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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리엄 포츠 윙클] 시간의 방랑자

by Casey,Riley 2023.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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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방랑자

월리엄 코츠윙클 지음


                                                        - 차 례 -



제 1장  운명의 파티 
제 2장  화려한 출연 제의
제 3장  어릿광대의 춤
제 4장  고독한 방랑자 
제 5장  거울 속의 연인
제 6장  이중의 존재
제 7장  연극 속의 연극
제 8장  죽음의 골짜기
제 9장  환상 속의 현실
제10장  의혹의 그림자   
제11장  꿈속의 수수께끼  
제12장  역사 속의 늪  
제13장  안개가 된 사나이
제14장  개집에 사는 인간들
제15장 게쉬타포를 말살하라
제16장  공간을 초월한 사랑
제17장  영혼의 그림자
제18장  유혹의 덫 
제19장  비밀 클럽
제20장  4차원의 세계
제21장  어느 먼 이름에게
제22장  떠오르는 강 
제23장  어둠의 장막
옮긴이의 말




제1장 운명의 파티



"나는 우연히 그곳에 있게 되었는데 말이야."
핫 터브(역자주 : 여러 명이 한꺼번에 들어갈 수 있는 온수탕. 미국 서해안 등지에서 레크레이션 용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에서 가느다란 김이 피어 오르는 속에서 영화 프러듀서 두 사람이 땀을 흥건히 흘리면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페블 비치에서 말야. 클리프가 말이지, 해변의 탈의장에서 베이 에리어에서 온 그 여자에게 그것을 빨게 하고 있는 도중에..."
"내가 듣기로는 그렇지가 않던데 ? "
"그렇다니까 그래. 마침 그곳에 우리들이 샴페인 병을 들고 뛰어 들어갔단 말씀이야. '축하하네 ! ' 하면서..."
핫 터브는 무어 풍의 광대한 저택으로 이어지는 세코이야 삼나무 판자를 빈틈 없이 깐 파티오(안뜰)에 설치되어 있었다. 저택은 꽃과 야자수와 한 쌍의 오크의 노목에 둘러싸여 있었고, 개울이 완만한 계곡을 누비면서 한 줄기 흐르고 있었다.
다른 손님들은 골짜기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개울은 잔잔한 물 위에 사람들의 그림자를 비추며 조용히 흘러 내려가고 있다. 먼 쪽의 강기슭에 몸집이 큰 도베르만 개 한 마리가 높다란 쇠그물 울타리 옆을 유유히 오가고 있었다. 이 태평스러운 무드가 깨어지지 않도록 파수를 보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든 간에 울타리를 넘어 오는 것은 도베르만의 밥이었다.
파티의 주인인 데이빗 카스피안이 사보텐 밭의 돌을 깐 오솔길을 따라 이쪽으로 걸어왔다. 카스피안은 그의 경비견과 마찬가지로 우람한 체구의 소유자로서, 지금은 또한 개 특유의 사람을 의심하는 듯한 분위기까지 감돌게 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에이전트가 옆에서 따라오며 사업 얘기를 하고 있는 도중이었기 때문이다.
펭귄을 닮은 체형의 에이전트는 돈을 많이 들인 조깅복에 몸을 감싸고 있었지만, 그것을 입고 다섯 발자국도 뛴 적이 없는 사나이였다.
"내가 보낸 대본은 읽어 보았나 ? "
"그것이라면 똥통에 던져 버렸네, 마일론. " 하고 카스피안은 채소밭 쪽을 손가락질했다. "품질이 나쁜 대본은 좋은 비교가 되는데, 그렇게 되기까지는 2년은 걸리지."
"역할이 마음에 안 들었나 ? "
"신파조드구만."
"앞으로는 신파조가 좀 주류를 이룰 꺼야, 카스피안." 마일론 피쉬는 의뢰인에게 달라 붙어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카스피안은 피쉬의 머리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 대본은 저질이야, 마일론."
"대본을 고치도록 하지. 학대를 받은 어린애가 카운센링을 받은 다음에 자네가 만난다는 식으로 말일세."
카스피안은 걸음을 재촉했다. 앞서 촬영한 영화는 형편 없는 작품으로, 그는 아역들에게 압도당한 끝에, 그의 연기 생활에서 가장 바보스러운 연기를 강요당하는 곤경에 빠졌었는데, 그래도 결국은 그 영화에 의해서 그는 아카데미 후보로 지명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마일론 피쉬는 그런 영화의 두 번째 히트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것이었다.
"어린이들은 전멸의 위기에 빠져 있는 종족일세, 카스피안. 자네라면 그들을 위한 일을 얼마든지 해 줄 수가 있네."
"전멸의 위기에 빠져 있는 종족은 에이전트가 아닌가, 마일론 ? "
"우리들을 아주 근절시킬 수는 없다구. 맹렬한 스피드로 자꾸만 증식하니까 말일세."
카스피안과 마일론 피쉬는 저택을 향해서 걸어갔다.
빨간 기와가 반짝반짝 빛나고, 황색의 아도비 벽돌 벽이 눈부신 햇살을 반사하고 있었다. 미닫이 문으로 둘러싸인 한 단 낮게 되어 있는 거실에서는, 다른 손님들이 카스피안의 생활의 일단을 맛보고 있었다. 카스피안은 피쉬를 위해서 문을 열어 주고, 두 사람은 혼란스런 대화 속으로 발을 들여 놓았다.
"그 녀석들 차례차례로 사업에 손을 댄 것까지는 좋았지만 말일세, 지금까지 무엇이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 위궤양애 걸린 것 밖에는 없잖은가 ? "
"그것도 하나의 인생이 아니겠어 ? "
"그럴 지도 모르지. 그런데 이번에는 디즈니에 손을 대겠다는 거야. 구피 레인에 사무실을 차려놓고서 말일세."
육중한 돌로 만든 난로가 한쪽 벽에 우아한 정취를 더하고, 그 반대쪽의 개폐식 벽은 열려 있어서, 그곳의 움푹 들어간 곳에 바텐더가 한 사람 번쩍번쩍하는 검은 머리칼과 흰 웃저고리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마실 것을 믹스하고 있었다.
웨이터들은 음료수와 먹을 것을 바쳐들고 방안을 돌아다니며, 손님들이 활력을 보충하여 얘기를 계속할 수 있도록 연료를 끊임없이 보급하고 있었다. 유명무명의 각양각색 스타, 해평아리 스타, 측근자, 스튜디오에서 곧장 달려온 갖가지 유니폼 차림의 면면들.
"유니버살에 멋진 일감이... 3년씩이나 지나면 심장이 녹초가 되어서 삼중의 바이패스 수술을 받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는 게 아닐까 ? "
"...우리들은 매우 훌륭한 평을 받았습니다"
"그는 훌륭한 평 따위는 바라고 있지 않네. 그 녀석이 원하고 있는 것은 숫자일세."
"게다가 그곳의 변소에는 장미꽃이 띄워져 있어요. 그사람은 더 할 수 없이 비현실적이라니까요."
방의 네 구석에는 매직 아이가 장치되어 있어서 채칵채칵 초점을 수정하면서 상황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데이빗, 이것은 엄청나게 유리한 얘기라구.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니 어디가 잘못된 거야. 프러듀서가 주는 시시한 돈이 아니라 총매상의 몇퍼센트가 주머니로 굴러 들어온 다니까 그러네."
"분명히 이 근처에 말굽 버섯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고 부페 테이블을 가리키며 데이빗 카스피안이 딴전을 피웠다.
"알았어. 더 이상 무리하게 강요하지는 않겠네. 희망에 찬, 가슴 훈훈해지는 인정담은 자네의 흥미를 끌지 못하는 모양이니까 말야.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더 이상 권하지는 않겠네. 다른 누군가가 미국을 웃기고, 건전한 눈물을 흘리게 하면 되겠지, 뭐. 다른 누군가가 오스카상을 휩쓸어 가면 되겠지."
마일론 피쉬는 땅콩 접시를 들고 다른 곳으로 가 버리고, 카스피안은 거실을 한 바퀴 돌고 천장이 높은 현관 홀로 나갔다. 그곳도 손님들의 잡담으로 붐비고 있었다.
"...폴랜드의 굉장히 고풍스러운 거리에서 촬영을 하고 있었지. 그랬더니 말이야, 트럭 운전수가 롤스로이스를 후진시키다가 마리아 테레사의 성상을 받아 버렸단 말씀이야."
"...그분의 손을 보셨어요? 글쎄 주름 사이에 구아카모레의 디프가 잔뜩 끼여 있더라구요."
카스피안은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조금 전까지 도로에서 자동차의 정리를 하고 있던 주차 계원들은, 지금은 현관 앞에 할일 없이 우두커니 서서 에이전트나 프러듀서나 머리가 약간 돌아 버린 부인들에게 스카웃당할 지도 모른다고, 궁짜가 낀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저택의 옆구리를 돌아서 약초원으로 걸어가자, 카스피안의 고양이가 향초 속에 웅크리고 앉아 가늘게 뜬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매가 한 마리, 원을 그리면서 날고 있었다. 상승 기류를 타고 활공하는 매의 폭넓은 날개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카스피안 자신도 태양에 눈을 가늘게 뜨고 상공을 응시했다. 매의 습성에는 정통하고 있었다. 이미 매의 이동 루트에 있는, 어떤 산꼭대기를 발견해 두었기 때문에 매년 어느 특정한 하루, 매가 한꺼번에 수백 마리씩 산바람을 타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협곡이 있는 낮은 산악 지대의 상공을 천천히 선회하는 매를 카스피안은 눈으로 쫓다가, 그대로 그 눈을 낯익은 깊은 산들의 봉우리로 돌렸다. 그들 산을 헤치고 들어가 헤매며 걷지 않는 날은 하루도 없었다.
그곳의 땅은 벌거벗고 황량해 있어서 강하게 내리쬐는 태양이 모든 바위에, 식물에, 뱀에, 새에, 동물에 머물러 있다. 카스피안은 온갖 체험을 한 아마추어 박물학자지만, 이 산악 지대의 생물에 관해서 얻은 지식은 모두 우연의 소산이었다. 왜냐 하면, 카스피안이 산에 들어가는 것은 동일성을 추구하거나, 또는 유별하는 것이 목적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카스피안은 그 땅이 그 자체의 내부에서 자아내는, 동일성을 추구하는 것이 불가능한, 항상 변전하는 형언하기 어려운 어떤 종류의 감각과 만나기 위해서 그곳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는 산 위에서 지내는 한 때를 만족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현재, 그가 열고 있는 가든 파티와 같은 목적이 뚜렷하지 않은 활동에 그 시간을 부득이하게 할애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서게 되면 영낙 없이 그 시간이 더할 수 없이 아까워진다.
산들은 이 헐리웃식 파티를 진행시키고 있는 카스피안을 뚫어져라 하고 내려다 보고 있다. 그러면 카스피안은 어쩐지 신뢰를 배반하고 있는 것 같은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 그렇기는 하지만, 산들은 과거 몇세대 동안이나 어리석은 자들의 영위를 그 눈으로 보아왔던 것이다.
매는 산의 상공에서 선회를 중단하고 비상해서 되돌아 왔다. 그의 소유지인 수림 위를 이쪽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려니까, 부리가 열리고 소리를 발하는 것이 보였다 ---- 그러나 불안을 불러 일으키는 것 같은 귀에 거슬리는 그 소리는 파티의 웅성거림에 싹 지워졌다.
갑자기 매는 급강하를 시작했다. 껑충한 다리가 열리고 날카로운 발톱이 쑥 뻗는 것이 카스피안의 눈에 보였다. 아무래도 다리도 발톱도 정면으로 카스피안을 노리고 다가오는 것 같았다.
카스피안은 몸을 벌렁 뒤로 젖혀서 피했다. 그 한순간 막연한 꿈이 휙 스쳐 지나갔으나 붙잡을 틈도 없이 그것은 지나가 버렸다. 발톱은 사라지고, 매는 상승 기류를 잡아 타고 선회하면서 산 너머로 날아 갔다. 그것을 눈으로 쫓는 카스피안의 가슴에 언젠가 꿈에서 마주친 한 마리의 맹금의 감각이 다시 한번 되살아 났다.
정원을 빠져 나가서 풀장 싸이드로 나갔다. 그곳에 탐욕스런 생물체가 꾸는 꿈의 상징과 같은 줄리어스 데브루스카의 모습이 있었다. 그 프러듀서는 데키 췌어에 걸터 앉아서 영화 제작의 뒷이야기에 관한 온갖 지식을 다 털어놓고 있었다.
"죄악감이라는 것은 이 도시에서는 굉장한 효과를 가져올 때가 있지. 파라마운트는 싸이 브리트를 얼마 전에 쫓아냈어. 그런데 그것에 죄책감을 느껴서 이번에 싸이가 그러한 비상 사태에 대비해서 남몰래 숨겨 두었던 영화 세 편을 제작하기로 한 것일세."
데브루스카는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을 둘러 보았다.
"자네들도 하느님의 손길이 구름 사이에서 손가락질하면서, '다음은 네 차례다' 하고 말할 때를 대비해서 저작권 한두 개는 숨겨두는 편이 좋을께야."
데브루스카는 카스피안 쪽으로 인사 대신 손을 흔들어 보였다. 카스피안은 그대로 정원의 부페 테이블을 향해 걸어갔다. 시나리오 작가가 일인용 접시에 음식을 담고 있었다. 작가는 눈을 들어 카스피안의 눈치를 살폈다.
"잠시 조용히 할 얘기가 있는데 괜찮겠나 ? "
카스피안은 인기척이 없는 테이블 주위를 둘러 보았다.
"여기 있는 것은 우리들 뿐일세, 에드."
"사실은 자네에게 4천 달러 받을 것이 있다네."
에드 클레스웰은 깡마른 체구의 유령 같은 사나이로, 한낮의 태양을 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될 정도로 캘리포니아와는 어울리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틀림 없이 착오였다고 생각하지만 말일세. 그러나 4천 달러가 부족한 수표를 보내왔다고 하는 것은 말이네, 요컨대 자네가 나에게 그것 밖에는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얘기가 아닌가 ? "
마일론 피쉬가 테이블 가장자리에 홀연히 나타났다.
"지금 내 귀에 들려 오는 것은 사업에 관한 얘기인가 ? "
"아니, 자네 마일론 아닌가 ? " 하고 시나리오 작가인 클레스웰이 말했다.
"그 조깅복을 입고 있으니까 자네는 훨씬 더 스마트하게 보이는 구만."
땅땅하고 두리뭉실한 에이전트는 크래커의 가장자리를 한 입 베어 먹었다.
"클레스웰 씨, 혹시 원숭이의 임파선을 먹어 본 적이 있으신가요 ? "
"어디에 있는데 ? " 하고 클레스웰은 포크를 들고 부페 테이블을 둘러 보았다.
"우리들은 장부의 미스를 발견한 길일세." 하고 카스피안이 말했다.
"내가 에드 씨한테 4천 달러 빚이 있다는군."
피쉬는 크래커를 또 한 개 집어 들었다.
"시나리오 작가에게 돈을 지불할 필요는 없네. 설마 지불한 것은 아닐테지 ? "
그리고는 클레스웰의 접시를 보고,
"당신은 어떻게 항상 그렇게 말라 있을 수가 있지요 ? "
"에이전트 때문에 두통거리가 사라지지를 않기 때문이지."
"내가 갈비씨 싸롱이나 열어야겠군 ! " 하고 피쉬가 말했다.
클레스웰은 상종을 못하겠다는 얼굴을 하고 접시를 들고 비실비실 그곳을 떠나갔다. 피쉬는 카스피안 쪽으로 돌아섰다.
"저녀석에게 쓰게 하다니, 자네, 도대체 어떤 종류의 신경을 가지고 있는 거야 ? 그 시나리오에 아역이 나오기나 하나 ? "
"아니."
"그렇다면 한 푼짜리도 안 되는 거야. 관객은 가족들을 대상으로 하는 영화에 등장하는 당신을 보고 싶어 하니까 말일세."
비아냥거리는 말투가 피쉬의 목소리에서 사라졌다.
"이 도시에서는 실패하고 있을 여유는 없다네, 카스피안."
피쉬는 휙하니 등을 돌리자, 정원을 가로질러서 되돌아 갔다.
카스피안은 테이블 있는 곳에 남아서 마일론 피쉬가 참으로 교묘하게 불러 일으키고 간 공포의 물결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 교활하기 짝이 없는 피쉬.
어떠한 일격이 의뢰인을 불안의 구렁텅이에 몰아 넣는가를 잘 알고 있는 피쉬였다. 카스피안은 자기를 붙잡고 놓아 주지 않는 문제의 이미지, 즉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악몽의 이미지, 그리고 시선을 돌리고 싶어지는 진실에 뿌리를 둔 이미지로부터 마음을 돌리려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온갖 것이 다 들어 있는 샌드위치를 억지로 씹어댔다.
그 이미지란 수천 명이나 되는 야심에 불타는 젊은 배우들이 매일 몇대의 버스에 빽빽히 올라 타고 로스엔젤리스에 도착하는 광경이었다. 그들은 버스의 승강구를 내려온다 ---- 엄청나게 잘 생기고, 증오감을 느낄 정도로 적극적이고, 전원이 한 사람 빠짐 없이 카스피안 자신이 연기하는 역할을 완벽하게 해낼 수가 있는 젊은이들이다.
그런데 그는 ---- 그의 머리에는 흰 머리칼이 벌써 희끗희끗 섞여 있었다. 이제는 먹고 싶은 대로 먹을 수도 없다. 먹은 것만큼 그대로 배 부분에 쌓여가기 때문이다.
카스피안은 기괴한 샌드위치를 얹은 접시를 내려 놓자, 지나가는 웨이터의 쟁반에서 꼬냑 온 더 록스의 글라스를 낚아챘다. 낚아채기는 했지만 옛날처럼 마실 수 없는 카스피안이었다.
그래도 문제의 이미지는 뇌리를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 변덕이 심한 영화 회사와 매스컴이 군침을 흘리면서 기다리는 신인들이 버스에 몇 대씩이나 타고 있었다. 미경험이라는 것은 강점이다. 왜냐 하면, 어떤 것이라도 그곳에 새겨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 새로운 표정을 가진 뉴 페이스. 유행하는 태도, 말투, 호흡을 극히 자연스럽게 몸에 익히고 있는 젊은 신인배우들. 최신의 신체 단련 시설의 은혜를 입어 강철 같은 육체의 소유자가 된 젊은이들.
침착해라, 카스피안. 너에게는 신체 단련 기계는 필요 없다. 너는 이미 10편의 메이저 영화를 촬영하지 않았는가 ? 가슴을 펴고 이 오후를 보내면 되는 거야.
'하지만 자네는 45세나 되었네.' 하고 마일론 피쉬의 목소리가 후최면 암시 속에서 말했다.
그 꼬마 에이전트가 되풀히해서 카스피안의 머리 속에 계속 프로그램하고 있는 후최면 암시. 마일론은 자기 의뢰인을 수세에 두기 위해서는 어떤 기회도 놓치지 않는다. 에이전트라는 족속들은 모든 인간을 수세에 세워 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두말할 것도 없이 에이전트는 옳다. 언제나 옳다.
카스피안은 다른 샌드위치를 집어들고 씹을 여유도 없이 꿀꺽 삼켰다.
왜냐 하면, 45세 정도가 되면 카메라에 섹스 어필이 과연 나타나는 지가 문제가 되어오기 때문이다. 그의 성적 매력은 이미 솔직한 것은 아니었다. 최근 영화 관객층의 중심, 즉 그보다 10세, 20세, 30세 젊은 고객층의 눈에 스크린 위의 자기가 어떻게 비치고 있는지 알 수가 없게 되어 버린 카스피안이다.
그를 연기가 서툰 배우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 괴팍한 인간이라고 생각할까 ? 센치멘탈하다고 ? 시대에 뒤떨어진 배우 ? 웃기는 녀석이라고 ?
세트에 있는 젊은 배우들의 싱싱한 활력은 그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의기소침하게 만든다. 그도 그럴 것이 격투 장면을 옛날처럼 연기할 수 없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전 같으면 좀 더 우수한 사정을 스턴트맨과도 펀치를 교환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보아 달라고 해야 할 처지다. 그것은 카메라를 통해서 탄로가 나고 있을까 ?
실패작이 3편 계속되면 배우의 생명은 끝난다. 그것이 관례다. 타작 3편으로 유배를 가서, 시골 구석에서 영화를 만드는 신세가 된다 -----
- 가령 괌 같은 데서.그곳이라면 아직 얼마간의 출연료를 받을 수가 있다. 그 다음에 제산제 광고로 10년 계약을 맺는다. 다음에는 집필가를 고용해서 거짓말 투성이의 자서전을 쓰게 한다.
그리고서는 죽는다.
카스피안은 부페 테이블에 등을 돌리고서 숨을 들이 쉬어 배를 들어가게 한 다음, 어떤 영화 회사의 광고선전 담당 부사장이 곤드레만드레가 되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 중역은 마치 카스피안과 얘기하고 있는 도중이라는 느낌으로 떠들기 시작했다.
"감독들이란 광고는 쳐다보지도 않지. 그들은 광고의 제일 밑줄만 보는 거야. 크레디트 타이틀에 나오는 자기 이름을 확인하기 위해서지. 철자법이 틀리지 않았는가, 커다란 글자로 나와 있는가 하고 말야. 배우도 마찬가지야. 나의 기괴하기 짝이 없는 체험담을 읊어 볼까? 이 길에 들어서서 그런 일은 처음이라구.
그는 술잔을 입에 가져가 단숨에 그것을 마시고 나서 목소리를 죽였다.
"가이 로크우드가 말이야, 시더스 오브 사이나이 병원의 응급 치료실에서 죽어가고 있을 때의 얘기인데, 사실은 그의 계약서에 우리 회사는 그의 어떠한 초상도 승락이 없이는 광고에 사용하지 않겠다는 조항이 들어 있었다네. 그래서 우리는 선전 광고를 모조리 들고 병원으로 달려 가지 않을 수가 없었지. 가족은 모여서 최후의 막이 내리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네. 이쪽은 .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그가 3초 동안 눈을 뜬 틈에 문제의 광고를 들고 날쌔게 병실로 뛰어 들어갔지. 그리고 그에게 보여 주었다구. 그래서 그는 임종의 숨을 거두면서 그것을 승인했다는 그런 얘기일세."
부사장은 카스피안 앞에서 몽롱한 눈으로 비틀비틀 흔들거렸다.카스피안은 불쌍한 가이를 상기했다. 마지막 숨을 거두는 바로 그때까지, 임종의 자리에서까지 자기가 어떻게 찍혀 있는가에 신경을 쓰다니 ! 오로지 인기를 잃지 않기 위해서. 젖비린내나는 젊은 녀석들에게 자기 자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다음 역할을 확보하기 위해서. 배우가 승천하는 천국인가 어딘가에서.
돌아다 보니까 잔디밭 너머에 아내의 모습이 보였다. 파티의 진행 상황을 둘러보고 있는 참이었다. 오늘 오후에는 그녀가 일하고 있는 광고업계에서도 손님이 많이 와 있었다.  카스피안의 시선을 느끼자 이쪽으로 다가왔다.
"미쳐 버릴 수  있다면 벌써 미쳐 버렸을 거예요."
"무슨 일 있었어 ? "
"내가 말이예요, 비만형 여성용의 팬티를 제조하고 있는 사람에 관해서 농담을 했다구요. 그랬더니 저쪽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진짜로 비만형 여성용 팬티를 제조하고 있는 사람이 있더라니까요, 글쎄."
캐롤 카스피안은 키가 5피트가 채 안 되고, 검은 머리칼의 군데군데에 금발이 섞인 곱슬머리를 하고 있었다. 크림색의 슈미즈 드레스는 자락이 프레어로 되어 있어서 날씬한 다리가 들여다 보였다. 캐롤은 벤치에 걸터 앉아 무릎을 끌어 안았다.
"파티는 비용만 많이 들고 실속이 없어서 싫어요."
카스피안은 부페 테이블을 가리켰다.
"저 디프 먹어 보았어 ? "
"내가 녹초가 된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라구요. 오르가즘 몇 회분인지 몰라요."
머리칼에 손을 집어 넣고 안쪽에서 소트 컬을 일으켜 세웠다.
"저곳에 있는 남성, [헐리웃 리포터]지의 기자 아니예요 ? 저기 은퇴한 프랑스의 색정광같이 생긴 사람 말예요."
"가서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고 오라구."
"그럴 바에는 마음에도 없는 아부의 문구를 잔뜩 적은 메모라도 갖고 오는 편이 더 나을 거예요."
캐롤은 의자에 앉은 채 빙그르 몸을 회전시켜서 안뜰에 원을 그리고 있는 손님들에게 눈을 보냈다.
"눈치채지 못하도록 살며시 돌아다 봐요. 저곳에 광고대리점의 젊은 여자가 한 사람 와 있어요. 굉장히 머리가 날카롭고 매력적이예요. 아트 디렉터가 데리고 왔는데요, 그녀가 내 자리를 원하고 있어요."
"현재의 직업에서는 유능한 여자인가 ? "
"어깨 너머로 보지 말라니까요. 부탁이예요. 저런 여자는 우리들의 안중에도 없다는 것을 믿게 하고 싶으니까요. 또 사실 그대로가 아닌가요 ? "
"그런 것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어. 당신 이외에 현재의 당신 일을 더 잘할 수 있는 여자는 없으니까 말이야."
"신경 같은 것을 쓰는 게 아니에요. 다만 모두에게 그녀는 브리프를 입고 있다고 광고하고 돌아다닐 꺼예요."
캐롤이 의자에 웅크리고 앉은 채 움직이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카스피안은 다시 정원의 오솔길을 걷기 시작했다. 지금은 아내가 품은 불안감이 가슴에 있었다. 그것은 그 자신의 불안감과 보기좋게 겹쳐진 데다가 한층 더 조장시키기까지 했다.
두 사람은 완벽하게 닮은 부부였다 ------ 톱의 자리에 있으면서 소심하고 겁이 많은, 신경과민성 이기주의자 부부였다. 어째서 나는 이런 식으로 혼잣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
이 지긋지긋한 파티 탓이다. 마일론 자신이 줄리어스 데브루스카와 얘기를 할 목적만으로 나에게 열게 한 파티. 더구나 양로원의 집회처럼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할 수 없이 젊은 배우들을 몇사람인가 초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지금은 풀장이나 안뜰은 말할 것도 없고, 온 저택 안에 젊은이가 우글우글거려서 그 존재가 나를 뒤틀리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그것도 마일론의 계획 중 하나였다. 내가 출연하고 싶어하지 않는 영화에 계약 싸인을 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카스피란은 문 바로 앞에 무성하게 늘어져 있는 포도나무의 큰 가지를 고개를 숙이고 빠져 나갔다. 잎사귀들로 덮여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문을 열고 집안으로, 집무신의 어둠컴컴한 속으로 들어 갔다.
전등의 스위치를 켜자 육중한 오크 재목의 책상 위를 무지개색의 빛이 비추기 시작했다. 책상을 열고 장부를 꺼냈다. 역시 클레스웰에 대한 지불 금액이 부족되어 있었다. 왜 ? 그러니까 클레스웰이 의심하고 있던 대로 지불하고 싶지 않다는 감정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스튜디오가 거들떠도 보지 않을 내용이 풍부한 각본을 클레스웰이 썼기 때문에 ---- 요컨대 이 도시에서는 우수한 각본은 별볼일 없는 각본으로, 마일론이 말하는 것처럼 한 푼도 돈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때 내가 돈을 쏟아 넣었어도 결국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10년 일찍 재산제 광고에 출연하는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장부의 미스를 정정하는 카스피안의 그림자가 집무실의 벽에, 그리고 그곳에 붙여 놓은 유럽의 카바레의 포스터에 비쳤다. 1930년대의 포스터 ---- 실크 햇을 쓰고 대리석 기둥에 기대어 서 있는 여성의 모습이 적색과 백색으로 그려져 있고, 그 옆에 남성의 그림자가 음탕한 댄스를 암시하며 다가오는 그림.
카스피안은 장부를 집어 넣고 포스터를 향해 돌아 앉았다. 젊었을 때 그는 로마로 가서 마카로니 웨스턴에 출연하고, 그뒤 독일로 흘러 가서 최종적으로는 브레히트의 옛날 작품을 상연중인 연예집단에 참가했던 것이다. 문제의 포스터는 언제나 당시의 일을, 즉 베를린의 초라한 클럽을, 우울한 음악을, 무희들을 연상시켜 주었다.
바깥쪽의 오솔길을 줄리어스 데브루스카와 마일론 피쉬가 지나가는 것이 귀에 들어왔다.
"...만찬회 장면을 찍으려고 세트로 돌아가 보았더니 말일세, 트럭의 운전수들이 스테이크를 모조리 먹어 치운 다음이었네."
"다음에는 플라스틱제 모형을 쓰게나."
두 사람은 계속 걸어가고, 대화는 차츰 멀어져 갔다.
"...데이빗은 이미지 체인지를 계획하고 있는데 관객에게 먹혀 들어갈까 ? "
"나는 일대 우주 공상 과학영화(SF)를 기획 중인데 말일세." 하고 데브루스카가 말했다.
"지금부터 협상을 해야 하는데 골치 꽤나 아프겠어."
자갈을 밟는 발소리가 오솔길을 멀어져 갔다. 카스피안은 열고 최고급 꼬낙을 끄집어냈다. 다음, 쿡 찌르는 방향을 빨아들였다. 훌쩍거리며 들여 마시자 기분 좋은 온기가 몸 안으로 퍼져 나가고, 뒤이어 황금색의 아지랑이가 끼였다.
그 잔을 비우고 다시 따르고나서 한동안 조용하게 앉아서 집무실의 서늘한 어두운 분위기를 즐겼다. 책상 서랍을 열고 수표책을 꺼내 클레스웰에게 수표를 썼다. 그것을 탁상용 흡인지에 갖다댔을 때, 귀 뒤에서 찰싹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나고 뒤이어 기어들어갈 것 같은 목소리가 속삭였다.

"이건 뚜껑에 못을 지나치게 세게 박은 거야. 질식할 것 같애."
서둘러 창가로 갔다. 그러나 정원의 오솔길에는 사람의 모습이 없었다. 방안으로 돌아서는 것과 동시에, 옆방과 이어진 문이 열리고 에드 클레스웰이 당구실에서 나타났다.
클레스웰은 문턱을 들어선 곳에서 발을 멈췄다.
"허허, 안색이 안좋은데. 마치 방금 자기 무덤 위를 걸어온 것 같은 얼굴이군."
그리고는 책상 위의 수표를 힐끗 내려다 보고는,
"그 4천 달러가 그렇게 아깝다면, 안 받아도 괜찮네."




제2장  화려한 출연 제의



"나는 말예요, 그 정도로 그를 미워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구요."`
파티는 끝나고, 캐롤은 침대에 카스피안과 함께 누워서, 하루의 끝에 이따금 불현듯 그녀에게 달라 붙는 전남편에 대해서 이것저것 얘기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타고난 제비족이고 색골이라서, 여자의 약점을 이용하려고 노리고 있었던 거예요."
캐롤은 핑크색 사텐의 긴 베개를 등에 갖다 댔다. 카스피안은 밤술인 브랜디를 홀짝거렸다. 그것은 그린 멜론을 섞은 일종의 칵테일로, 파티의 파장에 근처에 놓여 있던 것을 들고 온 것이었다.
"이것 뭐라는 칵테일일까 ? "
"나는 아직 나이가 어려서 하고 싶지 않은 일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거라구요."
캐롤은 사텐의 등받이를 따라 쑥 밑으로 몸을 미끌어뜨리고, 위에 덮는 시트를 끌어 올렸다.
"그사람은 마약으로 기분 좋게 해 주겠다고 속여서, 나는 멋도모르고 미쳐서 그이에게..."
그녀는 돌아 누워 배리엄을 마시고, 어깨에 시트를 둘렀다. 이윽고 호흡이 느려지고 이따금 흠칫흠칫 신체를 경련시키면서 잠에 떨어졌다.
카스피안은 스텐드의 불을 끄고, 침대의 아래쪽을 향해 몸을 집어 넣고 캐롤 옆에 누웠다. 파티에서의 면면들이 차례차례로 눈에 떠오르고, 그림물감으로 얼굴을 그린 풍선처럼 둥실둥실 떠다니다가 사라졌다.
무엇인가가 마음속에 맺혀 있다. 젊은 배우들일까 ? 아니다. 그 노려보는 듯한 모습으로 피어 있었다.
카스피안은 조용히 집을 나가 소리 안 나게 문을 닫았다.
어둠이 검은 망또의 그늘에, 밤만이 가르칠 수가 있는 갖가지 것을 감추고 그를 맞이했다. 밤은 한 사람의 등장인물. 때로는 작품 속의 애인이며, 또 대부분의 경우 악역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밤을 향해 구애한다. 카스피안은 몇년에 걸쳐서 구애를 계속해 왔다. 그는 달빛과, 달빛이 이 세계에 던져주는 잔잔한 영광을 더할 수 없이 사랑했다. 카스피안은 언덕을 방황하고, 스스로의 그림자로 분장한다. 무언의 탐구자가 된다 ----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감정을 억누르고 조심스럽게 연기하는 법을 배우고, 하나하나의 장면에 마치 숨은 장소에서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등장하는 육감을 몸에 익혔던 것이다.
도베르만이 달려 왔다. 사냥감을 쫓는 기쁨에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카스피안은 정원을 가로질러 가서 문의 빗장을 열고 개와 함께 도로로 나갔다.
코요테들의 강되고 신경질적인 울음 소리가 뚝 그쳤다. 이어서 낮고 중얼거리는 듯한 신음 소리와 함께 코요테 무리는 옆집의 애완 동물을 물고 달려가기 시작했다. 앞쪽의 도로를 가로질러 가는 것이 보였다. 산기슭의 풀숲을 비집고 뛰어 올라 가기 시작하는 것과 동시에 또 다시 요란스럽게 짖어댔다.
그 뒤를 쫓아 도베르만이 달려 나갔다. 화산암의 파편이 달려 올라 가는 개의 발 밑에서 부스러져 떨어져 내려왔다. 카스피안은 뾰죽한 잎사귀와 건조한 사면에 달라 붙어 있는 선인장을 피해 가면서 뒤를 쫓아갔다. 앞쪽의 산 위에서 코요테들의 의지가 전해져 왔다.
숨을 헐떡이면서 최초의 대지를 가로지르고 있는 승마길까지 올라 갔다. 코요테들은 이미 앞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발바닥에 승마길이 부드럽게 느껴졌다. 이 길은 승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지나다니는 길이다. 낮에는 소설 속의 기사처림 말을 타는 그들도 밤이 되면 이곳까지 나올 용기가 없으리라. 지금까지도 이 부근 일대에서는 그 악명 높은 맨슨 일족에 대한 공포심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기 때문이다. 길이 90피트나 되는 거실을 지닌 저택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면, 또 한편에서 사람들은 시기심을 품고 좋지 않은 일을 계획한다.
승마길을 사이에 두고 선인장이 가시에 달빛을 담고 있었다. 팔을 들어 인사를 하고 있는 외계인을 연상시키는 가지들. 메마른 흙에 집요하게 달라 붙어 있는 뿌리.
선인장으로 둘러싸인 부드러운 승마길을 걷고 있으면 발소리가 전혀 나지 않기 때문에 카스피안이 그곳을 지나가고 있다는 것은 동물 밖에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동물에게는 반드시 들켜 버린다. 그때 한 번만은 예외로 하고.
옛날의 카스피안은 한 마리의 코요테에게 기습을 가한 적이 있었다. 조금만 더 했으면 꼬리를 붙잡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직전에 코요테는 휙 하고 돌아다 보았다. 그 순간 코요테의 눈에 스쳐간 것은, 인간에게 허를 찔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표정이었다,
카스피안은 그 한순간을 마음에 새겨 두었다가 그것을 연기에 도입했다. 자신의 주위에 구릉 지대를, 그곳에 존재하는 계율을, 코요테가 겪고 있는 위험을 재현했다 ---- 그는 관객을 납득시키는 모험가를 연기한 것이다. 카메라 앞에서의 그의 연기는 숨을 죽이고 걷는 코요테의 위기를 유감 없이 전하고 있었다.
계속 걸어서 산들의 한층 더 황량한 지대에 발을 들여 놓았다. 승마길은 그곳에서 방향을 바꿔 말라 붙은 강바닥을 향해 사면을 내려가고 있었다. 카스피안은 미끈미끈한 돌이 빽빽하게 깔린 강바닥을 지나 풀숲을 헤치고 건너편 기슭의 뚝으로 올라 갔다. 풀숲을 빠져 나가자 건조한 평탄한 땅이 나왔다. 오른쪽에 움직이는 그림자가 있었다. 그 순간 눈 앞에 총검이 번뜩하고 빛났다.
"신분증을 보여라 ! "
그 병사는 큰 소리로 명했다.
카스피안은 뒤로 물러나 권총을 뽑자마자 발사했다. 총알은 공허한 어둠 속에 비명 소리를 지르며 빨려 들어가고, 화산성의 뾰죽한 산꼭대기에서 코요테의 길다랗게 짖는 소리가 들려 왔다.
"무엇 때문에 그런 곳을 헤매다가 왔어요 ? "
집에 돌아오자 캐롤은 겉옷을 걸치고 부엌에 앉아 있었다.
"알리샤는 깼나 ? "
카스피안은 현관의 낭하를 통해 딸의 방에 시선을 보냈다.
"새끼양처럼 얌전하게 자고 있어요. 또 내 배리엄을 먹은 모양이에요."
캐롤은 냉장고를 열었다.
"배가 고파 미칠 지경이라구요. 지금 같아서는 타이어의 튜브라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난 요즘 계속 기분 나쁜 꿈을 꾸었어."
"그런 종류의 얘기라면 나도 우리 스탭들에게 하고 있다구요... "
캐롤은 냉장고에서 쟁반에 담은 오드볼을 가져다가 카운터에 얹었다.
"어떤 얘기 ? "
"계약율이라던가, 계약고라던가,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지. 어떤 식으로 짰느냐는 아니잖아요 ? "
"협곡에 무엇인가가 있다니까."
"그런 것은 다 알고 있는 일 아니예요 ? 하지만 제발 부탁이니까, 그녀석을 우쭐하게 만들지는 말아요."
카스피안이 웃저고리를 벗자 캐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신 권총을 들고 바깥을 돌아다니고 있는 거예요 ? 무엇 때문에 그러죠 ? 우리 집에는 유사 이전의 개가 있어서 보안을 맡겨 놓고 있잖아요."
캐롤은 양손으로 권총을 들어 올려, 팔을 뻗어 몸에서 멀리 들었다.
"이것은 냉장고에 넣어 두겠어요. 당신은 침대로 가요. 그리고 긴장을 풀고 아침까지 푹 주무세요."
카스피안은 캐롤이 한껏 신경을 긴장시키고, 작은 몸에 소름을 일으켜 세우고 냉장고 문을 열고 다시 닫는 것을 지켜보았다. 아마 아침까지 그녀는 천장을 노려보고 있을 것이다.
"미안해." 하고 카스피안은 말했다.
"당신을 놀라게 할 생각은 전혀 없었어."
"괜찮아요. 남보다 쓸모 있는 일을 하려고 생각한다면 고민하는 것이 당연하죠."
캐롤은 카스피안의 팔에 자기 팔을 감고 낭하를 따라 침실로 데리고 갔다.

카스피안은 커브를 꺾어서, 큰 길을 벗어나 <버터필드>의 뒤쪽에 있는 주차장을 향해 급한 언덕길을 내려 갔다. 주차 계원이 나타나 여느 때와 같이 고급 차든 무엇이든 상관하지 않고 무관심하게 메르세데스를 맡았다. 타이어의 고무가 비명을 지르고 멋진 차가 아슬아슬한 공간에 달려들어갔을 때, 카스피안은 아찔해서 눈을 감았다. 이런식으로 또 다시 승산이 없는 대결을 피하려하고 있는 지금, 무엇이든 한 마디라도 입에 담으면, 나는 바보멍청이라고 카스피안은 자신에게 타일렀다. 주차 계원이라는 녀석들은 한 치의 빈틈도 없는 대답을 준비해 놓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주차장을 가로질러 <버터필드>로 향해 가면서 카스피안은 지금 들어가려 하고 있는 레스토랑이 옛날에는 그 유명한 존 배리모어의 저택이고, 과거의 부와 명성은 지금은 5달러 95센트짜리 <엔더비와 고트 치즈의 샐러드>로 전락해 있다는 사실을 되새겼다.
입구는 담쟁이 덩굴로 덮인 돌계단 위에 있었다. 배리모어의 생전부터 무성하게 자라 있던 덩굴은 주인이 죽은 다음에도 여전히 변하지 않은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붉은색 등불로 조명된 파티오로 올라가자 마일론 피쉬의 테이블로 안내되었다. 왜소한 체구의 에이전트는 생선회를 담은 접시를 앞에 놓고 마실 것을 한 손에 들고서 열대식물에 둘러싸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목이 마른 모양이로군, 카스피안. 카스피안 씨에게 아이리쉬 크림을. 나한테는 러시안 뮤르를 한 잔 더 부탁하네."
피쉬는 웨이터가 떠나 가기를 기다렸다가 비밀 얘기라도 하듯이 카스피안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데브루스카 작품의 각본을 읽어 보았는데 말일세, 그건 훌륭한 성인용 우주 드라마더군. 감독은 허먼 아머스. 우선은 1백만 달러짜리지. 자네가 나에게 있어서 아들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은 데브루스카도 알고 있네."
"나는 우주 유영에는 흥미가 없다구."
"카스피안, 내가 내 자식을 우주에 보낼 수 있겠나? 자식이 그곳에서 비참한 지경에 처해질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 말일세."
"나는 받아들일 수 없어." 하고 말하면서 카스피안은 어쩌면 자기가 받아들이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머스 감독의 최근작 3편이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다는 실적이 있기 때문이다.
"자네가 희망하고 있던 그런 작품이라구. 아역은 한 명도 나오지 않네. 하긴 우호적인 화성의 동물을 연기하기 위해서 난장이는 멸 사람 출연하지만 말일세."
"나는 현실적인 것에 흥미가 있다니까."
"우주선을 삼켜 버리는 괴물은 현실적이 아니란 말인가, 카스피안 ? 그러나 무엇보다도 현실적인 것은 돈일세."
"돈이라면 충분히 있어."
"돈이 충분하다는 말은 있을 수가 없네. 이 테이블도 돈, 저 화분도 돈, 내가 대접하고 있는 이 식사도 돈이 필요하네."
마일론 피쉬는 러시안 뮤르를 쳐들었다.
"자네의 건강을 위해 건배 ! 그것도 돈이지, 자네는 의사들이 로스엔젤리스 군에 얼마만큼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하나 ? "
파티오에 놓여 있는 테이블들은 서서히 채워져 가고 있었다. 낮게 늘어진 나무가지의 그늘에서 갖가지 대화가 오고갔다. 카스피안은 뜰 너머의 벽으로 시선을 이동시켰다. 부드러운 랜턴의 불빛을 받고 벽의 표면을 덩굴이 기어 내려와 있었다. 랜턴 불빛의 노란색은 캘리포니아 특유의 황금색을 뛴 노란색이다. LA의 밤이 모든 카페, 모든 뜰에 던지고 있는 색깔.
카스피안은 그 무드에 잠시 잠겨 있었다. 그것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LA의 밤은 어디에 몸을 두든 항상 연출된 영화라고.
신인 여배우가 한 사람 파티오로 올라 왔다. 초승달 모양의 눈썹. 화장도 헤어 스타일도 10년대의 요부를 연상시켰다. 적색과 백색의 사텐 드레스 아래서 유방이 물결치고 있었다.
"정신이 딴 곳에 가 있는 것 같군, 카스피안."
마일론 피쉬는 테이블 위로 몸을 내밀었다.
"무슨 곤란한 일이라도 생겼나 ? 있다면 나한테 털어 놓게. 그 때문에 나는 여기 있으니까. 부부 사이에 뭔가 작은 말썽거리라도 생겼나 ? 만일 그렇다면 나한테 얘기해서 정신과 의사에게 지불하는 비용을 절약하라구. 나처럼 다섯 번씩이나 결혼한 경험이 있는 사나이에게 의논하면 좋은 충고를 해 줄 수가 있으니까 말야."
"어떤 충고 ? "
"무조건 최고의 변호사를 찾아내는 거야. 비용은 단 한 푼도 깎지 말게. 나중에 훨씬 더 큰 피해를 입게 되니까 말일세."
피쉬는 글라스의 가장자리를 가슴에 갖다 댔다.
"이것은 충심에서 나온 충고일세, 카스피안. 난 경험자란 말일세. 법정에서 여자가 남자에게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지를 나는 다 알고 있네." 카스피안은 바구니에서 빵을 한 조각 집어 천천히 버터를 발랐다.
"자네도 감상적인 인간이로군 그래, 마일론."
"나는 인생을 살아 왔네, 친구. 온갖 고생을 다 맛보아 왔거든."
피쉬는 통통한 작은 손을 바구니에 집어 넣었다.
"지독한 정신적 고통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나는 다 알고 있어. 첫번째 마누라는 지금까지 20년간 위자료로 살아가고 있다네. 쇼핑이다, 스키다, 또 쇼핑이다 하면서 말일세."
"우리 집은 문제가 없어, 마일론."
"확실한가 ? 그런 일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 쌓여 가면서 슬금슬금 스며들어 오는 것이라네. 자네 부인이 혹시 페라리의 새 차를 사고 싶어하거나, 자신의 야구팀을 갖고 싶어하지는 않나 ? 아니면 이건 나의 쓸데 없는 참견인가 ? "
"쓸데 없는 참견이라니, 자네는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지."
카스피안은 글라스를 비웠다.
"그런 짓을 할 사람은 아니지만, 다시 이 멋진 술을 한 잔만 주문해 주었으면 고맙겠네."
"그것이 올바른 태도일세. 가정 문제로 끙끙 앓지는 말게나. 자네는 훌륭한 인간이야, 카스피안." 하고 피쉬는 빵을 또 한 조각 집어 들었다. "기분을 안정시키려면 열심히 일에 열중하는 게 제일이지. 우주선의 조종석에 대해서."
피쉬는 조종간을 잡고 있는 흉내를 내고, 그 다음에 의자를 빙그르르 회전시켜 통로를 사이에 둔 테이블에 있는 신인 여배우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런 유의 여배우라면 모두 한결같이 눈동자 속에 숨기고 있는 질문을 담아, 여배우가 은밀히 마주 바라보자, 마일론은 무언으로 그것에 대답했다.
  . . .  . .   . .  . . . . .   . . .
<그렇고 말고, 나는 에이전트야, 아가씨.>
"...게다가 아머스 감독이 어떤 감독인지 자네는 알고 있을 테지, 카스피안 ? 그의 터치도."
피쉬는 빵 부스러기를 셔츠 주름에서 끄집어내면서,
"그는 모든 것을 변신시켜 버린다네... 그러니까..."
"자네가 찾고 있는 것은 '똥으로'라는 말이겠지 ? "
마일론 피쉬는 카스피안을 마주 응시했다. 그 시선은 과거와 현재에 걸쳐서 손을 대 온, 그리고 또 장차 손을 댈 무수한 거래를 반영하고 있었다.
"모든 것은 똥이라네, 카스피안. 우리들은 배경을 다시 그릴 뿐이지. 플라톤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 "
카스피안은 피쉬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덩굴의 잎 사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뭔가 조그만 초록색 물체가 힐끗 움직인 것이다.
"이 하늘과 땅 사이에는 말일세, 호레이쇼, 철학 같은 생각지도 않은 것이 존재한다네...(세익스피어작 [햄릿] 제1막 5장)"
"자네가 지금부터 클레스웰 작가의 각본 얘기를 꺼낼 생각이라면 이곳 식사 값은 자네가 지불하게 될 걸세."
카스피안은 피쉬의 팔꿈치 바로 뒤의 그늘에서 나온 조그만 도마뱀을 지켜 보았다. 도마뱀은 날름날름 혀를 보이면서 카스피안을 보고 있었으나, 이윽고 덩굴 잎 뒤의 비밀 통로로 모습을 감추었다.
"자네 정도의 매력을 갖춘 스타는 이 업계에는 없어." 하고 피쉬가 말했다.
"그야 물론 한두 사람은..."
"마일론, 마음 편하게 먹게 좀 해줄 수 없겠나 ? "
"자네가 어디 말뼈다귀인 지도 모를 유럽인 프러듀서와 시시한 얘기를 나누고 있지 않다는 것이 확실해진다면 그러겠네."
"나는 등산을 하는 거야. 언젠가 자네도 따라오는 게 좋을껄 ? "
"도중에 먹을 것을 파는 노점은 있나 ? "
"백 야드마다 있지."
"카스피안, 나는 다 알고 있네. 자네는 매우 착실한 배우이고, 대담한 짓도 하지. 대담한 짓을 하다가 그것이 실패하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실패였다고 말할 수가 있어. 자네는 창조성이 있는 기획을 세웠으니까. 그러나 스폰서는 그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네. 단 한 마디도 말일세. 패자의 말은 듣지를 않는다는 얘기일세. 자네 는 그들의 사무실에 자네의 영화에 대한 미친 놈의 넋두리 같은 비평의 발췌를 읊으면서 기어들어가지. 그러나 그들의 귀 뒤에는 스위치가 달려 있어서 말일세, 영화가 실패하면 스위치를 끄고 그대로 내버려 두는 거야. 자네의 입술이 움직이고 있는 것은 보고 있어도 마음은 딴 곳을 나르고 있는 것일세. 어딘지 아나 ? 거대한 규모의 특수 음향 효과를 구사한, 엄청나게 큰 우주를 무대로 삼은 인간 드라마지. 그들은 다른 혹성을 미끼로 삼아 최대한으로 올릴 수 있는 수익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거야.
자네가 텔리비젼에서 주워 들은 헛소리를 읊어대고 있는 동안에, 그들은 <정체불명의 우주 물체>를 보려고 입장권을 들고 행렬을 이루고 있는 미국의 어린이들에게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일세. 그들이 구하고 있는 것은 <동부 금성>에서 온 우주인과 똑같이 만들어진 플라스틱제 장난감이야. 비오는 날 밤에 UCLA(캘리포니아 대학 로스엔젤리스 분교)의 영화 전공과 강의실에서 35명 정도의 관객이 즐겨 보는 것 같은 어려운 영화 따위는, 설사 비평가가 절찬을 한다고 해도 그런 것을 스폰서는 원하고 있지 않네."
"자네에 대해서 한 마디 하겠네, 마일론. 자네는 사업밖에는 아무 것도 모르는 인간일세."
"나는 자네를 예술로부터 구해내 주려고 하고 있을 뿐일세, 카스피안. 이것은 그 정도로 단순한 일이란 말일세."
"고맙네, 마일론."
"테크놀로지의 진보와 함께 자네는 안락한 생활을 계속하고 싶겠지 ?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사고 싶을 테지 ? "
"그것이 나의 꿈의 전부라는 것은 잘 알고 있을 테지."
"그렇다면 마일론 아저씨의 충고에 귀를 기울이게. 자네는 지금 자네의 배우 생활에 있어서 찬란한 기로에 서 있네. 5천 년에 한번 밖에 찾아오지 않는다는 그러한 기회라구."
피쉬는 웨이터가 프라이드 파세리를 가져오자 말을 끊었다. 잘 튀겨진 파세리를 한 개 집어들고 카스피안의 눈 앞에서 흔들었다.
"자네는 지금 바야흐로 이 세계의 우상이 되려하고 있어. 그것을 아직도 모르겠나 ? 이번 데브루스카와의 영화는 그것을 성취해 준다구."
"연극을 계속해 주게, 마일론."
"계속하다 마다. 피쉬(물고기)는 피로를 모른다네. 자네가 <스타로버>에 출연만 하면 궁전도, 요트도 모두 자네의 것이 된단 말일세. 게다가 연기력도. 데브루스카는 괴물역의 탤런트를 총동원하고 있다네."
카스피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전에도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마일론 피쉬가 깔아 준 그 약속이라는 이름의 레일을 타고. 실현된 약속도 있으며, 무효가 된 것도 있다. 그리고 인생은 그 나름대로 이어져 왔다.
카스피안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런 일이 몇년 계속되어도 여전히 자기가 마일론이 얘기하는 배우 생활의 기로라는 대사를 그냥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 한 마디로 기분은 확 밝아지고, 그의 꿈꾸는 기계는 찰칵찰칵 계속 움직였다------이번에야말로 배우로서의 그의 본령이 발휘되어 수많은 꿈이 실현될 것이라고. 그리고 마일론은 내일은 다른 의뢰인에게 같은 대사를 되뇌이고 있을 것이다.
옆 테이블에 앉은 신인 여배우가 담배를 사치스러운 홀더에 꽂고 있었다. 그것이 끝나자 피쉬 쪽을 향해 다리를 포갰다. 카스피안은 힐끗 그쪽에 시선을 보냈다. 그러자 귓가에서 여자의 속삭이는 목소리.
     . . .  . . .  . . . .  . . .  . . .
"...일체의 신부늘 말살시켜 버리는 거예요."
카스피안은 깜짝 놀라서 여자를 뚫어질 듯이 보았다. 그러나 여자는 이미 동행의 남자 쪽으로 고개를 돌린 뒤였으며, 속삭임 소리는 잎사귀 사이를 빠져 나가는 바람을 타고 사라졌다.




제3장   어릿광대의 춤



캐롤 카스피안은 BMW(서독의 고급 승용차)를 문 앞에 세우고 비스듬히 주차시킨뒤 내렸다. 뒷굽이 뾰족한 새로 맞춘 구두를 손에 들고 있다. 카스피안은 선인장 밭에서 눈을 들었다.
"또 꿈의 탑에 오르려다가 떨어졌어요 ? "
캐롤은 한 걸음마다 얼굴을 찡그리면서 다가와서는 벤치에 걸터 앉아 발톱을 어루만졌다.
"내일은 핫도그의 빵을 벗겨서 신고 가야겠어요."
서류 가방의 끈이 어깨에서 미끌어져 떨어졌다.
"그 광고주를 놓쳤다구요. 그렇게 열심히 설득했는데 실패였어요. 완전히 내 실수라구요."
"그 다음에는 어떤 문구가 튀어 나올지 상상이 가는군."
"형편 없이 무능해요. 금주 내가 남에게 보여준 것은 그것 뿐이라구요. 이젠 지긋지긋해요. 나는 정말 멍청이라구요."
"더 계속되겠군."
"이쪽의 기획을 설명한 순간, 나는 상대방의 눈에서 그것을 깨달았어요. 애당초부터 일을 맡길 생각이 없었던 거예요. 그 사람들은 세금 도피를 권하고 있는 것으로 밖에는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 거라구요."
카스피안은 한 손으로 캐롤의 어깨를 안았다.
"자아, 이제 집으로 돌아왔으니까. 날씨도 좋고 하니까 느긋하게 푹 쉬도록 해요."
"광고 대리업은 딱 질색이예요."
"파스타가 있어. 내가 만들었지. 채소밭에서 신선한 바질을 따다가 말야. 먹을까 ? "
"데브루스카하고는 계약을 했어요 ? "
두 사람은 정면 현관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앞으로 3개월간, 나는 우주에서 무중력 상태로 들어간다구."
"파스타를 모두 먹어 치운다면 그것은 약간 무리일 꺼예요."
캐롤은 무거운 쇠빗장을 잡고 문을 밀어 열었다. 함께 길다란 현관 홀로 들어가자, 캐롤은 빅토리아 왕조풍의 모자걸이에 서류 가방을 걸었다.
"만약 내가 파면을 당한다면 상처를 입는 것은 여성으로서의 자존심 뿐이에요. 그 회합에 나와 있던 남자들의 얼간이 쌍판들이라니..."
"그러니까 상대방은 유머러스한 커머셜을 구하고 있지 않았다는 얘긴가 ? "
"그녀석들 꼭 잉꼬가 물 속에서 숨을 쉬고 있는 것 같은 얼굴을 하더라구요."
"웃지도 않고 ? "
"웃는게 다 뭐예요 ?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너절한 인간들이라니까요."
캐롤은 낭하를 터벅터벅 걸어가서 딸의 방 앞에서 발을 멈추고 안으로 사라졌다. 카스피안은 두 모녀의 얘기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캐롤의 목소리가 일변해서 밝아져 있었다. 그런데 낭하로 되돌아온 것을 보니까 토끼 얼굴이 붙은 푹신푹신한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우울하다는 표시다. 캐롤은 발을 끌면서 걸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기분이 우울할 때만 그것을 신는다.
계단을 내려가서 거실로 들어가더니 그녀의 졸도용 긴 의자에 다리를 위로하고 쓸어졌다. 긴 의자는 캐롤의 작은 몸집에 맞춰서 넓이를 좁게 만들어져 있었다.
"미국의 중류 계급의 비위를 맞추는 것은 이제 신물이 나요."
카스피안은 언제나처럼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졸음이 올 정도로 실컷 먹고 비디오를 보자. 그렇게 하면 한밤중에는 위기는 지나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직업을 가진 여성의 고민에 대한 간단한 해소법이다.
이전의 카스피안 같으면 너무나도 저속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경험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카스피안은 거실을 나가자 부엌을 향해서 계단을 몇 계단 올라갔다, 옥내 온실이 희미하게 밝았다. 뒤엉킨 덩굴이 정글의 동굴과 비슷하게 석조 벽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날개를 떨면서 아프리카 제비꽃의 꽃잎 속으로 기어들어가려고 하는 파리가 한 마리. 그 섬세한 환희의 날개 소리가 조그만 유리 방에 충만해 있었다.
카스피안은 온실로 들어갔다. 촉촉하게 따뜻한 공기에 식물의 향기와 그 수수께끼 같은 꿈이 농후하게 들어 차 있었다. 식물에는 마력이 있다. 인간이 스스로의 마음에 빨아들일 수 있는 수수께끼 같은 힘이 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죠 ? " 캐롤이 거실에서 말을 걸었다. "지금 당장 파스타를 얻어 먹지 못하면 걸을 수도 없을 것 같아요."
카스피안은 온실에서 현관 홀로 나왔다. 캐롤이 목소리를 죽이고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배꼽 댄스를 새로 시작해야 할까 ?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될지 몰라 ? "
카스피안은 부엌의 카운터 뒤로 돌아갔다. 가정부는 언제나처럼. 얼룩을 하나 남겨 놓지 않았다. 가정부는 이따금 캐롤의 보석류를 훔쳐다가는 전당포에 잡히고 코카인을 사서, 그 코카인을 팔아서 다시 보석류를 제자리에 갖다 놓곤 했다.
이 얘기는 정원사가 카스피안에게 가르쳐준 것인데, 카스피안은 무엇인가가 일시적으로 없어지면 가정부가 보통 때보다 훨씬 바지런해지는 것을 깨달았다 ---- 바지를 다리거나 옷정리를 하거나 구두를 반들반들 빛나게 닦아 놓거나 했다. 그것은 성능좋게 기능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일환처럼 생각되었다.
카스피안은 포도주 보관장으로 가서 버건디를 한 병 꺼냈다. 콜코병 따개에 손을 뻗었을때, 느닷없이 우울한 기분에 사로잡혀, 아무런 이상도 없는 오늘 저녘이 현실로부터 유리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집안의 공기는 폭풍의 직전처럼 농밀해지고, 카스피안은 천둥의 낮은 중얼거림을 들었다.
그러나 그날은 구름 한 점 없고 비가 내릴 기미도 없었다. 폭충은 이 집안에만 있어서 그의 고막을 압박하고 있었다. 그때 천둥 소리에 섞여 라이플의 날카로운 총성이 울려 퍼졌다. 뒤이어 귓속에 소리가 들려왔다.
  . . . . .  . . . .   . .   . . .  . . . .
"그녀석에게 명중했다. 봐라, 녀석이 쓰러진다 ! "
딸의 방에서 미친 것 같은 요란한 웃음 소리가 울려 왔다. 카스피안은 쏜살같이 낭하를 달려 가서 방문 앞에서 멈춰 섰다. 그런 카스피안을 그의 딸 알리샤가 깜짝 놀란 얼굴로 쳐다 보았다. 알리샤 앞쪽의 마루 위에 건전지로 손발이 움직이고, 컴퓨터화된 기분 나쁜 웃음 소리를 내는 장난감 어릿광대가 서 있었다.
"왜 그래, 아빠 ? " 하고 어린 딸이 물었다. 장난감 어릿광대는 팔을 뻗은 채 카스피안을 향해 걸어 왔다.
"아무 것도 아니다, 얘야. 아빠는 틀림 없이... 네가 아빠를 부르고 있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생각이 되어서..."
"이건 그냥 전자식 어릿광대야. 새로운 건전지를 넣어 주었더니 흥분해서 저래요."
리모컨의 버튼을 눌러서 알리샤는 어릿광대를 우측으로 돌게 했다. 카스피안은 전자식 장난감이 또 다시 웃으면서 딸의 방안을 가로질러 가는 것을 지켜 보았다. 뒷걸음질쳐서 문을 나서자 부엌으로 돌아갔다. 마개를 딴 포도주 병은 손에 든 채였다.
"여보, 허기가 져서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아요."
캐롤은 긴 의자를 떠나 부엌을 향해 계단을 두 단 가량 올라온 길이었다.
캐롤의 미간에 세로 주름이 잡혔다.
"왜 당신은 홍당무의 알파파를 발산하고 있는 거죠 ? "
"오늘 병신이 된 것은 나라구요, 내 노이로제가 나을 때까지 당신은 노이로제에 걸려서는 안 돼요."
냉장고의 문을 열고 캐롤이 말했다.
"자아, 파스타를 먹읍시다."
파스타가 담겨 있는 그릇을 꺼내더니 서슴치 않고 포크를 쑤셔 넣었다. 그런 캐롤을 바라보면서 카스피안은 남편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전혀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아내를 갖는 것에 의해서 얻어지는 갖가지 이점을 짓씹고 있었다.
물론 때로는 마치 부재중 전화기와 결혼한 것과 같다고 생각할 적이 있다. 유달리 밝고, 그리고 애교있는 말투로,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용건을 말씀해 주십시요. 나중에 이쪽에서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하고 응답하는 부재중 전화기와 말이다.

빅터 콰트렐은 올챙이 배를 핸들에 얹고 자동차를 운전하고 있었다. 영화에서, 텔리비전에서 명성을 날리게 된 올챙이 배였다. 그는 자칭 "업계 제일의 뚱보 명배우"였다. 카스피안은 올즈모빌의 앞좌석에 나란히 앉아 있었고, 콰트렐은 줄리어스 데브루스카 프러듀서와 함께 일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를 그의 경험에서 얘기해 들려 주고 있었다.
"나는 그의 <러브 어페어>에 출연했었는데 말일세, 이건 자네트 링스트롬의 데뷰 영화였지만 말야, 그와 자네트가 칸느로 그 영화의 판촉 활동을 갔을 때의 일이네. 그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훌륭한 특실을 그녀에게 얻어주었다네."
여기서 콰트렐은 얼굴을 찡그리고 데브루스카의 흉내를 내면서 쉰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는 말이야, 자네트, 어디를 가도 당신은 이런 특실을 쓰게 될 꺼야. 이 정도로 넓고 모든 것이 흰색으로 통일되어 있을꺼야. 그리고 흰 개를 키우는 거야. 그 왜 야윈 것, 뭐라더라, 빅터 ? 그래, 아프간 하운드야. 그녀석을 두 마리 키우는 거야. 그리고 향수와 꽃과 흰색 롤스 로이스를 ! "
방향 지시기를 켜고 프리웨이로부터 내려와 링컨 붙버드로 들어선 빅터 콰트렐은 데브루스카의 얘기를 계속했는데, 그때는 이미 그의 흉내는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특실에서 혀를 핥고 있는 자네트를 남겨 두고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도중에, 낭하에서 녀석은 이렇게 말했다구. '좋은 것을 가르쳐 줄까 ? 저 계집애의 재능은 내 유방만큼도 안 된다네.'"
올즈모빌은 쭉쭉 큰 거리를 빠져 나가고, 카스피안은 햇볕을 받으며 피부를 태우고 있는 추한 베니스 가의 뒤쪽으로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와 콰트렐은 오랜 동안의 옛 친구로, 카스피안은 콰트렐을 존경하고 있었다,
세상에는 잘해도 못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역할에도 전심 전력을 다해 달라붙어서 그 인물에 생명을 불어넣을 정도의 재능을 갖고 있는 배우가 있는 법인데, 콰트렐도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콰트렐에게 있어서도, 또 카스피안에게 있어서도, 이번의 목표는 두 사람이서 협력한다면 단순한 모험 영화를, 단순하면서도 동시에 생각할 자료를 관객들에게 제공할 작품을  만들수가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모험이기는 했다. 일찌기 그런 것을 시도했었기 때문에 다른 캐스트들과는 전혀 다른 영화에 출연하고 있는 것 같은, 조화가 안 되는 연기에 시종한다고 하는 쓰라린 경험이 두사람에게는 있었기 때문이다. 비평가들은 그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
콰트렐이 부근을 흐르는 운하와 교차하는 옆길 중 하나로 들어섰다. 자동차는 조수의 수로를 가로지르고 있는 작은 다리를 올라갔다. 수로에서는 매어진 보트가 나른하게 떠 있었다.
"저곳에는 틀림없이 티푸스 균이 우글우글거리고 있을 거야."
콰트렐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한번 핸들을 꺾어서 마리너 델레이의 또 하나의 뒷거리로 구부러져 들어갔다. 그 길은 즙은 일방 통행로였다. 콰트렐은 또 다시 방향지시기를 켜고 그의 맨손이 있는 건물 밑의 주차장으로 구부러져 들어가 은빛 롤스 로이스와 캐딜럭 세빌 사이에 차를 세웠다.
건물 입구의 문은 한 쌍의 거창해 보이는 자물쇠로 지켜져 있었다. 엘리배이터로 이층으로 올라가 안뜰 위로 빠져 나가 있는 발코니로 나갔다.
안뜰에는 야자나무가 한 그루 외따로 심어져 있고, 발코니에까지 가지를 뻗고 난간 위에 잎사귀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이곳은 일 년에 10만 달러의 돈이 들어가지만, 때때로 코코넛을 얻어 먹을 수가 있다네."
콰트렐이 자기 방문을 열고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주거는 바다에 면하고 있었으며 아래쪽 모래사장에 초점을 맞춘 망원경이 세워져 있었다. 콰트렐은 망원경 쪽으로 다가가서 모래사장을 대충 한번 둘러 보았다.
"언제든지 뭔가 재미있는 것이 보이는데 말이야 ---- 아, 저기다, 저 여자는 공깃돌 두 개와 구두끈밖에는 아무 것도 걸치고 있지 않은 걸."
콰트렐은 망원경을 테라스로 가지고 나갔다. 카스피안은 콰트렐이 있는 난간 쪽으로 갔다. 해변은 산타 모니카 방면을 향해서 길고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반대 방향에는 로스엔젤리스 공항이 있고, 제트기가 쉴 새 없이 이륙하며 바다 위를 상승해 날아갔다.
카스피안은 캔바스 췌어에 걸터 앉는 순간 한쪽 손을 거미줄에 집어 넣었다. 의자 밑에는 맥주의 빈 깡통이 담배 꽁초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재떨이 옆에 굴러 다니고 있었다.
"이곳에는 미인이 살고 있지 않나 ? "
"내 물건 끝에 골치 아픈 곰팡이가 쓸어서 말일세."
망원경을 들여다 보면서 콰트렐이 말했다.
"비버리 힐즈에 있는 그것 전문의사가 만일을 위해서라면서 껍질을 벗겨 버렸기 때문에 지난 한 달 동안은 제대로 서주지를 않는 거야."
"허허, 자네답지도 않군 그래, 빅터."
"꼭 성전환 같은 거라구, 안 그래 ? "
콰트렐은 망원경 렌즈에 뚜껑을 닫고 카스피안이 앉아있는 쪽으로 돌아섰다.
"그런데 <스타 로버>에 내가 나설 장면이 있나 ? "
얼굴을 찡그리고 악당과 같은 눈매를 했다. "여자에게 국물을 퍼붓는 명왕성의 변질자라던가 말야 ? "
"허먼 아머스 감독하고는 어떻게 상종하면 되지 ? " 하고 카스피안이 물었다.
"나는 아머스의 최초의 작품에 출연했었는데, 그 영화 촬영 때 그 친구, 너무나 불안한 나머지 첫말을 까먹어서 말일세. '액숀 ! "이라는 말이 안 나와서, 끝내는 결국 '시작 ! ' 이라고 소리치고 말더군. 그러나 그 때문에 오히려 모든 불안이 날아가 버렸지. 현재로는 자신을 베루이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네. 틀림없이 샘물처럼 개인적 접촉을 시도해 올걸세."
콰트렐은 카스피안을 방 안으로 데리고 들어와서 부엌 한 구석에 있는 아담한 바로 안내하고는, 그가 <보일드 아울>이라고 명명한 칵테일을 만들어 주었다.
"지금 내가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을 보여 줄까 ? "
콰트렐은 조그만 나무 상자를 꺼내 가지고 왔다. 그것은 옛날 보드빌의 무대의 모습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앞으로 안에 스프링을 달 생각일세. 그리고 바벳트도."
콰트렐은 봉투를 열고, 각각 꼼꼼하게 잘라내서 보올 종이로 뒤를 바른 어릿광대와 몸종의 낡은 사진을 꺼냈다. 두 사람 모두 옛날 복장을 하고 있었다.
카스피안은 남자 사진을 집어 들었다.
"자네 할아버지인가 ? "
"할아버지와 할머니일세. 이것은 두분의 공연물 중 하나였다네. <유태인과 몸종>이라는..."
콰트렐은 킬킬거리고 웃었다.
"옛날의 반 유태주의 코네디라네."
사진의 무릎과 팔꿈치의 관절에는 경첩이 달려 있고, 실이 매여져 있었다. 콰트렐은 유태인과 몸종을 무대에 매달고 두 사람을 춤추게 하거나 팔과 다리를 흔들게하는 크랭크를 돌렸다.
"언젠가 기회를 봐서 오르골을 집어 넣을 생각일세. 조그만 커튼도 달아 볼까 ? "
콰트렐은 옛날 뮤직홀의 멜로디를 콧노래로 읊조렸다. 입술을 오무리고 트럼펫의 음색을 냈다. 이마에 주름을 잡고 소형 드럼의 반주를 넣었다.
콰트렐이 미니쳐의 보드빌 무대 위에서 몸종에게 비명을 지르게 하고, 춤추는 유태인에게 그 뒤를 쫓게하는 것을 카스피안은 지켜 보았다.
"정말 멋지고 순박한 한때로군." 콰트렐은 조그만 무대를 내려다 보며 말했다.
"이토록 멋대가리 없는 직업에 열중할 수 있다니 ! "
카스피안은 글라스에 손을 뻗었으나 입가로, 가져오는 도중에 갑자기 손목에서 기운이 빠져 술이 마루에 흘렀다.
"그녀석에게는 더 이상 먹이지 말게, 곤드레만드레니까."
"이상하군." 카스피안은 말하고 빈글라스를 카운터에 얹었다.
"---- 누군가가 나의 줄을 잡아당긴 것 같은 느낌이었어."
카스피안은 걸레를 집어 쏟아진 술을 닦아냈다. 조금 전의, 마치 타인의 팔이 된 것 같은 감각이 아직 남아 있었다.
"네, 할머니, 수고하셨습니다." 콰트렐은 몸종을 무대에서 끌어 올리면서 말했다. "오늘은 이만 합시다 ! "
그 다음에 할아버지도 끌어 올려서, 두 사람을 카운터 뒤에 챙겨 넣었다.
"우리 할아버지는 말이야, 70세 때 가발과 여자 의상을 걸치고 헐리웃 대로를 콘버티불을 타고 달렸다네. 그는 정지 신호까지 오자 옆에 멈춰선 트럭 운전수를 올려다 보면서 한 마디 했지. 늙은 부인의 목소리로 말일세. '젊은이, 좀 빨아 주지 않겠소.'"
콰트렐은 작은 무대를 카운터 밑에 놓았다.
"이런 식이니까 손자인 내가 제대로 된 일을 할 수가 있겠어 ? "



제4장   고독한 방랑자




데이빗 카스피안은 렌트카를 운전하여 기억 속으로 헤집고 들어갔다. 가는 길목에 보이는 피츠버그의 굴뚝군 ---- 지금은 사멸되어 버려 이제는 하늘로 치솟는 불꽃은 볼 수 없다 ------ 과 지난날의 철강 산업의 껍데기인 건물이 즐비해 있다.
어린 시절에 그 스카이라인은 빨간색과 금색의 불꽃을 토해내는 거대한 탑의 무리, 마법의 세계의 지옥이었다.
그는 숲처럼 검고 거대한 탑의 그림자 속에서 자라났다. 밤에조차도 침대 속에서 그는 그 광경을 떠올리고 있었다. 야근을 하는 공원들이 도착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그 사내들의 목소리나 그들이 움직이는 기계의 소리에 몰두하곤 했었다. 공원들의 목소리를 부적 대신으로 삼으며 꿈길을 헤매는 것은 최고의 기분이었다.
지금은 정적 그 자체. 거인들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잘 왔다, 왜냐 하면 이제 모두들 내가 나의 조카라는 얘기를 믿어 줄 테니까 말이다. 얘야, 잘 들어라." 하고 숙모는 문가에 고개를 들이밀어 보이고는, "이곳에 입원해 있는 환자들은 말이야, 자신들은 누군가 유명인과 연관이 있다고 모두들 공상하고 있지. 하지만 나는 정말로 그렇잖니 ? 모두들 깜짝 놀라게 해 주자꾸나."
"좋구 말구요. 루스 숙모님, 반드시 그렇게 하죠."
숙모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여기에는 굉장히 좋은 선생님이 계셔서 말이야, 많은 일을 도와 주신단다 데이빗. 무척 양심적인 분들이지."
그녀의 피부색은 납을 연상시켰으며 눈가에는 기미가 있었으나 눈 그 자체는 민첩하고 청명했다. 그녀는 일족 중에는 유일한 예술가적 기질을 가진 인간이었다.
그가 어린 시절에 읽은 책은 모두 그녀로부터 선물받은 것이었다. 최초의 성찬식을 축하하여 숙모는 1달러짜리 은화를 주었다. 교회 앞의 보도에서 그의 위로 몸을 수그리고 있는 숙모가 지금도 눈에 떠오른다. 숙모는 그 당시보다 훨씬 늙었으며, 그를 향해서 창살이 쳐진 창문 옆의 의자에 앉아 있었고 더군다나 방에는 불쾌한 냄새가 고여 있었다. 그것은 소년 시절부터 기억하고 있는, 그, 문에 들어선 그를 껴안아 주었을 때의 냄새는 아니었다. 그것은 라일락, 숙모의 집의 부엌 창문의 옆에 있는 큰 나뭇가지로부터 풍겨 오는 라일락의 향기였다. 라일락의 향기에다가 이윽고 올리브 기름의 냄새와 지글거리며 볶이고 있는 마늘 냄새가 겹쳐지는 것이었다.
"...최고의 의사 선생님에다가 최신의 약. 그러니까 안심하라고 그러더구나."
숙모는 언제나 회색의 낡은 집에서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는 가장 사랑을 받는 조카였던 것이다. 유난히 선명하게 되살아나는 것은 이런 기억이었다.
어느 날 그는 숙모의 집의 부엌의 리노륨 마루 위에서 미니카를 질주시키면서 놀고 있었다. 그런 그를 숙모는 바라보고 있었으나, 그때 문득 그는 숙모가 생판 남이며 전혀 루스 숙모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갸름한 얼굴이 더욱 뾰족해졌고 바라보는 눈초리가 갑자기 외계인 같은 냉랭한 것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숙모 뒤의 창문 너머로 빨랫줄에 널은 세탁물이 바람에 날리고 나무들 사이에서 잎새들이 살랑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때 그의 마음에 이 세상에 대한 심각한 의혹이 잠입했던 것이다.
"무척 기분이 좋아, 정말로. 이곳의 택지는 무척 아름답고 나는 매일 그곳을 걸을 수 있어. 안내해 줄까 ? "
숙모는 약물 덕택으로 유연해진 말투로 말했다.
"꼭 그렇게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루스 숙모님."
그는 숙모에게 팔을 내밀었고 둘이서 복도를 지나 같은 층의 여자들이 TV를 보거나 뜨게질을 하거나 트럼프 놀이를 즐겁게 하고 있는 면회실로 들어갔다. 또 다시 그 기묘한 냄새가 더욱 강렬해져서 방의 안쪽으로 숙모와 함께 발길을 옮기는 그를 감싼다. 숨이 막혀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신이 그 냄새를 거부하고 있었다. 마치 호흡할 수 없는 공기 속에 있는 것 처럼...그것은 광기의 냄새였다.
루스 숙모는 TV앞에 모여 있는 그룹에게 그를 소개했다. 여자들은 그가 출연하고 있는 것으로서 이미 관람한 영화는 하나도 남기지 않고 손꼽았다. 그중에는 그가 들은 일도 없는 것 같은 영화도 섞여 있었다. 루스 숙모는 유명한 영화 스타로서 핸섬한 조카가 그녀의 친구들에게 말을 걸고 TV가이드에 사인을 하고 있는 광경을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바라보았다.
그는 환자들과 가볍게 대화를 나누면서 그녀들의 정체 불명의 놀림이나 뒤죽박죽의 질문에 편안하게 응하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정신 병원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의 레벨은 일반 기자 회견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그는 생각했다. 다만 이곳에서 받는 질문쪽이 훨씬 지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를 둘러싼 테두리의 바깥에는 다른 종류의 여자들이 있었다. 소위 망각이 진행되고 있어서 그의 일은 커녕 자신이 누구냐는 것도 모르며 몰래 숨을 죽여서 울거나 어딘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여자들이...
루스 숙모는 그를 그곳으로부터 데리고 나왔으나 그렇게 되자 이번에는 간호원들이 그를 만나고 싶어하는 차례였다. 그는 간호원의 눈도 이상하다는 일을 깨달았다. 그 눈길에는 습성으로부터 오는, 약간 감각이 벗어난, 기묘한 질문이 머물러 있었으나, 그는 그 간호원들에게도 위화감은 느끼질 않았다. 환각과 망상증과 어두운 강박 관념이 충만해 있는 분위기라는 것이 웬지 그가 지금까지 출연해 왔던 영화의 세트 모두와 공통되어 있다는 것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간신히 루스 숙모는 긴 복도를 따라서 택지로 그를 데리고 나갔다. 문 밖은 화창했고 숙모는 일족의 일, 지나간 나날들의 추억을 얘기했는데, 기억은 두말할 나위 없이 또렷해 있었다.
"너는 정말로 재능이 있는 아이였어. 몽상가이기도 했지 데이빗. 열심히 놀았어. 몰두하는 타입이야 너는. 물론 그게 중요한 일이지. 누구든지 일에 몰두해야 된다구."
그는 숙모를 보면서 도대체 이분은 정신 병원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는 의아스러움을 느꼈다. 아무 데도 이상한 곳은 없는데. 이곳에서 데리고 나가서 맨션이라도 하나 구해 드리자, 마음이 평화로와지는 풍경이 있고 가지고 싶은 것에는 곧바로 손을 내밀을 수 있는 주거를. 머리는 제정신이니까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여생을 되찾아주자. 그런 식으로 그는 생각했다.
숙모는 택지를 데리고, 돌아다니면서 눈이 확 뜨일 것 같은 새빨간 봉오리를 듬뿍 달은 장미덩굴 사이의 옆을 지나쳤다.
"데이빗, 너는 몽상가이며 게다가 탐험가야. 나는 너를 꿰뚫어 보고 있었어. 너는 너 이외의 사람은 될 수 없어. 네가 열중해 있었던 여러가지 일을 떠올리게 돼. 너에게 결투용 칼을 사주었었지, 기억하고 있니 ? 투사가 되고 싶어하고 있었으니까. 나는 말이다, 정원의 담 앞에서 메시지를 받는단다, CIA로부터."
숙모의 목소리에 변함은 없었으며 똑같이 온화하게 흘러나왔다.
"은닉 마이크에서 명령이 하달되지. 나는, 스파이라구." 말을 중단하고서 그를 향했다.
"내가 선발되다니 누가 믿을 수 있겠니 ? 있잖나..." 숙모는 그의 팔짱을 끼었다. "말하자면 나는 굉장히 특수한 임무에 선발된 거야."

