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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드니 랭동] 신들은 신난다

by Casey,Riley 2023.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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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들은 신난다
드니 랭동
솔 출판사
 

    
1부 올림포스쪽으로
    1. 제우스가 세력을 잡다 
  3천여 년 전의 땅 위에는 수많은 신들이 모여 살면서 끊임없이   인간의 
일에 끼여들었다 신들은 여러 면에서 우리들 보통 인간과 닳은  점이 많았
다. 거만하고, 욕심 많고, 게으르고,  탐욕스럽고, 치사하고. 거짓말도 하고, 
원한도 품고, 질투도 하며,  경박하고, 변덕스럽고 난폭했다. 때로는  좋은 
감정을 가질 때도 있었다. 또한 결혼을 하여 자식을 낳고, 서로  싸우고 속
이며, 복수와 용서를 일삼았다. 이 모든 것은 인간과의  공통점이다 그러나 
신들은 매우 독보적인 2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우선 신들은 결코 늙거
나 죽지 않는다. 그래서 흔히 신들을 '불사  신' 이라고 부른다. 이 놀라운 
특성은 신들만이 구할 수 있는 2가지 양식을 규칙적으로 섭취한 데서 유래
했다. 그것은 식물을 원료로 도수 높은 알코올을 빚어 만든 넥타르라는 술
과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그 맛이  어떤지도 확실히 모르지만, 전문
가들에 의하면 달큰한 오트밀과 비슷했을 것이라는 암브로시아라는 음식이
다. 또 하나의 특징은 원할 때면 언제나  모습을 바꾸어 변신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신들은 남자나  여자, 동물이나 사물로도  변할 수 있었다. 
그들은 주로 인간을 속이거나 골탕먹이려 할 때 이러한 능력을   사용하곤 
했다. 다행히 그들이 인간으로 변신했을 때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 
3가지 있다. 첫째, 신들은 아무리  더워도 땀을 흘리지 않는다.  둘째, 해를 
바라보고 있어도 눈을 깜빡거리지 않는다. 셋째, 신들의 몸은  그림자가 생
기지 않으며 물이나 거울에도 모습이 비치지  않는다. 신들이 인간의 일에 
끼여들어 했던 역할을 고려해볼  때, 우선 신들의 역사에  대해 어느 만큼 
할애하지 않고서는 영웅들의 모험을 이야기 할  수 없다. 불멸의 신들이긴 
하지만 그들 역시 어떤 역사 파란만장하기조차 한 나름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간테스족 같은 티탄족과 티탄족 같은 기간테스족 
  세상이 처음 시작될 때에는 하늘과 땅만 있었다. 그 둘이 결합하면서 강
력한 두 종족이 생겨났는데, 그것이 티탄족과 기간테스족이다. 티탄족은 그 
수가 수십에 이르며, 그리스인들에 따르면 '거대한 크기와 놀라운 힘을 가
진 존재들' 이라고 한다. 기간테스족 역시 수십 명이고 '거대한  크기와 놀
라운 힘을 가진 존재'였던  것 같다. 그렇다면  티탄과 기간테스의 차이는 
도대체 뭔가라고 물을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프린스톤 대학의 저명
한 비교진학 전문가 폰 프루흐템부흐 박사의 설명이 아마도 도움이  될 것
이다. 그는 "티탄족은 정말로 기간테스족 같은 힘을 가졌다는 특징이 있는 
반면, 기간테스족은 무엇보다도 티탄족 같은 거대한 체구로 두드러진다"고 
했다. 외형적인 차이가 무엇이든 간에, 티탄족과 기간테스족은 정신적인 면
에서 큰 차이가 난다. 즉 티탄족은 지능적이지만 기간테스족은 야만적이라
는 점이다. 그래서 티탄족은 아주 빠른 시간 내에 기간테스족을 제압할 수 
있었고 기간테스족은 노예와 흡사한 예속 상태로 떨어졌던 것이다. 

    잔혹한 아버지 크로노스 
  티탄족의 우두머리는 크로노스였고 그의 아내는 레아였다. 기간테스족에 
대한 승리로 세계 제국을 손아귀에 넣은 크로노스는 염세적인 데다 의심이 
많고 잔인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자신의 아들 중 하나가 언젠가 자
기를 제거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이러한 위험을  피하기 위해 그는 아
내가 아이를 낳으면 그  즉시 모두 먹어버리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다섯 아이를 계속해서 삼켜버렸고 가엾은 레아는 모성의 당연한 기쁨을 빼
앗겨버렸다. 욕구 불만이 점차  쌓여가던 레아는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여섯번째 아이만은 살려내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크
레타 섬의 이데 산으로 피신시켜 보냈다.  남편에게는 갓난아이 대신 돌덩
이를 배내옷에 둘둘 말아 주었다. 탐욕스러운 크로노스는 아무것도 눈치채
지 못한 채 그것조차 삼켜 버렸다. 

    제우스, 신들의 세계를 정복하다 
  어머니에 의해 살아난 여섯번째 아이가 제우스이다. 그는 염소 아말테이
아의 젖을 풍족하게 먹으며, 즐겁고 소란스러운  한 무리의 요정과 목신에 
의해 키워졌다. 요정들의 외침과 웃음 오리가 아이의 울음 소리를 덮어 주
어 크로노스는 아이가 살아 있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어른이 된 제
우스는 고마움의 표시로 염소 아말테이아를 하늘의 별자리로 만들어주었으
며, 염소의 뿔 하나를  떼내어 이데 산의 요정들에게  선물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풍요의 뿔'이라 불리는 이 뿔은 요정들이 몹시나 좋아했던 꽃이며 
과일, 장신구와 보석을 한없이 만들어 내는 기적과도 같은  요령을 부렸다. 
이렇게 자기를 돌봐주었던 보호자들에게 은혜를 갚고 나자  제우스는 자기 
아버지와의 일을 청산할 역량이 생겼다. 후에 다른 여러 증거를 통해 밝혀
지겠지만, 제우스는 뛰어난 정치 감각을 타고났다. 크로노스를 이겨 권력을 
잡으려면 연합군에 의존해야 한다는 걸 알았고, 연합군이 너무 많은 걸 요
구할 경우 그들을 없애버릴 수단도 마련할  줄 알았다. 제우스는 기간테스
족이 크로노스에게 반항하도록 유인했고, 티탄족의 중요한 인물 중의 하나
인 프로메테우스의 협력도 얻어냈다. 프로메테우스는  뛰어난 지력과 발달
된 도덕 의식으로 동족들 사이에서 단연  두드러진 인물이었다. 인권 수호
를 위해서라면 서명을 마다하지 않는 우리  시대의 몇몇 지식인들처럼, 프
로메테우스는 크로노스의 권력 남용과 잔혹함에 대해 종종 두려움 없이 항
의하곤 했다. 그가 제우스를 돕기로 약속했던  것은 개인적인 야망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이상주의 때문이었다. 이 동맹을 필두로 제우스는 크로노스
와 티탄족을 기습 공격하여 무너뜨렸다. 그리고 아버지가 삼켜버렸던 다섯 
아이를 토해내게 했는데, 이상하게도 아이들은 아직  소화도 되지 않은 상
태였다. 먼 곳으로 추방당한 크로노스는 불가사의하고 결정적인 최후를 맞
이했다. 남아 있는 티탄족은 땅속 깊은 곳에 매장시켜  없애버렸다. 때문에 
그리스 사람들은 뒤이은 몇 세기 동안의 화산 폭발을 땅에  묻힌 티탄족의 
분노의 발작이며 원한의 분출이라고 생각했다.  티탄족의 하나인 아틀라스 
는 힘이 너무 세서 매장이 어려웠기 때문에 두 어깨로 하늘을 영원히 짊어
지고 있어야 하는 특별한  형벌을 받았다. 기간테스족은  제우스를 도와준 
대가로 자유를 되찾았다 프로메테우스는 모든 개인적인 보상을  정중히 거
절했다. 단지, 편을 잘못 선택했던 자기 동생 에피메테우스를  사면해줄 것
을 요구했을 뿐이다. 

    기간테스족의 반항 
  제우스는 그리스에서 제일 높은 산 올림포스에 자리를 잡았고, 크로노스
가 토해낸 두 형과 세 누이와 함께  올림포스 신전의 첫 세대를 이루었다. 
형들의 이름은 포세이돈과 하데스였고 누이들은 헤라, 데메 테르, 헤스티아
였다. 처음에는 온갖 일을 제우스 혼자 돌보고  형제들은 하는 일 없이 한
가롭게 지냈다. 당시만 해도 신들의 고민과 근심의 주된 원인인 인류가 아
직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은 그다지  고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더라
도 단 한 명의 신이 감당하기에는 벅찬 일이었다 흔자 모든 걸  감시할 수 
없었던 제우스는 이전의 동맹이었던 기간테스족이 권력의 핵심  부분을 차
지하지 못한 데 불만을 품고 자신에 대항하는 공모를 통해  왕위를 뺏으려
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어느 날  밤 기간테스족은 행동을 개시하기로 
결정했다. 제우스를 포위하기 위해서는 우선 매우  가파른 절벽으로 된 올
림포스 산을 기어 올라가야만 했다. 그들은 이웃해 있는 펠리온 산과 오사 
산의 거대한 돌무더기들을 끌어내어 펠리온  산을 오사 산 위에  쌓아올려 
올림포스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전날 밤에  넥타르주를 과하게 마신 제우
스와 형제들은 깊은 잠에 빠져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제우스가 길들여 늘 가까이 두고 지내던 독수리만은 한 쪽 눈을 뜬  채 자
고 있었다. 선두 공격대가 산의 정상에 올랐을 때 독수리는 맹렬하게 날개
를 파닥거려 제우스와 포세이돈과 하데스를 깨웠고 그들은 즉시 전투에 임
했다. 하지만 수적인 열세가 너무도 명백했고  기간테스족에 의해 곧 전멸
되리라는 걸 깨달았다. 바로 그때 제우스는 자신의 수중에 있던 위력의 비
밀 무기를 처음으로 사용해보기로 결심했다. 이 고도의 무기는 벼락이었다. 
제우스가 어떻게 그것을 얻어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추측해볼  때, 
박식한 프로메테우스가 고안해낸 것으로, 도덕적인 조심성이 몸에 밴 프로
메테우스는 절대로 사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후 제우스에게 준 것 
같다, 그러나 극한의 위기상황에 처한 제우스로서는 그러한 조심성이나 약
속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포세이돈과  하데스가 후퇴하고 기간테스족이 
올림포스 산에 발을 내딛으려 하던 바로 그  순간, 앞을 캄캄하게 하는 한 
줄기 섬광이 제우스의 손에서 솟아 나와 대기를 가르더니 기간테스족이 발
판으로 삼아 기어오르던 바위들을 일순간에 가루로 박살내버렸다. 곧 이어 
바위 덩어리들이 거대한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렸고  기간테스족은 추락하
고 말았다. 그날 이래로 폭우가 쏟아질 때  벼락이 치면 산이 무너져 내리
는 소리와 비슷한 천둥 소리가 늘 함께 들리게 된 것이다. 

    권력의 분리 
  이러한 호된 위기를 겪고 난 제우스는 권력 분리의 원칙을  고안해 내어 
실행에 옮기게 된다. 모든 일을 혼자 도맡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도 했
고, 기간테스족과의 전쟁을  함께 치른 형제들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은 
마음도 있고 해서 제우스는 세계를 그들과 나눠 갖기로 결정했다. 그는 우
주를 공평하지 않은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 가장 중요한 첫째 부분은 하늘
과 땅이며 둘째 부분은 바다, 셋째 부분은 황천이었다. 그런데 아직 인간이 
창조되지 않았기에 당시의 황천은 비어 있었다.  세 지역의 할당은 추첨을 
통해 이루어졌지만 제우스가 조작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늘과 땅은 제우스
가 차지한 반면 포세이돈에게는 바다, 하데스에게는 황천이 돌아갔기 때문
이다. 이처럼 권력의 공평함을 선포한 원칙에도 불구하고 제우스는 사실상
이론의 여지없는 우월권을 유지하였다.  그러한 우위를 좀더  잘 나타내기 
위해 제우스는 자신의 거처와 왕권을 올림포스에 정하였고  포세이돈과 하
데스는 각기 바다 밑과  지하에 궁전을 지었다. 세  형제는 성격과 취미가 
사뭇 달랐으며, 이는 그들 각자가 실제의  삶을 영위하는 방식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정치가 제우스 
  제우스의 성격은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 시대의 위대한 정치가들과 비슷
하다. 그는 무엇보다도 인간이나 신들과의 접촉을 좋아했다. 후손을 만들어
낼 수만 있다면 온갖 관계와 결합에 즐거이 탐닉했다. 그래서 당당한 체구
와 가끔 위협적으로 치켜 올라가는 두툼한 눈썹,  화를 낼 때면 주위 사람
들을 떨게 만드는 우레 같은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여신들이나 인간 여자
들에게 좌지우지되곤 했다. 요샛말로 그는  '플레이보이'였기 때문이다. 그
의 여성 편력에 대해서는 나중에  한 부분을 할애하여 집중적으로  다루게 
될 것이다. 요즘의 정치인들과 구별되는 그의  유일한 모습은 거짓말을 몹
시 혐오했다는 점이다. 외도한 사실을 아내에게  숨기려 했던 경우를 제외
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스스로를 속이지  않겠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호메로스가 말했듯이 '거짓말하거나  맹세를 어긴 사람은 결
코 도와주려 하지도 않았다'.  올림포스의 지배자가 된  제우스의 제일 큰 
고민은 신부를 구하는 일이었다. 자신의 위치를  고려해볼 때 두번째 서열
의 여신과 결혼할 수는 없었기에 선택의 폭은 당시에 완전한  권리를 가지
고 있던 3명의 여신, 즉 세 누이들로 한정되었다. 그는 셋 중에서  가장 아
름다운 헤라를 선택하는데 이로 인해 나중에  몹시 후회하게 된다. 하지만 
그 당시로서는 승리와 영광의 첫 순간을 맘껏  음미할 수 있었다. 황금 권
좌에 앉아 있는 그의 한 손에는 권위의  표징인 왕홀이, 다른 손에는 힘의 
도구인 벼락이 들려 있고, 발치에는 목숨을  구해줬던 애완 독수리가 눈을 
반쯤 감은 채 쉬고 있었다. 빛나고  향기롭고 평화로운 올림포스의 대기를 
아직은 그 무엇도 흐트러트리지 않았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 
  포세이돈은 제우스보다 덜 사교적이었고 신들과 어울리기보다는  자연과 
접촉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는 영국이나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의 몇
몇 지주들처럼 몇 가지에 강한 애착을 보였는데, 그 중 하나  가 바다였다. 
그래서 자신의 삼지창으로 기분 내키는 대로 바다에 폭풍을 일으키거나 가
라앉히곤 했다. 또한 빨리 달리는 말과 힘센 황소를 좋아했다. 가끔 올림포
스에서의 회합이나 향연에 가려면 마지못해 바다 밑 거처를 떠나곤  할 정
도였다. 아내로 맞아들인 바다의 여신 암피트리테  역시 야외 생활을 좋아
했다. 포세이돈은 행복해질 수 있는  모든 조건을 다 갖춘 듯이  보이지만, 
신들보다 더 강력한 운명이란 것이 자식들을 중개로 수많은 근심과 잔인한 
슬픔을 가져다 주게 된다. 

    하데스의 보쌈 장가 
  하데스는 의기소침하고 과묵하고 염세적이었다 천성적으로 우울한  성격
인데다 황천의 지배자가 된 이래 그 정도가 심해져서, 음침한 거처에 자리
를 잡고 들어앉아 아예 나다닐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랫동안 아무
도 그의 얼굴조차 볼 수 없었는데, 지하  거처를 좀처럼 떠나지 않았던 탓
도 있었지만, 어쩌다 외출할 때면 자신의 모습을 가리는 투구모를 쓰고 다
녔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리하여 올림포스의 거주자들은  그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리게 될 지경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데스가  투구모도 쓰
지 않은 채 제우스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는 아주 급작스럽게, 고독을 좋아
하긴 하지만 황천에서 너무 권태로워 결혼을 하기로 했다고 공표했다. "누
구와?"라는 제우스의 질문에 그는 "페르세포네"라고 대답했다.  페르세포네
는 제우스의 세 누이 중 하나인 데메테르의 딸이었다. 그렇다면 그녀의 아
버지가 누군가 궁금할 것이다. 그것은 자기  누이이자 처제와 최초의 외도
를 저지르는 일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던 제우스였다. 페르세포네는 바로 이
러한 이중의 불륜 관계에서 태어난 딸이다.  자신의 애인들에게 항상 관대
했던 제우스는 데메테르에게 초원과 밭의 왕국을  선물했고, 풀과 꽃과 나
무를 자라게 하는 임무를 내렸다. 페르세포네는 아름다운 여신으로 성장했
고 서로를 극진히 사랑했던  두 모녀는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데 바로 그 페르세포네에게  하데스가 눈독을 들인  것이다. 페르세포네가 
자기 엄마와 헤어지려고 하지 않을 것이며 을림포스를 떠나 음침한 성격의 
남편을 따라 죽은 자들의 왕국에 묻혀 살려고 하지도 않을  것임을 예상한 
하데스는 젊은 여신을 강제로 납치하는 일을 도와달라고  제우스를 찾아온 
것이다. 올림포스의 지배자는 거절할  수 없었고 협조를 약속했다.  음모는 
며칠 뒤에 실행되었다. 엄마와 함께 꽃이 핀 들판을 산책하고 있던 페르세
포네는 근처에 피어 있는 이름 모를 꽃  하나를 발견했다. 그 꽃은 제우스
가 그 기회를 위해 창조해낸 수선화였다. 페르세포네는 엄마 곁을 떠나 꽃
을 따러 다가섰다. 그때, 투구모를  써서 보이지 않게 된 하데스가  그녀를 
잡아채어, 돌연 땅속으로 벌어진 틈을 통해 황천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데
메테르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으며 단지 딸의  비명 소리만을 들었다. 절망
한 데메테르는 여기저기 딸을 찾아 나섰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아무 얘
기도 하려 들지 않았지만 분명 딸의 실종에 대해 뭔가 더 알고  있을 거라
고 제우스를 의심한 데메테르는 협박을 이용했다. 
  "딸을 되찾지 못하면 더 이상 식물이 자라지 않게 하겠어요."
꽃이 시들고 풀이 말라가자 동물들이 기운을  잃었다. 결국 제우스는 굴복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페르세포네를 그녀의 엄마에게 되돌려 줄 것을 하
데스에게 부탁했다 
  "그럴 수 없소. 아무리 짧은 기간이라도  황천에 머무는 동안 음식을 먹
으면 반드시 그곳에 머물러야  한다는 규칙이 있소.  그런데 페르세포네는 
내 집에 도착하자마자 석류 알갱이를 깨물었소." 
제우스는 데메테르와 하데스를 불러 화해 조약을 제안했고 다소 어려운 절
충 뒤에 합의에 이르렀다. 페르세포네는 1년 중 4개월을 하데스와 함께 황
천에서 보내고 나머지 기간은 올림포스에서 엄마와 머문 다는 조약이었다. 
하지만 데메테르는 한 가지 점에서만은 굽히지 않았다. 즉 매년 딸이 없는 
4개월 동안은 어떤 식물도 땅 위에 자라지 않게 했던 것이다. 이로써 겨울
이라는 황폐한 계절이 자리잡게 되었다. 

    2. 인간의 탄생 
    프로메테우스, 인간에게 불씨를 
  세계를 두 형제와 나눠 가진 후, 제우스는  땅 위에 동물의 삶을 구성할 
생각을 했다. 동물의 종류를 서로 확연히  구별짓고 동물들 저마다에게 고
유한 특징들과 생존 수단을 부여하기로 했다.  그는 가장 유능한 협력자인 
프로메테우스에게 일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좀더 근본적인 연구
와 철학적이고 도덕적인 사색에 몰두하고 싶었던 프로메테우스는  그 일을 
동생 에피메테우스에게 맡겨버렸다. '너무 늦게 생각하는 자' 라는 뜻의 이
름을 가진 에피메테우스는 '미리 생각하는 자' 라는 뜻의 이름답게 사려깊
고 조직적으로 사유하던 형 프로메테우스에 비해 경솔한데다 체계적이지도 
못했다. 그래서 전체적인 계획도 없이 자기 수중에 있던 해부 기관과 생명 
능력을 충동과 기분에 따라  분배하기 시작했다. 물고기에게는  물 속에서 
살 수 있도록 비늘과 지느러미와 아가미를 주었고, 새에게는 날 수 있도록 
날개와 깃털을 주었다. 사자에게는 용기를, 여우에게는 간계함을, 뱀에게는 
신중함을, 낙타에게는 절제를, 얼룩말과 산양과 산토끼에게는 빨리 달릴 수 
있는 능력을 주었다. 코뿔소와 악어에게는 튼튼한 가죽을, 곰에게는 두툼한 
털을, 시라소니에게는 날카로운 시력을, 카멜레온에게는 변신할 수 있는 능
력을 주었다. 가지고 있던 기관과 능력을 모두 나눠주고 나서야 그는 마지
막 남아 있는 종족인 인간에게는 아무것도 줄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느러미나 날개도 없이, 갈고리나 날카로운 발톱도 없이, 또한   가죽이나 
털도 없이 어찌 이 불쌍한 종족이 자연의 공격에 맞서 생존해갈 수 있겠는
가? 당황한 에피메테우스는 이러한 자신의 실수를 형에게 알렸다. 가련 한 
인간 종족에 대한 연민과 애정을  품게 된 프로메테우스는 그들을  돕기로 
작정했다. 그는 천상의 불을 조금 훔쳐내어  횃불을 붙여 인간에게 선물했
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추위를 피하고 음식도 익히고 무기와 도구 그리고 
나중에는 기계까지 만들어낼 수단을 갖게 되었다. 그는 또한 더 많은 일을 
통해 인간에게 자비를 베풀었다. 인간을  괴롭힐 수 있는 온갖 해악들,  즉 
질병, 슬픔, 미움, 질투, 분노, 시새움, 거짓말 따위들을 한데  모아 상자 안
에 가두어놓고는 에피메테우스에게 절대로 열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좀더 확실한 도움을 주고자, 희생을 통해 신들의  은총을 얻어
내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는데, 이 일은 제우스가  결코 용서하지 않을 장난
의 계기가 되었다. 신들에게 봉헌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기 위해 프로메테우
스는 최초의 인간들을 모아놓고는, 아주 기름진 소  한 마리를 죽여 그 부
위를 두 가 지로 분류하게 했다. 첫번째는 소화가 제일 안 되는 부위인 뼈, 
뿔, 심장, 허파 따위였고, 두번째는  가장 좋은 부위였다. 그리고는  첫번째 
것은 냄새도 좋고 흰빛이 도는 지방질로  먹음직스럽게 포장하게 했고, 두
번째 것은 소의 핏자국이  묻어난 가죽으로 아무렇게나 싸게  했다. 이 두 
묶음 중에서 선택을  해야 했던 제우스는,  슈퍼마켓에서 우리네 주부들이 
종종 그러하듯이, 포장에 현혹되어 보기 좋은  모습으로 내놓아진 나쁜 부
위를 선택하고 말았다. 포장을 풀면서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지만,  때는 이
미 너무 늦었다. 이러한 전례에 근거한  이후의 고대인들은 자기들이 원치 
않는 것들을 신들에게  바치면서도 아주 태연하게,  희생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곤 했다. 어쨌든 모욕을 당한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와 인간들에게 복
수 할 결심을 하게 된다. 

    프로메테우스의 형벌 
  티탄족과의 전쟁, 그리고 기간테스족의 반항을  제압하는 전쟁을 치르는 
동안 프로메테우스가 해냈던  지대한 공헌도 잊어버린  채, 제우스는 그를 
사로잡아 코카서스 산의 꼭대기에 묶어버렸다. 그리고 자신의 독수리를 시
켜 하루에 두 번씩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파먹도록 했다. 이러한 형벌을 내
린 후 며칠이 지나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즐 찾아가 말했다. 
  "너는 불사신이므로 형벌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하지만 인류에  게 퍼
뜨려야 하는 악과 고통을 어디에 숨겼는지 말해준다면 널 사면해  줄 수도 
있다." 
  "절대로 말할 수 없다."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회유를 단호히 거부함으로써 불의와  폭정에대한 
저항을 인류에게 보여준 최초의 모범이 되었다. 프로메테우tm를 동정한 각
계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제우스는 이번만큼은 절대로 굽히지 않았다. 자신
을 비난하는 아내 헤라에게도 잔인하게 빈정거릴 따름이었다 
  "프로메테우스를 측은히 여기느니 차라리 끼니때마다 간을  먹어야 하는 
불쌍한 내 독수리를 동정하구려."

    판도라의 호기심이 부른 인류의 고뇌 
  인류의 악을 감금해놓은 비밀스런 장소를 알아내지 못한  제우스는 그것
을 대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새로운  재앙을 고안해내기로 했다. 이 천
상의 복수를 위한 도구는 바로 여자였다. 지금에서야 말하지만,  인간 종족
은 원래 남자들로만 이루어졌었다. 이제껏 그  사실을 밝히지 않았던 것은 
독자들을 좀더 놀라세 하기 위해서다. 옛날  사람들은 이 행복했던 시기를 
황금기라고 불렀다. 이러한 황금기는  제우스가 자기의 형제  자매와 다른 
여러 신들의 도움을 받아 여자의 원형을 만들어낸 날로써 끝나게 된다. 제
우스는 그 원형에 수많은 신체적 매력과 작은 정신적 결함  하나를 부여했
다. 인류에게 엄청난 재난을 불러 일으킬  기폭제로 쓰이기를 소망했던 단 
하나의 결함이란 바로 호기심 이었다. 자기가  만든 작품에 만족한 제우스
는 최초의 여자에게 판도라라는 이름을 주었는데 그것은  '모든 재능을 가
진 여자' 라는 뜻이었다. 그리고는 그녀를 땅으로 내려보냈다. 판도라가 인
간의 땅에서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은  경솔한 에피메테우스였다. 그는 형이 
벌을 받게 된 이후 인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에피메테우스는 판도라의 
아름다움과 부드럽고 순결하며 천진한 자태에 완전히 반해 자기 집에서 함
께 살자고 했다. 다음날, 급한 일로 밖에 나가야 했던 에피메테우스는 판도
라를 집에 혼자 남겨두었고 그녀는  즉시 집안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곧 프로메테우스가 인류의  재앙을 가두어 에피메테우스
에게 맡겼던 상자를 찾아냈다.  상자 위에 적힌  '어떤 이유로든 열어보지 
말 것' 이라는 글은  그녀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래서 에피메테우스가 
눈치채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는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증오, 시
기심, 죄, 후회, 질투, 고뇌 같은 대죄악과 신체와 영혼에 관련된 갖가지 질
병이 마치 폭풍우처럼 상자 속에서 빠져 나와  땅 위로 퍼져 나갔다. 집으
로 돌아온 에피메테우스는 상자가 열려 텅 비어 있는 것을  보고는 망연자
실하고 말았다. 그런데 상자가 아주 말끔히 비어 있지는 않았다. 상자 밑바
닥 한 구석에 아주 작은 또 하나의 상자가 있었던 것이다 종이로  싸여 있
는 그 작은 상자 위에는 '유사시에 열어볼 것' 이 자고 적혀 있었다.  최악
의 경우를 예상했던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이 살아 나가며 겪게 될 모든 유
독한 일들에 대한 유일한 해독제를 상자 속에 하나 집어넣었던 것이다. 그
것은 모든 질병에 대한 보편적인 처방책이자 온갖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위안이 
되기도 하는 것이었다. 에피메테우스는 떨리는 손으로 작은 상자를 열었다. 
그러자 상자 안에서 '희망'이 빠져 나왔다.   

    3. 제우스의 여인들 
  여자를 창조해낸 제우스의 첫째 목표는 인간의 행복을 방해하려는 데 있
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론, 올림포스의 여신들로는 더 이상  충족되지 않는 
자신의 사랑의 열망을 좀더 넓은 출구를 통해 만족시키고자 하는  속셈 또
한 없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제우스의  애정 편력의 리스트에는 여신들
의 수에 못지않게 수많은 여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질투의 여신 헤라 
  헤라는 제우스의 첫번째 동반자이자 유일한 정식 아내이며, 그의 누이이
기도 하다. 그녀는 제우스와의 사이에서 세 아이를  갖게 되는 데 가장 위
대한 신성의 혈통을 이어받은 이 후손들에 대해서는 곧 다루게 될 것이다. 
헤라는 출산과 결혼에서 여신들 중의 으뜸을  차지했지만, 반감을 갖는 데
서도 단연 으뜸이었다. 키도  크고 아름다웠지만 대리석  조각처럼 차가운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던 그녀는 허영심 많고 예민한데다 까다로웠다. 자
신은 다른 누구보다도 우윌하다고 생각했으며 다른 여신들과  모든 여자들
을 험담하고, 쉴새없이 남편을  비난하고, 남편이 과음할 때면  넥타르주를 
아예 숨겨버리곤 했다. 특히 제우스가 다른 여자나 여신과 관계를 갖고 있
다고 의심하기 시작하면, 그 의심이 옳든 그르든 간에, 더할 수  없는 증오
심으로 상대를 쫓아다니며 괴롭혀  복수를 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이러한 
그녀의 질투심을 불러 일으킬 기회는 쉴새없이 찾아들었다. 

    레다와 백조
  어느 날 제우스는 스파르타의 왕 틴다레오스의 젊은 왕비 레다를 정복해 
볼 생각을 품었다. 제우스는 천성적으로 소심한  레다를 놀라게 하지 않고 
가까이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궁리했다. 그러던 중.  그녀가 아름다
운 백조들이 노니는 호숫가 산책을 즐겨 하며 특히나 백조들을  몹시 좋아
한다는 것을 알아내고는 백조로 변신하기로 했다. 그리고 자기의 독수리에
게 레다가 거닐고 있는 호수 근처의 공중으로 백조로 변한  자기를 채가는 
체하라고 시켰다. 가짜 백조의 찢어질 듯한 비명에 놀란 레다는 자신의 두 
팔로 백조를 보호했다. 그녀의 두 팔에 안 기자마자 제우스는 원래 모습인 
신의 형상으로 다시 변해 염치없이 레다의 품에 안겼다. 남의 말하기 좋아
하는 사람들을 통해 얘기를 전해 들은  헤라는 불 같은 남편을 겁내  정작 
그에게는 아무런 항의도 못하고, 불운한 레다에게 복수하기로 결심했다. 그
녀는 기상천외의 작업을 통해 레다의 뱃속에 아주 커다란 2개의 알을 집어 
넣었는데, 그 알이 너무도  커서 그것을 밖으로 꺼내는  순간 레다는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 2개의 알 중  하나에서 여자 쌍둥이인 헬레네와 클리타
임네스트라가 나왔으며, 다른 알에서는 카스토르와 폴리데우케스라는 남자 
쌍둥이가 나왔다. 설명할 길 없는 이  이상야릇한 생성을 통해 나온 4명의 
쌍등이 중 셋은 인간이었고 폴리데우케스만이  유일하게 신이었다. 이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뒤에 다시 이야기할 것이다. 

    메아리를 울리는 에코 
  헤라의 복수가 때로는 그녀 자신에게 되돌아오기도 했다. 언젠가 헤라는 
에코라는 젊은 요정이 제우스와 사랑에 빠졌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에코를 
죽일 수는 없었기에 (에코는 불멸의 요정이었다) 그녀의 언어 능력을 거의 
완전히 박탈하여 다른 사람이 그녀에게 말을 하면 그 말의  마지막 음절만
을 되풀이하도록 만들어버렸다. 그래서  누군가 에코에게 "내  말 듣고 있
니?"라고 물으면 그녀는 "있니? 있니?  있니....." 하고, "에코, 거기  있어?" 
하면 "있어? 있어? 있어....."만을 되풀이 말했다. 한데  이같은 비뚤어진 잔
꾀로 헤라 자신이 곤혹을 치르게 된다. 그로부터 얼마 후, 남편이  또 다른 
여자의 뒤꽁무니를 쫓고 있다고 의심한 헤라가 사방으로 그를 찾아 헤매던 
중, 우연히 에코와 마주쳤다. 
  "제우스 어디 있는지 알지?" 
라는 헤라의 질문에 에코는 
  "알지? 알지? 알지....." 
하고 끝말만을 되풀이했다. 
  "여기 어딘가 있다는 건 나도 알지만,  그 파렴치한이 누구와 함께 있는
지 알고 싶으니 말해봐. 어떤 여자지?" 
  "여자지? 여자지? 여자지....." 
  "물론 여자겠지 하지만 어떤 여잔지 그 이름을 말할 수 없어?" 
  "없어? 없어? 없어....." 
  "뭐라구! 넌 내가 배신당하고 농락당하는 걸 즐기고 있구나. 그렇지?" 
  "그렇지? 그렇지? 그렇지....."
 
    공작 깃털에 박힌 아르고스의 눈 
  바람둥이 남편을 좀더 잘 감시하기 위해 헤라는  아르고스라는 염탐꾼의 
도움을 이용할 생각을 해냈다. 그는 눈이 백 개나 되는 꽤나 쓸모 있는 염
탐꾼이어서, 잠을 잘 때도 50개의 눈을 항상 뜨고 있을 수  있었다. 그래서 
제우스의 어떤 움직임도 아르고스의 시야를 벗어날   수 없었고, 제우스의 
일거수 일투족은 헤라에게 즉시 전달되었다. 제우스는   이 귀찮은 감시를 
벗어나기 위해 오믈렛을 만들 거라며 아르고스에게 양파를 까달라고 했다. 
알다시피 양파 껍질 벗기는 일만큼이나 눈물을 쏟아내는 밀도 없다. 백 개
나 되는 아르고스의 눈에서 쏟아지기 시작한 눈물은 말 그대로  홍수를 이
루었고 불쌍한 아르고스는 그  속에 빠져  익사해버렸다. 아르고스를 잃게 
되어 낙담한 헤라는 그의 몸을 공작새로 바꾸어 새의 꼬리에  죽은 아르고
스의 백 개의 눈을 붙여주었다. 이 다음 언젠가 공작새가 꼬리를 부채처럼 
활짝 펼치는 모습을 보게 되면, 거기에  여전히 아르고스의 눈들이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날 이후  공작새는 헤라가 총애하는 동물 중 
하나가 되었고, 그녀가 타고 다니는 마차는 4마리의 공작새가 끌게 되었다. 
제우스로서는 좀더 쉽게 연애 놀음에 탐닉할 수 있었다. 그의 연애 상대들 
중 2명을 더 언급하겠는데, 그 이유는  이들과의 관계의 결실로 얻어진 아
이들이 훗날 인류의 역사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쾌락을 선사한 디오니소스 
  인간 여자들을 유혹하기 위해 제우스는  주저하지 않고 갖가지 다양  한 
형태로 변신했는데, 때로는 백조로, 때로는 황소로 또 언젠가는  비로 변신
하기도 했다. 테베의 젊은 공주였던 세멜레를 유혹하려 했을  때, 처음에는 
인간의 형태를 취했다. 하지만 세멜레가 저항했기 때문에 결국에는 자신의 
진짜 정체를 말하고 말았다. 그제서야 세멜레는 제우스를 받아들였다. 그런
데 판도라의 후예들이 가진 어찌할 수 없는 호기심에 사로잡힌  그녀는 올
림포스의 지배자가 진짜로는 어떤  모습인지 몹시  궁금했다. 그래서 어느 
날 밤 제우스에게 말했다. 
  "저를 기쁘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세요."
경솔하게도 제우스는 그렇게 하겠노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세멜레는 부탁
의 말을 했다. 
  "제게 경이로운 신의 완전한 모습을 보여주세요." 
제우스는 어떤 인간도 신의  모습을 견뎌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약속을 꼭 지킨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네가 원한 것이니 후회는 하지 말아라" 
라고 슬프게 말하면서 제우스는 신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세멜레는 그 즉
시 횃불처럼 타버렸고 숨을 거두기  직전 제우스에게 겨우 이렇게  소리칠 
수 있었다. 
  "내 뱃속에 있는 당신 아이를 구하세요!" 
제우스는 성급히 세멜레의 배에서 몇 주일된 태아를 꺼내어,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자신의 엉덩이 속에 집어넣어버렸다. 몇 달 후, 별탈 없는  잉태 기
간 끝에 제우스의 엉덩이에서는 디오니소스가  빠져 나왔다. 디오니소스는 
인간의 아들이었으므로 정상적으로 따지면 반신이거나 단순한 영웅에 불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 몸 속에 품고 있다가 낳은 아이였기에, 제우스는 
그를 완전한 권리를 가진 신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어른이 된 디오니소
스는 모계의 혈통 때문이었는지, 인간 종족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품었고 
인간에게 남다른 도움을 주려고 했다. 이미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희망
을 줌으로써 정신과 육체의 고통을 좀더 잘 견뎌내게 했다. 인간이 설정할 
수 있는 가장 야심적인 계획이란 것이 몇몇 염세적인 철학자들이 실재론과 
더불어 주장하듯이, 결국은 고통의 완화에  있다고 한다면 프로메테우스의 
도움은 상당한 것이다. 한데 디오니소스는  쇼펜하우어나 프로이트를 읽지 
않았음에도, 고갈되지 않는 쾌락과 즐거움과  향연을 인간에게 제공함으로
써 프로메테우스보다 더 나은 일을 하고자 했다. 그는 인간에게 술을 주었
다. 그리고 포도재배 기술을 전파하고 술에 대한 예찬을 퍼뜨리는 일에 일 
생을 바쳤다. 그는 목신들과  숲의 요정들 그리고  여사제관들을 앞세우고 
이 나라 저 나라를 돌아다녔다. 동반자였던  2명의 신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 중 하나는 술에 절어 불그레한  얼굴과 뚱뚱한 배를 가진 실레
노스였는데 그를 당나귀에 태워 가려면  2명의 보조자가 필요할 정도였다. 
또 한 명의 신은 다른 목신들처럼 털투성이에다 머리에 뿔이  나고 산양의 
발을 가진 판Pan이었다. 그는 줄곧 요정들의 뒤를 쫓아다녔는데 너무나 못
생긴 얼굴 때문에 요정들이 '겁에 질려' 도망치곤 했다. 판은  술을 마시면
서, 그리고 자신이 만들어 뺀 오관피리를 불면서 마음을  달랬다. 제우스는 
종종 올림포스의 꼭대기에서 디오니소스가 이끄는 이 즐거운  행렬을 흐뭇
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지켜보곤 했는데. 그럴  때면 자기 아들이 인간에 
대해 느끼는 애정을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도 했다. 

    신의 아들과 인간의 아들을 쌍등이로 낳은 알크메네 
  하지만 제우스의 주된 애정은 여자들에게 바쳐졌다. 세멜레가 살아 있을 
당시 그녀를 만나러 테베를 오가던 중에도 제우스는  알크메네라는 상당히 
예쁜 여자를 이미 점찍어두었다. 그리고는 불행한 세멜레가 죽자마자 알크
메네를 정복하기 위한 계략을  벌써 준비하고 있었다.  알크메네의 남편은 
테베의 장군인 암피트리온이었는데, 직책상 그는 집 을 자주  비우곤 했다. 
그렇지만 자기 아내가 모범적인 정절을 지키는 여자였기에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았다. 제우스 역시 그 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제우스는 암피트리
온의 부재를 틈타 그의 모습으로 변신하고는 알크메네 앞에 나타났다 그녀 
는 자기 남편이 (혹은 남편이라고  착각하는 척했는지도 모른다) 예상보다 
빨리 돌아온 것을 보고 조금 놀라워하면서도 특별한 애정으로 맞아 들이곤 
했다. 몇 달후 그녀는 2명의 아들을 낳게 되었다. 그중하나는 암피트리온의 
아들인 이피클레스이고, 다른 한  명은 제우스의 아들 헤라클레스로,  인간 
세상은 머지않아 그의 무훈으로 가득 차게 된다. 

    4. 명사수 아폴론과 아르테미스 
  아폴론과 아르테미스는 제우스가 두번째 서열의 여신 레토와  잠깐 가졌
던 관계에서 태어난 쌍둥이  오누이다. 출산이 가까워오자  레토는 헤라의 
노여움이 두려워서 델로스의 아주 작은 섬으로  숨어들었고, 두 아이는 그
곳에서 태어나게 된다. 그들 은 함께 자랐고, 결코 변함이 없던 우애와, 둘 
다 뛰어난 솜씨를 보였던 활쏘기에 대한 취미로 인해 굳게  결속되어 있었
다. 그렇지만 둘의 성격은 아주 달랐다. 

    태양의 신 아폴론 
  금발의 순결한 용모를 지닌 아폴론은 그리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이다. 
그는 시, 음악, 그리고 의술과 같은 예술의 수호성인이었다. 당시의 의술은 
오늘날과는 달리 과학이라기보다는 예술로 여겨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환
자들이 죽어가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폴론은 무엇보다도 태양
의 신이었다. 그는 매일 아침 정확한 시간에 4마리의 혈기 왕성한 신의 말
이 이끄는 마차를 태양에 매달고는 하늘을 한 바퀴 돌았다. 단 한 번을 제
외하고는 매일 그렇게 했는데, 신중하지 못해 벌어진 그 단 한번의 실수는  
자식에게 너무 약하기만 한 아버지와 지나치게 경망한 자식에 대한 훈계로 
두고두고 얘깃거리가 될 만 한 것이었다. 

    태양을 서에서 동으로 몰고간 파에톤
  아폴론은 여러 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파에톤이었는데, 그는 
흔히 말해 '아버지 덕에 사는 아들'이었다. 자신의 출신을 지나  치게 자만
하여 친구들에게 자랑을 일삼았고 아버지가 사준 수많은  선물을 과시하느
라 여념이 없었다. 특히 그가 아폴론의 태양  마차 얘기를 할 때면 백만장
자의 아들이 자기 아빠의  롤스로이스를 자랑하는 모습  그대로였다. 어느 
날인가 친구 하나가 이렇게 말했다. 
  "넌 그 마차를 몰 줄도 모르잖아." 
아픈 데를 찔린 파에톤은 즉시  아버지를 찾아가 비위를 맞추면서  시원한 
넥타르 한 잔을 대접하고는 이윽고 말을 꺼냈다. 
  "아빠. 제 작은 소원 하나만 들어주세요," 
  "신성한 스틱스 강물에 맹세코 네 청을 들어주마." 
스틱스의 이름을 걸고 한 맹세는 그리스  신들에게 절대 절명의 것이었다. 
그걸 어긴 자는 올림포스에서 추방당하고 넥타르와 암브로시아를 박탈당한 
채 3개월에서 6개월까지 다른 곳에 머물러야  하는 형벌이 부과되며, 재범
일 경우에는 형량이 더 무거워진다  파에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제서야 아주 침착하게 자신의 요구 사항을 구체적으로 얘기
했다. 
  "태양 마차를 제게 빌려주여서 하루만 몰게 해주세요." 
아폴론은 아들을 설득하려 했다. 혈기 왕성한 말들은 자신에게만 복종하기 
때문에 태양이 따라가야 하는 시간과 궤도를 조심스럽게  지켜가기가 쉽지 
않으며, 그로서도 장담할 수 없는 심각한  돌발사의 위험조차 있다고 설명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폴론은 약속을 지켜야만 했다. 다음날 새벽, 파에
콘은 고삐를 잡았고 마차는 돌진했다. 마차를  모는 사람이 평소의 주인이 
아니란 걸 느낀 말들은 즉시 마구 날뛰기 시작했고, 마차를 순식간에 천정
점으로 끌고 갔는데, 그 지점은 정오에나 도달해야 하는  곳이었다. 땅에서
는 놀라움과 혼란이 일어났다.  아낙네들이 아침 준비를 서두르고  있는데, 
남편들은 벌써 점심을 달라고 했다. 애들은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다시 나
오려고 했다. 농부들은 아침 나절 내내 한 이랑의 밭도 갈지 못한 걸 보고
는 깜짝 놀랬다 바로 그 순간, 약간의  통제력이 생긴 파에톤은 왔던 길을 
되돌아가도록 말을 몰았다. 이로써 역사 이래  최초이자 최후로 태양이 서
쪽에서 동쪽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질겁한 신들은  제우스에게 이 일에 개
립하여 이러한 재난을 어서 멈추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나 태양의 문
제는 자신의 소관이 아니라고 판단한 올림포스의 지배자는  자기 손자를응
징하는 일에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파에톤은 일대 모
험을 감행하기로 했다. 자신의 명령에 따라  질주하는 마차를 친구들이 좀 
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게 하려고  말들을 땅 쪽으로 바짝 붙이고는  마차
를 땅에 닿을락말락하게 낮게 몰아간 것이다.  마차가 지나가자 태양이 곡
식이며 집들을 모두 태워버렸고, 커다랗게 떠다니는 빙산을 녹여버리고, 강
을 메마르게 하고, 아프리카에 사는 사람들의  피부를 영원히 검도록 태워
버렸다. 이건 정도가 너무 심했다. 제우스는 경솔한 파에톤에게  벼락을 내
렸고, 아폴론은 광란의 마차를 서둘러 다시 몰았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비극적으로 사라져버린 아들로 인해 상심한 아폴론은 음악  속에서 위안
을 찾았다. 아폴론은 기타와  비슷하며 그리스인들이 매우  높게 평가하던 
악기 칠현금 연주에 열정적으로 매달려  뛰어난 거장의 솜씨를 갖게  되었
다. 겸손을 미덕으로 여기지  않던 아폴론은 이때부터  스스로를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칠현금의 대가로 여겼는데, 그러한  생각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재능이 칭송될 기회는 곧 주어졌다. 미다스 왕이 지배
하던 그리스의 한 도시에서 왕의  주도하에 국제적인 경연 대회가  열렸던 
것이다. 우승자가 되리라는 사실을 한 순간도  믿어 의심이 않았던 아폴론 
은 변장을 하고 가명을 사용하여 경연 대회에 참가했다. 그의 차례가 되어 
자신이 작곡한 소나타를 칠현금으로 연주했을 때 청중들은 그 놀라운 재능
에 완전히 압도되어 갈채를 보냈다. 하지만 경연 대회를 주재하고 상을 결
정하는 것은 미다스 왕이었다. 경연자들 가운데는  미다스 왕의 총애를 받
고 있던 마르시아스라는 자가 있었고, 왕은  그에게 일등상을 주기로 이미 
약속을 해두었다. 마르시아스 역시 음악적 재능이 있었으며 당시로서는 전
혀 새로운 악기였던 금관 플루트를 소유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가 들판에
서 플루트를 발견했던 것은 아주 신비한 우연이었다고 한다. 물론 그는 아
폴론의 거장다운 힘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경연 대회의 주심인 미다스 왕의 
절친한 친구라는 이점이 있었다. 그리하여 미다스는 아폴론이 몇몇 음표를 
잘못 연주했으므로 (물론 아폴론은 인정하지 않았다) 일등상은 마르시아스
에게 돌아간다는 부당한 결정을 발표했다. 아폴론은  자존심이 상한 채 물
러섰지만 미다스에게 복수할 것을 마음속으로  결심했다. 아폴론은 재미난 
생각을 하나 해내었다. 음악을 들을 줄 모르는 미다스를 벌하기 위해 그의 
귀를 당나귀의 귀처럼 만들어버린  것이다. 당나귀  를 갖게  된 미다스는 
자신의 불행을 감추기 위해, 요즈음 몇 몇 배우들이 대머리를 감추고 싶어 
그렇게 하듯, 늘상 모자를 쓰고 다녀야 했다. 그래서 누구도 그의  귀를 볼 
수 없었다. 아무도 못 봤을까? 아니 단 한 사람에게만은 감출 수가 없었는
데 그는 바로 미다스의  이발사였다. 그래서 미다스는  이발사에게 자신의 
비밀을 절대로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게 했으며, 이를 
어길 경우 엄중한 벌을 내리겠다고 협박했다.  이발사는 처음 얼마은 맹세
를 지켰다. 하지만 비밀이 그를 질식시켰고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누구
에겐가, 아니 최소한 그걸 퍼뜨리지 않을  그 무엇에게라도 쏟아내야만 했
다. 그래서 그는 땅속에 구멍을 파고 몸을 숙여 구멍에 대고 중얼거렸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그리고 다시 성급히 구멍을 막았고, 비밀이 땅에 잘 묻혔다고 믿고는 마음
이 놓여 집으로 돌아갔다. 한데, 몇 주일 후 그 구멍 위로 갈대가  자라 바
람이 불 때마다  흔들렸고, 이발사가 영원히  묻어버렸다고 생각한 비밀은 
그곳을 지나가는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갈대의 가느다란 억양 
때문에 마치 지방 사투리처럼 불분명하게 들리기는 했지만 그 뜻만은 모든 
사람이 아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창피하고 당황한 미다스는 자신
의 불행의 원인과 가해자의 정체를 알아내었다.  그는 아폴론의 용서를 구
하려고 자기가 아는 모든  신들과 인간들을 끌어들였다.  아폴론은 그에게 
원래의 귀를 되돌려주마고 했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간의 피해를 보상하
는 뜻에서 미다스가 원하는  청을 하나 들어주겠다고 했다.  한 치 코앞도 
내다보지 못하던 미다스였던지라, 게다가 불행하게도 그 코는 귀보다도 짧
은 코였기에 '자신이 만지는 모든 것들을 금으로 변하게' 해달라고 부탁했
다. 
  "그렇게 해주지." 
대답하며 아폴론은 벌써 마음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미다스는 다시 
돌아온 자기 귀를 믿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속임수에 걸려든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하려고 주머니에 있던 구리 동전 몇 개를 손에 쥐어보았다. 그러자 
구리 동전은 금새 순도  높은 금동전으로  바뀌었다. 이번에는 마구간으로 
내려가 마부가 아직 치워내지 않은  말똥 몇 개를 손으로  그러모아보았고 
그것들 역시 금덩어리로 변해버리자 그는  기쁨에 넘쳐 제 정신이  아니었
다. 원하기만 한다면 세상에서  가장 부자 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갑자기 
식욕이 느껴졌다. 그래서 요리사에게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인 크림 
소스를 얹은 양배추 요리를 해달라고 했다.  당시에는 집기를 사용하지 않
았고 왕들도 손으로 음식을 집어먹었다.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파이와 크
림 과자와 바삭바삭한 캐러멜은 미다스가 입으로 옮겨가기도 전에, 진귀하
고 변치 않는 금속이긴 하지만 도저히 소화시킬 수 없는 금으로 변하고 말
았다. 그리하여 불쌍한 미다스는   자신의 탐욕으로 인해  황금을  산처럼 
쌓아놓고도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 되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아폴론에게 
용서를 구해야만 했다. 아폴론은 쾌히 승낙했고,  팍톨(고대 리디아의 강으
로 사금의 산지로 유명한 곳)이라는 마술의 강에 가서 몸을 씻으라고 고
했다. 미다스가 그곳에 가서  목욕을 한 이래 팍톨의  강물 속에는 반이는 
금 조각들이 함께 흘러다녔다.
 
    까마귀의 깃털이 검게 변한 이유 
  아폴론은 아버지 제우스처럼 바람둥이였다. 그의  전설적인 수려한 용모
에 저항할 여자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여자를 유혹하는 데는 름다운 용모
가 충분한 조건이 되지만, 사랑을 유지하는 데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대다수의 미소년들처럼 아폴론도 많고많은 쉬운 성공을 거두었지만 대개는 
일시적으로 끝나버렸다. 코로니스라는 처녀와의  관계가 특히 그러했다. 그
녀는 아폴론의 접근에 빠르게 응했지만, 곧  이어 그를 지루하게 여기고는 
다른 평범한 인간 남자를 사귀는 배신 행위를 했다. 하지만 태양신의 질투
가 두려워 자신의 부정을 숨기려 했고 얼마간은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그
녀는 사람들이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는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정원에
서 애인을 만나곤 했다. 불행하게도, 이 비밀 정원 위를 날고  있던 까마귀 
한 마리가 젊은  남자와 함께 있는 그녀를  알아보고 말았다. 까마귀는 아
폴론이 총애하는 새였는데 당시의 까마귀는  눈부시게 횐  깃털을 가지고 
있었다. 코로니스를 목격한 까마귀는 서둘러 아폴론에게 날아가 그 사실을 
고자질했다. 불 같은 질투심에  사로잡힌 아폴론은 그녀에게  화살을 쏘아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다. 코로니스는 숨을 거두기  직전 아이를 낳고 아폴
론에게 돌봐줄 것을 부탁했다. 후회에 사로잡힌 아폴론은 아이를 받아들여 
아스클레피오스라는 이름을 주고, 인간의 병을 낫게 해주는 최초이자 최상
의 의사로 만들기로 했다.  까마귀는 아폴론으로부터 자신의  고발에 대한 
보상을 받기는 커녕, 비열한 행동에 대한 징계로 깃털이 검게 변해버렸다.
 
    정결한 아르테미스 
  호색가였던 아폴론에 비해 쌍둥이 누이  아르테미스는 정결하였다. 고백
하지는 않았지만 오빠를 사랑했기 때문에 다른 신들이나  남자들에게 도무
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같은 취미를  가진 몇 명의 요정을 벗삼
아 그녀가 몹시도 좋아했던 사냥에 온 정열과 시간을 보냈다. 아폴론이 타
오르는 태양의 신이었던 반면 아르테미스는 차가운 달의 여신이었다. 어두
운 밤에 숲과 들판을 열기 없는  빛으로 환히 밝혀주는 것이 바로  그녀였
다. 

    여신의 목욕을 훔쳐보지 말라 
  아르테미스는 차갑고 정결한 성격에다 때로는 제우스 가문의  모든 구성
원들처럼 야멸차게 단호한 면도 가지고 있었다.  일행과 더불어 사냥을 나
갔던 어느 날인가 그녀는 샘물 근처에서 멈춰 서게 되었다. 그리고는 요정
들과 함께 속옷도 벗어 던진 채, 맑고 시원한 물 속에서 즐겁게 장난을 쳤
다. 그때 악타이온이라는 젊고 잘생긴 사냥꾼이 나타났다. 그는  한 무리의 
사냥개를 이끌고 사냥을 하던 중 우연히 그곳을 지나던 참이었다. 만일 그
가 눈앞에 있는  인물이 누구였는지 알았더라면,  샤워하고 있던 빅토리아 
여왕을 우연히 목격하게 되었던 어떤 영국  신사가 "형씨 죄송합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했다는  얘기에서처럼, 그 역시  아무것도 못 본척 
지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신중하지 못했던 악타이온은 만족과 감탄을 섞어
가며 자기 눈앞에 펼쳐진 매력적인 나체들을  열심히 훔쳐보았다. 몹시 불
쾌해진 아르테미스는 몇 방울의 물을 끼얹어  그를 사슴으로 변하게 했다. 
악타이온은 기겁을 하고 도망쳤지만 자기 개들의 추격을 받게 되었고 결국 
개의 먹이가 되고 말았다. 

    니오베의 교만 
  아르테미스를 극도로 잔인한 행위로 이끈 것은 단지 그녀의 정결한 성격 
탓만은 아니었다 때로는 과장된 자만심이 그같은  일을 벌이기도 했다. 니
오베가 바로 그 가혹한 예이다. 강대국  테베의 왕비였던 그녀는 아름답고 
부유했으며 매력적인 남편의 사랑을  받았다. 게다가 딸과  아들이 반반인 
14명의 자식들은 한결같이 아름다웠다. 자만에 겨운 나머지 그녀는 자신을 
아폴론과 아르테미스의 어머니인 레토와 공공연하게 비교함으로써  자기의 
행복을 돋보이게 하려는 경솔한 짓을 했다. 
  "불쌍한 레토는 임신하자마자  제우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난 아직도 
남편을 내 발 밑에 두고 살잖아. 그녀는 델로스의 초라한 섬에서 살았지만 
난 테베의 큰 도시를  지배하고 있고, 게다가 14명의  내 아이들은 그녀의 
두 아이들보다 훨씬 더 잘생겼지."
이 말은 아폴론과  아르테미스에게 전해졌고, 그들은  곧 어머니의 명예를 
위해 복수하기로 했다. 아폴론이 쏜 7개의 금화살은 니오베의 아들들을 죽
음으로 이끌었고, 아르테미tm가 쏜 7개의 은화살은 딸들을  같은 운명으로 
몰아갔다. 니오베는 제일 어린 딸을 자기 몸으로 막아보려했지만 소용없는 
일이 었다. 아르테미스의 복수는 가혹했다. 너무도 심한 고통을  받은 니오
베는 모든 감수성을 잃게 되었고 급기야  석상으로 변해버렸다. 가련한 그
녀의 두 눈만이 살아남아 쓰라린 눈물을 한없이 흘리고 있었다.

    사랑에 빠진 아르테미스 
  아르테미스는 대개의 남자들을 혐오하지만, 생애 단 한 번 엔디미온이라
는 젊은 양치기를 사랑한 적이 있다. 어느 날 밤 양들과 함께 잠들어 있던 
엔디미온을 발견한 아르테미스는 그 아름다운 모습에 감동했고, 그가 자고 
있다는 사실에 안심하고는 매일밤 그를 훔쳐보러  보곤 했다. 하지만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고 건드리지도 않았으며 그저 달빛으로 그의 이마를 정결
하게 어루만지곤 했다. 한데 단 한 번, 욕망을 억제할 수  없던 아르테미스
는 엔디미온을 깨웠고, 너무도 오랜 동안  억눌렸던 격렬한 열정을 폭발하
며 그와 관계를 맺었다. 이 단  한번의 사랑, 단 한 번의  포옹으로 50명의 
딸이 한꺼번에 태어났다. 그  후 아르테미스는 다시는  엔디미온의 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5. 짓궂은 헤르메스 
  헤르메스는 제우스의 아들이었고, 모계 쪽으로  보자면 아틀라스의 손자
였다, 거구였던 선조들에 비해 그는 작고 마른 편이었다.  하지만 우아하고 
균형이 잡힌 체구였다. 그는 다리와 모자에 날개를 달고 다녔는데, 이 날개 
덕에 세상 구석구석을 아주 빠르게 옮겨다닐 수 있었다. 또한 그의 머리는 
날렵한 몸만큼이나 빨리 돌아갔다. 웅변적이고 설득력 있고 거짓말도 능해
서 상인과 도둑의 신이 되었는데 이 점에 서는 오늘날의  현대인이나 고대
의 그리스인이나 다를 바가 없다. 어린  시절 제우스의 응석받이였던 그는 
허다한 장난을 일삼았다. 하지만 제우스는 으레히 즐겁고 너그럽게 용서하
곤 했다. 태어나던 날부터 태양의 신 아폴론이 특히나 애지중지하던 한 무
리의 소를 훔쳐냈는  데, 발각되지 않으려고  소들을 뒷걸음질치도록 하여 
끌어내는 기지를 발휘했다. 소의 발자국이 마구간을 향해 나도록 함으로써 
자신이 범인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며칠 후 헤르메스는 
아폴론에게 소들을 다시 돌려주었고, 사죄하는  마음에서 거북이의 등껍질
로 손수 악기를 만들어 선물했는데, 그것이 바로 최초의  칠현금이다. 아폴
론의 소들을 시작으로 포세이돈의 삼지창,  헤라의 마차, 아르테미스의 활, 
하데스의 투구를 계속해서 훔쳐냈는데, 이 투구 덕에 한 동안 아무도 헤르
메스를 볼 수 없었다. 제우스는 자신이 희생자가 되기 전까지는 이러한 선
의의 장난을 그저 즐겁게 바라보기만 했다. 어느  날 벼락이 없어진 걸 알
게 된 제우스는 화를 버럭 내며 말했다. 
  "네가 그토록 소일거리가 필요하다면 일을  주마. 이제부터 신들과 인간
들 곁에서 내 심부름꾼 노릇을 해라." 
그날부터 헤르메스는 그 기발함과 웅변의 재능을 공식적인  임무의 실행을 
통해 펼쳐 보이게 되었다. 

    6. 헤라의 아들 아레스와 헤파이스토스 
  제우스의 아내인 헤라는 딸 헤베와 2명의 아들 아레스와 헤파이스토스를 
낳았다. 여자들에게 별로 호의적이지 않았던 헤라는  자기 딸조차 전혀 돌
보지 않았다. 그래서 헤베는 마치 올림포스의 재투성이 신데렐라처럼 되어
버렸고, 신들의 향연이 있을 때면 넥타르주를  접대하는 일이나 맡아야 했
다. 헤라의 두 아들은 외모나 성격에서 닳은 점이 거의 없었다. 

    전쟁의 신 아레스 
아폴론처럼 수려하진 않았지만 아레스는 예쁘장한  소년이었다. 갈색 머리
에 창백한 안색, 음울한 눈과 반듯한 용모는 강하고 냉정한 느낌을 주었다. 
외모에 몹시 신경을 썼고,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공을 들여 우아하게 
옷을 입고 다녔다 천성적으로 응석받이인데다 헤라 또한 그렇게 키워 모친
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고 온갖 투정을  다 부렸다. 훗날 드러나는 그의 
못된 성미는 이러한 한심한 교육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약한 자들에게
는 허세와 권위를 부리고 공격적이었으며 거칠고 잔인하게 굴었다. 그러나 
강자 앞에서는 비굴했고 고통을 당하면 엄살을  떨었다. 마치 지나가는 사
람들에게 무섭게 짖어대며 털을 치켜세워 덤벼들 태세로 있다가도, 누군가 
머리만 잡아채면 다리 사이로 꼬랑지를 집어넣고 내빼버리는 개와 같았다. 
그가 즐겨 괴롭히며 희생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새들이었다. 새들은 가장 
무해한 동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제우스의 독수리,  헤라의 공작새, 
아폴론의 까마귀, 아테나의 올빼미, 아프로디테의 비둘기를  쉴새없이 쫓아
다니며 돌팔매질을 해댔다. 동물을 사랑하던 아폴론은 그를 벌하기로 했다. 
그는 올림포스 산의 서쪽에 수천 마리의 갈매기들이 등지를 틀고  있는 걸  
보고는 아레스에게 말했다. 
  "장담컨대, 너 꼭대기에 기어올라가서  등지 속의 알들을  깨지는 못 할
걸." 
산에 오르는 일은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았고 갈매기들도 그다지 겁 낼 것
이 없어보였기에 아레스는 내기에 응했고 재빨리 등지  한가운데까지 기어
올라갔다. 하지만 갈매기들은 보기보다 만만치 않았다 아레스에게 알을 빼
앗긴 갈매기 한 마리가 소리를 치며 경계를 알리자 수 백 마리의 갈매기들
이 일제히 날아오르며 날카롭게 짖어댔고, 아레스  머리 바로 위를 선회하
면서 희끄무레하고 물컹하고 지독한 냄새가 나는 갈매기의 똥을 아주 정확
하게 난사해댔다. 갈매기 똥 때문에  눈을 뜨지도 못한 채, 냄새에  질식되
고, 옷이며 신발이 모두 더럽혀진 아레스는 창피하고 화가 나서 , 아폴론의 
조롱을 받으며 울면서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제우스로서는 재능도 없고 
진지하게 공부할 능력도 없는 부랑아 자식을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하
지만 아들의 앞날에 대한 보장을 염원했던 헤라는 제우스에게 간언했다. 
  "그 애에게 행정부의 전쟁 장관직을 맡겨줘봐요. 그건 어떤 특별한 능력
이 없어도 해낼 수 있는 직책인데다 호전적인 그 애 성격과도 아주  잘 어
울리잖아요." 
이렇게 해서 아레스는 전쟁의  신이 되었다. 이후로 그는  '폭정'과 '공포' 
라는 이름을 가진 두 마리의  신경질적이고 격노한 말이 이끄는  번쩍이는 
마차를 타고 다니게 되었다. 

    대장장이 헤파이스토스 
  둘째아들 헤파이스토스는 아레스의 미모와는 거리가 멀었고 못 생겼다고 
할 정도였다. 태어나던 날 어찌나 크게  울어댔던지 제우스로서는 차마 더 
이상 그를 볼 수도, 소리를 참아낼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많은 아
버지들이 한번쯤은 그래보고 싶은 유혹을 가지듯이, 제우스는 갓난애의 목
을 잡고는 있는 힘껏 발길질을 해서 올림포스 산 꼭대기에서 땅을 향해 굴
려보냈다. 올림포스 산이 꽤나  높았기 때문에 헤파이스토스가  땅에 닿을 
때까지는 꼬박 한나절이 걸렸다. 보통의 아기라면 그러한 추락에 살아남지 
못했겠지만, 헤파이스토스는 신이었기 때문에 겨우  다리 하나만이 부러지
고 척추 몇 개가 탈구되었을 뿐 이었다. 얼굴도 못생긴데다가 이제 절름발
이에 꼽추까지 된 것이다 자연으로부터 학대받은 아이는 자신의 추함과 불
구에 자극이 되어, 일이나 사회적인 성공을 통해 타인의 존경과 사랑을 얻
어내게 된다. 나폴레옹이 키가 작다는 사실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고통받
지 않았더라면 훗날의 그 '위대한 나폴레옹'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헤파이
스토스도 바로 그런 경우였다. 억척스럽게 일한  대가로 그는 비범하게 능 
숙한 일꾼이 되었으며, 특히 금속을 다루는 일에서 전문가가  되었다. 대장
장이, 철물공, 조립공, 세공사를 두루 겸한 그는 제우스로부터 불과 공업의 
신이라는 이름을 받게 되었다.  오른손에는 망치, 왼손에는 노루목을  쥐고 
대장간에서 쉴새없이 일하고 있는 그의 얼굴은 연기로 온통 시커멓게 그을
고 몸은 땀으로 뒤범벅이 되었지만, 더욱더 열심히 일에 몰두했다. 그를 도
와주는 일꾼들 중에는 거대한 체구와 이마 한가운데에 눈이 하나밖에 없는 
한 무리의 키클롭스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도움을 받아 헤파이스토스는 철
제 가구, 건축용 철물, 무기, 보석  따위를 올림포스에 공급하는 자격을 부
여받게 되었다. 특히 그는 제우스의 벼락을 제조하는 일을  담당했다. 만일 
헤파이스토tm가 현명했더라면, 자신의 직업적인 활동이 가져다  준 존경과 
보상에 그저 만족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인간들처럼 그 역시 사
랑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못생긴 모든  남자들이 그러하듯 그도 아름다운 
여자만을 좋아했다 그래서 결혼을 결심했을 때, 올림포스에서 가장 못생긴 
그가 선택한 결혼 상대자는 가장 아름다운 여신이었던 아프로디테였다. 아
프로디테에 대해서는 조금 후에 자세히 이야기할 것이다. 그리하여 헤파이
스토스는 부모인 제우스와 헤라를 찾아가 아프로디테와의 결혼을 승낙해줄 
것을 요청했다. 제우스는 쉽게 승낙하려 들지 않았지만 헤파이스토스가 벼
락의 공급을 끊어버리겠다고 협박하는 바람에 결국 허락하고 말았다. 반면
에 헤라는 아들의 계획에 단호하게 반대했다. 
  "아프로디테는 네겐 너무 과분할 정도로  아름답다. 그리고 그녀는 철공
소의 소음이며 냄새들을 결코 견뎌내지 못할 것이고, 게다가 너랑 함께 일
하는 그 키클롭스들과 한데 섞여 사는 일은  도저히 참아낼 수 없을 거다. 
그렇게 되면 머지 않아 널 배신할 것이고 누구보다도 네가 먼저 이 결혼을 
후회하게 될 거야." 
이러한 말들에 동요되기는커녕, 헤파이스토스는 어머니의 동의를 얻어내기 
위해 간교한 술책을 이용했다.  그는 황금으로 된 아주  멋진 안락 의자를 
헤라에게 선물했는데, 그  의자에는 보이지 않는  용수철과 비밀 자물쇠가 
마련되어 있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헤라는 매우 기뻐하며  의자에 앉았다. 
위엄 있는 그녀의 묵직한 엉덩이가 놓여지자마자 헤파이스토스가 끼워넣은 
기계가 작동했고 그녀는 의자에 묶여 꼼짝 할  수 없게 되었다. 헤라의 고
함 소리를 듣고 몰려든 올림포스의 신들이 그녀를 의자에서 떼어내려 했지
만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마술 걸린  의자에 죄수처럼 묶여버리고 말
았다. 승리에 찬 헤파이스토스는 자신의 결혼을 승낙한다는 조건으로 그녀
를 풀어주었다. 그리하여  헤파이스토스는 아프로디테와 결혼하게  되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예감은 근거 있는 것이었으며,  결혼하던 날 자신의 두번
째 다리를 잘라버리는 게 차라리 나았을 것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오랜 시
간이 걸리지 않았다.

    7.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 
    아프로디테의 탄생과 결혼 
  아프로디테는 제우스의 딸이고 어머니는 없다. 그녀는 오직 아버지의 뜻
에 따라 대서양의 거품으로부터 잉태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아름다운 봄날 
아침 올림포스의 신들이 신성한 산의 발치께까지 드리워진  해변에서 일광
욕을 즐기고 있을 때, 급류에 떠밀려온  바닷가의 소라고둥 하나가 그녀를 
해변가에 부드럽게 눕혀놓았다. 그녀는 기다란 금발에 크고 푸른  눈, 장밋
빛 피부와 반짝이는 하얀 치아를 가진  놀랍도록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날
씬하면서도 알맞게 살이 붙은 몸에는 고혹적인 향기를 발하는 향수가 가볍
게 드리워졌을 뿐, 옷이라고는 아무 것도 걸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총
애하는 비둘기 한 마리를 데리고 있었다.  아프로디테의 도착은 신들 세계
에 동요를 불러일으켰다. 모든 신들이 자기 아내들은 소홀히 한 채 그녀를 
올림포스에 초대하려고 앞을 다투었기 때문이었다.  질투심으로 얼굴이 새
하얘진 여신들은 그녀에게서 어떤 결점, 비판의 대상이 될 만한 아주 조그
마한 결점이라도 찾아내려 했지만 헛일이었다.  헤라의 탄원으로 제우스는 
신들의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아프로디테에게 옷을 입을  것을 명령했고 
아프로디테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속옷을  입었다. 헤파이스토스는 그녀
를 위해 황금과 보석으로 만든 마술 벨트를 하나 만들어주었는데, 그 벨트
를 차면 누구도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을  발산할 수 있었다. 애써 상대방의 
사랑을 불러일으키려는 수고를 덜어준 이 황홀한 선물에 대한 감사의 표시
로 아프로디테는 헤파이스토스의 모든  청을 들어주겠다는 경솔한  약속을  
'스틱스 강에 대고 맹세했다'. 헤파이스토스는 즉각 "내 아내가 되어 달라"
고 했고 아프로디테는 거절할 수 없었다.  앞서 말했던 수단들을 동원하여 
제우스와 헤라로부터 결혼 승낙을 얻어낸 헤파이스토스는 즉각  성대한 결
혼식을 올렸고, 신혼 부부는 키클롭스들의 도움으로 지어진 궁전에 자리를 
잡았다. 호화로운 궁전과 무엇이든 거절하지 않고  온갖 선물을 해주는 남
편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금세 혜파이스토스에게 싫증이 났다. 억척스런 일
꾼이던 혜파이스토스는 아침 다섯시면 일어나  대장간으로 나갔고, 수없이 
밀려들어오는 신들의 주문품을 만들어내느라, 그리고  다급한 고장과 수리
를 처리하느라 온종일을 공장에서 보냈다. 그리고  피곤에 지친 더러운 몸
으로, 게다가 과로로 기분까지 나빠져가지고 자정이 넘어서야 집으로 돌아
오곤 했다. 이것은 아프로디테처럼 아름다운 여자에게 어울리는 삶이 아니
었다. 더욱이 그녀는 고독을 좋아하지도 않았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마
련이었고, 그녀는 애인들을 갖게 되었다. 

    아네모네꽃으로 최어난 아도니스 
  아프로디테의 첫번째 애인 아도니스는 평범한 인간이었지만 아마도 인간 
세상에서 나올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남자였을 것이다. 키프로스 왕의 아
들인 그는 대단한 유혹자이면서 동시에  탁월한 사냥꾼이었다. 아프로디테
가 그를 만나 반해버렸을 때 그의 나이 겨우 스물이었다. 그리하여 아도니
스는 몇 달인가를 몹시 고단하게 보내야 했다. 밤이면 아프로디테의 두 팔
에 안겨 거의 잠을 자지 못했고, 낮이면 쉬는 대신 사냥을  나갔다. 그에게 
닥친 비극적인 사고도 아마 이러한 누적된  피로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느 
날 아도니스는 상처를 입은 채 도망가던 멧돼지를 추격하고 있었는데 멧돼
지가 갑자기 몸을 돌려 그를 덮쳐와 대퇴부 동맥을 끊어버린 것이다. 아도
니스는 순식간에 피를 쏟아 내며 그  자리에서 절명하고 말았다. 늦게서야 
도착한 아프로디테는 땅 위에 떨어진 아도니스의 피 몇 방울을  봄철에 잠
깐 피는 매혹적인 꽃인 아네모네로 변하게  했다. 그러나 아도니스의 모험
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일단 죽고 나자 황천으로  내려갔는데, 거기에
는 아프로디테가 혜파이스토스를 지겨워한  것 못지않게 남편인  하데스를 
지루하게 여기던 페르세포네가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사랑의 여신
의 정부였던 아도니스가 이번에는  죽음의 여신의 정부가  되었다.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된 아프로디테는 분개했다. 그녀는 제우스에게 아도니스를 돌
려달라고 요청했고, 페르세포네는 자기가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우스
는 어찌해야 했을까? 나중에 이와 동일한 상황에 빠졌던 솔로몬의  왕처럼 
분쟁의 대상이 된 아도니스의 육체를 두 쪽으로 절단해야 하는가?  제우스
는 좋은 꾀를 생각해냈다. 아도니스의 몸은 그대로 놔두되, 1년 중 6개월은 
아프로디테와 그리고 나머지 6개월은 페르세포네와 지내도록 명령을  내린 
것이다. 이러한 판결을 받고 나자 페르세포네의  시간 사용이 넘치게 되었 
다. 이미 이전의 중재로 인해 그녀는 1년의 2/3는 데메테르와 나머지 1/3을 
하데스와 보내야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1년의 반을 아도니스와 보내야 하
는 것이다. 다음의 분수들을 공통 분모로 합산하여 덧셈을 해보면, 
2/3+1/3+1/2=6/9이된다. 다수의 직업을 가진 모든 대가들처럼, 그녀는 행복
한 보충 시간을 가짐으로써 자신의 여러  가지 의무를 채울 수 있었던  그 
방면의 선구자가 된 셈이었다. 

    올림포스의 스캔들 
  반면 아프로디테는 아도니스가 황천에 내려가 있는 여섯  달이라는 많은 
시간을 한가로이 보내야 했다.  보통 여자라면 이 시간을  메우기 위해 또 
한 명의 정부를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프로디테 였던지라 대
번에 2명이나 되는 정부를 맞아들였는데, 아폴론과 아레tm가  바로 그들이
었다. 이러한 이중의 관계는 2명의  정부가 서로 다르면서도 상호보완적인 
일과표를 갖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루 종일 태양 마차를 몰아야 했던 아
폴론은 밤이 되어서야 아프로디테를 만나러 갈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러
나 아레스는 모든 군신들이 그렇듯이 평화시에는 별로 할 일도  없었기 때
문에 낮시간을 그녀 와 보낼 수 있었다.  때문에 두 신은 자신이 경쟁자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남편인 헤파이스토스는 언제나 
일이 넘쳐났기 때문에 아무것도 몰랐다. 단지  그는 얼마 전부터 아프로디
테가 자신이 일을 너무  많이 한다고 비난하지도 않고,  매일 밤늦게 집에 
돌아 올 때마다 상냥하고 기분 좋게 맞이한다는 사실에 놀랐을 뿐이다. 이 
네 사람의 관계는, 어느 날인가 아프로디테  곁에서 선잠이 들어버린 아레
스가 떠날 시간을 놓치지 않았더라면 좀더 오래 지속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늘을 한 바퀴 돌고 난 아폴론은 마차를 챙겨놓고 매일의 약속 장소로 은
밀히 찾아갔다. 아프로디테 곁에서 잠들어 있는  아레스를 본 아폴론은 피
가 거꾸로 돌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복수심에 불탄 아폴론은 헤파이스토
스를 찾아가 그의 아내가 부정한 짓을  했음을 고자질 했다. 헤파이스토스
는 그 당장에 아주 촘촘하게 짜인 철제 그물을 만들어가지고  자신의 궁전
으로 몰래 돌아와 발가벗은 채 잠들어 있는 아프로디테와 아레스에게 덮어
씌웠고, 그들은 마술에 걸린 그물 속의 포로가 되어버렸다. 헤파이스토스는 
그들을 이러한 굴욕적인 상태로 을림포스까지 끌고 가서 모든 신들의 비난
과 조롱 앞에 내던졌다. 아프로디테의 탄원과 아레스의 눈물에도 불구하고 
헤파이스토스는 완고히 그들을 풀어주지 않았다. 다행히도,  날렵한 손가락
과 깊이 있는 지성을  갖춘 여신 하나가 그들을  동정했다. 게다가 그녀는 
매듭의 발명자였다. 몇 시간의 작업 끝에  그녀는 그물의 비밀을 발견해내
어 풀어낼 수 있었다. 이 여신이 바로 아테나였다.

