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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찰스 패널티] 배꼽티를 입은 문화

by Casey,Riley 2023.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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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의 171가지의 표정
  배꼽티를 입은 문화


찰스 패너티


         차례

  파노라마같은 문화의 다양한 표정들

  1. 약탈혼이 정당하던 시절
  신부를 약탈하던 풍습
  깨지는 순결신화
  결혼 착수금?
  체면치레를 좋아하는 영국인들의 웨딩마치
  웨딩드레스의 색깔 논쟁
  약탈해 온 신부를 숨기던 곳은?
  생일 축하는 이교도의 제전?
  네안데르탈인들의 장례식
  신의 머리에 떨어지는 새똥을 막아라
  악수는 무기가 없다는 의사 표현?

  2. 나폴레옹은 검은 고양이를 싫어했다
  비오는 날에만 돈을 건다
  고양이 목숨은 9개다
  금요일은 악마의 안식일
  살아남기 위해 시작된 마스카라
  예수의 생일이 12월 25일이었을까?
  낙타를 타고 온 산타클로스
  크리스마스 트리를 발견한 사람은?
  포스트 맨은 벨을 두 번 누르지 않는다
  성 문란을 막기 위해 생긴 날?
  설날은 1월 1일이 아니다
  유령들의 축제
  출생 증명으로 쓰이던 달걀

  3. 끔찍하고 잔인했던 어린이들 이야기
  동화의 테마는 본디 끔찍하고 잔인하다
  강간당한 잠자는 숲속의 미녀
  진짜 신데렐라는?
  뛰어난 사기꾼, 장화 신은 고양이
  히틀러 때문에 외면 당한 '헨젤과 그레텔'
  드라큘라의 모델은?
  무섭기만 했던 어린이 책

  4. 고대엔 남성들도 화장을 했다
  고대엔 남성들도 립스틱을 발랐다
  예쁜 남자, 야한 남자
  아름다워지기 위해서라면 죽음까지도 불사한 여성들
  염색은 남자들이 즐겨했다
  금지 1호였던 가발
  멋쟁이들의 필수품, 생선 등뼈
  향수의 원료는 무엇일까?
  고대전사들은 전투를 앞두고 매니큐어를 발랐다
  피부미용제는 무엇으로 만들었을까?
  인류 최초의 거울은?

  5. 스칼렛은 배꼽티를 좋아했다
  스칼렛은 배꼽티를 좋아했다
  파리의 비키니 수영복 대회
  여성들의 저항의 상징, 바지
  바지 때문에 탄생한 옷은?
  턱시도의 어원은 '늑대'
  옛날엔 코를 풀고 어떻게 처치했는가?
  모자와 가발의 경쟁사

  6. 마리 앙투아네트와 패션 민주화
  예쁜 발 경연대회
  하이힐을 즐겨 신은 남자
  누군가가 채워주어야만 좋은 여성의 단추
  중세의 고문도구로 보였던 지퍼
  부채는 계급의 상징
  평생을 조롱 당하며 우산을 보급한 사람
  운동화 혁명
  마리 앙투아네트와 패션 민주화
  죄를 씻으면 병도 낫는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바셀린 사나이
  한 애처가의 발명품


     파노라마 같은 문화의 다양한 표정들

  최근 들어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것은 시대의 흐름과 깊은 연관이 있다.
  먹고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먹느냐가 중요해진 오늘날에는 보다 다양하고 세분화된 
욕구들이 팽배해졌기 때문이다. 이제 음식을 먹는 것은 주린 창자를 채우는 행위를 넘어서 혀로 
미각을 느끼고 필요한 영양소를 공급하는 행위로 간주되고 있다.
  옷도 그렇다. 옛날에는 추위나 더위로부터 몸을 보호해주면 충분했다. 특히 비용이 많이 드는 
방한용 겨울외투 같은 것은 구해서 입을 수만 있어도 감지덕지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추위를 막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움이 없이 가벼워야 한다. 
게다가 스타일, 색상, 액세서리가 어떤 것인지가 옷을 선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렇게 
선택된 옷은 그것을 입은 사람의 사회적 존재를 나타내준다.
  옷차림만으로 그 사람의 성향, 취향, 재산 정도 등이 드러나는 것이다. 
  다가올 21세기는 더욱 그럴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고, 그런 
눈에 보이지 않는 개개인의 욕망들이 '문화'라는 이름 아래 모인다. 문화의 개념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문화는 고상하고 지적인 사람들이 누리는 특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일상 생활에서 
향유하는 것이다. 이제 문화를 알아야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 책은 문화의 다양한 표정을 담고 있다. 인류의 역사에서 벌어진 온갖 사건들 중에는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들이 무궁무진하게 담겨 있다.
  갓 결혼한 신랑 신부가 둘만의 행복한 시간을 갖는 허니문은 약탈해 온 신부를 신부 
가족으로부터 숨기기 위한 것이었고, 스타킹은 최초의 반항적인 패션 표현이었다. 콘돔은 임신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성병의 전염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동화는 원래 끔찍하고 잔인한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남성과 여성의 것이 뒤바뀐 것도 있다. 오랫동안 여성 전용으로 여겨진 화장, 그러나 
고대에서는 남성들이 화장을 즐겼다. 하이힐을 유행시킨 것도 남자들이었다. 선탠 크림도 
남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것도 겉옷으로.
  이 책은 흥미 있는 읽을거리들을 담고 있지만, 한 번 읽고 마는 책이 아니다. 여기에 바로 가장 
진솔한 인류의 문화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1. 약탈혼이 정당하던 시절

     신부를 약탈하던 풍습

  여자와 남자가 사랑으로 결합하는 결혼. 하지만 결혼에 사랑이나 합의가 필요 없었던 시대도 
있었다. 2세기의 북유럽, 게르만인의 고트족 남자는 자기 부락에서 결혼할 여자가 없으면 근처 
마을로 가서 신부를 약탈해 왔다. 예비 신랑은 친구의 도움을 받아, 혼자서 마을을 돌아다니는 
젊은 여자를 찾아내어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약탈했던 것이다. 신랑 들러리의 관습은 이 
무장한 2인조에 의한 약탈혼의 흔적이다. 친구를 도와서 신부를 약탈하는 중요한 임무는 
들러리가 아니면 안 될 일이었다.
  이 약탈혼은 문자 그대로 신부를 약탈해 오는 것이기 때문에, 신랑이 신부를 안고 신방에 
들어가는 풍습도 역시 그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서기 200년경의 신랑 들러리가 휴대하고 있던 것은 결혼 반지만이 아니었다. 신부의 가족이 
그녀를 되찾으려고 언제 들이 닥칠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무기를 휴대하고 있었다. 들러리는 
신랑 옆에 서서 결혼식이 올려지는 동안 내내 무장한 채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신랑 
들러리는 신방에까지 가서 감시를 서는 일도 있었다.
  신부의 가족은 신부를 되찾아 가려고 결혼식 장소에 들이닥쳤다. 그 증거로 고대의 많은 
민족(훈족, 고트족, 서고트족, 반달족 등)의 교회 제단 밑에는 곤봉이나 칼, 창 따위의 무기가 
숨겨져 있었다.
  신부가 신라의 왼쪽에 서야 하는 전통도 단순한 관례가 아니다. 로마인이 말하는 '북유럽의 
야만인'은 신부 가족의 갑작스런 습격에 대비하기 위해 왼손으로는 약탈해 온 신부를 안아야 
했고 오른손은 무기를 잡아야 했기 때문이다.
  결혼 반지도 일설에 의하면 약탈된 신부가 남자의 집에 매어져 있던 때의 족쇄의 자취라고 
한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반지 교환 관습은 남녀평등의 증거라고 할 수 있을까.
  또 다른 설은 실제로 결혼식에 반지가 나타나기 시작한 시대에 주목하고 있다.
  처음으로 결혼 반지가 나타난 것은 기원전 2800년경의 이집트 제3왕조이다. 당시 이집트에서는 
시작도 끝도 없는 고리는 영원을 나타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결혼의 
징표로서 반지를 사용했던 것이라고 한다.
  부유한 이집트인이라든가 후기 로마인이 귀중하게 생각한 것은 금반지였다. 폼페이의 
유적에서는 2000년 전의 반지가 많이 출토되고 있다. 그 중에는 훨씬 뒤 유럽이나 1960__70년대 
히피 시대의 미국에서 유행한 독특한 디자인의 반지도 있었는데 그것은 오늘날 '우정의 
반지'라고 불리는 황금 결혼 반지로 두 손이 악수를 하고 있는 그림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가난한 로마 청년은 결혼으로 인해 무일푼이 되는 일도 자주 있었다.
  초기 기독교 신학자인 테르툴리아누스가 2세기에 쓴 책에는, '대부분의 여성은 자기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결혼 반지 이외에 금 따위는 본 적도 없다.'는 글이 있다. 평범함 주부의 경우, 
밖에서는 자랑스럽게 금으로 된 결혼 반지를 끼고 있어도 집에 돌아오면 그것을 벗고 대신 무쇠 
반지를 꼈다는 것이다.
  고대의 반지 디자인에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 많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로마 시대의 
반지에는 작은 열쇠가 붙어 있는데, 남편의 마음의 문을 여는 열쇠라는 등 로맨틱한 이유에서 
붙여진 것은 아니다. 이것은 로마법에 따른 혼인 계약의 기본이 되는 사고방식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즉 아내는 결혼과 함께 남편 재산의 절반에 대해 권리를 가지며 밀이건 옷감이건 남편이 
갖고 있는 재산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내가 갖는 이러한 권리는 한 
번 상실되어 다시 나타날 때까지 무려 2000년이 걸렸다.
  결혼 반지를 왼손 약지에 끼는 서양의 관습은 어디서 유래하는 걸까.
  고대 헤브루인은 결혼 반지를 검지에 끼었고, 인도인은 엄지에 끼는 것이 보통이었다. 왼손 
약지에 끼는 관습은 그리스에서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다. 하지만 맨 처음 유래는 그리스인의 
잘못된 인체해부학의 지식에 있었다.
  기원전 3세기 때 그리스 의사는 '사랑의 혈관'이라는 혈관이 약지에서부터 곧바로 심장까지 
흐르고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마음으로부터 사랑을 상징하는 반지를 약지에 끼게 된 것이다.
  그리스인의 인체해부도를 도용한 로마인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약지에 결혼 반지를 
끼었다. 만에 하나라도 잘못 끼는 사람이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결혼 반지를 끼는 손가락은 
'제일 작은 손가락의 옆 손가락'이라고까지 씌어져 있다.
  또한 의사들도 약지로 약을 조제하였는데, 약지의 혈관이 심장에 직접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조합한 약에 어떤 독성이 있게 도면 환자에게 주기 전에 의사의 심장에서 느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기독교인들은 결혼반지는 왼손의 약지에 끼었지만 사랑의 혈관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신랑은 
신부의 집게손가락에 반지를 살짝 끼우고, '인자하신 신과'라고 말한 다음 이번에는 
가운뎃손가락에 끼우고,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이라는 기도를 한 다음 약지에 끼웠다. 이것을 
삼위일체 방식이라고 한다. 오늘날까지 교회에 그 모습이 남아 있는 결혼 공고는 프랑크왕, 카를 
대제의 칙령으로 정착되었다.
  카를 대제는 서기 800년 크리스마스에 황제의 왕관을 받아 로마 황제가 되고 신성로마제국의 
기초를 쌓았다. 광대한 지역을 다스리게 된 카를 대제에게는 결혼 공고를 철저하게 해야 할 
의학상의 이유가 있었다.
  당시 빈부를 불문하고 혼외정사가 다반사였던 이 나라에서는 부모가 분명하지 않은 아이들이 
상당수였고 그 결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복 형제 자매와 결혼하게 되는 일이 많이 일어났다.
  근친 결혼과 그에 따른 기형아 출산이 점점 많아지자 위태롭게 생각한 대제는 드디어 결혼 
공고를 의무화하는 칙령을 내렸다.
  그에 따르면 결혼하고자 하는 남녀는 적어도 7일 전에 그 사실을 공고해 자기들이 혈연관계에 
있지 않은 것을 확인해야만 했다. 즉 두 사람이 실은 형제라든가 이복형제라는 것을 알고 있는 
자는 이 기간 중에 신고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깨지는 순결신화

  70년대 말의 '아주 야한' 영화 "겨울 여자"는 한 인텔리 여성의 분방한 성생활을 다루어 
한국사회 및 영화계에 커다란 충격을 던져 주었다.
  그러나 당장 비디오 가게로 달려가 "겨울여자"를 빌려서 보라. 그 야하다고 소문난 영화는 
영상은 물론 내용도 안방극장 TV드라마보다 점잖다. 그만큼 성이 개방된 또는 노골적인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시대의 우리네 순진한 요조숙녀들은 남자에게 손목 한 번 잡힌 것 때문에 그 남자와 
결혼을 결심했었고, 남자와 같은 이불 속에서 잠만 자도 임신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도 물레방앗간은 남녀의 밀회 장소로 애용되었고, 불교행사인 탑돌이도 남녀가 
합법적으로 얼굴을 맞댈 수 있는 장소로 환영받았다.
  그렇다면 성을 자극하는 환경들로 둘러싸인 20세기 말의 젊은이들에게 성은 어떤 것인가?
  그들의 큰언니들만 해도 혼전 순결은 가장 고결한 가치였다. 처녀막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미혼여성들은 밤거리를 나다니는 것도, 여행을 떠나는 것도, 친구와 밤새 얘기를 나누기 위해 
외박을 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그러지 않으면 결혼 시장에서 하자 있는 상품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드시 첫날밤'의 신화는 천연기념물로 퇴락하고 있다. 몸은 어른이고 결혼은 5년 또는 
10년 후인 지금의 젊은이들은 보수적인 어른들의 도통 변할 줄 모르는 낡고 늙은 잣대를 
거부한다. 기존의 순결 이데올로기나 도덕은 기성세대의 몫으로 돌린다.
  인간 삶의 절실한 문제이자 필수인 섹스에 대한 그들의 사고와 태도는 공개적이고 적극적이며 
저돌적이기까지 하다. 자기 감정이나 성적 욕구를 당당한 언어로 표현하고 실행한다.
  자신이 원하고 책임질 수만 있다면, 당당히 요구하고 또 받아들인다. 몰래 엿보는 저급한 성적 
욕망으로 묶어두지 않는다.
  성을 공유한 사람이면 영원히 인생을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은 어림없는 생각이다. 순간에 
충실하고, 감정에 충실한 것으로 만족한다.
  그러나 그들도 자기 여자만은 혼전 순결을 지키기를 원하는 남자, 성을 돈 많고 잘생긴 남자를 
잡는 수단으로 생각하는 여자이기도 하다. 방종과 무책임을 가져오기도 한다. 쉬쉬해온 성의 
급작스러운 드러냄으로 인하 부작용이다. 올바른 성관념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이나 신념 등은 
가르치지 않고 무조건 금기시해 왔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의 성풍속을 문란과 타락이라고 비난하는 기성세대에게 그들은 항변한다. 적어도 
자기들은, 성을 금기시하면서도 성을 상품화하고 산업화하는 기성세대의 이중성은 갖고 있지 
않다고.

     결혼 착수금?

  1503년 베네치아의 결혼증명서에는 '다이아몬드가 달린 반지 한 개'라는 말이 적혀 있다. 결혼 
반지로는 황금 반지를 사용했다는 것이 따로 기재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은 다이아몬드가 붙은 
약혼 반지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다이아몬드 약혼 반지의 유행이 이때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베네치아인은 다이아몬드가 보석 중 가장 단단하고 잘 변하지 않는데다 깎고 닦으면 굉장한 
빛을 내는 보석이란 것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15세기가 가까워지자 부유한 베네치아 사람들 
사이에는 금이나 은에 다이아몬드가 희귀하고 너무 비쌌으므로 유럽에는 빠르게 확산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 영롱한 빛은 앞으로의 인기를 약속하고 있었다. 17세기에는 유럽에서 
다이아몬드 약혼 반지의 인기가 절대적이어서 다이아몬드는 약혼 시기에 가장 수요가 많은 
보석이 되었다.
  역사에 남아 있는 가장 작은 다이아몬드 약혼 반지는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의 아들과 영국 
왕 헨리 8세의 딸 메리의 약혼식을 위해 만들어졌다. 1518년 2월 28일 프랑스 왕자가 태어나자 
곧 영국과 프랑스의 우호관계를 더욱더 긴밀히 유지하기 위해 이들을 약혼시키게 되었다. 어린 
메리의 손가락에 끼워진 약혼 반지는 장차 유행의 최첨단을 걷게 될 다이아몬드 반지였지만 
이것이 그녀의 작은 손가락을 장식한 것은 아주 짧은 동안이었으리라.
  이와 같이 다이아몬드 약혼 반지의 기원은 대략 알고 있지만 약혼 반지 자체의 기원은 
분명치가 않다. 물론 그 기원이 다이아몬드 약혼반지가 등장하게 된 15세기보다 훨씬 더 이전인 
것은 확실하다.
  옛날 앵글로색슨 사회에서는 약혼한 남자는  그 징표로 뭔가 자기의 보물을 둘로 쪼개어 그 
한쪽을 자기가 갖고 다른 한쪽을 신부의 아버지에게 맡기는 풍습이 있었다. 부유한 남자는 
금이나 은을 징표로 삼았다. 이것이 언제부터 약혼반지로 모습을 바꾸었는지는 분명치가 않다 
다만 적어도 유럽에서는 약혼 반지가 결혼 반지보다 더 옛날부터 있었던 것 같다. 신부는 약혼식 
때 반지를 받게 되면 일단 그것을 신랑에게 되돌려주고, 다시 한 번 신랑에게서 받았다. 약혼 
반지는 일종의 '착수금'이었다.
  로마 카톨릭에서 약혼반지가 정식으로 받아들여진 것이 언제인가 하는 것도 확실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서기 860년에 교황 니콜라우스 1세가 약혼 발표에는 약혼 반지가 필요하다는 
명령을 내리고 있다. 니콜라우스는 '신성한 결혼'의 단호한 옹호자로 로렌 왕국의 로타르 2세의 
결혼, 이혼, 재혼에 관계한 두 사람의 대주교를 중혼을 묵인한 이유로 파문에 처한 교황이다.
  그런 니콜라우스에게 신성한 결혼을 약속하는 반지는 금과 같은 비싼 금속, 장래의 남편에게 
경제적 희생을 지불하게 하는 그런 것이어야 했다.
  이때 파혼을 하게 되면 반지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원칙도 정해졌다. 남자 쪽에서 파기한 
경우는 약혼 반지를 돌려 받을 수 없지만 여자 쪽에서 파기한 경우는 약혼 반지를 돌려 줘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차츰 약혼을 중요시하게 되었고 약혼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자에게는 벌을 주도록 
하였다. 엘비라 교회의 회의에서는 약혼을 파기한 남자의 부모를 3년간의 파문에 처했다. 또한 
약혼을 파기한 여성에게는 교구 사제의 권한으로 그녀를 평생 수도원에 가두어두는 일마저 
가능하게 되었다.

     체면치레를 좋아하는 영국인들의 웨딩마치

  웨딩케이크는 먹는 것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다. 신부에게 던지는 일도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웨딩케이크는 결혼식 때 있기 마련인 갖가지 다산의 징표 가운데 하나로서 생겨난 것이었다.
  먼 옛날부터 부와 번영을 나타낸다고 여겨진 밀은 신부 머리에 끼얹는 곡식 중에서도 가장 
오래 된 곡식이다.  결혼하지 않은 아가씨들도 다음에는 자기가 결혼하게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신부의 머리에서 흘러 떨어진 밀알을 앞다투어 끌어 모았다. 마치 지금의 아가씨들이 신부의 
부케를 받는 것과 같은 것이다.
  로마인은 토목 기술의 수준도 높았지만 과자 만드는 기술도 뛰어났다. 기원전 100년경 그들은 
결혼식에 쓰이는 밀을 작고 달콤한 케이크로 만들어냈다. 물론 이것은 던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먹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결혼식에 모인 사람들은 밀알을 신부에게 던지는 즐거움을 잊지 못해서 
종종 밀알 대신에 이 케이크를 던졌다. 부서진 케이크 부스러기는 다산을 빌면서 신랑 신부가 
함께 먹었다. 그 후 하객들에게는 콘펫(달콤한 과자라는 뜻)이라고 하는 땅콩과 말린 과일, 꿀에 
잰 아몬드로 만든 사탕과 과자를 나누어 주었다.
  웨딩케이크를 잘라 그것을 신랑 신부가 먹는 이 관습은 서유럽 일대에 널리 퍼져나갔다. 이때 
영국에서는 케이크 부스러기를 먹을 때 특별한 맥주를 함께 마시게 되었다. 이 맥주인 '브라이드 
에일(신부의 맥주라는 뜻)'이 후에 브라이들(결혼식이란 뜻)이 되었다.
  그런데 케이크를 던지는 것, 즉 음식을 던지는 것이 아무리 풍요의 상징이라고 해도 이 습관은 
기본적으로 경건함을 중요시하는 중세의 풍습에 맞을 리가 없었다.
  따라서 중세에 와서는 다시 신부에게 옛날처럼 밀알이나 쌀을 던졌다. 케이크는 모습을 감추고, 
간단한 비스킷이 케이크를 대신했다. 또한 결혼식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가져온 과자가 남으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결혼식의 과자가 이후에는 한결 호화로운 장식품, 몇 단으로 겹겹이 
쌓은 케이크를 낳는 계기가 되었다. 영국에서는 그 무렵 결혼식에 가져온 비스킷, 스콘 등의 구운 
과자를 한곳에 쌓아올려 산처럼 만들었는데 과자로 만든 산이 높으면 높을수록 두 사람은 복을 
많이 받는다고 여겼으며 두 사람은 그 산 위에서 키스를 했다.
  1660년 샤를 2세가 통치하던 프랑스의 한 요리사가 런던을 방문했다. 그는 영국인이 과자를 
쌓아올리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 그런데 쌓아올리는 방법이 엉터리여서 과자는 쌓는 
가장자리에서부터 부서져 버렸다. 그래서 그는 차라리 부서지는 과자 대신에 처음부터 설탕옷을 
입혀 딱딱하게 만든 과자로 쌓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여러 층의 호화판 케이크가 탄생하였다.
  당시의 영국 신문은 프랑스인의 이 주제넘은 아이디어를 그리 좋게 평가하지 않았지만 
1600년대가 끝날 무렵에는 전 영국의 빵굽는 기술자들이 이 아이디어에 따라 케이크를 만들게 
되었다.
  웨딩케이크의 오랜 역사에 비하면 웨딩마치의 역사는 두세기도 채 안 되는 짧은 것이다.
  보통 신부가 입장할 때 들려오는 곡은 1848년에 바그너가 작곡한 오페라 "로엔그린" 중의 
'결혼 행진곡'이란 장중한 곡이다. 그리고 식을 끝낸 신랑 신부 두 사람이 퇴장할 때 연주하는 
곡은 멘델스존이 1826년에 작곡한 "한여름 밤의 꿈" 중에서 '결혼 행진곡'이다.
  이 두 곡이 맨 처음 사용된 것은 1858년 영국의 빅토리아 황녀와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빌헬름과의 결혼식 때로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인 빅토리아 공주가 스스로 이 두 곡을 선택했다. 
예술애호가였던 그녀는 전부터 멘델스존의 작품을 아끼고 사랑했으며 바그너의 곡을 숭배하고 
있었다.
  영국 사람들은 귀족이나 서민이나 왕실이 하는 일은 무엇이든 흉내내지 않으면 마음이 내키지 
않는지, 결혼식 때 연주하는 음악도 곧 빅토리아의 선곡에 따르게 되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이 두 곡은 전 영국의 결혼식에서 들리게 되었고 이윽고 서양 결혼식의 
전통이 되었다.

     웨딩드레스의 색깔 논쟁

  하얀색은 청정과 순결을 나타내는 색깔이다. 그러나 고대 로마에서는 신부가 노란색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는 노란 베일을 썼다. 사실 신부가 쓰는 베일은 웨딩드레스보다 역사가 오래 되었다. 
그리고 베일은 신부가 쓰기 훨씬 이전부터 있었다.
  복식사가들에 의하면 베일은 남자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여성을 종속적인 지위에 
두고 다른 사내의 눈으로부터 숨겨두기 위해서 고안된 물건이다. 그 긴 역사 속에서 고상함과 
아름다움의 상징이 되거나 비밀리에 정을 통한다든가 상을 당한 것을 나타내왔던 베일은 여성의 
몸에 걸치는 물건이면서도 여성에 의해서 만들어지지 않은 유일한 의상 용품이다.
  동양에서는 베일이 적어도 4000년 전에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는 
얌전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결혼한 여자는 남편에 대한 순종을 나타내기 위해 베일로 
얼굴을 가렸다. 이슬람 사회에서 여성은 집에서 한 발짝이라도 나갈 때에는 반드시 머리와 
얼굴의 일부를 덮어야 했다. 남자가 만든 이 계율은 더욱 엄격해져서 눈을 제외한 모든 것을 
가려야만 했다. 눈을 내놓은 것은 당시의 베일이 두꺼운 천이어서 푹 뒤집어쓰면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북유럽의 여러 나라에는 그런 관습은 없었다. 여기서 베일을 쓴 것은 약탈된 
신부뿐이었다. 이 베일은 색깔과는 상관없이 얼굴을 가릴 수만 있으면 족했다.
  기원전 4세기에는 그리스인과 로마인들 사이에서 결혼식 때 얇고 환히 비치는 베일을 
쓰는 것이 유행하였다. 신부는 베일을 핀으로 머리카락에 고정시키거나 머리에 잡아맸다. 
당시는 드레스, 베일 모두 노란색이 유행이었다. 중세에 들어서자 사람들은 색보다는 천의 
재질이나 레이스와 같은 장식을 중시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하얀 웨딩드레스가 처음 대두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이다. 그러나 이 하얀 
웨딩드레스는 '하얀색은 신부의 순결을 나타낸다'는 말의 노골적인 표현이어서 환영받지 못했다. 
반면에 목사들은 신부의 순결은 당연한 일이며 새삼스럽게 떠들썩하게 말할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후 150년 동안 영국의 신문과 잡지들은 하얀 웨딩드레스를 둘러싸고 뜨거운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18세기 말경에 와서는 하얀 웨딩드레스가 일반화되었다. 복식사가에 의하면 그것은 
당시 팔리고 있던 정장용 드레스가 거의 하얀색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쨌든 1813년, 프랑스의 
인기 있는 여성지 "저널 드 다메"에 커다란 순백의 웨딩드레스 삽화가 실린 이래 하얀색은 
웨딩드레스 색깔로 정착되었다. 

     약탈해 온 신부를 숨기던 곳은?

  원래의 허니문과 지금의 허니문은 의미가 아주 다르다. 지금의 허니문은 말할 것도 없이 결혼 
생활의 전주곡이며 둘만의 행복한 격리 기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전의 허니문 기간은 전혀 
행복한 것이 아니었다.
  그 옛날 북유럽에서 약탈혼이 성행하고 있을 때 신부를 가까운 마을에서 약탈해 온 사나이는 
그녀를 데리고 잠시 몸을 숨겨야만 했다.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신랑의 들러리 이외의 
누구에게도 거처를 알리지 않고 신부 가족이 찾는 것을 포기하고 돌아갈 때까지 자기 마을로 
돌아가지 않고 숨어 있었다. 이것이 민속학자가 말하는 허니문의 시작이다.
  허니문이란 숨어버리는 것이었다. 때문에 둘이 서로 사랑하여 맺어진 것이 아닌 두 사람에게는 
며칠이나 몇 주일씩 일하지 않고 행복에 잠기는 사치스러움 따위는 허락되지 않았다. 
허니문이라는 말도 역시 북유럽에서 있었던 관습에서 나온 것이다.
  이 지방에서는 신혼인 두 사람이 한 달 동안 미드라고 불리는 꿀술을 매일 마셨다.
  이 술에 대해 전해 내려오는 일화가 있다.
  서기 433년부터 453년까지 훈족의 왕이었던 아티라는 서기 450년, 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여동생 호노리아 공주와 결혼했다. 아티라는 그 결혼 잔치에서 이 증류주를 먹어 보고는 
너무 맛이 좋아 큰 잔으로 벌컥벌컥 마셨다. 아티라는 이미 결혼한 그녀를 약탈하여 결혼하면서 
로마 제국의 영토도 조금 떼어줄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삼 년 후 다른 여성과의 결혼식 축하연에서 아티라는 미드의 유혹을 견뎌내지 못하고 
또다시 벌컥벌컥 마셨다. 아니나다를까. 꿀술을 너무 많이 마신 아티라는 인사불성에 빠져 그대로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허니문'의 허니(꿀)는 이 꿀술에서 유래된 것이지만 문(달)은 
어디서 유래된 것일까?
  달은 한 달을 주기로 차고 기울기를 되풀이한다. 즉 달은 한 달을 주기로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결혼 생활이 언제까지나 신혼초처럼 달콤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16,17세기 영국의 산문가나 시인들은 이 북유럽의 허니문 해석을 증거로 내세워 달이 차고 
기우는 것을 자주 결혼 생활에 비유했다.
  이렇게 결혼이라는 것이 오늘날과는 많이 다른 의미이다 보니 이혼의 역  사 또한 결혼의 
역사만큼이나 길다.
  정식 결혼이 없다면 정식 이혼도 있을 수 없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가장 오래 된 
결혼증명서는 기원전 5세기에 이집트의 엘판틴에 주재하고 있던 주둔병의 유품에서 발견되었다. 
파피루스에 아랍어로 쓰인 이 결혼증명서는 매우 간단하고 매정했다. 그것은 마치 매매증서와 
같이 건강한 열네 살의 소녀를 소 여섯 마리와 교환한다고 적혀 있었다.
  법률을 좋아했던 로마 시대에는 결혼증명서가 몇 페이지나 되는 복잡한 법률 문서로 
변해버렸다. 거기에는 결혼 지참금의 액수라든가 이혼이나 사망시의 재산 분배에 대해서까지 
빈틈없이 적혀 있다.
  서기 1세기에 개정된 결혼증명서가 헤브루인에 의해 정식으로 채용되어 조금 바뀌었을 뿐 
오늘날도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이혼도 처음에는 되는 대로여서 절차를 제대로 밟지 않았다. 아테네나 초기의 로마에서는 
법적인 이혼 따위란 없고 남편 마음대로 아내와 이혼할 수 있었다. 지방 관청에 들어가 이혼을 
신청해 허가를 받아야만 했다고는 해도 그것이 기각되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7세기 말경, 앵글로 색슨인의 사회에서는 남편은 되지도 않는 이유로 아내와 이혼할 수 있었다. 
당시의 법률 문서에는 이렇게 되어 있었다.
  "아내가 다음과 같은 요건에 하나라도 해당될 경우 남편은 이혼할 수 있다. 불임, 서툰 솜씨, 
우둔, 짜증, 사치, 무례, 음주, 대식, 수다, 성급함."
  이혼을 연구하고 있는 고대나 현대의 인류학자들의 견해는 다음과 같은 저에서 일치하고 있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합의에 의한 이혼이 많은 것은 모계사회이며 그곳에서는 여성의 출산 
능력이 숭앙되어 가정 내에서 모친의 권력이 강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부계사회에서는 여성의 출산 능력이나 성적인 권리는 소위 혼인 비용을 지불해 남편이 
사들인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사회에서는 이혼이 남자측의 일방적인 편의로 행해지는 
일이 많다.

     생일 축하는 이교도의 제전?

  오늘날 살아 있는 사람의 생일을 축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서양의 옛전통에 
따르면 죽은 사람의 기일을 해마다 더욱 성대하게 기념해야 한다. 
  오늘날의 생일 축하 풍습은 과거의 관습으로부터 180도 전환을 거친 것이 많다.
  옛날에는 아이들의 생일을 축하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여성의 생일도 마찬가지였다. 생일 
케이크의 관습도 한때 그리스에서 잠깐 있었지만 그 후 몇 세기 동안 잊혀져 있었다. 그것이 
'해피 버스데이 투 유'의 합창과 함께 촛불로 장식되어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이집트나 바빌로니아에서는 생일날이 기록된 것은 왕후나 귀족의 자제뿐이었다. 서민의 탄생을 
축하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고 여왕 이외의 어떠한 여성의 탄생일도 축하된 일이 없었다. 게다가 
왕과 여왕과 귀족 남자들도 겨우 자기가 태어난 날을 알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역사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 된 생일 축하는 기원전 3000년경 메네스 왕에 의해 남북 이집트가 
통일되고 난 후의 이집트 왕들의 생일 축하 파티이다. 왕들의 생일 축하는 궁전 전체의 축제로 
시종들이나 노예, 해방 노예도 참가할 수 있었고, 왕궁의 감옥에 갇혀 있는 죄인도 종종 대사면을 
받아 해방되었던 것 같다.
  고대 이집트에서 기록에 남아 있는 여성의 생일은 두 명밖에 없다. 1세기의 그리스 전기 
작가인 플루타르크에 의하면 하나는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최후의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가 연인 마크 안토니를 초청해 열었던 성대한 생일 파티로 초청한 손님들에게도 선물까지 
나누어준 호화로운 파티였다고 한다.
  또 하나는 그것보다 오래된 시대의 여왕 클레오파트라 2세의 생일 축하 파티로 그녀는 그 
자리에서 친 남동생이자 남편인 프톨레마이오스에게서 역사상 가장 잔혹한 생일 선물을 받게 
된다. 그것은 두 사람 사이에서 생긴 자식의 시체였는데, 무참히 손발이 잘려 있었다.
  그리스인은 이집트에서 생일 축하의 관습을 받아들였으며 또한 이집트의 고자 만들기도 함께 
전해져 생일 케이크의 관습이 생겨났다. 저술가 필로코라스가 쓴 글에 따르면, 달과 수렵의 여신 
아르테미스를 숭배하는 사람들은 매달 6일에 밀과 꿀로 커다란 케이크를 구워 여신의 탄신일을 
축하했다고 한다. 아르테미스에게 바치던 이 케이크에는 이미 불을 켠 촛불이 장식되어 있지 
않았을까 하고 여겨지고 있다. 촛불은 기우는 달빛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그리스 신들의 생일은 매달 축하하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에 신마다 한 해에 열두 
번의 생일 축하가 있었던 셈이다. 신들의 탄생일은 그렇게 몇 번씩이나 축하하면서 여성과 
아이들의 생일은 한 번도 축하하지 않은 것은 지나친 처사였다. 그러나 남성의 생일축하는 
아무리 성대하게 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되어 있다. 그리스에서는 살아 있는 남서의 생일축하를 
Genethlia, 죽은 후 수년간 그 기일에 지내는 제사를 Genesia라고 불렀다.
  로마 시대에 와서 생일축하에 새로운 요소가 첨가되었다. 기독교 시대로 접어들기 전 로마 
원로원의 어느 의원이 위대한 정치가의 탄생일을 축일로 해야 한다고 말해 기원전 44년에 암살된 
줄리어스 시저의 탄생일을 해마다 축하할 것을 결정했다. 축하 행사는 퍼레이드, 서커스, 검객 
투사의 시합, 야회, 연극 등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이 탄생일을 축하하는 관습도 기독교 시대의 개막과 함께 완전히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끊임없이 유태인이나 이교도의 박해에 시달린 초기의 기독교 신자에게 이 세상은 고통스럽고 
잔혹한 곳이었다. 또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아담이 범한 원죄를 짊어지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기에 생일을 축하할 이유가 없었다. 도리어 참된 구원이며 영원한 낙원에 들어가는 것인 
죽음이야말로 축하해야 할 일이었다.
  일반인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기독교의 성자 축일이라는 것은 성인이 태어난 날이 
아니라 죽은 날이다. 교회사 편찬자들은 초기의 기독교 서적에서 보이는 탄생일이란 말은 저 
세상에의 탄생을 가리키고 있다고 해석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초기 기독교 학자 페테로 크리소로가스는 분명히 이렇게 쓰고 있다.
  "성인의 탄생일이란 것은 그들이 이 세상에 태어난 날을 축하하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천국으로 떠나간 날, 즉 노고에서 안락으로 해방된 날을 말한다."
  초기 교회의 신부들이 탄생일을 축하하는 것에 반대한 이유가 있다. 그들이 볼 때 생일 축하는 
이집트나 그리스로부터 빌려온 것, 즉 이교도의 제전으로 비쳤던 것이다. 서기 245년 몇몇 
역사가가 그리스도가 태어난 날을 규명하려고 조사를 시작하자 카톨릭 교회는 그것은 신을 
모독하는 짓이라고 몰아붙이면서 '마치 이집트의 파라오인가 뭔가처럼' 탄생일을 이것저것 
캐내려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죄악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4세기에 들어서자 교회는 탄생일에 대한 종래의 태도를 갑자기 바꾸고 그리스도가 
태어난 날을 언제로 해야 할지 진지하게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논의 끝에 정해진 날이 
크리스마스이다(제5장의 '크리스마스' 참조). 이리하여 그리스도의 탄생일을 축하하게 되면서 
간신히 서양에서 탄신일을 축하하는 관습을 되찾게 되었다. 
  12세기에는 전 유럽의 교구 교회에서 여성과 아이의 생일을 기록하게 되었고, 생일 축하도 
해마다 하게 되었다.
  그 무렵 생일 케이크도 촛불로 장식되어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그것은 중세에 독일 농민들 
사이에서 '킨더페스테'라고 하는 어린이를 위한 생일 축하 행사를 하면서부터의 일이다. 이것이 
오늘날의 생일 파티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킨더페스테는 생일을 맞은 아이가 눈을 뜨면 촛불을 장식한 생일축하 케이크를 아이 앞에 
갖다 놓으면서 시작된다. 이 촛불은 계속 갈아 끼워 저녁 식사 때 케이크를 먹을 때까지 
하루 종일 켜놓는다.
  촛불은 아이의 나이보다 하나 더 많게 밝혀 놓았는데 그 여분의 한 자루는 '생명의 등불'을 
나타냈다.(옛날부터 자주 사람의 생애는 촛불에 비유되고 맥베스의 대사에도 사람의 생애는 
'순간의 등불'이라고 말했으며 '초 양쪽 끝에서 불을 붙여서는 안 된다'고 하는 속담도 여기에서 
나온 것). 생일을 맞은 아이들은 선물도 받고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도 대접받게 된다.
  소원을 빌고 촛불을 불어 끄는 오늘날의 관습도 독일의 킨다페스테에서 시작되었다. 촛불은 
단숨에 불어 끌 것. 소원은 비밀에 붙여야만 한다고 하는 것도 같다.
  독일의 생일 축하 행사에는 지금의 생일 파티에는 없는 것이 한가지 있었다. 이것은 생일을 
맞은 아이가 착한 일을 많이 하면 선물을 가져다준다는 '생일 아저씨'이다. 수염을 기르고 
난쟁이인 생일 아저씨가 지금의 산타클로스와 같은 존재는 아니지만 금세기 초까지는 어엿이 
존재하였으며 생일 아저씨의 인형도 상점에 진열되어 있었다.

     네안데르탈인들의 장례식

  장례식은 서아시아 일대에 사로 있던 네안데르탈인, 즉 우리들과 같은 현생인류 
호모사피엔스에 속하는 원시인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네안데르탈인이라고 하면 표정이 없고 두툼하고 커다란 코를 가진 원숭이에 가까운 모습으로 
그려 놓은 것이 많은데 실제로는 오늘날의 유럽 인종에 가까운 용모를 하고 있고 피부도 희며 
온몸에 털이 텁수룩하지도 않았다. 또한 발굴된 두개골에서 네안데르탈인의 뇌의 크기가 
현대인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도 알려져 있다.
  그들은 동료의 시체를 쓰레기처럼 버리지 않고 장례식을 하고 매장하였다.. 구멍을 파서 그 
속에 시체를 누이고 음식물, 사냥 도구, 불을 일으키는 숯을 함께 넣어 그 위에다 갖가지 꽃을 
뿌렸다. 실제로 이라크의 샤니다르에서 발견된 네안데르탈인의 무덤에는 여덟 종류나 되는 
꽃가루가 남아 있다.
  이미 5만 년 전부터 사람은 장례식에 불을 사용하였던 것 같다. 그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어쨌든 네안데르탈인의 무덤가에는 횃불을 피운 흔적이 있다.
  시간이 흘러 고대 로마에 와서는 장례식 때의 횃불은 육체를 떠난 혼을 저 세상으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영어의 funeral(장례)이라는 말은 '횃불'을 뜻하는 라틴어의 funus에서 유래한다.
  장례식 때 촛불을 켜놓게 된 것도 로마 시대부터이다. 그들은 시체 주위에 촛불을 세워 놓아 
한번 육체를 떠난 영혼이 다시 돌아와 시체를 되살아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했다. 그들은 어둠을 
집으로 삼는 영혼은 빛을 두려워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갖가지 장례식의 관습도 죽은 사람에 대한 경애의 마음에서라기보다 
저승에 대한 공포에서 시작된 것이 많다.
  고인을 애도해 입는 까만 옷도 원래는 공포 때문에 생긴 관습이다. 서양에서 검은색이 상복의 
색깔이 된 것은 친척이건 적이건 또는 타인이건 어쨌든 죽은 사람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그 
기원은 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옛날 사람들은 한순간이라도 경계를 늦추면 죽은 사람의 혼령이 언제 다시 날아 들어올지 
모른다고 두려워하였다. 인류학의 자료에 따르면 원시시대의 백인은 장례식 때 영혼을 속이기 
위해 온몸을 새까맣게 칠했다고 한다. 또 아프리카에서도 같은 이유로 온몸을 새하얗게 칠하는 
흑인 부족이 있었다고 한다.
  인류학자들은 몸을 까맣게 칠한 것으로부터, 많은 사회에서 가족이나 친척이 죽으면 몇 주 
또는 몇 달 동안 내내 검은 상복을 입었던 것은 영혼의 눈을 멀게 하는 방법이었다고 추측하고 
있다. 얼굴을 숨기는 베일도 물론 이 공포 때문에 생긴 것이다. 지중해 여러 나라에서는 미망인이 
꼬박 1년을 까만 옷으로 몸을 감싸고 베일로 얼굴을 감춘 채 떠돌아다니는 남편의 영혼으로부터 
숨어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상복이 검은색인 것은 죽음을 애도하는 뜻에서가 아니라 하얀 
피부에 반대되는 색이었기 때문이다.
  관(coffin)이라는 말은 바구니를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온 것이다. 기원전 4000년경 고대 
사마리아인은 죽은 동료를 작은 가지로 엮어 만든 바구니에 거두었다. 그런데 여기서도 죽은 
사람의 영혼에 대한 공포가 예사 바구니를 관으로 변화시켰다.
  아주 먼 옛날 북유럽에서는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위협하지 않도록 특별한 방법을 썼다. 
시체를 묶고 머리와 다리를 잘라낸 다음 매장할 장소로 곧바로 가지 않고 일부러 멀리 돌아가 
만에 하나라도 죽은 사람이 돌아오려고 해도 길을 알 수 없도록 하였다. 또한 시체를 집 밖으로 
내갈 때 출입구로 가지 않고 벽에 구멍을 뚫어 그곳으로 내보낸 뒤 다시 곧 막아 버리는 관습도 
많은 나라에서 볼 수 있다.
  땅 속을 깊이 파고 시체를 묻는 것도 안전하지만 나무관에 시체를 넣고 관 뚜껑을 못으로 박아 
땅 속에 묻는 것은 더욱 안전하다. 이 때문에 옛날 관에는 못이 무수히 박혀 있다. 뚜껑이 열리지 
않도록 박아놓았다고 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많은 못이었다. 게다가 이것도 모자라 관 위에 커다란 
돌을 얹고 흙으로 덮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덤 위에 다시 한번 무거운 돌을 얹었는데 이것이 
비석의 시초였다. 가족이 애정을 담아 비석에 이름을 새기거나 그리운 고인을 찾아 묘소를 
방문하거나 하는 것은 훨씬 뒤의 얘기다. 그런 문화가 생겨나기 전에는 가족이나 친구들이 
고인을 방문하는 것은 생각지도 못하던 일이었다.
  시체를 묘지로 운반하는 영구차의 기원을 알려면, 고대 농기구의 하나인 갈퀴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왜 그럴까? 거기에는 복잡한 역사가 있다.
  로마 시대의 농민은 밭을 경작한 후 히르펙스(hirpex;라틴어로 갈퀴라는 뜻으로 큰 못이 붙어 
있는 나무나 쇠로 만든 삼각형의 도구를 말한다)를 사용하여 흙을 긁어 골랐다. 기원전 51년 
시저의 통치시대에 로마는 갈리아 지방의 평정을 끝내고, 그에 따라 서유럽으로 옮겨가 살게 된 
로마인이 이 갈퀴를 새로운 토지로 가져갔다.
  이 도구는 이윽고 영국의 여러 섬에도 전해져 하로(harrow)라 불렀지만 11세기 노르만인이 
영국을 정복하자 프랑스식으로 에르스(herse)로 불리게 되었다.
  노르만인은 이 갈퀴를 뒤집으면 교회에서 쓰는 가지가 달린 촛대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리하여 교회의 촛대를 차츰 '에르스'라 부르게 되었다. 또한 제사를 지낼 성인과 
축제일이 늘어남에 따라 세워야 할 촛불의 숫자가 늘어나 촛대는 자꾸만 커지게 되었다.
  이 커다란 촛대는 원래는 제단에 설치되어 있었지만 훗날 명사의 장례식에서는 관을 얹어 놓은 
대 위에 놓이게 되었다.
  15세기에는 2미터나 되는 커다란 촛대로까지 발전했다.
  다시 아름답게 꾸며진 커다란 촛대는 장례식 때에 관 뚜껑 위에 얹혀져 관과 함께 운반되었고, 
16세기 영국에서는 촛대와 관을 얹은 운반차를 가리켜 하스(hearse)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농기구였던 하스는 드디어 장례식 때의 관을 운반하는 영구차가 된 것이다. 
  장례 행렬이 느릿느릿하게 나아가는 것도 실은 고인에게 존경을 나타낸 것만은 아니다. 관 
위에 세워 놓은 촛불이 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장례식에 참가한 사람들의 걸음걸이는 자연히 
느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무렵 장례 행렬의 속도가 오늘날 영구차의 속도에도 영향을 끼친 
셈이다.