카스피안은 에드 클레스웰의 집의 거실에서 클레스웰의 어린 시절의 수많은 추억에 둘러싸여 앉아 있었다. 바로 옆에 원형의 풍선껌 디스펜서가 있다. 뒤에는 캡틴 미드나이트를 비롯하여 스파이크 게리나, 텔리 리가 스타로 연기한 <베터 리를 북스(코믹)>의 팽대한 라이브러리. 커피 테이블 위는 월트 디즈니의 낡은 장치의 양철장난감으로 점령 되어 있다. 강아지인 플루트에 미키에 도날드. 그것과 마토이사의 장난감 비행기 ----- 이것은 활주하여 테이블 끝으로부터 날아오르는 직전에 공중 회전을 한다. 온 집안의 모든 곳이, 벽장에도 벽의 움푹한 곳에도 요술 저금통, 장난감 슬로트 머신, 장난감 빈테이지 카가 죽 늘어서 있다.
클레스웰의 집에는 각본의 용건으로 발길을 돌린 카스피안이었으나, 두 사람은 라이오넬사의 모형 기차로 놀고 있어서 이미 저녁 시간을 소비해 버리고 있었다. 열차는 다이닝 룸이 좁다기라도도 하듯 펼쳐져 있었으며, 라이오넬사 제작의 부속품도 하나도 빠짐없이 갖추어져 있다. 원목 적재기, 작은 깡통을 마루 일면에 뿌리는 우유운반차, 어두움에 각등을 흔드는 신호수.
에드 클레스웰은 이제서야 카스피안의 건너편에 앉았다. 그날밤의 최종 열차를 지금 막 차고에 넣고 왔으므로 아직도 회색의 철도원 모자를 쓴 채로였다.
"피츠버그, 어땠어 ? "
"머리가 이상한 숙모를 만나고 왔어."
"정신 병원. 딱지가 붙어 있나 ? "
"CIA로부터 메시지까지 받는다구."                                           . .
"우리 숙부님은 보청기로 메시지를 받기 때문에 때로는 대화로 사용할 수 있는 꺼리가 있어. 가능한한 받아들이기로 하고 있지."
카스피안은 크고 새빨간 판매기가 그를 향해서 토해내며 건내준 병에 들은 이 콜라를 홀짝였다. 다른 손에는 눅눅한 프란다스의 땅콩. 이것은 미니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거실에 성화처럼 서 있는 고색 창연한 판매기에서 출현한 것이다.
"우리 일족은 일반인 이상으로 정신이 상을 이어 받고 있어서 말이이야" 카스피안은 테이블 위에 콜라병을 놓았다. "아무래도 여자들을 통해서 전해지는 것 같아. 하지만 격세 유전이라고 생각해."
"지금, 정신 착란을 느끼고 있나 ? " 에드 클레스웰은 자신의 병에 든 콜라를 앞에 들어 올렸다.
"이녀석 때문인지도 몰라. 왜냐 하면 이 안에 들어 있는 설탕은 30년이나 전의 물건이니까."
"애당초 발단은 내가 꼬맹이 시절의 일이지만 말이야." 카스피안이 말했다. "말해도 될까 ? "
"노트를 펼칠 때까지 가다리라구."
"맹장염 수술을 한 뒤에 합병증이 생겨서 말이야. 페니실린을 주사맞았다구. 나는 페니실린 알레르기인데 그때는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지. 그래서 매일 주사를 맞았어. 맞을 때마다 나는 금방 죽어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고. 그래서 결국 모두들 알게 되었지만 그 시기에 이미 가벼운 정신병에 걸려 있었던 거라구. 퇴원할 무렵에는 나는 자신이 이 세계를 매일매일 창조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어 있었어. 자동차를 만들고 우리의 집을 만들고 공기를 만들고. 그리고 나아가서는, 당연히 나는 나 자신을 매일 창조하고 있다는 결론에 달했지."
"자아, 계속하라구." 클레스웰은 노트에 적으면서 말했다.
"즉, 나는 실존하지 않는다는 절대적인 확신에 도달한 거라구. 이런 얘기는 아무에게도 할 수 없었지. 너무나도 외설스러워서 말이야. 그래서 나는 비실재라는 악몽 속에서 살았어. 매일 밤 가능한한 늦게까지 일어나 있어야만 했다구. 시트를 웅켜쥐고 부들부들 떨면서 자신을 진정시키자, 침착해지자 하면서 눈을 뜨고 있었어. 몇년이나 그런 상태였지."
"그래서 ? "
"세계가 창조되어 있었던 것이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어. 당장이라도 무시무시한 결말이 ---- 모든 것이 붕괴할 때가 도래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일에도 일체 관연하지 않았지. 나는 그 카크토오의 영화에 등장하는, 자신들의 상상의 세계에 누구에게도 속박당하지 않고 살고 있는 친구들처럼 신성하고도 비현실적인 보물로 가득 차 있는 일실에서 살고 있었다구. 그런데 그 어린 시절의 보물이 어떤 것인지 알겠나 ? "
"풍선껌이 디스펜서라든가 ? "
"나치의 유품이지. 아버지가 전쟁에서 가지고 돌아왔다구. 철모, 철십자, 해골반지. 해골반지는 언제나 나에게 말했지. 너는 진실을 알고 있다. 세계는 비실재의 공간을 떠도는 해골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라고 말이야."
"이것 참 또한 기묘하기 짝이 없는 유년 시절이군." 클레스웰은 아까부터 펜을 놓고서 카스피안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학교에서 연극에 관심을 가졌지. 스테이지에 서서 자기 자신을 창조하고 그로 인해 갈채를 받았을 때 악몽은 나에게서부터 떠났어. 그 이래로 계속 하고 있지."
"그 나치의 유품이란 것은," 에드 클레스웰은 두 사람 앞의 테이블에 놓여진 각본을 펜으로 툭툭 두드렸다.
"이 베를린 이야기를 우리가 쓰고 있는 것은 그것 때문인가 ? 이 독일의 연극, 당신의 에이전트의 입을 빌리자면 아무도 사지 않을 시시콜콜한 것을 쓰고 있는 것은 말이야."
"나는 독일인이 만드는 영화를 좋아하지. 그들은 카메라 워크를 터득하고 있다구."
"그럴까 ? 내 생각에는 에바 브라운은 웃겨도 한참 웃긴다구." 클레스웰은 또 다시 다른 판매기로 가서 동전 두 개를 투입했다. 빨간 액체가 들은 작은 밀랍의 병이 두 개가 나왔다. "이거 기억하고 있어 ? 안의 쥬스를 마시고서 밀랍은 깨물지."
"그러고 보니."
클레스웰은 하나를 조명에 비추었다. "이 병 속에는 일그러진 우리들의 청춘의 진수가 담겨져 있어." 그리고 카스피안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것으로 되돌아 가나 ? 한때의 공백 상태로 ? "
"나는 프라하에서 엑스트라를 하고 있었고 학생용 유스호스텔에서 묵고 있었지. 호텔 솔리다리다였어. 그 호텔은 시의 교외에 있었는데 공공 화장터 옆이었어. 평소에 바람은 러시아를 향해서 동쪽으로 불지만 어느 날인가 반대 방향으로 부는 거야. 그래서 화장터의 연기에 당했지. 그때 세계는 창조된 장소로 변모한 거야."
"나는 여행은 하지 않아서 말이야." 에드 클레스웰이 말했다.
"이곳 LA에 풍선껌 디스펜서와 함께 가만히 있지."
"사실을 얘기하자면 말이지." 카스피안이 말했다. "요즈음 기묘한 막간광언으로 고민하고 있어."
"이걸 마셔 보게나." 에드 클레스웰은 밀랍으로 만든 작은 병을 건냈다.
둘이서 마셨으나 카스피안은 즉각 빨간 액체를 카페트 위로 내뱉었다. 클레스웰은 어떠했느냐면 얼굴을 찡그리고 삼켜서 넘겼으며 아직도 미간을 찌푸린채로 카스피안을 되돌아 보았다.
"화학 성분이 침전해 버렸나 ? "
"순수한 빨강색 5호가 되어 버렸군."
에드 클레스웰은 병을 토해냈다. "이건 깨물면 안 되는 모양이군, 기대하고 있었는데."병을 재털이에 버렸다. "지나간 날은 돌아오지 않는다, 이거로군."
"반드시 그렇지도 않지."
"이 밀랍의 막과자에는 상당한 재산을 털어 넣었다구."
"자네에게 있어서 이것은 깨달음의 경지, 탐색의 일부라네 에드."
"변질된 캔디라면 자네의 상상에 남을 정도로 시식하고 있지."
클레스웰은 거실의 한 구석을 차단하고 있는 안티크의 유리로 만든 디스플레이 케이스를 가리켰다. 안에는 40년이나 전의 캔디 종류가 색바랜 포장지에 싸여서 즐비하게 이어져 있었다.
"초저녁에 분명히 찾는 녀석이 발견될 거야. 그 혀가 녹는 맛 말일세."
"그래." 클레스웰은 먼 곳을 보는 눈길이 되어 있었다. "어딘가에 나의 수호신의 안에 들은, 바위처럼 딱딱한 메리 제인(캬라멜 캔디)이 말이야." 그리곤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얼마나 황당한 망상인지."
"적어도 그건 나치의 유품은 아니야."
클레스웰은 빳빳하게 고개를 세우고는 손가락 하나를 코로 가지고 갔다.
"잠깐만, 잠깐만 기다리라구 ! 지금 생각해 냈어."
방의 건너편의 스크랩 북을 산더미처럼 쌓아 올린 테이블로 가서 재빨리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어떤 경매에서 샀지. 어떤 할아버지의 물건이었는데 여성의 스타킹 광고만 잘라서 모으고 있었다구." 클레스웰은 솜씨있게 자른 광고를 빽빽하게 붙인 페이지를 들어올렸다.
"취재 기자였겠군. 분명히."
"그래, 그런데 그밖에 여러가지 것이 여기저기에 끼워져 있었어. 이 근처에..." 클레스웰은 다시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으나 갑자기 손을 멈추고서 투명한 소형 봉투를 카스피안에게 건넸다.
카스피안은 봉투를 열고 뒤집어서 새빨간 인쇄가 찍힌 우표 한장을 꺼냈다. 제3제국의 우표. 군대의 큰 외투를 입은 히틀러의 초상이 이상화되어 그려져 있다. 먼 곳에 즐비한 작은 건물에는 하켄크로이츠 깃발이 펄럭거리고 있었다.
"가지게."
클레스웰이 말했다.
"아뭏든 고맙네." 카스피안은 우표를 봉투에 넣고서 클레스웰에게 되돌렸다.
에드 클레스웰은 봉투를 다시 한 번 앨범에 넣었다.
"이 할아버지는 나치의 스파이가 아니었을까 ? 절취한 광고에 나와 있는 다리는 모두들 대단히 살집이 좋아. 바로 플로어라인의 다리라구."
"쉐인하이츠탄첼린넨."
"뭐라구 ? "
"뷰티 댄서즈." 카스피안은 교대로 들어 올려진 다리가 이어지는 페이지를 보았다. "판에 박은 코러스라인이군."
"우린 모두 뭔가에 심취해 있어." 클레스웰이 말했다. "나의 종착역도 이 부근이 아닐까."
"여자 다리를 자르는 거 ? "
"아니, 옛날의 캔디 바의 광고지."
카스피안은 앨범을 반대로 펄럭였다. 히틀러의 우표가 끼워져 있는 곳에서 손을 멈추었다. 그럴 생각도 없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우표를 봉투에서 꺼내서 총통의 이상화된 얼굴을 조명 밑에 비추고 있었다. 이중턱이 외투의 높은 옷깃으로 숨겨져 있다. "나치 독일은 창조된 세계였어." 우표의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만졌다. "창조된 하늘, 창조된 건물, 창조된 총통. 그것을 모두는 샀어." 클레스웰 쪽을 보고서 "아마 지금도 우리는 창조하고 있지 않을까. 창조된 자네. 창조된 나. 창조된 미국. 어린날의 데이빗 카스피안은 옳았을 지도 모르지."
"자네도 미국인 모두와 마찬가지로 말이야." 클레스웰은 앨범을 닫고 옆에 놓으면서, "단순히 페니실린을 과다하게 맞은 것 아닐까 ? "

테라스 옆의 정원의 흙에 삽을 넣었다. 한편에 노란 마대에 뿌리를 감싸인 과수의 묘목이 두 그루. 심겨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바로 옆에서 캐롤이 엎드려서 화단의 손질을 하고 있었다.
에드 클레스웰은 두 사람 근처의 론체어에 랩 톱 형태의 콤퓨터를 무릎에 올려 놓고 앉아 있었다. 잠시동안 키보드를 두르리고 있었으나 이윽고 우울한 듯이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 보고서 양팔을 힘없이 떨어뜨렸다. 그러자 그의 주먹이 지면에 닿았다. 캐롤은 작은 목소리로 카스피안에게 말했다.
"저 사람은 억제하고 있군요."
클레스웰은 원고에 눈을 떨구어 응시하고는 낮게 신음을 토해냈다. 그리곤 길고 앙상한 양손에 얼굴을 묻었고 잠시 후에 또 다시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한 마리의 고독한 딱따구리라는 느낌." 캐롤은 정원 손질용 무릎 덮개를 조절하고 땅을 파는 도구를 한 손에 들고서 기어서 앞으로 나갔다. "이곳 일대에 꽃을 심어 두었는데 어딘지 잘 생각나지 않는군. 조심해야지." 그녀 전용의 부분은 잡초나 풀이나 약초가 뒤섞여서 활기로 가득차 있다. "아마 이게 내가 심은 마법의 나무라고 생각되는데. 문 위에 달아 놓으면, 악귀를 쫓는 꽃."
"해 보자구." 카스피안은 몸을 수그려서 작은 가지 두, 세 가닥을 비틀어서 잘랐다.
"당신이 마법을 믿는 타입인지는 몰랐어." 캐롤은 엎드린 채로 계속해서 전진했다.
알리샤가, 이어진 핑크빛의 진달래사이에서 나타나서 부모를 발견하고는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렇게 바로 코 앞에서 만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모양이라서 어깨 너머로 진달래밭을 되돌아보았고 그리고 다시 한번 부모에게로 시선을 돌리고 망설이듯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 . .
"난 굉장이 입장이 난처해요." 크게 뜬 눈으로 말똥말똥 부모를 응시했다.
그 눈은 그녀의 성격을 모르는 어른, 뒤가 캥기는 돈의 사용 도중, 진행중인 바람을 들켰다는 것을 깨달은 어른을 움추리게 만드는 눈길이었다.
알리샤는 망설이면서 세 갈래로 딴 한쪽 머리를 꼼지락거렸고 부드럽게 말은 각색의 머리 끝을 몇 번이나 쓰다듬었다. 형세가 이상해지면 언제나 그렇게 하면서 자신을 진정시키는 것이 버릇이었다.
"무슨 일이니 ? "
"내가, 고양이에게 향수를 뿌렸어."
그때 절묘한 타이밍으로 바로 그 고양이가 꼬리를 당당하게 세우고는 진달래 사이로부터 느릿느릿 나타났다.
코 앞을 지나가자 캐롤이 킁킁거렸다. "디버야, 1온스에 175달러나 하는."
오솔길을 멀어져가는 알리샤와 고양이 ---- 고양이는 여전히 향수가 뿌려진 꼬랑지를 자랑스럽게 세웠다. 카스피안이 딸에게 뒤로부터 말을 걸었다.
"알리샤, 이리로 돌아와."
"야단치면 안 돼요." 하고 캐롤이 말했다.
"야단을 치긴. 고양이에게 향수를 뿌리기보다 보람이 있는 일을 가르쳐 주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라구."
알리샤는 발길을 돌려서 겁을 먹고는 되돌아왔다. 고양이가 야옹거리면서 다리에 감긴다. 카스피안은 딸을 손짓으로 불렀다.
"알리샤, 아빠는 말이다, 반드시 정말로 내가 마음에 들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취미를 하나 생각해 내었단다."
딸은, 무엇일까 하고 탐색하듯 그를 올려다 보았다. 카스피안은 그런 딸을 내려다 보았다. 카스피안은 그런 딸을 내려다 보았다.
"너에게 개미 사육 상자를 주마."
"개미 농장 ? " 캐롤이 자신도 모르게 끼어들었다. "당신 지금 제정신이에요 ? 아예 독거미 농장을 주지 그래요. 아니면 벼룩 농장을 차려 주던지." 캐롤은 허리에 양손을 얹었다. "개미농장 따위는 정말로 싫어요. 분명히 망가져서 개미가 슬금슬금 나한테 기어올라올 거예요."
"망가지지 않아. 멋지다구. 알리샤는 완전한 소문명 세계의 구조를 관찰 할 수 있어."
이번에는 알리샤가 어머니의 모습과 똑같이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나는 개미 농장하고 독거미 농장, 양쪽 다 좋아"
"안돼, 줄 수 없어." 캐롤은 그리고는 카스피안에게로 몸을 돌리고서 "개미 농장이라구요 ? 어떻게 그런 미치광이같은 짓을. 아예 풍뎅이 호텔로 하면 어때요 ? 그렇게 하면 풍뎅이는 이 근처의 잎사귀를 전부 먹이로 쓸 수 있을 텐데."
알리샤는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아빠, 괜찮지 ? 풍뎅이의 호텔을 줄 거지 ? 내가 돌볼께. 약속 할께. 여러가지 풍뎅이가 좋아. 테이블 위에서 풍뎅이를 경주시킬 거라구."
"그것 보라구요." 캐롤은 카스피안을 힐끗 노려보았다. "테이블 위에서 풍뎅이의 경주라잖아요. 음식물 안에도 들어갈 것이고 지치면 함께 침대에라도 기어들어갈 거예요."
"풍뎅이를 기른다고는 말하지 않았어. 나는 다만..."
"개미 농장이 좋아." 알리샤는 애원했다. 손뼉을 치면서 아버지의 주위를 깡총거렸다. "아빠, 아빠, 부탁이야. 개미 농장이 제일 좋아 ! "
"엄마가 안 된다잖니."
"아이, 엄마 -------"
"절대로 안 돼. 전에 거북이를 주었더니 냉장고 뒤에서 죽었잖아."
"매일 먹이를 줄께." 알리샤는 자신의 땅을 굳히는 것 처럼 작은 원을 그리면서 행진했다.
"매일 물도 주고 책도 읽어 주고, 성 교육도 시켜 줄 거라구."
"뒷마당의 움푹한 곳에 개미집이 있어. 거기에 있는 개미에게도 성 교육을 시킬 수 있잖아."
"하지만 그건 방에 있는 것과 다르잖아." 하고 배를 쑥 내밀면서 알리샤가 말했다.
"이것 보라구요. 이렇게 되잖아요." 캐롤은 카스피안을 향해서 말했다. "당신은 자식 교육을 어떻게 시켜야한다고 배웠나요 여보 ? 곤충의 필드 가이드 ? " 캐롤은 알리샤의 손을 양손으로 잡고서 온화하게 말을 걸었다. "얄리샤, 엄마의 방에 들어가서 말이다. 엄마의 지갑에서 1달러 가져도 좋아."
"2달러는 안돼 ? " 하고 알리샤가 말했다.
"좋아, 2달러라. 하지만 두번 다시 개미 농장 얘기는 안 된다 얘야. 엄마는 소름이 끼치니까, 알았니 ? "
"응." 알리샤는 대답했고 아버지에게 공모자의 눈길을 힐끗 보내고는 걸어갔다. 이 일은 좀더 때가 좋을 때에 또 얘기하자는 식으로. "미안하지만." 클레스웰이 정원의 건너편으로부터 말을 걸었다.
"자네에게는 <스타 로바>쪽이 어울린다는 방향으로 생각하기에 이르렀어. 자네에게 리얼한 역을 써 보았는데 자네는 오히려 화성행 로케트를 조종하는 편이 좋다는 생각이 드는구만."
"나는 전에 한 번 화성에 간 꿈을 꾼 일이 있어요." 캐롤이 말했다. "괜찮아, 변명해 주지 않아도." 하고 클레스웰이 말했다.
"아카데미상 수상식의 만찬회에서 작가들이 어떤 좌석에 앉혀지는지 알고 있어 ? 단상에서 제일 먼저 작가들만 있는 테이블이지, 주방 옆의."
"요리가 식기 전에 먹을 수 있도록 말이지 ? " 하고 카스피안이 응수했다.
클레스웰은 콤퓨터의 스크린을 가리켰다. "독일의 남작 부인과의 섹스 신이 필요해 ? "
"아니요." 캐롤이 말했다. "필요하지 않아요. 영화의 섹스 신은 너무나도 노골적이라는 것이 우리의 의견이에요." 무릎 보호대를 대고 기면서 조금씩 앞으로 전진했다.
"내 취향에 맞는 여배우로 해 주게나." 하고 카스피안은 말했다.
"섹스에는 항상 취향이 있지." 클레스웰은 콤퓨터의 <삽입>키를 눌렀다.
"섹스 신 따위를 삽입하면 식사는 없는 줄 아세요." 하고 캐롤이 말했다.
클레스웰은 <삽입>을 취소했다.
카스피안은 배나무 묘목을 들어서 정원의 구석으로 가지고 갔고 뿌리를 다듬고는 지면에 판 구멍에 넣었다.
"잘 자라거라." 하고 말하면서 뿌리 주위에 흙을 토닥거렸다.
"잘 자라서 쥬스가 듬뿍 나오는 배가 되렴."
배나무를 상대로 말을 계속했다. 우선은, 너는 정말로 멋지구나 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수액, 꽃술, 꽃받침, 화관, 잎의 변태 등 학습한 이것저것을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렇게 하는 것도, 식물은 식물학자에게 뒤지지 않는 세련된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점잖은 말투를 기뻐한다는 신념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신념하에 밀폐되고 방수처리를 한, 중간뜰 전체에 울려퍼질 것 같은 스피커를 부착해서 그의 식물들에게 세레나데를 들려 주었다. 그들은 인도인인 대나무 피리의 명인 사크데브가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그의 소유지인 건너편의 밀림이 우거진 계곡에서는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자신들의 구역으로 넘어온 한 마리의 올빼미때문에 그 주일 내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오크 나무의 꼭대기에 커다란 머리 부분과 꼽추처럼 볼록한 날개가 보이고 새들은 그 상공을 선회하고 했다. 그 울음소리는 우리의 구역에서 꺼져 버리라고 집요하게 추구했다. 카스피안은 이웃 소유지의 땅으로 힐끗 눈길을 돌렸다. 옆집 사람이 바깥으로 나와 있다. 옆집 사람은 카스피안이 손을 흔든 것에 응하여 담가에서 만났다.
"어젯밤에 경찰이 질문하는 것이 들렸나요 ? 저쪽에 사냥감이 있었다구요." 이웃은 대나무로 만든 갈퀴의 손잡이 끝으로 산쪽방향을 가리켰다. "녀석들은 산양을 붙잡아서 피의 제물로 바치고 있었다는군요." 파이프에 불을 붙이고서 깊은 생각에 잠긴 듯이 연기를 내뿜었다." 이상한 시대에요, 정말이지."
카스피안은 그것에 대해서 간신히 대답을 하고 말을 계속했으나 눈은 올빼미에게로 되돌아가 있었다. 이웃은 말하고 있다. 하지만 카스피안은 유년 시절에 체험한 그 에테르 냄새를 맡았을 때와 같은 황홀 상태를 떠올리면서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상상에 빠져들고 있었다. 세계가, 가족이나 교사가 부가한 의미를 상실한 공허한 유년 시절. 태양이 그 공허함 속에 적의 있는 눈처럼 느껴졌고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은 자신 뿐이었던 그 시절.
이웃이 또 다시 갈퀴를 쓰기 시작했으므로 카스피안은 시냇물까지 걸어가서 그곳을 건넜다. 발소리를 들은 올빼미는 계곡의 고요 속으로 날개를 펄턱이면서 날라갔다. 카스피안은 그 행방을 지켜 았다. 새들이 요란스럽게 울면서 뒤를 따른다.
이윽고, 그 높은 울음소리는 날아가는 올빼미와 함께 산의 저쪽 편으로 사라졌다. 걷다 보니 승마길과 만났다. 잘 다듬어진 가는 흙먼지 위에 새겨진 말발굽 흔적을 따라서 산맥으로 들어섰다. 주위의 공기는 명료하게 변화했다.
인간에게 적대하는 것의 정기가 느껴졌다. 코요테, 방울뱀. 대기 그 자체마저가 사람을 무너뜨릴 정도로 덥다. 그럴 마음이 있다면 산양을 제물로 바치는 장소는 이곳일 것이다. 높은 학산성의 산들은 대지의 신비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카스피안은 험난한 바위의 영감을 느꼈다. 그들은 산 제물을 바치는 광신자들이나 코요테나 영화 스타들의 발소리는 물론이거니와 그들 바위에 관련된 절실한 사상-----산의 밑바닥에서 잠자는 불, 용암의 흐름, 불온한 핵-
---에게 조차도 무관심했다.
더욱 승마길을 계속해서 걸었다. 원만한 커브길의 유혹을 받아서 수풀더미나 약간의 오크의 낮은 나무가 채색하고 있는 계곡의 중심부의 공지에 발을 들여 놓았다.
햇빛에 구워진 점토로부터 열파가 천천히 피어올라서 대기를 흔들고 있다. 그러나, 한 방의 총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서 옆을 돌아다 보았다. 검은 옷을 입은 그림자가 그와 나란히 걷고 있었다. 잘 닦여진 군용 장화가 빛났으며 담배를 들은 손이 쉬지 않고 흔들리고 있다.

"그곳 창녀관의 즐거움은 끝내주지. 내 여자는 아직 열두살이라고. 나를 변태라구 생각 해 ? "
또 다시 울린 총성에 열파는 심하게 흔들렸으며 그림자는 사라졌다. 카스피안은 건조한 지면을 내려다 보았다. 온 몸이 땀투성이며 관자놀이가 맥박치고 있다. 몇 걸음 뒷걸음치고는 공지를 나서서 그늘진 승마길로 되돌아갔다. 카스피안은 떠올렸다. 어린 시절에 꾸었던 꿈속의 연기를 내뿜는 묘지의 일을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로 지나쳐서는 안 되는 그 문을.
승마로를 따라서 계곡에 모여 있는 집들이 보이는 곳에 이르렀다. 어린 시절에도 이런 식으로 우울한 심정을 품고서 집으로 뛰어 돌아가곤 했었다.
시냇물을 건너서 집의 뒷문까지 언덕을 올라갔다. 뒷마당에 인기척은 없고 잎사귀 사이에서 벌레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저택은 말이 없었고 든든하게 서 있었다. 그것은 확고한 현실의 덩어리였다. 테라스의 문이 열리면서 캐롤이 나왔다.
"에드 클레스웰이 방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점심을 먹더니 괜찮아진 것 같아요."
카스피안은 저택으로 들어갔고 어슴프레하면서 선선한 거실로 들어갔다. 클레스웰은 원고를 놓고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만둬." 카스피안은 앞으로 나서면서 말했다. "그만 두라구------"
"누군가, 자네는 ? 공중위생국의 의무장관인가 ? "
"아냐... 자네가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보여서." 카스피안은 할말을 잃었다. 담배를 집은 에드 클레스웰이 바로 지금 그와 나란히 계곡을 걷고 있던 인물로 보였기 때문이다.

캐롤은 침대 옆 안락의자에 앉아서 독서를 하고 있었다. 책의 페이지와 라벤더 색상의 네글리제에 램프의 부드러운 불을 받아서 꼬은 다리의 한쪽을 무릎 부분부터 침착성 없이 흔들고 있다.
"지금 사페이지째를 읽고 있는데 말이에요, 벌써 여자 세 사람과 남자 두 사람이, 그리고 개가 한 마리가 등장했다구요." 카스피안은 <스타 로바>의 대본을 무릎에 놓고서 침대에 누워 있었다. 대사를 암송할 때마다 입술이 움직였다. 캐롤이 서둘러서 갈 수가 없어요. 나는 이런 추잡한 생각을 문자로 만든 녀석의 두배의 나이니까요."
카스피안은 계속해서 읽었다. 대본은 뚝뚝 끊어진 매정한 대사의 나열이었으나 불안스러운 졸작은 아니었다.
"그저 그렇군."
캐롤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나가서 결말을 읽고 있었다. "법인은 개인 센트버드너였어요." 무릎 위에서 책을 닫았다.
"뭐라고 그랬어요, 여보 ? "
"수준급이기는 한데." 하고 나이트 테이블 위에 대본을 대수롭지 않게 던지고는, "어차피 영화 회사는 쓸모 없이 만들어 버릴 걸 뭘."
"그렇게 우울해지지 말아요." 캐롤은 나란히 누웠다. "당신의 고민의 씨앗은, 당신의 일에서는 당신 자신이 제품이라는 것이군요." 캐롤은 네글리제의 스트랩을 내렸다. "자아, 그럼 내가 어떤 곳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일을 가르쳐 드리죠."

산 속에서 신경질적인 첫 번째 소리가 들렸고, 코요테의 일단은 산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카스피안은 창가에 서서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달은 계곡 위로 얼굴을 내밀었고, 은색으로 물들은 식물군이 묘목을 비추는 월광에 응답하며 빛나고 있다. 코요테가 다가옴에 따라서 절박한 포효 소리가 커졌다. 부근의 개들이 일제히 길고 높은 목소리로 짖기 시작했다. 소요가 점차 고조되는 속에서 카스피안은 코요테의 습격이 개시되는 것을 들었다.
바깥을 보니 그의 고양이가 은색의 식물 사이를 발소리도 없이 지나가고 있다. 귀를 쫑긋 세우고 꼬랑지를 꿈틀거리면서 선인장의 가시 사이로 모습을 감추었다.
커튼을 열어 젖히고는 달빛이 빛나는 하늘에 뚜렷하게 떠오르는 계곡의 정상의 녹색을 올려다 보았다. 코요테의 무리가 산의 정상을 향해서 올라 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만찬을 끝내면 일출까지 차례차례로 계곡을 헤맬 것이다.
커튼을 닫고서 침대로 되돌아왔다.
방은 그의 방이 아니었다.
눈 앞의 벽은 맨바닥의 회반죽으로서 금이 가있다. 전구가 하나, 천장으로부터 매달려 있었고 여자가 피우는 담배 연기가 피어 올라서 그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여자의 목소리는 공허했다. 그녀의 몸은 방과 마찬가지로 월광에 비추어진 물질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똑같은 물질 속에 카스피안은 본의 아니게 사로 잡혀 있었다.
"내 옷가방은 저기 구석에 있어요." 여자는 다 떨어진 가방을 가리켰고 흩으러진 채로 있는 침대에서 허리를 돌려서 재빨리 다리를 내딛었다. 은색의 네글리제가 시트 위를 미끌어져 희미한, 아무렇게나 소리를 냈다.
"알았으니까 간지럽히지 말라구. 목에 로프를 걸고 싶어 ? " 자신의 목소리가 낯설었으며 행동도 불가해했다. 그런 주제에 자신의 다른 부분은 지금 있는 곳이 어떤 건물인지 알고 있었다.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나야만 하는 이유도 알고 있었다. 어두운 복도로 나왔다. 계단의 난간은 부서져 있었으며 계단 그 자체는 비틀어지고 어두웠다.
거리는 밤도 깊어져서 여자로서는 여유를 부릴 시간은 없었다.
그의 마음의 상극은 복도를 더듬는 몸의 어색한 행동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거리를 접한 창문에 도달했다.
검은 메르세데스가 보도의 경계선에 다가서며 멈추고 있었다. 검은 외투 모습의 남자가 둘, 밤공기에 하얀 입김을 내뿜으면서 내렸다. 카스피안은 서둘러서 방으로 되돌아갔고 문을 재빨리 열고는 뛰어들었다.
"녀석들이 왔어 ! "
"누가요 ? "
캐롤이 시트로 가슴을 가리면서 상반신을 일으켰다. 카스피안은 재빨리 몸을 움추리고서 금이 간 벽과 메달린 전구를 찾았다.
"오줌이나 누고 올까." 캐롤은 졸린 듯한 한숨을 쉬고 침대에서 뒤척거리며 나와서는 카스피안의 옆을 바스락거리며 빠져나갔다.

"한 유예를 주는 거야." 비젤은 한 호흡 사이를 두고 두려운 나머지 아연실색해 있는 학자를 쳐다보았다. "네가 좀 더 용의 주도하지 않았던 것은 유감이야."
교수는 스르르 의자에 주저앉았다.
"난 아무 것도 하지 않았소."
"그건 틀리지 교수." 비젤은 와인이 방치되어 있는 테이블로 다가갔다. 병을 들어 라벨을 불빛에 비쳤다. "빈테지 루이 레데라"




제5장   거울 속의 연인



자동차를 달려서 비버리 힐즈의 심장부를 통과해 왼쪽으로 꺽어져서 엘 카미노 스트리트로 들어섰다. 동으로 세운 높은 문을 지나서 비버리 윌셔 호텔의 옥석을 깔은 앞뜰에 차를 넣었다. 앞뜰의 경계선에는 배나무와 가스등이 나란히 서 있었으며 하얀 장갑을 낀 아시아인이 그의 차를 맞이했고 지하 주차장에 주차하러 간 사이에 도어맨이 호텔로 안내했다.
두터운 카페트를 깔은 복도가 물건에 가격표를 붙이지 않은 상점 사이를 지나가고 있다. 한편에는 영국풍의 맞춤 양복점. 한편에는 명나라 도자기를 전시한 상점. 남미인 부부가 이쪽으로 다가온다. 카스피안은 그들의 목장의 소, 말, 그리고 목욕탕의 순금의 비품을 느낄 수가 있었다.
루이 16세풍의 샹데리아 밑을 지나서 라 베라 폰타나로 들어 갔다. 급사장이 이 폰페이풍의 작은 동굴을 지탱하고 있는, 가로로 홈이 파진 기둥사이를 누비고서 마일론 피쉬의 테이블로 안내했다. 빅터 콰트렐과 마일론의 최초의 아내이며 현재는 영화 회사의 중역인 페이 로퍼가 동석하고 있었다.
25년 전, 페이 로퍼가 젊고 아름다운 여배우였던 무렵에 그녀와 마일론과의 부부싸움은 늘 사람들의 화제거리였었다. 그녀는 마일론의 재규어를 타고서 풀장으로 돌진한 일도 있었다. 지금은 성격도 원만해졌고 머리를 애쉬 브론드로 물들이고 있지만 그 색조가 한없이 백발에 가까우므로 그다지 젊게 보이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손은 아직도 매력적이며 예쁜 장신구를 달아서 그 매력을 능숙하게 이용하고 있었다. 야한 수공품이지만 싸구려는 아니다. 지금도 블라우스에 커다란 플라스틱 제품인 야자수 나무의 블로치를 달고 있다. 페이는 카스피안을 찬찬히 관찰했다.
"눈이 충혈되어 있군요. 푹 쉬지 못했나봐요 ? "
"건강해요."
"잠깐만요 마일론. 이사람, 충분히 휴식할 수 있나요 ? "
"내 명령으로 매일 밤 9시가 되면 고무 망치로 한방 얻어맞는다구." 마일론은 메뉴를 드려다 보고는 콰트렐을 향하여, "자네는 과일 샐러드로 하는 편이 좋을 거야." 하고 말했다. 콰트렐은 큰북 같은 배를 툭툭 두르렸다. "내 몸은 지방을 증식하도록 만들어져 있어." 하고 말하고는 꿩 고기를 주문했다.
"데이빗, 자네는 ? "
"나는 이제 곧 몸에 딱 맞는 우주복을 입어야 하니까." 카스피안은 웨이터를 보고서, "과일 샐러드." 하고 주문했다.
레스토랑의 중앙에서는 천사가 꼭대기에 달려 있는 3단짜리 분수가 부글부글 거품을 내고 있었다. 요리가 오자 마일론 여전히 전처와 가볍게 얘기를 주고 받으면서 호스트 역할을 했다.
"함께 일을 하게 되서 말이지, 부부였을 때에는 얻을 수 없었던 것을 얻을 수 있게 되었어. 그건, 약속의 메모지. 그곳에 모든 일을 확실하게 적어 놓기로 하고 있지."
"스튜디오는 말이죠, 마일론과 교섭할 수 있는 것은 나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구요. 나는 이 사람의 술수를 읽을 줄 아니까요."
"내 눈을 보면 알 수 있지." 마일론이 말했다. "나는 믿을 수가 있다구."
"네, 맞아요. 그렇다구요 달링. 당신은 래블러들 리틀리버처럼 충실해요."
햇빛이 벨기에 레이스의 커튼을 투과하여 들어왔다. 객실에서 손님을 접대하고 있는 이탈리아 백작 같은 옷차림의 급사장은 지나가면서 요리의 상세한 이모저모를 지도하며 지나갔다. 천사가 거품을 일으키는 물줄기 속에서 지켜보고 있다. 카스피안은 몰래 요리를 입가로 가져갔고, 주위 사람들의 버릇을 흡수하고 느끼고 분석 정리하여 머리 속에 넣었다. 말하고 있는 인물의 손놀림은 그 인물이 인생이라는 희극에 있어서 스스로 할당한 역할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바지를 입는 방법 하나를 가지고서 그 인물의 패배, 우울, 절망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카스피안은 마음속에 가공의 호텔을 짓고 있었다. 방이 여러개 있고 그 방 안에 그가 창조한 인물이 있다. 젊은 인간, 늙은 인간, 모든 종류의 인간이, 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는 반드시 의상이나 표정 등의 약간의 소도구를 첨부시킨다. 그들은 그 호텔에 상주하며 식사를 하거나 음모를 계획하거나 대기하거나 꿈을 꾸거나 한다. 그는 이 기억의 호텔에 몇 십년 동안에 관찰한 사항을 저축한다. 그것들은 주의깊게 도장을 찍은 문의 저쪽편에 있으며 이용당하길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난 또 다시 알란 모데스트를 술주정뱅이용 감방에서 보석을 시켜 주었지." 콰트렐이 말했다. "그 성가신 친구, 한밤중에 해변에서 용상어를 껴안고 있다가 발견되었다더군."
"좋은 배운데." 페이가 말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웬지 스위스 치즈의 구멍에서 말하고 있는 것 같잖아요 ? "
"하지만 충격적이야." 콰트렐이 말했다. "오늘의 스타가 내일에는 누군가의 메르세데스에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이 발각되다니 말이야. 하지만 한참 날릴 때의 그녀석은 한 번만 보고도 줄줄 대사를 외우는 천재였어."
마일론은 콰트렐과 카스피안의 손목에 손을 놓고는 가볍게 쥐었다. "자네들은 바람과 비를 견디면서 성공했지. 그것은 나 자신이 자네들에게 역할의 모범을 보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군."
페이가 화제를 그녀와 마일론이 공동개발하고 있는 토지의 얘기로 바꾸었다. 카스피안은 귀를 기울이면서 페이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갑자기 자신은 그녀가 자기 자신의 일을 잘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그녀를 잘 알고 있다는 당치도 않은 생각에 사로잡혀 버렸다. 마치 그의 마음의 뒤편에 지난날에 페이, 다른 시대의 페이에 대한 아련한 인식이 숨겨져 있고, 그것이 갑자기 시계로 뛰쳐나왔다는 듯이. 더군다나 그녀에 대한 그 인식이라는 것은 강렬할 정도로까지 관능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그의 지각을 뚫고 지나가는 쾌감의 전율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그가 사교상 사귀고 있는 여성의 꿈을 꾸었을 때에 또한 발생하는 일이 있었다. 그런 꿈은 그와 그 여성의 사이를 깊은 관계로 유도했다. 그렇다면 페이의 꿈을 꾼 일이 있는가 ? 아무래도 있는 것 같은데 잘 생각나진 않는다. 다만 정열의 미련이 그녀를 감싸고 있는 것은 파악할 수 있었다.
디저트를 먹는 동안에 그녀는 마일론과 다음 주 후반에 저녁을 함께 할 약속을 했다. "6시예요." 하고 페이는 말했다. "내가 6시라고 말하면 6시예요."
"당신이 말하는 6시는 어떤 의미로도 해석이 가능하니까."
카스피안은 조금 전의 감정이 무엇인지 잘 파악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페이는 한때 그녀의 연인이었던 것 같았다. 지금도 그녀에 대한 색바랜 연정이 그림자를 숨기고 있었다. 페이가 그가 던지고 있는 눈길을 깨닫고는 말했다.
"어머나, 데이빗 ! 정말 다정하기도 하지."
카스피안은 얼굴이 빨갛게 되는 것을 느꼈다. 마일론이 재빨리 테이블로 몸을 수그렸다. "뭐가 상냥하다구 ? 내가 좀 다른 생각을 하느라구."
페이는 계산서을 가지고 오게 해서 작은 안경을 코끝에 걸쳤다. 꼼꼼하게 숫자를 확인한 후에 그것을 마일론에게 건넸다. 일동이 일어서려고 하자 페이는 카스피안의 팔을 붙잡고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옛날 같으면 농담으로 그쳤을 일이라도 지금이라면 어떻게 될지 몰라요."
"미안해요. 나는 다만------"
"괜찮아요, 사과하지 말아요 달링. 이 순간을 소중하게 마음에 품을 수 있께 해 줘요 ! "
일행은 함께 레스토랑을 나서서 긴 복도를 지나 옥석을 깔아 놓은 앞뜰로 나갔다. 카스피안의 마음에는 여전히 페이에 대한 당혹감이 있었다. 알게된 이래로 그녀의 일을 성애의 대상으로 생각했던 일은 한 번도 없다. 그런데 오늘이라는 날은 웬지 마치 지금 막 그녀의 침대에서 빠져나온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것을 천한 중년의 수상쩍은 성충동이라는 것일까------ ? 눈 앞에 앉아 있는 여성에게 상대로 불문하고 투사되는 예기치 못하는 성욕의 고양. 설령 그렇다고 한다면 그로서는 그러한 감정을 카메라 앞에서 표현할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으리라.
페이의 자동차가 다가왔고 하얀 장갑이 문을 열었다. 그녀는 팁을 주지 않는다. "안녕, 여러분 ! " 부드럽게 발진하여 떠났다. 손을 흔들면서 전송하는 마일론. "옛날에는 내가 뛰라고 하면 저여자는 언제 ? 얼마나 높게 ? 하고 물었지." 카스피안과 콰트렐 쪽을 돌아보았다. "도대체 어디에서 어긋났을까, 나는 ? 아, 내 차가 왔군." 마일론은 아끼는 자신의 재규어 자동차로 다가갔다. 오랜 옛날, 페이가 그녀와 함께 풀장으로 뛰어든 자동차다. 마일론이 올라타자 주차 계원이 문을 닫았다. "예의 격언을 기억해 두라구." 기어를 넣었다. "이곳에 들어오는 차는 취향을 버려라 ! "
마일론은 카스피안과 콰트렐을 차도에 남겨 놓고 떠났다. 그러자 곧 이어서 콰트렐의 자동차가 경사로에 코끝을 나타냈다.
"지금부터 <에드워드 상점>까지 한바탕 달릴 거라구. " 콰트렐이 말했다. "함께 가지 않겠나 ? " 카스피안이 타자 콰트렐은 대형차를 출발시켜 로데오 드라이브를 달렸고, 어떤 남성복 가게 앞에까지 오자 보도에 3피트를 걸치고 주차했다. 하이테크조의 메탈 마네킹이 숨겨진 달에 비추어져서 은은하게 빛나는 메탈릭 비스의 무리를 배경으로 쇼윈도를 장식하고 있다. 문에서 흘러나오는 전자 음악이 우주의 에코와 여운을 떠돌게 하고 있다. "별것 아니야, 단순한 개인 상점이야." 문을 향해서 걸으면서 콰트렐이 말했다.
가게 안에 있던 에드워드가 양팔을 벌리며 내밀었다. "어서오세요 여러분..." 카스피안은 그가 한때 사교춤의 교사를 했었고 이룸바의 레슨은 평생 유효하다고 선전하던 시절부터 알고 있었다.
"주문하신 선물 상품이 도착되어 있습니다."
에드워드는 콰트렐에게 보고하고서 앞에 서서 가게를 가로질러서 금속으로 만든 나선형 계단을 올라갔다. 사무실 앞까지 오자 은행의 금고실도 질릴 것 같은 두터운 문에 열쇠를 꽂았다.
"대단하군. 하지만 싫진 않아."
철문이 찰칵거리면서 등 뒤에서 닫히자 콰트렐이 자세를 바로하면서 말했다. 사무실 벽은 클롬으로 테두리가 쳐져 있었으며, 벽을 따라서 방을 감고 있는 하얀 아크릴로 만든 반케트로부터 간접조명이 은은한 불빛을 발하고 있었다. 미드나이트 블루의 쇼파와 쿠션이 그 빛에 물들어 있었다.
에드워드는 책상을 앞에 두고 앉고는 서랍의 열쇠를 열었다. 안에서 검은 옻칠을 한 상자를 꺼냈다. "소문에 의하면 두 분은 함께 영화를 만드실 거라면서요 ? "
"그래, 화성까지 잠깐 갔다가 올 거라구."
콰트렐은 자리에 앉고는 튀어나온 배가 벨트 주위에 잘 들어가도록 조정했다. 에드워드는 상자를 열고서 투명한 셀로판 봉지를 꺼냈다. 눈처럼 하얀 내용물이, 잘 닦여진 상자와 검정이 훌륭한 콘트라스트를 이루고 있다. "자아, 여러분의 로케트의 부스터."
에드워드는 콰트렐에게 봉지를 건넸고 그것과 동시에 콰트렐은 돈다발을 건넸다. 에드워드는 세어 보지도 않고 돈다발을 상자 속으로 미끌어뜨렸고 원상태로 서랍에 넣었다. 콰트렐은 미소지었다.
"마치 금고 속에 있는 것처럼 침착하군."
"은행의 금고실에서 살고 있으니 겁먹을 필요는 없겠죠." 에드워드는 일어서서 카스피안을 응시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데이빗 ? 긴 여행을 위해서 뭔가 하나 ? " "아니, 나는 됐네." 카스피안이 말했다. 에드워드는 한쪽 팔을 카스피안의 어깨로 돌렸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카스피안의 상의의 가슴 부분을 더듬었다. 월셔가 만져졌다.
"아니, 또 이 요란한 것을. 당신답지 않군요. 그런 거라면 좀더 눈에 뜨이지 않는 것이 있죠. 델린저에요. 지갑처럼 보이는 케이스에 들어 있다구요. 돈 내   ! 하면 지갑을 열고서 땅 ! 한방. 상대방을 날려 버리죠."
"전미 권총협회의 회의가 끝났다면------"
콰트렐은 작은 코카인용 스푼을 봉지 속에 넣고는 카스피안들에게 돌렸다. 카스피안은 상쾌한 가루를 들이마심과 동시에 예에 따라서 자신감이 체내에 가득 차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는 평상시처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연기이며 조명이며 전환하는 장소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의 경지에 달했다.
세 사람은 사무실에서 나왔다. 에드워드가 앞에 서서 발코니에 이어진, 클롬으로 만든 기둥 옆을 지나갔다. 카스피안들의 모습이 기둥에 비추어 비뚤어지거나 늘어나거나 하고 있다. 카스피안은 자신의 정신상태가 코카인 흡입자가 원하는 단계보다 더욱 다음단계로 굳혀지는 것을 느꼈다.
기둥에 비추는 에드워드의 얼굴이 흔들리고 카스피안은 자신의 내부에서 벽이 어긋나고 있음을 느꼈다. 지극한 사소한 일로서도 세상은 얼마든지 변화한다.
나는 특수 임무에 선발되었어, 라고 말하는 루스 숙모의 목소리.
카스피안은 발코니의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스타라는 것, 로데오 드라이브의 옷가게에서 코카인을 마신 것 정도로 환각 상태에 빠진다면 이름이 부끄럽다.
에드워드와 콰트렐을 따라서 나선형 계단을 내려와 1층에 도달했고, 나아가 가게의 뒤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신상품 소개가 있겠습니다." 에드워드가 말했다. "여러분, 이쪽입니다."
카스피안은 빨간 빌로드의 커튼 벽을 제쳤다. 무거운 옷감이 일순간 케이프처럼 어깨를 눌렀고 등 뒤로 미끌어 떨어지는 희미한 소리가 났다. 카스피안은 전방의 어둠 속으로 발을 들여 놓았다.
"불은 어디있지, 에드워드 ? "
"불 ? "
부서전 커다란 마분지 상자나 목이 없는 마네킹이 쌓여져서 먼지를 뒤집어 쓴 신발 상자가 가득한 방에 칙칙한 불빛의 전구 하나가 들어왔다. 주위는 축축했고 곰팡이 냄새가 났다.
그는 뒤돌아 보았다. 젖혀진 커튼 사이에 서 있던 사내가 커튼에서 손을 놓고서 카스피안에게로 다가왔다.
"우리 가게는 좀 지저분해서 말이야."
머리는 흩으러졌고 어딘지 모르게 겁에 질려서 주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망가진 마네킹을 밀치고서 낡고 일그러진 금고를 노출시켰다.
"스타킹을 사지 않겠나 ? 얼마든지 팔 수 있다구."
카스피안은 말을 하려고 했다. 자신이 발을 들여 놓은 그때까지와는 전혀 이질적인 현상의 흐름을 찾아내고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목덜미에서 희미하게 찰싹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사내는 독일어를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물론 란제리도 있지. 그것도 팔 수 있어."
목덜미에서 들린 소리는 그의 체내의 어딘가 부가해한 장소로 울렸고 간신히 그는 제정신으로 되돌아 왔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는 독일인이었다. 눈 앞에 있는 사내는 거래상대의 상인인 헬 하이스. 그는----펠릭스였다.
"여기에 대금이 들어 있어 펠릭스. 항상 신새를 지는군." 하이스는 돈다발이 들은 봉투를 건넸다.
이곳은 어디지 ? 펠릭스는 곰곰히 생각했다. 이 얼마나 이상한 꿈인가, 눈을 활짝 뜨고서 꿈을 꾸다니. "잠깐만 기다려 주게 하이스. 방금 전에 나는 당신과 함께 1천 마일이나 떨어진 곳에 있었어. 분명히 당신은 가게를 가지고 있었어. 하지만 모든 것이 번쩍거렸고 아주 새것이었다구."
하이스는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그래, 1천마일이라. 번쩍거리고 아주 새로운 가게를 가지려면 그정도는 떨어져 있어야 하겠지,
지금의 베를린은 어디를 가도 유황 폭탄이나 무너진 회반죽 같은 냄새가 나니까." 쌓아 올린 마분지 상자 사이를 앞서서 걸었다.
"그런데 스타킹은 어쩌지 ? 팔아 주겠나 ? "
"프랑스제라면. 대담한 디스플레이로 프로이센 훈공장을 달은 녀석 말이야." 봉투를 매끄럽게 웃저고리에 넣었다. "그건 좋지만 가격은 올랐어. 세상사란 점점 힘들어지기는 한다구. "
"알고 있어. 언제나 댁에 물건이 들어오면 나는 여기에 있을 테니까." 하이스는 뒷문을 열었다. 펠렉스는 가게 뒷편의 길로 나섰다. 큰길을 향해서 걷고 있었으나 그 직전에서 회색의 소프트 모자를 고쳐쓰고 지팡이를 의지하며 이미 연습이 끝난 한쪽 다리를 끄는 걸음걸이 방법을 시작했다.
주머니 속에는 위조된 징병 면제증과 그것에 맞춘 신분증명서, 경찰증명서, 운전면허증이 들어 있다. 이것 모두가 제복을 입고 있지 않은 자에게 쏠리는 혐의를 받아넘기기 위한 필수품이었다.
모두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지만 너무 오랫동안 한참 들여다 보거나 전문가에게 투명지나 착색료나 인감이나 서명을 조사받는다면-----
펠릭스는 생각했다----만일 그런 일을 당한다면 게쉬타포 본부에서 고문을 당하게 되리라.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하이스의 가게라던가 먼 외국에서 살고 있는 자신이라던가 하는 실로 기묘한 꿈이었다.
방금 전에 내린 비로 도로는 빛나고, 시원한 오후였다. 젖은 길가에 자신의 그림자가 비추어 가늘게 떨고 있다. 보는 자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는 그림자. 야매장사의 그림자. 지금은 전시중이므로 휠씬 불운한 일을 만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예를 들자면 보병연대의 군기교육대 같은 소대에 배치되어 신병 훈련에서는 소대 소속 병장에게 기합을 받거나, 총통이 베를린에서 국가 재산을 다 잡아 먹는 사이에 러시아의 어딘가에서 얼어붙어 있을 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런 처지보다는 십중팔구 게쉬타포의 허를 찌르는 편이 훨씬 났다. 담배 가게를 향하여 바젤라슈트라세를 건넜다. 철십자를 옆구리에 붙인 전차가 클루티우스슈트라세에 접근해 왔다. 주위에 늘어선 작은 광장을 접한 창문에도 문에도 <피의 깃발>이 걸려 있다. 상점에 들어가 신문을 구입했다. 이 가게의 차양막에도 보란 듯이 <피의 깃발>이 걸려 있었고, 나갈 때에는 고개를 수그려서 피해야만 했으나 그는 그만큼의 관심밖에 나타내지 않았다.
그대로 계속 걸어서 리히테르페르데 역을 지나쳤다. 창문에는 작은 깃발이 장식되어 있고, 애국심을 고양시키는 슬로건이 창문유리에 붙여져 있었다. 이제 곧 작은 깃발은 모두의 이마에 붙여지게 될 것이다.
전차의 노선을 따라서 모퉁이를 돌았다. 비젤이 자동차의 핸들에 기대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젤은 기어를 넣고서 이쪽으로 다가왔다. 펠릭스는 뛰어들었다. 눈 앞의 바이저에도 위조 문서가 붙여져 있다. 비젤이 특수 임무를 맡고 있는 게쉬타포 대원이라고 하는 증명서인 것이다. 하이틀리히 본인의 서명까지 있다. 화를 내는 척하면서 그 증명서를 코 앞에 들이밀면 경찰도 뒤도 돌아다 보지 않고 도망칠 것이다.
자신을 체포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되는 상대를 체포해서는 안된다는 금과 옥조에 따라서.
"하이스는 상품을 마음에 들어 하던가 ? "
"대단히 기뻐하더군." 펠릭스는 암시장의 담배에 불을 붙였다.
뒷좌석에는 시민 공급국의 위조 마크를 붙인, 그러나 사실은 내용은 프랑스제 내의나 꼬낙이나 사치품 상자가 쌓여져 있었다.
"물러가 자네를 만나고 싶다고 하더군." 하고 비젤이 말했다,
"카페에서. 앞으로 1시간 이내에 올 거야." 비젤의 용모는 날카로웠고, 동작에는 절도가 있고, 빈틈이 없고, 때로는 위협적이었다. 그는 펠릭스에게 체제 바깥에서 연명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자동차는 극장가로 들어섰다. 그곳의 주연 여우들이 그들의 고객인 것이다. "별걸 다 좋아하는군." 메트로폴 극장 옆의 보도 근처에 차를 대고는 펠릭스가 말했다. "프랑스제 란제리에 목숨을 걸다니 말이야."
"1시간마다 사람이 죽어 나자빠지고 있어." 비젤은 앞유리창 너머로 바깥으로 눈길을 돌렸다. 작고 냉정한 눈. 핸들 위에 가만히 올려 놓은 손에는 검은 가죽 장갑올 끼고 있다. 지나치는 사람들은 가끔 그의 시선과 마주치면 눈길을 돌렸다.
펠릭스는 상자 하나를 내리고 지팡이에 팔을 기대고서 분장실로 가지고 갔으며 마중나온 나이 지긋한 수위에게 건네 주었다.
"이것으로 쇼는 무사하겠군."
"출연료가 싸다고 투덜거리고 있지만 말입니다." 수위는 윙크해 보였고, "하지만 멋진 팬티가 있어야죠." 펠릭스에게 돈이 들은 두터운 봉투를 건넸다. "플로이라인 셔페르즈가 당신을 만나고 싶다더군요."
펠릭스는 언젠가 본 기억이 있는 분장실 복도의 어둠 속을 지나고 있었다. 전쟁 전에 건들거리던 시절, 그 자신이 이곳에서 대사가 불과 한, 두 마디인가의 단역에 출연했던 일이 있다. 그밖에 노이바벨스베르크에 있던 UFA의 촬영소에서도 비슷한 단역으로 영화에 출연했었다. <파라오의 연인들> 속의 군중 장면에 펠릭스 팔켄하인의 얼굴은 남들에게 알려지는 일 없이 남아 있다. 지금, 무대 뒤의 으스름한 어둠은 그곳에 살고 있는 정착자의 얼굴로 그를 맞이해 주었다. 당시의 몇몇 대사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분장실의 문을 노크하고서 안으로 들어가자 조명이 달린 거울에 비친 여자의 얼굴이 그를 맞이했다. "왜 지팡이 따위에 의지하고 있지 ? 복숭아뼈라도 다쳤나 ? "
"이번 주의 무대 의상에요. 관절의 상태가 나쁜 병역 면제의 폐병장 역할이죠."
"그럼 지난 주는 뭐였는데 ? "
"지난 주에는 말예요, 남들에게 곧바로 감염되는 전염병에 걸린 외국인 노동자. 경찰은 서류를 보는 즉시 당황해서 돌려 준다구."
"정말 질이 나쁜 사람이군." 플로이라인 셔페르즈는 분을 뺨에 톡톡 두르리면서 거울을 향했다.
"나는 평화주의자에요 사랑스러운 자기 ! " 목덜미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 "나는 근대전을 믿지 않아."
"언제가 되어야 우리의 레뷰로 돌아와 줄 건가 펠릭스 ? " 플로이라인 셔페르즈는 자신의 애쉬 브론드빛 머리를 가볍게 어루만졌다. 머리의 뿌리 부분에 하얀 부분이 보이고 있었고, 이제 슬슬 염색을 해야 되지만 염색약은 내의와 마찬가지로 쉽게 손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후드라이트 너머로 보는 그녀는 스타일도 아직 꽤나 아름다워 늙음을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펠릭스는 윗도리의 안쪽 주머니에서 파란색의 얇은 스타킹을 꺼냈다.
"자아, 조직으로부터의 선물."
펠릭스는 한때 그녀가 이끄는 레퍼터리 극단에 시간제로 애인이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얇은 스타킹에 손을 넣고 조명을 향해서 황홀하게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언젠가 다른 시간, 어딘가 다른 장소에서 다른 사람인 플로이라인 셔페르즈와 알고 지내던 것 같은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두사람은 계속 친구이며 일의 동료라고 말하기라도 하듯. 그곳은 열대의 야자수 그늘이었다.
"당신을 바라보면서 나는 꿈을 꾸고 있어요."
셔페르즈는 가운 앞을 열고 보기 좋은 매끄러운 다리에 스타킹을 신었다. 레이스의 가티에 스타킹 끝을 채우면서 펠릭스를 올려다 보았다.
"정말로 돌아와 주길 바래. 왜냐 하면 주역을 맡을 수 있는 남자 배우가 부족하니까."
"지금의 나는 실업가인걸."
"무대에 서면 다른 사람이 되지. 절대로 당신에게 실업가의 역할 따위는 맡기지 않아."
"내가 장사를 하지 않으면 당신은 군용 팬티로 참아야만 할 텐데 ? "
"그래도 오길 바래." 그녀는 또 다시 손을 머리로 가지고 갔다. 싸구려 인조 보석의 반지를 끼고 있었다. 펠릭스는 그녀의 손을 응시했다. 뿌리가 하얀 머리와 마찬가지로 손은 그녀의 숨겨진 연령을 말해주고 있었으나 그것조차도 무대 조명하에서 변모했고 그녀는 전쟁터에서 전쟁터로 이동하는 병사들의 연인을 계속 담당해 왔던 것이다. 만약 베를린이 벽돌 부스러기의 마을로 변한다 하더라도 그녀는 잿더미 속에서 계속 노래할 것이다.
"나도 장사를 할걸 그랬어" 하고 그녀는 말하면서 아이라이너를 넣었고 카본을 사용하는 무대 조명의 파란 불빛에 비추듯 눈가에 분을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나는 좋은 여자 실업가가 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 적어도 당신과 비슷한 정도로는 ? "
의자에 깊숙히 고쳐 앉고는 등줄기를 피고 화장 효과를 검토한 후에 또 다시 거울에 얼굴을 접근시켰다.
"이제 다리를 들어올리는데 질렸어. 누군가가 공장을 경영하고 있는 파시스트라도 없을까 ? 돈을 불리는 일을 돕고 싶어. 그런 사람 몰라 ? "
"친숙한 기병대의 대위님들에게 붙어 있어 보라구요."
"하지만 그 친구들은 장화를 신은 채 침대에 들어가고 싶어한다구. 나는 잠옷을 입은 품위있는 아저씨가 좋거든."
펠릭스는 그녀를 응시했다.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감각이 또 다시 되살아났다. 시간과 장소가 멀리 떨어진 어딘가에서 알고 있는 셔페르즈. 그곳에서 그녀는 여자 실업가였다. 그는 열대 풍경에 둘러싸여서 그녀와 저녁 식사를 함께 했던 일이 있고, 분수 속에서는 천사가 춤추고 있었다.
"이 극장은 환각을 일으키게 하는군요. 상당히 많은 풍경이 아직 사라지지 않고 머물고 있어."
"옛날의 추억이----" 그녀의 손이 펠릭스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이젠 가야겠어요."
"그래, 가서 란제리를 팔고 다니라구----!" 셔페르즈는 손을 놓았고 또 다시 거울을 향했다. 펠릭스는 자신의 당돌함을 후회했다. "기다리게 하면 난처한 손님도 있어서 말예요. 미안해요 ! "
"당하지 말아요." 마스카라를 칠하면서 말했다.
펠릭스는 셔페르즈의 양 어깨에 손을 놓았다. 이사람도 저사람도 이웃을 스파이하고 있는 와중에서 그녀는 충실했다.
"당신의 극장에 있으면 나는 안심이 돼." 귓가에 입술을 가져가면서 말했다. "하지만 가야만 해."
"귀여운 악마 ! " 다른 한쪽의 속눈썹을 붙히고서 거울 속에서 눈을 깜빡거리며 기분 좋게 펠릭스를 향했다. 문 쪽으로 뒷걸음치는 떠나가는 것을 거울 속에서 쫓았다. 펠릭스는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고 살짝 닫았다.
분장실의 복도를 따라서 인기척이 없는 극장의 무대 옆까지 오자 발걸음을 멈추고, 그 마력을 가슴 가득 들이마셨다. 넓은 스테이지로 올라가서 안쪽의 어두운 무대 배경으로 다가갔다. 아마도 그에게는 천분은 있었을 것이리라. 하지만 전시하에서 병역 면제가 될 정도의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극장을 나서서 비젤의 옆자리에 앉았고 대쉬보드에 봉투에 들은 돈을 툭 던져 올렸다. 목숨을 걸은 것에 비하면 소액에 불과했으나 그도 비젤도 여자배우를 좋아했고 그리고 막상 위태로울 때에는 은닉할 수 있다는 생각도 있었다.
"셔페르즈 양을 만나고 왔어."
"그 늙은이를, 왜 ? "
"옛날에 그녀에게 들은 말이 있지, 나의 연기에는 정열이 없다구." 펠릭스는 비젤의 얼굴을 보았다. "나의 신체에는 심장 대신에 컷트 글라스가 들어 있다더군."
"자네가 연극을 하고 있는 것을 본 일이 없어서 말이야." 비젤은 자동차를 큰길로 향해서 몰았다.
펠릭스는 소프트 모자를 약간 비스듬히 쓰고서 모자챙의 그림자로부터 눈을 뜨고 유창한 영어로 노래했다.
"사실은 시저의 망령이 내 앞에 나타났네 . 한밤중에 , 두번씩이나(섹스피어작(섹스피어작 [줄리어스 시저] 제5막 제5장)."
비젤은 자동차의 흐름을 따라서 신중하게 운전했다. 쓸데없는 주의를 끌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사태가 성가시게 되면 클럽 콘퍼먼트에는 권총이 들어 있고, 좌석 밑에는 월셔 P-38을 숨겨두고 있었다.
"정열이라면 있지, 제기랄 ! " 펠릭스가 말했다. "그 여자는 당치도 않은 얘기를 하고 있어."
"유능한 하인이 되기 위한 사제 생활은 길지. 자네로서는 그녀가 마음에 들어하는 포지션올 잘 파악할 수 없었겠지."
"그녀가 마음에 들어하는 장소라는 것은 은행의 출납 장소에서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일일 거야."
비젤은 끊임 없이 사이드 밀러, 백밀러, 노상으로 규칙바르게 시선올 움직이고 있었다. "곤돌프는 지금 새로운 증명서를 만들어 주고 있는 도중이야. 뭐라더라, <베를린 방위 지령서>라는 것의 사본을 말이야. 그것을 휴대하고 있는 자에게는 당과 경찰과 게쉬타포의 협력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군."
"어린 시절에," 하고 펠릭스는 옆 유리로 바깥을 응시하면서 "나는 잠자리에 미쳐 있었지. 잠자리의 날개만큼 델리케이트한 것은 없어. 그 훌륭한 홀쭉한 곤충이----" 하고 한손으로 손짓을 했다.
"여름의 햇빛을 받으면서 이렇게 하늘에 떠 있을 때의 모습이란 정말이지----"
"나는 부모에 의해 기독교인으로 자랐지." 하고 비젤은 말했다.
"군대든 제국이든 잠자리의 완벽함에는 도저히 미치지 못하지. 이건 대단한 진실이라구, 비젤."
"프린츠 아르블레히트슈트랏세의 게쉬타포 본부는 새로운 장치를 도입했지. 페니스에서 아누스에 걸쳐서 전류를 흘르게 하지. 이쪽이 더 대단한 진실이야."
펠릭스는 모자를 갑자기 뒤로 젖히고는 단정하고 높은 이마를 노출시켰다. "아주 작은, 그건 아주 작은 날개 소리를 내면서 날개를 펄럭이면서 연못 위에서 멈추어서 나른다구."
"밀라노에 있는 게쉬타포의 대장은 빗자루 손잡이를 직장에다가 처박는다는군." 비젤은 모츠슈트라세로 회전했다. 캬바레나 댄스바나 카페가 즐비한 그 부분의 거리는 지저분하고 더럽다. 비젤은 상당히 앞까지 자동차를 전진시킨 후에 보도 가까이에 정차시켰다.
"잊지 말고 뮬러에게 가라구, 이쪽에게 2천마르크의 빛이 있다구 말이야."
펠릭스는 권총을 주머니에, 지팡이를 손에 들고 자동차에서 내려 어떤 캬바레의 입구까지 끌면서 걸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서 주위를 힐끗 둘러보았다. 이곳에도 (피의 깃발)이 걸려 있었고 피아노 위에 스와스티카가 내려와 있다. 테이블은 전부 비어 있으며 한 군데만 육군 장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흡사 여유가 있는 쾌활한 것 같은 사내로서 둥글둥글한 배가 테이블 위에 올라가 있다. 가슴에 즐비하게 이어진 훈장으로 미루어보아 제1차 대전의 전사인 것 같았다. 당원 순열 번호는 낮았다. 두 사람은 몇 년인가 전에 빈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빛나는 숙소>라는 신비주의자의 단체가 개최한 회합에서의 일이었다. 펠릭스는 완전히 스테이지 메지션의 집회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너무나도 신들린 단체인 데에 놀랐다. 하지만 뮬러와는 연락이 두절되지 않았다.
그후, 뮬러는 정치와 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타인의 재산을 몰수함으로써 부를 이루었다. 그의 두 번째 재원은 블렉 마케트로서 그쪽은 펠릭스와 비젤의 협력하에 착실하게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당신이 이곳에 올 때는 언제나 가게에서 사람을 내쫓나요 ? " 펠릭스는 뮬러의 옆에 앉았다.
뮬러의 미소가 커졌다. "그 대신에 야간에 점령하는 것은 사양하고 있지." 입을 다물고는 웃었다. "하지만 이보게, 밤에 이곳에 와 보게나. 쇼가 훌륭한 정도로 재미있다네."
주인이 도어 셔터를 내리고 간판을 뒤로 뒤집어서 <폐점>이라고 내거는 것이 펠릭스의 눈에 비추었다. 겁에 질려서 억지로 은밀하게 그 일이 행해졌으므로 마치 연극처럼 보였을 정도였다.
"자아," 하고 뮬러 대좌는 펠릭스의 손목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두드리고, "자네에게 적합한 새로운 계획이 있네."
"파리제 실크인가요 ? "
"독일산 모피야. 따스한 그린이지. 색이 바래면 회색이네." 군모를 벗고 손가락 끝에 걸치고는 천천히 회전시켰다. "슬슬<시민공급국>은 중단해야만 되네. 너무 빤히 들여다 보여. 나의 부하로서 자네에게 좀더 잘 어울리는 역할이 있어. 지금 그 밖에도 내가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물건이 있어. 실크 내복보다 가치가 있는 물건이지. 물론----" 하고 생글거리면서, "그런 종류의 것에 가격이 없다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 일이지만 말일세."
"죄송하지만, " 펠릭스는 말했다. "저의 최종 목표는 육군이 아니라서요." 의자를 뒤로 빼면서 일어섰다. "덧붙이자면 댁은 우리에게 2천마르크의 빚이 있죠."
뮬러는 와인잔을 들었다.
"자네는 이런 사항의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가고 싶나---- ? "
피아노 위에 걸려 있는 빨간 깃발 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였다.
"부자가 되겠나 ? 아니면 내의 세일즈맨인 채로 끝나겠나 ? "
신호를 보내자 주인은 서둘러서 다시 한 잔을 가지고 와서 폐점 간판을 내걸었을 때의 그 심각한 태도로 테이블 위에 놓았다. 마치 이 자리에서 나누어지고 있는 대화를 훔쳐듣거나 이해하는 능력을 빼앗긴 망령이기라도 한 듯.
펠릭스는 이 장소를 전세내고 있는 상대방을 찬찬히 응시했다. 회녹색의 군복을 입은 뮬러는 피를 빨아들여서 부풀어오른 타란츄라를 연상시켰다. 먹이는----잠자리 ? 하지만 쾌속으로 비행하는 그 곤충을 포획하려면 상당히 튼튼한 거미줄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잡혀도 날개를 바둥거려서 거미줄을 깨뜨릴 수도 있다.
"나에게 장교 완장이라도 달아 준다는 얘긴가요 ? "
"자네에게 혜성과도 같은 승진을 보장해 주지."
"그럼 비젤은 ? "
"자네를 소개하는 써클에게 그 사내를 끌어들일 수는 없어. 우리의 비젤은 호감이 가는 사내일 지도 모르지만 현 상태에 머무르는 수 밖에 없어." 뮬러는 와인을 다 마시고는 일어섰다.
"앞으로는 지팡이를 집고 눈이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하지 않아도 돼."
캬바레의 주인은 뮬러의 앞을 빠른 걸음으로 문 쪽으로 향했다. 문을 열든 닫든 기와로 부수든 간에 아뭏든 이 손님이 시키는 대로 할 생각이었다. 펠릭스가 대좌와 나란히 서서 거리로 나오자 대좌의 리무진이 도착했다. 햇살이 구름을 깨트렸다. 그러자, 담황색의 빛의 분류가 갑자기 대좌의 모습을 감쌌다. 마치, 바로 옆에서 어떤 가스라도 분출한 것처럼.
펠릭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리는 담황색으로 변했고 모든 움직임이 정지되어 있었다.
뒤돌아보니 한순간 시간의 흐름을 멈춘 것처럼 대좌는 떫은 얼굴인 채로 뭔가의 동작 도중에 얼어붙은 것처럼 멈추어 서있다. 펠릭스는 대좌의 눈에 여러 의미를 포함한 탐욕과 간책을 생생하게 보았다. 그리고 또한 소화불량, 색욕, 운명론, 몰래 짓이긴 무지, 공포도, 담황색의 베일 건너편으로부터 아연해 하면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대좌의 강직된 얼굴에 이러한 모든 것이 집약되어 있었다.
펠릭스는 발길을 돌렸다. 늘어선 풍경 속에 그의 모습 이외에는 움직이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의 발걸음이 황색의 베일을 떨게 했고, 잔물결의 희미한 움직임이 왕래를 이동했다. 그것이 자신의 윗저고리의 소매가 스치는 소리로서 그저 과장되게 들리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펠릭스는 깨달았다. 그외의 모든 것은 고요했다.
신체의 심이 쿵쾅거리면서 흔들렸다. 먼 옛날에도 그런 경험을 했던 적이 있다. 그것은 물결 하나 없는 연못의 상공을 잠자리가 날고 있는 것을 물가에서 바라보고 있었던 때의 일. 그때 그는 무엇 하나 놓치지 않는 왕눈을 가진 그 벌레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지금 모츠슈트랏세에서 세계는 또 다시 정지해 있으며 또한 그도 잠자리가 되어 있었다.
두 번째의 흔들림을 느꼈다. 시간은 걸음을 재개했고 거리는 다시 되살아나고 있었다.
'...어차피 건축 현장의 인부 나부랭이가 주워온 딜렉터잖아. 아무튼 믿을 수 없어 사람들이라구. 그래서 그 녀석이 무도병 말기 증상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구급차에 태워서 데리고 갔지. 이쪽으로 오게 데이빗, 난 한군데 더 들리고 싶은 가게가 있어..."
카스피안은 빅터 콰트렐을 응시하고 있었다----방금 상실된 차원에서 베를린의 가두에 있었던 독일군 대좌를.
"우린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건가 ? "
"<에메랄드의 도시>지." 콰트렐이 대답했다. "<에메랄드의 도시>에서는 곰의 봉제에 진짜 내용물을 넣는다구, 무슨 일이야 ? 코카인을 너무 많이 했어 ? 에드워드의 물건은 일체 불순물이 없으니까."
"무슨 얘길 하고 있었지 ? "
"알게 뭐야. 플론프터를 불러서 대본을 체크해 달라고 그래." 콰트렐은 로데오 드라이브를 큰 걸음으로 거침없이 나아갔다. 큰 상어 같은 콰트렐. 그 옆에서 카스피안은 가게의 윈도우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곁눈질하면서 자신의 정체를 확인하려 하고 있었다.



   제6장  이중의 존재
  게이라드 의사의 진료소는 글로밍 웨이를 올라간 곳에 있는 자택에 있었다. 진료실의 창문은 완만하게 경사진 녹색의 계곡을 향해서 열려 있으며 번창하는 식물 사이로 다른 집들의 지붕 끝이 힐끗힐끗 보였다. 벽에는 중국의 커다란 수묵화의 판넬. 난로 위에는 이집트의 신들의 상이 진열되어 있다. 암체어가 한쌍, 낮은 원형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서 마주보고 놓여져 있었으며 의사와 카스피안은 그곳에 앉아 있었다. 의사는 눈을 감고 고개를 숙여 카스피안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대인 관계가 좋고," 카스피안이 말했다. "대단한 사람이죠. 하지만 약간 모진 면이 있어서요. 세상에서 삐져 나온 면이 있죠. 잠자리 따위가 그래요."
"아아, 그 잠자리요." 게이라드는 콧볼을 잡았고 온화한 말투로 얘기했다. "커다란 복안. 그건 날아다니멱서 먹이를 잡아먹는 포식충에게 필요한 거죠."
"아니요, 별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단지 주석일 뿐이죠." 게이라드는 손을 떼고서 미소지었다. "계속하시죠."
"그는 베를린에서 태어났고 자랐고 플레이보이에요. 전쟁으로 시들해졌지만 그것을 거꾸로 이용하고 있어요."
"어떤 감각의 소유자인가요 ? "
"여성에 관해서요 ? "
"어떤 일에 관해서라도."
"그는 나치 시대의 독일에 살고 있는 남자에요. 그것 만으로도 극히 특이한 감각의 소유자라고 말할 수 있겠죠."
"그렇군요. 그게 당신하고 어떤 관련성이 있나요 ? "
"관련성 ? 그건 내가 그곳에 출현하는 일이에요." 카스피안은 몸을 수그리고 원형 테이블의 가장자리를 손가락 끝으로 쓰다듬었다. "내가 현실의 시간을 상실하는 거죠, 나는 거울을 통과해요. 토끼굴에 빠진 앨리스와 같아요. 관련성을 말한다면 그런 일인데요. 이상한 관련성이죠."
게이라드는 눈을 감고 침묵했다. 의사는 키가 크고 너무 말랐으며 예리하게 구부러진 큰 코를 가지고 있어서 그 풍모는 매를 연상시켰다. 뒤의 벽의 판넬에서는 한잔 걸친 중국의 선인이 달빛속을 갈짓자 걸음으로 걷고 있다. 왼편에는 책장이 있고 등표지가 낡아서 떨어진 서적이 즐비하다. 의사는 다시 눈을 떴다.
"그 펠릭스라는 인물에 관해서 좀더 상세하게 얘기해 주십시오. 당신은 그를 존경하고 있습니까 ? "
"별로요. 하지만 그는 머리가 좋은 것 같아요."
"계속하세요."
"펠릭스 자신도 문제를 안고 있죠. 그의 세계가 정지해 버렸어요. 베를린의 길가에서. 갑자기 밀랍 인형관으로 뛰어들은 거죠."
"펠릭스도----똑같은 시간의 상실을 체험했어요."
"그 틈에 나는 자유의 몸이 되었죠. 하지만 그때가 올 때까지 그의 신체 속에 있었어요. 그의 모습으로 걸어다녔다구요. 자신의 일은 완전히 잊고서. 그의 아이덴티가 마음의 최전방으로 압출되어 있었고 나는 훨씬 뒤쪽에 끈질기게 붙어 있는 아주 작은 상념 같은 것이었어요."
"펠릭스가 됨으로 인해서 어떤 일을 알 수 있었나요 ? "
"누군가 나 이외에도 베일을 찢고 나타난 것이 있다는 일. 전쟁 중에 살아 있던 베를린 토박이인 펠릭스가 시간을 깨트리고 출현 했다는 일. 그리하여 그의 신체가 나의 신체와 일치했다는 점이에요."
"어째서 이 일을 알고 있는 것이 세계에서 당신들 둘 뿐인가요 ? "
"세상을 앞질러서 사물을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이 반드시 있기 마련이지요. 갈릴레오라던가. 뉴튼, 레니 블루스라던가. 남을 앞서서 뭔가를 하는 데에는 반드시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지요."
카스피안은 또다시 손가락 끝으로 테이블의 끝을 더듬었다.
"선생님은 제가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씀하시고 싶으시겠죠 ? 그래도 괜찮아요. 다만 저를 그곳으로부터 탈출시켜 주세요."
"그곳으로부터 탈출한다는 얘기는 그곳을 빠져나온다는 일인지도 몰라요."
"그러므로 선생님은 펠릭스가 나에게 있어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가를 알고 싶어하시는 거군요. 하지만 그는 어떤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아요. 정말로. 그는 꿈을 팔려고 LA를 어슬렁거리고 있는 백만 명의 사내 같은 거에요." 카스피안은 말을 중단하고서 일순간 침묵했다.
"선생님은 펠릭스가 실재한다고 믿습니까 ? "
"그건 아무래도 좋은 일이에요. 중요한 것은 말입니다. 당신이 모르면 안 되는 어떠한 감정을 그가 당신에 대해서 품고 있느냐는 것이에요."
"그것에 대한 해답은 두 가지가 있어요. 첫번째로, 몇 십년이나 시간을 사이에 두고 존재하는 펠릭스와 내가 시간에 대한 기본적인 방정식의 하나를 발견했다는 일. 두번째로, 펠릭스와 분열된 자아의 한쪽끼리이며 상대방에 대해서는 공포심 이외에는 아무런 타의도 품고 있지 않다는 것이죠. 나에게 있어서 그와 교체되는 일은 항상 자아를 죽이는 일과도 상통하죠."
"모두 극단적인 견해군요. 한 가지 중간의 입장을 찾아 보도록 합시다."
"무슨 말씀이신지..."
"어떠한 심리적인 요인이 당신의 내면에 나타나고 있다는 거에요. 펠릭스의 일을 좀더 얘기해 주세요."
"그는 사람을 죽일 수 있어요. 하지만 그건 전쟁에 부수된 사항이에요."
"그런 자질에 매력을 느낍니까 ? "
"유용하다고는 생각해요."
"계속해 주세요."
"무엇보다도 놀란 것은 그의 어린 시절이 나의 어린 시절과 매우 흡사하다는 사실이에요. 그는 현실의 상실을 체험했어요. 잠자리를 바라보고 있고. 세계가 미끌어져 버렸다구요."
"당신의 어린 시절의 얘기를 좀더 들려 주세요. 당신은 페니실린에 의한 정신적인 충격을 경험했어요. 그밖에는 ? "
"저는 항상 배우였어요. 꾀병을 부려서 1학년마다 60일간 땡땡이를 쳤어요. 그리고는 침대 위에서 병정 인형을 가지고 놀았죠. 인형끼리의 전쟁놀이가 되면 너무 열중해서 마치 구름을 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아버지가 돌아온 소리를 들었을 때의 충격이란 ! 그 시절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루가 지나갔어요."
"그대로 계속하세요."
"그러는 사이에 나는 친구를 만들었죠. 자주 그녀석에게 말을 걸곤 했어요. 거울 속에서."
"누구였나요 그건 ? "
"나하고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나와는 다른 녀석이에요. 나는 나의 생활 속의 일을 그녀석에게 얘기했고, 그는 거울 나라의 일을 얘기해 주었죠. 거울 나라는 모든 것이 반대에요. 정말이지 꼬마들 장난 같은 짓거리였어요. 나는 오른손잡이 타자라고 말하면 녀석은 자신은 왼손잡이라고 말하죠. 그렇다면 한번 해 보자면서 둘이서 배팅 스탠스를 취하면 과연 녀석은 왼손잡이였어요. 그쪽 세계의 일을 아는 것은 불가사의한 기쁨이었어요. 부모가 바로 옆에 있는데 우연히 식당의 거울이 힐끗 눈에 들어오면 친구도 나를 보고 있었고 그래서 둘이서 몰래 씨익 웃곤 했죠."
"그런데 이제와서 그 친구가 되돌아왔다----그거군요."
"단, 친구는 아니지만요." 카스피안은 또다시 몸을 앞으로 수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고 의사를 응시했다. "선생님이 철저한 프로의 태도로 계셔주셔서 저도 안심하고 말할 수 있지만, 선생님은 4차원의 세계에 빠진 환자는 그다지 만난 일이 없겠죠 ? "
현관 홀에서 시계의 챠임이 울렸다. 게이라드 의사는 서서히 일어났다.
"당신도 깜짝 놀랄 거에요, 얼마나 많은 곳에 사람이 떨어지는지."