    8. 지혜의 여신 아테나 
  제우스의 머리에서 나온 아테나 
아테나도 아프도디테처럼 제우스의 딸이면서 어머니가  없었다. 그녀가 태
어난 상황은 아주 독특했다. 어느 날 아침 제우스는 지독한 두통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처음에는 전날 밤에 좀 과하게 마신 넥타르주 탓으로 여
겼고, 의술의 신인 아폴론이 마련한 약을 먹으면 낫겠거니  생각했다. 하지
만 처방은 소용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정오 쯤  되자 제우스의 두통은 
참을 수 없는 정도에 이르러 좀더 강력한 해결책을 쓰기로 했다 그는 헤파
이스토스를 불러 도끼로 자기의 머리를 쪼개라고 명령했다. 불필요한 설명
이겠지만, 이러한 충격 요법은 신에게만 허용되는 것이다. 제우스에게는 그
것이 효험이 있었다 벌어진 두개골 안에서  두통의 원인이 나왔는데, 그것
은 머리에 투구를 쓰고 손에는 창을  들고 옷까지 입고 있는 실물  크기의 
여신이었다. 이 여신 이 바로 아테나이다.  그녀는 키가 크고 마른데다, 갈
색 머리에 섬세한 용모, 초록빛  눈과 생각에 잠긴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 
아프로디테처럼 선정적이진 않았지만 좀더 뛰어난 아름다움이었다. 아프로
디테가 마릴린 몬로를 닳았다면, 아테나는 차라리  그레타 가르보 같은 미
인이었다. 그녀의 지적인 자질은 이러한 신체적인 매력보다 훨씬 두드러졌
다. 지적이고 생각도 깊고  근면하며 합리적인 정신의  소유자인 아테나는 
제우스로부터 지혜와 학문의 여신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녀 덕에 그리스
인들은 문자, 수학, 천문학, 항해술 그리고 매듭을 고안해낼 수  있었다. 때
문에 그들은 아테나에게 특별한  찬사와 고마움과 숭배를  바쳤던 것이다. 
많은 지성인들처럼 그녀  역시 밤에 공부하기를  좋아했고, 그래서 그녀가 
좋아하던 새도 밤의 새인 올빼미였으며, 그 올빼미는 주로 그녀의 모자 위
에 앉아 있곤 했다. 필자가 제일 좋아하는 여배우와 닮아서인지 아니면 그
녀의 지적인 자질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간에 아테나는 필자가 
제일 좋아하는 여신이라는 사실만은 숨길 수  없다. 또한 그녀는 제우스가 
가장 사랑하던 딸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테나가 결점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다른 모든  신들처럼 그녀 역시 허영과  질투와 복수심을 드러낼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음악적 재능에 대해 늘 너무 자만하던 아폴론에 대
해 기분이 상한 그녀는 어느 날 새로운 악기인 금관  플루트를 고안해내어 
그와 경쟁을 벌여보기로 했다. 아테나가 새로운  악기 연습에 몰두하고 있
을 때, 여자들에게 듣기 싫은 소리만 골라 하는 데 소질이 있던 헤라가 소
리를 질렀다. 
  "양볼이 뿔룩하니 꼭 두꺼비 같구나!" 
여자로서의 자존심에 상처를 받은 아테나는 음악에 대한 계획을 당장 포기
해버렸고 홧김에 플루트를 땅에 던져버렸다. 며칠 후 플루트는 마르시아스
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 악기 덕에 그는 미다스 왕이 개최한  음악 경
연 대회에서 아폴론을 누르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혜의 여신도 질투를 
  아테나는 또한 편물과 자수와 레이스  뜨기에 대한 자신의 재능을  몹시 
자랑스러워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는 아라크네라는 그리스 여자가 자기
보다도 뜨개질과 자수에 능하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기분이 몹시 상한 
아테나는 성급히 땅으로 내려가 아라크네의 작업실을 찾아가서  그녀의 작
품을 보여달라고 했다. 아라크네는 방금 짜낸 베일 하나를  내놓았다. 그것
은 너무도 섬세하고 가벼워서 아테네는 그보다 더 잘은 커녕  그만큼도 만
들어내지 못 할 것임을  내심 인정했다. 화가 난  아테나는 베일을 찢어서 
짓밟아버리고는 아라크네에게 소리쳤다. 
  "그토륵 실을 잘 짜니 앞으로는 그 일만 하게 해주마." 
이렇게 말하고는 그 가련한 여자를 거미로 만들어버렸다 이 사건은 아폴론
과 아테나 사이의 격렬한 분쟁의 근원이 되었다.  이 두 신은 서로 남매간
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맞지 않았는데, 그  까닭은 둘의 기질이 근본적으
로 대립되었기 때문이다 예술가이자 시인 이고 음악가인  아폴론은 세상이 
감정과 정열에 의해 통치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반면 아테나는 지적이고 
논리적이고 현학적이었기 때문에 이성과 학문의 우위를 믿었다. 때문에 아
테나를 이길 수 있는 이처럼 좋은  기회를 아폴론이 그냥 넘어갈 리  없었
다. 
  "저런! 박식하고 합리적인 부인께서도 감정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나 보
군?" 
하면서 아폴론이 빈정거렸고, 화가 난 아테나는 내기를 제의했다. 
  "네가 그토록 우월하다고 생각하면 나와 함께 아테네인들이 개최하는 경
연 대회에 참여해보자 그러면 우리 둘 중 누가 정말로 인간에게 더 유용한
지 알게 될 테니!" 

    9. 아테네의 창설 
  그리스의 중요한 도시인 아테네가 창설되었다.  이것을 기회로 아테네인
들은 저다란 축제를 기획하고는 모든 신들을 초대했다. 그리고는 자기들에
게 가장 유용한 선물을 하는 신에게 이 도시의 후원자요  보호자라는 신의 
칭호를 부여하겠노라고 했다. 평소 별로 할  일이 없어 올림포스에서 지루
해하던 신들은 자신들의 재능을 보여줄  아주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
다. 아테나의 내기로 마음이  상해 있건 아폴론은 제일  먼저 선물을 들고 
나타났는데, 그의 선물은 시였다. 한데 시는 그다지 환영받는 선물은 못 되
었다. 왜냐하면 좋은 시가 시민들에게 생생한 즐거움을 제공 해줄 수 있다
는 걸 인식하긴 했지만, 앞으로 전개될 역사에서 보듯, 좋은 시보다는 나쁜 
시가 더 많으리라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아테네의 
아이들 역시 이 경연 대회에서 나름대로의  입장을 표명했는데, 그들은 시
를 배우느라 자신들의 교과 과정이 과중해지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다. 아
폴론의 뒤를 이어 아프로디테가 가져온 선물은 고급 기성복을 입은 모델들
의 행렬로 표현된 여성 의류였다. 여기에 대해서도 의견이  갈라졌다. 여자
들 대개는 환호를 보냈지만, 남자들은 자기 아내들이 옷에 대한 변덕을 부
려대면 그 비용이 엄청나리라는 현실적인 생각을 해냈기 때문에 신중한 태
도를 보였다. 그 다음은 헤파이스토스의 차례였는데  그는 경연 대회를 위
해 쟁기를 고안해냈다. 한 쌍의 소를 쟁기에 매달고 그 조작법을 보여주면
서, 그것을 사용하면 곡식  수확량이 65퍼센트나 증가할 거라고  설명했다. 
이 기구의 유용성에 대해서는 모두들 동의했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은 오늘
날의 코르시카 사람들처럼 그다지 억척스러운  일꾼들이 아니었다. 때문에 
감히 목청 높여 말하지는 않았어도,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헤파이스토스
가 이런 기구들을 발명해냈기 때문에 앞으로는 땅에서 할 일이  더 많아져 
노동이 좀더 고안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등장할 차례였다. 사람들은 그가 항해와 관련된 어떤 발명품, 예를 들면 바
람에 맞서 항해를 도와줄 선미의 키라든가  아니면 좀더 현대적으로, 햇빛
에 타지 않으면서도 피부를 아름답게 그을려주는 선탠 크림 따위를 가져왔
으리라고 기대했다. 그런데 전혀 아니었다. 그가 아테네인들에게 그리고 그
들을 통해 전 인류에게 가져다 준 것은 그 후로 수천 년 간 지상의 중요한 
교통 수단이 될 말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아테네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
던 이 동물의 아름다움과 우아함, 그 힘  앞에서 그들 모두는 경탄의 소리
를 내질렀다. 그 들 중 많은 사람들은  벌써 경연 대회의 우승자로 포세이
돈을 지목하려고 서둘렀다. 그때, 자기 자신은 선물도 가져오지 않았으면서
도 순전히 형제 자매들에 대한 반감으로 차라리 삼촌인 포세이돈의 승리를 
염원했던 아레스가 아저씨를 도와주겠다는 생각으로,  말을 이용한 전투적
인 효과를 강조하면서 평소의 어눌한 말투로 지지 연설을 했다.
  "기병을 이용하면 적군을 3배 이상 죽일 수 있답니다." 
이 말을 들은 똑똑한 청중들은 적들 역시 조만간 기병을 마련할 것이고 그
렇게 되면 그리스인들 역시 3배 이상 죽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즉각 생각
해냈다. 그리하여 좀전의 열광은 식어버리고 말았다. 아테나는 맨 마지막으
로 선물을 내보였다. 그녀는 상업의 신  헤르메스에게 무역에 대한 과학적
인 연구를 해줄 것을 부탁함으로써 아주  면밀한 준비를 해왔다. 헤르메스
가 아테나에게 비밀리에 넘겨준 보고서 안에 들어 있는 연구의  중요한 결
과들은 다음과 같다. 1. 아테네의 인구는 그 동기와 취향이 분명히 다른 두 
부분의 인구로 구성되어 있다 즉 6,873명의 남자와 6,874명의  여자로 이루 
어져 있다. 2. 남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운동과 전쟁이다.  3. 여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은 요리와 평화이다. 이와  같은 연구를 기초로 아테나는 
아테네인들에게 을리브나무를 제공하기로 결정했는데 그 이유는 곧 밝혀질 
것이다. 그녀는 직접 이 나무를 아크로폴리스  광장에 심고는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이 튼튼하면서도 소탈한 나무는 아무 땅에서나 잘 자라며 물을 많이 주
지 않아도 매년 풍성한 올리브 열매를 가져다 줄 것이다. 올리브 열매에서
는 맛도 좋고 요리에 적절하며 영양가도 풍부한 기름을 다량으로  짜낼 수 
있다. 게다가 올리브나무는 가장 귀중한 행복의  하나인 평화의 상징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투표에 들어갔다. 모든 남자들은 포세이돈의 말에, 모든 여자들은 
아테나의 올리브나무에 표를 던졌다. 그런데 남자보다  여자 의 수가 하나 
더 많았기 때문에 아테나가 그리스의 보호신으로 발표되었다. 그리고 여신
의 이름인 '아테나' 를  기념하기 위해 새로운  도시를 아테네로 부르기로 
했다. 자랑스러워진 아테나는  그날이래 끊임없이  아테네인들을 보호하고 
수많은 선물을 해주었다. 특히 도시 창설 다음날, 포세이돈이  제공한 말에 
누군가가 올라타기만 하면 말이 이리저리 날뛰는 격노한 성질이 있다는 걸 
발견하고는 고삐를 발명해내어 아테네인들에게 그 사용법을 가르쳐주었다. 
아테네 창건 다음날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도시의 남자들이 비
밀리에 모여서 여자들의 투표권을 없애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리하여 여자
들이 그 권리를 되찾기까지는 앞으로 3천 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2부 테세우스와 헤라클레스의 엇갈린 운명
    두 영웅의 출현 
  그리스의 다른 모든 도시처럼 아테네도 처음에는 왕국이었다. 아테네 왕
국은 두 왕조가 연이어 지배했는데, 첫번째 왕조는 별로 흥미로운 게 없다. 
반면 두번째 왕조의 창시자인 에릭토니우스는 언급하고 지나갈 만한데, 그
가 재임하던 동안에 일어났던 사건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가 태어날 당시의 
기이한 상황 때문에 그렇다. 아테네 왕국의 보호신이던 아테나는 아크로폴
리스에 세워진 자신의 사원에 자주 머물렀다. 어느 날 밤, 사원에  혼자 있
던 그녀에게 오빠이자 공업의 신인 절름발이 헤파이스토스가  느닷없이 찾
아왔다. 술을 마셨든지, 아니면 아내인 아프로디테가 그를 사랑의 열정으로 
달아오르게 하고는 만족시켜주지 않았든지, 헤파이스토스는 음탕한 시선과 
이상한 태도로 사원에 들어섰다. 곧 이어  그는 아테나에게 모욕적인 제안
을 했다. 아테나가 화를 내며 밀어내자  헤파이스토스는 그녀를 겁탈 하려
했다. 그러나 아테나의 저항이 워낙 완강했고  헤파이스토스 또한 너무 흥
분된 상태여서 -독자 여러분은 내가 이 부분에서 완곡하게 이야기하는  바
를 이해하기 바란다- 헤파이스토스의 시도는 질질 시간만 끌고 진척을  보
지 못했다. 아테나는 자기의  손수건으로 다리를 닦았고  혐오하듯 그것을 
땅바닥에 던져버렸다. 몇 달 후, 손수건이 떨어졌던 바로 그 자리에서 에릭
토니우스가 태어났다. 그리하여 그는 헤파이스토스의  체외 수정과 아테나
의 자궁외 임신을 통해 태어난 아들이라고 여겨지게 되었다. 에릭토니우스
는 아테네의 왕이 되었고, 그의 후손들은 왕위를 계승했다. 그들 중  세 번
째 자손이 아이게우스였다. 아이게우스는 알크메네와 멀긴 하지만 인척 관
계인데, 제우스와 원치 않는 부정한 관계를  가졌던 테베의 여인 알크메네
에 대해서는 이미 이야기 한 바 있다. 모든 그리스 사람들처럼 아이게우스
는 여행과 여자를 좋아했다. 그가 아테네에서 꽤 멀리 떨어진 그리스 남쪽
의 한 도시에 머물고 있었을 때 귀족  처녀를 사귀게 되었다. 그가 그곳을 
떠나 자기의 왕국으로 돌아가려 할 때  그녀는 임신 중이었다. 아이게우스
는 떠나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기 무거운 돌덩이 아래 내 칼을 묻어놓겠다. 태어날 아이가 아들이면, 
이 돌을 들어내어 칼을 집어낼 수 있을 만큼 힘이 세졌을 때  나를 찾아오
게 하라."
몇 달 후 태어난 아이는 아들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태세우스라
는 이름을 주었다. 같은 날, 테베에서는  알크메네가 2명의 아들을 낳았다. 
하나는 제우스의 아들인 헤라클레스이고, 또  하나는 암피트리온의 아들인 
이피클레스이다. 이렇게 해서 신화의 위대한 두  영웅 테세우스와 그의 증
조부뻘 되는 헤라클레스는 같은 시대를 풍미하게  된다. 어린 시절부터 드
러나는 커다란 성격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아주 절친한  사이가 된
다.

    그리스 최고의 영웅 헤라클레스
  헤라클레스는 마음씨 좋은 야수였다. 그를 조각해낸  모습에서 볼 수 있
듯이 헤라클레스는 작은 머리와 건강한 육체를 갖고 있었다. 에우리피데스
에 의하면 그는 "거칠고 교양없고 성질이 급했으며, 할 수 있는 유일한 일
이라곤 몸을 쓰는 것뿐이었고  학교 같은 데는  제대로 다니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제 곧 알게 되겠지만, 그는 초인적인 체력과 용맹을 지니고 있었
다. 태어난 지 며칠 안 된 헤라클레스가 쌍둥이 형제 이피클레스와 나란히 
요람에서 잠들어 있을 때, 제우스의 모든  서자들을 증오하던 헤라가 아기
들 쪽으로 무서운 독사 2마리를 밀어넣었다. 먼저 깨어난 이피클레스가 놀
라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헤라클레스는 태연하게 고사리  같은 손으로 
뱀들을 잡아서는 민첩하게 목을 졸라버렸다.  알크메네와 암피트리온이 이
피클레스의 비명을 듣고  방으로 달려왔을 때,  헤라클레스는 뱀의 시체를 
가지고 장난치면서 웃고 있었다. 헤라클레스의 부모는  그를 정성 들여 가
르치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신체의 단련에는 남다른  열성을 보이면서도 
문화적 활동에는 혐오감을 나타냈다. 음악 선생이었던 리누스가 주의가 산
만하고 서투른 헤라클레스를 꾸짖자 갑자기 화를 벌컥  내면서 칠현금으로 
스승의 머리를 내리쳐 죽게 했다. 이런 일들은 끊임없이 일어나게 된다. 심
성이 착한 헤라클레스인지라 스승의 죽음에 깊은 슬픔과 처절한 후회를 표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열여섯 살이  되자 그는 거인으로 성장했
다. 힘센 몸에 철퇴로 무장하고 나서자 두려울 게 없었고 신들조차 겁나지 
않았다. 몹시 더운 어느 날 따가운 햇볕에 시달리던 그는 아폴론의 마차를 
향해 활을 겨누어 말들과 아폴론을 위협했다. 또 언젠가는 자신이 타고 있
던 배가 폭풍에 흔들리자 포세이돈에게 욕설을 퍼부며 감히 대항하려고 했
다. 심지어 아버지인 제우스에게조차 두려움 없이 맞서곤 했다.  언젠가 코
카서스 지방 근처를 지나던 중에  바위에 묶여 독수리에게 파먹히고  있는 
프로메테우스를 발견했다. 벌을 받게 된 사연을 듣고 프로메테우스를 동정
한 헤라클레스는 맨손으로 사슬을 끊어 그를 구해주었다. 이러한 수훈들로 
인해 성인이 될 즈음의  헤라클레스는 그리스 전체에서  유명해졌다. 그의 
이같은 쾌거를 전해 들은 테세우스는 자신도 그처럼 되고 싶어  몸이 달았
다. 

    또 하나의 영웅 테세우스 
  테세우스는 신체적으로는 헤라클레스보다 못했지만, 지적으로는 그를 크
게 능가했다. 그는 아주 일찍부터 '행동하기 전에 깊이 생각해야  한다' 는 
걸 알고 있었으며, 야수 같은 힘보다는 지성의  능력을 더 쉽게 사용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소심한 성격은 아니었으며, 영광이나 우정에 대한 뛰어난 
감각도 있었기에 헤라클레스 못지 않게 큰 위험과 무거운 부담이 뒤따르는 
일에 자주 뛰어들었다 열여섯 살이 되자.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누구인
지를 알려주었고, 아버지 아이게우스가 숨겨놓은 바위  밑의 칼에 대해 얘
기해 주었다. 테세우스는 두 팔로 바위를 들어내려 했지만  힘이 모자랐다. 
그는 머리를 쓰기로 했다. 말뚝 하나를 찾아내어  그 끝 부분을 땅과 바위 
틈에 집어넣고 말뚝의 윗 부분에 힘을  주자 바위가 들렸다. 아르키메데스
보다 천 년이나 앞서 그는 지렛대의 원리를  적용할 줄 알았던 것이다. 테
세우스는 아버지의 칼을 가키고 아테네로 향했다.  그가 지나쳐 가야 했던 
여러 지방에는 강도와 살인자들이 들끓고 있었는데 그들 중  2명은 특히나 
위험한 인물들이었다. 첫번째는 스키론이라는 자였는데, 그는  깊은 벼랑이 
마주보이는 곳에 의자를 내다 놓고는 거기 앉아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러
다가 여행객이 지나가면 자신의 발을 좀 씻어달라고 공손하게 부탁했고 여
행객이 무릎을 꿇고 앉아 그의 발을  씻으려는 순간 단 한 번의  발길질로 
그를 벼랑 아래로 떨어뜨리곤  했다. 테세우스는 이러한  스키론의 술수에 
넘어가는 체하다가, 스키론이 그에게 발을 내맡기는  순간 유도 선수의 동
작처럼 재빠르게 그를 붙잡아 등뒤로 돌려가지고 머리  위에서 흔들어대다
가 곧장 벼랑으로 내던졌다. 두번째 강도는 가장 유명한 자였다. 그는 프로
크루스테스로서 포세이돈의 아들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포세이돈은 자식 
복이 없었다. 프로크루스테스는 헤파이스토스에게 순식간에 늘였다 줄였다 
할 수 있는 철제 침대 하나를 만들어달라고 했다. 그리고는 여행객이 지나
가면 재빨리 키를 가늠하여, 키가 작은  여행객일 경우 침대를 최대한으로 
늘여놓았고, 키가 크면 침대를 가장 작은 크기로 줄여버렸다.  그리고 여행
객을 침대 위에 눕게 하여 크기를 잘 맞춰주겠다는 핑계로 키가 큰 여행자
들은 머리를 잘라버렸고, 키 작은 여행자들은  척추가 부러질 때까지 다리
를 잡아당겨 키를 늘여놓았다. 테세우스는  키가 컸으므로 프로크루스테스
는 침대의 길이를 줄여놓았다. 하지만 오랫동안 기하학을 연구했던 테세우
스는 사각형의 대각선 길이는 가장 긴 한 변의 길이보다 반드시 길다는 사
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침대에  대각선으로 누워버림으로써 프로크루스
테스의 계산을 망쳐놓았다. 당황한 프로크루스테스가  어찌된 셈인지를 알
아보려고 침대로 몸을 숙였을 때, 테세우스가 달려들어 그의 몸을 두 동강 
내버렸다. 희안하게도 이 동강난 몸은 침대 폭의 크기와 아주 똑같았다. 테
세우스가 아테네에 도착했을 때는 이와 같은 공적이 이미 파다하게 소문이 
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아이게우스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테세우스는 아버지의 궁을 찾아갔고, 아이게우스는  엉중하게 그를 맞이했
다. 하지만 아이게우스는 자신의 경쟁자가 될지도 모를 이 낯선 인물을 경
계했다. 그래서 술잔에 독을 탄 음료수를 준비했다. 젊은  영웅을 영접하기 
위해 벌어진 연회에서 아이게우스는 독이 든 술잔을  테세우스에게 건네주
며 잔을 높이 들어 건배하자고 했다. 
  "자. 우리의 주빈을 위해 건배합시다. 그의 칼은 무서운 도적들로부터 우
리를 구해주었습니다." 
그러자 테세우스는 술을 마시기에 앞서 아이게우스에게 칼을  돌려 주면서 
대답했다. 
  "이제 이 칼은 당신 것입니다." 
칼을 알아본 아이게우스는 자기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자신의  아들임을 
깨달았고, 재빠르고 정확한 칼솜씨로 테세우스가 이미  입가로 가져 간 술
잔을 떨어뜨림으노써 아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그 이후 테세우스는 
아테네 민중들의 열렬한 애정을  받으며 아버지의 궁전에서  살게 되었다. 
민중의 애정에 고무된 테세우스는 몇 달 후 생애 최고의  모험에 뛰어들게 
된다.

    2. 테세우스와 미노타우로스 
    황소 인간 미노타우로스 
  테세우스가 돌아오기 몇  년 전, 아이게우스가  아테네를 지배하고 있을 
당시 크레타 섬은 미노스 왕의 통치하에 있었다. 젊은 시절 미노스는 파시
파에라는 여자와 결혼을 했다. 그들의 결혼은  화려한 예식 속에 치러졌으
며,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 신들에게 수많은 제물이 바쳐졌다. 포세이돈에
게는 황소 한 마리를 봉헌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황소의 아름다움에 
감동한 파시파에가 소를 살려달라고 애원했고 미노스는 그  청을 들어주었
다. 화가 난 포세이돈은 파시파에가 황소와 사랑에 빠지도록  만들었다. 황
소와 파시파에의 결합에서  태어난 기이한 괴물이,  황소의 머리에 인간의 
몸을 가진 미노타우로스다. 미노타우로스를 자기  아들로 믿었던 미노스는 
아들을 죽일 수는 없었기에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게 숨겨놓기로  작정했
다. 그래서 재능 있는 건축가인 다이달로스를  불러 누구든 한번 들어가면 
절대로 빠져 나을 수 없는 감옥을 지으라고 했다. 다이달로스는 일에 착수
했고 미로를 만들어냈다. 미로에는 길과 교차로와 막다른 골목과 굽이길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 설계도면 없이는 누구도 그 안에서 길을 찾을 수가 없
었다. 미노스는 다이달로스로부터 도면을 건네 받아 불태워 없앴다. 그리고
는 미노타우로스를 미로 속에  집어넣어 절대로 빠져 나올  수 없게 했다. 
혹시 누군가가 호기심으로 미로 속에  들어가더라도 결코 되돌아 나올  수 
없으므로 거기서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으리라 믿었다. 그 후 미
노스는 아내와 함께 평화롭게 몇 해를 보냈다. 파시파에는 세 아이를 낳았
는데, 아들은 안드로게오스였고 두 딸은 아리아드네와  파이드라였다. 안드
로게오스가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 미노스는 그에게 세상 구경을 시킬 나
이가 되었다고 판단하고는, 아이게우스 왕에게 보내는 추천서와 함께 그를 
아테네로 떠나 보냈다. 불행한 우연으로, 안드로게오스가  아이게우스 왕의 
궁에 도착했을 때 왕은 마침 맹수 사냥을 떠나려던 참이었다. 사냥을 포기
하고 싶지 않았던 아이게우스는 안드로게오스를  사냥길에 끌어들였고, 경
솔한데다 경험도 없던 안드로게오스는  사자에 물려 죽고  말았다. 환대의 
예우를 위반한 아이게우스 왕에 대한 분노로 미노스는 토벌대 파견을 계획
했다. 군대를 앞세워 아이게우스 왕의 부대를  쳐부순 미노스는 가혹한 조
건을 내걸었다. 
  "오늘부터 계산해서 9년마다 아테네 귀족 출신의 젊은 남녀 각각 7 명씩
을 검은 돛단배에 실어 보내라. 그들은 미노타우로스의 먹이가 될 것이다." 
아이게우스는 굴복할 수밖에 없었고 즉시 인간 화물을 실어 보내야 했다 

    아리아드네의 실 
  테세우스가 아테네에 도착했를 때는 이 숙명적인 조약을 체결한  지 9년
이 되어가고 있었다. 미노스에게 보낼 두번째 징발을 위한 음산한 준비 장
면은 즉각 테세우스의 눈에 띄었다. 자초지종을 설명들은 테세우스는 자기
도 이 징발의 일원으로 참여하게 해달라고 아버지에게 간청했다. 아이게우
스는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과 반드시 살아 돌아오겠
다는 약속을 받아낸 뒤 아들의 청을 승낙했다. 
  "위기를 벗어나 돌아오게 되거든, 배의 검은색 돛을 횐색으로 바꾸어 달
아라. 그렇게 하면 멀리서도 좋은 소식을 알아볼 수 있을 테니까." 
테세우스와 13명의 일행은 크레타에 도착했다. 그들을 맞아들인 미노스 왕
은 미로에는 다음날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덧붙였다. 
  "하지만 나는 환대의 예우를 지키는  사람이니, 오늘 저녁만큼은 왕실의 
성찬에 여러분 모두를 초대하겠소." 
그날 저녁식사에서 테세우스는 출생 신분이 높다는 이유로 미노스 왕의 두 
딸인 아리아드네와 파이드라 사이에 앉게 되었다. 그는 즉시 파이드라에게 
강한 매력을 느꼈다,  그러나 파이드라는 그에게  조금치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반대로 테세우스가 눈길도 주지 않았던 아리아드네는 그에게 홀딱 
빠져버렸다. 저녁식사 끝무렵에 아리아드네는 무슨  일이 있어도 테세우스
를 구해내야겠다고 마음속으로 몰래 결심했다. 밤이 되자 아리아드네는 건
축사 다이달로스를 찾아가 미로의 설계 도면을 달라고 간청했다. 
  "그건 이제 없어요.  하지만 출구를 되찾을  또 다른  방법이 있긴 하지 
요." 
라고 말하면서 아리아드네에게 비밀을 털어놓았다.  다음날 새벽 아리아드
네는 테세우스의 방으로 찾아갔다. 그는 파이드라의  꿈을 꾸며 아직 잠에
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깨우며 말했다 
  "당신이 날 아테네로 데려가  결혼해준다면 미로에서 빠져  나올 방법을 
당장 알려주겠어요." 
더 이상의 선택의 여지가 없던 테세우스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아리아
드네는 그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설명해주었다. 
  "자 여기 두툼한 실타래가 있어요. 미로에  들어갈 때 이 실뭉치의 끝을 
입구의 철책에 묶어두고는 어디를 돌아다니든 실이 풀어지도록 하세요. 되
돌아오는 길을 찾으려면 이 실을 거꾸로 따라오기만 하면 돼요"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의 충고대로 했다. 그는 미로  속을 한참 헤매어 미
노타우로스를 찾아내 죽인 후 13명의 일행과 더불어 무사히 철책으로 되돌
아왔다. 그들은 그곳에 기다리고 있던 아리아드네를  데리고 얼른 배에 올
랐다. 

    미로를 탈출하는 또 다른 방법 
  테세우스가 탈출했으며 아리아드네가 납치되었다는 걸 알게 된 미노스는 
조사를 통해 다이달로스가 그 일의 공모자라는  걸 밝혀냈다. 미노스는 다
이달로스를 그의 아들 이카로스와 함께 미로 속에 감금시켜버렸고, 그들의 
몸을 샅샅이 뒤져 실뭉치가 없나 확인하는 걸 잊지 않았다. 이같은 상황에 
빠진 다이달로스는 자신이 훌륭한 건축가 못지 않은 기술자임을 과시할 수 
있었다. 그는 아들에게 말했다. 
  "이카로스야, 땅으로 통하는 길은 막혔지만 하늘로 나갈 길은 열려 있단
다." 
비행술의 선구자였던 그는 서로 붙어 있는 두 쌍의 날개를  만들어 밀랍을 
이용해 각자의 어깨에 붙였다. 얼마간의 비행 연습을 한 후 아버지와 아들
은 공중으로 날았고 미로 바로 위로  솟구쳐 올라갔다. 그리고는 크레타를 
벗어나 지중해의 푸른 물결을 내려다보며  그리스로 향했다. 다이달로스는 
너무 높이 날지 말 것을 아들에게 충고했다. 하지만 하늘을 난다는 기쁨과 
자만심에 취해버린 이카로스는 자기가 독수리나 된 듯  착각했고 아폴론의 
마차를 좀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했다. 하지만  태양에 너무 가까이 다가
간 탓에 날개를 붙였던 밀랍이 녹아버렸고, 불행한 이카로스는 돌멩이처럼 
추락하여 물 속에 잠겨버렸다. 참담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던 다이달로스
는 시실리까지 계속 날아 갈 수밖에 없었다. 

    버림받은 아리아드네 
  그러는 사이, 테세우스는 아테네를 향해 배를 몰아가고 있었다. 크레타를 
출발할 때부터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에게 열렬하고  일방적인, 말하자면 
부담스러운 사랑을 드러내 보였다. 하지만  테세우스로서는 그녀에게 냉담
한 고마움만을 느낄 뿐이었는데, 이러한 감정은 처음에는 짜증으로, 다음에
는 배은망덕으로, 마침내는 원한으로 쉽게 변해버렸다.  테세우스가 영웅이
긴 했지만 성자는 아니었기에 별수없는 노릇이었다.  위대한 행동을 할 수 
있었지만 비열한 행동 역시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그는 아리아드네
를 떨구어버리기로 결심했지만 그 얘기를 직접  할 용기는 없었다. 그래서 
충실한 동반자였던 개를 산책 도중에 슬쩍 버리곤 하는 비겁한  개 주인처
럼 아리아드네를 버리기로 했다. 배가 낙소스 섬에 잠시 정박했을 때 테세
우스는 아리아드네가 잠든 사이 소리 없이 일어나 혼자 배로  돌아가 돛을 
올리고 떠나버렸다. 아리아드네가 깨어났을 때 테세우스의 배는 이미 멀어
져가고 있었다. "때로는 불행이 괜찮을 때도 있다"는  스페인 속담이 있다. 
울면서 낙소스 섬을 혼자 헤매던 아리아드네는 우연히 그곳에 있던 디오니
소스와 마주쳤다. 그는 아리아드네에게  술을 주며 위로했고  그녀에게 반 
해버려 결흔을 했다. 영웅 대신 신을  얻었으니 그녀로서는 손해본 장사는 
아닌 셈이다. 

    검은 돛이 부른 비극 
  테세우스의 배는 아테네의 해변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크레타 섬을 떠날 
때부터 수많은 문제와 고민에 시달렸던 테세우스는 일이 성공하면 배의 돛
을 바꾸어 달라고 충고했던 아버지의 말을 까맣게 잊어 버렸다. 궁전의 창
가에 앉아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배의 검은 돛을 알아본  아이게우스는 아
들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말았다. 낙심한 나머지 그는 바다에 몸을 던져 목
숨을 끊었다. 그날 이후 그  바다는 아이게우스(에게 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아리아드네를 버리고 온 일과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이중의 회
한에 시달리던 테세우스는 마음을 붙들어 맬  필요를 느꼈다. 그는 헤라클
레스가 힘과 용기를 자랑한다는 소리를 오래  전부터 들어왔던 터라, 테베
로 가서 그를 만나보기로 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에, 헤라클레스는  더 
극심한 절망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을 테세우스가 어찌 알았겠는가? 

    3. 테세우스와 헤라클리스의 첫 만남 
    헤라클레스의 자살을 막은 테세우스 
  헤라클레스는 아주 젊었을 때 메가레우스라는 공주와 결혼하여  세 아이
를 낳았다. 결혼 초기에 헤라클레스는 평온한  부르주아의 삶을 누리기 위
해 모험 여행을 그만두겠노라고 아내에게  약속했다. 하지만 헤라클레스는 
정원 손질이나 하면서 집안에 한가로이 있을  사람은 아니었다. 금세 그는 
지겨워하기 시작했고 술을 과하게 마셔댔다. 술을  많이 마시지 않을 때도 
워낙 성질이 급하고  격했는데, 술에 취하자  그야말로 정신착란의 발작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러한 정신 발작 상태에서  완전히 정신이 나가 자기 
손으로 아내와 세 아이를  죽여버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의식불명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의식을 되찾았을 때 그는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었
다. 공포로 일그러진 표정으로 시체들을 바라보면서 두려움에 질린 하인들
에게 누가 이런 일을 저질렀는가를 우레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처음엔 아
무도 감히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말을 하지 않으면  테베의 온 백성을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했기 때문에 법적 부친이었던 암피트리온이 용기를 모
아 진실을 말해주었다 그러자 헤라클레스의 분노는 후회와  절망으로 바뀌
었다. 극도의 절망 상태에 빠진 그는 먹지도 자지도 씻지도 않은 채 몇 날
인가를 보내고 있었다. 하인들과  친구들 심지어 부모조차도  그를 두렵고 
원한 맺힌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죄에 더럽혀질까  두려워 누구도 감히 그
의 곁에 다가서지 않았다. 인간과 신으로부터  영원한 저주를 받았다고 생
각한 헤라클레스는 생을 마감할 결심을 했다.  그래서 침대에 누워 자신의 
날카로운 칼끝을 목에 대고 있는데, 그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그는 무
의식적으로 들어오라고 대답했다. 문이 열리자 테세우스가 들어섰다. 

    두 영웅의 새로운 출발 
  테세우스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지만 헤라클레스에게 다가가 그를 껴
안았다. 죄를 저지른 후 처음으로 받게 된 이 우정의 표시에 감격 한 헤라
클레스는 눈물을 흘렸다. 잠시 후 테세우스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선 그
는 자신이 누구인가를 밝힌 다음, 자기도  역시 2가지 그릇된 행동을 저질
렀노라고 고백했다. 하나는 아리아드네에 대한 배은망덕의 죄이고 다른 하
나는 부친에 대해 무심했던 죄라고 설명했다. 그러자 헤라클레스가 말했다.  
  "그렇기는 하지만 내가 지은 죄가 더 무거워." 
  "아니, 덜하지. 왜냐면 당신은 술취한 상태에서 무슨 일을  하는 지도 모
르고 한 거잖소." 
두 친척간의 대화는 이렇게 며칠인가 계속 이어졌다. 위안을 찾고 자 테베
에 왔던 테세우스는 오히려 자살하려던  헤라클레스의 마음을 돌려놓았다. 
헤라클레스에게 삶과 행동의 의욕을 되찾아주기 위해 그는  마침내 현명한 
충고를 해주었다. 
  "무슨 대가를 치러서라도 속죄하고 싶다면. 우리 두 사람의 친척이 되는 
에우리스테우스 왕을 찾아가서 도와주게나. 그가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다
는 소리를 들었거든." 
  "그러면 넌 뭘 할작정치지?" 
  "난 근간 결혼하게 되는 친구를 찾아갈 거야." 
이제 친구가 된 두 영웅은 그리하여 함께  테베를 떠났다. 며칠 후 서로의 
갈 길로 갈라지게 되었을 때. 헤라클레스는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내 생명을 구해주었다는 걸 잊지 않으마." 

    친구 따라 황천으로 
  테세우스가 방문한 친구는 페이리토스라는 라피타이족의 왕이었다. 테세
우스가 도착했을 때, 마침 결혼식 연회가 시작되고 있었다.  연회에는 수많
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그 중에는 예외적인  장수 덕분에 세기의 중대
한 사건의 증인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그러한 사건에 직접  참여할 수많은 
기회를 가졌던 인물이 하나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네스토르였다.  당시 네
스토르는 한창 나이였고 지적이고 도덕적인 자질을 여전히  자랑하고 있었
지만, 말을 많이 하는 그의 습관은 이미  도가 지나칠 정도였다 이러한 그
의 수다스러움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희화화되어 전설적이 된다. 잔칫상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에도 그는  페이리토스와 테세우스를 독점하고는  끝도 
없는 이야기로 그들을 완전히 사로잡아, 초대하지도 않았던 '불량배'  떼거
리가 몰래 연회 장소에 끼여드는 장면 을  놓치게 했다. 이 침입자들은 사
람의 머리와 말의 몸을 가진 힘세고 거친 켄타우로이 종족이었다. 술에 취
한 켄타우로이족은 페이리토스가 못 보는 틈을 이용해 신부를 괴롭히기 시
작했고 갑자기 그녀를 납치하려 했다. 젊은 아내의 비명 소리에 놀란 페이
리토스, 테세우스, 네스토르 그리고 연회장의 손님들이 그녀를 구하러 나섰
고 연회장은 금세 무시무시한 격전장으로 변했다. 결국 라피타이족이 켄타
우로이족을 물리치긴 했지만 싸움 중에 페이리토스의 아내가 죽고 말았다. 
테세우스는 다시금 위로자의 역할을 해야만 했다.  설득을 너무 잘한 탓인
지, 페이리토스는 며칠 후에 재혼을 결심했다. 이번에는 그  누구도 자신의 
신부를 넘보지 못하게 하겠다는 생각에서 세상에서 가장 잘 보호된 여자나 
여신과 결혼하겠다는 엉뚱한 결심을 했다. 그  여신이 바로 황천의 여신이
자 하데스의 아내인 페르세포네였다. 이러한 계획이 말도 안 된다는 걸 알
았지만서도, 당시의 테세우스도 완전히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던지라 친
구를 따라 황천의 여행길에 나섰다. 

    망각의 의자 
  목적지로 가는 중에 그들은 스파르타를 지나게 되었고 그곳의 왕 틴다레
오스를 방문하기로 했다. 여러분은 이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 틴다레오스는 
레다의 남편이었고, 레다는 제우스와 관계를 맺은  일로 인해 헤라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레다가 죽으면서 낳은  아이들이 헬레네와 클기타임네스트
라라는 쌍둥이 딸과 카스토르와 폴리데우케스 라는 쌍둥이  아들이다 테세
우스와 페이리토스가 틴다레오스의 궁에 도착했을 때는 왕과  그의 아들들
은 없었고 당시에 열 살이었던 헬레네만이  있었다. 테세우스는 그녀를 보
는 순간 이 매력적인 아이가 몇  년 후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가 
될 거라는 짐작을 했다. 그래서 '저 여자 애를 점찍어두어야겠다'  고 생각
했다. 그리고는 페이리토스의 도움을  받아 그녀를 납치했다. 헬레네의  이 
첫번째 납치는, 나중에 이야기하게 될 두번째  납치보다는 덜 알려져 있지
만, 꽤나 의미 심장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사랑에서 여성들의 운명이란 
되풀이된다는 걸 보여주기 때문이다. 어떤 여성들은  늘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건달하고만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보이고,  어떤 여자들은 아버지뻘 
되는 나이 든 사람만을 사랑하고, 또 어떤 경우는 연인으로부터 늘 버림받
기만 한다. 헬레네의 경우는 무의식적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납치를 반
복적으로 당하게 된다. 그러나 그녀의 첫번째  납치는 심각한 결과를 가져
오지는 않았다. 테세우스는 그녀를 한 늙은  시골 아낙에게 맡겨두고 보호
해줄 것을 부탁했는데, 헬레네의 두 오빠인 카스토르와 폴리데우케스가 구
해내어 집으로 데려왔기 때문이다. 테세우스와  페이리토스는 어쨌든 하데
스의 왕국에 도착했다. 황천은 오로지 죽은 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도록 되
어 있다. 하지만 이 두 방문객은 워낙 뻔뻔스럽고 대담해서, 어떻게 했는지
는 모르겠지만서도, 온갖 통제를 통과하고서는  마침내 페르세포네와 하데
스의 침실에 다다랐다. 처음에 하데스는 그들의 무례함을 죽음으로 다스리
려고 했지만, 페르세포네의 중재로 고통을 감해주기로 했다. 하데스는 그들
을 '망각의 의자' 에 앉게 했는데, 거기에 앉으면 누구든  완전한 기억상실
에 빠지게 되었다. 의자에 앉게 된  테세우스와 페이리토스는 자기들이 누
구인지조차 기억할 수 없게 되었다. 

    4. 헤라끌레스의 12가지 과업 
  술김에 저질렀던 죄를 용서받고자 했던 헤라클레스는 테세우스의 충고대
로 친척인 에우리스테우스를 도와주러 갔다.  미케네의 왕이던 에우리스테
우스는 타산적이고 뻔뻔스러운  인물이었다. 그는  헤라클레스의 자발적인 
협력으로부터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다는 걸 즉시 간파하고는, '헤라클레
스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라는 명목으로 하나같이  어려운 10가지 일들을 
계속적으로 부과했다. 

    네메아의 사자 
  헤라클레스의 첫번째 과업은 네메아의  숲에서 뛰쳐나와 미케네  왕국의 
가축들과 목자들을 공격하곤 했던 무서운 사자를 처치하는 일이었다. 활과 
철퇴로 무장하고 임무 수행에 나선 헤라클레스는  곧 사자를 발견했다. 처
음에는 화살을 쏘았지만 사자의 가죽이 워낙 두터워서 화살이 박히지가 않
았다. 그래서 철퇴로 있는 힘껏 내리쳐보았다. 하지만 사자의  머리가 워낙 
단단해서 오히려 철퇴가 부서져버렸다. 마침내  헤라클레스는 맨손으로 사
자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결국 사자의  포효 소리와 이빨과 발톱
에도 아랑곳없이 힘센 팔로 사자의 목을 졸라 죽여버렸다. 그는 사자의 가
죽을 벗겨 휘장처럼 자기 어깨에 둘렀고, 사자  머리를 자기 머리 위에 얹
어 투구처럼 썼다. 이러한 차림 새로  에우리스테우스의 궁에 나타나 자신
의 첫번째 임무가 완수되었음을 알렸다. 처음엔  그를 사자로 착각하고 몹
시 놀랬던 에우리스테우스는 성공스런 임무 수행에 대단히  만족하면서 곧 
이어 두번째 일을 주었다. 그것은 아우게아스의 외양간 청소였다.

    아우게아스의 외양간 청소 
  아우게아스는 에우리스테우스의 친구이자 이웃이었다.  그는 3천 마리의 
소를 소유하고 있었고, 소들은 낮이면 풀밭에서  지내고 밤에는 거대한 외
양간에서 잤다. 관리인들의 태만이 계속되어선지 파업을 해서인지 (역사는 
말해주지 않고 있다) 오랜 동안 청소를 하지 않은 외양간에는 엄청난 양의 
배설물이 그대로 쌓여 있었다. 그 지독한 냄새 때문에 아무도 외양간 근처
에 얼씬하지 못했고, 퇴비 더미는 매일  20센티미터씩 증가하여 곧 지붕까
지 차 오를 기세였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대양과도 같은 쇠똥 더미를 바라
본 헤라클레스는 삽이나 빗자루 따위로는 어림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
러자 갑자기 몹시 화가 났고 화풀이를 하느라 커다란 바위 하나를 집어 들
어 발치께에 흘러가던 개울 쪽으로 사납게  내던졌다. 그런데 바위가 떨어
지면서 눈사태를 일으켰고, 눈사태로 인해 계곡 아래쪽이 막혀버렸다. 그러
자 계곡을 흐르던 개울물이 범람하여 아우게아스의 외양간  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쏟아져 내려 눈 깜짝할 새에  외양간을 청소했다. 아우게아스는 헤
라클레스에게 고마움을 표하면서 3백 마리의 소를 선물했다. 

    스팀팔로스의 새테 
  스팀팔로스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숲에는 여러 가지의 무서운 새들이 서
식하고 있었는데, 그 새들은 견고한 부리와  발톱을 가지고 있어서 가축뿐 
아니라 인간에게도 위험한 존재가 되었다. 에우리스테우스는 헤라클레스에
게 그 새들을 몰살시키라는 임무를 내렸다. 아침 일찍 호수가에 도착한 헤
라클레스는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새들을 향해 화살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뛰어난 사수였던 헤라클레스의 화살은 매번 적중했다. 하지만 새들의 수가 
워낙 많아서 헤라클레스가 죽이는 속도보다 더  빨리 번식해갔다. 해질 무
렵이 되자 화살통은 비어버렸는데 새의 수는  아침보다 더 많아졌다. 너무
도 화가 난 헤라클레스는 자신의 청동 검으로 청동 방패를  힘껏 내려치며 
화풀이를 했다. 그러자 금속성의  충격이 천둥 소리처럼 울려퍼졌고,  놀란 
새들은 흥분과 동요로 빙빙 돌며 날기  시작했다. 이것을 본 헤라클레스에
게 좋은 꾀가 떠올랐다.  새들이 안심하고 다시 나무  위에 앉으려는 순간 
검으로 또 한 번 방패를 두드려대어 새들을 다시금 놀라게 한 것이다 이처
럼 자기의 무기를 한 짝의 심벌즈처럼 이용하여 새들을 밤새도록  날게 했
다. 새벽이 되자 계속된 비상으로 녹초가 된  새들은 한 마리씩 차례로 스
팀팔로스의 호수에 빠져 익사했다.
 
    크레타의 황소 
  에우리스테우스가 헤라클레스에게 부과한 네번째 일은 크레타의  황소를 
찾아 산 채로 잡아오는 것이었다. 이 황소에 대해서는 이미 말 한 적이 있
는데, 크레타의 왕비 파시파에가 사랑에 빠졌던 바로 그 황소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서 나온 괴물 같은 아이가 미노타우로스였다. 미노타우로스는 얼
마 전에 테세우스의 손에 죽음을 당했다. 하지만 미노타우로스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크레타의  황소는 아직 살아 있었다.  황소를 죽이는 것이라면 
비교적 쉬운 일이지만, 산채로 잡아오는 일은 또 다른 문제였다. 철퇴와 활
을 두르고, 사자 가죽을 뒤집어쓴 헤라클레스는 황소가 풀을 뜯고 있던 넓
은 울타리 안으로 침입했다. 머리를 들어 침입자를 알아본 황소는 성을 내
며 편자 발굽으로 땅을 긁어댔고 콧김을 뿜어대며 숨을 몰아 쉬었다. 헤라
클레스는 이처럼 위협적인 태도를 보이면서도 미동도 않고 있는 황소를 향
해 한 발짝 두 발짝 다가섰다. 헤라클레스가  겨우 열 걸음 정도의 거리를 
두고 다가섰을 때 맹수는 갑자기 공격을  시작했다. 좀더 민첩하게 움직이
기 위해 헤라클레스는 거동을 불편하게 하던 사자 가죽을 벗어버리기로 했
다. 그래서 아주 빠른 동작으로 어깨 위의 가죽을 벗어 멀찌감치 던져버리
려고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황소가 묵직한 자신의  몸을 옮겨 간 곳은 헤
라클레스 쪽이 아니라 사자  가죽 쪽이었다. 아주  우연히도 헤라클레스는 
투우의 기술을 발견해낸 참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사자  가죽을 휘장처럼 
이용해서 황소를 흥분시켰고 육중한  몸을 이리저리 옮겨다니게  했다. 한 
번, 두 번, 열 번, 스무 번, 성난  황소는 헛되이 공격을 해댔다. 황소의 뿔
은 펄럭이는 휘장의 주름만  들이박고 있었다. 헤라클레스의  왼손이 백번 
째의 멋진 휘장술을 발휘하자 지쳐빠진 황소가  마침내 무릎을 꿇었다. 헤
라클레스는 황소의 다리를 묶어 어깨에 매고 에우리스테우스의  궁으로 돌
아왔다. 그 모습을 본 왕은 깜짝 놀라 침대 밑으로 들어가 숨어 버렸다. 

    황금뿔사슴과 에리만토스 산의 멧돼지 
  황소를 잡아다 준 헤라클레스에게 에우리스테우스는 말했다. 
  "동물을 산 채로 잡는 일을 그토록 잘해내니, 2마리의 다른 동물도 잡아 
왔으면 좋겠다. 뭐냐 하면, 세리네 숲에 있는 황금뿔  사슴하고 에리만토스 
산에 있는 멧돼지다. 인심 써서 이 일은 2가지로 쳐주도록 하지." 
황금뿔 사슴은 특별히 위험한 동물은  아니었지만 상당히 빨리 그리고  왜 
오랫동안 달릴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사슴을 지치게 하여 
잡아들이는 데 거의 1년이  걸렸다. 멧돼지 잡는  일에도 그만큼의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기에 헤라클레스는 다른 방법을  쓰기로 했다. 멧돼지를 자
꾸만 높은 곳으로 몰아가서는 에시만토스산 정상의 급경사로 유인했다. 산 
정상에는 두텁지만 부드러운 눈이 덮여 있었다.  멧돼지는 눈 속으로 파고
들어 갔지만 곧 지쳐버렸다. 그래서 쉽사리 헤라클레스의 손아귀에 들어오
게 되었다 

    게리온의 양떼 
  탐욕스러운 에우리스테우스는 이번에는 헤라클레스에게 게리온의 양떼를 
가져오라고 했다. 게리온은 몸이 3개인 거인으로 스페인의 남쪽에 살고 있
었다. 일의 첫 단계인 게리온의 제거는 재빨리 이루어졌다.  하지만 어려운 
문제는 양떼의 운반이었다 육로로  가려면 카딕스에서 메케네까지는  주로 
산악 지대로 이루어진 엄청난 거리였다. 수로를 이용하자니, 당시에는 대서
양에 연결되어 있지 않았던  지중해에 접근하는 일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런 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헤라클레스는 철퇴 한 방으로 지중해를 닫
고 있던 지협을 부숴버리고  지브롤터 해협을 개설했다.  그래서 지브롤터 
해협과 세우타의 여기저기에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헤라클레스의 기둥들' 
이 세워져 있다 

    헤라클레스의 여덟번째 과업 
  다음에 이어질 일을 공식 명칭인 '디오메데즈의 암말들' 이라고 하지 않
고 '헤라클레스의 여덟번째 과업' ('베토벤의 제  8번 교향곡' 처럼)이라고 
정한 까닭은, 원래 이 일의 목표였던 4마리 식인  말의 포획이 그 일에 뒤
따라 덧붙여진 사건에 비해 별 중요성이  없어보였기 때문이다. 문제의 그 
4마리 말은 디오메데스 왕의 소유였다. 그는 말들에게 인간의 살덩이를 먹
여 기르는 패륜적인 습관이 있었다. 그래서  말에게 일용할 양식을 먹여대
느라 자기 영토를 지나는 행인들을 희생자로  삼았던 것이다. 이러한 일에 
반감을 갖고 있던 에우리스테우스는  헤라클레스에게 이 일을  막아달라고 
했다. 일은 즉시 처리되었다. 헤라클레스는 디오메데스를 사로잡아 자기 말
의 먹이가 되게 했다. 한데,  디오메데스의 살이 너무 질겨서 말들은  고기 
맛을 완전히 잃어버렸고 이후로는  채식 동물이 되었다고  한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이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헤라클레스는 그의 전력  중 가
장 인상적이면서 그의 성격을 잘 드러내주는 수훈을 세우게 된다. 

    남편의 죽음을 대신한 알케스티스 
  헤라클레스에게는 아드메테라는 친구가  있었다, 그는  젊고 부자인데다 
잘생겼으며 알케스티스라는 매력적인 아내를 갖고  있었다. 언젠가 아폴론
을 도와준 일로 그는 아폴론 신의 특별한 보호와 은덕까지 누리고 있었다. 
한마디로 아드메테는 '행복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진'셈이었고, 실제로 그
는 행복했다. 어느 날  몸이 좀 불편해서 의사를  찾아갔다가 앞으로 얼마 
살지 못할 거라는 얘기를 듣게 되기 전까지는 불행이라곤 몰랐다. '스물다
섯의 나이로 죽을 수는 없다'고 생각 한 아드메테는 아폴론을 찾아가 어떻
게든 해줄 것을 부탁했다. 
  "누군가 대신 죽어주지 않는 한 네 생명을 구할 수는 없다." 
하고 아폴론은 대답했다. 
  "그건 쉬운 일이에요, 수많은 하인들 중 자원자를 곧 찾아낼 수 있을 테
니까요." 
그러나 하인들은 하나같이 거절했다. 친구들도 더 이상 협조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칠십이 넘은 자신의 부모를 생각해냈다. 그들은 여러 가지 노
쇠 현상으로 고통받고 있던데다, 그들 나이쯤 되면 정말이지 더 살 가치가 
없다는 말을 되뇌곤 했던  것이다. 아드메테는 아버지나  어머니가 아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비참한 자신들의 삶을 마감할 좋은 기회를  놓치려 하
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두 사람 모두 단호한 거부 의
사를 밝혔다. 
  "늙은이에게도 햇빛은 따사롭단다" 
라고 말하면서 거절의 이유를 합리화했다. 아드메테는  헤아릴 수 없을 만
큼 뿌리 깊은 인간의 이기심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자 스물세 
살 난 아내 알케스티스가 다가와  남편을 위해 자신이 희생하겠노라고  했
다. 좀전까지 부모의 이기심을 통렬히 비난하던 아드메테는 그러한 이기심
을 입증하듯, 주저 없이 아내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며칠 후 병이  다 나은 
아드메테는 죽어가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백 살까지 살더라도(그는 정말로 그렇게 믿었다)  당신이 나를 위해 한 
일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며,  맹세컨대 다른 여자에게는 손길 한번,  눈길 
한번 주지 않으리다." 
알케스티스는 애정과 의혹이 섞인 표정으로 남편을 바라보며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아드메테가 이끄는 장례 행렬이 막 집을 떠나려 할 때, 디오메데
스의 일을 처리하고 돌아가던 헤라클레스가 그곳을 지나치게 되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른 채 친구 집에서 며칠 묵어  갈 생각을 했다. 아드메테는 손
님 접대에 남달리 각별했고 아주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을 쓰는  섬세한 면
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만일 헤라클레스가 모든 사실을 알게 되면 좋지 
않은 시기에 찾아왔다고 생각하고는 자기 집에 머무르려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무슨 장례식이냐고 묻는  헤라클레스에게 아드메테는 외
부 사람 하나가 집안에서 죽었노라고만 회피하듯 대답해 버렸다. 그리고는.  
  "오늘 저녁이면 돌아올 테니 자네 집처럼  편하게 몸을 풀면서 기다리게
나." 
하고 헤라클레스에게 말했다.  헤라클레스는 섬세함이나  예민함 따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아드메테의 초대를 말 그대로 받아들이고는, 집안으
로 들어가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마실  것을 가져오라고 했다. 몇 잔
의 술을 마시자 즐거운 기분이 되어 하인들과 농담을 하고  하녀들을 희롱
하더니 상스러운 노래를 목청껏  불러대기 시작했다. 그런데  하인 하나가 
죄지은 표정으로 서 있는 모습을 보자 화도 나고 조금  불쾌해지기도 해서 
헤라클레스는 그를 거세게 몰아붙이며 야단쳤다. 
  "왜 그렇게 죽을상을 하고 있냐! 누가 보면 네 어머니가 돌아가신 줄 알
겠다." 
  "우리 안주인님은 제게는 어머니나 다름없는 분이셨어요." 
  "안주인이라고? 난 외부인이 죽은 줄 알았는데?" 
놀란 헤라클레스가 반문했다. 갑자기 술이 깬 헤라클레스는 아드메테가 섬
세한 마음 때문에 자기에게 거짓말을 했는데 자신은 비열한 놈처럼 굴었다
는 걸 깨달았다. 부끄러움과  후회에 사로잡힌 헤라클레스는  늘 그렇듯이 
충동적이고 광적인, 그러나 관대한 해결책 하나를 찾아냈다. 
"내가 황천에 가서 알케스티스를 데려와야겠다."
 
    황천에 간 헤라클레스 
  헤라클레스는 제우스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더욱이 그는 
이미 신들과 인간 곁에서 지대한 존경을 받고  있었다. 띠러한 두 가지 특
별한 상황으로 그는 온갖 규칙을  위반해가면서 죽은 자들의 왕국에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하데스와 페르세포네는 그와 잘 알고 지내고 싶어 몸이 
달았기에 그를 환대하면서 무슨 일을 도와줄까를 물었다. 
  "알케스티스를 되살려주시오." 
그의 부탁은 받아들여졌다. 단, 알케스티스는 베일을 쓰고 나가야 하며 3일 
간 아무에게도 얼굴을 보이지  말아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황천문을 
나서던 헤라클레스는 그곳에서 놀랍게도 망각의 의자에 앉아  있는 테세우
스를 발견했다. 
  "거기서 뭐 하는 거냐?" 
하고 헤라클레스가 묻자, 
  "모르겠어 ." 
라며 모든 걸 다 잊어버린 테세우스가  대답했다. 의심에 사로잡힌 헤라클
레스가 
  "너 테세우스 맞지?" 
라고 다시 묻자 그는 공허한 목소리와 멍한 시선으로 같은  말만 되풀이했
다. 
  "모르겠어." 
헤라클레스는 하데스를 다시 찾아가 설명을 요구했고 알케스티스에 뒤이어 
테세우스의 사면도 얻어냈다. 그리하여 얼마 후 헤라클레스는 두 동반자와 
더불어 지상의 햇빛을 되찾을 수 있었다.  즐거운 기분으로 아드메테의 집
에 돌아온 헤라클레스는 친구의 지  나친 예의를 꾸짖어줄 마음으로  그를 
좀 골려주기로 했다. 그는 아주 맛있게 저녁을 먹고 있는 아드메테를 보았
다. 친구의 거짓말을 다정스럽게 꾸짖은 후에 그는 말했다. 
  "방금 만난 아주 예쁜 여자 하나를 데려왔어." 
바로 몇 시간 전에 자기 입으로 정절을 맹세했던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 
걸 보면 아드메테도 망각의 의자에 잠시  실수로 앉았는지도 모른다. 아드
메테는 알케스티스를 쳐다봤지만 베일에  쌓여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젊은 자태는 베일 아래서도 돋보였다. 
  "이 조촐한 식사를 당신과 함께 할 수 있는 영광을 내게 주시오." 
라고 아드메테는 말했다. 

    안티오페의 혁대 
  헤라클레스는 테세우스와 함께 에우리tm테우스의 집으로 돌아와 새로운 
지시를 받았다. 
  "다음 임무는 아마존의 여왕인 안티오페의 혁대를 빼앗아  내 딸에게 선
물하는 일이다." 
아마존족은 오로지 여자들로만 구성된 종족으로 과격하고 호전적인 풍습을 
가지고 있었다. 종족 보존을  위해 그녀들은 매년 한  차례씩 이웃 종족을 
토벌하여 그곳의 여자들은 학살하고 남아들을 강간하곤 했다. 열달  후, 그 
짧은 관계의 결실로 아이들이 태어나면 사내아이는 모조리  익사시키고 여
자아이들만을 길렀다. 이 거친 여자 무사들은 왼쪽 가슴만을 가릴 수 있는 
짧은 웃옷을 입고 있었는데, 이 특별한 복장은 그녀들이 오른쪽 가슴이 없
다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활 쏘는 데 편하게 하기 위해 열세 살이 되면 오
른쪽 가슴을 도려내기 때문이다. 그들의 여왕인 안티오페는 자신의 지위를 
드러내기 위해 넓은 황금 혁대를 차고 다녔고 거기에 칼을 매달고 있었다. 
바로 이 혁대를 헤라클레스가 가져와야 했다. 테세우스가 헤라클레스를 따
라가겠다고 고집했기 때문에 두 영웅은 함께  길을 떠났다. 그들이 아마존
에 도착했을 때는 그녀들이 연례적인  신혼 여행을 계획하고 있던  참이었
다. 헤라클레스의 멋진 근육과 테세우스의  단아한 남성미는 안티오페에게 
신선한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저런 종류의 남자들이야.' 
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리하여 협상이 시작되었고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조약이 체결되었다. 헤라클레스는 50명의 아마존  여자들과 연달아 잠자리
를 해야 하고, 테세우스는 오로지 안티오페에게만 봉사를 해야 한다. 그 대
가로 헤라클레스에게는 안티오페의  혁대를 주고,  테세우스에게는 그들의 
관계로 태어난 아이가 남자일 경우, 산 채로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안
티오페는 헤라클레스가 계약을 완수하려면 적어도 한두 달은  걸릴 것이므
로 그 동안만큼은 자신이 테세우스를 마음껏 이용할 수 있으리라고 짐작했
다. 하지만 그것은 헤라클레스가  제우스의 아들이며 비범한  성적 능력을 
가졌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은 계산이었다. 단  하룻밤에 그는 아주 가볍
게 50명의 여자를 상대했고, 다음날 아침  장미처럼 싱싱한 몸으로 혁대를 
찾아가지고 여왕에게 작별을 고했던 것이다. 몇  달 후 안티오페는 아들을 
낳아 히폴리토스라는 이름을 붙여주게 되는데, 그에  대한 얘기는 곧 다루
어질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두 영웅은 서로 헤어져,  테세우스는 아테네로 
헤라클레스는 에우리스테우스 에게로 향했다. 

    레르네의 히드라 
  헤라클레스의 열번째 임무는 레르네의 히드라라는 흉칙한 괴물을 죽이는 
것이었다. 이 괴물은 머리가 여럿 달린 뱀이었는데, 그 머리는 잘라내는 즉
시 다시 솟아나곤 했다. 이 전설적인  동물은 3천여년 전부터 오늘에 이르
기까지 신화 연구자들에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히드라가 
여러 개의 머리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고대의 모든 작가들이  일치하고 
있지만, 그 정확한 숫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이들은  3개라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5개라 하고 때로는 6개 혹은 9개라고 주장한다. 오
비디우스는 "백 개의 머리"라고  쓰기도 했고 에우리피데스는  "머리가 천 
개 달린 괴물"이라고까지 했다. 하지만 이  두 작가의 경우는 단순히 수사
적인 문체 때문에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이렇듯  다양한 수치들 앞에서 
성급한 작가는 온건하게 평균치를 택하기로 작정하고는 레르네의 히드라가 
6.4개의 머리를 가졌다고 말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렇게 쉽게 
타협을 볼 수는 없었고, 고대의 작가들 중에서 누구 말이 옳은지를 알아보
려고 했다. 연구 결과 나는 그들 '모두 다' 옳다는 확신에 다다랐다. 이 혼
란스러운 신비에 대한 열쇠는 히드라의 머리가 재생되는 과정에 관해 몇몇 
신화학자들 이 제시한 자세한 설명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들의 설명에 따
르면 히드라의 머리가 하나 잘려질 때마다 2개의 머리가 다시 자란다는 것
이다. 그렇다면 모든 게 설명이 되지 않는가! 헤라클레스가 레르네에  당도
하여 처음으로 히드라를 봤을 때는 머리가 단지 3개뿐이었다. 하지만 칼로 
머리 하나를 베어내자 2개가 다시 자라 나와  모두 4개가 되었다. 다시 또 
하나를 자르자 5개가 되고, 이런 식으로 9개까지 계속 되었다. 머리 회전이 
둔한 헤라클레스였으므로 산술급수의 법칙 따위를 알 리 없었지만서도, 그
런 식으로 해서는 끝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리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대개의 신화학자들은 헤라클레스가 자기 조카였던 이올라오스의 도움을 받
아 다음과 같은 방법을 택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헤라클레스가 머리를 
잘라낼 때마다 조카가 지푸라기나 깜부기의 불씨를 이용해서  머리가 잘려 
나가 피가 흐르는 부위를 불로 지졌다는 것이다  한데, 내가 보기에 이 얘
기는 거의 설득력이 없다. 철에도 버터내던 히드라의 피부가 왜 불에는 견
뎌내지 못하겠는가? 그러니 이번만큼은 전통에서 빗겨나서 내 나름대로 이
야기를 한번 해보려 하니. 독자들의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내 생각엔 헤라
클레스가 테세우스에게 찾아가 조언을 구했고,  테세우스는 상호성의 산술 
원리에 근거한 추론 끝에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렀던 것 같다.  즉, 히드
라의 머리 하나가 잘려 나갈 대마다  2개의 머리가 자란다면, 반대로 머리 
하나를 더 붙여주면 2개를 잃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헤라클레스에
게 시험 삼아 히드라의 몸에 양의 머리 하나를 붙여보라고 충고했다. 그러
자 테세우스가 예상했던 대로, 필시 생물학적인  거부 반응의 과정에서 일
어난 일인 듯한데, 접합이 이루어지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접합이 염
증을 일으켜 기존의 머리들마저  떨어져 나가게 했다.  이러한 접합을 9번 
연달아 함으로써 헤라클레스는 히드라의 머리를 모두 제거했고, 그로 인해 
히드라는 죽어버렸다. 그리고 헤라클레스는 자기  화살통에 있던 화살들을 
꺼내어 괴물의 몸에서 솟구쳐 나온 김이 나는 검은 피를 적셔 독화살로 만
들었다. 헤라클레스는 즐거운 기분으로 에우리스테우스에게 돌아왔다. 그들 
이 맨 처음 만났을 때, 에우리스테우스는  헤라클레스에게 10가지의 일 을 
맡기겠다고 했었고 레르네의 히드라는 바로 그 열번째의 임무였다. 하지만 
에우리스테우스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헤라 클레스의 봉
사에 맛이 들어 그걸 좀더 이용하고자 했다 

    헤드페리데스 정원의 황금 사과 
  히드라의 시체를 에우리스테우스에게 내려놓으면서 헤라클레스는 자신의 
10가지 임무가 끝났음을 알렸다. 그러나 에우리스테우스는, 
  "천만의 말씀! 네가 한 10가지 일 중 2가지는 셈에 넣을 수 없다. 왜냐하
면, 아우게아스의 외양간을 청소하고는  내 허락도 없이  3백 마리의 소를 
보수로 받았고, 안티오페의 혁대를 찾는 일은 테세우스와 함께  했으니, 그 
둘은 빼야겠다. 그러니 아직 2가지 일이 더 남았어." 
라고 말했다. 놀랍게도 헤라클레스는 아무런  항의도 없이 에우리스테우스
가 제시하는 열한번째 일을 받아들였다.  그것은 헤스페리데스가의 정원에 
있는 황금 사과 광주리를 가져오는 일이었다.  이 전설적인 과일에 대해서
는 그다지 알려진 게  없다. 그걸 봤다고 주장하던  몇몇 여행자들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사과 모양의 황금빛 과일로  달콤한 과즙이 가득하다고 했
다. 사실 그것은 오렌지였을 뿐인 데, 당시만 해도 그리스에는 재배법이 널
리 퍼져 있지 않았다. 그 과일을 딸 수 있는 넓은 과수원은 무시무시한 용
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이 용들은 제우스에 의해 두 어깨로 하늘의 궁륭을 
영원히 지고 있도록 벌을 받았던 티탄족인 아틀라스의 딸들이 소유하고 있
었다. 과수원 주인인 그 딸들은 헤스페리데스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그
러나 그 과수원이 세상 어디쯤에 위치해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헤라클
레스는 우선 그곳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내야  했다. 어느 시대에나 그렇
듯이, 당시에도 곳곳의 주소를 잘 꿰어차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네레우
스라는 바닷사람이 바로 그런  인물 중의 하나였는데,  그는 때로 '바다의 
노인'으로 불려지기도 했다. 불행히도 그는 몹시도 비사교적인 성격이어서 
뭔가를 물으러 누가 찾아와도  만나길 꺼려했다. 그런  사람들을 피하려고 
그는 괴물이나 무서운 동물 혹은 불 따위로 변신하곤 했다. 그렇지만 헤라
클레스는 헤스페리데스 정원의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 그를  만나기로 작정
했다. 헤라클레스가 다가오는 모습을 본 네레우스는 처음에는 사자,  그 다
음엔 황소 마지막엔 거인으로 변신했다. 헤라클레스가 이런 모습들을 두려
워할 인물이 아님은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그러자 네레우스는 불기둥으로 
몸을 바꾸었다. 그러자 헤라클레스는, 
  "내가 어떻게 불을 끄는지 보여주마." 
라고 말하고는 네레우스를 급류 속에  빠뜨려버렸다. 헤라클레스가 어떻게 
급류를 이용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독자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다. 
어쨌든 승복한 네레우스는 헤스페리데스의 정원이 모로코의 서쪽 끝, 아틀
라스가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바로 그곳에 있다는 걸  혜라클레스에게 가
르쳐주었다. 그리하여 헤라클레스는  아틀라스에게 찾아가  자신이 찾아온 
목적을 설명했다. 
  "내 딸들의 정원이 어디 있는지는 쾌히  알려주겠네만, 별 도움은 안 될 
걸세." 
라고 아틀라스는 친절하게 말하면서, 
  "정원을 지키는 용들은 누구도 손댈 수 없는데다, 자네를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할 테니 말야. 그 용들은 나와 내 딸들의 말만 듣는다네. 하지만 원
한다면 내가 대신 황금 사과를 가지러  갈 수는 있지. 단, 자네가  내 대신 
며칠간 이 궁륭을 떠받치고 있어야 하네. 그렇게 해준다면 덕분에 나도 오
랫동안 못 보고 지낸 딸들을 만날 수 있으니 좋지." 
헤라클레스는 의심 없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헤라클레스에게 짐
을 떠넘기자마자 아틀라스는 자기의 꾀를 드러냈다. 
  "수고하게나! 이제 영원히 자네에게 내 자리를 넘겨주겠네. 내 가끔씩 오
렌지나 가져다 주지." 
아틀라스는 빈정거리며 말하고는 딸들에게로 떠나가버렸다. 낙담한 헤라클
레스는 그의 친척 테세우스에게 다시금 구원을  청했다. 당장 달려온 테세
우스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를 대번에 알아차렸다. 
  "어떻게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지 알려주지." 
주위의 누군가가 듣지 않을까  걱정한 테세우스는 헤라클레스에게  다가가 
귀에 대고 무슨 말인가를 소곤거렸다. 그러자 헤라클레스는 대답했다. 
  "음, 잘 알았어." 
며칠 후 아틀라스가 헤라클레스를 찾아왔다. 그는  황금 사과를 비롯한 약
간의 음식을 담은 식량 바구니를 가지고 왔다. 착한 마음 때문에서가 아니
라, 헤라클레스가 굶어  죽어 혹시나 하늘을  떨어뜨리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 온 것이다. 
  "별일 없지?" 
고 아틀라스가 묻자 헤라클레스는 테세우스가 가르쳐준 대로 했다. 
  "네, 한데 목이 조금씩  아파오네요. 어깨에 작은 쿠션을  좀 대야겠으니 
그 동안 잠깐만 대신 해줄래요?" 
라는 말에, 헤라클레스보다도 더 어리숙한 아틀라스는 
  "그러구 말구." 
라고 말하고는 짐을 다시 맡았다. 짐에서 벗어나자마자 헤라클레스는 줄행
랑을 쳤다. 물론 귀한 황금 사과도 챙겨가지고... 

    케르베로스 
  에우리스테우스는 자신의 동물원을 몹시 자랑스러워했다.  이미 그 동물
원은 헤라클레스 덕분에 꽤나 훌릉해졌다. 크레타의 황소, 황금뿔 사슴, 에
리만테스 산의 멧돼지, 디오메데스의 암말 등등. 한데 그는 오랜 전부터 케
르베로스라는 특이한 개를 자기 동물원에 포함시키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 
개를 가져오는 일을 헤라클레스의 열두번째  임무로 내렸다. 케르베로스는 
황천문을 지키는 거대하고 사나운 개였다. 그 개는 모든 사람을 황천문 안
으로 들어가게 하고는 누구도 빠져 나가지 못하게 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
다. 그 개는 서로 다르게 짖어대는 3개의 머리를 가지고 있다. 황천을 찾아
가는 일이 어렵지는 않았다. 이미 한 번  갔었기 때문에 길을 잘 아는데다
가 삼촌인 하데스와도 좋은  관계를 터놨기 때문이었다.  그는 하데스에게 
자신의 이번 방문 목적을 설명했다. 
  "정말이지 아무 걱정 말아라." 
라고 대답하며 하데스는 기분 좋게 웃기까지 했는데, 이렇게 웃는 일은 그
로서는 참으로 드문 일이었다. 
  "케르베로스를 사로잡아 가겠다는 건 허락하겠다만, 철퇴나 다른 무기는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케르베로스를 맨손으로 공격한다는 건 제아무리 헤라클레스일지라도  생각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시금 그는 테세우스에게 도움을  청했다. 테세우스
는 황천에 얼마간 머물렀기 때문에 그 개를 잘 알고 있었다. 
  "케르베로스는 머리가 3개고 짓는 방법도 3가지니까 그 개를 길들이려면 
연달아 3가지 목소리를 사용해야 해.  명령할 때는 조용한 소리로,  야단칠 
때는 큰소리로, 달래줄 때는 부드러운 소리를 내야 하지." 
그 이래 개를 다루는 모든 사육사들은 이 방식을 따르게 된다. 헤라클레스
는 조심스럽게 테세우스가 일러준 대로 했고 케르베로스는  유순하게 그를 
따랐다. 그런데 헤라클레스의 꽁무니를 쫓아 방으로 들어 온 머리 셋 달린 
무시무시한 케그베로스를 보자 에우리스테우스는 질겁을 하며 개를 황천으
로 다시 데려가라고 애원했다. 그리고 다시는 혜라클레스에게 일을 시키지 
않겠노라고 약속했다. 그리하여 헤라클레스의 12가지  과업은 끝나게 되었
다. 

    5. 테세우스의 위대함과 몰락 
    아테네 민주주의의 실현 
  헤라클레스를 도와 아마존의 여왕 안티오페의 혁대를 빼앗아  온 테세우
스는 모험에 싫증이 나기도 했고 분별이  생기기도 해서, 아테네로 돌아와 
부왕이 죽고 난 뒤를 이어 아테네의 왕이  되었다. 고대의 모든 그리스 국
가들처럼 당시의 아테네도 절대 군주  국가로서 모든 권력이 왕에게  속해 
있었다. 테세우스는 그러한 정부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기로 했다.  그는 
아테네인들에게 절대권을 주겠다는 발표를 했다.  이제부터는 국민 스스로 
집회를 열어 법을 만들고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 집행자를 정하도록 했다. 
모든 시민은 법 안에서 자유롭고 평등해지는 것이다. 그들은 이제 법의 권
위에만 복종하면 되었다. 테세우스는 왕의 직분을 포기하고 다른 사람들처
럼 일개 시민이 되었다. 단지 그는 국민이 원한다면 군대의 명령권만은 갖
고 있기로 했다. 테세우스의 제안은 국민들에게 받아들여졌고, 아테네는 로
마보다 몇 세기 앞서,  미국보다는 수천 년이나 앞서  역사상 최초의 민주 
국가가 되었다. 곧 이어 아테네는 모든  그리스인들에게 정의와 자유의 표
본이 되었다. 그래서 이웃나라의 추방자와 망명자들이 종종 피난처를 찾아 
아테네로 오곤 했다. 어느 날, 그러한 정치 망명객 하나가 단 몇 시간만 머
물게 해달라며 겸손하게 테세우스의 집을 찾아왔다.  그는 아직 젊은 사람
이었는데, 눈이 먼데다 얼굴에는 고통의 흔적이  드리워 있었고 그를 닮은 
두 처녀의 부축과 안내를 받고 있었다. 테세우스는 몸에 밴 관대함으로 그
를 맞아들였고 식사에 초대했다. 식사를 마친  후에 테세우스는 그 이방인
에게 어디에서 왔으며 어떠한 불행과 사건들이 나라를 떠나 이곳까지 오게 
했는가를 정중하게 물어보았다. 