     신의 머리에 떨어지는 새똥을 막아라

  기독교 회화에서 몇 세기 동안 그려진 성인 등의 머리 주위에 나타나 있는 둥근 바퀴 모양의 
찬란한 빛, 즉 후광은 원래 기독교의 상징이 아니라 이교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이 후광은 왕관의 
기원이기도 하다.
  아주 먼 옛날부터 사람들은 신을 그릴 때 대개 머리 주위에 후광을 그렸다. 고대 인도, 그리스, 
로마의 그림 속 신의 머리에는 모두 후광이 그려져 있다.
  고대의 왕들은 신과 자신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자기를 신격화하기 위해 이 후광을 
자기 머리에 붙이는 것을 생각해냈다. 그것이 바로 깃털이나 보석, 금으로 만든 관이다.
  로마의 역대 황제는 신성시되었기 때문에 관을 쓰지 않고 사람들 앞에 모습을 나타내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예수를 박해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머리에 가시관을 씌운 것은 신의 나라 
왕이라고 말한 그를 조롱한 것이었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교의 상징이 그리스도 교회의 중요한 상징이 되어버렸다. 
초기 카톨릭 교회의 신부들은 후광이 원래 이교의 상징이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 
한동안은 종교 화가에게 가능한 한 이것을 그리지 말도록 하였다. 그렇지만 삽화가 들어 있는 
중세 때 책을 보면 이것이 모두 지켜지고 있었던 것은 아닌 듯하다.
  역사가에 따르면 그리스도 교회가 처음 후광을 받아들인 것은 7세기 때라고 한다. 애초에 
그것은 실용적인 의미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바로 우산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즉 바깥에 있는 
성인의 동상이 비나 새똥을 맞지 않게 하고 녹스는 것을 막기 위해 그 머리에 나무나 놋쇠로 
만든 접시를 얹었던 것이다.
  그 접시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는데 처음에는 후광(halo)이라고는 불리지 않았다.
  어원학자는 할로라고 하는 말은 이교의 신이나 기독교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 한다. 할로는 
그리스도 탄생보다 천년 이상이나 앞선 농민들이 탈곡하는 방식이었다.
  그 당시의 농민들은 탈곡할 때 우선 곡식 다발을 딱딱한 땅위에 산더미처럼 쌓아올려 그 위를 
몇 마리의 소로 하여금 걸어다니도록 하였다. 소가 한가운데서 차츰 원을 그리며 걸었으므로 
탈곡 후에는 원형이 되었다. 이것을 그리스인들은 원형 탈곡법, 즉 할로스라고 말하였다.
  16세기 와서 천문학자는 천체 주위에 보이는 무리를 후광이라고 불렀고 또한 신학자는 성인의 
머리 위에 있는 동그란 모양의 광채를 가리켜 이 말을 사용하게 되었다.

     악수는 무기가 없다는 의사표현?

  가장 오래된 기록에 의하면 악수는 천상의 신이 지상의 지배자에게 권력을 수여하는 
동작이라고 한다. 이집트의 상형문자에서 손을 내민 그림이 '주다'하는 뜻을 나타내는 것도 
여기에서 온 것이다.
  기원전 1800년경 바빌로니아에서는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축제를 벌이고는 그 자리에서 왕이 
최고신 말두크 상의 손을 잡았는데 이것은 말두크가 그해의 통치권을 왕에게 내린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 의식은 대단히 설득력이 있어서 아시리아인이 바빌로니아를 정복했을 때 
아시리아의 왕들은 자기들도 이 의식을 행하지 않으면 통치권이 인정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 
이것을 받아들였을 정도이다.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는 미켈란젤로가 그린 이 악수의 의식이 남아 있다.
  악수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는 대부분 추측할 수밖에 없지만 이런 얘기도 있다. 이집트 
시대보다 훨씬 더 옛날 사람들은 길에서 낯선 사람과 만나면 우선 적이라고 의심해 몸에 지니고 
있는 칼에 손을 댔다. 물론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서로 경계하면서 얼굴을 마주본 채 상대에게 천천히 다가선다. 그러다가 서로 싸울 
뜻이 없음을 알게 되면 칼을 거두고 무기를 쓰는 오른손을 내밀어 적의가 없다는 것을 나타내 
보였다.
  이 설에 의하면 어째서 여성에게는 악수를 하는 습관이 없는가 하는 것도 설명이 된다. 
여자들은 오랜 옛날부터 무기를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악수 이외의 인사법들도 아주 오래 전의 일에 기원을 두는 것이 많다.
  모자테에 손을 대는 신사들의 인사는 고대 아시리아의 포로가 정보자에게 복종을 나타내기 
위해 옷을 벗고 벌거숭이가 되어 보이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스에서도 새로 고용된 하인은 
상반신의 옷을 벗어 주인에 대한 복종을 나타냈다고 한다.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을 벗어버리는 동작은 존경을 나타내기 위해 자주 행해졌다. 로마인은 
신전에 가까이 가기 전이나 연장자의 집에 들어갈 때에는 신발을 벗었다.
  영국에서는 왕족이 앉아 있는 곳에서 여성은 장갑을 벗었다. 남성이 인사하는 것도 여성이 
무릎을 굽혀 인사하는 것도 복종과 존경의 동작에 대한 흔적인 것이다. 여성의 옛 인사는 완전히 
한쪽 무릎을 땅 위에 대는 것이었다.
  중세 유럽에서는 영주에게 복종을 나타내기 위해 노예는 머리에 아무 것도 쓰지 않았다. 
이것은 예전에 옷을 벗고 복종을 표시했던 아시리아의 포로와 마찬가지로 '나는 당신의 충실한 
하인입니다'라는 것을 뜻했다. 기독교 교회는 재빨리 그것을 받아들여 남성에게 교회에 들어가기 
전에 모자를 벗도록 명했다.
  이윽고 모자를 벗는 것은 상대에게 존경을 나타내는 남성의 기본 예절이 되었다. 그리고 
모자테에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같은 의미를 나타내게 된 것이다.

     2. 나폴레옹은 검은 고양이를 싫어했다.

     비오는 날에만 돈을 건다

  나폴레옹은 검은 고양이를 싫어했고, 소크라테스는 사팔뜨기를 무서워했다. 줄리어스 시저는 
꿈을 두려워했고, 헨리 8세는 앤 블린과의 결혼을 마술에 홀린 탓으로 돌렸다. 표트르 대제는 
다리를 건너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했고, 새뮤얼 존슨은 건물에 들어 갈 때나 나올 때 반드시 
오른발을 먼저 내디뎠다.
  미신이란 애당초 불합리한 것이다. 교육이 널리 보급되고 과학이 진보했는데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상하다면 이상한 일이다. 오늘날 고도로 발달한 문명사회에 살고 있으면서도 
우리들은 한두 가지, 또는 그보다 더 많이 미신을 믿고 있다. 미국에서 매일 수만 장의 복권이 
단지 그 사람의 행운의 숫자라고 하는 이유만으로 팔려나간다. 미신을 믿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 
속에 부조리한 부분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고고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처음으로 미신이라는 것이 생겨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5만 년 전, 
서아시아 일대에 살고 있던 네안데르탈인에게서부터라고 한다.
  그들은 사후의 세계를 믿은 최초의 인류였다. 선대의 인류는 시체를 그냥 버렸으나, 
네안데르탈인은 의식을 행한 뒤 시체를 매장했고, 저 세상에서 사용할 식량과 무기 그리고 불을 
일으키는 숯을 시체와 함께 묻었다.
  영혼이 있다고 믿는 것과 미신은 동시에 생긴 것이라 해도 별로 이상할 것은 없다. 역사를 
통해서 어떤 사람에게는 종교인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미신에 지나지 않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자였던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이교는 괘씸한 미신이었으나, 이교도 정치가인 
타키투스에게는 기독교야말로 해롭고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미신이었다. 개신교 쪽에서 보면 
카톨릭의 성자나 성물 신앙은 미신이며, 기독교도의 관점에서 힌두교는 미신으로 넘쳐흐르고 
있다. 무신론자들이 보면 모든 종교의 계율은 미신이다.
  왜 네잎 클로버를 찾은 것은 행운이고, 거울을 깨뜨리는 것은 불길한가? 지금에 와서 논리적인 
근거는 전혀 없다. 그러나 본래 어떤 미신에도 그렇게 여기게 된 이유와 배경은 있다.
  미신은 직접적인 체험에서부터 생겨난다. 자연의 법칙을 몰랐던 고대인은 갖가지 자연현상, 즉 
번개나 천둥, 일식, 월식, 탄생이나 죽음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해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의 힘이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즉 그들은 동물이 육감으로 위험을 알아차리는 것도 틀림없이 영혼이 
동물들에게 경고하기 때문이며, 씨앗에서 싹이 돋아나고, 올챙이가 개구리가 되는 기적도 저 
세상의 영혼이 부리는 조화라고 여겼다. 또한 그들을 온갖 고난에 찬 생활을 겪으면서 아무래도 
주위에는 선한 영혼보다는 악한 영혼이 훨씬 더 많다고 생각했다. 미신 속에 사악한 
영혼으로부터 몸을 지키기 위한 방법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악령이 날뛰는 세계로부터 몸을 지키고, 영문을 알 수 없는 이 세상에서 조금이라도 자신의 
의지를 지켜보려고 옛날 사람들은 동짓날에 팥죽을 끓여 귀신을 쫓고, 부적을 써서 신의 가호를 
빌며, 네잎 클로버를 찾아서 행운을 빌었다. 어떤 것을 실험해서 효과가 없으면 다른 것, 그것이 
안 되면 또 다른 것 하는 식으로 차례차례 부적을 만들어 나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자기 주변에 있는 갖가지 물건이나 동작, 말이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오늘날 우리들도 그와 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 몽당연필로 답을 써서 높은 점수를 
받은 학생은 그 연필을 행운의 연필로 여기며, 비오는 날에 경마를 해서 큰 돈을 딴 사람은 
다음에도 다시 비오는 날에 돈을 걸려고 한다.
  사람들은 이렇게 해서 아무 것도 아닌 일을 특별한 것으로 만든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 있는 
물건이나 몸짓들 중에는 미신이 아닌 것이 거의 없다. 어느 나라의 누군가가 반드시 미신의 
대상이 되고 있다. 마을 어귀의 나무, 마늘, 사과, 거울, 우산, 딸꾹질, 돌에 걸려 넘어지는 것, 
다리를 떠는 것, 댕기, 무지개... 등등이 그렇다.
  과거에 불가사의했던 현상들은 대부분 오늘날 과학적으로 해명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의 
일상에서 예측할 수 없는 사태가 모두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니다.
  불행이 닥치면 미신에 눈이 간다. 전혀 원인을 알 수 없는 불행을 미신이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사업이 잘 되기를 바란다든지 시험에 합격하기를 바랄 때도 미신에 마음이 간다. 사람의 힘이 
미치지 않는 행운을 비는 셈이다.

     고양이의 목숨은 9개다

  검은 고양이가 앞길을 가로질러 가면 불길하다는 미신은 미신치고는 좀 새롭다. 까마득한 옛날, 
기원전 3000년쯤 이집트에서 고양이를 기르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고양이는 숭배받는 동물이었다. 
물론 검은 고양이까지도 모두 숭배의 대상이었으며 고양이를 해치거나 죽이거나 하면 법을 
어겼다 하여 처벌받았다.
  고양이 숭배는 절대적이었으며, 집에서 기르던 고양이가 죽기라도 하면 온 가족이 상복을 입고, 
부자나 가난한 집 할 것 없이 그 시체를 썩지 않도록 처리한 다음에 고급 린넨 천으로 감싸고, 
값비싼 청동제나 목제 관에 안치했다. 나무가 귀한 이집트에서는 나무관 값이 매우 비쌌다. 
고고학자에 의해서 발굴된 고양이들의 묘지에는 검은 고양이의 미라도 많이 있다.
  이집트인은 고양이가 높은 곳에서 몇 번씩 떨어져도 상처 하나 입지 않는 것을 보고 
고양이에게는 아홉 개의 목숨이 있다고 믿었다.
  고양의 인기는 아주 빠르게 다른 문화권으로 퍼져나갔다. 2000년 전에 범어로 쓰여진 책에는 
그 당시 인도 사회에서의 고양이의 역할이 기록되어 있으며, 기원전 500년 중국에서는 공자가 
고양이를 애완동물로서 귀여워했다고 전해진다. 또 600년경 예언자 마호메트는 고양이를 팔에 
안고 설교를 했다고 하며, 그 무렵 일본에서도 성스러운 경전을 쥐가 갉아먹는 것을 막기 위해서 
고양이를 절 안에서 기르기 시작한 것 같다. 이 시대에는 고양이가 앞을 가로질러 가면 그것은 
틀림없는 길조였다.
  고양이, 그 중에서도 검은 고양이를 유럽 사람들이 혐오하기 시작한 것은 중세에 
들어서면서부터다. 영국에서는 특히 심했다. 그 무렵 대도시에서 고양이 수가 급격히 늘어났던 
탓도 있었지만 속박을 싫어하고 말을 잘 안 들으며 소리도 없이 걸어다닌다는 고양이 특유의 
성질이 고양이의 지위를 떨어뜨렸다. 떠돌아다니는 도둑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는 사람들로는 으레 
가난하고 의지할 곳 없는 할머니를 떠올렸는데 유럽에서 마녀 소동이 일어나자 흑색 마술을 
부리고 있다고 해서 제일 먼저 의심을 받은 것이 바로 집 없는 할머니들이었다. 그리고 
할머니들의 친구인 고양이도(특히 검은 고양이는) 마녀의 공범자로서 생포 당했다.
  고양이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감정을 잘 나타내주는 다음과 같은 영국 전설이 있다.
  1560년대 잉글랜드 동부의 링컨셔에서의 일이다. 달도 없이 캄캄한 어느날 밤, 시내에서 서둘러 
길을 가던 부자는 뭔가 작은 동물이 눈앞을 재빨리 가로질러 가기에 깜짝 놀랐다. 그 동물이 
좁은 곳으로 뛰어들어가는 것을 보고 돌을 던졌더니 상처 입은 검은 고양이가 황급히 뛰어나와서 
근처에 있는 어떤 집으로 다리를 절룩거리면서 도망쳐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고양이가 도망친 
곳은 평소에 거리 사람들이 마녀가 살고 있다고 수군덕거리는 집이었다.
  그 이튿날이었다. 부자가 길을 걷고 있으려니까 맞은편에서 문제의 여자가 다가왔다. 얼굴은 
상처투성이고, 팔에는 붕대를 감고 더구나 다리를 절룩거리는 것이 아닌가. 그날부터 
링컨셔에서는 검은 고양이는 모두 마녀가 밤에 변장한 모습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훗날에까지 계속 전해져 미국에서 세일럼의 마녀 사냥이 있었을 때도 마녀가 
거리를 떠돌아다닐 때에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검은 고양이로 둔갑한다고 사람들은 믿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한때 그처럼 숭배 받고 소중히 여겨지던 고양이가 지금은 두렵고 혐오스런 존재로 
변해 버렸다.
  중세 말기에는 유럽의 모든 나라에서 고양이가 절멸의 위기에 빠졌다. 마녀에 대한 공포는 
이상하리만치 높아지고, 많은 무고한 여자가 무고한 애완동물과 함께 화형 당했다. 어떤 갓난애는 
눈빛이 이상하고 얼굴이 교활해 보여 갓난애답지 않다는 이유로 희생되었다. 장차 악령이 
달라붙어서 낮에는 마녀, 밤에는 검은 고양이로 둔갑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1630년대에 들어서서 루이 13세가 이 수치스러운 행위를 금지시킬 때까지, 매달 
수천 마리의 고양이가 불에 타 죽었다고 한다.
  검은 고양이는 전 유럽에서 몇 세기에 걸쳐서 계속 학살당했다. 그래도 검은 고양이가 
사라지지 않고,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랄 만한 일이다. 고양이의 목숨이 정말로 
아홉 개가 있다면 얘기는 또 다르지만.

     금요일은 악마의 안식일

  불길하다고 하는 미신 가운데서도 13이라는 숫자를 둘러싼 미신만큼 오늘날에도 갖가지 형태로 
서구인들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드물다.
  예를 들면 프랑스에는 13번지의 집이 없고, 이탈리아에도 복권에 13번이 없을 뿐만 
아니라 국내선, 국제선 항공기에도 13번 좌석은 없다. 역시 미국의 고층 빌딩에도 맨션에도, 더 
나아가 공동주택에도 아파트에도 모두 12층 다음은 14층으로 되어 있다.
  바로 얼마 전에도 사람들이 아직도 이 13의 미신에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있었다. 새로 지은 어떤 고급 맨션이 현대풍으로 13층을 두었더니, 다른 층은 
꽉찼는데도 13층만은 몇 집밖에 입주하지 않았다던 것이다. 그래서 13층이라는 표시를 
12층-B라고 고치니까 즉각 입주자가 몰려들었다고 한다.
  13이라는 숫자를 두려워하는, 이 '13 공포증'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 뿌리는 적어도 기원전의 북유럽 신화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언젠가 열두 명의 신들이 바르하라에 모여서 연회를 베풀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혼자서만 
초대받지 못한 싸움의 신 로키가 난입해 와서 참석자가 열세 명이 되었다. 로키를 쫓아내려고 
실랑이를 하던 중에 신 중에서도 가장 인기가 많은 바르다가 살해당하고 만다.
  이것이 기록에 남아 있는, 13을 불길하다고 하는 가장 오래된 전설이다. 이 설화는 13을 
두려워하는 미신이 되어서 유럽을 거쳐 그리스도 기원의 막이 열릴 때쯤에는 지중해의 모든 
나라에 완전히 정착되었던 것 같다.
  여기에다가 역사상 가장 유명한 만찬, '최후의 만찬'의 고사가 이 13의 공포에 박차를 가했다고 
민속학자는 말한다. 그리스도와 제자를 합쳐 열세 명이 식탁에 앉았는데, 이 만찬 뒤에 
그리스도는 24시간을 넘기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신화학자는 고대 북유럽의 전설에서 그리스도 만찬의 원형을 본다. 배반자인 유다에 해당하는 
것이 싸움의 신 로키, 못 박혀 죽는 그리스도가 살해된 신 바르다이다. 어쨌든 기원 초기부터 
열세 명의 손님이 같은 식탁에 앉는 것은 불길하다고 생각한 것은 확실하다.
  어떤 미신이라도 일단 믿게 되면,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관계없이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그 
미신을 생각해내고 끄집어내는 경향이 우리들에게는 있다.
  1798년에 발행한 영국의"젠틀맨 매거진"의 기사도 그랬다. 그날 현재의 보험통계표를 게재한 그 
기사에서는 그 표의 평균을 내어 13명 중 한 명이 1년 안에 죽는 다고 발표함으로써 13의 미신을 
크게 부추겼다. 그 자료가 좀더 오래 된 것이었거나 좀더 최근의 것이었다면 나온 숫자는 물론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우연히 그것이 13이었기 때문에 많은 영국인에게는 과학이 미신을 
뒷받침해 준 것처럼 보였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미국에서는 13이 행운의 숫자이기도 하다. 13은 국가 상징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1달러 짜리를 보자. 뒷면에 그려져 있는 미완성의 피라미드에 붙어 있는 돌계단은 
13이다. 흰머리독수리가 한쪽 발로 움켜쥐고 있는 올리브 가지에도 13장의 잎과 13개의 열매가 
달려 있으며, 다른 한쪽에 쥐고 있는 화살도 역시 13개이다. 이것은 물론 미신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미합중국 건국 당시의 13개의 식민지를 기념한 것으로서 행운을 상징하는 것이다.
  모든 날 가운데서도 13일의 금요일이 왜 가장 불길한가를 설명하려면, 성서에 나와 있는 
커다란 재해가 모두 이 날에 일어났다고 하는 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설에 따르면 이브가 선악과로 아담을 유혹한 것도, 대홍수가 일어나서 노아가 방주로 
탈출한 것도 이날이라고 한다. 또 바벨탑이 무너져서 언어가 뒤죽박죽 되어 버린 것도, 야훼의 
신전이 파괴된 것도, 더 나아가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죽은 것도 이날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미신의 기원도 실은 북유럽의 신화에 있다. 
  프라이데이라는 호칭의 기원이 되기도 한 북유럽의 사랑과 풍요의 여신 프릿가는 북유럽인이나 
게르만인이 기독교로 개종한 순간 마녀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산꼭대기로 추방되었다. 화가 난 
프릿가는 금요일마다 11명의 마녀를 모으고, 악마도 불러서-더해서 13명이 된다-모임을 갖고 
다음주에는 어떤 재앙을 일으킬 것인지를 의논했다.
  이 때문에 북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금요일을 마녀의 안식일이라고 불렀다.

     살아남기 위해 시작된 마스카라

  '불길한 눈초리', '그 눈에 직시 당하면 끝장이다', '응시 당하면 죽는다', '노려보면 화가 
찾아온다' 등등. 이것은 세계적으로 믿어온 미신의 하나인 사팔뜨기를 표현하는 상투적 문구다.
  사팔뜨기의 미신은 옛날부터 거의 모든 나라에 있었다. 고대 로마에는 사팔눈을 가진 직업 
마술사가 있어서, 자신의 적에게 마법을 걸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고용되었다고 한다. 집시는 
누구나 사팔이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인도나 근동제국에서도 사팔뜨기의 미신이 널리 퍼지고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중세가 되자 유럽인은 사팔뜨기의 재난이 찾아오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조금이라도 이상한 
눈초리, 무엇에 씌운 것 같은 눈매라든가 사팔뜨기 비슷한 눈을 한 인간을 발견하면, 당장 
사팔눈을 가진 사람이라고 단정하고 누구를 막론하고 화형에 처하려 했다. 그래서 백내장 같은 
것에 걸리면 그야말로 큰일이었다. 
  이처럼 여기저기서 사팔뜨기의 미신이 생겨난 것은 도대체 어찌된 영문일까.
  민속학자 사이에서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눈동자의 반사설이다. 누군가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라. 그 검은 눈동자에 자신의 모습이 조그맣게 비쳐져 있는 것이 보일 것이다. 
실제로 동공(pupil)이라는 말은 '조그만 인형'을 뜻하는 라틴어인 푸필라(pupilla)에서 유래했다.
  옛날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이 작아져서 상대의 눈 속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꽤나 놀라고 
의아해 했을 것이다. 이것을 보고 고대인이 자신의 몸이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다. 자신의 혼이 영구히 상대의 눈 속에 갇혀져 버렸다, 상대의 사악한 눈에 의해서 
도둑맞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사고방식은 바로 1세기 전까지 아프리카의 어떤 원시 부족 사이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들은 사진에 찍히면 영구히 혼을 잃어버린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 사팔뜨기의 사악한 힘을 없애기 위해서 이상한 물건을 사용하고 
있었다. '코르'라는, 말하자면 인류 최초의 마스카라다. 이것을 여자뿐만 아니라 남자도 준 
가장자리에 둥글게 또는 타원형으로 칠했다. 코르는 안티몬 가루로 만들었는데, 남자들 것은 
예언자가 만들었으나 여자들은 안티몬에 비밀 재료를 적당히 넣어서 독자적인 코르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왜 눈 주위에 화장을 하면 사팔뜨기에 대항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오늘날 
확실하게 알 수는 없으나 눈 주위에 칠한 검은색이 태양 빛을 흡수함으로써 눈 속에 들어가는 
반사광이 적어졌으리라는 것은 생각할 수가 있다. 이 효과는 미식축구 선수나 야구 선수들의 
경우에서 익히 알고 있는 바다. 고대 이집트인은 사막의 강렬한 태양 밑에서 우연히 이 효과를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화장의 본래 목적은 아름답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팔뜨기로부터 자신들의 
몸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의 생일이 12월 25일이었을까?

  성스러운 날이며 축일인 오늘날의 크리스마스에는 몇 세기에 걸쳐 축적되어 온 여러 나라의 
관습이 포함되어 있다.
  칠면조 요리, 크리스마스 트리, 크리스마스 카드, 산타클로스, 교회의 종, 크리스마스 캐럴... 
원래는 모두 다른 문화, 다른 사람들의 관습이었지만 이것이 한데 모여 크리스마스를 빛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12월 25일 이 날 그리스도가 태어났는지 어땠는지 아무도 모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12월 25일로 정하고 축하하게 된 것은 4세기 때이다. 당시 기독교에 
적대하고 기독교의 존속을 위협하던 다른 종교의 제전을 어떻게든 없애려고 그리스도 교회가 
지혜를 모아 짜낸 결과였다.
  예수가 태어난 지 2세기 동안 예수의 정확한 탄생일을 아무도 몰랐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오히려 죽은 날이 중요하며 태어난 날을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게다가 예수는 신성한 
분이기에 보통 사람과 똑같은 의미에서의 탄생일을 운운하려 하지 않았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마치 이집트의 파라오처럼' 예수의 탄생일을 이것저것 캐내는 것은 신에 대한 모독이라고 초기 
기독교는 여겼다.
  그래도 심술궂은 몇몇 신학자들은 예수의 탄생일을 규명하려고 조사를 계속하였다. 그리고는 
1월 1일, 1월 6일, 3월 25일, 5월 20일 중 하나라고 추정하였는데 특히 3월 25일과 5월 20일을 
유력하게 생각했다. 누가 복음에 의하면 목자가 밤에 양을 지키고 있다가 구세주 탄생의 계시를 
들었다고 되어 있는데 목자가 밤에 양을 지킨다면 그것은 양이 어릴 때인 봄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것이 어떻게 해서 12월이 되었는가? 교회가 강력하게 12월 25일을 예수의 탄생일로 
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 날이 기독교의 라이벌인 미트라교의 축일이기 때문이었다.
  12월 25일은, 당시 로마인의 다수파를 차지하고 있던 미트라교의 신자들이 태양의 신 미트라의 
탄생일을 축하하는 날이었다.
  미트라교는 페르시아에서 시작되어 기원전 1세기에 로마에 전해져 로마 최대의 종교로 
성장하였고 274년에는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국교로 정해졌다. 300년대 초에는 기독교를 
적대시하는 미트라교의 세력이 갈수록 강해져 기독교의 존속이 위태로울 정도였다.
  교회의 권력자들은 대책을 세워야만 했다.
  귀족이나 평민을 막론하고 로마인들이 축제를 좋아하는 것은 기원전 753년 전설상의 로마 
건국자 로물루스가 파라티노 언덕에 로마를 건국한 이래의 전통이다. 12월은 미트라 신의 
탄생일을 기리는 축제 외에도 농경신 사투르누스에게 감사하는 축제도 열렸고, 축연과 
퍼레이드가 계속되는 달이었다.
  기독교 교회에도 반드시 12월의 행사가 필요했다. 이교도를 개종시키려면 개종하는 사람들을 
위해 지금까지 벌였던 이교도 행사에 대신하는 것을 준비해야만 한다. 교회는 마침내 예수의 
탄생일을 정식으로 인정하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예수의 탄생일은 미트라 교도에 대항하기 위해 12월 25일이 되었던 것이다. 
예수의 탄생일은 진지하고 경건한 행사였다. 즉 예수에게 미사(mass)를 올리는 축제, Christ' 
Mass(크라이스트 마스@e=@m크리스마스)였다.
  어느 신학자가 320년대에 크리스마스에 대해 쓴 기록을 보자.
  "우리는 이날을 성스러운 날로 축하한다. 이교도가 말하듯 이 태양이 탄생한 날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만드신 신이 탄생한 날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뭔가를 함께 축하함에 따라 생기는 심리적인 효과, 즉 계급을 초월한 일체감과 동료 
의식, 결속의 강화를 사회학자가 지적한 것은 훨씬 뒤지만, 그것보다 훨씬 옛날부터 인간은 
직관적으로 그 효과를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서양에서 크리스마스를 공식적으로 축하하게 된 것은, 337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세례를 
받고 기독교가 황제에 의해 정식으로 인정된 뒤였다. 
  354년 로마의 리베리우스 주교는 예수의 죽음뿐만 아니라 탄생을 성스러운 날로서 축하하는 
것의 중요성을 말하고, 12월 25일을 기독교 탄생일로 삼을 것을 새삼 강조했다.

     낙타를 타고 온 산타클로스

  산타클로스의 모델, 성 니콜라스는 4세기 초 터키 남동쪽에 있던 고대 국가 리시아에서 
태어났다. 니콜라스는 어릴 때부터 대단히 신앙심이 깊어 하느님을 존경하기 위해 자진해서 
일주일에 두 번(수요일과 금요일)씩 단식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리시아 신학교에서 공부한 그는 그의 인생을 오로지 하느님에게 바치고 
갖가지 기적을 행했다고 전해진다. 맨 처음 기적은 팔레스타인으로 가는 항해 도중에 사납게 
굽이치는 파도를 두 팔을 벌려 진정시킨 것인데 그 기적으로 그는 선원들의 수호 성인이 되었다.
  젊었을 때 니콜라스는 미라의 주교였다. 뛰어난 설득력으로 많은 사람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킨 
그는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선 존재로 로마의 지배자들에게는 괘씸한 존재였다. 이윽고 기독교도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자 그는 폭군 가이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명령으로 투옥되었다. 
  하지만 온갖 포악한 짓을 다 저지른 황제는 60세가 되자 시골로 돌아가 양배추를 심으며 살고 
싶다고 하더니 갑자기 퇴위해 버렸다. 그것은 많은 로마인을 기쁘게 했고 하늘이 니콜라스를 
돕는 것이었다.
  새로운 황제 콘스탄티누스(나중에 스스로 기독교로 개종한다)는 니콜라스를 자유의 몸으로 
만들었다. 325년, 그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소집된 제1회 니케아 종교회의에 중요 인물로서 
참석했다. 그 후 342년 12월 6일에 죽은 니콜라스는 러시아, 그리스, 시칠리아의 수호 성인이 
되었다.
  어떤 어려움에 빠져도 니콜라스는 항상 다정함을 잃지 않고, 또한 아이들을 사랑했다. 아이를 
좋아했던 그의 다정함이, 그를 산타클로스로 만들었을 것이다. 로마 시대의 기록에는 니콜라스가 
소년들의 후견인으로 일을 했다고 나와 있으며 나중에 아이들의 수호 성인도 된다. 그러나 중세 
유럽에서는(그 이후에도)니콜라스를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렀지만 산타클로스라고 부른 적은 
없었다.
  오늘날의 아이들은 몇백 년 전에 유럽의 아이들에게 선물을 갖고 왔던 산타클로스를 봐도 그가 
진짜 산타클로스라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폭포 같은 하얀 수염이 있기는커녕, 
빨간색과 흰색으로 된 가운같이 길다란 주교복으로 온몸을 감싸고 머리에는 주교의 관, 손에는 
비틀어진 주교 지팡이를 든 채 발이 빠르고 늘씬한 사슴이 끄는 비틀어짐 주교 지팡이를 든 채 
발이 빠르고 늘씬한 사슴이 끄는 썰매가 아니라 느릿느릿한 낙타를 타고 찾아왔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그가 찾아오는 날은 12월 24일인 크리스마스 이브가 아니라, 그의 제삿날인 12월 
6일이었다. 그가 난롯가에 놓고 가는 선물도 오늘날과 비교하면 작고 보잘것없는 물건, 즉 과일, 
사탕, 나무나 점토로 만든 인형 등이었다. 하긴 산타클로스가 남기고 가는 오늘날의 선물이 
과거보다 더 좋다고는 결코 할 수 없지만 말이다.
  16세기 종교개혁 시기에는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 카톨릭의 주교였던 성 니콜라스의 이름은 
거론되지 않았다. 대신에 영국에서는 파더 크리스마스, 프랑스에서는 파파 노엘이라는 종교색이 
없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활동했다. 하지만 어린이를 별로 소중하게 여기지 않던 시대 
분위기를 반영해서인지, 두 사람 모두 성 니콜라스와는 달리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가져다 주지는 
않았다.
  성 니콜라스가 계속 살던 곳은 네덜란드였다. 미국에 최초로 이주해 온 네덜란드 사람들이 탄 
뱃머리에는 선원의 수호 성인인 성 니콜라스의 상이 장식되어 있었고, 그들이 지금의 뉴욕을 
중심으로 뉴암스테르담이라는 식민지를 건설했을 때 최초로 세운 교회에도 성 니콜라스의 이름이 
붙여졌다. 이 네덜란드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함께 들어온 크리스마스의 관습은 미국에 맞는 
형태로 바뀌면서 순식간에 신세계에 뿌리를 내렸다.
  16세기 네덜란드 어린이들은 성 니콜라스가 오는 밤에는 나무 신발을 난로 옆에 두고 잤다. 
나무 신발 속에는 성 니콜라스와 함께 선물을 날라다주는 낙타를 위해서, 짚을 가득 채워둔다. 
그러면 니콜라스가 짚을 주어 고맙다는 인사로 선물을 양쪽 신발에 넣고 간다. 미국에서는 나무 
신발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대신 양말을 걸어 놓았고 그 양말 속에 채워둔 것은 짚 
대신에 '기대감'이었다.
  원래 네덜란드어로 성 니콜라스는 '신트 니콜라스'이고, 그것이 신세계에 와서 신타클로스라고 
불리게 되었다. 17세기에 네덜란드어가 뉴암스테르담에서 그 세력을 잃자, 신타클로스는 
영어화하여 산타클로스가 되었다.
  오늘날의 산타클로스의 이미지는 사슴이 끄는 썰매를 비롯하여 미국에서 생긴 것이 많다. 그 
대부분을 만들어낸 것이 뉴욕의 신학자 무어 박사의 시였다.
  클레멘트 클라크 무어 박사는 1822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자기 아이에게 들려주려고 
"크리스마스 전야"라는 시를 썼다. 만일 이 시를 그의 친구가 박사 몰래 신문사에 보내지 
않았더라면 분명히 그것은 세상에 나오지 않은 채 무어 박사의 서재에 조용히 파묻혀 있었을 
것이다.
  신문과 잡지들이 번갈아가며 이 시를 실었다. 곧 이 시에 묘사된 산타클로스의 이미지는 
사람들의 의식에 자리잡아 갔다. 하지만 권위 있는 학자였던 무어 박사는 동시를 쓴 사실이 
밝혀지면 명성에 지장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이 시의 작자라는 것을 오랫동안 인정하지 않았다. 
1838년에 겨우 그가 썼다고 인정했을 무렵에는, 이미 전국의 어린이가 이 시를 보지 않고도 
줄줄줄 읊을 수 있을 정도였다.
  산타클로스가 뚱뚱하게 된 것도 미국에서의 일이었다. 모델인 성 니콜라스는 늘씬하고 키가 큰 
고상한 주교였다. 그 고상한 이미지가 유럽에서는 몇 세기 동안 계속 유지되었다.
  빨간 볼에 통통하게 살찐 산타클로스는, 19세기의 만화가 토머스 나스트가 만들어 냈다.
  나스트는 1863년부터 1886년까지 "하퍼스 윙클리"지에 크리스마스의 삽화를 그리고 있었다. 
20년 동안 계속된 이 나스트의 그림에 의해 사람들 마음 속에 있는 산타클로스는 점차 오늘날과 
같은 친숙한 모습으로, 이미 무어 박사가 쓴 불후의 명작에 나오는 땅딸막하고 작은 
산타클로스가 아니라 통통하게 살찌고 수염을 기른 당당한 체격의 산타클로스로 변해 갔다. 
나스트는 이 잡지에, 산타클로스가 장난감을 만드는 모습과 어린이들의 행동을 지켜보는 모습, 
또는 어린이들이 갖고 싶어하는 물건의 목록을 읽고 있는 모습 등을 그리고, 산타클로스의 
생애도 소개했다.
  나스트가 그린 산타클로스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진정한 산타클로스의 모습으로 깊이 새겨지게 
되었다.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사슴 루돌프는 미국의 한 백화점에서 탄생했다.
  잘 알려진 크리스마스 캐럴 '빨간 코 사슴'은 백화점이 배부한 소책자에 쓰였던 시였다. 
1939년, 시카고의 백화점 몽고메리 워드는 산타클로스를 소재로 어른이나 어린이가 함께 즐길 
수 있는 멋진 얘기를 광고지에 싣고자 기획하고 있었다. 당시 몽고메리 워드의 
카피라이터였던 로버트 메이는, 산타클로스에 관한 시를 짓고 그에 맞는 삽화를 그려 
소책자로 만들고 다음해까지 놔두었다가 다시 읽고 싶을 만한 것으로 만들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메이는 시의 주인공으로 산타클로스를 돕는 빨간 코 사슴을 생각해 내고 '로로'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는 자신의 친구인 화가 덴버 길렌에게 그림을 의뢰했다. 길렌은 동물원에 나가 몇 
시간에 걸쳐 사슴의 갖가지 동작을 스케치했다. 몽고메리 워드의 중역들은 길렌의 기발한 
그림이나 메이의 시는 마음에 들었지만, 사슴의 이름이 로로라는 것에는 반대였다. 로로 다음으로 
레지날드가 후보에 올랐지만 이것도 어딘지 좀 어색했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귀여운 이름이 
올랐지만, 결국 메이의 네 살배기 딸이 제일 좋아하는 루돌프로 타결을 보았다. 1939년 
크리스마스가 되자 루돌프가 그려져 있는 소책자 240만 부가 미국의 모든 지역에 배부되었다.
  루돌프 소책자는 1947년까지 부정기로 찍어 배부되고 있었다. 그해 메이의 친구 조니 막스가 
이 시에 곡을 붙였다. 그런데 노래는 만들었지만 가수가 결정되지 않았다. '빨간 코 사슴'은 
가수들에게 계속 거절당한 끝에 1949년 겨우 진 오토리에 의해 녹음되었다.
  오토리의 레코드는 예상 밖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히트 퍼레이드'의 톱에 올랐다. 그후 
300종류 이상의 '빨간 코 사슴'이 녹음되고 800만 장을 넘는 레코드가 팔렸다. 진 오토리의 
오리지널 레코드는 크리스마스 시즌마다 1위인 빙 크로스비의 '화이트 크리스마스'와 거의 
맞먹을 정도로 팔려나간다.
  이윽고 루돌프는 텔레비전 만화에도 등장하고 독일, 네덜란드,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영국, 
스페인, 오스트리아, 프랑스 각국에서 인기 캐릭터가 되었다. 각 나라의 전설이 덧붙여지고, 이미 
전 세계에 퍼져 있던 성 니콜라스 전설에 다시 이 빨간 코 사슴 루돌프가 더해졌던 것이다.
  이미 사회학자가 말했듯이 빨간 코 사슴은 20세기가 되어 산타클로스 전설에 덧붙여진 유일한 
요소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발견한 사람은?

  크리스마스와 전나무의 관계가 시작된 것은(이때는 아직 장식은 하지 않았지만) 700년대 
초반의 독일이다.
  독일에 전도하러 와 있던 성 보니페이스(680년, 윔프리드 태생의 영국인 선교사)가 
가이스마르라는 마을 부근에서 게르만인 드루이드들에게 예수의 탄생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참나무 숭배자인 드루이드에게, 참나무가 특별히 신성한 나무가 아니라는 것을 
납득시키려고 보니페이스는 그 곳에 서 있던 큰 참나무를 한 그루 베어 쓰러뜨렸다. 참나무는 
주위의 키가 작은 나무를 단숨에 쓰러뜨리며 땅바닥에 쓰러졌는데, 이때 이상하게도 어린 
전나무만은 화를 피해 무사했다.
  이것은 물로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 우연한 사건이었지만, 보니페이스는 재빨리 어린 
전나무가 살아남은 것은 기독교의 탄생과 똑같은 기적이라며 "우리는 앞으로 이 나무를 아기 
예수라고 부릅시다"라고 말했고, 그 후 전나무를 심게 되었다고 한다.
  16세기에 들어서자 독일인은 크리스마스용으로 장식을 한 전나무를 집 안팎에 장식하게 
되었다. 이것은 1561년 알자스 지방 아마슈바이어의 삼림 조례의 내용에서도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크리스마스용으로 두 그루 이상의 전나무를 베지 말 것. 키가 구두 여덟 켤레 이상 되는 
전나무는 베지 말 것.'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전나무는 장식한 것은 색종이로 만든 장미꽃, 사과, 웨이퍼, 금가루, 
사탕이었다.
  불을 켠 초를 나무에 장식하는 것을 생각해낸 사람은 16세기 종교개혁가로 잘 알려진 
루터였다. 어느 추운 겨울 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설교를  생각하면서 걷고 있던 루터는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고 상록수 사이로 반짝이는 별의 아름다움에 감동하였다. 그 아름다움을 
가족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그는 거실에 나무를 세우고 가 가지에 불을 켠 초를 동여맸다고 
한다.
  1700년대 독일에서 크리스트바움(크리스마스 트리)은 크리스마스에 빠뜨려서는 안 될 
물건이었다. 이 관습은 독일에서 서유럽 각지로 널리 퍼져 나갔는데, 영국에서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을 시작한 것은 19세기 빅토리아 여왕이 독일인 알버트 왕을 남편으로 맞이하고 나서의 
일이었다. 독일 중앙의 잭스 고부르크 고타 공의 아들로 태어난 알버트 왕은 크리스마스 트리에 
장식을 하면서 성장했다. 1840년 빅토리아 여왕과 결혼한 그는 이 독일의 관습을 영국에서도 
받아들이도록 여왕에게 요청했다.
  미국에 크리스마스를 전해준 것은 펜실베이니아로 이주해온 독일인들이라는 것이 현재의 
정설이다. 펜실베이니아 주 랭커스터의 마추 참의 일기에 의하면 1821년 12월 20일에 신세계에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트리가 등장했다고 한다.
  크리스마스 트리도 다른 크리스마스의 축제 행사와 똑같이 미국에서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에 놀랄 필요는 없다. 뉴잉글랜드에 이주해 온 청교도 무리는 매우 보수적인 
프로테스탄트 그룹으로, 그들에게 크리스마스는 성스러운 날이었다. 식민지의 제2대 총독 윌리엄 
브래드포드는 '이교의 모방 행위'를 중지시키기 위해서 참되지 못한 모든 행위를 하면 징벌할 
것이라고 자신의 책에 쓰고 있다. '이교도의 관습'인 크리스마스 캐럴, 크리스마스 트리, 그 밖에 
'신성한 날'을 더럽히는 모든 불성실한 행위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한 올리버 크롬웰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1659년 매사추세츠 입법의회는 교회 예배를 제외한 12월 25일의 모든 행사를 위법으로 정하고 
이를 어기는 자에게는 벌금을 부과한다는 법률을 제정했다. 크리스마스 트리에 장식을 하는 것도 
위법이었다. 이 엄숙한 크리스마스는 19세기, 독일과 아일랜드에서 이민 온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청교도적인 엄격함을 흔들어 놓을 때까지 계속된다.
  1856년, 시인 롱펠로는 이렇게 쓰고 있다.
  '뉴잉글랜드의 크리스마스는 지금이 과도기인 것 같다. 청교도적 분위기는 여전히 밝고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부정하고 있지만, 현실의 크리스마스는 해마다 점점 더 밝고 즐거워져 간다.'
  그해 크롬웰의 생각을 끝까지 따르던 매사추세츠 주도 마침내 크리스마스를 법정 휴일로 
정했다. 
  재미있는 것은 추수감사절을 국가의 명절로 하는 데 큰 힘을 발휘한 1800년대의 여성지 
"구디즈 레이더스 북"이 크리스마스에서도 큰 역할을 해냈다는 점이다. 이 잡지는 즐겁고 
익살스러운 그림과 함께 집을 장식하는 법, 크리스마스 과자와 음식을 만드는 방법, 크리스마스 
트리를 꾸미는 법 등을 가득 실어 몇 만에 이르는 주부에게 예수의 탄생일은 신성할 뿐만 아니라 
모두가 즐기는 축제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심어 주었다.

     포스트 맨은 벨을 두 번 누르지 않는다

  인쇄된 크리스마스 카드가 맨 처음 등장한 것은, 1843년 런던에서의 일이었다. 그 이전에는 
손으로 직접 만든 카드를 사람들이 처음에는 직접 건네주다가 나중에는 우편으로 서로 교환했다. 
1822년에는 이미 크리스마스 카드가 미국 체신부의 골칫거리가 되어 버렸다.
  그해 워싱턴의 우체국장은 열여섯 명의 우체부를 더 고용하지 않으면 크리스마스 카드를 
배달할 수 없다고 비명을 질렀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그는 크리스마스 카드의 우송을 
제한해 달라고 의회에 탄원했다.
  "이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우리로서도 대책이 없다."
  그러나 상황은 점점 더 심각해져, 값싸고 멋진 카드가 대량으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자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는 사람은 갈수록 늘어나 우체국의 부담은 점점 더 커졌다.
  인쇄 크리스마스 카드 제1호는 당시 런던의 인기 일러스트레이터였던 존 칼코트 호스레이가 
그린 것이다. 부유한 영국인 실업가 헨리 콜 경이 '친구와 사업상 아는 사람에게 자신 있게 보낼 
수 있는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을 하자 그가 직접 만든 것이다.
  호스레이의 카드는 세 번 접게 되어 있는데 양 날개에는 각각 헐벗은 자에게 옷을 입혀 주고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고 가운뎃장에는 훌륭한 음식과 굴로 
가득한 크리스마스 파티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가운뎃장에 그려진 그림은 그 무렵 일어난 금주 
운동에 대한 호스레이의 통렬한 비판이기도 했다.
  이 최초의 크리스마스 카드에 쓰인 문구는 '메리 크리스마스 앤드 해피 뉴 이어 투 유'로, 
당시의 '메리'는 '메리 잉글랜드'라고 할 때와 똑같이 축복 받았다는 뜻의 종교적인 말이었다.
  헨리 콜을 위해서 1,000장이 인쇄되었던 이 최초의 카드 중 열두 장이 오늘날까지도 개인 
소장으로써 남아 있다.
  인쇄한 크리스마스 카드는 곧 영국에서 크게 유행하였고 곧 독일에도 퍼졌다. 그러나 그것이 
미국에 나타나는 것은 뜻밖에도 30년 뒤의 일이다.
  1875년 미국에서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카드를 인쇄한 것은 독일에서 이주해 온 보스턴의 
인쇄업자 루이스 프랑이었다(프랑은 미국에서 '크리스마스 카드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다.)
  프랑의 카드는 품질도 좋았지만 비싸지도 않았다. 게다가 도안이 예수를 안은 마리아라든가 
크리스마스 트리, 또는 산타클로스 같은 크리스마스에 낯익은 것이 아니라, 장미와 
데이지, 치자나무, 제라늄, 사과 등의 꽃들을 조합한 정교한 것이었다.
  미국에서도 인쇄 크리스마스 카드는 인기를 끌었지만 프랑의 카드는 아니었다. 미국에서 잘 
팔린 것은 독일에서 건너온 값싼 수입품이었다.
  1890년에 프랑은 크리스마스 카드의 제작을 포기하니 않을 수 없었다.
  독일에서 만든 카드의 유행은 그 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에 카드 산업이 탄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오늘날 미국에서만 일 년에 20억 통을 넘는 크리스마스 카드가 교환되고 있다.

     성문란을 막기 위해 생긴 날?

