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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카글리아]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by Casey,Riley 2023. 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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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오 버스카글리아 교수의 사랑의 메세지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레오 버스카글리아


  Living Loving and Learning


    레오 버스카글리아(Leo Buscaglia):
  철학박사로 미국 남캘리포니아 대학에서 특이한 교육방법으로 "사랑"에 관한 많은 명강의를
함으로써 미국 내에서 가장 잘 알려진 교육학 교수이다.
  그는 사랑과 삶의 신비로움을 찾고 만인에게 이를 전달하기 위해 끝없는 여행을 하고 오직
진실만을 추구한다.
  미국 전역에 걸친 수많은 청중들이 매스콤과 강연등의 매체를 통하여 그의 명강의에
매료되어 있다.
  그가 이처럼 만인에게 사랑받는 것은 다른 사람의 삶과 사랑에 대해 이해를 얻기 위해
자신의 소중한 시간과 정열을 할애하는 데 있다.
  그의 강연 못지 않게 사랑받는 저서로는 "사랑(Love)", "인간성(Personhood)",
"황소가 가는 길(The way of the Bull)", "카운셀링(A Counselling)" 등 많은 작품이 있다.


    입문
  언제인가 나는 어떤 글 가운데에서 "버스카글리아는 교사로서, 학생으로서, 작가로서,
독자로서, 연설가로서, 그리고 경청자로서의 다재다능한 자질을 겸비한 사람이다."라고 쓴
일이 있다.
이 모든 자질 가운데서도 그가 선택한 교사로서의 자질이 특히 돋보이는 것 같다.
  한번은 친구 한 사람과 함께 공항으로 레오를 마중나갔던 일이 있었다. 레오가 짐을
찾으려고 자리를 떴을 때, 한 노신사가 나에게로 다가오더니 "저분이 누구십니까? 저는
비행기에 저분의 옆 좌석에 앉았습니다. 저분이 누구신지 좀 알려 주십시오."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레오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을 해 주자 그 노신사는 놀라워하면서
"저도 그분이 훌륭한 분이라는 것을 짐작은 했습니다. 여행중에 시험지에 채점을 하고 계시는
것 같더군요. 그런데 그분은 시험지 하나하나에다가 일일이 <아름답습니다>,
<환상적입니다>, <아주 훌륭합니다.>라는 글을 적어 넣으시더군요. 제 시험지에 그러한
글귀를 적어 놓으신 선생님은 한 분도 없었습니다.
나는 지금 내가 저분처럼 훌륭하신 선생님 밑에서 공부를 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 노신사는 교직을 명예롭게 생각하는 가장 모범적인
교사의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레오는 이에 대한 보상으로 대학생들과 일반인, 학생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다.
  내가 레오를 알게 된 이후 "저분은 언제나 저러시는 것이 사실입니까?" 라고 질문하는
사람들을 만났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런 질문은 아무런 가식이 없는 질문이기는
하지만 답변을 하기에는 어려운 질문이다.
  이에 대한 나의 대답도 변했다는 것을 자인한다. 초기에는 이런 질문에 대해 분명하고도
자신있는 태도로 "네, 그렇습니다." 라고 대답했으나 지금에 와서는 좀더 정확한 대답으로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라고 대답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풍요롭고 또 사색적이며, 재미있고도 현명하게 보이기 위해서 많고 적은 청중 앞에
나설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는 그렇다고 대답할 수가 있다. 인간의 잠재력에 대한 그의 관심이
심오하고도 순수하다는 점도 그렇다고 답변할 수가 있다. 그는 붐비는 교실이나 강당에 앉아
있는 그 누구 못지 않게 자신의 인생을 향유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가
있겠다. 그는 인간의 육체와 정신과 삶의 목적이 잠에서 깨지 못함을 늘 안타깝게 생각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고 답변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라고 대답할 수가 있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그는 항상 "그와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가 노상 그렇다면은 그는 단 하나의 메시지만을 가지고도 수요가 많고
인기가 좋아서 관중을 즐겁게 해주는 재미있는 연기자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속적인 성장은 어떻게 해서 가능한 것일까? 그 샘물의 원천은 무엇인가? 그 원천은
인간 바로 그것이다. 그가 사귄 옛 친구와 새로운 친구가 바로 그의 샘물의 원천인 것이다.
서적과 그리고 그 서적을 쓴 작가들, 그리고 변화와 성장과 아름다움을 모범적으로 표상하는
자연과, 그리고 동방문화에서 경험한 신비로움과 학생들과 어린이와 같은 그의 실질적인
교사들, 그리고 각종 음악이 그의 샘물의 원천인 것이다.
  나는 레오를 거대한 잉크를 빨아들이는 압지와도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영민한
눈과 지극히 이지적이며, 관대한 마음을 피해 달아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는 변화를 포용하는 인생이 영광된 것임을 확신하며 또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안일한
자기 만족에서 탈피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그는 늘상 그렇지는 아니하다. 내가 아는 바로 레오는 자신의 활력을 붇돋우고
지식과 생의 기운을 붇돋을 필요가 있다고 느낄 때에는 어느 때라도 잠적해 버리는 그러한
사람이다.
그는 홀연히 자리를 떠나 저녁 내내 골방에서 사색에 잠기거나, 느닷없이 오레곤 강 오지의
오두막에서 여름을 보내는가 하면, 섬으로 가서 일년 내내 명상에 잠기기도 하며 현자들로부터
가르침을 받기도 한다. 그는 고독을 매우 즐겨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의 고독은 도피 또는
후퇴라기보다는 오히려 일보전진을 위한 방편인 것 같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짐으로써 오감을
새로이 각성시키고 정화시키며, 지적인 성장과 발전을 꾀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말 그는 언제나 그러하느냐?' 하는 문제는 인간적인 의미와 신화적인 의미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그는 결코 신화적인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나도 인간적인
인간이다. 따라서 그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때로는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이리저리
배회하기도 하며, 또한 우리와 마찬가지로 관료적인 20세기 생활의 복잡성에 시달림을 받고
있으며,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말 못할 고뇌의 순간이 있으며 크고 작은 비인간적인
행위들에 대해 화를 내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우리와는 달리 자기 자신의 인간성과 그리고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는 약점과 불안전성과 희극을 찬미한다. -베티 로우 크라토빌레-


    @[행동 수정자로서의 사랑@]

  사랑이란 행동 수정자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지극히 과학적인 의미로 들리기
때문에 아무도 놀라는 사람이 없습니다. 대학에서 내가 사랑을 강의할 때면 모든 교직원들이
킬킬거리면서, 캠퍼스를 걸어 내려가고 있는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토요일엔 사랑의
실습이라도 하십니까?" 라며 짓궂게 묻습니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단호하게 말해 줍니다.
  나는 교육정책위원회가 교육의 목표를 결정하기 위해 회합을 가질 때마다 그 첫째 목표를
자기 실현 또는 자기 현실화에 두고 있다는 점에 항상 흥미를 느낍니다. 그것도 중요할
테지만 나는 국민학교에서 대학원에 이르기까지 이를테면 "나는 누구인가?", "내가 왜 여기에
왔나?". "인류에 대한 나의 책임은 무엇인가?", "사랑" 따위를 무엇보다 중요시 여기는
교과과목을 설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이란 자연 발생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을 자연 발생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인간 관계에 관한 장애물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누가 우리에게 사랑을
가르쳐주는 것일까요? 우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사랑을 가르쳐주는 교사의 하나인데
사회란 실로 다양합니다. 우리의 부모님들도 우리들에게 사랑을 가르치십니다. 부모님들이
우리의 첫 번째 교사이긴 하지만 반드시 훌륭한 교사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부모님들이 완전한 분들이길 기대합니다. 자녀들은 그들의 부모님들이 완벽한 분들이라고
기대하면서 성장하게 마련이지만 사실은 완벽하지 못하다는 것을 나중에 깨닫게 되면
실망이 크고, 분노를 느끼기까지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우리가 비록 부모님들이나 사회를 통해 사랑을 배웠다 할지라도 그것을
다시 잊어버리고 또 다시 배울 수도 있기 때문에 항상 커다란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에겐 커다란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에겐 커다란
희망이 있긴 하지만, 어느 순간에서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만 하는 것입니다. 나는 배워야
할 대부분의 것들이 여러분 자신 속에 이미 내재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여러분은 누군가가 나타나서
용감하게 여러분에게 사랑을 고백함으로써 여러분 마음속에 잠재하고 있는 사랑에 눈을
뜨게 해주고 여러분도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저 역시 그렇게 느끼고
있습니다. 이런 느낌을 가지는 것이 옳지 않은 일인가요?" 라고.
  최근에 칼 로저스는 기회를 상실하는 일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정곡을 찌른 바 있습니다.

    나는 누가 누구를 가르칠 수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교육의 효과에 관해 회의를
품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바로는 오직 배우고자 하는 의욕이 있는 사람만이 배우게 된다는
사실이다. 교사란 음식을 차려놓고 그 음식이 얼마나 맛이 있고 훌륭한 음식인가를
학생들에게 보여주며 먹기를 권유하는 보조자에 지나지 않는 사람이다.

  교사로서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권유하는 것뿐입니다. 그 음식이 무엇이든간에 먹기를
강요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학생에게 그 무엇을 가르쳐줄 수 있는 교사는 아무도 없습니다.
학생 스스로가 배우는 것입니다.
  위대한 사회학자인 소로킨은 자신의 저서인
"사랑의 방법과 힘(The Way and Power of Love)"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감정적인 우리 인간의 마음은 사랑의 힘을 단호히 부인한다. 사랑을 환상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사랑을 자기 기만,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마취제, 이상향적인 사고,
비과학적인 환상 따위로 부른다. 우리는 인간의 행동과 인격을 형성하고 생물학적, 사회적,
도덕적, 정신적 진화과정에 영향을 미치며 역사적인 사건의 방향 전환에 영향을 주고,
사회제도와 문화 형성에 있어서 다른 요인들과 마찬가지고 사랑 역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모든 이론을 거부하는 편견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사랑이 그러한 힘이 있다는 것을 과학적인 연구로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존재하는 모든 것을 모두 다 통계적으로 밝힐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참으로
딱한 노릇입니다. 측정할 수가 있는 것에 의해서만이 납득이 간다면 이는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측정할 수 없는 것에 매료되고, 현실뿐만 아니라 꿈에
의해서도 매혹되기 때문입니다. 현실은 눈에 보이는 것이므로 나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눈에 보이는 것만을 자로 재면서 인생을 보내고 싶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그것도 좋은 일이겠죠. 그러나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저 밖에 있는 것에 흥미를 느낍니다.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고, 느낄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사람들은 현실이 우리가 처해 있는 상자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난 여러분에게
분명히 말해 둡니다. 가끔 현실의 뚜껑을 열고 그 밖을 내다보십시오. 거기에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오늘의 꿈이 내일엔 현실이 될진대 우리는 꿈꾸는 방법조차도 모르고 있습니다.
  나는 남에게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자리에 앉아서 "아니, 저 양반이 말하는 건 도대체 무슨 뜻이죠?" 라고 말합니다.
내가 말하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란, 거울앞에 서서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누구지? 네 말이 맞다. 거울아, 바로 나지? 누구겠니?" 라고 말하는
자기 도취적인 인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의미하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란
가진 것을 나누어줌으로써 보다 값진 것을 얻을 수 있음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여러분이 누구보다도 교육을 많이 받고 싶어하고, 더 똑똑 하고, 더욱 매력있고, 누구 못지
않게 다재 다능하며, 이 세상에서 가장 창조적인 인간이 되고 싶어하는 것은 그렇게
되야만이 남에게 나누어 줄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는 유일한 이유는 그것을 남들에게 나누어주려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모르는 것을 여러분에게 가르칠 수는 없어요."라고 말하는 것은 쉽기는 하지만
이보다 어리석은 짓은 없습니다. 그런 줄 알면서도 우리 교사들은 그런 식으로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학생들 앞에 서자면 무엇인가 아는게 있어야 하고 할 말을 준비해 두는 것이 좋습니다.
학습부진에 관해서 강의를 할 예정이라면 이에 대해서 뭔가 알아두는 편이 낫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만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이니까요. 그러므로 내가 학습 부진에 관한 대가가
되려면 학습 부진에 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다 알아두어야만 합니다. 다행한 것은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남김없이 다 가르쳐준다고 하더라도 나로서는 손해 볼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나서도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여전히 알고 있는 채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남에게 준다고 해서 그 지식이 나에게서 떠나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
나누어 가질 뿐입니다. 언젠가 풀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남김없이 가르치는 데는 열 다섯 시간이면 족하다." 라고.
이 위대한 과학자이며, 철학자인 풀러의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열다섯 시간이면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다 가르쳐줄 수 있다." 는 말을. 그가 그의 지식을 남에게 가르쳐 준다고 해도
그는 그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잃게 되는 것은 아니며, 그 지식은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도 이와 같습니다. 내가 여러분과 친해질 수 있는 기회만 있다면 이 교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똑같은 강도로 사랑할 수 있으며 그러면서도 내가 가지고 있는 사랑의 양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아 다시 사랑할 수 있는 저력을 계속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잃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우선 나는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에 나의 사랑이 신경질적이고, 이기적이고, 병든 것이라면 내가 여러분에게
가르쳐드릴 수 있는 것은 신경질적이고, 이기적이고, 병든 사랑일 뿐입니다. 나의 지식이
광대무변하다면 나는 그
광대무변한 지식을 여러분에게 가르쳐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의무감
때문에 나는 내 자신을 지식으로 충만시키고, 사랑과 이해심과 경험등 그 모든 것으로
충만해지도록 노력해서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여러분들에게 주면 여러분은 이것들을
받아들여 이를 토대로 하여 여러분 스스로를 구축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교육의 본질은 지식을 주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유일성을 반견하도록 도와주고,
이를 개발하고,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데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교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유일한 인간이 되도록 격려 받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면 이 세상이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를 상상해 보십시오. 내 말 뜻을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교육 제도의 본질은 인간들을 서로 사랑하게 만드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될 때 실로 우리
자신을 행복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일이 늘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의 개성 그 자체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내가 여러분에게 내 자신을 주는 일에
성공했는지의 여부를 알아보는 데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나의 모범을 따르는 정도에
따라 나는 교사로서 성공한 사람일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개체로서의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게 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이 같은 불합리한 교육 제도의 철폐를 위해 투쟁해야 합니다.
  사랑을 베푸는 사람은 개성있는 인간이 되는 것으로만 만족하지 아니하고 그 개성을
발전시키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 분투 노력해야만 합니다. 그가 최고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이것이야말로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임을 알고 있는 때문입니다.
  철학자와 심리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네가 가진 것은 오직 네 자신뿐이다. 그러므로 네
자신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인간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 넌 살아 남게 된다."
라고 말해오고 있습니다. 희랍의 비극의 주인공 메데아를 기억하십시오. 모든것이 사라져
버렸을 때
하늘의 사자가 내려와 그녀에게 말한 훌륭한 이 구절을 기억하십시오."메데아야, 이제 남은
것이 무엇이냐? 모든 것이 부서지고 모든 것이 사라진 지금." 이 물음에 대해 그녀는 "무엇이
남았느냐고요? 내가 남아 있지 않습니까." 라고 답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의 아내가 될
여인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남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시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내가 남아
있으니까 모든 것이 다 남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스스로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자세로 돌아갈 때 모든 것이 자신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때야 비로소 남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중요한
시점에
도달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전혀 새로운 자기를 창조해 낼 수 있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여러분이 처해 있는 환경이 마음에 안 든다며, 그것을 부서버리고 새로운
환경을 창조하십시오. 현재 가지고 있는 여러분의 성격상의 기질이 마음에 안든다면 그것을
던져버리고 한아름의 꽃처럼 아름다운 성격이 되도록 하십시오.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여러분의 것이니까, 뭐니뭐니해도 그게 제일입니다. 이것저것 다 제쳐놓더라도
진심에서 내가 한 이 말만큼은 잊지를 마십시오. 당신 자신으로 돌아가십시오.
  나는 사랑을 베푸는 사람의 또 하나의 두드러진 특징은 호칭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그야말로 불가사의한 존재입니다. 놀라운 일들을 해낼 수 있으며, 엄청난
창조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시간이라는 것을 만들어 놓고는 그것에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나는 어느 시간엔 커피가 나오고, 어느 시간엔 누가 오기로 되어 있고, 어느 시간엔
점심을 먹어야 하기 때문에 줄곧 벽시계를 봐야 합니다 
  우리는 또한 언어를 만들어 놓고는, 언어가 우리를 해방시켜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어는 우리를 가두어 넣는 상자는 자루가 되었습니다.
  이름만 듣고도 그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가 우는가?
그는 느끼는가? 그는 이해하는가? 그는 희망을 가지고 있는가? 그는 자녀들을 사랑하는가?
등의 말을 번거롭게 질문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진정으로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라면, 말을 지배해야 하지 말에 의해
지배되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해준 말의 의미를 믿음으로써가
아니라, 오직 여러분 자시의 경험에 의해서만이 이러저러한 말은 이러저러한 것을
의미한다고 장담하는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비밀 한 가지를 말해 주겠습니다. 어른이 된 휄리스는 지금도 하루에
24시간이 아니라 29시간 일을 해 녹초가 되어 침대위의 이불속으로 기어들 때도, 이렇게
물어봅니다. "휄리스야, 오늘은 무엇을 배웠니?" 라고. 만약에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지
못한 경우에는 다시 일어나서 황급히 백과사전을 펼쳐들고 뭔가 새로운 것을 배우지 않고서는
잠을 청할 수가 없습니다 
  교육이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여러분들이 나를 알고 싶다면 여러분들은 나의 머리속으로 들어와야만 되고, 내가 여러분들을
알고자 한다면, 나는 "그녀는 뚱뚱하다. 그 여자는 말라깽이다. 그 여자는 유태인이다.
카톨릭이다."하는 식으로 말을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은 내게 그
이상의 의미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낭비를 싫어하고 위선을 용납하지 않는 그러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로스텐은 "잔인한 자는 약자이다. 부드러운 기질은 오직 강자만이 가질 수 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나는 또한 사랑을 베푸는 사람은 가식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그
어느 것보다도 보고 싶어하는 것은 느낀 대로 생각한 대로 말하고,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고
느끼는 것에 순응하는 어린시절의 천진난만한 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서로를 마주 볼 수
있는 상태로 되돌아 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말에 좌지우지되다가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조차 잊어버리고 말게 될 것입니다.
 인간으로 돌아갑시다! 서로를 사랑하는 인간다운 모습으로 다시 돌아갑시다! 여러분도
인간이고, 나 역시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훌륭한 일을 해낼 수 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그야말로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나는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가식 없는 자세로 돌아가서, 서로를 만져주고, 껴안아 주고,
서로를 웃음으로 맞이하고, 서로를 걱정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 오신 분들 중에서,
나를 껴안고 싶은 사람은 서슴지 말고 그렇게 하십시오! 나는 조금도 상관치 않겠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본래의 우리들 자신으로 돌아가고, 우리들을 다시 뭉칠 수 있게 하는
길이라면, 나는 하루 종일이라도 여기 서서 여러분이 하고 싶은대로 하도록 내 자신을
맡기겠습니다. 포옹을 하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내 말이 믿어지지 않으면 시험삼아 한 번
해보십시오!
  그리고 또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자신의 요구를 망각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나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각과는 달리 물질적
욕망은 사실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나 우리 자녀들의
물질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는 일에 거의 우리의 모든 인생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은 너무나 빨리 성장하여 알아볼 수조차 없습니다. 불현듯 올려다보면, 벌써
결혼하여야 할 성인으로 성장해 있는 것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 이리뛰고 저리뛰기에 너무나
바빠서 아이들 얼굴조차 제대로 못 보고 지내는 것입니다. 그 귀여운 모습을 보는 즐거움을
놓친 것이 이제 와서야 후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문화는 목표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문화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에게 알려 드리고 싶은 것이 한가지 있습니다. 인생은
여행이라는 사실입니다. 인생은 여행이며 과정인 것입니다. 인생은 죽음으로 다가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죽음에 이르렀을 때 얻는 것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들이 바라는
목표가 여러분들을 존경해 줄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캐딜락 자동차란 말입니까? 캐딜락은
아무런 생명이 없는 반려자입니다. 차문을 여닫고 운전대를 잡는 일조차 귀찮은 일입니다.
서로 바라보고, 만져보고, 서로 가까이 하고, 서로를 걱정해 주는 것이 어떤 것인지조차 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독감으로 죽어가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성취욕과 남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야만 하며, 그 일을 하는 가운데에서 기쁨을 얻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또한 사람은 자유롭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드로우는 "새장에 갇힌 새는 결코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라고 말했습니다. 인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배우기 위해서는 우선
자유로워야 합니다. 자유롭게 실험도 해볼 수 있어야 하고, 마음놓고 실수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학습하는 방법입니다. 나는 여러분의 실수를 이해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또한
내 자신의 실수로부터 많은 것을 배웁니다. 실수를 되풀이해서 하지만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나에게 내 자신이 되고자 하는 자유, 그 기쁨을
맛보고자 하는 자유를 허용해 주십시오. 나에게 당신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말하지 말고, 나로
하여금 내 자신의 문제를 발견하여 이를 극복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나는 이 장을 로스텐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끝맺음하고 싶습니다. 그 특유한 어조로 그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습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우리 모두는 약간씩 미쳤다. 모든 인간은 본래 외로운
것이어서, 남이 이해해 주기를 갈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자신 이외에 그
누구도 전혀 이해하지 못해,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조차 이방인 채로 남아 있다.
잔인한 자는 약한 자이다. 온순한 기질은 오직 강한 사람에게서만 기대할 수가 있다.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은 참된 의미에서 용감한 사람이 아니다. 왜냐하면 용기란 상상적인 것을 직면할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마치 그들이 어린아이들인 것처럼 스스럼없이 바라본다면 그들의 나이가
어떠하든, 신분이 어떠하든 간에 사람들을 좀더 잘 이해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 대부분이
키만 멀숙히 클 뿐 완전히 성숙한 인간은 없기 때문이다. 행복은 우리의 두뇌와 마음을
가능한 한 멀리까지 펼칠 때만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다. 인생의 목적은 그 무엇인가를
문제삼고, 그것을 따져 보며, 그것을 위해 투쟁을 하므로써 우리의 삶을 특징있게 만드는 데에
있다.