    오이디푸스의 이야기 
  이방인은 쉽사리 얘기를 꺼내려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비극적인 삶
에 대한 기나긴 이야기가  주인을 괴롭힐까 염려스럽다고  말했다. 하지만 
테세우스의 강요에 못 이겨 마침내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 이름은 오이디푸스입니다. 나와 함께 동반하여 내 고통을 덜어 주느
라 온 힘을  다하고 있는 이  두 젊은  여자는 안티고네와 이스메네  랍니 
다." 
  "그녀들은 당신과 닮았소. 당신 누이인가요, 딸들인가요?" 
테세우스가 말을 막으며 물었다. 오이디푸스는 생각에 잠겨 테세우스의 질
문을 못 들은 양 대답 없이 자기 얘기를  계속해 나갔다. 내 가장 오랜 기
억은 내 나이 일곱살  때 일이지요. 나는 코린토스  왕궁의 크고 아름다운 
방에서 살고 있었어요. 잠에서  깨면 시녀가, 아시다시피 왕가의  아이들은 
시녀들이 돌봐주지요, 부모님들이 식당에서 기다린다고 말해주곤  했죠. 아
버지는 코린토스의 왕 폴리보스였고 어머니는  메로페 왕비였어요. 그들은 
날 맞으며 생일 선물을 주었어요. 그리고는 짐짓 위엄 있는 목소리로 아버
지가 내게 말했지요. 
  "넌 내 외아들 오이디푸스이다. 그러니까  넌 언젠가 코린토스의 왕위를 
계승할 거다. 이제 철들 나이가 되었으니  앞날의 과업들을 준비하기 시작
해야 한다." 
그날 이후 제게는 가정교사 한 명이 모셔졌어요. 그리고 저는 공부와 신체 
단련과 놀이로 시간을 쪼개 쓰게 되었지요.  이렇게 10년이란 세월이 흘렀
는데, 그때가 아마도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던 것 같아요. 열
일곱 살이 되자 아버지는 저의  교육을 충실히 하겠다는 생각으로  가까운 
나라들을 몇 달 간 여행할 것을 권했지요.  바로 그 여행 초반부에 유명한 
델포이의 신탁에게 찾아가 내 운명을 알아봐야겠다는 불길한  생각이 떠올
랐어요. 테세우스 당신도 아시다시피, 그 아폴론의 무녀는 모든  인간의 미
래를 알고 있어 누구에게 나 가르쳐주긴 하는데 대개는 아주  애매하고 모
호한 방식으로 말해주곤 한다잖아요. 한데 내 경우에는 그 대답이 더할 수 
없이 분명한 것이었어요. 그녀가 점친 내 운명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
와 결혼하게 될 것' 이라는 거였어요. 난 한번도 신탁이나 점 따위를 크게 
믿지는 않았지만서도 그 같은 예언에 마음이 혼란스러워졌고  그것이 실현
되는 걸 피하려는 생각에서 코린토스 왕국과 부모로부터  영원히 멀어져야 
겠다고 그 즉시 결정했어요.  나는 몹시 언짢은 기분으로  정처 없이 그저 
동쪽을 향해 걸어갔어요. 며칠 후 내게 닥친  중대한 사고는 바로 그런 좋
지 않은 기분 상태 때문이었을 거예요. 좁다란 산길을 따라 고개를 넘어가
고 있었는데 반대 방향에서 말을 탄  다섯 남자들이 제 쪽으로 달려  오는 
게 보였어요.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 하나가  거친 목소리로 길을 비키라
고 소리를 질렀어요. 거절하자 칼을 뽑아들고는 날 치려 했지요. 하지만 내 
칼이 좀더 빨랐고 그는 그 자리에서  죽어버렸죠. 그러자 다른 4명의 남자
가 즉시 말에서 내려 나를 공격했어요. 분노로  힘이 뻗친 저는 세 남자를 
한꺼번에 죽여버렸어요. 그러는 사이 네번째 남자가 도망쳤어요. 난 그것이 
정당방위라고 생각했기에 아무 후회도 없이 다시  길을 떠났지요. 몇 달후 
저는 테베의 왕국에 들어서게 되었어요. 그 나라는 온통 비탄에 잠겨 있었
는데 주민들을 통해 곧 그 이유를 알게 되었지요. 몸은 암사자인데 여자의 
얼굴과 가슴을 하고 어깨에 2개의 작은 날개가 달린 이상한 괴물이  그 나
라를 공포로 뒤덮고 있었던 거예요. 그 괴물의 이름은  스핑크스였는데, 테
베의 입구에 있는 바위 옆에 웅크리고 앉아 그곳을 지나는 모든 이에게 수
수께끼를 내고 있었어요. "수수께끼를 하나 낼 터인데, 답을 맞추면 지나가
게 하고 못 맞추면 목숨을 앗아갈 것"이라고 말하면서요. 여행자들은 이런
저런 답을 말했지만 그 어느 것도  정답은 아니었어요. 그러자 스핑크스는 
그들 모두를 잡아먹었던 거예요. 그 이후 누구도 감히  테베를 방문하지도, 
테베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게 되었고 나라의 삶이  완전히 마비되어버렸지
요. 당시의 제가 처해 있던 열악한 상황으로  보아 저로서는 별로 잃을 게 
없다 판단이 섰고, 그래서 스핑크스를 대면해보기로 작정했지요. 그는 나를 
자기 앞에 앉게 하고는 다음과 같은 수수께끼를 냈어요. 
  "아침엔 네 발로 걷고,  점심때는 두 발로 걷고  저녁이면 세 발로 걷는 
동물이 무엇이지?" 
그리고는 평소의 자기 습관대로 3분 동안 흘러내리는 모래시계를 뒤집어놓
았어요. 제가 답을 찾는 데는 2분밖에 안 걸렸죠. 
  "그건 인간이다. 인간은 아기 때는  네 발로 기고, 어른이 되면  두 발로 
서게 되며, 늙으면 지팡이에 의지해 걷는다." 
나를 둘러싸고 있던 군중들은  박수를 터뜨렸지요. 화가  난데다 기만적인 
자기 성격을 드러내느라 스핑크스는 군중 중 누군가가 내게 답을 귀뜸해줬
을 거라며 두번째 질문을 하나 더 맞춰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두번째 수수
께끼는 
  "서로를 낳고 있는 두 자매는 누구인가?"
는 것이었고, 나는 "낮과 밤"이라는 답을  어렵지 않게 알아냈지요. 그렇게 
되자 스핑크스는 더 이상 저의 승리를 부인할 수 없었지요. 그는 자존심이 
상한 나머지 하늘로 날아가버리려고 앉아 있던 바위에 서 몸을  위로 날렸
어요. 하지만 작은 날개는 몸을 지탱하지  못했고 그는 땅으로 곤두박질치
면서 그 자리에서 죽어버렸어요.  스핑크스를 이겨낸 대가로  저는 테베의 
왕실에 인도되어 이오카스테 왕비를  만나게 되었어요. 그녀를  보는 순간 
아주 강한 호감이 느껴 졌는데, 그것은 단순한  호감 이상의 어떤 깊은 감
정이었어요. 삼십대 정도 되어보였던 그녀의  얼굴은 매우 아름다우면서도 
온화한 느낌을 갖게 했어요. 그녀는 자기 나라를 위해 큰일을 했다면서 저
를 저녁식사에 초대했어요. 식사를 하는 동안 제가 누구이며 왜 부모와 나
라를 떠나게 되었는가를 그녀에게 얘기해주었어요.  얘기를 듣더니 그녀는 
슬프게 웃으며 말했어요. 
  "신탁의 예언을 그렇게 중요하게 받아들이지  말았어야 해요. 그 아폴론
의 무녀는 상상력이 모자라서 늘 똑같은  얘기만 되풀이 하는군요. 그녀가 
당신에게 한 얘기는 20년 전 제게 한 얘기와 꼭 같아요. 제 얘기를 들어보
면 곧 그걸 수긍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면서 이오카스테 왕비는 자기 얘기를 시작했어요. 그녀는 아주 젊었을 
때 테베의 왕인 라이오스와 결혼했대요. 곧 이어 임신을 하게 되었고, 태어
날 아이의 앞날을 알아보기 위해 남편과 함께 델포이의 신탁을 찾아갔더래
요. 그러자 신탁은 "그 아이는 자기  아버지를 죽이고 자기 어머니와 결혼
할 것"이라는 말을 했대요. 그같은 예언에  놀란 라이오스 왕은 아이를 태
어나는 즉시 죽여버리기로 했고 하인을 시켜 근처 숲의 나무에  아이를 매
달아버렸다는 거예요. 
  "그러한 맹목적인 믿음 때문에 우리가 저지른 끔찍한  죄는 절대로 용서
받지 못할 거예요. 그 일로 심한 타격을 받은 제 남편 라이오스 왕은 번번
히 저를 저버리고는 긴 여행을 핑계로  밖으로 나돌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여행을 다니던 중 그는  도적 무리의 공격을 받아  죽고 말았어요. 과부가 
된데다 아이도 없이 저는 테베의 왕국을 다스려야 하는 막중한  일을 맡게 
되었지요." 
  이오카스테의 얘기에 감동되기도 했고 그녀의 청도 있고 해서 저는 테베
에 며칠을 더 머무르기로 했지요. 우리가 서로에 대해 느꼈던 호감은 금세 
강렬한 감정으로 바뀌었고 저는 이오카스테와 결흔하여 테베의  왕이 되었
답니다. 이렇게 15년의 세월이 흘렀고 우리는 그간  아들 둘에 딸 둘을 갖
게 되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저의 부친인 폴리보스 왕이 서거했다는 소식
을 들었어요. 그 소식은 신탁의 예언이 틀렸다는 확신을  갖게 해주었지요. 
그런데 몇 달 전, 온 나라에 갑자기  페스트 병이 확산되어 평화로운 시대
가 끝나고 말았어요. 의사들은 그 질병을 물리칠 수 없노라고 진단했고, 저
는 국민들의 요청으로, 비록 저  자신은 심한 회의를 가지고 있긴  했지만, 
델포이의 신탁을 찾아가 조언을 듣기로 결심했어요.  신탁은 옛 왕인 라이
오스를 죽인 자를 찾아내어 응징해야만 전염병이 사라질  거라고 대답했어
요. 그 말을 진짜로 믿지는 않았지만 테베 국민의 동요를 가라앉히기 위해 
저는 15년 전에 일어난 살인 사건에  대한 정황 조사를 다시 하기로  했어
요. 그리고 그 일을  유명한 점쟁이 테이레시아스에게 맡겼어요.  테세우스 
당신도 그 사람에 대해 들어본 적 있지요? 
  "테이레시아스를 누가 모르겠소?" 
테세우스를 비롯한 당시 그리스의 모든 사람들은 테이레시아스를  잘 알고 
있었지만 이 책의 일부 독자들은 그를 잘 모를지도 모른다. 그래서 여기서 
잠깐 오이디푸스의 얘기를 중단하고, 장님 점쟁이 테이레시아스에 대해 간
단히 언급하는 게 좋을 듯싶다. 

    테이레시아스 
  테이레시아스는 테베 사람으로 젊은  시절에 성전환이라는 아주  기이한 
경험을 했다. 독자 여러분은 그게 별로 대수로운 일이 아니며, 게다가 오늘
날에는 그러한 통성이 흔한 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렇기는 하지만, 
테이레시아스의 경우는 '두 번씩'이나 성전환을 했다는 데 그 기이함이 있
다. 남자로 태어난 그는 열여덟 살에 여자가 되어 9년 간 여자로 지내다가 
다시 남자로 성전환을 했다. 이러한 이중의 변신으로 인해 그는 테베 사람
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올림포스의 신들에게도  유명해졌다. 그래서 그는 
제우스와 헤라에 의해 분쟁의  심판관으로 선택되어 신들과  함께 지냈다. 
헤라는 수없이 되풀이되는 제우스의 외도를 질책했고 그럴  때마다 제우스
는 익살맞은 유머로 대꾸하곤 했다. 그는  남자들이나 신들이 사랑의 체험
을 다양하게 추구하는 이유는 남성들이 여성들보다 사랑의 즐거움을 덜 느
끼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헤라가 이러한 가설을 반박하고 나서자, 
제우스는 테이레시아스의 의견을 들어 논쟁을  종식시키자고 제안했다. 테
이레시아스는 2가지 성을 연달아  경험해봤으므로 객관적인 비교를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자문을 받은 테이레시아스는 제우스의 말이 옳
다고 판단을 내렸다. 화가 난 헤라는  즉시 테이레시아스를 장님으로 만들
어 응징했다. 테이레시아스의 시력을 되찾아줄 수는 없었기에 제우스는 특
별한 능력을 부여해주어 그를 위로하기로  했다. 테이레시아스는 예외적인 
심리적 통찰력과 더불어 불가사이한 일과 수수께끼를 풀어낼 수 있는 희귀
한 능력을 선사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당대의 셜록 홈즈나 에르퀼 프
와로 같은 인물이 되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테이레시아스는 필요한 모든 증인을 소환할 수 있다는  조건하에 수사를 
맡기로 했지요. 하지만 3주일이  지나도록 수사의 진척  상황을 전해 들을 
수가 없었어요. 놀란 저는 그를 왕궁으로  소환했지만 그는 나타나지도 않
았어요. 마침내 저는 화가 나서 직접 그를 찾아갔어요. 그는 거북한 태도로 
저를 맞이하면서 자기에게 맡겨진 임무를 면해 달라고 부탁하는 거였어요. 
저는 화를 벌컥 내고는 그의 무능함을  질책했어요. 그리고는 신탁이나 점
쟁이의 형편없는 복수보다 더 나을 게  없다고 말해줬어요. 그러자 자존심
이 상한 그가 소리쳤어요. 
  "그토록 진실을 알고자 한다면 당신이 어떤 대가를  치르든 상관하지 않
고 모든 진실을  말해주겠소. 1이간 후  궁으로 갈 테니  거기서 기다리시 
오." 
약속한 시간에 저는 이오카스테와 함께 왕실에서 테이레시아스를 맞이했어
요. 그는 저에게 첫번째  증인을 출두시킬 동안 벽걸이  뒤에 몸을 숨기고 
있어달라고 부탁했어요. 그 사람은 나이가 오십 정도 되어보였는데 얼굴에
는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어요 그가 자리에 앉자  테이레시자스는 이오카스
테에게 물었어요. 
  "이 사람을 알아보겠소?"
  "네. 그는 라이오스 왕의 마지막 여행에 함께  했던 4명의 수행자 중 하
나죠. 그 숙명적인 여행의 유일한 생존자이고, 라이오스 왕과  그 수행원들
이 어떻게 수많은 도둑떼들의 공격을 받아 목숨을 잃었는가를 내게 말해준 
바로 그 사람이에요." 
테이레시아스는 증인 쪽으로 몸을 돌려 물었다. "당시의 일들이 네가 말한 
그대로 벌어졌느냐?" 
그 남자는 고개를 떨구면서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요, 제가 거짓말을 했어요. 사실은 라이오스 왕과 3명의 수행자들은 
단 한 사람에게 죽었어요. 전 그들처럼 죽고  싶지 않아서 말을 타고 도망
쳤어요. 그리고 돌아와서는 저의 비겁함과 배신에  대한 비난이 두려워 떼
거리의 공격을 받았다고 말했던 거예요." 
  "그 이후 넌 무얼 하며 지냈느냐?" 
는 테이레시아스의 질문에 , 
  "외딴 마을에 은거하여 오늘날까지 테베의 땅에 발을  내딛지 않고 지냈
지요." 
  "지금도 넌 라이오스 왕을 죽인 자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겠느냐?"
  "그의 얼굴은 제 기억 속에 또렷이 새겨져 있어요." 
저는 테이레시아스가 부르기도 전에  벽걸이 뒤에서 나왔어요.  그 남자는 
잠시 날 쳐다보더니 소리쳤어요. 
  "저자예요?" 
이미 짐작하긴 했지만, 그러한  확언은 제 가슴을 짓눌렀답니다.  당황하는 
제 모습을 본 이오카스테가 저를 도와주려 했어요. 
  "자책할 것 없어요. 라이오스 왕이 먼저 당신을 자극했던 거예요. 게다가 
당신은 바로 오늘까지도 당신이 죽인 사람이 누구였는지 몰랐잖아요." 
그러자 테이레시아스가 말하길 
  "그가 아직 모르고 있는 게 또 있지요. 하지만 곧 모든 걸 알게 될 겁니 
다." 
그리고는 두번째 증인을 들어오게 했지요. 그는 왕실의 가장 오래 된 하인 
중 하나였는데, 30년  전 라이오스 왕으로부터  이오카스테가 낳은 아이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던 바로 그 하인이었어요. 테이레시아스는 그에게 말
했어요. 
  "라이오스 왕이 네게 맡긴 일을 어떻게  했는지, 어제 내게 고백했던 그
대로 되풀이해라." 
하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했어요. 
  "아이가 불쌍하긴 했지만 주인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었어요. 하지만 
전 마지막 순간에, 라이오스 왕이 아이를  숲속의 나무에 매달라고는 했지
만 몸의 어느 부분을 매달라고 정확히 지정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생각해
냈지요. 그래서 아이의 목을 매다는 대신 다리를 매달았어요.  그리고는 울
어대긴 했지만 여전히 살아 있는 아이를  그대로 버려두고 숲을 떠났어요. 
궁으로 돌아와서는 거짓 없이 임무를 완수했노 라고 말했지요." 
저와 이오카스테가 끼여들 틈도 주지 않고 테이레시아스는  세번째 증인을 
들어오게 했어요. 그 역시 꽤 나이 든  사람이었고 즉시 자기 얘기를 풀어
놓았어요. 
  "저는 코린토스의 양치기입니다. 30여  년 전 어느 핸가.  가뭄으로 저희 
나라의 풀밭이 온통 메말라서 이곳 테베 근처로 양들을 먹이러  나온 적이 
있었어요. 숲을 지나는 중이었는데 어디선가 갓난애 울음 소리가 들렸어요. 
다가가보니 어떤 애기가 나뭇가지에 다리가 묶인  채 울고 있었어요. 저는 
아이를 나무에서 풀어 돌봐주었고 양들의 젓을  먹여 키웠지요. 그리고 며
칠 후 그 애를 코린토스로 데려왔어요. 자손이 없던 폴리보스 왕과 메로페 
왕비는 제가 주워온 아이를 양자로 삼았고. 그들은 그 애가 발견되었을 당
시의 상황을 기억하기 위해 그의  이름을 오이디푸스 즉, '부풀어오른  발' 
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답니다." 
나는 두려움에 입을 다물어버렸어요. 그렇게 해서 델포이의 예언은 정확히 
실현된 것이죠. 내가 도망쳤던 폴리보스와 메로페는  내 진짜 부모가 아니
었던 거예요. 운명을 피한다고 믿었는데 오히려  서둘러 그것을 마주한 꼴
이 되었어요. 나는 아버지인 라이오스 왕의 살인자였고, 어머니인 이오카스
테와 결혼을 한 거예요. 내 4명의 자식들은... 좀전에 테세우스 당신이 나와 
함께 온 안티고네와 이스메네가  저의 누이인지 딸인지 물었지요?  그때는 
감히 대답을 못했는데, 이제 당신도 알게 되었을 거예요. 그녀들은 내 누이
이자 딸들이라는 사실을. 오이디푸스는 복받치는 감정으로 목이 메어 잠시 
동안 아무 말 없이 있었다. 그러더니, 
  "제가 끔찍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 몹시  창백해진 이오카스테는 
아무 말도 없이 왕실을 나가버렸어요. 잠시 후 불길한 생각이 들어 그녀를 
찾아 침실로 갔어요. 제가 도착했을 때 그녀는 이미 목을 매어 자살해버린 
후였어요. 처음엔 저도 그녀처럼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제 아이들을 고아
로 만들 수는 없었어요. 의도적인 건 아니지만 어쨌든 엄청난 죄를 벌하기 
위해 저는 제 스스로 눈을 도려냈어요.  다음날로 저는 테베에서 추방당했
지요. 눈은 멀고 가진 것도 없이, 수치심과 고통에 빠져 있던  저는 딸들의 
헌신과 사랑이 없었더라면 아마 오래 전에  죽었을 겁니다. 안티고네와 이
스메네만은 저를 저버리지 않았답니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저를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았고 모두들 제 앞에서 문을 굳게 닫아버렸어요. 이제 더 이
상 제게는 조국도 집도 없어요." 
  "그건 당신의 의지가 아니고 운명의 탓이오. 그러니 내가 보기에 당신은 
죄인이 아니라 희생자일 따름이오. 원한다면 이제 아테네가 당신의 조국이
고 내 집이 당신의 집이 될 것이오." 
라고 테세우스가 말했다. 그리하여 오이디푸스는  테세우스의 집에 머물렀
고, 그로부터 몇 달 후 숨을 거두었다. 그가 죽고 나자  안티고네와 이스메
네는 테베로 돌아갔다. 그녀들은  불길과 피에 휩싸인  왕궁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안티고네의 항거 
  오이디푸스가 테베에서 추방된 후 그의 두 아들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
이케스는 왕위 계승을 놓고 서로 다투었다. 그들은 결국 번갈아가며 1년씩 
나라를 지배하기로 합의했다. 그리하여 형 에테오클레스가 먼저 왕위에 올
랐다 1년 뒤 폴리네이케스가 자신의 차례를 요구하자 에테오클레스는 권력 
이양을 거부하고 동생을 테베에서 쫓아냈다.  안티고네와 이스메네가 테베
로 돌아왔을 때 폴리네이케스는 이웃 나라의 여섯 제후들과 협력하여 강력
한 군대를 앞세워 테베를  공격하려 하고 있었다.  에테오클레스도 자신의 
수비대를 왕국의 7개 성문에 배치시키고는 폴리네이케스의 동맹군들과  마
주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수많은 피의 희생을 피하고자  했던 폴리네이케
스가 그 들의 분쟁을 둘만의 싸움으로 종결짓자고 형에게 제안했고 에테오
클레스가 그것을 수락했다. 그리하여  두 형제는 두 편의  군대와 두 누이 
가 지켜보는 가운데 원수지간처럼  서로에게 달려들어 싸웠다.  두 사람의 
솟구치는 증오심은 서로를 사정없이 찔러댔고, 잠시  후 그들은 서로의 칼
에 찔려 함께 죽고 말았다. 포위하고 있던  여섯 제후들의 군대는 즉시 테
베에 공격을 개시했다. 짧은 전투 후에 다섯 제후는 수많은 주검들과 함께 
성문 앞에 쓰러 졌다. 여섯번째 제후만이 생존자들과 함께  도망쳤다. 승리
한 테베 시민들은 이오카스테  여왕의 동생인 크레온을  왕으로 추대했다. 
크레온은 전투에서 사망한 에테오클레스의 장례를 치른 후 폴리네이케스와 
다섯 제후들의 시신은 장례식도 치르지 못하게 했고 묘지에 묻지도 못하도
록 명령했다. 그것은 중대한  결정이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묘지가  없는 
자들의 영혼은 죽은 자들의 왕국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에  황천문 앞을 
하염없이 떠돌아다녀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정을  알게 된 
안티고네는 새 왕이 된 삼촌 크레온을 찾아가 항의했다. 
  "에테오클레스에게는 묘지를 주고 폴리네이케스에게는  그걸 거부한다는 
게 옳은 일인가요?" 
  "그건 옳은 결정이다. 난 테베의 법률에 따라 일을  처리했을 뿐이다. 법
에 의하면 조국을 배신한 자에게는 장례의 예우를 갖추지 않게 되어 있다. 
폴리네이케스는 이방인들의 도움을 받아 나라를 공격한 배신  행위를 저질
렀다. 그러니 그를 매장하는 일은  금하도록 할 터이며, 이 명령을  어기는 
자는 누구든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나라의 법은 내 오빠를 묻지 못하게  하겠지만, 자연의 법은 그렇게 하
도록 내게 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게는 신의 법이 인간이 만든 법보다 
더 엄중합니다." 
안티고네는 삼촌의 금지를 거스르고  밤사이에 폴리네이케스를 땅에  묻었
다. 크레온은 다음날 당장 그녀를 사형시켰다. 
 
    죽은 자의 영혼을 위하여
  전투에서 살아남은 여섯번째 제후는 아드라스토스이다.  그는 패배를 자
인했지만 죽음을 당한 자신의 동반자들이 묘지도 없이 독수리와 개들의 먹
이가 될 것을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아테네를 방문하여 
테세우스가 개입해줄 것을 요구했다. 아드라스토스가   아테네에 도착했을 
때, 테세우스는 도시의 모든  시민들과 함께 민중의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아드라스토스는 그를 따로 불러내어 자신의 방문 목적을 설명했다. 그러자 
테세우스는,
   "아테네는 다른 나라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
소. 하지만 외국의 제후들에 대한 크레온의  행동은 전쟁의 규칙에 위배되
는 것 같소. 그러니 원한다면, 내일 당장 우리의 의회에 탄원서를 제출해보
시오." 크레온은 아드라스토스가 협조를 구하기 위해 아테네로 갔다는  사
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아테네인들이 개입하지  않도록 설득할 대
사를 긴급히 파견했다. 아드라스토스보다 조금  후에 아테네에 도착한  그 
대사는 다음날 아테네인들의 의회에  출석하여 회의가 열리자마자  발언을 
했다.
  "저는 테베의 새 왕인 크레온이 보낸 사람입니다. 저희 국왕께서는 여러
분들의 국왕께 전할 말씀이 있답니다. 그러니  어느 분이 왕이신지 말씀해
주십시오."
테세우스는, 1789년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나기 직전, 국민의회에서의 미라보
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대사를 향해 비난의  손가락질을 하며 다음과 같이 
꾸짖렀다.
  "크레온에게 가서 아테네인들은 왕이 없으며 그들 모두는 스스로의 주인
이라는 사실을 알려라. 네가 탄원할 것이 있다면 여기 모인 모든 아테네인
들에게 말해야 하고, 바로 이들에게 그걸 제시해야 한다. 그러면 그들이 자
유롭게 토의를 거쳐 일을 결정할 것이다." 
당황한 대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왕의 말을 전했다. 
  "크레온 왕께서는 만일 당신이 테베의 일에 감히  끼여들려고 하면 당신
도 그들과 꼭 같은 운명에 놓이게 될 거라고 했소." 
그 말이 끝나자 테세우스는 간단히 대꾸했다. 
  "자 이제 우리가 그 문제를  토의하도록 자리를 비켜주시오." 대사가 떠
나가고 아드라스트의 얘기를 들은  아테네의 민중의회는 크레온의  위협에 
기분이 상한데다 그가 폴리네이케스와 다섯 제후들에게  했던 조처에 분개
하여 테베와의 전쟁을 선포하기로 결정했다.  군대의 통치자인 테세우스의 
인도하에 아테네인들은 승리를 얻어냈다. 포로가 된 크레온은 테세우스 앞
에 끌려왔다 테세우스는 그에게 말했다.
  "보다시피, 이상을 위해 싸우는 자유로운  인간들로 이루어진 군대는 오
로지 지배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싸우는 노예들의 부대보다 훨씬  더 강
한 법이다. 이제 우리가 원하기만 한다면  네 나라를 노략질하여 초토화시
키고 주민들을 포로로 데려갈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에  온 이유는 
사람들의 권리가 존중되도록 하기 위해서지 그것을 위반하려는  것이 아니
다. 그러니 우리는 승리를 남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다섯 제후들과 전쟁에서 죽은 모든 병사들의 장례식을 치러준 뒤 
아테네의 군대는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비극 
  테세우스는 파란만장한 삶을 영위하는 동안 수많은 연애 사건을 겪긴 했
지만, 한번도 결혼은 하지 않았다. 아테네로 돌아온 직후 다시금 평범한 시
민으로서의 삶을 되찾은 그는 이제는 자신도 한 가정을 이루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그가 만난 온갖 여자들 중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
긴 여자는 크레타의 왕인 미노스의 딸 파이드라였다. 그녀를 알게 된 것은 
몇 년 전 미노타우로스를 대면하기 위해 크레타에 갔을 때였다. 당시에 파
이드라는 테세우스에게 아무  관심도 보이지 알았고,  반면 그녀의 자매인 
아리아드네가 그의 품에 안겨버린 사실을 독자 여러분은 기억하고 있을 것
이다. 얼마 후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를 낙소스 섬에 떨구어버렸고 이후로
는 그녀를 완전히 잊어버렸다. 하지만 파이드라는 잊지 않고  있었다. 오히
려 그녀에 대한 추억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상화되기까지 했다. 그래서 
결혼하겠다는 결심을 했을 때 그는 대번에 그녀를 떠 올렸다. 그녀가 여전
히 독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테세우스는 미노스 왕의 허락을  얻기 위해 
크레타를 찾아갔다. 수많은 공적들의 후광 덕택에 미노스의 동의를 얻어내
는 일은 어려울 게 없었다. 파이드라에게는 의견을 묻지도  않았다. 테세우
스의 민주주의적 신념도 여자들이 자신의 남편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사
실에까지는 아직 이르지 못했던 것이다. 테세우스에게 좀체로 매력을 느낄 
수 없던 파이드라는 아무런 열정도  없이 그와 결혼하여 아테네에  정착했
다. 몇 달이 지나, 둘이 함께 저녁을  먹고 있을 때, 테세우스는 아주 곤란
해하며 고백할 것이 하나 있다며 말을 꺼냈다. 
  "몇 년 전에 헤라클레스와 함께 일을 수행하던 중에 아마존족의 여왕 안
티오페와 짧은 관계를 가졌다오. 그녀를 떠나면서  혹시 아들을 낳게 되면 
그의 나이가 열여덟이 될 때 내게 보내라고 약속했소. 한데 안티오페가 히
폴리토스라는 아들을 낳았으며, 그 애가 이제 열여덟 살이 되어 지금 아테
네로 오고 있는 중이고 며칠 안에 도착할 거라는 소식을 방금 전해 들었다
오. 바라건대, 그 아이를 너무 섭섭지 않게 대해 줬으면 하오." 테세우스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파이드라는 질투심 또한  느낄 수 없었다. 그래서 
히폴리토스를 잘 대해주겠노라고 선선히 약속했다. 그녀는 자신이 말을 잘
한 건지조차도  생각하지 못했다. 히폴리토스는  젊고  미남이고 활동적이
며, 완벽하고 강직한 도덕성을 겸비하고 있었다. 한데 그는 건강에 대한 강
박관념이 있었다. 단단한 육체를 유지하고 생체 에너지를 절약하려는 근심
에 사로잡혀, 매일 아침 조깅을 하고  낮에는 사냥을 하고 술은 마시지 않
았으며 채식과 장수식을 철저히 지켰고 하루에 세번 손과  이를  닦았으며 
매일 저녁 아흡시면 잠자리에 들었다.  여자들은 그에게 뿌리 깊은 혐오감
을 불러일으킬 뿐이었고, 피곤과 분쟁의 원천으로만  여겨졌다. 그의  완벽
한 정숙함과 자연에 대한 사랑은  사냥과 숲의 고독한 여신  아르테미스의 
총애를 받게 했다. 반면에 아프로디테는  그가  사랑의 즐거움을 경멸한다
는 사실 때문에 기분이  상해  있었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그에게  벌을 
내릴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히폴리토스가 자기 아버지를 만나러 떠나던 
그날 아프로디테는 마침내 그 기회를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테세우스는 아
들을 보자마자 강한 호감을  느꼈다. 한편 파이드라는  자신의 의붓아들을 
보는 순간 호감보다 훨씬 더 강한 감정을  느꼈다. 그녀는 미친 듯한 사랑
에 빠지고 말았다. 이러한 벌받을 사랑의 감정에 변명의 여지가 있다면 그
녀가 여지껏 한번도 사랑을 해보지 못했다는  점일 것이다. 게다가 히폴리
토스는 매우 잘생겼고. 아프로디테가 파이드라의  가슴에 이러한 급작스럽
고도 격렬한 정열의 불을 당겨버린 것이다. 몇 달이 지나갔고, 그  동안 테
세우스와 히폴리토스 부자간의 애정은  파이드라가 의붓아들에 대해  품고 
있는 사랑처럼 나날이 커가기만 했다. 하지만  파이드라가 워낙 자신의 감
정을 잘 감추었기 때문에 테세우스와 히폴리토스는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
았다. 어느 날 테세우스는 왜  긴 여행길에 올랐다. 테세우스가 없는  때를 
이용하여 파이드라는 히폴리토스와 단 둘이 있게 된 어느 날  저녁 마침내 
자신의 열정에 굴복하여 사랑을 고백하고  말았다. 히폴리토스는 아연실색
했다. 여전히 모든 여자들을  혐오하긴 했지만 양모인  파이드라만은 그가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여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갑자기 그녀 곁을 떠나 방을 나가버렸다. 숙명적이게도 바로 그 순간 하인 
하나가 들어와 테세우스의 급작스러운 귀환을  파이드라에게 알렸다. 두려
움과 수치심과 불같은 복수심에 사로잡힌 파이드라는 자기  방으로 올라갔
다. 그녀는 테이블에 앉아, 히폴리토스가 자신을 유혹하여 강간하려 했으며 
이러한 굴욕을 견디지 못해 죽어버리기로 했다는 내용의  편지를 남편에게 
썼다. 편지를 다 쓰고 난 후 그녀는 가슴에 비수를 꽂고 자살했다. 얼마 후 
도착한 테세우스는 아내의 시체와 편지를 발견했다. 그는 히폴리토스를 불
러 심하게 질책했다 당혹한 히폴리토스는 진실을 밝히려고 했지만 만일 아
버지가 진짜 죄인이 파이드라라는 사실을 알면 더 더욱 분노할  거라는 생
각이 들었다. 남달리 고귀한 영혼을 지닌 히폴리토스였기에 변명을 포기한 
채 그대로 아버지의 집에서 쫓겨나기로 했다. 히폴리토스를 향한 아프로디
테의 원한이 해소되었으니 일이 그쯤에 서 끝났으리라  생각할는지도 모른
다. 하지만 그건 시작일  따름이었다 이후에 계속되는 파장을  이해하려면, 
다음의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올림포스의 또  다른 신인 포세이돈은 침대를 
가지고 여행객들을 괴롭혔던 자기 아들 프로크루스테스가 몇 년 전에 테세
우스에 의해 죽었던 사실로 그  역시 테세우스에게 복수할 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집에서 쫓겨난 히폴리토스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2필의 
말이 끄는 마차를 몰고 아테네 근처의 해변을 따라가고 있었다. 그때, 포세
이돈이 보낸 바다 괴물이 갑자기 바다에서 솟구쳐 나왔다. 놀란 말들이 미
친 듯 날뛰었고 마차는 뒤집어졌다 히폴리토스는 마차에 매달린 채 한참을 
끌려다녔다. 피로 뒤범벅이 된 히폴리토스는 근처에 있던 농부들의 구원으
로 자기 아버지의 집으로 옮겨졌다. 숨을 거두기 전 그는 테세우스에게 몇 
마디의 말을 할 수 있었다. 
  "저는 결코 아버지의 명예를 더럽히려 하지 않았어요. 제가 그랬듯 아버
지도 죄지은 그 여자를 용서하세요."
그리차여 테세우스는 모든 걸 깨달았다. 후회와  슬픔에 사로잡힌 그는 아
테네를 떠나 이웃 나라를 지배하고 있던 친구 리코메데스의 집으로 피신했
다. 처음에 리코메데스는 친구를 잘  대접했다. 그런데 며칠 후 둘이  같이 
벼랑 근처를 산책하던 중 리코메데스는 뚜렷한 이유도 없이 테세우스를 갑
자기 벼랑 아래로 밀어버렸고 바위에  깔린 테세우스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리코메데스의 행위는 흔히 이렇게  설명되고 있다. 즉, 테세우스가 
아테네에 적용하고 있던 민주적이고 전복적인 이념들이 그리스  전역에 퍼
지는 걸 리코메데스가 두렵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에는 얼마간
의 진실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리코메데스의  행동에는 좀더 심오한 다른 
원인이 있으며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밝히기로  하겠다. 파이드라와 
히폴리토스와 테세우스가 죽었으니 이 피로 물든 비극의 커튼을 이제 내려
야 하는가? 아니, 아직 그럴  때가 아니다. 올림포스의 여신  아르테미스가 
아직 자신의 마지막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아르테미
스는 히폴리토스를 특히나 좋아했기 때문에 그의 때 이른 죽음에  몹시 상
심하고 있었다. 그녀는 의술의 신인 자기  오빠 아폴론을 찾아가 히폴리토
스에게 생명을 다시 찾아줄 것을 부탁했다. 동생의 청을 거절할 수는 없었
지만 아폴론 자신은 이 일에 개인적으로 말려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
리스 최고의 의사이자 세계 제일의 의사인 자기  아들 아크클레피오스에게 
히폴리토스를 되살리는 일을 맡겼다. 아스클레피오스는  그 일에 동의하여 
성공했다. 그런데 이 일을 수행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멸망을 재촉한 셈이 
되었다. 제우스의 두 형제 포세이돈과 하데스가 히폴리토스의 소생을 너그
럽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포세이돈은 그 자신이 히폴리토스를 죽게 
한 장본인이니 그러한  일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하데스는 이후로 아스클 
레피오스가 이런 식의 일에 자꾸 끼여들면 자신의 저승 왕국에  점차 사람
이 줄어들어갈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형제는 제우스를 찾아
가 아스클레피오스를 본보기로 응징해줄 것을  간곡히 청원했다. 제우스는 
그들의 의견에 동의하여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벼락을 내렸다 그러자 이번에
는 아폴론이 자기 아들의 죽음에 분노하고  말았다. 하지만 감히 제우스나 
포세이돈 또는 하데스를 직접 상대할 수는 없었기에 제우스의 벼락을 제조
하는 헤파이스토스의 일꾼들인 키클롭스에게 화살을 쏘아버렸다. 공교롭게
도 아폴론이 쏜 화살을 만든 것도 바로  그 키클롭스들 이었다. 이러한 보
복의 결과로 이번에는 헤파이스토스가 활을 겨누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고 올림포스에서 이같은 보복전이 계속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던 제우스
는 자신이 직접 아폴론에게 벌을 내리기로  했다. 그래서 아폴론에게서 온
갖 신의 특권을 빼앗고는 올림포스에서  추방시켜버렸다. 이러한 아폴론의 
추방은 훗날 트로이 전쟁의 기원이 됨을 우리는 곧 보게 될 것이다. 

    6. 헤라클레스의 새로운 공적과 죽음 
  테세우스와는 달리 헤라클레스는 나이가 들어도  현명해지지 않았다. 12
가지 일이 끝나자 이번에는 스스로 새로운 모험에 뛰어들어 황소, 괴물, 용
과 거인들을 차례로 무찔러가며 수많은 승리를  쌓아 나갔다. 초인적인 힘
과 몸에 두른 사자 가죽 그리고 철퇴와 독화살은 그를  명실상부한 무적자
로 만들었다. 때로는 신들조차  주저 없이 공격하여  아폴론이나 아레스를 
상대로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신들의  노여움을 가라앉히기 
위해 아버지인 제우스가 끼여들어야만  했다. 그런데 이러한  모험 가운데 
하나는 강력한 신을 상대로 진짜 분쟁을 일으키고 알았다.

    거인 안타이오스와 씨름을
  포세이돈과 대지의 아들인 안타이오스는 거인이었다. 포세이돈의 아들들
이 대개 그랬듯이 그 역시 별로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 못 되었다. 그는 숲
속에 자리를 잡고 앉아 지나가는 여행자들을 멈춰 세워 내기  씨름을 제안
하고는, 자기가 이기면 그들을  죽이고 금품을 모조리 빼앗겠노라고  했다. 
싸움은 늘 그의 승리로 돌아갔는데 힘이 세기도 했지만 어쩌다가 상대방이 
그를 때려 눕혀 어깨를 땅에 닿게 할 때마다 안타이오스는  자기 어머니인 
대지와의 접촉으로 금세 힘을 되찾기 때문이었다. 헤라클레스는 이 산도적
을 추방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내기를 수락하고 씨름을  시작했다. 3번이
나 연달아 헤라클레스는 그를 땅에 확실히  눕혔다고 믿었다. 그러나 놀랍
게도 안타이오스는 매번 전보다 더  힘이 세어져서 벌떡 일어서는  것이었
다. 안타이오스가 대지와의 접촉에서 힘을 끌어낸다는 사실을 알아낸 헤라
클레스는 그를 자기의 두 팔로 확 안아 땅에서 들어올려 질식시켰다. 그가 
죽었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헤라클레스는  안타이오스를 내려놓았다. 포
세이돈은 아들 안타이오스의 죽음에 몹시  상심했다. 당장에 헤라클레스를 
응징하고 싶었지만 제우스의 노여움을 사지  않을까 두려웠다. 헤라클레스
에 대한 제우스의 사랑은 신들 사이에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포세이돈
은 적절한 기회를 기다려 다른 사람을 개입시켜 복수할 것을 결심했다. 인
간이나 짐승은 말할 것도 없고  괴물이나 신들도 헤라클레스를 무찌를  수 
없다는 걸 포세이돈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한  가지 희망이 남아 
있었으니 그것은 여자들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바로 그  여자들이 영웅의 
패망을 재촉하게 된다. 

    헤라클레스의 두번째 결혼 
  메가레우스와 했던 헤라클레스의 첫번째 결혼은  비극적으로 끝났다. 그
때 헤라클레스는 독신으로 지내기로 맹세했다. 하지만 그는 기억력이 나쁜
데다, 안타이오스를 이기고  난 얼마 후에  데이아네이라라는 젊은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데이아네이라의 다른  청흔자들을 무력으로 제
거한 뒤에 그녀를 아내로 삼았다. 신혼  여행길에 오른 헤라클레스와 데이
아네이라는 넓고 깊은 강을 건너게 되었다. 그곳에는 다리도 없고 얕은 곳
도 없었기에 네소스라는 켄타우로스(반인반수)가 강을 건너게 해주고 있었
다. 네소스는 여행 객들을 자기 등에 업고  헤엄을 쳐서 반대편 강가로 옮
겨주곤 했던 것이다. 헤라클레스는 아무 의심 없이 데이아네이라를 그에게 
맡겼다. 강 저쪽에 다다른 네소스는 사티로스(반인반수의 숲의 신)의  색마
적 본능을 가지고 있었기에 갑자기 데이아네이라를 껴안으려 했고 놀란 그 
녀는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반대편에서 그러한 장면을 본 혜라클레스는 
독화살을 네소스에게 쏘아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다. 네소스는 숨을 거두기 
직전, 자신도 모르는 사이 포세이돈이 보내는  영감을 받아 들여 데이아네
이아에게 다음과 같이 중얼거렸다. 
  "내가 저지른 저열한 행동을 용서하라는 뜻에서 당신께  한 가지 은혜를
베풀겠소. 내 피 몇 방울을 잘 간직하시오. 이 피는 사랑의  묘약이라 필요
한 경우 당신 남편의 사랑을 되찾을 수 있다오. 아무 옷에나 몇 방을 떨어
뜨려 그 옷을 남편에게 입히기만 하면 돼요."
헤라클레스의 가벼운 행동거지를 잘  알고 있던 데이아네이라는  네소스의 
충고가 언젠가는 유용하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조그만  병에 피를 채워 자
기 짐 속에 숨겼다. 그러는 사이 헤라클레스는 타잔처럼 물 속에 뛰어들어 
힘차게 물을 가르며 강을 건너 아내와 합류했다. 나머지 여행길은 사고 없
이 이어 졌다. 그들은 보이오티아 지방 어딘가의 커다란 집에 자리를 잡고 
평화로운 몇 달을 보냈다. 헤라클레스는 다시금 역마살에 사로잡혔다. 데이
아네이라에게 곧 돌아오마고 약속한 뒤 그는 새로운 모험을 위해  길을 떠
났다. 어느 날 저녁 여관에  묵었을 때인데, 술에 취한 혜라클레스는  아무 
해도 끼치지 않은 젊은이에게  시비를 걸고는 그를  죽여버렸다. 이번에는 
제우스도 화가 나서 자기 아들이 또다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헤라클레스에게 옴팔레라는 젊은 여왕을 찾아가 그녀의  일을 도우
라고 했다. 옴팔레는 이전의 에우리스테우스처럼  헤라클레스에게 여러 가
지 시련을 받게 했다. 옴팔레는 가학적이고 변태적인 여자였다.  그녀는 사
람들에게 모욕을 줌으로써 쾌감을 느꼈다.  헤라클레스의 남성적인 평판을 
익히 알고 있던 그녀는 그에게 여자의 옷을 입게 하고, 보석으로 치장하게 
하고, 가사일을 시키고, 털실을 짜고 옷감을 짓게 했다. 그러나 헤라클레스 
는 제우스의 용서가 내려지기까지 1년 간 옴팔레의 변덕을  유순하게 견뎌
냈다. 그리고 아내 데이아네이라를 다시 만나기  위해 즐거운 마음으로 길
을 떠났다 

    헤라클레스의 죽음 
  돌아오는 길에 헤라클레스는 여러  가지 일로 지체하게  되었다. 그래서 
자기를 걱정하고 있을 아내를 안심시키기 위해 하인 몇 명을  먼저 떠나보
내 아내에게 자신의 귀향을 알리라고 했다. 앞서 출발한 하인들 중에는 헤
라클레스가 여행 중에 맞아들인 아주 아름답고 젊은 하녀가 하나  끼여 있
었다. 그녀를 본 데이아네이라의 친구들은 그녀가 헤라클레스의 정부일 거
라고 추측했고, 그러한 자기들 생각을 데이아네이라에게  까지 전염시켰다. 
그 순간 데이아네이라는 켄타우로스 네소스가 죽어가며 남겨준  사랑의 묘
약을 기억해냈다. 이 기억의 반추에는 분명 포세이돈이 끼여들었을 것이다. 
그녀는 옷장에서 헤라클레스가 없는 동안 수를 놓아 만든 속옷 한 벌을 꺼
내어 네 소스의 피로 적신 후 하인을 시켜 그에게 갖다 입히라고 했다. 이
러한 사랑의 징표에 감동한 헤라클레스는 즉시  옷을 입었다. 옷을 걸치자
마자 온 몸이 타들어가는 끔찍한 고통이  느껴졌다. 켄타우로스의 피에 헤
라클레스의 화살에 묻어 있던 히드라 레르네의 피까지 섞여 그야말로 초자
연적인 위력을 발하는 독이 되었던 것이다.  옷을 벗어던지려 했지만 소용
없는 일이었다. 옷이 마치 피부에 달라붙어  있는 듯해서 헤라클레스의 살
을 생으로 뜯어내지 않는  한 벗겨낼 수 가  없었다. 헤라클레스의 용기와 
저항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이러한 고통은 참아낼 수가 없었다. 그는 함께
한 친구들에게 차라리 자기의 목을 졸라  죽여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누
구도 동의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스스로 거대한 장작더미를 쌓아
놓고 그 위에 자신의  사자 가죽을 깔았다. 그리고  몸을 눕혀 친구들에게 
불을 지펴달라고 간청했다. 친구들 중  필로크테테스라는 젊은이가 헤라클
레스의 고통을 보다 못해 마침내 그의 요구를 수락했다. 
  "넌 내 가장 충실한 친구이다. 내 활과 화살을 네게 물려주마. 내 철퇴는 
나와 함께 태워버려라." 
필로크테테스는 장작에 불을 붙였고 헤라클레스의 육체는 곧 타들어 갔다. 
불멸의 헤라클레스 이러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제우스는 필시 자신
의 사랑 놀음에 차져 있었던 듯싶다. 왜냐하면  그가 소식을 접했을 때 헤
라클레스는 이미 죽어버린 후였기 때문이다. 올림포스의 지배자는 즉시 잃
어버린 시간을 되돌렸다. 그는  우선 포세이돈의 음험한 개입을  응징하여, 
몇 달 전 아폴론을 쫓아냈던 것처럼, 그를 올림포스에서 추방했다. 그런 다
음 법률 자문이던 헤르메스에게 헤라클레스를 불멸하게 만들도록  소송 절
차를 밟으라고 했다. 이 소송은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 한한 것으로, 반신들 
즉, 부모 중 한 쪽이 신이고 다른  쪽이 인간인 자들에게 불멸을 제공해주
는 것이었다. 그 방법은 이미 여러 번 사용되었는데, 제우스와 인간 세멜레 
사이의 아들인 디오니소스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헤라클레스의 지위는 디 
오니소스만큼 뛰어난 것도 아니었고 신의 최고 품격도 받지 못한  처지 였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라클레스는 불멸을 부여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죽
은 지 몇 달이 지나서 헤라클레스는 장엄하게 올림포스 신들의  세계에 받
아들여졌다. 그는 올림포스에 있는 모든 신들아게 호의적인 인상을 주었는
데, 특히 제우스와 헤라의 딸이던 헤베는 즉시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헤베
는 얌전하고 눈에 띄지 않던, 신들에게  넥타르주를 제공하는 것이 유일한 
임무였던 여신이라고 이미 소개했었다. 어쨌든 제우스의 승낙을 얻어 그녀
는 헤라클레스와 결혼했다. 헤라클레스처럼 무절제한 주량을 가진 자를 술 
접대하는 여신과 결혼시킨다는 것은 별로 권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올림
포스의 술 창고에 언제든 접근할  수 있었기에 헤라클레스는 금세  알코을 
중독 아니, 넥타르 중독에 빠지고 말았다. 이러한 악덕에서  남편을 구제하
기 위해 헤베는 제우스에게 넥타르 접대부라는 자신의  직책을 면해달라고 
요구했다. 제우스는 동의했고 대신  트로이의 젊고 아름다운  남자 가니메 
데스에게 그 일을 맡기기로  했다. 제우스는 독수리를  시켜 가니메데스를 
납치해왔고 보상하는 뜻에서 그에게도 불멸을  허락했다. 테세우스와 헤라
클레스의 죽음과 더불어 한 시대가 끝이 났다. 하지만 그들이 이루어낸 수
많은 과업을 지켜보았던 여러 인물들은 아직 살아 있었고, 이제 그들이 이 
영웅적 세기의 두번째 시대에 무대의 전면에  나서서 활약하게 된다. 테세
우스에 의해 첫번째 납치를 당했던 헬레네가 그의 죽음을 알게  되었을 때
는 스무 살이 채 안 되었을 때였다.  장작 위의 헤라클레스를 목도했던 필
로크테테스는 아직 서른을 넘기지 않았다. 두 영웅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
들의 여러 모험을 함께 했던  네스토르는 이제 막 육십대로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원기 왕성했다. 그는 자신의 생일을 맞이하여 행한 긴 연설을 이렇
게 시작하고 있었다. 
  "내 생의 전반부가 끝나던 무렵..."

3부 트로이 전쟁
    1. 트로이 성벽의 구축 
  여러분들은 테세우스가 죽은 뒤에  제우스가 키클롭스들을 살해한  죄로 
아폴론을 올림포스에서 추방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제우스는 아폴론에
게 넥타르주와 암브로시아의  배급마저도 끊어버렸는데,  그것은 '이제 네 
밥벌이는 네 힘으로 하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래서 일을 찾아야 했던 아
폴론은 트로이 신문의 구인 광고란에서 다음과  같은 기사를 읽게 되었다. 
"성벽 구축을 위한 경험 있는 건축 기사 구함. 지원자는 소개서와 함께 트
로이의 왕 라오메돈에게 문의할 것." 예술의 신으로서의 자질을 갖추고 있
던 그는 건축 분야에도 상당한 재능이 있었기에 지원에 응하기로 했다. 당
시의 트로이는 광활하고 부유한 도시  국가로 오늘날의 터키의 일부가  된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그 도시는 항구가 아니었
는데도 수십 킬로에 달하는 영토가 에게 해로 부터 분리되어 있었다. 에게 
해의 다른 쪽에는 트로이에서 수백  킬로 떨어진 곳에 그리스가  자리하고 
있었다. 트로이의 왕 라오메돈은 똑똑하고 친절하긴 했지만 양심이 없었다. 
자기 나라가 그리스 왕들의 조직적인 침략으로 빈번히 공격과 노략의 희생
물이 되고 있다고 생각한 라오메돈은 튼튼한 성벽을  둘러쌓아 침략자들로
부터 나라를 지키기로 했다. 건축 기사 모집에 지원하기 위해 아폴론은 우
선 건축가로 변장했다. 머리를 아주 길게 기르고, 턱수염은  귓불까지 이르
게 둥글게 다듬고, 헐렁한 듯 능란한 옷차림과 이러한 직종에서 일하는 사
람들이 흔히 쓰는 태연자약한 말투까지 준비했다. 그리고 자신을 이탈리아
에서 온   건축 기사 포놀라라고 소개했는데, 이  이름은 아폴론의 철자를 
뒤바꿔 만들어낸 것이다.  그는  라오메돈에게 자신이 이미  이탈리아에서 
수많은 성벽을 건축한 경험이 있다며  자기가 했던 작업들에 대한  도면과 
모형을 왕에게 제시해가며 끝없는 감언이설로 왕을 설득했고, 결국 라오메
돈은 그에게 일을 맡기기로 했다. 
  "보수는 얼마나 되나요?" 
라고 아폴론이 묻자 왕은 대답했다. 
  "황금 1탤런트를 주겠다. 단, 늦어도 3년 안에 일이 끝나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 주춧돌은 착공 기념식 말미에 내가 하게 될 짧은 축하 연설이 끝나
면 얹어놓을 수 있도록 해라. 만일 불행하게도, 매일매일 해가 지기 전까지 
계산해서 정확히 3년 후에 마지막 돌이 놓여지지 않는 다면, 넌 한푼도 받
을 수 없다." 
아폴론 아니, 포놀라는  이러한 약정 조항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고는 
일에 착수했다. 몇 달이 지난 뒤, 수백 명의 석공들과 토목  인부들을 고용
했는데도 일이 빨리 진척되지않자 아폴론은 포세이돈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포세이돈 역시 헤라클레스의 죽음을 교사한 죄목으로 올림포스에 서 
추방되었던 터였다. 포세이돈은  에눕텐이라는 가명으로  라오메돈 왕에게 
소개되었다. 그의 개입으로 작업은 속도를 내게  되었고 그간의 부진을 따
라잡을 수 있었다. 라오메돈이 정한  최종 기한은 6월 3일이었고, 6월  2일 
정오가 되자 모든 작업이 끝났다. 트로이를  둘러싼 15 미터 높이와 2미터 
두께의 석재 성벽이 완성된 것이다. 성벽  중간과 꼭대기에는 수많은 총안
들을 만들어놓아, 트로이 사람들이 성 안쪽에서 안전하게 침략자들을 향해 
활을 쏘거나 돌을 던지거나 펄펄 끓는 기름을  들이부을 수 있게 했다. 참
나무로 만든 12개의 커다란 문은 도시의 출입을 자유롭게 했다. 게다가 성
벽 안쪽에 거대한 창고들을 만들어 필요한 경우 트로이 시민들이 성안에서 
진지를 구축하고 살더라도 20년은 버틸  충분한 식량을 쟁여둘 수  있도록 
했다. 일에 만족한 아폴론과 포세이돈은 라오메돈을 찾아가 기념식에 맞춘 
마지막 돌이 예정대로 다음날인 6월 3일에  놓여지게 될 거라고 통고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보수를 지급할 생각이 아예 없었던 라오메돈은 음흥한 계
략을 꾸몄다. 
  "기념식은 내일 아침 10시에 시작될  것이다. 우선 너회들이 작업과정을 
설명하도록 해라. 그리고는 신들에 대한 봉헌식을 거행하여 트로이의 영구
한 보호를 간구할 것이다. 그런 다음에 식사를 할 것이고, 점심식사  후 내 
연설이 있을 것이고 연설이 끝나면 마지막 돌이 엄숙하게 놓여질 것이다." 
아폴론과 포세이돈은 아무런 의심 없이  이러한 일정표를 받아들였다. 6월 
3일 아침나절은 예정된 대로 진행되었다. 우선 건축가들의 설명이 한 시간 
동안 이어졌고, 종교 예식은 한 시간 반이 걸렸다. 12시 반이  되자 손님으
로 초대된 2백 명의 왕이 식탁에  앉았다. 향연의 식단은 라오메돈이 직접 
짠 것으로, 63가지의 각기 다른 요리들로 되어 있었다.  그러한 식단으로는 
식사 시간이 한없이 늘어지게 마련이었다. 사람들이  식탁을 떠난 것이 오
후 5시쯤 되었고. 그제서야 라오메돈은 자신의 연설을 시작했다. 우선 그는 
건축가들의 직업 의식과 재능에 대한 길고  긴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는 그간 일어났던 온갖 사소한 사건들을 장황하게 환기하면서 공사 과정의 
모든 단계들을 아주 시시콜콜하게  다시 들먹였다. 손님들은 하품을  했고, 
심지어는 너무 무거웠던 식사 탓에 앉은  자리에서 졸기까지 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8시가 되자 마침내 건축의  역사에 대한 긴 연설을 마친 
라오메돈은 공사비 내역에 대한 회계 분석으로써 자신의  연설을 결론짓겠
다고 발표했다. 그리고는  3년 간의 공사에  지불되었던 석재, 목재,  모래, 
삽, 바구니 등등에 대한 2843건에 달하는  계산서를 일일이 읽어내리기 시
작했다. 그가 모든 걸 다 끝냈을 때는 이미 밤이 깊은 지 오래였고. 횃불을 
밝힌 가운데 지친 군중의 박수를  받으며 마침내 마지막 주춧돌이  놓여졌
다. 다음날 아침 일찍 아폴론과 포세이돈은  급료를 받기 위해 라오메돈의 
왕실로 찾아갔다. 왕은 그들에게 말했다. 
  "자네들 농담하는가? 보수는, 공사가  시작된 날로부터 하루하루 계산해
서 3년째 되는 날 '해가 지기 전에'  마지막 돌이 놓여져야만 주기로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 기한이 지켜지지 않았네. 그러니 내가 어제 제공한 만
찬과 자네들을 여러 사람 앞에서 칭찬해준 것을 급료로 생각하게나." 아폴
론과 포세이돈은 어안이 벙벙해서  잠시 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목이 
꽉 막힌 아폴론이 마침내 외쳤다. 
  "돈을 내놔. 이런... 이런..." 
그는 끓어오르는 분노에 걸맞은 욕설을 찾아내려 했다. '도둑'으로는  충분
하지 않았고, '산적', '사기꾼', '더러운놈' 혹은 '악당' 같은 그런 욕이어야 
했다. 포세이돈이 그를 도왔다. 
  "이런 날강도 같은 놈!" 
'날강도'라는 말은 당시나 지금이나 특별히  염치가 없는 강도들을 지칭했
다. 또한 이때부터 회의에서 끝없는 연설로  투표나 결정을 지체시키는 연
설가를 가리키기도 했다. 라오메돈은  두 건축가의 협박에  아랑곳도 하지 
않았고, 정작 그들이 누군지 알지 못한 채 거침없이  그들을 내쫓아버렸다. 
하지만 자신이 누구를 상대로 그같은 짓을 했는지를 알게 되는  데는 그리 
긴 시간 이 필요하지 않았다. 얼마 후 아폴론과 포세이돈은 제우스와의 면
담을 요구했고, 그들이 겪어낸 오랜 고통을  감안한 제우스는 그들을 용서
하고 신권을 복원해 주었다. 라오메돈에게 복수하기 위해 포세이돈은 즉시 
해일을 일으켜 트로이 주변의  평지를 온통 물에 잠기게  했다. 한편 보건 
문제를 담당했던 아폴론은 도시에 페스트 전염병을 퍼지게 하여 수많은 민
중을 죽게 했다. 이런 종류의 자연 재해가 발생하면 당시의 지도자들은 으
레히 신탁을 찾아가 의논했다. 신탁은 신들의  의지를 알고 있다고 여겨진 
사제 같은 인물이었다. 라오메돈도 신탁을 찾아갔다. 그 신탁은  비밀을 밝 
혀주었다. 
  "당신이 골탕먹인 그 건축가들은 바로  아폴론과 포세이돈이오. 지금 이 
나라에 흥수와 페스트가 번진 것은 바로 그들의 복수 때문이오. 당신 자식
들 중 하나를 바위 위에 묶어 바다 괴물의 제물이 되도록 희생시켜야만 그
들의 화가 풀릴 것이오." 
라오메돈은 자식이 둘밖에 없었다 아들은 프리아모스였고 딸은 헤시오네였
다. 길고도 고통스러운 망설임 끝에, 아들은 어쨌든 자신의  왕위를 계승해
야 했으므로, 라오메돈은 헤시오네를 희생시키기로 했다. 그는 신들의 요구
대로 헤시오네를 바위 위에  묶었다. 그러나 포세이돈이  보낸 무시무시한 
바다 괴물이 물 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모습을 보자 딸을 잃게 된다는 생각
을 견뎌낼 수가 없었다. 그는 올림포스를 향해  간절한 기도를 했다   "내 
딸을 구해주는 자에게 제우스로부터 받은 가장 훌륭한  말 2필을 선물하겠
다." 
불멸의 권한을 부여받은 이래 올림포스에서 권태롭게 지내던, 게다가 말을 
몹시도 좋아하던 헤라클레스는 아직 자기의  손에 위력이 남아 있다는  걸 
과시할 이러한 기회를 대단히 기뻐했다. 그리하여  갑자기 괴물 앞에 나타
나 맨손으로 괴물의 목을 졸라버렸다. 그리고 라오메돈이 약속했던 보상을 
요구했다. 하지만 라오메돈은 불치의 위선가였다. 
  "내 가장 훌릉한 말 2필을 선물하겠다고 약속한 건 사실이지만, 그건 명
목상의 소유권을 주겠다는 거였지 죽을 때까지 내가 갖게 되어  있는 말의 
실제 사용권을 주겠다는 건 아니었네."
  "그렇다면 네 그 사용권의 기간을 마감해주지." 
헤라클레스는 평소의 그답지 않은 기지를 발휘해 대답하고는  한방의 주먹
으로 라오메돈을 절명케 했다. 그리고 나서  헤시오네를 낚아채어 에게 해
를 건너 자기 친구인 텔라몬에게 선물했다.  살라미스 섬의 왕이었던 텔라
몬은 곧이어 그녀와 결혼했다. 자신이 유난히  좋아했던 누이가 떠나는 모
습을 본 프리아모스는 몹시 심란해졌다. 그래서 누이를 결코 잊지 않을 것
이며 언젠가 그녀를 다시 자기  나라와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리라는 
맹세를 했다. 하지만 이러한 맹세가 얼마나 많은 민중의 피와 땀과 눈물의 
대가를 치르어내게 될지는 상상하지 못했다. 