  연인들의 축제일 발렌타인. 그러나 이것은 사실 카톨릭 교회가 당시 성대하게 이교의 제전을 
말살하려는 의도로 만든 것이다.
  기원전 4세기부터 로마에는 해마다 루페르크스라고 하는 신의 제전이 있었는데, 그 제전에서 
젊은 남자들은 연인이 될 사람을 찾기 위해 제비를 뽑는 관습이 있었다. 십대의 처녀들이 자신의 
이름을 써서 상자 속에 넣으면 그것을 남자들이 뽑는다. 이 제비뽑기로 생긴 커플은 다음해 
제비뽑기를 할 때까지 연인(종종 성적인 의미에서도)이 된다.
  초기 교회의 신부들은 800년 동안이나 계속된 이 음란한 행사를 그만두게 하려고 루페르크스를 
대신할 연인들의 수호성인을 찾고 있었다. 그리하여 200년이나 거슬러 올라가 연인들을 위해서 
순교한 발렌타인이라는 신부를 생각해냈다.
  발렌타인이 순교한 것은 270년, 폭군 황제 크로디아스 2세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이었다. 본시 
국민의 원성 따위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던 황제 크로디아스는 결혼한 병사는 가족에게 
신경을 서서 가기가 떨어진다고 하는 이유로 병사들에게 결혼 금지령을 내렸다.
  그런데도 인테라무나에서 신부로 있던 발렌타인은 결혼을 간절히 원하는 젊은 연인들을 몰래 
자신의 성당으로 불러서 결혼식을 올려 주었다.
  크로디아스 황제는 이 '연인들의 친구'의 존재를 알게 되자 화를 내고 체포해서 연행해 오라고 
명했다. 궁정으로 끌려온 젊은 신부는 품위와 신념으로 가닥 차 있었다. 그 모습에 마음이 움직인 
황제는 로마교로 개종을 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고 제의했다. 그러나 발렌타인은 그 제의를 
거부하면서 거꾸로 황제에게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권했다. 270년 2월 24일, 마침내 발렌타인은 
몽둥이와 돌로 얻어맞고 참수를 당했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옥사에서 처형을 기다리는 동안 그는 간수의 눈먼 딸 아스테리우스와 
사랑에 빠져, 그 깊은 사랑의 힘으로 기적을 일으켜서 처녀의 눈을 뜨게 해주었다고 한다. 
발렌타인이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의 끝을 장식한 '당신의 발렌타인으로부터'라는 
문구는 발렌타인이 죽고 나서 한참 뒤에 '당신의 연인으로부터'라는 의미의 발렌타인 
데이의 상투적인 문구가 되었다.
  교회 쪽에서 보면 인기 있는 루페르크스를 대신할 성자로서 발렌타인은 정말로 
안성맞춤이었다. 기원전 496년, 마침내 엄격한 교황 게라시우스는 2월 15일에 루페르크스 제전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로마 사람들이 도박을 좋아하는 것을 잘 알고 있던 교황은 제비뽑기 행사만은 
남겨 놓았다. 다만 상자 안에는 연인이 될 처녀의 이름이 아니라 기독교의 여러 성인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 남자든 여자든 제비를 뽑은 사람은 일 년 동안 제비뽑기로 나온 성인의 덕행을 
본받아서 실천하며 지내라는 것이었다. 이전의 제비뽑기와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달랐다.
  아가씨의 이름을 기대하고 제비를 뽑은 로마의 젊은이들은 그곳에 성자의 이름이 쓰여 있는 
것을 보고 정말로 크게 낙담했을 것이다.
  이 새로운 행사를 주관하는 것이 연인들의 수호성인 발렌타인이었다. 이윽고 로마인들은 
본의는 아니었지만 이교도의 제전 루페르크스제를 단념하고, 교회의 성스러운 날로 대신하게 된 
것이다.
  본래 2월 15일인 루페르크스 제전은 로마의 젊은이에게 파트너가 될 젊은 여성을 찾거나 
유혹할 수 있는 둘도 없는 좋은 기호였다. 그 루페르크스 제전의 제비뽑기가 사라지고 아무도 
그것을 부활시키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그런 일은 커다란 죄에 해당하니까)로마의 젊은이들은 
전날인 2월 14일, 좋아하는 처녀에게 사랑의 메시지를 쓴 카드를 건네주고 유혹할 것을 
생각해 냈다. 그리고 약삭빠르게 그 카드에 성 발렌타인의 이름을 쓰는 것을 잊지 않았다.
  기독교가 널리 퍼져 나가면서 발렌타인 카드도 보급되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가장 오래 된 
발렌타인 카드는 1415년, 런던 탑에 유폐되어 있던 오를레앙 공 샤를이 아내에게 보낸 것으로서 
현재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6세기에 제네바의 신부 성 프랑수아 드 사르는 발렌타인 카드를 보내는 관습을 폐지하고 
'성인의 이름이 새겨진 제비뽑기'를 부활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기독교도가 길을 잃고 
있어 길 안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제비뽑기는 교황 게라시우스의 
제비뽑기보다도 훨씬 평판이 나빴고 오래 가지 못했다.
  발렌타인 카드는 없어지기는커녕 점점 더 성행하였고 디자인도 화려해져 갔다. 그 무렵 
발렌타인 카드의 그림으로 가장 인기 있었던 것은, 사랑의 묘약에 적신 화살을 활 시위에 건 
발가벗은 큐피드의 그림이었다. 로마 신화에서 큐피드는 미와 사랑의 여신 비너스의 아들로 이 
사랑의 축일을 상징하는 데는 딱 들어맞았다.
  17세기가 되자 손으로 만든 카드는 점점 더 커지고 복잡해졌고, 한편 기성품 카드는 작으면서 
값이 비쌌다.
  1797년에는 영국의 어떤 출판사가 스스로 멋진 문구를 생각해낼 수 없는 청년들을 위해서 
낭만적인 애정 표현을 소개한 "젊은이를 위한 발렌타인 카드 쓰는 법"이라는 책을 냈다. 인쇄업자 
중 몇몇 사람들은 이미 그림과 글귀가 들어간 카드를 만들기 시작했다.
  19세기에 들어서 우편요금이 내리게 되자 손으로 건네주는 것 대신에 카드를 우송하는 
간단하고 편리한 방법이 유행했다. 그런데 우편으로 보내면 익명으로도 카드를 보낼 수가 있었기 
때문에 점잔을 빼는 빅토리아 시대였는데도 아슬아슬한 문구가 쓰여진 익명의 발렌타인 카드가 
크게 유행했다.
  카드에 쓰인 외설스러운 말은 점점 더 정도를 넘어서서 끝내는 몇몇 나라에서 발렌타인 카드의 
교환을 금지할 정도였다. 19세기 말경, 시카고 우체국은 취급하기에 적절하지 않다고 하면서 약 
2만 통의 카드 우송을 거부했다.
  미국에서 최초로 발렌타인 카드를 인쇄한 것은 인쇄업자이자 화가였던 에스터 하우랜드였다. 
손으로 그린 카드가 35달러에 팔리던 1870년대 무렵에 아름다운 레이스 무늬가 인쇄된 
하우랜드의 카드는 겨우 5__10달러만 주면 살 수 있었다.
  그 뒤부터 발렌타인 카드 사업은 더욱 번창하여 오늘날 미국인이 보내는 발렌타인 데이 카드는 
크리스마스 카드 다음으로 많다.

     설날은 1월 1일이 아니다

  설날은 명절 중에서 가장 오래 전부터, 그리고 또 가장 널리 찾아볼 수 있는 명절이다. 그 
시작은 달력이 생기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달력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설날이 있었다는 것이 
이상하지만,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보라.
  기록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 된 새해 축하 행사는, 오늘날 이라크의 아르히라 도시에 가까이 
있던 고대 바빌로니아의 수도 바빌론에서 있었다. 당시 새해라는 의미는 농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봄에 씨앗을 뿌리고 나서 수확할 때까지 일년이라는 기간이 걸렸는데, 바빌로니아에서는 
봄이 시작되는 3월, 그러니까 씨 뿌리는 계절을 한 해의 시작으로 여기고 새해를 경축하였다. 그 
축제는 열하루 동안 계속되었으며, 오늘날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성대했던 것 같다. 첫째 
날은 해뜨기 두 시간 전에 일어나서 성스러운 유프라테스 강물로 몸을 깨끗이 씻고 나서, 고대 
바빌로니아의 주신이고 농업 신이기도 한 마르둑에게 다음해의 풍작을 기원하고 신성한 노래를 
바쳤다. 그리고 작은 양의 머리를 잘라내고 거기서 나오는 피를 신전의 벽에 발라 그 성스러운 
건물, 나아가서는 이듬해의 농작물을 온갖 병충해로부터 지켰다. 이 의식은 '쿠풀' 이라고 
불렸으며 그 당시 헤브루인들  사이에서도 이와 비슷한 의식이 유태교의 '속죄의  날'에 행해졌다
고 
한다.  
  축연에는 많은 음식과 술이 나왔으나 이것은 사람들이 즐기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마르둑에게 
지난해 수확의 풍요함을 보여주고 감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엿샛날에는 가면을 쓴 배우의 무언극이 열렸는데 이는 풍작의 여신에게 바쳐졌다.
  그 뒤 음악이 흘러나오면서 개성을 살린 옷을 입고 화려한 춤을 추는 웅장한 퍼레이드가 
신전을 출발해서, 종점인 '뉴이어 하우스' 라고 불리는 특별한 건물로 향하여 축하행사를 벌였다. 
바빌론 시 교외의 뉴 이어 하우스 유적은 고고학자에 의해서 발굴되었다.
  이렇게 본래 봄의 씨 뿌리는 시기에 행해지던 새해 축하 행사가 어떻게 해서 한겨울로 
옮겨졌을까. 이야기는 2,000년 전의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천문학적으로나 농업적인 견지에서 말해도 한겨울인 1월을 농경의 주기나 한 해의 시작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게다가 각각 계절의 시작이라고 하는 춘분, 추분, 동지, 
하지 때처럼 태양이 천구상의 기준점에 있는 것도 아니다. 새해의 시작을 굳이 1월로 한 것은 
로마의 원로원이었다.
  로마 시대에도 처음에는 봄의 시작인 3월 25일을 새해가 시작되는 날로 경축하였다. 그런데 
대대로 황제나 정치가들이 자신의 임기를 조금이라도 연장시키려고 한 달의 길이와 일년의 
길이를 제멋대로 주물러댔기 때문에 천문학 견지에서 본 달력은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다. 달력이 
너무나 형편없이 되자 기원전 153년, 로마 원로원은 잘못된 달력을 바로잡고 새해를 1월 1일로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 뒤에도 권력자들의 달력 고치기는 계속되어 달력은 일정하지 
못했다. 기원전 46년에 줄리어스 시저는 다시 잘못된 달력을 바로잡고 1월 1일을 새해로 했으나, 
그때 잘못을 시정하기 위해서  그 해를 445일로 정해야만 했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혼란
의 
해' 이다. 시저가 바로잡은 새로운 달력은 그 이름을 따서 율리우스력이라고 불렀다.
  4세기 때 로마의 국교가 기독교로 변했는데도 황제들은 계속해서 새해를 경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초기 카톨릭 교회는 이교의 온갖 제전을 폐지하기 위해서 이들 제전에 기독교도의 참가를 
금지시켰다. 이윽고 신자를 늘리고 그 영향력을 강화한 기독교 교회는 이미 사람들 사이에 
정착되어 있는 여러 가지 이교의 제전을 교묘하게 기독교 의식으로 바꿔나가기 시작했다. 교회가 
새해 축하 행사에 대신하는 것으로 준비한 것은 기독교의 할례였다. 오늘날에도 카톨릭, 루터 
교회, 동방정교회의 신자들은 1월 1일을 기독교의 할례제로서 경축하고 있다.
  중세에 들어와서도 교회는 이 이교의 행사를 계속 적대시했기 때문에 기독교가 지배적이었던 
도시나 나라에서는 새해 축하 행사는 한동안 전혀 행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새해를 
경축하게 되었을 때, 새해 첫날을 언제로 하느냐는 문제가 생겼다. 11세기에서부터 13세기까지 
영국에서는 새해를 3월 25일, 프랑스에서는 이스터의 날로 하고, 이탈리아에서는 처음에는 
크리스마스로 했다가 나중에는 12월 15일로 바꿨다. 이 무렵 유럽에서 1월 1일을 설날로 삼았던 
것은 이베리아 반도뿐이었다.
  오늘날과 같이 설날이 1월 1일로 정해진 것은 사실은 아직 400년밖에 되지 않았다.
  옛날부터 섣달 그믐날 밤은 일년 중에서 가장 시끄러운 밤이다. 옛날 유럽의 농민들은 섣달 
그믐날 밤에 요란스럽게 풀피리를 불고 큰 북을 두드리며 곡물의 해충신을 내쫓았다. 중국에서는 
이날 밤, 빛의 힘, '양' 과 어둠의 힘 '음' 이 만난다고 믿었으며, 사람들은 모여서 징을 두드리고 
폭죽을 터뜨리는 관습이 있었다. 
  미국에서는 섣달 그믐날 밤을 경축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로, 오늘날의 뉴욕 근처를 중심으로 
뉴암스테르담이라는 식민 도시를 건설한 네덜란드인들이다. 본래 그들에게 섣달 그믐날 밤에 
떠들고 노는 것을 가르친 것은 본시 그곳에 살고 있던 인디언들이었다.
  사람들이 신세계로 찾아오기 훨씬 전부터 이로쿼이 인디언(뉴욕 주에 살던 인디언)들은 이듬해 
옥수수가 잘 되기를 기원하며 섣달 그믐날 밤에 의식을 지내는 관습이 있었다. 그 해에 남은 
옥수수와 그 밖의 곡물, 헌옷이나 나무로 만든 가재 도구 등을 들고 다 같이 모여서 신년과 
새로운 생활의 시작을 기원하며 그것들을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 속에 던져 불태운다. 학자가 
이러쿵저러쿵 추측할 것도 없이 새해의 시작을 축하하는 참으로 명쾌한 의식이었다.
  인류학자 제임스 프레이저는 자신이 쓴 "황금의 가지" 라는 책에서, 이로쿼이 인디언의 섣달 
그믐날의 관습을 또 한가지 소개하고 있다.
  "남자 여자 모두 가지각색으로 변장하고, 부락의 판잣집에서 판잣집으로, 주위에 있는 것을 
닥치는 대로 부수거나 내던지면서 걸어간다. 인디언들은 섣달 그믐날 밤에는 정신이 나간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것을 면죄부로 자기가 하고 싶은 짓을 마음놓고 한다."
  인디언들의 즐거워 보이는 난리법석을 직접 눈으로 보고 이주민들도 질세라 법석을 떨기 
시작했다. 다만 식량과 옷, 가구 등이 부족했던 탓으로 모닥불 속에 던져 넣을 수는 없었다.
  1773년 뉴욕에서는 섣달 그믐날 너무나도 시끄러워서 두 달 뒤에 새해 축하용 폭죽이나 손으로 
만든 꽃불, 공포를 사용하는 것이 법률로 금지될 정도였다.
  이렇게 설날이 왔다갔다 한 데서 파생한 것이 바로 만우절이다.
  16세기 초, 프랑스에서도 새해는 봄이 시작되는 3월 25일이었다.
  그런데 1564년에 그레고리력이 도입되자 샤를 9세는 새해를 1월 1일로 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렇게 바뀌는 것을 싫어하거나 또는 깜빡 잊어버린 채 여전히 파티가 끝나는 날인 4월 
1일에 선물을 교환하거나 파티를 여는 사람들이 많았다. 장난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에게 장난 삼아서 선물을 보내거나, 있지도 않은 파티에 초대하거나 하면서 그들을 
놀려먹었다. 그리고 이처럼 놀려먹는 대상이 된 사람들은 '4월 물고기' 라고 불렀다(4월에는 
태양이 물고기자리의 구역을 떠나버리니까). 사실 그 유명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도 두 번째 
아내 마리아 루이자와 결혼한 것이 1810년 4월 1일이었기 때문에 프랑스에서는 그들을 '4월의 
물고기' 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그 후 몇 년이 지나자 그레고리력에 따른 새해에 완전히 익숙해지고 나서도 프랑스인들은 이 
기묘한 만우절의 습관을 갖고 있었다. 이것이 영국에 전해지게 된 것은 200년 후. 미국에 
전해지는 것은 그보다 더 훗날의 일이었다.

     유령들의 축제

  먼 옛날부터 할로윈은 지금과 똑같이 마녀와 귀신 그리고 유령의 축제로, 사람들은 장작불을 
피우고 악마의 분장을 했다.
  단 지금과 다른 것은 옛날에는 악마의 분장을 하거나 불을 피우거나 장난을 하는 아이들 
놀이가 아니라 어른들의 진지한 축제였다.
  '올 할로즈 이브(모든 영혼들의 전야제)'라고 불리던 이 축제를 처음 시작한 것은 기원전 
5세기, 아일랜드에 살고 있던 켈트족이었다.
  여름이 끝나는 날인 10월 31일 밤, 켈트인들은 난롯불을 끄고 집을 일부러 춥게 만들어 
유령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한 다음 마을 변두리에 모였다. 그곳에서는 드루이드(고대 
켈트의 성직자)가 큰 장작불을 피운 채 여름 곡식을 수확하게 해준 태양신에게 감사 기도와 함께 
유령을 쫓아내는 기도를 드렸다.
  켈트인은 10월 31일은 지난해에 죽은 사람의 혼이 저 세상에 갈 때까지의 열두 달 동안 매달릴 
동물이나 사람을 찾는 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악마나 도깨비, 마녀의 
모습으로 변장하여 자기에게 매달리려고 하는 유령을 무섭게 만들어 쫓아내려고 했다.
  그들은 변장한 모습으로 끊임없이 소란스럽게 소리를 지르면서, 먼저 어둡고 몹시 추운 집 
안팎을 빙글빙글 돈 다음 이윽고 거리에 나가 장작불이 지펴진 마을 변두리까지 걸어갔다. 
그곳에서 행해지는 유령 쫓는 의식에서는 이미 유령에게 붙들렸다고 생각되는 마을 사람을 
두루이드들이 불에 던져 다른 사람들에게 매달리려고 하는 유령에게 본보기를 보였다.
  로마인은 이 켈트족의 할로윈을 받아들였지만, 61년에 산 사람을 제물로 삼는 것이 법률로 
금지되었기 때문에 대신에 이집트인을 모방해 인형을 사용하게 되었다(이집트에서는 왕이 죽으면 
그 가신과 종자들을 모조리 산 채로 왕과 함께 묘에 매장했는데 나중에는 산 사람인 가신, 
종자를 대신한 인형이 묘에 들어가게 되었다).
  시대가 바뀌고 죽은 사람의 영혼이 매달린다는 것을 점차 믿지 않게 되자 할로윈 의식도 점차 
즐거운 행사로 변해 갔다. 1840년대에 흉년이 들어 아일랜드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사람들이 
할로윈의 관습을 미국에 전했다. 그 무렵의 아일랜드 청년들은 '나쁜 짓을 하는 밤' 할로윈에 
악마의 분장을 하고 헛간을 뒤엎거나 문의 열쇠를 부쉈다.
  아일랜드에서 이민 온 사람들은 할로윈과 함께 '도깨비 초롱불'을 만드는 관습도 미국에 
전했다. 도깨비 초롱불도 고대 켈트인의 관습 그대로 만들었는데, 큰 무를 도려내어 악마의 
얼굴을 새기고 그 안에 초를 넣어 불을 켠다. 새 땅에는 큰 무가 거의 눈에 띄지 않았지만, 
대신에 큰 호박이 많이 있었다. 호박 알맹이를 감사절의 대표 요리로 만든 것이 필그림 
파더스라면 호박 껍질을 할로윈의 트레이드마크로 사용한 것은 아일랜드에서 온 이주민들이었다.
  아일랜드의 전설에 의하면 도깨비 초롱불(잭 오 랜턴)의 유래는 이러하다 대단한 술고래이자 
구두쇠인 잭이 어느 날 악마를 속여 나무 위에 올라가게 했다. 그러고 나서 부리나케 나무 
줄기에 십자가를 새겨 악마가 내려오지 못하도록 한 다음 두 번 다시 자기를 부추겨서 죄를 짓지 
못하게 하도록 약속했다.
  그런데 죽고 보니 잭은 많은 죄를 범한 이유로 천국에도 들어가지 못했고, 속아서 화가 나 
있는 사탄 때문에 지옥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이 세상 끝까지 얼어붙은 어둠 속을 헤매게 된 
잭은 가는 길을 비추는 등불의 연료를 조금이나마 나눠 달라고 사탄에게 부탁했다.
  그러자 사탄은 정말로 얼마 안 되는 거리를 갈 만큼의 연료만 나누어주었다. 아무튼 
이것마저도 감지덕지하게 생각한 잭은 속을 파먹은 순무 안에 그 연료를 넣어 랜턴을 만들었다. 
이것이 잭의 랜턴, 잭 오 랜턴(Jack-o'-lantern)이다.
  "맛있는 음식을 안 주면 장난칠 거야."
  할로윈의 밤, 악마의 복장을 한 아이들은 이렇게 말하며 집집이 돌아다니면서 과자를 달라고 
조른다.

     출생증명으로 쓰이던 달걀

  부활절은 기독교의 부활을 경축하는 날로 기독교 신자에게는 성스러운 날이다.
  그러나 근본을 따지고 들어가면 부활절은 고대 색슨인의 여신 이스터(Eastre)의 제전이었다. 
야단스러운 이교의 여신을 위한 제전이 어쩌다가 엄숙한 기독교의 축일이 되었을까? 이것도 또한 
초기 기독교 교회가 이교의 축제를 기독교의 행사로 바꾼 결과라고 할 수 있다.
  2세기 때 로마 제국의 북쪽에 있는 튜턴인(게르만인)이 살고 있는 지방에 포교를 하러 간 
기독교의 전도사들은 그곳에 수많은 제전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전도사들은 이미 정착되어 있는 
관습을 억지로 바꾸려고 하지 않고, 시간을 들여서 그 제전을 원만하게 기독교의 의식으로 
바꾸려는 노력을 했다.
  거기에는 매우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개종한 사람들이 인정받지 못한 종교인 기독교의 
의식에 참가하는 것은 위험이 뒤따른다. 부활절을 기독교만으로 거행하면 당시의 권력자가 
그것을 이용해서 기독교를 뿌리째 뽑아버리려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랫동안 계속해온 이교의 제전을 빌려서 그 속에 뒤섞여서 거행하게 되면 개종자들도 
살아남고 새로운 개종자를 늘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전도사들은 기독교가 부활한 시기와 옛날부터 행해지고 있는 봄의 제전 이스터의 시기가 
우연히 일치한다는 것에 착안했다.
  이렇게 해서 부활절은 여신 이스터의 이름으로 행해져 많은 기독교도의 목숨을 구하게 되었다.
  그 후 몇십 년 동안 부활절은 금요일에 행해지거나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행해지는 등 일정하지 
않았으나 325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소집한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이스터 법'이 정해져 
부활절은 '춘분 이후의 최초의 만월 다음에 찾아오는 일요일'로 정해졌다. 따라서 부활절은 3월 
22일보다 빨라지는 일도 없고 또 4월 25일보다 늦어지는 일도 없다. 또 이 회의에서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십자가를 기독교의 상징으로 정한다고 발표했다.
  초콜릿이나 캔디로 만들어진 달걀을 부활절 선물로 교환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부터지만, 
봄에 여러 가지 색으로 물들인 진짜 달걀을 서로에게 선물하는 관습은 부활절이 시작되기 몇 
세기 전부터 있었다.
  먼 옛날부터 많은 문명권에서 달걀은 새로운 생명과 부활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무덤 속에 달걀을 함께 매장하고, 그리스에서는 무덤 위에 장식했다고 한다. 
로마에는 '모든 생명은 달걀로부터' 라고 하는 속담이 있었다. 또한 기독교가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을 도왔던 크레네 사람 시몬은 달걀 상인이었다고 전해진다(기독교가 처형된 후 시몬이 
양계장에 돌아가 보니까 그곳에 있던 달걀이 전부 빨간색으로 변해 있었다고 한다. 물론 그것이 
거짓인지 참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리하여 기독교가 부활절을 거행하게 되었던 2세기에 부활의 상징으로서 달걀 이상으로 
적절한 것은 없었다.
  당시 부유한 사람들은 달걀에 금가루를 뿌리거나 금박으로 덮어서 부활절 선물로 삼았다. 
서민들은 대개 달걀에 염색을 했다. 염색은 염료가 되는 꽃이나 잎을 넣은 냄비에 달걀을 함께 
넣고 삶으면 된다. 초록색이나 시금치 잎이나 아네모네의 꽃잎, 노란색에는 민들레꽃이 가장 
적합하고, 보라색에는 로그우드가, 빨간색에는 봉숭아가 쓰였다.
  1880년대 초 독일에서는 부활절 달걀이 출생증명으로 쓰이던 지역도 있었다고 한다. 바늘같이 
끝이 날카로운 것으로 껍질에 받는 사람의 이름이나 탄생일을 새긴 부활절 달걀은 법정에서도 
출생일과 나이를 증명하는 증거로서 쓰였다.
  가장 값비싼 부활절 달걀은 1880년대 러시아의 금 세공사 표트르 파베르제가 만든 것인데,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3세가 황후 마리아 페오도로브나에게 선물하기 위해 주문한 것이다.
  1886년 파베르제가 최초로 만든 부활절 달걀은 길이 6센티미터로 겉모양은 아무런 특징이 
없지만, 에나멜을 칠한 흰 껍질을 열면 안에는 황금 노른자위-눈을 루비로 만든 황금 병아리-가 
들어 있고, 그 병아리가 부리를 위로 쳐들면 안에서 루비 장식이 달린 다이아몬드 왕관이 
나타나도록 만들었다.
  파베르제의 작품은 오늘날 모두 합쳐서 400만 달러 이상의 값어치가 있다고 알려져 
있으며, 그가 만든 53개의 부활절 달걀 가운데 43개는 박물관이나 개인이 현재 소장하고 있다.

     3. 끔찍하고 잔인했던 어린이들 이야기

     동화의 테마는 본래 끔찍하고 잔인하다

  오늘날 강간이나 유아 학대나 유기는 신문이나 영화의 소재이지만, 우리들이 가장 많이 읽은 
동화들 대부분의 중요한 테마이기도 했다. 본래 동화의 테마는 그런 것이었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 원판에서 공주가 키스를 받고 눈을 뜨지만 아름답고 행복한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여기서부터 진짜 시련이 시작되고 있다. 공주는 강간을 당하고 유기 되며 공주가 
낳은 사생아들은 끔찍하게도 인육이 되어 희생당할 상황까지 간다. 또 "빨간모자"에서는 늑대가 
할머니를 통째로 집어삼키고 나서는 소화를 할 틈도 없이 빨간모자에게 덤벼들어서 손발을 
갈기갈기 찢어버린다.
  당시 삽화가들은 잔일한 살인 장면이 두 번씩 나오면 아이들이 도저히 견뎌내지 못할 
것이라면서 이 이야기에 삽화 그리는 일을 거절했다. 그리하여 한 삽화가가 좀더 밝은 이야기로 
바꾸어야겠다고 생각하여, 사냥꾼을 등장시켜 마지막에 늑대를 죽이고 어떻게 해서 빨간모자만은 
살려낸다.
  20세기 많은 비평가들은 어린이들에게 읽어서 들려주고 어린이들의 입에서 되풀이되는 수많은 
동화나 동요의 테마는 부도덕의 전형이라고 주장한다. 광기나 술에 곤드레만드레 취하는 것, 
사람이나 동물의 손발을 자르는 것, 절도, 허풍, 그리고 노골적인 인종 차별, 이것들에 얇은 
베일을 씌운 것이 그 테마라고 한다. 이야기의 구성 요소에 앞에서 말한 것들 모두 또는 그 
이상이 포함된다. 특히 원판이 그렇다.
  어째서 불후의 명작을 쓴 작가들은 이렇게 부도덕하고 잔혹하기 짝이 없는 테마를 받아들인 
것일까?
  그 이유 중 하나는 엘리자베스 왕조 시대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어린이는 신체가 작은 
어른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좁은 집에서 많은 가족들이 함께 빽빽이 들어차 살았기 때문에 아이들은 어른과 함께 밤 
늦게까지 깨어 있었다. 그러면서 음탕한 말을 듣고 배워 입에 담았다. 어른들의 성행위도 
아이들에게 노출되어 있었다. 술주정뱅이를 눈으로 보며 일찍부터 술을 마시는 것도 배웠다. 
거리의 광장에서 행해지는 공개 채찍형이나 교수형, 내장 빼내기, 효수대에는 많은 구경꾼이 
모여들고, 폭력이나 잔학 행위나 죽음은 어린이들에게 별로 신기한 것이 아니었다. 생활은 
냉엄하고 힘들었다.
  동화는 행복으로 가득 찬 꿈 같은 이야기에 이 냉엄한 현실을 혼합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내용의 이야기를 어린이들에게 들려준다는 것이 당시에는 아주 당연한 일이어서 특별히 나쁘게 
여기지는 않았던 것 같다.
  현재 가장 많이 읽히고 있는 동화 몇 가지를 불후의 명작으로 남게 만든 것은 다른 어떤 
작가보다 특히 샤를르 페로의 공적이다.
  물론 그 동화들을 그가 모두 창작했던 것은 아니다.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많은  동화가 
구전되어 오다가 그 가운데 몇 가지는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 "신데렐라" 
"빨간모자" 세 편이 페로의 동화집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이다.
  17세기의 프랑스인인 페로는 학교에서는 반항적인 낙제생이었고 몇 개의 직업에 실패한 뒤, 
루이 14세의 궁정에서 낭독이 유일했을 때 동화에 눈을 돌린 사람이다.
  페로는 1628년 유명한 작가이자 고등법원 직원이기도 한 아버지 밑에서 다섯째 아들이자 
막내로 태어났다. 파리에서 태어난 샤를르 페로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에게 읽는 법을 배웠다.
  날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난 뒤에는 그날 배운 내용 전부를 아버지에게 라틴어로 들려줘야만 
했다. 10대 무렵의 페로는 학교 교육에 반항해서 독학을 했다. 그는 기분이 내키는 대로 이것 
저것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공부했다. 그 결과 넓고 얕은 교양은 몸에 익혔으나 무슨 일을 하건 
그것만으로는 만족을 느끼지 못했다. 1651년에 변호사 자격을 따려고 마음먹은 그는 시험관을 
매수해서 면허증을 돈으로 샀다.
  하지만 변호 사업에도 금세 싫증을 느낀 페로는 결혼해서 네 명의 자녀를 낳고 자식 수와 같은 
숫자만큼 여러 공직을 전전했다. 공직에도 만족할 수 없었던 그는 자신이 아이들에게 들려준 
옛날 이야기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샤를르 페로는 드디어 천직을 찾아낸 것이다.
  1697년 그는 역사에 남을 동화집을 파리에서 출판했다. "지나간 옛날의 이야기"라는 제목이 
붙고, 여덟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여덟 편의 이야기는 모두 훌륭했으며 그 가운데 일곱 
편이 전 세계에 알려져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이 여덟 편은 "잠자는 숲속의 미녀" "빨간모자" "푸른 수염" "장화를 신은 고양이" 
"다이아몬드와 두꺼비" "신데렐라" "난쟁이"이다. 그리고 여덟 편 가운데 가장 알려져 있지 않은 
이야기가, 못생긴 왕자와 아름답지만 어리석은 공주의 사랑을 그린 "곱슬머리 리케"이다.
  페로는 단순히 구전이나 기록으로 남아 널리 알려져 있던 이야기를 그대로 문자로 옮긴 것은 
아니다. 현대의 비평가들이 약간은 시기하는 마음으로 "페로는 이 세상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여자 가정 교사, 그리고 친구와 친척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채집한 
것뿐이다."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러한 이야기의 매력이 소박한 점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페로의 재능이었다. 그는 이미 있어온 민담을 마법으로 염색하여 의도적으로 순진한 내용으로 
만들고, 마치 어린이의 방에서 들은 이야기를 어린이가 친구에게 이야기하는 듯한 가락으로 
완성한 것이다.
  페로나 그 밖의 작가들이 채집한 동화의 본래 이야기를 모르는 현대 독자들이 충격을 
받으리라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지만, 이 기회에 우리들이 어릴 때부터 들어왔고 또 우리 
자녀들에게 계속 이야기해 나갈 동화의 원판과 초기의 개작을 여기에 소개해 둔다.

      강간당한 잠자는 숲속의 미녀

  "잠자는 숲속의 미녀"는 샤를르 페로가 1697년에 낸 동화집의 첫번째에 나오는 이야기로서, 
오늘날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과 내용은 같지만 원판을 완전히 그대로 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페로는 아름다운 공주에게 주어지는 정말 끔찍한 시련의 많은 부분을 생략하고 있다. 이 
이야기의 출처는 1636년 이탈리아의 장바티스타 바질레가 쓴 "5일 이야기"(펜타메로네)이다.
  이 나폴리판 "잠자는 숲속의 미녀"에서는 갓태어난 타리아 공주가 아마 가시의 독으로 목숨을 
잃는다는 예언을 임금이 현자에게 듣는다. 임금의 명령으로 성에 있던 아마는 모두 없앴으나 
소녀로 자란 공주는 우연히 아마를 잣는 물레를 찾아내고, 그로 인해 손끝에 아마 가시가 박혀서 
그 자리에서 죽어버린다. 
  슬픔에 잠긴 임금은 타리아 공주의 시신을 벨벳 깔개 위에 누이고, 성문을 닫아건 채 영원히 
숲을 뒤로한다. 여기서부터 현대판과 원판이 갈라지는 것이다. 
  숲속에서 사냥을 하고 있던 한 귀족이 황폐한 성과 정신을 잃은 공주를 발견한다. 그 귀족이 
공주를 강간하고 떠나간 지 9개월 만에 타리아 공주는 잠이 든 채 남녀 쌍둥이를 출산한다. 
태양과 달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아이들은 요정이 기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사내아이가 
타리아 공주의 손가락을 빨자 독가시가 떨어지면서 공주는 다시 살아난다.
  다시 몇 달이 지난 뒤 잠자는 아름다운 공주의 육체를 탐했던 일을 생각해낸 귀족은 다시 성을 
찾아왔으나 이번에는 잠들어 있지 않은 공주를 발견한다.
  귀족은 아이들의 아버지가 자기라는 것을 털어놓고 일주일 동안 실컷 즐긴 뒤 또다시 공주를 
버리고 아내에게 돌아가 버린다. 물론 아내에게 이야기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는다.
  원판은 여기서부터 지나치다고나 할까, 어쨌든 더욱 그로테스크하게 진전된다.
  남편에게 숨겨 놓은 자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귀족의 아내는 쌍둥이 아이들을 붙잡아 와서 
요리사에게 건네주며 목을 따고, 살은 맛있는 소스에 섞어서 삶으라고 명령한다. 
  남편이 음식을 절반쯤 먹었을 때 아내는 신바람이 나서 가르쳐준다.
  "당신은 지금 자기 자식을 먹고 있다구요!"
  한동안 귀족은 그 사실을 믿고 있었지만, 마음씨 고운 요리사가 쌍둥이 아이들을 살려주고 
염소 고기를 대신 썼다는 것을 알게 된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아내는 타리아 공주를 잡아다가 불에 태워 죽이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공주는 위기의 순간, 아이들의 아버지인 귀족에게 구원된다.
  한편 페로의 동화집 가운데 가장 짧고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이야기가 바로 "빨간모자"이다.
  고증가들에 의하면 페로 이전에는 이런 종류의 이야기가 없었다고 한다. 페로의 이야기에서는 
할머니도, 빨간모자도 늑대에게 잡아먹혀 버린다. 늑대는 할머니를 잡아먹은 다음 빨간모자와 
이야기를 나눈다. 민속학자들이 말하는, 모든 어린이의 읽을거리 가운데 가장 멋지고 가장 유명한 
문답 장면이다.
  찰스 디킨스는, 빨간모자가 자신의 첫사랑이며 어린 마음에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 안타깝게 
그리워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중에 그는 '할머니를 잡아먹고도 배가 부르지 않은지 
소름끼치는 농담을 하고 난 뒤 갑자기 나의 연인(빨간모자)을 잡아먹어 버리는 거짓말쟁이 
늑대의 냉혹함과 배신'에 심한 충격을 받았다고 쓰고 있다. 
  사실 많은 작가들이 페로의 음침한 결말에 반대하고 각자 자기 나름대로 결말을 생각했다.
  잘 알려져 있는 1840년의 영국판에서는 늑대에게 잡아먹히게 된 빨간모자가 커다랗게 소리를 
지른다. 그러자 '아버지와 몇 명의 나무꾼이 달려와서 늑대를 보고 당장 그 자리에서 때려죽여 
버렸다.'
  그 무렵, 프랑스의 어린이들은 또 다른 결말을 가져오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늑대가 바로 빨간모자에게 덤벼들려고 했을 때, 커다란 말벌이 창문으로 날아들어와서 늑대의 
콧등을 따끔하게 찌른다. 고통으로 신음하는 소리를 들은 지나가던 사냥꾼이 활을 쏘아서 
'늑대의 귀를 꿰뚫고 순식간에 죽여버렸다'고.
  아마도 이 이야기들 가운데에서 가장 피비린내가 나는 것은 19세기 말의 영국판일 것이다. 
늑대는 할머니의 피를 병에 담아서, 아무 것도 모르는 빨간모자에게 마시게 하려고 한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개작판이든 빨간모자는 구해내지만 할머니를 
구해내려고는 하지 않는다.
  페로보다 120년 늦게 그림 형제가 또다시 새로운 개작판을 낸다. 이것이 할머니도 구해내는 
유일한 작품이다. 할머니와 빨간모자를 잡아먹고 완전히 나른해진 늑대는 잠이 들고 만다. 늑대의 
천둥처럼 코고는 소리를 들은 사냥꾼이 방안으로 들어오자 사태는 바뀐다. 사냥꾼은 즉시 가위로 
늑대의 배를 가른다. 뛰어나온 빨간모자가 말한다.
  "늑대의 뱃속은 왜 그렇게 어두운지 몰라!"
  그 다음에 지쳐서 비틀거리며 말도 하지 못하는 할머니가 나온다. 그리고 늑대는 쫓겨난다.
  민속학자들은 페로가 능숙한 문체로 "빨간모자"를 문자로 기록하여 불후의 명작으로 남기기 전, 
아마도 중세기부터 이 이야기는 구전 민화로 존재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진짜 신데렐라는?

  신데렐라 이야기는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동화일 것이다. 심술 사나운 계모와 유리 
구두.  너무 유명한 이 신데렐라 이야기는 사실은 세계 각국에서 옛날부터 이야기로 내려온 
것이다.
  최소한 1000년 전부터 구전되거나 문자로 기록된 형태로 수 없이 많이 있었던 것 같은 
대부분의 신데렐라 이야기에는 이상한 구두를 쓸데없이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욕심 낸 여자들이 
발을 자르는 잔인한 장면이 들어 있다.
  현대 어린이들이 알고 있듯이, 부엌데기인 불쌍한 여자 아이가 어머니를 대신한 요정의 자비로 
무도회에 참석할 수 있게 된다는 스토리는 완전히 샤를르 페로의 것이다. 만일 페로의 뛰어난 
개작이 없었더라면 유럽 어린이들은 널리 알려져 있는 스코틀랜드판의 가난하고 아름다운 소녀 
라신 코티의 불쌍하고 괴로움으로 가득 찬 이야기밖에 알지 못했을 것이다.
  스코틀랜드판에 따르면 계모가 데리고 들어온 못생긴 세 언니들이 소녀에게 강제로 
골풀(rush;소녀 이름의 유래)옷을 입힌다. 라신 코티에게는 어머니를 대신한 요정은 없지만 
소원을 들어주는 마술 송아지가 있다. 그러나 간악한 계모가 심술 사납게도 잡아먹고 만다.
  비탄에 잠긴 소녀는 무도회에 가고 싶어서 소의 뼈에 대고 새로운 드레스가 필요하다고 소원을 
빈다. 눈부신 드레스를 입은 소녀는 왕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오려고 
하다가 아름다운 새틴 구두 한 짝을 잃어버린다.
  왕자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한쪽 구두가 발에 맞는 여성과 결혼하겠다고 하자 계모는 첫째딸의 
발끝을 잘라내고 그래도 발이 너무 컸기 때문에 뒤꿈치도 잘라낸다. 왕자는 이 추한 (발을 
남몰래 줄인) 처녀를 받아들이지만 곧 작은 새가 '구두 속의 발은 그 구두의 임자가 아니다. 
왕자가 찾는 아름다운 처녀는 라신 코티'라고 말해준다. 왕자는 라신 코티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다.'
  이 이야기의 유럽판들을 보면 대부분 가장 못생긴 처녀의 발을 새틴이나 천, 가죽, 모피 신발에 
맞게 하려고 잘라낸다. 그리고 언제나 여러 종류의 작은 새가 왕자에게 속임수를 일깨워준다. 
페로가 어렸을 때 들은 프랑스의 이야기에서도 신발은 아무래도 유리(프랑스어로 verre)가 아니라 
얼룩 무늬가 들어간 모피(vair)였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유리 구두라면 늘어나는 일도 
없고 투명해서 안이 보일 것이라는 장점을 깨달은 것은 페로의 비범한 재능이었다. 유리의 
특성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가 붙인 제목 "신데렐라 또는 작은 유리 구두"를 보면 
분명하다.
  유럽에서 오래 된 신데렐라류의 이야기는 장바티스타 바질레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의 "5일 이야기"에 "부엌데기"라는 제목으로 들어 있다. 나폴리 출신의 시인, 군인, 신하, 
행정관으로 널리 여행을 한 바질레는 50편의 이야기를 썼다. 50편 모두 나폴리의 여성이 그에게 
들려준 이야기들이라고 한다. 세조라는 이름을 가진 그의 신데렐라는 요즘 말하는 아동 학대의 
희생자였다.
  바질레의 이야기는 불행한 소녀 세조라가 심술 사나운 계모를 죽이려고 획책하는 곳에서 
시작한다. 이윽고 세조라는 계모의 목을 부러뜨리는 데 성공하지만, 불운하게도 아버지가 한층 더 
심술 사나운 여자와 결혼한다. 새 계모가 데리고 들어온 여섯 명의 악질적인 딸들은 세조라에게 
부엌일을 떠맡기고, 하루 종일 쉴 새 없이 부려먹는다.
  세조라는 화려하게 펼쳐지는 축제에 가보고 싶어서, 마법의 대추나무에 소원을 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변신한 세조라는 화려한 의상으로 몸을 감싸고 백마에 올라탄 채 두 명의 
하인까지 거느리고 간다. 임금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매혹 당하고 만다. 그러나 한밤중 임금의 
손에 남겨진 것은 한 짝의 신발뿐. 온 나라를 찾아다녀도 그 신발이 발에 맞는 처녀는 없다. 물론 
세조라를 빼놓고.
  이 초기의 이탈리아판은 샤를르 페로의 것과 놀랄 만큼 비슷한데, 고증가들은 바질레가 내놓은 
이야기집을 페로가 알고 있었을 리가 없고 아마 페로는 프랑스의 구전 민화에서 알았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최초의 신데렐라 이야기를 입에 담았던 것일까?
  이런 종류의 이야기로 가장 오래 된 것이 서기 850년에서 860년 사이에 쓰여진 중국 책에 
들어있다.
  동양의 이 이야기에서는 엽한이라는 소녀가 심술 사나운 계모에게 학대를 당한다. 계모는 
엽한에게 누더기옷을 입히고 일부러 깊고 위험한 샘으로 물을 길으러 가게 한다.
  중국의 신데렐라는 집 옆의 연못에 3미터나 되는 마법의 물고기를 키우고 있었다. 그러나 
누더기를 걸치고 소녀로 변장한 계모가 물고기를 속여서 붙잡아 죽여버린다.
  엽한은 축제에 입고 갈 옷이 갖고 싶어서 물고기의 뼈에 소원을 빌자, 순식간에 멋진 깃털과 
황금으로 장식된 드레스에 몸이 휘감긴다.
  중국의 축제에는 왕자도 임금도 나오지 않지만 서둘러 돌아오던 중국의 신데렐라는 금구두 한 
짝을 잃어버린다. 그 구두는 '깃털만큼 가벼워서 설사 돌 위에서 깡충깡충 뛰어도 아주 조그만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이윽고 구두 한 짝은 그 지방에서 제일 돈이 많은 상인 손에 들어간다. 부자 상인은 팔방으로 
구두 임자를 수소문하여 찾은 끝에 구두가 딱 들어맞고 '천녀'처럼 아름답게 변신하는 
신데렐라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결혼하고, 계모와 못생긴 딸은 무너져내리는 무거운 
돌 밑에 깔리고 만다.
  9세기 중국의 이 이야기는 역사상 가장 오래 된 민화 수집가의 한 사람인 탄 첸 시가 채록한 
것으로 그의 집에 오랫동안 살았던 하인에게 맨 어음 이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출처에 대해 
그 이상의 것은 아무 것도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중국판에는 유럽판과 분명히 비슷한 점이 
많이 있다.
   현재는 700가지나 되는 각기 다른 신데렐라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뛰어난 사기꾼, 장화 신은 고양이

  1697년 샤를르 페로가 쓴 "장화를 신은 고양이"는 사람을 도와주는 동물이 나오는 모든 민화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고양이는 초기에 나온 이야기에서나 훨씬 나중에 나온 이야기에서나 언제나 뛰어난 
사기꾼의 전형이다. 두뇌 회전이 빠른 이 고양이는 가난한 주인에게 부를 가져다주려고 훌륭한 
장화로 멋을 내고 거짓말을 하고 속이고 협박하고 훔친다. 이야기의 끝에는 의도가 환히 
들여다보이는 책략이 모두 보기 좋게 성공한다. 이야기는 고양이가 화려한 옷으로 몸을 장식하고 
고귀한 사람들의 동료가 되는 것에서 끝나버린다. 이 이야기는 나쁜 짓은 수지가 맞는다고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출처도 바질레의 "5일 이야기"이다. 나폴리의 거지가 아들에게 고양이 한 마리를 
남기고 죽는다. 참으로 한심스러운 유산에 불평만 하는 아들에게 고양이가 약속한다. 
  "네가 마음만 먹으면 당신을 부자로 만들 수 있습니다."
  프랑스 페로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고양이도 거짓말과 음모로 부를 손에 넣는다. 
임금에게까지 사기를 쳐서 공주를 제 주인과 결혼시키고 만다. 임금에게 그럴 듯한 말을 해서 제 
주인이 광대한 영지를 살 수 있는 지참금까지 내놓게 만든다. 페로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만 
바질레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주인은 고양이에게 "네가 죽으면 상으로 너의 몸을 호화스러운 황금관 속에 영원히 
보존하겠다."고 약속한다.
  고양이는 시험 삼아서 죽은 시늉을 했다. 그러자 주인은 고양이의 옷이 괴상하다느니, 못된 
녀석이라느니 하면서 웃음거리로 만들고 고양이를 모욕한다. 그뿐만 아니라 이제 본심을 드러낸 
주인은 고양이의 손발을 움켜쥐고 창문으로 내던져 버린다. 화가 난 이탈리아 고양이는 얼른 
뛰어 일어나 씩씩거리며 집을 나가서 두 번 다시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다.
  페로의 결말에서는 고양이가 훨씬 행복해진 채 끝난다. '훌륭한 신사가 되어 두 번 다시 쥐를 
쫓는 일도 없어졌다. 기분 전환을 위한 것 외에는.'
  이탈리아 이야기와 페로의 이야기는 많은 점에서 비슷하다. 이탈리아판의 고양이가 장화를 
신고 있지 않고, 주인이 공주의 지참금으로 영지를 구입하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래도 
민속학자들은 페로가 바질레의 민화집을 읽었을 리가 없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더욱 오래 된 이탈리아판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페로와 바질레 양쪽에 
영향을 주었는지 어쨌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1553년에 이탈리아의 옛날이야기 작가 장프란체스카 스트라팔로라가 "즐거운 밤"이라는 책을 
냈다. 그 속에 주목할 만한 고양이 이야기가 들어 있었다.
  이 이야기는 이 책에 있는 다른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열 명의 젊은 처녀들이 입으로' 
이야기한 것을 기록한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페로의 이야기하고는 아주 조그만 차이가 
있을 뿐 많이 비슷하다. 더구나 스트라팔로라의 작품은 바질레의 작품과는 달리 페로가 
살아 있는 동안에 프랑스에서도 출판되었다.
  몇 세기에 걸쳐 많은 나라에서 이 이야기가 어린이들의 책에 나타나는데, 교활한 고양이가 
부자들의 물건을 훔쳐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로빈 후드 타입의 의협 고양이가 되어 
있는 등 내용이 많이 부드러워져 있다.
  페로의 위업을 현대로 이어주는 많은 아동 문학 작가들 가운데 라이먼 프랭크 보옴은 "오즈의 
마법사"로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어린이들에게 새로운 동화의 재미를 톡톡히 안겨주었다.
  1856년 뉴욕 주에서 태어난 라이먼 프랭크 보옴은 저널리스트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으나, 아동 
문학 작가로 전향하고 1919년 할리우드에서 죽기까지 60권이 넘는 어린이책을 썼다.
  첫번째 작품은 1899년에 출판한 "파더 구스"로서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계속해서 이듬해에 
출판하자마자 바로 명작의 대열에 오르게 된 소설 "오즈의 마법사"를 썼다.
  "오즈의 마법사"의 구상은 1899년 어느 날 밤, 자기 아이들과 이웃집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려고 
즉흥적으로 생각해낸 이야기로 인해 시작되었다.
  그는 도로시라는 이름의 소녀를 만든 다음 캔자스의 집에서 입으로 불어 날려서 이상한 마법의 
나라에 떨어뜨린다. 그곳에서 도로시는 허수아비나 나무꾼, 겁쟁이 사자와 만난다.
  그때 갑자기 이웃집에 사는 소녀 튜티 로빈스가 보옴의 이야기를 가로막고 "마법의 나라 
이름은 뭐죠?"하고 물었다.
  재능이 풍부한 동화 작가도 순간적으로 얼른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몇 년 뒤 보옴은 신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이름, 오즈의 유래를 
밝혔다.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해주던 그날 밤, 보옴의 옆에는 3단 짜리 필름 캐비닛이 놓여 있었다. 
첫번째 서랍의 표찰은 A-G, 두 번째가 H-N, 그리고 세 번째가 O-Z. 오즈라는 이름은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고 그는 말했다.
  보옴은 이 이야기를 자주 했지만 나중에 그의 연구가들은 이것도 그가 만들어낸 이야기의 
하나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1899년 그가 최초로 이 책의 원고를 출판사에 
건네주었을 때의 제목은 "에메랄드의 도시"로, 그것이 마법의 나라 이름이었다. 출판이 진행되고 
있을 때 보옴은 제목을 "캔자스에서 동화의 나라로" 그리고 "위대한 오즈의 도시"로 변경했다. 
그러나 이때까지고 오즈는 단지 마법사의 이름이었지 왕국의 이름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책 제목을 작가도 출판사도 마음에 든 "오즈의 마법사"로 낙착을 보았다. 
그제서야 비로소 나라의 이름을 오즈로 바꾼다는 데 착안한 보옴은 서둘어 원고에 에메랄드의 
도시는 '오즈의 나라에' 있다고 써넣었다.
  보옴은 또 다른 13권의 오즈 책을 썼고, 이 인기 시리즈는 보옴이 죽은 뒤에 다시 한 권이 더 
나왔다. 오즈라는 이름을 창작한 것은 물론 보옴이지만 그의 연구가들은 그 이름의 출처에 대해 
세 가지의 타당한 설을 들고 있다.
  (1)성서에 나오는 욥의 고향 우즈를 바꿨다.
  (2)그의 이야기를 듣고 아이들이 지른 '오(Ohs)'라든가 '아(Ahs)'라는 소리에 기분이 좋아서, 
첫번째 감탄사의 스펠링을 바꿔서 오즈(Oz)로 했다.
  (3)영국의 작가인 찰스 디킨스의 열렬한 팬이었기 때문에 그의 팬네임인 'Boz'를 약간 
변형했다.

