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데이빗
안네 홀름
사람들의 나직한 속삭임을 들으면서 데이빗은 어둠 속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
다. 오늘 밤 그들의 이야기는 먼 곳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의
말 따위는 이제 데이빗의 관심 밖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밤 탈출해라."
그 남자는 데이빗에게 말했다.
"경비원이 교대하는 시간까지 모든 준비를 끝내고 기다려라. 전기가 끊기자마
자 성냥불을 켤테니까 그때 재빨리 철조망을 넘어라. 시간은 30초 뿐이다."
회색 페인트가 칠해진 그 남자의 우중충한 방이 데이빗의 눈에 들어왔다. 너
무나도 낯익은 방이었다. 그 남자를 볼 때마다 데이빗은 이해할 수 없는 미움으
로 가슴이 꽉 막히는 것 같았다. 그 남자의 작은 눈은 언제나 싸늘하게 번득였
으며 살진 얼굴은 천박하게 보였다. 데이빗은 처음부터 그를 알고 있었다. 그러
나 먼저 말을 걸어 본 일은 없었다. 그 남자가 물어 오면 간단하게 대답이나 하
는 정도였다. 물론 그 남자의 이름도 알고 있었지만 역시 한 번도 불러 본 적이
없었다. 늘 '그 남자'라고만 불렀다. 이름을 부른다면 그 남자를 다른 사람들처럼
생각해주는 것 같아 그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날 저녁, 데이빗은 처음으로 그 남자와 말을 주고 받았다.
"만약 내가 탈출하지 않는다면?"
그 남자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난 내일 여기를 떠날 테니 내 알 바 아니지. 내 후임이 널 어떻게 취급하든지
상관할 바가 아니고. 하지만 넌 곧 어른이 될 테고 세상에는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곳이 많은데 넌 이런 곳에서 일생을 보내겠니?"
지금까지 살아온 이 수용소보다 더 살기 좋은 곳이 있다니 상상할 수조차 없
었다.
"만일 붙잡히지 않고 탈출하게 되면 그 다음엔 어떻게 해요?"
"광산 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숲속에 아주 커다란 나무가 한 그루 보일 게
다. 그 밑에다 물통과 나침반을 숨겨뒀으니 나침반을 보면서 계속 남쪽으로 가
거라. 그러면 살로니카라는 항구에 도착하게 된다. 그곳에 도착하면 이탈리아로
떠나는 배를 찾아라. 아무도 안 볼 때 살짝 숨어 타야 한다. 배에서는 물이 필요
할 테니 준비해 가지고 타도록 해. 배가 이탈리아에 도착하면, 계속해서 북쪽으
로 가거라. 얼마를 가다 보면 덴마크라는 나라에 도착하게 된다. 그곳에 가서야
안심하고 살 수 있을 게다."
"나침반이라는 게 뭐여요?"
그 남자는 나침반을 꺼내어 데이빗에게 보여주었다. 글자는 동서남북을 의미
하며 바늘은 언제나 북쪽을 가리키면서 자유롭게 돌아간다는 것을 자세히 설명
해 주었다.
"시간은 30초 뿐이니까 누구를 데리고 탈출할 생각은 말아라. 그러다가는 둘
다 붙잡히고 말 테니까."
데이빗은 그 남자의 마음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지금껏 늘 그
남자가 싫었기 때문에 무엇을 특별히 청해 본 일이 없었지만 데이빗은 처음으로
비누 한 장을 청했다.
"비누 한 장만 주시겠어요?"
우중충한 회색빛 방안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남자는 세면대로 가서 비누
한 장을 집어들더니 탁자에 던지며 말했다.
"가봐라."
데이빗은 서두르는 기색을 보이지 않으면서도 재빨리 방을 나왔다.
어디선가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가 들려왔다. 제일 나중에 입소한 사람의 목소
리였다. 그의 독특한 억양 때문에 데이빗은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는 잠만 들면 가위에 눌려 한바탕 소란을 피웠다. 그래서 곤히 잠들었던 다른
사람들을 모두 깨워놓곤 했다. 어젯밤에는 경비원 교대시간 바로 전에 한바탕
법석을 떨었었다. 오늘 밤은 이렇게 늦게까지 잠들지 않고 있으니 그가 소란을
피우기 전에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데이빗은 아직도 탈출을 결정짓지 못한 채 망설였다. 그 남자가 왜 자기를 탈
출시키려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어쩌면 함정인지도 모른다. 철조망을 넘으
려는 순간 탐조등이 쫙 비치고 철조망에 매달린 자기의 모습이 드러나면 그 남
자가 제일 먼저 총을 쏠 곳이다. 데이빗이 그 남자를 미워하는 만큼 그 남자도
데이빗을 미워했기 때문이다. 신상 카드에 열두 살로 되어있는 데이빗은 그동
안 기쁜 일이라곤 한 번도 없었다.
그 순간, 데이빗은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비록 이것이 계략이나 함정이라도 좋
다. 그들이 총을 쏘면 모든 것은 순간에 끝나버리고 말 것이다. 머리가 터져버릴
만큼 의문이 꼬리를 물었지만 데이빗은 탈출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약속된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경비실에서는 사람들의 발소리와 옷 갈
아입는 소리로 부산스러웠다. 하품 소리에 뒤이어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그 남자였다. 희끄무레한 불빛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들어서는 그 남자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 남자의 경비 차례인 것이다. 갑자기 데이빗은 온 몸의 기
운이 빠져버리는 것을 느끼면서 주저앉았다. 바로 그 시간이 되어도 떠날 수 없
을 것만 같았다. 데이빗은 앞으로 수용소에서 보내야 할 기나긴 세월을 눈앞에
그려보았다. 결국에는 지쳐서 죽고 말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더욱 비참해질 것
이 뻔하다. 데이빗은 이를 악물고 목에 힘을 주었다. 그 순간 그 남자가 성냥을
켰다.
열 아홉, 스물… 데이빗은 천천히 서른을 세면서 가시철조망을 기어오르기 시
작했다. 탐조등이 나를 비추면 어떻게 하지? 깜깜한 데서야 볼 수 없겠지만…
그들이 서두르지만 않는다면철조망을 무사히 넘을 수 있으리라.
잠시 후 데이빗은 철조망을 넘었다. 그리고는 어둠 속을 달리기 시작했다. 데
이빗은 자기 자신에게 화를 내면서 속으로 부르짖었다. '이 바보야! 숲까지는 아
직도 한참인데 이렇게 뛴다고 될 줄 아니? 네가 숲에 거의 다다를 때쯤 나타나
려고 숨어서 기다리는지도 모르잖아. 이젠 안심이라고 마음을 놓는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단 말이야. 그렇게 되어야 더 신바람이 날 테니까.'
왜 서둘러서 잡으러 오지 않을까? 데이빗은 자기 머리 위로 금방 탐조등의 강
렬한 빛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뛰지 말아야지. 탐조등이 켜졌을 때 침착하게
걷고 있는 내 모습을 보여주자. 그러면 오히려 그들이 속은 것 같은 기분이겠지.
잡힐 때 잡히더라도 그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주자.' 이런 생각을 하며 침착
하게, 그러면서도 재빨리 걷고 있는 데이빗은 쾌감을 느꼈다.
어렸을 때부터 데이빗은 그들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특히 그 남자를 이겨내
고 싶었다. 그러한 생각은 오랫동안 데이빗을 사로잡고 있었다. 드디어 그들을
이겨낸 것이다. 탐조등의 빛줄기 속에서 유유히 걷고 있는 데이빗을 뒤에서 쏜
다는 것은 비겁한 짓이기 때문이다.
데이빗은 그들을 이겼다는 기쁨에 넘쳐서 계속 걸었다. 어느덧 수용소에서 12
야드쯤 떨어진 숲에 도착했다. 저격당하지도 않고 몸을 숨길 수 있는 숲까지 걸
어온 것이다. 수용소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
고 뒤를 돌아다 보았다. 엉성한 나무들 사이로 어두컴컴한 하늘에 수용소 건물
이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건물들은 마치 짙은 회색 바탕에 검정으로 칠해진
얼룩 같았다. 경비원의 말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점점 가까이 들려오는 게 아
니라 점점 벌어지는 소리였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적막한 분위기는 평소와
다름없다.
데이빗은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곧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숲길을 따라
서 큰 나무가 있는 곳까지 단숨에 뛰었다. 커다란 나무둥치 밑에 몸을 던지듯
주저앉은 그는 풀밭을 헤쳤다.
무언가 금방 손에 잡히는 것이 있었다. 갑자기 데이빗은 등줄기가 오싹했다.
비오듯 흐르던 땀이 금방 식어버리는 것 같았다. 데이빗은 나무둥치에 기대앉았
다. 보자기는 단단하게 잘 싸여져 있었다. 보자기를 풀어야겠다는 생각과는 달리
오히려 손이 움츠러들었다.
그때 비로소 데이빗은 깨달았다. 그 보자기를 풀지 못하고 엉거주춤하는 이유
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데이빗은 조심스럽게 그것을 살펴보았다. 혹시 폭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자 자꾸만 손이 떨렸다. 데이빗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폭
탄이든 무엇이든 상관없다. 금방 결말이 날 테니까.
보자기를 끌렀다. 물통 하나와 나침반처럼 생긴 물건이 집혔다. 그 남자의 말
대로였다. 데이빗은 너무나도 놀라 마구 뛰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조
심스럽게 보자기 속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보자기 안에
는 물통과 나침반 말고도 한 덩어리의 빵과 주머니칼 그리고 성냥 한 통이 들어
있었다.
정말 그 남자는 데이빗을 탈출시켜준 것이다. 수색대는 아침에나 그를 잡으러
올 터이니 이 밤은 데이빗의 것이다. 새벽이 되기 전에 되도록 멀리 도망쳐야
한다.
이 모든 것은 불과 몇 분 동안에 일어났건만 데이빗에게는 꽤나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데이빗은 비누를 꽉 움켜 잡았다. 처음 비누를 얻었을 때부터
줄곧 그것을 움켜쥐고 있었다. 데이빗은 조금 전의 일들을 눈앞에 떠올려 보았
다. 침대 위에서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를 들으며 그 남자가 했던 말을 곰곰히
되새겨 보지 않았던가? 이제 데이빗에게는 지난 일들이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
다. 중요한 것은 오직 보따리와 발의 자유 뿐이다. 그는 보따리에 비누를 넣고
물통 위에는 빵을, 그 옆에는 주머니칼을 놓은 후 단단히 잘 묶었다. 그리곤 손
에 나침반을 보면서 남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데이빗은 닷새 동안을 계속해서 달렸다. 제대로 가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계속 손에 든 나침반을 보면서 뛰었다. 그는 매일 밤 쉬지 않고 뛰었다. 물웅덩
이에 빠지거나 진흙탕에 넘어지기가 일쑤였으므로 온 몸은 상처와 흙투성이가
되었다. 또 나뭇가지에 긁힌 얼굴, 팔과 다리에서는 피가 계속 흘러내렸다. 가시
밭을 지나던 밤의 일은 결코 잊을 수 없었다. 나침반의 바늘은 가시나무로 뒤덮
인 숲을 똑바로 가리키고있었다. 가시나무 숲을 피해 돌아가 보려고 했지만 그
때마다 나침반의 바늘은 엉뚱한 곳을 가리키고 있었으므로 데이빗은 되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데이빗은 두 팔로 얼굴을 감싼 채 가시나무 숲속으로 뛰
어들었다. 나침반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데이빗은 엉뚱한 고생을 치른 것이
다. 가시나무 숲속에 들어가자마자 금방 온 몸에 상처가 났다. 긁히고 찔린 상처
에서는 피가 흘러내렸지만 그는 온 힘을 다해 덤불을 헤치며 앞으로 앞으로 나
아갔다. 그날 밤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사방은 죽은 듯이 고요했다. 그런데 어
디선가 흐느낌같은 소리가 들려오는게 아닌가. 그 소리는 데이빗 자신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임을 곧 알게 되었다. 쉬지 않고 계속 정신없이 달렸기 때문에 터질
듯한 가슴과 목구멍에서 이상한 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매일 아침, 먼동이 희미하게 터올 때면 인적 없는 곳에 숨었다. 밤에는 달리고
낮에는 잤다. 그동안 여러 마을을 지나쳤지만 달려오느라 마을 이름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러는 중에 데이빗이 잊을 수 없는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어느 날 해질 무
렵이었다. 잠결에 무언가 부드러운 감촉을 느낀 데이빗은 깜짝 놀라 잠을 깼다.
너무나 무서워 눈을 감은 채 죽은 듯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 겨우
머리를 돌린 데이빗의 눈에 띈 것은 한 마리의 양이었다. 양이 있으면 분명히
목동도 있을 터이므로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행이었다. 가
지고 있던 빵과 물이 없어진지 벌써 오래 되었기 때문이다. 굶주림은 어느 정도
견딜 수 있었지만 타오르는 갈증은 참기 어려웠다. 금방 죽을 것만 같았다. 그래
서 길을 걷는 동안 데이빗의 머리 속은 내내 물 생각 뿐이었다.
그날 밤 데이빗은 숨소리까지 죽여 가며 길을 걸었다.
그때 겉옷을 덮고 잠이 든 두명의 목동이 보였다. 데이빗은 두근거리는 가슴
을 진정시키며 숨을 죽였다. 다행히 맨발이어서 소리를 내지 않고 가까이 다가
갈 수 있었다.
데이빗은 조심스럽게 뒷걸음질치며 주위를 살펴보았다. 달빛 아래 뿌연 잿더
미 속에서 아직 꺼지지 않은 불씨가 발갛게 보였다. 그 위에는 뚜껑 덮인 들통
이 놓여 있었다. '음식이구나. 음식이 있으니 물도 있겠지!'
그날 밤 데이빗은 그곳에 머물렀다. 이곳은 목동들이 양식을 두고 다닐 수 있
도록 정해 놓은 야영장인 것 같았다. 만일을 생각해서 들키면 도망칠 수 있도록
충분한 거리를 두고 두 목동의 거동을 살펴보았다. 아침이 되어 목동들이 일을
나간 사이에 재빨리 음식을 훔쳐올 생각이었다. 데이빗은 음식과 물 없이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이런 때 수용소의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가를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궂은 날이 있으면 개인 날도 있는 법이다. 들통에는 국이 좀 남아 있었고 보
따리에는 한 덩이의 커다란 빵이 들어 있었다. 빵을 뚝 잘라 작은 덩이는 남겨
두고, 국은 물통에 가득 담았다. 양들이 국이나 빵을 먹는지 안 먹는지 알 수 없
었지만 데이빗은 마치 양들한테 허락을 받고 가져가듯이 인사를 했다.
그날 밤 이후로는 발걸음을 떼어 놓을 때마다 더 조심스러웠다. 게다가 숨이
찼기 때문에 자주 걸음을 멈추어야만 했다. 너무 지친 나머지 앞을 제대로 분간
할 수도 없었다.
두 번째 사건은 도시 가까이에 왔을 때였다. 나침반의 바늘은 도시 한가운데
를 가리키고 있었다.
살로니카까지 어느 정도의 시일이 필요한지를 물어 보지 않고 떠나온 것이 몹
시 후회스러웠다. 이제는 빵 한 조각과 국물 두어 모금 남아 있을 뿐이었다.
밤이 되었는데도 행인들이 여기 저기 눈에 띄었으므로 무작정 뛸 수도 없었
다. 밤이 이슥하도록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데이빗은 앞으로 통과해야될 많은
도시를 생각하며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졸리지도 않은 눈을 꼭 감고 가만히 누워 있어야 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데이빗에게는 사람들 눈에 뛰지 않도록 숨는 일이 중요했다. 어떤
생각도 허락될 수 없었다. 생각하지 않는 습관은 이미 수용소에서부터 익혀 온
것이었다. 무엇을 보거나 소리를 들어도 마음 속에 새겨 넣고 곰곰히 생각하는
것은 절대 금물이었다. 비가 오려고 한다든지 날씨가 갤 것이라는 등 또는 식사
시간은 몇 시며 경비는 언제 교대한다는 등 일 이외에는 거의 무관심해야 했다.
더구나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문제들은 더욱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했다.
수용소를 탈출한 날 밤부터 데이빗의 생각은 온통 하나로 쏠렸다. 밤을 이용
하여 좀더 빨리 도망갈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는 것과 낮동안 안전히게 숨어서
잠자는 일에 대한 것이었다. 먹을 것을 구하러 가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며 보따
리를 챙겨 들었다. 나침반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다른 생각에 몰두할 여유도 없었다. 잡힐 것 같은 두려움에 떨면서 전
날 저녁에 걸어온 길을 곰곰 되새겨 보았다. 굴곡이 심한 산길을 밤에 걷는다는
것은 몹시 위험했다. 살로니카까지 가는 이 길은 왜 이렇게 산들이 많을까 하며
한숨을 몰아쉬었다.
데이빗은 연방 풀을 잡아뜯으며 이러한 생각에서 벗어나고자 애썼다. 다리를
건너던 날 밤에는 어떻게 붙잡히지 않을 수 있었을까? 데이빗은 헤엄칠 줄을 몰
랐다. 그래서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위험을 각오하고 다리를 통과할 수밖에 없
었다. 그때 데이빗은 꼭 붙잡힐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아무도 데이빗을 잡는 사람
은 없었다.
데이빗의 발은 이미 그의 몸에 딸린 것이 아니라 독립된 기관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소리를 내지 않고 다가가서는 그것을 훔쳐왔으며
가야 할 길을 정확하게 갔다. 그늘을 찾아서 쉬게 해주었고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때맞춰 걸음을 멈췄다. 너무나 지친 나머지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
을 때라도 데이빗을 일으켜 세워서는 가던 길을 재촉하곤 했다.
다리를 건너게 한 것도 그의 발이었다.
데이빗은 이를 악물었다. 살로니카라는 말을 입속으로 계속 중얼거렸다. 계속
남쪽으로 가면 살로니카에 도착한다는 것만을 생각했다.
그때 갑자기 자동차 소리가 났다. 깜짝 놀란 데이빗은 주위를 살펴보았다.
아주 가까운 데서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요 며칠 동안 사람들의
말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런데 왁자지껄하게 들려오는 여러 사람들의 말소리에
는 뜻밖에도 귀에 익은 것이 있었다. 수용소의 경비원과 그 남자의 음성 같았다.
그들은 이상하게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주고받으며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
다. 데이빗은 숨을 죽인 채 그들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데이빗으로부터 좀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더니 담배에 불을 붙였
다. 점차 어둠에 익숙해진 데이빗은 모든 것이 잘 보였다. 그들은 데이빗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았으나
전에 들었던 그 남자의 말과는 너무나 달라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데이빗은 몇
마디만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수용소에 물건을 실어다 주는 짐차를 몰고 가던 중이었다. 잠시 후 그
들은 서로 말다툼을 하기 시작했다. 한 사람은 그냥 가자고 하는 것 같았고 다
른 함 사람은 그 도시에 사는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잠시 들렀다가 가자는 것이
었다. 드디어 두 사람은 합의를 보았다. 살로니카까지 가려면 많은 시간이 소요
되므로 30분 동안에 방문을 끝내기로 합의를 본 것이다. 마치 데이빗의 간절한
마음이 전해지기라도 한 듯이 그들은 살로니카로 가는 것이다. 이제 데이빗이
할 일은 그들의 차가 떠나기 전에 재빨리 숨어 타는 것 뿐이었다.
잠시 후에 그들이 탄 차는 시내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데이빗은 있는 힘
을 다해 짐차 뒤에 매달렸다. 차가 시내의 변두리에 멈추고 그들이 어떤 집으로
들어갔을 때 데이빗은 재빨리 차에 올라가 짐 속에 숨었다. 다행히도 차 문은
잠겨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 집은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지만 아무도 보이지는 않았다. 짐칸에는 포장
된 짐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데이빗은 그중 하나를 힘겹게 옆으로 밀어놓은 다
음 겨우 끼어 앉았다. 이제야 살로니카에 가게 되는구나! 자동차 안은 칠흑같이
어두었다. 밤이기도 했지만 운전석과 짐칸 사이에 있는 조금만 창마저 짐더미에
가리워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문을 열고 들여다본다 하더라도 짐을 모두
치우기 전에는 데이빗을 발견하기란 힘들 것 같았다. 이렇게 차를 타고 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일이다. 짐차나 승용차를 본 일은 있었지만 타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마차조차 타 본 일이 없었다. 들키지 않고 차에서 내리는
문제는 지금부터 생각하고 싶지가 않았다.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차에 시동이 걸리고 차가 몹시 흔들거리며 달리자 데이빗은 깊은 잠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얼마 동안을 잤을까!
데이빗은 이상한 엔진소리에 깜짝 놀라 잠을 깼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데이빗은 오랫동안 밤에는 잠을 자지 못했다. 낮동안 잠을 자는 데 익숙해진 것
이다. 소리나지 않게 장을 막고 있는 짐을 약간 밀어냈다. 좁은 틈으로 내다보니
밖은 아직 깜깜했고 운전석도 어두웠다.
날이 밝기 전에 빠져나가야 한다. 그들이 뒷문을 열고 자기를 벌견하기 전에
도망쳐야 한다.
갑자기 데이빗은 자신이 독방에 갇힌 느낌이 들었다. 독방에 갇혀 있으면 어
떤 기분일까? 그런 일에 대해서는 여러 번 들은 적이 있었다. 데이빗은 충분히
실감할 수 있었다. 밖에서 단단히 잠근 문 때문에 움직일 수도 죽을 수도 없는
처지에 놓인 그들의 심정을… 캄캄한 어둠 속에서 데이빗은 꼭 독방에 갇힌 사
람처럼 꼼짝 못하고 있었다.
갑자기 데이빗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요하네스…"
그가 아주 어렸을 때였다. 그는 삼 년 동안이나 요하네스를 생각하지 않으려
고 무척 노력했다. 드디어 요하네스는 데이빗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떠오른 것이다.
그는 두 무릎 사이에 어리를 파묻고 뭄부림을 쳤다. 홍수처럼 밀려드는 기억
들을 몰아내려고 애를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의 가슴 속에서는 증오와 미움,
의문투성이의 기억들이 불길처럼 마구 타올라 머리 속을 어지럽혔다. 그런 중에
서도 요하네스만은 미소 띤 얼굴로 데이빗을 바라보고 있었다. 요하네스의 목소
리가 다른 사람들처럼 맥이 빠지고 기분 나쁘게 들렸다면 … 그러나 요하네스는
자기의 신념을 바꾸지 않았고 누가 무어라고 해도 상관하지 않았다. 어느 날 그
는 땅에 쓰러졌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날 저녁 데이빗은 요하네스가 쓰러졌던 곳으로 나갔다. 먼저 와 있던 그 남
자는 데이빗을 보자 무뚝뚝하게 말했다. 요하네스는 심장마비로 죽었으니 그에
대한 생각은 잊어버리고 가서 자라는 것이었다.
그날부터 데이빗은 요하네스를 생각하지 않았다. 경비원 교대시간이나 궁금해
하고 식사를 기다리며 날씨를 점쳐 보는 게 고작이었다. 다른 생각은 절대 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처음에는 괴로웠지만 차츰 익숙해졌다.
살로니카까지 가는 것만이 가장 시급한 문제인 지금 왜 갑자기 요하네스가 생
각났을까?
"내가 살로니카까지 너와 함께 가주마!"
먼 곳에서 어렴풋이 어떤 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다. 정말 요하네스의 목소리
인지 분간키 어려웠다. 그러나 어려서 요하네스와 함께 일으면서 이야기할 때
듣고 느꼈던 것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데이빗은 요하네스의 음성이라고 확신했
다.
"고마와요, 요하네스!"
데이빗은 어둠 속에서 속삭였다.
그러고 나자 기분이 한결 가벼워졌다. 많은 짐짝들 중의 하나가 못이 빠진 채
열려 있는 것이 보였다. 먹을 수 있는게 아닐까 하고 둥굴게 생긴 것을 만져 보
았다. 딱딱한 감촉이 치즈 같았다. 데이빗은 소용소에서 딱 한 번 치즈를 먹어
본 일이 있다. 한 덩어리를 칼로 잘라 얼른 보자기에 쌌다. 아직 밖은 어둠이 걷
히지 않았는데 그들은 차를 세워둔 채 어디론가 가고 없었다. 짐칸 뒷문은 열린
채였다. 데이빗은 재빨리 차에서 뛰어내렸다. 그곳은 커다란 도시의 중심지 같았
다. 건물들의 그늘 속으로 몸을 숨기면서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곧 항구가 나
왔고 이내 데이빗의 눈앞에는 정박하고 있는 배들이 나타났다. 저족 길 모퉁이
에서 한 사람이 물을 마시고 있었다. 데이빗이 달려가 보니 수도꼭지에서 물이
흐러나오고 있었다. 데이빗은 행인이 없는 틈을 타서 물통을 가득 채웠다.
이탈리아로 가는 배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 배에는 흰 페인트로 '이탈리
아'라고 큼직하게 씌어있었고 굵은 밧줄에 묶여 있었다. 데이빗은 배를 지키고
있던 선원이 배 뒤편으로 돌아간 틈을 이용하여 배에 올았다. 들키지 않도록 조
심하면서 자꾸만 아래로 내려갔다. 맨 밑에는 짐으로 가득찬 커다란 방이 있었
는데 몹시 어두웠다.
데이빗은 짐 사이에 비집고 앉았다. 처음에는 창문을 찾아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 방은 물 속에 잠기는 부분이었으므로 창문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곧 알게 되
었다.
데이빗은 성냥을 켰다. 수용소의 경비원들처럼 솜바닥으로 불꽃을 감싸며 천
정 꼭대기까지 들어찬 짐들을 비춰보았다. 짐은 주로 상자와 자루에 들어 있었
다.
한쪽 구석에 자루 두 개가 놓여 있었다. 그곳에 숨어 있으면 누가 들어오더라
도 쉽게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다. 이탈리아에 도착할 때까지는 누가 들어올 것
같지도 않았다. 짐은 모두 이탈리아로 가는 것들이었다. 성냥은 두 개비만 썼다.
데이빗은 은 그 이상 성냥은 쓰지 않았다. 성냥을 아껴야만 했기 때문이다. 성냥
불이 거의 꺼져갈 때 조금 높은 상자 위에 놓여진 커다란 병이 눈에 띄었다. 무
언가 반쯤 들어 있었다. 데이빗은 보따리를 자루 위에 내려놓고는 발꿈치를 들
어 간신히 병을 내렸다. 병마개를 열고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니 먹을 만했다.
데이빗은 자루 위에 편안히 앉았다. 배를 타고 가는 동안 먹을 것이 있어서 다
행이었다. 데이빗은 엔진소리에 또다시 눈을 떴다. 그러나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차 속에서 우연히 요하네스를 회상하고 부터는 계속 그런 느낌이렀
다. 몽롱한 상태에서 깨어나기 위해 데이빗은 눈을 껌벅거리며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요하네스는 이미 먼 나라 사람으로 자기 곁을 떠났다. 그는 이미 오래
전에 잊혀진 사람이었다.
데이빗은 두려움을 몰아내려고 애썼다. 요하네스는 살로니카까지만 함께 가준
다고 했었다.
그래서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추위와 어둠과 절
망적인 외로움에 시달려 온 데이빗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며칠이 지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늘 캄캄했으므로 낮과 밤을 구별
할 수 없었다.
한 번은 목이 말라 잠이 깨었다. 더듬거리며 물통을 찾다가 그 커다란 병에
들어 있는 것을 마셨다. 그것을 마시고 나면 금방 잠이 들었고 맛도 좋았다. 그
후로 데이빗은 깨어나면 항상 그것을 마셨다. 좀 독하기는 했지만 기분이 나쁘
지는 않았다. 그것을 마시고 나면 오랫동안 잠을 잘 수 있었다. 어떤 때는 문을
열고 나가서 누구를 만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러면 모든 것이 잘
해결될 것 같았다.
어느 날 그는 머리 위에서 나는 이상한 소리에 잠이 깨었다. 절망적인 어둠이
데이빗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의 발은 꼼짝도 하지 않았고 그의 두 다리
도 이미 힘을 잃고 있었다.
"아이구 깜짝이야. 아니, 너 여기서 뭘하고 있지?"
데이빗은 놀라서 황급히 일어나기는 했지만 도망치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 사
람은 이탈리아 사람인지 머리카락이 검은 색이었다.
"아무것도 안해요."
데이빗은 이탈리아 말로 대답했다.
고함을 치려던 선원은 곧 생각이 바뀌었는지 가만히 문을 닫은 뒤 데이빗에게
로 다가왔다. 그 선원도 자신의 행동에 어리둥절한 듯했다. 어쩌면 데이빗의 힘
없는 모습과 바짝 마르고 지저분한 얼굴이 곧 죽을 것처럼 보였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선원은 마땅히 데이빗을 선장에게 데리고 가야 했다. 그러나 회중전등 불빛에
비친 데이빗의 모습은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불쌍하고 비참했다. 소년
은 거의 죽어가고 있지 않은가? 선원은 그의 할머니 생각이 났다. 돌아가시기
전날 할머니의 눈빛이 바로 이랬다. 물론 할머니의 눈빛은 이 소년의 눈빛과 달
리 갈색이었다. 희미한 불빛으로 쉽게 구별할 수는 없었지만 이 소년의 눈빛은
짙은 녹회색이었다.
선원은 직감적으로 느끼는 것을 우선 물어보았다.
"내 포도주는 다 네가 마신 거냐?"
"예, 제 물통의 물이 다 떨어졌어요. 포도주인 줄은 몰랐어요. 정말 감사합니
다."
검은색 곱슬머리의 이탈리아 사람은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아마도 이런 아이
는 처음 만났을 것이다. 무엇인지도 모르고 포도주를 마신 일과 그것도 전연 훔
쳐 먹었다는 생각이 없이 고맙다고 인사하는 그 소년의 태도가 놀라우리만큼 침
착했기 때문이다. 흔히 잘못을 저지르고 붙잡힌 소년들은 어떻게든 도망치려고
몸을 뒤틀고 안간힘을 쓰는데 이 소년은 어딘가 달라 보였다. 오히려 소년은 똑
바로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어딜 가려고 이 배를 탔니?"
"이탈리아요!"
"그래? 나는 너를 선장한테 데려가야 하는데…"
이렇게 중얼거리면서도 그 선원은 데이빗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우리는 오늘 저녁 살레르노에 도착한단다. 나는 너를 선장에게 끌고 가서 혼
나게 하고 싶지 않구나. 너는 거기에 도착하기 전에 배에서 내렸으면 좋겠다. 난
모른척하고 있을테니까."
"저는 헤엄을 칠 줄 모르는데요."
데이빗은 조용히 말했다.
"아이구, 그럼 어떻게 한다? 그렇다고 여기에 그냥 있을 수는 없는데…음, 그
럼 구명대를 하나 갖다줄 테니까 그걸 타고서 해안 쪽으로 나가 볼래?
"…고맙습니다."
그 이탈리아 사람은 머리를 끄덕이며 나갔다.
데이빗은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았다. 배가 무척 고팠다. 마음이 착해 데이빗을
선장에게 데려갈 수 없었던 그 선원은 데이빗이 너무나 지친 나머지 서 있을 힘
조차 없다는 것을 몰랐다. 그러나 데이빗은 물 속으로 뛰어들어야 할 때가 왔다.
구명대가 무엇인지, 어떤 역할을 하는지, 데이빗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
선원은 구명대만 있으면 해안까지 갈 수 있다고 했다. 육지에 닿으면 밤마다 달
음질을 칠 수 있다. 그는 잡히지 않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도망갈 것이다. 잡힐
때는 잡히더라도 있는 힘을 다해 멀리멀리 가고 싶었다.
데이빗은 다 헤지고 더러운 웃저고리를 단정하게 바지 속으로 집어넣었다. 보
따리는 안전하게 허리에다 묶었다.그 선원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준비를 다 끝
냈다.
조금 후 선원이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구명대와 빵 한 덩어리가 들려있었다.
데이빗은 눈깜짝 할 사이에 빵을 반이나 먹어치우는 동안 선원은 열심히 설명
해주었다. 구명대를 끼는 방법과 바를 방향으로 나가기 위해 팔을 젓는 방법 등
이었다. 목만 겨우 물 위로 올라온다는 이야기에 데이빗은 깜짝 놀랐다. 나침반
이 젖을 것 같아 보따리를 목에다 묶었다. 마지막으로 그 선원은 들키지 않으려
면 배가 떠나기 전에는 절대로 물을 튀지 말라고 당부했다.
잠시후 데이빗은 밧줄에 묶여 바다로 내려갔다. 다행히 물이 별로 차갑지 않
았다. 배가 재빠르게 미끄러져 가기 시작하는 순간 데이빗은 돈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이대로 물에 빠져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동차 타이어
같이 생긴 이 구면대로 정말 살아날 수 있을까? 데이빗은 선원이 일러준 대로
팔을 휘저어 보았다. 그러나 곧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다. 배가 떠나가면서 센
물결이 뒤로 밀어 보냈으므로 데이빗은 저절로 해안 쪽으로 떠밀려 나갔던 것이
다.
육지에 닿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힘겹게 땅으로 올라서니 겨울처럼
으스스 추웠다. 발이 앞으로 움직여주었다.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너무 지쳐 있
었던 것이다.
주위는 깜깜한 어둠에 싸여 있었다. 데입시은 간신히 언덕 위로 기어올라갔다.
땅은 돌이 많았고 험했다. 아마 산비탈인 모양이었다. 얼마를 더 기어가니 큰길
이 나타났다. 행인을 겁내거나 숨을 여유도 없이 무작정 길을 건넜다. 길 건너편
에 있는 언덕 위로 다시 한참 동안을 올라갔다. 작은 키의 농작물들이 줄지어
선 밭을 지나 모퉁이를 도는 순간 날카로운 돌멩이에 발을 부딪힌 데이빗은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
데이빗은 쓰러진 채 잠이 들었다. 아침이 되어 눈을 떴을 때는 거짓말처럼 몸
이 가벼웠다. 피곤이 말끔히 가셨을뿐만 아니라 기분이 좋을 만큼 날씨는 따뜻
하고 상쾌했다. 데입빗은 편안히 누운 자세로 늘 하듯이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
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침햇살에 몸이 따스하게 녹았다. 사방은 고요했다. 일어
나 앉아 사방을 들러보았다.
지금까지 데이빗은 회색과 갈색에만 익숙해 있었다. 물론 하늘이 파란 것도
잘 알고 있었고 어쩌다 피어난 수용소 마당의 빨간 꽃을 본 일도 있었다. 그러
나 지금까지 그외의 색깔에 대해서는 듣기만 했을 뿐 그가 지금까지 보아온 것
은 수용소와 그 주변에서 볼 수 있었던 희미하고 빛바랜 색깔 뿐이었다.
산기슭에 앉아서 정신없이 주위를 살펴보던 데이빗의 눈에서는 갑자기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저 아래쪽에는 하늘보다 더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었고 구불구불 이어진 해안
선은 초록과 황금색이었다. 여기저기 피어 있는 빨간 꽃들이 데이빗의 눈길을
끌었고 해안선을 따라 이어진 도로가 시원스러웠다. 길 옆에는 군데군데 흩어진
집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었으며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숲에서는 햇살의 각도
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초록빛이 무척 싱그러웠다. 햇살도 모든 것을 태워버릴
것 같았던 수용소의 강렬한 햇살과는 달랐다. 주변은 부드럽고 따스한 황금빛의
햇살로 가득차 있었다.
"아름다움!"
데이빗은 문득 요하네스를 떠올렸다. 꼭 한 번 그에게서 들은 적이 있는 말이
었다. 아마 요하네스는 이런 광경을 두고 아름답다는 말을 했겠지…요하네스는
살로니카까지 데이빗과 함께 와주었다. 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도록 해주었고
이렇게 아름다운 곳을 볼 수 있게 해주었던 것이다.
데이빗은 요하네스를 생각하면서 계속 눈물을 흘렸다. 주먹으로 눈물을 닦아
내며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경치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비로소 데이빗은 살고 싶은 의욕이 생겼다.
달리는 짐차 속에서 외로움과 무서움에 휩싸여 절망에 빠졌을 ㄸ 요하네스는
살로니카까지 그와 함께 해주었다. 데이빗은 머리카락이 유난히도 까맣던 이탈
리아의 선원도 생각이 났다. 이상하게도 자기를 육지로 나올 수 있게 도와주지
않았던가. 이제 데이빗은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배우게 되었고 가슴 깊은 곳에서
터져나오는 생명의 소리를 들었다.
