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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브 브라이어] 황금 파라오 투탕카멘

by Casey,Riley 2023. 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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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금 파라오 투탕카멘
보브 브라이어

    (1)왕은 죽어야 한다
  늦가을의 어느날,열여덟 살의 투탕카멘은 홀로 잠자리에 들었다. 농부들의 경우에는  남편
과 아내가 한방에서 잠을 잤지만,이집트의 파라오들은 왕비나 첩들과는 떨어진 별궁에서 생
활했다.부부간의 만남과 잠자리는 별개의 문제였다. 투탕카멘은 걸상과 책상,발치가 사자 발
처럼 생긴 1인용 나무 침대 등이 드문드문 놓인 넓은 방에서 휴식을 취했다.회칠을 한 벽에 
그려진 물고기와 오리,키 작은 풀들이 희미한 불빛 속에서 어른거리고 있었다. 밤이  이슥해
지자 문이 소리없이 스르르 열리면서 한 사람이 겨우 들어올수  있는 틈이 생겼다. 그와 동
시에 누군가가 열려진 문 틈으로 잽싸게 들어오더니 등 뒤에서  문을 닫았다. 어찌 된 영문
인지 침입자는 보초들을 무사히 통과한 모양이었다. 다른 곳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은 걸까?
한밤의 침입자는 파라오의 침대가 있는  쪽을 향해 살금살금 다가갔다.  어쩌면 물시계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침입자의 발자국  소리를 삼켜 버렸는지도 모른다.  침입자는 왕이 
설화서고 머리 받침을 벤 채 옆으로 누워 잠들어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곧 이어 침입자는 
품 속에서 둔기를 꺼냈다. 언뜻 보기에 3인치 두께의 돌덩이에  길이가 2인치 정도 되는 갈
고리를 매단 이집트 철퇴 같았다. 침입자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투탕카멘의 두개골을 향
해 둔기를 휘둘렀다. 한밤중의 갑작스런  소리가 잠잠해지기를 기다렸다. 왕의 침실을  빠져 
나온 침입자는 궁궐 밖으로 나와 밤의 어둠 속에서 사라졌다. 다음날 아침 하인들은 의식은 
없지만 아직 살아 있는 파라오를 발견하고는 그 즉시 총리 대신인 아이와 투탕카멘의 왕비
인 안케센아멘에게 알렸다. 잠시 후  머리에 난 상처를 치료하는 데  뛰어난 기술을 보유한 
사제 겸 의사가 사원에서 불려 왔다. 이 의사는 외상 환자들을 수없이 보아온 사람이었다.당
시는 돌무더기가 건설 현장의 일꾼들을 덮치거나 전쟁터에 나간 보병들이 머리에 화살을 맞
는 사례가 왕왕 발생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파라오였다. 당연히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했다. 의사는 조수에게 왕의 머리를 깎으라고 지시했다. 그래야 적절한 진단을  내
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청동 칼날이 왕의 부드러운 검은 머리칼을 제거해 나가는 동안,  의
사는 벌써 수술 결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파라오를  위해서나 자신의 경력을 위해서나 
그건 중요한 문제였다. 섣부르게 행동했다가 투탕카멘이 죽기라도 하면 비난의 화살이 자신
에게 쏟아질 게 뻔했다. 머리칼을 밀자  심하게 부어 오른 상처가 드러났다. 목과  두개골이 
연결되는 머리 뒷부분에 그런 상처가 나는 경우는 좀처럼  드문 일이었다. 외과술을 기록한 
파피루스에도 그런 상처를 치료하는 방법은 나와 있지 않았다.  두개골 가격이 무의식 상태
의 원인이 되었지만, 두개골의 골절 정도는 경미했다. 다행히 제거해야 할 뼛조각은 없었다. 
의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청동  탐침과 핀셋을 도로 나무 상자에  집어 넣었다. 그러나 
파라오의 콧구멍에는 계속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뇌를 둘러싸고  있는 얇은 막인 뇌막이 
손상당했다는 신호였다. 총리 대신인 아이는 파라오의 죽음이 이집트와 자신에게 미칠 영향
을 따져 보며 침대 옆에 말없이 서 있었다. 안케센아멘이 겁에 질린 채 의사 쪽을 바라보았
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의사의 소견을 묻는 시선이었다. 의사는 세 가지 중 한 가지를  골
라 대답하라는 교육을 받아왔다. 첫째,"치료할 수 있는  병입니다."둘째,"치료하기가 좀 힘든 
병입니다."셋째,"치료가 불가능한 병입니다."왕의 증상이  치료가 가능한 상태라고 말한다면 
완쾌를 뜻하는 게 된다. 대신 좀 힘든 상태라고 말한다면, 불확실한 회복을 뜻하는 게 된다. 
의사는 재빨리 상황을 판단했다. 제거해야 할 뼛조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제자리
를 찾아줘야 할 뼈가 있는 것도 아니니 왕을  위해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
다. 치료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왕이 죽지 않을 거라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의사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만에 하나 투탕카멘이 죽을 경우 자신에게 비난의  화살이 쏟아질 게 불을 보
듯 훤했다. 의사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환자의 중요성을 고려하건대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편이 훨씬 안전했다. 아무래도 의사 입장에선  왕의 운명을 신의 손에 
넘기는 게 훨씬 더 나을 것 같았다. 이 사제 겸 의사가  처한 곤경은 어쩌다 유명한 환자를 
치료하게 된 현대의 의사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전세계  응급실의 의사들은  이를 가
리켜 '유명 환자 증후군'이라고 부른다. 사회적으로 유명한 환자와 마주칠 경우, 의료진은 긴
장한 나머지 신속하게 행동하거나 훈련받은  바를 제대로 실행하지 못한다.  이를테면 전에 
한참 동안 토론하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다. 투탕카멘이 높은 지위 때문에 곤란한 일을 겪
은 최초의 지배자는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어쨋든  그런 이유로 손해를 본 마지막  지배자는 
아니었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하다. 에이브러햄 링컨도 명성 때문에 죽었을 수 있다. 링컨  대
통령이 머리에 저격을 당한 후 포드 극장에서 링컨을 수행했던 젊은 외과의는 적절한 모든 
조치를 취했다. 그는 손가락으로 총상 입구를 조사하고 나서  총알이 빠져 나가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리고는 대통령을 쉬게 했다. 대통령을 근처 여관으로  운반하는 사이에 공중 위생
국장이 도착했다. 공중 위생국장은 수년 동안 환자를 치료해 본 적이 없는 관료였지만 도착 
즉시 링컨의 총상 처치를 지휘했다. 그는 대뜸 총상 입구에 탐침을 집어 넣더니 거의 눈 있
는 데까지 밀어 넣었다. 공중 위생국장은 의과 대학에서 가르치는 최신 의학 지식을 모르고 
있었다. 즉 탐침으로 검사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뇌는 아주 부드럽기 때문에 총알이 지나간 
경로를 맞게 따라가고 있는지, 아니면 추가  손상을 입히고 있는지 쉽게 판단할 수가  없다. 
취근에 이루어진 재평가에 따르면, 총알을 손대지 않고 그대로 놔두었더라면 링컨은 살았을
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링컨은 유명 환자 증후군의 희생자였다. 사제 겸 의사
는 안케센아멘에게 고개를 돌려 그녀가 두려워하고 있던  얘기를 꺼냈다. "치료가 불가능합
니다." 안케센아멘이 흐느끼는 동안, 의사는 조수에게 왕의 콧구멍에서 피를  닦아내라는 지
시를 내렸다. 그러자 파라오는 침대에 평화롭게 누운 채 한결 쉽게 숨을 쉬었다. 이제  왕을 
돕기 위해 신앙 요법가들이 불려 올 차례였다. 오후가 되자 신앙 요법가들이 고수풀 열매와 
양귀비 열매,쑥,요법가들은 찜질약 재료에 꿀을 섞어 만든 고약을 상처에 펴 바른 후 그위에 
호루스의 눈을 상징하는 그림이 그려진 아마포 보자기를 덮어 씌었다. 매의 머리를 한 태양
의 신 호루스는 세트(호루스의 아버지인 오시리스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다고 전해지는 사
막, 불모, 폭력의 화신으로 태풍과 암흑을 관장하는 악신 짐승 머리에 뾰족한 입을 하고  있
다.)와의 전투에서 한쪽 눈을 잃었으나, 마법의 신인 토트의 마법 덕분에  다시 눈이 생겨났
다. 그 이후로 이집트인들은 매의 눈 주변에 있는 반점들을  그때 입은 상처 치유의 흔적이
라고 여겼다. 처음 며칠 동안은  낙관적이었다. 투탕카멘은 빠르게 의식을 회복했고  음식을 
먹기까지 했다. 안케센아멘은 얇게 저민 무화관에 계란을 섞은 음식을 해서 날랐다.  계란에 
재생 성분이 들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앙 요법가들은 투탕카멘이 마시는 포도주에 
계란껍질을 빻은 가루를 탔다. 그렇게 하면 손상된 두개골이 계란 껍질처럼 잘 붙는다고 믿
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주가 지나자, 파라오는 의식을 놓치는 횟수가 잦아지면서 몸도  쇠
약해졌다. 시야도 흐려지고 머리의 고통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왕은 뭔가가 두개
골을 누르고 있는 것 같다며 고통을 호소했다. 투탕카멘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안케센아
멘은 점점 더 많은 포도주-왕의 포도밭에서 수확한 포도로 담근-를  날라왔다. 겨울이 닥치
면서 마지막 무의식 상태에 빠진 그는 빨대로 어렵게 아주 소량의 포도주만을 받아 마실 정
도로 악화되었다. 투탕카멘의 임종을 지켜본 안케센아멘에게서  시작된 통곡 소리는 궁궐의 
하녀들에게로 퍼져 나갔고, 얼마 후에는 강건너 테베까지  이어쪘다.부유한 자건 가난한 자
건 할 것 없이 죽음의 신인 오시리스에게 사람이 죽었음을 알리는 최초의 애도 의식 속에서 
모두 하나가 되었다. 몇 시간 후 충격에서 헤어난 아이는 투탕카멘의 매장 계획을 진행시키
기 시작했다. 위에서 그린 투탕카멘의 죽음을  둘러싼 나의 설명은 물론 허구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그가 죽은 후 3,300년 동안 보존해 온 증거에 기초하고 있다. 투탕카멘의 매장  과
정을 재구성하는 작업은 이보다 훨씬 쉽다. 투탕카멘이 스스로를 위해 준비했던 무덤,  그러
니까 왕들의 계곡서쪽에 위치한 조부의 무덤 옆에 있던 무덤은 소년 왕이 죽었을 때 완성이 
한참 덜 된 상태였다. 그러나 계곡 중앙에 사용하지 않은 거의 완성된 무덤이 있었다.  원래 
이 무덤은 지체는 높지만 왕족과는 거리가 먼 일반인을  위한 용도로 지어진 것이었으나,아
이는 이 자그마한 무덤에 파라오를 묻기로 결정했다. 결정 즉시 화가들이 달라 붙여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벽에 조각을 새기지 않은 건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덤을 준비하는 동
안, 미라 제작자들은 영원 불멸을 위해 투탕카멘의 시신을 수습했다. 미라 제작은 주로 과학
적인 과정이었지만 각 단계마다 종교적인  의식이 뒤따랐다. 제일 중요한  단계는 시체에서 
가능한 한 빨리 수분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박텍리아가 조직을  파괴하기 위해선 수분이 필
요하다. 다시 말해 물이 없으면 시체는 썩지 않는다. 뇌와 내장 조직은 다량의 수분을  함유
하고 있다. 따라서 부패를 막기 위해선 죽은 후 바로 뇌와 내장을 떼어내야 한다. 왕실 전속 
미라 제작자들에게 운반된 투탕카멘의  시체는 그 즉시  미라 제작용 설화석고(암염,석회암 
등에 붙어 층을 이루고 있는 흰빛의 작고 치밀한 덩어리로, 석고의 한 종류)테이블 위에 놓
여졌다.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시체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액체와 내장들을 테이블 밑에 있
는 대야 안으로 흘려 보내기 위해서였다. 미라 제작자들은 먼저 콧구멍 안에 길다란 철사를 
밀어 넣은 후 사골(두개골의 일부로 두 눈구멍 사이에 있는 벌집같이 생긴 뼈)을 통해 철사
를 두개골 안으로 밀어 넣어,철사를 빙빙 돌렸다. 이처럼 철사를 빙빙 돌렸던 이유는 뇌  조
직을 잘게 부숴 반액체 상태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쉽게 말해 철사가  일종의 총채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렇게 하면 시체를 엎어 놓았을 때 반 액체 상태로 변한 뇌 조직이 콧구멍을 
통해 흘러나오기 때문이었다. 미라 제작자들은   투탕카멘이 다음 세상에서 부활했을 때 완
전한 모습을 갖출 수 있도록 거의 모든 신체 기관을  보관했다. 그러나 뇌는 버렸다.그 기능
을 잘 몰랐기 때문이다. 이집트인들은 사람이 흥분했을 때 빠르게 뛰는건 뇌가 아니라 심장
이기 때문에 심장으로 사고한다고 믿었다.  성경에 파라오가 무슨 일이  있어도 유대인들을 
보내지 않겠다며 고집을 부리는 대목을 보면, "파라오는 심장은 딱딱해졌다."는 표현이 나온
다. 투탕카멘의 뇌가 제거되고 나자 이번에는 장기를 꺼내기 위해 왼쪽 하복부 절개가 시작
되었다. 조심스럽게 떼어낸 위장과 간,창자,콩팥은 얕은 대야에 담겨졌다. 대야에  담긴 장기
들은 나중에 건조과정을 거쳐 왕이 다음 세상에서 부활할 날을 위해 4개의 조그만 황금  관
에 보관되었다. 이제 투탕카멘의 몸에는 부활을 비는 마법의  주문을 기억해 옲을 심장만이 
남아 있었다. 뇌와 장기들이 제거된 후에는 투탕카멘의 몸 안에는 아직도 상당한 양의 수분
이 남아 있었다. 미라 제작자들은 수분을 제거하기 위해 탄산나트륨과 중탄산나트륨, 염화나
트륨 성분이 만나면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천연 소다석을 투탕카멘의 몸에  뿌렸다. 35일을 
천연소다석 속에서 지내고 나자 투탕카멘의 몸에서는 거의 모든 수분이  빠져 나갔다. 이제 
미라는 50파운드도 채 나가지 않았다. 바야흐로 천으로 감싸는 일만 남은 것이다. 붕대를 감
는 동안 자칼의 머리를 한 장례의 신 아누비스(오시리스의 아들로 죽은 자의 안내인이자 미
라를 만드는 이집트의 신)의 가면을 쓴 사제가 투탕카멘의 부활과  영생을 기원하는 주문을 
읽었다. 사제는 소년 왕의 영생 불멸을 빌기 위해 아마포로 만든 붕대 사이사이에 150여 점
의 보석과 부적을 끼워 넣었다. 미라  제작자들이 미라를 만드는 동안, 전국의 내노라  하는 
장인들은 새공한 위에다 금박을 입힌 목제 성골곽,황금 가면과 관, 가구,아마포,옷,보석 등속
의 장례 물품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어다.  이제 중요한 작업으로는 우샵티(고대 이집트에
서 죽은 자와 함께 부장했던 작은 인형)를 준비하는 일만 남았다. 마법에 의해 생명을 얻어 
다음 세상에서 투탕카멘의 시종을 들게 될 이들 수백 개의 하인 일상은 투탕카멘의 모습과 
비슷하게 조각되었다.나무나 돌로 만들어진 이들 입상은 죽은 자들의 신인 오시리스를 상징
하는 미라 형태를 띠었다. 이집트는 농경 사회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죽은 자들이 다음 세상
에서도 농사를 지을 거라고 생각했다. 우샵티들이 농기구를 들고 있는 건 그 때문이다. 투탕
카멘을 위해 413점의 우샵티와 1년365년을 기준으로  하루에 한 명씩 계산해서 365점의  일
꾼,일꾼,10명당 계산해서 36점의 감독관,추가로 한 달에 한  명씩 계산해서 12점의 감독관이 
제작되었다. 모르긴 해도,파라오의 매장을 준비하기 위해 조를 이뤄 밤새 작업하던 장인들의 
일터에는 공포감이 감돌았으리라.재무 대신 마야는 조그만 황금 지팡이와 도리깨를  보관하
는 장례용 의자 위에 않을 투탕카멘의 소형 목제 조각상을 주문했다. 신들에게 그가 위대한 
왕이었음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조각상 옆면에는  젊은 파라오에 대한 마야의  진한 애정을 
나타내는 글귀가 새겨졌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말하는 바를  행함으로써 주인에
게 이로움이 되는 하인이, 옳지 않은 일은 하지 않는  하인이 주인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라
면 기꺼운 마음으로 행하는 하인이 만들다."몇 가지 점에서 투탕카멘의 장례 물품을 준비하
는 데에는 시간이 충분치 못했다. 예정된 70일이 지나자 미라와 관 제작은 차질없이 끝났지
만 그 외에 필요한 제의 용품들은 제시간에 맞추지  못했다.그래서 투탕카멘의 형인 스멘카
레의 무덤에 안치됐던 장기 보관용 소형 관을 꺼내 투탕카멘을 위해 다시 사용했다. 각각의 
관 안에는 2백여 개의 주문과 기도문 성가를 모은 [사자의  서]에 수록된 기도문이 황금 글
씨로 새겨졌다. 관 내부의 기도문은 투탕카멘과 관련된 내용이지만 카르투슈(고대 이집트의 
벽화나 기념비 등에서 상형문자로 쓰여진 국왕  또는 신의 이름을 에워싸고 있는  타원형의 
테)밑을 자세히 보면 그의 형인 스멘카레의 이름이 새겨졌던 흔적이 남아 있다. 투탕카멘이 
죽은 지 70일째 되는 날 장례 행렬은 영원의 집까지 투탕카멘의 미라를 호위하기 위해 테베
의 서쪽 둑으로 모여들었다. 미라를 실은 썰매 위로 화환으로 뒤덮인 목제 성골곽이 놓여졌
다. 성골곽 위에는 명부로 가는  여행길에서 투탕카멘을 보호해줄 목제  코브라들이 화려한 
색채를 뽐내며 두 줄로 정렬해 있었다.  썰매는 궁중 관리들이 끌었다. 애도를 표하기  위해 
머리에 흰 끈을 동여맨 열 명의 관리들 틈에는 화려한 관복 차림의 상 이집트 장관  펜투와 
하 이집트 장관 우세르몬트도 끼여 있었다.장례 행렬이 불모의 땅을 지나 왕들의 계곡을 향
해 천천히 움직이는 동안,여인네들은  옷을 찢으며 울부짖었다.여인네들은 심지어는  머리에 
모래를 뿌려대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는 장례 때면 흔히 볼수 있는 의식의 일부일 뿐이었다. 
그들 중에는 안케센아멘도 있었다. 사람들 속에서 안케센아멘은 극심한 외로움을 느꼈다. 향
도(관을 끄는 사람들)들이 무덤에 다다르자 행렬은  잠시 멈춰 섰다. 미라를 싸는 과정에서 
투탕카멘의 입과 코는 완전히 막혀져 있었다. 이제 영생을  위해 무덤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입을 여는 의식이 행혀졌다. 죽은 자로 하여금 숨을 하는 한편,[사자의 서]에 수록된 마법의 
주문을 외울수 있게 하려는 의식이었다.  향도와 사제,장례 위원들이 투탕카멘을 위해  입을 
여는 의식을 거행했다. 종교적인 의식이라기보다는 기적극에  가까운 의식을 위해 열두명의 
조문객이 불려 나왔다. 의식을 집전하는 사제가 진행 과정을 적은 파피루스를 펼쳐  들었다. 
다음 세상에서 투탕카멘을 오시리스처럼 부활시킬 호루스의 호위병역할은 관리들 몫이었다. 
기적극이 연출될 무덤 정면의 공터도 땅의 네 귀퉁이를 상징하는 네 개의 항아리에 담겨 있
던 물로 깨끗이 씻겨졌다.네 개의 향로에 불이 지펴지면서 신들이 깨어났다. 곧 이어 호루스
가 오시리스의 원수를 갚기 위해 벌인 전투를 기념하는  종교적인 살육이 행해졌다. 이집트 
신화에는 세트의 공모자들이 오시리스의 시신을 토막낸 후 동물로 변해 호루스의 추겨을 피
하려고 했으나 호루스에게 잡혀 참수를 당했다고 나와 있다. 입을 여는 의식에서 동물들-두
마리의 황소(한 마리는 남쪽을 위해,또 한 마리는 북쪽을 위해)를 위시해 가젤과 오리들-을 
죽이게 된 건 그런 연유 때문이었다. 도살당한 남쪽의 황소에서 잘라낸 심장과 다리 한쪽이 
미라에게 바쳐졌다. 마법의 힘으로 마법의 힘으로 투탕카멘은 이제 오시리스로 화했다. 제물
로 바쳐진 동물들은 오시리스의 몸을  없애려고 했으나 실패한 공모자들을  상징했다. 다시 
말해 동물들을 죽임으로써 투탕카멘의  육신도 그러한 공격으로부터  안전해졌다. 도살당한 
동물들은 투탕카멘의 긴 여행에서 식량으로 쓰였다. 사제가 황소의  다리로 미라의 입을 건
드리자,조수가 손도끼처럼 생긴 제기를 들고  앞으로 나왔다. 사제는 조수가 건네준  제기를 
미라의 입에 갖다댄 채 주문을 암송했다. 그대의 입은 막혀 있었으나,내 그대를 위해 그대의 
입과 이를 원래의 상태로 돌려 놓노라. 그대를 위해  그대의 두 눈을 여노라.내,신들의 입을 
연 아누비스이 연장으로 그대의  입을 열었노라. 호루스여,입을  열라!호루스여,입을 열라!그 
옛날 신들의 입을 연 쇠 연장으로 호시리스의 입을 열었듯이 호루스가 죽은 자의 입을 열었
도다. 호루스가 그대의 입을 열었도다. 죽은 자는 일어나  걷고 말하리니, 죽은 자는 아누의 
궁전에서 모든 신들과 함께 하리니,죽은자는 인류의 신 호루스로부터 왕관을 하사받을지니.
의식의 진행되는 동안, 투탕카멘의 육신은 썰매 위의 성골곽 안에 안치돼 있었다. 그래서 대
신 투탕카멘의 수호자 역할을 하게 될, 투탕카멘의 실제 키와  거의 똑같이 제작된 두 개의 
조상 중 하나를 사용했다. 의식을 마무리할 때가 되자.사제가 제기를 쳐들더니 젊은  왕에게 
숨을 불어 넣는 주문을 외우며 투탕카멘의 입을 툭툭 쳤다. "그대는 다시  젊어지리니, 그대
는 다시 생명을 얻으리니, 그대는 다시 젊어지리니,  그대는 다시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니."
그리하여 투탕카멘이자 오시리스가 된 투탕카멘-그는 이제  오시리스처럼 서방인이었다.-의 
시신이 안치된 성골곽을 등에 진 채 무덤으로 이어지는 열  세 개의 계단을 내려갔다. 바닥
에 이르러 향도들은 관을 안치할 방을 향해 오른쪽으로  돌았다. 왼쪽으로 미라를 제작하는 
70일 동안 투탕카멘을 위해 갖가지 의식이 거행됐던 5피트 높이의 전례용 침대들이 보였다. 
첫 번째 침대 머리맡에는 금도금을 입힌 아름다운 하마 두상 두 개가, 두 번째 침대 머리맡
에는 뿔 사이에 태양을 이고 있는 암소 두상이 세 번째 침대 머리맡에는 사자 두상이  조각
돼 있었다. 이 동물들은 투탕카멘이 다음 세상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의 여부를 주관하는 신
들이었다. 미라를 현실(관을 들여 놓는 방)로 운반하는 동안 향도들은 마치 눈 속에 집어 넣
기라도 할 기세로 왕의 부장 보물들을 훔쳐 보았다. 현실에 다다르자,뚜껑을 열면 또 나오는 
러시아 인형처럼 크기가 다른 관 세 개가 들어 있는 직사각형의 석관이 향도들은 기다리고 
있었다. 관 뚜껑들은 바닥에 놓여 있었다. 파라오는 제일 안쪽 관에 안치되었다.암송에 능한 
사제가 기도문을 옲은 동안,투탕카멘의 시신위로 연고가 부어졌다. 다음 세계로 가는 투탕카
멘의 길이 향내로 가득 차게 하기 위해서였다. 잠시 후 제일 안쪽의 관 뚜껑이 닫히면서 투
탕카멘은 암흑 속으로 사라졌다. 3,300년  후라면 모를까.이제는 아무도 그이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가운데 관 뚜껑이 닫히나 싶더니 마침내 제일 위쪽의 관 뚜껑마저 제자리에 끼워졌
다. 바깥쪽에 있는 두 개의 관에는 소년 왕을 닮은 조상이 안치되었다. 마지막 관 뚜껑이 제
자리를 찾자, 안케센아멘이 남편의 이마를 보호해줄 콘도르와 코브라 조각상 둘레에 조그만 
화환을 올려 놓았다.적들을 물리친 오시리스 신의 승리를 기념하는 '승리의  화환'이었다. 화
환이 제자리에 놓여지자,사제가 기도문을 암송했다.그대의 아버지 아툼(혼자만의  수정 작용
으로 슈와 테프누트를 낳았다는 이집트 태고의 신)께서 그대를 위해 이 아름다운 설욕의 화
환을 그대의 이마에 동여매셨도다.신들의 총애 속에서 그대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지니. 그와 
동시에 석관의 무겁디 무거운 돌 뚜껑이 스르릉 닫혔다. 조문객들은 한 걸음씩 천천히 내디
디며 무덤의 계단을 올라가 눈이 부실 듯한 태양 속으로 나갔다. 조문객들이 무덤을 떠나기
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한 무리의 일꾼들이 서둘러 현실로 들어왔다. 일꾼들은 감독관이 지
켜보는 가운데, 석관 주변에 3중으로 된 판벽널을 설치했다. 일꾼들은 작업이 끝나자 이번에
는 석공들이 무덤의 나머지 공간으로부터 현실을 봉하는 회벽을 세웠다. 입을 여는 의식 때 
사용됐던 조상과 나머지 또 하나의 조상은 투탕카멘을 지키기 위해 회벽 바로 앞에 놓여졌
다. 하인들이 부산스레 움직이며 무덤에 부장할 마지막 물건들, 즉 이륜 전차와 아마포를 넣
은 상자.흑단을 깎아 만든 의자등을 전실로 날랐다.누가 파라오의 보물을 훔쳐갈까 봐서인지 
그 사이에도 감시의 눈길을 여전히 계속됐다. 석공들이 전실을 봉하고 나자.이집트의  9적을 
상징하는 아홉 명의 포로들 위에 서 있는 자칼 문장이 덜 마른 회벽 위에 찍혀졌다. 투탕카
멘은 죽어서도 당당한 승자였다. 안케센아멘의 긴 하루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죽음과  싸워 
이긴 투탕카멘의 승리를 축하하는 마지막 식사 의식은 무덤 입구에서 치러졌다. 참석자들은 
파피루스 깃 위에 꿰매 붙인, 꽃과 구슬로 치장한 밝은 색깔의 가슴 장식을 착용했다.  식사
는 고인의 가족들끼리 하는게 보통이었지만 안케센아멘이 투탕카멘의 유일한  유족이다보니 
궁정 관리들-펜투와 우세르몬트, 아이, 아이의 부인 테이, 호렘헵 장군-도 자리를 같이했다. 
하인들이 푸른 연꽃 문양이 목이 긴 항아리에 담겨 있던 포도주로 깨끗이 손질한 양고기와 
오리 요리 네 가지, 거위 요리 세 가지를 내왔다. 그러나 참석한 사람 중 그  누구도 식사에 
대해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하나같이 자신들의 미래를 저울질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함
께 식사를 하고 있는 두 남자가 이집트의 왕이 되리라는 사실을 이 자리에 참석한 두  여자 
중 한 명이 얼마 안 가 이 세상을 하직하리라는 사실을 그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식사가 
끝나자, 하인들이 전통에 따라 접시와 잔, 아름다운 포도주 단지를 깨뜨렸다. 깨진 조각들은 
먹다 남은 고기 뼈다귀와 함께 커다란 보관용 단지 위에 갈무리되었다. 이제 주변을 비질할  
차례였다. 하인들은 빗자루 역시 단지 위에 옮겨서 묻었다. 이리하여 장례식은 완전히  끝났
다. 마지막 식사 때 사용됐던 접시 조각과 가슴 장식, 빗자루는 현재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
술관에 소장돼 있다. 의사들에게 어떤 환자를 치료할지,혹은 치료하지 말아야 할지를 지시하
는 파피루스도 함께 들어 있다. 투타카멘의 무덤 벽에는 장례  진행 과정 일체와 입을 여는 
의식이 그려져 있다. 물론 투탕카멘의 무덤에 부장됐던 보물들도 있다. 여기에 덧붙여  투탕
카멘의 두개골을 X-레이도 있다. 그러나 그가 살해됐다는 증거를  살펴보기에 앞서,먼저 우
리는 어째서 그가 살해될 수밖에 없었는지부터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집트 사외
와 종교의 과정 및 파라오를  이해해야 한다. 다음 장에서는 파라오의  살해를 가능케 했던 
101일간의 혼란스러웠던 이집트 역사를 다루고자 한다. 자세히 읽어 보면,돛을 너무  팽팽히 
잡아당기다가 급기야는 이집트라는 돛대가지 부러뜨리고야  만 제반 세력들의 발전  과정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2. 투탕카멘 이전의 이집트
  투탕카멘이 태어나기 이미 2천년 전에, 향후  이집트의 사회 조직을 결정하게 될,  결국에 
가서는 그이 죽음을 가져오게 될 세 개의 세력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즉 최초의 이집트 왕
이 등극하면서 군대가 창설되는 한편,  성직자 계급이 생겨났다. 수세기를 거치며  자신들의 
권력 기반을 다진 이들은 급기야  이집트 사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부상했다. 이제 
어느 한 세력이 변화만으로도 이집트에 재앙을 불러올 수 있을 정도로 이 세력들은 강해졌
다. 이집트가 수세기를 이어 가며  고대 세계에 안정적인 얼굴을 보여준  데에는 이와 같은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부적으로 이집트는 이들 세 개의  세력이 서로를 지탱하여 돌아
가는 기름이 잘 쳐진 기계와 같았다. 투탕카멘의 불행은 이들의 세력 균형을 한꺼번에 바꾸
려는 혁명적인 노력이 진행되던 시기에 살았다느 데 있었다.  앞선 시기와 투탕카멘이 성장
했던 시기가 얼마나 달랐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선 머저 이집트가  어떻게, 나아가 왜 그처럼 
전례없는 시기를 누릴 수 있었는지부터 이해해야 한다. 탐정 놀이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집
트 역사 공부부터 시작해 보기로하자.
  
  왕권 형성 이전의 이집트
  여러면에서 '파라오'라는 개념은 고대  이집트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집트에 
늘 왕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1천 마일에 이르는 나일 강변을 따라 소규모 부락들이 산재돼 
있던 B.C.4천 년경의 이집트를 생각해 보자 이  시기의 기록들이 남아 있는 건 아니지만,각
기 다른 통치자가 지배하던 상 이집트와 하 이집트라는 두 개의 독립적인 정치 조직이 있었
던 것으로 보인다. 모든 정황들을 종합해 보건대, 나일 강변에서의 생활은 안전하고도  만족
스러웠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가능했다. 첫째로, 당시 이집트는 다음
과 같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가능했다. 첫째로, 당시 이집트는 바깥 세상으로부터 상대적으
로 고립돼 있었다. 따라서 두려워 할 적이 거의 없었다. 두 번째로는 나일 강이 경제적인 풍
요를 제공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해마다 찾아오는 나일  강의 범람은 강변을 따라 뻗어나
간 평야에 신선한 표토를 공급함으로써  풍부하고 다양한 곡물을 경작할수  있게 해주었다. 
이에 비해 다른 나라들은 특정한 계절 동안에만 내리는 예측 불능의 강우량에 의족하고 있
었다. 비가 일년 내내 고르게 내린다고 하더라도 일 년에 일 회  이상 경작할 경우 땅은 얼
마 못 가 영양분을 잃게 된다. 뭐니뭐니 해도 이집트이 가장 큰 행운은 해마다. 표토를 갈아
줄 뿐만 아니라 농작물에 필요한 물을  충분하게 공급해주는 나일강을 끼고 있었다는  점이
다. 다른 나라들이 한 가지 작물을 수확한데 대해 신에게 감사를 드리는 동안, 이집트는  매
년 다양한 종류의 작물들을 거두어들였다.고대 그리스의 대여행가이자 역사가였던 헤르도토
스가 일찍이 이집트를 가리켜 '나일강의 선물'이라고 한 데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해마다 발생하는 나일 강의 범람은 강물이 갑자기 불어나는 이유나 물 색깔이 빨간
색으로 변했다가 다시 녹색으로 변하는 이유를 알수 없었던 이집트인들을 놀라게 하고도 남
았다. 강물의 범람은 물론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지만.당시의 이집트인들에게는  라스베이거스
의 마술 쇼에 버금가는 신기함과 화려함을 제공했을 게  틀림없다. 오늘날의 우리는 이집트 
남쪽에 위치한 에티오피아 지방에 내리는 봄철 폭우가 화강암층으로 스며들어 나일 강의 수
위를 높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사하라 사막 이만에서 북쪽을 향해  맹렬하게 치달려 온 
나일강은 이집트에 이르면 정상  수위보다 약20여 피트  정도 높아졌다. 처음에는  물 속을  
떠 다니는 표토 때문에 강물이 빨간색을 '띠지만, 범람하면서 표토가 가라앉고 나면 강물 위
를 부유하는 식물의 영향을 받아 물 색깔이 녹색으로  바뀌었다.나일 강이 제공하는 연례쇼
는 태양이 날마다 펼치는 현란한 공연 다음으로 굉장한  볼거리였다. 하루의 시작을 알리며 
동쪽에서 떠오른 태양은 구름 한점 없는 보석과도 같은 하늘을 가로질러서는 마치 나일 강
처럼 한결 같은 모습으로 불덩이처럼 빨갛게 타오르며 서쪽으로  스러졌다. 나일 계곡의 인
구는 백만 미만이었던 것 같다. 이집트가 거대한 나라이긴  했지만 전체 인구의 99퍼센트는 
나일 강을 껴안고 있는 국토의 5퍼센트  위에서 생활했다. 나일 강은 이집트의  심장이었다. 
이집트에서는 계절까지도 나일 강에 의해 결정했다. 현재의 365일이라는 개념은 이집트인들
에게서 나왔다. 그러나 고대 이집트인들에게는 세 계절밖에 없었다. 1)나일 강이 범람하면서 
땅이 물에 잠기는 범람기,2)물이 빠져나가 땅이 드러나는 출현기,3)건기인 여름,이들 각 계절
은 30일씩,넉달로 구성되었다. 여기에 연말에 닷새가  보태어져서 365일이 되었다. 밭이 afn
에 잠겨서 농사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범람기 때는 다들  휴식을 취했다. 그런점에서는 
범람기는 이집트인들에게 아주 독특한 계절이었다.  이 기간 동안 사람들은  쟁기를 비롯한 
농기구를 수리하는 한편 다음에 심을 작물과 농사 계획을 의논했다. 이에 비해 출현기는 작
물을 심는 계절있었다. 그리고 건기인 여름에는 출현기때 심은 작물들을 수확했다. 농부들의 
주요 음식은 빵과 맥주로, 우리가 음식 하면 '밥과 갈치'를 떠올리듯이, 이집트인들에게는 이 
둘이 '음식'과 동의어였다. 참고삼아 잠깐 언급하면,일반적인 장례 기도문은 다음과  같이 시
작된다. "왕이시여, 서방의 주인이신 오시리스께 제물을 바치소서  .왕이시여,빵과 맥주,가축,
거위,황소,그 밖에 좋은 것들을 모두 모아 신들이  사는 곳에 보내소서."식물 생장기가 길었
던 덕분에 이집트인들은 다양한 작물들을  재배할 수 있었다.그중에서도 밀과  양파는 제일 
중요한 작물이었다. 고기는 상류층 사람들을 위해 남겨 두어야  했기 때문에 농부들은 나일 
강에서 잡은 물고기를 먹었다. 그중에서 농어 무리의 민물 고기인 퍼치는 농부둘이 제일 좋
아하는 생선있었다. 그러나 이집트인들은 무얼  먹건 간에 양파를 곁들였다. 수확이  끝나고 
난 이집트는 늘 풍성하고 평화로웠다. 적어도 나일 강변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자연과 세상
이 위험스런 존재가 아니었다. 이와 같은 평화는 이웃 나라들과 고립된 이집트의 지리적 위
차가 크게 한몫을 했다. 알다시피 이집트의 서쪽으로는 드넓은 사막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고대인들이 이 사막을 건너려면 수많은 우물을 파야 했을 뿐만 아니라 상당한 양의 식량을 
비축해야 했다. 거기다 거대한 조직과 세심한 계획이 필요했다. 예를 들어 리비아에서  이집
트로 여행하려면 4백 마일에 이르는 건조한 혈암지대를 지나야  했다. 투탕카멘이 죽고 s서 
6세기 후 페르시아의 캄비세스 대왕이 2만 명의 군대를 파견했으나 2만 명 전원이 이곳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여기다 이집트의 동쪽 국경은 1백 마일에 이르는 황량한 사막이 
버티고 있는 홍해와 접하고 있다.  (말이 난 김에 참고삼아  말하면 '사막의 배'라고 불리는 
낙타는 투탕카멘이 죽고 나서 1천년여 후인 로마 정복기 때서야 이집트에 들어왔다.)나아가 
북쪽으로는 수백 마일에 달하는 지중해가-물론 실제적인 위협보다는 심리적인 위협 요인으
로 작용하긴 했지만-제3의 천연 장벽을 형성했다. 이와 같은  조건 속에서 이집트인들은 잔
잔한 나일 강을 항해하는 기술을 개발하면서 위험 천만한 넓은 바다로 나가는 대신 나일 강
의 선원으로 남아 있었다. 거기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진행되는 강물의 흐름과 북쪽에서 남
쪽으로 부는 강한 바람 때문에 남쪽에서 가든 북쪽에서  가든 여행하기가 수월했다. 북쪽으
로 갈 경우, 선원들은 흐름에 배를 맡긴  해 노로 조정을 했다. 이에 비해 남쪽으로  여행할 
경우에는 돛을 감아 올린 채 바람을 좇아 갔다. 강  바닥의 거대한 옥석들이 폭포를 형성하
는 이집트의 남쪽 국경을 제외하고는 배로 하는 여행이 훨씬 쉬었다.물론 폭포와 같은 이러
한 장벽을 지나 남쪽으로 여행하는 게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이곳에서는 항
해하기가 고되고 힘들었다. 이 경우 선원들은 강에서 배를 끌어 올려 옥석들 사이를 헤치며 
배를 끌고 가거나, 밧줄을 이용해 급류를  통과해야 했다. 그러므로 이런 여행이 결코  쉬운 
건 아니었다. 먼 훗날이 이집트인들은  다른 땅을 돌아다니며 이집트에  부를 가져오겠지만 
당시의 이집트인들에게는 지금 이 시간 자신들이 살고 있는 바로 이곳이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낙원으로 느껴졌다. 