     히틀러 때문에 외면 당한 '헨젤과 그레텔'

  자신들을 잡아먹으려고 하는 마녀에게 두 어린이가 기지를 발휘해 골탕을 먹인다는 이 
이야기는 야콥 그림과 빌헬름 그림 형제가 쓴 동화다.
  그림 형제는 1807년경 독일의 카셀 근처에서 마을 사람이나 농사꾼들에게 들은 민화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모두 156편의 이야기를 수집했는데, 대부분 "신데렐라"나 "장화를 
신은 고양이" 등과 같이 샤를르 페로가 쓴 이야기들과 종류가 같은 것들이다.
  "헨젤과 그레텔"은 도르트헨이라는 처녀가 그림 형제에게 들려준 이야기로 그 처녀는 나중에 
빌헬름의 아내가 된다.
  이 옛날이야기가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독일의 작곡가 엥겔베르트 핸퍼딩크가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해서 오페라를 작곡하고 1893년 뮌헨에서 최초로 상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페라는 
모든 후속 개작판이 그런 것처럼 이 전래 민화의 가장 충격적인 장면, 다시 말해 짐승에게 
잡아먹히게 하려고 부모가 일부러 자식들을 숲속에 버리는 장면을 생략하고 있다.
  "헨젤과 그레텔"은 독일의 구전 민화만을 통해 알려진 것은 아니고, 17세기에 벌써 프랑스에서 
널리 알려져 있었다. 프랑스 이야기에서는 집이 아무렇게나 지은 싸구려가 아니라 금과 보석으로 
꾸며져 있다. 또 집에 소녀를 가두는 것은 덩치가 큰 남자로 나중에 소녀가 그 거한을 그가 
피우고 있는 불 속으로 던져 넣는다.
  물론 이 이야기를 후세에 남을 불후의 명작으로 만든 것은 그림 형제이다.
  독일에서는 히틀러의 잔학 행위가 있은 뒤부터 이 이야기가 환영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뒤 뮌헨에서 대규모 아동 도서 전시회가 열렸을 때, 많은 사람들이 
"헨젤과 그레텔"은 적을 불태우는 짓을 칭찬하고 있다면서 항의했다.
  한편 야콥 그림과 빌렐름 그림 형제가 구전 민화를 수집하기 위해 독일의 카셀에 머물고 
있었던 것 때문에 두 개의 결혼식이 이루어졌다. 빌헬름이 자신에게 "헨젤과 그레텔" 이야기를 
해준 여성과 결혼하고, 빌헬름이 누이동생인 로테가 그림 형제에게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 
이야기를 해준 하센부르크 집안으로 시집을 간 것이다. 
  미의 개화와 쇠퇴, 그리고 여성의 경쟁 의식이라는 요소를 교묘하게 도입해서 불후의 동화를 
쓴 것은 그림 형제가 처음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동화를 처음 쓴 사람은 그림 형제가 아니다.
  "5일 이야기" 속에는 일곱 살 된 아름다운 소녀의 이야기가 들어 있다.
  소녀의 이름은 리자이며, 빗을 머리카락에 집어넣는 순간 의식을 잃고 만다. 유리관에 안치된 
소녀는(백설공주도 같다.)성장을 계속하여(이것도 백설공주와 같다. 그리고 백설공주도 버려졌을 
때는 일곱 살이었다)하루하루 아름다움을 더해 간다.
  그런데 친척 여자가 리자의 아름다움을 시기하여 죽여야겠다고 마음먹는다(질투심 많은 여왕이 
백설공주를 어떻게 해서든지 죽이려고 하는 것과 같다). 그 여자가 관을 열고 리자의 머리칼을 
잡아 끌어낼 때 빗이 떨어져나가고 아름다운 리자가 다시 살아난다.
  바질레의 이 이야기가 문자로 쓰여진 가장 오래된 백설공주 타입의 옛날 이야기일 것이다. 
200년 뒤 "눈꽃"(snow drop;그림 형제가 붙인 백설공주 'snow white'의 이름)을 쓴 형제가 
이탈리아의 민화를 알고 있었는지 어떤지는 알 수가 없다.
  1938년 월트 디즈니가 최초의 장편 만화 영화로 스크린에 등장시킨 "백설공주"는 그림 
형제판이다.
  그림의 이야기를 초기에 번역한 사람들 대부분이 잔혹한 부분을 생략하고 있다. 여왕이 
백설공주를 살해하고 그 증거로 공주의 심장을 성으로 가져오라고 명령하는 대목이다.
  디즈니는 이 부분은 본래대로 다시 살리고 그로테스크한 장면을 일부 생략하기로 했다. 생략된 
곳은 그림판에서 사냥꾼이 가지고 돌아온 심장을 백설공주의 것(실제는 사슴의 심장)이라고 믿은 
여왕이 소금에 절여서 먹어치우는 대목이다.
  그림의 이야기는 여왕의 패배로 끝난다. 불로 새빨갛게 달군 쇠구두가 신겨지고, 고통으로 
반미치광이 상태가 된 여왕은 죽을 때까지 춤을 계속 춘다.


     드라큘라의 모델은?

  19세기의 아일랜드 작가 브람 스토커가 뜻하지 않게 자신의 소설 "드라큘라"의 소재를 찾아낸 
것은 대영박물관에서 연구를 하고 있을 때였다. 그곳에서 스토커는 동유럽의 전승 민화 원고를 
발견했다. 15세기 왈라키아 공국의 전투적인 군주 부라도 공에 대해 쓴 민화였다. 
  루마니아의 전설에 따르면 이 가학적인 군주는 사람을 꼬챙이에 끼워서 문 밖에 늘어 세워 
놓고 신음소리를 들으면서 밥을 먹고, 식사의 한 코스에 희생자의 피를 흘려넣었다고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초자연적인 힘이 몸에 생긴다고 믿었다.
  부라도의 범죄는 엄청난 것이었다. 새빨갛게 구운 쇠꼬챙이에 적이 된 친구나 자기에게 부정을 
저지른 여자들을 끼워 놓고 살가죽을 벗겨냈다. 또 자기 자신을 감금하고 쥐나 새들을 잔인하게 
괴롭히며 즐겼다.
  산 위에 있는 부라도의 별장은 드라큘라 성이라고 불렸다. 스토커의 소설 제목은 여기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스토커는 드라큘러의 모델을 발견하기는 했지만 소설의 무대에 대한 힌트는 친구인 부다페스트 
대학의 교수에게서 얻었다. 그가 스토커에게 트란실바니아의 흡혈귀 이야기를 들려준 것이다.
  스토커는 트란실바니아로 찾아가서 어둡고 무거운 공기가 잠겨 있는 산들, 새벽녘의 안개, 
을씨년스러운 모습을 한 성에 금세 매료되고 말았다.
  "드라큘라"는 1897년 다갈색 표지로 출판되어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이 소설 덕분에 괴기 
공포 소설의 인기가 부활하여, 오늘날의 책이나 영화에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그런데 괴기 소설의 대표격인 "드라큘라"보다 먼저 세상에 나온 소설이 있었다. 
  메어리 셸리가 쓴 괴기 소설 "프랑켄슈타인 또는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는 1816년 6월 스위스의 
제네바 근교에서 며칠 밤에 걸쳐 열린 '이야기를 만드는 모임'에서 생겨났다.
  19세기의 메어리의 남편인 24세의 퍼시 비슈 셸리, 18세의 시누이 클레어 클레어몬트(애인인 
바이런 경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데리고 있었다), 28세의 바이런 그리고 그의 주치의인 
23세의 존 폴리드리였다.
  비가 계속 내리던 일요일에 바이런이 유령 이야기를 창작해서 즐기자고 제안했다.
  어느 날 밤 메어리는 난로 옆에서 셸리와 바이런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영감이 
번뜩인 것은 그때였다. 그들은 사람의 생명의 근원은 무엇인가, 생명을 인공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가능한가 불가능한가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뜨겁게 의견을 주고받고 있었다. 당시의 과학 
연구의 중심이 전류였기 때문에 이 두 시인은 그들이 말하는 '생명의 열기'를 불어넣는 것으로 
전기를 통해 시체를 되살려낼 수 있는지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밤 늦게야 두 사람의 토론은 끝났고 메어리 셸리는 방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공상에 
잠겨서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1831년판의 "프랑켄슈타인" 속에서 메어리 셸리는 그때 
번뜩였던 영감을 선명하게 상기하고 있다.
  "나는 보았다. 신경이 예민하게 모아졌고 감은 눈 속으로 그 광경이 뚜렷이 떠올랐다. 사악한 
작업에 전념하는 창백한 얼굴의 연구자가 자신이 만들어낸 것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광경이... 소름이 오싹 끼치는 남자의 시체가 길게 누워 있고, 강력한 기계 장치의 힘으로 
무엇인가 천천히 생명의 조짐을 보이고, 그 생명체가 조금씩 움직이는 것을, 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섬광처럼, 그리고 선명하게 그 아이디어는 나의 뇌리에 번뜩였다... 이튿날 아침, 
나는 멋진 이야기를 생각해 냈다고 모두에게 알렸다. 그날 우선 '11월의 어느 음울한 밤의 
일이었다'고 쓰기 시작했고, 그 다음은 비몽사몽간 꿈에서 본 을씨년스러운 공포 이야기를 계속 
써나갔을 뿐이다."

     무섭기만 했던 어린이 책

  17세기 중엽까지는 특별히 어린이를 대상으로 쓴 책은 사실 존재하지 않았다.
  글자를 읽을 줄 아는 어린이는 가난한 집 아이든 부잣집 아이든 똑같이 어른들 책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 가운데에서 가장 인기 있는 책이 "이솝 이야기"였다. 기원전 6세기에 
그리스인이 쓴 작품으로,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몇 세기를 지난 다음에 1484년 처음으로 영어로 
번역되었다.
  동물을 의인화한 이 책이 그때까지 정말로 유일하게 어린이에게 알맞는 어른들 책이었는데 
1578년에 독일의 작가이자 출판업자인 지그문트 페이에라벤트가 "어린이를 위한 그림과 
이야기책"을 출판했다.
  이 획기적인 그림책은 당시 유럽의 생활과 우화, 그리고 독일 민화를 그린 목판화를 모아 
그림이 주가 되게 하고 그림의 설명문을 길게 쓴 문장을 붙인 형식으로 만들어져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지금도 매년 가을이면 우량 도서를 출판하는 선구적인 출판업자였던 그에게 경의를 표하여 
그의 고향인 프랑크푸르트에서 도서전이 열린다. 해마다 열리는 도서전 가운데 최대 규모이다. 
  1500년대 중반에 어린이들이 즐겨 읽은 또 한 권의 책은(어린이를 위해서 쓰여진 것은 
아니지만) 존 폭스가 1563년에 내놓은 "Actes and Monuments"로 보통 '순교자의 책'이라고 
부른다. 본문과 삽화가 많이 들어 있는데, 특히 삽화는 죄인들을 불태우는 지옥의 업화, 순교의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성인, 돌로 쳐죽이는 형벌, 채찍형, 목이 잘리는 크리스트교 교도를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16세기 말에 어른과 어린이를 포함해 가장 널리 읽혔던 책 가운데 하나다.
  1657년에 이르러 처음으로 아주 중요한 어린이 학습서가 출판되었다. 삽화가 들어간 "세계 
그림책"이라는 라틴어 책으로, 체코슬로바키아의 교육학자 요한 아모스 코메니우스가 썼고 
독일의 뉘른베르크에서 출판되었다.
  코메니우스는 어린이 학습서에 설명문과 도표와 그림을 넣는 것의 중요성을 맨 처음 제창한 
사람이다. "세계 그림책"의 부제가 '세계의 중요한 사물의 명칭'으로 되어 있는 것처럼 백과 
사전적인 시야와 학습적인 색채가 느껴지는 이 획기적인 책은 뒤에 이어지는 아동 도서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여러 면에서 현대 백과 사전의 선구가 되었다.
  인쇄기가 보급되자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싼 소책자가 발행되기 시작했다. 17세기에는 유명한 
'채프 북'이 나타났고 '채프맨'이라고 불린 행상인들이 유럽의 큰길 옆이나 길모퉁이에서 책을 
팔고 돌아다녔다. 10페이지가 채 안 되는 이 얇은 소책자는 삽화나 인쇄가 엉성했지만 값이 쌌기 
때문에 많은 독자를 얻었다. 중세의 민화, 시, 우스개 이야기, 그리고 검열에 걸릴 정도는 
아니지만 때때로 포르노적인 유머 이야기를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1662년에 제정된 통일령으로 너무 갑자기 '채프 북'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말았다. 
엄격한 청교도 주의와 윤리의식이 출판물에 도입되었던 것이다.
  연구가들은' 이 억압적인 풍토 속에서 진정으로 어린이가 읽을 만한 읽을 거리가 탄생했다고 
본다. 그러니까 어린이를 대상으로 쓰여진 책들이 그제서야 정기적으로 간행될 수 있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나중에 '천국과 지옥'류의 책이라고 불린 이런 책들은 교조적. 도덕적으로 공포감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어린이들의 품행을 바로잡으려는 목적으로 쓰여졌다. 주요 테마는 이 
세상에서의 행동은 모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신의 자비가 있으면 모르지만)지옥으로 영원히 
이어진다는 것이다. 삽화는 주로 지옥에서 심하게 고통을 받고 있는 어린이들을 그리고 있었는데 
다음과 같은 시를 곁들여서 공포감을 한층 더 부채질했다.
  아이들아 
  부모를 울리면 
  언젠가는
  복수를 당한단다
  자기 자식으로부터
  몇 십 년 동안 이 지옥의 책들로부터 어린이들을 해방시켜 준 것은 오로지 알파벳과 산수 
교과서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참다운 해방이 1600년대의 끝에 동화라는 형태로 찾아왔는데, 특히 앞에서 
이야기한 샤를르 페로가 쓴 1697년의 명작 "지나간 옛날의 이야기"에 의해 도입되었다.
  이 책 속에 실린 이야기는 몇 세대에 걸쳐서 입으로 전해내려온 민화로, 페로가 선명하고 
공상력에 넘치는 문체와 문자로 옮겼다. 무척 훌륭한 솜씨였기 때문에 바로 유명한 명작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어린이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다양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진정한 어린이 노래 역시, 어린이책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어린이를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라임(rhyme)이라는 개념은 옛날부터 있었으나 너서리 라임(nursery rhyme 어린이 노래)이라는 
말이 쓰여진 것은 겨우 1820년대의 일이다. 옛날에는 어린이 노래를 짧은 노래 정도로 여기다가 
1700년대에 들어와서 특히 "톰 섬의 노래"라든가 "머더 구스의 노래"라고 부르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19세기가 되자 작가와 출처에 상관없이 모든 어린이 노래는 "머더 구스의 노래"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대표적인 어린이 노래인 "머더 구스의 노래"에 잔인한 부분이 많은 것은 본래 어린이를 
위해 만들어진 노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몇 가지의 대중적인 노래 속에 보여지는 가학적인 부분, 예를 들어 가령 "세 마리의 장님 
쥐"노래에 '부엌 칼을 들고 나와서 꼬리를 싹뚝 잘랐다'를 삭제하려는 시도도 수없이 있어 왔다. 
성인용 넌센스 이야기로 가득 찬 노래도 있다. 그런 것들은 어린이에게는 결코 적합하지 않다고 
지적하는 사람들도 많다.
  실제로 대부분의 어린이 노래는 어린이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몇 
세기에 걸쳐서 'nursery(어린이용)'라는 형용사가 붙지 않았던 것이다. 'nursery rhyme'이라는 
말의 출처는 1824년 영국 잡지에 실린 "너서리 라임의 개요"라는 논문이었다.
  라임이 원래 어린이를 위한 노래가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었을까?
  라임 가운데에는 외설스러운 민요에서 도입된 것이나 유행하는 유희나 속담, 기도에 바탕을 둔 
노래에서 발생한 것도 있다. 그러나 대개는 술집의 우스개 노래, 종교적인 습관의 패러디, 사회 
풍자, 로맨틱한 사랑 노래에서 시작되고 있다. 그런데 현재 노래로 남아 있는 가사는 처음 
그대로는 아니다. 1800년대 초에 새롭게 대두된 빅토리아 왕조의 도덕주의에 맞춰서 많은 
'어린이' 노래가 어린이에게 맞게끔 개작되었다. 
  아이오나와 피터 오피 부부가 낸 결정판 "옥스퍼드판 전래 동요"는 이렇게 쓰고 있다.
  "주저하지 않고 말할 수 있는 것은 1800년 전부터의 것으로, 특별히 어린이를 위해 만들어진 
진짜 라임은 알파벳 노래, 유아의 놀이 노래, 게임을 수반한 노래, 자장가 정도이다. 어린이 노래 
중 거의 대부분이 어린이를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당시에는 외설 그대로의 라임이 어린이들의 노래로 들려지고 있었다. 어린이가 작은 
어른으로 취급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1800년대 초에 많은 라임이 '너서리'의 항목 밑에 정리. 편찬되어 '머더 구스'라는 
팬네임이 붙여졌다. 머더 구스란 어떤 여성이었을까? 어쩌면 남성이었을까?



     4. 고대엔 남성들도 화장을 했다.

     고대엔 남성들도 립스틱을 발랐다.

  아름다움은 영원한 기쁨이겠지만 그것을 유지하려면 약간의 비용을 들여야 한다. 남녀 
미국인들이 단지 아름답게 보이려는 이유만으로 미용실이나 이발소, 화장품 회사에 내는 돈은 
연간 50억 달러를 넘는다.
  하지만 대대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화장이나 그 밖의 멋내기는 별로 놀랄 일도 걱정할 일도 
아니다. 적어도 이미 8000년 전부터 계속되어 온 일이니까 말이다.
  얼굴이나 몸을 장식하고, 향료를 뿌리고, 파우더를 바르고, 머리를 염색하는 등의 행위는 모두 
종교나 전투 의식의 일부로 시작되었는데 그 역사는 아주 오랜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고학자들은 기원전 6000년 전에 얼굴이나 눈에 화장을 하기 위해 안료를 잘게 깨거나 섞을 때 
썼던 팔레트를 발굴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기원전 4000년에 이미 미용실이나 향료 제조 공장이 번성했고 메이크업 
기술도 매우 발달하여 널리 퍼져 있었다. 당시에 사랑받던 아이섀도는 그린, 립스틱은 블루 블랙, 
볼연지는 빨강이었다.
  그리고 상류층 여성들은 손가락이나 발을 주황색인 헨나(부처꽃과의 식물) 염료로 염색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또 당시는 가슴을 드러내는 시대였기 때문에 가슴의 혈관을 푸른 색 안료로 
뚜렷하게 그렸고 유두는 금색으로 칠했다.
  이집트의 남성들도 여성들 못지 않게 화장을 좋아했다. 이승에서뿐만 아니라 저승에서까지도. 
그들은 죽으면 저승에서 사용할 엄청난 양의 화장품을 함께 매장했던 것이다.
  1920년대에 기원전 1350년 무렵의 이집트 왕인 투탄카멘의 묘지를 발굴했을 때 스킨크림, 
립스틱, 볼연지가 든 작은 항아리가 발견되었다. 그것들은 지금도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상태가 
좋고 무척 향기가 좋았다.
  사실 기독교 시대까지 기록에 남은 모든 문명을 보면 그리스인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파우더나 향료, 안료로 열심히 몸을 치장하고 있었다.
  특히 눈은 몸의 어느 부분보다 마음 속의 감정을 잘 나타내므로 특히 정성스럽게 화장을 했던 
것 같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기원전 4000년에 이미 얼굴 메이크업의 최대 포인트로서 눈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들은 골작석 가루나 청록색의 동광석으로 만든 녹색 아이섀도를 즐겨 칠했는데 
눈꺼풀의 위아래와 양쪽을 진하게 발랐다.
  또 아이라인을 그리거나 눈썹이나 속눈썹을 진하게 하려고 코르라는 검은 페이스트(paste)를 
사용했다. 이것은 안티몬의 가루, 소성 아몬드, 검은색 산화동, 자토로 반죽해서 작은 설화 석고 
항아리에 담겨 있었다. 그것을 침으로 적셔서 상아나 나무 또는 금속제의, 현재의 눈썹 펜슬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스틱에 발라 눈화장에 사용했다. 코르가 들어 있는 항아리들은 현재도 많이 
남아 있다.
  상류 이집트인들은 남녀 모두 사상 최초로 눈 주위를 반짝거리게 하는 아이글리터를 붙였다. 
풍뎅이의 딱딱한 황금빛 날개를 유발에 넣고 거칠게 짓이겨 공작석 아이섀도에 섞어서 썼던 
것이다.
  이집트 여성들 대부분은 눈썹을 밀어내고, 나중에 그리스의 고급 창녀들이 한 것처럼 눈썹을 
붙였다. 진짜든 가짜든 코 위에서 양쪽 눈썹이 붙어 있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이집트인과 
그리스인은 코르를 사용하여 본래 떨어져 있는 눈썹을 하나로 이었다.
  눈화장은 헤브루인들 사이에서도 가장 대중적인 메이크업이었다. 이 습관은 기원전 850년경, 
아하브 왕의 왕비인 예제벨에 의해 이스라엘에 소개되었다.
  시든의 공주였던 예제벨은 당시 문화나 패션의 중심지인 페니키아의 습관을 따르고 있었다. 
성경도 그녀의 화장에 대해 쓰고 있다.
  "예후가 이즈르엘에 이르자 예제벨은 소식을 듣고 눈화장을 하고..."("열왕기" 하 9장 30절)
  예제벨은 진한 화장을 하고 궁전의 높은 창문에서 자신의 아들과 왕좌를 다투는 예후를 
나무랐다. 하지만 예후의 명령을 받은 자신의 하인에 의해 창문에서 떨어지고 만다. 예제벨은 
평민의 권리를 냉혹하게 무시했고 헤브루의 예언자인 엘리야와 엘리샤를 공공연히 모욕했기 
때문에 악녀의 전형이라는 평판을 받게 되었다. 예제벨은 몇 세기에 걸쳐 화장품에 나쁜 
이미지를 남겼다.
  이집트의 메이크업 기술을 흉내내 바로 실천한 로마인과 달리 그리스인은 맨얼굴을 좋아했다. 
기원전 12세기 도리스인의 침입이 시작된 시대부터 기원전 700년 무렵까지, 하루가 싸움으로 
시작해서 싸움으로 끝나는 그리스인들에게 몸을 장식하는 따위의 퇴폐적인 쾌락에 소비할 시간은 
없었다. 그 뒤 사회가 안정되어 기원전 5세기에는 황금시대라는 번영을 맞이했으나 남자다움과 
무풍류를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그리스 사회에서 발전한 것은 학문과 육상 경기였고 치장하지 
않는 남성이야말로 이상적인 남성상으로 여겨졌다.
  이 시기에 이집트에서 그리스로 조금씩 들어온 화장술이 고급 창녀들에 의해 정착했다. 고급 
창녀들은 돈이 많고 생활이 풍요로워 진한 화장을 하고 머리를 멋드러지게 묶었으며 몸에 향료를 
발랐다. 또 입냄새를 없애려고 입 안에 방향액이나 방향유를 넣고 혀로 굴리다가 삼키지 않고 
적당한 때 뱉어냄으로써 좋은 냄새를 풍겼다. 이것은 역사상 최초의 구취 방지제인 셈이었다.
  또 그리스의 고급 창녀들에게서는 흑발보다 금발을 좋아하는 금발 선호사상이 처음으로 
나타남을 볼 수 있다. 금발은 순결과 사회적 지위가 높음, 성적 매력을 뜻했기 때문에 창녀들은 
노란 꽃잎이나 화분에 칼륨을 섞고 사과 향을 첨가한 포마드로 머리색을 금색에 가깝게 
만들었다.
  로마인들은 그리스인들과는 전혀 대조적으로 남성이나 여성 모두 화장품을 무척 많이 
사용했다. 동방의 원정에서 돌아오는 병사들은 인도의 향료나 화장품, 금발용 황색 가루나 
꽃가루, 금가루를 가지고 왔다. 아예 몸에 붙이고 오는 병사들도 많았다. 또 로마 여성들의 
화장대에는 현대의 화장품에 버금가는 모든 것들이 이미 갖추어져 있었다는 것도 확실하다.
  1세기의 풍자 시인인 마르티알리스는 사랑하는 연인인 가라의 지나친 화장을 비난하며 이렇게 
노래했다.
  "가라, 당신이 집에 있을 때 당신의 머리는 머리를 빗어주는 하녀의 손 밑에 놓여 있구려. 밤이 
되면 틀니를 뽑아 놓고 수백 가지의 화장품 상자 안에서 잠이 들지. 당신의 얼굴조차 당신과 
잠자리를 함께 하지 않아. 그리고 다시 아침이 되면 상자에서 꺼내 붙인 가짜 눈썹 밑으로 
남자에게 눈길을 보내는구려."
  로마인들의 화장에 대한 이상할 정도의 집착에 근거하여 어원 연구가들은 오랫동안 '화장품'을 
뜻하는 'cosmetic'이라는 말이 줄리어스 시저가 지배했던 로마 제국의 유명한 화장품 상인인 
코스미스(Cosmis)에서 나온 것이라고 믿어왔으나, 아주 최근에 '장식에 시간을 들이는'이르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 'Kosmetikos'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예쁜 남자, 야한 남자

  남자들의 멋부리기는 어디까지인가?
  어느 시대나 신세대들의 옷차림은 구세대들의 혀를 내두르게 할 만큼 파격적이었다. 오늘날 
'요즘 애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오십 대의 중년들도, 이삼십 년 전에는 '요즘 애들' 이라는 
눈총을 받았다. 그들은 강제로 머리를 자르던 단속 경찰의 가위를 피해 장발을 고수했고, 무릎 위 
10센티미터가 넘는지를 확인하던 자를 피해 다니면서 미니스커트를 입었다.
  패션은 젊은이들이 주도해 온 것이다.
  라틴풍 귀걸이, 양손엔 반지와 팔찌, 가느다란 다리에 꽉낀 청바지, 갸름한 얼굴, 뽀얀 피부, 
예쁘게 컬한 머리, 노랗고 붉은 부분 염색머리...
  이것은 요즘 남자들의 모습이다. 그들은 이발소가 아닌 헤어숍에 들락거리고, 심지어 
피부미용실도 마다하지 않는다.
  머리를 감고 나면 장시간 헤어드라이기와 씨름하다가 자연스럽게 무스나 스프레이로 
마무리한다. 메이크업을 한 남자도 종종 눈에 띈다. 아동용이다가 여성용으로까지 확대되었던 
반바지는 남성들의 외출용 옷차림이 되었다.
  그들은 무슨 별종이 아니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모습들이다. 이제는 더이상 남자들이 
거울을 자주 들여다보는 것조차 흉이 되던 시대가 아니다. 아름다움이나 멋은 여자들의 전유물이 
아닌 것이다.
  이렇게 예쁜 남자들과 함께 야성미와 성적 매력을 한껏 강조하는 남자들이 공존한다.
  구리빛으로 인공 선탠을 하고, 머리는 마치 죄수를 연상시키는 까까머리, 거뭇한 턱수염, 
한겨울도 아랑곳 않는 찢어진 청바지, 웃옷을 풀어헤친 차림, 노출형 러닝티셔츠 차림, 심지어 
코걸이까지 한 남자들이 야성미와 함께 섹시함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여성 의상에서 빌려온 부드럽고 패셔너블한 분위기의 색상이나 치마, 비치는 옷, 
신체의 굴곡이 다 드러나는 딱 붙는 옷으로 성적 매력을 돋보이게 하는 남자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들은 여자 못지 않게 몸매관리에 관심이 많고 그렇게 가꾼 자신들의 체격을 돋보이게 하는 
차림을 즐긴다.
  그 밖에 꽁지머리나 1회용 문신까지 멋내기의 소품으로 애용되고 있다.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이 다양하게 펼쳐지는 남성들의 모습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부모 
세대의 피땀어린 수고를 바탕으로 먹고사는 것이 어느 정도 해결된 세대들은 기본적인 욕구 외에 
더욱 다양한 욕망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생존의 위협도, 크나큰 좌절도 실패도 
경험할 필요가 없는 그들은 당당하게 자기의 개성을 표현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 것이다.
  분화되고 다양해진 가치관의 변화로 인해 여성 대 남성의 구분을 무의미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추세도 남성들의 멋내기에 일조하고 있다.
  그들이 기성세대가 되면 자식들의 옷차림을 보고 무어라고 할까? '요즘 애들'은 정말 못 말려?

     아름다워지기 위해서라면 죽음까지도 불사한 여성들

  유독한 납이 들어간 분과 볼연지, 비소가 들어간 탈모제.
  여성들은 아름다워지기 위해 오랫동안 죽음의 위험까지도 불사했다.
  그리스 남성들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존중하여 화장품을 거의 쓰지 않았지만 뺨을 물들이기 
위해 볼연지는 사용했다. 또 고급 창녀들은 볼연지의 빨강색을 강조하려고 우선 얼굴 색을 
분으로 하얗게 발랐다.
  분은 그 뒤 2000년 동안 유럽 여성들의 얼굴이나 목, 가슴을 하얗게 만드는 데 사용되어 
왔는데, 많은 양의 납을 함유하고 있는 분을 계속 사용함으로써 피부색을 망가뜨리고 수명을 
앞당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18세기 유럽에 나돈 '비소가 들어간 웨하스'를 여성들은 피부를 하얗게 만들기 위해 실제로 
먹었다. 이 방법은 피가 독에 오염되어 각 기관으로 보내지는 적혈구가 감소하여 산소부족이 
되었기 때문에 효과는 있었다.
  그리스와 로마에서 잔털을 제거하기 위해 남녀 모두에게 널리 사용된 탈모제인 석황은 성분이 
비소 화합물이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위험했다.
  볼연지도 안전하지 않았다. 원료는 뽕나무나 해초의 무해한 식물성이었지만 유독한 유화은인 
빨강색으로 착색돼 있었다. 그와 똑같은 빨간 크림이 몸 안으로 좀더 들어가기 쉬운 립스틱에 
사용되어 몇 세기 동안 그 독은 천천히 몸을 좀먹고 있었다.
  납이나 비소, 수은은 한번 혈관에 들어가면 특히 태아에게 악영향을 미친다. 옛날의 화장 
때문에 얼마나 많은 유산이나 사산, 선천성 기형이 비롯되었을지 그 숫자는 추측할 수도 없을 
정도이다. 더구나 당시의 사회관습상 기형아는 태어나자마자 처리되어 버렸으니 말이다.
  역사를 통해 여성에게 화장을 금한 시도가 몇 번인가 이루어졌다. 도덕이나 종교적인 이유 
ㄸ문만은 아니었다.
  4세기의 그리스 역사가인 크세노폰은 "가정론"에서 어떤 신부의 화장을 사기라고 말하며 "나는 
그녀의 얼굴에서 화장기를 보았을 때 '화장으로 당신의 용모를 가려 나를 속이려는 것은 내가 내 
재산을 감추고 당신을 속이는 것과 똑같다'고 지적했다"라고 쓰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의 신학가인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2세기에, 여성이 화장이라는 
수단으로 남성을 속여 결혼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금지하는 법률의 제정을 지지했다. 나아가 
1770년 영국 의회가 제정한 엄격한 법률은 "나이, 계급, 직업, 처녀, 미혼, 미망인에 관계없이 
향료, 안료, 화장수, 틀니, 붙인 털 등으로 유혹하거나 속여서 결혼한 여성은 모두 마술을 사용한 
것으로 여겨 벌하며 그 결혼은 무효가 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효과가 없었다.
  그런데 특히 이시기에 하얗게 분을 바르고 그 위에 빨간 볼연지를 칠하는 것이 영국과 
프랑스에서 역사상 유래가 없을 만큼 크게 유행했다는 사실이다. 영국의 잡지인 "젠틀맨스 
매거진"은 '텁수룩한 하얀  머리와 새빨간 얼굴의 여자'를 '껍질을  벗긴 양'과 똑같다고 쓰고 있
다. 
남성 독자를 대상으로 남성이 쓴 이 기사는 이어 다음과  같이 비난한다. 
  "미혼 여성이 이런 유행을 좇는 기분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결혼 상대를 잡아야만 하니까. 
하지만 이 경박함은 기혼 여성의 지위와 품위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 광적인 화장의 시대 뒤에 오는 것이 프랑스 혁명과 그 직후의 화장기 없는 시대다.
  19세기 말까지 볼연지, 분, 립스틱(남녀 모두 6000년 동안 즐겨왔던 화장)은 유럽에서 거의 
모습을 감추었다. 이 일시적인 진정기에 어떤 패션 잡지는 "얼굴과 입술에 화장하는 것은 
무대에 서는 사람에게만 허용되는 일이다. 가끔 착각한 여성들인 자신의 젊음과 건강한 빛을 
위장하려고 뺨을 빨갛게 바르는데 이것은 누구의 눈에나 뻔히 인위적으로 보임으로써 자신이 
가장 숨기고 싶어하는 곳을 강조하는 결과가 되어 오히려 사람들의 주목을 끌 뿐이다. 볼연지나 
립스틱을 사용하는 시대가 두 번 다시 오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1880년의 일이다. 무대 여배우들이 사용하는 화장품은 과거 몇 백 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자가제품이었다.
  하지만 19세기 말쯤 완전히 부활한다. 그 선두에 선 것이 프랑스인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탄생한 것이 현대의 화장품 산업이다. 겔랑, 코티, 로제 가레, 랑방, 샤넬, 
디오르, 헬레나 루빈스타인, 엘리자베스 아덴, 레브론, 로더, 에이본 등 시판하는 브랜드 화장품의 
출현은 과거에 없던 현상이었다. 
  게다가 더욱 중요한 일은, 안전한 화장품을 만들기 위해 화학자들이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이나 
미용사의 응원에 힘입어 일어선 것이다.
  그런데 19세기 말 외국인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미국 화장품 시장에서 에이본은 
독창적으로 화장품 산업을 개척했다.
  샤넬, 코티, 겔랑은 프랑스에서, 헬레나 루빈스타인은 폴란드의 클라코프에서, 엘리자베스 
아덴(본명은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글레엄)은 캐나다에서, 그리고 맥스 팩터는 소련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브랜드 화장품 시대를 활짝 열어 놓고 있었다. 이렇듯 여러 나라의 값비싼 유명 화장품의 
홍수 속에서 에이본은 최고의 판매고를 자랑하는 자리에 오르는데, 그 성공의 열쇠는 방문 
판매원인 '에이본 레이디'가 쥐고 있었다.
  에이본 레이디 제1호는 사실은 남성으로 데이비드 맥코넬이라는, 뉴욕 북부 출신의 젊은 
세일즈맨이다. 그는 1886년에 에이본의 방문 판매를 시작했는데 식구가 적은 자신의 집에서 
여유 있게 화장품을 구입할 기회를 여성들에게 제공했다.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향수나 핸드 
크림을 판 것은 아니다.
  맥코넬은 열여섯 살 때 서적 방문 판매를 시작했다. 책이 그다지 팔리지 않자 유행하던 판매 
작전을 취하기로 했다. 즉, 처음에는 무료로 선물을 나누어주고 대신 상품의 설명이나 판매를 
하는 방법이다. 판매를 시작할 때 향수 선물이 가장 적합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맥코넬은 그 
지역 약제사의 힘을 빌려서 오리지널 향수를 만들었다.
  운이 따랐다. 후세의 세일즈맨이 판촉물로  금속 수세미를 선물하는 것이 주부에게 인기가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처럼, 맥코넬도 여성들이 향수는 매우 좋아하지만 중요한 서적에는 흥미를 
나타내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으로 배웠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서적 판매를 중단하고 뉴욕을 본거지로 하는 '캘리포니아 향수 회사'를 세웠다. 
회사 이름은 캘리포니아 출신의 친구 겸 출자자에 경의를 표한 것이다. 호별 방문 방식은 화장품 
판매에 가장 적절했다. 특히 교통 수단을 마차에 의존하는 시대에 시골 사람들이 멀리 떨어진 
가게에까지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에이본 레이디 여성 제1호는 뉴햄프셔 주 윈체스터 출신의 P. F. E. 올비라는 미망인이었다. 
그녀는 한 집 한 집 초인종을 누르면서 에이본의 인기 제품인 '리틀 도트 향수 세트'를 팔고 
다니는 일을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다른 여성들을 모아서 호별 방문 판매 양성 훈련을 했다.
  회사 이름을 에이본으로 바꾼 이유는 단순하다. 맥코넬이 살고 있던 마을인 사판 라마포라는 
지명에서 셰익스피어가 태어나고 묻힌 스트레이포드 온 에이본을 연상했기 때문이다.
  1879년까지 맥코넬은 열두 명의 여성 판매원을 고용하여 열 여덟 종류의 향수를 판매했으며 그 
숫자는 갈수록 늘어날 뿐이었다. 오늘도 50만 명이 넘는 에이본 레이더가 미국 방방곡곡에 있는 
집의 초인종을 누르며 돌아다님으로써 에이본을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이다.

     염색은 남자들이 즐겨했다

  세계 최초의 본격적인 헤어 스타일리스트는 앗시리아인이었다.
  그들은 현재의 이라크 북부에 살고 있었다. 그들의 커트, 계단 커트 웨이브, 염색 기술은 
중동에서 으뜸으로 알려지고 있었다. 머리에 대한 집착일 정도의 까다로움이 우수한 기술을 
낳았던 것이다.
  앗시리아의 이발사는 상류층 조정 신하의 머리를 손질할 때 머리카락 끝을 조금씩 틀어서 깎는 
그라데이션 커트를 해서 이집트의 피라미드처럼 확실히 기하학적인 라인이 나오도록, 그리하여 
어딘가 모르게 피라미드처럼 보이도록 깎았다. 긴 머리는 웨이브 방울 어깨에서 가슴에 걸쳐 
계단 모양으로 흘러내리도록 정성스럽게 매만졌다.
  머리카락에는 오일을 바르고 착향, 착색했다. 남성은 세로로 주름을 잡은 계단 커트로 깨끗하게 
깎은 수염을 턱에서 가슴에 걸쳐 달고 있었다. 왕이나 전사, 귀족 계급 여성들은 푹신하게 흐르는 
듯한 긴 머리에 사상 최초의 헤어 아이론이라고도 할 수 있는, 불로 뜨겁게 만든 철봉을 
이용하여 노예들에게 웨이브를 길게 했다.
  앗시리아인들은 다른 화장술에는 거의 눈길도 주지 않고 오로지 머리를 손질하는 기술만을 
발전시켰다. 지위와 직업에 따라 머리 형태를 규정하는 법률까지 있었다. 또한 이집트인들처럼 
고위층 여성은 궁정에서 공무를 볼 때 남성과 똑같은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양식화한 가발을 
썼다.
  대머리는 전체적이든 부분적이든 창피하게 여겨져 가발로 숨겼다.
  앗시리아인과 마찬가지로 호메로스 시대의 그리스인도 웨이브가 진 긴 머리를 좋아했다. 
독특한 스타일의 긴 머리야말로, 짧은 머리로 아무런 손질도 하지 않은 북방의 야만족과 
자신들을 구분하는 표시라고 생각했다. '향기롭고 거룩한 정도로 아름다운 웨이브'는 그리스인의 
동경의 대사이었고 산문이나 시 속에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언급되고 있다.
  금발이 가치 있고 소중하게 여겨져 그리스의 위대한 영웅 대부분(몇 명의 이름을 꼽자면 
아킬레스, 메넬라오스, 파리스)이 금발의 웨이브를 가진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금발로 태어나지 
않은 사람은 페니키아의 성분이 강한 비누와 알칼리 표백제를 써서 금발이나 빨간 머리로 바꿀 
수 있었다. 당시의 페니키아는 지중해에서 비누 제조의 중심지였다.
  남성들은 머리를 금발로 만들기 위해 갖가지 수단을 썼다. 일시적인 금발로는 노란 꽃가루, 
노랗게 만든 밀가루, 미세한 금가루를 섞은 타르캄 파우더(숫돌 가루)를 뿌렸다. 기원전 4세기에 
아테네의 극작가인 메난드로스는 금빛이 더욱 오래 가는 방법에 대해 '머리를 금발로 만들고 
싶으면 이쪽에서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태양 광선을 쬐는 것이 가장 좋다.'고 썼고 이어 실제의 
방법을 '아테네제의 특수 연고로 머리를 감은 뒤에 모자를 쓰지 않고 몇 시간을 햇볕에 노출하여 
머리가 금발이 되기를 가만히 기다린다. 그러면 분명히 금색이 된다'고 묘사하고 있다.
  기원전 303년 프로 이발사들이 최초의 조합을 결성하여 로마에 가게를 열었다.
  로마 사회는 기본적으로 머리 손질을 요구했고 그것을 게을리한 사람은 웃음거리로 여겨지거나 
공공연히 모욕을 당했다. 그리스인의 금발 취향을 피하듯, 사회적, 정치적으로 지위가 높은 
로마인들은 검은 머리 색을 좋아했다. 나이가 지긋한 로마의 집정관이나 원로원 의원들은 백발을 
숨기기 위해 고생을 했다. 1세기 로마의 박물학자 대 프리니우스는 머리를 검게 염색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확실하게 쓰고 있다.
  인기 있는 흑발 염료는 호도 껍질과 부추를 함께 삶은 것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염색하기 
전에 우선 백발을 방지하는 일이 중요했으므로 약초와 지렁이로 만든 페이스트를 하룻밤 동안 
머리에 바르고 자는 일이 남성들에게 권장되었다. 로마의 대머리 방지약은 분쇄한 킨바이카의 
열매와 곰의 기름을 섞은 연고였다.
  전 세계가 금발이나 흑발을 좋아한 것은 아니다. 아직 이유는 분명히 밝혀져 있지 않지만 고대 
색슨인은 그림 속에서 머리와 수염이 담청색, 진홍, 그린, 오렌지색으로 칠해져 있다. 한편 
갈리아인들은 빨간 색으로 염색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영국에서는 엘리자베스 1세가 패션의 중심적 존재였던 무렵 당시의 저명 인사들은 여왕의 
색인 밝은 빨강이 들어간 오렌지색으로 머리를 염색했다. 엘리자베스 1세를 궁정으로 방문한 
어떤 대사는 여왕의 머리를 '도저히 자연스러운 것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선명한 색'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독교 시대 이전부터 남녀 모두 여러 가지 머리카락 가루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이 습관을 
패션의 기본 룰로 도입한 것은 16세기의 프랑스였다.
  머리카락 가루는 미립자로 만든 표백 밀가루에 강한 향을 입힌 것으로 진짜 머리카락에든 
가발에든 듬뿍 사용했다.
  1790년에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궁정에서 머리카락 가루를 비롯한 모든 머리 손질 용품들이 
유행의 붐을 이루었다.
  사람들은 머리카락을 빗으로 빗고 웨이브를 넣고 덧상투를 몇 개나 겹쳐서 머리 위에 훌륭한 
탑을 만들고 여러 가지 머리카락 가루를 뿌렸다. 파란색, 핑크, 바이올렛, 노란색, 흰색 모두 
인기가 있었다.
  영국에서는 머리카락 가루의 전성기 때 의회가 국고를 살찌게 하려고 머리카락 가루에 세금을 
물렸다. 연간 25만 파운드의 수입을 예상했으나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의 전쟁으로 헤어 패션도 
변덕스러운 유행을 따라 머리카락 가루의 유행이 지나가 버리자 세금 수입은 줄어들었다.
  그런데 머리 색을 아름답게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집착에도 아랑곳없이 본격적인 염색에는 
항상 위험이 뒤따랐다. 염증, 발진, 암으로 연결되는 세포의 돌연변이 등 충분히 실험된 현대의 
시판 염색약에도 위험은 있다. 그래도 부식성이 강한 원료를 사용한 옛날 제품과 비교하면 훨씬 
안전하긴 하겠지만.
  안전한 시판용 염색 염료를 개발하는 시도는 1909년 프랑스의 화학자인 유전 쉴러가 처음으로 
성공시켰다. 그는 프랑스의 무해 염모제 회사를 세우고 새롭게 발견된 화학물질인 
파라페니렌지아민을 재료로 제품화했다. 나중에는 팔리게 되었지만 처음에 이 제품은 그다지 
많이 팔리지 않았다. 1년 뒤에 쉴러는 좀더 매혹적인 회사 이름으로 '로레알'을 생각해 냈다.
  그런데 대부분의 여성들은 기본적으로 머리카락을 염색한다는 생각에 반대했다. 염색이라면 
여배우가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1950년이 되어서도 염색을 한 사람은 미국 여성의 
겨우 7퍼센트, 그에 비해 현재는 무려 75퍼센트나 된다. 도대체 무엇이 이러한 의식의 혁명을 
가져온 것일까?
  현대의 염색 혁명은 더욱 안전한 제품 때문도 아니고 간편해진 사용법 때문도 아니다. 
대부분이 이미지 변화를 주창한 교묘한 선전 광고 때문이었다.
  이 염색 선전의 선두에 화려하게 선 것이 클레이롤 사였다.
  뉴욕의 카피라이터인 셸리 폴리코프가 생각해낸 선전 문구인 "그 여자, 했니? 안 했니?"와 
"알고 있는 건 그 여자의 미용사 뿐이야"가 순식간에 전국적으로 퍼졌고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클레이롤 사는 삽화가 들어간 모든 광고에 아이를 넣었다. 염색을 한 여성 모델이 평범한 여성, 
경우에 따라서는 어머니로 보이게 한 것이다.
  "그 여자, 했니? 안 했니?"가 시사하는 의미는 숱한 비난을 불러일으켰고 덕분에 최고의 선전 
효과를 올리는 결과가 된 것은 아이러니였다. 사람들은 "그 여자, 했니? 안 했니? 그게 무슨 
뜻이야?"하고 농담을 했다. "라이프" 잡지는 그 선전 문구가 노골적이고 아슬아슬하다는 지적을 
하면서 광고의 게재를 거절해 버렸다. 이에 대해 클레이롤 사의 중역들은 전원 남성인 "라이프"지 
심사단에게 이 광고를 남성과 여성 양쪽에 시험을 하라고 요구했다. 그 결과는 깜짝 놀랄 만한 
것이라고 할까, 예상했던 대로라고 할까, 무척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여성들은 아무도 그 선전 
문구를 가지고 성적인 연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남성들은 모두 성적인 연상을 했다.
  "라이프"지는 태도를 누그러뜨렸고 제품의 판매는 호조를 이루었다. 머리카락을 염색하는 일은 
이제 충격적인 일이 아니었다. 1960년대 말기에는 거의 70퍼센트의 미국 여성과 2백만 명의 
남성이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머리카락의 색깔을 바꾸고 있었다. 현대의 미국인이 2000년이나 
전의 유행을 그제야 도입한 것이다 
  하지만 옛날과 한 가지 다른 점은 옛날에는 남성 쪽이 여성보다 많이 염색을 했다는 사실이다.

