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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맥스 애플] 룸메이트

by Casey,Riley 2023.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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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룸메이트
맥스 애플

  

      1.우연한 만남
  나는 히피, 이피(급진적인 히피족), 반전주의자, 블랙 팬서스(검은 표범단, 1966
년에 설립된 미국의 
급진적인 흑인 결사단으로 검정 점퍼에 검정 바지를 입음),  장수식론자, 기타 양
당제를 불신하는 갖가지 
단체의 학생들 7, 8백 명이 모여 학생회장 후보를 지명하는 자리에 끼여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1968년, 베트남 파병  인원이 이미 10만을  넘어섰고 계속해서 
미국의 젊은 병사들이 
베트남으로 떠나고  있었다. 미시간 주립대학  학생 회관 앞  잔디밭에서는 존슨 
대통령 인형의 화형식이 
거행되었고, 학생 회관 2층 강당 연단에서는  블랙 팬서스 대표 엘드리지 클리버
가 평화를 주제로 한 
연설을 하고 있었는데,  그의 보디가드 둘이 청중을 향해 기관총을  겨누고 있는 
모습이 연설자의 열변 
내용과 사뭇 대조를 이루었다. 나는 박수가 터질  때마다 그 자리를 빠져나갈 기
회를 노렸다.
단상에는 엘드리지 클리버말고도 후보가 세 명 더 있었지만 이미 청중은 클리버
의 손아귀에 들어 
있었다.
  "단식주의자예요?"
  누가 나에게 물었다.
  지미 헨드릭스의 사진이  박힌 검정색 티셔츠를 입은  여학생이었다. 선글라스
는 목에 건 줄에 
외다리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고, 맨발에 무릎 부분을 찢은 청바지 차림이었다. 
게다가 눈엔 핏발까지 
서 있었다.
  길을 가다가 그런  여자가 다가와 잔돈푼을 요구했다고  해도 난 별로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기꺼이 
잔돈을 내주고 그녀를 기억했을 것이다.
  "단식주의자가 뭐죠?"
  내가 되물었다. 
  "뭔지 모르는 걸 보니 아닌 모양이네요."
  그녀는 클리버 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나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렇게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을 생각이라면 차라리 내 운전 면허증  사
진을 주죠."
  그녀는 허리춤에 찬 나일론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사진은 사절, 난 실물이 더 좋으니까."
  "글쎄요, 실물이 사진보다 훨씬 엉망인데."
  "그래도 실물이 더 좋은데."
  "그럼 좋으실 대로."
  나는 그녀를 따라  강당 밖으로 나갔다. 복도에는 선전 전단들이  수북히 쌓인 
테이블들이 스무 개가 
넘었다. 그녀는 멈춰 서서 네이팜탄을 맞은  어린이의 사진과 장수식론자들의 테
이블에 놓인 팜플렛을 
집어들었다.
  "왜 따라오죠?"
  그녀가 물었다.
  "따라가는 게 아녜요. 나도 팜플렛을 가지러 왔다구요. 장수식에 관심  있는 사
람이 그쪽뿐인지 
알아요? 나도 장수식에 대해서 알고 싶다구요."
  "그럼 저 사람들한테 물어 보시죠."
  그녀가 테이블 뒤에 서 있는 선글라스 낀  두 젊은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
곤 다시 사람들 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서 계단 쪽으로 향했다.
  나는 어깨에 평화의 심벌을 문신으로 새긴 위통 벗은 남자를 제치고 부리나케 
그녀의 뒤를 따랐다.
  "잠깐만요, 달아나지 말아요. 만난 지 얼마나 됐다구."
  "미안하지만 난 바빠요. 집회 때문이 아니고 개인적이 사정으로.   나중에 만나
게 되겠죠."
  그녀는 널찍한 대리석 계단을  후닥닥 달려 내려갔고, 나는 내처 뒤롤 쫓았다. 
첫 번째 층계참에서 
내가 따라오는 걸 본 그녀가 말했다.
  "이봐요, 왜 이렇게 귀찮게 구는 거죠?"
  "그쪽이 자꾸  그렇게 달아나지 않으면 나도  그쪽을 귀찮게 따라다닐  필요가 
없겠죠."
  "좋아요, 원하는 게 뭐죠?"
  우리는 학생 회관 현관 로비의 거대한 청동 샹들리에 바로 아래에 서 있었다.
  내가 먼저 내 소개를 하자 그녀도 자기 소개를 했다.
  "나는 정말로 얘기할 시간이 없어요. 급한 일이 있다구요."
  "난 급한 일이 없으니까 같이 가도 되겠죠?"
  우리는 유니버시티 애버뉴를 따라 걸어 내려갔다.  그녀는 지붕을 여닫게 되어 
있는 노랑 플리머스 
승용차 앞에  멈추었다. 차 뒷좌석엔  옷가지들과 상자들이 수북히  쌓여 있었고 
그 맨 위에 베갯잇도 
없는 벌거숭이 베개 하나가 놓여 있었다. 아까 이후로 아무 대화도 없었지만, 우
리는 함께 가는 것으로 
무언의 합의를 본  상태였다. 그녀가 운전석에 올라타더니 옆으로 손을  뻗어 잠
겨 있던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자구 뻔뻔스럽게 굴어서 미안하지만, 늘 이렇게 갈아입을 옷가지를 많이 가지
고 다녀요?"
  "2주정도 내 물건들을 보관할 장소를 찾고 있는 중이죠. 하룻밤 묵을 곳이라면 
얼마든지 구할 수가 
있는데, 짐까지 보관하겠다고 하면 갑자기 태도가  변해서 임대 계약서를 들이대
기 일쑤거든요. 옷가지와 
레코드가 사람보다 더 중요한가 봐요."
  그녀는 길 양편으로  여학생 클럽과 남학생 클럽들, 대학 소유의  널찍한 집들
이 늘어서 있는 힐 
스트리트를 달려 올라갔다.  그리스 문자 연구회와 학술 협회들이 들어  있는 20
세기 초기 양식의 저택들 
사이로 건물  하나가 두드러지게 눈에  띄었다. 그녀는 레인보  인민당이 본부로 
쓰고 있는 알록달록한 
3층짜리 빅토리아풍 건물 앞에 차를 댔다. 
  "여기에 짐을 맡길 수 있는지 알아봐야겠어요. 이곳이 내 마지막 희망이죠."
  그녀는 자동차 문을 닫고 건물을 향해 걸어갔다.  나는 그녀가 자주색 계단 발
치까지 걸어가는 동안 
차안에 앉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계단 발치에서 걸음을 멈춘  그녀가 다
시 돌아와서 내가 앉은 
쪽 문을 열고는 나와 눈 높이가 맞도록 쪼그려 앉았다.
  "원한다면 여기 계속 앉아 있어도 되지만 오래 걸릴지도 몰라요."
  "난 괜찮아요, 내가 짐을 안전하게 지켜 드리지."
  "같이 들어갔으면 좋겠지만 안의  사정이 어떤지도 모르겠고 또 내 물건을  보
관할 수 있는 장소가 
있는지도 알아봐야 해요."
  "자보다 그 안에 두는 게 더 안전해요?"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도대체 안전이란 게 뭐죠? 그건 환상일 뿐이
에요. 아무래도 그냥 
가시는 게 좋겠어요. 나한테 전화라도 있으면 번호를 알려 줄 텐데."
  "아니, 기다리지요."
  그녀는 일어섰다.
  "기다리기 지루해서 가고 싶으면  손가락으로 문에 달린 잠금 장치나 꼭  눌러 
줘요. 그러면 차문이 
잠길 테니까."
  그녀는 까만 눈동자로 내려다보며  그렇게 말했는데 말과는 달리 마음은 내가 
있어 줬으면 하는 것 
같았다.
  "저 안에서 만나야 할 사람이  남자예요. 그래서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지 않는 
거예요. 그쪽이 같이 
들어가면 산통이 깨질지도 모르니까."
  그녀는 문을 닫고 건물 쪽으로 달렸다.
  나는 창문을 열었다.  남자를 만나러 간다는 말에 질투심에 눈이  멀어 모험을 
걸게 된 것이다.
  "나한테도 짐을 보관할 곳이 있어요. 미닫이문이 달렸고 선반도 두  개나 돼요. 
원한다면 써도 좋아요."
  "왜 진작 말 안 했죠?"
  그녀는 아까 부리나케  달려갔던 것보다 더 빨리  차 쪽으로 되돌아오며 물었
다.
  차에 타서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좀 켕기는 구석이 있는 모
양이었다.
  "임대료를 얼마나 받아야 할지 생각하느라고 그렇게 입다물고 있었어요?"
  "그런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어요."
  "그럼 지금 해요.  괜히 짐을 다 끌고 갔다가 월  2백 달러를 내라느니 어쩌니 
하는 말은 듣고 싶지 
않으니까."
  "돈은 안 받아요."
  "정말예요?"
  "물론."
  "또 한 가지, 미리 확실히 해둘 게 있어요. 내가 보관하려는 건  옷과 레코드와 
책, 신발들뿐이에요."
  "장 하나에 다 보관하기엔 그 정도도 적지 않아요."
  "내 말은, 물건만 맡긴다는 뜻이에요. 나는 빼고."
  나는 현관문을  열면서 목소리를 낮춰  달라고 부탁했다. 차에  실린 물건들을 
집안으로 옮겨오는 데 두 
번 걸음밖에 안 걸렸다. 이제 마루에 정갈하게  쌓아 놓은 그녀의 옷가지와 책들
은 생각했던 것보다 
공간을 많이 차지하지 않을 듯했다. 그녀는 소지품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장 안에 넣죠."
  그녀가 말했다.
  "지금은 장 안이 엉망이에요.  여기 그대로 놔둬요. 내일 아침에 내가 다 넣어 
놓을 테니까."
  "지금 하죠, 뭐. 그래야 나도 도울 수  있고. 그쪽한테 이 일을 다 떠맡기고 싶
진 않아요."
  "내일."
  나는 그녀에게 겁을 줘서 내쫓지  않는 한도 내에서 가장 단호한 어조로 말했
다.
  그녀는 아파트 안을 휘 둘러보았다. 푹신한 두  개와 의자, 목재 식탁, 바닥 전
체를 덮은 카펫.
  "여긴 학생이 사는 아파트 같지가 않군요."
  그녀의 말에 나는 지갑을 꺼내어 학생증을 보여 주었다.
  "그런 뜻이 아녜요. 아파트가 워낙 깨끗해서 말예요. 거실도 진짜  가정집 같고 
카펫에 얼룩 하나 
없어요."
  나는 그녀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텔레비전을 켰다. 10시  뉴스는 벌
써 끝난 뒤었다. 그녀도 
내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텔레비전에서는  일기 예보와 스포츠  뉴스가 나오고 
있었고 나는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왜 이렇게 캠퍼스에서 멀러  떨어진 데서 살죠? 이 정도 아파트를 빌린 돈이
면 캠퍼스 코앞에 있는 
스테이트나 이스트 유니버시티 같은데서  살면서 강의 직전까지 늦잠을 즐길 수 
있을 텐데."
  그때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아서 나는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저기 쌓
인 책들과 옷가지들에 
대해 내 룸메이트에게 어떻게 설명을 할까 목하 고민 중이었다.
  "나, 지금 갈까요?"
  내가 지나치게 오래 입을 다물고 있었던 듯 그녀가 막 일어나 나가려고 했다.
  "아니, 제발 그대로 있어 줘요. 같이 심야 영화를 보고 싶어요.."
  "정말예요?"
  "그럼요."
  나는 아까  그녀가 확실히 못박아 두었던  문제, 즉 여기 보관하는  건 그녀가 
아니라 짐이라는 걸 
머리에 새겨 두고는  있었지만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갰다.  그녀는 저항하
지 않았다.
  키스 도중에 눈을  뜨니 휴대용 흑백 텔레비전에서  존 웨인이 누군가를 향해 
총을 쏘고 있었다. 내가 
키스에 몰입하지 못하고 눈을 뜬 건 무슨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발자국 소리, 문이 닫히는 소리, 그리고 변기 물 내리는 소리.
  나는 황급히 일어나  앉아 그녀에게서 물러났다. 그녀는 전혀 놀라는  것 같지 
않았다.
  "룸메이트예요"
  그녀가 물었다.
  이제까지 나는 룸메이트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요, 그래서 조용히 있자고 한 거예요. 오늘 밤 장 안에 그쪽  물건을 넣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구."
  "그럼 진작 그렇다고 말을 하지 그랬어요?"
  "그런 얘기를 하면 여기 물건들을 두겠다는 생각을 바꿀지도 몰라서요."
  "생각을 바꿔요?  지금 농담해요? 여기서 받아  주지 않으면 다음에 구세군을 
찾아가야 할 
지경이었는데."
  그러면서 그녀가 다시 가까이 다가왔으나 나는 도저히 마음이 편칠 않았다.
  "먹을 것 좀 줄까요?"
  나는 일어서서 발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부엌으로 걸어갔다.
  "나한테서 입냄새 나요?"
  그녀가 소곤거렸다.
  "아뇨, 내 룸메이트를 깨우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나도 소곤거리며 대꾸했다.
  "내 키스 소리가 그렇게 요란해요?"
  나는 그녀가 앉아 있는 카우치(침대 겸용 의자)로  돌아가서 다시 그녀에게 키
스했다.
  "그래요, 너무 요란해."
  "어쩌면 그쪽이 내는 소리인지도 모르죠."
  "그럴 리가, 난 늘 소리 안 내는 연습을 하는 사람인데."
  그건 사실이었다.
  "그쪽 룸메이트는 밤샘을 예사로 하고 그러다 꼬박 일년은 잠만 자는 그런  사
람인가 보죠?"
  "아니."
  나는 그녀의 말을 멈추게 하려고 다시 키스로 입을 막았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한껏 조심하는 가운데서도 그녀는 눈을 뜨고 내 어깨를 
두드리더니, 
집게손가락으로 포개진 우리의 입술을  가리키며 이 정도로 조용히 하면 되느냐
고 눈으로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우린 둘 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텔레비전 소리도 
한껏 낮춰 놓아서 
사람이 죽어 쓰러지는 장면을 보고서야  존 웨인이 총을 쏘았다는 걸 알 정도였
다.
  침실 쪽에서 날카롭고 새된  씨근거림이 들리는가 싶더니 이어서 살이 맞부딪
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마치 입술로 손뼉을 치는 것 같았다.
  우리는 둘  다 눈을 반짝 떴지만  입술은 떼지 않고 있었다.  다시 씨근거리는 
소리, 입술이 쩍 
맞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개새끼'하고  거칠게 욕지거리를 씹어 뱉는 소리가 들
려 왔다.
  데비가 웃었다. 나는 일어나서 그녀의 옷가지들을  창문에서 가까운 카우지 저
편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우리 뒤편에 있는  침실에서 거실로 불쑥 나올지도  모르는 내 룸메이트의 눈에 
잘 띄지 않게 하려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그게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되고 말았다. 턱 끝까지  닿도록 책을 한
아름 안고 옮기다가 
미끌미끌한 <로마 제국의  흥망성쇠> 현대판이 바닥에 떨어져  버린 것이다. 그 
책을 집으려고 손을 
내민 순간, 안고 있던  책무더기가 카펫 위에 와르르 쏟아졌다. 데비는 쏟아지는 
책들을 잡으려고 황급히 
달려들다가 카우치에 걸려 엎어졌다. 침실에서 달려나온  내 룸메이트가 그 꼴사
나운 광경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데비의 옷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었고, 데비는 책무더기 사이에 누워 있
었다. 나는 선 채로 내가 
연출한 혼란을 멀뚱히 쳐다보기만 했다.
  데비와 내 룸메이트의  눈이 마주쳤다. 데비는 잠시 기다리다가 먼저  손을 내
밀었다. 놀라긴 했지만, 
위아래가 붙은 속내의 차림의 늙은이와 마주치게 되는 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예사로운 일인 양 
행동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전 데비예요. 잠을 깨워서 죄송해요. 실수로 그런 거예요."
  내 룸메이트의 푸른  눈에는 피곤한 기색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눈처럼  회 백
발을 지닌 그는 
152센티미터의 키에 체중은 50킬로그램이었다. 그가 데비를 사정없이 공격했다.
  "여기서 나가!"
  그는 우리를 홱  밀치고 걸어가서 데비의 옷가지를 한아름 안아  들었다. 그걸 
들고 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는데, 위아래가 붙은 속내의의 똑딱단추가  열린 틈으로 속이 들
여다보였다. 데비는 
간신히 웃음을 깨물어  삼키고 있었다. 나는 허둥지둥 데비의 옷들을  챙기러 복
도로 달려갔으나 어느새 
그가 옷 한 무더기를 더 던졌다.
  "알겠어요, 5분만 시간을 주면 내 손으로 직접 물건들을 갖고 나가겠어요."
  데비가 말했다.
  "지금 당장!"
  내 룸메이트가 소리쳤다.
  나는 문간에서 그가 한아름 안고 온 데비의 블라우스들을 복도로 내던지기 전
에 받아 안았다.
  그때 난  룸메이트에게 먹혀 들 만한  거짓말을 꾸며 댈 수도  있었다. 데비는 
유대인 고아들과 그가 
원수처럼 여기는 존슨 대통령과 허버트 후버 대통령 같은 자들에 의해 길거리로 
내쫓긴 거리의 
부랑자들을 위해  옷가지를 모으고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왠지 그러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데비는 벌써 자기 물건들을 한아름 챙겨 들고 문간에 서 있었다.
  "나가."
  내 룸메이트가 다시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가고 있어요."
  대비는 그의 험상궂은 얼굴에 역시 험상궂은  얼굴로 대항하며 대꾸했다. 그들
이 그렇게 으르렁거리며 
서로 노려보고 서  있는 동안 나는 복도에서  대비의 신발과 셔츠들을 주섬주섬 
챙겼다.
  데비가 그걸 내 품에서 거칠게 낚아채는 바람에  몇 개가 밑으로 떨어졌다. 나
는 그것들을 주워 들고 
데비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벌써 운전대 앞에 앉아 있는  데비를 겨우 붙
잡았을 때 그녀는 애써 
눈물을 삼키고 있었다.
  "미리 경고를 했어야 했는데, 내 실수요."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나머지 물건들을 가져다주겠어요? 다시는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가 않아요."
  "내가 잘 설득을 시킬게요. 물건을 그냥 두고 가요. 내일 장에다 다 넣어 놓을 
테니까."
  "부탁해요, 빨리 여기서 나가고 싶어요."
  나는 아파트 안으로  다시 들어갈 필요가 없었다. 그녀의 물건들이  모두 복도
에 내팽개쳐져 
있었으니까. 나는 그것들을 자동차 뒷좌석에 도로 실었다.
  데비는 코를 팽 풀고는 마음의 평정을 되찾았다.
  "늘 저렇지는 않아요."
  내가 말했다.
  "그가 집세의 반 이상을 낸다 해도 저런 룸메이트를 둔 건 밑지는 장사예요."
  그녀가 말했다.
      2.운명
  데비를 아파트에서 쫓아낸 나의 룸메이트는 평생-아니 어쩌면 그보다 오래-나
를 돌보아 준 사람이다.  
우리의 인연은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 5년 전인  1936년 1월에 이미 시작되었던 
듯하다. 그때 우리 
할아버지 로키는 아들 맥스와  여자 사촌 둘, 우리 아버지인 사위  샘과 함께 디
트로이트에서 친척 
결혼식에 참석한 되에 맥스의  검은색 시보레를 타고 미시간 주 그랜드래피즈로 
돌아오고 있었다.
  날이 저문 밤  9시경이었는데 맥스가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당시 스물셋이었
던 그는 맹렬한 기세로 
질주하는 고속 도로 운전에는 그다지 익숙지 못했지만,  새로 산 차를 모는 기분
에 한껏 들떠 있었다. 
그러나 과속을 하지는 않았다. 날씨 탓에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정없이 휘
몰아치는 진눈깨비가 
시야를 막았고 아스팔트는 눈이 얼어붙어 검은  빙판을 이루고 있었다. 미시간의 
지독한 겨울 날씨였다.
  랜싱 근방에서 시보레가  빙판에 미끄러지면서 중앙 분리대를  넘으려고 했다. 
당황한 맥스는 황급히 
브레이크를 밟았고, 차는  도로에서 이탈하여 우람한 느릅나무를  들이받고 말았
다.
  다른 승객들은 모두 차 밖으로  퉁겨져 나갔으나 운전대 때문에 안에 갇힌 맥
스의 가슴에 시보레의 
뾰족한 표지가 박혔다.
  앰뷸런스가 도착했고 로키의 사촌인 두 여자는  그대로 남겨졌다. 즉사한 것이
다. 로키와 우리 
아버지는 몸이 만신창이였지만 의식은 있었다. 그들은  의료진 둘이 맥스를 들것
에 싣는 걸 지켜보았다.
  앰뷸런스는 악천후 때문에  제대로 속력을 낼 수가 없었다. 응급  요원이 맥스
의 입에 산소 마스크를 
대고 가슴에 청진기를 댔다. 병원에  도착하기 몇 분 전, 그가 산소 마스크를 떼
어 내며 로키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사망했습니다."
  앰뷸런스 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내리려는 로키를 응급 요원과 우리 아버지가 
가까스로 뜯어말렸다.
  로키는 내게 한 번도 그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아니, 맥스의 이름을 입에 올
린 적도 없다. 내가 그 
사건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아들을 잃은  슬픔을 한시도 잊지 못하셨던 할머니와, 
내가 태어나고 자라는 
동안 꼬박꼬박 동생의  묘지를 찾았던 우리 어머니를 통해서였다. 나도  어린 시
절 내내 어머니를 따라 
그 묘지에 갔었기 때문에 히브리어로 새겨진 묘비들이 내 가장 초기의 기억들이 
되었다.
  하나의 결정적인 사건으로  가정 내의 모든 것이 뒤바뀌는 경우가  흔히 있다.  
우리 가정도 그러했다. 
그로부터 5년 뒤  내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까지 우리 부모님과  조부모님, 두 누
나들은 가족을 잃은 
슬픔을 부둥켜안고 살았다. 그러다가 내가 태어나면서  모두들 슬픔을 잊기 시작
하게 되었던 듯하다. 그 
누구도 죽은 맥스를  대신할 수는 없었으나, 아무튼 나의 탄생은  가족 모두에게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가족들은 내게  맥스라는 이름 붙이고  나를 공평하게 소유했다.  그러니까 나는 
두 세대에 걸쳐 태어난 
셈이다.
  그랜드래피즈의 산업 지구에 위치한  널찍한 회색 물막이 판잣집에 살던 우리 
가족은-미국에 이민 온 
사람들이 흔히 그러하듯-자식 교육에  가진 걸 모두 쏟아 부었다. 우리  집 같은 
경우엔 조부모님도 
계셨으니 손주들 교육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집에서는 이디시어(중세 고지  독일어 방언에 러시아여, 폴란드어,  히브리어가 
섞여서 생성된 언어로 
히브리 문자를 쓰며 널리  유럽과 미국의 유대인 사회에서 사용되고 있음)를  썼
으나 나와 누나들은 
학교에 가면 영어가  구명 보트라도 되는 양 죽자살자 매달렸다.  누나들은 영어
를 유창하게 하는 
모범생에, 고교  논쟁 대회 챔피언까지 되었다.  누나들이 황금 트로피를 타오면 
우리 집은 한바탕 흥분의 
도가니가 되곤 했다.
  그러나 식탁에 둘러앉으면 영락없는  19세기였다. 어른들은 이디시어로 차르와 
유대인 학살에 대해 
이야기했다-우리 집 식당에서 들을 수 있는 시사적인 이야기라곤 테두리에 금칠
이 된 대형 거울 앞에서 
논쟁 대회에 나갈 연습을 하는 누나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들뿐이었다.
  누나들은 <타임>이나 <뉴스위크>지를  주로 인용하였으며 그래서 침대  밑에 
묵은 잡지들을 고스란히 
모아 쌓아  두었다. 어머니는 부엌에서  설거지나 요리를 하다가  딸들이 손짓을 
해가며 큰소리로 열변을 
토하는 걸 보고는  까무러칠 듯 놀라곤 하였다. 할머니는 두툼하게  덧댄 브래지
어가 몸을 따스하게 하는 
데는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구식 여인네였다. 아버지는 딸들이  타온 트로피들을 
트럭에 가지고 다니며 
아버지에게 고철을  파는 북부 미시간의 구매  대리인들이나 공자 지배인들에게 
자랑스럽게 내보이곤 
했다.
  어머니는 '너도 누나들처럼 말 잘하는 사람이 될  거다'라고 내게 다짐을 주셨
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사실 꼬박꼬박 상대에게'실례입니다만'하고 예의를 차려야 하고 주
어진 2, 3분 동안 열변을 
토한 뒤 중단해야 하는 누나들의 논쟁보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원시적인 논쟁에 
더 끌렸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연습 같은  걸 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서로에게 콜레라나  학질에 걸
리라고 저주를 퍼붓기도 
하고 저 모양 저 꼴이니  이교도들 틈에서 감옥살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는 거
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이디시어 악담 대회 같은 것이 열렸다면  우승 트로피는 당연히 그들 몫이
었으리라.
  우리 할머니 구티는 작달막하면서도  골격이 큰 여인네로 부엌을 왕국으로 삼
고 살았다. 거실 
출입은-월요일 저녁 <왈가닥 루시>를 보는 것 같은-특별한 일이 있을 경우에만 
했다. 러시아에서 1차 
세계 대전  중에 화물 열차에서 떨어진  뒤로 할머니는 불편한 몸이  되었다. 그 
사고로 그만 다리가 
부러졌는데, 제대로 치료 한 번 받아 보지 못해  마비된 다리 한 짝을 평생 질질 
끌고 다녀야 했다. 그런 
불구의 몸이었기에 몸을  움직일 때는 반드시 사전에 계획을 세웠다.  그것이 정
신적인 면에까지 영향을 
미쳤는지 할머니는 만사에  느리고 조심스러웠으며, 성질이 불같은  남편과 사뭇 
대조적이었다. 그들의 
결혼은 한마디로 생각과 행동의 결합이었으며 늘 갈등이 끊이질 않았다.
  폭풍 같은 성격의  로키는 우리 가족의 개척자였다. 그는 1914년  스스로 미국
행을 결심했으며 미국에 
닿자마자 하루 열여섯  시간씩 중노동을 하기 시작했다. 아내와 두  아이 배시와 
맥스를 미시간으로 
데려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곧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고, 고향으로 아무리 편
지를 보내도 회신이 
없었다. 가족들이 어디에 있는지, 아니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조차 알 길이 없
었지만 로키는 열심히 
돈을 저축하고 계속 편지를 보냈다.
  전쟁이 끝나자, 러시아 정부에 의해 대도시  오데사로 강제 이송당했던 구티와 
우리 어머니, 맥스는 
고향 마을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집은 폐가가 되어 있었고, 수중에 지니고 
있던 독일 돈과 
리투아니아 돈은 무용지물이었다. 다행히 편지 몇 통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시간에서 로키는  야학을 다니며 영어  읽기와 쓰기를 배웠다.  거기서 그가 
확실히 익힌 건 
서명이었다. 공문서에 서명할  일이 생기면 그는 훌륭한 농구 선수가  프리 스로
를 던지듯 몹시도 공을 
들였다. 서명할 종이 위에 왼손을 얹어 균형을  잡고는 연필이나 볼펜을 잡은 엄
지와 검지의 위치를 
점검한 다음'허먼'을 필기체로 멋들어지게 썼다. '허먼'이라는  좀 우스꽝스런 미
국식 이름은 그의 원래 
이름 '예라치미엘'이 너무 어렵다는 이유로 이민국 서기가  멋대로 지어 붙인 것
이었다. 그래도 아메리칸 
베이커리에서 일하는 할아버지의 동료들은  그 서기보다 나은 데가 있어서 예라
치미엘 대신 로키라는 
이름을 붙였고, 그 이름은 그대로 계속 남게 되었다.
  나는 할아버지가  '허먼'이라는 서명을 하는  대단한 구경거리를 한번도  놓친 
적이 없다. 정말이지 그 
모습은 제왕 같았다. 그런 서명에는 깃촉펜과 압지를 사용하는 것이 제격이리라. 
할아버지는 일단 
서명이 끝나면 펜을 내려놓기  전에 획하니 한 번 점검해 보는  걸 잊지 않았다. 
4학년에 올라가 
필기체를 배우게 되었을 때  나는, 굵은 줄과 가는 줄 사이에  쓰기 연습을 하게 
되어 있는 파머식 습자 
공책에 내 이름과 할아버지의 이름을 가득 채우곤  하였다. 내 이름 맥스 애플은 
그저 휘갈김에 지나지 
않았으나 할아버지 이름  '허먼 굿스타인'만큼은 전문 위조범 못지  않게 할아버
지의 멋들어진 서명을 
그대로 흉내낼 수 있었다.
  할머니 구티는 영어를 배우지 않았다. 사실  할머니는 불편한 다리보다는 영어
를 못한다는 점 때문에 
더 집안귀신으로 살았으나  그런 비활동성을 오히려 강점으로  만들었다. 할머니
는 가족들이 밖에서 
있었던 일을 그대로  보고하는 걸 좋아했으며, 우리의 보고가 끝나면  비꼬는 논
평을 하곤 했다. 늘 
식탁에 커피잔을 놓고 불편한 다리를 발판에 받치고 앉아서는 자기가 앉아 있는 
그 자리가 가정의 
중심이 되게 만들었다.  그녀는 사건들을 분석하고 이러저러한 판단들을 내렸다. 
항상 커다란 회 
손수건을 옆에 차고 있다가 너무  웃어서 눈물이 질금질금 나올 때는 그걸로 눈
가를 훔치든지 코를 팽 
풀든지 했다. 할머니에겐 두  가지 커다란 웃음거리가 있었는데, 바로 미국과 남
편이었다.
  할머니가 알고 있는 미국은 신문에 난 사진들과 길거리의 행인들을 보고 배운 
것이거나 가족들이 
물어다 주는 뉴스와  가십들을 주워들어서 알게 된 것이었다. 할머니의  가장 먼 
여행지는 동네 
슈퍼마켓이었다. 할머니는 특히  나와의 동행을 좋아했는데, 그건 내가 슈퍼마켓
에 진열된 상품들의 
이름을 일일이 읽어 주고 포장 안에 어떤 내용물이 들어 있는지 설명해 주는 인
내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슈퍼마켓에서  파는 상품들은 대부분 할머니에겐  새롭고 재
미난 것들이었다.
  나는 다섯 살이 되자 글을 제법 잘  읽었고 그걸 과시하기를 좋아했다. 슈퍼마
켓에서 우리는 참으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내가 상표명을 이디시어로 크게 읽으면  우린 둘이서 
토마토 페이스트와 
토마토 소스 같은  것의 미묘한 차이를 해석하느라 머리를 모으곤  했다. 할머니
와 나는 동네 슈퍼마켓 
A&P에서 돼지고기 덩어리나  총알 같은 사악한 물건들을 쇼핑 카트에  잔뜩 싣
고 얼쩡거리는 
비유대인들 틈에 끼여서 그렇게 오랜 시간을 소일했다.
  우리는 A&P에 물건을 사러  가는 것이 아니었다. 부모님이 일주일에 한 번씩 
암녹색 폰티액을 몰고 
가서 시장을 봐오기 때문이다. 구티와 나는  슈퍼마켓에 놀러 갔다. A&P의 통로
들은 우리에겐 
영화관이었다. 할머니는  사람들이 클리넥스나  탈취제 같은 쓸데없는  물건들을 
잔뜩 사는 걸 지켜보기를 
좋아했다. 그녀는 사람들의 카트에 실린 물건들을 보고 그들의 인생을 상상했다. 
로맨스란 걸 통 경험해 
본 적이 없으면서도 그 무엇보다도  로맨스를 좋아하는 구티, 부부가 다정하게 '
허니', '스위트 하트'라고 
부른다든지 문간에서 가볍게 키스하는 걸 보면  할머니는 그걸 그대로 흉내냈다. 
집에 돌아오면 냉장고 
옆에 기대서서 내게  정열적인 시선을 던지며 입술을 달싹거리면서  '스비트하트 
하니 디어'하고 러시아식 
사투리를 섞어 불렀다. 그러면 둘 다 배를  잡고 눈물이 질금질금 나도록 웃어대
는 것이었다.
  할머니가 A&P를 편하게  여겼던 건 리투아니아에 살 때 그녀의  부모님이 작
은 상점을 갖고 있어서 
맨발의 시골 사람들에게  빵, 공산물, 술 같은 걸 직접  팔아 보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할머니가 
리투아니아의 세븐일레븐에서 보드카를 조금씩 아껴서 파는 장면을 상상하곤 했
다. 할머니는 내가 
나중에 자라서 상점 주인이 되길 바랐다. 아들  맥스도 죽기 전에 어떤 포목점을 
공동 운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너는 상점을 두 개씩이나 갖게 될 게야."
  할머니는 내게 그렇게 말하곤 했다.
  바로 그 문제도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싸움거리가  되었다. 로키는 내가 상점이
나 지키는 사람으로 
성장하는 걸 원치 않았던  것이다. 그에겐 보다 원대한 계획들이 있었다. 할아버
지는 나를 데리고 외출할 
때면 유대교 선생들에게 데려가곤 했는데 할아버지 말에 따르면 그들은 나 같은 
소년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아는 이들이라는 것이었다. 할아버지가  정규적으로 나의 손을 이
끌고 찾아갔던 유대교 
현인들은 주유소 근처에 있는 방 세 칸 혹은 네 칸짜리 누추한 아파트에 기거했
다. 할아버지가 
그들에게 나를 소개하는 방식은 항상 똑같았다.
  "어떻게 좀 해주세요. 제  손자 놈을 가르쳐 주세요. 이 녀석은 이교도처럼 자
라나고 있답니다."
  지금 생각하면 과연 그때 그 현인들이 내게 무얼 어떻게 해줄 수 있었을지 의
심스럽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건대, 그들은 나보다 더 한심한 상태였던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1940
년대 후반 미시간 
서부를 지나던 순회 교사들과 라비들은 어서 다른 곳으로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
었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로키가 그토록 많은 현자들을  찾아낼 수 있었던 건 아무리 생각해도 신
기한 일이다. 그들 
가운데 내가 가장 쉬게 피할 수 있었던  이들은 로시 하샤나(유대교의 신년제)를 
앞두고 집집마다 돌며 
과부들과 유대 신학교를 돕기 위한 성금을 모으러 다니는 턱수염을 기른 노장들
이었다. 그들은 이른바 
유대교의 사랑을 팔러 다니는 턱수염을 기른  노장들이었다. 그들은 이른바 유대
교의 사랑을 팔러 
다니는 떠돌이 장사치들이었으며 로키보다  훨씬 돈이 많은 사람들을 노리고 있
었다. 그래서 짧은 축복 
한마디로 그만이었기에  내게 골칫거리가 될  수 없었다. 입으로는  축복의 말을 
읊조리면서도 눈으로는 
버스 시간표를 읽는 그런 이들이었으니까.
  몇 주씩 나를 가르치곤 하던  젊은 선생들은 조랑말을 타고 교구들을 돌며 한
참씩 머무는 이들이었다.  
그들의 교구 순회란 캘러머  주에서 미사를 보고, 닐스에서 결혼식 주례를 서고, 
머스키건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식이었다. 그렇게  순회를 하면서 그들은 신학교에서  범재들에게 참회
의 고행을 시키고 
대도시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기도했다.  그런 기도는 로키가  나를 데리고 가
서 간청을 한 뒤에야 
이루어졌다.
  내가 히브리어 책과 차 한잔을  앞에 놓고 앉으면 홀쭉한 삼십대의 선생이 말
하곤 했다.
  "자, 그럼 시작하자."
  나는 끝내 기초  단계를 뛰어넘을 수가 없었다. 이미 속속들이  미국인이 되어 
버린 탓이었다. 그 
선생들이 히브리어 번역과 아람어(고대 시리아 지방에서 널리 사용된  셈족에 속
하는 언어로 그리스도와 
제자들의 일상어였음)기도문을 가르치느라  진땀을 빼는 동안 나는 야구  생각만 
하고 앉아 있었다. 
지금까지 특별히  기억에 남는 서너  명의 선생들은 관대한  분들이었다. 그들은 
내 공부가 시원찮은 것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자기 문제만으로도 골치가 아픈 이들이었으니까. 어
떤 젊은 선생은 
영구적인 일거리를 잡고  싶어했는데, 몇 분 공부를 가르치더니 그  지역의 집세
에 대해 물었다. 또 어떤 
선생은 운전을 배우고 있었는데, 수업 시간에 도로  상황을 그려 놓고 자기 차가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 
내게 설명하기도  했다. 내가 더듬더듬  천지 창조와 노아의  방주와 아브라함의 
초년 인생에 대해 공부할 
때 선생들은 나  못지 않게 지겨워했다. 그들은 기회만 주어진다면  그리고 기술
만 있다면, 나 같은 
학생을 가르치느니 차라리 닭 죽이는 직업을 택했으리라.
  로키는 직접 나한테 대고 실망이나 분노를  표시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매일
같이 반복되는 부부 
싸움의 한 원이 되었다. 로키와 구티는 딱히  싸울 이유가 없어도 습관적으로 싸
움을 했다. 그들의 의견 
불일치는 한  번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고, 둘이 다투면 늘  로키의 패배로 
끝났다.
  아버지는 노인네들의  쓸데없는 말다툼을 수수방관하였으나,  부친인 로키에게
서 불같은 성질을 
물려받은 어머니는 그걸 로키에게 불리하게 이용했다.  어머니는 할머니 편일 수
밖에 없었다. 전쟁 
때문에 부친과 헤어져 살아야 했던  그녀는 열두 살에 미국 땅에 첫걸음을 디뎠
을 때, 갈색 양복에 
백구두를 신고 금줄 시계를 찬  멋진 신사가 되어 나타난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
했다. 그후로도 어머니는 
평생 로키를  이해하지 못했다. 어쩌면 어머니와  로키의 관계는, 태어날 때부터 
줄곤 로키와 함께 산 내 
누나들과 나의 그에 대한 친밀감에 미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구티와의 말다툼이 심각해지면 로키는  화가 나서 발을 쿵쿵 구르며 위층으로 
올라가 버리곤 했다. 
당시 우리 집은 3중 구조였다. 우리  식구는 아래층에서만 생활했고 이층에 살림
집이 두 개 있었다. 우리 
집에서 쓰던 난방 기구인 석탄 난로는  일층에서도 난방 효과가 들쭉날쭉이었고, 
이층으로 올라가면 
아예 온기가 없다시피 했다. 그래서 세를 놓은  이층 뒤채에는 따로 벽난로를 만
들어 놓았다.
  로키는 이층 앞채에서  잠을 잤다. 나는 로키와 구티가 언제부터  각방을 쓰기 
시작했는지 알지 
못하지만, 맥스의 죽음이 부부간의 성생활에 종말을  고하게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층 앞채를 혼자 
차지하게 된 로키는 아무 방해 없이 자신이 정해  놓은 8시 30분 취침, 4시 기상 
시간을 지킬 수 있었다.
  이층으로 가려면 썰렁하고 긴 복도를 지나  어두컴컴한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누나들이 친구들을 
데려와 재잘거리는 소리,  텔레비전이 왕왕대는 소리,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
리로 시끌시끌한 
따스하고 복작거리는 아래층을 뒤로하고 춥고 텅 빈 위층으로 올라가는 건 내겐 
지독한 형벌이었다. 
로키는 구티와 말다툼 끝에 푸르르  이층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가도 한 시간 내
로 화가 풀어져서 
내려오곤 했지만, 사명은 그런 할아버지를 달래어  아래층 가족들의 품으로 내려
오게 하는 것이었다.
  구티는 꽁하는 성격이  아니어서 금세 화가 풀렸다. 이따금 나는  할머니가 재
미 삼아 할아버지의 
부아를 돋우는  건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 로키가 끼니때가  지나도록 이층에서 
내려오지 않으면 구티는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코트를 챙겨 입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가서  보면 로키는 휜 코바늘 뜨개 
테이블보를 덮은 목재 
테이블에 앉아 <탈무드>를 읽고 있었다.
  네댓 살 때, 나는 마치 죄수의 탄원을  들으러 감방으로 찾아가는 꼬마 변호사 
같았다. 첫 방문에서는 
묵묵히 듣기만 했다.  로키가 부아를 터뜨리며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걸 참
을성 있게 들어주었다. 그 
후 한 시간쯤 지나서 이루어지는 두 번째 방문 때는 그의 적이며 아내인 구티가 
마련한 음식을 들고 
갔다. 물론 로키는 음식에 손도 대려 하지 않았다.
  그제야 나의 진정한 임무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나는 할아버지가 음식을 먹도
록 온갖 아부를 다 했다.  
하지만 로키는 고집이 보통이 아니었고, 또 늘 배가 고픈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가끔씩은 실패할 
수밖에.
  부부 싸움이 도가 지나쳐서 단단히  화가 나면 로키는 몇 시간씩 위층에 버티
고 앉아 있거나 
이튿날까지 내려오지 않기도 했다.
  한번은 그런 상태가  이틀, 사흘, 나흘까지 지속된 적도 있었다.  그 싸움의 발
단은 칠장이 선정 
문제였다. 우리 집에  새로 페인트칠을 하게 되었는데 로키는 직장  동료인 폴란
드인 에드에게 칠을 
맡기기로 약속했고, 구티는  길 건너에 사는 은퇴한 칠장이 쿨리  씨에게 맡기기
로 흥정까지 다 해두었던 
것이다. 흥정을 할 때 나도 그 자리에  합석해서 할머니가 말하는 이디시어를 영
어로 통역하는 역할을 
맡았기에 일말의 책임감을 느꼈다. 마침내 흥정이  이루어져서 구티와 쿨리 씨가 
악수까지 나누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으니까.
  그러나 로키의 입장에서는 단순히 체면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로키는 시간제 
근무로 하는 아메리칸 
베이커리 일에 악착같이 매달리고 있었으며, 그가  전폭적으로 밀고 있는 에드는 
로키가 불법 노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노동 조합에 찔러박을 가능성이  있는 세 사람중 하나였던 
것이다. 사실 로키는 
노동 조합의 강요로  이미 은퇴한 몸이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물래  일을 하고 
있었다. 아메리칸 
베이커리 주인인 로키의  사촌 필립이 시간제 근무를 시켜 주었던  것이다. 로키
는 그게 얼마나 위험한 
짓인지 알면서도 근무 시간을 더 늘리고 싶어했다.  로키를 따라 빵집에 가는 건 
내게 일종의 첩보 임무 
같은 거였다.  노동 조합측 첩자들이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로키는 조합에 들기를 
거부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어쩔 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로  조합원이 되었는데, 
그후 몇 달도 되지 않아 
노동 조합 노동법에 의거해 강제로 은퇴 당했던 것이다.
  로키가 내게 들려준  말로는, 필립이 그를 위해 커다란 위험을  감수하고 있다
고 했다. 로키가 계속 
일하고 있는 게 조합측에 발각되는 날이면 아메리칸 베이커리는 문을 닫아야 한
다는 것이었다. 나는 
로키를 따라 빵집 안으로 들어갈  때면 늘 빈틈없는 눈으로 주위를 살피곤 했는
데 그건 할아버지가 
'상놈들, 씨팔놈들, 개새끼들'이라고 부르는 조합원들이  숨어서 지켜보고 있을까 
무서워서였다.
  나는 다섯  살바기 경비병이었다. 도넛 한  개와 우유 한잔을 앞에  놓고 시종 
망보는 일을 맡았으니까. 
나는 로키가 마련해 준 작은 휴식 공간-작은 의자 하나를 놓고 낮잠이라도 자게 
될 경우를 대비하여 
부드러운 밀가루  포대들을 깔아놓은-에 앉아서  도넛과 우유를 먹었다.  그리고 
절대 로키의 일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 정도 철은 있었다.
  빵집엔 로키 말고도  조 포스트와 칠장이 일도  하는 에드 비즈네스키가 있었
다. 체중 90킬로그램이 
넘는 조는 34킬로그램 무게의 밀가루 포대들을  공깃돌 던지듯 하면서도, 케이크
에 장식을 할 때면 인공 
색소가 든  긴 튜브 용기를 마치  페인트 붓처럼 우아하게 잡고  앙증맞은 초록, 
빨강 꽃들을 그려 나갔다.  
시선은 테이블 건너편의 로키에게 박고 제발 빨리 좀 움직이라고 성화를 해대면
서도 말이다.
  에드는 심심하면 로키를  노동 조합에 찔러박겠다고 놀려대곤  했는데, 로키는 
그걸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조가 로키에게 빨리 하라고 소리를 질러대면 에드는 옆에서 이렇게 놀리곤 했
다.
  "로키, 서두를 게 뭐 있어요? 여기서 일하고 있지도 않은데. 아저씬 여기  없는 
거잖아요. 이미 
은퇴했잖아요."
  로키는 그런 놀림을 무시하려고 애는 쓰면서도 에드의 술주정이 고약한 걸 아
는지라 술김에 정말로 
노조에 밀고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떨쳐 내지  못했다. 그래서 집 페인트칠을 
맡기는 걸 일종의 
뇌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나는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그  점을 완곡
하게 설명했으나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들은  로키가 은퇴하길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제 근
무라곤 하지만 로키는 
일주일에 30시간 이상씩 일하고 있었다. 나는 로키가  빵 굽는 일을 얼마나 사랑
하는지 할머니나 
어머니보다 훨씬 잘 이해하고 있었다.
  로키를 따라 빵집에 가면 으레  주방 밖 판매대 있는 곳에서 기다려야 했지만 
어쩌다 한 번씩 
주방까지 따라 들어가 빵 굽는  과정을 지켜 볼 수 있었다. 이따금은 밀가루, 쇼
트닝, 물, 이스트, 계란이 
바삭바삭하고 윤기 흐르는 빵으로  둔갑하여 나오는 전 과정을 지켜보는 행운이 
주어지기도 했다.
  나는 빵이 부푸는  걸 마치 만화를 보듯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로키는 시게나 
타이며 없이도 밀가루 
반죽을 언제 오븐에 넣고 또 꺼내야 하는지를 귀신같이 알았다.
  케이크를 굽는 날에는  늦게까지 남아서 일을 하고 했다. 로키와  조 포스트가 
케이크 만드는 
담당이었다. 그들은 서로 다른  밀가루를 썼으며, 케이크를 만들 때는 천하의 로
키도 행동이 굼떠졌다. 
그들은 다른 빵들이 다 구워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오븐 온도를 다시 맞췄다. 그
리고 설탕과 버터, 
달걀을 섞어 케이크용 당의를 만들면 꼭 내게 먼저 맛을 보이곤 했다.
  "케이크를 만들 때는 자기가 무얼  하고 있는지 이해해야 한다. 케이크는 쿠키
나 도넛과는 다르니까."
  로키의 선언이었다.
  도넛 만들 사람이 없으면 할 수 없이 로키가 그 일을 맡곤 했는데 그러면서도 
진저리를 냈다.
  "도넛은 굽는 게 아니야, 튀기는 거지."
  나는 도넛을 튀김  과자라고 생각했다. 아메리칸 베이커리에서  나오는 도넛은 
아무런 토핑 없이 
가운데 구멍 뚫린 반죽을 튀겨만 놓은 것이었다.
  로키는 쿠키도 차별을 했다. 한번은 필립이  코코넛 쿠키를 120개 만들라고 하
자 파르르 성을 내며 
주방을 나가 버렸다.
  "쿠키를 원한다면 빵 굽는 사람이 필요  없지, 쿠키라면 저 애도 만들 수 있을 
거야."
  그러면서 로키는 나를 가리켰다.  필립이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가 내게 쿠키 
만드는 일을 맡기려는가 
보다 생각하고 몹시 흥분이 되었다.
  "그렇게 고집 부리지 마세요.  120개만 만들라는 거예요. 그까짓 것 만드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린다구."
  필립이 로키를 설득했다.
  로키는 앞치마를 벗어서 테이블 위에 내던지며 내게 말했다.
  "가자."
  나는 혹시 필립이 쿠키 만드는  일을 부탁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잠시 주
저하다가 부리나케 
할아버지의 뒤를 따라 달려나갔다.
  로키는 맨 설탕투성이야. 그걸 먹느니 페이스트리나  케이크 같은 건강에 좋은 
걸 먹거라."
  나는 빵집 판매대 앞에 앉아 기다릴 때면 책을 읽거나 간식을 먹곤 했지만 빵
을 굽는 주방에 따라 
들어가게 되면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에  흠뻑 빠져서 지켜보곤  하였다. 그건 
아무리 보아도 물리지 
않는 구경거리였다. 그러니 집에 있는 것과 로키를  따라 빵집에 가는 건 비교도 
안 될 수밖에.
  "난 할아버지 편이에요, 에드가 우리 집 칠을 했으면 좋겠어요."
  나는 로키에게  그렇게 선언하고는 아래층을 내려가서  구티를 상대로 로비를 
벌였다. 그러나 곧 
항복할 기세인 할머니를 어머니가 도로 충동질했다.
  "이제 위층으로 음식 나르는 거 그만두세요. 배고프면 내려올 테니까.  신경 쓰
지 말고 그냥 
놔두시라구요."
  그러기를 닷새, 로키가 그토록 즐겨  보던<오리지널 아마추어 아워>까지도 보
러 내려오지 않자 
어머니는 두손들었다.
  "가서 에드한테 칠을 맡기겠다고 전해라. 이제 더는 참을 수가  없구나. 아버지 
때문에 내가 진저리가 
난다니까."
  나는 재킷을 걸치는 것도 잊은  채 위층으로 후닥닥 뛰어 올라가 기쁜 소식을 
전했다. 그러나 로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분노는 이제  원인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독자적
인 생명을 갖게 된 
것이다. 이제 도저히 할아버지를 설득할 수가 없었다.
  저녁 8시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로키는 벌써 침대 발치의 의자에 바지와 재킷
을 벗어 걸쳐놓고 
있었다. 그의  베개는 워낙 높아서 잠잘  때면 삼분의 일쯤은 일어나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렇게 
누워서는 다시는 아래층에  내려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나는 할아버지의 
말을 곧이들었다.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잠옷으로 갈아입고 아치 만화책 두 권과 베개를 챙
겼다. 그리곤 누나의 
도움을 받아 구키가  러시아에서부터 끌고 온 깃털  요를 들고 위층으로 올라갔
다. 로키는 자꾸 
아래층으로 내려가라고 했지만 나는 끝까지 싫다고 버텼다.
  로키가 누워  있는 침실은 원래 부엌용으로  만들어졌던 공간이라서 마호가니 
트윈 베드 사이에 도기로 
만든 싱크대가 있었다. 나는 그 싱크대를 사이로  해서 로키의 맞은편 침대에 누
웠다. 방에 온기가 아주 
없는 건 아니었지만 내  입김이 뽀얗게 보였다. 그렇게 몇 분  누워 있으려니 로
키가 코를 골기 시작했다.  
당시 일곱 살이었던 나는 잠결에 벽너머에서 들려오는 뒤채 사람들의 소리를 들
었다.
  나는 그들이 마당을  가로질러 자기들 방으로 통하는  뒤쪽 출입구로 가는 걸 
매일 보았다. 그들은 
신혼 부부였다. 여자는 스무  살쯤 되어 보이는 아담한, 검은 머리였는데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남자의 이름은 나의 기억 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밤에 여자가 자꾸만 '
로저, 로저'하고 신음 
소리를 내는 걸 여러 번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 그게 무얼 하는 소린지 분
명히 알 수는 없었으되 
중요한 일인 것만은 틀림없다고 생각했었다.
  아침에 되자 로키는 다시 아래층을 내려갈 것을 명령했다.
  "여긴 너한테는 너무 춥다."
  "그래도 난 여기가 좋아요."
  나는 그렇게 대꾸하고 밤이 되자 다시 올라왔다.
  내가 그렇게 완강하게 버티자 로키는 점점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나는 
다시 부지런히 
위아래층을 오르내리며 양쪽의 전갈을  전하게 되었고 협상은 꼬박 이틀이나 걸
렸다. 마침내 협상의 
매듭이 지어졌다. 에드가 묵은 페인트를 긁어내고  쿨리가 새 페인트칠을 하기로 
된 것이다.
  어른들이, 협상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나의 공로를 인정하여  상을 주겠다고 
하자 나는 로키와 함께 
위층 방을 쓰겠다고 했다. 그리하여 로키에겐 새 롬메이트가 생겼다.
    3.컵 스카우트
  내가 구식 세계에서 얼쩡거리고  있는 사이 누나들은 미국이라는 온갖 인종들
의 도가니로 돌진해 
들어갔다. 논쟁의 일인자가 되기 여러 해 전부터  누나들은 여러 학생 클럽에 가
입하여 민주주의란 것을 
배웠다. 맥신 누나는 터너 학교 안전대 대장이 되었고, 베일리 누나는 중학교 자
치 위원회 임원으로 
뽑혔다. 그러한 누나들의 활약과,  내가 친구들과 잘 어울려 놀지 않는다고 생각
한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의 영향으로 부모님은 내게  미국의 품안으로 성큼 들어설 것을 강권하였
다. 그리하여 나는 
억지로 컵  스카우트(보통 8-10세까지의 어린이들로  이루어진 보이 스카우트의 
유년단)대원이 되었다.
  클라크 부인이  새 유년대원을 모집하러  우리 교실로 들어왔다.  나는 클라크 
부인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우리 집에서 네 블록  떨어진 곳에 있는 프런트 스트리트의 조그만 야채
상 레드 앤드 화이트의 
경리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로키가 빻아서 고추냉이 요리에 쓰는  갈색 뿌리들
을 파는 곳이 우리 
동네에서는 그 야채상뿐이었다.
  클라크 부인은 금발에 새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다니는 몹시 뚱뚱한 아주머니
였다. 그녀의 아들 존이 
바로 우리  반 친구였다. 운동장에서 편을  갈라놓을 때면 존이 맡아  놓고 대장 
노릇을 했으며, 존이 나를 
자기편에 넣어 주면 나는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존은 이미 작년부터 다른 유년대 소속의 컵 스카우트 대원으로 활동하고 있었
고, 이번에 클라크 
부인이 우리에게 컵 스카우트 가입을  권유하러 오게 된 것도 존이 컵 스카우트 
활동을 몹시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클라크 부인은 존을  불러서 학생들 앞에 세웠다. 존은 푸른빛  유니폼 차림이
었다.
  클라크 부인이 아들의 오른쪽 어깨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길 보면 유년대 번호를  쓰게 되어 있는 곳에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은  게 
보일 거예요. 다음 주에 
존은 번호를 받게 될 겁니다.  원한다면 여러분 모두. 컵 스카우트는 학교 와 다
르지만 그렇다고 방학 
같은 것도 아니에요. 겁 스카우트는 조직체랍니다. 재미나게 놀이를 하면서 자기
도 모르게 여러 가지를 
배우는 그런 조직이죠."
  나는 컵 스카우트 대원이 되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우리 유년대
의 집합 장소가 
'성베드로와 성바울 교회'여서 로키가 반기를 들고나섰던 것이다.
  "유대인은 교회에 가지 않는다." 로키의 강경한 어조였다.
  "거긴 교회가 아니에요, 교회 안에 있는 회의실이란 말예요."
  나도 지지 않고 맞섰다.
  "그게 그거야."
  "그렇지 않아요. 거긴  학교처럼 의자와 탁자들을 놓은 방이란 말예요.  신부님
이나 수녀님도 없어요. 
우리 유년대 감독 클라크 부인밖에요."
  "처음에야 유년대 감독만 있겠지만 금방 성모 마리아 얘기가 나올거다. 리투아
니아에서도 
그랬으니까."
  "리투아니아에는 컵 스카우트가 없어요."
  "그래 맞다, 우린 그런 쓸데없는 일들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으니까.  그럴 시
간이 있으면 공부를 
했지."
  로키는 끝내 허락을  하지 않았지만 부모님과 누나들, 심지어 구티까지  내 편
을 들어주는 바람에 나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교회 가고 싶으면 가도 좋다. 그렇지만 나랑 같이 갈 생각은 말아라."
  나는 그렇게 했다. 아버지가  트럭에 태워 교회까지 데려다 주었고, 나는 로키
에게 온다 간다 말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트럭에서 내린 나는 감옥에라도 들어가는 듯  잔뜩 몸을 
사리고는 계단을 올라가 
노랑 벽돌 건물로 들어섰다.
  교회의 냄새부터가 내겐 맞지 않았다. 나는  색유리창이 달린 복도를 지나면서
도 눈을 들어 바라보지 
않았다. 다면 학교에서 적어 온  방 번호를 향해 나아갈 따름이었다. 그 방이 지
하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계단이 어디  있는지만 살폈다. 계단이 보이자 나는 부리나케  달려 내
려가 모이기로 한 방을 
찾았다. 문을 여니 클라크  부인과 컵 스카우트 유니폼 차림의 친구들만 있었다. 
방안에 수녀와 신부들이 
우글거리면 어쩌나, 은근히 걱정하고 있었던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방안에
는 의자들과 칠판이 
있었고 테이블 위에 연 만들기 모형이 진열되어  있었다. 모든 게 학교와 똑같았
다.
  클라크 부인이 반갑게 인사를 했다.
  "안녕, 이렇게 와줘서 기쁘구나."
  내가 유니폼까지 다 사지 않고 모자와 나침반만 산 걸 보고 아직 망설이고 있
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연 좋아하니?  좋아하면 좋겠구나. 우리  모두 재미나는 실습을  할 계획이거
든."
  "밖에서요?"
  내 목소리는  흥분으로 사뭇 떨리고  있었다. 만일 밖에서  연날리기를 한다면 
로키에게 교회 밖에서 
모든 활동이 이루어졌다고  얘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모임이 열린  교회 지하
방에 들어왔었다는 
사실은 굳이 밝히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니! 여기 테이블 위에서 할거야. 그렇지만 우리 모두가 연을 하나씩 만들게 
되면 다음 주엔 함께 
밖으로 나가서 연을 날리게 된단다. 그럼 정말 신날 거야, 모두들 말야."
  우리는 열네 명의 대원들이 다 도착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고 모자를 벗어 
가슴에 대고는 컵  스카우트 서약을 낭송했다. 클라크 부인이 우리  지구 지도자
가 보낸 컵 스카우트 
입단을 환영하는 편지를  대신 읽었다. 기르곤 칠판에 우리의 번호를  적어 주고
는 베껴 적어 가서 
그대로 견장을 사라고 했다.
  "오늘 밤 여러분은 특별한 선물을 받게 됩니다. 학교에서 만났을 때 연 만들기
를 할거라는 얘기는 
했지만 어떤  분이 연 만들기 지도를  해 주실지는 알려 주지  않았었죠. 그분은 
20년이 넘게 연을 만들어 
오신 연 만들기의 명인이세요. 자, 우리 컵 스카우트의 뜨거운 박수로 그분을 환
영합시다."
  우리는 그렇게  했다. 나도 친구들  틈에서 손바닥아 아프도록  열렬히 박수를 
쳤다. 옆문이 열리고 
대머리 신부가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뎀브로프스키 신부님이십니다. 교회에 나가는  친구들은 신부님을 잘 알 거예
요. 신부님,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히려 제가 감사합니다, 클라크 부인.  저는 컵 스카우트를 좋아합니다. 그리
고 이 교회의 모든 
시설물이 여러분에게 개방되어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 단, 연을 날릴 때 일요일 
오전 주차장은 피해 
주세요. 잘못하면 제가 일자리를 잃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신부가 우리들을 향해 말했다.
  나는 빵집에서 여러 차례 그 신부를 보았다. 그는  쉰 살 가량 되어 보이는 뚱
뚱한 대머리였다. 하지만 
신부가 영어로 말하는 걸 듣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빵집에서는 늘 폴란드어만 
썼기 때문이다. 로키도 
신부와 여러 번  얘기를 나눴다. 그는 아메리칸 베이커리에 많은  일거리를 주는 
서너 명의 신부들 중 
하나였던 것이다. 나는 혹 신부가 내 얼굴을  알아볼까 무서워 얼른 고개를 숙였
다. 신부가 영어로 
말하는 걸 듣고 있으려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연 만들기는 보람있고 경이로운 활동입니다. 클라크 부인이  말씀하셨듯이, 저
는 오랫동안 연을 
만들어 왔습니다. 튼튼하게  잘만 만들면 몇 시간이고 연 날리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어요. 자, 그러면 
시작해 봅시다."
  신부는 말을 마치고  가는 막대기들과 종이와 실이  놓여 있는 작업 테이블로 
걸러갔다.
  신부가 연 만들기  시범을 보이는 동안 나는 클라크 부인만  빤히 쳐다보았다. 
혹시 그녀도 수녀 옷을 
입으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내 눈길을 느낀 그녀가  신부를 보라고 
손으로 신호를 보냈다.
  나는 그렇게 했다. 신부는 손동작이 민첩했다. 우리들은 신부가 빠른 손놀림으
로 막대기들을 묶고 
거기 얇은  종이를 꺾쇠로 고정시키는 걸  지켜보았다. 연 하나를 만드는  데 채 
몇 분도 안 걸렸다.
  "각자 집에 가서 만들어 오되  어떻게 고정시켜야 할지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그건 내가 대신 해줄 
테니까. 자기가 원하는 모양을 골라 가져가서 크기에  맞게 잘라 오기만 하면 돼
요."
  그는 단순한 갈색 연을 집어들었다.
  "여기 이 재료들은 값은 싸지만 잘만 다루면  일년 내내 연을 날릴 수 있어요. 
그 이상 좋은 게 
없겠죠, 안 그래요?"
  우리들은 각자 작은 용구 다발과 막대기,  실, 종이를 집었다. 뎀브로프스키 신
부의 선물이었다. 나는 
그걸 식구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몰래 집안으로 가지고 들어가서 내 셔츠와 아
래위가 붙은 로키의 
내의를 나란히 넣어 두는 서랍 속에 넣었다.  막대기들이 들어갈 만큼 신 서랍은 
그것뿐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것들을 서랍 맨 아래에 숨겨 놓고 아무도 없을 때에만 꺼냈다.
  나는 멋진  연을 만들고 싶었고 그럴  자신도 있었다. 신부님이 알기  쉽게 잘 
가르쳐 주었으니까. 
그런데 막대기 두  개를 바닥에 엇갈려 놓고 묶으려  할 때마다 그게 연이 아닌 
십자가로 보였다. 그래서 
막대기를 단단하게 묶을수록  죄책감이 커져 갔다. 생각다 못해 막대기  두 개를 
차례로 조금씩 비틀어 
보았더니 십자가 모양보다는 X자에 가까워졌다.
  로키는 컵 스카우트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었다. 내가 모임에 가지  않은 걸
로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다음 주가 되자 나는  연을 몰래 꺼내 들고 교회로 갔다.  모자와 나침반은 클라
크 부인에게 맡겨 두고 
있었다.
  "나머지 유니폼은 아무때나 사고 싶을 때 주문해도 돼. 서두를  필요는 없어요. 
모자만으로도 넌 
당당한 대원이니까."
  클라크 부인이 모자를 씌워 주며 말했다. 나는  그 당당한 컵 스카우트 대원으
로 15분 정도밖에 
머물지 못했다.
  내 차례가 되어 연의 뼈대를 갖고 뎀브로프스키  신부 앞으로 가자, 신부는 꺾
쇠로 고정시켜 줄 
생각은 않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건 다시  만들어야 되겠다. 이렇게 하면  날지 않거든. 내가 지난주에  보여 
줬던 거 기억 안 나니?"
  신부의 손가락이 내가  만든 연을 잡는가 싶더니 내 눈앞에서  X자가 다시 십
자가로 둔갑했다. 나는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왜 그러니? 어디 아프니?"
  클라크 부인이 뒤에서 소리쳤다.
  그녀가 의자에서 거구의  몸을 일으켰을 즈음, 나는 벌써 계단을  뛰어 올라가 
교회 밖으로 내닫고 
있었다.
  집에 가보니 로키는 정원에서 새 목욕통을 닦고  있었다. 나는 모든 걸 고백했
다.
  "교회에 갔었어요, 그렇지만 십자가를 만들진 않았어요."
  로키는 도자기통을 닦던 일손을 멈추고 물  호스를 내려놓았다. 나는 뎀브로프
스키 신부와 연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너 그럼 거기 들어간 거니?"
  로키가 물었다.
  정신없이 달려나오느라 푸른색 컵  스카우트 모자를 그대로 쓰고 있었던 것이
다.
  "그건 그냥 컵 스카우트이지 이교도가 아니에요."
  "그걸 정말로 그렇게 하고 싶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반 애들 전부 대원이에요."
  "가자."
  우리는 '성베드로와 성바울 교회'로  갔다. 나는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지
만 로키는 들어갔다.
  "여기 들어가면 안 되는 거잖아요."
  내가 로키에게 주의를 주었다.
  "안 되지, 그러나 모자를 쓰고 있으면 괜찮아."
  나는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서 로키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먼저 나온  건 클라
크 부인이었다. 그녀가 
우람한 팔로 내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얘야, 정말 미안하구나. 아줌마가 몰랐어. 네 할아버지와 신부님이 폴란드어로 
다 얘기하셨단다. 
신부님은 종교적인 뜻으로 그런  게 절대 아냐. 그냥 연 만드는  얘기를 하신 거
야."
  클라크 부인도 내  옆에 앉아서 로키와 신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들은 나
오면서도 폴란드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 뒤로 우리 대원들이  각자의 연을 들고 행진해 나
오고 있었다. 존 
클라크가 다가오더니 내가  원래 만들었던 대로 X자 모양이 된  나의 연을 건네
주었다.
  우리들은 교회 주차장에서  연을 날렸다. 기형적인 모양을 한 내  연도 공중으
로 날아오르긴 했지만, 
내가 달리기 시작하자 맥없이 곤두박질 치더니 뎀브로프스키 신부님의 1947년형 
플리머스 안테나에 
걸려 버렸다.
  그런 일이 있은 뒤로 우리는 클라크 부인의  집에서 모였다. 클라크 부인과 존
은 레드 앤드 화이트 
위층의 방 세 칸짜리 살림집에 살고 있었다.
  우리는 우선 상점에서 모여서는 클라크 부인이 상점 문을 잠그는 걸 쳐다보고 
서 있다고 그녀를 따라 
가파른 계단을 올라 빙 세 칸짜리 살림집에  들어가서 간식을 먹었다. 클라크 부
인은 우유가 든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유리병 두 개를 들고 계단을  올라갔는데, 몸집이 워낙 커서 좁은 
계단을 꽉 채웠다. 
그녀가 계단 난간 사이를 지나가는  모습은 마치 작은 트럭이 좁은 도로를 요리
조리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당시 일곱 살이었던 우리들은  보이는 것마다 우스웠고 특히 뚱뚱한 사람들을 
보면 웃음을 참지 
못했으나, 클라크 부인에 대해선 그 누구도 웃거나 놀리지 않았다.  그녀에겐 무
시할 수 없는 위엄과 
덕성이 있었던 것이다. 존도  마찬가지였다. 어린 나로서는 그런 걸 어떻게 표현
해야 할지 알 수는 
없었으되, 존을 늘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인격체로 여겼다.
  클라크 부인이 우유와 쿠키를 내오면 존은 나중에 컵들을 챙겨 들고 싱크대로 
가서 설거지를 했다. 
그 집엔 텔레비전도 없었다. 우리들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좁은 방에 장식이
라곤 벽에 덩그러니 
걸린 클라크 씨의 사진뿐이었다. 클라크 씨는  군복 차림이었으며 한국 전쟁에서 
조국을 위해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영웅의 집에서  우유를 마시는 
푸른색 유니폼의 
소년들이었다. 그러고 앉아 있노라면 어쩐지 우리도  조국을 위해 봉사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몇 주 뒤, 나는 유니폼 바지와 셔츠,  그리고 호루라기까지 샀다. 그해에 나는 짚
으로 빗자루도 만들고 
램프도 만들고 로프를 잡고 산을 오른 법도  배웠다. 그러나 연 사건은 여간해서 
잊혀지질 않았다. 
이듬해 보이 스카우트로 올라갈 때가 되었을 때 나는 그냥 집에 남았다
      4.성년식
  내 나이 열두 살이 되자 로키는 유대교  공부를 가르치는 일을 포기하였다. 성
년식을 치를 날이 
가까워 오면서 비로소 현실을 직시하게 된 것이다.  나는 성인 남자는 될 것이되 
라비가 될 가망은 
없었다.
  로키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내게 새로울 것도 없는 뉴스를 전했다.
  "누구나 다 라비가 될 수 있는 것 아니다. 유럽에서 살았더라면 네게도 기회가 
주어졌을 텐데."
  "유럽에서 살았더라면 전 이미 죽었을 거예요."
  내가 진실을 상기시켰다.
  그러나 로키에겐 차선책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는  견습 제도를 신뢰하고 있었
던 것이다.
  "넌 전문가가 될  거다. 힘든 야근 같은  건 절대 안 하는 직업을  갖게 될 거
야."
  로키는 나를 데리고 우리 집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있는 렉설  약국(드러그
스토어, 약뿐만 아니라 
담배 화장품 잡지는 물론 음료와  간단한 식사까지 판매함)으로 갔다. 로키가 약
사와 얘기하는 동안 나는 
소다수 판매대에서 기다렸다.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 닥(닥터의 약칭)이라고 불렸
던 그곳 약사는, 우리 
조무래기들에게 만화책을 뒤적이지 말라고 경고하며 입을 쩍 버리면 금니 두 개
가 드라큘라의 
송곳니처럼 번쩍거리곤 했다.
  그러잖아도 큰 키인데  바닥보다 높은 약사대에 올라서  있다 보니 닥은 마치 
거인처럼 보였으며, 
그렇게 서서 약국에 진열된 상품들을 내려다보는 두 눈은 오늘날의 전자 카메라 
같았다.
  그는 약사  대에서 내려서더니 로키와  함께 나에게로 다가왔다.  나는 동그란 
의자에 앉아서 
전문가다운 인상을 풍기려고 애써 연고곽만 노려보고 있었다.
  닥이 먼저 말을 걸었다.
  "네 할아버지 말씀이 나중에 약사가 되고 싶다고."
  나는 로키에게 사전에 코치를 받았고 그래서 연습해 둔 대사까지 있었다.
  로키는 말했었다.
  "약사가 너한테 무슨 질문을  하거든 무조건 일할 준비가 돼 있다고만  대답해
라. 그러면 다 되니까."
  나는 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너한테 만화잡지 코너를 맡겨도 되겠니?"
  "저는 일할 준비가 돼 있습니다."
  나의 대답이었다.
  "너도 알다시피, 여기엔 아픈 사람들이 많이 드나든다. 사람들이 네  모습을 볼 
거야."
  "저는 일할 준비가 돼 있습니다."
  "준비는 돼 있을지  몰라도 넌 아직 너무 어리다. 너를  고용하는 건 노동법에 
어긋나는 일이야."
  "개새끼들! 노조 놈들이  우리 손자까지 망쳐 놓는군. 닥,  우리 손자에게 기회
를 좀 주시게, 난 저 
녀석을 훌륭하게 키우고 싶으이."
  로키가 나섰다.
  "로키 어르신, 말씀드렸다시피 저 아이를  공용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어쩌
면......"
  닥은 말끝을 흐리며 나를 빤히 쳐다봤다.
  "저는 일할 준비가 돼 있습니다."
  내가 앵무새처럼 읊조렸다.
  "그럼 그냥 여기 있게 해주마. 어깨너머로 요령을 배울 수 있을 거야."
  그는 소다수 향료와  밀크 셰이크 기계들이 놓여  있는 소다수 판매대 뒤편의 
스테인리스 철판 쪽으로 
가더니 빨간색 물걸레를 집어서 내게 건넸다.
  나는 돈 꾸러미라도 받듯 그걸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았다.
  내가 끈적거리는 소다수  판매대를 닦고 있는 사이  닥은 원래 자리로 돌아갔
고, 로키는 손자의 
학문적인 실패와 한계를 달게 받아들이며 그래도 할 일을 했다는 생각에 만족해
하며 아메리칸 
베이커리로 돌아갔다. 이제 나는 라비는 되지 못할지언정 전문가가 될 터였다.
  나는 렉설 약국에서 걸레질도  하고 바닥도 쓸고 진열대도 정리하면서 약사가 
되는 비결을 배우려고 
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건 로키가 진작에 다짐해 둔 약속 때문이었다.
  "네가 부지런히 몸을 놀리면  닥이 너를 조제실로 데리고 들어가서 약  조제하
는 법을 가르쳐 줄 게다.  
조제법을 알게 되면 넌 과학을 이해하게 되는 거야."
  나는 그때를 기다렸지만  과학은 나를 피했다. 사실 닥은 조제를  많이 하지도 
않았다. 판매대에 놓인 
잡지에서 낱말 맞추기 페이지를 찢어 낸 잡지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다시 판
매대에 놓여졌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거야."
  그러면서 그가 내뱉는 말이었다.
  닥은 만화책을 훔쳐보면 당장에 쫓아낸다고 엄포를 놓았지만 신문이나 잡지를 
읽는 것에 대해선 
군소리가 없었다. 그 즈음 아인슈타인이 타계하자  신문마다 잡지마다 그의 사진
이 실렸고, 그에 대한 
떠들썩한 기사들은 닥에게서 과학을 배우고 싶은 나의 욕구를 자꾸만 들쑤셨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마침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언제쯤 조제하는 걸 보여 
주겠냐고 닥에게 물었다.
  "좋았어, 약에 대해 알고 싶다 이거지. 그럼 보여 주마."
  그는 소다수 판매대를 담당하고  있는 제리에게 약국을 맡기고는 나를 이끌고 
카운터 뒤편의, 
조제실이 아니라  온갖 약병들과 담배, 캔디,  치약, 바셀린 박스들이  쌓여 있는 
창고로 갔다.
  "이 세상엔 심각한 오점이 딱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전쟁이고 나머지 하나는 
성병이지."
  닥은 약병 하나는 열더니 푸른색과 오렌지색으로 이루어진 캡슐 하나를 내 손
바닥에 쏟았다.
  "자 봐라, 지금 네가 들고 있는 게 뭔지 알겠니?"
  "페니실린이다."
  닥은 내 손에서 캡슐을 거둬 가더니 약병 속에 도로 넣었다.