  이집트에 왕권이 형성되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파라오를 단순한 지도자로서뿐만 아니라  국가의 구현체로 여겼다. 이
집트 최초의 파라오였던 나르메르는 B.C.3천년대 초기에 각기 다른 두 개의 정치 조직을 통
합시켜 국가를 세웠다. 이때 이후로 이집트인들은 지속적인 통일 상태가 전적으로 파라오에
게 달려 있었던 지신들의 국가를 가리켜 '두 개의  땅'이라고 불렀다.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의 귀중한 소장품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물건의 하나인 나르메르 팔레트는 이집트를 통일시
킨 나르메르의 정복 활동을 묘사하는 한편 이 업적의 중요성을 찬양하고 있다. 하나의 석판
에 조각된 3피트 높이의 나르메르 팔레트는 이집트 최초의 파라오인 나르메르 왕을 소개한 
귀중한 역사적 자료다. 초기시대부터 이집트인들은 눈  화장용 재료(지방 성분과 곱게 빻은 
공작석을 섰으면 녹색 아이 섀도를 얻을 수 있다.)를 빻끼 위해 조그만 점판암 팔레트를 사
용했다. 이에 비해 커다란 의식용  팔레트는 중요한 사건들을 기념할 목적에서  제작되었다. 
나르메르 팔레트도 마찬가지로 의식용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 팔레트의 앞면을  보면 상 
이집트의 전통적인 백관을 쓴 나르메르 왕이 북쪽의 통치자로 추정되는 적의 머리칼을 움켜
쥐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하 이집트(북쪽)의 홍관을 쓴 나르메르 왕이 행렬
을 사열하는 모습이 조각돼 있다. 북쪽과 남쪽의 통일은 투탕카멘이 상 이집트와 하 이집트
의 왕이 되기 약2천년 전인 B.C.3200년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소년 왕이 왕좌에 올랐을 
때는 왕권의 개념이 나르메르시대와는 전적으로 달랐다.  이집트는 다음 3천 년 동안,  살아 
있는 신으로 추앙받는 한편,이집트의 번영을 책임지는 절대 권력을  지닌 왕들에 의해 통치
된다. 파라오는 교황이자 대통령이자 왕이며  최고 사령관이었다. 나르메르가  북부 지역과 
남부 지역을 통일하면서 이집트의 고립주의는 막을 내렸다. 즉 이집트는 파라오가 지배하는 
공격적인 국제 세력으로 탈바꿈했다. 이집트 군대는 정복할 땅과  획득할 금을 찾아 이집트 
국경 밖으로 나갔다. 

  군대의 출현
  나르메르 이후 처음 몇 세기 동안의 기록에는 군대에 관한 부분이 전혀 없지만 이집트 군
대의 기원은 이 시기에서 찾아야 될 듯싶다. 단일 왕  이래의 중앙 집권화된 정부 입장에서
는 군대의 조직이 불가피했다.  팔레스타인 남부의 텔 엘-마이시에에서  발견된 나르메르의 
이름이 새겨진 도자기 파편은 나르메르가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 밖으로 원정나갔을  가능성
을 제시하고 있다. 최기의 군대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발굴된  유물들로 
미루어 보건대 주무기는 철퇴와 창,도끼,단검이었다. 고대 세계에서의 전쟁은 거의가 백병전
이었다. 다시 말해 일 대 일로  맞붙어 싸우며 적을 죽였다. 오늘날의 군대에서는  장군들이 
원거리에서 결정을 내리면 전장의 군단들이 명령을 수행한다. 그러나 고대의 전쟁에서는 장
군들이 최전선에 나가 모범을 보였다. 그래서 옛날 군인들은 이내 살인에 익숙해졌다.  이집
트는 나일 강 때문에 군대를 부양할 수 있었다. 농부의  가족들이 소비하는 양보다 더 많은 
양의 작물을 재배할 수 있는 능력에 힘입어 나일 계곡 거주자들 사이에서 직업의 전문화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결과, 직업적인 군대가 유지될 수 있었다. 군대가 강대해지면서 원정 
범위도 점점 넓어졌다. 그리하여 나르메르가 죽고 나서 7세기 후인 스네페루 왕대에 이르면 
베두인족을 제압해서 터키 옥 채굴자들을 위해 시나이 반도의 안전을 보자했노라고  큰소리
칠 정도로까지 국력이 증가했다. 왕권의 발전과 더불어 국가의 관심을 관개 수로와 같은 대
규모 프로젝트에 집중시킬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났다. 수로를  준설하는 데에는 중앙 조직과 
권위가 제자리를 잡고 난 연후에만이 가능한 대규모 인력 조직이 필요했다. 관개 수로의 준
설로 인해서 이제 이집트인들을 홍수 때마다 범람하던 물을 다스리는 한편, 저 안쪽의 내륙 
지방에까지 물을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경작  가능한 농토가 늘어났을 뿐만 아니
라 농업 생산성도 더 한층 높아졌다. 수로 준설을 가능케 했던 중앙의 공조 체계는 이 밖에
도 천문학의 발전이라는 부산물을 낳았다.  홍수가 일어나기 전에 미리  경고를 내보내려면 
광범위한 수로 체계를 정비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확보해야 했다. 따라서 시간 조절은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낡은 수로를 너무 일찍 막아 버릴 경우, 이집트의 뜨거운 태양이 수로  전
체를 먼지 구덩이로 바꿔 버릴  가능성이 높았다. 반대로 수로를 너무  늦게 막을 경우에는 
수로 체계의 손질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홍수가 발생할  위험이 있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나일 강의 범람은 아주 정기적이어서 매년 5일에서 10일  정도면 끝이 났다. 홍수가 일어날 
시기를 사전에 파악하는 게 그 어는 때보다 중요해지면서,  천문학자를 겸한 사제들이 하늘
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일 년중 어느 때가 그 시기인지를 예측하는 일에 전력투구하게 되었
다. 초기의 천문학은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이 밖에도 나일 강에 의해 해마다 경계선이  유
실되는 밭의 크기를 정확하게 측정하기 위해서는 수학의 발달도 필요했다. 파라오가 이집트 
사회의 근본이다 보니 고대 이집트인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사건의 연속이 아닌 사건이 발생
한 기간에 재위한 왕중심으로 생각했다. 연도를 우리처럼 연달아 계산하는 대신, 새로운  왕
이 즉위하면 예를 들어 X왕 치세의 1년  1일과 같은 식으로 달력을 새로 시작했다. 그러다 
그 왕이 죽으면, 다음 왕이 다시 Y왕이 치세의 1년  1일에서 출발했다. 이러한 계산법은 현
대 이집트학자들이 각 파라오의 통치 기간을 추정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
는 고대 이집트인들에게는 파라오 없이는 어떤 통일성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심지어  시간의 
통일성마저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증거다 이집트인들은 이처럼 중
앙의 모든 권위를 오직 파라오에게만 부여했을 뿐만 아니라,  파라오를 자신들의 안전을 위
해 없어서는 안되는 신이라고 생각했다. 파라오의 보호에 대한  이야기는 이집트의 가장 오
래 된 신화에 등장한다. 이 신화를 보면, 인간의 모습으로 화한 레 신(매의  머리를 한 인간
의 모습으로 표현되는 최고의 신으로 태양의 신. 머리위에  태양을 나타내는 원반과 왕자의 
상징인 뱀이 얹혀져 있다.)이 최초의 파라오로 군림하기 위해 어떻게 지상에 내려오게 됐는
지를 알 수 있다. 레 신의 통치  기간 동안 이집트는 부족함이나 고통, 질병이 에덴  동산과 
같은 번영을 구가했다. 그러나 레의 신민들은 근심이라곤 없는 생활에 젖은 나머지 그에 대
한 존경심은 물론, 그가 만들어준 낙원에 대한 고마움을 점차 잃어 갔다. 이에 분노한  레는 
신민들이 너무도 망각해 버린 교훈을 다시 가르칠 목적에서 암사자의 형상을 한 세트메트라
는 피에 굶주린 악마를 만들어  신민들에게 풀었다. 세크메트가 수백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살육하며 돌아다니자, 겁에 질린 생존자들은 다시 레를 존경하게 되었다. 그러나 피에  미친 
세크메트는 그만두라는 레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살인을 저질렀다. 이에 레는 인류
를 구원할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모든 신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그리고 신들에게 요청
해 엄청난 양의 맥주와 맥주를 물들이는 데 쓸 빨간색 염료를 확보한 레는 염료를 섞은  맥
주를 이집트 전역에 뿌리라고 명령했다.  다음날 살육 여행에 나선  세크메트는 빨간색으로 
염색된 맥주를 피로 착각하고는 정신없이 마시다가  결국은 취해서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
다. 이렇게 해서 파라오의 원형인 레는 인류를 구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쇠약해진 레
는 다시 명부로 돌아가고 대신 자기 아들 호루스를 보내  신민들을 통치하게 했다. 그 이후
로 신민들은 파라오를 호루스의  화신이라고 여겼다. 지배자들마다  이름 속에 '호루스'라는 
명칭을 집어 넣었던 데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파라오는 아버지 레를 통해 인
류를 지키는 동시에 인류를 파괴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존재였다. 이제 신민들은 파라오에게 
복종하고 존경을 표함으로써만이 상상을 불허하는 악마의 무리를 가두어둘 수 있다는  점을 
충분히 이해했다. 이 같은 믿음을 지닌 이집트인들이 파라오에게  반기를 든다는 것은 상상
조차 하기 힘든 일어었다. 

  피라미드의 시대 
  피라미드는 왕권이라는 개념이 고대 이집트 사회에서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두드러진 증거다. 나르메르가 이집트를 통일하고 나서 5백 년쯤 지나자, 파라오의 힘은 지구
상의 어떤 지배자보다도 강력해졌다. 살아 있는 신으로 추앙받던  파라오는 신의 지위에 걸
맞게 지어진 영생을 위한 안식처가  필요했다. 지상에서의 날들이 끝나면  파라오의 미라는 
하늘로 올라갈 때까지 피라미드에 안치되었다. 투탕카멘 시대보다  1천여 년 앞서서 건축되
기 시작한 피라미드는 이집트에서의 왕권의 역할을 반영하는 거울이었다. 어렸을 적에 텔레
비젼에서 찰턴 헤스턴이 나오는 영화를 보면서 잔인한 감독관의 채찍 세례를 받아가며 거대
한 나무 토막을 운반하는 노예들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했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다. 나는 
노예들의 숫자가 훨씬 많은데도 어째서 감독관한테 대들지 않는지, 그게 늘 궁금했다.  나중
에 안 사실이지만 그러한 상황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베긴 수상이 이집트를 
방문했을 때였다. 당시 베긴 수상은 자신의 선조들이 피라미드를 건설했노라고 했다. 그러나 
그건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었다. 피라미드는 노예들이 짓지도 않았을 뿐 더러, 모세가  이끄
는 이스라엘인들이  이집트에 발을 들여 놓기 이미 1천여  전에 완공했기 때문이다. 피라미
드는 이집트 초기에 지어졌다. 투탕카멘의 시대에 비하면 피라미드가 한창 건설되던 시기는 
먼 옛날에 속한다. 아직은 어린 국가였지만, 이집트는 굉장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피라
미드를 건설하는 데 투입된 인력과 기술을 생각해 보라. 현재 이집트에는 70개 이상의 피라
미드가 남아 있다. 기자 지방의  대 피라미드와 같은 조형물을 지으려면  수천 명의 일꾼이 
20년 동안 그일에만 달라 붙어 있어야 했다. 공사 기간 동안 채석공들은 평균 무게가 5톤씩 
나가는 석회암을 무려 2백만 5천 개나 깍고 다듬었다. 채석장에서 다듬어진 석회암덩이들은  
짐꾼들이 나일 강에 띄워 기자까지 운반했다. 바지선에서 부려진 돌들은 수십명의 일꾼들이 
끄는 나무 썰매로 옮겨져 최종목적지인 피라미드 공사 현장으로  날라졌다. 이 모든 작업은 
바퀴를 사용하지 않고 이루어졌다. 짐 무게 때문에 바퀴가 모래에 빠질 위험이 높았기 때문
이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대 피라미드를 짓기 위해 선, 새로 깍은 석재를 장장 20년 동안 그
것도 밤낮 구분 없이 평균 3분에 한 개꼴로 제자리에 집어 넣어야 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자면, 규모도 규모거니와 단 하나의  건물을 짓기 위해 20년을 투자한다는  게 상상이 잘 
안 가는 일이다. 절대 권력자가 이끄는 막대한 부와 안정성을 가진 사회만이 그처럼 엄청난 
프로젝트를 추진할 수 있었다. 파라오의  말은 곧 법이었다. 다시  말해, 이집트는 파라오의 
말이 가감 없이 그대로 행해지던 사회였다. 신성한 왕과 강력한 군대의 출현과 함께, 투탕카
멘을 죽음으로 몰고 갈 세 개의 세력 중 두 세력이 활동에  들어갔다. 이제 세 번째 세력인 
종교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다. 인류 역사상 고대 이집트인들처럼  종교와 사후 세계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민족은 없다.  이 역시 이집트의 독특한 지리적  조건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할 듯싶다. 선사 시대의 이집트인들은 사막의 모래 구덩이에 묻혔다. 토지는 너무 귀
해서 묘지로 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토양에 함유된 수분과 광물질이 시체를 부패
시킨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이는 오히려 다행스런 일어었다. 관도 없이 모래 구덩이에  매
장된 시체는 고온 건조한 사막 기후 때문에 순식간에  건조되었다. 수분이 없으면 박테리아
는 활동하지 못한다. 그 때문에  이집트의 시체들은 자연적으로 보존되었다. 그러나  무덤이 
워낙 얕다 보니 모래가 날릴 때면 피부와 머리카락이 그대로 붙어 있는 시체가 종종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발생했다. 그래서 영생 사상이 생겨난 건지, 아니면 사후 세계에 대한 기존의 
종교적인 믿음을 강화하는 계기에 불과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썩지 
않은 시신을 목격한 이들이 동료들한테 죽은 사람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고 말했을 거
라는 점이다. 나르메르 직후, 이집트의 장례 풍습은 이전에  비해 훨씬 복잡해졌다. 얕은 구
덩이는 벽돌을 얹은 무덤으로 바뀌었으며, 시체는 동물가죽에 싸서 손으로 짠 자리 위에 안
치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벽돌구조물은 죽은 자의 사회적 지위와 재산 정도에 따라 좀더 정
교해졌다. 시체를 얹은 자리도 시신 전체를 덮기 위해  면적이 넓어졌다. 쉽게 말해, 조잡한 
관과 비슷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초기의 장례  풍습의 변화는 시체가 사막에
서 자연스럽게 건조될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해 버렸다. 몸  속에 수분이 오래 남아 있을수록 
부패의 정도는 심해진다.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시체를 보존하려고 만든 무덤이 오히려 시체
의 부패를 가져왔다. 이에 이집트인들은 인공적으로 시체를 영원히 보존할 수 있는 방법, 즉 
미라를 생각하게 되었다. 이집트의 종교는 미라 제작을 필요로 했다. 현대의 신비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내용과는 정반대로, 고대 이집트인들은 윤회를 믿지 않았다. 사람이 죽고 나면  영
혼이 다른 몸을 빌어 다시  지상으로 돌아온다는 윤회 사상에 따르면,  태어나서 죽고 다시 
태어나는 과정이 수없이 반복된다. 만약 이집트인들이 윤회를 믿었다면, 굳이 미라를 제작할 
필요가 없었으리라. 죽은 자의 영혼이 새 몸을 빌어 살 수 있다면 이전의 몸이 필요하지 않
을 테닌 말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부활을 믿었다.  즉 사람이 한 번 생명을 얻고 나면 죽
은 뒤에도 지상에서의 육신이 되살아나서 다음 세계로 들어간다고 믿었다. 이는 수천 년 동
안 이집트 사회를 지배했을 뿐만 아니라, 투탕카멘 이후에도  수세기를 이어 내려온 믿음이
었다. 이집트 고대 종교와 사후 세계에 대한 신앙을  자세하게 이해하려면 이집트에서 옛부
터 전해 내려오던 이시스와 오시리스 신화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이시스와 외시리스는 남
매이자 부부였다. 오시리스는 농사짓는 법과 가축 기르는 법을  비롯해 이집트에 문명을 전
달해줌으로써 나일 계곡의 초기 거주민들을 비참한 생활에서 해방시킨  신이었다. 그 뒤 외
시리스는 사악한 동생 세트를 감시해 달라며 마법의 여신  이시스를 남겨 둔채,다른 세상에 
문명을 전파하기 위해 이집트를 떠났다.  오시리스가 다시 돌아오자, 세트는 속임수를  써서 
형의 신체 치수를 알아낸 다음, 거기에 딱 맞는 나무 상자를 만들었다. 연회가 진행되는  동
안 세트는 상자와 몸 치수가 일치하는 사람에게 상자를 선물로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이에 
손님들은 돌아가며 상자에 몸을 맞취  보았지만. 모두들 실패하고 말았다. 물론  오시리스는 
예외였다. 오시리스가 상자 안에 들어간 순간 세트는 재빨리 상자를 봉하고는 그 위에다 납
을 녹인 물을 부은 후 나일 강에 던져 버렸다. 그후 사나운 폭풍에 의해 레바논의 비블로스
까지 떠밀려 간 상자는 근처에  있던 나뭇가지에 걸리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흘러 나무는 
상자와 그 안에 있던 오시리스의 시체를 뒤덮을 정도로 거대하게 자라났다. 그러던 중 궁궐
을 짓던 비블로스 왕이 기둥으로 쓰기 위해 나무를 잘랐다. 한편, 남편에게 일어난 일을  알
게된 (어떻게 알게 됐는지는 묻지 마시라. 아주 긴 이야기니까)이시스는 그 즉시 남편의 시
신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났다. 천신만고 끝에 시신의  행방을 알아낸 이시스는 비블로스여왕
의 도움으로 궁정의 기둥을 쪼개 시신을 찾은 후 장례를 치르기 위해 다시 이집트로 가져왔
다. 그러나 시신이 이집트로 돌아오자, 이 사실을 눈치챈 세트가 시신을 열네 토막으로 난도
질해서 이집트 전역에 흩뿌려 버렸다. 이에 이시스는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토막난 남편의 
시신을 거두어들였다. 그러나 나일 강에 던져졌던 남근은 끝내 찾지 못했다. 물고기가  먹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시스는 토막들을 모아 시신을 원래대로 수습하는 한편, 남편을 위해  남
근을 만들어 붙였다. 그리고는 새로 변해 오시리스의 시신 주위를 맴돌며 남편의 소생을 비
는 마법의 주문을 외었다. 그후 얼마 안 있어, 죽은 오시리스의 이시스 사이에서 매의  머리
를 한 호루스 신이 태어났다. (레신의 신화에 등장하는 그 호루스와  같은 인물이다. 이집트
인들은 호루스의 아버지가 둘이라는 점을 미처 인식하지 못했거나,아니면 그점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 같다.)이집트의 장례 신앙은 거의 모두가 이 신화에서 유래한다.죽은 
남편의 시신을 찾으려는 이시스의 노력이나 남근을 만들어 붙인 이야기는 이집트인들이  손
상되지 않은 원형 그대로의 육신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이시스는 
완전한 육신 주변을 맴돌았다. 이제 오시리스는 생전과 똑같은 육신을 보유하게 되었다.  드
디어 이시스가 주문을 외자, 외시리스는 부활한다. 따라서 미라 제작은 영생 불멸을 위해 없
어서는 안 될 조건이다. 즉 사후를 위해서는 육신을 보존해야  할 뿐만 아니라 적절한 의식
을 행해야 한다. 오시리스 몸에 딱 맞는 상자는 고인의 모습을 한, 시신을 보호하기 위한 관
의 시조였다. 신화는 그 사회의 성격을 이해하는 통찰력을 제공해준다. 그런 점에서  이시스
와 오시리스 신화는 불멸에 대해 이야기해줄 뿐만 아니라,  세상에는 반드시 정의가 존재한
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매의 신 호루스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전투
에 나가 삼촌 세트를 굴복시킨다는 내용으로 끝난다. 정의해 대한 세계 최초의 개념이 이집
트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랄 만한 일이 못 된다.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질서의
식,다시 말해 행동을 통제하는 규칙이 있다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러한 질서  의식은 
이집트 사회의 모든 분야에 스며들어  있다. 이집트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신들이 주재하는 
법정인 진실의 전당에 불려 나간다고 믿었다. 거기서 죽은 자는 어째서 자기의 다음 세상으
로 들어가야 하는지에 대해 변론하게 된다. 변론이 타당하다고 판단되면, 죽은 자는 '진실한 
목소리'로 인정받게 된다. 두 번째 재판에서는 저울 한쪽에는  죽은 자의 심장을, 반대쪽 저
울에는 깃털(깃털이 상형 문자로 쓰이면, '진실' 혹은  '신성한 질서'를 의미한다.)을 올려 놓
는다.저울이 균형을 이루면,즉 심장이 깃털처럼 가벼우면,죽은  자는 명부로 갈 수 있다.  반
면,심장이 더 무거우면 사악한 행동  때문에 그런 거라고 간주해 악어  몸통에 하마 머리를 
한 괴물에게 던져진다. 괴물이 심장을 먹어 버리면,심장의 주인은  더 이상 존재 할수 없다. 
서방(명부를 뜻함)의 법 체계가 정의의 상징을 차용하면서부터, 정의는 이집트인들의 잣대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오시리스 신화에서 악을 상징하는 세트는 호루스와의 전투에서 패한 후 
호시탐탐 신성한 질서를 위협한다. 그래서 이집트는 늘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했다.  세트가 
내뿜는 악의 기운이 신성한 질서의 전복을 노리며 어딘가에 숨어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
집트 땅에 신성한 질서를 구축하고 유지하는 일은 파라오의  책임이었다. 그래서 왕은 해마
다 전용선에 몸을 실은 채 나일 강상류로 올라가 선이 악을 물리치기를 기원하는 일종의 기
적극에 참여했다. 오시리스 신화에 바탕을 둔 이 연극은 기복으로 남겨진 희곡 중에서 가장 
오래 된 작품이다. 이집트 남쪽의 에드푸에 위치한 호루스  신전 벽에 새겨진, 일명 '호루스
의 승리'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물론 파라오는 호루스 역을 맡았다. 

  성직자 계급 
  이집트가 점점 성장해가자, 규모가 커진 정부를 운영하는라 바빠진 파라오는 제물을 바치
거나 신들을 달랠 기도문을 외우기 위해 이 신전 저  신전 돌아다닐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
는 신전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도시들은 저마다 수호신을  섬겼다. 악어의 신 소베크, 따오
기 머리를 한 지식과 학예의 지배자 토트, 매의 신 호루스는 그 대표적인 예였다.나일  강변
의 신전에 모셔진 수백 명의 이집트 신들은 더 높은  서열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경쟁했다. 
파라오를 대신해 공물을 바치거나 태양이 밤으로의 여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기원하는 
기도문을 외울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집트 역사 초기에  왕을 대신해 기도문을 암송하
는 한편, 의식을 거행할 사람들이 선발되었다. 이들이 바로 이집트의 성직자 계급이었다. 사
제들은 중요한 종교적 기능을 수행했지만, 국가 경제에는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았다.  사제
들은 이집트의 번영을 상징하는 증거였다. 파라오의 대리인이었던 이들은 수천 년의 세월을 
거치는 동안 성직자라는 직업의 원형을 만들어 놓았다. 단지 파라오의 대리자로서 행동했다
는 점에서, 사제들은 굳이 독실한 종교적 신념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맡겨진 일을 수행하고 
제단에 적절한 공물을 바치고, 정해진 양식에 따라 기도문을 암송하고, 신을 섬기고  달래서 
그 대가로 신이 이집트에 번영을 가져다 주도록 하는 게 그들의 임무였다. 다시 말해,  사제
들은 자신이 섬기는 신에게 헌신할 필요가 없었다. 이는 고대 세계에서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구약을 보더라도, 야훼의 추종자들이  무엇을 믿어야 할지에 대해 거의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 법을 따라야 하긴 했지만.  십계명 어디에도 믿어야 한다는 말은 없다.  '마음
속'에 있는 부분을 강조하기 시작한 건 기독교 신앙에 들어와서였다. 그래서 이집트의  사제
들에 대해 생각할 경우, 순전히 정신적인 신의 봉사자로 여겨선 안된다. 한마디로 이들은 무
자비할 수도, 악을 행할 수도 있는 나아가 거대한 관료주의  안에서 많은 기회를 누렸던 사
람들이다. 신전에서 고위 성직자의 역할은 대개 세습되었다. 아버지나 할아버지와 같은 지위
를 누렸다는 사제들의 자서전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아문의 수석 사제인 민 신의 예언
자가 그 대표적인 경우였다. 방대한 성직자 계급의 형성과 더불어, 출세에 필요한 능력과 야
망을 가진 사람들에게 많은 기회가 주어졌다. 고위 성직자는 신전에 소속된 밭과  과수원,가
축을 관리했다. 이는 곧 그들이 개인적으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소유했음을 뜻했다. 수석 사
제가 되면 부동산과 하인, 선물, 뇌물을 비롯해 귀족이 누릴 수 있는 모든 특권이 뒤따랐다. 
수석 사제 밑에는 직급과 임무가 각기 다른 사제들이 수도  없이 포진해 있었다. 쉽게 말해 
현대 기업 조직에 버금가는 위계 질서가 형성돼 있었다고 보면 된다. 분파가 다른 성직자들 
간의 경쟁은 아주 치열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모시는 신이  더 뛰어나다고 주장하면서 파라
오의 특별 후원을 얻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카이로 근처의 멤피스에서는 우주를 창조한 프
타흐 신이 신중의 신으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도시들은 저마다 자신들이  모시는 수호신이 
최고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자신들의 수호신이 최고라고 우겼던 데에는 단지 신학상의 우위
를 차지하려는 목적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부와 지위를 확보하려는 목적
이 훨씬 더 강했다. 이 점은 고대 이집트의 성직자들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성직 사
회에서는 누구든 공적을 인정받으면 성공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일개 사본 필경자에서 출발
해 고위직까지 오르는 사람도 많았다.  각 신전은 나름의 위계 질저에  따라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는 조직들을 두었다. 이들 조직은 임무만 수행했던게 아니라  그에 따른 특권도 누렸
다. 그중에서도 신전의 서기들은 파라오가 하사한 선물 목록을 작성하는 한편, 신전의  토지
에서 수확하는 생산물과 창고에 저장된 물품들-곡물과 포도주,아마,황금 등-을 분류하고 기
록했다. 기도문을 암송하는 사제들이 깨끗한 사본을 볼 수  있게 파피루스에 기도문을 옮겨 
적는 일도 서기들의 몫이었다. 이 밖에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게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정
리하는 사서 업무 역시 서기들이 맡아야 했다. 신전에는 종교적인 책자뿐만 아니라,의료업무
를 맡아 보는 사제들을 위한 의학 서적과 꿈의 의미를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꿈  해
석서가 비치돼 있었다. '스톨리스트'는 신들의 조상을 돌보는 사제였다. 신이  계속해서 선의
를 베풀도록 하기 위해 정해진 절차에 따라 예를  올리는게 스톨리스트의 임무였다. 스톨리
스트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신전 제일 안쪽에 위치한 지성소에 들어가 성골곽에서 신의 조
상을 꺼내 아침 의식을 거행했다. 먼저 '신'의 몸 구석구석에 향유를 바르고 향을 피운 다음 
정성 들여 마련한 음식을 올렸다. 그러고 나면 깨끗한 아마포로 조상을 감싼 후, 다시  성골
곽에 넣었다. 이 모든 과정이 끝나고 지성소의 문이 닫히면 기도문과 주문을 암송했다. 지위
가 낮은 사제들의 경우에는 결혼해서 가족을 거느렸을 뿐만  아니라, 별도의 직업까지 가졌
다. 이들은 목수나 교사, 서기로 일하다가 일정한 시기가 되면 다시 신전으로 돌아와 30일씩 
근무했다. 말하자면 종교적인 임무를 띤 일종의 국가 수비대였던 셈이다. 외국 땅을  정복한 
후 황금과 포로들을 앞세우고 돌아온 파라오들은 그 가운데  일부를 신전에 기부했다. 신들
에게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준 데 대해 감사를 드리는 한편, 앞으로도 계속해서 선의를 베풀
어 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외국 포로들은 신전은 물론, 신전이 소유한 밭과 과수원
을 유지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인력 공급원이었다. 파라오들은 가축과 경작물이 계
속해서 연부금을 제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신전에 상당한 토지를 희사했다. 새로 즉위하
는 파라오마다 선왕과 아량을 경쟁함에 따라, 신전은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뿐만 아
니라 사제들의 숫자도 수만 명을 헤아렸다. 그리하여 투탕카멘이  태어나기 몇 년 전부터는 
세계 최고의 거대한 관료 조직으로 불어나 파라오 다음 가는 강력한 권한을 행상하게 되었
다. 파라오들이 무수한 외국 땅을 정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집트가  진정한 제국이 되지 못
했다는 사실은 상당히 흥미롭다. 이집트의 신들이  이집트만의 신들이었듯이 파라오는 전세
계의 왕이 아닌 상 이집트와 하 이집트의 왕일 뿐이었다.  게다가 나일 강 유역에서의 생활
이 너무나 만족스럽다 보니 다른 곳에서 살 필요, 다시  말해 외국을 식민지로 만들 필요가 
전혀 없었다. 뿐만 아니라 미라 기술자들이 없는 외국 땅에서  죽을 경우 육신을 미라로 만
들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영생 불멸의 기회를 놓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집트
에서 사는 게 훨씬 더 편했다. 파라오가 매년 군대를 이끌고 인접 국가로 정복 여행을 나가
긴 했지만,군인들은 어김없이 다시 이집트로 돌아왔다. 이집트인들에게는 우주의 중심이  이
집트였으며 이집트의 중심은 파라오였다. 고대 이집트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거의 대부분이 
사후 세계에 대한 이집트인들의 신앙에서 비롯된다. 이집트인들은 정말이지 말 그대로 가져
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무덤을 가구와 음식,의복 심지어는 다음  세상에서 가지고 놀 
놀이 기구로 채워 놓았다. 무덤의 부장품은 크게 사치품과 실용품,기분 전환용  오락 기구로 
대별된다. 이들 부장품을 보고 있노라면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짐을 꾸리긴 했지만 한 번도 
가보지 않은 탓에 무엇을 가져가야 할지 잘 몰라 이것저것  다 챙겨 넣었다는 생각이 든다. 
무덤은 고대 이집트의 일상을 비춰주는 창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부장품들이 소형 아파
트 안처럼 세심하게 정리돼 있지는 않았다. 대신 높이 쌓아 올려지거나 조그만 공간에 마구
잡이로 쑤셔 넣어져 있었다.그러나 상상은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침대 머리맡에 안주인의 
화장품-우아한 설화석고 항아리에 담긴  향유와 가느다란 도자기 관에  담긴 아이새도 -이 
놓여 있는 광경을 그려보라. 그리고 그 옆으로는 결이 고운 아마포와 옷가지, 마지막 소풍을 
위한 음식과 빵, 갖가지 감미료, 질 좋은 포도로 빚은 포도주가 담긴 단지, 고기,  구운 오리
가 놓여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집트인들의 식생활과 의생활,나아가 사용하
던 가구의 종류를 알 수 있다.  이 밖에 무덤 벽에다 당시의 정경을  묘사한 그림들도 가끔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누구나 영생 불멸을  원했다. 그러나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기회는 
그 사람의 재산 및 지위와 직결되었다. 사람들이 사후 세계를 위해 준비하는 무덤의 종류는 
무덤 주인이 어느 정도의 여유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화집에서 볼 수 있
는 아름답게 채색된 무덤들은 이집트 귀족들을 위해 준비된 묘였다. 귀족 계급은 자신이 동
원할 수 있는 최대치를 무덤에 투자했다. 더욱이 궁정 대신들은 파라오의 눈에 들면 최상의 
묏자리를 하사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농부나 장인, 막일꾼과 같은 대부분의 이집트인들에
게는 가구와 음식, 사치품을 부장한 아름다운 무덤이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평민들의  경우
에는 세상을 하직하면 침대 시트에 싸여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집단 매장지로 옮겨졌다. 거
기서 수백명에 이르는 죽은 이웃들에 둘러싸여 부활을 기다렸다. 평민들 대부분은 글쓰는법
을 몰랐기 때문에 문학은 물론, 자신들의 희망이나 관심 사항, 혹은 일상 생활에 대한  기록
을 전혀 남기지 못했다.따라서 우리가 고대 이집트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의 대부분은 소수 
특권층에 근거하고 있다. 일상 생활의 모습을 그려 무덤 벽을 장식한다는 생각은 고대 이집
트의 마법에서 유래했다. 이집트인들은 죽은 자의 눈에 비친  모습이 다음 세상에서 그대로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이집트의 무덤 벽돌은 죽은자가 연회를 베풀거나 사냥을 하거나 낚시
를 하거나 자기 소유의 밭에 나가 일꾼들을 감독하는 그림들로  가득하다. 이 경우 다음 세
상에서도 함께 하라는 의미에서 고인의 부인과 아이들 심지어는 애완 동물까지 포함돼 일가
족 전체가 그려졌다. 그래서 이집트 무덤의 그림들을 볼 때면 이집트인들은 저 세상도 이세
상과 똑같다고 생각했다는 느낌이 든다.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 보아도 무덤 벽화에서 불행
해 보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예를 들어 밭에 나가 일을 할 때조차도 다들 제일 좋은 
옷을 걸치고 있다. 한편, 고위 관료들은 무덤 벽에다 자신의 업적을 연대순으로 기록한 자서
전을 남기곤 했다. 예를 들어 군인들은 원정 활동을  왕궁서기들은 궁정에서의 임무를 총독
들은 자기 관할하의 지역과 왕을 위해 거두어들인 세금을  기록했다. 지금의 수상과 동급인 
총리 대신의 경우에는 자기가 맡아 처리한 공적인 임무를 남기기도 했다. 이처럼 무덤은 죽
은 자의 삶을 보여주는 작은 세계였다.  한 마디로 이집트의  건조한 기후가 보존해준 이들 
무덤은 고대 이집트의 모습이 기록된 입체 백과 사전인 셈이다. 사제들은 기록을 남기는 일
뿐만 아니라, 관료주의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기록 보관자의 역할까지 했다. 이집트가  성장
하면서 기록보관자들의 숫자와 중요성도 점점 커졌다. 나일 강 유역의 비옥한 땅이 잉여 작
물을 생산하면서 파라오는 군대와 성직자들에게 월급을 주기  위해 이 잉여물(조세의 기원)
을 거두어 들였다. 나일 강 유역을 중심으로 세금을 걷게 되면서부터 농부들이 기르는 작물
의 수를 조사하는 한편,  파라오의 창고에 얼마만큼의 곡물이  쌓였는지를 기록할 회계원이 
필요했다. 급성장한 이집트 경제가 관료층을 배출하기 시작한 후  서기가 된다는 건 출세를 
위한 확실한 통로로 들어갔음을 의미했다.  한편 세금 체계가 되입되자  이집트 젊은이들은 
다음과 같이 사방에서 글 쓰는 법을 배우라는 압력에  사달렸다. "군대에 끌려갈 필요가 없
잖니,깨꿋한 옷을 입고 살 수  있잖니, 한낮에 들판에 나가 일하지  않아도 되잖니...."이것은 
일단 글을 쓸수 있게 되면 출세 길이 보장됐기 때문이다. 서기들의 업무는  천차만별이었다. 
신전 창고의 재고품을 분류하면서 '아문 서기'라는 칭호를 받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종교 서
적을 쓰면서 '비밀 유지자'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자들도 있었다.  도 더욱 뛰어난 능력을 보
이면, 왕궁에 소속된 '궁정서기 '가 돼서 각종 공문서에  답신을 보내거나 신전벽에  새길글
귀를 작성할 수도 있었다.이집트가 번성해지면서  전 국토는 오늘날 미국의  주개념과 거의 
일치하는 노모스라는 행정 단위로 나뉘었다. 총44개의 노모스가 있었으며 각 노모스마다 최
고 책임자인 지사, 혹은 총독 아래 시장과 공사 감독관,서기 감독관, 마부 감독관을  두었다. 
노모스에 소속된 모든  관리들은 서기 계층에서  선발되었다. 따라서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서기가 돼라"고 윽박질렀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말하자면 서기는 중간 계급이었다.빨
리 출세하는 법을 가르쳐 주는 책들도 있었다. "실언을  하지 않으려면 맥주를 너무 마시지 
말라 ""언변이 종아지려면, 글 쓰는 법을 익혀 머릿속에  각인시켜라.""지위가 높건 낮건 맡
은 바 소임을 다하라. 너무 서두르는 건 좋지 않은니 직급에 따라 한 발짝씩  밟아 나가라."
한마리로 고대 이집트식 데일 카네기의 방식이었다.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했던 건 농부층
의 증가 때문이었다. 굶주림으로 고생하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새로운 이주민이  도착
하더라도 먹을 것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만큼 잉여 생산물이 충분했다는 얘
기다. 거기에 힘입어 시치품 산업까지 생겨났다. 무덤 벽을 장식하기 위해 화가들이  고용되
는 한편, 보석 기술자와 장인들도 일한 만큼 대가를 받았다. 다 나일 강의 선물 덕분이었다. 
투탕카멘이 권좌에 앉을 무렵,이집트 사회의 세 세력-왕권,군대, 종교-은  수세기 동안 구축
해 온 지위에 힘입어 점점 강해지고 대담해지고 있었다. 이제 파라오는 성직자와 군대 없이
는 성스런 질서를 유지할 수가 없었다. 사제들은 파라오로부터는 기부금을 군대로부터는 전
리품을 얻어내는 데 혈안이 돼 있었다. 군대도 나름대로  입김이 강했지만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신에게 선처를 호소해야 했다. 게다가 정치적으로도 사제들의 지지를 구할 
필요가 있었다. 3개의 세력이 모두 강해질 대로 강해져  있었기 때문에 셋 사이에는 미묘한 
균형이 조성돼 있었다. 그러나 신성한 왕권은 여전히 이 모두의 중심에 있었다. 따라서 파라
오 없는 이집트란 상상할 수 조차 없었다. 고대 세계에서는 왕권이 문명이 토대였다. 큰  국
가일수록 지도자의 위치가 중요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왕을 신성한 존재로 여긴 나라는 이
집트밖에 없었다. 즉 파라오는 태양신  레의 아들이었다. 다른 나라들은 인간이  다스렸지만 
이집트에서는 신이 다스렸다. 역사에 기록된 170여 명의 왕들은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왕
에게 맡겨진 전통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유지했다. 왕들은 군대를 지휘하고 기념물을 건설하
는 한편, 신들에게 제물을 바쳤다. 파라오의 지도 아래 신성한 질서가 보급되면서  이집트는 
날로 번창해 갔다. 그러나 나르메른에서 투탕카멘에 이르기까지 왕위 계승이 순조롭게 이루
어졌던 건 아니다. 사람들은 이집트 역사 하면 단절이라고는 전혀 없는 완벽함 그차체로 바
라보는 경향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때도 가끔 있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설령 그런 사건이 발생했다. 하더라도  사회 기반 자체가 워낙 튼튼해서  금세 다시 회복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혼란스런 시기가 없지는 않았지만 하부  구조는 여전히 제자리에 있었
으며 땅도 생산을 계속했다. 사제들 역시 여전히 부를 누렸고 왕권의 개념도 변하지 않았으
며 군대의 기동성도 여전했다. 여기서 잠시 피라미드이 겨우를  살펴보자 .피라미드는 고왕
국 시대(B.C.2686∼2181)에 건설되었으나,B.C.2200년에 이르러 이집트가 무정부 상태로 떨어
지면서 피라미드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이 부분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이집
트 사회가 왜 붕괴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길이 없다. 이와  관련해 고왕국의 마자막 
파라오가 너무 오래 살아서 그랬다는 이론이 있다. 고왕국의 마지막 파라오인 페피2세는 어
렸을 때 왕좌에 올라 90년 이사을 통치했다. 이는 전세계 역대 군주들  중 가장 긴 통치 기
간이다.군주가 명목상의 대표에 불과한 현대 영국과 달리 이집트의 파라오는 실제로 군대를 
이끌고 전투에 참가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페피2세는 통치 능력을 상실했다. 그렇게 되
자 군대 유지가 불가능해졌고 그 결과 이집트는 쇠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이집
트는 가장 큰 힘, 즉 절대적인 지배자인 왕을 중심으로  조직된 강력한 중앙정부에 의해 쓰
러졌다. 한 마디로 이집트는 파라오의 힘이 쇠약해지면 고통을 겪을 수 밖에 없는 체계위에 
서 있었다. 후일 투탕카멘은 체엄을 통해 이러한 교훈을 습득하게 된다. 페피2세이후  1세기
가 넘는 기간 동안 이집트는 지역 총독들끼리 힘 겨루기를 하며 진정한 왕 없이 지냈다. 국
력이 쇠약하던 시기에도 이집트는 외적의 침입을 받지 않았다.  사막과 바다라는 천연의 장
벽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나르메르 왕과 같은 한지역의 지배자가 나타나 국
토를 통일하면서 이집트는 다시 파라오를 맞이했다. 그리하여 이집트는 지위를 회복했다. 단
일 지도자가 강한 군대와 성직자들을 이끌면서 이집트는 다시  신성한 질서를 되찾았다. 그
러나 투탕카멘의 통치기까지는  아직도 8백 년이 더  남아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정치 세
력'이니 '왕권'이니 '성직자 계급'이니와 같은 용어로만 이야기만 왔다. 이집트를 전적으로 물
리학의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거대한 기계 체계로 바라본다는게 어쩌면 지나친 단순화의 결
과일 수도 있다. 이처럼 이집트를 위대하게 만든 건 개인들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제 투탕
카멘의 가족들을 만날 시간이다. 