2
데이빗은 오랫동안 넋을 잃은 채 앉아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
들-푸른 바다, 굽이굽이 펼쳐진 해안선, 자연의 갖가지 생각들-황금색, 붉은색,
초록색…모두가 어리둥절할 만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푸른 바다와
끝없이 펼쳐진 하늘이 서로 만나 하나로 녹아드는 수평선도 좋았다.
데이빗은 잔디 위에 놓여 있는 자기 손을 바라보았다. 새까맣게 때가 낀 손이
당장 자기가 해야 할 일을 가르쳐주는 것 같았다. 여름도 가고 가을이 깊었건만
잔디는 아직 푸르렀다. 가까운 곳 어딘가 물이 있을 것 같았다.
아직 이른 아침이었다. 낮동안 숨을 만한 곳을 찾아나섰다. 숲으로 들어서자
쉽게 물을 찾을 수 있었다. 넓은 바다를 향헤 흘러가는 물줄기가 햇살을 받아
반짝거렸다. 사람이 오면 숲속에 숨을 수 있어서 마음이 놓였다. 데이빗은 옷을
벗었다. 옷이라곤 다 해진 샤쓰와 끈 달린 바지 뿐이었다. 바지와 샤쓰를 물 속
에 담가 돌로 눌러 놓았다. 데이빗은 보따리 속에서 비누를 꺼내 손바닥에 놓고
서는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수용소에서 처음 입소하는 사람들은 모두 깨끗하
게 보였고 냄새도 나지 않았었다. 데이빗은 떠오르는 생각들을 떨쳐버리며 손부
터 깨끗이 씻었다.
몸은 샤쓰로 문질러 말끔히 때를 씻어냈다. 밤동안 바닷물에 잠겨 있었기 때
문에 몸은 쉽게 씻겨졌지만 머리가 문제였다.
엉겨붙은 머리칼이 깨긋해질 때가지 몇 번이고 계속 감았다. 수용소 냄새와
찌꺼기를 머리 속에서 말끔히 몰아내기라도 하듯 팔이 아플 때까지 비누칠을 하
여 머리를 문질러 댄 후 깨끗한 물로 수십 번 헹궜다. 그리고는 끈적거리지 않
을 때까지 샤쓰로 닥아냈다. 좀 춥긴 했지만 지금 데이빗에게 중요한 것은 깨끗
해지는 것 뿐이었으므로 아랑곳하지 않았다. 샤쓰와 바지도 밝은 빛이 나도록
빨았다. 목욕과 빨래가 끝나자 이번에는 주머니칼로 나뭇가지를 잘라 끝을 뾰족
하게 만들어 손톱과 발톱을 께끗이 손질했다.
손에서 무릎으로 떨어진 물방울울 문질렀는데도 더러워지지 않았다. 말끔하게
때를 벗기도 난 데이빗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온 몸이 추위로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용소에서 몸에 베었던 냄새와 먼지들을 말끔히 씻어버린 지
금, 데이빗은 참으로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자기자신의 참된 주인임을 느낄 수
있었다. 자유, 데이빗은 자유를 얻어서 오래오래 그것을 누리고 싶었다.
그곳에 계속 앉아 있는 것은 위험하게 느껴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언덕 위의
집 한 채가 나무들 사이로 보였다. 아래쪽에는 길이 있었다. 조금 후에는 행인들
이 나타날 것이다. 낮동안 안전하게 몸을 숨길 만한 곳이 필요했다.
개울을 따라 걷다가 해안 쪽으로 내려갔다. 경사가 심했지만 유연하게 몸의
균형을 잡으며 재빠르게 움직였다. 큰길 가까이에서는 망설여졌다. 길 옆에 있는
무성한 숲이 몸을 숨기기에는 적당해 보였으나 종일 누워 있기는 힘든 노릇이었
다.
큰길 가까이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예쁜 집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었
다. 집집마다 대문에 칠해진 샐깔이 달랐으며 뻗어오른 담쟁이덩굴의 푸른 색과
멋진 조화를 이루었다. 집이 있으면 반드시 거기 살고 있는 사람이 있으리라.
큰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경사가 심한 언덕이 보였다. 그 근처에는 집도 없
었으며 안전할 것 같았다. 큰길을 건너려고 하자 데이빗의 가슴이 마구 뛰었다.
길은 언덕 사이의 절벽을 따라 띠를 두른 듯 나 있었다. 지금은 조용하지만 길
을 건너려 할 때 불쑥 누가 나타나기라도 하면 어쩌나하는 두려움이 데이빗의
마음을 조였다. 아무리 데이빗의 귀가 밝고 재빨리 피할 수 있단들 잔디를 밟고
온다면 눈앞에 다가올 때까지 알아채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렇게 되면 이 모든
것이 끝장이 나고 만다. 아름다움과 자유를 맘껏 누리며 살고 싶은 이 바람이…
여기서 오래 머뭇거릴수록 그만큼 위험은 커질 것이다. 나무 사이로 키 작은
농작물들이 줄줄이 늘어선 밭이 보였다. 사람들이 가꾸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데
이빗은 다시 주변을 살펴보았다. 금새 어디선가 밭주인이 나타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 데이빗은 잔디 위에 딩굴고 있는 주홍색의 노란 열매를 보았다.
무의식중에 그것을 주워든 데이빗은 큰길 쪽으로 내려갔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햇살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느리지
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길을 건넜다. 드근거리던 가슴도 차츰 진정이 되자
데이빗은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의 결정에 따라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수용소의 그 남자가 이야기했던 대로 나무 밑에는 보따리가 있
었고 그날 밤부터 모든 일을 데이빗 자신이 결정해야 했다.
그의 결정에 따라 모든 일이 진행되었다. 발이 움직인 것도 자신의 결정에 따
른 것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니 용기와 힘이 솟아나면서 가슴 벅찬 자유가 느껴
졌다. 앞으로도 계속 모든 결정은 데이빗 자신이 내려야하고 손이나 발은 이 결
정을 따르는 종에 불과한 것이다.
데이빗은 곧장 물가로 내려갔다.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서 그가 발견될
가능성은 매우 적었지만 그래도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
을 안전한 곳을 찾기로 했다. 데이빗은 곧 큰 바위 저편에 있는 아담한 동굴 하
나를 찾아냈다. 그러나 그곳으로 가려면 바위 벼랑을 건너뛰어야 하는데 간격이
넓어서 데이빗에게는 무리였다.
데이빗은 스스로를 격려하면서 건너갈 수 있는 방법을 궁리했다. 큰 돌을 굴
려다가 벼랑에 끼워 넣는 방법이 있지만 그렇게 큰 돌이라면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옮길 수가 없었고, 밧줄이 있으면 크게 도움이 되겠지만 끈이라곤 바지
에 달린 멜빵 뿐이었다.
그때 해변가에 흩어져 있는 널판지 조각이 눈에 띄었다. 파도에 떠밀려온 것
이리라.
데이빗은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리고는 그 중에서 제일 큰 널판지를 끌어다가
벼랑에 걸쳐 보았다. 간신히 건너편과 이어지긴 했으나 불안해 보였다. 데이빗은
널판지 밑에다 작은 돌멩이를 끼워 넣었다. 그러자 흔들거리지 않게 되었다. 건
넌 후에 치워버리면 아무도 데이빗이 있는 쪽으로 건너올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동굴은 숨어서 지낼 수 있는 장소로는 아주 적합한 곳이었다. 동굴의 앞쪽
은 탁 터져 있었고 안은 좁았지만 데이빗이 편히 누울 만했다. 더욱이 천정처럼
앞으로 튀어나온 바위 덕분에 그늘진 동굴 안은 아늑하게 느껴졌다. 옆으로 큰
길이 약간 보였으나 큰길 쪽에서는 이곳을 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고개를 돌
리니 동쪽으로 펼쳐진 해안선이 한눈에 들어왔다.
데이빗은 젖은 바지와 샤쓰를 벗어서 바위 위에다 널었다. 그리고 보따리 속
에 들었던 물통, 주머니칼, 나침반, 배에서 선원이 가져다 준 빵조각 등을 한쪽
으로 쭉 늘어놓고는 바닥에 주저앉아 주홍빛의 둥근 열매를 자세히 들여다 보았
다. 조심스럽게 손톱으로 껍질을 누르자 속에서 물기가 배어 나왔다. 갑자기 동
굴 안은 향기로운 냄새로 가득찼다. 약간 신맛에 달콤하여 입안에 저절로 침이
고였다. 껍질을 다 벗기자 반달같이 생긴 작은 조각들이 둥그렇게 붙어 있었다.
불현듯 심한 허기를 느끼면서 데이빗은 한 쪽을 떼어서 빵과 함께 먹었다.
독이 있는 열매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 쪽을 먹은 후 한참 동안을 그대로
앉아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았다.
더 기다리지 않고 급하게 나머지를 먹어치웠다. 두껍게 벗겨낸 껍질이 아까워
먹어보려고 했만 톡 쏘는 쓴맛 때문에 먹을 수가 없었다. 데이빗은 하나의 생각
에 사로잡혔다. 떨쳐버리려고 했지만 끈질기게 떠오르는 생각이었다. '나는 모르
는 것이 너무 많다. 남들은 다 아는 것을 나만 모르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도
어떻게 자유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먹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며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이 무엇인지 조차 모르고 있다. 먹어 본 음식이라고는 빵과 죽, 그리고
멀건 국뿐이지 않은가.'
의기소침해진 데이빗은 수용소에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 두
지 않은 것이 후회스러웠다. 수용소 밖의 세계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
던 자신이 미워졌다. 음식에 대한 것만이라도 알아 두었더라면 지금과 같은 경
우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수용소 사람들은 음식에 대한 이야기는 절대로 하
지 않았다. 그것은 누가 강제로 시칸 것이 아니라 수용소 안의 포로들이 스스로
만든 규칙이었다. 식사는 빵과 죽이 전부였으며 그나마 배부르게 먹을 수도 없
었다. 그러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자유의 몸으로 즐기던 식사에 대하여
회상한다는 것은 커다란 고통이었다. 요하네스와 함께 오래 지낼 수 있었더라면
그에게 모든 것을 알아낼 수가 있었을 것이다. 요하네스를 생각하면서 그와 함
께 이야기하던 일들을 회상했다. 요하네스와 함께 살던 시절, 자주 많은 것을 그
에게 물어보곤 했었지만 그것들은 지금 의 데이빗에겐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데이빗은 햇살을 받아 밝게 빛나는 푸른 바다를 바라보면서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데이빗은 다른 사람들과 나누었던 이야기도 기억해내려고 애를 썼다. 오랫동
안 수용소에 갇혀 지낸 사람들 중에는 더 이상 나눌 이야깃거리마저 없게 된다.
같은 내용의 이야기를 몇번씩이나 되풀이하게 되고 제풀에 싱거워진 사람들은
결국 하루를 지루하게 보내는 것이다.
가끔, 갇힌 사람들 중에는 탈출을 계획하는 일이 있었다. 그들은 치밀하게 계
획을 짰고 다시 신중하게 검토하여 제일 큰 위험과 함정들을 확실하게 표시해
놓았다. 그러나 그들은 탈출하지 못했다. 그것은 계획에 잘못이 있었다기보다는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데이빗은 그들처럼 계획을 세우기로 했다. 그 계획은 자신이 모르고 있는 것
을 알아내는 데 중점을 두었다. 너무 희망에 들떠서 남들의 의심을 사거나 일을
그르치는 일이 없도록 신중하게 계획을 짰다.
데이빗은 마른 편이었지만 다부진 근육과 음식을 조금만 먹고도 오랫동안 견
뎌낼 수 있는 강인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떳떳하게 내놓을 수 있는 신분이 못되었다. 누구에게나
자신을 소개할 수 있는 처지가 되어야만 했다.
데이빗은 수용소 경비원들이 사용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네
의 잔인함을 숨기고 친절하게 대해주지만 그것은 늘 함정이었다. 데이빗은 배신
에 대한 댓가라든가 그에 따른 죽음이 어떤 것인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들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제 데이빗은 살고 싶었으며
더욱이 맘껏 자유를 누리고 싶었다. 데이빗은 자기가 알고 있는 많은 외국어를
생각해 보았다. 수용소에는 여러 나라에서 붙잡혀온 사람들로 항상 시끄러웠다.
데이빗은 그날의 식사나 경비원의 교대시간 등에 대한 생각만으로 꽉 차 있었던
압박감에서 벗어난 이후로는 그들을 통해서 열심히 여러 나라 말을 배울 수 있
었다. 그는 자기가 알고 있는 외국어를 헤아려 보았다. 수용소측 사람들이 쓰는
말과 글을 알게 되었고 불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영어는 능숙하게 할 수 있었
다. 스페인어와 히브리어도 약간은 알았다.
베에서 선원에게 들켰을 때도 이탈리아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이 큰 다행이었
다. 이탈리아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여기에 머물러 있는 동안 큰 힘이 될 것
같아 새로운 용기가 솟아났다.
천천히 기억을 더듬다 보면 지금 잘 생각나지 않는 것들도 기억이 되겠지. 데
이빗은 지도가 보고 싶었다. 그런 것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어떻게 생겼
는지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유럽에 있는 나라의 위치나 국경 등
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또 어떤 나라가 자유로은 나라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데이빗은 자유주의 국가가 많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고 또 수용소에
관계되는 사람들은 어느 곳이나 있을 것이라고 느껴졌다.
음식에 대한 것도 큰 문제였다. 데이빗은 앞으로 자기가 구할 수 있는 음식을
먹고 살아야 했다. 독이 있는 음식인데도 그냥 먹을 위험과 또 먹을 수 있는 음
식인데도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경우를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제일 큰 문제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었다. 그가 자유스럽게 지내기 위
해서는 사람들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숨어 살아야 한다. 동시에 그들이 살아가
는 방법도 알아 보고 배워야만 한다. 잘 몰라서 당하는 위험은 알고 당할 때보
다 훨씬 크기 때문이다.
데이빗은 단안을 내렸다. 해안선을 따라서 저 아래 멀찍이 보이는 마을로 내
려가 보는 것이다. 살로니카에서와 같이 어둠을 이용하여 슬쩍 마을에 들어선다
면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그러나 이번에는 사람들이 아직 거리에
있는 동안에 가기로 했다. 그것은 많은 사람 가운데 소년 하나가 섞여 있다 해
도 별로 이상하지 않겠지만 인적이 끊긴 밤거리를 소년이 혼자서 돌아다닌다면
틀림없이 의심을 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법을 알아보기 위해서도 그 사람들 속에 섞여야 하는 것이다.
데이빗은 또 자기 자신에 대한 궁금증이 되살아았다. 자기는 어느 나라 사람
이며 부모님은 누구인가? …모르는 게 없어 보이던 요하네스도 데이빗에 대해서
는 아는 것이 없었다.
데이빗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데이빗은 한 번이라도 자기의 얼굴을 보
고 싶었다. 수용소의 그 남자 방에 거울이 있었지만 너무 높아서 키가 닿지 않
았다. 한때는 자기가 유다인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했다. 수용소의 사람들은 대부
분 책이나 신문지상을 통해 자신들의 사상을 강력하게 주장했기 때문에 끌려온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데이빗은 그런 일을 전연 알지 못했다. 유다인들은 유다인
이라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잡혀왔었다.
요하네스는 데이빗이 유다인이 아니라고 했었다. 사람들을 잡아올 때는 반드
시 그 이유를 밝혀야 한다고 했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는 모양이었다. 데이
빗이 갓난아기였을 때는 수용소 사람 중에 누가 데이빗을 주워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데이빗은 수용소에서 자기를 도로 붙잡아 갈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렇
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편안할 것이다.
데이빗은 남의 의심을 사지 않도록 자기의 신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꾸며내기
로 했다. 행여 누가 그에게 물어 온다 하더라도 대답할 수 있는 자료가 준비되
어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마을로 내려갔다.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갖는 것 같지 않았다. 길에서 가끔 데
이빗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긴 했지만 애써 두려움을 감추면서 계속 침착하게 걸
었으므로 아무도 데이빗을 유심히 쳐다보거나 말을 걸지 않았다. 이곳은 살로니
카보다 작은 도시였다. 길은 좁고 울퉁불퉁했다. 어디에서나 사람들은 모여 서서
즐겁게 이야기하고 웃고 잇었다. 바구니를 든 사람들도 있었고 보따리를 들고
가는 사람도 있었으며 가게 앞에 서 있는 사람도 있었다. 데이빗은 처음에 사람
들이 웃는 것만 봐도 온 몸이 굳어지는 것 같았다. 이곳 사람들의 웃음소리는
수용소 사람들의 웃음소리와는 달리 즐겁고 유쾌하게 들렸다. 그들은 모두 만족
스런 얼굴이었고 서로의 친금감이 넘쳤다.
이 도시에는 수용소와 관련된 사람들이 없는 것 같았다. '정말 그렇다면 얼마
나 좋을까… 이곳 사람들은 모두 좋은 사람들인가봐' 하고 중얼거리던 데이빗은
자기가 기억하고 있는 훌륭한 사람들을 생각했다. 체포되어 수용소에 갓 들어온
사람들은 대부분 훌륭하게 보였다. 요하네스는 죽을 때까지 훌륭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이곳 여자들의 모습도 수용소의 여자들과는 달랐다. 수용소의 여자들은
굳어진 얼굴에 남자와 같은 인상을 풍겼었다.
이곳 여자들은 머리카락부터 달랐다. 윤기있는 검은 머리는 잘 손질되어 있었
다. 태양에 적당히 그으른 보드라운 갈색 피부가 아름다웠다. 또 그들은 모두 고
운 색깔의 옷을 입고 있었다. 특히 나이가 든 부인들은 바다나 나무, 황금빛 과
일들과 같이 아름답고 여유가 있어 보였다.
가게 앞을 지나던 데이빗은 개울가에서 주웠던 것과 똑같은 것이 광주리에 수
북히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 데이빗은 '오렌지'라고 씌어진 것을 중얼거리듯 읽
었다. 글자를 읽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요하네스가 여러 나라에서 쓰고 있
는 글자들을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 전의 일이었고 변변한
책 한 권 없었으므로 데이빗은 반복해서 읽는 연습을 할 기회가 없었다.
거리에 내려가 본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 그에게 의심을 품는 사람은 아무
도 없었다. 가게에 진열된 물건들을 바라보면서 데이빗은 많은 것을 배웠다. 거
기엔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물건들이 많았다.
데이빗은 특히 놀란 것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물건이 엄청나게 많다는 사실이
었다. 한껀번에 많은 것들을 보고 익히느라고 현기증을 일으킬 지경이었다. 잠시
멈춰 서서 쉬고 있는 데이빗 앞으로 두 사람의 남녀가 지나갔다. 그들은 웃는
얼굴로 얘기를 나누며 무언가를 먹으며 가고 있었다. 그들은 저만큼 걸어가다가
먹고 난 포장지를 버리는 것이었다. 데이빗은 가슴을 두근거리며 재빠른 걸음으
로 따라가 얼른 그 종이를 주워들었다.
불빛이 좀더 맑은 곳으로 달려가 들여다보니 종이봉지에는 글씨가 인쇄되어
있었다. 그 자리에서 읽는 연습을 하고 싶었지만 날이 밝으면 시작하기로 했다.
그는 불이 환한 가게 앞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머리가
지끈거리면서 몸이 떨려 왔으므로 동굴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데이빗은 널다란 광장에서 있었다. 그러나 좁은 골목에 숨어 있는 것보다 오
히려 안전한 느낌이었다. 광장 앞쪽에는 십자가가 우뚝 솟은 큰 건물이 데이빗
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건물을 쳐다보는 동안 마음이 평온해짐을 느끼며 데이빗
은 요하네스의 이야기를 생각해냈다. 요하네스는 십자가가 붙어 있는 건물은 교
회라고 했다. 그러나 교회가 아름답다는 말은 한 적이 없었다. 데이빗은 교회를
바라보며 천천히 다가섰다. 갖가지 돌로 복잡하면서도 아름다운 모양의 무뉘로
장식된 벽과 커다란 돌계단으로 이어진 끝에는 육중한 문들이 보였다. 데이빗은
오랫동안 교회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마치 밤
새도록 달리기를 했을 때처럼 머리가 무거웠다.
천천히 몸을 돌려 광장을 건너자 길은 번화가로 이어졌다. 빵가게 앞을 지나
던 데이빗은 발을 멈췄다. 시장기를 느꼈다. 당장은 견딜 수 있으나 아침까지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내일 아침에는 오렌지를 하나 주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고개를 돌릴 때였다.
"얘야! 빵 한 개 줄까?"
데이빗은 깜짝 놀랐다. 가게의 유리문 앞에는 앞치마를 두른 아저씨가 빵을
들고 서 있었다. 데이빗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얼른
손을 움츠렸다. 자기를 놀리기 위해 빵을 잡는 순간 도로 빼앗아 가버릴지도 모
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데이빗은 그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약간 미련스럽고 선량해 보이는 인상
이다. 배에서 만났던 서원과 비슷했다. 데이빗은 얼떨결에 빵을 받았다. 그 사람
은 데이빗을 해칠 사람은 아닌 듯했다. 요하네스는 데이빗에게 이 세상엔 좋은
사람들도 많이 있다고 했었다. 또 수용소에 잡혀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아
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자기들이 쫓길 때 숨겨주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
주곤 했다.
"별로 배가 고프지 않은가보구나."
"배고팠어요, 정말 고맙습니다."
빵을 받아든 데이빗은 침착하게 걸어갔다. 그러자 그 사람은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데이빗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이더니 이내
안으로 들어갔다.
데이빗에게 하루가 오늘처럼 빨리 지나간 적은 없었다. 동굴에 도착하자 얻어
온 빵을 반쪽 먹고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눈을 떴을 때는 한낮이었다. 모든
것은 어제와 다름없이 밝은 태양 아래 아름다웠다. 그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않
도록 조심하며 개울로 가서 세수를 했다. 전날 저녁에 주워온 종이쪽지를 빨리
읽어 보고 싶은 마음에 언덕을 달음질쳐서 내려왔다. 세수를 할 때는 꼭 비누를
사용했다. 빨래를 하느라고 비누가 상당히 작아졌지만 걱정하지 않았다. 엉겹결
에 주위를 살피지도 않고 길을 건넜다. 깜작 놀라며 다시는 이런 실수가 없어야
겠다고 마음을 다져먹었다. 무슨 일이든지 아무 생각없이 할 경우 그 위험이 얼
마나 클 것인가를 알아야만 한다.
데이빗은 종이쪽지를 읽어 보았다. 예상대로 쪽지는 읽기 힘들었다. 어제 저녁
거리를 지나면서 그는 몇 가지의 경고문들을 읽었었다. 그러나 이 쪽지의 문장
은 많은 단어들로 구성된 완전한 것이었으므로 글자 하나하나를 먼저 소리내어
읽어본 후에 다시 붙여서 읽었다. 데이빗이 알고 있는 단어들도 눈에 띄었다. 그
것을 다 읽은 후 데이빗은 실망하고 말았다. 쫓기고 있는 데이빗에게는 아무 도
움도 되지 않는 내용이었다. 그는 음성으로 소리날 때와 문자로 씌어질 때의 단
어를 비교하면서 충분히 읽는 연습을 했다. 종이쪽지에 실린 글은 자동차에 대
한 상품선전이었다. 끝에는 어떤 왕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그러나 이야기 중
간에 종이가 찢겨져서 어느 나라의 왕인지 알 수가 없었다.
수용소에서 들은 바로는 왕이 다스리는 나라들을 자유국가이며 그 나라는 많지
않았고 데이빗은 그런 나라들이 어느 곳에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아
무런 도움도 안되었다. 다만 데이빗에게는 붙잡히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만이 더
욱 뚜렸해질 뿐이었다. 어제 거리로 나갔을 때 대충 물건들을 훑어보고 사물에
대한 것을 슬쩍 알아보았지만 충분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데이빗은 다시 마을로
내려가서 좀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었다. 그러나 데이빗은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좀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었으나 혹시라도 자기의 신분이 탄로나지 않
을까 하는 두려운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당분간 낮에는 마을로 내려가지 않기로 했다. 그렇지만 종일 바쁘게 지내야만
했다. 데이빗에게는 별로 도움을 주는 내용이 아니었지만 그 종이쪽지로 읽는
연습을 하기로 했다. 소리와 문자를 비교해 보았고 정확하게 읽을 수 있을 때까
지 소리내어 읽는 연습을 했다. 그리고 전날 보고 들어온 일들과 알고 싶은 것
들, 스스로 해결해야될 일들로 머리 속이 복잡했다.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의문
으로 머리 속이 복잡해지면 데이빗은 자연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싫증나
지 않는 자연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바다, 갖가지 모양의 파도가 일렁이는
해안선, 푸른 숲으로 덮인 언덕들, 붉은 바위, 태양아래 밝게 빛나는 집 등...
저녁이 되자 데이빗은 다시 마을로 내려갔다. 이제는 매일 저녁이 되면 으레
마을로 내려갔다. 내려갈 때마다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었으며 낮에는 피난처
인 동굴에서 생각 속에 파묻혀 지냈다.
드디어 근사한 이야기를 생각해냈다. 두 번째로 마을의 거리로 갔을 때 곡마
단에 대한 내용의 벽보를 읽은 일이 있었다. 곡마단이란 장소를 옮겨다니며 공
연하는 이동극단 비슷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데이빗은 자신을 곡마단의 한 일원
이며 그들을 만나기 위하여 약속한 곳으로 가고 있는 중이라고 이야기를 꾸몄
다. 만약 누가 그에게 물어 온다면 그렇게 대답할 작정이었다. 만나는 장소는 사
람들이 의심하지 않을 만큼 충분히 먼 곳을 택했다.
데이빗은 자기가 꾸며낸 곡마단 이야기를 아직 아무에게도 할 기회가 없었다.
그날도 저녁이 되자 마을로 내려갔다. 데이빗은 이제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
바닷가까지 펼쳐친 넓은 광장, 교회 등을 지나 마을로 내려가는 길에 익숙해졌
다. 데이빗은 동굴로 돌아올 때면 언제나 지나치는 교회를 바라보며 마음을 새
롭게 가졌다. 교회 내부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었지만 감히 들어가 볼 용기
가 나지 않았다.
데이빗은 보이지 않게 숨어서 사람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엿듣곤 했다. 마을
사람들은 큰 소리로 얘기하면서 웃고 떠들었으므로 그것은 그다지 힘든 일은 아
니었다. 사람들이 쳐다볼라하면 그는 눈길을 피하면서 얼른 자리를 떴다. 그러면
서 생소했던 물건들의 사용방법을 조금씩 익혀갔다.
그들의 이야기에는 수용소에 대한 내용이 전연 없었다. 가끔 데이빗은 이곳에
수용소측에 관계되는 사람들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마음이 놓일 때도 있었
다. 그래 두려움을 잊은 채 해변가의 펌프에서 버젓이 물을 떠 오기도 했다. 또
빵집에서 여러 번 빵을 얻어 먹었다. 빵집 주인은 데이빗에게 배고프냐는 말 외
에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늘 부드러운 미소를 띤 얼굴로 빵을 주었다. 데이빗
은 어두워지면 일과처럼 빵가게로 가서 창가에 붙어섰다. 창 밖으로 흘러나오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날도 데이빗이 빵가게에 도착했을 때 빵집 주인은 굴리오라는 손님과 바다
에서 잡아 온 물고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데이빗은 건성으로 들으면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데이빗은 건성으로 들으면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소리가 높아진 빵집 주인의 음성이 들렸다.
"매일 여기 와서 빵을 얻어 가는 아이를 아십니까?"
"어느 아이 말이오?"
"바싹 마른 몸에 해진 옷을 입었지만 항상 깨끗해요. 아마 외국아인가봐요."
데이빗은 반사적으로 벽에 착 달라붙었다. 귀에 익지 않은 음성이 다시 들렸
다.
"난 요즘 매일 저녁 그 이상한 소년을 만났어요. 그 소년은 한참 동안 교회를
쳐다보곤 해요. 내 생각엔 추수일을 하러 온 소년인 것 같아요. 미시아니 씨는
이맘때면 많은 일꾼을 쓰잖아요?"
이어서 부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신부님, 테레제가 그러는데 아직은 아무도 추수하러 오지 않았대요. 저도 그
소년을 보았지만 보통 아이들과는 좀 달랐어요. 그 아인 누구와 시선이 마주치
면 재빨리 자리를 뜨곤 했어요. 그 소년의 눈길이 아주 이상해요."
"어떻게 그애 눈길이 이상하다는 거요?"
신부라고 불린 사람이 물었다.
"나는 늘 어두운 광장에 서 있는 것만 보았기 때문에 잘 모르겠어요. 혹시 무
슨 나쁜 짓을 할 것 같아 보이나요?"
"아이구 신부님, 그런 뜻이 아니구요. 누가 그애를 보고 미소를 지어도 그애는
절대로 웃지 않아요. 또 언제나 뛰어가는 법도 없어요. 누가 보기만 하면 획 돌
아서서 빠른 걸음으로 가버리곤 해요. 언제 한 번 붙잡고 어디서 왔는지 물어
보세요."
데이빗은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었다. 어두컴컴한 길을 쏜살같이 달려 마을
을 빠져나왔다. 전에는 두렵지 않은 척 침착하게 걸어다녔지만 지금은 달랐다.
마을에서 좀 한적한 곳으로 빠져나오자 그는 정신없이 동굴을 향해 뛰었다. 그
들이 찾으러 오기 전에 빨리 이곳을 떠나야만 한다.
그를 찾으려고 벌써 사람들을 보냈는지도 모른다. 데이빗은 동굴로 들어가기
전에 한참 동안을 길가에 숨어 있었다. 따라오는 사람이라도 있을까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보따리는 동굴에 있었으므로 서둘러야 했다.
그러나 데이빗은 동굴에 도착하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너무나 피곤하여 다
리가 아파서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바위에 기대어 누운 채 저
멀리 아랫마을에서 반짝이는 불빛은 정말 아름다왔다. 지금까지 데이빗이 위험
하다는 육감이 들 때는 거의 틀리지 않았다. 그날 밤으로 그곳을 떠나야만 할
것 같았다.
막상 떠날 생각을 하자 마음이 착잡해졌다. 어느 새 이 마을이 좋아졌고 동굴
은 마치 자기 집인 양 살고 있었다. 바위 속에 생긴 흠 하나에 이르기까지 눈에
익었고 매일 아침이면 보따리를 풀러서 물건들을 정리해 놓곤 했었다. 길 건너
에 있는 개울에서 상쾌하게 아침 세수를 했으며 돌아오는 길에는 오렌지를 하나
씩 주워오곤 했었다.
자연의 온갖 아름다움이 전부 자기 것인 듯 흐뭇하기만 했었다. 넓고 푸른 바
다, 굽어진 해안선, 파랗고 빨간 지붕의 아름다운 마을.
데이빗이 이곳에 오기 전에는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이곳에서
머무르는 동안 그는 새로운 삶을 배웠고 자기 일을 자신이 결정하는 결단력을
길렀다. 햇볕 아래에서 몸을 깨끗이 씻을 때의 상쾌한 기분을 맛보았고, 맛있는
음식으로 허기진 배를 채울 때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선량한 웃음소리를 분
간할 줄 알게 되었으며 아름다움의 의미를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제 이곳
을 떠나야만 한다.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을 것 같았다.
데이빗은 뜨거운 눈물을 흘렀다. 그러나 곧 울움을 그치고 마을의 불빛을 바
라보며 자기의 처지를 생각해 보았다.
그는 아직도 자유의 몸이었다. 이곳에서 배운 것을 바탕으로 신중하게 모든
일을 처리해 나간다면 얼마 동안은 자유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어느 곳에서나 소용소측의 사람들을 조심해야겠다는 마은을 새롭게 했다. 그
리고 지금 이 순간부터 자기를 쫓아오고 있는 그들을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나
데이빗은 이곳의 친절하고 선량한 사람들을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이제 데이
빗은 망설이지 않고 이곳을 더나기로 했다. 앞으로는 한곳에서 하룻밤 이상 머
물지 않기로 결심했다.
데이빗은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되새겨 보았다. 자기를 이상한 눈빛을 지닌
아주 침착한 소년이라고 했었다. 자신의 어떤 모습이 그런 느낌을 주었는지 알
수 없었다. '언젠가 거울을 본다면 이 모든 것을 알게 되겠지.' 데이빗은 한숨을
쉬었다. 데이빗이 만약 어른이라면 수염을 기르거나 깍아버릴 수도 있다. 또 옷
을 바꾸어 입을 수도 있고 안경을 낀다든가 머리염색 등으로 변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데이빗은 수염도 없고 돈도 없으니 변장을 하고 싶어도 마음만
간절할 뿐이었다.
그는 나침반만 꺼내 놓고는 짐들을 모두 보자기에 쌌다. 처음 이 동굴에 올
대처럼 널판지로 건넌 다음 그것을 을어다 큰길 옆으로 옮겨 놓았다. 아무도 그
가 숨어 살던 곳을 찾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잠깐 동안 불빛이 반짝
이는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북쪽을 향해 발걸ㅇ을 떼어놓았다.
3
아침 해가 솟아오르자 데이빗은 무척이나 기뻤다. 마을로부터 상당히 멀리 온
것 같았으므로 밤에는 걷지 않고 낮에만 걷기로 했다. 밤을 이용한 여행은 굉장
히 위험한 일이었다. 너무나 피곤했고 여기저기 긁혀서 상처투성이였다. 발을 한
번씩 떼어놓을 때마다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지거나 경사
진 언덕과 낭떠러지 혹은 웅덩이가 있을까봐 항상 두려웠다. 데이빗은 또 행인
들을 조심해야 했다. 그저 길을 가는 소년으로 보이도록 애썼다.
그는 마을에서 좀더 많은 것을 배우지 못하고 떠나온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
마을에도 소년들이 많았을 터이지만 데이빗은 물건을 관찰하거나 주의사항 등이
적힌 벽보같은 것을 읽는 데 열중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이들에게는 관심을
가질 수가 없었다. 지금은 무엇이나 다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글을 읽을 수 있다
는 것은 크게 도움이 되었다.
데이빗은 어둠이 내리면 한적한 곳에 있는 숲 속의 덤불을 찾아서 잠을 자곤
했다.
며칠이 지난 후였다. 햇빛이 눈이 부셔 벌떡 일어나니 한낮이었다. 데이빗은
눈앞에 펼져진 광경에 깜짝 놀랐다. 나침반이 고장났나 생각하며 눈을 비볐다.
데이빗의 눈앞에는 뜻밖에도 떠나온 마을과 똑같은 모양의 바다가 펼쳐져 있었
다. 처음에는 그 마을로 되돌아온 걸로 생각될 정도였다. 데이빗은 찬찬히 바다
를 살펴보았다. 왼쪽으로 펼쳐져 있던 해안선이 이번에는 자기의 오른쪽으로 펼
쳐져 있었다. 데이빗은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의 허리를 가로질러서 넘어온 것이
었다. 해안선과 모든 것이 먼저 마을과는 반대 방향으로 놓여져 있었다.
데이빗이 가야할 곳은 북쪽이었다. 그 남자가 데이빗에게 그쪽으로 가라고 했
었다. 데이빗은 그 남자에 대해서 다시 한번 냉정하게 생각해 보았다. 그 남자는
데이빗에게 덴마크라는 나라에 도착할 때까지 북쪽으로 가리고 했었다. 갑자기
데이빗은 왜 꼭 북쪽으로 가야 하는지 의문이 생겼다. 지금의 자기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 뿐이었다. 그런데 왜 그 남자의 말을 따라서 북
쪽으로 가야 하는가? 수용소에서는 책임자인 그 남자의 말을 거부할 수 없었다.
만일 경비원일지라도 그 남자의 명령을 어기면 어떤 벌을 받아야 하는지 데이빗
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데이빗은 자유의 몸이고 그 남자의 말에 복종해야 할 아무런 이
유가 없었다. 그런데 모든 것은 그 남자의 말대로였다. 나무 밑에는 나침반이 들
어 있는 보따리가 있었고 남쪽으로 갔을 때는 정말 살로니카라는 도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배를 이용하여 이탈리아로 온 것이다. 데이빗은 그 남자의 말
이 거짓이 아님을 알았다. 그 남자의 말대로 계속해서 북쪽으로만 가면 덴마크
라는 나라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기를 탈출시켜준 그 남자의 의도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남자가 속이지 않은 것만은 확실했다.