    2. 파리스의 탄생과 유년 시절 
  라오메돈의 뒤를 이어 트로이의 왕위를 계승한 프리아모스는 아버지와는 
아주 달랐다. 그는 착하고 정의롭고 무엇보다도 약속에 충실했다.  왕이 된 
직후 그는 헤카베라는 처녀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훌륭한 아내이자 어머니
였고, 게다가 아주 뛰어난 요리사였다. 몇 년 뒤 그들은 50명의  자식을 갖
게 되었다. 이 아이들 중 몇몇은 헤카베가 직접 낳았고, 다른  아이들은 프
리아모스가 관계했던 다양한 여인들과 궁녀들이 낳았다. 마르지 않는 모성 
본능을 타고난 헤카베는 이 모든 아이들을 마치 제자식인양 잘 키웠다. 50
명의 아이를 모두 다 얘기할 수는 없고,  그들 중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세 아이의 이름만은 언급하는 게 좋을 듯싶다. 장남인 헥토르는 태어날 
당시의 몸무게가 이미 6킬로그램에 육박했고  나중에는 정말 거구가 된다. 
그가 태어났을 때, 부모들은 당시의 관례대로  신탁을 찾아가 아들의 미래
를 물어보았다 신탁은 그 분야의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는 약간은 신비스러
운 어휘를 구사해가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헥토르는 "크산토스 강이 범람
하지 않는 한, 나라의 영광이 될 것이며 결코 패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것
이다. 크산토스 강은 트로이와 에게 해 사이에 있는 평지를 흐르는 강이었
다. 유사 이래 그 강이 범람하는 걸  본 일이 한번도 없었기에 프리아모스
와 헤카베는 신탁의 예언 속에 헥토르의 앞날 이 아주 좋은 징조로 나타나
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들의 두번째아이는 카산드라라는 딸이었다. 신
탁에게 전해들은 그녀의 미래는 헥토르만큼 고무적인 것은 아니었다. 
  "카산드라는 나처럼 미래를 읽어내는 힘을 갖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와
는 달리 그녀의 말은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을 것이다." 프리아모스는 카산
드라가 태어나자 아기의 날카롭고 그칠 줄  모르는 울음소리에 짜증이  났
다. 그래서 신탁의 예언의  두번째 부분을 당장 증명이나 하듯, 더 이상 카
산드라의 울음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며 유모에게 아이를 왕궁의 외진  구
석방에서 기르라고 명령했다.  카산드라가 태어난 1년 뒤에 헤카베는 셋째
아이를 낳았다. 아들인 파리스였는데, 출산 전날 밤 헤카베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그녀의 몸에서 20개의  촛불에 둘러싸인 횃불이 솟아 나오는 꿈이
었다. 20개의 촛불이 하나씩 꺼지기 시작하여 마지막 촛불마저  꺼지자, 횃
불이 움직여 다니며 왕실과 도시에 불을 붙여 엄청난 화재를 일으켰다. 그
녀는 신탁에게 꿈 이야기를 했고 신탁은 다음과 같은 해몽을 해주었다. 
  "횃불은 파리스를 나타내며 촛불은 나이를 표시한다. 태어난 후 스무 해
가 지나고 나면 파리스는 트로이의 멸망과 파괴를 자초하게 될  여행을 하
게 될 것이다." 
왕궁에 돌아온 프리아모스는 헤카베에게 말했다. 
  "그토록 큰 불행을 끌어들이게 될 아이를 살려둔다는 건 너무 위험하오. 
오늘 당장 아이를 죽여야겠소." 
헤카베는 처음엔 거부했지만 마침내 남편의 주장에 승복했다. 
  "하지만 아이가 죽는 걸 내 눈으로 볼  수는 없어요. 차라리 그 애를 도
시에서 멀리 떨어진 이데  산에 갖다 놓아요. 그러면  사나운 짐승에게 곧 
잡아먹힐 테니까요." 프리아모스가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더라
면 이러한 계획을 경계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얘기를 모르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래서 다음날 새벽 신하에게 슬픈 임무를 내렸다. 한편 헤카
베는 다시는 볼 수 없게 될 아기를 추억하기 위해 궁전의 뜰에 올리브나무 
한 그루를 심으며 생각했다. 
  "나무가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이 나무와 같은  시기에 태어났지만 운명
이 앗아간 내 아이를 생각해야지." 
하지만 운명은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날 정오쯤에 이데 산으로 양
들을 먹이러 갔던 양치기 하나가  파리스의 울음소리를 듣게 되었고  나무 
밑에 있는 아기를 발견했다.  아기의 아름다움에 반한  양치기는 아기에게 
양젖을 먹여주고는 그날 저녁 자기 집으로 데려왔다. 아기가 없던 그의 아
내는 그를 양자로 삼아 키우기로 작정했다.  이렇게 해서 파리스는 자신의 
진짜 출신을 모르는 채 소박한 시골 집 아들이 되어 트로이에서 십여 킬로 
떨어진 마을에서 자라났다. 그는 비범한 미모와  뛰어난 재주를 가진 아이
로 성장했다. 아버지의 양 떼를 지키는 기나긴 시간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
해 그는 활쏘기를 연마했다. 처음에는 호박을  표적으로 삼아 50미터 되는 
거리에서 활을 쏘았다. 매번 화살이 적중하자  이번에는 표적을 사과로 바
꾸었다. 그것도 너무 쉽자 이번에는 버찌를  표적으로 정하고는 버찌의 살
이 아니라 그 씨를 화살로 꿰뚫어버렸다.  활쏘는 일 외에는 오이노네라는 
요정을 벗삼아 단조롭고 평온한  삶을 이어 나갔다. 파리스에  반한 그 요 
정은 다친 사람들을 고쳐주는 신비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3. 파러스의 판결 
  파리스가 이데 산에 버려진 지 19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간 지상과 올
림포스에서는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고  신들은 권태로워했다. 그들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제우스는 두번째  서열에 있던 한 여신의  결흔식을 
기회로 큰 연회를 베풀기로 했다. 결혼  당사자는 테티스라는 여신과 미르
미돈족의 지배자인 인간 펠레우스였다. 제우스는  에리스라는 여신을 제외
한 모든 신들을 결혼식에 초대했다. 에리스는  고약한 말투와 심술궂은 성
품으로 유명해서 모임에 참석하기만 하면 사람들간에 분쟁과  싸움을 일으
키곤 했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제우스의 그러한 계획은  에리스의 귀에 
들어갔고 모욕을 느낀 에리스는 복수를 결심했다. 연회가 시작되어 초대된 
사람들이 모두 식탁에 앉았을 때 갑자기 나타난 에리스가 식탁으로 다가와
서는 한마디 말도 없이 황금 사과 하나를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그 사과
에는 '가장 아름다운 여인에게'라는 글귀가  씌어 있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여신들은 이제 곧 미인 경연 대회가 벌어질 것이고  우승자에게 사과
가 돌아갈 것임을 알아챘다. 여신들은 법석스러운  소란을 떨며 제가끔 자
기가 가장 아름답다고 주장했고, 아우성을 치면서 사과를 요구했다. 그녀들
을 진정시키기 위해 제우스는 신들만을 참여시켜 비밀 투표를 함으로써 판
결을 내릴 것을 제안했다. 신들 각자가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여신의 
이름을 적어 투표함에 집어넣은 다음,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여신을 우승자
로 정하기로 한 것이다. 투표가 끝나고 개표가 진행되었다. 그런데 그 결과
가 아주 곤란하게 나왔다. 헤라와 아테나  그리고 아프로디테가 똑같이 12
표씩 얻어 공동 1위가 되었던 것이다.  다른 소수의 표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여신들에게 던져졌고. 몇몇 익살맞은 신들은 엉End한 표를  던짐으로
써 투표를 조롱했다. 예를 들면, 어떤 신은 아테나의 올빼미를, 또 다른 신
은 여성처럼 나약해진 아레스에게, 게다가  못생기기로 유명한 헤파이스토
스에게 표를 던지기도 했다. 한데, 이같은 상황에서 3명의 동점 자인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그때 아테나가 한 가지 제
안을 했다. 
  "우리 셋이 모두 땅으로 내려가서 무작위로 선택한 지역으로 갑시다. 그
리고는 거기서 맨 처음 만나게 될 남자를 심판관으로 정해, 우리 들 중 누
가 가장 아름다운가를 결정하라고 합시다." 
헤라와 아프로디테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식탁 위에 그리스의 지도를 펼
쳐놓았다. 눈을 감은 제우스가 아무렇게나 핀으로  지적한 곳은 이데산 이
었다. 세 여신이 저마다 아름답게 치장을 하는 사이,  제우스의 심부름꾼인 
헤르메스는 그녀들보다 먼저 땅으로 내려가 경연 대회를  준비했다 헤르메
스가 맨 처음 만난 남자는 다름 아닌  파리스였다. 그는 피리를 불며 평화
롭게 양떼들을 지키고 있었다. 헤르메스는 세 경쟁자의 신분이 파리스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일의 전말을 설명했다. 
  "3명의 여자가 네 앞에 나타날 것이다. 그녀들을  잘 살펴본 후에 네 가 
보기에 가장 아름답다고 판단되는 여자에게 이  황금 사과를 주어라. 일의 
대가로 네게 황금 10냥을 주마." 
횡재를 만났다고 생각한 파리스는 헤르메스의 제안을 기꺼이 수락했다. 맨 
처음 그 앞에 나타난 여신은 아테나였다. 그녀는 횐옷을 정갈하게 입고 화
려한 투구를 쓰고 있었다 
  "황금 사과를 내게 주면 이 마술 투구를 선물로 주마. 이것은 평생 동안 
네게 권력과 영광을 가져다 줄 것이다." 
이 같은 제안에 감동한데다, 아테나의 아름다운  용모와 지적인 눈매에 사
로잡힌 파리스는 벌써 사과를 그녀에게 내주려고 했다. 그때 네 마리의 공
작이 이끄는 마차를 탄 헤라가 나타났다. 그녀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목
이며 손목에 보석을 휘감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은실로 잔 돈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헤라는 마차에서 내려 파리스 앞으로 몇 걸음 다가왔는데, 치
켜 든 머리와 자신감 있는 태도는 마치  의상 발표회에 나온 모델 같았다.  
  "황금 사과를 내게 주면 이 마술 지갑을 선물로 주마. 이 주머니는 쓰는 
대로 황금 동전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평생을  부자로 살 수 있지." 영예와 
부, 아테나와 헤라 사이에서 파리스는 머뭇거렸다. 사과를  두 쪽으로 나누
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 평소와 다름없는 습관대로 아프로디테가 뒤늦게 
도착했다. 그녀가 늦게서야  나타난 것은 몸치장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는 태어나던 날과 마찬가지로 알몸 그대로였고 몸에 걸친 것이라곤 마
술 혁대가 전부였다. 하지만 차가운 얼굴과 거만한 표정의 다른 두 여신과
는 대조적으로 아프로디테는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황금 사과를 내게 주면. 이 마술 혁대를 선물로 주마. 이것을 차고 있으
면 누구도 저항할 수 없는 유혹의 힘을  발하게 되지. 그래서 평생 사랑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여자들의 마음을 끌기 위해서라면 파리스가  굳이 마술 혁대를 찰  필요는 
없었다. 지금 당장은 그의 젊음과 미모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젠
가 늙고 추하게 되더라도 여자들에게는 아프로디테의 마술 혁대를 찬 파리
스보다는 차라리 아테나와 헤라가 약속한  영광과 부를 가진 파리스가  더 
매력적으로 여겨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그의  마음을 정하게 한 것
은 아프로디테가 제시한 선물이 아니라, 순전히  그 여신의 아름다움과 향
기와 미소였다. 그는 주저  없이 황금 사과를 아프로디테에게  건네주었다. 
승리한 아프로디테는 그에게 혁대를  주었고 올림포스의 신들에게  소식을 
알리러 달려갔다. 자존심이 크게 상한 헤라와  아테나는 벌써 복수를 생각
하고 있었다. 우선 헤르메스에게 자신들을 모욕한  그 양치기에 대해 빨리 
조사 해달라고 부탁했다. 헤르메스는 즉시 파리스의 실제 출생을 밝혀내어 
두 여신에게 알렸다. 
  "그 양치기는 진짜 양치기가 아닙니다.  그는 프리아모스와 헤카베의 아
들인데 19년 전 부모에 의해 이데 산에 버려졌어요. 그 이유는,  그가 스무 
살까지 살아 있으면 자기 민중과 가족과 스스로에게조차 끔찍한 불행을 끌
어들일 거라는 신탁의 예언이 있었기 때문이랍니다." 
아테나는 즉각 악의적인 계획을 마련하여 헤라에게 알렸다. 
  "파리스에게 출생의 비밀을 폭로해서 트로이의 부모에게  돌아가게 만듭
시다. 그러면 신탁의 예언이 실현될 것이고  우리는 복수하게 되는 셈이지
요."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긴 하지만, 파리스가  부모에게 가서 자신을 밝힌
다고 해도, 아직 19년밖에 지나지 않은 걸  부모들이 안다면 스무 살이 되
기 전에 이번에는 진짜로 그를 죽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  말이 맞네
요. 그렇다면, 파리스의 부모가 19년이 아니라 20년이 지났다고  믿게끔 만
들어 모든 위험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도록  일을 꾸며야겠네요.  부모를 
속이는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마세요." 당시 사람들은 해가 지나
는  것을 정확하게 계산하지 않았다.  지금 이 몇 년, 몇 월인지를 알려주
는 달력이란 게 아직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간이 흐른다는 
것을 달 모양의 변화나 계절의 순환  혹은 나무들이 자라는 모습 등과  같
은 자연 현상들을 통해  대강 측정하곤 했다.  특히 당시의 모든 사람들은 
올리브나무는 심은 지 꼭 20년이 지나야 첫 열매를 맺는다는 걸 알고 있었
다. 한데 독자 여러분은, 헤카베가 아들을 추억하기 위해 그가 태어난 날에 
맞추어 올지브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는 걸  기억할 것이다. 또한 아테네인
들에게 선물하기 위해  올리브나무를 창조해낸 사람이 바로  아테나였다는 
사실도 기억할 것이다.  말하자면 올리브나무는 아테나에게는 아무런 비밀
이 없었고 그녀의 뜻을 거역할 수 없는 처지였다. 파리스의 부모에게 20년
이란 세월이 이미 지났다고 믿게 하려면 아테나가  올리브나무에게 명령하
여 1년 앞서 열매를 맺으라고 하면 되는 일이었고, 아테나는  그렇게 했다. 
올리브나무의 가지에 매달린  열매들을 본 헤카베는 우울한 어조로 프리아
모스에게 말했다. 
  "어머 이것 봐요! 파리스가 죽은 지 20년이 되었네요. 신탁의  예언은 실
현되지 않았어요. 이제 우리도 편한 잠을 잘 수 있겠네요. 하지만  우리 아
이는 영영 다시 볼 수 없겠지요." 
바로 그 시간 이데 산에서는 아테나와 헤라가 파리스를 따로 불러 내어 말
했다. 
  "네게 알려줄 커다란 소식들이 있다. 첫째, 우리는 네가 생각하듯이 단순
한 인간이 아니라 여신들이다.  여기 이 사람은 헤라  여신이고 난 아테나 
여신이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파리스가 대답했다.
  "둘째. 넌 한낱 양치기가 아니라, 트로이의  절대자인 프리아모스와 헤카
베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왕실의 피를 받은 왕자이니라."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라고 파리스가 대답했다.
  "셋째, 그러니 지금 당장 양떼들과 피리와 요정을 놔두고 얼른 트로이로 
가서 부모님께 너를 알려라. 여기서 초라하고  단조로운 양치기 생활을 하
느니 가서 네 신분에 맞는 부귀와 영화를 누려라." 
만일 자기 앞에 준비된 불행을 알았더라면 파리스는 지금껏 지내온 평화로
운 삶에 만족하고는 여신들의 그러한 충고를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는 젊었기에 앞을 내다볼 줄 몰랐고 경망했다. 그래서 한 순간도 주저하지 
않고 길을 떠나기로 했다. 자기의 양부인 양치기와 함께 부모의 왕궁을 찾
아간 파리스는 왕과 왕비를 만나 자신이  누구이며, 양치기에 의해 어떻게 
구원되어 키워졌는지를 설명했다. 그리고 양부인  양치기가 그러한 얘기를 
확인해주었다. 게다가 부모를 닮은  파리스의 얼굴은 그  얘기가 진실임을 
입증해 주었다. 아테나의 간계로  파리스가 스무 살이라는  위기의 나이를 
넘어 섰다고 믿어버린 프리아모스와 헤카베는 몹시 기뻐하며  아들을 맞이 
했고 왕궁의 가장 좋은 방에 그의 거처를 마련해주었다. 파리스는 이데 산
에서 함께 지내면서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던 오이노네에게만은  진실을 말
할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급한 일로 며칠간  없을 것이다."라고만 말하고 
그녀를 떠나고 말았다. 그리고  나서는 그녀를 완전히 잊어버렸다.  가련한 
요정은 상처의 치료사라는 자신의 재능을 스스로에게 적용시켜봤지만 헛일
이었다. 어떠한 묘약과 연고도 사랑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무력했고, 마음
의 상처는 영원히 아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4. 헬레네의 납치 
  파리스가 트로이로 돌아온 후 1년이 지났다.  그 동안 그는 왕자의 습관
을 아주 빨리 몸에 익혔는데, 특히 나쁜 점만을 재빨리 배워  나갔다. 늦게 
일어나 무위도식하며 예쁜 여자와 멋진  말과 화려한 옷에만 관심을  가졌
다. 부모는 태어나자마자 아들을 죽이려 했던  잘못을 보상하느라 그를 애
지중지했고, 뛰어난 외모 덕분에  백성의 사랑을 받았다. 그리하여  화려한 
외양과 친절한 태도 밑에 숨겨진 그의 중대한 결함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
았다. 하지만 그는 게으름뱅이에 거짓말쟁이요 겁쟁이였으며 이 모든 것은 
뒷날 밝혀지게 된다. 모두들 파리스가 스물  한살이라고 믿었지만 정작 그
는 스물밖에 안 되었다. 즉 신탁의 예언대로라면 일련의 재난을 나라에 끌
어들이게 될 바로 그 나이였다. 그의 생일날 부친인 프리아모스는 그를 자
신의 집무실로 불러들였다.
  "네게 맡길 중대한 임무가  있다. 내가 여러 번  얘기해서 너도 기억 할 
테지만. 나의 누이이자 네  고모 되는 헤시오네가  옛날에 헤라클레스에게 
납치되어 그리스에 가 있다. 거기서 아마도 어느 왕의 시녀나 부인(당시에
는 시녀나 부인이나 결국 똑같았다)이 되어 여전히 그리스에 살고 있을 것
이다. 그러니 네가 그리스로 가서 고모를  찾아 이곳으로 다시 데려와야겠
다. 고모가 떠나던 날 내가 그러마고 약속했던 대로  말이야." 그리스를 구
경하게 될 기회를 얻어낸 파리스는 몹시 기뻐하며 당장에 짐을  꾸려 배에 
올랐고 며칠  뒤 그리스 해변에 발을  디뎠다. 당시의 그리스는 50여 개의 
작은 나라들로 나뉘어 각각 왕을 가지고  있었다. 파리스가 정박한 왕국은 
스파르타였다. 그곳은 메넬라오스가 지배하고  있었다. 삼십대의  왕이었던 
그는 당시에, 그리고 이후에도 계속  좀 멍청하다는 평판을 받아왔다. 하지
만 그건 옳지 않은  평가였다. 사실 그는 용감하고  너그럽고 사람들을 잘 
대했으며 아주 올곧은 사람이었다.  유일한 그의  결점은 순박하다는 점이
다 하지만 이게 정말로 결점일까?  그 자신이 거짓말하거나  숨기거나 할 
줄을 몰랐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거짓말이나 위선을  의심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는 어디에서도 나쁜 것을 보지 않았고. 모든 사람을 믿었기에 쉽
사리 속곤 했다. 이외에도 2가지 사실을 특별히 언급해야  한다. 하나는 그
가 사냥에 열광적이어서 대개의 중요한 시간을 사냥하는 데 보낸다는 점이
고, 다른 하나는 그의 아내가 레다와  제우스  사이의 딸인 헬레네라는 사
실이다. 그녀는 '아름다운 헬레네'로 지칭될 정도로 그리스는 물론 전 세계
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로 통했다. 레다는 헬레네를 낳자마자 죽어버렸기 
때문에 그녀의 남편인  틴다레오스가 헬레네를 키웠다.  그는 헬레네를 자
기 딸로 믿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예뻤던 헬레네는  이미 테세우스의 
관심을 끌었던 적이 있었다. 커가면서 그녀는 푸른 눈에 갈색 피부를 가진 
비범한 미인이 되었는데, 이는 그리스에서는 아주 보기 드문 아름다움이어
서 얼굴이나 몸매에서 금발의 아프로디테를 부러워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
다. 게다가 쾌활하고 상냥하고  지적인데다. 부자인 아버지까지 갖고  있었
다. 이러한 온갖 자질을  갖춘 그녀에게 수많은  구혼자가 나타났으리라는 
건 짐작이 가고도 남을 일이다. 그래서  그의 부친이 그녀를 결혼시키겠다
고 공고했을 때, 상황을 고려하여 한 나라에서 한 명의 후보자만을 받기로 
했는데도 50명이나 되는 왕과 왕자들이 줄을  이었다. 이렇게 몰려든 구혼
자들을 보고 틴다레오스는 일견 자부심을 갖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걱정
이 되기도 했다. 헬레네가 선택하게 될 한 사람은 만족하겠지만 나머지 49
명은 불만을 가질 공산이  컸고, 그렇게 되면 그들이  언젠가 헬레네와 그 
남편에 대해 복수할지도 모른다는  염려가 앞섰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50명의 청혼자들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여러분들은 제가 오늘 저녁 마련한 큰 축제에 초대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남편을 선택할 사람은 바로  헬레네 자신입니다. 저로서는 헬
레네에게 어떤 영향력도 행사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다음과 같
은 서약을 할 수 있는 사람들만을  축제에 초대할 생각입니다. 즉 '헬레네
의 남편으로 누가 선택되든  언제나 그의 친구가 될  것이며, 그의 권리와 
명예를 지켜줄 것이며, 그가 요구한다면 힘과  무기로써 도와줄 것을 엄숙
히 맹세한다' 는 서약입니다." 
모두들 자기가 선택될 것이라 자신하고 있었기에 아무도 이러한 서약을 어
렵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째서 헬레네는 용모가 출중하지도 않고,  돈이 제
일 많지도 않고 가장 용감하지도 않고,  가장 똑똑하지도 않았던 메넬라오
스를 선택했을까? 아마도 그가 누구보다도  다정해 보였기 때문이리라. 남
편감으로는 이러한 자질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파리스가 스파
르타에 도착했을 때는 헬레네와 메넬라오스가 결혼한 지 벌써 몇  해가 지
난 후였다. 그들 부부는 서로 마음이 잘 맞았고 헤르미오네라는 딸도 하나 
있었다. 메넬라오스는 행복감으로 충만해  있었고 헬fp네도 불행하지는 않
았다. 다만, 남편을 사랑하긴 했지만 빈번한 사냥으로 자신을  흔자 내버려
두는 게 가끔 불만이었다. 메넬라오스의 잦은  부재로 헬레네는 넓은 궁전
에서 조금은 권태를 느꼈다. 그녀의 유일한  동반자는 딸 헤르미오네와 하
녀들, 그리고 아프로디테처럼 그녀 역시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던 비둘기
뿐이었다. 그곳 주민들로부터 스파르타 왕국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사실
을 알아낸 파리스는 궁전으로 향했고, 왕과 특히 왕비에게 좋은 인상을 주
고자 했다. 그런 목적으로 그는 아프로디테가 선물했던 마술  혁대를 찼다. 
먼저 그를 맞이한 사람은 메넬라오스였다. 
  "저는 트로이 왕의 아들 파리스로, 30여  년 전부터 그리스에 살고 있다
는 저희 고모 헤시오네를  찾아 이곳에 왔습니다. 혹시  저의 일에 도움을 
주실 수 있으신지요?" 
메넬라오스는 그를 친절히 맞이했다.
  "최선을 다해 도와주도록 하지. 하지만 우선 며칠 여기서 머물게나. 궁전
의 방을 하나 마련해줄 테니 거기 머물도록 하고 내일부터  함께 찾아나서
도록 하세." 
파리스는 시간 낭비를 하는 게 아닌가 싶어 그러한 초대에 선뜻 응하지 않
고 있었는데, 그때 헬레나가 메넬라오스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파리스와 그
의 혁대를 바라본 순간 헬레나는 젊은 왕자의 수려한 용모  앞에서 이상한 
흥분에 사로잡혔다. 파리스 역시 그녀와 똑같은 기분을 느꼈는데, 그것은 1
년 전 이데 산에서 아프로디테를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그런 기분이었다. 
그들은 잠시 동안 그러한 감정에 빠져 한마디 말도 못하고  벙어리처럼 있
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메넬라오스는 다시금 자신의 초대를 
강요했다. 
  "기꺼이 그렇게 하지요."
알아듣기 힘들 만큼 빠르게 대답한 파리스의 머릿속에는 더 이상 사냥이나 
헤시오네나 환대의 신성한 규칙 따위가 자리하지  않았다. 오직 그는 헬레
네와 좀더 깊이 사귀어야겠다는  계획만을 즐겁게 세우고  있었다. 뒤이은 
나날 동안 파리스는 매일 아침 메넬라오스를  따라 사냥을 갔다. 활솜씨에 
뛰어났던 파리스는 갖가지 묘기를 부렸고 그러한 파리스와의  사냥이 몹시 
즐거워진 메넬라오스는 하루하루 그의 체류를  연장시켰다. 저녁이면 궁으
로 돌아와 헬레네와 함께 식사를 했다.  낮의 사냥으로 피곤해진 메넬라오
스는 마지막 음식을 삼키기 무섭게 손님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깊고 평화
롭고 원기를 되찾아줄-하지만 경솔한-달콤한 잠에 빠져들기 위해 자기 방
으로 가버렸다. 파리스와 헬레나는 화로 옆에 단둘이 남게  되었다. 파리스
는 유혹자로서의 재능을 마음껏 펼쳐 보였다. 
  "당신처럼 아름답고 똑똑한 여자가,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 하고 
늘 혼자 있게 내버려두는 남편 곁에서 화려한 젊은 날을  허비하고 있다니 
참으로 애석하군요! 당신에게는 여행과 축제와 활기찬 대화, 그리고 무엇보
다도 열정적으로 당신을 사랑하고 밤낮으로 당신 마음을 사로잡을 그런 남
자가 필요해요." 
파리스가 부어준 술과 혀에 발린 칭찬의 말에 게다가 그의  수려한 외모에 
정신이 몽롱해진 헬레네는 남편에 대한 정절의 마음이 차츰 사그라들고 있
었다. 어느 날 저녁 파리스는 더욱더 몰아붙였고, 헬레네 는 마침내 유혹에 
꺾여 그의 품에 안겨버렸다. 다음날 아침  메넬라오스가 사냥에 가기 위해 
파리스를 데리러 왔을 때, 파리스는 몸이  불편한 척하면서 그와 동반하지 
못하겠노라고 말했다. 
  "오늘만큼은 흔자 가세요. 저는 궁에서 좀 쉬어야겠어요."
메넬라오스는 의심 없이 혼자  떠났다. 파리스는 즉시  헬레네에게 올라가 
그녀를 깨워 말했다.
  "난 오늘 트로이로 떠날  거요. 원한다면 당신을 데려가겠소.  거기 가면 
당신은 나와 함께 즐겁고 화려한 삶을 즐길 수 있을 거요."
   "하지만 메넬라오스는요?" 
헬레네는 주저하며 물었다. 
  "사실 메넬라오스는 진정으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그는 당신을 치
워버리고 거리낌없이 자신의 여가를 즐길 수 있게 된 걸  오히려 만족스러
워할 거요." 
  "그러면 내 딸 헤르미오네는 어떡해요?"
  "그 애 걱정도 할 것 없소. 메넬라오스는 좋은 남편이라기보다는 훌륭한 
아버지죠. 그러니 자기 애를 아주 잘 돌볼 거요." 
헬레네는 마침내 설득 당하고 말았다. 그녀는 서둘러 짐을  챙겼다. 자기의 
옷가지며 개인 용품들 외에도 그녀는 파리스의 요청으로  메넬라오스의 금
고를 열어 물건을 훔쳐냈다.  그리하여 메넬라오스의 황금과  보석 그리고 
예술품들을 3개의 궤짝에 쓸어담았다. 서두르는  통에 헬레네는 자신의 애
완 비둘기를 빠뜨리고 말았다. 오후  2시. 하인들과 경비병들이 낮잠  자는 
시간을 이용하여 파리스는 마차를 끌어내어 헬레네와 짐들을  싣고 항구로 
달렸고, 정박해 있던 자신의 배에 올라 돛을 모두 올리고는 트로이로 향했
다. 밤이 되자 메넬라오스는 만족스러운 한나절을 보낸 뒤 궁으로 돌아 왔
다. 그는 즐거운 기분으로  헬레네의 방으로 올라갔으나. 방에는  비둘기와 
파리스가 남기고 간 조롱 섞인 글귀만이  놓여 있었다. 거기에는 '사냥 나
간 자는 자기 자리를 잃게 마련'이라고 적혀 있었다.

    5. 전쟁의 준비 
  경악과 고통에 짓눌린 메넬라오스는 몇 날인가를 아무런 반응 없이 보냈
다. 그리고 나서 원기를 회복하고는 맏형  아가멤논을 찾아가 도움과 조언
을 구했다. 아가멤논은 그리스와 50개 나라 중 가장 크고 강력한 나라였던 
아르고스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나라 왕들의  두려움과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권세와 부를  가진 그는 대단히  거만하고 권위적이었지만 
자기 가족 특히 동생에 대해서만은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메
넬라오스의 불행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아가멤논은 도저히 냉담할 
수가 없었다. 헬레네의 부정과  파리스의 위선에 분노한  아가멤논은 우선 
도망간 헬레네와 훔쳐 간 보물들을 돌려달라고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와 
교섭해보겠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대사  한 명을 트로이에  파견했지만 성 
공하지 못했다. 끔찍이나 사랑하는 아들에게 고통을  주고 싶지 않았던 프
리아모스가 완강하게 나왔기 때문이다.
  "예전에 당신들이 헤시오네를 앗아갔기 때문에 헬레네를 데려온 것이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인 셈이오." 
그리고는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대사를 항구로  되돌려보냈다. 교섭에 실패
한 아가멤논은 이웃 나라 왕인 네스토르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는 많은 경
험과 지혜로 존경받고 있던 여든 네살의, 그리스의 최고  연장자 왕이었다. 
늙어가면서 지나치게 말이 많아지고 망령도 부렸지만 여전히  좋은 충고자
였다.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로부터 헬레네의 납치에 대한 전모를 전해 들
은 네스토르는 끝도 없는 연설을 시작하더니,  이전에 있었던 역사적인 일
들을 주워섬겨가며 찬반 양론을 비교 검토하느라 이야기를  너무 복잡하게 
끌어가는 바람에 아가멤논이 찾아온 목적을 잊어버릴 정도여서  몇 번씩이
나 그것을 다시 일깨워 줘야 했다. 마침내 정신을 차린 네스토르는 메넬라
오스 개인을 상대로 그리스 전체에 가해진  치욕을 씻어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그리스의 모든 군대가 합세하여 트로이에 토벌대를  파견해야 한
다고 선언했다. 그리고는 아가멤논에게 덧붙여 말했다. 
  "그리스의 중요한 왕들을 찾아가서 이  토벌대에 참가할 것을 부탁하게. 
그들에게 헬레네의 약혼식 때 그녀가 선택한  남편을 도와줄 것이며, 필요
한 경우 자신들의 힘과 군대를 보내줄  것을 선서했던 일을 환기시키시오. 
또한 그들을 좀더 잘 설득하기 위해서는 트로이가 함락 되면  전리품을 널
리 함께 나누겠다는 약속하게."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가 맨 처음 찾아간 왕은 디오메데스였다. 그는 칼리
돈의 멧돼지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칼리돈 왕국을 
지배하고 있었고 몇 년 전 그나라를 휩쓸었던 작고 땅딸막하고  검은 털을 
가진 억센 멧돼지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닮았기 때문이다. 그는 용감
하고 투지가 있었으며 지칠 줄 모르는데다가 얻어맞거나 상처를 입어도 튼
튼히 버티었다. 모험이나 싸움에 언제나 응하던  그는 토벌대 참가를 열광
적으로 수락했다. 아가멤논이 두번째로 찾아간  사람은 프키아모스의 누이
인 헤시오네와 결흔한 텔라몬 왕의 아들인  아이아스였다. 같은 이름을 가
진 그리스의 왕과 구별하기 위해 그를 '키 큰 아이아스' 라고 부르기도 했
다. 실제로 그는 2미터가 넘는 키에 몸무게가 100킬로그램  가까이 나갔다. 
게걸스럽게 먹고 밑 빠진 독처럼 마셔댔으며, 말 1마리를 어깨에 들어올릴 
수 있었고 무릎에 대고 팔을 구부릴  수 있었다. 7마리의 소가죽을 포개어 
만든 그의 방패는 보통 사람 둘이 들어도  무거운 것이었다. 그는 유년 시
절에, 부친 텔라몬의 절친한 친구였던 헤라클레스에게 특별한 체육 교육을 
받았다. 불행하게도 그의 두뇌는 이두박근만큼 발달하지 않아서 겨우 평균 
수준을 유지할 정도였다. 그래서 아가멤논의 얘기를  이해하는 데 왜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황금과 술과 여자와 노예를 데려올 수 있다는 희
망으로 전쟁에 나선다는 사실 을 마침내 깨닫고는 쉽게 일에 동의했다, 이
제 아가멤논에게는 제일 어려운 일이 남았다. 그리스에서 가장 유명하면서 
토벌대의 승리에 반드시 필요한 두 왕을 설득해야 했던 것이다. 그들은 오
디세우스와 아킬레우스였다. 오디세우스는 이타케라는 작은 섬의 지배자일 
뿐이었지만 그리스 전역에서 유명했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체력이 
아니었다. 유연하고 기운차긴 했지만 거구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고 그
의 용맹함 때문도 아니었다.  용감하긴 했지만 쓸데없는  위험을 무릅쓰진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잘생겨서도 아니었다. 힘있는 모습과  균형 잡
힌 체격을 갖추긴 했지만 아폴론 같은  미남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좀 작은 듯한 키와 대머리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는 머리 때문
에 은근히 고민하기조차 했다 오디세우스를 돋보이게 하고  명성을 드높이
게 한 것은 바로  그의 지능이었다. 그는 그리스에서  가장 섬세하고 가장 
능란하며 가장 통찰력 있고 가장 교활하며 가장 웅변적이 라는  걸 모두가 
인정했다. 이렇듯 뛰어난 지능은 천부적인 자질이기도 했지만 어린 시절부
터 그것을 갈고 닦는 일을 계속했던 덕분이기도 했다. 일례로 그는 자신의 
암기력을 유지하기 위해 50개나 되는 그리스의 모든 나라의 이름과  그 지
배자의 이름 그리고 그들 자손의 이름까지  줄줄이 외웠다. 때로는 재미삼
아 그 이름들을 나라 이름의 알파벳 순서로  외워보기도 하고, 혹은 왕 이
름을 알파벳 순서로 또는 왕의 장남 이름을 알파벳 순서로도  외워보곤 했
다. 그리고 유연한 손놀림을 개발하기 위해 목공일이나 철공일,  무기 제조 
따위에 몰두하여 몇 시간씩 작업장에서 보내곤  했다. 게다가 연설 연습의 
일환으로. 발음에 관련된 아주  세세한 실수를 교정하기  위해 "간장 공장 
공장장은 장공장장이고..." 따위의 아주 까다로운 문장들을 읽는 연습을 매
일같이 했다. 아가멤논이 징병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했을 때,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섬에서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는 1년 전 페넬 
로페라는 아름답고 온유하며 충실한 아내와 결혼하여 이제  막 사랑스러운 
첫아들 텔레마코스를 얻은 참이었다. 오디세우스의  부모들은 연로하긴 했
지만 아직 살아 있었고 아들 며느리 내외와 화목하게 지내고 있었다. 말하
자면 오디세우스는 멀고도 위험한 토벌대에 참가하기 위해 자기 나라와 궁
전과 가족을 떠날 기분이 전혀 아닌 상태였다. 더욱이 당시는 신문이나 라
디오 혹은 전화 따위가 없던  때라 오디세우스는 아가멤논의 계획에  대해 
전혀 알 수 없었고  아무런 걱정 없이 지내고  있던 터였다. 오디세우스의 
가장 친한 친구는 네스토르였다. 지혜가 가득한 이 나이 많은 왕에 대해서
는 이미 여러 차례 말했었다. 네스토르는 그의 후견인으로서 오디세우스에
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오디세우스는  고마움의 표시로 그를 텔
레마코스의 대부로 삼았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아가멤논이 디오메데스
와 아이아스에 뒤이어 이번에는 오디세우스를 찾아가 트로이  토벌대 참가
를 부탁하겠다고 했을 때 네스토르는 그를 말렸다. 
  "불쌍한 오디세우스는 그냥 내버려두게. 결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데
다 이제 막 아이를 갖지 않았나.  그를 가정에서 떼낼 때가 아닌 듯  싶네. 
게다가 부친인 라에르테스는 몇 년 전부터 왕위를 아들에게 넘겨주었기 때
문에 다시 일을 하기에는 너무 늙었어."
네스토르의 이 마지막 말은 참으로 의외였다. 왜냐면 자신은 라에르테스보
다 열 살이나 위였으면서도 여전히  완벽한 지배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아가멤논으로서는 그러한  이유로 설득당할 처지
가 아니었다. 
  "자발적으로든 강제로든 토벌대를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그가  필요합니
다. 그가 참여해야만 해요." 
네스토르는 더 이상 주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디세우스에게 편지를 보내 
아가멤논의 교섭을 미리 알려주어 핑계를 찾아낼 시간을 갖도록 하기로 했
다. 그런데 혹시나 편지가 아가멤논의 부하들에게 가로채질까 걱정이 되어 
그는 오디세우스만이 알아볼 수 있게끔 편지를 썼다 밀랍 판자  위에 씌어
진 편지는 다음날 아침 오디세우스에게 전달되었는데 그 내용은 이러했다.
  아가멤논의 요청에 
  흔쾌히 응하리라는 걸 의심치 않네. 
  절대로 귀기울이지 말게나. 
  신중함과 이기심의 소리에 말일세. 
  자네가 아프거나 미쳤다고 하며 
  시기심 많은 자들은 자네를 모함하면서 
  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을 것을 믿고 있다네. 
  자네는 분명 그들의 음모를 좌절시킬 수 있을 걸세. 
  추신. 짧은 편지를 용서하게. 하지만 자네는 명석한 머리를  가졌으니 내
가 편지를 반으로 줄여 썼더라도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걸세. 
이 이상한 편지를 읽고 나서 오디세우스는 편지 안에 뭔가  비밀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편지를 반으로 줄여 쓴다는 건' 무슨 소리일까?를 생각
해보았다. 그래서 우선 편지의 앞부분과 뒷부분을 나누어 반만 읽어보았지
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한 줄 씩 건너뛰어서 읽어보았
더니 내용이 분명해졌다. 
  아가멤논의 요청에 
  .....
  절대로 귀기울이지 말게나. 
  .....
  자네가 아프거나 미쳤다고 하며 
  .....
  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을 것을 믿고 있다네.
아가멤논이 그날 오후  자신을 찾아온다는 전갈을  받은 오디세우스는  곧  
  그의 방문 목적을 알아차렸고, 네스토르의 충고대로 미친 사람으로 가장
하여 아가멤논을 따르지 않기로 작정했다. 아가멤논이 이타케 섬에 도착했
을 때 맨 처음  만나게 된 사람이 바로  오디세우스였는데, 그는 벌거벗은 
몸으로 시선을 한곳에 고정시킨 채 얼빠진 표정으로 두서 없는  말을 중얼
거리면서, 쟁기로 해변의 모래를 갈고 거기에 소금을 심어대고 있었다. 
  "간장 공장 공장장은  장공장장이고 된장  공장 공장장은 강공장장이다. 
이 콩깍지는 깐 콩깍지냐 안 깐 콩깍지냐. 이 그림은 내가 그린 기린 그림
이냐 네가 그린 기린 그림이냐." 
아가멤논은 처음에는 오디세우스가 완전히 미쳐버렸다고 생각하고는  그를 
끌어들일 생각을 아예 포기해버리려 했다. 그런데  문득 그것이 어쩌면 오
디세우스의 교묘한 술책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오디
세우스가 정말 미친 건지 알아보자' 는 생각으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이보게 친구, 날 알아보겠나? 난  아가멤논이고 여기 같이 있는 자들은 
메넬라오스, 디오게네스, 아이아스 그리고 여러  다른 친구들이라 네. 우리
는 자네에게 중대한 일을 얘기하러 왔다네." 
오디세우스는 마치 아무것도 듣도 보도 못한  양, 태연하게 고랑을 계속해
서 매고 있었다. 아가멤논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런데 같이 온  일행 중
에 팔라메데스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신이 오디세우스만큼 똑똑하다
고 생각하고 있었고 오래 전부터 그 사실을 입증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는 마침 좋은 생각이 떠올라 오디세우스의 궁전으로 달려가 어린 텔레마
코스를 엄마의 품에서 떼어내어 해변으로 데려와서는 아이를 오디세우스가 
이끌고 있던 쟁기 바로 앞 땅바닥에  놓아버렸다. 오디세우스는 자기 아이
가 쟁기 밑에 깔려버리려는  것을 보고는 갑자기 멈춰  섰고, 자신이 하고 
있던 연극을 잊어버린 채 소리를 질렀다. 
  "뭐 하는 짓이야, 팔라메데스 자네 미쳤나?"
  "아니. 미치지 않았다네. 그리고 자네 역시 미치지 않았다는  걸 이제 알
게 되었다네." 
그리하여 속임수를 쓴 사람이 되레 속임수에  넘어간 꼴이 되었다. 자신의 
술책이 좌절되었음을 깨달은 오디세우스는 아가멤논의 요청에 더는 거절할 
구실이 없었다.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에 참여할 수 밖에 없었다. 
  "다음은 누구 차례인가?" 
라고 묻는 아가멤논의 질문에 메넬라오스가 대답했다. 
  "미르미돈족의 왕 아킬레우스." 
아킬레우스라는 이름이 말해지자 모여 있던 왕들 사이에 일순 침묵이 감돌
았다. 그들 모두는 토벌대에서 아킬레우스가 차지하게  될 크나 큰 중요성
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아킬레우스는 그리스 전체에서 가장 
뛰어난 투사라는 걸 모두가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킬레우스는 신인
(신과 사람 사이의 자식)이었다. 그의 모친은 테티스라는 여신이었으며, 그
녀가 올림포스에서 인간 펠레우스와 결혼할  때 앞서 얘기했던 황금  사과 
사건이 벌어졌다. 그런데 부친인 펠레우스의 혈통을 따져보면, 그의 조부가 
제우스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사실이 있었다.  그러므로 아킬레우스는 사실
상 62.5퍼센트의 신의 피를 가진 셈이었고, 그래서  그를 '신성한 아킬레우
스'라고 불렀다. 게다가 아킬레우스의 부친인 펠레우스는 아이아스의 부친 
텔라몬과 형제지간이었기 때문에  아이아스와는 사촌지간이었다. 아킬레우
스가 태어났을 때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앞날을 알아보기 위해  신탁을 찾
아갔는데 그때 신탁은 이렇게 예언했다. 
  "당신 아들의 운명은 아직  그려지지 않고 있소.  그의 생은 영광스럽고 
짧든지, 아니면 길지만 보잘것없는 것이오."
어느 어머니라도 그렇게 했을 테지만, 테티스 역시 두번째  것을 선택했다. 
하지만 혹시 있을지도 모를 위험한 전쟁에 대비해서 아들을 스틱스 강물에 
목욕시키기로 했다. 그 강물에  몸을 담그면 온몸이  상처로부터 보호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기의 오른쪽 발목을 잡고 머리를 아래로 하여 잠시 동
안 신비의 강물에 몸을 잠기게 했다. 익사하거나 폐렴이 걸리지 않게끔 조
심하여 차가운 강물에  목욕을 시키고 나자,  아킬레우스는 어떤 상처에도 
끄떡없게 되었다. 단지 손으로 잡고 있느라 물에  잠기게 할 수 없었던 오
른쪽 발목만은 예외로 남았다. 이 조그만  실수를 보충하기 위해 테티스는 
어린 시절부터 아들의 오른발에  청동 발굽을 신겨주었다.  테티스가 늑대 
등심, 사자 구이, 호랑이 뇌, 곰의 골수 등을 재료로 만들어준 독창적인 영
양식 덕분에 아킬레우스는 놀라운 투사가 되었고, 용맹스러운 투지와 더불
어 무기를 다루는 뛰어난 솜씨 그리고 비범한 달리기 능력으로  이름을 날
렸다. 특히 놀라울 정도로 빨리 달려, '날아가는 발을 가진 아킬레우스' 라
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게다가 이 모든 것을 완성하기라도 하듯 신처럼 
아름다운 용모까지 갖추고 있었다. 아들을  위험한 일들로부터 모면시키기 
위해 수많은 예방을 했지만 서도 테티스는  항상 조바심을 쳐댔다. 그러던 
어느 날 올림포스에서 아테나와 넥타르주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던 중 아가
멤논이 토벌대를 위해 아킬레우스를 동원시키려 한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
게 되었다. 테티스는 급히 아들을 찾아와 그  일을 수락하지 말 것을 애원
했다. 
  "이 전쟁은 길고도 살인적인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전쟁이 네게는 
치명적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단다." 
어머니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아킬레우스는 자기 나라를 떠나 이웃 나라의 
왕인 리코메데스에게 가서 피신해 있겠다고 했다. 리코메데스는 이전에 테
세우스를 벼랑으로 밀어버려 죽게  한 바로 그자이다.  그는 아킬레우스를 
반가이 맞아들였다. 아킬레우스가 찾아온 까닭을  전해 들은 리코메데스는 
아가멤논의 징병을 피하려면 여자로 변장하여 여자들의 숙소로  가서 숨어 
있으라고 충고했다. 그곳에는 2백 명이나 되는 여자들만 있기 때문에 아무
도 아킬레우스를 찾아내지 못할 거라고 했다. 아가멤논이 메넬라오스, 디오
메데스, 아이아스 그리고  오디세우스를 동반하고  아킬레우스를 찾아왔을 
때 그들의 영웅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조심성 없는 하인들 덕에 아가멤논
은 아킬레우스가 리코메데스의 집에 피신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곧 그
리로 향했다. 이러한 상황에  이르자 리코메데스는 그의 본성을  드러냈다. 
그가 테세우스를 죽였을 때, 사람들은 그  동기가 순전히 정치적인 이유일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리코메데스는 근본적으로 시기심이  많은 인물이었
고 친구를 배신하면서 쾌감을 느끼곤 했다.  그리하여 그는 아무런 주저도 
없이 아가멤논에게 아킬레우스가 숨어 있는 곳을 가르쳐주었다. 하지만 긴 
옷을 입고 베일을 드리워 똑같은 모습으로 보이는 2백 명이나 되는 여자들
이 경계하는 빛으로 아가멤논 앞에 나타나자, 그로서도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어떻게  그 중에서 아킬레우스를  찾아낼 수 있겠는가? 
디오메데스는 습관적인 난폭함과 거친 말투로 말했다. 
  "옷을 벗겨버리면 아킬레우스가 누군지 금방 드러날 거요." 그러나 숙소
의 여자 사감은 순결을 이유로 내세우며  그같은 제안에 반대했다. 오디세
우스는 아킬레우스를 식별할 방법을 발견했다. 그는 상인으로 변장하여 자
신이 가져온 물건들을 아가씨들에게 보여주러 들어갈  수 있도록 여사감의 
허락을 얻어내었다. 여자들을 들어오게  하고는 오디세우스는 테이블 위에 
브로치, 반지, 팔찌, 향수병 등을 늘어 놓았다. 이러한 여성용  액세서리 가
운데 오디세우스는 멋진 검과 2개의 단도를 슬쩍 끼워놓았다. 모든 여자들
이 장식품들을  가지려고 앞다투어 서둘러대고  있었는데, 단 한 사람만은 
칼과 검에만 관심을 가지면서 그 것을 들어보고 칼날을 만져보곤 했다. 오
디세우스는 그자의 베일을 벗겨내면서 아가멤논에게 말했다. 
  "자, 이 자요." 
당황한 아킬레우스는 더 이상 아가멤논의 요구를  피할 수 없었다. 아들이 
전쟁에 참여하는 걸 더는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테티스는 이렇게 
된 이상 그에게 가장 훌륭하고 무서운 무기를 마련해주는 게  자신의 의무
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공업의 신 헤파이스토스를  시켜 청동으로 된 투구
와 갑옷과 방패를 직접 만들게 했는데, 그것들은 햇빛이 반사되면 눈을 뜨
지 못 할 정도로 광채를 발했다. 물푸레나무로 만든 창은 웬만한 투사들도 
다루기 힘들 만큼 무거웠다. 양면의 날을 가진 청동검은 백 개의 보석으로 
장식된 칼자루가 달려 있었다. 이렇게 갖추고 나자 아킬레우스는 무적자처
럼 느껴졌다. 디오메데스, 아이아스, 오디세우스 그리고 아킬레우스까지 합
세하자 나머지 그리스의 왕들을 모집하는 일은 아가멤논에게는  단순한 형 
식 절차일 뿐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 2주일 후 그들은 각자의 군대와 함께 
아울리스 항구에 집합하여 고대의 가장 유명한 원정인 트로이 전쟁을 위해 
떠날 준비를 했다.


    6. 이피게네이아의 희생과 트로이 도착 
  트로이로 떠나기 위해 아울리스 항에  모여든 그리스 군대는 10만  명에 가까
웠고, 각각의 왕국을 대표하는  50개의 연대로  나뉘어 있었다.  그리고 1,186척
의 범선 함대가 그들을 실어 나르기로 되어  있었다.  당시 군인들의 무기는 일 
대 일의 육박전을 위한 창과 검, 그리고 원거리 전투를  위한 투창과 활, 화살로 
이루어져 있었다. 투사들 모두는 투구와  가슴을 보호하기 위한 갑옷, 가죽 각반
과 방패로 무장했다. 특히 방패는 소가죽을 겹쳐 만들어 한데 꿰맨 것으로 때로
는 청동판을 사이에 끼워넣어 좀더  튼튼하게  하기도 했다. 졸병들은 걸어다니
며 싸웠지만 장군들은 말 2마리가 끄는 이륜 마차를 탈 수 있었다. 이륜 마차에
는 2명씩 탔는데, 한 사람은  마차를 몰았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옆에서 상황에 
따라 창이나 검, 활 또는  투창을 써가며 싸웠다.  '왕 중 왕' 의 칭호를 가졌던 
아가멤논은 이론상 최고 사령관의 직책을 수행했다.  하지만 중대한 결정을  위
해서는 언제나 왕들을 모아놓고 의견을 경청했다. 특히 네스토르의   경험, 오디
세우스의 지력, 아킬레 우스와 디오메데스의 대담성을 높이 샀으며, 자존심을 상
하지 않게 하려고 키  큰 아이아스의 의견도 들었고,  점쟁이로  통하던 야룻한 
인물인 칼카스의 예언도  고려했다. 아가멤논은  칼카스의 도움을  곧 받아야만   
했다. 그리스의 군대가 범선에 오른 지 한 달이 지나도록 그들은 여전히 항구에 
묶여 있었던 것이다. 에게 해에는 바람 한 점 불지 않았고, 바람이  없기에 범선
들은 꼼짝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칼카스는, 바다가 이처럼 평온한 이유는 사냥
의 여신 아르테미스가 바람의 신 아이올로스를 시켜  바람을 막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칼카스의 설명에 따르면,  아가멤논이 언젠가의 사냥 시합  도중 신의 
사슴 한 마리를 활로 쏘아  죽이고  나서 '아르테미스도 이처럼  잘하지는 못할 
것'  이라고 말했는데, 그 일로  이 여신이 몹시 기분이 상해 있다는 것이다. 모
욕을 당한 아르테미스가 아이올로스에게 그리스 함대의 출발을 방해하라고 시켰
던 것이다. 
  "어떻게 하면 아르테미스의 화를 가라앉힐 수 있을까?"    아가멤논은 칼카스
에게 물었다. 
  "유일한 방법은 당신의 열여섯 살 난 딸 이피게네이아를 아르테미스에게 희생
시키는 것이다." 
처음에 아가멤논은 단호히 거절했다. 하지만  미풍이라도 불기를 헛되이 기다리
다 지쳐버린 그리스의 왕들은 칼카스의  충고를 따르지  않는다면 모두  자기들 
나라로 되돌아갈 테니 아가멤논 흔자  알아서  하라고 협박했다. 그제서야 아가
멤논은 굴복하는 척했다. 
  "나야 심부름꾼을 보내 딸을 데려오고  싶지만, 제 엄마인 클리타임네스트라가 
절대 보내려 하지 않을걸." 
아가멤논의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아름다운 헬레네의  자매, 아니 이복 자매
였다. 둘 다 레다의 딸들이긴 했지만  헬레네가  제우스에 의해 수태된 반면 클
라타임네스트라는 레다의 남편 틴다레오스 왕의 진짜 딸이었다. 두 자매는 생김
새나 성격이나 전혀 닮은 데가 없었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까다롭고 깐깐한 성
격인 데 반해 헬레네는  애교가 넘치고 매력적이었다. 아가멤논은 다른 모든 사
람들에게는 권위적이고 퉁명스러웠음에도  아내에게만큼은  꼼짝못했다. 그러나 
아가멤논은 자기 딸을 오게 할 수 없다는 자신의 거부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번
만큼은 클리타임네스트라의 못된  성격을 이유로 내세울 수 있다는  사실에  은
근히 만족했다.  하지만 불행스럽게도 오디세우스가 그러한 핑계에 즉각 대응책
을 찾아냈다. 
  "클리타임네스트라에게 당신이 이피게네이아를 아킬레우스에게   시집 보내기
로 했으며, 결혼식은 출항 전에 거행되기로 했다고 편지를  쓰시오. 그녀는 자기 
딸이 그리스에서 가장 멋진 결혼 상대자를 맞이 했다고 몹시 기뻐할 거요." 
  "하지만 아킬레우스가 자기 이름을 이용한 걸 알면 뭐라 하겠소?" 아가멤논이 
반박하자 오디세우스가 대꾸했다. 
  "아킬레우스가 그 사실을 알 필요는 없어요." 
아가멤논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클리타임네스트라에게 심부름꾼을 
보내 이피게네이아를 아킬레우스에게 결흔시키기로 했으니  지체하지 말고 이피
게네이아와 함께 아울리스로 오라고 했다. 하지만 왕들이 흩어지고 나자, 자신의 
딸을 희생시킬 수 없다고 생각한 아가멤논은 가장 충실한 하인  하나를 불러 말
했다. 
  "말을 타고 빨리 궁으로 달려가서 클리타임네스트라 왕비에게 내가 보낸 전령
의 말을 절대 고려하지 말고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이피게네이아를 여기에 데려
오지 말라고 전해라  " 하인은 전속력으로  출발했지만 야영지를 벗어나기도 전
에 메넬라오스와 마주쳤다. 
  "어디를 그리 급히 가느냐?" 
메넬라오스가 묻자 난처해진 하인이 대답했다. 
  "말할 수 없습니다." 
메넬라오스가 얼르고 달래고 위협하자, 하인은 결국 비밀을 누설하고 말았다. 그
러자 메넬라오스는 아가멤논의 텐트로 달려가  자기 형의 술수와 배신을 비난했
다. 아가멤논은 고통스러워했고 눈물을 흘리며  변명하려 했다.  
  "메넬라오스, 내가 얼마나 널  사랑하여, 너를 도우려고 했는지는  너도 잘 알 
거다. 하지만 어떻게 내  딸을  죽게 하라고 요구할  수 있느냐?  너라면 네 딸 
헤르미오네를 그렇게 희생시킬 수 있겠느냐?" 
그 말에 마음이 움직인 메넬라오스는 화를   가라앉혔다. 하긴 헬레네를 되찾고 
파리스에게 복수하겠다는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 때문에  무고한  사람의 생명을 
회생시킬 권리가 그에겐 없었다.
  "형의 말이 맞아요. 그러한 죄를 짓느니 차라리 토벌대 계획을 포기하는 게 나
아요." 
그리하여 트로이 전쟁은 시작도 되기 전에  끝나버릴 뻔했다. 하지만 다른 왕들
은 이 일에 대해 의견이 달랐다.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가 텐트를 나서며 처음 
만난 사람은 오디세우스였다. 그들이 오디세우스에게  토벌 계획을 취소할 의도
를 전하자 그는 화를 내었다. 
  "뭐라고? 우리들을 가족과 왕국을 떠나게 하고 선박까지  띄우게 하더니 이제 
와서 우리를 천박한 하인들인양  해고하겠다고? 정 그렇게 하겠다면, 군대 전체
를 당신들에게 대항하도록 선동하겠소." 
아가멤논은 논쟁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닫고는 그저  오디세우스에게 이렇게 말
했다. 
  "자네는 말만 부드럽게 할 뿐, 돌  같은 마음을 가졌군." 다음날 클리타임네스
트라와 이피게네이아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야영지에 도착했다. "나가서 산책 
좀 하고 있거라. 네 엄마와 할 얘기가 있다." 아가멤논이 딸에게 말했다.  클리타
임네스트라와 단둘이  된 아가멤논은 어디서부터 얘기를 꺼내 야 할지 몰랐다. 
  "어디에서도 결흔식 준비를 볼 수 없으니 어찌된 일이에요? 식이 거행될 제단
은 어디 있어요?" 
클리타임네스트라가 놀라며 물었다. 
  "제단이 아니라 화형대가 세워질 거요." 
아가멤논이 대답했다. 그리고는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분노한 클리타임네스트라
는 만일 그러한 계획이 실행된다면 가차없는  복수를  하겠노라고 위협했다. 그
러는 동안 군사들은 이피게네이아를 붙잡아 화형대로 데려갔다. 화형에 앞서 우
선 그녀의 목이 잘려질   것이었다. 그런데 이피게네이아를  함정에 끌어들이기 
위해 자기의 이름을 팔았다는 사실이  아킬레우스의 귀에 들어갔다 화가  난 아
킬레우스는 화형  집행지로 달려갔고. 이피게네이아의 앞을 가로막고는 칼을 뽑
아 들면서 그 처녀를 구하기 위해  그리스 군대를 모두 쳐부수겠다고 공언했다. 
아킬레우스가 자아낸  공포가 하도 끔찍해서 그를 에워싼 10만의 군인  중 누구
도 감히  나서지 못할  정도였다. 그들 중 유일하게  테르시테스란 자만이 이번 
기회에 자기를 좀  과시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앞으로 나섰다. 테르시테스는 절름
발이에  허리도 굽은데다 대머리였고 눈곱까지 끼어 있어 몹시 추한 모습을  하
고 있었다. 그는 그리스 군인들 가운데 가장 못생기고 말이 많고 천박하며 비겁
한 자로 꼽혔다. 
  "기숙사의 처녀들 틈에 끼여 숨어 있을 때는  그렇게 허세를 부리지도 못했으
면서." 
라고 아킬레우스를 모욕했다. 하지만 아킬레우스가  무섭게 노려보자 입을 다물
어버렸다. 다시금 토벌 계획은 유예 상태에 빠졌다. 그때, 야영지를 짓누르던 침
묵 속에서 이피게네이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킬레우스, 당신은 그리스 사람 중에서  가장 귀하고 용감하며 인자한 분이
에요. 제가 당신의 아내가 된다면  몹시 기쁠 거예요.  하지만 그리스의  명예와 
영광을 위해 제가 죽어야 한다면 이 한몸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답니다."
그리고는 단호한 걸음으로 제물  집행자가 기다리고 있는   화형대로 올라갔다. 
그런데 집행자가 이피게네이아를  향해 칼을 들어올린 순간,  기적과도 같은 일
이 벌어졌다. 이 모든 장면을  내려다보고 있던 아르테미스가 처녀의 용기에 감
동하여 이피게네이아를 구름 속으로 사라지게 하고는 그녀 대신 암사슴 1마리를 
바꿔놓아 사슴의 목이 잘려나가게 했던 것이다.  곧이어 바람이 다시 일었고 그
리스  선박들은 떠날 준비를 했다.  며칠 후 선박은  트로이의 해안을 볼 수 있
게 되었다. 

    버려진 필로크테테스 
  그리스 군의 상륙을 며칠 더 지체시킨  마지막 사건이 있었다. 트로이에 도착
하기 앞서 물과 식량의 보급에  신중을 기하고자 아가멤논은 트로이  해변 맞은 
편에 있던 렘노스 섬에 잠깐  머물기로 했다.  그런데 그리스 군들이 섬에 발을 
내딛자마자 필로크테테스라는 왕자가 독사에  발을 물려버렸다. 알다시피 이 왕
자는 젊었을 때 헤라클레스와 절친했던  사이였고, 헤라클레스가 죽으면서 자신
의 활과 화실을  물려주었던 자이다. 헤라클레스의  화살은 예외적인 위력과 정
확성을 가진 것으로 그 사용법은 오로지 필로크테테스만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리스 군대는 트로이  군을 함락시키는 데에서 그에게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
다.  필로크테테스가 사고를 당한 처음 며칠간은 모두들 그를  에워싸며 따뜻한 
동지애를  보여주었다. 서둘러 상처를 치료해주며 그를 격려하기도 했다. 
  "우리가 돌봐줄 테니 걱정 말게 이틀 후면 괜찮아질 걸세." 이틀이  지나도 독
은 여전히 남아 있었을 뿐만 아니라 상처에  염증까지 생겼다. 부패한 상처에서 
악취 나는 고름이  흘렀고 열에 들뜬 필로크테테스는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질렀
다 냄새와  비명에 점점 더 어찌해볼  도리가 없게 된 동료들  사이에서는 처음
에 가졌던 동정심이 곧 참을 수 없다는 심정으로, 그러다가 분노로, 급기야는 혐
오감으로 바뀌고 말았다. 오디세우스는, 필로크테테스를 처량한 운명 속에  내버
려 둔 채, 밤을 이용하여  군대 전체를 몰래 다시 배에 태워 떠나자고 아가멤논
에게  제안함으로써 다시금 그의 모진 성격을 드러냈다. 메넬라오스는 필로크테
테스의 편을 들어 그가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며 중재에 나섰다.  하지만 오디세
우스는 필로크테테스가 헤라클레스로부터  물려받은 활과 화살로  날짐승이라도 
잡아먹으며 연명할 거라고 대꾸할 뿐이었다.  그리하여 그리스 군대는 필로크테
테스를 버려둔 채 다시 배에 올랐고 며칠 후 트로이의 해안에 닿았다. 

    트로이에 첫발을 채딛는 자의 희생 
  여행의 초반부터 군인들 모두는 배에서  내리게 될 최초의 그리스인  이 누가 
될까에 대해 강한 호기심과 얼마간의  불안감을 가지고 궁금해 했다. 
해변에 맨 처음 발을 내딛는 자가 맨 먼저 죽게 될 거라는  점쟁이 칼카스의 예
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배가 뭍에 이르렀는데도,  내리려는 소동이 전
혀 없었다. 모두들 잃어버린 투구를 찾느라, 갑옷의  가죽끈을 다시 조이느라 혹
은 각반을 고쳐 매느라 느릿거리며 바쁜 체했다. 마침내 한 남자가 땅으로 내려
섰다. 그는 프로테실라오스 였는데  트로이로 떠나기 하루 전날  결혼했다. 그가 
땅에 내리자마자  트로이의 성벽에서 화살이 날아와 목을 관통했다. 그는 곧 숨
을 거두었다. 그리스  군대는 프로테실라오스의 헌신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모
든 걸 알면서도 자신의 목숨을  희생했고 젊은 아내를 영원히  떠나버렸던 것이
다. 군인들  모두 차례로 배에서 내려 선박을  커다란 돌에 묶어 모래사장에 고
정시킨 후, 프로테실라오스에게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주었다.  하지만 그의 영웅
심의  비밀스런 이유는 곧  밝혀지게 된다. 황천으로  내려간 프로테실라오스의 
영혼은 하데스에 의해 직접 영접되었고 그가 죽던 상황을 모두  알고 있었던 하
데스가 말했다. 
  "내 감동의 표시로 그리고 아주 특별한 예외로 너를 다시 살려주기로 했으니 , 
이제 넌 아내에게로 되돌아갈 수 있다." 
프로테실라오스는 정중하게 하데스에게 감사해하며 작별   인사를 했다. 다음날 
같은 시간에 그는 다시금 황천의 문을 두드렸다. 조금 놀란 하데스가 물었다. 
  "무얼 원하는가? "
  "아내와 이틀을 지내고 나니 결심이 굳어졌어요. 전 차라리 황천이 좋아요." 

    맞수 아킬레우스와 킥노스 
  프로테실라오스가 죽자 그리스인들은 두려운 심정에서 벗어나  한꺼번에 해안
으로 내려섰다. 그들 중에서도 신성한 아킬레우스는  어서 빨리 전투를 하고 싶
어 안달을 했다. 전쟁 첫날부터 높은 계급의 트로이 장군을 무찌르는 영광을 누
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공격권  안에 있었던 잔챙이 졸개들을 무시
한 채 해안 경비를 맡고  있던 분대장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는 쉽게 그를 발견
해냈다. 그는 킥노스라는  이름을 가진 왕자로 포세이돈의 아들이었는데, 트로이 
사람은 아니지만 트로이 동맹군 중의 하나였다. 그와 대적하게 된  것이 아킬레
우스로서는 행운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킥노스는 트로이 군의 모든 전사들  가
운데 가장 물리치기 힘든  상대였기 때문이다. 그가 태어났을 때, 부친인 포세이
돈은  테티스가 아킬레우스에게 했던  것과 같은 조치를  취했다.  킥노스 역시 
스틱스  강물에 잠기게 하여 몸에 어떤  상처도 침투하지 못하게끔 했던  것이
다. 게다가 테티스와는 달리 포세이돈은 발목까지도  잊지 않고 잠기게 하여 온 
몸에  완벽한 방어벽을 만들어주었다. 장교임이 한눈에 드러나는 킥노스의 화려
한 깃털 장식과 무기들을 알아보자마자 아킬레우스는 그를 불러 세   결투를 신
청했다.
  "나는 신성한 아킬레우스다. 용기가 있거든  나에게 덤벼라." 놀랍게도 상대가 
조금도 반응하지 않자. 아킬레우스는 그에게 다가가 전투 태세를 취했다. 아킬레
우스는 힘센 팔로 킥노스의  가슴을  향해 투창을 내꽂았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보였다. 
  '이런! 내 투창 촉이  날카로움을 잃어 무뎌졌는가  보군.' 하고 아킬레우스는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투창의   청동 촉을 조심스레 확인하고는  더 힘을 주어 
두번째 투창을  킥노스에게 던졌다.  투창은 킥노스의 갑옷과  방패를 꿰뚫기는 
했지만  그의 피부에는 생채기조차 내지  못했다.  그러자 아킬레우스는 초조해
졌고 손에 힘이 빠졌나하며  의아해했다. 이번에는 시험  삼아 킥노스가 아니라 
그들의 싸움을 태연하게 지켜보고 있던 불운한 트로이 군사 하나를 향해 세번째 
투창을  던져보았다 아킬레우스의 투창은 그 군인을 관통했을 뿐만 아니라 계속 
날아가 뒤에 있던 두번째 트로이 군사의  등까지 내리쳐 그 역시 쓰러지게   했
다. 자신의 힘을 다시  확인한 아킬레우스는 세번째 투창을   주워 들어 그것을  
킥노스에게 던졌다. 
처음부터 킥노스는 비웃어가며 그저  상대방이 하는 양을   쳐다볼 뿐이었는데, 
이번에는 아예 방패로 막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아킬레우스의 투창은 킥노
스의 어깨에 닿더니만  마치 돌담에 부딪힌 듯  다시 튕겨 나왔다. 
하지만 킥노스 어깨 위의 핏자국을 보고 아킬레우스는 쾌재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좀전에 죽인 트로이  군사들의 피가 투창끝에 남아  있던 것임을 
곧 알게 되었다. 그러자 아킬레우스는 자신이 늘 사용하던 무기가 이 괴이한 상
대에게는 아무 쓸모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킥노스에게 달려들어 머리가 
핑 돌만큼 주먹질을 해대고는 땅바닥에 내던져 그의 등을 타고 올라가 킥노스의 
투구 끈을 이용해 목을 졸라버렸다. 이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네스토르는 격언
조로 한마디했다. 
  "킥노스의 죽음은 세상에 천하 무적은 없다는 걸 보여주지."  승리한 아킬레우
스는 그러한 예언적인 관전평에 조금도 개의치  않고 몸을 일으켰다. 

    트로이의 명장 헥토르 
  그리스 군대가 정박할 무렵 해변에는 짙은  아침 안개가 끼어 있었다. 안개가 
걷히자 거대한 물체가 차츰  그리스인들의 시야에 들어왔는데,  그것은 바로 그 
옛날 아폴론과  포세이돈이 건축한 거대한  트로이의 성벽이었다. 
아가멤논은 그 성벽을 결코 습격할 수 없으리란 걸 즉각  깨달았고 다음과 같이 
결론 지었다. 
  "유일한 방법은 도시를 포위한 뒤 굶주림에 지친  성안의 주민들이 항복할 때
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트로이의 창고에는 20년을 버틸 수 있는 충분한 식량이 있다는 사실, 게다가 성
벽 뒤에 피해 있는 트로이의 군대는 그리스 군대만큼  강력하다는  사실을 아가
멤논은 몰랐던 것이다. 트로이 군대는  프리아모스의 장남인 헥토르의 지휘하에 
있었다. 기억하겠지만, 헥토르는  태어날 때부터 아주  튼튼했고, 크산토스 강이 
범람하여 트로이의 평지로 흘러들지 않는  한 나라의 영광이 될  인물이며 결코 
패하는 법이 없을 것이라는 신탁의 예언이 있었다. 
그로부터 30년이 흘러 헥토르는 아주 거대한  인물이 되었다. 엄청나게 큰 키를 
가진데다, 몇 년 전에 크로톤의  밀론이라고  불리는 그리스인이 개발한 체계적
인 훈련 덕분에 비범한  힘까지  갖추고 있었다. 크로톤의  밀론은 실상 트로이 
전쟁과는 아무 관계도 없지만 나로서는 헥토르의 이야기를  계속하기에 앞서 이 
인물에 대한 얘기를 좀 하고 싶은 유혹을 저버릴  수 없다. 

    크로톤의 밀론에 대한 이야기 
  이십대의 청년이던 크로톤의 밀론은 올림픽 경기에서 우승을   차지 해야겠다
는 결심을 했다. 천성적으로 이미 거대한  힘을  소유하고 있었던 그는 체력 단
련을 위해 어린 송아지를 어깨에 짊어지고 꽤 먼 거리를  걸어서 답파해볼 생각
을 했다. 훈련은 몸에 아주  이로워보였고 그는  송아지를 등에 지고 같은 훈련
을 매일  되풀이했다. 처음에는 송아지  무게가 10킬로그램 정도밖에 되지 않았
기에 일이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송아지의 무게는 날로 조금씩  늘
어갔고, 그럼에도 불구하도  전날과의 차이는 거의 느낄 수 없을  정도였다.  그
렇게 해서 밀론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무거워지는 짐을 지고 다니게 된 
셈이었다. 4년이 지나자 그는 4백 킬로그램이나 되는 황소를 힘들이지  않고 질 
수 있게  되었다. 그제서야 밀론은 올림픽에 참가했고 어깨에 황소를 지고 트랙
을 한 바퀴 돌아  관중들의 갈채를 받았다. 그리고  난 후 단  한방의 주먹으로 
황소를 때려눕히고는 3일 간 그 고기를 먹었다. 몇 년 간 그는 그리스에서 가장 
훌륭한 운동 선수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황소가 그랬듯이 그 역시  느낄 수 없
을 만큼 나날이 늙어갔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쉰 살이 되
었는데도 밀론은 자신이 아직 강하다고  믿고 있었다.  어느 날  숲속을 산책하
던 그는 열심히 전나무를 패고 있는 나무꾼들을 보게  되었다. 나무 가장자리에 
틈새가 나긴 했지만 나무기둥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가 좀 도와주지요." 
라고 말하며 밀론이 다가섰다. 그는 가장자리의  틈새에 손을 집어넣어 나무 기
둥을 들어올려 나무를  절단할 생각으로 나무꾼들에게  가장자리에서 떨어져 있
으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틈새에 손을  집어넣자 기둥이 다시 맞물렸고 그의 두 
손은  나무 기둥 사이에 끼이고  말았다. 나무꾼들이 그를 나무에서 떼어내려고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밤이 되자 나무꾼들은  그를 버려둔 채 떠나갈 수밖에 
없었다. 지친 밀론은  늑대의 밥이 되어 죽고 말았다. 이러한 경험을 배우게  된 
헥토르는 밀론이 했던  것과 유사한 훈련 과정을 채택했다. 물론 똑같은 실수는 
범하지 않으리라는 다짐도  했다. 매년 봄마다  그는 호박밭에서 투포환 던지기 
연습을 했다. 처음에 주워온 호박들은 사과만한 크기였고 쉽게 50미터까지 던질  
수 있었다. 호박들은 차츰 자라 10킬로그램에 육박했다. 하지만  규칙적인  훈련 
덕에 헥토르는 그 차이를 거의 느낄 수  없었다. 서른 살이 되자 그는 트로이의 
가장 힘센 투사가 되었다.  게다가 용감하고 너그러웠으며 매우  사려가 깊었다. 
그리하여 트로이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그가 트로이  군을 지휘하
게 된 이래 크산토스 강은 한번도 범람하지 않았으며 그는  한번도 패배하지 않
았다. 하지만 해안에 정박한 그리스 군대를 보자 헥토르 역시 초조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중에서도 가장 두려운  투사인  아킬레우스의 투구와 갑옷과 방패가 
떠오르는 태양에 번득이는 걸 볼 수 있었다. 이러한 모습을 지켜본 것은 헥토르
만은 아니었다. 올림포스의  정상에서는  신들 역시  주의 깊게  그러한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 달  전부터 신들 역시 두 편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리스의 입장에  호의적인 한편은 헤라와  아테나에 의해 지휘되고 있
었다. 헤라는 황금 사과 사건 이래 파리스에 대한 원한을 간직하고 있었고 아테
나 역시 똑같은 이유로 트로이군을 증오했다. 
더욱이 아테나는 그리스 창설 당시의 경연 대회 이래 그리스인들을 각별히 사랑
했고, 특히 오디세우스의 지력을 높이 평가했다. 또  다른  한편은 상대편이 '트
로이의 압력 단체' 라고  부르던 무리였다. 이 편은  아프로디테가 지휘하고 있
었으며, 그녀 역시 파리스의 판결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프로디테는 자신의 입장
을 지원해줄 동조자로 옛날 애인이었던  아폴론과 아레스를 끌어들이는 데 성공
했다. 아내와 자식들의  서로 엇갈린 압력을 받아야 했던 제우스로서는, 쉬운 일
은 아니었지만서도, 엄정한 중립 태도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리스 군이 트로이
에 정박한 날 저녁,  제우스가 올림포스에서  저녁을 먹으러 대식당으로 들어섰
을 때,  끔찍한 소란이 그를 맞아들였 다. 서로 욕설을  주고받는 걸로 만족하지 
못하던 신들이 급기야 체면 불구하고 접시를 식탁 위로 날려대면서 싸우기 시작
했던 것이다. 
  '그렇지, 또 그 얘기들을 하고 있군.' 
하고 제우스는 생각했다. 그는 주먹으로 식탁을 탕탕 쳐대며 조용히 할 것을 요
구한 후, 트로이 전쟁은 순전히 인간들의  일이니  절대로 그 일에 개입하지 말 
것을 신들에게 단단히 경고했다. 

    7. 기묘한 전쟁 
  트로이 공략 후 처음 9년 간은 어떤 결정적인 군사적 사건도  없이 지나갔다. 
성안에 피신해 있던  트로이 사람들은 그리스인들을  비웃었다.  가끔 헥토르는 
부하들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섰다. 그리하여 평지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양 진영
의 사상자가 생겨났다. 그러면  시체들을 거두어 장작 더미 위에 화형시키는 장
례식을 치르기 위해 며칠간의 휴전이  선포되었다. 그리스인들과 트로이인들 모
두 전사들의 영혼을 황천으로 가게  하려면 종교적인 의식과 함께  그들의 몸을 
화형시켜야만 한다는 걸 여전히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휴전 기간  동안은, 
며칠 후면 다시 서로 죽일  듯이 싸울지라도,  평화로운 가운데 양 진영의 우승
자를 가리는 운동 경기를 벌이곤 했다. 

    운동 경기 
  첫번째 경기는 단거리 경주였다. 이 시합에서는 아킬레우스가 너무 나도 두드
러진 우세를 보였기 때문에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기 위해  경기 규칙을 
바꿔야만 했다. 우선 아킬레우스는 투구와 갑옷을 모두 입고 뛰게 했고 다른 선
수들은 거의  맨몸으로 달리게 했다. 하지만  이러한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아킬레우스가 여전히 월등하게 앞섰다. 그래서  마침내 아킬레우스를 제외한 다
른  모든 선수들에게 말을 타고  달릴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러자 가끔씩, 하지
만 아주 드물게 경기병들 중의 하나가 결승선에서 아킬레우르를 앞서기도 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오래  전부터 아킬레우스에 대한  끈질긴 질투심을 키워 
오던  야비한 테르시테스는 그에게 조롱과 욕설을 퍼붓곤 했다.  그렇지만, 다른 
모든 그리스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테르시테스를 치사하고  볼썽  사나운 잔소리
꾼으로  여기던 아킬레우스였던지라 그저  경멸로 대꾸할 따름이었다.   두번째 
경기는 순전한 힘겨루기인 투포환  던지기와 역도  시합이었다.  이 분야에서는 
트로이와 그리스의 두 거구인 헥토르와 아이아스가   늘 결승에 올랐는데, 헥토
르는 대개 투포환에서 아이아스는 역도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세번째 중요한 시
합은 고정된 과녁이나 비둘기를 표적으로 한  활쏘기 대회였다. 섬에 버려진 필
토크테테스의 부재로 승리는 주로  파리스에게 돌아갔지만,  노련한 두 명의 사
수가 그의 뒤를 바짝 뒤쫓고  있었다. 한  사람은 파리스와 같은 트로이인 판다
로스였고, 다른 사람은 그리스의  왕이자 아이아스의 동생인 테우크로스였다. 이 
경기 중 하나는 아주 볼 만한 것이었다.  표적으로 정한 것은 12미터 높이의 돛
대 끝에 끈으로 묶인 때 날아가지는 못하고 돛대 주변을  파닥거리기만 하던 비
둘기였다. 첫번째  사수는 트로이의 판다로스였다. 그는 오랫동안 조준한  뒤 사
위를 당겼는데 화살은 표적을 빗나가 부르르 진동하며 돛대의 끝에 박혀버렸다. 
두번째 사수인 테우크로스는 판다로스보다는 나았다. 그의 화살은  비둘기를 스
치고 지나가 끈을  잘라버렸고, 그 틈을 이용해 비둘기는 재빨리 도망치려 했다. 
관중들이 벌써 환호의 갈채를 보내려는 그 순간 세번째 참가자인 파리스가 황급
히 자신의  활을 당  겨 날아가는 비둘기를 떨어뜨렸다.  콜트식 자동 권총이나 
윈체스터식 연발 권총을 가진 서부의  내노라하는  명사수들도 결코 이보다  더 
멋지게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장기의 발명
  무료함을 달리기 위해 그리스와 트로이 사람들은 여러 다양한 사교 놀이를 만
들어냈다. 장기도 바로  이 트로이 포위기간 동안에   발명된 놀이 중 하나라고 
전해진다. 이 놀이는 아주 재치가  많았던  그리스  왕 인 팔라메데스가 발명했
다. 그는 자신이 오디세우스 못지않게 명석하다는  걸 증명하는 일을 인생의 주
요 목표로 정했는데, 장기도  그같은 목적으로 발명된 것이었다.  새로운 놀이의 
전체적인 규칙을 정하고 나서 그는 오디세우스에게 한판 승부를 신청했다. 오디
세우스는 재빨리 게임을 우세하게 이끌어 나갔다. 그러자 절박한 패세에서 벗어
나기 위해  팔라메데스는  매번 새로운 규칙들을  고안해내어 자기에게  이롭게  
하더니 결국에는 자신이  승리하도록 만들어버렸다.  오디세우스는 그렇지 않아
도 자신을  전쟁에 억지로 끌어들인 장본인이었던 팔라메데스를 용서할 수   없
었는데다가,  이 사건으로 인해  언젠가는 그에게 단단히 복수하리라  맹세했다. 
한편, 집으로부터 멀어져 아내  없이 지내야 했던  그리스 왕들에게 밤은  너무
도 길기만 했다. 그들의 마음을  달래줄 겸, 그리고 무엇보다 도  이야기하는 걸 
너무도 좋아하던 네스토르는 매일  저녁 함께 식사를 하고 난   뒤 이야 綬  하
나씩 해주기로 했다. 그 얘기들은  옛날의   전설이나 환상적인 이야기들이기도  
했고, 때로 는 네스토르가 젊었을 때 직접 겪었던  실제  모험담이기도 했다. 네
스토르의 첫번째 이야기는 페르세우스와 메두사의 전설이었다.

    메두사의 머리를 가져오라
  옛날에 아르고스의 왕이던  아크리시오스에게는 자식이라곤  다나에라는 딸만 
하나 있었다. 혹시 언젠가 아들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알아보기 위해 신탁을 
찾아갔다가 아들은  없을 것이며, 손자를 보게  되면 그 손자에 의해 죽음을 당
할 거라는 예언을 듣게 되었다. 위험을  피하기 위해 아크리시오스는 딸 다나에
를 탑에 가두었다. 철통같은   탑은 외부와는 단절된 채  하늘로만 열려 있었고 
유일한 문의 열쇠는 아크리시오스가 늘 지니고 있었다. 그는 하루 한 번씩 딸에
게 식사를 가져다주었고, 새를 제외한  모든  생물의 시선으로부터 그녀를 벗어
나  있게 했다. 어느 날  탑 위를 날아가던 제우스의 독수리가 다나에를 발견했
고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았다. 독수리는 제우스에게 자기의 발견을 알렸고 
제우스는 즉시 그 아름다운 포로를 정복할 생각을  품었다. 문을 통해 탑  안에 
들어갈 수는 없었기에 그는 하늘을 통해 들어가기로   했다.  이 계획을 실현하
기위해 그는  금으로 된 빗물로 변신하고는 어느 여름 밤 다나에를 향해 쏟아짐
으로써 그녀를 애무했다. 몇 달 후 아크리시오스는 딸의 임신을 알게 되었다. 그
러자 이번에는 딸을 통 속 에 가두어  바다에  던져버렸다. 급류에 휩쓸린 통은 
섬에 표류했다. 통속에서 빠져 나온  다나에는 아들을 낳아  페르세우스라는 이
름을 지었다. 그 섬의 왕 폴리덱테스는 다나에의  미모에 반해 그녀에게 청혼했
지만 아들에게 전적으로 헌신하고자 했던 다나 에게는 왕의 청혼을 오랜동안 거
절했다. 페르세우스가 열여섯  살이되자, 다나에는 이제  의무로부터 해방되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고 그제서야 폴리덱테스의 구혼을 수락했다. 
왕은 성대한 약혼식을 준비하고 인근의 많은   손님을 초대했다. 모두들 선물을 
가지고 나타났지만 한푼도 없었던 페르세우스반은 빈손으로  와야 했다. 창피한 
마음에 술을 많이 마셔버린 그는  식사가  끝나자 이 세상 어디든 찾아가  왕이 
원하는 가장 희귀한 선물을 구해다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그러한 제안이야말로 귀찮은 의붓아들을 떼버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 폴리덱
테스는 다시는 살아 돌아오지 못할 임무를 맡겼다.
  "내게 메두사의 머리를 가져라 주렴."
메두사는 고르곤의 세 자매 중의 하나였다.   고르곤의 자매들은 악어 등가죽으
로 뒤덮인 몸에 뱀의 머리들이 불쑥 솟아난  아주 흉측한   괴물들이었다. 그들
의 모습은 너무도 끔찍해서 누구든 그  얼굴을  보면 즉시 돌로 변해버렸다. 고
르곤의 세 자매 중 둘은 불사신이었고, 셋째인  메두사는 원래 불사신은 아니었
지만 딱딱한 등껍질과 사람을 돌로 만들어버리는 능력으로  가히 천하무적에 다
름없었다. 술이 깬 페르세우스는 경솔히 지나쳤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메두사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을 뿐만 아니라,  아무  탈없이 메두사에게 다가가 그것을 
죽일  방법에 대해 아무런 대책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페르세우스
의 부친인 제우스가 궁지에  빠진 그를 도와주기로  결심했다. 제우스는 자신의 
아들이자  특사인 헤르메스에게 페르세우스를 찾아가  도와주라고 부탁했다. 페
르세우스가  잔뜩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고뇌에 잠긴 표정으로  정처 없이  들판
을  방황하고 있을 때, 젊은 양치기로 변장한 헤르메스가 나타났다.
  "뭔가 고민이 있나 보군요. 내가 좀 도와줄 수 있을까요?"  "도울 수  없을 거
요. 난 지금 메두사를 찾고있는 중이지만, 그게 어디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 
같소."
  "나도 그건 몰라요. 하지만 그걸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은 알아요. 여기서부터 
북쪽으로 한참을 가면, 온통  잿빛인 지역이 나타나죠.  그곳에  그라이아이라는 
세 자매가 살고 있어요. 그녀들은 셋이서 눈 하나만을 가지고 있어서 서로 번갈
아 가며  그 눈을 사용한답니다.  그  여자들은 고르곤의 세 자매에  견줄 만한 
추한 얼굴을 가지고 있는 건 자기들뿐이라는  걸 자랑으로 삼고 있지요. 그래서 
두 집안의 자매들은 해  마다 이  집 저 집 옮겨가며 추녀 경연  대회까지 열고 
있답니다. 그러니 분명 고르곤의  집이 어디인지 알려줄 거요.  하지만 그녀들의  
유일한 눈을 빼앗겠다고 협박해야만 말을 해줄  거요. 원한다면 내가  그라이아 
이의 집까지는  데려다 주리다."그리하여 숱한 우여곡절을 겪은 긴 여행 끝에 혜
르메스와 페르세우스는 그라이아이의 집에 당도했다.
  "자, 이젠 자네 혼자 해보게나."
라고 말하고는 헤르메스는 황급히 사라져버렸다. 잿빛 하늘 아래, 잿빛  풍경 폭
에서 잿빛 옷을 입고 웅크리고 앉아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는 세 자매는 
말소리조차 잿빛처럼 들렸다. 그러다가 아주 규칙적인  간격으로 그녀 중 한 명
이 이마에 붙은 외눈을 떼내어  옆 사람에게 건네주곤 했다. 
페르세우스는 나무 뒤에 숨 어 잠시 그   과정을 관찰했다. 그리고는 한 여자가 
눈을 떼어 옆 사람에 게  전해주려는 순간에 갑자기 튀어나와  눈을 가로채고는 
위협했다.
  "고르곤 자매의 집이 어디인지  말해주면 너희들에게 눈을 돌려주겠다."  그라
이아이 자매들은 하는 수 없이 그가 요구한 정보를 주어야 했다. 눈을 돌려주기
에 앞서 페르세우스는 한 가지를  더 물었다.
  "고르곤 자매들  중에서 메두사가   누구인지 어떻게  구별해낼  수  있지?"      
"그거야 쉽지요. 메두사의 머리에 있는   뱀들은  독사들이에요. 한데 다른  두 
자매들의 머리에 있는 건 독  없는 보통 뱀이고요. 알겠지만,  독사들은  머리꼴
이 삼각형이고 일반 뱀들은 타원형이죠."
  "하지만 고르곤 자매들을 한번  쳐다만 봐도 돌로 굳어버린다는데  어떻게 그 
머리 모양을 유심히 살펴볼 수 있겠어?"
라고 페르세우스가 재차 물어보자,  "그거야  당신 일이죠."라고 대꾸했다. 
페르세우스는 극심한 당혹감에 빠져 길을 떠났다. 또   한 번 제우스 가 도와주
어야 했다. 그는 아테나를  불러들여  페르세우스를 돕기  위한 구상을 좀 해보
라고 부탁했다. 잠시 생각에 잠긴 아테나는 곧 묘안을  발견했다. 묘안의 실행을 
위해서는  몇 가지 소품들이  필요했고 아테나는 올림포스의 신들에게서 그  품
목들을  얻어냈다. 얼마  후  페르세우스가 고르곤의 소굴에 다가서고  있을 때 
아테나가 그 앞에 나타났다. 아테나는 애써 변장하지 않았다.
  "나는 아테나인데 네가 메두사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기  위 해 왔다. 
이것은 헤르메스가 쾌히 빌려준 작은 날개인데,  이걸 달면 넌 날 수 있다. 그리
고 하데스의 투구를 쓰면 넌 보이지 않게   된다. 또 아레스의 검으로는 제아무
리 두꺼운 껍질도 꿰뚫을  수  있지. 헤라의 손가방은  집어넣는 물건 크기대로 
형태가 만들어지는 특성이 있단다. 마지막으로 거울처럼  빛나는 내 청동  방패
를 이용하면 고른곤 자매들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고도 그녀들과 싸울 수  있
을 거다."
페르세우스는 헤르메스의 날개를 달고, 하데스의 투구를  쓰고 공중으로 날았다. 
그는 고른곤 자매들을 등뒤로 하여 자리를 잡았고. 세 자매의 모습이 선명히 비
치는 방패의 도움으로 정교한 작업을  펼 수 있었다. 그녀들에게는 자신의 모습
을 보이지 않은  채로 아테나의 방패를 이용하여  침착하게 메두사를 찾아냈다. 
그런 다음 아레스의 검을  메두사의 등에 꽂아 머리를 베어내고는  헤라의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모습인 채로 어머니와 폴리덱
테스가  있는 섬을 향해  날아갔다. 돌아오는 길에 페르세우스는 메두사 머리의 
초자연적인  힘을 입증 할 기회를   여러 번 갖게 되었다. 한번은  거대한 뱀이  
바위에 묶인 안드로메다라는 처녀를 삼켜버리려는 것을 보고 뱀을 돌로  변하게 
하여 그녀를 구해주고는  자기 아내로 삼았다. 또 한 번은 어떤 잘못된  연회에 
참석하여 백여 명의  참석자들이 그를  박살내려고 한꺼번에  공격하는 바람에,   
급히 가방을 열어 메두사를 꺼내었고 순식간에 연회장을  돌무지로  만들어버렸
다. 마침내 섬에 돌아온 그는 폴리덱테스에게 헤라의 가방을 열어 선물을  가져
가라고 유인함으로써 그를 돌로 변하게 했다.  일을  마친 페르세우스는 아테나
에게 모든 물건들을 되돌려주었다. 게다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메두사의 머리를 
아테나에게 선물했다. 그녀 역시 언젠가 메두사의 희생물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
려움이 있었기에, 메두사가  처치된 것에 대해  몹시  만족해했고 이후로 그 무
서운 전리품을 자기 방패에 늘  붙이고  다녔다.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는 많
은 자손을 낳아 오래 살았다. 그   자 손들 중의 하나가 알크메네의  아버지, 즉 
헤라클레스의 할아버지이다. 네스토르가 아주 자세하게 얘기한 페르세우스의 전
설은 그리스 왕들의 저녁나절을 한 달 이상이나 채워주었다 하지만 그들이 네스
토르 의 얘기를 지루해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얘기가 끝나자마자 또 다른 이야기를 요구했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벨
레로폰과 페가소스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벨레로폰과 페가소스 
  페르세우스가 메두사의 머리를 베어냈을 때 고르곤의 키 몇 방울이 땅에 떨어
졌고, 이 피로부터 날개 달린 말 페가소스가 탄생했다. 평소 딸을 몹시 좋아하던 
포세이돈은 살아남은 고르곤의 두 자매들에게 요청하여   말을 얻어냈고, 그 말
을 자기 땅의 초원에 풀어놓았다 몇 년 뒤, 바로 그 초원에서 말을 발견하게 되
는 사람이  벨레로폰이다. 벨레로폰의 생애는, 적어도  그 초반부는  헤라클레스
와 유사한 점이 없지 않다. 테베의  영웅 헤라클레스처럼 벨레로폰도 신과 인간 
사이의 불법적 인 사랑 가운데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가 바로 포세이돈이었
다.  헤라클레스처럼 그도 젊은  시절 본의  아닌 죄를 저질렀고, 그 죄를  씻어 
내기  위해 프로이토스 왕이 내리는 일을 시행하라는 임무를 받게 되었다. 그러
나 헤라를레스와는 반대로 벨레로폰은 힘도 용기도  뛰어나지 못했다. 그가  자
신의 과업을 수행해내기 위해서는 아버지인 신의  보호 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프로이토스가 맡긴 가장 어려운 일은  키마이라를 죽이는 일이었다. 키마이라는 
정면은 사자, 후면은 뱀, 그 사이는 염소 모양을 한 이상한 괴물이었다. 이 괴물
은 그 중심 토막만이 약한 부위였는데, 그것도 위에서 아래로,  ㅐ걍   사람들이  
말하는 등심 부위를 내리쳐야만 했다. 키마이라를 정면 대응하기를 꺼려한 벨레
로폰은 포세이돈의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포세이돈은   날개 달린 말 페가소스
와 그 말을 다스릴 수 있는  황금 재갈을 함께 아들에게 선물하면서  말했다.
  "이 말을 타면 키마이라를 공중에서 공격할 수 있다."그리하여  벨레로폰은 괴
물 바로 위를 빙빙 돌면서 괴물의 취약  부위를 맞출 때까지  아무런 위험도 없
이 화살을 퍼부어댈  수 있었다. 이 싸움을 귀감 삼아 그는 이후에 계속되는 프
로이토스 왕의 일을 처리했고, 수많은 적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 일례로 그는 아
마존족 전체를 화 살 하나 쏘지 않고 혼자 힘으로 퇴각시킬 수 있었다. 머리 위
를 날고 있는 경기병을 본 아마존족은 비행기나 헬리콥터가 나타난  줄 알고 기
겁을 하고  혼비백산 도망을 쳐버린 것이다. 
이같은 손쉬운 승리에  도취된 벨레로폰은 야심을   끝없이 펼쳐갔다. 그리하여 
올림포스까지 올라가 신들이  모인 앞에서 말을 이리저리 날 뛰게  하려는 그야
말로 '정신나간' 계획을 품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제우스는  그의 공적에 종지부
를 찍게  하기로 했다. 벨레로폰이  올림포스에 다다른  순간 제우스가 보낸 등
에가  페가소스의 엉덩이를 물었다.  준마는 갑자기 뒷발질을 했고 말에서 떨어
진 벨레로폰은 2백  미터 상공에서 땅바닥으로 추락해버렸다. 괴물과 거인을 물
리친  벨레로폰은 조그만 등에 한 마리한테 패하고 만 것이다.
  "이번만큼은 얘기가 길지 않군요."
라고 아이아스가 네스토르에게 한마디했다.
  "그래, 하지만 교훈적이잖아."
라고 조금 기분이 상한 네스토르가 대답했다.