    3. 투탕카멘의 선조들- 찬란했던 18왕조
  인접 국가들을 지배했던 이집트는 자기네 나라가  세계 질서의 맨 위에 위치한다고  믿었
다. 사실 이집트의 역사는 정복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라오는 계속해서  패
권을 유지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 밖으로 원정 나가 외국을 쳐분순 후 어마어마한 
전리품을 가지고 귀국했다. 정복당한 국가들은 파라오의 재공격을 감수할 각오가 돼 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해마다 '조공'을 바쳐야 했다. 오늘날에는 이를 무분별한 도발 행위라
고 여기겠지만 고대 세계에서는 살아가는 방식의 일부였다. "내  재임 기간 동안 전쟁은 없
었노라"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파라오는 단 한명도 없었다. 애초부터 식민지라는 걸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해마다 나서는 정복여행이  이집트인들에게 필수적이었다. 일단 외국 
영토를 정복하고 나면 이집트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조공을 기다렸다.그러나 이집트 군대
와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들은 조공을 바치는데 소홀했다. 그러면 파라오는 다시 군대를 이
끌고 나갔다. 이집트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이러한 과정은 수없이 되풀이됐다. 즉 이집트인
들에게는 전쟁이 자연의 질서 중  일부였다. 투탕카멘 왕조의 초기 파라오  가운데 한 명인 
투트모시스 1세는 광범위한 정복 활동으로 알려져 있을 뿐 만 아니라, 신왕국의 파라오들이 
그로 말미암아 피라미드가 아닌 왕들의 계곡에  묻히게 됐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이
다. 투트모시스 1세의 일꾼 감독관을 지낸 이네니의 묘에 새겨진 자서전적 기록을 보면,  최
초의 무덤이 어떻게 해서 건설되었는지를 알 수 없다. 보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없는 가운
데, 나는 폐하의 무덤 입구를 면밀하게  살폈다. ......나는 온 가슴을 다  바쳐 그 일을 했다. 
내가 가진 장점 중 가장 큰 미덕은 지혜였은니, 이는 윗사람이 시켜서 한일 아니었다.  나의 
지혜로 말미암아 내가 한일을 모방할 사람들에 의해 나는 대대손손 찬양받으리라. 투트모시
스1세의 시신을 보호하려면 무엇보다도 비밀 엄수가 필수였다. 고왕국 몰락 직후 기자의 피
라미드들은 도굴꾼들에게 약탈당하는 운명에 처했다. 그리고 그 바람에 시신들도 모조리 파
괴되고 말았다 그후 정부가 안정을 되찾으면서 중왕국의 파라오들이 피라미드 공사를  재개
했으나 부족한 인력과 자재 때문에 진흙 벽돌과 외장재로 쓰이는 얄팍한 석판만으로 무덤의 
내부 공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 피라미드도 약탈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투트모
시스1세의 비밀 무덤은 무덤 도굴꾼들을 따돌리기 위해 황량한 계곡 절벽에 조성되었다. 그
로부터8세대 후 투탕카멘은 왕들의 계곡으로 알려진 이 장소에서 당당했던 선조와 함께 하
게 된다. 이들 중에는 이집트를 통치했던 위해한 군주들이 포함돼 있었다. 투탕카멘의  선조
인 18왕조의 왕들은 '파라오는 곧 전사'라는 개념을 이전과는 비교가 안 되는 경지로 끌어올
렸다. 파라오 투트모시스1세는 최고 수준의 훈련과 장비를 갖춘 수 천명의 군대를 창설했다. 
투트모시스 1세의 군대는 숫자면에서도 나르메르가 조직했던 소규모 군대와는 비교갸 안 됐
을 뿐만 아니라, 나르메르로서는 상상조차 못했을 장점 즉 이륜 전차까지 갖추고 있었다. 두 
마리의 말이 끄는 이륜 전차에는 마부와 궁수가 각각 1명씩 탔다. 이들 이륜 전차는 바퀴용 
느릅나무와 몸체용 물푸레나물를 비롯해 모두  수입 목재로 제작되었다. 바닥은  가죽 끈을 
엮어 만든 후 다시 그 위에다 가죽을 덮었다. 그렇게 하면 가죽  덮개가 충격 흡수 장치 역
할을 해서 궁수가 활을 쏠 때 상대적으로 안정된 자세를  취할 수 있었다. 전차를 지원하는 
역할은 보병들의 몫이었다. 보병들은 가죽 방패와 창,도끼,단검을  소지한 채 하루에 15마일
씩 행군했다. 투트모시스 1세가 원정 여행을 성공리에  끝내자 이집트는 자국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7백 마일을 영토로 확보할 수 있었다. 투트모시스  1세는 유프라테스 강 양쪽 둑
에다 기념 석주를 세웠다. 맨 위에 둥근 돌을 얹어 놓은 마치 거대한 묘비를 연상케한는 이 
기념 석주는 말하자면 일종의 게시판이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뭔가를 선언하고자 할 경우, 
그 내용을 기념 석주에  새겼다.투트모시스1세는 석주에다 여기가 이집트의  북쪽 영토임을 
선포했던 것이다. 투트모시스 1세의 자식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은 하트셉수트 공주
였다.고대 이집트어에는 '여왕'이라는 말이 없다. 우리가 '여왕'이라고 번역하는  어구는 실제
로는 '왕의 위대한 부인'이다.하트셉수트가 아들이었다면  당연히 왕위를 물려받았겠지만 딸
이었기 때문에 문제가 생겨났다. 이집트인들이 왕위  계승권자를 어떻게 정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왕의 장남이 왕위를 이어받도록 한 장자 상속법이 명문화된 영
국에서처럼 단순치가 않았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파라오는 여러 명의 부인을 거느렸을 뿐만 
아니라 누이와도 결혼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가계가 상당히 복잡했다. 그래서 대개의 겨
우,'여자 상속인 법'으로 알려진 법칙이 적용되었다. 즉 왕가의 장녀와 결혼한 사람이 파라오
의 자리에 올랐다. 투트모시스 1세가 죽자, 서출인 투트모시스2세는 파라오의 장녀이자.이복 
누이인 하트셉수트와 결혼했다. 하트셀수트와의 결혼은 투트모시스  2세에게 왕위를 계승할 
권리를 부여해주었다. 그후 이들 부부는 22년 동안 이집트를 통치했다.투트모시스 2세는  죽
으면서 하트셉수트와의 사이에서 테어난 딸 수트는 이 어린 소년을 대신해 7년 동안 이집트
를 다스렸다. 이집트의 긴 역사를 통틀어  가장 믿기 어려운 사건 중 하나는  바로 그 후에 
일어났다. 다름 아니라 하트셉수트가 자신의 칭호를 '여왕'에서 '왕'으로 바꾸는 한편, 턱수염
을 기른 채 정통 복장을 입은 모습을 그리게 한  사건이었다. 보수적인 고대 이집트에서 이
는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하트셉수트는 가짜 턱수염을 붙이고  파라오의 정통 복장을 걸침
으로써, 이집트 왕원의 전통적인 테두리 안에 남고자 했다. 다시 말해 그녀는 어쩌다 여자로 
태어난 왕이었다. 하트셉수트가 이 엄청난 사건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밖
에 없었다. 다름 아닌 훌륭한 통치자이자,재임기간 동안 이집트 전역에 번영을 가져다  주었
기 때문이다. 하트셉수트가 왕으로 묘사되기를 원하면서 궁정 화가와 서기들은 적잖은 도전
에 부딪혔다. 그렇다면 하트셉수트는 '국왕 폐하'라고 불렀을까. 아니면 '여왕 폐하'라고 불렀
을까?(실제로는 둘다로 불렀다.)하트셉수트가 재임 22년 6월 10일(B.C.1942년2월)에 죽자, 비
로소 이집트의 단독 통치자가 된 투트모시스 3세는 연이은 정복 여행을 통해 이집트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대 지도자로  군림하기에 이른다. 투트모시스 3세는  하트셉수트가 죽고나서 
16년 동안 이집트 북쪽으로 무려 14번의 원정 여행을 떠났다. 이집트학자들은 이런 그를 가
리켜 '이집트의 '나폴레옹'이라고 부르고 있다. 투트모시스 3세는 재임33년에  유프라테스 강
으로 진격해 미탄니 (메소포타미아 유프라테스 강 중류  연안에 있던 후르리인의 왕국)왕을 
굴복시킨 후 할아버지가 세운 기념  석주 부근과 강 건너에 자신의  기념 석주를 건립했다. 
하트셉수트가 죽은 지 1세대후, 투트모시스 3세는 모든 기념물에서  그녀의 이름을 지워 버
렸다. 이집트의 기록에서 그녀의 흔적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이집트의 왕이 여자였
다는 사실을 도무지 받아들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파라오의 이름과 기억에서 하트셉수트
를 지워 버린 이 사건은 나쁜 전례를 낳았다. 그로부터 1백년  후 동일한 숙청의 물결이 이
집트 전역을 휩쓸게 된다. 이번에는 투탕카멘이 그 대상이었다 왕위에 오른지 44년 만에 투
트모시스 3세가 죽을 무렵 이집트는 중동의 모든 세력들이 두려워하는 군사 대국이 돼 있었
다. 투트모시스 3세는 투탕카멘의 할아버지, 할아버지의,할아버지의, 할아버지였다. 투트모시
스 3세와 투탕카멘 사이에 재임한 파라오들은 선조들의 위대한 전통을 계승, 발전시켰다. 그
들은 18왕조를 절정으로 끌어올렸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  도래하는 이집트의 찬란한 역
사를 일군 장본인들이었다. 이제 투탕카멘의 직계 조상이 등장할 차례다 투탕카멘이 태어나
기 25년 전의 이집트는 의지와 결단력이 강한 아멘호테프  3세가 통치하고 있었다,  아멘호
테프 3세는 고결함과 강인함으로 그 이후의 파라오들에게 널리 귀감이 된 인물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그를 왕위 계승자로 공공연하게 지명했기 때문에 아메호테프 3세는 평민과 결혼할 
수있었다. 즉 왕좌에 대한  권리가 이미 확보됐던 터라 굳이 순수한 왕가 혈통의 부인을 맞
이할 필요가 없었다. 티이와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아멘호테프 3세는 돌에다 행운의 상징
인 풍뎅이를 조각한 지금으로 치면 일종의 전보를 보냈다. 풍뎅이 조각 밑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왕의 위대한 부인 티이의  장수를 기원하며, 그녀의 아버지 이름
은 유야 그녀의 어머니 이름은 투야 그녀는 위대한 왕의  부인이로다. 이 행간이 주는 의미
를 생각해 본 사람이라면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이해했으리라.  즉 티이는 평민이지만 나의 
아내인 왕비로 받아들이라는 메시지를 말이다. 모든 정황을 종합해 볼 때, 두 사람의 결혼은 
성공적이었다. 아멘호테프 3세의 조상 옆에는 늘  티이가 등장한다. 그것도 왕과 거의  같은 
크기로 이는 티이가 상당히 존경을 받았음을 뜻한다. 왕가의  사람들은 늘 이상적인 모습으
로 그려졌지만 티이의 초상화는 실물에 가깝다. 베를린 박물관에  소장된 티이 왕비의 아름
다운 두상은 뚜렷한 이목구비에 원하는 건 뭐든지 손에 넣을 수 있었던 성숙한 여인의 이미
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티이는 딸 넷과 아들 둘을 포함해 총 여섯명의 자식을 낳았다. 공주
들은 중요한 칭호를 부여받았다.그  가운데 시트-아문이라는 딸은  '왕의 부인'으로 불렸다. 
이 때문에 일부 이집트학자들은 그녀가  아버지와 결혼했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이복 
남매끼리 결혼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파라오가 딸과 결혼하는  예는 아주 드물다. 선조
의 이름을 따서 투트모시스로 명명된 장남은 테베와 함께 이집트 수도의 하나였던 멤피스의 
수석 사제직을 수행하며 대권 훈련을 쌓았다. 아멘호테프 3세의  입장에서 볼 때 이는 사전
에 치밀하게 계산된 행동이었다. 이집트의 역대 파라오들이 신들에게  예를 표했던 건 정치
적인 이유에서였다. 이런 점을 고려하건대, 아멘호테프  3세의 조치는 입김이 센 성직  사회 
안에 왕가의 일원을 심어 놓기 위한 포석이었다. 차남은  아버지의 이름을 따 아멘호테프라 
칭해졌으나, 왕가의 기록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조각상조차 없다. 단지  깨
진 포도주 항아리에 잠시 이름이 등장할 뿐이다. 앞날이 암울했던 왕자, 즉 투탕카멘 부친의 
불행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이 수수께끼의 인물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자세히 살펴보기
로 하겠다. 아멘호테프 3세가 재임하는 동안, 이집트는 유례없는 태평성대를 누렸다. 그렇다
고 해서 값비싼 연고와 향유가 흘러넘쳤다거나 터키옥과 청금석,금 따위로 장식한 목걸이가 
지천에 널렸다는 얘기는 아니다. 향긋한 삼나무 목재로 만든 신전 문의 숫자가 더 많아졌다
는 얘기도 물론 아니다. 대신 먹을 게 풍부했으며 평화가 있었다. 아멘호테프 3세의  선임자
들 덕분에 이집트는 시리아 북쪽에서부터 나일 강의 제  5폭포(수단의 중심부)에 이르는 광
활한 영토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제 군대는  전투를 통해 힘을 과시할 필요가 거의  없었다. 
그보다는 적들에게 먼젓번에 당한 공격에서 얻은 교훈을 분명히 깨닫게 하는 작업이 더 중
요해졌다, 게다가 누비아(지금의 수단)와 서부 사막에서 유입된 금은 이집트 경제를 더욱 튼
튼하게 지탱해주었다. 당시 아멘호테프 3세와 편지 왕래를 했던  외국의 한 왕은 이런 이집
트를 가리켜 "폐하의 나라에서 금은 아무나 줍기만 하면 되는 먼지와도 같구려"라고 말했을 
정도다. 남쪽의 쿠시에서는 코끼리 상아와  기린 가죽, 궁정가구를 만드는데 쓰이는  흑단이 
아프카니스탄에서는 신들의 호부를 만들거나 장신구에 박아  넣는 청금석이 들어왔다. 이제
는 외국의 무역상들이 정기적으로 지중해를 왕복했다. 이 밖에 크레타에서는 궁정에서 사용
하는 이국풍의 항아리가 키프로스에서는 구리가 들어왔다. 아멘호테프 3세는 신들에게 신들
은 이집트에 호의를 베풀었다. 어느 쪽에서  보나 밑지지 않는 장사였다. 아멘호테프  3세와 
티이 왕비는 이집트의 두 지역을 성공적으로 통치하며 가히 국제적으라 할 만한 삶을 영위
했다. 이들 부부는 멤피스와 테베를 번갈아 가며 여행했다. 북쪽 수도였던 멤피스는  지중해 
쪽으로 흘러가던 나일 강이 부채꼴 모양의 삼각주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해 있었다. 멤피스
는 왕이 나라를 통치하기 이해 거주했던 이집트 행정의  중심이었다. 그러다 보니 멤피스에
는 국가의 각종 보관소와 수천 명에 달하는 관료조직이 생겨났다. 그러나 도시가 지하 수면 
위에 건설됐던 탓에 그 옛날 멤피스의 모습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현재는 거대한 조각상
과  기둥만이 멤피스가 한때 세계에서 가장 분주한 도시였음을  증명해주고 있을 뿐이다.안
타깝게도 멤피스를 구성하고 있던 관공서 건물들은 시간과 물기에  오래 노출되다 보면 다
시 진흙으로 변하고 마는 햇볕에  말린 벽돌로 지어져 있었다. 궁정  건물도 똑같은 운명을 
겪었다. 문서 보관소의 귀중한 서류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거나 젖은 파피루스가 걸어가야 할 
운명을 극복하지 못한 채 모조리 썩어 문드러지고 말았다. 찬란했던 신전들 역시 습기를 견
디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멤피스에서 남쪽 테베까지 4백 마일에 이르는 길을 여행하려면 
국왕 전용선에 몸을 실은 채 나일 강의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거기에 약 3주가 걸
렸다. 강에서의 편안한 여행을 위해 거대한  목재를 이어 붙여 만든 배의  길이는 2백 피트 
정도였다. 아멘호테프 3세는 여행 도중  신전에서 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잠깐씩 배를 멈춰 
세웠다. 사제들은 살아 있는 신과 조우했던 이때의 경험을 후세들에게 자랑스럽게 이야기했
으리라.멤피스가 각종 기록과 사업가들로 넘쳐나는 워싱턴과  같은 도시였다면 테베는 부유
하고 매혹적이며 황홀한 파리와 같은 도시였다. 테베는 기능적인 행정 도시가 아닌,  신들의 
영광을 위해 건설된 도시였다. 아멘호테프 3세의 선조들은 무사히 원정을 마치고 돌아올 때
마다 자신들이 거둔 성공에 감사드리기 위해  테베의 신전에 전리품의 상당 부분을  희사했
다. 돈궤에는 황금이 흘러넘쳤고 창고는 사제들의 옷을 만드는 새하얀 아마포로 발 디딜 틈
이 없었으며, 기부받은 수천 에이커의 농토에서 거두어들인 수확물의  행렬이 끝도 없이 이
어졌다. 밀과 가축과 야채를 위시해, 내다팔 수 있는 잉여 작물이 생산되면서 성직자들은 부
자가 됐고 그러면서 발언권도 세졌다. 그리하여 국왕 전용선이 마침내 테베에 닻을 내릴 때
쯤엔 주머니가 두둑해질 대로 두둑해진 성직자들이 아멤호테프 3세와 티이를 맞이했다.일찍
이 호머는 신전 본채로 이어지는 거대한 탑문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던 이 도시를 가리켜 '
백 개의 관문을 가진 테베'라고 칭했다. 실제로 테베에는 무수한 신전이 있었다.그러나 이도
시가 그토록 중요했던 이유는  수호신인 '아문' 때문이었다.  이집트인들은 아문신의 보살핌 
덕택에 고왕국 이후의 무정부 상태와 외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고 믿었다. 아멘
호테프 3세에 이르는 근 1천 년의 세월 동안, 파라오들은 아문을 특별한 수호신으로 여기며 
그이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 엄청난 재산을 기부했다. 그 결과 테베는 각종 선물로 흘러넘치
는 화려한 도시로 성장했다. 아문의  위세는 최고의 신인 레와 합쳐져  아문레로 불릴 만큼 
막강했다. 타조 기스로 치장한 왕관을 쓴 남자로 상징되는 아문은 여신 무트와 결혼했다. 그
후 아문은 아들 콘수와 함께 테베를 지키는 성스런  일가를 형성해다. 아멘호테프라는 이름
을 풀면 "아문께서 기뻐하시도다"라는 의미다. 그는 자신의 이름에 걸맞게 아문신을 만족시
키는 데 있어서 역대 파라오들을 능가했다.아마 사제들의 성화가  어는 정도 작용하긴 했겠
지만 투탕카멘이 장차 할아버지라 부르게 될 이 왕은 테베의 수호신과 자신의 영광을 기리
기 위해 사상 유례없는 대규모  공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장남의 이름을  기록의 신 토토를 
기려 "토트께서 태어나시도다."라는 뜻인 투트모시스로 지은 걸로 미루어 부아, 원래부터 신
앙심이 독실했던 것 같다. 차남은 아멘호테프 자신이 그랬듯이 아문 신의 이름을 따서 지었
다. 장녀 역시 아문 신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아멘호테프 3세는 역사상 가장 큰 종교  건축
물인 카르나크 대신전에 아문 신에 대한 자신의 충성을  표했다. 카르나크는 단일 신전이라
기보다는 신전과 성소가 수 에이케의 땅에 걸쳐 두서없이 산재돼있는 복합 신전이었다.카르
나크가 이처럼 규모가 커졌던 이유는 파라오들이 수세기에 걸쳐 신들에게 기념물을  봉헌했
기 때문이다. 아멘호테프 3세가 아문  대신전을 짓기 시작할 당시만  해도 투트모시스1세와 
그이 딸 하트셉수트가 세운 탑문은 아직 건재했다. 그때도  사람들은 카르나크 신전에서 최
초로 건립된 투트모시스1세의 오벨 리스크 (고대 이집트의 태양 숭배의 상징으로 세워진 기
념비. 네모진 거대한 돌기둥으로 위쪽으로 갈수록  가늘어지며 꼭대기는 피라미드 모양으로 
되어 있음 )를 보면서 입을 다물지 못했으리라. 우선 아멘호테프 3세는 신전이 시작되는 곳 
정면에다 크르나크를 찾는 사람들이 맨 처음 보게 될 건물인 거대한 탑문(제 3탑문)을 세웠
다. 거대한 탑문의 밝게 채색된 처마 장식 둘레에는 금과 은을 합금한 일렉트림으로 도금한 
깃대에 매달린 하려한 깃발들이 바람이 불 때마다 마치  꽃잎파리처럼 일렁였다. 이 인상적
인 건물은 물론 아문신을 위한 기념물이었다. 카르나크에서 1마일 반 떨어진 테베 중심부에
는 굉장히 중요한 으미를 갖는 도다른 신전이 있었다. 테베에서는  일 년에 한 차례씩 머리
를 깎은 사제들이 이 신전으로 향하는 신성한 범선에 황금으로 만든 묵직한 아문상을 적재
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아울러 호위선 역할을 하게 될 배에는  그의 아내인 무트 여신의 조
상을 실었다. 테베에서 가장 중요한 명절인 '하넴의 아름다운 축제'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아
문 신과 무트 여신을 태운 선두 배가 출발하고 나면 새하얀 예복을 입은 사제들과 금과은으
로 치장한 고관들이 그 뒤를 이었다. 그리고 나면 두  시느이 결혼과 부부애를 축원하는 의
식이 뒤따랐다. 이 기념식은 일 년에 한 차례만 사용되는 '남쪽의 하렘 '이라는 조그만 신전
에서 거행되었다. 아멘호테프 3세는 건축가들에게  이 낡은 사원 대신  좀더 화려한 건물을 
지으라고 명령했다. 이에 건축가들은 일곱쌍의 웅장한 연꽃 기둥을  지나면 넓은 뜰이 나오
는 주랑을 만들어냈다. 뜰 양쪽으로는 위에다 석판을 얹은 파피루스 모양의 원주가 마당 한 
옆에다 그늘을 만들며 두 줄로 늘어서 있었다. 뜰을 지나  신전의 제일 끄트머리쯤 되는 지
점에 이르러서는 아문 신과 무트 여신의 조상을 안치할 두 개의 지성소가 새워졌다.아문 대
신전은 아멘호테프 3세가 아문 신에게 바친공물중 가장 정성을 쏟아 만든 역작이었다. 그런 
만큼 단일 파라오가 지은 신전중에서는 제일 규모가 컸다. 건축물을 짓는 데 관심이 많았던 
아멘호테프 3세는 강 건너의 공터에다 궁궐을 새웠다. 편안하게 쉬면서 신전 공사를 감독하
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한명의 파라오만  쓰면 된다는 생각에 궁궐 건물  전체가 짧은 진흙 
벽돌로 지어졌다. 그래서 현재는 벽만 남아 있다. 그렇지만 굉장한 공사였음을 보여주는  증
거는 충분히 남아 있다. 밝은 색감의 자연 풍경이 그려진  바닥과 화려한 문양으로 테를 두
른 벽들이 그렇다. 이 궁궐 역시 규모가 큰 단일 건물이었다기보다는 왕과 그이 참모진,  왕
비와 시녀, 주방 하인들과 궁정 수비대가 사용하는 건물이 각기 따로 존재했던 복합 건물이
었다. 뿐만 아니라 아멘호테프 3세가 자신의 오랜 통치를  기념하기 위해 특별 축제 으식을 
개최했던 대규모 공연장도 있었다.이곳에서의 생활은 그야말로 사치의 극을 달렸다. 나일 강
이 지척에 있었건만 아멘호테프 3세는 궁궐 뒤편에 티이 왕비가 뱃놀이를 할 수있도록 인공 
호수도 만들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아멘호테프3세는  점차 테베의 영광에 젖어  들었다.예를 
들면 70피트나 되는 자신의 조각상을 만들게 해서 자신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신전으로가는 
길을 안내하게 했다. 오늘날 이 신전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지만 아멘호테프 3세의 거
대한 좌상은 아직도 테베를 응시하고 있다. 이조각상이 바로  고대의 방문객들을 놀라게 했
던 그 조각상이었다.
 