이곳은 바다 쪽으로 튀어나온 반도이므로 지금 있는 곳에서 동쪽으로 가면 북
쪽으로 갈 수 있는 길과 만나게 될 것이다. 길은 아름다운 해안선을 따라 절벽
을 이루며 끝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는 길을 건너 오렌지 나무를 찾아보았다. 빵이 얼마 남지 않았던 것이다. 오
렌지가 잔뜩 달려 있는 나무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한적한 길에는 가끔 지나가는 자동차가 보일 뿐이었다. 오렌지 나무에 올라간
데이빗은 두 개를 따서 하나는 호주머니에 넣고 하나는 보따리에 넣었다. 그는
바닷물이 출렁이는 바위 위에 앉아 아침을 먹었다. 빵 한 조각과 신선하고 깨끗
한 물을 조금 마신 후 오렌지를 먹었다. 수용소의 물은 뿌옇고 맛이 아주 나빴
었다.
식사 후 곧 길을 떠나야만 했다. 혹시 마을에서 자기를 찾아 나섰다면 빨리
이곳을 떠나야 하는 것이다. 데이빗은 그들이 자기 사진같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에 마음이 놓였다. 보따리를 챙겨들고 일어선 데이빗은 바위를 밟고
건너뛰었다. 그 순간, 밟았던 바윗돌이 흔들거렸다. 그러자 데이빗의 몸이 휘청
이면서 쥐고 있던 나침반이 물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바위 밑의 바다는 깊어 보였다.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나침반은 보이지 않았다.
데이빗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이제는 방향을 잃고 빙빙 돌다가 떠나온 그
마을로 되돌아가서 붙잡히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그가 가진 것은 정말 보잘 것 없었지만 그나마 지금까지 의지해온 나침반이
없어진 것이다.
"하느님!"
그는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자기가 왜 하느님을 불렀는지는 몰랐다. 수용소에 끌려온 사람들이 대개 절망
적일 때 "하느님"하고 부르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데이빗은 하느님에 대해서 아
무것도 아는 바가 없었다.
자유를 얻기 위한 이 여행에서 꼭 필요한 나침반이 없어졌으니 큰일이었다.
데이빗은 처음으로 하느님을 불렀고, 하느님께 의지하고픈 마음이 생겨났다.
모르긴 해도 하느님은 도와주실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어느 하느님을 선택해야
하나? 올바른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다. 수용소의 사람들이 하
느님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때 잘 들어 두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새로운
단어들만 배우지 말고 하느님에 대한 것도 물어 보았더라면 많은 것을 알게 되
었을 텐데…
데이빗이 알고 있는 하느님을 어떤 하느님인가? 유다인의 하느님은 도와주고
난 후 만드시 그만한 대가를 요구한다고 했다. 데이빗은 바칠 것이 아무것도 없
었다. 그리고 유다인이 아니면 그 신을 섬길 권리도 없다고 했었다.
카톨릭의 하느님은 마리아라는 여인을 통해서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 들은 적
이 있었다. 데이빗은 여자에 대한 반감은 없었지만 스스로 축복을 내리지 않고
여인을 통해서 한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사실 카톨릭교에 대해서는 너무나
모르고 있었다. 요하네스가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해주었었더라면 얼
마니 좋았을까. 다만 요하네스로부터 '다윗'이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희미한 기억에 의하면 그 사람은 오래 전에 살았던 사람이었다.
데이빗은 그 이야기를 확실하게 기억해내려고 애썼다. 여러 가지 희미한 기억
중에서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다윗이라는 사람이 자기의 신을 찬미하
는 시구였다. 그것은 어려운 단어들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항상 새로운 것에 대
한 호기심이 강하던 데이빗은 열심히 그 단어의 뜻을 알아보고 외우곤 했었다.
"주님은 푸른 풀밭에 나를 눕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끌어주시네."
그 옛날 다윗이 섬기던 신을 자기의 신으로 모시고 싶었다. 오렌지를 움켜쥔
채 데이빗은 누가 엿듣지 않을까 주위를 살펴본 후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푸른 풀밭과 잔잔한 물가의 하느님, 저는 데이빗이예요. 이제부터 당신을 저
의 하느님으로 모시겠어요. 저는 당신께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저
는 그동안에 무엇을 알아서도 안되고 배울 수도 없는 나쁜 곳에서 살아왔기 때
문이랍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께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다만 요하네
스가 제게 이런 얘기를 해주었답니다. 옛날 다윗이라는 사람이 믿었던 하느님이
계셨는데 그분은 볼수도 만질 수도 없는 분이지만 어느 곳에나 항상 계신다고
했습니다. 또 누구보다도 힘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제 부탁은 제가 다시 수용
소로 잡혀가지 않도록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하네스가 있는 곳을 아시
면 살로니카까지 저와 함께 와준 것에 대하여 감사한다고 전해주세요. 또 지금
은 요하네스를 다시 생각하며 자유롭게 살고 있다고도 전해주세요. 저는 데이빗
입니다. 아멘."
'아멘'이라는 말을 이 기도 끝에 한 것이 틀리는지도 모르지만 이 말은 가톨릭
에서 사용하는 거룩한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냥 덧붙인 것이었다.
또 하나 아멘이라고 끝을 맺은 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기도가 끝
났는지를 모르실 것 같아서였다.
기도를 드리고 나자 데이빗은 큰 위로를 느꼈다. 그리고 아침에 느꼈던 삶의
의욕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는 나침반보다는 하느님을 의지하는 편이 훨씬
낫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두 가지 모두 있으면 좋겠지만…
그날 저녁 무렵 데이빗은 해안선이 왼쪽에서 만을 이루고 있는 곳에 도착했
다. 해를 바라보니 그 길을 따라 계속해서 간다면 북서쪽으로 이어지리라는 것
을 알 수 있었다.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데이빗은 해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자기
가 걷고 있는 방향을 바로잡기 위해서였다. 나침반은 없었지만 계속 바른 방향
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날씨는 맑았고 자연은 아름다웠다. 마을마다 공동수도가 있어서 물에 대한 걱
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어디서도 수용소측의 사람들이나 차는 보이지 않았다.
데이빗은 다시 한 번 확신을 가졌다. 잡히지 않고 무사히 탈출할 것이며 오랫동
안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에게 제일 급한 문제는 빵이었다. 오렌지나 토마토는 쉽게 구할 수 있었지
만 빵은 좀처럼 얻을 수 없었다. 살아 남기 위해서는 빵이 있어야만 했다.
데이빗은 가끔 사람들이 하듯이 자기도 길가에 앉았다. 잠시 후 그는 배를 땅
에 깔고 엎드렸다. 가까이 다가오는 인기척이 들리면 재빨리 머리를 수그렸다.
그는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그날 데이빗은 길을 걷다가 표지판을 발견했다. 그
것은 다음에 당도할 마을의 이름과 거리가 표시된 작은 게시판이었다. 표지판을
보고 계속 걸으면 어김없이 마을에 도착하곤 했다. 내일까지 빵을 얻지 못한다
면 하느님께 청해야겠다고 데이빗은 생각했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거리는
조용했다. 조금후 요란한 엔진소리와 함께 저만큼 앞에서 자동차 한 대가 급히
멈추었다.
데이빗은 고개를 숙이고 주의를 기울였다. 어떤 사람이 차에서 내리더니 무엇
인가를 찾기 시작했다. 데이빗은 머리를 쳐들었다. 그 사람이 수용소측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임을 확인했다. 그 사람은 허둥대며 영어로 말했다. 그는 이탈
리아 사람이 아니었다.
"이놈의 안경이 어디로 갔지?"
데이빗은 아직도 더듬거리며 찾고 있는 그를 보다가 벌떡 일어났다. 안경을
끼던 사람이 안경없이 무엇을 찾는다는 것은 힘든 일이리라.
"제가 도와드릴께요."
그는 허리를 펴고 데이빗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데이빗은 눈길을 피하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 고맙구나. 안경 쓴 사람을 보면 딱하지?"
"아니예요."
예의바르게 대답한 데이빗은 침착하게 안경을 찾기 시작했다. 데이빗이 안경
을 찾아서 고개를 들었을 때 그 사람은 차 안에 앉아 있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어두웠기 때문에 앉아 있는 사람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혹시
나 자기를 잡으려는 사람이 아닐까하는 두려움으로 데이빗은 신경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못 찾겠으면 그만두려무나. 나 대신 아내가 운전을 하면 된단다."
"여기 있어요. 선생님!"
안경을 받아 낀 그는 얼굴 가득히 미소를 띠었다. 데이빗은 그 사람이 수용소
측 사람이 아님을다시 한 번 확신했다. 그의 인상은 수용소측 사람들과는 아주
달랐다. 사람을 쏘거나 때릴 수 있는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주머니 속
에서 금화 한 닢을 꺼내어 데이빗에게 주었다.
"도와줘서 정말 고맙다. 받아주겠니?"
데이빗은 재빠르게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아니예요. 고맙지만 돈은 받지 않겠어요."
그러자 그 사람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곧 웃음을 터트리며 감사의
표시로 주는 것이니 받아달라고 했다. 그리고 자기 부인을 소개해 주었다.
당황한 데이빗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도망가고 싶었지만 꾹 참으면서 운전석
옆에 앉아 있는 부인께 인사를 했다. 어둠이 눈에 익숙해지자 미소를 띤 부인의
얼굴이 뚜렷하게 보였다. 이탈리아 부인들같이 이쁘지는 않았지만 그 부인에게
서는 향긋한 냄새가 풍겨왔다.
그는 자기 부인에게 불어로 설명해 주었다. 데이빗은 돈을 받지 않는다는 얘
기와 점잖은 영어를 할 줄 안다는 것이었다. 데이빗은 기분이 상해서 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영어를 잘하는 것도 이상하
게 생각하는데 불어까지 잘한다면 더 궁지에 빠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
다.
그들은 이름을 물었다.
"데이빗이예요."
데이빗은 곡마단과 합류하기 위하여 북쪽으로 가는 길이라고 덧붙였다. 그러
나 그 이야기는 큰 관심을 사지 못했다. 그들은 이탈리아에서 휴가를 보내려고
영국에서 왔지만 급하게 돌아가는 중이라고 했다. 그 부인은 데이빗에게 '샌드위
치'라는 빵을 주었다. 그것은 빵과 빵 사이에 무엇을 넣은 것이었다.
"고맙습니다."
그들은 데이빗이 빵을 받아 먹자 무척 기쁜 표정이었다. 데이빗은 그들이 친
절하다고 느끼자 용기를 내어 질문을 했다.
"영국에는 임금님이 다스리나요?"
데이빗의 질문에 그 남자는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아들 없이 딸만 있던 전
왕이 죽고 지금은 여왕이 영국을 다스리고 있는데 그분은 훌륭하고 아름다우며
아주 화려한 왕관을 쓰고 계신다고 했다.
데이빗은 놀라서 그 사람를 쳐다보았다. 여왕이 무엇을 머리에 쓰고 있든 상
관이 없었다. 문제는 그 여왕이 다스리는 나라의 국민이 얼마나 자유롭게 살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데이빗은 샌드위치를 다 먹은 다음 고맙다는 인사를 한 후 부인에게 가도 되
겠느냐고 물었다.
"물론이지, 가도 되고 말고. 그런데 …데이빗, 나는 너의 웃는 모습을 보고 싶
구나."
데이빗은 당황했다. 그 부인의 얼굴은 진지한 표정이었다. 데이빗도 그 부인에
게 무엇인가를 주고 싶었지만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정말 죄송해요. 저는 그것을 어떻게 하는지 몰라요."
데이빗은 얼굴만 약간 돌리고 말했다.
"가도 되나요?"
그 부인은 남편에게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도날드! 저애를 그냥 보내고 싶지 않아요. 저애는 우리 애들과 비슷한 나이일
거예요. 혹시 영국애인지도 모르잖아요. 떠돌이 거지 아이는 아닌 듯해요. 저 아
이의 눈을 좀 보세요. 당신은 저런 눈을 본 일이 있으세요?"
그 사람은 부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소. 저애는 무언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아. 우리가 붙잡
고 있으면 더욱 겁을 먹게 될 것 같소. 엘리스! 너무 복잡하게 생각지 맙시다.
저애는 영국 아이가 아닌 것 같소."
그리고 나서 데이빗에게 물었다.
"데이빗, 너는 영국 사람이니?"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데이빗은 급하게 대답했다.
"아니예요. 선생님."
"곡마단에는 영국 사람도 있었어요."
하마터면 곡마단이라는 말 대신에 수용소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이제는 가도 될까요? 빵은 아주 고맙게 잘 먹었습니다."
"그럼. 가도 된단다, 데이빗."
그의 음성은 요하네스와 아주 비슷했다.
"널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겠니?"
"고맙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어요. 안녕히 가세요."
데이빗은 서둘러 그곳을 떠났다. 그는 차와 반대 방향의 길을 따라 뛰기 시작
했다. 그들이 다시 불러 세울까봐 데이빗은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언덕에 닿았을
때 뒤를 돌아보니 차는 한참 동안을 서 있다가 떠났다. 이제 사방은 완전히 어
두워졌다.
데이빗은 잘 곳을 마련하기 위해 바닷가를 향해 언덕을 내려갔다. 그는 낯선
영국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들은 데이빗에게 정말 친절했고 그를 도
와주고 싶어했다. 그 부인은 진심으로 데이빗을 염려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같
이 가기를 원했다. 데이빗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자유주의 국가에 대
한 지식을 자신 안에 넓혀 간다면 조금씩이나마 의문은 풀릴 것 같았다. 그 나
라에는 잘못이 없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어떤 제도가 있는 것 같았다. 그 부인은
휴가차 이곳에 왔을 뿐이다. 그 부인은 다른 나라의 어려운 처지를 전연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이 데이빗에게는 큰 위안을 주었다. 그러나 다음 순
간, 그 부인의 고의적인 꾐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빵과 미소로 함정에
빠뜨리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그 부인은 그런 것을 전혀 몰랐다면
그 부인의 미소와 빵은 나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데이빗은 더욱 조심해야겠
다고 다짐했다. 될 수 있으면 자기의 눈을 보지 못하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데이빗은 거울을 하나 가지고 싶었다. 자신의 눈을 들여다 보았을 때 이상한 점
이 있다면 스스로 고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그는 미소짓는 법을 배워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가 만난 마을 사람들은 곧잘 미소 띤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은 곧 어색하게 변했으며 후회하는 듯이 보였다. 상대방이 자기를 보고 미
소를 지었을 때 이쪽에서도 미소로 답한다면 이상하게 보지는 않을 것이다.
데이빗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혼자 기쁨에 잠겨들었다. 그 영국 사람은
데이빗에게 돈을 주고 싶어했지만 데이빗은 그것을 거절했었다. 그것은 누가 시
켜서 한 일이 아니었다. 단순히 그 사람을 위하여 한 일이었다. 데이빗은 뿌듯한
마음에 부자가 된 느낌이었다. 자기가 가진 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줄 때와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만일 돈을 받았다면 지금 이런 기분을 느낄 수는 없을 것
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돈을 벌기 위해서 일을 할 테고 그러면 매일 빵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을 무조건 피할 수만은 없다.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눈빛을 고치고 또 미소짓는 법을 배우게 되면 사람들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 주일은 잘 꾸려 나갔다. 이틀 뒤에 데이빗은 나폴리라고 하는 도시에 도착
했다. 그 도시에서 다행히 거울을 하나 얻게 되었다. 길을 가던 어떤 부인이 땅
에 거울을 떨어뜨린 것이다.
"쨍그랑."
하는 소리가 요란하자 그 부인은 깜짝 놀라며 깨진 거울을 쳐다보았으나 이내
바쁜 듯 가던 걸음을 재촉했다. 부인의 모습이 모퉁이를 돌아 사라진 뒤, 데이빗
은 얼른 달려갔다. 다행히도 거울은 한쪽 귀퉁이만 떨어져 나갔을 뿐이다. 재빨
리 거울을 집어 들었다. 거울을 손에 꼭 쥐고서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나무들과
마른 잔디가 깔려 있는 인적이 없는 곳에 이르러서야 발을 멈췄다. 자리를 잡고
거울을 들여다보는 데이빗의 손이 심하게 떨렸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에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지만 그울 속에 담긴 낯선 얼
굴이 데이빗을 바라보고 있었다. 데이빗이었다.
못생기지는 않았다. 이상하거나 잘못된 곳은 분명히 없었다. 야위기는 했지만
데이빗이 만난 사람들과 다른 점은 찾아볼 수 없었다. 머리칼은 어두워 보이는
검은 갈색이었다. 거울을 얼굴 가까이에 바싹 대고서 데이빗은 자기의 눈을 들
여다보았다. 요하네스의 눈빛은 밝은 하늘색이었고 이탈리아 사람들의 눈빛은
어두운 갈색과 검은색이 대부분이었다. 수용소 사람들의 눈빛을 떠올려 보려고
했지만 그들의 흐리멍덩하던 시선 외에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데이빗의 눈빛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 짙은 회색으로 반짝이는 눈빛은 조금도 이상하거나 나쁘게
보이지 않았다. 더욱 자세히 들여다보자 작은 녹색의 점들까지 발견되었다. 데이
빗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엇다. 자기의 눈이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때 어떻게
이상한지 알 수가 없었다. 자기를 한참 동안 쳐다보는 사람이 있으면 데이빗은
얼른 고개를 숙였던 것이다.
데이빗은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웃는 연습을 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미소를 그대로 흉내낸다는 것은 몹시 어려웠으므로 결국 포기하
고 말았다.
데이빗은 계속 북쪽을 향해서 걸었다. 북쪽으로 가라는 수용소의 그 남자 때
문이 아니라 어디론가 가야 하기 때문에 가는 것 뿐이었다. 그 영국인 부부도
같은 방향으로 갔었다. 잘 모르지만 영국으로 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탈출한 첫날부터 데이빗은 줄곧 이런 생각에 시달렸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
터는 '오늘 저녁 때까지만이라도 붙잡히지 않는다면…' 라는 생각에서 시작하여,
'내일까지만이라도 붙잡히지 않는다면…' 하는 생각 속에 잠이 들곤 했다. 그러
나 이제 겨울까지는 붙잡히지 않을 것 같았다. 늘 그것은 아침 햇빛에 눈을 비
비며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데이빗이 새롭게 확인하는 예감이었다.
어느 날 데이빗은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마을로 내려갔다. 그러나 나폴
리에서는 돈을 벌지 못했다. 어떤 음식점에 들어가 손님들게 커피를 날라다주는
심부름을 했더니 종업원이 그에게 빵 한 덩어리를 갖다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좀더 북족에 있는 작은 도시에 도착했을 때였다. 그곳에서 데이빗은 처음으로
돈을 벌었다. 자동차 주인이 성당에 들르는 동안 그의 짐을 지켜주고 돈을 받은
것이다. 사실 그는 누가와서 짐을 빼앗아 간다면 어떻게 막아야 하는지조차 알
지 못했으나 다행히 그 짐을 노리는 사람은 없었다. 데이빗은 자기가 번 돈으로
이틀 동안 빵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데이빗은 지금까지 겪은 경험들을 토대로 더욱 근사한 곡마단 이야기를 꾸며
낼 수 있었다. 그 이야기는 이탈리아 사람들보다 외국에서 휴가 온 여행자들에
게 많이 들려주었다. 그들을 상대로 돈을 버는 것이 쉬웠기 때문이었다. 데이빗
은 자기의 이야기를 완벽하게 만들어 누구에게도 의심받지 않도록 했다. 특히
곡마단과 만나는 장소를 설명할 때면 질문한 사람이 아무리 의심스럽더라도 뒤
쫓아올 수 없는 어떤 곳을 꾸며대곤 했다.
데이빗은 사람들의 많은 질문 때문에 몹시 피곤했다.
낮에는 기분좋게 햇볕이 따사로왔지만 밤에는 차츰 추워지기 시작했다. 그러
나 데이빗은 잠자리를 구하기 위하여 남의 집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집은 위험
한 곳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만일 뜻하지 않게 도망을 쳐야 한다면 문에서 지
키고 있던 사람에게 붙잡힐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어느 마을에 도착하든지 데이빗은 잊지 않고 교회부터 찾았다. 만약 붙잡히는
일 없이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곳에 도착하게 된다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그것은 교회의 내부가 어떻게 생겼는지 들어가 보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붙잡히지 않는다는 보장이 전연 없었다. 지나친 기대는 하지 않는 것
이 상책이라고 데이빗은 스스로를 타일렀다. 그러나 보따리에 들어 있는 빵이
충분하고, 편안한 잠자리를 발견하게 되면 데이빗의 마음은 쉽게 풀어졌다. 아름
답게 이어진 언덕과 산골짜기를 바라보거나 먼 산에 해가 지는 광경에 감탄하고
있으면 자기는 정말 운이 좋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바다를 본 지도 참 오래된 것 같았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어느 곳을 가든지
아름다왔다. 데이빗은 가는 곳마다 갖가지 변화를 이루는 경치에 사로잡혀 피곤
한 줄을 몰랐다. 언덕을 오를 때는 항상 조급했다. 곧 눈앞에 펼쳐질 광경에 대
한 기대와 만약 아름답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곤 했기 때문이다. 그러
나 막상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은 늘 아름다웠으므로 새로운 경외심을 불러일으
켰다. 데이빗은 몇몇 나무들의 이름도 알게 되었다. 올리브나무 밑둥은 울퉁불퉁
하지만 연한 녹색의 나뭇잎은 줄기찬 생명력을 자랑하는 양 미풍에도 파르르 잎
사귀를 떨었다. 하늘을 찌를 듯이 곧고 늘씬한 키의 사이프러스도 좋았다. 무엇
보다도 마음에 든 것은 물이 흐르는 골짜기였다.
데이빗은 그런 곳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그는 계곡이 시작된 곳과 강으로
이어지는 곳을 상상해 보면서 마냥 앉아 있기도 하고 물 속에 뛰어들어 몸을 씻
기도 했다.
이제 비누는 거의 닿아서 아주 조그맣게 되었다. 물론 공동 수도에서 물통에
물을 채울 때는 손을 씻지 않았다. 비누를 아껴야 하기도 했지만 그곳에서 손을
씻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씻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
다.
일요일이었다. 사람들은 휴일의 흥겨움에 젖어 있었고 가게들은 모두 문을 닫
았다. 데이빗은 이틀 동안 돈을 벌지 못해 빵을 사지 못했지만 며칠을 굶고도
견뎌냈었기에 그것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데이빗은 길가에 주저앉았다.
어제부터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계획을 다시 정리해 보았다. 그러나 여전
히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망설였다. 전날 그는 지나가는 차를 세워서 태워달라
고 청하는 사람을 보았다. 운전수가 머리를 내밀고 목적지를 묻자 그 사람은 뭐
라고 대답하는 것 같았다. 데이빗에게는 낯선 지명이었지만 운전수는 곧 웃으며
타라고 하는 것 아닌가. 데이빗은 깜짝 놀랐다. 자기도 손을 들어서 지나가는 차
를 세우고 싶었다.
그러나 데이빗의 경우는 좀 달랐다. 운전수가 목적지를 묻는다면 데이빗은 대
답할 말이 없었다. 그냥 북쪽이라고 대답했다가 운전수의 의심이라도 산다면 큰
일이었다. 도망치지도 못하고 영낙없이 붙잡히고 말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니
데이빗은 두려움이 앞섰지만 차를 얻어타고 싶은 충동은 억누를 수가 없었다.
차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달리지 않은가. 같은 방향의 차를 얻어 탈 수만 있다
면 곧 이탈리아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탈리아의 자연은 너무나 아름다웠
지만 날이 갈수록 데이빗은 자유의 소중함을 뼈져리게 느끼게 되었다. 처음 이
탈리아에 도착한 데이빗은 바위동굴 속에 살면서 하루 이틀로 그의 자유를 손꼽
던 그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지금은 절대로 자유를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이 굳
어진 것이다.
데이빗은 사람이 원하던 것을 손에 넣으면 더 큰 것을 원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비록 욕심이라고 할지라도 어쩔 수 없었다. '자유를 보장받고, 안
심하며 살 수 있는 나라' 데이빗은 이 두 가지가 필요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오직 이 두 가지만으로 충분했다. 요하네스는 사람들이 욕심을
부리면 행복해질 수 없다고 말했었다. 행복하다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를 데이빗
은 알고 싶어 하자 요하네스는 이렇게 설명해 주었다. 갖고 있지 않은 것을 너
무 많이 원하면 갖고 있는 것조차 잘 보살필 수 없게 된다고 했다. 데이빗은 이
러한 요하네스의 말이 물건에만 관계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데이빗은 새 비누를 한 개 갖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뿌리치려고 했다.
자유를 누리며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나라에 도착하게 된다면 그런 것은 손쉽게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차를 얻어 탈 수만 있다면 그 나라에 도착하는 시간을 훨
씬 단축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나라의 지명들을 알 수 있다면 많은 도움이 될 텐데. 데이빗은 안타까웠
다. 결국 어떤 차도 세울 수가 없었다. 데이빗은 곡마단 이야기를 할 수도 없었
다. 만일이라도 재주를 좀 부려보라고 할까봐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데이빗의 생각은 달리는 차 소리 때문에 잘 이어지지 않았다. 특히 낡은 차가
지나갈 때는 더 요란한 소리를 냈다. 잔디밭에 배를 깔고 엎드린 데이빗은 지나
가는 차들을 주의깊게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의 앞에서 멈추는 차가 있었다. 번
호판에 씌어진 글자를 보니 미국 차인 것 같았다.
미국 사람들은 대체로 친절하고 너그러웠다. 그들은 수용소측 사람들이 가장
미워하던 고상한 영어를 사용할 줄 모르고 부자인 척 한다는 것이었다.
차 안에서 짜증 섞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휘발유가 다 떨어진 모양이
었다. 데이빗은 일어나서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화가 났는지 부인은 계속 커다란
목소리로 떠들어대고 있었다.
데이빗은 바짝 긴장이 되었지만 용기를 내어 남편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휘발
유를 사다주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그 부인은 금방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뜻밖의 제안에 몹시 기뻐했다. 데이빗은 기름통을 주면 마을에 내려가
서 휘발유를 사오겠다고 했다. 데이빗은 기름통을 들고 말했다.
"휘발유 살 돈을 주셔야죠!"
남편이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주려고 하자 부인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딕! 저애는 거지예요. 돈을 가지고 도망가버릴지도 몰라요. 주유소에 가서 휘
발유를 갖다달라는 말만 부탁하는 게 어때요?"
그 부인은 데이빗이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리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들이
자기를 그런 사람으로 취급하는 이유를 데이빗은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은 아마
천천히 이야기할 때만 데이빗이 겨우 알아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기름통이 너무 무거워서 네겐 너무 힘들겠구나. 주유소에 가서 아무한테나 휘
발유를 좀 가져다달라고 얘기해 주겠니?"
그 남자의 이야기에 데이빗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이곳 사람들은 일요일이 되면 일을 조금밖에 안해요. 휘발유를 갖다줄 만한
사람이 없을 꺼예요. 하지만 휘발유를 먼저 가져오고 돈은 나중에 갖다주기로
하죠. 부인께서 제가 기름통을 슬쩍 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신다면 말이예요."
그 남자는 당황해서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구나. 두 번씩 오르내릴 필요가 뭐 있니? 우리집 사람
은 네가 어두운 데서 돈을 잃어버릴까봐 그랬던 것 뿐이란다…"
데이빗은 돈을 받아들자 남자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보따리를 내밀었다. 그리
고는 갖다 올 동안 맡아준다면 기름통을 들고 오는 데 힘이 덜 들 것 같다고 했
다.
그 부부는 당황한 나머지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빨개졌다. 데이빗은 대답을 듣
지도 않고 곧 그 자리를 떠났다. 데이빗은 지금까지 남의 것을 훔친 적이 없었
다. 다만 언젠가 숲에서 목동의 빵과 국을 조금 덜어 왔던 것과 나무에 달란 과
일 이외에는…
다른 사람의 소유물을 함부로 취득할 수 없다는 것이 데이빗의 생각이었다.
자기의 보따리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마을의 주유소에서는 데이빗의 얘기를 듣자 곧 사람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어
쨋든 데이빗은 그의 보따리를 되돌려 받기 위해서 그들에게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 남자는 데이빗에게 차를 태워주겠다고 했으나 한마디로 거절했다.
데이빗은 돈을 벌기 위하여 애썼던 것이 생각났다. 호주머니는 텅 비었고 굶
지 않기 위해서는 정말 돈이 필요했다. 그러나 데이빗은 손을 내밀지 않았다. 좋
아하지도 않는 사람에게서 도움을 받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괜찮아요."
망설이지 않고 거절했다.
"저도 가끔은 돈을 벌어야 하지만 지금은 괜찮아요."
괜찮지는 않았지만 이야기는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 이것은 마치 '나
는 데이빗이라는 한 인간이예요. 내 주인은 나예요. 누구도 나에게 이래라 저래
라 할 권리는 없어요' 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데이빗은 재빨리 어두움 속으로 뛰어갔다. 마치 미국 사람에게서 도망이라도
치듯 걸음을 재촉했다.
다음날 눈을 떴을 때 데이빗은 배고픔과 갈증을 심하게 느꼈다. 물이라도 마
셔 주린 배를 채우고 싶었다. 그러나 물통의 물마저 아주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어제 저녁 때 그 마을을 떠나 새벽녘에야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
에 도착할 수 있었던 데이빗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곳에서는 돈을 벌기가 제
일 좋은 시간이었다. 만일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둠 속으로 도망치기가 쉽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장은 사정이 다급했다. 저녁이 되려면 아직 멀었지만 마을로 들어가
야 했다. 목이 말랐기 때문에 저녁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 전에 남아 있
던 물을 마저 마시기 위해 물통을 꺼내려고 보따리를 풀자 그 밑에 담뱃갑같이
생긴 이상한 상자가 들어 있었다. 전혀 본 적이 없는 이상한 상자였으므로 데이
빗은 얼른 열어 보았다. 뜻밖에도 상자 속에는 편지와 함께 돈이 들어 있었다.
그것도 2천 리라나 되었다.
리라 한 푼은 작은 돈이다. 그 돈으로는 아무것도 살 수가 없다. 그러나 2천
리라라면 꽤 큰 돈이다. 데이빗은 돈과 함께 들어 있는 작은 쪽지를 펼쳐보았다.
데이빗은 자잘한 글씨가 잔뜩 씌어진 쪽지를 읽기 위해 무척 힘들었다. 데이빗
은 편지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더구나 그 편지는 읽기조차 어려워 받지 않았더
라면 더 좋았을 걸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데이빗은 영어로 씌어진 것을 읽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한 시간 동안이나 편지와
씨름을 한 끝에 편지의 내용을 완전히 알아내게 되었다. 편지를 쓴 사람은 그
미국 남자였다. 데이빗이 돈을 받지 않으리라고 생각한 그는 보따리 속에다 돈
을 넣어 두었던 것이다. 그는 자기들이 데이빗을 도둑으로 의심햇던 것을 깊이
사과한다고 했다. 정직하지 못한 소년들이 있기 때문에 데이빗을 의심했으며 데
이빗의 이해를 바라지는 않지만 이 돈을 받아준다면 기쁘겠다는 것과 너무 자기
들을 미워하지 말아 달라는 간절한 부탁의 내용이었다. 끝에 적힌 것은 그 미국
남자의 이름인 듯했으나 마구 날려 썼으므로 데이빗은 잘 읽을 수가 없었다.
데이빗의 머리에 첫 번째로 떠오른 생각은 비누를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리고 여러 날 동안 빵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고, 머리빗도 살 수 있을 것 같
았다.
그렇지만 데이빗은 욕심장이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요하네스가 지나
친 욕심장이를 싫어 했을 뿐 아니라 나중에는 빵을 살 수 있기 위해서는 돈을
저축해 두어야만 했다. 비누와 꼭 필요한 것 한두 가지 외에는 돈을 지출하지
않기로 했다. 데이빗은 서두르지 않고 먼저 신중하게 가장 필요한 것을 생각해
보았다.
드디어 한 덩어리의 빵, 비누, 그리고 빗을 사기로 햇다. 머리를 빗는 일은 성
가신 일이었다. 수용소에서는 아무도 빗을 갖고 있지 않았으므로 데이빗도 머리
를 빗어 본 일이 없었다. 데이빗은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깨끗한 머리칼은 햇빛
을 받아 반짝거렸다. 그러나 깍은 지 오래된 탓으로 굉장히 길었다.
다시 한 번 생각한 후 데이빗은 가위를 샀다. 그리고 연필 한 자루와 종이 한
묶음도 함께 샀다. 남의 눈에 유별나게 띄지 않도록 머리를 깎으려고 가위를 샀
고, 연필과 종이를 산 것은 글씨 연습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요하네스는 전
에 데이빗에게 쓰는 법을 가르쳤었다. 데이빗이 연습을 할 수 있었다면 배운 것
을 확실하게 기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아주 유익
한 일이다. 그리고 언제나 큰 도움이 되었다.
데이빗은 이 예기치 않은 큰 돈 때문에 심한 갈등을 느꼈다. 그는 지금까지
빵 한 덩어리를 살 수 있을 정도의 돈밖에는 가져 본 일이 없었으므로 벌써 돈
을 절반 가까이 써버렸다. 데이빗은 여러 날 동안 빵을 사먹기 위해 남은 돈을
아껴야 했지만 그러나 꼭 치즈를 사먹고 싶었다. 50리라를 가지고 한 조각을 살
수 있었다. 입에 넣으니 그대로 녹는 것 같았다. 언젠가 수용소에 있었을 때 한
번 먹어 보았고 살로니카로 가는 짐차 안에서 먹어 본 적이 있었지만 그때보다
훨씬 훌륭한 맛이었다. 허기진 배를 채우고 나서 그는 머리를 자르기 시작했다.
올리브 나무 아래에 앉아서 나무 둥치에 거울을 기대놓고 머리를 깎았다. 목뒤
부분은 보이지 않았으나 까다로운 일을 할 때처럼 정성을 들였더니 괜찮은 것
같았다.
데이빗은 차를 얻어 타는 일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식료품을 나르는 짐
차라면 안전할 것 같았다. 수용소측 사람들은 그런 차를 타고 다니지 않기 때문
이다.
많은 짐차가 지나갔지만 데이빗은 태워달라고 청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마음
을 다부지게 먹었지만 막상 차가 가까이 오면 놀람과 두려움으로 가슴이 마구
뛰고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데이빗은 하느님을 불렀다.
"푸른 밭과 잔잔한 물가의 하느님! 저는 데이빗이예요. 저는 보통 놀라는 정도
가 아니라 지독히 무섭습니다. 차를 얻어 타야 다른 나라에 빨리 갈 수 있겠는
데 그걸 할 수가 없답니다. 당신은 우리의 생각과 느낌을 바로잡아주실 수 있으
시니 제발 이 두려움을 없애주십시오. 그래서 제가 짐차를 얻어 탈 수 있게 해
주세요. 한 번에 두 가지나 부탁드리는 것이 죄송하지만, 다음번에 오는 짐차 운
전수 아저씨는 마음씨 좋은 사람으로 보내주셔요. 저는 아직 당신을 위해서 무
엇을 해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저는 데이빗입니다. 아멘."
정말 하느님은 힘있는 분이신 것 같았다. 조금 후, 짐차가 다가왔을 때 데이빗
은 놀라지 않고 길에 나와 섰다.
짐차 운전수의 얼굴은 배에서 그를 구해준 선원과 같은 인상이었다. 데이빗이
손을 흔들자 그는 차를 세우고 어디까지 가느냐고 물었다.
"페루지아까지요."
데이빗은 차를 얻어 타게 되었다. 페루지아는 여기서 굉장히 먼 곳이었다. 데
이빗이 걸어간다면 사흘은 걸릴 만큼 먼 곳이었다.
데이빗은 선원을 닮은 낯선 운전수 옆에 앉았다. 곡마단에 대한 이야기를 했
을 때 그 운전수는 한번도 물어 보지 않고 오히려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의 이름은 안젤로라고 했다. 또 자기 고향에는 부모님과 많은 형제들이 있으
며 릿다라고 하는 아가씨를 사귀고 있는데 돈을 많이 벌어서 짐차를 한 대 사게
되면 그 아가씨와 결혼할 생각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클로린다라고
부르는 포도 과수원의 딸과 결혼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둘 중의 누구와 결혼해야
될지 망설여진다고 했다. 그리고는 데이빗의 의견은 어떠한지 들려달라고 했다.
데이빗은 한참 동안을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
다.
"둘 다 좋은 사람들인가요? 만일 조금이라도 서로 다른점이 있다면 착하고 친
절한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좋겠네요. 포도원은 다음에 돈을 많이 벌어서 살 수
있을 테니까요. 이 문제는 아저씨 자신이 결정해야 할 일이예요. 아마 아저씨 아
버지께서는 그들이 착한 사람인지 아닌지 생각해 보지 않았을 께예요. 선택하기
전에 깊이 생각해야만 하겠네요."