     금지 1호였던 가발

  대머리를 숨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장용품이었던 가발. 가발의 역사는 대대적인 유행과 
교회에 의한 금지를 되풀이해 왔다.
  고대 세계에서 이발사의 지위가 최고였던 곳은 앗시리아였으나, 그보다 약 1500년이나 전에 
이집트인은 가발을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서구 사회에서도 독자적으로 가발이 
고안되었는데 대머리를 숨기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순전히 정장용품의 하나였다.
  많은 이집트의 가발이 오늘날까지 매우 양호한 상태로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깨끗하게 세 
갈래로 땋은 가발은 화학적인 분석에 따르면 식물 섬유와 천연 모발로 만들어져 있다.
  장식용 가발 중에는 지나치게 큰 것도 있으며 무척 무겁다. 기원전 900년에 이시무케브 여왕이 
국가 행사 때 쓴 가발은 너무 무거워서 하인들이 보행을 도와야 할 정도였다. 현재 카이로 
박물관에 있는 이 가발은 화학 분석 결과 100퍼센트 갈색의 천연 모발로 만들어졌음이 밝혀졌다. 
당시의 다른 가발도 그렇지만 머리 위로 높이 솟구치는 디자인은 왁스를 발라 형태를 보존했다.
  금발 가발이 기원전 1세기의 로마에서 크게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리스의 고급 창녀들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표백하거나 머리카락 가루를 붙이는 일을 좋아했으나 로마 여성들은 게르만족 
포로의 머리에서 잘라낸 깨끗한 아마색 머리카락을 좋아했다. 게르만족 머리카락으로 여러 가지 
디자인의 금발 가발이 만들어진 것이다.
  1세기의 로마 시인인 오비디우스는 "마음대로 자를 수 있는 게르만족의 머리카락이 풍족할 
만큼 많아서 로마인은 남성이건 여성이건 대머리 걱정을 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고 쓰고 있다.
  금발 가발은 결국 로마 창녀들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고 창녀촌에 자주 드나드는 사람들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기도 했다. 방탕한 황제비인 메살리나는 로마에서 악명 높은 '매춘굴 순례'를 
할 때 '노란 가발'을 썼다. 가장 미움받은 로마 황제인 칼리굴라는 밤마다 쾌락을 좇아 거리를 
어슬렁거렸는데 그도 역시 똑같은 가발을 쓰고 있었다. 금발 가발은 현재 창녀들의 하얀 부츠와 
미니 스커트처럼, 척 보면 신분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기독교 교회는 어떤 목적으로든 가발을 일절 금지하려고 계속해서 시도를 했다. 1세기 때의 
성직자들은 가발 착용자는 기독교의 축복을 받을 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다. 2세기의 그리스 
신학자인 테르툴리아누스는 "가발이란 모두 엄청난 속임수이며 악마의 발명품이다"라고 설교했다. 
이어서 3세기에는 성직자인 키프리아누스가 "여러분이 이교도에게 이길 수 있겠습니까?" 하며 
가발 착용자들을 심하게 규탄했고 전체 가발 또는 부분 가발을 쓴 기독교도의 예배 참배를 
금지했다.
  가발에 대한 심한 비난은 692년에 절정을 이루었다. 이 해에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가발 
착용을 그만두지 않는 기독교도를 파문했다.
  국왕의 성직자 임명권을 둘러싸고 교회와 정면으로 대립하여 결국은 파문 당한 헨리 4세조차 
교회가 추천한 짧은 스트레이트로 아무 장식도 없는 헤어 스타일을 따랐고 궁정에서의 장발과 
가발을 금지할 정도였다.
  1517년의 종교개혁으로 교회는 신도가 줄어든 어려운 상황에 부닥치자 처음으로 가발이나 헤어 
스타일에 대한 규제를 완화했다.
  1580년까지 가발은 또다시 헤어 패션의 최신 유행이 되어 있었다.
  웨이브를 풀고 염색을 한 가발의 부활에 누구보다 공헌한 사람은 엘리자베스 1세였다. 그녀는 
빨강이 섞인 오렌지색 가발을 엄청나게 많이 갖고 있었는데, 사용 목적은 주로 심각하게 
벗겨지는 이마와 엷어져 가는 머리카락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가발이 아주 당연한 것이 되자 가발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스코틀랜드 여왕인 메어리는 다갈색 가발을 쓰고 있었으나 그녀와 가까웠던 사람조차도 그녀의 
목이 단두대에서 날아갈 때까지 그 사실을 몰랐다. 가발의 인기가 최고였던 17세기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에는 40명의 상근 가발 제작자가 입주하여 고용되고 있었다.
  그리고 또다시 교회가 가발 반대를 들고 일어섰다. 하지만 이번에는 많은 사제들이 당시에 
유행한 긴 웨이브의 가발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의 위계질서가 내부로부터 깨져 버렸다. 
17세기의 문헌에 따르면 가발이 없는 사제가, 미사를 보러 가거나 신의 축복을 기원하러 가는 
하급 성직자의 가발을 빼앗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샹롱 출신의 프랑스 성직자인 장 
바프티스트 티에르는 가발의 해악, 가발 착용자를 찾아내는 방법, 살짝 다가가서 가발을 빼앗는 
방법에 대한 책을 썼다.
  교회는 결국 절충안으로 이 논쟁에 결말을 냈고 평신도는 대머리이거나 몸이 약한 고령자이면 
가발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단지 교회 안에서는 금지되었다. 여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18세기의 런던에서는 법정 변호사의 매우 값비싼 가발이 자주 도둑맞았다. 가발 도둑은 
바구니에 작은 소년을 담아서 어깨에 짊어지고 사람들이 많은 길에서 가발을 훔쳤다. 바구니에서 
재빨리 손을 내밀어 지나가는 신사의 가발을 실례하는 것이 소년의 역할이었다. 가발을 도둑맞은 
신사는 푸르뎅뎅하게 깎은 까까머리처럼 보기 흉한 자신의 머리 모습 때문에 사람들 속에서 
소란을 일으키는 일을 대부분 포기했다. 법정 변호사들에게 가발은 법정에서 정식 의상의 
일부였는데, 20세기인 지금까지 착용하고 있다.

     멋쟁이의 필수품, 생선 등뼈

  머리를 손질하는 대표적인 도구로는 아주 오래 전부터 사용되어온 빗과 머리핀을 들 수 있다. 
게다가 현대에 들어서는 헤어 드라이어도 남녀 모두에게 필요한 필수 품목이 되었다.
  가장 오래 된 빗은 대형 생선의 등뼈를 건조시킨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이런 종류의 빗은 
현재도 아프리카 오지의 원주민들이 쓰고 있다.
  빗 특유의 모양은 '빗살 무늬'를 뜻하는 영어 'comb'의 어원인 고대 인도, 유럽어 'gombhos'가 
'이(치아)'를 뜻하는 것으로 보아 분명하다.
  사람이 만든 가장 오래 된 빗이 6000년 전의 이집트 묘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교묘한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것들이 많다. 반듯한 이가 한 장인 것과 두 장인 것이 있는데 한 장짜리가 
두 장짜리보다 눈금이 촘촘하고 긴 것도 있다. 이집트의 남녀들이 화장대에 아주 평범하게 
갖추고 있던 빗은 머리카락을 빗는 것과 특정한 머리 형태를 보존하는 빗 두 가지였다.
  고고학자들은 모든 고대 문명이 실제로 각각 독자적인 빗을 개발하여 자주 사용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모든 문명 가운데 브리튼인은 제외된다.
  영국 제도 연안에 살고 있던 브리튼인들은 전혀 손질을 하지 않은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 
있었다. 이용 기술이 발달한 로마인의 점령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빗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789년 데엔인의 침입 뒤의 일이다. 800년대 중반까지 데엔인들은 영국 전역에 정착했다. 
연안의 브리튼인들에게 머리를 깨끗이 빗질하는 것을 가르친 것은 그들이었다.
  초기 기독교 시대에 머리를 빗는 일은 종교 의식의 일부로 발을 씻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식적으로 행해졌다. 만과를 앞에 두고 사제가 성구실에서 머리를 빗을 때의 올바른 방법을 
나타내는 자세한 법도가 있었다.
  기독교 순교자들이 초기 기독교도의 지하 피난소인 카타콤에 빗을 가지고 갔기 때문에 
그곳에서 상아나 금속제 빗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종교사 연구가는 빗에 어떤 시기의 뭔가 
상징적인 의미가 있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하면서 중세 시대 교회의 가장 오래 된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에 빗이 분명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 불가사의한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빗에는 마력도 따라다니고 있었다.
  1600년대 유럽 각지에서는 납으로 만든 빗으로 자주 머리를 빗으면 백발이 원래의 색깔로 
되돌아간다고 널리 믿어지고 있었다. 실제로 무척 작은 양의 부드럽고 질이 나쁜 검은 납이 
머리카락에 붙어 조금이나마 검게 되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납으로 만든 빗을 
사용하고 있던 사람이 염색을 해서 그것을 빗의 탓으로 돌렸다고 생각하는 쪽이 더 타당한 
듯하다. 
  이 추측을 지지하는 것으로 1600년대 말 20__30년 동안 '납빗'이라는 말이 '그는 납빗을 
사용하고 있다'는 용법으로, 백발을 염색한다는 뜻의 완곡한 표현으로 사회적으로 널리 받아 
들여졌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빗의 디자인에 본격적인 변화가 나타난 것은 1960년, 가정용 첫 전기 스타일링 컴이 
스위스에서 고안된 해였다.
  길고 반듯한 장식용 핀 '보드킨(머리를 묶는 핀)'은 그리스와 로마 여성들이 머리카락을 묶는 
데 사용했다. 고대인이 사용하던 것과 같은 형태와 기능을 갖고 있는 핀을 현대에도 많은 미개 
민족들이 사용하고 있다. 몸이 작은 동물의 뼈나 엉겅퀴의 줄기를 그대로 모방한 것들이다.
  고대 아시아의 묘지에서는 뼈, 철, 청동, 은, 금으로 만든 머리핀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 
대부분은 단순한 것이지만 장식이 멋진 것도 있다. 아무튼 1만년 동안 머리핀의 형태에 아무런 
변화도 없었던 것은 분명하다.
  클레오파트라가 애용한 머리핀은 길이 17센티미터의 상아제로 보석이 박혀 있었다. 로마인은 
머리핀 속을 비게 만들어 독을 숨겼는데, 클레오파트라가 독으로 자살할 때 이용했다는 핀과 
똑같은 디자인이다.
  반듯한 머리핀이 200년에 걸쳐서 U자형의 보비핀으로 변신했다.
  17세기 프랑스의 궁정에서 가발이 크게 유행했는데 그 가발을 쓰려면 자신의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든가 핀으로 단단히 붙여야 했다. 그렇게 자신의 머리카락을 짧게 해야 가발을 보기 좋게 쓸 
수 있었고 만약 벗겨지는 경우에도 흉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긴 스트레이트 핀이나 U자형 머리핀 
모두 '헤어핀'이라고 불렀으나 이어 18세기 영국에서 '보비핀'으로 바뀌었다.
  강력 와이어에 검은 래커를 칠하고 다리가 두 개인 작은 핀이 19세기에 대량 생산되기 
시작하고 스트레이트 핀은 실질적으로 물러났는데 이것이 '보비핀'의 이름을 독점하게 되었다.
  현대의 전기 헤어 드라이어는 전기 청소기와 믹서라는, 전혀 관계없는 두 가지의 
발명품으로부터 탄생했다. 탄생지가 위스콘신 주 라신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전기 헤어 드라이어의 최초의 두 기종인 '레이스'와 '사이클론'은 1920년에 데뷔했다. 위스콘신 
주에 있는 회사인 라신 유니버설 모터 사와 해밀턴 비치 사 제품이었다.
  머리카락을 말리는 아이디어는 전기 청소기의 초기 광고에서 태어났다.
  1910년대는 제품의 다기능성을 주장하는 것이 통례였다. 전기가 사상 최고의 동력원으로 
판매되고 있었기 때문에 특히 전기 제품은 더욱 그런 경향이 있었다. 이 판매 작전이 판매량을 
늘렸고 소비자는 다기능 제품을 기대하게 되었다.
  전기 청소기도 예외는 아니었다. 흔히 공기 청소기라고 부르는 전기 청소기의 초기 광고에는 
화장대 앞에서 청소기의 배기구에 연결된 호스로 머리카락을 말리고 있는 여성을 그렸다. "왜 
당신은 온풍을 낭비하고 있습니까?" 하는 식의 광고 문구는, 청소기가 앞부분은 쓰레기를 
빨아들이고 뒷부분으로 '배기구에서 청결하고 신선한 바람'을 내뿜는다는 것을 소비자들이 
확실히 알게 만들었다. 초기에 청소기의 수요는 그런 대로 높았으나, 많은 여성과 남성들이 
청소기를 어떤 식으로 최대한 활용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을 이용해 머리를 말리는 아이디어가 탄생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손으로 들고 
말리는 전기 헤어 드라이어의 개발이 늦어진 것은 발명가들이 '분마력 모터'라고 부른 효율이 
좋은 소형의 저출력 모터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믹서가 등장한다.
  위스콘신 주의 라신은 최초의 밀크 셰이크용 전동 믹서의 고향이기도 하다. 믹서의 특허 
취득은 1922년의 일이지만 믹서를 작동하기 위한 분마력 모터의 개발 노력은 이미 10년 이상이나 
계속되고 있었는데 특히 라신의 유니버설 모터 사와 해밀턴 비치 사가 힘을 쏟고 있었다.
  이렇게 원리상으로는 전기 청소기와 배기 온풍과 믹서의 소형 모터가 합체되어 현재의 
헤어드라이어가 탄생했고 라신에서 제조되었다.
  초기의 핸드 드라이어는 모습이 이상하고 에너지 효율도 나빴으며 조금 무겁고 과열되는 일이 
잦았으나 그래도 머리 손질에는 전기 청소기보다 편리했다. 그리고 이것이 뒷날 시대의 유행을 
결정하게 되었다.
  1930__1940년대에 개량이 되자 온도나 속도의 조절 기능이 붙었다. 포터블 홈 드라이어의 
독특한 신제품이 1951년 추동판 시어즈 카탈로그에 등장했다. 정가 12.95달러의 이 제품은 핸드 
드라이어와 핑크 색 뚜껑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뚜껑 부분은 드라이어의 배기구와 연결되어 
여성들이 완전히 뒤집어쓰는 구조였다.
  헤어드라이어는 데뷔한 해부터 여성에게 크게 인기를 끌었으나, 남성이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말경이었다. 이 무렵부터 남성이 장발을 했고 머리카락을 말리고 손질하는데 어려움을 
알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헤어드라이어 시장은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향수의 원료는 무엇일까?

  향료는 고대의 성스러운 신전에서 시작된 것으로, 화장품 제조자가 아닌 사제와 관련되어 
있었다. 원래 훈향으로 이용된 그 관습은 오늘날 교회의 예배에 남아 있다.
  향료를 뜻하는 영어 'perfums'은 라틴어 'fume'의 합성어로 '연기를 통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 산 제물 굽는 연기를 좋은 향기에 실어 예배자가 있는 곳까지 풍기는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식량을 구하는 일이 전부였던 사람들이 신에게 바칠 수 있는 최고의 공양물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귀중한 것, 가장 필요한 것, 즉 사로잡은 동물이었다. 그러니까 향료는 동물이 탈 때 
풍기는 악취를 지우기 위한 방취제로 뿌린 것이 그 시작이다. 성경을 보면 홍수에서 살아남은 
노아가 동물을 제물로 굽자 '주님은 그윽한 향기를 맡으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물이 타는 
냄새가 아니라 향료의 냄새였던 것이다.
  이렇듯 신성스러운 방취제에서 나중에는 강한 향기의 방향 자체가 신에게 바치는 공양물이 
되었는데 유향, 몰약, 카시아, 감송 등의 수지를 태우는 것이 사람이 신에게 바치는 최고의 
공양물이었다.
  이렇게 해서 향료는 악취를 없애는 방취제로서의 실용적인 역할에서 이제는 그 자체만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존재가 되었다. 악취를 제거하는 강한 향기는 이제 필요하지 않았고, 사람들은 
상쾌하고 섬세한 과일이나 꽃의 향기를 좋아하게 되었다.
  훈향에서 향수로, 강렬하고 자극적인 냄새에서 은은한 향기로의 변천은 약 6000년 전 중동과 
극동의 양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기원전 3000년까지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인과 나일강 연안의 
이집트인은 문자 그대로 자스민이나 아이리스, 히아신스, 인동 덩굴로 향수 목욕을 했다.
  이집트의 여성들은 몸의 부분마다 다른 향기를 뿌렸다. 클레오파트라는 장미, 크로커스, 
제비꽃에서 채취한 오일인 '캬피'를 손에 발랐고 아몬드 오일, 벌꿀, 시나몬, 오렌지 꽃과 착색용 
헨나로 만든 로션인 '아이기프툼'으로 발에 향기를 냈다.
  고대 그리스의 남성들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좋게 여기며 얼굴에 화장품을 바르는 일을 
피했으나 향료는 무척 좋아하여 머리, 피부, 옷에 가가 다른 향료를 뿌렸다.
  기원전 400년 무렵의 그리스 책을 보면 팔에는 민트, 가슴에는 시나몬이나 장미, 손발에는 
아몬드 오일, 머리와 눈썹에는 마요라나 익스트랙트(extract)를 쓸 것을 추천하고 있다. 멋 부리는 
젊은 그리스인들이 향료를 너무 남용했기 때문에 아테네 민주정치의 틀을 짰던 정치가 솔론은 
아테네 남성에 대해 향료 판매 금지령을 내렸다(물론 곧 폐지되었다).
  향료는 그리스에서 로마로 건너갔다. 로마에서는 적당한 향료를 바르지 않은 병사는 전쟁터에 
나가는 자로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로마 제국이 많은 나라들을 정복하면서 등나무나 
라일락, 카네이션, 바닐라 등의 향료가 들어왔다. 중동과 극동에서 소나무, 진저, 미모사의 방향을 
알았고 그리스에서는 귤, 오렌지, 레몬의 감귤 오일 제조법을 배웠다.
  로마에서 향료 제조업자 조합이 결성되어 남녀 모두에게 최신의 향기를 공급하며 크게 
번창했다. 향료 가게를 'unguentarii'라고 불렀는데 고대 로마의 상점가를 독점할 정도로 많았다. 
이 '연고를 바르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unguentarii'에서 영어의 'unguent(연고)'가 태어났다.
  향료 가게에서 만드는 제품은 기본적으로 세 종류였다. 아몬드나 장미, 마르멜로의 순수 
단일향으로 만드는 연고, 꽃이나 향료나 수지를 짜거나 짓이겨 혼합해 만드는 오일 베이스 액체, 
꽃잎이나 향료를 건조시켜 분말 상태로 만드는 파우더 타입이었다.
  그리스인과 마찬가지로 로마인도 피부와 옷, 가구에 향료를 듬뿍 사용했다. 극장에서조차도 
로마의 풍속에 대해 쓴 18세기 영국의 역사가인 에드워드 기본은 '원형 극장의 공기는 분수대의 
물줄기로 끊임없이 상쾌했고 향료의 향기로운 냄새가 가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세기에 장미물을 크게 유행시킨 로마 황제 네로는 단 하룻밤의 향연에 오늘날의 16만 달러에 
해당하는 4백만 세스테르스의 장미 기름, 장미수, 장미 꽃잎을 자신과 손님을 위해 사용했다. 
또한 65년에 네로가 두 번째 왕비인 포파에나의 장례식에 사용한 엄청난 양의 향료는 
아라비아 전체의 연간 제조량을 초과하는 것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례식의 당나귀에게도 
향료가 사용되었다고 한다.(아마 당나귀는 특히 필요했을 것이다)
  향료의 이러한 남용은 교회를 분노하게 만들었고 향료는 퇴폐와 방탕의 동의어가 되었으며 
2세기에 교회의 성직자들은 기독교도의 개인적인 향료 사용을 격렬히 비난했다.
  로마 제국이 망한 뒤에 향료는 주로 중동과 극동에서 만들어졌다. 11세기에 십자군이 동방에서 
유럽으로 또다시 가지고 들어온 가장 고가의 향수 가운데 하나가 다마스크 장미의 꽃잎으로 만든 
장미 기름인 '로즈어터'로, 날개처럼 가벼운 장미 꽃잎 100파운드를 모아서 만든 것이 겨우 
1온스였다.
  약해지던 유럽의 향료열과 제조에 또다시 불을 붙인 것은 이국적인 향료를 가지고 돌아온 
십자군이었다. 그리고 이때 향료 사상 완전히 새로운 요소인 동물성 향료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약제사들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 동물의 분비물 네 종류는 사향, 용연향, 영묘향, 해구향으로 된 
현대 향수의 기본 에센스가 된다.
  네 종류 모두 생식선 등의 선분비물로 무척 불쾌하여 구토를 불러일으키는 성질을 갖고 있는데 
향수의 원료가 된다는 사실은 쉽게 믿기 어려운 일이다. 그것이 어떻게 향료로 사용되게 
되었는지 그 기원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사향'이라는 이름은 중국 남부의 덤불에 사는 작고 얌전한 사슴인 사코우 사슴(Moschus 
moschiferus)에서 유래되었다. 성숙한 수놈이라도 10킬로그램이 되지 않는다.
  수놈 하복부에는 수코양이가 오줌을 뿌려대는 것과 똑같은 구조의 생식 시그널을 분비하는 
주머니가 있다. 옛날 동방의 수렵꾼들은 몇 백 년 동안 가까운 숲에서 풍기는 달콤하고 진한 
향기를 깨달았고 결국 그 냄새의 근원을 찾아냈다. 그때부터 이 작은 사슴은 계속 쫓겨다니게 
된다. 수렵꾼들은 사슴을 죽이면 그 주머니를 꺼내 건조시켜서 향료업자에게 팔았다.
  사향의 정유는 거의 0,000,000,000,000,095cc의 미량까지 검출이 가능하여 부의 축적에 큰 몫을 
담당했다.
  강한 향기를 발하는 납 상태의 물질인 용연향은 향유고래에서 분비된다. 가장 값비싼 향수의 
원료로 사용되며 사향과 마찬가지로 금과 견줄 만큼 가치가 있다.
  거대한 포유류인 향유고래(Physeter catodon)는 오징어나 날카로운 갑(잉꼬의 부리를 닦는 
용도로 흔히 새장에 넣어진다)을 가진 오징어와 비슷한 연체 동물을 먹이로 삼고 있다. 용연향은 
이 줄톱 같은 갑에서 고래의 장내벽을 보호하기 위해 분비되는 것이다.
  유지 상태로 떠다니는 이 동물은 자주 어부의 망에 딱 달라붙는다. 처음으로 용연향의 달콤한 
냄새를 맡고 그것이 방향을 지속시키는 강한 보류성을 가진다는 것을 안 것은 고대 아랍의 
어부들이었다. 용연향을 섞어 만든 향수는 휘발 속도가 무척 빠르게 진행된다. 오늘날 사향과 
용연향 냄새는 모두 합성이 가능하며, 향수업자는 향유고래의 보호라는 관점에서 용연향의 
구입을 자제하고 있다.
  영묘향은 부드러운 납 상태의 물질로써 아프리카와 극동에 생식하는, 검은 반점이 있고 누런 
털을 가진 야행성 육식 동물인 사향 고양이가 분비한다.
  영묘향은 'Viverra civetta'에 속하는 사향 고양이의 암수 양쪽이 내는 선분비물로 생식기 
근처에 생기며, 포획하여 사육하면 일 주일에 두 번 정도 채취할 수 있다.
  속이 울렁거리게 하는 분취를 가지지만 다른 향수와 섞으면 방향을 내는 동시에 강한 휘발 
보류제로 작용한다.
  고대 극동의 향료업자가 이 사실을 어떻게 발견했는지는 아직도 수수께끼다.
  '해구향'이라는 이름은 옛소련과 캐나다의 해구(Castor fiber)에서 유래하는데, 암수 양쪽의 
하복부에 있는 두 개의 주머니에 모이는 분비물이다. 
  많은 양을 희석하면 해구향 자체가 방향이 되지만 주로 향기를 지속시키는 보류제로 사용된다.
  이상 네 가지 동물성 향료의 공통적인 특징인 강한 휘발 보류성은 그것들의 분자가 무거운 
데서 나온다. 무거운 분자가 닻이 되어, 향수의 향기가 바로 떠올라 공기 중으로 도망치는 것을 
잡아 두는 것이다.

     고대전사들은 전투를 앞두고 매니큐어를 발랐다.

  이탈리아 이발사인 장 바프티스트 펠리너는 향수업으로 성공하려고 1709년에 독일 
쾰른(cologne)으로 갔다.
  그는 레몬 익스트랙트, 오렌지 비터, 배의 모양을 한 뱅가모트 열매에서 채취한 민트 오일을 
알코올 원료로 조합한 오리지널 향수를 만들었다. 이것이 세계 최초의 오드콜로뉴인 '쾰른의 
물'로서 그 이름은 로마 황제인 클라우디우스의 왕비인 아그리피타가 50년에 건설한 도시 
쾰른에서 딴 것이다.
  쾰른은 중세에 3왕의 성궤가 있는 대성당으로 유명했지만 펠리너의 향수 이래 오드콜로뉴의 
일대 생산지로 전 유럽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세계 최초의 오드콜로뉴는 크게 성공했는데 특히 
1700년대 중반의 7년 전쟁 때 쾰른에 주재했던 프랑스 병사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펠리너 가문은 크게 번영했고 그 중 몇 명이 파리로 나가서 다른 향수업을 시작하여 성공했다. 
그것은 1860년대 아르말로제와 샤를르 가레라는 프랑스인 사촌들로 이어졌다. 그들은 펠리너 
제품의 확장을 꾀하면서 두 사람의 이름을 합친 로제가레라는 회사 이름으로 판매를 시작했다. 
이윽고 향수업계에서는 '오드콜로뉴' '오드투알레' '향수'의 의미가 확실하게 정의되었다.
  향수는 한 가지나 한 가지 이상의 향료를 알코올에 대한 부향률 25퍼센트로 에탄올과 브랜드한 
것이고, 오드투알레는 원료는 향수와 같지만 농도가 낮아 향료의 부향률이 약 5퍼센트이며, 
오드콜로뉴는 알코올을 더 섞은 것으로 부향률은 3퍼센트이다. 이 정의는 지금도 적용되는데 
특히 농도가 높은(가격도 높다) 향수에는 42퍼센트까지 향료를 첨가할 수 있다.
  프랑스의 향수 산업 독점은 19세기에 들어서도 계속되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코르시카 출신의 프랑소와 코티는 제1차 세계대전 후에 미국 병사들이 많은 향수를 고향으로 
보내는 것을 보고, 미국인은 프랑스 향수에 사로잡혀 있다고 확신했다. 양을 줄이고 가격도 낮춘 
'코티'라는 상표로 향수를 팔기 시작한 코티는 새로운 소비자층의 인기를 얻어 향수업계에 
처음으로 대량 생산 방식을 도입했다. 또한 장 랑방은 미국인의 프랑스 향수 취향에 편승하여 
'몽페셰'를 만들었는데 파리에서는 파리지 않았으나 '마이 신(나의 죄)'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에 
팔아 순식간에 대성공을 거두었다.
  '마이 신'이 데뷔한 해에 프랑스인 형제인 피에르와 자크 겔랑이 '샬리마르(산스크리트어로 
'사랑의 신전'이라는 뜻)'를 만들어 냈다. 형제는 파리를 방문한 인도 왕자로부터 파키스탄라홀에 
있는 샬리마르 공원에서의 구애 이야기를 듣고 무척 감명을 받아 이 향수를 조합했다.
  전 세계에서 모아온 수많은 꽃을 심어서 향기로운 향기가 주위에 떠도는 샬리마르 공원에서 
17세기의 인도 황제인 샤자한은 무무타즈 마할에게 구애했고 그리고 결혼했다. 황제는 사랑하는 
왕비가 죽자 그녀를 기리며 웅장하고 화려한 타지마할 묘를 세웠다.
  그런가 하면 운수 대통한 패션 디자이너 가브리엘(코코)샤넬은 행운을 숫자의 5번과 연결했고 
1921년 5월 5일 '5번'이라는 상표를 붙인 새로운 향수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당시 판매되고 있던 다른 향수와 달리 '샤넬 5번'은 그때 유행하던 '여성적'인 꽃향기를 
확실하게 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 덕택에 재즈 시대의 '사내 같은' 말괄량이들에게 
인기를 얻게 되었다. 시의적절했고 향기 좋은 이 혁명적인 '5번'은 1천5백만 달러의 이익을 
올렸다. 그녀에게 5번은 행운의 숫자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미국인은 곧바로 이 향수의 포로가 되었다. 마릴린 먼로는 밤에 무엇을 입고 자느냐고 묻는 
저널리스트에게 '샤넬 넘버 파이브'라고 대답했다.
  화장품 가운데 향수와 함께 특히 일부 멋쟁이들이 애용하는 매니큐어는 원래 사회 계급을 
나타내는 상징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일부 여성들만 애용하는 이 매니큐어를 고대 시대에는 
남성들도 사용하고 있었는데, 손가락뿐만 아니라 손톱까지 이상한 도료로 염색하는 것은 기원전 
3000년에 이미 이집트에서 습관적으로 널리 행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정확하게 매니큐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손톱 색깔이 사회적 계급을 나타낸 
중국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인은 기원전 3000년에 아라비아 고무, 계란 흰자위, 젤라틴, 왁스를 섞어서 니스나 에나멜, 
래커를 만들었다. 15세기 명조 시대의 기록에 따르면 왕족의 손톱 색은 몇 백 년 동안이나 
검정과 빨강이었으며, 훨씬 거슬러 올라가서 기원전 600년의 주왕조 시대에는 금색과 은색이 
왕족의 전용색이었다.
  이집트에서도 손톱 색깔이 사회적인 계급을 나타냈는데 빨강 계통이 최고였다. 당시의 종교에 
이설을 주창했던 이크나톤 왕의 왕비인 네페르트이티는 손톱과 발톱을 루비 레드로 물들였고 
클레오파트라는 짙은 빨간색을 즐겼다. 하층 계급의 여성은 엷은 색조밖에 사용할 수 없었다. 
여왕 또는 왕(이집트에서는 남성도 손톱을 물들였다)의 색을 당당하게 사용하는 사람은 없었다.
  남성의 매니큐어는 특히 고위층인 전사들 사이에서 성행했다. 이집트나 바빌로니아, 고대 
로마의 군대 대장들은 전투를 앞두고 몇 시간이나 들여서 머리를 말고 스프레이를 하고 립스틱과 
같은 색깔의 매니큐어를 칠했다.
  이렇게 고대인이 손톱과 발톱에 신경을 쓴 것은 매니큐어를 칠하는 일이 이미 예술의 한 
분야로 확립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화장사 연구가들은 말한다. 그 생각을 증명하는 
공예품이 다수 발견되고 있다.
  남바빌로니아의 울에 있는 왕족 묘가 발굴되었을 때 순금 제의 무수한 소품을 포함한 매니큐어 
세트가 출토되었다. 약 4000년 전 바빌로니아에 살았던 멋쟁이였음이 분명한 귀족의 물건이다.
  이렇듯 아름답게 매니큐어를 바른 손톱은 문화, 문명의 상징이자, 육체 노동을 하는 평민과 
우아한 귀족을 구별하는 한 수단이었다.

     피부미용제는 무엇으로 만들었을까?

  중동의 고온건조한 사막 기후에서 오일이 피부의 수분을 유지하고 건조를 방지하기 위해 
사용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비누가 발명되기 2000년이나 전에 피부에 윤기를 주는 이 
모이스처라이저 종류가 몸의 오염 물질을 제거하는 데 사용되었다. 콜드 크림으로 메이크업을 
지우는 것과 마찬가지다.
  피부의 연화용 오일로는 유향, 몰약, 타임, 마요라나, 과일이나 나무 열매의 에센스가 있었으며 
이집트에서는 특히 아몬드로 향기를 냈다.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는 기원전 3000년의 이집트 점토판에는 피부 상태에 맞춘 특별한 손질 
방법이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에 따르면 기미, 주근깨로 고민하는 여성은 거세한 소의 담즙, 낙타 알을 거품낸 것, 
올리브유, 밀가루, 바다 소금, 식물 수지, 신선한 우유를 섞어서 만든 팩을 했다. 나이에 따라서 
피부의 건조나 주름이 고민인 사람은 우유, 향료, 올리브유, 가젤이나 악어의 똥, 짓이긴 
노송나무의 잎으로 만든 팩을 6일 동안 얼굴에 바르고 잤다.
  그 뒤 몇 천년 동안 이것은 거의 변하지 않고 있다. 오늘날 여성지들을 보더라도 알 수 있듯이 
기미와 주근깨에는 얇게 저민 오이를, 피곤한 눈에는 젖은 티백을, 그리고 벌꿀, 맥아 오일, 
알로에 즙, 캄프리 약초의 미용 팩을 권장하고 있다.
  고대 세계에서는 어린 동물의 생식기가 나이 때문에 늙는 것을 억제하며 성적인 능력을 
유지하는 데 최고의 효과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 최고의 것이 중동에서 송아지의 음경과 
음문을 똑같은 양으로 섞어서 만든 보디 팩이다. 이 팩의 성분과 이름과 젊은 조직의 효능을 
역설하는 내용들은, 어린 양의 태아 세포를 주입하는 유의 현대의 회춘 요법에 비해 특별히 
그로테스크하지는 않다.
  나이와 함께 상실되어 가는 육체의 아름다움과 성적 능력에 대한 현대인의 망집, 그리고 
회춘을 위한 요법이 있을 수 있다는 강한 신앙의 뿌리는 아마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가장 
먼 옛날에 그 발단이 있었을 것이다.
  고대의 수많은 화장품 제조법 가운데 단 하나, 콜드 크림만은 거의 변하지 않고 몇 세기를 
거쳐서 현대에 이르고 있다.
  콜드 크림은 왠지 차갑다. 콜드 크림을 피부에 바르면 다량으로 함유된 수분이 체온을 
증발시켜서 차가운 느낌이 든다. 그래서 차가운 크림, 콜드 크림이다.
  콜드 크림을 최초로 만든 것은 2세기의 유명한 그리스 의사인 갈레노스로 로마에서 개업하고 
있었다.
  서기 157년, 갈레노스는 페르가몬의 검도사 도장의 주임의사로 임명되었으나 로마 왕가의 
치료도 계속하고 있었다. 그는 검도사들을 괴롭히는 악성 감염증이나 농양의 치료약을 처방하는 
한편 귀부인들을 위한 화장품을 만들었다. 그가 쓴 "약재 처방론"에는 콜드 크림을 만드는 
방법으로 흰 밀을 세배의 올리브유(장미의 꽃봉오리를 담근 것)로 녹여서 '거기에 딱딱해질 
때까지 물을 섞는다'고 쓰여 있다. 피부를 유연하게 하고 깨끗하게 한다는 콜드 크림의 
대용물로는 양모지와 당시에 데스품이라고 부른 라놀린을 추천하고 있다.
  고대의 대부분의 화장품에는 유독 물질이 재료로 함유되어 있었으나 오랜 세월 동안 콜드 
크림만은 단순하고 가장 안전한 화장품 가운데 하나였다.
  좀더 근대로 오면 초기의 시판 콜드 크림 가운데 3종이 순도와 안정성 그리고 모든 계층의 
여성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가치를 가진다.
  1911년 함부르크의 독일인 약제사인 H. 바이엘스도르프는 피부에 습기와 영양을 준다는 콜드 
크림의 변종을 만들어 냈다. '니베아'라고 이름 붙인 이 제품은 순식간에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고 
당시의 전 세계 여성이 사용하고 있던 끈적거리는 크림을 대신했다. 니베아는 지금까지 
본질적으로는 최초의 제조법 그대로 만들어져 판매되고 있다.
  '자겐스 로션'은 원래 뛰어난 한 벌목꾼의 작품이었다. 네덜란드에서 미국으로 이민간 28세의 
앤드류 자겐스는 제재업에서 모은 돈을 투자할 대상을 찾고 있었다. 그리하여 1880년 신시네티의 
비누 제조업자와 합명회사를 만들어 고급 화장비누의 제조에 들어갔다.
  제재업에 종사할 때 핸드 로션의 고마움을 절실하게 느꼈던 자겐스는 스스로 로션을 제조했고, 
그것에 자신의 이름을 붙였다.
  세상은 마침 여성들이 화장품을 직접 만들지 않고 시판되는 화장품을 사용하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자겐스에게 그보다 좋은 기회는 없었다. 자겐스 로션은 사회 계급의 벽을 깨뜨리고 
빅토리아조 풍의 대저택 화장대 위에도, 소박한 집의 싱크대 옆에도 언제나 똑같이 놓이게 
되었다.
  알맞은 가격으로 널리 사용된 세 번째의 크림 '노그제마'는 교장선생님에서 약제사로 전업한 
메릴랜드의 한 사나이가 만들었다.
  1899년에 메릴랜드 대학의 약학과를 졸업한 조지 번딩은 볼티모어에 약국을 개업했다. 당시에 
스킨 크림의 판매는 대단한 호조를 보였기 때문에 번딩은 가게 안쪽에서 자신이 직접 조합해 
청색의 작은 캔에 담은 크림을 '닥터 번딩의 선탠 크림'이라는 상표를 붙여 팔기 시작했다.
  파라솔 없이는 햇빛이 비치는 곳으로 절대 나가지 않는 여성들이 이 크림을 사러 몰려들었다. 
번딩은 자신이 만든 제품의 효과를 재평가하고 사람들이 깜짝 놀랄 만한 이름은 없는지 여러 
가지 말이나 문구를 라틴어와 영어로 만들어 보았으나 이렇다 할 것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남성 고객이 가게로 들어오자마자 선탠 크림이 습진(에그제마)에 놀랄 
정도로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이 우연한 얘기에서 '닥터 번딩의 선탠 크림'은 '노그제마'(노 
에그제마의 뜻)로 바뀌어 태어났다.
  그리하여 선탠용 콜드 크림이 백만 달러짜리 사업의 토대가 되었다.

     인류 최초의 거울은?

  깨끗한 웅덩이의 잔잔한 수면이 인류 최초의 거울이었다.
  그런데 기원전 3500년경 청동기 시대가 되자 금속을  닦아서 만든 거울이 사랑을 받았다.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인들은 청동 거울을 단순한 나무나 상아 또는 금 손잡이에 끼웠다. 
이집트인들은 동물이나 꽃, 새를 조각하여 디자인이 멋진 손잡이를 만들었다. 이집트의 묘지에서 
발견된 많은 거울들을 보면, 옛날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을 받은 손잡이는 사람이 청동 거울을 
머리 위로 받치고 있는 디자인이었다고 생각된다.
  금속 거울은 이스라엘인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있었다. 그들은 이 기술을 이집트에서 배웠다. 
모세는 이동 신전을 위해 제식용의 커다란 대야를 만들 때 이스라엘 여성들에게 거울을 내놓도록 
했고 그것을 '놋쇠 대야' '놋쇠 받침'이라고 했다.
  기원전 328년에 그리스에 거울 가공 기술학교가 만들어졌다. 그곳에서 학생들은 금속판의 
반사면을 상처를 남기지 않고 모래로 닦는 정교한 기술을 배웠다.
  그리스의 거울에는 원반형과 상자형 두 종류가 있었다. 원반형 거울은 표면이 깨끗이 닦였고 
뒤에는 조각이나 부조 장식이 있었으며 테이블에 세울 수 있도록 다리가 하나 달려 있었다.
  상자형은 두 장의 원반형 거울이 조개처럼 닫히도록 만들어졌고 한 장은 깨끗이 닦은 것, 또 
하나는 닦이지 않은 것으로 거울을 보호하는 뚜껑 역할을 했다.
  거울 제조업은 에트루리아와 로마에서 크게 번창하여 땅에서 파낸 것이나 수입품 등 모든 
금속을 닦아 냈다. 그렇지만 거울의 재료로는 은이 애용되었다. 은이 가지는 중간색이 얼굴의 
메이크업 색조를 바꾸지 않고 비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기원전 100년경 금 거울이 열광적인 인기를 불러일으켰다. 대부호의 집에서는 하인의 
우두머리가 자신의 전용 금 거울을 요구할 정도였고, 많은 하인들은 임금의 일부로 거울을 
지급 받았다고 옛 기록은 전한다.
  중세까지 남녀 모두 선조가 사용한, 금속을 닦은 거울로 만족하고 있었다. 하지만 1300년대에 
들어서 화장대의 필수품인 이 거울에 일대 혁명이 일어났다.