  "네가 <라이프>지에서 아인슈타인에 대한 기사를 읽는 것 봤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죄다 잠꼬대 같은  소리야. 그가 원자 폭탄을 발명해 냈다는 건 알지만, 
우리를 구원해 줄 건 
폭탄이 아니야. 바로 페니실린이라구."
  "독일 놈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성병을 옮길 음모를 짰었지. 네가 아직 너무 어
리기 때문에 그 방법에 
대해선 얘기하지 않겠다만, 아무튼 우리에게 페니실린이  있다는 걸 알고는 그들
은 즉시 그 음모를 
포기했지. 자, 그럼 폭탄과 페니실린 중에 어떤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니?"
  "페니실린요."
  "명심하거라."
  나는 그렇게 했다. 하지만 폭탄에 대한 기사를 읽는 걸 중단하지도 않았다. 잡
지들마다 폭탄이 터지는 
섬광과 버섯 모양의  구름 사진이 실려 있었다. 저토록 위대한  발명가가 담낭에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나야 했다는 건 내겐 아무래도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아인슈타인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으며  유대교 회당엔 발걸음도 한 적이 없다
는 기사를 읽게 되자 
나는 전부터 해온 결심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닥의 열띤 주장에도 불구하고, 나
는 페니실린보다 
아인슈타인을 더 좋아했다. 저 위대한 과학자는 나에게 신념을 불어넣어 주었다. 
어느 토요일, 로키가 
여느 때처럼 빨리 회당에 갈 채비를 하라고 성화를 부리자 나는 나의 원자 폭탄
을 떨어뜨렸다. 이제 
유대교 회당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로키는 잠자코 혼자  다녀왔다가 오후에 다시 그 얘기를 꺼냈다.  나는 아인슈
타인을 등에 업고 종교를 
헐뜯었다.
  로키는 나를 그리스어  '에피큐리언(epicurean, 쾌락주의자)'의 히브리어인 '아
피코로스(apikoros)'라고 
부르며 나하고는 말도 섞으려 하지 않았다.  아침에 깨워 주지도 않고, 빵집에도 
데려가 주지 않았으며, 
예전처럼 나 먹으라고  페이스트리를 가져오지도 않았다. 실에서  야구나 레슬링 
중계를 보고 있다가도 
내가 들어서면 획하니 나가 버렸다.
  가족들은 현명하게도 우리의  불화에 끼여들지 않았다. 마침  본격적으로 성년
식 준비를 해야 할 
시기라서 일이 어렵게  꼬였다. 하나님을 믿진 않았지만 나는 꼭  성년식을 치르
고 싶었다. 그건 순전히 
선물이 탐나서였다.
  "성년식을 취소해라, 아피코로스에겐 성년식이 필요 없으니까."
  로키의 강경한 어조였다.
  나는 그럴 수 없다고 우겼고 가족들이 뒤에서 힘이 되어 주었다.
  "그럼 해라, 성년식을 하는 건 막을 수 없지만 나는 거기 안 간다."
  우리를 이제 갈  데까지 가고 말았다. 부모님도, 라비도, 그  누구도 로키와 나 
둘 중 누가 항복할 
것인지 알지 못했다. 나는 <라이프>지 기사를  인용해서 그걸 과학과 신앙의 대
결이라고 불렀지만, 
사실은 몇 년  동안 지겨운 유대교 공부에 시달린 앙갚음이라고  보아야 옳았다. 
내가 성년이 되기 열흘 
저, 약국에 처음으로 3차원 만화책이 들어왔다. 벌써 몇 달 전부터 3차원 만화책
이 들어온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었으며, 성년식을 빼고  그것보다 나를 흥분시킨 건 없었다. 약국에 잡
지와 담배를 배달하는 
샤키가 내 호기심을 한껏 돋우었다. 그는 벌써 한 권을 봤다는 것이었다.
  "슈퍼맨이 종이를 뚫고  튀어나와서 나한테 달려드는 것  같더라니까. 그런 건 
머리털 나고 한 번도 못 
봤을 거다."
  3차원 영화는 이미 있었다. <브와너  악마>라는 3차원영화가 나왔다는 광고는 
벌써부터 봤지만, 그건 
시내 머제스틱 극장에서 상영되고 있었고 입장료가  너무 비쌌다. 그러니 브리지 
스트리트에 있는, 영화 
세 편을 동시 상영하는  싸구려 영화관 <타운>에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
에 없었다.
  렉설 약국에서 견습으로 일하던 몇  주 동안 아는 근무 중에는 절대 만화책을 
보지 않았다. 그러나 
3차원 만화책이 들어온 날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보통 만화책값
의 열 배나 되는 거금 
1달러를 내고 마이티 마우스 입체 만화책을 샀다.  모두 다섯 종의 3차원 만화책
이 들어왔지만 마이티 
마우스의 속력을 나타내는 빨간 선을 꼭 3차원으로 보고 싶어서 그것 택한 것이
다.
  닥에게 덜미를 잡혔을 때, 나는 <가제트  형사> 만화책을 무더기를 깔고 앉아 
셀로판 포장에서 
빨간색과 푸른색으로 된 3차원 안경을 꺼내어 마이티 마우스가 책에서 튀어나오
는 속도를 완벽하게 
맛볼 수 있는 각도로 만화책을 펼쳐 들고 있었다.
  닥이 만화책을 홱 채뜨려 갔다. 그런데 내가  만화책을 너무 꽉 붙들고 있었던 
탓에 한 페이지가 반 
동강으로 찢겨 나가고 말았다. 닥은 내 얼굴에서 3차원 안경까지 벗겨 냈다.
  "나가! 너도 규칙을 알 거야."
  나는 집까지 달음박질쳐 내 방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울음보를 터뜨렸다. 로키
가 방안에 들어왔을 때 
나는 정말이지 섧게 흐느끼고 있었다. 그는 아직도 나와 말을 섞지 않고 있었다. 
그는 잠자코 방을 
나갔다가 금세 다시 들어왔다. 그리곤 내 옆에 앉아서 물었다.
  "왜 그러니?"
  "닥이 저를 내쫓았어요. 전 이제 약사가 못 돼요."
  나는 할아버지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나중에 소다수  판매대 담당 제리가  그날 일어났던 일을  들려주었다. 로키는 
약국 직원만 출입하게 
되어 있는, 닥이 약을 조제하고 있는 조제실로 거침없이 들이닥쳤다고 한다.
  "네 할아버지가 주먹을 불끈 쥐고  닥에게 달려들었지. 내 평생 그렇게 재미난 
구경거리는 
처음이었다니까. 그  노인네는 싸움을 원했던 거야.  닥은 노인네를 치고 싶지가 
않아서 품질마크 카드 
판매대를 뺑뺑 돌면서  도망 다니다가 나한테 약국  좀 보라고 소리치고 밖으로 
도망쳤지."
  제리의 설명이었다.
  로티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까지 나는 울음을 그치지 않고 있었다.
  "모두 그지 잘못이다.  약사놈이 네 머리에 아인슈타인을 집어 넣은거야.  네가 
약사가 되지 않게 돼서 
오히려 잘됐다."
  로키는 그렇게 위로하며 내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내 성년식 때 로키는 맨 앞줄에 앉아서 노래를 더 크게 하라고 신호까지 보냈
다. 그리고 히브리어 
낭독을 할 때는 실수를 네 군데나 고쳐주었다.  나는 우리 가족과 노인들 몇몇만
이 알아듣는 이디시어로 
연설을 했다. 연설 내용은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원자  폭탄에 대한 것
이었다. 나는 원자 폭탄을 
노아 시대의 홍수에 비교하며 폭탄이  떨어진 뒤 무지개가 뜬다는 약속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성년식을 치른 뒤로 나는  아인슈타인에 대해서 지나치게 떠벌리지 않았고 로
키도 신앙에 대한 얘기를 
삼갔다. 우리는 약을  지을 일이 생기면 레너드 스트리트에 있는  커트레이트 약
국까지 나갔다.
      5.집을 떠나서 대학으로
  로키가 미국으로  가는 길을 개척했다면,  누나들은 교육을 통해  그의 업적을 
이어 나갔다. 나보다 일곱 
살 위인 큰누나 베일리와 두 살 반 위인 작은누나 맥신은 미시간 대학을 장학생
으로 다녔다. 부모님은 
나도 누나들의 뒤를 그대로 따르기를 기대하셨다.
  누나들의 성공이 내 부담을 더욱 가중시켰다. 내가  고교 졸업반 때 베일리 누
나는 이미 
디트로이트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고, 맥신 누나는 남자 친구가  있어서 대
학만 졸업하면 멀리 
떠나서 살아야  할 처지였다. 그래서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외로움에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대학으로 떠나면 물론  부모님도 나를 보고 싶어하시겠지만,  그래도 부모님에겐 
아직 할 일이 많았다. 
그러나 로키와 구티는 그렇지 못했다. 내가  없으면 적적해하실 할머니 할아버지
를 생각하니 대학으로 
떠날 결심이 쉽게 굳혀지질 않았다.
  우리는 그 얘기를 노골적으로 입에 담진 않고  대신 음식 핑계를 대었다. 당시
엔 대학 기숙사 
식당에서 유대 음식을 따로 차려 주는 특례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 집에선 육류
는 매달 디트로이트에서 
들여왔고 빵은 로키가 구웠으며  포장된 식료품은 라비의 승인을 받았다는 표시
인, 작은 동그라미 안에 
u자가 박힌 것들만 먹었다. 그리고 외식은 절대 없었다.
  "널 결핵에 걸리고 말  게다. 거기 음식을 먹지 못해 굶다  보면 피를 토해 낼 
거야. 아이구, 주님."
  구티가 겁을 주었다.
  "결핵은 병균 때문에 걸리는 거고 요즘은 다 치료가 돼요."
  내가 대꾸했다.
  "넌 학교에서 배우는  걸 곧이곧대로 다 믿는구나. 결핵은 결핵이야.  여기서만 
암이라고 부르지."
  누나들은 대학에 다니면서 비유대식 식사를 하게 되었다.
  "너도 그럴 수 있어, 또 그래야만 하고."
  어머니의 말이었다.
  내게 신과의 단절은 단순히  정신적인 문제이기만 했으므로 그다지 어려울 것
이 없었으나 음식 문제는 
달랐다.  나는 음식에 있어서만 큼은 라비가  되고도 남을 만큼 철저하게 금기를 
지켰던 것이다.
  나를 떠나 보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무너지는데 귀한 손자가 객지에서 배까
지 곯을 걸 생각하니 
잔뜩 애가  달던 구티는 이 문제의  해결사로 남동생 조를 불렀다.  내가 유니언 
고교를 졸업하던 
해로부터 60년 전에 조는 제정 러시아 육군  병참 부대에 근무했었다. 그 경험이 
60년이 지난 뒤에야 
가치를 발휘하게 된 것이다.
  "네가 그때 어떻게 했는지 이 아이에게 말해 주렴."
  "아무도 안 바꾸려 하면 어쩌죠?"
  내가 물었다.  
  "아, 그런 일은 없단다. 이교도들은 죄다 돼지고기를 좋아하니까."
  "그런데 상대가 진짜 쇠고기를 갖고 있는지 어떻게 알아요?"
  "일단 냄새를 맡아보는 거지. 그렇지만 정확하게 구분할 수는 없어.  사실 배가 
몹시 고프다 보면 
돼지고기, 쇠고기 가릴 경황도 없으니까."
  조의 눈동자에 구슬픈  표정이 어렸다. 문득 되살아난 열일곱 살  시절의 향수 
때문이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냥 아무거나 먹어라. 그런다고 몸이 어떻게 되는 건 아니니까."
  진입로 근처에 서 있던  로키가 쏜살같이 달려오더니 조의 의지를 뒤집어엎으
려 공격을 했다. 내가 
얼른 일어나서 막힌 했지만 의자가 조의 옆머리를  때렸다. 경황 중에 찻잔이 잔
디밭에 떨어졌고 구티는 
비명을 질렀다. 나는 조가 포드 쪽으로 달아나는  동안 로키를 붙잡고 있느라 젖 
먹던 힘까지 짜내야 
했다.
  "이 개새끼, 의자나 처먹어라."
  로키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조는 문 네 개짜리 포드 앞에 도착해서 한 번 심호흡을 한 뒤에 십대 소년 같
은 날쌘 동작으로 
운전석에 미끄러져 들어가 앉았다.
  대학 입학을 앞둔 여름에  나는 3일 간의 오리엔테이션을 받으러 미시간 대학
이 있는 앤아버로 갔다.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고 떠나며 나는 구티에게 나오는 걸 다 먹겠노라고 약속
했다.
  학교 기숙사에서 묵게  됐는데, 사방엣 돼지고기 냄새가 나는 것  같은 기분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오리엔테이션 기간동안 수학과 스페인어, 영어 시험을  보았지만 정작 긴장이 되
는 건 시험보다 
식사였다.
  나는 미시간 출신 친구들과 함께 3층 방에 묵었다. 모두 카페테리아(손님이 자
기 손으로 음식을 
날라다 먹는 간이 식당)에 익숙한 친구들이었다. 이윽고 저녁 먹을 때가 되자 나
도 만원 엘리베이터에 
비비고 들어가 타고 우르르들 몰려가는 대로  식당으로 향했다. 그러면서 속으로
는 저 덩치 큰 열여덟 
살짜리들 중 과연 누가 나와 돼지고기를 바꿔 먹을지 열심히 재보고 있었다.
  나는 앞에 선  친구들을 그대로 흉내내어 식판을 잡고 샐러드를  집었다. 그러
나 젤리는 집지 않았다. 
동물의 발을 고아서 만들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줄을 따라가다가 
주요리 앞에 당도하자 
나는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머리에 망을 쓴 여자가 접시를 쑥 내미는데, 가운데
에 고기 소스를 채운 
감자와 고기 요리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빈 테이블로  가서 앉았지만 순식간에 옆자리가 다 차버렸다.  남자 기숙
사는 미시간 대학 
신입생이 되려는  학생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으니까. 나도 그들  틈에 끼여 
녹색 샐러드 조각을 
맛있게 씹었다. 그리곤 포크로  회갈색 고기 소스를 감자에 골고루 묻혔다. 나는 
지금 먹고 있는 주요리 
이름이 뭔지 몰랐기에 혹 옆에  앉은 친구들 입에서 그 이름이 튀어나올까 해서 
귀를 쫑긋 세웠지만 
그들은 플라톤에 대해서만 얘기했다.
  다른 친구들이 거의 접시를 비워  갈 즈음 나는 용기를 짜내어 주요리 이름을 
물었다.
  "미트로프."
  한 친구가 대담했다.
  "햄로프."
  다른 친구가 나섰다.
  "이름이 뭐든 간에 맛 기차다."
  식판을 들고일어나며 미트로프라고 대답했던 친구가 말했다.
  나는 함께 앉았던 친구들이 식당에서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얼른 식판을 들
고 쓰레기통으로 갔다. 
고기 소스조차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던 것이다.
  오리엔테이션을 받는 사흘 동안 나는 아침 식사로 나오는 시리얼밖에 먹지 않
았다. 그래서 허기지고 
핼쑥한 몰골로 집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거 봐라, 저 앤 대학에 못 보낸다."
  구티가 기세 등등하게 말했다.
  나는 할머니가 그때처럼 행복하는 걸 보지 못했다.  사실 나도 거의 대학을 포
기한 상태였다. 음식 
문제 때문에 어지간히 신경을  썼던 터라 시험을 다 망쳐 버렸던  것이다. 내 지
도 교수가 시험 성적을 
보더니 어떻게 이런  실력으로 장학금까지 받게 됐는지  모르겠다며 의아해했다. 
그러면서 그랜드래피즈 
전문 대학에서 영어 보충 수업을 받아보는 게 어떻겠냐고 충고했다.
  "너는 앤아버에 가는 거야.  거기서 네 친구들과 똑같이 먹고. 넌 멋진 대학생
이 될 거다. 그까짓 시험 
한 번으로 뭘 아니?"
  어머니 말씀이었다.
  그러나 구티는 전문 대학 쪽을 밀었다.
  "그 학교에 다니면 점심 먹으러 집으로 올 수도 있잖니."
  "거긴 2년 코스밖에 안 돼요."
  내가 진실을 상기시켰다.
  "2년이면 배울 건 다 배운다. 아무렴, 2년이면 충분하지 않고."
  집에 남는 쪽으로 이울고 있던 내가 막  결심을 굳히려는 즈음,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프로 야구 
메이저 리그 경기에 갔던 이야기를 꺼냈다.
  그때 나는 열  살이었고 타이거스와 레드 삭스의 경기를 보러  갔었다. 아버지
와 나는 디트로이트의 
경기장에 일찍  도착해서 타격 연습까지 지켜보자는  야무진 생각에 새벽 6시에 
집을 나섰다.
  디트로이트까진 자동차로  꼬박 다섯 시간이  걸렸고, 나는 너무  들떠서 전날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한 
터라 아침 식사로는 엷게  탄 코코아 한잔밖에 못 마셨다. 나는  운 좋으면 파울 
볼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글러브를 챙겼고, 혹시 주차장에서  앨 캘리너나 테드 윌리엄스 
같은 선수와 마주칠 
경우에 대비해서 사인을 받을 연필까지 준비했다.  중부 미시간의 어느 휴게소에
서 나는 벤치 위에 
도시락을 버리고 떠났다.  명색이 처음 가는  메이저 리그 경기 관람인데 거북살
스럽게 무게가 족히 3백 
그램은 나가는 참치  샌드위치 도시락을 끼고 들어갈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파
울 볼을 받으려면 양손이 
비어 있어야했고 무릎 위에는 득점표만 올려놓고 싶었다.
  운동장에 도착했을 즈음 나는 속죄일을  맞아 종일 단식을 한 것 같은 상태로 
자동차 뒷좌석에 
까부러져 있었다. 아버지는  주차할 곳을 찾아 브리그스 경기장을 한바퀴  빙 돌
았다.
  "저기 있구나."
  나는 어질어질한 걸 꾹 참고 지저분한 빈민가에 둘러싸인 암녹색 경기장을 올
려다보았다. 엄숙한 
얼굴을 한 흑인들이 '주차 1달러'라고 쓰인 팻말을  들고 자기 집 뒷마당을 가리
키며 일렬 횡대로 서 
있었다.
  허기 때문에 속이 자꾸만 쓰렸고  손가락 힘이 없어서 차문도 가까스로 열 정
도였다.
  "너 뭣 좀 먹어야겠다."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고는 경기장을  등지고 황량한 상업 지구를 향해 걸어갔
다. 어렵사리 발견한 
주차 장소를 포기할 수도 없고  타격 연습도 구경해야겠기에 차를 몰고 멀리 나
갈 수는 없었다. 
아버지가 유대식 델리(미리  요리해 놓은 음식을 파는 가게)앞에서  걸음을 멈추
었다.
  나는 어찌나 배가  고팠던지 야구 글러브까지 차에 팽개쳐 두고  따라 나섰다. 
웨이터가 핫도그는 
유대식 음식이라고 말했지만 메뉴판을 보니 별별 돼지고기 요리가 다 들어 있었
다.
  나는 콜라 한잔만  준비했다. 아버지가 먹어야 경기를  볼 수 있다고, 제발 좀 
먹어 달라고 눈물까지 
글썽이며 애원했다.
  "우리 애한테 먹으라고 좀 권해 주시오, 부탁입니다."
  아버지가 웨이터에게 부탁했다.
  웨이터는 '저런 싸가지없는  놈은 굶기는 게 최고'라는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
더니 주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곧 이어 니스칠을 한 주방문이 열리면서 중년의 웨이트리스가 나왔다.
  "애야, 이리 온."
  그녀는 나를 이끌고 주방으로  들어가서 내가 지켜보는 앞에서 유대식 핫도그 
두 개를 두꺼운 
플라스틱통에 넣고는 통째로 물에 끓였다.
  그리곤 봉지에 담긴 호밀빵을 꺼내더니 식물성  쇼트닝을 가리켰다. 친절한 웨
이트리스는 
채식주의자용 구운 강낭콩까지 곁들여  핫도그 요리를 내놓고는 내가 먹는 동안 
곁에 앉아서 지켜보아 
주었고, 식사가 끝나자 디저트로 딱딱한 사탕까지 주었다.
  "그 핫도그는 유대식 음식이었다. 그런데 넌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려서 하마터
면 경기까지 놓칠 
뻔했지. 그땐 겨우 메이저 리그 더블 헤더(하루에 연속 두 경기를 하는 것)에 불
과했지만 이번엔 교육 
문제다. 네겐 앞으로 평생  유대식 식사법을 지킬 기회가 얼마든지 있어. 그러나 
대학은 그렇지 않다. 
이번에 놓치면 영영 못 가게 되는 거야."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더니  우리 집 길 건너에 있는 시멘트 블록 
주차장에 세워진 자신의 
다지 트럭으로 갔다. 그리곤 운전석 쪽 문을  따더니 잡용품함을 열어서 내가 다
섯 살 때쯤 쓰던 
앙증맞은 노랑색 벙어리장갑 한 켤레를 꺼냈다.
  "그건 제 작업 장갑이네요."
  "아버지는 새 트럭을 살 때마다 이 장갑을 잡용품함에 넣었단다. 이 장갑을 보
며 너를 트럭 운전사로 
키우지 않겠노라고 다짐했었지." 9월이 되자  나는 부모님과 함께 앤아버로 떠났
다. 부모님은 내가 짐을 
푸는 걸 도와준 뒤 난생 처음 나를 데리고 회식을 하러 갔다.
  어머니는 누나들과, 자식을 미시간 대학에 보낸  동네 분들에게 미리 수소문을 
해서 앤아버에서 가장 
근사한 레스토랑의 이름을 알아 둔 뒤였다.
  나는 그때 왜  아버지가 연청색 양복에 넥타이까지  맸고 어머니도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갔는지 알지 
못했다. 아마도  다른 학부모들에게 기죽지  않고 싶어서일 거라고  짐작만 했을 
뿐이었다. 부모님은 차에 
오를 때까지 우리의 목적지가 앤아버 최고의 레스토랑 슈거 볼이란 얘기를 하지 
않았다.
  저녁 8시경 앤아버  시내 중심 가에 위치한  그 레스토랑에 들어서니 텅 비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거긴 늘  그렇다는 것이었다. 슈거 볼은 내부가 널찍하고  천장이 높았으며 
속고 기둥과 이중 
색조의 초록  벽지가 인상적이었다. 어느  그리스인 가족이 그곳  주인인데 가족 
모두가 식당에 나와 
일한다고 했다. 메뉴 판에는 속을 채워 푹신한  빨간 커버가 달려 있었는데 마치 
교과서 같은 느낌을 
주었다.
  "여기가 제일 좋은 레스토랑이라고 모두들 칭찬이 자자하더구나."
  웨이트리스 디미트라의 안내로  8인용 칸막이 좌석에 들어가 앉으며 어머니가 
내게 말했다. 슈거 볼의 
칸막이 좌석들은 모두  8인용 이상이었다. 나는 발이 땅에 겨우  닿는 높은 의자
에 앉으며 마치 섬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나는 기껏해야 커피숍 같은 곳에나  출입했던지라 메뉴 판을 직접 대해 본 적
이 없었다. 커피숍에선 
그냥 오렌지 주스나  아이스크림이나 콜라를 주문하면 그만이니까,  서서히 마음
의 부담이 밀려왔다.
 부모님은 이런 일이 흔히 있었던 것처럼,  대학생이 된 아들을 데리고 외식하러 
나온 평범한 미국인 
엄마 아빠처럼 굴려고 애를 썼다. 어머니는 쾌활한  목소리로 이곳 슈거 볼을 추
천해 준 사촌 매미 
이야기를 했다. 매미는 대공황 때 이곳에서 일한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디미트라의 영어 실력은 신통치 못했다.
  "어서 오세요, 선생님들."
  우리는 주문 내용을 꼬박꼬박 두 번씩 되풀이  말해야 했는데, 내 생각에 디미
트라는 우리가 말한 
내용을 종이 위에 그리스어로 적는 거 같았다.
  "우리 아들한테는 여기서 제일 좋은 스테이크를 주세요."
  어머니가 말했다.
  부모님은 용케 자연스런 분위기를 이끌어 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미시간 대학 
풋볼 팀과 베일리 
누나가 살았던 아름다운  기숙사 얘기를 했다. 그러면서 내 자전거  숫자 자물쇠 
키를 잊지 말고 꼭 
복사해서 달라고 했다. 슈거 볼의 컴컴한 주방에서  내 스테이크가 익어 가는 동
안 우린 그렇게 시간을 
죽였다.
  내가 레스토랑 풀 코스 요리를 즐길 수  있었던 곳은 유대교 회당뿐이었다. 우
리 회당에선 기금 
마련을 목적으로  매년 뉴욕에서 연사를  초빙해 왔고 여신도들이  요리를 했다. 
우리는 회관에서 빌린 
테이블들을 놓고 앨트 영안실에서 기증한 접는 의자에 앉아 식사를 했다.
  식사 일인분이 20∼30달러나 하는  비싼 가격이었지만 어머니는 나를 그런 행
사에 보내고 싶어했다. 
특히 누나들이 논쟁  대회에서 한창 날릴 때는 극성스러울 정도였다.  내가 논쟁
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 
하는데도 어머니는  회당에서 2백 달러 이상씩  주고 초청하는 도덕가들을 보고 
아들이 위대한 웅변가의 
꿈을 키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디미트라가 쇠뚜껑으로 덮은 저녁 식사를  갖고 왔고 곧 내 앞에 김이 모락모
락 나는 으깬 감자와 
가열로 색이 바랜  녹색 강낭콩에 둘러싸인 고기 요리가 놓여졌다.  나는 말로만 
듣던 티본 스테이크를 
그때 처음 보았다. 비계와 연골에 둘러싸인 T자형 뼈가 분명하게 보였고 거뭇한 
골수도 눈에 들어왔다.
  "아주 맛있어 보이는구나."
  어머니가 오렌지 주스를 홀짝거리며 말했다.
  "그래."
  아버지도 커피잔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나는 부모님의 용기에 그만  목이 메었다. 아버지의 할머니, 그러니까 내 증조
모께서는 1880년에 
펜실베이니아를 떠나 도로 폴란드로 가셨는데 그 이유는 미국의 유대 음식을 믿
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또 구티의 할머니뻘 되는 어떤  분은 백 살을 넘겨 브루클린에 사셨는데 통조림 
음식은 입에 대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우리 가문의 역사는  그렇듯 금식의 행위로 점철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 집에
선 속죄일 뿐 아니라 
모든 금식일을  철저히 지켰다. 로키는 여호와의  신전이 붕괴된 날에도, 에스델 
여왕의 기일에도 금식을 
했고 나처럼 신앙심이 깊지 못한 구티조차도 양배추나 브로콜리를 먹을 때는 혹 
바구미라도 붙어 
있을까봐 꼼꼼히 살폈다. 뿐만 아니라 마른 렌즈 콩도 일일이 하나씩 골랐고, 캄
캄한 속에서도 우유 
그릇과 고기 그릇을 혼동하지 않으려고 은그릇에 쇠줄로 표시를 해놓았다.
  나는 어머니가  스테이크를 바라보고 있는  걸 눈치챘다. 저  티본 스테이크는 
이제 고기가 아니라 
하나의 경계였다.  부모님과  모든 조상님들이 경계 저편에 있었고, 이편에는 나
와 스테이크가 있었다. 
그리스에서 앤아버로 온 지  3개월밖에 안 되는 디미트라는 우리 건너편 칸막이 
좌석에 앉아서 고국을 
그리워하며 우리가 디저트를 주문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8시 20분이었다.  아버지는 오늘 밤 안으로 네 시간  거리를 달려 집으로 
돌아가야 했고, 월요일엔 
그의 최고 고객인  '카소 난방기 주식회사'로부터 고철을 사들이기  위해 트럭을 
몰고 250마일이라는 고된 
여행을 해야 했다.
  "음식이 식겠다."
  어머니가 성화를 해댔다.  마치 당장이라도 나이프를 집어들고  스테이크를 조
각조각 잘라서 세 살바기 
아들에게 하듯 내게 먹여 줄 것 같은  기세였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고개를 돌려 
이곳을 찾는 손님들에게 고전적인  위엄을 느끼게 하는 눈꺼풀까지 그려진 그리
스 영웅들의 석고 벽화를 
바라보았다.
  나는 스테이크를  잘라서 깨물고 씹었다. 어머니는  숨을 죽이고 계셨다. 나는 
입안의 고기를 
목구멍으로 꿀꺽 삼켰다. 부모님은  마치 무언의 갈채를 보내고 있는 듯했다. 어
렵사리 첫 입을 뗀 
후로는 긴뼈에 붙은 한쪽  고기를 모두 먹을 수 있었다. 그것은  종교적 회식 같
은 것이었다. 나는 
부모님을 위해 먹었고 부모님은 나를 위해 먹었다.
  부모님은 내가  대학에서 굶주리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만족해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기숙사에 
돌아와 옷가지들을 풀었고, 토하지 않았다.
  내 룸메이트는 일년째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는 디트로이트 출신의 근육이 우
람한 2학년생이었다. 
저녁 내내 기숙사 휴게실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브리지 게임을 하다가 자정이 되
어서야 방에 돌아온 
그가 물었다.
  "그래, 저녁에 뭐했니?"
  "부모님과 함께 스테이크를 먹으러 갔었어요."
  "복 많은 친구로군."
      아흔세 살의 룸메이트
  나는 대학생이 외어서야  비로소 난생 처음 내  또래의 룸메이트를 갖게 되었
고, 배를 곯지도 않았다. 
그리고 1964년 9월, 스탠퍼드 대학원에 입학했다. 그해 10월에 아버지가 당신 표
현을 따르자면, 가벼운 
심장 발작을 일으켰다. 그래서 조수 겸 운전  기사를 고용하긴 했지만 아버지 자
신은 몇 달 안에 몸이 
완전히 회복될 거라고 믿었다.
  12월에 겨울 방학을 맞아 집에 돌아가 보니  아버지는 멀쩡해 보였다. 집에 돌
아간 첫날 밤 우리 
부자는 함께 텔레비전  앞에 앉아 미시간 야구팀의 경기를 보았다.  그해 미시간 
주는 캐지 러셀과 빈 
번틴이 이끄는 최고의 팀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해 9월에  아버지는 나를 스탠퍼드가  있는 캘리포니아까지  태워다 주었고, 
우리 부자는 
라스베이거스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아버진 크랩에서 2백 달러를, 블랙잭에서 1
백 달러를 땄다. 
아버지는 그곳 분위기에  스스럼없어 녹아들었고, 크랩 테이블에서  어떻게 움직
여야 할지도 알았다. 내가 
잔뜩 몸이 달아 침 지키기에  급급한 동안 아버지는 노름 과 현란한 라스베이거
스를 즐겼다. 우린 다음 
가을에도 또 오자고  의견을 모았다. 아버지는 내가 스탠퍼드에서 밟고  있는 영
문학 박사 과정(Ph. D. 
English)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도대체 Ph. D.(doctor of philosophy)가 뭐하는 직업이냐?"
  치과 의사, 발 치료 전문의, M. D(의학 박사)는 알아도 Ph. D.란 듣도 보도 못
한 직업이라는 
것이었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거예요."
  나도 그  이상의 것은 확실히 알지  못했기에 어물쩍 넘겨 버렸다.  사실 나는 
작가가 될 생각이었지만, 
어떻게 해야 작가가 되는  지 알지 못했다. 다만 문학 박사  학위를 받으면 계속
해서 책과 접하며 살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에 박사 과정에 들어간 것이었다.
  위층에서 면도를  하고 있는데 어머니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나는 부모님의 
방으로 달려갔다. 가서 
보니 아버지가 방바닥에  엎드려 헐떡거리고 있었다. 등은 활처럼 휘고  양 주먹
은 꽉 움켜쥔 채고. 
어머니가 앰뷸런스를  불렀다. 아버진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아버지에게 인공 
호흡을 했다. 그 바람에 
내 얼굴에 묻어 있던 푸른색 면도용 크림이 핏기가 싹 가신 아버지의 뺨에 얼룩
졌다. 나는 있는 힘껏 
숨결을 불어넣었다.  아버지의 목구멍  안쪽에서 라스베이거스 노름판의  침들이 
서로 맞부딪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임종 직전의 가르랑거리는 소리였다.  나는 그것조차 힘껏 불어 
없앴다.
  잠시 후 아버지의  입술이 움직였다. 그리곤 채 1분도 되지  않아 일어나 앉으
려고 했다. 앰뷸런스가 
도착했을 때 아버진  병원에 가는 것조차 마다했으나  아무튼 병원에 실려 갔고 
입원까지 했다. 그 다음 
7주 동안 피에 굶주린 아버지의  심장이 요동을 치는 사건이 두 번이나 더 발생
했다.
  나는 스탠퍼드로 돌아가지 않았다.  아버지의 일을  대신 하고 짬이 나는 대로 
병원에 들렀다. 이미 
죽음의 문턱에까지  이른 아버지의 모습을  목격하고, 그게 도무지  현실 같지가 
않았다.  당시 스물 
둘이었던 나에게 죽음은  곧 맥스 삼촌의 묘비를 의미했다. 나는  아버지가 병을 
이겨내고 장수를 누릴 
것을 믿었다. 아버진 건강해 보였고 내가 학교를 떠나는 걸 원치 않았다.
  "고철상은 네 일이 아니다, 캘리포니아로 돌아가거라. 이 아빈 곧  괜찮아질 거
야."
  그러나 아버진 이듬해 1월에도, 2월에도 괜찮아지지 못했다. 내내 병원에 누워 
있다가 2월 마지막날 
자정 직후 심장이 영영 멎어 버렸다. 겨우  쉰아홉의 연세에 세상을 하직하신 것
이다.
  주위에 안 싸워 본 사람이 없는 싸움 대장 로키조차도 아버지와는 단 한 번도 
충돌이 없었다. 로키는 
또 하나의 아들을 잃은 것이다.
  구키는 아버지보다  꼭 일년을 더  살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나는 트럭을 
물려받아 빅 래피즈, 
레이크뷰 등지의  기계 공자에서 쇠나  알루미늄 조각들을 끌어  모으기도 하고, 
캐딜락에 있는 카이저 
공장 하역장에서 노조원들이 우리 덤프 트럭에 기름때 묻은 놋쇠 부스러기나 중
고 라디에이터의 
잔해물들을 싣는 걸 지켜보고  서 있었다. 그렇게 난 아버지 샘  애플의 대를 이
은 리틀 샘이 되었다.
  누나들은 모두 결혼하여  맥신 누나는 캘리포니아에, 베일리  누나는 미네소타
에 살고 있었다. 그래서 
추억이 가득한 썰렁한 집엔 어머니와 로키, 그리고 나뿐이었다. 아버지나 할머니
나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보험 혜택을 받지  못했다. 구티가 세상을 떠난 바로 그  주부터 노인의 의
로 보장 제도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트럭 일을 쉴 수가 없었다. 트럭 잡용품함에는 
여전히 내 노랑 장갑이 
들어 있었으나, 지금  내 모습이 아버지가 바라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한 
데 그게 필요친 않았다.
  나는 기계 공장이나 차고에서 노동자들과 나눠야 하는 짧은 대화가 싫고 거북
스러웠다. 그들은 
알루미늄, 놋쇠, 청동 부스러기에 여러 등급을 매겨 놓았지만 내 눈에는 다 똑같
은 고철일 뿐이었다. 
나는 그 지긋지긋한 일에서 빠져나갈 궁리만 했다.  다지 트럭에 앉아 회고해 보
니 스탠퍼드 교정에서 
보낸 일년 반은  그야말로 지상의 천국이었다. 이젠 상상의 향연을  누릴 여유도 
영영 갖지 못할 것만 
같았다. 작가가 되는 무리한  꿈은 포기했고 나의 정신은 성장을 멈추었다. 그러
고 나니 유일한 
만족이라면 그랜드래피즈와 캐딜락 사이의  세 시간 거리를 달리며 트럭 안에서 
즐기는 몽상과, 
머리로만 쓰는 소설들뿐이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6개월쯤  지난 어느 날 어머니는 용감한 시도를 감행
했다. 당시 우리 사업은 
위태위태했다. 내가  그 분야에 젬병이라는 걸  알아챈 경쟁자들이 우리 고객들, 
그 중에서도 특히 
캐딜락에 있는 카이저 공장에 고철값을 더 많이 쳐주겠다고 제안하고 나선 것이
다. 처음 아버지와 
거래를 시작할 즈음만 하더라도  카이저는 소규모 기계 공장에 불과했지만 이젠 
뉴욕 증권 거래소에 
상장될 정도로 성장하였다.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는 고객들은 한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원래  고철 거래
란 것이 무게의 기준이 
일정치가 않아 속이기가  누워서 떡먹기였지만, 아버지의 정직성은  의심의 여지
가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에게 고철을 파는 공장들  몇몇 곳은 아예무게를 달아보지도 않았으며 그
런 공장에서 일하는 
근로자, 직공장, 선반공, 정비공들은  아버지를 친구로 알았다. 아버진 그들과 말
이 통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못했다.
  어머니는 어느 월요일  꼭두새벽에 나 몰래 운전  기사를 데리고 일터로 나갈 
때까지 자신이 
여권주의자임을 깨닫지 못했다. 그날 새벽 3시에  어머니는 우리 트럭 기사인 프
랜시스 옆에 앉아 
북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5시에 자명종 시계  소리를 듣고 일어난 나는 부엌에 
남겨 놓은 어머니의 
쪽지를 읽었다. 그때쯤 어머닌 빅 래피즈를 훨씬  지난 곳을 달리며 고철의 목록
과 가격표를 공부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날 키 150센티미터가 채  되지 않는 쉰일곱의 할머니인 어머니
는 11톤의 쇠붙이 
부스러기를 감독하였다.
  어머니는 공장에  있는 아버지의 친구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인사를 나누었
다. 그리곤 구매 담당자를 
만나 다른 고철상들이 우리 사업을  넘보고 있는 걸 알고 있다며 우리에게 방도
를 마련할 시간을 좀 
달라고 애원했다. 평상복  바지에 스웨터 차림의 어머니는 로키 못지  않게 백발
이 성성했지만 기운이 
넘쳤다. 하역장에서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달려들어 고철이  든 통을 옮기려고 요
란을 떠는 통에 
인부들이 억지로 뜯어말려야 했을 정도였다.
  트럭에 고철을 한짐 싣고 돌아온 어머니는 고물 수집장에서 제대로 값을 쳐서 
팔아먹었다. 어머니는 
고물 수집상 책임자에게 고철값을 일일이  다 적어 달라고 부탁한 뒤 카이저 공
자의 구매 담당자가 준, 
우리 경쟁자들이 제안한 황동과  이등품 구리와 알루미늄 조각들의 가격표를 꺼
내었다.
  집을 떠난 지 열네 시간  뒤에 돌아온 어머니는 얼룩덜룩해진 바지에 손톱 밑
엔 기름때가 새까맣게 깬 
모습이었다. 그 하루만에  어머니는 금속은 1.5페니, 강철은 톤당  5달러를 더 높
여 놓았다. 그리하여 그날 
어머니의 수익금은 내 평균 수익금보다 3백 달러 가량이나 더 높았다.
  "학교로 돌아가거라."
  어머니의 명령이었다.
  나는 몇 주일  더 어머니의 사업 수완을 지켜보다가, 떠나도  되겠다는 확신이 
생기자 캘리포니아가 
아닌 앤아버로 돌아갔다. 이번엔 아흔 세 살의 늙은 룸메이트와 함께였다.
  로키는 나와 함께 떠나는 걸 기뻐했다. 장수를 누리다 보니 그의 시대도, 친구
들도 모두 가버려 
주위에 말벗  하나 제대로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로키는  그랜드래피즈 유대교 
회당의 창립 멤버였지만, 
신도의 대다수를 이루는 중년과 젊은이들에겐 맨 뒷줄에 앉아서 이미 오래 전에 
진보적인 신도단에 
의해 예배 의식에서 제외된 곰팡내 나는 기도문이나 외고 있는 괴팍한 노인네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내  눈에 비친 할아버지의 모습은  20년 전 이나 별반  차이가 없었다.  
마치 이미 육신의 
노화가 정점에 이르러 계속  그 상태로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젊어 보
이는 것도 아니었다. 
이를테면 만년  칠십대라고나 할까. 백발은  점점 숱이 적어져  갔자면 대머리는 
아니었다. 혈색도 좋고 
근육도 나무랄 데  없었으며 돋보기를 쓰지도 않았다. 로키는 튼튼했고  일을 하
고 싶어했다.
  앤아버에 도착하자 나는 좀 무리를 해서 쓸  만한 집을 세냈다. 버스 정류장과 
쇼핑 몰에서 가깝고 
반전 시위로 들끓는 대학 캠퍼스에서 멀리 떨어진,  앤아버 교외의 뜰이 있는 저
층 아파트였다.
  내가 데비를 만났을 즈음 로키와  나는 앤아버에서 이미 일년째 함께 살고 있
었다. 로키는 유대 
교회당과 아파트에서  친구도 꽤 사귀었고 가끔씩  3마일이나 되는 거리를 걸어 
캠퍼스가지 찾아오곤 
하였다. 처음엔 이웃  사람들에게만 빵을 구워 주던 것이 입에서  입으로 솜씨가 
알려져 어떤 날은 
아파트 세네 군데를 상대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하기도 했다. 어머니도 몸
을 뺄 수 있으면 주말을 
함께 보내러 찾아왔다.  나는 로키를 저버리지 않고도 내가 바라는  인생을 사게 
된 것이 그저 
다행스럽기만 했고, 지금의 상태를 바꾸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럼 다시 1968년의  여름으로 돌아가 보자. 데비를 떠나 보내고  아파트로 돌
아와 보니 로키는 다시 
잠들어 있었다. 나는  휘파람 같은 소리로 시작해서 부드럽게 푸우  내뱉는 소리
로 끝나는 로키의 코고는 
소리를 들었다. 평생 들어 온  소리였다. 문 뒤쪽에 데비가 흘리고 간 실크 실내
복이 떨어져 있었다.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이 입었던  겉옷처럼 청색 바탕에 알록달록한 줄무늬가 들
어간 옷이었다. 나는 
그걸 옷걸이에 걸어서 발끝으로 곧추서서  장롱을 열어 내 옷을 걸어 놓는 쪽으
로 걸었다.
  아침에 로키는 지난밤의  소등에 대해 아무 말이 없었다. 그렇게  일이 마무리
된 걸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눈앞에 보이지 않는 일은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로키, 그는 철저히 
자기 앞에 있는 것에만 
집중했다. 내가 7시쯤  일어나서 나오자 로키는 이미 롤빵 여남은  개를 구워 놓
고 부엌을 치우고 
쓰레기까지 갖다 버린  뒤였다. 나는 로키가 <앤아버  뉴스>지의 구인 광고란을 
읽고 있는 걸 보고 그가 
화가 났다는 걸  눈치챘다. 로키는 신문을 네 겹으로 접어서  광고란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돋보기를 쓰지  않고도 좁쌀 만한 신문  글씨를 어려움 없이 읽어  내는 그였다. 
로키는 연필심에 침을 
묻혀 여기저기에 동그라미를 쳤다.
  로키는 내게 화가 나면 즉시 일거리를 찾아  나서고, 나는 로키에게 화가 나면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다. 그게 아예 버릇이  되다시피 했는데 그 두 가지 다  사실 아무 효과
가 없었다. 아무도 
로키에게 일자리를 주려는 이가 없었고, 내가  아무리 연설을 늘어놓아도 로키는 
귀담아듣지 않지만 
우리는 고집스럽게 자기 방법을 고수했다.
  우리는 아침 인사도 나누지 않았다. 내가  부엌에 들어서자마자 로키는 침실로 
향했는데, 그건 나를 
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침대를 정돈하기 위해서였다. 로키는 질서를 좋아한다. 그
렇다고 청결한 것은 
아니다. 로키가 설거지를 하면  그릇에 밀가루 반죽이 여기저기 남아 있다. 로키
는 침대 커버를 덮어 
여며 놓기는  하지만, 베개를 털거나 시트를  팽팽하게 정돈하지는 않는다. 나는 
십대였을 때 방학만 되면 
늦잠이라는 사치를 즐길  수 있기를 갈망하며, 내가 잠자리에 들어  있어도 침대 
정돈만 할 수 있으면 
로키도 개의치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자주 했었다.
  로키는 자기 방식이 방해받는 걸 절대 용납치  않았고, 나도 데비를 만나기 전
에는 여자 문제에 
있어서만 큼은 할아버지의 방식을 순순히 따랐었다.
  나는 데비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녀를 집까지 데려왔다.  어쩌면 평화 
운동가들로 북적거리는 
강당에서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나는 그녀를 특별한 사람으로 점찍었던 건지
도 모르고, 로키도 그날 
밤 옷가지들이  흩어진 거실에 들어서는  순간 그런 예감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때 로키는 
무질서하게 어질러진 거실의 모습에 부아가 치밀었을 것이다. 그건 나도 안다.
  그러나 내 룸메이트인 로키에게 최악의 무질서는 내 인생에 들어온 여자일 터
였다. 나는 그 점을 
미리 간파하여 어떻게 해서든  할아버지를 설득하고 안심시킬 궁리를 했어야 함
에도, 잔뜩 화가 난 
로키가 설거지를 하고 부엌  바닥을 걸레질하느라 분주한 동안 어리석게도 1968
년식의 예절과 도덕에 
관한 강의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나는 설탕과 계피를 바른 롤빵을 먹으면서 현대의 로맨스에 대해 설명했다.
  "첫째, 여자를 집에 데려오는 건 절대  나쁜 짓이 아니에요. 둘째, 인간은 누구
나 사생활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어요. 셋째, 상황이 어떻든 간에 사람을 그렇게 함부로 내쫓을 순 없어
요."
  "내가 깬 게  너한텐 운이 좋았던 거야. 그렇지 않았다면  그 아가씨가 지금쯤 
경찰을 데리고 여기 와 
있을 거다."
  "경찰요?"
  "그래, 경찰. 여자를 집에까지 데려오고 게다가 옷까지 다 들였다가  그 여자랑 
결혼하지 않으면 넌 
약혼 불이행으로 감옥에 가게 돼."
  "지금은 1910년대가 아니에요. 약혼 불이행 같은 건 없어진 지  오래예요. 요즘 
여자들은 그런 
정도쯤으로 결혼을  기대하지 않는다구요. 더구나  저는 그 여자에  대해 달지도 
못해요. 옷가지를 둘 
장소가 없다기에 장롱을 빌려주려고 한 것뿐이라구요."
  "옷 둘 곳을  찾는다, 버스 터미널에 가면 로커가  있어. 거기 넣어 두면 아무 
문제없을 거 아니냐."
  로키는 햇볕에 말리려고  대걸레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곤 그냥  아침 산
책을 나가 버렸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문을 쾅 닫고 나가는 로키의  등뒤에 대고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서 나는 사실
이 그렇기를 바랐다.
  그해 여름  내내 나는  논문 예비 시험  준비에 매달렸다. 1400년  초서로부터 
1916년 헨리 제임스에 
이르는 영문학을 공부해야  했고, 읽어야 할 책 목록만 해도  촘촘하게 타이핑해
서 아홉 페이지에 
달했으며 그 책들의 태반이 두 권 이상짜리들이었다.
  물론 그걸 다 읽는 건 애초에 불가능이었지만,  서너 달 악착같이 붙들고 있으
면 해로울 건 없을 
터였다. 그래서 그 여름  내 직업은 회색 비닐 카우치에 누워서  두꺼운 책을 배
에 올려놓고 노랑색 형광 
펜을 오른손에 들고는 때때로  셰익스피어의 희곡이나 러스킨의 시구에 눈을 던
지는 것이었다.
  그걸 못마땅해하는 로키는 나를 '천하에 게으른 놈'이라고 불렀다.
  "이건 제 직업이에요. 보수도 받는다구요."
  그건 사실이었다. 대학원생에게 주는 특별할 연구 보조금을 받고 있었으니까.
  "벌러덩 드러누워서 하는 일이라곤..."
  로키는 손가락으로 내가 밑줄을 치는 흉내를 냈다.
  "봐라, 그럼 나도 일을 하는 거로구나."
  그는 손가락으로 허공에 연신 밑줄을 그려댔다.
  내가 대학원에서 하는 일,  즉 회색 카우치에 누워 책을 읽는  건 로키에게 직
업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나는 매일 눈만 뜨면 아침을 먹고 샤워를 끝내고는 카우치로 갔다. 로키
는 산책을 마치고 
돌아와 부엌으로 들어가며 내가 다 들을 수 있게끔 큰소리로 불퉁거리곤 했다.
  "천하에 게으르고 쓸모 없는 것."
  나는 그런  욕설쯤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으나,  로키가 <컨센트레이션> 
이나 <제퍼디> 같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볼  때면 하는 수 없이  조명도 침침하고 편안하기도 덜한 
침실로 쫓겨 들어가야 
했다. 로키는 즐겨 보는 텔레비전 쇼가 끝나면 내 점심을 만들었는데, 점심 메뉴
는 보통 청어와 양파와 
커피였다. 나는 워낙 오래  전부터 그렇게 먹어 왔던 터라 조금도  이상할 게 없
었지만, 이따금 그걸 
도시락으로 싸가서  잔디밭이나 북적거리는 학생 회관  구내 식당에 풀어놓으면 
모두들 슬금슬금 다른 
자리로 피해 가는 것이었다.
  로키는 정오에 점심을 잔뜩 먹고 오수를 즐겼다.  나는 오전 시간에는 주로 집
안에서 미적거리며 
할아버지와 함께 있는 걸 좋아했다. 책에 얼굴을  처박고 앉아 있어도 집안에 있
는 건 있는 거니까.
  그러다 로키가 내가 나가는 걸 더 좋아한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내가 부리나
케 오트밀을 먹어 
치우고 뜨거운 커피를 단숨에 들이켜고 가방에 책을 잔뜩 집어넣고 서둘러 나가
면, 로키는 내가 
부지런히 일을 한다고 생각하고 흡족해했다.
  나는 저녁때까지밖에 있다가 집에  돌아와 로키와 함께 월터 크론카이트가 진
행하는 뉴스를 시청했다. 
뉴스가 끝나면 로키는 반숙이나 스크램블 에그 같은 달걀 요리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8시 30분 취침, 
새벽 4시 기상.  그는 빵집에 근무하던 시절의 일찍 잠자리에  들고 일찍 일어나
는 습관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었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씩 로키가 목욕하는 걸 도와주었다. 매주  화요일은 간단
한 사유 정도로 끝냈고, 
금요일 오후에 대대적인 목욕을  실시했다. 안식일(유대교의 안식일은 매주 토요
일임)을 기념하기 위해 
욕조 속에 들어가서  몸을 깨끗이 씻었다. 그래서 나는 욕조  인명 구조원이라는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았다. 옛날 우리 집에 있던 커다란 욕조는 안심하고 쓸 수 있었다. 그러나 
아파트에 있는 욕조는 
크기는 그 반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경사가 가팔라서 들고나기가  수월찮고, 손
을 짚을 만한 손잡이도 
달려 있지 않았던 것이다.
  로키는 금요일이면 내가 늦게까지 수업이 있어서 네다섯시까지 캠퍼스에 있어
야 할 때도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맨 처음에는 욕조에 들고나는 것만 도왔으나, 로키가 머리
를 감는 게 영 신통치가 
않아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로키는 머리를 후닥닥 대충 감았다. 마치 팔
이나 다리를 씻듯 비누를 
칠하고는 비눗물을 헹굴 때에도 수도꼭지를 이용하지 않고 목을 한껏 뒤로 젖혀
서 헹궜다.
  나는 삼푸를 사용해  머리를 감기고 헹굴 때에도  차 끓이는 주전자에 따뜻한 
물을 담아다가 위에서 
부었다. 그러면 로키는 눈을 꼭 감고 숨을 참았다.
  우린 서로에게  알몸을 보이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서로  너무나 가까운 
사이여서 할아버지의 
목욕을 돕는 건  코고는 소리나 기도 소리를 듣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뜨거운 
몰에 겨드랑이께까지 
담그고 근육질의 팔을  늘어뜨리고 앉아 있는 할아버지를 보고 있노라면,  축 늘
어진 가슴과 뱃살에서 
어쩔 수  없이 나이가 느껴졌다. 그리고  그걸 가장 강하게 느끼게  하는 부분은 
발톱이었다. 할아버지의 
발톱은 마치 거북의 등뼈 같았다. 나는 집에  있는 손톱깎이로 한참 씨름을 하다
가 결국 포기하고 석 
달에 한번 꼴로 발  치료 전문의를 찾아가 발톱을 깎였다. 발  치료 전문의는 마
스크로 코와 입을 가리고 
돌처럼 굳은 나무를 갈 듯 로키의 발톱을 갈아냈다.
  목욕은 우리 둘에게 피로 회복제의 역할을 했다.  로키가 따스한 물 속에서 첨
벙거리고 있으면 나는 
이렇게 머리를 감으니 얼마나 멋져 보이냐고 놀려댔다.
  "할아버지, 귀를 덮게 옆머리를 기르세요.  그러면 꼭 비틀스처럼 보일 거예요. 
이디시어로 노래하는 
록스타는 없으니까 할아버지 독무대가 될 거라구요."
  나는 할아버지의 흰머리 몇 가닥을 귀 끝에까지 잡아늘이면서 말했다.
  "그러면 십 년은 젊어 보이실 거예요."
  "나는 젊어 보이고 싶은 생각은 없다. 어린애처럼 보이게 차려 입고 싶지."
  내가 등과 다리를 말리는 걸  도와주고 나면 로키는 아침에 양말을 속에 넣고 
똘똘 말아서 화장실 
뒤쪽에 챙겨 놓은 아래위가 붙은 깨끗한 속옷을 꺼내 입었다.
  나는 무릎을 꿇고  앉아 할아버지의 양말을 신겼다. 양말을 다  신으면 로키는 
자기 발보다 족히 한 
사이즈는 더 큰 양가죽 슬리퍼를 꿰어 신었다.  일단 미끄러운 타일이 깔린 욕실
까지만 내 부축을 받고 
안전한 암녹색 카펫  위에 다다르면 내 손을 뿌리치고 서둘러  침대로 달려갔다. 
침대 위엔 아침부터 
준비해 둔 갈색 양복과 깨끗한 와이셔츠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사실 로키가 잠든 뒤에 외출하는  건 나였지만 파티에라도 가는 듯 옷을 차려 
입는 건 로키였다.
  로키는 촛불을 켜고  포도주를 앞에 놓고 기도를 올렸다. 따스한  음식을 덮었
던 흰 보자기를 걷고 
나면, 식사 기도를 올리기  전에 자기 작품을 경탄하듯 들어올렸다. 그리곤 내가 
빵맛이 훌륭하다고 
칭찬하기를 기다렸다. 나는 잠시 뜸을 들인 뒤에야 칭찬의 말을 했다. 그 다음에
는 기도는 선행되지 
않지만 신성함에 있어서  다른 의식에 결코 뒤지지 않는 순서가  이어지는데, 할
아버지가 내 뒷덜미를 
잡고 가까이 끌어당겨 키스를 하는 것이었다.
  "안식일을 축하하며. 자, 먹자."
      7.셰익스피어 사건
  나는 혹 데비를 만날 수 있을까 해서  반전 시위마다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만
나서 무얼 어떻게 
하겠따는 작정은 없었고  그저 다시 얼굴을 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미시간 대
학 학생수가 3만 명이나 
되었지만 시위대에서 사람을  찾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시위에 참
여하는 학생은 늘 그 
얼글이 그  얼굴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전에  데비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게 놀라웠지만 시험 
준비로 책만 들여다 보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싶었다.
  처음 만났던 그 다음날, 나는 켐펴스 한가운데에  종일 죽치고 앉아 있으면 그
녀를 볼 수 있겠지 
생각했으나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사흘째 되는 날에는  레인보 인민당 
본부에까지 찾아가서 
그녀의 이름을 댔다. 몇 사람을 붙잡고 물어도 데비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곳
에 묵고 있는 사람들의 
명부 같은 것도 없어서 할 수 없이 두 시간씩이나 바닥에 죽치고 앉아서 팜플렛
과 낡은 잡지들을 
뒤적거리며 가끔씩 18세기 시를 읽기도 하며 기다렸다. 그러나 헛수고였다. 그녀
는 커피 하우스에도, 
서점에도, 학생 회관에도, 따스한  여름날이면 누구나 한 번쯤은 나와 앉은 도서
관 사이의 잔디밭 
DIAG(diagonal, 비스듬한 경사지)에도 없었다.
  나는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며  수시로 일어나 나가서 여기저기 데비를 찾아다
녔다. 로키에게 그런 
수모를 당하고 쫓겨났으니 우리 아파트러 찾아올  리는 만무였지만, 내가 강의를 
맡고 있다는 걸 얘기해 
주었던 터라 혹시  쪽지라도 남기지 않았을까 싶어서  내 우편함을 열심히 뒤졌
다.
  마침 나는 르네상스 시대의연애시들을  훑고 있었는데 그것들도 내 마음에 위
안이 되지 못했다. 그 
시들은 하나같이 남자가 여자에게  늙음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으니 망설이며 시
간만보내지 말고 어서 
마음을 열라고 경고하는 내용이었다.  1600년경에는 남자들마다 '이리 와서 나와 
함께 살아 주오, 내 
사랑이 되어 주오'를 입에 달고 다녔던 모양이었고, 데비에 대한 나의 공상을 부
채질하는 데 그만한 
것은 없었다. 나는  데비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기에  셰익스피어와 크리스토
퍼 말로의 상상력으로 
자세한 부분을 대신했다.
  나는 로키에게  두 번 다시 그녀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로키도  묻지 않았다. 
로크는 자신의 행동이 
결정적인 위력을 발휘하는  걸 좋아했다. 그가 내쫓은 사람은 신만이  다시 들일 
수 있었다. 어쨌거나 
로키는 내게 새 친구를 붙여 주었다.
  그러니까 목요일 아침  7시 반경이었다. 밤을 새다시피 하고  공부에 매달렸던 
나는 한창 달게 자고 
있었다. 로키는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아침에 캠퍼스 내에 있는  유대교 회당에 
나갔다. 예배를 보려면 
열 명은 필요했는데, 그 이른 시각에 열 명을 채으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
는 애초에 거부를 했고 
로키도 강요하진 않앗다.  아직도 나를 약사로 만들고 싶은 꿈을  버리지는 못했
을지 몰라도 나에 대한 
종교적인 환상은 버린 지 오래였던 것이다. 아무튼  로키는 굳이 날 필요로 하지
도 않았다. 이미 
회당에서 새 친구들을 사귄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철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들
이었고, 내가 보기엔 
아침 잠이 없는  무신론자들로 일주일에 두서너 번  회당을 찾는 것으로 신심의 
부족을 때우려는 족속들 
같았다. 어쨌거나 그 목요일  아침 곤히 자고 있는 나를 로키가  흔들어 깨운 건 
나를 기쁘게 해줄 
심산에서였다.
  "너 같은 친구를 하나 데려왔다."
  로키는 뒤로 물러서며  약간 낯익은 얼굴을 들이밀었다. 안면이 있는  같은 과 
대학원생이었으나 
이름은 모르는 친구였다.
  그 옅은 갈색 머리의 홀쭉한 친구는 내  베개맡에 서서, 졸음이 덕지덕지 묻은 
눈을 하고 속옷 
바람으로 침대에 누워있는 나에게 악수를 청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고 있
었다.
  나는 그들이 그냥 나가 주기를 바라며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일어나서 둘이 얘기 좀 해라."
  "전 피곤해요."
  "잠은 나중에 자도 되잖아."
  로키가 이불을  재치려고 손을 뻗는 순간,  나는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음을 
깨달았다.
  내가 침대에서 빠져 나오자마자 로키는 침대보를  정돈했다. 로키가 데려온 친
구가 손을 내밀며 자기 
소개를 했다.
  "조엘 커너요, 학교에서 여러 번 보긴 했지만 우리 둘이 공통점이 이렇게 많은 
줄은 몰랐어요."
  그로부터 5분 뒤, 로키는 커피를 따르고  커너는 시나몬 롤빵을 칭찬하는 광경
을 바라보며 나는 그와 
나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할아버님 말씀이 셰익스피어를 공부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고요. 그래서 좀 도
와주라고 
부탁하시더군요."
  커너가 내게 말했다.
  나는 로키의 장기인 '어디 두고 보자'는 위협을  담은 눈초리를 똑같이 흉내내
어 로키를 무섭게 
노려보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부끄럽게 생각할 거 없다, 공부는 혼자 못하는 거니까. 커너군에게 물어 봐라. 
셰익스피어를 잘 
아니까."
  그러자 커너가 겸손하게 말했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로 석사 학위를 받았죠.  내가 도움이 될 수 있
다면..."
  "도움은 필요 없어요, 그냥 가만히 놔두는 게 돕는 거라구요."
  "그렇게 고집 피우지  마라. 자기보다 많이 아는 사람에게 모르는  걸 묻는 건 
죄가 아니야."
  "잠깐만요, 할아버진 무슨 근거로 오늘 처음 만난 저 친구가 저보다 많이 안다
고 생각하시는 거죠?"
  "월요일이야, 우린 월요일에 만났다. 하지만 셰익스피어에 대해서는  오늘 처음 
알게 됐지. 커너군이 
어떤 학생에게 셰익스피어 얘기를 해주는 걸 듣고 이렇게 데려온 거다."
  "그럼, 셰익스피어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전부 저를 도울 수 있는 거
예요?"
  로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셰익스피어를 안다고는 생각지 않으세요?"
  "만일 안다면 계속 그렇게 붙들고 있찌 않겠지."
  나는 두손들고 말았다.
  "제가 언제 빵 굽는 것에 대해 참견한 적 있어요?"
  "넌 빵 굽는 것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으니까."
  "할아버진 제가 하루 열두 시간 이상씩 도대체 뭘 한다고 생각하세요?'
  "내가 알고 싶은 게 바로 그거다. 너는 책만 붙들고 앉아 있지 무엇 하나 나아
지는 게 없어. 약사는 
말이다, 모르는 게 있으면 의사에게 전화를 해서 물어 보고 배운다."
  나는 시종 몹시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는 커너에게 시선을 돌렸다.
  "당신 의사(doctor는 의사로도,  박사로도 해석될 수 있으며 문맥으로 보아  주
인공은 의사를 뜻한 
듯하지만 커너는 박사로 받아들인다)요?"
  "존슨 홉킨스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죠."
  "좋아요, 그럼 셰익스피어에 대해 말해 보시지."
  로키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도  셰익스피어를 배워 보겠다는 듯 의자에 앉았
다.
  "좋아."
  그러면서 흡족하게 내뱉은 한마디였다.
  불쌍한 커너! 사실 그는 나보다 2년이나 후배였다. 그는 신경직적으로 눈을 깜
짝거리며 말을 약간 
더듬었다.
  "미, 미안하지만 노트를 갖고 오지  않았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그렇지만 그
의 희곡에 대해 토론하고 
싶다면 나, 난 그의 비극을 제일 잘 알아요."
  "좋아요, 그럼 <리어왕>에 대해 설명해 보시오."
  로키는 그런 직선적인 질문을 좋아했다.
  "설명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르겠어요."
  커너에게 그렇게 가혹하게 구는 건 정당하지 못했지만 로키에게 본 때를 보여 
주고 싶었다.
  "리어왕의 모든 걸 설명하라구요, 그것도 빨리."
  "리어왕은 비극적인 체험을 하고  나서야 자신의 권력의 한계를 깨닫게 된  어
리것은 노인이었죠. 결국 
그는 사랑으로 구원받았구요."
  커너는 거기까지 설명하고 나서 생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 시나몬 롤빵을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나는 그가 가엾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는 유머라곤 모르는 성격 같았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리어왕>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지  곰곰이 생각하며 빵을 씹고 커피를 홀짝 거
리고 있는 그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나도 모르게 웃으이 터져 나왔다.
  "커너군은 중요한 얘기를  해주고 있는데 넌 그게  재미있는 모양이구나. 바로 
그런 점 때문에 넌 장차 
아무것도 못 될 게다. 너한텐 이해하는 것보다 웃는 게 더 중요하니까."
  "맞아요, 사실 리어왕도 저랑 똑같았죠. 리어왕이 어땠는지 아세요? 웃고  즐기
는 걸 하도 좋아해소 
아예 전문 재담꾼을  고용했죠. 옆에 따라다니며 재담이나 하는 그런  사람 말예
요. 그 어릿광대가 그 
작품의 주요 인물들 중 하나라구요."
  "리어왕이 아직 살아 있다면 넌 아무 걱정도 없을 뻔했구나. 네가 그 어릿광대 
일을 하면 될 테니까." 
로키는 그렇게 빈정대고는 커너에게 물었다.
  "그 왕이 또 누구를 고용했지?"
  커너는 어깨를 으쓱 올료 보였다.
  "문학이 직업 소개소란  거 몰랐어요? 햄릿에게 직업이 있었다면 그렇게  많은 
문제들을 일으킬 
시간이나 있었겠소?"
  내가 커너를 향해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죠.'
  커너의 대꾸였다.
  "희극들을 보면 남자들이 숲속을  누비고 다니며 이 여자 저 여자에게  사랑한
다는 말을 하는데, 그중 
과연 몇 명이 약혼 위반으로 감옥에 같을 것 같소?"
  "많은 수가?"
  커너가 어림짐작으로 말했다.
  "전부 다지, 아무렴. 그래야 마땅하구."
  로키는 그렇게 못박고는 나를 보며 말했다. 
  "너도 명심해라."
  로키는 커너와 내가 마신 빈 컵을 들고 일어서며 덧붙였다.
  "봐라, 아까는  나한테 화가 났었지. 하지만  이렇게 뭔가를 배웠잖니.  커너군, 
저 아이가 셰익스피어에 
대해 저대로 아는가?"
  "그런 것 같습니다."
  커너가 대답했다.
  "좋아, 그럼 이제부터 다른 걸 배우러 가거라."
  그날 오후 커너가 도서관으로 찾아왔다.
  "종일 두 분에 대해 생각했어요. 그런 모습은 난생 처음 봤어요."
  "우리 할아버지 말이요, 아니면 나 말이오?"
  "둘 다요. 난 로킹게 정말로 매로당했어요. 언제 또 찾아가도 되겠어요, 아까처
럼 아침 여덟시에는 
말구."
  "나한테 뭘 더 가르치고 싶소?"
  "아니, 배우고 싶어요."
  로키가 그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어느 날 아침  식사를 하러 부엌에 들어가 보
니 커너가 글자 그대로 
가죽끈에 묶여 있었다.
  성물함(유대교 기도 도구의  하나. 가죽끈으로 연결된 두  개의 조그마한 검정 
상자로 이루어지며 
이마와 왼쪽 팔뚝에 부착함)의 나무 상자와 가죽끈이 그의 팔과  목을 친친 감고 
있었다. 성질도 급하고 
또 커너가 유대식  기도 절차에 대해 그토록  무지하리라곤 생각지 못했던 로키
가, 제 셰익스피어 
전문가를 복잡한 기도 도구로 포박해 버린 것이다.  나는 그 서투른 신참자가 가
죽끈을 푸는 걸 도왔다.  
로키가 커너에게 언짢은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팔에 일곱 번을 감고 나서 이렇게 하는 거야."
  그리곤 능숙하게 가죽끈을 팔뚝에 감아 보였다. 성인식 이후부터, 그러니까 81
년 간이다 매일같이 
해온 절차였으므로 이미 도가 튼 솜씨였다. 로키는  서툰 커너를 위해 천천히 시
범을 보일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그리 어렵진 않아,  저애도 배웠으니까. 어쩌면 아직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르
겠군."
  나는 아직 잊지 않고 있었던 터라 커너에게 천천히 시범을 보였다.
  "이제 피차 공평하게  됐군요. 저 친구는 나한테  셰익스피어를 가르쳤고 나는 
저 친구한테 기도법을 
가르쳤으니까."
  "아니, 그렇지 않아. 셰익스피어는 중요하지 않지만 이건 중요하니까."
  로키의 대답이었다.
  로키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인 커너는 몇 주 지나지 않아 햄릿보다 히브리어
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그를 특별히 친구로 점찍은 것도 아닌데  자주 만나 
정이 들다 보니 그가 
점점 좋아지기 시작했다.  스물네 살인 커너는 지난해에  이스라엘을 방문했다가 
유대 신앙에 눈뜬 
구도자였다. 그의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만일 그가 이스라엘이 아닌  인도를 방
문했더라도 힌두교의 
구도자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이스라엘의  시대적인 배경과 
커너의 성향이 잘 
맞아떨어져 그를 독실한 유대교인으로 만든 것이다.  사실 종교마다 경이로운 마
력을 지니지 않은 것이 
없고 처음 발견한 종교는 특히 더 그러하니까.
  커너는 여섯 살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그의 부친과 형은 커느를  범률가나 사
업가, 아니면 선량한 
시민이 되도록 키웠다. 그런데 이스라엘 여행이 그의  눈을 뜨게 해준 것이고 이
제 로키가 그 눈을 더 
활짝 뜨게 하고 있었다.
  커너는 몇 번 우리 집을  방문하고부터는 더 이상 로키를 이상화하지 않게 되
었다. 로키와 함께하는 
삶이 소풍처럼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란 걸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로키
에게서 이스라엘의 
매력을, 진정한 유대인의 모습을 발견했다.
  "로키는 나한테 엄격하지, 늘 내가 부족하다고 화를 내. 맥스  자네가 할아버지
의 어떤 점에 반항해 
왔는지 알겠어. 하지만 난 요즘 진정한 인생을 살고 있지."
  그가 나에게 토로한 말이었다.
  커너의 부친은 대학원은 꼭  마쳐야 한다고 우겼지만 본인은 즉시 이스라엘로 
이민을 가고 싶어했다.
  "2년이야, 아버지께  2년만 더 여기 남겠다고  약속했네. 2년 후엔  이스라엘로 
떠날 거야."
  커너가 직접 가서 보았던  1967년의 이스라엘은 6일 전쟁에서 몇몇 아랍 국가
들의 군대를 물리친 
뒤였다. 그리하여  나라 전체가 승리감에  도취해 있었고 국민  모두가 하나같이 
군인이었으며 모든 
군인이 영웅이었다. 누구라도 그런 이스라엘에 반하지  않는다는 건 어려운 일이
었고, 커너 같은 
사람에겐 아예 불가능이었다.
  로키와 커너가 종교와 시오니즘에 빠져 있는 동안에도 나는 데비를 찾는 일을 
중단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한 주일, 두 주일, 그러다 한  달이 지나자 결국은 포기하고 말았다. 그렇
게 열심히 찾아도 
보이지 않는  걸 보면 그녀는 앤아버를  떠난 거였다. 점차 그녀  생각이 잊혀져 
갔고, 사실 스치듯 만난 
사이인지라 그리워할 건덕지도  별로 없었다. 그녀의 알록달록한  샐내복은 여전
히 내 장롱 속에 걸려 
있었지만, 이제  그녀가 나타난다 해도 시험  준비 때문에 만날 시간도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팀을 위해서는 짬을 낼  수 있었다. 내가 그 팀의 
팬이 된 후 처음으로 
타이거스는 첫 페넌트 레이스에서 이기고 있었다.  데니 매클레인 투수는 30승에 
도전하고 있었고, 왼손 
투수인 미키 롤리치도  그에 버금가게 잘 던져 주고 있었다.  텔레비전으로 중계
되는 야간 경기는 종일 
책과 씨름한 내겐 커다란 즐거움이었다.
  로키도 보통 초반 몇 회는 보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타이거스가 어느 팀과 싸
우든 항상 상대편을 
응원했다. 로키가 타이거스에 등을 돌리게 된 건  한때 홈런을 쉰여덟 개까지 쳐
낸 적이 있는 유대인 
강타자 행크  그린버그가 트레이드되면서부터였다. 로키는  직접적으로 그린버그 
얘기를 입에 담진 
않았지만 타이거스 팀을 비방하는 한마디 한마디엔 그런 생각이 깔려 있었다.
  "타이거스는 힘이 없어, 홈런 타자가 없잖아."
  그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었다.
  나는 로키가 야구를 좋아하는게 놀라웠다. 그는 축구를 '돼지 새끼들이 진흙탕
에서 뒹구는 것'이라고 
불렀고, 농구에 대해서도 전혀  흥미를 보이지 않았지만, 야구 중게만 나오면 공
수 교대 시간에도 계속 
라디오를 틀어 놓게 했다. 점수가 어떻게 됐냐고  물었을 때 내가 타이거스 팀이 
지고 있다고 대답하면 
로키는 내게 우쭐한 시선을 던지곤 했다.
  1968년 여름  내내 그 우쭐한 표정을  지었던 건 바로 나였다.  타이거스 팀은 
페년트 레이스에서 
승승장구하고 있었고, 만일 월드 시리즈에 진출을 하게  되면 난 한 게임도 빼놓
지 않고 지켜 볼 
작정이었다. 다행히 예비 시험이 끝나는 다음  주부터 시리즈가 시작될 예정이니
까.
  한편 세계적으로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속속 터지고  있었다. 로버트 케네디 암
살 사건, 민주당 전당 
대회장 난동 사건, 존슨  대통령의 제출마 포기, 그리고 극성스럽게 계속되는 전
쟁들. 나는 그런 
시사적인 문제에 무관심하지  않았다. 로키가 그러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던 것이
다. 이제 그의 벗이 
되다시피 한 월터  크론카이트가 하루도 빠짐없이 뉴스를 전해 주고  있었다. 그
러나 문학 작품을 읽는 
데 깊이 빠져 있던 내게  텔레비전을 통해 듣는 현대의 뉴스는 1666년에 런던에
서 일어난 화재 서건보다 
가깝게 느껴질 것도 없었다.
  나 자신은 어수선한 사회 상황으로부터 고립되고자  했지만, 국무성이 내가 쌓
아 놓은 책의 울타리를 
뚫고 들어왔다. 징병 위원회에서 내  앞으로 우편을 보내 온 것이다. 나는 그 문
제에 있어서만큼은 
로키가 내 편이 되어  줄 것을 의심치 않았기에 그 우편을  로키에게 보였다. 나
는 전쟁에 반대하고는 
있었지만 징병 카드를  태워 버리지는 못했다. 그리고 캐나다 같은  곳으로 피신
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평소에 반전 사상을 갖고 있었는데도  막상 징병 카드를 받고 보니 나라의 부름
에 응하지 않는 것이 
반역처럼 느껴졌다. 나는 자신이 정당함을 알고  있었으나 정당성만 갖고는 충분
치가 않았다.
  로키와 나는 각자 빠져 나갈 방도를 모색했다.  나는 대학원 학생 과장을 찾아
가 의논을 했는데, 그는 
성적이 좋은 대학원생들은 모두 자동적으로 징병 유에가 되므로 걱정할 것 없다
고 말했다. 그러니 
애국심과 자신의 양심 중 하나를 고르는 힘겨운  선택을 할 필요는 없었다. 원래 
계획대로 학교에 남아 
공부만 하면 되었다.
  로키와 어머니는 나름의  묘책을 마련했다. 그들은 내가 열여섯 살  때 여드름 
때문에 치료를 받았던 
적이 있는 그랜드래피즈의  어느 피부과 의사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  여자 의사
는 집 안에 병원을 차려 
놓고 진료를  했는데 나는 거기서 다른  환자를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나이가 
로키 정도 되었다. 치료를 
받으로 그 병원에  찾아갈 때면 나는 초인종을  누르고 대문을 두드리고 하면서 
그녀의 보청기가 제대로 
작동하길 빌며 대문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로키는 1930년대쯤 그  여의사에게 화상 치료를 받은 적이 있었다.  내가 여드
름 치료를 받으러 다니던 
시절 그녀는 여든셋이었는데,  자기도 콜라만 마시면 여드름이  생긴다고 토로했
다. 로키가 보호자로 
따라가 주곤 했는데 갈  때마다 자기가 구운 빵을 들고 갔다.  의사는 나를 병실
로 쓰고 있는 거실에 
앉혀 놓고  내 얼굴에 플래시를 비췄다.  그리곤 세수할 때 다이얼  비누를 쓰고 
콜라와 초콜릿을 
피하라고 지시했다.
  치료비는 5달러였다. 나는 그 뒤로 10년이나 그녀를 보지 못했다. 버스를 타고 
그랜드래피즈로 달려간 
로키는 그날 밤 안에서 돌아왔다. 피부과 의사에게 소견서를 받아 온 것이다.
  닥터 헤릭의 소견서 내용은 이러했다.
  맥스는 군대에 들어가면  농포성 좌창이 생길 수 있음. 그러므로  징집 대상으
로 부적격하다고 사료됨.
  로키는 그 소견서를 읽는 내 표정을 지켜보다가 말했다.
  "그녀는 중요한 의사다, 그러니 군대에서도 그녀의 충고에 따를 거야."
  "할아버지, 군대에서 제 여드름 따위에 신경이나 쓸 것 같으세요?"
  "그들이 치료비 무는 걸 달가워할 거라고 생각하니? 가서 이 편지를 보이기만 
해. 결정은 군대가 
알아서 할 테니까."