안젤로는 양미간을 모으더니 잠시 후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넌 참 영리하구나. 네가 말한 대로 할께."
그리고는 그의 장래 계획들을 얘기해 주었다. 데이빗은 귀를 기울였지만 조금
전처럼 주의깊게 들을 필요는 없었다. 안젤로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영리하지는
못한 것 같았다.
지금까지 데이빗은 마음이 착한 사람들은 또한 영리하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에
갑자기 혼란에 빠졌다. 이 문제를 놓고 한참 동안 생각해 보았다. 자기가 틀린
것일까? 데이빗은 자기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다시 한번 의식했다.
아무튼 안젤로는 어른이며 자기가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인데도 다른 이에
게 기대려는 행동이 바보스럽게 보였다.
오랜 시간을 달린 끝에 안젤로는 차를 세웠다. 그는 자기가 가지고 온 음식을
데이빗에게도 나누어 주었다. 포도주도 나누어 주었다. 얼마 후 그들이 탄 차가
페루지아에 닿았다. 페루지아는 언덕 위에 자리한 커다란 도시였다. 데이빗은 언
덕을 올라가는 길목에서 내렸다. 안젤로가 섭섭한 듯 천천히 차를 몰고 간 후
데이빗은 시골로 접어드는 큰길 쪽으로 걸어갔다. 빵이나 물은 충분했으므로 그
곳에서 밤을 지내는 편이 나았다. 차를 이용하려던 데이빗의 계획은 순조롭게
잘 진행되었다. 데이빗은 다음날도 차를 세워서 타고 갔다. 그러나 데이빗은 혼
자서 차를 타야 하는 것이 두려웠다. 그러나 하느님께 보답해드릴 수가 없었으
므로 또다시 청할 수도 없었다. 계속 청하기만 한다면 욕심을 부리는 것이고, 혼
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자기 때문에 하느님은 퍽 피곤하실 것이다. 하느님께서
자기 때문에 지치신다면 큰일이다. 데이빗은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큰일이 앞
으로 일어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데이빗은 바로 다음날 그러한 큰 일을 만났다. 그러나 물론 도움은 청하지 않
았다…
4
데이빗은 한 번도 산림지대를 본 적이 없었다. 그날 아침도 차를 얻어 타고
먼길을 온 그는 시간을 낭비할 마음은 없었지만 산림지대가 어떤 곳인지 알아보
고 싶었다. 한두 시간 동안 살펴보리라 생각하며 숲속으로 뛰어들었다. 산림은
아름다왔다. 울창한 숲을 뛰어다니며 즐거워했으나 잠시 후 데이빗은 불안해지
기 시작했다. 수용소측 사람들이 나무둥치 뒤에 숨어서 자기를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데이빗은 숲속을 빠져나왔을 때에야 비로소 안도감을 느꼈다.
데이빗은 아직도 그들이 자기를 잡으러 쫓아다니는지 아니면 포기해버린 것인
지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이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잡으려고 한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퍽 궁금한 일이었다. 자기가 어떤 정보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러는 것
은 아닌 것 같았다. 요하네스는 언제나 새로운 죄수가 입소할 때마다 같은 말로
주의를 시켰던 것이다.
"이 소년에게는 어떤 이야기도 하지 마세요. 수용소측에서 아이를 구슬러 결국
은 모든 것을 털어놓게 할 테니까요."
요하네스가 죽자 다른 사람이 그 일을 맡아서 했다. 그 남자도 이런 일은 이
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데이빗은 자신이 쓸 만한 인질이라고 가정해 볼 수는
있었다. 예를 들면 데이빗의 아버지가 있는데 그는 수용소측 사람들의 적이기
때문에 수용소에서는 데이빗을 구실로 그를 위협하고 있다는 내용의 상상이었
다.
데이빗은 이러한 상상이 사실일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아버지가 있다고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데이빗은 그들이 자기를 찾아야 하는 이유
를 하나하나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때 데이빗은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재빨리 주위를 살핀 다음 덤불
속으로 숨었다. 깊은 생각에 잠겨 무턱대고 걸어왔던 것이다. 가까운 곳에 집이
한 채 보였다. 나무들 사이로 바라보이는 저택은 아름다왔으며 교회같이 커다란
건물이었다.
그 저택에서 흘러나오는 이상한 소리는 귀에 설었지만 굉장히 감미로왔다.
나폴리에 있었을 때 데이빗은 풍선을 본 일이 있었다. 만일 사람이 풍선같이
되어 공기를 가득 채운다면 점점 부풀어서 결국은 유쾌한 리듬에 맞추어 하늘로
높이높이 날아오를 것이다. 가슴은 두려워서가 아니라 어쩔 줄 모르는 기쁨으로
마구 두근거릴 것 같았다. 행복하다는 것은 이런 것일까?
데이빗은 자기가 듣고 있는 것이 음악이라는 것을 알았다. 수용소에서도 한때
는 음악가가 한 사람 있었다. 그는 죽기 전에 오랫동안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즐겨 했고 소리에 대한 이론을 설명해 주려고 애썼다. 그러나 데이빗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은 달랐다. 데이빗은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소리는 마음속에
서 흘러들어와 위로 위로 높다랗게 들어 올려주는 것 같았다. 모든 악기들이 연
주되는 속에서도 섬세하고 가늘게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그 소리는 데이빗의
가슴을 더욱 설레이게 만들었다. 그것은 바이올린 소리가 틀림없었다.
"뭣하는 놈이냐? 이 애숭이 도둑놈아, 왜 남의 집을 함부로 얼씬거리는 거야?
이 대낮에. 혼내줄 테다."
마치 폭탄이 터지는 소리 같았다. 아름다운 음악에 취해 있던 데이빗에게는
순식간에 모든 것을 파괴하여 망가뜨리는 악마의 소리로 들렸다. 데이빗이 정신
을 차리고 고개를 들자 검은 머리에 눈을 부릅뜬 소년이 불쑥 나타낫다. 그리고
는 피할 사이도 없이 그 소년의 주먹이 날아왔다. 그 소년은 데이빗만했지만 날
쌔게 움지여 도망칠 수도 없었다. 설혹 도망간다 하더라도 흠씬 얻어맞을 것이
다. 머리를 양팔로 감싼 데이빗은 이를 악문 채 가만히 매를 맞고 있었다. 차츰
날아오던 주먹에 힘이 빠지고 소년의 말이 들려왔다.
"너는 왜 가만히 있지? 왜 나를 치지 않니? 감히 싸울 용기조차 없니?"
데이빗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소년은 다시금 싸움을 걸어왔지만 처음과 같이
사납게 굴지는 않았다.
"자, 주먹을 휘둘러라. 이 도둑놈아!"
"싫어!"
데이빗이 달려들지 않자 그 소년도 싫증을 느낀 모양이었다. 데이빗은 코피가
흘렀으므로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넌 숨어 있는 걸 좋아하는가 본대 내가 좋은 곳을 가르쳐 줄까?"
그 소년은 비웃으며 말했다.
데이빗은 조용히 그를 쳐다보았다.
"그럴 필요없어. 난 네가 싫어. 너에게 얻어맞은 어느 누구보다도 나는 너를
미워할 거야. 네가 지금 당장 죽는다 하더라도 못 본 척할 거야. 네가 다시는 이
아름다운 것들을 보지 못하게 되었으면 좋겠어."
그 소년음 깜짝 놀라서 쳐다보며 심술궂게 물었다.
"넌 왜 덤벼들지 않았지?"
"내가 널 쳤다면 너보다 나을 게 조금도 없잖아. 너처럼 비열하고 가치없는 인
간이 되고 싶지는 않아. 그리고 또 자유를 잃을까봐 싫어."
그 소년은 기가 찬 듯이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그러나 마음은 불안한 것
같았다.
"정말 웃기는구나. 넌 지금 누구랑 얘기한다고 생각하니?"
"네가 누구인지는 나도 몰라. 다만 짐승처럼 힘이나 자랑하는 인간이지 뭐. 이
제는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아. 날 붙잡아 봐라. 또 실컷 때릴 수 있을 테니
까."
데이빗은 벌떡 일어나 뛰어갔다. 그러나 빨리 뛸 수가 없었다. 맞은 다리가 아
팠기 때문이다. 소년은 쫓아오지 않았다. 뒤에서 소리만 질렀다.
"이 바보야! 멍청이, 비겁한 자식."
데이빗은 그 소년이 기분이 나쁘니까 화가 나서 소리지르는 것이라고 생각했
다.
데이빗은 몹시 아팠다. 그 소년 생각을 하면 더 아픈 것처럼 느껴졌다. 이탈리
아는 자연이 아름답고 모든 것이 풍부하고 잘 사는데 왜 사람들이 주먹을 휘두
르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소년은 마치 수용소 경비원 같았다. 한 가지 다
른 점이 있다면 경비원은 사람이 기절할 때까지 멈추지 않고 때린다는 것 뿐이
었다. 그 소년은 물론 맨손으로 데이빗을 때렸고 곧 지쳐버렸다.
데이빗은 잠깐이나마 '수용소 밖에도 나쁜 사람이 있나보다'라는 생각이 들었
다. 잡히는 일 없이 꼭 그 나라에 도착할 것이다.
데이빗은 몸을 깨끗이 씻고 싶었다.
가까운 곳에 커다란 강이 있었는데 여기저기 바닥이 드러나 있었다. 데이빗은
옷을 벗어서 물에 담가 놓고 몸을 씻었다. 물에 녹은 비누가 쉽게 닿았지만 게
의치 않았다. 소년에게 맞아서 상처난 부분만 빼놓고는 전부 잘 씻었다. 말끔히
씻고 나니 다시 자유로운 기분이 되었다.
머리도 감았다. 옷은 물을 꼭 짜서 바위 위에 널어 놓았다. 데이빗은 그 옆자
리에 조용히 누웠다. 그 소년 생각을 떨쳐버리는 대신 감미롭게 들렸던 음악을
다시 생각해 보고자 애를 썼다. 저 훌륭한 집안에는 많은 악사들이라도 있단 말
인가? 아니면 라디오 소리였을까?
데이빗은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이야기 소리에 깜짝 놀랐다. 순간적으로 젖
은 옷을 끌어당기며 몸을 움츠렸으나 곧 안심하고 귀를 기울였다. 커다란 바위
가 한 옆으로 버티고 있었으며 앞쪽으로는 올리브 나무의 둥치와 촘촘하게 줄지
어 선 포도덩굴이 있었으므로 데이빗이 몸을 움츠리기만 하면 완전히 몸을 숨길
수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의 밝은 음성이 데이빗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데이빗은 아이들의
노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아이들만 보면 오히려 도망가기가 바빴던 데이빗이었
다. 데이빗은 아이들이 두려웠으므로 한 번도 아이들에게 말을 걸어 본 적이 없
었고 또 어떻게 말을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바닷가 바위동굴 속에서 살던 날부
터 그는 아이들을 피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아이들은 어른보다 더 위험했다.
수용소측 사람들을 제외한 어른들은 어린애들만큼 기억력이 좋지 않았다. 요하
네스도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데이빗은 아이들의 세계를 전혀 알지 못했다. 늘 혼자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데이빗은 아이들이 하는 놀이도 전혀 몰랐으나 새삼스레 알아볼 수도, 같이 놀
수도 없었다. 사람들은 언제나 아이들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데이빗에게는 우선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그가 아이들을 피하
기 위해서라도 아이들의 세계를 알아두어야만 했다.
데이빗은 아이들의 놀이가 끝나기 전에는 떠날 수가 없을 것 같았으므로 그들
이 노는 것을 관찰해 보기로 했다.
포도덩굴을 젖히자 그 사이로 두 명의 어린 소년과 데이빗보다 조금 작았지만
소년들보다는 좀 커 이는 열 살 가량의 소녀가 보였다. 셋이서 웃음을 터뜨리며
한꺼번에 커다란 소리로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아이들은 조그만 집주위를 돌고
있었는데 그 집은 사람이 사는 집은 아니었다. 농기구나 손수레 또는 과일 저장
용 바구니를 넣어 두는 집이었다.
데이빗은 소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소녀의 머리는 검은 색이었으며
붉은 리본으로 묶어서 길게 늘어뜨린 채였다. 밝게 빛나는 빨간 원피스 차림의
소녀는 눈부시도록 아름다왔다. 그 소녀의 웃음 소리는 맑은 공기를 뚫고 높다
랗게 퍼져나갔다. 여기저기 뛰어 다니는 소녀의 모습은 마치 바람에 한들거리는
꽃처럼 인상적이었다.
그들은 "데이비 크로켓과 인디언"이라고 부리우는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처음에 소년들은 인디언으로 꾸미고 나타나 소녀를 잡아다가 오두막에 가두어
놓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잠시 후 그중 한 소년이 데이비 크로켓이 되어 소녀
를 구출하는 놀이였다.
데이빗은 그들이 하는 놀이가 우습게 보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어린이들이 좋
아하는 놀이인가 보다고 생각했다.
잠시 후 그 소녀는 오두막 속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데이빗은 졸음
이 와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감미로운 잠 속에 빠져 들었는데 자
는 동안에 아이들이 가 버렸다면 데이빗도 가던 길을 계속 갔을 것이다.
데이빗은 고함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바람결에 이상한 냄새가 실려왔다.
"누나가 불에 타고 있어! 누나가! 체챠, 이건 네 잘못이야. 네가 하자고 했잖
아. 불장난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하자고 했으니 … 어떻게 하
면 좋아!"
오두막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데 두 소년은 그 옆에서 서로 다투고 있었다.
"어떻하지 ? 체챠. 뛰어가서 까를로를 데려와라. 그동안에 누나가 불에 타죽으
면 어떻게 하지?"
두 소년은 마구 울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하나는 데이빗이 있는 방향으로 뛰
어왔다. 다른 소년은 그냥 그 자리에 선 채 발을 동동 구르며 울고 있었다.
타고 있는 것은 오두막이 아니라 그 소녀였다. 꽃처럼 아름답던 그 소녀가 불
속에 있다니!
데이빗은 벌떡 일어났다. 널어 놓았던 옷을 다시 물에 적신 다음 재빨리 뛰어
갔다. 오두막까지 달려가는 데 몇 시간이나 걸리는 것 같았다.
달려가는 동안 데이빗은 여러 가지 생각들이 한꺼번에 떠 올랐다. 수용소에
있던 어떤 남자가 불타는 건물에서 탈출할 때 머리에 젖은 옷을 싸매었다는 말
이 기억났다. 덕분에 그는 정신을 잃지 않았고 얼굴을 데지도 않았던 것이다.
어떻게 해서라도 그 소녀를 구해내야만 한다. 벽은 아직 불길이 심하지는 않
았지만 오두막의 문은 큰 횃불 같았다. 온통 마른 잎사귀와 줄기로 엮어진 지붕
을 보자 데이빗은 지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데이빗은 그를 도와주시는 하나님을 부르기로 했다. 하느님께서도 꽃
처럼 아름다운 그 작은 소녀의 죽음을 원치않으신다면 소녀를 구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 일을 하느님께 드리는 보답으로 하고 싶었다.
너무 빨리 뛰느라고 또박또박 말씀드릴 수도 없었다. 데이빗은 자기만 알아들
을 수 있을 정도로 다급하게 중얼거렸다.
"푸른 풀밭과 잔잔한 물가의 하느님, 저를 돕지 않으셔도 돼요. 저는 제 힘으
로 이 일을 하고 싶습니다. 오직 당신을 위하여, 그럼 제가 당신께 드리는 보답
이 되게 해주셔요 … 저는 데이빗예요. 아멘. "
그 순간 데이빗은 오두막에 도착했다. 그 자리에 남아 있던 어린 소년이 아직
도 울고 있었다. 갑자기 강 아래쪽에서 사람들이 소리치며 달려오는 소리가 들
렸다. 그러나 돌아볼 여유조차 없었다. 재빨리 보따리를 끌러 칼을 꺼내 쥐고 바
지로 코와 입을 가렸다. 그리고 날름거리는 불꽃 속으로 뛰어 들었다.
오두막 속에는 아직 불꽃이 퍼지지 않았지만 연기로 가득차 있었다. 소녀는
마루 한가운데 있는 낡은 의자에 묶여 있었는데 공포에 질린 두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도와달라고 외치면서 연방 기침을 했다.
반사적으로 데이빗은 소녀에게 먼저 달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먼저 침착하게
상황을 판단해야 햇다. 데이빗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을 가려내었다. 그의 행동
은 민첩했으나 세상의 모든 시간이 그에게 달려 있는 양 신중했다. 먼저 소녀를
묶고 있는 줄을 끊어야 한다. 불꽃은 문 쪽에서부터 안으로 빠르게 번져나갔다.
마른 잎들을 타고 벽이며 마루로 번져오는 것이었다. 오두막에는 창문이 없었다.
나갈 수 있는 곳은 오로지 불타고 있는 문 뿐이었다. 문 옆에 쌓인 바구니와 상
자를 문에서 되도록 멀리 치워 놓았다. 그는 나무 토막 서너 개를 뒤로 밀어놓
고 자작나무 빗자루로 가랑잎을 쓸어 모았다. 조금씩 연기로 나고 있는 가랑잎
들을 바구니들이 있는 벽 쪽으로 쓸어 보냄으로써 불꽃이 방안에 확 퍼지지 않
고 그쪽 방향에서만 타들어 가도록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기침이 자꾸 나왔다.
데이빗은 소녀에게 눈과 잎을 꼭 다물도록 주의를 주고 난 후 자기의 젖은 샤
쓰를 소녀의 얼굴에 감아주었다. 겨우 숨쉴 수 있는 틈만 내놓았다. 그리고는 소
녀를 묶은 줄을 자르기 시작했다. 다행히 느슨하게 묶여 있었다. 만약 의자에
꽉 묶어놓았더라면 풀기 위해 꽤나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칼이 무디어져서 칼날인지 칼등인지 확인해 보면서 잘라야 했다. 소녀가 발을
꿈틀거렸다. 데이빗은 소녀의 발을 꽉 붙잡으며 조용히 않아 있으라고 했다. 연
기를 많이 마시지 않으려면 말을 줄여야 한다. 몹시 뜨거웠다. 그러나 데이빗은
스스로 하기로 한 이 일을 해내야만 하는 것이다.
드디어 줄이 모두 끊어지고 소녀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리고는 얼굴에 감
긴 샤쓰를 끌어내렸다. 연기 때문에 눈이 쓰라렸으므로 자주 깜박거려야 했다.
크고 검은 눈으로 데이빗을 쳐다보다가 소녀는 눈을 감으며 비틀거렸다. 데이빗
은 쓰러지지 않도록 얼른 소녀를 안았으나 소녀는 기절하고 말았다. 소녀는 데
이빗과 함께 뛰어나올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소녀를 구출해야만 했다.
데이빗은 하느님께 드린 약속을 생각했다. 그 일을 해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연기 때문에 소녀는 죽은 것처럼 보였다. 수용소의 사람들이 하던 것처럼 데이
빗은 그 소녀를 마루 위에 눕혔다. 가슴에 귀를 대자 심장이 뛰는 소리가 가늘
게 들려왔다. 데이빗은 다시 한 번 샤쓰로 소녀의 얼굴을 단단히 잘 감쌌다.
자기 얼굴은 바지자락으로 가렸다. 문이 있는 곳을 찾아야 했다. 소녀가 의식
을 잃었기 때문에 뛰어나갈 수 없게 되어 데이빗은 소녀를 업고 나가야만 했다.
그러나 데이빗은 용기를 잃지 않았다. 쓰러지기 전에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았
다.
불에 타 죽을까봐 두려웠지만 재빨리 뚫고 나갈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총
알처럼 튀어나갈 것이다. 더 생각해 볼 것도 없이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상책이
었다.
소녀를 업었다. 소녀는 무거웠다. 소녀의 몸이 데이빗보다 작은 것이 천만다행
이었다. 이글거리는 문 앞에서 데이빗은 잠깐 망설였지만 확 뛰쳐나갔다.
모든 것은 순간적으로 끝났다. 그는 소녀와 함께 빠져나온 것이다. 어떻게 그
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 데이빗도 알 수 없었다. 밖에는 두 소년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데이빗은 기침 때문에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돌
봐주어야 할 소녀가 없었다면 분명히 쓰러졌을 것이다.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
며 소녀를 받으려고 했다. 그러나 데이빗은 사람들을 밀치고 소녀를 땅에 눕힌
뒤 얼굴을 가렸던 옷을 풀어주었다. 그의 옷은 이미 바싹 말라 있었다.
소녀의 긴 머리카락 한 올이 그의 샤쓰 자락에 붙어 있었다.
그때 데이빗은 소녀의 머리카락이 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데이빗은 분노에
찬 자신의 외침도 의식하지 못한 채 얼른 옷을 옆으로 밀어놓은 다음 불타고 있
는 소녀의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꽉 눌렀다. 불을 끄면서도 데이빗은 자기가 다
친 것을 느끼지 못했다. 데이빗은 소녀의 머리를 자기 가슴에다 비벼서 마지막
불꽃을 껐다. 그제서야 데이빗은 손으로 눈을 문질렀다. 기침은 여전히 그치지
않았다. 검은 곱슬머리를 다시 내려다보았을 때 불꽃은 모두 꺼져 있었다. 불은
이 작은 소녀를 건드리지 못한 것이다 … 조금의 머리카락밖에는.
데이빗은 불길을 뚫고 하느님과의 약속을 지킨 것이다. 소녀의 눈까풀이 움직
였다. 꽃같은 소녀는 다시 살아났다. 눈을 뜬 소녀가 데이빗을 바라보았다. 소녀
는 조금도 놀란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모든 것이 잘 되었다는 듯이 평온한 얼
굴로 물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에게 질문하던 식으로 "너는 누구니 ? 어디서 왔
지 ? 네 이름이 뭐냐 ? 무엇을 원하니 ?" 라고 하지 않고 다만 "너는 누구니 ?"
라고만 물었을 뿐이다.
"난 데이빗이야."
소녀가 미소를 지었다. 붉은 양 입술 사이로 작고 하얀 이가 빠끔히 보였다.
갑자기 데이빗은 음악을 들었을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황활한 그 무엇이 마음
에 와닿았다. 데이빗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데이빗은 자기가 웃었다는 사
실이 놀랍기만 했다.
"데이빗!"
소녀는 자꾸만 불렀다. 그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무언가 좋은 일을 기대하는
것처럼 말이다. 소녀는 미소를 지은 채로 데이빗을 바라보았다. 데이빗과 소녀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훌쩍 거리는 소녀와 함께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아까 너보고 비겁한 돼지새끼라고 했지. 나는 아직까지 너처럼 용감한
사람을 보지 못했어. 아빠!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 못보셨지요? 저 두 꼬마들
이 마리아를 묶어놓았는데 불이 났어요. 그러자 얘가 저 불속을 뚫고 들어가서
마리아를 데리고 나온 거예요."
"그래, 나도 보았단다. 까를로야, 그애가 마리아의 생명을 구해주었구나. 정말
재빠르게 잘 해냈다. 지붕에 불이 붙었으니 우리는 너무 늦었지. 까를로야, 그애
가 아니었더라면 마리아를 잃어버릴 뻔했구나."
"시간이 아무리 많았더라고 저는 감히 얘처럼 해낼 수는 없었을 거예요. 그런
데 저는 조금 전에 얘를 마구 때려주었어요."
"아버지 ! 저 아이도 탔어요. 팔이랑 다리가 모두 까매요. 옷도 안 입었어요."
드디어 울음을 그친 꼬마 소년 중의 하나가 소리를 쳤다.
그들의 말소리는 멀리서 들려오는 듯했다. 데이빗은 소녀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 소녀 때문에 자기는 미소 지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소녀를 보
고 있지 않으면 미소를 잃어버릴 것 같았다. 사람들은 기쁠 때 미소를 짓는다고
했다. 이런 것이 행복이라는 걸까? 요하네스는 약간의 차이점이 있다고 했었다.
기쁨도 순간적으로 지나가 버리지만 행복은 오랫동안 없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행복은 항상 남아 있으면서 사람을 미소짓게 해준다고 했다. 데이빗은 땅에 그
대로 앉아 있었다. 벌거벗은 몸은 덴 자국에다 그을음으로 까맸으나 행복과 승
리감에 가득차 있었다. 마치 죽음으로부터 빼앗은 전리품을 잃지 않으려는 듯
이. 데이빗은 하느님의 도움없이 제 힘으로 소녀를 구하겠다고 하느님께 맹세했
었고 그 약속을 지켰다. 그의 선물을 기뻐하신 하느님께서 즉시 그에게 미소 짓
는 방법을 보여주신 것일까?
소녀는 너무 아름답고 부드러워서 만질 수도 없었다. 소녀는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고 다만 그가 데이빗인 것으로 만족한 것 같았다.
"데이빗 ! 내가 그애를 데려가도 되겠니?"
데이빗은 놀라서 쳐다보았다. 아이들의 아버지가 웃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소녀를 안으려고 손을 내밀지는 않았다. 그는 불 속에서 소녀를
구해낸 데이빗에게 먼저 허락을 구한 것이다. 아무런 허락도 없이 소녀를 빼앗
아 가듯이 데려간다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시는 분인 것 같았
다. 데이빗은 갑자기 손이 아프고 지독한 피곤을 느꼈다.
"네, 데려가세요."
소녀는 데이빗과 떨어지기 싫다는 몸짓을 했다. 아버지가 번쩍 안아올리자 데
이빗을 볼 수 없게 된 소녀는 계속 데이빗을 불렀다.
데이빗도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자 까를로라고 하던 소년이 데이빗을 도와주
려고 왔다. 이제는 까를로도 나쁜 소년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데이빗은
그의 도움을 물리치고 혼자 힘으로 일어섰다.
"겁낼 것 없어. 난 정말 몰랐어. 너는 내가 본 소년들 중에서 제일 용감한 소
년이야. 아까 내가 부린 심술을 용서해줘. 정말 미안하다."
까를로는 열심히 얘기를 걸었다.
"난 겁나지 않아."
데이빗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그리고는 소녀를 따라가면서 자기를 볼 수 있
도록 했다.
"나도 자동차가 있는 데까지 너와 함께 갈게."
소녀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데이빗은 잠시 망설인 끝에 손을 잡게
해주었다.
"마리아야! 데이빗은 손을 다쳤단다."
하고 아버지가 타이르듯이 말씀하셨으나 소녀는 여전히 고집을 부리고 데이빗
의 손을 놓지 않았으므로 데이빗도 소녀와 함께 걸어가야만 했다.
"데이빗!"
소녀가 불렀다.
데이빗은 또다시 웃고 있는 자신을 의식했다. 미소는 억지로 지을 수 있는 것
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그들이 차를 타고 가버린다
해도 데이빗은 계속 웃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꽃같이 아름답던 소녀를 생각하거
나 그 소녀가 자기를 좋아하던 일 등을 생각하면 절로 미소지을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들은 데이빗을 보내주지 않았다. 거기에 있던 모든 사람들, 즉 데이
빗의 옷을 갖고 따라온 두 꼬마와 까를로, 안드레야, 그리고 그의 아버지 모두는
당연히 데이빗이 그들과 함께 집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데이빗은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애써 설명했으나 막무가내였다. 두 꼬마는 데이
빗이 옷을 달라고 하자 그의 주위를 빙빙 돌면서 집에 같이 가야만 줄 수 있다
고 하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안드레아라는 소년도 역시 웃으면서 데이빗의 짐보
따리를 자기 어깨에 둘러메고 있었다.
데이빗은 은근히 화가 났다. 소녀를 불에서 구해준 것에 대한 그들의 기쁨과
감사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자기에게 명령하거나 강요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했
다. 어느 누구도 그럴 권리는 없었다.
그때 이이들의 아버지가 말했다.
"나는 죠반니 디 레반나바르키라고 하는 사람이란다. 모두 우리 애들이지. 안
드레야, 까를로, 체챠와 굴리오 그리고 마리아라고 한단다. 네가 시간이 없다면
오래 붙잡지는 않겠다. 그러나 네가 한 일에 대하여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은데
거절하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또 너를 그냥 보냈다고 말하면 아이들의 엄마가
얼마나 섭섭해 하겠니. 네가 강요하는 것은 아니란다."
데이빗의 화는 스르르 풀어졌다. 그들은 자기에게 명령하거나 강요한 것이 아
니란다. 다만 그들을 위해서 같이 가달라고 청했을 뿐이었다. 그들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의 기쁨을 망쳐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이름이 무척 긴 그 아버지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데이빗은 웃을 수가 없
었다. 데이빗은 소녀를 쳐다볼 때만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저는 아무것도 바라는게 없어요. 원하시는대로 하겠어요. 선생님."
데이빗이 꼬마들에게 손을 내밀자 꼬마들도 얼른 옷을 내주었다. 그러자 아버
지가 급히 말했다. "얘들아! 뒷자리에 보면 여행용 담요가 있을 게다. 그것을
꺼내와서 데이빗의 몸을 싸주도록 해라. 그게 부드러워서 화상을 입은 데는 좋
을거야 …"
데이빗은 아름다운 담요를 보자 불안스러워졌다. 여러 가지 색깔의 줄무늬가
있는 담요였다. "제 몸은 그을음로 더러운데 담요를 더럽히면 어떻게 해요,
선생님."
데이빗의 말에 아이들은 모두 소리를 질렀다. 그런 것이 무슨 문제냐는 것이
다. 그래서 데이빗은 담요로 몸을 잘 감싼 후 마리아가 앉은 맨 앞자리에 앉았
다. 자리가 넉넉했는데도 마리아는 데이빗의 곁에 바싹 다가앉았다.
다행히도 데이빗은 곡마단이 있을 만한 곳을 하나 새로 생각해냈다. 소년들이
다투어서 데이빗에게 질문을 했으므로 결국은 아버지가 나서서 말려야 했다.
그들이 탄 차는 커다란 대문을 지나서 굉장히 넓어 보이는 정원에서 멈추었
다. 그 집은 데이빗이 숲속에서 발견했던 저택이었다.
집은 위험한 곳이라는 생각이 번개처럼 데이빗의 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모두
들 소녀의 구출을 기뻐하고 있는 데이빗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모르고 있으니까
괜찮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집의 내부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보는 것
은 퍽 유익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맨발로 널찍널찍한 층계를 올라가서 조각으로
장식된 문을 열고 현관을 통과하자 알 수 없는 불안이 데이빗을 엄습했다.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러나 거기에는 그에게 해를 끼칠 만한 것은 없었다. 지난날
그가 살아온 곳과는 엄청나게 달랐다. 상상할 수도 없었던, 생전 처음 보는 것들
로 집안은 가득차 있었다. 데이빗은 불안한 마음을 가까스로 진정시켰다. 이미
그는 집안에 들어온 것이다.
너무나 많은 것을 한꺼번에 대하자 데이빗은 멍청해지는 것 같았다. 까만 옷
에 흰 앞치마를 두른 여자들이 시중을 들어주었는데 그들은 하녀라고 했다. 아
름다운 부인이 뛰어나왔는데 아이들의 어머니였다. 즉시 의사에게 전화를 걸었
다. 데이빗이 좀 씻고 싶다고 했지만 의사가 보기 전에는 씻지 말라고 했다. 불
에 덴 곳은 씻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화상은 심하지 않다고 데이빗이 우겼지만
소용이 없었다. 의사가 와서 진찰한 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다. 마리아
역시 빨리 구출되었기 때문에 아무런 상처가 없었다. 데이빗은 자기의 두터운
발바닥에 고마움을 느꼈다. 많은 사람들이 감탄을 하며 떠들어댔지만 데이빗은
자신의 행동은 그리 대단한 게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손과 팔 그리고 다리에 입
은 화상은 곧 나으리라.
데이빗은 의사들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다. 수용소에서는 좀체로 의사
를 부르는 일이 없었다. 의사는 앓는 사람들을 치료해준다고 들었었다. 데이빗은
의사가 자기를 진찰하고 병에 든 솜으로 더러운 곳을 닦아주는 동안 묵묵히 복
종했다. 치료를 받는 동안 무척 아팠다. 덴 곳에 무엇인가를 발라줄 때는 몹시
쓰라렸다. 이렇게 해야만 내일은 덜 아프게 된다고 의사가 설명해주었다. 데이빗
은 빨리 자고 싶었다. 자고 나면 기분이 좋아질 것 같았다.
의사의 말은 틀림이 없었다. 다음날 데이빗은 한결 기분이 좋아졌다. 아직 손
은 아팠지만 기분이 상쾌했다. 잠에서 깨어난 맑은 정신으로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이 즐거웠다. 약간만 움직여도 몸이 둥실 뜨는 것 같고 기막히게 포근했다. 침
대가 어떻게 생겼나 보기 위하여 데이빗은 일어나 앉았다. 침대는 그의 몸무게
를 지탱해주면서도 기분좋게 출렁거렸다. 나무로 된 커다란 상자에 다리가 달렸
고 그 나무는 윤기나는 검은 색이었고 … 베개와 홑이불이 씌워져 있었다.
집의 구조를 알아보는 것은 참 재미있는 일이었다. 그는 자기가 알고 있는 모
든 말들을 총동원했다. 몰랐던 낱말들도 많이 배우게 되었다. 그러나 잘못 사용
한 말이나 모른다는 것이 밝혀질까봐 조심했다. 깨끗이 세탁된 새하얀 보드라운
이불을 덮고 포근한 침대 속에서 매일 밤 달콤한 잠에 빠져 들었다. 요하네스는
그에게 무엇을 받은 뒤에는 항상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도록 가르쳤으며 엄하게
지키도록 했다. 예를 들면 밥을 가져다주는 사람에게도 고맙다는 인사를 하게
했었다. 데이빗이 싫다고 하자 요하네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의란 네가 다른 사람들에게 갚아야 하는 빚과 같은 것이란다. 작은 것이라
도 네가 소홀히 생각지 않고 예의를 지킨다면 만사는 쉬워지고 더욱 좋아지기
때문이지. 그러니까 결국 그 빚은 자기 자신에게 갚는 것이다. 너는 데이빗이라
는 한 인간이야. 남들이 너를 어떻게 다루든 네 자신을 지킬 수 있다면 너는 너
만의 그 무엇을 지니게 될 것이다. 수용소측 사람들일지라도 그것만은 네게서
빼앗을 수 없단다. 다른 사람들이야 어떻든 상관할 바가 아니다. 너는 데이빗이
라는 한 인간이 되어야 해. 내가 얘기하는 것을 이해하겠니?"
그때부터 데이빗은 음식을 받으면 꼭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러나 그런 인
사를 한다고 해서 수용소측 사람들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데이빗
이 스스로 원하기 때문에 예의를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람들에게 특히 수용소측 사람들에게도 예의를 지킨다면 하느님께는 더욱 바
르게 예의를 지켜야 할 것이다.
데이빗은 곧 실천에 옮겼다. 방안에 있는 어떤 물건에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
으려고 홑이불을 응시하면서 재빠르게 말씀드렸다.
"푸른 풀밭과 잔잔한 물가의 하느님! 행복이 무엇인가를 알게 해주시고 미소
짓는 방법까지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또 당신을 위하여 소녀를 구해
낼 수 있었던 것도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당신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하고 싶습
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제겐 너무나 힘들었어요. 불도 무서웠구요. 그런 일은
이제 없었으면 좋겠어오. 제가 청하는 모든 것을 당신이 도와주시리라 믿습니다.
저는 데이빗입니다. 아멘."
기도를 마친 데이빗은 침대 밖으로 나왔다. 마루에는 커다란 무늬가 그려진
양탄자가 깔려 있어서 걸을 때마다 푹신푹신했다. 의자와 책상도 데이빗이 보지
못했던 좋은 것들이었으며 잘 손질된 옷장과 서랍장이 눈길을 끌었다. 모든 가
구에는 나뭇잎이나 과일들 혹은 동물의 머리모양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창문은 넓고 높았으며 양쪽으로 커튼이 내려져 있었다. 두터우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커튼은 올리브 나무의 잎사귀 색깔이었다.
데이빗은 천천히 방안을 돌면서 가까이 가서 만져도 보고 자세히 관찰하기도
했다. 책상 위에는 커다란 접시와 길ㅉ하게 생긴 것이 두 개 놓여져 있었는데
한참 후에야 촛대임을 알았다. 반짝거리는 품이 은 같았다. 은이 틀림없다는 말
을 천천히 반복하다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은이란 아주 귀하고 좋은 것이라고
했다. 데이빗이 알고 있는 상식에 의하면 촛대는 틀림없이 은제품이었다.