  유리는 기독교 시대가 시작될 때부터 형틀이나 입으로 불어서 병이나 컵 또는 장식품으로 
가공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1300년 밀라노에서 베네치아의 유리를 부는 기능공에 의해 유리 
거울이 탄생했다. 
  유리를 부는 기술은 예술의 극치였으며 기능공들은 항상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베네치아에서 유리를 불 만큼 최고의 기술을 가지고 있더라도 유리 거울 제작은 어려운 
일이었다. 금속과 달리 유리는 모래로 닦아도 쉽게 반사면이 깨끗해지지 않았고, 형틀에 
흘려 보내는 완전한 판유리를 만들 필요가 필요가 있었다. 이 기술이 처음에는 미숙했기 때문에 
초기의 유리 거울은 얼굴을 희미하게 일그러지게 비추었다. 하지만 유리 거울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무척이나 가지고 싶어했다.
  14세기의 베네치아에서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아니라 타인의 눈에 비치는 자신의 
이미지가 최고로 중요한 일이었다. 부유한 남성, 여성 모두 펜던트의 보석 대신 금줄에 유리 
거울을 붙이고 보란 듯이 목에 걸고 다녔다. 거울에 비친 얼굴이 실망할 정도로 심한 모습이라도 
타인의 눈에 비친, 거울을 단 자신의 이미지는 틀림없이 품위 있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남성은 
도검의 손잡이에 작은 유리 거울을 박고 있었다. 왕족들은 상아나 은, 금으로 테두리를 한 유리 
거울을 많이 수집했으나 실제로 사용하기보다는 소유를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당시의 거울은 기능보다 사랑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잘 비추어지지 않았으므로 장식품으로 
사용하는 것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그 후에도 거울의 질은 크게 좋아지지 않았는데, 1687년에 프랑스의 유리 부는 기술자였던 
베르나르 페로가 아주 편편하고 찌그러짐이 없는 판유리의 제조법을 고안하여 특허를 땄다. 
그러고 나서 완벽하게 비추는 유리 거울뿐만 아니라 전체 모습을 볼 수 있는 것까지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거울을 보는 즐거움을 앗아간 커다란 불행이 닥쳤다. 용모를 심각하게 망가뜨리는 
무시무시한 병인 천연두가 1600년대의 유럽에서 맹위를 떨친 것이다.
  한 번 휩쓸 때마다 몇 천 명이 픽픽 쓰러져 죽었고, 많은 사람의 얼굴에는 수두 흔적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보기 흉한 곰보가 되었다. 유럽인 대부분이 많든 적든 지저분한 곰보 자국 
때문에 얼굴의 윤기를 잃고 말았다.
  그리하여 별이나 초승달, 하트 모양을 한 패치(patch ; 한 번에 열 개도 넘게 붙였다)가 곰보 
자국에서 시선을 빼앗는 수단으로 대단한 인기를 모았다.
  패치는 검은 비단이나 빌로드로 눈가, 입가, 뺨, 이마, 목, 가슴에 정성스럽게 붙여졌다.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도 붙였다. 남의 마음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데에는 실로 효과가 있었다고 
전한다. 프랑스에서는 패치를 직설적으로 표현하여 곤충인 '파리' 라는 뜻으로 '무슈'라고 불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비하여 여분용 패치 상자를 만찬회나 무도회에 갈 때 휴대했다. 패치 
상자는 작고 얇았으며 뚜껑 안쪽에 작은 거울이 붙어 있었다. 현대 콤팩트의 전신이었던 것이다.
  패치를 붙이는 일은 무언의(하지만 매우 알기 쉬운) 언어로까지 발전했다. 여성의 입가에 붙인 
패치는 바람을 피우고 싶다는 신호, 오른쪽 뺨은 기혼, 왼쪽 뺨은 약혼중임을 의미했고 눈가의 
패치는 가슴에 숨긴 정열을 나타냈다.
  1796년 의학적인 차원에서 패치의 필요성은 없어졌다. 영국의 한 시골 의사인 제너가 농촌의 
여덟 살짜리 소년에게 가벼운 천연두라고 할 수 있는 우두를 접종했던 것이다. 천연두를 
예방한다는 우두 접종설을 실험한 것이다. 접종 후 곧이어 소년에게 가벼운 발진이 나타났다. 
그것이 사라지자 제너는 더욱 위험한 천연두를 접종했다. 소년에게는 아무런 증상도 나타나지 
않았다. 면역이 생긴 것이다.
  제너는 이 처치를 우두를 뜻하는 라틴어인 'vaccinia'에서 이름을 따 'vaccination(종두)'이라고 
이름지었다. 우두 접종이 유럽 전역으로 급속히 확산됨에 따라 천연두는 사라졌고, 패치는 
가리개용 필수품에서 멋부리는 화장용품으로 변해 갔다.
  멋부리는 화장품인 패치에서 펜슬로 그리는 점이 탄생했다. 그리고 이제는 텅 비어버린, 
보석을 박은 패치 상자에는 딱딱한 파우더가 들어가게 되었다.

     5. 스칼렛은 배꼽티를 좋아했다

     스칼렛은 배꼽티를 좋아했다?

  원작소설보다 영화로 더 유명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여주인공 스칼렛 오하라를 기억할 
것이다. 얄미우리만치 당차고 저돌적이고 거침없는 그녀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위해서는 남들의 
곱지 않은 시선도 무시해 버리는 그 시대의 신세대였다.
  남녀의 공식적인 만남의 장소인 파티장에 가기 위해, 스칼렛은 유모의 도움을 받아 코르셋으로 
허리를 있는 대로 졸라맸다. 그렇게 졸라맨 그녀의 허리는 남자 주인공역을 맡은 배우 클라크 
케이블의 두 손 안에 들어갈 정도로 가늘었다는 얘기가 있다. 그 위에 사람 다섯은 들어갈 만한 
폭 넓은 드레스로 몸을 감쌌다.
  인상 깊은 것은 그 다음 장면이다. 가슴이 깊이 파이고 어깨에 프릴이 많이 달린 그 드레스. 
그녀는 어깨를 조금이라도 더 드러내려고 기를 쓴다. 정숙한 여성은 아무도 그러지 않는다는 
유모의 애원 섞인 핀잔도 무시한 채 말이다. 파티장에서 그녀는 뭇남성들에게 가장 주목받는 
여성이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오늘날 그녀의 후손들은 배꼽을 드러내고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팬티보다 5센티미터쯤 더 
내려오는 핫팬티와 함께.
  1960년대 초 영국 마리퀸트가 '어머니와 같은 옷입기'를 거부한다는 선언을 한 이후 
지구촌에는 미니 선풍이 불어닥쳤다. 곧 프랑스의 한 디자이너는 '옷으로부터의 해방'을 
내걸고 노브라를 제안했다.
  거리에는 슬립처럼 어깨를 가느다란 끈으로 처리한 '슬립형 미니' 원피스나 등을 과감히 
드러낸 배꼽티에 슬리퍼를 신은 젊은 여성들의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어깨나 가슴 부분을 파거나, 속옷 패션, 앞 단추를 몇 개 푸는 식의 노출 면적 확대는 머지 
않아 투명 소재를 통해 가슴을 엿볼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데까지 발전했다.
  이런 노출 패션에 재미를 더하는 요소는 신발이다. 슬리퍼 등 뒤축이 없는 여름용 신발 
못지 않게 발목이나 무릎까지 올라오는 워커 부츠 같은 겨울 신발이 각광받고 있다. 그야말로 
계절 파괴이다.
  노출 패션이 성숙하고 세련된 여성미를 표출하려는 욕망과 관계 있다면, 베이비돌(baby doll) 
스타일은 귀엽고 천진난만한 소녀의 느낌을 표현한다. 여성들의 두 가지 욕망이 옷차림에 
교차해서 드러나는 것이다.
  몸매를 그대로 드러내 섹시함과 여성스러운 느낌을 최대한 살린 노출 패션 스타일과는 달리 
베이비돌 룩은 소녀다운 건강한 이미지와 인형 같은 귀여운 분위기를 연출해 낸다. 목의 선을 
깊이 파내고 아기자기한 단추나 레이스, 프릴 외에는 장식을 거의 하지 않는 미니 원피스 차림의 
한껏 어려 보이는 소녀들이 배꼽을 드러낸 섹시한 여성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그 밖에도 얼룩무늬 군복의 밀리터리 룩, 엉덩이에 살짝 걸친 바지가 신발까지 덮는 힙본 룩, 
속옷도 겉옷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언더웨어 패션, 가슴이 팽팽하게 드러나는 글래머룩 등 
다양한 패션이 눈을 즐겁게 또는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있다. 또한 햇빛에 눈을 보호하던 
선글라스는 여성들의 머리띠 대용으로 쓰이고 있으며, 갖가지 색으로 염색한 머리는 세계화에 
발맞추는 것인가. 미인의 상징이던 하얀 피부는 한물가고 건강미 넘치는 구리빛 피부가 그 
자리를 대신해 선탠 전문점이 성업하고 있다.
  강아지도 패션 소품으로 만드는 감성, 표현하지 않는 감각은 감각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자신감에는 개성과 자기 만족, 모방, 유행에 대한 부화뇌동이 뒤섞여 있다.

     파리의 비키니 수영복 대회

  수영복이 하나의 특별한 의상으로 탄생한 것은 1800년대 중반이다.
  그때까지 수영이나 물놀이는 그다지 인기 있는 레크리에이션이 아니었다. 그래서 남성이든 
여성이든 수영을 할 때는 내복이나 알몸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떤 이유로 수영이 환영받게 되었고 수영복의 필요성이 생겨났을까? 1800년대 유럽의 
의사들은 '마음의 우울함'을 고치는 레크리에이션으로서 수영이 효과적이라며 권유하기 시작했다. 
'마음의 우울함'이라는 말에는 상사병 같은 한때의 심심풀이부터 결핵성 수막염처럼 죽음이 
확실한 증세까지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것을 고치는 것이 광수, 샘물, 바닷물 등의 '물'이라는 
것이었다. 이로써 몇 세기에 걸쳐 온몸을 물에 적시는 일은 죽음과 같다고 생각하고 있던 
유럽인이 몇 천 명씩 호수나 시냇가나 해변을 돌아다니면서 흠뻑 젖어 물놀이를 하게 되었다.
  이 수요에 발맞춰 등장한 수영복은 외출복의 디자인을 모방했다.
  예를 들어 여성용 수영복을 보면 천은 플란넬이나 알파카 또는 서지 등으로 몸에 딱 맞는 
정도였으며, 하이 넥 칼라에 팔꿈치까지 오는 소매, 무릎까지 내려가는 스커트 밑으로 블루머, 
검은 스타킹, 마포로 만든 낮은 운동화를 신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두터운 천으로 만들어진 수영복이 물에 젖으면 입고 있는 사람 자신의 몸무게만큼 
무거워져서 익사 사고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영국과 미국의 사고 사망자 기록에 따르면 썰물의 
파도 때문에 익사한 해수욕객이 매우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번거로움이나 위험성 
면에서는 남성의 수영복도 여성의 수영복과 비슷한 형편이었다. 나중에 나온 좀더 가벼운 
'수영용' 수영복과 비교하면 초기의 수영복은 실로 '목욕용' 수영복인 셈이었다.
  1880년 무렵부터 여성들은 '이동 편의 오두막' 덕택에 해수욕을 안심하고 즐길 수 있게 된다. 
트랩과 탈의실이 달린 이 진기한 고안물에는 해변에서 얕은 여울까지 이동할 수 있는 자동차가 
달려 있다. 여성들은 이 오두막 안에서 드레스를 벗고 목 부분을 끈으로 조이게 되어 있는 긴 
플란넬 의상을 입고 트랩으로부터 바다로 내려간다. 게다가 '모디스티푸드(신중함을 위한 햇빛 
가리개)'라고 부른 차양막이 달려 있어서 해변에 있는 남성들의 눈으로부터 여성들을 숨겨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또한 이 이동 편의 오두막에는 '디퍼'라는 여성 감시인이 있어서 
어슬렁거리는 남성들을 내쫓았다.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하기 얼마 전 몸에 딱 맞는 원피스식 수영복이 확산된다. 
하지만 아직은 소매가 달려 있고 길이도 무릎까지 내려오는 모양이었다. 여성용 수영복에는 
치마가 달려 있었다. 그러다가 덴마크계 미국인인 칼 얀센이 직물 기술을 획기적으로 
개량함으로써 대대적인 수영복 혁명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1883년에 덴마크의 오르후스에서 태어난 얀센은 미국으로 이주하여 1913년에 오리건 주의 
포틀랜드 편물 제작소의 공동 경영자가 된다. 이 회사는 울 스웨터나 양말, 챙이 없는 모자 같은 
제품을 생산하고 있었다. 1915년에 얀센은 편물기를 사용하여 신축성이 뛰어나며 몸에 딱 맞고 
가벼운 울 스웨터를 만들려고 시도하여 신축적인 리브 짜기를 고안한다.
  이 울 니트는 스웨터 생산에 사용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포틀랜드 보트 팀의 한 친구가 
얀센에게 더욱 '탄력성'이 있는 경기용 옷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몸에 딱 맞는 리브 짜기로 
만든 얀센의 신축적인 옷은 곧이어 포틀랜드 보트 팀 전원이 입게 되었다.
  포틀랜드 사는 회사 이름을 얀센 편물 제작소로 바꾸었고 슬로건을 내건다.
  "목욕을 수영으로 바꾼 수영복!"
  1930년대에 들어서자 수영복은 노출 부분이 많아진다. 여성 수영복은 어깨끈이 가늘고 등이 
없는 디자인이 되었다가 곧이어 홀더 넥의 윗부분과 팬티로 나누어진 투피스식 수영복으로 
바뀐다. 그 뒤에 등장하는 것이 비키니다. 이 이름 때문에 비키니 패션은 불안정한 시대의 도래와 
영원히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것이 된다.
  1946년 7월 1일 미국은 비키니 환초로 알려진 태평양의 마샬 제도 해역에서 원폭을 투하했고 
평화시의 핵실험을 시작했다. 원폭은 그보다 1년 전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파괴한 것과 
똑같은 것으로 전 세계 매스컴의 주목을 받았다.
  파리에서는 루이 레아르라는 디자이너가 지극히 작은 면적의 천을 사용한 대담한 투피스 
수영복을 발표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 수영복에는 아직 이름이 붙지 않았다. 신문은 온통 
원폭 투하에 대한 기사로 메꾸어져 있었다. 레아르는 자신이 만든 수영복이 매스컴의 주목을 
받기를 원했고 그 디자인의 위력도 폭발적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 사이에 
화제의 중심이었던 '비키니'를 그 이름으로 삼았다.
  원폭 투하 4일 뒤인 7월 5일, 레아르의 톱 모델인 미슐란 베르나르디는 역사상 처음으로 
비키니를 입고 파리의 자동차 도로를 퍼레이드 한다. 1946년은 수영복이 원폭 못지 않게 숱한 
논쟁과 관심 그리고 비난을 불러일으킨 해라고 할 수 있다.

     여성들의 저항의 상징, 바지

  코미디의 주인공으로 묘사된 성 판타레오네(판타로네)의 의상이 판타롱, 그것이 좁아져서 
바지가 되었다.
  성 판타레오는 '모든 것에 자비를 베푼 자'로 알려진 4세기 기독교의 의사이자 순교자다. 로마 
제국 황제인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명령으로 참수된 판타레오네는 베네치아의 수호 성인이 되었고 
그 피(지금도 액체라고 알려져 있다)를 넣은 성 유물 상자는 이탈리아의 바렐로 마을에 남겨져 
있다.
  판타레오네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름이 옷 이름에 붙여진 명예를 얻은 
유일한 성인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도 사실이라기보다는 전설적인 것이다. 판터레오네라는 
이름은 '전부 사자('판'은 전부 '레오네'는 사자)'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 성인은 두뇌 회전이 
빠른 경건한 의사였는데 이탈리아의 전설에서는 기묘하게도 사랑스럽지만 머리가 둔한, 전혀 
성자 같지 않은 인물로 다루어지고 있다.
  이 전설의 이물 판타레오네의 이상한 행동이나 의상으로부터 훗날 팬츠의 이름이 태어났다고 
한다. 판타레오네는 하인을 뼈와 가죽만 남도록 굶주리게 만들었다. 또 신사로서의 체면에 신경을 
쓰기는 했지만 여성을 농락했기 때문에 여성으로부터 노골적인 조소를 받았다. 이런 이야기가 
16세기 이탈리아의 "코미디 아델라루테"에 등장하는 야위고 검고 턱수염을 기른 판타로네에 
도입되었던 것이다. 이 인물은 발목에서 무릎까지는 다리에 딱 붙고 그 위는 페티코트처럼 퍼진 
바지를 입고 있었다.
  코미디는 유랑 극단에 의해 영국이나 프랑스 등에도 전해졌지만 판타로네는 어디서나 매우 
특색 있는 이 바지를 입은 채 나타나는 것이었다. 프랑스에서는 이 인물과 바지를 
'판탈롱(pantalon)'이라고 불렀고 영국에서는 '팬터룬(pantaloon)'이 된다. 셰익스피어는 
"멋대로"에서 이 영국식 이름을 더욱 유행시켰다.
  팬트룬은 18세기에 들어(이미 이 무렵까지는 무릎 길이의 바지로서 한 스타일을 확보하고 
있었다) 미국에 상륙하자 축소되어 '팬츠(pants)'라고 불리게 된다.
  성 판타레오네가 돌고 돌아 팬츠라는 이름의 의상 제공자가 되었으며, 고대 켈트인은 남성의 
발을 덮는 의상으로 'trews'라는 말을 사용하여 이것이 바지(trousers)가 된다. 또한 로마인은 
헐렁한 바지를 뜻하는 말인 'laxus'를 사용했는데 '넉넉한'을 뜻하는 이 말에서 
'슬랙스(slacks)'가 태어난다.
  그런데 이렇게 옛날에 발을 덮던 의상에는 아직까지 주머니라는 편리한 것이 붙어 있지 
않았다.
  주머니만큼 단순하고 게다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 1500년대 말까지 없었다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그때까지 사람들은 돈이나 열쇠, 약간의 신변 잡화는 작고 깨끗하게 포장하여 
임시로 쓰는 가방에 넣거나 옷의 어딘가에 적당한 부분에 넣고 다녔다.
  1500년대의 남성이 흔히 소지품을 넣은 곳은 코드피스(바지의 터진 앞부분을 숨기기 위한 
장식용 봉지)였다. 이것이 나중에는 너무 커져서 우습고 성가시게 되어 못쓰게 되지만 원래는 
바지의 터진 앞부분을 숨기는 편리한 덮개(단추 가리개)로 태어난 것이다.
  당시의 패션에서 이 덮개에는 천을 넣는 것이 관례였으므로 남성의 귀중품을 싼 천조각을 
넣기에는 안성맞춤의 장소였다. 코드피스가 유행하지 않게 된 뒤로도 이 천만은 살아남았다. 
윗부분을 끈으로 조여서 작은 가방으로 만들었고 허리에 매달았던 것이다. 이렇게 천이 주머니로 
변모해 가고 있었다. 
  바지에 처음으로 주머니가 나타난 것은 1500년대가 끝날 무렵이다.
  주머니가 될 때까지는 2단계의 진전이 있었다. 우선 처음에는 남성이 몸에 딱 맞는 바지의 옆 
봉제선을 터서 이곳에, 필요한 물건들을 넣은 천으로 만든 작은 봉지를 넣었다. 그리고 곧이어 
바지와 떨어져 있던 작은 봉지가 바지에 영구적으로 붙게 되는 것이다.
  주머니가 한번 붙자 매우 편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음 세기로 들어서자 주머니는 남녀 
모두의 케이프나 코트의 주요한 디자인이 된다. 처음에는 코트의 소매 부분에 붙던 주머니가 
곧이어 허리 부분에 붙게 된다.
  멜빵(서스펜더)은 바지를 매달아 올리기 위해 사용되기 전까지는 양말 고정용으로 장딴지에 
감아서 사용했다. 당시의 양말은 흘러내리지 않을 만큼 신축성이 없었다.
  멜방이 나타난 곳은 18세기 영국이다. 어깨에 거는 단추로 바지에 고정시킨 영국식의 이 
패션을 채택해서 이름 그대로 '서스펜더'(거는 것)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18세기의 뉴잉글랜드 
사람들이었다.
  초기의 브리치스(무릎 길이의 반바지)와 마찬가지로 니커보커스는 넉넉한 바지로서 무릎 바로 
밑에서 주름을 잡아 조였다.
  '니커보커스'라는 이름은 뉴암스테르담(지금의 뉴욕 시)의 초기 이주자들에게 많았던 
네델란드인의 성인 니커보커에서 온 말이다. 그들이 즐겨 입고 있던 것이 넉넉한 바지였다. 
하지만 이 별명이 붙은 것은 19세기의 작가인 워싱턴 어빙이 작품 속의 작가인 디트리히 
니커보커를 탄생시킨 뒤의 일이다.
  어빙이 1809년에 쓴 유머러스한 두 권의 작품"세계의 시작부터 네델란드 왕조 끝까지의 뉴욕 
역사"속에서 네델란드계 시민인 니커보커는 무릎 바로 밑을 버클로 조인 브리치스를 입은 
네델란드인에 대해 쓰고 있다. 이 책에는 여러 가지 일러스트가 실려 있는데 그 가운데에서 
미국인들은 특히 소년용 바지를 흉내냈던 것이다.
  옛날에 전 유럽 남성이 입고 있던 몸에 딱 맞는 타이츠 형태의 바지와 비슷한 '레오타드'는 
19세기 프랑스인인 주르레오타드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레오타드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몸에 딱 달라붙는 의상을 입고 공중제비를 함으로써 
묘기와 돋보이는 의상 두 가지로 관객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많은 여성팬을 가졌던 레오타드가 남성들에게 남긴 충고 한마디,
  "부인들에게 사랑 받고 싶으면 자신의 가장 훌륭한 곳을 숨기지 않도록 좀더 자연스러운 
의상을 입어야 한다."
  발목 부분에 주름을 잡은 헐렁헐렁한 바지에 벨트가 달린 짧은 웃옷은 1851년 뉴욕 주에 살던 
아메리아 젱크스 블루머가 선보인 스타일이다.
  친구인 엘리자베스 스미스 밀러의 팬츠룩을 흉내낸 이 남성용 옷은, 여권 신장론자이며 
사회개혁가인 스잔 B. 앤소니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블루머 부인의 이미지와 강하게 연결되어 
'블루머'라는 이름이 붙어 버렸다.
  당시에는 남성 의상이었던 바지가 블루머의 마음을 강하게 흔들었다. 블루머는 당시의 커다란 
후프 스커트(원래는 스커트 허리가 소매까지 펼쳐진 17세기의 퍼지게일)가 부도덕하고(임신을 
숨기기 위해서 고안된 스커트라고 부르기도 했다) 바람이 들어가 입는 것이 성가시고 화장실에서 
불편하다며, 여성의 복장 개혁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1840년대에는 탄력이 있는 린넬과 말털로 짠 크리놀린(버팀살을 넣어 부풀게 만든 
페티코트)이 유행하여 드레스는 더욱 여성다움을 강조하는 나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블루머는 유행하던 드레스 입기를 거부했다. 1851년부터 블루머는 헐렁거리는 바지와 짧은 
웃옷을 입고 사람들 앞에 나서기 시작했으며, 부인 참정권 운동에 참여하는 여성이 늘어나자 이 
바지를 저항을 상징하는 유니폼으로 삼았다. 바지를 입기 시작한 움직임은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유행한 자전거 열풍으로 더욱 성황을 이룬다. 스커트는 자주 자전거의 톱니 바퀴나 
체인에 말려서 가벼운 상처를 입기 쉬웠다. 때로는 커다란 상처를 입기도 했다.
  블루머는 자전거를 탈 때 이상적인 복장이 되었고, 바지를 입는 성별이 결정되어 있던 
그때까지의 긴 전통에 도전하게 되었다.
  블루머처럼 활동성이나 실용성을 강조하며 현대에 들어 세계인의 사랑을 받게 된 것이 바로 
미국에서 탄생한 청바지이다.
  아직 청색도 아니고 바지도 아니었던 무렵의 진스는 데님과 비슷한 능직물 목면으로서 튼튼한 
작업복용 천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이 천은 이탈리아의 도시인 제노바(Genova)에서 직조되었는데 
그것을 프랑스의 직조공들이 제느(Genes)라고 불렀던 데서 '진스(jeans)'라는 이름이 유래했다.
  하지만 청바지의 기원은, 리바이스 스트라우스라는 17세의 미국 이민 재봉사의 전기 자체라고 
할 수 있다.
  1850년대 골드 러시의 전성기에 샌프란시스코로 이민간 스트라우스는 텐트나 포장마차에 크게 
필요하던 캔바스 천을 팔고 있었다. 재주 있는 장사꾼이었던 스트라우스는 광부들의 바지가 금방 
해지는 것을 알아차리자, 자신이 가지고 있는 튼튼한 캔버스 천으로 오버올(아래위가 한데 붙은 
작업복)을 만들어 보았다. 이 바지는 천은 딱딱하고 거칠었으나 수명이 길었으므로 스트라우스는 
재봉사로 성공하게 된다.
  1860년대 초기에 스트라우스는 캔버스 천을 프랑스의 님에서 짠 좀더 부드러운 데님으로 
바꾼다. 이것이 유럽에서 '서지 드 님(serge de Nimes 님산 서지)'으로 알려진 천으로 미국에서 
'데님(denim)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나아가 스트라우스는 이 데님 바지를, 더렵혀져도 눈에 띄지 않는 짙은 감색으로 염색했다. 
인기는 배로 늘어났다. 카우보이들은 몸에 딱 붙게 하려고 스트라우스의 바지를 입은 채 말의 
물통 속으로 뛰어들었다가 나와 햇빛 속에 누워서 천이 마르며 줄어들기를 기다렸다.
  데님 바지는 튼튼하고 잘 찢어지지 않았지만 광부들은 장비가 무거워 자주 주머니의 봉제선이 
찢어져 버린다고 불평했다. 스트라우스는 이 문제를 러시아에서 온 유태인 재봉사 야곱 
데이비스의 아이디어를 빌려서 해결한다.
  1873년에는 구리로 된 리벳이 주머니 이음새마다 붙었고, 광부가 금을 구분하느라 쭈그려 앉을 
때 가랑이의 봉제선이 찢어지지 않도록 앞부분 끝에도 또한 붙였다.
  그런데 가랑이의 리벳은 다른 문제를 일으켰다. 모닥불 바로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있으면 
리벳이 뜨거워져서 화상을 입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가랑이의 리벳은 달지 않게 되었다.
  주머니의 리벳은 1937년까지도 계속 붙였었는데 이때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미국에서는 많은 아이들이 한결같이 청바지를 입고 학교에 갔는데 교장은 엉덩이 주머니의 
리벳이 목재 책상이나 의자를 후벼파서 더이상 수리가 힘들 정도로 상하게 한다고 보고했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주머니의 리벳은 제거되었다.
  완전히 실용성만을 생각하여 태어난 청바지는 1935년에 패션 상품이 된다. 이 해의 "보그"지에 
두 명의 사교계 부인이 몸에 딱 달라붙는 청바지를 입은 광고가 실렸고 이것이 '웨스턴 
시크'라는 유행의 발단이 되었다.
  그렇지만 이 유행은, 1970년대에 들어서 디자이너 청바지의 유행이 시작될 때까지는 한동안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애용되었다. 그러나 작업복으로 태어난 바지가 또다시 외출용으로 바뀌자 
바야흐로 거대한 산업을 낳게 되었다.
  디자이너 청바지 전쟁이 한창일 때는 캘빈 클라인의 청바지는 값이 무려 50달러나 
됐는데도(어쩌면 바로 그 이유 때문에)일 주일에 25만 벌씩 팔리는 경이적인 판매고를 보였다.

     바지 때문에 탄생한 옷은?

  패션사 연구가는 허리춤에 넣어 입는 근대의 와이셔츠는, 스커트에 맞추어 블라우스가 탄생한 
것과 마찬가지로 바지에 맞추어서 탄생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 전에는 남성용이든 여성용이든 '셔츠'란 몸 전체를 덮는 것으로서 무릎 또는 무릎 아래까지 
내려왔으며 허리를 벨트로 조였다. 바지와 뒤이어 나온 스커트의 등장으로, 허리 밑까지 내려가는 
셔츠는 천을 낭비하는 결과가 되었고 결국 새로운 의상이 필요해졌다.
  처음에는 남성 와이셔츠가 1500년대의 서유럽에 나타났다. 이것은 속옷을 따로 입지 않고 바로 
입을 수 있었다. 1800년대가 될 때까지 표준적인 복장으로서의 속옷(언더셔츠)은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블라우스가 나타난 것은 그보다 훨씬 늦은 19세기 후반이다. 넉넉하고 옷깃은 높고 팔이 
길며 팔목은 단단히 조인 스타일이었다.
  여성들이 블라우스를 즐겨 입게 되자 훗날에는 블라우스와 함께 입는 옷인 카디건(스웨터)이 
등장한다.
  앞에 단추가 달리고 옷깃이 없는 울 카디건은 제7대 카디건 백작인 제임스 토마스 블루덴넬의 
이름을 딴 것이다.
  크림전쟁에서 영국군을 지휘하고 있던 블루덴넬은 1854년 10월 25일, 그 유명한 경장비 여단을 
이끌고 싸워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사람이다. 이 사건은 테니슨이 시로 써서 불후의 이야기가 
되었으나, 오늘날 제7대 카디건 백작은 자신이 입어 확산시킨 울 니트 카디건으로만 이름이 
알려져 있다.
  1890년대에 영국의 폴로 경기자가 입는 표준적인 복장은 흰색 린넬 바지, 흰색 울 스웨터에 긴 
팔의 흰색 와이셔츠였다. 와이셔츠에는 크고 반듯한 옷깃이 붙어 있어서 제대로 고정시키지 
않으면 바람에 날리거나 말이 위아래로 움직일 때마다 펄럭였다.
  폴로 경기자는 옷깃이 펄럭이지 않도록 뒤를 고정시켜 달라고 언제나 재ㅂ사에게 주문하곤 
했는데, 두 개의 단추를 달아 고정시킴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1900년 브룩스 브라더스 의료품 회사 설립자의 아들인 존 브룩스는 이 버튼다운 칼라에 
주목했고 '폴로 칼라'라고 이름 지은 새로운 모양의 와이셔츠를 브룩스 브라더스의 상품 라인에 
집어넣었다.
  이 모양은 이제 고전적인 스타일로서 '버튼다운 셔츠'라는 말로 정착했다.
  메리 아가시의 단편소설인 "버튼다운 셔츠를 입은 남자"에서는 원래의 뜻 그대로 사용되고 
있고 코미디 작품집인 "The Button-Down Mind of Bob Newhart(돌대가리 봅 뉴허트)"에서는 
제목이 나타내듯이 비유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옷깃의 이름은 로드바일런 칼라, 피터팬 칼라, 네일 칼라등처럼 그 옷깃을 확산시킨 사람의 
이름을 따서 붙이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폴로 칼라는 버튼다운(옷깃을 버튼(단추)으로 
고정시켰다)이라는 기능 때문에 널리 알려진 것이다.
  폴로 경기가 존 브룩스에게 버튼다운 셔츠를 제작하게 만들었듯이, 보스턴 가방 가게의 
쇼윈도에 장식되어 있던 악어 가죽 옷가방은 프랑스의 인기 테니스 선수인 르네 라코스테에게 
악어 마크가 붙은 셔츠 제작을 착안하게 만들었다.
  1923년 프랑스의 데이비스 컵 팀과 함께 미국 원정 여행을 갔던 19세의 라코스테 선수는 한 
가게의 쇼윈도에 있던 악어 가죽 옷가방을 보게 된다. 그는 미국에서의 시합에 이기면 저 비싼 
가방을 살 것이라고 팀 동료들에게 말했으나 결국 시합에 져서 가방을 사지 못하게 된다.
  팀 동료들은 그를 놀렸고 그 후로 라코스테는 '악어'라고 불리게 된다.
  르네 라코스테는 1929년에 테니스계를 은퇴한다. 4년 뒤에 테니스 셔츠를 디자인하기 시작한 
라코스테는 자신의 별명이었던 '악어'를 상표로 만들어 등록했다.
  오늘날 그의 제품을 '악어(앨리게이터) 셔츠(alligator shirts)'라고 부르고 있으나 사실 이것은 
잘못 부르는 말이다. 라코스테는 자신이 트레이드 마크로 삼은 파충류에 대해 자세하게 조사했다. 
라코스테가 셔츠 상표로 만든 코가 긴 악어는 같은 악어라도 엄밀하게 말하자면 악어목 악어과에 
속하는 크로코다일(crocodile)이며, 앨리게이터는 코가 그다지 길지 않은 악어목 앨리게이터 
아과의 악어인 것이다.

     턱시도의 어원은 '늑대'

  현대 남성들은 스포츠 재킷을 입고 재킷과는 색이나 소재가 다른 바지를 입는데 이런 복장은 
결코 양복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현대적인 정의로 양복이란 웃옷과 바지, 그리고 때로는 베스트가 
갖추어진 옷을 말한다.
  하지만 이것이 본래 양복이라고 부르던 옷의 정의는 아니다. 또한 양복은 비즈니스용 복장도 
아니었다.
  신사용 양복의 전통은 18세기 프랑스에서 소재, 모양, 색이 다른 웃옷, 베스트, 바지를 착용한 
것에서 시작한다. 아주 넉넉하게 재단하여 벗기에 가깝고 형식을 따지지 않는 컨트리웨어로 만든 
옷으로 이른바 '라운지 수트'라고 불렀다. 그러나 1860년대에 들어서자 전체를 똑같은 천으로 
만든 양복이 유행하게 된다.
  컨트리 라운지 수트는 승마용으로 입었다. 재봉사는 흔히 재킷 뒤에 슬릿(자락을 튼 곳)을 
만들어 달라는 주문을 받았는데 이것이 현대 양복의 '백 슬릿'의 시작이다. 실용적인 목적으로 
태어난 특징으로 또 하나가 있다.
  라펠 홀(옷깃 구멍)은 실제로는 단추구멍으로, 추운 날 라운지 수트의 옷깃을 세워 단추에 
고정시키기 위한 것이었고, 장식으로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남성들은 라운지 수트가 매우 착용감이 좋다는 것을 알고 외출복으로도 입기 시작했다. 
재봉사는 재단 방법을 개선했고, 1890년대에는 레저용이었던 라운지 웨어가 훌륭한 비즈니스 
수트가 되었다.
  그리고 19세기 말엽인 이 무렵, 멋쟁이들의 정장인 연미복에 파격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요즘엔 
결혼식이나 파티, 야회복용으로 일반화해 있는 턱시도의 출현이 그것이다.
  턱시도가 지금부터 100년쯤 전에 턱시도 파크라는 한 마을에서 데뷔하던 날 밤, 이 옷은 
정장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말도 안 되는 옷이라고 비난받아야 할 차림이었다.
  1800년대 영국 멋쟁이들에게서 태어난 정장으로 당시의 상식이 되고 있던 블랙 타이와 
연미복으로 보자면, 연미가 없는 이 상의는 분명히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이 상의는 
사회적인 명성과 지위를 갖고 있던 집안 사람이 디자인하고 입었기 때문에 시민권을 얻었다.
  턱시도 이야기는 1886년 여름 맨해튼에서 북쪽으로 약 40마일 떨어진 작은 마을인 뉴욕 주의 
턱시도 파크에서 시작된다. 프랑스계 명문 출신으로 뉴욕인이며 롤리라드 타바코의 후계자였던 
피에르 롤리라드 4세는 정기적인 가을 무도회에서 입는 연미복보다 좀더 간소한 옷을 궁리하고 
있었다.
  롤리라드는 재봉사에게 의뢰하여 당시 영국에서 여우 사냥 의상으로 인기가 높던 새빨간 
승마복을 모방하여 뒤에 붙는 제비 꼬리 모양의 연미가 없는 상의를 몇 벌 만들게 해보았다.
  롤리라드가 이것을 생각해낸 것은 패션 감각이 뛰어난 에드워드 7세가 영국의 황태자로서 
인도를 방문했을 때 너무 더워서 상의의 연미를 잘랐다는 얘기에 자극 받았다는 얘기가 있다.
  그런데 무도회 날 밤 피에르 롤리라드는 갑자기 자신이 디자인한 옷을 입고 갈 생각이 
없어졌다. 그래서 롤리라드 대신 그의 아들과 아들의 친구 몇 명이 검은 연미가 없는 그 디너 
재킷을 입고, 영국의 승마복에서 힌트를 얻은 새빨간 베스트를 입고 참가했다.
  정장에 대해 매우 엄한 격식을 따지던 1880년대에 새빨간 베스트 차림은 그저 사람들을 놀라게 
만드는 것으로만 끝나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토지를 롤리라드 일족이 소유하고 있던 마을에서 일어난 일인 데다가 더욱이 그것을 
디자인한 사람이 롤리라드였고 그 아들이 입었다는 점 때문에, 시선을 끄는 이 의상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강하게 남아 있었는지도 모른다.
  롤리라드 집안이 갖고 있는 권위 때문에 순식간에 모든 사람들이 이 약식 의상을 흉내내게 
되었고 결국에는 표준적인 야회복이 되어 버린 것이다.
  아메리카 포멀 웨어 협회는 롤리라드 집안이 모반이 거액의 부를 벌어들이는 산업을 
탄생시켰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1985년에 턱시도와 그 부속품의 판매 및 대여료는 모두 5억 
달러에 이르고 있다. 턱시도 대여의 80퍼센트는 결혼식용이었지만 다음으로 많은 것은 
고등학교의 댄스 파티용이었다.
  결혼식과 댄스 파티용 턱시도로는 폭이 넓은 사슈벨트의 '카마밴드'가 표준적인 부속품이 
되었다. 이것은 원래 인도 정장의 일부였다.
  힌두어로 '카마르밴드(kamarband)'라는 이 말은 '허리의 밴드'라는 뜻으로 신중함을 
나타냈는데 그 전에는 배 밑쪽에 매고 있었다. 그러다가 허리 위치까지 올라갔는데 
이것을 영국 사람들이 흉내내면서 호칭도 영국식으로 '카마밴드'라고 바꾸었던 것이다.
  턱시도는 물론 그것이 태어난 마을의 이름에서 따왔다. 오늘날 '턱시도'라는 말은 형식적인 
느낌과 매혹적인 이미지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 말은 현재 턱시도 파크라고 불리는 지역에 한때 
살던 아르곤키안 인디언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개척 시대에 기원을 두고 있다.
  아르곤키안 족의 추장 이름이 '늑대'를 뜻하는 '턱시트'(P'tauk-Seet; 'P'는 발음하지 
않는다)였다. 이 추장에게 경의를 나타내는 의미에서 인디언들이 이 지역을 턱시트라고 부르고 
있었다.
  하지만 제국주의자들은 인디언의 말을 귀로 들은 그대로 글자로 옮겼으므로 1765년에 실시한 
토지 조사 기록을 보면 'P' tauk-Seet'를 Tucksito'로 쓰고 있다.
  피에르 롤리라드의 조부가 이 부근의 토지를 손에 넣기 시작한 1800년 무렵에 그 이름은 이미 
턱시도가 되어 있었다.
  이렇게 '턱시도'는 이것을 입는 남성이 모두 늑대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별도로 치더라도 
인디언 말의 '늑대'에서 나온 것이다.

     옛날엔 코를 풀고 어떻게 처치했는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장식품일 뿐 아니라 답답한 남성용 복식품인 넥타이의 기원은 군대에 
있다.
  목에 매는 복식품 기술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기원전 1세기다.
  로마 병사들은 한낮의 더위 속에서 몸을 식히기 위해 스카프를 물에 적셔서 목에 감은 
'포케일'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오로지 실용적인 목적밖에 없는 이 스카프는 실용적으로나 
장식적으로 남성의 표준 장식품이 될 만큼 인기를 끌지 않았던 것 같다.
  남성 넥타이의 기원은 또 다른 군대 습관에서 찾을 수 있다. 1668년 오스트리아 군대였던 
크로아티아 용병 연대 일행이 몸에 린넬과 모슬린 스카프를 감고 프랑스에 나타났다. 스카프가 
'포케일'처럼 한때는 기능적인 것이었는지 아니면 군대 제복에 장식적인 액센트를 주는 
것이었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단지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유행에 민감한 프랑스인 남녀가 
이 아이디어를 매우 마음에 들어 했다는 것뿐이다.
  그들은 목에 린넬과 레이스 스카프를 감아서 앞의 중앙에 묶고 끝을 길게 내린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 프랑스인들은 이 타이를 '크라바트'라고 불렀는데 이 말은 이 멋스러운 
복장을 가르쳐 주었던 '크로아티아인 경기병'을 뜻하는 프랑스어다.
  이 패션은 즉시 영국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사치를 좋아하던 영국 왕 찰스 2세가 스스로 
시범을 보이고 궁정에서 강제로 착용하게 하지 않았거나, 즐겁게 기분전환 할 수 있는 패션을 
요구하는 풍조가 거세지지 않았다면 이 유행은 금방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때 런던 사람들은 1665년에 크게 유행한 페스트와 1666년에 시태를 태워 버린 대화재 때문에 
무척 의기소침해 있었다. 스카프 열풍은 런던 대화재의 불꽃처럼 순식간에 온 도시를 휩쓸고 
지나갔다.
  유행은 다음 세기의 멋쟁이인 포우 브란멜의 등장으로 더욱 붐을 이룬다.
  브란멜은 크고 화려하게 묶은 넥타이와 그것을 신식으로 매는 방법으로 유명해졌다. 실제로 
넥타이를 어떻게 잘 매는가 하는 것은 남성들에게 큰 문제여서 끊임없이 검토되고 논의되고, 
숱한 매체들이 앞다투어 논쟁을 일삼을 정도였다.
  당시의 패션 관계 출판물에는 넥타이를 매는 방법이 서른 두 가지나 실려 있다.
  넥타이 이름과 매는 방법에는 유명인 이름이나, 영국의 애스콧 경마장처럼 사교장이 된 장소 
이름이 붙여졌다.
  그때부터 넥타이는 벨트에 닿는 긴 것, 나비 넥타이처럼 짧은 것, 단순한 것, 누빈 것, 끈처럼 
가느다란 것, 가슴의 폭 만큼 폭이 넓은 것 등 여러 가지 형태로 계속 인기를 유지해 오고 있다.
  '보우 타이'(나비 넥타이)는 1920년대에 미국에서 보급되는데 역시 크로아티아인이 시작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패션사 연구가들은 오랫동안, 자그마하고 붙이고 떼는 것이 손쉬운 보우 타이가 긴 넥타이의 
한 종류로 태어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크로아티아 지방에서는 몇 세기에 걸쳐서 보우 타이가 남성 의상의 일부였다는 것이 
드러났다.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사각 손수건을 대각선으로 접어서 나비처럼 묶은 것을 끈으로 
목에 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초기 넥타이의 한 형태로 사용되기도 한 이 손수건은 언제부터 사람들의 손에 들려지게 
되었을까?
  15세기에 프랑스인 선원들은 동양에서 돌아오는 길에, 중국인들이 들일을 할 때 폭염으로부터 
머리를 지키기 위해 쓰던 넓고 가벼운 린넬 천을 가지고 왔다.
  패션 감각이 뛰어난 프랑스 여성들은 질이 좋은 이 린넬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리하여 이 천의 
용도와 사용 방법을 만들어 '머리에 쓰는 것'이라는 뜻으로 쿠브르셰(couvrechef)라고 이름지어 
머리를 장식했다.
  영국인이 이 습관을 도입하면서 이름도 영국풍인 커치프(kerchief)라고 부르게 되었다.
  유럽 상류 사회의 부인들은 논일을 하는 중국인들과는 달리 이미 햇빛 차단용 파라솔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손의 커치프는 처음부터 패션적인 장식물이었다. 당시의 수많은 책이나 그림들을 
보면 정성스럽게 장식된 손수건이 웬만해서는 머리에 올려져 있지 않고 눈에 띄도록 손에 들거나 
흔들거나 때로는 은근슬쩍 떨구거나 하는 것으로 보아 이 점은 분명한 것 같다. 금실이나 은실로 
바느질한 실크 손수건 등은 15세기에 무척 값비싼 상품이었으며 귀중품으로 유언장에 기재되는 
일도 많았다.
  영국에 레이스 손수건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엘리자베스 1세 때다. 사랑하는 사람의 
이니셜을 조합한 장식 문자를 넣은 사방 4인치 크기로 한쪽 구석에는 방울을 매달았다. 한때 이 
손수건은 "진정한 사랑을 나타내는 끈"이라고 불렀다. 신사는 사랑하는 여성의 이니셜을 넣은 
손수건을 모자 밴드(모자에 감은 리본)에 단단히 넣어 두었고 여성은 가슴 속에 이 사랑의 끈을 
넣어 두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인이 머리에 쓰던 것에서 손의 커치프인 손수건으로 유럽에서 다시 태어난 
복식품은 도대체 언제부터 코에 사용되기 시작했을까? 아마 손의 커치프가 유럽 사회에 소개된 
뒤의 일이 아닐까? 하지만 당시에 코를 푸는 방법은 지금과는 매우 달랐던 모양이다.
  중세 시대에 사람들은 손으로 힘껏 코를 풀고 무엇이든 가까운 곳에 있는 것으로 닦았던 
모양인데 가장 많이 사용한 것은 옷소매였다. 옛날 에티켓 책은 이것을 정식으로 코 푸는 
방법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고대 로마인은 '땀 천'이라는 뜻의 '스다리움'이라는 천을 가지고 다녔는데 더운 날 땀도 닦고 
코도 푸는 데 사용했다. 스다리움을 사용하는 매우 좋은 습관은 로마 제국의 멸망과 함께 
사라졌다.
  옷소매로 코를 닦는 일을 처음으로 비판한 것은(손으로 코를 푸는 것은 비판하지 않았지만) 
16세기의 에티켓 책으로, 손의 커치프가 대단한 기세로 확산된 시기의 일이다. 1530년에 습관과 
에티켓에 대한 책을 쓴 인문학자인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는 이렇게 충고하고 있다.
  "코를 옷소매로 닦는 것은 무례한 짓이다. 반드시 손수건을 사용하는 것이 옳다."
  16세기 후의 손수건은 차츰 코를 푸는 데 사용하게 된다.
  19세기에 병원균의 공기 전염이 알려지고 기계로 대량 생산된 면포가 싸게 팔리자 손수건으로 
코를 푸는 습관은 급속히 확산된다. 우아하게 손을 장식하던 커치프가 믿음직스러운 실용 
손수건이 된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실용화한 손수건을 넣는 핸드백은 언제부터 사용되기 시작했을까? 고대 
사람들이 처음으로 사용한 핸드백은 위를 조인 봉지처럼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영어로 핸드백이나 지갑을 뜻하는 'purse'의 어원은, 고대인이 가방을 만드는 데 사용한 
짐승 가죽으로 '비르사'(byrsa)라는 그리스어다.
  로마인은 봉지 모양의 백을 뜻하는 그리스어 '비르사'를 그대로 받아들여 라틴어화하여 
'버사'(bursa)라고 불렀다. 프랑스인들은 그것을 '부르스'(bourse)라고 불렀는데 그것이 백이나 
지갑 안의 돈을 나타내게 되었고, 그 후 파리의 증권거래소 이름인 'Bourse'로도 되었다.
  옷에 주머니가 만들어지는 16세기까지 남성과 여성 그리고 아이들도 이런 백을 가지고 다녔다. 
단순히 열쇠나 신변 잡화를 넣는 한 장의 천 조각에 지나지 않은 경우도 있고, 때로는 매우 멋진 
자수에 보석을 박은 것도 있었다.

