침내 간악한 자들 자신에게
도 돌아갔다. 어느 날 측천무후는 주흥이 반역을 꾀하고 있다고 밀고한 글을 내준신에게 건
넸다. 내준신과 주흥은 매우 친한 친구 사이였으나 내준신으로서는 친구를 희생시킬지라도
자신의 충성과 결백을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주흥을 찾은 내준신은 이렇게 물었다.
"어떤 죄인이 너무 완강해서 반란을 자백하지 않는다면 어떤 방법으로 그 자를 다루는 것
이 좋겠는가?"
"그야 간단하지. 그놈을 큰 항아리에 처넣고 불을 때는 거야. 그러면 불지 않고는 못 배기
지."
그러자 내준신은 즉각 사람을 시켜 항아리를 준비하게 한 다음 주흥에게 "누군가가 자네
를 모반죄로 고발했네. 내가 황제의 명을 받고 조사하게 되었네. 자, 항아리로 들어가게."라
고 말했다. 주흥은 새 파랗게 질려 황급히 머리를 조아리며 죄를 인정했다. 목숨을 보전키
어려웠음은 말할 것도 없다.
봉건적 사유제는 정치의 암흑과 부패를 조성하고, 백성들의 위기와 빈곤을 초래했을 QNs
만 아니라, 인간의 야심과 사욕을 극대화시켰다. 이러한 부패와 빈곤의 교차, 야심과 사욕의
충돌은 음모와 계략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고, 또 칼과 창을 들게 만들었다.
천여 년 동안 쉼없이 격렬한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생산력의 발전은 심각한 타격을 받거
나 파괴되었다. 간신의 끊임없는 출현은 결국 봉건적 사유제가 촉발시킨 권력 투쟁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 과정에서 백성들의 삶은 철저하게 외면당했고, 백성들은 착취와 압박
을 견디다 못해 대대적인 반항과 봉기로 맞섰다.
역사가 증명하듯, 봉건적 사유제 아래에서 분쟁과 살육을 피하려는 희망은 헛된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
새로운 지도자를 키우는 올바른 방향은 바뀔 수 없다.
"정치 노선이 확정되고 나면 지도자가 결정적 요소가 된다." 한 국가의 모습이 수시로 바
뀌지 않게 하려면 정확한 노선과 정책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맡을 많은 지도자를
길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점에 유의해야 한다.
첫째, 재능만으로 뽑아서는 안 된다. "재능에 따라 뽑는다."는 원칙을 처음으로 창안한 사
람은 조조다. 군웅들이 서로 중원을 차지하려고 피 투기며 싸우는 특수 상황에서 나온 특수
한 인재 초빙과 관리 선발의 원칙이었다. 조조는 이렇게 말했다. "틀을 갖추지 못한 선비라
고 해서 그 선비가 꼭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진평은 한나라의 기초를 닦았
고, 소진은 약한 연나라를 건졌다. 이렇게 본다면 선비들에게 단점이 있다고 해서 버릴 수
있겠는가?" 인물을 골라 쓰는 데 있어서 조조의 이러한 공리적 사상이 당시의 특수한 상황
에서는 필요했고, 또 적극성을 가진 곳은 물론이다. 또 거기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고, 시기
적절한 면도 있었다. 왜냐하면 한나라 때의 관리 선발 제도는 채거와 정벽이었는데, 이 제도
가 많은 폐단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선비가 관리가 될 자격을 얻으려면 충, 효의 명성을 얻
기 위해 죽어라 애를 써야만 했고, 재능과 실용적 학문은 뒷전이었다. 앉아서 도나 따지고
쓸데없는 명성만 쫓는 사람은 '품행은 단정'할지 몰라도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존재에 지나
지 않았다.