데이빗이 고개를 들자 벽에 걸린 그림이 보였다. 상점의 유리문이나 담벼락에
붙어 있언 그림들과는 달리 아름다운 풍경화였다. 더 잘 보기 위하여 데이빗은
침대 위로 올라갔다. 유화였다. 수용소의 사람들이 데이빗에게 설명해준 것과
꼭 같았다.
그림에 완전히 압도된 데이빗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지난날에 들었던 이야기
를 기억할 수 있다면 좋겠는데 … 그때는 수용소 밖의 세상에 대하여 호기심을
갖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요하네스는 사람들이 데이빗에게 바깥 세상에 대
해서 너무 많이 이야기해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얘가 모르는 것은 모르는대로 놓아두시오."
언젠가 데이빗이 자는 줄 알고 커다란 소리로 이야기할 때에 요하네스가 주의
를 주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데이빗이 질문을 하면 기꺼
이 대답해주곤 했다. 요하네스가 죽자 데이빗은 누구에게도 말을 건네지 않았다.
그후에는 아무도 그에게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
데이빗은 늘 무엇을 배울 수 있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지금도 그는 아이들과
아이들의 부모님이 눈치채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가능한 한 많은 것을 배우도록
노력할 생각이었다.
아침나절의 집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데이빗은 자기를 데리러 올 때까지 기다
려야 하는지 아니면 일어나 즉시 아래층으로 내려가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입을 옷이 없으니 아무것도 입지 않고 맨몸으로 집안을 돌아다닐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할까 하고 데이빗이 궁리하고 있을 때 문이 열리더니 아이들의 어머니
가 들어왔다.
"일어났구나. 네가 깨어나면 입을 수 있도록 옷을 가져왔단다. 아직 피곤하면
그냥 누워 있으려므나. 손은 좀 어떻니? 아직도 발목은 아프지?"
아이들의 어머니는 미소를 띠고 말했다.
데이빗은 발목을 제일 심하게 다쳤지만 그렇게 아픈 것 같지는 않으니 일어나
고 싶다고 했다. 부인이 가지고 온 옷은 데이빗의 것이 아니었다.
"네 옷을 빨았단다. 이 옷은 안드레아 것인데 네게도 잘 맞을 것 같구나."
데이빗은 불안한 기색으로 말했다.
"제가 입었다가 옷을 찢기라고 하면 어떻게 하죠 ?"
"착하기도 해라. 너는 우릴 위해 큰 일을 해주었단다."
데이빗은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 빚진 것을 같기 위하여 소녀를 구
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아이들 어머니는 그런 것을 이해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더구나 푸른 풀밭과 잔잔한 물가의 하느님을 아이들 어
머니가 모를 수도 있었다. 또 말은 많이 하지 않는 것이 여러 모로 안전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데이빗은 옷을 입었다. 아이들 어머니가 손수 옷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 옷
들은 모두 훌륭했으며 양쪽으로 단추와 지퍼가 달려 있었으므로 데이빗은 어떻
게 해야 되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바지는 짧은 것으로 갈색이었고 보
통 아이들이 입는 것과 꼭 같았다. 데이빗의 옷과는 달리 단추가 달린 완전한
모양의 샤쓰는 산뜻한 초록색이었다. 바지에는 주머니가 달려 있었다. 양말에다
가 샌들이라고 하는 신발도 신었다. 지금까지 발에다 무엇을 신어 본 일이라곤
전혀 없는 데이빗이었다.
데이빗은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 울고 싶을 때처럼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이렇게 좋은 옷을 입어 보리라고는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다. 데이빗은
자기가 어떻게 변했는지 또 보통 소년들과 같아 보이는지 알고 싶어서 견딜 수
가 없었다.
아이들 어머니는 데이빗의 이러한 심정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부인이 옷장문
을 열자 그속에서 커다란 거울이 나타났다.
굉장히 큰 거울이었다. 어른도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쳐다볼 수 있는
커다란 거울이었다. 데이빗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잘 살펴보았다. 조금도
이상한 데라곤 없었다. 그의 머리가 검은색이 아닐 뿐 보통 소년들과 똑같았다.
햇볕에 그을린 얼굴이 약간 검게 보일 뿐이었다.
무심코 데이빗은 중얼거렸다.
"다른 애들과 똑같아 보이죠, 그렇죠 ?"
"물론이지."
그러나 부인은 얼버무리는 것 같았다.
"거기에다 아주 잘 생겼단다. 또 용감하고 … 아이들이 널 보고 싶어서 야단들
이란다. 배도 고플거야. 자, 내려가자."
이렇게 덧붙인 부인은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그래서 데이빗은 물건들을 잘
관찰할 수가 없었다. 어디든 적당하게 가구들이 놓여 있었고 양탄자가 깔려 있
었으며 아름다운 그림들이 눈에 띄었다. 길고 넓은 층계를 내려온 데이빗이 어
떤 방을 통과해서 문 하나를 열자 즉시 넓은 정원과 연결되었다. 정원에서는 아
이들과 아버지가 데이빗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굴이 창백한 마리아도 보였다. 아
버지의 말에 의하면 마리아는 데이빗을 보기 위하여 아래층으로 내려왔다는 것
이다.
데이빗은 마리아를 보자 미소를 지었다.
"우유를 마시고 나면 데이빗과 함께 놀아도 되겠지만 불에 덴 상처를 조심해
야 한단다. 알았지! 얘들아."
그러자 아이들은 데이빗의 상처가 다 나을 때까지는 자기들과 함께 살아야 한
다고 떠들었다. 또 급하게 곡마단과 만날 이유가 없다면 좀더 오랫동안 머물렀
으면 좋겠다면서 매달렸다.
데이빗은 어찌 할 바를 몰랐다. 떠나고 싶기도 하고 오랫동안 같이 지내고 싶
기도 했다. 그러다 보면 집에 대한 것은 다 배울 수 있게 될 것이다.
데이빗은 아이들의 부모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모두 웃기만 했다.
"제가 원하기만 하면 지금 당장에라도 떠날 수 있겠지요?"
아이들의 아버지는 미소를 거두며 실망한 얼굴로 말했다.
"물론이지, 네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고말고. 우리는 네가 얼마 동안만이라도
우리와 함께 있으면서 우리의 감사함을 받아주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란다. "
데이빗은 생각해 보았다. 별다른 위험이 없다면 그들과 함께 머물면서 그들의
생활양식을 배우고 싶었다.
"언제라도 제가 떠나고 싶을 때 떠나게 해주신다면 얼마 동안이나마 함께 지
내고 싶습니다. 아직은 곡마단과 합류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그리고 마리아를
불 속에서 구해낸 것은 제가 원해서 한 일이고 또 저는 이만하면 충분히 보답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항상 네게 감사할 거야. 잊어버릴
수 있는 일이 아니란다."
아이들의 아버지가 조용히 말했다.
그날 저녁 데이빗은 너무나 피곤했다. 포근한 침대로 뛰어 들었지만 그날 본
모든 것이 한꺼번에 떠올랐기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너무나 많은 사물을
한꺼번에 대한 탓인지 절반도 제대로 기억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음식에 대한
것은 생생하게 떠올랐다. 이런 집에서 식사하는 기분은 음악을 듣는 것과 같았
으며 결코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데이빗은 요하네스로부터 이러한 식사법에 대한 이야기를 언젠가 들은 적이
있었다. 오늘의 경험은 그것을 더욱 완전하게 해주었다. 수용소의 식사를 어떤
사람은 돼지밥같다고 하며 비난한 일이 있었다. 그때 데이빗은 바깥 세계의 사
람들은 어떻게 식사를 하는지 물어 보았지만 상상조차 해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드디어 경험하게 되었다. 눈부실 정도로 하얀 식탁보 위에는 각 사람
마다 꽃무늬가 있는 큰 접시가 놓여 있었다. 식탁의 중앙에는 화려한 꽃과 촛불
이 켜진 촛대가 시선을 끌었으며 정교하게 만들어진 유리잔들이 불빛에 반짝거
렸다. 포크와 나이프, 그리고 숟가락은 모두 은이었고 각 사람마다 자기 자리에
놓인 것을 사용했다. 식사중에 손에 묻은 기름기를 닦을 수 있도록 냅킨이라는
작은 수건도 사람마다 따로 놓여져 있었다. 데이빗은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를
몰랐으므로 아이들 부모가 하는 대로 따라 해야만 했다. 조심스럽게 먹다 보니
무엇을 엎지르거나 실수를 하지 않아 오히려 다행이었다. 푸짐한 음식에 종류도
여러 가지였으므로 맛이 좋았다. 데이빗은 과식하지 않도록 적당히 먹었다. 기름
진 음식에 익숙치 않았으므로 배탈이 날까봐 조심한 것이다.
이런 식사는 생각하는 것만도 즐거운 일이었다. 마치 아름다운 것을 떠올릴
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수용소에 갇혀 있던 사람들도 잡혀오기 전에 이런 식사
를 했을 것이다. 비로소 데이빗은 그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수
용소의 식사를 돼지밥이라고 부르며 울분을 떠뜨리던 그들이었다.
음식은 하인들이 차례대로 날라왔으며 새 음식이 나오기 전에는 반드시 먹던
접시와 칼 등을 치웠으며 준비된 새 접시와 칼로써 식사는 계속되었다. 이 집
아이들은 평소에도 이런 식사를 하며 하루에도 여러 번 식사를 한다고 했다.
다음날에도 데이빗은 이런 식사를 즐길 수가 있었다.
5
데이빗은 집에서 함께 산다는 것이 쾌 힘든 일임을 깨달았다. 그것은 함께 사
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집안에서 지내는 것은 기분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항상 그가 같이 있어주기를 원했으며 할 줄도 모르는 것을 하자
고 졸라대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일을 보고서 놀라기도 했다.
집안에서 머무르는 동안 항상 무언가를 배울 수 있었다. 예를 들자면 좋은 것
을 의미하는 경우에는 그 정도에 따라서 각각 다른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아름답다는 의미에도 여러 가지 단어들이 쓰이고 있었다. 약간 아름다울 때는
좋아 보인다는 표현을 하며 좀더 아름다울 때는 사랑스럽다고 했다. 그리고 정
말 아름다울 때는 아름답다는 말을 쓴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데이빗은 또 만족
을 표시하는 단어 두가지를 여러 번 반복해서 발음하며 그 의미를 구분해 보았
다.
그 상황에 맞는 단어를 정확하게 골라서 쓴다는 것은 퍽 유익한 일이었다. 말
을 잘 알고 쓰며 생각도 그만큼 풍부해지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바른 말을 써야
만 정상인으로 취급받을 수 있었다. 욕실을 들여다본 데이빗이 아름답다고 하
자 옆에 있던 아이들 어머니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때는 근사하다는 단어가
적당하다는 것이었다.
데이빗은 연한 녹색의 욕조와 수도꼭지만 틀면 언제든지 깨끗한 물이 쏟아지
는 그 욕실을 잊지 못할 것이다. 데이빗이 원하면 언제나 더운물을 가득 받아
목까지 푹 담그고 목욕을 할 수가 있었다. 비누는 데이빗이 샀던 비누보다 크고
향기로왔으며 깨끗하게 잘 씻어졌다. 목욕이 끝나면 부드럽고 커다란 타월로 몸
을 닦아냈다. 욕실에는 손톱을 손질하는 기구들도 있었다. 데이빗은 처음으로 칫
솔을 가지고 양치질을 했다. 처음에는 입안이 따끔거렸지만 닦고 나면 깨끗해서
기분이 퍽 좋았다.
특히 데이빗을 놀라게 한 것은 집안에 있는 많은 책이었다. 이 집에 처음 온
날이었다. 아이들 아버지는 데이빗에게 특별히 청할 것이 있으면 말해 보라고
했다. 데이빗은 신중하게 생각한 후 말을 꺼냈다.
"제일 하고 싶은 일은 책을 읽어 보는 것이예요."
음악도 듣고 싶었지만 그보다는 먼저 책이 보고 싶었다. 데이빗은 1917년 전
에 만들어진 책을 보여달라고 했다. 그러자 아이들의 아버지가 까닭을 물어 왔
지만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 전에 출판된 책이라면 수용소측 사람들이 조작해
내지 않은 진실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었기
ㄸ문이었다.
이 집에서의 식사는 데이빗을 기쁘게 했다. 깨끗한 식탁과 각자 앞에 놓인 커
다란 접시, 유리컵들이 너무 아름다왔다.
여러 가지로 좋은 점도 많았지만 이 집에 사는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것은 참
힘든 일이었다. 그들은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듯했다. 데이빗이 욕실을
좋아하자 아이들 엄마는 무척 기뻐했다. 그 집 아이들은 씻는 것을 싫어했으며
꾀를 부렸기 때문이었다. 잘못된 버릇인지는 몰라도 데이빗은 조금만 더러워도
참을 수가 없었다. 하루 일과가 끝나면 누구나 사람은 더러워지게 되며 그렇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더러워졌을 때 언제나 씻을 수 있다는 것은 얼
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 집 아이들은 전혀 이런 것에 대한 고마움을 몰랐다. 깨
끗한 머리와 반짝거리는 이를 가졌던 사람이 더럽혀진 누런 이 때문에 주위의
모두에게 불쾌감을 주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를 데이빗은 설명할 수 없었
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 데이빗의 정체가 금방 드러나고 말 것이다. 그들은 데이
빗이 어디서 왔는지를 알게 될 것이고 어쩌면 데이빗을 수용소로 보내버릴지도
모른다.
그 집 아이들은 열심히 책을 읽는 데이빗을 보고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그
들은 항상 데이빗과 함께밖에 나가 놀기를 원했다. 책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진장 많기 때문이다. 이제는 제법 읽는 속도가 빨라졌지만 아주 빨리 읽
는 것은 힘들었다. 좋은 책을 선택하는 것도 어려운 문제였다. 그곳에 있는 책은
모두 읽고 싶었지만 그럴 만한 시간이 없었다. 겨울이 오기 전에는 이곳을 떠나
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데이빗은 혹시 자기 자신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며 열심히 읽어 나갔다.
그 때문에 벌써 여러 날이 지났지만 아직 떠나지 못하고 있다. 그 집 아이들
은 몹시 귀찮게 굴었다. 또 까를로와 함께 있는 것도 지켜웠다. 이제 이 집을 떠
나야겠다고 생각하니 섭섭했다. 데이빗은 결코 자기가 보통 소년으로 변화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고통스러웠지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데이빗
은 수용소 밖에서 자라난 평범한 소년들과 같아지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집 아이들을 바라볼 때마다 데이빗은 전연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그들은 목욕하기를 싫어하고 공부할 시간에는 도망을 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당나귀처럼 아무런 생각도 없이 살고 있는 듯했다. 데이빗은 당나귀도 근사한
동물이긴 하지만 무엇을 배울 수 있는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당나귀로 태어난
것보다 훨씬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식사시간이 되어도 아이들은 마찬가지로 제멋대로 굴었다. 곧잘 흰 식탁보에
물을 엎질렀으며 단정하지 못한 자세로 앉아서는 포크와 나이프를 휘저어 아름
답게 정돈된 식탁을 엉망으로 만들곤 했다.
데이빗은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따라줄 수 없는 것이 제일 큰 문제였다. 그
아이들은 늘 놀이를 하자고 했지만 데이빗은 어떻게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러나 데이빗은 지금은 몇 가지의 놀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공놀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공은 둥글게 생겼으며 손에 잡을 수 있는 크기로 밝은색이었다. 데이
빗이 안드레아에게 던지면 공을 받은 안드레아가 다시 던지는 것을 데이빗이 받
곧 했다. 안드레아와 함께 달리기를 한다든지 나무타기나 줄넘기를 하는 것은
퍽 즐거웠다. 그런 운동들은 몸을 단련시키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다른 놀이를 좋아했다. 각기 정해진 역할대로 누구는 식료품
가게 주인이 되고 누구는 물건을 사러 오는 사람이 되는 등의 놀이였다. 어떤
때는 엄마와 아빠, 아이들이 되어서 놀았고 때론 해적이 되는 놀이도 했다. 그들
은 언제나 데이빗에게 맨 먼저 하고 싶은 역할을 고르도록 양보했다. 그럴 때마
다 데이빗은 한결같이 고집을 부렸다. 자기는 데이빗 외에는 아무것도 되고 싶
지 않으며 그들을 돌보아주는 사람이 되겠다고 했다.
한 번은 군인들이 죄인들을 잡아가는 놀이를 하자고 했다.
"난 군인 대장이 될 테야."
까를로가 외쳤다. 그리고는 급히 덧붙였다.
"데이빗이 하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데이빗은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난 그런 나쁜 놀이는 하고 싶지 않아."
마리아도 덩달아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안드레아가 잔뜩 화난 목소리
로 말했다.
"데이빗! 넌 참 이상한 아이구나. 그런 놀이가 왜 나쁜 놀이니?"
데이빗은 잠자코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놀이를 별로 잘 하지는 못해. 그러나 너희들이 그런 흉내를 내면서 놀 때
진짜처럼 하려고 애쓰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어. 그래서 나는 누구를 죄인으로
잡아가는 따위의 놀이는 싫다는 거야. 누구도 다른 사람을 죄인으로 잡아갈 권
리는 없다고 생각해. 모든 사람은 자유롭게 살 권리가 있어."
"그래. 그건 네 말이 옳아. 하지만 살인자는 어떻게 하니? 감옥에 가야 할 것
같은데. 또 도둑도 마찬가지로 잡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해."
이미 화가 풀린 안드레아는 오히려 흥미진진한 말투였다.
데이빗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살인자는 더 이상 살인을 못하도록 감옥으로 보내야겠지. 그러나 누구도 그
살인자를 고문하거나 굶어죽도록 만들 권리는 없다는 뜻이야.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는 없어."
"그래. 하지만 아버지와 엄마는 우리에게 권리를 행사하고 있잖니?"
안드레아가 말했다.
"그것은 권리행사가 아니야. 나는 그것을 의무라고 생각해. 그분들은 너희들의
부모님이기 때문에 음식과 옷을 주시고 너희가 알아야 될 것들을 가르쳐주시는
것이지. 장차 너희가 어른이 되면 혼자 살아갈 수 있도록 돌봐주시는 거야. 부모
가 자식들에게 하는 일은 모두 올바른 일이라고 생각해. 내가 이야기한 권리행
사와는 다른 거야. 힘으로써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부끄러운 짓이야. 그것
은 폭력을 쓰기 때문이지."
그때 두 꼬마들이 다른 놀이라도 좋으니 빨리 하자며 졸랐다. 아무것이나 데
이빗이 원하는 놀이를 하자고 했다.
데이빗은 비로소 해방되는 기분이었다. 안드레아에게 좀더 자세히 설명하고
싶었지만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하다 보면 자
기 신분이 탄로날까봐 겁이 나기도 했다. 까를로도 있는 자리에서 너무 조심성
없이 말한 것 같아 기분이 언짢았다.
그 집에 온 처음 며칠간 까를로는 데이빗의 호감을 사기 위하여 무척 노력하
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와 같은 접근 방법에는 익숙해진 데이빗이었으므로 까
를로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수용소측 사람들이 필요할 때면 접근해 오던 수법
을 데이빗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데이빗은 예의 바르게 까를로를 대하면서
필요한 말 외에는 하지 않았다.
까를로도 자기를 달가와하지 않는 것을 눈치챈 것 같았다. 까를로는 지나치게
꾀를 부렸고 순진한 데가 없었다. 그는 자기가 나쁘지 않다는 것을 데이빗이 알
아주기를 바랐고 자기에게 관심이 없으면 기분이 상한 척했다. 수용소측 사람들
이 늘 하던 것과 똑같은 수법이었다. 그런 까를로를 데이빗은 좀처럼 좋아할 수
없었다. 마리아나 안드레아와 같은 아이들은 까를로의 그런 교활함을 알아 채지
못했다. 데이빗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곳에 머물러 있는 것이 불안했다.
두 꼬마들은 귀여웠다. 그 꼬마들의 요구를 다 들어주지는 못하지만 그 아이
들이 착하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그 꼬마들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시끄럽게 떠들면서 장난을 치고 돌아 다니는 품이 꼭 새끼 강아지들 같았다. 데
이빗은 안드레아가 좋았다. 자기가 정상적으로 자랐다면 안드레아와 무척 친한
친구가 되었을 것이다. 안드레아는 친절했고 멋진 소년이었다. 아름다운 것의 가
치를 알고 소중히 다루었으며 까를로나 두 꼬마들처럼 함부로 물건을 다루지도
않았다. 그러나 안드레아와 너무 친숙해지는 것도 위험한 일이었으므로 데이빗
은 안드레아로부터 질문공세를 당하지 않도록 늘 신경을 쓰면서 조심스럽게 말
을 했다.
그러나 그는 마리아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마리아는 하루종일 데이빗
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누군가가 곤란한 질문으로 데이빗을 괴롭히는 것 같으
면 마리아가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관심을 자기에게로 유도한다든지 데이빗을 대
신하여 자기가 얼른 대답을 함으로써 항상 데이빗을 도와주곤 했다.
데이빗은 마리아와 함께 있는 동안에는 자신의 무지함을 의식하지 못했다. 마
리아는 모든 것에 대하여 데이빗의 생각을 알고 싶어했으며 조금도 그를 이상하
게 여기지 않았다. 다행히 데이빗은 마리아를 도와주어야 할 때가 많았다. 마리
아의 건강이 좋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마리아가 가진 아름다움은 주변의 모든
것까지 정교하고 우아하게 만들었으며 그녀를 돋보이게 했다.
데이빗의 음악을 듣고 싶어하면 마리아가 얼른 전축을 틀어주었고, 함께 집안
을 거닐면서 물건들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그 집에 있는 물건들은 대부분 아주 오래된 것들로서 삼백년이 넘은 것도 있
었다. 자기의 증조부 때부터 물려받은 것들이며 항상 같은 자리에 놓여 있다고
했다. 그 집에 살았던 사람들의 의복이나 음식 또는 얼굴의 생김새에 이르기까
지 마리아는 자세히 들려주었다. 그런 때에는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마리아는
가끔 학교에 관한 이야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데이빗은 새삼스럽게 자기 처지
를 깨닫곤 했다. 자기의 환경이 평범한 아이들의 환경과는 너무도 다른 점이 많
았다.
마리아는 학교에 대한 관심이 많지 않았다. 데이빗은 이런 마리아가 좋았다.
데이빗은 일생동안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퍽 놀랐다. 또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고 알고 싶은 것이나 의문나는 점들을 질문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마리아는, 학교를 아이들에게 그들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을 알려
주는 곳이며 역사나 다른 나라들에 관한 상식적인 것을 가르치고 글을 빨리 읽
고 틀리지 않게 쓸 수 있도록 가르쳐주는 곳이라고 했다. 그러나 데이빗의 느낌
은 달랐다. 학교가 그렇게 평범한 곳만은 아닌 듯했다.
데이빗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다른 이야기를 하나 만들어 내야겠다고 생각했
다. 곡마단 이야기를 들으신 아이들 부모님이 데이빗에게 다른 여러 나라의 최
근 소식을 물어온다면 곤란한 일이었다. 달리 이야기를 했더라면 그가 궁금하게
생각했던 점들을 알아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여러 다른 나라들의 위치
나 환경에 관한 것이었으니 곡마단 이야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이제 데
이빗은 책을 통해서 자기 자신에 관한 의문을 해결한다는 것이 퍽 힘들다는 사
실을 알았다.
저녁 때가 되면 제법 쌀쌀한 날씨가 되었다. 이제 포도를 추수하는 계절이었
다. 데이빗도 서둘러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느날 데이빗은 처음으로 지구의라는 것을 보았다. 안드레아 방에 있는 책장
속에서 그것을 발견한 데이빗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데이빗은 막대
기에다 커다란 공을 달아 놓은 까닭을 안드레아에게 물어 보았다.
"이건 지구의잖아. 세계지도를 그려놓은 것이란 말이야. 자, 여길 봐. 이렇게
돌리면 세계 어느 곳이나 다 볼 수 있단다."
안드레아는 데이빗이 지구의도 모르는 것에 놀라며 말했다.
데이빗의 가슴은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안드레아는 온 세계를 공 위에다 그
려놓은 것을 갖고 있다. 모든 나라들은 물론이고 강과 산, 그리고 골짜기까지 표
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국경이 표시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약간 실망이 되었다. 안드레아는 항
상 데이빗이 무슨 이야기를 하든 기꺼이 응해주었다.
"여기가 우리나라야."
바다 속으로 기다란 띠같이 숙 튀어나온 반도를 가리키며 안드레아가 말했다.
"그리고 여기는 프랑스."
마리아가 재빨리 받아서 말했다. 데이빗이 흥미를 보이자 그들은 계속해서
스페인,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영국 등을 가르쳐주었다.
너무 빨리 지나갔기 때문에 데이빗은 하나도 기억할 수가 없었다. 데이빗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거리에 대해서도 알고 싶었다.
"덴마크는 어디 있니?"
덴마크는 아주 작은 나라로 이탈리아에서 굉장히 멀었다. 그렇게 먼 데까지
겨울이 오기 전에 닿기는 힘든 일이었다. 그전에 수용소측 사람들에게 발각될지
도 모른다.
그러나 데이빗은 떠나야만 했다. 부드럽고 따뜻한 침대 속에서 데이빗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다음날이나 아니면 늦어도 이삼 일 안으로는 꼭 떠나야겠다고
마음을 정했다. 이 집은 그 가족들의 보금자리이지 자기가 있을 곳은 아니었다.
그 집의 모든 가족들은 데이빗이 마리아를 구해준 것에 대해 아직도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또 까를로만 제외한다면 모두 친절했다. 그러나 데이빗이
이상한 아이라는 것을 곧 알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 때때로 아이들 어머니
는 그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것 같았다. 이제는 그를 꼭 껴안아주는
일도 없었다. 자러 갈 때면 가볍게 머리를 쓰다듬어주었지만 내키지 않는 얼굴
이었다.
데이빗은 누가 자기를 만지는 것이 싫었다. 마음속에서부터 거부반응을 일으
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이들의 부모가 아이들을 다정하게 껴안아주는 것을 보
면 쓸쓸한 마음에 요하네스를 생각하곤 했다. 아마 처음에는 데이빗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요하네스가 죽고 난 후부터 이상한 아이로 변해버렸다.
데이빗은 이런 생각에 빠져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마리아하고는 달랐다. 싫
지 않았다. 가끔 마리아와 함께 손을 잡고 나란히 산보하는 일도 있었다. 마리아
의 손은 작고 부드러웠으며 소년의 손과는 느낌이 달랐다. 마리아가 데이빗의
머리에 손을 얹고 있으면 아무런 말이 없어도 즐거운 얘기를 나누는 듯한 기분
이었다. 그러나 아직은 데이빗은 불안한 마음이 남아 있었다. 무언가 중요한 것
을 잊은 듯했다.
데이빗은 침대에서 뒤척거렸다. 잊어버린 것이 무엇일까?
덴마크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이 집에 처음 도착하던 날 떠오른 추억이었다.
갑자기 데이빗은 무릎을 쳤다. 추억은 우유와 관련된 것이었다.
아이들의 부모는 훌륭한 분들이었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빠짐없이 마련
해주었으며 아이들이 훌륭하게 자라도록 모든 것을 가르쳤다. 매일 아이들에게
우유와 비타민을 먹였으며 데이빗에게도 나눠주었다. 데이빗은 수용소에서도 우
유를 마신 기억이 났다.
자기의 기억이 틀림없다면 일주일에 두 번씩이었다. 화요일과 금요일이 되면
데이빗은 그 남자의 방으로 불려갔다. 흰 빛깔의 액체를 마셔야만 했는데 맛이
고약했다. 데이빗이 그것을 마시지 않겠다고 할 때마다 그 남자는 죄수를 하나
씩 끌어내다가 총살시키겠다고 위협했던 것이다. 죽도록 싫었지만 다른 사람들
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하여 억지로 마시곤 했다. 그때를 회상하면 마치 수용
소측 사람들이 악마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을 마신 후에도 데이빗은 아프다
거나 죽지 않았다. 그 남자는 그것이 데이빗을 죽일 만한 독성이 없다는 것임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계속 데이빗이 그것을 마시도록 했다.
여기서 먹는 우유는 맛이 아주 좋았다. 훨씬 희게 보였지만 수용소에서 먹었
던 것과 같은 우유였다. 비타민을 씹어 먹고 난 다음 우유를 마시자 수용소에서
와 같은 우유 맛이났다.
결국 그 남자는 데이빗에게 몸에 좋은 것을 먹였던 것이다. 다른 죄수들과 달
리 튼튼하게 자라도록 보호받으며 살아왔다는 사실을 데이빗은 깨달았다.
왜 그랬을까? 정신이 맑아진 데이빗은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왜 그 남자는
데이빗이 중요한 인질이었다면 그런 대로 이해가 되지만 데이빗을 탈출시킨 이
유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데이빗을 탈출시킬 때 그 남자가 일러준 말은 모두가
진실이었다. 나무 밑의 보따리하며 살로니카까지 배를 탈 수 있다는 것 등등 …
데이빗은 옷을 입었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그 이유를
알아낼 수가 없었다. 마음이 답답하여 방에 있을 수가 없었다. 조용히 아래층으
로 내려온 데이빗은 정원으로 나갔다. 어둠 속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생각에 잠
겼다. 그 남자는 분명히 데이빗을 미워했다. 미움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
고 있던 데이빗이므로 틀림없는 판단이었다.
또한 중요한 인질이라면 살려두어야 하고 더욱 도망가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
도 잘 알고 있었다. 덴마크에 대해서는 전연 아는 것이 없었다. 왕이 다스리는
나라라면 빨리 가고 싶었다. 데이빗을 탈출시킨 데는 반드시 어떤 까닭이 있었
을 것이다. 정직한 사람에게는 뇌물이 통할 수 없지만 수용소측 사람들은 뇌물
을 좋아했다. 뇌물이란 허락되지 않는 일을 제뜻대로 하기 위해서 몰래 주는 돈
이나 물건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데이빗을 탈출시키기 위해서 뇌물을 준 사람은 누구인가? 데이빗은
전혀 아는 사람이 없었고 항상 수용소에서만 지내왔다. 누구를 위한 인질이었을
까? 중요한 인질이었다면 그 남자는 데이빗을 탈출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또 그
가 뇌물을 받고 데이빗을 탈출시킨 것이라면 수용소측에서는 혈안이 되어 데이
빗을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색도 없다.
데이빗은 빠르게 고동치는 가슴을 손으로 지그시 눌렀다.
반드시 어떤 이유가 있기는 있을 텐데 … 다만 중요한 인질이 아니기를 바랐
다. 날이 밝으면 아이들 아버지께 덴마크에 관해서 물어 보기로 했다. 만일 왕이
다스리는 나라라고 하면 서둘러서 떠나야 할 것이다. 가능하다면 차를 얻어 타
고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이런 계획도 자신이 중요한 인질이 아닐 때에만
가능할 것이다. 만일 중요한 인질이라면 빵을 사기 위하여 돈을 번다는 것도, 차
를 얻어 타는 것도 모두 위험한 일이 아닐까?
그는 다시 침대로 돌아가 한잠 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가만히 집안으로 들어
왔다. 테라스로 통하는 넓은 거실 앞을 살금살금 지나가려고 했다. 그 순간 발소
리가 나면서 거실에 환하게 불이 켜졌다. 아이들 부모님의 모습이 드러났다.
데이빗은 벽에다 몸을 찰싹 붙인 채 숨을 죽였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동안 반
대 쪽으로 빠져나간다면 그들의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다.
문틈으로 아이들 어머니가 바느질감을 집어드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이내 그
것을 내려놓으면서 남편을 보고 말을 건넸다.
"여보, 당신 데이빗을 어떻게 하실 작정이세요?"
순간 데이빗의 온 신경이 문틈으로 쏠렸다. 남의 말을 엿들으려다간 들키기
싶상이다 싶었지만 데이빗은 벽에 바싹 붙어선 다음 눈을 감았다.
"어떻게 하다니 무슨 얘기를 하는 거요, 엘자? 데이빗이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
렀소?"
데이빗은 그들의 이야기를 잊을 수가 없었다.
"제 말은 … 데이빗을 언제까지 이 집에 둘거냐는 거예요."
"무언가 당신은 그애가 못마땅한 모양이구료."
"그래요 … 저는 데이빗을 사랑하려고 했어요. 그애는 마리아의 생명을 구해주
었잖아요. 그렇지만 저는 그 아이를 이해할 수가 없어요. 이상한 말 같겠지만 그
애 때문에 깜짝 놀라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예요."
"데이빗은 보통 아이들과는 다르오. 나도 그 점에는 당신과 동감이지만 당신이
그애를 싫어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구료."
"저는 데이빗을 싫어하는게 아니예요. 다만 우리 애들을 그 아이와 함께 기르
고 싶지 않다는 뜻이예요. 그 아이가 빨리 여기를 떠나주었으면 좋겠어요."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요. 자세히 좀 들어 봅시다."
"저는 그 아이가 누군지 몰라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려고 하는지를 모르
겠어요. 곡마단 얘기는 새빨간 거짓말이예요. 곡마단의 단원이라면 분명히 어떤
재주를 부릴 줄 알아야 하는데 그런 것도 없잖아요. 그건 그애가 잘 꾸며낸 거
짓말일 뿐이예요. 그애는 얼음같이 차가운 꼬마 사기군이예요."
"엘자! 그애의 눈빛을 보고 하는 말이요?"
"네 … 전 그애 눈빛을 보면 섬뜩해져요. 꼭 늙은이 눈빛 같아요. 인생의 쓴맛
단맛을 모두 알고 난 늙은이 말이예요. 자기가 택해서 스스로 외톨이가 된 사람
처럼 고독하고 차분하면서도 어떤 열망으로 가득차 있는 그런 눈이예요. 애들
눈빛은 그렇지 않잖아요? 무언가 문제가 있는 아이예요. 그리고 거짓말같이 들
리겠지만 그애는 절대로 웃는 일이 없어요. 우리에게는 더없이 예의 바르고 성
실하지만 절대로 웃지않아요. 마리아를 볼 때만큼은 다르지만요. 웃는 얼굴로 마
리아를 쳐다보는 그애의 모습은 아주 달라요."
"마리아를 보고 미소 짓는 얼굴이 참 좋던데 그래. 수줍은 듯 살짝 웃는 얼굴
이 아주 행복해 보였어."
" 당신은 나를 무정한 사람으로 만들고 계시는군요. 난 우리 아이들을 먼저 돌
봐야 해요. 어린 소년이 그런 미소를 짓는다면 반드시 무슨 곡절이 있을 거예요.
도대체 그애는 어디서 왔을까요? 그 아이에게는 가까운 일가친척조차 없는 모
양이예요. 그애는 우리가 무얼 물어보면 질색을 하잖아요. 예의 바르게 대답은
하지만 얼굴에는 경계심이 가득하고 대답도 될 수 있는 한 간단하게 해버리고
말아요. 난 데이빗을 비난하는게 아니예요. 당신도 좀 신경을 써서 그 아이의 이
상한 점을 알아 봐야 할 것 같다는 말씀이예요. 여기 처음 왔을 때 그애가 입었
던 옷 생각나세요? 아무리 형편없는 거지라도 요즈음 그런 옷을 입지는 않을 거
예요. 주머니칼과 물통을 무슨 보물처럼 모시는 것하며 이탈리아 말은 플로렌스
귀족처럼 우아하게 하는 것 등 … "
"프랑스 말은 마치 프랑스의 지성인들처럼 완전한 발음이던데."
"그애는 어떻게 된 아이일까요?"
"난 어느 날 우연히 그 아이의 방에 들어가게 되었다오. 프랑스 말로 된 책을
보고 있던 그 아이가 나를 보더니 읽어달라고 하지 않겠소? 그래서 난 그 아이
가 해석해달라는 줄 알았는데 그애는 단순히 글자 읽는 법을 알고 싶었던 거야.
프랑스의 글은 읽어 본 일이 없었던 것 같더군. 그런데도 말은 유창하게 한단
말이야. 선천적인 재질을 타고 난 모양이야. 아주 훌륭하게 교육받은 사람같이
한단 말이오."
"그애가 속했던 곡마단에 프랑스 사람이 있었다고 했잖아요."
"그런 곡마단은 어떤 곳인지 하느님만이 아시겠지."
"그런 곡마단은 이 세상에 없어요. 곡마단 이야기를 할 때 얼마나 애매한 게
많았어요. 난 처음엔 학교 다니기 싫어서 뛰쳐나온 아이인 줄 알았어요. 그러나
그 아이 이야기를 들으니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주인공 같더군요. 온 세상을 헤
매며 잃어버린 부모를 찾는 아이 말이예요. 그 아이는 어디서 그런 말을 배웠을
까요? 그 아이의 말투는 전혀 아이답지가 않아요. 완전히 어른스런 말투이기 때
문에 우리 애들에겐 가끔 설명이 필요한 일도 있답니다. 여기에 오기 전에 그
아이는 누구랑 지냈을까요? 한 번도 아이들과 어울려서 이야기를 해 본 일이 없
는 것 같아요."