    @[자기 자신이 되어라@]

  쌩떽쥐베리는 "아마도 사랑은 내가 여러분을 자신으로 온전하게 되돌려 놓는 과정일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나는 사랑의 정의를 내리는데 늘 망설여 왔는데, 왜냐하면 사랑은 무한한
것이라고 여겨왔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보다 성장하고, 보다 아름다워지고, 더욱 대범해지면,
사랑도 그에 따라 변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정의함으로써 사랑을 일정한 틀에 묶어
놓는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쌩 떽쥐베리의 정의를 좋아합니다.
그의 사랑에 대한 정의야말로 가르친다는 것이 무엇이며, 상담의 진수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가르친다는 것과 상담이란 내가 바라는 대로 나의 이미지 속에 여러분 자신을
이양토록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여러분 자신에게로 자신의 독특함으로, 여러분이
원초적으로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으로 이끌어가고자 하는 과정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들을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으며, 우리는 곧 우리
자신을 포기하고 남들이 원하는 대로 소위, 적응이라는 형태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리들에게 "이래서는 안돼."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서 "안돼. 나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 될 수가 없어. 나는 나 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이 되고 싶다."라고 반항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나는 때때로 의구심을 품고 있습니다. 즉, 비록 우리가 반항을 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진실로
우리 자신인가 아니면 단지 우리 자신이라고 남에게서 들은 것에 불과한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나는 변화가 일어날 거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교사로서 우리는 변화가 있을 것을 믿어야
하며, 또 그것은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인식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학생들을 가르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육은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칠 때마다 피학습자는 이를 소화하여 새로운 인간으로 탄생하는 것입니다. 나는 왜
사람들이 열의를 가지고 배우려하지 않는지, 배움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일이라는
것을 어째서 모르고 있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교육은 변화의 과정입니다. 우리가
새로운 것을 배울 때마다 우리는 보다 새로운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이 자리에
참석함으로써 나는 어제의 나와는 다릅니다.
  이 모든 것을 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인간이 탄생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참모습으로서의
당신인가? 당신은 꾸준히 배워가는 존재로서의 당신인가? 아니면 사람들이 항상 말해 온
아무런 변화없는 그 모양 그 타령으로서의 당신인가?
  자신의 참모습을 찾는 일에 전념하는 것이야말로 인생에 있어 가장 보람된 일이라는 것을
나는 여러분들께 자신있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아직은 그리 불량하지도 않고 성품이 악하지도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대단히 선량합니다. 내가 한 말 중에 새로운 것이 있었나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나는 아무것도 새로운 것을 말한 것이 없습니다. 나는 다만 여러분 속에 이미
내재해 있는 것을 암시해 주었을 뿐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은 허심탄회하게 "그것은
사실이야, 왜 내가 그것을 가두어 두었지? 이제부터는 사람들을 포옹해 주어야지."라고 말하는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의 잠재 능력을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잠재의식은 본연의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말해 주고 있으며, 본연의 자기로
돌아가 더욱 성장할 수 잇도록 허락하고 있습니다. 본연의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이 옳은
일임을 깨우쳐 줄 사람을 마냥 기다려야 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오늘 "사랑은 학습되는 것"이라고 말을 했는데, 그것은 사실입니다. 학습되는 것은
사랑뿐만이 아니라 두려움, 편견, 증오, 책임감, 관심, 범행, 존경, 친절, 우아함 등 모든 것이
학습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사회에서, 가정에서, 대인 관계에서 학습되는 것입니다.
대개 한 살 내지 두 살 때부터 말을 배우기 시작하는데, 이때부터 말은 정서적, 지능적인
내용을 내포하게 됩니다. 말로써 환경을 구성하고, 말로써 평생을 살아가며, 울타리 안에
가두어 두는 것도 말이요,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는 것도 역시 말입니다. 이것은 더할 수
없이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누구냐 하는 자기 개념 역시 대개 가족들로부터 습득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가정은
막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 누구도 부모가 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아기를 낳아 부모가 됩니다. 부모로서의 책임감을 느끼지만 인격이라는 체를 통해
걸러지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내가 오늘 아침에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여러분
자신을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인간, 가장 고귀한 인간, 가장 경이로운 인간, 누구보다 더
많은 사랑을 베푸는 인간이 되는 일이라고 말했던 이유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자녀나 여러분이 접하는 사람들에게 베풀게 되는 것은 여러분의 인4격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운명을 지배하여 여러분이 원하는 인격의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잠시 멈추어 서서 "아냐, 이런 짓을 해서는 안 돼, 더 이상 이런 식으로
행동해서는 안돼, 나는 외롭다. 내 주위에는 사람이 필요하다. 앞으로는 태도를
바꿔야겠다."라고 반성해 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이러한 반성이 있은 다음, 여러분은
자의에 따라 이를 행동에 옮기고 이를 해내는 것입니다.
  나는 완전성의 개념에 놀라움을 금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완벽하게 해낼 수 없다는 이유로
인해서 무슨 일이든 그것을 지속하기를 꺼립니다.
  우리는 그것이 훌륭한 것이 못 될까봐, 그것이 남으로부터 인정받지 못 할까봐 두려워서
어떤 일을 하기를 꺼려합니다. 벽에다 잉크칠을 하고 싶은 기분이 들면 그렇게 하십시요. 그렇게
하는 것이 자기의 표현이며 그것이 바로 이 순간의 자신의 위치인 것입니다.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십시요. 그리고는 "저것은 나로부터 나왔다. 저것은 나의 창조이다. 내가
그것을 했다. 그리고 그것은 잘 한 일이다."라고 외치십시오. 그러나 우리는 완벽해지기를
바라기 때문에 이러기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이 완벽한 인간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인간은 물건이 아니므로 물건을 다루듯이 인간을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연약하고 상처받기 쉬우며 부드럽고 무서움을 잘 타는 존재입니다. 이처럼
약한 존재이기에 자칫하면 다른 사람의 가슴에 못을 박아 괴롭히기가 십상인 것입니다.
그러나 가슴에 못을 박은 바로 그 손으로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일 역시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닐 것입니다. 문제는 여러분이 못을 박는 인간이냐 아니면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사람이냐에 달려 있습니다.
  인간은 그야말로 불가사의한 존재입니다.
  다음으로 인간은 변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믿지 못한다면 교사로서의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매일 새로운 각도에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집 밖에 서 있는 나무는 항상
똑같은 나무가 아니라고 생각하여야 합니다. 태초 이래로 똑같은 모습의 저녁 노을이
두번이었던 적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모습의 저녁 노을을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물들이 변화의 과정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있어서의 투자는 변화에 대한 투자입니다. 나는 너무나 바쁘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
관심을 둘 겨를이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제쳐 두기로 합시다. 태평성대가
있기를 기대하지 맙시다. 인생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변화를 하는 한 새로운 변화에 계속
적응해 나아가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늘 새로운 장애물에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삶의 기쁨인 것입니다. 일단 변화를 시작하게 되면 멈출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운명입니다.
여행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행은 얼마나 멋있는 여행입니까? 하루하루가
새롭습니다. 꽃마다 새롭고, 만나는 얼굴마다 모두가 새롭습니다.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마다
모든 아침이 새롭습니다.
  허버트 오토는 "사람은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인생에 도전을 할때 변화와 성장이
이루어진다."라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멋있는 말입니까? 자신의 인생에 도전을 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환희이며 기쁨과 경이로움으로 가득 찬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모험이란 두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험에 의해 미지의 것을 다루게 되고 자기 만족을 느낄 수 있으므로
경이로운 일이기도 한 것입니다. 편안히 앉아서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되어 가고 있어. 좋은
직장도 있고, 자동차도 가지고 있으니까." 하고 느긋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과감히 변화하기를 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어느 순간엔가는 이와 같은 것이 당신이
바라는 가치관이 아닐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변화를 함으로써 자기 만족을 공감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사랑이라는 단어의 반의어는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무관심은
무언가를 남에게 주는 일이 절대로 없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누구를 증오한다면, 그 사람에
대해서 어떤 감정이 있게 되거나, 또는 생각을 바꾸어 더 이상 미워하지 않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증오에는 의사 소통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접근할 방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처해 있는 환경이 마음에 안들거나,
외롭거나, 변화의 느낌이 들지 않는다면 환경을 바꾸어 보십시오. 배경을 다시 색칠하고 배우도
바꾸십시오. 대본도 새로 쓰십시오. 이렇게 쓴 연극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즉시 무대에서
내려와 연극을 다시 쓰십시오. 사람의 숫자만큼이나 연극도 수백만 가지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또 다른 하나의 이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신병원에는 수용자가 날로 늘어가고
있습니다. 나는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자살방지 연구소"에서 일한 적이 있는데, 그때에 전화는
밤낮을 안 가리고 쉴 사이 없이 울리면서 여기저기에서 심상지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려 왔습니다. 우리는 기회를 놓치고 있습니다. 그 이유중 하나는 조건부적인 사랑 즉"당신이
만약에.... 하다면, 나는 당신을 사랑하겠다."는 사고방식 때문인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무조건
사랑합니다. 당신이 천치바보이든, 넘어져 코가 깨지든 못된 짓을 하든, 당신이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던 간에 나는 당신을 무조건 사랑하겠습니다."라고 말해 주는 사람을 평생에 단 한
사람이라도 만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우리는 결코 우리의 인생을
정신병원에서 마치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결혼은 이러한 것이라야만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어떻습니까? 가정도 마땅히 이러한 것이라야만 하는데 과연 그렇습니까? 그 어느 사회도
그렇지가 못한 것이 분명합니다. 사회는 이 같은 현상에 대한 책임이 큽니다. 우리 평생에
우리를 "무조건"사랑해 주는 사람을 단 한 사람이라도 만난다면 이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가정이란 우리가 돌아갈 때는 언제나 우리를 반갑게 맞아들이는 곳이라야 한다." 라고 한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정에 대한 정의에 나는 공감합니다. 가정은 비록 바보 같은 짓을 했지만,
나는 그런 것을 말하고 싶지 않아요.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그래서 나는 있는 그대로의
당신을 받아들이려고 해요. "내가 의미하는 인도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에게 진정한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그러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나는 지금 무슨 거창한 문제를 말하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극히
사소한 일, 즉 자기자신을 그대로 보여주는 방법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만
관심을 가져주어도 사람들이 얼마나 만족해하는가는 이미 말했습니다. 손가락 하나로 둑을
막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은 성취감을 필요로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무언가
잘한다는 데 대해서 남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그 점을 우리에게
지적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따금 우리를 찾아와서 우리의 등을 다독거려주며 "그것 참
잘하셨군요. 아주 마음에 드는데요."라고 말해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배우고 변화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또한 자유가 필요합니다. 배우기 위해서는 자유로워야
합니다. 사회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법과 개인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법은 각기 다른
것입니다. 또한 나는 인간은 자양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 점을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는 남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동정을 받을 필요가 있으며, 누군가 우리를 만져줄 사람을
필요로 하며, 또한 진정한 사랑을 입증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마음이 선량하고 다부지며 무한한 사랑을 가지고 있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평범한 아이들이 얼마든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다음은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갈길이 있다는 점입니다. 자기 자신을 발견하여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많습니다. 여러분은 누구나 다 자신의 길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누구에게도 그들의 길을 여러분에게 강요하도록 허용해서는 안됩니다.
  남을 도와주고자 한다면, 다음과 같은 일을 실천하는 일로부터 출발하여야 합니다.
  첫째, 자기 자신의 생각이나 가치관 따위를 남에게 강요해서는 안되고 진실해야 하며 남의
말을 경청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가지 상징들이 있는데 언어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입을
잘못 열므로써 엄청난 실수를 범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상대방을
주시하면서 서로 공감을 느끼는 편이 훨씬 좋습니다.
  금명간에 나는 모든 일을 떨쳐버리고 인간의 공감에 대해서 연구하기로 결심했는데, 그
이유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말이 여러분들에게 전달해 주는 공감 못지 않게 인간들
사이에는 많은 공감이 존재하고 있다 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공감을 일으키는 비결을
알게 되면 언어보다 효과적인 의사 전달 수단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나는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이 몹시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침묵을
두려워하고 침묵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침묵한다면 아름다운 일들이 계속될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상담자이어서 상대방이 말을 해주었으면 하고 생각할 때에는 조용히
침묵을 지키면 됩니다. 잠시 후에는 입을 열기 마련인 것입니다.
  진실해야만 합니다. 가식적이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자신의 참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참된 자기가 아닌 다른 어떤 인물로 가장하려는 행위입니다.
당신의 실체에 더욱 가까워질 수 있는 바와 같은 그러한 길을 택해야만 합니다. 이
길이야말로 인생을 쉽게 사는 방법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은
자기 자신을 간직하는 것인 반면에 가장 힘든 일은 남이 바라는 바의 인간이 되고자 하는
일입니다. 그 누구도 당신을 그런 지경에 빠지게 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자신을 찾으십시오. 참된 자신의 모습을 찾아 그 참된 모습을 보여주십시요. 그렇게
되면 당신의 인생은 편해질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리처드 알퍼트의 말처럼"유령을
감추는데 소모되는 정력을 다른 일에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감추어둘 유령이 없게 됩니다. 더이상 유치한 짓은 안하게 됩니다. 그 따위짓거리는 말끔이
씻어버리고, "여기에 내가 있다. "나를 보되 모든 약점이 있는 인간, 어리석은 인간, 사실
그대로서의 인간인 나를 보아 달라. 만약에 그럴 수 없다면 내 곁을 떠나라." 라고 호탕하게
말하십시오.
  또 한가지, 명령조로 어떤 사람에게 어떤 일을 시켜서는 안 됩니다.여러분은 신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상대편의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안내를 해줄 뿐 명령을
해서는 안 됩니다. 상호 뜻이 통하도록 노력을 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십시요.
  마지막으로 여러분은 팀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인간 관계는 협동심을
가질 때에만 성공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고자 하는 일을 계획함에 있어서 중지를 모으려
함은 혼자서 생각할 때보다는 여럿이 함께 생각할 때가 더 많은 지식과 힘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사소한 일을 가지고도 같이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팀을
구성하자면 몇 가지 일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장애아 부모들에게 올바른 처방전을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최소한 그 방법만이라도 제시해 주어야 합니다. 무엇이든
숨겨서는 안 되고 사실 그대로를 알려주어야 합니다.
  예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 감각기관들을 이용하여 보고, 듣고, 만져보고, 느끼는 방법을
연습함으로써 완전함을 추구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우리 손으로 창조함으로써, 자기 패배적인 
태도를 탈피할 방법을 모색하고, 자기의 아내나 자녀들 그리고 친구들에게 하는 자신의 말에 
조심을 하며, 남이 하는 말에 경청하고, 자기에게 말을  걸어오는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자신의 투쟁 과정을 중시하며, 이러한 투쟁의 노력으로 인해 목적지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짐으로써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열심히 일하지 않고서는 손에 흙을 묻히지 않고서는 그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참된 자아가 되는 길에 대해서는 어떤  공식도 없고 아무런 안내 책자도 
없습니다. 나는 다만 한가지 사실만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나는 존재한다. 나는 여기에 있다. 
나는 변화해 가고 있다."라는 것만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내 인생을 내 스스로 창조하며 그 
누구도 내 인생을 대신해서 살 수 없습니다. 나는 내 자신의 부족한 점, 실수 그리고 나의 허물을 
직시해야만 합니다. 나의 죽음을 나만큼 슬퍼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내일은 또 다시 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각오를 새로이 하여 삶을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비록 실패할지라도 남을 
비난하거나 인생을 저주하거나 신을 책망하는 안이한 태도는 가지지 말아야겠습니다.


    @[자아의 추구 바로 그곳에 빛이 있다@]