일찍이 소진은 연왕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만약 증삼 같은 효자에 백이 같은 청렴결
백한 인물, 게다가 미생같이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을 얻어 대왕을 섬기게 할 수 있다면 어
떻겠습니까?" "그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겠소?"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증삼이 효
자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때문에 부모 곁을 떠나서는 단 하루도 잠을 자지 못합니다. 결백하
고 강직하기로 말하면 백이를 따를 자 없지만 그는 그 때문에 무왕의 신하가 되기 싫다고
수양산에서 굶어 죽었습니다. 신용이라면 당연히 미생이지만 그는 여자와의 약속 때문에 다
리를 부둥켜안고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이런 효도, 결백, 신용이 대왕께 무슨 소용이 있단
말입니까? 만약 이런 자들을 뽑아 쓴다면 당장 자리를 내놓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지금
보면 자신의 청렴을 과시하기 위해 일부러 더러운 옷을 입고 다니는가 하면, 좋은 마차는
숨겨놓고 도시락을 들고 일하러 나갑니다. 이런 위선적인 명성 추구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
입니까?"
대체로 이러한 생각에 바탕을 두고 조조는 실용적인 재능과 학문을 지닌 인물을 끌어들인
다는 "지능만을 뽑는다."는 원칙을 제기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조조가 덕을 요구하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다. 아니 매우 높은 수준의 덕을 요구했다. 그는 이익과 유혹에 흔들리지 않
은 조조지를 "천성이 충성스럽고 순수하다."고 칭찬했으며 악진, 우금, 장요를 "바탕이 한결
같이 충성스럽고 지조와 절개를 지킬 줄 안다."고 칭찬했다. 그러나 자신의 표준에 맞지 않
는 인물은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고 공이 많아도 용인하지 않았다 여포는전투를 잘 하고 뛰
어난 용기를 지녔지만 약속과 의리를 밥 먹듯 저버리는 바람에 조조에 의해 살해되지 않았
던가? 순욱, 변양, 공융, 양수, 화타 등은 모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조조의
표준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차례차례 살해되었다.
무엇이 '덕'인가? 시대가 다르면 바라는 것도 다르기 마련이고, 덕의 내용과 의미도 달라
진다. 덕이 주로 가리키는 것은 사람의 품질과 인격이다. 품행이 없고 인격이 없으면 사람은
갖추어야 마땅한 염치, 예의, 믿음, 책임을 잊어버리고 무슨 일이든 저지른다. 그래서 사마광
은 "재주는 덕의 자질이요, 덕은 재주를 이끄는 장수와 같다."라고 했다.
그는 또 "재주와 덕을 온전히 갖춘 사람을 '성인'이라 부르고, 재주와 덕 모두가 없는 사
람을 '우인'이라 했다 덕이 재주를 앞지르는 사람을 '군자'라 하고, 재주가 덕을 앞지르는 사
람을 '소인'이라 했다. 무릇 사람을 얻는 방법에 있어서 성인, 군자를 얻지 못하더라도 그들
과 함께할 것이요, 소인을 얻기보다는 차라리 우인을 얻는 게 낫다."라고 했다. 군자는 재주
로 선을 행하지만, 소인은 재주로 악을 행하기 때문이다. 재능은 덕성을 갖춘 사람 손에 들
어가야만 인류를 복되게 하는 공구가 된다. 그러나 소인의 손에 들어가면 사람을 해치는 독
약이 되고 만다.
"우인은 나쁜 짓을 하고 싶어도 머리가 못 따르고 힘이 모자란다. 예컨대 어린 개가 사람
을 물려 해도 사람에게 되려 얻어맞는 이치와 같다. 소인은 머리가 뛰어나 간사슬운 짓을
얼든지 저지르며, 포악스러울 정도의 용기와 결단력을 갖추고 있다. 호랑이가 날개를 단꼴이
니 그 피해가 얼마나 크겠는가!" 그래서 사마광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경고한다. "대체로 덕
있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엄하고, 재주 있는 자는 사람들의 귀여움을 받는다. 귀여움을 받으
면 금세 가까워지나 엄하면 쉬 멀어진다. 이 때문에 사람을 살필 때 재주에 덕이 가려지는
것이다. 예로부터 나라를 어지럽힌 신하와 집안을 망친 퍠륜아는 지주는 점치나 덕이 모자
랐다. 따라서 나라를 위해서는 진실로 재주와 덕을 잘 살피고 그 선후를 살펴야 한다. 그래
야만 넘치고 모자라는 걱정을 하지 않게 된다."