    8 신화 속의 전설
  벨레로폰의 이야기에 뒤이어 계속된 네스토르의 '환상적인 전설' 들에는 다음
과 같은 것이 있었다.  전쟁의 신 아레스를 13개월   동안 항아리 속에 가둔 두 
거인 오토스와 에피알테스, 테베를 건설한 카드모스,  농업을 전파한 아리스타이
오스, 큰곰 별자리가 된 칼리스토, 여행길에 강도에게  죽음을 당한 그리스의 서
정시인 이비코스와 그의 죽음을 복수해준 두루미떼, 오리온  별 자리의 전설, 신
을 경외하지 않아 지옥에 떨어진 살모네우스 이야기 이 이야기들을 모두 독자들
에게 다시 들려준다는 것은 좀 지루한  감이  있다. 게다가 그리스 왕들도 그렇
게 느꼈던  것처럼 결국에는 단조롭고  반복된다는 느낌마저 자아낼 우려가  있
다. 네스토르는 살모네우스의 전설을 이야기하던 중 청취자들의 관심이 다소 느
슨해지고 있으며, 헬레네가 도망친 이후 불면증에 걸린 메넬라오스를 제외한 모
든 이들이 턱을 괴고  졸고 있는 걸 발견하고는 레파토리를  바꾸기로 결심했고 
다음날부터는 '실제 모험' 시리즈, 즉 자신이  젊었을 때 진짜로  체험했던 이야
기들을 시작하기로 했다. 이 새 시리즈의 첫번째 이야기는 '황금 양가죽의 정복' 
인데, 때로는 '이아손과  아르고의 선원들' 이라고도  통칭된다.  껑  양가죽의 
정복  이아손이 태어났을 때, 그의 부친인 아이손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작은 
나라 왕이었다. 이아손이 태어난 얼마  후 아이손은 동생  펠리아스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추방당했다. 아들의 생명을 걱정한 이아손의 모친은 아들과 함께 도망
쳐 이웃 나라로 숨었다.  그로부터 16년이 흐르도록  아무도 펠리아스의 세력을 
넘보지 못했다. 하지만 펠리아스는 신발을 한  짝만 신고서 그를 찾아오는 남자
를 경계하라는 신탁의 권고 이후 늘 불안에  사로잡혀  살고 있었다. 그래서 펠
리아스는 방문객을 맞을 때면 사람의 눈을 보는 대신 우선  발부터 바라보곤 했
다. 이아손이 열여섯 살이 되자 그의  어머니는 그가 합법적인 왕위 계승자임을 
말해주고 찬탈자에게 가서 왕위를  요구하라고 충고했다. 이아손은 걸어서 펠리
아스의 수도를 향해 떠났는데, 가는  도중 신발 한 짝이  찢어졌다. 그는 찢어진 
신발 한 짝을 길가에 버렸고 다리를  약간 절름거리며 목적지에 다다랐다. 이아
손이  펠리아스의 왕궁에 도착하자마자 신발을  한 짝만 신은 이방인을  알아본 
펠리아스가 경비를  시켜 그를 멈춰 서게 하여 자기 앞 에 불러들였다.
  "넌 누구며 여기에 뭐 하러 왔느냐?"
고 묻는 펠리아스에게 이아손이 대답했다.
  "나는 당신 조카 이아손이며 당신이 아버지로부터 빼앗은 왕위를 되찾으러 왔
다."
펠리아스는 이아손을 그대로 감옥에   집어넣거나 사형시켜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좀더 교활하고 품위  있는 방식으로 이아손을 제거하기로 했다.
  "나도 나이가 있으니, 이제는 모든 권력을 포기하고 네게 물려줄 준비가  되어 
있다. 하지만 먼저 네게 그만한 자질이 있는가를  입증해야 하느니라. 
그걸 보여주려면 황금 양가죽을 찾아오기만  하면 된다."황금 양가죽은 전설적인  
양의 모피를 말하는데,  예전에 이아손의 왕국에  있었던  그 양이 죽음을 맞이
하러 흑해 근처에 있는 먼  나라로  떠나버렸던 것이다.  그 나라의 왕은 이 귀
중한 유물을 소유해버렸고,   아이손과 펠리아스의 계속적인  반환 요구에 응하
지 않고  있었다. 펠리아스는 그것을 되찾아오라는  멀고도 험한 임무를 이아손
에게 부과함으로써  다시는  그가 돌아오지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 이아손은 젊
은이다운 패기로 협상을  받아들였다.  그토록 먼길의 여행을  위해서는 선박과 
선원이 필요했다.  그래서 유명한 건축 기사를 불러 선박을 축조하게 했고, 그리
스의 주요 도시들에 원정 계획을 알리는 벽보를 내걸어  선원을 모집했다. 역사
적인  위업에  참가할 수  있으리라는 전망에 고무된  당대의 위대한 영웅들은   
기꺼이 자원 신청을 했다. 
헤라클레스를 필두로 테세우스와 피리토오스, 그리고   헬레네의 쌍둥이 형제인 
카스토르와 폴리데우케스가 연이어 참가를  원했다. 당시 그리스에서 가장 이름
난 음악가였던  오르페우스도 참가 신청을  했다.  여기까지 얘기하던 네스토르
가 아킬레우스를 돌아보며,  "자네 부친 펠레우스도 이 원정대에 참가했다네. 그
때는 아직 결혼 전이지."
그리고 아이아스에게 겸손하게 덧붙였다.
  "자네 부친 텔라몬도 참가했지. 그리고 나도 거기 끼였다네."선박의 이름은 건
축가의 이름을 따서 아르고라고  했고, 선원들도  그 이름을 따서 아르고나우타
이, 즉 '아르고의 선원들' 이 라고  불렀다.  흑해 어귀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여
행은 몇  달이나 계속되었고  그간 많은   사고들이 일어나 중요한 선원 3명을 
잃었다. 맨  처음 참가 신청을 했던 헤라클레스는 최초의 탈락자가 되었다. 배가 
어떤 섬에 잠시 머물렀을 때,   그의 시종 하나가 사냥을  하다가 길 을 잃었고 
그를 찾아나선 헤라클레스가  다시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며칠간 그를  기
다리던  아르고의 선원들은 하는  수 없이 닻을 올려야 했다. 다음 번 기항지에
서는 카스토르와 폴리데우케스가 사라졌는데, 이 번에는  좀 심각한 이유  때문
이었다. 기억하겠지만, 이 둘은 레다가 낳은 쌍둥이 형제이긴 한데 아버지가  서
로 달랐다. 카스토르는 레다의 정식 남편인 틴다레오스의 자식이 지만, 폴리데우
케스는 백조로 변신한 제우스에 의해 수태된 자식이었다. 그래서 카스토르는 인
간처럼 유한한 생명을 가졌지만 폴리데우케 스는  불사신이었다. 하지만 두  형
제는 서로에 대해 모범적인 형제애를 느끼고 있었다.  아르고의  굻便湧  야만족
과 싸움을 벌이던 중 카스토르가  죽음을 당했다. 낙담한  폴리데우케스는 원정
을 포기하고, 아버지 제우스를 찾아가 카스토르의  생명을 되돌려달라고 부탁했
다. 하지만 제우스는 그 청을 들어줄 수 없었다.  그러자 폴리데우케스는 자신의 
불멸권을 카스토르와 나눠 가져 번갈아가며  쓰겠노라고 했고, 그리하여 각자 6
개월 은 황천에서  나머지 6개월은 올림포스에서  보내기로  했다. 그렇지만 더 
이상 둘이 함께 있을 수는 없게 되었다.  훨씬 뒤에서야 그 둘은 하늘에서 다시 
결합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 것이 바로 쌍둥이좌라는  별자리이다. 음악가인 오
르페우스는 이 여행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르고의 선원들이 노 젓
는 일에 지루해질 때마다 그의 아름다운 선율이 그들에게 힘과 용기를 북돋워주
었던 것이다.  선원들 사이에 불화가 생겨 서로 치고 받고 싸우려고 할 때면 마
음을 가라앉혀주는  칠현금의 운율이 화해를 되찾아주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
다도 아르고의 선원들이 세이렌의 치명적인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바
로 오르페우스의 음악적 재능 덕분이었다. 세이렌은 3명의  바다 여신이었다. 상
어  몸뚱이에 여자의 상반신을 하고 있는 그들은  오직 인간의 살덩이만을   양
식으로 섭취했다. 
목소리 가 너무도 고혹적이었고 노래 또한  아름다워서, 그들의 노래를 들은 전
원은 누구나 미치광이가 되어 바닷속으로  뛰어들곤  했다. 그러면 곧 세이렌들
이 그들을 삼켜버렸고 해변가에는 앙상한 흰 뼈만이 밀려오 곤 했다. 하지만 아
르고의 선원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일이  진행되었다. 멀리서부터 세이렌의 
노래 첫  곡조가 들려오자마자 오르페우스도   칠현금을 꺼내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번만큼은 세이렌들 이 한  수 아래였다. 
오르페우스의 음악에 사로잡힌 세이렌들은 여느 평범한 돌고래들처럼 선박 주위
를 맴돌기 시작하더니 음악의  박자에 맞추어 우아하게  튀어오르기도 하고  선
원들이 던져주는 물고기를 공중에서  낚아채기도 하면서  쇼를  벌였다. 이러한 
장면을 몇 시간 연출하고  나서 오르페우스는 음악을 멈추었고 세이렌들은 불쌍
하게 자기 섬으로 되돌아갔다. 여러  가지 시련을  더 겪은 후에 마침내 아르고
의 선원들은 아이에테스 왕이 지배하는  코르키스 섬에 도착했다. 아이에테스는 
이아손을 정중하게 맞이하며  무슨  일로 찾아왔는가를 물었다.  황금 양가죽을 
찾으러 왔다는  이아손의 대답을 들은 아이에테스는 양가죽을  되돌려줄 마음은 
없었지만 싸움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돌려주지, 단 그에 앞서 어려운 일 하나를 완수해야  한다. 청동 발굽을 달고 
화염을 내뿜는 야생 황소 2마리를 쟁기에 매달아 한 이랑의  밭을 갈고 나서 거
기에 용의 이빨을 심어라. 그리고 씨 뿌린  자리에 불 쑥 솟아나는 거인들을 죄
다 없애라."
영웅의 기질을 갖지 못한 이아손은 깊은 절망에 빠진 채  선원들이 기다리는 곳
으로 되돌아왔다. 이번에는 테세우스가 그를 돕기로 했다.  자신이  옛날 크레타 
섬의 미노타우로스를 대면해야 했을 때와  동일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아손에게 자기의 경험을 이용하게 했다.
  "그 일에서 빠져 나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이에테스의 딸을 유혹해서 그
녀의 도움을 얻어내는 거야."
실제로 아이에테스에게는 메데이아라는 신통력을 가진 아름다운 딸  이 하나 있
었다. 그날 저녁 아이에테스가 이아손과  아르고의  선원들을 위해 베푼 만찬에
서 이아손은 메데이아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테세우스의 충고대로 온갖 매
력을 발산하며  처녀를 유혹했다. 식사가  끝나자 이아논은 그녀에게 작별을 고
하며 슬프게 말했다.
  "다시는 당신을 볼 수 없을 거요. 내일 마주해야 할 시련에서 죽어 버릴 게 분
명하니까요."
몇 시간 후, 메데이아는 해가 뜨기 전에 궁전을   몰래 빠져 나와 선 박 주변에 
있는 이아손의 숙소를 찾아갔다.
  "당신을 사랑하기에 아버지를 배신하기로 했어요.  여기 연고 하나 와  마술의 
돌을 가져왔어요. 이 연고를 황소의 몸에  바르면  황소가 아 주 순해져서 아무 
해도 끼치지 않고 명령에 따를 거예요. 그런  다음 이 마술의 돌을 거인들 사이
에 던지면 그들은 무기를 서로에게 겨누며 자  기들끼리 싸워  자멸해버릴 겁니
다. 이렇게 도와주는 대신  저를 데려가 결혼해주세요."이아손은 그녀의 청을 들
어주마고 약속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테세우스가  아리아드네를 저버린 것
처럼 자기도 얼른 그녀를  치워버릴 결심을 했다.  다음날 이아손은 메데이아가 
가르쳐준 대로했고 모든 일은  그녀 의 에언대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아손의 
놀라운 승리에 자존심이 상한 아이에테스는 약속을 무시하며  황금 양가죽을 돌
려주지  않겠다 고 했다. 메데이아는 또  한 번 이아손을 도와야 했다.   다음날 
밤 그녀는 남동생을 데리고 너도밤나무에  매달린 황금 양가죽이  있는  숲으로 
갔다.  그곳에는 무서운 용이 지키고 있었다. 그녀가 마술 주문을  걸어 용을 잠
재우는 동안 동생은 양가죽을 벗겨내었다. 그들은 이아손에게 양가죽을  건네주
었고 모두 함께 아르고의 배에 올라  출발했다. 얼마 후 황금 양가죽과  黴탔  
아들딸이 동시에 사라진 걸 알게 된 아이에테스는 어렵지 않게  일의 전말을 이
해했다. 
그는 곧 수많은 군대를  이끌고 쾌속 함선에 올라  도망자들의  추격에 나섰다. 
자기 아버지가 쫓아오는 걸 본 메데이아는 이아손을 향한 사랑이 정신착란에 이
르렀던지라 이후 그녀를 유명하게 만든  일련의 끔찍한 행동 중의  첫번째 일을 
벌이게 된다. 자기 동생을 작은 조각으로 잘게 토막내어 뱃전 위로 던져버린 것
이다. 아이에테스는 아들의 유해를 주워모아 거두느라 아주 조심스럽게 배를 몰
아야 했고,  이로 인해 귀중한 시간을 흘려  보냈다. 
마침내 마지막 시체 조각을 찾아냈을 때 아르고선은 이미 수평선   뒤로 사라진 
후였다. 메데이아의 신통력  덕분에 아르고선의 귀환은  갈 때보다도 훨씬 빠르
고 쉬웠다 목적지인 펠리아스의 왕국에 도착하자  아르고의 선원들 은 1년에 한 
번씩 모여 함께했던 추억을 되새기자고 엄숙하게 약속하고는 서로 홑어졌다. 물
론 그 후 한번도  다시 모이지는 못했다.  이아손은  삼촌 펠리아스에게 찾아가 
황금 양가죽을 건네주며 왕위를 요구했다. 예상했던  바이지만, 펠리아스는 쉽게 
응하려  들지 않았고  시간을 벌고자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이아손의 이익을 수호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던 메데이아가 
직접 나서기로 했다. 그녀는 어느 날  저녁 펠리아스의 두 딸을 찾아갔다.
  "너희 아버지는 늙고 병들었기 때문에  좀 있으면 돌아가실지도 몰라.  하지만 
원한다면 내가 마법의 수술로 그의 원기와 젊음을 되찾아 줄 수도 있지 지금 당
장 그 시범을 보여주마."
그리고는 커다란 냄비에 물을 가득 채우고 소금과 여러 가지   약초를 집어넣은 
다음 한꺼번에 끓여냈다. 그러더니 가까스로 몸을 지탱하고  있는, 몹시 늙은 양
의 목을 졸라 토막을 내어 끓는 냄비  속에 던졌다. 그리고 마법의 주문을 외웠
다. 그러자 놀랍게도, 깡충거리며 뛰어 다니는  어린양이 냄비  속에서 튀어나오
는 것이었다.
  "너희 아버지에게도 이와 똑같이 해줄 수 있다. 단,  그가 잠자는 틈을 이용해
서 너희들이 그의 목을 졸라 토막내야 해.  내가 늙은 양에게 했던 것처럼 말이
야."
순진한 두 딸은 메데이아가 시킨 대로 즉시 일에 착수하여   토막난 펠리아스의 
시체를 메데이아에게 가져왔다 메데이아는 그것을 냄비  속에  집어넣더니 양에
게 사용했던 마법의 주문을 완전히  잊어버린 체 했다. 그리고는 냉소적으로 덧
붙여 말했다.
  "하지만 상관없어, 그 대신 너희들은 아주  맛있는 고기국을 먹게 될 테니."
보잘것도 없으면서 얼굴만 반반한 이기주의자였던 이아손은 오로지 메데이아 덕
분에 왕위도 되찾고 영웅 대접도 받게 되었다. 메데이아에 대한 그의 감정은 메
데이아가 그에게 느끼던 열렬한 사랑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당장에 배은망덕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는 그녀와 결혼하여  아이를 둘이나 낳기까지 했다. 그러
나 몇 년 후, 코린토스를 여행하던 중 그곳  왕의 딸을 유혹했고, 그녀야말로 자
신에게 적합한 훌륭한  배필이라고 판단하고는 돌아온 즉시 메데이아에게 그 사
실을  통고하고  이혼해버렸다. 그리고는 메데이아에게 품위에  걸맞은  숙식은 
제공하겠노라고 했다. 이에 메데이아는 이렇게 대꾸할 따름이었다.
  "당신은 날 아리아드네로 착각하나  본데, 전  그녀와는  근본이 달라요."메데
이아는 이아손의 새 약혼녀에게  독약 묻은  드레스를 선물했고,  그 옷을 입은 
약혼녀는 헤라클레스처럼 죽어버리고  말았다. 그  다음엔 이아손과의 사이에서 
얻은 자신의 두 아이도 죽여버렸다. 그리고 나서 슬픔에 쌓여 있는 이아손을 버
려둔 채 혼자 떠나버렸고, 몇 년인가를  그리스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마법
사와 독약 제조가로서의 빛나 는 경력을  쌓았다고 한다. 네스토르가 얘기를 마
쳤을 때, 청중들은 아르고선에 탔던  중요한  인물들이 나중에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싶어했다.
  "그들 중 몇몇이 저희 할아버지 시절에 칼리돈의 멧돼지 사냥에 참 가하지 않
았던가요?"
하고 디오메데스가 물었다.
  "아마도 그랬을 거야. 하지만 그   얘긴 아무 재미도 없어."   네스토르는  좀 
퉁명스레 대답했다. 사실  칼리돈의 멧돼지 이야기가  네스토르가 앞서 했던 많
은 이야기들보다 지루한  건 아니다. 하지만 그  자신이 이 이야기 속에서 별볼
일 없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피했던 것이다. 무서운 멧돼지에 기겁한 네스토르
는 자신의 투창을 장대처럼 이용하여 4미터 높이의 나뭇가지  위로 도망쳐 올라
갔고,  그  위에서 피투성이의  멧돼지  사냥전을 그저 수동적으로  관찰하기만 
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독자들이  이미 알고  있는 헤라클레스와 테세우스의 모
험들, 그리고  곧 이야기하게 될 오르페우스의  모험담은 기꺼이 들려주고자 했
다. 황천에  간 오르페우스가 코르키스에서 돌아온  후 오르페우스는 음악의 거
장다운  빛나는 삶 을 누렸다. 
그리스의 경연 대회는 물론이고 올림포스에서조차 대단한 성공을 거둠으로써 올
림포스의 신들과 유익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을 찬미하는 
여자들 중의 하나였던 에우리디케라는  처녀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려 했는데, 
뱀에 물린  에우리디케가 갑자기 죽고 말았다.  오르페우스의 슬픔은 너무도 컸
고 음악에서조차 위안을 찾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황천으로 내려가 약혼
자를 되돌려달라고 요구하기로 했다. 한낱  인간에 불과한 오르페우스가 산채로 
황천에 들어가는 일은 극도로 어려운 시도였다. 
우선 깊은 구멍을 통해 땅속 깊은 곳으로 내려가야만 했다. 그러면 스틱스 강의 
지류인 아케이론이라는 넓은 강에 이르게 된다. 이 강을 건너려면 턱수염 난 고
집스런 노인네인 뱃사공 카론의  나룻배를 타야만  했다. 원칙적으로 죽은 자만
이 배를 탈 수 있었고,  그것도 반드시  장례식을 치른 자들이어야 했으며 또한 
뱃삯으로  줄 은동전을 입에 물고  있어야 했다. 강을  건너고 나면 머리 셋 달
린 개인 케르베로스가 황천의 문을 지키고 있다  죽은 자들은 아야코스, 미노스, 
라다만티스라는 3명의 심판관  앞을 통과해야 한다.  이들은 각 기 그리스의 중
요한 나라를 모범적으로  지배했었고, 하데스에 의해 그 자리에  임명되었다. 이 
세  심판은 죽은 자들을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으로 분류했다. 그래서 선한 사
람들은 엘리시온(천국)에서 무미건조하고 오로지  정신적인, 하지만  견딜  만한 
생활을 영위했고,  나쁜자들은 타르타로스(지옥)에서 영원한 체형을 감내해야 했
다. 엘리시온과  타르타로스 사이에 사자 왕국의   지배자인 하데스와 페르세포
네의  왕궁이 있었다. 
오르페우스는 황천에 들어갈 수 있는  어떤 조건도 갖추지 않았지만  그의 음악
적 재능 덕분에 온갖 난관을 뚫고 들어갈 수 있었다. 뱃사공 카론에게는 소나타 
연주로 뱃삯을 지불했다. 케르베로스는 오르페우스의 음악에 넋이 나가 그의 발
을 핥을 정도였다.  세 판관들은 헤라클레스와  테세우스의 유명한 전례에 근거
하여 오르페우스에게 통행증을 교부해주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오르페우스는 하
데스와 페르세포네 앞에  서게 되었다. 올림포스에서의 독주회를 기억하고 있었
던 그들은 오르페우스를 영접했다. 
  "스틱스 강에 맹세코 모든 청을 들어주겠소."
라고 하데스가 말하자 오르페우스는 답했다.
  "에우리디케를 돌려 주시오."
하데스는 거절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오르페우스에게 단  몇 시간만이라도 자기 
집에 머물러 그날 저녁에 조그만 연주회를 열어준다면 더  없는 영광이 될 거라
고 했다. 그리고는 덧붙이길,  "기다리는 동안 페르세포네가  타르타로스를 구경
시켜줄  거요. 볼 만한 구경거리이니  한번 둘러보시오."타르타로스 방문 시간이 
별로 없었기에 페느세포네는 오르페우스에게 타르타로스의 중요한 3가지 구경거
리만을 보여주기로 했다. 그 3가지는 시지프스의 바위, 다나오스의 통, 탄탈로스
의  형벌이었다. 페르세포네는 황천 안내서에 적힌 대로 오르페우스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시지프스는 말하자면 '매점매석가' 라고 불리는  그런 죄많은 상인이었죠. 한 
해 동안 한 지방에서 수확해낸 밀을 모두 사들였다가 엄청 난 값으로 되팔곤 했
지요. 그는 이러한 방법을 다른 영역에도 적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어요. 그래
서 신비한 수단을 이용해서 밤의  두 아  들인 히프노스와 타나토스, 즉 수면과 
죽음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지 요. 이때부터  인간들은 잠을 잘 수 없었고 그로 
인해 많은 고통을  받았죠. 죽지 못하게 된 건 인간에게 그다지 괴로운 일은 아
니었지만, 저승 의 신 하데스의 일을 곤란하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하데스의 청
원으로  제우스가 시지프스에게 벼락을  내렸고 타르타로스에서 종신형을  받게 
된 거죠. 보다시피 시지프스가 받은 징 벌은 무거운 바위를 저기 언덕 꼭대기까
지 굴려 올리는 거예요. 꼭대기에 다다르면  바위는 시지프스의 손을 벗어나 다
시 언덕 아래로 굴러떨어지게 되어 있고, 시지프스는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해요. 
좀더 뒤쪽에  보이는 한 떼의 처녀들은  다나오스의 딸들이에요. 다나오스 왕에
게는 50명의 딸이 있었는데, 그녀들은 자신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똑같은  날 
이집트 왕의 50명의 아들들과 결혼을 하게 되었죠. 결혼식 전날 밤에 은밀히 모
인 그녀들은 신혼 초야에 남편을 없애  버리기로  맹세했어요. 그래서 약속대로 
49명의 딸들은 각자의 남편을 칼로 찔러  죽였지요. 가장 못생겼던 50번째 딸만
은 남편이 첫날밤부터 외박을 하는 바람에 그럴 수 없었어요. 샘의 물을 열심히 
퍼내고 있는 그녀들은 구멍난 통에 물을 가득 채워야 하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형 걸을 받은 거지요. 탄탈로스의 경우야말로 진짜 흥미  있는 구경거리예요. 그
는 유명한 식도락가였고 그리스에서  가장 훌륭한 식탁과 술창고를 가지고 있었
지요. 올림포스의 신들조차 그의  초대를 받는 걸  대단한 일로 여길 정 도였지
요. 하지만 당대의 가장 섬세한 미식가임을 자처하는 걸로  그치지 않고, 초대된 
사람들의  무능한 감식안을 들춰내며  모욕하는 일을 즐겼어요. 일례로,  모캐를 
바닷가재로 속여 대접하는가  하면 그보다 더한 것은 로스트 비프를  배불리 포
식시키고는 식사가 끝난  후 실은 그게 말고기였다고 밝히는 거예요. 그러던 그
의  장난이 도를 넘어서고 말았어요. 제우스와 아폴론과 데메테르를 초대해놓고
는, 손수 자기 아  들 펠롭스틔 목을 졸라 토막내어 구이 요리를 해서 내놓았던 
거예요.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었던 데메테르가 맨 먼저 아무 의심 없이 펠롭스 
한 조각을 베어 물어 삼켰어요. 하지만 그  누구도 속일  수 없던 제우스만큼은 
즉각 끔찍한 비밀을 밝혀냈지요. 우선 그는 아버지의 몰지각한 자만심의 희생물
이 된 불쌍한 펠롭스의  생명을  되찾아주기로 했죠. 제우스와   아폴론이 아주 
공들여서 조각난 젊은이의 몸을 다시 모   아 붙여주었어요. 그런데 데메테르가 
삼켜버린 한 조각 때문에 펠롭스의  어깨가  모자랐어요. 그래서 아폴론은 유명
한 의사인 아들 아스클레피오스를 시켜 상아 어깨를 대신 만들어 붙이도록 했어
요. 이로써 그는 역사상 최초로  정형수술을 시행한 셈이  되었지요. 탄탈로스의 
형벌은 허기와 갈증에 고통받도록 하는 거였어요.  보다 시피 그는 가슴까지 차 
오르는 맑은 호수 물  속에 서 있고, 바로  위에 는 먹음직하게 잘 익은 과일들
이 주렁주렁 매달린  나무들이 늘어져 있죠.  하지만 탄탈로스가 과일을 따려고 
하면 나뭇가지들은 그로부터 멀어지고, 물을 마시려고 하면 호수의 수면이 그가 
닿지 못하는 지점으로  쑥 내려가버리곤 하죠."
이렇듯 신속하게 황천 방문을 마친 후 페르세포네는 오르페우스와 함께 다시 궁
으로 돌아왔고, 오르페우스는 약속했던 연주회를 즐거운 마음으로 베풀어주었다. 
그러자 하데스는 예우리디케와  함께 다시 지  상으로 돌아갈 것을 허락했는데, 
거기에 한 가지 조건을 덧붙였다.
  "자네가 앞서 걸어 나가고, 둘 다 황천을 빠져 나갈 때까지 단한번 이라도  절
대 에우리디케를 뒤돌아보지 말아야 하오."
오르페우스는 그 조건을 받아들였고  에우리디케를 뒤따르게 하고는  길을 떠났
다. 케르베로스는 짖지도 않고  그들을 내보내주었고, 카론도 돈  한푼  안 받고 
아케이론 강을 건너게 해주었다. 사랑하는 이의  얼굴 을 바라보고 싶은 불같은 
욕망에도 불구하고 오르페우스는 머리를 돌리지  않았다. 이제 지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가기만 하면 되었다.  마지막 계단에 발을 놓았을  때, 오르페우스는 
마침내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에우리디케는  아직 마지막에서 두번째 계단에 
서 있던 중이었고,  거기는 여전히 하데스의 권한에 속한 황천의 영토였다. 오르
페우스가 그녀를 바라보자마자 그녀의 영상이 흐려지더니 스르르 녹아버리고 말
았다. 자신의 팔로 그녀를 잡아보려 했지만 허공만이 잡힐  뿐이었다. 낙담한 오
르페우스는 다시 계단을 내려가 하데스를  찾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엄중한 명령을 받은 카론이 호락호락하게 굴지 않았다 지상으로 다시 올라온 오
르페우스가  가기로 작정한 곳은... 그리스의 왕들은 오르페우스가  어디를 찾아
가려 했는지 영원히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네스토르가 막  그 얘기를 하려던 
순간에 그리스 군의  의료 대장이 황급히  막사로 들어와 아가 秀諮“   위급한  
일을 전 하려 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냐?"
아가멤논이 묻자 그가 대답했다.
  "우리 진영에 페스트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9 아킬레우스의 분노 
  그리스 군 사이에 페스트 전염병이  돌게  되었을 때는 트로이를  포위한 지 
아홉 해가 지나가던 무렵이었다. 아이올로스  때도  그랬듯이 관례에 따라 아가
멤논은 군의 공식  점쟁이인 칼카스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리스의 왕들이 모인 
자리에서 칼카스는 이번 전염병은  아폴론이 보낸 것으로, 아가멤논이 태양신의 
신관의 딸인 크리세이스를 강제로 납치했던   일을 벌주기 위해 내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칼카스는 크리세이스를 자기 아버지에게 돌려보내야만 페스트가 멈춰
질 거라고 덧붙였다. 아가멤논은 늘 자기만  죄인으로 지목되어 손해 봐야 되는 
일에 넌더리를 냈다. 그래서 처음에는 크리세이스를 돌려주는 일을 거절했다. 하
지만 다른  왕들의 성화에 못 이겨 마침내 동의하 고 말았는데, 다른 왕들의 볼
모로 잡혀 있는 여자들 중에서  크리세이스를 대신할 자기 마음에  드는 여자를 
보상해주어야만  한다고 공표했다. 아킬레우스는 이러한  태도를 아주 못마땅해
했다. 사실 그는 아가멤논의 권위를 간신히 참아내고 있는  중이었다. 여신의 아
들이었던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이 자기보다 출신도  낮고,  전투적인 면에서도 
뒤떨어진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아가멤논의  변덕에  
진저리가 난다며,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면 자기는 집으로 돌아가 버리겠다고 선
언했다. 자존심이 상한 아가멤논이 대꾸하기를,   "갈 테면 가게나, 자네 없이도   
우린 잘 해낼 수  있어. 하지만 그 전에, 내가 크리세이스 대신  선택할  여자가 
바로 자네 포로인 아름다운 브리세이스라는 사실만은 알아두게."브리세이스는 아
킬레우스의 포로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정부이기도 했다. 
아가멤논이 그녀를 빼앗겠다고 호언하자 아킬레우스는 모든 자제력을 잃고 칼을 
뽑아 그를 치려고 달려들었다. 오디세우스가 말로써 달래보려 했지만 단호히 거
부되었다. 아이아스가 자신의 힘센 팔로  그를 막으려 했지만 분노로 힘이 배가
된 아킬레우스는 그를 열 걸음 뒤로 곤두박질치게 던져버렸다. 올림포스에서 이
러한 모습을 지켜보던 아테나는  자신이 사랑하는 그리스인들이  둘로 갈라지는 
걸 원치 않았기에 일에 끼여들기로 했다.  만일 그녀의 즉각적인 도움이 없었다
면 아가멤논은 진짜로 당했을  것이다. 아테나는 아킬레우스의  눈앞에 안 개를 
드리워 상대방을  볼 수 없도록 했고, 그렇게  해서 마음을 가라앉힐 시간을 갖
도록  했던 것이다. 하지만  상처받은 아킬레우스의 마음은 여전했다.  그리하여  
왕들이 모여 있는  장소를 떠나 자신의 텐트, 아니 막사로 몸을 피했다. 흔히 알
고 있는 것과는 달리, 그리스 왕들  특히 아킬레우스는 9년이라는 시간 동안 충
분히 지어낼 수 있었던 목재 막 사에서 기거했다. 몇 시간  동안 네스토르와 오
디세우스는 아가멤논이 그의 무모한 계획을 포기하도록 설득조의 웅변을 늘어놓
았다.
  "아킬레우스는 최고의 전투가요. 그가  없이는 결코 이  전쟁에서 이 길 수 없
어요. 우리들의 포로 중에서 한 사람, 아니 몇 명이라도  가져가고 브리세이스는 
아킬레우스에게 그냥 놔둡시다."
고집 세고 거만한 아가멤논은  굽히려 들지 않았다. 그래  서 약속한 대로 크리
세이스는 자기 아버지에게 돌려보내고, 동시에  브리세이스를 앗아오기 위해 아
킬레우스의 막사에 2명의 전령을  보냈다.  그들에 대항하여 무력으로 브리세이
스를 수호하는  일쯤은 아킬레우스로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네스토르와 오디세우스는 다시금 중재에 나섰고,   아가멤논은 군대의 최고지휘
자이니 모두 그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걸 아킬레우스에게 강조했다. 
아킬레우스는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승복할 수밖에 없었고, 헛되이 자기에게 매
달리는 사랑하는 브리세이스를 눈물 속에  떠나  보내야 했다. 그리고는 소리쳤
다.
  "이같은 권력의 남용에 굴복할 수밖에 없지만,  이후로 이 전쟁은 나 의 전쟁
이 아니다. 나는 내 궁전과 아버지와 국민들을 남겨둔 채, 아내를 도둑맞은 메넬
라오스에 대한 우정  때문에 여기에 왔다. 하지만  이 번에는 내 동반자를 도둑
맞았고, 그 범인이 아가멤논이니 더   이상 나한테 뭘 기대하지는 말아라.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나는 내 막사에, 내 부하들은  그들의 막사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스 군 전체가 용감한  헥토르와 그 부하들에 의해 모두 학살당한다 해도 난 
새끼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을 것이다."그리고는 막사 앞에 자리잡고 앉아 태연
한 모습으로 칠현금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아킬레우스의 이같은 선포에  오디세
우스와 네스토르는 당황스런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누가 부른 것
도 아닌데 호기심 때문 에 그 자리에 끼여 있었던  야비한 테르시테스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평소의 비열함을 발휘하며  아킬레우스가 방금 암시한 새끼손가락
을 가지고 저질스러운 농담을 해댔던 것이다.  인간의  분노는 예측  불허의 폭
발력을 지니고 있는 법이다. 오랜 동안 질질  끌어왔던 분노는 불가사의한 이유
들로 인해 어느 날 갑자기  폭발적인 점화를 하게 된다. 앞     수많은 세월 동
안 아킬레우스는 열 번이고 백 번이고 테르시테스의  오만불손을 대꾸하지 않고 
들어 넘겼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그냥 참고 넘어갈 기분이  아니었다. 갑작스런 
노여움에  사로잡힌 아킬레우스는  테르시테스에게 덤벼들어 그의 목을  낚아채
어 오얏나무처럼 흔들어댔다. 공포에 사로잡힌  비겁한 테르시테스가 자기 말을 
취소하겠다며 용서를  구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한번 타오르기 시작한 아킬
레우스 의 분노는 그 마지막 불꽃을 다 태울 때까지 휘몰아칠 따름이었다. 극도
의 분노에  휩싸인 아킬레우스는 테르시테스에게 결정타를 가함으로 써 그의 숨
을 끊어버렸다.
  "항아리를 너무 자주 샘물가에 가져가면 깨지게 마련이지"라고 네스토르가 격
언조로 말했다.  이러한 짧은 추도사를  보충하기  위해 오디세우스는 테르시테
스의 비겁함과 건방짐을 빗대어 말했다.
  "많이 짖어대는 개치고 무서운 개 없더라."
분노를 가라앉힌 아킬레우스는 어두운 얼굴로 자리에 다시 앉아 칠 현금을 잡았
다.


    10 일 대 일의 전투 
  그리스 왕들간의 불화와 아킬레우스의 탈퇴 소식은 곧이어  헥토르의 귀
에 흘러 들어갔다. 가장 두렵던 적군 하나가 전투에서 빠지게 되었다는 사
실에 고무된 그는 즉각 부대를 모이게 하여 성곽 밖으로 나섰고, 침략자들
과 결판을 내기로 작정했다. 그리스 군도 서둘러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두 
군대는 서로 마주보고 섰고 달려들어 싸울  신호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런데 헥토르가 자기 부대에게 공격 명령을 내리려는 순간 오디세우스가 그
리스 군 사 이에서 튀어나와 헥토르에게 소리쳤다.
  "장군 잠깐 기다리시오. 싸움이 시작되면  어느 편이 이길지는 모르겠지
만 그리스와 트로이의 수많은 사람이 죽어갈  것만은 확실하오. 그같은 대
량 학살을 피하기 위해 단독 전투를 제안하는 바이오.  즉 그 리스 군 1명
과 트로이군 1명이 일 대 일로 싸우자는 거요"
  "그거 괜찮은 생각이오. 이 전쟁의  근원은 메넬라오스와 파리스간의 개
인적인 분쟁에 있으니, 그들이 공정한 한판  승부를 벌여 분쟁을 종결시키
는 것이 합당할 거요. 그러니 우리 두  군대가 지켜보는 가운데 제한된 전
투지에서 그들을 싸우게 합시다. 만일 메넬라오스가 이기면 그에게 아내와 
보물들을 돌려줄 것을 약속하지요. 하지만 파리스가 이긴다면 그리스 군은 
우리의 해변을 떠나 모든 계획을 포기해야 하오."
라고 헥토르가 대답했다. 오디세우스는 메넬라오스와 의논을  했고, 메넬라
오스는 이러한 제 안을 수락했다. 반대로  파리스는 자기형의 말을 듣고는 
기가 죽어서 도망칠 생각을  했다. 그는 슬그머니  헥토르로부터 멀어져서 
트로이 군대 속으로 사라져버리려 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화려한 표범 
가죽으로 된 갑옷을 입은 그는 쉽게 눈에 띄었고 헥토르에게  견되어 망신
스러운 비겁함을 책망 당했다.
  "뭐야? 막대한 손실과 수많은 죽음으로 이끌지도 모를 전쟁에 우리를 끌
어들이고는 넌 네가 배신한 사람과 당당하게 맞서 싸울 용기도  없다는 거
냐?"
파리스는 고개를 떨구고 형에게 용서를 구했고  싸움을 하기로 했다. 트로
이의 왕 프리아모스와 그리스의 최고 우두머리인 아가멤논이  방금 제안된 
합의를 엄숙하게 확인하는 동안에, 헥토르와   오디세우스는 메넬라오스와 
파리스가 맞붙게 될 일 대 일 전투의  규칙을 정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래 
위에 가로 30미터 세로 20미터의 사각형을 그려냈고,  두 사람 중 이 사각
형을 벗어나는 자가 패하는 걸로 하기로 했다.  두 사람 모두 투창, 검, 단
도를 차례대로 사용할 수 있으며, 추첨을 통해 투창 던지는 순서를 정하기
로 했다. 투창 던지기로 결판이 나지 않으면  검과 단도를 이용하여 둘 중
의 한 사람이 죽거나 도망칠 때까지 계속  싸우기로 했다. 완전한 침묵 속
에 그리고 20만 대군의  눈이 지켜보는 가운데,  두 남자는 장식용 깃털이 
길게 늘어진 투구와 짧은 갑옷을 입고, 사각형의 금 양끝에 자리를 잡았다. 
오른손에는 투창이, 왼팔에는 방패가 들려 있었고  검과 단도는 혁대에 차
고 있었다. 메넬라오스는 분노로, 파리 스는 공포로 얼굴이 창백해졌다. 두 
사람의 이름을 적은 종이를 투구 속에  집어넣고는 추첨에 들어갔다. 먼저 
투창을 던질 수 있게 된 것은 파리스였다.  평소에 그는 투창에 아주 노련
했지만, 팔이 너무 벌린 나머지 투창에는  힘이 빠졌고 메넬라오스의 방패
에 가서 멎어버렸다. 이  번에는 메넬라오스가 복수심으로  배가된 힘으로 
투창을 던졌으나, 파리스는 정확하게 몸을 숙여 피할 수 있었다. 그러자 메
넬라오스는 검을 쥐고 상대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파리스의 투구를 향
해 격렬하게 휘둘러댔지만 칼만 부러지고 말았다. 질겁한 파리스가 도망치
려 하자 메넬라오스는 그의  투구 깃털을 잡아채어  목을  졸라대었다. 그 
순 간, 파리스의  보호 여신이던 아프로디테가  제우스의 금지령을 무시한 
채 끼여들지 않았더라면, 파리스는 그대로 죽어버렸을 것이다. 그녀는 파리
스의 투구끈을 잘라버려 메넬라오스의  손에는 끈자락만이 들려있게  했으
며, 파리스를 구름으로 둘러싸 잠시 상대방의 시야로부터 벗어나게 함으로
써 트로이 성곽 쪽으로 도망칠 수 있게 만들었다. 파리스가 어찌나 날쌔게 
도망을 쳤는지, 가벼운 발을 가진 아킬레우스조차  쫓아갈 수 없었을 것이
다. 이렇게 파리스가 싸움을 저버리고 도망치는 걸 본 10만 그리스인들 은 
승리의 감탄사 '아!'를, 10만 트로이인들은 실망의 감탄사 '오!'를 외쳐댔지
만, 프리아모스와 아가멤논 사이에 이루어진 합의에  따라 이제 곧 전쟁이 
끝나리라는 생각에 모두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실제로 성벽 위에서 싸
움을 지켜봤던 프리아모스는 메넬라오스에게 아내 와 보물을 돌려보냄으로
써 벌써 자신의 약속을 실행에 옮길 준비를  했고, 자신이 한 말을 충실히 
지키는 헥토르도 자기의 검을 땅에 내던짐으로써 전투가  끝났음을 알리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신들은 또 다르게 일을 결정하고 있었다. 트로
이인들에  대한 집요한 원한을 품고 있던 아테나로서는 그들을 이렇게  쉽
게 난관에서 벗어나게 놔둘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제우스의 금지에도 불구
하고  아프로디테가 분쟁에 개입했으므로, 자신도 그만큼  할 권리가 있다
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헥토르로 변신하고는 유명한 트로이의 사수인 
판다로스를 찾아갔다. 그는 막 파리스의 참패를 지켜보고 있던 중이었다.
  "판다로스, 방금 우리 민족이  당한 치욕을 피로써  씻고 우리를 능멸한 
메넬라오스를 응징해야 하네. 자네는 활에 능하니  그를 저 세상으로 보내
어, 거기서 맘껏 잘난 체하도록 해주세."
판다로스는 상관의 말을 거역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2명의 군인에게 방
패로 자기 모습을 가리게 하고는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이미 갑옷을 
벗어버린 메넬라오스를 향해 조준된 활을 쏘았다  화살은 메멜라오스의 옆
구리를 관통하여 그는 엄청난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그리스 군의 전열에
서 분노의 함성이 솟구쳤다. 아가멤논이 외쳤다.
  "우리는 배신당했다. 전투를 다시 시작하자."
그제서야 판다로스는 가짜 헥토르가 홀연히 사라지는 걸 보았고 자신이 속
았다는 걸 깨달았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전투를 재개한 첫번째 인물은 디
오메데스였다. 그는 아킬레우스가 없는  상황에서 그리스  장군들 중 가상 
용감한 자였다. 분노한 그는 부대를 이끌고  방금 메넬라오스를 다치게 한 
판다로스가 속해 있는 트로이 군대를 공격했다. 판다로스는 그에게 화살을 
날렸고, 잘 조준된 화살은 디오메데스의 갑옷을  묶었던 끈 하나를 끊어버
리고 디오메데스의 어깨 한 복판에 깊은 상처를 내었다. 하지만 '칼리돈의 
멧돼지'를 멈추게 하려면 그 정도로는 안 되었다. 디오메데스는 고통을 개
의치않고 자신의 임무를  계속했고 판다로스에게 투창 하나를 던져  그를   
단 번에 죽여버렸다. 겁에  질린 트로이인들은 무질서하게 후퇴했다.  아프
로디테에 대한 사랑 때문에 트로이의 편에 서게 된 전쟁의 신 아레스가 그
들을 돕기로 했다. 그는 트로이 병사로  변장하고는 전쟁터로 내려와 디오
메데스 앞에 나섰다. 흥분한 디오메데스는 아레스의  팔을 향해 무서운 칼
날을 휘둘렀다. 겁쟁이에 엄살꾼이던  아레스는 찢어질 듯 소리를  질렀고,  
그 소리가 하도 커서 전투의 굉음을 압도할  정도였다. 그리고는 망신스럽
게 도망을 치고 말았다. 그는 내려올  때만큼이나 재빠르게 올림포스로 다
시 올라가버렸고 아이처럼 징징 울면서 자기 엄마인 헤라에게 찾아가 치료
와 위안을 구했다.  제우스는 그를 비웃으며 말했다.
  "내 명령을 거스른 대가인 줄 알아라."
하지만 아레스의 개입으로 시간을 번 헥토르는 디오메데스가  전투를 벌이
고 있는 장소를 찾아낼 수 있었다. 헥토르가 나타나자 마음이 놓인 트로이
군들은 다시 전열을 정비하고 그리스 군에 맞섰다. 전투는 격렬했고 두 진
영의 손실은 막대했다. 그때 헥토르가 오디세우스에게 말했다.
  "우리가 합의했던 조약이 깨진 건 어떤 오해와 신들의 농간때문인 것 같
소. 하지만 배반의 주역인 판다로스는 이미 벌을 받았소. 그러니 이 전쟁의 
운명을 결정하기 위한 새로운  일 대 일 전투를  제안하는 바요. 이번에는 
나 헥토르가 트로이를 대표하겠소. 나는 그리스의 어떤 장군이라도 대적할 
준비가 되어 있소."
그리스 왕들은 전투를 잠시 멈추고 누가 헥토르에 대적할 것인가를 의논했
다. 메넬라오스가 자원했지만, 동료들은 옆구리의 상처 때문에 헥토르에 맞
설 수 없을 거라고  제지했다. 사실 아킬레우스가  없는 가운데서는 2명의 
그리스인만이 헥토르와 견줄 만했으니, 그들은 디오메데스와 아이아스였다. 
한데 디오메데스는 판다로스가 입힌 상처로 불리했기에 그리스  왕들은 만
장일치로 아이아스가 그들의 진영을 대표할  것을  결정했다. 다시금 모래 
위에 사각형이 그어졌다. 두 거구가 서로 마주보며 자 리를 잡았다. 싸움을 
유발하기 위해 그들은 거친 말로 서로를 비난하고 헐뜯었다.
  "이 술고래야!"
아이아스의 과도한 주벽을 빗대어 헥토르가 먼저 욕설을  퍼붓자 아이아스
가 응수했다.
  "너도 네 동생 파리스만큼 재빨리 도망치는지 한번 보자."
이렇게 서두를 뗀 후 싸움이 시작되었다. 헥토르가 먼저 던진 투창이 아이
아스의 거대한 방패에 부딪쳐 부서졌다 반면에 아이아스의  투창은 헥토르
의 방패를 절단내고 갑옷에  금을 내었지만  뚫지는 못했다. 기억하겠지만 
헥토르는 투포환 경기 대회의 우승자였다. 그래서  그는 무거운 돌 하나를 
집어들고는 아이아스의 방패를 향해 힘껏 던져 방패를 아이아스의  손에서 
떨어뜨렸다. 방패가 없어진 두 영웅은 길고 격렬한 칼싸움에  들어갔다. 두 
사람의 힘은 대등했고 그들이 휘두르는 세찬 칼 소리는 평지  전체를 울려
댔다. 저녁 6시에 시작된 싸움은  밤 9시가  되어도 결판이 나지  않은 채 
계속되었다. 그러자 그리스의 노왕 네스토르가 끼여들었다.
  "당신 두 사람은 하나같이 용감하고 힘이 넘치니. 오늘 안에 승부 가 가
려지지 않을 듯싶소. 그러니 이 고귀한 결투를 그만 끝내도록 합시다."
지친 아이아스와 헥토르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칼을 자루에 집
어넣었고 운동 선수처럼  서로 악수를 나누었으며,  오늘날   럭비 선수들
이 시합이 끝난 후  서로의 운동복을 바꿔 입듯이,  피묻은 서로의 갑옷을 
교환했다. 밤이 완전히 이슥해지자 두 군대는 각자의 진영으로 물러갔다.

    11 디오메데스와 오디세우스의 야간 수훈
진지로 돌아온 그리스의 주요 왕들은 아가멤논의  막사로  모였다. 그들은 
내일 트로이 군이 어떻게 나올까를 의논했다. 그들이 다시 공격을 해올까? 
그렇다면 언제, 어디를 공격해올 것인가?
  "그걸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늘 밤 사람을  보내어 그들의 대화를 
엿듣는 것이지."
라고 네스토르가 말했다. 모두 이 의견에 찬성했다. 아가멤논은  이 위험한 
임무를 위해 호전 적인 디오메데스와 교활한 오디세우스를 지목했다. 피곤
했지만 그들은 수락했다. 그들은 어두운 색깔의 옷을 입고 얼굴과 손을 시
커멓게 칠했다. 투구와 갑옷은  달빛에 반사되어 트로이  보초병들의 눈에 
띌 염려가 있으므로 걸치지 않기로 했다.  무기라고는 각자 단도 하나씩만 
지녔다. 자정 무렵 그들은 트로이의 성벽을 향해 떠났다. 도중에 작은 숲을 
지나가고 있을 때 그들 쪽으로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들은 몸을 숨겼고, 그들과 거의 비슷한  차림새를 한 2명의 트로이 병사
가 그리스 군의 막사로 향하는 걸  보았다. 오디세우스와 디오메데스는 뒤
에서 그들을 덮쳐 단도로 목을 위협하고는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움직이지 말고 질문에 대답해라, 안 그러면 목을 베어버릴 테니 그리스 
막사에는 뭐 하러 가는 거냐?"
하고 오디세우스가 물었다.
  "그리스인을 염탐하라고 헥토르가 우리를 보냈어요."
  "헥토르는 어디 있지?"
  "트로이의 다른 지휘관들과 아테나의 사원에서 회의를 하고 있어요."
  "아테나의 사원이 어디지?"
트로이를 한번도 방문한 일이 없는 오디세우스가 물었다.
  "그건 아주 쉬워요. 아폴론 문을 통해 트로이로 들어가면 정면에 아폴론 
거리가 나오는데, 아테나 사원은 그 왼편 두번째 거리에 있어요. 어렵지 않
게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초소를 통과할 수 있는 오늘 저녁의 암호는 뭐지?"
오디세우스가 다시 물었다.
  "오늘 저녁 암호는  '아름다운 헬레네는 명랑한  파리스를 사랑한다' 예
요."
이러한 정보에 만족한 오디세우스는, 말을 하면 살려주겠다고 약속했던 대
로 두 병사를 그냥 밧줄에 묶어놓으려 했다. 하지만 신속한 방식을 선호하
던 거친 성격의 디오메데스는 빼었던 단도의 날을 그대로 병사  하나의 목
을 향해 찔렀고, 날렵한 손으로  다른 병사의 목을 부러뜨렸다. 그런  다음 
두 그리스 왕은 다시 출발하여 아폴론 문에 당도했다. 그들은 정탐 나갔던 
트로이 병사들인 양 암호를 외침으로써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통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단 성안에 들어서자 방향을 잡는 데 어려움이 생기기 시
작했다. 오디세우스는 아폴론 거리로 가야 한다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디오
메데스는 트로이 병사가 포세이돈 거리라고  했다고  주장했다. 어쨌든 간
에 거리의 이름은 표시되어 있지 않았고, 설사  있다 한들 너무 높은 곳에 
적혀 있어 읽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트로이에  들어선 지 반 시간이 지나
도록 오디세우스와 디오메데스는 아테나 사원은커녕 출구조차 되찾을 희망
도 없이 길을 헤매고  있었다. 그때 그들은 몇  발자국 앞의 길모퉁이에서 
도시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여자 행인  하나를 발견했다. 오디세우스는 발
걸음을 빨리 하여 그녀에게 다가섰다. 길을 묻는 사람은 으레 외지 사람으
로 여겨질 거라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던 오디세우스는 정중하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부인 실례합니다만, 이곳 분이신가요?"
  "아니오."
라고 천연스럽게 대답하면서 행인 여자는 오디세우스를 양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깜짝 놀라 소리쳤다.
  "헬레네?"
  "오디세우스?"
오디세우스의 머릿속에서는 놀라움에 이어 즉각  걱정이 드리웠다. 자신을 
알아본 헬레네가 트로이 군에게 고발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하지
만 그의 염려는 잘못된  것이었다. 헬레네는 선한  여자였고 오디세우스에 
대해서는 항상 마음이 약했다. 그녀는 오디세우스를 정겹게 포옹하며, 한밤
중에 트로이 길거리에서 뭘 하고 있는지  물었다. 별안간 질문을 받았기에 
이번만큼은 거짓말을 둘러댈 겨를이 없었다.
  "여기 있는 디오메데스와 함께 염탐을 하러 왔소."
라고 간단히 답했다. 헬레네는 디오메데스와도  인사를 나누고 메넬라오스
와 다른 그리스 왕들의 안부를 물었다.
  "그들은 모두 잘 있소. 한데 여기서  이렇게 얘기를 주고받을 시간이 없
다오. 아테나의 사원이 어디 있는지 알려주겠소?"
헬레네는 '여기 사람은 아니었지만'  10년 이상 살았기에  도시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몸소 오디세우스와  디오메데스를 사원 문  앞까지 데려다 
주었고 경솔한 행동을 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는 작별을 나누었다. 그들이 
몰래 사원에 들어서는 순간 헥토르가 동료들과의 회의 끝에 결론을 내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여러분, 우리는 낙관해도 될 것입니다. 아킬레우스와 그의 병사들 도 없
는 상황에서 그리스 군이 우리를 이길 수는 없을 거요. 게다가 우 리는 매
일 저녁 성곽 안으로 피신하여 아주 안전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지만, 그
리스 군은 외부의 어떤 공격으로부터도 보호받지  못하고 있소. 그래서 그
들은 야간 공격에 대한 두려움으로 눈도 다 못 붙이고 잠 을 잘 것이고 머
잖아 지쳐버리게 될 거요. 그러면 그들은 우리의 뜻대로 좌우될 것이오."
이러한 말로 회의는 끝났고, 트로이 왕들은 잠자리에 들었다.  곧이어 잠든 
도시 위에 깊은 적막이 흘렀다.  오디세우스와  디오메데스만은 사원 안에 
남아 있었다. 그들 정면에는 매끄러운 나무로 조각된 '수호신' 아테나가 50
개의 촛불에 의해 밝혀지고 있었다.  트로이 사람들은 그 수호신에게 각별
한 경배를 바치고 있었고 그녀가 도시를 보호해준 다고 믿었다.
  "저 수호상을 가져가고 대신 우리가 다녀갔다는 작은  기념물을 남 겨둡
시다."
라고 오디세우스가 말했다. 그들은 받침대에서 수호상을  끌어내렸고, 밀랍
으로 대리석 받침대에 '오디세우스가 인사를 전함' 이라고 적어놓았다.  하
지만 일단 사원을 나서자, 수호상이 너무 무거워 그들 힘으로는 그리스 군
의 진지까지 운반이 곤란하다는 걸 깨달았다.
  "레소스의 말들을 훔치자."
오디세우스가 제안했다. 레소스는 트로이에서 가장  멋진  백마를 6필이나 
가진 유명한 트로이 장군이었다. 아테나 사원으로 오던 도중 오디세우스와 
디오메데스는 레소스의 궁전 앞을 지나왔었다.  그들은 그곳으로 되돌아가 
6마리 의 말이 잠들어 있는 마구간으로 소리 없이 침입했다. 말이 울지 못
하도록 그들이 메고 있던  가방에서 귀리 2되를  꺼내어 말들에게 먹였다. 
말발굽 소리에 보초들이 깨지 못하도록 발바닥을 짚으로 싸매고는  말 2필
을 마차에 매었다. 궁을 나온 그들은 마차에 올랐고, 수호상을 마차에 실어 
덮개로 가렸다. 그리고 보초병에게 암호를 대고  어려움 없이 트로이를 빠
져 나 왔다. 그들은 말을 달려 다른  그리스 왕들이 초조히 기다리는 막사
로 돌아왔다. 유명한 레소스의 말 2필과, 그 못지않게 유명한  수호상을 가
지고 돌아온 그들을 보고서 네스토르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당신들은 신이오!"
  "처량한 신이라오."
라고 허기와 피곤에 지친 오디세우스가 대답했다. 그들에게는 향기로운 소
금이 배인 따끈한 목욕물이 준비되었고, 마케도니아의 포도주 향이 가미된 
부드러운 양고기가 대접되었다. 자신들의  막사로 되돌아온  두 영웅은 곧 
이어 모든 걸 잊고 휴식에 접어들어 깊은  잠에 빠졌다. 하지만 다음날 아
침 오디세우스는 일찍 일어났다. 그는 헥토르가  했던 말을 그리스 왕들에
게 보고했다. 
  "트로이의 급작스런 공격에 대비하여  깊은 요새와 튼튼한  방책을 쌓아 
우리의 진지를 수호해야 합니다."
  네스토르의 지지를 받은 그의 제안은 회의에서 채택되었다. 그리스 군은 
즉각 일에 착수했고 한나절이 지나자  3미터 넓이와 2미터의 높이를  가진 
요새가 그리스의 진지를 막아주었고, 그 위에는 2미터가 넘는 방책이 둘러 
세워졌다. 10여 개의 튼튼한 문과 목재 다리는   방책과 요새 사이를 지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는 동안  트로이인들은 오디세우스와 디오메데스가 
어떻게 해서 수호상과 레소스의 말들을 훔쳐갈 수  있었는지를 알아내느라
고 그같은 작업을 막아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12 위기에 몰린 그리스 군 
  자신의 방심을 틈타 그리스 군이 요새와 방책을 쌓았다는 걸 알게 된 헥
토르는 낙담에 빠졌다. 그는 부친인 프리아모스 왕을 찾아가 그 리스에 화
해 협정을 제안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스에 메넬라오스의 보물을 돌려주고 헬레네는 우리에게  남겨 달라
고 하고 일을 종결지읍시다."
프리아모스는 이 생각에 동의하고 아가멤논에게 알리기 위해  특사를 파견
했다. 아가멤논은 즉시 왕들을  모이게 하여 의논했다. 메넬라오스는  물론 
이러한 협정에 화를 내며   반대했다. 그는 보물보다는 아내를  찾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이다. 하지만 몇몇 그리스 왕들은 그렇게 하자는 쪽으로 기
울었는데 그들 중에는 오디세우스의 경쟁자인  팔라페데스도 끼여 있었다. 
오디세우스는 이때야말로 팔라메데스에게 복수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는 
일어서서 발언권을 요구했다. 그는 노련한 웅변가였다. 연설을 시작할 준비
가 되자, 천천히 단상 쪽으로 걸어가면서 넓은 어깨 뒤로 머리를 젖히고는 
눈썹을 치켜올려 주위를 집중시키는 태도를 취했다. 그는 서두르지 않았고, 
호흡을 좀 더 잘 이용하고 성대력을 한껏 펼쳐내기 위해 구두 교수법의 교
사들이 권고하는 몸가짐을 만들어냈다. 즉 몸무게의  삼분지 이는 오른 발
에, 삼분지 일은 20센티쯤 앞으로  내민 왼발에 실었다. 뒤쪽으로 약간  기
운 상체는 15도 정도의 각도를 유지했다. 등뒤에서  맞잡은 두 손은 세 번
째 허리 척추뼈 높이에 놓여 있었다. 턱은  약간 앞쪽으로 내밀었고 두 눈
으로는 천천히 청중을 훑어보고 있었다. 완전한 침묵이 자리하자, 오디세우
스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그 소리는 웅변의 내용에 따라 때
로는 열정적으로 때로는 냉소적으로 어조를  달리했다. 눈송이처럼 경쾌하
면서도 빈틈없는, 날아갈 듯 그의 입술을 빠져 나온 말들은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아버렸다. 오디세우스가 팔라메데스를 비난한 그  연설은 모든 정치 
연설문집에 다 나와 있으므로 그걸 여기  다시 베껴 쓸 필요는 없을  것이
다. 게다가 그것은  세 문장으로 요약된다.  '팔라메데스는 배신자다. 그는 
프리아모스 왕에게 팔렸다. 그 증거로 그의  침대 밑에는 프리아모스 왕이 
지원을 대가로 건네준 금화 한 자루가 숨겨져 있다.' 팔라메데스는 결백을 
주장하며 아가멤논에게 침대 밑을 뒤져보라고 했다.  이미 며칠 전부터 공
격을 준비하고 있던 오디세우스가 금화 한 자루를 그곳에 숨겨놓은 사실을 
팔라메데스가 알 리 없었다. 돈자루가  발견되자  팔라메데스의 유죄는 확
실해졌다. 그의 항변에도 불구하고 사형이 언도되어 즉각 처형되었다. 프리
아모스의 제안은 그리하여 냉담하게 거부되었다. 이에 헥토르는 다음과 같
이 선포했다.
  "그리스인들이 이성에 따르지  않으려 하니,  우리로서는 그들을 강제로 
쫓아낼 수밖에 없다."
며칠 전 오디세우스에게 수호상을 도둑맞았다는 모욕감으로 헥토르의 전투
욕은 배가되었고 즉시 군대를  이끌고 성곽을 나섰다.  트로이군의 공격이 
하도 거세어서 그리스 군의 전열은 큰 충격을 받고 무너졌다. 어떤 그리스
의 지휘관도, 디오메데스나 아이아스조차도 헥토르 의   돌진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이아스는 유명한 사수인  동생 테우크로스를 불러 그
에게 명령했다.
  "내 방패 밑에 숨어서 헥토르를 죽이거나 상처를 입히도록 하라."
테우크로스는 무릎을 꿇고 앉아 활을   당겼고 아이아스는 무거운 방패로 
동생의 머리를 가렸다. 하지만 헥토르가 그 위험한 순간을 보고 말았다. 그
래서 그는 무거운 돌을 주워 방패를 향해 던졌고, 테우크로스에게 심한 부
상을 입혔다. 아이아스는 실신한 동생을 어깨에 메고 퇴각했다. 그리스인의 
퇴각은 패주로 변해버렸다. 무질서하게  막사로 밀려들어와  요새와  방책 
뒤로 몸을 피한 군인들은 전멸은 모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해가 떨어졌다. 헥토르는 군대에 전투 중지 명령을  내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일 싸움을 끝장내고 그리스인들을 바닷속에 던져버립시다. 그 동안은 
풍요로운 식사와 충분한 휴식을 취하면서 다시금 우리의  힘을 충전시키도
록 합시다."
그리스 진영에는 초조함이 감돌았다. 아가멤논조차 용기를 잃었다. 그는 다
시금 왕들을 모이게 했다.
  "여러분, 우리는 결코 이 전쟁에서 이기지 못할 것 같고,  완전히  패 할 
위기에 봉착했소. 우리를 가족과 나라로부터 오랜  동안 떨어지게 했던 이 
전쟁을 이쯤에서 그만 두는  게 현명하지 않겠소? 여러분들이  동의한다면 
오늘밤에라도 당장 배에 올라 우리들 조국으로 돌아갈 것 을  제안하는 바
요."
이러한 발표에 놀라운 침묵이 뒤이었다. 하지만 디오메데스가 즉각 거세게 
반발했다.
  "당신은 당신 뜻대로 하시오. 난 남아서 끝까지 싸우겠소."
메넬라오스, 아이아스, 오디세우스가 이 용감한  태도에  동의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네스토르가 말했다.
  "내 솔직히 말하리다. 우리가 이같은 위기  상황에 빠진 것은 우선 아가
멤논 당신에게 책임이 있소. 당신이 아킬레우스를  화나게 하여 그의 탈퇴
를 자극했으니, 우리의 가장 견고한 원조자를 없애버린 건  바로 당신이오. 
하지만 아킬레우스에게 저질렀던 잘못을 용서받고 그를 우리편에  서서 싸
우도록 설득할 시간은 아직 있을 거요."
아가멤논은 고개를 떨구었다.
  "좋소, 아킬레우스에게 그의 아름다운 브리세이스를  돌려주리다. 그리고 
보상하는 뜻에서 다른 7명의 젊은 포로와  말들, 그리고 우리가 트로이 전
쟁에서 승리하면 내 몫으로 돌아올  전리품의 일부도 제공하겠소이다."
  "그거 관대한 제안이구려. 아킬레우스도 그만하면   마음이 움직일 거라 
생각되오. 그러한 제안을 전달할 2명의 대사를 보내도록 합시다."
라고 네스토르가 말했다. 이 임무를 위해 오디세우스와 아이아스가 지목되
었다. 오디세우스 에 대해 아킬레우스는 크나큰 우정을 가지고  있었고, 아
이아스는 그의 사촌 형제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리스 진영의 끝에 위치
한 아킬레우스의 진지로 향했다. 아킬레우스는 막사  앞에 앉아 절친한 친
구인 파트로클로스를 벗삼아 칠현금을 연주하고 있었다. 아킬레우스는  그
들 을 환대하며 식사에 초대했다. 식사 도중에는  이런 저런 다른  이야기
를 나누었고, 디저트가 나온 순간 오디세우스는  예의 웅변조로 자신들 이 
찾아온 목적을 설명했다. 그는 우선 아킬레우스 없이는  그리스  군 이 승
리할 수 없을 거라고  말하면서 아킬레우스의 자존심을  높이 세워주었다. 
그리고는 아가멤논이 제공한 보상의 규모를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아킬레
우스가 트로이를 향한 배에 오를 때  그의 부친 펠레우스가 했던  권고를 
환기시킴으로써 아들로서의 효심을 자극했다.
  "아킬레우스, 부친이 자네에게 했던 마지막 말을 기억하게나.  '용감해라. 
하지만 감정을 잘 다스리고 기분의 변화를 억제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아킬레우스는 말없이 듣기만 했다. 그리스의 군대가  자신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에 우쭐해졌고, 아가멤논이 받았을 모욕에  속으로 고소해했다. 
더욱이 브리세이스를 되찾을  수 있으며, 아름다운  포로들과 말들 그리고 
전리품 일부를 보상으로 받을  수 있다는 데도 민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원한과 완고함은 이 모든 것보다 강한 것이었다. 잠시 숙고한 
아킬레우스는 멸시하듯 미소 지으며 오디세우스에게 말했다.
  "자네의 말은 참으로  웅변적이네만 내  마음을 누그러뜨리지는 못하네. 
이 전쟁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네.  나는 트로이에 아내를 빼앗긴 메넬라
오스에 대한 우정으로 이 전쟁에 참여했네. 하지만  내  아내를 훔쳐간 건 
트로이군이 아니라 아가멤논이네. 왜 내가 내게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헥
토르에 대항해 싸우며 내 목숨을 위험에 내놓겠는가? 더 말해도 소용없네. 
내 결심은 확고하니까. 난  내일 당장 부대를 이끌고  그리스로 가는 배를 
타겠네. 아가멤논에게 가서 브리세이스와 말들 과 포로들과 전리품을 모두 
가지라 하고, 아킬레우스는 몸을 팔지 않았다고 전하게."
파트로클로스가 오디세우스의 편을 들어 애원해도  소용이 없었고, 아이아
스가 아킬레우스의 고집을 거세게  나무라도 소용이  없었다. 어찌해볼 수 
없을 만큼 미르미돈족의 왕은 완강하게 버티었다. 그리하여 아이아스와 오
디세우스는 아킬레우스와 작별을 하고 아가멤논에게  돌아왔다. 그들의 당
황한  표정으로 미루어 다른 왕들은 임무가 실패했다는 걸 짐작했다. 용기
를 북돋게 한 것은 이번에도 디오메데스였다.
  "아킬레우스가 떠나든 남든 그건 그의 일이다.  우리는 그 없이도 해 나
갈 수 있다. 그러니 내일의 전투를 위해 좀 쉬도록 하자."
모두들 그의 충고를 따랐다. 하지만 그날 밤 그들 모두는 불편한 마음으로 
잠에 들 수밖에 없었다. 새벽이 되자 트로이  군의 공격을 알리는 나팔 소
리가 잠을 깨웠다. 그리스 군은 그들을 대적하기 위해 트로이 성곽과 그리
스의 진지 사이에 있는  평야로 서둘러 나아갔다. 트로이  군은 아주 빠른 
속도로 우세권을 잡았다. 파리스를  옆에 대동한 헥토르는  그리스 전열에 
큰 피해를 입혔다. 그는 투창으로 아가멤논의 팔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아
가멤논을 보호하려던 디오메데스도 파리스의  화살을  맞고 그의  발치에 
쓰러진 채 땅에서 꼼짝하지 못했다. 오디세우스가 달려와 화살을 뽑아냈지
만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이번에는  헥토르의 두번째 투창이 날아와  그의 
엉덩이를 찔렀다. 너무도  고통스러워 오디세우스는 도와달라고  소리쳤다. 
메넬라오스가 그를 도우러 왔지만 그 역시 헥토르가 던진 돌에  얼굴을 맞
아 다치고 말았다. 그리스 군은 겁에 질려 정신없이 후퇴하기 시작했고, 요
새와 방책 을 뛰어넘어 해변가에 정박하고  있던 선박까지 계속 도망쳤다. 
헥토르와 그의 부대들 역시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은 채  방책을 뛰어넘어 
그리스 군의 함대를 불사르겠다는  생각으로 그리로 향했다.  그리스 군의 
장성들 가운데 아이아스만이 아직  건재했다. 그는 용감하게  자기 부대의 
일부를 모아 트로이 군의 공격에 제동을 가해 그리스의 선박을  구하려 했
다. 하지만 헥토르가 던진  불붙은 짚단에 의해 선박  하나가 이미 불길에 
휩싸였다. 그리스의 상황은 절망스러워 보였다.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
는 자기들의 막사에서 이러한 접전을 지켜보고 있었다. 파트로클로스는 동
족의 패망을 그대로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킬레우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네가 이 전쟁에 끼여들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걸  이해한다. 하지만 난 
너처럼 아가멤논과 우리의 종족을 증오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니 제발 부
탁인데 그들을 도울 수 있게 해다오. 알다시피  트로이 군은 네 모습만 봐
도 충분히 기가 꺾이니, 네 무기들을 빌려  너처럼  차리고 나서기만 해도 
적군을 놀라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아킬레우스는 마지못해 승낙했다. 파트로클로스는 즉시 헤파이스토스가 손
수 아킬레우스에게 만들어준 번쩍이는 청동 갑옷과 투구와  방패로 치장했
다. 그리고 그의 검과 투창도 지녔다. 하지만 너무 무거워 들 수 없었던 긴 
나무창만은 그대로 두었다. 그리고 아킬레우스의  마차에 레소스의 말들만
큼이나 훌륭한 2필의 말을 서둘러 맸다. 격노한 아킬레우스의 말들을 다스
릴 줄 알았던 유일한 사람이자 수석 마부인 아우토메돈이 마차를   몰았고 
무장한 파트로클토스가 그 위에 올라탔다.  아킬레우스는 근심스런 얼굴로 
파트로클로스에게 마지막 당부를 했다.
  "먼발치에서 그저 트로이 군에게 모습을  보이기만 해라. 네가 나타나기
만 해도 그들은 그리스 진지에서 도망쳐버릴 테니까. 특히 그들을 따라 요
새를 넘어가지 않도록 조심하고 헥토르와는 대적하지 말아라. 그는 네게는 
너무 힘든 상대야."
파트로클로스는 이 지시를 지키기로 약속하고는 재빨리 말을  달려 전쟁터
로 향했다.