    4. 성스러운 도시 아마르나 
  아케나텐과 그를 따르는 순례자들은 마침내 새로운 도시를 건설할 땅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들을 반기는 건 황량한 사막뿐이었다. 오늘날 이 유적지는  그로부터 수세기 후 발굴자들
이 도착했을 당시 이곳에 거주하던 베두인족의 이름을 따 텔  엘 아마르다. 혹은 짧게 줄여 
'아마르나'로 불려지고 있다. 아케나텐이 이곳을 새 수도로 결정했을 때는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았다. 조지프 스미스가 모르몬교도들을 미지의 유타 사막으로 이끌었듯이 그는 다른 신들
을 위한 성소나 신전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은 처녀지를 선택했다. 추측건대 신심이 강한 초
기 이주민들은 약 1천여 명쯤 되지 않았을까 싶다.  이들은 천막이나 임시로 지은 오두막에
서 생활하며, 자기들 눈 앞에서 도시가 형성돼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가장 큰 문제는  이
들을 조직하고 먹이는 일이었다. 이 천막 도시는 막사마다 보급 업무를 담당하는 병참 장교
가 배치된 군대의 임시 주둔지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밭이나 관개 수로가 없었기 때문
에 그 즉시 작물을 심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물고기와 새가 풍부했다. 맨 먼저 이
들은 이집트인들의 2대 주식을 생산할 양조장과 빵집부터 지었을 게 틀림없다. 게다가 술을 
빚든 빵을 만들든 없어서느 안될 재료 즉 이스트 때문에 두 집이 나란히 붙어 있었을  확률
이 높다 일꾼들은 이 새 도시의 진정한 영웅이었다. 석공들이  청동 끌과 나무 메로 채석장
의 돌을 쪼개는 동안, 벽돌공들은 도시를 건설하는데 필요한  수백만 개의 벽돌들을 찍어냈
다. 벽돌을 만드는 작업은 간단했다.먼저 나일 강의 보드라운 진흙을 직사각형의 나무  틀에 
부은 다음 거푸집을 제거했다. 이  상태 그대로 이집트의 타는 듯한  햇볕에 말리면 벽돌이 
완성됐다. 벽돌을 쌓은 줄이 높아짐에 따라, 화가와 장인들은 새로운 주택과 정부 건물을 장
식하기 위해 미친 듯이 일했다.  작업량이 상당히 많았던 걸로 보아  어쩌면 이들은 테베의 
친구들에게 이쪽으로 와서 함께 일하자는 전갈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워낙 바쁘다 보니 시
간 낭비라는 게 없었다. 밝게 채색된 진흙 기와를 만들거나 벽화에 포인트를 주기위해 꽃문
양을 새겨 넣으려면 도자기 가마가 빨갛게 되도록 불을  지펴야 했다. 아마르나에서는 고대 
이집트의 두 가지 중요한 건축 재료인  돌과 나일 강의 진흙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고대 
이집트의 신전들은 영구 보존을 위해 돌 벽돌로 지어졌다.  그러나 주택의 경우에는 왕궁가
지도 진흙 벽돌로 지은 다음 그 위에 그림을 그려 마감했다. 돌을 깨서 채석장에서 신전 공
사장까지 끌고 가느라 생긴 먼지와 모래 때문에 도시 위에는  늘 엷은 안개가 끼여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신전이 모습을 갖춰 나가는 광경을 신기한 눈길로 지켜보던 아이들에게는 공
사장에서 산다는 게 굉장한 매력이었다. 벽 높이가 6피트  이상이 되면 진흙 벽돌로 경사로
를 만든 다음 썰매를 이용해 벽돌을 끌어올렸다. 아마르나에서는 대여섯 개의 중요건물들이 
동시에 올라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흥분했을지를 한 번 상상해 보라 아
마르나의 초기 시절 어린이들의 장래 꿈은 건추가였다. 아마르나뿐만 아니라 이집트의 다른 
지역에서도 건축 활동을 기록한 파피루스가 여지껏 단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피라미드를 어떻게 세웠는지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물론 옛날에는 있었지만  모
조리 사라져 버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정보는 직업상의 
비밀이었기 때문에 아버지 건축가에게서 아들로 전해졌던 게 아닐까 싶다. 실제로 문학이나 
종교에 관한 파리루스는 많지만 건축업에 대한 파피루스는 전혀  없다. 도시 계획은 서쪽의 
나일 강과 동쪽과 가파른 절벽이 형성하는 지형에 근거해  이루어졌다. 도시 중심부는 이들 
두 경계선 사이에 있는 너비 3마일,  길이 8마일의 초승달 지역에 들어섰다. 시내를  세로로 
쪼개며 남북으로 내달리던 대로의  이름은 '왕의 도로'였다. 폭이  125피트가 넘었으나 고대 
세계에서는 가장 넓은 도로였을 듯하다. 원래 이 도로는 왕가의  대형 전차 행렬을 위해 설
계되었으나. 나중에는 통근용 길로 사용되었다. 관리들은 나귀 등에 올라탄 채 이 길을 따라 
교외의 집에서 도시 중심부의 사무실로 출근했다. 이 밖에 동서에  걸쳐 바싹 마른 강 바닥
이 두 군데 있었지만 홍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여기에는 아무것도 짓지 않았다. 그리하여 
도시는 시내와 남쪽 교외 북쪽 교외를 합해 총 세  구역으로 나뉘여졌다. 완성된 도시는 양
쪽 끝에 있는 교외 지역을 포함해 남북으로 17마일에 걸쳐  뻗어 있었다. 교외 지역에는 새
로 단장한 공방과 신전, 주택들이 들어섰다. 그 당시 아마르나의 부자들과 유명 인사들은 단
순하게 설계된 고급 주택에서 살았다. 연꽃 그림으로 단장한 나무 기둥이 늘어서 있는 넓은 
현관을 지나면 거대한 기둥 네 개가 위용을 자랑하며 서  있는 널찍한 거실이 나왔다. 거실
을 중심으로 다시 침실과 욕실 응접실로 갈라졌다. 본채  뒤로는 하인들 숙소와 창고, 부엌,
마구간이 있었다. 이들 대저택이 거의 동시에 지어졌음을 감안할 때 이를테면 고대 상류 계
층의 주택 단지가 형성됐던 셈이다. 일명 '축제 속에서  고귀해진 섬'으로 통하던 도시 중심
부는 새 수도의 행정 중심이었다.  외무부는 '파라오의 급송  문서 보관소'로 알려진 이곳의 
한 건물에 아케나텐과 아시아의 지배자들  사이에서 오갔던 문서를 보관했다.  뿐만 아니라 
아케나텐은 아멘호테프 3세와 외국 밀사들 사이에 오갔던 편지와 무역 비준서를 비롯해 아
버지 아멘호테프 3세 재임기 동안의 모든 문서를  모아두었다. 천도하면서 누군가가 서류함
을 가져왔던 모양이다. 기록 보관소 옆에는 경찰서가 있었다. 경찰서에는 본 건물 외에도 기
숙사와 훈련장을 비롯해 그 시대의 경찰차에 해당했던 이륜 전차를 위한 마구간이 딸려 있
었다. 신정 도시를 표방했음에도 불구하고 도시 건설과 함께  막대한 부를 부장한 무덤들이 
생겨나면서 체포해야 할 도둑과 뜯어 말려야 할 싸움들이 있었나 보다. 그 옆으로는 미래의 
사제들을 교육하던 '페르-앙크', 즉 '생명의 집' 이라는 대학교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아마 아케나텐이 직접 입안했을  새로운 교과 과정을 가르쳤다.  이제 수도중인 
젊은 사제들은 완전히 외울 때까지 이시스와 오시리스의 신화를 암송하거나 '레신에게 바치
는 성가'를 반복해서 부를 필요가 없었다.  더 이상은 이들 신들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
다. 대신 아케나텐에 의해 만들어진 새로운 기도 전례문과 성가집이 쓰여졌다. 아텐  신앙의 
입회자들에게는 실로 흥분의 순간이었다. 아텐의 교리 체계는 가히 혁명적이었다. 일찍이 그 
어떤 나라도 이전에 있던 신들을 모두 무시한 채 전지전능한 유일신으로 대체한 적은 없었
다. 여기에는 앞으로 차차 발전시켜 나가야 할 강력한 개념이 있었다. 신흥 종교의 추종자들
은 지도자인 파라오와 함께 뼈대에 살을 붙이는 작업을 추진할 작정이었다. 그런 다음 세상
을 바꿀 참이었다. 한편 학생들은 아텐의 수석 사제인 메리-레의 감독을 받았다. 이 인물은 
이름의 뜻이 '레가 사랑하는자'인 점으로 미루어 보아, 테베의 하급 사제로 있다가 일찌감치 
아케나텐의 새 종교로 개종한 후 최초의 순례 여행 때 아케나텐을 따라 아마르나로 이주하
지 않았나 싶다. 도시 중심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은 뭐니뭐니 해도 왕의 거처였다. 광
활한 부지에 정교한 미로를 형성하며 사방으로 뻗어나간 널찍한 접견실과 탁 뜨인 뜰, 개인 
주택, 육아실, 부엌, 거대한 창고 등으로 보아 그 무렵의 고대 세계에서는 가장 규모가 컸다.
이국풍의 나무들을 심은 계단식 정원을 지나 궁전 앞쪽으로 나오면 시원한 산들바람이 불어
오는 나일 강이 기다리고 있었다. 게다가 궐  안 어디에 있더라도 좌우 익벽(흙이 무너지지 
않도록 교대에 붙여 놓은 벽)을  연결하는 고가 도로를 통해 대로로  나올 수 있었다. 건축 
기술의 연결하는 고가 도로를 통해 대로로 나올 수 있었다.  건축 기술의 혁신이라 할 만한 
이 고가 도로는 완공과 동시에 궁궐은 물론이고 도시  전체의 명물로 자리잡았다. 아케나텐
과 네페르티티가 공주들을 대동한 채 저 아래 길에 모여 있는 고관들을 접견하기 위해 모습
을 드러내는 장소라고 해서 사람들은  이곳에 '용안의 창'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왕 부처는 
이 창을 통해 충신들에 대한 상으로 커다란 반지 모양의  황금 칼라를 하사히기도 했다. 종
교는 그 자체로 강한 매력을 지니고 있지만 황금은 그러한  매력을 더 한층 배가시켰다. 궁
궐 옆의 '아텐의 성'이라는 개인 신전은 왕족들이 개인적으로 에배를 보면서 아텐의  내뿜는 
광선에 의해 다시 원기를 회복하는 성소였다. 일반 시민들을  위해서는 카르나크에 견줄 만
한 거대한 신전이 세워졌다. 사람들은 길이 2백 야드,너비50야드에 이르는 이처럼 큰 신전을 
전에는 한번도 본적이 없었다. 이집트 신전들의 경우 햇빛이라고는  석판 지붕에 뚫은 조그
만 구멍을 통해 들어오는게 전부였기 때문에 늘 어둠침침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전통적인 신전들은 지금으로 치면, 한 줄로 이어진 각 방이  다음 방으로 가는 통로 역할을 
하는 기차간식 아파트와 비슷했다.먼저 일반인들이 신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장소인 넓은 뜰
이 나왔다. 뜰 뒤의 경사로를 지나면  지붕을 얹어 훨씬 호젓한 느낌을 주는  두 번째 뜰이 
나왔다. 이 두 번째 뜰은 귀족들을 위한 장소였다. 신전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바닥은 높이고 
천장은 낮추어서 신성한 공간의 분위기를 연출했다. 세 번째 구역인 '지성소'는 신을 모시는 
사제들만의 장소였다. 미래를 예언하거나 신의 계시를 알리는 사제들은 신의 조상들을 보관
하는 '지성소'에 거주했다. 이들 예언자는  대개는 지성소 안에 틀어  박혀 지냈지만 특별한 
축제일에는 파라오의 성스러운 배와 비슷하게 생긴 나무에 금박을 입힌 이동식 성소를 타고 
시내로 나왔다. 그러나 아케나텐은 새 예배당을 지으면서 이 모두를 무시해 버렸다.  아텐이
야 원래부터 조각상이 없었지만 다른 신들마저 우상과 함께 추방됐기 때문에 '지성소'를  만
들 필요가 없었다. 태양 원반이 숭배 대상이었기 때문에 어두운 통로와 지붕은 완전히 모습
을 감추었다. 아텐의 새 신전은 태양 광선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그  성격
상 신전은 축구 경기장 두 배만한 크기의 뜰을 둘러 싼 직사각형 모양의 방어벽으로 이루어
져 있었다. 안에는 아텐이 매일매일의 음식을 공양받는 365(매일 하나씩 계산해서)개의 공물
대를 위한 공간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케나텐의 다른  신전들도 거의 이런 설계
에 따라 지어졌다. 그중에도 정자처럼 생긴 소규모의 신전도  있었지만 하나같이 하늘을 향
해 열려 있어 햇빛과 바람이 잘 통했다. 모르긴 해도 아케나텐과 그의 추종자들은 캘리포니
아의 태양 숭배자들처럼 일 년  내내 구릿빛으로 그을려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이전 
양식을 완전히 뒤집었으면서도 테베 신전들의 건축 특징 중 한가지 즉 탑문은 무시할 수 없
었던 모양이다. 카르나크와 룩소르 신전에서 발견된 것과 동일한  거대한 탑문은 실내 신전
과 옥외 신전을 분리하는 역할을 했다. 생명의 숨결을 상징하는 미풍이 불때면 탑문 정면에 
매단 깃발들이 형형색색의 물결을 이루며 펄럭였다. 아마르나에 대한  이 모든 지식은 지금
은 폐허로 변해버린 이 잊혀진 도시의 수수께끼를 풀려는 열성적인 발굴자들의 노력에 힘입
은 바가 크다. 목사의 아들이자  최초의 영국인 이집트학자 중 한명인  존 가드너 윌킨슨은 
옥스퍼드에 입학했으나.학위를 포기한 채 군에 입대했다. 이탈리아에 주둔할 당시, 윌킨슨은 
이집트학자들이 상형문자를 해독하려 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이 사실에 고무된 윌킨
슨은 그 길로 이집트로 건너가 거기서 12년 동안을  머물렀다. 이집트학의 선구자들이 그랫
듯이 윌킨슨도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혼자 힘으로 배워  나갔다. 그러나 짧지만 군대에
서 생활했던 경험 덕분에 그가 평생을 투자하게 될 이집트의 스파르타식 체제에 쉬이 적응
할 수 있었다.윌킨슨은 테베에 숙소를 정한후 맨먼저 왕들의  계곡에 있는 무덤들을 분류했
다. 간단한 일이었다. 그는 한 손에는 물감통을 다른 한손에는 붓을 든채 무덤에 번호를  매
겨 나갔다. 당시 그가 매긴 숫자들은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다. 1824년 윌킨슨은  아마르나로 
여행했다. 거기서 그는 신전과 궁궐, 무덤,주택,넓은 도로 등 고대 도시에서 기대할 수  있는 
그러나 어딘지 이상한 유적을 발견했다. 벽화와 부조 조각에 나타난 양식이 그가 일전에 이
집트에서 본 것들과는 확연히 차이가  났다. 1세기 후에 발견된  카르나크의 벽돌에 그려진 
그림들처럼 왕과 왕비가 기형으로 묘사돼 있었기 때문이다. 왕은 거의 여성을 방불케 할 만
큼 커다란 엉덩이아 튀어나온 가슴을 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여성에게서 느껴지는 느낌과
는 달랐지만 왕비 역시 커다란 엉덩이와 튀어나온 가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목이 지나치
게 기다란 데다 팔도 가늘고 길었다. 뿐만 아니라  공주들까지도 뒤통수가 보통사람보다 길
게 그려져 있었다. 그림에는 이 인물들 외에도 왕족들을 향해  빛을 내리쏘고 있는 태양 원
반이 등장했다. 그러나 태양에서 나온 광선은 생명의 상징인 앙크를 쥐고 있거나 권력의 상
징인 홀을 쥔 손에서 사라져  버렸다. 이 이상한 사람들은  대체 누구였을까?그러나 이름이 
모두 지워져 있었기 때문에 도무지 알길이 없었다. 윌킨슨은  도시의 경계를 표시했던 이정
표의 상형 문자를 판독하진 못했지만 후에 아마르나의 운명에 대해 중요한 단서를 재공하게 
될 유적을 목격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도시는 단순히 버려진 게 아니라 철저히 분해된 흔적
이 역력했다. 궁전과 신전은 물론 주택들까지도 철저히 파괴돼 있었다. 그래서 실제 남아 있
는 유적은 건물터와 여기저기 흩어진 벽돌이 전부였다. 그러나 무덤만은 멀쩡했다. 산을  깎
아 만들었기 때문에 파괴할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무덤의  벽화들은 나중에 아마르나의 대
격변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게 된다.  그후 수십 년에 걸쳐 조사가  진행됐지만 이 유적지에 
대한 최초의 공식적인 발굴은 반 세기 후에야 이루어졌다. 마침내,1883년 프랑스 고고학자단
이 이상한 외모의 왕조과 기이한 그림, 되시의 파괴를 둘러싼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아마르
나의 발굴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전에 없던 문제가 발생했다. 유적지의  성격이 
기존의 경우와는 판이하게 달랐기 때문이다. 이전까지의 발굴 작업은 룩소르의 신전과 같은 
단일 건물이나 카르나크와 같은 복합 건물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남아있
는 게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도시 전체였다. 프랑스  학자들이 본 건 수마일에 걸쳐 
뻗어 있는 모랫더미가 전부였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실로 난감했다. 도시가 의도적으
로 파괴됐기 때문에 그만큼 발굴이  어려웠다. 그 누구도 보물이 나올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프랑스 학자들은 궁궐터와 신전터, 집터에서 모래를 걷어내는 작업을 시작으
로 발굴을 진행해 나갔다. 그러자 교외와 도시를 관통하는 널찍한 도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동쪽의 가파른 절벽 지역에 위치한 암굴묘 조사 작업이 진행된 건 그 다음이었다.이들 암굴
묘는 귀족과 고관들의 무덤이었다. 무덤 안에는 이상하게 생긴  왕부부와 태양 원반이 거의 
모든 벽마다 새겨져 있었다.그러나 무슨 이유에선지  프랑스인들은 자신들이 발견한 사실을 
책으로 펴내는 데 늑장을 부렸다.  그래서 이 이상한 유적지의 수수께끼에  몸이 달아 있던 
플리더스 피트리라는 젊은 영국인 고고학자가  기다지다 못해 1890년 직접  발굴에 나섰다. 
모험심이 강한 다양한 이집트학자들이 판치던  시대에 피트리는 그들 모두를  능가했다. 흰 
턱수염에 다 해진 옷을 걸친 그의 모습은 세실B.드밀 감독의 '모세'에 나오는 찰턴 헤스턴을 
연상시켰다. 피트리는 인부들에게 줄 주급을 찾기 위해 16마일을  걸어 시내까지 갔다가 다
시 막사로 돌아오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 발굴  초기에도 골동품을 거래하는 시
장이 있었다. 초기 발굴 과정에서  일어나는 가장 큰 문제는 인부들에  의해 자행되는 절도 
문제였다. 가령 땅을 파다 나온 보석 조각을 옷 속에 숨겨서 나가면 한 달급료 이상을 받고  
 팔 수 있었다. 이에 피트리는 인부들이 자기가 발굴한 물건을 가져왔을 경우 후한 값을 쳐
주는 제도를 만들었다. 그 덕분에 피트리는 발굴자들 중에서  유일하게 지신의 발굴 대상에 
대해 상당히 완벽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그러나  외부인들의 절도는 여전히 골칫거리였
다. 질이 나쁜 사람들이 뭔가를 훔쳐갈 목적으로 야음을 틈타 발굴터 주변으로 숨어들곤 했
다. 그러나 피트리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도둑과 맞닥뜨린  경험을 이렇게 술회했다. 
흠씬 패주었건만 퀴벨이라는 사람이 계속해서 얼쩡거렸다. 그는 내가 자기 다리를 부러뜨렸
따며 영사관에 가서 고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래서 나는  그를 땅바닥에 냅다 집어 
던졌다. 그러고 나서 엉금엉금 기어가는 그를 향해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자, 그는  부리나케 
달아나 버렸다. 이집트학의 개척사는 이 정도로 거칠었다. 한편 피트리는 새로운 회화  양식
에 몹시 끌렸다. 1천년의 세월 동안 이집트의 왕들은 젋고 활기차며 당장 전투에 나가도 될 
만큼 다부진 모습으로 그려져 왔다. 파라오는 언제나 승자였다. 그러나 아마르나의 경우에는 
파라오가 이집트의 전통적인 적들을 쳐부수는 전투 장면이 전무했다.  더욱 놀라운 점은 파
라오가 신들에게 공물을 바치는 장면마저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정말이지 알아볼  수 있는 
신이 한명도 없었다. 대신 파라오가 지식들을 무릅 위에 앉힌 채 다정하게 얼르는 장면이나 
딸이나 부인에게 키스하는 장면 파라오와 왕비가 이집트의 널리 알려진 신이 아니라 태양을 
숭배하는 장면이 발견되었다. 2천년에 이르는 이집트 회화사를  통틀어 이런 그림들은 한번
도 나온 적이 없었다. 이러한 경향은 주제뿐만 아니라 인물의 신체 균형과 크기까지도 세심
하게 규제했던 전통적인 이집트 회화와는 완전히 달랐다. 화가들이 무덤이나 신전을 장식하
면서 맨 처음 하는 작업은 비율-머리는 두칸 어깨는 네  칸 등 -을 맞추기 위해 벽에 빨간 
격자 눈금을 그리는 일이었다. 그 다음부터 벽화 작업은 기계적인 그림 그리기에  불과했다. 
그러나 아케나텐에 이르러서는 비율에 대한 옛날의 규칙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왕
비의 키와 왕의 키가 거의 비숫해을 뿐만 아니라 자식들도 동일한 크기로 그려졌다. 게다가 
일반인들 까지도 왕보다 조금 작을까 말까 할 정도였다.  피트리는 예술적인 신선함이 넘쳐
나느 아마르나 회화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발굴이 진행되면서 이  신비한 가족에 대한 비밀
이 하나 둘 드러날수록, 피트리는 점점 더 깊은 매력을 느꼈다. 이 파라오는 결국  아케나텐
으로 밝혀졌지만 종교적인 몽상가처럼 보였다. 수세기 동안 다양한 신들을 숭배해왔건만 이 
파라오는 한 명의 신 즉 태양 원반인 아텐을 위해 다른 모든  신을 추방해 버렸다. 그는 이
집트에 처음으로 일신교를 도입한 인물이었다. 피트리가 보기에도 아케나텐이 채택한  '진리
에 살리'라는 모토가 이 혁명의 핵심처럼 느껴졌다. 아케나텐은 신체적으로 기형이었던게 분
명하지만 자신의 모토에 따라 자기 고집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간에 이러한 생각은 주제
의 선택폭을 넓혔고 그 결과 친밀한 가족 풍경이 탄생했다.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지금 소개
하려는 그림이 가장 근사했다. 1891년  피트리는 예전에 궁궐이었던 데서  아름답게 채색된 
마룻바닥을 발굴했다. 밑에서 뛰노는 동물들을 뒤로 한채 늪지  이로 날아오르는 새들이 원
래의 선명한 색깔을 자랑하며 아직도 찬연하게 빛나고 있었다.  피트리는 그림들을 전부 베
껴 그렸다. 프트리는 나중에  있을 출판에 대비해 250평방피트나되는  마룻바닥의 그림들을 
전부 베껴 그렸다. 피트리는 방문객들을 위해 나무로 만든 통로를 설치했다. 그 정도로 마룻
HH마닥에 볼 거리가 풍성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방문객들은 그림들을  훼손하지 않고도 충
분히 둘러 볼 수 있었다. 목수들을 고용하면 재료를 질질 끌고 가다 바닥을 긁어 버릴까 봐 
피트리는 혼자서 그 모든일을 했다. 피트리가 발굴 작업을 끝내고  나서 몇 년동안은 이 굉
장한 그림을 보러 몰려 드는 광광객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다. 그러나 강에서 유적지까지 
제대로 된 길 없었던 탓에 일부 관광객들이 질러 간다며 어느 농부의 밭으로 들어갔다가 농
작물을 망쳐 놓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다. 참다 못한 이 농부는 어느  날 밤을 틈타 주변 차
도를 모조리 뒤엎어 버렸다. 피트리는  아케나텐의 유일교에서 자기 믿음의  시작을 보았을 
정도로 종교적인 사람이었다. 동일한 배경을 지닌 초기 이집트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성경에 나오는 출애굽기의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성지의 일부인  이집트로 갔다. 그러나 피
트리는 종교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진리도 중요하게 여겼다. 아케나텐은 자신의 추상적인 사
고를 사회에 적용시킨 최초의  인물이자, 기록된 역사에서 유일신에  대해 언급했던 최초의 
인물이다. 이에 대해 피트리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이집트의 어떤 왕도 나아가 전세계의 어
떤 왕도 자신의 생각을 그처럼 솔직하게 표현하지는 못했다.  따라서 모든 점에서 아케나텐
은 이집트에 살았던 가장 독창적인 사상가이자 전세계의 가장 위대한 아상주의자 가운데 한
명으로 우뚝 서 있다. 새로운 견해를 향해 그처럼 큰 발걸음을 내디딘 사람은 아마 없을 둣
하다....   프트리는 상형문자해독과 관련해 정규  교육을 받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발견한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정표가 이 도시에  얼마나 중요했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기에 이정표에 새겨진 글귀의 일부라도 판독하고자 했다. 그는 망원경 없
이는 볼 수 없는 아주 먼 곳의 석주까지 포함해 석주마다 번호를 붙여가며 이정표에 새겨져 
있는 글자들을 일일이 베끼기 시작했다.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그가 그린 그림들을 판독했
을때,아케타텐이 자신의 새 도시임을 선어하기 위해 세운 14개의 석주들은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4년에 걸쳐 새겨진 석주들은 똑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아케나텐은 아텐이 자
신을 이곳으로 이끌면서 그가 처음 모습을 드러낸 장소 다시 말해 세계가 생겨난 이 장소에 
도시를 지으라고 명령했다고 주장했다. 파라오는 신비한  힘에 이끌려 허허벌판에다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다. 그는 이 새도시의 이름을 아케타텐, 즉 아텐의 지평선이라고 지었다. 나아
가 그는 석주를 읽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파했다. 그 위대하신 분은 지평선에서 떠오
를 때처럼 거대한 일렉트럼 전차를 타고 나타나셨다. ......아케타텐에 관해 내게 충고해 준이
는 이제 내 아버지가 된 아텐이시다. 어떤 관리도 이에 대해 내게 충고해준 적이 없었다. 본
토에 있는 사람들도 .....이 버려진 땅에 아케타텐을 건설하는 문제에 대해 내게 충고하지 않
았다. 아마도 아케나텐은 지평선 너머의 골짜기에 의해 뚝 잘린 단애 지형을 바라보다 지평
선을 뜻하는 상형문자O처럼 생긴 풍경을 발견했던 모양이다. 아마 아케나텐은 이걸 두고 계
시라고 생각했으리라.몇년 전 아마르나에 머무르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창밖을 보니 태양이 나일강 너머의 계곡에서  떠오르고 있었다. 태양이 V자형 계곡에서 나
오는 광경은 영락없는 상형문자의 모습이었다. 나는 "아케나텐이  정말 이 광경을 보았겠구
나"라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석주는 아케나텐이  아버지 아텐을 위해 짓게될 건물들
에 대해 설명한후 다음과 같은 굳은 끝을 맺는다. 아케타텐의  동쪽 산에 있는 남쪽 이정표
에 관한한 .......나는 그 너머 남쪽으로는 영원히 나가지 않겠다.......아케타텐의 동쪽  산에 있
는 중앙 이정표에 관한 한 ....나는 그너머 동쪽으로는 영원히 나가지  않겠다. .....아케나텐은 
무슨일이 도시를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 시대 사람이라면  파라오의 이런 맹세가 이
집트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충분히 짐작하지 않았을까 싶다.  자신의 맹세대로 영원히 도시
에 머물렀다면 아케나텐은 파라오의 전통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없었으리라. 이집트의 적들
에 대항해 군대를 이끌 수도 없었을 뿐더러,도시 밖으로의 여행을 요구하는 한 국사를 돌볼 
수도 없었다. 이는 국가의 경영이 왕에게서 공무원들한테로 넘어갔음을 의미했다. 이러한 왕
권의 포기는 남들보다 야망이 강한 궁정 대신들 사이에 암투를 조성했을 게 분명하다. 게다
가 아케나텐은 심기야 불편하겠지만 여전히 입김이 센 테베와 멤피스의 사제들과도 일체 연
락하려 하지 않았다.왕은 절대적인 권력을 제공하는 왕좌에 오른 후 모든 책임을 벗어 던지
기로 결정했다. 아케나텐은 단지 종교만을 바꾼게 아니라 왕의 역할까지 바꾸었다,전통의 테
두리 안에 있던 이집트에서 이는 옛날 종교를 추방시킨 조치만큼이나 충격적인 혁명이었다. 
아케나텐은 백성들을 영적인 생활로 인도하는  게 왕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어느 
날 아케나텐은 추종자들을 예의 석주가 있던 자리에 모아 놓고는 이종의 '상상수훈'을  설파
했다. 생명을 잉태하시는,늘 활기에 넘쳐있는 위대하신 아텐....나의 아버지시며.......나의 벽이
시며,영원의 계시자이며.....영원의 증인이시며, 두 손으로  당신임을 선언하시는 어떤 장인도 
만들어내지 못한 매일같이 떳다. 지는 행동을 반복하시며.....그분은 당신의 광선으로 이 땅을 
채우시며 모든 이에게 생명을 주시도다..... 이 선언은 '어떤 장인도 만들어내지 못한 '이라는 
중요한 문구를 포함하고 있다. 이 문구가 암시하는 바는 미묘하지만 명쾌하다. 즉 진정한 신 
아텐은 누구도 감지할 수 없는 추상적인 존재라는 의미다. 이 선언은 모든 조각상의 종말을 
뜻했다. 바야흐로 신비주의자 상징주의가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장인들은 이제 더  이상 
신상을 조각할 필요가 없었다. 새로운 신은 태양 광선처럼 형태가 없었다. 눈에 보이는 신에
서 추상적인 개념으로의 이동은 아케나텐이 시도했던 변화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중심 축
이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많은 분야에서 진보적이었지만 추상적인 명상가들은 아니었다. 1
천 년뒤의 그리스인들과는 달리 이집트인들은 철학적인 저작을 단  한 편도 남기지 않았다. 
이집트 수학은 고대 세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나 추상적이지는 않았다.기하학을 발전
시키긴 했지만 매년 나일 강이 범람할 때마다 유실되는 농장의 경계선을 재조사할 목적에서 
그랬을 뿐이지 공간의 개념을 파고들진 않았다. 그들의 모든  사고는 구체적인 필요에 의해 
지배되었다. 그러나 아케나텐은 많은 점에서 이집트인들에게는 그야말로 생소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추종자들을 데리고 아마르나로 천도하면서  아메나텐은 그들이 상상했던 바
이상의 정신적인 여행을 이끌었다. 

  몽상가 아케나텐 
  새로운 종교의 신학 체게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아마르나의 몇몇무덤벽에 새겨진  찬송가
에서 찾을 수 있다. 그중 가장 공들여 만든 가사는  아케나텐이 총애하던 대신 아이의 무덤
서쪽에 이 성가는 구약 성서보다 몇세게 전에 쓰여졌지만 구약과 동이 한 분위기가 느껴진
다. 실제로 학자들은 시편 104편과의 유사점에 주목하고 있다.천상의 명토에서 찬란하게  더
오르는 당신은 오 생명의 청조자인 살아 있는 아텐이시도다.  동쪽의 명토에서 모습을 드러
내시어 당신의 아름다움으로 온 땅을 적시시도다. 아름답고 위대하시며 눈부신 당신은 모든 
땅위에 계시도다.당신의 광선이 대지를 껴안으심에  당신이 만드신 모든 생명이  당신 품에 
있도다. 위대하신 레여 당신은 그들의 한계룰 넘어 그 위에 군림하시니. 당신을 흠모하는 아
들들을 위해 그들을 발아래 두셨도다. 당신은 저 멀리 계시나. 당신의 광선은 땅위에 가득하
시시도다. 사람들은 당신을 보되, 당신의 걸음걸이는 보이지 않도다. .....눈에  보이지는 않으
나 당신은 그 얼마나 많은 일을 하시는가.  오 신중의 신이시여!당신의 소망대로 당신 혼자
서 이 세상을 만드셨으니 사람과 가축과  날짐승이 모습을 드러냈도다 다리로 걸어  다니는 
모든 짐승들 날개에 으지해 높이 나르는 모든 새들 코르와 쿠시의 땅 이집트의 땅이 생겨났
도다. 당신은 모든 이를 적재적소에 배치히시며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시며 모든이의 수명
을 계산해 일용할 양식을 주시도다. 민족마다. 특색을 부여하셨으니 쓴 말이 다르듯 성격 또
한 제각각이며 피부색도 다르도다. ...당신은 내  마음속에 계시니 당신의 길을 가르쳐  주신 
당신의 독생자 레의 유일한 적자 네페르-케프루-레의(아케나텐)말고는 당신을 아는 이 아무
도 없어라. 시는 아케나텐이 최상의 상태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아텐 성가'는 고대  세계
의 가장뛰어난 지적 성과물 가운데 하나다. 신학상의 기본  원칙을 이렇듯 우아하게 표명했
으나. 추종자들이 받았을 감동이 얼마나 컸을지에 대해선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으리라.  유
일신아텐은 세상을 창조했다. 나아가 그는 이집트인들뿐만 아니라 새상의 모든 민족을 창조
한 신이었다.. 물론 아텐이 모든 민족이 신이었다면 이집트인들은 더 이상 선택된 민족이 아
니었다. 모든 민족을 껴안음으로써, 아케나텐은 기존의 모든 군사 원정에 대한 정당화를  암
암리에 훼손시켰다. 이제 세상은 더 이상 이집트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다시말해  세
상은 태양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아텐 성가'는 아케나텐이  감수성이 강한 사람이자 영감이 
뛰어난 시인임을 드러내준다. 이에 비해 도시 경계선의 석주에 새겨져 있는 그의 연설은 그
가 몽상적인 신비주의자였음을 보여준다. 그의 재임기 동안에 진행됐던 인본주의 정책과 변
화들은 너무 급진적이어서 파라오 본인에  의해서만 추진될 수 있었다.우리는  신전과 무덤 
벽에서 가족에게 헌신적인 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그의 도시에서 우리는 창의력이 물씬 풍
겨나는 대담한 계획을 목격하게 된다. 그의 예술에서 우리는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과  '진리 
속에 살리'라는 그의 믿음을 접하게 된다. '미인이 오도다'라는 뜻의  네페르티티는 아텐에게 
공물을 바치는 아케나텐 옆에 빠짐없이 등장한다. 그림 속의 이들 부부는 공식적인 행새 때
마다 다정하게 손을 잡은 모습으로 대중 앞에 나타나거나.전차에  나란히 탄 모습으로 신전
으로 가고 있다. 왕은 네페르티티를 '내  사랑' 혹은 '왕을 기쁘게 하는  목소리'라고 불렀다. 
도시 경계지역의 석주에는 사랑하는 왕비의  미덕을 찬양하는 아케나텐의 긴전문이  새겨져 
있다. 아케나텐은 어린 딸들에게도 헌신적이었는지, 아이들을 무릎에 앉히거나 다정하게  키
스하는 모습이 종종 등장한다. 아마르나의 페허에서 나온 아케나텐은 가족 가치의 옹호자로
서 사려 깊은 다정다감한 누구나 좋아할 수 있는 남자다.  우리는 피트리가 왜 그에게 반했
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사랑과 평화를 설파했던 아케나텐의 이런 면만을 봤으면 좋겠
지만 그러나 어두운 구석도 있었다. 아케나텐은 대책없는 엘리트주의자이기도 했다.  아마르
나 예술의 두 번째 특징은 아텐이 이집트 국민이 아니라 아케나텐과 그의 가족들한테만 비
친다는 점이다. 아텐의 광선은 물론,생명과 권력의 상징을 직접 받고 있는 일반인은 눈을 씻
고 찾아보아도 없다. 아텐은 아케나텐의 개인적이 신이었다. 따라서 나머지 사람들은 아케나
텐에게서 반사되는 간접 광선으로 살아가야  했다. 아마르나에서 발견된 기록들은  이 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데 무능했을 뿐만 아예 관심이 없었음을 보여준다.그가 아버지인 아멘호테
프3세에게서 물려받은 이집트는 최절정기의  황금 시대를 구가하고 있었다.  외국 영토에서 
거두어들인 조세가 해마다 이집트로  흘러들어왔으나, 아케나텐이 왕위를  계승한 후부터는 
아무도 거기에 신경쓰지 않았다. 조세 수입은 이집트가 상대국에  조공을 강요할 만큼 강한 
군대를 가지고 있을 때만 가능했다. 정부의 일을 처리할  의사도 능력도 없었던 아케나텐은 
나라의 경영을 측근에게 넘겼다. 강력한 왕이 없는 이집트의 조세 수입과 유리한 무역 협정
은 어느덧 소멸되고 말았다. 그 결과  군대도 거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 아케나텐이  아텐에 
대해 명상하는 동안 국사는 내팽개쳐져 있었다. 그는 부유한 아버지(아멘호테프  3세)로부터 
가족의 사업을 물려받았으나 거기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는 철부지였다. 아케나텐의 무관심
한 통치 아래 근동에서 이집트의 영향력은 급속하게 쇠락해  갔다. 아케나텐의 흩어진 유적
들을 발굴하는 데 4반세기 이상을 바친 도널드 레드퍼드라는 이집트학자는 그 동안의 연구 
조사 결과 '아케나텐이 모델로 삼은 삶의 방식 중 가장 역겨운 특징 중의 하나는  나태'라고 
확신하고 있다. 이집트가 근동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점차 상실해 나감에  따라 아마르나의 
거주자들도 비록 멀리 떨어져 있긴 했지만 본토 사정이 그리 좋지 않다는 시실을 알았을 게 
틀림없다. 새로운 신 아텐은 옛날 이집트 신들에 비하면 나라와 백성을 재대로 부양하지 못
했다. 결국 아케나텐은 신도들을 묶어 두기 위해 후한 상을 내렸다. 무덤 벽화들을 보면  아
케나텐과 네페르티티, 그리고 공주들이 궁전의 '용안의 창'에 서서 저 아래 거리에 모여있는 
아마르나 시민들에게 황금 목걸이를 나누어 주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아케나텐 통치 말기
에 이르면 황금 =목걸이를  나누어 주는 행사가 사람들의  충성심을 유지하기 위한 뇌물에 
불과했을 수도 있다.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광신 상태에 빠진 아케나텐은  모든 기념물에서 
테베의 수호신인 아문의 이름을 지우기  위해 이집트 전역에 인부들을  급파했다. 심지어는 
자기 아버지 이름(아멘호테르)에서 아문을 뜻하는 글자까지도 지워 버렸다. 아케나텐은 재임
17년째 되는 해에 죽었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비전은 그의 죽음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그
이 시신은 아직까지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가 왜 죽었는지도 알 수 없다. 단지 우리는 평
화와 아름다움을 설파하면서 시작됐던 통치가 결국은 편협한 체제로 끝나고 말았다는  사실
만 알 뿐이다. 
                                                               