신당서의 기록을 한번 보자. 목종 초기에 숙주자사 이직신이란 자가 뇌물 사건에 얽혀 죽
게 되었다. 그러나 직신은 혼관을 매수하여 황제에게까지 줄을 댔다. 그리하여 이 멍청한 황
제는 "직신은 재주가 뛰어나 짐이 크게 기용하고자 한다."라고 신하들에게 떠벌렸다. 이에
대해 우승유가 반대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 자는 그저 나라의 재산만 축내는 재주도 없는
자입니다. 안록산이나 주차는 재주가 남달랐기 때문에 천하를 어지럽힐 수 있었습니다. 그래
서 천자는 법을 만들어 재주 있는 자를 속박하는 것입니다." 대단히 일리 있는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간신들의 '남다른점'을 분석할 때 지적했듯이, 역사상 대간, 거간에 속하는
자들은 지위가 높고 재주가 뛰어날수록 그 피해가 심각했다. 재주가 모자라서는 간사스러운
짓도 제대로 할 수 없고, 재주가 보잘것없어서는 나쁜 짓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권력은 사회의 지혜, 영예 그리고 양심을 집중적으로 체현한다. 권력이란 보검이 무고한
사람, 선량한 사람의 머리 위로 떨어질 때 가볍게는 '한 집안을 통곡'하게 만들고, 무겁게는
'한 나라를 통곡'하게 만든다. 국가, 민족, 백성에게 엄청난 손실을 가져다준다. 따라서 권력
의 보검은 덕과 재능을 아울러 갖춘 사람에게 건네져야지, 마음이 바르지 못하고 어질지 못
한 자에게 건네져서는 절대 안 된다.
둘째, 잘 따른다고 기용해서는 안 된다. 봉건 군주는 권력을 한손에 쥐고 있었다. 살리느
냐 죽이느냐를 멋대로 할 수 있을 정도이다. '나를 따르는 자는 번창할 것이요, 나를 거스르
는 자는 망할 것이다.' 그러다 보니 군주의 욕심을 잘 알아차리고 '교묘하게 그 뜻에 아첨하
는' 간사한 무리가 생겨나기 마련이다. 봉건 전제주의 통치의 필연적 결과였다. 당나라 때의
이의부나 이임보 같은 자들은 남의 눈치를 기가 막히게 잘 살피고, 돌아가는 상황을 귀신같
이 파악해서는 교묘하게 사람을 주무르고 비위를 맞추어 환심을 샀다. 오늘늘까지도 이런
현상과 이런 자들이 끊이지 않고 곳곳에 남아 있다. 어떤 사람들은 옳지 못하다는 것을 너
무나 잘 알면서도 나 몰라라 남의 일처럼 여긴다. 어떤 사람들은 비평도, 건의도 하지 않는
다. 책임을지지 않는 것은 물론, 백이면 백 모두 순순히 따르기만 한다. 또 어떤 자들은 남
의 비위를 맞추는 데만 급급하다.
우리들 주위 동료 중에도 이런 사람들이 적지 않다. 조금만 치켜 주어도 정신을 못 차리
고, 한번만 손뼉을 쳐주어도 기뻐 어쩔 줄 모른다. 슬쩍 당기기만 해도 어느 틈엔가 건너와
있고, 뭐라고 제대로 말하기도 전에 믿어버린다. 부드럽고 말 잘 듣는 면만 보고, 저질스러
운 인품과 제멋대로인 면을 보지 못하며, 덕이 있느냐 없느냐 재능이 있느냐 없느냐를 상관
하지 않고 그저 유순하기만을 원하다가는, '후회해도 이미 늦고마는' 비극적인 상황을 피하
기 어렵다.