     모자와 가발의 경쟁사

  머리를 덮는 모자가 영어로 'hat'인데 굉장히 오래 된 집을 나타내는 'hut'와 발음과 철자가 
비슷하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는 아니다.
  서양인들은 몸에 걸치는 의상을 연구하기 훨씬 전에 초가집을 짓고 살았다. 이 초가집 
'해이트'(haet) 또는 '허트'(hutt)는 먼 옛날 사람들을 자연의 위협이나 어두운 밤으로부터 
지켜주는 존재였다. 그리고 그들은 더위나 비 또는 공중에서 떨어지는 것들로부터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쓴 모든 것을 해이트 또는 허트라고 불렀다. 어원학자들은 이것들을 모두 
'피난소'나 '보호하는 것'이라고 번역한다.
  머리를 덮는 것과 오래 된 집과의 연관은 'hat'나 'hut'보다 훨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먼 
옛날에 영국 사람들은 '캐판'(cappan)이라는 골풀 다발로 만든 원뿔꼴 모자를 쓰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캐반'(cabban)이라는 역시 골풀로 만든 오두막에 살고 있었다. 이 두 가지 말에서 
캡(cap)과 캐빈 (cabin)이 태어난 것이다. 말의 발달사를 보면 새로운 이름을 붙일 때 눈앞에 
보이는 사물의 이름을 빌려 오는 예가 많이 있다.
  챙이 있는 모자를 썼다는 기록이 처음으로 나타난 곳은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다. 사냥꾼이나 
여행자들이 태양이나 비를 피하기 위하여 쓴 펠트로 된 이 '페타소스'는 넓은 챙이 있는 
모자인데, 쓰지 않을 때는 끈으로 등에 매달고 있었다. 페타소스는 맨 먼저 에트루리아인, 이어서 
로마인이 쓰기 시작했는데 중세에는 상당히 보급되었다.
  그리스인은 끝을 자른 원뿔꼴의 챙이 없는 모자를 쓰고 있었다. 이집트 모자를 흉내낸 이 
모자는 소재인 '펠트'의 의미에서 '필로스'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모자는 대부분의 유럽 
문화권에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중세 말기 대학이 출현했을 때는 4면 펠트 모자인 '필리우스 쿼터라터스'로 학자 전용 모자가 
되었고 훗날에는 '모르타르보드'(챙의 위가 사각이며 평평하고 장식이 달린 식모)로 졸업식 때 
고등학생이나 대학생들이 쓰는 모자가 되었다.
  지금은 모자가 남성보다 여성에게 인기 있지만 옛날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옛날 여성들은 
거의 모자를 쓰지 않았고 남성들은 실내나 교회 등에서 모자를 쓰고 있었다. 이 습관은 
16세기까지 계속되었으나 16세기에 가발이 유행하고 디자인이 대형화하면서 모자를 쓰는 일은 
아주 불편한 일이 되고 말았다.
  가발 열풍이 식자 남성들은 또다시 모자를 쓰는 습관을 되찾았으나 이제는 옛날만큼의 열의는 
없었다. 그리고 전과는 전혀 반대인 세 가지 습관이 생겨났다. 남성은 실내나 교회나 여성 
앞에서는 결코 모자를 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습관이 정착한 1700년대 말기에 많은 여성들이 모자를 쓰기 시작한다. 리본이나 날개, 꽃 
들을 꽃모양으로 장식하고 테두리를 레이스로 두른 모자였다. 그 전에 유럽 여성들이 쓴 모자는 
실내에서는 장식이 없는 캡 모양이었고 밖에서는 두건 상태 모자였다.
  턱 밑에서 끈으로 묶는 부인 모자는 '보닛'이라고 불렀다. '보닛'이라는 말은 그 전부터 
있었지만 중세 말기까지는 작고 부드러운 모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것이 여성용의 특별한 
모자를 뜻하게 된 것은 18세기에 들어온 뒤부터다. 밀라노는 보닛의 중심지가 되었고 밀라노의 
모자는 전 유럽에서 인기품이 된다. 그래서 모든 부인 모자를 영어로 '밀리너리'(millinery 부인 
모자류)라고 통합해 부르게 되었고, 밀라노의 기능공들을 '밀리너'(milliner 부인 모자 가게)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또 18세기 말엽에는 굴뚝처럼 생긴 검은 모자인 실크 해트가 출현했다.
  런던에서 신사용 장식품 가게를 운영하고 있던 존 에셀린튼은 1797년 1월 15일 황혼 무렵 
자신이 디자인한 새로운 모자를 쓰고 가게에 나타났다.
  런던의 "타임"지는 에셀린튼이 쓴 굴뚝같은 검은 모자가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고 
구경꾼들 사이에 밀고 밀리는 소동이 일어났다고 보도하고 있다. 한 남자는 쇼윈도에서 가게 
안으로 밀려들어갔다고 한다. 에셀린튼은 치안 방해죄로 체포되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한 달도 
지나지 않아서 그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실크 해트의 주문을 받게 된다.
  영국의 복식사가는 에셀린튼의 실크 해트가 세계 최초라고 주장한다. 한편 프랑스의 
복식사가는 실크 해트의 디자인은 에셀린튼보다 1년 전에 파리에서 태어난 것으로 에셀린튼이 
그것을 도용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파리에서 태어났다는 설을 뒷받침할 증거는 프랑스의 만화가인 샤를르 베르네가 그린 
그림 "1796년의 멋쟁이"뿐인데, 에셀린튼의 것과 매우 비슷한 실크 해트를 쓴 신사가 그려져 
있다. 예술가란 원래 시대를 앞서가지만, 이 그림의 제목은 실제 제작 연도보다 옛날 것으로 정한 
것이 분명하다고 영국인들은 말하고 있다.
  페드라는 가벼운 펠트제의 부드러운 챙이 달린 중절모로 1882년에 상연된 프랑스 연극 
"페드라"의 등장 인물이 쓰고 있던 모자에서 따온 이름이다.
  19세기의 파리를 열광시킨 극작가 빅토리안 사르드가 여배우인 사라 베르나르를 위해 쓴 
"페드라"가 새로운 모자의 유행을 낳았던 것이다. 방울과 깃털을 단 페드라는 자전거를 타는 
여성이 좋아하는 모자가 된다.
  파나마 모자는 당연히 중미의 수도에서 그 이름을 따온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이 가벼운 스트로 모자는 파나마초 잎을 가늘게 따서 만든 것으로 페루에서 태어났다. 
파나마는 이 모자의 중요한 유통 센터이기는 했다. 북아메리카의 기술자들이 1914년 파나마 운하 
건설 때 파나마로 와서 이 모자를 만나 파나마제라고 생각한 것이다.
  1780년 제 12대 다비 백작 에드워드 스미스 스탠리는 런던 근처에서 3년생 말들의 경마 
레이스인 다비를 매년 개최할 것을 결정했다.
  그런데 당시 남성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던 모자가 윗부분이 둥근 돔 상태에 가느다란 
테두리가 달린 딱딱한 펠트 모자였다. 이 모자를 다비 백작이 언제나 쓰고 있었으므로 경마 
레이스와 똑같은 '다비 해트'(중산모)라는 이름을 얻었다.
  1860년대 필라델피아의 신사용품 상인이었던 존 B. 스테트슨은 모자 판매로 어떻게든 돈을 
벌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침 중서부에서 휴가를 보내면서 많은 부자 목장 주인들의 일을 눈여겨본 스테트슨은 '목장의 
왕자'들에게 어울리는 커다란 모자를 만들기로 했다. '평원의 주인'이라고 이름 붙인
'텐갤런'(깊고 커서 10갤런이나 들어간다는 뜻에서)의 카우보이 모자가 스테트슨의 사업을 
성공시켰고 이 모자는 서부 개척 시대의 남녀를 상징하는 소품이 되었다.
  버팔로 빌이나 카스터 장군 그리고 톰 믹스도 이 스테트슨(카우보이 모자)을 쓰고 있었고, 애니 
오클레이나 칼라미티 제인도 썼던 것이다.

     6. 마리 앙투아네트와 패션 민주화

     예쁜발 경연대회

  옷 가운데에는 몸을 보호할 목적으로 태어난 것도 있지만 먼 옛날부터 대부분의 여러 가지 
옷들은 지위나 계급,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이었다.
  색이나 모양이나 천 등으로 고승과 평신도, 입법자와 위법자, 지휘관과 사병 등을 구별했던 
것이다. 옷은 문화의 중심적 인물을 기타 대중으로부터 돋보이게 했다. 실제로 지금도 옷만큼 
사회적 계급을 직접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내는 수단은 달리 없다. 소박한 옷차림을 명령한 
검약령 등은 옷이 태어난 시점에서는 전혀 쓸데없는 것이었다. 그 영향이 옷에 뚜렷한(가끔 
특이한) 각인을 주게 되는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이제부터 이야기할 구두도 매우 실용적이면서 옛날부터 신분과 계급의 차이를 확실하게 
나타내는 장식품의 하나였다고 말할 수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신발은 샌들이다. 파피루스를 엮어 만든 신발이 기원전 2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집트의 묘지에서 발견되고 있다. 기후가 따뜻한 지역의 고대인들이 신었던 
샌들에는 여러 가지 디자인이 있었으며 모양도 아마 지금과 다르지 않을 정도로 다양했다고 
생각된다.
  그리스의 가죽 샌들인 '크레피스'는 여러 가지 염료로 염색하고 장식을 박고 금박을 씌운 
것이다. 로마의 '크레피타'는 바닥이 두텁고 옆면은 가죽이고 발등 부분에 끈을 건다. 고르인은 
뒤가 높은 '캠퍼구스'를 좋아했고 쿠어인은 마와 아프리카에서 나는 풀들을 가지고 그물 
모양으로 짠 샌들인 '아르파르가타'를 신었다. 고고학자들은 묘지나 고대의 회화에서 실로 
여러 가지 모양의 샌들을 발견하고 있다.
  샌들은 고대의 가장 대표적인 신발이었지만 그 밖의 신발도 있었다. 샌들 이외의 신발로 
기록에 최초로 나타나는 것은 가죽을 묶어 신은, 뒤축이 없는 모카신 형태의 구두다. 생가죽 끈을 
다리에 감은 것으로 기원전 1600년 무렵의 바빌로니아에서 애용되었다.
  그것과 비슷한, 발에 딱 맞는 구두를 기원전 600년 무렵부터 그리스의 상류 계급 여성들도 
신기 시작했는데 당시 흰색과 빨간색 구두가 유행하였다.
  구두 가게의 길드(동업 조합)를 처음으로 만든 것은 기원전 200년 무렵 로마인이다. 이 프로 
구두 기능공들은 구두 가게에서 두 발에 맞춘 구두를 최초로 만들었다.
  로마인의 신발은 모양과 색으로 사회 계급을 명확하게 나타냈다. 신분이 높은 여성들이 신은 
것은 발을 덮는 형태의 구두로 대개 흰색이나 빨간색, 특별한 경우에는 녹색이나 노란색이었다. 
신분이 낮은 여성들은 색을 칠하지 않고 발이 보이는 가죽 샌들을 신었다.
  원로원 의원은 갈색 구두를 신었는데 네 개의 검은 가죽끈을 장딴지 중간까지 매고 두 번 
묶었다. 집정관은 흰색 구두를 신었다. 브랜드 따위는 아직 없었지만 어디 어떤 길드의 기능공이 
만든 구두는 특별히 고급스럽고 발에 딱 맞으므로 그것을 가지고 싶어했는데 당연히 그런 
기능공의 구두는 값도 비쌌다.
  구두를 나타내는 말도 구두의 모양과 마찬가지로 차례차례 변화했다. 영어권에서 'shoe'의 
철자는 열 일곱 번이나 바뀌었고 복수형은 적어도 서른 여섯 종류가 있었다. 가장 최초의 
앵글로색슨어는 '덮다'를 뜻하는 'sceo'였는데 이것이 복수형으로는 'schewis'가 되었고 이어서 
'shooys'로 바뀌었고 마지막으로 'shoes'가 된 것이다.
  14세기 초까지는 문명이 발달한 유럽의 어떤 사회에서도, 설령 왕족일지라도 규격 사이즈의 
구두를 찾을 수는 없었다. 아주 값비싼 맞춤 구두라도 각 기능공의 사이즈 측정 방법이나 실력에 
따라서 한 켤레 한 켤레의 사이즈가 달랐던 것이다.
  변화가 일어난 것은 1305년이다. 당시의 영국왕인 에드워드 1세는 상거래의 정확한 기준으로 
보리 세 알의 길이를 1인치로 하라고 포고했다. 영국의 구두 기능공들은 이 도량법을 채택하여 
처음으로 규격 사이즈의 구두를 제조하기 시작한다. 보리 열세 알 분량의 길이인 아이들 구두는 
사이즈 13이라고 불렀으며 그렇게 지정하여 주문을 받았다. 또한 로마 제국 쇄망 후에 보이지 
않던, 좌우 구분이 있는 신발이 14세기 영국에서 또다시 만들어지게 된다.
  14세기에는 새로운 모양도 등장하는데 앞이 매우 길고 뾰족한 구두다. 그 길이가 너무 
길어졌기 때문에 에드워드 3세는 발끝에서 2인치 이상 튀어나온 구두를 금지하는 법령을 
내놓았다. 사람들은 잠시 동안은 이 법률을 따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1400년대 초에는 발끝이 18인치가 넘는 '크라코우'라는 긴 구두가 나타났다. 그것을 
신은 사람은 걸핏하면 발이 걸려 넘어졌을 것이다.
  크라코우는 르네상스를 낳은 독창적인 분위기 속에서 나타났는데 이것을 시작으로 이런 모양이 
유행했다가 다른 모양이 유행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예를 들어 이상하게 발끝이 뾰족한 구두의 
유행 뒤에는 발끝이 아플 정도로 뭉툭한 모양에다가 폭은 발이 두 개라도 들어갈 정도로 
헐렁거리는 재미있는 사각형 구두가 유행했다.
  17세기에는 영국의 학술 도시인 옥스퍼드의 구두 기능공들이 앞부분에 끈을 묶는 쇠고리가 세 
개 또는 세 개가 넘은 송아지 가죽의 편상화인 '옥스퍼드'를 만들어 냈다.
  당시 미국은 구두 디자인에서 한 걸음 뒤져 있었다. 식민지에 최초로 등장한 구두 가게에는 
'스트레이트형'이라는 단 한 종류의 구두형밖에 없었으며, 좌우 구분이 없는 구두였다. 그 때문에 
부자들은 영국제 수입품을 구입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구두 종류가 많아지고 가격이나 착용감이 개선된 것은 미국 최초의 구두 공장이 
매사추세츠에 생긴 18세기 중반의 일이다. 이 공장에서 만들어진 구두는 대량 생산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가죽의 재단이나 바느질도 수작업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집에 있는 여자나 
어린이가 약간의 수공비를 받고 봉제한 것을 공장에서 완성 가공한 것이다.
  구두 제조의 완전한 기계화, 진정한 의미에서의 대량 생산은 꽤 오랫동안 실현되지 않았다.
  영국의 노샘프턴 맨필드 제화 회사가 규격 사이즈의 질이 좋은 구두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었던 것은 기계를 처음으로 도입한 1892년의 일이다.
  구두가 대중화하면서 편리하고 좋은 점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건강에 좋지 않은 부작용을 
가져오기도 했다. 발에 생긴 물집이나 티눈 그리고 평발이 더욱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미국에서 최초로 티눈과 발바닥 물집용 패드를 발명한 인물이 구두 가게에서 일한 
사람이라는 것은 수긍이 가는 이야기다.
  윌리엄 숄은 부모님이 경영하는 미국 중서부의 낙농장에서 일하던 10대 무렵부터 구두와 발 
손질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었다.
  1882년에 열세 형제 가운데 한 사람으로 태어난 윌리엄은 소년 시절에 스스로 생각해낸 튼튼한 
밀 실로 대가족을 위해 구두를 기웠다. 한 집안의 전문 구두쟁이로 멋진 솜씨와 발명에 재능을 
보이자 그의 부모님은 윌리엄이 열 여섯 살 때 그를 구두 가게 조수로 내보냈다.
  1년 뒤에 윌리엄은 다른 구두 가게에서 일하기 위해 시카고로 옮겨갔다. 그곳에서 구두를 파는 
일을 하는 동안 윌리엄 숄을 발의 물집이나 티눈, 평발이 얼마만큼 손님들을 괴롭히고 있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발은 주인에게 무시당하고, 무시당하는 발에 대해 의사나 어느 구두 가게 
주인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고 있지 않다고 그는 결론을 내렸다. 윌리엄은 그 일을 스스로 
떠맡기로 했다.
  낮에는 구두 판매를 하면서 시카고 메디컬 스쿨의 야간 학과를 졸업했다. 의학 박사 학위를 
받은 1904년에 이 스물 두살의 의사는 처음으로 만든, 발바닥의 장심을 받쳐 주는 '풋이저'로 
특허를 얻어냈다. 윌리엄이 만든 구두 깔창의 인기가 솟자 풋케어(foot-care) 제품 산업이 
탄생하게 되었다.
  '풋이저'를 팔려면 올바른 풋케어 지식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 윌리엄은 구두 가게 점원들을 
위해 발 치료 통신 교육을 시작했다. 또 컨설턴트를 모아 그들이 곳곳을 돌아다니며 올바른 발 
치료에 대한 의학적이고 일반적인 지식을 설명하도록 했다.
  윌리엄은 건강하지 못한 발이 미국에 넘치고 있는 것은 미국인 50명 가운데 한 사람밖에 
올바른 걸음걸이를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머리를 쳐들고, 가슴을 펴고, 
발부리를 똑바로 앞으로 내밀고' 하루에 2마일씩 걸을 것을 권장했으며 하루에 두 켤레의 구두를 
신을 것을 권했다. 그렇게 하면 한 켤레씩 번갈아 가며 말릴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발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해 의사들을 대상으로 "사람의 발, 그 해부학, 기형, 
치료"(1915)를 냈고, 좀더 일반적인 입문서로 "발 사전"(1916)을 출판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 열심히 일하고 선전한다'는 윌리엄의 신조는 물론 장기적으로는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맨발을 내보인 광고에 물집용 패드를 붙인 것과, 
깔창에 얹은 발을 공공연히 보이는 것은 외설이라는 항의가 쇄도했다.
  1916년에 윌리엄이 후원자로 나선 '신데렐라 발 콘테스트' 덕분에 발에 대한 의식이 
전국적으로 높아졌다. 가장 완벽한 발을 노린 수만 명의 여성들이 구두 가게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참가자의 발은 윌리엄이 발명한 장치로 정밀히 검사되고 계측되어 족형이 떠졌다. 
발 전문가로 이루어진 심사 위원단이 신데렐라를 뽑았고, 국내의 주요 신문과 잡지에 
수상자의 족형이 실렸다.
  윌리엄이 기대했던 대로 많은 미국 여성들이 자신의 변변치 못한 발과 미국을 대표하는 
이상적인 발을 비교하며 앞다투어 그의 제품을 사러 왔다. 전국의 약국, 백화점, 그리고 
잡화점에서 노란색과 푸른색으로 된 닥터 윌리엄 숄의 상품이 미국 풍경의 일부가 되었던 
것이다.
  윌리엄 숄은 1968년에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한 번 본 사람의 얼굴은 잊지 않는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지만, 윌리엄은 일생을 통해 한 번 본 발은 잊지 않는 것을 최후까지 
자랑으로 삼고 있었다.

     하이힐을 즐겨 신은 남자

  부츠는 전투용 신발로 탄생했다.
  수메르나 이집트의 병사들은 맨발로 싸우고 있었으나 기원전 1100년 무렵의 앗시리아인은 구두 
바닥을 금속으로 보강하고 장딴지까지 올라오는, 끈이 달린 부츠를 신고 있었다.
  앗시리아인들은 히타이트인과 함께 구두 제조로 널리 알려졌고 좌우의 모양이 다른 군대용 
부츠를 신었다는 증거가 있다. 히타이트어 문헌 중에 농업신인 테리피누가 어리석게도 '오른쪽 
부츠를 왼발에 신고 오른발을 왼쪽 부츠에 넣었기' 때문에 기분이 상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앗시리아의 보병용 부츠가 바로 그리스나 로마 병사들에게 도입된 것은 아니다. 맨발로 싸우고 
있던 그들이 우선 신기 시작한 것은 바닥에 압정을 박아서 미끌어지지 않고 내구성이 있게 만든 
샌들이었다.
  그리스인이나 로마인이 튼튼한 부츠를 신은 것은 주로 도보를 하는 원정 때였다.
  추운 계절에는 모피로 속을 대고 동물의 발이나 꼬리를 장식으로 매단 부츠가 많았던 것 같다.
  부츠는 또한 추운 산악 지방이나 광대한 초원 지대의 유목 기마 민족이 평소에 사용하는 
구두가 되기도 했다. 튼튼하고 더구나 약간 올라간 뒤꿈치가 발을 등자(발걸이)에 단단히 
고정시키므로 부츠는 전투용 장비로서 안성맞춤이었다.
  1800년대에 독일 헤센 지방의 구두 기능공은 무릎까지 오는 '헤시안'이라는 군대용 부츠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광택이 있는 검은 가죽 제품으로 로마인의 부츠와 마찬가지로 동물의 꼬리가 
매달려 있었다.
  같은 무렵 영국의 구두 기능공은, 전쟁의 승리를 등에 업고 웰링턴 부츠를 유행시켰다. 
웰링턴이란 이름은 워터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을 대파한 장군인 웰링턴 공의 애칭인 아이론 듀크, 
즉 아서 웨슬리 웰링턴의 이름을 딴 것이다.
  부츠는 몇 세기에 걸쳐서 유행과 퇴조를 되풀이해 왔다. 그리고 부츠의 가장 큰 특징인 유별난 
뒤꿈치가 하이힐 구두의 유행을 낳았다.
  하이힐은 하룻밤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몇 십 년 동안 조금씩 높아진 것으로, 시작은 
16세기의 프랑스다. 
  '하이힐'이라는 말은 요즘엔 뒷굽이 높은 여성 구두의 대명사가 되었으나 원래는 남성의
구두를 일컫고 있었다. 16세기에는 여성화에 이렇다 할 변화는 보이지 않는다. 여성의 
다리는 긴 옷 밑에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뒷굽이 높은 구두의 편리함이 처음으로 인정을 받은 것은 사람들이 말을 탈 때였다. 힐 덕택에 
발을 등자에 단단히 걸 수 있었다. 그 때문에 힐을 붙이는 것이 기정 사실이 된 최초의 부츠는 
승마용이었다.
  또한 중세에는 위생 시설이 빈약하고 도시가 과밀해서 사람과 동물의 배설물이 거리 
여기저기에 널려 있었다. 따라서 두꺼운 바닥과 뒷굽이 있는 부츠는 실제로 몇 인치 몫의 보호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상당한 심리적인 효과도 갖고 있었다.
  실제로 중세에 크록(목화)이 등장한 것은 거리의 오물로부터 몸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북유럽에서 크록은 일부 또는 전체가 나무로 만들어졌는데 거리의 쓰레기로부터 고급 가죽 
구두를 지키는 오버 슈즈로 태어났다. 그리고 따뜻한 계절에는 흔히 작은 가죽 구두 대신 신었다.
  '펌프스'라는 독일 구두가 1500년대 중반에 전 유럽으로 확산된다. 이것은 아무런 장식이 없는 
것도 있지만 때로는 보석을 박기도 한 굽이 낮고 헐거운 덧신이었다. 그런데 나무 바닥을 걸을 
때 뒷굽이 '뚜걱뚜걱' 하고 소리를 내므로 역사학자는 펌프스라는 이름이 붙여진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훗날 여성의 덧신인 스카프(슬리퍼)의 이름도 마찬가지로 붙여진 것이리라.
  1600년대 중반 프랑스에서는 하이힐 신사용 부츠가 예장에는 빼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바로 
이것을 유행시키고 굽을 더욱 높인 것은 태양왕 루이 14세다. 유럽 역사상 가장 길었던 73년 
동안의 치세 중에 프랑스 군사력은 최강이 되었고 프랑스 궁정은 과거에 없던 세려되고 찬란한 
문화를 누린다. 하지만 위업이 아무리 떠받들여져도 루이 14세의 작은 키에 대한 열등감은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그리하여 왕은 어느 날 자신의 키를 조금이라도 크게 보이려고 구두의 뒷굽을 몇 인치인가 
높게 만들었다. 그러자 왕을 모방이라도 하듯 궁정의 남녀 귀족들 모두가 구두 기능공에게 
자신들의 구두 뒷굽도 좀더 높이라고 주문했던 것이다.
  루이 14세는 왕의 위엄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구두 뒷굽을 더욱 높이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 남성들은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의 키로 되돌아왔지만 궁정의 여성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남자와 여자 사이에 역사적 불균형이 구두 뒷굽에서 나타난 
것이다.
  18세기에 프랑스 궁정 여성들은 금빛 은빛 자수 모양이 있는 뒷굽 3인치의 구두를 신고 
있었다. 미국 여성들은 파리의 유행을 모방하여 '프렌치 힐'이라는 이 구두를 도입했다. 이것이 
미국에서 뒷굽의 양극화를 낳는 원인이 된다. 여성의 뒷굽이 점점 높고 가늘어져가는 한편, 
남성의 구두는(부츠를 제외하고)반대로 낮아진다. 1920년대에 '하이힐'은 이제 실제의 뒷굽
높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매혹적인 여성화의 패션을 나타내는 말이 되어 있었다.
  끈이 없는 슬리퍼식 로퍼는 노르웨이의 초기 오버 슈즈인 크록에서 탄생했다고 여겨진다. 좀더 
정확히 위전 로퍼는 메인 주 윌튼의 제화공인 헨리 바스가 '노르위전'(노르웨이인의)이라는 말의 
끝 두 음절에서 이름을 딴 것이다.
  바스는 뉴잉글랜드의 농부들을 위해 1876년에 발목까지 덮는 튼튼한 구두를 만들기 시작했고, 
그 후 채벌용 구두나 특별 주문한 구두도 취급했다. 그는 버드 제독이 남극 탐험에서 성공을 
거두었을 때 신은 방한 부츠나, 찰스 린드버그가 역사적인 대서양 횡단 비행을 했을 때 신은 
가벼운 비행용 부츠를 만든 인물이다.
  1936년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고 있던 노르웨이의 슬립 온식 모카신에 주목한 바스는 노르웨이 
제조업자로부터 이것을 미국 시장용으로 다시 디자인할 것을 허가 받는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로퍼가 '바스 위전'이라는 상품 라인이 되었다.
  1950년대에는 바스 위전이 손바느질한 모카신으로 과거에 없던 인기를 누렸다. 구두가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던 옛날의 관습을 따르자면 바스 위전은 대학생을 나타내는 상징이 되었다.

    누군가가 채워 주어야만 좋은 여성의 단추

  현대의 안전핀은 위험하지 않도록 핀 끝이 금속 씌우개 속에 완전히 숨겨져 있다. 옛날 핀의 
끝은 약간 튀어나온 모양으로 철사를 구부려서 고리를 만들어 넣은 것이었다.
  핀을 U자형으로 구부리는 연구는 중부 유럽에서 약 3000년 전에 탄생했는데, 그때까지 
직선이었던 핀으로는 최초의 커다란 진보였다. 이런 종류의 청동제 핀이 여러 가지 발굴되었다.
  철이나 뼈로 만든 직선 핀은 기원전 3000년 무렵에 수메르인이 사용했다. 수메르의 문헌을 
보면 봉제용 바늘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고대의 동굴 회화나 유물들을 조사하는 
고고학자들은 그보다 훨씬 옛날인 1만년쯤 전 사람들이 생선 등뼈를 이용해 만든, 맨 위 또는 
중간에 실구멍이 있는 바늘을 사용하고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기원전 6세기에 그리스나 로마의 여성들은 옷을 어깨나 팔의 윗부분에서 피뷸라라는 핀으로 
고정시키고 있었다. 이것은 한가운데가 원으로 되어 있어 천을 단단히 조이는 데다가 뺄 때 
스프링 작용을 하는 획기적인 핀이었다. 피뷸라는 현대의 안전핀에 한 걸음 다가선 것이다.
  그리스에서는 직선의 막대 모양 핀을 액세서리로 사용했다. 상아나 청동으로 만든 
'스틸레트'라는 이 핀은 15센티미터에서 20센티미터 정도로 머리나 옷을 장식했다. 핀은 벨트와는 
별도로 여전히 옷을 고정시키는 가장 소중한 도구로 남았다. 그리고 감거나 덮거나 하는 옷이 
더욱 복잡해짐에 따라 그것을 고정하는 핀도 더욱 많이 필요해졌다. 1347년에 기록 된 어느 
궁정의 목록에 따르면 프랑스 공주 한 명이 가진 의상 때문에 1만 2천 개의 핀이 납품되었다고 
쓰여 있다.
  당연한 일이지만 손으로 만든 핀은 가끔 품귀가 일었고 그 때문에 핀의 가격이 뛰었는데, 
농노들에 대해 쓴 사료 속에는 봉건 영주가 핀을 살 돈이 필요하여 세금을 부과했다는 기록까지 
볼 수 있다.
  중세 말기에 영국 정부는 핀의 부족이나 남용, 매점매석에 대해 제동을 걸기 위해 핀 
제조업자가 1년 가운데 특정한 날 외에는 핀을 팔 수 없도록 법률로 정했다. 정해진 날에는 
신분의 상하를 가리지 않고 여성들이(대부분 평소부터 핀을 사기 위한 '핀 머니'를 열심히 
모았다) 핀 가게로 몰려가 꽤 값이 비쌌던 핀을 샀다. 대량 생산 덕택에 핀 가격이 급락하자 '핀 
머니'라는 말도 가격이 내려가서 '마누라 용돈'이라는, 다시 말해 핀을 살 수 있는 정도의 하찮은 
돈을 가리키게 되었다.
  이렇게 복식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핀도 기능성이 뛰어난 단추의 등장으로 지위를 
위협받게 된다. 핀은 단추가 세상에 등장하기 전까지만 옷을 고정시키는 데 반드시 있어야 하는 
귀중품이었던 것이다.
  단추는 원래 옷을 고정하는 것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둥글고 평평한 보석과 
비슷한 액세서리로 남녀 모두의 옷에 붙여졌다.
  그리고 약 3500년 동안 단추는 순수한 장식품으로 머물러 있었다. 옷을 고정하는 것은 핀과 
벨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최초의 복식용 단추를 볼 수 있는 것은 기원전 2000년으로, 고고학자가 인더스 강 유역에서 
발굴했다. 여러 가지 연체 동물의 껍질로 만들어진 그 단추는 원형이나 삼각형 모양으로 옷에 
붙이기 위해 두 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고대 그리스인이나 로마인들은 튜닉이나 토가, 망토 같은 옷의 장식으로 조개 단추를 
브로치처럼 옷 위에 붙였다. 금박을 입히거나 보석을 박은 것도 많으며, 정교하게 조각한 상아나 
뼈의 단추가 유럽의 유적에서 출토되었다.
  그러나 어떤 회화, 문헌, 의상의 단편을 보더라도 옛날의 재봉사가 단추와 단춧구멍을 맞출 
연구를 한 것 같은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단추'라는 명사가 '단추를 끼우다'라는 동사로도 쓰인 것은 놀랍게도 13세기 후의 일이다.
  옷을 단추로 고정시키는 습관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서유럽에서 탄생했다.
  넉넉하고 펄럭이는 형태였던 그때까지의 옷은 1200년대에 이르러 몸에 딱 맞는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벨트만으로는 몸단장을 할 수 없었고 핀이 여러 개 필요했다. 그런데 핀은 금방 자기도 
모르게 잃어버리기 쉬웠다. 매다는 단추가 등장하자 비로소 사람들은, 날마다 옷을 입을 때 고정 
도구를 찾는 번거로움에서 해방되었다.
  이때 단추와 단춧구멍이 사용된 또 하나의 이유는 옷의 소재와 관련이 있다. 1200년대의 
의상에는 전보다 고급스럽고 섬세한 천을 사용했다. 그런데 옷감을 몇 번씩 핀이나 안전핀으로 
꽂는 사이에 옷감이 찢어져 버렸다.
  그리하여 결국 기능성이 뛰어난 현대의 단추가 등장한다. 그때까지 허비한 시간을 되찾기라고 
하려는 듯 단추와 단춧구멍은 모든 옷 위에 나타난다. 그저 단추를 쭉 늘어놓기 위해 옷의 
목부분부터 발목 부근까지 달기 시작한 것이다. 단추가 확실하게 단추 역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 필요도 없는 소매나 다리 부분까지 일부러 길게 재단이 들어갔다.
  여성용 드레스 한 벌에는 단추가 줄줄이 200개나 붙여져서 입고 벗는 것도 큰 일이 되었다.
  잃어버린 핀을 찾느라 시간을 낭비했다면, 이렇게 단추가 많이 달린 드레스도 결코 시간을 
절약하게 해주지는 못했다.
  14세기와 15세기의 조각, 삽화, 회화들을 보면 단추 매니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단추의 유행은 다음 세기에 절정을 이루었다. 이때에 단추는 또다시 단춧구멍을 발명하기 전과 
마찬가지로 금과 은으로 만든 것, 보석을 박은 것들이 장식적인 이유로 옷에 붙여졌다.
  1520년에 프랑스 왕인 프랑소와 1세는 검은 벨벳 양복 한 벌에 붙이기 위해 1만 3천 4백 개의 
금단추를 보석상에 주문했다. 그 양복은 영국 왕인 헨리 8세와의 회견 때 입기 위한 것이었다. 
칼레 근처 크로스 오브 골드 전투장에서 열린, 허례와 과시로 가득찬 회견에서 프랑소와는 
어떻게든 헨리와 손을 잡고 싶은 덧없는 소망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헨리는 반지와 똑같이 디자인된 자신의 보석 단추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독일의 초상 
화가인 한스 홀바인은, 단추가 달린 의상과 짝이 맞는 반지를 낀 헨리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 시절 단추의 열기는 1980년대의 그것과 어딘가 비슷한 면이 있다.
  그렇지만 1980년대에는 단추가 아니라 지퍼의 열기가 절정을 이루었다. 바지나 셔츠에 지퍼를 
다는 일이 크게 유행했던 것이다.
  지퍼가 달린 주머니, 지퍼로 소매나 발 부분의 위쪽까지 개폐식으로 만든 것, 지퍼가 달린 
주머니 덮개, 그 밖에도 무수한 지퍼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붙여졌다.
  남성 옷에는 단추가 오른쪽에, 여성 옷에는 왼쪽에 달린다. 단추가 달린 옷을 입은 인물의 
초상화나 데생을 조사한 복식사가는 이 습관이 15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며, 그 기원이 
무엇인지도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남성은 궁중에서든, 여행중이든, 전쟁터에서든 옷을 자기 스스로 입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른손잡이였으므로 양복 단추는 오른쪽에 붙이는 것이 편리하다고 
생각했다.
  한편 당시에 무척 값이 비쌌던 단추를 옷에 붙일 수 있는 여성들은 의상 담당 하녀를 따로 
거느리고 있었다. 하녀들도 대부분 오른손잡이였으므로 마주보고 여주인에게 옷을 입히려면 
단추와 단춧구멍이 반대로 되어 있으면 입히기 쉽다는 것을 깨달았다. 재봉사는 여성들의 희망에 
따랐다.
  그 뒤에도 이 습관은 변하지 않았으며 또한 바꾸자는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중세의 고문도구로 보였던 지퍼

  고대에서는 지퍼에 해당하는 것을 볼 수 없다. 그렇다고 지퍼가 근대에 갑작스럽게 탄생한 
것은 아니다. 
  지퍼는 끈질기고 오랜 기술 개발 끝에 탄생했는데, 이 아이디어가 시장에 나온 뒤부터 현실화 
될 때까지 2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것을 사용하려는 마음이 생길 때까지 
또다시 1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지퍼는 처음에 단추와 경쟁하는 옷의 고정 도구로 연구된 것이 아니라, 목이 긴 부츠의 옆을 
닫는 도구로서 1890년대에 구두의 긴 구두끈을 대신하여 등장했다.
  1893년 8월 29일 시카고에 살던 기계기사 위트컴 잿슨은 '클래스프 로커'(열쇠 후크식 
지퍼)라는 이름으로 지퍼 특허를 땄다. 당시 특허국의 파일을 보면 잿슨이 발명한 지퍼와 
조금이라도 닮은 것은 찾을 수가 없다. 하지만 두 개의 클래스프 로커가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 
하나는 잿슨 자신의 부츠에 달려 있었고 또 하나는 잿슨의 동료인 루이스 워커의 부츠에 달려 
있었다.
  잿슨은 원동기나 철도의 브레이크 등에서 몇 개의 특허를 따낸 실적이 있는 발명가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으나, 클래스프 로커에는 아무도 흥미를 나타내지 않았다. 후크(hook 갈고리)와 
구멍이 직선으로 이어진, 언뜻 보기에 섬뜩한 이 장치는 시간을 절약하는 근대적인 
도구라기보다는 중세의 고문 도구처럼 보였던 것이다.
  잿슨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고 클래스프 로커를 1893년의 시카고 만국박람회에 출품했다. 
하지만 이 회장에 몰려든 2천 1백만 명의 관람객들은 세계 최초의 전기식 대관람차와 밸리 댄서, 
리틀 이집트가 자랑하는 '쿠티 춤'(허리를 비틀며 추는 춤)으로 몰렸고 세계 최초의 지퍼에는 
아무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잿슨과 워커가 경영하는 유니버설 파스너 사는 미국 체신부로부터 지퍼가 달린 우편 배낭 
20개를 주문 받았다. 하지만 지퍼가 너무 자주 움직이지 않게 되어 우편 배낭은 폐기처분 당했다. 
위트컴 잿슨은 이 열쇠 후크식 지퍼를 계속 개량했으나, 이 장치를 완전한 것으로 만든 발명가는 
스웨덴계 미국인 기술자 기데온 샌드백이었다.
  샌드백은 1913년에 잿슨의 지퍼보다 좀더 작고 가볍고 믿을 수 있는 것을 만들었다. 이것이 
현재의 지퍼이다. 샌드백이 만든 지퍼를 최초로 주문한 것은 미 육군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쓰는 의료품으로 여러 가지 장비에 이용했던 것이다.
  일반인들은 부츠나 주머니에 달린 벨트, 담배 주머니 등에 지퍼를 사용했다. 일반인들 옷에 
지퍼가 붙여진 것은 대략 1920년 대의 일이다.
  지퍼가 처음부터 특별한 인기를 끈 것은 아니다. 금속 지퍼는 녹이 나기 쉬웠으므로 세탁할 때 
떼어 놓았다가 마르면 또다시 붙이는 수고를 해야 했다. 거기다가 지퍼에 대한 지식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문제점도 있었다. 단추를 단춧구멍에 끼운다는 사실처럼 손쉬운 것이 아니어서, 지퍼를 
잠그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은 전혀 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옷에 지퍼를 달아 놓고도 그 장치의 
사용 방법이나 손질법을 가르쳐 주는 안내서는 거의 붙어 있지 않았다.
  1923년에 B. F. 굿리치 사는 이 새로운 '후크가 없는 파스너(fastener)'를 붙인, 고무로 만든 
오버 슈즈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부츠의 파스너를 닫을 때 나는 지지직거리는 소리에서 굿리치 
자신이 의성어인 '지퍼'라는 말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굿리치는 신제품에 '지퍼 부츠'라는 
이름을 붙였고, 나중에 터론 사라고 이름을 바꾼 부클레스 파스너 사에 15만 개의 지퍼를 
발주했다.
  '지퍼'라는 독특한 이름과 함께 제품의 신뢰성도 커졌고 녹에도 강해졌으므로 지퍼의 인기는 
더욱 높아졌다.
  1920년대에 지퍼는 주머니 덮개에 숨겨진 채로 아주 당연한 옷의 도구가 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1935년에는 복식 액세서리로서의 지위를 확립한다. 이 해에 "뉴요커"지는 유명한 
디자이너인 엘자 스카폴레리가 내놓은 봄옷 컬렉션을 "지퍼가 잔뜩 붙었다"고 소개했다.
  스카폴레리는 색을 넣은 지퍼를 사용한 패션 디자이너다.
  오랜 시간에 걸쳐 탄생하고 또다시 받아들여지지 않은 긴 세월을 거친 뒤에 지퍼는 비닐 
필통에서 고성능 우주복에까지 모든 것에 이용되는 길을 찾아냈다.
  이 아이디어의 진정한 발명자였던 위트컴 잿슨은 불쌍하게도 자신의 발명품이 실용화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한탄하며 1909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 뒤로도 수십 년 동안 복식업계에서 지퍼의 안정된 지위를 뒤흔드는 발명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국화과 잡초의 작고 둥근 가시투성이의 덧껍데기를 본 한 남자가 그것을 
합성섬유로 만들어봄으로써 매직 테이프가 탄생한다.
  1948년 알프스에서 산을 오르고 있던 스위스 등산가인 조지드 메스트랄은 바지나 양말에 
질기게 달라붙는 덧껍데기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덧껍데기를 뜯어서 버리는 일을 
되풀이하던 그는, 비록 지퍼를 대신할 정도는 아니더라도 그와 비슷한 기능을 할 수 있는 
파스너를 덧껍데기 같은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늘날의 매직 테이프는 두 장의 가늘고 긴 나일론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한쪽에는 무수한 작은 
갈고리가 있고 다른 쪽에는 작은 고리가 있다. 두 장을 겹치면 갈고리가 고리에 걸리며 달라붙어 
떨어지기 어렵게 된다. 이 단순명쾌한 아이디어도 완성되기까지 10년의 노력이 들었다.
  드 메스트랄이 상담을 한 섬유업자들은 인공 덧껍데기를 만든다는 아이디어에 웃으며 응해주지 
않았다. 그런데 단 한명 프랑스 리용에 있는 섬유 공장의 섬유공이, 특별히 만든 작은 베틀을 
사용하여 한쪽에는 작은 갈고리가 있고 또 한쪽에는 작은 고리가 있는 두 장의 면조각을 간신히 
만들어 주었다.
  눌러붙이면 두 장은 딱 붙어서 일부러 뗄 때까지 붙어 있었다. 드 메스트랄은 이 시작품에 
'로킹 테이프'라는 이름을 붙였다.
  직조공의 손작업에 따를 만큼 미세한 작업을 하는 기계 장치를 개발하는 데는 기술적인 진보를 
기다려야 했다. 게다가 여러 번 개폐를 되풀이하는 사이에 면 소재에 붙인 갈고리와 고리가 
못쓰게 되자 좀더 튼튼한 나일론 천으로 대체했다. 더 나아가 드 메스트랄이, 보들보들한 나일론 
실을 적외선 밑에서 짜면 딱딱해지고 거의 망가지지 않는 갈고리와 고리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발견함으로써 커다란 돌파구가 열렸다.
  1950년대 중반에는 첫 나일론제 로킹 테이프가 현실화되어 있었다. 상표를 결정할 때도 드 
메스트랄은 단순히 울림이 좋다는 것 때문에 벨벳의 '벨'을 땄고 프랑스어로 '갈고리'의 파생어인 
'크로셰'에서 '크로'를 따서 '벨크로'로 붙였다.
  1950년대 말에는 기계 직조기에서 연간 6천만 야드의 벨크로가 탄생한다.
  그리고 이 나일론제 파스너는 드 메스트랄이 바라던 것처럼 지퍼를 대신하는 일은 없었지만, 
지퍼와 마찬가지로 다방면으로 사용되었다. 인공 심장의 심방 접합, 우주의 무중력 공간에서도 
도구류의 고정, 그리고 드레스나 수영복이나 기저귀에도 사용되고 있다.
  조지 드 메스트랄이 한때 꿈꾸었던 것만큼 무한하지는 않지만 매직 테이프의 용도는 끝이 없을 
정도로 넓다.

      부채는 계급의 상징

  공작 날개나 파피루스 또는 야자 잎 등으로 만든 부채들은 장식품이자 시원한 바람을 일으키는 
실용품이다. 부채는 두 개의 전혀 다른 문화 속에서 5000년 전 똑같은 시기에 별도로 탄생했다. 
한쪽은 중국인으로 부채를 예술로까지 승화시켰고 또 한쪽인 이집트인들은 계급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이집트의 수많은 문헌이나 그림들은, 부유한 사람의 '부채를 든' 하인이나 파라오를 위해 '왕의 
부채를 드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을 증명하고 있다. 하얗거나 검은 피부를 가진 
노예들이 주인에게 시원한 바람을 안겨 주기 위해 커다란 잎이나 파피루스를 엮어 만든 거대한 
부채를 끊임없이 펄럭여댔다.
  그런가 하면 부채가 땅에 드리우면 그림자 영역은 평민들이 침범해서는 안 되었다. 열대에 
가까운 이집트에서 '그림자'나 '산들바람'은 누구나 갖고 싶어하는 무형재산이었으며, 부채는 
밤낮을 가리지 않는 노예의 노력으로 고귀한 사람들을 마치 옷처럼 장식하고 있었다.
  중국의 부채는 좀더 민주적으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었다. 그리고 부채의 디자인이나 
장식도 더욱 다양하고 종류가 많았다. 비단벌레 색의 공작 날개 외에 '칸막이식' 부채도
만들었다. 실크 소재를 대나무 틀에 붙이고 옻칠을 한 손잡이를 붙인 것이다.
  6세기에 칸막이 부채가 일본으로 도입되었으나 일본인들은 이것을 독창적으로 개발해 접는 
부채인 접부채를 만들었다.
  일본의 접부채는 빳빳한 비단천을 막대기 상태의 골조에 붙이고 순서대로 접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부채는 소재나 색상, 디자인 등에 따라 이름도 다르며 사용 목적도 달랐다. 예를 들어 
여성용으로는 무용, 궁정, 다도용 부채가 있고 남성용으로는 승마, 전투용 부채가 있다.
  10세기에 일본인은 접부채를 중국에 소개했는데 이번에는 중국인들이 이 일본식 디자인을 
고쳤다. 골조에 붙여진 빳빳한 비단을 떼어낸 뒤에 골조만 대나무나 상아의 블래이드(칼날 
상태의 평평한 것)로 바꾸어 끝에 달린 리본으로 블래이드를 연결하고 역시 접는 식의 부채를 
만들었던 것이다.
  15세기가 되자 동양과 교역을 하던 유럽 상인들이 중국이나 일본의 여러 가지 장식용 부채를 
가지고 돌아가게 되었다. 그 중에서 단연 인기가 있었던 것은 복잡한 모양을 조각한 상아의 
블래이드를 흰색 또는 빨간색 리본으로 연결한 '블리즈'라는 부채였다.
  부채가 한여름을 연상시킨다면, 장갑은 추운 겨울을 떠올리게 한다. 장갑은 추위나 
중노동으로부터 손을 지키고 싶다는 소원 때문에 태어났다. 북유럽 지방에서 발견된 많은 장갑 
중에는 동물 가죽으로 만들고 팔꿈치까지 덮는 '봉지형 장갑'이 있는데 이 장갑은 적어도
1만년도 더 된 것이다.
  지중해 연안의 온습 지역에 살고 있던 고대인들은 집을 세우거나 밭일을 할 때 장갑을 
사용했다.
  이들 가운데 기원전 1500년 무렵 이집트인들이 처음으로 장갑을 장신구로 사용했다. 시타카멘 
왕의 묘지 안에서 겹친 천에 싸인 부드러운 린넬 장갑과 염색한 실로 짠 장갑 한 쪽을 
고고학자가 발견했다.
  장갑 끝의 실 모양으로 보아 이 장갑은 손목에 묶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 다섯 손가락이 
나누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손 모습을 한 장갑이 지금부터 적어도 3500년 전에는 사용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후의 따스함과는 관계없이 모든 주요 문명은 장갑을 장식용과 노동용으로 모두 만들어 왔다. 
기원전 4세기에 그리스의 역사가인 크세노폰은 페르시아의 매우 정교한 장식용 모피 장갑에 대해 
말하고 있다. 또한 호메로스는 "오디세이"에서 오디세우스가 집으로 돌아와 정원일을 하고 있는 
아버지를 보고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아버지의 손을 가시로부터 지키는 역할을 장갑이 하고 
있었다."
  두꺼운 가죽으로 만들어 손을 덮는 것을 'glof'(손바닥)라고 부른 것은 앵글로색슨인이다. 
여기서 'glove'(장갑)라는 말이 태어났다.