카스피안가의 하녀인 라모나 구아즈는 차고 근처에 주차해 있는 보이프랜드의 자동차를 향해서 걷고 있었다. 그 주일의 일을 막끝마쳤고 평상시처럼 니노 칼리료가 마중을 와 있는 것이다. 니노는 분방한 작은 사내로서 검은 선글래스를 끼고 있었다. "마치 무슨 범인 같군요." 정원에 나와서 남편과 함께 앉아 있던 캐롤 카스 피안이 살짝 말했다. "저녀석이 말이에요, 발리암을 싸게 구입해올까요 ? 하고 말하더라구요."
"언제나 기분 좋게 대해 주라구."
"라모나의 일이 걱정돼요."
"니노는 저래뵈도 그녀의 일을 소중하게 감싸 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나의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전당포에 넣는 녀석은 아마도 저녀석일 꺼에요."
"언제든지 수중에 다시 들어오잖아."
"하지만 말이에요, 누구의 귀에 달려 있었을까를 생각하면..."
"누구의 귀에도 달려 있지 않았어. 전당포에 놓여 있으니까."
"어머나, 저것 보세요." 자동차에서 내린 니노가 앞으로 가서 문을 열어 주고 있다. "저 건달 같은 몸짓, 야생 동물이라면 어울리겠군요."
"아니, 신중해 보이는데 ? "
"여보, 정말로 저 똘마니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 군요."
"니노 같은 녀석은 알아두면 편리한 일도 있지."
"그래요, 누군가를 죽일 때 말이에요." 캐롤은 생각에 잠긴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있을 수 있는 일이에요." 손을 들어 니노를 향해서 흔들었다. 니노는 선글래스를 벗은 후에 손을 흔들어 대답했다.
그때 작고 땡그란, 번쩍이는 눈이 비스듬히 이쪽으로 향해졌다.
"난 저 녀석을 알고 있어." 카스피안이 말했다.
"그야 그렇겠죠. 니노니까요."
"그게 아니야.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는 얼굴이라구."
"<클럽 티파니>의 돈키 쇼에서 ? "
카스피안은 니노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똘마니는 선글래스를 천천히 눈으로 가지고 갔다. 카스피안의 귓가에서 뭔가가 튀는 듯한, 들리는 듯 안들리듯 하는 소리가 났다는 생각이 들자 그의 마음의 카메라가 니노의 얼굴을 크게 확대했다.
니노의 웃는 얼굴이 긴장되었고 작고 검은 눈이 구슬처럼 빛나고 있다. 지금 막 느닷없이 자신을 엄습한 착각을 기이하다고 생각하면서 펠릭스는 비젤을 응시했다. 비젤도 이쪽으로 고걔를 비스듬히 기울이고 있다. 웃는 얼굴도 그대로다. 그렇지만 비젤의 뒤에는 야쟈수가 있었다. 그와 비젤은 예의 열대지에 와 있었던 것이다.
"최근에는 이상한 꿈만 꾼다니까." 둘이서 자동차를 타면서 펠릭스가 말했다.
"난 꿈같은 것은 꿔본 적이 없어." 하고 기어를 넣으면서 비젤은 말했다.
"전혀 ? 그것 참 안됐군. 꿈에는 어떤 종류의 열쇠가 숨어 있다구."
"그러고 보니까 딱 한번 있군. 젊었을 때의 일이지." 비젤은 헤르만 게일링슈트라세를 달려 모퉁이에 있는 친위대 숙소의 옆을 통과했다.
"단 한번 ? 그것 뿐이야 ? 평생 ? "
"한번이면 족하잖아." 비젤의 손에는 검은 가죽 장갑이 끼여져 있었다. 외투는 펠릭스와 마찬가지로 검정. 두 사람의 바지도 웃도리와 똑같은 검정. 각각 아무 것도 아닌 하얀 와이셔츠에 수수한 색상의 넥타이를 매고 있다. 비젤은 헤르만 게일링슈트라세의 자동차의 흐름 속을 신중하게 천천히 달렸다. 가끔 정보를 급송하는 보도 관계의 오토바이나 병력 장갑 수송차가 지나가지 않으면 아무런 변화도 없는 교통 상태였는지도 모른다.
"뮬러가 우리에게 일을 제의했어. 내일이라도 나는 상급 장교가 될 수 있다구."
"그렇게 되면 <피와 명예> 도장을 찍은 지휘봉을 가질 수 있어."
"정말이지 솔깃한 얘기야. 물론 나는 받을 생각이 없지만."
"당연하지."
동쪽으로 향하여 좁아진 길로 회전했다. 비젤은 펠릭스에게, 그 딱 한 번 보았다는 꼴을 얘기하며 들려 주었다.
"반 사회적 범죄자가 꾸는 꿈이군." 하고 펠릭스는 말했다.
"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지만," 비젤은 장갑을 낀 손 안에서 핸들을 미끄러뜨리면서 침착하게 말했다.
리헤텐베르크로 들어섰다. 그곳은 기능공들의 생활 구획으로서 양쪽으로 작은 일터가 줄지어 있었다. 비젤이 목을 끄덕였다. "저기야." 길고 검은 영구차 뒤에 차를 대고는 펠릭스와 차에서 내려서 그 영구차를 향해서 걸어갔다.
"주차 금지 구역이지만" 하고 비젤은 미소짓고는 "앞유리에 위반 티켓을 붙일 걱정은 없군." 안에 놓여진 관을 고개를 기울여 보고는, "아무도 죽은 자와 관련되고 싶지 않을테니까." 하고 말했다.
그와 펠릭스는 영구차를 탔다. 비젤은 영구차를 발진시켜서 도로에 들어섰다. 그러자 관의 뚜껑이 열리면서 시체가 갑자기 상반신을 일으켰다.
"있기는 편한데 시간이 더디게 흘러 견디기 힘들어."
"잡지라도 넣어둘걸 그랬군" 하고 펠릭스가 대꾸했다.
시체는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건장한 체격의 사내로서 겨울용 자켓을 입고 하이킹 부우츠를 신고 있다. "일단 마음껏 등줄기를 펴야지. 이 상태로는 앞으로 못견딜 것 같아. 어디선가세울 수 있나 ? "
비젤은 백밀러를 본 후에 영구차를 작업장이 없는 옆길로 넣고 보도 가장자리에 세웠다.
"빨리 하라구."
"황송하옵나이다." 죽은자가 관에서 나왔으므로 펠릭스는 서둘러서 뒷문을 열어 주었다. 죽은자는 보도로 뛰어 내렸고 그 장소에서 몸을 절도있게 움직였다. "여기저기에서 의심하고 있어."
펠릭스는 도로의 좌우로 눈길을 돌렸다. 아직 나이가 어린 소년 하나가 옆길에서 이쪽을 가만히 엿보고 있다. 소년은 입을 멍하니 벌리고서 두려운 듯한 눈길을 보내면서 뒷문이 열린 장의차의 뒤에서 뛰거나 펄쩍거리는 죽은자를 바라보고 있다. 펠릭스는 그 아이에게로 걸어가서 등줄기를 펴거나 점프를 하고 있는 죽은자를 가리켰다.
"장의사 녀석이 저녀석의 몸에 방부액을 너무 많이 부어서 저렇게 된거란다. 알겠니 ? "
소년의 눈은 더욱 튀어나왔다. 무릎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펠릭스는 소년 위를 덥칠 듯이 몸을 접근시켰다. "저녀석을 눌러야 되는데 좀 도와줄래 ? "
소년은 토끼처럼 재빨리 도망쳤다. 펠릭스는 죽은자에게 손을 흔들어서 장의차로 돌아가라고 신호를 보냈다. 죽은자는 뒤로 차에 올라타고는 안에서 문을 닫았다. 동시에 비젤은 발진했다.
"이제 얼마간은 버티겠지. 그런데----" 하고 펠릭스는 관의 부드러운 내부를 찔렀다. "여기에는 식량이 들어 있어. 손을 넣기만 하면 돼. 물도 들어 있어. 아무튼 앞으로 48시간을 이 관 속에 갇혀 있어야 하니까." 펠릭스가 관 옆에 무릎을 꿇자 죽은자도 펠릭스의 한 마디 한 마디에 고개를 끄덕였다. 펠릭스는 상의의 가슴께를 열어서 증명서 다발을 꺼내서 죽은자에게 건넜다.
"자네가 들어 있는 관은 유바리겐에서 열차로부터 내려져. 그 후로는 도보로 국경까지 운반되지." 탄약을 죽은자에게 건넸다.
"알았나 ? "
"확실하게."
"그럼 관 속으로. 자네 위에서 못을 박아야 하니까."
죽은자는 떨떠름한 얼굴로 펠릭스를 한번 본 후에 느릿느릿 또다시 사텐의 벽 사이로 돌아갔다.
"그걸 닫기 전에----" 비젤이 말을 걸었다.
죽은자는 또다시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래, 알고 있구 말구. 이거 말이지 ? "
그는 한 구석으로 손을 내밀어서 작은 봉투를 꺼냈다. "나폴레옹 금화야."
그가 눕자 펠릭스는 관 뚜껑의 못을 박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 일이 끝나자 곧바로 관의 머리 부분의 옆에 붙여진 신주의 투명한 세공 부분에 손을 얹었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경첩으로 부착해 놓은 작은 사각 창문이 활짝 열렸다.
"공기가 엷어지면 이걸 열라구." 어두운 구멍을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안에서 두 개의 눈이 부릅뜨며 노려보고 있다.
"신경쇠약에 걸릴 것 같아."
"게쉬타포는 근처에 널려 있는 인두의 새로운 사용 방법을 고안해 냈다더군." 펠릭스가 말했다. "맨 먼저 콧구멍에 쑤셔 넣는다더군."
손가락 두 개가 작은 창문으로부터 나와서 작은 뚜껑을 힘차게 닫았다.
펠릭스는 비젤의 옆자리로 올라탔다. "뭐하는 놈이야 ? "
"I.G 파벤. 화학자야. 자신도 모르게 실언을 했지."
펠릭스는 뒤돌아서서 관의 뚜껑을 톡톡 두드렸다.
"이봐, 마술을 배웠으면 좋을걸 그랬군.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방법하고."
관 속으로부터 분명하지 않은 말이 새어나왔다. 비젤은 운전을 계속했다. 베를린의 외곽을 지나서 시의 중심부로 되돌아갔구 그리고 역으로 향했다.
"이봐 비젤." 하고 펠릭스는 태연자약하게 핸들을 잡는 검고 작은 비젤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찬찬히 응시하고는, "자넨, 장의사가 될걸 그랬어." 하고 말했다.
"장의사가 되지 않은 대신에," 하고 비젤은 장갑을 낀 손의 손가락을 하나 목에 대고서 살짝 옆으로 잡아당겼다. "브로커를 하고 있지." 영구차를 이 옆의 화물출하장으로 몰았다. 관은 제국 국유 철도원의 익숙한 손놀림으로 재빨리 내려졌으며 플랫홈 쪽으로 운반되었다. 펠릭스와 비젤은 옆에 붙어서 조용히 걸어갔다.
"오늘은 군인들이 많이 나와 있군." 하고 펠릭스가 말했다.
"하이들리히가 지나가거든." 직원 중 한 사람이 말했다. "댁의 잠든 사자와 함께 열차를 타지." 직원은 관을 턱으로 가리켰고 펠릭스는 비젤의 얼굴을 봤다. 플랫홈은 야전 헌병과 SS와 게쉬타포로 북적거리고 있다.
"검문당하겠는걸." 펠릭스는 비젤에게 속삭였다. "잊지 말라구, 자네는 바바리아의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말이야."
스스로 입에 담은 농담에 비젤의 작은 눈은 더욱 가늘어졌고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그것을 보고서 펠릭스는 이곳에서의 성공과 실패의 여부는 이 작은 사내의 침착 냉정한 태도 하나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한 태도는 그가 생애에서 단 한번밖에 꿈을 꾸지 않았다는 일에 근거할 것이다.
두 사람은 열차까지 관을 따라갔다. 비젤은 차장에게 표와 사망증명서와 히물러의 위조 서명이 있는 특별 취급을 요청하는 편지를 내밀었다. 차장은 고개를 끄덕였고 관을 열차에 실으라고 직원에게 신호를 보냈다. 돌아가려고 발길을 돌린 펠릭스와 비젤의 눈 앞에 검은 가죽 외투가 가로섰다. 게쉬타포의 검찰관이다. 부관을 둘을 데리고 있다.
"두 사람, 신분증명서를."
펠릭스와 비젤은 ID 카드와 경찰등록 증명서와 노동조합 등록 증명서와 운전면허증을 상대에게 건넸다. 검찰관이 정성스럽게 서류를 조사하고 있는 사이에 펠릭스는 사람들의 흐름이 이 소수의 무리를 크게 피하며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건너편에서는 군인과 SS장교들이 하이들리히의 도착에 대비해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비젤이 공세에 나섰다.
"검찰관님, 저희들은 지금 막 국가적 영웅의 유체를 이곳으로 날라서 최후의 전송을 하는 영광을 받았죠. 저희들은 유서있는 장의사에요. 저희들은 이 계통의 전문가로서 어떻게든 도움을 드리고 십습니다만."
"나한테 말인가 ? " 검찰관이 말했다. "나에게는 장례를 부탁할 시체가 없네."
"그건 모르죠." 비젤은 차갑고 음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님의 사자는 어디에든 계시니까요."
검찰관은 비젤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비젤은 죽은 얼굴같은 눈으로 되받아 보았다. 상대방의 관의 사이즈를 재는 듯한 눈길이었다.
"저희들은 국가적 장례를 몇번이나 치루었죠. 괜찮으시다면 저희가 헤스 총리대리에게서 받은 추천장을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만. 그분의 아버지의 서거시의 저희들의 일솜씨를 마음에 들어하셨거든요."
이제 끝장이다, 하고 펠릭스는 생각했다. 비젤은 윗저고리의 주머니를 뒤져서, 그곳에 들어있지 않다고 펠릭스가 알고 있는 서류를 꺼내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보다도 먼저 검찰관이 아까 받은 증명서를 비젤에게 내밀었다. "그럴 필요는 없네." 이어서 펠릭스를 봤다. "너는 왜 제복을 입고 있지 않지 ? "
펠릭스는 고개를 숙이고서 장단지에 붙여 놓은 예비 탄환을 툭툭 두드렸다.
"의족입니다 검찰관님." 말하면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시선은 플랫홈의 계단으로 쏠려 있다. 상의 안쪽에 있는 수류탄을 던졌을 경우 재빨리 저 밑으로 피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폐를 망가뜨려서요. 아무래도 폐병인 것 같아요." 펠릭스는 검찰관을 향해서 습기가 많은 기침을 끼얹었다. 검찰관은 의심스러운 듯이 눈을 가늘게 떴으나 그래도 뒤로 물러섰다.
두 사람 사이가 멀어졌다. 비젤은 검은 다비 모자를 벗고서 우아하게 장의사 식의 인사를 했다. 게쉬타포 검찰관은 갑자기 몸을 홱 돌리고서 두 사람의 부관을 데리고 좀더 단순한 먹이를 찾으러 떠났다.
"저녀석은 올존멜이야. 제놈도 암시장에서 꽤 수입을 올리고 있는 주제에 언젠가 한밤중에 난 트럭 한차 분의 버터를 500 마르크에 팔은 일도 있다구."
비젤이 영구차를 향해서 걷기 시작했을 때, 하이들리히 부총독을 태운 열차 일행이 역의 정면에 나타났다.
"나는 아무래도 뮬러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되겠군." 펠릭스가 말했다.
"좋으실대로."
"돈은 더 나오고 위험은 적고."
"매일밤 크림 파이를 먹겠지." 비젤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고 두사람은 영구차에 이르렀다.
펠릭스는 본네트 너머로 동료를 바라보았다. 플랫홈에서는 하이들리히가 지나가는 길을 비키게 하는 큰 목소리의 명령이 바쁘게 오고가고 있다. 비젤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 각도와 광선의 배합과 하늘색이 혼연일체가 되어 예의 열대지역과 관련된 펠릭스의 데쟈브를 되살렸다.
"...무슨 일이라도 말씀하세요 카스피안씨, 사양하지 마시고." 니노 칼리뇨의 음침하고 냉소적인 웃음은 그대로 변하지 않고 있었다.
"사람 한 사람이 핥는 청산카리의 양 따위는 뻔해요, 그렇죠 ? "
하녀인 라모나가 아까부터 앉아 있던 자동차의 문을 열고는 작지만 근육지고 튼튼한 몸을 미끌어트렸다. 행동에 빈틈이 없다. 자동차를 후진시켜서 말 없이 서 있는 카스피안의 자동차를 남기고서 달려갔다. 캐롤이 다가와 있었다. 수상하다는 듯이,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어요 ? 설마 저녀석으로부터 통제품을 사려는 것은 아니겠죠 ? "라고 말했다.
카스피안은 캐롤을 뒤돌아 보았다. 서서히 현실이 형태를 이루면서 되돌아왔다.
"나는----베를린에 있었어."
"니노와 관련을 맺는다면 그거야말로 당신은 베를린은 커녕 감옥행이에요. 데이빗, 지금 저녀석에게 마약을 받은 것은 아니겠죠 ? 안색이 심상찮아요."
"난 저곳의 벤치에 당신과 함께 있었지 ? 그런데 어째서 이 차도까지 와서 니노하고 있었을까 ? "
"어머나, 역시 그녀석이 당신에게 뭔가 복용시켰군요. 정말로 형편없는 안색을 하고 있어요."
카스피안은 깊게 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목을 뒤로 제꼈다.
"캐롤, 최근에 무척 이상한 일이 나의 신변에 일어난다구."
"마약은 안 해요 ? "
"난----시간의 함정에 사로잡혀 있어."
"당신은 콜드 캐는 로드에 있어요. 이런 곳에서는 아무도 시간의 함정에 걸리지는 않아요. 이곳은 시간의 출입금지 구역인걸요."

파티의 멤버들이 문이 닫혀져 있는 말리브의 콜로니에 있는 줄리어스 데브루스카 저택에 모여 있었다. 카스피안은 광활한 택지에 마련되어 있는 핫 터브의 옆에 있었다. 그 누구도 그 안에 앉으면 안 되게 되어 있다는 것을 카스피안은 잘 알고 있었다. 누구하고 함께 따스한 물에 들어가느냐는 일에 관해서는 데브루스카가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이걸로 몇 년이나 나를 소송을 걸었었다구."
데브루스카는 아무도 들어 있지 않은 핫 터브 옆의 온통 백색인 호화로운 라운지에서 마일론 피쉬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마지막 상고는 취하되었지. 양자 무승부라고나 할까, 변호사만 돈을 벌어서 요트를 구입할 계획인 모양이더군."
핫 터브를 따라서 놓여진 벤치에는 로마 프렌치가 앉아 있었다. 지금 막 데브루스카가 <스타 로바>의 주연 여배우로 발탁한 것이었다. 그 옆에 앉아 있는 것은 드자스로서 18승을 올린 그녀의 최신의 연인. 힘없이 손을 담그고 있다.
남편과 함께 나란히 서 있던 캐롤 카스피안은 온수 속의 손을 보고서 미간을 찌프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사람, 줄리어스의 규정을 모르는 모양이죠 ? "
로마는 오랜지색의 왼쪽 어깨를 노출하고 나머지를 가슴 부분에 꽉 조이게 감은 나염 염색의 드레스 차림이었다. 그녀가 출연한 영화는 한편 밖에 본 적이 없는 카스피안이었지만 그곳에서의 그녀는 블라우스가 찢기워져 있었다. 영화의 줄거리는 잊었지만 그런 로마의 모습을 잊지는 않았다.
"저 아이는 당신보다 겨우 20살이 젊을 뿐인데요." 캐롤이 한탄했다. "그녀가 요전에 사귀던 아저씨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요 ? " 캐롤은 데브루스카 저택에 장식되어 있는 로마 시대의 조각상의 하나----목이 없고 손과 발이 없는 토르스----를 가리키며
"저렇게 되어 버렸다는군요 글쎄."
카스피안의 파티에서 엉망으로 취해 있던 그 영화 회사의 광고선전 담당 부사장이 이번에도 완전히 취해서 술을 양손에 들고 다가왔다.
"오늘은 집에서 일요 목공일을 하고 싶었어."
"저희들에게 앤 여왕 과도기의 멋진 티펜데일 풍의 팔걸이가 없는 의자를 만들어 주시지 않겠어요." 하고 캐롤은 말했다.
"나는 <혹성 X 에서 온 사나이>에서 아머스와 일을 했는데 말이야, 그에게 우주 개척물의 우수한 SF영화를 만들 수 없다고 말했지. 그랬더니 '이봐요, 놀리는 거예요 ? 모르나요 ? 혹성 X 에서 온 사나이는 <쥬르와 짐>이라구요' 하고 말하는 거야." 중역은 몸을 건들건들 흔들면서 한쪽 잔에서 홀짝거리고 이쪽 잔에서 홀짝거리면서 술을 마셨다. "그게 <쥬르와 짐>이야 ? 그거라고 알 수 있겠어 ? "
한숨을 쉬고서 실내로 시선을 돌렸고 난로 옆에 서 있는 백발의 사내에게로 눈꺼풀이 내려온 눈길을 멈추었다.
"저 남자는 그 옛날 이 마을에서 한가닥 하던 에이전트였어. 그러던 자가 지금에 와서는 레스토랑을 경영하고 있네. 나는 절대로 그곳에는 발을 들여 놓지 않지만 말일세. 저녀석의 옛날의 단골 손님이 접시에 올려져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어서 말이야."
영화 회사의 중역은 천천히 눈을 깜빡거렸고 몰래 트림을 하면서 로마에게 잠시 말을 걸려고 팔자걸음으로 다가갔다.
로마는 투우사의 부드러움으로 몸을 피했고, 상대방이 로마가 없는 공간에서 헤매고 있는 사이에 카스피안에게로 다가왔다.
"함께 일할 수 있게 되어서 정말로 기뻐요."
"나야 말로." 카스피안은 말했다. "당신이 출연했던 작품은 모두 봤어요."
"데이빗과의 공연은 분명히 마음에 드실 거에요." 캐롤이 말했다. "이 사람은 손의 키스를 4종류나 알고 있으니까요, 손목을, 그리고 팔을 타고 올라오고, 뒤집어서----"
로마는 캐롤을 이상한 듯이 일별한 후에 그대로 방을 가로질러서 갔다. 로마의 훌륭하게 새겨진 히프의 곡선이 뒤틀리는 것을 캐롤은 바라보면서, "좀 엉덩이의 폭이."
"그래." 카스피안은 당황해서 맞장구를 쳤다. "이제 곧 의자가 두 개가 필요하게 될 것 같군."
"고마워요 달링." 캐롤은 남편의 셔츠의 옷깃을 정돈했다. "앞으로 2개월이나 그녀와 로케를 가는군요."
"그 영화의 테마에 불륜은 포함되어 있지 않아."
"그건 로마의 테마에 포함되어 있겠죠." 캐롤은 외롭게 남겨진 도자스의 투수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이번에는 투구하는 쪽의 팔꿈치를 빙글빙글 움직이고 있는 온수 속에 넣고 있다.  "난 그에게 록커룸의 뒷얘기나 들으러 가야겠어요." 하고 캐롤은 그쪽으로 걸어갔다.
카스피안은 그녀가 야구선수의 옆에 앉는 것을 바라보면서, 저 애숭이 녀석 가련하게도 앞으로 얼마동안 골치 꽤나 썩히겠구나 생각했다. 그 자신은 저택 탐색에 나섰다. 객실을 지나서 그 발길로 광대한 방을 나섰으며, 어디까지나 펼쳐져 있을 것 같은 느낌의 리빙룸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도 손님들이 담소하고 있었다. <스타 로바>에서 단역을 맡게 되어 있는 신출나기 여배우도 많이 섞여 있다.
로마는 10만 달러의 드레싱 반은 받을 것이다. 그리고 스타레트들은 각자에게 가설 화장실같은 분장실을 줄 것이다. 한 명이 무리에서 이탈하여 카스피안 앞에 섰다. "안녕하세요, 저는 세레나 실비에요. 제 소개를 해도 괜찮을까요 ? "
"괜찮구 말구요."
"당신의 영화는 전부 봤어요. 당신은 인기 스타잖아요. 나는 이번 영화에서는 보잘것 없는 단역이지만 하지만 상관없어요, 괜찮아요."
"두드리라, 그리하면 문은 열리리라."
"사실은 저는 그밖에도 열중하고 있는 일이 있어서요."
"예를 들자면 ? "
"카드 점이라든가 점성술이라든가 진동추 최면술이라든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일이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매력적인 사진은 더욱 도움이 되지."
"그건 알아요. 하지만 성공할 거라면 성공하겠죠. 만약에 잘 되지 않는다면----"
"좀더 괜찮은 에이전트를 찾겠지 ? 정말이지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즐거웠어 세레나. 나는 마누라한테 가봐야겠어. 마누라가 정신나간 야구선수하고 함께 옆방에 있다구."
"아, 잠깐만요, 도망가지 마세요. 댁의 눈을 들여다 보고 싶어요. 나는 눈으로부터 사람의 운세를 읽을 수 있어요."
그녀 자신의 눈으로부터 거의 표정이 사라졌다. 그렇지만 그 안쪽에 머물고 있는 희미한 정신이상의 징조를 카스피안은 놓치지 않았다.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은 뱀의 응시처럼 막연했다.
이윽고, 그녀는 당돌하게 그녀의 눈을 깜빡거리며 정상적인 눈빛을 되찾았다.
"놀랐어요, 당신은 뭔가 무척 어려운 일에 관여하고 있군요. 대단해요. 나는 그런 일은 꿈에서조차 생각하지 못했어요. 당신도 흔하게 널려 있는 골이 텅빈 스타의 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뭘 알았다구 ? "
"글쎄요, 대흉이라고나 할까요. 당신은 자신의 안에서 어떤 녀석들이 살고 있는지 알고 있어요 ? "
"어쩌면..."
"감탄했어요. 당신은 누구에요 ? 마법사 ? "
"아니, 난 흔하게 널려 있는 골이 텅빈 스타지."
카스피안은 여자의 곁을 떠나서 걷기 시작했다. 리빙룸을 나와서 별채로 갔다. 세레나 실비는 그를 불안에 빠트렸다. 뭔가가 뭔가가 가슴 안쪽을 깨물고 있는, 그런 심경이었다.
침착해라, 괜찮다, 너는 두, 세잔 걸쳤잖아. 그래서 조금 취했을 뿐이라구. 보라구, 줄리어스 데브루스카의 저택에 걸려 있는 훌륭한 그림을.
긴 복도에는 데브루스카 비장의 그림의 주된 작품군이 장식되어 있다. 피카소, 샤갈, 드가. 카스피안은 줄리어스가 중탄산 소다를 탄 컵을 손에 들고 천천히 이들 그림 앞을 왔다갔다하고 있는 장면을 떠올렸다.
복도의 끝부분에 장미색 거울이 있어서 동색으로 침전된 먼곳의 리빙룸을 비추고 있었다. 로마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진을 치고 있는 야구 선수, 헤어 디자이너, 메니저, 그리고 필요하다면 옆에 있는 수조의 엔젤 피쉬마저도 고소할지 모르는 변호사.
그곳에 비추는 로마는 동색의 빛을 띄우고 있다. 갑자기 카스피안은 그녀도 또한 거울 안쪽에 다른 아이덴디티를 가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상은 그의 눈 앞에서 가물가물 흔들리면서 장미색 미광을 발하고 있다. 그 거울도 어린 시절의 거울처럼 신비를 숨기고 있다.
카스피안은 슬립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의 내부에 입을 열고 있음을 안다. 한 마리의 잠자리를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서 소름이 끼쳤다. 동색의 호수 위를 날으는 잠자리의 모습에 유혹되어 그는 마지못해 그 뒤를 쫓았다.
"친구인 말러 씨가 기다리고 계십니다" 캬바레의 호스트가 테이블의 긴열의 안쪽의 그림자에서 잔을 앞에 두고서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말러를 가리켰다.
"로마 ! " 펠릭스의 마음속에서 목소리가 속삭였다. 지금 막 그를 찾아온 그 기묘한 자기 분열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원래 그는 일단 사라지고 그 열대의 도시에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곳을 걷고 있었다. 남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파티에 나가 있었다. 그리고 말러는 그 열대지방에서 온 정체를 알 수 없는 지금 한 사람의 여자. 사람은 여러가지 일을 생각한다. 훌륭한 일을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도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이다. 그 잠자리처럼.
말러는 아직 이쪽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으므로 그를 조금 더 기다리게 하기로 했다. 기다리게 해서 울화통이 터지게 하여 옛날처럼 미쳐 날뛰게 만들자.
번쩍이는 동색의 스테이지 라이트 속을 지나서 카운터로 향했다. 스테이지에서는 젊은 여자가 활인화를 연출하고 있었다. 담배 연기가 스포트라이트에 응집되어 있어서 여자는 안개 속을 헤매고 있는 듯이 보였다.
한편 스테이지의 훨씬 끝쪽에서는 3인조 밴드가 누드 예술은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그저 기계적으로 맥빠진 테마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카운터를 점거하고 있는 것은 대부분 여자였으나, 묘하게 목소리가 굵은 사람도 몇명인가 있었다.
"이봐요 펠릭스, 새로운 스타킹을 가지고 싶어요... 이것 좀 보라구요."
굵은 목소리의 여자는 드레스를 씩씩하게 걷어 올리고서 교련담당 군관도 고개를 숙일 것 같은 장딴지에서 스타킹이 찢어져 있는 것을 보였다.
"이봐요, 뭣 좀 가진 것 없어요 ? "
"벗이여, 그대는 베를린에서 가장 용감한 사나이로다 ! " 펠릭스는 여자를 향해서 경례의 표시로 약간 모자에 손을 댔다.
"의상 얘기를 하고 있는 거에요 ? 아니면 내가 댄스를 하는게 좋기 때문에 ? " 굵은 목소리의 여자는 웃었다.
"우리가 헤스 총리 대리의 일을 뭐라고 불르고 있는지 알아요 ? 우리들의 블로이라인 안나. 그치는 우리의 동료라구요. 달링."
"설령 그게 정말이라고 하더라도 말이야, 자네는 이대로 수용소로 보내지면 그것으로 끝장이야. 파리로 가라구, 파리로."
"나의 아름다운 베를린을 버리고서 ? 단골 술집도 ? 축구 경기장 옆의 ? 그 부근에서 즐겁게 보냈죠. 물론 프렌틀 라우어의 히틀러 유스 호스텔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누군가가 자네의 일을 찔르지, 그래서 어느 날 우린 카운터의 자네의 자리가 휑하니 비어 있는 것을 깨닫게 될 거라구."
펠릭스는 주머니에서 포장 하나를 꺼내서 여왕에게 건넸고 여왕은 몇 장인가의 지폐를 펠릭스의 손 안에 쥐어 주었다. "당신은 단골이에요 펠릭스. 나의 구역에서 뭔가 부탁할 일이 있으면----"
그녀는 꾸러미를 옆구리에 끼고는 스타킹을 갈아 신으려고 느릿느릿 화장실로 향했다.
펠릭스는 스테이지 쪽을 봤다. 누드 예술가는 이번에는 하프를 손에 들고서 강을 걸어서 건너는 판토마임을 연기하고 있다. 우연히 드라마가 맥주컵을 뒤접었으므로 그녀가 있는 부분의 스테이지가 맥주에 젖었고 이미지에 깊게 남았다.
펠릭스는 카운터에 회색의 소프트 모자를 놓았다. 누드 여자의 움직임을 쫓아서 이동하는 스포트라이트의 광선이 그대로 비추며 통과했다. 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열린 문으로부터 전쟁이나 사랑이나 범죄의 부산물, 이상한 분위기를 지닌 무대 배우의 일단이 쳐들어왔다. 뮬러 대령의 리무진이 도착하였고 노상에 내려선 실루엣이 보였다. 대령이 손을 흔들어서 운전수를 재촉하자 리무진은 떠났고 대령 또한 가로수의 그림자로 모습을 감추었다.
펠릭스는 잔을 비우고서 플로어를 가로질러서 말러가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각자 어떤 까닭이 있든 간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모이는 캬바레에서 그녀는 평온을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베레모를 벗고 있어서 파도치는 긴 아마색 머리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동의 광택을 생각나게 하는 장미색 스포트라이트가 재빨리 그녀를 비추었고, 시비를 걸을 수 없는 정돈된 옆얼굴을 일순간 돋보이게 했다. 펠릭스가 뭔가 좋은 일을 소개할 지도 모른다고 하여 오늘 밤의 스카라좌의 코러스 라인에서 빠져나온 말러였으나 그 일에 관해서는 이미 의심을 품고 있음을 펠릭스로서는 알 수 있었다.
"어머나 ! " 펠릭스가 다가오자 말러는 입을 열었다. "얼마나 음침한 일을 끝내고 오셨나요 ? "
부드럽게 빛나는 블루의 슈트를 입은 모습. 그 밑에 빨간색 실크 블라우스를 바쳐입고 있다. 그녀가 윗저고리의 앞을 열자 은은한 광택이 가슴의 불룩함을 감싸고 있는 것이 보였다. 등줄기를 피며 한쪽 팔꿈치를 낮은 의자등에 기대었을 때, 또다시 스포트라이트가 그녀를 재빨리 비추며 통과했고, 일순간 유방의 윤곽이 얇은 실크를 통해서 뚜렷하게 떠오르며 빛났다.
"당신이 스포트라이트를 끄는군." 펠릭스는 보라색 연기로 뿌옇게 되는 광선에 한쪽 손을 비추었다.
말러는 의자 위에서 빙글 몸을 돌려서 꼬고 있던 다리를 풀었다. 양쪽 장딴지를 따라서 스타킹이 올이 풀린 것을 펠릭스는 봤다. 그 있는 듯 없는 듯 하는 가느다란 두 줄기는 다리를 따라서 올라가서 스커트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 있었다. 신발도 닳았고 둥그렇게 변모한 구두끝의 가죽에 주름이 잡혀 있다. 그의 값을 매기고 있는 듯한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말러는 머리로 손을 옮겨서 부드럽게 부풀렸다. 적어도 머리만큼은 두말할 나위 없이 손질이 잘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래뵈도 벌써 상당히 오랫 동안 기다렸다구요."
"당신이 코러스 라인을 그만두게 해줄 수가 있어."
"그만 두면 뭘하죠 ? " 손톱이 건성으로 댄싱 부분을 더듬는다. 그것은 그녀의 운세를 측정하는 무의식의 척도였다.
"내 친군데, 당신이 일하길 원하는 인물이 있어."
"어떤 놈팽이인데요 ? " 말러는 세컨드백을 열고서 안의 상자에서 담배를 한개비를 꺼냈다.
"앞으로 당신이 만날 수 있는 인물로서는 그밖의 다른 어떤 녀석보다도 당신의 도움이 될 녀석."
"그래서, 난 뭘 해서 그녀석을 즐겁게 만들어 줘야 하죠 ? "
펠릭스는 엄지 손가락의 손톱으로 성냥을 그어서 내밀었다. "난 약장사가 아니야. 이건 정부의 일이라구."
펠릭스는 웨이터를 불러서 베를리나 바이세를 두 잔 주문했다.
"로즈베리 시럽을 조금 떨어뜨린 맥주지. 글류네바르트의 숲에 일요일이 되면 피크닉을 가서 마셨었지, 우린."
"그 우리라는 것은 우리 두 사람을 말하는 건가요 ? " 말러는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눈 위에 펜슬로 그려진 그 초승달 모습의 선처럼 그녀는 신랄했다.
옛날에는, 하고 펠릭스는 회상했다. 우리는 이렇지 않았었다. 세상을 믿었고 서로를 믿고 있었다. 지금은 우리는 딱딱한 껍질을 아무렇지도 않게 뒤집어 쓴 마음이 삐뚤어진 곤충이다.
웨이터가 화분같은 모습의 잔을 놓았다. 맥주는 빨간 거품을 머금었으며 스트로우 한쌍이 꽃혀 있다. 펠릭스는 한 모금을 마셨고, 맛있다는 듯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옆에서 있던 웨이터가 작은 목소리로 전했다.
"대령이 분장실에서 만나고 싶다는군요. 방이 하나 비어 있어요. 30분 후에."
펠릭스는 계속해서 맥주를 마시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말러와 모래 언덕이 많은 숲이나 공원에서 지낸 일요일을 상기시키는 맛. 두 사람은 햇빛을 받으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섞여서 돌아다니곤 했었다.
"보라구." 펠릭스는 스테이지를 손가락질했다. "그녀가 지금 에로틱한 라스트 신을 보여줄 테니까." 누드의 요정은 연기를 끝내려 하고 있었다. 커튼을 양쪽으로부터 몸에 감아서 동그란 엉덩이만 보이도록 스테이지에 남겼다. 그러자 순식간에 그것도 사라졌고 드문드문 제각기의 박수소리만 남았다.
"저것 때문에 매일 밤 나타나요 ? " 말러는 얼굴을 찡그리며 웃었다. 펠릭스도 쓴웃음을 보내며 그녀의 손 위에 살짝 손을 놓았다. "그 몇 번째인가의 일요일에 우린 약혼하지 않았나 ? "
"그럴 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 두 사람은 이젠 없어요." 말러는 심심한 듯이 목걸이를 매만졌다. "그 두 사람은 둘의 일요일 속으로 영원히 사라졌다구요. 행복이 모두 사라진 곳으로 말에요."
"당신은 친구가 찾고 있는 인물에 딱 제격이야."
"어째서요 ? "
"당신은 자신이 고독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 그곳에 있는 것은 말러 뿐. 말러 이외에는 아무도 없어. 절박하게 가슴에 다가오는 어두운 비밀."
"마치 란제리 세일즈맨의 말투같군요."
"이건 섬세한 프랑스제 레이스에요." 담배에 불을 붙였다. "모든 것이 투명하게 보이죠."
커튼이 열리면서 다음 연예인이 나타났다. 짜리몽땅한 체격에 부드럽고 긴 머리의 가발을 쓰고 있으며, 가슴에는 거대한 패트가 채워져 있다. 그녀가 취해 있는 드러머에게 비틀거리지 않도록 지팡이를 가져다 주겠다고 묻자 드러머는 드럼을 치는 막대기로 응했다. 출연자는 무대의 중앙으로 나섰다. 드러난 다리는 카운터에 있는 호모와 마찬가지로 근육이 발달해 있었다. 드러머가 의자에서 미끌어져서 풀썩 주저앉았다. 밴드의 멤버들이 물을 얼굴에 끼얹어서 제정신을 차리게 하는 동안 연기는 중단되었다.
펠릭스는 미소지으며 말러를 되돌아봤다. "잠자리야, 본 일이 있어, 잠자리를 ? 그건 아름다운 곤충이지. 눈이 확 뜨이는 것 같은 블루의 의상----"
펠릭스는 말러의 광택있는 블루색인 슈트의 옷깃을 만졌고 나아가 손가락을 빨간 실크 블라우스 위로 미끌어뜨렸다.
"----안감은 불타는 빨강이지. 하지만 죽을 때가 몇 시간 후로 다가오면 아름다움은 모두 사라지고 죽은 갈색으로 변해."
"그렇다면, 나는 나치의 돌격대처럼 되어 버리는 것 아네요 ? "
아무런 감정도 들어 있지 않은 말투였으므로 말러는 이 전쟁이라는 게임에 관해서는 그녀 나름대로 어떤 순응한 후라는 것을 펠릭스는 깨달았다.
"그 친구란 말이야, 육군 대령이야. 그가 일갈하면 군복을 입은 녀석들을 펄쩍 뛰게 되지. 머리를 써. 그렇게 하면 당신은 수많은 특권을 향유하게 된다구."
"난, 군인은 싫어요."
"목하, 그들의 지배하에 있지."
"세계는 무질서의 세계하에 있는 거에요." 한쪽 머리를 매끈하게 잘빠진 작은 귀의 뒤로 넘겼다. "그야 어쨌든간에, 어떻게 군대에 가지 않았지 ? "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당신한테는 애국심이라곤 없나요 펠릭스 ? "
"요만큼도. 군대 따위는 오밤중에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시끄럽게 낼 뿐이야."
말러는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 대령 말인데, 당신의 내복 회사는 그녀석이 관장하고 있어 ? "
"경멸하지 말라구. 그    조차도 스타킹을 트럭 몇 대분이나 사들인다구. 모두 장사를 하고 있어. 정부의 자동차가 당치도 않은 수량의 오리나 닭을 장교들의 집 앞으로 배달하는 세상이야."
열린 콧구멍으로부터 보라색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미술품 종류야. 가치있는 작품이 바로 옆에 흘러다니고 있어. 커다란 공업 계약도."
펠릭스는 어떤 반응을 요구하면서 말러의 얼굴을 살폈다. 뭔가 약점이 나타나지 않을까 살폈다. 그렇지만 그녀는 평정 그 자체로서 흥미를 나타내지 않았다. "그 친구인 대령은 영화 관계의 사람은 모르나요 ? "
"당면 제작중인 영화에 나가고 싶다는 따위의 생각은 하지 말라구. 전쟁이 끝나면 아무도 두번 다시 당신의 얼굴을 보고 싶어하지 않을 테니까."
입구의 문이 열리면서 쫄병 몇 명이 징을 박은 군화로 요란스럽게 들어왔다. 최전선을 경험하고 온 것일까, 그들의 태도는 포악스러웠다. 자신들이 이미 죽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내들이라고 펠릭스는 생각했다. 최고의 병사다.
펠릭스는 그들이 씩씩하게 테이블로 다가서는 것을 지켜보았고 그들의 잔인한 힘을 느꼈다.
"당신은 회사에 있어서 귀중한 존재가 될 거야 말러, 팔아 제껴야할 신발이 20만 개가 있다구."
"나는 여배우지, 땜장이가 아니라구요."
훌륭하군, 하고 펠릭스는 혼자 생각했다.
스테이지에서는 명랑한 가수가 엄청나게 큰 블래지어와 팬티 뿐인 모습으로 소세이지 같은 삼겹의 배를 내보이고 있었다. 이어서 교태를 부리면서 거의 입지 않은 그 의상을 떨어뜨리기 시작했으나 중요한 시점에서 스포트라이트가 완전히 꺼졌다. 야유가 난무했다. 하지만 카운터만은 별세계로서 몇 명의 여성이 사양하듯 박수를 치고 있었다. "당신은 훌륭한 여배우야 말러. 당신이 스카라좌에서 다리를 흔들어 올리는 처지가 된 것도 오로지 냉혹한 운명이 당신을 매장시켰기 때문이지. 하지만 이제 당신의 수호 천사인 펠릭스가 당신을 구원하러 나타났다구."
"선진국에 누구 아는 사람 없어요 ? 여배우에게 적합한 일이 많이 있을 텐데요 ? "
"횃불 행진에라도 참가하나 ? " 펠릭스는 재털이에 담배를 부벼껐다.
"꿈이란 좀처럼 버리기 어려운 거야."
"나도 UFA를 노렸었지만," 펠릭스는 소프트 모자를 벗고서 크라운이 살짝 들어가게 했다. "그 꿈의 세계의 주인이 되고 싶어서 말이야. 하지만 어느날 오후에 양철 갑옷을 입은 츄튼인 기사역을 하다가, 잘못하다가 질식해 버릴 뻔 했어."
웨이터가 클럽 안쪽에 있는 문을 가리키며 신호를 보냈다. 펠릭스는 일어서서 말러를 데리고 연기가 아른거리는 라이트를 지나 플로어를 통과했다. 바로 옆에서 병사들의 외침. 죽음의 울림을 들을 수 있다. 잔이 부딪치는 소리. 핀트가 안 맞는 밴드. 순간적으로 저승에 발을 들여 놓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웨이터가 복도 끝에 있는 분장실 방향으로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그곳까지 걸어가서 펠릭스가 문을 가볍게 노크했다.
대령이 웃는 얼굴로 문을 열었다. 낡고 지저분한 의상으로 넘치는 실내로 두 사람을 불러들였다. 마술사의 망토, 행정장관이 쓰는 가발, 먼지 투성이의 실크햇 등등.
"쓸만한 물건은 없지만, 이것들 보라구, 그래도 아직도 가슴을 울리는 매력이 있어. 이곳은 우리가 동경하는 환상이 모이는 장소야. 말러, 당신은 정말로 아름다워. 스카라좌에서 오페라 안경으로 보고서 정말로 감탄했지만 그 정도가 아니군."
"나한테 어떤 흥미가 있죠 대령님 ? " 말러는 팔목 시계를 봤다.
"극장으로 돌아가야 하는데요----"
"그렇군. 그렇다면 서둘러서 돌아가기 전에 부디 나로부터의----
그리고 나의 회사로부터의----아주 약소한 선물을 받아주길 바래." 뮬러는 경대에 몸을 수그리고서 검은 작은 상자를 꺼냈고, 가볍게 미소지으면서 그것을 말러에게 건넸다. 작은 상자를 열고 내용물을 본 말러의 눈길이 누그러졌다. 진주, 다이아 블로치, 사파이어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말러는 장신구에서 뮬러에게로, 그리고 또다시 뮬러에서 빌로드 안감을 댄 작은 상자로 눈길을 돌렸다.
"저한테 일자리를 주신다구요 ? "
대령은 테이블 위에 놓인 승마용 채찍을 들어서 세차게 장화를 때렸다.
"구두 약간에다가 홍차가 1천톤. 그밖에 여러가지." 뮬러는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서 건넸다. "마을의 동쪽 언덕, 이 주소에서 내일 밤."
말러는 명함과 악세서리가 들은 상자를 백에 넣었다. "이제 극장으로 돌아가야겠어요."
"내 리무진으로 바래다 드리지." 대령은 말러와 함께 문으로 향했고, 말러의 손을 잡고서 가볍게 키스했다. 말러가 펠릭스에게 힐끗 시선을 주었다고 생각되자 벌써 분장실 복도를 따라서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음, 그녀라면 할 수 있을 거야." 뮬러가 말했다.
"주어진 역할을 충분히 소화해 낼 겁니다, 그녀라면."
"남들이 본다면 저 아이의 아버지는 남작이라고 생각할 거야. 바지 제조업자 따위가 아니라."
"이미 조사를 끝냈군요."
"현재의 방식이지. 젊은이, 자네 자신에 관해서 말하자면 말이야." 뮬러는 주머니에서 접은 서류를 꺼내서 펠릭스에게 건넸다.
"175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순수한, 보증서가 첨부된 아리아인의 피를 이어받고 있어."
"그녀석은 조국을 위해서 피를 흘릴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지만 말입니다."
"이 내가 희생을 요구했나 ? 하지만 조심하게----" 뮬러는 테이블에서 장갑을 들어서 손가락 하나하나를 정성스럽게 끼었다.
"지금 우리가 행하고 있는 일 때문에 벽 앞에 세워질 가능성은 있으니까."
"나보다 조심스러운 인간은 없다는 것을 곧 알게 될 겁니다."
"아니, 아니야. 항상 누군가가 있는 법이지. 그녀석이 지나가는 길과 우리의 길이 교차되지 않을 거라고 믿자구."
대령의 머리가 낮게 드리운 전구에 맞았고 분장실의 거울에 불빛이 반사되어 눈부시게 흔들렸다. 펠릭스는 잠자리의 날개 소리를 들었다. 그러자 갑자기 충격이 그를 엄습했고 동시에 거울 안쪽이 어느새 장미색으로 변했다. 그 장미색의 세계에 서서 가만히 이쪽을 되받아보고 있다. 저것은 말러. 두 사람 사이에는 몽롱한, 헤아릴 수 없는 간격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펠릭스는 흔들리는 전구를 멈추게 하려고 손을 뻗었으나, 그 손은 전구를 통과해 버렸다. 거울 속의 말러는 남녀의 울타리에 둘러싸여 있다. 그녀는 변모를 이룩하고 있었다. 여왕 같은 품격을 지닌 여자로,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주연. 여배우로. 주연 여배우에 어울리는 의상과 부를 몸에 걸친 그 여자의 이름은...
...로마...
카스피안의 몸이 데브루스카 저택의 복도에서 맥없이 흔들렸다. 그는 큐비스트 수법에 의한 한폭의 그림, 화가의 눈을 통해서 분해된 기타의 그림 밑에 서 있었다. 복도 끝으로부터 로마 프렌치가 가만히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문득 양손을 보니 장미색 서광은 그곳으로부터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또다시 로마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는 생각했다. 두 사람의 영혼은 꿈속에서 찍힌 낡은 한장의 사진과 비슷하다고.
어느 일요일 오후,  독일의 공원에서 맥주를 마시는 두 사람... 맥주 속에는 로즈베리 시럽이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제 7 장 연극 속의 연극



"하지만 어째서 또 나치 시대의 독일 같은 곳에 내가 ? "
안은 둥근 테이블에 반사하는 아침 햇살을 사이에 두고 게이라드 의사와 마주보고 있었다. "그것이 어떤 심정인지 압니까 ? 스스로의 인생을 살아오다가 문득 깨닫고 보니까 나치가 되어 있다는 것이 ? "
"그것은 그림자에 관한 문제군요." 하고 게이라드는 컵 바닥에 조금 남아 있는 홍차를 들여마시고, 딸깍하고 조그만 소리를 내며 받침접시 위에 내려놓았다.
"여기에 데이빗 카스피안이 있습니다. 어디에나 있을 것 같은 인간입니다. 성인도 아무 것도 아니지요. 그러나, 그에게는 그 자신의 생활 신조가 있습니다. 그런 그가 돌연 뭔가 대단히 어두운 것으로 변신했습니다. 사실 인간이 될 수 있는 최저의 수준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는 것으로----나치로."
게이라드는 눈에 부드러운 표정을 띄고 카스피안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마음을 안정시켰다.
"심리적 견지에서 말한다면, 무의식이 당신에게 악을 느끼게 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당신 자신 내면에 존재하고 있다고 깨닫지 못하는 악을 말입니다."
"그것을 안고 있는 것은 나 뿐인가요 ? "
"누구나가 안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통 우리들은 그것을 상사라던가, 이웃이라던가, 러시아인이라던 가에 투영하는 것입니다. 혹은 독일인의 경우----유태인에게. 상대는 악인, 자기는 선인이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것은 인류의 모든 문명이 안고 있는 문제입니다. 우리들은 악인이 될 수 있는 자질을 내면에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고, 그것을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떠넘길려고 합니다. 그러나 한 개의 완전한 인간이 되려면 이 양면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예는 이전에도 ? "
"나치의 꿈이라던가, 나치가 되는 꿈이라던가, 나치에게 고문을 받는 꿈은 흔히 있습니다."
"다만 나는 자고 있지 않습니다. 완전히 눈을 뜨고 있다구요. 그곳에 돌연 탕----그래서 나는 무릇 인간이 될 수 있는 최저의 수준으로 전락하고 있는 셈입니다. 쾌적한 생활도 명성도 얻은 품행 단정한 미국인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도중에 나는 대뜸 세계가 일찌기 유례를 볼 수 었었던 혐오스러운 정치 체제의 일원이라는 사실에 직면하게 되니까 말입니다."
카스피안은 말을 끊고 눈을 감았다.
"영화 배우에게 나치를 연기하게 하다니, 애당초 무리한 얘기입니다. 이전에 더크 보가드가 도전한 일이 있지만 자칫했으면 배우 생활을 망칠뻔 했습니다."
카스피안은 눈을 떴다.
"나의 경우, 꼼짝 못하고 나치가 되도록 꾸며져 있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이것을 어떤 형태의 도덕적 계몽이라고 하는 겁니까 ? "
"융그는 그림자의 통합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보통 하잘 것 없는 시선한 일, 증오, 선망 등을 이해하는 데서 이것은 시작됩니다만. 그러나, 어쩐 셈인지 당신은 그 민족의 커다란 그림자 속에 갑자기 뛰어 들어가 버렸습니다. 이것은 치료라는 점에서 보아 이상적인 과정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한꺼번에 당신에게 무거운 짐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그때문입니까 ? 내가 완전히 자기를 상실해버리는 것은 ? "
"요전에는 얼마 정도 그쪽에 가 있었습니까 ? 데브루스카의 파티에서 말입니다."
"한 시간 정도지만 그동안 아내는 나를 향해 분명히 얘기를 하고 있었고, 나도 그것에 대답하고 있었습니다."
"펠릭스로서요 ? "
"나는 그의 쪽에 있고 그가 내쪽에 있었습니다."
"당신이 그의 쪽에 있었을 때, 나이트클럽에서인데요, 자신이 데이빗 카스피안이라는 자각은 있었습니까 ? "
"나는 완전히 펠릭스가 되어 있었습니다. 마음의 뒤쪽에 누군가 다른 인물이 있구나 하는 희미한 감각은 있었지만----몽롱한, 공중에 뜬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 아닙니까 ? 선생님은 어떻습니까 ? "
"펠릭스로 있는 것은 즐거웠습니까 ? "
"천만에요. 심심해서 놀러나간 것은 아니니까요. 자기가 펠릭스가 되어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어요. 선생님은. 선생님 자신이라는 것을 즐기고 있습니까 ? 다만 이것이 자기라는 것 뿐이지 않습니까 ? 그때 나는 펠릭스였고, 그것에 대치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펠릭스라는 그것은 어떤 것입니까 ? "
"체스의 말과 같은 존재입니다. 하나하나 행동이 신중하고."
"데이빗 카스피안과는 다른 ? "
"내게는 그것을 위한 에이전트가 있습니다."
게이라드는 미소를 지었다. "시간을 상실하고 있는 동안 부인이 얘기를 걸었지요 ? 부인은 어딘가 이상한 점이 있다고 느꼈습니까 ? "
"거울이 있는 낭하에서 나와 만났다고 했습니다. 나에게서 자기 이외의 것은 전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틀림 없이 나는 <스타 로바>의 역할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겠지요." "당신이 그렇게 말했습니까 ? "
"펠릭스가 말했습니다."
"로마 프렌치에 대해서 상세하게 말해 주시겠습니까 ? "
"로마는 매우 능력있는 여배우입니다. 사실은 어젯밤 재방송의 영화에서 그녀를 보았는데, 그녀는 대단히 이상한 맛을 지니고 있더군요. 어딘지 모르게 엇갈린 데가 있었습니다. 이쪽에는 단순한 이름바 육체파 배우라는 제멋대로의 편견이 있었으니까 얼마간 저항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것은 내 잘못이었습니다."
"그곳에 뭔가 매력을 ? "
"그 영화를 볼 때까지는 그런 유의 미인에 대해서 남성이라면 누구나가 갖는 감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 "
"지금은 모르겠습니다."
"동전의 뒷쪽 면에서 그녀는 독일 여성인 말러였지요 ? "
"그렇습니다."
"펠릭스의 옛날 애인이고."
"아직도 밑바닥에서 타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펠릭스는 그녀에게 반해 있어서 그의 귀에는 회전 목마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들리는 겁니다. 옛날에 자주 함께 갔던 공원이 있었지요. 그는 지금도 그녀와 그곳을 산책하는 겁니다. 추억 속에서. 그녀는 이른바 펠릭스의 급소가 이닐까요 ? 그녀를 위해서라면 맞아 죽어도 좋다는, 그런 유의 여자라고 할까요."
"당신은 독일어를 알고 있군요."
"일년 가량 독일에서 연극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어릴 때는 나치를 상징하는 것을 수집했었지요."
"내가 수집한 것이 아닙니다. 저쪽에서 제멋대로 날아들어온 겁니다. 마치 너를 제대로 찾아냈다는 듯이. 그점이 기분이 나쁩니다. 마치 내가 무엇인가의----패턴의 일부 같아서."
카스피안은 한 호흡 쉬었다가 골짜기를 내려다 보았다.
"나를 미리 그곳에 준비해 두었다고나 할까요."
"누가 그렇게 했다고 생각합니까 ? "
"누군가 육체에서 분리되어진 것. 현실과 현실과의 골짜기에 있는 자동식문 옆에 세워져 있는 녀석의 소행이지요."
"그런데 왜 데이빗 카스피안을 ? "
"손쉬운 목표물이기 때문이겠지요."
"어째서 ? "
"어딘가에 허약한 구석이 있는 것입니다. 구멍이 뚫어진 곳이."
"우리들은 모두 무의식의 영양 하에 놓여 있습니다." 게이라드 의사가 말했다. "예술가들은 고의로 그런 영향 밑에 자신을 노출해 보이고, 더구나 거래를 한 이상의 것을 손에 넣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밖에 나치 통치하의 독일에서 인생의 절반을 보내고 있는 배우가 있습니까 ? "
"이 방에서 지금까지 그런 배우의 말을 꽤 많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 "
"이미 하고 있을 것입니다. 가령, 데이빗 카스피안이 그 세계에서 배울것이 한 가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어떤 교훈인가 ? 펠릭스가 그 교훈에 관계되어 있군요."
"이래도 아직 선생님은 펠릭스가 꿈속의 인물이라고 주장하시는군요. 사소한 억압이라던가, 뭔가 그런 종류의 것이라고."
"그는 사탄 그 자체일 지도 모릅니다." 게이라드는 입을 다물고 안쪽 벽을 놓여있는 서가 쪽으로 막연히 눈을 돌렸다. "구한다고해서 손쉽게 손에 들어오는 것은 없습니다. 융 그는 자기가 돌산에 깔려 죽는다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빠져 나왔겠지요 ? "
"돌파했습니다, 확실히."
"그래서 무엇을 발견했습니까 ? "
"몇천 피트나 낙하했지요. 살로메와 에리야를 발견한 것입니다. 두 사람은 독자적인 존재로서 그는 두 사람과 오랫 동안 대화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곳에서 무엇을 얻었습니까 ? "
"그곳에서 심층 심리학의 기초를 확립했습니다." 게이라드는 앞으로 나와 앉았다. "당신은 무엇을 얻었습니까 ? "
카스피안은 말없이 계곡의 나무들의 꼭대기로 시선을 되돌렸다. 지금 마악 대양은 아직도 남아 있는 아침 서리를 녹이려고 하고 있었고, 새의 지저귐 소리가 높아져가고 있었다. "우리들은 정신분열증적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내가 보는 한에서는 그것이 교훈입니다. 이런 세계를 만든 것은 미치광이에 틀림 없습니다."
카스피안의 호흡은 빨라지고, 가슴이 부풀기 시작했다. 횡경막에 불이 붙어서 당장 숨이 막힐 것 같은, 메마른 목소리가 목구멍에서 뿜어 올랐고, 갑자기 그는 흐느꼈다.
"그것이 좋습니다." 게이라드는 조용하게 말했다. "모두 토해 버리세요."

마일론 피쉬 저택의 풀은 S자 형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양쪽 끝에 다이빙대가 있어서 전체가 달러 표시로 보이는 그 풀에서 피쉬는 비닐제의 뗏목으로 왔다갔다하면서 이따금 더할 수 없이 빼어난 영감을 얻는다. 지금도 선글라스를 하늘로 향하고 한 손을 따뜻한 물에 담그고 떠돌고 있었다.
"곧 <죽음의 골짜기>에서 촬영을 하게 되는데 데브루스카는 제작비를 아끼려들꺼야. 어떤 장면에서 문이 절반밖에 보이지 않으면 절반밖에는 페인트를 칠하지 못하게 하는 친구니까."
카스피안은 마일론의 옆에서 다른 뗏목에 엎드려서 물 속에 비친 타일이 깔린 바닥을 들여다 보면서 떠들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 숙소는 <데드 밸리 홀리데이 인>이라는 말인가 ? "
피쉬는 한쪽 팔꿈치로 상체를 일으키고, 최근에 손에 넣은 신인 여배우가 누워있는 풀가의 안마당 쪽을 살펴보았다.
"저 아이는 새끼 손가락만큼의 재능밖에는 갖고 있지 못한데."
피쉬는 물가의 미녀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유방이 얼룩무늬 수영복 속에서 버섯형으로 튀어나와서, 몸둥이 부분을 명암으로 나누고 있었다. "그녀를 키우는 역할을 떠맡게 되다니 나도 운수가 좋은 인간이야."
"꽤나 많은 아가씨들이 당신의 신세를 지고 있을텐데."
"그런데도 내가 답례를 하는 괴로운 처지에 빠지고 만다니까. 대개의 경우 위자료의 지불이라는 명목으로."
피쉬는 대단치 않은 올챙이 배를 하늘로 향한 채 그 위에 얹은 마티니를 통통한 두 개의 손가락으로 바치고 균형을 잡으면서 또 한 손으로는 태평스럽게 물을 헤치며 멀어져 갔다. 풀 가장자리에서 카스피안의 딸인 알리샤가 기다리고 있었다.
"잠깐 얘기해도 괜찮아요, 피쉬페이스 아저씨 ? "
"알리샤." 캐롤이 나무라는 어조로 말했다.
"미스터 피쉬페이스라고 해야지."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 "
"피쉬페이스씨, 이번 여자 친구는 이름이 뭐에요 ? "
"발레리란다." 피쉬는 풀 가장자리에 손을 뻗어서 <로스앤젤리스 타임스>를 집어 얼굴을 덮었다.
"굉장한 미인이예요."
"아아, 그렇구나."
"내가 미인이 되면 에이전트가 되어 주시겠어요 ? "
"그럴 필요가 생긴다면. 그러지." 피쉬의 목소리는 신문지 밑에서 분명치 않게 들려왔다. 알리샤는 피쉬의 뗏목 뒤로 돌아가더니 풀의 얕은 곳으로 밀고 갔다. "모처럼 내 장래에 대해서 의논하려고 했는데."
"그렇다면 사무실로 오시지요." 피쉬는 신음하듯이 말했다. 졸리기 때문에 차츰 흐릿한 목소리가 되었다.
카스피안은 옆으로 몸을 굴려 물로 들어가자 왕복 헤엄을 쳤다. 몸짓에 맞춰 수면에 맑은 잔물결이 일어났다. 사다리 있는데까지 가서 몸을 끌어 올리자 다이빙대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옆에 클레스웰이 앉아 있었다. 한 손에는 비인 디프, 한 손에는 빵. 접시에서는 담배가 타고 있다. 에드 클레스웰은 인사 대신에 비인 디프를 쳐들어 보였다.
"나는 인생 항로에서 중대한 결단을 내렸네."
"설마 우리들의 프로젝트에서 빠진다는 얘기는 아니겠지 ? " 하고 카스피안은 말했다. 기묘한 개성의 소유자이기는 하지만 지금 비인 디프를 한 손에 들고 눈 앞에 앉아 있는 이 뼈와 가죽 뿐인 우울증 환자 이외에, 함께 일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상대는 없었다.
클레스웰은 디프를 내려놓고, 담배에 손을 뻗어 길다란 재를 마일론의 풀 속에 떨어뜨렸다. "아니, 탭댄스의 레슨을 시작하겠다는 거야."
"그래요 ? 그 이유는 ? "
"내 자신이 프레드 아스테어풍의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
카스피안은 새우등에다 풍채가 빈약한 편집광인 친구를 들여다 보았다. "맞아, 자네와 아스테어는 이상적인 한 쌍이지."
클레스웰은 담배를 접시에 다시 놓았다.
"자네도 함께 하지 않으려나 하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아도 레슨, 레슨으로 정신이 없다네... 도저히 시간을 낼 수가 없어."
"배우라면 탭댄스의 기초 정도는 알아야지."
"지금까지 해온 것은 펜싱에다 가창법에다 호흡법에다 당수에다 승마에다 판토마임에다 마술이었네. 그밖에도 대사 발음법, 집중력, 역에서 마스터베이션까지 공부를 했어. 레슨이라면 이젠 신물이 나네."
"운동이 된다니까." 클레스웰은 카스피안의 드러난 허리를 손가락질했다. "그 모습은 임산부가 무색할 정도야."
"친구를 보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카스피안은 숨을 들여쉬고 배를 집어 넣었다. "불과 1인치 불어난 것 뿐이라구."
"상상해 보라구. 자네가 탭댄스를 추며 계단을 내려오면 캐롤이 얼마나 감격할까를 ! "
"불행하게도 우리 집에는 계단이 없어서."
"계단을 찾아내서 캐롤을 깜짝 놀라게 해 주는 거야. 그녀가 쇼핑을 하고 있다가 문득 눈을 쳐든다. 그때 우리들 두 사람이 탭댄스를 추며 계단을 내려와서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잘 꾸며진 환상이군."
"아무래도 지금까지 자신의 껍집 속에 너무 들어앉아 있기만 했다는 느낌이 들어. 빛이 있는 곳으로 나가고 싶어. 탭 슈즈가 갖고 싶어."
에드 클레스웰은 앉은 채 고무줄로 엮은 샌들을 찰싹찰싹 두들겼다.
카스피안은 다시 다이빙대를 향해 사다리를 올라갔다. 지금까지 바이올린의 명 연주가나 스프피리족의 학자나 뇌외과 의사로부터 특훈을 받은 일이 있다. 그것도 저것도 단 일분 간의 장면에서 자못 그럴듯 하게 보이기 위해서인데, 그것은 자타가 모두 인정하는 일분간이었다. 탭댄스나 우루두어도 언젠가 레슨을 받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올 것이다.
다이빙대 위까지 올라가자 그는 피쉬가의 바로 옆집을 쇠울타리 너머로 내려다 보았다. 주민은 아랍인으로 어떤 이유에서인지 언덕의 전면을 콘크리트 덩어리로 바꾸려 하고 있었다.
카스피안은 다이빙 판의 끝까지 걸어가서 반짝이는 거울을 향해서 뛰어들었다. 물을 꿰뚫고 내려가니까 손가락이 푸른 타일을 스쳤다. 그대로 방향을 바꿔 잔물결을 담고 반짝반짝 태양을 반사하는 수면을 향해 올라갔다.
수면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흘러 떨어지는 도중의 무수한 물방울이 눈앞에 일그러져 걸려 있다. 빛이 물방울에 반사해서, 그는 아주 조그마한 투명한 달의 샤워에 감싸여져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루가 끝나고, 태양은 풀을 비추는 조명등으로, 그리고 풀은 실내 뜰로 되어 있었다. 동굴을 연상시키는 광대한 공간. 그 속에 사람들이 붐비고 있다. 바야흐로 파티가 무르익고, 베를린은 밤이었다.
꽤나 멀리 왔다고 펠릭스는 생각했다.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드는 그 무더운 고장. 게다가 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한 저 사람들.
풀 속에서 펠릭스는 목표도 없이 방향을 바꾸고 호화로운 저택의 어두운 유리창을 응시했다. 별들이 빛의 엷은 망을 이루며 반짝이고, 창 너머로 덧없이 깜빡이고 있었다.
큰 양치의 뾰죽뾰죽한 잎이 전황을 비웃듯이 열대 지방 특유의 나태를 노골적으로 나타내고 창에 늘어져 있다.
그러나, 마치 죽음의 도래를 앞두고 오늘 밤이 최후의 화려한 모임이라도 되는 듯이 침울한 분위기가 파티를 뒤덮고 있었다.
풀의 가장자리까지 헤엄쳐 가서 기어 올라가 초로의 하인이 펼쳐 들고 있는 가운데 몸을 감쌌다. 칸막이로 가로막은 갱의실로 안내되어 그곳에서 가운을 벗고 타올로 몸을 닦았다.
팔뚝에는 젊은날의 기념물, 날개를 펼친 매의 문신이 있다. 지금 그 부분을 문지르면서 언제나 그렇지만 가까운 장래에 이것을 지우러 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마음속에 새겼다. 신원을 식별할 수 있는 표시는 경찰에게 있어 매우 편리하기 때문이다. 옷걸이에는 군복이 걸려 있다. 몸에 딱 들어맞는 셔츠와 바지를 입었다. 뒤이어 윗저고리, 넥타이, 목이 높은 검은색 장화. 옷을 모두 입고 뒤꿈치를 딱하고 높게 맞부딛치게 했다. 남동유럽담당 특별무관, 요제프 에르하르트 뮬러대령 지휘하의 주간 경제개발 연락부의 제2분대 대원 파르켄하인 중위는 칸막이 뒤에서 씩씩하게 모습을 나타냈다.
하사관들이 쟁반에 얹은 샴페인이나 브랜디를 장교의 부인들에게 대접하며 돌아다니고 있다. 일반 시민----야회복 차림의 실업가 및 사람----을 상대로 같은 것을 대접하고 있는 것은 나이가 든 집사들이다. 실업가들은 대령의 막료와의 대화에 여념이 없다----군복 차림의 젊은 변호사, 경제 분석가, 투자가 그들의 첫번째 관심사는 경제 개발이다. 그때문에 이 그룹이 결성되어진 것이다.
따라서, 토의의 대상도 탱크가 아니라 드로프에차에 있어서의 석탄 채굴공업이었다.
펠릭스는 대화가 들리는 곳을 천천히 지나갔다. 그들은 이곳에 없는 장교를 귀에 거슬리는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비웃고 있었다.
"그 사람은 문제의 광천수의 거래에서 엉뚱한 실수를 저질렀다구요."
"그리고 폴랜드의 벽돌 공장에서두요. 하여튼 그 사나이의 머리속에는 벽돌이 가득 들어 있다니까요. 여어, 파르켄하인, 재미있게 지내나 ? "
펠릭스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자기가 취해야 할 태도는 이미 알고 있었으며, 이번만은 증명 서류도 대강 갖춰져 있다. 넓은 방의 가장자리를 지나갔다. 이 저택은 펠릭스들의 여단장의 소유물로서, 지금도 뮬러 대령은 티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당사자와 긴의자에 앉아 있었다.
"작년도의 총 매상고는 5백만 마르크입니다. 군이 관계하고 있다는 것은 비밀로 하고 트위글러 씨를 그대로 명의상의 사장으로서 머물러 있게 합시다."
여단장은 중년의 실업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현재 말러를 접대하고 있는 인물로서, 그 사이에 그의 피혁 회사는 군의 카르텔에 합병되어지고 있었다. 펠릭스는 그의 속셈을 읽을 수가 있었다----누가 그 공장을 경영하든 천 파운드짜리 폭탄이 떨어져 내려 올 지도 모른다. 지금 이 미인을 놓칠 수는 없는 거야.
여단장은 프램 퓨레를 크레커에 얹으려 하고 있었다. 펠릭스는 여단장의 머리 위의 벽면을 보았다. 오랜가족의 초상화가 몇장인가 걸려 있다----육군 원수, 고위 성직자. 그 번쩍이는 액자 옆에서 가지형 촛대가 그들의 명복을 기원하듯이 타고 있었다.
앞쪽으로 계속 어슬렁 어슬렁 발을 옮겨갔는데 그 결과 감시중인 두 명의 사복 게쉬타포에게 가까이가게 되었다. 그들의 음침한 눈초리를 견디다 못해 서둘러 방을 가로질러서 동료인 육군 장교 그룹 속으로 끼어들어갔다.
장교들은 흰색 그랜드 피아노 옆에 서 있는 또 다른 사나이를 병신으로 만들고 있었다.
"누가 그러는데 뭇솔리니의 친척이라면서 ? "
"나폴리에서는 도어맨을 하고 있었대."
그 장교는 말러 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쪽은 영낙 없는 코러스라인 출신이군."
"아니," 펠릭스가 말했다. "저쪽은 폰 브라운슈타인 백작 부인일세, 대령이 소개해 주었다네."
"등에 번호를 붙이고 각성제를 맞고, 36시간 계속 댄스를 할 수 있어. 저 여자는."
펠릭스는 말러에게 이쪽으로, 펀치 테이블이 있는 쪽으로 오도록 신호를 보냈다. 말러는 구두왕에게 실례하겠다고 말하고 다가왔다. 긴 드레스 자락이 펠릭스의 장화 위를 스쳐 갔다.
"일은 잘 되어가고 있어요." 그렇게 말하고 말러는 글라스를 손에 들었다.
"빈틈 없는 연기지만 좀더 천천히 하도록. 벌써 빽스트레치에 다달았으니까." 펠릭스는 동료를 향해 어떠냐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트위글러 씨는 최고로 기분이 좋았어요." 말러는 그녀의 구두왕에게 방 이편에서 미소를 보냈다.
펠릭스는 다른 글라스에 펀치를 따랐다. "그쪽에 있는 군인말인데, 어딘가에서 만난 적이 있오 ? "
"아니요. 왜 물어보죠 ? "
"당신을 알고 있는 것 같길래 하는 말이오, 백작 부인. 댄스 마라톤에서."
말러는 손에 들고 있던 펀치 글라스를 살며시 그의 글라스에 갖다댔다. "당신은 좋은 파트너였어요. 그때 2등을 했었나요, 우리들 ? "
"그날 밤 우리들은 시간을 멈추게 했지." 펠릭스는 글라스를 뗐다. "지금도 멈추게 할 수가 있을까, 이대로 ? "
말러는 드레스의 가슴께를 매만져 드러난 유방의 주위를 정리했다. "우리 구두방 아저씨에게 인사를 하고 와야겠어요. 정말로 저 사람의 회사를 먹어 치울 건가요 ? "
"장화용 못 한 개에 이르기까지."
"그런데도 저 사람은 저렇게 신이나서."
"당연하지. 당신을 손에 넣었으니까."
"오래 계속되지는 않아요." 구두왕이 일어서는 것과 동시에 말러는 글라스를 내려 놓고 함께 문으로 향했다. 펠릭스가 글라스 너머로 지켜본다.
"어떤가, 재미있게 해 나가고 있는가 ? " 하고 뮬러 가 뒤에 서서 접시에서 오이 샌드위치를 집어들고 있었다.
"게쉬타포가 나를 노려보고 있습니다." 하고 펠릭스는 말했다. 방 건너 쪽의 사복 두 명과 또 다시 시선이 마주쳤다.
"자네에게 겁을 주고 싶은 거라구. 저놈들은 누구누구할 것 없이 겁을 주고 싶은 거야."
"저녀석들의 서류 상자에 내 신상 카드가 들어가 있어요." 펠릭스는 손을 뻗어서 오이 피클을 집어 그 끝을 잘라 먹었다. "짙은 보라빛 표시가 되어 있어요. 불평 분자의 표시입니다."
"자네가 불평을 입에 담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었네. " 그리고는 대령은 목소리를 낮췄다. "내가 저 지저분한 녀석들을 두려워하고 있는 줄 아나 ? 저 두 사람은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이곳에 와 있는 거야. 자네를 탐지하기 위해서는 아닐세. 우리들의 위험은 훨씬 높은 차원에 있다네."
"그 차원이라는 것은---- ? "
대령은 피아노를 치는 듯한 손짓으로 펠릭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네는 배우를 하고 있었다면서 ? 그렇다면 연극을 하게. 어떤 연극을 하고 있었나 ? "
"그 사람은 <써클 카페>에 출연하고 있었어요." 말러가 뒤로 다가와서 말했다. "이 사람은요, 무대에서 코트 자락이 의자 밑에 끼어서, 일어나라는 큐가 나왔을 때 일어서지를 못했다구요."
뮬러 대령은 말러의 손을 잡고 양손에 썼다.
"사실은 당신에게 이태리대사관부 항공 무관을 만나보고 와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어. 저기 피아노 옆, 타조의 날개 밑에 있는 사나이 말이야. 저 전구의 비행장에서 착륙하고 싶은 곳이 있는데 협력을 해 주지 않는 거야. 당신이 한번 가서 관료주의자의 무거운 엉덩이를 들도록 해 주지 않겠오 ? "
펠릭스는 공습 경보의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하는 것을 들었다. 멀리서 폭격기의 낮은 폭음도 들려온다. 집사들이 용이주도하게 창과 천창에 암막을 내렸으나 파티는 계속되었다. 말러는 어둠컴컴하게 한 불빛이 선조 전래의 가구에, 벽면에, 그리고 실크 드레스를 입은 말러 자신의 위에 희롱하는 속을 이태리 무관에게 다가갔다.
가까이오는 말러에게 무관은 등을 똑바로 펴고 주목했다. 뮬러가 펠릭스에게 웃는 얼굴을 돌렸다.
"반 시간마다 계획의 실행이군."
"혹시 저 사나이가 이태리 영화계에 연출을 가지고 있다면 두번다시 말러를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대령은 펠릭스의 팔꿈치를 잡고 천천히 방향을 돌렸다.
"저기 있는 사람 말인데, 콧수염을 기르고 가느다란 쇠테 안경을 쓴 사람말일세. 저녀석은 한끼 더 얻어먹고 트롤리 버스의 왕복 승차권을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남을 구데기에게 파먹게 할 녀석이야. 우리들은 저 사나이를 크라크프 시의 조역으로 임명할 계획을 세우고 있네. 그래서 말인데, 자네가 책임을 지고 그를 무사히 그곳에 도착하게 해 주었으면 좋겠네. 그리고 조그만 개인적인 볼일도 부탁하려고 생각하고 있어."
"저는 정치에 관해서는 무지한 인간입니다."
"자네는 물론 초크마이어의 희곡을 기억하고 있겠지. 난장이 구두장이의 얘기를. 구두장이는 관리가 패스포드를 주지 않는다고 군의 잉여 물자인 군복을 사들여 병사의 일대를 시청에 쳐들어가게 해서, 그 자리에서 시장을 체포해서 자기가 자기의 패스포드를 발행하게 한다는 그것 말일세."
뮬러는 펠릭스의 윗저고리를 약간 잡아당겼다.
"인생은 단순히 연극일세, 펠릭스. 그럴듯한 제복을 입고 구두 장이의 역할을 해내면 되는 걸세. 그렇게 하면 아무도 자네를 귀찮게 하려고 하지 않을 걸세."
뮬러가 두 사람 사이의 얘기는 여기까지라는 몸짓을 은연중에 나타냈기 때문에 펠릭스는 부하인 하사관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일동은 연회용 테이블의 저쪽 끝에 몰려서서 말러와 그 무관을 궁금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히 카페 <화이트 마우스>에서 본 얼굴인데. 그녀는 <중국의 부채>라는 쇼에 나왔었다구."
"폴랜드로 출장이다." 뒤에서 펠릭스가 말을 걸었다.
하사관들이 물러가자 펠릭스는 풀가의 테이블에 잊고 가져오지 않은 담배 케이스를 가지러 갔다. 테이블 옆에 창백한 얼굴의 장신의 장교가 앉아 있었다. 장교는 펠릭스가 내민 담배 케이스에서 담배를 한 개 뽑았다. "고맙네, 파르켄하인, 잘도 이런 고급 담배를 손에 넣었군. "
화제는 장사 얘기로 옮아갔다----주철고장, 섬유공장, 크링켈 시멘트 회사. 펠릭스가 농담을 섞어 말했다.
"우리들은 마침내 쨈 만드는 일까지 손을 댄다는 얘기 아닌가."
"그렇지 않아도 우리들은 이미 쨈 속에 발을 쳐넣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구."
멀리서 들려오는 공습 경보 사이렌이 장교의 말을 중단시켰다. 그는 술을 따른 스니프터 글라스를 손에 들고 손목을 흔들어 금박이 빛나는 리큐르를 흔들었다.
"뮬러 대령의 말로는 자네는 카페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다더군."
"조금은 하층 생활을 한 경험에서지."
두 사람의 눈이 풀로 향해졌다. 얼룩 무늬의 수영복을 입은 여성이 물속으로 몸을 집어넣는 길이었다.
"여단장의 정부지." 장교가 말했다. "나 자신은 좀더 어린 여자를 좋아하지. 훨씬 어린 여자. 내 말 뜻을 알겠나 ? 좋은 곳이 있네. 사실은 비밀 클럽인데 자네도 마음에 들어할 꺼야."
장교는 담뱃재를 풀에 툭툭 털었다. 램프에 빛에 비쳐서 반짝반짝 빛나는 수면에 재가 떠다니는 것을 펠릭스는 바라보다가 다시금 장교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엇을 노려보고 있는 거지 ? " 클레스웰이 말을 걸었다. "내 셔츠가 어떻게 됐나 ? 이것은 하와이에서 손으로 그린 거라구." 클레스웰의 깡마른 팔이 풀 위에 늘어져 있고 담뱃재가 물 속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카스피안은 의자에 길게 누었다. 태양이 한껏 최대한의 에너지를 담아 내려 쬐고 있는---- 오후의 황금색...붙잡을 곳이 없는...반짝 반짝 빛나는----스너프터에 따라진 금박이 들어간 리큐르. 그 속에서 제3제국의 파티가 꿈을 꾸고 있었다.




제8장 죽음의 골짜기



"정신병자가 사로잡히게 되는 강박 관념은 변화하는 일이 없어요. 항상 고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극이지요. 하지만 펠릭스에게는 유동성이 있고 이미 변화해 버려서 말입니다. 그는 독일 육군에 입대했습니다." 게이라드 의사가 말했다.
게이라드의 맞은편의 카스피안은 정신의 심층이 드디어 정체를 나타내기 시작하고 있으며, 그것이 비록 정신분열증적인 발현 방식을 취하긴 해도 그곳에는 그 어떤 의도가 담겨져 있는 것이라고 믿어버리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가 독일 육군에 입대해도 나에게는 그다지 위안이 되지 않는데요."
"우리들은 다만 상징적인 가치를 논하는 데 불과합니다. 이것으로 펠릭스는 인지된 셈입니다."
"인지되었다니요 ? "
"그는 자기가 범죄자란 것에 어떤 종류의 불안 같은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명백한 범죄자이기 때문에 침착성올 잃고 있었습니다. 그는 적응할 필요가 있고 입당할 필요도 있어요. 그가 가장 유익한 일을 하도록 정신적으로 제고되었던 것입니다."
게이라드는 눈을 감았다. 그곳에 내려진 침묵은 한낱 공백 그대로는 아니었다. 카스피안의 혼은 게이라드와 더불어 어둠 속에 밀어 넣어지려고 했다. 펠릭스 내부의 우주에 숨겨져 있는 참된 의도를 찾아 내려고 하고 있었다.
"그래요. 그는 권력을 수중에 넣어야겠다고 기를 쓰고 있었어요.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더욱 의식을 향해 부상하지 않으면 안 되었죠. 그는 이미 암호 사회의 존재인 것에 만족할 수 없게 된겁니다." 게이라드는 눈을 떴다.
"그건 왜지요  ? "
"자아를 희구하는 지칠줄 모르는 충동이지요." 게이라드는 사이를 두고 카스피안을 주시했다. 말할 때 그의 눈은 기묘한 변화를 가져왔다. "펠릭스는 당신에게 내재하는 분신, 자아를 풀어보려고 원하는 우세한 분신입니다. 자아는 폭군이예요. 명령을 내릴 뿐으로 변화를 싫어하죠. 배우란 것은 불안정한 직업이란 것과 남들로부터 추켜 세우는 부추김을 받는 데서 강철같은 자아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펠릭스도 또한 자아를 갖고 있겠죠 ? "
"그는 자아의 일부이지요, 때로 얼굴을 내밀 뿐인."
"차츰 단골이 되어가고 있지만 말입니다."
"당신은 밤낮으로 그의 위에 듬직히 주저앉아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다치고 펠릭스의 동기지움으로 돌아가기로 하죠. 그는 당신의 하나의 원동력입니다. 그에 관해서는 저에게는 상당한 확신이 있습니다."
"뻔뻔스러운 말씨를 용서해 주신다면 말입니다만 힘에 관해 말하면 나는 이미 상응하는 이상의 힘과 그에 걸맞을 만한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위를 쳐다보면 끝이 없잖아요. 이 게임은 영원히 끝나는 일이 없어요. 헤라클레스는 저승에서 망령을 상대로 끝없는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에요. 당신의 어린 시절은 가난했었죠. 그런데, 노력한 끝에 엘리트에 걸맞는 직업의 톱 자리에 오르게 되었어요. 그러기 위해선 상당히 고자세로 사물을 처리해 왔지요. 당신은 그 일에 자신도 모르게 싫증을 느끼고 있어 당신의 혼에는 그것이 무거운 짐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펠릭스가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그건 인정합니다. 난 공격적입니다. 그러나 펠릭스의 세계는 현실과 마찬가지로 세부에 이르기까지 정교하게 조립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는 꿈 속의 인물 따위는 아닙니다."
"이 건에 있어서는 현실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가 무엇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 세계는 정신이 창조한 것이라고 말한 현인도 있고요."
카스피안은 이 레슬링 시합에서 내려서기로 했다. 그는 자신의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 마침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펠릭스는 그 자신의 세계에서 주체를 가진 존재이고 나는 나 자신의 세계에서 주체를 가진 존재라고 내가 계속 주창하는 한 결말이 나지 않겠지만, 펠릭스를 나의 분신이라고 볼 수 있게 되면 얘기는 맞아떨어지게 되겠군요."
"좋겠지요. 다만 이것 만은 마음에 새겨두세요. 우리들은 절대로 참된 펠릭스의 정체를 파악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것을.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그는 일반인의 이해를 넘어선 좀더 우주적인 존재인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는 요소를 분해하여 적어도 어째서 신(神) 펠릭스가 그와 같은 모습으로 당신 앞에 출현했는지 알아낼 수는 있을 것입니다."
카스피안은 끄덕이고 나서 팔꿈치 아래쪽 팔을 비볐다. 그곳이 아까부터 근질근질했던 것이다. 지금은 찰과상을 입은 것처럼 알알했다. 셔츠의 소매를 걷어올린 카스피안은 눈길을 보내며 게이라드 앞에 팔을 내밀었다.
피부 밑으로 매의 문신이 희미하게 떠오르듯이 보였다.