셋째, 가깝다고 해서 뽑아서는 안 된다. 역사상 간신들은 대개 지도자 또는 지도자의 측근
에 접근해서 뜻을 이루었다. 따라서 측근을 어떻게 다스리느냐 하는 것은 정치를 크게 좌우
했다. 고대사회에서 환관의 사회적 지위는 아주 보잘것없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이런
자들 중에서 극악무도한 거간과 교활하기 짝이 없는 대간이 나타났다. 수조, 조고, 황호, 이
보국, 정원지, 동관, 왕진, 유근, 위충현 등등... 어째서 이런 자들이 환관의 신분으로 조정을
떡 주무르듯 하며 짧게는 소년, 길게는 수십년 동안 나라에 피해를 끼쳤는가? 가장 중요한
까닭의 하나는 봉건 군주에게 있다. 현명한가 어리석은가를 따져 보지 않고, 충성스러운지
간사한지에 상관없이, 그저 가깝고 낯이 익으며, 하는 일이 마음에 들고, 말이 그럴듯하면
자기를 알아주는 심복으로 여겼다.
심지어는 눈에 훤히 보이는 간사한 짓거리조차도 나 몰라라 하며 오로지 그들의 말만 듣
고 그들의 헛소리와 모함을 믿었다. 군주 한몸의 사리사욕을 위해 나쁜 짓거리도 눈감아 주
고, 나라를 어지럽게 하는데도 충성을 다한다며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역대 왕조의 패망은
모름지기 여기에서 비롯되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 당 태종은 역사를 거울삼아 역사가 주는
교훈을 잘 받아들인 황제였다. 사람을 쓸 때도 개인적 감정을 중시하지 않았으며, 멀로 가까
움을 따지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관리를 뽑을 때는 그 사람의 재능을 보아야 한다. 재능이 아니다 싶으면 가깝더라도 기
용하지 않으며, 재능이 있으면 원수라도 버리지 않는다." 그리하여 황제가 된 뒤에도 태자
이건성의 사람, 화강채 사람, 수 왕조 때 사람을 가리지 않고 두루 기용했다. 그러나 황실의
친척에 대해서는 '사사로운 끈에 이끌리지 않도록' 경계했다. 그래서 아버지 고조 때 군왕으
로 봉해진 수십 명의 황실 친척들 중에서 뛰어난 공이 있는 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현공으로
강등시켰다. 측천무후는 역사상 유일하고도 실질적인 여황제였다. 그녀에게는잔인하고 포악
한 면이 있었지만, 어느 면에서는 아주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그녀의 가장 큰 장점은 개인
의 생활과 국가의 정치, 개인의 감정과 나라의 큰일을 비교적 잘 구분했다는 것이다. 측근들
을 엄격하게 통제하여 그들에게 권력을 넘겨주지 않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정사에 관여하
지 못하게 했다.
그녀의 조카 무승사를 한때 재상에 기용한 적이 있지만 이소덕의 건의를 받아들여 파면시
켰다. 이 때문에 무승사는 측천무후에게 이소덕을 모함하고 헐뜯었다. 그러나 그녀는 조카의
말을 믿지 않고 오히려 이렇게 나무랐다. "내가 이소덕을 기용할 수 있어서 마음이 놓인다.
그는 나를 대신해 내 수고를 덜어주고 있다. 네 따위가 어찌 그와 비교가 되겠느냐?" 이러
했기 때문에 무후가 아끼던 측근들이 적지 않았지만 권력을 쥐고 흔든 자는 없었다. '가깝다
고 끌어들이는'것은 정말 비과학적이며 엄숙하지 못한 방법이다. 그것은 또 봉건 왕조의 가
장 큰 폐단이었다. 지혜로운 봉건통치자조차 이 문제에 대해서는 충분히 주의하지 못했다
우리가 다시 이런 잘못된 역사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러한 현상이 오늘날까
지도 사라지지 않고 우리 사회 곳곳에 남아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자기와 친한 사람이라
면 얼른 데려다 쓰는 비정상적인 현상이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이런 현상은 결국 부적합한 지도자를 만들어내는 것은 물론, '경쟁'해야 될 분야에서는 경
쟁하지 않고, 힘있는 자를 향해 줄을 대려는 쓸데없는 경쟁만 일삼게 만든다. 지도자를 살피
고 뽑는 일은 민주적이고 과학적인 길을 밟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들이
깨어 있어야 한다.