      평생을 조롱 당하며 우산을 보급한 사람

  우산은 지위나 신분의 높이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3400년 전 메소포타미아에서 태어난 부채의 
한 변형이다. 왜냐하면 우산은 사막의 나라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에게 내리쬐는 태양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우산(umbrella)은 라틴어로 그림자를 뜻하는 'umbra'에서 나온 말이라는 사실로도 알 수
있듯이 몇 세기 동안 주로 차양의 역할을 해왔다.
  오늘날 아프리카의 여러 사회에서 우산 하인은 부족의 우두머리 뒤를 따르며 그의 머리를 
태양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걷는다. 이것은 고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의 습관이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원전 1200년대에 이집트의 우산은 종교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다. 하늘은 하늘의 여신인 
누트의 신체로 만들어졌으며, 누트가 거대한 우산처럼 땅을 덮어 발과 손끝만으로 대지를 만지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별이 가득 달린 여신의 복부가 밤하늘을 낳았다고 믿었다.
  사람이 만든 우산은 누트 여신의 지상에서의 체현으로, 고귀한 것의 머리에만 쓰는 것이었다. 
왕의 우산 그림자 절반에 서도록 초대받는 일은 커다란 명예였으며 그 그림자는 왕의 보호를 
나타냈다.
  우산은 부채와 마찬가지로 야자 잎, 깃털, 파피루스 등으로 만들었다.
  그리스인이나 로마인은 이집트의 문화를 많이 받아들였으나 우산은 여성의 것으로 생각했는지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기원전 6세기 무렵 그리스 작가들이 이 차양막을 가진 남자를 가리켜 
"여자 같다"고 표현하며 웃음거리로 기록한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몇 세기에 걸쳐 그리스 남성이 
남들 앞에서 우산을 써도 괜찮은 경우는 동반한 여성을 위해 쓸 때뿐이었다.
  여성의 경우는 상황이 정반대였다. 신분이 높은 그리스 여성은 하얀 파라솔을 썼다. 그리고 
1년에 한 번은 파라솔 축제에 참가했는데 이것이 아크로폴리스에서 열린, 풍작을 기원하는 
행진이다.
  방수를 위해 종이 차양에 기름을 바르기 시작한 것은 파라솔에 관심이 많던 로마 여성들이다. 
로마의 역사가는 실외 원형 극장에 내리는 이슬비 때문에 많은 여성들이 시야를 가로막는 우산을 
씀으로서 남성 구경꾼들에게 매우 폐를 끼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공공 행사가 열리는 장소에서 
비우산의 사용에 대한 논의가 일어났다. 1세기에 이 문제는 황제 드미티아누스의 앞으로 
이끌려 나왔는데, 황제가 여성편을 들자 여성들이 공공 장소에서 우산을 쓰는 일이 허용되었다.
  18세기 유럽에서 파라솔과 우산은 오랜 기간 동안 여성의 복식품이라고 여겨졌다. 미국에서는 
훨씬 오랫동안 그러한 생각이 이어졌다. 그동안 남성은 모자를 쓴 채 비에 젖은 생쥐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비를 심각하게 피하는 일은 남성에게 어떤 금기 사항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16세기 프랑스의 인기 작가인 앙리 에티엔은 우산을 쓴 남성에 대한 유럽 사람들의 견해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만약 프랑스 여성이 우산을 쓰고 있는 남성을 보면 여자 같은 남자라고 경멸할 것이다."
  우산을 남성용의 훌륭한 우산으로 만든 것은 영국 신사인 조나스 헌웨이다. 그가 이것을 
이룩한 것은 한결같이 꺾이지 않는 의지를 가지고 사람들의 조롱과 굴욕을 견딘 결과였다.
  러시아나 극동과의 무역으로 부를 쌓은 헌웨이는 38세에 은퇴한 뒤 병원이나 고아원 건설, 
그리고 그가 사랑하는 우산의 보급에 모든 정열을 쏟아 부었다.
  1750년부터 헌웨이는 비가 내리건 해가 내리쬐건 우산 없이 외출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가 
나타나는 곳에는 항상 센세이션이 일었다. 옛날의 사업 파트너들은 당장 그를 여자 같은 
남자라고 깔보기 시작했다. 마을의 건달들은 그를 조롱했다. 
  마차 가게는 우산이 비를 피하는 도구로 세상에 받아들여지면 장사를 못하게 될 것이므로 
일부러 마차를 물구덩이로 몰아 헌웨이에게 흙탕물을 튀기곤 했다.
  하지만 헌웨이는 조금도 굽히지 않고 남은 30년의 생애 동안 계속 우산을 들고 다녔다. 
사람들은 점점 비가 내릴 때마다 마차를 부르기보다는 한 번만 투자를 하여 우산을 찾는 편이 
싸게 먹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것이 런던에서는 분명한 절약이었다.
  경제성 때문인지 아니면 보기에 익숙해졌기 때문인지 오랫동안 우산을 따라다니던 여자 같다는 
오명은 반납되었다.
  조나스 헌웨이가 1786년에 세상을 뜰 때까지 우산은 비가 오는 날이면 영국 신사들의 손에 
들려 있었고 '헌웨이스'라고 불리게 되었다.

      운동화 혁명

  우비의 역사는 옷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매우 오래 되었다.
  먼 옛날 사람들은 비를 맞지 않기 위해 납질의 잎이나 풀을 짜서 수지를 바른 길고 가느다란 
짐승 가죽 조각과 함께 봉제하여, 물을 튀겨내는 외투나 머리에 쓰는 것을 장만하고 있었다. 물을 
튀기기 위한 코팅재는 문화에 따라서 여러 가지다.
  예를 들어서 고대 이집트인은 린넬에 납을 바르거나 파피루스에 기름을 바른 것을 사용했고, 
중국인은 종이나 실크에 왁스나 래커를 발라서 사용했다. 그렇지만 편리하고 가볍고 정말 
효과적인 고무제 우비를 개척한 것은 남아메리카의 인디언이었다.
  16세기 신대륙으로 온 스페인의 탐험가는 원주민이 외투나 모카신에 이 지방에서 나는 고무 
나무에서 채취한 우유 같은 수지를 바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새하얀 수액을 응고시켜 말린 
다음 옷에 바르면 옷이 튼튼하고 부드러워진다. 스페인인은 이 물질을 '나무의 우유'라고 불렀고 
인디언의 수액 채취 방법을 흉내내서 이것을 코트나 케이프, 모자, 바지, 그리고 부츠의 바닥에 
발랐다. 그런데 비를 효과적으로 튀겨내는 데 효과가 있는 이 방수재는 한낮의 더위에 녹아서 
끈적거리기 때문에 건조한 풀이나 쓰레기, 고엽들이 달라붙고 밤이 되면 또다시 경직되고 
딱딱해져 버렸다.
  수액이 유럽으로 들어오자 당시의 저명한 과학자들은 수액의 특성을 개선하기 위해 여러 가지 
실험을 했다. 1748년에 프랑스의 천문학자인 프랑소와 플레느는 수액을 소재에 도포 하면 더욱 
부드러워지고 접착성은 없어지는 과학적인 방법을 발견했으나 이것에 이용되는 화학 첨가물이 
견디기 어려울 정도의 불쾌한 냄새를 풍겼다.
  또 하나의 실패로 끝난 이 실험은 단지 수액에 이름을 붙이는 데에는 공헌했다. 1770년에 
영국의 대화학자이며 산소의 발견자인 조셉 프리스틀리는 이 우유 상태의 수액의 개선에 힘을 
쏟고 있었다. 그때 우연히 그는 응고한 수지가 흑연 자국을 지운다는 (rub out)것을 알아차렸다. 
그리하여 고무는 영어로 '러버'(rubber)라는 이름을 달게 되었다.
  그러나 근대적인 고무제 우비로의 길이 열릴 때까지는 57세의 스코틀랜드 화학자인 찰스 
매킨토시에 의한 1823년의 획기적인 발견을 기다려야 했다.
  글래스고 연구소에서 실험을 하고 있던 매킨토시는 천연 고무가 석유의 분별 증류로 생겨나는 
휘발성이며, 유상의 액체인 콜타르 나프사(휘발유와 케로신의 중간으로 비등 분류하는 
유분)속에서 쉽게 분리하는 것을 발견했다. 나프사 처리한 고무의 혼합액을 천에 발라 굳어지게 
함으로써 매킨토시는 고무 냄새 외에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 방수성 코트를 만들었다. 이것이 
일반인들에게 '매킨토시'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나프사 처리된 고무로 만들어진 신발은 '갤로쉬'라고 이름 지었다. 이것은 목이 긴 부츠에 이미 
정착한 이름이지만 원래는 무거운 가죽끈이 달린 고르인의 샌들에 로마인이 붙인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갤로쉬는 장딴지의 중간까지 오는 십자형 교차의 랩식 구두로서 '고르인의 신발'이라는 
뜻에서 '갤로릭 소레어'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갤로쉬'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누구나 한 켤레쯤은 가지고 있는 운동화의 바닥이 고무로 만들어지기까지는 
일대 기술 혁신이 필요했다. 발소리가 나지 않기 때문에 '스니커'(몰래 걷는 사람)라는 이름을 
얻게 된 고무 바닥의 운동화는 1860년대에 찰스 굿이어가 개발한 고무의 가황법 덕택에 탄생할 
수 있었다.
  굿이어는 고무나무에서 채취한 천연 고무가 따뜻할 때는 녹아서 끈적이고, 차가워지면 
딱딱하게 굳는다는 기존의 생각을 변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고무는 황과 섞으면 건조하고 
부드럽고 유연성이 있는 물질이 된다. 1800년대 후기에 처음으로 성공을 거둔 고무제 복식품인 
우천시의 오버 슈즈처럼 고무는 신발에 가장 적당한 소재가 된다.
  1800년대 말에는 고무가 신발의 바닥에도 붙여지고 있었다.
  그리고 1900년대에 들어서자 캔버스 천의 신발 바닥에 가황 고무 바닥을 아교로 붙인 신발이 
나온다. 제화업자가 운동화의 혁명이라고 못박은 신발이 등장한 것이다.
  1917년 U. S. 로버 사가 처음으로 시장에 내놓은 운동화 '케즈'가 선을 보인다. 이 이름은 
'키즈'(아이들)를 연상시키면서 '발'의 라틴어 어원인 'ped'에 음을 맞춘 것이다. 이 첫 운동화는 
전체가 흰색이거나 검은 캔버스 천에 흰색 바닥을 붙인 것이 아니라, 바닥이 검고 캔버스 천은 
다갈색인 얌전한 색상이었다. 이것이 신사용 가죽 구두의 일반적인 색이었기 때문이다.
  1960년대 초까지는 운동화의 기본적인 디자인에 거의 변화가 없다. 그러다가 한 대학의 전 
육상 선수와 코치의 우연한 발견으로 신발 바닥이 요철 모양을 한 현대 운동화의 시대를 맞게 
된다.
  오리건 대학의 1마일 주자였던 필 나이트는 미국제 운동화보다 유럽제 운동화를 신고 달리는 
것을 좋아했다. 다른 육상 경기에서도 선수들이 질 좋은 운동화를 신으면 좀더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나이트와 그의 코치 빌 바우먼은 1962년에 운동화 회사를 세워 최고급 
일본 제품을 수입하기 시작한다.
  신발이 가벼워진 것은 무척 커다란 이점이었지만, 바우먼은 특히 운동 선수들의 커다란 
관심사인 접지 때의 마찰력 부분에 좀더 개선할 문제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바우먼은 어떤 신발 바닥 모양이 가장 좋은지를 몰랐다. 많은 제화업자들은 자동차 
타이어용으로 개발된 얕은 요철 모양을 사용하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부엌에서 와플 구이틀을 
손에 들고 있던 바우먼의 머리에 번뜩이는 것이 떠올랐다. 그는 당장 고무를 구이틀 안에 부어 
가열했고 깊은 와플 형태의 신발 바닥 모양을 만들어 냈다.
  이것이 곧 전 세계의 대표적인 신발 바닥이 되었다. 이 새로운 운동화는 신발 바닥뿐만 아니라 
그 밖에 세 가지 획기적인 특징을 갖추고 있었다. 웨지(선저형)힐, 충격을 흡수하는 쿠션식의 
중간 바닥, 그리고 그때까지의 캔버스 천보다 가볍고 통기성이 좋은 나일론 천을 채용한 점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날개를 가진 승리의 여신의 이름을 따서 '나이키스'라고 이름 붙인 이 
와플형 신발 바닥의 나일론제 운동화를 선전하기 위해 나이트는 1972년에 오리건 주 유진에서 
열리는 올림픽 예선 주자들을 주목했고 장거리 주자 몇 명에게 특별히 디자인한 신발을 신고 
달리도록 했다.
  그리고 "결승에서 이긴 일곱 명 가운데 네 명이나" 그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고 광고 기사에 
대대적으로 실었다. 물론 1위, 2위, 3위 선수가 신은 신발은 서독의 아디다스 사 운동화였지만 
말이다. 그래도 여러 가지 브랜드의 와플형 신발 바닥 운동화는 판매가 엄청나게 늘었고 
1970년대 말에는 바닥이 평평한 캔버스 슈즈는 먼지 속으로 묻혀 버렸다.

     마리 앙투아네트와 패션 민주화

  디오르, 브래스, 클라인, 지방시, 드라 렌타, 폰 프루스텐베르그, 카시니, 가르뎅, 로렌, 구찌.
  역사는 오늘날의 수많은 패션 디자이너의 이름을 기록에 담고 있지만 지금까지 계속 왕족이나 
귀족의 옷을 만들어온 재단사, 드레스 메이커, 재봉사들의 이름은 어떤 페이지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런 사람들은 당연히 있었을  것이고 패션이 있었던 것도 분명하다.
  가장 일찍부터 프랑스와 밀라노는 유럽의 2대 패션의 중심지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18세기 
말까지 중요한 것은 옷자체(모양, 세공, 색, 소재, 그리고 물론 그것을 입고 걸어다니는 사람)로서 
디자이너가 나설 공간은 없었다.
  디자이너 의상을 처음으로 세상에 내고 브랜드 현상의 어버이가 된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 
이름은 로즈 베르탄. 그녀야말로 명성과 신망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얻어낸 최초의 디자이너다. 
1700년대 중반에 프랑스에서 태어난 로즈 베르탄은 재능을 타고나긴 했지만 몇 차례의 행운을 
만나지 못했다면 유명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로즈 베르탄은 1770년대 초에 파리에서 부인용 모자 가게 주인으로 출발한다. 그 가게의 멋진 
모자는 샤르트레 공작 부인의 눈에 띄었고 부인은 베르탄의 후원자가 되어 그녀는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를 만난다.
  이 오스트리아 여왕은 딸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입는 드레스 모양을 싫어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로즈 베르탄은, 나중에 프랑스에서 가장 사치스럽고 또 유명한 왕비가 되는 이 여성의 
의상을 모두 위임받는다. 로즈가 프랑스 황태자비를 위해 만든 사치의 극치인 의상을 두고 
여제는 마치 무대 여배우처럼 야하다고 슬퍼했으나, 프랑스 궁전에서는 사람들의 눈을 빼앗았다.
  왕비가 된 마리 앙투아네트는 더욱 많은 시간과 돈을 패션에 쏟아 붓는다. 그 낭비가 국가적 
스캔들까지 되었을 때 로즈 베르탄의 살롱은 파리 패션계의 중심이 되어 있었다. 로즈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매주 두 번씩 만나 새로운 드레스를 만드는 한편 프랑스 대부분의 귀족, 
스웨덴이나 스페인의 왕비, 데본샤 공작 부인, 러시아 황후들의 의상까지 만들고 있었다.
  로즈 베르탄의 의상에는 엄청난 가격이 붙었다. 하지만 몰아치는 혁명의 폭풍도 그 가격을 
내리는 일, 의상의 수요를 줄이는 일, 왕비의 패션광적인 집착(이것이 체포의 방아쇠가 되었고 
결국에는 단두대로 향하게 만든 원인이었는지도 모르지만)을 억제하는 일 가운데 이루지 못했다.
  1791년 6월 초에 남편인 앙투아네트는 로즈 베르탄에게 대량의 여행복을 시일 안에 빨리 
맞추라고 주문을 한다. 그런데 이 주문이 발각되어 왕과 왕비가 국외 도주를 꾀하고 있다는 
의심을 뒷받침하고 말았다고 한다. 물론 왕비는 체포되어 옥에 갇혔고 1793년에 단두대에 선다.
  로즈 베르탄은 프랑크푸르트로 도망갔고 그 후 런던으로 옮겨가 유럽과 아시아 귀족의 의상을 
계속 디자인했으며 나폴레옹이 치세하던 1812년에 세상을 떠났다.
  로즈 베르탄의 세계적인 명성으로 사람들은 의상을 디자인하는 사람에게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파리에서는 부티크나 개인 디자이너들이 자신이 만든 의상에 자신의 이름을 넣게 된다. 그리고 
파리의 디자이너인 샤를르 윌트는 1846년에, 오늘날에는 저작권법에 따라 위조나 모조가 
금지되어 있는 브랜드 의상을 패션 모델을 써서 알린다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다. 이렇게 해서 
전속 디자이너가 있는 고급 양장점이 탄생한다.
  디자이너 브랜드가 태어나 커다란 이익을 낳는 산업으로 발전한 것은 19세기의 일대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패션 쇼와 동시에 일어난 기성복 보급이 서로 어우러진 결과다. 
  오늘날 백화점이나 옷가게에 가면 남성이든 여성이든 누구나 마음에 드는 옷을 얼마든지 고를 
수 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입을 수 있는 기성복이 옛날에는 없었다는 사실을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기성복이 나타나서 편리해진 지는 아직 300년도 지나지 않았고 양질의 기성복이 
탄생한 지는 200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 전에는 필요할 때 전문 재봉사나 집안의 여인네들이 옷을 만들어 왔다.
  첫 기성복은 남성용 양복이다. 헐렁하고 볼품없는 싸구려 옷이 1700년대 초 런던에서 팔리고 
있었다. 모양을 존중하는 남성들에게는 무시당하고 손님을 잃을 것을 두려워한 재봉사들에게는 
조소의 대상이 되면서도, 몸에 맞지 않는 이 양복은 아무리 헐렁거리더라도 특별한 때를 위해 꼭 
양복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노동자나 하층 계급 사람들에게 구입되고 있었다.
  런던에서는 하층 계급의 시민이 귀족보다 훨씬 많았는데 대부분이 귀족에게 지지 않으려고 
분발하고 있었으므로 기성복 양복이 많이 팔린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로부터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서 기성 양복은 리버풀이나 더블린에서도 만들어졌다.
  재봉사 길드는 이 유행을 억누르려고 기성복을 위법이라고 못박는 법률을 정하라고 청원한다. 
그러나 의회는 그런 성가신 일에 말려드는 것을 피했고, 기성복을 사는 사람이 더욱 늘어나자 
길드를 버리고 이 새로운 수요에 따르려는 재봉사의 수도 증가했다.
  1770년대가 되자 기성복 선풍은 유럽 패션의 중심지인 파리를 엄습한다. 재봉사들은 질도 좋고 
몸에 맞는 양복을 만들려고 경쟁하게 된다. 게다가 양질의 기성복은 상류 계급 고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한다. 70년대 말기에는 프랑스의 6개 회사가 양복과 제2의 기성복인 코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코트는 특히 어부들이 마음에 들어 했다. 항구에서 지내는 시간이 짧아 옷을 몇 번씩 
가봉하여 몸에 맞추어 만들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오랫동안 자신의 옷은 스스로 
만들고 있었다. 자신의 모양이나 기호, 사이즈도 모르는 남이 만드는 옷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모양이나 색이나 소재를 여러 가지 가운데에서 선택할 수 있는 이상, 옷을 만드는 데 
들이는 커다란 수공을 절약할 수 있는 일등의 기성옷에는 맞춤복에 없는 이점이 많이 있으므로 
결국에는 여성들도 기성복의 커다란 매력에 지고 만다. 여성과 아이들을 위해 처음으로 커다란 
기성복 제조 회사가 1824년에 파리에 탄생했는데 꽃가게와 비슷하다고 하여 라벨르 
샤르디네르(아름다운 꽃바구니)라고 이름지었다. 거의 같은 무렵인 1830년 미국에서는 매사추세츠 
주 뉴베드퍼드의 브룩스 브라더스가 신사용 기성복을 제조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두 가지 발명에 힘입어 기성복 제조업은 오늘날처럼 거대한 산업으로 성장한다. 우선 
재봉틀이 옷의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옷을 손바느질 외의 방법으로 
재봉한 것이다. 나아가 신사복, 부인복, 아동복 각각에 규격 사이즈를 채용함으로써 제2의 
돌파구가 열린다. 
  1860년 무렵까지 천은 두 가지의 방법으로 사이즈에 맞도록 재단했다. 한 가지는 가지고 있는 
옷과 똑같이 새로운 옷을 만드는 방법이다. 이 경우에는 옷을 풀어서 천 상태로 되돌려야 했다. 
또 다른 방법은 모슬린을 대략적인 형태로 재단하여 가봉하고 시착한 다음 다시 한 번 모양을 
바로 잡는 작업을 몸에 딱 맞을 때까지 되풀이한다. 그런 다음 완전하게 형태가 갖추어진 모슬린 
형태를 실제로 옷을 만들 좀더 값비싼 천에 대고 베끼는 것이다. 이렇게 번거로운 작업은 언제나 
고급복의 재봉에 채용되고 있었는데 이 방법은 아무리 봐도 대량 생산용은 아니었다.
  1860년대에 업계는 규격 사이즈에 맞춘 '사이즈별 옷본'을 채용한다. 손님은 이제 기성복을 살 
때 세 번이고 네 번이고 몸에 대보고서 어느 것이 가장 잘 맞는 사이즈인지 생각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가정에서도 잡지나 가게의 카탈로그에 실린 것이나 통신 판매용 옷본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1875년까지 옷본은 1년에 1천만 장 판매되었고, 옷본을 사용한 옷을 입는 사람을 멋쟁이로 
부르게 되었다. 맞춤복을 맞추는 것이 당연한 빅토리아 여왕마저 왕자를 위해서 당시 가장 
인기가 높던 패털릭 옷본을 사용한 양복을 주문하고 있다.
  기성복에는 어딘가 민주주의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사람이 모두 평등하게 만들어졌다는 것을 
확실하게 증명한 것은 아니었지만 부자이건 거렁뱅이건 대부분의 사람이 한정된 몇 가지의 
사이즈에 맞아떨어지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해주었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일은 인류의 
역사상 처음으로 패션이 소수의 부자 계급의 특권이 아니라,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손쉬운 것이 
된 것이다.

     죄를 씻으면 병도 낫는다

  옛날 사람들은 병이란 신이 내리는 벌이며 죄를 씻으면 병도 낫는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약과 종교와는 몇 세기 동안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 신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면 
병에 걸리고 심신을 깨끗이 하여 신의 심기를 풀어주면 병도 낫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사고 
방식은 영어의 'pharmacy'(약학)의 어원이 '나쁜 것을 없애 깨끗이 한다' 라는 뜻의 그리스어 
'pharmakon'에서 오고 있는 것을 보아도 분명하다.
  기원전 3500년까지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수메르인들은 사실상 현대 투약법의 모든 
것을 개발하고 있었다. 그들은 양치질약, 흡입제, 좌약, 관장, 습포, 코로 흡입하는 약용 분말, 
탕약, 주사, 환약, 정제, 바르는 물약, 연고, 그리고 경고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 무렵 무명의 수메르인 의사가 최초의 약 목록을 써 놓고 있다. 한 장의 점토판에 설형 
문자로 쓰여 있는 목록에는 지금도 우리를 괴롭히는 병을 치료하기 위한 여러 가지 약 이름이 
들어 있다. 양치질약에는 소금물. 일반적인 상처 소독약으로는 시큼해진 와인. 수렴제에는 오줌 
속의 질소를 포함한 노폐물에서 채취한 초산칼륨. 그리고 해열제에는 아스피린과 같은 약효가 
있는 버드나무 껍질을 분말로 한 것.
  거기에다가 이집트인이 고대의 약장 내용물을 늘렸다.
  기원전 1900년 무렵 독일인 이집트 학자 게오르그 에벨스의 이름을 붙인 두루마리로 된 에벨스 
고문서에는 옛날 이집트 의사들이 시행착오를 거듭해서 얻은 노하우가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 
변비에는 가루로 만든 센나(열대 지방에서 나는 콩과의 키 작은 나무. 잎은 설사약으로 씀) 
열매나 피마자유로 통하는 약으로 치료했으며, 소화 불량에는 박하 잎을 씹는다든지 
탄산염(오늘날에는 제산제로 알려져 있다)을 사용한다. 그리고 이를 뽑을 때 통증을 줄이기 위해 
이집트 의사들은 에탄올로 잠시 환자의 신경을 마비시켰다.
  또 이 고문서를 보면 약품 조합에 대한 고대 사회의 진기한 계층 제도의 일면도 엿볼 수 있다. 
'약품 조합 사장'은 주임 약사에 해당하는데, 추출물을 포함한 광물이나 약초를 모으는 야외 
작업자인 '약 채취자'를 감독했다. '조합 기사'(기술자)는 재료를 건조시킨다거나 가루로 만드는 
일을 했으며 그것을 '조합사'가 처방에 따라 조합했다. 그리고 '약품 보존자'가 각 지방에서 
수집하거나 수입한 광물이나 약초, 동물의 기관 같은 재료를 보존하는 창고를 관리했다. 
  기원전 7세기에 이미 그리스인들은 의료에 대해 앞선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의사는 
과학적인 틀 속에서 병의 물리적인(인체의) 원인을 진단하여 치료에 애씀과 동시에 그 병이 지닌 
초자연적인(마음의)요인도 치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이 고대 그리스의 의사는 병에 대한 전체요법적인 접근을 중시했다. 설령 병의 
심리적인 요인을 스트레스나 우울증이라고 진단하지 않고 노한 신들의 저주라고 해석했다 한들 
어쩌랴. 어쨌던 의료의 주신인 아폴로와, 인간을 위해 천국에서 불을 훔친 거인족인 
프로메테우스가 모든 약의 조합을 관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약리학의 근대사는 16세기에 시작되었으며 화학분야에서 초기의 커다란 발견이 선도자가 
되었다. 약품이 몸안에서 어떻게 작용하고 효과를 거두는 것인지를 알면 의학에서 마술이 크게 
제거되기 때문이다.
  같은 세기에 또 한 가지 획기적인 사건이 있었다. 1546년에 독일에서 최초의 근대적인 약전이 
출판되었던 것이다. 수백 가지의 의약품이 실렸으며 조제 방법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딸려 
있었다. 그때까지 농도가 크게 달라 성분조차 각양각색이었던 약이 이 책으로 엄밀히 규정되었다. 
이 약전은 스위스와 이탈리아, 영국에서도 번역 출판되었다.
  약은 과학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으나 과학적인 사실이 미신과 교체되기까지는 
그로부터 몇 세기가 걸렸다.
  첫번째 이유는 의사가 병의 원인인 박테리아나 바이러스 같은 병원체의 존재를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거짓된 미신을 병의 원인으로 날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로운 화학 약품이 
생겨도 병 치료에 대한 효능에 대해서는 아직도 시행착오를 거듭하고 있었다. 새로운 약이 
효험이 있더라도 어째서 효험이 있는지 진정한 이유는 아무도 알지 못했으며 어떻게 효과가 있는 
것인지는 더욱더 몰랐다.

  약장 안에 있는,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는 대부분의 약도 이러한 시행착오를 통해서 
생겨난 것이다. 병과 사람의 생화학적 조성이 너무 복잡하므로 의학의 커다란 진보가 축적된 
현대의 우리 약장에 최근 추가된 신약에서도 우연히 발견되는 것이 많은 것이다.
  약장 안에 놓여 있는 수많은 약들 가운데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그리고 가장 많이 사용되는 
약을 들라고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아스피린이다.
  고대의 의사는 열이 날 때 버드나무 껍질에서 만든 가루를 권했다. 오늘날에는 버드나무 
껍질에 아스피린과 관계가 있는 세리틸산화합물이 함유되어 있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것은 아스피린만큼 효과도 없으며 위장을 더욱 자극하고 출혈시킬 가능성도 높다.
  아스피린, 화학명 아세틸살리실산은 이 옛날 치료약의 인공적 변종이다. 아스피린은 현대에 
통증과 염증을 멈추게 하는 약으로 세계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지만, 1853년에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뒤 40년 동안 잊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독일의 화학자가 관절염으로 몸이 말을 듣지 
않는 아버지를 위해 좋은 약을 찾고 있을 때 가까스로 재발견했던 것이다. 
  알자스로렌의 과학자 샤를르 프리드리히 폰 게르하르트는 1853년에 자신의 실험실에서 
처음으로 아세틸살리실산을 합성했다. 그러나 그가 한 한정된 실험 결과만으로는 그 약이 당시에 
인기 있던 세리신(버드나무 껍질과 장미과의 하야초 추출물)에 비해 특별히 뛰어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아스피린은 무시되었으며 발열과 염증, 관절염 환자는 여전히 세리신을 계속 
복용했다.
  1893년에 독일의 젊은 화학자로 바이엘 제약 회사에 근무하던 펠릭스 호프만은 아버지의 만성 
류머티즘을 조금이나마 낫게 해주려고, 알려져 있는 모든 약을 하나도 남김 없이 조사하여 
세리신의 합성 형태를 알게 되었다.
  그는 1회분을 조합하여 아버지에게 시험해 보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이 인공 합성약은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증상을 완하시켰으며 통증을 거의 완벽하게 물리쳤다.
  뒤셀도르프에 있는 바이엘 사의 화학자들은 호프만이 중요한 신약을 발견한 것을 알았다. 
하야초(spiraea ulmaria)에서 합성물을 제조하기로 한 바이엘 사는 아세틸 기(acetyl)에서 'a'를, 
라틴어인 'spiraea'에서 'spir'를 취했으며 약품의 접미사로 인기가 있던 'in'을 붙여
'aspirin'이라는 상표를 만들었다.
  1899년에 분말 형태로 시장에 내놓은 아스피린은 즉시 세계에서 가장 많이 처방되는 약이 
되었다. 1915년에 바이엘 사는 아스피린 정제를 팔기 시작했다. 독일에 본거지를 둔 이 바이엘 
사가 제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당시 '아스피린'이라는 이름의 상표권을 소유하고 있었으나 
독일의 패전으로 연합국측은 상표권도 전쟁 배상의 일부로 요구했다. 1919년 6월의 베르사유 
조약에서 독일은 그 상표권을 프랑스. 미국. 소련에게 넘겨주었던 것이다.
  그 후 2년 동안 각 제약 회사는 아스피린의 이름을 자기 회사 것으로 만들려고 서로 다투었다. 
그리고 1921년의 유명한 재판 판결에서 재판장인 래너드 핸드가 이 약은 아스피린으로 이미 
세계에 알려져 있어서 어떤 회사도 그 이름을 소유할 수 없으며, 또한 그 이름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사용료를 낼 수도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고유명사였던 아스피린이 보통명사가 된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거의 1세기에 걸쳐 아스피린을 사용하고 실험해 왔으면서도 과학자들은 
어째서 이 약이 진통제. 해열제. 염증 억제제로서 갖가지 기능을 발휘하는지 완전히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바셀린 사나이

  처음에 바셀린은 아주 폭넓게 사용되고 남용되었다.
  반투명한 젤리 물질인 바셀린을 낚시꾼은 송어를 끌어들이기 위해 낚싯바늘에 발랐고, 무대 
여배우는 빛나는 이 연고를 눈물로 보이기 위해 뺨에 발랐다. 바셀린은 여간해서는 얼지 않기 
때문에 북극 탐험가인 로버트 피어리는 살갗이 트지 않도록 피부를 보호하는데 썼으며, 기계 
장비가 녹슬지 않도록 발라서 북극점까지 가지고 갔다. 
  그리고 고온다습한 열대 지방의 더위 속에서도 역겨운 냄새가 나지 않았으므로 아마존의 
원주민은 바셀린으로 요리를 했고, 빵에 발라 먹었으며, 돈 대신에 바셀린으로 거래를 하기도 
했다.
  바셀린의 발명자인 브루클린 출신의 화학자 로버트 오거스터스 치즈블로는 바셀린을 모든 
곳에서 갖가지 용도로 사용한다는 얘기를 듣고도 놀라지 않았다. 치즈블로는 96세까지 살았는데 
바셀린 덕분에 오래 살았다고 말했다. 그는 날마다 바셀린을 한 스푼씩 먹고 있었던 것이다.
  1859년에 로버트 치즈블로는 파산을 벗어날 방법을 찾고 있었다. 당시에는 등유가 가정과 
산업용의 주된 연료원이었으나 펜실베이니아의 석유 붐으로 석유 연료가 좀더 싸질 거라는 전망 
때문에 그가 브루클린에서 하고 있던 등유 사업은 위협받고 있었다.
  브루클린의 이 젊은 화학자는 석유 사업에 참여할 작정으로 석유가 발견된 중심지인 
펜실베이니아 주 테이터스빌로 여행을 떠났다. 그런데 보링 막대기에 끈적끈적 달라붙어 꼼짝 
않는 풀 모양의 파라핀 같은 석유 찌꺼기를 보고 화학자로서 호기심을 느꼈다.
  치즈블로의 질문을 받은 현장의 작업원들은 펌프를 막히게 하는 이 물질에 재미삼아 이름을 
몇 개 붙여 놓고 있었으나 그 물질의 화학적인 성질에 대해서는 아무도 전혀 짐작을 하지 
못했다. 다만 작업원들은 그것을 칼에 베인 상처나 화상에 바르면 치료가 빨라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치즈블로는 석유 사업에는 참여하지 않고, 이상한 석유 폐기물을 병에 담아 브루클린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풀 모양의 그 폐기물을 정제하고 정분을 추출하기 위해 몇 개월에 걸쳐 실험을 
했다.
  그러자 화합물은 투명하고 매끄러운 물질로 되었으며 그는 그것을 '석유 젤리'라고 불렀다. 
치즈블로는 자신이 모르모트가 되어 젤리의 치유력을 시도하기 위해 손과 팔에 크고 작은 베인 
상처와 찰과상, 화상을 입혔다. 그리고 추출물을 바르자 상처는 병균 감염도 없이 즉시 낫는 
듯했다. 1870년에 치즈블로는 세계 최초의 바셀린 석유 젤리를 제품화하고 있었다.
  바셀린(vaseline)이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치즈블로는 어느 쪽도 
부정하지 않았던 것 같다. 1800년대 후반에 그의 친구들이 주장했던 것이 그 하나다. 치즈블로가 
이 물질을 정제하고 있던 초기 무렵, 아내의 꽃병을 실험용 비커로 사용한 점에 착안하여 
'vase'(꽃병)에 당시 의약품의 접미사로 인기가 있던 '린'(line)을 붙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치즈블로가 설립한 제조 회사의 직원에 따르면, 치즈블로는 좀더 과학적으로 독일어인 
'wasser'(물)와 그리스어인 'elaion'(올리브유)이라는 두 낱말을 합성한 것이라고 말했다.
  로버트 치즈블로는 자신이 만든 제품의 실험대 제 1호가 되었을 뿐 아니라 가장 강력한 
광고인도 되었다. 
  그는 말 한 마리가 끄는 이륜마차를 타고 뉴욕 주 북부를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베인 상처나 
화상에 바셀린을 사용하겠다고 약속한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공짜로 배달했다. 사람들의 반응은 
굉장했다. 6개월 안에 치즈블로는 마차로 도는 세일즈맨 20명을 고용하여 약 30그램당 1페니에 
바셀린을 팔기 시작했다.
  뉴잉글랜드 사람들은 바셀린을 베인 상처와 화상 외에도 사용하고 있었다. 주부들은 바셀린이 
나무 가구의 때나 얼룩을 지워 반짝반짝하게 해주고 나무의 표면을 보호해 준다고 말했다. 또한 
바싹 말라 버린 가죽 제품이 바셀린 덕분에 되살아난다고도 보고해 왔다. 농부들은 집 밖에서 
사용하는 기계에 바셀린을 듬뿍 발라 두면 녹슬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 프로 화가는 바닥에 
바셀린을 얇게 펴두면, 물감이 튄 것이 눌러 붙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바셀린을 누구보다 찬양한 것은 약방 주인들로 그들은 불순물이 없는 깨끗한 이 
연고를, 자신들 고장에서 만드는 고약이나 크림, 화장품의 재료로 사용했던 것이다.
  20세기 초에 바셀린은 가정용 상비약의 중심적인 존재가 되어 있었다. 로버트 치즈블로는 
끈적끈적하고 성가신 폐기물을 백만 달러 산업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1912년에 뉴욕의 커다란 보험 회사 본사에 큰 불이 났을 때, 화상을 입은 사람들의 치료에 
바셀린이 사용된 것을 알고 치즈블로는 자랑스럽게 여겼다. 이제는 병원에서 널리 사용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당시 신흥 자동차 업계에서는 바셀린을 바르면 차의 배터리 단자가 부식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여 바셀린은 공업계에서도 널리 사용하게 되었다.
  또한 스포츠 세계에서도 일반화가 되었다. 장거리 수영 선수는 바셀린을 몸에 발랐으며, 
스키어는 얼굴에 발랐고, 야구 선수는 가죽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글러브에 문질러 발랐다.
  이렇게 다종다양한 이용법이 나오는 동안 바셀린의 발명자는 날마다 한 스푼의 바셀린을 먹는 
것을 거르지 않았다.
  50대 후반에 늑막염에 걸렸을 때 치즈블로는 담당 간호사에게 정기적으로 전신을 바셀린으로 
마사지하라고 지시했다. 그의 조크대로 치즈블로는 바셀린 때문에 죽음의 손길에서 벗어났으며, 
그 뒤로도 40년이나 더 살아 1933년에 사망했다.

     한 애처가의 발명품

  1876년의 필라델피아 의학회에서 조셉 리스터 경의 병원균설에 감명을 받은 미국의 의료 
관계자는 조셉 로렌스 의사 한 사람이 아니었다. 브루클린에서 온 31세의 약제사 로버트 존슨도 
저명한 영국인 외과 의사 리스터의 강의를 듣고 인생이 바뀌었다.
  리스터는 제재소에서 나오는 톱밥으로 만든 재료가 외과용으로 쓰이는 것을 탄식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리스터는 수술할 때 사용하는 붕대는 모조리 석탄산 수용액에 담가 소독하고 있었다.
  브루클린의 약제 회사 시밸리 앤 존슨의 공동 경영자였던 존슨은 미국의 병원에서 톱밥이나 그 
밖에 여러 가지 불결한 기구가 사용되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토목 기사인 제임스와 변호사인 
에드워드 형제에게, 리스터가 강의 때 이야기한 이론에 따라 개별 포장한 외과용 멸균 붕대를 
만들어 판매하려는 자신의 계획에 참여해 달라고 설득했다.
  1880년대 중반 이들 형제는 존슨 앤 존슨 회사를 설립하여 면과 거즈로 만든 타원형 붕대를 
제조했다. 붕대 하나마다 세균을 막는 패키지에 밀폐하여 멀리 떨어진 병원이나 전쟁터의 
의사에게도 위생적으로 운반되도록 한 것이다.
  존슨 형제는 보건 위생업계에서 점점 성공을 거두었다. 
  1893년 존슨 형제는 미국의 어머니들을 겨누어 산뜻한 향내가 나는 존슨즈 베이비 파우더를 
팔기 위해, 조산부들이 사용할 출산용품이 한 벌 든 포장에 베이비 파우더를 서비스 상품으로 
넣었다.
  더불어 세계의 모든 가정 약장에 등장하게 될 멸균 제품이 곧이어 탄생하려 하고 있었다.
  1920년에 존슨즈 앤 존슨의 사장인 제임스 존슨은 알 딕슨이라는 사원이 조그만 붕대를 손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전해 들었다. 구매과에서 면의 매입을 담당하고 있던 딕슨은 그 무렵 막 
신혼생활을 시작한 사람이었다. 딕슨의 신부는 성격이 덜렁거려 늘상 부엌에서 칼에 베이고 불에 
데이곤 했다. 그러나 남편 회사의 커다란 외과용 붕대를 사용하기에는 상처가 너무 작았으며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나중에 알 딕슨은 밴드에이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쉽게 붙일 수 있고 탄탄해서 무균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붕대를 연구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딕슨은 아내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자기 회사의 멸균된 면과 거즈를 작게 잘라 반창고 
중앙에 얹어 사용했다. 필요할 때마다 하나하나 만드는 것이 귀찮아진 딕슨은 이것을 대량으로 
만들어 두고 반창고의 달라붙는 부분에 일단 크리놀린의 뻣뻣한 천을 붙여 두는 것을 
생각해 냈다.
  제임스 존슨은 알 딕슨 사원이 두 장의 크리놀린 천을 벗겨 손쉽게 자신의 손가락에 붕대를 
감는 것을 보았을 때 회사에 새로운 구급용품이 생긴 것을 알았다.
  밴드에이드라는 이름은 이윽고 구급 반창고의 일반적인 명칭이 되는데, 존슨 앤 존슨 회사의 
뉴브런즈윅 공장의 관리자인 W. 존슨 케논이 이 이름의 발안자였다. 그리고 최초의 접착 붕대 
구급 반창고는 무균 상태에서 컨베이어 시스템으로, 그러나 손으로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매상이 대단하지는 않았다. 구급 반창고 밴드에이드의 가장 강력한 선전맨 중에 그 
회사의 연구부장 프레드릭 킬머(시인 조이스 킬머의 부친)박사가 있었다. 킬머는 1890년대 존슨즈 
베이비 파우더의 개발과 마케팅의 책임자였으며 1920년대에는 밴드에이드의 판매 촉진 캠페인에 
참가했다.
  그는 밴드에이드가 베인 상처나 화상의 감염증을 예방하고 치료를 빠르게 한다는 사실을 
의학적이고도 일반적인 기사로 써서 널리 알렸다.
  회사가 한 가장 교묘한 선전 방법 가운데 하나는 무료 밴드에이드를 전국의 보이스카웃단을 
비롯해 지방의 푸줏간까지 무제한으로 배달한 것이었다. 
  밴드에이드의 인기가 치솟았다. 1924년에는 기계 생산으로 길이 약 7.5센티미터, 폭 약 
2센티미터의 밴드에이드가 제조되고 있었다. 4년 뒤에는 통풍을 좋게 하여 치료를 더욱 빠르게 
하기 위해 거즈 패드에 통기 구멍을 낸 밴드에이드가 미국에서 발매되었다.
  밴드에이드의 발명자인 알 딕슨은 그 뒤에도 존슨 앤 존슨에 오랫동안 근무하여 부사장이 되어 
중역으로 업무를 수행했다. 오늘날까지 가정집 약장에 반드시 한 개쯤은 들어 있는 소형 
반창고는 이렇듯 한 애처가의 고안품으로 세상에 나온 것이다.
  회사에서 딕슨의 발명품에 대해 1921년에 제품이 판매되기 시작한 후 세상 사람들이 1천억 개 
이상의 밴드에이드를 사용했다고 어림잡고 있다.
  이 밴드에이드와 함께 상처를 치료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의약품이 소독제이다.
  베인 상처를 깨끗이 하는데 사용하는 약 알코올성의 수렴제 위치해젤(wych hazel)은 위치해젤 
나무, 즉 미국의 조록나무 잎과 나무껍질로 만든다.
  열을 가하면 깍지가 터지는 이 키 작은 나무는 앵글로색슨 시대에 실용적인 면과 미신적인 
면에서 사용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뭇잎이 떨어지고 가지가 드러나 마치 나무가 죽은 듯이 보이는 만추가 되고 
나서야 노란 꽃이 피므로 영국 주민들은 위치해젤 나무에 초자연적인 힘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고승이 작은 위치해젤 가지를 들고 있으면 그 손은 군중 속에서 
범죄인을 지목할 수 있다고 믿었다.
  낭창낭창하고 작은 위치해젤 가지가 더욱 실용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우물을 파기 위해 지하수 
장소를 찾는 점술봉으로 삼은 것이었다. 실제 나무 이름에 있는 '위치'라는 단어는 가지가 
낭창낭창한 나무를 뜻하는 앵글로색슨어 'wice'에서 왔다.
  앵글로색슨족이 위치해젤 나무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던 일로 미루어 최초로 이 나무에서 약을 
만든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좀더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미국 인디언 부족이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 ; 1620년 메이플라워 호로 신대륙에 이주한 청교도의 일단. 총 102명)에게 
위치해젤 나무껍질로 통증이나 타박상, 찰과상을 완화시켜주는 로션제를 만드는 방법을 가르친 
것이다.
  그 뒤 2세기 동안 사람들은 가정에서 자신들이 쓸 위치해젤을 만들고 있었다. 이 로션제는 
미국에서 아주 다양한 용도로 사용했다. 소독제, 세안제, 수렴제, 국소용 진통제, 냄새 제거, 
화장수의 원료, 그리고 위치해젤의 알코올 성분이 재빨리 증발하여 땀을 흘리고 식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내므로 더운 날의 청량액(오늘날의 스플래시와 같은 것)으로도 사용했다.
  1866년에는 뉴잉글랜드의 교사 토마스 뉴튼 디킨슨은 이것을 시판하면 돈벌이가 될 만큼 
수요가 있을 것이라고 예측을 했다. 그는 질이 좋은 미국산 위치해젤 나무가 자라는 들판이 
가깝게 있는 코네티컷 주 어섹스의 코네티컷 강 연변에 제조소를 차렸다.
  1860년대에 디킨슨의 위치해젤은 작은 나무통에 담겨 약국에 보내졌으며 약국은 그것을 병에 
넣어 손님에게 팔았다. 딕슨의 위치해젤 처방이 무척 호평을 받았으므로 오늘날까지 기본적인 
제조법은 바뀌지 않았다. 이것은 사람들이 적어도 300년 동안 약장에 넣어온 약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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