 
      8.재회
  나는 무릎께에 뜨뜻한 감촉을 느끼고 화들짝 놀랐다. 아까부터 긁는 소리 같은 걸 간간이 
듣기 했지만 도서관 열람실에 개가 들어와 있으리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시험이 하루밖에 안 남았지만 나는 이미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월드 시리즈에 
대한 공상에 빠져 있었던 터라 무릎에 이상한 감촉을 느끼고 책상 밑을 살폈을 때, 개 한 
마리가 오래 전에 누가 씹다 붙여 놓은 껌을 떼어 내는 일에 골몰해 있는 걸 보고는 
혼란보다는 흥미를 더 느꼈다. 그러나 다른 친구들은 그렇지가 않아서 나는 개목걸이를 
잡아끌고 일층으로 내려가 밖으로 나갔다. 개는 밖으로 나오자 킁킁 냄새를 맡으며 
DIAG에서 기타를 티고, 원반던지기를 하고, 산책을 즐기고, 자전거를 타는 학생들의 무리를 
둘러보았다. 그러더니 헐렁한 갈색 상의를 입은 여학생에게 곧장 달려가서 껑충 뛰어올라 
그녀의 얼굴을 핥으려 했다. 여학생은 그 바람에 뒤로 넘어질 뻔했으면서도 깔깔거리고 
웃었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나도 개 못지 않게 쏜살같이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이제 그녀의 
안경은 다리 두 개가 온전히 붙어 있었다.
  "나, 기억나요?"
  내가 물었다.
  "아, 친절한 룸메이트를 둔 사람."
  우리 주위엔 학생들이 수백 명이나 되었고, 주인의 관심을 내게 빼앗겨 버린 개가 나를 
향해 컹컹 짖어댔다.  데비는 마침 옆에 있는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던 중이었으나 내 
눈에는 데비만 들어왔다.
  "별별 곳을 다 찾아다녔어요.'
  "여기에 없었어요, 여름 방학 동안 집에 가서 지내야 했거든요."
  르네상스 시인들의 시간에 대한 충고에 영향을 받은 나는 단 1초도 낭비하지 않았다.
  "보고 싶었어요, 나한테 한번 더 기회를 주겠어요?"
  데비와 얘기를 나누던 양복 차림의 가무잡잡한 사내가 헛기침을 했다.
  "실례지만, 지금 얘기중입니다."
  "이쪽은 비잔이에요, 이란 출신이죠."
  데비가 나서서 그를 소개했다.
  "방해해서 미안합니다."
  나는 사과하고 한 걸음 물러서긴 했지만 떠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가서 커피나 한잔합시다."
  비잔이 데비의 팔을 이끌며 말했다.
  "무례하게 굴어서 미안합니다. 내가 끼여들었다는 건 알지만 계속 데비를 찾아다니고 
있었거든요. 데비가 어디 사는지 알지도 못한 채 이대로 보낼 순 없습니다."
  데비는 비잔에게서 명함 하나를 빌렸다. 이란 국영 석유 회사의 황금색 문장이 찍힌 
명함이었다. 명함 뒤편에 주소와 전화 번호를 적어 준 뒤 데비는 비잔과 개와 함께 
캠퍼스를 가로질러 걸어갔다. 나는 우두커니 서서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초록의 캠퍼스가 끝나고 상점가가 시작되는 시테이트 스트리트 모퉁이에 거의 
다다랐다. 내 바로 앞에서 하레 크리슈나 교도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먼발치에서 보니 
비잔이 혼잡한 상점가를 가로질러 걸어가고 있었다. 먼발치에서 보니 비잔이 혼잡한 
상점가를 가로질러 걸어가고 있었다. 데비와 개는 다시 캠퍼스로 돌아왔다. 개가 먼저 
내려와서 혀로 내 뺨을 핥았고 데비가 뒤따라 달려오며 개를 불러댔다.
  "내가 기다리고 있는 줄 어떻게 알았어요?"
  "몰랐어요, 그냥 그러길 바랐던 거죠."
  데비는 아까 그 외국 학생이 아닌 나와 커피를 마셨고 어머니와 싸우고 가출했던 이야기, 
부모님이 차를 압수하고 히피 생활을 청산하도록 강요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흔해 
빠진 부모 자식간의 갈등 얘기였다.
  "그래서 부모님 뜻대로 했어요?"
  "물론이에요, DAR(Daughter of the American Revolution, 독립 전쟁 참가자의 자손에 
의해 조직된 애국 여성 단체)에도 가입하고 손톱 손질도 했는걸요."
  데비는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덧붙였다.
  "농담 아녜요. 보라구요."
  무광택 분홍 매니큐어 자국이 군데군데 남아 있는 게 아직도 보였다. 그때 처음 나는 
뽀빠이 팔뚝처럼 기형적인 데비의 엄지손톱을 보았다. 다른 손톱의 반밖에 안 되는 그 
찌부러진 엄지손톱은 그녀의 예쁜 손에서 마치 어릿광대처럼 보였다.
  "내 엄지 이상하죠?"
  "빨아서 그런가 보죠?"
  "그냥 그런 거예요, 나의 다른 결점들처럼."
  "그건 결점이 아니에요."
  나는 그녀의 엄지를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내 입술에 갖다댔다.
  "매니큐어가 맛있네요."
  "무광택 레몬 향이죠. 난 DAR에도 가입했어요. 트리시아 닉슨이라는 가명을 사용해서 
그렇지. 엄만 감격한 나머지 다시 앤아버로 보내 주셨죠. 반전 시위나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요. 난 공부만 해야 돼요."
  "공부 그거 지겨워요. 그때 처음 만난 뒤로 난 공부만 했지요."
  "그렇지만 신나는 가정 생활을 누리고 있잖아요. 그쪽 룸메이트가 양로원 같은 데서 늙은 
숙녀들을 데려오면 그쪽도 그렇게 야박하게 여자들을 내치나요? 농담 아녜요. 그런 일 여러 
번 겪었어요?"
  "그쪽이 처음이에요. 그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 바랄 뿐이지요."
  내가 약혼 위반 얘기를 들려주자 데비는 아주 좋아했다.
  "그럼 그분은 신사로군요. 나도 그런 게 좋아요. 거기 다시 가게 되면 우린 결혼해야 
되겠네요, 안 그래요?"
  "우선 시험 먼저 통과한 뒤에 얘기합시다."
  우리는 드레이크 레스토랑의 암녹색 칸막이 좌석에 앉아 있었다. 헐렁한 갈색 상의에 
고급 샌들을 신은 데비는 찢어진 청바지에 맨발이었을 때와 사뭇 달랐다. 그러나 그렇게 
여자다운 옷차림을 하고 있는데도 왠지 떠돌이처럼 보였다. 내가 손을 잡자 그녀의 슬픈 
갈색 눈이 기쁨으로 가득 찼다. 밖에서 그녀의 개 조지가 창문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조지는 
데비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시험 날이 되자 로키는 자신의 대형 보온병을 꺼내 커피를 끓여 넣어서 문 앞에 
놓아두었다. 1930년대쯤에 만들어진 그 보온병은 진짜 유리에 스테인리스 컵이 딸린 
것이었다. 로키는 일 다닐 때 매일 거기 커피를 넣어 갖고 다니며 마셨고 내게 줄 때는 
우유를 듬뿍 넣어 건네곤 했었다. 나는 문 앞에 놓인 보온병을 보고서야 로키가 내 공부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모르긴 몰라도 커너의 입김이 적잖이 작용한 
모양이었다.
  그 보온병은 로키가 내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나는 보온병을 열어 보지도 
않았지만 그냥 책상 앞에 놓고 보는 것만으로도 생애 최고의 행운의 물건이 되었다. 나는 
오리지널 커피가 담기 그 보온병을 일주일 내내 들고 다녔다.
  나는 그 주 내내 데비를 만나지 못했지만 밤마다 집에 돌아오면 전화통화를 했다. 
돌아오는 토요일 밤에 데이트 약속이 되어 있었고, 일요일엔 함께 월드 시리즈 오픈 경기를 
보고 싶었다. 데비는 사실 야구팬은 아니라고 말했다. 나는 어디서 경기를 봐야 할 지 좀 
걱정이 되었다. 원래는 집에서 로키와 함께 볼 계획이었지만, 만일 데비가 함께 보겠다고 
하면 대신 바에 가서 볼 심산이었다.
  우편함에 행운을 빈다는 커너의 쪽지가 들어 있었다. 고마웠다. 그러나 정작 행운이 
필요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였다.
  토요일 아침 회당에서 돌아온 로키가 아직도 잠자리에 누워 있는 나에게 소리소리 
질러대지 않는 걸 보고 나는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금요일에 시험이 
다 끝났으니 토오일만큼은 늦잠을 즐겨 보자는 생각이었으나, 로키가 그걸 조용히 묵인하는 
건 전혀 기대치 못한 일이었다. 로키가 침대를 정돈하러 오는 기미가 없자 나는 슬그머니 
걱정이 되어 부엌으로 나갔다.
  로키는 그릇을 꺼내고 있었다.
  "오늘 커너를 위해 특별 기도를 했다. 커너가 오늘을 넘기기 힘들다는구나."
  로키가 아는 건 그게 전부였다.
  나는 여기저기 전화를 해봤지만 아무도 내용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병원 전화 교환원은 
커너라는 환자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려 주지 않았다. 그러나 정오쯤에 중환자실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커너 씨 부탁으로 전화했습니다, 즉시 좀 와주시겠어요?"
  전화를 건 간호사는 커너가 지난밤 집에 돌아가는 길에 도서관 앞에서 총을 맞았다고 
했다. 총알이 그의 3번 척추에 박혔다는 것이다. 커너는 현재 안정 상태에서 신경 외과 
수술을 기다리고 있고 그의 가족들이 오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커너 씨가 당신을 찾고 있어요, 함께 기도를 하고 싶다고요."
  "살아나긴 하겠습니까?"
  "되도록 빨리 오세요."
  내가 여름 내내 회피했던 전쟁은 뜻밖의 모습으로 찾아왔다. 데비의 개와 여남은 명의 
학생들이 원반을 쫓아 달리고, 연인들이 손을 잡고 거닐고, 하레 크리슈나 교도들이 
찬송하던 저 DIAG, 지난밤 커너는 머리 위로 평화의 깃발이 펄럭이고, 여남은 명의 
학생들이 오가고 있는 그곳을, 모르긴 해도 이스라엘 생각에 골몰한 채, 분노한 주정뱅이 
곁을 지나쳐 걸어갔다.
  그 사내는 한 시간 전부터 도서관 앞에 서서 지나가는 학생들을 성가시게 굴고 있었지만 
그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미친놈이 길에서 행인을 괴롭히는 건 
흔히 있는 일이니까. 게다가 그런 인간들 중에는 미치지 않은 자들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자는 정말 미친놈이었다.
  그자는 부대에서 탈영한 상등병이었다. 정식 훈련을 받은 총 찬 군인이었다. 그날 밤 
옆구리에 책을 끼고 웃으며 캠퍼스를 오가는 대학생들은 그의 눈에 얼마나 자유롭고 
유유하게 비쳤을까. 학생들은 그가 소리를 지르며 난동을 부릴 때까지 그가 거기 
있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하다가 이거 웬 미친놈이냐는 듯 재빨리 피해 갔다. 커너도 그런 
학우들 틈에 끼여 미친놈을 피했지만, 불행히도 적에게 슬픔을 주기 위해 제조된 미군의 
총알이 그의 척추에 파고들었다.
  병원에 도착하니 간호사가 기다리고 있다가 널찍한 중환자실에 딸린 좁은 방에 누워 있는 
커너에게 안내했다.
  "수술 준비를 하는 중인데 환자가 면회를 원했습니다. 서둘러 주셔야 합니다. 환자에게 
손대지 마세요,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안 되니까요."
  간호사가 옆에 붙어 서서 잔소리를 해댔다.
  나는 커너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가 마주 손을 흔들 수 없다는 걸 그때까지도 모르고 
있었다. 커너의 말을 들으려면 허리를 굽혀 그의 입에 귀를 대야만 했다. 커너는 이마에 
작은 멍자국이 있을 뿐 얼굴은 멀쩡해 보였다. 나는 간호사의 말을 믿긴 했지만 그가 벌떡 
일어나서 의료 기계들을 헤치고 걸어온다고 해도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셰마(유대교 기도문)하는 것 좀 도와주게."
  커너가 말했다.
  나는 들고 간 기도책을 열어-물론 다른 때로 읽지만-주로 신자들이 임종 직전에 외는 
히브리경을 큰소리로 읽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기에 잠자코 기도서만 읽어 내려갔다. 죽어 가는 이라면 
그렇게 길게 기도문을 욀 수 없었으리라. 이윽고 유대인들에게 이마에 성물함을 붙이고 
문설주에 유대교의 표시를 붙이라는 구절이 막 끝나 갈 즈음 간호사가 내 어깨를 두드렸고 
커너는 수술 팀에 의해 실려 나갔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서 로키에게 모든 걸 얘기해 주었다. 단 한 가지, 병원을 떠나기 전에 
간호사가 들려준 이야기는 뺐다. 커너의 척추가 절단되어 살아나더라도 팔다리를 쓸 수 
없다는.
  로키는 리투아니아에서부터 쓰던 투박한 기도서를 들고 커너를 위해 기도했다. 그 
기도서는 여러 번 장정이 떨어져 나가서 스카치 테이프로, 보호 테이프로, 검은 전선용 
테이프로 덧붙인 것이었다. 나는 그 책의 너덜너덜하고 누렇게 바랜 종잇장을 볼 때마다 
수없이 다시 붙인 장정 못지 않게 고물이라고 생각했다.
  다섯시가 되자 커너의 아버지의 형이 전화를 걸어 왔다. 그들은 앤아버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조엘이 나를 불렀다는 얘기를 간호사에게 전해 들었던 것이다. 그들은 
수술실 밖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나는 데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를 집에 
없었다. 그래서 데이트 약속을 취소한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병원으로 갔다.
  8시 30분, 수술이 끝나고 의사가 나올 때까지 커너의 아버지와 형, 나는 대기실에서 
기다렸다. 수술은 더할 나위 없이 성공적이었다. 커너는 호흡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총알이 
2번 척추는 건드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목도 움직일 수 있을 겁니다."
  의사의 말이었다.
  "그리고 또요?"
  커너의 형이 물었다.
  "목 윗부분은 전부요. 눈, 얼굴."
  나는 커너 아버지의 얼굴을 차마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먼저 자리를 떴다. 커너의 
회복을 빌어야 하는 건지 말아야 하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커너에게 일어난 일에 대한 
분노와 슬픔으로 마음이 말할 수 없이 착잡한 가운데서도 문학 작품들 속의 이야기들이 
생생하고 섬세한 모습으로 마음속에 뒤엉켜 있었다.
  대학 병원 계단을 걸어 내려가는데 조지가 달려왔다. 데비가 가로등 아래 벤치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지?"
  "메시지를 남겼잖아요, 뉴스도 들었구. 이제 모두들 알아요. 벌써 범인을 체포했대요."
  데비는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정말 안됐어요, 정말로."
  타이거스는 일곱 경기만에 세인트루이스 팀을 물리쳤다. 그러나 나는 어쩌다 잠깐씩밖에 
경기를 볼 수 없었다. 그 주 내내 대부분의 시간을 중환자 실에서 커너의 심장 박동을 
포시하는 작은 스크린만 보며 지냈으니까. 커너는 하루가 다르게 건강해져 갔다. 그는 
의사에게 사지가 마비되었다는 말을 듣고도 낙심하지 않고 불타는 삶의 의지를 보여 모두 
놀라게 했다.
  커너는 병동으로 옮겨가자마자 공부를 하고 싶어했으나 병원에서는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 병동에는 모두 열 여섯 명의 환자가 있었는데, 그중 몇 명만이 팔을 쓸 수 있었고 
다리를 쓸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담당 간호사들의 일거리가 워낙 많았으므로 면회 
시간은 7시까지였다. 가족들이 아무리 불편해해도 병원 측에서도 면회 시간을 늦추려 하지 
않았다.
  "이곳 환자들은 모두 장기 입원 환자들이에요. 병원 규칙에 적응할 수 있을 거예요."
  수간호사 헬렌이 설명했다. 그 병동에 근무해 온지 10년이 다된 헬렌은 팔팔하고 
유능했다. 감히 그녀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커너는 담당 의사에게 논문 예비 시험을 준비해야 하는데 책을 읽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해서 특별 허가를 얻어냈다. 매일 밤 일곱 시이다. 영문과 학생들이 모두 그 일을 
자원하고 나서서 돌아가면서 당번을 맡았으나 며칠 지나지 않아 헬렌이 반기를 들었다.
  "그들은 공부를 하는 게 아니고 그냥 면회를 하는 거예요."
  그녀는 지원자 한 사람을 일찌감치 쫓아 버렸다. 가까스로 얻은 특별 면회 기회를 
박탈당할 지경에 이른 커너는 새로운 협상을 맺었다. 일곱시부터 아홉시까지 누군가로부터 
공부 도움을 받되 매일 똑같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헬렌도 그러면 놀고 싶은 
유혹을 피하고 공부에 전념할 수 있을 거라며 찬성했다.
  커너는 그 일을 내게 부탁했다. 그래서 나는 매일 규칙적으로 병원을 찾게 되었다. 일찍 
귀가해서 로키와 저녁을 함께 먹고 로키가 구워준 빵을 들고 집을 나선다. 7시 15분전에 
데비를 태워 병원으로 간다.
  내가 8층 병동에서 커너에게 책을 읽어 주고 있는 동안 데비는 병원 휴게실에서 공부를 
했고, 조지는 병원 앞 버스 정류장에서 우리를 기다렸다.
  로키도 가끔씩 커너 면회를 가긴 했지만 무언의 합의에 따라 히브리어 공부는 잠시 뒤로 
미루었다.
  데비와 나는 영화 구경도 자주 못 갔고 바나 파티에 갈 시간은 아예 없었다. 가끔씩 
우리는 병원에서 나와 잠시 도서관에 들렀고 부리나케 그녀의 아파트로 향했다.
  2월이 되자 커너를 쏜 사내는 3년형의 집행 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9.삼각관계
  로키는 내게 모종의 변화가 생겼음을 눈치챘다. 어떤 날은 새벽 한시, 두시가 지나야 집에 
돌아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아침 일곱시에 깨우는 걸 중단하지도 않았다. 
로키에게 아침 일찍 나를 깨우는 건 내 앞길을 결정하고, 내가 그 좁은 길을 곧장 
따라가도록 인도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임무였다.
  나는 아무리 피곤해도 자리에서 일어나 오트밀과 롤빵을 먹고 청어나 생선 구이나 삶은 
닭이 든 점심 도시락을 들고 서둘러 아파트를 나서야 했다. 이따금은 도서관에 앉아 몇 
시간은 버틸 수 있었지만 보통은 아예 도서관에 가지도 않았다. 곧장 데비의 아파트로 가서 
열시나 열한시까지 내처 잤다.
  데비는 내가 왜 그걸 참고 견디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그녀는 그다지 호녀가 
아니였던 것이다. 나는 데비의 어머니를 만나 보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홀로 데비의 아파트에 들어선 해리엇은 금이 간 리놀륨 바닥을 두발짝 딛더니 가방을 
들고 뒤따라 들어올 벨 보이라도 기다리는 듯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곤 거실 겸 식당 겸 
주방 공간을, 마치 흰개미나 파이프 물이 조금씩 새는 곳을 찾아내기라도 할 듯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나는 다리가 하나 부러져서 책으로 괴어 놓은 세 발 카우치 앞에 서 
있었다. 해리엇의 시선은 내가 버스 정류장의 표지판인 양 그냥 휙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데비에게서 어머니가 쉰에 가까운 나이라는 걸 들어 알고 있었으나 해리엇은 처녀 
같은 자태를 간직하고 있었고 엷게 화장을 한 얼굴도 나이가 무색하도록 고왔다. 표백한 
머리에 흰색 린네를 정장 차림이었는데, 이 아파트의 어느 곳에 앉아도 금방 얼룩이 묻을 
것 같았다. 해리엇은 앉을 마음이 전혀 없다는 걸 노골적으로 표시했다. 일단 거실 겸 식당 
겸 주방의 점검이 끝나자 빠른 걸음으로 침실로 들어간 그녀는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 버렸다. 데비는 묵묵히 서 있었다. 어머니도 딸도 서로 인사가 없었기에 
나도 말없이 서서 둘 중 한 사람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그 얼음장 같은 침묵을 깬 
사람은 해리엇이었다.
  "왜 지하란 말을 안 했니? 지하엔 쥐가 살아."
  그리곤 내 곁을 획 지나치며 문지기에게 하듯 고개만 까딱했다. 그걸 묵인할 데비가 
아니었다.
  "엄마, 제가 말씀드린 그 사람이에요. 인사 정도는 해야 되는 거 아녜요?"
  해리엇은 니키지 않는 듯 손끝만 내밀었고 내가 땀이 축축한 손으로 잡자마자 휙 
빼버렸다.
  그녀에겐 딸이 아프트가 도무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었다. 냉장고 모터 소리는 너무 
요란하고, 수도꼭지는 찔끔찔끔 샐뿐더러 수압도 형편없고, 매트리스는 너무 푹신하고, 
리놀륨 바닥은 지저분하고.
  이윽고 참다 못한 데비가 한마디 내질렀다.
  "엄마, 주택과에서 나오셨어요? 아니면, 우호적인 방문이세요?"
  "나는 우호적인 일만 하지."
  바야흐로 해리엇은 옷장을 점검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자네 물건은 어디 있나?"
  "제 집에요, 제가 이런 데서 살 사람으로 보이진 않으시죠, 안그렇습니까?"
  부엌에서 데비가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며 손가락으로 V자를 만들어 흔들어 보였다.
  "무슨 공부를 하나?"
  "문학요."
  "실용적인 건가?"
  데비가 눈짓으로 계속 공격하라고 부추겼다.
  "그럼요, 가장 성공적인 사람들 중에는 읽고 쓸 줄 아는 사람들이 더러 있죠."
  해리엇은 내 말을 싹 무시하고 카우치에 앉으려고 클리넥스로 먼지를 훔치다가 마음이 
바뀌었는지 그냥 선 채로 수표책을 꺼내서는 앞수표를 여섯 장 썼다.
  "집세다."
  "그럼 승낙하시는 거군요."
  "아니, 하지만 네가 앰대 계약을 맺어 놨으니 달리 아쩌겠니. 엄마랑 한 약속은 잊지 않고 
있길 바란다."
  "물론이죠."
  데비는 그렇게 대답하고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내가 반전 시위에 참가했어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맥스 말을 믿지 못하겠거든 계속 뉴스를 보세요. 폭탄이 차질 없이 떨어지고 있으니까."
  "내 딸이 자네에게 나를 전쟁광이나 되는 것처럼 말했을 거야. 나도 자네들 못지않게 
평화를 원한다는 걸 저앤 믿지 않지. 다만, 난 베트남뿐 아니라 거정의 평화도 원하네. 내 
딸이 2주마다 체포되는 건 원치 않아."
  "엄마, 내가 그러지 않았음 어디서 저런 재미있는 남자를 만날 수 있었겠어요.?"
  해리엇은 내가 정말로 재미난 남자인지 한눈에 가늠해 보기라도 하려는 듯 나를 
쳐다봤다. 그녀가 그렇게 나를 쳐다보고 있는 동안 나는 커피나 소다수를 드시겠냐고 
물었다.
  "아니, 됐네. 하지만 데비가 저 옷만 갈아입는다면 둘 다 데리고 나가서 점심을 사주지."
  데비는 이미 엄마를 위해 몸치장을 한 상태였다. 흰 블라우스에 꽃무늬 인디언 치마를 
받쳐입고 엷은 눈화장까지 하고 있었으니까.
  "제가 무얼 어떻게 입길 바라세요?"
  "브래지어를 안 했잖아. 그리고 정 그렇게 안이 훤히 비치는 치마를 입고 싶으면 
속치마도 입어라."
  데비는 침실로 들어가서 재빨리 청바지와,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것이 더 두드러지게 
강조되는 브이 네크라인 티셔츠로 갈아입고 나왔다.
  "좋다, 아까 그걸로 다시 입어라. 그 청바지는 이리 주고, 나가다가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게."
  해리엇의 체념 어린 목소리였다.
  데비는 원래 입었던 옷으로 도로 갈아입고 나왔고 모녀는 만족한 얼굴이었다. 마치 이제 
불가피한 대결을 마쳤으니 긴장이 풀린다는 듯.
  교외의 어는 레스토랑 안에서 해리엇은 거의 즐거워하기까지 했다.
  "내가 공격적이라는 거 나도 알아, 데비가 날 그렇게 만들지. 항상 말야. 자네가 데비를 
좋아한다면 나한테 감사해야 할걸세. 저애는 나와 정반대로 살려고 하고 내 생각에 그런 
노력이 성공적인 거 같으니까."
  "맞아요, 그치만 늘 힘겨운 몸부림을 해야만 하죠. 매주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이면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감고 싶은 욕구와 싸워야 하고, 잔디밭에서 골프를 치면 딱 좋을 
양지바른 날에 강의실이나 쥐가 득실거리는 아파트에 처박혀서..."
  벌써 보도주 한잔을 다 비운 해리엇은 술기운이 돌아서 간간이 웃기까지 했다.
  "쥐가 득실거린다는 말은 안 했다."
  "맞아, 그런 말씀은 안 하셨어."
  처음으로 해리엇의 말에 동의할 수 있게 된 걸 기뻐하며 내가 얼른 나섰다.
  그러나 해리엇은 나를 철저히 무시했다.
  점심을 먹는 동안 내내 데비는 말대꾸를 하지 않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해리엇은 
점심값을 내고는 지갑에서 크레디트 카드 두 개를 꺼내서 데비에게 건넸다.
  "삭스와 제콥슨 카드다, 여기에 그 상점이 있는지 모르겠구나. 앤아버도 조금은 발전을 
했으니까."
  데비는 그 카드들을 받았다.
  "마음대로 사용하렴."
  그날 밤 침대에 누워 책을 읽다 말고 데비는 침대맡 테이블에 달린 서랍을 열어 카드들을 
던져 넣었다. 서랍 속엔 이미 여남은 개의 카드들이 들어 있었다.
  "저것들 한 번이라도 써본 적 있어?"
  "아니, 그러면 엄마가 너무 좋아할 테니까. 엄마의 목적은 내가 카드를 쓰면서 돈과 
사치에 맛을 들여 엄마 멋대로 날 조종할 수 있게 만드는 거예요. 엄마 말을 듣지 않으면 
카드도 차도 다 빼앗고 학비도 안대준다고 협박을 할 수 있도록."
  "난 늘 부자들이 부러웠는데 데비를 보니 생각이 달라지려고 하는데."
  "난 부자가 아녜요, 엄마가 부자지. 엄마와 내가 극과 극이란 걸 잊지 말아요."
  사실 데비는 나보다 돈을 적게 쓰는 것 같았고 음식과 꼭 필요한 잡용품 이외엔 아무것도 
사지 않았다. 그러나 돈 귀한 줄은 모르는 것 같았다. 슈퍼마켓에서도 가격은 보지 않고 꼭 
고급 식료품만 샀으며, 자기가 얼마를 지출하는지 신경 쓰지도 않았다. 멀리 사는 친구에게 
장거리 전화를 걸어 전화 요금도 생각지 않고 내키는 대로 수다를 떨기도 했다.
  그건 모두 하찮은 일들일 수도 있으나 나로서는 적잖이 신경이 쓰였다.
  부모님의 경제적인 지배에서 벗어나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여 주려는 듯 데비는 
일자리를 얻었다. 보육 학교에서 점심 시간에 운동장에 나와서 노는 아이들을 돌보고, 오후 
3시 이후부터는 늦게까지 남아 있는 상급반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었다.
  나도 시간이 나면 거기 가서 소프트볼 시합을 하며 함께 놀았다. 내가 방망이를 잡고 
타자석에서 약 30미터쯤 물러나 철조망을 바로 등지고 서면 4학년 아이들이 '아저씨 
차례다!'라고 환성을 올렸고 나는 그걸 즐겼다.
  공은 데비가 던질 때가 많았는데, 그녀가 투수석에 서면 쳐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녀는 나 
못지않게 공을 잘 던졌고 나만 타석에 들어서면 언데 핸드에서 사이드암(옆으로 
던지기)으로 바꾸어 던졌던 것이다. 데비는 여학생 편에, 나는 남학생 편에 들어갔다. 그 
조무래기들은 매일 하는 시합임에도 대단한 열성으로 우리를 감동시켰다. 데비가 나타나기 
전에는 연승을 하던 아홉 살바기 남학생들은 내게 옛날의 영광을 되찾아 주길 기대했다.
  나는 어렸을 때 브리그스 경기장에서 산 타이거스 팀 야구 모자를 썼다. 기념품으로 고이 
간직해 둔 그 짙은 청색 모자는 어느덧 색이 바래고 찬란하게 반짝이던 D자 장식도 빛을 
잃었지만, 나는 다타석에 서서 투수와 눈싸움을 할 때 태양을 가리기 위해 그 모자를 썼다.
  데비는 나보다 키가 1센티미터 정도밖에 안 작았고 몸무게도 엿비슷했으며 나보다 몸도 
훨씬 날랬다.  그녀의 몸놀림은 아주 유연했다. 공을 던질 때뿐 아니라 수영을 하거나 
조깅을 하거나 조지에게 막대기를 던제 놓고 물어 오라고 시킬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에게 몸동작 단 한 군데도 버릴 것이 없었다.
  데비는 공을 던질 때면 머리를 말총 모양으로 묶어서 짧은 머리 꼬랑지가 야구 모자 뒤로 
삐쭉 나오게 했다. 그녀의 연갈색 모자에는 그녀의 아버지가 경영하는 공장의 로고가 붙어 
있었다.
  데비는 주저 않고 빈볼(투수가 일부러 타자의 머리 부근을 겨누어 던지는 공)로 타석에 
선 나를 위협하곤 했다.
  "준비됐어요, 미스터 썩은 사과?"
  그녀는 내 성이 애플이란 걸 이용해서 나를 놀릴 때면 미스터 썩은 사과(Mr. Rotten 
Apple)라고 불러댔고, 그러면 여자아이들이 입을 모아 아예 노래를 부르곤 했다.
  "미스터 썩은 사과! 미스터 썩은 사과!"
  우리 투수를 원한다, 배긁적이는 물러가라."
  남자아이들이 그렇게 극성스럽게 외쳐대면 데비는 일부러 더 배를 긁적여 보이고는 공을 
던졌다.
  낮에는 논문 쓰는 데 매달리다가 운동장에 나가서 아이들과 어울려 놀며 머리를 식히고, 
저녁때는 커너에게 책을 읽어 주고, 밤에는 데비의 아파트에 가고, 그렇게 내 하루하루는 
새로운 일과들로 꽉찼다. 그리하여 로키는 자연히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로키는 그걸 묵묵히 견뎌냈고 내 앞에서 구인 광고란을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나는 
할아버지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적어진 것에 대해 죄책감이 느껴질 때면, 내가 밖에 나가 
있는 시간이 많으니 그만큼 열심히 공부하는 줄 알고 기뻐하시겠지 생각하며 자신을 
위로했다. 나는 이제 로키가 아닌 데비가 구심점을 이루는 새로운 삶에 로키를 끼워 넣어 
보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저녁 식사는 하루도 빠짐없이 집에서 했지만, 로키와 뉴스를 함께 보는 일은 아예 
없어졌고 어떤 때는 목욕을 시켜 드려야 한다는 것도 잊고 후닥닥 나와 버리곤 했다. 
로키의 인생은 전혀 변함이 없었지만, 내 인생은 180도로 변한 것이다.
  나는 여간해서는 데비 앞에서 로키 얘기를 꺼내지 않았지만, 어느 날 그녀에게 
할아버지를 혼자만 있게 하는 것에 죄책감이 느껴진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죄책감이라구요? 세상에! 할아버지가 아침 7시에 깨울 수 있도록 새벽 3시에 시계를 
맞춰 놓고 슬그머니 일어나서 먼 길을 달려가는 사람이 할아버지에게 죄책감을 느낀다구요?  
나는 어쩌구요. 자기가 새벽에 조심조심 침대에서 빠져 나가 할어버지에게 달려가는 걸 
보고 나는 기분이 어떻겠어요?"
  "데비는 나말고도 다른 많은 걸 갖고 있지만 할어버지는 그렇지 못해."
  "야구 보는 걸 좋아한다면서요."
  "나와 함께. 혼자가 아니라 나와 함께 보는 걸 좋아하셔."
  "그럼 뭔가 소일거리를 만들어 드리면 되잖아요. 유대교 회당은 어때요?"
  "이미 예배 때마다 참석하고 있어. 그것만으론 충분치가 않아."
  "취미는요?"
  "할아버진 취미가 없으셔. 할아버지 같은 사람들은 일밖에 모르지.
  취미가 뭔지도 모를 거야."
  "과연 그럴까요? 내 생각엔 자기가 할아버님의 취미인 거 같은데. 그것도 제일 큰 취미."
  데비는 청어와 정어리, 삶은 닭이 든 내 도시락을 비웃었다. 그걸 자기 냉장고에 넣어 
주려고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이제나저제나 그녀 입에서 로키를 다시 만나 봐야겠다는 
얘기가 나올 때를 기다리면서도, 한편으론 그녀가 내켜 하지 않는 것에 안도감을 느꼈다.
  나는 데비에게 직접 결혼하고 싶다는 얘기를 하지 않고 커너에게 했다. 커너는 총에 맞고 
한 달 만에 다시 공부를 시작해서 병원 스태프들의 감탄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들은 커너를 
세상에서 가장 학구적인 학생으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영악한 
수간호사 헬렌이 조금씩 우리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간호사가 옆에 있으면 문학 
이야기만 했다. 잡담을 하고 있다가도 간호사가 의혹의 눈초리를 빛내며 귀를 기울이면 
시를 많이 외고 있는 커너는 순발력 넘치게 아무 시나 골라서 읊조리곤 했다. 특히 헬렌이 
근무를 서는 날에는 더욱 조심을 해야 했는데, 이따금 그녀는 침대 발치에 서서 우리 
얘기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우리에게 시간만 충분하다면 이 수줍은 처녀가 무슨 죄가 되겠소. 느긋하게 앉아서 긴 
사랑의 날을 어찌 보내야 할지 생각에 잠길 수 있으리니."
  헬렌이 옆에 와 있는 걸 보고 커너가 시 한 구절을 읊었다.
  "지금 잡담을 나누고 있다는 걸 알아요."
  헬렌이 말했다.
  "두 시간 내내 시만 외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가끔씩 잡담도 필요하다구요."
  내 대꾸였다.
  병실에서의 그러저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커너와 나는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헬렌이 
없으면 우린 마음을 터놓고 얘기를 나누었다.
  "난 영어 선생이 되고 싶진 않아.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지. 그냥 마지못해서 시늉만 
해왔던 것뿐이야. 사고를 당하기 전에도 내가 박사 학위를 받느냐 못 받느냐는 전혀 문제가 
안 됐었고, 지금은 더욱 그렇지."
  커너가 말했다.
  "학위를 받으면 일자리를 얻기가 쉽잖아."
  "난 일자리 같은 건 신경도 안 써. 자넨 어쩔 거지? 학위를 마치면 뭘 할 작정이야?"
  내가 데비와 결혼하고 싶다고 하자 커너는 한 가지 질문만 던졌다.
  "로키는 어떻게 하고? 로키가 함께 살겠다고 하실까?"
  "모르겠어, 그랜드래피즈로 다시 돌아가실 수도 있겠지만 그곳 회당은 더 이상 정통이 
아니고 할아버지 친구들도 모두 죽었어. 이젠 죽는 날만 기다리며 살게 될지도 몰라. 
인생에서 기대할 게 없으니까."
  "이스라엘로 가시는 건 어떨까?"
  "농담 마."
  "난 할아버지와 그렇게 멀리 떨어져서 살고 싶진 않아."
  "데비는 어쩌구?"
  나는 대답을 하기가 싫어서 헬렌이 근처에 와 있지는 않나 둘레둘레 살폈다.
  "힘들겠어, 응?"
  커너가 입을 열었다.
  "자네도 불평을 안 하는데 내가 불평을 하다니, 우습군."
  "내 마비된 몸이야 어찌해 볼 도리가 없지만 자네 문제는 해결이 가능한 거니까. 데비와 
의논은 해봤어?"
  "우린 로키 얘기는 꼭 필요한 경우에만 해. 데비에게 로키는 중요한 존재가 아니니까. 
렇지만 이제부터라도 고민을 좀 해봐야 되겠어."
  한편, 로키도 그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 고민을 하고 있었고 나보다 먼저 해결책을 
내놓았다. 이번엔 직장이 아니라 새 거처를 구하기로 한 것이다.
  어느 날 저녁, 로키는 카티지 치즈(쉰 우유로 만든 연하고 흰 치즈)와 복숭아 통조림을 
급하게 먹다 말고 불쑥 말했다.
  "방을 알아보고 있다, 넌 바빠서 집에 들어올 시간도 없고 나 혼자 이 넓은 아파트를 
차지하고 있잖니. 그건 돈 낭비야. 난 이렇게 큰 아파트는 필요 없다."
  로키의 생각은 우리 둘이 헤어져서 각자 캠퍼스 근처에 방 하나씩을 얻자는 것이었다. 
내가 이제까지 생각해 낸 그 어느 해결책보다도 근사한 것이었다.
  "그럼 할아버지는 언제 만나죠?'
  "회당에서 만나면 되지."
  내가 토요일에만 회당에 나가는 게 못마땅해서 잔뜩 비꼬는 어조였다.
  "그리고 또 어디서요?"
  "그거야 네 맘이지, 바쁜 사람은 너지 내가 아니니까."
  나는 로키가 정말로 그 생각을 실천에 옮기리라고 믿진 않았다. 그저 내가 너무 밖으로만 
나도는 걸 힐책하는 경고쯤으로 여겼다. 나는 로키의 교활함에 혀를 내두르며, 앞으로 집에 
있는 시간을 더 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로키의 말은 진심이었고, 잔뜩 흥이 나서 방을 구하러 다니는 
바람에 나로서는 차마 말릴 수가 없었다. 결국 로키에겐 매일 매달릴 일거리가 생긴 것이다. 
로키는 내 차를 타고 아침 일찍 캠퍼스로 가서 빅토리아풍 저택들과 눈에 거슬리는 2, 
3층짜리 현대식 주택들이 늘어선 길을 훑고 다녔다. 이곳에 오밀조밀하게 붙은 현대식 
주택들은 집장사들이 학생들에게 비싼 값으로 세를 주기 위해 지은 것이었다.
  낡은 셋집의 경우 운이 좋으면 싸게 세를 얻을 수 있었다. 학부 학생들은 그런 
셋방보다는 친구들도 있고 안전하기도 한 기숙사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숙사에 
구비된 텔레비전과 도서실, 그리고 입으로는 불평을 하면서도 규칙적인 기숙사 식사를 
좋아했다. 세를 얻어 살면 그 모든 걸 자기 돈으로 해결해야 하니까.
  그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방을 얻어 사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로키는 
활력이 넘치는 캠퍼스에서 살아갈 것이고 산책을 하다가 시위대를 만나기도, 원한다면 
강의실에 앉아 청강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손자와도 아침 7시와 저녁 식사 시간에 잠깐 
얼굴만 대하는 형식적인 만남말고 매일 4시에서 6시까지 실하게 함께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문제가 한꺼번에 해결될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잘된 건 이제 부담 없이 데비의 
아파트로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건 데비가 오래 전부터 제안한 일이었다.
  "교외 생활이 진력나면 내 아파트로 들어와요. 나야말로 진짜 장롱을 내줄 수 있으니까."
  나는 이미 데비의 장롱에 셔츠와 바지 몇 벌을 두고 있었으므로 합치는 걸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데비는 우리의 동거 생활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걸 쉬쉬하는 건 내 쪽이었다.
  로키는 캠퍼스 한가운데서 생활하게 된 것이 자못 신이 나는 모양이었다.
  "네가 무슨 박사가 될 수 있다면 세상 사람들이 다 될 수 있을 게다. 나도 될 수 있을지 
모르지."
  "아뇨, 할아버진 기껏 공부해야 박사는 못 되고 약사나 되겠죠."
  "농담 아냐, 나도 빵집을 갖고 있다면 아직 일을 하고 있을 게다. 하지만 공부를 
시작하기엔 너무 늙었지."
  "저처럼 종일 앉아서 이렇게 이렇게만 하고 있으면 저절로 박사가 되는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겠어요."
  나는 손가락으로 허공에 밑줄을 긋는 시늉을 했다.
  "나도 그게 어려운 공부란 건 안다, 넌 지쳐 있고 제대로 먹지도 않고 있어. 너무 말랐어. 
점심도 제대로 안 먹고 다니는 모양이야."
  "저를 살찌게 하려면 쿠키를 굽기 시작하셔야 되겠네요."
  "쿠키가 먹고 싶거든 다른 데 가서 알아봐라."
  "할아버지가 굽는 빵 때문에 살이 빠지는지도 모르는데요."
  "내 빵에는 아무 이상 없다."
  "글쎄요, 어떤 날은 그 흑빵에 설탕을 더 넣어야 될 것 같던데요."
  "바보 소리, 넌 책이나 붙들고 앉아 있어라. 빵은 내가 구을 테니. 앞으로 점심 도시락에 
찐 달걀 두 개씩을 넣어 줄 작정이다."
  "전 그렇게 많이 못 먹어요."
  "나중에 간식으로 먹으면 된다."
  나는 완숙 달걀을 기대했으나 로키는 3분간 삶은 반숙을 고집했다. 로키는 아침마다 달걀 
반숙 한 개씩을 먹었는데, 위쪽에 구멍을 낸 뒤 티스푼으로 내용물을 떠서 먹었다. 그러나 
나로서는 도서관 계단이나 학생 회관 식당에서 그 짓을 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데비가 보는 앞에서.
  로키는 완숙은 몸에 좋지 않고 반숙이 좋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나는 굳이 그 믿음을 
바굴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냥 조지에게 계란을 먹였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자 
콜레스테롤의 영향으로 조지의 털은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로키가 방을 구하는 일로 분주해지자 나도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그가 번스 파크 국민 
학교 앞을 지나는 사건이 터지기 이전까지는. 번스 파크 국민 학교는 데비가 아르바이트로 
아이들을 돌보는 바로 그 학교였다. 나는 철저히 주거 지구인 그곳까지 로키의 발걸음이 
닿으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으나, 그는 <미시간 데일리>에 난, 잔디 깎는 일과 집안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맡아 주면 차고에 딸린 방을 그냥 빌려 주겠다는 광고를 보고 좋아라 
달려왔던 것이다. 학생을 기대하고 있던 그 집 부부가 로키를 보고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는 
보지 않아도 상상이 간다.
  아무튼 그 일로 몹시 실망을 했던지 로키는 고약한 기분으로 학교 앞을 지나고 있었다. 
마침 홈 베이스에서 서 있던 나는 뒤에서 다가오는 로키를 보지 못했다.
  나는 방망이를 들고 서 있었다. 외야수들이 깊숙이 포진하고 있었고 선행 주자들이 
진루한 상태였다. 데비는 나를 노려보며 모자를 벗어 이마의 땀을 닦았다. 나는 방망이를 
흔들어댔다. 아이들은 나와 데비가 메이저 리그 선수들 흉내를 내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데비는 곧게 내려오다가 귀 아랫부분에서 약간 굽슬거리는 엷은 갈색 머리 칼을 
손으로 쓸어 넘겼다. 1센티미터 정도 길이의 애교 머리가 앞이마에 흘러내렸다. 그녀는 
살갗이 쉽게 타서 초봄인데도 벌써 얼굴이 다 갈색으로 그을려 있었다. 데비는 왜야의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등을 돌렸다. 그리곤 다시 돌아서서 누더기가 다된 공을 손으로 
주무르며, 글러브를 탕탕 치며, 투수판에 선 나를 노려보며 콧등에 주름을 모았다. 포수인 
루시 핸킨스가 글러브 낀 손에 주먹을 갖다 대는 사인을 보냈다. 나는 홈 베이스로 쓰고 
있는 찌부러진 우유 상자 끝을 톡톡 치며 외쳤다.
  "여기로 넣으라고, 배긁적이."
  내가 그렇게 외치자 데비는 보란 듯이 배를 긁적였고 우리 편 남자 아이들이 입을 모아 
외쳤다.
  "배긁적이! 배긁적이!"
  데비는 높은 속구를 던졌고 나는 보기 좋게 스윙을 당했다.  일부러 져준 게 아니었다. 
결국 난 스트라이크 아웃으로 물러났다. 여자아이들은 좋아서 팔짝팔짝 뛰며 데비에게로 
몰려갔고, 남자아이들은 제대로 가누기도 힘든 성인용 야구 글러브를 들고 서서 다음 
시합을 기약했다.
  "천하에 게을러 빠진 놈!"
  나는 거친 욕설에 뒤를 돌아보았다. 로키가 철사를 파도 모양으로 엮은 울타리에 얼굴을 
바짝 갖다 대고 서 있었다. 근처에 서 있던 아이들이 찔끔해서 물러났다.
  "이게 공부냐?"
  데비가 여자아이들 틈에서 빠져 나와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이봐요, 타석을 바꿔야겠어요."
  로키는 침을 탁 뱉고 뛰다시피 후닥닥 가버렸다.
  나는 저녁 시간까지 기다렸다가 차를 몰고 집으로 갔다. 로키는 식사 준비도 하지 않은 
채 앤아버로 올 때 내가 사준 잡낭에 벌써 짐을 다 꾸려 놓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들어 주시면 다 설명하겠어요."
  "네가 들어라, 나 방 구했다."
  "좋아요, 하지만 더 중요한 얘기가 있어요. 이제 더 이상 할어버지께 숨기고 싶지 않아요. 
저 여자 친구 있어요."
  "길거리의 개새끼들도 다 여자 친구가 있지."
  "한 시간 동안 아이들과 어울려 소프트볼을 했다고 해서 길거리의 개새기가 되는 
건가요?"
  "넌 천하에 쓸모 없는 놈이야, 내 할말은 그게 다야. 내일부턴 내 얼굴을 못 볼 게다."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저도 할아버지 못지않게 기쁘겠어요.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니 앉아서 얘기나 해요."
  "가서 그 여자랑이나 얘기해. 가서 그 여자 옷을 다 갖고 들어오라구."
  "저는 할아버지를 내쫓으려는 게 아녜요. 우리 모두 함께 살 수 있다구요."
  "창녀굴에 살고 싶었다면 그냥 그랜드래피즈에 남았을 거다. 거기에도 창녀굴은 
있으니까."
  로키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쾅 닫았다. 나는 데비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밤엔 
집에 있어야겠다고 말했다.
  "자기 할아버진 성질이 고약해요, 나한테 침까지 뱉었다구요. 그런데 그 대가로 밤에 
할아버지 곁에 있겠다구요. 할아버지가 바라는 대로."
  "그만둬, 할아버진 내일 여기서 나가실 거야. 그래서 마지막 밤을 함께 지내고 싶은 
거라구. 할아버지가 데비한테 침을 뱉은 건 미안해. 내가 대신 사과할게. 내가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있겠어?"
  나는 그날 밤 잠을 이룰 수없었고, 그건 로키도 매한가지인 모양이었다. 밤새도록 그의 
방에서 서랍장 여닫는 소리가 들렸다. 새벽 3시가 되자 로키는 물을 끓이기 위해 부엌으로 
나갔고 주전자가 휘파람 소리를 내기 시작할 때 욕실로 들어갔다. 나는 그 요란한 소리가 
이웃 사람들을 깨우기 전에 후닥닥 달려나가서 불을 껐다. 로키는 욕실에서 나와서 
아침마다 마시는, 레몬 반쪽의 즙을 짜 넣은 뜨거운 물을 마셨다. 나는 할아버지 맞은편에 
앉아 인스턴트 커피를 마셨다.
  "들어가서 자거라."
  "할아버지가 주무시면 저도 그러겠어요."
  "나한텐 지금이 아침이다, 짐도 싸야 되고."
  로키는 아침 7시에 나를 깨울 필요가 없었다. 나는 눈이 말똥말똥한 채 카우치에 누워서 
<투데이 쇼>가 시작될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로키의 잡낭이 문 앞에 놓여졌다. 
그가 애지중지하는, 발끝 부분이 흰색인 갈색 구두는 찌부러지지 않도록 즈크로 만들어진 
잡낭 손잡이에 따로 묶어 놓고 있었다. 형태를 보존하기 위해 신문지를 똘똘 뭉쳐 넣어 
보관해 둔 구두였다.
  로키는 나보다 훨씬 오래 묵은 갈색 더블 정장을 차려 입고 나섰다. 빨간 넥타이에는 
달걀 노른자 자국이 하도 많아, 마치 원래 디자인의 일부 같았다. 하얗게 센 머리는 곱게 
빗고, 양복 색깔과 어울리는 짙은 갈색 트위드 모자를 쓰고 있었다.
  내가 사준 청색 아디다스 러닝화만 아니라면 은퇴한 회사 중역 같은 멋진 차림새였다.
  로키는 자신만만해 보였고 사실 그랬다. 망설임이라곤 조금도 없는 그런 모습이었다. 7시 
5분쯤 로키는 무거운 잡낭을 질질 끌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서둘러 쫓아가서 짐을 차에 싣는 걸 도왔다. 로키는 마치 택시 승객처럼 뒷자석에 
떡 앉아서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내 옆좌석에 앉아 차가 새로운 길로 
접어들 때마다 길을 잘못 들었다고 잔소리를 해댔을 텐데 말이다. 우리는 묵묵히 차 안에 
앉아 있었고 나는 시동을 걸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로키가 얼음장 같은 침묵을 깼다.
  "출발해라, 안 그러면 버스를 탈 테니까."
  "가요. 어딘지 말씀을 해주셔야죠."
  로키는 바지 주머니에서 봉투를 하나 꺼내 주었다. 봉투의 접는 부분에 주소가 씌어 
있었는데 본 스트리트 16번지였다. 봉투의 발신인 주소는 대만으로 되어 있었다.
  길을 찾는 데는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 데비의 아파트에서 모퉁이만 돌면 바로 거기니까. 
나는 로키의 짐을 들고 로키가 야학에서 영어를 배우던 제1차 세계대전경 어느 유명한 대학 
교수와 그 가족들이 살았음 직한 낡은 3층짜리 조지 왕조풍 저택의 현관 계단을 올라갔다. 
뒤를 따라오는 로키의 태도는 너무도 냉담하고 형식적이어서 나중에 수고했다고 팁을 건네 
준다 해도 별로 놀랍지 않을 것 같았다.
  "어디예요?"
  로키는 계단 왼편에 붙은 방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고는 잔돈을 넣는 지퍼 달린 
지갑에서 열쇠를 꺼내어 문을 따기 시작했다. 부엌에서 김이 무럭무럭 나는 쌀밥에 코를 
박고 먹고 있던 중국인 넷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우리를 쳐다보았다. 나는 꼭두새벽에 
일어났던 터라 그들이 아침이 아닌 점심 식사를 하는 줄로만 생각했다.
  로키가 문을 따지 못하자 나와 동갑이거나 연상인 듯한 남자가 일어나서 다가왔다. 그가 
서툰 영어로 말했다.
  "실례, 내가 도와요."
  나는 내 소개를 했지만 로키는 잠자코 있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로키는 잡낭을 질질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에는 철제 침대와 의자 하나가 있었다. 그게 다였다. 책상도 램프도 
탁자도 서랍장도 없었다. 옷장이라도 있나 둘러보았으나 없었다. 원래는 그 방 자체가 
옷장이었던 듯했다. 거기에 작은 창문을 하나 내어 요술을 부린 것이 로키의 새 집으로 
둔갑한 것이다. 그 방의 크기는 거짓말 안 보태서 로키의 잡낭 길이의 세 배밖에 되지 
않았다.
  우리를 도와 짐을 들여놓아 준 예의 그 중국인 리처드 후앙은 그 비좁음에 자기가 공연히 
민망한 모양이었다.
  "작아요, 그렇지만 아주 편안할 거예요."
  로키는 벌써 애지중지하는 갈색 구두를 침대 밑에 두고 잡낭 지퍼를 열어 양말과 속옷을 
꺼내고 있었다. 두리번거리다가 그것들을 마땅히 놓어 둘 곳이 없자 그냥 침대 위에 올려 
놓았다.
  "이제 가봐라, 다 됐으니까."
  로키가 하던 일을 멈추고 내게 던진 한마디였다.
  로키는 내 등을 떠밀다시피 하여 내쫓고 얼른 문을 닫아 버렸다. 나는 리처드 황과 함께 
어정쩡하게 복도에 서 있었다. 식사를 하던 세 명의 중국인들이 다시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봤다. 리처드가 함께 식사좀 하자고 부엌 안으로 청했다. 나는 작은 식탁에 끼여 앉았고 
그들 중 하나가 밥사발과 젓가락을 건넸다. 그중에서 영어를 많이 하는 사람은 리처드와 
다른 한 사내뿐이었다. 그들은 영어를 배우고 싶어하는 실험실 조교나 수학 전공 
대학원생들이라고 했다. 그들과 함께 온 학생 하나가 영어 배우는 걸 포기하고 대만으로 
돌아가자 집주인은 그 학생이 쓰던 방을 로키에게 내준 것이었다. 그 집의 세입자들은 모두 
중국인들이었다.
  "저분 학생이예요?"
  리처드가 내게 물었다.
  "아뇨, 우리 할아버지예요."
  "방이 작아요."
  "방이 작아요."
  나는 메아리처럼 리처드의 말을 그대로 되풀이했다.
  나는 로키의 방문에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로키는 절대 그런 방에서 살 수 없었다. 
집에선 잠만 자는 실험실 조교 같은 이들만이 그럭저럭 견딜 수 있는 방이니까.
  영어가 짧은 리처드 후앙도 로키의 행동을 보고 뭔가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화난 표정과 
코앞에서 문을 쾅 닫는 행동은 사실 세계 어디서나 통하는 몸짓 언어이니까.
  "할아버지 화났어요?"
  "예."
  "방 너무 작아서?"
  "아뇨, 나한테 화가 나신 거예요. 여자 친구가 있다고."
  나는 목소리를 크게 하면 중국인 친구가 내 영어를 알아듣는 데 도움이라도 되는 듯 
큰소리로 말했지만, 리처드는 내 엉뚱한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미안하지만 그게 무슨 말예요?"
  이윽고 실험실 조교들은 아침 식사를 마쳤다. 그들 중 하나가 몸짓으로 내게 더 먹겠냐고 
물어 보는 예의를 차지고는 그릇과 젓가락을 씻고 남은 밥은 냉장고에 넣었다. 나는 
그들에게 식사에 초대해 줘서 고맙다고 사례했다. 여덟시가 되자 그들은 모두 일터로 갔다. 
지금쯤 모퉁이 너머어ㅔ 사는 데비는 샤워를 마치고 흰 대형 타월로 한 1분 가량 박력 있게 
머릿가죽을 문질러 물기를 닦은 뒤 청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있으리라. 이따금 그녀는 
아홉시 역사 강의에 맞추어 급하게 아파트를 나서면서 내가 갖다 준 로키의 시나몬 롤빵을 
베어물기도 했다. 내 얼굴을 봐서 마지못해 맛이 괜찮다고 말은 했지만, 사실 데비는 사라 
리 회사 빵을 더 좋아했다.
  식탁에 앉아 꼬박꼬박 졸고 있는데 로키가 문을 열고 나오는 소라기 들렸다. 화장실을 
찾는지 이방 저방 열어 보다가 일층에는 없다는 걸 알고 터벅터벅 이층으로 올라갔다. 나는 
로키가 변기 물을 내리는 소리가 들리기 전에 얼른 그의 방안을 빼꼼 들여다보았다. 로키의 
소지품은 모두 다시 잡낭 속에 들어가 있었고, 그가 애주중지하는 구두도 잡낭 손잡이에 
묶여 있었다.
  로키는 밖으로 나가서 진입로로 접어들었다. 나는 엿볼 심산은 아니었지만 부엌에 
앉아서도 밖이 다 보였다. 로키가 내 모습을 보아 주길 기대했지만 그는 고개도 들지 
않았다. 로키는 차고의 나무문을 열더니 고물 자동차 바퀴와 서류함들이 여기저기 뒹굴고 
있는 속에서 함석 쓰레기통을 찾아냈다. 그는 쓰레기통 뚜껑이 잘 맞는지 확인하고는 문 
가까이로 끌어당겨 놓고 차고를 닫고 나왔다. 그리곤 산책을 하러 데비의 아파트가 있는 
모퉁이 쪽으로 걸어갔는데, 나는 혹시 데비와 마주칠까 봐 뜨끔하면서도 이미 9시가 
넘었으니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데비가 오늘따라 늦잠만 자지 않았다면 말이다.
  식탁에 엎드려 깜빡 잠이 들었던 나는 문이 쾅 닫히는 소리를 듣고 후닥닥 일어났다. 
시계가 10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졸음을 쫓으려고 부엌 싱크대에 찬물을 받아 세수를 
하고 종이 타월로 물기를 말렸다. 10시 30분, 나는 로키의 방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로키가 
문을 열었다.
  "중국 청년들인 줄 알았다."
  "모두 나갔어요. 저녁 5시나 6시, 아니면 그보다 훨씬 늦게야 돌아올 거예요."
  "잘됐구나, 난 어차피 그들이 필요 없으니까."
  "방세는 얼마나 내시는 거예요?"
  "주당 20달러."
  나는 화난 표정을 지었다.
  "주당 20달러라니, 여기가 무슨 호텔쯤이나 되는 줄 아시는 거예요? 주당 20달러면 개인 
욕실에 부엌가지 딸린 방을 얻을 수 있어요. 집주인에게 사기당하신 거라구요."
  "그 개자식이 내 사정이 급하다는 걸 알았어."
  "당장 이사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군요."
  로키는 잠자코 고개만 끄덕였다.
  "운동장에서 저를 보고 곧바로 방을 얻으러 나선 거죠?"
  로키는 성난 눈초리를 던지긴 했지만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이 25달러를 부르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군요. 그거라도 내셨을 거 아녜요, 안 
그래요?"
  "여기선 일자리를 구하는 것만큼 방 구하기도 어렵다. 집주인들 위세가 대단해."
  "계약서에 서명하셨어요?"
  "아니."
  "주인한테 얼마나 주셨어요?"
  "2주일치를 선불했다, 40달러."
  "할아버지가 반대만 안 하시면 제가 집주인한테 돈을 돌려 달라고 편지를 쓰겠어요. 학교 
마크가 찍힌 편지지에요. 임대법에 대해서 얘기하면 주인도 꼼짝못할 거예요. 방을 세주려면 
옷장은 반드시 있어야 되거든요."
  "중국 청년들 방세도 내려 주라고 써라. 그 청년들은 법을 몰라. 집 주인놈은 그들한테도 
사기를 쳤을 거야."
  "그런 사람한테는 아무도 방을 빌리지 말아야 해요."
  나는 어느새 로키의 잡낭을 집어 들고 있었고, 로키는 말리지 않았다.
  "돈을 돌려 받도록 해드리겠어요."
  "절반은 너 가져라, 변호사도 그 정도는 수수료로 챙기니까."
      10.할아버지의 방황
  로키는 다시 돌아왔지만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미 떠나기로 마음을 굳힌 그는 
셋방 구하기 작전이 대실패로 막을 내리자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날 오후, 
떠나려는 마음이 잠시나마 누그러졌겠지 생각하고 마음을 놓고 있는 나에게 로키는 
지갑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어 건넸다. 얼마나 오래 지니고 다닌 쪽지인지는 모르되 거기엔 
디트로이트에 있는 유대인 양로원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
  "제게도 숨돌릴 시간 좀 주세요, 좀 쉬시다가 다시 나가시면 되잖아요."
  "난 여기서 나가기 전에는 못 쉰다."
  로키는 내게 양로원으로 보내느 편지를 받아쓰게 했다.
  '양로원 원장님께, 곳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나는 누구의 신세도 지지않고 살 수 있습니다. 
매달 120달러씩 노인 연금을 받으니까요. 현지는 손자와 함께 앤아버에 살고 있습니다. 
거기서 가깝죠. 손자가 데려다 주면 한 시간이면 되고 버스를 타고 가게 되면 두세 시간 
내로 갈 수 있습니다. 거기서 제일 가까운 버스 정류장이 어디죠?
  우리 형님이 리버노이스 애버뉴에 빵집을 갖고 있었던 고로 디트로이트를 잘 압니다. 
우리 손자의 집 전화 번호를 알려 드릴 테니 언제 가면 되는지 알려 주십시오.'
  그리곤 저 화려한 '허먼 굿스타인' 서명이 마지막을 장식했다.
  나는 로키가 부르는 대로 받아쓰긴 했지만 정작 봉투 안에는 다른 편지를 넣었다. '귀 
양로원에 들어가길 원합니다. 신청 서류를 보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쓰고 로키의 
서명을 그대로 흉내냈다. 그러나 편지를 부치지 않고 그냥 내 책상 위에 놓아 두었다. 
그키가 캠퍼스에 방을 얻겠다는 얘기를 꺼냈을 때만 해도 나는 잠시나마 일이 제대로 풀려 
가는구나 생각했었다. 그렇게 되면 매일 할아버지의 얼굴을 볼 수 있고, 설령 무슨 문제가 
생긴다 해도 그건 집주인과의 문제일 뿐이니까. 그러나 양로원은 전혀 다른 세계이다. 
양로원은 하나같이 까다로운 절차와 규칙들로 움직이는 지극히 관료적인 곳이다. 나는 
로키가 양로원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일주일, 아니 하루도 못 되어 뛰쳐나오리란 걸 알고 
있었다.
  "양로원에 들어갔다가 그곳 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다시 나오고 싶으면 
어쩌시겠어요?"
  "나오지."
  "어디로 가시려구요?"
  "그건 네가 걱정할 바가 아니다."
  "제가 걱정할 바가 아니죠. 하지만 할아버지 앞으로 오는 우편물은 어디료 보내죠? 
만약에 노인 연금이나 아니면 할아버지가 내야 되는 생명 보험금 고지서가 저한테로 오면 
어떻게 하냐구요."
  "주소는 바로바로 알려 주마."
  "정말로 그렇게 양로원에 들어가고 싶으세요?"
  "똑같은 얘기 자꾸 되풀이하기 싫다. 이제부터 양로원에서 소식이 오기만 기다릴 게다."
  로키가 도지히 고집을 꺾을 것 같지가 않아 나는 하는 수 없이 편지를 부쳤다. 그러나 
앞으로 일이 어떻게 되어갈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내가 셋집 얘기를 들려주자 데비는 깔깔거리고 웃었다.
  "한 일주일 거기 그냥 내버려둬야 되는 건데 그랬어요. 그래야 자기 할아버지도 뭔가 
깨닫는 게 있을 거 아녜요."
  "중국 청년들에게는 차마 그럴 수가 없었어. 아주 좋은 친구들이었거든."
  데비는 로키처럼 펄펄 뛰진 않았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나를 시험에 들게 했다. 로키와 나, 
데비는 이 삼각 관계가 오래가지는 못하리란 걸 알고 있었지만 로키와 데비 둘 중에서 누가 
떨어져 나가게 될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나는 데비에게 확신을 주려고 애썼다.
  "할아버진 옛날 여자 친구가 아냐. 그러니 꼭 할아버지와 관계를 청산해야 할 필요는 
없는 거라구."
  "차라리 옛날 여자 친구였음 좋겠어요. 그러면 적어도 죄책감 없이 실컷 화내고 질투할 
수 있으니까."
  "데비는 우리 할아버지를 좋아하지 않는데도 죄책감을 느끼지. 그러나 난 어떻겠어?"
  "자기가 힘들어하는 거 알아요. 그렇지만 난 자기처럼 늘 할아버지 생각을 할 순 없어요. 
나도 이제 내 앞길을 정해야 해요. 내가 졸업을 하고도 직장을 얻지 못하고 또 갈 데도 