  우리 모두는 누구나 엄청난 사랑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말 그대로 사랑의
잠재력은 다른 잠재력들과 마찬가지로 이를 실천하고자 노력하지 않는 한 영원히 잠들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서로서로 배우는 것입니다. 사랑은 학습되는 것이므로 서로가 각기 다른 각도에서 사랑을
터득하는 것입니다. 나에 못지 않게 여러분들은 나에게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을 많이 가지고
계십니다. 바로 이 때문에 진정 사랑은 나누어 가지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정한 의미로써의 사랑의 실천자라면 여러분은 최상의 자신을 주고 싶어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독특한 개성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경이로움을 발전시켜 나아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실로 모든 인간은 교육을 받은 바가 각기 다르므로 사람마다
특이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그의 독특한 개성을 좀더 일찍이 깨우쳐 주고,
그것을 발전시키는 방법을 가르켜주고, 그 독특한 개성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도록 지도해 주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여러분을 가로막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므로 여러분은 늘 흥분에 차 있으며, 나누어 줄 그
무엇을 늘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기를 추구함이 없이 남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역할만을 하다 보니까 자기 자신을 상실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아를 영원히 상실해 버리는 일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상실했어도 그것은
순간적일 뿐입니다. 다시
찾고자 한다면 언제든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일단 소유했던 것은 잃지 않는 법입니다.
때때로 가슴속에 커다란 공허감을 느끼거나, 창자를 끊는 듯한 고통을 느끼거나, 소리쳐
떨쳐 버리고 싶은 그 무엇이 있을 때에는 내면의 본질적인 자아가 이렇게 외쳐대는
것입니다. "내가 아직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 너의 내면 깊은 곳에서 눈을 뜨고 나를
보아라, 나를 발전시켜라! 나를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너는 인생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조금은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인 자아를 끌어내야만 한다. 이곳 깊숙이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라고.
  회교도 수피(Sufi)파라고 작은 책자들을 읽어본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 지는 모르겠으나, 이
책들은 읽기에 재미있는 우화들로 되어 있습니다. 그 이야기들은 이름을 몰라라고 하는 한
왜소한 체구의 미치광이 남자에게 벌어지는 일들을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들 중에
신랄한 풍자적인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이야기들 중에 신랄한 풍자적인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물라가 그 무엇인가를 찾으면서 길바닥을 기어다니고 있을 때, 한 친구가 기인한
생각이 들어 그에게로 다가와서 "여보게 물라, 자네 지금 뭘 찾고 있는 건가?"라고 물어
봤습니다. 그러자 물라가 "열쇠를 잃어버렸다네."라고 대답했습니다."오! 저런 참 안됐군, 나도
같이 찾아주지."라면서 또 그 친구도 땅바닥을 기어다니다가, "여보게 물라, 자네는 그걸
어디서 잃어 버렸나?" 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물라는 "우리 집안에서 잃어 버렸지." 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친구는 어이가 없어서 "그런데 왜 여기서 찾고 있는 거지?" 라고
반문했습니다. 그러자, 물라는 "이곳이 더 밝기 때문이라네." 라고 엉뚱한 대답을 했습니다.
  괴상한 말이기는 하지만, 이는 우리의 인생과 관련이 있는 의미심장한 말인 것입니다.
우리가 찾고자 하는 모든 것이 찾기 쉬운 밝은 곳에 있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자기 자신에
대한 유일한 해답은 오직 자기 자신속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자아를 찾되 그것을 외부에서
찾지 마십시오. 여러분 자신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알려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로지
여러분만이 그 해답을 알고 있습니다. 짐을 꾸려 자신으로부터 도망칠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잘못입니다. 네팔의 산 꼭대기에 올라, 잠시 후 네팔에 와 있다는 도취감이 사그러진 다음
마음의 거울 속에서 접하는 얼굴은 과연 누구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여러분 자신의
얼굴입니다. 모든 역경에 시달리고, 무서워 떨며 당황해서 어쩔줄을 모르고, 고독에
몸부림치는 이것이 바로 여러분의 모습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자신의 참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의미있는 일이 되는 시기인 것입니다. 본질적인 것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
내부에 있습니다. 그러나 진아는 내면 깊숙이 어두운 곳에 있어 그것을 찾기란 용이하지가
않습니다. 그것을 찾는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의 전
교육과정을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자아에 관한 교육을 하는 수업시간을 가져 본 일이
있습니까? 학교에서는 수학을 가르치는데, 내가 그것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고 감히 말하는
것은 그것 없이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걸 몰랐단 말입니까?
  도서관에 가서 성전들을 모두 쌓아놓고 성전들의 내용 중에서 공통된 점들을 찾아보면
희한하게도 공통된 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예수는 이르기를, "인생을 찾으려면 너의 내부를
들여다보라." 라고 했는데 석가도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히브리 성서, 코란 경전, 지타
성전, 죽은 자에 대한 티벳 성서, 도교 등 모든 성전들은 한결같이 "자기를 벗어난 여행은
무가치한 여행이며 이러한 여행은 숲속으로 인도하여 결국 길을 잃게 된다는 것, 그러므로
자기 문제에 대한 해답은 외부가 아니라 자기 내부에서 찾아야 한다." 는 것을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무엇을 본질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우선 무엇보다도 우리가 본질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고 또 이를 위해 우리 대부분의 생활을 바치는 것으로 육체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육체(물질적인 것)을 본질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때문에 매디슨
아벤뉴를 풍요롭게 하기 위하여 너무나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육체는 달구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본질적인 것(자아)을 싣고 다니기 때문에 훌륭한
달구지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구지 그 자체가 본질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본질적인 것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배움을 본질적인 것이라 생각하여
학문에 몰두합니다. 그러나 지식은 지혜가 아닙니다. 우리는 지식을 본질적인 것으로 잘못
생각해서 우리의 마음을 지식으로 채우는 일에 평생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식은
대부분이 별반 쓸모없는 정지된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정지된 것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내부로 파고들어 오려는 새로운 것들은 이 낡은 정지된 지식의
그물에 걸려 들어오지 못하므로써 변화하기가 힘들게 됩니다.
  나는 종종 사람들에게 "당신은 참된 의미로서의 당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바와 같은 사람으로서의 당신입니까? 라는 질문을 자주 합니다. 사람들 중에는 우리가
누구인가를 말해 주느라고 평생을 낭비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개중에는 그 일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도 있고, 이와 같은 일을 무의식중에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알고 있는 지식이 실체라고 믿어 그 외의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면, 여러분의 지식은 오히려 자신의 발전에 방해가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와
같은 정지된 지식을 통해서는 성장과 발전을 기할 수가 없습니다.
 지식은 지혜가 아닙니다. 학문만이 지혜는 아닌 것입니다. 지혜란 지식과 사실을 병용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지혜란 또한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가슴을 열어라, 나는 현재 위치가 어떠하든지간에, 나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내가 지금 알고
있는 것보다 깨달아야 할 일이 수백배는 더 있다."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입니다.
  학식이 인간의 전부가 아님이 분명합니다. 우리 문화에서는 변함없는 쾌락을 필수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쾌락 추구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쾌락 외에 다른
할일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기분이 나빠도 약을 먹거나 술을 마십니다.
누군들 고통을 즐기랴만은 우리의 문화는 고통을 지나치게 혐오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고통을 사서 하자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쾌락을 배우고 싶은 심정입니다. 쾌락은
훌륭한 교사인 반면에 절망 또한 그것에 못지 않은 훌륭한 교사입니다. 경이감이 훌륭한
교사인가 하면 당황 또한 그러합니다. 희망, 환멸, 인생, 죽음이 모두가 훌륭한 교사들인
것입니다. 이것들 중에 그 어느 하나를 부인한다는 것은 인생을 완전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 문화만큼 인생을 충실히 살지 못하고 낭비하는 문화는 없습니다. 인생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허다합니다. 우리는 생활을 보장받고 있습니다.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큰 저택이나 많은 돈 따위의 재산이 본질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중요한 목표가 본질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절박한 운명에 대비하는
일에 일생을 낭비하는데, 운명은 대문 밖에서 들어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보잘것없는 일을 하는 동안 어느덧 우리는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진정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오직 실재하는 것은 현재뿐이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어제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에 대해서는 어쩌는 도리가 없습니다. 과거는 과거대로
좋았습니다. 왜냐하면 과거가 있으므로써 현재의 내가 있기 때문입니다. 남이 뭐라든간에
지금 이곳이야말로 내가 있어야 할 정소인 것입니다. 비록 과거에 대해서는 어쩌는 도리가
없습니다. 과거는 과거대로 좋았습니다. 왜냐하면 과거가 있으므로써 현재의 내가 있기
때문입니다. 남이 뭐라든간에 지금 이곳이야말로 내가 있어야 할 장소인 것입니다.
비록 과거에 대해서 손을 쓸 수 없음은 사실이지만, 이미 과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내일은 어떻습니까? 내일에 대해서 꿈을 가진다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그러나 내일은
내일에 존재하는 것으로 지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제와 내일로 인해 현재를 꿈결
속에 보낸다면 현재의 것, 지금의 나를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손으로 만져볼
수 있는 실체인 것입니다. 내일은 짙은 안개 속에 가려져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일에 너무나 몰두해 있다고 생각하니 애석합니다. 우리는 다음 순간에 어떤
일이 일어날는지 전혀 모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은 한 번 지나가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도 또한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나는 여러분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습니다. 어쨌든 나는 내 자동차가 나의 본질적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내가 받은 교육이 나의 본질적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내가 받은 교육이 나의 본질적인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나에게 있어서
본질적인 것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나 그대로의 모습으로 지금 이 순간을 살면서 삶을
포옹하는 것이 나에게 있어 본질적인 것입니다. 나는 지금 이 순간의 나의 삶을 두 팔로
포옹하고 있습니다. 어제 일로 울고불고하며 시간을 낭비하지는 않겠습니다. 어제는
어제로써 끝난 것입니다. 나는 나의 과거를 용서하렵니다. 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사람들도 용서하렵니다. 나는 남은 나의 인생을 남을 책망하거나 손가락질하는 일로
보내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부모님들이
자기들에게 한 서운했던 일들을 두고 불평하는 것을 들으면 불쾌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부모님들이 여러분들에게 어떤 일을 해주셨는지를 아십니까? 그들로서는
할 수 있는 최대의 것을, 알고 있는 최상의 것을 여러분들에게 해주신 것입니다. 정신병자가
아닌 이상 자녀들의 마음을 일부러 상하게 하려는 부모는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부모님들을 용서해 드릴 수 있겠습니까? 부모님들에게 괜찮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분들도 인간이다" 라고 하는 이해심을 가지고 그 분들을 포옹해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이럴 수 있는 다음에 여러분 자신을 포옹해 주십시오.
  여러분은 누구나 특이하며 유일하고 신비로운 존재라는 것을, 이 세상에는 "나"와 똑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 인간이라는 사실을 망각하는 일도 있겠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의 상태가 어떠하든가에 성장할 수 있는 잠재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본연의 모습에 크게 가까워진 것입니다.
찾아내야 할 것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우는데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들을 포옹해 주고, 자기 자신을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완벽한 인간이
아니기에 용서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자신의 인생에 맡겨진 의무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본질적인 것은 바로 여러분 자신의 삶인 것입니다.
  앞으로라도 다시는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해주지 않는다며, 과거에 여러분이 누구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은 문제되지 않습니다. 앞으로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는다면 과거에
어떤 실수를 했던지 문제가 안됩니다. 배우기를 계속하는 한 여러분의 인생을 기꺼이
맞아들여 입을 맞추어 주고, 그 시점으로부터 출발한다면 성장과 여러분의 참다운 인생이
있는 것입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 또한 본질적인 것입니다. 끔찍스러운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인생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음은 우리들에게 한계가 있음을 깨우쳐 줍니다.
  그러나 우리는 생활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기 때문에 죽음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이 죽음을 다루는 방법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늘 눈물을 글썽거리며 평생동안
죽음의 사신인 신천홍을 목에 걸고 다닙니다. 죽음은 인생의 다른 일면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영혼은 육체를 떠나서 계속 존재하며, 죽음은 우리에게 삶을 계속하도록
가르쳐 줍니다.
  나의 어머니가 나에게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어머니는 이태리인
특유의 크고 아름다운 눈을 뜨시고, 두 뺨에 눈물을 흘리고 있는 나를 보시더니 이렇게
물어보셨습니다. "헬리야, 너는 무엇을 붙잡고 있니?" 라고. 이 말의 뜻을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무엇을 붙잡고 있는 것일까? 죽음은 무엇을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일까? 죽음은
무서워할 일이 아닙니다. 죽음은 우리들에게 시간의 소중함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시간을 영원히 간직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죽음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항상 같은 모습으로 남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우쳐 줍니다. 우리는 서로를 보지 않고 있습니다. 일에 너무나
집착해서 일손을 멈추고 서로를 볼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현재의 모습을 영원히 간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은, 아침이면 이미 같은 얼굴이 아니고 여러분들의
얼굴 역시 어제와는 같은 얼굴이 아닌 것입니다. 순간순간의 얼굴들을 놓치지 마십시오.
밖에 서 있는 나무들은 신비로운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 나무들을 바라보는 순간마다
마치 마법을 보는 것과도 같습니다.
  죽음이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찾아오게 마련입니다. 죽음은 사랑이
무엇인가를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사랑은 팔을 벌려 사람을 반기되, 사랑은 자유입니다. 팔을
벌려 맞아들이되 사람들이 들어오든 가버리든 그들 좋을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십시오.
여러분은 이래라 저래라 할 아무런 권한이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을 그대로 죽도록
버려두지는 않겠습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을 붙잡고 있습니까? 인생을 경험하고 그리고
번민도 하고, 비명도 지르고, 울기도 하십시오. 그렇게 인생을 사십시오. 내가 본질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경이로움 속에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것들이 모두
신비로운 것들이지만 그냥 지나치도록 내버려둡시다. 아시아 사람들이 인생은 커다란
강이어서 인간이 무슨 일을 하건말건 인생은 강물처럼 흘러간다고 말을 합니다. 우리가
강물과 함께 흐르기로 결정한다면, 우리는 평화와 기쁨과 사랑 속에서 살 수 있으나 강물에
역행을 한다면 번민과 절망속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강은 이에 개의치 않고 유유히 흘러갑니다. 인생 또한 그러합니다. 어떤
경우이든간에 우리라는 시냇물은 결국 모두 바다로 흘러들어 갑니다. 어떤 길을 택하느냐
하는 것은 여러분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끝으로 인생으로부터 취하는 것뿐만 아니라 인생에게 그 무엇인가를 되돌려 주는 것이 또한
본질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돌려줘야 할 우리의 책임을 망각해 왔습니다. 나는 내가 도와주고 있는
자선단체들이 있는데 돈을 외국으로 보내야 하기 때문에 소득세를 면제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미쳤다고 합니다. 극히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주는 방법을 까맣게
잊고 있습니다. 내가 사랑을 주는 것은, 내가 여러분을 사랑하기 때문인지 여러분이 그에
대한 보답으로 나를 사랑해 주기를 기대하기 때문인 것은 아닙니다. 내가 만약에 뭔가
보답을 바란다면 난 분명 불행해질 것입니다.
  바라지 아니하면, 모든 것을 얻게 된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고자 하기에
사랑하는 것이고 주고자 하기에 주는 것입니다. 꽃들이 피는 것은 사람들이 예뻐해 주기
때문에 피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섭리인 때문입니다. 그러고자 하는 의지가 있기에,
그래야만 하기에 살고 또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나는 말을 즐겨하며, 마로가의 유희를 좋아해서 본질적인 것에 이르는 지침이
될 만한 말들을 몇 마디 적어 놓으려 합니다.

  1.올바른 지식: 인생 항해에 필요한 도구를 제공해 준다.
  2.지혜: 과거의 축적된 지식을 이용해서 현재의 자아를 발견하는데 커다란 도움이 된다.
  3.연민: 인생을 살아가는 도중, 우리와는 습관이 다른 우리 주위의 사람들을 부드럽게
이해심을 가지고 받아드릴 수 있도록 해주는데 도움이 된다.
  4.조화: 인생의 자연적인 흐름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준다.
  5.창조력: 인생의 여정에서 곤경에 처했을 때 차선의 방법을 선택할 수 있고 지도에
나타나지 않은 길을 찾아낼 수 있도록 해준다.
  6.힘: 두려움을 이겨내고 아무런 보장이나 보수를 받지 않고서도, 장래에 대한 확신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과감히 전진할 수 있도록 해준다.
  7.평화: 안정을 유지하도록 해준다.
  8.기쁨: 인생을 콧노래로 부르며 웃으며 춤을 추듯 유쾌히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준다.
  9.사랑: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양심 수준까지 이를 수 있도록 계속 안내를 해준다.
  10.결합: 우리가 출발했던 당초의 지점으로 다시 데려다 줌으로써 인간을 포함한 삼라만상과
일체가 되도록 해준다.

  그러므로 사랑의 연구는 인생의 연구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고, 인생을 산다는 것은 사랑하며 사는 것을 뜻합니다.
  인생은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참되게 사는 길이
하느님께 드리는 최대의 선물인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멋있게 삽시다!


    @[본질적인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이 "외부로의 여행"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음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외부로의 여행에는 재물을 얻어 부자가 되거나 재자가인이 되는 일이 포함돼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생활의 안위를 위해 필요한 물건은 거의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질의 풍요가 우리들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 주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몹시
고독해 하고, 방황하고, 당황하고 있습니다.
  다른 방향으로 여행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내부로의 여행" 입니다. 내가
내부로의 여행에 커다란 흥분을 느끼는 것은 평생동안 아동에 대해 연구한 결과 우리가
아이들에게 제공해 줄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치 있는 유일한 것은 재산이 아니라 우리의
인격이라는 사실을 자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이들에게 물질적인 것을 주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우리의 지혜에
의해 물질적인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아이들과의 관계에
있어, 우리가 그들에게 제공해 주어야 하는 가장 필수적인 것은 우리가 누구이고 어떠한
인간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보려는 일에 진정한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들을 접하게 되면 마음 든든합니다.
  내가 존경하는 분 중에, 체구가 작은 노인인 벅민스터 풀러라는 분이 계신데 이분은 한때
나와 같은 대학에 계셨습니다.
  그분은 "새터데이 레뷰 월드(saturday review /world)"지에 훌륭한 기사를 쓰신 일이
있습니다. 그 기사는 78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 인간이 독특하고 경이로운
존재가 되는가 하는 문제에 정열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는 벅민스터 풀러의 전형적인
글이었습니다. 그분은 어찌하여 우리 모든 인간은 그토록 신비하며 어떤 사람을 진실로
이해하게 되면 그 사람은 남과는 달리 특이하고도 신비스러운 존재가 되어서 사랑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 하는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그
누구도 여러분의 생활 내부로 들어오도록 허용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다른 사람에게는
찾아 볼 수 없는 그의 독특한 개성을 결코 파악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내가 내 인생에
있어 여러분을 필요로 하는 것은 여러분이 없다면 내 인생은 결코 완벽해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의 진아를 발견할 때만이 여러분은 나에게
나누어 줄 것을 가지는 것입니다. 물론 나도 내 자신의 진아를 발견해야 합니다. 왜 나는
책을 읽나? 왜 나는 여행을 하나? 왜 나는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관심을 가지는 걸까?
그것은 더욱 여러분과 인생을 공유하기 위함이며, 그것이야말로 인생을 사는 유일한 목적인
것입니다.
  또한 아이들에게 우리의 진아를 나누어주려면, 우리 자신의 내부에서 우리의 진아를
발견해야 할뿐만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그들의 내부에서 그들 자신의 진아를 발견하여
발전시킬 수 있고, 진아의 경이로움을 만끽하여 그것을 남에게 나누어 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자유롭게 내버려 두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이를테면 여러분 자신의 본질을 완전히 파악하고 나서야 아이들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결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전문가들은 외적으로 나타나는 국부적인 것들만을 가지고
아이들을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음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부분으로 분할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전체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단편적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제각기 자신의 눈을 통해서만 본질을 보고 있습니다. 눈은 지극히 부정확하고,
일관성이 없는 아마도 우리 신체 부위 중에서 가장 편견이 심한 감각기관일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생각보다는 본질적인 것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아이는 그들의 눈에
띄는 것 이외에도 훨씬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을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본질적인 것을 보지 못하게 가로막는 요인들로써는 어떠한 것들이 있을까요?
우선 나는 우리의 지식 즉, 우리가 배운 언어라든지, 우리의 중추신경을 통해 자각되는 모든
것이 그 첫째 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고착된 마음,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나는
최근에 지각에 관한 많은 흥미있는 책들을 읽었는데, 결국 나는 여러 책에서 이런 견해를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학생들에게 가르쳐 온 바와 같이 중추신경의 목적은 사실상
사물을 받아들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선별하는데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소위 선별지각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환경 속에 있는
사물들의 전체를 보지 못하고 극소 부분만을 보게 되는 이유인 것입니다.
  우리는 사실상 우리가 실체로써 지각하는 것을 존재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현 위치가 어떠하든간에 여러분은 이제 자아 자신을 발견하고자 하는 일을 이제 시작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들의 작은 감각 기관을 통해서, 여러분은 이제껏 꿈조차 꾸지 못했던 감각들,
이제까지 존재해 왔으나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경이로운 일들을 지각하고 냄새 맡고 맛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조만간에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마법처럼 어려운 일은 결코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능력을 터득해야 하고 발전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이 무지의 세계, 이 제한된 세계에 남이 있는 한은 그저 그런 것쯤으로
생각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우리의 자아 즉, 우리가 지금까지 쌓아온 바의 자아를 본질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의미의 참된 자아를 본질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의미의 참된 자아를 구축해 온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우쳐 드리고 싶습니다.
현재 여러분의 자아는 여러분 스스로가 구축한 것이 아니라 남의 구축해 준 자아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여러분들에게 너는 이러한 인간이 되어야지, 저러한 인간이 되어서는 안된다. 처신은
어떻게 해야 되고, 냄새는 어떻게 맡아야 하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어떻게 해야만 하는지에
관해서 사사건건 간섭을 하는 것입니다.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아시아 사람들이 말하는
식으로 "자아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아 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자신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신의 껍데기를 테이블 위에다 올려놓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아는 그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 주위에 거대한 성벽을 쌓아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이 벽을 진실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성벽에 갇혀 있는 자아가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것 이외에는 그 어느 것도 받아들이지 않으며, 새로운 지각이
들어올라치면 질겁을 해서 원래의 위치로 후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대부분은
인생을 통해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만을 보고, 듣고자 하는 것만을 듣고, 냄새 맡고자 하는
것만을 냄새 맡고자 고집하기 때문에 그 외의 모든 것들은 전혀 눈에 뜨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눈에 뜨이지 않는 바로 그곳에 우리가 찾고자 하는 것들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내서, 안아도 보고함으로써 지금까지의 태도가
아니라 이들을 있는 그대로 경험할 줄알아야 합니다.
  뭐니뭐니해도 본질적인 것을 보지 못하게 하는 가장 흉악한 악당은 무관심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주지 않겠다.""나는 지금의 내가 하는 방식대로 만족하고 있다." "도대체 누가
전율을 느끼기를 바란다는 말인가?" "전율 따위는 버스카글리아나 느끼라지 내가 알게
뭐야?" "꽃은 꽃이고, 나무는 나무란 말씀이야." "어떤 놈이 마흔네개의 저녁 노을을 보고
싶어한다는 말이야?"내가 나의 저서 "사랑(Love)"에서 말한 바와 같이, 나는 진정 사랑의
반의어는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사람들이 이 죽음보다
더 무서운 무관심의 상태로부터 깨어나게 하는 일입니다. 나는 증오라든지 분노, 절망 또는
그 외 어떤 감정도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감정이 없는 무관심만큼은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내가 자주 언급하는 R.D랭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인간은 인간이
되도록 짜여져 있으되, 주어진 문화나 부모 및 교사들에 의해서 권유받는 바와 같은 인간이
되는 것이다."그런데 무엇보다 끔찍스러운 일은 우리는 이러한 지식에 중독되어 우리 자신과
이 지식을 동일시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내부에다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닌 우리의 가족이나 문화, 친구등등에 속하는 수천, 수만가지의 것들을 쑤셔 넣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것들을 그냥 지니고만 다니다가, 나중에는 우리 자신의 것이 돼 버려
이것을 수호하는데 사력을 다하게 되고, 새로운 자아의 추구에 대한 도전은 회피할 정도로
무감각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완전의 전형들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는 외부의 세계를 우리의 완벽의 개념에
적용시키면서 인생을 낭비하고 있음이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들은 어떠한 날은 완벽한
하루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재수없는 날이란 어떠한 날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는 고달픈 날을 의미합니다. 하루가 우리가 뜻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며, 그건
재수없는 날이요, 만족감으로 채울 수 있는 날은 완벽한 날인 것입니다. 기대감은 스스로
강화되고, 이러한 기대감은 기대감은 우리의 굳어버린 습관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그 어떤
새로운 것도 우리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차단시키는 것입니다. 나는 이러한 경우를 수없이
많이 보았습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을 위해 아름다운 집을 짓기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을 하지만 막상 집을 다 짓고 나면 자녀들에게 그 집에 들어가 사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소파에 앉지 말라, 응접실에서 놀지 말라, 신발 벗어라, 저 방엔
들어가지 말라 하는 식으로 아이들이 그 집에서 편히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것입니다.
고착된 습관의 명령에 따라 모든 사람들이 대학에 들어갑니다. 대학에 못 들어가는 것을
수치스러운 일로 여기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대학이라는 공장으로 밀어넣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폐인이 되지 않으면, 대학 졸업 후에 폐인이 되고야 맙니다.
  어디를 돌아보나 우리는 제한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현상은 변경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여러분은 자신의 사고 방식을 바꿀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하는 것은
지극히 쉬운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고자 하는 결단력이 있어야만 합니다. 지금
당장에 여러분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십시오. "나는 경험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음식을
맛보기를 시작했다. 사람들을 경험하고, 하늘을 쳐다보고, 공기의 냄새를 맡아보고, 사물을
느껴보기를 시작했다.
잠자리에 뛰어들어 곧바로 잠들 것이 아니라 시트를 만져보고, 내 몸을 만져보고, 나를
인색하고, 나의 변화와 성장 그리고 내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일을 시작하겠다" 라고
말하십시오. 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것이 있는데, 우리들이 지극히 적은 것으로
만족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우리는 작은 공간만을 인식하고 이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물질적인 우리의 육체를 본질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도 물질적인 자아(육체)를 돌보는 일에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샤워를 하고, 몸에 향수를 뿌리고, 머리를 빗고, 치장을 하고, 악취를
제거하고, 옷을 입습니다. 이러고 나서야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는데, 일과를 마치면 아침과는
반대되는 동작을 되풀이합니다. 이건 전혀 쓸모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질적인 것은 우리의 육체가 아닙니다. 육체가 중요한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사고와 사고 방식이 중요한 것 또한 사실입니다. 우리의 위치가 어떠하든간에 현재가
중요합니다. 나는 "현재의 위치가 어떠하든간에" 하는 말을 사용하기를 즐겨합니다. 나는
여러분의 현재의 위치를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그곳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진아의 추구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다. 나는 나의 굳어진
습관과 한계성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위치에 있는 나를 사랑한다. 그렇다고 해서 내일도 이
자리에 머물러 있겠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다만 현재 위치에 있는 나를 사랑한다는 뜻일
뿐이다." 여러분은 이 말을 할 수 있기 전까지는 전진을 계속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바라는 단 한가지 소망이 있다면, 그리고 요술 지팡이를 가지고 있다면 나는 그
요술 지팡이를 모든 사람들을 향해 흔들면서 다음과 같이 말을 시키고 또 그것을 믿도록
만들고 싶습니다. "나는 지금 현재 위치에 있는 나 자신을 사랑한다. 나는 위대하다."라고.
  우리는 쉴 사이 없이 뛰는 가운데에도 마음은 생각들로 가득 차있습니다. 우리는 잠시도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갖 생각으로 가득 찬 머리를 가지고 잠자리에
들어갑니다 이 생각들을 떨쳐 버릴 방도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은 정체를 감소시켜 보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여전히 우리들 옆에 서서 "야! 이 멍청아!"라고 외쳐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마음으로부터 온갖 생각들을 비워버릴 수 있는 방법을 배워
두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정체로 인해 미쳐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잠시 앉아 있을 수도 없고 천방지축 하루 24시간 내내 걱정으로 지내게 될 것입니다. 가끔은
만사를 깨끗이 잊어버려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할 때 멋있는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여러분은 "아무것도"발견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모든것>을 발견하게 되는 데 굳이 애를 쓰지 않아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남다른 특이한 느낌이 들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잊어버린다는 두려움이 없이, 마음을 비우는 방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또한 우리는 안정욕구를 본질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안정욕구를 본질적으로 보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 문화에서는 매우 중요시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타성들을 안정욕구에 중독된 성인들로부터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을 우리 주변에
끌어들이는 것도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목표를 정해 둠으로써 우리는 안정감을 느낍니다.
  돈, 그것도 많은 돈을 가지므로써 우리는 안정감을 느낍니다.
  그러면 돈은 어떠한 것일까요? 내가 처음으로 아시아에 가서
"황소가 가는길(The way of the Bull)" 을 집필할 때 나는 하루에 35센트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지난 번에 아시아에 갔을 때는 하루 생활비로 20달러나 썼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형편이 좋아진 것은 아니었고 다만 체중이 늘었을 뿐이었습니다. 돈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돈이 좋긴 하지만 필수적인 것은 아닙니다. 안정이 깃들 곳은 오직 여러분
자신뿐입니다.
  안정은 바로 여러분 속에 내재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야말로 안정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곳입니다.
  이제 본질적이 아닌 것은 무엇이었던가를 정리해 봅시다. 정신적인 정체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고 우리의 육체 또한 본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계획이나 교육, 현재의 마음이나
물질적인 자아도 본질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감각이나 지각, 힘 또한 현재의
느낌이나 현재의 반응 따위도 본질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를 형성하고
있는 일부에 지나지 않을 뿐 이외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이러한
것들에 이미 중독돼 있다면 여러분들은 영원히 이것들을 지니고 다니게 될 것입니다.
이것들이 현재의 당신일 지는 모르나, 이들은 당신이 이룰 수 있는 지극히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실현한 것보다는 실현하지 못한 것이
더 많이 있습니다. 사실 실현된 것은 실현되지 않는 것에 비하면 그야말로 형편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자신과 어떻게 접촉할 수 있을까요? 첫째로는 인식을 통해서입니다.
인식이란 정말로 훌륭한 단어입니다. 인식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판단한다는 뜻입니다. 인생을
인식하며, 성장을 인식하며, 죽음을 인식하고, 아름다움을 인식하고, 사람들과 꽃과 나무들을
인식한다는 뜻입니다. 마음을 활짝 열고 보고 느끼기를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전과는 다른
태도로 모든 것을 경험하고, 만져보고, 느껴보고, 씹어봄으로써 성장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부단히 성장함에 따라 변화를 하는 것입니다. 마음과 가슴을 활짝 열고 팔을 벌려 모든
것을 한껏 포옹하십시오. 그렇게 함으로써 여러분은 결코 고갈될 줄 모르는 새로운 것들을
계속 받아들이고 또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받아들일 것은 무궁무진합니다. 나무 한
그루를 보더라도 그것을 볼 때마다 새로운 것을 더욱 더 발견하게 됩니다. 베토벤의
소나타를 들으면 이에 심취하게 되고, 시집을 꺼내서 읽으면 곧 도원경에 빠지게 됩니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수백, 수천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계속 성장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방법을 강구하십시오. 지금 여러분이 사용하고 있는 방법은 수많은 방법 중의
하나에 불과한 것입니다.
  나는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가장 훌륭한 대안, 가장 건전한 방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은 "만약에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그외에 다른 방법은
없을까?" 라고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고, 맞으면 맞고, 틀리면 틀리고, 정상이면 정상, 비정상이면
비정상식의 양단논법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단계적인 전환방법을 쓸 수도 있고, 여러
가지 가능성을 모색해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실에는 나보다 훨씬 정상적인 한 눈 먼 소녀가 있습니다. 그녀는 사리를 정확하게
판단합니다. "선생님께서는 볼 수 있는 것이 정상이듯이 저에게는 못 보는 것이 정상입니다."
라고 소녀는 말합니다. 도대체, 정상이란 무엇입니까?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리다는 말입니까?
  자유 행동에 대한 책임감만 있다면, 자유가 있는 한 자유롭게 여러가지 방법을 선택한
것입니다. 선택한 방법을 시험해 본 다음, 그 방법이 기대했던 것만큼 효과가 없었다 하더라도
남을 탓해서는 안됩니다.
  자기가 선택을 잘못했음을 탓할 뿐입니다. 그리고는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것입니다.
  결정을 내린 다음 화필을 들고 물감을 골라서 자신의 천국을 그린 다음 그 천국으로
들어가서 사는 겁니다. 지옥을 그려도 좋으나 다른 사람을 탓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그것은 여러분 자신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과거는 깨끗이 잊고 현재에 충실하십시오. 현재만이 이 일을 해낼 수가 있습니다. 인생은
고립된 현상이 아니라 순간순간 영향을 주고, 영향을 받기도 하는 전반적인 경험의 일부인
것입니다. 현재의 처지가 마음에 안 든다면 그 환경을 바꾸어서 다른 사람이 되십시오.
  변화를 위해 노력하십시오.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을 배우십시오.
  또 한 가지 일러둘 일은 역경을 피하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역경으로부터 많은
교훈을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역경을 만들어주는 사람들 역시 피하지
마십시요. 우리들은 이런 사람들에게서 등을 돌려 피해 버리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사람들이 있으므로 해서 자기 자신을 재평가하고 보다 더 새로운 각도에서 자기 자신을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이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은 이미 여러분 속에 내재해 있습니다. 그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그것을 인색해야 합니다. 그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그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은 완벽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완전함을 탐하는 것은 고통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 속에서 성장하십시오.
  마이너의 번역서 라오 추저 <The way>에 나오는 글을 인용함으로써 끝맺음하고자 합니다.
  이 책에서는 내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들을 보다 아름다운 문장으로 요약해서 말해 주고
있습니다. 지혜로 가득 찬 책들은 대개가 작은 책자로 되어 있다는 것은 아주 흥미있는
일입니다.
  내가 1시간 50분에 걸쳐 말한 내용을 라오 추는 50단어로 요약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존재란, 말로써는 정의하기 어려운 것이다.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 여러가지 단어들을
사용하지만 그 어느 것도 완벽하지는 못하다. 천지가 창조되던 태초에는 어떤 단어도
존재하지 않았다. 말은 물질의 자궁으로부터 태어났다. 인간이 냉정한 태도로 인생의 핵심을
보든지 아니면 무분별하게 인생의 곁껍질을 보든지간에 핵심이든 겉껍질이든 결국은 같은
것이며 오직 말로써 그 표현을 달리하고 있을 뿐이다. 만약에 이름을 필요로 한다면 그
이름을 경이롭게 하라. 그리하면 경이로움을 반복하는 동안 존재는 전개된다.
  만일 이름이 필요한 경우에는 경이로 하여금 그 이름을 짓게 하라. 경이감을 반복함에 따라
존재는 전개된다.