    5. 투탕카멘의 부모 
  아케나텐이 죽자, 이 소식을 본토에 알리기위해 전령들이 급파되었다. 전령들은 남쪽 테베
와 북쪽 멤피스로 달려갔다. 일반적으로 이런 공고가 나붙으면  슬픔과 근심으로 온 나라가 
비탄에 잠겼다. 파라오의 죽음은 오시리스에 대한 세트의 승리 다시 말해 신성한 질서의 붕
괴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케나텐의 죽음은 이전과는 경우가 달랐다. 신성한 질서는 
파라오 자신에 의해 이미 심하게 파괴된 뒤였다. 파라오의 죽음에  대한 사회 각 계층의 반
응은 저마다 달랐다 그 가운데서도 테베의 아문 사제들 사이에서는 드러내놓고 그러지야 않
았겠지만 굉장한 환호성이 터져 나왔을  게 틀림없다. 그들은 그 동안  올린 기도에 응답이 
와 자기들이 모시는 신의 이름을 지워  버린 파라오에게 아문의 복수가 가해졌다고  생각했
다. 멤피스의 사제들은 지나 수세기 동안 그래왔듯이 세상의 창조자인 프타흐 신을 다시 모
실 수 있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군대 역시 박수를 쳤다. 그들에게 이집트의 지배력이  기
울어 가는 모습을 그저 멀뚱멀뚱 지켜보는 일만큼 큰 고통은 없었다. 외국에서 조공을 받아
내기 위해 마지막으로 원정을 나갔던게 벌써 몇십 년전 일이었다. 선왕인 아멘호테프 3세도 
전투에서보다는 신전에서 영생을 찾으며 테베를 건설하는 데 35년을 바쳤다. 35년이라는 세
월으 참아낸다는 게 쉬운일은 아니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주변 속국둘은 이집트의  응징이 
무서워 겉으로나마 충성을 보였다. 군대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건 지난 15년이었다.  각국에 
나가 있던 대사들이 이집트의 군대가 귀머거리 파라오의 손에 넘어갔음을 한탄하는  편지를 
보낸 뒤로 가증스러운 히타이트와 미탄니의 입김 아래 이집트의 속국들은 하나 둘씩 떨어져 
나갔다. 아케나텐의 사망 소식에 대해  병사들만큼 기뻐한 이들은 없었다. 드디어  자신들의 
능력을 다시 펼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을 테니 무리도  아니었다. 반면 아마르나의 
시민들은 불확실함과 두려움에 우왕좌왕했다. 새로운 세계에서  그들은 이제 어디로 가야하
나?아마르나의 유일한 존재 이유였던 그들의 종교는 한  사람의 비전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이제 그 예언자가 죽었으니 누가 그를 대신한단 말인가? 그의 도시와 신민들은 과연 어떻게 
될까?얼마 안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이 나오겠지만 우선은 장례식을 준비해야 했다. 파라
오의 미라를 제작하는 한편 그에 수반되는 의식을 행하려면  원래는 70일이 필요했다. 그러
나 아케나텐은 자신의 종교를 통해 다른 것들뿐만 아니라 사후 세계의 개념까지도 바꿔 놓
았다. 다음 세상이 이 세상의 연속이라는 이전의 믿음은 세상에 최초로 추상적인 신을 제시
한 파라오에게는 너무 세속적이었다. 이케나텐은 다음 삶은 그림자  같은 존재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즉 죽은 자 혹은 그의  영혼이 무덤에 머물러 있다가 매일  아침 아텐이 지평선에 
모습을 드러낼 때면 잠에서 깨어난다는 게 그의 믿음의  핵심이었다. 그의 무덤에서 발견된 
유물 파편들로 미루어 보아 우리는 아케나텐이 우샵티 조상들과 함께 매장됐음을 알 수 있
다. 그러나 그이 경우 이 전통적인 명부와  하인들은 엘루시온(선량한 사람들이 죽은 후 사
는 곳 )에서의 작업을 위한 농기구를 들고 있는  대신 생명의 상징인 앙크를 들고 있다. 아
케나텐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어떤 새로운 의식과 기도가 행해졌는지에 대해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수석 사제였던 메리-레가 최소한 아텐 성가를 암송했지  않았을까 싶다. 아마르나로 
처음 천도했을 때부터 시작된 아케나텐의 무덤 공사는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가 
자신의 영원한 안식처로 선택했던 장소는 도시에서  6마일  반 떨어진 지점에 위치해 있었
다. 처음으로 그 황량한 곳에 발을 디뎠을 때 나는 왜 하필 여긴가? 라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무덤으로 가려면  사방이 바위투성이인 계곡을 통과하는  방법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일꾼들과 보급품을 수송하는 데 꽤 애를 먹었다. 그러나 일단 목적지에 
도착해 보니 아케나텐이 왜 그곳에 끌렸는지 이해가 갔다. 하얀 석회암 절벽이 골짜기 위로 
솟아 있는 모습이 마치 테베의  왕들의 계곡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케나텐의 무덤 
구조는 그이 아버지 아멘호테프 3세가 누워 있는 테베  계곡의 무덤들과 거의 동일하다. 커
서도 어릴적의 소외감에 시달렸을 아케나텐은 결국은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 싶어했던  모양
이다. 아케나텐의 무덤은 계곡 바닥을 25피트정도 파내려간 지점에서 시작된다. 무덤 입구의 
지하 통로를 따라 아래로 내려가면 오른쪽에 편평한 복도와 공사가 덜 끝난 여섯 개의 방이 
나온다 여기서 다시 전방에 있는 지하 통로를 따라 25피트쯤 내려가면 역시 오른쪽에 아까
와 비슷한 방들이 늘어서 있다.  바로 이방들 가운데 한 곳에서  우리는 투탕카멘의 흔적을 
찾게 된다. 그러고 나면 통로는 아케나텐의 석관을 안치한 방에서 끝난다. 발굴자들이  발견
한 파편들을 복원한 결과, 아케나텐은 석관 설계에서도 전통을 무시했다는 게 밝혀졌다.  그
이 선조들이 왕권의 상징인 긴 타원형 모양의 석관에 매장했던 데 반해 그는 직사각형의 화
강암 상자를 선택했다. 전통적으로 관 모서리에는 왕을 보호하기 위해 팔을 뻗친 여신의 형
상이 새겨졌다. 그러나 아케나텐의 석관에는 여신의 형상이 없었다. 대신 그가 사랑했던  넾
르티티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매자을 위해 파라오의 시신을 준비하는 동안(이 새로운 종교
에서는 그이 시신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과연 미라로 만들긴 한 건지 등 궁금한 점이 많지만 
이 부분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전혀 알 길이 없다. )사람들은 다급한 문제를 처리해야 
했다. 이집트는 새 지도자르 위해 70일 동안이나 기다릴 수가 없었다. 다시말해  그전에 새
로운 파라오가 즉위해야 했다.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 아마르나의 깨진 벽돌에  새겨진 
글귀들로 판단하건대 아케나텐의 집안은 상당히 손이  귀했다. 거기다 네페르티티까지 아케
나텐보다 7년 앞서 세상을 떠났다.  한편 성인기에 접어든 왕가의  일원 중에 스멘카레라는 
소년이 있었다. 비밀에 싸인 이  소년은 투탕카멘의 형이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아케나텐의 
재임 말기에 공동 통치자로 잠시 등장할뿐 왕가의 자식이라는 기록이 전혀 없다. 어쨌든 이 
스멘카레라는 인물은 아케나텐과 왕위를 나누어 가진 지 2년쯤 돼서 죽고 만다. 아케나텐은 
그 후에 죽었다. 아케나텐과 네페르티티 사이에서  태어난 여섯명의딸들 중 안케센파텐만이 
아케나텐의 죽음 이후 우리가 들을 수이있는 유일한 이름이다. 다른 딸들도 살았을 수 있으
나확실한 증거가 없다. 고대 세계의  경우 유아 사망률이 출생률의  50퍼센트에 육박했지만 
아동 사망률도 만만치 않았다. 최소한 딸 넷이 죽었으니  안케센파텐을 순수한 왕가의 혈통
을 이어받은 또 한명의 아이는 나중에 이름 끝자를 '멘'으로 바꾼 투탄카멘이라는 어린 소년
이었다. 나는 그가 아케나텐의 아들이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는 이집트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쉽게 말해 믿는 사람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다 이제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살펴볼 차례다. 아마르나의 궁전을 발굴하면서 피트리가 제일 먼저 
찾아나선 건 궁정생활에 대한 막대한 정보원인 쓰레기 더미였다. 항아리, 접시, 등,화장품 단
지와 같은 왕족의 물건에는 소유자의 이름이 새겨지는 경우가 많았다.이들 물픔은 사용하다  
깨지면 궁궐 전용 쓰레기장에 버려졌다. 피트리는 이러한 쓰레기가  제공하는 가치를 잘 알
고 있었기에 그 일에 따로 인부들을 배치했다. 작업결과, 투타카멘을 포함해 왕족의  이름이 
새겨진 수백 개의 물건들이 발견되었다. 당시만 해도 이집트학자들에게는 베일에 싸인 신비
의 인물이었지만 피트리가 보기에는 투탕카멘이 아마르나의 종교 혁명과 연관돼 있는게  분
명했다. 다행히도 투탕카멘의 시대에는 왕족의 이름을 새긴 청색 점토 반지를 끼는 게 왕궁
의 유행이었다. 하지만 워낙 약해서 쉬이 깨졌다. 아니다 다르까 피트리가 발견한  왕족들의 
쓰레기 더미에서 아케다텐과 왕비 네페르티티 여섯명의 공주 그리고 투탕카멘의 이름이  새
겨진 수십개의 반지들이 나왔다. 이로써 그가 왕족의 일원이었음이 분명해졌다. 그러나 그이 
부모는 누구였을까?그는 어째서 공주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걸까?두 질문은 서
로 연결돼 있을 수도 있다. 그럼 일단 투타카멘의  아버지에서부터 출발해 보자 아마르나의 
신전과 궁전이 아직도 건재하다면 거기에 그려진 벽화들이 투탕카멘의 부모에 대한  세세한 
사항들을 알려주었으리라.그러나 알다시피 신전이나 궁전은 이미 예전에 파괴되었다. 그렇더
라도 한때 거대한 신전을 구성했을 하나 하나마다 글귀나 그림이 새겨진 수천개의 벽돌들중 
일부가 어딘가에 남아 있을 법도 했다. 그 많은 벽돌들이 모두 다 먼지로 변했을 리는 없었
다. 그렇다면 과연 어디에 있을까?그러나 피트리는 이 문제에 대해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
지 않았던 듯하다. 그가 아마르나를 떠나고 나서 몇 년 후 강을  사이에 둔 채 아마르나 건
너편에서 일하던 한 독일인 탐험가가 헤르모폴리스라는 도시의; 신전을 짓는데 다시 사용하
기 위해 나일 강 맞은편 지역으로 운반된 벽돌들을 발견했다. 이 벽돌들은 투탕카멘의 부모
에 대한 최초의 실질적인 단서를 제공해주었다. 독일인 탐험가가 나중에 헤르모폴리스 벽돌
로 알려진 이 벽돌을 해석해보니  '왕이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왕의 아들 투탕카멘이라는 
내용이 나왔다. 이 밖에도 카르투슈로 둘러싸인 투탕카멘의 이름이 새겨진 물건들이 있었다. 
이는 투탕카멘이 왕이었음을 뜻했다 해르모  폴리스 벽돌은 투탕카멘이 왕의  아들이었음을 
확실히 입증해주었다. 그러나 어떤 왕의 아들이었단 말인가?헤르모폴리스 벽돌이 발견되 이
후로 이집트학자들은 투탕카멘의 부모가 누구였는지를 둘러싸고  저마다 의견이 다르다. 개
주에는 그가 아멘호테프 3세와 티이 왕비의 아들이었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 그 러나 간단
한 산수만 해봐도 이 이론은 신빙성이 없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중에 언급하게 
될 자료를 통해 우리는 그의 사망연도를 알 수 있다. 여기다. 투탕카멘의 미라를 자세히  조
사해 본 결과 그가 열아홉살쯤에 죽었음이 밝혀졌다. 따라서 그이 사망 시기를 거점으로 거
꾸로 계산해 보면 그가 아케나텐의 재임기 중반에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티이 왕비가 아
케나텐의 아버지인 아메호테프 3세와 결혼한 시기는 38년에 걸친 아멘호테프 3세의  재임기 
초반 무렵이었다. 당시 그녀의 나이가 열다섯 살이었다. 하더라도 투탕카멘이  태어났을때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50대에 접어들어  있게 된다 게다가 아멘호테프 3세와 티이는  아들들 
얘기를 하면서 투탕카멘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기록에  따르면 이들 부부가 딸 
넷과 아들 둘을 합해 총 여섯명의 자녀를 두었다고 나와  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의 이름까
지도 알 수 있다. 결국 투탕카멘이란 이름은 아멘호페프3세가  자식들과 이름을 지을 때 참
고했던 아문신이나 다른 전형적인 신이  아니라 아텐의 이름을 넣은  아마르나식 이름이다. 
투탕카멘의 아버지로서 가장 유력한  후보자는 아케나텐이다. 그러나  투탕카멘이 가족들과 
함께 등장한 적이 한번도 없다는게 문제다 아마르나 무덤의 벽화에는 아케나텐과  네페르티
티,여섯명의 딸들만 있을 뿐 아룸리  찾아보아도 아들은 없다. 투탕카멘이 정말  아케나텐의 
아들이었다면 어째서 가족들과 함께 등장하지 않는 걸까 여기에는 두가지 그럴듯한 답이 있
다. 첫째 18왕조의 왕자들은 공주들과는 달리 기념물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아마 파라오들은 미리부터 아들을 등장시키면 왕위를 이
양할 준비가 되기도 전에 일종의 임명장으로 작용할까봐 두려워했던 모양이다 이유가  뭐든
지 간에 적어도 18왕조의 경우에는 왕족들의 그림에서 왕자를 제외시켰다고 해서 왕자가 없
었음을 의미하는 건 절대 아니었다 훨씬 더 그럴 듯한 두 번째 이유는 영국 박물관과  뉴욕
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소장돼 있는 화장품 용기에서 전혀 새로운 인물인 키야라는 아마
르나의 왕비 이름이 발견되면서 드러났다. 1960년대의 일이었다. 원래 메트로 폴리탄 미술관
의 화장품 용기는 하워드 카수지 타산을  맞추기 위해 골동품을 내다팔던 시기에  그에게서 
사들인 물건이었다. 하얀색 돌에 푸른 염료로 새겨진 글자들은  키야의 지위를 다름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진리를 좇아 사는 살아 있는 아텐의 아름다운 자식이여 상 이집트와 하 이
집트 왕인 아케나텐의 부인이자 연인인 키야,영원히 살리라.영원히"영국 박물관에 있는 단지
에도 거의 동일한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이로써 아케나텐에게 두  번째 부인이 있다는 걸 알
게 된 이집트학자들은 그녀에 대한 다른 흔적들을 찾아나섰다.  그러고 나서 얼마지나지 않
아 아마르나의 파괴된 신전들에서 키야의 이름이 새겨진 벽돌들이 발견되었다. 키야는 '왕의 
위대한 부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궁정에서는 중요한 인물에 속하는  왕의 두 번째 부인이
었다. 아케나텐의 파괴된 신전터에서 나온 벽돌을 보면, 태양 원반에게 공물을 바치는  아케
나텐과 함께 있는 키야의 모습이 나온다. 이 밖에 그녀를  위해 특별히 지어진 신전에서 아
텐에게 예를 올리는 장면도 있다. 그러나 위대한 부인 네페르티티와는 한 번도 같이 등장하
지 않는다. 비록 남편은 나누어 가졌을지 몰라도 두 사람의 지위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었다. 
키야의 모습이 그려진 벽돌들은 한때 그녀의  신전이 서 있던 마루아텐이라고 알려진  도시 
지역에서 나왔다. '햇볕 가리개'로 불리던 이 신전은 돌로  만들 정자로 둘러싸인 널찍한 공
원이었다. 아마 공식적인 예배당이었다기보다는 명상을 위한 뜰쯤 됐던 모양이다 키야의 신
전은 중앙에 널따란 연못과 아텐이 제공해주는  자연 풍경-습지,물새,나무와 풀등 -으로 장
식한 포장도로를 갖춘 아름다운 장소였다. 새색깔의 도자기와 돌을  박아 넣은 정자에는 신
에게 공물을 바치는 키야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키야의 이름은 아케나텐의 보위
에 오른지 9년째 되는 해  그러니까 투탕카멘이 태어난무렵쯤부터 기념물에 등장하지  않는
다. 이는 그녀가 미래의 이집트 왕을 출산하다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제기한다.  그
녀가 죽고 나서 얼마 안 가 그녀의 이름은 에의 '햇볕 가리개'신전에서 지워진다. 대신 아마
르나 공주의 이름이 새겨진다. 키야가 정말 투타카멘의 어머니였다면  이 어린 왕자가 어째
서 왕족이 등장하는 공식적인 장면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지 설명이 된다 두 번째 부인
이 낳은 왕의 자식들은 '위대한 부인'의 자식들보다 지위가 낮았다. 그래서 투탕카멘은 자기
보다 신분이 높은 이복누이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러나  아마르나의 고립된 
아케나텐의 무덤에서 그가 투탕카멘의 아버지였다는 게 발기혀지기 전까지 이 모든  추측은 
추상적인 이론에 불과했다. 피라미드의 시대이후 왕들의 무덤은 당사자가 죽고 나서야 마무
리되었다. 아마 왕이 죽기 전에 무덤을 완성하면 불길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
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왕이 죽고나서 무덤 단장을 마무리할 시간이 충분치 못했다. 아케나
텐의 무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몇몇 방들에 한해서는 벽 장식이 끝나 있었다. 이곳의 벽
화들은 이전에 파라오의 무덤에서 발견된 그림과는 전혀 성격이  달랐다. 즉 다음 세상으로 
들어가는 파라오를 환영하는 신들의 그림이 하나도 없었다. 이는 아케나텐의 종교적인 신념 
때문이었다. 옛날의 전통은 파라오의 개인적인 생활 모습으로 대체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아케나텐과 네페르티티가 둘째딸 메케타텐의 죽음을 슬퍼하는 감동적인 장면이 그려진 벽화
는 이집트학자들 사이에서 두고두고 화제가 됐다. 그러나 거의 똑같은 그림이 두 군데나 있
다는게 아무래도 이상했다. 알파라는 방과 감마라는 방에 그려진  이들 그림에는 침대에 누
운 채 죽어 있는 여자와 비탄에 잠긴 아케나텐과  네페르티티,갓난아기를 안고 있는 유모가 
등장한다. 전문가들 대부분은 이 두 그림이 아이를 낳다  죽은 메케타텐을 기록했다는데 의
견이 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어째서 똑같은 사건을  두 번이나 그렸을까?1970년대에 들어와 
제프리 마틴이라는 런던 대학 교수가 아케나텐의 무덤벽에 남겨진 기록들을 재조사하던  중 
아케나텐이 투탕카멘의 아버지였다는 확실한 증거를 발견했다. 마틴은 두 그림이 동일한 장
면을 묘사하고 있긴 하나, 감마 방에 그려진 여인만이  아케나텐과 네페르티티의 딸 메케타
텐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러나 알파 방에 그려진 그림의  경우에는 어머니가 누군지 나
아가 갓난아기는 누군지 아직도 확인이  되지않고 있다. 이 알파 방의  그림에는 방금 죽은 
산모를 내려다 보고있는 아케나텐과 네피르티티의 뒤로  갓 태어난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
(산모?)가 그려져 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부채를  든 하인이 이 유모와 갓난아기 머리위
로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이아기가 왕손임을 뜻한다. 마틴은 알파방의  그
림은 투탕카멘의 탄생을 묘사한 것이며,산모는 아케나텐의 둘째 부인인 키야라는 그럴 듯한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이 모두를  종합해 볼 때 상황은  이렇다. 즉 누군가가 왕손을  낳았
다.(부채를 든 하인으로 미루어보아)왕의 두 번재 부인 키야는 자기소유의 조그만 예배당을 
가졌을 정도로 특별한 존경을 받았다. 이는 그녀가 첩의 지위를 뛰어넙게 해준 뭔가를 했음
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녀의 이런 지위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아이를 낳다. 죽었으므로)
그녀가 죽고나서 그녀의 예배당은 다른 누군가에게 다시 헌정되었다. 파라오에게 딸을 안겨
주었다면 이미 여섯명의 딸을 둔 아버지를 그다지 흥분시키지 못했으리라. 따라서 아들이었
을 확률이 높다. 게다가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단 한명도 없었다면 그
녀가 죽은 후 왕의 무덤에 그려졌을 가능성이 크다.  모든 가능성을 고려하건대 아케나텐의 
두 번째 부인 키야는 왕에게 아들을 낳아주었음이 확실하다.  우리는 이미 헤르모폴리스 벽
돌을 통해 투탕카멘이 어떤 왕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증거는 확실치 않지만 나
는 이게 정확하다고 믿고 있다. 즉 투탕카멘은 키야와 아켄텐의 아들이었다. 이는  투탕카멘
이 어째서 다른 공주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지를 설명해준다. 그는 신분이  높다. 
하더라도 어쨋든 첩에게서 태어난 자식이었다. 투탕카멘이 공식적인 가족 그림에 나와 있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존재를 간과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된다. 다른 누군가가 나타날때까
지 투탕카멘의 위치는 제 1상속자인 스멘카레 바로  다음이었다. 우리는 투탕카멘이 언젠가 
파라오가 될 왕족의 일원으로서 그에 걸맞는 특권과 관심을 누렸다고 확신할 수 있다. 이제 
어린 투탕카멘의 삶이 아마르나에서 어떤 형태를 띠었을지에 대해 재구성해 볼차례다. 이집
트 역사상 가장 급격한 종교 혁명의 와중에서 태어난 투탕카멘은 새로운 운동에 대한 낙관
주의와 흥분이 최고조에 달래 있을 무렵  부산스럽고 정력적인 가족의 품에서 생을  시작했
다. 그러나 그전의 왕손들과는 달리 이집트 본토와 전통적인  신들롱부터는 멀리 떨어져 있
었다. 투탕카멘은 아직은 어려서 아버지가 설파하는  생각을 이해하지는 못했겠지만 아버지
인 왕이 중요한 지도자라는 사실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었으리라. 투탕카멘은 여섯명의 이
복누이들 -그중 한명만이 그보다 나이가 어렸다.-과  함께 왕립 보육원에서 성장했다. 그보
다 열살 정도 많았을 이복형제 스멘카레는 그 무렵 이미 제 1상속자로서의 길을 걷고  있었
을 확률이 높다. 투탕카멘은 네 살경에 읽고 쓰는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상형 문자 해독법을 
배우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 단순한 그림 문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올빼미나 발 모양
이 새겨져 있다고 해서 새나 발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올빼미는 M의 소릿값을  발은 B 
의 소릿값을 낸다. 다른 상형 문자들도 영어의 알파벳과 비슷한 소릿값을 지닌다.투탕카멘은 
스물다섯 글자로 이루어진 본 알파벳을 배운다음 그림을 통해 말이나 생각을 전달한는 수백
개의 표의 문자에 도전했다 모르긴 해도 갈대 붓으로 정확하게 상형문자를 쓰는데 몇 시간
씩 소요됐으라. 게다가 붓 끝은 학생이 질근질근 씹어대는 바랍에 그립 붓처럼 밖으로 볼오
죠 있었으리라. 나무나 돌로 만든 직사각형 모양의 필기용 팔레트에는 잉크 병을 넣는 구멍 
두 개-하나는 빨간잉크, 다른하나는 검은 잉크-와 갈대 붓을 보관하는  길쭉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나중에 그의 무덤에서 발견된 투탕카멘의 팔레트는 상아로 조각돼 있었다. 투탕카멘
은 쓸 준비가 되면 먼저 조그만 물병에다 붓을 적신후  고체 잉크를 묻혔다. 그리고는 깨진 
도자기  조각에다 연습삼아 몇번 써본 다음 최종적으로 파피루스에  옮겨 썼다. '쓰기'에 해
당하는 상형 문자 는 투탕카멘이 글을 배우면서 준비했을 도구가 팔레트와 물을 담는 단지, 
갈대 붓이었음을 보뎌준다. 투탕카멘은 선조들의 지혜에 담긴 책자들을 베끼며 연습했다. 전
통적으로 정신 수양과 필적 향상에 좋은 격언들이 널리 애용되었다. 그중 몇 가지만 소개하
면 이렇다. "네 이름을 드높이되 입은  다물라.""듣는데 의지하기보다는 직접보라" 내추측이
지만 어느정도 나이가 들면서 투탕카멘은 아텐을 위한 기도문을  베끼지 않았을까 싶다. 그
렇다고 투탕카멘은 공부만 히진 않았다. 아마도 궁정 수비병과 유모들이 악어떼를 감시하는 
가운데 누이들과 대신의 자식들과 함께 가장 많이 애송되던 시에는 악어를 원망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 "내 사랑은 강 저쪽에 나는 강 이쪽에 있구나. 그러나  모래 언덕위
에는 악어가 있구나."투탕카멘은 소년의 짧은 팔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조그만 활로 오리를 
잡는 법도 배웠다.어쩌면 어린 투탕카멘은 누이와 함께 갈대 숲에 숨어 설레는 마음으로 목
표물을 가다렸을지도 모른다. 사냥은 그가 평생 동안 즐겼던 취미였다. 이 어린 왕자는 근심
이라곤 거의 없었다. 형이 왕이 될 테니 투탕카멘은 국정이나 종교의식에 관해 따로 훈련받
을 필요가 없었다. 여뎗 살쯤 되자 투탕카멘은 전차 모는 법을 배웠다. 물론 투탕카멘이  혼
자서 고삐를 조절할 만큼 강해질 때까지는 거칠게 날뛰는 두 마리의 말을 통제하기 위해 노
련한 기수가 동석했으리라. 그이 교사는 어린 왕자가 울퉁불퉁한  모래 지형을 아무 문제없
이 잘 달릴 수있도록 하기 위해 최소한 몇주 동안은 훈련시켰으리라. 그러나 투탕카멘의 전
차훈련은 언젠가 나가게 될 전투에 대비해서가 아니었다. 알다시피 그의 아버지는 군사적인 
문제에 대해선 전혀 관심이 없었다. 왕족의 행렬 때 왕의  도로를 따라 질주하는 씩씩한 왕
자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투탕카멘이 하지 못하는 일들도 있었다. 그의  아
버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도시를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투탕카멘에게
도 아마르나에서 북쪽으로 250일 마일  떨어진 삼각주쪽으로는 가지 못하게 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곳은 갈대 덤불이  아주 울창해서 10피트 전방도 안  보이는 그래서 오리와 
새를 사냥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장소였다. 새 사냥꾼들은 여기서 그물을 이용해 한 번에 스
무 마리씩 잡았다. 투탕카멘도 이 전설 같은 사냥에 대해 들어는 봤지만 직접 가지는못했다. 
투탕카멘은 아마르나의 신전들보다 훨씬  규모가 큰 신전들이  있는 대도시이자.할아버지가 
통치했고 아버지가 자란 도시 테베에 대해서도 듣지 못했다. 그는 이곳도 방문할 수 없었다.
테베는 아문 사제들이 사는 곳이자.최근에는 그의 아버지가 하인들을  보내 신전에 있는 아
문의 이름이란 이름은 하나도 남김없이 지워버린 곳이었다.. 심지어는 하트셉수트의  오벨리
스크 아주 높은 곳에 있는 이름 하나는 남겨 두었다.  여덟이나 아홉 살쯤 되면서부터 투탕
카멘은 자기 아버지의 궁정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어는 정도 눈치채지 않았나 싶다.. 그 당
시 외부부에는 이집트 국경 너머에 있는 먼 나라들로부터 돌처럼 단단한 소형 점토판에 쓴 
편지들이 도착하고 있었다. 폭이 2인치  반에서 3인치 반 정도 길이가  2인치 반에서 9인치 
정도 되는 이들 소형 점토판에는 그가 배우고 있는 상형 문자와는 판이하게 다른 쐐기 모양
의 글자들이 그득 적혀 있었다. 이 쐐기  모양의 글자들은 그 시대의 국제어인 아카드어(바
빌로니아와 아시리아 지방을 포함하는 동부 지방의 셈어)였다. 대부분은 비블로스(레바논)와 
우가리트(시리아),아시리아(이라크),하티(터키)와 같은 외국의 왕들이 이집트에  보낸 편지들
이었다. 개중에는 파라오의 선처를 호소하는  신하들이 보낸 편지들도 있었다. 대개의  경우 
편지들은 왕이 자신들의 요청에 답을 하지 않는데 대해 당혹감을 표시하고 있었다. 예를 들
어 레바논에 있던 아케나텐의 측근 리브-아디라는  비블로스 왕자가 연거푸 보내 편지들은 
절망스런 탄원 일색이었다. 그는 무려 64통이나 되는 편지를 썼다. 그가 나라의 일을 잘  돌
볼 수 있는 훌륭한 감각을 지닌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케나텐의 통치기 동안 
비블로스에서 리브-아디의 지위는 상당히 약화돼 있었다. 이에 이  충성스런 왕자는 아케나
텐에게 자신이 처한 곤경을 설명하면서 군대를 보내줄 것을  재차 요청했다. 저혼자서 왕의 
땅을 차지하려는 개만도 못한 아브디-아시르티가 누구옵니까?.......제게 말 1백필과 보병 2백
을 보내주십시오 그렇게만 된다면 저는 시가타에 남아 있을  수 있사옵니다. 그러나 군대를 
파견해주지않자, 그는 다시 이집트의 아마나파 장군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나의 아버지 아마나파께 아버지의 발 밑에 엎드려  비오니 바라옵건대....어찌하여 당신의 주
인이신 왕께 궁수들을 데리고 진격하게  해달라고 간언치 않으셨나이까.......당신의 주인이신 
왕에게 이  말을 꼭 전해주소서.....가능한 한 빨리  소자에게 지원군으르 보내달라고 말입니
다. 당신의 아들 리브-아디 올림    이토록 간절한 청원에도 답이 없자,  리브-아디는 다시 
아케나텐에 리브-아디가 모든 땅의 왕이신 나의 주인께 아뢰오니,위대한왕이시여 전투의 왕
이시여....나의 태양이자 나의 주인이신 폐하의 발 밑에 마흔아홉번을 엎드려 비옵니다. 아버
지의 아버지 대부터 왕의 충성스러운 신하였던 구블라 덕분에 모든 게 잘 이루어지고 있나
이다. 그러나 보시옵소서 아브디-아시르티가 저 혼자 사가타를 차지하더니 암니아 사람들에
게 "왕자를 죽이라. 그리하면 우리의 일원이 돼서 편안히 살 수 있으리라"라고 말하고 있나
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그의 말대로 행함에 가즈족들이  따로 없나이다. 보시옵소서, 아브
디-아시르티가 병사들에게 쓴  편지이옵나이다. "구블라를 칠  것이니 니미트의  집에 모이
라......."그리하여 사람들이 음모를 새웠으나 그들의 손아귀에서 저를 구해줄 이 없어 이렇듯 
두려움에 떨고 있나이다. 그물에 걸린 새  꼴이 바로 저올시다. 이 탄원에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리브-아디는거의 살해되기 직전이었다. 낯선자가  단검을 빼든 채 제앞에 나타났습
니다. 그러나 제가 먼저 그를  죽였나이다.....이제 저는 (대문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처지가 
됐나이다.이전에 궁전에 편지를 보냈으나. (폐하께서는  )아문런 답변을 보내지 않았더이다. 
그 동안 저는 아홉번이나 상처를 입었나이다. 제  목숨이 경각에 달렸음을 통촉하소서.... 그
후 불쌍한 리브-이디의 최후가 어찌 됐을지는 여러분 상상에  맡기겠다. 이상주의자이자 종
교적인 몽상가였던 투탕카멘의 아버지는 대국을 통치하는 데 수반되기 마련인 복잡한  일에
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투탕카멘은 자기가 원하는 일이면 뭐든지 할 수 있는 특권적인 환경 
속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스멘카레가 아버지와 함께 왕위에 있는 한 아무도 그에 대해 기대
하지 않았기에 그이 삶에는 근심과 걱정이 없었다. 물론 이집트의  모든 게 다 옳지만은 않
다는 생각에 가끔은 마음이 편치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스멘카레가 죽었다.  투
탕카멘의 인생애서 그날은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이제 그는 언젠가 욍이 될 몰이었다.  그로 
부터2년후에는 아버지 파라오마저 세상을 떠났다. 아케나텐의 죽음은 이집트에 혼란을 가져
왔다. 그보다 먼저 부인들과 유일한 성인이었던 아들이 죽었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나이든 
황손의 단절을 의미했다. 무엇을 해야할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누가 권력을 이을 건
지를 놓고 엄청난 혼란이 일어났을게 분명하다.안케이파센과  그녀의 이복 남동생인 투탕카
텐이 왕가의 유일한 생존자였으나, 둘다 아직 어렸다. 그러나 누가 아케나텐의 뒤를 이어 이
집트의 왕위에 오를지는거의 확실했다. 열살의 투탕카텐이 왕족 중 유일한 남자였다면 안케
센파텐은  유일한 여자 왕족이었다.
반밖에 안되는 왕가의 피를 순수한 왕가의 혈통을 이어받은 누이에게 보충받아야 했지만 어
쨌든 투탕카텐만이 파라오가 될 수 있었다. 투탕카텐은 안게센파텐과 결혼했다. 그리하여 열
살밖에 안된 마른 투탕카텐은 이집트의 파라오라는 큰 짐을  지게 되었다. 아케나텐의 죽음
으로 인해 권력 공백 상태가 야기되면서 아마르나의 궁정관리들 사이에는지위 확보를  위한 
맹렬한 암투가 일어났다. 열 살짜리 두 부부는 지위야 어떻든  간에 주도권을 장악할 수 없
었다. 내각 구성원들은 자기들의 괴상한 지도자가 사라진 이  시점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를 
놓고 각기 의견이 달랐다. 그중에는 이 나라를 이끌고 이  불확실한 시대를 헤쳐 나갈 인물
은 자기밖에 없다고 생각한 사람도 분명히 있었으리라. 잃을 게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지
위가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몹시 불안해 했으리라  특히 아텐의 수석 사제인 
메리레는 자신을 아마르나로 데려온 몽상가 아케나텐 다음으로 높은 지위와 막대한 부를 누
리고 있었다. 좀더 자세한 사항은 대규모 공동묘지에서 가장 규모가 큰 그이 무덤을 조사해 
보면 알 수 있다. 메리레는 가장 많이 알려진 '왕의 오른쪽 부채를  운반하는자"라는 직함외
에도 국가 경여에서 그가 차지했던 중요한 역할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아텐의 수석사제' '왕
의 고문' '세습왕자' '왕에게 알려진 자' 등의 다양한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무덤 벽에
는 아케나텐이 그를 아텐의 수석사제로 임명하면서 황금 칼라와 목걸이를 하사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메리레는 새로운 종교에서 아케나텐에 버금 가는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는  아
케나텐이 재임 17년째 되는 해에 죽을 때까지 살아 있었다. 이 점은 거의 확실하다.  그리하
여 소년 왕 옆에서 결정을 내리도록 돕는 한편 계속해서 새로운 종교를 지지하도록 압력을 
넣었으리라. 메리레다음으로는 판헤시라는 귀족을 꼽을  수 있다. 그는 '두  땅의 주인의 두 
번째 사제'를 비롯해 '아텐의 곡물 창고를 지키는 감시자' '아텐의 황소를 지키는 감시자' '왕
의 북쪽 고문' '왕의 친구'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판헤시는 종교적인 문제에서는 메리레
보다 지위가 낮았지만 아텐 및 성직자와  관련된 부를 운영, 통제하는 일을 담당했다.  그의 
무덤 벽에도 황금 목걸이를 주렁주렁 걸친 그의 모습과 왕이 하사한 황금 칼라와 팔지 기타 
장신구를 운반하는 하인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또다른 왕의 측근으로는 투탕카멘의 할아
버지 아메호테르 3세와 동시대인인 총리  대신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이미 두세대에 걸쳐 
왕족을 모신 인물이었다.그는 아케나텐을 따라온  대신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궁정관리들 중 가장 지위가 높았던 것 같다. 아이의  말과 일부 행동들은 그가 파라
오와 그의 가족의 보호자였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밖의 행동들을 보면-곧 살펴보게 되겠
지만 -그가 교활한 야심가였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이 단계에서  우리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은 아이가 새로운 파라오 주변의 몇 안되는 사람들 중 한명이었다는 점이
다. 아이는 정부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관리였다. 귀족들 무덤 중에서 가장 크고  정교
한 그이 무덤에는 '왕의 오른쪽 부채를 운반하는자'를  비롯해 '국왕의 말을 관리하는자 ''왕
의서기''신의 아버지'들과 같은 칭호가 적혀 있다. 그중에서도가장 중요한  '신의 아버지'라는 
칭호는 살아 있는 신 파라오의 가장 가까운 측근에게만 수여되는 직함으로 경우에 따라서는 
아버지를 대신하는 왕의 교사를 뜻할 수 도 있다.  '왕의 말들을 관라하는자 '는 아케나텐의 
군대를 등한시했던 점으로 미루어 명예직이었을 확률이 높지만 어쨌든 그가 군대와도  연관
돼 있었음을 의미한다. 아이의 부인 테이도 아마르나 궁정에서 높은지위-네페르티티의 유모
-를 차지하고 있었다. 정치적으로 이들  두 사람은 아마르나에서 가장 금슬이  좋은 부부였
다. 왕비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테이는 그 때문에 궁정 생활을 아주 소상하게 알고 있
었다.그녀의 남편 아이는 파라오의 귀였다. 그라하여  두 사람은 궁정의 눈과 귀 역할을  했
다. 이들이 궁정에서 누렸던 특권은 아이의 무덤 벽에서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벽에는  아
케나텐이 충성에 대한 대가로 아이와 테이에게 황금 칼라를 하사하는 장면과 테이를 여자로
서는 유일하게 '황금과 같이 빛나는 사람들'에  임명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황금과  같이 
빛나는 사람들'의 일원이 된다는 건 권력을 가질 수 있음을 뜻했다. 다음은 아이의 무덤  벽
에 새겨져 있는 글귀 중 일부다. 뛰어난 판단력으로 인해  나는 해해년년에 거쳐 날마다 해
주셨으니 백성을 다스리는 관리 중에서 내능력으로  인해 내이름은 궁정 안으로 퍼져  나갔
다. 아무리 보아도 사심없는 충직한 가신의 말처럼 들리지는 않는다. 즉 이들 문장에서는 뒤
어난 능력에 힘입어 얻은 권렬들 속속들이 즐기려는 사람의  오만한 태도가 느껴진다. 그의 
무덤 벽에는 이들 부부가 파라오로부터 훈장과 황금을 하사받는  장면이 두 번이나 나온다. 
그중 한 장면을 보면 높직한 의자위에 앉은 한 남자가 기념식장을 떠나는 어린 소년에게"저
들은 누굴 축하하고 있느냐?라고 묻는다. 이에 소년은  "그야 신의 아버지인 아이와 테이를 
축하하고 있지요 둘다 황금과 같이 빛나는 사람들이  됐거든요"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아이
의 무덤은 아케나텐이 오래 전에 작업이 중단됐던 것 같다.  이러한 사실은 이상할 뿐만 아
니라 불길하기까지 하다. 수많은 징후들이 그렇다는 걸 얘기하고 있다.
  무덤 공사가 중단된 시기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예를 들어 아케나텐 12
년처럼글자가 새겨진 날짜를 기준으로 삼거나 아텐의 이름은 슈 즉 아텐의 지평선에서 사는 
레호라크티였다. 그러나 아케나텐 9년 이후의  아텐의 이름은 아텐이 돼  되돌아 온 아버지 
레로 바뀐다. 이 밖에도 벽화에 등장하는 아켄나텐 딸들의머릿수를 세는 방법이 있다. 즉 넷
째 공주는 9년경에 다섯째 공주는 11년경에 하는 식으로  계산하면 된다. 아이의 무덤 벽에
는 아텐의 초기 이름과 세명의 공주만이 등장한다. 따라서 아이의 무덤은 17년에 걸친 아케
나텐의 통치 기간 중 8년경에 중단됐을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왜? 이에 대한 답은 아마르
나에서 높은 지위에 있던 아이가 아케나텐 통치 8년으로 접어들면서 아마르나에 뭔가 문제
가 있다고 생각했던 대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그는 캐멀롯의 운명을 예감했
는지도 모르겠다. 추측일 뿐이지만 아마도 아이는 거기다 뼈를  묻을 만큼 아마르나에 오래 
머물 의사가 없었던 듯하다. 그렇다면 아이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 어떤 계획을 세웠을까?
  투탕카멘이 적어도 성인기로 접어들 때까지는  누군가가 그를대신해 나라를 통히애야  했
다. 메리 레와 판헤시 아이는 어린 왕에게 가장 맣은 영향력을 미친 인물들이다. 세 사람 다 
왕에게 조언을 했겠지만 이들 사이에는 삼두 체제를 방해하는  장애 요소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최종 발언권은 누가 주고 있는가? 왕의 뒤에 있는 진짜 실력자는 누구인가.? 등등
  아텐의 수석 사제인 메리 레는 어린 왕이 아텐을 포기할 경우 잃을 게 가장 많은  사람이
었다.판헤시의 부와 지위역시 아텐의 재산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따라서 그 역시  투탕카
멘에게 아버지의 종교를 계속이어 나가라고 충고했을 게 분명하다. 두 사람 다 나라의 안위
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아마르나는 종교적인 수도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리라. 그러나 세 사람 중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있던 인문은 신의 아버지 아이였다. 
아이는 새로운 종교나 수도에 얽매여 있지 않았다.
  곧 이어 그는 이집트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모습을 드러냈다. 테베 로 돌아가 옛날 종교를 
다시 부활시킨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아마르나의 세 지도자 중  아이만이 새 체제로 옮겨갔
다. 메리 -레와 판헤시는 그후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
지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다. 아이가 수상에 해당하는 총리  대신이 됐다는 확실한 기록
은 없지만, 대다수의 이집ㅈ트 학자들은 그가 그 자리를 차지했으리라는 데 동의하고 있다.
  통치권을 쥔 아이는 군대와 성직자 계급과 같은 강력한  이해 집단과 마주쳤다. 여기저기
서 불평의 소리가 들려 왔다. 아이의 권력은 알다시피 두명의 어린 왕족으로 이루어져 있었
다. 그는 첫번째 조치로 이집트의 전통적인 종교 도시인 테베에서 새 파라오의 즉위식을 거
행함으로써 구체제의 회복을 선언하고자 했다. 그와 동시에 아이는 이문과의 연계를 보여주
기 위해서 투탕카텐과 안케센파텐의 이름을 투탕카멘과 안케센아멘으로 바꾸었다. (이들 이
름에 들어가 있는 '아멘'은 아문의 영어식 발음이다.). 이 두 행동으로  아이는  사제들의 지
지를 끌어냈다. 군대의 경우에는 아직은 사태의 추이를 지켜볼 뿐이었지만, 적어도 새  파라
오가 아마르나에서의 고립을  종식시켰다는 사실에 고무받았다.
  한편 투탕카멘과 안케센아멘에게는 대관식을 위해 테베로  향하는 길이 아마르나 밖으로 
나가느 최초의 여행이었다. 덕분에 아버지의 죽음과 아마르나의 혼란을  잠시 잊을 수 있었
다. 배가 나일강 상류를  향해 거슬러 올라가는  동안, 어린 왕 부부는 새로운 왕과 왕비를 
보기 위해 강둑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목격했다. 고립된 도시에서 한 신만을 섬기며 자람 
이 두 어린이는 테베에 도착해 분주한 도시 풍경과 수많은 신전들, 각양각색의 신들을 보고
느 어리둥절했으리라. 그들은 자기네가 알고 있는 유일한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고아였다.  게
다가 좀 있으면 자기네가 믿었던 종교를 비난해야 할  처지였다. 그리고 모든게 무서웠으리
라.
  아이와 그의 부인  테이는 이러한  광경이 낯설지는 않았겠지만, 테베를 떠난  지가 벌써 
십몇년째였다. 이제 테베에서는 성공을 약속하며 사람들을 유혹했던 옛날의 그 화려하고 거
만했던 자태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도시는 어둠침침하고  위험스러운 장소로 
병해 있었다. 여기서 이 아이들은 순박한 농부들의 경외감 서린 얼굴 대신, 의심이 많은  심
지어는 적대적이기까지 한 얼굴들과 마주쳤다. 투탕카멘과 그의 신부는  서로의 손을 꼭 잡
은 채 두렵고도 큰 세계에서 펼쳐질 자신들의 미래를 걱정하며 바싹 달라 붙어 있었으리라. 
당시의 그림과 기록들을 보면, 이  두사람 사이에 싹튼 순수한 사랑은  어쩌면 초기의 힘든 
경험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투탕카멘과 안케센아멘은 한때 할아버지 아멘호테프 3세가 살았던 거대한 궁전으로  안내
되었다. 거의 20년 동안 왕이 거처하지 않다 보니, 인부와  화가들은 새로운 왕의 도착에 맞
추기 위해 눈코 뜰 새 없이 일했다. 회반죽을 입힌 진흙  벽돌로  지어진 이 궁전은 정원과 
호스를 비롯해 파라오의 왕비와 첩, 자식들을 위한 숙고가 사방에 산재돼 있는 복합 건물이
었다. 투탕카멘의 아버지도 여기서 자랐다. 그 당시 아이는 아마 궁전의 방문객이었으리라.
  보나마나 늙은 가신들은 투탕카멘과 안케센아멘에게 할머니 티이 왕비와 거짓말 같은  그
녀의 인공호수, 위대한 건설자였던 할아버지 아멘호테프 3세에 대해 얘기했으리라. 뿐만  아
니라 두 어린이는 한 번도 보지 못한 타조와 기린을 비롯해 궁궐 앞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공물에 대해서도 얘기했으리라.
  더 넓은 세상의 중심에 위치한 이 바쁜 궁전에  비하면 아마르나는 고립된 상아탑이었다. 
투탕카멘과 안케센아멘은 살아남기 위해 최대한 빨리 적응해야 했다.
  마침내 대관식 날이 왔다.. 투탕카멘은  아버지가 추방한 신을 섬기는 수천명의  사제들이 
늘어선 뜰을 보면서 여지껏 자신이 본 건물 중에서가장 큰 카르나크 신전의 출입구 정면에 
서 있었다. 밖에 떼지어 몰려 있는 테베 시민들에게는  이집트에 옛 영광을 가져올 새 왕을 
처음으로 대하는 순간이었다. 
  투탕카멘은 네 개의 황금항아리에서 따른 성수로 몸을 깨끗이  했다. 몸을 정갈히 함으로
써 이제 그는 신들의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행렬은 투탕카멘의 선조들인 투트모시스 3세
가 지은 성소 쪽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그 동안 행렬은  의식과 기도를 위해 여러 장소에서 
멈춰섰다. 잠시 후 그의 머리에 왕관-처음에는 상  이집트를 상징하는    백관이, 다음에는 
하 이집트를 상징하는 황관이 -이 씌워졌다. 이리하여 그는 '두 땅의 주인' 즉, '상 이집트와 
하 이집트의 왕'이 되었다. 그  다음에는 푸른 '케프레시' 관(가끔은 '전쟁의  관'이라고도 한
다.)이 씌워졌다. 이는 그가 군대의 총지휘관이 됐음을 의미했다.
  이집트의 왕관들은 그것을 쓰는 사람에게 천하 무적을 보장하는 신비한 특징으로  말미암
아 숭배의 대상이었다. 처음에는 각기 따로 존재했을 이 왕관들은 대관식 날 파라오에서 파
라오한테로 전달됐다. 그러나 지금까지 유적지에서  왕관이 발견된 예는 없다. 왕관은  왕의 
물건들 중 무덤에 가져가선 안 되는 유일한 품목이었다. 
  행렬이 신전들 사이에 있는 통로를 따라 움직이는 동안,  투탕카멘은 황금으로 뒤덮인 어
린이 크기의 왕관을 향해 가가갔다. 거기서 투탕카멘은왕권의 상징인 지팡이와 도리깨를 받
았다. 이는 파라오가 백성들의 목자이자 주인임을 뜻했다. 나중에 투탕카멘의 무덤에서는 두 
벌의 지팡이와 도리깨가 발견되었다. 그중 그가 대관식에 사용했던 어린이용 세트에는 이제 
얼마 안 있어 그가 남겨 놓고 오게 될 삶의 마지막 흔적인 아텐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투탕카멘이 비로소 왕좌에 앉자 아문의 수석 사제가 그에게붙여진 다섯 개의 이름을 암송
하기 시작했다.