없는 신세가 되면 부모님은 다시 집으로 돌아오라고 성화를 부리실 거예요. 그게 나한테 
얼마나 큰 고통인지 자기도 알잖아요."
  그로부터 일주일쯤 뒤, 데비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얘기를 꺼냈다. 그녀의 
아파트에서였다. 데비는 벌써 이를 닦고 부엌에서 꾸무럭거리고 있었고 나는 책에 코를 
박고 있었다. 내가 준비하고 있는 박사 논문은 17세기 멜랑콜리 문학에 대한 연구였다.
  데비는 내가 고개를 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아니면 얘기 좀 해도 돼요?"
  "얘기해."
  데비는 특대형 미시간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마치 짤막한 나이트가운 같았다. 그녀는 
내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오지 않고 건너편 창틀에 달랑 올라앉았다.
  "바바라에게 시카고로 가겠다고 했어요."
  "그럼 내가 공항까지 태워다 줄게. 언제 가는데?"
  "잠깐 다니러 가는 게 아니라 살러 가는 거예요. 졸업한 뒤에."
  "그럼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자기 마음에 달렸죠."
  "그게 무슨 뜻이야?"
  데비는 창틀에서 뛰어내려서 내게로 다가왔다.
  "나랑 같이 가요."
  "같이 가자, 그렇게 간단하게?"
  "왜 안 돼요?"
  "나는 어디서 일 하구?"
  "내가 부양할게요. 자기는 계속 멜랑콜리 공부만 해요. 내가 책임지고 자기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내가 그럴 수 없다는 거 알면서 그래."
  "아뇨, 그럴 수 있어요."
  "그만둬, 난 아직은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어."
  "자기는 그럴지도 모르지만 난 이제 결정을 내려야 해요. 장래의 계획을 세워야 
한다구요."
  "난 거기 포함되지 않나 보지?"
  "바보처럼 굴지 말아요."
  "데비의 말이 그렇게 들렸어."
  "절대 그렇지 않아요. 난 단지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을 말했을 뿐예요. 그러니까 자기도 
앞으로 어떻게 할건지 결정해요."
  나는 책을 덮고 가방을 챙겼다.
  "도대체 나한테 뭘 기대하는 거죠?"
  "내가 데비한테 기대하는 건, 시카고로 떠나겠다고 불쑥 통고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나와 
상의하고 함께 결정을 내리는 거야. 우리 커플 아냐?"
  "가끔은요, 하지만 대부분은 로키가 자기와 진짜 커플인 것 같아요."
  나는 문을 쾅 닫고 나와 버렸다.
  이튿날 나는 저녁 식사시간에 맞추어 로키가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들어가지도 않고 
데비에게 전화를 걸거나 그녀의 아파트로 가지도 않았다. 자정까지 도서관에 있다가 곧장 
집으로 가서 잠자리에 들었다.
  로키는 공적인 이야기를 할 때만 나와 말을 섞었다. 아침 7시에도 내 방에 들어와서 
흔들어 깨우는 대신 찻주전자가 요란한 휘파람 소리를 내도록 내버려두었다. 내가 그 
소리를 듣고 잠이 깨어 불을 끄러 나올 때까지 말이다. 내 아침상을 차려 주진 않았지만 
스토브에 내 몫의 오트밀을 남겨 두었고 롤빵도 만들어 놓았다. 점심은 내가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나는 로키와 데비 둘 다에게 넌더리가 났지만 데비에게 더 화가 났다. 나는 로키를 
다루는 법을 알았다. 평생 붙어살며 그의 방식에 따라왔으니까. 나는 로키에게 내 방식을 
받아들이게 하는 방법을 알았다. 그러나 그건 결코 쉽지 않았다. 고등 학교때 나는 토요일 
밤마다 포커를 하는 재미에 빠졌었는데, 로키는 나를 노름꾼이라고 욕하며 내 편으로 만들 
묘안을 짜냈다. 포커에서 딴 돈의 10퍼센트를 꼬박꼬박 바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포커를 
치고 돌아오면 로키의 모자에 보통 1달러나 1달러 50센트를 넣었다. 잃고 온 날도 
마찬가지였다.
  "넌 할 때마다 따니?"
  "로키가 물었다.
  "대부분요. 저는 포커를 잘 치거든요. 절대 모험을 걸지 않죠. 패가 좋지 않으면 그냥 
빠져요."
  "그럼 너는 노름을 하는 게 아니로구나."
  "노름이라기보다는 투자에 가깝죠. 정신만 바짝 차리고 있으면 아무리 많이 잃어야 고작 
2, 3달러거든요. 우린 판돈이 크지 않아요. 5센트나 10센트, 마지막 판엔 25센트 정도죠. 
그러니까 집중만 하면 일종의 직업 같은 거죠."
  그 말이 로키에게 마력을 발휘했다. 로키는 내가 상납한 10퍼센트를 한푼도 축내지 않고 
손수건에 꽁꽁 싸두었다가 내가 고등 학교를 졸업할 때 엘진 손목시계를 사주었다. 로키와 
나 사이는 매사가 그랬다. 로키는 내가 뭔가를 시작하면 무조건 반대부터 했다가 내가 
새로운 돌파구를 열어 보이면 그제야 수긍을 했다. 그러나 단지 그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로 하여금 만사에 책임감을 갖도록 했다. 포커의 경우에도 나는 할아버지께 설명 
드린 그대로 절대 허세를 부리지 않았다. 그걸 진짜 직업처럼 여겼다.
  로키는 그저 집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공기처럼 에워싸고 따라 다니는 격하고 
완고한 대모 같은 존재로, 나에게 이러저러한 소망을 갖게 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소망까지도 내게 심었다. 나는 늘 로키의 반대를 받아 왔고 그 반대와의 겨룸을 통해 
성장해 왔다.
  이튿날 데비가 전화를 걸어오자 나는 로키가 침을 뱉은 사건에 대해 그녀가 과민 반응을 
보이는 걸 나무랐다.
  "할아버진 그때 잡역부 자리를 구하러 같다가 퇴짜를 맡고 오는 길이었고 또 3주 내내 
방을 구하러 다녀도 허탕만 쳐서 잔뜩 실망해 있던 참이었어. 그런데 공부에 열중하고 있는 
줄로만 알았던 내가 놀고 있는 걸보고 좀 흥분을 해서..."
  "자기 할아버지가 운동장에 있던 아이들을 다 죽였어도 자기는 할아버지 편만 들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도 안되는 소리가 아녜요. 자기 어머니도 할아버지를 다룰 수가 없다고 했잖아요. 
누나들도 마찬가지구...게다가 친구도 없고..."
  "친구가 없긴 왜 없어. 다 죽었을 뿐이야."
  "변명 듣고 싶지 않아요. 난 자기 할아버지가 어떤 분이고, 또 무슨 짓을 하건 
상관안해요. 내가 바라는 건 자기를, 우리를 좀 가만뒀으면 하는 것뿐예요."
  "데비도 가족들에게 완전히 등을 돌리진 못하고 있잖아."
  "우리 엄마도 가족이에요. 자기도 내가 엄마에게서 벗어나는 게 현명한 일이라고 
찬성했잖아요."
  "그건 경우가 달라. 데비 어머니는 돈과 영향력을 지녔어. 이 세상에서 실권을 지니고 
있다구. 로키는 아무것도 없어. 전에는 일이 있었지만 이젠 일주일에 세 번 회당에 나가는 
것과 나밖에 가진 게 없다구."
  "아무튼 자기 할아버지는 나까지 갖진 못했어요. 앞으로도 그럴 거구요."
  데비는 내 전화를 끊자마자 시카고의 바바라에게 전화를 걸어서 졸업식 다음날 
도착하겠다고 말했다.
  1970년의 봄이 찾아왔다. 내가 앤아버에서 마지막으로 보낸 봄. 다른 때 같았으면 봄이 
되기가 무섭게 메마른 도서관 분위기를 견디지 못해 생명이 약동하는 DIAG로 뛰쳐나갔을 
나였지만 그해엔 도서관에만 틀어박혀 지냈다. 그렇게 나만 쏙 뺀 채로 캠퍼스엔 다시 
봄풍경이 펼쳐졌다. 강의실 안에서는 도저히 수업을 집중할 수가 없다는 학생들의 성화로 
영어, 역사, 심리학 할 것 없이 여남은 개의 강의들이 파릇파릇 돋아난 봄잔디 위에서 
이루어졌다. 때때로 경제학 야외 수업을 하는 광경이 눈에 띄곤 했는데, 정장 차림의 교수가 
바깥에까지 들고 나온 칠판에 도표들을 그리고 있었다. 장장 다섯 달간의 지리한 잿빛 
겨울이 꼬리를 감추고 화창한 태양이 얼굴을 내밀면 캠퍼스의 칙칙한 회반죽 건물들은 녹아 
없어지고, 싱그러운 풀빛과 티셔츠에 반바지 차림의 건강한 젊은 육체들만이 남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해 봄, 나는 도서관에만 처박혀 지냈고, 눈부신 태양이 캠퍼스를 찾아온 
지 2주만에 논문 두 장을 써내는 개가를 이루었다. 나는 봄날의 태양도 보지 않았고 데비도 
만나지 않았다.
  양로원에서 면접을 하겠다는 답신이 오자 나는 로키를 차에 태워서 디트로이트로 갔다. 
지난 몇 주 동안 잔뜩 골이 나서 다니던 로키는 그제야 좀 누그러져서 갈색 양복에 빨강 
넥타이를 매고 따라 나섰다. 고속 도로를 달릴 때 로키가 두 번씩이나 길을 잘못 들었다고 
잔소리를 하는 걸보고 나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 동안 나는 양로원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살아왔다. 머릿속에서 데비를 
떨쳐내려고 몸부림을 하듯 양로원 생각도 멀리했다. 그러한 노력의 커다란 성과라면 
'멜랑콜리'연구에 몰두한 나머지 족히 6개월은 걸릴 작업을 단 2주만에 해치운 것이다.
  로키는 단호한 의지를 보이려는 듯 미리 잡낭을 꾸려 놓고 살았다. 할아버지가 정말로 
양로원에 들어가게 된다면 나는 원하는 삶을 얻을 수은 있겠으나, 할아버지를 양로원에 
보내 놓고 마음 편히 살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4월 하순 오후의 햇살 아래서 우리는 견고한 빨간 벽돌 건물과 잘 가꾼 잔디밭 울타리로 
이루어진 양로원을 보았다.
  양로원의 방들은 모두 2인 실로 실용적인 측면을 우선으로 꾸며져 있었지만 카펫, 책상, 
램프, 장롱, 욕실까지 갖추어져 있어서 로키가 잠깐 세 들었던 본 스트리트의 그 방에 
비하면 대궐이었다.
  로키는 이번 방문이 면접만 보는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굳이 잡낭을 꾸려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우리가 거기 있는 동안 금세 빈자리가 나오면 어쩔래. 거긴 늙은이들이 득실거리는 데야. 
늙은이들은 방귀만 잘못 뀌어도 죽을 수 있다구."
  "그런 일이 생기면 대기자 명단에서 충원하지 마침 양로원에 와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을 
들이진 않아요."
  "그거야 네 생각이지, 방만 비어 있으면 난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어. 나야 내 몸 하나는 
남의 신세 지지 않고 거뜬히 추스르지, 많이 먹지도 않지, 그러니 한 10달러나 20달러 슬쩍 
찔러 주면 다 통하게 되어 있어."
  나는 요즘 세상에 겨우 10달러 찔러 주어서는 하다못해 타이거스팀 경기장에서 좋은 좌석 
얻기도 어이없다는 말을 하려다가 꾹 참았다. 로키는 그렇게 세상 물정에 어두웠다. 그도 
그럴 것이, 나와 어머니가 금전적인 문제는 거의 다 맡아서 처리해 왔으니까. 뿐만 아니라 
그는 미국에 온 지 반평생이 지났건만 생각하는 것도 살아가는 방식도 만사가 리투아니아의 
시골 마을에서 살던 때 그대로였다.
  미국은 2억의 인구와 1조 달러의 경제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로키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로키는 그 흔한 은행 구좌 하나 없었다. 백화점이나 가스 회사, 전화국에서 고지서가 
날아오면 로키는 직접 걸어가서 냈다. 달러 지폐를 몇 장 내고 페니 단위의 거스름돈을 
받았다. 6개월마다 한 번씩 3천 달러 짜리 생명 보험금 25달러씩을 내고 있는데, 1919년에 
처음 가 임할 당시만 하더라도 그 보험금은 주당 25센트(그러니까 6개월 치는 6달러 
정도)였다.
  로키는 슈퍼마켓에 가도 밀가룰, 설탕, 버터, 이스트, 계란만 샀고 그것들의 가격밖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 물건들은 값이 비싸지 않았다. 그리하여 로키는 매달 120달러씩 
나오는 노인 연금에서 몇 푼씩을 따로 저축할 수 있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집세도 로키가 반을 부담하겠다고 했으나 어머니가 막무가내로 혼자 
부담을 했다. 어머니와 나는 월세가 220달러라는 걸 할아버지에게 비밀로 했다. 월세가 
그렇게 비싼 걸 알았다면 로키는 당장 나가자고 보따리를 쌌을 것이다. 사실 대학원생의 
처지로서는 과분한 아파트이긴 하지만 조용한 동네라 로키가 긴 산책을 즐기기에 좋을 
거라는 생각에서 세일 얻은 것이었다.
  로키와 나는 그랜드래피즈의 집에서 쓰다 남은 잡동사니 물건들로 그 아파트를 치장했다., 
그러다 보니 제대로 어울리는 가구가 하나도 없었다. 빨강 색과 흰 꽃무늬가 그려진 의자는 
초록색 카펫 위에서 지나치게 튀었고, 다리가 앙상한 나무 테이블은 머리에 인 16인치 
텔레비전이 너무 무거워서 금세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벽에 붙은 장식이라곤 금칠 테를 
두른 대형 거울뿐이었는데, 어렸을 때 누나들이 그 앞에 서서 열심히 논쟁 연습을 하던 
바로 그 거울이었다.
  유일하게 새 가구가 있다면 식탁인데 그것도 변변치는 못한 것이, 상판에 포마이커 
처리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대신 두꺼운 플라스틱 테이블 보를 덮었고, 로키는 음식을 
흘릴까 무서워 이따금 자기 자리에 유포를 덧깔기도 했다.
  나는 닭고기나 쇠고기 같은 비싼 물건을 살 때는 로키와 함께 나가지 않고 혼자 쇼핑을 
했다. 로키가 금요일 저녁에 즐겨 먹는 생선 대가리는 앤아버에선 아무도 찾는 사람이 
없는지 공짜로 얻을 수 있었다. 우리 둘에겐 돈이 많지 않았다. 나는 양로원 서류를 
꾸미면서 우리가 얼마나 가난한지 깨닫게 되었다. 내가 대학에서 매달 강사료로 받는 돈이 
420달러였고, 거기에 로키의 노인 연금 120달러를 보태면 최근에 존슨 행정부가 정한 
극빈자 수준에서 간신히 벗어나는 정도였다.
  나는 주차장에서부터 양로원 건물까지 로키의 잡낭을 운반하는라 몸이 녹초가 되어 
있었다. 바야흐로 꽃피는 봄이라 그런지 아니면 기분이 좋아서인지, 로키는 애지중지하던 
갈색 구두를 신고 있었다. 로비에 들어서자 나는 로키가 도착을 알리러 사무실로 들어간 
사이 잡낭을 내려놓고 쉬었다.  무게가 30킬로그램은 됨 직한 옷가지들과 바빌로니아어 
<탈무드>를 지키며 그렇게 서 있노라니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나는 로키에게 제발 
이곳 담당자에게 10달러 지폐를 슬쩍 찔러주는 짓 따위는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해두었지만, 내 말을 귀담아 들을 그가 아니었다.
  양로원에 살고 있는 노인 대여섯 명이 로비의 가죽 카우치에 앉아 있었고 남자용 방들이 
있는 쪽에서 한 노인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그 노인이 카우치 3미터 전방에 다다랐을 즈음 
나는 그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노인은 마치 도랑을 건너듯 바지의 무릎 바로 윗부분을 잡고 
있었다. 노인은 그렇게 바지를 잡고 어기적거리며 카우치로 다가왔다. 예전부터 있던 
버릇이었다. 그는 우리 집에 들어올 때도 바지를 잡고 걸어 들어오곤 했었다. 이제 생각하니 
노인의 그런 버릇은 바지 주름이 구겨지지 않게 하려는 노력이었음 직하고 젊은 사적인 
기사도적인 상징으로 보였을 수도 있었겠다 싶다. 어릴 적 나와 내 친구들은 그를 
'키다리'라고 놀려댔었다. 아무튼 난 고등 학교를 졸업하고부터는 그를 만난 적이 없으며 
아직 살아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노인은 내가 먼저 손은 내민 다음에야 잡고 있던 바지를 놓았다. 허리가 굽긴 했지만 
키는 여전히 컸다. 노인의 부드럽고 찬 손에 잡힌 내 손은 마치 난쟁이 손 같았다.
  "슈나이더맨 어르신, 저를 기억하시겠습니까?"
  그러면서 이름을 댔더니 그는 알겠다고 했다. 로키가 관리실 앞에 서서 내게 잡낭을 갖고 
들어오라고 소리쳤다.
  "로키, 이 염병할 늙은이! 너 아직 살아 있었구나."
  슈나이더맨이 반가움을 표했다.
  로키는 빤히 쳐다보더니 대꾸했다.
  "자네가 여기 들어왔다는 걸 잊었었군."
  슈나이더맨은 예 친구를 환영하려 관리실 쪽으로 걸어갔다. 그 거구를 움직이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나 지금 바빠, 저 안에서 여자 분이 기다리고 있다구."
  "괜찮아, 괜찮아. 저들은 시간이 남아도니까. 여기선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다구."
  로키는 옛 친구와 악수를 나눌 동안은 기다려 주었으나 키다리가 포용까지 하려 하자 
뒤로 물러섰다.
  "난 가야 해. 잘 지내게, 슈나이더맨."
  "도망치지 마. 일 다 끝나면 깜짝 놀라게 해줄 일이 있으니까."
  슈나이더맨이 외쳤다.
  "저분은 연세가 어떻게 돼요?"
  나는 로키를 딸라 복도를 걸어 내려가면서 물었다.
  "내가 아니?"
  로키의 퉁명스런 대꾸였다.
  무거운 잡낭을 들고 로키와 보조를 맞추어 걷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면접 담당자는 편지에서 본 그 이름, 오크런트 부인이었다. 오십대 초반의 성격이 쾌활한 
그녀는 내가 잡낭을 들고 끙끙거리며 걸어오는 걸보고 재미있다는 듯 웃어댔다.
  "웃어서 미안해요. 비서가 이건 그냥 면접일 뿐이라고 얘기하지 않던가요?"
  "얘기 들었습니다. 할아버지가 고집을 부리셔서요."
  "혹시 위로가 될지 몰라 말씀드리는데, 면접을 보러 오면서 짐까지 들고 오는 사람은 
할아버님뿐만이 아니랍니다."
  "그것 봐라."
  로키가 호기 있게 나섰다.
  오크런트 부인이 우리를 데리고 다니며 양로원 이곳 저곳을 구경시키는 동안 로키는 
정중함의 선을 넘어 아예 굽실거리기까지 했다. 오크런트 부인에게 앞서 가시라고 정중히 
길을 비켜 주는가 하면 쪼르르 달려가서 문을 열어 주기도 하고, 방과 복도의 페인트칠이 
어쩌면 이리도 훌륭하냐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 어디 그뿐인가, 침대 시트를 
들추고 매트리스 상표를 살피더니 최고 브랜드인 시몬스 매트리스라며 알랑거렸다.
  "어머, 전 몰랐네요. 감사합니다."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 보니 슈나이더맨이 1930년대 영화에서 갱들이 썼던 회색 펠트 
모자를 쓴 어떤 노인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죄송하지만, 지금 면접중입니다."
  오크런트 부인이 말했다.
  "나, 해리 제플세."
  모자를 쓴 노인이 마치 자기 몸이 명함이나 되는 듯 불쑥 앞으로 내밀었다. 162센티미터 
정도의 키에 윤기 나는 회색 정장 차림이었는데 지금보다 몸무게가 20킬로그램쯤은 더 나갈 
때 맞춘 옷 같았다.
  "헤리 제프."
  로키가 아무 감정도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도무지 반가운 기색인지 아닌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나도 얼굴은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 이름만은 기억하고 있었다.
  제프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아이가 필시 엄마 치마꼬리만 잡고 다니던 그 꼬마 녀석이 틀림없으렷다. 너, 내가 
몰고 다니던 핸리 J.컨버터블(지붕을 여닫게 되어 있는 자동차)기억나니?"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가 다섯 살인가 여섯 살쯤 됐을 때지, 아마. 나한테 그 차를 태워 달라고 어지간히도 
졸라댔었지."
  나도 기억이 났다.
  "네 엄마와 할머니, 로키까지 나서서 너를 차에 못 태우게 했었지. 그냥 동녀만 한바퀴 
도는 것도 안 된다고 펄펄 뛰었어. 자동차 지붕이 없어서 감기 걸릴 거라구 말야. 너 아직도 
그렇게 마마 보이니?"
  "우리가 저 앨 차에 못 타게 했던 건 자네와 있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어. 아무렴, 잘한 
일이었지. 자넨 순 바람둥이니까."
  로키가 나서서 말했다.
  제프는 로키의 사촌 중 하나인 가슴이 풍만한 과부 배실과 데이트를 했었다. 그들이 
이따금 헨리 J를 몰고 그래트래피즈까지 달려왔던 일이 생각난다. 이제 배실과 제프의 얼굴 
모습은 흐릿해졌고 겨우 이름만 기억하고 있는 정도지만 제프가 몰던 헨리 J만큼은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차체 뒷부분에 붙어 있던 크롬 도금을 한 지느러미 모양의 
장식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배실은 나한텐 너무 늙었었지."
  해리 제프가 말했다.
  "하지만 너무 과분했었지."
  로키가 대꾸했다.
  오크런트 부인이 싸움을 말리려고 나섰다.
  "부탁입니다, 제프 씨. 몇 분 안으로 면접이 끝나니까 밖에 나가서 기다려 주시면 실컷 
옛얘기를 하실 수 있어요."
  "나는 저 인간이랑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로키는 오크런트 부인에게 단호하게 선언하고는 제프를 향해 말했다.
  "자네 아직도 죽은 사람들의 옷을 팔아먹고 있나?"
  제프가 어리둥절해 있는 나머지 사람들에게 내막을 설명했다.
  "내가 전시 잉여 물자 판매업을 한 적이 있는데 그걸 갖고 저러는 거야. 로키는 내가 
무덤에서 그 물건을 훔쳐다 판다고 생각했거든. 로키, 자넨 너무 오래 오븐에 대갈통을 박고 
살아서 머릿속이 텅 비었어. 원래부터 든 게 없었지만."
  "난 척 보면 사기꾼을 알아보지. 네 녀석은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도둑놈이야."
  "도둑놈이라구! 슈나이더맨, 자네가 말하게. 자넨 알고 있으니까."
  제프가 한껏 발돋움을 하며 말했다.
  "저 친구 사진이 신문에 났었어."
  슈나이더맨이 나서 주었다.
  "난 도둑놈이 아냐, 내가 도둑을 한 놈 잡았지. 경찰에 좋은 일 하나 해 준 거지, 뭐. 
오크런트 부인도 알고있어. 서류에 다 나와 있으니까."
  방안의 시선이 일제히 오크런트 부인에게 쏠렸다.
  "제프 씨는 악명이 높았죠."
  부인이 입을 열었다.
  "텔레비전에도 나갔었다 이 말씀야, 채널 2와 채널 13. 방송마다 나와 달라고 
야단들이었다구. 내 인기가 그 정도였어."
  "저승 사자한테나 인기가 있었겠지."
  로키가 비꼬았다.
  잔뜩 의기양양해진 제프는 로키의 말을 싹 무시하고는 목숨이 다하는 그날가지 지칠 줄 
모르고 떠들어댈 자신의 영웅담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때 난 모자 점을 복 있었지. 루스벨트 애버뉴의 해리네 모자점. 내 마지막 모자 
상점이었지. 손님 하나가 들어오더니 깃털 달린 모자를 사고 싶다고하더라구. 그래서 
밀짚모자, 중산모자, 펠트 모자, 중절모, 카우보이 모자 등등 종류별로 다있으니까 말만 
하라고 했지. 깃털은 거저 달아 주겠다고. 아니 그래, 그보다 더 친절하게 손님을 대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놈이 총을 꺼내어 내 가슴에 대더니만 돈을 내 놓으라는 거야."
  우리 다섯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정도로 좁아 터진 오크런트 부인의 사무실에서 제프는 
기어이 그 장면을 재연해 보였다. 그는 깃털 달린 모자를 찾는 도둑놈 역할을 맡았고, 
슈나이더맨이 모자점 주인인 그의 역할을 맡아 주었다.
  "내가 겁을 먹었을 거라고 생각하겠지? 천만의 말씀. 그때 내가 뭐라고 했는줄 알아? 
'나는 너 같은 놈들은 밑 닦는 종이만큼도 안 여긴다. 썩 꺼져!' 그랬더니 놈이 '그건 내가 
할 소리다.'그러면서 '정찰제'라고 써놓은 팻말을 치려고 퉁퉁한 손모가지를 뻗치는 거야. 난 
늘 카운터 아래 놓아두는 잭나이프를 집어서 잽싸게 놈의 코를 베었지."
  "코를요?"
  내가 놀라서 물었다.
  "직접 그 장면을 봤어야 되는 건데 말야."
  제프는 슈나이더맨을 설명대로 코를 베는 동작을 해 보였다.
  "그래서 살아 났나요."
  내가 다시 물었다.
  "살아났지. 잘라진 코도 병원에서 다시 꿰매 붙였는 걸. 하지만 다시는 모자 점을 털지 
못했지. 하기야 모자점도 내 가게가 마지막이었고 나도 가게를 닫고 여기로 들어왔지만 
말야."
  "왜 저런 자를 받았습니까?"
  로키가 오크런트 부인에게 물었다.
  "신사 여러분, 이제 그만 합시다."
  오크런트 부인은 그 말과 함께 사무실에서 나가 버렸고 로키가 황급히 그 뒤를 
쫓아나갔다. 나도 잡낭을 들고 허둥지둥 따라나갈 수밖에.
  제프가 사무실 문밖으로 머리만 빼죽 내밀고 소리쳤다.
  "로키, 여기 들어와서 오래오래 살기 바라네. 그게 자네에겐 가장 끔찍한 저주지. 여기 
와서 오래 살라구. 단, 나와 같은 층엔 살지 말고."
  오크런트 부인이 우리를 차까지 배웅했다. 그녀는 너무 웃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이 양로원에서는 그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없죠."
  "그놈을 쫓아내 버려요, 그렇지 않으면 난 안 들어와요."
  "그럴 순 없습니다, 이곳엔 규칙과 절차가 있으니까요. 할아버님도 잘 아실 거예요. 
아무튼 우리 양로원은 넓으니까 함께 살아도 자주 부딪치진 않을 겁니다."
  그녀는 앞으로 1개월 안으로 결과를 통보하겠노라고 말했다.
  앤아버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로키를 집에 내려 주고 캠퍼스로 갔다. 내 우편함에 병원 
재활 병동에서 온 편지가 들어 있었다.
  토요일 밤 커너 씨의 외출이 허가되었습니다. 잠깐 커너 씨를 데리고 외출하실 수 
있습니까?"
  그날은 4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커너가 9월초에 총을 맞았으니 무려 8개월을 병원에만 
갇혀 지낸 샘이었다.
      11.하루 동안의 외출
  그날 나에게 연락이 닿지 않자 커너는 간호사를 시켜 데비에게 전화를 걸도록 했다. 내가 
데비와 냉전중이라는 얘기를 하지 않았던 탓이었다. 커너는 워낙 꼬치꼬치 캐묻기를 
좋아하는 성격이라서 무슨 말만 꺼내면 어물쩍 넘어가질 못하게 해서 나는 그 문제에 대해 
아예 입조차 떼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매일 저녁 두 시간씩 공부하는 시간에 간호사의 
논을 피해 나룰 수 있는 잡담은 커너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모자랐다. 하긴 전신 마비로 누워 있는 그에게 나의 고민들이래야 사치스러운 투정에 
불과하니까.
  그러나 커너의 입장은 반대였다. 끔찍한 재난도 그의 호기심을 꺾어 놓지는 못했다. 
커너는 자기가 잠시 소외된 일상적인 삶의 모든 사소하고 구체적인 것들을 알고 싶어했다.
  데비에게서 전화가 왔다.
  "커너를 데리고 외출할 거예요?"
  "물론이지."
  "나도 같이 가도 돼요?"
  "그럼."
  "나한테 아직도 화났어요?"
  "음."
  "그럼 자기 기분 거스르지 않도록 할게요. 나도 그 자리에 있고 싶어서 그래요. 몇 
개월만의 외출이니 얼마나 신나는 일이에요."
  데비는 내가 커너를 휠체어에 태워 병원 카페테리아로 내려갔을 때 꼭 한 번 그를 만났을 
뿐이었다.
  그때 두 사람은 어색하게 몇 마디 주고받았다. 사실 커너는 총에 맞기 전에도 상대를 
불편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처음 만나 인사 소개한 지 5분도 안 되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뭐냐고 묻는 사람이니까. 데비에게도 그런 질문을 던지자 그녀는 나를 
가리켰다.
  나는 한동안 커너와의 외출만 생각하며 지냈는데, 그건 어디로 데려가야 하나 
궁리하느라고 그랬기도 했지만 사실은 데비를 만난다는 설램이 더 큰 몫을 차지했다. 
커너는 그의 친구이자 내 친구이기도 한 앨런 펄러스도 함께 초청해 놓았다. 뉴잉글랜드 
출신인 펄리스는 준수한 이목구비와 근사한 몸매를 겸비한 우리 과의 스타였다. 그는 포드 
재단 보조금도 포기하고 커너가 맡고 있던 1학년 영어 강의를 대신 맡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커나가 대학으로부터 쥐꼬리만한 월급이나마 계속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은 아무 
보수도 받지 않았다.
  앨런 펄리스는 커너와 나의 절친한 친구라는 점 말고도 무거운 휠체어를 옮기는데 꼭 
필요한 존재이기도 했다. 커너는 등은 물론 목까지 받쳐 주는 특수 휠체어를 사용했기에 
접어서 차 트렁크에 집어넣는 일이 쉽지 않을 터였다.
  앨런과 내가 어디로 가고 싶냐고 묻자 커너는 우리끼리 정해서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에게 
비밀로 해달라고 했다. 요컨대 자기를 깜짝 놀라게 해달라는 거였다. 우리는 미리 병원에서 
휠체어를 빌려서 분해하는 연습을 했다. 앨런의 폴크스바겐 트렁크에는 들어가지 않았지만 
내 셰비에는 겨우 들어갔다. 우리는 커너를 영화관에 데려가기로 하고 이틀 전에 미리 
스테이트 극장에 찾아가서 특별 주차를 부탁하고는 극장 내부를 둘러보며 계단과 화장실의 
위치를 점검했다. 당시만 해도 건물마다 장애자용 주차 구역을 따로 마련해야 하는 법규가 
없었던 것이다. 앨런과 나는 커너의 첫 외출이 되도록 완벽하게 이루어지도록 하고 싶었다.
  나는 데비와는 아무런 의논도 하지 않고 계속 화난 체했다. 그런데 금요일에 데비가 
전화로 말했다.
  "연주회표 네 장을 구했어요."
  나도 연주회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매년 봄이면 유진 오면디와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가 앤아버에서 한 달 간 연주회를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난뱅이 학생들보다는 
나이 든 음악 애호가나 디트로이트이 부유한 후원자들을 위한 연주회였다.
  커너는 음악을 사랑했다. 그는 늘 귀에 헤드폰을 꽂고 누워서 재활 병동의 단조로운 
일상을 견뎌 냈다. 다른 환자들이 마비된 수족을 움직여 보려고 눈물겨운 노력을 하는 동안, 
커너는 눈을 감고 모차르트의 세계에 침잠했다. 나는 그가 눈만 감으면 음악의 세계로 
빠져드는 걸보고 부러움까지 느꼈다.
  "셋째줄 가운데 좌석이에요."
  "돈이 엄청나게 들었겠군."
  "맞아요, 크리디트 카드는 그런 때 써먹는 거 아녜요?"
  "없었던 일로 하지, 데비 어머니의 돈으로 연주회에 가긴 싫어."
  "괜찮아요."
  "데비 어머니가 카드 청구서를 보기 전까지는 괜찮겠지. 하지만 나중에 데비가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그렇게까지 할 필욘 없어. 그냥 영화 구경이나 하면 되니까. 벌써 사전 
답사도 해두었고 특별 주차 공간도 부탁해 놓았어."
  "잠깐만요, 내 말을 더 들어봐요. 엄마가 먼저 제안한 일이라구요."
  "그거 놀랍군."
  "놀랄 건 없어요. 우리 엄마도 인정은 있거든요. 영혼이 없어서 그렇지."
  "그래도 내키지 않아."
  "자기가 내키고 내키지 않고는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안 그래요?"
  "좋아, 엄마가 한턱내는 걸로 받아들이지. 우리들에겐 데이트가 되나?"
  "데이트를 원해요?"
  "모르겠어, 그 자리엔 커너와 앨런도 있을 거고 데비는 다른 사람이 낀 데이트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잖아."
  "난 다른 사람 신경 안 써요. 단 한사람 빼고는. 그런 일로 또 싸움을 해야겠어요? 그저 
조엘을 데리고 외출하는 걸로만 하죠. 그 하나만으로도 하룻밤이 빠듯하니까."
  앨런과 나는 연주회가 열리는 힐 음악당으로 사전 답사를 나갔다. 스테이트 극장보다는 
여러 가지로 나았다. 주차장도 가로등도 있고 특별 주차 구역도 마련되어 있었으니까.
  6시 30분쯤 커 너를 데리러 병원으로 갔는데 공교롭게도 강경주의자 헬렌이 근무를 서고 
있었다. 그녀는 원래 정해진 시간인 정각 7시까지 우리를 기다리게 했다. 데비와 앨런은 
그녀와 처음 대면하는 것이었다.
  "저 여자를 보니까 여기가 병원이 아니라 감옥 같군."
  앨련의 소감이었다.
  나는 헬렌이 조엘에게 시간 관리가-특히 장애자들에게-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걸 들은 적이 있었다.
  "시간을 낭비하는 건 곧 인생을 낭비하는 거예요."
  일리 있는 말이었다. 재활 병동의 몇몇 환자들은 멍하니 누워 있거나 꾸벅꾸벅 졸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으니까. 그러나 커너는 아니었다. 그는 공부를 하고 있지 않으면 
음악을 들었고 아니면 편지를 대필하도록 불러 주었으며, 그도 아니면 이스라엘에 돌아갈 
구상을 했다.
  "10시까진 데리고 들어오세요."
  헬렌이 명령조로 말했다.
  나는 연주회에서 연거푸 앙코르가 터지면 시간에 지체될 것에 대비하여 30분만 더 연장해 
달라고 간청했다.
  "나 때문에 방해만 안 되게 슬그머니 빠져 나올 수가 없어요."
  커너가 옆에서 거들었다.
  "좋아요, 그럼 10시 30분까지예요. 더 늦으면 안 돼요."
  그러나 힐 음악당 주차장에서 우리의 계획은 완전히 어긋나고 말았다. 우선 주변에 
교통량이 많아서 특별 주차 구역까지 접근하는 데 진땀을 빼야 했고, 가까스로 도착해 보니 
자리가 꽉차 있었다. 하는 수없이 음악당 건물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웠는데,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차 트렁크가 열리질 않았다. 휠체어 띠가 트렁크 잠금 장치에 물린 것이었다.
  사람들이 꾸역꾸역 연주회장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앨런과 내가 트렁크를 붙들고 
씨름하는 동안 커너는 앞좌석에 앉아서 연주회장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연주회가 시작되고 30분이 지난 8시에 데비가 자동차 뒷자석을 들어내고 트렁크에 기어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커너가 더 애쓰지 말라고 애걸했다.
  "괜히 비싼 표만 버릴 것 없어, 셋이 가라구. 난 아무 일 없을 테니까."
  트렁크 안으로 들어간 데비가 가까스로 연장통을 열어서 드라이버로 잠금 장치를 비집어 
열었다.  이윽고 트렁크 문이 탁 소리를 내며 열리자 우리는 풋볼 게임이라도 보고 있었던 
것처럼 일제히 환성을 올렸다. 앨런이 휠체어를 끌어냈고, 이어서 데비가 밖으로 기어 
나왔다. 데비의 얼굴은 땀투성이에 얼룩덜룩했고 연노랑 드레스도 더럽혀져 있었다.
  우리 일행이 음악당 안으로 들어갔을 즈음엔 이미 9시가 넘은 시각이었고 중간 휴식 
시간도 끝난 뒤였다. 안내원이 못 들어가게 하자 데비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힘으로 밀고 
들어가자고 했다.
  "연주회가 망쳐져도 상관 안 해요, 우린 들어갈 거라구요."
  앨런은 <미시간 데일리>지에 폭로 기사를 쓰겠노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나 정작 
커너는 천해태평이었다. 그는 음악당의 널찍한 현관에서 휠체어에 앉은 채 도리아식 
주랑들과 그 위의 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데비와 내가 다가가서 그의 휠체어를 
무기로 해서 강제로 밀고 들어가겠다고 하자 커너는 우리를 만류했다.
  "날 그냥 여기 가만히 놔둬, 여덟 달 동안이나 하늘을 못 봤거든."
  우리는 하는 수 없이 계단에 앉아서 그의 하늘 보기를 기다려 주었다. 커너는 특별한 
별자리를 찾는 건 아니었다. 그저 생동하는 바깥 세상에 나와 있는 것만으로도 기뻐하고 
있었다.
  "난 연주회에 안 가도 돼, 이게 바로 연주회니까."
  우리는 그의 말을 곧이들었으나 아무튼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기에 낭패감에 마음이 
씁쓸했다.
  "달리 가고 싶은 곳은 없어요? 이번엔 트렁크가 말썽을 피우지 않을 거예요, 약속해요."
  데비가 말했다.
  "크게 폐만 되지 않는다면 로키를 보러 가고 싶은데."
  그러나 이미 로키의 취침 시간을 한 시간이나 넘긴 9시 30분이었다. 내가 그런 사정을 
말할 틈도 없이 데비는 차 세워 둔 곳으로 휠체어를 밀고 가기 시작했다.
  "그러죠, 문제없어요."
  나는 부리나케 쫓아가서 데비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커너에게 우리 셋의 삼각 관계가 
낳은 불화를 들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데비와 내가 냉전중이라는 걸 알게 되면 커너는 
꼬치꼬치 따져 물을 것이 뻔하니까. 그러나 데비는 나를 싹 무시하고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보다 로키를 더 보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난 그래요, 진슴으로."
  커너가 대꾸했다.
  데비는 힐 스트리트의 오르막길에서 힘에 부쳐 앨런에게 휠체어를 넘겨야 했다. 앨런이 
휠체어를 맡자 나는 데비를 조용히 한 쪽으로 불렀다.
  "왜 이런 모험을 하려는 거야?"
  "난 함께 가지 않아요. 차에 타자마자 난 내 아파트로 갈 거예요. 로키가 커너까지 내쫓진 
않겠죠, 안 그래요?"
  데비가 따로 빠지자 커너는 그 이유를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집에 
도착했을 즈음, 그는 우리의 삐걱거리는 삼각 관계에 깊숙이 관여해 있었다.
  "내가 로케에게 말을 해보지, 내 말엔 귀를 기울이시니까."
  커너가 열성적으로 나섰다.
  "제발 그냥 놔두게. 이제 겨우 잠잠해졌는데 다시 들쑤셔 놓고 싶지가 않아. 오늘은 그냥 
반갑게 만나서 회포나 풀게."
  내가 로키를 깨우러 들어간 사이 앨런과 커너는 현관에서 기다렸다. 로키는 위아래가 
붙은 속내의 바람으로 달려나와서 커 너를 얼싸안았다. 거실 안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로키는 커 너를 휠체어에서 끌어내어 창가에 놓은-자신이 신문을 볼 때 즐겨 앉는- 빨강과 
흰 꽃무늬가 박힌 안락 의자에 앉히느라 수선을 피웠다. 앨런이나 나는 커너가 휠체어에만 
앉아 있을 이유는 없다는 걸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커너는 편안한 안락 의자에 
앉아서 로키가 옷을 갈아입은 뒤 데워 온 시나몬 롤빵을 음미했다. 로키는 귀한 손님이 
찾아온 것을 기념하여 넥타이까지 갖춰 매고 있었다.
  로키는 기도서를 꺼내더니 커너에게 목숨을 잃을 뻔한 시련을 딛고 살아난 사람의 
기도문을 읽게 했다.
  "은총 있을지니, 우리의 주님, 우주의 왕이시여."
  커너는 히브리어로 더듬더듬 읽어 내려갔고, 로키가 잘못된 부분을 일일이 지적해 주었다.
  "더 크게."
  커너는 시키는 대로 목청을 돋우어 계속 읽었다.
  "제게 과분한 은총을 베푸시고 온갖 사랑과 친절을..."
  이윽고 로키가 '아멘'하고 기도를 마쳤을 때 앨런과 내 눈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나는 
눈치를 보아 조엘에게 늦지 않게 돌아가야 된다는 걸 상기시켰다.
  "신경 쓸 거 없어."
  그래서 나도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이제부터 병원에서 외출을 할 수 있게 됐으니까 회당에 다시 나갈 작정이에요. 거기서 
뵙게 될 겁니다."
  커너가 말했다.
  "우린 자네가 필요해, 학생들은 하나같이 늦잠을 자거든. 아침 7시까지 나오게. 매주 
월요일, 목요일."
  "조엘은 아침 7시에 병원에서 나올 수 없어요."
  내가 끼여들었다.
  "로키가 시간에 맞춰서 꼭 나오라고 했다고 병원에 말하지 뭐."
  커너가 웃으며 말했다.
  "농담이 아니다."
  로키가 말했다.
  "로키와 함께 히브리어 읽기 연습을 좀 하고 싶은데 자네들 잠시 자리 좀 비켜 주겠나?"
  앨런과 나는 밖으로 나가서 함께 걸으며, 커너가 엄청난 사고를 당하고도 저렇게 자신의 
모습을 잃지 않고 사는 게 경이롭다는 얘기를 나누었다.
  우리가 다시 아파트로 돌아갔을 때 로키는 뜨거운 커피잔을 커너의 입술에 대고 있었다. 
커피가 줄줄 흘러내려서 커너의 셔츠와 휠체어를 흥건히 적시고 있었지만, 둘 다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로키는 혼자 힘으로 커 너를 휠체어로 다시 옮겼고, 그들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우리는 자정 무렵까지 아파트에서 놀았다. 앨런과 내가 휠체어를 밀고 병동으로 들어섰을 
때 헬렌은 간호사실에 앉아서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우리를 보자마자 부르르 
달려오며 앨런과 나에게 말했다.
  "나가요."
  우리는 커 너를 침대에 눕히고 있었다.
  "두 시간씩이나 늦었어요, 병원 경비원을 시켜 여기저기 찾기까지 했다구요."
  "내가 또 총 맞은 줄 알았어요?"
  커너가 능청을 떨었다.
  "농담할 때가 아녜요, 도대체 병원규칙을 존중할 줄을 모르는군요."
  "그래요."
  커너가 대꾸했다.
  헬렌은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당신 책임이에요. 이제 특별 면회도 중지시키겠어요. 앞으로 저녁 공부 시간은 없어요. 
사실 그 동안 공부는 않고 잡담만 나눈다는 거 다 알고 있었어요."
  "아니, 면회가 뭐가 그리 나쁩니까?"
  앨런이 나서서 따졌다. 헬렌을 모르는 앨런이었기에 그녀의 말이 도저히 납들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헬렌이 11시까지만 근무를 선다는 계산에 그다지 걱정을 하지 
않았는데 공교롭게도 그녀는 그날따라 연속 근무를 서고 있었다.
  "저들이 침대에 눕혀 주지 않았더라면 밤새 그냥 휠체어에 앉혀 둘 작정이었어요. 그래야 
뭔가 깨닫는 게 있을 테니까."
  헬렌이 커너에게 말했다.
  "그런 짓을 하기만 하면 당신 목을 부러뜨려 놓겠어."
  앨런이었다.
  헬렌은 다시 우리들에게 나가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우리가 막 병동을 빠져나갈 즈음 
비명 소리가 들려 왔다. 헬렌이 커너의 베개를 똑바로 해주려고 허리를 굽힌 순간 커너의 
이빨이 그녀의 빳빳하게 풀먹인 흰 간호사복의 어깨에 박혔던 것이다.
  헬렌의 비명 소리에 잠을 깬 몇몇 환자들이 커너에게 응원을 보냈다. 헬렌은 당직 
근무중인 레지던트를 불러 커너에게 진정제를 주사하게 했다. 아침이 되자 정신과 의사와 
사회 사업가가 커 너를 찾아왔다. 그들이 입을 모아 한 말은 대학원생 정도의 지성인이 
사람을 무는 야만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일주일 동안 면회 금지를 당했다. 커 너를 담당한 사회 사업가는 정신 치료의 
목표를 커너가 자기 행동에 대해 사과를 하게 만드는 것으로 삼았다. 병원 측에서 가족 
회의를 소집하는 바람에 커너의 부친과 형이 동부에서 부랴부랴 비행기로 날아와야 했다.
  그러나 당사자인 커는 그 모든 걸 재미있는 에피소드쯤으로 취급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보다 원대한 포부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날 밤 난 떠날 준비가 되었다는 걸 알게 됐지. 로키와 그 문제에 대해 의논했었거든."
  헬렌 사건으로 병원 측에서 커너의 퇴원을 서두르게 되었다. 커너는 부친과 형이 
도착하자 이스라엘로 떠나겠다는 계획을 털어놓았다. 아흔다섯 살 먹은 친구와 함께.
      12.예루살렘 여행
  5월에 대비에게서 졸업 통지서가 날아왔다. 그때까지도 냉전 중이었기에 그녀는 내가 
어차피 졸업식장에 나타나리란 걸 모르고 있었다. 데비에 대한 그리움을 삭이느라 논문에만 
매달린 결과 나는 정해진 기간 내에 논문을 마쳤고, 6월에 그녀와 함께 졸업을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아무튼 나는 데비에게 통지서를 보내 주어서 고맙다는 전화를 걸었다.
  "나한테 평생 그렇게 화가 난 채로 살 거예요?"
  데비가 물었다.
  "난 화나지 않았어. 데비는 시카고로 떠나겠다는 결정을 내렸고, 그것으로 난 데비의 
마음을 읽었을 뿐이야."
  "정말 멍청이군요. 소설 속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남자가 어떤 결정을 내리는지 
자기도 알 거예요."
  "그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어 면 알겠지."
  "그러면 소설의 재미를 놓치게 되겠죠. 자긴 지금 인생을 허비하게 있어요, 나도 
마찬가지구. 만나서 커피나 하겠어요?"
  우리는 처음으로 함께 커피를 마셨던 드레이크 레스토랑의 어둠침침한 목재 칸막이 
좌석에 다시 앉았고, 그때처럼 조지가 창 밖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자기, 왜 그렇게 고집이 세요? 나한테 기회를 한 번 주지 않았잖아요."
  "데비는 이미 결정을 내렸잖아."
  "그럼 그 결정을 바꾸게 하면 되잖아요.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나와 결혼해 주었으면 좋겠어, 데비도 알잖아."
  데비는 내 옆으로 옮겨앉으며 대답했다.
  "좋아요, 그러겠어요."
  우리가 키스에 몰입해 있는 사이 다른 손님이 열어 놓은 문틈으로 몰래 들어온 조지가 
질투심에 눈이 멀어 우리사이로 뛰어들었다. 그 소동을 본 지배인이 다가와서 나가 달라고 
했다.
  우리는 행복에 겨워 말을 잊은 채 앤아버의 거리들을 거닐었다. 조지가 대신 우리의 
결혼을 세상에 알리기라도 하는 듯 앞서 뛰어가며 짖어댔다. 나는 데비를 따라 그녀의 
일터인 국민 학교 운동장으로 갔다. 우리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알리자 아이들은 데비를 
'썩은 사과 씨 부인'이라고 놀려대기 시작했다.
  우리는 골칫거리는 뒤로 미뤄 두기로 했다.
  "골치 아픈 문제들은 나중에 얘기하기로 해요. 지금은 그냥 행복에 젖어 있자구요."
 데비의 말이었다.
  나는 다시 옛날의 일상으로 돌아가 하루의 대부분을 데비와 보냈다. 로키는 내가 다시 
밖으로 나돌기 시작하는데도 그다지 마음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 자신 가슴속에 작은 
비밀을 품고 있었으니까.
  커너가 병원에서 외출하던 날 밤 아파트에 둘이만 남게 되었을 때 로키와 커너는 은밀한 
계획을 세웠다. 커너는 로키에게 모는 수속이 끝나서 비행기표를 손에 넣을 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자고 했다. 그래서 그 계획은 비밀에 부쳐졌지만, 로키는 양로원이 아니면 
이스라엘로 떠날 작정으로 미리 잡낭을 꾸려 두고 지냈다.
  이윽고 입을 열어야 할 순간이 오자 로키는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유월절만 지나면 예루살렘으로 떠날 생각이다."
  나는 그게 죽음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표현인 줄 알았다.
  "어디 아프세요?"
  "아픈 게 아니고 커너를 도우려는 게야."
  나는 할아버지의 말을 곧이듣지는 않았지만 밤에 병원에 갔을 때 커너에게 사실을 
확인했다.
  "내겐 시중들 사람이 필요해. 보험 회사에서 그 비용을 부담할 거야. 로키라고 안 될 
이유가 어디 있어?"
  "할아버진 휠체어를 밀고 다니거나 자넬 부축할 힘이 없어."
  "아니, 그렇지 않아. 충분히 하실 수 있어. 그리고 우리형도 함께 가니까 걱정 없어. 
로키에겐 내가 꼭 필요해서 함께 가는 걸로 얘기해 두었네. 그래야만 내가 여행비용을 
부담할 수 있게 하실 테니까. 로키는 절대 공짜 여행은 하지 않을 겨야."
  나는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고 함께 걱정했다. 우리는 로키가 막무가내로 힘든 일들을 
떠맡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건 본인에게나 커너에게나 위험한 짓이었다. 
예루살렘의가파른 언덕길에서 로키가 휠체어를 이기지 못해 사고라도 일어난다면.
  "안 된다, 네가 함께 간다면 몰라도 할아버지 혼자는 보낼 수 없어."
  어머니가 말했다.
  나는 로키에게 이스라엘 구경을 시켜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긴 했지만 데비와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더 강했다. 그래서 핑계를 댔다.
  "전 안 돼요, 논문이 마쳐야 되거든요."
  내가 그러저러한 어려운 사정들을 털어놓았더니 커너는 잘 알겠다며 즉시 묘안을 
내놓았다.
  "배시 아주머니가 함께 가면 어떨까?"
  어머니는 앤아버에 올 때마다 꼬박꼬박 커너에게 문병을 갔고, 젊은 시절엔 간호사의 
꿈을 품기도 했던 그녀였기에 꼼짝못하고 누워 있는 커너를 살뜰하게 보살펴 주었다. 
그리하여 여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읜 커너는 우리 어머니에게 정이 흠뻑 들었던 것이다.
  "잠시 사업을 다른 사람에게 맡겨야 하긴 하지만 아마 가실 수 있을 거야."
  "좋아, 그럼 로키와 배시 아주머니 두 분 다 가시면 돼."
  "두 분 다 가시게 되면 비용이 너무 비싸잖아."
  "사실 그렇지도 않아, 여기서 아파트를 구해 살며 시중들 사람을 고용하는 것보단 싸게 
먹히지. 이봐, 난 꿈에 그리던 이스라엘로 가는 거라구. 게다가 그 두 분과 형까지 함께 
가면 가족 여행이 되는 거야."
  그래도 내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자 커너는 한마디로 그 문제를 매듭지었다.
   "내 결혼 선물이라고 생각하게."
  로키는 겉으론 전혀 가슴이 설레지 않는 것처럼 무덤덤하게 굴었으나, 커너와 그런 
얘기를 나눈 그날로 벌써 짐을 꾸려 놓고 있었다.
  함께 떠나게 되 어머니가 앤아버로 오셨고, 나는 로키와 커너와 어머니를 태우고 
공항까지 갔다. 커너의 형은 예루살렘에서 합류하게 되어 있었다.
  나는 커너가 비행기에 탑승하는 걸 돕기 위해 함께 탔다. 어머니가 커너 옆자리에 앉았고 
로키는 바로 뒷줄 창가 자리에 앉았는데, 신고있는 러닝화가 채 바닥까지 닿지도 않았다. 
로키는 비행기가 빨리 떴으면 해서 안절부절못했다. 스튜어디스가 다가와서 로키에게 
안전벨트를 매라고 하자 그는 겁날 게 없다고 했다. 이스라엘로 가는 것이니까. 나는 로키의 
안전벨트를 매주고 셋 모두에게 작별 키스를 했다.
  "결혼 선물 고맙네, 할아버지가 자넬 미치게나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나는 로키 못지 않게 잔뜩 들떠 있는 커너에게 속삭였다.
   "그런 걱정은 말게, 병원 스태프들 말이 난 이미 미친놈이라니까."
  6월이 되어 내가 졸업식장에서 단상에 올라가 학장과 악수를 나누고 수료장을 받을 때 
로키는 예루살렘의 어느 아파트에 있었다. 커너와 어머니가 카드를 보내 왔다. 그들의 
전언에 의하면 로키는 아직 마음에 드는 유대교 회당을 발견하지 못했으며, 예루살렘에 
회당들이 워낙 지천으로 깔려 있는지라 매일 한 군데씩 돌아보고 와서 불평을 늘어놓고 
있다는 것이었다.
  로키에게서도 편지가 왔다. 이디시어로 쓴 그 편지에서 로키는 나이가 좀 젊었더라면 
하다못해 여든쯤만 되어도 키부츠에서 일하며 여생을 그곳에서 모낼 텐데, 안타깝게도 너무 
늙은 몸이라 돌아올 수밖에 없겠노라고 했다. 또 이스라엘에서 바라는 과일들이 하나같이 
맛이 기가 막히다며 그곳은 진정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강조했다.
  로키도 예루살렘에 가 있고 는 꼭뒤를 물고늘어지던 시험과 리포트에서도 완전히 해방된 
터라 나는 처음으로 종일 데비와 함께 있을 수 있었다. 우리는 함께 수목원 길에서 조깅을 
하고, 자전거를 타고 쇼핑센터로 달리고, 일주일에 영화 서너 편을 보았다. 골칫거리가 하나 
있다면 우리들의 결혼 문제였다.  데비가 짐에 결혼 소식을 알린 것이다.
  사업가이며 집안 문제를 회피하는 데는 아예 프로급인 데비의 아버지는 늘 그랬듯이 아무 
반응도 없었다.
  "엄마가 지진으로 중국이 지구상에서 사라져 버렸는데 그게 좋은 일이라고 하면 아빤 
두말없이 동의할 겨예요. 아빠는 집안 문제에서 빠지기 위해서라면 별별 짓을 다 할 
분이에요."
  데비의 설명이었다.
  해리엇은 처음엔 우리의 결혼 선언을 만우절 거짓말쯤으로 여겼다. 그래도 데비가 쉽게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자 이번엔 전략을 바꾸어 제멋대로 옷을 입겠다고 떼를 쓰는 여덟 
살바기 딸을 야단치듯 했다.
  "이 결혼은 안 된다, 절대로. 결혼은 반전 시위와는 달라. 시위야 네 멋대로 낄 수 있지만 
결혼은 그럴 수없다."
  "엄마! 전 결혼해요. 지금 엄마한테 허락을 구하고 있는 게 아니라구요."
  나도 다른 수화기를 들고 모녀의 통화내용을 듣고 있었다.
  "아무튼 난 허락 못한다. 돈도 한푼도 못 줘."
  "좋아요." 데비는 이미 금전적인 협박을 예상하고 있었다. 돈이야말로 해리엇이 가장 
우선으로 내세우는 무기니까.
  "그럼 뭘해서 먹고 살래?"
  "맥스는 마약을 팔고 저는 창녀로 뛰고 아이들에겐 구걸을 시키죠."
  "너한텐 결혼이 다 장난으로 보이지, 응? 너도 결혼을 해보면 인생이 장난이 아니란 걸 
알게 될 거다."
  "이미 귀가 따갑도록 들은 얘기예요."
  "그걸로 충분치가 않았던 모양이구나."
  "아뇨, 넘쳐요. 아무튼 우린 결혼할 겨예요. 엄마가 기뻐하지 안으셔서 유감이군요."
  "넌 이제 겨우 스물이야. 다른 남자들을 만날 기회가 얼마든지 많아."
  "돈 많은 남자들 말이죠?" "그래, 맥스보다 돈도 많고 얼굴도 잘생기고 똑똑하고 모든 
점에서 나은 남자들 말이다."
  "감사합니다, 어머님."
  내가 수화기에 대고 그렇게 이죽거렸지만, 해리엇은 싹 무시하고 자기 말만 계속했다.
  "설사 네가 더 좋은 남자를 만나지 못한다고 해도 맥스와는 아무때나 결혼할 수 있어. 
정말로 널 사랑한다면 기다려 줄 거 아니니. 책벌레니까 기다리는 동안 지루하진 않겠지.  
책은 지천이니까."
  "그런 얘기만 하시려거든 전화 끊어요."
  "잠깐 기다려, 맥스 아직도 수화기 들고 있니?"
  "예, 저 여기 있습니다."
  "전부 없었던 일로 하세, 내일 우편으로 수표를 보내겠네. 1만 달러."
  "엄만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형편없는 분이군요." 데비는 그렇게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래서 나도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 다음 주에 데비의 아버지가 나를 점심 식사에 초대했다. 그는 디트로이트에 사업체를 
갖고 있었고 나를 만나기 위해 35마일을 달려와야 했다. 딸을 함께 초대하지 않은 걸로 
보아 우리 둘이 남자 대 남자로 만나자는 뜻인 것 같았다.
  "아빠도 돈을 주겠다고 할 거예요. 아빠는 좀 올릴 거예요. 2만 달러 정도로."
  "5만까지 버티겠어."
  "농담하지 말아요. 난 농담할 기분 아니니까."
  "진심이 아니란 거 데비도 잘 알잖아."
  "우리 부모님의 세계에선 돈으로 모든 걸 살 수 있어요. 자기가 그런 말하면 아빤 진짜로 
믿을 거예요."
  "데비 앞이니까 그런 농담 한 거지. 아무튼 미안해."
  로키를 빼고 데비가 즉각적인 거부 반응을 나타내는 건 돈뿐이었다.
  "돈은 우리 부모님이 가진 것의 전부이자 내가 가장 원치 않는 것이죠."
  데비의 아버지 벤이 보드라운 손을 내밀었을 때 나는 그의 소매 안에 1천 달러 짜리 
지폐들이 숨겨져 있지는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그날 벤은 돈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데비에 대해서도, 우리의 결혼에 대해서도 전혀 말이 없었다. 벤은 조용하고 어두운 느낌을 
주는 미남자였다. 말주변이 없는 성격으로 보아 나와의 점심은 자청해서라기보다는 아내의 
강요에 못 이겨 억지로 떠맡은 숙제인 것 같았다.
  그는 엉뚱하게 골프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마치 내가 장래 사윗감이 아니라 
골프장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기나 하드.
  "전 골프 안 칩니다."
  내가 참다못해 말했다.
  그런 결국 새로운 화제가 필요하다는 얘기였고, 나는 벤의 눈에서 희미한 공포를 읽었다. 
그에겐 다른 화제가 준비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적어도 나와 단둘만의 자리에서는 벤은 
바보가 아니었다. 바보라니, 천만의 말씀! 나는 그가 철강 사업에서 수백만 달러를 
벌어들였다는 걸 데비를 통해 알고 있었다. 다만 평판이나 발판, 철근 얘기를 떠나면 백지 
상태가 되는 게 문제라면 문제일 뿐. 나는 그에게 재화를 이끌어 가도록 맡겨 놓았는데, 
식사가 끝나 갈 무렵 딱 한번 그래도 대화다운 대화가 이루어졌다.
  "여자들은 여러 가지 문제들을 일으킬 수 있지."
  "그건 데비 어머님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신가요, 아니면 데비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신가요?"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얘기지."
  벤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다짜고짜 멕시코의 작은 제철소들이 만들어 내는 고품질의 
철근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식사가 끝나자 벤이 수표로 점심 값을 치렀고, 나는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리곤 악수를 나누고 헤어졌다.
  전투 태세를 갖추고 잔뜩 긴장해서 나갔던 나는 벤과 만난 그 한 시간 동안 아이들이 
물장구치고 노는 미적지근한 물 놀이터에 있는 기분이었다. 내가 그 공허한 점심에 대해 
설명하자 데비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부모님은 각자 맡은 역할이 분명해요. 엄마는 가정의 모든 일을 관리하고 아빠는 
돈을 벌어 오는 거죠. 아빠가 엄마와 어떤 결혼 생활을 해왔는지 알겠죠."
  "그럼 데비 아버지는 나를 반대하지 않는 걸로 해석하면 될까?"
  "아빠는 엄마가 벌이는 일에 끼여들고 싶어하지 않아요. 하지만 자기가 아빠 마음에 든 
건 분명해요. 아빠는 착한 분이고 뭐든 안정된 걸 좋아해요. 일에서 행복을 찾는 분이죠."
  해리엇은 일주일에 두 번씩 전화를 걸면서 결혼 얘기는 비치지도 않았다. 벤이 사준 
점심을 먹고 내가 순순히 물러난 줄로 아는 것 같았다. 나는 벤에게 전화를 걸어서 그가 
무슨 말을 했는데 내가 알아듣지 못했던 건지, 아니면 그쪽에서 내가 한 어떤 말을 듣고 
결혼을 포기하겠다는 뜻으로 오해한 건지 확인해 볼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데비는 그냥 
무시하고 가만있자고 했다. 우리는 7월 4일에 학교 운동장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나는 홈 베니스에서의 결혼식이 근사하게 여겨졌다. 데비가 학교측으로부터 운동장 사용 
허가를 받아 내는 일을 떠맡아 추진하는 동안, 나는 이스라엘에 있는 어머니와 로키에게 
편지로 결혼 소식을 알렸다. 로키의 면전에서 결혼 선언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럽단다.
  데비가 나의 청혼을 받아들인 며칠 뒤에 우리는 로키에 대한 몇 가지 합의를 보았다. 
우선 로키는 살던 아파트에서 그냥 있고, 내가 데비의 아파트로 옮겨간다. 결혼을 하면 새벽 
3시에 로키가 있는 집으로 달려가는 일은 없겠지만 매일 식사 한끼씩은 꼭 거기서 한다. 
그러다가 로키가 마음을 풀고 데비를 받아들이면 언제든지 데비의 아파트로 모신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아."
  내가 데비에게 한 말이었다.
  로키는 겉으론 디트로이트의 양로원에서 소식이 오길 기다리는 체했지만, 거기서 제프와 
맞닥뜨리고부터는 갈 마음이 전혀 없는 게 분명했다. 마침 나는 여기저기에 교수 자리를 
알아보는 중이었기에 자리만 얻으면 앤아버를 떠나야 했고, 로키의 거취는 본인이 결정할 
문제였다. 로키가 우리와 함께 가겠다면 한집에서 못 살더라도 가까이에서 모실 생각이었다. 
그렇게 데비와 나는 서로 조금씩 양보해서 모든 결정을 보았다. 로키가 예루살렘에 
멀찌감치 떨어져 있고 보니 우리 세 사람의 장래 계획을 세우는 일이 훨씬 쉽고 간단했다.
  데비는 나에게서 로키를 떼어놓을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되자 사뭇 철학적이 얘기를 했다.
  "세상에 완벽한 곳은 없어요.  캘리포니아엔 지진이 있고 중서 부엔 대폭풍우가 있고... 
자기 할아버지를 그런 피치 못할 자연 재해쯤으로 생각하겠어요."
  "할아버지도 데비를 그렇게 생각하게 될 거야."
  "그렇담 서로에 대해 재해 보험을 들 수 없는 게 안타깝군요."