카스피안은 촬영소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 위를 뒤덮고 있는 강철 돔이 구름 하나 없는 하늘에 눈을 뜨고 있을 수 없을 만큼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트럭이나 유개차나 스테이션 웨곤이 각기 꿈을 쫓는 사람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예술 작품을 싣고 그의 곁을 앞질러 달려갔다. 스튜디오 구내의 햇빛에 그을린 아스팔트 위를 걸어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촬영소의 뒤로 돌아가 거리의 세트에 발걸음을 들여놓자 그는 외톨이가 되었다.
카스피안은 사람이 없는 이 거리가 마음에 들었다. 사는 사람은 바람 뿐으로, 이곳을 스치듯이 불어갔다. 식민지 시대 식으로, 혹은 벽돌로 지은 연방 스타일의 집들이 늘어선 교외의 꼬불꼬불한 거리. 어느 건물이나 외부는 세밀하고 훌륭하게 만들어져 있지만 그 안은 텅 비어 있어 카메라에서 보이지 않는 뒷편에는 대들보와 판자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잔디는 아름답게 꾸며져 있고 보도는 우아하게 커브를 그리고 있지만 아무도 그곳을 지나 다가오진 않았다. 살아있는 생물은 전혀. 고양이나 개도. 카스피안은 이곳이 LA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라고 생각했다.
그대로 유령이라도 나올 것만 같은 거리를 지나갔다. 그러나 이곳이 그저 평범한 세계이며 이제라도 차가 다가오고 아이들이 뛰어나올 것만 같은 착각에 빠져들었다------그러나 바람은 티끌을 뒤집어쓴 출입문 층계에 낙엽을 굴러다니게 했고, 그곳에 서 있는 크리그 등의 커다란 유리 눈이 텅 빈 집안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임시적인 현관홀을 불어 빠져나갔다.
거리 모퉁이를 지나 서부의 거리로 들어섰다. 말을 매는 기둥이나 주막과 잡화점 앞을 먼지가 달리듯이 빠져나갔다. 유치장의 벽쪽에 버려진 제2차 대전의 전투기가 한 대. 마치 어딘가의 다른차원에서 스스로 착륙장을 구해 그곳에 날아와 내린 것 처럼 보인다.
그곳을 피해 빙 돌아 뉴욕 시티로 들어섰다. 쓸쓸한 입구 부근에는 물건을 사러 온 손님도 없거니와 아파트의 주민도 보이지 않았다. 직업 소개소 앞을 지나갔다. 잇대인 곳이 있는 창문에는 이곳저곳 글자가 빠진 광고까지 있어 정면은 세부에 이르기까지 정성들여 만들어 놓았다. 그 이웃은 중국인의 세탁소로 창문 안쪽에는 먼지투성이인 종이봉투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카스피안은 그곳 출입문 그늘로 들어가서 자기가 올바른 정신을 잃어버리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음미해 보았다.
세탁소 옆에는 그에게 행운을 가져다준 계단이 있었다. 예전에 <스트리트와이즈 엔젤스>였던 B급 영화에 출연해 그 계단 위에서 거리의 깡패들과 한 차례 연극을 벌린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 영화 덕분에 그는 뒷뜰에 풀장을, 그리고 폴세 928을 손에 넣었다. 이것이 처세의 지혜라는 것이 틀림 없다고 당시의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이봐요 ! 잠깐만 ! "
스튜디오를 경비하고 있던 경비원이 동 157정목의 모퉁이에서 이쪽을 보고 있다. "스튜디오 견학의 일행이십니까 ? 그렇다면 당신은 일행에서 처져 있어요. 저쪽 잠수함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해요." 정중히 가리키며 다가왔다. 진짜 거리에서는 이렇게 친절한 경비원은 만날 수가 없다. 카스피안이 출입문 그늘에서 양지 쪽으로 나오자 상대는 정신이 번쩍 드는 얼굴로 변했다.
"아아, 이것 실례했습니다, 아직 이 일을 맡아본지 얼마 안 돼서. 그쪽은 톰 반 혼씨죠 ? 그만 방해가 돼서 죄송합니다. 저는 가버리겠습니다." 모자 차양을 살짝 들어올리며 걸어가버렸다.
카스피안은 그 자리에 계속 머물어 있었다. 싸늘한 것이 혈관을 치달아 돌고 있었다. 톰 반 혼으로 잘못 보이다니. 톰은 적어도 다섯 살은 더 연장인 배우로 이제는 노경에 가까운 배역만 맡아 하 고 있다-
---친절한 아저씨라든가 연배인 비지니스 파트너나 연륜이 있는 과학자라든가----더우기 그런 연기가 서툴기가----그런 사나이로 잘못 보인다는 것은 몹시 기분나쁜 일이었다.
카스피안은 출입문의 더 안쪽으로 들어가 톰 반 혼에 대한 기분 나쁜 상념을 떨쳐버리려고 했다. 실제로는 잘 생긴 사나이다. 카스피안은 반 혼의 모습을 심술궂게 떠올려 보았다. 용모가 약간 징그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고 등에는 작은 혹이 솟아올라 있었다. 그래 그렇지, 그리고 또 하나 사소한 것이지만 코가 없어지려고 하고 있다. 이미 아무도 그를 고용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카스피안은 다시 양지 쪽으로 발길을 옮기면서 중얼댔다. "어이가 없군. 배우란 것은 누구나 어딘지 모르게 마음의 추악한 한구석에서 다른 배우를 한 사람 남김없이 미워하고 있군. 비록 다소라도 자기와 비슷한 사람이면, 더욱 말이야."
카스피안은 다시 카루치의 카페, <월드 테레그램>의 사옥 크라인즈 백화점 앞을 지나 계속 걸었다. 맨하탄의 어느 거리의 모퉁이를 몇 야드 지나간 곳에서 중세의 마을로 들어섰다. 저쪽 성채 골짜기의 성벽에서는 예전에 스턴트맨들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재주를 연출했던 것이다.
지금은 사람의 그림자도 없고 바람이 아치형의 삐걱대는 문을 앞뒤로 흔들고 있다. 카스피안은 금방이라도 나치의 대장군이 그곳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응시했다. 과연. 심리학자들이 생각할 만한 자극이었기 때문이다.
도어가 거칠게 열리고 나타난 것은 마일론 피쉬였다.
"여기에 산다고 들었기에. 어쩔 셈인가, 뇌졸증이라도 일으키고 싶은가 ? 밖은 50도 가까이 되는 급경사야."
카스피안은 손을 눈 위에 대고 가느다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마일론, 자네 혹시 자기가 나치가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본 적이 있나 ? "
"나치를 위해 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 적은 몇 번이 있지만." 마일론은 자기도 손을 눈썹 위에 대고 광대한 스튜디오의 구내를 바라보았다. "왜 ? 일반적으로 공개하지 않는 까다로운 예의 독일 영화의 한 배역이라도 받았나 ? 그렇다면 자네도 그것으로 끝장이야. 이 거리에서 5분간만 나가 있게. 그럼 녀석들이 자네를 빼고 다시 할 걸세."
카스피안은 피쉬의 어깨에 손을 돌리고 몸집이 작은 에이전트의 땅에 뿌리를 내린 흔들리지 않는 감촉을 고맙게 맛보았다. 이러한 인간이 사차원으로 끌려 들어가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빅터 콰트렐은 해안에 서 있는 자기 맨션의 발코니에서 밖을 바라보면서 카스피안이 지난달에 생긴 사건을 설명하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제네 얘기라면. 아무래도 약을 너무 과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군. 물론 다른 요소도 들어있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알고 있는 칼럼니스트는 말이네. 매일 사무실에서 의자를 창문을 향해 앉아 있으면서 영감을 느꼈다는 거야. 몸속을 눈부신 전류가 치닫는다는 거야. 실은 말이야, 그건 카페트 아래서 겉이 까져 드러난 전기 코드가 한 짓이라는 걸 알게 됐지만 말이야. 녀석 전기 의자에 앉아 한 순간 한 순간 자기를 처형하고 있었다는 걸세."
카스피안은 마실 것을 손에 든 채 난간에 걸터앉았다. "나의 정신과 의사에게 얘기를 들었는데 그건 자각하기 시작한 어떤 종류의 원형이라고 하는 거야. 그러나 내가 그곳에 가면 거기서는 척척 아귀가 맞아 떨어지고 그리고 나는 다시 돌아오는 그런 상태란 말이네."
"나는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오고 싶어." 콰트렐은 배 위에서 깍지를 끼고 한숨을 쉬었다.
"5년간이나 연속 홈코메디를 하고 있으면 누구나 진절머리가 나지. 나치당에 입당하고 싶어지기도 하고."
카스피안은 친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렇게 말하는걸 보니 자네도 있었군, 그쪽에."
"내가 ? "
콰트렐은 낄낄대며 웃은 다음 다시 바다에 눈을 돌렸다.
"내가 누구라고 ? "
"대령이었어. 국방군의."
"전혀 내 취향의 역은 아니군."
"펠릭스 역시 내 취향이 아니야."
"펠릭스라고 ? "
"내가 변신하는 사나이야."
"그녀석은 그쪽에서 뭘 하고 있지 ? "
"녀석도 군인이야. 일하고 있어 자넬 위해서."
"데이빗 ! "
빅터는 느긋한 끈기있는 리듬으로 배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카스피안이 말했다. "나도 약과 4차원의 차이 정도는 알 수 있네. 내 경우는 과거와 현재가 일체가 된 현실이 되어 있지. 나와 자넨 이곳 LA서 지내고 있지만 제3세계인 독일에서도 살고 있다네."
"그럼 뭔가 ? 난 숨어있는 나치인가 ? "
"육군 대령 뮬러야."
"그래 ? 허긴 좀더 지독한 말을 들은 적도 있으니까."
빅터는 일어나 테라스의 출입문 바로 안쪽에 있는 아담한 바아로 다가갔다. 카스피안은 그런 빅터의 몸동작을 주의깊게 지켜보았다. 뮬러 대령은 자취를 감추고 빅터의 느긋하고 명랑한 행동거지에는 교만한 탐미주의자의 면모는 없다. "자아." 라고 빅터는 마실 것을 건네주고,
"긴장을 풀게. 자네는 마치 버드란트 러셀 같은 것을 말하게 만들었어."
"이건 훌륭한 건물이군. 부인네들을 유혹하려고 할 때의."
"뭔가 혼합물이 없는 것을 신체 조직에 넣어야만 해. 최근 인삼 쥬스를 지나치게 많이 섭취한 것이 아닐까."
"생전 처음으로 모든 것에 절제하도록 유념하고 있네."
"당치도 않은 착각이야. 그런 짓을 하면 신체조직은 뿔뿔이 분해되고 말아." 빅터는 꼬낙을 손에 들고 앉아 천천히 마셨다. "이번에 정신을 차렸더니 에머럴드의 귀고리를 하고 제트기로 나르고 있어."
카스피안은 테라스에 비치고 있는 한 줄기의 햇빛을 향해 술잔을 기울였다.
"그림자와 태양은 하나의 접근 방법이야. 무슨 일이나 겉보기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어. 이것이 최근의 심경이야."
"틀림 없네." 빅터가 말했다. "남아돌 만큼 돈이 있게 되면 다음엔 정신적인 것으로 마음이 향하게 되는 것이지. 나 자신이 직접 체험해 왔으니까 말이야. 나는 애완 동물 가게에 나가 하마터면 앵무새를 살 뻔했어. 기독교도의 결혼에 관해 뭔가 기분 전환이라도 될 말을 해줄 것 같아서 말이야."
"개벽 이래 인간은 밖으로 눈을 돌려 왔지. 그리고 자신들의 체험에서 도그마를 자아냈지. 하지만 그런 것은 유익한 종교가 되지는 않아. 누가 자기의 분신과 만나보고 싶어하겠나 ? 나치와 ? "
빅터는 꼬냑을 모두 마셨다. "산책이나 하러 갈까 ? 자네에게 기분 전환을 시켜줘야지, 시켜줘야겠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어."
카스피안은 일어나 잔을 놓았다. "이 일은 아직 캐롤에게 아무말도 않고 있는 거야."
"그렇겠지. 그녀는 이런 방면의 정보에는 걸맞지 않으니까."
맨션을 나서자 뒷계단을 내려와 눈부시게 타오르는 해변으로 나갔다. 수영복 차림의 여자들 옆을 지나 해안을 따라 느긋이 걸어 갔다. 태양이 바다에서 반짝반짝 반사광을 내쏘고 있다." 드디어 여기까지 찾아왔군." 카스피안은 머리를 쳐들어 보였다. 그쪽 방향으로 반짝이는 수면에 당장이라도 빛의 단편이 뒤틀려 십자를 만들어 놓으려고 했다.
"요컨대 철십자를 말입니다. 게이라드 의사가 말했다. 무의식을 향해 떨어져가는 왼쪽으로 회전하는 심볼이에요."
"다음을 듣고 싶은지 어떤지 자신도 잘 모르겠는데." 빅터가 말했다.
"나는 자네를 자극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해."
"생각컨대 자네는 그 세계를 두려워하고 있군 그래."
"자네의 환상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 "
"4차원은 존재하고 있어." 카스피안은 불쑥 그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자기 생각이 동했을 때 그곳으로 가도록 하지."
빅터를 똑바로 쳐다본 카스피안은 친구의 눈 속에서 뮬러를 인정했다. 그러나 뮬러는 3차원의 베일 뒤에 조심성있게 몸을 숨기고 있다.
두 사람은 마리나의 비치 하우스를 지나 워싱턴 블루버드를 거쳐 해면 공원으로 들어갔다. 철망 울타리 안에 역도 선수들이 엄청난 무게의 바벨을 들어올리고 있다. 마침 방대한 중량을 어깨에 메고 천천히 웅크리고 앉은 선수의 일그러진 표정을 빅터가 흉내냈다. 그 사나이가 이마의 혈관을 무섭게 노장시키고 일어서자 빅터는 푸 ! 하고 거친 숨을 토해냈다. "난 누군가 나 이외의 인간이 저렇게 트레이닝을 해주면 그 후 산뜻한 기분이 된다니까."
보도의 훨씬 앞쪽 모래터와 야자숲 사이에서 로울러 스케이트를 신은 소녀를 TV 카메라맨이 무릎을 꿇고 촬영중이었다. 한 여성이 그 아이에게 어떻게 스케이트를 타고 카메라 앞을 통과하는지 가르치고 있었다. 큐가 발해지고 일련의 신이 시작되었다. 소녀가 보도를 미끌어지듯 지쳐왔다. "카메라를 보지 말어 ! " 여성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쳐대며 뒤를 쫓았고 소녀를 붙들자마자 거칠게 흔들어댔다."어떻게 된 거니 ! 넌, 프로일 텐데 말이야 ! "
"우리들의 것은 멋진 예술이지." 카스피안은 중얼댔다.
두 사람은 늘어선 야자나무 그늘을 나라히 서서 걸어갔다. "몇 년 전의 일인데 말이야." 빅터가 말했다. "난 어떤 꿈을 꾸었어. 꿈 속에서 난 경치가 좋은 농장을 할일없이 걸어다니고 있었지. 잠을 깨고 보니 그곳이 어디인지 내가 알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견딜 수가 없었지만 암만해도 그곳에 걸맞는 장소가 생각나지 않아. 그로부터 훨씬 뒤에 덴마크로 영화를 촬영하러 갔었지. 마감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유럽을 종단하는 드라이브를 했는데 놀랍게도 중부 독일의 요하네스벨크성 가까이에서 꿈 속의 그 농장을 발견했던 거야. 세세한 곳까지 모두 꿈에 본 것 그대로였어."

그는 서재에 앉아 독일제 권총을 쳐다보고 있었다.
현관 앞으로 눈을 옮겼다. 그의 폴세와 메르세데스가 주차되어 있었다. 아내의 B M W도 그곳에 있었다.
저것들을 팔아버리자. 그리고 헝가리안 하프톤을 사는 것이다.
권총을 손에 들고 일어섰다.
좋아, 계곡으로 가서 이 재수없는 물건들을 모래 속에 파묻어 버리고 오겠다.
권총을 벨트에 차고 그 위를 셔츠로 감추면서 복도를 걸어갔다. 발 밑에서 타일이 또각또각 소리를 냈다. 하지만 친숙한 응접실의 포옹도 이미 그의 마음을 끌지 못했다. 저택은 바람에 맞서는 비누방울과 마찬가지다. 펠릭스가 그 바람 속을 활보하고 있다. 탄탄한 목재의 도어를 열고 출입문에 서 있었다. 선인장의 가시가 마치 총검처럼 빛나고 있어 정면의 뜰은 그 금속성의 빛 속에 떠올려지고 있었다. 캐롤과 알리샤가 선인장 사이에 무릎을 짚고 자그맣고 호화스러운 다육 식물을 손질하고 있었다. 반짝거리는 가시에 둘러싸인 처자식을 보고 카스피안은 문득 두 사람이 죄수가 된 것 같은 불안에 사로잡혔다. 셔츠를 고치며 권총을 감췄다.
"개구리다 ! " 캐롤이 소리치며 등을 둥글게 하며 주위에 눈길을 보냈다. "도망쳤어."
"개구리 역시 갈곳이 있으니까." 알리샤가 시치마를 떼고 말했다.
"어디 ? "
"에이전트의 사무실." 알리샤는 정원 손질용의 작은 양동이를 뒤로 끌면서 살금살금 기어가듯 나아갔다.
카스피안은 아랫쪽 길을 택하자 뜰 변두리에서 모습을 감췄다. 뒷문을 나서 산으로 향했다. 길에서 풀숲으로 한 발 들여놓은 순간 이제까지 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갖가지 의무감이 사라지고 본능이 자아내는 푸른 망토로 뒤바뀌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곳 산중에서는 사람의 소리는 끊기고 식물의 신들이 더욱 기운이 서리는 바람이 흔들어 놓는 잎들 사이에서 조용히 신들의 말을 속삭이고 있다.
카스피안은 자기의 발이 어떤 식으로 돌연 부딪치면 몸이 어떤 식으로 그늘 밑 식물을 헤치고 자기가 어떤 식으로 그 장소에 녹아들고 있는지 하나하나 의식하게 되었다. 마치 다른 생물이 적의에 찬, 그러나 아름다운 거친 땅을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카스피안은 올라갔다. 화산암의 암층이 발 밑에서 미끌어져 내린다. 쉬지 않고 오르자 솟아오르는 땀이 셔츠에서 살까지 흠뻑 적셨다. 원래 다리가 튼튼해 걸음걸이는 빨랐다. 높은 곳에 오르면 사물을 보는 눈이 달라지기 마련이다. 아니면 가로막는 것이 없는 햇빛에 듬뿍 젖어드는 것에 의해, 혹은 그 농후한 애무 때문에, 혹은 그곳에 포함되어 있는 것 때문에 사고가 맑아지게 된 것일까----메마른 진흙 내음, 불타는 돌의 내음, 찾아오는 사람을 더욱 곁으로 유인하려고 부러대기를 휘저어놓아 충만케 하는 꽃의 냄새 때문에.
그리고, 산 위에는 항상 죽음의 상징이 존재한다----매의 눈, 방울뱀의 위협음. 최초의 정상을 정복했다. 그 저쪽엔 다음 산이, 그리고 또한 다음 산이 캘리포니아 연안의 북을 향해 연봉을 이루고 있다. 끝없는 수수께끼의 산봉우리들. 나의 것도 아니러니와 펠릭스의 것도 아니다.
왼쪽으로 몇 야드 떨어진 곳에 코요테가 나타났다. 혀를 늘어뜨리고 눈을 번쩍이며 이쪽을 노려보고 있다.
카스피안은 천천히 권총으로 손을 가져갔다. 코요테는 멈춰섰고, 머리를 들었고 귀를 쫑긋 세우고 카스피안을 쳐다보았다.
"이게 보이냐 ? " 카스피안은 권총을 벨트에서 뽑으면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코요테의 눈이 가늘게 되었고 콧구멍이 좁아졌지만 도망치려고는 하지 않았다. 카스피안은 코요테에게서 이성의 파동을 느꼈다. 코요테의 눈에서 카스피안의 눈 속으로 어떤 종류의 기력이 왈칵 흘러 들었다. 그러자 코요테는 한차례 거칠게 울어젖히고 숲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바위부스러기가 쌓인 지면 위를 짐승의 발들이 짚고 가는 소리가 들렸고 이윽고 무리의 소리높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는가 했더니 풀숲 속에서 별안간 습격해 왔다. 리더의 눈이 번들번들 빛나고 있었다. 카스피안은 권총을 단단히 쥐고 방아쇠를 당겼다.
탄환이 튀어나가는 것과 동시에 그는 총알 소리와 일체가 되었고, 그와 더불어 코요테를 향해 돌진했다. 코요테의 눈이 점점 커졌고 빛을 더해갔다. 눈이 드디어 거대한 구체로 화하자 문득 생기를 잃고 그의 눈 앞에서 딱 정지했으며, 무기질의 차가운 빛을 발했다.
...패트롤의 감시의 눈을 피해...그는 시내로부터 곧장 직행해 왔습니다...
눈부신 헤드라이트가 번뜩였다. '나는 꿈을 꾸고 있었어'라고 펠릭스는 생각했다. 또 다시 저 세계의 끝이다. 그리고 한 마리의 코요테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무더운 나라는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
"바이어는 시내에서 나와 호텔에서 우리들과 만나기로 되어 있습니다. 괜찮겠습니까, 중위 ? "
"아아, 됐네." 펠릭스는 하얀 입수염을 기른 점령 지구의 시의 보좌역에게 끄덕였고 두 사람은 메르세데스의 헤드라이트를 향해 걸어갔다. 부하인 하사가 운전석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또 한 사람은 그의 옆에 착 붙어 따라왔다.
"호텔로." 메르세데스에 올라타면서 펠릭스가 명했다. 보좌역이 뒤를 이어 올라탔고 바지와 코트의 주름을 폈다. 펠릭스는 힐끗 곁눈질을 했다. 너의 하는 수작을 난 벌써 꿰뚫어보고 있어. 나 펠릭스는 10킬로나 떨어진 바람이 불어오는 곳에서 블랙 마켓(암시장)을 찾아낼 수가 있어. 너는, 육군에 통조림을 납품하고 있지만 그 중 6분의 1쯤이 네놈들의 찬장으로 숨어드는 식이지. "지금부터 만나기로 되어 있는 남자 말입니다." 보좌역이 말했다. "이게 대단히 의심스러운 자라고 생각될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스위스인이라는 녀석들은 우리들을 모욕하는 것쯤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니까요."
'그것보다도 먼저 너 같은 사람을 의심해야 하지 않겠나, 보좌역 나리 ? ' 펠릭스는 속으로 그렇게 말했다. 지금 나는 베를린을 멀리 떠나 있어. 그리고 아지트로부터도. 그곳에는 사람 하나 잠적할 수 있는 은신처가 여러개 있어. 나는 그 길에 있어서는 훤하다구.
"...미술상이라는 소문인데 말입니다. 때에 따라서는 스위스 정보국의 사람인지도 몰라요." 보좌역은 하얀 입수염을 쓰다듬으며 펠릭스를 쳐다보았다. "확인하려고도 했습니다. 그쪽 정보부가 이것저것 협력해 주어서요." 그는 무언가 있는 듯이 금시계의 시계줄을 두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면서,
"아무쪼록 조심해 주십시오."
"걱정해줘서 고맙네."
"아닙니다. 제 임무니까 당연한 일입니다."
펠릭스는 달리듯이 지나가는 가로수를 바라보았다. 어두운 건물의 정면과 더불어 그의 생각도 자꾸만 지나쳐 버렸다. 이곳은 레지스탕스의 냄새가 난다. 그런 기색이 거리를 둘러싸고 감돌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펠릭스는 허리의 권총 위치를 바로잡았다. 옆에 기관단총과 자동소총이 각 1정씩 놓여 있었다. 핸들을 잡은 하사가 백밀러를 들여다보고 펠릭스와 눈을 마주쳤다.
"전방에 검문소가 있습니다."
다음 모퉁이에 눈을 보냈다. 크라크프의 경찰관이 소총을 겨누고 있었다. 때에 따라서는 독일군 장교의 머리에 바람구멍을 낸다고 하는 녀석이다. 또 한 사람의 하사는 재빨리 그러브 콤파트먼트를 열어 여권 따위를 꺼내려고 했다.
"이상없음." 펠릭스는 중얼댔고 현재 유럽에서 가장 귀중한 그 한 마디를 입 속에서 되풀이했다.
메르세데스의 차창 유리가 스르륵 내려지고 펠릭스는 기관단총을 무릎 위에 놓았다. 차가 정지하자 하사가 서류를 재빨리 검문소의 경찰관에게 내밀었다. 보좌역은 펠릭스에게 몸을 기대듯이 하며 속삭였다.
"전 검문소에서 얼굴이 통하죠. 이런 지루한 상대에게는 차입하는 술병이 무엇보다 기분풀이가 된답니다." 보좌역이 차창에 얼굴을 보이자 경위는 끄덕였다.
"이상없음." 경위가 게이트에 신호하자 차단기가 올려졌다.
"물론." 검문소를 빠져나가면서 보좌역은 펠릭스에게 말했다.
"지금은 안일한 지위가 없습니다. 저희 시에서도 많은 시민이 우리들의 행정이 지향하는 것을 이해해 주지 않습니다. 너무 성급합니다."
"당신을 게시판으로서 이용하고 싶겠지. 납으로 만든 압정을 사용하여."
펠릭스는 싱끗 웃으며 이 정치가가 아연 실색하는지를 지켜보았다. 이 사나이가 어떤 자에겐 브랜디를, 다른 자에겐 사체 방부액을 보냄으로써 현재의 지위를 손에 넣었다고 하는 확신이 펠릭스에게는 있었다.
보좌역은 동하지 않았다.
"실은 저희들 마음 뿐이기는 하지만 음식을 좀 장만해 놓았습니다. 좋아하실 와인도 있습니다. 그리고 같이 할 친구도 택해 놓았습니다. 내가 보증하는 사람입니다. 그저 두세 사람의 여배우지만요. 일하신 뒤 사소한 파티의 얘기 상대가 될까 해서요. 그는 금시게의 시계줄을 쓰다듬었다.
"그토록 신경을 써 주니 고맙기 짝이 없군."
"그쪽 여단장님에게는 좋은 환대를 받고 있습니다. 저 같은 것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지만요. 그저 주제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쪽 시가 연합군의 손으로 분쇄되는 일이 있어도," 펠릭스는 담배 케이스에서 담배를 한 대 꺼내 불을 붙였다. "종전을 맞이해----이것이 좀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만----자네가 난처한 입장에 놓이게 되는 한이 있어도 호의를 베풀어준 사람으로서 마음에 새겨두도록 하겠네."
보랏빛 연기가 펠릭스의 코에 피어 올랐고 펠릭스는 다시 한번 보좌역에게 곁눈질을 했다. 이 사나이와 헤어지면 얼마나 상쾌해질까. 살아있는 동안 두번 다시 얼굴을 마주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그럴 것 같다. 하지만 지옥에서 다시 만날지도 모른다. 즉 저 새로운 점령 지구에서. 그러나 이곳 이 세상에서는 어떨까. 너 같은 상대는 피하고 지나치고 싶지만 말이다. 네가 지꺼릴 때마다 그 거짓말이 비수처럼 나의 늑골을 쿡쿡 찌른단 말이다.
"호텔입니다. 중위님."
메르세데스가 보도의 노견석에 가까이 정차하자 펠릭스는 독일인의 피에 굶주린 레지스탕스의 그림자를 찾아 거리에 눈길을 보냈다. 그런 기색은 없는 것 같았다. 일행은 차에서 내렸다. 펠릭스는 부하에게 말했다.
"로비에서 기다려주게. 용무를 마치면 위에서 부르겠네."
로비의 도어가 열렸다. 호텔 주인이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주인은 명예로운 군인을 손님으로 맞이해 깊이 머리를 숙였다. 그 눈은 물건을 가져가려면 사소한 가구류도 용서해 달라고 간청하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요. 어서 오세요." 그는 펠릭스와 보좌역을 초로인 급사에게 인계했다. 급사는 누가 누구에게서 물건을 훔치건 이미 신경쓰지 않을 나이가 되어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둘러친 철망의 문을 급사가 열어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갔다. 보좌역은 배 위에서 모자를 끌어안고 잘게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급사는 발 밑을 내려다 보았고 노인답게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것은 어쩐지 펠릭스를 당황하게 했다. 이제까지 줄곧 펠릭스는 군복과 그것이 사람들 사이에 자아내게 한 경의와 쾌감에 가까운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순간, 이 노인의 쓸쓸해 보이는 눈초리가 진실을 투영시켰다. 그는 군복이 출입하는 것을 싫증이 날 만큼 보아왔다. 그에게 있어 이제 군복은 급사의 줄무늬가 들어있는 바지와 마찬가지로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다. 아니, 도리어 급사 쪽이 남의 도움이 된다.
엘리베이터가 정지했다. 노인은 문을 열고 복도에 먼저 내려서 신혼부부용 응접실이 딸린 방으로 안내했다.
"손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레이스로 주절주절 장식한 방에 한 스위스인이 있었고 취리히의 어느 은행 금고실의 오라를 발산시키고 있었다. 밀실의 정숙이 그를 몽땅 감싸고 있는 그런 느낌이었다. 펠릭스는 보좌역을 향해 이제는 됐다고 신호했다. 보좌역은 아래에서 기다리겠습니다고 살며시 몸짓을 해 보였다.
그가 나가고 도어가 닫히자 펠릭스는 재빨리 찰칵찰칵 두 번 소리내어 서류 가방을 열어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보티체리가 그린 여신이 두 사나이를 되돌아보고 있다. 스위스인인 미술 수집가는 확대경을 손에 들고 그 위에 몸을 구부렸다. 그림 뒤에까지 꿰뚫어볼 것만 같은 시선. 곧 머리를 들었다.
"한번 알아보지 않고서는."
"그럴 겨를이 없소."
"소유자는 없는 것 같으신데 ? "
"그림은 어엿이 이곳에 있소. 댁은 그 이상 알 필요가 없소."
펠릭스는 바이어들이 프랑스재의 내의를 보고 마구 사들이는 때처럼 여행용 가방을 닫는 시늉을 했다. 이탈리아 명화와 어디가 다르다는 것인가 ? 스위스인은 그것을 말리려고 손을 내밀었다.
펠릭스는 프로렌스파의 주옥과 같은 작품을 다시 한번 배견하게 했다. 이 때문에 이 사나이는 스위스에서 일부러 점령 지구까지 날아왔는 데도 빈손으로 돌아갈 이유가 없었다. 그건 양쪽 모두 익히 알고 있는 일이다.
수집가는 살며시 액자에서 손을 뗐다.
"10만 스위스 프랑."
"흥정할 여가가 없소." 펠릭스는 가방을 단단히 닫았다.
"그쪽에서는 얼마쯤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 " 확대경을 끈 끝에 늘어뜨린 채 수집가는 자못 놀란듯이 그런 얼굴을 하고 펠릭스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쪽의 예정액은 50만이요. 그건 이미 알고 있을 텐데."
수집가의 눈이 오그라들었고 한쪽 눈썹이 약간 올라갔다.
"상황이 상황이라면 그만한 액수를 지불해도 좋겠습니다만 어쨌든 이쪽에서도 흥정할 여가가 없습니다. 그건 세간에서도 마찬가지겠지요. 25만을 내도록 하지요. 파손될 염려가 있고 또한 이런 기근 때라 먹을 수가 없습니다."
펠릭스는 아가씨가 쉬고 있는 여행용 가방을 건네주었다. 군이 특별히 선발한 군대를 파견해 다음 애호가에게 운반할 만큼 그녀와 얽힌 얘기는 사람들에게 외경당하고 있는 것이다.
"축하하오."
수집가는 대신에 자기 여행용 가방을 건네주었다. 안에는 이미 헤아려 놓은 21만 프랑이 들어있었다.
"자아----오늘 밤의 일과 댁의 얼굴이 밤마다 나의 꿈에 씌우게 될지 모르겠군."
그가 육군의 여행용 가방을 들어올려 도어 쪽으로 향하는 것과 동시에 전화 벨이 울렸다. 펠릭스는 전화기를 들었다. 로비에 있는 하사에게서 온 것이었다. 그는 또렷또렷하게 말했다.
"일행이 도착했습니다. 여배우들입니다."
"이곳으로 올려 보내게."
펠릭스는 수화기를 살며시 내려놓고 돈이 들어있는 여행용 가방을 화장실 안에 들여놓았다. 돈을 갖고 스위스에서 온 방문자의 뒤를 따라 국경을 넘어서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힌다. 그것과는 반대 방향인 폴랜드를 빠져나가 독일로 돌아가는 도중에는 당의 밀고자나, 야전 헌병이나, 게쉬타포나, 나치소녀단의 조직망이 둘러쳐져 있다. 이 중 누구라도 사유 재산을 소지한 장교를 발견하는 즉시 기뻐 날뛰며 체포할 것이다.
술이 진열되어 있는 곳으로 가서 마실 것을 만들었다. 도어를 살며시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여자의 목소리. 펠릭스는 그 억제된 소리와 목소리에 술잔을 들어올렸다. "나도 꽤나 출세했군." 그런 다음 잔을 쭉 들이마시곤 부하와 세 젊은 여성을 위해 도어를 열었다.
"우리들은 보잘 것 없는 군인입니다." 펠릭스는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아무쪼록 편안히 즐기시길. 나는 팔켄하인이라고 합니다."
다음에 문에 나타난 것은 그 늙은 급사였다. 그가 반짝반짝 빛나는 은제의 뚜껑이 달린 깊은 접시를 몇 개씩이나 실은 손수례를 밀고 들어왔다. 뚜껑이 열리고 음식이 채워진 그릇이 테이블 위에 차려졌다. 일동은 창가의 촛불에 비춰진 긴 테이블에 앉았다. 여배우들은 긴장하여 신경을 쓰면서 이야기했다. 펠릭스의 옆에 앉은 한 사람은 신중하게 어떤 군무에 종사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미술골동품 이동국이지요." 펠릭스는 촛불에 반짝이는 오팔 같은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창문은 여인의 바로 뒤에 있었고, 광장으로 돌아가는 램프가 희미하게 반짝였다. 군용 유개차가 한 대 광장을 지나가고 있었다. 유개차 안에는 아스라이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그러면 저희 시에는 언제까지 머무시게 되나요 ? " 여인은 물었다. 자세히 보니 그녀와 다른 두 사람도 숙녀답지 않은 식욕으로 요리를 먹고 있었다.
"아침까지지요." 펠릭스는 와인을 더 따랐는데 대화는 전화 벨소리에 의해 중단되었다. 보좌역의 사과하는 말투의 목소리가 한 차례 들려온 뒤----죄송하지만 로비로 내려와 주시지 않겠습니까, 마지막으로 한 마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펠릭스는 전화를 끊고 실례라는 말을 남기고 복도로 나섰다. 이미 엘리베이터가 대기하고 있었다. 펠릭스는 약간 조바심을 느끼면서 올라타긴 했지만 보좌역으로서는 얘기할 용건이 있어 그래서 로비를 택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곳이라면 엿듣을 사람이 절대로 없을 테니까.
"중위님, 대단히 죄송합니다. 실은 장비 감독국에서 이곳으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이번 군복 제조의 신규 계약을 저희들에게 주시기로 되어 있습니다만, 그쪽 여단장님의 가족들이 국경 가까이에서 섬유회사를 경영하고 계시죠 ? " 보좌역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의 자가용이 바깥 보도의 가장자리에 멈춰섰다. 보좌역은 계속 지껄이면서 펠릭스를 출입구로 데리고 나갔다. 가로에서라면 더욱 안전했다. 외등 외에는 아무도 엿들을 자가 없다. "여단장님 일가족의 섬유 회사를 추천해 주셔도 좋습니다. 계약은 이미 보증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보통 계약이 아닐 것입니다. 이 건에 관해서는 제가 열성을 다해 협력하겠다는 취지를 여단장에게 전해주십시오."
"군복이라... 여단장에게 그쪽 의향을 전해 달라고 하지."
보좌역은 모자를 머리에 살짝 얹어놓자 리무진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적재 적소." 라고 보좌역은 뭔가 고백이라도 하듯 친밀한 어조로 얘기를 마무리했다. "때론 도움이 될 때도 있습니다." 보좌역은 두 손가락을 모아 가장자리에 대었다. 그러자 모퉁이를 돌아온 차가 급히 속도를 가했다. 보좌역은 교통 정리라도 하듯 한 팔을 올렸다. 가느다란 긴 총신이 자동차 창문에서 번쩍하고 빛났는가 생각되었을 때 자동소총이 불을 뿜었다.
펠릭스는 권총을 뽑아들고 보도를 기었다. 헤드라이트가 이쪽을 향해 왔다. 정면을 똑바로 향해 총탄을 쏘아댔다. 헤드라이트가 변화하여 차가운 빛이 따스함을 띄었다. 헤드라이트는 코요테의 이마에서 빛나는 눈이었다.
짐승은 산의 비탈진 어둠 속에서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인간의 지혜가 깃든 눈. 그는 그놈이 인솔하는 무리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어떤 놈이야, 너는 ? "
"SS대장이다." 코요테는 말했다.
짐승이 소리높이 울부짖자 무리는 리더와 더불어 방향을 바꾸어 산의 비탈진 저쪽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데이빗 카스피안은 큰 대자로 누워있었다. 권총은 손안에 있었다. 슬슬 일어나 손에 권총을 늘어뜨린 모습으로 좀 전에 올라왔던 언덕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곳에 군인이 한 사람 서 있었으며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소총을 겨누려고 했다. 카스피안의 팔이 올려졌다. 손과 더불어 권총이 뻗어 군인의 심장에 겨냥을 정했다.
"기다려, 쏘지 말어, 이봐 ! " 사나이는 두 손을 들었다.
카스피안은 권총을 내리고 그곳으로 걸어갔다. 군모로 보인 것은 회색의 테니스용 바이저로 군복은 실은 줄무늬의 조깅 바지였다. 소총은 몽둥이었으며 이미 땅바닥에 굴러떨어져 있었다.
"미안합니다." 카스피안은 권총을 벨트에 찔러 넣으면서 말했다. "최근 이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놈이 있어서."
사나이는 얼굴이 창백해졌고 입술도 빛을 잃고 있었다. 아직도 공포의 눈을 뜬 채 비만한 체격이 땀을 흠뻑 흘리고 위험한 미치광이라도 쳐다보는 그런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콜드 캐는 로드의 친구 집에 묵고 있는 사람이오. 사비토스 라는 사람이에요, 레코드 제작을 하고 있지요. 알고 있습니까 ? "
"네에, 알고 있습니다."
사나이의 얼굴에 나타났던 공포와 의혹은 그래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쪽으로 반쯤 등을 향하고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오늘은 상당히 위에 까지 올라갔군. 이만큼 오르면 충분해..." 바위부스러기가 발 밑에서 부셔져 사면에 굴러떨어졌다. 사나이는 가능한한 서둘러 그 뒤를 쫓았다. 카스피안이 지켜보는 가운데 맨 먼저 눈에 띈 숲속으로 뛰어들어 바삭바삭 시끄러운 소리를 내면서 겨우 그 속으로 몸을 숨기자 그대로 모습을 감추었다.




제9장  환상 속의 현실



카스피안은 나지막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게이라드 쪽으로 몸을 내밀었다.
"하마터면 가까운 이웃집에 묵고 있는 손님을 죽일 뻔했습니다. 이 기분을 아시겠습니까 ? 하마터면 방아쇠를 당길 뻔했어요. 그때의 나에겐 펠릭스가 가지고 있던 살인자의 본능도 냉정성도 그리고 결단력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지금 내 안에 그것이 남아 있습니다. 적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감각도 말입니다."
카스피안은 의자에 등을 다시 기대었다.
"저쪽에서 팔을 흔들어대는 바람에 살아났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시체를 산 속에 숨기지 않으면 안 될 처지가 되고 말았을 겁니다." 카스피안은 말을 끊고 게이라드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제가 정말 사람을 죽이기 전에 저를 도와주시지 않으면 곤란합니다. 날 감금해야 하는 건 아닌가요."
"연극 같은 생각은 그만두세요."
"이 사건은 날 파멸시키려고 하고 있어요."
게이라드는 다리를 얹어놓는 대에 발을 얹었다. "헤밍웨이의 더블 디쵸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 '사람은 패배당하는 일은 있어도 파멸당하는 일은 없다' 그 반대는 '사람은 파멸당하는 일은 있어도'---
-"
"----패배당하는 일은 없다. 그게 나와 어떤 관계가 있지요 ? "
"인생에 있어서는 패배라는 것을 피해 지나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약점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의식은 위태로운 것이며 참으로 인간의 근저가 되는 것은 그것보다 훨씬 강력한 무의식이며 그 무의식은 그것 자신의 생각하는 대로 우리들을 조종하는 것이라는 것을 용인하는 것이 중요해요. 무의식은 되풀이하여 우리들을 좌절시키지만, 우리들이 그 위대한 힘 앞에 무릎을 꿇으면 우리들을 파멸시키는 데까지 이르지 않고 드디어는 그 전모를 밝히는 경우마저 있어요. 거기에는 영원한 혼이라고 이름 붙일 수 밖에 없는 어떤 하나의 관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 이유이기 때문에 최종적으로는 인간은 패배당해도 파멸되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게이라드는 파이프를 집어들자 손으로 감싸듯이하여 닦아놓은 담배통을 비벼댔다. "헤밍웨이는 디쵸의 또 다른 한쪽의 편린을 좋다고 했습니다. 패배와 싸우고 전력을 다해 저항하며 토끼털만큼의 연약성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패배하기 전에 파멸을 택했던 것입니다." 게이라드는 담배통에 담배를 재웠다.
"그런데 우리들의 친구 펠릭스는 그 뒤 어떻게 하고 있죠 ? "
카스피안은 펠릭스와의 가장 최근의 만남을 생각나는 한 얘기를 했다----폴랜드에의 출장, 다름아닌 그가 보티체리의 작품을 맡게 되었다는 것. 스위스의 미술 수집가. 호텔. 시의 보좌역이 길에서 암살된 것.
"그 급사의 일을 다시 한번. 그 호텔에 있던 노인 말이에요, 육군의 바보같은 엘리트들의 참된 모습을 꿰뚫어보고 있던."
"그가 마음에 들었나요 ? "
"그렇게 건전한 사람은 이제까지 등장한 예가 없지 않아요."
"그 할아버지에겐 걸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어요. 고급 호텔의 일개의 비품에 불과하지요."
"그러나 그의 본질이 중요해요. 영화에도, 독일인 장교에게도, 보좌역에도 개의치 않아요. 오로지 가방을 나르고 손수레를 밀기만 하지요."
"정상적인 인간이란 것입니까."
"당신에게 정상적이 되라고 했습니까 ? 정상적이라는 것은 하나의 환영이에요. 흔해빠진 여신의 하나에 불과해요." 게이라드는 몸을 내밀었다. "우리들의 혼을 만든 것은 우리들의 나약함이에요. 나는 당신을 현재의 병상에서 구해내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병이 조금 낫다는 것처럼 그것과 더불어 더 편하게 지내도록 해드리려는 것입니다."
"현실의 상실에 익숙해지라고요 ? "
"그 늙은 급사의 생각이 나에겐 참으로 똑똑히 알 수 있어요. 그의 조언을 받았으면 할 정도에요."
"그건 다만 한직에 종사하고 있는 냉소적인 노인에 불과해요."
"짐을 나르는 일은 한직이 아니에요."
"다른 사람이 바쥬카포를 운반하고 있을 때는 말이죠."
게이라드는 입을 다물었고 까만 샌들에서 빠져나온 발가락을 물끄러미 들여다 보았다. "그 스위스인인 수집가란 어떤 사람이죠 ? "
"모르겠습니다. 융그일 지도 모르겠어요. 융그는 나치와 잘 어울리지 못했지 않습니까 ? "
"그렇다고 들었습니다만."
"그것을 얘기해 주세요." 카스피안은 말했다.
"그는 전시 중 나치의 정신분석의사들과 교류가 있었저요. 정신과의 개업의사와의 사이에서 중립적인 회의를 개최하자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주 나쁜 시기에 유태인의 정신 구조에 관한 논문집을 발행한다는 과오를 저질렀던 것이지요. 후일 그는 [실수를 저질렀다]고 술회하고 있어요. 흥미깊은 말이에요." 게이라드는 잠시 창밖에 눈을 주시하며 침묵을 지켰다.
"펠릭스의 얘기를 합시다. 그는 이데올르기에 있어서는 나치는 아닙니다, 내가 아는 한에서는 일반인을 속이는 일은 없으니까요."
"암시장이란 것이 가난한 사람에게 있어 공평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해요."
"역시 그는 떳떳하지 못한 인물이에요. 그러나 적어도 그는----" 불쾌한 생각이 문득 머리를 가로질렀고 카스피안은 입을 다물었으며 똑바로 게이라드를 쳐다보았다. "혹시 이것이 세계의 그림자의 한 조각을 통합하는 작업이라고 한다면 사태는 더욱 나빠질 염려가 있어요. 나는 펠릭스가 아닌 아이히만이라도 될 수 있어요. 떳떳지 못한 개인으로서 존재할 뿐만 아니라 <부헨발트 강제수용소의 짐승>을 소생시킬 수도 있고. 그러면 나는 이 사태를 어떻개 통합하면 좋겠습니까 ? "
게이라드는 천천히 끄덕였다. 뒷벽에서는 수묵화인 중국 선인이 영겁의 고요 속을 헤매고 있다. 게이라드는 다시 몸을 내밀고 느긋하고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융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드러난 악마의 얼굴을 보는 것은 충격적이다, 라고."
"헤아려보건대 그는 그것을 보았던 것이군요."
"아마도."
"똑 같은 일이 저의 신상에도 일어난다고요 ? "
"그러한 언짢은 그림자를 통합하는 데는 우선 방대한 빛을 모아 놓아야 해요. 우리들은 당신의 빛을 매주 조금씩 증가시켜 나가고 있어요, 펠릭스에게 대처할 수 있도록. 당장은 그것만을 염려하고 있으면 좋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당신과 펠릭스는 외모가 닮았던가요 ? "
"그래도 그는 제가 아니에요. 나가서 그의 얼굴을 보면 알게 돼요---
-그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어떤 기분입니까 그건 ? "
"별안간 덮쳐오는 심리적 타격이지요."
"그 후 그녀석은 야금야금 당신을 둘러싸기 시작하죠."
"이젠 안 되겠다고 하는 느낌입니다. 몸부림쳐도 어떻게 할 수 없어요. 이것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라고." 카스피안은 게이라드를 쳐다보았다. "나를 안정시켜 그 일이 일어나는 것을 멈추게 하는 마약을 주세요."
"육체를 치료하고 혼을 파멸로 내몰겠다는 말인가요."
"그 마약이 듣는 것을 알기가 무섭게 나는 서슴치 않고 팔에 바늘을 꽃아 넣을 것입니다."
"정신병원에서는 환자에게 마약을 처방하지요. 그런 짓을 하면 좀비(초자연적 힘)가 생길 뿐이에요, 데이빗 카스피안의 다음 영화는 <좀비의 황혼>인가요 ? "
"걱정스러운 것은 그 영화의 일이에요. 제가 많은 사람 가운데서 자제심을 잃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카메라는 돌아가고 있어요, 돈은 1분에 천달러의 비율로 화장실로 흘러가고 말아요."
"이 일이 당신을 어떻게 바꾸어가고 있는지 좀더 들려주세요."
"자기의 중심이 빗나가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미 자기의 인격에 대한 조정을 취할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알맹이도 이리저리 다른 사람이 꾸고 있는 꿈 같은 생각이 들어서. 참된 나는 펠릭스 쪽에 있는 것입니다."
"저항하면 ? "
"천국과 지옥 사이에 떨어지겠죠. 이미 그 어디의 누구도 아닌 저기 있는 저런 전봇대가 되고 말 거에요."
"아버지가 가지고 돌아온 나치의 유품 얘기를 말해주세요."
"어느 것이나 나에게는 두려웠어요. 마음에 든 것은 철모 뿐이었습니다. 탄환의 크기만한 우묵 들어간 자국이 있는. 그걸 쓰고서는 탄환이 그곳에 맞은 날에 그것을 쓰고 있던 독일 병사의 일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녀석은 [이런, 지금 것은 위험했어]라고 하며 전투를 계속하는 것입니다. 제 쪽은 말이지요, 여름의 풀에 드러누워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으면서."

온화한 미풍이 철망 창문에 둘러싸인 포치 위에서 하늘거렸고, 노란 보드라운 빛이 포치의 참대로 만들어진 의자와 테이블을 비치고 있었다. 캐롤 카스피안은 한밤의 커피를 마시면서 포트폴리오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게 트위드 밍크란 거예요. 1만 달러. 이 사진의 움직임을 봐요. 이런 것은 우리 광고에선 좋은 부류에요. 광장히 호화스럽고 말이에요." 페이지를 뒤적이자 모피를 걸친 커플의 사진이 나타났다. "이것 저쪽은 시장조사 이사. 이쪽이 부사장. 부탁해서 포즈를 취해 달라고 했는데, 상당히 좋은 광고가 아니겠어요." 슬쩍 페이지를 넘겼다.
"이것들은 굉장하죠. <이번달의 여인>이에요. 친칠라를 입고 있어요."
"이런 상태라면 쇠망치로 한방 얻어 맞지 않으면 잠들 것 같지가 않군."
"괜찮아요, 바리암을 복용하면 되니까. 그것보다 잠깐 이 세이블(검은 담비 털가죽)을 좀 봐요.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알 수 있겠죠. 겨울에 얼음을 파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좀 특이한 연출이라고 생각지 않아요 ? "
"특이하다는 말로는 부족하군."
"고객이 흥분해서 말이야. 내가 그러지 말라고 말렸더니 얌전해졌어요."
캐롤은 대나무로 된 상자 모양의 그네에 짐이 앉아 맨발로 저어댔다. 그네가 카스피안 앞에까지 오면 발끝으로 카스피안의 무릎에 접촉해 본다. "난 충격적인 의견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그렇겠군."
"진실미 넘치는 광고지요. 페이지를 넘겨 다음 것을 봐요, 해변의 멋진 커플이에요. 코트는 2만5천 달러 짜리에요. 그걸 손에 넣기 위해 그 여자가 어떤 일을 해야만 했는지 알 수 있어요. 문제는 그녀가 그런 것을 마시는가에요."
카스피안은 광고를 쳐다보고 있었지만 마음은 그곳에 없었다. 더블 디쵸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디쵸의 문구가 전후에 반대로 된다는 것. 입에 올릴 때마다 반대 쪽에서 불러댈 때마다 뭔가가 그의 속에서 꿈틀대는 것을 느낀다. 마치 하나는 앞을 향한 것, 다른 하나는 뒤를 향한 머리를 가진 쌍두의 죽각상같은 그런 것이. 두 개의 머리는 디쵸답게 계속 빙글빙글 돌아간다. 그리고 그의 마음속에 다른 디쵸가 떠오를 것이다. 사람은 사라져도 모습은 보인다. 그리고----보이면서도 사라질 수가 있다.
캐롤은 그의 허벅다리 위에 양다리를 얹고 그대로 조금씩 그네를 앞뒤로 흔들었다. "내 얘기 듣고 있었어요 ? 아니면 내가 너무 시시꺼벙하고 구질구질한 얘기만 떠들어댔나요 ? 지금 몇 시죠 ? 보통 내가 구질구질하게 하기 시작하는 것은 한밤중이 지난 다음부터인데."
"아직 11시 반이지만 이미 탄력이 붙었는데."
"알리샤를 좀 들여다보고 와야겠어요." 캐롤은 일어섰다. 카스피안의 눈 앞에서 한바퀴 돌아 앞쪽 호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순간적으로 포즈를 지어 복숭아빛의 퀼로트(기장이 짧은 승마바지)와 짝을 이르는 블라우스를 카스피안에게 보여주었다.
"나의 새 옷에 대해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죠 ? "
"지방시군. 천 달러보다 싸지는 않겠지 ? "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있는 재생가게에서 15센트에 샀어요. <세르마의 말쑥한 중고품 가게>라고 하는 곳이죠."
"훌륭하군 ! "
"저어, 들어봐요----" 캐롤은 카스피안의 팔꿈치를 받들어 의자에서 일어서게 했다. "선생님이 알리샤가 또 울었다고 했어요."
"뭐라고 했는데 ? "
"누군가 다른 아이가 선생님한테 본보기로 벌을 받았다며 하루종일 그애 때문에 울고 있었다나봐요."
두 사람은 현관 홀로 들어갔으며 알리샤의 침실로 갔다. 천장에는 은색의 별과 달이 그려져 있었고 침대는 좋아하는 봉제 인형으로 둘러싸여 있어 꺼지지 않는 등불이 부드러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알리샤의 몸을 웅크린 모습을 보니 그녀가 아이의 독특한 고민을 안고 잠든 것은 분명한 것 같았다. 캐롤은 어깨를 시트로 감싸주고 뺨에 키스를 했다.
뒷걸음질을 치며 방을 나와 부엌으로 돌아갔다. 캐롤은 카운터에 앉아 눈 앞의 과일 그릇에서 오렌지를 한 개 집어 가죽을 벗겼다. 밖에서는 코요테가 늘쌍하듯 먼곳에서 울부짖기 시작했다.
"저걸 들으면 초조해져."
카스피안은 창 밖으로 응시하며 달밝은 산줄기에 눈을 향했다. 앞쪽 초지에 부엌의 희미한 등불을 등진 그의 아련한 그림자가 비쳐 있었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저놈들의 말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게돼."
"하지만 백과사전의 세일즈맨처럼 시끄러워요."
카스피안은 자신의 그림자를 아직도 쳐다보고 있다. 캐롤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알리샤가 속임수를 쓴대요."
"시험에서 ? "
"아이들끼리 게임을 할 때. 선생은 어떻게 그런 걸 그리 잘 알아내는 걸까요 ? " 캐롤은 블라우스의 소매를 매만지며 그곳을 바로 잡은 뒤 퀼로트의 이음새를 잡아당겼다. 그 몸짓에서 카스피안은 무언의 질문을 해독했다.
"그래서 그것이 뭔가 우리들에게 관계가 있다고 선생님은 생각하고 있나 ? "
"네, 그 여자 특유의 남을 깔보는 듯한 말투로 말이죠, 알리샤의 트러블은 우리들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고 말을 비치는 거에요. 우리들 어느 쪽이 상대를 속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고요. 알고 있어요, 동정해요라는 느낌으로 끈적끈적하게 말하지 뭐에요. 그 못된 선생이, 그런데 여보, 제 눈을 속이고 있나요 ? "
캐롤은 캐내려는 시선을 보내며 쳐다보았다. 카스피안은 냉정한 밑바닥을 알 수 없는 배우의 가면을 쓰고 그에 응했다. "그런 것 없어."
캐롤은 그 가면에 아주 작은 균열이라도 찾아낼 수 없을까 하고 그를 마음껏 관찰했다.
"로마 프렌치는 ? "
"천만에."
"오늘 밤엔 잔뜩 먹어야겠군요."
"무엇이 알리샤를 그렇게 만들고 있는지 내 짐작을 말하는 것도 좋지만 당신에겐 잘 이해가 안 될 거야."
"되는지 안 되는지 시험해봐요."
"이 집엔 유령이 나오곤 해."
"데이빗, 그렇지 않아도 난 잠드는 것이 아주 힘들어요."
"집안이 아니야, 엄밀히 말하면. 나에게지. 뭔가가 내게 남몰래 붙어다니는 거야."
"뭐가 ? 누가 말이에요 ? "
"죽은 나치."
"연극을 하고 있군요, 그렇죠 ? 저 1시간 300달러의 연기 선생이 숙제를 낸 거죠 ? "
"다른 사람의 육체를 이용하는 마법사의 얘기는 알고 있겠지 ? "
"그것보다 햄스터(시험 쥐)를 이용하라고 하세요. 데이빗, 이런건 당신답지 않아요." 캐롤은 손을 내밀었다. "벌써 한밤중이에요. 어차피 난 수다스러운 경솔한 인간이고 죽은 나치가 광고의 스페이스를 사줄 리 없고. 자아, 물침대에 듭시다. LA선 이렇게 하는 거 아니겠어요."
카스피안은 캐롤과 함께 침실로 들어갔다. 놋쇠로 만든 사당패의 침대 등이 켜져 있었다. 바랜 오크재로 만든 둔중하게 큰 침대, 캐롤은 두툼한 카페트의 파일의 위를 맨발로 걸었다. 모든 것이 잘 정돈되어 정취가 있다. 그들의 생활은 나무랄 데가 없었다. 캐롤은 블라우스와 퀼로트를 벗자 화장실 안쪽의 불빛에 비쳐진 채 알몸으로 잠시 쉬고 있었다. 거울을 붙인 한쌍의 문에 각각 그녀의 반면상이 비춰지고 작은 요정을 생각케 하는 모습이 어디까지나 무한하게 계속되고 있었다. 나이트가운을 꺼내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썼다.
"왜 알리샤는 속임수를 쓰고 있을까요 ? "
"이 집의 분위기에 울적한 그 무엇이 짓누르고 있는 거야."
"<황혼 지대>에서 사는 건 사절이에요."
"그렇다면 나의 인격이 일그러진 탓이라고 해두지. 어쨌든 그애는 그걸 느껴 알고 있는 거야."
"그애는 불행하니까 속임수를 써요. 불행한 것은 양친이 한결같이 병적인 자부심의 소유자니까. 난 아마 그러리라고 생각해요."
"당신에겐 전혀 책임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당신 옷을 입은 채로 주무실 거예요 ? "
"산책좀 하고 돌아오려고."
"유령에게 안부 전하세요. 난 여기서 오직 잠에 빠져들고픈 심정 뿐이니까."
카스피안은 침대 가에 무릎을 꿇고 캐롤의 이마에서 살며시 머리카락을 젖혀 놓았다.
"최면 테입을 걸지."
"텍사스 사투리의 사나이의 테입이라면 절대 잠을 청할 수 없을 거에요."
"그렇다면 잠재 의식에 호소하는 것은 ? 해변에 밀려오는 파도 소리라던가."
"그 테입은 뒤에서 사람이 중얼대고 있어요. 난 그런 패거리들은 믿지 않아요." 몸을 뒤적여 수면제에 손을 내밀었다.
"당신도 한 알 먹어야죠. 두 알이라도 좋아요. 그 유령에게 한알 줘요." 물에 손을 내밀었다. "5분도 채 안 돼 난 푹 잠들 거예요."
"잘 자요." 카스피안은 작은 소리로 말했지만 이미 캐롤은 눈가리개를 하고 시트에 들어가 있었다.
침실 도어에서 나와 배란다에 내려섰다. 그가 키우는 개가 어둠속에서 소리도 없이 나타나 다가왔다. 카스피안은 개 조련사의 말을 상기해 보았다----뭔가 이상한 점이 있으면 도베르만이 발견할 것이라는.
개는 뜰을 지나 문을 빠져나가 따라왔다. 코요테의 무리는 이미 모습을 감추었고 산 속으로 물러갔다. 카스피안은 길을 걸었고 멈춰서서 자기 집에 단 하나 켜져 있는 불빛을 내려다보았다----
희미하게 빛나는 그것은 알리샤의 방에 밤새 켜져 있는 불이었다.
계곡을 누비듯 인기척없는 길을 더욱 나아갔다. 북두칠성이 그의 저택 상공에 걸려 주걱에 담겨진 어두운 알맹이를 지상에 쏟아내고 있었다.
걸으면서 그 자신과 우주에 상념이 치달았다. 그러나 무엇 하나 분명치가 않다. 머리 위에서 별들이 타올랐다. 길은 어둠을 꿰뚫고 꾸불꾸불 이어져 있었다.
도베르만은 까맣고 긴 코를 지면을 향하고 카스피안과 나란히 걸었다. 콧구멍이 코요테가 남긴 냄새를 분주하게 맡았다. 눈은 불타오르는 작은 루비 덩어리였다. 길은 구불구불 계곡 밑을 향해 내려가고 있었다. 카스피안의 캔바스 신발은 발소리도 없었고 도배르만의 발톱이 길바닥을 스치는 희미하고 불온한 소리만이 들렸다. 길에서 벗어나 숲속으로 들어갔다. 도베르만은 메마른 모래땅에 코를 나지막히 대면서 뒤를 따랐다.
계곡 밑에 이르렀다. 혹 같은 모습의 산들이 검게 둘러싸고 있었다.
"널 만나러 왔다."
카스피안의 목소리는 공허하게 둘러서 있는 산 속에 메아리졌다.
"나와 ! 아예 결말을 내자."
산들은 그의 목소리를 받아 그 메아리를 삼키고 정적으로 돌아 갔다.
계곡 밑을 가로질러 더욱 전진했다.
계곡의 베일을 꿰뚫고 즉물주의라는 목소리.
도베르만은 입술을 말아올리고 울부짖었다.
바로 앞에 기분나쁜 인간의 눈이 있어 달그림자를 비치고 있었다. 카스피안은 머리와 동체가 희미한 윤곽을 인정해 가슴을 억눌리는 공포를 느꼈다----그러자 그 사람의 그림자는 정거장의 불빛 아래 전신을 나타냈다. 서 있는 것은 자겐 하사였다. "자겐인가. 놀라게 하지 말아." 펠릭스가 말했다. "눈이 몹시 반짝반짝하는데."
"전 술을 마시지 않았습니다만."
"변명은 그만 해 자겐. 안내해."
플랫폼 끝까지 걸어가 화차가 있는 조차장까지 돌층계를 내려갔다. 대피선이 있는 곳에서 화차로부터 야전용 경트럭에 짐이 옮겨지고 있었다.
펠릭스는 화물열차의 열려진 문 옆에 서서 적환을 재촉했다. 만일 야전헌병이 냄새를 맡는 날이면 귀찮은 질문을 실컷 당할 곤경에 처한다. 그리고 공연한 대답이라도 하는 날엔 모가지가 날아갈 뿐이다. "빨리해. 밤새도록 하게 돼선 안돼."
군인들은 작업을 서둘렀다. 자겐 하사는 철도운송표를 접어 다른 쪽지와 함께 서류철에 철했다. 만약 오늘 밤의 철도면으로 무엇이 송달됐는지 확실한 것을 알려고 하는 높은 사람이 나타나면 이 쪽지가 소용이 있게 된다. 그곳에는 소시지의 통조림과 그밖에 얼마 안 되는 품목이 적혀 있다. 결코 캐비아도 아니며, 에스카르코(달팽이)도 담배도 화란제의 여송연도 초콜릿도 아니다. 자겐이 트럭의 짐을 가리켰다.
"뮬러 대령님의 농장까지입니까 ? "
"아니다. 육군 사령부까지. 지배카장군 앞이다." 펠릭스는 자기의 까만 소형 수첩에 선물의 정확한 내용을 적어놓은 다음 달팽이 상자를 가리켰다. "한 개 내 차에 실어."
펠릭스가 최후의 짐을 부리는 것이 끝나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사이 자겐은 옆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것이 전부입니까 ? "
"어젯밤에 송달된 예의 특별 나무상자를 싣고 날으는 편이 있어."
"네, 그림 말씀이군요."
"그것에 그림이 들어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고 있지 ? "
"모릅니다. 다만 그렇게 말해본 것 뿐입니다. 두 번 다시 말 않겠습니다."
"떨어지는 참새를 헤아리는 자가 있다면 그건 자네가 아니고 신이나 뮬러 대령님이야. 알겠지 ? "
"알겠습니다." 자겐 하사는 눈에서 완전히 표정을 지우고 한 점을 응시하고 조각상처럼 차렷 자세를 취했다. 예전에 최전선에 있었던 적이 있는 자겐은 숨이 붙어있는 한 두 번 다시 같은 체험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만일 누군가가 너에게 질문해도 말이야. 상대가 누구이건 너는 아무 것도 몰라. 그런 경우 곧 나에게 보고하는 것이다. 알겠지 ? "
"네, 알겠습니다." 자겐 하사에게 있어서는 이만큼 명쾌한 일은 없다. 저 수수께끼의 나무상자의 알맹이 때문에 누군가가 교수형에 처해진다면 그것은 팔켄하인이지 자겐은 아니다. 자겐은 이미 달팽이 한 상자와 담배 500개를 무사히 차에 실었다. 오늘 밤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펠릭스는 화차 조차장을 가로질러 마침 한 군인이 메르세데스의 뒷문을 잠그려고 하는 곳으로 돌아왔다. 정거장의 불빛에 희미한 안개가 서리고 있었지만 들어오는 승객은 없었다.
펠릭스는 운전석으로 몸을 미끌어뜨리며 들어가 앉았다. 꺼져있던 계기판의 불이 켜지고 차는 조용히 엔진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핸들을 돌리는 펠릭스의 등에 가죽으로 된 시트가 살며시 삐걱댔다. 다시 한번 돌아 역 구내를 빠져 거리로 나섰다. 다만 하나 무기에 한해 암시장이 없다. 모두 넌더리를 내는 것이다. 한장의 셔츠는 6연발 로켓포보다 값어치가 있다. 수요가 많은 것은 탈출용차----오토바이도----라고 이 나라가 붕괴되는 순간 그것들을 움직이는 가솔린이었다.
펠릭스는 다름아닌 이러한 물건들을 도망 준비 중의 상급 장교에 돌리는 것에 의해 다대한 이익을 얻고 있었다. 그에 대응해서 게쉬타포는 조사를 강화해 암시장 주변에 쳐놓은 그물을 좁혔다.
불이 켜져 있지 않는 한길을 지나갔다. 흔들리는 헤드라이트가 영국공군의 랑카스타중폭격기의 공습을 받아 깨진 창문이나 타다 남은 출입문을 스치고 지나갔다.
운전을 하면서도 그의 눈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늘을 쳐다보았고 배에 소이탄을 안고 고공을 날으는 신예기의 그림자를 찾고 있었다. 쓸쓸해진 길을 택했다. 폭격 목표가 되지 않는 지역을 지나 유태인들이 저버리고 간 거리를 지나갔다. 빽밀러를 들여다 보았지만 흐린 밤은 어둠의 커튼에 닫혀 있어 사람의 그림자가 없는 길이 비칠 뿐이었다.
예의 그 아련한 향기를 실은 먼 열대의 환영이... 그렇다 ! 정거장의 플랫폼에서도 강하게 느낀 저 꽃들과 빨갛게 익은 과일의 냄새다.
환상은 따스하고 기분좋은 미풍을 어디선지 모르게 날라와 희롱하듯 그의 신경에 불어댔다. 그는 이 세상이라는 섬유에 구멍을 발견했을까 ? 존재라는 이름의 직물에 뚫려진 구멍을 ? 아니면 이것은 게쉬타포와의 체스 게임에서 오는 과로일까 ?
그와 뮬러는 돈을 쫓아 상대의 진지에 너무나 깊이까지 말을 진출시키고 있어 피로는 하늘을 날을 수 밖에 도리가 없다.
쿠르펠스텐슈트라세에 가까운 공습을 받지 않은 지역으로 들어섰다. 말러가 그곳에 호화 저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신분증명서 상으로 그녀는 정보국에 고용되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정보국에는 "백작부인"이 많이 있어 제3제국을 위해 일하고 있다.
차를 멈췄다. 하인이 응대하러 나와 저택 안으로 안내했다. 계단을 올라가 거실로 갔다. 뮬러 대령 개인의 수집품 중에서 가져온 장식품이 저택에 고봉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현관에의 통로에는 로마시대의 대리석 말. 벽에는 17세기의 정물화가 걸려 있어 케타울스가 걸려있는 램프의 부드러운 빛에 비쳐지고 있다. 검정 사텐의 롱 드레스를 입은 말러는 침대의자에 벌렁 누워있었다.
"어머나, 펠릭스 ! "
말러는 흥미가 없는 것처럼 이쪽을 쳐다보았지만 그래도 잡지를 내려놓았다. 펠릭스는 마주 앉아 자신의 은제 담배 케이스에서 담 배를 한 대 뽑았다.
말러는 구부리고 있던 다리를 펴고 오닉스의 테이블 너머로 펠릭스를 바라보았다. 그 테이블과 펠릭스가 앉아있는 루이 14세식 의자는 전에 어느 덴마크인의 가구의 일부였는데 그는 뜻하지 않은 파산에 몰려 소유물을 모두 하나의 열차표와 교환으로 육군에 깡그리 양도되었던 것이다.
"새 생활이 마음에 드는 것 같군." 펠릭스는 담뱃불을 붙였다.
"옛날엔 코러스 라인에서 페이퍼 문에 타고 있었는데. 나는 환상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알고 있죠." 드레스 밑에서 다리가 흔들리고 옷자락 밑에서 금으로 만든 구두가 드러났다.
"그런데 그 이탈리아의 무관은 어떻게 하고 있지 ? "
"그는 이미 용무가 끝났어. 지금은 폴랜드의 남작과. 언덕 중턱에 공장을 건설하는 시중을 돌고 있어. 안전하게 오래 유지하고 싶다고 하더군."
"빈틈이 없는 녀석이야."
"뮬러를 우두머리 주주로 내세웠어." 벨을 울려 하인을 불러 샴페인을 가져오게 했다.
"당신은 어떻게 하고 있었죠, 다링 ? "
"달팽이와 용상어 알젓 배달꾼이지." 펠릭스는 하녀로부터 삼페인을 받아 마개를 따서 두 사람분을 따랐다. "당신은 아름다운 것을 많이 가지고 있군."
"난 물건을 믿어요."
"그 침대의자의 소유자인 덴마크인도 그랬었군."
"당신은 이곳에 설교하러 온 건가요 ? "
"우리들의 그리운 극장은 폭격당했어."
"애석하군요." 말러가 말했다.
펠릭스는 장화의 한쪽 발끝을 테이블에 걸쳤다. 그 위에 매달아 놓은 프랜들 양식의 샨델리아의 촛대가 상판에 비치고 있었다. 약탈된 물건들은 다시 장소를 얻어 느긋해 있는 것 같이 보였다. 그들은 성격적으로 그 소유자보다 차가운 것이라고 펠릭스는 생각 했다. 그러나 많은 단장을 한 저택의 화려함은 그곳 장식품의 출처는 좌우되지 않았다.
"돈을 전하러 왔어." 펠릭스는 봉투를 테이블에 놓았다.
"뮬러로부터."
"비밀의 숭배자로부터."
말러는 봉투를 알아보았다. "이건 당신의 전용 봉투가 아니에요."
"의상비라고 생각해. 당신의 속옷 세일즈맨으로부터."
말러는 봉투를 소파의 쿳션 사이에 밀어넣고 다시 펠릭스 쪽으로 향했다.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당신은 돈을 아끼지 않는군요."
펠릭스는 담배를 재털이에 놓았다. 가느다란 보라색 연기가 재털이에서 피어올랐다.
"기억나 ? 옛날 두 사람을 위해 오두막 산장을 사려고 한 것을 ? 북부에 ? 호수에 머물었지. 슈타인프터 메아야."
"그 두 사람의 일은 거의 기억하고 있지 않아요." 말러는 침대 의자에서 살짝 두 다리를 내렸다. 펠릭스는 다시 담배를 꺼내 연기가 손가락에 얽히는 것을 쳐다 보았다. "호수를 요트로 달렸지. 바람의 마력에 실려. 하지만 당신 말이 맞아 말러. 우리들은 이미 옛날의 우리들이 아니야."
말러는 일어나 드레스의 옷깃을 여였다. "에밀 바이아스라는 남자를 알고 있어요 ? "
"게쉬타포의 거물이지."
"대체 당신, 무슨 짓을 해서 그를 모욕했죠 ? "
"내가 ? 아무 것도. 뮬러와 그자는 사이가 좋지 않아." 펠릭스는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피웠다. "무엇때문에 에밀 바이아스 일 같은 것을 꺼내지 ? "
"국립경찰에서 벼락 승진했으니까 그러죠."
"그자가 당신에게 뭐라고 욕을 했나 ? "
"대단히 델리게이트한 말투였어요. 말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독기를 품었어요. 뮬러로부터 명령을 받는 자는 혐의를 받게 된다고 하더군요. 대단히 매력적인 말주변으로 벌칙에서 몇몇 항목을 인용하면서 말에요."
펠릭스는 눈을 떨어뜨리고 둔탁하게 빛나는 테이블 상판을 쳐다보았다. 차가운 그 표면은 지금 무덤 같은 취향을 보였다. 닦아놓은 묘비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것과 마찬가지인 돌이 그의 마음속에 부리를 내렸다.
말러는 난로에 다가갔다. 난로 위에 금테 안경이 걸려 있었다. 그녀는 거울 속의 펠릭스를 향해 말을 걸었다.
"우리들이 도망갈 길은 준비해 놓았나요 ? "
펠릭스는 일어서 옷깃을 여몄다.
"거울을 빠져나갈 수 있었으면 하고 생각해본 적이 있어 ? 유명한 영국의 앨리스의 얘기처럼 ? "
말러는 거울을 쳐다보며 중얼대듯 말했다. "이미 몇 년씩이나 왔다갔다 빠져나가고 있어요."
펠릭스는 말러에게로 다가가 머리카락에 살며시 손을 대었으며 매끄러운 머리카락에 따라 손바닥을 미끌어뜨렸다. "에밀 바이아스 녀석, 아침에 눈을 뜨면 머리에 총알을 꿰뚫었다며 놀랄 거야."
"전쟁은 패배죠." 말러가 말했다. "우리들은 이제 곧 도망쳐야 해요."
"종말이 올 때까지 더 많은 돈을 만들 수 있어. 그 폴랜드 남작과 언덕에 세울 공장에 전력을 집중하는 거야." 말러의 뺨에 가볍게 키스했다. "마음을 단단히 가져. 제때에 도망치게 해줄 테니까."
"당신을 믿을 수 밖에 없군요." 눈이 의혹을 나타내고 있다.
"국경에서 조금 소매 밑을 붙들게 하기만 하면 돼. 생판 다른 사람에게 시킨 일이 있을 정도이니까. 내가 전에 사랑하던 사람에게 해줄 수 없지 않아 ? "
"펠릭스는 펠릭스 이외에 아무도 사랑한 일이 없어요."
"그것이 당신 잘못이야, 사랑스러운 여왕님. 나는 어떤 특별한 일요일에 당신을 사랑했어. 당신은 후줄근한 펠트 모자를 쓰고 있었지. 나는 빳빳한 낡은 양복을 입고 있었고."
펠릭스는 입술을 말러의 입술에 겹쳤다. 말러는 눈을 감았다. 펠릭스에게 밀어붙여진 몸에서 힘이 빠져갔다. 두 사람의 입맞춤은 계속되고 난로 위의 덴마크제의 시계가 시간을 새긴다. 펠릭스가 말러에게서 떨어지자 하인이 나타나 그를 위해 도어를 열었다. 장갑을 낀 손을 닦아놓은 안간 위를 미끌어뜨리면서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 끝에 황금공을 받들어든 폰의 조각상이 서 있었다. 그 앞을 지나 도어를 향해 거리에 나서 메드세데스에 올라탔다.
엔진을 걸고 울퉁불퉁한 길을 신중히 핸들을 잡아 지나갔다. 우묵 패인 곳은 차축까지 그림자를 드리울 만큼 깊다. 펠릭스는 계기판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고급 레저, 하얀 손장갑. 좋아, 오늘 밤 하루는 살아남을께.
건물이 계속 후방으로 물러가고 둔탁하게 빛을 반사하는 본네트에 가로등의 그림자가 가로질렀다. 지붕 위 하늘에서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쿠르펠스텐슈트라세의 판자를 붙여 놓은 레스토랑이 늘어선 옆에 차를 멈췄다. 폭격기의 폭음으로 하늘이 진동하고 있다. 전과 같이 경보는 너무 늦었었다. 그는 공습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이미 폭탄은 구름을 비추는 섬광을 발하며 계속 작렬하고 있었다.
고급 장화, 잘 만들어진 군복. 오늘 밤 하루는 살아남을 거다. 어느 지하실 입구에 뛰어들었다. 랭가스터 폭격기의 굉음에 고사포부대가 응사했다. 몸 아래서 지축이 흔들리고 문득 군가가 뇌를 가로질렀다.
탄환이 퓽퓽 날아왔다.
표적은 너인가 아니면 나인가.
지하실 입구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하늘에는 폭음이 충만하고 거리는 지축을 울리는 진동이 다가왔다. 장갑 정찰차가 모퉁이를 돌아 모습을 나타냈다. 갑옷을 입은 기사를 생각케 하는 검은 얼굴에서 가느다란 눈이 사방을 엿보고 있다. 그러자 20밀리포가 포신을 천천히 돌려 펠릭스에게 살짝 겨냥을 정했다.
펠릭스는 실을 매단 종이로 접은 새처럼 자기 몸에서 슬쩍 빠져 나와 하늘로 날아올라갔다.
공중으로 방향을 바꾸자 거리에서 안개가 나선형처럼 말려 무수하게 솟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저건 사자야----정지한 정찰차가 아직도 운전석에서 소리를 내며 속삭였다.
기관총을 든 망령들이 그의 곁을 화살처럼 스치며 지나갔다. 환상 속에서 아직도 계속 싸우고 있는 망령들. 나선형을 그리며 상승하는 죽은 사람들 중에 겁많은 한 망령이 이쪽을 향해 올라왔다. 그 망령은 그와 일체가 되어 그의 방향을 바꾸었다.
카스피안은 목덜미에 탁하는 소리를 들었다. 너무 큰 소리여서 목뼈가 부러졌나 하고 생각했다. 가만히 머리를 들어올려 보니 딸의 방 창문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제10장  의혹의 그림자



원장은 카스피안과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밝은 사무실이다. 벽은 화려한 복숭아빛이었고, 창문은 넓직한 부지 위로 돌출되어 있었다.
"애석하게도 숙모님의 병환이 또 도졌어요." 의사의 말투는 온화했다. 겁먹은 동물에 말을 걸며 달래 안정시키려는 그런 목소리였다. 이 의사가 환자, 간호사를 비롯 누구에게나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카스피안은 알아차렸다. 그의 눈에는 세상 전체가 약간 이상하다는 듯이.
"상당히 뜻밖의 일이었어요. 지금 복용하고 있는 약으로 현상유지는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안됐지만 오늘은 그 전과는 다른 사람 같은 숙모님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간호사가 호출되어 오고 카스피안을 숙모의 방으로 안내했다. 숙모는 창가에 앉아 창살 사이로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몸을 맥없이 앞으로 숙이고 있긴 해도 머리는 꼿꼿이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간호사가 말을 걸었다.
숙모는 가볍게 머리를 돌렸다. 동그란 작은 어깨에서 부러질 것만 같은 가느다란 목을 내밀었다. 카스피안의 상상 이상으로 안색이 나빠져 있었다. 뺨이 황달에 걸린 것처럼 거무칙칙하고 누렇게 되어 있었다.
"안녕하세요, 루스 숙모님." 카스피안은 늙어 주름투성이의 손을 쥐었다. "루스 숙모님, 데이빗이에요."
"네가 누구라는 정도는 알고 있다."
"뭔가 제가 해드릴 것이 없겠습니까 ? "
숙모는 기침을 했다. 폐에서 무엇을 제거해 내려고나 하는 심한 헛기침이었다. 등을 쓸어주던 카스피안은 척추가 튀어나와 있는 것을 손바닥을 느꼈다. 기침이 멎자 숙모는 힘이 드는 듯 고개를 들었다.
"얘야, 난 쫓기고 있단다..."
"쫓기다뇨, 누구한데요 ? "
"내가 돈을 빌렸어. 그랬더니 쫓아오는 거야."
"지불은 모두 마쳤습니다. 누구에게도 빚은 없어요."
뼈가 앙상한 작은 손이 카스피안의 손을 꼭 쥐었다.
"빚과 거짓말 때문에 쫓기고 있어. 그녀석들은 내가 있는 곳을 알아냈어. 나를 잡으러 올 꺼야. 나를 고문할 꺼야."
"아무도 숙모님을 함부로 다룰 순 없어요." 카스피안은 숙모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숙모님, 이 양지바른 방에 계시니까 누구라도 함부로 들어와 숙모님께 나쁜 짓은 못합니다."
"벌써 들어와 있는걸. 쫓아낼 수가 없어. 그놈들의 정보원들은 영리하니까. 난 엉뚱한 짓을 저질렀어. 빚과 거짓말. 자고 있는동안 놈들이 나의 뇌에 전류를 흐르게 했어."
"누굽니까, 숙모님, 누가 그런 짓을 했습니까 ? "
"누군지 알고 있으면서."
"누군데요 ? "
"누구긴 누구야 나치 녀석들이지."
카스피안은 간호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간호사가 귀띔을 해주었다.
"어제는 KGB였어요. 그 전에는 FBl. 내일은 또 다른 것이겠죠."
카스피안은 숙모의 옆에 앉아 독방의 격자 사이로 밖을 바라보며 그날 오후를 함께 지냈다. 그 동안 숙모는 히틀러의 일, 뇌에 전류를 흐르게 하는 얘기, 빚과 거짓말, 그리고 부헨발트 강제수용소의 짐승 얘기를 그에게 말했다.