  1.타고난 힘센 황소 호루스
  호루스의 이름은 매의 신 호루스와 왕을 연결시키기 위함이었다.
  2.법과 미덕으로 모든 신들을 달래는 자 
  두 개의 여자 이름은 파라오와 코브라 여신 및 콘도로 여신을 연결시키기 위함이었다.
  3.신성한 질서를 가져오는 한편 신들을 기쁘게 하는 자 
  귀중한 호루스의 이름은 호루스와 다시 연결시키기 위함이었다.
  4.스스로 주인임을 천명한 레 레의 주인 
  왕권을 상징하는 타원형의 카르투슈로 쓰인 왕의 첫째 이름 뒤에 나오는 벌과 사초를 뜻   
   하는 상형 문자는 상이집트와 하 이집트를 상징했다.
  5.아텐의 살아 있는 상 투탕카텐
   카르투슈로 쓰여진 이름 중 두  번째 이름 뒤에 나오는  레의 아들을 뜻하는 상형  문자    
는 왕의 가계가 태양신 레에게서 출발했음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다섯 개의 이름이 모두 부여된  후 투탕카멘은 공식적으로 이집트의  왕이 되었다.행렬은 
왔던 길을 되짚어 탑문으로 향했다. 이제 기념식을 끝났다.볼거리가 풍부한 자기만의 기념식
을 위해 궁전으로 돌아가던 새 왕은 나누어준 빵과 맥주로 잔치를 벌이며 환호하는 군중들
과 마주쳤다. 허리까지 머리를 내려뜨린 무희들과 악기 연주자  박수 부대 가수들이 군중들
과 께 새로운 왕의 취임을 축하하고 있었다.
  투탕카멘과 안테센아멘이 대관식과 환상적인 신에 관해 얘기하면서 얼마나  흥분했을지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다.두 사람은 인간의 몸에 암사자와 매 양  등 동물의 머리를 한 이
상한 신들의 모습이 그려진 신전 벽을 보고는 무척 놀랐으리라. 벽에 그려진 파라오들은 어
째서 신들에게 공물과 맥주는 바치는 걸까? 아버지 같았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텐데. 테
베가 넓을수록 이 두사람은 아마르나의  친숙하고 조용한 환경을 동경했다.  테베는 크기도 
크기려니와 너무 복잡했다.
  얼마 후 어린 왕과 왕비는 정말 아마르나로 돌아갔지만  1년 남짓 머물렀을 뿐이다. 아버
지의 죽음으로 아마르나는 영혼을 잃어버렸다. 서로 성격이 다른 두 종교 세력은 끝내 화해
를 거부했다.이집트가 통일되려면 둘 중 하나는  사라져야 했다. 그 동안 슬픔을 겪을  만큼 
겪은 두 어린이는 이제 아마르나가  세상의 다가 아님을 깨달았다. 두  부부는 테베의 신인 
아문에게 귀의한다는 의사 표시로 이름을 투탕카멘과 안케센아멘으로 바꾸었다.
  그로부터 2년이 채 못 돼 투탕카멘의 궁정과 정부는  테베로 다시 천도했다. 옛날 종교와 
과거의 전통들이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존재 이유가 없어진  아케나텐의 성스런 도시 아마
르나는 철저히 버려졌다. 그의 신 역시 세상에서 완전히 잊혀졌다. 그러나 남아 있는 사람들
도 꽤 있었다. 아텐의 사제들은 종교를 바꾸지 않는한 아마르나에 남아 있어야 했다. 아케나
텐의 궁정 대신들은 아케나텐의 혐오스런 정책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어떤 도시에서도  환영
받지 못했다. 실제로 테베의 기록 어디에도 이들의 이름이 나와 있지 않다.
  아케나텐의 고위 관리들 중 오직 아이만이 이단을 초춸해 자신의 경력을 되살리는 데 성
공했던 것 같다. 그는 투탕카멘의 정책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도록 인도했다. 그를  의심스런 
눈길로 바라보는 사람도 분명 있었을 테지만 사제들은 아문과 신전의 부활을 열렬히 환영했
다. 옛날 전통이 복원되면서 아이를 둘러싼 회의주의자들의 비난은 점차 약해져 갔다.  투탕
카멘은 아이의 지도 아래 모든 걸 잘하는 것처럼 보였다. 여간해서는 맞추기 어려운 미묘한 
균형이었지만 아이는 막후 조종의 대가였다. 그는 어린 주인의  신뢰와 사제들의 찬양을 얻
어냈다. 이 정도면 자신의 뛰어난 업무 능력에 자부심을 느꼈음직도 하다.
  아마르나의 꿈은 썩은 악취로 변했다. 일반 시민들은 아마르나를 버려둔 채 이주했다.  하
룻밤 새에 도시는 아무도 원하지 않는 종교의 사제들과 궁정을 잃어버린 조신들만 어슬렁거
리는 유령 도시로 탈바꿈했다. 아마르나  사람들이 자신들이 버린 도시에서  지낸 시간들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그들이 두고 온 흔적에 나타나 있다.
  1912년 루트비히 보르하르트가 이끄는 독일 발굴단은 투트모시스라는 거장 조각가의 집과 
작업실에서 쓰레기를 걷어내다 굉장한 발견을 했다. 발굴자들은 이  조각가의 집에 있는 창
고에 들어갔다가 도시를 떠나느라 투트모시스가 미처 완성하지 못한 그러나 더없이  훌륭한 
흉상과 두상들을 발견했다.이 안에는 그 유명한 네페르티티의 흉상도 있었다. 그와 같은  예
술 작품이 버려져 있었다는 건 사람들이 자기들 손으로 창조했던 그 시대를 기억하고 시어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의미할 뿐이었다.
  한편 아케나텐에게는 이단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그가 죽고 나서 15년 후 한 무리의 인부
들이 아마르나로 보내졌다. 신전들을 분해해 거기서 나온 벽돌들을  다른 곳의 건물을 짓는 
데 다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아마르나는 철저히 파괴되었다. 한때 황무지 위에 우뚝  솟아 
있던 미의 오아시스는 사막의 잊혀진 도시가 되고 말았다. 아텐과 이집트의 짧은 조우가 끝
나면서 일신교는 이후 1500년 동안 다시는 나일 계곡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 그후 1천 
년 동안 물론 그 세월 동안 세계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상실하게 되지만 이집트는 두 번  다
시는 파라오의 종교나 역할이 바뀌는 걸 용납하려 들지 않았다.
  아마르나의 이단은 전통의 테두리 안에 있던 이집트 역사에서 볼 때 아주 독특한 이탈이
었다. 오늘날 물리학자들은 미증유의 이런 사건을 가리켜 특이 현상이라고 부르고 있다.  많
은 경우 사회 혁명의 씨앗은 빈곤과 불만 속에서 싹튼다.그러나 이 운동은 번영의 와중에서 
튀어 나왔다. 정치적인 토대를 뒤흔드는 혁명에는 대부분 폭력이 뒤따른다. 그러나 아케나켄
의혁명은 평화적이었다. 비록 아주 짧은 기간했지만 그의 꿈이  실현됐던 이유는 비전을 가
진 당사자가 파라오의절대 권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너무 빨리  죽었다. 
그 결과 세계 역사에서 전환점이 될 수 있었을 그의 혁명도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우리는 일신교에 너무 익숙해 있다.그래서 이러한 생각이 나일 계곡의 거주자들에
게 얼마나 혁명적인 발상이었는지를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이집트인들은 2천 년 동안 수많
은 신들을 숭배했다. 그 동안 신들은 서열이 완전히 버려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뿐만 아니
라 이집트의 신들과 비슷하다고 판단되면  외국의 신들도 환영받았다. 이미  수많은 신들을 
섬기고 있다면 거기서 몇 명 더 추가한가다 해서 문제가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끝까지 강력한 한  신을 배제했던 이유는 뭘까? 그야 많은 신들과 사이
좋게 지내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한 신만을 고집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신교는 부자
연스럽다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사고 방식을 사람들에게  강요
했다. 아케나텐도 일신교의 가장 큰 위험 즉 분열을 조장하는 경향은 미처 감지하지 못했다.
오조리 한 신만이 있다면 그 신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은 옳지 못한 것이다.
  일신교는 사람과 국가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나눔으로써 우리와 그들 사이에 전선
을 형성한다. 다신교 국가들 사이에서 누구네 신이 진정한 신인가를 놓고 전쟁이 벌어진 적
은 없었다. 다신교 국가들 사이에서 발생한 전쟁의 숫자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때문에 
반발한 전쟁의 숫자를 비교해 보라. 아케나텐은 그 점을 깨닫지 못했다.
  현대적인 비교가 아마르나 혁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현재 독일에서 일어나고 있
는 변화를 생각해 보자. 독일은 오랫동안 이념적으로 분리돼 있었다. 그중 한쪽은  현실과는 
거리가 먼 비전 다시 말해 인재가 없이는 지지할 수  없는 비전을 가진 지도자가 다스렸다. 
결국 그는 패자가 되고 말았다. 이 운동이 실패한 후  그를 따르던 추종자들과 그가 창조했
던 대상들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지켜볼 경우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오늘날 
동독인들 가운데 이전 체제를 지지했노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들은 자기네 손을 
건립한 동상과 건물들을 쓰러뜨리기 위해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고대 이집트에서도 아케나텐이 주도했던 운동의 일원이었음을 부인하는 광범위한  움직임
이 있었다. 사람들은 새 체제와 융화하기 위해 이름까지도 바꿨다.가령 아텐 엠 헵 즉  축제
중인 아텐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마르나의 시민은 그 이름ㅇ르 그대로 둔 채 테베로 돌아가
지는 않았으리라 아마르나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답을 찾을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그건 공산주의 독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공산주의자들 대부분
이 당원이었음을 나타내는 흔적을 모조리 지워 버렸듯이 아마르나의 주민들도 혁명의  사눌
을 보존하지 않았다. 네페르티티의 흉상은 아무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뒤에 남겨졌다.
  확신을 가지고 이 모두를 추진했던 사람은 아마르니에 있는 자기 무덤에 평화롭게 잠들지 
못했다. 도시가 버려지고 나서 얼마 후 아마르나의 무덤들은 그 안에 부장된 보물들을 노린 
강도들에게 모조리 약탈당했다. 아마르나에서 죽은 네페르티티와  키야를 비롯해 공주들 다
섯 명의 시신은 아직까지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아케나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마 갈갈
이 찢겨졌으리라.

    6. 다시 테베로 돌아가다
  투탕카멘은 선왕이 야기한 나태와 불화로 불안하게  흔들리는 왕위에 올랐다. 이웃나라들
은 이집트를 둘러싼 내부 문제를 알게 되면서부터 사뭇 도전적으로 변했다. 예들 들어 누비
아는 뻔뻔스럽게도 이집트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흩어져 있던 부족들을 끌어모아  연방
을 만들었다. 그리고 황금 선적을 중단하는 한편 나중에는  남부의 군사 기지까지 공격하며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다. 이집트의 서쪽에  위치한 아시아라는 나라들은 무역  협정 위반에 
대해 이런저런 핑계를 둘러대다가 급기야는  이집트에 필요한 물자 공급을  중다해 버렸다. 
이집트 경제의 부흥은 대체가 불가능한 자원을 공급해온 아시아와 누비아에 대한 지배력을
다시 확보하는 데 달려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행정부의 최우선 과제는 뭐니뭐니 해도 자금 
확보였다. 그래야지 태만과 광신으로 인해  엄청난 고통을 겪은 신전들을  다시 복구할 tyn 
있었다. 투탕카멘 통치기의모토는 복구가 될 터였다.
  우선 수년 동안 뚜렷한 목적도 없이  아마르나에서 아케나텐의 개인 근위병 노릇을  하며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군대에 뭔가  조치를 취해야 했다. 그 동안  군대는 영토와 조공을 
확보하기 위한 원정은 고사하고 수년 동안 전쟁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더 늦기 전에 군인
들을 재훈련하는 한편 증원해야 했다.
  보병은 창과 활 가죽 방패와 같은 최상의 무기로  무장시켜야했다. 이집트 군대의 정예인 
전차 기수들에게는 말과 전차를 비롯해 마구와 갑옷을 지급해야  했다. 이러한 부흥 정책은 
그에 따른 부수 효과로 장인들의 일자리를 파생시키게 될 터였다. 그렇게 되면 다시 번영을 
구가하게 될 터였다. 
  재건설을 위해서는 레바논의 목재가 필요했지만 예전의 활발했던 무역은 오래 전에  끝난 
상태였다. 상등품인 삼나무 목재들은 언변이 좋은 다른 이웃나라들로 가고 있었다. 이  수지 
맞는 무역을 재개하기 위해서는 발빠른 중재자들을 물색해야 했다.  전열을 재정비 한 이집
트 군대에 대한 두려움이 이들 중재자가 유리한 조건을 끌어내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되리라. 
군대는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었지만 재무장을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멤피스의 행정 기관들도 다시 문을  열어 활동을 재개했다. 아케나텐이  아마르나에 있는 
자기만의 세상에 틀어 박혀있는 동안 이집트의 거대한 관료주의는 부패할 대로 부패해져 있
었다. 세금은 여전히 걷히고 있었지만 관리들이 농부들로부터 곡물을  타루치 하는 등 부패
가관료 사회전체에 만연해 있었다. 이는 당시의 기록들에 나와 있다.관료주의를 원활하게 움
직이려면 장관과 관리들 전체를 새로 등용해야 할 판이었다.
  이집트 역사를 통틀어 변하지 않는 두 가지는 강과 땅이었다. 이집트의 부를 구성하는 이 
두 기본 요소는 전에도 그랬듯이 작물이자라 수출이 되면 새로운 세금 징수원이 얼굴을 내
밀 터였다. 이번에는 정직한 인물이었으면 좋으련만 철저한 감독  아래 지방 총독들은 다시 
자신들의 행동에 책임을 지게 될 거고 그렇게  되면 조세 체계도 다시 공정하게 바뀔 터였
다.
  무역 상품과 공물이 다시 이집트로 흘러들면 아케나텐이 폐쇄했던 신전과 성소들이  다시 
문을 열게 될 터였다. 신들의 지성소와 황금 조각상들이 복원되는  한편 다시 수천 개의 의
식용 조각상들을 만들게 되리라. 그리고 테베는 위대한 신 아문의 종교 수도로 다시 위용을 
갖출 것이고 그러면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올 터였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하려면 엄청난 
노력과 부가 필요했다.
  효과적인 세수체계가 승패의 관건이긴 했지만 재건설 기금과 강한 군대 간의 복잡한 상관 
관계는 열한 살짜리 파라오가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유능한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집트의 자연이 이집트에 천연 자원을 공급하는 동안 새 내각이 다음 십 
년 동안 나라의 방향을 결정할 터였다. 어린 왕과 왕비는 어디서나 눈에 띄었다. 그들은  신
전을 봉납하는 한편 축제를 주재했다. 뿐만 아니라 외국의 고위 인사들을 접대하는 한편 연
회에도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 둘은 아직도 배움이 필요한 아이들이었다.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으면서 투탕카멘은 이집트의 왕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이해하게 되
었다. 그가 이집트 왕으로서 해야 하는 임무를 싫어해서 해마다 늘어는 책임을 마지못해 수
행했을 거라고 단정할 만한 근거는 없다 오히려  상 하 이집트의 수상와 보물 관리자 궁정 
관리자 군대 관리자 등을 불러 거대한 영토의 각  지역에 대해 이것저것 물러 보지 않았을
까 싶다.
  이집트는 거대한 나라였다. 즉 젊은 파라오가  모든 걸 감시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  보니 
관리들의 권력이 막대해졌다. 따라서 이들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덕목은 신용과 공정성
이었다. 그래서 이집트에는 자비로운 왕 공평한 재상이라는 속담까지 있었다.
  장래 펴나갈 정책에 대한 활발한 홍보 활동은 백성들에게 새 파라오가 그네들이 겪은 고
통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카르나크 신전 정면에 그러한 내용을 새긴 높이 8
피트의 석주가 세워졌다. 이를 역사상 최초의 정견 발표라고 가정한다면 투탕카멘의 참모는
정말이지 영감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석주  맨 위에는 아문에게 공물을  바치는 투탕카멘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거기에 쓰인 상형 문자를 읽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메시지는 분명히 
전달될 수 있었다. 즉 여기 아문에게 향을 바치는 파라오가 있음을 뜻했다.
  이전 체제에 비해 얼마나 많은 게 변했는가 뿐만 아니라 투탕카멘은 석주 아래쪽에 새겨
진 글에서 이집트의 신전들이 처한 비참한 상태를 통탄하는 한편 앞으로 옛날의 영광을 되
찾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왕이 되어 찾아와 보니 엘레판티네에서 시작해 델타의 습지대까지 이어졌던 신과  여신들
의 신전이 버려져 있도다.
  폐허가 된 성소 부지에는 라타 풀만이 가득하도다. 
  신들의 지성소는 사람들의 발길에 채어 애초부터 없었던 듯 상태가 말이 아니도다.
  나라가 혼란에 빠짐에 신들은 이 땅을 저버렸도다.
  선왕께서는 최상의 기회를 포착하기 위해 아버지 아문께 이익이 되는 일을 찾기 위해 진
정하 stls의 당당한 모습을 만들기 위해 온 마음을 다 바쳐 고민하셨도다.
  은과 금 청금석 터키 옥을 비롯한 희귀한 보석 아마포 새하얀 제의천 모든 공물은 부  배 
세 배 네 배가 되리니
  이땅의 신과 여신들은 진정으로 흐족해 하리라.
  이에 성소의 관리자들은 기뻐 춤추며 온 땅에 환호의 노랫소리가 메아리치리니 
  방방곡곡에 축하의 물결이 넘쳐나리라.
  