  여러분의 참된 자아는 무한합니다. 아동을 대상으로 하여 연구를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아동들은 인식의 고하를 막론하고 무한한 잠재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일은 아동들이 그들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이 사실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하여
그들이 도움과 지지와 격려를 필요로 할 때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그 이름이 경이로운 것이라면, 그들 모두는 성공하게 될 것입니다.


    @[장벽을 뛰어넘는 다리@]

  <내일을 향한 다리>라는 주제의 모임에 나는 대단한 흥미를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지난 4-5년 간 간격을 메우고 패인곳 위로 길을 놓고 장벽을 뛰어넘어 내가 접하는 사람들을
위해 인생을 보다 간편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헌신해 왔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내일을 향한 다리를 놓겠다는 정신으로 다리를 건설하고 장벽을 극복하는 일에 바친다면
훌륭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러기 위해서는 여러분 한 사람 한사람 모두가 참다운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다리를 세우는 일은 집단적인 노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나,
이 집단적인 일은 개개인 한 사람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집단으로써 이 일을 할 수 있기 전에 먼저 시작해야 할 일이 있는데 내 생각으로는
여러분이 우선 먼저 건설해야 할 다리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과 연결하는 다리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는 우리 자신에
대한 신뢰와 존경심이 너무나 빈약하다는 사실이 나를 괴롭힙니다.
  여러분이 거울 앞에 서서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라고 물으면,
거울이 "당신입니다, 아름다운 분" 하고 대답하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정도에 이르러야
합니다.
현재 여러분은 여러분이 바라는 만큼 키가 크지도 않고, 여러분의 다리가 여러분이 바라는
것보다 훨씬 굵더라도 여러분 자신이야말로 여러분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것입니다. 이 사실을 인식하게 되면 자신의 길을 꿋꿋하게 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자기 존중에 대해 강의를 하는 학교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나는 진정으로 나를 좋아한다.
나는 현재로써의 나뿐만이 아니라 나의 마법과 같은 잠재 능력을 사랑한다." 라고 떳떳이
말할 수 있는 모범적인 사람도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현 상태로써의 여러분일 뿐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여러분인 것입니다. 자신을 개발할 여지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책을 읽되 건성으로 읽지 말고, 무엇을
보되 건성으로 보지 말아라. 너는 무한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라고. 이러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이들에게 이 사실을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만약에, 그렇지 못한 사람이 이를 가르칠
한다면 그것은 가식적인 행위이므로 아무런 효과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인가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부터 훌륭한 인식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연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목적을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특별한 존재인 것입니다.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그 목적이 환상적인 것이라고 하면서
엉뚱한 말을 한다 하더라도 이에 흔들릴 필요는 없습니다. 환상이라도 좋으니 자기의 목적대로
사는 겁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위해 그 무엇인가 본질적인 일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그러한 존재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공헌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이 세상은 아직도 덜 짜인 색무늬 융단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차지하고 있는 조그마한 공간은 오직 여러분만이 메꿀수 있는 부분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간적인 속성, 광기, 불완전성, 고독 따위를 예찬하십시오. 그 무엇보다도 그러한
존재로서의 여러분 자신을 예찬하십시오. 나는 다름이 아닌 오직 나이기를 바라며 인간이기를
희망합니다. 나는 진심으로 인간을 사랑합니다. 인간이라 함은 완전치가 못해서 건망증이 심하고,
벽에도 부딪치고, 방을 잘못 찾기도 하고, 엘리베이터를 잘못 내려 3층에 내린다는 것이 6층에서
내릴 수도 있습니다. 이 같은 실수를 연속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속성인 것입니다.
  모든 것은 여러분 자신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연결되는 그 훌륭한 다리는 바로
여러분 자신의 다리인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만약에 내가 성장을 계속한다면
나는 더 많은 나를 여러분들에게 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지헤를 추구하는 것은
여러분들에게 진리를 더욱 장려해줄 수 있고자 하기 위함입니다. 내가 좀더 많이 인식하고 좀더
민감해짐으로써 여러분의 인식과 감수성을 좀더 잘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나의 인간적인 속성을 이해하고자 애를 쓰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여러분이 내 앞에
나타났을 때 여러분을 유일한 인간으로서의 여러분을 좀더 잘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계속해서 인생의 경이로움 속에 살고자 하는 것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여러분의 인생을 예찬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내 자신을 위해서 내가 하는 바를 여러분을 위해서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여러분이 하는 바와 같은 일을 나를 위해서 해주기를
바랍니다. 이것을 결코 이기적인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배워왔던 것은 여러분의
삶 속에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해 배웠던 것입니다.
  "나"의 껍질을 탈피하여 "우리"가 됩시다. 이것이 여러분 자신을 이해하고 또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힘은 거기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우선 자신을 연결해 주는 교량을 세우되 거기서 멈춰서는 안 되고 그
교량을 다른 사람의 다리와 연결시켜야 합니다.
  이제는 외부로 눈을 도려야 할 시대입니다. 바야흐로 다른 사람들과 연결하는 다리를
건설해야 할 시대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건설해야 할 두 번째 교량입니다. 하찮은 편견으로
자리멸렬하거나 나만이 옳다는 아집을 버리고 공동의 목적을 위하여 협력을 함으로써 구원을
받게 됩니다. 지난 수년 동안 내가 발견한 가장 중요한 사실 중의 하나는 항상 정확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근사한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항상 정확할 필요는 없고 이따금
정확하기만 하면 충분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내가 발견한 사실은 내 생각뿐 아니라 상대방의
생각도 옳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두 사람의 생각이 다 옳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두 개의
정의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아니 두 개의 정의가 아니라 이백개의 정의가 존재할 수 있고, 또
옳고 그름만이 아니라 옳은 것도 아니요, 그른 것이 아닌 그 중간의 것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이분법적 태도는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현상입니다. 우선 공통된 점을 찾아내야
합니다. 이 강의실에 있는 우리들 중에 똑같이 닮은 사람은 없지만, 그래도 여러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잇습니다. 우리가 출발할 수 있는 지점은 바로 이 공통점에서부터인 것입니다. 만약에
이러한 측면에서 접근한다면 가능할 것입니다.
  또 한 개의 나뭇잎일지라도 아무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무심결에 떨어지는 나뭇잎은
없습니다. 숨을 장소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 서로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거대한 진동이
사방팔방으로 울려퍼지고 잇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리를 건설하는 일에 착수를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벌어진 틈이 너무나 넓어져서 다리를 놓을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 혼자만의 힘으로는 큰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내일을 향한 다리"라는 제목은 아름다운
말이기는 하나 나는 "내일"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내가 진심으로 가지고 잇는 것은
오직 지금 현재 뿐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부모님들이 내게 그렇게 했다."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부모님들이 여러분들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여러분들은 알고 있습니까? 그분들은
그분네들이 알고 있는 바를 여러분들에게 해주셨습니다. 부모님들에게 하느님의 축복이
있으시기를 기원합니다. 부모님들은 완벽한 분들이 아니었을는지도 모릅니다. 여러분들이 실망을
느꼈던 이유는 아마도 여러분들이 부모님들을 완벽하신 분들로 오해를 했거나, 아니면
부모님들이 여러분들로 하여금 그렇게 생각하게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지나치게 자제를 하고 있는데 그것은 일종의 자기 학대와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해보고 싶은 일을 해보지도 못 하는데 이따금은 대담하게 행동을 할 필요도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걱정하고 있는 일들 중 90%는 결코 일어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온갖 걱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순간들이 모여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인생은 여러분의 수중에 놓여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원한다면 기쁨을 택할 수도 있고 또
눈에 보이는 어느 곳에서나 실망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인생은 여러분 자신의 것입니다.
카잔자키스는 "화필과 물감을 가지고 천국을 그린 다음 그 천국으로 들어가라."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물감을 쓰든 상관없습니다. 또한 언제나 새로운 물감을 선택하여 다시 그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나는 여러분들이 광적인 정열로 새로운 다리를 놓기를 바랍니다.
  또한 마지막 다리, 즉 모든 다리들을 연결시켜 주는 사랑의 다리를 놓아야 합니다. 도톤
와일더는 사랑의 다리를 다음과 같이 간결하고 명쾌하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삶의 땅과 죽음의
땅이 있는데, 이 두 땅을 연결해 주는 것이 사랑의 다리이다. 이 다리야말로 유일한 생존의
다리이며 유일한 의미를 가진 다리이다."라고.
  나는 다음의 말로써 이 장을 끝맺음하겠습니다. 인도에서는 인사를 하거나 작별을 할 때는 
두손을 합장하면서 "나마스테"라고 하는데 그 뜻은 "모든 우주를 품고 있는 당신을 존경합니다.
나는 당신이 당신 속에 있고, 나는 나 자신 속에 있으면서도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는 당신
속의 우주를 존경합니다."이라고 합니다. 우리들도 "나마스테"라고 인사합시다.


    @[완전한 인간이 되는 길@]

  사랑은 너무나도 포괄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한 마디로 정의를 내리기가 지극히 어렵습니다.
즐거움과 아름다움 속에서 살면 살수록 나는 더욱 더 훌륭한 사랑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날이 갈수록 더욱 더 훌륭한 사랑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정의한다는 것은 곧
사랑을 한정짓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사랑을 실천하다 보면 어떤 경지에 이르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내가 여러분에게 손을 뻗을 때 여러분들은 나에게 사랑의
새로운 의미와 새로운 개념을 주실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서 고독을 한 번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한 분도 안 계실 것입니다. 그런
분이 계시다면 오히려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한 번도 실망한 일이 없거나 한 번도 울어 본 일이
없는 분도 안 계실 것입니다. 반면에 한 번도 웃어 본일이 없다거나 기뻐해 본일이 없는 분도
안 계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든 감정을 통해 의사를 소통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같습니다. 적어도 난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완전한 인간이 되기 위한 투쟁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완전한 인간, 전인적인 인간, 바로 그것이 인간의 최대의 목표라 할 수
있습니다. 이보다 더 훌륭한 목표가 어디 있겠습니까?
  내가 생각하기에는 아마도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즐거움은 내가 전인적인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자신을 자각한 때인 것 같습니다. 내가 신이 될 수는 없지만, 완전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인간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완전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 내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관해서입니다. 
  여기서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야 되겠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이 말은 여러분에게는
충격적인 것이어서 싫어하실지 모르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나의 변함없는 신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시 '나를 사랑한다.'는 모험적인
말을 해야 되겠습니다. 가지고 있지도 않은 것을 남에게 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획득하는 일에 전력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든 것을 남에게 나누어 줄 수
있게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민감하며, 가장 경이롭고 신비로우며, 독특하고도 훌륭한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내가 가진 지혜가 없다면, 내가 여러분들에게
가르쳐 드릴 수 있는 것은 무지밖에 없을 것이고, 만약에 내가 기쁨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나는
실망밖에는 여러분들에게 가르쳐 드릴 것이 없을 것입니다. 내가 자유를 모른다면 나는 여러분을
새장안에 가두게 될 것입니다. 여하튼 간에 내가 가지고 잇는 것만을 드릴 수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획득해야 할 이유인 것입니다. 우선은 획득하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남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여러분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지각과 감각에 관해서 연구해 보신 분이라면 사람마다 사물을 보는 눈이 각기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세상은 똑같으되 보는 눈에 따라 각기 다르게 보는 것입니다. 나무가 있으되
나무의 모습은 각인 각색으로 달라 보입니다. 나무를 같이 보되 각기 다른 각도에서 본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나의 머리는 그 생각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나누어 줄
수 있는 게 무엇이 있다는 말입니까?"라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엇을 나누어 줄 수
있는지를 정녕 모른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글자 맞추어넣기 놀이의 빈칸과도 같은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책임 맡은 빈칸을 채워 넣지 않는다면 그림은 결코 완성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여러분의 나무를 볼 수가 없게 됩니다. 사람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세계를 공개하지 않기 때문에 정신적인 고통과 실망과 고뇌를 느낀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않다면 우리의 그림은 보다 선명한 것이 될 것입니다. 무늬 융단에는 오직 여러분만이
짜야 하고 그림을 그려 놓어야만 할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그 부분은 오직 여러분만의 것입니다.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경이로운 존재, 신비의 존재, 유일무이의 존재입니다.
  다음 번에 거울을 들여다보실 때에는 "그건 사실이야, 나는 오직 하나밖에 없는 존재야."라고
말씀하십시오. 우리가 오직 하나밖에 없는 여러분의 세계를 들어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가 여러분의 세계 그 어느 곳에 위치하든가 그것은 문제가 안됩니다. 이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잠재 능력, 인간이 될 수 있는 잠재 능력은 무한한 것임을 잘
알고 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입니다.
  나는 내가 누구를 보면 그가 누구든간에 내가 그 사람을 보았다는 사실을 표시하고 싶어서
안달을 하는 그런 미친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우리를 봐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고독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무시당하는 느낌이 드는 것이죠. 내가 교정을 걸어 내려가면서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를 건네면 그 대답은 믿기 어려울 정돌로 냉랭합니다. 어떤 이는
"안녕하세요."라고 답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마치 프라이버시를
침해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버럭 화를 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르는 사람에게 인사하는 것이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일이 될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나의 인사에 대해 "제가 아는
분이시던가요?"라고 말하는 사람에겐, 나는 "아닙니다, 하지만 인사를 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대꾸를 합니다. 그럴라치면 개중에는 "좋을 거 하나 없어요."라고 퉁명스럽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럴 때에는 꾹 참고 넘어갑니다. 나는 속상한 일을 참고 넘기는
방어기재라는 비결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그런 사람 곁을 지나면서, "이렇게 멋진 나를 사귀려
들지 않다니 한심한 일이군."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그 사람을 다음 날 또 만나면 또 인사를
함으로써 그 사람에게 나를 사귈 수 있는 기회를 다시 한 번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내가 다시 그 사람에게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할 때 여전히 "제가 아는
분이시던가요?"라고 말하면, 그때가서는 "아, 그럼요. 어제 만나 뵙지 않았습니까?"라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모험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온 세상이 배울 것으로 가득 찬 거대한 신비의 덩어리였던
어린시절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는 거기에 몰두해야 합니다. 그리고는 자기 자신에게
"나는 무엇이든지 전부 알고 싶다. 나는 모든 것을 느껴보고, 만져보고, 맛을 보고, 이해하고
싶다. 이 모든 것을 다 하기에는 인생이 너무나 짧기는 하지만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겠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순간순간들을 최후의 순간인 것처럼 소중하게 여기십시오. 또한 그것은
사실인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음을 천하의 악당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죽음에 대해서라면은 나는
죽음과 평화협상을 맺고 있습니다. 나는 죽음을 긍정적인 현상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나에게 시간의 유한함을 깨우쳐 주기 때문입니다. 또한 죽음은 잔재주를 부리지 않습니다. 죽음은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마치 무한한 시간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행동을 합니다. "그건 내일 해야지."라든가 "나는 늘 등산을 하고 싶어하지만
등산은 내일 해야겠어."라고 말하면서 미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이러다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학생들 중에는 "학교를 졸업하면 마음놓고 독서를 해야지."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지금 당장에 독서를 하지 않으면 영원히 독서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행동에 옮길 시간입니다. 내일까지 기다리지 말고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한다고 지금 당장에 말하십시오. 미적미적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모든 것은 여러분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축복해
주지 않는 한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축복해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비록 괴팍스럽고, 건망증이
심하고 또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 간혹 있기는 해도 여러분 자신을 스스로 축복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훌륭한 속성 중의 하나는 남을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완벽한 사람이 아니기에 여러분을 용서해 드릴 수 있습니다.
  나는 내 자신이 완벽해지고 나서야 다른 사람들에게 완벽해지기를 요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나를 경계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기쁨과 경이로움과 신비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는
여러분 자신을 축복하십시오.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축복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축복해 드릴 수 있는 것은 나의 기쁨입니다.
  우리 문화에 있어서 무엇보다 놀라운 일은 유머 감각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모든
문제를 너무나 심각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웃는 방법조차 잊어버렸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 나이쯤 되었거나 나보다 연세가 많은 분들은 옛날에는 가정에 웃음이 가득했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웃음소리를 별로 듣지 못합니다.
  우리는 즐거워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보다 더한 것은 열광적인 행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어린 뻐꾹새와 같습니다. 그 뻐꾹새와 같은 태도로 접촉을
가지는 즐거움을 다시 한 번 맛봅시다. 멋있게 삽시다. 적어도 가끔은 그럴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루를 유쾌한 마음으로 지낼 수가 있습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기적과 같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기적을 잡으십시오. 여러분이 이와
같은 광적인 충동을 느낄 때는 그 충동을 억제하지 마십시오. 그러한 충동을 우리 한 번 더
발휘해 봅시다. 그런 다음에 그 느낌이 어떠한지를 말해 보십시오.
  그런데 인간이 되자면 민주주의의 특징-현재로써는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으므로-을
인식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이는 우리보다 더 낫거나 더 못한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나는 모든 사람이 똑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 모든 경이로움을 겸비하고 있는 인간의 이와 같은 놀라운 자질은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질을 올바르게 쓰는 것이 하느님에 대한 보답일
것입니다. 완전한 인격자로서 여러분을 바치는 것보다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더 좋은 선물은
없을 것입니다. 당장 실천에 옮기십시오!