햇빛은 신선들이 쉬고 있는 정지된 산의 경치를 비추고 있다.
게이라드와 카스피안은 그 수묵화 속의 분위기 그대로라고 할 수 있는 적막 속애서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게이라드는 눈을 감고 있었고, 카스피안은 숙모의 정신병에 관해 상세히 얘기하는 것에 귀를 가울였다.
게이라드는 눈을 떴다. "어느 가문이나 각기 이상이나 모자라는 점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까지 유전된 악영향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게이라드는 양 발을 무릎방석 위에 얹었다.
"지난번에 그곳에서 당신들이 다투고 있을 때는----펠릭스는 게쉬타포가 쫓아오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었지요 ? "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게쉬타포입니다. 우리들이 그물을 좁혀가고 있는 것을 그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붙들면 어떻게 하실겁니까 ? "
"아직 거기까지는 말할 수 없습니다." 게이라드는 천천히 손가락으로 머리를 빗어올렸다. 뒤쪽 돌출 창문에서 빨간 배를 가진 작은 새 한 마리가 모이대에서 모이를 쪼아대고 있었다. 날카로운 부리가 분주하게 대를 쪼아대고 있는 소리가 주위의 정적을 충만케 했다.
게이라드의 눈은 작은 새를 포착하고 있긴 해도 쳐다보지는 않았다. 그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그 상념을 쫓으면서 새삼 카스피안을 쳐다보았다.
"당신은 연극의 의상처럼 펠릭스를 몸에 입고 있군요."
"그 결과 자기의 인격을 완전히 축출해 버리고 말겠죠 ? "
"그건 지나친 생각입니다."
"글쎄요, 지나친 생각일까요 ? "
"그러나 드문 일은 아닙니다. 건강한 사람이 갑자기 미쳐버리는 것은 흔히 있는 일입니다. 감자를 깎고 있던 여자가 문득 칼을 벽으로 던져버린다. 칼은 벽에 꽂혀 기분 나쁘게 떨린다. 그 여자는 깜짝 놀라고 그것이 남편에게, TV 앞에 앉아 축구 시합을 응원하고 있는 남편에게 꽂히지 않은 것을 신에게 감사한다. 당신의 경우 원망스러운 막간극은 좀더 오래 계속되겠지만 당신은 그것에 익숙해졌습니다. 당신은 무대에 섰던 경험이 있어 하룻밤 내내 같은 역을 연출한 일도 있고 1년 내내 한 적도 있어요.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당신은 어떤 형태의 인격 상실에도 견뎌낼 수 있도록 훈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저는 스타니슬라프스키 시스템의 교육을 받은 배우가 아닙니다. 나는 언제나 내가 표현하려고 하는 등장 인물밖에 서 있습니다. 하나의 배역 속에 빠져드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언제나 그곳에 같이 있으면서 자신이 연기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것입니다. 브레히트는 그것을 이화 효과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내가 연출하고 있는 인물은 생판 다른 남입니다. 아무리 빠져들어도 구석구석까지 알 수가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것은 관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의혹과 그림자와 설명이 될 수 없는 사실에 충만한 예측할 수 없는 인물입니다." 카스피안은 거기서 문득 말을 끊었다.
"그것이 저의 과민한 점입니다. 동료 배우들은 대부분이 자연주의에 굳게 뭉쳐 있어서 아부도 그들이 지꺼리고 있는 것을 절반도 이해할 수가 없어요."
"독일서 보고 들은 것을 얘기해 주세요."
"그 당시 보고 들은 것은 그 이후의 저의 행동에 기반이 되고 있습니다. 비틀즈는 함브르크에서 돌아온 다음 좋은 노래를 쓸 수 있게 되었더군요. 같은 해 베를린에서 돌아온 나는 연기를 몸소 익히고 있었습니다."
게이라드는 이마에 손을 대고 미간에 새겨진 세로 주름을 몇 번씩이나 만졌다.
"독일의 혼을 얼마간 흡수해 왔다고 생각되는군요."
"그쪽 사정에는 통하고 있었으니까요."
"나치 가운데 아는 사람이라도 ? "
"극작가 한 사람을 압니다. 그의 아버지는 북부의 한 촌에서 나치 청년단의 리더를 맡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되는 사람은 그 당시까지도 나치였으므로 그 일로 아들은 아버지와 심한 언쟁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제3제국이 부활했다는 징조는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세계적인 운동은 그렇게 간단하게 소멸되지 않습니다."
"연극 관계로 내가 상종하고 있던 사람들은 극히 온화했습니다."
"세계적인 운동이란 것들은 사실은 우리들 속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정신의 표면에 나타나는 것은 그 무엇이건 공통된 속성이니까 말입니다."
"저의 내면에 파시스트가 도사리고 있기라도 ? "
"내가 말하는건 말입니다, 권력을 손에 넣어야만 했던, 피츠버그로부터, 그 악마 같은 공장이 숲처럼 세워진 장소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꾼 꿈이나 공상은 당신이 지금도 그 모든 것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펠릭스는 그 노여움의 일부인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러한 싸움의 모든 것에서 승리를 차지했습니다. 현재 저는 스타입니다. 그것에 어떠한 가치가 있는 지는 모르지만."
"아닙니다. 당신은 미쳐 날뛰는 사람을 잡아먹는 귀신입니다. 당신은 끊임없는 확인을 구하고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아무도 얻을 수 없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들도 각기 생활이란 것이 있으니까요. 당신이 숭배하는 것을 가질 수 있는 시간의 모두를 할애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권력을 손에 넣으려고 하는 충동은 만족하지 못하고 부단히 표면에 얼굴을 내미는 것입니다."
"배우란 것은 모두 숭배받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아내가 말하듯이 우리들의 직업에 있어서 우리들은 자신이 상품이니까요."
"그것이 심한 일그러짐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한 예는 이곳에서도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펠릭스가 씌운 것을 그렇게 이상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코리야 형제의 일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 " 카스피안은 물었다.
"그 두 늙은 부호가 방안에서 헌 신문지에 묻혀 죽어 있는 것이 발견됐다는 얘기를 ? 저에게는 그 두 사람의 기분이 그대로 이해됩니다. 저는 저의 집을 떠나는 것이 두렵습니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이미 흐르는 물 속에 몸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전진해 갈 수 밖에 없지요. 당황하여 되돌아가려고 하는 것은 당신의 입장을 약화시키고 펠릭스에게 이제까지 이상의 힘을 줄 뿐입니다."
게이라드는 촛점이 분명치 않은 눈길을 창문으로 다시 향했다. 아직까지도 두 마리의 작은 새는 모이를 쪼으고 날개를 파닥거리고 있다. 게이라드의 눈은 작은 새를 그냥 지나쳐 계곡으로 향해졌다.
"에고이즘은 아직 유년 시절에 그것이 형성되는 도중에 분열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때 거대한 그림자가 형성되는 일도 있습니다. 지금 당신에게 들씌워져 있는 그것, 즉 당신 내부에 있는 분신일 것입니다. 당신이 그것을 생기게 했다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원래대로 돌이킬 수 있는 것은 당신 뿐입니다."
"도대체 분열은 무엇이 원인이 되어 생기는 것입니까 ? "
"그건 아무래도 좋은 일입니다만 이렇다고만 설명해 두겠습니다. 당신의 경우, 자아의 형성기에 가정의 분위기 속에서 뭔가가 혼란을 일으킨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에고, 즉 자아라는 놈은 원래 분열하고 싶어하는 경향을 안고 있는 것이므로 당신의 자아도 분열했던 것이겠죠."
"펠릭스는 어렸을 때부터 제 속에 있었단 말씀입니까 ? "
"그는 당신의 에고의 쌍생아, 또 다른 한쪽이겠죠 ? 그러나 당신만큼 강하지는 않지요. 보다 약한 쪽의 한쪽인 것입니다. 그가 냉혹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당신은 바깥 세계와 교제를 가졌어요. 그는 암흑과 손을 맞잡았어요."
"그러나 어떻게 해서 그는 그 정도의 주체성을 획득했을까요 ? 그런 완전 무결한 세계를 ? 그곳에는 무엇이나 갖추어져 있어요. 자동차, 여성, 군대, 도시, 그것만으로 하나의 완전한 현실이에요."
"완전이라곤 단언할 수 없어요."
"무엇이 부족하지요 ? "
"당신입니다. 실제로 살아가기 위해 펠릭스는 당신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영원한 떠돌이가 되고 마니까요. 에고 콤플렉스에 있어서는 당신이 우세해요. 그의 희망은 당신을 유혹해 그의 쪽으로 붙이는 당신의 에고를 그가 사는 환상의 현실에 끌어넣는 것. 즉 그 어떤 확실성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당신의 눈에 그는 강력한 존재로 비칠 지도 모르지만 그는 벨스토헨, 즉 단순히 가련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당신 쪽이 강한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죠 ? 내가 방심 상태로 건들건들 하고 있다는데 ? "
"당신보다 좀더 심한 예를 매일처럼 보고 있으니까요. 진성분렬증 환자를 상대로 하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상상도 할 수 없겠죠. 생명력이 저하되어 있어 기능을 발휘하게 할 수 있는 불가능한 사람들이니까요. 그 무엇을 가지고도 그러한 사람들을 현실 세계에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람들의 에고에는 여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절망적입니다. 그래도 나는 치료에 힘쓰지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 뿐이니까요. 여성 환자가 있었어요. 그녀는 정말 천재입니다. 그녀의 상상력이야 말로 믿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무엇 하나 그 속에서 창조할 수가 없어요. 그녀 자신을 위해서도 누구를 위해서도. 그에 비하면 당신은 생활력이 있고 적극적이며 현재 일하고 있어요. 약점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투덜거리고 있으면 안 돼요. 약점이 있으므로써 인간성에 깊이가 생기게 되는 일도 있는 것입니다."
"이 것을 깊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 현실을 상실해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이 ? "
"좋겠죠. 당신은 전면적인 상실감을 맛보고 있는, 그리고 그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비록 조금씩이라도 그곳에서 탈출할 수 있다면 그것은 상실에 고민하고 있는 에고에 의해서입니다."
게이라드는 입을 다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는 가능한 최선의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당신의 백주몽을 하나하나 분석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곳에 빛을 쏘이게 하기 위해. 당신은 엄청난 문제의 밑바닥으로 전락되었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원형인 것입니다."
"멋지군요."
"네에 ? "
"당신은 여전히 이 상황을 심리학적으로 보고 있어요."
"달리 어떤 관찰법이 가능하겠습니까 ? 나는 하루 종일 환자가 갖고 있는 환상을 경청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그것을 모두 현실로 간주하고 있으면 훨씬 전에 나는 정신병원 행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말했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래요, 당신은 나치와 대신하려고 하고 있어요 라고. 나는 현실을 견고한 것으로 하기 위해 여기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이며 환상에 또한 심령 현상까지 부여해줄 생각입니다."
게이라드는 다시 한번 양손의 손가락을 모았다. "사태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나요 ? "
"제가 말입니까 ? "
"심리학이라는 것은 라디오의 주파수를 합친 그런 것입니다. 전 우주에 파장을 맞출 수가 있습니다. 당신은 그것을 발견한 한 사람입니다. 얻어진 지식은 작게 토막난 것이지만 통합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M G M 스튜디오의 나무숲의 잔디에 앉아 <버라에티>지를 읽고 있었다. 아침부터 <스타 로바>를 위한 의상 맞추기를 하고 있었고 그것도 이제부터 2,3시간이면 끝난다. 스튜디오에서 만든 샌드위치의 나머지가 옆 잔디 위에 놓여 있었다. 오랜 습관에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계속 넘긴 다음 내려놓았다. 다른 습관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지나가는 사람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스튜디오의 게이트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사람들은 언제 관찰해도 흥미 진진하다. 카폰을 설치한 길다란 차를 운전하고 오는 남자가 있다. 차에서 내릴 때의 그 남자의 걸음걸이로 그의 현재의 신분에 마음으로부터 안주해 있는 지를 알 수 있다.
마침 대도구 담당이 어깨를 치켜올리고 지나갔다. 벨트에 끼여져 있는 금속제의 고리에 해머를 매달고 있다. 몸을 뒤로 젖히고 걷는 한 발짝 한 발짝이 내게 한번 덤벼봐라, 하고 말하고 있다. 그는 그 자신의 마음속에서 <불타는 해머>라는 영화의 스타인 것이다.
LA에 처음 도착했을 당시 그는 자신의 손으로 집을 세운 기억이 있다. 그는 목수 기질이란 것을 납득하고 있었고 그들이 더불어 빠져들게 되는 백주몽을 이해하게끔 되었다. 자기가 그은 백묵금에 따라 작업을 잠시 계속하는 동안에 어떤 문제도 문제가 아니게 된다.
빨간색 페라리 자동차가 구내로 들어왔고 로마 프렌치가 그것을 주차시키곤 내려서는 것을 지켜보았다. 스크린 밖에서 걸을 때는 조금은 얌전하게 걷는구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일정한 보폭과 팔은 옆에 찰싹 붙이고 앞이나 뒤로 별로 흔들지 않는다. 헐렁한 진즈에 느긋한 대님 셔츠, 그리고 운동화. 머리는 한올한올 신경을 쏟아 손질하고 있지만 전체의 스타일에 어딘지 모르게 생기가 부족해 보였다.
"로마----"
불리어지자 머리를 돌려 둘러보았다. 카스피안은 일어나 손을 흔들어 불렀다. 로마는 카스피안 쪽으로 걸어왔다. 그 걸음걸이를 보고 약간 뭔가의 걱정거리에 사로잡혀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계약 문제일까 ? 보이프렌드 문제일까 ?
"그 모습으론 잠시 앉아 작은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는 것이 좋은 것 같군."
카스피안은 <바라에티>를 잔디 위에 깔아 주었다. 로마는 그 위에 앉아 무릎을 당겨 앉고는 똑바로 앞쪽에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지금 연기 교실에서 나오는 길이에요." 그의 쪽으로 머리를 기울였다. 긴 적갈색의 머리카락이 어깨 밑까지 늘어졌다. "난 정말 엉망이에요. 다른 모든 사람은 멋지게 해 내던데."
"누군데,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야 ? "
로마는 얼굴을 돌린 채 앞쪽을 쳐다보았다. "저 사람들, 학급에선 훌륭하지만 스크린에서 보면 대체 뭘 하고 있는 건가 하고 의아스럽게 생각된다니까요."
카스피안은 끄덕였다. "연기 교실의 천재들이지."
두 사람은 말 없이 앉아 있었다. 기대한대로 작은 새가 나무 위에서도 스튜디오의 경사진 지붕 꼭대기에서도 지저귀고 있었다. 로마는 잔디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잊어버릴 때까지 시간이 걸릴 거에요. 저의 연기를 비평하는 단계가 되면 녹초가 되도록 헐뜯는 거에요. 하지만 결국에 있어 어떤 셈인지, 그 사람들은 연기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것 같아요."
카스피안은 뒤로 한쪽 팔꿈치를 짚고 몸을 기대었다, "어떤 영국인 배우를 알고 있는데 말이야, 그 사나이는 임금 역할밖에 할 수 없어. 왜냐 하면 이것이니까----" 과연 거만스럽게 머리를 젖혀 보였다.
"그런 치들과는 만나고 싶지도 않지만 하지만 우리들은 같은 클라스에 있으니까----" 로마는 핸드백을 열어 작은 손거울을 꺼냈다. "그런 어리석은 교실 같은 건 그만둬야겠죠 ? "
"나는 그만두지 않겠어. 이것은 하나의 생각이지만 학급에 나갈 때마다 어딘지 모르게 몸에 와 닿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야."
"저는 하루 온종일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어요. 집에 돌아가 고양이와 만날 때까지는."
카스피안은 로마가 화장 상태를 알아보는 것을 지켜보았다. 거울은 작은 은제의 고풍스러운 것으로 뒤에 전원 풍경을 그린 에나멜 흔적이 남아 있다. 로마는 마스카라를 약간 고친 후 손거울을 백에 넣었고 그를 웃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난 다시 정상으로 비치고 있어요."
"당연하지."
"전 원래가 서툴러요. 아마 한쪽 다리가 짧은가 봐요. 내집 거실을 걸으면서도 자주 넘어지는 편이니까."
"교실에서 넘어졌나 ? "
"소도구 대신에 큰 나무블록을 사용했는데요, 그것에 걸려 넘어졌지 뭐예요. 모두들 크게 웃었죠." 로마는 잔디 저쪽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지금 한 젊은 여성이 마침 차를 멈추고 내려서는 참이었다.
"저기 밸런스 감각이 뛰어난 한 여성이 있어요. 아세요 ? 스턴트 우먼 에이프릴 오키프에요." 로마가 손을 흔들자 에이프릴도 손을 흔들어 답했다. "난 자기 스턴트 신은 자기가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언제나 생각하고 있지만 여차할 때는 겁이 나서 에이프릴에게 해달래는 처지가 되고 말죠."
"그것이 뭐 문제라도 ? "
로마는 에이프릴이 입구 그늘에 재빨리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녀에 비해 내가 더 벌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지만요. 그녀보다 내 쪽이 스튜디오에 있어 돈이 된다는 것. 하지만요, 그녀가 제 의상을 입고 창문에서 100피트 아래로 뛰어내리는 단계가 되면 내 인생이란 그녀의 것보다 가치가 낮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돼요." 로마는 일어나 <버라에티>를 카스피안에게 건네주었다.
"이젠 가봐야겠어요."
카스피안은 로마가 스튜디오 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눈으로 전송한 다음 지금 의상 맞추기가 진행 중인 건물로 슬슬 되돌아갔다. 스튜디오의 길은 태양열에 녹아버려 발 밑의 아스팔트가 찐득거리고 있었다. 소형의 이사용 유개차가 지나가며 속도를 떨어뜨리고는 바로 앞 모퉁이를 돌아갔다. 후부에서 실은 짐의 전선이 늘어져 있었다.
핸들을 갑자기 확 꺾는 바람에 타이어가 노견석에 걸치게 되었으며 전선이 벗어나 튀어나왔고 일부가 지면에 떨어졌다. "이봐요 ! " 카스피안이 소리를 지르자 운전사는 빽밀러를 들여다보고 차를 멈췄다. "오늘은 재수가 없군, 정말." 운전사는 중얼거리며 내려왔다. 카스피안은 몸을 구부려 도와주었다. 그러자 그때 머리 밑 뿌리쪽에서 뭔가가 튕겨져 나오는 것 같은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햇빛이 어두컴컴하게 되었다. 몸을 일으켰을때는 밤이 되어 있었다.
펠릭스는 잉크와 롤러가 들어있는 상자를 들어올려 훔쳐온 이사용 유개차의 뒤쪽에 서 있는 비젤에게 건네주었다.
"무슨 소리가 들렸어."
"소총의 총성 같아."
"있을 법한 일이지."라고 비젤이 말했다.
"하지만 내 머리 속에서 들렸어." 펠릭스는 후두부에 손을 대고 어깨를 움츠렸으며 그런 다음 건물 안으로 되돌아가 지하실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곤돌프가 소형 카피 머신을 안고 아래에서 올라왔다.
"뭘 하고 있었어 ? 서둘러줘."
"목을 뺀 것 같아." 라고 펠릭스가 말했다.
곤돌프는 코끝에 얹은 안경 너머로 힐끗 한번 쳐다보고 애가 타는 듯이 급히 옆을 빠져 올라갔다. 펠릭스는 지하에 있는 위조실로 들어갔다. 상자가 그들을 기다리며 쌓여 올려져 있었다. 알맹이는 인쇄된 종이----고심 끝에 투시 무늬를 넣은 종이이다.
그것은 곤돌프에게 귀중한 종이이며 게쉬타포에게는 더욱 가치있는 종이였다. 그것을 만들기 쉽고 가까운 곳을 프린츠 알브레히트슈트라세에 사는 비젤의 친구가 몰래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작은 몸집의 위조자는 숨을 헐떡이며 문간에 다시 나타났다. 그 옆에 있던 비젤이 산처럼 쌓아놓은 상자로 눈을 보냈다.
"어떤 거야 ? "
"저것이야. 그런 안료는 두 번 다시 만들 수 었어."
"부분대로----"
비젤이 그 상자를 안아 올렸으므로 펠릭스는 또 하나를 안아올렸고 비젤과 나란히 계단을 올라갔다. 뒤에서 곤돌프가 화학 약품이나 어떤 종류의 바위를 부순 것, 그리고 특수한 브렌드의 커피등을 안고 올라왔다.
"저어, 지구 감찰관 녀석한테 얼마나 많은 돈을 집어 주었나 하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말이야." 곤돌프는 계단에서 몹시 숨을 할딱이고 있었다.
"그 누군 더 많이 집어줬어." 라고 비젤이 말했다.
"그녀석에겐 보지도 못했을 만큼 굉장한 배급표를 위조해 주었지. 바보인 그놈의 조카는 군대에서 빼내줬고."
일행은 좀처럼 저물지 않는 가로길로 나와서 유개차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 상자 조심하게 ! 안에 들어있는 병을 깨뜨리면 아무에게도 배급표를 만들어줄 수가 없으니까."
"우리들의 광고를 읽어봐." 비젤이 말했다. "위생적인 유개차----
안전 포장한 짐을 안전하게 배달해 드립니다라고 적혀 있잖아."
"게쉬타포가 올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제기랄, 손이 떨리는군. 이것 봐----" 곤돌프는 오른손을 이마에 가져갔다. "이꼴로는 내 이름도 위조할 수 없겠군."
"그래, 그렇다면." 펠릭스가 말했다.
"나머지는 놔두고 튀기로 할까 ? "
"그런 짓 하면 내 장사는 끝장이야."
곤돌프는 잰걸음으로 지하실로 향했다. 펠릭스는 별로 주저함 없이 뒤를 따랐다. 어쨌든 군복차림으로 국가의 적에게 돕고 있는 것이다.
"피아노는 놔두지 않았던가 ? " 두 사람의 뒤로부터 계단을 내려와 비젤이 물었다. "피아노 운송이라면 맡겨두라고 했어."
먼저 낡은 지하실에 뛰어든 곤돌프는 주머니에 화필이나 펜을 잔뜩 집어넣고 늘어놓은 정부나 군대의 도장을 위조한 것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우라질 놈들. 솜씨가 있는 직공님을 쫓아내다니... 그곳에 있는 의사 처방 용지와 진단서 용지도 부탁해." 격분해서 쉰 목소리로 말하면서 펠릭스를 밀쳐대며 지나갔다. "어느 곳의 불쌍한 녀석이 중증인 치질 환자의 진단서를 필요로 할지 모르니까 말이야."
"이번 집은 더 안전해." 비젤이 다시 한 상자를 어깨에 메어올리며 말했다.
"난 어디로 가지 ? "
"도심지야. 뷰로보겐."
"매춘부 할망구들의 쓰레기장이군." 곤돌프가 투덜대며 말했다.
"그곳이라면 거리의 여자는 10마르크면 똑소리가 나지."
"그래서 얼마나 절약이 되는지 생각해 보게." 뒤에서 올라오면서 비젤이 말했다.
"난 이 거리에서 자랐어." 라고 곤돌프가 말했다.
"지구 감찰관인 칼프스도 역시 그래." 두 사람의 뒤에서 펠릭스가 덧붙여 말했다.
"그 아첨장이 악당놈 ! " 일행이 윗쪽 출입문을 나섰을 때 곤돌프가 쌕쌕거렸다.
"그놈, 이 지역 반쯤의 주민을 수용소로 보내 버렸어."
"정말인가 ? " 유개차 뒷부분에 짐을 실으면서 비젤이 나지막히 말했다.
"베를린에 얼마든지 있는 지구 감찰관 중에서도----" 곤돌프는 비젤이 실은 상자 뒤에 자기가 안고 온 상자를 실으면서, "칼프스는 가장 비열한 놈이야."라고 말했다.
"어쩐지 오싹해지는군." 펠릭스가 말했다. "뭔가가 우릴 쫓아오고 있어."
비젤은 곤돌프를 향해 싱끗 웃었다,
"펠릭스는 말이야 예언자가 됐어. 목소리가 들리는 거야."
"내가 만든 타이프 폰트를 놔 두고 갈 수는 없어. 몇 년씩이나 걸려 뼈를 깎아 정부의 인쇄기와 똑같은 결함이 있는 것을 만들어 냈거든." 곤돌프가 말했다.
일행은 복도로 되돌아갔다. 연배의 여성이 자기의 방문을 열고 내다보고 있었다.
"이사가는 거예요."
비젤이 아담한 둥근 굽이 놓은 모자를 살짝 들어올리며 말했다. 여인은 수상쩍은 눈매를 비젤에게 보냈지만 펠릭스의 군복을 본 순간 싹 들어가 버렸다.
"칼프스의 할머니야." 곤돌프가 말했다. "본인 대신 냄새를 맡으러 돌아다니고 있어. 이 빌딩에 남아있는 것은 당원 뿐이야."
"그런데, 녀석들은 자네를 뭘로 알고 있지 ? " 곤돌프의 방으로 들어가면서 펠릭스가 물었다.
"탐험가." 곤돌프는 보통 타이프 폰트를 넣어둔 몇몇 상자가 있는 곳으로 허둥지둥 다가가 펠릭스에게 건네주었다. "나중 것은 내가 가져가겠어. 비젤, 제판을 가져가 줘. 저것이야. 영국의 5파운드 지폐." 곤돌프는 주위를 살폈다. "그밖에 또 뭐가 있었지 ? "
"설마." 하고 펠릭스는 진절머리가 나서, "벽지는 가져가지 않겠지 ? 떼내줄까 ? " 라고 물었다.
"뒤에 감춰둔 걸 보면 자넨 놀라 자빠질걸." 라고 곤돌프는 말했다. "하지만 하는 수 없지. 흰개미에게 선사나 할까." 곤돌프는 분주스럽게 왔다갔다하면서 다른 상자를 들여다보며 돌아다녔다. 이윽고 머리를 저었다. "그럼 작별을 고할까. 나 혈압이 올라가고 있어."
"잠깐 기다려 ! " 비젤이 말했다. "이건. 뭐지 ? "
"최고의 슈냅스야."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비젤은 병을 따고 선반에서 잔을 3개 내렸다. "이쯤에서 <안전과 신뢰의 이삿짐회사>에 건배를 해야지." 각자의 잔에 신중히 술을 따랐다. "이만하면 어때 곤돌프 ? 건배도 않고 정든 우리 집과 울며 헤어지라는 법은 없네."
"건배는 무슨 얼어죽을 건배 ! 토스트 되는 것은 이쪽이야. 놈들은 우리들이 내민 머리를 몽땅 구어버릴 거야."
곤돌프는 잔을 들고 쭉 단번에 들이마셨다. 비젤은 자기 잔을 펠릭스의 잔에 쨍그랑하고 부딪쳤다.
"급할수록 침착히."
펠릭스는 한입 마시고 잔을 놓았다.
"프린츠 알브레히트슈트라세의 패거리들을 기다려 한 잔 마시게 하는 게 어때 ? "
"적당히 곤돌프가 신음하듯 말했다. "자아, 가세."
"중요한 건 모두 가져갔지 ? " 비젤이 다짐을 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야."
"장사에 필요한 건 다 가졌어. 침대의 시트는 대용할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어." 비젤은 손장갑을 낀 손으로 주름토성이인 회색 시트를 집어들자 몸에서 좀 떨어지게 들었다. "이런 것은 이젠 구할 수 없어."
"난 가네 자네들이 오건 안 오건 말이야." 곤돌프가 말했다. 곤돌프는 앞장서 출입문을 나서다가 마지막으로 한번 돌아보았다.
"그래도 헤어지는 건 괴롭군."
"저쪽도 헤어짐을 아쉽게 생각한다네." 비젤이 말했다.
계단에 한쪽 발을 올려놓은 곤돌프가 머리를 들자마자 멈춰섰다. 슬금슬금 발을 뒤로당기며 코끝에서 안경을 벗으며 비젤을 돌아보았다.
"헌병이다 ! "
숨을 죽이고 말했다. 계단 위에서 두 검은 그림자가 내려와 중간쯤에 켜져 있는 불빛 아래에 나타났다. 느긋한 발걸음으로 내려왔다. 두 사람의 홀스타가 삐걱댔고 기관단총이 번쩍 빛났다.
"저녀석들을 알고 있어." 곤돌프가 속삭였다. "이 지구에서 사람 하나를 태워죽인 놈들이야. 기도용 술에 불을 붙여서."
헌병 둘은 몸집이 크고 딱 벌어진 체격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 몸무게로 계단이 삐꺽대었다. 쥐를 발견한 고양이기라도 하듯 두 사람은 유유히 계단을 내려왔다. 앞서 내려온 한 사람이 곤돌프의 턱 밑에 총구를 밀어댔다. "어디로 가는 길이지 ? "
"네. 여동생의 이사를 돕고 있었습니다요."
"여동생은 어디에 있지 ? "
"안에 있습니다. 네."
"국방군의 장교가 이런 곳에서 뭐하고 있지 ? " 곤돌프를 밀어젖히고 펠릭스에게 다가섰다.
"이 일가의 친구요." 펠릭스는 천천히 권총으로 손을 가져갔다.
헌병은 동료를 돌아보았다. "이봐, 우린 대단히 재미있는 장면을 보게 된것 같군."
"사소한 즐거운 파티란 것인가." 뒤따라 내려온 헌병은 펠릭스의 저고리의 접힌 옷깃 밑으로 손가락을 하나 집어넣었다. "마침 잘됐어. 장교님에게 공사 현장에서 일해 달라고 할께. 어때, 새 고속도로의 건설을 도와달라고 할까 ? "
"운이 좋다면." 또 한 사람이 말했다, "만약 운이 나쁘면-----" 펠릭스의 목 언저리에다 팍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여러분 잠깐 ! " 비젤이 사이에 끼어들었다. "내게 설명하게 해주겠습니까."
"닥쳐, 이 건방진 놈아 ! " 현병은 비젤을 벽에 밀어붙였다.
"신분증을 내놓아 ! "
"좋습니다." 비젤은 몹시 침착하게 대답하고는 손장갑을 낀 채 한 손을 외투에 가져가 천천히 앞을 열었다. 다른 한 손을 순간적으로 들어올려 뒷통수를 치는 수작은 하지 않는다는 듯한 시늉을 했다. 이어 그 손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나 했더니 번개 같은 속도로 그곳에서 뽑아내자마자 눈앞에 있는 헌병의 배를 찔러댔다. 그리고 옆으로 뛰어 몸을 날려 나이프의 칼날로 또 다른 한 사람의 목을 찔러 관통시켰다.
두 사람의 거한은 총의 안전 장치도 풀기 전에 비젤의 발 언저리에서 목숨이 끊기었다.
"풋나기 놈들이 ! " 비젤은 조용히 모멸차게 중얼대고 복도 바닥에 번져가는 핏덩어리를 치웠다.
"이런, 간이 콩알만 해졌군."라고 곤돌프가 중얼거렸다.
비젤은 나이프의 칼날을 죽은 자의 바지에 닦고 원래대로 상의의 주머니에 감추었다. "칼피스 지구 감찰관의 방은 어디지 ? "
"일층 앞쪽."
펠릭스 일행들은 헌병의 시체를 끌고 계단을 올라갔다. 지구 감찰관의 도어앞에 이르자 비젤은 중산 예모를 벗어 안쪽에서 철사를 꺼내 자물쇠를 비틀었다. 도어가 열리고 안으로 들어간 비젤은 전등 스위치를 넣었다.
"자아, 잠시 쉬어갈까 ? "
거실 안쪽까지 시체를 끌고 가 침대의자 위에 털썩 걸쳐놓았다. 곤돌프는 지구 감찰관의 살림을 둘러보고 듬직한 부르죠아풍의 가구나 섬세한 도자기와 두툼한 카펫에 눈을 보냈다. 비젤은 근골이 늠름한 헌병의 몸을 침대 의자에 의젓하게 앉히고 두 손을 무릎에 포개어 놓았다.
"예술적인 그림이군. 그러나 좀더 뭔가 필요할 것 같군."
펠릭스가 꽃병에서 노랑 장미를 한 개 꺾어다 한 헌병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놓았다, "'자아 그럼 ! " 하고 곤돌프가 책장에서 [나의 투쟁]을 뽑아와 또 하나의 헌병에게 책장을 펴서 들고 있게 하고 머리를 수그리게 했다. "총통이 쓴 것은 죽은 자에게 밖에 이해될 수 없지."
세 사람은 도어 쪽으로 돌아오자 살며시 문을 닫고 현관까지 이르자 감찰관의 할머니가 지하에서 계단 위를 엿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비젤은 중산 예모를 착 들어올리며, "손자님께서 돼지를 두마리 맞췄습니다요." 하고 말했다.
늙은 여인은 얼굴을 찡그리고 비젤을 쳐다보았다. 비젤은 모자를 원래대로 쓰고, "어떻습니까 ? "라며 가볍게 인사하고, "나체주의자의 문화 살롱에라도 참가하시는게 ? "라고 말했다.
비젤은 곤돌프와 펠릭스를 거느리고 현관을 나섰다. 어두운 거리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없었다. 급한 걸음걸이로 유개차 앞까지 오자 펠릭스는 뒤쪽 도어를 닫았다.
"소총 소리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라고 곤돌프가 말했다.
펠릭스의 후두부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수반한 날카로운 파열음이 몇 번인가 울려왔다. 밤이 낮으로 바뀌었다. 데이빗 카스피안은 짐을 실은 스튜디오의 유개차를 보고 있었다. 전선의 코일은 이미 유개차 안쪽에 잘 간수되어 있었다.
"이젠 됐어." 라고 운전사가 말했다.
"그렇군." 카스피안은 슬슬 뒷걸음질을 치면서 중얼댔다. "이제 휠씬 좋아졌군."




제11장   꿈 속의 수수께끼



"그는 그야말로 진짜 프러듀서였지. 죽은 헤라사슴이 필요하다고 했더니 2시간도 채 못되서 열차에 치여 채 식지도 않은 것을 찾아내 가져왔어."
허먼 아머스는 가스파쵸 스프를 마셨다.
"...상당히 우아하군... 복사뼈까지 내려오는 바지와 실크모슬린의 타이트 스커트의 조화..." 색스 오브 비버리 힐즈의 모델은 일행의 테이블 앞에 멈춰서서 로마의 앞에서, 그리고 카스피안 앞에서 빙그르르 돌았고, 그 뒤 마일론 피쉬 앞에서 돌아보였지만 피쉬는 딜렉터 쪽으로 얼굴을 향했을 때였다.
"그 전엔 세계 제일의 에이전트였지. 그 사람 영화 회사에 죽은 배우를 판적이 있어."
"그런 그 자신이 죽어버렸다는 것인가 ? "
"세상이란 그런 거야."
"...이 줄무늬 튜닉의 심플한 것에 주목해 주시기..."
"그가 수표를 보냈어 라고 하면 그 수표는 절대로 송달되지 않는다는 거야. 하지만 그래도----"
"대단한 인물이었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데이빗 ? " 마일론이 말했다.
"최고였지." 최근 작고한 그 프러듀서를 두 번씩이나 고소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카스피안이 대답했다.
웨이터가 샴페인을 가져와 일동은 잔을 서로 마주쳤다.
"기뻐해 주게. 하워드 히브즈가 작곡해 주기로 됐어." 아머스가 말했다.
카스피안은 눈을 감았다. 두려울 만큼 센치멘탈한 사운드 트랙이 벌써부터 귀에 들려오는 것 같았다.
"데이빗은 하워드의 작품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군."라고 마일론이 말했다.
"...이쪽은 사이드 버튼 식의 터어키 블루의 작은 쟈켓입니다..."
모델은 카스피안 앞에서 회전하고 날을듯한 발걸음으로 다음의 테이블로 옮겨갔다.
"이건 특출한 영화야." 마일론이 계속했다. "굉장한 평판을 얻게 될 거야."
"굉장한 일사병올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요 ? " 로마가 말했다.
"데스 바레에 6주일간 체재하게 될 거 아니예요."
"데스 바레는 대단히 지내기 편한 곳이야"라고 마일론이 말했다.
"난 그곳 햇살이 좋아."라고 아머스가 말했다.
로마는 다시 패션쇼에 주의를 돌렸다. 그녀 자신은 긴 주름을 이루고 장단지에 드리워져 있는 보드라운 스웨드 스커트와 그것과 매치된 프린지가 달린 작은 구슬을 수놓은 쟈켓 차림이었다. 팔에 따라 점점이 늘어선 작은 구슬이 밝게 반짝이는 그 쟈켓은 아까 모델한테 찬사를 받았다. 크리미 화이트의 실크 루즈피트의 블라우스는 살며시 유방의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웨이터가 요리를 받들고 나타나 테이블에 놓은 뒤 거드름을 피우며 커다란 목제 후추 절구로 후추를 빻은 다음 그것을 쳤다.
"근래에는 없는 화려한 걸작이 만들어지는 거야." 마일론이 말했다. "웅장하고 감동적이며 또한 호화 찬란한 것이 순서지."
"난 오래 전부터 자신의 혹성을 원했어요."라고 로마가 말했다.
"...랩 드레스입니다, 등쪽을 깊이 판 것에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번 여름 유일한----" 라고 마일론은 마치 연극을 하듯 충분하게 뜸을 들인 다음, "우주 모험 영화로 할 것, 절대 틀림 없어." 냅킨으로 입가를 조금씩 누르고 나서 로마에게 얼굴을 돌렸다.
"당신 지독한 경우를 당했었지 ? 예의 경리상의 잘못인데 말이야. 마치 자기 딸이 겁탈이라도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아머스가 끄덕였다. "나는 언제나 브르펜에서 변호사에게 연습을 시켜달래고 있다구."
"물론 누구든지 얼마 되지 않는 푼돈 때문에 언제나 말썽을 피우고 싶지는 않지.' 마일론은 목 언저리의 목걸이와 그곳에 매달려 있는 금화에 손을 대었다.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이 금화에 반사되어 카스피안의 눈을 포착했다. 빛은 흐릿하게 어른거렸고 그 가장자리가 희미해졌다...
...눈을 빤히 뜬 채 꿈이라도 꿀 수 있다는 듯이 담배를 흑단나무의 홀더에 들이밀면서 펠릭스는 생각했다. 베를린의 호텔 에덴에 있는 레스토랑은 넓고 혼잡했지만 지금 막 그의 눈에 비치고 있는 것은 좀더 쉴 수 있는 좁고 어두운 다이닝 룸이며 세부에 이르기까지 모두 감추어져 있어 분명했으며 현실감이 있었다.
펠릭스는 친구들과 동석하고 있었지만 그 자신은 딴 사람----- 딴 세계의 사람이었다.
담배에 불을 붙였다. 호텔의 레스토랑에서는 패션쇼가 진행 중이었고 지금도 플레어 스커트를 걸친 한 모델이 꽃길을 지나 걸어 나오고 있는 참이었다. 본래의 일----옆 좌석의 도가니 제조업자 헤르 뷸룸과의 상담은 집어치우고 펠릭스의 눈은 모델에게 빨려들어가 있었다.
헤르 뷸룸은 반지투성이인 손으로 대머리를 쓰다듬었다. 몸집이 작은 사나이로 펠릭스는 전에 어디선지 만난 일이 있는 기분이 들었지만 좀처럼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것은 최근 자주 보게 된 기묘한 꿈속에 있는 어떤 장소에서의 일이었다.
"중위, 두세 개의 세세한 점만을 검토하면 됩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어떨지 모르지만 그러한 대화를 추진시키기 위해서는 이곳은 대단히 좋은 분위기여서."
모델이 커튼 뒤로 물러나고 다른 모델과 교체하자 헤르 뷸룸은 달아오른 손으로 박수를 보냈다. 그런 다음 서류 봉투에 손을 내밀어 안에서 청사진을 한 장 꺼냈다.
"그쪽의 섹션에 발주한 소각로를 설치해 달래면 말입니다, 재 제거기의 옵션이 따르게 됩니다. 이것은 그러한 대량의 재가 배출되는 경우 눈부신 위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만한 양을 손으로 배제하려고 하면 굉장히 많은 시간이 필요하게 됩니다." 뷸룸은 메카니즘의 장점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뮬러 대령에게 전하죠." 펠릭스는 꽃길로 시선을 돌렸다. 테니스복 일식을 몸에 걸친 모델이 걸어나왔다.
"네, 그건 벌써." 뷸룸은 말러 쪽으로 몸을 돌렸다. "패션 쇼는 마음에 드셨습니까 ? "
말러는 생긋 웃었지만 펠릭스는 알고 있었다. 그녀의 흥미가 선전을 위한 영화를 감독하고 있는 동석한 지금의 한 신사에게 향해져 있다는 것을. 뷸룸은 펠릭스에게 눈을 다시 돌렸다.
"실은 제3제국을 위해 소각로를 설치시켜 달라는 것은 이것으로 세 번째입니다." 비밀을 털어놓는 듯한 그런 말투였다.
펠릭스는 꽃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 소각로 설치 한 건으로 얻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겐친겐의 병기공장의 한 설비를 도입한다는 번거로운 일이다. 어차피 뮬러는 이 기획에 편승해 호주머니를 불렸겠지만.
말러가 몸을 가까이 당겨 작은 소리로 말했다. "보여요 ? 지금 도어 쪽에 들어왔어요. 이쪽을 보고 있어요."
게쉬타포인 에밀 바이아스 중령이다. 사복차림이었다. 그러나 이브닝 웨어를 입은 그의 모습은 제복을 입은 때와 마찬가지로 한치의 헛점도 없었다. 말러의 시선을 알아차리자 고개를 까닥여 인사를 했다. 눈은 펠릭스에게 못박혀 있었다. 덮치려고 해도 덮칠 수 없는 곳에 몸을 숨기고 있는 먹이를 노려보고 있는 매의 눈. '그래도 찾아냈어.'라고 맹금을 생각케 하는 눈매가 얘기하고 있다. 줄곧 먹이 위를 선회하고 있으므로...
펠릭스는 바이아스의 응시에 '나 역시 맹금이야, 바이아스, 매라고 하지. 내게도 발톱이 있고 나 역시 그렇게 예의바르진 않아.'
게쉬타포 장교는 펠릭스 일행이 있는 테이블 옆을 지나갔다. 바이아스가 없어지면 얼마나 이 세상은 즐거운 것이 될 수 있을까 하고 펠릭스는 생각했다.
"확실히 뷸룸씨, 병기공장은 댁의 재 제거기에 충분히 흥미를 가질 것으로 생각해요. 말씀하신 대로 그것이 없이는 그 설비는 소용이 없게 되고 마니까요."
"저희 회사에서는 최대한 서비스를 해드릴 생각입니다."
"설치할 때는 내가 입회하도록 하죠."
"계셔주시겠습니까 중위님 ? 참 잊어버리기 전에 마음으로부터의 물건을 준비하였습니다만. 괜찮으시겠습니까---- ? "
"별로."
유럽에서도 최고급에 속하는 팔목시계가 펠릭스의 007가방에 넣어졌다.
"비니네스에 우호적인 무드를 배제할 필요는 없습지요 중위님. 저 자신, 오늘 밤 함께 있은 것을 깊이 간직해둘 것입니다. 중위님도 제 일을 조금이라도 기억해 주시면 다행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잊어버릴 수가 있나요, 뷸룸씨." 007가방을 닫으면서 펠릭스는 대답했다. 볼륨은 다시 한번 웃은 다음 상의 라벨 뒤에 엄지를 문질렀다. 그곳에는 작은 금 갈고리 십자가 붙여져 있었다. 바로 곁의 스포트라이트가 꽃길 끝에서 방향을 바꾸어 모델을 쫓았고 순간 금갈고리 십자를 찬연하게 비쳤다.
펠릭스는 게쉬타포의 장교 바이아스의 모습이 금빛 빛 속에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남아도는 빛이 후광처럼. 그를 감싸고 있었다. 바이아스의 시선이 펠릭스를 꿰뚫었고 그 자리에 단단히 못 박아 놓았다.
...이미 독안에 든 쥐다...
후두부에 물건이 튕겨나는 희미한 감각이 느껴졌고, 그 순간 펠릭스는 바이아스의 정체를 알았다.
"그 때는 나의 코미션이 도어로부터 나풀거리며 날아가는 것이 보였지. 이봐 데이빗, 듣고 있나 ? "
카스피안은 깜짝 놀라 머리를 들어 마일론 피쉬의 얼굴을 똑똑히 쳐다보았다. 마일론은 그의 사무실의 책상에 앉아 있었고 카스피안은 그와 마주향해 앉아 있었다. 그는 걱정스러운 듯이 몸을 내밀고 있었다.
"데이빗, 위가 나쁘기라도 한가 ? "
카스피안은 방안을 휘둘러보았다. "마일론, 우리들 언제부터 이 사무실에 있었지 ? "
에이전트는 일어서 테이블을 돌아 카스피안한테 다가갔다.
"자네 대체 점심때 무슨 묘한 약을 먹었나 ? "
"당신은 뷸룸이란 사나이야. 독일에서 살고 있어. 당신은 방금 전 나와 함께 있었어, 나치의 패션 쇼에서."
"데이빗, LSD 따위를 가까이 하면 안돼. 자기 집 풀에서 몰래라면 모르지만."
게이라드 의사는 테이블 너머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이젠 나도 그쪽에 등장한단 말입니까 ? "
카스피안은 예약 시간에 닿을 수 있도록 제트기를 전세내어 사막에서 날아돌아왔던 것이다. "선생님은 게쉬타포의 중령 에밀 바이아스입니다."
게이라드는 잠시 말없이 의자의 팔걸이를 한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뭔가 알 것 같군." 안경을 벗어 셔츠의 소매에 닦았다. "꿈 얘기를 해주세요."
"헐리웃의 배우라면 그 꿈이 하찮은 꿈만도 아니겠죠."
"나는 정치에 흥미는 없습니다."
"모두 그렇게 말하지요. 미국의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모든 권력을 장악한다는 것입니다." 게이라드는 샌들을 신은 발에 물끄러미 눈을 떨구고 침묵이 카스피안에게 말하는 것을 맡겼다." 흔히 있는 전능자에 대한 동경입니다. 아직 쇠퇴하지 않는 것 같군요."
"나에게는 세계를 재배하고 싶은 생각 따위는 없습니다. 나는 하나의 일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것도 항상. 그것은 내가 돌았다는 사실입니다."
게이라드는 방 저쪽의 서류 캐비넷을 가리켰다. "여기에는 발의 엄지발가락으로부터 목소리가 들린다는 환자도 있고 슈퍼마켓에 있는 점원에게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방송되고 있다고 믿는 환자도 있습니다. 젊은 여성인데 언제나 텔리비전에서 보는 주간 멜로물에 자기의 아이디어가 도용되고 있다고 하며 고집을 부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카스피안을 향해 고쳐앉으며, "그러한 것이 우리 병원의 미친 사람입니다. 당신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카스피안은 실망한 듯이 "그럼 대체 저의 병명은 무엇입니까 ? "
"당장 이렇다하고 대답할 순 없습니다. 첫째 그것이 뭔가 ? "
"오늘은 정신의의 선생님들이 사용하는 안내서 중의 통계의 한 항목이 되고 싶은 기분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기분이 가시지 않을 것 같습니다."
게이라드는 책장에 쭉 늘어선 교본 사례집을 가리켰다. "당신은 저것 중 어디에도 들어있지 않습니다. 전혀 댁의 증상과 비슷한 사람과 만난적이 없습니다."
"돈을 갖는 목적은 말이야, 이봐." 데브루스카가 말했다. "그야 밤에 자기 위해서지."
카스피안은 데브루스카와 함께 세트에 펼쳐진 커다란 캔버스의 차양 밑에 앉아 있었다. 바로 앞 모래터에는 번쩍이는 우주선이 진좌해 있어, <스타 로바>의 제작 스탭이 몰려 있었다. 그들은 스튜디오에서 제작된 모쥬르식의 부품을 사용해 이른 아침부터 필요 최저한의 설비를 구비한 우주선을 조립했던 것이다. 카스피안은 주섬주섬 지껄이고 있는 데브루스카를 외면하고 그의 배를 쳐다보고 있었다. 멋진 창조물이다. 진짜로 발사되어 우주에 돌입할 것 같이 보였다----골격이 드러난 안쪽에서는 이것을 디자인한 젊은 대도구의 패거리들이라는 표어를 새긴 셔츠 차림으로 일하고 있었다.
"돈이란 것은 말이야." 데브루스카는 계속했다. "여러 가지 것을 움직이는 힘이지. 전 주일에 베가스에서 말이야. 카지노를 하고 있는 호텔의 종업원이 주사위대를 사람이 북적대는 것을 싫어하는 아랍인의 방까지 창 밖의 벽을 따라 매달아 올리는 것을 보았어."
데브루스카의 남자 비서가 옆에 앉아 분주하게 펜을 놀리고 있었다. 데브루스카는 힐끗 그 남자를 쳐다보았다. "지금 그걸 써 놓았나 로버트 ? 뭣하다면 좀더 천천히 말할까 ? " 데브루스카는 카스피안 쪽을 향해, "로버트는 책을 쓰기로 했네, 나의 일을 모조리 털어놓은 책을 말이야. 그렇지 로버트 ? "
"천만에요. 이건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내 일을 모조리 폭로해 주게, 그러면 영화가 맞아떨어져. 돈은 자네가 지금 쓰고 있는 것처럼 책이 탄생시키는 거야."
"자아, 여기 봉투가 있네 로버트. 그 책에 [개새끼들은 절반 밖에 안 되는 급료로 일하고 있다]고 표제를 붙이도록 해." 데브루스카는 카스피안쪽으로 다시 향했다. "나는 영화 동물들에게 급료를 전액 지불한 적이 없어."
카스피안은 우주선과 그것을 둘러싼 병기나 로보트나 기발한 모습의 육상차에 시선을 돌렸다.
몇 100만 달러에 상당하는 기술의 정수가 지금 데브루스카의 면전의 사막에 모두 모여 있다. 데브루스카는 너트 1개 볼트 1개 나아가서는 한번 칠할 페인트라 해도 여분으로 써버리지 않도록 감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여송연으로 우주선을 가리키며 울부짖었다.
마일론 피쉬가 뜻밖에 차양 밑을 지나 끼어들어 두 사람의 옆에 앉았다. "지금 어떤 여배우를 쇼에 소개하고 왔지." 햇빛에 그을린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를 요전에 완전히 블랙 아웃하고 말아서 말이야, 대사를 모두 잊어먹어 스테이지에서 안아내려야 했어."
"그렇다면 말이야 그 여자 계약을 해약해 주었으면 좋겠구만." 라고 데브루스카는 말했다.
"그런 것은 젊었을 때 사들이는 게 좋아." 피쉬가 말했다. "확보해 두는 거야." 땀이 흐르는 머리를 손수건으로 닦으며 카스피안을 쳐다보았다. "머리카락만 있으면 나도 완전한 인류라는 기분이 될 텐데 말이야."
카스피안에게는 문제의 여성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자신이 몸을 흔드는 방법을 택해야 한다면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밖에 없다는 그런 프로젝트에 관계한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언제나 버티고 참았다. 어느 세일즈맨이 디자인한 것이 아닌가 하고 잘못 볼 것만 같은 세트. 배트맨 만화책 못지 않은 색상구사. 또한 촬영 후 러시가 어마어마한 홈 무비의 양상을 보이기 시작하자 배우란 자는 완전히 자신을 잃고 이후 연기 과잉이 된다. 감독은 그것을 감싸주려고 찬사나 축사를 퍼붓는다. 여기까지 이르면 배우는 자기가 무능한 배우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뼈져리게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인생의 짧음을 생각할 수 있게 되고 금후엔 소규모로 기발한 취향의 영화에만 출연하거나 오프 브로드웨이의 일만으로 국한시키려고 작정한다. 그곳에 마일론이 나타나 뒤흔들어 놓았고, "몇 백만 달러라는 거금." 란 말을 아롱새겨 원래의 세계로 되돌리는 것이다. 마일론이 이 대사를 속삭이면 문득 귀를 기울이게 되는 카스피안이었다.
카스피안은 의자에서 일어나 대화의 흐름 밖으로 나오자 사막의 모래땅에 점점이 흩어진 장비의 미로를 빠져나와 냉방이 되는 트레일러로 들어가 썰렁한 피난처에 몸을 피했다. 브라인드를 통해 가까이에 로마의 트레일러가 보였다. 들락거리는 수많은 보조자들.
"로마는, 말러는, 로마는..." 손을 떼자 브라인드가 내려졌다. 그의 의상이 준비되어 있었다----소매에 은빛 파이핑을 박은 광택있는 검은 의상. 우주의 한 마리 승냥이의 유니폼이다. 옷을 벗고 그것을 몸에 걸치고 조명이 비치는 거울 앞에 섰다.
도어에서 노크 소리가 나고 성운간의 마술사의 실내복을 입은 빅터 콰트렐이 들어왔다.
"나는 베이젤 노슈 성운에서 왔다."
빅터는 실내복을 무릎 위에까지 걷어 올리고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는 트레일러 하우스의 간소한 장식품들을 둘러보았다.
"옛날엔 이런 조용한 장소를 이용해 카메라 앞에 서기 전에 약을 맞곤 했지. 그밖에 이것 저것 천벌 받을 행동을 말이야."
실내복의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마리화나 담배를 한 대 꺼냈다. 불을 붙이자 뒤쪽 브라인드를 열었다.
"밖에서는 임시 변통의 일들로 북적대고 있군."
수많은 전기 담당이 라이트를 가지고 우주선을 둘러싸고 있었다. 선체에 이상야릇한 빛을 주어 안쪽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듯이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리노행의 로케트 편이 출발하겠습니다, 연배의 사람들에겐 운임 반액."
사막의 대기에 증폭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빅터는 붙들고 있던 브라인드에서 손가락을 떼었다. 그것은 찰카닥 하고 닫혔다.
"준비. 제자리에. 즐겁게 해주게. 그 웃는 얼굴 됐겠지, 진짜야."
"진짜가 좋아." 빅터는 흉내를 내듯 말하고 굵은 남성적인 다리를 실내복 자락으로 펄럭펄럭 부채질했다.
또 노크 소리가 들렸고 곧이어 의상계의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모두 들어가도 될 준비가 되었나요 ? " 들어오자 의상을 입은 카스피안을 위에서 아래로 슬쩍 바라보고 OK를 냈다. 나이는 60정도, 사막의 조약돌처럼 무미건조한 고지식한 사람으로 과연 착실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카스피안은 이 여인의 숨겨진 공포란 무엇일까, 그녀의 그림자는 어디에 떨어질 것인가 하고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최근 사람을 만날적마다 똑같은 자기 문답을 하여 사람들이 현실 세계에 머물러 있기 위한 신조를 규명하려고 한 카스피안.
그녀는 실내복 차림의 빅터를 한바퀴 돌게 했다. 빅터는 어깨 너머로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나, 소몰이 막대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 "
"마법의 지팡이는 소도구계에서 준비하고 있습니다."
빅터는 타고 있는 마리화나 담배를 손안에 감추고 등을 노인처럼 구부리며 노인의 떨리는 목소리로 거칠게 말했다. "난 오늘 밤 디스코추러 가려고 생각하고 있는데 소도구계가 마법 지팡이를 건네주지 않겠지 ? "
의상계는 그런 빅터를 무시하고 실내복의 이음새를 폈다. "잊지 말고 줄곧 이곳을 앞으로 당겨줘요."
빅터는 앞으로 숙인 자세를 흐트리지 않고 도어까지 그녀를 따라갔다. "나 틴에이저와 섹스를 하고 싶다네 ! "
의상계는 그의 코 앞에서 도어를 닫았다. 카스피안은 냉장고를 열어 오렌지 쥬스병을 꺼내 그것을 손에 들고 앉아 대본을 폈다. 눈을 감고 천정을 향해 다음 대사를 중얼댔다.
빅터가 이쪽을 향했다.
"자네의 나치와 지껄이고 있나 ? "
"지금은 아니야."
"다음에 얘기할 기회가 있다면 우리딸의 폴크스바겐의 핸들이 낡아 덜거덕 거린다고 전해주게."




제12장  역사 속의 늪
      "처음으로 쿠퍼의 머리를 커트해 준것은 나였다고 얘기했던가 ? " 메이크업 담당자가 카스피안을 세트의 끝머리에 바싹 몰아 넣고 보기좋게 천막지의 의자에 앉혔다. 이발 도구 일식을 넣은 후줄근한 가방을 안고 있었다. 안에는 오래 사용한 거울과 빗이 들여다보였다. "당신은 쿠퍼와 닮았어." 그는 카스피안의 머리를 빗기고, 스프레이를 뿌려 웨이브 하나하나를 정성껏 정돈했다. "이대로 고치지 말아요. 머리칼 한 올이라도 흩어지면 안 되니까."
델리케이트한 헤어스타일을 품평이라도 하듯 마지막으로 한번 힐끗 쳐다보고 메이크업 담당자가 떠나가버리자 대신 예의 의상을 담당한 여자가 찾아와 스페이스 헬멧을 뒤집어 씌웠다.
우주선은 카스피안들의 뒤쪽에 있었다.
"스위치를 전부 넣고."
"오케이."
"좀더 위로----전체적으로 비치게----좋아."
카스피안이 우주선 쪽으로 걸어가자 저쪽에서 마일론이 걸어 왔다. "자네가 일하는 모습은 이 프로덕션의 화제가 되고 있어." 앞쪽 세트에서는 아머스감독이 조감독과 토의를 하고 있다. 마일론은 목소리를 낮추었다. "자네는 아머스의 감독 자세에 만족하고 있지 ? 안그런가 ? " "날 감독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별도로 친다면----"
"그는 당신의 재능을 신뢰하고 있어."
"그는 절대로 배역을 혹사하지 않지."
"대체 그게 뭔가 ? 브래저인가? 빨리 저 우주선에 올라타 인간답게 하고 와."
카스피안이 대본을 마지막으로 한번 훑어보고 마일론에게 건네 주었을 때 감독이 다가왔다. "자네가 착지한 곳은 잃어버린 세계일세--
--" 아머스는 유개차나 커피 웨건과 트럭이나 높은 발판위의 조명계를 향해 신호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사이를 어물거리고 있다. 조감독이 끄덕여보이자 뒷사람은 메가폰을 잡았다. "조용히 해요 ! 모두들 조용히 ! "
대도구 담당이 해머를 놓았다. 카스피안은 우주선 옆 모래터로 나아갔다.
"알겠나, 데이빗 ? 자네는 외톨이야, 지독히도 고독해, 다른 별의 대기 중에서. 다시 한번 세계의 끝에서 발을 내딛고 만 사나이의 느낌을 내주지 않겠나 ? " 아머스는 촬영반 쪽으로 몸을 향했다. "준비."
"신 투, 테익 원."
"카메라 OK."
"액션 ! "
모래땅은 뜨겁고 걸으면 푹푹 발이 빠져든다. 촬영 감독이 이동차로 카스피안의 옆을 지나갔다. 촬영 감독은 정밀 조정 손잡이를 조작하고 있다. 소문에 의하면 그는 그것을 사용하여 자기 이름을----4음 절로 되는 폴란드어의 이름을----쓸 수 있다는 것이다.
카스피안은 이동차를 향해 걸어가면서 대사를 읊조렸다.
"좋아, 데이빗, 그곳을 다시 한 번 해줄 수 있겠나."
그 쇼트는 다섯 번이나 되풀이되었고, 그 후 카메라에 필름을 바꿔넣기 위해 휴식을 취했다. 카스피안은 차일 속으로 들어갔다. 옆에 카메라맨이 있어 빛이 들어오지 않도록 꾸며 놓은 상의 아래에 양팔을 집어넣어 먼곳을 쳐다보는 눈길로 필름을 카메라에 장정했다. 데브루스카가 뒷짐을 지고 지나갔다. 비서에게 뭐라고 계속 잔소리를 늘어놓고 있다.
"...<배우 조합>이 생긴 것도 알 졸슨의 물건 덕분이야."
카스피안의 뒤에 서 있던 마일론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 사나이가 마음에 들었어. 감정 면에서의 얘기지만 말이야."
카메라맨은 상의 밑에서 카메라를 빼내 조감독을 향해 끄덕였다. AD는 메가폰을 입에 대었다.
"제자리에."
"데이빗, 이게 마지막이야. 자네는 고독한 떠돌이야. <작년 마리엔바트에서>라는 것 속에서 남자가 침울하게 걷고 있었지. 그 모습대로 해 주게." 아머스는 촬영반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준비."
"신 투, 테익 식스."
"카메라 OK."
"액션"
카스피안은 사막의 태양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이동차를 향해 모래 땅을 걷고 있었다. 레일을 쳐다보며 그 종점까지 눈으로 더듬었다.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회색으로 혼도되어 있었다.
철도의 레일은 은색의 강철 줄기로 되어 후퇴하여 하나로 합쳐져 아침 안개에 녹아들었다.
펠릭스는 그 모습을 쳐다보았고 머리가 멍해질 정도의 속도로 침목들이 자꾸만 후방으로 멀어져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열차의 맨 뒷부분의 창문에 양팔을 얹었다. 차륜의 리드미컬한 진동음에 맞추어 세계가 멀어져갔다.
저곳의 꿈은 이미 몇 번씩이나 보았다...
기적이 한번 울리고 접근하는 플랫폼쪽을 향하자 이번 일의 후견인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열차가 정지하여 내려서자 공장장은 그를 맞이해 차로 안내했다.
"이제까지는 우린 모면하고 있습니다만." 정거장을 뒤로 한 차안에서 케슬러가 말했다. "그러나 영국의 중폭격기 랑카스터는 새로 롤스로이스 사의 엔진을 탑재했답니다. 머지 않아 몰려올 것입니다."
펠릭스는 연기를 뒤집어쓴 회색 건물이 계속 흘러가듯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무겁게 드리워진 공장의 소음이 충만하고 화학 약품이 가슴을 메스꺼릴 만큼 역겨운 냄새가 강하여 펠릭스는 창문을 닫아야만 했다.
"이곳은 활기가 없군."
펠릭스의 말에 케슬러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는 순간 눈을 외면했다.
"사기가 오르지 않습니다. 제게 말하라고 하면 이건 사보타쥬입니다. 이 공장에서 게으름을 피우는 것은 강제수용소 행의 후보감 입니다."
"그것은 너무 심하지 않을까 ? "
"군수상 자신이 직접 지령을 내리니까요. 노동 기피자의 귀감 같은 자들이 이 뉴스를 서둘러 퍼뜨릴 것입니다."
케슬러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성냥을 창 밖에 버렸다.
"예외는 인정되지 않습니다. 지금은 가시철망 저쪽에 있는 공장장에도 한두 사람이 있는게 아니니까요. 저 비열한 녀석들은 원료를 횡류하고 있었습니다. 따로-----라고 케슬러는 펠릭스의 군복을 힐끗 쳐다보고, "이런 일은 구태여 당신에게 얘기할 것까지 없습니다만."
"그래, 그따위 일은 충분히 알고 있네, 애석하게도 사방에서 만연되고 있어서 말이야. 중요한 인물도 많이 있지만 그들은 절대로 체포되지 않을 거야."
펠릭스는 케슬러를 되쳐다보았다.
"소위 연줄이란 것이지. 그에 걸맞는 일족들이지."
"모두 비열한 놈들 뿐이에요."
케슬러가 토해버리듯 말했지만, 거기서 입을 다물었다. 차가 광대한 부지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그곳은 이 공업도시 가운데서 또 하나의 도시를 형성하고 있었다. 몇 줄기의 거리가 주거나 점포나 오락 시설에 통하고 있는 것을 펠릭스는 보았다. 올려다보니 인접해 있는 언덕 사면의 수목 위에 돔이나 작은 탑이 솟아있다.
"저건 ? "
"게친겐공의 집무실이죠. 나중에 만나러 오실 겁니다."
케슬러의 차는 철망으로 둘러친 구획된 땅을 빠져나갔다. 울타리 안에는 바라크가 늘어선 공장의 경비원이 감시하고 있다. "징용 노동자들입니다." 케슬러는 이곳 구획 지역 거리에 보이고 있는 수인들 쪽으로 머리를 쳐들어 보였다. "그리 도움이 되지 않지만 용도는 있습니다." 케슬러는 다시 차를 콤비나트 안쪽으로 몰고 갔으며 최후로 번쩍이는 사무실 건물 앞에서 정차했다. "도착했습니다, 중위. 이곳에서 간소한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케슬러에게 안내된 사무실에서는 커피와 케이크가 준비되어 있었다. "회사측으로서는 항상 너그러운 방침을 취해왔습니다. 의료급부도 교육 수당도 있고 상당한 액수의 연금도 붙습니다. 그래서 상습 결근 따위는 당치도 않습니다. 상습 결근은 우리들의 두통의 씨앗이에요. 노동자가 의욕을 상실하고 있어요. 그러나 게친겐공은 그들을 옹호해 왔습니다. 임금을 커트한 일이 없습니다. 커트하고 싶은 것은 모가지시키는 쪽이어서. 뭐니뭐니해도 전시 중이니까요, 게으름을 피우는 것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모르는 자는 없을 거요. 그러나 상습 결근이라고 하여 처형을 한다고 ? " 펠릭스는 말했다.
케슬러는 차가운 눈길을 펠릭스에게 쏟았다. "당신은 계획적인 사보타쥬에 동정하십니까 ? 말해두겠습니다만 슈페아군수상은 상습 결근은 승리에의 노력을 헛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말이지, 중위, 그런말을----" 이라며 펠릭스의 연대 휘장에 힐끗 눈을 돌렸으며 "----당신과 같은 지위에 있는 분으로부터 그런 말을 들으려고는 생각지 못했는걸요."
"요즘 공장장인 사람들이 고용자의 생사를 쥐고 있다고는 듣질 못했군." 서포터에 철십자를 붙인 나치다 라고 펠릭스는 생각했다. 그러므로 이 작자를 조롱하고 있으면 비지네스 쪽이 위태롭게 된다.
잠깐 저쪽으로 발을 옮겨 나의 이익을 도모해 주게. 그리고 뮬러는 모든 면에 있어서 원조를 아쉬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주게.
"미안, 케슬러, 나는 임무에서 이탈하고 있는 것 같군. 본래 나는 뮬러 대령이 지휘하고 있는 설비 도입에 만족하고 있는지 어떤지 확인하러 온 것 뿐이니까. 그럼 조립라인의 과정으로 생기는 폐기물의 소각로에 관해 묻겠소."
케슬러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당신의 사과를 받아들이고, 저도 사과드리겠습니다. 모두가 스트레스 탓입니다. 그러나 중위, 당신도 재미있는 분이군요."
케슬러는 스스로 얘기를 중단하고 창문 쪽을 보라는 몸짓을 했다. 쳐다보니 성체 쪽으로 차가 다가오고 있었다. 펠릭스는 잠깐 케슬러에게로 얼굴을 돌리고 말했다.
"멋진 차군요."
"벨지움제 미네르바입니다. 게친겐공은 차에 미쳐 있어요."
접근해오는 차의 차창에 눈을 주시하고 있던 펠릭스는 그 안에 초로인 귀족의 모습을 확인했다. 케슬러는 도어로 향했다.
"게친겐공과는 어언 25년이나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요즘과 같은 위기에 직면해 그분은 최고의 역량을 발휘하게 되었습니다."
위대한 실업가는 거침없는 태도로 들어왔다. 펠릭스는 발꿈치를 착 붙이고 이 늙은 사자에게 경례를 했다.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댁의 엔지니어 제군에게는 감사하고 있습니다. 뮬러 대령에게 내가 만족하고 있다고 전해 줘요. 오래오래 사귀고 싶어한다고."
"그 말씀을 들으면 대령께서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는 골치아픈 일을 처리해 주었어요. 형식에 구애됨이 없이. 군인 중에는 격식을 갖춘 서류를 내지 않으면, 서류철 그림 하나 내주지 않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뮬러 대령은 지금이 비상시란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가 이쪽 업자를 움직여주지 않았으며. 이 플랜트는 벽에 부딪쳤을 거에요. 커피는 들었나요 ? 안으로 안내해 드리죠."
게친겐공은 앞장서 굉음에 감싸인 건물을 차례차례 돌았다. 대화가 곤란해서 공은 몸짓을 사용해 이곳은 병기를 제조하고 있는 곳, 여기는 평화시를 위한 제품을 만들고 있는 곳이라고 가르쳐주며 돌아다녔다.
고무로 만든 경비봉을 휴대한 감시원 한 사람이 몇 줄로 늘어선 조립라인에서 작업 중인 노동자 사이를 걸어다니고 있었다. 대부분의 노동자는 안색이 나쁜 여성으로 엉성한 천으로 지은 옷을 입고 있었다.
게친겐공의 눈은 노동자들을 그냥 지나치고 설비에만 눈길을 보냈다, 공은 그 설비들을 자랑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순회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강철의 큰 도가니통 옆에서 끝나고 게친겐공은 싱긋 웃었다. 노란 빛에 비쳐진 그 얼굴은 방금 금화에서 빠져나 것처럼 보였다.
경사진 철제 위를 걸어 발소리가 메아리지는 계단을 내려가 그대로 바깥으로 통하는 도어로 향했다. "그런데 뷰룸의 소각로는 어떻습니까 ? "
게친겐공은 가시철망을 둘러친 지역을 가리켰다.
"저곳에서 이용하고 있지요. 저 안은 위험해요. 유행병이 돌고 있거든요. 저 패거리들은 쥐들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우리들은 유행병을 두려워하고 있지요. 그래서 부득이 소각로를 주문했던 것입니다. 시체를 처리해야 하니까요."
펠릭스는 건물 바깥 쪽 통로에서 멈춰섰다. 발을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콤비나트의 수많은 굴뚝에서 솟아오르는 연기가 뒤섞여서 생긴 구름이 하늘에 낮게 드리워지고 있다. 게친겐공은 펠릭스의 팔을 잡았다.
"그밖에도 그쪽 대령과 계약하고 싶은 생각이 있는데 말입니다. 대령의 신속한 처리가 필요해요. 계약서 일체는 갖추어져 있습니다. 뮬러 대령과 내가 좋아하는 간결한 형태로 말이요. 알겠지요 ? "
"그 때문에 뮬러 대령은 저를 보내신 것입니다." 펠릭스는 어색하게 대답했다.
"좋아요. 계약서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이것은 뮬러 대령한테만 보여주기 바래요. 아니, 극히 단순한 얘기지만 이제부터 다소 설비를 증가하고 싶은데 다른 육군의 높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것이 이곳에 필요한지 어떤지 시끄럽게 질문을 받고 싶지 않아요. 당신도 알고 있듯이 뮬러 대령은 번잡한 것을 피해 통하게 하는 길을 잘 알고 있지요."
게친겐공은 주요 건물로 펠릭스를 데리고 돌아왔다.
"중위, 이것으로 당신과의 거래는 끝난 셈이요. 당신이 타야 할 열차는 오후까지 오지 않아요. 이곳엔 당신이 즐길 수 있는 좀더 기분좋은 장소가 많이 있소. 임원들만 사용하는 라운지 따위는 어떨까. 상당히 좋은 포트 와인이 준비되어 있다오."
건물의 미로를 누벼 그 라운지에 이르렀다----드러난 대들보와 거무틱틱한 오크재의 판넬. 어두컴컴한 서재식 취향이었다. 장작이 튀고 있는 난로를 빨간 가죽올 씌운 의자가 둘러싸고 있었다. 와인은 핸드 커트의 유리잔에 담아 제공되었고 홍보부의 사나이가 한 사람 이야기 상대를 맡아 했다. 그 사나이의 오른쪽 소매는 비어 있었다.
"이곳에서 다친 게 아닙니다. 다른 공장에서 다쳤지요. 정면으로 당했어요. 뛰어서 물러났으면 좋았을 걸을 살짝 피하기만 해서 그만."
잔을 들었다.
"승리를 위하여 ! " 사나이의 목소리는 억양이 없고 뻔뻔스러웠다.
펠릭스는 매우 좋다는 와인을 마시고 뭐라고 할 수 없이 맛이 있는 치즈를 먹었다. 창가로 걸어가자 수용소의 일부가 보이는 것을 알았다.
"회사는 싼 노동력을 존중하고 있군요."
"싸지는 않아요."
"꼴불견이군요."
"막사를 어딘가로 옮기면 좋겠군요." 홍부부의 사나이는 여송연을 한 대 꺼내서 한손으로 성냥을 그었다. "습관이라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우리들 인간이란 습관의 천재죠. 여송연 한 대 드릴까요 ? "
"역사라는 것은 일종의 늪이예요, 중위. 여러 가지 사건이 그속에 빠져들고 진흙이 그것을 뒤덮어 그래서 두 번 다시 우리들의 귀에 들리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외팔이 사나이는 펠릭스의 여송연에 불을 붙였다. 보랏빛 연기가 두 사람의 사나이의 머리를 감쌌다.
펠릭스는 창가로 돌아왔다. 회사측은 관목으로 수용소를 눈가림 하려고 시도했겠지만 아직 거기까지는 자라지 못했다. '기다려야 겠지' 하고 펠릭스는 생각했다. 그리고 느닷없이 한 마디 말도 없이 라운지를 나와 거리로 돌아왔다.
울타리 지역의 철사로 만든 문 위에 표지가 걸려 있었다. <위험----
오염의 염려가 있음>철망 저쪽에 막사가 여러 줄 서 있었다. 막사 사이를 왕래하면서 용무를 맡아하고 있는 쓸쓸한 몇몇 여자들.
막사에서 떨어진 곳에 어린 소녀 한명이 있었다. 건물에서 건물로 뭔가를 쫓고 있었다. 재빠른 나긋나긋한 작은 고양이 같다. 완전히 매료되어 소녀가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펠릭스는 그녀가 뒤를 쫓고 있는 것이 다람쥐라는 것을 알았다.
도토리를 먹으려고 하고 있는 다람쥐. 그 다람쥐를 잡아먹으려고 하는 소녀. 맨발로 몰래 다가가는 소녀의 장딴지의 근육이 수축하기도 하고 펴지기도 한다. 그 다람쥐는 뭔가를 발견한 듯 앞발로 끌어안고 뒤집으려고 하고 있었다.
"이쪽으로 와 보렴."
펠릭스가 말을 걸었다. 소녀는 그가 그곳에 있다는 것에 놀라 얼굴을 들었다. 이미 다람쥐에 대한 일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급한 발걸음으로 펠릭스 쪽으로 달려왔다.
아직 어린 아이로 거친 천이 축 늘어진 드레스 위애는 유방의 아주 작은 싹이 움트고 있는 것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팔은 철사 뭉치처럼 튼튼하며 아래팔과 이두박근에 혈관이 드러나 있다. 얼굴은 더러웠고 상처투성이다. 그래도 나이 많은 여자보다는 그녀 쪽이 건강하게 보였다. 여자들은 뼈와 가죽 뿐인데 소녀의 근육에는 지방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솜씨가 있는 사냥꾼이기 때문일 것이다.
소녀는 방심하지 않고 펠릭스를 쳐다보았지만, 그 눈이 '나는 누구와도 대등해요'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암시장 상인인 펠릭스는 갖가지 어설픈 외국어 중에서 서투른 폴랜드어로 말을 걸었다.
"넌 무슨 일을 하고 있지 ? "
함정에는 주의깊은 소녀였지만 이 사나이는 위협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고 눈에는 타산적인 악의도 없다.
"강철을 붓고 있어요."
팔에는 경찰봉을 얻어맞은 자국이 있었다. 소녀는 펠릭스로부터 눈을 떼지 않았다. 어두운 눈동자, 흉폭한 눈이다. 펠릭스는 소각로의 일이 생각나 펜스로 다가와 손가락을 철망에 걸었다.
"아저씨가 여기서 나갈 수 있게 해줄께. 알겠니 ? "
소녀는 펠릭스를 유심히 쳐다보았지만 그 얼굴에서는 알고 있는지 어떤지 확실치가 않았다. 그래 괜찮겠지.
"이름이 뭐지 ? "
"바렌티나." 천천히 대답했다. "바렌티나 포반다."
펠릭스는 그 이름을 적어두고 소녀의 문신 번호도 적었다. 소녀는 아직도 그에게 눈길을 보내며 자신이 동침 상대로 선택되었거나 오븐이 기다리고 있는지 분명히 알지 못한 채 한발한발 뒷걸음질치며 가까운 출입문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펠릭스는 담장을 따라 남성의 수용소까지 갔다----막사 몇 채와 개집이 한줄로. 개집 속에서 눈이 밖을 엿보고 있다. 호각 소리가 들려왔고 개집에서 사나이들이 살금살금 기어나왔다.
펠릭스는 산 중턱에 있는 게친겐공의 성을 우러러보았다. 그런 다음 노동자들이 대열을 짜고 나가는 수용소의 주위를 돌았다.
문간에 위병이 한 사람 남아 있었다. 그 옆에 도베르만이 한 마리. 펠릭스가 가까이 가자 병사는 급히 차렷 자세를 취했다.
"그놈은 어디서 자지 ? "
"저와 함께입니다."
"개집이 아니라 ? "
"아닙니다. 이 녀석은 훈련을 받은 동물입니다."
펠릭스는 위병에게 담배를 권하고 두 사람이서 좁은 위병소에 들어갔다. 안에 곤로가 놓여있었고 커피 포트가 얹혀져 있었다. 펠릭스는 창문 너머로 여자 수용소 쪽을 향하여 머리를 기울여 보였다.
"저곳에 있는 죄수인데 2336787번이지. 그애에게 특별 음식을 줄 수 없겠나 ? "
얼마간의 돈을 위병에게 쥐어주었다. 그것이 위병의 호주머니에 들어가는 것은 쌍방이 모두 양해한 선에서다. 그래도 바렌티나는 얼마간 남은 밥이라도 덤으로 받을 수 있겠지.
"그 애는 두 번째의 수송편으로 이송되어 왔습니다." 위병이 말했다. "그들은 도착한 때도 쇠약해 있었지만 점점 더 심해져갑니다."
"그 애를 이곳에서 꺼내겠어. 죄수를 진찰할 의사는 있는가 ? "
위병은 수용소에서 떨어진 한구석의 시멘트 블록집 쪽을 가리켰다. 펠릭스는 위병소를 뒤로 향했지만 도중에서 헬 뷰룸의 소각로를 발견했다. 수인들이 시체를 포크리프트에 싣고 있었다. 공장의 경비원은 펠릭스가 눈에 띄자 엄숙한 동작으로 차렷 자세를 취했다. 그렇긴 해도 그는 이미 노병으로 영광의 나날은 훨씬 전에 지나가 버렸다. "안녕하십니까. " 이어 펠릭스의 찡그린 얼굴을 눈치채자 덧붙였다. "사망한 징용자의 처리입니다."
헛죽음을 한 맨몸의 시체가 한 대의 유개차에서 내려져 소각로의 입구에 포크리프트의 샤벨로 대량으로 집어넣어졌다. 굴뚝에서 뭉게뭉게 솟아오르는 회색 연기는 공장의 연기와 섞였다.
"사인은 ? "
"운명입니다."
펠릭스는 진료소로 발길을 향했다. 작은 건물이었다. 진료실은 조명이 흐렸고 설비도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여기서는 제 마음 먹은대로 할 수 없습니다." 펠릭스가 노동자의 건강 상태에 관해 심문한 것에 대해 의사는 말했다. "필요한 의약품이 전혀 갖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몇 천명이란 환자를 안고 있고 그 절반은 죽어가는 데도 말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지급되었는지 아십니까 ? 아스피린 100정이예요."
책상 너머로 펠릭스를 쳐다보았다.
"댁은 얼굴이 통하나요 ? 그럼 그렇게 해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찾으시는 아이도 이 수용소의 사람도 한 사람 남김없이 굴뚝으로 올라가게 되는 처지가 되고 말 테니까요."
의사는 등을 돌려 수용소를 쳐다보았다. 마를 대로 마른 죄수들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지나갔다. "아스피린 100정이에요." 의사는 진찰실을 나오는 펠릭스의 뒷모습을 향해 되풀이했다.
그는 한줄로 서서 걸어가는 여자들을 뒤따라갔다. 나막신이 보도를 스쳤다. 하지만 머리를 드는 사람도 없으며 소리를 내는 사람도 없었다. 식당까지 따라가자 여인들은 멀건 스프를 타려고 그곳에 줄을 섰다. 바렌티나 포반다가 긴장한 까만 눈동자를 펠릭스에게 보냈다.
"아아, 여기 계셨습니까 중위님." 공장장이 다가왔다. "그만 잃어버린 줄 알았습니다. 길이 여러 개로 갈라져 있어서요. 이곳 사기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상황을 생각하면 충분히 높은 편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바로 눈앞에 발을 끌며 지나가는 여자들을 제외하는 몸짓을 했다.
"식량이 부족한 것 같군요. 이 사람들은."
공장장은 어느 사람들의 일을 말하고 있는가 하며 의아해 하듯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겨우 알아차렸다.
"설사병이 재앙을 가져왔습니다. 식량을 주어도 조금도 몸에 이롭지가 못합니다."
"묽은 스프군요."
"하늘에서 야채는 내리지 않으니까요. 어디서나 모자라는 형편이지요.'
"당신은 체중이 줄고 있지 않군요."
"저는 자식 둘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정거장에 모시고 가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만."
펠릭스는 긴 테이블에 앉아 사발 위에 머리를 내밀고 있는 소녀에게 눈을 보냈다, 소녀는 다시 펠릭스를 한번 쳐다보았다. 펠릭스는 한 치의 빈틈도 없는 군복을 입은 자기가 벌거숭이가 된 것처럼 무방비한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아이도 테이블에 앉아있는 여자들도 고난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에 실재하는 것이다. 그도 공장장도 이곳에서 일하고 있는 선량한 시민도 모두 망령에 불과 하다.
"정말 이젠 가시지 않으면 차를 놓치게 됩니다."
"그게 어떻다는 겁니까 ? 우리들은 망령이나 마찬가지인 존재가 아니던가요 ? " "그렇긴 하지만." 공장장은 짐짓 은근한 태도가 되었고 펠릭스의 팔을 붙들고 회사에서 차출한 자동차가 있는 곳까지 데려갔다. 차가 정문에 이르렀고 문이 열리는 동안 펠릭스는 정면을 쳐다보고 있었다. 플랫폼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객차의 도어는 닫히려고 했다. 서둘러 뛰어 올라 자신의 찻간으로 나아갔다. 열차가 정거장을 떠나자 좌석에 앉아 차의 진동에 몸을 맡겼다. 어떻게서든 손을 써서 그 애를 그곳에서 꺼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불바다 속에 있으면서 이제 불 속의 밤을 주우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농가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고 그 온화한 분위기가 기분을 안온하게 해주었다. 뭔가 기분을 달래기 위해 읽을 거리가 필요 했다. 가벼운 잡지나 뭔가를. 문득 쳐다보자 좌석의 쿠션 아래서 종이 끝이 삐져나와 있었다. 끄집어내 보니 삐라였다. 이미 종이가 누렇게 된 <독일 레지스탕스 조직>의 삐라였다.
나치 표식 위에  X 표를 붙여놓고 있다. 제일 밑에 카피를 하여 배포해 주세요 라고 되어 있었다.
'이런 것을 가지고 있으면 사형대로 직행이다.' 그는 삐라를 반쪽으로 찢었고 다시 계속 잘게 찢었다. 그리고 잘게 찢긴 종이를 창문을 열고 날려버렸다.
"...아주 잘됐어, 데이빗, 완벽해. 이것을 프린트하게..."
이동차를 탄 촬영반이 옆을 통과했다. 그것을 쭉 눈으로 배웅하는 카스피안이 있는 곳으로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감독이 다가왔다.
"멋진 발사였어. 개봉이 안타깝게 기다려지는군."
"네에.' 카스피안은 쉰 소리로 말했다. "저도요."




제13장  안개가 된 사나이
  "태양은 쌍둥이좌에 달은 물고기좌에 있어. 그러니까 당신은 전형적인 2중 인격 요소의 소유자란 거지."
점성술사는 상당한 연배의 사나이로 낡아빠져 덜거덕대는 가죽 의자에 앉아 있었다. 벽에는 마야의 원반달력, 중국과 힌즈의 성축도, 양피지에 그려진 페르시아의 오랜 궁전도, 그의 의자 위 천장에는 모빌이 매달려 있어 혹성이 금빛 구체를 중심으로 천천히 돌고 있다.
사나이는 장식서체와 같은 치밀한 문자로 꼼꼼하게 그려진 카스피안의 천궁도를 손에 들고 그것을 찬찬히 바라보면서 턱수염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것도 대단히 깊은 곳에 뿌리내리고 있구만. 특히 당신이 달이 있는 성좌의 과거를 통해 보면 말이야. 사인 그 자체는 두 복사뼈가 각기 반대방향으로 멀어져가고 있는 그림 문자야." 힐끗 눈을 들어 카스피안에게 눈길을 보내며, "쌍둥이좌는 말할 나위도 없이 쌍둥이의 표시지. 한 사람은 진실, 한 사람은----허위."
테이프레코더가 돌고 있다. 점성술사의 해설을 녹음한 것을 카스피안이 가지고 돌아가게 한다는 것이다. 무척 비싼 관람료에는 테이프대가 포함되어 있다.
테이프레코더가 의자의 팔걸이 위에서 조용히 돌아가는 가운데 노인은 계속했다.
"당신에게는 일련의 강한 '저항'이 존재하고 있어. 이 <전사의 보자기>는 말이지, 인격의 내부에 갈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거야. 보통 두 사람의 인간이. 하나로 싸여있다고 생각되고 있지."
노인은 계속 턱수염을 쓰다듬으면서 혼자 끄덕였다, "당신의 천궁도에서는 산양좌의 운세의 젊은 도수가 3도. 이것이 당신의 직업 능력, 즉 힘이지. 당신은 이름이 통하는 자신만만한 배우야. 그러나 여기서 무엇보다 흥미깊은 것은. 그럼----" 라고, 수염을 놓고 그 손가락을 카스피안의 그림 바깥 쪽 가장자리 위에 놓았다.
"대단히 진귀한 배열이 나온다는 것이네. 몇 100년만에 한 번 나올 정도로. 자아, 명왕성이 해왕성 운세에 와 있지. 나는 이것을 불긴한 상징이라고 부르고 싶어." 쓸쓸한 눈으로 카스피안을 쳐다보았다. 한때 그 눈은 인간의 주변을 감싼 에너지를 포착했다고나 하듯 카스피안의 몸에 주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윽고 그의 얼굴에 눈을 돌리자 노인다운 신중성으로 묵묵히 그를 관찰했다. 주시되는 동안 카스피안은 자신이 삼라만상의 작은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는 기분이 되고 말았다----많은 것을 보아온 눈에 비치는 돌덩어리, 혹은 시냇물이나 작은 새와 동열인. 그러한 눈에서는 모든 사상이 우주의 <도> 속의 각개가 점해야 하는 위치에 들어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노인이라면 그것으로 좋을 지도 모르지만.' 라고 카스피안은 생각했지만 나는 아직 현세에서 당분간 바둥대지 않으면 안 된다.
"뭐라고 했지요, 지금---- ? "
점성술사는 제 정신으로 돌아온 눈이 되었고 카스피안의 그림 위에 상체를 숙였다. "이건 극도로 자기 변태를 가져오는 배열이군. 특히 당신이 관계해야 할 것이 아닌 사물에 관계하고 있는 경우. 어때, 그런가 ? "
"줄곧 그래요."
"그렇다면 명왕성이 당신 주위에 전체를 끌어당겨 지금 말한 변태를 강렬한 것으로 하고 있어. 아마 폭력적인 사유에서. 그건 왜냐하면----
나는 절대로 그렇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화성이 중천에서 명왕성에 접근하고 있고. 충격을 배가시키고 있기 때문이겠지."
점성술사는 자기가 그린 도형 위에 다시 눈을 떨구었고 나이 때문에 가죽처럼 되어버린 손가락으로 빙그르르 원을 더듬었으며 원의 제일 상부에 가져갔다.
"명왕성은 여기야. 이 별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심원한 변태를 가져와. 당신을 이 별이 깃드는 미지의 세계의 맨 끝에 밀어버리지. 이 별은 먼 조상이 또는 죽은 친구나----그렇지 않으면 적이----그 어느 것에서부터의 영향을 가져올 가능성이 있어. 명왕성의 달이 <삼도천의 나룻배의 사공신인 카론>이라 불리우고 있기 때문이지."
점성술사의 손가락이 원의 주위를 돌아 지평선으로 내려왔다.
"이곳에 방황을 낳는 별, 해왕성이 있어. 영화 배우로서의 당신은 해왕성의 앞잡이야. 그러나 해왕성이 당신의 운세 위에 있기 때문에 당신에겐 사물이 분명히 보이지 않게 되어 있어. 만나는 사람 모두가 당신을 혼란시키지. 더욱 중대한 것은 당신이 자기 스스로를 혼란시킨다는 것이야. 당신은 이미 자기가 어떤 자인지 모르고 있어. 사실 당신의 자기 확인(아이덴티티)은 꿈 같은 것이 되어 있어."
모빌이 점성술사의 머리 위에서 천천히 돌고 아홉 개의 혹성이 태양 주위의 궤도상을 돌아 때로 그 추이를 정하고 계절과 각개의 계절이 생겨나는 것----겨울에 태어난 아이, 여름에 태어나는 아이----에 기준점과 그에 따른 냉기나 서기의 표지를 부여해 주고 안으로 향해 혹은 밖을 향해 부단히 돌고 있다.
"명왕성과 해왕성의 양쪽이 가장 중요한 각도에 있다는 것은 기괴한 일이야. 아까도 말했듯이 이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아. 일생에 한번 있을까말까하지. 우선. 전혀 일어나지 않는 것이 보통이야."
손가락이 다시 명주실의 다발처럼 턱수염에 돌아갔다. 점성술사는 천궁도를 꼼꼼히 바라보면서 깊이 생각하는 것처럼 수염을 쓰다듬었다.
"해왕성은 현실을 왜곡하지. 명왕성의 전형적 타입은 말하지 않아도 알듯이 히틀러야. "
카스피안은 리시에나가 부르바드에 있는 바아의 안쪽 구석에 앉아 있었다. 이곳에는 영화 스타는 우선 나타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들킬 염려도 없다. 이곳은 그가 주로 몰래 숨어다니는 바로 다만 하나 범한 실책이라면. 가게의 소재를 마일론에게 밝힌 것이었다. 마침 마일론이 들어와 안쪽 어둠 속을 엿보았다. 카스피안은 구석에 몸을 웅크렸지만 그런 그를 발견하자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데이빗, 무슨 짓이야. 자네는 2시간 이내에 세트에 있어야만 하는데."
"가려던 참이야, 마일론."
"잘도 내 얼굴에 먹칠을 했군. 중요한 인터뷰를 준비해 놓았는데. 이미 리포터들은 어디론가 가버렸을 거야."
"또 돌아오겠지 뭐."
"2천만의 독자가 얽혀 있어 최초의 한번으로 됐으면 하네." 마일론은 맞은편에 앉아 깊은 한숨을 쉬었다. "발전소에서 사는 고민은 줄곧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것 같네."
"마일론, 당신 머리카락은 하나도 없잖아."
"난 감수성이 예민한 사나이야."
"자아, 한잔 하세."
"자네 머리가 어떻게 된 건 아니겠지 ? "
"괜찮아."
"데이빗, 매스콤을 피해선 안 돼. 그러면 자바가 이제까지의 자네의 캐리어를 대중에게 보여주는 걸 싫어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말아."
"인터뷰는 거북해."
"왜 ? 자네를 기둥에 붙들어매어 모가지를 치는 것을 모두에게 보여주어. 하얀 유니폼을 입은 비행사도 두 사람 딸려서 말이야."
"비행기라면 나도 한 대 전세를 내고 있네."
"즉 우리들은 고용한 공군이 생겼다는 것이지, 자네는 우리들에게 얼마나 많은 돈을 쓰게 하는지 아나 ? "
"잠깐 점성술사한테 갔었단 말이야."
"자네, <타임>지를 들고 점성술사한테 갔었다는 건가 ? "
"나이 든 점성술사인데 말이야."
웨이트레스가 마일론에게 술을 가져왔다. 마일론은 절반쯤을 꿀꺽꿀꺽 마셨다.
"좋겠지. 자네는 점성술사를 만나고 왔어. 이젠 그건 끝났어. 나는 자네를 찾아냈어. 다음은 둘이 돌아가 사태를 수습하는 거야."
"이제부터 정신분석의한테 가야 해."
마일론은 어안이 벙벙해 카스피안을 쳐다보았다. 턱에서 술이 방울져 떨어지고 있다. 카스피안은 마일론의 이마를 쿡쿡 찔렀다.
"정신위생의 시간이야, 마일론."
"데이빗, 점성술사니 정신분석의니 하는 것은 대체 무슨 영문이지 ? " 마일론은 꼼꼼히 살피듯이 카스피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뭔가 영감이라도 체험했나 ? "
"해왕성이 나의 아센던트에 와 있어."
"나의 꽁무니엔 더불스카가 쫓고 있어. 데이빗, <타임>은 너의 사진을 특집하려고 했어. 이런 PR의 기회는 돈으로 살 수도 없어."
"미안해, 마일론. 요즘 고민되는 일이 너무 많아."
마일론은 술이 남아있는 잔을 탁하고 테이블에 놓았다.
"그 의사는 어디 있지 ? "
"그로밍 웨이."
"좋아, 내가 따라가지."
카스피안은 술을 들이켰다. 두 사람은 썰렁한 어두운 가게 안을 지나 도어 쪽으로 향했다.
"의사 다음엔 뭔가 ? 손금을 볼 건가 ? 사용한 크리넥스를 보고 점을 친다는 그런 것인가 ? "
두 사람은 큰 거리의 눈부신 햇살 속으로 발을 딛었다. 마일론은 선글라스를 썼고 바로 앞에 2중 주차시키고 있는 리무진을 가리켰다.
"캐롤은 자네가 되돌아온 것을 알고 있나 ? "
"아니. 그리고 그녀에겐 알리고 싶지 않아."
"공자왈----" 펠릭스는 리무진의 뒤쪽 도어를 열었다. "----위 자료 때문에 다섯 차례나 소송을 제기당한 자는 입이 무겁도다."