넷째, 친하다고 해서 기용해서는 안 된다. "안으로 친척이라 해서 피라지 않고, 밖으로 원
수라 해서 피하지 않으니, 기황양이야말로 공적이라 할 수 있도다!" 그러나 '참으로 공적일
아 할 수 있는' 기황양 이후 '안으로 친척이라 해서 피하지 않는' 사람만 날이 갈수록 늘어
가는 것 같다. 아마 이는 기황양도 미쳐 생각하지 못했던 현상일 것이다. 그러나 엄연한 역
서적 사실이 말해주듯 안으로 친척이라 해서 피하지 않는 것은 좋지만 오직 '친하다고 해서
끌어다 쓰는'것은 안된다. 역사상 아비와 군주를 살해하고 천하를 어지럽힌 대간, 거간들 중
에는 황제의 친척들이 많았다. 어떤 사람들은 흔히 이런 오해를 한다. 그래도 친척이 남보다
믿을 만하지 않느냐고. 그러나 실제는 늘 그런 생각 때문에 머리가 터지고 피를 흘리게 된
다.
친하고 그렇지 않고는 구분도 있어야 하지만 그보다는 충성과 불충의 구별이 있어야 한
다. 간신들은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군신, 부자, 형제, 친척을 떠들지만, 필요없을 때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매몰차게 등을 돌린다. 그들의 눈에는 권력과 지위가 모든 것에 앞서며 무엇
보다도 중요하다. 서한의 왕망이 황실의 외척으로 권력을 훔치지 않았던가? 수 왕조를 세운
양견이 누구에게 당했던가? 그의 아들 양광이 아니던가? 양귀비는 친척뻘 오빠 양국충에
의해 간접 피살되지 않았던가? 여갓의 경험을 받아들여 옛 사람들은, 친척들을 부유하게 해
주는 것은 괜찮지만 귀하게 해서는 안 되며, 중요한 자리에 앉혀서는 더군다나 안된다고 주
장했던 것이다.
북제의 육영훤은 황태자의 유모로, 무성제에 의해 '군군'에 봉해지는 바람에 '여자 시중'에
임명되고 '시이품'의 내정총관이 되었다. 그녀는 '물 가까이에 있는 누각에서 달을 먼저 볼
수 있는' 좋은 자리를 얻었으며, 그의 아들 목제파도 개부의 동삼사, 무위대장군, 진주대중정
에 임명되는 등 크게 귀여움을 받았다. 목제파는 그 뒤로두 계속 승승장구하면서 재상 자리
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이 모자는 북제의 후주를 적군의 포로가 되게 하여 북제를 역사의
무대에서 영원히 끌어내리고 말았다. '친하다고 해서 끌어다 앉히는' 것은 천하를 한 집안의
것으로 여기는 왕조 체제의 산물이며 썩고 뒤떨어진 계급 의식의 반영이다. 오늘날 국가는
이미 국민의 국가가 되었으며, 모든 권력은 국민의 것이다. 오늘날에 있어서 이 문제를 어떻
게 대할 것이냐는 더 이상의 토론이 필요없어 보인다. 가장 중요한 것은 행동이다. 행동은
어떤 강령보다도 더 중요하다.
위대한 철하과 인식의 틀을 위하여
어떠한 시대이건 그 시대에 필요하고 알맞은 인식의 틀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우리의
의식 세게를 바꾸어놓는다. 그러나 최근 우리는 이러한 인식의 틀과 이론을 가볍게 여기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그것을 마치 낡고 쓸모없는. 그래서 더 이상 오늘날에는 무의미한 것
으로 여긴다. 이 때문에 갈수록 철학과 의식과 이론을 연구하려 하지 않는 경향이 더해만
간다. 반면에 즉흥적인 검정에 의존해 사물을 판단하는 경향만 더욱 커져간다.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인, 게다가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들이 기승을 부린다. 예컨대 사람을 가리고 뽑는
일을 보아도 엄숙하고 과학적인 태도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국민의 관점, 실천적 관점, 역
사적이면서도 공정하고 객관적인 관점은 온데간데없다. 덕을 논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얄
팍한 재주만 떠들어댄다. 인간성은 뒷전으로 밀어놓고 전문성만 내세운다. 덕과 재주를 겸해
야 한다는 목소리는 작고, 학벌, 나이, 순간적인 실적만 따진다. 심하면 감정에 치우쳐 인연
을 따지고 든다.