    @[내일의 어린이들@]

  "나는 현재의 내가"아니라 "되어가는 나"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잘 알고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아는 한 인생을 가르쳐주는 학교는 하나도
없으며, 또한 "나는 되어가는 존재로서의 나이다. 그것은 멋진 일이다. 인생은 즐겁고, 세상은
아름답다."라고 외칠 수 있는 모범적인 사람도 흔치 않습니다.
  우리는 인생으로부터 과잉 보호를 받아 왔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참모습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마치 인생은 추하고 두려운 것이기나 한 것처럼 꽃들과 신비로움으로 가득 찬
인공의 벽으로 둘러쳐진 정원 속에 갇혀 살아왔던 것입니다. 청년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벽을
기어 넘어가 세상을 내다보고는 현실에 살아 남을 수 있는 도구를 아무 것도 갖추고 있지 않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통받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약을 복용하며 마음은 돌처럼 굳어지고
술에 만취되는 것입니다. 살기를 두려워하지만 죽음은 더욱 더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과거를
탓하고 과거에 있었던 사람들을 탓하기를 좋아하지만, 우리는 오늘 또는 앞으로 할 일만큼은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남을 의심하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마저도 의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목소리에 귀기울여 듣는 방법을 잊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내부로부터
들려 오는 소리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현재를 그냥 놓쳐 버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선택할
권리가 있으므로 그 중에서 기쁨을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목적이 없고, 참된
인생이란 과연 어떤 것인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뭘하고 있는
건가?"라고 자문 자답해 보는 일도 없습니다. 우리가 할 역할은 과연 조그마한 공간을 점유하는
것뿐이라는 말입니까?
  내가 우리는 어린아이들의 인생을 부인하고 있다고 말을 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성년이 되고 나서야 죽음을 가르쳐줍니다. 우리는 어린아이들로 하여금 인생은
장미의 동산이라고 믿게끔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실망은
얼마나 크겠습니까? 우리는 어린아이들로 하여금 어른들은 완벽한 인간이라고 믿게끔 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들이 받는 충격은 얼마나 크겠습니까? 이래도
우리 스스로 인간이 됨으로써 어린아이들에게 인간을 가르치자는 개념이 잘못되었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어린아이들에게 인생을 가르쳐주기 위하여서는 우선은 아이들과 쉽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인과 어린이들과의 대화는 주로 성인들의 일방적인 대화로 일관하거나 어린이들을
아주 무시해서 말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건 결코 올바른 대화방법이 아닙니다. 아이들과
진정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무릎을 구부려서 아이들과 얼굴을 마주볼 수 있을 정도로 몸을
낮추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우리들 자신의 세계를 말해 주지 말고 어린이들의 세계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그들의 말에 귀기울여 들으면서 그들이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며 무엇을
듣는지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이제껏 여러분들이 잊혀져 온, 한때는
여러분들도 정주했던 신비의 세계와 다시 한 번 더 접촉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지난 수년 동안 내가 발견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때 나는 배우는 일보다는 배운 것을
잊어버리는 일에 더욱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내 머리 속에 쑤셔넣은 쓰레기같이
쓸모없는 것들을 말끔히 잊어버려야만 했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지금 바로 그런 과정을 밟고 있는
것입니다. 쓰레기를 하나씩 제거할 때마다 나는 더욱 자유로워질 수 있었고, 더욱 자유로워짐에
따라 더욱 본연의 "나"로 가까워질 수 있었습니다.
  어린이가 필요로 하는 지식은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여러분에게 자기의 생각을 어린이들에게
전달함에 있어서 필수적인 몇 가지 사항을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는 어린아이들로
하여금 그들만의 것인 상상력의 보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조기에 깨닫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린이들에게 그들은 이 세상에서 단 하나의 유일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개중에는 이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의 한 가지 문제점은 모든 인간을 한 가지의 모형으로 찍어내려 한다는 점입니다.
인간을 벽돌처럼 찍어낼 수는 없는 법입니다. 아이들의 얼굴을 들여다보십시오. 이 세상에 똑같이
생긴 아이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건 다행한 일입니다. 나는 사람은 누구나 인류 역사상에 단
한번밖에 태어나지 않는 유일무이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도 이 사실을 생각한다면
자랑스러운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여러분들은 어린아이들이 아무런 목적도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생각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세상은 거대한 무늬 융단과 같은
것인데, 우리 모두가 그 융단의 한 부분을 짜넣을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각자
맡은 바 의무를 다하지 못한다면 이 융단은 바람직스럽지 못한 것이 될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나를 모방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나와 같은 사람은 나 하나로
충분합니다. 이는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나는 "이 선생님을 따르라."하는 식의 태도를 싫어합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나를 모방하려 한다면 여러분은 자신을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나를 모방하려
한다면 여러분은 나와 비슷한 인간이 되는 것이지 여러분 자신의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네 자신의 인간이 되라."하는 것이 나의 지론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의 인생을
추구함으로써 참다운 자아에 이르게 되며, 나는 나 자신의 인생을 추구함으로써 내 지신의
참다운 자아에 이르게 되는데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상호 유리됨이 없이 하나로 뭉칠수가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린아이들에게 그들은 이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것을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그들은 반드시 최선의 그들 자신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쉽지 않은 것은 우리 어른들 자신이 이 사실을 일찍이 깨우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보아주는 사람이 없었고 우리를 안아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린아이들에게 그들은 훌륭한 개성을 지녔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알 수 없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시켜야 합니다. 그들은 또한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에겐 이미 발견된 능력보다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은 능력이 훨씬 더 많습니다. 바로 그
발견되지 않은 능력 속에 신비의 세계가 있습니다. 그들의 현재 상태는 문제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시작에 불과하고 앞으로 개발하고 발견해야 할 신비의 인생 여정은 그 전도가
양양하고 자아라는 신비의 보고는 무궁무진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으로서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 인간이야말로 사고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창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만이 사고하기 위해 기호를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분석할 수 있고, 꿈을 꿀 수 있으며 마음속에서 창조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이 바로
인간이 뜻하는 의미이며 이것이 바로 인간으로서 크나큰 경이감과 신비감을 가지게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나의 유일한 소망은 여러분을 여러분 자신에게 되돌려주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자기만을 아는 이기적인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참다운 인간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가장 특출하며 가장 관대하고 가장 아름다우며 가장 창조적인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쌓아두지만 마시고 그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주십시오. 여러분이 무식하다면 무식만을 가르칠 수밖에 없으므로 지혜를 배우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쇠사슬에 묶여 있다면 오직 편견밖에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없으므로 그렇지 않기
위해서는 자유를 배워야만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여러분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내가 내 자신을
위해서 하고 있는 바를 여러분들에게 해드리겠습니다. 내가 내 자신을 사랑하게 되면 될수록
나는 여러분들에게 더욱 더 많은 사랑을 베풀어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일찍부터 어린아이들에게 말해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입 낙엽도 무심히 떨러지는 일이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숨을
수 있는 장소는 아무 데도 없습니다. 사장님이 당신한테 화를 내시면 여러분은 집에 돌아와서
부인에게 화를 내고, 부인께서는 아이를 때리고, 엄마한테 맞은 아이는 개를 걷어차고, 그 개는
고양이를 물어뜯으며, 고양이는 놀라서 양탄자 위에 오줌을 쌉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시작되었습니까? 우리는 보다 집단 의식을 가지고 보다 많은 것을 얻기 위해서 조금씩
양보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시금 신뢰와 믿음을 회복하여 협력할 줄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하나를 보는 데에는 둘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눈을 들여다보십시오. 그들이야말로 당신의 코에 묻은
검댕까지도 말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입니다. 당신이 하루종일 코에 검댕을 묻히고
돌아다닌다면 그들 말고 그것을 당신에게 말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봐요, 코에 검댕이 묻었어요." 라고 말해 줄 것입니다.
  나는 어린아이들에게 죽음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어야 하고 과잉보호를 하지 말아야 하며,
인간은 반드시 한 번은 죽는다는 사실을 인식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마치 우리가
불사조나 되는 듯이 행동을 합니다. 프로이드는 여러가지 훌륭한 말을 많이 남겼지만 그
중에서도 "우리 인간의 대부분의 문제는 자기 자신은 결코 죽지 않는 다는 그릇된 신념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참다운 인생을 살지 못하는 것도 바로 이 그릇된 신념에서 비롯된다." 라는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는 나만큼은 영원히 살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의 마음 한 구석에 이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죽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남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 죽게 마련인
것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 그 어떤 일보다도 가장 공평한 일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누구이든
얼마나 돈이 많든간에, 얼마나 학식이 고매하든간에, 또한 여러분이 여러분의 인생을 얼마나
엉망으로 살았던간에, 또는 그와 반대로 제아무리 아름다운 인생을 살았던간에 여러분은 반드시
죽게 돼 있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누구나 다 죽어야 하는 것인데 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입니까? 참다운 인생을 살지 못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 진실된 마음에서 사람들을 대하였다면, 그들이 죽었을 때 그들의 관에 엎드려 "가지 마오,
가지 마오." 라면서 슬피 울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슬피 운다는 것은 오히려 죽은 이들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짓인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전혀 그릇된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린아이들을 장례식에
데려 가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관 뚜껑을 열고 할아버지나 할머니의 돌아가신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는 마지막 작별인사를 드리도록 했다는 것을 여러분들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예전에는
이와 같이 꽃들이 겨울에 죽었다가는 다시 자라나듯이 모든 만물이 죽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죽음은 아름다운 삶의 연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보아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죽음은 우리들의 다정한 벗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우리들에게 모든 인간은
영원히 살 수 없다는 것, 사는 것은 현재라는 것, 그러기 때문에 순간순간이 더 없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책을 읽고는 "그게 사실이야."라고 말을 하면서도
실생활에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꽃을 볼 때 그 순간을 산다는 게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누군가 여러분에게 말을 걸어오면 제발 그의 말을 성의 있게 들어주십시오. 어깨 너머로 딴전을
부리면서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성의없는 태도를 보이지 마십시오. 이보다 더 큰 모욕은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나와 함께 있고 싶지 않으시다면 내 곁을 떠나가셔도 무방합니다.
나는 그런 대로 적응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와 함께 있기로 작정하셨다면 성의 있는
태도를 보여주십시오. 바다를 바라보면서 저녁 노을 이야기는 하지 마십시오 보고자 한 것을
보십시오. 그것은 두 번 다시는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귀기울여 듣는다면 행동에 옮겨야 할 시간은 바로 지금이라고 속삭여 주는 죽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화를 해야 할
시간인 것입니다. 죽음은 우리들에게 순간의 기쁨을 가르쳐주며, 우리는 영원히 살 수는 없다는
것, 무엇이든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 영구히 붙들고 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
오늘 밤 무사히 집에까지 도착할 수 있는지조차 모르는 터에 기대감 따위는 던져 버리고 내일은
내일에 맡겨 두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죽음이야말로 커다란 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음은
"지금 당장을 살아라." 라고 말해 줍니다. 어린이에게 이 사실을 알려 줍시다.
  끝으로 어린아이들에게 전해 주고 싶은 말은 우리가 저녁 7시 뉴스나 신문에서 보는 것처럼
인생은 그토록 괴롭거나 비참하거나 실망스러운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건들은
그야말로 뉴스를 위한 사건들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우리가 듣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써
훌륭하고 즐겁고 아름다운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아름다운
일들도 있다는 사실을 아이들에게 알려 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 자신이 즐거운
마음으로 또 정열을 가지고 이러한 아름다운 것들과 접촉하도록 노력을 해야 합니다. 우리들은
모두가 미쳤습니다. 여러분이 이 사실을 믿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그 누구보다도 더 미친 사람일
것입니다. 따분함은 일상적인 단조로움으로부터 나옵니다. 즐거움과 기쁨과 환희는
경이로움으로부터 나옵니다. 단조로운 일은 따분함에 이르게 되고, 따분함을 느끼게 되면 따분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여러분과 같이 있기를 꺼려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선택할 수 있으며 또 선택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인생을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은 여러분이 선택할 수 있는 일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즐거움과 자유와
창조와 경이로움을 선택할 수 있는 반면에 무관심과 따분함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선택의 결정은 지금 당장이라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린아이들에게 그들은 그들이 선택하기에 따라서 인생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인생의 패배자도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을 상실한다는 것은
인생을 상실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도톤 와일더는 "산 자와 죽은 자의 땅이 있는데, 그 두 곳을
연결시켜 주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이야말로 유일한 삶의 의미이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어린아이들에게 사실을 말해 줍시다.


    @[친교에 관해서@]

  나는 만약에 이 세상에서 우리가 아무런 부끄러움이나 수치심을 느끼지 않고 마음대로 포옹할
수 있는 사람이 단 한사람이라도 있다면 결코 고독감으로 죽는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십 명,
백 명, 천 명이 아니라 단 한사람이라도 말입니다. 그 사람이 남자이든, 여자이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언제든지 달려갈 수 있고, 언제든 전화를 걸면 마다 않고 받아주는 그런 사람이면
됩니다. 자기 감정을 숨김없이 털어놓으면 따사롭게 받아주는 사람 "이게 나예요."라고 말하면
"괜찮아요."라고 관대히 받아주는 사람이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친교의 즐거움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친교를 택하지
않으려 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여러분들뿐만이 아니라 내 자신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보면 그 이유가 각양각색입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친교 그 자체가 아니라 상처를 받을까봐 염려를 하는 것입니다."
  "저는 대인 관계에 곧 싫증을 느낍니다. 서로 친해지는 순간부터 새로운 맛이 없어져서
흥미가 없어집니다."
  "사람들은 친교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성교를 원합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나의 참모습을 드러내기가 두렵습니다. 그들이 나의 참모습을 알게 되면
나를 미워하게 될거예요."
  "나는 친교 자체를 믿지 않습니다. 친교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상호간에 너무나 다르니까요."
  "친밀하게 되면 언제나 불안감을 느끼고 질투심을 느낍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 가지는 정이
깊으면 깊을수록 그 사람에 대한 불안감과 질투심이 더욱 더 깊어집니다. 그래서 차라리 깊은
정을 가지지 않으려 합니다. 상처를 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지요."
  "재미있는 일이죠. 하지만 나는 친한 사람과 싸움을 자주하고 기분을 상하게 하는 일이
많아요."
  "전 친밀한 인간 관계를 가질 대마다 사기를 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또 그 사람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또 다른 사람을 구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일을 망친답니다."
  "사람들마다 욕망이 다르죠. 다른 사람들의 욕망을 채워주려고 애를 쓰다 보면 내 생활이
복잡해져요. 안 그래도 복잡한데 말입니다."
  이것들은 가식이 없는 솔직한 말들입니다. 친밀한 인간 관계는 위험이 따른다는 것도 사실이고,
이로 인해 상처를 받을 수도 있으며 변화를 초래할 경우도 있고, 또 깊은 감정의 유발로 인해
비참한 느낌이 들게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도 또한 사실입니다. 절망과 고독감에서 친교를
선택하는 경우가 있는 것도 또한 사실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서로 의견이 달라 논쟁을 하게 되면 "야! 저리꺼져! 너하고는 만사 끝장이야.
너 때문에 이 고생을 할 필요도 없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신경 쓸 필요도 없어. 다른 사람을
찾는 편이 훨씬 쉽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상호 공감을 가지고 인간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최고의 친교는 아무런 사심이
없는 진실한 자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참다운 의미의 친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아무런
사리사욕없이 주고받을 수 있는 친교의 상태입니다. "나는 당신을 이용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싶고, 당신을 알고 싶으며, 당신을 냄새 맡아 보고 싶고, 나는 당신과 춤을
추고 싶으며, 당신과 함께 울고 싶으며, 당신을 포옹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내가 말한 바와 같이
이런 말을 하는 데에는 온갖 정열이 다 필요한 것입니다.
  친교를 추구하자면 위험이 뒤따르고 또 고통이 뒤따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발견하고 또 성장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친밀한 인간 관계를 맺는 데 있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이 나를 사랑할 때 우리는 서로의 거울이 되며
서로의 거울 속에서 영원을 발견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만약 내가 내 자신에 관해서 알고
싶어한다면 혼자 살아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한테 나타내는 반응을 보고 이에
의해서 내 자신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모든 사람들이 나를 외면한다면 나는 나 자신을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자기자신을 탓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탓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회는 그런 사람들을 거부하며 비서는 물론 아이들조차도 이런 사람들을 싫어합니다.
하느님조차도 이런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만약에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에게는
사람들이 그들을 외면하게 하는 그 무엇인가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돌이켜봐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비춰볼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나타내는 반응의 거울에 비춰보는 것입니다.
  친교에 관해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신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임은 고독을 막아주는 가장
아름다운 방편입니다. 여러분이 집에 갔을 때 여러분을 반겨 줄 사람이 있음을 안다는 것은 마음
든든한 일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친교의 중요한 점은 친교로 인해서 우리의
세계는 더욱 더 넓어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화판이 하나 있다면 그 세계를 여러분들에게 그려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그 세계는 생각만 해도 아름다운 세계인 것입니다. 여기에 "내"가 있고
"나"는 "너"를 만납니다. 우리는 서로 끌고 당김이 있고, 어떤 공통점이 있어 우리는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감대로 인해 우리는 "우리"가 되며 이 "우리"가 점점 더 큰 "우리"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된다고 하더라도 "너"는 너를, "나"는 "나"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을 상실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공동 결합체로서의 "우리"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 자신을 남에게 완전히 주어버린다면 그것은 여러분 자신을 영원히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들 자신을 간직한다는 것처럼 여러분도 여러분 자신을
간직하십시오.
  그리고 "그들"을 결합하여 "우리"로 형성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이 "우리"를 더욱 더 커다란
"우리"가 되도록 한다면 결국은 "너"와 "내"가 거대한 동심원이 되어 영원히 성장해 나아갈
것입니다. 친교란 아름다운 "우리"의 세계인 것입니다. 비록 여러분이 어쩌다 이 특별한
"우리"라는 것을 잃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그래도 여러분은 "나"를 유지하면서 "우리"를
형성해 나갈 아름다운 추억들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장을 계속해야 합니다. 그리고는 매일같이 새로운 것을 집안에 가지고 들어와야
합니다. 그러는 가운데에서도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그렇게 생각하지 아니하면 여러분은 그 누구에게도 그 어떤 것을 가져다 줄 수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만을 줄 수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이 춤으로,
혹은 나무에 매달리는 것으로, 혹은 기발한 행위를 하는 것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면
여러분은 계속 흥미있는 존재로 남아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밀착시켜 주는 것은 동질성이지만 우리를 계속 하나로 유지시켜 주는 것은
참신함입니다. 지혜로워야 하고 자극적이며 남을 흥분시킬 줄 알아야 하며 새로운 생각을 나누어
가짐으로써 성장 발전해야 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저절로 이루어지기를 기대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친교를 망치는 또 다른 한가지는 변화의 결핍입니다. 우리는 변화를 두려워하지만 친교에는
변화가 필요합니다. 삼라만상은 계속적인 변화를 하고 있으므로 그 누구든 똑같은 상태로 남아
있기를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 또한 계속 변화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친교는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릇 인간 관계에서 기대를 가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인간이란 반드시 우리가 바라는 바와 같은 인간일 수가 없으며 또 우리가 바라는
바와 같은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것이 놀라울 따름이어서 그 생각을 하면 진정제를
먹지 않을 수 없는데, 이는 사람들이 당신의 기대에 어긋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전화를 해주지 않거나 또는 여러분의 생일을 기억해 주지 않을
때에는 여러분은 실망을 하게 됩니다. 만약에 그들이 여러분의 생일날을 기억해 주면 여러분은
테이블 주위를 춤추며 돌아다니면서 기뻐 어쩔 줄을 모를 것입니다. 비록 기억해 주지 않은들
그게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다만 이것은 여러분이 인간 관계에 있어서 보다 자발적인 태도로
접근해야 함을 말해 줄뿐입니다.
  이런 일쯤은 가볍게 웃어넘기는 것입니다. "몹쓸 친구 같으니라구, 내 생일을 잊어버리다니,
내 생일 선물은 내가 직접 사와야지. 그편이 훨씬 낫지.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살 수
있거든."라고.
  기대한다는 것은 따분한 일입니다. 더욱이 매력적인 일을 기대할 때에는 더욱이 그러합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나에 대해서는 전혀 예측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내가 무슨
행동을 할 것인지 또는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전혀 예측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는 쉴 사이없이
변하며 또 나는 그러한 변화를 좋아합니다. 학생들이 손을 들어 "그 말씀은 화요일날 말씀하신
것과는 다릅니다."라고 항의를 할 때는 나는 이렇게 답변을 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난 지난 화요일보다는 많은 성장을 했습니다. 학생은 이 레오가 오늘도
화요일과 같은 레오이기를 기대하는 것입니까"라고.
  인간 관계에 있어서는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해야 합니다. 울고 싶을 때에는 눈이 붓도록 울고,
웃고 싶을 때는 배꼽이 빠지도록 웃고, 소리를 지르고 싶을 때는 소리를 지르고, 마루 위를
구르고 싶을 때는 구르십시오. 모든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십시오.
  감정을 표현함에 있어서 우물쭈물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인간 관계와 친교를 망치는 가장 큰
요인 중의 하나는 현재 느끼는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논쟁을 하되 짧게 하지 말고 길게 하라고 늘 말을 합니다. 논쟁의 문제점을 논쟁들이
어떤 해결점을 찾기도 전에, 아니 무엇 때문에 논쟁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지도 못하는 채 끝나는
것이 보통이라는 데  있습니다. 논쟁을 길게 하면 길게  할수록 상대방의 감정을 좀더 잘  파악할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논쟁의 해결을 보기도 전에 상대방이 방을 나오려 한다면은,
쫓아가면서 이렇게 말하십시오.  "잠시 기다리세요. 난 아직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말을 계속합
시다."라고. 그러면 마침내 여러분은 여러분이  논쟁하고 있던 것이 실로 어리석은 것이었음을 깨
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늘 필요로 하지만 특히 지금 당장에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가족 흩어지고
이혼율은 계속 높아만 가고 있으며 인간관계는 일시적이고 대개의 경우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자살 비율은 두 배로 늘고 있고,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 자살 비율이 높습니다. 친교란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친교는 우리의 성숙에 대한 커다란 도전인 동시에 우리의 최대의 희망입니다.