제14장  개집에 사는 인간들



트레일러 하우스 안에서 빅터는 카스피안과 마주향해 앉아있었다.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나 ? "
"난 그곳에 있지 않았어. 연기도 하지 않았어. 난 독일의 군수 공장에 있었다구."
빅터는 마술사의 의상을 무릎 위에까지 걷어오리고 있었다. 늠름한 장딴지는 단단하지 못한 신체의 다른 부분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머리에는 얼음주머니를 얹었고 아이스 티 컵을 손에 들고 있었지만 그것을 마시면서도 의아한 눈초리를 카스피안에게서 떼지 않았다.
"어제의 자네의 행동에는 이상한 점이 있었어. 자내가 분장한 캐릭터가 마지막으로 얘기했던 대목이야----자네 목소리가 다른 사람의 목소리처럼 들렸어. 아주 이상한 목소리가 되어 있었는데 뭐라고 잘 설명할 수 없군."
카스피안은 블랙 커피를 마시면서 트레일러 하우스의 창문너머로 밖을 쳐다보았다.
"그 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다른 사람과 뒤바뀐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
도어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고 AD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빅터는 실내복의 아랫단을 내리고 머리에 있는 얼음주머니를 치웠다. "아아, 아우타 푼코의 열대 사막으로 되돌아가기로 할까." 빅터에 이어 카스피안은 트레일러의 연결로 이루어진 통로를 지나갔다. 모퉁이를 돌아선 곳에서 눈부신 햇살을 피해 손을 이마에 얹고 걸어온 프로덕션의 비서가 카스피안과 부딪쳤고 그 바람에 지출 전표의 다발이 훌훌 날아 흩어졌다.
"죄송합니다." 비서는 놀라 불쑥 말했다. 비서는 전표를 주우려고 무릎을 꿇었고 한편 빅터는 카스피안을 재촉해 그 자리를 떠났다. "마치 스카치 테입으로 이어붙인 인간 같았어.
"나----그걸 봤어."
"그녀의 젖가슴 ? "
"저쪽 세계의 것. 펠릭스가 찢어버린 건 <레지스탕스>의 삐라야."
"이봐, 레지스탕스란 어떤 것인지 알고 있나 ? 한 장의 레코드를 사는 데 대중은 9달러 95센트 이상은 내지 않아. 그것이 레지스탕스야."
다시 유개차의 열 사이를 지나 그날의 촬영 현장으로 나갔다----
사막에 한 장으로 된 큰 바위 가 솟아있고. 그 위에 집음마이크가 목이 긴 새처럼 여러 개 매달려 있다. 아머스가 그 바위 그늘에서 두 사람을 맞이했다.
"어서 오게나. 곧 준비하겠네."
촬영 감독이 바로 건너쪽에서 콘트라스트 미터를 어두운 렌즈의 외알 안경처럼 들어올리고 빛의 최종 검사를 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마스터 쇼트를 찍고 그런 다음 바위 끝까지 이동해 데이빗을 크로즈업시킬 거야." 아머스는 끄덕이고 두 배우를 위치에 자리하게 했다.
"자네들은 사막에서 만난 떠돌이와 마술사야. 두 사람 사이엔 사회에서 추방된 인간끼리의 친근감, 즉 인연 같은 것이 있어. 마술사는 바위 속에서 나타나면 뭔가 빅터의 영상을 바위에 투영해 그것을 서서히 전면에 이끌어낸다는 것이야. 그곳 데크닉은 컴퓨터 담당자들이 알고 있어. 나는 몰라. 데이빗, 당신은 그걸 목격하여 상대가 두려운 놈이란 것을 알게 되지. 자네는 그를 경계하면서도 경의를 갖게 되지. 그리하여 인연이 생기게 된다는 그런 식이야."
"테이프 마크는 여깁니다----" AD가 카스피안을 그의 위치까지 인도했다. 큰 바윗덩어리는 그의 머리 위에 솟아있다. 촬영반은 몇 피트 저쪽에 있어 그곳으로부터 천천히 후퇴하기로 되어 있다. "오른쪽을 봐, 데이빗, 훨씬 먼곳을."
카스피안은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는 열대의 더운 공기 저쪽으로 눈을 보냈다. 꽃은 꺾이었다고 그림자가 말했다.
"없어 ? 어떤 의미지, 없다는 것은 ? " 펠릭스는 이마를 비볐다. 자신의 어설픈 사고가 뇌를 거미집처럼 뒤덮고 있었다. 몸이 흔들흔들 흔들렸으나 그는 그 자리에 순응하려고 애썼다. 싸늘한 블록 집 안, 그는 게친겐공의 군수공장에 주재하는 의사 앞에 서 있었다, 의사는 펠릭스가 가져온 서류에서 눈을 들어 이쪽을 쳐다보고 있다.
"그 아이는 이곳에서 내보내줬습니다."
의사는 창문 쪽을 향했다. 바깥에서는 노동자들이 쭐레쭐레 걸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해골의 행진이었다.
"그 애가 제대로 된 취급을 받도록 유념해달라고 했죠. 여기서는 당당한 취급을 받을 수 없으니까요."
"지금 어디 있죠 ? "
"지금은 석탄을 캐지도 않고 보일러를 헤머로 두드리지도 않습니다." 펠릭스는 노여움을 억눌렀다. 그렇긴 하지만 왜 ! 라고 그는 자문했다. 어찌하여 내게 있어 이렇게도 소중하다는 것인가 ? 그 애의 일이, 생판 남인 그 애의 일이 ?
"어디로 보냈소 닥터 ? "
"저의 동료한테요. 단치히 대학의 부속연구소에서 독도 약도 되지 않는 실험을 하고 있는 사나이입니다. 그곳에 보냈습니다. 그곳이라면 잔뜩 먹여줄 것입니다. 이젠 이 해로운 공기 속에 있지 않아도 되는 겁니다." 의사는 사이를 두었다. "분명히 동료는 여자를 좋아하긴 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을 생각하면----"
펠릭스는 끄덕였다. 현상을 고려하면 단치히 대학에서 욕을 당하는 것도 한때의 요행이 되지 않겠는가. "한데 그 사나이의 실험이란 ? "
"식이요법, 전기치료, 심리학을 다소-----" 의사는 다시 창문 너머로 보이는 수용소 쪽을 향했다. "그 애의 생명은 지켜지겠지요. 나는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펠릭스는 진료소의 도어를 열고 자겐 하사에게 신호를 보냈다. 자겐은 차가 있는 곳으로 가서 큰 나무상자를 안고 돌아와 진료소 안으로 가져왔고 의사 앞에 놓았다.
의사는 그 상자에 의아한 눈길을 보냈다. 펠릭스는 뚜껑을 열어 빽빽이 차 있는 약이라든가 앰플이나 주사기를 보였다. 의사의 목소리가 갑자기 낮아지고 기침이 되어 흘러나왔다.
"이걸 어떻게 ? "
"신중하게 쓰도록."
의사는 가지런히 놓여있는 병을 쓰다듬으며 다시 한번. 펠릭스를 윗눈질로 올려다보았다. "이걸 모두 그 애를 위해 ? 그 애는 당신의 친척인가요 ? "
펠릭스는 자기가 가져온 의료품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도 커다란 의문이었던 것이다.
펠릭스는 발을 돌려 진료소를 나왔다. 자겐 하사가 얼굴이 창백해져 몸을 경직시키며 운전석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개집에서 기어나온 유태인 무상노동제공자를 목격했던 모양이다.
"차를 출발시켜."
밤길을 몇 시간이나 달렸다. 뮬러 대령의 이름이 가는 곳마다 검문소의 문을 열어놓게 했다. 펠릭스는 밤길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단조로운 주행이 그를 멍하니 생각에 잠기게 했고 그칠줄 모르는 생각들이 머리를 스쳤다----꿈속의 사람들이 눈에 떠올랐다. 그들에게 상념을 집중하면 믿기지 않는 행복감이 몸속에 충만해진다. 그들은 고민하는 독일을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멀리한 존재인 것이다. 그들은 펠릭스가 마음에 품은 열대의 전원풍경 중의 인물이었고 그의 모든 기쁨은 그 땅에 저축되어 있는 것이다.
'만약 꿈의 수수께끼가 풀린다면.' 하고 달리는 차의 도어 쪽에 향해 머리를 꾸벅하고 숙이면서 생각했다. 만약 그 지복한 섬들의 수수께끼가 해명될 수 있다면 한 사람의 사나이에게 걸려있는 저주는 소멸되어 버릴 것이다.
달의 은빛 혀가 대뇌 깊숙히 스며들어 그곳을 핥는 감각----꿈이 그를 위로해주고 있다. 보도에 타이어가 스치는 소리가 그의 잠자리의 날개소리로 바뀌었다. 잠자리는 그가 꾸는 꿈의 입구의 문지기였다.
난 수수께끼의 일부를 풀었어. 이 세상은 사람이 믿고 있는 그런 것이 아니야.
"미친 것 같은 생각이군, 하사."
"넷 ? "
"어둠 속에 있는 출입구 말일세." 꾸벅꾸벅 졸릴 때 나타나지. 그런 경험은 없나 ? "
"너무 장시간 운전하고 있으면 별안간 나타납니다."
"응 ? "
"괴물들이 말입니다."
펠릭스는 앉음새를 고치고 전면 유리 너머로 저물어가는 쓸쓸한 풍경에 눈길을 모았다.
"요즘은 꽤나 편해서들 말이야."
서쪽 방향에서 포성이 울리고 하늘에 섬광이 충만했다.
"모두가 우리들의 지도자 덕분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자겐은 악셀을 밟았다.
"메크렌불크가 가까웠군." 펠릭스가 말했다. 헤드라이트는 풍요로운 농경지를 비추고 있었다. 베를린까지 이제부터 12시간. 낯익은 것이 없나 하고 펠릭스는 어둠 속을 꿰뚫어보았다. 언젠가 한번 가본 적이 있는 여인숙이 어딘가 가까이에 있을 것이다. 자갈을 쫙 깔아놓은 하얀 아름다운 차로가 예전에 이 근처에 있었다. 그 여인숙은 전나무와 삼목제로 만들어졌고 내장재는 오크재였다. 그건 평상시였고 검소한 와인과 요리로 오후의 한때를 보냈다----이제 와서는 성스럽기까지한 향연처럼 생각되는 그 하루. 이미 최고의 와인도 입에 쓰다.
어둠의 괴물들이 펠릭스의 머릿속을 행진해 지나갔다. 그 속에 에밀 바이아스 중령의 모습이 있었다. 펠릭스는 바이아스의 그물이 이 시골에도 거미줄처럼 둘러쳐지고 사람들의 생활 속에 군대에 산업계에 엮어지고 있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아직 날 매달려면 부족하다. 그는 쭉 기다리고 있다. 그물을 짜면서.
펠릭스는 눈을 비비며 잠을 쫓았다.
"꿈속의 문 그 어느 것을 빠져나오면 안전히 통과할 수 있는 길이 있다네, 하사."
"그렇다면 콘크리트로 만든 엄페호가 좋겠죠." 자겐 하사가 말했다. "벽의 두께가 16피트나 되고 전체가 몽땅 지하에 잠겨 있는 것. 안전의 길이란 그것입니다."
"그게 유일한 길인가 ? "
"머리 위에 5,6톤이나 되는 흙을 이고 편안히 자는 것입니다. 중위님, 당신도."
그 뒤 두 사람은 말없이 시간을 보냈다. 드디어 자정이 가까와져 베를린으로 들어서자 그류네발트의 베치나슈트라세에 있는 뮬러 대령의 저택으로 직행했다. 저택의 원래 소유자가 안개처럼 모습을 감춘 뒤---
-인네베르 아우후게레스토----대령은 본래의 가격의 10퍼센트로 손에 넣었던 것이다.
환영처럼 되어 있는 현관 앞에 차를 몰았다. 저택 안은 어두웠다. 신원 확인을 위해 파수병이 다가왔다. 펠릭스는 자겐을 맡기고 혼자 뮬러의 서재로 들어갔다. 대령은 난로 앞에 앉아 있었다.
"앉게, 이보게, 이건 베를린 최후의 유서있는 한 병의 브랜디일세. 함께 마셔주게."
다시 한 잔에 술이 채워지고 펠릭스는 이 집의 주인과 잔을 마주댔다. 캐비어를 얹은 크래커를 담은 쟁반을 한 손에 든 펠릭스는 극도의 피로로 그것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버려두게." 뮬러가 말했다. "이미 그건 하층 사회의 것이 되었네. 떨어져야 하겠기에 그들의 곳으로 떨어진 것이니까. 고대 로마 가정의 풍습이지. 난 그러한 착상이 마음에 들어. 자네는 어떤가 ? "
펠릭스는 연마된 딱딱한 나무의자에 떨어져 부서진 크래커와 자잘한 까만 구슬을 연상케 하는 캐비어를 바라보았다.
"우리들은 얻을 수 있는 한 원조가 필요하군요."
"그래, 바야흐로 독일 그 자체가 하층 사회로 떨어지고 있어. 우리들은 지각에 생긴 균열에 전락한 거야. 어차피 삼켜버려지게 되겠지만."
"그걸 삼켜버리려고 하는 것은 러시아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그건 외견 상의 일이야. 실제로 우리들을 삼켜 버리는 것은 운명일세. 그것도 혈관에 이르기까지."
"난로 앞에 앉으신 대령님은 심기가 좋으신 것 같습니다."
"어땠나 ? 자네의 귀여운 꼬마 친구는 게친겐공의 공장에 있었나 ? "
"단치히로 보내졌습니다. 그곳에 사는 의사한테로."
"요즈음은 어린 소녀들이 대거 이곳저곳으로 보내지고 있더군. 동부전선에서 귀환한 장교들 사이에서 어엿한 백인 매매가 행해지고 있지 않은가. 여자를 증정하는 거야. 독일도 힌두스탄 못지않게 되었네."
펠릭스는 난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춤을 추는 불꽃 끝에 악마가 아른아른 얼굴을 내밀고 있다.
"게쉬타포의 바이아스 중령이 흥미를 가지고 당신의 경력을 추궁하고 있다더군요."
뮬러는 브랜디를 마셨고 잔을 멍하니 불빛에 비춰보고 옆의 테이블에 놓았다.
"말러를 방문해 주게. 그녀는 몹시 겁을 집어먹고 있어."
"슬슬 발을 빼는 편이 좋으시지 않겠습니까."
"징발한 물건들이 동부 점령 지구로부터 이쪽을 향하고 있어. 상당한 금액의 금과 보석이지." 뮬러는 브랜디를 다시 따르고 잔을 입가에 가져갔다. "일부는 프랑크푸르트의 제국은행에 가기로 되어 있어. 일부는 말러의 힘을 빌어..."
"상대는 ? "
"뭐야, 제국은행의 총재지. 뭐라고 할까----상당히 세련된 취미의 소유자지. 나의 손에 그의 집무 시간 후의 행동에 관한 흥미 깊은 서류철이 있네. 실은 그중의 몇몇 건은 내 자신이 철해 놓은 것이지만 말이야."
뮬러는 빙그레 읏으며 새끼손가락으로 뺨을 비벼댔다. 반지 가득히 박아놓은 다이아몬드가 반짝반짝 빛났다.
"그를 말러가 만나도록 되어 있는데 그녀의 우아함과 재치에 의하여 그 가련한 사나이는 우리들을 절대 배신하지 않겠고 신용할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겠지. 그 답례로서 우리들은 그의 은행이 모든 적송품을 수령했다고 적은 한장의 쪽지를 요구할 뿐이지."
뮬러는 펠릭스의 잔에 브랜디를 다시 부었다.
"물론 절반은 자네 손에 맡겨지네. 그 몫의 보석은 때마침 나의 소유로 되어 있는 별장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쉬게 되는 거지."
"그런데, 바이아스는 ? "
"그쪽도 쉬게 되지."
펠릭스는 브랜디를 비우고 일어섰다. 불타오르는 불 속의 악마가 불꽃의 손가락으로 박자를 맞추어 춤추고 있었다.
뮬러도 의자에서 일어나 펠릭스와 나란히 난로 앞에 섰다. "그의 일은 최종 단계에서 나의 부하가 처리한다. 그에 관해서는 이렇다 할 당국에 통달될 염려는 우선 없어." 뮬러의 손이 펠릭스의 어깨에 얹어졌다. "이런 일은 일상 다반사야. 수수께끼의 커튼이 드리워지지. 그리고 야망에 불타는 게쉬타포 장교들은 그들의 권력에도 한계가 있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걸세."
대령은 몸을 구부려 부젓갈로 불을 쑤셔댔다.
"우리들은 지배하고 우리들은 성공한다, 이지. 볼프 폰 헬돌프공은 패스포드와 비자의 답례라고 하며 유태인으로부터 100만 마르크를 착취하고 있고 게링은 석탄과 제철소와 로스챠일드의 대저택을 손에 넣었지. 나도 사소하지만 손에 넣었네. 대관구 지도자의 소속 운전사까지 몇 100만이란 재화를 이룩하고 있네. 자네 자신도 벌었겠지."
부젓가락에 대응해 불꽃은 더욱 춤을 추었고 굴뚝의 어둠 속에까지 날아올랐다. "말러에게 귀띔해 주게. 기분을 풀어주고. 현명한 자에게 있어 전쟁이란 번영인 것일세."
"게친겐공이 인간을 개집애 살게 하고 있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 "
"그들이 치약 튜브에 살게 하면서 매일과 같이 쥐어짜는 데 동원된다 해도 내가 알 바 아니고 자네가 참견할 일도 아니야." 뮬러 대령은 펠릭스를 도어가 있는 곳까지 배웅했다. "말러를 만나고 난 다음 다시 한번 내게 돌아와주게."
"어떻게 제가 말러에게 자신을 붙여준단 말입니까, 저 자신이----"
뮬러는 호주머니에서 주문서의 다발을 꺼내 싹싹 넘겼다. "이것이 총통 본인의 사인이다. 이것만 있으면 바이아스는 자네에게 손을 대지 못해."
펠릭스는 복도로 나섰다. 몇 세기나 지난 우두머리 천사가 들어 올린 램프의 빛이 주위에 충만하고 그 불빛을 받아 서 있는 뮬러의 가슴에 훈장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두 대전에서 총화의 곁에 서 있은 적이 없는 데도 철십자 훈장을 달고 있는 뮬러이다. 펠릭스의 시선에 답해 그는 온화하게 말했다.
"장사 요령과 그리고 유력한 연줄의 고마움에 관해 한 마디 하겠네. 우리 독일 육군의 차량은 뉴저지의 스탠더드 석유회사의 연로로 달리고 있다네." 씽긋 읏자 발을 돌려 서재로 돌아갔다.

"사과주야. 기억하고 있어요 ? 저어, 작센하우젠의 가까운 여인숙에서 마셨었잖아요." 말러는 침대에서 잔을 그의 앞에 내밀었다. 침대의 천장 레이스가 그러한 그녀의 괄에 그물눈 무늬의 그림자를 떨구었다. 옆 테이블에는 아마도 비어있는 데칸다와 잔이 둘 있었다.
"난 너무 마셨어." 펠릭스는 침실용의 의자 등받이에서 바지를 당겨 아무렇게나 발을 집어넣었다.
말러는 침대 테이블에 손을 내밀어 담배를 집었다. 가운의 가슴팍이 자연스럽게 벌어져 유방이 우아하게 넘쳐흘렀다.
"내게 흥미를 잃은 것 같군요. 누구 새로운 사람이라도 생겼나요 ? 나치의 여자 학생연맹의 팔팔한 아가씨 ? 당신 지방에 출장가 있었죠 ? "
담배에 불을 붙이고 일어섰다. 침대 옆의 거울에 전신이 비쳤다. 마치 남을 쳐다보는 듯한 시선으로 그녀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었다.
"난 이런 떠돌이 장사는 싫어요. 이잰 발을 씻겠어요."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야." 펠릭스는 지폐가 잔득 들어있는 봉투를 침대 위에 탁 던졌다.
"뮬러가 잘 부탁한다고 했어. 당신한테 새로운 일이 있는 모양이야." 말러는 화장테이블 쪽으로 걸어가서 그 위에 있는 보석함을 열었다. 팔찌에, 반지에, 브로치에 보석이 번쩍거렸다. 박혀있는 보석의 작은 면을 살며시 손톱으로 쓰다듬었다.
"이번 신사는 어떤 놈팽이죠 ? "
펠릭스는 셔츠의 단추를 채우고 넥타이를 맸다. "만날 가치는 충분히 있을 것 같아. 뭐라고 하는 은행 총재라던가."
"당신만이 의지할 곳이에요." 말러는 보석함을 탁하며 닫고 펠릭스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남은 흔적도 없이 사람을 사라지게 하는 것은 암상인인 펠릭스 뿐이에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증명서 같은 것을 만들어줬지요 ? 내게도 부탁해요. 난 점점 두려워져요."
"뮬러에게 있어 가치가 있는 한 당신은 절대로 안전해."
"에밀 바이아스가 두려워서 완전히 공포에 질려 버렸어요. 뮬러는 절대로 날 지켜주지 않을 거에요."
펠릭스는 돈지갑을 꺼내 안에서 열쇠를 하나 끄집어냈다. "작은 금고의 열쇠야.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당신은 부자가 돼."
"부자가 여러 명이나 게쉬타포애 붙들렸어요."
"몇 명이라고 할 정도가 아니야, 거의 다지. 영리한 놈은 붙들리지 않아."
말러는 열쇠를 눈앞에 늘어뜨리고 충분히 검사한 다음 이어 보이지 않는 자물쇠에 집어넣어 비틀어 여는 흉내를 냈다.
"펠릭스의 심장이야. 열면 인정이 굴러나오지. 코인과 함께 와르르하고."
"당신 심장의 열쇠야." 상의를 입고 천천히 주의 깊게 단추를 채우고 말러의 거울 앞으로 나아갔다. 그곳에 비치는 군복 모습의 자신을 찬찬히 들여다 보았다. "난 겨우 어엿한 배우가 되었어, 말러."
"어머나, 당신은 언제나 뭔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어요. 생각지도 못하는 것을. 당신을 본 사람은 생각하곤 하지요, 이 사나이는 어째서 배우 같은 것을 하고 있을까 하고." 말러는 그의 뒤로 다가가 팔을 목에 감았다. "당신에게 반했어요, 당신이 나치의 여학생을 찾아낸 지금은 더욱."
펠릭스는 넥타이에 최후의 손을 가해 옆에 서 있는 말러의 모습을 거울에서 보았다. "짝지어 날으는 두 마리의 잠자리 말이야. 본 일이 있어 ? 살짝 균형을 잡고. 몸을 서로 연결시키고 함께 날개를 흔들며." 그는 말러의 팔을 풀었다. "가봐야겠어. 당신은 은행가를 접대해요."
"우리들 모두 바이아스에게 붙들리는 거죠 ? "
펠릭스는 군모를 똑바로 쓰고 나서 한쪽 손을 차양 위로 가져갔다. "서류를 입수해 주겠어. 당신은 모험의 외교원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서류를 말이야."
돌아가려고 발꿈치를 돌린 펠릭스는 아주 순간 뭔가 머릿속을 스치는 것을 느꼈다. 이전에도 들었던 희미한 불발탄의 소리. 단순한 불발이야. 그는 외톨이었다.
"데이빗, 로마, 아주 잘됐어, 이걸 프린트하기로 하지."
데이빗은 로마의 얼굴을 뚫어져라하고 들여다 보았다. 로마는 씽긋 웃으며 한손을 내밀었다. 그녀 저쪽에 촬영반, 그리고 세트의 의상 담당자, 메이크업 담당, 그리고 특기부의 스탭이 모여 있었다. 그의 세계, 그의 영화, 상대역인 주연 여배우. 일체가 친천히 형태를 취해 현실의 존재로 변했다. 그녀와는 이제 막 다른 신을 연출했었는데 그는 아무 것도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로마는 그의 팔에 자신의 팔을 미끄러뜨리듯 집어넣었다. "몹시 타프한 쇼트였어요. 아머스가 기뻐했어요. 물론 당신은 멋졌어요, 하지만 나 잘했어요 ? 조금이라도 ? "
당신은 완벽했어, 말러와, 펠릭스가 말했다.




제15장  게쉬타포룰 말살하라



비버리 힐즈에 있는 페이 로퍼의 집에는 키가 큰 삼나무의 생울타리가 둘러쳐져 외부 사람을 가로막고 있었다.
"대단한 것이지." 마일론 피쉬가 말했다. "이것도 예전엔 나의 것이었어."
그는 카스피안과 파티오에 멈춰섰다. "페이가 이혼 소송 때 법정에서 비길데 없는 감동적인 연기를 보여 주어서 말이야." 피쉬는 술을 마셨다. "덕분에 판사는 눈을 적셨지. 나는 열린 입이 닫히지 않았고."
피쉬는 예전의 자기 집과 그 부지를 둘러보고 그곳에 있는 모두를 향해 잔을 들어올렸다." 그녀는 언젠가 영화 회사의 주인이 되고 말 거야." 다시 카스피안을 향해 앉으면서, "어때, 기분은 ? 긴장을 좀 풀고 있어."
"완전히."
"줄리어스는 자네가 만 3일간 숨을 돌려줬으면 하고 있어. 그래서 우리들은 이곳에 온 거야."
"숨을 돌리고. 있네."
"그럼 어째서 그런 멀건 치킨 스프같은 눈을 하고 있지." 피쉬는 잔을 파티오 테이블에 놓았다. 그의 전처의 저택 안에서 파티의 떠들썩한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적어도 그녀가 내놓고 있는 술은 나의 것이 아니지."
"위자료는 이제까지도 지붙하고 있지 않나."
"당연히 내고 있지."
"그렇다면 그녀가 대접하고 있는 것은 당신의 술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 판사 녀석, 나를 이런 처지에 내몰다니. 그녀석 게리 그란트와 닮았어."
"그 판사의 에이전트를 하고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두 사람은 같이 뜰을 산책했다. 피쉬는 한손을 카스피안의 어깨에 걸쳤다.
"전처인 미세스 피쉬에 관한 에피소드를 하나 얘기할까. 어느 날의 일인데 우리 하녀가 와서 결혼하게 됐다고 했어. 그러자 페이는 결혼 축하로 그날 하루를 휴가로 해줬던 거야." 피쉬는 카스피안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남에게 물건을 베풀어 준다는 것이 전혀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 여인이란 말이야." 피쉬는 앞장서 돌 층계를 올랐다. 머리 위에는 나무들에 아롱다롱한 랜턴을 염주알처럼 주렁주렁 매달아 놓았다. 풀은 물 밑의 스포트라이트에 비춰져 반짝이고 있었다. 랜턴의 따스함이 서린 소프트한 불빛 속에 대화를 즐기고 있는 손님들. 작은 편성으로 되어 있는 콘보가 연주하고 있는 음악이 거실에서 새어나오고 있다. 바스는 바브라혼이 억제된 조용한 째즈를 연주하고 있다.
은실의 팬츠에 쟈켓이란 스타일의 캐롤 카스피안이 잔을 한손에 들고 다가왔다. 쟈켓에는 까만 초승달의 작은 아플리케가 몇 개씩 붙여져 있고 높이 솟아오른 까만 터반 아래서 곱슬머리가 삐져나와 이마에 걸려 있었다, 피쉬는 재빨리 그녀의 손을 쥐었다.
"오늘 밤의 파티에선 당신이 단연히 빛나고 있군요."
"고마워요 마일론, 난 저 과자에 얹혀있는 토오잉키 같이 보이는 건 아닌가요."
"대단히 매력적이에요."
"토오잉키는 27년이나 놔둬도 썩지 않잖아요." 캐롤은 컬한 머리를 터반 밑으로 밀어넣었다. "포장지 쪽이 먼저 마무되는 것이 아닌지 몰라."
"페이를 못 보았어 ? "
"마치 교도수에서 나온 사람처럼 그런 모습으로 치과의사와 얘기하고 있었어요."
"그녀석이라면 알고 있지."라고 피쉬는 말했다."그녀석 1페이지짜리 컬러 광고를 내고 있어. 진료소란 터키풍의 디스코장만도 못해.
"그런 녀석의 손가락을 입속에 집어넣게 하다니 절대 사절이야." 캐롤은 카스피안을 향해 "즐기고 있어요 다링 ? "
"느긋하게 즐기고 있다고 그래."라고 피쉬가 말했다.
"느긋하게 즐기고 있어."라고 카스피안이 말했다.
"난 말에요 프라메타 본피리와 수다를 떨고 있었어요. 그녀는 말이죠, 온갖 종류의 남편을 바꾸고 갈아치워요."
"그녀는 페이의 영화에 출연하고 있어." 피쉬가 말했다."저 두사람은 마음이 맞아서 말이야."
캐롤은 뜰과 거실을 잇고 있는 둥근 창문에서 안을 들여다 보았다. "그럼, 나는 프라메타 본피리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겠어요." 카스피안의 뺨에 키스하고, "묘한 여인들이 데이빗 주위에 어슬렁대고 있지 않나 확인하러 왔을 뿐이에요." 캐롤은 가버렸다. 라메의 팬츠가 멋진 모습의 히프에 찰싹 달라 붙어 있다.
"조금도 군살이 붙지 않았군 그래." 피쉬가 말했다. "어디서 단련하고 있지 ? "
"여하튼 제인 폰다의 비디오 그대로 하려고 하다가 기절해 버리고 만 사람이니까 말이야."
"훌쭉한 유전자가 풍부한 결과이지. 나의 유전자 따윈 치즈가 들어있는 팬케익 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니까." 피쉬는 배를 디밀려고 하다 단념했다. "잠깐 가서 사람들과 얘기하고 와야겠네. 점성술사 같은 것에 접근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겠나 ? "
"이젠 괜찮아. 당신이 함께 있어줘서 안정이 됐어."
"3일간은 자취를 감추면 곤란해."
"어엿이 이곳에 있겠소이다. 전에 당신의 것이었던 공기를 마시며."
카스피안은 뜰로 통하는 돌층계에 앉았다. 페이가 반짝이는 발을 헤집으며 거실에서 나타나는 것이 보였다. 발은 살며시 소리를 내며 그녀의 뒤로 미끌어져 내려졌다. 까만 이브닝 드레스를 입고 있다. 마메이드 풍의 옷자락을 소리없이 관자를 깐 마루에 떠돌게 하면서.
배꼽까지 V자형으로 파내려갔으며 그곳에 빨간 벨트 모양의 새시를 두르고 그 긴 끝을 허벅지의 정면으로 살짝 늘어뜨리고 있었다. 20년 전의 관능적인 걸음걸이는 그대로였지만 오늘밤은 약간 다리가 휘청댔다.
"어머, 데이빗----" 페이는 카스피안과 나란히 돌층계에 앉았다." "-
---혼자에요 ? 캐롤은 어디 있죠 ? "
"프라메타 본피리와 가장족들의 얘기를 하고 있어요."
페이는 어깨너머로 뒤를 돌아보았다.
"난로에 불을 넣은 다음 누구도 떨어지지 않으면 좋은데." 백발이 섞인 엷은 색의 머리를 살짝 흔들고 천천히 한손으로 들어올려 잠깐 머리 위에서 다발을 짓고 나서 다시 살짝 흔들어 내렸다. "나 조금 취한 것 같지."
"조금은."
"그럴 거야, 약간 취한 것 같아." 카스피안의 팔에 기대었다.
"모두들 마치 중고차 세일즈맨 같아 데이빗, 바보와 쓰잘데 없는 사람만 데려왔어."
카스피안은 뜰을 내려다보며 소형 야자수의 숲을 바라보았다. 폐이는 드레스의 옷자락을 갖추고 다시 한번. "바보와 쓸모없는 놈들..."라고 혼잣말로 중얼댔다.
"누가 ? "
"누구나 모두."
"과연."
"프러듀서를 믿을 수가 없어. 그래서 중역급 프러듀서를 넣어 프러듀서를 감독시켰지만 이게 또 자기가 무얼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지 뭐야."
"어려운 영화 ? "
"제1급의 실패작이사 그게 모두 내게 덮어씌우려고 엄습해 오는 거야. 하지만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 알겠어 ? "
"무얼까요 ? "
페이가 카스피안 쪽으로 얼굴을 돌린 서슬에 그녀의 머리카락이 그의 뺨을 살짝 스쳤다. 그의 눈 깊숙한 곳을 들여다보듯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 페이. 카스피안은 다른 시대의 여인을 그곳에서 보고 있었다. 베를린의 뮤직 홀의 스타----플로이라인 셔페르즈를.
"날 쳐다보는 당신의 눈이 난 좋아." 페이의 손이 그의 손을 구해 더듬듯이 움직였고 살며시 겹쳐졌다. "그날 한낮의 일----기억하고 있어 ? "
"음."
"데이빗, 난 거래하는 돈과 영화의 배급료만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야. 그걸 알고 있어."
카스피안은 나무들이 서 있는 곳을 꿰뚫어보듯 쳐다보았다. 페이는 천천히 그의 손을 들어올려 가슴의 젖무덤 사이로 넣었다.
"이것도 예전엔 대단히 유명한 유방이었다구." 다른 또 한손으로 그의 머리를 받들고 입술을 당겼다. 그녀의 키스는 부드럽고 심오한 경지에 이르고 있었다. 조용히 그녀의 입이 떨어졌다. "저어, 제일부지 끝에 작은 방가로가 있어."
"오늘 밤은 안 돼요."
"그럼 언제 ? "
"저어 페이----"
"그럴 마음이 없으면 암컷을 유인할 신호를 내는 게 아니야. 입장이 곤란해지잖아. 특히 여자가 나 정도의 나이또래라면." 페이는 몸을 빼고 허리의 벨트를 다시 고쳐 조였다.
"페이, 당신은 멋진 여인이에요. 그런 식으로 쳐다본 내가 나빴어요. 한때는----"
"네에, 영광이었어요. 그러니 이쯤해 두겠어요. 좋겠지 ? " 페이는 일어서 인어처럼 옷자락을 날리자 소리도 없이 사라져갔다. 이젠 이것으로 그녀의 영화 회사에서 영화를 찍는 일은 없을 것 이다. 갑자기 맹숭한 얼굴로 돌아온 것 같은 그 뒷모습을 배웅하며 카스피안은 그렇게 확신했다.
"그래, 그것도 괜찮겠지." 그는 그렇게 입에 담으며 일어섰다. 돌층계를 내려와 뜰을 지나 거리로 나섰다. 주차시켜 놓았던 폴세에 올라타자 타이어가 삐걱댈 만큼 액셀을 밟고 갖가지 상념을 엔진의 굉음에 내맡겼다.
"파티란 것은 사업 관계를 원활히 해주는 거야."
카 라디오의 스위치를 넣어 선셋 블루버드로 향했다. 길은 야자수나 기타 비버리 힐즈의 푸른 녹색 공간을 미끌어지듯 뱀처럼 달리고 있다. 보기좋게 포장된 이 길은 배우들이 각자의 캐리어에 생각을 달리면서 이미 몇 10년이나 차를 달리고 있었던 길이다.
카스피안은 자신의 캐리어를 회고해 보았다. 옛날에는 체포되고 싶어도 될 수 없을 만큼의 3류 배우였다. 하지만 지금은 각광을 받는 스타이다. 지금은 마시는 물에서 석면을 걸러낼 만큼의 여유가 생겼다.
헐리웃 지구에 진입했다. 이제까지 정체없이 달려왔지만 신호때문에 자꾸만 섰다가 다시 발진하곤 해야만 했다. 도로의 가장자리에 바짝 대어 주차시키고 차에서 내렸다.
이곳은 혼들의 사격장이다. 명멸하는 대로의 휘황 찬란한 네온사인은 한 권의 무수정 영화. 그 사운드 트랙은 레코드 비디오 상점에서 볼륨 가득히 거리로 흘러 내보내는 무조정의 음악이란 무절제. 프라메타 본피리 못지 않는 미인인, 거리의 창녀들이 보도를 누비고 있다. 누가 줏는 걸까 ? 그녀들은 비버리 힐즈 호텔의 라운지에서, 또는 선셋 블루버드에서 손님을 끈다. 한 사람이라면 합법인 것이다.
"난 어떤 배우를 알고 있어." 걸어 가면서 떠들어 댄다. "그녀석은 <3각>이라는 이름의 세 개의 다리를 가진 개를 키우고 있더라구." 웃음 소리를 내며 계속 걸어간다.
어떤 문에나 밤의 장사꾼들이 넘치고 있었다. 헤로인을 파는 사람. 장물 테이프 데크를 파는 놈. 이곳저곳에서 엑스트라의 소란스러운 웃음 소리가 들리는 이곳의 스타는 선셋 블루버드.
"그런데 나는 죠니 다라야."(죠니 다라는 1940년대의 라디오의 연속 드라마의 주인공) 빛과 소음과 열대의 안개 속에서 그는 다시 한번.  소리내어 웃었다. 그러자 어느 어두컴컴한 불빛이 커져있는 바아의 출입문으로 발을 디밀고 들어가며 손목시계를 힐끗 쳐다보았다.
시간은 맞았지만 시계가 고장나 있었다. 그는 낯선 시계를 자꾸만 내려다 보았다. ... 테두리가 은으로 되어 있으며 표면에 독수리의 날개가 선묘로 새겨져 있는 시계였다.
펠릭스는 손목시계에서 눈을 들어 폭넓은 프리드리히슈트랏세를 끝에서 끝까지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 내리는 진눈개비에 보도가 빛나고 있었다.
그의 왼손에는 베덴슈트랏세가 있었고, 프리드리히슈트랏세와 가게나 비어가든이나 카메라점, 담배가게 같은 것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는 미로 안에서 서로 마주 향하고 있다.
아직 불이 켜져 있는 곳도 있지만 이미 꺼져 있는 곳도 있다. 그의 눈은 그 교차점에 못박혀 있었다. 시간이 다 되어서 에밀 바이아스가 탄 까만색 메르세데스가 코끝에 나타났다. 게쉬타포 중령의 차는 베렌슈트랏세를 건넜다. 그 뒤에서 같은 까만색 호위차가 와이퍼를 삐걱거리면서 따라갔다.
펠릭스는 두 대가 통과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모퉁이로 다가갔다. 차의 흐름 속에서 배달용 유개차가 나타나 보도 옆으로 다가왔다. 문에는 커튼 크리닝 서비스라고 적혀 있었다. 펠릭스는 그 유개차의 문을 열고 비젤의 옆으로 뛰어 올라탔다.
"그녀석, 분명 타고 있었지 ? " 펠릭스는 빗방울로 무늬 모양이 되어 있는 앞유리창을 통해 가리켰고, 비젤은 다시 유개차를 차의 흐름 속으로 들어서게 했다.
"이미 우리 거야." 비젤은 서둘러 게쉬타포의 호위차에서 몇 대분의 차간 거리를 두고 뒤에 따라붙었다.
"저녀석, 시간 한번 정확하구만."
까만색 손장갑을 낀 비젤의 손이 느릿느릿한 차의 흐름에 맞추어 위태롭지 않게 핸들을 다루었다.
"슬슬 준비해 두는 편이 좋겠어."
펠릭스는 유개차의 후부로 넘어갔다.
"드라이 크리닝 냄새가 나는군."
펠릭스가 무릎을 대고 캔바스를 치우자 장전된 MG 2가 나타났다. 까만 빛을 띈 대형 기관총은 두 받침다리 위에서 멋진 밸런스를 취하고 있다. 그 옆에 수류탄이 한 개, 기관단총이 한정. 펠릭스는 기관단총을 운전석으로 보냈다.
비젤은 총신을 사랑스러운 듯이 쓰다듬었다. "러시아제인, 카라시니코프야. 빛나는 우리 독일 육군이 사용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우수한 총이지."
"여기 고급 침대 커버도 있네." 펠릭스는 사치스러운 돌출무늬의 천을 회중전등으로 비쳤다.
"내려놓을 짬이 없었어." 비젤은 핸들을 꺾어 게쉬타포 일행과의 차 한 대의 간격으로 좁혔다. 펠릭스는 일어나서 슬라이딩 도어의 문틀을 비추어 빗장을 클렀다. 도어는 스르륵 열리고 진눈깨비가 내리는 거리가 보였다.
"바람이 들어 오는데 ? "라고 비젤이 말했다.
"잠깐 예행 연습이야."
"난 틈새 바람이 신경에 걸려. 빈혈증이 있어서 그래."
펠릭스는 도어를 닫았다. 그리고 유개차의 후면 출구로 이동했다. 바깥으로 열리는 두짝 문으로 각각 창문이 달려 있다.
"그쪽은 그냥 놔둬." 비젤이 말했다. "측면에서 해치우는 거야. 하지만 완전히 열지는 말아."
"아아, 알았어." 펠릭스는 물에 젖어 빛나는 길이 뒤로 흘러가는 모습을 옆창으로 바라보았다.
"앞서야겠어. 저녀석의 가솔린 탱크가 폭발하면 우리도 덩달아 당하게 될지 모르니까." 펠릭스는 MG42의 옆에 무릎을 꿇었다.
"30초간에 80발인가. 하지만 나는 두 세번 밖에 발사한 경험이 없어."
"이 정도 사정 거리면 눈이 없는 장님이라도 명중시킬 거야."
펠릭스는 앞 좌석까지 기어 돌아와 비젤의 바로 뒤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유개차는 천천히 나아갔다. 손목시계의 움직임은 더욱 더디었다. 펠릭스는 시간을 새기는 작은 초침을 쳐다보았다. 창밖으로 힐끗 눈길을 보내자 낯익은 포스터가 눈에 비쳤다. "주 5마르크의 절약으로" 작은 소리로 읽어갔다. "자동차가 당신 것으로."
"호일 너트마저 손에 넣을 수 없다고 하는데."
비젤은 다시 한번 핸들을 꺾었다. 펠릭스는 비젤이 게쉬타포의 바로 뒤에 차를 접근시켜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슬슬 준비해 두라구." 비젤이 말했다. "녀석은 스카게라트프라츠의 <알티스트 클럽>에 좌석을 예약해 놓았어."
비젤의 손이 기어를 매끄럽게 바꾸자 유개차는 가속되었다. 펠릭스는 측면의 슬라이딩 도어로 다가가 손잡이를 잡았다.
"만약 해치우지 못하고 실패하면." 펠릭스는 나지막히 말했다.
"내 주에 <알터스트 클럽>을 날려 버리겠어."
"호위차는 언제나 놈의 바로 뒤에 주자해. 놈을 해체시키면. 녀석들은 위축되어 움직이지 못하게 될 거야. 저 조무라기들 기관총 사격에는 익숙치 못하니까 말이야."
"문을 열겠어."
"아직이야 ! " 비젤이 덤벼들기라도 하듯 화급히 말했다.
"진바지를 입고 왔으면 좋았을 것을."
비젤은 기어를 2단으로 날카롭게 바꾸었다.
"열엇 ! "
펠릭스는 문을 열었다. 게쉬타포의 차는 두 대가 가지런히 보도의 가장자리에 멈춰 있었다. 펠릭스는 차 안의 그늘에 몸을 숨기고 신체를 바짝 긴장시켜 기관총에 겨냥을 정했다. 애밀의 얼굴이 이쪽을 향했다. 게쉬타포는 유개차에서 내밀고 있는 총구를 발견하고는 공포로 눈을 크게 떴다.
그때, 펠릭스는 바이아스의 옆에 있는 그의 오는 밤의 상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지난날 펠릭스와 사랑의 밤을 같이 지낸 적이 있는 그 얼굴은...
"게르타 ! "
"쏘아 ! " 비젤이 소리쳤다.
탄환이 유개차의 옆구리를 꿰뚫었다. 게쉬타포의 호위차가 바이아스가 탄 차를 가로막으며 튀어나와 창문으로 사격을 가해 왔던 것이다. 순간 액셀을 밟는 비잴. 흔들흔들 후부 도어까지 후퇴한 펠릭스는 문을 걷어차고 힘을 붙여 수류탄을 던졌다.
수류탄은 빙글 돌고 나서 호위차 밑으로 떼굴떼굴 굴러들어 갔다. 그러자 순간, 차는 불기둥으로 화해버렸다. 문짝과 창문들이 전주 위에까지 날아 올랐다.
펠릭스는 도어를 꽉 잡고 좌우로 기울면서 질주하는 유개차 안을 앞쪽으로 기어 돌아왔다.
비젤은 예정된 도주 경로를 치달았다. 거리의 풍경들이 창밖을 날르듯이 지나갔다.
"왜 바이아스에게 한 방 먹이지 않았지 ? "
"불가능했어, 게르타가 함께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너에게 그만큼 중요한 여자였어."
"그런 것 같아."
비젤은 별안간 핸들을 확 꺾어 나무 울타리를 돌파해 폭격 자국이 남아 있는 거리로 꼬부라들어 그곳을 치달아 달렸다.
차체는 덜컥덜컥 흔들리고, 튕겨올라 울퉁불퉁한 보도에 부딪치곤 했다. 그 블록 막다른 곳까지 오자 폐쇄된 지하철 입구 앞에서 비젤은 자동자를 멈췄다.
비젤은 카라시코프를 겨드랑이에 끼고 뛰어 내렸다. 펠릭스도 이어 그 옆으로 뛰어 내렸다. 비젤이 지하철 입구를 가리키는 것을 보고 흩어전 벽돌을 타고 넘어 계단으로 뛰어들었다.
비젤은 호주머니에서 수류탄을 꺼내 핀을 빼어 유개차 후부에 훌쩍 던져 넣었다.
폭발과 동시에 그는 계단에 있는 펠릭스 옆으로 뛰어들었다. 쭈그러진 금속과 부서진 돌이 후두둑 입구를 메웠다. 펠릭스의 회중 전등의 불빛에 이끌려 계단 아래까지 내려가 다시 플랫폼 근처까지 달렸다.
"내려갓 ! "
비젤은 플랫폼 끝에서 레일 위로 미끌어져 내렸다. 펠릭스도 그에 따랐고 두 사람은 발소리가 메아리지는 축축히 젖어 텅 비어있는 터널의 어둠 속을 급히 달려나갔다. 희미한 빛을 발하는 레일에 침목으로 늘어선 석조벽에 회중전등의 불빛이 춤을 추었다.
"쏴버렸으면. 좋았을 걸 말야."라고 펠릭스는 말했다.
"게르타에게 프랑스제 란제리를 팔아버린지 얼마 되지 않는데 우린 기관총을 발사하지 못했어." 비젤은 중산 예모를 살짝 들어 올렸다. "이것으로 그녀는 우리들에게 빛을 진 셈이군. 나의 법도로 하면 말이야."
텅빈 터널 안에는 그들의 발자국 소리가 크게 울려퍼졌다. 밤비가 균열에서 스며들어 터널 내부에 방울져 떨어졌다. 펠릭스는 문득 앞서 달려가는 쥐의 회색 몸둥이에 회중전등의 불빛을 번쩍 비췄다. 쥐는 다른 레일로 재빨리 도망쳤다. 펠릭스는 비젤을 돌아다 보았다.
"그녀는 나를 보지 못했을 거야. 난 그늘에 숨어 있었으니까."
"장미꽃과 레몬빛의 팬티를 보내주도록 하지. 그러면 알게 될테니."
"바이아스는 어떻게 하지 ? "
"비오는 밤에 죽음은 한 사나이를 잘못 놓쳤어. 놈의 적으로서의 놈에게도 잠시의 유예를 줘야 하지 않을까 ? " 비젤은 카라시코프를 어깨에 둘러댔다.
펠릭스는 빛을 벽면에 비친 다음 이어 레일을 다시 비쳤다. 회중전등은 번쩍번쩍 명멸했고 슬그머니 꺼졌다.
"성냥을 주게. 전구가 느슨해진 모양이야."
어둠 속에서 성냥을 긋는 소리가 들렸고 작은 불꽃이 비젤의 얼굴 앞에서 튀어 올랐다. 그러나 그곳은 지하철의 터널 안이 아니었으며, 또한 비젤은 까만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나 같은 졸다구가 댁 같은 분을 대접할 기회는 좀처럼 없으니까요, 카스피안씨."
니노 카릴료는 성냥을 카스피안의 담배에 가져갔다. 그의 뒤에는 멕시코풍의 맥주집에 흔히 있는 빨간 흙벽이었다. 니노 카릴료는 길다랗고 뾰족한 코 위에 선글라스의 위치를 묘하게 조절했다.
"그러니까요, 여기선 제게 한턱 낼 수 있는 기회를 주세요."
웨이터가 잔을 두 개 가져다 놓았다. 카스피안은 떨리는 팔을 테이블에 걸쳤다. "니노, 여긴 어떤 곳이지 ? "
"언젠가 말했죠, <클럽 세르펜티노>에요. 절반은 내 소유로 되어 있습니다. 천장에 걸어서 반은 말입니다." 니노는 웃으며 두 손가락으로 테이블 위를 가볍게 두드렸다. "댁의 하이파이의 상태는 어떠세요 ? 최신형입니까 ? 마침 나에게 굴러들어온 시스템이 있어서 말입니다. 아주 싼 값에 양도해 드리겠습니다."
니노는 또 웃었으며 잔을 입가에 가져갔다. "결점을 말하면 보증서가 없다는 것입니다,"




제16장 공간을 초월한 사랑



"난 기분이 우울해지면 장난감을 사곤 하지." 에드 클레스웰과 카스피안은 <노스탈지어>의 출입문 쪽을 향해 걸어갔다. 짤랑짤랑 방울이 울리는 밑을 지나 가게로 들어서면 그곳은 환상의 세계였다. "내가 단골로 다니는 가게야." 두 사람은 삼륜차나 유모차, 그리고 인형 마차와 스쿠터나 샌드보트가 늘어선 통로를 걸어갔다. 그 어느 것에나 옛날의 추억이 담긴 빛깔들로 칠해져 있고, 문자가 적혀 있다.
클레스웰은 유리 구슬이 들어있는 낡은 그물주머니 앞에서 멈춰섰다. "구슬치기 구슬이야." 라고 루비색의 유리 구슬을 손에 집었다. "그것으론 부족하니까 말이야." 그 주머니를 카스피안에게 건네주고 통로를 나아갔다.
"무엇이 우울한데 ? "
"장난감 가게에 있는 더러워 보이는 할아버지가 나라는 사실이." 클레스웰은 다시 통로를 걸어가, "이것 봐." 라고 회색 생철의 태입 장치를 한 잠수함을 내밀었다. 50센트라고 적힌 원래의 가격표와 그 잠수함의 움직임을 상세히 설명한 라벨이 매달려 있다. "태엽을 감으면 잠수한다구 ? " 그것을 카스피안에게 건냈다.
"이것을 사면 욕탕에 들어가는 것이 즐겁게 되겠군."
"목욕이 싫어졌나 ? "
"고무로 만든 오리를 잃어버린 다음부터." 에드는 나무 즐록이나 차륜을 나무로 짜맞추어 만든 작은 풍차나 2륜차, 엘리베이터가 늘어서 있는 앞에서 발을 멈췄다.
한 손가락으로 풍차의 마분지 날개를 살짝 돌렸다. "인생이란 조립된 완구의 <팀가토이> 같은 것임이 틀림 없어."
"아마 그렇겠군."
"안 그래 ? 뭔가 근본적인 것이 달라졌어." 에드는 다시 걸었다. "자네 깡총깡총 토끼 가지고 있었나 ? " 고무 주머니를 쥐고 누르면 관으로 연결되어 있는 벌레먹은 낡은 토끼 장난감이 선반 위에서 깡총깡총 뛰고 있었다. "...그거나 태엽 장치의 하이웨이라든가." 클레스웰이 태엽을 틀자, 금속제의 궤도를 작은 금속제의 자동차와 버스가 도중에서 터널을 통과하여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클레스웰은 궤도 위에 몸을 내밀었다. 코끝을 작은 차가 쌩쌩 달린다."옛날 나는 동화의 나라의 왕자님이었지."
"지금도 그렀잖아."
"지금은 열쇠구멍으로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야." 태엽이 풀려 하이웨이는 멎었다. "하지만 노경에 들어가는 것도 즐거움이야. 거기서 모든 것이 분명해지지."
통로가 막다른 곳까지 걸어가자 작은 골동품의 1인승, 1필의 말이 끄는 2륜 마차가 전시물로써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화려한 두개의 차륜 위에 마치 아이 한 사람이 앉을 만한 좌석이 얹혀 있고, 개가 끌도록 긴 자루가 두 가닥 뻗어 나와 있었다.
"우리집 개가 좋아하겠는데." 클레스웰이 말했다. "그놈을 태우고 하루 종일 끌고다니는 거야."
이웃 통로 위에는 목제(木製) 피노키오를 매달아 놓았다. 녹색 펠트 모자에 꽃은 작은 깃털이 긴 나무 코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 옆에 초라한 다갈색 망토 차림의 낡아빠진 원숭이를 손으로 부리는 인형이 있었다. 클레스웰은 그 원숭이를 손에 들고 머리를 이쪽저쪽으로 향하게 했으며 입을 빠끔거리며 벌리게 했다.
"내 분장실에서 네 스톱워치를 치워. 안 그러면 엉덩이를 걷어차 버리겠어."
"이 원숭이가 마음에 들었어." 라고 클레스웰이 말했다. "무엇보다도 우선 기품이 있어."
"기죽지 말아 에드. 자네는 업계 유일의 시나리오 작가잖아."
"원숭이가 나에 대해서 알고 있잖아 ? " 클레스웰은 원숭이를 카스피안에게 건네주었다. "이것도 부탁하네."
"피노키오는 ? "
"그 뾰족코는 필요없어. 난 나의 양심만으로 충분해."
인형 매장의 더 안쪽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머리가 쭉 늘어서 있었다. 머리를 잃어버린 인형에 끼워주기 위해서다. 곱슬머리, 곧은 머리카락, 움직이는 눈, 고정된 눈. "자네를 보고 있네 에드."
"아아. 인형은 혼의 깊숙한 곳을 꿰뚫어 보는 거야." 클레스웰은."잠깐 실례..."라고 손을 내밀어 눈동자가 움직이는 눈을 감기며 돌아다녔다.
카스피안은 슬슬 돌아다니다가 커다란 빅토리아조의 인형의 집 앞에 서게 되었다. 어느 방에나 당시의 가구의 미니튜어(축소판)가 비치되어 있었다. 샨델리아도 문도 창도 세세한 곳까지 진짜와 똑같다. 당시의 의상을 입은 인형이 와인 셀러에서 두 방에 이르기까지 각 방에 들어있고, 식당에서는 가족들이 긴 식탁을 둘러싸고 작은 접시를 앞에 놓은 채 좌석에 앉아 있는 식이다.
클레스웰은 카스피안과 얼굴을 가지런히하고 들여다 보았다.
"하녀가 그 일가의 어린 자식과 다락장 안에 있어. 일생 동안 남게 될 인쇄물을 박아넣고 있는 중이군."
카스피안은 작은 접시를 손가락으로 만졌다.
"알리샤의 마음에 들까."
"이 세트가 한국제 자동차와 같은 값인걸."
"그 애에게는 자신 멋대로 매만질 수 있는 작은 세계가 필요해."
"여기가 객실이야. 저 애의 이름을 지어준 어버이인 시나리오 작가가 은퇴하면 이곳에 기거하게 될 거야."
"내가 제정신으로 돌아가지 않는 동안에 그렇게 하도록 하지." 카스피안은 말했고, 클레스웰과 두 사람이 달라붙어 인형의 집을 가게 입구로 운반했다.
가게 주인이 카운터에서 두 사람에게 인사를 했다. "이건 박물관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시대의 대극장의 세트도 있습니다만. 열거나 닫히는 빌로드의 커튼이 붙어있고. 배경은 위에서 내려와 꺼내거나 들이밀 수 있으며, 달이 떠오르고..."
"브랑코처럼 여자에가 앉아있오 ? "
"의상을 입은 배역들이 그대로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 쇼라면 본 적이 있지." 카스피안은 수표를 끊어 가게 주인에게 건네주었다,
"이쪽은 클레스웰씨, 오늘은 무얼 사시지요 ? "
클레스웰은 손으로 다루는 인형을 쳐들고 입을 움직이게 했다.  "날 이 중국인 인신 매매단에게 파지 마세요 주인 나리."
"...그것과 유리 구슬과 잠수함이지요 ? "
"...이 남자는 원숭이를 위한 맛사지 쌀롱을 경영하고 있어서..."
가게 주인은 두 사람이 인형의 집을 출입문에서 안아내어 클레스웰의 차에까지 운반하는 것을 도왔다. 클레스웰의 차는 중고 폰티악으로 뒤쪽 좌석이 넓었다. 그곳에 인형의 집을 들여놓고 카스피안과 클레스웰은 앞에 타고 산타모니카의 대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저 인형의 집은 틀림 없이 즐거울 꺼야, 카스피안." 클레스웰은 차의 흐름 사이로 마구 누비며 대로를 돌진했다. "이쪽에서 보고 있지 않는 동안에 인형들이 움직이는 것을 이제 곧 알게 될 거야." 난폭하게 기어를 전환시켜 악셀을 밟았으며 앞차를 아슬아슬하게 빠져나갔다. "그들도 남 못지 않게 흥분할 때가 있으니까."
"그 기어가 갑자기 비틀어진 적은 없나."
"실은 있었어."
구멍투성이인 위를 지나가던 중고 폰티악이 털털거리며 흔들렸다. 클레스웰은 악을 쓰면서 방향을 바로잡았지만 전방 신호가 적색으로 바뀌어서 급브레이크를 걸었다. 카스피안은 창문 밖으로 눈을 돌렸다. 거리 모퉁이에서 남자 두 사람이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한 사람은 하얀 양복에 파나마 모자를 쓴 작은 몸집으로 피부가 까무잡잡한 남자였다.
"거래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모양이군."
카스피안은 그 사나이의 아담한 한 치의 빈틈도 없는 외모에 넋을 잃고 쳐다보고 있었다. 흠잡을 데 없는 깔끔한 몸짓. 그러자 사나이는 카스피안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은빛 밀러 선글라스가 햇빛을 받아 반짝 빛났다.
"건물 뒤쪽으로 돌리는 거야." 비젤은 그렇게 말하고 차에 올라 탔다.
펠릭스는 달빛이 비치는 길에 차를 돌렸다.
"때때로 나는 정신을 차리면 다른 나라에 있게 되고, 만나지도 못한 사람과 이야기하고 있곤 해."
"아무도 믿지 말게." 하고 비젤이 말했다.
펠릭스는 단치히 해부학 연구소의 둔중한 석조 건물을 돌아 갔다. 문은 끝이 뾰족한 쇠기둥이었고 두툼한 석벽 외면에는 담쟁이덩굴이 붙어 있었다. 육군의 수륙양용차 한 대가 거리 저쪽 끝에서 다가왔다. 헌병이 운전하고 있었다. 비젤의 손이 계기판 밑에 붙여 놓은 기관단총에 뻗었다.
수륙양용차의 운전사는 지나치면서 두 사람을 힐끗 곁눈으로 쳐다보았다. 또 다른 세 사람, 그리고 군견이 같이 타고 있었다. 비젤은 찰칵하는 희미한 소리와 더불어 MPl를 계기판 밑에서 떼내어 무릎 위에 올려 놓았다.
"녀석들, 가버렸어." 빽밀러를 쳐다보고 펠릭스가 말했다.
비젤은 총을 원래의 곳으로 다시 넣었고, 펠릭스는 연구소의 안쪽까지 차를 몰아 뒷문 옆에 주차시켰다.
차에서 내리자 비젤이 앞장서서 거무스레하게 변한 정문을 통과했다. 구내는 소리없이 조용했고, 어느 창문이나 까맣게 칠해져 있었다. 비젤의 뒤를 따라 펠릭스는 작은 좁은 길을 중심 건물을 향해 따라갔다. 비젤은 벽에 찰싹 몸을 붙이는 동작으로 펠릭스를 돌아다 보았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 소녀의 가족은 이 건으로 얼마를 주겠다고 했지 ? "
"가족은 없어."
"그럼 우린 이곳에 자선을 베풀러 온 거란 말인가 ? " 순간,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이 비젤의 얼굴을 스쳤지만, 곧 체념한 얼굴이 되었다. 까만 중산 예모의 운두를 잠깐 손으로 고쳐 씌운 다음, 도어에 소리없이 다가갔다. 당번인 SS대원이 한명 현관 안쪽에 있는 어둠컴컴한 불빛이 켜져 있는 작은 방에서 컵에 따라놓은 스프를 맛있게 먹고 있었다. 비젤은 도어를 열고 들어갔다. 대원은 얼굴을 들었다.
"<펙터시교>의 본산의 명령입니다." 비젤은 약간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SS대원은 여우에 홀린 것 같은 얼굴로 앉은 채 몸을 이쪽으로 향했다. 비젤은 재빨리 한 발 내딪자 권총을 빼들고 당번병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대었다.
"이곳에 있는 사람에게 용건이 있다."
"누구라도 데려가도 되겠나 ? " 비젤의 엷은 웃음을 띄운 입술과 빛나는 총신을 곁눈으로 쳐다보고 당번병은 스픈을 컵 안에서 달그락거리며 떨었다.
펠릭스가 나섰다.
"넘버 2336787 수용자, 바렌티나 포반다. 어디 있지 ? "
"전 현관의 감시만 하고 있을 뿐이라서."
"이제부터는 바람구멍이 난 머리로 감시하게 될 거야." 비젤은 권총의 안전 장치를 풀었다.
"찾아보겠습니다." 대원은 모기 소리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작은 방에 비치된 전화를 들어 천천히 분명히 조심조심 다이얼을 돌렸다. 비젤은 그가 수용자 번호 2336787의 거처를 묻는 것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들었다. 대원은 끄덕이고 수화기를 신중하게 내려놓았다.
"따라 오십시오."
대원은 앞장서서 인기척이 없는 복도를 지나, 막다른 출입문을 열었다. 가성소다와 유지의 강렬한 냄새가 펠릭스의 코를 찔렀다.
그 복도에는 많은 나무통이 있었고, 상자가 산적되어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가 한 사람 대조 메모를 손에 들고 서 있었다. 비젤은 긴총을 당번병의 갈비뼈 사이에 더 세게 누르고, "침착하게 말햇 ! " 하고 말했다.
당번병은 연구원을 향해, 어색하게 손을 들고 인사를 했다.
"비누가 많이 있군." 비젤의 권총이 심장 근처에 밀어붙여지는 것을 느끼며 얼빠진 말을 주절주절 줏어 섬졌다.
"80킬로 그램이나 되지." 연구원은 말했다. "고생에 비하면 적구만."
연구원이 서 있는 그 넘어에 열려있는 출입문에서 실험실이 펠릭스에게 건너다보였다. 실내에서는 납작한 그릇들이 부글부글 끓어 올랐고, 표면에 번들번들 빛나는 기름층이 떠 있었다. 그 뒤 잠시 당번병이 어리석은 이야기를 몇 마디 더 지껄였고 일행은 그 연구원의 실헙실을 지나 다시 더 복도를 따라 나아갔다.
"잘했어." 비젤이 말했다. "머지않아 내가 비서로 고용해도 되겠어."
"이 일이 끝나도 저를 끝장내지 말아주세요, 이곳 누구에게도 절대로 아무 말도 떠들어대지 않을 테니까요. 저의 머리 속에는 강철 조각이 들어있습니다."
당번병은 머리칼이 돋은 곳에 있는 긴 상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래서 때때로 건망증이 있지요. 때론 하루 종일 생각이 나지 않는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밤에도 말이지."
"네, 확실히 밤에도 생각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머리에 유산탄을 맞았으니까요."
대원은 다음 동으로 안내했다. 교실 도어 밖의 복도에는 관절을 철사로 이은 한 구의 해골이 서 있었다. 다가오는 세 사람에게 공허한 죽음의 시선을 던져왔다. 당번병은 더 걸어나가 펠릭스를 넓은 대리석 계단이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계단을 올라가자 복도가 있었고, 여러 교수의 명찰이 나붙어 있었다. 당번병은 볼후람 헤셀 교수의 도어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유리창 너머로 희미한 불빛이 흘러나왔다.
"이 안입니다." 비젤은 살며시 노크했다.
발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나고 우유빛 유리 저쪽에 사람의 그림자가 다가왔다. "무슨 이이지 ? " 초조한 쉰 목소리가 들렸다.
"교수님, 당신에게 기사 십자장이 수여되었습니다." 비젤이 말했다.
교수가 문을 열자 긴총의 총구가 그긋에 있었다. 양복을 입은 교수는 중년으로 가슴에 금시계줄이 걸려 있었고, 코에는 금속테의 안경을 걸치고 있었다. 바렌티나 포반다는 올이 거친 천으로 지은 연구소의 가운을 입고 차양이 달린 창가의 의자침대에 앉아 있었다. 옆 테이블에는 잔이 둘, 와인이 한 병. 비젤은 게쉬타포가 휴대하는 회색 원형 기장을 꺼냈다. 그리고는 이어 접혀진 쪽지를 꺼내자 교수의 얼굴에 들이대며 드세게 펼쳤다.
"이건 이 건에 관해 너에게 발행된 수색영장 V야."
"이 건이라뇨 ? 어떤 건을 말하는 겁니까 ? " 교수의 얼굴에서 욘전히 핏기가 가셨다.
바젤은 소녀한데 가서 손을 잡았다.
"이리 와."
소녀를 펠릭스애게 인도하고 다시 교수를 향해 섰다. "신병을 정리해 두게. 내일까지 시간을 주겠네. 교수의 신망을 보아 그만한 유예를 주는 거야." 비젤은 한 호흡사이를 두고 두려운 나머지 아연실색해 있는 학자를 쳐다보았다. "네가 좀 더 용의 주도하지 않았던 것은 유감이야."
교수는 스르르 의자에 주저앉았다.
"난 아무 것도 하지 않았소."
"그건 틀리지 교수." 비젤은 와인이 방치되어 있는 테이블로 다가갔다. 병을 들어 라벨을 불빛에 비쳤다. "빈테지 루이 레데라군." 그는 자기를 위해 잔에 따르고 감정이라도 하듯 코를 씰룩거렸다.
"요즘 와인을 구하려면 암시장에서 밖에 구할 수가 없어. 그러나 생각해 보면 당신은 이것을 몇 년씩이나 잠재워 두었을 것이 틀림없는 것 같군.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 말이야."
"그런 것은 사소한 일이 아닙니까." 교수는 안절부절하여 손수건을 호주머니에서 꺼냈다.
"그럼 묻겠는데, 국가의 죄수를 제국에서 밀출국시키는 것도 사소한 일인가."
"밀출국 ? " 교수의 눈썹이 놀라움으로 치켜 올려졌다.
"자네는 두 사람의 암상인의 손을 빌어 아이들을 수송한 사실을 부정하는 건가 ? 이 아이와 같은..." 라고 비젤은 바렌티나를 가리키며, "아이들을 스위스로 ? "
"그것만은 단연코 부정합니다 ! " 의자에서 뛰어오른 교수를 비젤은 밀쳤다.
"한 명 당 1만 마르크에 ? 좋은 장사지. 당신은 폴랜드의 유태인을 도와 적국으로 탈출시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스웨덴인의 실업가와 랑겐슈타인 성에서 함께 있는 것을 들키고 말았어."
"난 유태인의 탈출을 도운 적이 없소 ! 유태인을 도운 것은 알생에 한번도 한 적이 없단 말입니다 ! "
비젤은 와인을 마셨고 혀 위로 굴리면서 삼켰다. 그린 다음 머리를 들고 족제비 같은 눈을 번뜩이면서  교수 쪽으로 행했다.
"당신은 훔칠 수 있을때 훔칠 수 있는 만큼 훔쳐두자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을 엿들은 적은 없었나 ? 불법적인 은행 구좌를 트고 있는 사실을 부정하겠나 ? 당신의 처지보다 훨씬 상회하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돈을 물쓰듯이 써서 호화스러운 식사를 한 일도."
비젤은 헤셀 교수의 의자를 덮칠듯이 상체를 기울이며 부드럽게 말했다. "번 돈은 좀 더 현명하게 써야 하는 거라구."
교수는 축 늘어져 바닥을 내려다 보았다, 낯선 방에서 깨어 있는 자가 이러한 표정을 띄울 수 있을까. 이마에는 땀방울이 흘렀고, 눈썹이 꿈틀꿈틀 경련을 했다. 비잴은 와인을 따른 잔을 쥐어 주었다,
"사형수는 최상의 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지."
교수는 잔을 입술로 가져가려고 했지만 손이 떨려서 절반을 옷 위에 엎질르고 말았다. 이윽고 잔을 기울이는 그의 가슴 속에서 천천히, 서서히 하나의 불빛이 꺼져가고. 있는 것 같았다. 교수는 문득 생각난듯 허둥지둥 일어서더니 품 속의 호주머니에 손을 집어 넣었다. 지갑을 꺼내 알맹이를 비젤의 손 안에 펼쳤다.
"1개월치 급료입니다. 이것 밖에 없습니다."
"1개월 분의 급료라고 ? 이런 악당 같으니라구 ! 자신은 신 같은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 이몸에게 내미는 것은 1개월분의 급료인가 ? "
교수는 이마를 손수건으로 닦았다.
"나는 아무런 불법 행위도 하지 않고 있소. 나는 과학자요. 아무리 그래도 내가 어떻게 적을 도와줄 수  있단 말이오 ? 도리어 그들의 뼈를 표본으로 삼았을 정도요 ! 그렇다마다요, 연구소의 소장에게 직접 물어 보시오. 우리들은 유태인의 뼈를 해부학의 표본으로 사용했소. 언제라도 화차 1량 단위로 입수할 수 있습니다."
비젤은 호주머니에 돈을 집어 넣었다. 그리고는 빈 지갑은 책상에 내던졌다.
"당신은 암상인이야, 교수. 와이마르의 악랄한 당 지도자와 손 잡고 있어. 당신의 가족은 엄청난 특권을 향수해 왔어....."
게쉬타포의 원형기장의 쇠사슬을 교수의 안면을 향해 휘둘렀다.
"...한쪽에서는, 우리 가난한 아버지는, 공습에서 파괴된 스바벤 캄프의 지하실에서 직공으로 혹사당하고 있다구."
"댁의 아버님의 처지는 가엾게 생각합니다. 진심으로."
교수는 어찌할 바를 몰라 얼굴을 외면했다. 그때 문득 그의 시선이 벽에 결려있는 작은 액자의 동패화에 멈춰졌다. 거침 없이 걸어가더니 그것을 벗겨 비젤에게 건네주었다.
"내 소지품 가운데 가장 소중한 물건이요. 듀우라가 어머니를 그린 것이오."
비젤은 동판화를 잠시 찬찬히 감정한 다음 옆구리에 끼었다.
"내가 당신이라면 오늘밤은 밤이 새도록 신에게 빌 것이오 교수. 지금 당신의 눈 앞에 있는 이 제국의 천한 종이 당신에 대한 흥미를 잃어 버리도록 말이오. 체포영장을 어딘가에 놓고 잊어버리도록 기도하시오."
"그렇게 기도하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위해서도, 당신이 사랑하는 아버님을 위해서도."
교수의 눈은 젖어 있었다. 비잴이 방향을 바꾸자 교수는 허겁지겁 문을 열어 뛰어갔으며 비젤이 출입문을 지날 때에는 인사를 했다. 펠릭스와 당번병은 소녀를 사이에 두고 뒤를 따랐다. 교수는 눈을 들어 소녀를 쳐다보려고조차 하지 않았다. 그대로 기도를 드리듯 머리를 조아리고 있을 뿐이었다.
복도를 걸어 떠나가는 일행의 귀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도어를 닫는 소리가 살며시, 아주 살며시 들렸다. 비젤은 원형기장을 휘두르는 것을 그치지 않았다.
"당신 딸입니까 ? " 당번병이 물었다.
"그래." 라고 비젤은 대답했다.
네 사람의 발 소리가 탁 트인, 계단에 메아리졌다. 아래까지 내려가자 당번병은 문간을 가리켰다.
"건물 안을 다시 통과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 도어로 빠져나가면 중뜰로 나가게 되니까요."
당번병은 먼저 그곳으로 가서 도어를 열었다. 비젤은 나가던 발길을 멈추고 권총을 당번병의 팔꿈치에 찔러댔다.
"다음에 교수를 만나며. 용케도 목숨을 부지하셨군요 하고 놀란 얼굴로. 빤히 드려다 보게. 그놈은 오늘밤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결세. 내가 보증하지."
당번병은 세 사람이 지나갈 동안 도어를 붙들고 있었다. 펠릭스는 소녀의 손을 이끌고 비젤의 뒤를 따랐다. 바렌티나 포만다는 펠릭스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서 석조 건물로, 다시 그의 얼굴로 재빨리 시선이 왔다갔다했지만 손을 굳게 그의 손을 잡고 있었다.
문을 지나 황혼의 거리로 나오자 바렌티나가 빙그르르 연구소를 돌아다 보았다. 펠릭스는 그녀의 시선을 더듬어 석조 건물의 훨씬 윗층에 있는 교수의 방 창문을 올려다 보았다. 유리를 통해 교수의 그림자가 언뜻 비쳤다.
"너의 가족들을 찾아줄께." 펠릭스가 상냥하게 말했다. "빠른 시일 내로."
바렌티나는 잘 납득이 안 간다는 표정으로 펠릭스를 쳐다보았다. 펠릭스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듯이 안고 차가 있는 곳으로 서둘러 갔다. 길가에 움직이는 사람의 그림자는 없었다. 비젤은 엔진을 걸었다. 펠릭스는 뒷좌석에 바렌티나를 태웠다."여행을 하는 길이 좀 길단다 바랜티나, 비젤과 내가 노래를 불러줄께."
소녀는 빨려들듯이 음침한 조초건물을 쳐다보고 있었다. 펠릭스는 그녀의 옆좌석에 놓여있는 인형의 집에 손을 가져갔다.
"어때, 너에게 선물을 주려는 거야. 바렌티나, 바로 이것과 같은 집에 넌 가는거야. 멋지고 넓은방이 있는 곳으로 말이야. 자아, 이 가구도 움직일 수가 있단다."
바렌티나가 들여다보자 펠릭스는 작은 침대를 집안에서 꺼냈다.
"이건 너의 침대야. 네 방에 놓아둘 꺼야."
데쟈뷰야, 라고 그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모든 것이 이전에 한번 있었던 일이다.
"이쪽 구석에 놓도록 하지."
빅토리아조의 인형의 집 한쪽 끝을 받들고 있는 에드 클레스웰이 말했다.