    13 돌아온 아킬레우스
  멀리서 아킬레우스로 변장한 파트로클로스를  본 트로이 군은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그리스 군은 용기를 되찾았다. 전투지에서 떨어져 상처를 치료
하고 있던 오디세우스만은 아킬레우스 갑옷 속의 파트로클로스를 알아보았
다. 그는 파트로클로스의 전투가로서의 자질을 높이 사지 않았기에 냉소적
으로 중얼거렸다.
  "당나귀가 사자 가죽을 쓰고 나타났군. 우는소리밖에 낼 줄 모르니 애써 
포효를 내지르려 하지 말아야 할텐데..."
가짜 아킬레우스에게 후면 공격을 당할까 두려워진 트로이 군은 그리스 선
박에 불지르는 일을 포기하고 재빨리 요새와  방책 너머로 후퇴했다. 파트
로클로스는 그곳까지 그들을 추격했다. 이러한 손쉬운  승리 에 도취된 파
트로클로스는 자기가 진짜 아킬레우스인 양 착각했다. 그는 퇴각하는 트로
이 군에게 투창을 던졌고 운좋게도 막 요새를 넘어가 던 트로이 장군 사르
페돈의 등을 맞추어 치명상을 입혔다.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의 지시
를 잊은 채,  사르페돈의 시체를 찾으려고  마부인 아우토메돈에게 요새를 
넘어가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전우인 사르페돈의 시체를 거두어 가려고 헥
토르가 몸을 돌렸고, 그 순간 파트로 클로스의 얼굴을 보고 말았다. 헥토르
는 그에게 다가섰다. 긴 창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파트로클 로스는 완전히 
열세에 몰렸다. 헥토르는 자신의 긴 창으로 그의 복부를 깊이 찔렀다. 치명
상을 입은 파트로클로스는 마차 밖의 먼지 속으로 굴러 떨어졌다.
  "아킬레우스가 나의 복수를 해줄 것이다."
그는 마지막 숨을 거두며 중얼거렸다. 혼자가  된 아우토메돈은 마차를 되
돌려 그리스 진영으로 재빨리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 짧은 전투를 지켜
본 메넬라오스가 마침내 파트로클로스를 알아보았다.  그는 아이아스의 도
움을 받아 파트로클로스의 유해를 거두기 위해  요새를 건넜다. 하지만 헥
토르가 이미 아킬레우스의 투구와 갑옷을 탈취했고 파트로클로스의 시체를 
자신의 마차에 매달려 하고 있었다.  메넬라오스와 아이아스는 필사적으로 
그걸 막아보려 했다. 그리하여 파트로늘로스의  시체를 둘러싸고 격렬하고
도 혼란스러운 접전이 벌어졌고 시체의 팔과 다리를 서로 잡아당기고 있었
다. 한편 아우토메돈 혼자 마차를 끌고 돌아온 모습을 본 아킬레우스는 모
든 일을 알아 차렸고 급히 방책으로 달려가.  친구의 시체를 서로 밀고 당
기며 싸우는 모습을 목격했다. 당장 몸을 던져 싸움에  참여하고 싶었지만, 
갑옷도 투구도 무기도 없이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분노와 절
망의 외침을 크게 세 번 질러대었다. 한데  그 소리가 너무도 우렁차고 무
시무시했던지라, 트로이인들의 피를 얼어붙게 했다. 그들은  아이아스와 메
넬라오스에게 시체를 내던지고 성곽 안으로  도망쳤다. 아킬레우스는 완전
히 신경발작에 사로잡혔다. 땅바닥에 몸을 굴리며 통곡하는 그를 동료들이 
부축하여 막사로 옮겼다. 급기야 모친인 테티스 여신이 그를  찾아왔다. 그
녀는 전쟁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가자고  애원했다.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파트로클로스의 복수를 할 것이며 헥토르를 죽
이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어머니가 해주실 일은 헥토르가 앗아간 제 무기들을  대신할 새 무기를 
가져다주시는 겁니다."
테티스는 그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다시  올림포스로 떠났다. 밤새도록 아
킬레우스는 고통과 분노의 눈물을  쏟아내며 파트로클로스의 유해를  지켰
다. 다음날 아침, 테티스는 헤파이스토스가 새로 만 든 무기들을 가지고 아
들에게 왔다. 새 무기들은 이전 것들보다 더욱 더 훌륭했다. 매끄러운 청동 
표면에 황금으로 수를 놓아, 갑옷에는 포효하는 사자 머리를,  투구에는 휘
황찬란한 태양의 문양을 넣었다. 아킬레우스는 갑옷과 투구로 무장하고 무
기를 갖추고는 아우토메돈이 이끄는 마차에 올라 아가멤논에게로 갔다. 그
곳에 모여 있던 그리스 왕들과 군사들은 아킬레우스를 환호했다. 아가멤논
은 다시금 그에게 사과했고 전투에  다시 돌아와준데 대해  감사해하면서 
브리세이스를 돌려주었다. 그녀는 기쁨의 눈물을  쏟으며 아킬레우스의 팔
에 안겼다. 하지만 아킬레우스는 감격에 넋을 놓고 있을  정신이 아니었다. 
서둘러 복수하고 싶은 마음에 아가멤논에게 공격 신호를  내려달라고 요구
했다. 오디세우스는 그러한 생각에 반대했다.
  "점심때가 다 되었소. 빈속으로 전투에 임하는 건 경솔하오. 우선 가벼운 
식사라도 합시다."
아킬레우스는 아무것도 삼킬 수 없노라고 항변했지만 다른  왕들이 오디세
우스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양고기를 조금만 먹어두게나. 배고프지  않아도 그 정도는  먹을 수 있
어."
라고 오디세우스가 충고했다. 마침내 설득당한  아킬레우스는 다른 사람들
과 함께 식사를 했다. 그러나 마지막 고기 조각을 삼키기가 무섭게 군사들
에게 전열을 가다듬으라는 명령을 내리고는 요새를 넘어섰다. 그러는 사이, 
성곽 안으로 피신한 트로이의 장군들도 한데  모여 있었다. 헥토르는 싸움
을 격려했다.
  "최후의 순간이 다가왔다. 오늘 우리는 이기든지 죽든지 해야 한다."
프리아모스는 성곽 밖으로 나서려는 헥토르를 저지하려 했다.
  "너는 우리의 유일한 기둥이다. 그러니 전면에 나서선 안 된다."헥토르의 
여동생 카산드라도 아킬레우스와의 정면 대결을 말렸다. 
그녀는 미래를 예견할 능력이 있었지만 아무도 그녀의 말을 듣지  않을 거
라고 신탁이 예언했던 바로 그 인물이다. 그녀는 헥토르에게 예언했다.
  "오라버니가 오늘 트로이 성을 벗어나면 다시는 우리에게  돌아올 수 없
을 거예요."
하지만 헥토르는 가족들의 간청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전날의 승리에 도취
된데다 파트로클로스의 시체에서 벗겨내온 아킬레우스의 갑옷과 투구를 몸
에 걸쳐 기세가 등등해진  헥토르는 스스로를 천하무적자처럼 느끼고는 아
킬레우스와 일전을 치르고 싶은 욕망으로 몸이 달아올랐다. 그는 점심식사 
후 곧바로 성밖으로 나갈 준비를 하라고  부대에 명령했다. 무기와 투구로 
완전무장을 하고 기다리는 동안 그는 집으로 가서 아내 안드로마케와 아들 
아스티아낙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안드로마케도 그를 붙잡아보려고 했
다.
  "당신은 저의 전부예요. 아버지이자 어머니고 형제이며 동시에 남편이에
요. 저를 버리지 마세요."
헥토르는 부드럽게 자기의 임무를 이해시켰다. 그는 아내에게 입을 맞추고 
아들을 끌어안았다. 세 살밖에  안 된 아스티아낙스는 겁에  질린 듯 자기 
엄마의 치마폭에 숨어버렸다. 아마도 당신의 새 투구 때문에 겁먹은 것 같
아요."
라고 아내가 말했다. 헥토르가 투구를 벗자 아들은 곧 자기 아버지를 알아
보고는 다가와 서 팔에 안겼다. 헥토르는  온화하게 웃으며 아들을 안아주
었다. 그는 갑자기 이 아들을 다시는 못 볼 것 같은 불안을 느꼈다. 그러한 
감정에 빠져들지 않으려고 그는 서둘러 작별을 고하고 자기 부하들에게 돌
아갔다. 헥토르가 부하들과 함께 성을 빠져 나온 그 순간 아킬레우스를 앞
장세운 그리스 군대도 진지를 떠나고 있었다.  전투는 크산토스 강가에 위
치한 평원에서 벌어졌다. 싸움이 워낙 격렬했던지라 수많은 시체들이 강물 
속으로 빠져버렸고, 급기야 강의  흐름을 방해하여 강물을 범람하게  했다. 
크산토스의 강물이 범람하는 바로 그날 헥토르가 패하게  되리라던 신탁의 
예언을 기억할 것이라. 트로이 사람들만큼은 그  예언을 너무도 잘 기억하
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같은 예언이 실현되는 걸 보자 그들은 갑자기 두려
움에 사로잡혔고 토끼들처럼 성곽을 향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헥토르가 그
들의 도피를 막거나 늦춰보려고 해봤지만 헛일이었다.  하는 수 없이 그도 
그들을 따라 퇴각해야 했다. 잠시 후, 그는 병사들과 함께 성곽  밑에 도달
했고 성문이 열리려 했다. 헥토르는 부하들과  함께 성안으로 들어와 다시
금 기나긴 진지를 칠 것인가? 성 위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던 프리아모스, 
헤카베, 카산드라, 안드로마케는 헥토르에게 어서 성안으로  몸을 피하라고 
간청했다.
  "무모한 짓 하지 마라. 아킬레우스는 무적자인데다,  금빛 태양이 번득이
는 투구와 휘황한 사자가 장식된 갑옷을 입고 있어 그 어느 때보다도 기가 
등등해 있다는 걸 모르느냐?"
  "그러한 장식쯤은 겁나지 않습니다. 태양과 사자는 한낱 장식일 뿐 빛나
지도 물지도 않습니다."
라고 헥토르는 응수했다. 그리하여 마지막 트로이의 병사가 들어서자 성문
은 굳게 닫혀버렸다. 성곽 밑에 홀로 남은 헥토르는 자신의 용맹을 과시하
기로 했다. 하지만 몸을 돌리자마자 번득이는  갑옷을 입은 무서운 아킬레
우스 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헥토르, 그 용감한 헥토르는 
생전 처음 공포에 사로잡혔다. 스스로를 제어할  힘과 위엄을 모두 잃어버
린 채 그는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닫힌 성안으로 들
어갈 수 없었기에 그는 성곽 주변을 따라 뛰었고 아킬레우스는  갖은 욕설
을 퍼부어 대며 그를  추격했다. 그리하여 두 영웅은  성둘레를 세 바퀴나 
돌았고, 날렵한 발을 가진 아킬레우스는 점차 그와의 사이를  좁혀 나갔다. 
헥토르는 자신이 붙잡힐 게 뻔하다는 걸  깨달았고, 완전히 기진하기 전에 
즉각 싸워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되돌아섰다. 
아킬레우스는 겨우 10미터 전방에 있었다. 헥토르는 힘센 팔로 첫 번째 투
창을 아킬레우스의 배를 향해 던졌다. 여느  병사라면 그러한 상처에 당장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스틱스 강물에 몸을  씻었던  아킬레우스는 상처를 
입지 않았다. 그리하여 헥토르의  투창을 모기에  물린 것쯤으로 여기고는 
공격을 계속할 수 있었다. 아킬레우스는 자신만이 다를 줄 알던 무거운 나
무 창을 집어들었다. 그는 헥토르의 갑옷에 약한 부위가 있다는 걸 알았기
에(왜냐하면 그게 실은 아킬레우스의 갑옷이었으므로) 바로 그곳을 겨냥해 
창을 휘둘렀다. 헥토르는 칼을 뽑아들려 했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 아킬레
우스의 창이 갑옷과 가슴을 내리찍어버린 것이다. 헥토르는 자신이 치명상
을 입었으며 얼마 안 있으면 죽을 것을 알았다. 그는 아킬레우스에게 자비
를 구했다.
  "제발 부탁이니 내 몸을 우리 부모에게 돌려주어 온당한 장례를 치를 수 
있게 해주게. 그래야만 내 영혼이 엘리시온에  받아들여질 테니."
하지만 아킬레우스는 무자비했다.
  "넌 묘지도 없을 거다. 네 시체는 늑대와 독수리가 파먹게 될 거다."
라고 소리쳤다. 다행스럽게도 이 마지막 말은 듣지 못한 채 헥토르는 이미 
숨을 거두었다. 성곽 높은 곳에서 무기력하게 전투를 지켜보던 프리아모스
와 가족들은 공포에 질렸다.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시체를  마차 바퀴에 
매달아 이마를 땅에 질질 끌리면서 성 주변을 빠른 속도로 돌았다. 그리고
는 시체를 그리스 진영에 옳겨와 자신의 막사 앞에 펼쳐놓았다. 피와 먼지
가 뒤엉킨 시체에는 곧 이어 파리떼가 달려들었다. 밤이 되었다. 하지만 아
킬레우스도 프리아모스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킬레우스는 죽은 친구 파
트로클로스 생각으로 울며  지샜고, 프리아모스는 아들 헥토르를 생각하며 
눈물로 밤을 새웠던 것이다.

    14 휴전
  밤사이 프리아모스는 결단을 내렸고, 다음날 아침 가족에게 통고했다.
  "내 아들을 묘지도 없이 내버려둘 수  없다. 내가 직접 아킬레우스를 찾
아가 아들의 시체를 돌려달라고 애원해야겠다."
아내인 헤카베가 그를 말렸다.
   "아킬레우스는 성난 늑대예요. 그는 당신의 나이나 위치 따위는 고려하
지도 않은 채 당신마저 죽일 거예요."
하지만 프리아모스는 계획을 단념하지 않았다. 그는  아킬레우스에  게 줄 
선물을 가득 담은 궤짝을 마차에   실었다. 거기에는 은 꽃병,  황금 술잔, 
대리석 조각품들, 그리고 상아 손잡이가 달린 식기들이 그득 했다. 또한 아
킬레우스가 대단한 미식가라는 걸 알고 있던 헤카베는 뛰어난 요리 솜씨를 
발휘하여 맛난 음식을 준비해주었다. 평화를 알리는  흰 깃발을 앞세운 프
리아모스는 트로이 성을 빠져 나와 어려움 없이 그리스의 진지  안으로 들
어섰고, 여전히 헥토르의 시체가 널려 있는 아킬레우스의 막사를 찾아갔다. 
자기의 거처에 노장의 프리아모스가 들어서는 걸 본  아킬레우스는 놀라서 
입을 열지 못했다.
  "내 아들의 유해를 가져 갈 수  있도록 선처를 부탁하러 왔소. 보다시피 
여기 선물을 가득 가지고 왔소이다. 원한다면 내 딸들을 노예나 아내로 주
겠소. 이제 복수로 마음을 달랬을 테니 제발  당신의  관대함 을 보여주시
오."
아킬레우스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심란해진 그는 머뭇거렸다. 그러자 슬픔
으로 제 정신을 잃은 프리아모스가 그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아직 헥토르
의 피가 마르지 않은 아킬레우스의 손에 입을 맞추며 눈물을 흘렸다.
  "나처럼 나이 들어 당신의 귀환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당신 아버지를 
생각하시오. 당신이 만일 헥토르처럼 죽음을 당해   묘지조차 없다면 그의 
고통이 얼마나 크겠소."
이 장면을 지켜보았던 그리스인들은 프리아모스의 언행에 깊은  감동을 받
았고 차마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킬레우스조차 자신의 아버지를 생
각하자 목이 메었고 분노가 사그라들었다. 그리하여 아킬레우스는 말했다.  
 "귀하신 왕이시여, 그대의 아들을 돌려드리리다. 그를 데려가 훌륭한 장례
를 치러주시오. 장례식이 치러지는 동안 얼마든지  전투를 중단 할 준비가 
되어 있소."
프리아모스는 아킬레우스에게 감사하고 12일 간의  휴전을 요구했다. 아킬
레우스는 헥토르의 몸을 씻고 향수를 뿌리게 하여 프리아모스의 마차에 옮
겨주었고, 프리아모스는 곧 트로이로 돌아갔다. 헥토르의 유해는 깊은 애도 
속에 받아들여졌다. 그의 부모와  가족과 친구와 병사들은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헬레네는 슬픔과 후회로 심한 충격을 받았다.
  "헥토르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된 것은 다 내 탓이다. 더욱이 헥
토르는 나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지도 않고 비난하지도 않았던 유일한 트
로이 사람이 아니던가."
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휴전기간 동안은 관례대로 여러 경기들이 벌어졌다. 
육상과 경마, 투포환던지기  원반던지기, 투창던지기,  활쏘기 그리고 권투 
시합까지 벌어졌다. 영국인들이 주장하듯이 그 '귀한 경기' 가 18세기에 체
스터 필드경에 의해 고안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호메로스나 버질 
그리고 다른 고대 작가들의 책에서 볼 수 있듯이 권투는 이미 고대에도 존
재하고 있었다. 당시의 권투가  오늘날과 달랐던 유일한  점은 가죽장갑을 
끼는 대신 작은 청동 못이 박힌 가죽끈들로 손을 감쌌다는 데 있다. '세스
트' (권투용 장갑이라는 뜻)라고 불린 이 도구는  아주 살인적인 것이어서, 
선수들이 너무 격렬하게 싸우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상대방을 죽일지도 
모를 참가자는 아예 미리 탈락시키는 규칙을  마련해야 했다. 헥토르의 장
례식을 기회로 벌어진 권투 시합의 우승자에게는 4년생 황소를  주기로 했
는데, 결승전에서 아이아스와 프리아모스의 막내아들인 폴리도로스가 붙게 
되었다. 아이아스는 가장 키가 크고 무거웠으며, 폴리도로스는 가장 능란하
고 유연했다. 초반에 폴리도로스는 아이아스의 주위를 돌며 거리를 유지하
다가 여러번 상대방에게 펀치를 날렸지만  쓰러뜨리지는 못했다. 아이아스
는 묵직한 공격을 가했고 오른 쪽에 강력한 스윙을 날렸지만 폴리도로스가 
피해버렸다. 그 바람에 균형을 잃은 아이아스는 관중의 웃음 속에 먼지 구
덩이로 넘어졌다. 화가 난 그는 얼른 일어나 다시 시합을 했다.  하지만 그
의 강한 주먹은 허공에 가 닿을  뿐이었다. 폴리도로스는 상대방의 주먹이 
날아오는 걸 보고는 재빨리 몸을 굽히거나   물러섰고, 아이아스가 공격을 
위해 몸을 벌릴 때마다 정확하고 매서운 혹을 가했다. 동족이 어려움에 빠
져 있는 모습을 관중석 첫줄에 앉아 지켜보던 오디세우스는 반칙을 이용해 
끼여들기로 했다. 그는 정면을 향하고 있던  폴리도로스에게 마치 무슨 급
한 일을 알리기라도 하듯 등뒤에 대고  다급한 신호를 보냈다. 폴리도로스
는 잠깐 머리를 돌렸고 아이아스가 그 틈을 이용해 상대방  턱에 결정타를 
날렸다. 폴리도로스는 무너졌고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상태 에  빠졌다. 그
리하여 승리자에게 약속된 황소를 가져다주었고, 아이아스는 폴리도로스가 
어떤 위기를 벗어난 것인가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황소에게  무시무시한 주
먹 한 방을 가해 소의 머리를  박살냈다. 그러나 아이아스와 폴리도로스의 
권투 시합이 휴전 기간 동안의 가장 중대한 사건은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사건은 휴전 10일째 되는 날 거행된,  프리아모스의 딸 폴릭세네와 아킬레
우스의 결혼식이었다. 이는 프리아모스 왕이 헥토르의 유해를 찾아가며 아
킬레우스에게 약속했던 일이었다. 한데 이 결혼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사
람이 적어도 둘 은 있었다. 한 사람은 아킬레우스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었
던 브리세이스였다. 또 한  사람은 파리스였는데, 그에게도 이유는  충분했
다, 아킬레우스가 프리아모스의 사위가 되면 그리스와 트로이 간에 평화가 
이루어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헬레네를  메넬라오스에게 되돌려주어야 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파리스는 그러한 쓰라린 결과를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결혼을 방해하고자  했고, 최상의 
방법은 아킬레우스를 암살하는 거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아킬레우스는 스
틱스 강물에서 신비의 목욕을 했던지라 오른쪽 발목 을 제외한 온 몸이 상
처로부터 보호되어 있었고, 그 오른쪽 발목도  늘상 청동굽으로 싸매고 다
닌다는 걸 파리스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오랫동안 고심한 끝에 파리
스는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냈다. 그는 브리세이스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
다.
  "얘야, 넌 이제 곧 아킬레우스를 잃게 되겠구나. 네  사랑을 되찾고 싶으
면 내 충고를 따라라. 결혼식날 커다란 무도회가 열릴 텐데, 그때 아킬레우
스에게 찾아가 춤을 한번 같이 추자고 해라.  넌 춤 솜씨가 뛰어나니 분명 
그가 다시 널 사랑하게 될 거야."
파리스는, 춤을 추기 위해서는 아킬레우스가 청동 굽을 벗을 것이며 그 순
간을 이용해 그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냈던 것이다. 브
리세이스는 파리스가 요구한 대로했고, 아킬레우스는 브리세이스가 요구한 
대로했고, 파리스는 아무도 요구하지  않은 일을 했다. 그는  아킬레우스의 
발목에 독화살을 쏘아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다. 친구들에 둘러싸여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아킬레우스는 중얼거렸다. 
  "내 말들과 무기들을 물려받을 사람은......"
그는 말을 다 마치지 못한 채 눈을  감아버렸다. 이러한 살인에 분노한 그
리스인들은 배신을 외쳐댔고, 파리스가   예상한 대로, 아가멤논은 휴전이 
중단되었으며 다음날부터 전쟁을 재개한다고 선포했다. 당황한 트로이인들
이 성곽 안으로 돌아가는 동안, 그리스  왕들 사이에서는 아킬레우스의 유
물이 누구에게 돌아갈 것인가를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그들을 진
정시키기 위해 현명한 네스토르가 판관으로 나섰다.
  "아킬레우스의 무기와 말들은 그리스를 위해 가장 많은  공사를 한 자에
게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각자 자기의 장점만을 옹호하려  들테니, 여러분
이 원한다면 내가 심판을 내려주겠다."
그의 제안은 받아들여졌다. 맨 처음 자기 주장을 하러 나선 사람은 아가멤
논이었다.
  "나는 그리스 군의 최고 우두머리이니 내가 가장 자격이 있다."
네스토르는 아킬레우스의 분노와 탈퇴를 자극한 장본인이 바로 아가멤논이
며, 그로 인해 수많은 그리스 군이 학살당할 뻔했다는 점을 환기시켰다. 메
넬라오스는 헬레네를 납치당한 보상으로 자기가 유물을 받을  권리가 있다
고 주장했다. 그러자 네스토르는 다른 왕들은 메넬라오스의 아내를 되찾아
주기 위해 거의 10년 가까이 조국과 가족을 떠나야 했으므로 더 많은 보상
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주지시켰다. 그러자 이번에는 디오메데스가 말했다.
  "아킬레우스 다음으로는 내가 제일 용감한 그리스의 장군이오. 아킬레우
스가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동안 아가멤논이 공격을 중지하자고 했을 때도 
난 계속해서 싸울 것을 주장했고 오디세우스와 함께 트로이에 가서 대담한 
야간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소."
이 마지막 에피소드는 차라리 언급하지 않는 게  나을  뻔했다. 왜냐 하면 
생명은 살려주기로 약속했던 트로이 병사를 목졸라 죽인  디오메데스의 잔
인함과 배신 행위에 모든 사람들이 심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번에
는 아이아스가 일어나 자신이 그리스의 이익을 위해 봉사했던  바를  늘어
놓았다.
 "나는 일 대 일 전투에서 헥토르를 상대하여 그와 정면 대결했소. 게다가 
다른 왕들이 싸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나 혼자 정정당당히 헥토르
에 대적하여 우리의 선박을 불지르려는 트로이  군을 막아냈소."
그의 말을 수긍하는 두런거림이 일어났고,  네스토르는 아이아스에게 보상
을 주려는 듯했다. 하지만  오디세우스가 아직  자신의   권리를 옹호하지 
않았다. 그는 맨 나중에 말하는 사람이 으레  옳은 말을 한다는 걸 알고서
는 교활하게 마지막 순간을 기다렸던 것이다.  겸손을 가장하며 그는 다음
과 같이 의견을 표시했다.
  "나로서는 스스로를 영웅이라 생각지도 않으므로 어떤  보상도 요구하지 
않아요. 물론 여자 기숙사에 숨어 있던  아킬레우스가 나로 인해 발각되어 
이 전쟁에 참여하게 됐지만 말이오. 또한 트로이에 야간 임무를 띠고 갔을 
때 수호상과 레소스의 말들을 가져오게 된  것도 순전히 운명이었소. 더욱
이, 그리스 군을 숱한 재난으로부터 보호해준  요새와 방책을 구축할 생각
을 해냈던 것도 신들이 불어넣어준 영감  덕택이지요. 하지만 이러한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난 단지 내 의무만을 했을 뿐이며, 아킬레우스의 유물을 
받을 만한 자격에 대해서는 조국을  위해 날마다 목숨을 내걸고  피흘리는 
그 어떤 병사보다 내게 더 많은 권한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이러한 
능란한 연설은 청중과 네스토르의 호의를 샀다. 게다가 오디세우스에게 언
제나 특별한 호감을 가지고 있던 네스토르는 그에게  아킬레우스의 유물을 
주기로 했다.  아가멤논, 메넬라오스, 디오메데스도  이러한 판결에 동의했
다. 하지만 실망하고 화가 난 아이아스는, 술까지 과도하게 마신 탓에 광포
한 발작을 일으켰다. 비틀거리는  가운데 그는 존경하는  네스토르의 뺨을 
후려쳤고, 그를 막아보려던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를  넘어뜨렸으며,  칼을 
뽑아들고 한 무리의 돼지를 오디세우스의 병사로  착각하여 학살했으며 양
치기를 오디세우스로 착각하여 돛에 매달아놓고 죽도록 매질을 했다. 마침
내 제정신이 돌아와 자신의 흉칙스런 행동을 깨우치자, 분노는 부끄러움으
로 바뀌고 말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막사로 물러가 가슴을 칼로 
찔러 자살했다. 형이 받은 마음의  상처를 동정했던 테우크로스는 형 아이
아스를 위한 엄중한 장례식을  거행해줄 것을 요구했다.  아가멤논과 몇몇 
그리스의 왕들은 아이아스가 광란과 자살로써 스스로의 명예를 실추시켰으
므로 그의 시체는 개들의 먹이로 던지는 게 마땅하다면서 그러한  의견 에 
반대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오디세우스가 아이아스의 편을 들었다.
  "그는 나의 적이었고 나를 죽이려 했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영웅이었으며 우리의 군대를 구해낸 사람이오.  그러므로 영예로운 장례식
과 품위 있는 묘지를 가질 권리가 있소."
아가멤논은 이러한 논리에 굴복했고 테우크로스는 오디세우스에게  감사해
하며 말했다.
  "당신이 모진 사람이라는 평판이 있소. 하지만 오늘 당신이 보여준 태도
는 그 어느 그리스 왕들보다도 훌륭하오."

    15 트로이의 목마 
  휴전 파기 이후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아킬레우스와 아이아스의 죽음
으로 허약해진 그리스 군을 보강하기 위해 오디세우스는  아킬레우스의 아
들인 젊은 왕자 필로스를 그리스로부터 불러들였다. 필로스가 도착하자 오
디세우스는 그에게 아킬레우스의 무기들과 갑옷,  투구를 돌려주는 관대함
을 보였다. 필로스는 젊고 용감하긴 했지만  아버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
다. 똑같은 옷으로 무장하긴 했어도 아버지를 대신할 수는 없었다. 어느 날
의 접전 중에 그리스 군은 헬레노스라는 트로이의 점쟁이를 포로로   잡았
다. 오디세우스는 그에게 트로이 군의 정신 상태에 대해 물었고, 이 전쟁의 
귀추에 대해 의견을 물었다. 헬레노스는 도전하듯 대답했다.
  "우리를 이기려면 헤라클레스의 무기가 필요할 거요."
오디세우스는 10년 전 그리스 군이 트로이의 해변에 도착하기 앞서 렘노스 
섬에 잠깐 머물렀을 때 독사에 물려 섬에 두고 왔던  필로크테테스가 헤라
클레스의 활과 화살을 가지고 있었던 사실을 기억해냈다.
  "필로크테테스를 찾아 나서야만 한다. 그래서 만일 그가 아직 살아 있다
면 트로이군 앞에 나서게 해야 한다."
라고 오디세우스가 선언했다. 하지만  누가 이 미묘한  일을 맡을 것인가?
  "당시에 그 자리에 없었던 필로스만이  그의 분노를  돋구지 않고  얘기
를 건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필로스를  섬까지 데려다 주고 그가 
할 일을 지시해야겠다."
라고 오디세우스는 숙고 후에 결정 내렸다. 그리하여 오디세우스와 필로스
는 파견부대와 함께 렘노스 섬에 도착했다. 도착 즉시 필로스는 젊은 혈기
를 드러내면서, 당장 필로크테테프를 찾아내어 그의 멱살을 잡아 선박까지 
끌고 오겠노라고 호언하며 떠날 준비를 했다.  그런  그에게 오디세우스가 
타일렀다.
  "나도 젊었을 때는 언제나 폭력을  사용하려고만 했다네. 말은 사용하지 
않으려 했고 늘 팔이 먼저 앞섰지. 하지만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건데, 세상
을 지배하는 건 말이지 행동이 아니라네. 힘이 아니라 교묘한 술책이 필요
해."
그리고는 필로스에게 필로크테테스를 발견했을 때 취해야 할  행동을 설명
해주었다. 필로크테테스는 강인한 체력을 가졌고, 헤라클레스의  활로 날짐
승을 잡아먹을 수 있었기에  아직 살아 있었다. 필로스는  동굴 앞에 앉아 
있던 필로크테테스를 어렵지 않게 찾아내었다.  그는 오디세우스가 가르쳐
준 대로 말을 걸었다.
  "나는 아킬레우스의 아들인 필로스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그리
스 군에 합류했고, 그리스 군은 지금 트로이 성곽 앞에 진을  치고 있지요. 
한데 그리스의 왕들 특히 비열한 오디세우스와 도무지 마음이 맞지 않아서 
그들을 떠나 그리스로 돌아가기로 했다오. 그들이 이 섬 에 당신을 버렸다
는 이야기를 듣고는 함께 돌아가자고 하려고 이렇게 도중에 멈추게 되었답
니다."
필로크테테스는 기꺼이 승낙했고 동굴 속에 있는 활과 화살을 찾아 가지고 
나와 좀 절름거리며 필로스를 따라 나섰다.  뱀에 물린 상처의 후유증으로 
다리를 절었던 것이다. 필로크테테스가 필로스의  배에 오르자마자 잠복해 
있던 오디세우스와 군사들이 나타나 필로크테테스를  묶었고, 그의 항의에
도 불구하고 트로이의 해변으로 데리고 왔다.  불운에 굴하지 않았던 필로
크테테스는 마침내 트로이 군에 대항하는 전쟁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자네에게 중대한 임무를  맡기겠네. 파리스가  위협적인 명사수라는 걸 
알 걸세. 그는 매일 아침 식사 전에  트로이의 성곽 위에서 우리의 병사들
을 과녁 삼아 활쏘기를 즐기면서 병사들을 마치 자고새처럼 한  두 마리씩 
죽이고 있다네. 워낙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우리  쪽 사수들의 조준 
위치에서 벗어나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아무런 두려움도  느끼지 않
고 그러한 짓을 하고 있다네. 하지만 헤라클레스의 활이라면 분명 그를 맞
출 수 있을 걸세."
다음날 아침, 파리스가 아무런 의심 없이 느긋한 태도로 자신의 표적을 찾
아 헤매고 있을 때, 필로크테테스는 2백 미터도 넘는 높은 곳으로 활을 쏘
아 파리스의 가슴 한복판에 명중시켰다. 파리스는  많은 피를 흘리며 쓰러
졌다. 그제서야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의 황금 사과 사건 이레  아무런 설명
도 없이 저버렸던 옛 애인 오이노네를 10년도 지난 지금에서야   처음으로 
생각했다. 오이노네가 상처를 치료해주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걸 기억해
냈기 때문이다. 그녀만이 그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그는 황급히  이데 
산으로 떠나 오이노네가 즐겨 머무르던  작은 숲으로 찾아가 그녀를  만났
다.
  "지난 날 우리의 사랑을 기억하여 제발 나를 치료해주오."
라고 파리스는 중얼거렸다. 하지만 오이노데는 배신을 용서하지 않았다. 10
년도 넘게 복수의 날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분한 마음과 질투심을 되새기고 
있던 그녀에 게 마침내 그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그렇다면 황금 사과나 먹으렴."
하고 냉소하며 오이노네는 파리스를 팽개쳐버렸다.  파리스는 그대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헬레네가 파리스의 죽음에 대해 연민을 느꼈는지 어땠는지
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건 단지, 남자  없이는 한
시도 견딜 수 없었던 그녀인지라  얼마 후 파리스의 동생인  데이포보스와 
재혼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파리스가 죽었다고 해서 그리스 군의 승리를 
확신할 수는 없었다. 전쟁은 아직도 불분명했고 장기전의 조짐이   보였다. 
헥토르 가 없는 상황에서 트로이 군은 평지 전투를 피하고 성곽 안에 머물
러 있었고, 그리스 군으로서는 성곽 공격을 감행할 처지는 안 되었던 것이
다. 아폴론과 포세이돈이 성곽과 함께 축조해준  거대한 창고 덕에 트로이 
인들은 필요하다면 20년이라도 버틸 수 있었고,  그리스인들도 그 사 실을 
알고 있었다. 파리스가 죽고  난 얼마 후 그리스  진영에는 다시금 낙담의 
기운이 감돌았고, 아가멤논은 또다시 포위령을 풀 것을 생각했다. 이번에는 
오디세우스가 반대했다. 그는 왕들을 점심식사에 초대하고는 자신이 몇 주
전부터 비밀스레 생각해왔던 계획을 밝혔다.
  "여러분, 지난 10년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트로이의  성곽을 넘어설 수 
있는 방법은 무력이 아니라는 걸 분명히 알게 되었소. 교활한 술수를 사용
해야만 하오. 즉, 눈에 띄지 않게 도시를 침투해야 하는 거요."
  "눈에 보이지 않고 성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라도 발견했나?"라고 디
오메데스가 빈정거리며 물었다.
  "그렇소. 간단한 예를 통해  어떻게 하는지 보여주겠소. 당신  앞에 있는 
접시의 포도송이가 보이죠?"
  "보이지."
라는 디오메데스의 대답에,
  "이제 곧, 분명 우리 눈에 보이던 이 포도송이가 누구 눈에도 띄지 않고 
아가멤논의 막사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리다."
라고 오디세우스가 말했다. 그리고 그는 디오메데스에게 포도송이를 한 알
씩 다 따먹은 후 아가멤논의 막사로  들어가라고 명령했다. 그가 막사에서 
다시 나오자 오디세우스가 자신의 계획을 전개했다.
  "포도가 디오메데스의 뱃속에  들어가면 보이지  않게 되듯이, 병사들이 
만일 디오메데스보다 더 큰 동물의 뱃속에 들어간다면 보이지 않게  될 것
이요. 한데, 자연이 제공한 동물  중에는 우리 몸체보다 큰 동물이  충분치 
않으니, 우리가 직접 그걸 만들어내야 하오."
그리스의 왕들은 오디세우스의 계획에 원칙적으로는  수긍했지만, 그 세세
한 실행은 오디세우스에게  맡겨버렸다. 재능있는  목수였던 오디세우스는 
병사들과 더불어 몇 시간만에 10미터도 넘는 높이를 가진 목마를 만들어냈
다. 말의 내부는 비어 있었다. 오디세우스와 메넬라오스 그리고  30명의 병
사가 그 안에 들어갔다.  그러는 동안  오디세우스의 지시대로 아가멤논과 
모든 그리스 군대는 어둠을 이용하여 배에 올라 트로이 해변을  떠나 거기
서 몇 마일 떨어진 테네도스라는 작은 섬 뒤에 숨어버렸다. 다음날 아침해
가 뜨자 트로이 사람들은 그리스 군대가  떠나버렸다는 걸 확인했다. 그리
고 평지에서 있는 거대한 목마를 발견했다.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성밖으
로 몰려나온 트로이 사람들은 호기심과 경계의 눈빛으로  목마를 조사해보
면서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하며 무엇으로 여겨야 할지 궁금해했다. 가장 널
리 퍼진 의견은 그것이 그리스인들이 떠나며  남긴 선물일 거라는 거였다. 
하지만 트로이의 저명한 신관이었던 라오콘은 그러한 생각에  경계를 표했
다.
  "당신들은 그리스인들이 간교한 능력도 없는 줄 아오?  오디세우스와 그
의 교활함을 모르오? 트로이인들이여, 이 목마를 경계하시오.  나라면 설사 
그들이 선물을 했다 하더라도 두려워하겠소."
이렇게 말하고는 자신의 투창으로 말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안쪽에서 
이상한 소리와 금속성의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혼자  해변에 남아 
바위 뒤에 숨어 있던 그리스인 하나가 매복지에서 나와 트로이인들에게 다
가왔다. 그의 두 손은 등뒤로 묶여 있었다. 그는 전날 밤 오디세우스로부터 
모든 일을 지시받은 터였다. 자신을 둘러 싼 트로이 사람들에게 그가 외쳤
다.
  "내 이름은 시논이고 팔라메데스의 절친한 친구요. 팔라메데스는 아시다
시피 오디세우스에 의해 사형을 당했소. 오디세우스는  나 역시 죽이려 했
고 나를 묶어 감옥에  집어넣었소. 하지만 그리스 군이  배에 오르는 순간 
난 감옥을 빠져 나왔고 혼자 당신네 해변에  남게 된 거요. 당신들이 원한
다면 왜 그리스인들이 이 말을  남겨두고 떠나갔는지 말 해주겠소."
호기심이 극에 달한 트로이인들은 시논에게 설명을 재촉했다.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걸 안 그리스인들은  점쟁이 칼카스에게 자문
을 구했다오. 점쟁이는 수호상을 훔쳐내온 일  때문에 아테나 여신이 화가 
나서 그들로부터 돌아섰다고 했어요. 그리고 칼카스는 여신의 마음을 달래
려면 그리스 군이 자기 나라로 돌아가 아테나 여신상을 찾아다 돌려주어야 
할거라고 덧붙였다오. 그리고는 말의 모양을 한  다른 조각상 하나를 아테
나 여신에게 바치고 그리스인들이 되돌아올 때까지 평야에  세워놓아야 한
다고 점쟁이가 충고했어요.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말이 트로이 사람들 손
에 들어가 그들의 도시 안으로 옮겨진 다면 그 도시는  영원히 난공불락이 
될 것이라 했소. 그래서 여러분에게 충고하겠는데. 그리스 군이  없는 틈을 
이용해 이 말을 당신네 성곽 안에 옮겨 놓는게 좋을 것이오."
트로이의 신관 라오콘은 그러한 제안에 거세게  반대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그리스의 두 수호여신 헤라와 아테나가 개
입했다. 그녀들은 바다에서 흉측한 독사를 솟아오르게 하여 라오콘을 사로
잡아 위력적인 똬리로 그의 목을 휘어감아  질식시켜 버리게 했다. 이러한 
기적에 놀란 트로이인들은 그것이 라오콘의 불신에 대한  응징이라며 시논
의 설명을 긍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튼튼한  밧줄로 12마리의 소에 목
마를 매달아 도시의 가장 큰 대문을 통해  성곽 안으로 들어서게 했다. 그 
와중에 고삐가 네 번이나 흔들렸고 그럴 때마다 갑옷과 투구가  서로 부딪
치는 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카산드라는 목마가  도시에  죽음과 화재를 
불러올 거라고 소리쳐 예고했다. 하지만 늘  그랬듯이 아무도 그녀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해질 무렵이 되자  말은 마침내 트로이 시 한복판,  아
테나 사원 정면에 자리하게 되었다. 한  무리의 트로이 사람들이 말주변에 
빽빽이 둘러섰다. 안에서는 오디세우스가 발각되지  않도록 병사들을 조심
시키고 있었다. 감기에 걸린 병사가 재채기를  하려 하자 오디세우스는 그
의 코를 꼬집어 못하게 막았다. 졸고 있던  다른 병사는 칼을 떨어뜨릴 뻔
했는데 아슬아슬 한 순간에 오디세우스가 잡아낼 수 있었다. 또 다른 병사
가 설사에 걸려 급히 나가야겠다고 호소하자,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투구를 
벗어주며 그 안에 급한 일을 처리하라고 달래야 했다. 마침내 군중이 흩어
졌다. 하지만 말주변을 서성거리는 한 그림자 가 있었다. 그것은 술책의 낌
새를 챈 아름다운 헬레네였다. 그녀는 은밀히 그러한 일을  바랬다. 전쟁과 
새 남편 데이포보스와 이국에서의 생활에 싫증이 난  그녀는 메넬라오스와 
자신의 조국이 그리워졌던 것이다. 헬레네는 말에 가까이 다가가 중얼거렸
다.
  "메넬라오스 거기 있어요? 저예요. 당신 아내 헬레네예요. 전 여전 히 당
신을 사랑하고 있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감동받은 메넬라오스는 자제할 수가 없었다.  그는 헬레네에게 응답함으로
써 자신을 알렸다. 그러자 오디세우스도 그녀에게 말했다.
  "우리를 배신하지 말아요. 궁으로 돌아가 가장  높은 탑에 불을 밝혀 아
가멤논에게 선박과 함께 돌아와도 좋다는 신호를 보내요. 그리고 데이포보
스와 보초들이 잠든 사이 그들의 무기를 풀어 어딘가에 숨겨놓도록 해요."
헬레네는 오디세우스의 명령에 서둘러 복종했다. 몇 시간 후,  트로이의 모
든 사람들은 잠이 들었고 전쟁이 끝난 걸 축하하며 무절제하게  마셔댄 탓
에 대개는 술에 곯아떨어져 있었다. 성곽 발치에는 그리스 군 전체가 테네
도스 섬에서 돌아와 침묵 속에 정렬하고  있었다. 그리스의 배신자로 위장
했던 시논이 목마로 다가가  비밀 통로를 열었다.  오디세우스와 동료들은 
소리내지 않고 말에서 나와, 성밖에 있는  아군들을 위해 감시병조차 없는 
성문을 열어주었다. 도시로 들어선 그리스 군들은  온 사방으로 흩어져 트
로이 군사를 죽이고 사원들을 침략하여 불살랐다.  도시는 금세 거대한 불
덩이에 쉽싸였고, 공포의 함성은 타들어가는 불길 소리에 덮여버렸다. 중요
한 그리스의 왕들은 왕실로  쳐들어갔다. 왕실 가족과  보초들은 헬레네가 
숨겨놓은 무기를 찾으려 했지만 헛일이었다. 침략자  중 가장 가혹했던 자
는 아킬레우스의 아들 필로스였다. 그는 침대에  누워  있던 데이포보스와 
왕좌에 앉아 있는 프리아모스를  가차없이 죽였다. 또한  헥토르의 아들인 
아스티아낙스를 사로잡아 오디세우스가 시키는 대로 아이를 탑  위에서 추
락시켰다. 그리고 포로가 된 안드로마케를 아내로 삼았고, 헤카베는 요리사
로 삼았다. 아가멤논은 카산드라에게 호감을 가져 그녀를 포로로  가졌다.
눈물짓고 있는 그녀를 데려가면서 아가멤논이 호기심 어린 질문을 했다.
  "어떻게 그리 확실하게 미래를 예언할 수 있지?"
  "저는 항상 최악의 것을  예상하죠. 그렇게 하면  절대 틀리지 않는다는 
확신이 생기거든요."
라고 그녀는 대답했다. 오디세우스와  디오메데스 역시 약탈  상태에 놓인 
궁전에서 전리품을 챙겼다. 메넬라오스는 그러한  약탈이나 복수에는 여념
이 없었다. 그는 오직 헬레네만을 생각했던 것이다. 마침내  궁전의 후미진 
방에서 그녀를 찾아냈다. 그녀는 두려움과 애정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잠시 서로 마주보고 있다가 마침내 그가 말했다.
  "당신이 놓고 간 흰 비둘기가 당신을 몹시 보고 싶어하오."
  "저 역시 비둘기가 그리워요."
메넬라오스는 그녀를 품에 안았고, 헬레네는 용서를 받았다는 것을 깨달았
다. 이튿날이 되자, 트로이는 거대한 연기에 싸인 페허에 불과했다. 남자들
은 거의 모두 학살당했고 여자와 아이들은  포로가 되었다. 그리스 왕들은 
전리품을 배에 싣고 차례로 닻을 올렸다. 그들 중에서 출발을 가장 서두르
던 자는 오디세우스였다. 그는 한시라도 빨리  연로한  부친 라에르데스와 
아내 페넬로페와 아들 텔레마코스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려
면 아직 10년의 시련이 더 필요하리라는 것을 불행한 오디세우스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4부 왕들의 귀환
    1 최초의 귀환자들 네스토르, 디오메데스, 테우크로스
  트로이와 그리스는 단지 에게 해만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었지만, 에
게 해가  4백 킬로미터에 달하는 넓이였기에 그것을 건너는  일이 당시로
서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사실 그리스인들은 배의 방향을 잡아줄 항해 지
도나 뱃머리를 지탱 해줄 항해 도구 따위를 갖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선박
에 달려 있는 돛은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만 배를 나아가게 할 수  있는 아
주 불완전한 것이었다. 그래서 왕들과 군대의 귀환은 길고 험난한 일이 되
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3명의 왕은 비교적 쉽게   바다를 건널 수 있었
다. 네스토르의  전격적인 귀환  제일 먼저 출발한 사람은 당시 나이 아흔
이던 필로스의 노왕 네프토르였다. 그는 동료들 특히 총애하던 오디세우스
와 감동적인 작별을 나눈 후 배에 올랐는데, 그러한 순간에도 자신의 주특
기인  철학적 격언을 읖조리는 걸 잊지 않았다. 예를 들면, 어렵고  험난할  
뱃길이 두렵지 않느냐는  메넬라오스의 물음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불행을 기다리는 일이 불행 자체보다도 더 견디기 힘든 법이지. 게다가 
사람들이 두려워하거나 학수고대하던 불행과 행복은 결국엔 기대치의 반밖
에 안 나타나거든."
집으로 돌아가 무엇을 할거냐는 오디세우스의 질문에는,
  "백이십 살까지는 할 일이 벌써 마련되어  있다네. 그 다음에는 정말 이
지 생각을 해봐야겠지."
라고 단언하는 것이었다. 네스토르의 경험과 지혜는 명성이 드높았다. 하지
만 나이가  들어감 에 따라 그의 결점들이  자주 두드러져 나타나곤 했다. 
젊었을 때도 이미 말이 많은 편이었는데 나이가 들자 완전히  노망난 사람
처럼, 들어주는 사람만 있으면 한도 끝도 없이 이야기를 되뇌이곤 했다. 그
래서 동료들은 그에 대한 애정과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그와 마주하
는 걸 무슨 수를 써서든 피하려고 했다.  한데 묘하게도 바로 이러한 버릇 
덕분에 그는 아무 어려움 없이 아주 빨리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네스
토르와 비좁은 배에 함께 올라야 했던 그의  부하들은 말하자면 '꼼짝없이 
붙잡힌 청중'이 된 셈이었다. 끝없이 되풀이될 그의 이야기를 피할 방법이
라곤  없었다. 3일째 되는 날, 과격한 선원 몇 명은 얘기를 듣지 않기 위해 
바다에 몸을 던져버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다른 선원들은  좀더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아냈다. 즉 네스토르의 지루한 얘기에 대한   화풀이를 노 젖
는 일로 해소함으로써 에게 해를 5일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건너는 기록
을 세웠던 것이다. 다른 왕들보다 훨씬  먼저 돌아온 네스토르는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 특히 전우들의 부모와 자내,  자식들에게 트로이 전쟁의 무훈
담을 얘기 해줄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우리는 이 책의 뒤에서  네스토르
에 대해 또 한번 얘기하게 될 것이다.

    고국으로부터 유배된 테우크로스와 디오메데스
  거인 아이아스의 동생이며 텔라몬의 아들인,  살라미스의 왕 테우크로스
는 그야말로 불운한 사람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그는 부친 텔라몬의 총애
를 받았던 형 아이아스의 그늘에 묻혀 살았다 게다가 그리스  군에서 가장 
뛰어난 사수였음에도 트로이 전쟁에서는 한번도 두드러진 역할을  하지 못
했다. 헥토르를 공격함으로써 빛을 발할 수 있었던 유일한  기회도, 화살을 
쏘려던 순간 형의 방패가 등을 내려치는 바람  에 좌절되고 말았다. 그 이
래 목관절염으로 고통을 받아 더 이상 활을  잡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모든 시련에도 불구하고 그는 형에 대한 애정과 헌신을 아끼지 않았다. 특
히 자살한 아이아스가 명예로운 장례를 치를 수 있게 되었던 것은 그의 덕
분이었다. 놀랍게도 그의 귀환길은 순조롭게 이어졌고 곧 이어 살라미스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래서 마침내 자신에게도 행운이 따르는가 보다고 생각
했다. 부친 텔라몬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바닷가에서 아들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테우크로스는 배에서 뛰어내려 아버지에게  뛰어갔다. 텔
라몬은 테우크로스를 안아주지도 않은 채 걱정스레 물었다.
  "형은 어딨냐?"
  "불행하게도 그는 죽었어요"
라고 테우크로스는 대답했다.
  "뭐라고? 아니 넌 형을 보호하지도 못했단 말이냐?"
흥분한 텔라몬은 다그쳤다. 그리고는 더 이상  설명도 듣지 않고 테우크로
스를 자기 나라에서 영원히 추방시켜버렸다.  이유는 다르지만 디오메데스 
역시 비슷한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칼리돈의  멧돼지로 불렸던 그는 트
로이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그로 인해 올림포스의 두  신의 반목
을 사게 되었다. 전쟁터에 나선 아레스를 공격해서 그를  도망치게 했으며, 
생명은 살려주겠다고 약속했던 트로이의  두 군사를 죽임으로써  제우스를 
화나게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디오메데스가 뱃머리에 올라 트로이를 떠났
을 때, 제우스와 아레스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을 찾아가 디오메데스의 배
에 거센 풍랑을 일으켜달라고 했다. 물살에 쉽쓸려가게 될 위기에 닥친 디
오메데스는 포세이돈에게 간청했다.
  "풍랑을 잠재워준다면 칼리돈의 해변에 도착하는 즉시 맨 처음 마주치게 
될 생물을 희생물로 바치겠다."
디오메데스는 그같은 약속이 커다란 위기를 자초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
다. 칼리돈의 해변에는 늘 수많은 야생  염소와 물새들이 서식하고 있었기
에 그 동물 중 하나가 회생될 거라고만  생각한  것이다. 포세이돈은 그의 
간청을 받아들여 바다를 잠잠하게 했고 디오메데스는 순조로운  항해를 계
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가 칼리돈의 해변에  도착했을 때는 
밤이었고 모든 야생 동물은 잠들어 있었다. 한편, 아버지가  돌아오는 길을 
편히 해주겠다는 생각에서 매일 밤 벼랑에 불을 밝혀놓고 있었던  그의 아
들이 해변에 나와 있었던 것이다. 불빛을 통해 그는 아들을 알아보았다. 약
속에 충실하던 디오메데스는 아들을 포세이돈에게  희생물로 바쳐야 했다. 
부하들은 이같은 야만적인 행위에 격분하여 그를 왕국에서  추방 시켜버렸
다. 이탈리아로 유배된 그는 운명을 저주하며 남은 여생을 보냈다.


    2 메넬라오스와 헬레네의 귀환
  트로이를 함락하면서 헬레네를 되찾은 메넬라오스는 아내의 부정을 너그
럽게 용서하고 다시금 함께 살기로 결심했다.  아내와의 화해를 견고히 하
려는 생각에서 그는 스파르타 왕국으로  곧장 돌아가기에 앞서 우선  에게 
해의 작은 섬들을 돌며 사랑을 확인하는 짧은 여행을 계획했다. 그래서 큰 
선박은 곧장 스파르타로 출발하게 하고, 그들은 선원 몇몇을 태운 배로 길
을 우회하면서 여행을 하기로 했다. 불행히도 방향 감각이 전혀 없던 메넬
라오스는 바람 가는 대로 무심히 몇 달인가  배를 몰았고, 급기야 길을 완
전히 잃어버리고 말았다. 자신이 지금 그리스의  북쪽, 서쪽, 동쪽 중 어디
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섬 하나를 발견했고 우선 
그곳에 내려 식량 도 구하고 주민들에게 자신의 위치에 대한  정보도 얻어
내기로 했다. 처음에 섬은 무인도처럼 보였다. 한데 몇백 미터쯤 들어서자, 
놀랍게 도 샘물에서 목욕하고 있는 아주  매력적인 처녀를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다급하게 속옷을 챙겨 입은 후 인사를 나누었다.
  "저는 에이도테아이고 이 섬에서 아버지 프로테우스와  단둘이 살고있어
요. 저희 아버지는 아주 원시적인 성격이라  여행객이 섬에 정박하면 몸을 
숨기고 절대 만나려 들지 않아요."
메넬라오스는 자신이 누구이며 어쩌다 이 섬에 들르게  되었는가를 간단히 
설명했다. 그의 얘기에 매료된 에이도테아는 며칠 이   섬에 머물러 갈 것
을 제안했다.
  "섬에는 사냥감이 아주 많아요. 사슴, 노루, 토끼, 자고새들이 상당 히 많
답니다."
기억하겠지만, 광적인 사냥꾼이었던  메넬라오스는 몹시  기뻐하며 그러한 
초대에 응했다. 그는 에이도테아를 데리고 해변으로 돌아가 헬레네에게 자
신의 새 여자 친구를 소개했다. 뒤이은 몇 날 동안 메넬라오스는 대부분의 
시간을 에이도테아와 더불어 숲속에서 사냥하는  데  보냈다. 사냥도 했지
만, 진실을 말하자면 조금 즐기기도 했다. 에이도테아가 매력적이어서 그랬
기도 했지만, 헬레네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던  것이다. 질투
심에 사로잡힌 헬레네가 남편의 장시간의 외출과 늦은 귀가를 나무라려 들
면 메넬라오스는 호되게 그녀를 야단 쳤다.
  "나를 10년이나 기다리게 했으면서, 점심 시간에  단 10분 늦은 것을 가
지고 감히 화를 낼 수 있느냐?"
에이도테아와 시간을 보내면서 메넬라오스는  이 섬이 그리스의  어디쯤에 
위치하고 있는지 물어보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대답할  뿐이었
다.
  "그건 저희 아버지만이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는 절대 말하려 들지 않
을 거 예요."
그러나 집요하게 물어대는 메넬라오스 때문에 그녀는 마침내  도움을 주기
로 했다.
  "사실 저의 아버지 프로테우스는 바다의 신이에요. 물론 제 일등급의 신
은 아니지만 마음대로 모습을 바꿀 수 있고, 그러한 능력을 이용해서 성가
신 사람들을 놀라게 하여 쫓아버리지요. 그에게  뭘 물어보고 싶다면 새벽
에 작은 포구로 가면  돼요. 매일 아침 거기에서  바다표범의 숫자를 세곤 
하거든요. 하지만 몸을 잘 숨겨야 해요. 당신이 있는 걸 알면  나타나지 않
으려 할 테니까요. 그리고 변신한 그의 모습을 보고 절대 당황하지 말아야 
해요."
다음날 새벽이 되기 전 메넬라오스는  3명의 선원과 함께 작은 포구로  갔
다. 포구에는 50여 마리의 바다표범이 누워 있었다 메넬라오스 일행은 4마
리의 표범을 죽여 껌질을 벗기고 그 껄질을 뒤집어쓰고는 표범  무리 속에 
한데 누워버렸다. 에이도테아가 세심하게 준비해준  암브로시아 향수가 없
었더라면 메넬라오스는 바다표범의 지독한 악취를 견뎌낼 수  없었을 것이
다. 가끔씩 그 향을 들이마시면서, 신들의 양식인 암브로시아가   영양가뿐 
아니라 방향제의 효과도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조금 후 프로테
우스가 태연히 나타났다. 그는 애지중지하는  바다표범을 어루만지면서 표
범 사이를 거닐었다. 그가 4명의 남자 곁으로 다 가왔을 때, 그들은 갑자기 
몸을 일으켜 그를 사로잡았다.
  "스파르타로 가는 길을 가르쳐주지  않으면 놔주지 않겠다."
라고 메넬라오스가 위협했다. 프로테우스는 거절했고 공격자들을 놀래키려
고 곰, 멧돼지, 사자로 차례로 모습을 바꾸었다. 하지만 4명의 남자는 놀라
지 않은 채 계속 그를 확 잡고  있었다. 그러자 프로테우스는 그들의 손아
귀에서 빠져나갈 생각으로 물로 변신해버렸다. 메넬라오스는 즉각 자기 속
옷으로 그 물을 빨아들여 바위 구멍 속에 던진 후 큰 돌로  구멍을 막아버
렸다.
  "이제 넌 거기 꼼짝없이 갇혔다. 자, 말해라?"
승복한 프로테우스는 메넬라오스가 돌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정보를 제공
했다. 그날로 메넬라오스는 아쉬운 마음을 간직한 채 에이도테아와 작별하
고 스파르타를 향한 배에 올랐으며 별다른 사고 없이 몇 달 후  자기 나라
에 도착했다. 그 후 그는 세상의 어떤 여자보다도 사랑스럽고 충실하며 명
랑한 아내가 된 헬레네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 

    3 돌아온 아가멤논을 맞는 불운들 
  왕 중의 왕이었던 아가멤논은 트로이 전쟁이 끝난 데 대해  당연히 만족
스러워했다. 그리스 군의 우두머리 지휘자로서 전쟁의 승리를 자신의 덕으
로 돌렸고 트로이에서 얻어낸 전리품의 상당 부분과 수많은 여자들을 포로
로 가질 수 있었다. 그 중에는 프리아모스의 딸인 카산산라가 있었는데 그
녀는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 예언 능력을 신으로부터 부여받고 있었다. 
그리하여 카산드라를 동반하고 부대와 함께 전리품들을 실은 백 척의 선박
에 올라 자신의 왕국인 미케네로 향했다. 그는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와 두 아이들을 곧 만나게 된다는 생각으로 기뻐했다. 
클리타임네스트라은 이피게네이아를 잃은후, 열다섯 살난딸 엘렉트라와 열 
살된 아들오레스테스와 함께 살고 있었다. 아가멤논은 저주받은 가문인 아
트리데스의 일원이었다. 그 가문의 첫번째 인물이  바로 자신의 아들 펠롭
스를 요리해 신들에게 대접한 죄로 영원한  징벌을 받은 탄탈로스이다. 탄
탈로스의 딸인 니오베는 14명의 자식들이 아폴론과 아르테미스의   화살에 
맞아 죽는 모습을 본 뒤 돌로 변했다. 펠롭스의 후손들 중에는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의 아버지인 아트레우스와 그 동생인 티에스테스가 있다. 이 두 
형제는 저주받은 가문의 전통을 훌륭하게 이어나갔다. 즉 티에스테스가 아
트레우스의 아내를 유혹했기 때문에 아트레우스는 만찬회장에서  동생에게 
자식의 몸을 먹게 했다. 그리고 아가멤논은 트로이 전쟁 초반에, 그리스 군
의 선박이 아울리스 항을 출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딸 이피게네이아를 
아르테미스에게 희생시킨 바 있다. 하지만 카산드라와 함께 트로이를 떠나 
미케네로 가는 배에 오르던 순간의 아가멤논은 지난날의 그러한 불행한 일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항해를 시작한  처음 얼마 동안 카산드라는 
조국의 패망을 생각하며 눈물로  보냈다. 하지만 차츰  아가멤논의 지위와 
그가 쏟아주는 관심에 마음이 움직여 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정겨
운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신의 불행한 예감들을 아가멤논에게 
알려주었다.
  "당신 나라에 돌아가지 마세요. 죽음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제 경고
에도 불구하고 굳이 돌아가시겠다면, 당신  아내인 클리타임네스트라를 조
심하세요."
아가멤논은 카산드라의 이같은 경고를 그녀의 습관적인 비관론이나 여자의 
질투쯤으로 치부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카산드라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은 
채 항해를 계속했다. 아가멤논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하기에 앞서 그의 아
내인 클리타임네스트라에 대해 잠깐 언급해야 한다. 왜냐면 불길한 인물이
었던 그녀는 뒤이은 이야기에서  지대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불운했던 
레다의 딸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아름다운 헬레네의 쌍둥이 자매였다, 큰 키
에 기품이 있던 그녀는 새까만 흑발에  몹시도 흰 피부 그리고 아주  붉은 
입술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각진 얼굴 위의 표정은  경직되어있었다. 그
리고 까다롭고 독선적이며 공격적이고 질투가  많았다. 아가멤논의 친구들
은 종종 그러한 아내를  가진 아가멤논을 측은해했다.  그러면 아가멤논은 
나름대로의 철학을 피며 이렇게 대꾸하곤 했다.
  "어떤 여자도 완벽하지  않은데 어쩌겠나?  어쨌든, 난 헬레네처럼 매력 
있지만 바람기 있는 여자보다는 미모는 좀 떨어져도 충실한, 클리타임네스
트라 같은 여자가 더 좋다네."
어떤 여자도 온갖 자질을 다 갖출 수는 없다고 한 아가멤논의 말은 옳다. 
하지만 온갖 결점을 두루 갖춘 여자도 있다는 걸 몰랐던데 그의 잘못이 있
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의 아내가 바로  그런 부류의 여자였음이 머지않
아 드러나게 된다.

    전쟁에서 살아온 아가멤논
    집에서 암살되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남편을 증오할 만한 이유를 갖고 있었다. 자기와 이
피게네이아를 속여 아울리스 항으로 끌어들여 딸을 희생시킨 일을 결코 용
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때 이미 언젠가 남편에게 죄값을 치르게 
하겠다고 협박했다. 하지만 남편의  귀환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데는 그다지 떳떳하지 못한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남편이 트로이 전쟁에 
떠난지 얼마 안 되어 그녀는 애인을 하나  가 졌는데, 그는 아가멤논의 사
촌 형제인 아이기스토스였다. 그들의 관계를 숨기기 위해 그녀는 아이기스
토스를 수상으로 앉히고 왕실에 방을 하나 내주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고 언제든 그를 만날 수 있었던 것
이다. 그러니 트로이 전쟁이 끝나 아가멤논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은 클
리타임네스트라와 아이기스토스가 기뻐하지 않았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
다. 그리하여 그들은 기회가 되는대로 그를 없애버리기로 작정했다. 비교적 
쉬운 항해 끝에 아가멤논이 마침내 자기 나라에 도착했을때, 클리타임네스
트라는 우선은 반가운 얼굴을 했고 기쁨을  가장하며 남편을 맞았다. 하지
만 아가멤논이 카산드라를 동반한 것을 보고  질투를 느꼈고, 애초에 품었
던 음흉한 계획을 빨리  추진하기로 했다. 아이기스토스와  짰던 계획대로 
그녀는 아가멤논과 카산드라에게 시원한 것을 마시러 가자고 제안했다. 카
산드라는 공손하게 받아들였지만, 아가멤논은 먼저 목욕을 하고 싶다고 했
다. 독약을 탄 술잔을 받아든 카산드라를  혼자 방에 놔두고 클리타임네스
트라는 아가멤논을 따라 목욕탕으로 갔다. 그가  욕조 속에 들어간 지 3분
도 채 안 되어 카산드라의 외마디 비명이 들려왔다.
  "무슨 일이지? 가봐야겠다."
고 아가멤논이 걱정하며 묻자,
  "병나지 않으려거든 우선  물기부터 씻어요."
라고 클리타임네스트라가 충고했다. 그리고는 아가멤논에게  소매 없는 통
자루 가운을 입혀 팔을 쓸 수 없게끔 했다.  그런 다음 옷장 속에 미리 숨
겨놓은 도끼를 꺼내 무방비 상태에 있던 아가멤논을 향해 무자비하게 찍어
내렸다. 옆방에 숨어 있던 아이기스토스는 즉시 욕탕으로 달려와 아가멤논
의 마지막 숨을 끊는 일을 도왔다. 비명을  듣고 달려온 아가멤논의 두 자
녀인 엘렉트라와 오레스테스는 죽어버린 아버지,  기쁨에 사로잡힌 어머니
와 그 정부 그리고 흥건한 피를 보게  되었다. 겁에 질린 엘렉트라는 동생 
오레스테스를 끌고 나왔다. 아이기스토스가 복수를  피하려고 동생을 죽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엘렉트라는  믿을 만한 하인 하카에
게 동생을 이웃 나라의 왕인 삼촌댁에 데려다 줄 것을 부탁했다. 엘렉트라
가 궁으로 돌아왔을 때,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아가멤논과 카산드라의 '사고
로 인한' 서거를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성가신 남편을 제거해버린 클리타임네스트라와 아이기스토스는 그 후  8
년 간 아주 홀가분한 마음으로 죄악의 결실을 맛보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
들의 마음이 아주 평안했을까? 말은 안 했지만 가혹한 비난의 시선을 던지
던 엘렉트라가 늘 그들과 함께 있었고, 더욱이 아버지의 복수를 하려고 언
젠가 오레스테스가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항상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완전히 편안한 마음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레스테스는 삼촌의 보살
핌을 받으며 같은 또래였던 사촌 형제 필라데스와 깊은 우애를 맺을 수 있
었다. 그는 부친의 살해 장면을 잊을 수  없었고 복수할 생각을 자주 품었
다. 하지만 자기 어머니에게 폭력 을 휘둘러야 한다는 생각에 대해서는 주
저했다. 열 여덟 살이 되었을 때 그는  신탁을 찾아가 자신이 어찌해야 하
는가를 물어보았다. 신탁의 대답은 너무도 분명했다.
  "살인한 자들을 죽여라. 죽음은 죽음으로, 피는 피로  갚아줘라."
오레스테스는 필라데스와 함께 미케네로 출발했고 밤이 이슥해서 클리타임
네스트라의 왕실에 다다랐다. 그는 엘렉트라가 머물고  있는 방의 창문 아
래로 가서 누이를 불러 자신을 알리고는 일을 시켰다.
  "어머니에게 가서 아들 오레스테스의 사망 소식을 전하러  온 두 사람이 
성문에 와 있다고 해요."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에 클리타임네스트라는 모성으로서의 슬픔과  동시에 
안도감을 느꼈다. 그리고는 좀더 자세한 얘기를 듣고 싶어서 두 사람의 방
문객을 자기 방으로 불러들였다. 그들은 겉옷  주름으로 얼굴을 가리고 방
으로 들어섰다. 하인들이 나가자 오레스테스는 베일을 벗었다. 분노한 얼굴
과 떨리는 손으로 그는 단검을 확 움켜쥐었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아들을 
알아보았고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 보초병들을 부를 수도 있었지만 참았다. 
그러더니 자신의 속옷을 벗어제껴 가슴을 드러내 보이며  감동적인 목소리
로 아들에게 호소했다.
  "자 이게 너를 먹여 키운 젖가슴이다. 용기가 있으면 찔러라."
오레스테스는 잠시 주저했다. 한데  그때 문이  열리더니  아이기스토스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오레스테스는 아버지의 복수만을  생각했다. 그
리하여 가차없이 아이기스토스의 목을  조르고  자기 어머니를 칼로 찔렀
다. 
죽기 전에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신음하며 말했다.
  "엄마가 된다는 건 이상한 일이구나. 내게  이런 몹쓸 짓을 한 자식이건
만 미워할 수가 없으니."

    아버지의 복수인가 어머니 살해인가
  오레스테스가 저지른 죄는 신들과 인간 세계에 여러 가지 파문을 일으켰
다. 아버지의 복수를 한 것에 대해 찬성하는가 하면, 어머니를 죽였다는 사
실을 비난하기도 했다. 제우스로서는 반감이 더 컸기 때문에 오레스테스를 
응징하기로 했다. 그는 이런 종류의 일을  전담하는 '복수의 세 여신 에리
니에스'에게 임무를 맡겼다. 세 자매로 구성된 이 여신들은 그리스인의 표
현에 따르면 눈에서는 피가 튀고, 입에서는 거품이 일고, 뱀의 머리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녀들은 제우스가 지목한 죄인을  통자루 속에 집어넣고 다
니면서 미치거나 자살해버릴 때까지 잠시도 쉴새없이 후회와  고통으로 괴
롭혀댔다. 오레스테스는 복수의 여신을  따라 다시금  추방의 길을 떠나야 
했다. 그는 한번도 쉬지 못한 채 이 나라 저 나라를 오랜 동안 헤매다녔다. 
오레스테스를 불쌍히 여긴 아폴론은 신들의 재판을 열어  최소한 오레스테
스가 자기 변호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을 제우스에게 청원하여 승낙을 
얻어냈다. 12명의 올림포스의 중요한 신들로 구성된  이 재판은 그들이 모
여든 장소인 아테네 언덕의 이름을 따서 아레오파고스의  재판이라고 불렸
다. 재판 구성원 중 한 사람이 원고의 역할을, 다른 한 사람은 변호인의 역
할을 맡았다. 그들의 논고와 변론을 들은 후 재판부는 투표에 들어간다. 검
사와 변호인을 포함한  모든 재판관들은 차례로  자신의 관점을 표명하고, 
유죄라고 생각하면 검은 색의 작은 공을, 무죄라고 생각하면 흰 공을 투표
함에 집어넣는다. 그리고 공의 수를 세어 다수결로 판결을 내게 된다. 오레
스테스의 재판에서 하데스는 검사 역할을, 아폴론은 변호인 역  을 맡았다.
검사의 논고는 간략했다.
  "관대한 판결을 내린다고 해서 이 나라의 온갖 두려움이 추방되지 는 않
을 것이다. 아무것도 두려운 것이 없다면 어떤 인간이 정의롭게 남아 있겠
는가? 동기가 어떻든 간에 인간은 자기 어머니를 죽일 권리 가 없다. 그같
은 죄를 저지른 자는 수많은 다른 죄를 저지를 수도 있다. 그런 행실은 결
코 개선되지 않는 법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의 해악  을 끼치지 못하도록 
사형시켜야 마땅하다. 사후에 그가 처하게 될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
가 아니다. 그 문제는 황천의 세 심판관인 미노스, 아야코스, 라다만티스의 
권한에 속한 것이다."
아폴론은 상황을 정상 참작할 것을 호소했다. 그는 클리타임네스트라가 저
질렀던 끔찍한 죄를 강조했고, 오레스테스를 복수하도록 밀어 붙였던 델포
이의 신탁을 환기시켰다. 그리고 아폴론은 아주  별난 논리를 들어 설명하
기도 했다.
  "오레스테스처럼 어머니인  여성을 죽이는  일이, 클리타임네스트라처럼 
남편인 남성을 죽이는 것보다는 덜 위중하다. 왜냐하면 생식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남성이기 때문이다. 아이의 정자는 아버지로부터 나오며, 
어머니는 태아를 몇 달 간 품고 있기만 하면 된다. 게다가 아버지 없이 태
어나는 아이는 없지만, 제우스의 머리에서 태어났던   아테나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어머니 없이도 아이가 태어난다는 것이 밝혀졌다."
아폴론이 말을 마치자 투표 방식에 대한 설명이 있었고 곧  투표로 들어갔
다. 관례에 따라 제 1세대에 속하는 최고  연장자인 4명의 신들이 먼저 투
표를 하게 되어 있었다. 그들은  모두 검은 공을 던졌다. 제우스와  헤라는 
온갖 형태의 존속 살해를 증오했기 때문이었고,  하데스는 스스로 의 논고
에 설득되었기 때문이고, 포세이돈은 거인족과의 전쟁이래 중대한  상황에
서는 늘 형제들의 의견을 지지해왔던 습관  때문이었다. 다음으로 의사 표
시를 한 아폴론은 당연히 흰 공을 던졌고,  모든 일에서 오빠를 따랐던 아
르테미스 역시 흰 공을 던졌다. 헤파이스토스도 흰 공을  넣었는데, 자신의 
투표에 대해 그럴듯한 논리로써 정당화하려 고 노력하긴 했지만, 오레스테
스에 대해 은밀한 관대함을 표한데는 나름대로의 개인적인 이유가 있었다.
자기 아내 아프로디테한테 빈번히 속았기 때문에 그는 부정한 여자에 대해
서는 조금치의 동정심도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데메테르 역시 흰 공을 
던졌다. 그녀는 재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오레스테스
가 잘생겼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의 편을  들었다.  그리하여 4대4동점이 
된 상황에서 아레스의 차례가 되었다. 그는 장황한 연설을 싫어했다.
  "말할 것도 없이 사형이다."
라고 간단히 말하고는 검은 공을 던졌다.  아프로디테 역시 사형에 찬성하
는 투표를 한 것은 모두에게 놀라운 일이었다.  그녀가 원래 잔인 한 성격
의 소유자라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모든 아들에게 부정한 죄를 저지른 어
머니를 살해하는 일을 정당화시켜준다면, 인간 세상의 인구가 금세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헤르메스는 흰 공을 던졌다. 도둑의 
신이던 그는 살인자의 신이 될 야망도 품고 있었을 것이다. 이제 투표함에
는 6개의 검은 공과 5개의 흰 공이  있었다. 그리고 아테나만이 아직 투표
를 하지 않고 있었다. 모든 신들 가운데 유일하게 그녀만은 재판 초기부터 
개인적인 감정이나 이해 관계 혹은 선입관을 갖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오로
지 정의만을 추구하려고 했다. 마침내 그녀는 입을 열었다.
  "오레스테스는 끔찍한 죄를 저질렀다. 하지만  회한의 고통을 겪은 그는 
이미 자신의 죄를 씻어버렸다. 고결한 삶을 통해 명예를 회복할 기회를 주
기 위해 나는 그에게 흰 공을 던지겠다. 이제 그를 단죄할 수 있는 다수는 
없으므로 그는 무죄 석방되어야 한다."
이날 이후 모든 그리스의 재판정에서는, 투표 결과가 동수일 때는 항상 피
고가 유리하다는 근본 원칙이 성립되었다.