    @[인생을 가르치자@]

  갑자기 나는 "사랑들 선택하라" "인생을 선택하라" 라면서 떠들고 돌아다닌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오래 전에 누구를 가르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임을 깨달았습니다. 교육이란 혼자하는 여행과도 같습니다. 내가 대단히 현명한 사람이어서
여러분들에게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가르쳐준다 하더라도 배우려 하지 않는다면 결코
배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생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찾아볼 수 없는 현실에서 어떻게 우리 자녀들에게 인생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달라고 권유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걱정을 해주고, 관심을 보여주고,
사랑을 함에 있어 모범적인 사람들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우리 자녀들에게 책임감이
있고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걱정을 해주는 인간이 돼 달라고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아이들은 보고 배운대로 행동을 합니다. 우리는 이 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우리들이 모범적인 행동을 보여줘야 하는 것들에 대해서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내가 모범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모범적인 인생을 살아야 하겠다."라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가르쳐줘야 하는 제일 중요한 것, 그리고 우리가 그런 신념이 없으면
가르칠 수 없는 것은 아이들 하나하나가 모두 "신성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나는 청중을
바라볼 때나 사람을 만날 때에는 늘 경외감을 느낍니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나에게는
보석처럼 귀한 존재들입니다. 나는 지금 여러분들의 얼굴을 보고 있습니다.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운 여러분의 얼굴들을 보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영롱한 눈망울들, 아름다운 빨갛고
노랗고 갈색인 머리들을 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여러분과 똑같이 생긴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 그 자체가 경이로운 일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들을 아이들이 개성을 상실하기
전에 일찍이 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지나치게 보호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 자신이 삶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참다운 인생이 어떠한 것인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보다 적극적으로 살지 않으면 인생은 즐겁고 경이로우며 신비스러우며 환희 그
자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인생은 고통이며 불행하고 절망이며
눈물이라는 사실 또한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인생은 고통이며 불행이고 절망이며
눈물이라는 사실 또한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러분을 잘 모르긴 하지만 여러분을 한
분도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인생을 얼싸안으렵니다. 나는 인생이 무엇인지를 샅샅이
알고 싶습니다. 나는 슬픔이 어떠한 것인지 알지 못한 채 인생을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눈물을 좀 흘리는 것은 해로울 게 없습니다. 나는 눈물은 눈을 밝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마틴 부버의 작품 중에 나오는 "나"와 "너"의 개념을 좋아합니다. 그는 모든 인간
관계는 서로가 성스러운 존재로 상호 존중하는 바탕위에서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는 모든
사람은 각기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과 교제할
때에는 여러분 모두는 마틴 부버가 의미하는 그러한 소중한 존재로서의 "너" 인 것입니다.
그는 대개의 인간 관계가"나" 와 "그것" 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물건처럼 "그것" 으로 취급받는데 대해서
화가 나지 않습니까?
  부버는 우리가 "나" "너"의 개념에서 사람들을 대하는 한 우리가 대화를 가질 수 있으되,
사람들을 "나"와 "그것"(인격 대 비인격)의 개념에서 대한다면 그것은 대화가 아니라 독백이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나 자신과만의 독백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여러분들과의
대화를 하고 싶습니다. 물론 나는 내 자신과도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존엄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이들도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도 일찍이 알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또한 그들 자신의 외부를 바라보는 것으로는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내부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쉬운 일은 아니지만
여러분의 독특한 세계를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방법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평생을 두고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여러분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진정한
의미에서는 참된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일은 없으십니까? 여러분 대부분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사람들의 평가가 정당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들의 평가가 참된 자신의 자아와는 다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현명한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맡겨진 역할에 불편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사람들의 평가를 묵살하면서 "나는 참된 나를 찾아야겠다."
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생각을 실천에 옮기시면, 이 일은 여러분 인생의 최대
목표가 될 것입니다. 이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는 영일은 없을테지만 결코 따분함을 느끼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자기의 발견은 우주의 발견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 길이 아무리 험난하다
하더라도 남에게 의존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밖에서는 자신의 자아를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내부로 들어가서 찾아야 합니다. 그 내부는 어둡고 스산하기는 하지만
바로 그곳에서 여러분이 지닌 귀중한 모든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발견된
면보다는 발견되지 않은 면을 훨씬 더 가지고 있습니다. 이 발견되지 않은 면을 찾아냄으로써
무궁한 발전을 기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한한 가능성의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입니다. 여러분의
잠재력을 빠짐없이 찾아내어 그것을 개발하십시오. 그리고는 꿋꿋한 자세로 더욱 많은
가능성을 계속해서 찾으십시오. 실패할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실패한들 어떻습니까?
완벽한 인간이 되고자 할 필요도 없습니다.
  나는 또한 아이들에게 타인의 중요성을 깨우쳐 주고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시켜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타인의 세계를 많이 받아들이면 더 커다란 발전을 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남을 신뢰하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빌딩은 더욱 고층화되고 있고,
가정집들의 벽은 더욱 더 높아가고 있으며 자물쇠는 보다 튼튼한 것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 벽들을 헐어버려야 합니다. 서로 믿지 못하는 불신감으로 인해 상처받는 일을 나는
매일처럼 목격하고 있습니다.
  상실한 믿음을 다시 찾고, 잃어버린 신뢰감을 다시금 회복해야 합니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서
위험이 따를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것은 어느 경우에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현 상태를
탈피해야 합니다. 우리는 인격 대 인격으로서 인간 관계를 형성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상황을 달라질 것입니다.
  어떤 것을 따지지 않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될 때 여러분은 사랑을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자발적인 행동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길에서 내가 비켜주기를 바란다면 나는 그들이
자유롭게 길을 갈 수 있도록 길을 비켜줍니다. 어떤 사람이 울고 있으면 나는 "무엇 때문에
우십니까?" 라고 물어봅니다. 어떤 사람이 좌담회에서 나에게 "만약에 당신이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그런 식으로 물어봤을 때 나의 일에 참견하지 말고 당신 일에나 신경을 쓰라고
말을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라고 반문했습니다. 물론 그런 말을 듣는 경우도 있겠죠.
  그러나 어떤 대가를 받기 위해서 사랑을 베푸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사랑을 위한 사랑을
하십시오.
  사랑이란 잠재력을 지닌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를 꺼려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태도로 인해 숱한 아름다움이 상실되고 있습니다.
  나는 아이들에게 삶의 지속성에 대해서 말해 주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계층화된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어린아이들대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청소년들은 청소년들끼리, 젊은 부부들은 젊은 부부들끼리 각기 분리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식으로 고립된다면 좋은 친구들을 잃게 됩니다. 노인들마저도 노인들끼리만
어울립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인생은 여행과 같다는 사실을 어린이들은 어디 가서 배운단 말입니까?
인생은 지속적이라는 사실을 어디에 가서 배운다는 말입니까?
  어린 시절 나는 운이 좋았습니다. 우리집은 노인들 그리고 갓난애기들, 임신부들과
신혼부부 등 항상 사람들로 북적거렸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이에 대한 모든 이야기들을
전부 다 해드릴 수 있습니다. 같은 집에서 이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살았습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인생은 지속적인 과정이지 계층화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노인들을 보았고 언젠가는 우리도 늙게 되리라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인생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이러한 것들을 보지 못했으므로 이러한 것들이 존재하는지 조차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죽음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공포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품위있게 살고 품위있게 죽는 방법을
모르고 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품위있게 산다면 여러분들은 품위있게 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 꼬마 계집아이가 "아줌마는 죽으면 인형을 가져갈 거예요?" 라고 3-4개월밖에 살지 못할
한 부인에게 물었답니다. 그 부인은 그 꼬마를 통해 죽음을 배우게 되었으며 아직도 살아서
직장에 나가고 있습니다. 이제 그 부인은 죽음이 다시 닥쳐온다 하더라도 두려워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직 할 일이 남아 있고 또 그럴 만한 시간도 있습니다. 사람을 망령되게 만드는
것은 나이가 아니라 더 이상 할 일이 없다고 하는 무기력감입니다. 생명이 있는 한 죽는
날까지 정정하게 살 수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이를 인식시켜 줘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죽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이들을 장례식에 참여시키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죽은 시체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우리 개가 어떻게 됐지?"
"우리 할머니가 어떻게 됐지?" 라고 물었을 때 정확하게 답변을 해주지 않고 "할머니는
여행을 떠나셨어."라는 식으로 얼버무리고 맙니다. 어린애들은 부모들의 태도를 모방합니다.
만약에 부모들이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아이들도 죽음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런 식으로는
얼버무려서는 안 됩니다.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아이들은 자신들에게 선택권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이들에게 그들의 인생에 대해 여러 가지 제안을 제시해 주어야
그들은 자기들에게 인생의 선택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살을 하는
사람들은 인생을 너무 좁게만 보아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너무 까다롭게 굴지 마십시오. 사람이란 누구나 부족한 것이 있게 마련입니다.
  여러분들은 인생을 선택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절망보다 기쁨을, 눈물보다
행복을, 무관심보다 행동을, 정체보다 성장을 선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
외의 그 어떠한 힘에 의해서 좌우되어서는 안 될 시기입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여러분
자신이야말로 그 어떤 힘보다는 가장 큰 힘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나를 대신해서 인생을 살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아래와 같은 글귀들을 읽어 드리고 싶습니다.
  "웃는다는 것은 바보처럼 보일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단 말입니까? 바보들은 항시 즐거운데.
  "운다는 것은 감상적이라고 불리울 위험을 각오하는 일이다."
  물론 나는 감상적인 사람입니다. 나는 감상적인 것을 좋아합니다. 눈물이 때로는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남을 향해 팔을 뻗는다는 것은 공연한 일에 말려들 염려가 있다." 누군들 그것을
원하겠습니까만은 나는 오히려 그러길 바랍니다.
  "감정을 노출시킨다는 것은 자신이 참모습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가식적인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말입니까?
  "사랑을 한다는 것은 사랑을 되돌려받지 못할 위험한 짓을 하는 것이다."
  나는 사랑을 되돌려받기 위해서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산다는 것은 죽음을 감수하는 일이다."
  나는 죽음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버스카글리아가 공중으로 날아가
땅에 떨어져 죽어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리겠다는 말입니까? 버스카글리아는 정열을 다해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희망을 가진다는 것은 실망할 염려가 있고, 시도한다는 것은 실패의 위험이 뒤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모험을 해야만이 됩니다. 왜냐하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위험스러운 일은 아무런
모험을 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모험도 하지 아니하고, 아무 일도 아니하고,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의 인간은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닌 하찮은
존재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고통이나 슬픈 일을 당하지 않을는지는 모르지만
아무 것도 배울 수 없고 아무 것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성장과 변화를 이룰 수 없으며
제대로 사랑도 할 수 없고 확신이라는 사슬에 묶인 노예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스스로의
자유를 포기한 사람입니다. 모험을 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유인인 것입니다.
모험을 해보십시오. 그러면 내가 한 말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에 관해서@]

  나는 어디를 가나 사랑에 관해서 말하는 일을 귀찮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조금도
개의치 않습니다. 여러분이 나를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하신다면 그건 더욱 잘된 일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그렇게 생각해 줌으로써 나는 행동에 아무런 구애를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미친놈은 그러려니 하고 용서를 해줍니다. 나는 나의 관심을 끌고
있는 사랑에 관해 그토록 유감스러운 통계가 나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 관심을 가져 주기를 희망합니다.
  사랑을 놓치지 마십시오. 사랑이란 더 할 수 없이 훌륭한 선물입니다. 여러분이 태어나는
바로 그 날, 여러분은 생일 선물로 이 세상을 받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싶습니다. 그 선물
상자에 묶인 리본조차 끄르기를 귀찮게 여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에 나는 경악을
금하지 못합니다. 상자를 여십시오. 그 뚜껑을 여십시오. 그 사자 속 안에는 사랑과
신비로움과 인생과 즐거움과 경이로움이 가득 차 있고, 받은 선물들인 것입니다. 많은 신비와
경이로움이 들어 있는가 하면 또한 많은 혼란도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은 흥미로운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상자 속으로 들어가 보십시오.
절대로 따분한 감은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이는 입버릇처럼 "나는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사랑을 진심으로 믿습니다. 나는 사랑을
부분적으로나마 실천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웨이트레스에게 "물 어디 있지?" 라며 고함을 질러대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나에게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줄 때 여러분들이 사랑하고 있음을 믿겠습니다. 여러분이 모든 사람들은
모든 순간순간마다 서로에게 사랑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때 "나는 훌륭한
사랑의 교사인가?" 라는 질문에 스스로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나는 -을 미워한다." 는 대신에 "나는 -을 사랑한다." 는 말을
하루에 몇 번씩이나 하는지 헤아려 보십시오. 어린아이들이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 "네" 라는
대답보다는 "아니오" 라는 말을 수년 먼저 배운다는 사실은 흥미있는 일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아니오" 라는 말을 어디서 들었는지 언어학자들에게 한 번 물어보십시오. 만약에 아이들이
"나는 -을 사랑한다." 는 말을 "나는 -을 미워한다." 는 말보다 더 많이 들었다면 아이들은
"나는 -을 사랑한다." 는 말을 더 빨리 그리고 더 빈번히 사용하였을 것입니다.
  사랑, 그것은 너무나 훌륭한 단어입니다. 그것은 무한한 의미를 지닌 단어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란 과연 어떠한 사람일까요? 사랑하는 사람이란 곧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내가 이 말을 할 때마다 사람들은 나의 말에 동의를 하면서도 실천은 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한 남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장 중요한 의무인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여러분의 독특한 개성은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사람마다 개성이 다 달라서 저마다 오직
자기만의 세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되는 일에 열중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단단히 해둬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행하기에 가장 어려운 일인 -가장 쉬운 일일 수도 있는데 - 여러분 자신이
되는 일 즉 내 자신이 누구냐는 것과 남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으로 나는 과연 어떤 것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을 찾아내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남에게 줄 수 있도록 자신을 개발하는
일에 전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남에게 나누어준다는 것이 어떤 것을 소유하는 유일한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지닌 특성은 그것이 구체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여러분이
뒤에 남겨 놓는 것은 손으로 만져서 알 수 있는 그러한 성질의 것들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비로운 것이며 지극히 영적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자아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자아를 발전시킨다면, 그리고 여러분이 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것을 남겨 준다면, 그것을
받는 사람들은 더욱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투와도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자신도 남을 무조건 사랑할 수 있는 그러한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그러한 무조건적인 순수한 사랑을 제공받을 때에는 주저하지 말고 그 사랑을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 사랑이란 주기도 힘들지만 받아들이는 일 또한 그에 못지 않게 어려운
것입니다. 개중에는 사랑을 주기보다는 받아들이는 일이 훨씬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치뤄야 할 가장 치열한 전투는 자아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그곳에 존재함으로써 사람들이 더욱 편하게 느낄 수 있는 그러한 세계
속에서 평생 동안 자아 쟁취를 위한 투쟁을 벌여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자기 자신을
스스로 포기해 버리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와 반면에 여러분의 자질을 모두
집산시킬 수만 있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아를 쟁취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가서야 비로소
"나는 성장을 계속하고 있다. 나는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나는 아무런 연막도
치지 않고 나의 자아를 사람들에게 주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렇게 함으로써 자유를 얻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할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러분의
자아를 결코 놓치지 마십시오. 이렇게 하는 과정에서 여러분의 진정한 자아를 대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아와 만나게 되면 악수를 하면서 "나의 자아여, 자네는 그 동안 도대체 어디 가
있었나? 어쨌든 만나게 되어서 반갑네. 앞으로는 같이 사세." 라고 말하십시오. 여러분의
자아에는 그 끝이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의 잠재력은 무궁무진한
것입니다. 인간의 경우 여러분은 전과는 다른 방법으로 만져보게 되고, 전과는 다른 각도에서
사물을 보게 되고, 이렇게 되면 여러분은 이미 한 곳에 정체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더욱 더 많은 것을 얻게 되고, 더욱 더 발전하여 더욱 더 많은 것을 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멋있는 일입니까? 그렇게 되면 여러분이 죽어 하늘나라에 갔을 때
"너는 너 자신이 되었었느냐?" 라는 창조주의 질문에 그렇다고 답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사랑을 베푸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약간 돈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런 사람이 우리의 주위에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므로 팔을
벌려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은 훌륭한 일이며, 또 그렇게 할 때 여러분은 적극적인 자아상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유일하면서도 진정한 방법이며 이렇게 함으로써
발전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의미에서 사람다운 인간이 되자면 어떤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사람들을 팔을
벌려 받아들이고, 그들이 여러분들을 안심하고 대할 수 있는 정도에 이르러야 합니다. 나는 이
말을 전에 이야기로 들려드리기도 했지만 글로 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훌륭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즐거움이 됩니다. 우리 교실에서는
소위 자발적으로 행해지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남을 위해서 어떤 일을
자발적으로 해주는 것이 그것입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남을 위해서 일을 하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도대체 무슨 일을 해준다는 말입니까?" 라고 반문해 오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을 보면 정말 숨이 막힐 정도로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낍니다. 나는 자제하면서
"무슨 일을 하다니요? 라고 되묻습니다.
  할 일이 무엇이냐고요? 여러분의 주위를 살펴보십시오. 그래도 할 일이 무엇인지를
모르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외로운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따사로운 말 한 마디가 절실히 필요한 시달림에 지친 판매원 아가씨가 있습니다.
할 일이 어디 있냐구요? 거창한 일만이 할 일은 아닙니다.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지극히
사소한 일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주변에 있는 작은 일들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실천자로서 우리가 해야 할 또 한가지 일은 언어의 함정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입니다. 언어의 횡포로부터 벗어나는 일입니다. 말이란 함정과도 같습니다. 자기 자신이
사전을 쓸 수 있을 만한 나이가 채 되기도 전에 언어를 배워 말의 함정에 빠져버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말을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여러분이 미워해야 할 사람, 사랑해야 할
사람이 누구인가를 가르쳐주고, 어떤 것이 왜 중요한가를 역시 말을 통해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그러한 것들을 믿게 되었는데 아직도 이러한 것들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의 말은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 온갖 생각들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러한 현상을
지적인 훈련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낱말들을 들을
때마다 그 낱말이 가지는 사전적인 뜻 이외에 그 어떤 감정을 내심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공산주의 자, 카톨릭, 유태인, 흑인, 스페인 사람 등의 낱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전히
여러분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감정이라든가 수년 전에 배운 후 한 번도 재음미해 본일이
없는 마음을 괴롭히는 어떤 것 등의 모든 감정들이, 그 단어가 언급될 때 함께 떠오르는
것입니다. 또한 낱말들은 이들을 재정의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에 증오와
편견과 파괴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인생은 본질적인 여행이 아닙니다. 인생은 또한 목표도 아닌 것입니다. 인생은 하나의
과정입니다. 여러분은 한 걸음 한 걸음씩 전진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한 걸음 한
걸음이 경이롭고 또한 신비로운 것이라면, 인생 또한 경이롭고도 신비로운 것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결코 삶을 후회하는 그러한
사람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삶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의 어깨 너머 쪽을 보지 마시고 상대방의 눈을 들여다 보십시오. 자녀들에게 말을
하실 때에는 건성으로 하지 마시고 손으로 얼굴을 보듬어 안고, 얼굴을 들여다 보면서 말을
하십시오. 육체적인 사랑만을 하지 마시고 인간 그 자체를 사랑하십시오. 지금 당장 실천에
옮기십시오.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은 한 번 지나가면 영원히 되돌아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우리가 확실히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뿐인 것입니다. 이
순간을 놓치지 마십시오. 이 순간을 모두 사랑을 위해 사용하십시오.
  나는 만약에 여러분이 사랑을 정의하려 한다면, 그 의미를 함축하기에 충분하고도 유일한
단어는 "인생" 이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습니다. 사랑이란 어떤 면에서 보든 인생 그 자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상실한다는 것은 인생을 상실함을 뜻합니다. 그런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레오 버스카글리아와 함께@]