  여기서 투탕카멘은 자기 아버지의 지배 아래 나라가 혼란에 빠지는 한편 북쪽에서 남쪽에 
걸쳐 신전들이 버려져 있었음을 분명하게  인정하고 있다. 나아가 석주는  이집트의 침체기 
와중에서 발생한 종교적인 문제와 파업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다.  알다시피 이집트 
군대는 수년 동안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했다. 석주에 새겨진  글은 만약 이 시기에 이집트
의군대가 시리아로 파견됐다면 어떤 성공도  거두지 못했으리라고 단정하고 있다.  이는 한 
정치가의 단순한 정견 발표가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 계획이다.  다시 말해 군대를 정비하는 
한편 이집트의 부를 복원하고 신전을 다시 열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다.
여기에는 아마르나 시대의 고립주의가 끝났음을  천명하는 미묘하지만 확고한 선언이  담겨 
있다. 석주는 비문의 내용을 새겼을 멤피스 궁전의 왕좌에 앉아 있는 투탕카멘에 대해 언급
하고 있자만. 정작 석주가 세워진 곳은 테베였다. 이는 이집트가 이미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
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이제 이집트는 온 나라의 파라오, 즉 상. 하 이집트의 주인인 진정한 
왕을 가지고 있었다. 
 이 석주가 새겼졌을 당시 투탕카멘은 열한 살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따라서 누군가가 어
린 왕의 입을 빌어 얘기 했겠지만, 그 내용은 이집트  국민들과 아문 사제들이 듣고 싶어하
던 바였다. 사람들은 신전이 복구되고 다시 공물이 바쳐질 날이 머지않았다고 생각했다.  그
러나 약속과 행동은 행동은 달랐다. 따라서 투탕카멘이 발하는  포고들을 의심의 눈길로 발
라보는 사람들이 분명 있었어리라. 행동은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행정 체계를 필요로  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이 모든 계획을 실행할 것인가?
 담당 관리들은 아마르나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새론운  인물들이었다. 이들을 등용하는 데
에는 아이가 한몫을 했으리라. 실제로 그는 사람 보는 눈이 뛰어났다. 복구 계획을 진두지휘
한 인물은 투탕카멘의 새 재무대신 마야였다. 투탕카멘 통치기  동안의 정부 활동에 대해서
는 마야가 자기 무덤 벽에 새긴 자거전에 상세히 나와있다.  그가 맡은 임무는 세금을 거둬
들여 그 내역을 자세히 기록한 다음 왕의 보물창고에 보관했다가 필요한 곳에 배문하는 일
이었다.  이 밖에 신전에  봉납할 황금 조각상을 주조하는 작업을 감독하는 일  도 그의 몫
이었다. 마야는 농부들로부터 거둬들인 곡물 내역을 파악하기 위해 멤피스의 자기 사무실에
서 근무하는 서기들을  이집트 전역에 급파햇다. 
 농부들에게서 걷은 세금은 수확한 양이 아니라, 수확해야할 양을 기준으로 매겨졌다.  수확
해야 할 양는 "나일로미터"를 보고 판단했다. 나일강 둑을 따라 늘어져 있는 돌을 지칭하는 
"나일로 미터"에는 홍수에 대비해  수세기 전부터 수위표가 세겨져  있었다. 매년 찾아오는 
범람기 동안 나일로 미터는 이집트  전역의 수위를 기록했다.  나일강이 그  해 얼마만큼의 
물을 공급했는지가 알려지면 , 관리들은 에이커당 어느 정도의  곡물이 경작될 수 있는지를 
계산했다. 그리고 나면 예상되는 수확량에 비례해 농부들에게 세금을 책정했다. 이 같은  체
계 덕분에  세금징수원들은 빼돌린 곡물을 찾아헤매야하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밭
임자는 애초에 매겨진 세금대로 내야했다. 그러나 부지런히 일해도 나일로미터가 예측한 양
이상을 생산하면 나머지는 밭 임자의 몫이었다. 
 아직  화폐가 발명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마야의 일은 아주  어려웠다. 수거된 곡물은 일단 
왕의 창고로 운반된 후 기록  과정을 거쳐 보관에 들어갔다. 마야의  사무실에 지불 명령이 
떨어지면, 곡물의 무게를 달아 계산후 필요한 곳에 보내졌다. 서기들은 마야의 지휘아래  나
일 강 위아래를 오르내리며 일했다. 마야의 동생 나후헤르도 '왕의서기'였다 그러나 영국의 
'우정성'이 실은 여와에게 오는 편지를 가장  많이 취급하듯이, 이는 그가 파라오가 구술한 
내용을 받아적는 일을 했다기 보다는 왕의 창고에서 일했음을  뜻한다. 이러한 왕의 서기들
이 너무 많다 보니, 결국 정말 궁정에서 일하는 서기에게는 '진정한 왕의 서기'라는 칭호가 
내려졌다. 
 마야의 무덤은 멤피스에서 불과 몇 마일 떨어지지 않은 사카라의 고대 공동 묘지에 위치해 
있다. 사카라는 수 천년 전 최초의 피라미드가 세워졌던 곳이다. 마야의 대규모  공동묘지는 
관광명소였다.  오늘날 사람들이 유명한 공동묘지를 일삼아 찾듯이, 이집트인들도 관광삼아 
고대무덤들을 방문했다. 
이집트인들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사카라 주변을 산책하며 이집트의 좋은 시절을  떠얼
리곤 했다. 이를 증명리라도 하듯이 마야가 자지 무덤 벽에 새긴 자서전을 보면 '영원의 장
소에서 산책하며 기분을 전환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로 사작하고 있다. 마야는 이집트의 
복구작업과 관련한 자신의 역할에 대해 상당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경력
을 이렇게 요약했다. "처음에도 나쁘진 않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 활약은 그야말로 눈부
셨다. "
    그러나 신전을 다시 열고 신의 황금 조각상을 다시 만들고, 군대를 지원하는 이 모든 
 일에도 돈이  필요했다. 투탕카멘 재임8년에 마야는 "모든 땅에 세금을 거든 한편, 이집트 
    땅의 모든신들을 위해 성스런 공물제도를 만들라"는 지시를 받았다. 새로운 세금이 
부과될무렵, 투탕카멘은 열여덟 살이었다. 그 정도 나이면, 나일로미터에 표시된 그해의 수 
룰 지적하며 예상 가능한 조세 수입에 대해 마야와 긴 토론을 벌여음직도 하다. 아이도 이 
   모임에 참석했을 가능성이 높다. 보나마나 그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교묘하게 
   방향을 제시했으리라. 세금 인상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적어도 농부들은 
  자기네가 낸 세금이 신전을 달시 열고 신들의 조상을 만드는 데 사용되리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자기네가 재배한 곡물이 자기들은 섬기지도 않는 신가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파라오를 먹여 살리기 위해 듣도 보도 못한 도시로 유입되는 일은 이제 더 이상 없었다. 
   마야의 무덤에서 몇 걸음만 걸어면 방식은 다르지만 이집트의 부흥기에 마야만큼이나 중
요한 일을 한 사람의 무덤이 있다. 다름 아닌 호렘헵 장군의 무덤이다. 일약 투탕카멘  군대
의 총지휘자로 승진한 호렘헵은 양의 머리를 한 혜리셰프 신의 고향인  히에라콘폴리스라는 
북쪽마을 출신의 자수성가한 인물이었다. 추측건대 그는 아멘호테프3세의 재임 말기와 아케
나텐의 재임 초기에 일개 보병으로 군대생활을 시작했던 것  같다. 사병에서 장교로 출세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전쟁이 없는 시기에 복무한다는게 
내심 불만스럽겠지만, 호렘헵은 잘 참았다. 
 장년의 나이에 접어든 그는 투탕카멘의 행정부에서 비로소  중요한 지위에 임명되었다. 군
대의 감시자로서 호렘헵의 임무는 서부 아시아와 누비아에 대한 이집트의 지배력을  재탈환
하는 것이었다. 마야가 조달한 기금으로 호렘헵은 군대를  증원하는 한,장비를 마련했다. 얼
마후, 그가 훌련시킨 이집트 군대는 누비아를 정복하기 위해 마침내 "원정을 나갔다. "그 결
과 무역에 필요한 금이 다시 이집트의 창고로 흘러들었다. 
 그러나 이집트는 번영에 누비아 못지않게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정복 
아직 남아 있었다.  알다시피 이집트에는 숲이 없었다. 배를 비롯해 신전의 문과 깃대를 만
들려면 레바논의 삼나무 목재가 있어야 했다. 그래서인지 '신'을 뜻하는 상형문자 ㄱ 는 삼
나무 장대에 꽂힌 기 모양이다. 
 물론 멤피스였는지 테베였는지, 모임이  언제 어디서 소집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성인기로 
접어든 젊은 파라오가 자신이 중심이 돼서 국가를 이끌 날을  고대하며 재무대신 마야와 장
군 호렘헵, 충실한 조언자 아이와 의논하는 모습은 충분히 상상할수 있다. 시리아와의  결전
에 대비해 어린군인들을 단련시키기 위해서는 제일 약체인 리비아를 먼저 치는 게  좋지 않
을까? 아니면 황금을 얻기 위해 시리아를 먼저 치는게 현명할까? 이집트의 부흥을 위한 세
부사항들은 주로 이런 성격의 모임에서 나왔다. 
 내추측이지만  , 이른바 '빅스리'(마야와 아이, 호렘헵)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일하지 않았
을까 싶다. 예를 들어 마야는 자기 사무실에 파묻힌 채  조세 수익과 손해를 기록하느라 분
주하게 움직이는 서기들을 감독하는 한편 각종 파피루스 문서를 검토하느라 정신이  없었으
리라. 한마디로 그는 보수적이고 철저한 회계원이었지만, 언제나 일의 한 복판에 서서  이집
트의 재정을 주무르는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아이는 이와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일했다. 그는 무대 뒤에서 조용히 일하며 다른 
출연자들의 움직임을 지휘하는 정치가였다.  아마 모르긴  해도 아마르나에서처럼 투탕카멘
의 곁에 머물면서 궁정의 눈과 귀 역할을 했으리라. 옛날 이집트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
네가 한 말을 불리하게 사용할지도 모르니 낯선  사람에게 네 마음을 드러내지 말라.' 아이
가 바로 그랬다. 이제 우리는 그가 얼마나 야심이 강한 사람이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왕들
의  계곡에서 발견된 금박 조각은 그의 이러한 성격과 관련해  아주 재미있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이 금박에는 리비아 포로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은채  만월도를 내리치는 전통적
인  정복영웅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투탕카멘의  모습이 세겨져 있다.   투탕카멘의 뒤로는 
안케센아멘이 서 있다. 전통적으로 왕 앞에 서 있다. 자신을 신성한 지위로 끌어 올리는  일
에서 만큼은 아이는 그다지 교활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여기에는  그야말로 웅장한 꿈을 품
은 남자가 있었다.
  그러나 호렘헵은 달랐다. 그 역시 투탕카멘의 복구 계획에서 없어서는 안될 인물이었지만 
일의 한복판에 서 있지도, 그렇다고 무대 뒤에서 은밀히 조종하지도 않았다. 호렘헵도  아이
처럼 야심이 강한 사람이었지만 휠씬 솔직했다. 원정 계획에 대한 승인이 떨어지면 그는 그 
즉시 행군에 나섰다. 보급 장교가 필요한 물품 목록 -청동으로 만든 전쟁용 도끼와 활 방패 
신발 물 담는 가죽 부대  등-을 제출해서 계획대로 보급을 받아오면  그는 그 길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러고 나서 얼마 안 있으면  이번에는 포로와 전리품을 앞세워 돌아왔다. 한  번 
원정을 나가면 몇 개월씩 걸렸기 때문에 호렘헵은 궁정 내부 사정과 정치에 대해서는 잘 몰
랐다. 그런 점에서 그는 이방인이었지만 적어도 막대한 권력을 쥐고 있는 이방인이었다.
  호렘헵으 군대는 불과 몇 년 만에 아케나텐이 잃어버린  모든 영토를 되찾았다.북쪽 지방 
원정에서 돌아오자마자 호렘헵은 투탕카멘 앞에 아시아인 포로들을 정렬시켰다.남쪽으로 원
정갔을 때는 왕을 위해 누비아인 포로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호렘헵 군대의 공격을 벗어난 
민족은 아무도 없었다. 염소 수염에  귀걸이를 한 리비아인들까지도 포로로  잡혀 이집트의 
신전 공사장으로 보내졌다.
  투탕카멘은 연이어 성공을 거두는 호렘헵에게 상을  내렸다. 이집트가 강해지면서 호렘헵
의 권력도 강해졌다. 이제 그는  군대 총사령관직을 뛰어넘어 왕의 모든  일의 감시자 이자 
온 나라에서 왕의 대리인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그를 가장 기쁘게  한 직함은 그의 군대 경
력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다름 아닌  명예직의 성격이 강한 왕의서기였다. 장군은  너무 
기쁜 나머지 무릎 위에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올려  놓은 채 서기의 자세로 앉아 있는 실제 
자기 모습과 또같은 크기의 화강암 조각상을 주문했다. 우리는  조각상 기단에 새겨진 글귀
에서 법규에 대한 그의 생각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대신들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법의 기록자
  누가 들어도 현명하게 말을 하니 그 무엇이 나를  무시하랴.호렘헵은 멤피스에 있는 대규
모 공동 묘지를 통틀어 가장 아름답고  정교한 무덤을 새웠다.. 왕의 모든 일의  관리자로서 
그는 이집트에서 가장 솜씨 좋은 장인들을 차출했다. 그의  무덤에 있는 조각물과 벽화들은 
고대 이집트에서 제작된 작품들 중에서 가장 수준이 높다. 한마디로 걸작 중위 걸작이다. 비
록 양식은 전통적이지만 유연한  선의 흐름과 세부묘사로 미루어  보아, 그때까지 살아남은 
아마르나에서 훈련받은 장인들의 손질이었음을 보여준다. 호렘헵의  무덤이 있는 지상 터에
는 안마당과 자주실을 갖춘 조그만  신전이 서 있었다. 아마도 그의  후손들은 이곳의 기둥 
그늘에 앉아 선조를 기리며 음식을 먹었으리라. 사람들에게 그늘을  만들어 주며 나란히 늘
어선 기둥에는 '미개한 아시아인들'과 '사악한 누비아' 주민들,  '야만스런 리비아인들' 과 싸
워 이기는 호렘헵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으리라. 물론 그가 섬기는 파라오 투탕카멘으로부터 
황금 칼라를 하사받는 장면도 있었으리라. 이는 다시 찾은 낙원에 대한 군인식  해석이었다. 
호렘헵과 아이, 마야가 이집트의 경제와 지배권을  부흥시키는 동안 투탕카멘은 사제들에게 
이집트의 옛 신들을 받아들였음을 재차 확인시켜야 했다. 그런 조치의 일환으로, 그는  룩소
르 신전의 열주랑을 완성하기로 했다.. 이는 그야말로  천재적인 발상이었다. 그이 할아버지
인 아멘호테프 3세는 150피트 길이의 열주랑을 지었으나, 공사가  완전히 끝나기 전에 죽었
다. 그후, 아케나텐이 테베의 신들을 추방하고 아마르나로 천도하면서 아멘호테프의  열주랑
은 십년 넘게 버려져 있었다. 투탕카멘에게 이집트의 가장 중요한 종교 축재 장면으로 주랑
을 장식하라고 조언한 사람은 보나마나 아이였으리라.
  투탕카멘과 안케센아멘은 이 계획에 깊이 관여했다. 두 사람은 자주 신전을 방문했다.  그
때마다 사제와 서기, 화가들은 오페트 축제를 어떻게 하면 가장  잘 그려낼 수 있을지를 놓
고 긴 토론을 벌였다.  투탕카멘에게는 이런 모임이 전혀 생소한 종교의 성격을 배울 수 있
었다. 모르긴 해도 성경 학교나 그림을 통한 교리 문답과 비슷했으리라.
  열주랑을 완성하기로 한 이 발빠른 결정은 아문 사제들이 존경해 마지 않던 그의 할아버
지와 투탕카멘을 동일선상에 올려 놓았다. 이를 통해 투탕카멘은 왕손으로서의 자신의 정당
성을 강조하는 한편 아버지의 탈선으로부터 자신을 멀리 떼어 놓음으로써, 사제들에게 합법
적인 왕위 계승자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이로써 투탕카멘은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면 j
어쩌나 하는 사제들의 두려움을 말끔히 없앴다.
  새로운 종교에 대한 투탕카멘이 어떻게 반응했을지에 대해서는 그저 상상하는 수밖에  없
다. 기꺼이 받아들였을까, 아니면 남의 눈을 피해 계속해서 아텐을 섬겼을까? 각종 종교  축
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그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열주랑은 테베에서 열리는 축제들 중에서 가장 성대했던 오페트 축제 장면으로  장식되었
다. 오페트는 아문과 그 가족의 룩소르 신전 연례 방문을 기념하는 축제였다. 오페트는 축제
가 처음 시작됐던 장소이자 테베 3신-아문(아버지)과  무트(그의 부인) ,콘수(그들의 아들)-
의 고향인 카르나크의 옛 이름이었다. 오페트 축제가 시작되면, 아문과 무트, 콘수의 신상은 
카르나크 신전의 성소에서 나와 성스런 배에 태워진 후 나일 강을 따라 1마일 반 떨어진 룩
소르 신전으로 향했다.
  투탕카멘기에 그려진 이들 그림에는  안쪽의 룩소르 신장으로 갔다가 축제가 끝날 무렵쯤 
해서 다시 카르나크로 돌아오는 행렬의 모습이 아주 자세하게 나와 있다. 이에 비해 투탕카
멘의 모습은 열주랑 서쪽 벽에 주로 양각으로 처리돼 있다. 이곳 벽에는 그가 아문과  무트, 
콘수 신에게 공물을 바치는 장면, 신상을 실은 배를 수행해 나일 가 어귀까지 가는 장면, 배 
뒤를 따라 나일 강 둑에서 룩소르 신전 앞 까지 가는 장면, 룩소르 신전의 지성소에서 신들
에게 공물을 바치는 장면이 새겨져 있다. 어느 누가 이보다 더한 헌신을 보여 줄 수 있었겠
는가?
  오페트 축제가 다시 시작되자, 기쁨에 넘친 테베 시민들은 신상을 태운배와 옛 종교를 부
활시킨 투탕카멘을 보러 나일 강 동쪽 둑으로 개미떼처럼 몰려 들었다. 룩소르 신전 안으로 
들어간 행렬의 신상들을 임시 거처인 신전의 깊숙한 곳으로  운반하는 동안, 안마당은 일반
인은 들어갈 수 없는 성서를 구경하려는 수천명의 군중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투탕카멘
이 신에게 향과 고기, 채소, 맥주, 포도주 등의 공물을 바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일반 시민
들은 넘치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으리라. 파라오가 자기들이 섬기는 신에게 예를 올리기는 
몇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너무 감격스러운 나머지 흐느껴 우는 사람들도 많았으리라.
  사람들의 흥분과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투탕카멘과 안케센아벤은  아버지와 지금보다 
훨씬 자유스러웠던 아마르나 생활을 그리워했으리라. 그러나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테베와 
멤피스에서의 변화무쌍한 생활이 더 낫다고 생각했으리라.
  멤피스의 궁전에서 새 사냥에는 최상의 장소인 삼각주 지역까지는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새 사냥꾼들은 파피루스 줄기로 만든 바닥이 평평한 소형  배로 습지대를 누비며 그물을 설
치한 후 지나가는 새떼가 걸려들기를 기다렸다. 투탕카멘은 활로  하는 사냥을 특히 좋아했
다. 머리 부분을 뾰족하게 깎은 가벼운 나무 화살은 새보다  더 빨라 새 사냥에는 그야말로 
최고였다(투탕카멘의 활과 화살은 나중에 그의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 투탕카멘과 안케센
아멘은 습지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투탕카멘이 오리를 향해 활을 쏘는 동안, 안케
센아멘은 그를 위해 다음 화살을 준비했다. 활에 싫증이  나면 생김새는 부메랑과 비슷하지
만 손에 익히기는 그보다 훨씬 어려운 던지기용 작대기가 있었다. 나는 새를 쓰러뜨릴 만큼 
세게 작대기를 던지려면 팔이 튼튼해야 했다. 
  테베의 남쪽 궁전에서는 사막으로 타조 샤냥을 나갔다. 타조  사냥은 언제 해도 재미있었
다. 전차 기수가 새떼를 추적하는 동안 , 기수옆에 탄 투탕카멘은 달리는 전차에서 활을  쏘
았다. 잚은 왕과 왕비가 기분을 전환할 거리는 아주 많았다. 아마도 이른바 왕의 조언자들은 
사냥과 오락에 몰두하는 두 사람을 보면서 내심 기뻐했으리라.
  투탕카멘의 시간을 빼앗았던  또 다른 일은 무덤 건축이었다. 젊은  왕은 서부 계곡의 할
아버지 무덤 옆 장소를 골랐다. 아멘호테프 3세는 이 지역에 최초로 무덤을 판 왕이었다. 그
러나 우리가 주목하는 무덤은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미완성의 무덤이다. 대부분
의 이집트학자들은 이 무덤이 아멘호테프 4세가 이름을 아케나텐을로 바꾸고 아마르나로 천
도하기 전에 팠던 무덤이라는데 동의하고 있다.이 무덤에 관한 추측이 사실이라면, 투탕카멘
의 무덤은 할아버지의 무덤과 한때 아버지가 묻히려고 했던 무덤 사이에 있었던 셈이 된다.  
투탕카멘의 무덤 공사는 그가 십대로 접어들면서 시작되었다. 
  먼저 왕의 건축가가 평면도를 그리면, 맨  먼저 왕의 무덤 감독자에게 전달된다. 이걸  본 
제도 공이 절벽에 출입구를 대충 표시하면, 석공들이 청동 끌과  나무 메를 이용해 맨 위에
서부터 차례로 바위를 깎아냈다. 무덤 공사는 늘 위에서부터 출발했다. 이는 메를  휘두르는  
석공들이 중력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중력의 도움  없이는 메를 점점 
높이 쳐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바위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들이 수북이 쌓이면, 사내  아이들
이 이를 밀짚 바구니에 담아  무덤에서 멀리 떨어진 쓰레기장으로 날랐다.  몇 주가 지나자 
지하로 내려가는 통로가 모습을 나타냈다.
  하루가 다르게 깊이를 더해 가던 통로가 마침내 바닥에 닿으면 일군들은 청동 거울을 든   
  조수들을 소리쳐 불렀다. 청동 거울로 햇빛을 반사시켜야 볼 수 있을 만큼 실내가 어두웠
기 때문이다. 통로가 건축가가 지시한 깊이 까지 도달했다 싶으면, 이번에는 바위를 깎아 방
을 만드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천장을 지탱하는 사각 기둥은 따로 만들었다. 초벌 작업
이 끝나면, 좀더 경험이 많은 석공들이 벽화 작업에 대비해 벽을 다듬었다. 이제 무덤은  오
른손잡이와 왼손잡이가 동시에 일할 수 있을 만큼 넓어졌다.  끌이 무뎌지면 사내 아이들이 
땅위로 가져가 다시 날카롭게 갈아왔다. 무덤 공사는 이처럼 공동 작업이었다. 
  인부들과 그 가족은 왕들의 계곡 근처의 조금만 마을에서 살았다. 마을 주변에 벽을 세웠
던 건 밤에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해서였다. 제도공, 석공, 조각가, 화가, 상형 문자를 
새기는 장인, 감독자등 무덤을 만드는 데 필요한 사람들은 모두 여기에 있었다.
  성인으로 자라난 투탕카멘은 아이, 마야와 함께 재정에 관해 활발하게 포론하는 한편,  무
역 동의서 비준 건으로 방문한 외국 사잘단을 만나는     자리에ㅐ도 참석했으리라. 나아가 
자가기 부릴 하인과 가정교사를 고른 한편, 누구에게 상을 줄지도 직접 결정했으리라.  그는 
결국 위대한 외교관이자 영리한 행정가였던 아멘호테프 3세의 손자였다. 다시 말해, 그의 몸 
속에는 통치자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투탕카멘이 가장 신뢰했던 특사 중 한명인 후이의 무덤이 아직까지도 잘 보
존돼 있다. 그의 무덤은 투탕카멘의 역할을  판단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해준다. 이와 관련
해서 보건대, 그는 아직 십대였다. 호렘헵이 누비아를 굴복시키면서, 그 지역을 통치할 총독
이 필요했다. 누비아는 가구 제작에 필요한 흑단과 보석으로  쓰이는 상아 기린과 표범가죽
등과 같은 사치품을 비롯해 몇 톤씩이나 되는 황금의 주요 공급지였다. 이 모두는 이집트에 
있어서 풍요의 상징이였다. 그런 만큼 누비아 총독이라는 지위는 상당히 중요한 자리였다. 
  후이는 자기 무덤 벽에다 테베로 선적할 황금에 찍을 총독의 인장을  하사받기 위해 왕궁
으로 불려갔던 일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고왕국 시대 이후부터 조그만 원통 인장은 권
위의 상징이었다. 실제로 재무 대신을 뜻하는  상형 문자는 나달나달해진 끈에 꿰어져 있는  
 도장이었다. 당시 관리들은 자신의 신분을 나타내기 위해  끈으로 꿴 도장을 늘 목에 걸고 
다녔다. 따라서 후이에게는 테베 궁전으로 불려간 날이 평생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후이의 
가족에게도 이 굉장한 사건을 직접 볼 수 있는 영광이 허락되었다. 마침내 파라오에게 안내
된그가 허리를 숙여 절을 하자 투탕카멘의 대신 한 명이 그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네켄에서 네수트-토위에 이르는 땅을 그대에게 주노라."
  이에 후이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네수트-토위의 아문께서 폐하가 내리신 모든 명령을 들어주시길 비옵나이다."
  투탕카멘은 그제서야, 한시바삐 목적지로 출발해 황금과 상아,  흑단, 기린 등 누비아에서 
나는 좋은 물건들을 모도 가지고  돌아오라고 명령했다. 여기서 후이에게  위임장을 수여한 
사람은 투탕카멘이 아니라 내각의 일원이었음에 주목하기  바란다. 즉 투탕카멘은 명령을재
차 확인했을 뿐이다.
  후이는 관리의 인장을 손에 꼭 쥔 채 궁전을 나와 누비아로 떠날 준비를 했다. 한편 그의 
아들 중 한 명은 '말의 대가'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후이의 무덤 벽에는 그
를 태운 배가 누비아로 가는 동안 말들이 마구간 밖을  엿보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누비아
에 도착하기까지의 기록이나 그곳에서의 체류 기간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적어도 한 가지
는 상상할 수 있다. 즉 호렘헵의 원정으로 이미 모든  장애물이 제거된 뒤라 후이가 임무를 
수행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으리라는 점이다. 따라서  그의 여행이 대성공을 거두
었다고 해서 놀랄 필요는 없다. 
  후이는 보물을 가득 실은 선단과 함께 이집트로 돌아왔다.  보물이 어찌나 많았던지 궁전 
뜰에서 진상식을 거행해야 할 정도였다. 팔지 크기의 고리로 주조된 황금 무더기, 상아와 흑
단 더미, 기린 등등을 비롯해 보물의 행렬은 도무지 끝이 없었다. 잠시 후 족쇄에 묶인 노예
들이 젊은 왕 앞에 도열했다. 이는 왕이 마음에 드는 노예를 직접 고르도록 하기 위한 배려
였다. 진상품 중에는 아문 신에게 바치는 공물로는 가장 뛰어난 포동포동 살이 오른 누비아
의 가축들도 있었다. 오페트 축제 기간 동안, 이집트인들은 암수 뿔에다 절단된 손목을 매달
았다. 뿐만 아니라 뿔과 뿔 사이에는 누비아인의 머리를 매달았다. 암소가 머리를 숙일 때마
다, 누비아가 이집트에 신하의 예를 표하는 상징적인 효과를 누리기 위해서였다.
  행렬이 마음에 든 투탕카멘-그는 기린이 제일 마음에 들었으리라-은 후이에게 상으로 황
금 목걸이를 하사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 아버지가 용안의  창에서 황금 목걸이를 나누어 
주던 아마르나 시대를 떠올렸으리라. 그러나 후이의  경우레는 계속해서 신앙을 유지하라는 
뇌물이 아니라 일을 잘 처리한 데 대한 상이었다.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발견된 황금 물품들
은 후이의 수고 덕분이었다. 그 유명한 황금 관도 후이가 누비아에서 가져온 엄청난 황금으
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세월이 지나면서 청년기로 접어든 투탕카멘과 안케센아멘은  서로 사랑에 빠졌다. 안케센
아멘은 열 살 때부터 항상 투탕카멘 옆에 붙어 있었다. 이제 거의 모든 그림에는 파라오 옆
에 서 있거나 무릎을 꿇고 있는 안케센아멘의 모습이 등장했다. 왕의 공방은 각기 아문신과 
무트 여신의 보관을 쓴 채 나란히 앉아 있는 잘생긴  젊은 부부의 조각상을 생산했다. 룩소
르 신전에 가면, 이때 제작됐을 젊은 와과 왕비의 조각상이 지금도 지나가는 여행객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다.
  자시느이 선조들과는 달리, 투탕카멘은 일체 첩을 거느리지 않았다. 이는 투탕카멘과 안케
센아멘의 사이가 아주 좋았다는 또다른 증거다. 그러나 두  사람은 18왕조의 마지막 생존자
들이었다. 다시 말해, 왕통을 이으려면 빨리 아이들을 낳아야  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다음 
파라오를 선택해야 할 시기가 왔을  때, 이집트는 신성한 질서에서 이탈한  채 혼란에 빠질 
수도 있었다.
  두 부부는 이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안케센아멘은 드디어 임신을 했다. 온 
궁전이 이집트의 다음 왕 혹은 여왕의 탄생을 준비하는 동안,  그녀는 뛰어난  치료 기술로 
소문이 자자한 왕실 주치의의 보살핌을 받았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의학을 '필요한 기술'로 부르며 의료업계 종사자들을 엄격하게  관리했
다. 직책이 높은 의사들은 대개 사제직을 겸하고 있었다. 최고의 의사들은 세크메트의  사제
들 중에서 나왔다. 의학 기술에 관한 한 세크메트가 가장 중요한 신이었기 때문이다. 암사자
의 머리를 한 이 여신이 그 잔인한 성품으로 인해 이집트 역사 내내 두려움의 대상이  됐을 
뿐만 아니라 한때는 인류를 거의 말살할 뻔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는 다소 뜻밖이다.
  세크메트의 사제들은 의학과 관련한 직책  외에도 마술과 관련된 직책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네제모는 '세크멘트의 수석 사제' 이자 '의사들의 우두머리'였다. 반면 헤리세프나
크트는 '마술사의 우두머리'이자 '세크멘트의 수석 사제'임과 동시에, 파라오의 주치의이기도 
했다. 사제이자 의사인 와부 외에도 속인 출신 의사인 수누가 있었다. 수누는 특정한 사원에 
속하거나 특정한 신을 모시지 않더라도  의학 훈련만큼은 아주 철저하게  받았다. 부적절한 
치료 행위에 대해서는 엄청난 벌금을 무리는 등 의사들에 대한 관리가 워낙 엄격했기 때문
이다. 따라서 이들의 치료 방법은 사제-의사들에 비해 훨씬 다양했다.
  사제-의사들과 속인 출신의 의사들이 의학적 지식과 마법을 섞어서  활용했던 반면, 의학 
훈련은 받지 않았지만 주문과 부적을 이용해 환자를 치료했던  제 3의 의사 집단이 있었다. 
과학적인 지식이나 세심한 관찰과는 거리가 먼 주문과 조제법이 기록돼 있는 걸로 보아, 지
금까지 남아 있는 의학용 파피루스의 대부분은 바로 이 제3의 의사 집단에게서 나온 게  분
명하다.
  안케센아멘의 주치의는 모르긴 해도 부인과 의학을  전공했으리라. 그녀에게는 이번이 이
른바 '자궁의 개시자'인 첫 아이였다. 산달이 가까워지면서 분만용 걸상이  준비되었다. 이집
트 산부들은 해산이 임박하면 진흙을 다져 만든 걸상에 앉았다. 중력이 해산 과정을 도와준
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실제로 '아이를 낳다'의 속어는 '벽돌 위에 앉다'였다).  이는 이집트
인들의 생활에서 아주 기본적인 부분이었다. 그래서 '태어난'을  뜻하는 상형 문자는 의자에 
앉아 아이를 낳는 여자모습이다.
  그러나 안케센아멘이 분만용 걸상을 사용하기 전에 불행이 닥쳤다. 여덟 달째로 접어들면
서 그녀는 아이를 유산하고 말았다. 딸이었다. 아이가 살았다면 굽은 척추에 짝짝이 팔을 한 
기형아였으리라. 아마 궁전 어딜 가나  아이나 산모에게 저주가 붙어  그렇다는 소근거림이 
들렸으리라. 그리하여 왕의 마법사가 불려 왔으리라.
  고대 이집트 의학의 경우 임상 지식을 지닌 의사와 마법 치료사가 같이 일했기 때문에 병
의 성격에 따라 치료 방법이  달랐다. 가령 부러진 팔이나 악어에게  물린 자국처럼 원인이 
확실하다면 마법을 쓸 필요가 없었다. 악어에게 물렸을 경우에는 상처를 잘 봉합한 다음 그 
위에 날고기를 얹었다. 그러나 열병처럼  원인을 모르는 증상이었을 경우에는  마귀 탓으로 
생각해 결국 마법을 썼다. 실제로 알려지지 않은 병에 대해 훈련 받은 전문가도 있었다.  그
는 주로 원인을 모르는 병을 다루었다. 생식의 이치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고대 이집트
에서는 유산을 저주 탓으로 돌렸다. 태아의 기형을 동반한  안케센아멘의 유산은 필시 마법 
치료사를 필요로 했으리라. 그리하여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으리라. 
그리하여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으리라.  이 같은 경우에는 기록과 
마법의 신인 토트의 밀랍상을 만들어 분만용 걸상에 걸터앉아  있었으리라. 이는 연기가 자
궁 속으로 들어가 그 안에 있는 사악한 기운을 깨끗이 청소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녀의 유산은 왕족만의 비극이 아니었다. 농경 사회의 전형적인 대가족을 이루며 살았던 
이집트인들은 아이들을 사랑했다. 아이들이 많을수록 밭일을  도와줄 손이 늘어났기 때문이
다. 젊어서 결혼해 아이들을 많이 낳으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였다.
  투탕카멘과 안케센아멘은 괴로웠다. 가족을  꾸려야 할 나이에  투탕카멘과 안케센아멘은 
시작부터 발을 헛디딘 셈이었다.
  태아가 사산이었기 때문에 굳이 이름을 지을 필요가 없었다. 아기가 살아서 첫 번째 숨만 
쉬었더라도 바와 카라는 영혼을 가졌으리라.
  죽은 바의 바는 늘 사람의 머리를 한 새로 무덤 벽에 그려졌다. 그리하여 죽은 자는 육신
의 부활을 기다리는 동안 무덤 안팎을 날아다닐 수 있었다.  바는 부활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그 사람의 됨됨이였다. 고대 이집트의 어느 문학 작품에 보면 자살을 심각하게 고려하는 
한 남자가 자신의 바한테 심한 꾸지람을 듣는 장면이 나온다.  바는 이 남자에게 끝내 자살
을 한다면 내게서 버림을 받을 테니 당신은  영생을 위한 기회를 영영 잃게 되리라고 말한
다.
영혼의 다른 측면은 미라 안에 사는 일종의 정신과 비슷한  카였다. 바와 카가 없는 태아에
게는 부활을 위한 기회가 영영 없었다.
  그러나 이는 이집트의 종교였을 뿐 자식에 대한 희망과 기대에 부풀었다가 그 꿈이 여지
없이 무너지는 모습을 목격한 젊은 부모에게는 그다지 의미가 없었다. 투탕카멘과 안케센아
멘은 모든 전통을 무시한 어린 딸의 미라를 만들었다.
  태아의 키는 12인치밖에 되지 않을 만큼 작아서 미라 제작을 위해선 특별한 도구를 만들
어야 했다. 뇌를 제거하기 위해 조그만  철사가 두개골로 통하는 비강 속에 삽입되었다.  그 
다음 수지에 담근 아마포 조각이 두개골 속으로 밀어 넣어졌다. 이는 조직의 습기를 제거해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러고 나서 내장을 꺼내기 위해 부 왼쪽에 절개가  행해졌다. 
절개 부위는 1인치가 채 안 됐다. 그러나 상당한 기술을 지닌 왕의 미라 제작자들도 여기서
는 실패했다. 태아가 너무 작다 보니 신체에 손상을 가하지 않고 위와 같 콩팥 창자를 꺼낼 
수 있는 도구가 없었다. 미라 제작자들은 조직을 원래 자리에  그대로 놔둔 채 절개 부위를 
통해 수지를 주사하고는 그대로 봉했다.  사제들이 고대의 기도문을 암송하는  동안 붕대를 
감아주는 붕대 장인들이 깨끗한 아마포에 태아를 정성껏 쌌다.
  태아를 위해 검은 수지로 칠한 소형 관이 만들어졌다. 관  위에 얹은 미라의 붕대처럼 생
긴 얇은 금박 띠에는 숭배받는 자와 오시리스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태아에게 이름이 없었
기 때문이다. 안쪽에 들어가는 작은 관 정면에는 죽은 자들의 신인 오시리스가 다음 세상에
서 아기를 도와주기를 바라는 내용의 기도문이 새겨졌다. 사제가  사자의 서에 나오는 주문
을 암송하며 태아를 작은 관 안에 넣었다.
  그런 다음 태아를 넣은 관을 바깥쪽 관 안에 집어 넣고는 관 전체를 깨끗한 아마포  붕대
로 쌌다. 그 동안에도 암송은 계속 이어졌다. 관을 싸는 작업이 끝나자 아홉 명의 포로 위에 
군림하고 있는 자칼의 모습이 새겨진 왕가의 점토 인장이 첨부되었다. 이제 꼬마 미라는 언
젠가 부모와 함께 매장될 날에 대비해 모든 준비를 끝냈다.  젊은 부부에게 유산은 슬픈 일
이었지만 안케센아멘과 투탕카멘을 전보다 더 가깝게 묶어 주었다.
  투탕카멘이 열여덟 살로 접어들면서 이집트 사회를 구성하는 세 가닥의 실은 마침내 완전
한 직물의 모습을 띠게 되었다. 아문의 신전들은 날로 번창했다. 테베는 다시 투탕카멘이 복
구한 룩소르와 카르나크 신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신전에서는 사제들의 기도 소리가 그칠  날이 없었다. 아멘호테프의 열주랑  장식은 거의 
마무리 단계에 와 있었다. 눈이 부실  듯한 화려한 색채가 신전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낡은 벽들은 새로 회반죽을 발라 수리를 했다. 어찌나 솜씨  좋게 수리를 했던지 누가 보아
도 감쪽같았다. 신전 출입문과 성소에는 반짝이는  청동 장식을 덧 씌웠다. 이 모든  작업은 
전에 비해 훨씬 발언권이 세진 사제들의 참관 아래 진행되었다.이제 사제들은 매일 아침 지
성소로 통하는 문을 열어 첫 번째 태양 관선이 방으로  들어가게 했다. 그리고는 황금 신상
에ㅐ 향수와 성유를 정성껏 바른 다음 눈두덩 위에 아이  섀도를 발랐다. 그레 끝나면 이번
에는 아침 식사로 빵과 양파 맥주 과일을 바쳤다. 그러고 나서는 아문에게 바치는 기도문을 
암송했다.

  물길을 아는 안내자시며
  약자의 키잡이시여
  빵이 없는 자에게 빵을 주시며
  당신 집을 돌보는 하인에게 영양분을 주시도다
  나는 귀족을 보호자로 삼지 아니하며
  부자와 친교를 맺지 아니하며
  다른 이에게 내 몫을 구걸하지 아니하니
  내 부는 내 주인의 집에 있으며
  내 주인이 나의 보호자시니
  나는 그 분의 권능을 알고 있노라
  강한 팔을 지닌 구조자시니
  힘에 있어 그 분을 당할자 없도다
  당신을 부르는 이의 소리에 귀 기울이시는 
  동정을 아는 아문이시여
  신 중의 신 아문 레시여
  힘을 사랑하는 당신은 엄청난 힘을 지닌 황소이시도다

  신전 근처의 공방들도 다시 문을 열어 사제들이 필요로 하는 성유와 흰색 아마포를 생산
했다. 빵집과 양조장도 번성을 누렸다. 창고들도 각종  물건들로 넘쳐나기 시작했다. 제물용 
동물들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게 하면 청원자들은 공물을 두고  갔다. 꿈도 신전 도서실
에 비치된 해몽서를 기초로 해서 해석되었다. 가령 어떤 사람이  꿈에 난쟁이가 된 자기 모
습을 봤다면 인생의 반이 지나갔다는 뜻이었다. 옛 종교는  다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군대 역시 강해졌다. 호렘헵은 이집트의 군대를 모두가 두려워하는 대상으로 단련시켜 놓
았다. 이집트 왕가의 전통이 부활되면서 투탕카멘은 아문의 제단에 공물을 바쳤다. 뿐만  아
니라 오페트 축제에도 참가했다.마야의 감시 아래 이집트의 창고는 꽉꽉 찼다. 다들  알다시
피 복구를 다짐하며 새겨 넣은 석주 위의 약속이 지켜지고 있었다.
  투탕카멘은 나일 강 서쪽 둑에  자신의 영혼을 안치할 신전을 짓기  시작했다. 그는 자기 
무덤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을 신전 부지로 정했다. 신전은 직사각형 건물이었다. 신전 입구
에는 투탕카멘이 죽은 후 수세기 동안 숭배받게 될 왕의  거상들이 서 있었다. 마야는 신전 
기금을 배당하면서 땅도 기부했다. 땅은  신전을 관리하며 투탕카멘의 영혼을  위해 공물을 
바칠 카 사제들의 월급과 신전 유지비로 두고두고 쓰이게  될 터였다. 투탕카멘은 질주하는 
전차에 올라탄 채 전투에서 군대를 지휘하는 자신의 모습으로 신전을 장식했다.호렘합과 함
Rrpo 원정에 나간 적은 아직 한 번도 없었지만  그는 언제가 될지 모르는 그날을 기대하고 
있었다. 누가 뭐라 해도 그는 아직 젊었다. 신전 벽의 그림들은 백성들에게 자기네 왕이위대
한 왕 투트모시스 3세처럼 강하다는 점을 재차확인시켜 주었다.
  투탕카멘의 통치기 동안 이집트는 다시 옛날의 좋았던 시절로  돌아갔다. 즉 번영과 확장
과 관용의 시대가 다시 도래했다.  그러나 신성한 질서가 회복되는 것처럼  보이는 동안 두 
가지의 비극이 불운한 십대 두 명을 유린했다. 두 번째로  임신한 안케센아멘은 다섯 달 만
에 다시 유산했다. 이번에도 딸이었다. 투탕카멘과 안케센아멘은 망연자시 했다. 두 사람은 
확실히 저주를 받았다. 알다시피 위대한 18왕조의  마지막 생존자들이었기에 투탕카멘과 안
케센아멘은 상속자를 생산해야 했다. 그것도 반드시 아들을 낳아야 했다. 두 번째 태아는 언
니처럼 아마포에 사여 조그만 관에 넣어졌다. 젊은 부부는 죽은 자들의 신 오시리스가 다음 
세상에서 아기를 받아주길 기원했다.
  경제와 종교의 부흥에도  불구하고 투탕카멘이 상속자를 남기지 않은 채 죽는다면 이집트
는 다시 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될 가능성이 컸다.지배 세력 간에 왕좌를 차지하기 위
한 싸움이벌어지지 말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렇게되면 이집트는 다시 쪼개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럴 가능성에 대해 눈곱만큼도 걱정하지 않았다. 투탕카멘은 젊었다. 따라서 
상속자를 생산할 시간은 충분했다. 그러나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 발생했다. 
  B.C 1323년 1월 18 왕조의 열한 번째 왕 투탕카멘은 의문의 상황속에서  죽었다. 죽을 당
시 그의 나이는 열아홉 살이었다. 그후 그의 이름은 역사에서 지원진 채 3천여년 동안 잊혀
져 있었다. 그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선 우리는 먼저 왕들의 계곡으로 가야만 한다. 