개인적으로 멀고 가까우냐만 따지는 기풍이 온 천지에 퍼져 사상적 수준이 형편없는 자,
도덕성이 모자라는 자, 심지어는 양심이 불량하고 마음 씀씀이가 바르지 못한 자들이 이익
과 명예를 다투며 제멋대로 설치고 농간을 부린다. 곳곳이 더러운 냄새로 가득 찼으며, 저질
의 인간들이 뿌려대는 역겨운 아부와 아첨의 말들이 공중을 떠다닌다. 영혼마저도 더러워진
존재들이 지도자라는 자리에 떡 버티고 앉아 국민들의 생계와 정서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정부와 국가의 명예를 더럽히고 있다. 이것이 가져다줄 교훈이 얼마나 심각할 것인
지 생각해보았는가? 역사는 얼마든지 우리에게 증명해 보일 수 있다. 어떤 사회제도가 되었
건 간에 인간의 인식 능력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당태종은 "물은 배를 띄울 수
도 있지만 엎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군주였다. 그는 "천자란 도가 있으면
사람들이 떠받들어 주인으로 섬기지만 도가 없으면 버린다."라고 생각하여 현명하고 선량한
인물을 크게 기용하고, 듣기 싫은 소리도 내색 않고 잘 들어 행동으로 옮김으로써 나라를
크게 일으켰다.
그와는 반대로 송나라 휘종은 의식과 의지가 모자라 나라를 그르쳤다. "곧은 신하들의 말
을 죽어라 듣지 않는" 바람에 나라를 망쳤다 그와 똑같은 인물로서 당나라 현종이 있다. 그
는 처음에는 "나는 말랐지만 천하는 살쪘다."고 말할 정도로 정신이 제대로 박힌 인물이었
지만, 후반기에 들어와서는 그런 이치를 깡그리 잊어버린 듯 "군왕이 뭣 하러 일찍 조회에
나가느냐"며 쾌락만 뒤쫓다 죽고 말았다. 역사상 간사한 자들을 기용했다가 호되게 당한 숱
한 인물들의 문제는 다름 아닌 그들의 인식 또는 의식의 문제였다 .따라서 이러한 인식 내
지는 의식을 바로잡는 철학과 이론은 지금에도 절실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도덕을 바로 세우는 일은 잠시라도 늦추어서는 안 된다.
도덕은 사회를 안정시키고 발전시키는 디딤돌이다. 동한시대의 이름난 저서로 잠부론이란
것이 있는데, 이 책의 저자 왕부는 깨끗한 관리와 소박한 기풍의 백성들을 만들어내는 기초
는 교육에 있다고 보았다. 정치를 하는 사람은 아랫사람에 대해 늘 "애쓰게 하고 가르치고
깨우치게 하여" 단점을 장점으로 바꾸고, 모자란 점을 뛰어난 점으로 변화시켜야 하며, 절대
제멋대로 굴게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아주 미미한 싹이라도 잘 살펴서 사악한
쪽으로 흐르지 않도록 미리 잘라야만" 비로소 사악한 생각들을 소멸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또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선이 쌓이지 않으면 아름을 날릴 수 없으며, 악이 쌓이지
않으면 몸을 망치지 않는다."며 나쁜 일이 아직 미미할 때 더 이상 커지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는 교육을 특별히 중시해줄 것을 위정자에게 바라고 있다.
역사는 증명한다. 같은 사회제도 하에서라도 도덕이 제대로 세워져 있으면 간신들의 추악
한 현상은 적어지고, 정국이 혼란에 빠지면 사치와 방탕이 도덕을 느슨하게 만들어 각종 더
러운 현상이 흘러넘치게 된다는 것을. 당나라 정관 연간은 도덕을 바로 세우는 일을 중시했
던 시기였다. 태종은 신하들뿐만 아니라 자신의 자식들에 대해서도 도덕을 매우 강조했다.