    4 필로스의 죽음
  필로스의 죽음은 신화의 모든 사건 중에서 가장 다양하고 모순된   여러 
가지 해석을 불러일으키는데,  특히 호메로스, 에우리피데스,  버질 그리고 
라신느의 책들에서 그렇다. 모든 작가들이 동의하고 있는 단 한 가지 사실
은, 오레스페스가 필로스를 살해했다는 점이다. 하지 만 그 점을 제외하면, 
살인의 연대나 상황, 동기 등에 대해 전혀 일치하지 않고 있다.  이 신비에 
쌓인 사건을 좀더 명확하게 드러내 보이기  위해, 나는 '집합 내에서의 관
계'라는 수학 이론을 이용하여 사건을 분석하는 현대  역사학의 방식을 채
택하고자 한다. 앞으로 전개될 설명에서 '집합  E'로 지칭될 문제의 그 집
합은 4명의 중요한 인물을 구성  요소로 갖고 있다.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이 사건에 등장하는 네 인물은 헤르미오네, 필로스, 안드로마케, 그리고 오
레스테스이다. 우선 네 인물에 관한 있는  그대로의 정황을 정리하고 그들
간의 애정 관계를 분석 한 후, 납득할 수 있도록 사건을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트로이 전쟁 2세대들이 엮는 드라마
  헤르미오네는 메넬라오스와 헬레네의 딸이다. 헬레네가 파리스를 따라가
고 메넬라오스가 트로이 전쟁을 위해 떠났을  때, 헤르미오네의 나이는 다
섯 살이었다. 당시 그녀는 보모와 하인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스파르타 왕
국에 홀로 남겨졌다. 가끔 지체 높은  여행객들이 스파르타를 지나가는 길
에 예의를 갖춰 그녀를 방문하곤 했다. 그녀 나이 열네 살 되던 해에 아킬
레우스의 아들 필로스가 이런 종류의 방문을  했다. 그때 필로스는 아버지
의 사망 소식을 듣고 그리스 왕들의 부름을 받아 트로이로 가던 중이었다. 
타오르듯 붉은 머리털의 젊은 미남자 필로스는 부친의  영광까지 후광으로 
드리우고 있어 헤르미오네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그래서 그가 스파르타
에서 이틀을 머무르고 떠나갔을 때, 헤르미오네는  이미 미친 듯한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하지만 전쟁의 무훈을 꿈꾸고  있던 필로스는 그녀에게 한
갓 심심풀이의 관심만을 보였을 뿐이었다. 트로이에 도착한 필로스는 아버
지 덕분에 그리스 왕들로부터 온갖 명예로운  대접을 받았다. 특히 메켈라
오스는 필로스가 전투에 합류하기 위해 찾아와준데 대해  고마워하고는 전
쟁이 끝나면 자기 딸 혜르미오네와 결혼해줄 것을 제안하면서 많은 지참금
과 더불어 스파르타 의 왕위를 물려주겠노라고  했다. 필로스는 이 제안을 
수락했는데, 약 혼자보다는 지참금에 마음이 갔기 때문이었다. 몇 달 후 트
로이가 함락되었을 때, 용맹함과 잔인함을 높이  과시했던 그는 자기 몫의 
전리품으로 헥토르의 미망인 안드로마케를 얻어냈다.  그는 자신의 포로가 
된 안드로마케에 반해버렸는데, 안드로마케는 그러한  격렬한 애정을 공감
할 수가 없었다. 사실 그녀로서는 필로스에게 호감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
는 남편 헥토르를 죽인 아킬레우스의 아들이며,  자기의 어린 아들 아스티
아낙스를 잔혹하게 죽인 자가 아닌가? 필로스에 대한 안드로마케의 감정이 
하루하루 조금씩 변하기는 했지만서도, 그래봐야  무관심과 혐오감 사이를 
오갈 뿐이었다. 그러한 그녀의 수동적인 저항에 화가 난 필로스는 무슨 수
를 써서든 자신의 사랑을 쟁취하겠다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일도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별다른 사고 없이 자신의 왕국에 돌아와  몇 달이 
지난 후 메넬라오스로부터 헤르미오네와의 결혼 날짜를 잡자는  전갈을 받
았을 때 필로스는 핑계를 대면서 일을 지연시켰다. 나라 내부의 일들로 몹
시 바쁘기 때문에 상황이 허락되는 대로 반드시 연락을 하겠노라고 메넬라
오스에게 답을 보냈다. 물론 그가 몰두하고  있던 일이 실은 안드로마케였
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녀는 여전히 필로스의 사랑에 저항했고, 죽
은 남편 헥토르만을 한결같이 사랑하고 있었다. 메넬라오스는 필로스의 답
신에 좀 실망했고 헤르미오네는 몹시 실망했다. 아킬레우스의 아들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젊은 왕자인 그가 몇 달 전 그녀를 방문했던 이래 증폭되기
만 했다. 메넬라오스는 딸을 진정시키며, 단지 얼마간 연기되었을  뿐 결혼
식은 반드시 이루어질 거라고  안심시켰다. 그러는  동안에  메넬라오스의 
조카인 오레스테스가 아레오파고스의 재판에서 무죄 석방되어 삼촌의 왕궁
을 찾아왔다. 클리타임네스트라를 살해한 일에 대한 동요가 아직 잠잠해지
지 않은 미케네로 곧바로 돌아가는 것이 좀 성급하다고 판단한 오레스테스
가 메넬라오스에게 찾아와 몇 달 머물 것을 부탁했던 것이다.
  "네 집처럼 편히 지내라."
라고 맞이하면서 메넬라오스는 오레스테스를 왕실에 머무르게 했다. 곧 이
어 오레스테스는 사촌인 헤르미오네를 사랑하게  되었다. 하지만 필로스에
게 온 마음을 빼앗기고 있던  헤르미오네는 그러한 사실을 눈치조차  채지 
못했다. 자, 이제 이러한  정황을 바탕으로 집합 E의  네 구성 요소들간의 
사랑 관계를 자세하게  분석하는 일이 가능해지며,  그것은 사건의 전말을 
이해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집합E의 구성원들간의 애정  관계 우
선 다음과 같이 순전히 말로 풀어 설명할 수 있다.
 - 오레스테스는 헤르미오네를 사랑하지만,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 헤르미오네는 필로스를 사랑하지만, 그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 
 - 필로스는 안드로마케를 사랑하지만,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 안드로마케는 헥토르를 사랑하지만, 그는 죽었다.
위 글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집합 E에서 '...를 사랑하지만'의 관계가 가진 
근본적인 두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반대칭적'  이고 '반추이적' 
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대번에 눈에 띄는 반대칭적인 성격은  집합 E의 한 
요소 a가 b라는 요소를 사랑할 때마다, b는 a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의
미한다. 다시 말해, 집합 E에서의 사랑은 결코 상호적이 아니라는 뜻이다.
반추이적 성격은 그처럼 분명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a가 b를 사랑하고 b는 
c를 사랑한다면, a는 c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한다. 예를 들면, 오
레스테스는 헤르미오네를 사랑하고 헤르미오네는 필로스를 사랑하지만, 오
레스테스는 필로스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단 이러한  두 특징을 
발견하기만 하면, 필로스의 사건은 너무나도 명백하고 단순한 일이 되어버
린다. 그래서 이 사건을 풀기 위해 별 성과도 없이 1,648행이나  되는 길고 
긴 시구를 써낸 라신느에 대해 아연해지게 된다.

    처벌받지 않은 범죄
  몇 달이 지나자 메넬라오스는 필로스의 계속적인 결혼 연기에 지쳐 버렸
고 급기야 결혼식의 거행을 위해 혜르미오네를 필로스에게  보내겠다고 통
고했다. 며칠 후 헤르미오네는 행복에 겨운  마음으로 필로스를 만나러 떠
났다. 사촌인 오레스테스는 헤르미오네를 보호해주겠다는 명목으로 그녀를 
동반할 것을 주장했다. 필로스의 집에 도착하여  안드로마케를 보게 된 헤
르미오네는 자신의 약혼자가 왜 자꾸 결혼을 연기했는가를 곧 알아차렸다. 
그녀는 본의 아니게 자신의 연적이 되어버린 안드로마케에  대해 즉각적인 
증오심을 품게 되었다. 사촌 오레스테스의 맹목적인  헌신에 의지할 수 있
었던 헤르미오네는 자신을 모욕한 필로스와 안드로마케의 명백한  동거 관
계를 '무슨 수를 써서든지 끝내줄 것'을 사촌에게 요구했다. 고의적으로 모
호한 표현을 사용하여 말하긴 했지만 헤르미오네의 머릿속에는 안드로마케
를 죽여달라는 암시가 들어 있었다. 하지만 안드로마케보다는 필로스를 제
거해버릴 이유가 더 많았던 오레스테스는 헤르미오네의 지시를  잘못 이해
했거나 혹은 잘못 이해한 척했다. 필로스가  부친 아킬레우스를 기리는 종
교 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아폴론의 사원에 무기를 지니지 않은  채 참석한 
것을 알고 있던 오레스테스는 비겁하게도 그 순간을 이용하여 필로스를 죽
였다. 정상 참작을 할 것도 없는 오레스테스의 이 범죄는 첫번째 범죄와는 
비교도 안 되게 신들의 준엄한 징벌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
지만 그렇지 않았다. 물론  제우스는 복수의 여신  에리니에스에게 다시금 
오레스테스를 죄인의 통자루 속에 집어넣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녀들
은 단호히 거절했다. 또다시 신들의 재판에  회부되어 자신들의 일이 반박
되는 위험을 더는 치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재판부는 자신들이 맨 처음
에 판단을 잘못 내렸던 사실을 공개적으로 시인하고 싶지 않았기에 오베스
테스의 두번째 죄에 대한 고소장을 아예  접수하려 들지도 않았다. 그리하
여 오레스테스는 아무것도 걱정 할 게  없었다. 오레스테스는 태어날 때부
터 자신의 권리로 주어졌던 아르고스와 미케네 왕국의 왕권을 이어받았다. 
그리고 메넬라오스로부터 헤르미오네와의  결혼 허락을  받아냈고, 아들이 
없던 메넬라오스가 죽자 스파르타 왕국마저 그의 권한에 들어오게 되었다. 
필로스가 살해되고 난 며칠 후, 하데스는  올림포스의 한 산책길에서 아테
나를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  그는 아테나가 오레스테스의  재판에서 횐 
공을 던지며 피고를 두둔하는 연설을 했던 일을 떠올리면서 빈정거리듯 말
했다.
  "오레스테스는 본질적으로는 죄인이 아니며  명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소리가 아직도 귀에 들리는 듯하군요."
  "나는 내가 한 투표에 대해 후회하지 않아요.  무고한 사람을  단 한 번
에 단죄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열 번이라도  죄인을 무죄 방면하는 게  낫
다고 생각해요."

    5 오디세우스의 모험
  트로이를 떠나 이타케로 돌아올 무렵의 오디세우스는 이미  많은 사람들
의 칭송과 증오를 한 몸에 받는 전설적인  영웅이 되어 있었다. 그의 인격
이 자아내는 여러 가지 특징은 때로는 결점으로 때로는 장점으로 인식되곤 
했다. 그리하여 그의 이름 앞에는 비난과 칭송을 나타내는 형용사가 늘 함
께 따라붙어 다녔다. 교활한/능란한, 비겁한/신중한, 거짓말쟁이/웅변가, 모
진/단호한이라는 양면적인 형용사가 그러한 것이었다. 그의 적대자들, 특히 
그의 혁혁한 공로로 대파된 트로이 군의 생존자들은  오디세우스의 교활함
을 비난했다. 하지만 그의  친구들에게는 이러한 교활함이 전쟁을 위한 뛰
어난 기지로 보였던 것이다.  적대자들과 때로는 동료들도  그의 비겁함을 
비난하곤 했다. 사실 그는 쓸데없는 위험을  좋아하지 않았고 경우에 따라
서는 위험을 피해가기도 해서, 언젠가는 네스토르를 전쟁터에 혼자 버려둔 
채 퇴각하기조차 했다. 하지만 디오메데스와 함께  야밤에 트로이 성에 침
입하여 말을 훔쳐내오던 일에서 볼 수 있듯이 냉정함과 용맹성을 과시하기
도 했다. 그의 몸에 난 여러 개의 상처는 그러한 능력을  입증해주며, 언젠
가 공개 석상에서 어떤 사람이 그의 용기를 의심하자 상처들을 보여주기도 
했다. 오른쪽 무릎에 난 상처는 열다섯 살  때 이타케에서 사냥을 하던 중 
저돌적으로 멧돼지에게 달려들어 물린 것이다. 가슴에  난 또 다른 상처는 
트로이 전쟁 당시 아레스와의 일 대  일  격투끝에 얻은 것이라는데, 이는 
누구도 증명할 수 없는 사실이다. 헥토르의 투창에 맞아 왼쪽 엉덩이에 난 
상처에 대해서는 그다지 자랑스러워하지는 않았지만,  가끔 상대방에 대한 
경멸이나 조롱의 표시로 속옷까지  벗어가며 보여주곤 했다.  때로는 그의 
인색함과 탐욕스러움이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친구들은 그의 이같은 
성격이 왕국이 규모도 작고 가난한 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라며 그를 정당화
시키도 했다. 이타케 섬은 척박한 땅인지라, 기껏해야 몇 무리의 양과 염소
를 먹여 살릴 수 있을 정도였고 얼마 안 되는 밀밭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러나 인색하다는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필로스에게 아킬레우스의 무기들
을 선물한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때로는 너그러운 일면을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모진 성격에 대한 비난은 근거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 점에 대해
서는 수많은 증거들이  있지만, 특히 팔라메데스를 부당하게 사형 에 처한 
일과 필로스에게 아스티아낙스를  처형시키게 했던 일에서 두드러진다. 하
지만 때로는 선한 감정을 표현할 줄 알았는데,  부모나 아  내와 자식에게
뿐 아니라 간혹은 경쟁자들에게도 그랬다. 아이아스의 자살 후에 보여줬던 
행위가 그 좋은 증거이다. 친구들과 적들  모두 오디세우스의 위대한 자질
을 인정했다. 그의 지력, 섬세함,  웅변력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게다가 
목재를 다루는 데 아주 능란한 손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이타케 왕실의 많
은 부분은 오디세우스 자신이 손수 지은 것이며 그러한 일을 하는 도중 때
로는 건축의 혁신까지도 가져왔다. 일례로, 백 년생 올리브나무를 자르지도 
않고서 침대를 만드는 데 이용하기도 했다. 즉 나무 기둥을 그대로 침대의 
다리로 사용하고 침대의 나머지 부분은 같은 재질의 나무로 맞추어 제작한 
것이다. 트로이의 목마가 단 몇 시간만에  훌륭하게 만들어졌던 것도 역시 
그의 지휘하에서 이루어졌던 일이다. 마지막으로 언급 할 수 있는 그의 재
능은 그리 잘 알려진 것은 아니지만, 오디세우스는 예술가, 좀더 정확히 말
하자면 아주 세련된 음악 애호가였다는  사실이다. 아킬레우스처럼 악기를 
직접 다루지는 못했지만 좋은 음악을  들으면 깊은 감동을 받았고  그러한 
감정을 동료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했다. 트로이 포위 당시 그리스 군이 발
간하던 주간 신문에 익명으로 음악 기사를 써냈던 사람이 바로 그였다. 이
러한 온갖 자질을 갖춘데다 아테나  여신의 특별한 보호까지 받고  있었으
므로, 전쟁을 끝내고 무사히 자기 조국으로 돌아올 최초의 사람은 다름 아
닌 오디세우스일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비록 이타케가 
지리상으로 트로이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긴 했지  만  말이다. 하지
만 오디세우스는 초반부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첫 정박지에서의 전투
  오디세우스는 12척 선박의 선두에 서서 트로이의 해변을 출발했다. 선박
에는 트로이 함락에서 얻어낸 수많은 전리품과 천여 명의 생존  병사가 타
고 있었다. 전리품에는 황금과 보석, 예술품, 무기, 식량 그리고 디오메데스
와의 야간 수훈 때 훔쳐낸  레소스의 말이  있었다. 하지 만  다른 그리스 
왕들과 달리 그는 트로이의 여자 포로는 싣지 않았다. 그가 유일하게 관심
을 가진 여자는 오로지 자기  아내 페넬로페뿐이라고 늘 말해왔던  때문이
다. 바람이 좋으면 닻을 올리고, 그렇지 않으면 노를 저어가면서 몇 날인가
를 항해한 후에 식수를 새로 보급하기 위해 처음 정박하기로 했다. 12척의 
배가 다가선 해변은 키코네스족의 나라였는데, 이 종족은 호전적이고 별로 
사람을 반기지 않았다. 그  종족의 왕은 이타케 사람들이  물을 가져갈 수 
없도록 막았다. 그러나 오디세우스가 간청하자 협상을 제시했다.
  "내가 시키는 어려운 일 하나를 해내면  물을 가득 채워가도 좋고, 그렇
지 못하면 우리가 당신 배에 있는 양식을 갖도록 합시다."
스스로의 재능을 확신하고 있던 오디세우스는 내기를 수락했고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를 물었다.
  "마차 하나에 사자 1마리와 멧돼지 1마리를 매다는 일이요. 원한다면 내 
개인 축사를 마음대로 사용해도 좋소."
  "더 없이 쉬운 일이군요. 인심  써서 곰도 1마리 더  매어주도록 하지요. 
단, 당신 축사에 1시간 동안 나 혼자 있을 수 있도록 해주시오."
키코네스 왕의 축사는 흰 회벽으로 된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오디
세우스는 한 쪽 벽에 숯 조각으로 사자와  멧돼지와 곰이 이끄는 마차  하
나를 아주 사실적으로 그려내었다. 그리고는 키코네스 왕에게 말했다.
  "일이 정 말 쉬웠어요. 이 동물들은 생각보다는 유순하답니다."
키코네스의 왕은 그런 주장에 절대 응하려  하지 않았다. 지능이 보잘것없
었고 철학적 소양도  별로 없긴 했지만,  오디세우스의 그럴듯한 논리에도 
불구하고 기호와 기호의 지시 내용의 동일성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던 것이
다. 급기야 목청이 높아졌고 양쪽의 부하들이  서로 치고받으며 싸우기 시
작했다. 결국 오디세우스는 부하들과 함께 후퇴하여 바다로 달려갔다.   이 
어리석은 뜻밖의 난투로 72명의 병사만 잃고 물은 얻지도 못했다.

    망각의 꽃
  물을 얻지 못한 탓에 며칠 수 어떤  해변에 다시 정박해야만 했다. 키코
네스족과의 일로 의심이 많아진 오디세우스는 먼저 3명의 선원을 파견하여 
동태를 살피라고 했다. 섬에 내린 선원들이 만난 주민은 친절했다. 그곳 사
람들은 로터스(하얀 연꽃)를 먹는 종족이라는 뜻의 로토파게스족에 속했다.
그들은 로터스를 다양한 형태로 섭취했다. 즙을  우려내어 먹기도 하고 가
루로 빻아 먹기도 하고 질근질근 씹어 먹기도 했다. '망각의  꽃'으로 불리
는 로터스는 어떤 형태로  먹든지 간에 강력한 마약  효과가 있어서, 그걸 
먹기만 하면 과거에 대한 기억과 허기, 갈증을 비롯한 모든 욕구를 잊어버
리게 되었다 로터스를 우려내 만든 차를 얻어 마신 오디세우스의  정찰 대
원들은 자신들의 임무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누구였는지조차 잊어버리게 되
었다. 그리고는 넋나간 행복감에 빠져버렸고, 마약을 자꾸 섭취함으로써 이
러한 상태를 연장시킬 생각만을 하게 되었다.  정찰 대원들이 돌아오지 않
자 초조해진 오디세우스는 부하 몇 명을 데리고 그들을 찾아 나섰다. 그들
을 찾아낸 오디세우스가 어떻게 된 일인가를 물어봤지만 아무런 대답도 얻
어낼 수 없었다. 그는 정찰 대원들의 얼이  빠져버린 것이 그들이 마신 음
료수 때문이라고 의심하고는 더 이상 그걸  마시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3
명의 병사를 강제로 묶어 배로 데리고 왔다. 그리하여 이번에도 물은 구하
지 못한 채 다시 배에 올라야 했다. 고기 역시 점차 줄어들어 초조한 지경
에 이르고 있었다. 때문에 다시금 어느 섬엔가  빨리  정박해야 할 다급한 
상황이 되었다. 커다란 섬이 수평선에 나타났다. 오디세우스는 해변을 따라 
섬에 다가서면서 작은 포구 하나를 발견했고  그곳에 닻을 내렸다. 이번에
는 자신을 필두로 12명의 정찰 대원을 조직했다. 13명의 남자는 작은 배안
에 무기와 먹을 것과 물이 없을 경우를 대비한 술 한 포대를  싣고 섬으로 
향했다. 잠시 후 그들은 카프리 섬에 발을  내딛게 되었는데 그 섬은 키클
롭스족의 섬이라고도 불려졌다.

    외눈박이 키클롭스
  앞서 한번 나왔기에 기억하겠지만, 키클롭스족은  이마 한가운데에 눈이 
한 개만 달린, 몸집이 크고 거친 종족이다. 그들은  헤파이스토스의 일꾼들
로 제우스의 벼락, 아폴론의  화살, 포레이돈의 삼지창 그리고  올림포스의 
온갖 철제 물건을 만들어내던 자들이다. 그들의  실제 혈연 관계는 분명하
게 나타나고 있지 않지만, 그들 중 몇은 포세이돈의 아들이기도 하다. 그들
의 고용주 헤파이스토스는 좋은 사장이었다.  일꾼들에게 매년 교대로 4주
일 간의 유급 휴가를  주고, 복지 차원의  관광 센터를 건립해놓은 카프이 
섬을 무료로 이용하게 했기  때문이다. 휴가를  얻은 키클롭스들은 카프리 
섬에서 저마다 개인 동굴을 하나씩 가지고 한달 간 일에서 벗어나 양을 키
우며 소일했다. 섬에 내려선 오디세우스와 일행은 섬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수없이 널려 있는 양의 똥을 보고는  그 섬에 사람이 살고 있으며  가축을 
기르고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오디세우스는 똥의 발자취를 뒤따라
가 언덕의 바위 속에 움푹하게 난 거대한  동굴을 발견했다. 열려 있는 입
구를 통해 오디세우스는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사람은 없었지만 우유잔들
과 양젖으로 만든 치즈들이 선반 가득 정돈되어 동굴 벽을 거의 다 채우고 
있었다. 한 쪽 구석에는 평범하지만 이질적인  4가지 물건이 한데 오여 있
었다. 커다란 거울과 물통과 쇠스랑과 낫이었다. 처음에는 약간의 치즈만을 
가지고 동료들과 다시 배로 되돌아가는 것이  신중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
지만 그러한 신중함에 뒤이어 탐욕스런 마음이 오디세우스를 유혹했고, 동
굴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뭔가 좀더 유리한 협상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갈증을 해소하고  음식물로 원기를 회복한  13명의 남자는 
땅바닥에 짚을 깔고 선잠이 들어버렸다. 밤이 되어 동굴 안에 짙은 어둠이 
깔렸을 때 그들은 커다란 발자국 소리에  잠이  깨었다. 한데 그 발소리가 
너무도 묵직해서 처음에는 트로이 군대 전체가 황천에서 돌아와 그들을 향
해 박자 맞춰 걸어오는 줄로 생각했을 정도였다. 20여 마리의 통통한 양들
이 울음 소리를 내며 들어섰고, 그  뒤로  거대한 그림자가 잠시 그려지더
니 몸을 부딪히지 않으려고 머리를 숙이며  한  사람이 들어왔다. 그는 동
굴의 주인인 키클롭스 폴리페모스였다. 어두웠기 때문에 처음에 그는 오디
세우스 일행을 보지 못했다. 우선 그는 늘 하던 대로 커다란 돌을 굴려 천
천히 동굴 입구를 닫았는데, 그 돌은 22필의 말이 옮겨놓기에도 힘겨운 것
이었다. 그리고 나서 거울이 붙어 있는 구석으로  가서 아직 남아 있는 한 
줄기 빛을 이용해 쇠스랑으로 머리를 빗고 낫으로 면도질을 한 다음 통 속
의 물로 입을 닦아냈다. 몸단장을 마치고 나자 불을 밝혔고 그제서야 그는 
공포로 꼼짝도 하지 못한 채  숨죽여 웅크리고 있던 침입자들을  알아보았
다. 두려움을 억누르며 오디세우스는  몸을 일으켜 한걸음 앞으로  나섰고, 
목소리를 가다듬기 위해 잔기침을 좀 하면서 키클롭스에게  짤막한 인사말
을 했다.
  "우리는 트로이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둔 후 집으로 돌아가고 있던 그리
스 군사들이오. 당신의 귀족적인  용모와 장엄한 풍채를  보아하니 관대한 
마음씨 또한 짐작이 가는군요, 그렇기에 저는  신들의 가장 신성하고도 중
요한 규칙인 너그러운 환대를 당신이 보여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바입
니다."
  "신들의 규칙에 대해서는 당신 못지않게, 아니  당신보다 더 잘 알고 있
소. 왜냐하면 난 1년 중 11개월을 그 규칙에 복종하며 살고 있거든, 하지만 
휴가 동안만큼은 신들이나 그들의 규칙  따위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살고 
있소. 게다가 내게 가장 으뜸가는 신성이란 바로 내 뱃속이요. 그래서 당신
들의 방문이 몹시 즐겁소. 왜냐면 오늘 저녁에 먹을 고기가 없었거든."
그러더니 더 이상의 다른 설명도 없이 오디세우스의 부하 2명의 다리를 잡
아 머리를 동굴 벽에 부딪쳐 부숴 버리고는 힘센 턱 사이로 뼈를 잘근잘근 
씹어가며 게걸스럽게 삼켜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우유 몇 잔을 마
셔 방금 먹은 저녁 식사가  내려가게 하고는 몸을  눕혀 곧  잠에 빠졌다. 
밤새도록 오디세우스는 어떻게 해야  할까를 고민했다. 처음에는 키클롭스
가 잠든 틈을 이용해 그의 가슴에 비수를  꽃을 생각을 했다. 하지만 폴리
페모스가 일단 죽어버리고 나면, 그들의 힘만으로는  입구를 막고 있는 돌
을 치워낼 수 없으리라는 생각을 해냈다. 날은 밝았고 그는 아무런 해결책
도 찾아내지 못했다. 폴리페모스는 잠에서 깨어나  하품을 하더니  양들의 
젖을 짜고 어린 양들에게 젖을 먹이고 치즈를 만들었다. 그리고 나자 허기
가 찾아왔고 다시금 오디세우스의 부하 2명을 아침식사로 먹어치웠다.
  "배는 어디 두었냐?"
그는 오디세우스에게 물었다. 해변에 남아 있는 동료들을 공격하지나 않을
까 걱정한 오디세우스는 배는 난파되었으며, 자신과 일행들은 여기까지 헤
엄쳐서 왔노라고 답했다. 폴리페모스는 양떼들과 함께 밖으로 나섰고 입구
의 돌로 조심스럽게 문을 다시 막아버리는  걸 잊지 않았다. 8명의 오디세
우스의 부하들은 운명을 한탄하고 울부짖으며 신들에게 기도하며 온종일을 
보냈다. 오디세우스는 그러한 그들을 꾸짖었다.
  "신들에게 간구하기 전에 뭔가 행동을 해야지 신도 스스로 돕는 자를 돕
는 법이야."
오디세우스는 생각에 잠겼다. 해질 무렵이 되자 그는 한 가지 계획이 섰으
니 폴리페모스가 두고 간 철퇴를 날카롭게 갈아달라고  부하들에게 부탁했
다. 그는 말뚝처럼 뽀죽해진 철퇴를 동굴의 짚더미 속에 숨겼다. 밤이 되자 
폴리페모스가 양떼들과 돌아왔다. 전날처럼 간단한 몸단장을 하고 나서 몹
시 좋은 기분으로 식탁에 앉아 겁에 질려 바라보고 있는 동료들 앞에서 다
시 2명의 군인을 씹어 삼켰다. 그리고 우유를 마시려는 순간 오디세우스가 
앞으로 나서 말했다.
  "그렇게 좋은 식사를 우유와 함께 드는 건 별로 좋지 않아요. 차라리 이 
훌륭한 술을 좀 마셔보세요."
그리고는 자신의 술포대를 건네주었다.
  "이런, 자네는 인생을 제대로 즐길 줄 아는 군 그래, 이름이 뭔가?"
  "'아무도'라고 합니다."
라고 오디세우스가 답했다 술 한 모금을 길게 들이키고 난  키클롭스는 술
맛이 좋다고 했다.
  "한 잔 더 주게나,  그러면 내가 자네에게도 선물을 주지."
오디세우스는 서둘러 그에게 술포대를 주었고 키클롭스는 꿀꺽거리며 술을 
마셨다. 그는 손으로 입가를 문지르면서 오디세우스를 맨 나중에 잡아먹겠
다는 약속을 인심쓰듯 선물했다. 오디세우스는 감사하며  술을 마저 다 마
시라고 권했다. 포만한 식사와 과도한 술로  키클롭스는 곧 잠에 곯아떨더
졌다. 하지만 소화가 힘들었던지  딸꾹질과 토악질을 해대며  잠을 설쳤고 
그가 뱉아낸 더러운 토사물에는 인간의 살덩이와 피와 술이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 사이 오디세우스는 부하들의 도움으로 낮에 깎아놓은 쇠말뚝을 
찾아내어 키클롭스가 밝혀 놓은 횃불에  시뻘겋게 달구어내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키클롭스의 눈에 깊숙이  찔러넣었다. 강심장을 가진  독자들은 이 
장면에 대한 보다 자세한 그리고 견디기 힘들 정도의  사실적인  묘사를 '
오디세이아' 제 9장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그걸 다 
옮겨 적을 생각은 없다. 고통에 잠이 깬  키클롭스가  질러댄 커다란 비명 
소리는 섬 전체에 울려퍼졌다. 역시 휴가 중에  있던 열두어 명의 다른 키
클롭스들이 그 소리에 놀라  폴리페모스의 동굴로  달려왔다. 동굴 바깥에
서 그들은 무슨 일인가 물었다.
  "나 죽어요. 누가 날 죽여요."
라고 폴리페모스가 울부짖었고 달려온 키클롭스들이 물었다.
  "누가 널 죽이냐?"
  "'아무도'!"
  "아무도 아니라면, 네 병은 아마도 신들이 보낸 것일  거다. 그러니 우리
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그렇게 말하고는 모두 자기 집으로 돌아가버렸다. 폴리페모스의 동굴 안에
서는 곧 이어 복수를 향한 공포와 욕망이 고통에 점철되어 벌어졌다. 폴리
페모스는 더듬거리며 공격자들을 잡으려 했지만 그들은 널찍한  동굴을 돌
아다니며 피할 수 있었다.
  "너희들이 여기서 살아 나갈 수는 없을 거다."
라고 폴리페모스가 위협했다. 하지만 그건  꾀많은 오디세우스를 고려하지 
않은 생각이었다. 오디세우스는 소리 내지 않고 6명의 생존 동료들의 도움
을 받아 양들을 3마리씩 나란히  묶었다. 동료들은 오디세우스가 몸짓으로 
지시한 대로 3마리씩 묶인 양들 중 가운데 양의 배 밑에 각기 자리를 잡았
고 오디세우스는 그것을 다시 동아줄로 묶었다.  양떼의 수는 암양 18마리
에 거대한 숫양이 하나 있었으므로 6명의 동료를 각 묶음에 끼워  넣자 오
디세우스에게는 큰 숫양 하나만이 남았다. 오디세우스는 숫양의 배 밑으로 
기어들어가 손과 발로 양털을 움켜잡고 있었다. 그러느라고 양들이 울부짖
었고 폴리페모스는 날이 밝아서 그러는  줄 알고 양들을 바깥으로  내놓을 
준비를 했다. 그는 입구를 막았던 돌덩이를  1미터  정도 옆으로 비켜놓아 
양들이 빠져 나가도록 했다. 그리고는 양의  등을 한번씩 만짐으로써 혹시
나 오디세우스 일행이 그 위에 타고 빠져 나가지 않는가를 확인했다. 오디
세우스가 밑에 들어가 있어 무거워진 숫양은  맨 마지막으로 빠져 나갔다. 
뿔을 만져보아 숫양임을 알아본 폴리페모스는 꾸물대고 있던  양에게 말했
다.
  "항상 맨 앞에 나서던 네가 오늘따라 맨 꼴찌로 나가는 걸 보니 너도 네 
주인의 서글픈 신세를 아는가 보구나."
일단 바깥으로 빠져 나오자 오디세우스는 양에서 내려와  동료들을 풀어주
었다. 그리고는 숨겨놓았던 작은 배로 달려갔고  죽을힘을 다해 노를 저어 
선박으로 도망쳤다. 선박 위에 오르자 오디세우스는  백 미터 남짓한 거리
를 둔 벼랑에 서있는 폴리페모스를 발견했다.  그는  폴리페모스에게 심한 
욕설을 퍼부으며 조롱했다. 자신의 포로들이 도망친  걸 알게 된 폴리페모
스는 커다란 바위 덩이를 집어 어림짐작으로 오디세우스의 소리가 나는 쪽
으로 던졌다. 바위는 배에서 불과 몇 미터  안 되는 곳에 떨어졌고 오디세
우스의 배는 간신히 좌초의 위험을 모면했다.  놀란 선원들은 황급히 닻을 
올려 폴리페모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배를 몰았다. 하지만 완전히 흥
분한데다가 이제는 위험으로부터 놓여났다고 방심한 오디세우스는  계속해
서 폴리페모스에게 소리쳤다.
  "누가 너를 징벌했느냐고 묻거든 이타케의 왕이며 라에르테스의 아들인, 
뛰어난 기지를 가진 파괴자  오디세우스가 그랬노라고 말해라."
폴리페모스는 몇 개의 바위를 더 던졌지만 오디세우스의 배에 잔물결만 튀
길 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동굴로 돌아와 바다의 신이자 자신의 부친인 포
세이돈에게 간절한 기도를 했다.
  "나를 공격한 자들에게 벌을 내리고 그들이 영원히 제 집에   돌아갈 수 
없게 해주세요."
올림포스의 꼭대기에서 아니, 깊은 바다 밑에서 포세이돈은 아마도 아들의 
이러한 한탄을 들었을 것이다. 그는 아들의 복수를 해주기로 결심했다.

    6 아이올로스 섬에서 키르케 섬으로 
  포세이돈처럼 강력한 신의 반목을 사고도 오디세우스가 당장에  화를 당
하지 않은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 이유는 올림포스 신들의 개입은 그들간
의 권력 균형과 조화를 유지하기 위한 미묘한 묵계를 준수하는  가운데 이
루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절대적인 권위를 누릴 수  있었던 제우스
를 제외하고는, 어떤 신도 동일한 서열에 있는  다른 신의 보호를 받고 있
는 인간을 함부로 제거할 수 없었다. 한데 오디세우스는 올림포스의 세 신
들. 그것도 제 1서열에 있던 신들의 보호를 받고 있었던 뜻이다. 이미 장황
하게 그 까닭을 설명한 바 있는 아테나가 첫번째 보호자였다. 두번째 보호
신은 헤르메스였는데, 그는  우선 오디세우스의 재치와  웅변을 높이 사고 
있었고, 게다가 오디세우스의 증조모와 가졌던 짧은  관계로 인해 그를 자
기 증손자로 여겼던 것이다. 세번째 보호신인 아폴론은 좀 묘한 이유를 갖
고 있었다. 알다시피 아폴론은 음악의 신이다. 그가 자신의 여러 공적들 중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던 것, 그리고 사람들이  퍼부어댄 수많은 칭송들 중 
제일 듣기 좋아했던 칭찬은 악기 연주 솜씨와 작곡의 재능에  대한 것이었
다. 그 런데 트로이 포위 당시 아폴론이 작곡한 시타르와 칠현금과 플루트
를 위한 삼중 협주곡이 미르미돈 교향악단에 의해 최초로 연주된  일이 있
었다. 이틀 후 그리스 군이 발행한 신문에는  이 협주곡에 대한 극찬의 평
문이 가명을 쓴 오디세우스에 의해 게재되었다. 거드름피우는 과장된 문체
의 그 기사는 오늘날  대다수 음악 평론의 전범이  되고 있다. 추상적이고 
종교적인 주제를 담아내기 위해 여기 사용된 악보의 투명한 유연성은 전혀 
방해가 되지 않고 있으며, 특히 빠른 악장에서의 반음계 악기 구성은 다채
로움을 빛어내고 있다. 느린 악장에서 현악기들의 섬세한 분절음, 관악기들
의 풍부하고 부드러운 음색 그리고 타악기들의 정밀한  충만함은 변증법적
인 논증을 완벽한 굴절음 속에 결합시키는  선율을 자아내고 있다. 음악의 
여신 에우테르페를 가명으로 하여 써낸 이 기사의 장본인이 다름아닌 오디
세우스라는 걸 아폴론은 어렵지 않게 알아냈다. 그 이래 아폴론은 그를 높
이 평가하게 되었다. 오디세우스가 누리고 있던  신들의 힘을 가늠한 포세
이돈은 복수의 계획을 잠정적으로 유보했다.  오디세우스의 실수나 불운으
로 수호신들 들 중의 하나가 떨어져 나갈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기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순간이 오면  제우스에게 개입 허가를 얻어내기
로 작정했다. 그때까지는 그저 자연의 재해나 방해로 오디세우스의 귀환이 
늦춰지기만을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한 일은 곧 닥쳐왔다.

    고향을 눈앞에 두고 다시 모험 속으로
  키클롭스의 섬을 황급히 벗어난 오디세우스의 선박은 며칠  후 아이올로
스의 섬에 다가섰다.  아이올로스는 바람의 신이었다.  그는 제우스(흔히들 
포세이돈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의  권한 아래 있었으며, 부드
러운 서풍과 매서운 북풍을 자신의 동굴에서  마음대로 끌어내곤 했다. 그
는 오디세우스를 환대했고 며칠 묵어 갈  것을 권하기까지 했다. 오디세우
스 의 화술과 이야기에 매료된 아이올로스는 오디세우스 일행이 떠날 무렵
이 되자 귀중한 선물을 건네주었다.
  "돌아가는 길을 순조롭게 하기 위해 몇 주 동안 당신께  좋은 바람만 불
게 해주리다. 나머지 다른 바람들은 이 가죽 부대에 틀어막아 가두어 놓았
으니 가져가시오. 그리고 이타케에 도착할 때까지  절대 열지 않도록 조심
하시오."
그로부터 사흘 밤낮은 순풍만  불어왔고 배는 순조롭게 목적지로 향했다. 
누군가 실수로 가죽 부대를 열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에 오디세우스는 거기
에서 눈을 떼지 못했고  잠시의 휴식도 거절했다. 나흘째  되는 날 새벽에 
오디세우스는 수평선에 들어오는 이타케 산들의 모습을 보았다. 그러자 그
간의 피로와 안도감이 한데 몰려와 그 만  잠에 빠지고 말았다. 그가 잠이 
들자마자 부하 몇 명이 호기심으로 가죽부대에 다가섰다. 아이올로스 섬을 
떠날 때부터 이 가죽 부대는 화제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거기에 아
이올로스가 건네준 진귀한 선물들이 들어 있을 거라고  추측했고 오디세우
스가 동료들과 나눠 갖기 싫어서 탐욕스럽게 그걸 감추고 감시했던 거라또 
생각했다 그러한 짐작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가죽 부대 속을  한번 들여
다보기로 작정했다. 가죽 부대의 입구를 반쯤 열자마자 그 안에 있던 모든 
바람들이 빠져 나와 끔찍한 폭풍을 일으켰다.  선박들은 무서운 속도로 북
쪽으로 날아가버렸고 이타케의 산들은 순식간에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렸다. 
며칠을 표류하던 선박은 북쪽에 있는 미지의 나라 해안에 가 닿았다. 그들
은 해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닻을 내렸다.

    식인종의 나라
  그 나라에는 라이스트리고네스라는 식인종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그곳
은 북극의 위도인데다 마침 하지 무렵이어서 해가 완전히 지지 않은 채 24
시간 낮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같은 천문학적 현상을 알지 못했고 늘 밤이 
되어야만 잠을 자곤 하던 이타케 사람들은 시간이 흐른것도 모른  채 도착
한지 거의 48시간이 되도록 잠을 자지 않고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고 보초도 세워놓지 않은 채 모두들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라이스
트리고네스족은 해변의 덤불 속에  웅크리고 숨어서 이타케인들이  도착할 
때부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이 잠이 들자마자 라이스트리고네
스족은 카누를 바다에 띄워 오디세우스의 선박을  향해 노를 저어갔다. 바
로 그 순간, 오디세우스의  배에 타고 있던  군인 하나가 기적처럼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엘페노르라는 고질적인 술꾼이었다. 술에 취해 있던   그는 
동료들이 자지 않고 있던 사흘 전부터 갑판에서 이미 잠을 자고 있었던 탓
에 다른 사람들이 잠에 빠져들었을 때 그만은 술이 깨면서  정신을 차렸던 
것이다. 라이스트리고네스족이 다가오는 모습을 본  그는 오디세우스를 흔
들어 깨웠다. 위험을 깨달은 오디세우스는 즉시 칼을 꺼내 배의 닻줄을 끊
고 돛을 올려 가까스로 그들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머지 11
척의 배는 침략을 모면할 수 없었고, 배  안에 잠들어 있던 병사들은 수면
의 신의 팔에서 죽음의 신의 팔로 그대로  옮겨지고 말았다. 이 재난을 격
은 후 오디세우스에게는 단 한 척의 배만이  남았다. 배 안에는 고작 45명
의 병사와 소량의 전리품 그리고 약간의  물과 밀가루만이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오디세우스는 낙담하지 않았다. 그는 병사들의 용기를 북돋으며 이
타케로 무사히 데려다 주겠다고 약속했고 일행은 다시금 기운을 내서 이타
케를 향해 노를 저어가기 시작했다. 며칠 후 또다시 섬이 나타났다. 신중하
게 섬을 한 바퀴 돌아본 오디세우스는 섬에 사람이 살지 않는 것   같아서 
작은 포구에 닻을 내렸다. 하지만 부하들 중 누구도 섬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기에 오디세우스 혼자 활과 투창으로 무장하고 배에서 내렸다.

    돼지로 변해버린 병사들
  섬 안쪽으로 몇백 미터 들어갔을 때 오디세우스는 운 좋게도  커다란 사
슴 한 마리를 발견하여 활을 쏘아 잡을 수 있었다. 그는 사슴을 어깨에 메
고 투창을 목발처럼 짚고는  해변까지 어렵지 알게  되돌아왔다. 동료들이 
그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사슴을 토막내어 불에  구웠고 모두들 조금씩 나
눠 먹음으로써 허기를 채웠다. 오디세우스는 섬을  답사하던 중 섬 중앙에 
있는 작은 언덕 뒤켠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걸 보았다며 그걸  좀더 가까
이 다가가 살펴보는게 좋겠다고 동료들에게 말했다. 하지만 신중을 기하기 
위해 일부는 배에 남기로 했다. 그리하여 선원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 
첫 그룹에 속한 22명은 오디세우스의 부관이자 매부이기도  한 에우리로코
스가 지휘하기로 했다. 그리고 오디세우스는 나머지 22명의 지휘를 맡았다 
그리고 어떤 그룹이 섬으로 떠날 것인가를 추첨한 결과 에우리로코스의 그
룹이 선정되었다. 오디세우스는 그에게 신중할 것을 당부했다. 섬으로 조금 
들어가자 에우리로코스 일행은 오디세우스가 말한 연기를 발견할  수 있었
다. 그곳으로 다가서자 숲속의 빈터 한 가운데  아주 크고 아름다운 집 한 
채가 나타났다. 그들이 집을 향해 전진하자  갑자기 12마리의 늑대와 사자
와 호랑이가 나타나 그들을  포위했다. 처음엔 잠시  당황했지만 야수들이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 아니라 탄식하듯 끙끙거리면서  그들의 다리
를 부벼대고 손을 핥으며 정답게 굴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오
디세우스의 부하들은, 마술을 부려 방문객을 야수로 변모시키고 포로로 삼
는 일을 즐기던 마녀 키르케의 영역에  들어섰던 것이다. 야수들의 상냥스
런 환대를 받자 한층  대담해진 병사들은 그  집의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들어오라는, 멜로디처럼 상냥한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모두들 그 말에 
따랐지만 에우리로코스만은 경계를 늦추지  않고 밖에 남아  있었다. 그는 
창가로 다가가 집안에 들어선 동료들 을 지켜보았다. 수를 놓고 있던 몹시 
아름다운 여인이 넓은 거실에서  그들을 맞이했다. 그녀는  웃으며 일어나 
그들에게 앉으라고 한 다음 술을 대접했다.  동료들이 잔에 입술을 대자마
자 그녀는 소매에 감추고 있던 마술 지팡이를 그들 머리 위로 지나가게 하
더니 모두를 돼지로 변하게 했다. 돼지로 변한 병사들은 집밖으로 나와 콧
잔등으로 땅을 긁어대며 버섯이며 풀뿌리 따위를 찾아 헤매었다. 에우리로
코스는 키르케에게 들키지 않고 그곳을 벗어나 오디세우스가  기다리는 해
변으로 줄달음쳤다. 그는 자신이 목격한  장면을 오디세우스에게 이야기하
고는 어서 빨리 이 저주받은 섬에서  도망치자고 했다. 하지만 오디세우스
는 거절했다. 키르케의 포로가 된 22명의 불행한 동료를 저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을 구하러 가자."
오디세우스가 부하들에게 말했다.
  "전 안 가겠어요."
에우리로코스가 말하자 나머지 병사들도 대답했다.
  "저희들도 안 가요."
그러자 오디세우스가 말했다.
  "그렇다면 나 혼자 가지."
그곳으로 가는 도중 오디세우스는 마녀의 마술에 대항할  방법을 생각해보
았다. 에우리로코스가 전해준 얘기에 따르면 키르케가  동료들에게 권했던, 
그리고 분명 자신에게도 권할 그 술에 마약 성분이 들어있을  거라는 추측
이 가능했다. 그러자 오래 전 이타케네서 그의 할아버지인 아우톨리코스가 
증조부 헤르메스로부터 전해받았다며 가르쳐 주었던  비법이 생각났다. 그
것은 여러 가지 식물을 섞어 만든 것으로  온갖 종류의 독약 마약, 마술로
부터 몇 시간 동안 면역 상태를 유지시켜  주는 효능이 있었다. 그는 필요
한 식물들을 구해 그  즙을 짜내어 마셨다. 그리고는  키르케의 집을 향해 
다시 출발했다. 22마리의 돼지까지 끼여 있는  무해한 동물떼에 조금도 주
의를 기울이지 않고 오디세우스는 곧장 집의 문을 두드리고 거실로 들어섰
다.
 "시원한 거 한 잔드세요."
더할 나위 없는 애교를 떨며 키르케는  술을 권했다. 오디세우스는 단숨에 
잔을 비웠고 키르케가 자신의 머리 위에서 흔들고 있는 마술  지팡이를 못 
본 체했다. 그리고는 조롱하듯 말했다.
  "한 잔 더 주시겠어요?"
두번째 잔을 마시자마자 그는 칼을 빼들고 키르케의 손에서 마술 지팡이를 
떨어뜨렸고 칼끝을 목에 들이대었다. 키르케는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원하
는 모든 걸 해주겠노라고 했다.
  "내 부하들에게 본래의 인간 모습을 돌려 놀 것과 나와 그들에게 다시는 
그러한 짓을 하지 않을 것을 스틱스 강에 대고 맹세하라."
키르케는 수락했고 약속을 지켰다. 게다가 오디세우스의 용맹에 크게 감동
받은 그녀는 섬에 며칠  머물며 자기와 함께  잠자리를 할 것을 부탁했다. 
오디세우스는 그 섬에서 1년 간을 머물렀다 키르케와의 사랑의  결실로 오
디세우스가 떠난 몇 달 후 텔레고노스라는  이름의 아들이 태어나게 된다. 
이 책에서는 다를 수 없지만 언젠가는 그의 이야기를 다시 하게 될   것이
다. 지금은 그저, 텔레고노스는 오디세우스의 어머니  안티클레이아와 더불
어 오디세우스의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들 중   하나라는 
사실만을 지적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키르케와  즐거운 1년을 보내고 나자 
오디세우스는 다시금 조국과 가족을 만나고픈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결심을 키르케에게 알렸고 약속에 충실하던  키르케는 반대하
지 않았다. 오디세우스는 인근에 흩어져 있던  부하들에게 북을 쳐서 출발
을 알렸다. 그런 와중에 술꾼 엘페노르는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당하게 되
었다. 술에 찌들어 다락방에서 자고 있던 그는 오디세우스의 출발 명령 소
리를 듣고 비틀거리며 일어났는데 사다리가 치워진 걸 보지 못하고 그대로 
발을 내딛는 바람에 대퇴부 골절이  으스러지며 추락사를 당하고 만  것이
다. 급히 떠나는 중이었지만서도 오디세우스는 엘페노르가 라이스트리고네 
섬에서 보여줬던 충성을 기억하여 예의를 갖춘 장례를 치러주었다. 키르케
에게 작별을 고하면서 오디세우스는 앞으로 또 어떤 시련이 닥쳐올 것인가
를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저는 마술사이지 예언가는 아니랍니다. 하지만 한  가지  충고는 할 수 
있지요. 황천으로 가서 점쟁이 테이레시아스를 찾아 물어보세요. 그는 얼마 
전 죽었는데, 그라면 당신의 미래를 알려줄 수  있을 거예요."
그녀는 황천으로 가는 수로를 가르쳐주었다.  또한 테이레시아스의 얘기를 
얻어들으려면 황천에 사는 사람들이 아주 좋아하는 음료인  흑염소의 피를  
대접해야 한다는 것도 알려주었다. 그리고는 그 음료를 가득 담은 병과 함
께 수많은 선물을 싸주면서 오디세우스와 아쉬운 이별을 했다.

    7 황천에 간 오디세우스
  트로이 전쟁의 여파로, 죽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어 황천의 심판관
인 아야코스, 미노스, 라다만티스는 산더미 같은 일에 쌓여 있었다. 심판해
야 할 일이 너무 많이 밀려 있는 탓에 새로 온 사람들은  서류를 접수시키
는 데만도 몇 달씩 기다려야 했다. 스틱스  강을 건너온 죽은 자들은 엘리
시온(천국)으로 갈지 타르타로스(지옥)로 갈지를 판결받기 위해 일종의  수
용소 같은 곳에서 머물며 기다려야 했는데 그곳에서의 생활은 참담한 지경
이었다. 바로 그곳에, 얼마 전 사망한 테베의 유명한 장님 점쟁이 테이레시
아스의 영혼이 수많은 망령들 사이에 끼여  떠돌고 있었다. 키르케 덕분에 
오디세우스는 아주 쉽게 황천 입구를 찾을 수 있었다. 더욱이 그녀가 만들
어준 통행증 덕에 오래 기다리지 않고도 카론의 나룻배를 타고  스틱스 강
을 건널 수 있었다. 하지만  강 저쪽에 내려서자 낙담하고 말았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틈에서 테이레시아스를 어찌 찾아낼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
며 고민하고 있는데 누군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
  "아니 이거 오디세우스 아녜요? 여기서 뭐 하시오?"
라며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뒤를 돌아보니 그는 술꾼  엘페노르였다. 그
의 영혼은 오디세우스의 배보다 빨리  키르케 섬과 황천 사이를  건너왔던 
것이다. 오디세우스는 엘페노르에게 자신이 이곳을 찾은 목적과 난처한 상
황을 얘기했다.
  "걱정 말아요. 테이레시아스가 있는 곳을 내가 알고 있으니 데려다 주지
요."
라고 오디세우스가 자신에게 보여줬던 호의를 잊지 않은  엘페노르가 말했
다.
  '늘 한심한 인간이라고만 여겼던 자가 두 번씩이나 날 구해주다니! 세상
에 이럴 수가 있나?'
라고 오디세우스는 마음속으로 감탄했다. 황천의  점쟁이가 알려준 오디세
우스의 시련 잠시 후 엘페노르는 장님 점쟁이 테이레시아스를 데리고 다시 
돌아왔다. 오디세우스는 자기 소개를 한 후  가져온 흑염소 피를 대접하고
는 자신의 미래에 대해 물었다.
  "제가 저희 집에 돌아갈 수 있을까요? 제 부모와 아내와 아들을 다시 만
날 수 있을까요? 아직도 많은 시련을 겪어야 하나요?"
  "당신의 질문에 모두 대답할 수는 없소. 점쟁이도 모든 걸 다 알지는 못
하거든요. 당신이 집으로 돌아갈지, 아버지와 아내와 아들을 다시  보게 될
지에 대해서는 나도 모르겠소. 하지만 생각보다는  빨리 당신 모친을 만나
게 될 거라는 점과 아직도 수많은 시련이 당신 운명 속에 예정되어 있다는 
것만은 말할 수 있다오."
  "그러한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 제가 뭘 어떻게 해야 할까요?"오디세우스
의 물음에 테이레시아스는 몇 가지 충고를 해주기로 했다.
  "항해 중에 아폴론의 소유지인 태양의 섬에 정박하게  되거든 그의 소떼
에 절대로 손을 대지 말도록 조심하시오. 아폴론은 그 소들을 무척 아끼고 
있기 때문에 만일 그랬다가는 아폴론 신의  보호를 잃게 될텐데, 당신에게
는 그 신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오. 왜냐하면  또 다른 강력한 신인 포세
이돈이 더할 수 없는 증오로 당신을 뒤쫓고 있기 때문이오. 포세이돈은 당
신이 가는 길에 여러 가지 장애물을 쳐놓고 있소. 죽음으로 이끌 세이렌의 
노래 앞에 놓여질 것이고, 카립디스와 스킬라의  무서운 바위 사이의 비좁
은 수로도 통과해야 할거요.  그리고 무서운 폭풍도  다시 한 번 마주치게 
될 거요. 내 말을 믿는다면, 포세이돈의 힘이 가 닿을 수 없는, 바다로부터 
멀리 떨어진 나라로 피신하도록 하시오."
  "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있다는 걸  어떻게 확신하지요?"
  "배의 노를 어깨에 메고  뭍으로 걸어  들어가보면 되오. 당신이 지나가
는 걸 본 농부가 당신 어깨에 메고 있는 노를 신형 쟁기냐고   물어본다면 
그곳은 틀림없이 바다를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고, 바
다 음식을 전혀 먹어본 일이 없는 뭍사람들임이 확실하오."
  "알겠소."
오디세우스는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자신이 그러한 나라에서는 결코 살 수 
없으리라는 걸 알았다.

    오디세우스와 망자들의 대화
  오디세우스가 테이레시아스와 얘기를 나누는 동안 그가 황천에   왔다는 
소문이 망자들 사이에 퍼졌다. 그래서 테이레시아스가 풀러가자 수많은 사
람들이 달려왔다. 맨 처음 그 앞에 나타난 망자는 방금 전의 테이레시아스
의 예언 중 하나를 입증해주었다. 오디세우스의 모친인 안티클레이아가 나
타났던 것이다. 그녀를 본 오디세우스는 놀라며 슬퍼했다. 그는  모친이 죽
게 된 연유를 물었다.
  "늙기도 했고 네가  없어 너무 상심해서 그렇게 됐단다."
라고 어머이는 말했다. 그리고는 가족의 소식을 오디세우스에게 전해 주었
다.
  "네 아버지 라에르테스는 몹시  지쳐 있다. 그래서  시골의 조그만 집에 
은거해서 정원을 가꾸며 살고 있지.  이제는 더 이상 궁전에 머물지  않아. 
네 아내 페넬로페는 여전히  너를 기다리고 있다. 네게서  소식이 끊긴 지 
오래건만 네가 죽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다. 수많은 남자들이 그 애
를 쫓아다니며 재혼하자고 하는데도  말이다. 네 아들  텔레마코스는 아직 
너무 어려서 힘을 쓸 수 없지."
오디세우스는 모친을 포옹하려 했지만 망자들은 실체가 없었기  때문에 그
의 팔은 허공을 끌어안았을 뿐이다.  안티클레이아는 오디세우스로부터 멀
어져 군중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다음에는  아킬케우스의 망령이 오디세우
스에게 다가왔다. 그는 살아 있을 때나  다름없이 수려한 모습이었지만 슬
픈 표정이었다. 아킬레우스는 자신이 너무 이른 나이에 죽었으며 망자들의 
세계에서 목표도 영광도 없는 삶을 영위해야  한다는 사실을 한탄했다. 오
디세우스는 그를 위로하려고 애썼다.
  "자네는 트로이 전쟁에 참여했던 그리스 군인들 중  가장 영예로운 사람
이었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이 황천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일 걸세 이제 
죽었으니 자네는 평화를 얻었지만 난 아직도 살아남아 시련과 고통에 짓눌
리고 있다네."
  "이제 내게 영광이 무슨 소용인가! 이름을 날리며 죽는 것보다는 미미한 
존재로라도 살아남는 게 나아 오디세우스, 자네의 고통을 한탄하지 말게나. 
아무리 불행하더라도 나날의 삶이 가져다주는 단순한 기쁨들을  놓치지 말
고, 살아 있다는 사실을 즐기게나."
아킬레우스는 오디세우스에게 아들 필로스의 소식을 물었다.
  "자네 아들은 자네가 죽고 난 후 우리와 합류하기 위해   트로이에 왔다
네. 그리고 영웅처럼 처신했고 그리스 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네."
아킬레우스를 위로하고픈 욕망으로 격앙된 오디세우스는 약간의 과장된 주
석을 다는 일도 개의치 않았다.
  "필로스는 자네이래 가장 수려하고  용감하고 힘센 그리스  군이었을 뿐 
아니라 우리 중 가장 지혜로운 군인이기도  했다네. 그래서 우리들이 모여 
회의를 할 때면 그의 의견은 네스토르나 내 의견만큼이나 귀기울여 경청되
곤 했다네. 나와 동시에 트로이를 떠났으니 지금은 아마도 자기 나라로 돌
아갔을 걸세."
아킬레우스는 만족한 마음으로 멀어져갔다. 오디세우스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아이아스의 망령이 머뭇거리며  있는 걸  보았다. 오디세우스는 그를 
불러 화해를 청했다.
  "자네가 살아 있을 때 우리는 서로  경쟁자였지. 그리고 우리는 더로 힘
겹게 대치하곤 했지. 하지만 난 늘 자네를 존경했다네. 우리를 반목하게 만
든 갈등들이 원망스럽군. 미움은 잊어버리고 이제 화해하기로 하세."
하지만 아이아스는 아킬레우스의 무기를 차지해버린 오디세우스를  용서하
지 않았다. 그는 오디세우스에게  음울한 시선을  던지고는  대답도  없이 
멀어져갔다. 그러자 아가멤논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아니 이게 웬 일인가? 자네도 이승을 떠나왔나? 거인족과의   전투에서 
영광스런 죽음을 당했나? 아니면 포세이돈이 내려보낸 폭풍에  희생되었는
가?"
  "유감스럽게도 난 부정한 아내에게  영광도 없는 개죽음을 당했다네."
그는 오디세우스에게 자신의 귀환길과 죽게 된 상황을 얘기해주었다. 그리
고는 결론 삼사 오디세우스에게 충고했다.
  "언젠가 이타케에 돌아가게 되거든 신중하게 행동하게나. 아무도 모르게 
섬에 내려 자네의 귀환을 알리기에 앞서 우선 상황을 조심스럽게 살피도록 
하게, 여자들이란 항상 경계해야 한다는 걸 내 경험이 입증하거든. 내 말을 
믿게나."
그 말을 들은 오디세우스가 속으로 생각했다.
  '그의 경험이 입증하는 것은 소매 구멍이 뚫려 있지 않은 가운은 경계해
야 한다는 거로군.'
이렇듯 10여 명의 망자들이 오디세우스에게 달려와 그를  졸라대며 질문과 
한탄을 늘어놓는 바람에 그는 완전히 탈진해버렸다. 몰려드는 망자들에 대
해 갑자기 두려움을 느낀 오디세우스는 도망쳐버렸고 카론의  배에 뛰어들
어 스틱스 강을 건너 재빨리 밝은 세상으로 올라왔다.
  "아킬레우스의 말이 맞아. 죽은 자들의  넋두리보다는 산 사람들의 근심
이 훨씬 낫지."

    8 홀로 남은 오디세우스 
  배로 돌아온 오디세우스는 동료들을 모아놓고 설교를 했다. 그는 앞으로
의 모진 시련을 예고하면서, 이미 여러  번의 시련을 극복해왔으므로 집으
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계속 자신을 믿고  따라줄 것을 부탁했다. 키르케가 
준 해양 지도와 지금까지의 항해를 통해 얻어진 경험 덕분에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위치를 대략 알 수 있었고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도 알  수 있었
다. 또한 며칠 후, 세이렌의 섬 근처를 지나게될 거란 사실도 알고 있었다. 
세이렌의 노랫소리 오디세우스는 예전에 오르페우스가 어떻게  세이렌들을 
피할 수 있었는가를 설명해주었던 네스토르의 얘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하
지만 똑같은 방법을 사용할 수는 없었기에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만 했다. 
위험한 지대로 들어서자마자 그는 동료들을 모이게 하고는  위협이 다가옴
을 알렸다. 동료들이 세이렌들의 매혹적인 소리에 넘어가지 않도록, 손으로 
만져 부드럽게 만든 동그랗고 조그만 밀랍으로 귀를  틀어막게 했다 (당시
에 이러한 묘안으로 특허 신청을 냈더라면 상당한 재산을 모았을 것이다). 
하지만 오디세우스 자신은 음악을 너무도 좋아했으므로 그 3명의 프리마돈
나의 노래를 듣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귀를 막지는 않았고 대신 어
리석은 짓을 하지 않도록 자신의 몸을 배의 돛대에 단단히  묶어달라고 동
료들에게 부탁했다. 그리고 배의 지휘권을  충실한 부관 에우리로코스에게 
맡겼다. 바람이 잦아들자 노를 저어 세이렌의 영해로 접어들었다.  곧 이어 
세이렌들의 노래가 오디세우스의 귀에 들려왔다. 그 노래는 너무도 아름다
워서 오디세우스는 모든 결심을 다 잊고 그녀들 곁으로 다가서려고 몸부림
쳤다. 그는 노 젓는 사람들에게 방향을  바꾸라고 소리쳤고 애원과 협박을 
번갈아해가며 자기 몸을 풀어달라고 간청했다. 다행히 귀를 틀어막아 오디
세우스의 소리는 듣지 못한 채 그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만을 볼 수 있었던 
선원들은 더 빨리 배를 저으라는 소리라고 짐작하고는 있는 힘을  다해 노
를 저어 열심히 배를 몰아갔다.  에우리로코스만은 오디세우스가 소리치는 
내용을 짐작했지만 상관의 명령에 충실히 따라, 오디세우스를 묶었던 돛대
의 밧줄을 더 단단히 여몄을 뿐이었다.

    게임의 법칙
  오디세우스가 넘어서야 할 다음 장애물은 카립디스와 스킬라라는 가공할 
만한 2개의 바위로 이루어진 수로였다.  키르케와 테이레시아스가 해준 묘
사를 통해 오디세우스는 바위의 중요한 특징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 2
개의 바위는 서로 바짝 붙어 있었고  그 사이의 틈은 기껏해야 화살이  가 
닿을 정도의 짧은 거리밖에  되지 않았다. 바위들의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비켜 돌아가는 일은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바위  양쪽의 바다 밑에는 암초
들이 아주 길게 뻗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 두 바위 사이
로만 지나가야 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두  바위 모
두 치명적인 위험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립디스는 가파른 절벽들로 
둘러쌓인, 별로 해로워보이지 않는 작은 섬이었다. 바다와 접한  절벽 아래
쪽에는 우툴두툴한 굴곡이 깊이나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아주 불규칙
한 간격으로 이 굴곡은 예고도  없이 급작스런 침몰을 일으켰고  그곳으로 
물살이 휘몰아치면서 제어할 수 없는  소용돌이를 일으켜 백 미터  근방의 
수면 위에 떠 있는 온갖 배들이며  물건들을 한꺼번에 휩쓸어가버렸다. 그
러고 나서 정확하게 반시간이 지나면 소용돌이는 자신이 삼켰던 모든 것을 
똑같은 격렬함으로 모두 뱉아내곤 했다. 하지만 반시간의 간격이라면 급류
에 휘말린 어떤 배라도 이미 바닷속에  가라앉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스킬
라의 바위 역시 카립디스와 마주한 쪽에 깊은 굴곡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
지만 굴곡의 높이는 카립디스의 절반 정도였다.  그 동굴에는 옛날에 고위
층 신의 접근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괴물로  변해버린 요정이 살고 있었다. 
바위 이름 스킬라는 그녀의 이름을 딴 것이다. 그녀는 거대한 문어의 형상
을 하고 있었고 6개의 발끝에는 이빨이 세 줄씩이나 있는 개의  머리가 달
려 있었다. 그런데 참으로  묘하게도 이 흉물스런운  개가 짖는 소리는 갓 
태어난 강아지 소리보다도 크지 않았다. 새나 돌고래나 선원들이 지나가기
만 하면 스킬라의 머리가 동굴에서 불쑥 치솟아 나와 먹이를  덥석 물어가
곤 했다. 2개의 작은 섬이 시야에  들어오자 오디세우스는 어떤 행동을 취
해야 하는가를 오랜 동안 고심했다. 그는 3가지 해결책을 생각해봤다. 첫째
는 두 바위 사이로 지나가는 것이었다.  잠시 생각해보니 오디세우스는 그
것이 가장 나쁜 방법이라는 걸 깨달았다. 사실 그 길을 택하면 카립디스와 
스킬라 두 바위의 포위망에 모두 걸려 동시적인 위험을 무릅써야 했다. 두
번째 방법은 카립디스를 스쳐지나감으로써 스킬라의 공격권을 벗어나는 것
이었다. 만일 배가 카립디스의 두 호흡 사이에 지나가기만 한다면 어떤 피
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배가 지나갈 때  호흡에 걸린다면 배와 
그 안에 탄 모든  이가 삼켜지게 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모두 살아나거나 
전멸하는 방법인 셈이다. 세번째 해결 방안은 스킬라 섬에 바짝 붙어 감으
로써 카립디스의 위험을 피하는 일이었다. 이 경우 6명의 사공은 스킬라의 
머리에 잡혀 먹히겠지만, 빨리 지나가기만 한다면 나머지 사람은 살아남을 
수 있다. 오디세우스는 전멸하는 것보다는 희생자의  수를 제한하는 게 낫
다고 생각하여 세번째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오디
세우스는 오늘날 고전이 되다시피한 '게임의  이론'에 대한 문제를 우아한 
방식으로 제기하고 해결한 셈이 되었다.  왜냐하면 오디세우스는 감내해야 
할 최대한의 위험을 최소화하는 '미니맥스' 정책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선
원들이 아예 바위 곁에 다가서지 않으려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오디세우
스는 스킬라 바위의 괴물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배가 동굴 앞을 
지나는 순간 6개의 끔찍스러운 머리가  동굴에서 솟아 나와 6명의  선원을 
마치 탈구된 꼭두각시처럼 들어올려 공중으로  나꿔채갔다. 하지만 괴물이 
또다시 나왔을 때는 오디세우스와 38명의 생존자들은 은 이미 그의 영역에
서 벗어나 있었다.


    아폴론의 소를 금기하라
  테이레시아스가 오디세우스에게 경고한 세번째 위험은 태양의 섬에서 사
육되고 있는 아폴론의 소떼를 건드리지 말라는 것이었다. 위험을 피해가기 
위해  오디세우스는 아예 이 섬에는 정박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며칠
인가를 쉬지 않고 노를 저어온  선원들은 태양의 섬 가까이에 오자 오디세
우스에게 잠시라도 쉬어가며 물을 보충하자고 애원했다.
  "당신은 강인한 힘과 정신을 가졌기에  피곤한 줄도  모르겠지만 우리네 
평범한  인간들은 약간의 휴식이 필요해요."
오디세우스는 뜻을 굽혔다. 하지만 꼭 하룻밤만  머물 것과 섬에서는 오직 
물만을 가져올 것, 특히 어떤 이유에서든 아폴론의 소에는 절대 손도 대지 
말 것이라는 단호한 조건을 내걸었다. 동료들은 맹세로써 동의했다. 그들은 
섬으로 다가섰고 해변에  닻을 내렸다. 그런데  밤사이에  거센 폭풍이 일
었고 다음날  아침이 되자 그 기세가 더  심해져 항해가 불가능했다. 폭풍
은 하루하루 연장되었고 오디세우스 일행은 예상보다 훨씬  오랫동안 섬에 
머물러야  했다. 처음에 선원들은 얌전하게 있었다. 키르케가 준 양식이 아
직 남아 있어 먹을 것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폭풍이 3주 간이나  계속
되자 양식이 떨어졌고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다. 
며칠간은 풀뿌리나 조개류, 조류들과 산토끼를  잡아먹으며 그럭저럭 연명
했다. 하지만  점차 감시하는  사람도 없이 해변 근처의  풀밭에 널려있는 
기름이 번들거리는 살진 소들을 탐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마
침내  어느 날 밤 오디세우스의  부관인 에우리로코스는 오디세우스가 잠
든 틈을 이용하여 동료들을 불러모았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모든 형벌 중에 제일 잔인한 것이  탄탈로스의 형벌이며, 죽음 중의 최
악의 죽음이 배고파 죽는 일이다. 저 탐스러운 소 한두  마리만 죽이면 그
같은 죽음은 충분히 면할 수   있다. 그  정도면 아폴론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설사 눈치챈다 하더라도 우리의 적절한  희생으로 그의 화를 가라
앉힐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의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한다 하더
라도, 나라면 배고픈 채로 천천히  죽어가기보다는 차라리 배를 가득 채우
고  빨리 죽는 걸 택하겠다."
동료들은 그의 말에 동의했다. 그들은 소를  1마리, 2마리 쓰러뜨렸고 내친
김에 4마리를  더 쓰러뜨렸다. 다음날 아침  오디세우스가 깨어났을 때 깨
끗하게  잘려진 6마리의 소가 꼬치구이가  되어  익혀지고 있었다. 오디세
우스는 즉각 엄청난 재난을  파악했다. 그는 동료들  특히 에우리로코스를 
호통쳤다. 하지만 이미 일은 저질러졌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는 말
없이 호화로운 식사에 동참했다. 그 시간 올림포스에서는 아폴론과 포세이
돈이 오디세우스 일행을 징벌할 수 있는 전권을 을 제우스로부터 얻어내고 
있었다. 폭풍이 가라앉자 선박은 다시금 바다로 나섰다. 하지만  그것도 잠
시였고 다시금 천둥과 함께 태풍이 불어닥쳤다.  거대한 파도가 선박 위로 
휘몰아쳤다. 질겁한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은  정신을 잃었고 그의 명령조차 
들으려 하지 않았다 침착할  것을 권고대도 소용이  없었다. 오디세우스가 
소리 쳤다.
  "배가 파도에 휘몰아칠 때 뱃전에서 뱃미로 도망간다고 위험에서 벗어나
는 건 아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 말을 듣지 않았다 더 높은 파도가 배를 힘껏 후려치더니 
배를 붕괴시켜버렸고 선원들을 모조리 휩쓸어가버렸다 돛대에 몸을  꽉 붙
이고 있던 오디세우스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다 익사하고 말았다. 저항할 
수 없는 물살에 휘말린 오디세우스는 전속력으로 카립디스와  스킬라 바위 
쪽으로 떠내려갔다. 헤어날 가능성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
은 기껏해야 자신의 몸을 두 바위의  한쪽으로 몰아붙이는 것뿐이었다. 이
번에는 그 혼자였기 때문에 스킬라쪽으로 가면 아무런  희망도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반대로 약간의 희망을 을 가지고  카립디스 쪽으로 가서 삼켜지
지 않을 행운을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행운은  결정적으로 그의 
편이 아니었다. 그가 절벽을 따라가는  순간  밑에서 소용돌이가 일어나더
니 그를 깊고깊은 심연 속으로  끌어내리고 말았다. 이제 그의  모험은 끝
난 것일까? 아직은 아니다. 동료들과의 저승 왕국에서의 영원한  재결합을 
가능하면 늦춰보겠다고 결심한 불굴의  오디세우스는 돛대에 몸을  의지했
고, 낙담한 가운데서도  긴장을 풀면서 절벽 굴곡에  불쑥 자라난 야생 무
화과나무의 가지를 움켜쥘 수 있었다. 두 손을 허공에 내 맡긴 채 그는 자
신의 돛대가 심연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걸 보았다.  나무 줄기를 붙잡으려
고 발돋움하기에는 힘이 모자랐다.  하지만 나뭇가지를 붙잡고  있을 힘은  
충분했다. 카립디스가 돛대와 함께  삼켜버린 물살을 토해낼  때까지 그는 
반시간을 이렇게 피곤과 경련에 저항하며  견뎌냈다. 그제서야 오디세우스
는 나뭇가지에서 손을 놓았고 수면 위로 떨어져 돛대를 붙잡았다. 돛대 위
에 올라탄 오디세우스는 물살 흐르는 대로 미지의 목적지를 향해 떠내려갔
다. 

    9 칼립소 섬에서의 체류 
  오디세우스는 돛대에 매달린 채 거센 바다 위를 72시간  동안이나  표류
했다. 파도는 마침내 탈진한 그를 어떤 섬의 해안에  던져버렸다. 그  섬은 
칼립소라는 물의 요정의  섬이었다. 신의 서열에서  물의 요정이라는 직함
은 샘의 요정 숲의 요정, 사티로스(반인반수의 신), 목신과  마찬가지로 가
장 소박한 지위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그같은 귀족의 칭호를 맹목적으로 
신뢰해서는 안 된다. 유럽의 귀족 연감에서 볼  수 있듯이 그 귀족 신분이 
십자군 원정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몇몇 백작이나 남작들은  최근의 기원을 
가진 공작이나 왕자들보다 우세한  권력을 가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칼립
소 역시 비록 요정이긴 했지만  아틀라스의 친딸로서 신의 계급에서  가장 
높은 서열에 속해 있었다. 그녀는  올림포스의 대권을   가진 신들과 동등
하게 말을 나누었으며, 제우스의 면전에서도 당당하게 처신하곤  했다.  올
림포스의 향연에는 늘 그녀를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지만 그곳에  자
주  가지는 않았다. 향그러운 숲이 우거지고 맑고  시원한  시냇물이 흐르
는 자신의 섬에서,   보랏빛 바닷속을 헤엄쳐다니며  고독하지만 매력적인 
삶을 누리는 걸 더  좋아했기 때문이다.  날이 밝자  칼립소는 모래사장에 
기절해 있는 오디세우스를 발견했다. 그녀는 그를  정신이 들게 했고 씻겨
주고 나서 원기를 회복시켰다. 그리고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연달아 여자
들과 여신들의 전격적인  사랑을 얻어내는 오디세우스의 비결은 무엇일까? 
확실히 그의 젊음이나  미모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결코  잘생긴 미남은 
아니었으며  더 이상 젊은 나이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가 발산
해내는 지적이고 강인한  인상 탓일  것이다. 거기에다 수많은   무훈들로  
얻어낸 명성도 한몫했을 것이다. 어쨌든 칼립소는 그날 당장 오디세우스에
게 자신의  섬에 머물러 갈 것을 제안했다.  그녀가 몹시 아름답기도 했거
니와 배도 선원도 없이 더  이상의 선택의 여지가 없던  오디세우스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섬에서의 이러한  체류가  7년이나 계속 되
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으리라. 오디세우스와 칼립소는  몇  달인가를 꿈
결처럼  보냈다. 하지만 오디세우스의 사랑은 차츰  식어갔고 조국과 가족
을 보도 싶은 간절한  욕망에 다시금 사로잡혔다.  그때부터 오디세우스는 
칼립소를 저버리기 시작했다. 낮 동안은 곶 마루에 앉아 시간을 보내며 하
염없이 이타케 쪽의 바다를 슬프게 바라보곤 했고, 밤이 되면 칼립소를 마
주하긴  했지만 그녀의 애무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의 냉담함을 확인한 칼
립소는 연인을 잃게 될까 두려워 놀라운 제안을 했다.
  "당신이 내 남편이 되어준다면, 스틱스 강에  맹세코 제우스에게 당신의 
불멸권을 얻어내주겠어요."
대개의 신화연구가들은 맹목적으로 오디세우스를 찬탄하느라 그가  이러한 
제안을 '주저 없이' 거절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
는 많이 주저했다. 칼립소의  제안은 고려해볼 만한 것이었다.  지상에서의 
즉각적인 쾌락의 확신을 불멸의 삶이라는 우발적인 문제  제기와 맞바꿔야 
했던 파스칼의 내기와는 반대로, 칼립소의  제안은 오디세우스에게 불멸에 
대한 즉각적인 확신을 보장해주는 것이었으며  자기 나라로 돌아갈 수  있
다는  확실치 않은 희망만을  포기하도록 강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제안에는 오디세우스를 불안하게 하고 주저하게  만든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는 이러한 불안의  정확한 원인이 무엇인지 선뜻  말할 수 없었다. 그것
은 어렴풋한 과거의  어떤 일, 그와 유사했던 어떤 추억  때문이었는데 아
무리 애를 써도 잠재의식에 가라앉아 있는  그  기억을 되살려낼 수 없었
다. '언젠가 생각이 나겠지' 라고 생각하며 칼립소에게 숙고할 시간을 달라
고 했다. 그러자 오디세우스의  기분을 전환하고 사랑의  정열을 되살리기 
위해 칼립소는 또 다른 수단을 이용했다. '천일야화' 의 여주인공처럼 매일 
사랑 이야기를 한 가지씩 들려주기로  했던 것이다. 첫번째 이야기로 에로
스와 프시케의 사랑을 선택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 이야기를 
통해 신과 인간의 이질적인 결합도  행복할 수 있다는 걸  오디세우스에게 
입증하고 싶었던 것이다.