 
  
      13 우울한 결혼식
  로키는 7월 1일에 성지에서 돌아왔다. 세관을 통과하면서 바로 내게  건넨 것이 여행 가방 못지
않게 묵직한 쓰레기 봉지였는데, 그 속에 흙이 가득 들어 있었다. 
  "내 무덤에 넣어라."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신앙 깊은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이스라엘에  묻히고 싶어
하며, 그게 불가능하다면 상징적으로 이스라엘의 흙을 한줌 무덤에 넣는 게 관례이니까. 
  "한 숟갈 정도면 충분한데 5킬로그램쯤은 갖고 오셨군요. 세관에서  이걸 다 뭐할 거냐고 안 묻
던가요?"
  "다들 하는 일이야, 세관에선 흔한  일이라 자세히 쳐다보지도 않더라. 이보다 더 많이 갖고 올 
수도 있었어."
  나와 어머니는 로키에게 짐을 지키게 하고 차를 가지러 갔다.  나는 어머니와 둘이만 있게 되자 
할아버지가 내 결혼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더냐고 물었다. 
  "말하지 않았다. 괜히 말했다가 펄펄 뛰면서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면 어쩌니. 그래서 비행기 안
에서 말할 작정이었지만  거기서도 소란을 피울까 무서워 입을  못 열었지. 어차피 몇 시간  내로 
집에 도착해서 네가 직접  말씀드리면 될 텐데 하는 생각으로 가만히 있었다.  할아버지를 다루는 
데는 네가 제일 낫잖니."
  "이번만큼은 제가 나서지 않아도 되길 바랐는데요."
  "그렇게 곤란해할 거 없다, 아무튼 난 너희들이 결혼하게 돼서 기쁘구나. 할아버지가 왜 그렇게 
데비를 못마땅해하는지 알 수가 없구나."
  몇 시간 뒤  나는 그 이유를 알아냈다. 집에 돌아와서  로키가 낮잠으로 여독을 풀고, 성지에서 
가져온 흙을 속옷과 양말을 두는  서랍에 고이 모셔 두고, 커피와 함께 청어 점심을  먹을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렸다가 나는 충격적인 소식을 알렸다. 
  로키는 아무 말 없이 신문을 들고 안락 의자로 가서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분이 흐르자 나
는 혹시 로키가 몸이 아프거나 이스라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 아닌지 슬슬 걱정이 되기 시
작했다. 게다가 무덤에 넣을 흙을 들고 오신 걸 생각하니 기분이 좀 우울해졌다. 아흔 다섯 살 되
신 노인이 무덤 얘기를 꺼내면 그건 심각하게 받아들영야 할 문제니까. 
  이윽고 로키가 입을 열었다. 
  "네가 결혼하게 됐다니 기쁘구나. 난 너의 결혼을 원한다.  늘 네가 결혼하길 원했지. 나도 결혼
을 했었고 네  아버지도 결혼을 했었고 인간은 누구나  그렇게 살아가는 거니까. 그러나 그  여잔 
안 돼."
  "그래요?왜 안 되죠?"
  "마음에 안 들어."
  "도대체 어떤 점이 마음에 안 드신다는 거예요?"
  "나한테 혀를 내밀었어."
  "할아버지가 먼저 내쫓으셨으니까 그렇죠."
  "난 그 여자를 내 쫓을 권리가 있었어. 떠돌이처럼 한밤중에 남의 집에 들어왔으니까."
  "제가 초대한 거예요. 그걸 명심하시라구요."
  로키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도로 신문을 집어 들자 나는 부엌으로 가서 다시 전략
을 짰다. 내가 가장 피하고 싶은 건 로키가 데비에 대해 갖고  있는 사소한 불만들을 놓고 입씨름
을 벌이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서로  감정만 더 상하게 될 뿐이니까. 사실 우리의 감정 싸움은 
데비와는 하등 관계가 없었다. 나는 로키가 데비에게 나를 빼앗기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 것에 
대해 십분 이해한다는 걸 어떻게 해서든 보여 주고 싶었다. 
  나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얘기하면 지금까지  차마 입밖에 내지 못했던 서로의 속마음을 털어놓
기가 쉬울 듯하여 로키가 앉아 있는 안락의자에서 6미터쯤 떨어진 부엌에서 대화를 시작했다. 
  "결혼을 한다고 해서 할아버지를 잊는 건 아녜요.  우리는 어디에 살든 할아버지를 모실 생각이
에요."
  로키는 신문에서 고개도 들지 않고 대꾸했다. 
  "내 걱정은 말아라,나는 어디서든 살수 있으니까."
  나는 로키의 허세를 꺾지 않기로 했다.
  "물론 그러시겠죠, 하지만 전 어쩌구요? 멀리 떨어져 살게 되면 전 어떻게 해요?"
  "전화하면 되잖니."
  "할아버진 전화로는 얘기 안 하시잖아요."
  "그럼 편지를 써라."
  "매일 편지하고 전화하는 걸로는 부족해요. 전 매일 할아버지 얼굴을 봐야 한단 말예요."
  "그럼 다른 여자랑 결혼해라, 같이 살 테니까."
  "또 그 말도 안 되는 얘기로 돌아가시는군요. 우리 문제는 데비와는 아무 상관도 없어요."
  "그 여자를 원하거든 나느 잊어라."
  로키는 신문을 커피 테이블 위에 던지고는 문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데비에게 그 얘기를  들려주었더니 해리엇도 마지못해 결혼을  승낙하면서 로키와 비슷한 말을 
했다는 것이었다. 데비가 전해 준 해리엇 말은 이러했다. 
  "좋아, 정 그렇게 고집을 부리겠다면  운동장에서 하지 말고 우리 집에서 하거라. 그런데 왜 꼭 
상대가 맥스여야 하는 거니?"
  해리엇의 반대는 아주 솔직했다. 그녀는 떳떳하게 내세울 만한 사윗감을 원한다는 것이었다. 소
위 '사'자 붙은 의사나 변호사  혹은 사업가 사위 말이다. 해리엇은 나를 '할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책벌레'라고 불렀는데 사실 맞는 말이었다. 나라도 그녀의 입장이라면 딸이 그런 남자와 결혼하는 
걸 썩 달가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반대는 이미 예견했던 것이었고, 어찌 보면 합당하기
도 했다. 딸이 좋은 조건의  남자를 만나 유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마음을 그  누가 탓할 
수 있으랴.
  그런데 로키는 혀를 내밀었다는 걸  핑계삼아 나의 결혼을 두려워하는 자신의 속마음을 은폐하
고 있었다. 나는 어리석은 짓인 줄  알면서도 데비에게 혀 얘기를 꺼냈다. 데비는 정색을 하며 물
었다. 
  "내가 어떻게 해야 자기 할아버지 마음이 풀리실까요? 혀를 자를까?"
  "할아버진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저러시는 거야. 달리 반대할 이유를 댈 
수가 없거든. 하지만 그 일을 트집잡아 계속 저렇게 고집을 부리시니 어쩌면 좋겠어?"
  우리는 화해 작전을 폈다. 우선  데비가 사과를 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로키에게 정중한 사과의 
글을 써서 보내는 것이었다. 
  할아버님께, 제가 할아버님 앞에서 혀를 내밀었다고 생각하신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나는 '......다고 생각하신다면'은 빼자고 했다. 
  "그럼 진짜 혀를 내민 게 되잖아요."
  "그래."
  데비는 '......다고 생각하신다면'을 빼고 다시 쓰면 말했다. 
  "내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증거예요."
  그토록 공을 들였건만 로키는 그 편지를 홱 내던져 버렸다. 
  "도대체 뭘 더 원하세요. 데비가  사과를 했잖아요. 그럼 할아버지도 이제 어른답게 행동하셔야 
할 거 아녜요. 결혼  전에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예요. 그러니  제발 그만 데비의 혀로 절 고문하지 
마시라구요."
  내가 부아를 이기지 못해 소리소리 질렀다.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나에 대해선 잊어버려."
  "그러죠."
  그 뒤로 사흘 동안은 진짜로 그러려고 애를 썼다.
  해리엇도 내게 말조차 붙이지 않았지만 난 그녀가 우리의 결혼을 승낙한 것만으로도 양보할 만
큼 양보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데비와 나는 무조건  그녀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결혼식 
준비며, 하객을 초대하는 문제며, 신부 드레스며, 꽃이며 모두 해리엇이 결정했다. 그녀는 비록 열
의는 없을지언정 결혼식 준비를 착착 진행시켜 갔다. 
  데비의 가족도 그랜드래피즈에 살고  있었는데, 해리엇에겐 그 점이 더욱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딸이 노동자 가문 출신의 남자와 결혼하는 것만도 못마땅한데 하객들끼리도 뻔히 아는 처지라 그 
사실을 쉬쉬할 수도 없으니 말이다.
  나는 장모님을 기쁘게 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대학 친구 중에 워싱턴에서 변호사로  뛰는 스탠
리라는 멋쟁이가 있는데, 그 친구에게  자문을 구해서 회색 브룩스 브러더스 양복을 맞췄고, 곱슬
거리는 머리도 단정하게 잘라 허울이나마 의사나 변호사처럼 보이려고 정성을 들였다. 
  결혼식 하루 전날 로키와 나는 함께 그랜드래피즈로 갔고, 전에 쓰던 이층 침실에서 같이 잤다. 
해리엇은 애초엔 거실에서 가족들만 모아 놓고 조촐하게 식을  올릴 작정이었지만, 막상 결혼식날 
찬란한 태양이 떠오르자 뜰에서 야외 결혼식을 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어머니는 베일리 누나의 
두 아들과 놀아 주러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베일리 누나네 가족은 친구 집에서 묵었던 것이다. 
정오가 되자 맥신 누나는 가족들을 먼저  식장으로 보내고 나중에 로키를 모시고 가기 위해 집에
서 기다렸다. 그러잖아도  결혼식 분위기가 부드럽지 못할 터인데,  로키까지 한몫 보태면 곤란할 
것 같아 우리는 식이 시작되기 직전에 로키를 식장에 모셔 가기로 합의를 보았던 것이다. 
  결혼식날 아침, 나는  책을 붙들고는 있었지만 도무지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넥타이도 
대여섯 번은 고쳐 매었다. 그러나 해리엇의 집에 너무 일찍  도착하고 싶지는 않아서 그대로 있었
다. 한시쯤 맥신 누나가 내 방으로 달려 올라왔다. 울고 있었다. 
  "할아버진 안  가신단다. 겨우겨우 차까지 모시고  나갔는데 지하실로 도망쳐  들어가서 안에서 
문을 잠그셨어. 어쩌면 좋으니?"
  나는 침착하려고 애쓰면서 말했다.
  "나한테 맡겨."
  "결혼식날까지 이래서  어떡하니? 할아버지가 너한테 어떻게  이러실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돼. 
할아버지가 널 얼마나 사랑하시는데."
  "바로 그 점 때문에 이러시는 거야. 나한테 맡기라구."
  로키는 결혼식을 한 시간 남겨 놓은 내게 다시 옛날의 그 역을  시키고 있었다. 그를 달래서 아
래층의 가족 품으로  내려오게 하는, 아니 이번엔  지하실에서 따스하고 환한 지상으로  올라오게 
하는. 
  맥신 누나는 렌터카에 올라타면서도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몇 분 내로 갈게."
  내가 누나에게 말했다. 
  "할아버지 때문에 식을 망쳐선 안돼."
  "알았어, 난 할아버지를 다룰 자신이 있어."
  정각 1시에서 몇 분이 더  흘렀을 즈음 나는 로키가 틀어박혀 있는 지하실 문 앞에  서 있었다. 
미시간의 집들이 흔히 그러하듯,  우리 집 지하실도 깊고 썰렁해서 그 안에 들어서면  7월에도 한
기가 느껴졌다. 로키가  안에서 빗장을 질러 놓아 도저히 안으로  들어갈 방법이 없었다. 나는 몇 
년 씩이나 닦지 않은 손바닥만한 창을  통해 지하실 안을 들여다보기 위해 무릎을 꿇고 앉아야만 
했다. 
  지하실에 잡동사니들만 뒹굴고 있었다. 텅 빈 고물 냉장고, 세탁기, 드라이어, 그리고 한때는 첨
단의 상징처럼 보였으나 이젠 바닥에서부터  천천히 녹이 슬기 시작하는 맹글(두 개의 롤러 사이
를 지나게 해서 시트 따위의 주름을 펴는 자동 다리미의 일종).
  결혼식에 늦지 않으려면 앞으로 20분 내에 로키를 설득해서 밖으로  나오게 해야 했다. 우선 퉁
명스럽고 사무적인 전략을 써보았다. 
  "나오세요, 시간이 별로 없어요. 기다리잖아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이번엔 큰소리로 외쳤다. 
  "제 말 들리세요?"
  "그래, 들린다. 난 안 가."
  나는 바지를 더럽히지 않으려고 창가에 신문지를 깔고 앉았다. 먼지가  뿌연 창을 통해 오래 전
에 지하실에 처박아 둔 나무  의자에 앉아 있는 로키의 모습이 보였다. 갓을 씌우지 않은  1백 와
트짜리 전구가 그의 머리 위에서  강렬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마치 독방에 갇힌 죄수를  보고 있
는 기분이었다. 로키는 특별한 날에 입는  갈색 정장 차림이 아니라 평상복-청색 반팔 셔츠, 무늬
가 박힌 청바지, 내가 사준 아디다스 드래건스 운동화-차림이었다. 무슨 날이면 정장을 차려 입는 
걸 좋아하는 그가 지하실에나 어울리는 옷차림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애처부터 결혼식에 참석
할 의사가 없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걸 깨닫자 나는 부아가 치밀었다. 
  "할아버지 자신의 모습을  좀 보세요. 손자 결혼식날에 철창에  갇힌 죄수 꼴을 하고 있잖아요. 
정말로 그렇게 지하실에 틀어박혀 있고 싶으세요?"
  "그래."
  로키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고, 창에 코를 박고 있는 나를 올려다보려고도  하지 않았
다. 
  "제가 누구와 결혼하든 그  자리에 꼭 있어야 할 사람은 바로 할아버지예요.  제발 이러지 마세
요."
  대답이 없었다.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인지라 나는 절박하게 외쳤다. 
  "이러시면 평생 후회하게 될 거예요. 아무리 그래도 제 결혼은 못막아요."
  "가라, 가서 하고 싶은 대로 해."
  나는 지하실 창가를 떠나 차를 몰고  집을 나설 때까지 할아버지가 고집을 꺾고 지하실에서 나
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버리지 못했다. 안에서 문만 걸어 잠그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할아버지의 
몸을 만질 수 만 있었더라면 설득에 실패하지 않았을 터였다.  신체적 접촉은 말보다 강한 위력을 
지니고 있으니까. 내가 운전석에  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더라면 로키도  고집을 꺾
었을 것이다.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로키였기에 그렇게 지하실에 숨어 버린 것이었다. 나는 2
시 15분 전에야 결혼식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사진들을 보면 나는 결혼식 내내  웃고 있었다. 결혼 서약서에 서명을 하면서도, 라비와 악수를 
하면서도, 신랑 들러리인 빌리와 포옹을 하면서도, 어머니와 누나들과 함께 가족 사진을 찍으면서
도, 사진으로만 보면 우리의 결혼식은 완벽했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웨딩 드레스 차림의 데비를 보았다. 그녀는 뒤 뜰  잔디 위에 깔린 주단 위
를 사뿐사뿐 걸어오며 내게  로키는 어디 있냐고 눈짓으로 물었다. 따로이 예행  연습은 없었지만 
식장에서 로키가 내 옆에 서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라비가 찬송을 시작했다. 흰 드레스에 면사
포를 쓴 데비의 모습이 너무도 아리땁고 순결해 보여, 나는  운동장 홈 베이스에서의 약식 결혼이 
아닌 정식 결혼을 하게 된 것이 기쁘기 그지없었다. 
  나는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식을  올리고 있었고 천하의 로키도 우리의 결혼을 막지  못했다. 하
지만 로키가 빠진 결혼식은 마냥  행복하기만 할 순 없었다. 데비가 다시 로키는 어디  있나고 눈
짓으로 묻자 나는 혀를 쏙 내밀어 보였다.  

      14 화해
  나는 결혼한다는 실감보다는 부아가 앞섰다. 그래서 몸은 식을  치르고 있으면서도 마음은 지하
실에 처박혀 있는 고집불통  노인네에게 가 있었다. 식이 끝나고 피로연에서 해리엇과  벤의 친구
들이 다가와서 축하한다고 악수도 청하고 주머니에 돈봉투를 슬쩍 찔러 넣어 주기도 하는 사이에
도 나는 연신 문 쪽을 힐끔거렸다. 로키가 뒤늦게 마음을  고쳐 먹고 택시로 달려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우리는 캐나다 온타리오  주의 스트래트퍼드로 신혼 여행을  떠났다. 여행 기분도 내면서  돈도 
적게 쓰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린  선택이었다. 자동차로 겨우 세 시간 거리이지만, 어쨌든 국경
을 넘어야 하는 외국 여행이니까.
  결혼 이틀째 되는  날 우리는 글로브 극장(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처음 공연했던 영국 런던에 
있는 극장)을 모방한 건물 옆의 인공 호수에서  카누를 타고 있었다. 사방에서 모기들이 윙윙거렸
고 유쾌한 얼굴의 관광객들이 노를 저으며 우리를 지나쳐 갔다. 
  데비는 내 기분을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를 신혼 여행에까지 초대했다면 결혼식에 오셨을지도  모르는데 말예요. 분명 그걸 바
라고 끝까지 버티셨을 거예요."
  "미안해, 할아버지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어. 할아버지가 그렇게 까지 나오시리라곤 생각도 
못했거든."
  "내가 보기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분 같은데."
  "데비 말이 맞는지도 모르지. 여행을 즐겁게 보내도록 애써 볼게."
  우리는 잠시 묵묵히 노를 저어 갔다.
  "이게 신혼 여행이에요, 아니면 수학 여행이에요?"
  "수학 여행이 맞지 아마."
  "나도 그런 것 같아요."
  "그럼 이 여행은 그냥 수학 여행으로 해두고 다음에 신혼 여행을 다시 떠나는 건 어떨까?"
  "근사한 생각이에요."
  우리는 부랴부랴 여행 가방을 꾸려서 집으로 향했다. 나는 차를  몰면서도 어서 로키에게 내 속
마음을 보이고 싶은 초조감에 발을 동동 굴렀다. 
  "할아버지와 해결을 봐야 마음 푹 놓고 결혼 기분을 낼 수 있을 것 같아."
  "그럼 할아버지를 모셔 놓고 다시 식을 올리고 싶어요?"
  "그런 건 아니고, 그저 내 속마음을 보이고 싶어."
  "할아버지가 그걸 모르실까요?"
  "할아버지가 날 낙심시켰고  그로 인해서 내가 버림받은 기분을 느꼈다는  걸 꼭 알게 하고 싶
어."
  "자기가 나한테 입버릇처럼  말하듯이, 그냥 내버려두는 게 어떻겠어요? 자기  할아버지는 절대 
변할 분이 아니에요."
  "난 기분이 몹시 상해  있어. 당장 할아버지와 해결을 보지 못하면 앞으로의  내 행동을 책임질 
수가 없을 것 같아. 데비에게 못되게 굴지도 몰라."
  "제발 부탁인데 나와 자기 할아버지를 혼동하지 말아요. 난 자기의 '새' 룸메이트예요. '전' 룸메
이트보다 침을 덜 뱉는."
  국경에 이르자 세관원이 마약을  찾는답시고 우리 차를 이 잡듯 뒤졌다. 얼마나  수색을 꼼꼼하
게 하는지 공기 여과기는 물론  후드 아래의 절연체까지 살폈다. 어디 그뿐인가, 자동차 뒷좌석을 
끌어내고 카펫까지 걷어서 조사했다. 그리하여 온타리오에서 정오 못미처  떠난 것이 저녁 여섯시
나 되어서야 집에 당도할 수 있었다.  내 기분은 한층 저조해졌을 수밖에. 나는 얼른 샤워를 마치
고 집을 나설 준비를 했다. 
  "그 동안 데비는 뭘 하고 있을 거야?"
  "가서 조지나 데려오죠. 할아버지께 따지고 돌아와서 함께 영화 구경 가요. 비록 수학 여행으로 
치긴 했지만 그래도 기분은 좀 내야죠."
  로키 혼자 살고 있는 아파트로 가보니 그는 텔레비전 뉴스를 보고 있었다. 
  "닉슨 저 개자식이 또 폭탄을 퍼붓기 시작했어."
  로키는 우리 사이의 작은 전쟁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마치 캄보디아와 메콩 델타에서의 
전쟁만이 당면 문제인 양  행동하며 시나몬 롤빵과 커피를 내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텔레비
전도 외면한 채 맹렬한 공격 태세를 취했지만, 도무지 적진에서 전의를 보이지 않았다. 식탁에 달
걀 반숙과 미국의 명연설들이  수록된 낡은 책을 올려 놓고 있었는데, 책장이  게티즈버그 연설에 
펼쳐져 있었다. 
  "아직도 외고 있니?"
  로키가 애게 던진 질문이었다.
  나는 어린 시절의 추억에 젖었다. 고철상을 하시던 아버지는 가끔씩  고철 더미 속에서 책이 나
오면 깨끗한 것들만 골라 집으로  가져 오곤 했다. 우리 집에선 책을 공공 도서관에서  빌려 보았
지 일부러 사는  일은 없었기에 서가엔 아버지가 고철  더미에서 주워 오는 책들만 꽂혀  있었다. 
성한 책은 가리지 않고 주워다 놓은 우리 집 도서관에는 전집으로 나온 무슨무슨 백과 사전 낱권
들과 주택 개축 관련  소책자 같은 잡동사니들이 주종을 이루었으며, 그 가운데서  단연 돋보였던 
책은 <리더스 다이제스트  축약판>이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미국의 명연설집>이란  책을 주워 
오셨고, 로키와 나는 그 책 속에서 게티즈버그 연설을 읽게 되었다.
  그때 로키는 모르는 영어 단어가 많았고 나는 아직 어린 나이라 게티즈버그가 도대체 무엇인지
조차 몰랐으나, 우리에겐  그것이 에이브러햄 링컨의 연설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귀중한  의미를 지
녔다. 로키가 리투아니아식 악센트가 섞인 영어로 그 연설문을 낭독할  때면 나는 열심히 귀를 기
울이며, 링컨도 꼭 저렇게 연설을 했을 거라고 상상하곤 했다. 
  링컨은 역사 이래 로키가 영웅으로 떠받드는 우일한 인물이었다.  나는 유치원에 들어가서 게티
즈버그 연설을 암기하게 되었다. 그  뒤로 로키는 몇 년에 한 번씩 내게 연설문을  암송하게 했는
데, 그건 내가 연설문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내 입을 통해 링컨 대통령의 연
설을 듣는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아직 외고 있어요."
  내가 대답했다.
  "그럼 외워 봐라."
  "싫어요."
  "그걸 외워서 뭐가 해로울 게  있다고 그러니? 외우다가 잊어버린 부분이 있으면 내가 알려 줄 
테니까 어서 해봐."
  그러면서 록키는 책을 집어 들었다.
  "제가 왜 게티즈버그 연설을 암송해야 되죠? 할아버진 제 결혼식에도 오지 않았는데."
  "그게 게티즈버그 연설과 무슨 관계가 있니?"
  "관계가 있죠, 그 일은 모든  것과 관계가 있어요. 할아버진 지하실에 숨는 것으로 이제까지 제
게 베푼 모든 걸 망쳤어요. 할아버질 용서하지 않겠어요."
  "용서해 달라고 빌지도 않겠다."
  "할아버진 공화당원들보다 더 나빠요. 이젠 더 이상 할아버지를 믿지 않아요."
  로키는 연설집을 쾅 덮고는 침실로 들어가 버렸다.
  "그렇게 숨바꼭질할 필요도 없어요, 다 끝났다구요. 할아버지가 졌어요."
  "나가라."
  "제가 왜 나가요? 여긴 제 아파트예요."
  "그럼 내가 나가지."
  로키는 획하니 밖으로 나가  버렸다. 나는 뒤따라 나가진 않았지만 로키가 돌아오면  다시 공격
을 퍼부을 양으로 씩씩거리고 있었다. 
  텔레비전 뉴스도 끝나고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하자 나는 로키를  찾으러 밖으로 나갔다. 아파트 
언덕빼기에 있는 식품점은 이미  문을 닫은 것처럼 보였으나 그래도 혹시나 해서  올라가 보았다. 
가끔 로키가 빈 저울 옆에  놓인 벤치에 앉아 있는 걸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로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시 돌아서서 언덕 아래로  내려가 보았다. 밀퍼드 로드를 따라 내려가다 보면  갑자기 숲지대
로 들어서게 되는데, 그 수백 야드의  땅은 아직 개발되지 않은 아파트 부지였다. 근래 측량 기사
들이 드나드는 것으로 보아  조만간 건물이 들어설 모양이었다. 나는 로키가 그곳에  있지 않기를 
바라며 숲속으로 몇 발자국 들어가서 소리쳐 불렀다. 
  "나오세요, 아직 할 얘기가 남았단 말예요."
  그렇게 뱉어 놓고 나니 너무  지나쳤던 것 같아 금세 후회가 되었다. 이미 내  마음속에선 걱정
이 분노를 앞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저녁 여덟시, 로키가 잠자리에 들 시간이었다. 나는  숲속 끝
까지 걸어가며 할아버지를 불렀다.  아파트가 내 것이라고 야박한 말을 했던 터라  바깥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건 아닐까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나는 혹시 할아버지가 누워 있을까  해서 나
무 밑마다 자세히 살폈다. 
  숲을 다 돌아본 뒤 아파트로  달려가 보았지만 아직 돌아와 있지 않았다. 다시 숲  쪽으로 발길
을 돌렸다. 할아버지가 달리 갈  만한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기엔 너무 
멀고 또 정각 여섯시면 버스는 끊겨 버리니까.
  "로키! 제가 잘못했어요, 집으로 돌아오세요."
  나는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이런 짓을 하는 할아버지에게 분통이 터졌지만 걱정이  훨씬 앞섰
다. 그렇게 9시가  되자 나는 반은 미치광이가 되었다.  이번엔 차를 몰고 캠퍼스를 훑기로  했다. 
거기까지 걸어가기엔 너무 멀긴 하지만 혹 남의 차를 얻어  타고 갔을지도 모르니까. 그리곤 마지
막으로 회당에 가볼 생각이었다. 
  차에 가서 보니 로키가 운전석 옆좌석에 앉아서 자고 있었다. 
  "팔십하고도 칠 년 전, 우리 아버지들은 이 대륙에 새 국가를 건설 했으며......"
  나는 악을 쓰며 게티즈버그 연설문을 외웠다. 
  "더 크게."
  로키의 지시였다.
  나는 연설문을 끝까지 외웠다. 
  "좋았어, 게티즈버그 연설은 언제 들어도 아름답단 말야."
  우리는 함께 아파트로 돌아왔다. 낮잠을 자둔 터라 밤늦은  시각임에도 정신이 또록또록한 로키
는 내게 시나몬 롤빵을 데워다 주었다. 우리는 둘 다 마음을 가라앉혔다. 
  "난 양로원에 들어간다, 이번엔 정말이야."
  로키는 그렇게 말하고는 텔레비전을 켰다. 
  "양로원에도 방마다 텔레비전이 있을까요? 아니면 이 텔레비전을 갖고 가세요."
  "넌 어쩌구?"
  "아내에게 텔레비전이 있거든요."
  내가 로키 앞에서 데비를 그렇게 부른 건 처음이었다. 나는  소리를 지르지 않고도 그에 못지않
은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 일부러 '아내'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새로 사는 게 아니라면 좋다, 그렇게 하지."
  그때 데비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내가 전화를 받는 동안 로키는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누가 개를 훔쳐 갔다고?"
  통화가 끝나자 로키가 물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어요? 낸시라는 친구에게 조지를  맡겨 놨거든요. 낸시는 
데비와 함께 살던 친군데 조지도 공동 소유였대요. 그러다가 작년에 낸시는 기숙사로 들어갔는데, 
그 동안 한 번도 조지를  보러 오지 않았었나 봐요. 아무튼 낸시에게 조지를 맡겨  두었는데 기숙
사에서 개를 데리고는 못  잔다고 하자 어떤 여자한테 줘버렸대요. 그여자와 아이들은  조지를 못 
내주겠다고 비티고 있구요."
  "그래서 어쩔래?"
  "데비는 공중 전화를 건 거예요. 그 여자네 집 현관에서 계속 버틸 생각인가봐요. 조지를 안 주
면 거기서 꼼짝도 안 하겠대요."
  "좋구나."
  "제가 가봐야 되겠어요."
  로키도 아무 말 없이 따라나오더니 차 뒷좌석에 올라탔다. 
  "앞에 앚으세요."
  "아니, 거긴 네 처 자리야."
  우리가 문제의 집에 당도하자 현관에 죽치고  앉아 있던 데비는 벌떡 일어나서 차 쪽으로 달려
왔다. 이층짜리 목조 가옥인 그 집은 창문에 블라인드는 모두  내려져 있었지만 현관등은 켜진 채
였다. 
  데비는 로키가 뒷좌석에 앉아 있는 걸 보고는 주춤하면서 내게 험악한 눈길을 보냈다. 
  "그러잖아도 복잡한데 일을 더 꼬이게 만들진 말자구요.  내가 원하는 건 조지를 데리고 여기서 
나가는 것뿐예요."
  "자기 소유가 아닌 걸 남에게 줄 수는 없는 거야. 그건 공산당놈들이나 하는 짓이지."
  로키의 말이었다. 
  데비는, 혹시 말을 붙이면 로키가 버럭 화를 낼까 무서워 잠자코 고개만 끄덕였다. 
  "내가 해보지."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그 집 현관으로 가서 초인종을 눌렀다. 안에선 전혀 응답이 없었다. 초인
종을 두 번, 세 번 연거푸 눌렀다. 
  "여기서 나가요, 안 그러면 경찰을 부르겠어요."
  안에서 여자가 소리쳤다. 
  "우리 개를 내놔야 갈 겁니다."
  "진짜로 경찰을 부르겠어요. 당신들은 지금 우리 현관에  죽치고 앉아서 우리 애들을 겁주고 있
어요. 애들을 재워야 한다구요."
  "그 점은 미안하게 됐습니다. 개를 주시면 우리도 갈 겁니다."
  "이봐요, 지금 다이얼을 돌리고 있어요. 고소하겠어요."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데비가 나서서 외쳤다.
  데비는 나와 함께 현관에 서 있었고 로키는 내 차 근처의 보도에  서 있었다. 내가 합세하자 사
뭇 대담해진 데비는 집 옆쪽에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지 않은 창문이 하나 있는 걸 발견하고 그리
로 가서 집안을 들여다보았다. 
  "조지! 여기야, 여기."
  그녀가 창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나도 얼른 그쪽으로 뛰어갔다.  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애가 조지의 목끈을  붙들고 있었고 
조지는 무섭게 짖어댔다. 삼십대  중반의 뚱뚱한 여자가 손가락으로 귀를 막고 수화기에  대고 열
심히 지껄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리 둘을 보고는 무리나케 달려와서 블라인드를 내렸다. 블라인
드가 창 끝까지 미치지 못했기에 우리는 계속 매달려서 가느다란  틈새로 안을 살폈다. 조지의 발 
부분이 보였는데 남자애가 조지를 끌고 위층으로 올라가려고 애를 쓰는 모양이었다. 
  여자가 현관문을 열더니 외쳤다. 
  "경찰이 이리로 오고 있어요."
  그런데 생각지도 않았던 로키가 현관에 서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라면서 누구냐고 물었다. 데비
와 나 둘만 있는 줄 안 모양이었다. 
  "내가 누군지는 신경 쓸 것 없고 개는 이 사람들 겁니다."
  로키가 점잖게 말했다. 
  순간 조지가 남자애를 뿌리치고  현관 쪽으로 달려왔다. 이제 벌레가 날아드는 것을  막기 위해 
설치한 철망문만이 조지와 우리 사이에 가로 놓여 있었다. 
  로키는 그 문을 손으로 밀어도 보고 발로 차보기도 했다.  이윽고 부실한 걸쇠가 돌림띠에서 떨
어져 나가면서 철망문이 통째로 떨어졌다. 
  "조지, 이리 와."
  데비의 부름에 조지는 끈을 질질 끌고 나는 듯이 뛰어나왔다. 
  로키가 떨어져 나간 철망문을 들고 있는 걸 본 그 집 여자는 비명을 내지르며 현관문을 거칠게 
닫고 안에서 잠가 버렸다. 
  앤아버 경찰이 도착했을  즈음 로키는 떨어진 철망문을 옆에 세워  놓고 피해 상황을 점검하는 
중이었다. 
  "별거 아냐, 저 아기 엄마가 직접 고쳐도 되겠어."
  경찰이 초인종을 누르자 여자가 빼꼼 문을 열었다. 아이 셋이  잔뜩겁에 질린 채 엄마에게 매달
려 있는 모습에 나느 하마터면 동정심을 느낄 뻔했다. 
  "제가 확인하고 싶은 건 이 개의 임자가 누구냐는 것뿐입니다."
  경찰은 그렇게 말하고 조지의 목끈을 끌고 경찰차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곤 자기가 솔로몬왕이
라도 되는 양 여자를 자기  집 문 앞에 서게하고 데비를 길 건너 내  차 옆에 세운 뒤 끈을 놓았
다. 
  "좋습니다. 두 분, 개를 부르세요."
  별다른 특징도 없는 검정색  잡종개인 조지는 귀를 쫑긋 세웠다. 데비는 한껏  구슬픈 목소리로 
조지를 불렀지만 저쪽에서 어머니와 세 아이들이 요란하게 외쳐 부르는 소리에 그녀의 가냘픈 외
침은 그만 묻혀 버리고 말았다. 경찰의 손에서 놓여 난  조지는 엉뚱하게 나무에 뛰어오를 기세를 
보이더니 곧장 로키에게로 달려갔다. 
  로키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여기 10달러요, 저 아기 엄마에게 줘요. 이 돈이면 떨어진 문도 고치고 애들에게 새 개도 사줄 
수 있을 테니까."
  그는 경찰 에게 10달러를 준 뒤 10달러 지폐 한 장을 더 꺼냈다. 
  "이건 경찰 양반 수고값이우. 일 끝나고 맥주라도 한잔 드시게."
  그리곤 조지를 데리고 내 차로 왔다. 경찰관은 엉겁결에 당한  일이라 잠시 멍청하게 서 있다가 
황급히 달려와서 돈을 돌려주었다. 그때 쯤 조지와 로키는 벌써 차 뒷좌석에 타고 있었다. 
  "고마워요, 로키."
  데비가 감사를 표하며 손을 내밀자 로키도 맞잡아 흔들었다. 
  "우리 집으로 가자, 개한테 뭘 좀 먹여야지. 저 집에서 아무것도 못 얻어먹었는지도 모르잖니."
  로키가 말했다.
  조지는 핫도그를 한 무더기 받았고, 데비와 나는 청어를 먹었다. 데비는 눈을 감고 억지로 조금
씩 삼키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진짜 결혼한 실감이 났다. 

      15 휴스턴에서의 새살림
  휴스턴의 대학에 자리가 나자 나는 로키에게 어떻게 하고 싶은지 의향을 물었다. 
  "난 앤아버에 그냥 있을란다."
  "어머니도 함께 휴스턴으로 가실 거예요."
  "누가 네 엄마랑 같이 살고 싶다니? 난 여기에 그냥 있을 거야. 방을 한칸 구하지 뭐."
  "그건 이미 한 번 겪은 일이잖아요."
  "나는 신경 쓰지 말고 너희나 떠나거라."
  나는 결혼식날의 실패 이후 로키를 설득하는데 자신감을 잃긴  했으나, 이번엔 그때처럼 요지부
동은 아니었다. 이미 마음을 굳혔다면 입을 딱 다물어 버렸을  터인데 순순히 대화에 응하고 나섰
던 것이다. 
  "할아버지가 여기 살고 싶어하신다는 거  저도 알아요. 하지만 전 떠나야 해요. 직업이 걸린 문
제니까요."
  "누가 가지 말라고 하던? 넌 당연히 가야지."
  "할아버지, 도대체 앤아버와 휴스턴이 무슨 차이가 있어요?  여기에 사나 거기에 사나 마찬가지
잖아요. 휴스턴에도 회당이 있고 또 거기서 여기보다 훨씬 더 따뜻해요."
  "내가 미시간에서 산 햇수가......"
  로키는 입술을 우물거리며 햇수를 계산했다. 
  "65년이다......그런데 이 나이에 어떻게 정든 땅을 떠날 수가 있겠니?"
  "앤아버로 오신 것도, 이미 연세 드실 만큼 드신 나이에 정든 땅을 뜨신 거였어요."
  "그것과는 다르다. 그랜드래피즈에서 여기론 버스로 올 수 있었으니까."
  "그럼 버스로 갈 수 있는 곳에만 가시겠다는 거예요?"
  로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문제는 해결됐네요, 텍사스도 버스로 갈 수 있거든요."
  "넌 버스로 가거라. 난 여기 그냥 있을란다."
  "도대체 미시간이 뭔데요? 예루살렘이라도 돼요? 텍사스나 미시간이나 그저 사람 사는 땅일 뿐
이라구요."
  "가게 되면 가구를 몽땅 갖고 갈란다."
  늘 그래 왔듯이 로키는 한바탕 밀고 당기는 싸움을 치른  뒤에야 고집을 꺾을 태세였고, 이번엔 
엉뚱하게 가구를 물고늘어졌다. 그까짓 가구 문제라면 내게 승산이 있었다. 
  새로운 출발을 꿈꾸는 어머니는 육중한  카우치들과 식탁 세트와 중국산 장롱을 구세군에 기증
하고 싶어했다. 어머니가  머릿속에 그리는 텍사스는 등나무,  크롬, 유리 같은 최신  소재로 만든 
가구들이 구비된 거대한  파티오(스페인식 저택의 안뜰)쯤 되는  모양이었다. 나는 다시 중재자로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카우치들은 미시간에 남겨 두고 식탁 세트는 텍사스로  가져 가
게 되었다. 
  로키와 배시는 우리 부부가 산 주택에서  두 블록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단층짜리 트랙트 하우
스(한곳에 세워진 같은 형태의 소주택)에  입주했다. 로키는 이사한 그날로 에어컨이 싫다면서 집
에서 뛰쳐나왔다. 우리 집 현관에 나타나서 하는 말이, 데비와 내가 에어컨을 끄고 산다면 기꺼이 
우리 집으로 들어오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휴스턴의 기온은 섭씨  32도를 넘었고 습도도 90퍼센
트 가까이 되었다. 로키가 에어컨 바람을 싫어하는 건 충분히 납득이 갔지만, 그렇다고 나머지 사
람들을 찜통 속에서 살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집으로 가서 다락방으로 기어 
들어가 로키의 방으로 통하는  에어컨 구멍을 막았다. 우리 집에도 유리를 끼운  베란다엔 에어컨 
장치가 되어 있지 않아 결국  양쪽 집 모두에 로키를 위한 비냉방 공간이 마련된  셈이었으나, 그
는 그 두 곳을 마다하고 집 앞에 서 있는 멀구슬나무 아래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냈다. 
  로키는 아예 나무 밑에 탁자와  야외용 의자까지 내다 놓았고, 일년 중 다섯 달  가량은 멀구슬
나무를 서재삼아 살았다. 낮 동안 그가  집 안에 발을 들이는 건 끼니때나 낮잠 시간뿐이었다. 나
머지 시간은  휴스턴의 나무 아래서 스카치  테이프로 더덕더덕 붙인  특대판 바빌로니아어<탈무
드>를 읽으며 소요했다. 
  잡종개 조지는 종일  로키의 발치에 죽치고 앉아  있다가 오토바이라도 부르릉거리고 지나가면 
사납게 짖으며 쫓아가곤 했다. 그리하여 로키의 집 앞을 지나는  사람들은 나무 아래에 앉아 있는 
노인과 개의 모습에 점점 익숙해져 갔다. 덕분에 로키는 피부가  곱게 그을어서 빛나는 푸른 눈이 
더욱 돋보였고, 그런 그의 모습은 유대인 카우보이를 연상시켰다. 
  절대 집 안에선  오래 머물지 않겠다는 것이 로키의 요지부동한  결심이었지만 두 가지 사건이 
그 결심을 흔들어 놓았다. 첫째는 우리 부부에게 아기가 생긴 것이었다. 설령 로키와 데비 사이에 
감정의 앙금 같은  것이 남아 있었다 해도 제시카의  탄생으로 그 모든 것이 해소되었을  것이다. 
나는 로키와 제시카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내 어릴적을 보는 듯했다. 로키는  제시카의 살
아 있는 놀이터가 되었다. 귀,  머리, 얼굴, 반짝거리는 구두, 넥타이, 쉰 목소리의 속삭임...... 그는 
바닥에 누워서는 제시카에게 몸 위로 기어 올라가 마음껏 만지며 놀게 했다. 
  로키를 집 안에  머물게 한 두 번째 사건은  워터게이트 청문회였다. 그는 집에서 종일  청문회 
중계를 지켜 보고, 그것으로는 성이 안 차서 우리 집으로  건너와서 공영 방송의 재방송까지 보았
다. 제시카도 로키옆에  붙어 앉아서는 닉슨 대통령이  무참하게 당하는 날에는 할아버지를  따라 
좋아라 소리도 지르고 박수도  쳤다. 아무래도 제시카가 처음으로 하게 될 말은 '개새끼'가  될 것 
같았다. 
  나는 로키가 오면 자동 온도  조절 장치를 올려 놓았다. 제시카는 몇 시간이고 로키  옆에서 텔
레비전 보며 우유와 함께 로키가 음미하는 복수의 단맛을 빨아먹었다. 
  가련한 닉슨. 나 역시 그의 추종자는  아니고 또 그가 많은 실수를 저지른 것을 인정하지만, 로
키가 레인 애버뉴의 집을 잃게  된 건 엄밀히 따져서 그의 탓이 아니었다. 청문회를  열심히 지켜 
보고 있던 로키는, 닉슨이 우리 지역구의 전의원이었던 제럴드  포드에게 부통령 자리를 제안하자 
분연히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섰다. 절대 그 자리르 수락하지 말라고 편지를 쓴 것이다. 사실 로키
는 물러만 주고 편지는 내가 썼다. 
  
  제리에게,
  나는 자네 부친과 알고 지냈던 사람이네. 자네 부친은 나에게서 호밀빵과 도넛을 샀고, 나는 자
네 부친의 페인트를 팔아 주었지. 자네 부친이 팔던 무광택  페인트와 에나멜 페인트는 모두 질이 
좋았고, 자네 부친은 내가 요구하지 않아도 값을 깎아 주곤 했다네.
  자네가 공화당원이 된 건 심히  유감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닉슨 개새끼와 손을  잡는 일
은 절대 없어야 하네. 그보단 차라리 페인트 공장에 들어가서 일하는 편이 나을걸세.
  자네 부친이 몇 년  전에 세상을 하직했다는 소식 들었네. 어쩌겠나, 인명은 재천인  것을. 자네
가 페인트 가게를 팔지 않았길 바라네.
아메리칸 베이커리의 로키

  닉슨에 대한 로키의 원한은 192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키는  9년 간을 억척으로 일해서 아
내와 자식들을 미국으로 데려올 수 있을 만큼의 돈을 모았는데,  가족들이 도착하고 한 달쯤 뒤에 
채권자들이 애써 장만한 집과 가재 도구들을 빼았아 가버렸다. 하는  수 없이 거처를 베이커리 이
층으로 옮기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은 했지만  로키는 그 부당한 처사에 대한 원한이 가슴에 사무
쳤고, 그로부터 51년이 지난 뒤에 애꿎은 닉슨이 그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나는 로키의 그릇된 생각을 고쳐 주려고 애썼다. 
  "닉슨은 '레인 애버뉴'의 집과는 아무 상관도 없어요."
  "닉슨을 좋아하는 놈들이 한 짓이야, 노동자들을 착취하던 놈들."
  "닉슨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해 대해서만 심판을 받아야  해요.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한 짓까
지 그에게 탓을  할 수 는 없다구요. 미국에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수백만이에요. 그들을 모두 
감옥에 처넣고 싶으세요?"
  "그래."
  제시카가 짝짝 박수를 쳤다. 자기  영웅의 말이 무조건 옳다는 것이었다. 로키는 어린 제시카를 
얼마나 애지중지했던지, 빵을 반죽할 때도 옆에 동그란 의자를 놓고  아이를 그 위에 올라서게 한 
다음 작은 밀 방망이와 반죽을 떼어 주어 같이 놀게 했다. 
  그해 여름, 로키가 구워 내는 빵의 양이 현저히 줄어들자 데비가 우려를 표했다. 
  "할아버지가 어디 아프신 거 아녜요?"
  로키는 항상 빵을 남아돌게 구워서 이웃들에게 나눠 주곤 했던 것이다. 
  "의원들이 점심 먹으러 간 사이에만 빵을 굽거든. 청문회의 한 장면도 놓치려 들지를 않아."
  그해, 데비는 로키만큼 행복하질 못했다.  우리는 데비가 나중에 출산 문제로 사회 활동에 지장
을 받는 일이 없도록 결혼하자마자 아기를 갖기로 했었다. 
  "일찍 낳아서 그애들이 십대쯤 되면 몇 명 더 낳죠 뭐."
  말은 쉬웠지만 막상 엄마가 되고 낯선  도시로 이사까지 하고 보니 데비는 여러 가지로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잠깐 사이에 히피에서 가정 주부로 변신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 우리 
부부는 예고도 없이 친구집에 놀러 가고, 즉흥적으로 영화 구경을 가고, 냉장고에 든 음식으로 대
충 끼니를 때우는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나 대학 교수  사회에선 만사가 격식에 따라 움직
였다. 한 달 전에 이루어지는 저녁 초대, 과모임, 다과회......
  "우리 엄마가 좋아하는 생활이군요. 난 우리 엄마 주위에만 이런 생활이 있는 줄 알았는데."
  데비는 그런 자리를 어색해했고,  중년의 내 직장 동료들과 가벼운 대화를 나누는  것조차 부담
스러워했다. 
  "그들이 좋은 사람들이란 건 알아요. 그치만 그들이 무슨 말을  하면 꼭 강의실에 앉아 있는 기
분이 든다구요. 노트 필기를 해야 할 것 같다니까요."
  우리 과 교수들 거의 전원의 집에 차례로 초대를 받아 다녀오자 이젠 그들을 우리 집에 초대해
야 할 순서가 되었다. 
  "난 못해요, 딱딱한 디너 파티에서  고상한 안주인 역할을 하는 건 체질상 맞지 않아요. 피크닉
으로 대신하는 건 어떨까요?"
  나도 피크닉 이상의 아이디어가 없을 듯해서 이렇게 말했다. 
  "그래, 사람들도 꼭 자기네와 똑같은 식으로 초대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거야."
  "똑같이 초대를 해야지, 안 그러면 실례가 되는 거다."
  유럽식 예의 범절을 존중하는 로키가 나섰다. 그러면서 빵은 몇  백개라도 구워줄 수 있다는 것
이었다. 
  데비는 종일 아이와 씨름하는 단조로운 일상에서 해방되기 위해 대학의 영화 제작 강좌에 다니
고 있었다. 8밀리  카메라가 등장하면서 생겨난 강좌였다.  그런데 그녀는 야무지게도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렸다. 
  "그럼 파티를 열죠, 그러면서 파티 장면을 카메라에 담는 거예요. 몇 개월 뒤에 또 파티를 열어
서 전에 찍은 필름을 보여 주는 거죠.  그렇게 되면 파티를 두 번 열게 되는 셈이고, 앞으로 일년
은 걱정 없이 버틸 수 있을 테니까요."
  "파티 장면을 찍는 건 너무 지루할  거야. 또 안주인 노릇에 감독 노릇까지 하는 건 무리야. 두 
가지를 어떻게 다 하려고 그래?"
  "자기는 두고 보기나 해요."
  데비는 로키에게서 아이디어를  얻어냈다. 로키와 배시는 우리 부부의 너저분한  살림살이를 마
땅치 않게 여겼는데, 어머니는 그냥 모른체했지만 로키는 그럴 성격이 아니었다. 그는 슈퍼마켓에 
가서 플라스틱 용기를 사다가 병째로 그냥 두었던 제시카의 이유식과 우리가 남긴 음식들을 담아 
두었다. 냉장고에 플라스틱 용기가  가지런히 놓여 있는 걸 본 데비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 
  그녀는 초대장을 발송하기 시작했고, 초대장을 받아든 내 동료들은  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
를 쳐다봤다. 데비는 예의와  격식을 존중하는 대학 교수 부부들을 플라스틱 용기인  타파웨어 판
촉 파티에 초대했던 것이다. 
  "판촉 파티엔 게임들이  많아서 카메라에 담으면 아주 재미날 거예요.  게다가 손님들에게 물건
을 팔면 우린 공짜 상품까지 받게 돼요."
  데비가 신이 나서 그렇게 떠들어대자 로키는 상품 얘기에 귀가 솔깃했다. 
  파티가 열리자 타파웨어 회사에서 파견된 판촉 여직원이 오렌지 껍질을 벗길 때 쓰는 플라스틱 
기구를 상품으로 내걸고 오렌지를 옆사람에게 턱에서 턱으로 전하는  게임을 벌였는데, 로키는 그 
게임에서 우승하여 상품을 내게 주었다. 
  그러나 파티 자체는  완전히 실패였다. 손님이 넷밖에 오지 않았던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우리 
부부는 동네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파티에 와달라고 청했다. 작품  촬영에는 로키가 마이크를 들었
고 데비가 카메라로 사람들을 찍었다. 그리고 손님 접대는 우리보다  주인 노릇에 훨씬 능란한 타
파웨어 판촉 여사원이 맡았다. 
  데비는 나중에 필름 편집을 하면서 판촉 여사원이 '발전하는 타파웨어 피라미드'에 대해 설명하
는 장면에 거트루드 스타인의 시를 사운드 트랙으로 깔았다.  그리하여 타파웨어의 달러들이 피라
미드처럼 쌓여 가는 가운데 거트루드 스타인이 되풀이 묻고 있었다. 
  "돈은 돈인가, 아니면 돈은 돈이 아닌가?"
  우리는 두 번 다시 그런  파티를 열지 않았고, 데비는 다른 집에서 열린 타파웨어  파티에서 작
품 촬영을 완성했다. 
  데비는 비디오 촬영에 매달리고 로키와 제시카는 워터게이트 청문회에  열중해 있는 사이, 나의 
집필 인생이 시작되었다. 나는 소설 한 편을 팔아서 5백 달러를 벌었다. 로키가 도무지 그런 사실
을 믿으려 하지 않아서 나는 직접 수표를 보여 주어야 했다. 
  "아니 그래, 그까짓 꾸며 낸 이야기를 5백 달러나 주고 사는 사람이 있단 말이냐?"
  "예, 그렇다니까요."
  로키는 내 소설을 산 사람을 거룩한 자선가쯤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데비와 나는 그  돈을 어디에 쓸지 합의를 보았다. 그건  데비가 낸 아이디어였다. 그녀는 내가 
잔디를 깎는 동안 그걸 지켜 보는 로키의 모습을 여러 번 보았던 것이다. 
  "우리가 음식 먹는  걸 쳐다보는 조지의 모습과 똑같다니까요. 모터가  돌아가기 시작하면 로키
는 그 일이 너무 하고 싶어서 침을 질질 흘리 기세라구요."
  데비의 말이 옳았다. 로키는 잔디 깎기를 무척하고 싶어했지만, 나는 늙으신 할아버지께 고되고 
위험한 일을 시킬 수 없어서 엄격히 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쓰레기 버리는 일만큼은 그냥 
하도록 내 버려두었다. 로키는 양쪽  집 쓰레기 처리를 도맡았고 빵을 구웠으며, 식구들의 구두를 
반짝반짝하게 닦아 놓았고 아기까지 보았지만, 더 힘든 일을 하고 싶어했다. 백 살을 바라보는 고
령임에도 일다운 일을 하지  않으면 몸이 근질거리는 모양이었다. 나도 그런 심정은  십분 이해했
지만, 휴스턴의 살인적인 더위 아래서 잔디를 깎는 일은 젊은이에게도 벅찬 중노동이었다. 그래서 
잔디를 깎다가 갈증을  이기지 못해 집안으로 물을 먹으러  들어간 사이, 로키가 나 몰래  잠깐씩 
손을 대는 정도만 눈감아 주었다. 나는  물을 먹으러 들어갈 때면 일부러 시동을 끄지 않았고, 로
키는 내가 등을 돌리기가  무섭게 쏜살같이 달려들어 게걸스럽게 잔디 깎는 일에  탐닉했다. 어렵
게 얻은 1, 2분 간의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었다. 나는 물을 먹고 나와서는 짐짓 화난 체했
고, 로키는 잠시 실쭉해 있다가 내가 빠뜨리고 지나간 부분이나  잘못 깎여진 곳들을 지적하기 시
작했다. 
  "그 돈으로 할아버지께 자동차처럼 모는 잔디 깎는 기계를 사드리는 거예요."
  데비가 말했다. 
  당시 데비는 임신 7개월째였다. 둘째아이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때 시어스 상점에 잔디 
깎는 기계를 사러 가서 그녀가 기계  위에 올라앉아 제시카를 무릎에 앉히고 운전하는 시늉을 하
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옆진열대에는 스포츠용품과 야외용 바비큐  기계들이 진열
되어 있었다. 
  "이게 좋지 않겠어요?"
  데비가 기계에 올라탄 채로 말했다.
  아직 채 두 살이 되지 않은 제시카가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나는 로키가 제시카에게 운전대를 
맡기는 장면을 상상하며 고민에 젖어 들었다. 
  로키는 차를 몰아 본 적이 없었고 성격이 느긋하지도 못했다.  어쩌면 자동차처럼 모는 잔디 깎
는 기계는 너무 위험한지도 몰랐다. 데비가 고른 기계는 빨강색 머레리 상표로, 널찍한 좌석과 발
을 끼우는 구멍이 달려  있었고 운전대가 소형 트럭처럼 납작하게 붙어 있었다.  브레이크와 날의 
높이를 조정하는 장치도 있었는데 날은 기계 밑부분에 장착되어 있었다. 
  "이 위에 타고 있으면 아주  안전해요. 날 근처에 접근할 수가 없으니까요. 당신이 잔디를 깎을 
때마다 할아버지가 빠진  부분들을 가리키느라 쫓아 다니는  걸 보면 난 아주  아슬아슬하다구요. 
혹시 잘못해서 날이 튀어나와서 몸에 맞을까 봐서요."
  나는 데비에게 설득되어 기계를  사고 말았다. 픽업을 빌려서 집 모퉁이까지 싣고  와서는 데비
와 제시카에게 로키를 집 앞에 나와 서  있게 한 다음, 내가 직접 잔디 깎는 기계 위에 올라탔다. 
시동을 거는 데 좀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내가 날을 바짝 올린 채 기계를 몰고 집  안으로 들어
서자 로키는 배를 잡고 웃었다. 
  "할아버지 거예요."
  나는 로키에게 열쇠를 건넸다. 그러나 로키는 나와 데비가 예상했던것만큼 좋아하진 않았다. 기
계 위에 올라타서 잔디밭을 한바퀴 돌고 오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이건 너나 써라, 난 손으로 미는 게 좋아."

      16 새로운 일거리
  데비가 가게를 열었다. 그녀는 텍사스로 옮겨 간 뒤부터 줄곧 일을 하고 싶어했지만, 당시만 해
도 여성 운동이 꽃을  피우기 이전이라 대부분의 여자들이 가정에 속박되어 있었고,  데비도 어린 
제시카를 두고 일터로  나가는 것이 죄스러워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제시카를 잘 보아  줄 
배시와 로키가 든든하게 버티고 있는데도 말이다. 
  어느 날 자전거를 타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데 낡은 집을 개조하고 있
는 광경이 눈에 띄었다. 우리는 집주인을 만나 보았다. 집주인 데이비드는 다부진 체구를 지닌 신
경질적인 남자로 그 집을 공예품 전문 상가로 꾸미고 있다고  했다. 나머지 가게들은 모두 계약이 
되었고 유리로 막은 폭 3미터, 길이 3.7미터짜리 위층 베란다  공간만 남아 있었다. 우리는 나뭇가
지에 거의 가려진 채 늦은  오후의 햇살 아래 반짝이고 있는 그 공간을 올려다보았다.  도저히 포
기 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월세 1백 달러에 나무 위의 집 같은 그 가게를 계약하고 말았다. 
  데비는 그곳을 아담한  건강 식품점으로 꾸몄고, 한켠에는  동네 사람들이 손수 만들어서  팔아 
달라고 맡긴 목공예품을 진열해 놓았다. 건물 아래층에선 주인  데이비드가 직접 레스토랑을 운영
했고, 전에 침실로 썼던 위층의 세 공간에는 도기 가게와 보석상과 가죽 공예점이 들어왔다. 그리
고 재너스라는 여자가 복도에서  벨트 버클과 가죽 머리장식을 팔았다. 베란다에 차린  우리 가게
엔 목공예품 옆으로 약초차, 향료, 향비누, 완두콩, 강낭콩, 렌즈콩 따위가 진열되어 있었다. 
  제시카는 데비의 조수가 되었고, 배시와 로키는 구티가 리투아니아에서  갖고 온 벌꿀주를 담그
는 데 썼던 오지 항아리들을 기증했다. 데비는 그 항아리들마다  리마콩과 텍사스 특산 붉은 콩을 
담아서 진열했다. 로키는 항아리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력까지도 제공했는데  사실 그는 판매원 노
릇엔 젬병이었다. 
  아래층 레스토랑을 찾는 손님들이 위층까지 올라오는 건 드문  일이었고, 더구나 우리 가게에까
지 얼굴을 들이미는 건  드물다 못해 희귀한 일이었다. 게다가 드문드문 손님이  찾아오면 로키는 
불퉁거리는 목소리로 뭘  찾느냐고 대뜸 물었고, 손님이 대답을 얼버무리거나  우물쭈물하면 아예 
내쫓아 버렸다.
  로키는 아이 쇼핑을 한답시고 어슬렁거리는 인간들을 질색으로 여겼다. 
  "그렇게 할 일이 없으면 집에 앉아서 먹기나 할 것이지.  요란한 옷차림이며 대형 차를 몰고 다
니는 꼬락서니를 보니 집에 먹을 것이 지천인 것 같은데."
  내가 로키에게 무조건  손님은 왕이라는 일장 연설을 늘어놓자 데비는  로키 역성을 들고 나섰
다. 
  "전부 얼간이들이에요, 내 가게가 뭐 귀엽다나요. 어떤  인간들은, '아니, 세상에 이런 가게를 운
영해서 생활이 되나'하고 쯧쯧 혀까지 차더라니까요."
  "그래도 손님에겐 친절해야지."
  내가 말했다.
  "왜요? 괜히 어슬렁거리면서 이것저것 만져 보고 냄새나 맡아 보는 사람들은 어차피 사지도 않
아요. 그러니 그런 사람들은 그냥 쫓아 버리는 편이 낫죠. 그 시간에 책이나 읽게."
  음식 장사에는 경험이  전혀 없는 아래층 데이비드는  툭하면 데비를 부르러 올라왔다.  메뉴는 
골고루 다 갖춰 놓았는데 주방장이 결근을 밥 먹듯 했던  것이다. 주방장이 없는 날이면 데이비드
는 데비에게 올라와서는 제발 가게 문 닫고 자기네 주방일 좀 도와 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 어차피 이 집엔 손님도 없잖수."
  그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상할 법도 한데, 데비는 그렇듯  퉁명스러울 정도로 솔직한 사람을 좋
아했다. 그녀는 기꺼이 레스토랑 주방으로 들어갔고 어떤 때는 위층  다른 가게 주인들도 함께 거
들었다. 데비는 제시카를 안고 주방에  서서 요리에 어떤 양념들이 들어가야 하는지 설명했다. 어
쩌다 손님이 주문한 재료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데이비드는 손님  앞에서 양손을 쥐어짜며 잠깐만 
위층 가게를 구경하시면서 기다리면 즉각  준비해 드리겠노라고 사정하고는 부리나케 길 건너 슈
퍼마켓으로 달려가서 필요한 재료를 사왔다.
  데비의 가게는 매달 1백 달러의 매상도 올리지 못해서 계속 적자에 허덕였다.
  "당신도 신경 쓰여요? 난 자꾸 돈만 까먹는 게 싫어요."
  "투자라고 생각해."
  엉뚱하게도 데비의 가게는 내 집필 작업을 위한 투자가  되었다. 사람들의 행동거지를 관찰하는 
데 빼어난 눈썰미를 지닌 그녀가 매일같이 재미있는 얘기를 들고  왔고, 나는 거기에 상상력을 가
미하여 작품에 써먹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한 번은 열렬한 채식주의자에 관한 소설을  써서 팔기
도 했다. 내 소설이 거듭 팔리는 걸 본 로키는 노다지가 펑펑  쏟아지는 금광이라도 발견한 양 잔
뜩 열을 올렸다. 
  "꾸며 낸 이야기로 5백 달러를  버는데 나라고 가만히 있을 순 없지. 난 이야기  하나에 5천 달
러는 받을 수 있을 거야."
  그는 데비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곧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그런데 몇 페이지나 써야 하는 거냐?"
  바야흐로 작가가 된 로키가 선배인 내게 물었다.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쓰는 거죠."
  "내가 쓰는 건 꾸며 낸  이야기가 아니라 전부 실화야. 그런데 쓸 얘기가 하도  많아서 몇 년은 
걸릴 텐데."
  "좋아요, 계속 쓰세요. 길수록 좋으니까요."
  나는 로키가 무언가에 열중하는  게 보기 좋았다. 로키는 무슨 이야기를 쓰고  있는지는 비밀에 
부치고, 며칠에 한 번씩 작업 진도만 밝혔다. 
  "스무 페이지, 그 정도면 됐니?"
  "내용을 읽어 보기 전에는 뭐라고 대답할 수가 없조."
  "그럼, 넌 네가 쓰고 있는 걸 나한테 보여 주겠냐?"
  "보고 싶으세요?"
  "아니, 난 꾸민 얘기는 싫다. 실제 일어난 얘기가 좋지."
  "저도 실제 얘기가 좋아요."
  "넌 내 글을 이해 못해."
  "그럼 누가 이해하는데요?"
  "너보다 많이 아는 사람들."
  나는 로키가 글쓰기에 매달리는  모습이 그가 평생 해온 어떤 일보다도 경탄스러웠다.  이제 백 
살이 내일모레인 로키는 한쪽  눈이 백내장이었다. 아직 한쪽 눈은 성하다고 본인은  한사코 수수
을 마다했지만, 그 한쪽 눈 역시  뿌옇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나는 집필 작업을 구실로 내세워 백
내장 수술을 권유했다. 
  "앞이 안 보이면 글도 못 쓰시잖아요.  제 친구 중에 안과 의사가 있는데 그 친구 말이, 간단한 
수술이라 30분이면 끝난대요.  입원도 하루만 하면 되구요. 수술을 받고  다시 잘 볼수 있게 되면 
지금보다 열 배는 더 쓰실 수 있을 거예요."
  "지금도 웬만큼 보인다. 네 친구한테 손님을 그러모으려면 다른 데 가서 알아보라고 해라."
  로키는 워터게이트 청문회 때 보였던 뜨거운 열정을 고스란히  글쓰기에 쏟았다. 그리하여 이따
금 방에서 나오는 그의 얼굴에는  글을 쓰는 작가라면 누구나 갖게 되는, 그리고 집필  작업의 원
동력이 되는 자족감 내지는 충만감이 어려 있었다.
  "잘 돼가요?"
  "내 글이 팔리면 돈은 너 가져라, 너 다 주마."
  "돈을 많이 받을 것 같아요?"
  "흠."
  로키는 그렇게 대꾸하고는 도로 글쓰기에 매달렸다.
  임신 9개월이 다된  데비는 명상을 시작하기로 했다.  제시카 때는 나와 둘이서 분만의  고통을 
줄이는 호흡법을 익히는  라마즈 교실에 다녔었다. 그때 나는 라마즈  교실에서 스톱위치(운동 겅
기에서 시간을 재는데 쓰는 시계)까지  들고 열심히 호흡법을 배워서 데비를 도울 만반의 준비가 
갖춰져 있었지만, 막상 출산일이  닥쳐서 병원에 달려가 보니 보호자는 분만실에 들어갈  수 없다
는 것이었다. 그래서 병원 직원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데 간호사가 제시카를 안고 나왔다.  "라
마즈법이니 뭐니 하는 건 다 엉터리예요."
  데비는 그렇게 말하며 명상을  택했다. 꼭 출산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라기보다 명상  그 자체
를 배워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데비의 건강 식품점 옆에서 가죽  공예품 가게를 운영하는 보브와 함께 명상 교실에 등
록했다. 강사는 유난히 말이 느린 금발의 텍사스인으로 낡아빠진 아파트 단지에 살았다. 명상가답
게 그의 아파트는 온통 불상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나는 아슈람(힌드교  은둔자의 암자)에서도 살아  봤어요, 그래서 득도한  도사들도 많이 알아
요."
  우리는 둥그렇게 둘러않아서 시종  눈을 감고 있어야 했다. 강사가 요가식 호흡법이나  자기 본
성에 집중하는 방법 같은 걸  가르쳐 주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침묵 속에 앉아  있거나 다 
함께 '옴'을 외며  우주를 깉이 호흡하고 그  소리에 귀기울이며 보냈다. 강사는  명상의 분위기가 
무르익을 즈음이면 감았던 눈을 뜨면서 엄숙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밍 갤러리에서 세일을 하는데, 불교 작품들은 25퍼센트 깎아 준다니 한 번들 가보세요."
  그 6주 완성 명상 교실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영적 메시지를 보내는 법도 배웠다. 
  "나를 따라 하세요."
  강사는 그러면서 눈을 감았다.
  "나는 지금 저 머나먼 북쪽 캐나다에 살고  있는 누이에게 정신을 집중시키고 있어요. 누이에겐 
늘 문제가 많았지요. 누이와 전화 통화를 한 지도 벌써 몇 개월이나 됐어요. 사실 누이는 나와 얘
기하고 싶어하지 않죠. 그러나 난 명상법으로 누이와 통할 수 있습니다. '안녕, 메리엘런? 잘 지내
고 있구나.' 내가 소리내어  말한 건 여러분이 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자, 이제 모두 
눈을 감고 영적 메시지를 보내고 싶은 사람에게 정신을 집중하세요. 강한 집중이 필요해요."
  "내가 돈 내고 이런 짓을 하다니 정말 믿을 수가 없군."
  나는 옆에 앉은 데비에게 속삭였다.
  "쉿! 그건 내가 당신에게 보내는 영적 메시지예요. 내 것을 훔치지 말라구요."
  나는 내 소설을 한편  보내 놓은 <에스콰이어>지에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나  아무래도 신통한
효력이 없을 듯하여 이번엔 로키에게 백내장  수술을 꼭 받아야 한다는 내용의 영적 메시지를 보
냈다. 우리는 둥그렇게 둘러앉아 서로 손을 맞잡고 영적 교신을  시도했으며 그 과정이 끝나자 다
시 '옴'을 외웠다. 수업이 끝나 갈 무렵 강사는 우리의  뇌파가 알파파에 이를 만큼 심신이 편안해
진 상태인지 알아보기  위해 우리 머리 위에 탐침을  갖다 댔다. 나는 실패했지만 데비는  최대한 
평안한 상태에 이를 수 있었다. 데비의 머리 위에 탐침을 댄 강사가 말했다.
  "탐침이 거의 정지된 상태예요. 지금 부인 몸 속에 있는  아기는 깊고 푸른 평화의 바닷속에 있
는 것입니다.
  "당신은 누구에게 메시지를 보냈지?"
  내가 나중에 데비에게 물었다.
  "당신요."
  "왜?"
  "진짜로 효력이 있는지 확인하려구요."
  우리는 엉뚱한  일에 돈만 낭비했다며 웃어  버렸지만, 그로부터 일주일  뒤에 <에스콰이어>지 
소설 담당 편집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는 연락이 올 줄 알고 있었노라고 그에게 큰소리를 쳤다.
  로키에게도 역시 효력이 나타났다. 어느 날 오후 자신이 쓴 글조차 읽을  수 없게 되자 울며 겨
자 먹기로 백내장을 제거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네 친구에게 연락해라."
  "언제쯤 수술을 받고 싶으세요?"
  "내일 당장, 그것도 아침에."
  로키는 매사가 그런 식이었다.  뭔가 결심을 하면 당장에 해결을 보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견디
질 못했다. 바지를 사러 가서  바짓단을 줄여야 할 경우 판매원은 달력을 보고 있는데  그는 시계
를 봤다. 보통은 15분 내로 해달라고  성화를 부렸고 많이 봐줘야 30분, 사정이 여의치 않아 그날
로 수선이 불가능하다면 아예 사지를 않았다. 
  나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당장 이튿날 수술을 해달라고 했다.
  "첫째 앞으로 일주일은 예약이 꽉차서 안 되고, 둘째 난 백 살 먹은 노인은 안 받네. 그러니 큰 
병원으로 모시고 가게."
  친구의 단호한 대꾸였다.
  하는 수 없이 다음달로  수술 약속을 정해야 했다. 로키는 못마땅해서 불퉁거렸지만  나는 할아
버지가 질질 끌다가 이렇게 된 것이니 불평할 자격이 없다고 입을 막아 버렸다.
  로키는 아직 보이는 한쪽 눈으로 글쓰기 작업을 계속했고, 백내장  수술 직전에 내게 완성된 원
고를 건넸다. 95페이지짜리 이디시어 작품이었다.
  "이디시어라는 말씀은 안 하셨잖아요."
  "그럼 리투아니아어로 쓰는 줄 알았니?"
  "전 이디시어는 잘 읽지도 못해요."
  "너 읽으라고 준 게 아냐. 잡지사에 보내라고 준 거지.  넌 일단 보내기나 해라. 그 사람들이 다 
알아서 할 테니까."
  2개월여에 걸쳐 완성된 그의 원고는 칸도  쳐져 있지 않은 백지에 씌어졌건만 줄이 자로 잰 듯 
반듯했고 글씨도 정자체였다. 글자 한자 한자에 들인 정성이 그대로 드러났다.
  나는 장한 할아버지께 악수를 청하며 감격의 포옹을 하려 했지만, 그는 획하니 몸을 빼버렸다.
  "제 축하를 받아 주세요. 95페이지짜리 작품을 쓰는 건 보통 일이 아니라구요."
  "글이 잡지에 실리고 돈까지 받으며, 그때 가서 축하해라."
  그때부터 로키는 내 소설들을 얕보지 않게 되었다. 백 살이라는  고령도 작가의 긍지를 당할 순 
없는 모양이었다. 사실 로키는 소설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베스트 셀러 한 권 안 읽어  본 문외한
이었으며, 돈만 해도 1백 달러만 넘으면  무조건 거금이었다. 그러나 종일 백지에 코를 박고 앉아 
원고에 매달리면서 글쓰기의 뼈를  깎는 어려움을 몸으로 체험한 터라, 아무리 꾸며  낸 이야기를 
쓰고 있을지언정 내가 얼마나 힘든 작업을 하고 있는지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로키는 커피를 마시고 텔레비전에 곁눈질을 하며 말했다.
  "생각했던 것처럼 쉽진 않더구나, 하지만 좋은 도넛을 만드는 게 그 보다 훨씬 어려워."
  나는 무명 작가인 그에게 미리 실망할 준비를 시켜야 했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처음 나온 원고를 그대로 팔진  않아요. 그러니 할아버지도 원고에 손을 좀 
봐야될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리냐?"
  "원고를 좀 고치는 거죠."
  "난 안 고친다, 전부 사실이니까."
  "좋아요, 그럼 작품을 하나 더 써보시는 건 어때요?"
  "아니다, 그건 네 직업이야."
  로키가 워낙 고령인지라 내 친구인 안과 의사는 수술이 끝나고도 3일 간을 더 병원에 입원시키
며 찬찬히 경과를 살폈다.  로키는 퇴원을 한 뒤에도 2주일이나 더  안대를 하고 다녀야 했고, 그 
사이 나는 로키의 원고를  읽어 내려갔다. 작품의 주인공은 폴란드 두브노바의 어느  위대한 라비
였다. 18세기 사람이었던 그는 폴란드와 독일을 두루 여행하며 살았는데 '두브노바의 설교사 마기
드'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설교는 너무도 훌륭하여 그가 단상에만 서면 사방에서 몰려
든 선남선녀들로 회당이 미어 터졌다. 로키는 특히 주인공의  뛰어난 학식을 강조했는데 열여덟의 
나이에 <탈무드>를 줄줄 외웠다는 것이었다. 
  마기드는 신심 또한  타의 귀감이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반드시  탤리스(유대인 남자들이 예
배 때나 축일에 입는  가운 비슷한 예복)와 터필린(유대인의 호신패)을 경건히  갖춰 입었고 종일 
그런 차림으로 지냈다. 그리고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엔 단식을 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훌륭한 조
언을 들려주었으며 그들이 율법을 지키며 살도록 도와주었다.
  나는 무식한 농군이 책을  읽듯 손가락으로 한자 한자 짚어가며 이디시어를 읽어  나갔다. 그러
다 보니 모르는 글자도 많고 해석이 안 되는 부분도 적지 않았다. 
  마가드는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한 번은  길에서 장님 아버지를 이끌고 가
는 소년을 만나 집으로 데려왔는데 나중에 그 소년은 위대한 라비가 되었다.  또 한 번은 집도 절
도 없이 떠돌며 빈둥빈둥  술타령이나 하는 건달을 만났는데, 그 건달은 마기드의  선도로 건실한 
사람이 되었으며 열심히 일하여 회당을 세우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마기드의 도덕적 일화들 속에는 로키가 찬미해 마지않는  신앙심과 학식, 신도들이 북적
거리는 회당이 들어 있었다.
  나는 그 작품을 읽으면서 언제 시간이 나면 로키와 머리를 맞대고 앉아 영어로 옮겨 보고 싶다
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로키  쪽에서 그런 부탁을 해오지도 않았고 또 나도 그럴  만한 경황이 
없었다. 너무나 엄청난 사건들이 한꺼번에 밀어닥쳤기에.