자식들이 밥을 먹을 때면 양식이 얼마나 어렵게 여기까지 왔는지를 말해주면서 "농민들의
피와 땀이 있었기에 지금 이런 밥이 있게 된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자식이 뱃놀이를
하려 하면 "물을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배를 엎기도 한다. 백성은 물과 같고 군주는 배와
같으니라."라고 말했다. 나무 아래에서 쉬고 있는 모습을 보면 "목재는 먹줄을 퉁겨 바로잡
을 수 있으며, 군주는 바른 소리를 통해 성군이 될 수 있다."라고 말해 주었다. 이러했기 때
문에 그의 시대에는 나쁜 자, 나쁜 일, 사악하고 문란한 기풍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 왕조가 쓰러질 대는 정국이 어지러워져 도덕 따위는 뒷전으로 밀려난다. 이런
대가 되면 인심은 예전만 못해지고 풍속은 점점 각박해져 간다. 그에 따라 간신배와 부랑아
들, 그리고 갖가지 사이비 종교와 학설들이 활개를 치는 현상이 봇물 터지듯 솟구쳐오른다.
역사책을 들춰보면 이와 관련한 기록들이 수도 없이 많다. 송나라때의 채경, 동관,황잠선, 주
훈, 왕보, 장방창, 진회, 만사설, 가사도 및 전지교의 구처기등의 출현은 모두 이런 역사 현
상에 속한다.
어떤 시대가 되었던 도덕이 느슨해지거나 도덕을 내팽개치면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모르게
되고, 사회는 상식을 잃게 된다. 사람들은 제멋대로, 내키는 대로 아무 짓이나 저지르게 된
다. 그것이 혼란이요, 결국은 모두가 무너지고 만다. 어떤 시대가 되었건, 또는 어떤 계급이
되었건 자신의 도덕 체계를 세우지 않을 수 없다. 어떠한 사회가 되었건 그 나름의 양식과
상식이 없을 수는 없다 어는 누가 되었건 공중의 이익에 맞는 자신의 행위 준칙이 없어서는
안 된다. 도덕을 말하지 않는 계급은 썩고 타락한 계급이요, 도덕을 잃은 사회는 모래를 흩
어놓은, 그래서 곧 쓰러지고 흩어질 사회며, 자기 수양과 약속을 모르는 개인은 사회의 쓰레
기이자 밥벌레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숭고한 도덕 기풍을 바로 세워 우리의 생
활과 영혼을 깨끗이 하기 위한 투쟁에 나서야만 한다. 그를 위해 지금 당장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음 세가지다.
첫째, 지난날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그것이 남겨놓은 썩고 타락한 인생관을 청산해야 한
다. 낡은 사회를 멸망시킬 때 그 시체를 관에 넣어 무덤에 파묻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홁
속에서 썩어 악취를 풍기고 그 독으로 우리를 해치며, 나아가서는 우리들의 새로운 생활을
파괴한다. 낡은 사회의 썩고 타락한 사항, 도덕과 의식의 영향은 결코 쉽게 청소할 수 없다.
그것은 아주 완강하게 버티며, 마치 남의 몸을 빌어 환생하듯 거듭거듭 얼굴을 바꾸어 다시
나타난다. 그래서 우리는 한시라도 비판의 무기르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여러 모순과 갈등이 존재하는 한, 즉 선진과 낙수의 모순이 존재하는 한, 공
과 사의 모순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비판의 무기를 내려놓아서는 안 된다. 낡은 세계에 대
한 비판의 임무를 잊어서는 더욱 안 된다. 비판이 없으면 무엇이 아름다운지, 미운지, 진실
인지, 거짓인지, 선한지,악한지 알 수없다. 또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은 하지 말아야 하는지,
무엇을 추구하고 무엇을 버릴 것인지, 어떤 것을 긍정하고 어떤 것을 부정해야 하는지 모
르게 된다. 비판의 힘은 사람의 인식 능력, 억제 능력을 높인다. 우리는 비판의 무기를 결코
내던져서는 안된다.
둘째, 도덕 바로 세우기의 이론적 체계를 건설해야 한다. 고대의 스승들과 철학자들은 윤
리, 도덕 교육을 매우 중시했다. 그들은 도덕 교욱을 사회 진보의 관건으로보고 인, 의. 예,
지와 같은 일련의 사회 도덕의 틀로 발전시켜 왔다. 세 번 되돌이보고 아홉 번 생각하라. 약
속을 지키고 겸손하라. 남을 공경하고 예의로 대하라.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라....