"여보! 그애가 어디에서 왔든 상관하지 맙시다. 우리는 그애에게 은혜를 입었
다는 것만 생각하고 고맙게 여기면 되잖소. 그애의 과거를 물어본다면 분명히
당황할 게요. 그저 혼자 있도록 놔둡시다. 당신은 우리 애들과 함께 그애를 기르
는 것이 좋지 않다고 했지만 난 달리 생각하오. 그애의 훌륭한 태도와 예의 바
른 말씨는 우리 애들에게 좋은 모범이 되고 있소. 왜 당신은 그렇게 나쁜 면만
보오? 데이빗은 다른 아이들에게 절대로 나쁜 영향을 주지 않아요. 데이빗은 내
가 본 소년들 중에서 제일 훌륭한 소년이요. 난 한 번도 아이들끼리 싸우는 것
을 보지 못했소. 데이빗이 오고 난 후부터는 말이요."
"그렇게만 생각하면 안돼요. 제 말을 좀 깊이 이해해주세요. 제가 왜 데이빗을
못마땅해 하는지 그 이유를 말씀드리죠. 까를로를 대하는 그애의 태도 때문이예
요. 또 마리아와 데이빗과의 사이도 마음에 안 들어요. 그애가 얼마나 까를로를
싫어하는지 당신은 모르실 거예요. 보통 남자 아이들은 싸움을 하더라도 곧 잊
어버리고 같이 놀잖아요. 대단한 일로 싸운 것이 아니니까요. 그런데 데이빗은
달라요. 꼭 어른들처럼 까를로를 싫어하는 거예요. 그애는 꼭 필요한 경우 외에
는 까를로에게 말도 걸지 않아요. 또 마지못해서 말을 할 때는 예의를 지키지만
냉랭하게 쳐다보지도 않아요. 내일 한 번 자세히 관찰해 보세요. 그애가 안드레
아와 재미나게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까를로는 자기도 한몫 끼고 싶어서 불쌍한
모습으로 옆에 서 있어요. 그러나 데이빗은 예의 바르게 양해를 구한 뒤 싹 나
가버려요. 까를로는 착한 아이예요. 성질이 좀 급하고 거칠기는 하지만 마음은
여리고 착한 아이예요. 난 우리집 장남이 떠돌이에다 거짓말장이 소년의 비위를
맞추느라 쩔쩔매는 꼴을 보면 화가 나서 못 견디겠어요. 또 까를로가 번번히 미
움과 멸시를 받아 혼자서 외로와하는 것을 차마 볼수가 없어요."
"그렇게 흥분하지 말아요. 난 당신이 무언가 오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 아무튼 우리가 내일 데이빗에게 물어보기로 합시다."
"또 한가지 이야기해야 할 게 있어요. 마리아에 대한 데이빗의 영향은 대단해
요. 마리아는 항상 그애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데이빗의 흉내를 낸답니다. 그
아이의 생각이나 말 등 무엇이든지 다 받아들이면서 자기 친오빠들의 존재는 잊
어버린 것 같아요. 요전날 마리아는 꼬박 한 시간이나 데이빗과 함께 모짜르트
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었어요. 꼼짝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듣고 있었어요.
꼭 어미 젖에 매달려서 정신없이 빨아대는 어린 새끼처럼 음악에 푹 빠져 있더
군요. 도대체 아이들이 이러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그래서 나쁜 것은 아니잖소. 어린 여자애는 누구나 자기보다 몇 살 더 많은
남자 아이를 좋아하는 법이오. 데이빗은 생명을 걸고 마리아를 구해주었소. 그러
니 마리아가 데이빗을 좋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않소. 또 까를로나 안드레
아를 똑같이 좋아하지 않소?"
"그러나 데이빗의 경우는 좀 달라요. 두 오빠는 크고 겁이 나니까 존중해준 것
이지만 마리아는 데이빗에게 온통 빠져있어요. 데이빗의 생각을 모두 알고 싶어
하며 이해하려고 해요. 자기도 데이빗과 같은 생각을 가지려는 거죠. 전 그 점이
싫어요. 언젠가 그애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어요. 데이빗이 우리와 함
께 있을 때는 조용하고 말이 없지만 마리아하고 있으면 그렇지 않아요. 마리아
가 데이빗에게 여러 가지를 묻고 데이빗은 열심히 이야기를 합디다. 그런데 그
이야기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들어 보세요. 폭력, 배신, 부정이나 고통 등 가장
지독한 것들이었어요. 마리아에게 이런 이야길 해주고 있었던 거예요. 또 고통
없이 죽는 방법도 있대요. 도대체 어디서 그런 것들을 배웠을까요? 전 그런 아
이를 우리 아이들과 함께 기를 수는 없어요. 그 아이를 우리집에서 내보내야 해
요."
"난 데이빗이 나쁜 마음을 갖고 있다거나 잔인한 성격이라고는 생각지 않소."
"물론 그애는 나쁘지도 않고 잔인하지도 않아요. 어떻게 하면 그런 것들로부터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가, 또 마리아가 얼마나 축복받은 아이인가 이런 것에 대
해서도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나 저는 겁나요. 순진무구한 마리아가 그런 사회악
을 어떻게 이해하겠어요. 근심걱정을 모르고 자라야 할 어린시절이 다칠까봐 겁
나는 거예요. 아이들은 어디까지나 아이들답게 자라야 해요. 아이들이 어른들 세
계의 고통과 슬픔을 미리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당신은 굉장히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구료. 내가 데이빗에게 자세히 알아볼
테니까 염려 말아요. 엘지!"
"당신이 데이빗에게 얘기한다고 해서 달라지지는 않아요. 이 세상의 누구도 데
이빗을 바꿔놓지는 못할 것예요."
"난 그렇게 생각지 않소. 난 그애를 모든 점에서 존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야
기해주고 싶어요. 그애는 누구를 귀찮게 하거나 고집센 아이는 아니오. 늘 무엇
인가 배우려고 노력하며 자기의 생각을 지켜갈 줄 아는 개성이 뚜렷한 아이요.
개성이 강하다는 것은 어떻든 좋은 점이라 생각하오."
"저도 그렇게 냉정한 사람은 아니잖아요. 그애를 이곳에 두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든지 기꺼이 할 용의가 있어요. 그런다고 해서 나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
요. 그애에 대한 당신의 생각이 옳다는 것도 알아요. 그애가 어른이었다면 저는
그런 점들 때문에 오히려 좋아했을 거예요. 하지만 아이로서의 데이빗은 이해가
가질 않아요. 우리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면 참을 수가 없어요. 당신
이 정말 그애가 잘되기를 바란다는 말과 어디서 왔는지를 꼭 물어 보세요. 나쁜
일을 저질렀다면 경찰에 알아볼 수도 있어요. 또 우린 그애를 수도원같은 곳에
맡겨서 교육비를 보내줄 수도 있어요. 그애가 당신께 진실을 말해준다면 가장
좋은 방법을 택해서 도와줄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돈이 좀 들더라도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아요. 마리아를 생각해서라도 데
이빗에게는 옷이나 음식, 교육 등을 최고로 해주어야만 될 것 같아요. 전 정말
데이빗을 사랑하고 싶어요."
데이빗은 묵묵히 창턱에 앉아 어둠 속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이들 부모가 주
고받은 이야기는 모두 데이빗의 가슴 깊이에까지 파고들었다. 그는 떠나야만 한
다는 것, 그것도 되도록 빨리 떠나야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토록 가까운 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줄은 전혀 몰랐던 것이다. 데이빗에게는 모든 것이 불리
한 것 같았다. 혼자의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침이 되면 아이들 아버지는 그를 부를 것이고 잘못하다가는 경찰을 불러올
지도 모르는 일이다. 데이빗이 다시 수용소로 넘겨질 때까지 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오늘밤 안으로 데이빗은 떠나야만 했다.
옷장에서 보따리를 꺼내서 챙겼다. 물통, 주머니칼, 비누 등. 순간 데이빗은
욕실에 있는 커다란 비누 생각이 났다. 비누와 함께 스폰지와 칫솔, 초와 성냥을
가져가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데이빗이 입고 있는 옷은 안드레아의 것이었다.
아이들 어머니가 안드레아 옷을 가져도 좋다고 하며 데이빗의 옷을 돌려주지 않
았으므로 다른 옷은 없었다. 데이빗은 안드레아의 옷을 입고 가기로 했다.
이 집 사람들은 모두 좋은 사람들로 데이빗에게 아주 잘해주었으나 데이빗을
수용소측으로 돌려보내면 어떻게 되는지 그들은 전연 모르고 있었다. 다음날 수
용소측 사람들이 도착할지도 모르니까 한시 바삐 이 집을 떠나야만 했다. 그러
나 편지로나마 그동안의 고마움을 감사드리고 싶었다. 데이빗은 연필과 종이를
꺼냈다.
아침이 되기 전에 떠나야겠지만 편지를 쓰는 데는 꽤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
다. 그러나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데이빗은 한참 동안 생각한 뒤 조심스럽게
천천히 적어 나갔다.
저는 두 분의 말씀을 모두 들었읍니다. 이 편지를 끝내면 저는 곧 떠날 것입
니다. 두 분께서는 제가 이 집에 머물기를 원하셨지요. 그래서 저는 여기에 있었
습니다. 제 옷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안드레아의 것을 입고 갑니
다. 책을 읽을 수 있게 해주신 데 대해서 특별히 감사드립니다. 음악을 들을 수
있게 해주신 것에 대해서도 감사드리며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맛있는 음식과
포근한 침대에서 잠잘 수 있게 해준 것도 감사드립니다.
저는 누구를 죽인 일도, 폭력을 쓴 일도, 무엇을 훔친 일도 없습니다. 다른 사
람이 누리는 기쁨이나 행복, 자유나 재산을 빼앗은 일도 없구요. 두 분께서 제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 드리는 말씀입니다. 경찰이 잡으러
온다면 죽어버리겠어요. 더 이상 경찰에게는 할 이야기가 없습니다. 마구 폭력을
휘두르며 다른 사람의 생명과 자유를 마구 빼앗아도 되는 것처럼 행동하며 살아
가는 사람들에게 굴복한다는 것은 비겁한 일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눌러 이기는
방법은 그들이 나의 신념을 바꾸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어떤 분
이 제게 이것을 가르쳐주었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저는 이곳을 떠나고
자 합니다. 제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저의 이런 생각을 바꿀 수는 없을 거예요.
마리아에게 악이 존재한다는 것을 저는 기꺼이 가르쳐주었습니다. 그것은 마
리아가 이 세상을 겁내지 않고 굳세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악
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저는 아이들도 진실을 알 권
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위험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아
야만 하니까요.
제게 베풀어주신 모든 것에 대해서 감사드립니다. 이만 그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 데이빗 올림
편지를 다 쓰고 나니 꽤 많은 시간이 지났다. 장농 위에 놓여진 시계는 밤 한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데이빗은 마리아를 위해서도 무엇인가를 남기고 싶었
다. 특별히 마리아를 보호해달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갑자기 문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놀란 데이빗이 고개를 들자 문을 등지고 서
있는 마리아가 보였다. 데이빗의 간절한 마음이 전해지기라도 한 것일까. 마리아
도 놀란 표정이었다.
"데이빗!"
"쉿!"
데이빗은 손가락을 입에 대면서 소근거렸다. 마리아는 뒤로 문을 닫으며 가까
이 다가왔다.
"데이빗! 난 깜짝 놀라서 깨어났어. 네가 불 속에 있었는데 도무지 찾을 수가
있어야지."
"마리아! 난 지금 여기를 떠나야 해."
"안돼! 데이빗! 가면 안돼. 왜 그래?"
데이빗은 조금 전에 들었던 이야기를 마리아에게 모두 들려주었다.
"난 오늘밤 안으로 여기를 떠나야 한단다."
데이빗은 얘기를 끝내면서 결심을 털어놓았다. 다행히 마리아는 데이빗을 믿
으며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그를 붙잡지도 않았다. 다만 조용히 쳐다보면서
말했다.
"데이빗! 다시 또 오는거지? 얼마 있다가 꼭 다시 올 거지, 응?"
묵묵히 마리아를 보라보던 데이빗은 입을 열었다.
"마리아, 난 그런 약속은 할 수가 없어. 언제든지 다시 올 수 있으면 오겠지만
… 모르겠어. 약속은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지킬 자신이 없다면 함부로 그런
약속을 해서는 안돼."
"그러나 데이빗! 네가 가고 나면 앞으로는 누가 나에게 모든 것을 말해주지?"
그렇다. 데이빗은 누가 마리아를 돌봐줄 것인지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
떠나지 않으면 수용소측에서 그를 데려가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차피 데
이빗은 마리아를 더 이상 돌봐줄 수 없는 처지였다.
데이빗은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마리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처음으로 어깨
에 손을 얹어 본 데이빗은 마리아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마리아가 이해하고
기억할 수 있도록 천천히 말했다. "너는 너 스스로 그것을 해야 한다. 모든
것은 너 스스로 배워야 하고 너를 돌봐줄 사람이 없을 때라도 굳세게 모든 일을
해결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해. 너의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듣고 잘 생각하며 네가 옳다고 느끼는 것을 밀고 나가야 한단다. 그러나 옳
은 일이라고 해서 늘 네가 원하는 대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야. 만약 네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뒤에는 꼭 후회하게 될 것이다."
"안돼! 데이빗! 난 그렇게 똑똑하지 못해. 넌 왜 가야만 하니? 난 네가 여기
있으면 좋겠어. 날 데리고 갈 수는 없니?"
"그건 옳은 일이 아니야. 너의 부모님이 얼마나 놀라시겠니? 누구도 놀라게
해서는 안돼. 그것은 폭력과 같은 것이니까. 더구나 너는 견뎌낼 수도 없을 거
야. 난 잘 곳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 처지란다."
"너랑 같이 있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좋아."
"마리아! 넌 내 생각을 하며 지낼 수 있잖아. 나는 너를 떠나는 게 아니야."
"그럼 데이빗도 내 생각을 할 거야?"
"그럼, 마리아! 하고말고."
"언제나 할 거야?"
"그럼, 언제나 네 생각을 할께."
"데이빗! 떠나기 전에 날 한 번 껴안아줘. 그래야만 네가 없더라도 항상 곁에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을 것 같아."
데이빗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연필과 종이를 보따리에 집어 넣고 모든 준비를
끝냈다. 마리아는 그동안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마리아는 데이빗
에게 기다려 달라고 말한 뒤 방에서 나갔다. 곧 다시 돌아온 마리아의 손에는
금으로 된 십자가가 들려 있었다. 십자가 옆에는 작은 진주알이 붙어 있었다.
"데이빗! 네게 주고 싶어. 가지고 가줘."
십자가는 가는 줄에 매달려 있었다. 마리아는 발뒤꿈치를 들고 서서 데이빗의
목에 그것을 걸어주었다.
"고맙다. 마리아! 이젠 가봐야겠어."
데이빗은 보따리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두 팔로 마리아를 꼭 껴안아주었다.
불속에서 마리아를 구해내던 그날처럼.
"잘 있어, 마리아!"
"잘 가, 데이빗!"
데이빗은 재빨리 방을 나왔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
6
데이빗은 터벅터벅 발을 옮겼다. 길은 이미 잘 알고 있었으며 어두워도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아이들과 함께 그 길을 따라 여러 번 놀러 갔다 온 적이 있었
기 때문이다. 날이 밝으면 신발을 벗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집에 있는 동안 신발
이 닳으면 신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날씨는 추워질 것
이고 또 밤길을 가야 하는 경우를 생각해서 신발은 아끼기로 했다.
어느 길로 가야 할까 잠시 생각한 뒤 플로렌스라는 도시를 향해서 출발했다.
그곳에 도착하면 빵도 사야 할 것이다. 아직 미국 사람이 준 돈으로 생활할 수
있었다. 그래서 돈을 벌기 위해 오랫동안 한 도시에 머물러야 할 필요는 없었다.
다시 그전처럼 식사해야 할 것을 생각하자 데이빗은 우울해졌다. 우유와 비타민
생각에 이어서 자신이 중요한 인질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또 고개를 쳐들었다.
데이빗은 그 집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특히 지구의를 통해 마리아와 안드레
아에게서 배웠던 것을 기억하려고 애썼다. 스위스와 독일을 거쳐야만 덴마크에
도착할 수 있다고 했다. 그가 입고온 안드레아의 옷은 큰 도움이 되었다. 낡은
데이빗의 옷보다 훨씬 좋았으며 밤에는 추위를 막아 따뜻하게 해주었다.
그 집에서 배운 모든 것이 유익하게 생각되었지만 데이빗의 기분은 여전히 언
짢았다.
며칠이 지났지만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풍경은 가는 곳마다 그전과 다름없
이 아름다왔다. 둥글고 푸른 언덕들, 골짜기와 강들, 갖가지의 나무들. 이 모든
것이 전과 같은데도 전과 다르게 보였다.
데이빗은 처음 며칠간은 차를 타지 않았다. 서둘러서 플로렌스를 떠났으나 그
곳은 명승지가 참 많았다. 커다란 강에는 다리들이 놓여 있었고 다리의 양쪽으
로는 집들이 즐비했으며 그 가운데로 좁은 통로가 나 있었다. 도시 중앙에는 거
대한 조각들이 세워진 광장이 있었다. 또한 데이빗은 교회도 볼 수 있었는데 그
교회는 매우 아름다왔다.
그 집에 있을 때 플로렌스에는 유명하고 오래된 그림들이 많으며 누구나 볼
수 있다는 이야기를 아이들로부터 들은 일이 있었다. 데이빗은 그런 것들을 보
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지금은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오직 데이빗이 해
야할 일은 되도록 그 집으로부터 멀리 떠나는 것이었다.
그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야 한다. 호주머니에 돈이
있는 동안은 여행자들에게 말을 건넬 필요가 없었다. 여행자들은 성가실 정도로
많은 질문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사람들은 이름과 가는 곳
만 간단하게 묻는 정도였다. 데이빗은 조심스럽게 곡마단 이야기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만큼 적절한 이야기는 없는 듯했다.
데이빗은 아이들의 부모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거듭 생각해 보았다. 그럴 때마
다 기분이 나빴지만 자기의 잘못과 그들의 오해를 살 만한 점을 깨달을 수 있었
다. 그러나 자기를 나쁘다고 한 아이들 어머니의 이야기는 납득이 가지 않았다.
데이빗은 외국어에 대한 그들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았다. 좀 다르기는 해도 아
이들 부모는 자기와 똑같은 이탈리아 말을 쓰고 있었고 또 수용소에 있었던 이
탈리아 신부님과도 똑같았다. 데이빗이 구사하는 프랑스 말도 훌륭했다. 요하네
스는 프랑스 사람이었으므로 데이빗은 이탈리아 말보다는 프랑스 말이 먼저 튀
어나오곤 할 정도로 프랑스 말에 익숙해져 있었다. 요하네스는 누구보다도 지혜
롭고 좋은 사람이었다. 가장 훌륭하게 말할 줄 안다는 것은 결코 나쁘지 않다.
비록 떠돌이 신세일지라도 그것이 흠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말이란 자기의
생각을 표현하는 도구이지 부유함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까를로를 싫어한다는 점은 사실이었다. 아이들 어머니가 그점을 싫어하는 것
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들은 까를로의 나쁜 면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데이빗은 까를로를 좋아할 수가 없었다. 마리아가 둘 사이를 중개했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나쁜 것은 항상 미워해야만 한다고 데이빗은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수용소측 사람들과 다를 게 무엇이란 말인가?
다음 목적지인 볼로냐에 빨리 도착하기 위하여 차를 얻어타기로 했다. 플로렌
스를 떠나니 산은 굉장히 높아졌고 언덕을 오르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걸렸
다.
데이빗은 스위스를 생각해 보았다. 그곳에서는 꼭대기에 눈이 덮인 산들을 보
게 될 것이다. 안드레아의 지구의를 봄으로써 그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데이빗은 너무 많은 생각이 떠올랐으므로 그것을 적절히 정리할 수가
없었다. 구부러진 길 아래쪽으로 조그마한 마을 하나가 내려다보았다. 데이빗은
이번에야말로 용기를 내어보기로 했다. 교회 안에 한 번 들어가 보고 싶은 마음
이 간절했기 때문이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은 정답게 보였고 한낮이라 길에는 사람들이 없었다.
데이빗은 교회 앞마당에서 한참 동안을 망설였다. 교회 안에 어떻게 생겼는지
오래 전부터 보고 싶었다. 교회는 사람들이 하느님과 이야기하는 장소라고 했다.
이탈리아에서는 물론 로만 가톨릭의 하느님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데
이빗의 하느님께서 잠깐 이곳을 방문하신다면 아마 하느님을 뵐 수 있을 것이
다. 그러나 신들은 서로 왕래를 하지 않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더라도 데이빗
은 그곳에서 받을 어떤 위로를 기대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문은 굉장히 무거웠다.
힘겹게 들어서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교회 내부는 어두었다. 데이빗은
눈을 껌벅거리며 한참 동안 문 옆에 서 있었다. 차츰 어둠에 익숙해졌다.
교회 안은 몹시 조용했고 아름다왔다. 데이빗은 그 집 생각이 났으나 여러 가
지 면에서 그 집과는 달랐다. 벽에는 그림들이 걸려 있었고 나무로 된 조각들이
시선을 끌었으며 창은 채색유리로 되어 있었다. 그림 앞에는 여러 개의 촛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완전히 고요한 것은 아니었다. 데이빗은 어떤 그림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
았다. 그 사람은 나직한 음성으로 부드럽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데이빗은 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 사람이 기도하고
있는 중이라면 어떻게 말하는지 들어 보려고 했던 것이다. 데이빗은 기도하는
법을 배우고 싶었다. 그러나 데이빗은 그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
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그것은 라틴어였다. 데이빗은 라틴어를 알지 못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 사람이 데이빗을 보고 말했다.
"어서 와라. 꼬마야, 무슨 일이니?"
"아무것도 아녜요."
데이빗은 예의 바르게 대답한 뒤 급하게 발걸음을 떼어놓았다. 나가는 문을
찾기 위하여 그 사람의 어깨 너머로 두리번거렸다.
"무서워하지 말아라. 난 신부란다."
데이빗은 이미 그가 신부님임을 알고 있었다. 신부님은 항상 검은색의 긴 옷
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물론 수용소의 바깥 세계에서만 통하는 이야
기이다. 신부는 결코 수용소측 사람이 아니었다. 데이빗은 문을 찾는 대신 그림
을 보면서 물었다.
"이분이 신부님의 하느님이신가요?"
"아니, 그분은 그리스도폴이라는 성인이지."
"그분은 하느님이 아니신가요?"
"하느님은 한 분밖에 안 계신단다. 꼬마야."
데이빗은 약간 기분이 나빠졌다. 하느님이 한 분뿐이라는 것은 옳지 않았다.
데이빗이 아는 바에 의하면 하느님은 여럿이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지?"
"데이빗이예요."
"데이빗이라. 그럼 너의 하느님은 어떤 분이시니?"
"그분은 푸른 풀밭과 잔잔한 물가로 저를 인도해주시는 분이세요."
신부님은 데이빗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네. 파아란 풀밭에 이몸 누여주시고 고이쉬라
물터로 인도하시네. 내 영혼 싱싱하게 생기 돋아라. 그분 영광 위하여 지름길로
날 인도하시네. 죽음이 그늘진 골짜기를 지난다 해도 주님 함께 계시니 두렵지
않네."
"데이빗! 어떠냐? 같은 하느님이시지 …"
데이빗은 주의깊게 들었다. 그는 사람들이 흔하게 쓰지 않는 말들이 좋았다.
신부님은 그의 하느님과 아주 친한 사이처럼 보였다.
"같은 분일 수는 없어요. 그분은 아주 오래 전에 살았던 다윗의 하느님이세
요."
"그래, 맞았어. 방금 내가 ㅇ었던 시가 바로 다윗의 시 23편이지. 너는 여기 사
는 아이가 아니로구나. 우리 교회에는 나오지 않니? 날 믿으렴. 그분은 같은 하
느님이시란다. 사람들은 그분을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부르고 있지만 하느님은 한
분 뿐이시지. 우리가 도움과 위로를 구하는 기도를 바칠 때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는 그분은 같은 하느님이시란다."
신부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그런 것 같기도 했지만 너무 모르는 것이 많았
으므로 데이빗은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신부님이 틀릴 수도 있으니 그런 말
을 섣불리 믿어서는 안될 것 같았다.
"저는 저의 하느님을 그냥 모시고 싶어요. 미안합니다, 신부님. 그분은 아주 위
대하신 분이세요. 또 제가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당황할 때마다 저를 도와주시
는 분이시지요. 저는 벌써 그분과 약속을 했어요. 저의 하느님으로 모시겠다고
했으니 이제 와서 바꿀 수는 없어요. 자기가 한 약속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하잖아요?"
신부님의 기분을 언짢게 하지 않기 위하여 데이빗은 예의바르게 말했다.
그러나 그 신부님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여전히 미소를 띤 채 요하
네스를 닮은 목소리로 점잖게 말했다.
"데이빗! 네 말이 옳구나. 너는 올바른 신을 하느님으로 택했으니 다른 신을
찾을 필요가 없구나. 데이빗, 찾는다는 말의 뜻을 알겠니?"
"네, 그것은 경우에 따라서 다르게 쓰이죠. 그렇지만 저는 원한다고 해요. 원한
다는 말은 음악처럼 들리거든요."
데이빗은 신부님이 자기를 잡으려는 줄로 생각하고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신
부님은 그를 붙잡지 않고 부드럽게 말했다.
"뭘 좀 먹어야겠다. 데이빗! 너도 배고프다면 나랑 같이 가자꾸나. 어떤 방법
이든 내가 너를 도울 수 있다면 좋겠다."
신부님은 위험 인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돕고 싶다는 신부님의
말씀을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고맙습니다, 신부님. 배는 별로 고프지 않아요. 신부님 댁에 지도가 있으면 이
탈리아, 스위스 등을 좀 보고 싶어요. 스위스에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하죠?"
볼로냐를 지나니 경치는 단순해졌다. 풍경은 그저 평범했으며 우중충해 보이
는 길은 먼지투성이었다. 오히려 샛길로 가는 게 기분이 좋았다. 샛길은 항상 있
었지만 데이빗은 서둘러야 했으므로 그런 길만 이용할 수가 없었다. 큰길에는
차가 많이 다니고 있었다. 데이빗은 자기가 적어 온 이름들을 다시 읽어 보았다.
스위스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도시들이었다. 밤에는 제법 추웠다. 데이빗은
가끔 빵을 사기 위해서 가던 길을 멈췄다.
호주머니가 텅 비게 되자 데이빗은 돈을 벌 수 있는 도시에서 머물러야 했다.
이제는 여행자들도 많이 줄어들었다. 이대로 계속 날씨가 추워진다면 여행자들
은 모두 집으로 가버릴 것만 같았다. 데이빗은 굶어서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
각이 들었다. 부지런한 이탈리아 사람들은 남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
집을 떠나온 지 오래 되었지만 아직도 데이빗은 불안했다. 이탈리아 사람들로부
터 떨어져 있는 것이 안전할 것 같았다.
그러나 짐차나 승용차를 운전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바쁘기 때문에 이상한 소
년에게 관심을 둘 만한 여유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운전수들은 그들이 가
고 있는 목적지와 집에 돌아가면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 있
었다. 그들은 가족 이야기나 자신에 관한 이야기에 열중했고 들어주기만 하면
만족하는 것 같았다. 또 그들은 누구하고 얘기하는 것이 참 즐겁다고 말했다. 그
러나 그것은 누구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데이빗은 그저 그들의 이야
기를 들어주면서 그래요? 네, 등의 말만 하면 될 뿐 그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
는 것이 아니었다. 운전수는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을 기울였으므로 데이
빗은 오히려 마음 놓고 여행할 수 있었다. 그들은 항상 데이빗에게 음식을 나누
어주었다.
어떤 운전수는 데이빗에게 기차역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기차는 자주 볼 수
있었다. 데이빗은 정거장에서 하는 일들을 알고 싶었다. 밀라노에 도착한 데이빗
은 비로소 정거장에 가볼 수 있었다. 데이빗은 운전수에게 곡마단 이야기를 했
다. 자기는 곡만단의 단원이었지만 나폴리에서 병이 나서 혼자 떨어져 있다가
이제 몸이 좋아졌기 때문에 곡마단과 합류하러 가는 길이다. 대강 이런 내용이
었다. 그 운전수는 걱정이 되는 듯 데이빗에게 물었다. 돈을 충분히 갖고 있느냐
는 것이었다. 필요할 때마다 조금씩 벌어 쓴다고 데이빗이 대답하자 그는 자기
의 경험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기차역에서 돈을 벌었던 일을 회상하면서 돈을
버는 방법과 요령을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그는 데이빗을 밀라노 역에 데려다주었다. 밀라노 기차역은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곳이었다. 기차를 이용하는 손님들의 가방이나 짐을 들어주었으며 이탈리
아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여행자들을 안내하기도 했다. 어느 홈으로 나가야 원하
는 기차를 탈 수 있는지 또 식당은 어디 있는지, 데이빗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았다. 데이빗은 저녁 늦게까지 바쁘게 뛰어다녔다. 여러 날 빵을 살 수 있을
만큼 많은 돈을 벌었다.
신문을 파는 곳도 있었지만 데이빗은 별로 관심이 없었다. 우연히 얻게 된 신
문이나 빵을 싸주는 신문으로 읽는 연습을 했다. 신문의 기사는 대부분 데이빗
이 이해할 수 없었으며 얼마큼 진실한지도 믿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기사를 쓴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는 경우라면 더욱 믿기 힘들었다. 수용소측에서 낸 기사라
면 믿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마지막으로 아주 무거운 짐을 날라준 데이빗은 잠시 쉬고 싶어서 긴의자에 앉
았다. 옆자리에 앉아서 신문을 보고 있던 이탈리아 사람이 시계를 들여다보더니
황급히 일어났다. 보던 신문은 의자 위에 그대로 놓여져 있었다. 무심코 신문을
바라보던 데이빗은 깜작 놀랐다. 신문의 귀퉁이에서 자기 이름을 발견한 것이다.
데이빗은 재빨리 신문을 집어들었다.
"데이빗! 겁내지 말아라. 우리는 너를 찾지 않겠다. 그러나 네가 다시 돌아와
서 우리와 함께 살기를 바란다. 그리고 네가 말해준 모든 것을 믿는다. 아이들
부모"
의심할 여지도 없이 이것은 그에게 보낸 편지였다. 잠시 동안 데이빗은 가슴
벅찬 기쁨을 느꼈다.
많이 추었으므로 밤이 되면 바깥에서 지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둔 밤에 차
를 세울 수도 없는 일이다. 어둔 길목에서 서성거리다가는 의심받기 꼭 알맞다
는 생각이 들었다. 밀라노를 떠나온 지도 한참 되었다. 적당한 잠자리를 구하지
못하면 데이빗은 길가의 개천에서 자야만 했다. 이런 잠자리는 이미 수용소에서
단련된 몸이었으므로 그리 힘든 것이 아니었다. 다시 한 번 데이빗은 그 집 부
모가 보낸 편지를 생각해 보았다. 편지를 보내준 그들이 고마웠다. 까를로만 제
외한다면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렇지만 데이빗은 그들에게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또 까를로를 미워하게 된
다면 이상한 아이로 취급을 받으며 함께 어울리지도 못할 것이다. 또 그들이 궁
금하게 생각하는 것을 말해줄 수도 없었다. 만일 데이빗이 이야기를 한다면 그
들은 데이빗을 수용소로 보내버리고 말 것이다.
갑자기 데이빗의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그 집을 떠난 후 데이빗은 모든
것에서 흥미를 잃었던 것이다. 그 집을 나섰을 땐 문 뒤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
고 있는 것처럼 불안했었다. 결국 그 집에 오랫동안 머물렀던 것이 잘못이었다.
이전의 데이빗은 자기 자신의 당당한 주인으로서 정말 행복했었다. 바위동굴 속
에 살 때나 북쪽으로 여행을 할 때는 항상 주위의 모든 것이 아름답게 느껴졌으
며 빵이나 과일도 맛있었다. 원하면 언제든지 깨끗하게 씻었으며 출발하고 싶을
때는 서슴지 않고 떠났다. 그러나 그 집의 모든 것은 데이빗이 상상할 수도 없
는 엄청난 것들이었다. 그런 가운데서 생활하고 나자 모든 것은 전처럼 느껴지
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아름답지도 않았고 놀랍지도 않았다. 데이빗은 까를로
를 미워하지 않게 되더라도 다시는 그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집 아이
들과 부모는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었지만 데이빗은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은
수용소 밖에서 자란 아이들과는 다르기 때문이었다. 어느 곳에도 그는 속할 수
가 없었다. 데이빗에 대한 그들의 오해가 풀렸다 하더라도 또 진심으로 데이빗
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그것은 자연스럽지 않을 것이다. 데이빗은 자신에 대한
의문이 모두 풀릴 때까지는 방랑자로서의 여행을 계속해야 한다.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나라에 도착할 때까지는 멈출 수 없다. 그는 절대로 그 집에 가지 않을
것이다. 데이빗은 마리아를 생각했다. 마리아는 그에게 웃음을 가져다주었다. 마
리아 생각과 함께 데이빗은 그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인간이면
누구나 의지할 수 있는 무엇이 있어야 하는데 …
데이빗은 요하네스가 죽었을 때 자기도 곧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데이빗은 죽지 않았다. 그후로는 누구도 좋아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러한 생각은
마리아를 만나기 전까지 계속되었던 것이다.
데이빗은 다시 지난날의 생활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수용소측에서 데이빗을
더 이상 찾지 않고 자유가 보장되며 춥지 않고 배고프지 않게 된다고 하더라고
그전과 같은 처지로는 돌아갈 수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
는 사람으로, 항상 외톨이로 남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푸른 풀밭과 잔잔한 물가의 하느님, 푸른 풀밭과 잔잔한 물가만으로는 살아가
는 데 충분치 않군요. 또 자유가 있다고해도 충분치 않구요. 당신께서 저를 도망
쳐 나와 떠돌아다니는 소년이라 당신께 매이지 않고 사랑도 없다고 생각하신다
면 더 이상 저를 도와주실 필요가 없답니다. 그렇다면 괜찮아요. 제가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었을 때 저를 여러 번 도와주신 걸 감사드립니다. 데
이빗이 기도했습니다. 아멘."
데이빗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눈을 떠보니 아침나절이었다. 햇빛이 밝게 비
치고 있었다. 해가 떠오른 지 한참 지난 것 같았다. 아침은 지난밤처럼 그렇게
춥지 않았다.
데이빗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짐을 챙겨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지금은 걸음을 빨리 옮기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데이빗은 깊은 생각에 빠져들지 않았으며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하여 염려하지 않았다.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다음 마을은 국경도시였다. 큰길에 철책이 쳐져있었고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
다. 사람들은 국경을 넘어가기 전에 여권 검사를 받아야만 했다. 모두 친절해 보
였고 두려워하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 여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데이빗은 그런 증명서가 없었다. 만일 체포된다면 이런
큰길보다는 아름다운 산속에서 잡히고 싶었다.
데이빗은 마을을 벗어나 샛길로 접어들었다. 한 시간 가량 걸은 뒤 방향을 북
쪽으로 바꾸었다. 큰길로부터 상당히 떨어진 곳이었다. 데이빗은 수용소에서 들
은 이야기를 생각해냈다. 그것은 들키지 않고 몰래 국경을 넘는 방법에 관한 것
이다. 간혹 잡히는 경우도 있긴 했지만 그것은 여권없이 통행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했다.
데이빗은 큰길에서 멀리 떨어진 포도밭을 지나 한참 동안을 걸었다. 태양을
보면서 방향을 짐작했다. 곧 험한 산길로 들어섰으므로 걷는 것이 힘들어졌다.