      17. 우리의 영웅, 데비
  로키의 왼쪽 눈은 영구 콘택트 렌즈로 시력을 되찾았지만, 몇  달 뒤에 장암으로 다시 대수술을 
받아야 했다. 로키는 회복이 빨라 2주 만에 퇴원을 했고 퇴원한 다음날로  우리 집에 와서 아침 8
시에 쓰레기를 갖다 버렸다. 그러나 나는 자꾸 걱정이 되었다.
  "전에는 새벽 6시에 쓰레기를 버리셨는데."
  내가 데비에게 근심을 토로했다.
  "쓰레기차가 오는 시간은 오후 네시나 다섯시예요. 그러니  여덟 시간이나 빨리 갖다 버리신 거
라구요."
  "아무튼 예전 같지가 않으셔."
  "점점 똑똑해져 가는 건지도 모르죠."
  "놀리지 마. 난 걱정스럽다구. 이제 할아버진 오전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낮잠을 주무셔."
  "할아버진 백 살이고 또 수술 회복기에 있어요. 그  정도면 건강하신거지 더 이상 뭘 바라나요? 
할아버진 휴식을 취할 권리가 있다구요."
  옳은 말이었다. 로키는 하루 두  번의 낮잠과 점점 더 기승을 부려대는 졸음을 마음  편히 받아
들일 권리가 이었다. 나는 조금씩 마음의 준비를 해갔다. 피할 수 없는 이별을 맞을 준비를.
  데비는 로키가 한사코 마다는데도 고집스럽게 그의 사진을 찍어댔다.  그렇게 찍힌 사진들 중엔 
아름다운 광경을 담고 있는 것들도 있는데  그중 하나가 로키와 제시카가 함께 목욕을 하고 있는 
사진이었다. 로키는 ABC가 박힌  제시카의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고 앞치마가 허리께까지밖에 오
지 않았다. 로키와 제시카가 함께 찍은 사진들을 보면 제시카는 늘 수줍게 미소짓고 있는데, 엄마
가 카메라를 들이대기만 하면 화가 나서 잔뜩 인상을 쓰는 증조할아버지의 몫까지 책임지고 한껏 
상냥하게 보이려고 애쓰고 있는 것 같았다.
  로키가 우리 둘째아이 샘을  안고 있는 사진도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사진 속에서  샘은 자기보
다 백 살이나 많은 증조할아버지의 뺨에 입을 맞추며 앙증맞은 손으로 할아버지의 모자를 잡으려 
하고 있었다. 제시카가 어릴 때 그랬고 내가 어릴 적에 그랬듯이. 로키가 자꾸만 엄습하는 무력감
을 이겨내는 데 아이들이 커다란 힘이 되었다. 
  이따금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  로키가 통 먹지를 않는다고 일러바치곤 했다. 그러면  나는 제시
카와 샘을 데리고  득달같이 달려갔고, 두 아이는  양쪽에서 증조할아버지의 팔을 끌고  부엌으로 
들어가서 달걀 반숙이나 청어나 빵을 먹게 했다.
  로키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증손주들의 재롱과 내가 작가로서  자리를 잡아 가는 모습을 
지켜 보기 위해 억척스럽게 생을 연장시켜 나갔다. 암과 부분적인  실명과 30년 간의 실직 생활도 
꿋꿋이 이겨내면서. 그는 아흔에 이사를 두 번이나 했고 가는 곳마다 새 친구들을 사귀었다. 로키
에겐 아직도 회당에 나가고,  <탈무드>를 공부하고, 에어컨에 맞서 싸울 힘이  남아 있었다. 역시 
데비의 말이 옳았다. 4대가 한데 모여 사는 다복한 생활을 하고 있는  내가 더 이상 바랄 것이 무
엇이겠는가.
  1970년대를 살면서 나는  히피에서 아버지이자 작가로 변신했고, 데비도 아이들이  유치원에 다
니기 시작하면서 시민  대학에서 강의를 하나 맡았다.  바야흐로 인생의 전환기를 맞이한  데비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난 아이를 더 낳고 싶어요.  하지만 우선 재충전의 시기가 필요해요. 그러니 10년 정도 생각할 
여유를 달라구요."
  겨우 스물여섯, 스물일곱, 스물여덟의 계단을 오르고 있는 그녀에겐 10년이 길지 않은 세월이었
지만, 인생의 막바지에 다다른 로키에겐 그렇지 않았다. 
  우리들에겐 느릿느릿 더디게만 가는 시계 바늘이 그에겐 전광석화처럼 빨랐다.
  로키는 그런 얘기를  심심찮게 내비쳤다. 유난히 옷  욕심이 많은 그에게 나느  모자다, 셔츠다, 
바지다 일년에 몇 벌씩 사 안겼으나, 구두는 고르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았다. 남자 구두는 거개가 
사이즈 7부터 시작되는데 로키는 6을 신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운  좋게도 사이즈 6에다 로
키가 제일 좋아하는 갈색과  흰색이 섞인 코도반 가죽 구두를 발견하자  내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가격 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나는 비싼 물건을 싫어하는 그의 성격을 잘 아는지라 일부러 가격표를 뗐다.
  "갖다 물러라. 난 안 신을란다."
  이미 예상했던 일인지라 나도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할아버지 발에 맞는  구두가 드물어서 이제까진 모양은  보지 않고 사이즈만 맞춰서 사왔는데 
이걸 보니 사이즈도 딱 맞고 모양도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거더라구요.  그래서 기분 좋게 사온 건
데 어떻게 도로 물러요?"
  그러면서 나는 어릴 적 내가 새 신발을 신을 때마다 그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을 그대로 써먹었
다.
  "떨어질 때까지 신으세요. 그럼 이것보다 훨씬 좋은 걸 사드릴 테니까."
  나는 두툼한 가죽 구두를 억지로  그의 발을 신겼다. 로키는 그 구두가 마음에 드는  기색이 역
력하면서도 얼른 벗어 던지며 말했다. 
  "갖다 물러. 늙은이가  이런 좋은 구두를 신는 건 낭비다.  구둣값이 아깝지 않을 만큼 오래 살 
자신 없다."
  내가 끝내 고집을 꺾지 않자 로키는 하는 수 없이 구두를 꺼내  신었다. 예전 같으면 아껴서 토
요일에만 신었을 터인데 매일같이 신고 다니는 걸 보니 구둣값을 낭비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
는 모양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그 구두만 보면 로키의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다.
  "너무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할아버지가 잠시 마음이 약해져서  그러는 것일 뿐이
라구요. 로키는 서둘러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아요. 내 생각엔  할아버지를 좀 바쁘게 해드려야 할 
것 같아요."
  데비가 보다못해 한 말이었다.
  이튿날 데비는 로키가 쓰레기를 버리는 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에게 상의할 일이 있다고 말
했다. 그리하여 로키는 우리 집에 들어와서 그녀와 커피를 마시게 되었다. 
  "할아버지를 힘들게 하고 싶진 않지만, 도움이 좀 필요해요."
  데비가 로키에게 사정조로 말했다.
  "그게 뭔데?"
  "제가 매주 화요일, 목요일 밤에 시민 대학에서 강의를 맡고 있다는 거 아시죠."
  "그렇다고 야간 근무는 아니잖냐, 두어 시간 일하는 거지. 밤새 일해야 야간 근무지."
  "할아버지 말씀이 옳아요. 그럼 저녁때 잠깐씩 일하는 걸로 해두죠."
  "그게 바로 파트 타임 근무지."
  "그런데 제가 잘만 하면 풀 타임으로 일할 수 있게 될지도 몰라요."
  "넌 풀 타임으로 일할 필요 없어. 애들하고 같이 있어야지."
  "이제 몇 년 있으면 애들은  학교에 갈 테고 그럼 저도 풀 타임으로 일할 수 있게  돼요. 풀 타
임이래야 겨우 하루 네 시간 근무지만요."
  로키는 껄걸 웃으면서 말했다.
  "너희 부부는 중노동꾼들이로구나. 그런데 나한테 부탁하고 싶은게 뭐냐?"
  "어렵지 않으시다면 매주 화요일, 목요일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애들 좀 봐주셨으면 해서요. 저
도 같이 집에 있긴 하겠지만 할아버지가 애들 노는 걸 지켜 봐 주시면 그 시간에 강의 준비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중간 중간 힘드시면 제가 교대할게요."
  로키는 아이들을 지켜 보는 일을 맡고 나서 한결 생기가 돌았다. 
  "전에도 우리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셨는데 말야."
  내가 말했다.
  "하지만 전에는 그냥  계셨던 거지 책임을 맡진 않으셨죠. 이젠  말하자면 근무중이니까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하거든요."
  "정말 멋진 아이디어야."
  "그런데 중대한 문제가 하나 생겼어요. 내가 아주 죽겠다구요. 제시카 유치원 친구 하나를 우리 
집에 와서 놀게 했는데 로키가 영 마땅치 않아 해요. 그 아이 이름이 레베카인데, 글쎄 오늘은 그 
어린애한테 집에 가란 말을 해요, 그래. 레베카가 얼마나 서럽게 우는지 달래는 데 무려 30분이나 
걸렸지 뭐예요."
  "그래서 로키를 해고할 작정이야?"
  "아뇨, 일거리를 바꾸어 볼 생각이에요."
  이튿날 제시카와 레베카가 점심 식사를 끝낸  뒤 데비는 아이들을 길 건너에 있는 공원에 놀러 
보냈다. 보디가드로 채용된 로키가 아이들의 손을 잡고 길을 건네주었다. 데비는 로키의 알루미늄 
의자를 공원 놀이터  근처에 가져다 놓았고, 오후의  햇살 아래서 졸음으로 정신이  흐리멍덩해진 
로키는 레베카에게 질투를 덜하게 되었다. 
  "로키는 의자에 앉아서 졸았구요, 다 놀고 나서 집으로 올 때 우리가 깨웠어요. 그네를 밀어 달
라고 중간에도 몇 번 깨웠어요."
  제시카의 보고였다. 
  로키는 토요일엔 회당에 나가느라 바빴고  일요일엔 우리 부부가 대학 운동장에서 조깅을 하는 
동안 거기서 아이들이 노는 걸 지켜 보았다. 제시카와 샘은  장대 높이뛰기 아래 모래밭에서 놀았
고 로키는 심판석에 앉아 감독했으며, 조지는 우리를 앞질러 달리며 흙먼지를 일으켰다. 
  아이들은 물이 담긴 종이컵을  들고 골인 지점에서 기다리는 걸 무척이나 좋아했다.  데비는 아
이들에게 짜릿한 흥분을  안겨 주려고 나와 보조를 맞추어 천천히  뛰다가 마지막 지점에서 전력 
질주를하여 나보다 한두 발 앞서 골인하곤 했는데, 그럴 때면 아이들은 목이 터져라 "엄마 최고!"
를 외쳐댔다. 데비는 아이들의 영웅이었다.
  나는 로키가 건강한 몸으로 오랫동안 우리  곁에 머물러 주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 새록새록 
절감했다. 그래서 조용히 나만의 리듬에 맞추어 조깅을 할 때면  기도를 하곤 했는데 그건 절대자
를 향한 기도가 아니라 내 고동치는 심장과 가쁜 숨에서  저절로 우러나는 기원이었다. 나는 우리
의 할아버지가 건강하게 장수를 누리고 또 고통 없이 죽음을 맞게 되기를 기원했다.
  그러나 내 기도가 필요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18 천장의 나사못
  우리는 데비의 제자가 추천한  <핑크 플라밍고>라는 컬트 영화(cult movie)를 보고 있었다. 다
른 관객들은 영화에 흠뻑 빠져  든 것 같은데 우리 부부는 그렇지가 못했다. 데비가  꾸벅꾸벅 졸
고 있는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지금 스크린에 사람이 몇 명이에요?"
  "하나."
  "정말예요?"
  "정말이잖구. 당신 눈에는 몇으로 보이는데?"
  "둘요. 5분 전부터 죽 그랬어요."
  "콘택트 렌즈가 잘못된 모양이군."
  그래서 한쪽 눈을 감자, 중시 현상은 사라졌으나 영화에 별반  재미를 느끼지 못한 우리는 도중
에 나와 버렸다.
  그 사건은 그렇게 대수롭지 않은 일로 시작되었다. 우리는  영화관을 나오면서 재미없는 영화는 
중시 현상까지도 일으키는가 보다 하면서 깔깔거리고 웃기까지 했다.  그후 데비는 콘택트 렌즈를 
점검하러 안과 의사를 찾았다. 안과에선  아무 이상도 없다면서 치과로 가보라고 했다. 턱의 긴장
이 시력 장애를 가져올 수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치과 의사는  턱의 이상을 발견하지 못하고 귀 
전문의를 찾아가도록 했다. 귀를 진찰한  결과 역시 아무 이상이 없었다. 데비는 산부인과 주치의
를 찾았다. 
  "얼굴에 붙은 기관에 관련된 전문의는 다 찾아가  봤어요. 모두들 이상이 없다는데 지금도 당신 
얼굴이 둘로 보인다구요."
  데비의 탄식이었다.
  그녀의 산부인과 주치의는 신경과 전문의를 추천했고 신경과에선 입원 검진을 받아보도록 권유
했다. 뇌종양이 원인일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엑스선실에 앉아서  데비의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렸다.  데비는 집에서 입던 잠옷  위에 
병원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우리 부부는 몹시 겁에 질린 상태였다.
  "이 염병할 둘로 보이는 현상만 아니면 다른 덴 아무 이상도 없는데."
  데비가 한숨처럼 내뱉었다.
  우리는 데비가 엑스선과 단층 촬영을 하러 들어갈 때까지 초조하게 잡지를 뒤적이며 앉아 있었
다. 저녁때가 되자 담당 의사가 입원실로 걸어 들어오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뇌종양은 아닙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나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데비의 머리칼에 키스를 했다.
  "그럼 언제 퇴원하는 겁니까?"
  그러나 의사는 우리처럼  좋아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는  데비를 계속 입원실에 붙들어  놓고 
매독이니, 간염이니, 수막염이니 별별 검사를 다 했고 척수 결핵인지도 모른다며 척수액까지 뽑아 
검사했다. 마지막으로 뼈 검사까지 마친 뒤 의사가 입을 떼었다.
  "테스트 결과 모두 아무 이상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날이 입원 닷새째 되는 날이었는데  검사 결과와는 딴판으로 데비는 어지럼증이 심해져서 부
축 없이는 일어서지도 못하고 있었다.
  "저의 소견으론 다발성 경화증이 분명합니다. 다발성  경화증의 유일한 진단법은 다른 가능성들
을 모두 제외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까지 모든 검사를 실시한 것이구요."
  "그게 무슨 병인데요?"
  데비가 물었다. 사실 나도 잡지에 난 흑백 공익 광고에서 그런 비슷한  이름을 들어 본 것 이외
엔 다발성 경화증에 대해 전혀 지식이 없었다.
  의사는 장장 30분에  걸쳐서 우리 부부에게 인체의 중추  신경계를 감싸고 있는 '마이얼린'이란 
지방질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다발성 경화증이란 그 마이얼린이라는 지방질을  변질시키는 질병
이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물어 보았지만 의사는 그 어느  것도 딱 부러지게 대답을 못했다. 
다발성 경화증의 원인도, 그 치료법도  아직 밝혀진 게 없다는 것이었다. 의사는 다발성 경화증에 
관한 두틈한 책자를 건네 주며 직접 읽어 보라고 했다. 
  "병세가 나타났다가 저절로 쾌유되는 경우도 가끔은 있습니다. 또, 일년이나 5년쯤 뒤에 재발해
서 치유가 되지 않을 수도 있지요."
  "그럼 죽을 때까지 둘로 보이는 현상이 계속될 수도 있다는 말씀인가요?"
  데비가 물었다. 그녀는 아예 왼쪽 눈을 쓰지 않는 것이 더 나아서 검정색 안대를 대고 있었다. 
  "부인의 경우 현재 시신경에 이상이 나타나고는 있습니다만, 저절로 치유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이거죠?"
  "그렇습니다. 저도 분명한 대답을 해드리고 싶습니다만  다발성 경화증엔 일정한 유형이 없습니
다. 우선 그 책자를 읽어 보시고 나중에 다시 얘기를 나누죠."
  데비가 책자를 펼치자 훨체어에 앉은 남자의 사진이 나타났다.
  "그럼 다리에도 이상이 나타날 수 있는 건가요?"
  의사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대꾸했다.
  "저로선 어떤 예측도 할  수 없습니다. 다른 수천 명의 경우에서 특정한  현상이 나타났다고 해
서 부인의 경우에도 그럴 것이라는 말씀은 못 드립니다."
  그 의사와 달리 이제부터 나는 다발성 경화증이 데비에게 어떤 식으로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
서 이야기하려 한다.  그녀는 길고 고통스러운 투병 생활을 해야  했고, 나도 어느새 아내의 병든 
모습에 익숙해져서 건강하던 옛날 모습을  떠올리려면 한참이나 기억을 더듬어야 하는 처지가 되
고 말았다.
  병원에서 퇴원한 데비는 일상의 단 한 부분도 포기하려 들지  않았다. 마침 그때 그녀는 제시카
네 유치원 재롱 잔치에서 선보일 슬라이드 쇼를 준비중이었는데 그 작업도 계속 진행했다.
  데비는 동화가 아닌 현실  세계를 다룬 이야기를 만들었는데 그 소재인즉 개  유괴 사건이었고, 
작품의 두 주인공 제시카와 조지는 연기 호흡이 잘 맞았다.  한 슬라이드를 보면 갈색 고수머리의 
제시카가 애처로운 표정으로 사탕이 가득 담긴  커다란 유리병 앞에 서 있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모습은 보기만 해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제시카와 함께 출연하는 다섯 살바기 스튜어트도, 비록 
그 눈길이 제시카를 향한  것인지 사탕을 향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갈구하는 눈빛을  보내고 있
었다. 다섯 살바기 악당들이 고무 시거를 질겅질겅 씹으며 유괴한  조지를 차고 안에 가두고 쇠사
슬로 꽁꽁 묶었다. 그러나  데비와 유치원 교사인 데이비드가 공동으로 쓴 각본을  보면 마지막엔 
착한 아이들이 승리하게 되어 있었다.
  결국 유괴범들에게서 구출된  조지는 멋진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게 되는데,  조지가 테이블에 
점잖게 앉아 메뉴를 훑어보는 장면이 나오면 다섯 살바가 아이들은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데비는 슬라이드 작업을 하면서도 중시 현상 때문에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내게 
일일이 확인을 받곤 했다.
  "이거 초점이 잘 맞아요?"
  데비의 몸은 부분 부분 주인을  배반했다. 발가락 하나와 왼쪽 발바닥, 뺨, 방광, 머리가죽이 감
각을 잃었다. 게다가 증세도 일정치  않아 어떤 부분은 일시적인 마비 현상을 거친 뒤  다시 감각
을 되찾는가 하면 어떤 부분은 계속 감각이 없었다. 평형  감각이 희미해지자 그녀는 새빨간 지팡
이를 샀다. 데비는 플리머스 자동차 뒷범퍼에 '용감히 싸우자!'는 스티커를 붙였고 2년 반 동안 용
감하게 병마와 싸워 나갔다. 
  당시 나에겐 중요한 일과 중의 하나가 데비와 나란히 침대에 누워 천장에 붙은 구형 유리 등을 
고정시킨 작은 나사못을 쳐다보는 일이었다. 1백 와트짜리 전구를  둘러싼 2달러짜리 불투명 유리
를 고정시킨 5센트짜리 나사못. 나는 희망의 땅을 찾아 망망대해를 떠도는 맷사람의 심정이 되어, 
마치 그 작은 나사못이 희망의 땅을 비춰 주는 등대라도 되는 양 간절히 바라보곤 하였다.
  데비는 어지럼증이 더해 가자 점점 더 많은 시간을 누워서  보내게 되었다. 아내의 끔찍한 병이 
중시 현상과 함께  나타났기에, 나는 그녀의 눈이 정상을 찾는  것에 모든 희망을 걸었다. 그녀가 
천장의 나사못을 하나로 보게되면 우리 모두 행복했던 과거로 되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데비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 우리 주위엔 좋은 친구들이 많이 있었다. 이웃집에 살며 아이
들을 데리고 자주 놀러 오는 마시,  카풀(car pool)로 맺어진 친구 제인, 데비의 라켓볼 파트너 메
릴, 사친회에서 만난 친구 쿠키, 규칙적으로  번갈아 가며 데비를 찾아와 책을 읽어 주는 우리 영
문과 교수들. 그러나 우리는 그들 누구와도 온전히 교감할 수가 없었다. 우리 부부는 둘이만 외따
로 떨어져서 세상 한켠에  서 있었다. 침대 매트리스를 바다삼아 떠돌며 우리의  북극성이자 어둠
을 헤쳐 나가는 등대인 천장 나사못을 올려다보면서. 데비의 엄지발가락은 우리의 시계가 되었다. 
더듬거리며 걷다가 부딪쳐서 엄지발톱에 멍이 들었는데 그 멍이 점점 커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멍이 발톱 끝까지 퍼지기 전에 모든 악몽이 끝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전에 끝나면 더 좋구."
  우리 부부는 병이 치유될 것을 믿고 있었다. 이상한 병에  맥없이 무너지기엔 너무나 젊고 건강
한 데비였으니까.
  해리엇은 매일같이 전화를 걸어 왔는데  딸의 병명이 다발성 경화증이라는 사실을 한사코 부인
하려 들었다. 그녀는 몇몇  연구가들의 의견을 좇아 데비의 병이 바이러스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
했다. 나도 왠지 다발성  경화증보다는 바이러스 감염 쪽으로 생각이 기울어 굳이  장모와 병명을 
가지고 말다툼을 벌이진 않았다. 사실 나는  병의 이름 따위에 신경 쓸 계제도 못 되었다. 산산이 
부서지려는 우리 가족의 삶을 지탱하기 위해 발이 닳도록 뛰고 있었으니까.
  주부인 데비가 중시 현상과 어지럼증이 사라지길 기다리며 침대에 누워 지내는 동안 우리 집엔 
가정부와 아이 돌보는 이들이 연이어 들고났다. 구관이 명관이라고 했던가, 새로 갈아치울 때마다 
점점 형편 없는 여자들이 나타났는데 그중에서도 데비의 시중을  들 간병인들은 최악이었다. 그래
서 내가 직접 데비를 목욕시키고 머리 감기는 일을 맡겠다고 나섰지만 데비는 몹시 꺼려 했다.
  "당신에게 이런 일을 시키는 거 정말 싫어요. 당신의 아내가  아닌 환자 같은 생각이 든단 말예
요."
  "바보 소리, 난 오랫동안 할아버지 목욕도 시켜 드렸어."
  "그것과는 경우가 달라요."
  데비의 말이 옳았다. 그녀는 병약자가 아닌 아내와 엄마로 남고 싶었던 것이다.
  데비의 병세가 악화되어 가자  로키와 함께 보내는 시간은 점점 줄어갔다. 나는  로키와 배시에
게 아이들을 맡기로 자주 갔지만 로키 쪽에서 우리 집에  건너오기를 꺼렸던 것이다. 그건 데비를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몰라서였다. 로키는 병상에 누워 있는 데비가 아니라, 가게를 운영하고 아이
들을 돌보던 건강한 데비의 모습에 익숙해 있었던 것이다.
  내가 데비의 병에 대해 아무리 설명을 해주어도 로키는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기억할 거 다 기억하고 알 거 다 아는데 머리에 무슨 이상이 있다는 거냐?"
  나는 책자에서 읽은 비유를 들어 쉽게 설명했다.
  "그건 마치 고장난 전등  스위치 같은 거예요. 스위치의 명령이 전 등에  도달하지 못하면 불이 
들어오지 않는 거죠."
  "그럼 암이 틀림없구나."
  "암은 아녜요. 수백 번 말씀드렸잖아요."
  "그럼 언제 낫는 거냐?"
  나는 로키가 의학적인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면 인내심을 잃고 말았다. 그 동안  다발성 경화증
에 대한 자료는 닥치는 대로  다 읽었지만 결국 아무런 답도 찾아낼 수 없었으니까.  나는 의사가 
왜 애매한 태도를 보였는지  비로소 납득이 되었다. 그러나 로키는 나의 애매한  태도를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로키는 1백 년이라는 세월을 절대주의 입각해서  살아온 사
람이니까. 그의 세계에선, 병에 걸린  사람은 쾌유되거나 죽는 것이지 시름시름 앓는다는 건 있을 
수 없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할아버지의 그런 태도를 장난으로 넘겼겠지만, 마음의 여유가 없다
보니 벌컥벌컥 화를 내게 되었다.
  "이미 골백번도 넘게 한 얘기를 왜 자꾸 시키세요. 데비는  뇌에 이상이 생겼고 언제 나을지 아
무도 몰라요."
  "너는, 너는 도대체  뇌가 어떻게 된 거냐?  미친놈처럼 길길이 날뛰고 있는 건  데비가 아니라 
바로 너야."
  "그럼 제가 어떻게 행동하길  바라세요? 에스트로스 팀이 승리했다고 좋아서 펄쩍펄쩍 뛸까요? 
날씨가 30도를 넘지 않았다고 싱글벙글 할까요?"
  "누가 그렇게까지 하라고 했니? 그저 주변을 돌아보며 살라는 거야."
  "전 그렇게 살고 있어요."
  "아이들한테 신경 좀 써라."
  "애들은 괜찮아요. 학교도 잘 다니고 돌보아 줄 사람도 두었으니까요."
  "그런 사람은 필요 없어, 다 돈 낭비지. 애들은 내가 돌보마."
  우리는 싸움만 했다 하면 눈  깜짝할 사이에 막다른 데까지 가곤 했는데, 이번엔 데비의  병 이
야기를 하다가 둘 다 부아가 치밀어 아이들 돌보는 문제로 불길이 옮겨 갔다.
  데비가 앓기 시작했을 대 샘은  겨우 세 살이었다. 그래서 엄마 침대 위에 기어  올라가거나 그 
위에서 뛰어서는 안 된다고 설명을 하면  제시카는 말귀를 알아들었으나 샘은 들은 체도 하지 않
았다. 
  밤마다 샘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데비는 베개로 등을 받치고 앉아서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샘은 샤워를  끝내고 수건으로 몸을 말리기가 무섭게 내가 배트맨  잠옷을 입혀 
줄 겨를도 없이 엄마에게로 달려가곤 하였다. 
  한 번은 로키도 지켜 보고  있는 가운데 샘이 데비의 침대로 펄쩍 뛰어 올라가더니,  내가 그러
지 말라고 뒤에서 소리소리 질러도 못  들은 체하며 무릎으로 쿵쿵 뛰어 엄마에게 다가가서 졸라
대기 시작했다. 
  "옛날얘기 해줘요, 흐응."
  샘은 나를 피하기 위해 엄마 품으로 파고들었고 그 충격에  데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
녀는 어지럼증이 어찌나  심한지 침대 위에 책을 한 권  올려 놓아도 못 견뎌 했던  것이다. 나는 
소리를 질러대며 샘을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엄마 침대에서 뛰지 말랬잖아!"
  샘은 발딱 일어나서  다시 엄마에게 달려가려고 했다. 나는  재빨리 아이를 끌어내어, 엄마한테 
가겠다고 악을 쓰면서 울어대는 아이를 번쩍 안고 나가서 제  방에 처넣었다. 제시카와 로키는 멍
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고서 있었다. 
  "어린애한테 그렇게까지 심하게 할 건 없잖냐. 엄마에게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닌데."
  로키는 내가 못마땅해서 핀잔을 주었다.
  "해를 안 끼치긴 뭘 안 끼쳐요. 괜히 아시지도 못하면서 참견하지 마세요."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모르는 건 내가 아니라 너다. 가서 샘을 데리고 나와라. 옛날얘기를 해주거나."
  "아빠 말을 들어야 한다는 걸 깨달을 때까지 그냥 놔두겠어요."
  "그럼 내가 가서 데려오마."
  그러면서 샘의 방으로 들어가려는 할아버지를 나는 얼른 막아섰다.
  "아이가 옛날얘기를 해달라는 건데 뭐가 그리 잘못이란 말이냐."
  "나중에 시간이 나면 얘기는 실컷 해줄 거예요."
  "그럴 시간이 언제  나겠냐. 누가 훔쳐 가기라도 할까 봐  데비 곁에서 꼼짝도 안 하면서. 제발 
애들한테 신경 좀 써라."
  로키는 나를 밀어내려 했으나 나는 옴죽도 하지 않았다.
  샘은 자지러지게 울어대며 방문을 쾅쾅 두드리고 있었다.
  "할아버진 아이들을 돌보기엔 너무 늙으셨어요."
  "너나 네가 이 집에 들이는 가정부들보단 훨씬 나아."
  "가세요. 할아버진 일을 더 어렵게 하고 있어요."
  "가기 전에 애 먼저 데리고 나오마."
  내가 방문을 열자 샘이 총알처럼 퉁겨져 나왔다. 샘이 다시  데비의 침대로 뛰어갔더라면 난 그
애를 번쩍 들어서 벽에다  내던졌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샘은 로키에게 달려가서  품안으로 파
고들었다. 로키가 샘을 들어올리는 걸 도와주려고 내가 손을 대자 둘 다 나를 밀어냈다. 
  로키는 샘을 안고 거실 카우치로 가며 속삭였다. 
  "이 할아비가 재미난 얘기  해주마. 할아버지가 처음 미국에 왔을 때 비버  폴스에 있는 빵집에
서 일을 했는데......"
  로키는 샘을 무릎 위에 앉혀 놓고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고,  제시카가 그두 사람 옆에 다소곳이 
앉았다. 
  나는 다시 우리 침실로  돌아갔다. 천장의 나사못을 바라보고 있는 데비의 얼굴이  마치 시체처
럼 창백했다. 그녀의 뺨 위로 소리 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매일 되풀이하는 질문을 던졌다. 
  "몇 개로 보여?"
  "셋요. 날 그냥 내버려둬요."

      19 가족의 그늘
  1978년에서 1980년 사이  데비의 병세는 악화 일로였지만,  102세에 이미 무덤에 한  발을 들인 
것처럼 보이던 로키는 돌연 활기를 되찾았다. 그만 세상을 하직하기엔  할 일이 너무나 많았던 것
이다. 로키는 103세, 104세에도 부지런히 몸을 놀려 우리를 도왔다. 
  아이들 문제도 해결을 보았다. 집에서  아이들을 돌볼 사람을 따로 두었고, 또 어머니가 적극적
으로 떠맡고 나서서 로키에겐 손수 제시카와 샘을 돌보아야 하는 책임은 없어졌지만 감독관의 역
할이 주어졌다. 할아버지는 워낙 꼼꼼하기가 이를 데 없어서 아이들  일이라면 어느 작은 것 하나 
무심히 지나치지를 않았다. 
  로키는 샘에게 운동화 끈을 나비 모양으로  묶는 법을 가르칠 참이었는데 내가 생각 없이 접착
식 운동화를 사다  줬다고 불퉁거렸고, 제시카도 야구  경기장에만 데려가지 말고 이제  바이올린 
레슨을 시켜야 한다고  잔소리를 했다. 한때 튼튼한 코도반  가죽 구두가 낡아 떨어질 때  까지로 
잡았던 그의 삶의 시한이 이제 제시카와 샘이 학교를 마칠때까지로 멀찌감치 늦춰졌다. 
  샘의 유아원 담임 선생님이 아이를 일년  더 있다가 유치원에 넣는 것이 좋겠다고 권하자 나는 
로키와 함께 면담을 하러 갔다. 
  "무슨 일입니까? 샘이 유치원에 들어갈 만큼 똑똑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로키가 따지듯 물었다.
  나는 그러잖아도 집에서부터 샘을 일년  더 있다가 유치원에 넣을 생각이었다고 로키에게 설명
을 했었다. 샘은 생일이 11월이어서 제 나이에 넣으면 좀 이르고, 일년 있다가 넣으면 좀 늦은 감
이 있어서 어중간 했던 것이다.
  "급할 건 없습니다. 유아원에 일년 더 두죠."
  내가 담임인 쇼 여사에게 말했다.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는 거예요? 내 사회  보장 연금도 똑 떨어지게 계산을  잘하고 ABC도 
알고 히브리어 노래도 많이 아는데."
  로키는 아무래도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어르신 말씀이 옳아요. 샘은 똑똑한 아이죠. 하지만 오리기에 문제가 많아요."
  쇼 선생이 대답했다.
  "오리기라니,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가위로 오리기 말예요."
  쇼 선생은 오른쪽 손가락 두 개로 가위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오리기요?"
  "예."
  쇼 선생이 가위 모양의 손가락을 가까이 들이대자 로키는 손으로 선생의 손가락을 밀어내며 말
했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립니까? 아이를 재단사 만드는 유치원에 보내는 것도 아닌데."
  쇼 선생이 웃으면서 대꾸했다.
  "샘은 손재주가 좀 뒤떨어질 뿐이에요. 그 또래의 남자아이들은 대부분 그렇죠."
  "우리 애가 못하는 게 뭡니까?"
  로키가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똑바로 자르질 못해요."
  "나중에 재단사가 될 것도 아닌데 그게 무어 그리 문젭니까?"
  "그만 됐어요, 할아버지. 그러잖아도 일년 더 있다가 보낼 작정이었어요."
  내가 보다못해 끼여들었다.
  "회계 못지않게 계산을 잘하는 아이를 그까짓 가위질 똑바로 못한다고 저러잖니."
  로키는 끝내 억울함을 삭이지 못했다.
  나는 쇼 선생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는 로키를 끌다시피 해서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마침 
학기말이어서 복도에 엄마들이 많이  와 있었다. 아이들이 쓰다 만 크레용 토막과  칸이 널찍널찍
한 공책 그리고 스티커 따위를  챙기러 온 것이었다. 나는 샘의 반 엄마들을 아무도  몰랐고 일부
러 만날 기회를 마련한 적도 없었다. 
  제시카에겐 친구가 우글우글했다.  데비가 슬라이드 쇼를 상연했던 그날 유치원  졸업식이 있었
지만 여름 내내 유치원  친구들과 노느라 밖으로만 나돌았을 정도였다. 제시카의  인기는 1학년이 
되어서까지 계속 되었지만,  2학년에 올라가면서 친구들 집에  놀러 가는 일이 뚝  끊기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으려 했다.
  나는 제시카가 점점  고립되어 가고 있는 걸  뻔히 알면서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제시카는 집에서 샘하고만 놀았다.  동생에게 카드 놀이를 가르쳐 주고 둘이 붙어  앉아서 카드판
을 벌였다. 나는 아이들에게  소형 트램펄린(스프링이 달린 사각, 육각 모양의 매트)과  야구 글러
브와 플라스틱 방망이, 배터리로 작동하는 느리고 쉬운 공만 던지는 투수를 사주었다. 
  데비가 병상에 누운 지도 꽤 오래되어 우리 식구들은 예전의 평화롭던 나날들을 까마득히 잊고 
살았다. 데비의 발톱에 든 자주색 멍도 커질 대로 커졌지만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 난 천
장에 붙은 나사 못이 몇 개로 보이느냐고 묻는 것도  그만두었다. 데비는 어떻게 해서든 침대에서 
빠져 나오려고 안간힘을 썼다. 친구들이 책을 읽어주러 오면 책  읽는 대신 쇼핑이나 함께 가자고 
졸랐다. 그녀는 다리에  감각이 없어서 줄창 넘어지면서도 포기할  줄을 몰랐다. 그리고 사람들이 
붐비지 않는 수영장을 발견하면 반드시 물에 뛰어들어 수영을 했다. 더 이상  눈을 쓸 수 없게 되
자 클래식 음악을 듣기 시작했으며, 밤이면 나와 함께 다른  부모들이 다 그러듯이 아이들 이야기
를 했다. 
  나는 데비가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맹목적인  희망을 버리고 긴긴 투병 생활에 임할 각오를 단
단히 했다. 데비는 이따금 실의에 빠지기도 했으나 아직은 그녀다운 면모를 잃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몇 주를 고비로 그녀는  만사에 흥미를 잃어 갔다. 어느 날 부턴가 데비는  억지로 침대
에서 떨치고 일어나려는 노력을 그치게 되었다. 투병 생활 내내  어떻게든 침대를 빠져 나오려 애
썼고, 특히 아이들이  등교하는 아침엔 무리를 해서라고 일어나던  그녀였는데 말이다. 1980년 봄 
무렵, 나는 오전 10시가 다  되어서도 데비를 일으키려면 어르고 달래고 별별 짓을 다  해야만 했
다. 어떤 날은 나 혼자의  힘으론 도저히 안 돼서 데비의 친구들이 와서 도와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렇다고 데비가 저항 같은 걸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녀는 멍하니 누워만 있었다. 이제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다는 듯 점점 수동적이 되어갔다. 
  로키와 함께 쇼 선생을 면담하고  돌아온 날, 나는 샘이 2주 동안에 걸쳐 그린 그림  일곱 점과 
비뚤비뚤하게 오려 만든 공작품을 데비에게 보여 주었다. 
  "피카소도 샘처럼 가위질을 똑바로 못했을 거야."
  나는 샘이 만든 공작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정오가 지난 시각이었는데도 데비는  침대에 그대
로 누워 있었다. 그녀의 동공이 너무나 먼곳을 향해 열려 있어서 나는 더럭 겁이 났다. 이젠 단순
히 수동성의 차원을 넘어서서 더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샘의 그림들을 내려놓고 거의 속삭이다시피 그녀에게 물었다. 
  "당신, 내가 어디 다녀온 줄 알아?"
  데비는 잠시 뜸을 들인 뒤 나를 바라보며 대꾸했다.
  "앨라배마."
  나는 그녀에게 샘의 작품들을 마저 다 보여 주고는 의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간호
사에게 데비의 증상을 설명하자 즉시 진료 예약을 해주었다.
  신경과 의사는 데비를 검진한 뒤 원무과에 전화를 걸어 입원실을 하나 마련하라고 했다.
  "몇 가지 검사를 해봐야 알겠습니다만, 부인의 사고 사고 기능에 이상이 생긴 것 같군요."
  의사는 그러면서 정신과 의사의 도움을 요청해야겠다고 덧붙였다.
  데비는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입원하고 며칠이 흐르도록 아이들 이야기는  비치지도 않았
지만, 그래도 나는 일요일에 아이들을  데려갔다. 제시카는 엄마에게 키스를 했으나 샘은 내가 또 
떼어 낼까 봐 우두커니 구석에 서  있다가, 내가 엄마 곁으로 데려가자 그제야 걸음을 떼었다. 오
후에 로키와 어머니가 문병을 왔다가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 
  어머니는 데비의 상태가 악화된 걸  눈치챘으면서도 현명하게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로키는 굳
이 나의 설명을 듣고 싶어했다. 
  "왜 데비가 말을 안 하니? 무슨 일이야?"
  "저도 모르겠어요. 알게 되면 다 말씀드릴게요."
  나의 인내심은 바닥난 상태여서 누가 무슨 말을 하면 벌컥벌컥  짜증부터 났다. 당시 나는 세상 
사람들을 두 종류로 나누어 놓고 있었다. 데비의 병을 이해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나
는 후자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차근차근 상황을 설명해 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고,  로키는 당연히 
후자에 속했다. 그러나 로키는  그냥 모르는 채로 지낼 진중한 성격이 아니었고  어떻게든 도움이 
되려고 했다. 그러던 어느날  학교 연구실에 앉아 있는데 감리교 병원 간호사라는  여자한테서 전
화가 걸려 왔다. 
  "굿스타인 할아버님께 문제가 생겨서 이렇게 전화를 드린 거예요."
  여자의 말을 듣는 순간, 내 가슴은 두방망이질 쳤고 목이 바싹 탔다. 
  "무슨 일입니까?"
  자연히 급박한 외침이 튀어나왔다.
  "할아버님은 괜찮으시니까 염려 마세요."
  겁에 질린 내 목소리를 들은 간호사가 우선 안심부터 시켰다.
  "놀라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할아버님께서 선생님 댁의  딱한 사정을 말씀해  주셔서 저희도 
대강은 알고 있어요.  할아버지께선 역정을 내고 계시지만  저희로선 할아버지의 수혈을 받을  수 
없습니다."
  "뭐라구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 할아버님께서 혈액 은행에 와 계신데 피를 뽑아서 선생님 부인께 드리겠다고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리시지 뭐예요. 담당자가 병원 규칙을 설명드려도 저러고 계세요. 서류를 보니 할아버님 
연세가 103세로 되어 있는데 그게 사실인가요?"
  "맞아요."
  "전 할아버님께서 좀 혼동을 하신 줄 알았어요."
  "할아버지가 아직 거기 계신가요?"
  "예, 사실은 그래서 이렇게 전화를 드린 거예요. 피를 뽑지 않으면 안 가겠다고 버티고 계세요."
  "제가 가서 모셔오죠. 몇 분 내로 도착할 겁니다."
  다행히 내 연구실은  그 병원 길 건너에 있었다.  그래도 병원 혈액 은행까지 단숨에  뛰어갔던 
터라 대기실에 다다랐을 땐 숨이 좀  찼다. 대기실에는 가죽 카우치와 고만고만한 의자 네 개, 오
렌지 주스병이 비치되어 있었지만, 로키는 그런 편의를 마다하고 문 앞에 서 있었다. 자기 번호가 
불리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다분히 우스갯거리가  되었을 상황이었지만 당시 나에겐 유머라곤 조금도 남
아 있지 않았다. 사실 나는 연구실에 앉아서도 일손이 잡히지  않아 한숨만 푹푹 쉬고 있었으면서
도 로키 때문에 일에 방해를 받은 것 같아 벌컥 화부터 났다. 
  "너한테 연락하라는 얘긴 안 했다. 아니,  피가 너무 늙어서 안 된다니 그게 말이 되냐? 제대로 
잘만 돌고 있으면 좋은 피지."
  "할아버지 피는 안 뽑아요. 그러니 가요."
  로키는 움쭉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손가락에서 조금 뽑아서 검사를 해보라는 건데 왜 안된다는 건지 모르겠구나."
  "제가 벌써 간호사와 얘기를  해봤어요. 할아버지 피는 안 뽑으니까 모시고  가래요. 제발요. 전 
지금 할아버지와 실랑이할 기운이 없어요."
  로키는 하는 수 없이 따라 나서면서도 큰소리로 한마디 하는 걸 잊지 않았다. 
  "피를 뽑지도 않을 거면서 텔레비전에 나와서 헌혈하라는 광고는 왜 하냐구."
  나는 로키와 함께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말했다. 
  "데비는 수혈이 필요 없어요. 데비의 피는 정상이에요."
  "수혈을 한다고 해 될 건 없잖아."
  "의사들이 다 알아서 할 거예요."
  "알아서 하긴 개코를 알아서 해? 점점 더 나빠지기만  하잖아. 나중에 의사를 만나거든 피를 좀 
넣어 주라고 해라."
  기다리던 버스가 도착해서 로키가 먼저 차에 오르자 내가 얼른 팔을 부축했지만 그는 매정하게 
뿌리쳤다. 
  그날 밤 나는 의사와 만났지만 피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그는 다른  의사들 세 명과 함께 급
히 어디론가 가던 중이었다. 
  "지금으로선 아무 말씀도  드릴 수 없어요. 돌아오는 화요일에  모든 검사 결과가 나올 겁니다. 
화요일 오후 3시에 부인이 입원한 층의 간호사실에서 만나기로 하지요."
  데비가 병상에 누워  있는 중에도 내겐 변함없는 일과가  하나 있었다. 매일 정오에 같은  학교 
물리학 교수인 중국인 후이와 함께 하는 조깅이었다. 우리는 정오의  폭염 아래서 나무 그늘을 양
산삼아 달리며 물이 나오는 곳에선 어김없이 멈추어 목을 축였다. 
  후이는 나보다 훨씬 잘 달렸으나 늘 의리 있게 나와 보조를 맞춰  주었고, 덕분에 숨이 덜 차서 
내가 끝도 없이 쏟아 붓는  물리학에 관한 질문들에 세심하게 답변할 수 있었다. 그는  영어가 서
툴긴 했지만 3마일을 달리는 동안 전자 현미경이나 동양의  음양설, 그밖에 내가 던지는 질문들에 
대해 충분히 설명했다. 그리하여 내겐 그 조깅이 운동과 과학의 결합처럼 되었다. 
  우리는 조깅이 끝나면 샤워를 하고 체육관에서 몇 블록 떨어진 곳에 있는 '컬처드 카우'까지 차
를 몰고 가서 참치 샌드위치를 먹었다. 그렇게 조깅하고 샤워하고  점심 식사까지 하는 시간을 합
치면 꼭 한 시간 반이 걸렸다.
  그 한 시간 반은 내게  너무도 소중했다. 마침 생물 물리학을 연구하고 있던 후이는  데비의 상
태를 잘 알았고, 내가 지나치게 그 생각에만 골몰하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뭔가 다른 걸 생각하도록 하게."
  나는 적어도 그 한 시간 반만큼 후이의 충고대로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데비가 사고 능력을 상실하기 시작한 그해 늦봄만큼은 다른  생각은 할 수도 없었다. 나
는 후이에게 데비  얘기를 했고 후이는 열심히 들어  주었다. 그는 틈만 있으면 화제를  돌리거나 
아니면 이야기를 일반화시켜 꼭 데비의 두뇌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두뇌와 불가시의한 두뇌의 능
력에 대해 설명하려 했으나 그 말이 내 귀엔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다른 사람의 두뇌 따위엔 전
혀 관심이 없었다. 
  "왜 이젠 아이들도 찾지 않는 거지? 왜 텔레비전을 보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뭘 보고 있는지 모
르는 거지?"
  나는 알고 싶은 게 너무나 많았다.
  "의사가 설명해 줄 때까지 그냥 기다리게. 괜히 혼자서 해답을 찾아 내려고 애쓰지 말고."
  후이는 이렇게 충고해 주었다.
  공교롭게도 의사와 만나기로 한 그  화요일엔 후이가 물리학 세미나에 참석차 아일랜드로 떠나
서 나 혼자 조깅을 하게 되었다. 
  나는 체육관에 가서 늘 하던  대로 로커에 보관해 둔 타월과 반바지, 양말을 꺼내  신고 안면이 
있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거리로 나섰다. 그러나 단 몇 발자국밖에 뛰지 못했다. 그
날만큼은 매일 달리던 3마일이 텍사스에서 캘리포니아까지 달리는  것만큼이나 불가능 해 보였다. 
옆에서 같이 뛰어  줄 사람이 없으니 뛰면서 내내  데비 생각에만 매달릴 터이니까. 나는  의사가 
데비의 문제를 밝혀 내어 치료에 성공하는 상상을 했다. 데비가  일어나 앉아 의사와 기쁨의 악수
를 나눈다. 그리곤 제시카와 샘에게  전화를 걸어 행복하게 웃는다. 친구 마시에겐 다음에 병문안 
올 때 잡지를 가져다 달라고 전화한다. 
  "오늘은 너무 더우세요?"
  내가 도로 들어가자 체육관의 사무 보는 여직원이 물었다. 
  "예."
  앞으로 세 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원래 계획은 평소보다  조깅을 오래 하고 참치 샌드위치를 
먹고 두시 반까지 체육관에서 배구나 펜싱구경을 한 다음 병원까지 걸어가는 거였는데......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차에 올라타서 시동을 걸었다.  내겐 공간의 목적지는 없고 오직  시간의 
목적지뿐이었다. 12시에서 3시까지의  여행. 무작정 달리다가 중심가에 차를 댔다.  휴스턴 시가지
는 마치 외국의  거리처럼 생소해 보였다. 변호사, 은행원, 회계  사무원, 옷을 잘 차려 입은 사람 
들이 에어컨이 있는 곳을  향해 바쁜 걸음으로 나를 지나쳐 갔다. 나는 6층짜리  백화점 폴리스로 
어슬렁어슬렁 걸어 들어갔다. 데비와 함께 변두리 백화점들은 다녀  봤지만 시내의 대형 백화점은 
처음이었다. 
  남성용품 코너를 지나는데 건장하게 생긴 마네킹들이 재미있는 포즈를  취하고 서 있었다. 그러
나 내겐 그들의 생명 없는 눈밖에 보이지 않았다. 
  "입어 보시겠어요? 탈의실은 저쪽 엘리베이터 옆에 있어요."
  내가 노란색 셔츠를 만지작거리자 판매원이  말했다. 나는 그녀를 따라 탈의실 쪽으로 갔다. 탈
의실에 들어가서는 커튼을 내리고  셔츠를 고정시켜 놓은 핀들을 뺐다. 그러자 빳빳한  판지가 떨
어져 나가면서 셔츠의 배와 소매 부분이 펼쳐졌다. 나는 아까  진열되어 있던 그대로 셔츠의 가슴
과 칼라 부분만 보이게 다시  접어 놓으려 했지만 솜씨가 없어서 맵시 있게 접혀지질  않았다. 한
참을 붙잡고 씨름하다가 결국엔 포기하고 대충  접어서는 비닐 봉지에 담지도 않고 아까 뺐던 핀
들과 함께 판매원에게 건네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원래대로 접을 수가 없군요."
  "괜찮아요, 손님. 다른 걸로 입어 보시겠어요?"
  나는 차마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너무 복잡하고 번거로웠다. 
  그 다음에는 전자 제품 코너에 가서 텔레비전을 서른 대나  구경했다. 가정용품 코너에 가서 견
본으로 꾸며 놓은 식민지풍  침실들과 덴마크풍 현대식 주방, 복고풍 안락 의자와  작은 탁자들을 
둘러보다 보니 그  정갈한 꾸밈새에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보는 것마다 마음에 들어  그 
진열품 중 아무데나 들어가서 살고 싶었다. 
  나는 제시카가 좋아하는 팬시용품 헬로 키티 코너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그곳에 진열된 상품들
엔 하나같이 빨간색과  검은색 아기 고양이 마크가 달려 있었다.  제시카는 이미 헬로 키티 시계, 
헬로 키티 펜, 헬로 키티  연필, 헬로 키티 문구용품을 갖고 있었다. 나는 키티  열쇠 고리를 사서 
묵주처럼 손에 쥐었다. 
  나는 30분이 넘게  1층에서 6층까지, 다시 6층에서 1층까지 에스컬레이터로  오르내리며 층마다 
내려서 진열된 상품들을 획하니  둘러보고 다음 층으로 향했다. 나는 한때 그토록  친숙했던 물건
들 단추, 선글라스, 모프코트, 진공  청소기, 샹들리에 등등 사이를 다니며 마치 이방인 같은 낯설
음을 주체할 수 없었고, 그것들이 이룬 세계는 내 눈길이 스치고 지나가면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이윽고 백화점 에스컬레이터를 떠날 때 내  발걸음은 어른들의 재촉에 못 이겨 억지로 놀이 동
산에서 나가는 개구쟁이들의 무거운 발걸음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병원에 도착했을 즈음엔 기분이 한결  나아져서 무슨 말이든 들을 수 있는 마음의 준비
가 되어 있었다. 
  3시 15분, 나는 의사와 만나기로 약속한 간호사실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후이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물리학에 관한  중요한 질문들을 던질 수  있었으리라. 고온의 기체가 어떻게  행성이 
되었고, 전자는 왜 궤도 상태를 유지하며,  인력이 사라져 지상의 만물이 우주 속을 떠돌게 될 수
도 있는 것인지......
  방금 들어온 의사가 가슴에 푸른색으로 이름을 새긴 흰 가운을  걸쳐 입고 있었다. 그는 두터운 
공책 같은 걸 들고 있었는데  바로 데비의 차트였다. 오늘은 내가 그의 첫 번째  면담자였던 것이
다. 그의 가운 주머니엔 오늘 진찰해야  할 환자들의 입원실 번호가 적힌 가로 4인치, 세로 6인치
짜리 카드가 들어 있었다. 
  의사는 나와 악수를 나눈 뒤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권했다.  그리곤 책상 위에 차트를 내려놓았
다. 나는 그가 어떤 의학 용어로 데비의 상태를 설명할 것인지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가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쁜 소식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데비를 제정신으로 돌려놓을 방법을 듣기 위해 
그를 기다렸던 것인데.
  의사는 차트를 열며 입을 뗐다. 
  "여기 인성 검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확실하진 않지만 제가 우려했던 결과를 보여 주고 있어요. 
데비의 경우, 다발성 경화증이 두뇌와 정신의 경계가 분명치 않은 부분에까지 침투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죠?"
  "그러니까 제 말은, 이제 치유가 불가능한 지경에까지 이른 것 같다는 뜻입니다. 물론 앞으로도 
최선은 다할 것입니다. 약물  요법과 행동 요법을 총동원하여 환자의 사고 기능을  다소나마 되살
려 보긴 하겠습니다만, 제 소견으론  신경학적인 문제인 것 같습니다. 데비의 정신은 두뇌 기능에 
의존하고 있어요. 다발성 경화증이 이런 식으로 발전되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다시 나을 수 있을까요?"
  "질병은 기능상(dynamic, 보통은 '역동적인'이라는 의미로 쓰이나 의학에서는  '구조상의'와 대비
되는 '기능상의'를 뜻함)의 작용합니다."에서는 '구조상의'와 대비되는 '기능상의'를  뜻함)의 작용입
니다."
  의사는 그렇게 대꾸하고  데비의 신경계를 뒤덮고 있는 끈끈한 희  막에 어떤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지 자세히 설명해 주었지만 나는 'dynamic'이라는 말만  되씹고 있었다. 그 말이 몹시도 희망
적으로 들렸던 것이다.  데비가 역동적인 상태에 있다니 그 얼마나  듣기 좋은 말인가. 어렸을 때 
약국에서 팔던 만화책  뒤표지에 세계에서 가장 힘이 센 사나이  찰스 애틀러스가 역동적 압력을 
선전하는 사진이 실려 있었다.  그의 구릿빛 근육은 금세라도 꿈틀꿈틀 살아 움직일  것만 같았고 
이런 문구가 실려 있었다. 
  '제가 할 수 있으면 여러분도 할 수 있는 겁니다. 이렇게 간단하게요.'
  그는 양 손바닥을 맞붙이고 힘껏 찍어 누르는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오른손의 역
동적 압력을 왼손에, 왼손의 역동적 압력을 오른손에 전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세계 최강자임을 나타내는 번쩍거리는 챔피언  벨트를 찬 나이 예순의 찰스 애틀러스의 모습을 
마치 현실처럼 생생하게 보고  있는데 갑자기 시야가 뽀얗게 흐려졌다. 의사가 병원  마크가 찍힌 
작은 회색 티슈통에서 휴지를 빼서 건넸다. 
  "우시는 심정 충분히  이해합니다. 정말 유감입니다. 여기 좀더 계시면서  마음을 진정시키세요. 
제가 간호사들에게 부탁해 놓고 가겠습니다."
  의사는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가서 간호사들에게 무슨 말인가를 건넸다. 데비의 임상  기록이 든 
투툼한 공책이 책상 위에 그대로 있었지만 그 속엔 내가 일고 싶은 내용이 없었다. 
  잠시 후 나는 복도를 따라 데비의 방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오늘 폴리스 백화점에 갔었어. 당신의 크레디트 카드만  있었더라면 이것저것 잔뜩 살 수 있었
을 텐데 말야. 이거 제시카 주려고 샀어."
  나는 도자기로 만든 헬로 키티 장식이 붙은 열쇠 고리를 꺼내어 데비의 손에 쥐여 주었다.
 

 
  리모콘을 누르자  텔레비전 화면이  파랗게 밝아졌다. 이란과  아프가니스탄과 
페루에서 테러리스트들이 총으로 사람들을  쓰러뜨리는 장면, 대홍수로 아비규환
인 중국.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 곳곳에서  사고와 살인, 강간, 강도 사건이 잇따
르고 있었다. 그러나 데비의  병실엔 정적만이 감돌았다. 나는 데비의 이마에 키
스를 하고는 채널을 돌렸다. 존 챈슬러가 다시  똑같은 뉴스들을 전하고 있는 동
안 아마 데비는 잠이 들었나 보다. 아니,  깨어 있는지도 모른다. 이젠 끼어 있는
지 잠들어 있는지조차 구분할 수 없는 상태니까.

      20 영원한 이별
  그 시절 나는 거의  글을 쓰지 못했지만 <기일>이라는 단편의 미완성 원고가 
남아 있어 여기 그 내용을 소개한다.
  아이들은 잠자리에  들었고 개도 저녁을 먹였다.  빠진 건 아내뿐이다. 그녀가 
우리 곁을 떠난 지도 3년이 되었다.  아내는 우리들 눈앞에서 사라졌지만 그녀와
의 추억은 생생하게 남아 있다. 
  샘이 갓 세  살 되던 무렵, 흰색 추리닝 바지를  입고 있다. 샘은 제발을 엄마 
발에 갖다 대보는  걸 좋아했지. 동글동글하고 커다란 발가락과 활  모양으로 봉
곳이 솟은 발등은 보자지간에 얼마나 닮았던지......
  제시카가 재잘재잘 떠들어댄다. 학교에서 브라우니(걸 스카우트의 유년대)단원
을 뽑고 있고, 점심  시간에 줄을 설 때 새치기하는 아이들을  선생님이 혼내 줬
다는 얘기를 늘어놓는다. 
  숯불 그릴에 닭고기 조각이  눌어붙어 있다. 샘은 바비큐 소스를 엎질렀다. 우
리는 손가락 끝에 묻은 소스를 흰 냅킨으로  닦아 낸다. 제시카는 울긋불긋 물든 
손가락을 고양이 발톱처럼 오므려 괴물 흉내를 낸다.  키가 작은 샘은 식탁 의자
에 전화 번호부 책을  깔고 앉아 있다. 누나가 괴물 흉내를  내며 달려들자 샘은 
질겁해서 도망친다. 두 아이가 깔깔거리며 쫓고 쫓긴다. 
  데비가 싱크대에 프라이팬을 담그고 손으로 씻고  있다. 그녀의 손톱은 손가락 
끝과 비밀 협약이라도 맺은 듯 늘 짤막하고  단정하게 정리 되어 있다. 제시카가 
휴대용 녹음기에 대고 영화  <그리스(Grease)>의 음악을 연주한다. 제시카와 샘
은 그 영화를 두 번이나 봤으며 제시카는 올리비아 뉴턴 존에게 팬 레터를 보냈
다. 배우 존  트래볼타가 그려있는 비치 타월이  우리 집 복도를 장식하고 있다. 
샘은 이단 침대를,  제시카는 캐노피 침대를, 우리  부부는 킹 사이즈 침대를 쓴
다. 우리 집엔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커다란 옷장들과 뒤뜰과 정원까지 있다. 
정원엔 토마토나무 몇 그루와 잿빛을 띤 녹색 후추나무들을 심었다.
  우리는 일요일 저녁이면 닭고기 바비큐를 요리해  먹는 행복한 가족이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5분  뒷면 아이들은 텔레비전 앞에  앉아서 <디즈니 월드>를 본
다. 그리고 세 시간 반쯤  뒤, 나는 데비의 부드러운 등에 한없는 안락감을 느끼
며 스르르 잠에 빠져  든다. 서로 몸이 닿지 않더라도 그녀가  곁에 누워 있다는 
느낌만으로 족하다. 데비는 스물아홉.  그녀의 최대 고민거리는 샘을 낳고 난 뒤
에 생긴 배꼽 밑의 임신선과 그 위에 난 솜털이다.
  그건 그녀가 '난 이제 더 이상 젊지 않아'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나는 큼지막한 핑거 볼(식사  후에 손가락을 씻는 물이 담긴 그릇)을  들고 짐
짓 예의 다른 일본인  웨이터 흉내를 낸다. 제시카와 샘이 그  물에 손가락을 담
그고는 줄무늬가 쳐진 식탁용 수건으로 물기를  닦는다. 데비는 설거지를 하다가 
기름 구정물에 손을 담근 채 의식을 잃는다.  씻고 있던 프라이팬 손잡이가 바닥
에 떨어져 박살이 난다. 샘과 제시카는 정신없이 <디즈니 월드>에 빠져 있다. 
  데비는 잠깐씩만 정신을  잃는 정도이다. 나는 평형 감각을 잃은  그녀를 부축
한다. 싱크대엔 기름이 둥둥 떠 있고, 아이들 둘은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다. 
  나는 숙련된  간병이 클라라를 고용한다. 그녀는  비만 오면 나타나지 않는다. 
자기 말로는 어린  아들과 병든 어머니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데비가 몹쓸 
병에 걸린 건,  맨발로 걸어다니다가 벌레를 밟았는데 그 벌레가  발바닥을 뚫고 
들어가 뇌에까지 올라갔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클라라는 늘 고무창이  깔린 모카신(북아메리카 원주민의 뒤축 없는  신)을 신
고 다닌다. 그리고 야행성 벌레들에게 물리지  않으려고 발바닥에 알코올을 문질
러 바른다. 나는 그녀의 충고에 따라 데비의 발바닥에도 알코올을 바른다. 
  클라라와 나는 데비의 몸에서 벌레를 찾는다.  발가락을 하나하나 벌리고 세심
하게 살피지만 벌레는  없다. 발바닥에 알코올을 다 문질러 바르고  나서 고개를 
드는데, 데비의 임신선  위에 난 솜털을 타고 배꼽쪽으로 기어가는  놈의 모슴이 
포착된다. 재빨리 손을 뻗지만 놈은 이미 데비의 배꼽 속으로 숨어 버린 뒤다. 
  2주 동안 지리하게 비가 내리더니 클라라는  영영 나타나지 않는다. 나는 종일 
데비의 병상을 지키다가 밤이면 플래시를 들고  벌레를 찾는다. 벌레도 클라라처
럼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다. 아이들은 텔레비전을 본다. 
  나는 벌레를 죽이기 위해 길고 날카로운 손톱을 지닌 간병인을 둔다. 
  의사에게 전화를 걸어 벌레 얘기를 했더니 그는 벌레가 병을 일으킨건 아니라
고 한다. 
  손톱이 긴 간병인도  떠난다. 아무리 찾아도 벌레는 없고 종일  아이들이 보는 
텔레비전 소리나 듣고 앉아 있는 것이 따분해서 견딜 수 없다. 
  네 살 된 샘은 유아원에 들어간다. 이제 제시카는  글도 읽고 요리도 좀 할 줄 
안다. 제시카는 밤마다 호밀빵을 잘게 부숴서 그 위에 꿀을 끼얹는다. 우리는 그
걸 피자와 함께 먹는다. 나는 벌레 잡는 일을 포기하고 플래시를 차운다. 
  "엄마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예요? 엄마가 왜 말을 안 해요?"
  아이들이 나에게 묻는다. 
  "엄마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러는 거야."
  내가 대꾸를 하지 않자 샘이 혼자 결론을 내린다. 
  데비는 안경 두 개와 콘텍트 렌즈를 남기고  떠났다. 슬픈 눈과 짤막한 손톱을 
지닌 그녀가 흰 웨딩 드레스를 입고 개에게  먹을 것을 주러박으로 나간다. 그러
다가 벌레를 밝고 만다. 
  "우리 가족 중에 기생충 있는 사람이 없어."
  장모가 말한다. 
  데비는 개 밥그릇을  들고 밖으로 나간다. 조지는 딱딱한 음식만  먹어서 이빨
이 건재하다. 데비도 치아가 튼튼하다. 싸구려  음식은 잎에도 안 대니까. 그녀는 
충치가 생기기도 전에 떠나 버렸다. 