    에로스와 프시케
  옛날에 3명의 딸을 둔 왕과 왕비가 있었다. 세 딸은 모두 예뻤지만 특히 
셋째인 프시케의 미모는 두 언니들을 훨씬  능가했다. 게다가 그녀는 온화
하고 상냥한데다 지적이기까지 했다.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자신의 경
쟁자가 있다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고, 프시케에게 쏟아지는 한결같은 칭송
에 화가 나서 순진한 처녀에게  벌을 내리기로작정했다. 아프로디테에게는 
에로스 혹은 큐피드로 불리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통통한 볼을 가진 매혹
적인 아기였던  에로스는 미남의  청년으로 자라났다.  그는 올림포스에서   
모친의 보좌관으로서 사랑의 신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활과 화살을 지니고 다니던 그는 인간이나 심지어 신들의   마음에도 
사랑의 불길을 일으킬 수  있는 가공할  위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술 화살을 상대방 가슴을  향해 당기기만 하면 되었다. 
화살을 맞은 사람은 바로 그 순간 자신의 시선이 가 닿는 첫번째   사람이
나 사물을 사랑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프로디테는 프시케를 향한 질투심을 
해소하기 위해 아들 에로스의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그래서 프시케가 못
생기고 어리석고 고약한  남자를 사랑하게 만들어달라고 에로스에게  부탁
했다.
  "걱정 말고 제게 맡기세요."
라고 에로스가 대답했다. 그는  이런 종류의 장난을 통해   사랑이 얼마나 
맹목적인가를 보여주는 일에 강한 쾌감을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일은 아
프로디테가 원한대로 되지  않았고, 에로스가 예상한  것과는 전혀 다르게 
벌어졌다. 땅으로 내려와 프시케를 본 순간  에로스는 생전 처음으로 그리
고 그로서는 유일한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모친의 지시를 수행
하기는커녕 프시케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도록 하는 데 필요한   온갖 
배려에 몰두했다. 그리고 기회가  오면 자신이 그녀를 유혹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몇 달이  흘러갔다. 프시케의 두 언니 모두 멋진  결혼식
을 올렸지만 그녀는 독신으로  지낼 것만 같았다.  걱정이 된 그녀의 부친
은 신탁을 찾아가 물어보기로 했다. 에로스에  매수된 그 신탁은 프시케를 
언덕으로 데려가 그곳에 혼자 내버려두면 거기에서  마침내 사랑의 대상을 
만나게 될 거라고 말했다. 다음날 신탁의  권고대로 프시케의 아버지는 딸
을  언덕의 꼭대기로 데리고 가서 안락한 동굴 안에 자리잡게 하고는 저녁
이 되자 혼자  내버려두었다. 불안해진 프시케는 한밤중이 되도록 잠을 이
루지 못했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그녀 곁에 있음을 느꼈다. 그것
은 그녀를 만나러 온 에로스였다. 그녀는  감미로운 흥분에 사로잡혀 그와 
한 몸이 되어 부드러운 사랑을 경험하였다.  그런데 날이 샐 무렵이  되자 
그 미지의 연인은 그녀를 떠나야 한다면서 다음날  밤에 다시 오겠다는 약
속과  함께 덧붙여 말했다.
  "당신이 내 얼굴을 절대로 보지 말아야 우리의 사랑이 지속될 수 있소."
사실 에로스는 자신이 사랑에 빠졌다는 걸 부끄러워했고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사실이 알려지지 않길 원했던 것이다. 이후  몇 날 밤을 계속해서 에로
스는 프시케를 만나러 왔고, 프시케는 그의  얼굴을 절대로 보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새벽이 되기 전에 에로스는 그녀를 떠나곤  했다. 호기심
이 없지는 않았지만, 어느 날 아침 그녀를  찾아온 두 언니만  아니었다면 
프시케는 자신의 약속을 지켰을 것이다. 프시케의  얼굴에  드리워진 행복
감을 보고 질투를 느낀 언니들은 그 익명의 연인은  아마도 혐오감을 일으
킬 만한 괴물일거라고  넌지시 말함으로써 프시케의 마음에 불안과 의혹이 
일어나도록 했다. 그리고 그녀를 떠나가면서 사악한 충고를 해주었다.
  "그 점을 확실히 해두려면 오늘 밤 네 남자가 곁에서 잠든 사이 램프 불
을 밝혀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렴."
한참을 망설인 후 프시케는 언니들의 충고를  따르기로 했다. 기름 램프의 
흔들리는 불빛 아래에서 끔찍한 괴물의 얼굴이 아니라  인간의 아름다움을 
초월하는 수려한 얼굴이  드러났을 때 프시케의 놀라움과 안도감은 너무도 
컸다. 그녀가 감동에 겨워 그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을 때, 타들어가던 램프
의 기름 한  방울이 에로스의  이마로 떨어지고 말았다. 놀래서  잠이  깬 
에로스는 프시케가 맹세를 어겼다는  걸 알았다. 그는  몸을 일으켜  작별
의 키스도 하지 않은 채 프시케를 영원히 떠나면서 말했다.
  "사랑이란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하오."
그는 올림포스로 돌아가 모든 사실을 어머니에게 털어놓으면서 프시케에게 
벌을 내려달라고 했다. 아프로디테는 아들의 그같은 부탁을 몹시 기뻐하며 
승낙했다. 그녀 는 지상으로  내려와 동굴을  찾아가  눈물짓고 있던 프시
케에게 말했다.
  "나는 아프로디테이며, 네 연인은 바로 내 아들인 에로스이다. 넌 영원히 
그를  잃었을 뿐 아니라  배신한  죄를 씻기 위해  어려운  일을 해 내야  
한다."아프로디테가 프시케에게 시킨 일련의  과업은 헤라클레스가 해야했
던 일만큼이나 어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온갖  동물과 식물의 애정을 얻어
낼 수 있었던 프시케는 그들의 도움으로 어려운 일을 끝까지 해낼 수 있었
다. 엄청난 양의 곡식 더미를  내밀며 밀, 보리,  호밀, 귀리를  가려내라고 
했을 때는 개미들이 일을 도와주었다. 접근할 수 없는 협곡 아래를 흐르는 
강물에서 물을 담아 오라고 시켰을 때는 독수리가 자신의 발톱으로 물병을 
움켜쥐고 물을 퍼 담아다 주었다. 야생 염소의 털에서 뽑아낸 황금 양모로
된 실 한꾸러미를 가져오라고 했을 때는 가시덤불들이 실을  뜯어내어  제
비들이 날라다  주었다. 프시케가 3가지  시련을 극복해  나가고  있는 동
안 에로스는 전혀 다른 종류의  시련을 겪고 있었다. 프시케에게  '사랑이
란 믿음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자못 단호한  어조로 말하긴  했지만, 자신
이  진실에 반대되는 어리석은 말을  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당시에도, 
인간의 마음을 알아내는 일을  직업으로 삼았던 사람들, 즉 철학자, 심리학
자, 소설가나 시인들은 사랑에 해로운 것은 믿음의 부재라기보다는 지나친 
믿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의혹,  불신, 질투심은 사랑의 열정을 약
화시키기는커녕 더 자극하는 법이다. 게다가 사랑에 빠진 자의  불같은 정
열은 초조한 마음으로 인해 더욱 타오른다는 걸 즐겨 지켜보았던 에로스는 
그러한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철학자, 심리학
자,  소설가, 시인 심지어 사랑의 신조차도  사랑에 빠지면 별수없이  이성
을 잃게 마련이다. 에로스는 프시케가 자신을  배신한 이래 그녀를 잊기는
커녕 오로지 그녀만을 생각하게  되었다. 마침내 그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어머니를 찾아가 자기는 프시케  이외의 다른 누구도 사
랑할 수 없으며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겠노라고 했다.  아프로디테는 자기 
아들이 평범한 인간과 결혼한다는 걸  인정할  수 없었기에 제우스로부터   
프시케의 불멸권을 얻어냈고, 흔쾌히 불멸권을  받아들인 프시케는 에로스
의 아내가 되었다. 이야기를 마친 칼립소는  결론 삼아 오디세우스에게 물
었다.
  "당신도 그렇게 할 수 있겠어요?"
  "아직 좀더 생각해봐야겠소." 

    10 인간의 사랑
  칼립소의 입을 통해 올림포스 신들의 수많은  사랑 이야기. 특히 제우스
의 연애담을 주로 들은 오디세우스는 어느 날 저녁 칼립소에게 인간들간의 
사랑 이야기는 아는 게 없냐고 물었다.
  "왜요, 많지요. 그  얘기들을 들으면  사랑에 관해서는 인간이  신들보다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걸 당신도 알 수 있을 거예요."
하고는 얘기를 시작했다.

    조각상을 사랑한 피그말리온
  피그말리온은 아주 재능 있는  젊은 조각가였다. 그는  오로지 예술에만 
매료되어 여자들에게는 도무지 관심이 없었고, 어떤 여자도 아름답다고 생
각하지 않았다.
  "자연은 결점 투성이이며, 예술만이 완벽함에 도달할 수 있다."
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한 자신의 생각을 증명하기  위해 어느 날 그는 완
벽한 여자를 대리석으로 조각해내기로 계획했다.  작업은  너무도  성공적
으로 이루어졌고 그는 한낱  조각에 불과한  여상을 진짜로 사랑하게 되었
다.조각을 자기의 연인처럼 대하며 우아한 옷을 입혀주고 애무와 입맞춤을 
퍼부었다, 피그말리온의 괴상한 사랑의 열정에  감동한 아프로디테는 그를 
측은히 여겨 조각품에 생명을 불어넣어주고  갈라테이아라는 이름을  주었
다. 피그말리온은 그녀와 결혼했다.
  "자기애의 극치로군."
얘기를 듣고 난 오디세우스가 지적하자.
  "아니요, 자기애의 극치는 자기 자신을 사랑한 나르키소스(나르시스는 프
랑식  표기-역주)예요. 그의 얘기를 해주지요."
라고 말하며 칼립소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자신을 사랑한 나르키소스
  나르키소스가 태어났을 때,  그가 절대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지만 
않는다면 늙어서까지 행복하게 살  거라는 신탁의 예언이  있었다. 이같은 
예언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한 그의 부모는 그들의 거처에서 거울을 모
두 치워버렸다. 나르키소스는 뛰어난 미모의 청년으로 자라났다. 어떤 여자
든 그의 얼굴을 보면 불같은 사랑에 빠져들었다. 제우스와 불행한  관계를 
맺었던 요정 에코도 바로 그러한 열광자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불치의 여
자 혐오증에 걸려 있던 나르키소스는 그녀들에게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
았다. 어느 날 사냥을 마치고 돌아오던 나르키소스는 목을 축이기 위해 샘
물 앞에 멈춰 섰다. 몸을 굽히자 물 속에 비친 자신의 영상을 보게 되었고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그는 자기 영상과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완전
히 넋이 나가 움직이지도 않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은 채 그 모습만을  바
라보았다. 샘물에 입술을 적시면  행여나 잠시라도 수면이  흐트러질까 걱
정했던 것이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나르키소스는 허기와 갈증으로 죽고 
말았다. 황천의  뱃사공 카론이 아케이론 강을 건너게  해줄  때조차도 나
르키소스는 검은 강물에  몸을 숙인 채 여전히 자신의 영상을 감상하고 있
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하고 행복하게 되는 그런  정상적인 사랑 이야
기는 없소?"
라고 오디세우스가 칼립소에게 묻자,
  "당신에게는 안된 얘기지만, 그런 상황이란   것도 그다지 정상적이지만
은 않아요.  하지만  그런 얘기를 하나쯤은 알고 있어요. 필레몬과 바우키
스의 이야기예요."
라고 하면서 칼립소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인간의 완전한사랑
  어느 저녁나절, 제우스와 헤르메스는 평소처럼 저녁식사를 함께한 후 이
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는 산에  모여 사는 종족인 프리기아족
에 대한 이야기로 우연히 넘어가게 되었는데. 두  신이 그 종족에 대해 완
전히 다른 견해를 갖고 있음이 드러났다. 제우스는  프리기아족과 다른 산
사람들처럼 친절하고 호의적이라고  주장했고,  헤르메스는 반대로 그들은 
이기적이고 불친절하다고 했다.
  "내기를 해보세, 우리가 직접 그들을 찾아가보는 거야."이런 종류의 갑작
스런 장난을  즐겨하던 제우스가  제안했다. 다음날  제우스와 헤르메스는   
방랑자처럼 변장하고는 무작위로 선택한 프리기아의  한 마을로  들어서서 
여러 농가의 문을 두드리며 적선을 요구했다.  헤르메스가 예견했던  대로 
어디서나 사람들은 불친절했다. 문을 쾅 닫는가  하면 개를 풀어 위협하기
도 했다. 내기에 졌다고 생각한  제우스는 마지막으로  한 농가의 문을 두
드렸다. 그 집은 농가라고 할 수도 없는 초라한 오두막이었다. 그곳에는 늙
은 부부가 살고 있었다.
  "가진 건 없지만  우리의 식사와 거처를  기꺼이 당신들께 나누어  드리
죠."라고 말하며 손님을 안으로 들어서게 했다.  그들이 준비해놓은 식사는 
양배추와 빵 부스러기가 전부였다. 하지만 손님들을 위하느라 대들보에 매
달린 마지막 베이컨 조각을 떼어내어 대접했고,   아주 싸구려이긴 하지만 
찬장에 보관했던 마지막 술병도 손님을 위해   꺼내오는 것이었다. 식사를 
하며 노부부는 손님에게 자기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했다.  남편의 이름
은 필레몬이었고 아내는 바우키스였다. 결혼한 지 왜 오래  되었지만 처음
처럼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고 했다. 몹시  가난하긴 하지만 정원과 가축들
에게서 나는 것으로 먹고 살 만하다고 했다. 그래서 자신들은 아주 행복하
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얘기를 하면서도 필레몬은   손님들의 술잔을 자꾸 
채워주었고 혹시 술이  모자라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자신은 마시지도 않
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술병의 술이 줄어들지  않을  뿐 아니라 자꾸 채워
지는 것  같았다. 식사가 끝나자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게 되었다. 술병
은 가득 채워졌고 처음에 내놓았던 것보다 훨씬 좋은  술로 바뀌어버린 것
이다. 노부부는 그제서야  자기들의  손님이 예사로운 나그네들이  아님을 
깨달았다. 내기에 이기게 되어 몹시 즐거워진 제우스는 그들을 안심시켰다.
  "나는 신들의 왕이며 너희들의 호의로운  접대에  감사를 표하고  싶다. 
원하는 것을 뭐든지 들어주도록 하마. 금, 화려한 궁전, 넓은  영토, 수많은 
가축, 뭐든지 말만 해라."
필레몬과 바우키스는 잠시 소리를 낮추어 의논을   하였다. 그리고나서 필
레몬이 제우스에게 말했다.
  "우리가 바라는 유일한 것은 둘이  조금 더 함께 살았으면  하는 것입니
다. 그리고 때가 되면 같은  날 죽었으면 해요. 그래야  혼자 살아남은 슬
픔이 없을 테니까요."
제우스는 그 소원을 들어주었다.  몇  년이 지난 후  필레몬과 바우키스가  
죽었을 때 그들의 몸은 각기 전나무와 보리수나무로 변했고 죽어서도 헤어
지지 않게끔 같은 수령을 가진 나무로  만들어주었다. 이러한 모범적인 사
랑의 이야기에 오디세우스는 각별한 즐거움을 표했다.  그 모습을 본 칼립
소는 이때야말로 불멸권에 대한 선택을 결정하라고 할 좋은 기회라고 판단
하여 오디세우스를 다그쳤다.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다시금 몸을 사렸다. 마
음이  다급해진 그녀는 최후 통첩을 하기에 이르렀다.
  "당신은 생각할 시간을 충분히  가졌어요. 이제는 결정해야  해요.  그러
니 오늘 밤 안으로 반드시 대답을 하세요. 아침 일찍..."
그러더니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며 말했다.
  "내일 아침해가 뜨기 전까지 결정하세요."
당황한 오디세우스는 잠시 가만히  있었다. 그를  놀라고 당황스럽게 만든 
것은 칼립소의 최후 통첩이 아니었다. 그건 벌써 오래 전부터 예상된 것이
었다. 그는 마지막 유예  기간을 정하기 위해  칼립소가 사용한 말 때문에 
놀랬던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일출을 표현하고 싶을 때마다,  너무도 많이 
써서 상투적이 되다시피한 시적인 경구를  사용하곤 했었다. 그것은 '아침 
일찍 여명이 찾아오면...' 하는 표현이었다.  그런데 오디세우스는 칼립소가  
이 표현을 고의적으로 피했다는 걸 알아챘고 왜 그랬는지를 자문해보았다.
불현듯 오디세우스의 머리에 어떤 계시가 떠올랐고,   왜 칼립소가 여명(=
오로라)에 대한 언급을 피했으며, 자신이 몇  달 전부터 어떤 모호한 본능
에  이끌려 칼립소의 불멸권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동시에 알에 되었다. 그가 되살릴 수 없었던  오래 전의 모호한 기억이 마
침내 돌아온 것이다. 그래서 오디세우스는 칼립소에 게 말했다.
  "이번에는 내가 사랑 이야기 하나를  해주지,  아니 당신도 분명 알고있
는 얘기일 테니 기억을 되살려준다는 말이  더 적합하겠군. 오로라와 티토
노스의 사랑 이야기야."

    불멸의 유혹을 벗고
  오로라는 매일 아침 제일 먼저 일어나 동쪽의 태양을 자신의  장밋빛 손
가락으로 물들임으로써 해가 곧 뜰 거라는  걸 알려주는 여신이었다. 오로
라는 어느  날 티토노스라는 인간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는 자기와 결
혼해준다면  그에게 불멸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한 약속에 만족해하며 
티토노스는 몇 년인가를 지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의 머리가 희끗희끗
해지고 이마에 주름살이 늘어가며 가까이 있는  것도 잘 보지 못하는 노안
이  되어간다는 걸 알았다. 그는 오로라에게 불만을 터뜨렸다. 그러자 오로
라는 말했다.
  "당신에게 불멸을 준다고 약속했지 영원한 젊음을 준다고   하지는 않았
어요. 때문에 당신이 늙어가는 걸 막을 수는 없어요."
몇 해가 지나갔다. 티토노츠는 허리가 굽고  머리가 벗겨지고 주름이 잡혔
으며, 청각이며 시각, 후각과 촉각을  차례로 잃어갔다. 급기야 티토노스는 
자신을 제발 죽게 해달라고 오로라에게 애원했다. 이야기를 마친 오디세우
스는 칼립소에게 말했다.
  "자, 이제 오래 시간 끌 것도 없이 당신의 제안을 거절하겠소."

    오디세우스의 출발
  그날 이후 오디세우스와 칼립소의 관계는  급속도로 변해갔다. 오디세우
스는 침울하고 말없이 섬을 빠져  나갈 수단만을 강구했고 칼립소는  무슨 
수를  쓰든 그를 막아보려  했다. 아테나가  끼여들지 않았더라면  그러한 
긴장 상태는 좀더 길어졌을 것이다.  몇 달 전부터 올림포스에서 아테나와 
헤르메스를 중심으로 진행되오던 친오디세우스파의  로비 활동이  입지를 
강화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폴론은 소떼 사건을 거의 잊은  듯했고, 다른 
대개의 신들은 오디세우스에게 중립적인 호감을  나타냈다.  포세이돈만은 
불굴의 적대감을 그대로  지녔다. 하지만 그는  빈번히 올림포스의 자리를 
비우곤 했다. 어느  날, 무슨 연유인지 모르지만, 포세이돈은 에티오피아로 
장기 여행을 떠다버렸다. 그  틈을 이용하여 아테나는  다시금 제우스에게 
오디세우스의 탄원을 요구했다. 아테나의 청원은  승소했고 제우스는 헤르
메스에게 오디세우스와 칼립소의 일을  해결하기 위한  전권을  위임했다. 
헤르메스는 날개  달린 신발을  신고 즉각 요정의 섬으로 날아갔다.  관례
적인 정황 설명 후에 헤르메스는  곧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제우스는 오디세우스를 떠나보낼 것과  그가 떠나는 일을  도와줄 것을 
네게 부탁했다. 부탁한다는 말을 쓰긴 했지만  그것은 명령한다는 뜻이다."
칼립소는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여느 때처럼 곶 마루에 올라가 슬
프게 앉아 있는 오디세우스를 불러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말했다. 처음
에 오디세우스는 그 말을  불신했고 무슨 함정이  있지 않나 의심했다. 하
지만 그녀는 스틱스 강에 맹세코 진실이라고 말하면서 지체 없이   돌아갈  
배를 만들 것을 명령했다. 그러자 오디세우스는  약간의  위선을 가장하며 
후회하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이 섬에  계속 머무르는 일이요. 어떤 여자
도,  심지어 페넬로페도 당신과 비교할 수는 없기  때문이오. 하지만 가족
의 의무를 저버릴 수 없고 특히나 텔레마코스에 대한 아버지로서의 의무를 
저버릴 수가 없다오."
그리고 나서 오디세우스는 대번에 원기를  되찾아 일에 착수했다. 그는 쪽  
고른 소나무 몇 그루를 베어 단단히 묶어  뗏목을  만들고  돛과 용골, 키
까지 갖추었다. 정열적으로 몰두한 탓에 3일이  지나자 일은 많은  진척을 
보았다. 그러자 칼립소는  그를 붙잡아보려는 최후의 시도를 했다. 서로 헤
어진 연인들이 마주보고 얘기하면 자꾸 언쟁을 하게 될까 봐  종종 그러듯
이 그녀는 오디세우스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다.  눈물지으며 써내려간  이 
가슴 아픈 편지에서 그녀는 둘이 함께  보냈던 행복한 순간을 떠올리며 그
러한 시간을 영원히 기억할 거라는 것 과 불행한 그의 모습을  지켜보느니 
차라리 그녀 자신이 평생  고통받는 게 낫다고  썼다. 진실된 마음에서 이
처럼 고결한 편지를  쓰긴 했지만 직접 고백은 안 했어도,  자신의 너그러
움에 감동한 오디세우스가 그녀를 향한 사랑을 다시 느끼게 되기를 은밀히 
기대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런 종류의 편지는  정작 받아 읽는 사람보
다는 쓰는 사람이 더 감동적이 되버리는  경우가 많다. 오디세우스는 편지
를 무심히 읽어보고는 그만이었다. 칼립소는 자신의 은밀한 희망이 부질없
다는 것과 연인을 붙잡기는커녕 스스로의 고통을 달래야  한다는 걸  깨달
았다. 그리고 떠날 준비에 박차를 가하며 어서  빨리 떠나버리려고 성급하
게 울면서 이젠 아예 후회하는 표정조차 가장하지 않는 오디세우스를 보자 
갑자기 한가득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복수하겠다는 일념밖에 없었
다.  이틀 후 뗏목이  완성되고 얼마간의 양식을 배에  옮긴 오디세우스는 
칼립소에게 서둘러 작별을 고하고 떠나버렸다.  잠시 후 칼립소는  포세이
돈을 만나기 위해 올림포스를 향해 날아 갔다.

    11 오디세우스의 긴 모험을 끝내준 나우시카
    폭풍
  17일 간 불어댄 순풍은 오디세우스를 무사히  목적지로 향하게 했다. 계
산대로라면 3,4일 후 이타케에 도착할 것이었다. 그 순간  올림포스에 올라
간 칼립소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고 있던  포세이돈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
침내 포세이돈이 돌아왔고 칼립소는 오디세우스가 떠나버린 일에  대해 자
초지종을 알려주었다.
  "당신은 오디세우스의 귀환에 반대하는 입장이니 1분이라도 지체해선 안
돼요."제우스에게 의뢰할 시간도 없이 포세이돈은   황급히 올림포스를 떠
나 오디세우스의  위치를 찾아내어 삼지창으로 바다를  후려쳐 거대한 폭
풍을  일으켰다. 오디세우스의  뗏목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돛이 날아가
버렸고 키도 잃고 말았다. 엄청난 파도에 휩쓸리자 뗏목을  연결했던 나무
들이 분해되었다. 나무토막 사이에 압사될까  두려워진 오디세우스는 옷을 
벗어 던지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거대한 물살이 뗏목을 전복시키려는 순간  
멀리서 섬의 윤곽이 드러났다. 그는 헤엄쳐서 섬을 향해  갔다. 오디세우스
는 수없이 여러 번 싸움을 포기할 지경에 이르렀고, 그대로 바닷물에 떠내
려가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이타케에  대한 추억과 자신을 기
다리고 있을 가족을 생각하며 기운을 차렸다. 이렇게 이틀 낮과 밤을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쉬지도 않은 채 헤엄쳐갔다. 3일째  아침의 여명이 밝아왔
고 뗏목에 매달린 오디세우스는 아주 가까이에서  섬의 해안을 보았다. 해
안에는 바위가  몹시 많았고 거센 파도가 쉴새없이 부서지곤 했다. 오디세
우스는 우선 가장 가까운  곳으로 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바위에 부딪히고 말 거라는 걸 곧 깨달았다.  그리하여  극도로 탈진한 상
태였음에도 해안을 따라 섬을 한 바퀴 돌아 가장 안전한  지점에 내리기로 
했다. 거의 하루 종일이 걸려 그는 마침내 강어귀쯤에 모래로 이루어진 작
은 포구를   발견할 수 있었다. 헐벗고 굶주린  채 추위에 덜덜 떨면서 힘
겹게 다리를 이끌며 물 속에서 기어 나왔을  때 날은 이미 어두워졌다. 그
는 잠시 모래사장에 길게 누웠다가 마지막 힘을  다해 몸을 일으켰다.  이
렇게 무방비 상태로 해변에 누워  있다가는 밤사이에 폐렴에 걸려  죽거나 
맹수들에게  잡아먹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던 것이다. 절뚝거리
면서 그는 가까운 숲가로 몇 발자국을 걸어갔다. 그리고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마른 나뭇잎들을 그러모아 두툼하게 깔고는 그 위에 몸을 눕혔다. 그
리고는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나우시카와의 만남
  오디세우스가 내린 섬은 파이아케스족이 사는  곳이었다.  이 종족은 해
상  능력과 민첩한 발걸음으로 유명했다. 그들의 왕은  알키노스였다. 오디
세우스가 도착한 다음날은  알키노스 궁전의 주간  세탁일이었다. 그 일의 
책임자는 왕의 딸인 나우시카였다. 그녀는 매주 한 번씩 집안의 더러운 옷
가지들을 2마리 나귀가 끄는 수레에 담아 12명의 젊은  하녀들을 대동하고 
오디세우스가 잠든 해안 바로 옆의 강으로 빨래를  하러  가곤 했다. 아침
나절 내내 젊은 처녀들은 즐겁게 떠들어대며 옷을 빨아 헹구고  짜서는 널
었다.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오디세우스는 그녀들의  웃음  소리에도 깨지 
않았다. 빨래가 끝나자  나우시카와 하녀들은 간단한 점심을 했다.  그리고
는 빨래가 마르기를 기다리며  공놀이를 하기 시작했다. 한  처녀가  공을 
너무 멀리 던져 숲속으로  들어가버렸고 나무에 부딪히더니  오디세우스의 
코  앞으로 떨어졌다. 놀래서 잠이 깬 오디세우스가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한 무리의 처녀들이 즐겁게 다가오고 있는게 보였다. 튀듯이  일어나 그녀
들을 향해 가려던 순간  그는 자기가 벌거벗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
서 맨 처음 손에  닿은 아무 물건이나 집어서 몸을 가렸는데, 그것은 공이
었다 포도 잎사귀인 양 공으로 앞을 가리고서  그는  숲에서 나왔다. 무조
건적으로 오디세우스를 찬미하던 여자들도 그날의 그의 모습을 보았더라면 
과히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바닷물에 젖어  이마에  찰싹 
달라붙은 머리칼, 소금기로  충혈된 눈, 텁수룩한 수염, 여기저기 부어오른 
몸, 게다가 예의를 갖추느라 어쩔 수 없이 취해야 했던 우스꽝스런 자세는 
동정심이나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기에  꼭 알맞은 모습이었다.  나우시카의 
하녀들이 느꼈던 감정은 바로 혐오감이었다. 덥수룩한 남자가 그들을 향해 
오는 걸 보자 하녀들은 놀란 참새떼처럼 도망쳐버렸다. 나우시타만이 호기
심에 고무된 듯 냉정함을 지키며 단호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오디세우스를 
기다렸다. 그녀에게 처음  건넸던 말도 웅변가  오디세우스의 빛나는 경력
에 비춰볼  때 그다지 훌륭하지 못했다. 사실 상황이 좋지 않기도 했다. 혀
는 굳어  있었고 목소리는 갈라지고 잠이 덜 깬 머리는 무디기만 했다. 오
른손으로 공을 잡고 있어야 했기 때문에, 평소  하듯이 오른손의   도움을 
받아 웅변적인 효과를 자아내며, 자신이 공공연한 외설죄를 범한 것이  아
니라는 걸 강조할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나우시카의  기분을 좋게 할 적
절한  말을 찾아낼 줄은 알았다. 그는 우선 그녀의 아름다움을 칭찬했다.
  "당신은 여신이오? 아니면 평범한 인간이오? 만일 여신이라면  숲을  사
랑하는 여신  아르테미스가 틀림없고. 인간이라면 당신  남편될 사람은 정
말이지 행복할 거요."그리고는 자신이 누군가는 밝히지 않은 채, 어떻게 난
파를 당해 생명을 건질 수 있었는가를  간단하게 얘기했다. 마지막으로 처
녀의 자비로운 도움을 요청했다. 나우시카는 그를  동정했고 겁에 질린 하
녀들을 불러모아 꾸짖었다. 그리고 오디세우스에게  비누를  주어 씻게 하
고 알키노스의 속옷 한 벌을 입히라고 명령했다. 반시간 후, 몸을  씻고 머
리를 빗고 향수를  뿌린 다음 옷을 제대로 갖춰 입고 나타난 오디세우스는 
전혀  다른 남자가 되었다. 목욕을 마치고 다시 나타난 그에게 나우시카는 
단순한 동정심만은 아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저런 사람을  남편감으로 
소개해준다면 결코  거절하지 않을거야'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빨래들도    
말랐고 궁으로 돌아갈 시간도 되어 그녀는 오디세우스에게  자기를 따라오
라고 했다.
  "사람들이 수군거릴 테니 우리가   함께  가는 건 좋지  않아요. 그러니  
내 뒤에서 얼만큼 떨어져 따라오세요. 그리고  제 아버지인  알키노스왕의 
궁에 도착하면 당신이  직접 자신을 소개하세요. 아니 차라리 왕비인 저희 
어머니 아레테를 만나는 게  더 낫겠네요. 우리  집에서  모든일을 결정하
는 건 어머니니까요. 그녀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부탁하세요. 어머니는  
분명 당신의 청을 거절하진 않을 거예요."
오디세우스는 나우시카의 지시를 따랐다. 왕궁의  거실로 들어서자 나무가 
타고  있는 난로 앞에 앉아  있는 알키노스와  아레테가 보였다. 그는  그 
모습을 보고 놀랬다. 칼립소의 섬에 머무르는  동안 오디세우스는 계절 감
각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지금이  겨울이구나. 그래서  물에서 나왔을 
때 그렇게 추웠구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나우시카의  예상대로 오디세우
스는 아레테의 호감을 샀고 결과적으로 알키로스에게도 좋게 보였다. 그가 
겪은 시련에 대한 짤막한 얘기에  감동한 그들은 그를 친절하게  맞이하며 
저녁을 같이 들자고 했다.
 "걱정과 슬픔이 태산 같지만 거절할  수가 없네요.  고통으로  짖눌려 있
을 때도 배고픈 것만을 생각하게 하는 저주스런 뱃속처럼 기가 막힌  일이 
없어요."저녁 식탁에는 10명 정도의  사람이 있었다. 오디세우스의  옆자리
에 앉은 나우시카는 사흘 전부터 굶었던  그가 많은 음식을 먹는 걸  보고 
즐거워했다. 당시에는 손님을 초대하면 그의 신분이나   과거에 대해 물어
보지 않는 게 예의였다. 오디세우스로서는  차라리 자신을 밝히지 않는 걸 
좋아했기에 그저  긴 여행을  했으며 많은 시련을  겪었다고만  얘기했다. 
식사가 끝나자 모인 사람들의 여흥을 위해 알키노스가  음영시인을 불러들
였다. 음영시인들은 중세 프랑스의 음유시인들처럼  칠현금에 맞추어 자신
들이  작곡한 서사시를 노래하는 사람들이었다. 그  날 알키노스의 음영시
인이 선택한 시는 트로이 전쟁의 중요한  사건을 읊은 것이었다. 오디세우
스는 감정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간혹 사람들은   그가 어떠한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냉혈한이라고 말하기조차 했다.  하지만 그가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는 2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잘  알려진 대로 음악에  대해
서였고, 다른 하나는 젊은 시절의 추억에  대한  것인데 그것은 언제나 오
디세우스에게 가슴 저미는 향수를 불러일으키곤 했다. 게다가 지난 며칠간
의  피곤과 방금 전의 푸짐한 식사로 한껏 긴장이 풀려 있는 상태를  감안
한다면 오디세우스가 빠져든 심오한 혼란을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으리
라. 시인은 오디세우스 자신의  무훈과 사라진 동료들의  추억을 회상하고 
있었다. 시인의 노래가  트로이의 목마에 대한 일화에  이르자 그는 더 이
상 자신의  감정을 억제할 수 없었다. 지난 20년   간 한번도 냉정을 잃지 
않았던 그 남자, 아킬레우스  같은 영웅도 때로는  눈물과 분노와  슬픔을 
쏟아내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았는데도 언제나 눈물 한 방을 흘리지  않았
던  그 남자. 이피게네이아를  희생하라고 강요하고, 필로크테테스를 섬에 
저버리고,  팔라메데스를 사형시키고, 필로스로 하여금 어린  아스티아낙스
를 죽이도록 교사하면서까지 모진 성격을 드러내던  그 남자, 그리하여 교
활하고 음험하며 잔인하고 냉혈하고 혹독하다는 평을 받기도 하는 그 오디
세우스의 목이 마침내  메어왔던 것이다.  두 눈에 눈물이  솟구쳐 올랐고   
황급히 옷자락 속에 얼굴을  가렸다. 그는 울고 있었다.  오디세우스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나우시카는 그의 동요를  알아챘다. 그녀는 구릿빛 
도는 거친 그의 팔에 부드러운 자신의 손을 가만히 올려놓았다.
  "지나간 불행 때문에 새로운 눈물을 흘려선 안 돼요."오디세우스는 나우
시카에게 미소 지으며 눈물을 닦았다. 그는  자기처럼 시련에 달궈진 노련
한 군인이, 인생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젊은  여자의 입을 통해 나온 지
혜로운 교훈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며 감탄했다. 알키노스 역
시 오디세우스의 감정을 눈치챘다.  그는 음영시인의 노래를   중단시키고 
참석자들도 그만 물러가도록 했다.
  "손님이 피곤할 거요. 내일 그를  환영하기 위한 운동  경기를 벌일테니,  
그때까지는 그를 좀 쉬게 합시다."
그날 저녁 오디세우스는 실로 오랜만에 폭신한 침대 위에서 깨끗한 모포를 
덮고 잠을 잘 수 있었다.

    이국에서의 마차
  경주 다음날 아침, 파이아케스의 뛰어난 선수들은 왕실 가족과 오디세우
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포환던지기,  원반던지기, 투창던지기, 씨름,  높이뛰
기, 육상 등 여러 가지 운동 경기를 벌였다. 시합이 끝나고  선수들이 점심
을 먹으러 가자 왕의  아들인 라오다마스가 오디세우스에게  경기에 참여
해보고 싶지 않냐고 물었다.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나이와 훈련 부족 그리
고 피곤을 이유로 들어 처음엔 그러한 권유를  사양했다. 한데  젊은 그룹 
중 한 사람이며 여러 경기를 석권했던 에우리알로스라는 자가 무례한 태도
로 오디세우스를 조롱했다.
  "튼튼한 넙적다리와 넓은 어깨, 게다가  근육질의 팔을 가졌음에도 당신
은 입만 살아 있는 사람 같군요. 입씨름  대회에서는 분명 우승자가 될 거
요."
  "모든 걸 다 가질 수 없으니 어쩌겠나. 마찬가지로  자네는 잘생긴 용모
와 힘을 가졌지만 기지라곤 전혀 없지 않은가. 하지만 도전을 해왔으니 받
아들이겠네, 오늘 오후 자네가  선택한  경기에서 한번 붙어보세.  그런데 
내 나이로선 너무 불리한 경기인 육상만은 제외하도록 하세."
에우리알로스는 마차 경주를 선택했다. 점심식사를 하면서  나우시카는 마
차 경기는 에우리알로스의 특기이며 그가  아주 가벼운 흰 마차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오디세우스에게 가르쳐주었다. 에우리알로스가 그 분야에서
는 너무도 월등해서 오래전부터 누구도 감히 그를 대적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차 경기에 뛰어나지 못했던  오디세우스는  난처한 일에 빠졌다
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점심식사후, 모두들 낮잠을 자러 간 사이에 마차
들을  정렬해놓은 창고를 찾아갔다. 에우리알로스의 마차는  쉽게 눈에 띄
었다. 그는  마차의 오른쪽 바퀴를 고정시킨 청동  핀을 밀랍 막대기로 바
꾸어놓았다. 그런  다음  자신도 약간의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4시쯤 되자 
수많은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차 경주가 시작되었다.  시합은 회칠로 
표시된 트랙 10바퀴를 도는 것이었다. 출발 초부터 에우리알로스가 앞서가
기 시작했고 곧 이어 오디세우스를 무려 한 바퀴나 앞질러 달려갔다. 오디
세우스는 그러한 사실에 그다지 동요되지 않은 듯 신중하게 경주를 계속했
다. 에우리알로스가  트랙을 다섯 바퀴째 돌았을 때 오른쪽 바퀴를 지탱하
던 밀랍이 햇빛과 마찰에  달구어져 녹아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바퀴가 
떨어져 나가고 마차가  뒤집히면서 에우리알로스는  먼지 속에  곤두박질 
쳤다. 침착하게 10바퀴를 다 돌아온 오디세우스는 승자가 되었다. 알키노스
의 궁전에 이틀을 머무는 동안 오디세우스가 보여준 태도 는  주인의 호기
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리하여 마차 경주를 마치 고 저녁식사를 하
게 되었을 때, 알키노스는   궁금하기 짝이 없던 질문을  손님에게 던져도 
이제는 예의에 어긋나지 않으리라 판단했다.
  "외모나 태도 등을 미루어보건대 당신은  예사  인물이 아니오. 당신 삶
의 내력은 분명 흥미로울 것 같소. 우리에게 그 얘길 좀 해주시겠소?"잠시 
주저하더니 오디세우스가 말했다.
  "원하신다면 궁금증을 풀어드리지요."
오디세우스는 식탁을 둘러싼 침묵 속에서, 청중의 강렬한 감동을 불러일으
키는 유창하고 자신감 넘치는 언변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라에르테스 왕의 아들 오디세우스입니다 타고난 기지로   모든 이
들의 관심을  끌었고 저의 영광은 하늘까지 미치어..."
오디세우스의 얘기가 끝났을 때는  이미  밤이 깊어 있었다.  이야기는 단  
한 번도 중단되지 않았고, 오디세우스가 가장  혹독했던 시련을 얘기할 때
마다 나우시카의  눈은 몇 번이고 눈물에 젖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알
키노스는 오디세우스에게 감사했다.
  "당신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우리에게 크나큰 영광이고 기쁨이오. 하지
만 당신은 서둘러 조국으로 돌아가야 하오. 내일 당장 우리의 가장 훌륭한 
선박과 선원들을 내어주겠소.  그들과 함께라면 단  몇 시간안에 이타케에 
도착할 거요."
오디세우스는 관대한 제안을 수락했다. 그래서 다음날 저녁 환송연이 베풀
어진 후 이타케로 출발하기로 했다.

    오이세우스의 출발
  다음날, 파이아케스의 모든 귀족들은 오디세우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
해 알키노스의 궁전에 모여들었다. 만찬은 장시간에 걸쳐 풍요롭고 즐거운 
분위기로 이어졌다. 만찬이 끝났을 때 마차 경기에서 오디세우스의 불운한 
적수였던 에우리알로스가 한마디하겠다고 나섰다.
  "저는 당신에게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습니다. 저의 사죄를 받아주
십시오."그리고는 은 손잡이가 달린   멋진 청동 단검을   오디세우스에게 
내밀었다.  그의 뒤를 이어 모든  참석자들이 차례로  오디세우스에게  선
물을 주었다. 나우시카의 선물은  상아로 조각된 거울이었다.
  "정말이지 당신은 늘 내 얼굴 단장에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군요."오디세
우스는 웃으며 말했다. 갖가지 선물을 커다란  궤짝에  넣은  후 오디세우
스는 키르케가 가르쳐준 비밀 매듭으로  궤짝을  봉했다. 오디세우스가 마
침내 작별을 고했을 때는  어둠이 깃들였다. 그는  1명의 항해사와 52명의 
사공이 기다리는 배에 올랐다. 온화한 날씨로  잔잔해진 바다를 타고 배는 
항구를  벗어났다. 갑판에는 오디세우스를 위한  모포가  준비되어 있었고 
그는 그 위에 몸을 눕혔다. 20년 간의 부재 뒤에 마침내 그는 머지않아 조
국을 되찾게 될 것이다. 이 장엄한 순간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자신의 무훈과 모험 그리고  고난을 추억하고 있을까? 이타케에  도착했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을  일들, 그를 맞아들일 아내의 모습, 몰라보게  자랐
을 아들을 생각하고 있을까? 아니다. 그의 마음은 지난날의 시련이나 다가
올 근심에 사로잡혀 있지 않았다.  길게 몸을 눕히고 노 젖는 대로 흔들려
대는 배에 몸을 맡긴 채 별들이 반짝이는 캄캄한 하늘을  바라보며 오디세
우스는 나우시카를 생각하고 있었다.

    12 돌아온 오디세우스
    마침내 고국으로
  배가 이타케의 외진 해변에  다가섰을 때는 아직 날이   밝기 전이었다. 
공교롭게도 오디세우스는 그곳에 도착하기  반시간 전에 잠이  들어 버렸
다. 그를  깨우기가  조심스러웠던 선원들은   모포에 쌓인 오디세우스를   
그대로 들어 옮겨 올리브나무 곁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  옆에 파이아
케스족의 선물이 담긴 궤짝을  내려놓고 다시 배를 몰아 급히 떠나버렸다. 
새벽의 첫 햇살에 오디네우스는  잠이  깨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전에 한번도 이 후미진 해안을 찾았던 적이  없던 탓인지. 혹은 20년 사
이에 풍경이 변했던지, 아니면  해변을 가득 덮고  있는 짙은 안개 탓이었
는지, 그는 도무지 아무것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이런! 시련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단 말인가? 이 망할 선원들이 아무 섬
에나 날 내려놓고 도망쳐버렸나 보군."
그런 처량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자기를  향해 걸어오는 양치기   하나가 
보였다. 그는 인사를 하고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다.
  "당신, 하늘에서 떨어졌소?  여기가 이타케 땅인  것도 모르오?"바로 그 
순간 안개가 걷히고 섬 안쪽에 낯익은 이타케  구릉의 윤곽이 눈에 들어왔
다. 그는 너무도 기뻤다.
  "당신은 어디서 온 누구요?"
마짐내 양치기가 물었다. 아가멤논의 경험에서 배운 바 있었던 오디세우스
는 성급히 자신을 드러내지도, 자신의 귀환을 알리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
래서 자신을 외국의 상인으로 소개하며 어처구니없는 얘기를  꾸며대어 해
변에 있게 된 정황을 설명했다. 양치기는  조금은 의심스러운 미소를 띠며 
그의 얘기를 들었다. 오디세우스는 지나가는  사람의  손길을 탈까 걱정되
는 궤짝을 가까운 동굴로 옮겨달라고  양치기에게  부탁했다. 궤짝은 무거
웠고  경사는 가파랐다. 오디세우스는 힘이 들어 땀을 흘렸다.
  "당신은 보기보다 힘이 좋군요. 이마에 땀 한  방울 안 흐르다니!"오디세
우스가 양치기에게 말했다.
  "젊어서 그런 걸 어쩌겠소."
양치기는 조금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궤짝을 다  옮기자 해가 벌써 중천에 
있었다.
  "지금이 몇 시나 됐을까?"
오디세우스가 묻자, 양치기는 하늘을 바라보더니 11시라고 대답했다.
  "이상하군요, 햇빛에 눈살을 찌푸리지도 않다니."
라고 오디세우스가 한마디했다.
  "난 눈이 좋아요. 젊음의 특권이지요."
양치기가 대답했다.
  "땅에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는 것도  젊음의 특권인가요?"라고 오디세우
스가 또 한 번 물었다. 신이 인간으로 변신했을 때 드러나는 3가지 특징을 
알아챈 오디세우스는 자기가 신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짐작했다. 가짜 양
치기는 부인하지 않았다.
  "정말이지 오디세우스를 속일 수 있는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군! 나
는 아테나이고 내 도움으로 네가 이타케까지 돌아온 줄이나  알아라. 하지
만  더 이상은 너를 도울   수 없다. 더 도와줬다가는 포세이돈이  다시금 
너를 해하려 끼여들거나 제우스의 질책이 있을지  모르거든 내가 할 수 있
는 유일한 충고는 도시로 곧장 가지  말고 옛날에 돼지 치는  하인이었던 
에우마이오스를 찾아가 상황에 대한 정보를 먼저   얻어내라는 것이다. 그
는 아직도 너를 기억하는 충실한 하인들 중의 하나이다."
이 말을 마치자 아테나는 사라졌다. 오디세우스는 여신의 충고를 따르기로 
했다. 하지만  에우마이오스에게도 너무  일찍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게 
신중할  거라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그는 애써  늙은 거렁뱅이  모습으로 
변장했다. 머리를 밀고 얼굴과 몸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옷을 찢어 두더기
로 만들었다. 또한  이타케를 떠날 때부터 길러온  수염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게 할 것이고, 20년 간의 시련이 그의 얼굴에  새겨놓은 어찌할 수 없
는 풍화의 모습에 의지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에우마이오스의 오두막
  오디세우스가 배에서 내린 해변과  에우마이오스의 오두막이 있는  구릉 
사이는 꽤 먼 거리였다. 그곳을 찾다가는 데  오후 한나절이 다 걸렸고 밤
이 되서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에우마이오스의 집에 거의 다 왔을 
때, 거지를 좋아하지 않는 듯한 4마리의 개가 무섭게 짖어대며 달려들었다. 
개소리를 듣고 나온  에우마이오스가 말리지 않았더라면 오디세우스의  몸
은 개들에 의해 갈가리 찢겼을 것이다. 그는  오디세우스를 오두막으로 들
어오게 하고는 식사를 나눠주었다.  식사를 하면서  오디세우스는  자신이 
많은 여행을 하고  수많은 불행을 겪었으며 이제는 방랑 생활을 하고  있
다고 소개했다.
  "저는 방금 도착했기 때문에 이  나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어요. 이 나라의 왕은 누구요? 그는  나 같은 사람을 잘 받아줍니까?"라
고 오디세우스가 물었다.
  "참으로 유감이오! 이 나라의 왕은 내게는  가장  훌륭한 왕이자 주인이
었어요. 한데 그는 20년 전 나라를 떠나서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어요."  
"그의 이름이 뭔데요?"
  "오디세우스라고, 라에르테스의 아들이지요."
  "아, 그렇다면 당신의 주인은 아직 죽지 않았어요. 여행  중에 알게된 일
인데, 그가 칼립소라는 요정에게 붙잡혀 있다는  얘기를 아주 최근에 들었
다오. 문명코 그는 곧 돌아을 거요."  "내 기분을 맞추느라  그런  말을 하
는군요. 그런 얘길  한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  아니고, 더 이상 믿지도 않
아요."
  "내 얘기를 믿지 못하나 본데,  명예를 걸겠소. 물론 별볼일   없는 것이
긴 하지만 말예요. 
한데 정말이지 자신이 있어 하는 얘기니, 우리 내기를 합시다. 만일 오디세
우스가 3일  안에 돌아오면  당신이 내게 외투를 하나  주는 거요. 이처럼 
춥고 비가 오는 날씨에는 아주 유용할 것 같거든요.  반대로 내가 지면 한 
달 동안 무료로 당신을 위해 일을  해주리다."에우마이오스는 내기를 거절
했고 손님에게 조르지   말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나서   오디세우스의 청
에 따라 20년 전 이래 이라케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에 대한 기나긴 이야기
를 들려주었다.

    에우마이오스의 이야기
  "우리 주인이 트로이 전쟁에 떠난 후 10년 간은 가끔씩  그의 소식과 무
훈들을 전해 들었지요. 특히 그가 고안해낸  트로이의 목마 덕분에 그리스
인들이  승리했다는 얘기를 듣고 이 전쟁에서 그가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
을 했는가도 알았어요. 하지만 다른 왕들과 함께  트로이를 떠난 이후로는 
그에 대한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어요. 처음에 왕국에는 아무 변화도 없
었지요. 오디세우스의 부친 라에르테스는 아들이 트로이로 떠난 이후 권력
을 다시 잡았고 연로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존경을  받았지요. 그런데 3년  
전쯤에 오디세우스의 모친 안티클레이아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어요. 라에
르테스는 그  일로 상심하여 왕권에서  물러났어요.  시골의 작은 집에 은
거해버린 그는 여전히 살아 있긴 하지만 정원   돌보는 일만 하고 있지요. 
그때부터 일이 나쁘게 돌아갔어요.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는  너무 
어려 섭정 정치를 잘 해나가지 못했어요.  권력에 빈자리가 생기고 오디세
우스가 죽었다는 소문이 집요하게 나돌자 인근 섬나라의 제후들과  이타케
의  귀족들이 페넬로페와 결혼할 희망을  가지고 오디세우스의 궁으로 와 
자리를 잡았어요. 그렇게 해서 왕권과 부를 차지하겠다는 속셈이었지요. 오
디세우스를 다시 볼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페넬로페는 시간을 벌기 
위해 남편 못지않은 기지를 발휘했어요. 재혼  상대자를 선택하기 전에 시
아버지인 라에르테스의 수의를 손수 짜고 싶다고 구혼자들에게  알렸던 거
예요. 구혼자들은  그러한 계획이  정당한 사유라고 판단했고  페넬로페는  
일을 시작했지요. 매일매일 그녀는 궁전의  거실에서 오랜 시간 동안 열심
히 옷을 짰어요. 그런데 그녀의 편물이 좀처럼 진척되지 않자 모두들 놀랬
지요. 그 이유는 매일 밤  페넬로페가 몰래 자기 방을 빠져  나와 낮 동안 
짰던 옷을 모두 풀어버렸기  때문이었어요. 그렇게 해서  3년이란  세윌을  
버틸 수 있었는데 어느 날  그녀의 하녀가  그 사실을 폭로해버렸어요. 그
게 약 3개월 전의 일이지요.  그날 이래 구혼자들은 더  이상 편물 얘기는 
들으려 하지도 않았고 페넬로페에게 자신들 중 하나와 빨리 결혼하라고 점
점 거센 압력을 가했어요. 그들은 그녀를 압박하기 위해 아예 궁을 떠나지 
않았고, 매일  밤 궁전에서 거나한 향연을 열어 오디세우스의 가축을 잡아
먹고 술을 마시면서 재산을 약탈했어요. 
그들의 숫자는 계속 늘어나 현재 108명에 이르고 있어요. 한 달 전쯤 페넬
로페는 마침내 그들의 강요에 굴복한  것 같아요. 조만간  재혼 상대를 선
택하겠다고 발표했거든요. 그 이래 이타케 사람들은 서로들 내기를 했어요.  
구혼자들 중에서 가장 잘생긴  안티노오스와 가장 부자인  에우리마코스가 
유력하다는게 일반적인 생각이었지요. 하지만  경쟁자 수가  워낙 많다 보
니 두 사람의 평점도 그다지 높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페넬
로페는 새로운 유예를 얻어냈어요. 스무 살에 접어든 텔레마코스가 마지막
으로 부친의 운명을 알아보기로 했던 거예요. 그는 구혼자들에게는 알리지
도 않은 채 배를 하나 세내어 오디세우스와 절친한  친구였던  네스토르의 
왕국 필로스를 향해 한 달 전에  떠났어요.  떠나기 전에 텔레마코스는 자
신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재혼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페넬로페로부터 받아
냈어요. 모두들 이제나저제나 그를  기다리고 있어요.  텔레마코스가 몰래 
떠나버린 사실에  화가 난  구혼자들은 그가 도착하는 즉시 궁전으로 잡아
들이려고 항구에 부하들을 매복시켜왔다는 얘기도 있어요."
오디세우스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에우마이오스의 긴  이야기를  말
없이 듣고 있었다. 밤은 벌써 깊었고 불빛조차 꺼져들어갔다.
  "이제 그만 자도록 합시다. 추울 테니 내 외투를 걸치고 자도록 하시오."
라고 에우마이오스는 말했다. 텔레마코스의 귀환  에우마이오크가 집을 떠
나게 된 텔레마코스 얘기를  하고 있을 때, 마침 그는 집으로 돌아오고 있
는 중이었다. 구혼자들이 자기를 해하지 않을까 걱정한 텔레마코스는 이타
케의 중심 항구로  직접 돌아오지 않고, 밤을 이용해 외진 작은 해변에 내
렸다. 그리고 몇 시간   전에 오디세우스가 그랬듯이 궁으로  직접 가기에  
앞서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자신이 믿고 있던 하인인 에우마이오스를  먼
저 만나기로  했다. 밤새도록 걸어 오두막 앞에 도착했을 때, 에우마이오스
와 오디세우스는 아침을 들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젊은이가 들어섰다.
  "텔레마코스!"
에우마이오스는 두 팔로 반기며 외쳤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오디세
우스는 텔레마코스에게 자리를 내주기 위해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냥 앉아 계십시오. 다른 의자가 있을 거예요."
하면서 텔레마코스는 깍듯하게 말했다. 에우마이오스가  간단하게  서로를 
소개했고 세 남자는 함께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친 텔레마코스는 자신의 
여행 얘기를 했다.

    텔레마코스의 이야기
  꼭 한달 전 이타케를 떠난후, 저는 우선 예정대로 필로스의 노왕 네스토
르를  찾아갔어요. 제가 누구인 줄 알자 그는 궁전으로 절 초대했어요.  거
기서  사흘을 머무는 동안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추억을 얘기해주었어요. 
입이 마르도록 아버지 칭찬을 하면서 제가 몰랐던 아버지의 무훈들을 자세
하게 들려주었지요. 하지만 불행하게도  트로이를 떠난  후의 아버지에 대
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었어요. 기껏해야  메넬라오스를 찾아가보라
는 충고를 해줄 뿐이었죠. 메넬라오스는 트로이에서  돌아오는 데 가장 많
은 시간이 걸렸던 그리스 왕이니까 그  긴 귀환길에서 아마  오디세우스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죠.  그래서 전 네스토르를 떠났어
요. 하지만 며칠간 함께 시간을 보내고 나자 절 친구처럼 여긴 네스토르가 
더 머물다 가기를 바라는  통에 떠나는 일이 몹시 어려웠어요.  궁전 문턱
을 넘어서고 있는데도 계속해서 얘기를 할  정도였다니까요.  필로스를 떠
난 저는  메넬라오스의 왕국 스파르타로 향했어요. 처음엔 신분을  밝히지 
않은 채 그를 만났어요. 그런데도 친절히 맞아주더군요. 저녁식사  도중 그  
역시 트로이 전쟁을 회상하더군요. 아버지가 지대한 역할을 했다는 얘기였
지요. 그는 아버지를 '가장 위대한 영웅' 이라고  단정짓기까지 했어요. 말
없이 듣고 있으려 했지만 감정을 감추는 일이  몹시  힘들었어요. 그때 메
넬타오스의 아내 헬레네가 들어왔지요.  그녀는 아버지를 닳은  제 얼굴을 
보고는 깜짝 놀라면서 절 알아봤어요.
  "오디세우스가 그토록 자주 얘기하던 아들 텔레마코스가 틀림없어."저는 
그렇다고 시인했고 그녀는 절 따뜻하게 안아주면서 말했어요.
  "오디세우스는 그리스의 왕들  중에서 저의 가장   좋은 친구였지요. 어
느 날 밤에 트로이에서 우연히 만나 그의  생명을 구해줄  수 있었던 일을  
전 아직도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그는 디오메데스와  함께 트로이를 정탐
하러 들어왔다가 길을 잃었지요. 오디세우스는 뛰어난 여러 자질을 가졌지
만 방향 감각만큼은 별로거든요. 아마도 그래서 자기  나라로 돌아가는 데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리고 있는 걸 거예요."
그러자 모인 사람들이 돌아가며 자신의 추억을 회상했고 곧  이어  감정이 
고조되었죠. 나이 든 군인들은 죽은 동료들을 생각하며 눈물  흘렸고, 메넬
라오스는  자기 형 아가멤논을 생각하며 눈물  지었고,  헬레네 역시 눈물
을  흘렸어요. 하지만 그녀는 누굴 생각하며 울었을까요?  파리스? 데이포
베? 헥토르? 아니면 자신의 잘못으로  죽어간 모든 이들을 위해  울었을까
요?그때 텔레마코스의 얘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오디세우스가 끼여들었다.
  "헬레네가 울었던 건 파리스나  데이포베나 헥토르  혹은 전쟁의 그  어
떤 희생자 때문도 아닐 걸세. 그녀는 자신의 지나간 젊은 날을 생각하면서 
눈물 흘렸을 걸세."그러한 말에 대꾸하지 않은 채 계속된 텔레마코스의 이
야기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헬레네와 메넬라오스도 오디세우스의 운명
에 대해선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었다. 메넬라오스의 궁전에서 며칠을 머
문 텔레마코스는 아무 성과도 없이 돌아와야 했다.

    아버지와 아들의 해후
  이야기가 끝나자 텔레마코스는 에우마이오스를 시켜 궁으로 가서 페넬로
페에게 자신의 귀환을 알리라고 했다.
  "여기서 잠시 머문 뒤 궁으로   가서 저녁을 먹겠다고 전해주게나."에우
마이오스가 떠나자 오디세우스는 텔레마코스와 단둘이 되었다.
  "이제 어떻게 할 셈인가?"
오디세우스가 그에게 물었다.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요. 아버지는 아마도   오래 전에 돌아가신 게 분
명 해요."
텔레마코스는 슬프게 대답했다. 오디세우스는 더 이상  참고 있을 수가 없
었다.
  "그렇지 않아. 자네 부친은 살아 있네. 그는 지금 이타케에   있을 뿐 아
니라, 진실을 말하자면 바로 자네 앞에 있다네!"
텔레마코스는 처음에는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디세우스가 
이타케의 궁전이며 가족에 대해서, 그리고 전쟁이  벌어지던 10년 간 그에
게 보냈던 편지의 내용, 다른 누구도 알  수 없는 자세한 사실을 얘기하자 
그제서야 그 말이 사실임을 알게 되었다.  텔레마코스는 기쁨의 눈물을 흘
리며 아버지를 얼싸안았다.  이번에는 텔레마코스가 아버지에게 물었다.
  "그래 이제 어떻게 하실 참이세요?"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 우선  너는 궁으로 돌아가서 내게  상황을 
알려주고 우리가 믿을 만한 하인이 누구인지 알아내도록 해라. 왜냐면 108
명에  대항해서 너와 나 단둘이 싸운다는 건 좀 어렵거든. 오늘 저녁 거지 
행색을 하고 나도 궁으로 갈 테니 그때  네가 알아낸 것을 알려주도록  해
라.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즉 사람들이 네 앞에서 날  욕하고 박해하더
라도 절대로 흥분해서는 안 된다."
텔레마코스는 길을 떠났고 오디세우스도 곧 그의 뒤를 쫓았다.

    거지 행색의 오디세우스
  궁전으로 가는 도중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하인들이며 친척들  그리고 친
구들 여럿과 마주쳤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사실에 만
족했고, 대개는 무관심과 적대감만을 드러내고 있다는 걸 알았다.   염소지
기였던 멜란테우스는 아주 거칠게  대하기까지  했다. 그는  오디세우스의 
더러움과 누더기 옷을 조롱하며 욕을 퍼붓더니 발길질까지 했다.
  '어디 두고 보자.'
오디세우스는 속으로만  생각했을 뿐  즉각적인 반응을  억제했다. 마침내   
그는 궁전 앞에 이르렀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잠시 멈춰섰다. 눈먼 늙은 
개 한  마리가 퇴비 더미 위에서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그것은 오디세
우스가 손수 젖을  먹여가며  키워온 사냥개 아르고스였다.  오디세우스가 
옆으로 다가서자 아르고스는  주인의 냄새를   알아챘다. 개는 눈을  뜨고   
신음했고, 몸을  일으켜 오디세우스에게   다가가려고 두   걸음쯤 힘겹게   
움직이더니 그대로 쓰러져 죽고 말았다. 오디세우스  역시 자신의 개를 알
아봤다.
  "진실로 충직한 건 개뿐이로군."
그는 서글프게 생각했다. 드디어 성문 앞에  다가선  그는  마구간에서 하
룻밤만 재워달라고 보초들에게 아주 겸손하게 부탁했다.
  "너 같은 거렁뱅이한테는 별볼일이 없어."
라고 보초들이 대꾸했다. 그는 어찌할 바를 몰라 저만큼  물러서려고 했다.
그때, 궁 안쪽에서 보초들의 야유 소리를 듣고  있었던 늙은  아낙 하나가 
무슨 일인가 보려고 문을 열었다. 오디세우스는 아낙을 알아보았다. 그녀는 
궁정의 가장 오래된 하녀인  에우리클레야였다 오디세우스의 유모였던  그
녀는 그에게는 어머니나 다름없었다.
  '분명 날 알아볼 거다.'
라고 생각한 오디세우스는 초조해졌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녀는 아르고스 
같은 후각을 갖고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오디세우스를 더러운 거
지 정도로 여기긴 했지만, 그녀는 사람을 대하는  기본 예의는 지킬 줄 알
았다.
  "이렇게 나이 든 사람을 왜 성안에도 못 들어가게 하는 거냐?"
라며 보초들을 나무라고는 오디세우스를 쳐다보며 말했다.
  "겁내지 말고 들어와요.  내가 잠자리를  마련해주리다. 그리고  저녁도   
주고, 우선 그 먼지투성이 다리를 좀 씻겨드리지요."
  "그건 과분합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요."
라고 오디세우스가 막아섰다. 하지만  에우리클레야는  듣지 않았다. 잠시 
후 그녀는  따뜻한 물을 가득 담은 물통을  들고 왔다. 오디세우스는 피할 
수가 없었다. 왼쪽 다리를 닦을  때는 별일이 없었다. 하지만 오른쪽  다리
를  닦을 때 그녀는 오디세우스의 무릎에  난 그  유명한 상처, 어렸을 때 
멧돼지에게 물린 상처를 보고 말았다.  그녀는 즉각 그 상처를 알아보았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충격에 다리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아버렸고,  그바람에 
양동이가 뒤집어지면서 물이 쏟아졌다.
  "조용히 하세요. 특히 페넬로페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오늘 저녁 
모두들  잠이 들거든  텔레마코스와 에우마이오스를 데리고  이리로 오세
요."오디세우스는 낮은 목소리로 일렀다. 에우리클레야는 힘겹게 감동을 억
제했다.

    폭풍 전야
  몇 시간 후, 밤의 적막 가운데   에우마이오스와 텔레마코스와 에우리클
레야가 오디세우스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텔레마코스를 통해 오디세우스
의  정체를 알게 된 에우마이오스는 울면서  주인을 얼싸안았다. 텔레마코
스는 자신이 알아낸 사실을 전해주었다.
  "어머니는 이제 아버지를 다시 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모두  버렸어
요. 그렇지만 어머니에게 사실을 알리지는 않았어요.  내일 어머니는  구혼
자들 중에서  새 남편을 선택하려고 해요. 하지만   어떤 방식을 취할지에 
대해서는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어요."
  "하인들 중에서 믿을 만한 사람은 누구더냐?"
라고 오디세우스가 묻자,
  "에우마이오스 외에는 필로이티오스라는 소몰이꾼밖에 없어요.  그는 아
주 헌신적인 착한 하인이죠."
 "네 사람이 108명에  대항해 싸우려면  치열한  접전이 필요하겠군."하고 
오디세우스가 말했다. 그리고 나서  텔레마코스와 에우마이오스 그리고 에
우리클레야에게 내일  해야 할 행동을 설명했다.

    13 구혼자들의 최후의 향연 
  다음날, 평소와 다름없이 오후 5시가  되자 구혼자들의 향연이 시작되었
다. 에우리클레야는 오디세우스가 시킨 대로, 페넬로페가 그날로 결혼 상대
자를 정할 거라는 소문을 오전 내내 구혼자들 사이에 퍼뜨리고 다녔다. 그
리하여 식사가 시작되자 108명의 구혼자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나타
났다. 왕궁의 거실에는 12개의 식탁이 차려졌고  그 중 11개는 구혼자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현관을 향한 문 쪽에 가장   가까운 열두번째 식탁은 텔
레마코스와 궁전의 중요한 세 하인인 돼지 사육사 에우마이오스, 소몰이꾼 
필로이티오스, 염소지기 멜란테우스를 위해 마련되었다. 그리고  이 식탁에
는 술을 즐기는 늙은 음영시인과  이타케의 거지인 이로스도 함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젊은 나이의  이  거지는 키가 크고  뚱뚱했으며 식탐이 
있는 데다 말씨도 상스러웠다. 그는 천박한  익살   덕분에 구혼자들의 양
해를 얻어 향연에 자주 참석하곤 했다.  거실로 들어선 구혼자들은 이제껏 
거실 선반을 채우고 있던 수십 개의 검과 투창 등 오디세우스의 온갖 무기
들이 사라진 걸 보고 깜짝  놀랐다. 그들은 텔레마코스에게 어찌된 영문인
가를 물었다.
  "무기들이 못 쓰게 돼서 치웠어요. 게다가  여러분이 술을  마시다 혹시 
서로 싸우지나 않을까 걱정도 되고 해서요."

    모욕받는 오디세우스
  전채 요리가 끝난 후 막간을 이용해 음영시인이 첫번째 음악을 들려주고 
있을 때, 거지로 위장한 오디세우스가 거실 문을 살짝 열고 조심스럽게 들
어왔다. 하지만 완벽히 조심스러운 행동은  아니었기에 염소지기 멜란테우
스의 시선에 걸려들었다.
  "아니 이 몹쓸 거지가 또 나타났네!"
라고 염소지기가 소리쳤다. 그리고는 재미 삼아 이로스의 질투심을 자극하
기로 했다.
  "여기 자네 경쟁자가 나타났구먼 자리를  물려주겠나?"이로스는 즉시 오
디세우스에게 거친  욕설을 해대며 나가버리라고  명령했다.
  "우리 두 사람이 앉을 자리가 있는데요 뭐."
라고 오디세우스가 공손히 대답했다. 오디세우스를  대단한 적수로 여기지 
않았던 이로스는 욕설에 뒤이어 협박을 가했다.
  "여기서 물러나지 않으면 밖으로 내던져   네 이빨을 모두 부숴놓겠다."
구혼자들은 재밌어하면서 싸움을 부채질하기로 했다. 두 사람이 난투를 벌
이게 하여 이긴 사람만을 향연에 참석시키겠다고  한 것이다. 그러자 오디
세우스는 겉옷을 벗어버리고 속옷만  걸쳤다. 그의 단단한  넓적다리와 딱 
벌어진 어깨를 보자 이로스는  자신의 허풍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물러서기엔 너무 늦었다 싸움은 간단히 끝났다. 오디세우스가 이로스의 귀
밑으로 주먹을 한 대 날리자 그는 정신을 잃고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그
는 구혼자들이 웃어대는 소리를 들으며  이로스의 발을 잡아 거실  밖으로 
끌어냈다. 오디세우스는  당시의 관습대로  여기저기  식탁을 돌아다니며 
먹다 남은 고기나 빵 찌꺼기를 구걸해야 했다.  맨 처음 찾아간 사람은 잘
생긴 안티노오스였다.
  "모두들 나만큼만 준다면 3년  동안은 네 얼굴을  안  봐도 될 텐데 말
야."라고 빈정거리면서 그는 오디세우스에게 나무  걸상을 던졌고  그것은 
오디세우스의 어깨에 가 닿았다. 오디세우스는  분노를 억제하며 에우리마
코스가 앉아 있는 식탁으로 옮겨갔다.  그는  안티노오스에게 지지 않으려
고 오디세우스의 벗겨진 머리를 빗대어 농담을 했다.
  "머리가 하도 반들거려 마치 램프 같구나!"
그것은 오디세우스가 몹시 민감하게 반응하는 부분이었다 그는 에우리마코
스를 호되게 꾸짖었다.
  "오디세우스가 돌아와 이 자리에   있다면 그렇게 지껄여대지도  못하겠
지. 아니, 현관문으로 빠져 달아나느라 정신도 못 차릴걸!"
기분이 상한 에우리마코스 역시  오디세우스에게  걸상을  내던졌는데, 이
번에는 살짝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술을 마시고 있던 한  하인의 등에 
가서 걸상이 떨어지는 바람에 사람들의 웃음과 비명 속에 하인이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자 암피노모스라는  구혼자가 에우리마코스의  행동이 지나쳤
음을 지적했다. 그는 모두의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중재에 나섰고,  거지를  
그냥 내버려두자고 제안했다. 오디세우스는 그에게 감사했다.
  "여기 모인 사람들 중 당신이  제일 예의가  바른 것  같군요. 충고하건
대, 너무 늦기 전에 어서 이 무례한 집회를 떠나시오."
하지만 암피노모스는 그러한 경고를 심각히  받아들이지  않은 채 자리를 
지키고 앉아  계속 먹고 마셨다.

    108명의 구혼자와 활쏘기 시합을
  그때 텔레마코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모두에게  조용히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페넬로페가 오늘 저녁 구혼자들  가운데 한 사람을 남편으로  선택할 
거라는 발표를 했다.  그리고  텔레마코스가 벌이는 경연   대회의 우승자
를 남편으로 정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제가 제안하는 시합은 나란히  늘어선 12개의 도끼 고리에  화살을  쏘
아 화살이 고리를 빠져 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한데 반드시 저희 아버지가 
사용하시던, 오로지 그분만이  다를 줄 알던 활을 사용해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이 일을 해내는 자만이 저희 어머니의   남편이 되실 수 있습니다. 
만일  여러 명이 그 일에  성공한다면  또 다른 시합을  통해 우위를  가
리도록 하지요."
텔레마코스가 말하는 활은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에 나가기  바로 얼마 
전에 얻은 것이다. 비밀 태엽이 감겨 있어, 일종의 제동 장치를 풀어주어야
만 당겨지게 되어 있는 그  활의  특성은 오직 오디세우스만이 알고 있었
다. 이토록 다루기 까다로운 활이었기에 트로이 전쟁에는 가지고 가지  않
았다. 단순히 힘과 수완을 시험하는  경기라고 생각한 구혼자들은  텔레마
코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텔레마코스는 도끼날의 반대편 강철 부분에 달
린 고리가 나란히 늘어서도록 다진 홀바닥에 12개의  도끼를 박았다. 그리
고는 오디세우스의 활과 108개의 화살을 가져오게 했다. 구혼 자들은 순서
를 추첨하고 경기를 시작했다. 열댓 명의 구혼자들이  연달아 활을 당겨보
려 했지만 헛일이었다. 에우리마코스의 차례가 되었다. 그는 앞선 경쟁자들
의 실패를 거울 삼아, 기름을 가져오게 하고는 활에 발라 조심스레 문질러
댔고 활을 유연하게  하려고 불에 쪼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나서 활을 당
겨보았지만 역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어떤 음모가 있음을 의심한 
안티노오스가 시합을 다음날로  연기할  것을 제안했고  다른 구혼자들도   
이에 동의했다. 그런데 그때  오디세우스가 일어나서 자신도  한번 시도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모두들  비웃으며 그같은 요청을  반대했다. 
텔레마코스만이 그를 지지했다.
  "원한다면 거렁뱅이도 힘을 시험해보게 하지요. 하지만 어쨌든, 기적적으
로 그가 성공한다 해도 페넬로페가 그와 결혼하지 않을 거라는  약속을 하
겠습니다."구혼자들은 여전히 망설였고 의견이 분분했다. 그러자  에우마이
오스가 자신의 권한으로 활을 가져다가  오디세우스에게 주었다. 오디세우
스는 정해진 시합 장소로 가서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활을 어루만지
면서  숨겨진 태엽을 찾아냈다. 그는 어렵지  않게 활을 당겼고 화살은 부
르르 떨어가면서 12개의 고리를 관통했다. 그리고는 얼른  몸을 일으켜 화
살 통을 들고 재빨리 현관을 향한 문까지 물러섰고 아연실색하고 있는  구
혼자들을 향해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로지 오디세우스만이 이 활을 당길 수  있다. 이제  그가 너희들에게 
최후의 연회를 베풀어줄 것이다."
그의 첫 화살은 목을 뒤로 젖히며 술잔을 들이키던  안티노오스에게로  날
아갔다. 화살은 목을 관통했고  안티노오스는 피와 술이  뒤범벅이된 얼굴
로 고꾸라졌다. 절박한  재난을  예감한 에우리마코스는   오디세우스에게 
울며 매달렸다.
  "안티노오스만이 진짜 죄인이오. 그가 우리를  이 불행한 사태로 이끌었
다오.  저는 당신께 끼친 이  모든 재정적  손실을 넉넉히 보상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네가 가진 전 재산으로도  충분한 보상이 되지 않아."라고  
말하며 오디세우스는 그에게 치명적인 화살을  날렸다. 그러자 구혼자들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텅 빈 선반에서 무기를  찾으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텔레마코스, 에우마이오스, 필로이티오스 그리고 오디세우스만이  텔레마코
스가 몰래 궤짝에 감춰두었던 칼과 창을 가질  수  있었다. 질겁한 구혼자
들이 옆문을 통해 도망치려고 한꺼번에 사방으로 달려갔지만  문은 에우리
클레야의 손에 의해  바깥에서   굳게 잠겨 있었다. 오디세우스는  토끼를 
잡듯 침착하게 그들을 향해 활을 겨누었다.  그를 제압하려고 곁으로 다가
서는 자들은 텔레마코스 일행이  휘두르는  칼과  창에 쓰러졌다.  10분쯤 
지나자 108구의 시체가 피의 홍수를 이루며   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것은 
마치 바다가 샐물이 되어 물러가면서 해변가에   남겨놓은, 물구덩이 위에 
떠 있는  물고기떼의 시체 같았다. 거실의 벽들은   사람 키만한 높이까지 
피가 얼룩져 있었다. 오디세우스와 일행은 머리카락 속까지 피로 뒤범벅이 
되었다. 염소지기 멜란테우스는 학살을 피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오디세
우스가 그를 위한 특별한 처벌을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사로잡힌 멜란테
우스는 밧줄로 꽁꽁 묶여 기둥에  매어졌고 오디세우스는 단도를 꺼내어... 
아니, 호메로스의  독자들보다 예민한 우리의 독자들은  오디세우스가  멜
란테우스에게 가한 형벌에 대한 자세한 묘사를 참아낼 수 없으리라.  그러
니 그저 시체의  숫자가 곧 109구로 늘었다는  얘기만 하기로  하자. 피로 
물든 복수에 넌더리가 난  오디세우스는 거실의 문을  열어제쳤다. 그리고  
하인들에게 시체를 치우라고 했고 하녀들에게는  거실을 물로 닦고  향을   
피우라고 했다. 그런 다음  에우리클레야를 시켜 페넬로페의  방으로 가서 
남편이  돌아왔음을 알리고 아래층으로  내려오게 하라고 일렀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만, 페넬로페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궁전을 뒤흔
든 끔찍한 소요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에우리클
레야가 방으로 들어가 오디세우스가 아래에 와 있다고  말하자 페넬로페는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사기꾼일 것이다."
하지만 직접 내려가 알아보기로 했다. 그녀는 급히 옷을 입고 계단을 내려
가 하인들이 여전히 음산한 일거리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거실로 들어
섰다. 오디세우스는 그녀에게 다가서며 두 팔을 벌렸다. 피와  땀과 먼지로 
뒤덮인 도살자의 얼굴에서 페넬로페는  남편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그가 내민 팔을 피했다. 오디세우스는 그러한 반응을 이해했다.
  "우리 방으로 올라가 좀 씻어야겠소.  내가  좀 깨끗해지면 아마도 당신
이 나의 포옹을 받아줄 거요."
그러자 페넬로페는 그가 진정 오디세우스인지 알아보기 위한  능란한 기지
를 생각해냈다.
  "우리 방에 가보면, 방이 예전과  같은 곳에 있지 않다는 걸  알 거예요. 
궁의 다른 쪽 회랑으로 방을  옮겼고 침대도 그곳으로 옮겼어요."오디세우
스는 깜짝 놀랬다.
  "그렇게 하려면 침대 기둥으로 사용했던 올리브나무 기둥을   톱으로 베
었어야 할 텐데?"
그들 침실의 그같은 특징을 알고 있는 사람은 페넬로페  이외에  오직 오
디세우스뿐이었다. 그제서야 그녀는 자기 앞에 있는 사람이 진짜 오디세우
스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의 팔에  몸을 던졌다. 바로 그  순
간, 청소를 하던 하인들 사이에서 탄성이 들려왔다.
  "생존자다! 생존자 하나가 발견됐어요!"
하인들이, 술은 깨었지만 두려움으로 부들거리며 떨고 있던 음영시인을 발
견했던 것이다. 늙은 시인은 식탁 밑에 몸을 숨김으로써 학살을 모면할 수 
있었다. 오디세우스 앞으로 끌려와  발치에 내던져진 시인은  그의 무릎에 
입을 맞추며 자비를 호소했다.
  "자네는 운이 좋구먼. 나의 분노는 가라앉았고, 이제  난  자네말고도 돌
봐야 할 다른 일들이 많다네. 자넬 살려주지."
시인은 감격하며 오디세우스에게 감사했다.
  "저를 살려준 일을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당신의  공적을 도처에 
알려 당신 이름이 영원히 남도록 할 테니까요."
  "자네 같은 술주정뱅이는 그런 일을 할 수   없어. 마음이  바뀌기 전에 
얼른 여기서 물러나기나 해라."
오디세우스는 경멸하듯 말했다. 하지만 시인이 문가에  이르렀을때, 오디세
우스가 물었다.
  "그런데, 자네 이름이 뭔가?"
  "호메로스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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