  손을 뻗으십시오. 손을 내미는 법을 배우십시오. 여러분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그리고 "나는 사랑의 실천자이다."라는 말을 몇 번이나 하고 있는가를 들어보십시오.
나는 여러분이 "나는 미워한다."라는 말과는 정반대 되는 "나는 사랑한다."라는 말을 몇
번이나 하고 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흥미있는 현상입니다. 나는 "나" 또는
"나에게"라는 두 단어에 집중된 생활양식을 혐오하며,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들으면
따분한 느낌이 듭니다. "나" 또는 "나에게" 라는 말 대신에 "우리" 또는 "우리에게" 라는
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너" 와 "내" 가 힘을 합치면, 당신 또는 나 혼자만의 힘보다는 훨씬
더 강해지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가 힘을 합친다면, 나는 줄 수도 있고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당신의 팔 둘과 내 팔 둘을 합하면 네 팔과 머리도 둘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새로운 종류의 온갖 창조적 아이디어를 가짐을 뜻하며, 당신의
세계와 나의 세계를 합쳐 두 개의 다른 세계를 소유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나의 세계로 들어오시길 바라는 것입니다.
  나는 비록 팔 것은 없으나, 나누어 드릴 것은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만약에
우리가 상호 인간 관계를 맺을 수만 있다면, 사람은 누구나 혼자서는 살아 남을 수가
없다는 것과 고독감과 이기적 탐닉은 죽음과 파멸에 이를 뿐이라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이러한 추세를 발전시킬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배움에 관해 많은 것을 터득하고 있습니다. 나는 평생을 교직자로서 자리를
지켜왔으며, 또한 교직을 천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최근에 와서야 비로소
누구에게든 아무것도 가르쳐줄 수 없다는 사실을 꺠닫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누구에게 그 무엇인가를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릇된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해야 지식을 얻도록 안내해 주는 안내자로서의 본분을 다하는 것뿐입니다.
나는 음식을 차려 드릴 수는 있지만 만약에, 여러분이 먹기를 거부한다면 나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내가 그 교육이라는 음식을 보다 매력이 있고 재미있는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몇몇 사람들이 흥미를 느껴 "저 책은 무엇에 관한 책이지? 그
저자가 인생을 그토록 사랑한다면, 아마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만약에 숲속에서 춤을
춘다면, 그것도 자주 춤을 춘다면 다른 사람들도 용기를 내어 나처럼 숲속에서 춤을 출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성공인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숲속에서 춤을 추도록 가르칠 수만
있다면, 미치광이라는 욕쯤 먹어도 개의치 않겠습니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나는
미치광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미치광이 취급을 받으면 그만큼
행동에 구애를 받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이든 아무 거리낌없이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을 하겠죠."저 미치광이 버스카글리아가 숲속에서 춤을 추고
있군." 이라고. 아무런들 어떻습니까? 도덕군자 같은 분들이야 따분하든 말든간에 나는
숲속에서 무도회를 열었습니다.
  행동 수정자들은 우리는 사랑의 모델 즉,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지시하거나 가르치려 하거나 하지 말고, 여러분 스스로가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모범을
보여줌으로써 바람직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돌봐 주어야 합니다.
  "나" 또는 "나에게" 의 개념이 아닌 "우리" 또는 "우리에게" 의 개념으로 결속된 사랑으로써의
인간 관계와 공재, 바로 여기에 진정한 인생의 즐거움이 있는 것입니다. 혼자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좋겠지만, 사랑하는 사람들과 여럿이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보다 더 큰 즐거움은
없습니다. 혼자 공원을 산책하며 숲을 바라보는 것도 좋을 테지만, 정다운 사람들과 팔장을
끼고 "저 자주빛 나뭇잎들을 좀 보세요!"하면 당신은 자주빛 나뭇잎들을 놓치지 않고 보게
되고, 당신이 파란 잎새들을 보고 있을 때 상대방이 딴 곳을 보고 있으면 파란 잎새들도 있음을
꺠우쳐준다면 얼마나 멋이 있겠습니까? 무엇이든 함께 하십시요.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당신에게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함께 하는 일과 사랑에 관해서 여러 가지 훌륭한 저서들은 쓴
바 있는 애리프롬은 "인간의 가장 절실한 요구는 고독감을 극복하고자 하는 욕구이다. 그
고독이라는 감옥을 탈출하고자 하는 것이 가장 강한 욕구이다. 이 목적을 이루는데 완전히
실패하면 사람은 미치게 된다." 라고 말했습니다.
  생명(인생)이란 최상의 선물인 것입니다. 이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이 여러분이 해야 할일
입니다.
  모든 것은 탐구함으로써 알게 되는 것이므로 우리가 합치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하고,
공조하고 바람직한 인간 관계를 형성하고 남에게 관심을 가져주고 더 나아가서 사랑할 수
있게 되자면 우리는 어떠한 일을 해야 할까요?
  만약에 여러분이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면, 여러분은 그가 그의 본연의 모습을 유지하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그가 그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한다거나, 보다 나은 성장을 위해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한다거나, 도움이 될 만한 일을
배울 때마다 여러분은 춤추며 이를 축하해 주어야 합니다. 두 사람이 따로 떨어진 채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함께 성장하는 것입니다. 손과 손을 잡고 함께 나란히
나아가는 것은 좋으나, 어느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완전히 용해되어서는 결코 아니
됩니다. 각인은 유일체로써, 다른 사람에게 용해되어 버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누구에겐가로 다가서서 "나는 당신과 인생을 같이하고 싶습니다. " 라고 말을 하고 마음을
주되 그에게 마음을 사로잡히지는 마십시오. 왜냐하면 오직 인생의 손만이 여러분의 마음을
잡아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란히 서십시오. 그러나 너무나 가깝게 서지는 마십시오. 기둥이
적당한 간격을 두고 서 있어야 사원을 떠받칠 수 있는 바와 같습니다. 떡갈나무는 삼나무
그늘 밑에서는 자랄 수 없고, 삼나무는 떡갈나무 그늘에서 자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사람은 다른 한 사람의 그늘 밑에서 자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사람은 다른 한 사람의 그늘 밑에서 성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햇빛을 발견하여, 가능한 한 크고 아름답고 훌륭하게 성장해야 합니다. 그런 후에라야 나누어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이라야 "우리 서로 터놓고 얘기해 봅시다. 같이 대화를
나누어 보도록 합시다." 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타인의 그늘 속에 있을
때에는 이 일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타인의 그늘 속에서 시들어 버리면, 여러분은 자신을 상실하게 되고, 자신을 상실하게 되면
여러분이 간직하고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하나는
독립된 존재이고, 자신을 상실하게 되면 여러분이 간직하고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하나는 독립된 존재이고, 그 하나하나가 모여 둘이 되는 것입니다.
당신도 하나의 "나" 요, 그 사람도 하나의 "나" 인데, 그 두 사람이 모여서 "우리" 가 되는
것입니다.
  나는 사랑이 곁들여진 인간 관계와 공조는 천상에서나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 땅 위에서 실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일이 극히 힘든 경우가 많기는
합니다. 아니 사실 이보다 힘든 일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나는 사랑의 관계에 관한 책을
쓰려고 자료를 준비하고 있는 중인데, 인간 행위 중 가장 역동적인 양상이라고 생각되는
것에 관하여 많은 조사를 해봤으나, 많은 것을 발견해 내지는 못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사랑의 관계에 관해서 알고자 한다면, 자료 수집에 상당한 애를 먹게 될 것입니다. 사랑의
관계는 고통을 수반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인생을 함께 하고 자신의 일부를 포기해야
됨으로써 고통이 뒤따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으로부터 배울 점이 많은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그 누구도 고통을 원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분노를 느낍니다.
고통을 느끼는 순간부터, 약을 먹기 시작하거나, 술을 퍼마시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훌륭한
교훈은 때로는 괴로움과 절망의 와중에서 얻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채 말입니다.
그 차이점은 고통을 경험하되 그 고통에 집착하지 않는 데에 있습니다. 고통에 집착하면
병이 됩니다. 고통을 경험한 다음 흘려보내야 합니다. 누구의 인생에 있어서나 절망의
순간들은 많이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이 고통의 순간들을 잘만 이용했더라면 보다 더 큰
성장과 보다 더 훌륭한 인간이 되는 데 도움이 됐을 것입니다.
  "나" 와 "나에게" 의 개념을 떠나 "우리" 와 "우리들에게" 의 개념에서 상호 공조해야만
합니다. 여러분의 인간 관계는 여러분의 육체와 마찬가지로 활기있고 살아있는 것이라야
합니다. 만약에 여러분의 육체가 죽어 있다면, 여러분의 인간 관계도 죽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여러분의 인간 관계가 따분하고 적절치 못하다면, 그건 여러분 자신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유쾌하게 사십시오!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오직
여러분들만을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십시오. 다른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십시오. 여러분이 태도를 바꾸면 다른 사람들도 선량해진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그리고
또한 사람들은 누구나 변화할 수 있는 잠재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여러분은
그들의 잠재 능력을 개발하는 일을 도와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십시오. "나"와 "나에게"
라는 말 대신에 "우리" 와 "우리들에게" 라는 말을 사용하고, 그러한 개념에서 생각하도록
하십시오. 많은 것을 강렬하게 사랑하십시오. 왜냐하면 사랑의 실천자로서의 척도는 얼마나
많은 것을 얼마나 깊이 사랑하느냐 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물, 특히 인간 관계는
늘 변화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이들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여러분도
그들과 함께 변화해야 됩니다. 성장하는 가운데 변화하십시오. 남과 더불어 성장하되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생활속에서 웃는 방법, 사랑하는 방법, 우는 방법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는 건전한 사람을 찾으십시오.
불행은 친구를 좋아하되, 친구를 요구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불행을 간직하지는
마십시오.
  끝으로 작년에 티벳의 달라이 라마 승려가 한 의미심장한 말을 해드리고 싶습니다. 그는
"우리는 매우 가까운 곳에서 함께 살고 있으므로 인생이 최대 목적은 남을 도와주는 데에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야릇한 웃음을 띠면서 "남을 도울 수 없다면, 그들을
해치지나 마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만약에 우리 모두가 따뜻한 인간애와 공조를 통해서
서로의 성장을 돕는 일에 헌신하겠다고 약속한다면 아니, 도와줄 수는 없을망정 서로
상처를 내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다면, 이 세상은 천국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시 부문에서 노벨상을 받은 이태리 시인 콰시모도는 "그리고 문득 밤이었다"에서 "이 광대
무변한 세계에 우리 각자는 홀로 서 있다. 잠시 햇살에 묻혔다가는 곧이어 밤이 된다."라고
썼습니다. 그렇습니다. 갑자기 밤이 되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나와 함께 서 있는다면
우리는 햇볕을 함께 즐길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밤은 그렇게 두려운 것만은 아닙니다. 내
말을 믿으십시오.


    @[자기 패배적 사고 방식에 관하여@]

  나는 항상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일하면서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내가 만나 본 사람들마다 그들의 재질과 아름다움을 표출하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실천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사랑과 관심을 표명하고 이것을 아무 거리낌없이
공공연히 드러내 보여야만 합니다. 그래서 나는 자기 자신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지 못하고
자신을 표현하는 것을 꺼리는 사람들에게 충고를 해주고 싶습니다. 나는 오늘밤의 논제를
"자신을 망치는 반자아 장치"라고 이름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테지만,
여러분이 자신이 되지 못하고 있는 주된 이유는 여러분 자신의 사고방식이 여러분의 성장에
방해가 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그 그릇된 방식의 껍질에서 탈피할 것을
간청합니다. 그 껍질을 탈피하여 창공을 나십시오. 그러면 충만한 인생과 사랑을 만끽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를 의무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심지어는 자기 자신을 증오하기까지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기 패배적 사고 방식을 버려야 합니다. 여러분은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야." 라고
말하는 자신의 소리를 얼마나 자주 듣습니까! 만약 에 여러분이 자기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진정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나는 항상 집에서 "못 한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나가서 해봐?" 라는 핀잔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하든 그 일을 해내고야 말았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사람들이 일정표를 보여주면 해낼 수 없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할 수 없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하지 않겠다." 라고 말하는 것은 막다른 골목과도 같은 것입니다. 아버지한테 얻어맞고
싶으면 "안 하겠어요." 라고 말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뭐라고?
안하겠다고? 이놈의 자식이"  면서 손등을 때리곤 하셨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어는 "예(YES)" 입니다. 여러분은 이 단어가 얼마나 아름다운 낱말인지를
생각해 본 일이 있으십니까? 나는 이따금 사람들에게 "영어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는
무엇이겠습니까" 라고 질문을 합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예스인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길게 늘어뜨려 발음하는 예스인 것입니다. 그 단어는 예-스 하고 한도끝도없이 계속되는
아름다운 단어인 것입니다.
  "아니오(NO)"라는 말은 막다른 길입니다. "아니오"라고 말하는 순간 모든 창문과 문들이
닫혀지고, 여러분은 코코넛 속에 갇히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예스라고 말하기가
망설여지고 겁이 난다면, 가능성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지 않겠다."고 말한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나는 또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어쩔 수가 없어요."이런 말도 자주 듣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꼭 한 가지 방법밖에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해낼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언제나 있게 마련입니다. 그 방법을 찾아 시도해 보십시오.
  나는 또 "그런 일을 하기에는 나는 너무 늙었어."라는 말을 싫어합니다. 여러분은 "나는
너무 늙어서 공원에도 갈 수 없고, 숲속에서 춤출 수도 없다." 라는 말을 얼마나 자주 들어
왔습니까? 시험삼아 한 번해 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얼마나 젊었는지 알아보십시오.
우리는 나이를 지나치게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누구에게도 내 나이를 말해
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골치 아프고 기분 나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나이를
결부시키는 순간부터, 나이에 걸맞는 행동을 할 것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또 이런 말도 있습니다. "나는 전에 상처를 입은 일이 있기 때문에, 앞으론 절대 두 번 다시
남을 믿지 않을 거야." 라고. 그 상처가 그렇게도 대단하다는 말입니까? 고통 속에서도 교훈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얼마나 어리석을 세상인지
모르겠습니다. 무엇이든지 언제나 최고로 즐겁기만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죽음이 우리들에게 인생에 대한 교훈을 주듯이, 불행은 우리들에게 즐거움에 대한
교훈을 남겨주는 것입니다. 불행이 다가올 때에는 그 불행을 끌어안고 "이것 또한 내 인생의
일부이다." 라고 말하십시오. 그리고 그 불행을 경험하십시오. 그리고 그 불행을 다시 한번
느끼는 법을 배우십시오. 불행을 거부하지 마십시오. 이로 인해 상처를 받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상관없다고 말하시오. 슬픔에 못 이길 때는 소리도 지르고 울부짖기도 하며 벽이라도
물어뜯으십시오. 고통을 경험하십시오. 우십시오. 식탁을 힘껏 내리치십시오. 화를 내십시오.
그리고는 슬픔을 마음 밖으로 몰아내십시오. 그렇게 한 후에 깨끗이 잊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 슬픔은 가슴속에 영원히 쌓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위궤양이나 편두통에
걸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제한시키고, 우리를 고독하게 만드는 이 같은 자기 패배적 사고 방식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우리를 따분하게 만들고 자발성과 경이로움을 말살시키는 반자아적
사고 방식을 어디서부터 나오는 것일까요? 이러한 사고 방식으로 인해 삶을 거부하고, 성장을
거부하고, 변화를 거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타도합시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디서 이러한
사고 방식들을 배우는 것일까요?
  때때로 우리는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과 가족으로부터 이를 배우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성장과 인간의 존엄성을 배우는 데에는 가정보다 더 좋은 장소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적은 사랑을 나타내는 경우가 때때로 있습니다.
  여러분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무엇보다 좋은 점을 발견하지 못한 채 하루를 보내지는
마십시오. 그리고 좋은 점을 발견하게 되면 본인에게 말해주십시오. 오늘 당장에 찾아내기는
어려울지 모르겠으나, 여하튼 찾아내야 합니다. 좋은 점을 발견했을 경우에는 "그것 참
훌륭한데." "참 잘했어."라고 칭찬해 주십시오.
  우리는 일상 생활을 통해 서로서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나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줍니다. 그들이 "사랑이 너무 어려워요." 라고 말하면, 나는 "사랑은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아주 간단한 것입니다. 복잡한 것은 바로 우리들 자신입니다. 사랑은 시달림에 지친
웨이트레스에게 '고마워요. 참 훌륭한 음식이군요.' 라고 말해 주는 것을 뜻합니다."
  사랑은 기쁨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이 아름다운 사람을
보았을 때는 그에게 다가가서 "당신은 아름답다." 라고 말해 주는 걸 의미합니다. 그런 말을
한 다음에는 얼른 돌아서십시오! 왜냐하면 이 말을 듣고 상대방이 깜짝 놀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가정에서 뿐 아니라 학교에서도 자기 패배적 사고 방식을 배웁니다. 여러분이나
나나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우리 문화는 줄곧 우리들에게 의심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신뢰하지 말라, 믿지 말라,
모든 것을 두려워해라." 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짓은 고작 남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더욱 더 높은 벽들을 쌓아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여러분과 나 사이에 벽을 쌓고 싶지는 않습니다. 나는 여러분들 한
가운데로 뛰어들고 싶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을 겪어보고 싶습니다. 나는 여러분들로부터
보호받고 싶지가 않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을 믿겠습니다. 여러분을 믿다가 발등을 찍혀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여러분을 놓치고 싶지가 않습니다.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놀랍게도 우리 문화는 우리들에게 계속해서 "내 옆에 있는 사람은 믿을 수
없는 사람이야." 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이웃 사람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이건 부끄러운 일입니다. 도대체 우리는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우리
자녀에게조차 남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점점 더
멀어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조그마한 다리들을 놓기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
  이웃을 모르고 지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 년 동안을 한 곳에서 살아도 말입니다.
누군가가 찾아오면 문열어 주기를 두려워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염려하는
것입니다. 극히 유감스러운 일은 한 번 이러한 불신감과 의구심에 빠지게  되면, 새로
배우는 것은 무엇이든 간에 이 불신이 여과기를 통해 걸러내기 때문에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로 인해 자신의 발전을 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불신감과 의구심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의 세계는
지극히 작은 범위 내로 축소되어 버리고 의심과 추함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추함을 통해 여과된 것만을 봅니다.
우리는 우리가 거기에 투영시킨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는 것마다 의심을
품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무서워하고 늘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게 뭐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아름다움과 인생으로부터 단절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더 이상 우리
자신에게 해로운 짓은 하지 맙시다. 이 얼어붙은 자아에서 탈피합시다. 여러분 모두가
성스러운 존재라는 점을 명심하십시오.
  여러분은 신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탄생시키십시오. 자기 자신을 밖으로
끄집어내십시오. 여러분과 나 사이를 틈나게 하는 모든 자기 패배적인 사고 방식이나 기타의
타성을 떨쳐버리십시오. 다시 남을 신뢰하고 용서해 주는 법을 배우십시오. 남도 나와
다르기보다는 유사한 점이 더 많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여러분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는지는 잘 모르지만, 나를 믿으십시오. 나 역시 여러분과 같은
처지에 있는 것입니다. 나 역시 여러분 못지 않게 당황을 하고 여러분 못지 않게 이로우며,
절망하기도 하고 자주 울기도 합니다. 나는 여러분들보다 인생에 대한 해답을 더 많이 알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나도 여러분처럼 인생 문제의 해답을 찾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대가
많습니다. 또한 나는 여러분들보다 더 많은 해답을 구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
자신을 신비로운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나에게 "죽음은 왜 있는 것일까?
고통은 왜 있는 것일까? 어린아이들이 왜 죽어야 한단 말인가?" 하는 내용의 편지를
합니다. 이러한 편지에 대한 답장에서 나는 "나라고 해서 어찌 할 수가 있습니까?"하고
오히려 반문을 하는 것입니다. 나보다 위대한 사람들이 수세기를 두고 이러한 문제들을
탐구해 오고 있습니다. 나도 어째서인지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일찍이
누군가가 "그러한 문제들에 너무 몰두하기 때문에 오히려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라고
한 말이 기억납니다. 나는 매우 능동적으로 삶에 임하고 있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경험하고, 모든 것을 알고 싶습니다. 인생을 낱낱이 경험해 보고 싶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만들어낸 베니어 합판
(이는 자기 패배적인 합판인데) 밑에는 나처럼 의구심에 차 있고, 두려워하고, 고독하고,
 즐겁게 살고 싶어하고, 죽기 전에 자기 자신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으며, 매우 안정되어 있는 척하며 행동하기
때문에 "나는 약점이 많고 실수를 하며, 불완전하며, 소중한 재산이다. 내가 오직 바라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되는 데 있다." 라고 말하면 차라리 홀가분한 것을 그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점보다 닮은 점이 더 많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있으므로 당신과 나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를 놓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의 참된 자아는 나 자신과 그리고 여러분들 주위에 있는 그 어떤 사람과
연결되어 있는 이 다리들을 통해서만이 성장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로를 불신하는 폐습은 버립시다. 남을 믿는다는 것은 도박과 같을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만사 모든 것이 도박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최선이 것이 무엇인지 알만큼 충분히 현명치 못하다는 자기 패배적
사고 방식을 떨쳐버릴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내부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여러분 자신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여러분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여러분 자신만큼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스스로 완전한 자아가 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계속
부인한다면, 다른 이가 이를 떠맡게 되어 여러분은 정말 자기 자신을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스승을 따르라." 는 허튼 짓을 하지 마십시오. 우리들은 "내가 이 사람이 시키는 대로 따르면,
나를 잘 되게 만들어 주겠지." 하는 생각에 젖어 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그 사람의 말을
따른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러분은 또 하나의 그 사람과 같은 인간이 될 뿐,
여러분 자신을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교사란 안내자에 지나지 않을 뿐, 정작 여행을 하는
것은 바로 여러분 자신인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이 길밖에는 없다." 라고 말하는 사람을 믿지 마십시오. 길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가지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길은 나의 길 못지 않게 유용한 것입니다. 다만 그 길이
파탄으로 인도하는 길이 아니라 선과 부드러움, 아름다움과 즐거움과 성장으로 이끄는
길이기만 하면 됩니다. 여러분 자신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여러분 자신을 신뢰하십시오.
이러저러한 일들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컬럼들은 많이 있지만, 이 컬럼을 쓰는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해줘야 할 말이 무엇인지를 어떻게 안단 말입니까? 읽기에는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 "그 충고대로 해야지."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어떡하면 됩니까?"라고 물을 때마다, 나는 "당신
자신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 문제에 대한 대답은 당신의 내부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미 완전한 당신이기 때입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직접 그것을 접해 본다면, 당신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라고 답장을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 그것이 무엇인지를 여러분 자신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십시오. 그리고는 자신이 알고 있는 바에 경청하십시오. 그런 다음에 여러분 자신이
말해 주는 조언에 따라서 행동하십시오.
  여러분 자신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법을 배우십시오. 다시 한 번 듣고, 믿는 방법을
배우십시오. 시험삼아 한 번 해보십시오. 그렇게 할 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과 조화하게
되며 또 여러분이 행하고 있는게 여러분에게 유익한 것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문제의 해답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 의심하십시오. 나 자신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나 자신 외에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누가 그런 말을 할
때는 기꺼이 들어주기는 하십시오. 그러나 여러분의 인생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여러분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는 여러분이 직접 발견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여러분은 자아를 해방시켜 스스로 자유롭게 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자유롭도록
허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모든 행위에 대해서 여러분 자신이 책임을 지기
때문인 것입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완전주의의 사회에서 살고 있지만,
완전주의 따위는 잊어버리십시오!
  인생이란 소풍처럼 즐거운 것입니다. 실수 좀 해도 괜찮습니다.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실수를 함으로써 인생이 더욱 즐거운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저녁밥을 태웠다면 외식을 하면 될
게 아닙니까?
  여러분은 오늘밤에 자기 패배적 사고 방식을 떨쳐버리고 신이 뜻하는 대로 되겠다는 결정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신의 은총에 다소라도 보답할 수 있는 길입니다. 자기 자신이
되지 않은 채 어떻게 감히 죽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겠다는 결정을 내리므로써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간단한 일입니다. 그것이 변화가 일어나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변화는 언제나 가능합니다. "늙은 개에게는 새 재주를 가르칠 수 없다."는 자기 패배적인
격언을 듣는다는 것은 나로서는 괴로운 일입니다. 나는 늙은 개에게 여러 가지의 재주를
가르쳐준 경험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선택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생은 하나의 선택인
것이며, 선택을 하는 것은 여러분 자신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을 행복하게 살 수도 있고, 또
슬프게도 살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경솔할 수도 있고 진지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선택을
하든지간에 여러분 자신이 내린 선택에 대해서는 여러분 자신이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여러분이 처해 있는 환경이 따분하고 두렵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 환경을
빠져나오십시오. 누가 여러분에게 거기에 있어야 한다고 강요라도 한다는 말입니까? 여러분의
마음과 정신이 제대로 작용하는 한, 영혼이 고매한 여러분은 여러분의 환경을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바꿀 수가 있습니다. 자신의 환경을 선택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환경을
창조하십시오. 내일부터 시작하십시오. 곧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대로 실천하십시오.
왜냐하면 그것은 행동에 의해서만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통찰은 문제 해결의 절반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머지 일은 타성을
탈피하여 행동에 옮기므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생의 길을 선택하십시오. 사랑의 길을 선택하십시오. 관심의 길을 선택하십시오. 희망의
길을 선택하십시오. 내일에 대한 믿음이 길을 선택하십시오. 선의 길을 선택하십시오. 이 모든
것은 여러분에게 달려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여러분이 선택해야 할 문제들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절망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불행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에게 불편을 주는 인생을 선택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들을 선택한다는 것은
전혀 무의미한 일입니다. 그것은 자학의 길일뿐입니다. 그러나 나는 설혹 여러분이 여러분의
인생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을 지겠다고 결심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쉽지 않으며
모험을 각오해야만 한다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사전에 경고해 두고 싶습니다. 모험, 그것은
열쇠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웃는다는 것은 바보처럼 보일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다." 라는 말을 해두고
싶습니다.
  "울면 감상적인 것처럼 보일 염려가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우는 것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항상 웁니다. 나는 기뻐서 울기도 하고, 절망에 빠져 울기도 합니다.
학생들의 글을 읽고 울 때도 있습니다. 나는 사람들의 행복한 모습을 보고 울기도 합니다.
나는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울기도 합니다. 나는 감상적으로 보인다 하더라도
개의치 않습니다. 믿지 않으실지 모르겠으나, 나는 우는 것을 즐겨합니다. 눈물은 나의 눈을
맑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면 그들에게 빠져들어갈 염려가 있다." 그렇다면 삶에 있어 빠져드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나는 섬에서 나 홀로 서 있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과 내가 함께 한다는 사실은 곧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함께 함을
즐거운 경험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우리 함께 찾아봅시다.
  "감정을 드러내 보인다는 것은 당신의 인간성을 노출시킬 위험이 있다." 나는 기꺼이 내
인간성을 노출시키겠습니다. 인간성을 노출시키는 것이 좋지 못한 일이라면 이보다 좋지 못한
일들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 사람 앞에서 당신의 사상과 꿈을 밝힌다면은 그들을 잃게 될 염려가 있다." 옳은
말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을 다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저 사람 얼간이야, 이리 오게 마블. 이 따위 이야기는 신물나게
들었다네. 집에 갑시다." 라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늘 있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사실이며
또한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어느날 밤, 한 소녀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내가 어째서 항상 절망하고 있는지
알고 있어요.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합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즐겁고, 가장 맛이 있으며, 가장 훌륭한 복숭아가 될 수
있으며, 또한 그 복숭아를 모든 사람들에게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숭아에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내가 바나나이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복숭아를 원하는 사람에게 바나나가 되는 때도 있습니다. 마치 과일 샐러드와도 같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겐 "미안합니다. 그러나 나는 바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당신을 위해 내가
바나나가 되어드렸으면 좋겠지만, 나는 복숭아랍니다." 라고 말해주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무슨 뜻인지 이해하겠습니까? 기다리고 있노라면 언젠가는 복숭아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여러분은 복숭아로써 여러분의 인생을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구태여
바나나로서의 인생을 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랑을 되돌려받지 못할 위험이 있다." 이것 또한 지당한 말입니다.
사랑을 위해서 해야지 무슨 대가를 바라고 사랑을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희망을 가진다는 것은 고통을 받을 위험이 있다." 그리고 "시도를 하면 실패할 위험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험해야 한다. 왜냐하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불행은 아무런
모험도 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 모험도 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며,
아무것도 가질 수가 없다. 따라서 그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다. 그런 사람은 고통과 슬픔을
회피하기를 좋아하므로, 변화와 성장, 삶과 사랑을 배울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는 맹신과 타성이 사슬에 묶인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위대성 특성, 즉
개인적인 자유를 포기해 버린 것이다. 모험을 하는 사람만이 자유로울 수가 있다." 자기
패배적 사로 방식으로 인해 자기 자신을 은폐시킨다거나, 자기 자신을 상실한다는 것은
죽음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여러분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여러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나의 이익을 위해서도 철저하게 여러분 자신이
되는 것에 있습니다.