      21 외로운 사람들
  제시카와 샘은  토요일 밤이면 로키의  집에 잤다. 어머니는  트윈베드를 붙여 
놓고 손주들과  함께 밤늦게까지 <사랑의  유람선>을 시청했다.  일요일 아침이 
되면 로키가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왔는데 그 때부터 싸움이 시작되었다. 
  샘은 만화광이라 만화 영화만 보려 했다. UHF채널이 셋이어서 채널을 바꾸어 
가며 보면 종일 만화  영화만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제시카는  야구 경기를 보고 
싶어했다.
  "아빤 왜 샘이 저 하고 싶은 대로만 하는 걸 그냥 놔두세요?"
  제시카가 내게 불평을 했다.
  샘은 누나와 싸울 때마다 하는 말이 있었다.
  "야구 중계는  라디오로 들으면 되잖아. 만화  영화는 라디오엔 안  나온단 말
야."
  로키는 제시카 편이었는데, 내  생각엔 그도 야구를 좋아해서인 것 같았다. 하
지만 로키는 샘을 구슬릴 때마다 제시카의 장래 직업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누나는 야구를 봐야돼요. 나중에 아나운서가 될 거거든."
  그러면 샘은 얄밉게 받아넘기곤 했다.
  "그럼 라디오 아나운서가 되면 되잖아요."
  나는 병원에 있는  시간이 많아서 아이들의 싸움을  직접 목격할 기회는 많지 
않았지만, 로키가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걸 알게 되었다. 로키
는 한 시간씩 돌려 가며 보는 방법을 취했으나, 제시카도 샘도 불만이었다. 샘의 
입장에서는 만화 영화가 한 시간 단위로 방영되는 것이 아니어서 중간부터 보면 
줄거리를 몰라 재미를  망치기 일쑤였고, 제시카는 주자 만루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상황에서 다시  만화 영화로 채널을 돌려야  하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으니
까.
  "텔레비전을 한 대 더 사야겠어요, 소형 흑백으로요."
  보다 못한 내가 로키에게 말했다.
  "소용없어, 그러면  서로 컬러 텔레비전을  보겠다고 싸울 테니까. 지금오로선 
작은애를 만화에서 떼어놓는 방법밖에 없다."
  나도 로키의 말이 옳다는 걸 알았으나 변화를  감행할 기력이 없었다. 샘이 만
화 영화에 빠져 엄마를 찾지 않는 걸 그나마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으니까.
  "이건 너무해. 삐삐는 텔레비전을 봐야 해. 야구에 대해선 척척 박사야. 나중에 
야구 감독이 될지도 모른단 말이다."
  로키는 제시카가 걸음마를 배울 때부터 삐삐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로키 말대로 제시카는 야구에  열광한 나머지 텔레비전에서 야구 중계가 나오
면 한 이닝도 빼놓지 않고 열심히 보았고,  수첩에 경기 내용을 일일이 적기까지 
하였다. 나중에 내가 돌아오면 설명해 줄 부분엔  작은 황금별 스티커를 붙여 표
시해 두었다. 
  이따금 내가 밤  11시쯤 병원에서 돌아와 잠자리에  들기 전에 간단히 요기할 
게 없나 해서  냉장고의 문을 여노라면 뒤에서  제시카의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 저 나가도 돼요?"
  제시카는 문을 빠끔 열고 허락부터 구했다. 나는  늦은 시각이라 안 된다고 대
답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오랜만에 듣는 딸의  목소리가 너무 반가워서 차마 
그러질 못했다. 그때부터 우리 사이엔 제스처 게임이 벌어졌다. 
  "중요한 얘기니?"
  "예."
  "내일 아침에 해도 되니?"
  "그럴 거예요."
  제시카는 문을 닫다 말고 내게 마지막 기회를  주었다. 나를 감질나게 할 내용
을 말해 버리는 것이다. 
  "11회에서 우리 편이 졌어요. 아빠한테 그 얘기를 해주려고 했어요. 그 얘기만 
하고 금방 들어가 잘 거예요."
  제시카와 나는 야구라면  사족을 못썼다. 자연히 난 자세한 경기  내용이 듣고 
싶어진다. 데비의 병세가 악화된 뒤로 나는 만사에  흥미를 잃었지만 어찌 된 영
문인지 에스트로스 팀의  하루하루 경기 결과에는 관심이 갔다. 커너가  총에 맞
던 그해 이후 내가 응원하는 팀이 승승장구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5분만이다."
  나는 그렇게 속삭이며 실제로 5분을 엄수했지만 그 5분이 내겐 하루의 구원과
도 같았다. 기쁜 소식을 전할 때면 제시카는 숨도 제대로 쉬지 않았다. 
  "천천히 해야지. 그렇게  빨리 말하면 할아버지도 네가  나중에 아나운서가 될 
거라는 생각을 단념하실 거야. 그렇게 되면 네가  공연히 야구 경기에 빠져서 시
간만 낭비한다고 싫어하실 거고."
  "로키는 5분 넘게 준다구요."
  "좋아, 시이작."
  제시카는 경기  내용을 적은 수첩을  들고 읽어 내려갔다.  수첩에는 제시카만 
알아볼 수 있는 속기 글씨들이 적혀 있었다.  아직 기록 집계법을 모르는 제시카
는 각 이닝에 일어난  일들을 줄줄이 적어 놓았다. 나는 점수가  나거나 멋진 플
레이가 펼쳐진  중요한 이닝만 읽으라고  했다. 제시카는 멋진  플레이들은 적어 
놓지 않았다. 그냥 별표만 그려 놓았다가 기억력에 의존해서 설명하곤 했다. 
  "중간부터밖에 못 봤어요. 아빠 아들이 <톰과 제리>를 봤거든요."
  제시카가 늘 하는 푸념이었다.
  제시카가 전하는 5분 간의  스포츠 소식은 내게 매일매일의 경기 결과를 알려 
주었을 뿐만 아니라 간병에 찌든 나를 현실  세계로 되돌려 주는 역할까지 했다. 
매일 나는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와서 제시카와 샘을 데리고 져녁을 먹고 6시 반
에 다시 병원으로  가는 생활을 되풀이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을 잠자리에 
들게 하는 일은 로키나 배시, 파출부가 아니면 이따금 셋이 다 맡았다. 
  샘은 일찌감치 잠이 들었다가 새벽 2시에서 3시  사이에 꼭 잠이 깼다. 그리곤 
쏜살같이 복도를 달려서는  내 방으로 들어왔다. 처음엔 도로 제  침실로 데려가
서 재웠지만, 채 5분도  되지 않아 다시 내 방으로 달려오는 바람에  결국 내 쪽
에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낡은  매트리스를 침대 발치에 깔아  놓았고, 샘도 더 이상  나를 깨우지 
않고 그 매트리스 위에서 애완 동물처럼 웅크려  자곤 했다. 아침이면 나는 자고 
있는 샘을  넘어서 신문을 가지러 갔다.  나는 에스트로스 팀 경기  소식을 제일 
먼저 읽으면서 제시카가 이미 중요한  부분만 간추려 전해 준 경기 내용의 자세
한 부분을 음미했다. 
  그해 여름  에스트로스 팀은 많은 승리를  기록했다. 놀런 라이언, 조니크로를 
위시한 막강한  투수력과 타력, 도루력, 게다가  탄탄한 수비력까지 고루 갖추고 
있었으니까.
  우리 가족도 탄탄한 수비력을  갖추고 있었다. 제시카는 야구로, 샘은 만화 영
화로 스스로를 방어했다. 내게 최고의 방어 수단은 질서였다. 
  나에겐 정해진 일과가 있었다. 나는 데비의  머리를 곱게 빗겨주고는 억지로라
도 음식을 떠먹이고 손을  꼭 잡고 소리내어 신문을 읽어 주었다.  그 의식은 내
게 직장도 되고 가정도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환자인 데비 못지않게, 14인치 텔
레비전과 조절 장치가 달린 침대와  식탁 겸용 테이블과 성능 좋은 독서용 램프
가 구비된 감리교 병원의 작은 병실에 익숙해졌다.  복도 양쪽 끝에 음료 분수기
가 설치되어 있는, 고속  엘리베이터 근처의 병실. 그곳은 나름대로 안락했고 낭
만적이기까지 했다. 우리 부부는 그곳에서 호젓하게 지냈다. 
  일단 그 병실에만 들어서면 내 삶의 다른  모든 것, 일테면 학생들, 일, 심지어
는 제시카와 샘까지도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나는 그 모든 것들에  손을 흔들어 
작별 인사를  보내고 병실로 들어섰다. 밤이면  소설을 읽고, 파출부에게 급료도 
주고 식료품도 샀지만 내 진지한 삶은 병실에서뿐이었다. 
  로키는 우리를  돕기 위해 자기 일과를  바꿨다. 우선 내가 병원에  가고 없는 
동안 맑은  정신으로 아이들을 보살피기 위해,  내가 집에 함께 있을  때 낮잠을 
자두었다. 내가 아이들과  함께 꿀을 끼얹은 호밀빵과 피자를 먹는  동안 로키는 
갈색 코르덴 카우치 위에서 코를 골았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 깨어 있는 시간이 
다르다 보니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거의 없었다.  6시 20분쯤 되면 나는 커피 한
잔을 만들어 놓고 자고 있는  로키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그 커피는, 그가 아
이들과 함께 만화 영화와 야구 중계를 번갈아 보면서 마실 것이었다. 
  그러잖아도 텔레비전을 한  대 더 살 참이었는데  후이가 조깅을 하면서 멋진 
제안을 했다. 
  "나한테 9인치짜리 고장난 텔레비전이 있네. 화면이 쉬지 않고 날뛰지."
  그러면서 후이는 손짓으로 흉내를 냈다.
  제시카와 샘의 항의가 빗발쳤지만 나는 집에 있던 21인치 컬러 텔레비전을 내 
연구실에 갖다 놓고 대신 화면이 펄쩍펄쩍 뛰어오르는 후이의 고물 흑백 텔레비
전을 가져 왔다. 
  로키는 뉴스를 볼 때 아예 눈을 감고  귀로만 들었다. 제시카는 완전히 라디오 
쪽으로 돌아섰다. 그래서  야구 중계가 나오지 않을 때는 십대  초반의 학생들을 
위한 록 음악 프로그램  <99Q>를 들었다. 그러나 샘은 끝까지 텔레비전을 고수
했다.
  "샘, 너 눈 아프지 않니?"
  보다못해 내가 물었다.
  "그래도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 수 있어요."
  샘은 그렇게 일주일 가량 악착같이 텔레비전 앞에 붙어 있더니 제풀에 나가떨
어졌다. 로키가 귀띔해 준 말료는, 이제 자기가 좋아하는 만화 영화만 보고 나머
지 시간엔 복도에서 논다는 것이었다. 
  샘의 네 번째  생일에 이웃집 마시와 그녀의  아이들이 경주용 자동차 세트를 
선물했는데, 모두 원격  조종으로 움직이는 2∼3인치 크기의 2인승  오픈형 고속 
자동차들이었다. 나도 샘에게  내가 몰고 다니는 것과 똑같은 회색  플리머스 모
형차를 사주었다. 
  샘은 그  모형 자동차들을 가지고  복도에서 놀았다. 나는  저녁마다 병원으로 
갈 때면 샘의  주차장을 건너뛰어 저 현관문을 나가야 했다.  그러던 7월의 어느 
날이었다. 샘은 여느 때와 같이 무릎을 꿇고  앉은 채 입으로 '부웅 부웅' 자동차 
소리를 내며 놀고 있었다. 나는 데비를 그대로  빼닮은 부드러운 갈색 머리에 입
을 맞추며 말했다.
  "내일 아침에 보자."
  그리곤 밖으로 나가서 막 현관문을  닫는데 샘이 부웅 부웅 소리를 멈추고 말
했다. 
  "아빤 놀아 주지도 않아."
  나는 이미 현관문을 닫은 터라 밖에서 손가락으로 우편함을 열고 그 구멍으로 
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나중에 놀아 줄게."
  "언제?"
  "곧, 두고 보렴."
  나는 더 이상 추궁당하고 싶지 않아서 잰 걸음으로 차 쪽으로 가서 시동을 걸
었다. 차를 돌리느라  후진시키면서 보니까 우편함 구멍으로 나를 좇고  있는 샘
의 눈이 보였다. 
  나는 이미 병원 주차장에 도착해서 자동  주차기에서 주차권까지 받은 뒤였다. 
그러니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엔 너무 늦었다. 하지만 우편함 구멍  사이로 쳐다
보던 샘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혀 도로 출구로 나가서는 주차비 50센트를 치
르고 집을 향해 총알같이 달렸다. 
  집에 도착하니 7시 15분이었다. 복도에  마련된 가상의 인디애나폴리스 자동차 
경주로엔 차들이 빠짐없이  출발선에 정렬되어 있고, 샘은 그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맞은편, 그러니까 골인 지점에는 로키가 벽에 등을 기댄 채 책상다
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로키는 모자를 벗어서 다리 앞에 대고  있었는데 그 모
자가 바로 차들의 목표 지점이었다. 
  제시카가 야구 보던  것을 잠깐 쉬고 그곳에서 점수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녀
는 수첩에 피아트, 셰비, 올즈모빌, 트럭 등등  각 차량의 이름을 적어 놓고 차량
별로 로키의 모자에 골인된 횟수를 기록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니, 이게 뭐지? 샘과 그의 자동차 경주자들?"
  나는 들어서자마자 호들갑을 떨었다.
  "조심하세요."
  샘은 내가  자칫 잘못하다 자동차 경주장을  망가뜨리는 불상사라도 일으킬까 
봐  얼른 제 몸으로 막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앉으며 샘에게 물었다.
  "아빠도 같이 놀아도 되겠니?"
  샘은 아무 대꾸도 않고  내가 끼여들 수 있도록 벽 쪽으로  물러나 앉았다. 신
발도 양말도 다 벗어 던진  맨발이라 그 앙증맞은 발가락들이 바닥에 눌려 찌부
러진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다.  샘은 경기에 흠뻑 빠져 있었다. 제시카가 끼여들
어 말했다.
  "아빤 미는 걸 하실래요, 아니면 잡는 걸 하실래요? 미는 게 훨씬 재미있어요. 
로키는 맨날 잡는 것만 해요."
  그러면서 재빨리 내 이름을 수첩의 선수 명단에 적어 넣었다. 
  "그럼 미는 걸 하지. 경기 규칙을 알려 다오."
  나는 신발을 벗어 던지고 황금색 폰티액을 골랐다. 
  "살살 하세요, 그건 진짜로 간다구요."
  샘이 주의를 주었다.
  "그게 최고는 아녜요, 픽업 트럭이 더 빨리 가요."
  제시카가 나섰다. 
  "자아, 보자."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황금색 자동차를 힘껏  밀었다. 폰티액은 쏜살같이 달려 
로키의 모자 속으로 쏙 들어갔다. 
  "마젤 토브(히브리어로 '축하합니다'라는 뜻.)"
  로키가 외쳤다.
  "제가 똑바로 잘 밀 줄은 모르셨죠?"
  내가 로키에게 말했다.
  "네가 바른 생각을 할 줄 몰랐지."
  로키는 그렇게 대꾸하며 손발을 다  써서 끙 하고 몸을 일으켜 일어나서는 양
손으로 벽을 짚었다. 제시카와 내가 달려가서 부축했다. 
  "이제 네가 잡아라. 난 좀 쉬련다."
  "매일 이렇게 하셨어요?"
  "아냐, 가끔 꼬마 럭비공을  퉁겨서 잡는 놀이도 하지. 자동차 잡는게 훨씬 쉽
단다."
  그 말을 듣기가  무섭게 샘은 제 방 옷장으로  가서 꼬마 럭비공들을 가져 왔
다. 
  "아빠, 종류별로 다 있어요."
  대충 그런 줄은  알고 있었지만, 샘과 마주앉아서 별별 색깔과  크기의 공들을 
다 감상해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공들은  껌 사은품에 들어 있거나 직접 
샀거나 아니면 길에서 주운 것들이었다. 
  로키가 카우치에 앉아서  쉬는 동안 나는 샘의 공들을 갖고  놀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샘이 수집해 놓은 공이 튀는 힘을 일일이 다 시험하기에 이르렀다. 
  로키는 잠이 들었고 파출부도 돌아갔다. 제시카가  바비 인형들을 갖고 나와서 
내게 근사한 패션 쇼를 보여 주었다. 
  그날 저녁 나는  아이들의 특별 손님이었다. 샘은 옷장 깊숙한  곳까지 뒤져서 
수집품들을 모조리 끌고  나왔다. 그중 일부는 샘 단독 소유였고  나머지는 제시
카와 공동 소유였는데 고무줄, 플라스틱으로 만든  마가린 컵, 색종이 클립, 일회
용 숟가락, 구슬, 데비의 쾌유를  비는 카드에 붙어 있던 조화 등등 온갖 잡동사
니가 다 있었다. 그러니까 눈에  띄는 건 모조리 끌어 모은 모양이었다. 그 동안 
아이들은 안중에도 없이 병실에 앉아 데비와 나만의 무인도에 고립되어 있는 신
세인 것처럼 시름에 잠겼었는데 아이들이 끌어  모은 플라스틱, 종이, 고무, 유리 
소장품 들을 하나하나 보고 있노라니  진정 고립된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 것 같
았다. 
  그날 밤 아이들은 샤워도 하지 않고 잤다.  샘은 9시쯤 내 품에 안긴채 잠들었
고, 제시카는 내  무릎에 파고들어 엄지손가락을 빨며 바비 인형의  머리를 쓰다
듬다가 10시 반경에야 꿈나라로 갔다. 

    22 아빠를 향한 직구
  무슨 일이든 처음 시작하는  것이 어렵지 일단 하고부터는 수월해지는 법이듯
이, 하루 저녁 병원  가는 걸 빼먹고 나니 그 다음부터는  빼먹기가 훨씬 쉬워졌
다. 그리하여 오후엔 여전히 데비의 병실에서  보냈지만 저녁만큼은 제시카와 샘
과 함께  지내는 날이 많아졌다. 로키도  원하면 언제든지 우리와 함께  있을 수 
있었다. 
  로키는 실내 야구  경기를 싫어하면서도 삐삐를 위해 에스트로돔(반투명의  둥
근 지붕이 달린 경기장)을 찾았다.  제시카는 내가 공식적인 기록 집계법을 가르
쳐 주었는데도 가족들과 함께 센터  필드 쪽 관중석에 앉아 경기를 관전하다 보
면 열광하느라 점수를  계산하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샘은 플라스틱  야구 장갑
을 들고 가서 투수가 공을 던질 때마다  관중석까지 날아올 홈런을 기대했다. 로
키가 내셔널 리그에 대해 불만을 늘어놓았다. 
  "아메리칸 리그에서는 폴란드인과 이탈리아인들에게도 기회를 준다구."
  "내셔널 리그도 그래요, 에스트로스 팀도 마찬가지구요."
  제시카가 반박하고 나섰다.
  "에스트로스 팀에 폴란드나 리투아니아 출신 선수가 어디 있니?"
  로키가 따지듯 물었다.
  "테리 풀요, 테리 풀은 캐나다 출신이라구요."
  "캐나다라구? 캐나다는 외국으로 칠 수도 없어."
  "그럼 아메리칸 리그에 출전한 폴란드나 리투아니아 출신 선수는 누구예요?"
  제시카가지지 않고 물고늘어졌다. 
  "없지, 그게 바로 야구의 문제라구."
  에스트로스와 다저스 팀이  숨가쁘게 시소 게임을 펼치던 8월경,  나는 제시카
가 야구에 중독된 이유를 서서히 깨달아 가기 시작했다. 
  제시카에게 그런 영향을 미친 건 비단 나와  로키만이 아니었다. 우리 집에 자
주 드나드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스포츠광이었다. 
  데비의 사촌인 조엘은 매일 한 차례씩 우리 집에 들렀는데 어떤 날은 하루 두
세 번도 왔다. 24세에, 세일즈맨에 그는  독신이었다. 제시카와 샘은 조엘의 아파
트에 가는 걸 좋아했는데, 그의 집엔 케이블 텔레비전과 담배, 캔디 자판기가 있
어서였다. 조엘은 못다 판 물건들을 집에 두고 썼던 것이다. 제시카는 조엘이 두 
대의 텔레비전으로 동시에 두 경기를 시청하고 어떤 때는 라디오까지 켜놓고 세 
경기를 동시에 보고 듣는 데 감복했다. 조엘 역시 제시카에게 혀를 내둘렀다. 
  "세상에 어쩌면 그런 애가 다 있어요? 선수들의 타수를 줄줄이 외고 있더라니
까요. 나한테 그런  기억력이 있었더라면 누가 알아요? 지금쯤  대학원에서 공부
를 하고 있을지."
  조엘이 감탄하며 내게 말했다.
  조엘은 경기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상황이 되면 벌떡 일어나서 정신없이 서
성거리는 버릇이 있었는데,  자기 집에서야 그걸 갖고 잔소리 할  사람이 없었지
만 우리 집에서는 로키가 진저리를 냈다. 
  "앉게, 아니면 나가고."
  조엘은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좋아라 걸어나가곤 했는데, 그건  야구 한 
이닝도 진득하게 앉아서 보지 못하는 성격 때문이었다. 
  우리 집에 자주 드나드는 또 한 사람은 제시카의 유치원 선생님이었던 데이비
드였다. 데비의 슬라이드 쇼 이후 그는 우리  가족과 절친한 사이가 되었던 것이
다. 제시카는 유치원 적 버릇이 남아서 그의 이름  앞에 꼬박꼬박 '미스터(미국에
선 유치원이나 학교 교사에게  미스터, 미스, 미시즈라는 존칭을 붙인다)'를 붙였
는데 어린 샘은  그걸 '시스터'로 둔갑시켰다. 데이비드가  우리 집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제시카와 샘은 그의 빗과 지갑을 빼았아 감추는 놀이를 시작했지만 결국
은 셋이서  야구 경기에 탐닉했다.  로키는 그들에게 따끈한  초콜릿차를 만들어 
돌리곤 하였다. 내가 매일  저녁을 병원에서 보내던 무렵, 어쩌다 오후쯤에 집에 
들어가 보면 모두들  텔레비전 앞에 모여 앉아 있었다. 제시카는  열심히 수첩에 
경기 내용을 적고, 조엘은 리모컨을 들고 앉아  틈틈이 채널을 돌려 다른 경기의 
진행 상황을 살피고,  데이비드는 샘과 카드 놀이를  하면서 경기를 보고......그리
고 배시는  부엌에서 엉망진창으로 어질러 놓은  살림살이를 치우느라 분주하고 
로키는 큼직한 빨간색 의자에서 코를 골고 있었다. 
  "제시카 주위엔 어머니와 파출부를 제외하곤  전부 남자들뿐이예요. 그러니 듣
는 거라곤 맨  스포츠 얘기뿐이고요. 제시카가 다른 것에도 흥미를  가졌으면 좋
겠어요. 제시카도 여덟  살이에요. 이제 그 또래  여자아이들이 하는 걸 해야 돼
요. 데비만 곁에 있어도 아무 문제 없었을 텐데 말예요."
  내가 로키에게 의논을 했다. 
  "그래, 네 말이 옳다. 내가 데리고 쇼핑이나 가야겠다."
  그로부터 며칠 후,  제시카는 화사한 꽃무늬 드레스 차림에 어여쁜  보닛을 쓰
고 들어와서는 쿵쾅거리며 제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할아버지 때문에 창피해서 죽을 뻔했어요. 이 멍청한 드레스와 모자가 하나두 
마음에 안 드는데 할아버지가 하두 좋다고 해서  그냥 샀지 뭐예요. 값이 굉장히 
비싸요, 20달러나 한다구요."
  내가 쫓아 들어가자 제시카가 털어놓았다.
  "걱정 마라, 아빠가 돈을 드리면 되니까."
  "받지 않을 거예요. 할아버지가 어디다  돈을 싸가지고 갔는지 아세요? 손수건
에요. 진작에 알았더라면 따라 나서지도 않았을 거예요. 처음엔 판매원 언니더러 
너무 비싸다고 언제쯤  세일을 하냐고 묻더라구요. 그 언니가 세일은  안 한다고 
그러니까, 그제야 손수건을 펼쳐서 동전을 하나하나  세어서 20달러를 내고 다시 
손수건을 꽁꽁 싸지 뭐예요. 사람들이 다 쳐다보고 있었다구요."
  "괜찮아, 다른 사람들은 무슨 일인지도 몰랐을 거야."
  "아뇨, 다 알았어요.  그러더니 사람들 앞에서 '삐삐,  가자', 이러는 거예요. 난 
창피해서 이제 다시는 페니 상점에 못 가요."
  "그 일은 잊어버리고 이젠 네가 무얼  좋아하는제 얘기해 보자꾸나. 연극 보러 
갈까?"
  "아빠, 난 야구나 보러 갈래요. 그거면 돼요."
  "친구들이랑 영화관에 가거나 롤로 스케이트를 타는 건 어때?"
  "롤러 스케이트는 아무도 안 타요."
  "그럼 학교에 가서 네 친구들이 무얼 하며  노는지 물어 보렴. 아빠가 차로 데
려다 줄게. 볼링은 어때?"
  "다 싫어요."
  "아빠는 네가 친구들과 어울려 놀았으면 좋겠어. 전엔 친구가 많았잖니."
  "난 친구 없어요."
  나는 제시카의 옛 친구들 이름을 하나둘 주워섬겼다.
  "힐러리, 일레이나, 레베카, 세러......"
  "전엔 친구였지만 지금은 아녜요."
  "왜지?"
  "그냥 걔들이 싫어요."
  "친구들이 엄마에 대해서 묻니?"
  "가끔요."
  "친구들이 엄마에 대해서 묻니?"
  "가끔요."
  "친구들에게 엄마에 대해서 설명하기가 힘들지?"
  제시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아빠도 그러니까."
  그날은 더 이상 강요하지 않고 그 정도로 끝냈지만 나는 얼마간 고려해 온 일
을 실행에 옮겼다. 심리 치료사에게 전화를 건 것이다.
  나는 심리 치료사인 조이스에게 전화를 걸어 데비에게 일어난 일을 되도록 간
략하게 설명했다. 
  "제시카가 외롭다는 건  압니다. 인력으론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일들도 있다는 
건 알지만 딸애를 돕고 싶습니다. 이미 너무 늦지 않았길 바랄 뿐입니다."
  나는 그녀에게 호소하듯이 말을 맺고 전화를 끊었다.
  그 주일의 말경에 조이스는 나를  자기 사무실로 불러서 두 시간 동안 면담도 
하고 직접 병원에  찾아가 데비의 상태를 살피고 병원 기록도  보았다. 그리하여 
제시카와 만날 만반의 준비가 갖추어졌다. 조이스는  제시카를 피자 헛에 데려가
서 함께 피자를 먹은 뒤 집으로 데려왔다.  그녀와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조엘이 냅킨을 1천 달러짜리 지폐처럼 받쳐들고 집안으로 뛰어들어왔다. 
  "넌 도저히 믿지 못할 거다. 제시카, 널 위해 뭘 갖고 왔는지 한 번 보려무나."
  조엘은 의기양양하여  소리치며 들고 온  냅킨을 바닥에 펼쳐  놓았다. 그리곤 
샘이 밟기라도 할까 봐 온몸으로 그  냅킨을 지켰다. 냅킨에는 '제시카에게, 조어
퀸 안두하르'라고 씌어 있었다. 조어퀸은 에스트로스 팀의 오른손잡이 투수였다.
  "사인해 달라고 했더니 자기 이름믄 쓰더라구. 그래서 제시카 이름도 써달라고 
부탁했지. 뭘 좀  먹으려고 맥도널드에 들어갔는데 마침 그때 그가  자기 아이들
을 데리고 음식을 먹고 있지 뭐야. 부상 때문에 앞으로 이주일 더 쉰대."
  조엘이 여전히 들뜬 목소리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진짜 조어퀸이었어요? 확실해요?"
  제시카가 물었다.
  "그럼, 진짜지. 내가 조어퀸도 모르는 줄 아니, 응? 아, 실례했습니다."
  조엘은 그제야 조이스를 보고 인사를 했다. 
  제시카는 우리에게 조어퀸이 누구인지  설명하더니 야구 카드를 가져 와서 조
엘이 받아 온 사인이 진짜 조어퀸 것인지  확인했다. 냅킨의 필체를 확인하는 제
시카와 샘의 모습은 마치 꼬마 탐정들 같았다.  이윽고 아이들은 그 사인이 진짜
임을 수긍하고 조엘을 치하했다.
  "다시 맥도널드에 가서 내 사인도 받아와요."
  샘이 말했다.
  "나중에 조세 크루즈 걸 받아다 줄게. 난 일하러 가야해."
  로키는 아까부터 조이스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가 이윽고 그녀에게 물었다.
  "당신 의사요?"
  "아뇨, 전 심리학자예요."
  "우리 삐삐는 아무 이상 없소, 머리가 이상한 건 걔 아빠지."
  조이스는 한 시간 반 가량 있다가 갔다.  이튿날 내가 사무실로 찾아가자 그녀
는 두 아이  다 심리 치료를 받을 것을  권유하며 샘에겐 자기 동료인 샌드라를 
추천했다.
  "아이들에게 정말로 이상이 있는  겁니까? 멍청한 질문인 줄은 압니다만 도저
히 알 수가  없어서 그럽니다. 전 사실 아이들이 말하고,  생각하고, 걷는 것만으
로도 지극히 정상으로 보입니다."
  "제시카는 깊은 상실감에 빠져 있습니다.  부인의 병환은 아이들에게 죽음보다 
견디기 힘든  상처예요. 끝이 없으니까요. 지금  제시카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모르고 있는 상태입니다."
  "제시카가 그런 말을 하던가요?"
  "그런 건 아니고 간접적으로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제시카가 실의에 빠져 있는 
건 확실합니다. 이걸 보세요."
  조이스는 제시카가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을 보이며 계속 말을 이었다.
  "제시카의 방에서 저와 단둘이 있을 때 그린 거예요."
  검은 말이 검은 풀을 먹고 있는 그림이었는데  주위에 핀 꽃들도 검은색, 하늘
의 구름도 먹구름이었다. 
  "무슨 그림이냐고 물었더니 검은 종마를 그린 거라고 대답하더군요. 굳이 지그
문트 프로이트를 거론하지 않아도 제시카의 감정 상태를 알 수 있죠."
  "그런데 그애가 야구에 집착하는 이유는 뭘까요?"
  "야구를 아빠와의 연결 고리로 삼는 것입니다. 엄마나 다른 무엇과도 연관되지 
않은 중도적인 연결  고리요. 야구 용어를 빌리자면 아빠를 향한  직구라고나 할
까요."
  "딸애는 늘 제 주위만 맴돌고 싶어합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학교도 그만둘 거
예요."
  "물론이에요, 제시카는 아빠가  자기 시야에서 사라지는 걸 원치 않습니다.  엄
마가 보이지 않으면 영영 사라진 줄 알고 악을 쓰고 울어대는 아기들과 같은 심
리죠. 제시카는 야구로 그런  심리를 잠재우고 있는 겁니다. 아빠가 곁에 없어도 
야구만 보면 두렵지 않은 거죠."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 현상은 서서히, 오랜 시간에 걸쳐 진행되어 왔습니다. 제시카는 이런 식
으로 엄마를  잃게 된 것에 치명적인  타격을 받아 왔습니다. 이제  다시 세상을 
신뢰하는 법을 배워야만 아빠와 야구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저는 어떻게 도우면 되겠습니까?"
  "자신 있게 말씀은 못 드립니다만, 제가 지켜 본 바로는 선생님 자신도 집착에
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23 심리 치료
  조이스는 두 가지 치료법을 제시했는데, 고양이와  걸 스카우트의 유년대 브라
우니였다. 나는 고양이를, 제시카는 브라우니를  거부했다. 제시카는 조이스와 만
나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라는 것이었다. 
  "조이스랑 같이 노는 건 하나두  재미없어요. 꼬치꼬치 캐묻기만 한다구요. '이
건 어떻게 생각하니,  저건 어떻게 생각하니?' 그런게  자기랑 무슨 상관이 있다
구."
  "네가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  알아내고 또 너 스스로 네 감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조이스의 일이거든."
  "조이스가 도와주지 않아도 난 내 감정을 이해해요. 조이스는 꼬치꼬치 캐묻는 
것밖에 하는 일이 없다구요."
  "너를 도우려는 거야. 그러니 잘 협조해야지."
  "조이스가 엄마에 대해 어떻게 느끼느냐고 물어 보면 난 조이스에게 되물어요. 
아줌마는 아줌마 엄마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느냐구요."
  "그럼 대답을 하던?"
  "항상요. 둘이 만나면 조이스만 떠드는데 아빤 그 비용을 대시는 거예요. 사실 
난 조이스 얘기를  듣지도 않는다구요. 내 기분이 나아지길 바라신다면  그 여자
에게 주는 돈으로 야구 경기 정기 입장권이나 사주세요."
  제시카가 지적한 비용 얘기는 사실 설득력이  있었다. 제시카는 조이스와 일주
일에 두 번, 샘은 샌드라와 일주일에 세 번, 나는 두 심리 치료사와 일주일에 한 
번씩 면담하고 있었으니까.  로키는 조이스와 샌드라를 덩치만  큰 어린애들이라
고 불렀다.
  "어른들이 마룻바닥에 앉아서 애들처럼 노는 꼬락서니 하고는......  부끄러운 줄
을 알아야지, 원."
  "뭐가 부끄러워요? 할아버지도 그러시면서."
  내가 반박을 했다.
  "나는 그걸로 돈을  받아먹진 않아, 직업은 아니라구. 아직도  철이 덜든 건지, 
원."
  샌드라도 조이스처럼 고양이를 권했다.
  "제시카는 외롭고 또  고양이를 좋아해요. 그러니 고양이와  관계를 맺어 가는 
과정을 지켜 보면 치료에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조이스의 말이었다.
  "조지와의 관계를 참고하면 안 될까요?"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조지는 제시카만의 소유가  아니라 가족 모두의 
애완견이에요. 다른  누구와도 관련되어 있지  않은 존재와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게 필요합니다."
  "생각을 좀 해보겠습니다."
  망설이던 내가  마음의 결정을 내리게  된 건 조이스보다는  조지 때문이었다. 
조지는 눈만 뜨면  사방팔방으로 데비를 찾아다녔다. 그 심정 나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조지는 침대 밑에 기어 들어가 보기도  하고 가게에서 팔다 남은 양념
들을 가득 담아  둔 쓰레기 봉지들을 파헤치기도 했다. 부엌에  들어가서 청승맞
게 짖어대는가 하면  마당에 심은 진달래를 뿌리째 뽑아 놓거나  땅을 파헤쳤다. 
땅속 깊이 파들어 가면 그 속에 데비가 숨어 있기나 한 듯.
  나는 그런 조지가 몹시도 측은해서 담당의에게 병실에 개를 데리고 들어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청했지만 의사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의사 몰래 데리고 들
어갈 수도 있겠지만, 조지는 데비를 보면 반가워서 미친 듯 짖어댈 것이 뻔했다. 
그래서 어느  일요일 오후, 조지를 병원  잔디밭까지 데려갔다. 밖에서 제시카와 
샘과 로키가 조지의 목끈을 꼭 붙잡고 있는  사이, 나는 병실로 들어가서 데비를 
창가로 데려왔다. 아이들이 손을 흔들자 조지는 영문을 몰라 두리번거렸다. 
  "조지가 당신을 보고 싶어해, 당신을 찾아 사방을 뒤지고 다닌다구."
  내가 데비에게 말했다.
  병실은 5층에 있었지만  제시카와 샘은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창
문에 얼굴을 갖다 댔다.  제시카는 조지가 뒷발로 곧추 설 수  있도록 앞발을 잡
아 주었다. 로키는 개의  목끈이 샘의 발에 감기지 않게 잡고  있느라 진땀을 빼
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고 미소를 흘렸다. 아이들의 입모양
을 보니 엄마를 부르고 있었다. 그 소리에  흥분한 조지가 뒷발로 겅중겅중 뛰며 
젖어대기 시작했다. 이제  로키 혼자는 힘에 부텨 샘까지 가세해서  조지의 목끈
을 붙들고 있었다. 
  "조지가 미치기 직전이야. 당신을 보고 싶어해. 손 흔들 수 있어?"
  나는 데비의 손을 들어올려  창에 갖다 댔다. 그런 자세로 몇  분을 있자 아래 
잔디밭에서 모두들 손을 흔들며 키스를 던졌다. 
  그 일이 있기  3주일 전, 병원에서는 데비를  정신과로 옮겼다. 정신과 치료가 
도움이 될까 해서였다. 처음엔 약물 요법을 실시했는데  그 결과 데비는 잠에 빠
져 들었고 몸이 뻣뻣해졌다. 약물 요법이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다음엔 행동 요
법이 동원되었다. 
  "시도해 볼 만한 방법입니다, 보상 체계를 이용한 치료법이죠."
  정신과 의사가 행동 요법을 권하며 말했다.
  "데비는 요구하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원치 않는 사람에게 어떻게 
보상 체계를 이요하죠?"
  "현제 환자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들 중  일부를 빼앗는 것입니다. 환자가 그것
에 대해 반응을 보이면 그걸 다시 주는 것이죠."
  "예를 들면 어떤 것을요?"
  "그거야 남편께서 가장 잘  알고 계시죠. 일단 목록을 만들어 주세요. 함께 검
토해 봅시다."
  우리는 데비의 우편물을 끊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  동안 나는 매일 병원에 갈 
때면 아이들의 우편물을 들고 갔었다.
  제시카는 또박또박 쓴 인쇄체에서  동글동글한 필기체로 글씨체를 바꾼 지 얼
마 되지 않았는데,  '빨리 나으세요', '사랑해요', '보고  싶어요' 등의 사연과 함께 
밝은 색깔로 꽃, 나무, 새를 그려 넣었다. 
  나는 의사의 지시에 따라 제시카의 편지와 샘의 그림을 데비에게 주지 않는다
는 사실을 아이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전과  다름없이 아이들에게서 받아서는 연
구실에 있는 가방에  넣어 두었다. 데비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지만  벽에 테이프
로 붙여 놓았던 아이들의 카드와  그림을 모두 떼어 내고 보니 그나마 유일하게 
남아 있던 밝은 분위기가 사라져 버렸다. 
  두 번째로 실시한 방법은 크게  소리내어 책을 읽어 주던 걸 중단하는 것이었
는데, 그렇게 되자 데비의 병실은 소리마저도 잃었다. 그러나 환자는 무반응이었
다. 의사가 이번엔 내가 당분간 병실을 찾지  않는 충격 요법을 쓰자고 제안했을 
때 난 거부했다.
  "전혀 효과가 없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며칠 더 기다려 봅시다."
  의사의 간곡한 청이었다.
  그 모든 시도가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나자 나는 이제까지 모아 둔 편지와 그림
을 벽에 다시 붙이고 조지를 데려오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내 나름의 충격 요법
이었다.
  조지와 로키와 아이들이 있는 주차장 근처의  잔디밭으로 내려가 보니, 자유롭
게 풀려난  조지가 막 경비원을  공격하려는 찰나였다. 데비를  찾느라고 혈안이 
된 모양이었다. 이빨을 드러낸 채 으르렁거리는 조지의 등줄기가 빳빳했다. 경비
원은 허리에 차고 있던 경찰봉을 빼서 오른손에 들었다.
  "때리지 말아요."
  제시카가 경비원에게 소리쳤다.  로키는 개의 목끈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썼으
나 조지가  너무 빨랐다. 조지는  로키에게서 점점 멀어져서  경비원과의 거리르 
좁히며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나는 그 광경을  보고 쏜살같이 달려가서 조지의 목끈을 잡았다.  그러나 조지
도지지 않고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며 나를 떨쳐 내려했다. 내  손에서 풀
려난 조지가 경비원을 향해 뛰어가려는 순간 나는 재빨리 개의 옆구리를 걷어찼
다. 그 충격으로 조지는 풀밭에 나뒹굴었고 나는 목끈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아빠, 그만 하세요."
  제시카가 날카롭게 외쳤고 샘은 로키의 품안으로  뛰어들었다. 조지는 다시 경
비원을 공격하기 위해 내  손을 물려고 했다. 나는 목끈을 단단히  움켜쥔 채 재
갈을 물리듯 끈으로 개의 주둥아리를 꽁꽁 동여매고 차로 끌고 갔다. 조지도, 나
도 몸이 후들후들 떨렸다.
  "미친개예요, 아이들만 없었다면 쏴 죽였을  겁니다. 선생님, 저라면 그런 미친
개는 없애 버리겠어요."
  경비원이 등뒤에서 외쳤다.
  우리는 차에 올라타서도 조지가 진정될 때까지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경찰 아저씨가 진짜로 조지를 쏘려고 했대요?"
  샘이 물었다.
  "아니야, 그리고 경찰 아저씨는  아무 잘못이 없단다. 그냥 거기 서 있기만 했
던 거니까."
  "조지는 원래 경찰을 싫어해요."
  "그것 때문이 아니야."
  제시카는 아무것도 모르는 동생에게 핀잔을 주고는 조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창문을 조금 열어 신선한 바람을 쏘였다. 제시카와  샘 사이에 앉은 로키는 조지
가 도로 미쳐 날뛰지 않을지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제시카의 다음 말을 기다리다가 아무 얘기도 없자 물어 보았다.
  "그럼 조지가 왜 그렇게 화가 났다고 생각하니?"
  "그건 말예요......"
  그날 밤 나는  조이스에게 전화를 걸어 고양이 건에 동의했다.  토요일에 조이
스가 흰색 샴고양이 스노를 데리고 왔다. 그  암고양이는 도저히 집 안에서 길들
여지지 않아 이전  주인이 내놓은 것인데 조이스는  우리에게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내가 그걸 알았을 즈음엔 이미 제시카가  그 고양이에게 정을 담뿍 쏟고 
있어서 달리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아빠가 고양이를 받아들였으니까 너도 브라우니를 받아들일 수 있겠지?"
  내가 제시카에게 말했다.
  "싫어요, 조이스 말을 다 따를 필요는 없잖아요."
  "조이스만 그런 게 아니고 아빠도 널 브라우니에 보내고 싶어."
  "그냥 말로만 그러시는 거잖아요."
  "정말이야, 아빠 생각엔 브라우니가  되면 그건 네게 도움이 될 것 같아. 제발 
그랬으면 좋겠구."
  우리는 피자 인의 빨간 비닐 칸막이 좌석에  앉아 있었다. 로키는 커피를 마시
면서도 눈으로는 주크박스 버튼을  가지고 장난치는 걸 좋아하는 샘을 감시하고 
있었다.
  "아빤 조이스 말은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잖아요.  아빤 늘 조이스 편만 든다구
요."
  "제시카 말이 옳다,  애들처럼 앉아서 놀기만 하는  그런 여자들은 필요 없어. 
그 여자들도 직업다운 직업을 가져야 할 거야."
  로키가 나서서 제시카를 거들었다.
  "그리고 로키는 늘 네 편만 들구."
  내 말에 제시카는 빙그레 웃었다.
  "브라우니 얘기로 다시  돌아가자. 그냥 한 번  시도나 해보기로 하자, 손해볼 
거 없잖아."
  "난 싫어요, 아빠도 억지로 강요할 수 없어요."
  제시카는 반도 채 먹지 않은 피자 조각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제시카를 좀 그냥  놔둬라, 그까짓 클럽에 들라고 그렇게 콩  볶듯 볶을 필요 
없잖니."
  로키가 못마땅해서 말했다.
  "괜히 애한테 거기 들지 말라고 하지 마세요."
  "나는 그게 뭔지도 모른다."
  "걸 스카우트 유년대예요."
  "너 어렸을 적에 했던 그런 거 말이냐? 컵 스카우트? 너 하나 고생 한 걸로는 
부족해서 삐삐까지 고생을 시키겠다는 거냐?"
  로키는 화가 나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 차에 가서 기다리고  있는 제시카에게 
갔다.
  "아빠, 난 로키가 왜 걸 스카우트를 싫어하는지 알아요. 걸 스카우트 누나들이 
쿠키를 만드니까 그런 거죠, 그렇죠?"
  샘이 진지하게 말했다.

      24 제시카
  브라우니 역시 교회에서 모였는데 이번엔 성  안나 교회에서였다. 제시카가 모
임에 나가겠다고 순순히 응한 건 야구 경기에 데려가겠다는 약속 때문이었다.
  "놀란 라이언이 이번 게임에 선발 투수로 나올까요?"
  "그럴 예정이지."
  "집에 앉아서 공짜로 볼 수 있는데 뭐하러 돈 버리면서 야구장까지 가니?"
  제시카와 내가 주고받는 말을 듣고 로키가 못마땅해서 불퉁거렸다. 
  "좋아요, 브라우니에 가겠어요. 단,  게임이 끝날 때까지 다 봐야 해요,  연장전
까지 해두요."
  로키는 샘과 함께 집에 남았다. 나는 로키에게  교회에 간다는 말은 하지 않고 
주황색 별 모양이 그려진 청색 에스트로스팀 야구 보자를 쓰고 나섰다.
  브라우니 모임은 이미 학기초부터 시작되었던 터라 제시카는 말하자면 편입생
인 셈이었다. 성 안나 교회의 레크리에이션  룸에 들어서니 여학생들이 둥그렇게 
앉아 있었다. 대장인 케이 랜덜이 가슴 높이에서  손을 내밀더니 손톱 색깔을 확
인이라도 하는 듯 손톱을 내려다 보았다. 
  "숨을 깊이 들이쉬세요."
  그녀의 지시에 스무 명의 브라우니 단원들이 숨을 들이쉬었다.
  "준비됐어요?"
  케이 랜덜은 그렇게 묻고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곧바로 말을 이었다.
  "눈을 감으세요, 브리지(우리 말로  옮기면 '다리 건너기'이며 스카우트 의식의 
하나임)."
  케이가 심호흡을 계속하며 양쪽 손끝을 한데 모으자 단원들도 똑같이 따라 했
다. 제시카와 나는 접는 의자에 앉아서 바라보고 있었다.
  "아빠, 우리 나가요."
  제시카가 옆에서 소곤거렸으나 나는 못 들은 체하고 앉아 있었다.
  그렇게 30초쯤 있다가 케이가 일어나며 말했다.
  "5분간 휴식, 떠들지는 마세요."
  그녀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나는  이미 그녀와 한 차례 통화를 했었다. 케이는 
나와 제시카에게 차례로 악수를 청한  뒤 제시카의 손을 잡고 단원들이 있는 곳
으로 데려갔다. 단원들은  리츠 크래커와 200밀리 리터짜리 우유팩에  색색의 빨
대를 꽂아 마시고 있었다.
  "제 딸이 늦게 가입은 했지만 브라우니  활동을 통해 도움을 얻었으면 합니다. 
이곳 단원들과는 거의 다 이미  아는 사이니까 적응하는데 별 어려움은 없을 겁
니다."
  케이가 다시 내 쪽으로 다가오기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물론이죠, 꼭 제1단계부터 시작하란 법은 없습니다. 여긴 군대가 아니니까요."
  나는 단원들  틈에 끼여 앉아  있는 제시카를 쳐다보았다.  제시카는 우유팩을 
뜯지도 않고 그대로 들고 있었다.
  "제시카는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성격입니다.  그래서 그룹 활동이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저희 유년대엔 수줍은 아이들이 많아요. 스카우트  활동을 하다 보면 밝고 사
교적인 성품을 가지게 되죠. 절  믿으세요, 아홉 살짜리들 여섯 병이 한 텐트 안
에서 자면서  서로 어울리지 못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서로 의지하고 
의사 소통이 이루어져야만 하니까요."
  나는 제시카가 슬리핑 백의  지퍼를 올리며 마지못해 옆친구에게 잘자라는 인
사말을 웅얼거리고는 눈을 감고  불행한 저를 행복에 겨운 아이들만 우글거리는 
곳으로 보낸 아빠를 원망하는 장면을 상상했다. 
  "제시카는 야구를 좋아합니다."
  "스카우트 활동에도 야구가 포함돼요. 일년에 한  번씩 우리 지역 단원들이 단
체로 경기장에 가죠. 전광판에 우리를 환영하는 말까지 나온답니다."
  "제시카는 야구 중계를 빼놓지 않고 봅니다. 진짜 열성 팬이죠."
  케이는 미소만 흘렸다.
  "그래서 딸애를 걸  스카우트에 입단시키려는 겁니다. 제  또래 여자 아이들과 
어울려 놀기를 바라는 거죠."
  "잘 알겠습니다, 그것도 브리지의 일부죠."
  케이는 다시 양손 끝을 모으며 말을 이었다. 
  "아까 들어오실 때 우리가 하는 걸 보셨죠."
  "그러잖아도 뭔가 궁금했습니다,  전 손톱에 칠한 매니큐어를  말리는 건가 했
죠."
  케이는 웃으면서 자기 손끝을 눈높이까지 올렸다.
  "이게 바로  브리지예요, 상징적인 행동이죠.  스카우트 활동에는 다섯 단계가 
있는데 우리는 각  단계들 사이에 브리지를 하죠. 브라우니 활동이  끝날 때쯤이
면 단원들 모두가 가까워져요.  가을이면 모두 주니어 걸 스카우트가 됩니다. 브
리지는 다음 단계를 맞기  위한 마음의 준비라고 할 수 있어요.  미지의 것에 대
한 두려움을 쫓아 버리는 의식이죠."
  케이는 목에 걸고 있던 호루라기를 입에 물고  짧게 불었다. 단원들이 다시 둥
그렇게 둘러앉았다.
  "지금 기능 훈련을 할 거예요?"
  단원 하나가 물었다.
  "아니, 브리지를 계속할 거예요. 그러기 전에 우선 제시카를 환영합시다."
  단원들은 손에 손을  잡고 리듬에 맞춰 이쪽  저쪽으로 몸을 흔들며 노래하기 
시작했다.
  "안녕, 안녕, 안녕 제시카."
  제시카는 세러와 레베카 사이에 앉아 있었다. 
  노래가 끝나고 케이가 손을  올리자 갈색 제복에 주황색 스카프를 넥타이처럼 
맨 스무 명의 소녀들이 질겅질겅 씹어서 보기 흉하게 뭉툭해진 손가락을 들어올
려 브리지를 했다. 그러나 제시카는 고집스럽게 그냥 앉아 있었다.
  케이가 팔을 내리자 둥그렇게  둘러앉아 있던 단원들은 크기가 각양각색인 단
추를 마련해 놓은  기다란 테이블로 몰려갔다. 단추말고도 고무 마개가  달린 풀
병과 두꺼운 종이가 그 옆에 준비되어 있었다.
  "기능 훈련 시간이에요."
  케이가 내게 말하고는 소녀들이 만들기 시작하는  걸 도왔다. 제시카도 단원들 
틈에 끼여서 단추들을 골라 일정한 모양으로 놓고 있었다. 
  "풀로 붙이기 전에 먼저 자기가 만들 모양을 정하세요. 풀을 손가락에 너무 많
이 묻히지 말도록 하고요."
  케이가 단원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브라우니 단원들이 단추 붙이는 작업을  하는 동안 나는 벽에 조각된 성녀 안
나와 성자 그레고리, 토머스의 형상을 바라보았다. 그들도 막기도를 마치고 브리
지를 시작하려는 듯 양손을 모으고 있었다.
  휴식 시간에 케이가 나에게 스카우트 활동을 도와줄 수 있겠느냐고 묻기에 나
는 쾌히 응낙했다. 
  "지금까지 캐서린 어머님이  도와주셨는데 한 달 전에 세인트루이스로 이사를 
갔어요. 저 혼자 힘으로는 좀 벅차거든요. 바쁘시지만 않다면......"
  "할 수 있습니다, 일주일에 하루 저녁 정도는 문제없습니다."
  모임이 끝나자 내가 케이를 도와 모임에서 쓰던 물건들을 그녀의 차로 옮기는 
동안, 제시카는  곧바로 내 플리머스로 갔다.  다른 소녀들과 재잘거리거나 나를 
기다리지도 않고 또박또박 차로  걸어가서는 문을 열고 들어가 앉아 안전벨트를 
맸다.
  나는 경기가 시작되고 6이닝이  지날 때까지 묵묵히 앉아 있다가 브라우니 얘
기를 꺼냈다. 에스트로스  팀 투수 놀런은 6회까지 강속구를 뿜어  대며 내야 안
타 하나만을  허용했다. 그러자 제시카는  놀런이 안타 하나만을  허용한 경기가 
몇이나 되는지  찾아보기 위해 프로그램  표를 열심히 들여다봤다.  나는 놀런의 
멋진 투구로 제시카의 기분이 한껏 좋아진 기회를 이용하여 그 얘기를 꺼냈다.
  "아빠도 브라우니 모임에 나가기로 했단다, 케이의 보조를 맡기로 자원했지."
  "아빤 제정신이 아니군요, 난 거기 안 나갈 거예요. 다시는 안 간다구요."
  "거기 가서 뭐 손해  될 게 있다고 그러니? 재미있잖아. 여러  가지 기능도 배
우고 소풍도 가고. 그리고 내년이면 곧바로 걸 스카우트에 입단하는 거야."
  "걸 스카우트는 멍청한 짓거리예요. 쿠키나  만들어 팔고, 단추나 풀로 붙이고, 
멍청한 배지를 달고 행진이나 하고."
  "좋아, 네 맘대로 해라. 가지 마. 아빠는 이미 약속을 해놨으니 나갈거야.
  "아빠가 왜 그러는지  알아요, 엄마가 없으니까 케이  랜덜이나 걸 스카우트가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죠. 그렇지 않아요. 조이스도 엄마 역할을 해주
려고 한다는 것도 알아요. 아빠, 제발 부탁이니까 나를 그냥 내버려두세요."
  제시카는 프로그램 표를 탁 덮고는 점수 기록표를 들었다.
  7회에서 놀런은 안타 네 개와 포볼 한  개를 허용했고, 8회에서는 대 타자에게 
보기 좋게 나가  떨어졌다. 경기장에 오기 전까지는 연장전까지 다  봐야 한다고 
성화를 부리던 제시카는 이제는 그냥 나가자고 재촉했다. 
  이튿날 아침, 제시카는 로키에게 내가 브라우니에 든 얘기를 했다. 
  "부지런도 하구나, 지금 하고 있는 일들만으로는 부족해서 클럽에 까지 들구."
  로키의 핀잔에 제시카는 고소하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시리얼 먹었다.
  "제시카가 어떻게 생각하든 브라우니는 좋은  단체예요. 그래서 참여하기로 한 
거라구요. 제시카는 배우기 싫다지만,  전 거기서 가르치는 것을 배우고 싶고 아
직은 그럴 수 있는 나이예요."
  "아무렴요, 가서 안전핀으로 목걸이 만드는 법, 멍청한 무늬에다 색  휴지 붙이
는 법이나 배우세요."
  "저한테 강요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너는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난 나 하
고 싶은 대로 하는 거야. 약속은 약속이니까. 아빤 이미 브라우니 지도자가 되기
로 서명까지 했고, 녜가 함께 가건 안 가건 갈 거다."
  "그렇지만 아빤 내 생각을 물어 보지도  않고 아빠 맘대로 서명했어요. 상의도 
안 했다구요."
  "맞다, 그래서 너한테 억지로 강요하지 않는 거야. 내가 한 선택이니까."
  "어떻게 그런 걸 좋아하실  수 있어요? 난 멜리사 랜덜이 싫어요.  갠 맨날 감
기나 달고 다닌다구요."
  "그애 어머니는 훌륭한 지도자야."
  "그걸 어떻게 아세요?"
  "내 윗사람이니까. 윗사람을 좋아하고 따라야  하는게 도리 아니겠니? 제발 아
가야, 우리 함께 해보자꾸나."
  "억지로 강요하면 할 수 없이 가겠지만 진짜 가고 싶지 않아요."
  매주 화요일 내가  스카우트 모임에 참석하는 동안  로키가 제시카와 샘 곁에 
있어 주었다. 모임에서 우리는 주로 소풍 얘기와  어떻게 하면 공로 훈장을 받는
가 하는  얘기를 나누었다. 케이가 내게  신속성 공로 훈장을 달아  주었을 때는 
모두들 낄낄거리고 웃었다.  그것이 나로서는 머리털 나고 처음 받는  공로 훈장
이었다.
  내가 그 배지를 달고 집에 돌아오자 제시카는 근사하다며 직장에 달고 나가라
고 권했다. 
  이따금 나는 제시카가 머리를 빗어 말총 모양으로 묶고 점심 도시락을 챙기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정상적인  아이를 가지고 내가 공연한  법석을 떨고 있는 건 
아닌가, 심리 치료니  스카우트 활동이니 억지로 친구들을 초대하게 하는  일 따
위를 다 그만두는  게 옳지 않을까 생각하곤 했다. 어쨌거나  제시카는 모범생이
고 유머 감각도 있다. 게다가  이제 겨우 아홉 살이 아닌가. 제시카는 다른 아이
들처럼 잘 자라날지도 모른다. 내 어릴 적  우상이었던 존 클라크가 아버지 없이 
훌륭하게 자랐듯이, 제시카도 엄마 없이 반듯하게 자랄 수 있다. 제시카도 존 클
라크처럼 급우들 사이에세 위엄  있고 진지하고 어른스런 친구로 존경받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러나  존의 아버지는 조국을 위해 전사한 영웅이었고  그런 사실을 
세상에 떳떳이 밝힐 수 있었다. 
  우리 제시카는 어떠한가.  친구들에게 알아듣게 설명하기도 힘든  괴상한 병에 
걸려 병원에 누워 있는 엄마.
  "난 사람들이 엄마에 대해 묻는게 제일  싫어요. 그래서 그냥 엄마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떨어졌다고 대답해 버려요."
  
      25 하늘 돌팔매
  정신과 치료가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병원측에서는  빨리 퇴원하라고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어느 날 오전, 병원 카운슬러인 샤런이 찾아왔다.
  "내가 커피 한잔 살까요?"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이  갔다. 전에도 몇 번  만나서 얘기한 
적이 있으니까. 샤런은  새하얀 은발이 긴 얼굴을 푹신하게 감싸고  있는 오십대 
중반의 여인으로, 늘 이해심이  넘쳐흘렀다. 나는 그녀만 보면 영화 속에 나오는 
가슴 따뜻한 이웃들이 생각났다. 옆집에 불이 나면  도움을 청하지 않아도 발 벗
고 나서서 도와주는 그런 좋은 이웃.
  샤런이 병실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기분이 좋았었다.  아침에 샘의 
카풀 친구 케빈과 브래드를  차에 태웠는데, 샘이 나와 함께 앞  좌석에 앉지 않
고 친구들과 뒷좌석에 앉았던 것이다. 2개월의  정신 요법 치료와 고장난 텔레비
전 그리고 복도에 늘어놓은 50여 개의 모형차들 덕분이었다. 
  "의사들은 맥스 당신이 치료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고 보지 않더군요."
  "그럼 억지로라도 밀어붙이지 왜 가만히 있었답니까?"
  "그렇게 화내는 모습을 보니 기쁘군요. 지극히 자연스러운 감정  표현이니까요. 
하지만 화를 낸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에요. 이제 중대한 결단을 내
려야 해요."
  "의사들 회의에서 그런 얘기가 나왔나 보죠?"
  샤런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입을 열었다.
  "이 문제는 전에도 얘기한 적이 있지요. 이 문제를 회피하고 싶은 심정 충분히 
이해해요. 결정은 물론 당신이 내리겠지만, 참고삼아 요양소 명단을......"
  샤런은 말끝을 흐리며 요양소 안내 책자가 든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이런 데는 노인을 위한 시설이지 데비가 들어갈 곳이 아닙니다."
  "나이에 관계없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은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이에요."
  나는 고개를 가로 젓고는 물었다.
  "데비가 여기서 얼마나 더 있을 수 있죠?"
  "회의에선 즉시 퇴원시키는 걸로 결정이 났지만,  있을 곳을 구할 때까지 기다
려 드리죠. 열흘 정도. 이따금 말예요,  환자와 가까운 사람들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죠."
  "데비의 상태에 대해서는 잘 압니다. 하지만 아는 것과 실천에 옮기는 건 별개
니까요."
  "옳은 말이에요."
  샤런은 그렇게 맞장구를 치고는 자기 명함을 건네며 말했다.
  "지금은 약속이 있어서  가봐야 해요. 언제라도 나와  상의하고 싶으면 전화를 
주세요. 요양소 몇 군데를 직접 돌아보면 생각이 바뀔지도 몰라요."
  내가 그 문제를  회피하려 든다는 샤런의 생각은 완전히 빗나간  것이었다. 사
실 난 그 문제밖에  생각하고 있지 않았으니까. 나는 의사들, 조이스, 샌드라, 하
다못해 유대교 양로원 담당자들과도 그 문제를 상담 했었다. 
  "데비를 위해서라면 사실  어디로 보내도 별 차이가  없어요. 하지만 가족들이 
마음놓고 맡길 수 있는 곳이라야 되겠죠."
  데비를 담당하고 있는 간호사의 의견이었다.
  나는 샤런이 건네 준 마닐라 봉투를 들고  집으로 갔다. 샘과 로키는 정원에서 
구두를 닦고 있었다.  로키는 정원 의자에 앉아서 샘의 흰색  테니스회에 광택제
를 듬뿍 바르고 끈에까지 광택을 냈다. 샘은  구둣솔을 들고 광택제가 마르길 기
다리고 있었다. 
  쓰레기도 다 치웠고,  조지와 고양이의 밥그릇도 깨끗했고, 진입로도 말끔하게 
비질이 되어 있었다. 제시카가 집 안에서 뛰어나오며 외쳤다. 
  "아빠, 아까 샌드라가 샘을 데려다 주고 가면서 집에 오시는 즉시 전화해 달라
고 했어요."
  "알았다, 먼저 우리 딸하고 포옹 좀 하고."
  제시카는 기분이 좋을 때는 보너스로  포옹을 한 번 더 해주곤 했는데 포옹을 
할 때마다 긴 머리가 내 뺨을 간질였다.  제시카는 한사코 머리 자르기를 거부해
서 곱슬곱슬한 앞머리가 예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조이스는 그걸 심리학적으로 설명했다.
  "제시카는 머리칼 속으로 숨으려는 거예요. 아이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심리 현
상이죠. 제시카의 경우 좀 심하긴 하지만 그냥 내버려두세요."
  나는 시키는  대로 했다. 대신 크림  린스와 머리에 뿌리면 엉킨  머리 카락을 
빗질하기가 수월한 헤어 컨디셔너를 사주었다. 그리고  그 곱슬머리가 감당 못할 
정도로 엉키면 뭉텅 잘라 냈다. 
  샌드라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아직 사무실에 있었다.
  "지금 이쪽으로 와주신다면 기다리겠어요."
  2개월 전 샘이 처음으로 샌드라의 치료를  받기 시작하던 때만 하더라도, 나는 
싫다고 발버둥치며 우는  아이를 억지로 끌고 갔었다. 그런데 이제  샘은 샌드라
와 만나는  시간을 목 빼고 기다렸고,  어떤 때는 샌드라와 만나면  무슨 놀이를 
할지 그 전날 밤부터 궁리하기도 했다.
  샌드라는 워낙 늘씬하고 미모가 빼어나서 바닥에 앉아 샘과 놀이를 하는 모습
이 부자연스러워 보일 정도였다. 로키는 그녀가  유괴범일지도 모르니 철저히 감
사하라고 했다. 그러나 샌드라는 성격이 소탈하고  참을성도 많아서 샘이 신경질
을 부리면 그녀에게 장난감을 집어 던져도 상냥함을  잃지 않았다. 그리고 늘 내
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런데 이번엔 그렇지 않았다. 
  지난 주말 해리엇이 다니러 왔다가 샘과 제시카를 데리고 나가 선물을 한아름
씩 안겨서 돌려보냈었다. 
  "샘이 외할머니가 다녀가신 얘기를 하더군요.  샘과 제시카가 할머니와 만나서 
무얼 했는지 아세요?"
  "예, 그런데요."
  "데비를 만나러 병원에 함께 갔었다는 얘기를 하던가요?"
  "예."
  "외할머니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말하던가요?"
  "아니오."
  "외할머니가 샘을 데비의 무릎에 앉히고 엄마에게 키스를 하라고 했대요. 그래
야 엄마 병이 낫는다구요. 그러면서 엄마가  외할머니에게는 말을 한다고 하더래
요. 샘은 엄마가 왜 외할머니하고만 말하고 자기에겐  아무 말도 안 하는지 알고 
싶어해요."
  "장모님은 딸이  회복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잘하다  못해 그런 얘기를 꾸며 
낸 것이지 나쁜 의도로 그런 건 아닙니다."
  샌드라는 담배를 붙여  물었다. 그리곤 내가 담배 연기를 싫어한다는  걸 아는
지라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나쁜 의도는 없었겠죠,  하지만 결과적으로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어요. 아이들을 정신  이상으로 만들고 싶다면 그런 거짓말을 자꾸  꾸며 내어 
되풀이해서 들려주면 효과가 있죠. 샘은 진짜로  외할머니가 엄마와 대화를 나누
는 줄로 알고 있어요. 그리고 엄마를 살려내는  것이 자기 책임이라고 느끼고 있
죠. 아이들에게 데비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얘기해 주셨어요?"
  "아이들도 알고 있어요."
  "그런 말을 해 준 적이 있나구요."
  "직접적으로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지만, 우린 늘 데비의  병에 대해 얘기합니
다."
  "제 생각엔 아이들에게 모든 걸 밝힐 시기가  온 것 같아요. 샘은 엄마를 구해 
내지 못하면 외할머니가  꾸중하실까 봐 벌써부터 겁을 집어 먹고  있어요. 제시
카에게 그게 사실인지 확인했더니 똑같은 얘기를 하더군요."
  "그렇다고 장모님께 하고 싶은 말을 못하게 할 순 없어요."
  "그럼 아이들은 누가 보호하죠?"
  
  우리는 페니 백화점 커피솝으로 갔다. 아이들에게  그 얘기를 들려주기에 안성
맞춤인 장소인 것  같아서였다. 제시카와 샘은 그곳 단골 손님이어서  우리가 들
어오는 걸 본 웨이트리스는 묻지도 않고 치즈  샌드위치 두 개를 주문했다. 로키
도 함께 갔지만 그곳은 유대식 음식점이 아닌지라  물만 마셨다. 로키는 내가 그
런 데서 아이들에게  치즈 샌드위치를 사 먹이는 것을 나무라진  않았지만, 나도 
함께 이교도 음식을 먹었다면 분명 화를 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염려는 없는 
것이, 나는 전혀 식욕이 동하지 않았다.
  나는 아이들에게 샌드라와 면담한 얘기를 고스란히 들려주며 엄마가 외할머니
하고만 얘기한다는 건 꾸며 낸 얘기라는 걸 확신시켰다. 
  "엄마가 말을 하게 되면 누구보다도 먼저 너희들에게  말을 할 거야. 또 한 가
지 알아 둘 건, 엄마가  아픈 건 너희들 탓이 아니란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엄마
의 병을 낫게 할 수도  없다는 말이기도 해. 너희들이 아무리 원해도, 아무리 엄
마를 사랑해도 너희들 힘으로 엄마를 낫게 할 순 없단다."
  "그럼 누가 할 수 있어요?"
  제시카가 물었다.
  "아무도 못한단다."
  커피숖엔 테이블이 대여섯 개 종도밖에 되지  않는데다, 문 닫을 시각인 6시가 
다 되어서인지 손님이라고는 우리뿐이었다.
  "의사들도 더 손 쓸 방도가 없다더냐?"
  로키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이들은 잠자코 샌드위치를 먹었다.
  "엄마의 병을 고칠 수 없다는 걸 아빠는 이미 몇 달 전에 알았단다. 의사가 그
렇게 말하더구나. 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온갖 방법을  다 써봤던 
거란다."
  "왜 진작 말 안 했어요?"
  제시카였다.
  "너희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란다. 진작 말했어야 되는 건데......"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샘이 끼여들였다.
  "난 다 알고 있었어요, 할머니가 진짜로 엄마랑  얘기한 게 아니란 걸 다 알고 
있었어요."
  페니 백화점에서 우리 집까지는 불과 여섯 블록밖에  안 되었다. 나는 집에 도
착하는 즉시, 주차장에서  검댕이 묻어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샘  목욕부터 시켰
다. 목욕을 다 시키고 수건으로 몸을 닦아 주는데, 데비를 빼닮은 동글동글한 발
가락들이 눈에 들어왔다. 샘은 잠옷을 입고 고양이 스노를 오른팔에 안고 <외팔
이 스노>를 불렀다. 그러자 고양이도 리듬에 맞춰 가르랑거렸다.
  뒤뜰에 나가  보니 제시카가 잔돌을  집어서 던지고 있었다.  놀런 라이언처럼 
멋지게 와인드업을 하더니 엉뚱하게 하늘을 향해 돌을 던졌다. 
  아까 제시카와 함께  밖으로 나갔던 로키는 저만치  떨어진 정원 의자에 앉아 
졸고 있었다. 
  나는 제시카가 돌 하나하나를 정확하게 조준하여 힘껏 던지는 모습을 지켜 보
았다. 제시카에겐 야구 장갑과  진짜 야구공이 있었고, 테니스공은 여러 개 되었
다. 나는 내 글러브와 테니스공 한 개를 집어 들고 밖으로 나갔다. 
  "아빠가 공 잡아 줄까?"
  제시카는 도리질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포수처럼 쪼그리고 앉았다.
  "자, 던져. 너도 놀런 라이언처럼 강속구를 던질 수 있다구."
  제시카는 또 도리질을 했다.
  "빗나간 공은 아빠가 다 주워 온다니까."
  그래도 도리질. 제시카는 아무렇게나 돌을 던지는  게 아니라 또박또박 글씨를 
쓸 때처럼 던질 때마다 정성을 쏟고 있었다. 마치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듯. 나는 
하릴없이 서서 제시카가 허공을 향해 돌을 대여섯 개 더 던질 때까지 지켜 보기
만 했다. 날은 저물어 가고 있었고 비가 내릴 것 같았다. 나는 로키를 깨워서 집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지금 목표물을 향해 던지는 거니?"
  제시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목표물이 뭔데?"
  "하느님."
  나는 잠시 더 딸아이의 돌 던지기를 지켜  보았다. 허공으로 솟구쳐 오른 작은 
돌멩이들이 툭툭  땅에 떨어졌다. 제시카는 지쳐  가고 있었다. 돌이 솟구쳤다가 
떨어지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이제 내가 교대를 했다. 나는 돌을 하나 집어서 
있는 힘껏 하늘로 던졌다. 그러다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우리는 로키를 
깨워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26 생일 케이크
  제시카의 담임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제시카가  쉬는 시간에 통나가 놀지 
않는다면서 면담을 하자는 거였다.
  "물론 전 제시카에게 강요는 하지 않아요. 단지 쉬는 시간에 교실에만 앉아 있
지 말고 도서관을 이용하거나 구내 식당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는 게 좋을 거라고 
충고하는 정도죠. 쉬는 시간에 책을 읽고 싶어서  교실에 혼자 남아 있는 거라면 
이해를 하겠어요. 그런 경우는 가끔 있으니까요. 여덟 살 난 아이들이라 해서 다 
놀기를 좋아하는 건 아니니까요...... 하지만 제시카는  책을 읽는 것도 아녜요. 야
구 카드만 들여다보고  있어요. 아버님께서도 그런 사실을 아셔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오시라고 한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집에서도 그러니까요."
  "제시카에게 무얼 하고 있나고 물었더니 설명을 해주더군요. 하지만 전 야구팬
이 아니라서 알아듣기가 어렵더군요."
  "야구 카드들을 보면서 기록을 집계하는 겁니다. 제 잘못이 크죠. 야구를 재미
있게 볼 수 있도록  타율 계산법을 가르쳐 줬는데, 이젠 그  계산법으로 모든 걸 
계산하려 듭니다. 제시카가 계산한 저의 설거지 타율은 1할 9푼 8리죠."
  "매우 유용한 취미가 될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쉬는 시간에 혼자 교실에 남아 
있으면 하루 종일 친구들과  어울릴 기회가 없답니다...... 가정에 불행한 일이 있
다는 건 압니다만 그래도 걱정이 됩니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심리 요법 치료도 받고 있고 브라우니에 입단
시키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아버님께서 최선을 다하고 계실 줄은 압니다만 그 어린 것이 가엾어서요."
  "선생님, 제시카는 동정을 원치 않습니다. 사실 동정받는 걸 제일 싫어하죠. 그
러니 다른 학생들과 똑같이 대해 주셨으면 합니다."
  "물론이죠,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담임 선생은  내가 화난 기색을  보이자 시원스럽게 대답은  했지만, 목소리가 
떨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제껏 제시카에게 연민을 느껴 온게 분명했다.
  "제 아들도 늘 야구 카드를 갖고 다니죠. 하지만 그엔 열네 살이에요. 제 생각
입니다만, 제시카는 그러기엔 아직 너무 어리지 않을까요?"
  "제가 야구장에도 자주 데려가고 또 매일 야구 중계를 듣죠."
  "예, 알아요. 수업중에  라디오를 듣고 있어서 제가 지적한  일도 있었죠. 그때 
제가 보낸 메모, 받아 보셨을 거예요."
  "예, 저는 선생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래서 학교에 라디오를 못 가
지고 가게 했습니다."
  "그럼 앞으로 좀더 지켜 보기로 하죠. 상황이 나아지길 바랍니다. 제시카는 읽
기, 쓰기, 산수  모두 뛰어나요. 하기야 산수는 그렇게 매일  연습을 하니 잘하는 
게 당연하군요."
  조이스는 고양이와 피자를 가지고 제시카의 마음을 끌지 못하자 함께 야구 구
경을 가기로 했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다시는 조이스와 야구 구경 안 가요.  차라리 조이스의 사무실에서 유령 놀이
나 하는 게 나아요."
  집에서 돌아온 제시카는 골이 잔뜩 나서 투덜거렸다.
  "조이스가 자기는 야구팬이 아니라고 미리 얘기했잖아."
  "게임 내내 수다만 떨더라구요."
  "사람들이 다 너처럼  투구 하나하나에 집중하진 않아.  조이스는 그저 게임을 
즐기러 갔던 거야."
  "아뇨, 나를 감시하러 간 거예요."
  "감시라니, 조이스는 자기가  보고 느낀 걸 아빠와  너에게 고스란히 얘기하잖
아."
  "보고 느낀 것도 그다지 없어요. 4회에 우리 투수가 3루타를 맞고 와일드 피칭
까지 했는데도 조이스가 보고 느낀 건  내 콜라병이 비었다는 것뿐이었으니까요. 
조이스의 입장권까지 아빠가 사신게 아니라면 그나마 다행이구요."
  "앞으로 몇 번 더 함께 가면 조이스도 야구에 대해 배우게 될 거야."
  "싫어요, 아빠와 함께 가는 게 아니라면 차라리 집에서 라디오를 듣겠어요."
  조이스는 제시카의 심리 현상을 '분리 불안증'이라고 불렀다.
  "제시카가 끊임없이 기록을 계산하는  데 매달리는 것도 자신이 현재 서 있는 
자리르 확인하고 싶은 심리 때문이죠."
  어느 날은 도저히 짬이 나지 않는데 제시카가 야구장에 가자고 하도 졸라대서 
로키에게 아이들을 딸려서  보냈다. 운동장 북쪽 출입구에 내려 주면서  그 자리
에서 10시에 만나기로 약속했다. 
  "연장전까지 하면 어떻게 하구요?"
  제시카가 볼멘소리로 물었다.
  "밤새 연장전을 해도  10시까지 꼭 나와. 할아버지는  경사로로 걸어 올라가게 
하지 말고 꼭 에스컬레이터를 타시게 해라."
  "그런 소리 듣기 싫다."
  로키가 으르렁거렸다.
  제시카는 자기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말라는 눈짓을 했다.
  제시카는 나처럼 로키를 잘 다뤘다. 함께 라디오  앞에 앉아 야구 중계를 듣다
가 로키가 깜빡 졸다가 놓치기라도 하면 야구 해설가 래라디어커 뺨치게 설명을 
잘해 주었다.  아니, 제시카의 중계에는 로키를  위한 자세한 해설까지 가미되어 
있어서 로키는 라디오 중계보다 그걸 더 좋아할 정도였다. 
  "아 네네, 시디노 선수, 뒤로 뒤로, 네, 담장에 기댄 채 공을 받습니다. 센터 한
가운데로 125미터나 날아간 공.조 디마지오 선수라며  눈을 감고도 받을 수 있는 
공이죠. 아무렴 누가 그에게서 감히 행운을 얻어내겠습니까."
  10시에 약속 장소로 가보니 셋이서 기다리고  있었다. 샘이 쏜살같이 달려오더
니 말했다. 
  "아무도 홈런 못 쳤어요, 우리가 졌어요. 할아버지가 이거 사줬어요."
  그리곤 오렌지색 에스트로스 팀 페넌트를 들어 보였다.
  "저걸 3달러나 받더라, 3달러면 일주일은 너끈히 먹고 사는데."
  로키가 못마땅한 듯 내뱉었다.
  "그럼 왜 사주셨어요?"
  "자꾸 사달라고 조르잖아."
  "조른다고 다 사줄 필요는 없어요. 할아버진 애들한테 너무 오냐오냐 하신다구
요."
  "샘이 사달라고 5회전  때까지 줄기차게 졸라댔어요. 게다가  할아버지와 샘은 
저걸 사려고 매점을 열 군데나 돌아다녔어요."
  제시카가 나서서 설명했다.
  "위쪽으로 올라가면 더 쌀 줄 알았지. 위쪽엔 구경꾼도 그리 많지 않으니까."
  "그런데 다 똑같이 3달러 달래요, 불공평해요."
  샘이었다.
  "1센트짜리도 안 되는 물건을 말이다."
  다시 로키였다.
  "둘이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잠에 곯아떨어졌어요. 차라리 그게 낫지, 샘이  잠
들기 전까지는 어땠는지  아세요? 5분마다 점수를 물었어요. 10시 15분  전에 깨
워서 데리고 나온 거예요. 아빠랑 같이 안 가면 재미 하나두 없어요."
  제시카의 아홉 번째 생일날 나는 깜짝  파티를 준비했다. 제시카네반 여자아이
들 열네 명을 모두  파티에 초대한 것이앋. 데비의 절친한 친구  제인이 노래 테
이프를 몇 개 갖고 왔다. 나는 생일이니까  영화 구경을 시켜 주겠다고 제시카를 
데리고 나섰다가 깜박  잊고 지갑을 두고 왔다고  둘러대며 다시 집으로 돌아왔
다. 샘이 산통을 깰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기특하게도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다.
  나와 제시카가 집  안으로 들어가자 열제 명의 소녀들은 모두  침실에 숨었다. 
그런데 테이블 위에  깜짝 선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케이크를 담당한  로키가 생
일 케이크 대신 3단 웨딩 케이크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마음에 드니?"
  로키가 제시카에게 물었다.
  "너무너무 아름다워요, 이걸 아까워서 어떻게 자르죠."
  제시카는 달려가서 로키의  품안에 안겼다. 3단 웨딩 케이크의  꼭대기에 신랑 
신부 대신 야구  선수의 모습이 만들어져 있었다. 제시카가 로키와  뜨거운 포옹
을 하고 있는데 침실에 숨어 있던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며 외쳤다.
  "깜짝 파티!"
  그 순간 제시카의 표정을 보고 나는 아이들을  초대한 걸 후회했다. 근사한 케
이크만으로 족했을 것을 ......  제인이 테이프를 틀자 제시카의 친구들은 춤을 추
러 거실로 몰려갔지만 장작 주인공인 제시카는  제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로키가 
뒤따라 들어갔다.
  "제시카가 곧 나올까요?"
  제인이 내게 물었다.
  "깜짝 파티가 마음에 들지 않나 봅니다.  가서 친구들이나 즐겁게 놀게 해주세
요."
  나는 그렇게 대꾸하고 제시카의 방으로 들어갔다.  제시카는 벽을 바라보고 누
워 있고 로키는 그 앞에 앉아 등을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아빠는 네가 깜짝 파티를 좋아할 줄 알았단다."
  거실에서는 제시카의 애창곡  <베트 데이비스 아이스>에 맞추어 모두들 춤을 
추고 있었다.
  "난 파티는 싫어요. 아빠랑 영화 구경 가는 게 더 좋다구요."
  "그럼 친구들을 그냥 돌려보냈으면 좋겠니?"
  "마음대로 하세요, 걔들은 내 친구들이 아녜요."
  "아빠가 보기엔 그렇지 않던데, 모두들 초대받은 걸 얼마나 좋아했는지 아니?"
  나는 그렇게 대꾸하고 로키를 향해 찬사를 늘어놓았다.
  "할아버지의 깜짝  선물이 제일 근사했어요. 왜  진작 저한테 말씀  안 하셨어
요?"
  "말했으면 반대했을 테니까."
  "제가 반대해도 그냥 하셨을 거 아녜요."
  제시카가 배시시 웃으며 물었다.
  "아메리칸 베이커리에서도 저런 웨딩 케이크 만드셨어요?"
  로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그땐 저것보다 더  크게 만들었어. 여기선 그렇게 큰 케이크 틀이 없
어서 못 만들었지만 말야. 신부들이 내 케이크 덕에 돈을 많이 벌었었지. 폴란드
식 결혼식에서는 하객들이 케이크를 한  조각 받아서 신부와 춤을 춘 다음 신부
에게 케이크 값을 내거든. 그게 바로 결혼 축의금이지. 하객들은 술에 취하면 케
이크를 몇 조각씩  먹으면서 신부와 자꾸 춤을 추고  축의금을 내고 또 내고 했
지. 이따금 이  할아비도 결혼식에 초대받아서 가곤 했는데 신부가  내게 이렇게 
귓속말을 하는 거야. ' 로키, 당신이 케이크를  두 개 만들어 줬다면 저는 부자가 
됐을 거예요.'"
  "나가서 케이크를 잘라야지."
  내 말에 제시카는 로키를 쳐다봤다.
  "그럼, 잘라야지. 케이크는  구경하려고 만드는 게 아니라 먹으려고 만드는  거
니까."
  로키의 의견이었다.
  제시카는 얼굴을 닦고  로키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친구들은 춤을  추다가 멈
추고는 그들을 쳐다보았다. 로키와 제시카는 마치  신랑이 신부를 동반하고 교회 
회장을 걸어가듯이 복도를  지나갔다. 제시카는 청바지에 줄무늬  스웨터 차림이
었지만, 웨딩 케이크 때문에 생일을 맞은 소녀라기보다는 신부 같았다. 
  모두들 케이크를 빙  둘러서서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로키는  케이크 가운
데 단에 초 여덟 개를, 맨  위 야구 선수 옆에는 한 개를 꽂아 놓았다. 제시카가 
촛불을 끄려고 깊이 숨을 들이쉬자 세러가 말했다. 
  "조심해, 케이크에 침이 떨어지지 않게 말야."
  내가 케이크를  잘랐다. 모두에게 한  조각씩 돌아가고도 남을  만큼 케이크는 
푸짐했다. 제시카는 첫 조각을 로키에게 주었다.
  "나중에 제시카가 결혼할 때도 이렇게 만들어 주시면 되겠네요."
  마시의 말에 로키는 험악한 눈초리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난 결혼 따윈 관심 없소."
  "죄송해요, 전 그저 생일 케이크가 웨딩 케이크처럼 아름답다는 뜻으로 말씀드
린 거예요. 우리 달리아의 생일에도 저런 케이크를 만들어 주시겠어요?"
  "안 돼요, 이건 삐삐에게만 만들어 주는 케이크니까."
  모두들 커다란 케이크  조각을 받아서 양껏 먹었고, 샘은 세  조각이나 먹었지
만 케이크는 반도 더 남았다. 
  내가 아이들을 데리러 온 엄마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로키가 테이블을 치
웠다. 모두들 떠난 뒤  로키를 도와 함께 치우려고 가보니 로키는  케이크 맨 윗
단을 은박지로 싸고 있었다. 야구 선수와 초는  치웠지만 크림 장식은 그대로 있
었다.
  "그거 데비 갖다 줘라."
  로키가 플라스틱  숟가락들을 치우고 식탁에 묻은  아이스크림 자국을 닦느라 
분주한 동안 나는 케이크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미 10년이나 늦었고 신부
도 없지만, 로키는 제시카의 생일만이 아니라  우리의 결혼식까지도 염두에 두고 
웨딩 케이크를 만든 것이었다.
  나는 은박지에 싼 케이크를 병원에 가져 가서 데비에게 보이며 말했다. 
  "로키가 당신에게 갖다 주라고 하더군. 우리  결혼식 때 웨딩 케이크를 만들어 
주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서 그러는 모양이야."
  나는 흰 크림을 보금  떼어 그녀의 입술에 댔다. 그러나 데비느  입을 열지 않
았다. 다시 한 번 권해도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어, 나는 그녀의 입술에 묻은 크
림을 닦아 내고 케이크를 네 조각으로 잘라서 당직 간호사들에게 돌렸다. 