주공 단은 "덕을 널리 실행하면서도 공경스러움을 지키는 자는 번영할 것이요, 부유한 땅
을 갖고도 근검절약하는 자는 편안할 것이며, 귀한 자리에 있으면서 자신을 낮출 줄 아는
자는 존귀하게 될 것이고, 강한 군대와 많은 백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두려워할 줄 아는
자는 승리할 것이며, 홍명하고 지혜로우면서도 어리석음을 지킬 줄 알면 이익을 얻을 것이
고, 많이 듣고 기록하면서도 더 알려는 자세를 지키면 폭넓어진다."라고 했다. 모든 일은
"마음을 비우고 자신을 낮추어야" 하여, 아울러 예, 의. 염, 치를 "나라의 네 자기 기본"으로
삼아야 한다면서 이 "네 가지가 널리 퍼지지 못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여겼다. 사람들에 대
해서는 "그 뜻을 바르게 하고, 모습을 단정하게 하며, 성품을 수양하라."고 요구했다.
이 모든 것들은 당시 사회 질서와 인간관게를 유지하고 안정시키는 데 진보적인 작용을
했으며, 사람들에게 깊은 계발을 주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의 도덕윤리 체계는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고, 또 모습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다. 민족의 우수한 문화와
전통을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우리의 실제에 근거하여 기틀을 마련해야 할 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평무사가 핵심이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남을 즐겨 돕고 나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전체 국민을 대상으로 한 행위 규범이 필요하며, 국가 공직자 등
각종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행동준칙도 필요하다. 그리하여 찬란한 윤리도덕의 꽃이 새
시대 새로운 사람들의 마음에 활짝 피어 풍요로운 결실이 주렁주렁 매달릴 것이다.
셋째, 모든 조직의 간부, 특히 지도급 간부의 모범적인 실천이 강조되어야 한다. 그 몸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실행한다. 그러나 그 몸이 바르지 못하면 명령을 내려도 실행에 옮
겨지지 않는다. 복숭아나무나 배나무는 말을 하지 않아도 절로 열매를 맺는다. 역사가 증명
하듯이 지도자의 모범적인 행동은 일의 성공과 실패에 지극히 중요하다. 지난날의 경험과
교훈을 종합해볼 때 정신문명의 건설이 이상적인 효과를 거두지 못한 가장 중용한 까닭의
하나는 지도자가 솔선수범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남을 지휘할 줄만 알았지 몸소 나서서 싸
우지 않았다.
진정으로 도덕 체계를 바로 세우고, 진정으로 정부의 기강을 바로 잡으며, 국민의 풍속,
문명, 건강, 복지를 제대로 세우려 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조직의 간부와 지도자들이
정신 똑바로 차리고 행동해야 한다. 더러운 싸움질일랑 당장 그만두고, 구질구질한 밥그릇
다툼일랑 즉각 걷어치우며, 국민들에게 몸소 실천하는 이상과 도덕의 표본이 되도록 애써야
한다.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 민심이 떠나간다고 걱정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나라가 부
유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국민의 풍속이 순박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고 보니 옛
날 중국 사람 하나가 생각난다. 한번은 이 사람이 동래 태수에 임명되어 창읍을 지나게 되
었다. 그런데 그의 추천을 받아 창읍 현령이 된 자가 야밤에 금덩이를 품고 와서 그에게 감
사를 표시했다. 그는 금덩이를 거절하며 "나는 자네를 알았는데 자네는 어째서 나를 모르는
가?"라고 말했다. 그러자 현령은 "이 밤에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라고 응수했다. 그
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하늘이 날고 땅이 알고 내가 알고 자네가 아는데,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고?"
강물은 밤낮으로 쉬지 않고 흐른다. 문명과 진보를 향한 인류의 발걸음은 막을 수 없다.
비관적 관점, 교만방자한 주장, 퇴보적 관념 따위는 그곳에 발붙일 수 없다. 우리는 믿는다.
백성과 민족은 위대하며, 우리가 기대어 살아가는 이 세계는 희망으로 가득 찬 세계라는 것
을! 보라! 희망의 태양이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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