    @[인생을 선택하라@]

  나는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속담에서와
같이 인생이 있는 것에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생을 선택한다는 것은 우리가
상상했던 만큼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인생을 선택하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를 "희생자" 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향하는 목표란
말입니까? 이것이 인생의 목적이라는 말입니까? 우리는 결국 희생당하는 지점에 이르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까? 죽음과 절망 그리고 불행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돌아 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것들을 원한다면 어디에서나 그런 것들을 접할
수가 있습니다. 신문을 읽어보십시오. 텔레비전을 켜보십시오. 이것과 반대로 여러분은
"인생은 즐겁다. 인생은 아름답다. 우리 인생을 다 같이 축복합시다." 라고 소리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전에서 인생을 무엇이라고 정의를 하고 있는지 보고 싶은 생각에 찾아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그 정의가 너무나 훌륭해서 여러분들에게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생명이 죽은
자와 생명이 있고 활동력이 있는 자를 구별해 주는 성질이다." 이 얼마나 훌륭한 말입니까?
이 표현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내가 좋아하는 또 다른 정의를 말씀드리죠.
그 정의는 "삶이란 무엇인가 쓸모있는 일을 하는 기간을 뜻한다."입니다. 만일 유용성 여부가
죽은 자와 산 자를 결정짓는 조건이라고 한다면 이 세상에는 빈둥거리기만 하는 죽은 자와
다름없는 인간들이 너무나 많다고 생각합니다. 삶에 대한 정의로써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세
번째 정의는 "삶이란 주어진 기간을 통과하거나 보내는 것을 뜻한다." 는 것입니다. 우리들
중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을 참된 의미에서 충분히 사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인생을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기는 한 진실로 살아 있다고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인생을 선택하고 정의지을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생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우리들이 본질적인 우리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그 이유를 나는 정녕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훌륭한 감정과 용기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감정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보람되게 살지 못했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보람된 인생을
살지 못하도록 방해를 한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인생을 경험할 수도 없고 보고 느낄 수도
없는 것입니다. 모험을 하지 않고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습니다. 따라서 살아 있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생이란 능동적인 활동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손에 흙을
묻히는 것을 의미하며, 인생은 그 속으로 뛰어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며, 인생은 넘어지는 것을
의미하고, 인생은 자신을 초월하며 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인생은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하는 문제를 스스로 결정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삶은 훌륭한 비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충만하게 살지 못할 때
우리의 가슴속에서 폭발하고 만다는 사실을 언제나 나를 매혹시키고 있습니다. 수증기가
폭발하려 할 때 뚜껑을 덮으려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고가 발생하고야 말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극도의 공포감, 고통, 외로움 또는 과대 망상증에 빠지거나
무관심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여러분들이 죽어 있다거나 인생을 충만하게
살지 못하고 있다는 징조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느낌이 들 때에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도 한번 살아보자." 라고 외치십시오. 여러분이 인생에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순간부터 수증기는 빠져나가게 되고 따라서 여러분은 안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쉽지는
않은 일입니다. 이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나를 찾아와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뭣하나 그리운 것이 없는
분처럼 보이십니다. 인생이 그처럼 훌륭한 것이라면, 왜 우리는 죽음과 고통과 불행을 겪어야
하는 겁니까? 이 유감스러운 일들은 어째서 일어나는 것입니까? 왜 살인과 강간과 전쟁이
있는 것입니까? 도대체 어째서 그런 겁니까?" 이와 같은 질문들에 대해 나는 "난들 어떻게
알겠습니까?" 라고 대답합니다. 나보다 위대한 사람들이 오랫동안 이러한 문제들을 탐구해
왔습니다. 그런데 나는 어떤 일을 해왔는지 아십니까? 나는 이러한 문제들을 탐구하기를
중지하고 그 인생의 해답을 찾고자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왜 죽었냐고요? 나는 왜 죽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왜 고통이 있느냐고요? 나도 고통 같은
것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은 하나, 왜 고통이 있는지를 모르겠습니다. 만약에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찾는 데에 내 인생을 낭비한다면 나는 내 인생을 충만하게 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나에게 그와 같은 질문을 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인생에 대해서
조금은 알고 있다고 말을 해줍니다. 인생에는 기쁨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직접
느껴보았습니다. 또한, 인생에는 광적인 정열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나는 또한 사랑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내가 사랑을 해보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환희라는 것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희열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내 자신이 직접
경험해 보았을 뿐 아니라, 나는 이 희열을 경험해 본 사람들도 알고 있습니다.
  나는 희열이라는 단어를 퍽이나 좋아합니다. 희열을 경험해 봅시다. 나는 희열이
무엇인가를 알기 전까지는 절대로 죽지 않으렵니다.
  어쨌든 내가 알고 있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여러분은 자신에게 이 모든 것들을 제공해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러한 것들을 창조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을 부여받았으며, 여러분은 여러분이 되었고 또한 여러분은 자기자신이 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교육자의 한 사람으로서 배울 수 있는 것은 그 무엇이든 잊어버릴 수가
없으며 새로운 방법으로 다시 학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약속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 무엇인가가 되고자 한다면 여러분은 그러한 인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손에 흙을 묻힐 각오가 되었고, 약간의 고통을 감수할 각오가 되었고, 약간의 투쟁을 할
각오가 돼 있으며, 그것을 위해 얼마간의 노력을 하겠다는 각오가 돼 있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태어난 바로 그 날, 여러분은 생일 선물로 이 세상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예쁜 리본으로 포장된 멋있는 세상이라는 선물상자를 받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상자를 열어보는 것은 고사하고 리본조차 풀어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쩌다 상자를
열 때에는 그들은 상자 속에 오직 아름다움과 경이로움과 즐거움만이 들어 있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랬다가는 상자 속에 고통과 절망과 고독과 당황이 들어 있는 것을 알고는 크게
놀라는 것입니다. 이것들도 모두 우리 인생의 일부분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나는 나의 인생을 그냥 지나쳐버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나는
그 인생의 상자 속에 들어 있는 것들을 낱낱이 알아보고 싶습니다. 그 큰 상자 속에는
고통이라고 이름하는 작은 상자가 들어 있습니다. 그 고통 또한 나의 것입니다. 나는 고통의
상자를 열어보고 고통을 경험해 보고자 합니다.
  고독이라는 작은 상자도 들어 있습니다. 그 상자를 열어보면 무슨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나는 고독을 경험해 보려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고독하다고 말을 할 때에 나는
여러분의 고독을 조금쯤은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서로 만나 서로의
고루한 손을 잡아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나는 이런 모든 것들을 알고 싶어합니다. 나는 또한
희열을 배울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희열이  그 상자 속에 들어 있다면 난
틀림없이 그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내가 고통을 즐거움으로 바꿀 수 있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또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여러분이 못할 이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니, 여러분 중에는 나보다 더 잘 할 분도 계실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상자 속에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우리는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법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눈물을
말끔히 닦아내고 웃음으로 대치할 수가 있습니다. 힘에는 두 가지의 커다란 힘이 있는데
그것은 외적인 힘과 내적인 힘입니다. 우리는 폭풍우, 지진, 홍수, 천재지변, 질병, 고통 따위와
같은 외적인 힘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통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외적인 힘이 존재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기는 하지만 정말로 문제가 되는 것은 여러분이
이러한 외적인 힘에 어떻게 대처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절망을 기쁨으로 바꿀 수가
있습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다음에 기회가 있을 때 한 번 시험해 보십시오.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 있는 일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불행은 동반자를 좋아한다.
동반자를 좋아할 뿐만 아니라 동반자를 필요로 한다." 는 것입니다. 불행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도 불행해지기를 바라며 또 그렇게 만들려고 합니다. "내가 감히 행복해질 수 있겠느냐?"
라고 그들은 말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들은 나를 그들의 불행 속으로 끌어들이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들이 동반자를 좋아함으로 내가 그들의 동반자가 될 수는 있으나, 불행한
동반자가 아니라 행복한 동반자가 되어 주겠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하기 위해서 우리들은 많은 선택을 해왔습니다. 그러한 중요한 선택 중의
하나가 "자신을 선택" 하는 일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선택해야 합니다. 자신을 증오하는 일은
그만 두고 자신을 두 팔로 포옹하고는 "내가 다 옳다. 너는 화를 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나한테는 너밖에는 없다." 라고 말하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선택하셔야 합니다. 자기의 인생을 부여받아 그 인생을 제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바로 자기애가 부족한 사람들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이
말을 들어보신 지가 언제쯤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당신은 기적적인 존재" 라는 말을
다시 한 번 더 강조하는 바입니다.
  나는 언제나 인간에 대한 경외감을 느낍니다. 모든 사람들은 나름대로 아름답고 예쁘면서도
얼굴이 제각기 다르고, 눈이 다르고, 코가 다르고, 입이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심지어는
지문까지도 다릅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가 특이한 존재임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그토록 특이하게 만들어졌을까요? 다른 사람을 닮아가기 위해서일까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여러분만이 할 수 있는 독특한 언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토록 각자가 독특하게
만들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만이 할 수 있는 그 독특한 언어가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일에 여러분의 인생을 바치셔야 합니다. 그 언어를 개발하여 나에게도 들려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나와 여러분은 더욱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인간이
되느냐 하는 것은 여러분의 책임이자 의무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상실할
때에는 그야말로 끝장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품위를 지키시고 성실성을 간직하십시오. 여러분
외에는 그 누구도 여러분을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여러분들을 잘못
볼지도 모르지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잘 알고 있고 더욱이 자존심이 있는 중요한
인물임을 알고 있습니다. 연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나이다(I am I)." 라고 한 메데아의
말을 기억하십시오. 이 마지막 장면에서 사람들은 메데아에게 이렇게 물어봅니다. "메데아야.
이제 남은 것이 무엇이냐?" 라고. 이 물음에 대해서는 메데아는 "남은 것이 무엇이냐고? 내가
남아 있지 않습니까?" 라고 답변했습니다. 이 얼마나 의미심장한 말입니까? 나 이상 소중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
아닙니까? 우리는 같은 부모 밑에서 자란 한 가정의 아이들에 대한 연구를 거듭해
왔습니다. 어떤 아이는 성인이 될 수도 있고 또 어떤 아이는 악한이 될 수도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아마도 각자가 가지는 특성과 사물을 인식하는 방법의 차이 때문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독특한 역사를 지녀왔으며, 또한 여러분 특유의 정서적인 역사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개중에는 희열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불안감을 지닌 채 오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런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다 괜찮습니다. 모두가 아름다운
감정들인 것입니다. 이러한 감정들을 모두 포옹해 주십시오. 왜냐하면 이러한 감정들로 인해서
우리가 이 자리에 모여 있다는 것입니다. 왜 이 자리에 왔는지 그 이유를 우리 서로 묻지
말기로 합시다.
  우리는 무엇이든 따져 보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말을 한다면, 여러분은 "그말 뜻을 분명히 밝히십시오." 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방의 감정을 충분히 이해할 줄을 모르는 지경까지 이른 것입니다.
우리에게 와닿는 말들은 어떠한 말이든지간에 괴상한 정수기에 걸러져서 상대방이야 무슨
뜻에서 한 말이든간에 우리 멋대로 소화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장하지
못하고 성숙하지를 못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 똑같은 일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하튼간에 여러분은 하나의 역사, 그것도 대단히 독특한 역사이며 신비의 역사를 지닌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역사가 어떤 것이든 그것은 이미 지나간 과거인 것입니다. 그 과거의
역사를 사랑해 주고 포옹해 주십시오. 그리고는 용서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결코 인생을 선택할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들에게 못된 짓을 한 사람들을
"괜찮습니다." 라고 말해줌으로써 용서해 줄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용서해 주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그들로부터 당한 서운한 일들을 죽음의 사신 신천홍처럼 평생을 짊어지고
다니게 될 것이며, 그 짐은 여러분을 짓누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용서해 죽고
자비를 베풀어 줄 때야 비로소 여러분은 이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이 무거운 짐을 지고
다니는 데에 사용했던 힘을 여러분 자신을 성장시키고 아름답게 가꾸는 일에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결코 여러분의 과거를 죽음의 사신 신천옹처럼 평생을 짊어지고 다니지는
마십시오. 과거는 잊으십시오. 과거로부터 배울 것이 있으면 배운 다음에 과거는 흘려
보내십시오. 유진 오닐의 좋은 말씀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우리들 중 그 누구도 인생이
우리들에게 행한 모든 일들을 다 치유할 수는 없다. 그러한 일들은 우리가 무엇이 행해지고
있는가를 미처 깨닫기도 전에 이미 행해진 것이며 이러한 일들은 현재의 당신과 미래의
당신 사이에 늘 끼어들면서 평생을 따라다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나아가다가는 자아를
영원히 상실해 버리게 된다." 라고.
  여러분은 과거이기도 하고 또한 미래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미래가 어떤 것이 될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미래에 집착할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미래에
집착함으로써 부자가 된 사람들은 보험회사들밖에는 없습니다. 보험회사들은 우리들에게
별의별 것들을 다 보증해 줍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보험회사 따위가 우리에게 도대체
무엇을 보증해 줄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여러분은 또한 현재이기도 합니다. 의지와 지성과 욕망과 희열을 겸비한 여러분은,
지금 이 순간부터 여러분이 원하는 그러한 훌륭한 인물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이 말은 지극히
황당무계한 소리처럼 들릴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에 여러분이 오늘밤에 "인생을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알아봐야겠다. 그리고 오늘밤부터
당장에 인생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의 행동을 해야겠다. 인생을 부정하는 따위의 말을 할
때는 주먹으로 내 입을 틀어막겠다." 라고 결심을 하신다면 틀림없이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나는 믿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능력이 있으므로 그렇게 하실 수가 있습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당신에게 화필과 그림 물감이 있다. 그것으로 당신이 들어가 살 천국을 그려라" 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여러분들이 지옥을 그리고 싶다면 지옥을 그리십시오. 하지만
나중에 가서 나나 여러분의 부모님들이나 이 사회를 원망하지는 마십시오. 더욱이 하느님을
원망하지는 마십시오. 여러분의 지옥이 생기게 된 데에는 전적으로 여러분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거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과거입니다. 우리는 미래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미래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정 우리가 인생을 바쳐야 할 것은 지금 이 순간에
인생을 선택하는 일인 것입니다. 지금 당장에 선택을 하십시오. 왜냐하면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지금 현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잠재력을
개발하자면 자포적인 사고방식을 버려야 합니다. 폴 랩스는 이를 "반자아적 도구" 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이러한 이러한 자포적인 사고 방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안돼(don't)" "절대로 안돼(never)" 따위의 태도를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아뇨" "불가능합니다." 라는 따위의 부정적인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불가능한 것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희망이 없다." 는 말도 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에는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이 따위 말들은 바보들에게나 어울리는 말들이지
지성인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말들인 것입니다. 이 따위 부정적인 말들은 여러분의 사전에서
깨끗이 지워버리십시오."절대로 안돼."라는 말은 절대로 사용하지 마십시오. 불가능하다고요?
아닙니다. 그것은 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인류가 이룩한 위대한 업적들이 한때에는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진 적이 있었으나 그것을
가능한 것임을 입증한 위대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죽을 것이라는 의사의 선고를 받은
사람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죽을테면 당신이나 죽으시오. 나는 죽지 않을 테니까." 라고
용감하게 외쳤던 사람은 그의 말대로 죽지 않았습니다.
  인생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경이와 즐거움, 절망, 고통까지도 아니 불가사의한
일까지도 긍정적인 태도로 받아들이십시오. 항상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면서, "가능하다."
"희망은 있다." "어떻게든 해내겠다." "나는 할 수 있다." 고 확신을 가지십시오. 나는 여러분의
미완전감이 여러분들이 고통을 느끼는 주원인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자신이 되고자
노력하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포옹하십시오. 하지만 이 말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여러분들은
"터무니없는 말이야" 하고 생각하실른지 모르나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인생의 과업이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지식을 탐구하고 새로운 능력과 새로운 창조력을
개발함으로써 여러분은 500살까지도 사실 수 있으며 그 나이가 되어도 정력적으로 많은
일들을 해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여러분이 더욱 빠른 변화 더욱 신비스러운 변화를 원하신다면, 여러분은
"나"를 "우리"로 확대시켜야 합니다. 저도 포함시켜야 합니다. 나는 정말이지 "나" 또는
"나를"의 세대에 환멸을 느낍니다. 여러분들도 그러하시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나의 생활 속에 포함시키기 위해서는 나는 나 자신의 일부를 포기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도 상관이 없습니다. 내 자신의 일부를 포기하는 대신에 나는 더욱 더
많은 것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모험을 다시 시작하고, 사랑을 다시 시작하고자 하는 각오가
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인생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일을 하고
투쟁을 하고 고생을 하고 희망을 거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사랑이요 인생
때문인 것입니다. 인생을 놓친다는 것은 더할 수 없이 큰 손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모험을 하고, 상처를 받고, 고생을 할 각오가 돼 있다면, 여러분은 사랑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다루어야 하고 또한 선택해야 할 또 다른 하나의 것은 죽음입니다. 인생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죽음과 화해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더할 수 없이 정다운 우리의
벗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우리에게 인간은 영원을 가진 것이 아님을 깨우쳐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인생을 원한다면은 그 인생을 지금 당장부터 보다 값지게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미적미적 미루기만 하다가는 인생은 어느덧 끝장이 나기 때문인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죽음이 한 가지 좋은 점은 그 죽음이 언제 당도할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마치 죽음이 여러분 곁에 앉아 "나 여기 있어, 나 여기 있어." 라고 말이나 하는
듯이 순간순간을 결사적으로 유감없이 살아야 합니다. 우리 문화에 있어 죽음에 대한
개념처럼 우리가 싫어하는 것은 없습니다. 나는 미국 국민들처럼 죽음을 두려워하는 국민은
보지 못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시겠습니까? 우리 미국 사람들은 인생의 참된 의미를 모르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않는다면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하느님이 주신 여러분 인생의 순간순간을 유감없이 산다면 여러분은
비명을 지르거나 악담을 퍼부을 필요가 없게 될 것입니다. 죽음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행복하게 죽는 사람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문의해 보십시오. 행복하게 죽는 사람들은 인생을
알고자 노력했던 사람들인 것입니다.
  죽음은 하나의 도전입니다. 죽음은 우리들에게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권고를 합니다.
죽음은 우리들에게 성장하고 발전해 나가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죽음은 우리들에게 지금
당장에 서로를 사랑하도록 하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죽음은 우리 자신을 남에게 나누어 줄
걸 요구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는 조금도 없습니다. 죽음은 우리의 가장 큰 도전입니다. 여러분이
우리 인간은 영원히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여러분은 옆 사람에게 몸을 돌려
서슴지말고 "당신은 훌륭하십니다. 당신이 존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은 지금 당장 전화를 걸어 "안녕하세요, 어머니? 어머니와 서로 언성을
높여 다투는 일이 많았었지만 그래도 저는 여전히 어머니를 사랑합니다." 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생과 삶은 인생의 과업인 것입니다. 나는 "인생은 회상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말할 키에르케고르의 글을 읽은 일이 있습니다. 훌륭한 말이긴 하지만 인생은 앞을
내다보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앞을 내다보며 사노라면 인생을 이해하지 못하게 될는지는
모르지만 인생을 이해하는 것만이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인생을 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인생이라는 큰 상자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서 그 속에 든 작은 상자들을
전부 다 열어 보십시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하십시오. "이 모든 것이 모두 나의 것이다.
인생은 나의 특권이다. 나는 이 모든 것들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 라고. 여러분의
인생은 하느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신 귀중한 선물인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 대화를 할 수 있고, 함께 일하고 함께 배울 수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인생은 자기 스스로가 정의를 내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인생은 다른 사람의 인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달리 방법은 없습니다. 인생을
선택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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