  제17장 영혼의 그림자



게이라드는 낮은 테이블 저쪽에서 그를 쳐다보았다. 매끄러운 테이블 표면에 아침의 보드라운 햇살이 충만해 있었다. "그럼 어째서 펠릭스는 그 소녀를 구했을까요 ? 그 아이는 당신에게 있어 무엇을 상징하고 있을까요 ? "
"순진한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뭔가 살아남을 값어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요. 그 애는 당신의 일부, 싱싱하고 순진한 일부지요. 우리들은 그 부분에 작용해 눈뜨게 하지 안 되었지요. 왜냐하면 그 연약한 아이는 당신의 구원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당신의 인격 내부에 깃드는 가혹한 부권 지배의 세력, 나치의 힘으로부터 당신을 구해낼 수가 있을 지도 모릅니다."
카스피안의 손끝이 느긋한 안락의자의 폭신폭신한 팔걸이에 박혔다. "펠릭스는 지금도 나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나의 존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게이라드는 언제나 그렇듯이 까닭도 없이 합장하고 그대로의 모습으로 코 밑으로 가져갔다. "위협당하고 있는 것은 당신의 자아입니다. 당신의 존재 그 자체가 아니라 거기에는 차이가 있어요."
"이 일에 관해서는 이전에도 당당히 회우한 적이 있어요."
"그렇습니다. 지금도 하고 있는 셈입니다. 금후에도 이 현상이 이해될 때까지는 같은 점에 몇 번씩이나 언급할 것입니다."
"이 현상이 이해될 수 있다는 건 어떤 상태를 말합니까 ? "
"무엇인지 알 수는 없군요." 미소가 문뜩 사라지고 게이라드는 또 다시 생각에 잠겼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때의 어조는 온화했고 그 음색으로 시비하는 모습은 조금도 없었다. "당신의 몸에 대체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 우리들 어느 쪽에도 과연 알 수 있는 때가 올지 모르겠군요. 수수께끼입니다. 우리들은 아무런 해답도 얻지 못한 채 무덤에 들어가는 것이에요."
카스피안은 끄덕이긴 했지만 남모르게 절망의 한숨을 지었다.
"나는 아무 것도 기억하고 있지 않은 영화 속에서 갖가지 신을 연출한 셈입니다. 당신은 일생 일대의 연극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나의 에이전트는 말합니다만, 나는 그곳에 있으면서 감상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게이라드는 창가로 머리를 돌렸다. 잎 그늘에서 벌레가 한 마리 고조된 날개소리를 내고 있다.
"당신은 아키타 입에 고민하고 있는 것이에요. 이것은 누구나 부닥치게 될 가능성이 있는 가장 어려운 상태입니다. 그러나 그것에 견뎌낼 수 있다면 당신의 견해는 바뀔 것이고 최종적으로는 이 세상은 당신에게 자비로운 얼굴을 보여줄 것입니다." 게이라드는 창가로 걸어가 아직도 벌레의 날개소리가 들리고 있는 잎 그늘을 응시했다.
"눈 아래의 곳, 당신의 눈에 비치는 것은 노여움에 찬 얼굴 뿐이며 그것들에 대항해 일어선다는 남성 공통의 백주몽을 당신은 쫓고 있을 뿐입니다."
카스피안은 창가에 선 게이라드의 모습에 시선을 응집했다. 벌레의 날개소리는 그의 귓전에도 닿았다. 낯익은 그 날개소리는 인간 세계를 넘어선 걷잡을 수 없는 차원을 여는 부호처럼 들렸다.
문득, 정신을 차리자 게이라드가 얘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울적한 벌레의 윙윙대는 소리에 방해되어 소리는 들리지 않고 다만 입술만 움직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윙윙대는 소리는 더욱 높아졌다. 카스피안은 몸을 움직이려고 했다. 그런데 날개소리 때문에 뇌가 피로한 듯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지금이다라고 그는 소리치고 싶었다. 지금, 그것이 일어나려고 하고 있다 ! 그렇지만 저 건조시켜 굳게 졸아든 아마존의 전리품인 사람의 머리처럼 그의 입술은 꿰매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때 그의 뇌리를 가로지른 것은 그러한 내키지 않는 머리와 마찬가지로 자신은 생명에서 단절된 어떤 행동도 일으킬 수 없으며 그대로 얼어붙은 것처럼 눈을 뜨고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절단된 머리에 있어 시간은 형태를 잃고 내부를 향해 낙하했다. 게이라드의 방도 이제까지의 정돈을 상실했다. 눈부신 햇살에 비쳐든 벽은 창문이 열대의 광채를 잃어버림과 동시에 바탕도 변하고 색깔도 바뀌었으며 거무스레한 석벽으로 화했다. 창가에서 쉬고 있던 게이라드 자신도 변모했다.
매를 생각케 하던 풍모는 더욱 날카롭게 되고 지적이었던 눈도 매서운 기미를 띠게 되고 옷은 게이라드의 에밀 바이아스의 군복으로 바뀌었다. 방안의 가구도 어둡고 무거운 국립경찰의 그것으로 변했다. 책상 위에는 작은 라이트가 하나 빨갛게 빛을 발하고 있었으며 그 방에서 유일한 불빛으로 되어 있었다. 도어가 열리고 군복을 입은 사람이 들어왔다.
카스피안은 테이블 위의 덧없는 불빛보다도 더욱 덧없는 것----
유령이라도 나올지 모르는 음산한 방안에서 사람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의 가냘픈 한 줄기의 사고, 안개의 혼, 그림자 ----가 되어 두둥실 허공에 떠돌았다. 테이블 위에는 황색 서류철이 놓여 있었다. 금기된 제목에 파르켄하인이라고 되어 있다. 순간 악몽과 같은 쇼크에 엄습됐고 이어 읽지 못하고 있는 동안에 문자는 희미한 빛을 반짝반짝 빛을 내며 용해되고 말았다.
테이블의 불빛 속에 숨어들었으며 빛 속을 빠져나갔다. 환상과 같은 나의 모습은 무너지지 않을 뿐더러 어떻게서든 모습을 유지 하려고 했다.
바이아스의 담배 연기와 뒤섞여 통과하여 천천히 방향을 바꾸어 다시 두 사나이 앞에 날아왔다. 담배를 재털이에서 집어든 바이아스는 파르켄하인의 서류철, 위에서 가볍게 그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풍선을 비벼대는 것 같은 듣기싫은 소리가 났고 별안간 두 사람의 소리는 분명하게 들리게 되었다.
"...놈을 매다는 데 충분해. 그러나 살려두는 편이 이쪽에는 더욱 유리하지." 서류철 속의 서류 위에 재가 주르륵 떨어졌다. "녀석을 통해 뮬러에게 접근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내가 바라는 사냥감은 뮬러야. 뮬러의 머리가 떼굴떼굴 바구니 속에 구르는 것을 확인해야겠어. 그곳이 그놈이 끝내 가야 할 곳이야." 바이아스는 재털이에 담배를 눌러 비볐다.
또 한 사람의 남자는 서류철을 당겨 자꾸만 넘겼다. "이건 지독하군. 물샐틈없는 조사란 이런 것이구만. 여자는 어떻게 하지 ? "
바이아스는 겨우 창문 쪽을 쳐다보았다. "여하튼 상대는 전에 스카라 좌에 있던 댄서야. 앞으로는 혼자 춤을 추게 하도록 하지. 언젠가 베일이 벗겨질 때가 올 테니까."
바이아스는 서류철을 덮어 그것을 건사해 둔 다음 서류철을 꺼냈다.
"죄수를 데려와."
방을 나간 게쉬타포의 조수는 한 육군 장교를 동반하고 돌아왔다. 장교는 이곳저곳 반점투성이로 쇠약해 있었고, 이제라도 무릎에서 꺾이듯이 쓰러질 것 같이 보인다. 거칠게 의자에 앉게한 그 얼굴을 불빛이 비춰주고 있었다.
카스피안은 희미한 불빛 속을 떠돌았다. 흥분때문에 몸 좌우로 심하게 흔들렸다. 그 죄수는 현실 세계의 표리 양면에 살고 있는 그가 아는 사람이었다. 한쪽 면에서는 여단장의 파티에서 카페를 순례하자고 권유한 그 장교. 다른 한쪽 면에서는 에드 클레스웰.
"너는 유죄를 선고당했다. 내일 밧줄을 목에 감고 죽는다. 숨통이 끊길 때까지 반 시간은 매달려 있어야 할 것이지만 내가 청산가리의 캅셀을 준비해 줄 수도 있다. 너의 상관 뮬러 대령에 관한 정보를 아주 조금이라도 누설해 준다면 말이다."
카스피안은 바이아스의 권총을 권총집에서 뽑아버릴까 했지만 손이 권총을 지나쳐 버렸다. 책상의 전등에 다가가 어떻게서든 불을 끄고 방을 캄캄하게 만들어 친구를 도망치게 하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곳에 떠돌아 갔지만 돌연 전등은 열대의 태양처립 번쩍번쩍 빛나기 시작했다. 순간 멈추질 못하고 그 속을 빠져나가 카스피안은 그대로 차원을 넘어섰다.
낯익은 창문에서 태양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게이라드 의사가 책상에 앉아있었고 서류철을 덮으려고 했다.
"...융그는 인간의 혼에 깃드는 요술쟁이처럼 그림자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들로 하여금 거대한 힘의 희생자라고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책상 서랍에 서류철을 밀어넣었다.
카스피안은 입술을 봉해버렸던 실이 풀리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시간은 지나갔습니까 ? "
"죄송하지만 방금 시계의 차임벨이 울렸습니다. 들리지 않았습니까 ? 그는 재규어의 렌트카 좌석 한가운데의 팔걸이에 부착된 전화기를 들었다." "마일론, 세트에 지각하겠어. 어쩌면 오늘 하루 종일 나타나지 못할 지도 모르겠어. 잔소리하지 말아 마일론, 내가 등장하지 않는 장면을 촬영해 두면 되잖아. 에드클레스웰이 어색하게 됐어. 가보지 않으면 안 돼."
수화기를 내려놓고 골드워터 캐논 드라이브를 크게 돌아들면서 스피드를 최대한 올렸다. 문릿지에 닿을 즈음에는 하늘을 날으고 있을 것이다. 타이어는 노면에 삐걱대면서 조용한 거리를 질주했다. 만약 경찰관에게 저지당하면 천리안으로 보이는 환상을 쫓고 있다고 설명할 수 밖에 도리가 없다.
마르호랜드 드라이브로 나서자 샤만 오크스를 향해 왼쪽으로 꺾어들었다. 엔진은 쾌조. 투명한 맑은 하늘이다. 이런 좋은 날에 그 누가 번민할 것인가 ?
냉각시킨 마실 것과 뜨거운 햇살 외에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인가 ?
하필이면 LA에 이런 불행이 덮쳐오다니.
세바르베다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에드의 집이 있는 꼬불꼬불한 계곡 길까지 차를 몰았다. 에드는 스모그의 훨씬 위, 황금색의 오염에 아련한 믿기지 않는 전망에 둘러싸여 살고 있었다. 길 너비는 극도로 좁았고 어떤 속도로 달려도 위험한데 이 산허리의 하위 드라이버는 누구냐고 하면 그는 에드 클레스웰인 것이다. 지금 그를 만나게 되면 잠시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정상에 이르러 스피드를 떨어뜨리고 계속 올라가자 이번엔 클레스웰의 집이 있는 좁은 분지를 향해 내려갔다. 차를 대는 곳에 에드의 차가 주차해 있는 것을 인정하고 그 뒤에 재규어를 대었다.
내려가 현관의 도어 벨을 눌렀다. 응답이 없다. 도어에는 자물쇠가 걸려 있다. 뒤로 돌아 창문으로부터 팔을 집어넣었다. 기어올라 뒤쪽 홀로 들어갔다. 어디에나 티끌 하나 없고 모든 것이 잘 정돈되어 있고 복도에는 월트 디즈니의 원화가 늘어서 있다. 막다른 곳에 서 있는 것은 등신대의 <양철제의 나뭇군>의 복제품이었다.
에드의 모형 기관차의 울림소리를 의지해 복도를 지나갔다. 전방 출입문 위에 <유니온 퍼시픽 철도>라고 적은 팻말이 걸려 있다. 그 아래를 빠져나가 그가 기차놀이를 하는 방으로 들어 갔다.
긴 화물열차가 커다란 타원형으로 깐 레일 위를 칙칙 폭폭 달리고 있다. 건널목의 차단기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고 열차가 지나갈 때마다 작은 오두막에서 사나이가 나와 작은 등불을 흔든다.
카스피안은 열차가 달리는 바쁘기만한 방을 빠른 발걸음으로 빠져나가 거실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곳에는 턱시드 모습으로 탭댄스화를 신은 클레스웰이 의식을 잃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카스피안은 긴급 번호를 돌려 구급차를 요청하고 나서 클레스웰 곁으로 되돌아가 거칠게 잡아당겨 일으켰다. 머리가 풀쑥 기울었다. 카스피안은 뺨을 찰싹찰싹 손바닥으로 때렸다. 아랫턱이 덥썩 열리고 입가에서 침이 흘러나왔다. 몸을 격렬하게 흔들어대도 클레스웰의 머리는 봉제 인형처럼 건들건들 움직일 뿐이었다.
"정신차려 에드... ! " 머리를 힘껏 원래로 돌려 입안을 들여다보고 질식할 위험이 있는지 확인해 보았다. "당신이 지금 쓰고 있는 각본에 나는 2만5천 달러를 선불했다구." 에드 클레스웰을 빙그르르 뒤로 향하게 하고 견갑골 사이를 두드렸다. 하얀 점액이 에드 클레스웰의 입에서 분출되어 나왔다. 다시 한번 등을 두드리자 클레스웰의 신체는 카스피안의 팔안에 축 늘어졌다.
그런 클레스웰을 끌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탭 슈즈의 금속 크리트가 시끄럽게 바닥을 긁어댔다. 개수대에 몸을 밀어붙여 놓고 머리를 수도꼭지 밑에 내밀게 했다.
"일어나, 다음은 너의 18번이야."
물이 폭포수처럼 쏟아내리고 에드 클레스웰은 한쪽 눈을 떴다. 쏟아지는 물에서 피하려고 한쪽 팔을 움직였다.
"죽게 해줘... 제기랄... 가만 놔 두라니까..."
수도꼭지 밑에서 머리를 내려 위를 향하게 했다. "정신차려 에드, 우리들 함께 리덩철도를 타는 거야."
클레스웰의 다른 한쪽 눈이 열렸다. 핏발이 서고 번쩍번쩍 빛났다. 안개를 통해 그는 카스피안을 멍청히 쳐다보았다.
"빌어먹을 놈, 히어로 놈들... 뭐라고 하면 중뿔나게 나서고 지랄이야 ! "
"그게 우리들의 일이어서 말이야."
"변변히 자살도 못하겠군... 우리집마저도 프라이버시가 없어졌어." 무릎이 탁 꺾이고 스르르 개수대에서 미끌어져 내렸다. 카스피안은 클레스웰의 신체를 끌어올려 다시 한번 치받들었다.
"내게 빛을 지고 죽는 것은 절대 용서하지 않아. 그 각본을 써내기 전까지는 안 돼."
"나는 탭 슈즈를 신고 있었지. 가랜드를 추고 있었어... 무지개 저쪽에서... 드디어."
카스피안은 클레스웰의 몸을 겨드랑이 밑에서 받들고 걷게 했다. 부엌을 나와 거실을 향했다. 발을 질질 끌며 나아가는 클레스웰의 탭 슈즈가 판자를 깐 마루에 계속 질질 끄는 소리를 냈다.
"목을 끊어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집에 있는 자를 수 있는 것이란... 호밀의 크래커 뿐이었어."
"구급차가 왔어. 올라타면 병원까지 사이렌을 울려 줄 거야."
눈을 감았는가 했더니 다시 클레스웰은 의식을 잃었다. 카스피안에게 심하게 흔들려 호리호리하게 긴 클레스웰의 몸은 몸을 꼬은 채 허수아비처럼 버둥거렸다. 그는 천천히 눈을 뜨고 카스피안을 쳐다보았다.
"난 망칙한 인간이야... 이제 보게 될 거야. 한번만."
카스피안에게 떠받치어 비틀거리며 방구석에 놓여진 팬더의 커다란 봉제 인형한테 다가갔다.
"지퍼를 열어주게... 등에 있는."
카스피안은 팬더를 손에 들고 지퍼를 열었다. 와르르 잡지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걸 보고나면 날 죽게 해주게."
카스피안은 잡지를 펼쳤다. 그것은 소아용 포르노 잡지였다. "그래, 당신에게 이런 경향이 있었군 ? "
"그들이 아니면... 난 안 되는 거야." 에드 클레스웰의 무릎이 풀썩 꺾이고 카스피안은 다시 일으켜 세웠다.
"염려하지 말게, 에드. 잘 될 거야.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우리들이 무엇이든 돌봐주겠어."
"우리들 같은 녀석들을 가리켜... 소년 애호자라고 하는 거야."
클레스웰은 구역질이 나서 위를 꿈틀댔다.
"LA에서는 필요한 것을 무엇이나 손에 넣을 수 있어."
"좋아. 치킨을 찾아 줄께. 로드 아일랜드 레드종의 치킨으로 건강을 되찾게나."
"이봐, 날 죽게 내버려둬..."
카스피안은 집안을 점령하고 있는 장난감을 새삼 둘러보았다. 그 아이들은 이곳에 와서 에드의 열차나 게임이나 태엽 장치의 장난감으로 자못 즐겁게 놀았을 것이다.
"자넨 뭣하러 이곳에 왔지 ? 지금쯤은... 영화를 찍고 있을 시간이 아닌가 ? "
"환상을 보았어."
"환상을... 보았다고 ? "
"게쉬타포가 자네를 체포했어. 자네에게 청산가리를 먹였어."
"...기분나쁜 얘기군, 카스피안... 자네는 징글맞은 녀석이야... 하지만 달려와 주었어.. 잘 와주었어."
"구급차가 와도 죄다 얘기할 것은 없어."
"얘기하겠어. 이번부터 그걸 쳐박는 것은... 습기찬 아이스크림콘만으로 하겠다고."
"아니면 이 팬더 ? "
"그건 안 돼, 내가 모두... 충전물을 빼버렸으니까."


 제18장  유혹의 덫



캐롤 카스피안은 참대로 만든 그네를 타고 천천히 앞뒤로 흔들면서 파티오에서 크라이엔트의 일을 얘기하고 있었다.
"그의 그녀는 <인터내셔널 관광>의 주인이에요. 마치 유람기구 같이 커다란 여자지만 말에요. 대단히 성실한 사람이에요."
캐롤의 손가방이 정원 테이블 위에 열려 있었고 카스피안은 천천히 페이지를 펼치면서 최근의 광고에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거기 있는 것 가운데 몇몇은 그녀의 집에서 찍은 것이에요. 모든 것들이 대리석 일색이어서 난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어요. 현관 포치의 기둥은 샴페인 잔 같은 모습을 하고 있더라구요."
"좋은 취미를 가지고 있군."
"난 어딜 가나 거물을 잘 따르게 하는 거예요. <인터내셔널 관광>이라고요----파르마 데 마요르카가 권해줬어요, 저어, 줄지어 룸바를 추고 있는 것 보았어요 ? " 올 칼러의 광고를 가리키며,
"60세 이하의 사람은 없으니까 이미. 그야말로 놀라 숨을 죽이는 아름다움이지요."
카스피안은 테이블 위에 매단 등불의 조용하고 아름다운 불빛 속에 앉아 있었으며, 익숙한 캐롤의 수다가 소나기처럼 머리에서 퍼붓는 것에 내맡기고 있었다. 울창하게 무성한 가지를 늘어뜨렸고 수목에서 사향과 비슷한 온화한 밤바람에 실려 슬쩍 감돌아 다시 바람에 실려 사라져버렸다.
"제2일째" 캐롤이 브랑코로 슬쩍 다가왔다. "라바트의 파레스 호델에서 겨자를 듬뿍 친 점심. 그 후엔 전용의 모터코치에 타고 시내 관광----이 모터코치란 것은 말이죠 유고슬라비아에서 사들인 세코한의 시내버스에요. 하지만 모터코치라고 부르는 것이 그안에 바아 일식을 실은 뭔가 커다란 승용차같이 들리죠. 칼라풀한 팜플렛의 위력이란 대단한 것 같지 않아요 ? 이미 그것만으로 하나의 독립된 것이에요, 이런 의미 알 수 있겠죠. 그리고 당신 최근엔 누구와 자지요, 데이빗 ? "
캐롤의 손톱이 슬쩍 다가와 카스피안의 무릎에 살짝 닿았고 다시 쓱 당겨져 버렸다.
카스피안은 철망 창문 너머 달이 비쳐지는 뜰에 눈길을 모았다. 캐롤은 다시 슬쩍 다가왔지만 이번엔 닿지 않았다. "어쩐지 싫어." 우쭐한 목소리 같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혐오감이 듬뿍 단긴 솟아오르는 말의 샘을 안고 있는 그런 여자였으므로 카스피안은 문득 그것을 부추기는 그런 행동은 일체 하고 싶지 않았다. "저어, 상대가 누구예요 ? 로마."
"아무와도 자고 있지 않아. 난 발광하려고 하고 있어."
"그 닳고 닳은 년, 납작한 판대기를 만들어 벽에 붙여놓고 말겠어 ! " 너무나 화가 치밀어 부랑코를 힘껏 앞으로 흔들어 철망 창문에 발을 집어 넣었다. 그물은 간단히 찢겼고 캐롤이 후퇴하는 동안에 축 안쪽으로 늘어졌다. "역시 생겼군요, 실컷 즐기시구려."
"난 아무 것도 즐기고 있지 않아."
"빤히 들여다보인단 말이오. 이런 하등동물  ! "
"게이라드에게 전화해 봐. 내가 지금 어떻게 되어 있는지 가르처 줄 테니까. 여자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야."
"연극이 훌륭하군요. 역시 배우라서." 다시 달려 들어 철망 창문을 하나 더 구멍을 냈다.
카스피안은 빠끔히 구멍이 뚫린 한쌍의 구멍에 눈길을 보냈다.
"모기가 들어오잖아."
"좋잖아요."
캐롤은 그네를 타고 와서 이번엔 두 발로 엷은 철망 창문을 걷어차고 두 구멍을 하나의 커다란 구멍으로 만들었다.
"당신은 <최저 요금으로 구아다라하라의 휴가를 즐기자>의 관광 안내자가 되는 게 좋겠군요. 머리를 검게 염색하고 팬츠스츠를 입은 할망구들을 바꾸어가며 잘 수가 있으니까. 그래 그래요. 약간 입수염을 길러 보는 게 어때요 ? "
"난 대단히 복잡한----"
"----그걸 하고 있는군요. 그렇다마다요, 가엾은 사람. 로마 위에서 망서리고 있겠죠, "
"캐롤, 도대체 나보고 어떻하라는 거야 ? 촬영 기간의 압박은 당신도 잘 알고 있잖아."
"로마는 당신의 압박을 몽땅 분출해 주겠지요." 캐롤의 발이 그물 창문의 구멍을 쑥 통과했다.
카스피안은 일어나 부탕코의 밧줄을 붙들었다. 그네는 뒤틀리면서 빙글빙글 흔들렸다. 캐롤은 그의 무릎을 노려 발을 걷어찼다.
"내 부랑코를 방해하지 말아요."
카스피안은 로프를 붙든 채 그네를 멈추고  있었지만, 아내의 몸에 손을 대는 바보 같은 짓을 하지 않았다.
캐롤은 남편이 입고 있는 방울뱀 가죽의 부츠를 내려다 보았다. 최근 그가 네바다에서 산 것이었다.
"뱀가죽의 구두 따윈 보기도 싫어."
"뭐라고 ? "
"뱀가죽 구두라고 했어요. 이 천박한 바람둥이."
"캐롤, 내 생활에서 당신에게 알리지 않는 편이 좋은 일도 있을 수 있는 거야. 당신에게 걱정을 끼치게 하지 않기 위해서도."
"당신은 다른 여자들과 같이 자고선 이제까지 구린내 나는 변명을 산더미처럼 해왔어요. 하지만 이번의 이건 표창감이군요."
그네에서 내려 와락 그에게 덤벼들려고 했다. 그 서슬에 하얀 스커트의 레이스가 철망창문의 뚫어진 곳에 걸려 찢어졌다. 캐롤은 화가 치밀어 그것을 내려다 보았다. "오스카 데라렌타인데. 469달러나 준 거야, 바겐세일해서도."
"당신이 그 지나친 연기를 그만두면----"
캐롤은 커피 테이블을 걷어차 잔과 접시를 날려보냈다.
"난 엉뚱한 짓을 해치우는 것이 취미예요."
손가방을 집어들자 철망 창믄의 구멍에서 뜰을 향해 내던졌다.
"하지만 대단히 섹시한 기분이 돼요."
카스피안은 낙심하여 주저앉았다. 그는 사막의 세트에 있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사랑하는 아내와 느긋이 쉴 수 있는 밤을 지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 아내는 그의 앞에 가로막고 서서 그가 새로 맞춘 신발 위에서 발을 구르고 있었다.
"그녀 때문에 이걸 신고 있은 거죠 ? 싸구려의 웃음을 마구 휘두르고 ? 당신의 멋진 의치를 구석구석 그녀에게 보여주며 ? "
"당신은----추측만 하고----"
"날 분석하는 것은 그만둬요, 얄팍한 거짓말일랑 그만두라구요 ! 벌써 몇주일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옥신각신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에요. 하지만 당신을 보고 있으면 여자의 그곳이----"
"캐롤----"
"캐롤이라고 부르지 말아요 ! "
"그럼 뭐라고 부르지 ? 당신 이름이 캐롤이 아닌가 ? "
그녀는 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어째서 날 상처주지 않으면 안 되죠 ? " 기진맥진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네에 풀썩 주저앉자 양 무릎 사이에 손을 축 늘어뜨렸다. 스커트의 옷깃이 들어올려져 있었다. 아랫입술이 와들와들 떨렸고 마스카라가 흘러내렸다.
"하필이면 그런 로마 프렌치 같은 포르노 여배우 따위와."
카스피안은 그녀의 옆에 무릎을 꿇었다. "난 정말 진실을 말하고 있어. 로마하곤 아무 일도 었어. 다른 누구와도."
"저리 가욧 ! "
카스피안은 양손을 힘었이 늘어뜨리고 우물우물 일어섰다. 지금은 약간 김을 빼는 것 뿐이겠지만 이제 좀더 통렬하고 독이 있는 공격을 가해 올 것이다.
"캐롤, 나의 태도는 확실히 미지근했어. 변덕스러웠어. 뜻하지 않게 당신을 냉대하고 조롱했는지도 몰라. 하지만 나 자신의 노이로제가 임박했어. 2천만 달러의 영화가 내 어깨에 걸려 있는 데 촬영 중에 내 자신의 행동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게 되는 거야. 갑자기 블랙아웃(명암이 엇갈림)이 되는 거야. 대사를 말하고 있는 것 마저 잊어버리고 마는 거야."
캐롤은 남편을 올려다 보았다. 마스카라가 흘러내린 눈꼬리 탓인지 술에 취해 울기 좋아하는 광대의 눈처럼 되었다.
"속이는 방법에도 여러 가지가 있군요."
"속이고 있는 것이 아니야. 난 어둠 속의 세계로 들어서고 있어. 당신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어두운 곳이야. 지금의 나에겐 누구와 잔다거나 자지 않는다는 것은 문제가 아니야. 이세상 그 자체에서 나는 발을 밖으로 내딛으려고 하고 있어."
"그게 당신의 일 아녜요 ? "
"캐롤, 내가 행복해 보여 ? 지금 당장이라도 정신병원의 신세를 지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상태라구."
캐롤은 그네에서 일어나 카스피안의 앞을 그냥 지나쳐 앞뜰로 나섰다. 카스피안은 그 뒤를 따랐으며 밝은 달밤에 은빛 잎을 매단 식물군 속으로 들어갔다. 캐롤은 손을 앞으로 깍지를 끼고 눈을 내리깔고 자갈을 깔아놓은 작은 길을 쳐다보고 있다. 그녀도 이젠 늙었구나 하고 카스피안은 문득 생각했다. 늙어 투쟁할 의사를 잃은 캐롤. 그녀는 평화를 구하고 있는 것이다. 카스피안은 살며시 소극적으로 그녀의 몸에 한쪽 팔을 올렸다. 캐롤은 떨쳐버리려고 하지 않았다.
"용서한 건 아니에요. 지금 상황에 따라가지 않을 뿐이죠."
"나도 그래."
두 사람은 입을 다문 채 오랫동안 서 있었을 뿐이다. 이윽고 캐롤은 지친 한숨을 쉬었고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젠 됐어요. 들어가서 수면제나 먹어야겠어요."




제19장 비밀 클럽



사막의 밤은 썰렁하니 차갑다. 해질무렵이면 세트의 분위기는 일변한다. 불을 켠 유개차와 텐트는 사막에 야영하는 일대 캬라반으로 변모했다. 카스피안은 차양 아래 설치한 긴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머리 위에는 전구가 잇대어 연결되어 있었고 촬영대의 멤버들이 모여 커피를 마시거나 수다를 떨고 있었다. 카스피안의 옆에는 마일론 피쉬가 앉아 종이접시의 파이를 허기지게 먹고 있었다. 마일론은 무엇인가를 살피는 그런, 시선을 카스피안에게 보내며 물었다.
"또 그 분석의한테 갔었나 ? " "갔었지. 왜 ? "
"대체 그녀석은 자네한테서 얼마나 가로채곤 하지 ? "
"그저 그렇지."
"그저 그렇다니 ? "
"도움이 필요할 때 얼마간 그저 납득할 만큼이지."
"우리 단골에 거물인 록큰롤러가 있어. 이름은 대지 않겠지만. 그녀석의 분석의는 분으로 따져 치료비를 짜내는 거야----정확히 말해 1분당 4달러야. 예고도 없이 왕진하러 오지. 식사 중이건, 손님이 와 있건, 한참 섹스 증이건, 수면 중이건 상관 않고 말이야. 그의 행동의 상호 작용을 실제로 알아보기 위해서라면서."
"1분당 사달러 ? "
"문간에서 문간까지. 리무진을 타고와서 아무런 기별도 없이 그의 집에 들어올 때까지의 사이도 메타는 돌아가고 있다는 거야. 그 뮤직시언이 여행길에 올랐을 때도 붙어다니며 호텔 생활의 스트레스를 부드럽게 해주지. 그것도 1분에 4달러야. 그 비용을 음악가는 어떻게 지불하고 있는지 알아 ? 앨범을 낼 때마다 그 돌팔이 의사에게 인세에서 코미션을 주는 거야. 돌팔이는 1년간의 계약을 그와 맺고 있어. 굉히 능숙한 장사꾼이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나 ? "
"뭔데 ? "
"그녀석의 에이전트였으면 좋았을 텐데." 마일론은 파이를 먹어 치우고 종이접시를 내밀었다. 전구는 그의 머리 바로 위에 있었고 대머리가 매우 강렬한 빛을 반사하고 있다.
"그래서 말인데----자네 캐롤과 싸웠다며 ? "
"어떻게 그걸."
"부인들이 남편의 에이전트에게 전화 해오는 원인은 하나지. 어떤 상태지 ? 화해했나 ? 아니면 미국 제일의 이혼 전문가인 변호사의 이름이 필요한가 ? 나도 그 정신과 의사를 고용하고 있었으면 좋았을걸. 1분당 4달러를 지불하고 있어도 저녁 식사 때 왕진해 달랠수 있다면 말이네. 대개의 부부 생활이 암초에 부딪치는 것은 저녁 식사 때로 시세가 결정되어 있는 걸세. 연구필이야."
"누가 ? "
"내가. 두 번째의 와이프는 저녁 식사의 식탁에서 실제로 파이를 던져왔어. 레몬 파이였지. 일생을 두고 잊을 수 없네. 그 장면에 판사가 같이 있어줬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그 방면의 인간에게 목격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야."
"캐롤과 나는 잘 되어가고 있네, 마일론. 그건 아주 하찮은 오해가 원인이었어."
"유비무환일세 데이빗, 그것만은 말해두겠네. 내가 다른 사람을 점심에 같이 데려갈 때는 반드시 사전에 그 레스토랑에 전화해 어느 카드가 그곳에서 사용될 수 없는지 확인하지. 그런데 그 사용할 수 없는 카드를 나는 가져가는 거야. 사소한 수고이지만 유의해 두는 게 좋아. 귀여운 여자일수록 이혼 법정에선 잘 설쳐대니까."
워키 토키를 손에 든 조감독이 차양밑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이제 5분이 지나면 나갈 차례입니다."
카스피안은 끄덕이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마일론도 일어나 둘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나섰다.
"데이빗, 사적인 문제로 자네의 명연기를 흐리게 하지 않도록 ! "
"마일론, 카메라 앞에 서 있던 시간의 절반은 난 그곳에 있지 않았어."
"자네는 항상 연기의 첨단에 서 왔네. 자네가 항상 뭔가를 개척하려고 해온 것은 모두 인정하고 있어요."
"그 동안 나는 나치의 독일에 있었어, 강제노동수용소에 말이야."
"자네는 연기에 플러스되는 것은 제대로 잘 받아들이는 사나이니까."
잇닿아있는 유개차 사이를 지나 촬영현장에 닿았다. 달빛에 윤곽을 드러낸 뾰족뾰족한 산들을 저멀리 바라보는 한 밤중의 사막의 일각은 우주의 저편에 있는 밤의 다른 별들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었다. 촬영대는 마치 오아시스에서 쉬고 있기나 하듯 라이트나 마이크, 소도구를 늘어놓고 원진을 만들고 있었다.
아머스는 감독의 의자에 앉았고 블랙커피를 한손에 다른 한쪽손은 파인더에 얹고 한쪽 눈은 실눈을 하고 전방의 경치를 들여다보고 있다. 그런 아머스 옆에 로마 프렌치가 시중드는 사람에게 부축을 받고 있었다. 카스피안은 로마의 반대 쪽에 앉았다. 작열하는 정사의 상대로 지목되어 있는 당사자인 로마는 마음은 이곳에 있지 않다고 하는 쓸쓸한 모습으로 그를 향해 머리를 꾸벅 숙였을 뿐이었다. 추위와 피로와 이미 이것으로 5,6주일이나 상용하고 있는 코카인 탓이다.
로마가 군림하는 혹성의 여전사가 지나갔다. 반라의 의상이 늠름한 근육아래에 움직이며 율동하는 힘을 과시하고 있다. 카스피안의 의자 뒤에 서 있던 마일론이 말했다.
"나의 머리통 따위는 포도처럼 으스러질 걸세."
조명 담당의 사람들이 조각을 상기케 하는 그 육체의 선에 매료 되어 쳐다보고 있는 동안 여전사는 위치에 자리잡았다. 카스피안의 뒤에서 마일론은 소리를 죽여가며 덧붙였다. "그래도 그녀의 에이전트를 해 보고 싶군."
조감독은 카스피안과 로마와 그 산에 나오는 배우들에게 신호를 했다. 카스피안은 제자리에 섰고 로마는 메이크업 담당과 함께 조명 밖으로 나와 거울을 들여다 보았다. 그곳에 어떻게 비치고 있는가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얼마 후 라이트의 밑에 있는 카스피안의 옆으로 돌아온 로마의 눈에는 여왕의 자신이 되살아났고 연기에 착수하려는 마음가짐이 엿보였다.
시간을 들여 그 신을 몇 캇트 찍고나서 그녀의 이마가 번들번들 빛나기 시작해 메이크업 담당은 그곳에 백분을 토닥일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곳과 코의 안쪽과. 그 사이에 감독인 아머스는 카스피안을 옆으로 당겼다.
"당신 요전번 것까지는 역에 여느 때와는 달리 맛을 더했어. 그런 연기가 오늘밤의 쇼트에서는 나오지 않고 있군. 저어, 약간 딴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멍청한 소리도 내고. 내가 말하는 뜻을 알겠지 ? "
"네, 알겠습니다."
촬영 번호기는 몇 번 더 울렸다. 카스피안은 어둠에서 누군지 모를 손으로 내민 미지근한 스프를 쇼트의 중간에 마셨다. 심야가 지났다. 피로에 초조감이 더해감에 따라 분위기가 더욱 솟아올랐고 촬영대는 초현실적인 환상 상태 가운데서 작업을 속행했다.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아머스는 말했다. "이제 언 쇼트로 오늘은 끝내지."
산이 로마의 궁전 입구에 상당한다. 감시원인 여전사가 바로, 가까이에 있다. 카스피안은 다른 별의 세계에서 찾아온 사나이로 로마의 용병이다. 일동은 로마의 혹성의 파란 달빛 아래서 야영을 하고 있었다. 카스피안 일행과 함께 앉아있는 것은 로마를 받들고 있는 총리 대신. 연출하는 재능이란 눈꼽만큼도 가지고 있지 않는 스타, 아슈레이서머즈. 대시대적인 서툰 배우로 연기자로서의 자각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대신 빌로드 같은 아름다운 목소리를 소유하고 있었다.
여전사들은 각자의 테입 마크의 위치에 돌아왔다. 카스피안과 로마와 아슈레이가 앞 경치의 위치에 자리하자 촬영반이 준비 오캐이의 신호를 아머스에게 보냈다.
아슈레이가 카스피안 옆에서 달콤한 저음으로 말했다.
"저곳에 보이는 것이 화성이야. 사막에서는 별이 참으로 잘 보이지만 난 슬슬 침대에 기어들고 싶어."
촬영이 재개되고 카스피안은 로마 앞에 한 발 전진했다----그런데 그 일보는 중단되었다. 화성이 로마와의 사이에 별안간 끼어 들었던 것이다. 여느때의 혹성은 돌연 맹렬한 스피드로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그 광채가 차츰 강렬해지고 또렷해졌을 때 그 뒤에서 한층 더 큰 혹성 명왕성이 나타났다. 엄청나게 컸고 불길해 보였다. 그 동안에도 로마와 아슈레이는 대사를 읊조리고 있었다.
"베를린은 말입니다 부인, 보드라운 퇴적 토사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프랑크푸르트의 지반은 좀더 단단해요. 밟으면 이렇게 단단해요. 은행을 세우는 데 합당한 토지이지요. 그렇지 않은가 중위 ? "
화성과 명왕성은 돌연 졸아들었는가 했더니 높은 아치형의 벽에 붙여진 로코코 풍의 램프의 유리가 되었다.
"실례." 펠럭스가 말했다. "지금 잠깐 무엇을 생각하고 있어서. 뭐라고 하셨죠 ? "
"그래요, 프랑크푸르트의 땅은 폰브라우시타인 공작 부인의 발아래 감격하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있어요."
펠릭스 일행은 프랑크푸르트의 거물 은행의 본관 앞에 서 있었다. 밤이 찾아들어 본관에는 행원들의 모습도 없었고 썰렁했다. 광대한 돔에는 두셋의 불빛이 켜져 있을 뿐. 프릭 총재를 관찰하고 펠릭스는 이 사나이가 마치 신랑처럼 신이 나서 까불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의 깊고 낭랑한 목소리는 미의 여신이 미소를 보낸 사나이의 환희의 메아리가 되어 건물의 공간을 가득히 메아리 쳤다.
군과의 거래에 그가 일말의 불안을 느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닌것이지만 뭐니뭐니해도 말러는 귀족 출신. 이번의 거래가 고결한 것이며 그녀가 성실한 인품인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중위, 당은행은 동부 점령 지구로부터 수송되어 오는 징발 사재를 수령하게 됐습니다만," 헤르 프릭은 항아리형의 복도의 전등에 비쳐지는 커다란 마호가니의 책상 저쪽에 서 있었다. 책상 아래에는 사치스러운 카페트가 깔려 있었고 옆쪽 벽에는 르네상스의 회화가 장식되어 있었다. "그것을 당 은행의 금고실에 운반한 뒤에는 ? "
"물건은 시립 전당포에 인도하여 현금으로 바꾸게 됩니다. 그리고 그 돈은 군용 자금으로 충당하게 됩니다."
"과연, 대단히 합리적이군요." 프릭의 시선은 다시 말러에게 향해졌다.
"사무 절차가 귀찮겠지만 우리들로서는 가능한 한 간략하게 끝내도록 배려할 작정입니다."
"분명히 저로서도 이 이상 책상 위의 서류를 늘리고 싶지 않으니까요. 인생에게는 좀더 중요한 일이 많이 있으니까요."
여기서 말러 쪽을 쳐다보았다. 시립전당포가 물건을 인수하는 즉시 말러는 그의 인생에서. 담배연기처럼 사라지는 것이다. 말러는 그의 손목에 접촉하면서 요염하게 웃었다. "당신이 저에게 맛보게 해 주시겠다던 그 와인은 ? "
"킷투윙거 마인리트 비너스의 햇빛입니다." 헤르 프릭이 말했다.
펠릭스는 옆에 끼고 있던 군모를 손에 들었다. "그럼 이 건에 관해서는 우리들은 완전히 합의에 도달한 셈이군요. 운전사에게 일러 호텔까지 전송해 드릴까요 ? "
말러는 프릭을 돌아보았다. "그럼 9시에 함께 할 수 있게 해주시겠어요 ? "
"그야, 물론 기꺼이." 프릭은 그녀의 손에 입술과 깨소금이 섞인 입술 수염을 가볍게 -대었다.
"그럼 와주세요 네 ? " 말러는 살며시 손을 당겼다. "제 방에 식사를 하시도록 하세요."
프릭 총재는 메아리가 지는 복도를 지나 두 사람을 정면의 도어까지 배웅했다. 펠릭스와 말러는 화강암의 층계를 내려와 운전사가 딸린 펠릭스의 차가 기다리는 거리로 나섰다. "굉장했어 공작부인."
"별로요. 그의 부인이란 사이즈 50을 입는 여인이니까."
차에 올라타자 펠릭스는 운전사에게 신호했다. 말러는 달리는 차안에서 거리로 시선을 향했다.
"당신이 제일 행복했던 때는 ? " 마치 혼잣말인 듯한 그런 말투였다.
펠릭스는 말러에게서 받은 은체 담배케이스에서 담배를 한대 꺼냈다.
"어렸을 때에 정말 행복했더 때는 잘 의식하지를 못했지. 행복이란 것에는 언제나 뭔가가 부족한 것 같아."
말러는 그대로 쭉 어두운 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부드러운 펠트 모자를 비스듬이 쓰고 있었다. 모자의 밴드에는 색이 선명한 새의 깃털장식이 하나 꽃혀 있다. 까만 긴 스커트의 그늘에서 다리를 엇겨르고 있다.
"뮌헨의 레오폴트슈트라세에서는 지금도 저 레즈비언들이 서로 포옹하고 있어요."
"그것이 당신의 제일 행복했던 시절 ? "
말러는 손가락 하나를 세워 흐려진 유리창을 위에서 아래까지 쓱 내리그었다. "아마 그렇겠죠."
펠릭스는 묵묵히 담배를 피우면서 보내는 짐들과 얼마 후 그것을 받게 될 암시장에서 알게 된 전당포 상인들의 일을 생각했다. 그 패거리들과 교섭할 수도 있다. 동부 점령 지구로부터의 우선 상품을 그들이 받을 때마다 얼마간의 코미션을 받으면 비록 그것이 얼마 되지 않아도 그것이 쌓이면 어느 정도의 액수가 되기는 했다. 쥘 수 있는 동안 쥐도록 하자. 어차피 최후에는 모두 러시아인의 것이 되고 말 테니까.
말러가 파괴된 건물의 아치형 입구의 그늘에 서 있는 노파 쪽으로 머리를 기울이고 말했다. "난 벽돌을 줍는 여자가 될 지도 몰라요." 귀걸이를 조절하여 손가락으로 작은 다이아몬드를 매만졌다.
"이곳 나라의 사람들의 감정은 황폐되어 있어요."
"이제까지는 어떠했는데 ? "
"순간이긴 했어도----아주 행복했어요."
"묘하군, 그런 기억이 없는데." 창문유리를 내려 담배를 던져버렸다.
"연극을 하고 있던 때는 행복했겠죠."
"1935년에 일을 한 것은 다만 5분이었어. 화려한 캐리어의 화려한 종말이란 것이었지." 펠릭스는 핸들을 돌려 창문유리를 올렸고 좌석의 등받이를 따라 말러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자아, 기운을 내. 신과 프로이센 인이 붙어 있으면 두려울 것이 없으니까."
그 후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펠릭스는 말러와 더불어 거리로 내려섰다. 별안간 말러가 입을 열었다. "나, 이곳에 올 때 미행당했어요. 에밀 바이아스도 당신들의 값비싼 짐들에 눈을 번득이고 있어요."
"나라의 일대사니까."
"이 정신병원 같은 나라에서 도망칠 수 있는 수배는 해 놓았나요 ? "
"도중까지 포장용 나무상자에 들어가서 가는 건 싫은가 ? "
말러는 거리 저쪽으로 눈을 보냈다. 사람의 그림자가 슬쩍 하나. 옆의 문간으로 숨어 들었다. 그래도 길다란 가죽 코트를 입은 모습은 보였다. "언제 ? "
"괜찮다면 짐들이 송달되고 프릭 총재가 서류에 사인을 마친 그날에."
"좋아요."
"알겠어, 그럼 보석류와 은행권을 정리해 둬." 뺨에 가볍게 키스 했다. "불초 펠릭스가 그대를 스위스로 보내드리도록 하지."
말러는 펠릭스의 얼굴을 차분히 쳐다보았다. "당신은 언제나 잘해 주었어요. 난 돌처럼 차가웠고.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어요. 이해해 주겠죠 ? "
"군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아, 그래도 제군은 독일을 위해 일해 주었다고 말이야." 펠릭스는 거리의 어두운 곳에 서 있는 사람의 그림자 쪽에 힐끗 시선을 보냈다. 드디어 이렇게 곁에까지 와 있게 되었는가...
차에 돌아가 손을 도어에 대었다. "준비해 둬." 소리를 낮추어 "카트글래스의 식기란 것으로 해서 실어다 주겠어. 최고급품으로."
모자의 차양 그늘에서 윙크를 보내자 차안으로 들어갔다. 문간에 숨어있는 게쉬타포의 그림자 앞을 지나갈 때 한 손을 리벌버에 대었다. 그러나 그림자는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말러가 호텔에 들어간 다음에 비로소 움직임을 보였고 가까운 창문에서 쳐다보는 동안에 걸어가 버리고 말았다.
호텔은 멀어졌고 헤드라이트는 건물 측면의 좁은 돌출 부분에서 이쪽으로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한 마리의 이무기 석상의 얼굴을 비치기 시작했다. 거리를 감시하는 조각상. 헤드라이트나 폭격의 섬광을 받아 되살아나는 꿈의 세계의 괴물들, 이미 머리가 떨어져 나간 것도 있다. 언젠가 우리들 모두가 그렇게 될 것이라고 펠릭스는 생각했다. 수족이 조각나 벽돌 부스러기를 줏는 여자들에게 모아진다.
헤드라이트의 빛에 순간 떠오른 돌의 얼굴은 이동하는 카메라가 포착했다. 영화의 한 토막이긴 해도 펠릭스는 자신이 출연한 수많은 영화를 상기해 보았다. 당시는 보잘 것 없는 "통행인" 역 뿐이었다. 그러나 "인생"이란 타이틀의 이 영화 속에서는 나는 미행이 따라붙을 만큼 유명한 배우가 되었던 것이다.
차는 방향을 바꾸어 군용지로 다가가고 있었다. 차가 정지하자 두 위병이 목숨을 불어넣은 장난감의 병사와 같이 별안간 활기를 띄었고 그 중 한사람이 전진해 왔다. 신원을 조사한 뒤 통과하라는 신호에 차가 통과하자 군인은 빙그르르 돌아 다시 장난감 병사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입구의 문이 열려지고 차는 안으로 들어 갔다. 총기고, 탄약 집적소, 사람의 그림자가 없는 운동장을 지나 주건물로 타고 들어가 주차했다.
"방금 도착했다고 알려드리고 오게."
운전사가 건물로 들어가 도어를 슬쩍 뒷짐진 손으로 닫았다. 들려오는 것은 어둠을 순회하는 보조의 철모에 소총이 찰칵찰칵 부딪치는 소리 뿐이었다.
사령부의 문이 열리고 뮬러 대령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약간 여성적  몸매로 비만한 몸이 계단 위로 올라갔다. 그것을 쳐다보고 있던 펠릭스는 모츠슈트라세의 그 캬바레를 생각나게 했다. 그때의 음악이 다시 귀에 울려 퍼졌다. 뚱뚱한 여인이 담배 연기에 아른거리는 스테이지에 육중하게 나타난 그 정경이 되살아났다.
운전사가 도어를 열자 대령은 등을 구부리며 펠릭스의 옆 좌석에 올라탔다.
"자네 그 입을 다물게, 마치 가죽을 벗긴 보리새우 같은 얼굴을 하고."
"대령님이시었군요." 속삭이듯 그런 목소리가 되었다. "그 캬바레의 스테이지에서 뵈온 것은."
뮬러는 좌석의 앉음새의 기분을 확인하는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눈이 번쩍번쩍 빛나는 유리 구슬로 되어 있었다. 있는지 없는지 희미한 미소가 입가에 스쳤다.
"그럼 그때 누구와 분장실에서 함께였다고 알고 있었다. 그 뒤 스테이지에 나타난 크레오파트라가 누구였는지 ? 현재 게쉬타포로 동성연애 억제운동의 기수로 서 있는 사나이지. 알 수 없는 일이군----
" 좌석에 자세를 진정시키고, "----재능이 어떤 도움이 되는가 하는 것은, "운전사에게 지시를 내린 뒤 다시 펠릭스 쪽으로 향했다,
"총재와 만나고 왔다고 ? "
"말러가 그의 뼈를 발라냈습니다."
"그녀에게 뭔가 적당한 선물을 해줘야겠군 그래. 자네가 좀 골라주지 않겠나 ? "
"핸드 컷의 크리스탈 글라스를 준비해 두고 있습니다만."
뮬러는 금의 물뿌리가 붙은 긴 담배를 꺼냈다.
"그렇다면 저----짐들의 수령에는 자네가 입회해 모든 종목에 관한 필요한 절차를 취해줘. 카이살에게 돌려줄 것은 돌려주고."
"알았습니다."
"자네는 대단히 유능한 군인이야, 펠릭스. 머지 않아 진급을 신청하도록 하지. 그 소매에 은실로 꿰맨 소매 휘장을 붙이는 거야. 전쟁이 끝나고 출산률을 올리기 위해 중혼이 법률적으로 인정되게끔 되면 상급 장교로써 멋진 부인을 몇 사람씩이라도 고를 수 있을 걸세."
착검한 무장병의 일대가 거리 위에 내리 비치는 달빛에 칼끝을 번쩍이면서 행진해 오는 것이 보였다. 뮬러는 그쪽으로 슬쩍 눈길을 보냈다.
"우리나라의 공업계와 미국의 공업계 사이에 신사협정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 친구들은 저렇게 하고 행진할까 ? "
"어떤 협정입니까 ? "
"뭐 여러 가지 폭격 목표를 간과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지. 어느 미국 회사의 사정으로."
병사들의 대열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뮬러는 향수를 바른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가볍게 두드렸다. "나는 일의 풍자적인 면을 생각을 하면서 나 나름대로의 전시를 보내고 있었지."
사령부의 차의 계기판이 희미한 불빛을 내쏘고 있었다. 두 개의 작은 유리의 달에 이끌린 나방이 계기판 위에서 날개를 파닥거리고 있었다. 운전사가 날려보내자 뒤쪽으로 날아왔다.
그 날개가 펠릭스의 뺨을 스친 순간, 하나의 기억이 와락 솟아 올랐다. 그것은 그의 내부에 잠재한 한 사나이의 기억, 항상 그곳에 대기하고 있는 잔상의 일부였다. 사나이가그의 내부에서 힘을 증가시키자 동시에 무력감이 덮쳐왔다. 그놈은 내가 잠들려고 할때를 노려오고 있어, 펠릭스는 꾸벅꾸벅 배를 저으면서 생각했다.
"나의 질문에 대답을 해주지 않는군." 빅터가 말했다.
찰카닥 하는 희미한 소리와 더불어 또 하나의 세계에로의 문이 닫혔다. 카스피안은 공항을 향하고 있는 리무진 안에 있었다. 빅터가 동승하고 있었다. 그것은 사막에서의 촬영이 끝났다는 것이다. 즉, 밤은 이미 지나갔던 것이다."또 의식을 잃고 있었어."
빅터는 뺨 가득이 들이마신 공기로 천천히 긴 한숨을 토했다.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걸 나누어 주었으면 좋겠군."
"요즘은 아무런 약도 쓰고 있진 않네. 마시는 것도 그만뒀고. 비타민마저 복용하고 있지 않아. 그런데 나는 오늘 여기에 있지 않았어."
"자넨 여기 있었어, 이제부터 인터뷰하러 가는 거야."
빅터는 리무진에 비치한 바아의 찬장을 열어 멋대로 술을 따랐다.
"또 잠적해도 <헐리웃 리포터>들이 반드시 찾아내고 말겠다네."




제20장 4차원의 세계



카스피안은 시사실에 앉아 있었다. 최근에 촬영한 필름이 눈앞에서 찍찍거리며 돌고 있다. 그가 연기하는 인물은 베를린의 암상인 펠릭스-
---그 자신----마음에도 없는 다른 세계에 몸을 둔 채 살아남을 결의를 굳힌 우주의 방랑자(스타 로바)였다.
그러나 목하 스타 로바의 부조종사이고 쉰목소리를 가진 소인, 스페이스 노옴이 화면을 차지하고 있다. 그는 치명상을 입고 비가 오는 수성의 사막에서 카스피안의 팔안에 누워있다. "나는... 멀리 떨어진 다른 세계에서... 죽는군..." 힘없는 몸짓과 더불어 희미하게 어설픈 미소를 띠며 주름 투성이인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자 시사실에 확 불이 켜지고 마일론 피쉬가 불꺼진 여송연을 물고 옆자리에 앉아 있는 테브루스카 쪽을 향했다. "줄리어스, 배우를 아주 잘 부리는군. 관객의 누선에 관한 얘기야."

"몹시 배가 아파요." 캐롤 카스피안이 말했다. "하지만 이 멋진 광고를 봐요. 여백의 부분이 굉장히 효과적으로 처리되고 있죠 ? 그리고, 근사한 용기도, 의사의 피부관리에 대한 상세한 설명. 또한 남자 모델의 징그러운 얼굴을 보세요. 호색한 아저씨가 당신이 마음에 들어, 라고 말하고 있는 느낌이에요."
카스피안은 캐롤 곁의 침대의자에 앉아 있었다. 수면 부족으로 눈이 부어있다. 영화의 모래 시계는 이미 몇 번이고 상하를 바꾸었고 스튜디오에서의 촬영은 바야흐로 초읽기 단계에 들어가 있었다. 그래도 하루에 몇 시간은 캐롤과 함께 보낼 수 있었고 두 사람 사이는 아직 썩 잘 맞는데까진 가지 않았더라도 대화는 되살아나 있었다.
캐롤은 카스피안의 뱀가죽 부츠를 집지키는 개의 장난감으로 줘 버린 것 말고는 더 이상 복수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캐롤은 다이어트 콜라를 마시고 광고를 매만져 폈다.
"듀프레 박사가 내 피부가 곱다고 생각해줄까 어떨까 하고 조마 조마하면서 회의에 나갔어요."
"그랬는데 ? "
"오전 중 내내 부스럼이 턱에 싹을 티우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말에요, 시종 손으로 우아하게 감추려고 했지요."
옆에서 놀고 있는 알리샤가 전자 게임에서 눈을 치떴다.
"방금 인페더를 20 해치웠어." 오락가구를 아래에 놓더니 이번엔 지그시 퍼즐 쪽으로 살금살금 기어갔다. 조각들이 바닥 위에 흩어져있다. "이거 안 할래요 ? "
"그게 뭐지 ? 갈색이 너무 많잖아." 하고 말하는 캐롤.
"이건 밭이예요 엄마. 근사한 건초 창고도 있어요."
"갈색 쪼가리가 잔뜩 있을 뿐이야. 그런걸 가지고 너하고 놀면 엄마는 눈이 보이지 않게 될 거야. 그렇죠, 데이빗 ? 보세요, 이 광고-
---"
카스피안은 딸 옆으로 미끌어져 내려갔다.
"어렸을 때, 맨날 지그소 퍼즐을 했었지."
떨어져 있는 조각들을 표면으로 뒤집어 놓기 시작했다. 어느 것이나 온통 갈색이어서 잘 구분할 수가 없었다.
"알리샤, 이 퍼즐, 어디서 샀니 ? "
"드럭스토어에서요. 제가 사왔어요. 이거 밭이라니깐요. 보세요, 그래도 모르겠어요 ? "
알리샤는 상자 뚜껑을 들어을려 보였다. 표면애 갈색의 흐릿한 어두운 사진이 붙어있다,
카스피안은 아내 쪽을 보았다.
"이런 퍼즐, 팔게 해서는 안 되겠는데."
"아빠, 이거 전부 꼭 끼워맞추게 되어 있어요. 난 벌써 한번 해 보았는 걸요."
"완성해 보니 어떤 모양이었니 ? "
"밭같았어요." 알리샤는 조각 맞추기에 들어갔으나 문득 얼굴을 들고서 갈색 조각들의 산을 바라보고 있는 아버지에게 눈길을 멈췄다.
"아빤 또 멍청히 있네."
"일이 힘드셨단다." 하고 캐롤이 말했다.
카스피안은 상자 뚜껑을 아내에게 보였다.
"사진이 초점이 흐려----이런걸 누가 산다고----"
"아빠! " 알리샤가 말을 걸었다. "잠깐 비밀 얘기가 있는데, 괜찮아요 ? "
카스피안은 몸을 일으켜 딸 뒤를 따라 복도를 지나서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자 알리샤는 문을 닫았다. 잠시 문에 귀를 대고 있더니 이윽고 카스피안을 쳐다보며, "저런 퍼즐 따위는 하지 않아도 좋아요."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구나."
"저요, 개미농장 사 주실 거예요 ? "
"좋아, 하자만 그거라면 엄마한데 숨겨야겠는 걸."
"감출 장소는 얼마든지 있어요."
"만약에. 농장이 망가져서 개미들이 도망쳐 나가도 아빠가 사주었다는 말, 엄마에겐 절대로 말하면. 안돼 ? 먹이를 찾아서 제멋대로 들어온 것 같이 하라구, 알았지 ? "
"알았어요." 알리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방 저쪽에 있는 빅토리아조의 인형의 집으로 걸어갔다. 그 앞에 털썩 앉더니 아버지를 돌아보고,
"이젠 나 혼자서 놀께요. 엄마한테 돌아가도 좋아요. 그렇게 하고 싶으면요. "
"황공합니다." 카스피안은 등을 구부리고 알리샤의 이마에 키스했다. "그 인형의 집, 맘에 드니 ? "
"응. 여자들은 모두 알리샤라고 이름을 지었어. 이것 보세요, 이 사람들, 포치에서 티 파티하고 있어요."
"그거 좋구나."
"이것이 가정부인 라모나이고 손님용 침실에 있는데요. 지금 액세서리를 빌리고 있는 중이에요. 그렇지만 나중에 돌려놓을 거에요."
"그렇군. 하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남한테 말하지 않지. 왜냐하면 라모나는 아주 좋은 가정부니까."
알리샤는 포치에서 진행중인 티 파티에 주의를 돌렸다. "안녕, 알리샤. 당신은 알리샤를 아시나요 ? 어머, 이렇게 만나서 정말 반가워요, 알리샤..."
카스피안은 살며시 몰래 방을 빠져 나오자 복도를 따라 거실로 돌아왔다. 캐롤은 음료수를 또 다시 쇼트 글라스에 따르고 있는 중이었다. 카스피안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갈색 퍼즐 조각을 상자에 담았다.
"저앤, 인형의 집을 가지고 놀고 있어." 상자를 침대의자 밑에 밀어넣어 두고 아내 옆에 앉았다.
"내가 집에 없는 동안 저앤 뭘하고 있었어 ? "
"며칠이나 울고 있었어요."
"이번엔 또 왜 그랬어 ? "
"TV에서 자연 시리즈라는 걸 보았던 거예요, 어느 정글에서 나무가 모두 잘려 넘어지고 그때문에 원숭이들이 살 곳을 잃어버렸다나 하는 것."
"그래서 놀랐단 말이지 ? "
"저 원숭이들은 어디서 살아야 해요, 하고 계속 묻는 거예요."
"그래서 뭐라고 가르쳐 주었어 ? "
"맨숀에서 살거야, 했지요."
"성장기의 아이에겐 그럴싸하게 앞뒤가 잘 맞는 답이로군."
"알았어요. 어차피 난 이상적인 엄마는 아니니까. 원숭이들이 어디서 사는가 하는 걸, 어떻게 내가 알아요. 이근처로 이사오지만 않으면 그걸로 됐죠 뭐."
카스피안은 꼬냑이 담긴 잔을 테이블에서 들어올려 천천히 조금씩 마셨다.
"저앤. 원숭이 때문에 울고있는 것이 아니야. 나와 관계있는 일로 울고 있는 거야."
"아마, 우리 둘 다 관계있는 일이겠죠. 왜냐 하면 나로 말하면 저에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데 전혀 인내력이 없으니까 말에요. 오늘도 스킨케어 그룹의, 피부에 까다로운 분들의 모임이었기 때문에 점심 배달을 부탁했어요. 그랬더니 초밥이 5백 개나 남아버려서 내가 전부 먹어야 했어요."
캐롤은 광고지를 서류가방에 넣어 침대의자 옆에 놓았다.
"마치 압착공기의 봄베 같은 기분이에요."
"지금, 납작해진 타이어가 있었으면----"
"----나에게 연결시키겠다고. 말하고 싫은 거죠 ? " 그녀는 두손으로 주먹을 만들어 배를 누르고 몸을 앞으로 수그렸다.
"대학때 자주 생리통을 앓았어요. 이런 식이었죠. 지리학 책으로 때리면 좋아지는 수도 있었지만."
"위세 좋게 걸어보면 좋지 않을까 ? "
카스피안은 손을 내밀어 침대의자에서 일어서도록 도왔다. 캐롤은 파티오의 문까지 등을 둥글게 한 채 걸어갔다.
"브로모 벨투어 없을까요 ? "
"브로마이드계 진정제를 먹으면 머리가 이상해진다고 말했었잖아."
"스트레스가 심할 때에는요."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가 마당으로 나갔다. "배를 움켜쥐고 마당을 산책하기엔 멋진 밤이에요."
"운동을 좀 하면 좋아질 거야."
"왜 그런 말을 해요 ? " 그녀는 배를 움켜쥔 채 약초원으로 발을 돌렸다.
"무엇이 어디에 자라고 있는지 알면 다려먹는 약을 만들 수 있을 텐데."
"뭐가 무엇에 잘 듣는지 알고 있다면, 그렇게 할 수 있겠지."
"이판사판 해볼 거야."
"독에 걸려도 난 몰라."
캐롤은 카스피안의 팔에 매달려 마음껏 몸을 폈다.
"파리의 조그만 약국에서 다린 약을 얻은 적이 있었죠. 오레라좌 근처였을 거예요. 그게 분명히 타임이었다고 생각해요."
"나라면 위험한 다리는 건너지 않아."
"신들리게 될 지도 모르죠."
"하루밤 내내 화장실에 앉아있게 될지도 모르지."
카스피안에게 걸고 있던 손을 힘없이 풀고 캐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둘이서 마당을 다시 걸었다.
"자기 집에 뒤뜰이 있다니. 초밥을 5백 개 먹어보지 않으면 이 고마움을 모를 거예요. 하지만 기분이 상쾌하군요."
"응, 정말 그래." 카스피안은 말했다.
"당신도 그래요 ? " 카스피안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작은 시냇가까지 걸어가서 기슭에 앉았다. "이 개천이 넘친것 기억해요 ? 우린 온 집안의 물건들이 못쓰게 되는줄 알았었죠. 당신이 제일 먼저 들고나온 것이 상자에 든 아이스크림이었죠. 생각나요 ? "
카스피안은 조약돌을 흐르는 물에 던졌다. "무엇이 소중한지 나는 알고 있어."
캐롤은 그의 목덜미에 손을 얹고 그 곳을 부드럽게 주물렀다.
"나두요."라고 말했다.

카스피안은 커튼이 내려진 문으로 들어섰다. 스튜디오의 흡음판을 붙인 벽이 긴 복도를 걸어가는 그의 발소리를 흡수했다. 그의 머리 위 100피트쯤에 설치된 좁은 통로에서는 조명 기사가 한발 한발 확인하듯이 걸으며 라이트를 배치하고 있다. 바로 옆 가리워진 곳에서 마일론이 커피잔을 한손에 들고 나타났다.
"지금 제임스 죤슨 라일리에게 갓난아기의 질식이 테마인 영화를 알선해 주고 오는 길이야."
마일론은 커피를 마시며 카스피안과 보조를 맞추었다. "작년에는 J.J녀석, 갑자기 예술가다워지더니 헐리웃 따윈 엿이나 먹어라 하는 태도로 나왔었지. 다만 헐리웃에서 알아차리지 못했던 거야. 그러니까 올엔 그가 크롬병을 내흔들며 육아실에서 날뛰는 광경을 볼 수 있을 거야." 마일론은 굵은 전선을 펄쩍 뛰어넘어 카스피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내가 하는 말을 알겠어 ? 지금 한 말에 자네에 대한 충고가 담겨 있는 거야."
"빈정대는 거라면 다른 크라이엔트를 상대해주게 마일론. 나는 내 캐리어가 망가져도 아무렇지도 않아. 보다 큰 문제를 안고 있으니까 말야."
"데이빗, 어떤 문제를 안고 있는지 모르지만 자네가 따분한 영화에 출연할 지경이 되면 문제는 무지무지하게 커지는 거야."
"자네는 조금도 넌더리가 나지 않는가 보군."
"그야 무리인걸. 나는 마누라 다섯 명과 아이들을 주렁주렁 안고있는 몸이야." 마일론은 쓰레기통에 커피잔을 버렸다. "자아, 듣고 싶네. 도대체 어떻게 된 문제인가 ? "
"얘기가 복잡해서 설명할 수 없지만 요컨대 영화제작 일을 2,3년 쉬게 해 달라는 거야."
"데이빗, 설마.... 그건 아니겠지. 그게 자네를 자식보다 더 애틋하게 길러온 애이전트에게 하는 말인가 ? "
두 사람은 커튼을 친 문을 또 하나 지나서 세트로 들어갔다. 로마가 어시스턴트 디렉터와 함께 빛의 터널 입구에 서 있다. 터널이라고 하지만 스튜디오의 공간에 레이저 광선을 비추어 눈의 착각으로 안쪽을 깊숙하게 보이게 한 것 변이다. 카스피안은 그 빛속으로 들어갔다. AD가 로마를 그녀의 테이프 마크가 있는 곳으로 이도한다. 2인조인 대기부 스텝이 스모그 머신의 스위치를 넣고 레이저 광선을 향해 안개를 보내고 있다. 안개는 빛 사이사이로 꾸불꾸불 너풀거리며 전기장치로 된 터널의 안쪽을 더욱 깊게 보이게 했다. 카스피안은 로마의 곁에 자기의 테이프 마크를 발견했다.
"두 사람 다 지금까지 하던대로 해줘."
감독인 아머스는 스타를 파도치는 안개 속에 남겨두고 세트 끝에 있는 의자로 물러갔다. 로마는 이미 윤기있는 입술을 적시고 있었으나 스모그 머신이 마구 안개를 뿜어내기 때문에 카메라가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그 빌어먹을 머신을 멈춰 ! " 아머스가 소리쳤다.
카스피안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스모그를 헤치며 둘어갔다.
건물의 정면에 큰 시계가 나타났다. 안개를 통해서 가까스로 분간할 수 있다. 펠릭스는 안개가 꽉 들어찬 정거장 부지를 횡단하여 철도의 터미널로 들어가 낯익은 대합실을 휙 둘러보았다. 여기는 체코와의 국경에 있는 필젠. 전에는 국경선을 넘어 암물자를 몇 번이나 운반했었다.
"바이아스의 부하가 있습니다." 자겐 하사가 플랫폼으로 나가는 문에 서 있는 2인조 게쉬타포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고 말했다.
"나에게 죽은 사람 밖에 보이지 않는데." 하는 펠릭스.
자겐은 멀리 열차의 기적 소리를 듣고 바짝 긴장했다. "어떻게 할겁니까 ? "
"도중에서 사고가 일어난다." 펠릭스는 뒤돌아보고 나머지 무장한 호위병들에게 정거장으로 들어가라고 신호했다. 게쉬타포가 이쪽으로 향했기 때문에 펠릭스는 그들에게 건들건들 다가갔다. "전선은 바로 거기요. 두 사람 모두 마음이 편치는 않겠지요."
"파르켄하인 중위인가 ? 우리는 프랑크푸르트까지 중위와 화물과 동행하게 되어 있다."
나이 많은 쪽 대원이 말을 걸어왔다. 내뱉는 숨결에서 맥주와 베이컨 냄새가 났다. 아침식사 도중이라도 사람을 체호하는 것이 즐겁다는 듯한 태도였다.
펠릭스는 뒤꿈치를 소리내어 부치며 의례적인 인사를 했다.
"동행하게 되어서 참으로 즐거운 여행이 되겠습니다."
기적이 가까이서 들리고, 희미한 땅울림이 역 바닥에 전해왔다.
"저것이 그거로군." 하고 코가 뾰족한 핸섬한 쥐라고나 할 얼굴을 한 젊은 게쉬타포가 말했다. 그가 홈으로 통하는 문을 열자 게쉬타포와 펠릭스들이 빠져나갔다. 펠릭스는 선로를 따라 눈을 옮겨 증기를 토하며 접근해오는 기관차를 뚫어지게 보았다. 백발이 섞인 군인이 한 사람 몸을 내밀듯이 창에 기대고 있다. 휴양을 위해 귀환한 촉루사단 소속의 고참병이다. 펠릭스는 대원들로부터 몇 걸음 떨어졌다. 쥐 같은 사나이가 따라왔다.
"중위----"
쥐 같은 사나이의 가슴에 확 붉은 꽃이 피고 심한 경악의 표정이 온 얼굴에 퍼졌다. 펠릭스는 기관총의 총화에서 몸을 피해 화물 운반용 손수레 뒤로 숨었다. 기관차가 브레이크 소리를 내며 수야드 앞에서 정지하자 촉루사단의 지저분한 고참병들이 여기저기 뛰어 내리더니 착지와 동시에 선로 건너 쪽에서 불을 뿜는 총구의 열을 향해 발포했다. 펠릭스가 문득 보니 또 한 명의 게쉬타포가 공포에 눈을 부릅뜨고 이쪽으로 기어 다가오고 있다. 총이 발사되는 장면이라곤 자기가 남의 뒤통수에 권총을 대고 총알을 내쏘는 때 이외에는 본 적도 없었으리라. 사나이가 펠릭스 옆에 웅크리고 앉았을 때 역사의 일부가 날려, 돌과 시멘트의 파편이 흩날렸다. 탄환과 마찬가지로 맞으면 죽는다. "지금 것은 20밀리포군." 펠릭스가 말했다. "다음 1발은 이 손수레를 하늘까지 날려 보내겠지."
"여기서 나가게 해줘." 사나이의 입술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그때 대포와 박격포가 정거장 구내를 뒤흔들었고 사나이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나라면 당신을 도울 수 있어. 당신에 관해서는 뭐든지 다 알고 있다구."
"뭘 알고 있다구 ? "
펠릭스가 묻는 순간 역사의 지붕이 날아 올라갔다.
"당신 임무야----그 파일은 처분하겠다." 건물의 거대한 파편이 무서운 속도로 하늘을 가르고 날라, 사나이는 미친 듯이 주위를 둘러보며 떠들어댔다. "나는 위폐를 만드는 곤돌프도 알고 있었어."
"네가 체포했구나." 펠릭스는 기관단총의 안전장치를 풀었다.
"그 남자가 당신의 친구라는 걸 알았더라면 "
"그 사람의 온 몸의 뼈들을 토막내진 않았겠지."
"나는 그 남자에게 고통을 주진 않았어. 당신에게도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 박격포가 작렬하여 플랫폼을 밑에서부터 뒤흔들어 놓았다. 게쉬타포가 또 눈을 부릅떴다.
"이대로 있으면 둘다 고립되어 버릴 거야."
"저기까지 달리는 거야." 펠릭스는 슈마이저의 총구를 역사의 문에 겨냥했다. "엄호해준다. 거짓말이 아냐."
"알았어." 남자는 웅크린 채 스타트 자세를 취했다.
펠릭스는 기관총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게쉬타포는 미처 날뛰는 곰처럼 뛰어 나갔다.
"수고했다 이반." 펠릭스가 혼잣말을 했다. 러시아제 기관총이 그리는 탄도에 노출된 게쉬타포 대원은 일순 광기의 몸부림을 치더니 푹 꼬꾸라졌다.
촉루사단의 대원들은 정거장 주위에 산개하고 있었다. 그들이 쏘아올리는 조명탄이 조차장을 대낮같이 밝혔다. 이어 그들을 그 기관단총을 가슴에 대고 몸을 굴러 내려가 전복한 무개회차 뒤에 있는 촉루사단의 고참병들과 합류했다. 눈과 눈이 마주친다. 그들의 눈은 러시아의 눈처럼 냉냉했다----스타린그라드, 하리코프에서 살아남아 기갑부대로서 사선을 넘어온 병사들이다.
펠릭스는 화차 차바퀴 그늘에서 슈마이저를 마구 쏘아댔으나 10발째에서 더 이상 나가지 않았다.
"그따위 것은 내버려 ! " 옆에 있던 병사가 말하고 유탄 발사장치를 장착한 공기총 P44를 가리켰다. 그 총 임자는 이마를 한방 얻어맞고 밤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또 다시 조명탄이 쏘아 올려졌다.
펠릭스는 유개화차 사이에 러시아군 강습 부대를 발견하고 유탄을 발사했다. 유개화차 후부가 폭파되어 러시아 병의 그림자가 공중으로 날아 올라갔다. 그때 귓가에서 노랫소리가 들렸다.
"...총탄은 가슴에만 맞는 건 아니다..." 곁에 있는 병사가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사이에 그 사나이와 또 한 사람의 고참병은 기관총을 설치했다.
"...아가씨들은 미소를 보낸다... 숲속에는 산새들이 지저귀고... 오오, 이 세상은 아름답도다..."
고참병 두 명은 적을 향해 기관총을 쏘아댔다. 노랫말이 굉음에 지워졌다. 잠시 두 사람에게 눈을 빼앗기고 있던 펠릭스는 그 병사의 입술이 아직도 움직이며 노래하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노래하면서도 양손을 아무렇지 않게 무기를 조작하며 때때로 목을 자라목처럼 움츠렸다. 그의 주위에 소리를 내며 날아오는 탄환의 방향을 감으로도 안다는 듯이 본능적으로 극히 자연스럽게.
바야스로 촉루사단 병사들은 조차장 전역에 퍼져 휴가를 훼방당하지는 않겠다는 듯이 반격을 전개하고 있다. 대전차포는 대포를 침묵시키고 박격포와 유탄이 기관총을 일소해 버렸다. 조차장 건 너 쪽의 발포는 그치고 펠릭스는 무개화차 그늘에서 기어나왔다.
"레지스탕스다. 별것 아니야." 지휘관이 루가를 손에 들고 선로를 따라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들이 사용하고 있던 것은 우리측 무기야. 틀림 없어." 부하들에게 손을 흔들어 열차로 되돌아 가라고 신호했다. "출발이다. 빨리빨리 해라 ! "
펠릭스는 공기총을 안은 채 지휘관에게 다가갔다. 지휘관은 그런 그를 찬찬히 보았다. "누구야, 넌 ? "
펠릭스는 동사단과 함께 수송되는 특수화물의 호위를 명한 서류를 보였다.
"저 유개화차에 가뜩 실은 헌옷 말인가 ? "
"그것과 수선이 끌난 헌 구두하고 입니다."
"그 잡동사니라면 이미 수명이 경비를 맡고 있어."
"우리는 교대하러 왔습니다."
지휘관은 팔팔한 동작으로 루가를 홀스터에 넣었다. "이 열차를 5분 이내에 발차시켜야겠다."
거기에 자겐 하사와 호위병들이 가세했다. 자겐은 탄흔으로 곰보가 된 플랫폼에 보기흉하게 뻗어있는 두 명의 게쉬타포 쪽으로 힐끗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정말 시체 밖에 안 보이는군."
"그들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버린 거다." 펠릭스는 최후부의 차량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지저분한 중사의 지휘 아래 출발 때부터 하물의 경비를 맡았던 병사들이 모여 있었다. 펠릭스는 중사에게 그들에게도 휴가가 허가된 사실을 알렸다.
"중사, 출발 전에 수송 지령서를 이쪽에 건네주게."
"이까짓 유다의 헌옷을 위헤서도 대단한 수속이 필요한 거군요." 중사는 이 때문에 가려운 가랑이를 박박 긁으며 서류를 건네 주었다.
"가도 좋아. 중사."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중사는 부하 쪽으로 돌아섰다. "전진 ! " 기적이 울고 있었다. 펠릭스는 그의 분대를 데리고 화차로 기어 올라갔다. "빨리해 ! " 쌓아 올린 나무상자의 사이를 누비며 선별이 개시되었다. 펠릭스가 찾고 있는 나무상자의 번호를 읽었다. 모두해서 4개. 발견된 상자는 유개화차 문에서 지면으로 떨어뜨려졌다.
펠릭스는 새로운 수송 지령서 한벌을 자겐에게 건네주었다. "이것은 프랑크 푸르트의 은행장 프릭 앞으로 된 거야."
다시 한번 기적이 울려 퍼지고 화차가 덜컹 움직이기 시작했다. 펠릭스는 어두운 지면으로 뛰어내렸다. 화차가 눈 앞을 통과하고 바퀴 소리가 선로 위를 차츰 멀어져갔다.
펠릭스는 어둠 속에 혼자 남겨졌다. 체코의 레지스탕스가 기습을 감행해 온 역의 조차장 저쪽을 한참 바라보았으나 그들은 이미 숲속으로 철수한 뒤였다.
맨뒤쪽의 차량이 조차장의 마지막 커브를 꿈틀대며 돌아가고나자 열차의 검은 차체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펠릭스는 폭파된 역사 쪽으로 갔다. 각등이 하나, 부서진 페물더미에 묻혀 창가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자니 얼마 뒤 그 각등은 밖으로 나왔다. 그것을 쳐든 그림자가 하나 플랫폼을 내려 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가까와짐에 따라 구렛나루가 있는 늙은 철도원 얼굴이 등불빛에 떠올랐다.
"샤우펠." 펠릭스가 말했다. "설마 유령은 아니겠지, 몸은 괜찮은가 ? "
콧수염은 횟가루를 뒤집어 썼지만요. 노인은 화난 듯이 말하고 한 나무상자 위에 각등을 놓았다. "이게 보내온 겁니까 ? "
"그래, 저 손수레에 싣게 도와줘."
나무상자를 들어올려 보더니 늙은 철도원은 뭐가 이렇게 무거우냐고 투덜댔다. "속옷 장사는 어떻게 된 겁니까 ? 그쪽이 상자가 가벼웠는데."
"지금은 다른 물건을 취급하고 있어."
"아무래도 볼 베어링 같군요."
"그래 맞아, 샤우펠. 볼 베어링이야."
두 사람은 손수레를 밀고 플랫폼을 지나 역사 옆을 돌아 주차장으로 나왔다. 그런데 하필 펠릭스가 주차시켜 놓은 포장을 씌운 지프 위에 역사의 벽 파면이 덮쳐 있었고 더구나 핸들은 목재와 돌애 깔려 짜부라져 있었다.
"재수가 없군." 샤우펠은 말하고, 산산조각이 난 역사의 지붕을 바라보았다. "모처럼 저 처마에 참새가 둥지를 지었는데..."
"이렇게 되면 당신 턱수염에 둥지를 틀 수 밖에 없겠군." 펠릭스는 주차장을 가로질러 부하들이 타고 온 6기통 디젤엔진의 경트럭 쪽으로 갔다. 트럭의 손상은 새시에 총알 몇 발을 맞은 것 뿐이었다. 샤우펠은 손수레를 옆으로 댔다. 동부 점령 지구에서 보내어온 나무상자가 실리고 펠릭스는 원래 붙어있던 실을 의료부대인 암청색 실로 바꾸어 붙였다. 목하 뉴렌베르그에서 시민을 구원중인 뮬러 대령 휘하의 제2포병 중대가 긴급히 필요로 하는 중요한 의약이라는 뜻이다. "이젠 됐어." 펠릭스는 경트럭의 뒤쪽에서 내렸고 샤우펠에게 1통의 봉투를 건냈다.
샤우펠은 돈을 오바 밑으로 밀어 넣었다. "저, 말이야..." 그는 눈꺼풀이 축 쳐지고 젖어있는 눈을 펠릭스에게 가까이 가져갔으나 말이 나오지 않는 모양이다.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이 그의 얼굴을 일그러 뜨리고 있다, "저, 말이야..." 뺨에 경련을 일으키며 되풀이했다. "나 화물열차가 여기를 통과하는 걸 보았어. 악마의 짐을 싣고서 말이야." 멀리 있는 선로에 민첩하게 시선을 주고 나서 반백의 턱수염을 손으로 훑더니 신경질적으로 나꿔챘다. "무서워서 그쪽을 볼 수 없을 때도 있었어. 들려오는 거야." 다시 펠릭스 쪽으로 눈을 돌리더니 처진 눈꺼풀을 깜박거렸다. "망자들의 울음 소리가 말이야." 선로 쪽으로 향해 각등을 흔들었다. "저건 선로가 아니야, 저승으로 가는 삼도천이야."
펠릭스는 정적만 남아있는 선로에 힐끗 시선을 보냈다. 초승달이 비추고 있다. 도둑의 달, 그 자신의 달, 밤에 위험한 다리를 건너는 자의 달이다.
"당신은 아무 것도 나쁜짓하고 있지않아, 샤우펠."
노인은 다시 한번 선로를 되돌아 보았다.
"나는 각등을 흔들었던 거야, 알겠어 ? 이 죄없는 각등을 말이야. 그것이 나의 일이니까. 나는 그 열차가 통과하는 걸 도와준 거라구."
펠릭스는 경트럭의 운전대에 올라탔다.
"잘있어요, 샤우펠. 여길 통과하는 일은 다신 없을 거야."
"그들도 말이지 ? "  샤우펠은 동쪽을 가리키며 보이지 않는 선로로 눈을 보냈다.
펠릭스는 경트럭을 발진시켰다. 국경선은 바로 가까이에 있다. 그것을 넘지 않으면 안 된다. 도중에 다른 차를 만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차라면 샤우펠이 흔드는 운명의 각등의 인도를 받아 선로를 달리는 그 열차. 만약 내가 그 열차 앞에 몸을 내던졌다면 무언가가 달라질까 ?
독일 국경까지 얼마 안 되는 길이었다. 1마일 1마일 마다 불안이 더해간다. 전방에 검문소가 나타나자 불안은 몸이 굳어지는 것 같은 공포로 바뀌었다----병사들, 가시철선, 내려진 게이트, 헤드라이트에 보안경찰의 표시가 떠오른다. 스피드를 떨어뜨리자 총검과 철모에 라이트가 반사했다. 가장 가까운 얼굴이 뚜렷이 떠올랐다. 냉혹한 젊은 병사는 손을 들어 앞으로 나섰다. 너의 얼굴은 알고 있다----펠릭스는 생각했다----언제나 너다.
"정지 ! "
펠릭스가 핸들을 약간 꺾었기 때문에 젊은 병사는 도리없이 한 발짝 후퇴했다. "운전도 못하는 거야, 이 미친놈아 ! " 병사는 화가나서 고함치더니 자세를 바로잡으려고 비틀거렸다.
"자아, 자. 침착해요." 펠릭스는 온화한 어조로 타이르며 창에서 손을 축 늘어뜨리며 수송 지령서를 흔들어댔다.
젊은 야전 헌병은 펠릭스의 손에서 서류를 나꿔챘다. "설명을 듣고 싶은데 ? " 서류에는 눈도 주지 않고 말했다.
펠릭스는 병사를 내려다 보았다. "이 트럭은 약을 잔뜩 싣고 있어."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의 말 속에서 잠자리가 날개짓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무심히 오로지 무심히 날개짓하는 그 소리. 펠릭스는 청년을 노려보았다. "여기까지 밤의 절반을 달려온 거야. 아직도 절반이나 남았어. 만약 네가 으시대는 동안에 사람 하나라도 죽으면 넌 저기에 매달리게 될 거야."
젊은 헌병은 서류에 회중 전등을 비쳤다.
"빨리 해." 펠릭스는 팔을 내밀었다.
"좋아, 통과 ! "
펠릭스는 기어를 넣고 검문소를 총알처럼 통과했다. 식은땀이 한줄기 주르륵 겨드랑이를 타고 흘렀다. 백밀러 속에서 사람 그림자는 어둠과 섞이더니 이윽고 삼켜지고 말았다. 도둑의 달을 어깨에 얹고 차를 몰았다. 달은 느긋한 걸음걸이로 밤하늘을 가르며 그를 인도하여 마침내 6시간 뒤 기복이 완만한 백아질의 프랑스 알프스로 보내주었다. 지붕을 따라 서쪽 평야에 봐이젠베르크 시를 바라보는 곳까지 왔을 때 은빛 달은 그 너머로 지려하고 있었다.
산을 내려 시가지로 들어갔다. 중심지 역을 둘러싼 중세의 성벽이 헤드라이트 앞에 나타났다. 성벽 위에 즐비한 소탑의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오래된 교회의 한결 높은 탑도. 길을 잘 몰라, 하는 수 없이 성벽을 따라 시가지를 돌아다닌 끝에 가까스로 시장을 찾았다. 시장의 야경은 방금 내려온 산쪽을 손가락질하며 찾고 있는 곳을 가리켜 주었다.
산길을 되돌아가 목표인 별장의 나무로 새긴 간판이 있는 곳까지 올라갔다. <아라우나즈 케라>라고 씌어있다. 뮬러 전용인 사령부 차가 고전적인 건물 입구에 주차해 있었다. 펠릭스는 그 옆에 트럭을 댔다.
로비에 등불이 하나 켜 있고 군복을 입은 사람의 그림자가 창가를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잠시 후 뮬러의 부하가 두 사람 포치로 나왔다. 그 뒤에 뮬러 본인이 나와 세 사람은 계단을 내려와 트럭 운전석에서 내린 펠릭스를 맞았다. 밤도 깊어 부하들은 피곤한 모습이었으나 밤샘에 강한 뮬러는 졸리기는커녕 생생해 보였다.
"귀찮은 일은 없었나 ? "
"도로가 엉망진창이어서 진흙 바다에요."
"아하, 그러나 이 차는 우수하니까----"하고 친근하게 펜더를 두드리고나서, "----어쨌거나 미스터 헨리 포드의 작품이니까 말야." 하고 말했다.
"남은 짐은 현재 프랑크푸르트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쪽 몫은------" 하고 펠릭스는 트럭 뒤쪽에 실려 있는 나무상자를 가리키며, "절대로 발이 붙지 않을 겁니다. 지상에서 말살했으니까요."
뮬러는 한 사람에게 명령하여 트럭에 올라타게 했다. 또 한 사람은 스탭에 올랐다. 그대로 트럭은 좁은 주차장 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곳이 마음에 드는가 ? " 모래가 깔린 길을 걸어가면서 뮬러는 물었다. 등불이 켜있지 않은 창을 몸짓으로 가리키며, "손님은 자네와 나 뿐일세."
오솔길은 뒤쪽 산허리로 이어져 있었다. 뮬러의 부하들은 트럭에서 내려 산허리에 설치된 목제 덧문을 열려고 하고 있었다.
"이런 백아질의 산은 동굴 천지야. 안은 맥주 장사에게 안성마춤인 온도이고 말야."
펠릭스는 부하 한 사람이 들고 있는 칸데라의 불빛에 산의 동굴이 비쳐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뮬러는 펠릭스를 맥주 장사 동굴로 불러들였다. 엄청나게 큰 나무통이 한줄로 줄서있고 백아의 종유석이 천장에서 그 위로 늘어뜨려져 있다. 흔들리는 불빛에 펠릭스와 사람들의 그림자가 앉은뱅이 소인처럼 이쪽저쪽으로 춤추며 뛴다.
"참으로 기막힌 맥주야." 뮬러가 말했다. "이보다 맛있는 맥주는 맛보지 못했을 거야. 싱그러움, 바로 그 자체야."
뮬러는 맥주통의 코크를 비틀어 두 개의 컵에 따랐다. "번민 많은 총통의 건강을 위하여 건배 ! " 강한 맛이 펠릭스의 혓바닥 위에 왈칵 번져 나갔다. 감칠맛이 있는 독한 맥주다. 통은 키가 높고 깊으며 커다란 금속테가 끼워져 있다. 통만드는 기술은 그 마을과 함께 오래 된 것으로 짐작되었다.
두 병사가 나무상자를 운반해오자 뮬러는 뚜껑에 박힌 못을 빼도록 명하고 그 일이 끝나자 두 사람을 물러가게 했다. 한동안 멀어져가는 발 소리에 귀를 세우고 있더니, 동굴의 문을 닫았다.
"자, 이제," 하고 뮬러는 나무상자 위에 칸데라를 늘어뜨리고,
"동부점령지구가 어떤 것을 보냈는지 보자구." 뚜껑을 열었다. 다이어몬드와 루비, 사파이어가 칸데라의 불빛을 받아 찬연하게 반짝거렸다. 모두가 목걸이와 팔찌, 브로치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자넨 큰 부자야, 파르켄하인." 뮬러는 한 손을 보석 속으로 집어넣어 한줌의 반지를 손가락 사이로 흘렸다. "우리는 두 사람 다 큰 부자라구 ! "
펠릭스는 아연하여 서 있었다. 동부제국의 재물과 보화, 몇 세대나 이어져 내려온 민족의 유산에 눈이 아찔했다. 보석을 한줌 들어올렸다. "보석은 사자의 눈이라고 말합니다. 알고 있었습니까 ? "
뮬러는 큰 루비가 붙은 금제 타이핀을 집었다. "이것 속에 태양이 머물고 있어. 사랑과 생명의 태양이. 그것도 이것도 사자는 잊고 있어." 또 하나의 나무상자로 갔다. "이보게 도와주게."
펠릭스가 뚜껑 가장자리에 손을 대고 뮬러와 둘이서 뚜껑을 열었다. 그 나무 상자에는 아주 조그만 금덩어리가 꽉 채워져 있었다. 뮬러는 그것을 손가락 틈새로 좌르르 흘렀다. "지금까지 자네에게 끼친 수고를 생각하면 보잘것 었으나 그래도----" 하고 움켜쥐고 있던 금 알갱이를 좌르륵 상자 속에 도로 넣고, "----이건 무엇엔가 사용할 수 있을 거야."
"이빨입니까 ? " 펠릭스는 멍청히 황금의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때운 것들이야. 아말감과는 비교할수도 없어." 뮬러는 입을 벌리고 딱, 딱, 몇 번인가 이를 소리나게 물어보았다. "모두 금으로 씌웠어. 자네도 그런 나이가 됐지 ? 금관을 씌워야 해. 그러면 꽤 오랫동안 견디어내지."
펠릭스는 뮬러 쪽으로 돌아앉았다.
"드디어 나에게 혐오증을 일으키게 하는군요."
"유태인들이 구치와 함께 죽어간 것을 말하고 있는건가 ? 이봐, 자네 내 앞에서 성인인체 하는건 그만둬."
"난 무덤 도둑이 아니에요. "
"이 세상은 무덤이야. 우리도 눈깜짝할 사이에 무덤으로 가게 되는 거야. 그러니까 감상은 버리라구. 크리슈나의 눈으로 보는 거야. [너희도 나도 저 왕들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때는 없었다]"
뮬러는 금이빨이 꽉 차 있는 나무상자의 뚜껑을 닫고 다음 상자를 열었다. "자네의 노한 감정이 전해져 오는데." 팔찌와. 반지와 브로치 더미 속에 팔꿈치까지 손을 집어넣었다 다시 빼냈다. 보석이 반짝반짝 소매를 따라 흘러 떨어졌다. "도시는 약탈당하기 위헤서 존재하는 거다. 그것도 전부 크리슈나가 자신의 손으로 적어놓은 거야." 그는 뚜껑을 닫았다. "나는 운명이 명하는 대로 살아왔다고 생각하고 있다. 혼은 청천백일. 태양에 인정을 받고 자라온 사나이다" 여기서 빙긋하고 미소짓더니, "나는 말이야, 헤스 부총통과 같은 호메오파스 의사에게 치료받은 일이 있어."라고 말했다.
"내 몫을 받고 싶은데요." 펠릭스는 나무상자 쪽으로 고개를 기울여 보였다. "지금 당장."
"어디에 숨길 작정이지 ? 개처럼 지면에 구멍을 파서 말이야. 오늘밤의 행운처럼 몇 개의 검문소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 것 같은가 ? 나와 함께 기다리세. 전쟁이 끝날 때까지. 당분간은 다이어보다 빵이 값어치가 있겠지만 언젠가는 다시 세상은 안정되는 거야."
뮬러는 맨 끝에 있는 맥주통으로 다가가더니 쇠지렛대를 들고 그것을 술통 허리께에 있는 두 개의 테 사이로 쑤셔넣었다. 그러자 테는 거기서 벗겨지고 통은 양쪽으로 갈라졌다. 속은 공동이고 젖어있지도 않았다,
"특별히 개조한 거야. 이것을 손본 목수는 이 통의 비밀과 함께 무덤 속으로 들어가 버렸어, 요절한 거지. 불쌍하게도."
두 사람은 나무상자를 한 개씩  큰 통속으로 운반해 넣었다.상자는 만곡된 통의 안쪽으로 알맞게 들어갔다. "이젠 됐어." 뮬러가 말했다. "나머지는 이 고급 흑맥주, 포터를 잠재워두는 거지." 뮬러와 펠릭스는 두 개로 나뉜 통을 원상태로 맞추어 쇠테두리를 찰칵 끼워 맞췄다.
"폭탄도, 게쉬타포도 적군의 침입도 무서울 것 없어." 뮬러는 통의 코크를 틀었다. "통 전면에 맥주를 담아둘 곳이 있어서 말야. 다른 통과 똑같게 보이게끔 장치가 되어 있어." 맥주는 뮬러가 받치고 있는 컵에 거품을 내며 흘러 들어갔다. "맥주가 안 나와도 더 이상 빈통에 흥미를 갖는 자는 없겠지 ? "
뮬러는 잔을 높이 들었다.
"러시아 군인이 이곳에 뛰어들면 곤드레가 되도록 마시고 나서 이 술통 좀 봐라, 왜 이렇게 조금 밖에 안 나오는 거야. 어쩌구 욕을 퍼붓다가 가버리겠지."
앞장서서 동굴을 나오자 뮬러는 펠릭스와 함께 동굴의 큰 문을 양쪽에서 닫고 한쌍의 자물쇠를 걸었다. 그리고 웃는 얼굴로 펠릭스쪽을 보았다. "그런데 자네 집은 어떻게 됐나 ? 메크렌부르크에 한 채 갖고 있지 않았던가 ? "
"그것과 케페닉크 근처 마을에 또 한 채 있었는데 둘 다 당하고 말았지요."
"그래, 없어졌단 말이군. 거기에 둔 것은 모조리 실어와. 나의 은신처가 좋을 걸세."
"나는 속지 않습니다."
"자넬 속일 생각은 없어." 뮬러는 자물통 열쇠를 펠릭스에게 주었다.
"자물쇠쯤 간단히 바꿔달 수 있지요."
"그렇다면 수류탄으로 열면 돼." 뮬러는 모래를 깐 길을 앞서 걸으며 인기척 없는 앞뜰로 나갔다. 정원을 둘러싼 숲 너머에 금방이라도 가라앉을 것 같은 달이 나무의 가지 사이에 낮게 걸려있었다.
뮬러는 판대기로 덮여있는 붕어 연못 옆에 멈춰섰다. 수면이 보이기나 하는 듯 연못을 내려다 보며 말했다.
"나에젠 작은 낙이 있어."
어둠 속에서 담배를 피웠다. 숨을 들이쉬고 혀 위에서 연기를 말듯이 하고 나서 천천히 토해냈다.
"여기 서서 누군가와 함께 밤공기를 마시는 것----이것이 내가 알고 있는 평화라고 칭하는 속절없는 환영이야."
"결국 당신은 보통 인간과 똑같은 것을 알고 있는 거예요."
"그런가 ? 그렇다고 믿고 싶군. 나는 뭔가룰 붙잡으려다 놓친 것이 아니라고----뭔가 이렇게 말할 수 없는 아름다운 것이라고나 할까 ? "
펠릭스는 담배불을 붙이고 숲을 통헤 차갑게 빛나는 은빛 달을 바라보았다.
"필젠 역에서 바이아스의 부하 두 명이 지워졌어요."
"오늠밤 세상은 온화한 한 때를 보낼 수 있다는 얘기로군."
"우리들은 재수가 좋은 겁니다. 그러나 바이아스는 나를 잡으려는 그물을 죄어오고 있습니다."
"그놈은 절대로 너를 잡거나 하지 않아." 뮬러는 가느다란 담배 연기를 손가락 끝으로 하늘거리게 하면서 건들건들 정원을 걸었다.
"자네는 <빛나는 숙소>본산의 회원이 아닌가. 폰 제밧텐돌프 남작에게서 직접 비전을 베풀어 주었어. 자넨 인지를 초월한 힘로 수호되고 있는 거야,"
"그날 밤, 거기에 나간 것은 그것이 기술사의 클럽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각 뮬러는 담배를 입가에 대고 콧구멍으로 연기를 뿜어냈다.
"초기에 뮌헨에서 열린 집회에서는 영매가 엑트프리즘을 꺼내 사람 형상을 만들었어. 우리는 전원이 그걸 목격했지. 그때 영매는 이렇게 말했어. '이것이 새로운 구세주입니다.' 라고. 그 인물은 히틀러였던 거야. 그런데 그 엑트프리즘이 차츰 상상을 초월하는 추악한 얼굴이 되어갔었지----그것은 정녕 악마의 형상이었어. 바로 그 제밧텐돌프까지도 벌벌 떨며 그 방에서 도망쳐 버린 정도였지."
"그래서 그놈이 나를 바이아스로부터 구해주는 겁니까 ? "
"내가 자네를 바이아스로부터 구해주지." 뮬러는 담배를 길바닥에 튕겨 버렸다. "그러나 자넨 자신에게 나는 어떤 놈인가하고 물어보지 않으면 안돼."
뮬러는 펠릭스를 돌아보고 미소지었다. 그리고 포켓에 손을 넣더니 용모양을 한 작은 에메랄드 배지를 꺼내 펠릭스의 손바닥에 놓았다.
"이것은 매우 진귀한 물건이야. 라스푸친이 한 개 갖고 있었다. 물론 히틀러는 갖고 있어." 뮬러는 펠릭스의 손가락을 굽혀 손 안에 그것을 쥐게 했다. "자네는 SS의 제복을 입은 티베트 인이 백명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나 ? 히물러는 라마승으로 하여금 자기를 둘러싸게 하고 있어."
뮬러는 달빚이 비추는 가지에 눈을 고정시켰다.
"우리가 속세에 대해 품고 있는 관념이라는 것은 묘한 것이야. 그것은 인간이 아니야. 보다시피----그것은 녹색의 용인 거야."
뮬러는 정원에서 도로로 나왔다. 두 사람 모두 봐이젠부르크 마을을 향해 산을 내려갔다. 등불은 꺼지고 지붕은 어렴풋한 그림자가 되어 산자락에 보이고 있었다. 그 그림자 위를 이것 역시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 굴뚝에서 나오는 엷은 연기가 떠돌고 있었다. 뮬러는 느긋하고 차분한 발걸음으로 걸었다. 이밤의 한때를 그 향기와 인적이 끊긴 노상을 곰곰히 음미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한 발짝마다 검은 장화가 가만히 딛는 소리를 냈다.
"봄기운이 감도는데 ? " 담쟁이덩굴이 달라붙은 암벽 곁에서 멈춰섰다. 손을 뻗어 잎을 만졌다. "새 생명이 느껴지는군."
펠릭스는 전주 옆에 서 있었다. 색이 바래고 가장자리가 너덜너덜한 포스터가 달라붙어 있다. 그는 적혀 있는 고딕 문자를 천천히 눈으로 더듬었다.