큰길로 다시 나가기 위해서는 국경을 넘어야만 한다. 드디어 데이빗은 맨드리시
오라고 하는 마을에 도착했다. 그러나 행인들은 아직도 이탈리아 말을 쓰고 있
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데이빗의 실망은 컸다. 그러나 가게에는 '스비쎄라'라고
써붙인 간판이 보였으며 또 높이 달린 국기도 이탈리아 국기가 아니었다. 스비
쎄라는 이탈리아 말로 스위스라는 뜻이다. 이곳 사람들은 스위스에 살고 있는
이탈리아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데이빗은 다시 큰길로 들어섰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을 피하고 싶은 마음은 떨
쳐버릴 수가 없었다. 스위스에 대하여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수용소에는 스
위스 사람이 한 명도 없었기 때문에 두려움이 덜 하기 했으나 … 그러나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저녁 무렵 데이빗은 호숫가에 다다랐다. 아마 이 호수는 다른 호수인지도 모
른다. 호수는 너무도 아름다왔다. 바닷가 바위동굴에서 보았던 해안선만큼이나
아름다왔다. 산기슭에는 옹기종기 자리잡은 작은 집들이 보였으며 호수 위에는
보트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호숫가를 따라서 얼마를 걸어간 후 다리를 건넜다.
길은 호수 건너편까지 이어져 있었다. 다음 마을은 루가노라고 하는 동네였다.
그곳에서 데이빗은 빵과 치즈를 조금 살 생각이었다.
그러나 데이빗은 루가노에 도착하지 못했다. 산과 산 사이에 놓여진 길은 호
수로 이어졌으며 길에서 조금 떨어진 위에서 오렌지 나무를 발견했다. 산기슭으
로 기어올라간 데이빗은 떨어진 오렌지가 있는지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렌지는
쉽게 발견되었다. 데이빗은 그곳에 서서 호수를 내려다보았다. 호수는 여전히 아
름다왔다. 그는 나무들 사이를 지나 산기슭으로 높이 올라갔다. 그리고는 햇볕을
받아 따뜻해진 언덕배기에 앉아서 오렌지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저 밑으로
반짝이는 호수가 보였다.
"안녕!"
데이빗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너무나 조용한 분위기 속에 잠겨 있었으므로 인
기척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데이빗은 일어났다. 웬 부인이 서 있었다. 아이들
아버지는 아이들 어머니가 방에 들어올 때면 늘 일어서곤 했다. 그리고 그는 남
자 아이들에게도 일어서도록 가르쳤던 것이다.
"시간이 있으면 널 그리고 싶구나. 괜찮겠니?"
데이빗은 부인을 쳐다보았다.
"시간은 많아요."
그는 예의바르게 대답했다.
"하지만 어떻게 하는 것인지 몰라요. 그림은 어디에다 그리죠?"
부인은 길다란 막대기 위에다 무엇을 올려놓았다. 그것을 이젤이라고 불렀으
며 부인 쪽으로 판이 놓여 있었다.
"그림은 여기에다 그린단다."
데이빗은 부인 가까이 다가가서 이젤을 살펴보았다.
"저는 부인께서 그림을 그리고 싶어하는 줄은 몰랐어요. 부인께서는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나요?"
부인은 웃었다.
"아름답게 그리지는 못하지만 잘 그려 보려고 노력하는 중이란다. 꾸준히 그리
다 보면 좋은 작품이 나올 수도 있겠지."
"그러나 어느 날엔가는 그런 좋은 그림을 그릴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지
도 모르죠."
그 부인은 무슨 말을 할 듯이 데이빗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데이빗은 그 부인
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자기의 말에 대한 내용이 아님을 분명하게 느꼈다. 부인
은 데이빗에게 가만히 앉아 있어 달라고 했다.
데이빗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자 부인은 웃으며 한 방향으로 가만히 앉아 있어
야 한다고 말했다. 15분쯤 후에 부인은 그에게 힘든 일을 시켜 미안하다고 했으
나 데이빗은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머리는 움직일 수
있었고 원하면 말을 할 수도 있었다. 다만 몸의 다른 부분을 움직이지 않도록
주의했다.
데이빗은 이야기할 게 없었으므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부인은 데이빗을 이상
하게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부인은 그림에 몰두했으며 데이빗은 한가하게
앉아서 부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젊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늙어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마른 몸매를 한 그 부인을 데이빗이 좋아하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그녀는 이탈리아 말을 정확하게 하지 못하는 걸로 보아 이탈리아 사람은 아니었
다. 부인은 이탈리아 말의 정확한 어법도, 단어의 남성 여성도 잘 구별하지 못했
다. 부인의 머리칼은 정말 아름다왔으며 눈빛은 회색이었다. 얼굴은 예쁘지도 않
았고 잘 생기지도 않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부인은
지성적이었다. 데이빗은 사람의 얼굴을 보면 그런 것은 대체로 구별할 수 있었
다.
부인은 데이빗에게 질문을 하거나 말을 건네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할 때는 정확하게 했다. 어른들이 애들처럼 꾸며서 말하곤 하
는 우스꽝스러운 태도는 보이지 않았다.
몇 시간이 흘렀다. 해는 점점 더 기울어졌고 그늘도 많이 길어졌다. 갑자기 부
인이 말했다.
"아이고 이런, 벌써 어두워졌네. 너도 참 바보구나. 왜 날이 저물었다는 이야길
하지 않았니? 꼼짝도 못하고 앉아 있느라고 정신이 없었나 보구나!"
"아니예요, 전 괜찮아요."
데이빗이 대답했다.
"배고프지? 자, 나를 좀 도와다오. 함께 거둬가지고 집에 가서 뭘 좀 먹자꾸
나."
부인은 아름다운 집에 살고 있었다. 크지는 않았지만 노란칠로 단장된 집은
산뜻한 느낌을 주었다. 창문에는 초록색 덧문이 달려 있었으며 밖으로 작은 테
라스가 있었다. 정원은 사이프러스와 종려나무들이 심겨져 있었다. 내부도 무척
아름다왔다. 하얗게 칠해진 벽에는 그림과 장식품들이 걸려 있었고 가구는 고
급이었다. 데이빗이 이전에 보아온 것과는 아주 달랐다. 부인은 데이빗에게 자기
가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식탁준비를 해달라고 했다.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면
부탁한다고 했지만 데이빗은 능숙하게 그 일을 해냈다.
데이빗은 식탁차리는 일이 재미있었다. 아이들이 재미있다고 하는 놀이는 왜
그런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아름다운 방에서 혼자 마음
내키는 대로 식탁을 차리고 있으니 정말 재미있었다.
데이빗은 하얀 식탁 보도, 각자가 앞에 놓고 음식을 덜어먹는 은접시도 찾아
내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바닷가에서 바라보았던 산의 빛깔, 즉 갈색과 붉은색
이 섞여 있는 천을 찾아 식탁 위에 깔았다. 또 아름다운 접시와 은으로 된 칼과
포오크 그리고 예쁜 유리그릇들을 찬장에서 꺼내 놓은 다음 장농에 있던 촛대를
식탁으로 옮겼다. 까만 그릇에는 정원에서 꺾어 온 분홍색 꽃을 꽂아 촛대 옆에
놓았다.
"야! 굉장하구나."
부인이 들어와 보고 깜짝 놀라 소리쳤다.
"얘야, 어디서 이런 것을 배웠니? 식탁이 아주 근사해졌구나!"
데이빗은 부인을 쳐다보았다.
"전 아름답게 꾸며진 식탁에서 식사하는 것을 좋아하거든요."
데이빗은 진심으로 말했다.
"미안하다, 얘야. 떠들 생각은 없었지만 넌 정말 대단하구나. 매일 이렇게 하고
산다면 얼마나 감정이 풍부해지고 좋아지겠니."
부인은 현명한 사람이었다. 데이빗이 대답하지 않더라도 그 뜻을 금방 알아차
렸다.
데이빗은 점점 부인이 좋아졌다. 그들은 식사를 하는 동안 음식이나 가구와
색깔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부인은 데이빗이 무슨 말을 하든
지 조금도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부인은 데이빗을 무슨 말이든지 이해할 수
있는 어른처럼 대해주었다. 데이빗은 자기가 어디서 왔는지를 말하지 않았다. 그
러나 그가 의심을 받게 된다 하더라도 그런 것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 데이빗은 그동안 궁금했던 것을 부인에게 모두 물어보고 싶었다. 언젠가는
두려움없이 자신의 정체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을 물어 보고 싶었다.
물론 그 부인은 결코 되묻는 일 없이 데이빗에게 대답해주었다. 마침내 데이
빗이 말했다.
"덴마크에는 왕이 있나요?"
"그럼, 왕이 있고말고. 그분의 사진이 어디 있을 텐데. 찾을 수 있다면 네게 꼭
보여주마. 내가 덴마크 사람인 걸 어떻게 알았지? 너는 아랫마을에 살고 있니?"
"아녜요. 저는 몰랐어요. 저는 다만 왕이 다스리는 나라인지 아닌지 알고 싶었
을 뿐이예요."
"그래? 난 덴마크 사람이란다. 내 이름은 소피 방이라고 해!"
"제 이름은 데이빗이예요."
부인은 데이빗의 이름을 묻지는 않았지만 먼저 자기의 이름을 가르쳐준 부인
에게 자기도 이름을 말해야 될 것 같았다.
"데이빗이라고? 영국 외에는 그런 이름이 좀처럼 드물 텐데."
부인이 말했다.
"영국식 이름이라고 생각되세요?"
"아니, 그것은 성서에서 온 이름이지. 대부분의 이름들은 성서에서 따온 것이
란다. 그 이름 역시 여러 나라에서 사용하고 있지.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도 그
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 꼭 한사람 있었다. 지금은 그 사람을 만날 수가 없게 되
었지만 말이다."
데이빗은 호기심을 가지고 부인을 바라보았다. 그 다음 이야기가 무척 기다려
졌다. 그러나 부인은 내키지 않는 얼굴로 재빨리 말했다.
"괜한 이야기를 했구나. 네게 그런 이야기를 할 이유도 없는데 말이다. 아주
슬픈 이야기란다. 너무나 기막힌 사건이었지."
그들은 화제를 바꾸었다. 부인은 덴마크의 왕과 왕비 사진이 실려 있는 커다
란 잡지표지를 보여주었다. 데이빗은 사진을 바싹 당겨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왕
은 어깨에 견장이 달린 정장을 했으며 가슴에는 많은 훈장이 달려 있었다. 왕비
는 소매 없는 긴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는 보석이 달린 관을 쓰고 있었다.
"이 사진 참 근사하지?" 부인이 물었다.
"저는 왕과 왕비가 어떤 사람이지 잘 몰라요. 그러나 약속을 해놓고 지키지 않
는 사람들 같지는 않아요. 또 다른 사람들의 생명이나 자유를 마음대로 빼앗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같지도 않는데요. 사진을 보여주셔서 정말 감사합니
다."
데이빗은 그날 밤 푹신한 침대에서 잠을 잤다. 달리 가야할 곳이 없다면 이곳
에서 자고 다음날도 함께 지내자고 부인이 말했다. 데이빗은 곡마단 이야기를
했다.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달리 설명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부인과 이야기하는 것은 즐거웠다. 결코 보람된 삶을 살지 못하리라고 단정짓
기 전에 이 부인과 만났었더라면 그것은 데이빗에게 큰 기쁨과 만족을 주었을
것이다. 이제 그런것들은 데이빗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부인의 주변은
아름다운 것들이 많았다. 사실 호수 때문에 더 돋보이는 것 같았다. 부인은 이틀
후에 로마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데이빗은 이곳에서 하루를 더 지내려
고 마음먹었다.
데이빗은 잠을 잘 수가 없었지만 더 이상 비참한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죽고 사는 것 자체는 별문제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정말 살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 때는 수용소를 탈출한 직후였다. 그러나
데이빗은 지난날의 그 습관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수용소에서 늘 그랬던 것
처럼 일어나는 생각들을 지워버리면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다음날 아침 데이빗이 잠을 깼을 때 부인은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얘기가 끝날 때까지 데이빗은 침대에 누워서 기다리기로 했다. 그들은 프랑스
말로 이야기를 했으며 상대방은 남자였는데 부인에게 함께 뱃놀이를 가자는 것
같았다. 부인은 손님이 있어서 갈 수가 없으며 손님은 그림의 모델인 소년이라
고 설명했다. 그러자 남자는 마을에 사는 젊은 녀석이 아니냐고 다시 물었다. 부
인은 아니라고 하며 곡마단의 단원이라고 했다. 데이빗의 예상과는 달리 이상한
아이라고 하지는 않았다. 다만 누군가가 그 소년의 마음을 부수어놓은 것 같다
고 말했다.
남자는 아이들의 마음은 쉽게 상처나는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부인의 의견은
달랐다. 그렇기는 하지만 결국에는 부서지고 만다는 것이었다. 남자는 부인이 데
이빗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앗다. 어린 아이가 정말 비참하게 떠
돌아 다니는 신세라면 그를 도와주고 적당한 환경을 마련해주어야 한다고 주장
했다. 그러나 부인은 자기에게는 부서진 마음을 바로 잡아줄 수 있는 능력이 없
으며 그의 환경에 간섭할 권리도 없다고 했다. 돈이 있다면 빠른 시간 안에 곡
마단과 합류하도록 기차를 태워 보내고 싶지만 그럴 만한 돈조차 없다고 중얼거
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피에르! 아이들은 걷는 게 몸에도 좋아요. 아무튼 그애는 자동차라도 얻어 탈
수 있을 거예요.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길에서 차를 얻어 타고 여행들을 하니
까요."
남자가 가고 나자 데이빗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부인은 그를 위해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데이빗은 부인을 위해서 그림의 모델이 되어주었다. 점심을
먹고 난 후 잠시 쉬고 있을 때였다. 부인이 데이빗에게 자기의 책장을 보여주
었다.
그러나 데이빗은 책 대신 커다란 사진첩을 책장에서 꺼냈다. 여러 나라의 풍
경을 찍은 사진들이 많았으며 어떤 것들은 사진 밑에 지명이 씌어 있었다. 많은
인물 사진 중에서 부인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데이빗은 사진첩의 마지막 장에
서 손을 멈췄다. 다른 것보다 훨씬 큰 사진이었다.
데이빗은 오랫동안 그 사진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부인이 들어왔을 때 아
직도 그의 손에는 그 사진이 들려 있었다.
"이분은 누구죠?"
부인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데이빗이 물었다.
"내 친구야. 이름은 에디뜨 효르츠 펜젤이라고 해."
"이분에 대해서 말씀해줄 수 없으세요?"
"무슨 이야기 …?"
"왜냐하면 이분의 눈이 …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이 보여요. 또 아직도 미소
짓고 있거든요."
"넌 참 민감하구나. 그 친구는 너무나 슬픈 일을 겪었지 … 데이빗, 그 친구는
남편과 함께 외국에서 살았단다. 그런데 그곳에 정변이 일어났어 … 아주 위험
한 상황이었는데도 그 친구의 남편은 끝내 피하지 않았지 … 어느 날 경찰이 와
서 부부와 아기를 잡아갔단다. 그때 그 아기는 한 살이라고 했어. 난 본 적이 없
지만 그 아이 이름도 데이빗이었어. 그들은 남편과 아기를 죽이고 단지 에디뜨
만 살려 보냈어. 왜냐하면 그녀를 감시하던 경비원 중의 한 사람이 그녀를 사랑
하게 되었단다. 그래서 에디뜨에게 국경을 넘도록 여권을 주고 탈출시켜주었지.
지금 그 친구는 덴마크에 돌아와서 살고 있단다 … 네가 겪는 것처럼 커다란 불
행을 겪은 친구지. 데이빗, 모든 슬픔은 결국 끝나게 마련이란다. 그러니까 끝까
지 참고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야. 슬픔은 사람의 일생과 같은 것이다. 슬픔은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것이지. 슬픔이 죽는다는 것은 곧 슬픔이 없어진다는 뜻
이야. 이것을 기억하는 사람이면 언젠가는 승리하게 되지. 꼭 사람의 일생과 같
단다."
7
바람은 얼음같이 차가왔고 눈은 데이빗이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심
하게 쏟아졌다. 자신이 지쳤다는 것을 알면서도 데이빗은 마지막 힘을 다하여
계속 발을 옮겼다. 데이빗은 결코 쓰러질 수 없었다. 덴마크에 도착하여 어머니
를 만날 때까지는 계속 걸어야 했다. 그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눈도 추위도 험준한 산도 데이빗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데이빗이요, 쫓겨
다니는 소년이지만 이제는 그가 가야 할 곳을 뚜렷이 알고 있었다.
그 전날 데이빗은 루가노에서 차를 얻어 탔었다. 그러나 파이도라는 곳에 도
착했을 때 운전수는 더 이상 갈 수 없다고 했다. 날씨가 너무 나쁘기 때문에 길
이 막힌 것이었다. 데이빗은 마을 밖에 있는 마구간에서 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
난 데이빗은 다시 터벅터벅 걸었다. 길은 점점 오르막길로 바뀌었고 날씨는 점
점 추워지더니 결국은 눈이 쏟아졌다.
그 덴마크 부인은 자기가 로마에서 돌아왔을 때 데이빗이 다시 와 있기를 바
란다고 하며 자기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말해달라고 했었다. 그리고 곡마
단에 돌아가지 않아도 되고, 데이빗을 돌봐줄 수 있는 가까운 친척조차 없다면
자기와 함께 살자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부인의 이야기를 데이빗은 건성으로
들어넘겼다.
데이빗은 자기의 생각이나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는 버릇이 다행스러웠다. 예
의 바르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고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그리고
곡마단에 계시던 아저씨 한 분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는 자기를 잘 돌봐주시던 분이라고 했다. 데이빗은 생각나는 대로 이야
기를 꾸며댔다. 그런 거짓말이 나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데이빗은 덴마크로 가
야만 했다. 가는 도중에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또는 수용소측에서 어떤 함정을
파놓았다 하더라도 데이빗은 가야만 한다. 지금은 아무도 데이빗을 말릴 수가
없었다. 이 덴마크 부인도 데이빗의 이야기를 들었다면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다.
데이빗은 부인에게 수용소 경비원의 이름을 물어 보았다. 경비원은 바로 그
남자였다. 데이빗은 이제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 그 여자를 좋아했던 경비
원은 그 여자의 생명을 구해주었다. 어른들은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하기를 원
한다. 그 여자의 남편은 단지 그 여자가 사랑하는 남편이라는 이유만으로 경비
원의 미움을 샀고 구출될 수 없었던 것이다. 경비원은 살아 있는 아기에 대한
이야기를 그 여자에게는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여자가 경비원에게는 관심이
없었으므로 경비원은 그 여자에 대한 증오감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그 증오감
은 수용소에 남겨진 데이빗에게로 쏟아졌다. 그러나 그는 데이빗이 죽지 않도록
계속 돌보아주었다. 앙갚음의 대상이었던 데이빗에게 비타민과 우유를 먹이면서
도 이 모든 것을 소년이 알지 못하도록 해왔던 것이다.
데이빗은 이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요하네스를 굶기고 바깥
추위 속으로 내몰았으며 병이 들었을 때도 일을 시켰었다. 그러나 다른 죄수들
처럼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다. 데이빗은 요하네스가 그들을 똑바로 쳐다보면 그
들은 요하네스에게 손을 대지 못한다고만 믿었다. 그러나 그 남자가 요하네스
에게 데이빗을 돌보아주도록 했기 때문에 경비원들이 요하네스를 함부로 다루지
않았던 것이다.
요하네스는 사람이 나이가 들면 점점 복잡해지고 반대되는 감정을 동시에 가
질 수 있다고 했다. 이를테면 깨어 있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자고 싶은 것이 그
런 경우라고 했다. 그 경비원도 이와 같은 경우였다. 그는 데이빗을 미워했다.
그 아이의 엄마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았으므로 경비원은 데이빗을 미워했었지만
동시에 그 여자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데이빗을 돌보아주었던 것이다.
경비원을 매수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데이빗이 살아 있다는 사실조차 아는
사람이 없었다. 수용소라는 곳을 아는 사람은 그곳에서 죄수를 도망치게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경비원은 위험을 무
릅쓰고 그 일을 했다.
데이빗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발은 감각을 완전히 잃어버렸으며 이제는
마음까지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눈은 계속해서 내렸다. 데이빗은 잠깐이나마 어
디든지 드러눕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 눈속에서 얼어죽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억지로 버텼다. 커다랗게 떨어지는 눈송이 외에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오랫동안 표시판도 보지 못했다. 드디어 데이빗의 마음은 무감각해져서
살로니카로 갈 때같이 아무 의식도 없이 그저 발이 가는 대로 따라갈 뿐이었다.
갑자기 데이빗은 허공을 딛는 느낌이 들면서 몸이 심하게 흔드리더니 그대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낭떠러지였다! 너무나 지친 데이빗은 이런 위험조차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위험을 의식했다. 눈 위에서 한 발만 잘못 옮
겨 놓으면 그 다음은 낭떠러지였다.
한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데이빗은 더 이상 걸을 수가 없게 되자 팔
과 다리로 기어갔다. 또다시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손으로 더듬
어 가면서 조금씩 기었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전신이 쑤시고 아팠다. 눈은
계속 휘몰아쳤고 세찬 바람은 고개를 들지 못하게 했다. 데이빗은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웠으므로 한순간도 지탱하기 어려웠다. 이런 괴로
움은 일찍이 생각도 못한 일이었으며 수용소의 생활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웠다.
데이빗은 하느님께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머리 속의 말들은 모두 바람에 날
려가버린 것 같고 데이빗은 회오리 바람에 떠밀려 백색의 지옥으로 빠져버린 듯
했다. 도저히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이대로 죽어가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
었다. 갑자기 데이빗의 머리가 무엇인가 딱딱한 것에 쾅 부딪치면서 그대로 쓰
러졌다. 그리고 눈이 내리는 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갑자기 커다란 목소리가 데
이빗의 귀를 때렸다.
"요런 애숭이 녀석을 좀 보게나. 이런 날씨에도 도둑이 다 있네."
겨우 눈을 뜬 데이빗은 자기가 수용소측 사람에게 붙잡힌 사실을 알았다. 그
리고는 정신을 잃었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길었다.
그 농부는 마음씨가 나쁜 사람이었다. 바람과 눈은 피할 수 있었으나 끝내 자
유를 잃고 만 데이빗은 이 집의 포로가 된 것이다. 그가 머리를 부딪혔던 곳은
마구간의 문이었고 겨울내내 그는 이곳에서 갇혀 지냈다. 그 피난처는 결코 좋
은 곳이 아니었다. 데이빗은 하루 종일 노예처럼 일에 시달렸으나 가능한 한 열
심히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정말 그 농부는 수용소측 사람들 같았다. 그는 데
이빗을 심하게 부렸으며 말을 듣지 않으면 경찰에 넘겨버리겠다고 윽박지르곤
했다.
데이빗은 마리아의 가족들이 얼마나 정답고 착한 사람들이었던가를 새삼 깨닫
게 되었다. 여기는 전혀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 농부는 자기 아내나 아이들
에게까지도 냉정하고 잔인하게 대했다. 그러나 데이빗은 그들이 가엾게 생각되
지 않았다. 뻔뻔스런 부인은 함부로 말을 내뱉는 냉랭한 사람이었으며 그 집 아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집의 작은 아이들은 심술궂기 이를 데 없어 데이빗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린 소년은 그의 아버지를 그대로 닮았다. 머리카락은 뻣뻣하게 치솟았으며
붉은 딸기색이었다. 또 푸른색의 눈은 활기가 없었다. 항상 무엇을 부수거나 못
쓰게 만들면서 놀았다. 그 아이는 동물들에게도 잔인했는데 드러나지 않게 숨어
서 나쁜 일만 골라서 했다. 농부는 동물을 팔아 돈을 벌어야 했으므로 함부로
취급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아이는 동물들을 괴롭히며 노는 것이 가장 큰 즐
거움인 것 같았다.
요하네스는 한때 폭력과 잔인함에 대해 데이빗에게 말해준 적이 있었다. 그것
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느끼는 대로 마구 행동하는 것이라고 했다. 즉 어떤 문제
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분별력을 가지고 상대방을 납득시키는 것보다 주먹을 휘
두르는 것이 훨씬 쉽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데이빗은 그 아이의 잔임함을 바라볼 때마다 역겨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
다. 그 집의 딸도 별로 나을 것이 없었다. 그 소녀는 동물들을 잔인하게 다루지
는 않았지만 사랑하지도 않았다. 그 소녀는 마리아와 같은 또래였으므로 데이
빗은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았다. 그러나 마리아와는 엄청나게 달랐기 때문에 그
는 큰 충격을 받았다. 마리아는 항상 미소 띤 얼굴로 모든 사람들을 대했다. 어
린이나 어른들, 그리고 동물들에게도, 심지어는 떠돌이 거지 소년에게까지도 진
심으로 잘해주려고 했다. 그러나 이 집 소녀는 누구도 즐겁게 해줄 줄을 몰랐으
며 자기 가족들에게도 무뚝뚝하게 굴었다.
그들은 모두 데이빗을 자기 집의 가축처럼 취급했다. 데이빗에게는 음식을 던
져주었으며 욕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때리는 일은 없었다. 처음 얼마간은 데이
빗이 회복될때까지 마구간에서 누워 있도록 해주었다. 그런 후 데이빗이 일어나
자마자 즉시 일을 시켰다. 그들과 함께 일하고 있을때였다. 그 농부가 데이빗을
때리려고 하자 부인이 말리면서 말했다.
"한스! 당신은 왜 그렇게 어리석어요? 쓸데없는 참견이 아니라 제 말 좀 들어
봐요. 그 아이를 마구간에서 있게 하고 일을 부려먹으면 되잖아요. 당신이 그애
를 때려 보세요. 그 아이는 앙심을 품고 있다가 한밤중에 우리를 죽여버릴지도
몰라요. 그러니 겨울 동안 살살 달래가면서 실컷 부려먹고 봄이 오면 경찰에 넘
겨버립시다. 그렇게 하면 공짜로 일군 하나 얻은 셈이잖아요."
데이빗은 그들 모두가 어리석고 나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만일 그들이 때
린다면 데이빗은 눈속으로 다시 나갈 생각이었다. 바깥에서 얼어죽는다 하더라
고 그들과 같은 폭력은 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데이빗은 그들이 미웠다. 그
들과 같은 사람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어차피 겨울 동안에는 여행을 계속할 수 없었다. 이런 날에 여행을 한다면 굶
어죽거나 얼어죽기 안성마춤이었다. 어쨌든 데이빗에게는 매일의 잠자리와 음식
은 해결이 된 셈이었다.
마구간은 추웠으며 때로는 지붕 위에까지 눈이 쌓였다. 이 쌓인 눈이 다져지
면 마구간 안에 찬바람이 들어오지 않았으므로 오히려 따뜻했다. 동물들은 한결
훈훈하게 해주었다.
그에게는 음식물을 많이 주지 않았다. 마른 빵과 차가운 음식찌꺼기가 전부였
다. 그러나 수용소에서 먹었던 음식보다는 양이 더 많았고 맛도 좋았다.
그들은 데이빗이 어두운 마구간에서 혼자 지냄으로써 괴로움을 당하리라 생각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데이빗에게는 밤이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다.
데이빗은 어두움을 무서워햐지 않았다. 주변은 늘 사용하는 농기구들로 둘러
싸여 있었으며 동물들은 쉽게 잠이 들었다. 어두움은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않았
다. 데이빗이 두려운 것은 오히려 사람이었다.
밤이 되면 마구간은 온통 그의 것이었다. 수용소에서는 혼자 있어 본 일이 없
었으므로 데이빗은 조용히 혼자서 지내는 것이 좋았다.
그런데 개가 들어온 것이다.
데이빗은 늘 개를 적으로 생각해 왔다. 수용소측에서는 개를 시켜 죄수들을
물어뜯게 했다. 그것은 그들의 기분풀이 중의 하나였다. 이탈리아로 도망온 후
데이빗은 좋은 사람들도 개를 기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되도록 개는 피해
다녔다.
마구간에 갇힌 데이빗은 개를 피할 수가 없었다. 바깥에는 엄청나게 많은 눈
이 쌓였고 세찬 바람이 문짝을 흔들어대는데 개가 들어온 것이다. 데이빗은 죽
은 듯이 누운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개는 데이빗의 주위를 계속 돌면서 냄새
를 맡았다. 그 농부와 가족은 독일 사투리를 썼기 ㄸ문에 데이빗은 이탈리아 말
로 말했다.
"난 네가 무섭단다."
그는 목소리가 부드러우면서도 떨리지 않도록 온 힘을 기울였다.
"넌 내가 수용소에서 온 것을 안다면 내게 덤벼들겠지. 네가 나를 물어뜯는다
하더라도 난 도망갈 수 없단다."
데이빗은 어둠 속에서도 개를 볼 수가 있었다. 자기 주위를 킁킁거리며 돌아
다니는 개 뒤에는 커다랗고 시커먼 그림자가 따라다녔다. 잠시후 개는 데이빗
곁에 와 드러누웠다. 그들은 서로 몸을 바싹 붙이고 잠을 잤다. 개는 크게 하품
을 하고 숨을 내쉬더니 이내 곯아떨어졌다.
개는 데이빗을 물지 않았으며 오히려 데이빗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몸집이 무
척 큰 개였으므로 데이빗을 감싸줄 수가 있었다. 그 개의 이름은 킹이었다.
킹은 농부의 아이들에게 자주 으르렁거렸으며 농부를 따르지 않았다. 하지만
농부는 킹을 좀처럼 때리지 않았다. 킹은 양을 지키는 훌륭한 개였으므로 양들
을 목장에 놓아서 기르는 여름철이 되면 없어서는 안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킹은 데이빗을 볼 때마다 꼬리를 흔들었고 매일밤 데이빗의 잠자리로
왔다.
데이빗은 차츰 킹이 좋아졌다. 어느 날 저녁, 자리에 누운 데이빗은 겨울이 끝
나면 어떻게 할까 하고 걱정하고 있었다. 킹이 옆에 와서 눕는 것을 본 데이빗
은 손을 뻗어서 킹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것은 무심코 취한 행동이다. 마치 킹이
없으면 섭섭하다는 듯 또는 가까이 와서 자기를 따뜻하게 해달라는 듯이. 킹의
털은 보드라왔으며 따뜻한 느낌을 주었다. 킹은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데이빗은
다시 한번 천천히 킹의 두툼한 털을 쓸어주었다.
그런 다음 손을 내리고 조용히 누워 있었다.
그러자 킹이 머리를 쳐들었다. 데이빗 쪽으로 돌아서더니 조심스럽게 그의 손
을 핥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킹과 데이빗은 친구가 되었다.
데이빗은 점점 마음이 조급해졌다. 겨울은 영영 끝날 것 같지가 않았으나 빨
리 길을 떠나고 싶었던 것이다. 덴마크에 가기만 하면 어머니를 만날 수가 있을
것이다. 데이빗은 이제 목적지도 없이 떠돌아다니며 사람들의 의혹을 사는 거지
소년이 아니었다. 그는 꼭 가야 할 목적지가 있었다.
데이빗은 자기를 만난 어머니를 상상해 보았다. 놀라움과 기쁨으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 떠올랐지만 기대를 갖지 않으려고 했다. 이미 죽었다고 생각해
온 데이빗이 갑자기 나타난다면, 그리고 자기가 데이빗이라고 말한다면 어머니
는 선뜻 기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데이빗은 행복하고 감미로운 공상에 자주 빠졌다. 데이빗을 곧 알아본
어머니는 지극한 사랑을 쏟아줄 것이다. 그러면 데이빗은 자기가 몰랐던 모든
것을 물어 볼 수 있으며 모든 두려움은 단박에 사라질 것이다. 어머니는 데이빗
에게 "나의 아들아" 하고 부를 것이며 자기도 한 가족의 일원으로서 따뜻한 보
금자리가 생길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데이빗의 생각은 계속 부풀어올랐다. 어머니는 훌륭한 분으로서 음악을 이해
하며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찬미할 줄 알 것 같았다. 또한 모든 것을 어머니께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괴로왔던 일들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
다. 그러나 요하네스에 대한 이야기와 수용소를 탈출한 후에 겪고 배운 것들에
대해서는 거침없이 이야기할 것이다. 그리고 마리아에 대한 것과 소피 방 부인
과 함께 지냈던 일들도 빼놓을 수 없었다.
덴마크는 왕이 다스리는 자유의 나라이다. 비록 덴마크가 아름답지 않고 들은
이야기와 다르다 하더라도 데이빗은 어서 빨리 마구간을 떠나고 싶었다. 날이
따뜻해져서 여행을 할 수 있게 되기를 기다렸다.
어느 날 아침이었다. 마구간의 천정 밑에 높다랗게 달려 있던 작은 창문을 통
해서 햇빛이 들어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창문에는 온통 두터운 서리로 가려
있었다.
데이빗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가 움직이기만 하면 그 가냘픈 햇빛이 사
라질 것 같아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 있었다. 너무나 오랫동안 해를 보지 못한
데이빗은 거의 태양의 존재를 잊고 살았던 것이다.
그가 일어나서 손을 높이 뻗친다면 가늘고 창백한 햇빛이 손에 닿을 것만 같
았다. 갑자기 데이빗은 햇빛을 받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처럼 생각되
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햇빛은 그의 손가락을 스칠 뿐 그 이상은 받을 수가
없었다.
그날 저녁 데이빗은 잠이 오지 않았다. 농부가 마구간 문에다 빗장을 지르는
지 둔한 소리가 났다.
데이빗은 봄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봄은 맨 먼저 아랫동네에서부터 시
작됐다. 농부는 데이빗이 아랫동네를 보고서 봄이 왔다는 것을 알게 될까봐 문
에다 큼직한 빗장을 채워 놓은 것이었다. 산기슭에는 봄이 더디게 온다. 데이빗
은 매일 열심히 일했다. 그래서 농부는 가능하다면 오랫동안 그를 마구간에다
가둬 둘 심산이었다. 봄이 온 것을 더 이상 숨길 수가 없게 되면 그 농부는 경
찰을 부를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이 끝난다. 수용소측 사람들이 데이빗을 잡으
러 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데이빗은 어둠을 응시했다. 도망치기는 불가능했다. 나무빗장은 엄청나게 컸으
므로 움직여지지지도 않았다. 밤마다 주머니칼로 빗장을 자른다고 하더라도 아
침이 되면 결국은 농부에게 들키고 말 것이다.
"푸른 풀밭과 잔잔한 물가의 하느님! 어떻게 하면 좋을 까요? 제가 무엇을 잘
못했나요? 저는 마리아를 불 속에서 구해내어 그애의 생명을 당신께 대한 감사
의 보답으로 드렸어요. 또 저는 이 겨울 동안 한마디의 불평도 하지 않았어요.
그뿐만 아니라 내 처지를 바꾸어 달라고 부탁드리지도 않았어요. 당신은 다 알
고 계시지요. 농부와 그 가족들은 나쁜 사람들이예요. 저는 그 사람들이 미워요.
소피 방 부인을 만나서 모델이 되었고 결국 어머니의 사진을 볼 수 있었던 것은
당신의 도우심임을 알고 있어요. 저는 당신을 선택했고 그것을 바꿀 수는 없어
요. 그러나 당신은 저 농부나 까를로나 수용소측 사람들 같아요. 잔인하다는 생
각까지 들어요. 그리고 다시는 저를 도와주지 않으시려는 것 같군요. 아무리 긴
급한 일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말이예요. 제가 너무나 지쳤기 때문인가요? 보다
좋은 하느님을 선택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워요. 저는 데이빗이예요. 아멘."
데이빗은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자기의 마음속에 있던 것들을 탁 털어버리고
나니 시원했다. 그러나 데이빗은 두렵기도 했다. 자기의 비난을 들으신 하느님
께서 크게 화를 내실 것 같아 걱정이 되었다. 수용소에서처럼 데이빗은 인질로
잡히고 마리아에게는 어떤 재앙이 내려질 것 같았다. 또는 자기가 죽거나 더
심하면 수용소로 돌려보내져 그곳에서 살게 될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하느님이 원망스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데이빗은 겨우내 참고 기다
려 왔지만 하느님은 농부가 문에 빗장을 지르도록 하심으로써 데이빗이 도망갈
수도 없게 만드신 것이었다. 데이빗은 이틀 밤을 꼬박 새웠다. 문제의 원인을 꼭
알아내고 싶었다.
데이빗은 요하네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생각해 보았다. 수용소의 어떤 경비
원이 자기 책임을 다하지 않고 그 잘못을 제삼자의 탓인 양 비난한 일이 있었
다. 그때 요하네스는 데이빗에게 그것을 옳지 않다고 말했다. 사람은 자기의 책
임을 회피해서는 안되며 잘못한 일이 있을 때는 그 일을 잘 살펴본 다음 잘못의
원인을 찾고 책임을 지는 것이 명예를 아는 인간의 태도라고 했다. 문제해결도
이런 방법으로 해야만 마땅하다고 했었다. 언제나 남을 탓하기 전에 자신의 잘
못을 먼저 반성해야 한다고 했었다.