      27 떠나가는 데비
  10월에 제시카네 학교 시먼스 교장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제시카가 철자
법 시간에 이어폰을 꽂고 월드  시리즈 중계 방송을 듣다가 담임 선생님에게 발
각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행동은 교칙  위반이며 제시카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라디오를 
압수하고 학생을 집으로 돌려보내겠습니다."
  전화를 받은 로키는 이렇게 대꾸했다.
  "철자법 공부는 매일 하는 거고, 월드 시리즈는 일년에 한 번 열리는 겁니다."
  "제시카 아버님 직장으로 전화를 했는데 연락이 닿지 않더군요. 그래서 집으로 
연락하는 겁니다. 제시카를 데리러 올 분이 안 계신가요?"
  로키는 다섯 블록이나  떨어져 있는  제시카의 학교까지 걸어갔다.  학교에 도
착해 보니 제시카는 교장실 밖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라디오는 어디 있니?"
  로키가 얼른 달려가서 손을 잡으며 묻자 제시카는 손으로 교장실 문을 가리켰
다.
  "할아버지는 교장실  문을 노크했어요. 그냥  불쑥 들어가지 않았다구요. 교장 
선생님께 고함을 지르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교장  선생님은 할아버지의 말을 영 
못 알아듣더라구요. 그래서 내가 대신 통역해 줬어요."
  나중에 제시카가 내게 전해 준 말이다.
  로키는 교장 선생님의  책상 위에 놓인 제시카의  라디오를 달라고 했다고 한
다.
  "죄송합니다만, 라디오는 필요 없소. 시리즈가 끝났을 때 니가."
  "바로 그 점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저 라디오는 내가 사준 거요. 영수증을 보관하고 있으니까 증명하라면 증명할 
수도 있소."
  로키는 지난 아버지의  날에 아이들과 내가 돈을  모아 선물한 지퍼달린 잔돈 
지갑을 뒤지기 시작했다. 
  "라디오를 아주 빼앗겠다는 건 압니다, 일주일만 압수하는 거죠."
  "댁도 노조에 가입했소?"
  "예, 저는 교원 노조의 일원입니다."
  "그럼 노조에서 도둑질을 배운 거요, 아니면  그 도둑놈들 단체에 들기 전부터 
애시당초 도둑이었던 거요?"
  "그래서 할아버지를 끌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어요. 하지만 할아버지가 꼼짝도 
않지 뭐예요."
  제시카가 나중에 내게 한 말이다.
  "라디오를 주시오,  안 그러면 노동부에게  전화를 걸겠소. 당신네 노조원들은 
뭐든지 다 당신네들 거라고 생각하지. 일자리도,  라디오도, 어린애 혼자 월드 시
리즈를 듣는 게 뭐가 나쁘다고 그것도 못하게 하는 거요?"
  "학교에서는 안 됩니다."
  "제시카는 학교에서보다 라디오로 더 많이 배운다오. 나중에 아나운서가 될 아
이란 말이오."
  그러면서 로키가 책상 위에 있는  라디오를 집어 들자 교장 선생님은 그냥 잠
자코 있었다.  로키는 라디오의 이어폰을 빼고  볼륨을 최대한 높였고, 시끄러운 
광고 방송이 교장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제시카의 아버님과 담임 선생님께 오늘의 일을 알리겠습니다."
  교장 선생님이 로키를 배웅하며 말했다.
  "좋으실대로 하구려, 나도 만나는 사람마다 전부 다 붙잡고 얘기할 거요."
  시먼스 교장 선생님의 연락을 받고 나는 그  길로 학교로 달려갔다. 그때쯤 교
장 선생님은  마음이 진정된 상태였다.  교장 선생님은 제시카  담임 선생님만큼 
제시카를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자기로서는 도저히 로키의 행동을 막을  수 없
었다는 것을 나에게 알리느라고 몇 번이고 아까 있었던 일을 되뇌었다. 
  "제시카의 할아버님께 저희 입장을  말씀드렸지만, 그분은 학교의 교칙을 존중
하시지 않더군요."
  "사실 그분은 제시카의 증조부 되십니다. 교장  선생님 말씀대로 그런 면이 좀 
있으시죠. 아무튼 제  할아버지께서 교장 선생님께 무례한 행동을 한  점 사과드
립니다."
  나는 교장 선생님의 뜻에 따라 다음날 하루 동안 제시카를 집에서 근신시키기
로 했다.
  그건 처벌이었지만 제시카는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럼 내일 7차전 중계를 볼 수 있어요."
  "봐라, 교장도 자기 잘못을 알고 미안해서 하루 쉬게 해주는 거야."
  로키가 거들고 나섰다.
  제시카는 아메리칸 리그의 브루어스 팀을 응원하고 있었는데 롤리핑거스와 특
히 로빈 윤트 선수를 좋아했다. 
  "윤트가 옛날 하비 쿠엔 선수보다 더 잘 쳐요?"
  "그럼, 쿠엔은 뛰어난 외야수는 못 됐지만 아주 강타자였지."
  현역에서 은퇴하여 브루어스 팀  감독으로 있는 쿠엔은 다리 하나가 의족이라 
더그아웃 계단도  제대로 못 오르는  처지가 되었지만, 내가  제시카만했을 때는 
타자석에 서서 방망이로 플레이트를 툭툭 치면서 담뱃진을 퉤 뱉고는 투수의 공
을 시원하게 쳐내던 명타자였다. 
  제시카는 카즈 팀 조어퀸 안두하르 선수의 열렬한 팬이어서 조엘이 받아다 준 
그의 사인을 벽에  스카치 테이프로 붙여 놓기까지 했지만, 브루어스  팀을 응원
했다. 7차전이 열리는 날 아침 휴스턴의  기온이 섭씨 30도를 육박하는데 에어컨
이 작동되지 않았다. 
  "잘됐다, 윙윙거리는 에어컨 소리를 듣지 않고 조용히 야구 중계를 볼 수 있게 
됐으니."
  로키가 말했다.
  나는 이듬해 봄에 에어컨을 고치기로 작정하고 대신 방 두 개와 긴 복도에 매
달 선풍기값을 알아보느라고  여기저기 전화를 걸었다. 이윽고 7차전  경기가 시
작되자 제시카는 35인치짜리 야구 카드들을 앞에  주욱 늘어놓았다. 로키는 브루
어스 팀은 폴란드 선수가 없기 때문에 절대 승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폴란드 선수들은 죄다 홈런  타자들이거든. 클루제프스키, 야스트르젬스키, 루
진스키."
  "카디널스 팀에도 폴란드 선수가 없어요."
  제시카가 말했다.
  "스탠리 뮤지얼이 있잖아."
  "그 선수가 폴란드인예요?"
  "그럼."
  "어떻게 아세요? 이름은 안 그런 것 같은데."
  "다들 알아. 그를 스타슈라고도 부르기도 하는데 그게 바로 폴란드 이름이야."
  로키와 제시카가 한창 입씨름을 벌이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학교에서 온 전화면 아직 벌을 받고 있다고 하세요."
  "선풍기 파는 상점에서 온 전화일 거야."
  나는 선풍기의 모델 넘버와 가격을 적으려고 메모지와 연필을 챙겼다.
  "여기 병원이네. 데비를 데려가려고 왔어. 데비를 보고 싶거든 지금 당장 이리
로 오게."
  해리엇의 전화였다. 정확한 날짜는 몰랐으되 그녀가  데비를 데리러올 줄은 알
고 있었다. 그러니까 일주일  전의 일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데비의 상태를 사실
대로 얘기해 준  뒤 해리었에게 전화를 걸어  아이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지 말아 
달라고 했다. 
  "장모님께서 믿고 싶으신 대로 믿는 건 다 좋지만, 제발 제시카와 샘에게는 그
런 환상을 심지 마세요.  아이들은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래야 인생을 망치
지 않고 이 불행을 견뎌 낼 수 있어요."
  "자네도 그 의사놈들과 정신  치료사인지 뭔지 하는 마녀들과 한패가 되어 데
비를 포기하겠다는 거군."
  "저는 다만 아이들을  보호하려는 겁니다. 이제 아이들은 진실을 알아요.  그러
니 더 이상 아이들을 혼란스럽게 하지 마세요."
  "내가 진실을 말해 볼까? 진실은 의사놈들이 데비의 병을 더 악화시켰다는 거
야. 데비는 퇴원하면 금세 회복될 거야. 아이들이 엄마의 병을 고칠 수 있어."
  "아니오, 아이들은 데비의  병을 고칠 수 없어요. 그러니 아이들에게  쓸데없는 
부담을 주지 마세요."
  "데비는 집에 있으면 나을 거야. 내가  집과 아이들을 보살필 사람을 고용하겠
네. 그게 싫다면 자네가 떠나게."
  몇 달 전이었다면  나는 두말없이 장모의 요구에 응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그런 노력이 아무 쓸모  없는 것임을 잘 알기에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데비의 
변화한 모습에서 절망을 읽었다. 
  데비는 3년 가까이  용감하게 병과 싸웠다. 고장난  눈과 방광, 후들거리는 사
지, 끔찍한 현기증도 그녀를 제압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지난 6개월 동안 그녀는 
서서히 무너져 갔고, 이제 데비의 참모습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데비를 유대인 양로원에 보내려고 수속을 밟는 중입니다."
  "절대 안돼, 내 딸을 절대 그런 데 보낼 수 없어."
  "거긴 감옥이 아니에요.  회복되면 다시 집으로 데려올 겁니다. 그곳  담당자와 
얘기를 해봤는데, 데비와 비슷한  처지의 젊은 여자가 한 사람 있답니다. 그러니 
데비를 안심하고 맡길 수 있어요."
  내 약점을 아는 해리엇은 단박에 급소를 찔렀다.
  "자넨 할아버지도 양로원에 안 보낸 사람  아닌가. 그런데 아내를 양로원에 넣
겠다고? 데비는 그런 노인들과는 달라."
  옳은 소리였다. 데비는 그들과  달랐다. 양로원을 방문한 날 나는 그곳에 수용
된 노인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그들은 장기도 두고 버스  여행도 다니
고 음식이 형편없다고  불평도 했다. 그러나 데비는 그들과 함께  지내지 못하고 
양로원에 따로 마련된  병원 시설에 수용되어야 하는 처지였다. 나도  장모님 못
지않게 마음이 쓰렸지만 달리 어쩔 방도가 없었다. 
  그런 일이 있은 뒤 해리엇과  나는 원수가 되었고 해리엇은 딸을 자기 집으로 
데려가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제시카와 샘에게  엄마가 당분간 외가에서 지내
게 될 거라고 미리  알려 주고 마음의 준비를 시켰다. 그리고  나도 단단히 마음
의 준비를  했지만, 막상 해리엇의 전화를  받고 보니 수화기를 잡은  손이 덜덜 
떨렸다.
  "선풍기값이 얼마래요?"
  제시카가 선풍기 상점에서 온 전화인 줄 알고 물었다. 
  경기는 4회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외할머니 전화다, 엄마를 미시간으로 데려가려고 오셨단다."
  내가 그렇게 말하고 자동차 키를 집어 들자 로키가 물었다.
  "내가 같이 가주랴?"
  "제시카와 함께 계세요. 샘도 카풀 회원  차로 올 거니까 기다렸다가 맞으시구
요.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어요."
  제시카가 점수표와 연필을 내려놓으며 일어섰다.
  "너도 갈 필요 없어, 일요일에 엄마 봤잖아. 그때와 똑같아."
  "그래도 가고 싶어요."
  우리는 차를 타고 병원으로 달리는 동안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제시카가 야
구 중계를 듣는 것 같아 나도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는 채했다.
  "점수가 어떻게 됐니?"
  병원 주차장에 도착했을 즈음 나는 혼란한 마음을 달래려고 물었다. 
  "몰라요."
  엘리베이터 안에서 제시카는 내 손을 꼭 잡았다.  도착해 보니 데비의 병실 문
이 활짝 열러 있었고 해리엇이 병원 욕실 용품이 수북이 담긴 짐수레를 도로 병
실 안으로 밀어 넣는  중이었다. 짐수레 양 옆에 삐죽이 꽂혀  있는 종이 슬리퍼
가 마치 귀 같았다.
  "이것들은 필요 없어, 집에 다 있으니까."
  해리엇은 나는 본 체도 않고 제시카만 껴안아 주고는 미시간에서 데려운 시중
들 젊은 여자에게 제시카를 소개했다. 해리엇은  유별나게 쾌활했고 데비에게 빨
간색 벨트가 달린 드레스를 입혀 놓고 있었다. 처음 보는 드레스였다.
  해리엇은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몰라 어정쩡하게 서 있는 젊은 여자에게 말했
다.
  "일주일만 지나면 데비는  뭐든지 스스로 하게 될 거야. 제  방에 있던 캐너피 
침대의 위치가 바뀌어 있으면 불같이 화를 낼  거야. 오늘 아침에도 나를 보자마
자 그 침대 얘기부터 묻더군."
  제시카는 나를 쳐다봤다. 도움을 청하는 눈길이었지만  나는 제시카를 도울 수 
없었다. 나 자신도 도움이 간절했으니까.
  병원 잡역부가 데비의 훨체어를  밀고 앞장서고 해리엇과 시중드는 여자가 그 
뒤를 따랐으며, 제시카와 나는 꼬리에 붙었다. 
  장인은 밖에서 렌트한  뷰익에 타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내게 고개
를 끄덕여 보이고 제시카에게 손을 흔들었다.  시중드는 여자가 데비를 훨체어에
서 안아 내려 앞좌석에 태우고 안전띠를 매주었다.  제시카와 나는 차 쪽으로 다
가갔다.
  데비의 뺨에  키스하려고 몸을 굽히니  그녀에게서 향수 냄새가  났다. 입술에 
립스틱까지 바르고 있었다.
  "와서 엄마에게 키스해야지."
  해리엇의 말에 제시카는 얼른 엄마의 얼굴을 향해 몸을 굽혔다.
  "키스해라, 한동안 못 만날 테니까. 엄마는 외할머니 집에서 금세 나을 거야."
  해리엇과 시중드는 여자는 병실에 약봉지를 두고 온 걸 깨닫고 안으로 가지러 
들어갔다.
  데비는 앞만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차에 에어컨을 켜서 창문을  닫아 두었
기 때문에 제시카와 나는 창문을 통해 그녀를 바라보아야 했다.
  "엄마는 원래 화장도 안 하고 입술도 안 발라요. 그런데 왜 저렇게 해놨죠?"
  제시카가 내게 속삭였다.
  "외할머니가 엄마를 예쁘게 보이게 하려고 그런 거야."
  "그렇지만 엄마는 저런 거 싫어해요. 빨리 지우게 하세요."
  "네 말이 맞지만 그 문제로 입씨름을  벌이고 싶지 않구나. 외할머니 마음대로 
하시게 내버려두자.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건 공정치 못해요. 엄마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자기들 마음대로 해놓다니."
  우리는 뷰익이 시야해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차에 돌아와서도 야구 
중계를 들을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시어스  상점에 들러
서 선풍기를 샀다. 그 상점에서 제일 큰 58인치짜리 진동자 모델인데, 바람을 일
으키는 소리가 마치 허리케인 같았다.
  "저 모델이면 지붕이 날아가 버릴지도 몰라요.  정말로 저런 강력한 모델을 원
하십니까?"
  판매원이 물었다.
  "그렇소."
  선풍기값을 현찰로 치르고  나니 수중에 50달러가 남았다. 나는 그  돈을 제시
카에게 주면서 사고 싶은 걸 사라고 했다.
  "아빠는 슬플 때면 꼭 나한테 뭘 사주려고  해요. 하지남 그건 아무 도움이 안 
돼요."
  제시카가 돈을 도로 내 손에 쥐여 주면서 말했다.
  집에 도착하자 나는 탈진 상태가 되어 선풍기  상자를 풀 기운도 없었다. 그래
서 운반만 하고  푸는 건 로키와 제시카에게  맡겼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데비는 이미 지난 봄부터 집에 없었으니까. 그런데도  왠지 집 안에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밖으로 나가 로키의 알루미늄  의자에 앉아서 길 건너 테니스
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곳에 코트가 둘뿐이라  비어 있을 때가 거의 없었
다. 
  데비가 병에 걸리기 전에 우리  부부는 이따금 밤에 나란히 침대에 앉아 책을 
읽곤 했는데, 그때마다 길 건너 테니스장에서  시멘트 바닥에 부딪치는 공소리가 
부드럽게 들려 왔다. 내가 깜빡 졸다가 읽던 책을 가슴에 떨어뜨리면 데비는 '폴
트!'하고 나지막하게 외치곤 했다. 
  로키가 손수  만든 진저 에일을 종이컵에  가득 담아 들고 나왔다.  그는 진저 
에일을 약으로 여겨 몸이 아플 때마다 우선으로 찾았다.
  "전 괜찮아요."
  "그래도 마셔, 그럼 더 괜찮아질 거다."
  제시카가 우편함 구멍으로 밖을 내다보며 외쳤다.
  "아빠! 들어오실 거예요?"
  "곧 갈게."
  "그냥 앉아 있거라, 제시카는 내가 돌보마. 그리고 카풀이 도착하면 샘도 내가 
데리고 들어오마."
  나는 진저 에일을  마셨다. 그렇게 망연히 앉아서 데비 없는  인생을 받아들일 
용기를 짜내고 있는  동안, 길 건너 테니스장에서는 테니스치는 사람들이  세 번
이나 바뀌었다.
  현관문을 여니 과자 굽는 냄새가 진동했다. 제시카가  별 모양의 쿠키 틀을 들
고 의자 위에 서 있었다. 제시카는 손가락에 묻은 초콜릿 칩을 핥으며 말했다.
  "아빠, 이 일이 믿어지세요? 할아버지가 쿠키를 구워 주고 있다구요."
  케이크만 상대하던 고고한 사나이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팔꿈치까지 가루를 허
옇게 묻힌 채 열심히 쿠키를 만들고 있었다. 조리대  위에는 별 모양 쿠키 세 판
과, 초콜릿 칩 쿠키 한 판이 식고 있었고, 오븐 안에도 쿠키가 들어 있었다.
  "팔아도 될 만큼 많아요. 샘이 돌아오면 집밖에    테이블을 펴놓고 쿠키를 팔 
거예요. 쿠키 한 개에 10센트씩 받을까요?"
  "너무 비싸, 5센트만 받아도 돼."
  제시카와 로키의 대화였다.
  샘이 도착했을  때, 제시카와 로키는 이미  집 앞 보도에 커피  테이블을 차려 
놓고 있었다. 제시카는 흰 종이  타월 위에 쿠키를 진열했고, 샘은 집 안으로 들
어가지도 않고 곧바로 판매대로 달려오면서 외쳤다.
  "할아버지가 쿠키를 구웠어? 이게 웬일이야?"
  나는 주머니에서 10센트를  꺼내어 제시카에게서 한 개, 샘에게서 한  개를 샀
다. 그날 이후로도  오랫동안 데비를 잃은 슬픔에 복구명으로 쓴  물이 올라왔지
만, 그때 맛본 쿠키의 달콤한  맛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우리 집 앞을 지나
는 많은 차들이 쿠키를 사지 않고 그냥 달려  갔다. 혀에서 살살 녹는 근사한 쿠
키를 그냥 지나쳐 간 딱한 사람들.

      28 야생화 꽃다발
  브라우니 제 114분대와  226분대 대장 해리엇과 테리, 우리 분대의  케이와 나
는 케이 랜덜의  서재에서 브라우니의 마지막 행사인 '하루  동안의 소풍과 목장
에서의 꽃 꺾기'를 위한  계획을 짜고 있었다. 버스를 대절하여 70마일을 달려야 
했고, 브라우니 3분대와  대장 셋, 운전기사, 나까지 포함해서  62명이 먹을 음식
과 행사에 필요한 물품을 준비해야 했다. 케이와  헤리엇과 테리는 이미 여러 차
례 그런 여행을 다녀왔던지라 경험이 풍부했다.
  "단원들은 겉으론 브라우니를  떠나게 된 걸 기뻐하는  체하죠. 그리고 단복을 
마구 더럽혀요. 하지만 그들 모두 작은 공책에  말린 꽃잎을 넣어 오래도록 간직
한답니다. 바로 그래서 이런 긴 버스 여행을 떠나는 거예요. 그들에겐 아주 소중
한 추억이 되니까요."
  케이가 말했다.
  "전 항상 이맘때만 되면 슬퍼져요. 브라우니의  마지막 해는 어린 시절의 마지
막 해이기도 하니까요. 저는 아이들이 좋아서 브라우니에 남는답니다. 걸 스카우
느가 되면 갑자기 주니어 리그(여자 청년 연맹)나  여대생 클럽처럼 모두들 성숙
해지거든요."
  해리엇이었다. 
  케이는 가장 쉬운 임무인 예순두 명분의 음료수와 스낵을 준비하는 일을 맡겼
다. 나머지 행사준비와 가정 통신문은 대장 셋이 나누었다. 
  "제시카도 오겠다면 환영이에요. 다른 활동엔  참여하지 않았지만 마지막 소풍
은 함께 가고 싶어할지도 모르니까요."
  케이가 말했다.
  "그러잖아도 같이 가자고 했더니 싫다는군요."
  "제가 같이 가자고 하더라고 전해 주세요.  제가 직접 전화를 걸어서 말하는게 
나을까요?"
  "아니오,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지금 우리 집에서 스카우트는 나 혼
자뿐이거든요."
  "제시카가 나오지 않는데도 계속  이렇게 참여해 주시는 게 저로선 놀랍고 존
경스러워요. 제시카도 아버님의  활동 경험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무언가 얻는 
게 있을 거예요."
  "글세,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우리 남편은 내가 브라우니 활동
을 하면서 자기가 얻는 건 식어빠진 저녁 식사밖에 없다고 투덜대거든요."
  테리였다.
  우리는 나무 장식 판자를 붙인  케이의 서재에 앉아서 행사 물품 목록에 낙서
를 하며 잡담을  나누었다. 케이는 커피를 따랐고 우리들은 분대원들에  관한 이
런저런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그 분위기가 너무도  평화로워서 나는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
  "우리가 수레국화꽃을 꺾을  목장은 사유지이며 사전에 주인에게 허락을 받았
다는 사실을  단원들에게 인지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길가에 핀  꽃들을 함부로 
꺾는 행위는 불법이라는 것도 알려 주어야 해요."
  케이의 말에 나는 단원들이 수레국화꽃을 꺾은 혐의로 감옥에 갇히고 내가 보
석금을 모으려고 쩔쩔매며 돌아  다니는 모습을 보고 제시카가 깔깔거리며 웃는 
장면을 상상했다.
  "제시카 아버님은 걸 스카우트로 가실 건가요?"
  테리가 물었다.
  "그런 말 마세요, 그러면 다시 조수를 구해야 하는데 조수 구하기가 얼마나 어
렵다구요."
  케이가 웃으며 농담을 했다.
  "아직 결정을 못 내렸습니다. 집안 사정에  달려 있긴 합니다만 현재로선 브라
우니까지가 내 한계인 것 같군요."
  "목장에 가면 마음이  바뀔지도 모르죠. 다리 건너기 의식은 정말로  근사해요. 
꽃 꺾기보다 그게 더 중요할 거예요."
  지난 몇 주간 나는 브라우니  단원들이 손가락을 모으고 브리지를 할 때 함께 
참여했었다. 그러고 있으면 데비와  함께 다녔던 명상 교실이 생각났다. 명상 교
실에서는 모두들 눈을 감고 ' 옴'을 외웠었다.  강사 말이 옴은 우주가 영원을 통
과하면서 내는 소리라고  했다. 나는 옴을 외면서도 우주의 소리를  흉내내고 앉
아 있는 게 실없게만 느껴졌었다. 반면 브리지는  자세만 어색할 뿐 소리는 내지 
않아도 되어서 그런대로 견딜 만했고, 그러고 있으면  미래를 알 수 없어 불안해
하는 아홉 살바기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제시카에게 시범을 보였다.
  "아빤 지금 브리지를 하는 거야."
  "우리 반 애들이 다 그걸 해요. 정말 지겹다구요."
  로키는 그걸 이교도의 짓거리라고 우겼다.
  "그렇게 손가락을 모으고 숲으로 꽃을 꺾으러 가겠다는 거냐? 너한텐 그게 재
미있을지 모르지만 우리 삐삐는 영리해서 그런 어리석은 짓은 안 한다."
  나는 로키의 빈정거림을 무시하고 제시카를 설득했다.
  "소풍이 마지막 행사란다, 다음 학기부터는 모두들 걸 스카우트가 될 거야. 제
시카 넌 소풍 가는 걸 좋아하잖아."
  "아빠랑 샘이랑 할아버지랑 가는 건 좋지만 다른 애들이랑 가는 건 싫어요."
  "언제까지나 그렇게 가족들 품에서만 지낼 순  없어. 샘도 벌써 친구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고, 아빠도 일을 해야 해."
  "그럼 할아버지랑 있으면 되잖아요."
  "늘 할아버지와 붙어 있을 순 없어."
  "왜 안 돼요? 아빠도 그랬으면서."
  "그럼 할아버지가 소풍에 함께 가면 너도 가겠니?"
  "할아버지는 절대 안 갈 거예요."
  나도 같은 생각이었지만 아무튼 설득은 해보기로  했다. 예상했던 대로 로키는 
한마디로 거절하고는 읽고 있던 이디시어 신문에 도로 눈길을 떨구었다.
  "이건 중요한 일이에요, 할아버지가 가시면 제시카도 갈 거예요."
  "제시카는 집 앞 공원에서도 꽃을 꺾고 햇볕에  얼굴을 태울 수 있어. 내가 데
리고 공원에 가마."
  "가장 좋은 건 할아버지가 안 따라가도 제시카가 소풍을 가는 거예요."
  "그럼 혼자 보내지, 길만  건너면 되니까. 그러잖아도 늘 혼자 공원에 가고 있
어. 나는 멀찌감치서 지켜만 보고 말야."
  "지금 길 건너 공원 얘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잖아요. 제 또래 아이들과 어울
려 동심의 세계에서 즐겁게 뛰어놀게 해주자는 거지."
  "다 필요 없어. 제시카는 똑똑해서 그런 짓 안 한다."
  "그렇지 않아요, 제시카는  지금 중요한 걸 누리지 못하고 있어요.  어린애답게 
밝고 즐겁게 살지를 못하고 있다구요."
  "넌 세상에서 엄마 없는 아이는 제시카  혼자뿐인 줄 아는 모양이구나. 고아원
에 가면 부모 없는 아이들 천지야."
  "맞는 말씀이에요. 제시카만 딱한 처지에 있는 건 아니죠. 하지만 우리가 가까
이에서 도울 수 있는 아이는 제시카뿐이잖아요."
  로키는 나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네 곁으로  접어서 읽고 있던 신문을 치켜 
들었다.
  "제시카에게 제일 좋은 약이 뭔지 아냐?"
  "뭔데요?"
  "일. 야간 학교에 보내면서 낮엔 직장에 넣는 게 좋겠다."
  "걘 이제 겨우 아홉  살이에요. 좀 쉬게 하자구요. 평생 일하면서 살건데 그렇
게 서두를 필요가 어디 있어요."
  "나는 애들이랑 버스 여행은 못해."
  "시카고엔 함께 가셨잖아요."
  "그건 실수였어."
  그러니까 내가 국민학교 6학년 때 일이다.  산업 과학 박물관으로 수학 여행을 
떠나게 되었는데, 우리 반에는 함께 따라가 줄  부모가 아무도 없자 나는 로키에
게 같이 가달라고 졸랐다.  버스로 왕복 네 시간씩 걸리는 여행이었다. 6학년 과
학 선생님이 일년 내내 그  박물관 안에 있는 탄광 얘기를 해주어서 나는 꼭 한 
번 거기 내려가 보고 싶었다. 그리하여 로키와  선생님 두 분이 우리를 인솔하고 
떠나게 되었다. 
  로키도 우리와 함께 눅눅하고 캄캄한 인공  탄광 속으로 들어갔다. 우리 6학년
생들은 벽을 짚고  캄캄한 굴속을 걸어 들어가서  불이 환하게 밝혀진 지점에서 
석탄의 쓰임새와 탄광 사고의 주의점들에 대해 읽었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우리들은  <벽에 놓인 99개의 맥주병>노래를 신나게 불러
제쳤고, 로키는  버스의 흔들림에 맞추어  몸을 흔들며 히브리어  져녁 기도문을 
낭송했다. 우리의 요란한 노랫소리에 그의 기도문은 묻혀 버리고 말았지만......
  "좋다, 같이 가마. 단, 꽃은 안 꺾을 거다."
  로키가 신문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제시카는 할아버지보다 훨씬 고집스러웠다.
  "아빠가 할아버지를 어떻게 구워삶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난 안 가요."
  그러나 나는  제시카의 마음을 돌릴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음료수와 
스낵을 사러 갈 때  제시카를 데리고 갔다. 내가 콜라 세  상자와 과자들을 잔뜩 
사서 트렁크에 넣는 걸 보고 제시카가 물었다.
  "그냥 그렇고 그런 소풍일 뿐인데 아빤 왜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세요?"
  "네 말이 맞다, 그다지  중요한 소풍은 아니지. 넌 앞으로 이것말고도 많은 여
행을 하게 될 테이까. 하지만 무슨 일에든 시작이 있어야겠지."
  소풍날 아침까지 나와  로키는 제시카가 함께 가리라 믿고 있었다.  로키는 자
신의 점심 도시락으로  땅콩 버터와 꿀을 바른 샌드위치와 청어를  납지에 쌌다. 
제시카는 아침  내내 제 방에 처박혀  있었다. 샘음 친구 브래드의  집에서 잤고 
하루 종일 거기서 놀 예정이었다.
  "제시카만 두고 갈 수 없어, 난 집에 그냥 있을란다."
  로키가 말했다. 
  "가신다고 했잖아요, 약속을 지키세요."
  "삐삐랑 함께 가겠다는 거였지 나만 가겠다는 게 아니었잖니."
  로키는 점심 도시락을  냉장고에 넣고 텔레비전을 켰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씩 우리 집에  와서 청소를 해주는 주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로키도 그녀만큼
은 믿었다.
  "주아나가 오겠대요, 제시카는 주아나에게 맡겨 놓으면 돼요."
  로키는 묵묵히 앉아 있다가 냉장고에서 도시락을 꺼내더니 잠시 후 도로 집어 
넣었다. 삐삐를 혼자  두고 가야 하는 절대적인 이유를 들어야만  움직일 기세였
다. 의사나 약사나 아니면 내 윗사람이 서면으로  그 이유를 적어 보냈다면 그는 
만족했으리라. 로키는 이론보다는 사실을 존중하는 사람이니까.
  주아나가 도착하자 로키는  벌떡 일어나서 잔돈 지갑으로 손을 가져  갔다. 내
가 그의 팔을 잡으며 물었다. 
  "50센트 집어 주고 도로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시려는 거죠?"
  "아니, 1달러."
  그는 내 손을 뿌리치고는 지갑을 열어 꼬깃꼬깃 접힌 지폐 한 장을 꺼냈다.
  "좋아요, 정 그렇게 귀찮으시다면 그만두세요. 저 혼자 다 하죠."
  "네가 뭘 해야 하는데?"
  "잘 아시잖아요, 콜라와 과자,  다른 사람들이 가져 오는 음식까지 제가 다 날
라야죠. 소풍이 그렇게  간단한 건 줄 아셨어요? 단원들이 노는  동안 우리가 그 
시중을 들어야죠."
  제시카가 제 방에서 나오자 나는  와플 틀에 있는 와플을 꺼내 먹으라고 일렀
다. 로키도 점심 도시락을 꺼내 들고 차로 갔다.
  "뭐 필요한 게 있으면 주아나에게 부탁하렴."
  "주아나는 영어 못해요."
  "알아듣긴 하잖아, 그거면 충분해."
  "아빠한테는 충분하겠죠."
  "제시카, 아빠랑 같이  가자. 버스에 빈자리가 많아. 지금  마음을 돌려도 늦지 
않아."
  "그건 내가 아빠에게 하고 싶은 말이에요. 소풍에는 다른 대장들이 따라가니까 
아빤 꼭 가지 않아도  돼요. 아빠는 나를 괴롭히려고 이러는 거예요. 할아버지까
지 데려가는 건 더 그렇구요."
  나는 이미 제시카의  어떤 공격에도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제 조이스
와 만나서 한 시간 동안 상담하면서 바음을 단단히 다져 먹었으니까.
  "제시카가 아버님을 떠나기에 앞서, 아버님이 제시카를  떠날 수 있다는 걸 보
여 주세요. 그래도 아무 일 없을 거예요. 아프다고 자리에 누워도 절대 동요하지 
마세요."
  조이스의 충고였다. 
  제시카는 영리한 아이여서 꾀병을  핑계로 자리에 눕진 않았지만 침묵으로 일
관했다. 우리가  출발할 때까지 잠옷  차림으로 있다가 잘  다녀오라는 인사말도 
하지 않았다.

 
  로키도 버스 안에서 내내  입을 다물고 있었다. 연신 시계만 보고  또 보고 하
더니 모자를 눈  아래까지 끌어내리고 낮잠을 잤다. 목장에 도착하자  나는 무거
운 콜라 상자들을, 로키는  포테이토 칩 봉지들을 내렸다. 그러나 내가 브라우니 
단원들과 함께 풀밭으로  뛰어가는 사이 로키는 도로  버스에 올라 기사와 함께 
그 안에 머물렀다.
  나는 케이의 딸  멜리사가 눈물을 펑펑 쏟으며 나무  아래에 혼자 서 있는 걸 
보았다.
  "멜리사, 괜찮아. 브라우니는  끝나지만 걸 스카우트에 들어가면 훨씬 더  재미
있을 거야."
  나는 우는 아이를 달래며 갖고 있던 건포도를 한줌 건넸다.
  "전 슬프지 않아요, 우는 게 아니라 알레르기 때문에 눈물이 나는 거예요."
  멜리사는 보란 듯이 재채기를 해 보이더니 후닥닥 달아나 버렸다.
  나는 흐드러지게 핀 야생화  속에서 오열하는 멜리사를 바라보다가 캐럴과 조
앤과 수와 린다, 그리고 레베카에게 주위에 핀 꽃들의 이름을 가르쳐 주었다. 이
제 그 아이들은 나와 친해져서 케이를 따르듯  나를 따랐다. 우리는 집에서 자동
차로 한 시간 반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 어느  부유한 목장주가 오래 전에 걸 스
카우트에 기증한 초원에 서 있었다. 버스로  달려오는 내내 저희들끼리 낄낄거리
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소녀들은  온갖 들꽃들로 알록달록한 초원 위에서 흡사 
붕붕거리는 꿀벌들모양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껏 빨아들이고 있었다.
  케이가 호루라기를 불었을 즈음,  모두들 꽃을 한아름씩 꺾어 들고 있었다. 케
이는 초원을 가로질러 흐르는  구불구불한 시냇물 위에 놓여진 6미터 길이의 반
원형 나무  다리 앞으로 단원들을 집합시켰다.  그 다리는 폭이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정도여서 우리에겐 안성 맞춤이었다. 
  테리가 걸 스카우트 배지가 가득 담긴 종이 봉지를 들고 다리 건너편에 서 있
었고 단원들이 한 사람씩 다리를 건너갔다. 캐럴이 맨 먼저였는데, 안고 있던 꽃
다발을 내려놓고 얕은 개울물을 내려다보며 노래하듯 낭송했다.
  "나를 휘감아서 요정의 모습을  보여 주어라. 나는 물 속을 바라보네, 물에 비
친 내 모습을......
  그리곤 양 주먹을 꼭 쥐고 다리 위로  올라가서 건넜다. 건너편에 도착하자 테
리가 캐럴의 옷깃에 걸 스카우트 배지를 달아 주었다.
  "저는 정직하고, 공정하고, 제 도움이 필요한 곳에 도움을 아끼지 않고......
  배지를 단 캐럴이 걸 스카우트 선서를 했다.
  단원들은 정숙하고  질서 정연하게 줄을  서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해가 지려면  멀었는데도 촛불을 켜들고 있는 단원들도 더러  있었다. 레베
카가 내 팔을 쿡쿡 찌르더니 저쪽을 보라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멀리 목장 
문 근처에서 로키가 허리를  굽혀 꽃을 꺾고 있었다. 나는 식에  방해가 되지 않
도록 천천히 뒷걸을질로 물러나서는 초원을 가로질러  달렸다. 로키가 있는 곳에 
다다랐을 땐 숨이 턱까지 차 있었다.
  "제가 할게요, 그렇게 불편하게 서 계시면 허리 아프시잖아요."
  그러나 로키는 나를 밀어내며 핀잔을 주었다.
  "꼴 참 좋구나, 삐삐는 혼자 집에 있는 데 다 큰 어른이 아홉 살바기처럼 겅중
겅중 뛰어다니고 있으니. 거꾸로야, 거꾸로."
  "옳은 말씀이에요, 그래서 바뀌어야 한다는 거 아닙니까."
  나는 로키와 함께 버스에  올라타서는 멀리 다리 위에서 차례차례 걸스카우트
로 탈바꿈하는 소녀들을 지켜 보았다. 이윽고  주니어 스카우트 단원들이 야생화 
꽃다발을 들고 버스로 행진해 왔다. 옆을 돌아보니 로키는 잠이 들어 있었다. 햇
볕을 받으며 꽃을 꺾다  보니 고단했던가 보다. 그는 내 어릴  적 자장가와도 같
았던, 푸우푸우 코고는 소리르 내기 시작했다. 맨 앞좌석에 앉은 우리들 곁을 지
나가던 단원들이 그 소리를 듣고 낄낄거렸다. 
  케이가 다가와서 소곤소곤 물었다.
  "할아버님은 괜찮으세요?"
  "예, 그렇게 소곤거릴  필요 없어요. 잠만 들었다  하면 아무리 큰소리가 나도 
모르시니까요."
  "햇볕을 너무 많이 쬐셨나봐요."
  "아닙니다, 원래 지금이 낮잠 주무실 시간이에요. 집에서도 늘 그러시거든요."
  그러나 로키의 건강은 안심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104세의 고령이니까. 
로키가 백내장 수술을  받기 전 정기적인 엑스선 검사를 한적이  있는데, 의사가 
엑스선 사진을 오랫동안 쳐다보고 있자 나는 더럭 겁이 났다.
  "정상인가요?"
  "모르겠어요, 백 살 넘은  분의 엑스선 사진은 본 적이 없으니까. 어떤 상태가 
정상인지 모르겠어요."
  의사의 대꾸였다.
  나는 버스에 설치된  에어컨 바람이 로키에게 미치지  않도록 내 쪽으로 잔뜩 
돌려놓았다. 로키의 눈을  덮고 있는 모자가 푸우푸우 소리가 날  때마다 조금씩 
들썩거렸다. 로키는 재킷은  걸치지 않았지만 그 무덥고 습한 날씨  속에서도 넥
타이를 풀어헤치지 않고 있었다.
  케이가 운전석 바로 뒤에 잠시  서 있다가 북적거리는 버스 안을 휘둘러본 다
음 다시 내게로 상체를 숙였다.
  "단원들에게 할말이 있는데 호루라기를 불면 할아버님이 깨실 것 같아서요. 이
렇게 서 있으면 모두들 주목하겠죠."
  케이는 우뚝 선 채 입술에  손가락을 붙이고 있었고 잠시 후 단원들이 조용해
졌다. 
  "여러분 부모님이 주차장  남쪽 끝에서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차에서 내리면 
질서 정연하게......
  우리 분대가 아닌 다른 분대 소속의 단원 하나가 버스 앞쪽으로 걸어나오더니 
케이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내게 물었다.
  "저 할아버지가 진짜 백 살 넘었어요?"
  "그래."
  "톨로에 서 있으면 안돼요, 어서 자리로 돌아가도록."
  케이가 꾸짖었다.
  아이는 부리나케 널찍널찍한 칸이 쳐진 공책 한 장을 찢어서 내밀었다. 
  "할아버지가 깨시면 여기 사인 하나 해달라고 부탁해 주시겠어요?"
  "글쎄,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주무실 것 같은데."
  "그래도 혹시 깨시면......"
  "그래, 알았다. 깨시기만 하면 분명 해주실 거야."
  나는 목적지에 도착해서 내릴 때까지 로키를  깨우지 않았다. 케이와 단원들이 
먼저 내렸다. 운전  기사는 우리에게 빨리 내리라고 닦달하지 않고  버스에서 멀
찌감치 떨어져서 담배를 피웠다. 나는 로키의 모자를  집어 들고 그의 왼쪽 귓불
을 살짝 잡아당겼다. 로키는 소스라치게 놀라 잠이  깨서는 부축하는 내 손을 뿌
리치고 버스에서 내렸다. 
  "함께 가주셔서 고마워요, 피곤하지나 않으시면 좋겠는데."
  "난 안 피곤해, 삐삐가 걱정이지."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주아나가 부엌에서 만들고 있는 타코 소스 냄새가 진동
을 했다. 제시카는 제 방에 있었다. 친구를 집으로 데려와서 같이 놀라고는 해놓
았지만, 제시카는 종일  혼자서 눈물을 질질 짜며 무기력하게 보냈을  것이 분명
했다. 우리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제시카가 뛰어나왔다. 
  "정말 재미있었단다, 네가 같이 갔으면 더 좋았을 텐데."
  "에스트로스 팀이 4대 5로 졌어요."
  제시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행동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다음엔 네가 가거라, 나는 말고."
  로키가 말했다.
  "싫어요, 나는 그런 거 다 싫어요."
  "그럼 스카우트 활동말고 다른 걸 해보렴. 종일 그렇게 집 안에만 처박혀 있어
선 안 돼."
  내가 말했다.
  "아빠한테 좀 나가 달라고 해주세요."
  제시카가 로키에게 부탁했다.
  로키는 목장에서 꺾어 온 들꽃을 제시카에게 건넸다.
  "자, 이거 가져라. 다른 애들도 모두 꺾어서 나도 너 주려고 꺾어 왔지. 받아서 
너 좋을 대로 하렴."
  진입로에서 브래드의 엄마가 자동차  경적을 울리자 로키는 샘을 데리러 달려
나갔다. 제시카는 꽃다발을 마치 방패처럼 들고 서 있었다.
  "앞으로도 야구 경기에 데려가 주실 거예요?"
  "물론이지."
  "그냥 말로만 그러시는 거예요, 아니면 진심이에요?"
  "진심이야. 단, 네 친구를 반드시 데려가야 해. 그것도 진심이야."
  "아빠가 어렸을 땐 할아버지가 친구를 못 데려가게 했었잖아요."
  "그건 할아버지의 실수였어. 우릴 봐라, 그래서 아직도 둘이 붙어 다니잫아."
  "난 그게 실수라고 생각 안 해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할아버지가 아니다."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아빠도 많이 늙으면 할아버지처럼 될지도 몰라요."
  "노력해 보지, 아빠한테 한 가지만 약속해 주겠니?"
  "뭔데요?"
  "즐겁게 지내려고 애쓰겠다는 것."
  제시카는 꽃다발을 팽개치고 내게 와락 안겨서  흐느껴 울었다. 그러고 있으려
니 제시카가  아기였을 때 품에 안고  흔들며 잠을 재우던 생각이  났다. 하지만 
이제 제시카는 커다란 아이가 되었고, 잠이 아니라 활기가 필요했다. 
  샘과 로키가 뒷문을 여는 소리, 조지가 달려드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럴게요."
  제시카는 눈물을 닦으며 언약했다.
  "내가 울었다는 거 샘한테 말하지 마헤요."
  그리곤 꽃병을 가지러  부엌으로 갔다. 꽃병에 꽃을 예쁘게 꽂은  뒤 제시카는 
나가 놀겠다며 밖으로 나가다 말고 돌아서서 물었다. 
  "소풍 가서 할아버지도 그 멍청한 브리지를 했어요?"
  "아니."
  "그럴 줄 알았어요."
  "할 필요가 없었지, 이미 많이 해보셨으니까. 이 아빠한테 브리지를 가르쳐 준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니?"

      19 위대한 미국인의 죽음
  로키는 여든아홉이 되던  무렵 계속 기침을 해댔다. 그래서 진저  에일과 레몬
즙을 탄 뜨거운 물을 어지간히도 마셨지만 신통한 효력이 없자 의사를 찾아가서 
항생제를 받아다  먹었다. 그러나 기침은  좀처럼 낫지 않았고  목쉰소리가 더욱 
심해졌다. 로키는 화가 나서 다시 의사를 찾았고  이번엔 엑스선 촬영을 하게 되
었는데 성대에서 종양이 발견 되었다.
  "엑스선 소견과 환자의 증상으로 보아 암이 분명합니다."
  나는 의사의 진단 결과를 듣고는  내가 직접 환자에게 설명할 수 있게 해달라
고 부탁했다. 
  "환자에게 사실대로 말씀하셔야 합니다, 수술이 필요하니까요."
  "그러겠습니다, 다만 암말고 다른 병이라고 설명을 할 생각입니다."
  나는 '종기'라고 말할 작정이었다. 히브리에서 '종기'는 신이 파라오에게 내리는 
열 가지 질병  중의 하나인 고귀한 질병이었고, 이디시어로는 사마귀나  수포 따
위의 흔한 병으로 귀찮기는 하되 목숨을 앗아 가는 질병은 아니었다.
  "수술을 해서 종기를 없애지 않으면 기침이 멎지 않을 거예요."
  그러자 로키는 선뜻 수술에 동의하며 말했다.
  "1917년에 의사가 담낭을  떼어 내겠다고 하더구나. 그래서 내가 말했지,  담낭
이고 뭐고 내 몸에서 고장난 건 다 떼어  내라고 말야. 그래도 아직 멀쩡하게 살
아 있잖니."
  기침이 얼마나 고역이었던지  로키는 수술 날짜를 손꼽아  기다리는 눈치였다. 
그러나 막상 수술 전에 검진을 받으러 병원 주차장에 도착 했을 때는 마음이 변
했다. 나는 차에서 내려  로키가 탄 조수석 문을 열고 안  내리겠다고 버티는 그
를 억지로 끌어내렸다. 마침 병원 경비원이 그  광경을 보고 나를 치한으로 오인
하여 덥석 뒷덜미를 잡아서는 꼼짝못하게 벽에  밀어붙였다. 로키는 고소해 죽겠
다는 표정으로 경비원에게 말했다. 
  "걘 강도가 아니라 멍청이오, 의사 말이라면 무조건 다 믿지."
  "4시에 진료 예약이 돼 있는데 차에서 내리려고 하질 않아서 그런겁니다."
  아직 반신반의하는 경비원에게 내가 설명했다.
  "제가 함께 가드릴까요?"
  경비원이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는 듯 로키에게 물었다.
  로키는 갑자기 유순한 노인네가  되어 경비원과 나란히 병원 건물로 들어갔고 
나는 몇 발자국 뒤에서 따라갔다.
  "젊은이, 할아버님을 공손하게 모셔야지. 저렇게 점잖으신 분을 함부로  다뤄서
야 되겠나."
  경비원의 충고였다.
  그로부터 며칠 후  우리는 병실에서 수술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술  시각은 오
전 8시로 잡혀 있었다.  로키는 하루 전에 입원을하여 병실에서 잤고, 나도 그의 
침대 옆 바닥에서 불편한 잠을 잤다. 새벽  6시가 되자 로키는 기도를 마치고 신
문을 읽었다. 그리곤 나와 함께 <투데이 쇼>를 시청했다. 이윽고 8시가 되자 로
키는 맨발로 문 앞에 가서 섰다. 그렇게  15분을 기다리고 서 있다가 간호사실에 
가서 의사가 어디 있는지 물었다. 간호사 말이  수술 시간이 늦어지는 건 다반사
라고 했다. 
  "의사가 8시라고 했어, 8시라고 했으면 그 시간에 해야지."
  로키가 역정을 냈다.
  9시가 되자 그는 수술을  받지 않기로 결심을 굳혔고, 9시 반엔  옷을 입고 집
으로 가겠다고  나섰다. 내 비상벨 소리를  듣고 간호사가 달려 왔을  때 로키는 
이미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 내가 엘리베이터 앞을 막아서자  로키는 계단
으로 향하며 말했다. 
  "그 의사는 거짓말쟁이야,  나는 거짓말쟁이한테 수술을 받고 싶진 않아.  게다
가 수술을 받을  필요도 없어, 아무 이상이  없으니까. 나한테 필요한 건 수술이 
아니라 레몬즙을 넣은 뜨거운 물이야."
  로키와 내가 옥신각신하며 7층에서  5층까지 내려갔을 때 위에서 간호사가 의
사가 도착했다고 소리쳤다.
  "그는 거짓말쟁이야."
  "의사 선생님이 죄송하대요."
  간호사가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대꾸했다. 이어 의사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다른 수술이 있었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
려서요."
  "왜? 수술하다가 실수라도 했나 보지?"
  로키가 위쪽을 향해 이죽거렸다.
  그는 5층 층계참에 서서 망설이고 있었다.  계단 난간을 움켜쥔 손마디가 새하
얀 걸로 보아  겁을 먹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로키가 겁을 먹은  모습을 그때 
처음 보았다. 나는  그의 손을 난간에서 떼어  냈고, 우리는 천천히 다시 계단을 
밝고 올라갔다.
  7층에서 의사와 간호사  둘이 기다리고 있었다. 로키는 병실로  들어가서 그들
을 기다리게 해놓고는 옷을 벗고 환자복으로 갈아입었다.
  병원 잡역부가 미는  바퀴 달린 침대에 실려  수술실로 가면서도 로키는 잔뜩 
노해 있었다. 내가 옆에서 따라가면서 말을 걸었다. 
  "할아버지, 제가 맹장 수술 받았을  때 생각나세요? 제가 할아버지처럼 수술실
로 실려 가고 있을 때 할아버지가 달려 오셨죠."
  "그래 생각난다, 그땐 얼마나 겁이 났었던지."
  "저도 할아버지가 오시기 전엔 겁에 질려 있었어요."
  당시 나는 열두 살이었는데, 몇 년 간 속을  썩여 오던 맹장이 어느 토요일 오
후에 갑자기 터지기  직전까지 갔다. 병원으로 달려갔더니 의사가 배를  쿡쿡 찔
러 보고는 입원 준비를 하라고 했다. 마침  회당에 갔던 로키는 집에 돌아오자마
자 누나들에게서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병원으로 달려왔다. 나는  마취에 취해 
정신이 가물거리는  상태에서 달려오는 로키를  보았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 
시뻘겋게 상기된 얼굴과 턱 끝까지 숨이 차서 헐떡거리던 모습. 
  "내 새끼! 많이 아프니?"
  "아뇨, 전 괜찮아요. 하지만 의사들도 돈을 벌어야 먹고 살죠."
  나는 능청맞게 로키의 말투를 흉내내며 웃음 띤 얼굴로 의식을 잃었다.
  "그때 너를 수술했던 닥터 슈노가 아직 살아 있으면 좋으련만."
  "할아버지를 수술할 의사는 더 훌륭한 의사예요, 목 전문의라구요."
  "닥터 슈노는 이 병원 의사들보다 목에 대해서  훨씬 잘 알아. 그도 목 전문의
였어."
  어렸을 적에 로키는 내가 아플 때마다 닥터  슈노를 찾았었다. 진료 예약 같은 
건 아예  없었다. 그냥 병원에 가서  대기실에 놓인 빨간 가죽  카우치나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면 되었다. 닥터 슈노의 환자들은  대부분 목에 불룩한 갑상선종을 
달고 다니는 폴란드 여인들이었다. 이따금 나도  편도선염이나 감기에 걸리면 목
에 박하뇌를 바른 뒤 수건으로  감싸고 대기실에 앉아 있곤 했는데 그러고 있으
면 툭 불거진 울대뼈 때문에 갑상선종에 걸린  것처럼 목이 불룩해서, 대기실 가
득 앉아 있는 폴란드 여인들에게 동족 의식 같은 걸 느끼기도 했다.
  병원 잡역부가 나의 상념을 깼다.
  "보호자는 여기서 기다리셔야 합니다."
  나는 그 소리를 듣고 뒤로  물러날 때까지 로키의 손을 꼭 잡고 있었던 걸 의
식하지도 못했다. 로키가 한쪽 팔꿈치로 상체를 일으키며 말했다.
  "내가 죽으면 내 옷은 다 너 입어라."
  "할아버지 옷은 제게 맞지도 않아요."
  로키가 수술실로 들어가고  난 뒤에도 난 얼굴에서  웃음을 거두지 않고 있었
다. 
  이튿날 기관 절개로 당분간 말을 할 수 없게 된 로키에게 글씨를 마음대로 썼
다 지웠다 할 수 있는 매직 칠판이  주어졌다. 수술이 성공적이어서 종양은 깨끗
이 없어졌지만, 로키의  목소리가 원래대로 돌아올지는 의문이었다. 의사는 나중
에 후두에 인공 보조 장치를 달아야 할거라고 했다.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스타킹."
  내 물음에 로키는 매직 칠판에 또박또박 썼다.
  상점에 가서 빨강과 검정이 섞인 마름모꼴 무늬의 스타킹을 사다 주었더니 마
음에 들어 했다.
  수술을 받은 뒤부터 로키는 속삭이는 듯한 소리밖에 낼 수 없었으나 장장 6개
월 동안 일주일에 두 번씩  목소리를 키우는 복식 호흡법을 열심히 배우러 다닌 
결과 인공 보조 장치는 필요치 않았다. 게다가  그의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는 다
른 어떤 목소리보다 강한 호소력을 지니고 있었다. 
  로키는 아흔일곱, 그리고  백 할 되던 해에 또 몸에  '종기'가 생겼는데 이번에 
탈이 난 곳을 결장이었다. 아흔일곱에 생긴  종양은 양성이었으나 그것이 3년 뒤
에 악성으로 변했다.  나는 암을 종기라고 부르는 것이 속임수라곤  생각하지 않
았다. 그래서  당당하게 종이에 사람의 구불구불한  내장을 그리고, 거기 해롭지 
않은 자잘한 종기들을 몇 개 그리고는 창자 구멍을 막는 커다란 종기를 하나 그
려 넣었다.
  "그냥 종기일 뿐이지만 떼어 내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어요."
  "맞는 말이다, 사람 목숨은 깃털 같은 거야. 발톱이 잘못 되어도 죽을 수 있지. 
가자."
의사는 수술 전에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더니 수술이 끝타자 내 손을 잡아 
흔들며 성공적이라고 말했다. 
  "할아버님이 아주 건강 체질이세요. 저로서는 놀라울 뿐입니다."
  수술을 받을 때마다 로키는 2주 안에  퇴원을 했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쓰레기 
버리는 일을 시작하겠다고 우겨서 나와 한바탕 싸움을 벌이곤 했다.
  로키는 105세가 되면서  우리 집에 발걸음을 하지 않게 되었는데,  그 때 제시
카는 여덟 살, 샘은 다섯  살이어서 저희들끼리 로키에게 놀러 갈 수 있었다. 직
장에서 퇴근하다가 들러 보면 로키는  예전 모습 그대로 잔디밭 나무 아래에 앉
아서 <탈무드>를 읽고  있었고 조지가 그 옆에 버티고 앉아  있었다. 그러나 이
제 조지도 노령이라 오토카이가 요란한 소음을 내며 지나가도 힘없이 꼬리만 흔
들 뿐이었다.
  106세가 되자 로키는 가는귀가 먹어서 샘은 할말이 있으면 그의 귀에 대고 소
리를 질렀다. 그해에 나는 미국 정보부 대표로  브라질에 문학 강연을 하러 가게 
되었다. 사실 나는 데비의 발병 이후 집필 작업을 포기한 형편이었다. 데비와 아
이들을 보살피는 데 전력을 다해야 했기에 그 몇  년 동안은 글을 쓸 시간도, 마
음의 여유도 없었던  것이다. 창작이라면 고작해야 밤에  잠자리에서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지어내어  들려주는 게 전부였다.  제시카와 샘은 하룻밤에  보통 다섯 
가지 정도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모두 즉석에서 지어낸 이야기였다. 그러다 보면 
어떤 때는 한 시간도 넘게 이야기를 하느라 아이들 방을 나올 때면 온몸이 땀으
로 끈적거리기도 했지만, 늘 마음 한편으로는 글을  쓰고 싶은 열망을 지니고 있
었다. 바로 그런 때에 브라질  강연 제의가 들어왔다. 그 강연 자체는 사실 그다
지 중요치 않았지만 내겐 작가의 삶으로 복귀하는  첫 발자국이 될 수도 있었다. 
강은은 글쓰기가 아닌  연설이지만 그 원고는 내가 쓰는 것이니까.  주위 사람들
도 모두 그 제의를 받아들이라고 권했다. 
  "아이들은 내가 돌보마, 그러니 걱정 말고 다녀오너라."
  어머니였다.
  이웃 마시와 카풀  회원 어머니들도 모두 마음  편히 다녀오라고 권유했고 나 
자신도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면서도 왠지  자꾸만 망설여졌다. 결정을 내려야 
할 날이 임박해서야 비로소 나는  훌훌 떨쳐 버리고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제시
카와 샘에게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1982년의 어느 날, 나는 로키와 나란히 잔디밭에  나와 앉아서 그의 허락을 구
하고 있었다. 실상은 마흔한 살 먹은 어른이  브라질 여행을 하는 것이었지만 로
키에게 허락을 구하는 꼴로 마치  다섯 살바가 꼬마가 길을 건너도 되는지 묻고 
있는 것 같았다.  당시 로키는 건강하지 못했다.  몸무게가 점점 줄고 있는 것이 
몸집에선 그다지 표가  나지 않았지만, 뺨이 쑥 들어가서 콧구멍이  전보다 훨씬 
커진 것  같았다. 나는 정원 의자에  앉아 햇빛을 가리느라고 모자를  푹 눌러쓴 
그에게, 늘 그랬듯이 말을 돌려서 물었다.
  "브라질 가면 뭘 사다 드릴까요?"
  언제나처럼 손짓을 하며 선물 같은 건 필요  없다고 나올 줄 알았는데, 뜻밖에
도 로키는  생각에 잠기는 눈치였다. 나는  굳이 그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초조하게 기다리지 않았다. 표정만 보면 다 알수 있으니까. 과연 그의 눈을 들여
다보니 내가 평생 보아  온 허세와 초조함이 들어 있었다. 곧 내게  2주 간의 이
별을 허락할 모양이었다.
  "노란색 구두가 있으면 한 켤레 사오너라."
  나는 리우데자네이루 상파울루와  브라질리아에서 강연이나 단체 관광 틈틈이 
구두점들을 돌며  로키에게 맞는 노란색  구두를 찾아보았다. 그  노란색 구두는 
따지고 보면 로키가 나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내가 암을 '종기'라고 부르며 로키
에게 달려드는 죽음의  그림자를 억지로 떼어 냈듯이, 그는 내게  구두를 사오라
고 요구함으로써 적어도 내가 외국에 나가 있는 동안은 --자기 의지로 할 수 있
는 일이라면--절대 죽지 않을 것임을 약속한 것이었다.
  나는 선물을 잔뜩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카풀 회원 남자아이들에겐 12센티
미터 길이의 소몰이 채찍이, 여자아이들에겐 가죽  동전 지갑이 하나씩 돌아갔고 
어머니에겐 핸드백과 청금석  목걸이, 제시카와 샘에겐 지갑을 선물했다. 그리고 
아마존에서 멀지 않은 어느 도시에서 로키의 발에 꼭 맞는 노란색 구두 한 켤레
를 살 수  있었다. 로키는 자랑스럽게 그  구두를 신고 회당에 나갔고, 그로부터 
몇 개월 뒤 병원에 입원하게  되자 구두코가 찌부러지지 않도록 신문을 뭉쳐 넣
어서는 옷장 안에 고이 간직했다.
  이번에는 의사들도 그의 허물어져 가는 육신을  어쩌지 못했다. 그리하여 나의 
오랜 룸메이트 로키는 병원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어머니가 
병원에서 먹고 자며  그의 곁을 지켰다. 나는 제시카와 샘에게  로키가 아주아주 
많이 아프다며 그의 죽음을 맞을 마음의 준비를 시켰지만 아이들도 도통 믿으려 
들지 않았다. 일요일에 아이들을  데리고 로키를 찾았다. 아이들은 열두 살 이하
의 어린이는 면회를 금하는 병원  규칙을 어기고 몰래 병실로 잠입한 것이 어지
간히도 흥분되는 모양이었다. 마침 로키는 정맥  주사를 맞고 일시적으로 기력을 
회복한 상태였다. 제시카와  샘이 들어서자 그는 침대를 올려 일어나  앉아서 아
이들의 키스를 받았다. 
  "수염 때문에 간지러워요."
  키스를 하고 나서 샘이 말했다. 샘은 이제 일곱 살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키스할 때 입에 너무 세게 해서 그래."
  제시카는 그렇게 말하고 시범이라도 보이는 듯 살짝 뺨을 내밀었다.
  "화요일에 쓰레기 내다 버리는 거 잊지 마라."
  로키의 당부였다.
  어머니가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려고 데리고 나가자 로키는 손짓으로 
내게 침대를 내리라고 했다. 나는 그의 귀에 대고  평생 그가 내게 해준 말을 외
쳤다. 
  "슈타르크 지히(기운 내세요)!"
  그 소리가 너무  컸던지 간호사가 놀라서 뛰어들어왔다. 나는 손을  흔들어 그
녀를 내보냈다. 로키가 자꾸만 도리질을 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입술에 귀를 갖
다 댔다.
  "이히 켄 샤인 니히트(이제 난 안 되겠다)."
  어머니와 아이들이 돌아왔을  때 로키는 잠들어 있었다.  제시카는 아이스크림
을 사먹다가 기발한 생각을 해낸 모양이었다.
  "할아버지는 미국 나이의 반보다 많아요."
  그리곤 냅킨에 계산을 해놓은 걸 내게 보였다.
  '1982-1776=206'
  샘은 누나의 계산이 못 미더운지 내게 다시 계산해 보라고 했다.
  "맞구나."
  우리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계속해서 미국과 로키의 나이 얘기를 하고 있
었다.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조지 워싱턴을 알아요?"
  샘이 물었다.
  "아니, 할아버지의 증조할아버지는 알았을 수도 있지. 미국에 살았다면 말야."
  아이들은 미국이 자기네 증조할아버지인 로키 나이의 두 배도 안 된다는 사실
이 자뭇 경이로운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역사가 아주 가깝게  느껴진다고 했
다. 그로부터  몇 시간 뒤 나는  집에서 스파게티를 만들면서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로키가 임종을 맞고 있다는 것이었
다.
  나는 마시에게 아이들을 맡겨 놓고 서둘러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엘리베이
터 안에서 얼굴에  졸음이 덕지덕지한 젊은이가 '이츠  어 보이' 담배를 한 개비 
건넸다. 나는 로키의 병실로 들어설 때까지 그걸 그대로 들고 있었다. 로키는 바
로 몇 초 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우리는 시체를 방부 처리하는 것을  금하고 곧장 땅에 묻게 하는 유대교 전통
에 따라 로키를  휴스턴에 묻었다. 그의 아내와 아들이 묻힌  미시간과는 너무도 
멀리 떨어진 곳에,  그의 부모님이 묻힌 리투아니아와는 더더욱 멀리  떨어진 곳
에.
  로키는 수의 위에 탤리스를 입고, 이스라엘에서  가져온 예루살렘의 흙과 함께 
묻혔다. 나는 로키의 관 위에 텍사스의 흙을 한  삽 떠서 붓고 그의 아들을 대신
하여 찬송을 하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라비가 찬송가책을 건넸지만  나는 책을 
보지 않고도 암송할  수 있었기에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흐느끼이  멎지를 않아 
제대로 해닐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어머니, 누나들과 그 가족들, 이웃사람들, 회
당의 노인들이 전부인 조촐한 조객들이 뒤에서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다. 로카가 
생전에 실수를 용납지 않았기에  나는 한자한자 또박또박 암송하고 싶었지만 흐
느낌 때문에 자꾸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무덤 맞은편에 서 있던  라비가 도움이 
필요한지 눈으로 물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제시카와 샘이 눈물  젖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고개
를 들어 즐비한 묘석들과 묘지 관리인의 오두막,  저 멀리 슈퍼마켓과 자동차 부
품 상점, 그리고 댈러스와 갤버스턴으로 이어지는  45번 인터체인지를 돌아 흘러
가는 자동차의 행렬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스스로에게 타일렀다.
  "기운을 내라구!"
  나는 워싱턴과 링컨의  땅에서, 고속 도로에서도 보이지 않는 공동  묘지 한켠
에 서서 또 한  사람의 위대한 미국인 로키, 나의 로키를  회고하며 기도를 올렸
다. 나의  찬송 소리는 낭랑했고, 막힘도  실수도 없었다. 이윽고  마지막 구절에 
이르렀을 때 나는 목청껏 외치다시피 하고 있었다. 

      에필로그
  데비는 식물 인간처럼 살다가 결국 몇 년  후 친정집에서 세상을 떴다. 조지는 
17세까지 장수를 누렸는데,  아이들 말로는 개의 나이로 따지면 로키보다  더 오
래 산 셈이란다.
  제시카는 대학생이고 샘은 고교 졸업반이다.
  조엘 커너는  결혼해서 경건한 학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  그를 성인으로 
우러러보는 사람들까지 있다.
  나는 안식의 해에  뉴욕에서 <탈무드>를 공부하고, 한  여자를 만나 재혼했는
데 현재 세 살, 두 살바기 딸 둘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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