유태를 말살하라 !

"히틀러는 타고난 영능자야." 곁에 선 뮬러가 말했다. "브라우나 암 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그런 사람이 많아. 그는 저 위대한 정신과 의사인 슈나이더 형제, 루디 빌리와 유모의 젖을 나누어 먹은 사이였어. 자네가<빛나는 숙소>에 찾아왔을 때는 벌써..."
검은 글자는 춤추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묘한 소리가 들렸다----딱, 딱 하는 것 같은----그 자리에 우뚝 서서 귀를 기울였다. 이윽고 짚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말살된 유태인의 금이빨이 내는 소리였던 것이다. 귀를 막았으나 그 소리를 쫓아버릴 수가 없었다.
"뮬러 ! "
"왜 그래 ? "
글자에서 검은 잉크가 물방울져 흰벽을 타고 흘러내린다. 눈부신 햇살이 벽에 쪼이고 그 한줄기가 그의 어깨에 꽂혔다. 카스피안이 천천히 되돌아보자 곁에 알로하셔츠, 낡아빠진 바지에 샌들을 신은 빅터가 서 있었다.
몸이 떨리고 총성을 닮은 날카로운 작렬음이 들림과 동시에 카스피안은 완전히 원상태로 돌아가 있었다.
빅터가 머리를 저으며 베니스 비치의 벽에 마구 칠해진 치졸한 글자를 손가락으로 쓰다듬고 있었다.

유태를 말살하라 !




제21장 어느 먼 이름에게



그는 차를 빙 돌려 세운 후 서늘한 계곡의 밤기운 속에 내려섰다. 찍찍 하고 우는 박쥐의 가냘픈 소리가 귓가를 힉 스치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좁은 길을 더듬어 집을 향해 짤막한 계단을 올라가 현관의 커다란 목제 문 앞에 섰다.
"데이빗, 당신예요 ? "
카스피안은 부엌을 빠져 나가 거실로 내려갔다. 캐롤이 18세기 이탈리아 소파에 앉아 독서를 하고 있다. 카스피안은 모조품인 그 의자를 노려보았고 방을 가로질러 캐롤 옆에 걸터 앉았다. 캐롤은 책을 덮었다.
"촬영이 길었네요 ? "
"응." 카스피안은 책 표지에 눈길을 주었다.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책이다.
"지금 스트레스가 많이 쌓였나 보지 ? "
"그렇지 않다면 제가 왜 자고 있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어요 ? "
"알리샤는 뭐 하고 있지 ? "
"커피 테이블 위에 학교 선생님에게서 온 편지가 있어요. 그애, 오늘은 하루 종일 울며 지냈다는 거예요. 그애도 스트레스를 받았나 봐요." 캐롤은 다시 책을 폈다. "그리고 말예요, 이 책 안에 나오는 쥐란 쥐는 모두 스트레스 받은 쥐들이에요." 그녀는 독서용 안경 너머로 눈을 치켜 떠 카스피안을 올려다 보았다. "그런데 진동 침대를 사면 어떨까요 ? "
"한번 사용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뛰어 내려서 멈추기를 기다려야만 했지."
"어디에서요, 그걸 ? "
"모텔에서지. 몇 년인가 전에 외국에서."
"외국에서요 ? "
"분명히 감비아였다고 생각해."
캐롤은 빙긋이 웃고 안경을 벗었다.
"왜 그런지 오늘밤 당신은 무척 섹시해 보이네요 ? 왜 그렇죠 ? "
카스피안은 무릎 부위에서 엇갈려 있는 캐롤의 흰 기모노 옷자락에 손을 얹었다.
"이것, 어디서 샀는지 기억해 ? "
"하바나 시가 콘벤션이었지요 ? "
"마카오지. 당신이 도박에서 삼천 달러를 잃었지만."
"그래요, 도박 방법이 생각나요." 그녀는 기모노를 넙적다리까지 걷어 올리고 자세히 살펴봤다. "또 너무 먹어댔구요." 멋진 각선미를 드러냈다.
"저, 로바처럼 보여요 ? "
카스피안은 바닥으로 미끌어져 내려 그녀의 종아리를 천천히 손으로 매만졌다. 캐롤은 약간 몸을 수그려 묻는 듯한 눈길로 카스피안을 응시했다.
"왜 이래요, 이이가..."
카스피안은 바닥 위에 흩어져 있는 커다란 벨뱃 쿠션 위에 캐롤을 끌어 내렸다. 기모노 앞이 가볍게 열렸다. 캐롤은 양팔을 쭉 내밀었다. "어서와요, 이 못난 남편씨."

그는 어두워진 거실에서 몸을 일으켰다. 캐롤은 아프가니스탄제 니트 홑이불을 덮고 한쪽가에서 잠들어 있다. 부엌으로 올라가 조용히 식사를 하면서 온실의 꽃들을 바라봤다. 꽃잎에 거무스름한 선이 나 있다. 밀선의 존재를 알리는 선----벌레를 꽃송이 속으로 더욱더 꼬이기 위해 꽃 자신이 고안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거무스름한 선이 있는 꽃으로, 벌레를 잡기 위한 액체를 감추기 위해 꽃송이를 숨기고 있는 것도 있다.
저 꽃잎이 척 닫히면, 그러면, 카스피안은 생각했다. 우리는 익사하는 것이다.
복도를 따라 알리샤의 방으로 갔다. 실내에는 스탠드 불이 켜져 있었다----길다란 보턴 장치가 달린 신발 모양의 램프로, 입구나 창문 쪽에서 안의 전구 불빛을 볼 때마다 그 안이 이 도시에서 가장 마음편히 지낼 보금자리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울었던 탓으로 알리샤의 닫힌 눈꺼풀은 아직도 부어 있었다. 그녀 인생의 슬픔, 거기에 그의 이해는 미치지 못하고 없애 줄 방법도 없다. 모포를 다시 덮어 주고 베개 가장자리를 정돈해 주고 나자 뒷일은 <신발집 할머니>에게 맡기고 방을 나왔다. 알리샤의 병세에는 아마 그 나이든 여자가 무엇보다도 위안이 될 것이다.
그는 집 옆쪽 입구를 통해 테라스로 나갔다. 커다란 줄기 투성이의 떡갈나무가 머리 위에 덮개를 만들어 별빛을 차단하고 있다. 이내 옆의 나무 숲에서 호오 호오 하고 올빼미 우는 소리가 난다. 속이 텅 비고 아득한 기운이 감도는 듯한 그 소리는 밤의 상징.
문득 산이 자신을 끌어당기는 것을 느꼇다----갑자기 하나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지금 그가 어떻게 해서든지 가야만 할 장소의 이미지가. 그곳에 가면 그가 품은 의문의 한 가지는 해명되어질 것이다.
테라스를 내려와 뜰을 걸어갔다. 약초 뜰을 유유히 산책하고 있던 고양이가 휙 고개를 쳐들었다. 달빛을 받은 뾰족한 귀의 실루엣이 나타났다. 문을 빠져 나가 도로를 더듬어 걸었다. 프림로즈 향기를 실은 미풍이 그를 감쌌다. 밤나방을 꾀어 내는 달콤한, 고혹적인 향기. 그리고 그도.
계곡을 항하여 길이 난대로 발을 옮겼다. 귀뚜라미가 잡초 밑에서 세레나데를 연주하고 있다. 그들의 메시지가 카스피안의 발걸음에 맞추듯이 앞으로 앞으로 보내진다. 카스피안의 도래를 알리듯이.
도로가 굽어져 전망이 열렸다. 멀리 우뚝 솟은 휴화산 가장자리에 달이 떴다. 잡초에 발을 들여놓자, 물이 고인 강바닥이 그가 가는 앞길에 넘실넘실 굽이쳐 있었다. 우거진 무더기 잎이 양쪽 강가에 늘어져 있고 딱딱해진 강바닥 균열에 달이 비치고 있다.
강바닥을 걸어갔다. 귀뚜라미는 풀이 우거진 강가에서 여전히 그에게 이야기를 건다. 머리 위 어딘가에서 날개치는 소리가 들리고, 밤 솔개가 한 마리 울며 날아갔다. 바싹 마른 강바닥은 평탄한, 풀 한포기 없는 황무지로 이어졌다.
카스피만이 둑을 기어 올라 황무지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때 달이 계곡 꼭대기를 벗어났다. 하현달이다. 오른편에서 그림자가 언뜻 거리는듯 싶자, 눈 앞에서 총검이 번뜩이며 빛을 발했다.
"암호를 대라 ! "
"발쿠레." 마치 수은처럼 미끈하게 말이 되어 나왔다.
어둠 속을 트럭이 나란히 줄지어 다가온다. 머리 위에는 이국의 달이 떠 있었다.
나는 이쪽 편으로 넘어왔던 것이다. 머리는 정상인 채.
트럭은 일제히 정지하였고 군복을 입은 사내들이 내려섰다.
달빛을 받고 있는 지평선을 향해 철도망이 뻗어 있다. 호송 트럭의 일부는 선로를 따라 늘어서 있다. 트럭 뒷문이 내려져 너저분하게 뭉쳐져 있는 인간이 남, 여, 아이들이 서로 꼭 붙잡고 집과 싸우면서 구르듯이 내려왔다.
여기저기서 명령하는 소리가 들렸고 그들은 선로 위에서 대기하고 있는 가축 운반차 쪽으로 내몰아졌다. 비정한 달이 시치미를 뗀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다. 그는 힘없이 다리를 옮기는 사람들 무리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 보이는 곳까지 다가갔다. 어느 얼굴에도 한결같이 악몽의 표정이 새겨져 있었다.
SS하사관이 그의 앞으로 나섰다.
"예. 무슨 용무라도 있으십니까 ? "
"열차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네."
"알겠습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이것은 민간 열차입니다."
"이제 보니 그렇군." 대사는 매끄럽게 진행되었다. 그의 혀는 이미 정해진 줄거리를 따라 혼자서 움직이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는 잇달아 솟아 오르는 말을 기분상으로 얼마만큼 더디게 입에 담았다.
하사관은 지쳐버린 모습의 볼품 없는 시민의 대열로 되돌아 갔다. 카스피안은 그의 뒤쪽에 섰다. 사람들은 불안한 걸음으로 지나쳐 갔다. 낯선 얼굴의 물결. 공포에 쫓겨 이유도 모른 채 비틀거리며 나아가는 희생의 무리. 오버 코트를 파고 드는 차가운 밤기운에, 그는 무의식중에 포켓에 찔러 넣은 손을 더욱 깊숙이 기어들게 했다.
여자 한 사람이 넘어졌으며, 곧이어 거칠게 일으켜졌다. 그 여자에 딸린 애가 소리가 나오지 않는 비명을 지르고 매달린다. 여자의 코트 앞자락이 열려 짧은 슬립이 드러내졌다. 체포되었을 때 가냘픈 신체에 그것만 황급히 걸쳤을 것이다.
숱이 많은 머리카락을 말아 올린 그여자는 입을 굳게 다물고 훌쩍이는 딸을 안아 올렸다. 그 순간 카스피안과 눈이 마주쳤다. 그 눈은 카스피안이 여러 헤동안 응시해 온 눈이었다. 그때까지 반신반의하며 체내에서 맴돌고 있던 것이 일시에 노여움으로 바뀌었다. ----눈 앞을 비틀거리고 지나쳐 가는 것은 내 처와 딸. 그는 열에 뛰어 들어 두 사람을 끄집어 냈다. "열을 무너뜨리는 것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등 뒤에서 소리가 났다. 카스피안은 권총을 뽑아들고 재빨리 뒤돌아 봤다.
비척 마른 얼굴이 그를 마주 쳤다봤다. 사신의 검은 코트에 SS의 장군을 나타내는 회색 견장이 부착되어 있다. 사신은 금니를 번뜩이며 싱긋이 웃었다. 카스피안은 캐롤과 알리샤를 가축 운반차로 향하는 대열로 돌려 보냈다.
카스피안의 목구멍으로 치밀어 오른 절규는 열차의 기적이 되어 높아져, 정점에 이르자, 용솟음쳤다. 비명 같은 탄식 소리는 점차 얼마 안 있어 서서히 가라앉아 귀뚜라미 울음 소리가 되었다.
그는 달에 비추인 선인장 가시를 망연히 응시하며 굳어진 강바닥에 서 있었다. 그의 어깨를 잡고 있던 사신의 손이 느슨해지고 사신은 흰 수의가 되어 스르르 떨어졌다.
강바닥을 따라 되돌아가 잡초를 헤치고 나아가 도로에 나섰다. 차 한 대가 지나갔다. 눈으로 쫓고 있자니, 헤드라이트가 길모퉁이로 사라져 버렸다. 그는 계곡 사이에 낀 도로를 느릿느릿 걸었다. 집의 불빛이 나타났다.
뒷문으로 들어가 복도를 지나 딸애의 방으로 갔다. 알리샤는 마음에 들어하는 포동포동한 동물인형들 사이에서 잠들어 있으며, <신발집 할머니>의 눈빛이 근심어린 잠자는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22장   떠오르는 강



게이라드는 파이프를 두 사람 사이의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 옆에 방향 연초를 넣은 자루가 있으며, 대화 사이 사이에도 게이라드가 부단히 그 자루를 손에 쥐어서 공중에 대고 툭툭 친다든지 열어 본다든지 하므로, 그 향기가 이따금 허공에 맴돌곤 한다.
"상당히 흥미로운 일 주일이었지요."
"의식이 완전한 채로 저쪽 세계에 들어갔습니다. 저쪽에서는 내가 우세했지요."
"펠릭스 사고에 갇혀지지 않았나요 ? "
"이미 단순한 방관자인양 열쇠 구멍으로 엿보고 있는 입장이 아니었지요. 나는 독자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 저것 한 박자 먼저 일어나, 나는 그 뒤를 쫓아가는 듯한 느낌은 들었습니다만."
"자신의 마음이 내키는대로 행동할 수는 있었습니까 ? "
"어느 점에서는요. 이럭저럭하고 있는 사이에 사건에게 앞을 추월당해 버린 것이지요." 카스피안은 몸을 쑥 내밀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나는 이미 내용이 결정되어 있는 시간속에 빠져든 것이 아닌가하고 말입니다. 가령, 이미 완성된 영화라 할 수 있겠지요. 나는 그 안에서 스타 역을 해낼 수도 줄거리를 바꿀 수도 없어요."
"그렇다면 펠릭스의 인생은 어쩌며, 결말에 도달해 있다는 말이 되겠군요."
카스피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오늘 현재, 이쪽 편에 있는 내 인생에는----아직 계약은 없습니다. 어떤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지요. 가령 내가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말입니다. 하지만 결과는 어떻게 나올지 눈에는 보이지 않으며 예측도 할 수 없지요. 두 사람 사이의 차이점이라 하면, 나는 살아 있으며, 펠릭스는 죽어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그의 인생의 필름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돌아가고 있는 겁니다."
"물론 펠릭스는 그러한 견해는 아니겠지요."
"예, 그는 내가 자신의 인생을----즉, 제작중의 영화를----보는 듯한 눈으로 그 자신의 인생을 보고 있겠지요."
"당신은 저쪽 편에서는 행동을 제한받고 있었을 텐데, 그에 대한 감상은 어떤가요 ? "
"나는 아내와 딸을 구해낼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된 겁니까 ? "
"그 심상은 당신이 그 두 사람을 잃으려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당신의 감정이 두 사람에게서 유리되고 있는 중이며, 더우기 당신에게는 그것을 멈출만한 힘이 없지요. 감정을 죽이는 것은 좋지 않은 일입니다. 특히 남성은 쉽게 정신의 불모를 초래한답니다."
"그 점을 설명해 주시지요."
"이 상태는 서서히 진행되지요. 고통스러울 만큼 완만합니다. 커다란 전환은 없어요. 가령 모래 알맹이를 짊어지고 걸어가는 개미같은 것이지요."
"다시 한번 말씀해 주세요----나는 완전히 정상이란 말인가요 ? "
"당신은 특별히 나는 프랑스의 왕위 계승자라고 주장하고 있지는 않잖아요. 질문의 의미가 그러하다면 말입니다." 게이라드는 성냥을 그어 파이프에 갖다댔다. "어떻습니까, 정신이상자라며.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생후 18개월 된 어린이의 확대 응시도 그런 현상이지요. 당신은 그러한 눈을 하고 있지 않아요."
"선생님은 내게 활력을 넣으려 하고 있을 뿐이 아닌가요 ? 짐좋 뿔뿔이 분해하려 하고 있는 환자를 이어놓으려 하고 있을 뿐이 아니란 말입니까 ? 진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환자를 말입니다."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정신 병원에라도 들어가란 말인가요 ? 우리는 당신이 구성한 환각의 세계를 빠져 나가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이란 말입니다. 그것도 얼마 안 있어 마지막에 도달한다고 나는 믿고 있는 겁니다."
카스피안 주위를 파이프의 연기가 희미하게 에워싸고 있었다.
"죽음은 연기에 매혹된다고 아메리카 인디언은 말하지요. 연기를 인간의 혼이라고 착각한다든지 말예요."
"재미있군요." 게이라드는 두 사람 머리 위에 연기를 자욱하게 내뿜었다.
"이것으로 이인분이지요, 어때요 ? "

카스피안은 어두운 스튜디오로 들어갔다. 스포트라이트 스탠드와 무대 배경과 공구대 사이를 지나 이동 스낵차 옆을 지나쳤다. 작업원이 무료 간식을 먹고 있었다. 분말 스프와 치즈 크랙커와 종이컵에 부은 LA 명물의 맛없는 커피. 그들의 이야기 소리는 대 개 벽의 흡흠판이랑 방음판에 흡수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귀에 들어왔다.
"...그 얼빠진 요리사 녀석, 잘 보지도 않고 요리한다니까."
"글쎄말이야, 그녀석이 손가락을 처넣은 계란 노른자위 따위 딱 질색이라구 ! "
<스타 로바>의 세트 근처로 나서자, 줄리어스 데브루스카가 심부름하는 사람을 거느리고 자리잡고 앉아, 자신의 돈의 행방에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그의 굵직한 바리톤 소리가 세트에 울린다.
"...반드시 한 사람은 머리가 모자란 블론드가 필요하단 말이야."
카스피안은 빅터가 검은 우주 마술사 겉옷을 걸치고 대본을 한쪽 손에 꽉 쥐고 있는 곳으로 다가가서 그 옆에 털썩 앉았다.
"누군가 마법을 행할 수 있는 녀석이 없나, 요술사 말이야, 진짜로."
"그렇다면 하루 이틀 기다리게. 내가 다니고 있는 헬스 클럽에 이상한 사람이 있으니까 말이야."
"예, <빛나는 숙소>라는 것이 있었지요." 신사는 책상 너머로 카스피안에게 대답했다. 그곳은 남부 캘리포니아 대학 구내에 있는 집무실----종교나 인류학이나 마법에 관한 서적이 산더미같이 둘러 싸여진, 이른바 책벌레의 은거지였다. "정식 명칭은 <토우레 협회>라고 하지요. 중심 인물은 그쪽 계통의 대가인 에츠칼트랍니다. 빈에서 히틀러에게 비밀 의식을 전수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카스피안은 교수의 책상 건너편에 앉아 있었다. 그의 의자 옆에 낡은 서적이 탑처럼 쌓아 올려져 있었다.
"그들은 실력을 갖추고 있었습니까 ? "
"그들은 나치 당의 창시자랍니다. 그것이 실력이랄 수는 없겠지요. 그들이 개최한 어이없는 집회를 회상해 보십시오. 몇십 만이나 되는 철모가 번쩍이며 몇 만의 총검이 빛나는 집회를 말입니다. 우리 미국인은 그것을 정치적인 집회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히틀러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가 행하고 있는 것을 단순히 정치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술이지요. 그리고 분명히 그 마력은 발휘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비물질화라는 기술도 있었단 말입니까 ? "
소볼 교수는 고풍스러운 오크 의자에 앉은 채 몸의 방향을 틀어 발을 책상에 올려 놓았다.
"하우스호퍼라는 남자가 있었지요. 19O3년 당시, 티베트의 굴제프 대학의 학생이었으며, 어떻든지 수초 간에 씨를 발아시켜 성장시킬 수 있다는 이야기랍니다. 히틀러에게 생체 에너지가 체내에 존재한다고 가르친 장본인이지요. 히틀러가 그 방면에 통해 있다는 점은 그의 담화집을 읽으면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은 <사이크롭스의 눈>(Cyclops : 그리이스 신화에 나오는 눈이 하나 달린 거인)을 가지고 있다고 그는 서술하고 있지요."
소볼 교수는 몸을 뒤로 젖히고 무릎 위에 양손을 올려놓고 깍지를 켰다.
"말하자면 그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겠지요. 데니츠 제독 같은 사람은 가능한 한 그가 있는 방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유념하고 있었습니다만, 그것은 자신의 의지를 잃어 버리기 때문인 것입니다. 바다에 나가 폭풍우와 그밖에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사태에 직면해 온 해군의 난폭한 사내가 말예요, 아돌프가 마술을 건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치 사무국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하지만 히틀러는 무너졌지요."
"소멸된 것입니다. 흑마술사로서 연기처럼 사라진 것은 그가 처음이 아니랍니다."
카스피안은 회전 의자에 앉은 채 몸을 천천히 좌우로 돌렀다. 표지가 닳아 뼈지고 페이지가 누래진 서적이 양쪽에 두 개의 기둥같이 쌓아 올려져 있다.
"녹색 용에 관해서 무언가 알고 계신가요 ? "
"일본의 비밀 결사 조직입니다. 티베트 비밀 종교의 영향이 농후하지요. SS는 세펠 박사라는 인물을 티베트로 보내 라마승들과 수도원에서 함께 지내게 해 수행을 시켰던 적이 있습니다. 베를린에 <녹색 장갑을 낀 사내>로 불리우는 티베트의 마술사가 있었던 거지요." 소볼 교수는 의자를 돌려 창문 쪽을 향했라. "일반적으로는 마술사나 주술사는 공중을 나는 개의 뼈라든지 그러한 부류의 것으로 서로 싸운다고 되어 있지요. 그러나  MX 미사일, 그것도 초자연현상적인 마술의 소산인 비행 물체랍니다."
"실은 진짜 마술을 부리는 인간을 찾고 있습니다만."
소볼이 다시 의자에 등을 기대고 발을 책상 서랍에 맞대어 밀어 붙였으므로 의자가 삐걱거렸다.
"유감스럽게도 그런 사람은 알고 있지 않습니다."
카스피안은 몸을 일으켰다. "나치의 마술은 인간의 혼을 육체에서 빼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 "
"그들은 한 민족의 혼을 모조리 뽑아내 버린 것이 아닌가요 ? 독일은 괴테와 바하의 나라였지요. 그것이 어떻게 되었나요 ? 나는 남의 말을 받아 옮기는 역사가에 불과하지만 내게 말하라고 한다면. 그들은 혼이 뽑혀진 것입니다. 어떤 자가 당신의 혼을 뽑아내려고 하고 있단 말인가요 ? "

"...ABC는 죽느냐 사느냐의 각오로 그것을 산 것이지." 마일론은 말했다. "차라리 낙농장을 샀더라면. 좋았을텐데."
"무엇이 쓰러지는지 따위를 어떻게 알겠나 ? "라고 줄리어스 데브루스카가 말했다. "뭐, 알 때도 있기는 있겠지만."
데브루스카의 비서가 그의 옆에 앉아 노트를 쥐고 있다. 카스피안은 세트의 사용되고 있지 않는 한쪽 모퉁이에 설치된 임시 식탁을 끼고 두 사람의 건너편에 앉아 있었다.
"이 영화에서의 자네의 활약상에는 감격하고 있다네, 데이빗." 데브루스카는 그의 스타에게 얼굴을 돌리고 말했다.
"이녀석은 절대로 쓰러지자 않아. 내가 보증하지. 세계가 악하고 놀랄만큼 선전 캠페인을 퍼붓는 거야. 은하계를 뒤흔들 만큼을 말이야."
마일론은 분말 스프가 들은 컵을 손에 들었다. "나 말일세, 지금 친부 확인 소송의 피고란 말이야."
"내게도 경험이 있지."라고 데브루스카가 응수했다. "상대는 상상하기도 함든 정도의 무신경한 여자였어. 여자의 부친은 슬램 가의 악덕 집주인이었네, 여자는 핫도그 스탠드를 하고 있었지. 그 여자가 말일세, 핫도그에 케첩을 뿌리고 피클을 끼우는 틈에 내가 재빨리 소송을 걸었네."
조감독이 카스피안의 뒤에 와서 섰다.
"나갈 차례입니다."
데브루스카는 그의 스타를 향해, 기운을 내게, 라는 식으로 잠시 담배 끝을 쳐들고나서 다시 마일론을 향해 그 소송의 복잡한 짜임새에 관해 조언을 시작했다. 카스피안은 조감독의 뒤를 따라 옥외 촬영 광장의 통로를 지나갔다. 통로는 큼지막한 검은 방수포로 뒤집어 씌어져 대동굴로 변모해 있었다.
그 통로의 중간에 고리 모양의 불빛 아래에, 그를 체포하려고 대기하고 있는 것은 검은 제복으로 몸을 감싼 혹성 용병들이다.
"데이빗 이미 알고 있겠지." 감독인 아머스가 신뢰를 머금고 카스피안을 향해 한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 패거리들을 물리치는 거야." 아머스는 검은 복장 덩어리인 엑스트라 쪽으로 신호를 보내고 나서 그 옆을 빠져나가 카메라와 가까운 위치에 섰다.
"오케이, 모두 실감나게 연기하라구 ! "
카스피안은 자기 위치에 섰다. 매끈매끈한 금속벽에 기댄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검은 복장 덩어리는 카스피안과 밀치락거린다.
"너를 국가에 대한 반역죄로 채포한다." 카스피안은 대본대로 난폭하게 굴었다. 병사들은 그를 밀어 붙였다. 이것도 대본대로였다. 그런데 병사들에게 잡혀도 안개같아서 그러한 느낌을 전혀 받지 않았다.
펠릭스는 퍼뜩 눈을 떴다. 침대에서 상반신을 일으켰다. 목소리는 아직 머리 속에서 울리고 있었다----국가에 대한 반역죄로 체포한다.
중지해. 오늘이라도 나는 국가의 일원으로서의 자격을 그만두는 거야.
침대에서 내려, 잠에서 깨지 않은 채 실내를 돌아다녔다. 실내는 좁은데다 누추하다. 군복은 의자에 걸쳐 있다. 그것은 그대로 두고, 대신에 낡아빠진 사복을 입었다. 창가로 가 거리를 살폈다. 여기저기에 기와조각과 자갈더미가 있을 뿐 사람 그림자는 없다. 두 블록 건너편 쪽은 폭격을 당해 폐허가 되어 있었다.
조그만 경대 위에 분장용 메이크업 박스가 놓여 있다. 그것을 열고 속에서 액체 고무가 들은 병을 끄집어 냈다. 얼굴의 세로 전반, 이마에서 뺨을 거쳐 턱까지 그 액체를 발랐으며, 표면에 주름이랑 곰보 자국을 냈다. 눈 부위도 빈틈없이 발랐으므로 불 주위를 지나간 두 개의 계란구이같은 눈두덩이 되었다.
피부와 흡사한 고무의 두터운 막이 마르자, 그 위에다 자색빛 나는 안료를 발랐다. 화염방사기 희생자, 화상을 입은 부상자로 보일 것이다.
상의에는 병역 해제 증명서, 낡아빠진 군대의 개인 급료 지불 수첩, 몬테카시노 보병 대대 소속 증에 세운 공적을 기리는 표창장이 들어 있다. 그 밖에는 또 한 가지의 신원을 증명하는 서류----노동 및 거주 등록, 배급표, 시민 ID 카드, 여행 허가증이 갖추어져 있었다.
얼굴 표면에 고무로 인혜 생긴 잔금을 만져봤다. 안료도 고무도 다 말랐으므로 검은 두건을 머리로부터 푹 뒤집어 쓰고 타원형의 조그만 구멍을 통해 눈을 냈다. 게다가 두건 위에다 평소 애용하던 중절모를 눈이 가릴정도로 내려썼다.
그리고나서 지팡이를 집어들고 한쪽 발을 질질 끌면서 거울 앞에 섰다. 애용하던 월셔는 눈에 띄지 않도록 상의 밑의 홀스터에 넣어져 있다. 단화 안에는 미제 소형권총이 자리잡고 있었다.
의자에 걸쳐진 군복을 향해 중얼거렸다.
"그럼, 중위. 귀하는 조국을 위해 참으로 애썼네."
또각또각 지팡이로 더듬으면서 계단을 천천히 내려와 해 저무는 거리 모퉁이로 나섰다. 미군이 투하한 소이탄으로 인해 하늘이 뻘겋게 물들었다. 폐허를 몰아치는 바람에 건물의 회반죽이 춤추듯이 날아 올라가 소용돌이치면서 그 일대에 떨어져 내렸다. 그래도 이제 봄은 봄이다. 먼지를 뒤집어쓴 수목에 꽃이 피기 시작하고 있었다.
느릿느릿 거리를 지나갔다. 기와조각과 자갈더미가 구두 뒤축에 닿았으며 봄바람이 빨간 벽돌 먼지를 그의 주위로 날아 올렸다. 폭탄의 유황 냄새에 뒤섞여 복숭아꽃과 사과꽃 향기가 대기 속에 떠돌아다녔다.
모퉁이를 도는 지점에서 전봇대에 시체 하나가 매달려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전날 밤 SS에게 처형된 것일 것이다. 바야흐로 그들은 피에 굶주려 미쳐 날뛰었으며, 탈주병 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까지도 처형하고 있는 것이다.
"이곳은 죽음의 거리라는 것을 몰랐나 ? 오늘밤은 침대 속에 쳐박혀 있어야만 했는데 말이야."
"그렇군요. 하지만 밤공기가 저의 폐에 좋기 때문에."
"그래 ? 그렇다면 실컷 마시게. 이것이 마지막으로 숨쉬는 것이 될 테니 말이야." 근처 전봇대를 손가락질하고, "저것이 네놈 것이다."
"지금까지 몇 사람이나 매달았나요, 장교님 ? " 두건 구멍을 통해 입술에서 새어나온 그 말은 속삭임에 가까웠다.
장교는 빙긋이 웃었다. "전화 번호 부책 한 권쯤 되지."
명령받은 대원이 로프를 가지고 왔다. 장교는 펠릭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복면은 총살 집행 때만 쓰는 것이지. 그러니까 우리들 영웅에게는--
--" 두건을 휙 낚아챘다. 펠릭스의 안면을 뒤덮은 화상 자국 피부 덩어리를 입을 벌리고 바라보는 장교 한쪽 눈은 찌부러 들었고 전체가 그로테스크한 자색으로 변색되어 있다. 장교 손에서 두건이 툭 떨어졌다. "이런 ! 이거 실례했소."
"그럼 나를 이토록 모욕한 분은 어디의 누구신지 물어볼까요." 펠릭스가 말했다.
장교는 뒷걸음질쳤다. "그런... 아무도 그런 짓은." 몸을 웅크리고 두건을 집자 펠릭스에게 되돌려주고, 휙 등을 돌리고 부하와 함께 큐벨바겐에 올라탔다. 굉음과 함께 엔진이 걸렸다. 일행은 요란스럽게 타이어 소리를 내면서 화살같이 사라져 갔다.
펠릭스는 다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봄의 달은 더욱 높이 올라간다. 전선의 포성은 가깝고 대공 감시소는 폭격기의 재공습을 대기하고 있으나, 그럼에도 거리에는 아직도 활발한 기운이 남아 있었다. 폐허 속을 시가 전차가 달렸다.
펠릭스는 옛날 극장가까지 자갈더미 길을 걸어가 종을 울리고 노상으로 뛰어 내렸다. 그곳은 부르크할트 공회당 바깥이었다.
도로를 건너 극장 골목길로 들어섰다. 약속대로 분장실 문은 열려 있었다. 입구 안쪽에 석유통이 쌓아 올려져 있다. 그와 비젤이요 몇 주일 간에 걸쳐 쌓은 것이다. 한쪽 손을 품 속의 권총으로 가져가 발소리를 내지않고 복도를 지나갔다. 이 극장은 그 어느 누구도 일부러 들어오지 않으니 안전하다고 게프타 셔페르즈가 말했다. 그러나...
무대 뒤 통로를 발소리를 죽이고 지나쳤다. 무대 날개에 드리워져 있는 막의 주름 가장자리에서 일단 멈춰 섰다. 극장 안은 휑하니 텅 비어 있다. 오늘은 리허설도 없으며 연극도 없다. 연합군 전차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막 가장자리에서 무대로 올라갔다. 대도구도 없는 음울한 무대. 그럼에도 무대 중앙으로 나서는 그의 발걸음 소리는 널찍한 공간에 울려 퍼졌다.
"인생은 떠돌아다니는 그림자. 가련한 광대다, 무대 위에서 과장된 연기를 하더라도 출연이 끝나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세익스피어 작 [맥베드] 제5막 5장)
억누른 목소리였으나 극장의 활처럼 굽은 벽을 타고 잘 전달되었다. 그러자, 뒤쪽 좌석 어두운 곳에서 느긋하며 엄숙한 박수가 울리고, 비젤이 일어서 무대를 향해 다가왔다.
"멋져 ! 자네에게 그 역을 맡기도록 하지." 그는 펠릭스 얼굴의 화상 흔적을 찬찬히 관찰했다.
"이거 걸작인데. 내 코도 고춰줬으면 좋겠는 걸."
펠릭스는 계단을 내려와 무대 앞쪽 밑에서 합류했다. "이제 나가볼까 ? "
"북베스트팔레인의 한촌이야." 비젤이 말했다. "그곳은 공습은 전혀 없지. 숙소 주인은 우리편이고 경찰 서장은 프레디 조송이야. 그녀석에게는 최고급 샴페인을 건네 주었어. 그런 것은 마신적도 없었을 걸세."
"그럼, 차는 ? "
"오스트리아 제 다이믈러를 봐 두었네. 그런데 내가 아는 젊은 놈을 데리고 가지----빌리 지펠스라는 놈인데----머리는 대단치 않지만, 녀석에게 빚이 있단 말이야. 더우기 그 녀석이라면 다이믈러를 기차게 몰 걸세." 손목 시계를 봤다. "이제 갈 시간이네." 포켓에 손을 찔러 넣고 가죽으로 만든 종이 끼우개를 끄집어 냈다. "곤돌프의 유작이지." 비젤은 <베를린 방위지령서>를 쳐들었다. 이 지령서의 휴대자----
국방군, SS, 게쉬타포, 나치당----에게는 만인이 협력해야만 함. "재미있는 여행길이 될 것 같군." 펠릭스는 담배를 끄집어내 불을 붙였다.
"아무런 보증서도 없었지만, 어쨌든 여기까지는 왔네, 마지막까지 가는 것도 하나의 흥이 아니겠나 ? " 비젤은 펠릭스의 담배를 한 개비 뽑았다. "요즈음 게르타는 어때 ? "
"그런대로 즐겁게 지내지. 요즈음은 독일 공군 클립에 출입하고 있네. 그녀는 말일세, 곤도르를 타고 베를린을 탈출한다는군."
"나참, 걸음마를 공중에서 배웠나."
펠릭스는 무대 쪽을 향해 머리 위의 틀과 모래주머니가 매달려 있는 공간을 두드렸다. "만일 러시아 군과 마주치면 ? "
비젤은 포켓에서 별개의 서류 한 통과 헝겊으로 만든 세개의 별 표지를 끄집어 냈다. "우리는 도망중인 유태인이지."
펠릭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무대 전면에 맞추어 양팔을 펼쳤다.
"난, 지쳐 버렸어. 아담한 정원에서 화초라도 가꾸고 싶은 심정이라네."
"옛날에 씨를 한주머니 손에 넣었었지." 비젤은 자색 연기를 무대 위로 내뱉었다. "소중히 키웠으나 결국 싹트지 않더군."
"자네가 무서웠던게지, 비젤. 그러니까 따뜻하고 있기 편한 껍질 속에 틀어 박혀 있기로 했던 거야."
"나는 때때로 상상한다네, 우리집 창틀의 화분 속에서 싹이 올라왔더라면 어떻게 되어 있었을까 하고 말이야."
"자네 딴사람이 된듯 하군, 요즈음은."
"자네 말이 맞아. 그 이후 나는 아주 고독했어."
펠릭스는 손목 시계에 눈길을 주었다. "우리들 운전 기사는 어디에 있는 건가 ? "
"그녀석은 절대로 믿어도 좋아." 비젤은 가느다랗고 조그만 눈을 놀리기라도 하듯이 반짝거리며 펠릭스를 쳐다봤다. "어딘가에서 팬케이크 껍질에 휩싸여 동면이라도 하고 있지 않는 한 말이야." 펠릭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어렸을 적엔 수줍음을 탔지. 자넨."
펠릭스는 담배를 바닥에 비벼 껐다. "꽃 이야기를 곧잘 했었지."
비젤은 중산모를 벗었다. 그리고 괜스리 모자 안쪽의 흰색 빌로드 안감을 살펴보았다.
"말러는 소식이라도 보내나 ? "
"르가노 별장에 있네. 그쪽은 항상 봄이라더군."
"내 가슴 속 같군." 비젤은 다시 모자를 쓰고, 조그맣고 침착한 눈위에 모자챙을 비스듬히 눌렀다. "뚱뚱보 프리츠를 기억하나 ? 그녀석, 죽은 암소 뱃속에서 체포되었지." "정말 미식가가 숨을 만한 장소야."
"녀석들, 프리츠에게 사격해 암소를 묵사발로 만들어 버렸다지." 비젤은 소매자락으로 엿보이는 풀을 맥인 흰 커프스를 잘 매만졌다. "옛날 동료들은 모두 연행되어 버렸거나 예사로 죽음의 길로 들어섰네. 죽음으로 통하는 길은 이제 완전히 잘 다져져 있단 말일세. 싱긋이 웃고, "우리가 지나칠 즈음에는 닿아 빠져 있을 꺼야." 하고 말했다.
펠릭스는 무대 밑을 왔다갔다 했다. 시간을 들여 독일을 횡단하기로 하자. 이전에 다른 동료들이 똑같은 일을 실행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무대 전면의 표면을 어루만졌다.
"먼지군. 요즈음은 연극이나 공연을 하고 있는 곳을 찾아볼 수 없단 말이야."
"몰힌겔슈트라세에 벨리 댄서가 있다는군. 달걀 한 개로 개인 교습을 해준다는데." 비젤은 다를 한쪽의 커프스를 매만졌다. 고개를 옆으로 갸웃거리고, "이제야 빌리가 행차하시는군."
 두 사람은 통로에 발을 들여 놓았다. 극장 정면과 옆쪽 문이 동시에 확 열렸다. 빛나는 검은 가죽 외투의 무리들 중에, 게르타의 깃털 장식이 달린 모자가 있었다.
펠릭스는 무대를 따라 뛰었다. 탄환이 펑펑 날아와, 머리 위 무대에 명중했다. 비젤이 그의 바로 뒤를 달리면서 자동 권총을 연사했다. 통로에서 게쉬타포 두 사람이 뒤로 나자빠져 한바퀴 굴렀다. 펠릭스는 무대로 뛰어 올라 무대 옆쪽으로 기어 들어갔다. 뒤이어 비젤이 미끄러져 들어와 몸에 감긴 막의 주름을 마구 흔들어 풀었다.
"우리를 팔아 넘겼어, 그년이 ! "
비젤은 펠릭스를 일순간 응시했다. 그 눈 속에서 펠릭스는 친구의 전 인생을 똑똑히 바라봤다----한번만의 고독한 꿈, 식목 상자에 핀 꽃, 그리고 밟아다져진 죽음의 좁은 길.
비젤은 막의 날개를 따라 조금씩 나아갔다.
"보게, 지금 그 깃털 장식을 날려 버릴테니 말이야." 자동 권총 방아쇠를 당기면서 뛰어 나간 비젤은 기관총의 일제 사격에 의해 쓰러졌다----그는 앞으로 고꾸라졌으며 방아쇠에 손가락을 건 채, 한쪽 팔을 무대 가장자리로 축 늘어뜨렸다.
무대 날개의 왼쪽에도 오른쪽에도 게쉬타포로 꽉 차 있었다. 펠릭스는 권총을 팽개치고 양손을 쳐들고 무대에 모습을 드러냈다. 게르타가 극락조 깃털 장식을 모자 위에서 가볍게 흔들거리면서 에밀 바이아스와 함께 통로를 통해 이쪽을 향해 다가온다. 무대 아래까지 오자 게르타는 펠릭스를 올려다 봤다. 그 눈은 눈물을 머금어 반짝거리고 있었다.
"무대 행위라고는 하지만요. 지금에 와서 변명할 여지가 없는 짓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다링."
에밀 바이아스가 다가왔다.
"국가 반역죄로 너를 체포한다."
꿈에서 들은 대사다, 라고 펠릭스는 생각했다.
"잘했어요 데이빗. 그 마지막 장면은 상당히 좋았어요. 내일까지 당신은 무죄 방면이에요."
그는 로데오 드라이브를 캐롤과 걷고 있었다. 캐롤의 뾰족한 구두가 또각또각하고 리드미컬하게 소리를 냈다. 그와 팔짱을 끼고 있었으므로 손목에 빽빽이 낀 금팔찌가 그의 소매에 스쳐 소란스럽게 울렸다.
"저 발견했어요. 에라뷜이라는 정신 신경 안정제를 말예요. 잘게 부쉬 조금씩 핥고 있으면 훨씬 기분이 가라앉는대요."
"오랫동안 고대하던 의학상의 대진보로군."
캐롤은 그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데이빗, 사실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하면요, 촬영도 거의 끝났으니까 잠시 동안 약을 먹고 자신의 치료에 전념하세요. 당신은 마치 벽의 소켓에 부리를 넣은 하우디 도우디 같다니까요."
"정신신경 안정제로 낫는 것이라면 게이라드는 벌써 그 약을 주었을텐데."
"옥외 커피점에서 에라빌에 관해서 멋진 이야기를 들었어요. 당신은 고급스러운 무드에 젖어들고 싶지 않아요 ? "
"에라뷜이 그 커피점에 어떻게 효과가 있다는 거지 ? "
"몰라요. 도너츠가 둥실둥실 춤을 추기 시작하지 않겠어요 ? 커피를 사는 2분 동안을 의의가 있는 일에 사용하고 있는 거겠지요. 그사람, 훨씬 좋아 보였어요."
칼메리타 아베뉴로 방향을 틀었다. 카스피안은 그녀와 팔짱을 끼고 있는 팔에 꾹 힘을 주었다. "예약은 몇 시였다고 했지 ? "
"1시 15분에요. 보랏빛조개 요리부터 시작해서 메인은 홀스타인을 얇게 썰은 슈니첼이지요."
카스피안은 그 말을 받아 무언가 말하려 했으나, 갑자기 넓적다리 사이에 격심한 고통을 느꼈다. 그는 앞으로 몸을 웅크리고 부득이 멈춰섰다. "잠깐... 기다려..."
"데이빗, 무슨 일예요 ? "
"마치... 걷어 채인 것 같아... 불알을."
"어머, 어떻게 하지요, 그렇다면. 무서운 성병의 초기 증상인가요 ? "
"가만... 기다려 줘." 통증이 줄어들기 시작했으므로 몸을 일으켰다. 식은땀이 배어 나온 이마를 손으로 비볐다. 캐롤이 손을 내뻗어 그런 그의 가슴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아니, 갑자기 그곳에 통증이 오다니 원인이 도대체 뭔가요 ? 내게 숨기는 일이라도 있어요 ? "
"이것은 펠릭스와 관계가 있는 일이야."
"데이빗, 우리는 지금 사무엘 베케트의 극을 연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게쉬타포가 그를 고문하고 있는 거야."
"데이빗, 우리는 비스트로로 가는 도중이란 말예요. 가게 안은 은은하게 밝다니까요. 실내장식은 파리를 연상시키구요. 첫째로 비버리 힐즈에는요, 게쉬타포 따위가 있을 리가 없어요. 저는 덜덜 떨지 않는다구요. 커피점에 부탁하고나서 당신이야말로 당장 에라빌을 먹어야겠어요."
"괜찮아, 캐롤. 이것은 모두 저쪽편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구."
"어떻게 하죠 ? 제 남편이 이런 일을 당하고 이상한 말만 하니 말예요." 캐롤은 생각이 떠오른 듯이 팔찌를 정돈하고나서 거리를 두리번두리번 둘러봤다.
"게이라드 선생을 부를까요."
"나는 괜찮아. 자, 비스트로로 갑시다."
마일론은 카네로니(이태리 국수 요리의 한 가지)를 앞에 놓고 두 사람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뒤편 기등에는 벨 에포크의 소녀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는 캐롤과 담소하고 있었으며,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아, 이야기는 그에게서 들었어요. 소각로를 히틀러에게 어떻게 해서 강매했는가 말예요. 그건 나 역시 처음에는 무척 고통스러웠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아요. 왜냐구요 ? 그것은 그가 생애 최고의 연기를 보여 주었기 때문이지요. 전에 없으리만큼 불타고 있어요. 이제 어디에 가더라도 그라면 척하고 통하지요. 그것이 정신위생상 중요한 일인 셈이지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마음 든든해요, 마일론." 캐롤이 말했다. 눈앞의 슈니첼 홀스타인에는 손을 대지도 않았다.
"나는 리얼리스트랍니다. 보세요----" 하고, 포크로 카스피안을 가리키고, "그는 이곳에 있어요, 먹고 있어요, 정상이지요. 그렇지요 ? "
"예, 그래요."
"나는 진짜로 미친 클라이엔트를 데리고 있었던 적이 있지요. 그당시 그는 우편 배달부 모습을 하고 내 사무실에 나타났던, 거죠." 마일론은 카스피안에게 포크를 향한 채 캐롤 쪽을 바라봤다.
"남편께서는 우편 배달부 모습을 하고 나가려 하곤 했나요 ? "
"아니요."
"그렇다면 명백히 미친 것이 아닙니다. 그는 꽤 까다로운 사내지요. 솔직히 말하자면 성질이 비뚤어진 사람예요. 성질이 비뚤어진 것이 미치광이는 아니지요."
"데이빗, 나는 미치지 않았어요 라고 맹세해 주세요. 저를 니진스키의 아내 같은 처지에 빠지지 않도록 말예요. 저의 슈니첼에 걸고 맹세해 주세요."
"맹세하지."
"좋아요, 그럼 저도 먹도록 하지요. 하지만 혈당치가 내려간단 말예요. 그래도 저는 아직 걱정스러워요. 그래요, 식사를 마치면 곧장 집으로 돌아가 오늘은 종일 정원을 돌보도록 해야겠어요."
"좋고말고." 카스피안은 말했다.
"그것 봐요, 말을 잘 알아듣는군요." 말일론은 또 다시 포크를 쥔 손을 흔들어 보이고 말했다.
"이제부터 집에 돌아가 정원을 돌보라구. 아티초우크의 발육 상태를 봐. 그것뿐만 아니라 아티초우크에게 뭇솔리니의 이야기라도 해 주라구. 그러나 그건 단순히 예술가의 기벽이니까 부인과 에이전트가 참견할 일이 아니겠지."




제23장  어둠의 장막



마일론 피쉬는 한손에 커피, 한손에 샌드위치를 들고 카스피안의 분장실에 앉아 있었다. 그 샌드위치를 불빛에 비쳐보면서 "줄리어스 녀석, 이런 샌드위치를 어디서 사 왔을까. 꼭 플라스틱 같은 맛이 나는군." 한입 베어먹고 카스피안의 얼굴을 보았다. "컨디션은 좋은 것 같군. 기분은 좀 좋아졌나 ? "
"훨씬 나아졌어." 카스피안은 다리를 위로하고 분장실의 장의자에 누워 신문을 펼쳐 들고 있었다.
"당신의 이번 계약서를 레벤소르 앤드 호워스 사의 조사부에 건네줄까 하고 생각하고 있네. 레이다와 정밀한 탐지기로 속임수는 없는가를 조사해주지. 그 가운데 한 글자라도 몇백만 달러의 손해가 되는 경우가 있으니까."
"자네에게 맡기겠어, 마일론."
"누가 뭐래도 당신의 벌이는 엄청나게 많아질테니까 말이야. 받게 될 이익 배분도 이만저만이 아니지. 레벤소르 앤드 호워스 사에 재무를 모니터하지 않는 인간은 머리를 의심받아 싸지. 물론, 요금은 많지 않지만."
"그야 그렇겠지."
"그래도 의뢰하기로 정했네. 그 소식을 당신에게 전해주려고 생각했지. 내가 어떻게 되었을 경우에 대비해서 말일세."
카스피안은 신문을 내려놓고 피쉬의 얼굴을 보았다.
"당신이 어떻게 된다는 건가 마일론 ? "
"내가 친부 확인소송에서 싸우고 있는 것을 알고 있을테지 ? "
"요즘은 그런 일로 사형을 당하는 건가 ? "
"심적피로. 압박. 내가 사랑했던 여자, 내 가정에 들어왔던 여자, 나의 개에게 밥을 준 여자, 내가 마음을 준 여자가 이런 처사를 하는 거야. 나는 그녀의 장래를 돌봐줄 생각이었네. 마법의 문을 열어줄 생각이었어."
"시간을 너무 오래 끈 것이 아닌가 ? "
"이런 일은 시간이 걸리는 법이지, 나는 꼼꼼히 밭에 씨를 뿌리고 있었던거야."
"그 여자에게도 씨를 내린 것은 분명하군."
피쉬는 우물우물 샌드위치를 씹었다.
"내 회계사가 파이프커트를 권하고 있지만."
"그 회계사는 자기 사무실에서 그것을 하고 있는게 아닐까 ? "
"나같은 직업의 인간은 말일세, 기회만 있으면 기어올라 가려고 노리고 있는 젊은 여배우와 사업상 항상 접촉하게 되니까----"
마일론은 샌드위치를 떨어뜨렸다.
"왜 나를 이런 곤경에 몰아넣는 거지 ? 이런 치사한 짓을 잘도 하는군. 이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지 ? 내가 시담금을 줘서 그녀를 매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라구. 법정에서 싸우게 되면 나는 파산일세. 나는 입은 걸지만 근본은 착한 사람이야, 데이빗."
"알고 있네, 마일론."
"나는 이혼 법정에 섰던 경험이 다섯 번이나 있지 않나 ? 그래서 어떻게 된 줄 알고 있나? 초대면 때 아가씨의 눈을 들여다 보면 말일세, 그 아가씨의 변호사가 나를 되노려 보고 있는 것이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단 말이야."
분장실 문을 누군가가 노크했다,
"카스피안씨, 나갈 차례입니다."
카스피안은 일어서서 신문을 접었다. 문 옆의 의자에 우주 헬멧이 놓여 있다. 그것을 옆구리에 끼고, 샌드위치를 부루퉁해서 내려다 보고 있는 마일론을 남겨두고 분장실을 나갔다. 긴 낭하를 지나 눈부신 태양 아래로 나갔다. 세트까지 그를 태우고 갈 마이크로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촬영소의 구내를 지나, 그 옥외 촬영 광장에 있는 거대한 방수포를 덮은 통로까지 얼마 안 되는 시간이었다.
버스를 내려서 어둡게 한 일각으로 들어갔다. 촬영반과 조명계와 음성반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카스피안은 세트로 들어갔다. AD가 백묵으로 줄을 쳐 놓은 데서 기다리고 있었고, 아머스 감독과 촬영기사는 이미 12회 반복한 슈트를 다시 검토하고 있었다.
"NG, NG로 미칠 지경입니다." AD가 지친 어조로 말했다.
"인내, 인내 ! " 카스피안은 마크에게 맞장구를 쳤다.
AD가 메가폰을 들었다. "조용히 해 주세요."
아머스와 촬영기사는 카메라 옆에 자리를 잡았다. 카스피안은 눈을 감고 큐를 기다렸다.
"갑시다---조용히하고."
"준비---- ! "
"카메라 오케이 ! "
"액션 ! "
카스피안은 젖은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피사체가 빛나 보이도록 적셔놓은 것이다. 외계의 금속적인 성벽도, 지하 도시도 빛나고 있다. 거리의 끝까지 걸어서 가지 않으면 안 된다. 배의 레이저상이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 <우주의 방랑자>의 배가 고독한 파일럿을 태우고 초시공항행을 떠나기 위한 준비를 완료하고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카스피안은 느릿느릿한 발걸음으로 강렬한 레이저광을 발하고 있는 상을 향해서 걸어갔다. 불과 얼마 남겨 놓지 않았을 때 심한 현기증에 사로잡혔다. 간신히 서 있기는 했지만 그때문에 위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 오는 것 같은 감각을 억누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위를 비롯해서 모든 기관이 반전한 것이 아닌가고 생각되었다. 한 순간 다리로 서 있는지 머리로서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레이저광은 한 덩어리로 응축되었는가 했더니 불타는 태양으로 변했다. 눈을 뜨고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눈부셨다.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모든 것을 불태워 버릴 것 같은 빛일 안곽을 꿰뚫었다. 그러자 빛이 차츰 뚜렷한 형태를 취하기 시작했다----구형의 전체, 코로나를 갖지 않은 태양, 그리고----그냥 전구가 되었다. 손을 들어 가리고 이글이글 타는 불빛을 피하며 자기가 있는 장소를 가늠해 보려고 했다.
우측에 콘크리트 바닥. 좌측에 돌로된 벽. 소변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입술에 핏덩어리가 달라붙어 있다. 이런 일들을 차례차례로 지각하면서도 자꾸만 가라앉아갔다. 밑으로, 밑으로, 아픔의 영역을 통과하여 망각의 구렁 속으로, 그곳에 있다고 믿어지는 피신 장소로. 데이빗 카스피안의 존재는 점점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대로 펠릭스 파르켄하인의 마음속에 서 있는 조그만 감시초에 들어갔다. 그곳에선 상황을 방관할 수가 있었다. 그것은 꿈을 꾸는 것과 비슷했다 꿈속에서는 설사 이상한 고문이 행해져도 에고는 상처를 입지 않는다. 더욱 깊이 침하하면서 그는 생각했다----지금 궁지에 빠져있는 것은 펠릭스인 것이다.
나는 다른 차원에서 찾아온 한 조각의 파편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 것도 겁을 먹을 것은 없다. 그냥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이 상태가 지나갈 때까지... 그냥 기다리고만 있으면....
그는 목적하는 계층까지 내려갔다. 이제 위험은 없다. 그러자 펠릭스는 침상에서 일어났다. 조그마한 어떤 것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둥실둥실 떠돌아 다니고 있었다. 그 이상한 감각에 어렴풋한 망설임을 느끼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 존재도 그녀석이 갖는 이질적인 사고와 함께 그때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
비틀거리면서 감방의 두꺼운 나무문으로 다가갔다. 지끈지끈하는 머리를 문의 차가운 쇠테에 갖다 대었다. 이마를 비벼대도 두통은 속깊어서 쇠의 차가움도 그곳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아픔은 머리의 구석구석에 있었고, 이가 흔들리는 잇몸에까지 침투해 있었다,
루가노에 있는 말러를 생각했다. 그곳은 언제나 봄이라고 한다. 호숫가, 야자나무 그늘에 놓여진 테이블에서 차가운 음료를 마시고 있는 말러의 모습을 마음속에 떠올렸다. 음료를 손에 들고 그녀의 탈출을 도와준 친구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 ? 아니다, 그녀는 투자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 이제 곧 취리히에서 온 은행가와 만찬을 함께 할 것이다.
나도 내 돈을 꺼내와야지. 서류를 두세 장 뒤져서 내 이름으로 타인의 장례식을 치룬다. 그리고 그것은 나를 청천백일의 몸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문에서 몸을 뗐다. 낭하로 발 소리가 다가온다. 귀를 기울이고, 자세를 갖추고, 빗장이 벗겨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문이 천천히 열리고 미소를 띤 리츠 하사가 감방 안으로 들어왔다. 거대한 몸이 문 전체를 가로막고 있다.
"여어, 중위 ! 오늘은 어떤가 ? 재미있게 지내고 있나 ? "
펠릭스는 부풀어오른 눈꺼풀 밑으로 그를 마주 쳐다보았다. 하사가 다가왔다.
"옷을 입어."
펠릭스는 죄수복인 회색 셔츠와 바지를 입었다. 리츠로부터 떨어져 있으려고 조심했으나 하사는 아직 그를 발로 찰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그는 펠릭스를 낭하로 끌어내서 등을 밀치며 앞서 걸어가게 했다.
펠릭스는 하사의 앞을 비틀비틀 걸었다. 하사가 바로 뒤로 와서 낮게 얘기를 했다.
"놀랐어, 자네처럼 머리가 잘 도는 인간이 이곳에 기어들어 오다니. 그러니까 자네는 미행당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지 ? 그런데도 나중에 한장, 표가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 말이 틀렸어 ? 어처구니 없는 녀석이지..."
리츠의 굵은 목소리가 텅빈 통로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자네, 어딘가에 한 재산 숨겨놓고 있지 ? " 귓가에서 리츠의 목소리가 계속되었다. "그런 것은 지금은 아무 소용도 없지. 그것에 비하면 나에게는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돈은 한 푼도 없지. 한 푼도 없지만 내게는 자유가 있고, 자네에게는 그것이 없다구. 그러고 보면 어느 쪽이 상팔자일까, 응, 중위님 ? "
리츠는 다시 그를, 이번에는 계단 위를 향해서 떠밀었다.
윗층의 낭하에는 옆의 창에서 비쳐드는 햇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다 못 해 리츠와 거래할 시간을 벌수가 있다면, 그런 생각이 있다는 것을 그는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얘기가 하고 싶소." 펠릭스는 조그만 소리로 속삭였다.
"나중에."하고 리츠는 말했다. "그때까지 자네가 견디어 낸다면 말이지만." 그는 펠릭스를 회색 유리가 끼어진 문으로 데리고 갔고 문을 열었다. 펠릭스는 안으로 들어갔다. 프랑크푸르트의 게쉬타포의 책임자 오스발트 포피에가 책상 너머에서 펠릭스를 응시하고 있었다.
"자네와 다시 얘기하게 되기를 학수 고대하고 있었다네, 중위."
포피에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창가에 서서 집 밖을 바라다 보았다. 저곳으로 날아가고 싶다고. 펠릭스는 생각했다 그러나어디로 ? 라벤스부르크로, 만하임으로, 베스트파렌으로. 베스트파렌에서는 하지의 날 바퀴에 불을 붙여 산 위에서 굴리는 관습이 있다. 불길에 쌓인 그 바퀴 속에 한 사람이 못 박혀 있는 것을 지금 펠릭스는 보았다.
포피에는 창을 향해 담배 연기를 한줄기 뿜어내고 나서  펠릭스를 돌아다 보았다.
"나는 자네를 사형에 처할 수도 있고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줄 수도 있네. 아무도 나의 명령을 철회할 수가 없지."
포피에는 책상을 돌아와서 책상 가장자리에 기대고, 팔짱을 끼고 연한 하늘색 눈으로 펠릭스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자네는 많은 하사관들과 일을 해왔지." 포피에는 숨을 들이쉬고 천장에 '후' 하고 연기를 뿜어 올렸다. "물룬 그녀석들의 이름은 모두 알고 있지. 그러나 증거가 없는 거야. 아무튼 자네는 참으로 교묘하게 그들의 행위를 은폐해 왔으니까. 하지만 범죄는 내 관할 구역에서 행해졌지. 동부 점령지구로부터 수송되어 온 화물은 이곳 프랑크푸르트에서 수령되고 있어. 그들이 범한 국가 반역죄에 관한 공술서를 내게 제출해. 그러면 자네를 방면시켜 줄 테니까."
펠릭스는 부풀어 오른 눈꺼풀을 해서 포피에를 빤히 쳐다보았다. 멍하니 '앞으로 또 얼마만큼의 고통이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내 부하의 어떠한 범죄도 나는 전혀 알고 있지 못합니다."
"과연." 포피에는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뮬러는 ? "
"뮬러 대령님은 완전 무결한 상관입니다."
"그가 도와주러 오리라고 기대하고 있겠지."
"내 변호측 증인이 되어 주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네의 자유를 다시 사 주리라고 믿고 있겠지, 아닌가 ? " 포피에는 담배를 비벼껐다. "하지만 그것은 어떨까. 그정도의 계급과 사회적 지위가 있는, 훈장까지 받은 고급 장교가 자네 같은 사람을 위해서 편을 들어서 명성을 내동댕이 치리라고 생각하나 ? "
"뮬러 대령이 어떠한 행동을 취하실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는 일입니다."
포피에는 책상에서 몸을 떼어내서 문쪽으로 걸어갔다.
"그놈을 데리고 나를 따라와." 리츠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펠릭스는 리츠와 나란히 낭하를 걸어갔다. 이곳은 시민들이 어떤 일이 있어도 발을 들여놓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장소. 모든 사람들로부터 (물의 집)이라고 불리우고 있는 건물이다. 여기서는 불과 몇 개의 담배와 교환으로 매우 손쉽게 처형이 실시된다. 훈장을 받은 군인이 "어쩌면 총통은 지도자로서 그릇된 판단을 내리지 않았을까." 하고 엉겁결에 말을 했기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국가는 우리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다."고 얼결에 큰 소리로 불평을 털어놓은 늙은 부인이 이곳에서 죽어갔다.
포피에는 별채로 펠릭스를 데리고 갔다. 창이 없는 낭하의 양쪽에 자물쇠를 잠근 문들이 늘어서 있다. 포피에는 그 하나를 열게 하고는 안으로 들어가라고 펠릭스에게 손짓했다.
벽에 벌거벗은 뮬러가 매달려 있었다. 양 팔은 등에서 꺾여있고, 핑크빛의 올챙이 배에는 온통 검게 멍이 들어 있었다. 여성의 그것처럼 늘어진 가슴. 다리가 깨끗이 면도질된 것을 펠릭스는 놓치지 않고 보았다. 뮬러는 간신히 고개를 쳐들고 부풀어 오른 뺨을 실룩거렸다. 눈물이 스며나온 눈은 작고 가느다란 줄이 되어 있었다.
"자넨가..."
펠릭스의 몸이 휘청했고 리츠가 그것을 바쳐주었다.
"그의 팔은." 하고 포피에는 작은 목소리로, "비틀어서 어깨쭉지에서 빼 놓아 버렸지. 그다지 편한 죽음은 아니겠지."
포피에가 고개를 돌려 신호를 하자 하사는 펠릭스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다른 문이 있는 곳으로 가서 열고 거칠게 펠릭스를 밀쳐 넣었다. 벽에 인간을 달아매는 체인이 걸려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갖가지 고문기구.
비정한 기구는 벌거벗은 전구의 불빛을 받아 차거운 빛을 발하고, 임무를 수행하고 싶어서 좀이 쑤셔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 곧 전문가가 올 거다." 포피에가 말했다. "그의 일 솜씨를 바라보는 것은 참 즐거운 일이지. 그는 일종의 예술가더군."
리츠는 옷을 벗으라고 명하고, 수갑으로 펠릭스를 의자에 붙들어댔다. 그것이 끝나자 두 사람은 펠릭스를 놓아두고 방을 나갔다. 문이 찰칵하고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러나, 그 희미한 소리는 뱀의 독처럼 펠릭스의 몸 안을 미친 듯이 돌아다녔다. 손목에서 수갑이 철컥철컥 울정도로 몸이 떨렸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이 방, 이 의자 이외에는 결국 갈 곳이 없다는 것을.
바로 이곳이다. 성공도 계획도 책모도 그의 행선지를 바꿀 수가 없었다.
다시금 문이 열리고 몸집이 작고 쾌활해 보이는 사나이가 들어 왔다. 의사용 가방을 안고 윗저고리의 옷깃에 카네이숀을 한 송이 꽂고 있었다. 사나이는 펠릭스에게 웃는 얼굴을 돌리고, "오늘은 무덥군." 하고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가방을 열고 메스와 강철제의 푸롯드를  메ㅊ 개씩이나 꺼내서 테이블 위의 다른 기구들 옆에 솜씨좋게 늘어놓았다.
"이 방에는 꼭 선풍기가 필요하다니까. 공기가 너무 탁해. 그러나---
-" 하고 다시 상냥하게 웃어 보이고 "----어쨌든 전쟁 중이니까 말이지. 물자의 부족은 우리 모두가 참고 견뎌야 한다구. 자아, 그럼--
--"
한동안 기구류를 점검하고 나서 가느다란 메스를 손으로 집어들었다.
"이것을 잠깐 실험해봐도 좋겠나 ? " 메스가 펠릭스의 뺨에 가볍게 닿는 순간 펠릭스는  피가 얼굴을 흘러 내리는 것을 느꼈다.
"굉장히 잘 드는군. 그렇게 혹사했으면 무뎌질 때도 되었는데 말이야." 사나이는 메스를 빛에 비쳐보고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나서 펠릭스에게 눈을 돌렸다.
"이녀석을 못쓰게 되어 버리면 어쩌나하고 걱정이 된가니까."
"어떻게든 되도록 되어 있지." 펠릭스는 혀 위로 흘러 내리는 피를 맛보았다.
"그렇게 될까 ? , 그렇겠지. 연구를 하면 되겠지." 사나이는 우아한 솜씨로 손을 대고 있지. 시간이 절약되니까 말이야. 대동맥에는 손을 대지 않지. 그린 짓을 했다간 죽어가는 무서움을 당자가 느끼지 못하게 될 테니까 말이야. 아무튼 오늘은 오후 내내 함께 지내게 될 테니까."
사나이의 손은 작고 섬세했으며 주근깨 투성이었다. 사나이가 메스를 내려놓았기 때문에 펠릭스는 수갑을 위로 향해 힘껏 잡아 당겼다. 쇠사슬은 끊어지지 않았으나 그는 자신의 몸이 둥둥 떠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떠올라가서 지금은 의자의 조금 위에서 다른 각도로 고분자를 내려다 보고 있다. 다음 순간 문득과 정신을 차려보니까 봄은 벌거벗은 전구의 눈부신 불빛 가까이, 천장 근처를 떠다니고 있었다.
데이빗 카스피안도 또한 동시에 세포의 구석에서 떠올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안으로 들어온 그 육체를 뚜렷이 의식했다. 그리고 또한 그것을 의식하면서 신경과 체섬유의 구석구석까지 충만해갔다. 그는 수갑으로 의자에 묶여져 있고, 한 사람의 광인이 그의 위에 몸을 수그리고 있다.
누워있는 카스피안은 방안에 또 한 사람이 있는 것을 보았다. 천장에 망령과 같은 것의 윤곽이 보인다. 그것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아우프, 뷔다젠, 하고 펠릭스가 말했다.
"기다려 ! " 카스피안은 절규했다. "돌아와 ! 가버리도록 내버려 둘줄 알고 ! "
힘껏 수갑을 잡아당기는 카스피안. 그 사이에 펠릭스는 천장으로 사라져 버렸다.

펠릭스는 커다란 검은 방수포로 둘러 싸인 인공의 길에 서 있었다. 느릿느릿하니 로보트와 같은 동작으로 몸을 움직이고 자기가 지금 있는 장소를 확인했다. 한쪽 손, 한쪽 다리를 움직여서 데이빗 카스피안의 독특한 육체의 리듬을 감지했다----자신감에 찬 발걸음, 각본대로의 빈틈 없는 몸의 움직임----수련의 선물이다. 뇌에서 손 끝으로, 신경 에너지가 골고루 퍼진다. 그것들을 하나 하나 확인하고나서 천천히 익혀갔다.
빈틈 없이, 탄로가 나지 않도록 세트의 어두운 부분을 골라서 걸었다. 언어 패턴은 형성의 도상에 있었다. 그리고 기억의 만화 경도-
---가느다란 조각이 모여서 반짝반짝하면서 인격의 불가사의한 핵 주위를 빙빙 돈다.
그는 극장 비슷한 건물에 끼어있는, 불이 켜 있지 않은 복도로 나갔다. 목재가 쌓여져 있다. 전구가 끼어 있지 않은 조명 스탠드로 쌓여 있었다.
조심스럽게 빙그르 그곳을 피해 지나가 복도의 끝까지 가서 다시 건물의 정면이 늘어서 있는 넓다란 어두운 길거리로 나왔다. 해머 소리와 기계의 소음과 멀리서 들리는 사람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모두가 촬영소의 봉해진 미로에 산울림되어 전해온다. 소리와 그 출처가 머리 속에서 이어지고, 새로운 감각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 배후에 <눈물의 집>의 잔재가 희미하게 감돌고 있었으나 그들의 기억도 나른한 벌레의 날개소리와 함께 희미해져 가려고 하고 있었다.
"데이빗, 여기 있었군요. 지금 부르려고 하던 참입니다." 워키 토키를 손에 든 청년이 복도로 다가왔다.
"준비 오케이입니까 ? "
"아아." 펠릭스는 대답했다. "모든 것이 오케이야."
청년을 따라서 복도를 되돌아갔다. 발걸음도 흔들림이 없게 되어 조금 전 보다는 자기 제어를 할 수 있었다.
무거운 기압 같은 것이 여전히 내리누르고 있어서 그의 내심의 전율과----본래의 주거로 돌아가려고 괴로워하고 있는 영혼의 몸부림과----싸웠다. 그를 둘러싼 공기는 이경의 그것이고, 그가 속하지 않은 차원이 낳는 이들 압박은 아마도 앞으로도 줄곧 쫓아 다니겠지만 그러는 사이에 점점 익숙해질 것이다.
청년은 촬영반과 아머스 감독이 기다리는 제트 안의 길로 펠릭스를 데리고 갔다.
"데이빗, 안 됐지만 다시 한 번 찍어야겠네."
"상관 없어."
아머스는 말 없이 한동안 그를 응시했다.
"그래, 그 시원한 점이 좋아. 자네는 옛날로 돌아갔군."
아머스는 AD에게 신호를 보냈다. 벨 소리가 울리고 세트는 조용해졌다.
"준비하고."
"카메라가 작동합니다----조용히."
"갑니다----"
"카메라, OK."
"침착하게---- 액션."
카스피안은 감옥의 안뜰에 힘 없이 서서 외벽 위의 회색의 새벽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직 잠이 덜깬 병사가 두 사람, 안뜰의 중앙에 설치된 단두대의 양쪽 위치에 섰다. 카스피안의 옆에 있던 세 사람 째의 병사가 소총의 개머리로 슬며시 그를 찔렀다.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지." 속삭이듯이 말했다.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다구. 전에 본 적이 있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가버리는거야."
카스피안은 아침의 풍경 속에 뭔가 틈이 없을까, 약한 부분은 없을까, 하고 찾아 보았다. 있다면 그곳을 찔러 볼텐데. 저 벽을 넘어서 날아갈 수가 있다면.
감옥의 안뜰의 공기는 금속적인 색채를 띠고 희박한 듯이 빛나고 있었으나, 그의 희망을 들어주지는 않고, 감옥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그를 꽉 붙잡고 있었다.
그는 비틀비틀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발소리도, 몸의 아픔도 바로 현실, 그 자체였다. 고통에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었던 그때, 그는 드디어 절규한 것이다. 나는 이 차원의 인간이 아니다. 다른 차원에서 온 인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펠릭스의 범죄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고문의 전문가는 이런 독창적인 고백은 들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카스피안은 눈 앞의 광경을 지워 없애려고 하는 듯이 안면을 손으로 털어냈다. 터져서 부어오른 입술에 손가락이 닿자 그는 중얼거렸다.
"이건 무엇인가가 잘못된 거야. 나는 이곳의 인간이 아니란 말이야 ! "
"정신차렷 ! "
병사가 팜꿈치를 잡아 주었다. 카스피안은 허리와, 인대가 끊어져서 거덜이난 다리를 아픈 듯이 뻗었다. 그래도 앞으로 구부리지 않고 자세를 바로하고 걷는 것은 기분이 좋았다. 첫째 하늘이 훨씬 많이 보이고 날씨도 잘 알 수 있었다. 오늘은 조용한 오후가 될 것이다. 지금은 습기찬 옥사의 벽에서 아지랭이가 희미하게 솟아 오르고 있지만 언젠가 태양이 연소시킬 것이다.
죄수들은 안뜰을 빙글빙글 돌면서 운동을 했다. 그리고 무한한 시간이 사람들이 애타게 찾는 것, 인간이 두려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부여할 것이다. 태양은 외벽의 훨씬 높은 상공을 건너 갈 것이다.
자신의 갸날픈 그림자가 지면에 비추이고, 함께 진행해 가는 것이 보인다. 이 차원의 금속적인 공기는 미래의 시간이 어둡게 억누르고 있는 것처럼 가슴답답하게 갈아앉아 있다... 탄생이나 사상이나 부조리한 변화에 파묻혀진 시간.
"나는 미쳐버린 세계에 있는 거야 ! "
"옳은 이야기야."
병사가 말했다. 장화 뒤꿈치를 쿵쿵하고 카스피안의 옆의 지면을 짓밟았다.
몸이 마구 떨리고, 눈에 어렴풋이 눈물이 스며나왔다. 외벽 너머에서 새떼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 거품이 솟는 샘을 연상시키는 노래 소리.
"꽤나 괜찮은 걸. 하직의 노래치고는." 병사가 말했다. "잘 들어두라구. 이번에 정신이 들었을 때는 자네는 저 새들과 함께 있을 테니까. 그러나 나는 변함 없이 소총을 힘겹게 들고 이곳에서 있을 테지. 알겠나 ? "
새의 무리는 훌쩍 하늘로 날아 올라가서, 원을 그리며 다시 벽 넘어로 날아 내렸다. 끓어오르는 듯한 노래 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화약의 유황 냄새와 새카맣게 탄 거리의 잔해 냄새에 섞여서 히아신스 냄새가 풍겨왔다. 외벽의 표면에 덩굴이 다시 살아나서 작년의 회색 덩굴을 초록색 잎이 뒤덮기 시작하고 있다.
<반대도 또한 진리이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사라져도 그냥 존재할 수가 있다. 존재하고 있으면서 사라질 수도 있다.
"그렇다 ! " 카스피안은 말했다. "아름다운 아침이다, 이런 아름다운 아침은 지금까지 없었다."
"아암, 없었고 말고."
병사가 말했다.
카스피안은 다시 지면으로 눈을 떨어뜨렸다. 그의 그림자는 아직도 걷고 있다. 윤곽은 흐려지고 덧없이 보였으나 그림자는 위안이 되었다. 왜냐 하면 그녀석은 표표히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석은 불사신의 어릿광대였다. 카스피안은 다시 한번 등뼈를 똑바로 세웠다. 지금까지의 습관에서 이 역에는 이러한 동작이 어울린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다. 카메라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명배우는 절대로 그것을 잊지 않는다. 어디에 있더라도.
그는 발걸음에 신경을 쓰고 생각하는 것도 선택했다. 지금은 시 간의 간격에 빠져버린 방황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의 방황하는 영혼이 가지가지의 시대에서 산울림하는 것이 느껴진다. 그와 같은 길을 걸은 희망 없는 소수의 사람들.
그들은 스스로 자진해서 지나간 것일까.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등불에 비추어진 거미줄이 쳐진 문을 ?
그는 어떠했는가 ? 아니면 그의 경우 생활 속에서 우연히. 물리적 작용으로 시간의 경첩이 떨어져 나간 것 뿐일까 ?
"우리들의 몸에 일어나는 일 전부는 이미 과거에 일어난 일인것이다." 라고 카스피안은 뇌까렸다. 그 목소리는 앞서간 방황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합쳐서 산울림하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들의 꺼져들어갈 것 같은 속삭임은 그에게 조언을 주었다.
"오늘이라는 날은 이미 과거의 것아다. 우리들은 이미 죽어있는 것이다." 라고.
카스피안은 병사를 바라보았다.
"그 기백, 그 기백," 그리고 두 사람은 <단두대>를 향해 안뜰을 가로질러 갔다. 사형 집행인이 그곳에서 합류했다. 어깨에는 중세의 도끼가 번뜩이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빛나는 숙소>에 패했을 것입니다."
게이라드 박사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펠릭스가 말했다. "제3 제국은 이상한 힘의 집약이었으니까요. 하여간 그는 가버렸고, 그리고 내가 이곳에 있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렇군요." 게이라드 박사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맞은편에 있는 환자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는 당신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습관인 것 같았으니까 나도 그것을 따르지요. 나는 그의 생활 양식의 대부분에 적합하도록 하고 있으니까요. 당연한 이야기지만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내가 당신에게 이야기하는 내용은 비밀을 엄수해 주기를 부탁합니다."
펠릭스는 주름 하나 없는 바지의 줄을 만지작거렸다.
"외견을 유지해가는 것만 해도 대단히 힘이 듭니다. 게다가 이차원의 압력에 완전히 적응하지를 못해서요."
완전히 돌아버렸다고 게이라드 박사는 상대를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빛나는 숙소>가 아니더라도, 그래요. 무엇인가가 그를 미치게 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도 나도 영구히 이해하지 못할 일입니다." 펠릭스가 말했다.
뼈 속부터 완전히 미쳐버렸다고 카스피안의 눈을 들여다 보면서 게이라드는 생각했다. 그를 지배하고 있는 강박관념 속의 인물은 엄청나게 머리가 좋다. 그것을 쫓아버리는 것은 지극히 곤란하다.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도도 해 보지 않고 포기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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