데이빗은 하느님을 까를로나 농부와 같은 잔인한 분이라고 비난했던 것에 대
하여 용서를 청하고 잘못을 빌었다. 하느님은 데이빗의 잘못을 깨닫게 해주시려
고 지금까지 내버려 두셨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데이빗은 오히려 자신이 잔인하
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데이빗은 자기만이 참을성있게 기다렸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까를로도 마찬가지였다. 데이빗은 끝까지 까를로를 용서해주지 않았으며
쳐다보지도 않았다. 까를로는 자신의 잘못을 여러 번 사과하고 용서를 청했었다.
까를로가 정말로 나쁘고 어리석은 아이였다면 결코 용서를 청하지 않았을 것이
다. 더욱이 데이빗의 그런 태도를 보고 자기도 데이빗을 못본 체할 수도 있었다.
아이들 아버지에게 털어놓던 아이들 어머니의 이야기도 생각이 났다. 까를로는
데이빗과 친구가 되고 싶어 노력하고 있는데 데이빗이 너무 냉정하게 뿌리치기
때문에 자기의 마음이 몹시 상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어둠 속에 앉아 있던 데이빗은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을 다시 궁리하
기 시작했다. 꼭 찾아내야만 했다. 그는 집주소를 기억해냈다. 편지를 쓰고 우표
를 사야 한다. 만일 꼼짝없이 여기에 갇혀 있는다면, 까를로는 결코 어리석은 아
이가 아니라는 자신의 깨달음을 그에게 알려줄 수가 없다.
마구간의 문은 아주 크고 탄탄했다.
산기슭의 봄은 더디니까 아직도 단단하게 얼어붙은 눈을 이용하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구간의 벽을 헐어내고 바깥쪽으로 굴을 파는 것이
다. 그곳으로 빠져나온다면 무사히 탈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구간의 벽은 나
무로 되어 있었으므로 칼로 구멍을 파나갔다. 빠져나갈 수 있을 만큼 커지자 농
부의 눈에 띄지 않도록 그곳을 물통으로 가려놓았다.
그리고는 바깥쪽으로 계속 굴을 뚫었다. 수북하게 파낸 눈은 물통에 담아서
짐승들의 여물통에 쏟아 부었다. 눈치가 없는 농부는 여물통에 항상 물이 있는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눈 속에서 굴을 뚫는 일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힘들었다. 매일밤 데이빗은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봄이 너무 빨리
와서 눈이 녹으면 굴의 천정이 무너지지 않을까 큰 걱정이었다. 낮이면 일손을
멈춘 채 졸기도 했다. 그것을 본 농부가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조그만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이제 농부는 데이빗을 때릴 수 없게 되었다. 어느날 그가 데이빗을 때리려고
하자 킹이 데이빗을 가로막고 으르렁거린 것이다. 킹이 자기를 보호해주고 있다
는 사실을 알게 된 데이빗은 마구간에서 킹을 안고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킹은
비록 하찮은 짐승이었지만 자기를 보호해주고 있었으므로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날 밤 농부는 자기 아내에게 데이빗의 이야기를 했다. 데이빗이 킹을 마음
대로 조종하기 때문에 빨리 경찰에다 넘겨야겠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게 된 데이빗은 어처구니가 없었고 화까지 났다. 데이빗은 한 번도
누구를 조종해 본 일이 없었다. 그렇게 해보려고 생각한 일조차 없었다. 남을 조
종하는 것이나 폭력 등은 모두 수용소측 사람들이 사용하던 수법이었다. 데이빗
은 그럴 만한 기회가 주어진다 하더라도 결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 밤 안으로 도망가야만 한다. 굴의 길이는 그의 키의 두 배 가량 되었다.
마구간을 살짝 빠져나온 데이빗은 어림잡아 굴이 끝나는 곳에서 눈속으로 빗자
루를 찔러 보았다. 빗자루의 절반쯤이 눈 밖으로 나왔다.
이 정도라면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농부가 이 빗자루를 본다
면 틀림없이 데이빗의 짓임을 알게 될 것이다.
데이빗은 빗장을 지르기 위해 농부가 나올 때까지 마음을 조이며 기다렸다.
그런데 농부는 문에 빗장을 지른 다음 그냥 들어가버렸다. 밖은 아직도 몹시
추웠다.
데이빗은 너무 긴장하면 항상 메스꺼움을 느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속이 거
북했으며 토할 것만 같았다. 데이빗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밤을 새워 굴을
파기로 했다.
킹은 몹시 불안한 듯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가 굴을 파는
옆에서 쳐다보기만 하더니 금새 달려들었다. 어두움 속에서 눈을 빛내며 데이빗
을 도와주기 위해서 자기의 몸을 바깥쪽으로 밀어붙였다. 데이빗은 물을 뿌리면
서 굴을 뚫으면 훨씬 수월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킹은 앓는 소리를 내며 데
이빗을 따라다니더니 데이빗이 보따리를 싸자 끙끙거리기 시작했다.
데이빗은 어두움 속에서도 옷을 단정히 입었다. 잃어버릴까봐 바지의 허리 안
쪽에 단단히 매어두었던 마리아의 십자가는 목에 걸었다. 그리고 나서 킹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킹! 난 지금 가야 해. 밤마다 따뜻하게 해준 것 정말 고마웠어. 그리고 저 농
부가 나를 ㄸ리지 못하도록 네가 보호해준 일도 감사하고 있단다. 그 전에는 누
구도 나를 보호해준 일이 없었는데 말이야. 잘 있어."
그는 킹의 목을 끌어안았다. 얼굴을 킹의 목에 묻었다. 킹도 열심히 데이빗을
핥았다.
데이빗은 기어서 구멍 밖으로 나왔다. 킹이 쫓아왔다.
"안돼, 킹. 너는 여기 있어야 해. 여기 있으면 굶지는 않을 거야. 잘 있어."
드디어 밖으로 나왔다. 바깥은 생각대로 대단히 추웠다. 데이빗은 산기슭을 돌
아서서 큰길로 나가 아랫마을로 향했다. 지금은 벌써 사월이니까 아랫마을은 좀
따뜻할 것이다.
데이빗은 할 수 있는 한 빨리 걸어갔다. 눈으로 덮인 산길은 걷기에 충분할
만큼 희끄무레하게 밝았다. 큰길을 향해서 반은 엉금엉금 기었으며 반은 걸었
다. 한 시간쯤 지나자 큰길이 나왔다.
큰길은 벌써 말끔하게 눈을 친 다음이라서 데이빗은 걷기가 한결 쉬웠다. 사
람들이 일찌감치 눈을 쳐서 길을 만들어 놓았지만 자동차는 아직 다니지 않았
다. 성고토하르트라는 길을 내려다보면서 데이빗은 계속 걸었다.
데이빗은 고개를 돌려 하얗게 눈이 덮인 산을 바라보았다. 겨울은 이제 막바
지로 접어들었다. 다시 한번 데이빗은 자유로운 기분을 맛보았다. 또 농부가 마
구간 문에다가 빗장을 질러 놓았기 때문에 데이빗은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이었다. 그러자 모든 것을 다 나쁘게만 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데이
빗이 경험한 지금까지의 모든 일은 보다 나은 것을 위한 디딤돌이 된다는 사실
을 깨닫게 되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모든 문제들은 쉽게 풀려 나갔다. 데이빗은
역시 푸른 풀밭과 잔잔한 물가의 하느님을 선택한 것이 잘한 일이라고 느껴졌
다. 그의 하느님은 아주 힘있는 분이셨다. 인간이 무슨 생각을 하든, 어떻게 보
답하든지 상관하지 않고 다만 인간을 잘 되도록 이끌어주는 분이셨다.
데이빗은 산기슭을 돌아서 검은 물체가 자기 뒤를 따라오고 있음을 알지 못했
다. 그것은 곧장 데이빗을 향해서 달려오고 있었다.
그가 아직은 자유의 몸이 아님을 깨달았다. 데이빗은 몸을 돌려서 뛰기 시작
했다. 달빛이 환하게 비치고 있었다. 바위벼랑 위로 돌아서면 농부가 보지 못하
도록 몸을 숨길 수가 있을 것 같았다.
갑자기 데이빗은 엎어져서 눈 속에 빠져버렸다. 순간적인 일이었다. 눈앞은 온
통 깜깜하기만 했다.
그때 데이빗은 얼굴에 와닿는 축축한 감촉을 느꼈다.
그것은 농부가 아니었다. 데이빗과 함께 가고 싶어서 따라온 킹이었다.
킹은 그의 옆에서 함께 걸었다. 가끔 앞장서서 뛰어가기도 했지만 거의 데이
빗과 함께 보조를 맞추어서 걸었다. 데이빗이 킹에게 이야기를 하면 킹은 꼬리
를 흔들었다.
데이빗은 깊숙이 숨을 들이마셨다.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제 데이빗은
아주 자유로왔고 용기가 넘쳐 흘렀다. 데이빗은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가야 할 곳을 알고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는 아직도 많은 어
려움이 남아 있을 테지만 그런 어려움을 극복해낼 자신이 있었다. 데이빗은 하
느님께 드린 약속이 한 가지 더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자기 스스로
따라오는 개 킹이 있었다. 긴 겨울은 지나갔다. 데이빗은 봄을 맞으러 나선 것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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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잠을 자기엔 아직 추웠지만 봄은 아름다왔다. 첫날 밤은 다행히 마구
간을 발견하여 그곳을 킹과 함께 잠자리로 삼았다. 그 다음날은 정말 봄날씨였
다.
데이빗은 돈 때문에 약간의 곤란을 느꼈다.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번 돈은
겨우내 농부의 집에서 갇혀 지내느라고 쓸 기회가 없었다. 가게에서는 데이빗의
돈을 받지 않았으므로 은행에 가야만 바꿀 수 있다고 했다. 데이빗은 은행에 가
는 것이 두려웠다. 혹시 농부가 경찰에다 신고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장 빵이 필요했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 킹은 한번도 배고프
게 지낸 적이 없었다.
데이빗은 돈을 마련하기 위해 여기저기 기웃거려 보았다. 그러나 일거리를 얻
기가 무척 힘들었다. 스위스 사람들은 모두 근엄하게 보였으며 좀처럼 웃는 일
도 없었다.
스위스는 정말 아름다웠다. 흰눈이 덮여 있는 높은 산에 햇빛이 비치면 산봉
우리는 분홍빛으로 물이 들었다. 골짜기엔 파릇파릇하게 잔디가 움트기 시작했
으며 집 주위엔 흰색과 핑크색 꽃들이 피어나는 아름다운 나무가 즐비했다. 그
광경을 대하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아름답고 모양이 섬세한 꽃을 보자 문득 마리아 생각이 났다. 꽃이 만발한 나
무의 아름다움이여! 데이빗은 미소를 잃지 않았고 살고 깊은 의욕이 더욱 강해
졌다.
데이빗은 약간의 돈이 생기자 곧 봉투와 우표를 샀다. 편지는 그다지 말끔하
게 써지지 않았다. 잔디밭에 앉아서 무릎에다 좋고 썼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 쓸
때까지 마음을 기울였으며 정성을 다했다. 데이빗은 빗장이 걸린 마구간의 교훈
을 잊지 않게 해주시도록 하느님께 빌었다.
까를로에게
나는 이제 너를 나쁜 아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언젠가 네가 날 때린 것은 어
리석은 행동이었을 뿐 이제는 네가 밉지 않다. 그러나 정말 나쁜 사람들은 여전
히 미워할 거야. 네가 다시 주먹을 휘두른다면 또다시 너를 미워하게 되겠지. 너
의 부모님께서 신문에다 쓰신 편지를 보았다. 정말 감사드리고 싶구나. 그리고
내가 했던 이야기도 말씀드려줘. 부모님과 안드레아, 마리아와 두 꼬마에게도 안
부를 부탁해. 맨 먼저 마리아에게 말해줘. 꽃이 만발한 나무를 쳐다보니 마리아
생각이 났었다고.
-데이빗
으로부터
데이빗은 봉투에 까를로라는 이름을 쓰고 그 밑에 아이들 아버지의 긴 이름을
썼다. 그 집이 있는 동네의 주소를 적은 다음에 이탈리아라는 지명을 적어 넣었
다. 데이빗은 우체통의 생김새를 몰랐으므로 한참을 헤맨 후에야 편지를 부칠
수 있었다.
하루 종일 데이빗은 호수를 끼고 걸었다. 호숫물은 가장 짙은 나뭇잎의 녹색보
다 더 푸른빛이었다. 데이빗은 걷는 것이 좋았다. 차를 얻어 타지 못해도 즐거웠
다. 굳이 다른 이유를 찾자면 스위스 사람은 이탈리아 사람처럼 친절해 보이지
않았으므로 안심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모든 여행자들은 데이빗과 반
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기차역을 지날 때마다 많은 도움을 받았다. 역마다 지도가 걸려 있어서 위치
를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데이빗은 계속 북쪽으로 가야 했지만 간
혹가다가 방향을 분간하기가 어려울 때도 있었다.
루체른역에 도착한 데이빗은 돈을 벌어야 했다. 킹이 있기 때문에 더 많은 돈
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는 북쪽으로 여행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랐다.
데이빗은 바젤이라는 도시에 도착했다. 바젤의 일부는 프랑스에 속해 있었다. 프
랑스는 요하네스의 조국이다. 그의 고향은 알사스라고 했다. 꼭 가보고 싶었지만
그는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프랑스로 가기 위해서는 큰 강을 건너야 했는데 다리위에서는 국경 수비대가
여권 검사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데이빗은 알사스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대신 스위스에서 데이빗은 차를 얻어 탔다. 차는 바젤을 떠나 독일로 향하
는 안내판을 따라서 달렸다. 웅장하게 솟은 산봉우리들은 하얗게 눈이 덮인 채
하늘을 찌를 것 같았다. 데이빗은 산들을 뒤로 하고 계속 걸어나갔다. 앞으로 나
아갈수록 점점 낮아졌으며 둥글고 푸른 언덕이 많았다. 경치는 그런 대로 아름
다웠지만 이탈리아와는 달리 집은 예쁘지 않았다. 그러나 퍽 깨끗해 보였다. 그
리고 꽃으로 장식된 창턱이 아기자기했다.
데이빗은 국경초소에 닿았다. 그곳에서는 두 사람의 수비병이 스위스에서 커
다란 차를 몰고 온 키 큰 사람의 여권을 검사하는 중이었다.
그가 국경을 넘어 조금 걷기 시작했을 때였다. 커다란 짐차가 데이빗의 앞에
멈춰 섰다. 운전수는 아까 국경초소에서 검열을 받던 그 사람이었다. 데이빗은
혹시 수용소측 사람이 아닌가 해서 깜짝 놀랐다. 왜 차를 세웠을까?
데이빗의 불안을 함께 느낀 킹은 앞을 가로 막은 채 그 사람을 향하여 으르렁
거렸다.
"너 용케도 잘 빠져나왔구나. 그렇지?"
킹은 더 이상 으르렁대지 않았다. 데이빗은 재빨리 그 사람의 얼굴을 살펴보
았다. 사람의 얼굴을 보고서 웃는 버릇이 있는지 없는지 알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혹은 근심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친절한 사람인지, 마음이 착한 사람인지를 알아내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너무나 힘겹게 살아왔기 때문인지 그의 얼굴은 슬프게
보였다.
"슬쩍 빠져나왔죠. 뭐."
데이빗은 달리 할 말이 없었으므로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러면 어디까지 가니?"
"부른스위크요."
"잘 됐구나. 난 거기까지는 가지 않지만 프랑크푸르트까지는 태워다주마. 네
개가 얌전히만 있어준다면 타도 좋다."
데이빗은 그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그리고 킹이 얌전하게 있기는 하겠지만 약
속할 수는 없다고 하자 스위스 사람은 웃으면서 정직해서 좋다고 했다.
데이빗은 약간 망설여졌다. 정직하기를 바라는 그 사람에게 자기가 지어낸 거
짓말을 또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데이빗이 정직하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이름
뿐이었다. 스위스 사람의 이름은 그라프라고 했다. 데이빗은 그에게 곡마단 이야
기와 나폴리에서 병이 났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착하고 좋은 사람
에게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 사람은 데이빗에게 아주 맛있는
음식을 사주었고 킹에게도 먹을 것을 주었다.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했을 때 그는
독일에서 사용하는 마르크라는 돈까지 주었다.
"네가 나쁜 아이인지 좋은 아이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네 눈은 착해 보이는구
나. 저 개가 그렇게 따르는 걸 보니 넌 틀림없이 좋은 녀석이다. 설마 집에서 도
망쳐 오지는 않았겠지. 그렇지, 데이빗?"
데이빗은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아니예요. 저는 부모님 곁을 도망쳐 나오지 않았어요. 사실입니다. 이렇게 먼
길을 태워다주기고 또 음식까지 사주셔서 정말 고마웠어요."
스위스 사람은 데이빗이 길모퉁이로 돌아설 때까지 서서 쳐다보았다. 그리고
는 손을 흔들어주었다. 데이빗도 손을 흔들어서 답했다. 지금까지 데이빗은 한번
도 누구에게 손을 흔들어준 적이 없었으므로 곧 쑥스러움을 느끼면서 손을 내렸
다.
그후 데이빗은 여러 번 차를 얻어 탔다. 그때마다 킹은 데이빗의 다리 사이에
서 조용히 앉아 있었으므로 아무도 탓하는 사람이 없었다. 처음에 개를 본 사람
들은 대부분 겁을 냈다. 킹은 몸짓이 아주 컸고 사람들에게 덤벼들 것같이 보였
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데이빗의 말은 무엇이나 얌전히 잘 들었으므로 사람들은
웃으면서 늑대 옷을 입은 양이라고 불렀다. 데이빗이 킹에게 말하는 태도는 사
람에게 하는 것처럼 아주 조용하고 예의 바른 모습이었다. 킹은 자기가 원해서
데이빗을 따라왔으므로 킹에게 명령하는 따위의 말은 하지 않았다. 데이빗은 명
령하거나 큰 소리로 야단치는 것이 딱 질색이었다. 킹은 영리한 개였다. 어떤 개
는 사람같이 영리하다는 얘기를 듣고 웃어 넘긴 일이 생각났다. 개는 어디까지
나 개일 뿐이지 사람과 같을 수는 없으며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
던 것이다. 킹은 영리할 뿐만 아니라 착했다.
농부에게서 도망치는 데이빗을 킹이 따라나선 후부터 모든 것은 순조로왔다.
수용소측 사람같은 이들은 보지 못했고 가야할 목적지도 뚜렷했다.
킹은 데이빗에게 큰 위로가 되어주었다. 함께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지만 킹이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흐뭇했다. 밤에는 데이빗을 따뜻하게 재워주었으며
항상 지켜주었다. 하지만 데이빗은 항상 무기를 가지고 다니는 수용소측 사람들
을 생각할 때면 새로운 불안을 느꼈다.
데이빗은 곧 자기의 실수를 깨닫게 되었다.
데이빗이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생겨난 일이었다. 데이빗은 정거장에 걸린 지
도를 보면서 자기가 갈 길을 미리 정해 놓았다. 차를 얻어 타든지 걷든지간에
며칠 후에는 덴마크에 도착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길이었다. 그러자 데이빗은
방심하게 되었고 마음의 긴장이 풀렸을 때 그 일이 일어난 것이다. 무서움과 두
려움 속에서 늘 살아온 데이빗이였으므로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
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까지 불안에 대한 강박관념이 사라지고 자유로움을 누
리고 있었다. 그 남자는 정말 데이빗이 덴마크에 가기를 원했었고 그의 말에는
아무런 계략도 없었으므로 믿을 수 있었다. 데이빗을 못살게 굴었던 농부는 데
이빗의 탈출을 생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어리석었다.
수용소측에서는 물론 아직까지도 데이빗을 찾고 있으리다. 그 남자는 그것을
막을 만한 영향력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도 데이빗을 찾을 수 없을 것
이다. 이제 덴마크는 바로 지척에 있었고 그곳에는 어머니가 계셨다.
반 시간 가량 걸어온 데이빗은 갑작스런 공포감에 휩싸였다. 그것은 일찍이
느껴보지 못한 두려움이였다. 황혼 무렵이었으므로 마땅한 잠자리를 찾느라고
정신이 없었는데 무언가 잘못된 것 같았다. 그 건물은 언덕 아래 멀리 서 있었
는데 … 그 남자가 건물 밖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데이빗은 킹을 부드러운 휘파람으로 불렀다.
데이빗은 수용소측 사람들과 마주치게 된 것이다. 숲으로 들어간 데이빗은 죽
은 듯이 누워 있었다. 항상 그랬듯이 킹도 데이빗의 옆에 조용히 누워 있었다.
킹이 데이빗의 말대로 움직여 주는 것이 참으로 다행스러웠다. 그런데 무슨 일
이 일어났을까?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데이빗은 수용소측 사람들 사이로 들어
온 것이다. 그들에 대해서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곧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일은 킹이 들판으로 뛰어나갔을 때 일어난 것 같았다. 데이빗은 가끔 킹과
장난을 하며 놀았다. 데이빗이 돌멩이나 막대기를 멀리 던지면 킹이 그것을 입
에 물고 오는 것이다. 데이빗은 그런 놀이가 싱거웠지만 킹이 그 놀이를 아주
좋아했기 때문에 함께 놀아주곤 했었다.
큰길로 나왔을 때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곧 데이빗은 수용소
의 죄수들과 같은 인상을 풍기는 사람들을 만난 것이다. 걱정과 무관심, 슬픔과
낙담에 젖은 인상은 어둡기만 했다. 킹은 데이빗이 손으로 킹의 입을 막자 곧
조용해 졌다. 그러나 여전히 데이빗을 쳐다보고 있었다. 숲덤불은 성글었고 새
로 돋아난 잎사귀도 많지 않았다. 그날 아침의 데이빗에게는 새로 돋아난 초록
의 어린 잎사귀에서 봄의 아름다움을 느낄 만한 여유가 없었다. 오직 들키면 어
쩌나 하는 생각으로 차서 가만히 숲속에 숨어 있을 뿐이었다. 그는 수용소를 탈
출한 소년 데이빗이었기 때문이다.
수용소측 사람들은 언제나 의심스러운 사람들과 체포해야할 사람들의 명단을
만들어 갖고 있었으며 경비원은 언제나 그 명단을 들고 다니며 조사하고 있었
다. 그 명단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을 것이다.
"데이빗, 마르고 갈색 머리임. 수용소를 탈출했음. 특징은 눈빛이 보통 소년들
과 다르며 죄수들과 같은 눈빛임."
그 남자가 아주 큰 소리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데이빗이 숨
어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도망을 칠 수도 없었다. 어두워진
후에 도망을 친다고 하더라도 곧 들키고 말 것이다.
단 한번의 총소리로써 그의 탈출도 끝나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데이빗은 그들에게 들킨다 하더라도 절대로 멈추지 않고 도망칠 생각
이었다. 그러면 그들은 서슴지 않고 총을 쏘겠지. 만일 데이빗이 그들의 말을 순
순히 따르면 그들은 그를 심문한 후 곧장 수용소로 돌려보낼 곳이다. 그곳에서
는 건강하면 건강할수록 오랫동안 지겨운 삶을 이어가다가 죽을 곳이다. 데이빗
은 절대로 그렇게는 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이 자기를 발견한다면 무작정 뛸 것이다. 그러면 총을 쏘겠지. 수용소를
탈출했던 밤처럼 침착하게 걸어가야 할까? 광산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한 숲의
큰 나무를 향해서 조용히 걸어갔던 것처럼. 그러나 이번에는 그렇게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산다는 것은 무척 아름다운 것임을 알았으며 지금은 더욱더 살고 싶
은 의욕으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이다. 데이빗에게는 도망치는 것만이 수용소측
사람들에게 승리하는 길이었다.
데이빗은 잠깐 동안 지난날의 모든 고통과 쓰라린 경험들을 생각해 보았다.
자유롭게 지내는 동안 좋은 것도 많이 배웠다. 아름다움, 음악, 마리아와 같이
좋은 사람들, 핑크색의 꽃이 만발한 나무, 그를 따라 온 킹, 그리고 가야할 곳이
있다는 것 등등.
이 모든 것이 끝나려는 순간이었다. 데이빗은 킹의 긴 털에 얼굴을 묻고 소리
없이 울었다. 아무도 듣지 못하도록 숨을 죽여 가면서 눈물을 흘렸다. 다시 불안
해진 킹은 낑낑거리기 시작했다.
데이빗은 울음을 그친 뒤 "하느님" 하고 속삭였다.
"푸른 풀밭과 잔잔한 물가의 하느님! 저는 아직 당신께 드린 한가지의 약속을
실천하지 못했어요. 그러나 이제는 너무 늦었어요. 당신도 이런 경우가 되면 어
쩔 수 없겠죠. 저는 당신이 매우 힘있는 분이시므로 그들을 잠시 동안 여기서
떠나도록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잘 알아요. 그러나 그들은 당신을 알지 못하며
두려워하지도 않는답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그들의 상관들 뿐이랍니다.
상관들은 그들이 잠깐이라도 자기 자리를 떠나면 쏴 죽이기 때문이지요. 결국
당신이 하실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나 당신을 원망하지는 않아요.
위험을 제때에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제 잘못이니까요. 하지만 도망가야만 해요
… 그들이 총을 쏜다면 아픔을 느끼기 전에 금방 죽을 수 있을 거예요. 저는 피
가 나고 아픈 것은 딱 질색이거든요. 나의 하느님! 제 부탁을 하나만 들어주세
요. 킹을 도망갈 수 있게 도와주세요. 좋은 사람을 만나서 잘 살도록 해 주세요.
꼭 부탁드립니다. 지금까지 킹은 저를 보호해 왔어요. 저를 지켜주신 하느님! 저
는 당신을 나의 하느님으로 모셨던 것이 기뻐요. 이제 저는 도망가야겠어요. 시
간이 흐를수록 죽을 수 있는 용기가 없어질까봐 겁나요. 저는 데이빗입니다. 아
멘."
킹은 데이빗의 관심을 끌려고 목을 쳐들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 모습은
왔던 길로 되돌아가자고 하는 것 같았다. 킹도 어떤 위험을 느낀 모양이었다.
"안돼, 킹. 우리는 되돌아갈 수 없어. 너무 늦었는걸. 조용히 하렴. 킹, 저 사람
들이 나를 쏘면 그 틈에 넌 도망칠 수 있을 거야."
데이빗은 킹에게 속삭였다.
킹은 그의 뺨을 마구 핥더니 또다시 일어나고 싶다는 시늉을 했다. 그때였다.
데이빗이 말릴 새도 없이 킹이 확 튀어 나간 것이다.
크게 짖어대면서 어둠 속에 서 있던 사람들을 향하여 달려 나갔다. 그 순간 데
이빗의 마음속에는 어떤 목소리가 울려왔다. "도망가라, 도망쳐." 킹은 데이빗
이 도망가기를 원했던 것이다. 데이빗은 달렸다. 잠깐 망설였지만 지난날의 어떤
때보다 가장 빠른 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데이빗은 뛰어가면서 사람들의 고
함소리와 요란스런 발소리를 들었다. 그와는 반대 방향이었다. 그들 중의 하나가
비명을 질렀고 동시에 숲을 흔드는 총소리가 났다. 그리고 데이빗은 킹의 이상
한 부르짖음을 들었다.
데이빗은 킹이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계속 뛰었다. 그들이 그를 발견할 수 없을 만큼 멀리까지 뛰었다. 한 시
간 전에 떠났던 큰길의 숲을 휠씬 지난 뒤에야 데이빗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숨이 끊어질 듯이 괴로워하며 울었다.
아무리 울어도 눈물이 그쳐지지 않았으며 아무리 울어도 가슴이 시원하지 않
았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아시면서도 킹을 튀어나가게 하셨고 결국은
총에 맞아 죽은 것이다.
"하느님, 너무 하셨어요. 제가 언제 그렇게 해 달라고 했나요?"
데이빗은 또다시 울었다.
"킹은 나를 따라왔지만 나는 한번도 잘해주지 못했어요. 밥도 제대로 줄 수가
없었고 음식을 훔쳐야 할 때도 있었어요. 킹은 자기 스스로 나를 따라왔고 그
때문에 죽고 말았어요."
그러나 그 순간 데이빗은 자기의 잘못된 생각을 깨달았다. 킹은 자기를 따라
왔기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었다. 킹은 데이빗을 구하기 위하여 스스로 희생되
었던 것이다. 킹은 양을 지키던 개였다. 그래서 자기가 해야 할 바를 잘 알았던
것이다. 데이빗이 안절부절하며 우는 것을 본 킹은 데이빗을 그 위험에서 구해
야겠다고 생각했고 수용소측 사람들을 엉뚱한 방향으로 유도하여 데이빗으로부
터 멀리 떠나가게 했던 것이다. 그들에게 달려든 킹이 마구 짖어대는 소리는 마
치 "빨리 빨리 도망쳐라" 하는 것 같았다. 데이빗은 킹을 구할 수 없었음을 알았
다. 킹의 희생을 헛되게 하지 않고 또한 킹의 고마운 마음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데이빗은 멀리 도망쳤다.
데이빗은 큰 도시에 이르러 주위를 살펴 보았다.
가게의 간판과 포스터에 씌어진 글자들은 모두 낯익었지만 그의 귀를 스치는
말들은 낯선 단어들이었다.
"덴마크, 드디어 덴마크에 왔구나."
어떻게 하여 덴마크에 도착할 수 있었는지 데이빗은 거의 생각할 수가 없었
다. 킹이 자기를 위해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날 아침부터 그는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데이빗은 거기서부터 거의 대부분 차를 얻어 탔다. 운전수들이 그에게 음식을
나누어주었다. 건강이 좋지 않아 보인다고 하면서 걱정스런 표정으로 자주 묻
곤 했다. 데이빗은 차를 타는 것이 더 좋았다. 걷는 동안에는 끊임없이 자기 앞
을 걸어 가고 있는 킹을 보는 듯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환상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데이빗은 무사히 국경을 넘어 덴마크에 도착했다. 커다란 짐차를 타고 가던
중에 국경 가까이에 도착하자 운전수는 데이빗을 안쪽으로 깊숙이 숨겨주었다.
그것은 법을 어기는 일이었지만 운전수는 집에서 기다리는 자기 아이들을 생각
한 것 같았다. 국경 경비원은 그에게 친절했고 운전수는 서둘러 그곳을 떠났다.
데이빗에게 필요한 것은 서류검사를 하도록 시간을 무진장 끄는 것이 아니라 빨
리 가족에게 돌아가서 따뜻한 침대에 누워 쉬어야 한다고 했다.
콜딩이라는 곳에 도착한 운전수는 데이빗을 자기 친구에게 소개하여 코팬하겐
까지 데려다주도록 했다. 데이빗은 그들의 대화 중에서 몇 마디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여권같은 것은 필요없어. 저 아이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않아도 돼. 다만 너무
너무 지쳐 있을 뿐이야."
데이빗은 독일에서 덴마크 운전수들을 여럿 만났다. 그들은 대부분 말수가 적
었으나 친절했다.
데이빗은 차창으로 스치는 경치를 바라보았다. 큰 강이나 높은 산들은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작고 오밀조밀했으며 밝고 즐거워 보였다. 집이나 사람 삼림
등, 이 모든 것이 밝고 조그마하며 아기자기했다. 데이빗은 삼림이 이렇게 밝고
섬세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다. 꼭 마리아의 옷에 비치던 햇살무늬 같
았다. 덴마크는 독특한 인상을 주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맛볼
수 없는 고유한 아름다움이었다. 그러나 데이빗은 심하게 지쳐 있었으므로 모든
것을 무심히 흘려버렸다.
그는 배를 타기도 했다. 운전수가 표를 사주었으므로 숨지 않고 떳떳하게 탈
수 있었다. 코펜하겐이라는 큰 도시에 도착했을 때 데이빗은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운전수는 데이빗이 주소를 알려주면 그곳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데이빗은 물론 그럴 수가 없었다. 운전수에게는 차 뒤쪽에 얹어놓은
짐 속에 주소가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만일 그가 주소를 모른다고 하면 운전수
는 데이빗을 의심할 것이다. 이곳은 자유국가이지만 데이빗은 경계심을 풀지 않
았다. 주소도 모르는 낯선 소년을 보면 당장 수용소측에 넘겨야 한다고 생각할
것 같았다. 더구나 상대방이 덴마크 사람이 아닐 때는 더욱 위험했다. 킹이 죽
은 후 데이빗의 머리 속에는 오직 한 생각 뿐이었다. 덴마크에 계시는 어머니를
만나야만 한다는 것이다. 킹은 그를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던졌고 데이빗은 그
러한 킹의 희생을 무의미하게 할 수는 없었다.
운전수는 잠깐 차를 세우더니 전화를 하고 오겠다고 했다. 길가에 서 있는 공
중전화부라는 책이 있었는데 가입자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차례대로 기록해 놓은
것이었다. 데이빗은 운전수가 없을 때 살짝 빠져 나가서 그 책을 찾아보기로 했
다.
운전수는 커다란 광장에 이르러 차를 세웠다. 데이빗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
을 하더니 차에서 내렸다. 핫도그라고 하는 것을 사주겠다는 것 같았다. 운전수
가 핫도그를 사러 간 틈을 이용하여 데이빗은 차에서 내렸다. 곧 사람들 속으로
숨어들었다.
데이빗에게는 너무나도 친절한 운전수였으므로 이렇게 사라지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의 데이빗으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데이빗은 자기가
너무 지치고 기운이 없어서 더 이상 버티기가 어려우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쓰
러지는 곳까지 계속 달렸다. 공중전화 박스는 쉽게 발견되었으며 곧 어머니의
주소를 찾기 시작했다. 효르츠 펜겔이라는 사람이 여섯명이나 있었지만 다행히
이름 앞에 E가 붙은 사람은 한 사람 뿐이었다. 주소는 스트란트베젠 758번지였
다.
데이빗은 그곳으로 가는 길을 물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영어로 말하면 알아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았다. 데이빗은 책을 펼친 채로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적당한 사람이 없을까? 하고 망설이는데 어떤 부인이 다가와서는
데이빗을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데이빗이 영어로 설명하자 그 부인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 주소까지는 꽤 먼 거리라고 하면서 데이빗에게 말했다.
"하지만 나도 지금 그쪽으로 가는 중이니 나와 함께 타고 가자꾸나."
그 부인이 데이빗에게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었다. 데이빗은 간단하게 자기는
프랑스 사람이라고 했다. 부인은 데이빗이 몹시 지쳐 있다는 것을 눈치챈 후에
는 거의 말을 걸지 않았다. 데이빗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자동차는 바닷가를 지
나가고 있었다. 이탈리아의 바위 동굴에서 보았던 바다와 같이 이곳 바다도 푸
른색에 아주 맑았다. 그곳에서 살았던 일이 머나먼 옛일처럼 느껴졌다.
758번지 앞에 선 데이빗은 한참 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공기는 신선했고 마
음은 기쁨으로 울렁거렸다. 흰색과 노란색 그리고 연보랏빛의 화려한 꽃들이 핀
나무는 여기저기서 눈길을 끌었으며 햇빛은 반짝이고 나뭇잎들은 밝은 녹색이었
고 바다는 짙푸렀다. 덴마크는 역시 아름다운 나라였다. 이 세상 어느 곳이나 수
용소측 사람들만 없다면 세상은 정말 아름다울 것만 같았다.
데이빗은 현관으로부터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갑자기 다리가 후
들거리면서 그대로 주저앉고 싶었다. 영영 저 현관으로 들어갈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때때로 데이빗은 이런 생각을 해왔다. 그곳에 살고 있는 부인이
자기에게 무엇은 하라고 하든지, 그리고 어디로 가라고 하든지 모두 할 수 있으
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데이빗은 아무것도 해낼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의 가장 행복했던 꿈이 현실로 나타난다면 데이빗은 살아갈 수
있지만 그 꿈이 거짓이라면 모든 것은 끝나게 될 것이다.
프랑스 말은 데이빗에게 가장 자신있는 외국어였다. 그는 보따리를 집어들고
현관으로 다가가서 초인종을 눌렀다. 문을 열어준 사람은 낯익은 사람으로 바로
그 사진에서 본 그 부인이었다. 부인은 깊숙한 눈매에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데이빗은 프랑스 말로 이야기했다.
"부인, 저는 데이빗이예요. 저는 …"
데이빗은 더 이상 말할 수가 없었다. 놀라움으로 가득찬 그 부인은 두 손으로
데이빗의 얼굴을 감싸며 분명하게 외쳤다.
"데이빗! … 나의 아들 데이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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