    7. 역사상 가장 유명한 무덤
  보통 이집트학자들은 그 동안의 약탈로 거의  텅 비어 있는 그래서 연구할  대상이라고는 
벽밖에 남아 있지 않은 무덤들을 발굴한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다시피 무덤 벽화는 상당히 많은 양의 정보를 제공해준다. 그러나 고인
이 가장 아끼던 물건을 비롯해 부장된 모든  물건이 무덤에 그대로 있다면 거기서 얻을 수 
있는 정보량을 한 번 상상해 보라. 게다가 무덤의 주인이 파라오라면 어떨지 상상해 보라.
  지금까지의 이집트학 역사상 오직 한 무덤만이 이런 정보를 줄  수 있었다. 이 무덤은 고
고학자들이 왕들의 무덤이라고 부르는 지역인 룩소르의 나일 강변에서 발견된었다.
  왕들의 개곡은 그 자체만으로도 신비감을 지니고 있다. 이곳은 고고학의 산책로이자 공원
이며 모든 발굴자들이 한 번쯤은 꼮 가고 싶어하는  장소다. 이집트학자들을 왕들의 계곡으
로 끌어들이는 흡인력은 이곳에서 발견된 내용만은 아니다. 그보다  그곳의 역사 사람을 압
도하는 그야말로 웅대한 역사 때문이다. 이곳에는 출애굽기에 나오는 파라오 람세스 대왕과 
왕으로 태어났어야 할 하트셉수트 여왕이 잠들어 있다.
  이곳의 무덤들은 아무리 지친 관광객도  15분이면 돌아볼 수 있는 지역에  몰려 있다. 이 
지역의 역사에 대해 아무런 사전 지식이 없는  방문객도 이곳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 뭔가 
특별한 느낌을 갖게 된다. 붉게 타오르는 하얀 석회암 절벽에 펼쳐진 황량한 풍경을 바라보
고 있노라면 왠지 영원의 느낌 다시 말해 수천 년 동안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듯한  기운이 
느껴진다. 신앙심 깊은 사제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새기기 위해 잠시 멈춰 섰던 계곡 벽에는 
3천년 전의 낙서가 방금 전에 새긴 것처럼 선명하게 남아 있다.
  오늘날 왕들의 계곡을 찾는 방문객은 우선  비행기를 타고 룩소르에서 내린 다음  거기서 
관광선으로 갈아타고 나일강 서쪽 둑으로 건너온다. 여기서 다시 버스를 타고 15분 정도 가
면 왕들의 계곡에 도착하게 된다.
  그동안 드문드문 보이던 마을들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사탕수수 밭은 어느새  사막으
로 변해 있다. 왕들의 계곡 입구인 골짜기를 통과하는 동안  도로 양쪽의 석회암 절곡을 제
외하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갑자기 잔뜪 쌓아 놓은 노점 시장 한복판에 위치
한 버스 정류장이 나온다. 일단 입구만 지나면 관광객은  노점상의 손에서 벗어나 말끔하게 
단장한 안내판을 따라 투트모시스 3세와 람세스 6세 그리고 바로 그 앞에 있는 투탕카멘의 
묘로 갈 수 있다. 왕들의 계곡에는 60개 이상의 무덤이 있는 걸로 알려져 있지만 그중 관광
객들에게 개방된 무덤은 열두서너 개에 불과하다.
  B.C 1세기 중반에 그리스의 여행가 디오도루스 시쿨러스가 왕들의 계곡을 방문했을 때만 
해도 테베의 사제들로부터 47개의 무덤을 기록한 목록에 대해 들었으나 그중 15개만이 남았
을 뿐 나머지는 보물 사냥꾼들에 의해 모두 파괴당했다. 그로부터 15세기 후인 1739년 영국
인 목사 리처드 포코크가 배를 타고 나일 강을 거슬러 올라 왕들의 계곡을 방문했으나 들어
갈 수 있는 무덤은 9개에 불과했다.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은 1798년 이집트를 침공하면서 과학자들을 데려갔다. 이들은 왕들의 
계곡을 탐사하여 16개의 무덤을 발견한 후 그 중 11개를 발굴했다. 나폴레옹의 병사들이 당
시 이집트를 통치하던 노예 출신 장군들과 싸우고 있는 와중에서 군인도 아닌 책상 물림들
이 무덤을 파악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들의 날치기 조사는 굉장한 성
과였다.
  왕들의 계곡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인 발굴은 이탈리아 출신의 거인 모험가인 조반니 바티
스타 벨초니에 의해 19세기에 이루어졌다. 키가 6피트 7인치나  됐던 벨초니는 유압 기술자 
훈련을 받았음에도 보물을 찾아 이집트로 여행하기 전까지 서커스에서 괴력을 자랑하며  밥
벌이를 했다.
  벨초니는 1815년에서 1819년까지 나일 강을 오르내리며 여러 군데를 발굴했다. 그는 기자
에서 두 번째로 규모가 큰 케프렌의 피라미드와 람세스 대왕이 누비아에 세운 아부 심벨 대
신전에 들어간 최초의 현대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왕들의 계곡 발굴에 집중했다. 거기에  엄
청난 보물이 묻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지식을 늘리는 데보다는 이집트 밖으로 가
져다 팔 수 있는 고대 예술품을 찾는데 관심이 있었다.
  계곡 벽을 깎아서 무덤을 만들 당시 인부들은 작업중에 나온 엄청난 양의 돌 조각을 밖으
로 날라다 버려야 했다. 이때 쌓인 돌 무더기는 몇천 년 동안 그대로 있었다.
 벨초니는 이 돌 무더기를 이정표 삼아 무덤의 위치를 알아냈다. 무덤으로 통하는 입구들은 
대개가 막혀 있거나 유실돼 있었다. 위쪽의 절벽이 무너지면서 입구를 막는 경우도 가끔 있
었지만 계곡 전체를 휩쓸고 지나간 폭우 때 진흙과 모래 심지어는 바위까지 입구에 쌓인 경
우가 훨씬 더 많았다. 수세기가 지나면서 무덤들의 입구는 점차 쓰레기로 메워졌다.  그중에
는 수세기가 아니라 영원히 그 상태로 있어야 하는 무덤도 있으리라.
  벨초니는 한 번에 스무 명 가량의 일꾼들을  고용한 다음 가장 가능성 있는 장소를 골라 
발굴했다. 그러나 막상 무덤을 열어 보면 부장품이 깡그리 약탈당한 경우가 많았다. 그가 발
굴한 무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은 세티의 묘였다. 세티의 무덤  벽에는 세티가 다음 
세상으로 안전하게 여행하기를 기원하는 마법의 주문이 새겨져 있었다. 대문의 서와 서쪽의 
레를 찬미하는 서 명부의 서가 적과의 싸움에서 세티를 도와줄 신들의 모습과 함께 그려져 
있었다. 현실 위의 천정에는 검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밝게  빛나는 이집트의 별무리가 그려
져 있었다. 모든 게 세티가 묻힐 당시처럼 선명했다. 무덤의 화려한 색채에 현혹된 벨초니는 
밀납 모형을 만드는데만 1년을 보냈다. 나중에 그는 이  말납 모형을 토대로 런던에 전시관
을 세웠다. 장안의 화제로 떠오른 이 전시관은 유럽에 최초로 이집트 붐을 조성했다.
  그러나 벨초니는 세티의 무덤에서 불과 1백 야드밖에 떨엊지 않은 곳에 고고학 사상 최대
의 보물이 발견된 투탕카멘의 무덤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벨초니는 뒤를 이어 프랑스의 이집트학자 장프랑스아 샹폴리옹이라는 상형 문자 해독가가 
왕들의 계곡 순례 여행에 나섰다. 그러나 그는 발굴에는 관심이 없었다. 처음 보는 상형  문
자에 감격한 그는 무덤 벽에 새겨진 글자들을 베끼는 데 만족했다.
  수세기 동안 왕들의 계곡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1881년 굉장한 발견이 있기 전까지는 파라
오의 미라가 발견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1870년애로 접어들면서 이집트의 왕과 왕비의 
새겨진 아름다운 골동품들이 룩소르의 골동품 가게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이 희귀한 
물품들은 파산한 이집트가 채권국인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에 의해 통치되던 시기에 시장에 
나오기 시작했다. 이들 유럽 국가는 이집트 정부의 각기 다른 영역을 통제했다. 그중 프랑스
는 유물 관리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집트 유물 관리국은 다소 먼 길을 돌아 이집트학에 이른 오귀스트 마리에트에 의해 설
립되었다.마리에트는 이집트의 유적들을 스케치한 어느 칮척의  편지들을 받아 보다 이집트
에 반한 나머지 혼자서  상형 문자를 공부하다  마침내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안착했다. 
1850년 필사본을 구입하기 위해 이집트로 날아간  그는 책을 구입하는 대신 신성한  아피스 
황소들의 매장지였던 세라페움을 발굴하는데 그 돈을 썼다. 그는 유물이 가득 든 커다란 나
무 상자들을 가지고 프랑스로 돌아갔다. 이때 가져간 유물은  아직도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
돼 있다.
  마리에트의 가장 큰 업적은 이잡투 유물 관리국을 설립한 일이었다. 그는 이 기구를 통해 
실은 자기가 맨 먼저 저지른  약탈 행위를 근절시키고자 했다. 룩소르  상인들이 파는 왕의 
물건들은 전세계의 수집가와 박물관 규레이터들을 매혹시켰다.  마리에트는 투탕카멘보다 3
백 년 뒤에 살았던 헤네토위 여왕의 사자의 서를 구입했다. 다음 세상에서의 부활을 기원하
기 위해 미라와 함께 묻었던 마법 주문집인  이 사자의 서에는 신들의 모습과 다음 세상을 
그린 아름다운 그림들이 문장 사이사이에 삽입돼 있었다. 이집트의  건조한 기후는 이들 파
피루스 종이가 수천 년 뒤에도 거의 원래의 색감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 자체가 
뛰어난 예술품인 헤네토위의 사자의 서는 길이가 거의 1백 피트에 이르렀다.
  그 다음 몇 년 동안 헤네토위 여왕  가문의 왕이나 왕비 왕자 공주들의 소유였던 사자의 
서들이 시장에 쏟아져나왔다. 이 이들  파피루스 외에도 아름다운 보석들이  슬며시 모습을 
드러냈다. 훼손되지 않은 무덤이 발견돼 그 안의 부장품들이  하나씩 팔리고 있는게 분명했
다. 이에 마리에트는 모든 게 흩어지거나 파괴되기 전에  문제의 무덤을 발견해야겠다고 결
심하지만 자신의 폭묘를 완수하지 못한 채 1881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그의 후입자인 가
스통 마스페로는 문제의 무덤 수색을 최우선 과제로 정했다.
  용의자는 계곡 근처에 살고 있던  아브드 엘 라줄 가족에게로 좁혀졌다.  강도 높은 신문 
끝에 그중 한명이 무덤의 위치를 실토했다. 이틀 후 라줄  형제는 마스페로의 조수 에밀 브
뤽슈를 왕들의 계곡이 내려다 보이는 오솔길을 지나 한때 콥트 수도원이 서 있던 데이르엘 
바흐리라는 지역을오 안내했다. 인적 없는 지역에는 굴뚝처럼 생긴 바위들이 나란히 늘어서 
있었다. 거기서 하트셉수트 여왕의 파괴된 신전까지는 1마일밖에 되지  않았다.아니나다를까 
툭 튀어 나온 암반 근처에 8피트에서 10피트 정도되는 직사각형 모양의 갱이 40피트 아래로 
연결돼 있었다.
  라줄 형제와 브뤽슈는 밧줄을 걸기  위해 갱 위에 야자나무를 걸친  후 아래로 내려갔다. 
브뤽슈가 바닥에 난 출입구를 겨우겨우 통과하고 나서 처음으로 본 건 거대한 관이었다. 그 
뒤에 있는 조그만 관 세 개를 지나자 오른쪽에 계곡  안쪽으로 이어지는 복도가 나왔다. 브
뤽슈는 복도를 따라 70피트 이상을 내려갔다. 그러자 우샵티라는  죽은 자와 함께 매장되는 
푸른색 조상들이 수 백개나 있었다.
  복도는 신왕국 왕드르이 미라를 넣은 화려한  관들로 바닥을 거의 도배하다시피 한  사방 
17피트의 방으로 연결되었다. 투탕카멘의 선조들인 18왕조의  아멘호테프 1세와 투트모시스 
1세 투트모시스 2세 투트모시스 3세가 모두 여기 있었다. 이들 외에도 19왕조의 파라오들인 
람세스 1세와 그의 아들 세티와 그의 아들 람세스 대왕이 있었다. 거기서 다시 좀더 안쪽으
로 들어가자 제일 끝에 다른 방들보다 조금 큰 20피트 길이의 방이 나왔다. 여기에는 이 탐
색의 계기가 된 사자의 서의 주인들인 21왕조 왕족들의  관과 미라가 안치돼 있었다.피네젬 
2세와 헤네토위 여왕을 비롯해 존귀한 왕족들이 그  주인공들이었다. 라줄 일가는 18왕조에
서 21왕조에 이르는 4세기 동안의 왕과 여왕들의 유적을 발견했던 것이다.
  박물관의 일개 조수일 뿐인 브뤽슈는 위대한 학자는 아니었지만 형 하인리히의 손에 이끌
려 카이로에서 이집트학 수업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관 위에 쓰여진 카르뉴슈를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지금 역사상 가장 위대한 파라오들 바로 앞에 있음을 깨달았다.  이
집트의 발견 역사상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많은  왕조의 왕들이 어째서 한 무
덤에 묻히게 됐을까?
  투탕카멘이 죽은 지 2세기 후인 20왕조에 이르면 왕들의 계곡에 있는 무덤들은 거의가 약
탈되고 만다. 21왕조기에 왕드르이 계곡을 정밀 조사한 결과 약탈이 대대적으로 자행됐음이 
밝혀졌다. 그래서 고립된 무덤을 보호하기 위해 헛수고를 계속하는 대신 파라오들의 파괴된 
시신을 수습해 다시 싼 다음 나무 표찰을 붙여 새 관에 안치했다. 그리고는 나중에 라줄 일
가가 발견한 공동 묘지로 옮겼다. 원래의 무덤 벽에 급하게 쓰여진 설명과 파라오들의 관과 
금박판에 새겨진 글 속에 이관  날짜와 장소가 자세하게 나와 있었다.  이들 기록을 종합해 
보면 21왕조의 사제들이 선조들의 미라를 보존하기 위해 취한 조치였다는 결론이 나온다.
  사제 왕 피네젬 2세가 자신의 안식처로 골라둔 데이르 엘 바흐리가 가장 안전한 후보지로 
떠올랐다. 이 마지막 이관을 설명한 기록은 데이르 엘 바흐리  무덤의 갱 아래쪽 벽에 까만 
잉크로 쓰여져 있다. 기록에 따르면 세티 1세와 람세스  2세의 시신은 피네젬 2세의 장례식 
날 함께 묻혔다. 그후 이들은 3천 년 동안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그곳에 있었다.
  데이름 엘 바흐리의 경우 그 중요성에 비해 습득물에  대한 기록이 상당히 빈약하다.브뤽
슈는 무덤에서 두 시간을 보내고 난 후 일행의 촉불이 바싺 마른 목제 관들에 옮겨 붙을 수 
있다고 판단하고는 서둘러 무덤을 떠났다.  그후 그는 미라와 장례 물품을  가능한 한 빨리 
카이로로 옮겨야겠다고 생각했다. 근처의 구르나 주민들은 수년 동안 무덤을 약탈해서 생계
를 꾸려 나가고 있었다. 브뤽슈  일행은 눈 깜짝할 새에 무덤의  부장품들을 몽땅 도둑맞을 
수 있음을 알고 나서는 무슨 일부터 시작해야 할지 난감했다.
  무덤에서 발견된 관의 위치를 기록해 두는 것 고사하고 물건들의 원래 장소를 사진에 담
거나 그림으로 그려둘 시간조차 없었다. 단 이틀 만에 관과  궤를 비롯한 장례 물품 전체가 
지상으로 끌어올려졌다. 3백명의 인원이 달라붙어 이 보물들을 나일 강 서쪽 둑으로 날랐다. 
관과 미라 조각상들은 거기서 다시 배에 실려  나일 강 동쪽 둑으로 운반된 다음 카이로로 
가는 박물관의 증기선으로 옮겨졌다. 왕들의  짐을 실은 배가 멀어져 가는  동안 그 소식을 
듣고 나일 강 둑으로 몰려 든 아낙들은 그들의 선조가 왕의 장례 행렬이 지나갈 때  그랬던 
것처럼 구슬프게 통곡하기 시작했다.
  데이르 엘 바흐리의 암굴묘는 왕들의 계곡의 발굴 작업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 암굴
묘의 발견은무덤 도굴이 고대 이집트에서  얼마나 광범위하게 진행됐는지 나아가  무덤들에 
대한 보호가 얼마나 미흡했는지를 보여주었다. 데이르 엘  바흐리의 성과물인 투트모시스 1
세와 2세의 미라는 카이로 박물관에 소장되었다. 이들의 원래 무덤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지
만 여러 정황으로 볼 때  도굴된게 확실했다.좋은 소식도 있었다. 암굴묘에 안치돼 있던 왕
의 미라들 외에도 투트모시스 4세와 아멘호테프 3세 메르넵타와 같은 중요한 파라오들이 아
직도 많이 남아 있었다. 이들의 무덤은 도굴과 파괴를 피했을 수도 있었다.
  1898년 빅토르 로레가 아멘호테프 3세와 다른 왕들의 미라가 보관돼 있던 두 번째 암굴묘
를 발견하자 당시까지만 해도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투탕카멘에게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했
다. 투탕카멘이 죽은 지 1천 년 후에 이집트를  지배했던 클레오파트라에게 그에 대한 질문
을 했다면 대답 대신 멍한 표정을 지었으리라.
  피트리가 아마르나에서 올린 성과는 이집트학자들 사이에 아마르나에 대한 열풍을 몰고왔
을 뿐만 아니라 투탕카멘이 종교 혁명의 일부였음을 보여주었다.  이와 동시에 왕들의 계곡
에서도 수많은 왕의 무덤들 -물론 모두 약탈된  상태였다- 이 발견되었지만 투탕카멘의 무
덤은 없었다. 신앙심 깊은 사제들이  도굴된 무덤들에서 수습한 미라들  중에도 투탕카멘의 
미라는 없었다. 그렇다면 투탕카멘의 미라가 왕들의 계곡 어딘가에서  편히 쉬고 있을 가능
성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그때부터 투탕카멘을 찾는  탐색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
다.
  이집트에서 발굴을 하려면 유물 관리국의 허가를 얻어야 했지만 금세기 초반에는  허가증
을 얻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른바 면허에는 대개 발굴자가 팔 수 있는 지역과 기간이 
명기돼 있었다. 그 기간 동안 발굴자 외의 다른 사람은 해당 지역에 일체 들어갈 수 없었다. 
발굴된 유물들은 유물 관리구고가 발굴자가 나눠 가졌다. 어느 쪽에서 보나 이윤이 남는 장
사였다. 기금이 풍족할 리가 없는 유물 관리국은 돈 한 푼 들이지 않고도 박물관에 새 물건
들을 들여 놓을 수 있었다. 발굴자 역시 지식이든 유물이든 자기가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었
다. 발굴자 역시 지식이든 유물이든 자기가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었다.  그중에는 피트리처
럼 지식을 얻기 위해 오는 사람도 간혹 있었다. 피트리는  자기 몫으로 할당된 기금을 받으
면서 학술 전시회를 여는 데 필요하다 싶은 물건들을 추려냈다.  말이 나온 김에 하는 말이
지만 이 학술 전시회는 나중에  런던 대학의 피트리 박물관으로 발전했다.  그는 추리고 난 
나머지 유물들을 발굴 기금을 대준 후원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다른 발굴자들은 주로 자신의 소장품 목록에 포함시킬 물건을 찾거나 사냥이 주는 짜릿한 
기분을 느끼기 위해 왔다. 부유한 미국인 변호사이자 사업가인 시어도어 데이비스는 사냥을 
위해 온 경우였다. 데이비스는 피아노와 크리스털 샹들이에를 갖춘 베두인이라는 자기 배에
서 생활하며 이집트에서 겨울을 났다.  기분을 전환할 거리를 찾던 중  그는 발굴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허가증을 얻으려면 그와 함께 일할 전문가가 필요했다. 여기서 잠시  플린
더스 피트리 밑에서 처음으로 발굴 일을 시작했던 하워드 카터 얘기로 들어가 보자. 
  카터를 이집트학으로 이끈 동인은 그의 타고난 예술가적 기질이었다. 그의 부친은 부유한 
후원자들을 위해 동물 그림을 그리며 생계를 유지했다. 그의 자식들 중 카터와 막내 동생이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았다. 카터의 부친은 몇 년 동안 애머스트 일가의 초상화 화가로 일
한 적이 있었다. 덕분에 어린 카터는 아버지를 따라 애머스트가 이집트 유물 수집품을 보관
하는 디드링턴 홀에 자주 갔다.
  당시 애머스트는 이집트의 유물을 발굴 기록하기 위해 형성된 영국인들의 사교 모임인 이
집트 탐험 기금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그 무렵 이 기금의 지원을 받고  있던 발굴자 중 
한 명이 아마르나에서 그리 멀지 않은 베니 하산의 무덤 벽화 작업을 도울 화가를 급히  찾
고 있었다. 물론 화가라고는 하지만 높은 교육을 받은 사람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 그런  사
람은 비용만 많이 들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정규 교육이라고는 거의 받아  보지 못한 어린 
하워드 카터가 이 조건에 딱 들어맞았다.
  카터는 애머스트 부인의 추천에 따라 알렉산드리아행 증기선에 올랐다. 카터는 금세 능력
뿐만 아니라 성실성까지 갖춘 인물로 인정받았다. 그는 탐험 막사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단
순한 환경에 잘 적응했다. 얼마 후 그는 피트리에게서 발굴  기술의 기초를 배우기 위해 아
마르나로 보내졌다. 
  이 어린 탐험가에 대해 잘 몰랐던 피트리는 이렇게 논평했다.

  ....하워드 카터가 처음 내게 왔을 때는 열일곱 살짜리 소년이었다. 당시 그는 타이슨 애머
스트가 돈을 대는 발굴단에서 일하고 있었다.그의 관심은 회화와 자연사였다. 나는 그가  능
력이 있으면 얼마나 있으랴 싶었다. 그를 멀찌감치서 지켜보기 위해 나는 그에게 신전 터를 
치우는 일을 맡겼다. 그랬더니 그는  왕비의 깨진 조각상과 토르소 그리고  거기서 나온 돌 
조각들을 발견했다.

  두 사람은 굳이 표현하자면 다들 지나오긴 했으나 아무도 그 중요성을 깨닫지 못한 역사
의 갈림길에서 서로 엇갈렸던 셈이다. 피트리는 아직 젊었지만  그 당시의 이집트에서는 가
장 솜씨가 좋은 발굴자였다. 뿐만 아니라 투탕카멘의 초기 삶에 대한 단서를 벗긴 장본인이
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투탕카멘의 초기 삶에 대한 단서를 벗긴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로부
터 4반세기 후 카터는 투탕카멘의 묘를  발견해 이집트학자들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되었
다. 그러나 피트리는 물론 카터까지도 그런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어쩌면 아마르나 신
전 터에서 일하면서 투탕카멘의 이름이 새겨진 물건들을 다루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 당시
의 카터는 투탕카멘이 누군지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카터는 다른 발굴 작업에도 참여해 계속해서 고고학 기술을 배워 나갔다. 그러던 중 스물 
여섯 살 되던 해인 1899년 마스페로에 의해 유물 관리국의 남부 이집트 수석 감독관으로 임
명되었다. 카터는 정력적이며 성실했을 뿐만  아니라 이집트 유물을 보존하는  문제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임무를 파괴 행위와 절도를  막기 위해 무덤 입구에 철
문을 설치하는 한편 관광객들이 벽화를 잘 볼 수 있게  무덤 내부에 전구를 다는 일이었다. 
이밖에 신전 복구와 약탈 방지도 그의 임무였다. 카터는 특히 마지막 임무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그가 기록한 사건 일지는 셜록 홈스를 방불케 할 정도였다.
  당시 카터는 관광객들을 위해 아멘호테프 2세의 무덤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왕의 미라
는 원래의 석관 안으로 옮기는 한편 일전에 로레가 발견한 물건들을 진열했다. 그리고는 마
지막으로 철문을 설치했다. 밤에는 철문을 닫아 무덤을 봉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철저한 
경계에도 불구하고 1901년 11월 20일  누군가가 무덤에 침입해서 아멘호테프 2세의  미라를 
훼손시켜 놓고 갔다. 게다가 소장품의 일부도 도난당했다. 당시의 사건을 기록한 카터의  보
고서에는 범인들을 반드시 잡고야 말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나타나 있다.

  1901년 11월 28일 다음날 나는 아멘호테프 2세의 무덤에 다시 갔다.   아까 검사관으로부
터 자물쇠의 이음매 부분에 납 조각이 박혀 있어서 겉으로 괜찮은 것처럼 보였다는 보고서
를 받았다. 나는 문 밑에서 다량의 납 조각과 나무  진으로 보이는 조그만 결정체를 발견했
다. 자물쇠의 열쇠 구멍 크기와 일치하는 이 결정체는 내게 약간의 단서를 제공해주었다. 왜
냐하면 11월 11일 누군가가 무덤에 침입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 경우에도 지레로 자물
쇠를 연 다음 열쇠 구멍에 나무 진을 채워 넣어 멀쩡해 보이게 한 수법이 그때와 비슷하다.
  그 전부터 나는 이마두아 무더므이 강력한 용의자인 모하메드 아브드 엘 라주르이 동태를 
틈나는 대로 지켜보았다. 그는 악명 높은 무덤 도굴꾼으로 집도 아멘호테프 2세의 무덤에서 
아주 가깝다.
  두 무덤에 찍힌 발자국을 세밀하게 비교해 본 결과 매우  닮았다는 점을 발견했다. 두 경
우 다 맨발로 한 사람의 발자국이 틀림없다. 나는 좀더  자세히 조사하기 위해 사진을 찍어 
발자국 크기를 재보았다. 
  그러는 동안 추적꾼이 발자국을 쫓아 비반 엘 몰루크에서 구르나 마을로 거기서 다시 솔
레만과 모하메드 아브드 엘 라줄의 집까지 추적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체포됐다.
  1901년 11월 30일 마르카즈에 있는 검사관을 찾아가 모하메드 아브드 엘 라줄의 발자국을 
조사해 달라고 요청했다. 사람들은 내가 찍은 사진과  아멘호테프 2세와 아마두아의 무덤에 
찍혀 있던 발자국이 똑같다는 데 동의했다. 두 발자국의  크기를 재보니 밀리미터까지 일치
했다.

 데이비스가 발굴에 관심이 있다는 소식을  들은 카터는 왕들이 계솟에서의 발굴  허가증을 
얻어 줄 수 있다고 제안했다. 당시 카터는 계곡에서의 발굴  허가증을 얻어줄 수 있다고 제
안했다. 당시 카터는 발굴 작업을 총괄하는 수석 감시관이었다. 발굴 작업 첫 해 그들은  쿠
크모시스 4세의 무덤을 발견했다. 그러나 아름다운 청색 우샵티상과 전투 장면을 그린 파라
오의 전차를 비롯한 부장품 대부분은 이미 고대의 도둑들이  가져가 버린 뒤였다. 데이비스
는 이 일로 몹시 의기양양해졌다. 딱히 이 일이 아니더라도  두 사람의 관계는 좋은 편이었
다.
  그러나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1904년 카터가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14마일 떨어진 사카
라의 유적을 관리하가 위해 북쪽으로 옮겨 갔기 때문이다.  거기서 그는 불미스러운 사건에 
휘말려 결국은 유물 관리국 일을 그만두게 된다.
  어느 날 안하무인의 프랑스 관광객들이  입장권도 없이 무덤에 들어가려고  했다. 그들은 
제지하는 경비원을 밀치며 무덤 앞에서 버텼다. 잠시 후 카터가 불려 왔다. 프랑스인들이 이
집트인 경비원들을 공격하자 카터는 경비원들에게 막으라고  지시했다. 당연히 난투가 벌어
졌다. 프랑스인들은 이집트인 경비원이 자기들을 쳤다며 몹시 분개했다. 그러나 카터는 경비
원의 행동을 옹호하며 프랑스인들을 처벌하려고 했다. 식민지 이집트에서 내지인이 유럽 가
느이 외교 문제로까지 비화되면서 카터는  사과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물론 그는  거절했다. 
마스페로는 카퍼 편이었으나 그를 징계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이에 격분한 카터는 그 길
로 사표를 내던지고는 다시는 유물 관리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한편 데이비스는 카터의 후임으로 스물 두 살의 에드워드 에어턴을 고용해 계곡에서 발굴 
작업을 계속했다. 외교관의 아들인 에어턴은 중국에서 태어나 열아홉  살 때 이집트로 건너
와 피트리의 발굴단에 합류한 인물이었다. 피트리의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철
저한 훈련을 받았다. 그는 투탕카멘의 장군이었다가 나중에 왕이  된 호렘헵의 무덤에 대한 
최초의 단서인 투탕카멘의 이름이 새겨진 채색 도기 컵을 발견했다. 이 컵은 투탕카멘과 왕
들의 계곡을 연결해준 최초의 고리였다.
  여기에 흥분한 에어턴과 데이비스는 계속해서 탐색 작업을 벌이다 1907년 고대의 음식 찌
꺼기가 들어 있는 조그만 구덩이를 발견한다. 구덩이에서는 음식  외에도 컵과 포도주 단지 
화환 투탕카멘의 이름이 찍힌 미라 싸개가 나왔다. 이로써  투탕카멘이 왕들의 계곡에 묻혀 
있다는 게 확실해졌지만 데이비스는 자기가  발견한 물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이 물건들이 투탕카멘의  도굴된 무덤에서 나온 약탈품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은 투탕카멘의 가족과 친지들이 그의 장례식 날 먹고 남긴 음식 찌꺼기와 그의 미
라를 제작하고 남은 재료였다.
  데이비스는 그로부터 2년 뒤인 1909년 우샵티상과 투탕카멘의 이름이 새겨진 금박 조각이 
부장돼 있는 미완성의 조그만 무덤을 발견하고는 투탕카멘의 도굴된 무덤을 발견했다고  단
정지었다.
  데이비스는 자기가 발견한 내용을 호화로운  장정본으로 엮어 매년 출간했다.  어느 책을 
막론하고 권말에는 전문적인 이집트학자의 해설이 첨부된 유물 목록이 실렸다. 개중에는 하
워드 카터가 수채화 물감으로 그린 삽화가 수록된 책들도 있었다. 당시 실직 상태였던 카터
는 기꺼운 마음으로 이 일을  했다. 투탕카멘의 유물을 다룬 책  서문에서 데이비스는 이제 
왕들의 계곡은 더 이상 팔 데가 없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얼마 후 그는 카터에게 투탕카멘 
발굴의 문을 열어주고는 왕들의 계곡 발굴 허가증을 포기하게 된다.
  한편 데이비스가 왕들의 계곡에서 일하는 동안 카나본 백작인 조지 에드워드 스태넙 몰리
녹스 허버트는 계곡 바로 옆 지역의 발굴에 착수했다.  부유한 귀족이자 수집가였던 카나본
은 경주마 사유과 자동차 경주에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다름 아닌 그 독특
한 취미 때문에 1903년 세계 최초라 할 만한 치명적인 자동차 사고를 당하게 된다. 그는 후
유증도 치료할 겸 이집트를 여행해 보라는  충고를 계기로 고고학에 깊이 빠져들기  시작했
다. 데이비스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재미삼아 발굴을 해보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사
고 때 폐를 다쳐 몸이 약해지는 바람에 발굴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는 없었지만 그는 
자기도 뭔가 일을 하고 싶어했다. 그의 발굴단원이었던 한  화가는 이집트학에 대한 카나본
의 진한 애정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병약해 보이는 그의 안색은 얼굴의 수두 자국으로 인해 더욱  더 안 좋게 보였다. 그러나 
이집트학에 대해 얘기 할 때면 초점없이 멍하던  그의 두 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열정으로 
이글거렸다.

  카나본이 마스페로에게 발굴 허가를 내달라고 신청하자 마스페로는 돈이 없어 쩔쩔  매는 
마터를 도울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는 카나본에게 카터를 추천했다. 그리하여  1907년 
그와 카터는 동업 계약을 체결했다. 즉 카나본이 발굴 기금을 대고 카터는 현장에서 뛰기로 
했다.
  둘은 기묘한 팀이었다. 막대한 부 속에서 자란 카나본 경은 사교성이 풍부한 아주 매력적
인 인물이었다. 그는 대부분의 부자들처럼 느긋한 성격에 별난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영매가 나와서 수정 구슬로 점을 치는 모임을 본인이 직접 주재하거나 아니면 다른 사
람이 주재하는 모임에 참석했다. 강신회도 그런 모임의 연장이었다. 한 마디로 그는  인생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반면 중산층 출신인 카터는 삶의 여유와는 거리가 먼 인물로 모든 사물을 흑 아니면 백으
로 보았다. 그는 성실하고 근면했지만 사교성이라고는 약에 쓰려고  해도 없는 무뚝뚝한 독
심남이었다. 이처럼 둘은 어울리지 않는 팀이었지만 두 사람의 우정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물론 주인과 하인의 관계였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아끼고 감싸주었다.
  카터와 카나본이 같이 일하기로 결정한 바로 그 해에 데이비스와 에어턴 팀은 왕의 관과 
미라가 부장된 또다른 무덤을 발견했다. 데이비스는 발굴 작업 때 생긴 먼지를 채 걷어내기
도 전에 미라의 주인이 투탕카멘의 할머니인 티이 왕비라고 선언하려 했다. 새로 부임한 룰
솔 유물 관리국의 수석 감독관인 아서 위갤은 아케나텐의  미라라고 주장했다. 조르주 다레
시라는 프랑스링 이집트학자는 미라의 주인이 투탕카멘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결국은 그
들 모두가 틀렸음이 밝혀졌다. 미라는 투탕카멘의 형인 스멘카레였다.

    55호 고분은 누구의 것인가?
  지금까지 발견된 왕의 미라 중에서 왕들의  계곡에 있는 55호 고분에서 발견된  미라만큼 
의견이 분분한 경우는 없었다. 람세스 9세의 묘 옆에  위치한 이 무덤은 55번째로 발견됐다
고 해서 KV55 고분으로 알려져 있다. 데이비스와 에어턴이 쓰레기를 치우자 암반부로 이어
지는 계단이 나왔다. 계단을 내려가자 거대한  석회암 벽이 서 있는 복도가 나왔다.  첫눈에 
봐도 전통적인 무덤 건축양식 아니었다. 옛날에는 틔어 있던 무덤을 벽을 세워 재봉인 한게 
틀림없었다.
  벽을 치우자 도굴꾼들을 막기 위해 거의 천정까지 석회암 조각을 채워 놓은 제 2의  복도
가 나왔다. 그러나 천정 근처이 뻥 꿇린 공간이 이런  노력이 아무런 효과가 없었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이 무덤 역시 약탈자들의 손을 벗어날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무덤 개막식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는 가스통 마스페로와 아서 위갤, 이집트학자들과 일한 
경험이 있는 화가 조지프 런던 스미스 그의 아내 코리나도 있었다. 그러나 참석자들 전원이 
1907년 1월의 그날 일어난 일에 대해 아직도 설명을  유보하고 있다.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
기 때문이다.
  제일 먼저 무덤 안으로 들어간 사람은 조지프 린던 스미스였다. 그를 적극 추천한 사람은 
마스페로였다. 체구가 작아서 비좁은 통로를 헤집고 들어가기에는 그가 가장 적격이었기 때
문이다. 돌 조각을 헤치며 조금씩 전진하던 스미스는 금박을 입힌 거대한 목제 문과 마주쳤
다. 스미스는 문에 새겨진 글자들을 대충 옮겨 그린 후 일행에게로 돌아와 마스페로에게 보
여주었다.마스페로가 글자들을 판독한 결과 아멘호테프 3세의  부인이자 아케나텐의 어머니
인 티이 왕비의 이름이 나왔다. 3천 년 만에 처음으로 부드러운 바람이 무덤 안으로 들어가
자 문에 입혀져 있던 금박이 우수수 벗겨져 내렸다. 문이 너무 약해서 손을 댈 수가 없었기 
때문에 스미스는 기어서 문 옆을 통과한 다음 계속해서 무덤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무덤은 미완성 상태였다. 아무 칠도 안 돼 있는 대충 만든 방이 현실로 쓰이고 있었다. 방 
바닥과 벽에는 나무 판자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방 바닥과 벽에는 나무 판자들이 어
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스미스는 벽을 파서 만든 시렁에서 네 점의 아름다운 설화석고 항아
리를 발견했다. 정교하게 조각된 여자 머리 모양의 뚜껑이 눈길을 끄는 항아리들이었다.
  그러나 허섭쓰레기 가운데서 스미스의 주의를 끈 건 심하게 훼손당했지만 여전히  아름다
운 관이었다. 관은 뚜껑이 살짝 열린 체 한 쪽 벽에 붙어 있었다. 방의 다른 물건들과 마찬
가지로 이 관 역시 천정 틈을 뚫고 들어온 빗물 때문에 상당히 공욕을 치른 듯했다. 한때는 
나무로 만든 관대위에 얌전히 올려져 있었을 테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큰 피해를 입은 듯했
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천정에서 떨어져 내린 바위  덩어리가 관의 상태를 더욱 악화시켜 
놓았다.
  관 표면에 박아 넣은 수천 개의 납유리와 보석들이 매의 날개 모양을 이루며 보호대 구실
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관 자체보다 더욱 인상적인 건 그 안에 누워 있는 시신이었다. 전혀 
손상되지 않은 시신의 머리 위에는 파라오의 권력의 상징인 황금 콘도르가 얹혀져 있었다.
  스미스가 무덤 안에 얼마나 오래 머물러 있었는지는 재보지 않았지만 밖에서 그가 나오기
만을 기다리던 일행에게는 그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그는 최선
을 다해 자기가 본 내용을 설명했다. 마스페로는 몇 가지 질문을 한  후 비 피해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조사하는 한편 부장품들을 스케치해 오라며 그를 다시 돌려 보냈다.
  스미스는 관을 스케치한 다음 다시 돌아와 두 번째 보고를  했다. 다들 무덤 안으로 들어
가고 싶어 안달을 했지만 인부들이 통로를 치운 후 마스페로의 무거운 체중을 견딜 만한 판
자를 깔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데이비스가 집사를 보내 나일  강에 있는 그의 대형 요트에
서 피크닉 바구니를 가져 오게 했다. 일행은 점심을 들면서 그날의 발견에 대해 이야기했다. 
잔뜩 흥분한 데이비스는 자기들이 발견한 게 티이 왕비의  무덤과 미라라고 확신했다. 점심 
식사가 끝나자 일행은 마침내 무덤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판벽널 두 개를 제외하고는 모조리 붕괴돼 있었지만 모든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한때 티
이 왕비의 관을 에워쌌던 성골곽의 잔해가 확실했다. 티이의  성골곽을 만든 사람은 그녀의 
아들 아케나텐으로 어머니와 함께 아텐에게 예를  올리고 있는 모습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
다. 매장 후 누군가가 성골곽에서 아케나텐의 모습을 짓이겨  버렸지만 티이 왕비의 모습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벽을  파서 만든 직사각형  모양의 시렁에 있던  설화석고 항아리들은  
미라의 장기를 보관하는 용기였다. 
  관 뚜껑 상택 워낙 안 좋았기 때문에  일행은 관리국원이 와서 운반이 가능할 수 있도록 
보강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뿐만 아니라 무덤 밖으로 물건들을 옮기기 전에 원래의 위치
를 카메라에 담아 두어야 했다. 며칠이 지나 카이로에서 관리국원과 사진사가 도착했다.  미
라를 덮고 있던 싸개를 풀던 날 참석자들 전원은 그 사건이 갖는 역사적 의미에 가슴이  설
레였다. 3천 년 만에 처음으로 그 유명한 이집트 여왕의 얼굴을 목격하는 사람들이 될 터였
기 때문이다.
  마스페로와 위갤, 에어턴, 조지프 린던 스미스와 그의  부인 코리나, 시어도어 데이비스와 
그의 동료 앤드루스 여사 등이 방 안을 꽉 채웠다.  그밖에 데이비스의 화가로 일하는 해럴
드 존스도 있었다.유물 관리국의 아서 퀴벨은 나중에 도착했다. 일행이 숙연한 표정을  지으
며 관 주위로 모여들자 관리국원이 드디어 뚜껑을 열었다.  마스페로가 조지프 린던 스미스
에게 싸개를 벗겨 달라고 요청했다. 유독 스미스를 지목한 이유는 그가 이른바 예술가의 부
드러운 손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편지지만한 크기의 얇은 황금판들이 목부터 발까지 미라를 감싸고 있었다. 황금의 변색되
지 않는 성질 때문에 고대 이집트인들은 죽은 자의 영생 불멸을 기원하며 미라를 황금으로 
쌌다. 스미스는 미라에서 걷어낸 황금판을 마스페로에게 건넸다. 마스페로가 꼼꼼히  살펴본 
결과 총 열두 개의 황금판에는 아무것도 새겨져 있지 않았다.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미라는 왕가의 여인들 대부분이 그렇듯 왼쪽 팔을 가슴 위에 얹은 
채 오른쪽 팔은 옆구리에 붙이고 있었다. 양쪽 손목에는 각각  세 개의 황금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이로써 데이비스는 티이 왕비라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확실한 증거를 확
보한 셈이었다. 마스페로가 스미스에게 목과 흉곽 부분의 싸개밑에  가슴 장식이 있는지 만
져 보라고 요청했다. 스미스가 조심스럽게 작업을 진행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일행은 공포 
영화에나 나올 법한 장면과 마주쳤다.
 
  그러나 내 손이 미라의 피부에 닿기가 무섭게 미라는 뼈만  남긴 채 재로 변하고 말았다. 
이제 시신이라고 해봐야 먼지 더미와  말라빠진 살점이 붙은 뼛조각이  전부였다. 아마포가 
담뱃재처럼 바스라진 원인은 무덤에 들어온  물 때문이었다. 나는 여기저기  더듬으며 황금 
장식이 달린 목걸이와 상감 세송을 한 브로치 황금과 수많은 구슬로 장식한 연꽃들을 발견
했다.
  55호 고분에서 발견된 유물들의 내용은 사람들에게  궁금증을 자아냈다. 티이와 아케나텐 
스멘카레의 물건들과 대부분의 이집트학자들이 키야의 소유였다고 믿고 있는 항아리가 한꺼
번에 발견됐기 때문이다. 투탕카멘 가족의 물건들이 어떻게 해서 한곳에 모여 있게 됐을까?
여러 가지 추측 가운데 아마르나의 무덤들이 도굴당한 후 어느 충실한 하인이 남아 있는 물
건들을 모아 테베로 가져온 후 55호 고분 땅굴에 다시 묻었으리라는 가정이 제일 신빙성이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이집트학자들은 55호 고분의 시신이 투탕카멘의 형인 스멘카레의 것
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투탕카멘은 여전히 행방불명 상태였다.
  시어도어 데이비스가 왕들이 계곡 발굴 허가권을 포기하자 카터와 카나본이 이를 넘겨 받
았다. 두 사람은 이른바 체계적이고 철저한 탐색 작업을 벌여 나가기 지삭했지만 제 1차 세
계대전의 발발로 1917년 후반까지 작업이 중단되었다.
  카터는 미발견된 무덤이 있을 1차 후보지로 메르넵타와 람세스 2세 람세스 6세의 묘가 형
성하는 삼각형 지형을 지목했다. 왕들의  계곡 중에서 발굴이 덜 된  곳은 여기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인부들이 수천 개나 되는 쓰레기 바구니를 비우는 동안 카터는 그 유명한 람세스 
6세의 무덤 아래쪽 지역에서 일했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 무덤을 건축하면서 지어졌을 고
대 일꾼들의 오두막이 발견되었다. 작업을 계속하려면 이들 오두막을 제거해야 했지만 그렇
게 되면 가장 유명한 관광지의 하나인 람세스 6세의 무덤 입구를 막을 가능성이 컸다. 그래
서 카터는 관광객의 발길이 뜸한 계곡의 다른 장소로 옮겨 작업을 계속했다.
  카터가 계곡을 샅샅이 뒤지는 사이에 어느덧 5년이 흘러갔다. 카나본은 계곡의 발굴은 끝
났다는 데이비스의 의견에 동의하기에 이르렀다. 카나본과 카터 사이에 형성된 의리 때문에 
1922년 하이클리어 성으로 카터를 불러 발굴을 끝내기로 했다는 결심을 알리기가  카나본으
로서는 무척 힘들었다. 아무런 성과없이 몇 년을 허비한 터라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을 테지
만 카터는 아직 포기할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그는 대안을 제시했다. 카터는 자기가  경비
를 대는 조건으로 한 계절만 더 발굴을 하자며 카나본을  설득했다. 대신 발굴 되는 유물은 
모두 카나본에게 넘기겠다고 했다. 빈털털이인 카터의 대담한 제안에 감동받은 카나본은 한 
계절만 더 비용을 대기로 결정했다.
  카터가 예의 그 삼각형 지역으로 돌아가 오두막을 제거하기 시작한 건 1922년 11월이 돼
서였다. 11월 4일 인부 중 한 명이 계곡의 암반층을 깎아 만든 계단을 발견했다. 근  이틀에 
걸쳐 주변을 치우고 나자 완전한 모습의 층계가 드러났다.
  11월 5일 새벽 열두 번째 계단이  끝나면서 왕의 무덤임을 뜻하는 인장이 선명하게  찎힌 
출입구 윗부분이 드러났다. 카터는 왕의 무덤을 발견했다는 건 알았지만 어떤 왕인지까지는 
몰랐다. 카터는 출입구 위쪽에 뚫린 작은 구멍을 통해 도굴꾼들을 막기 위해 앞에다 쓰레기
를 쌓아 막은 회칠한 문 뒤에 나 있는 복도를 볼수 있었다. 어쩌면 무덤은 무사할지도 몰랐
다. 카터를 성가시게 했던 것이 폭이  6피트밖에 된지 않는 비좁은 계단이었다.다른  왕릉의 
입구들은 보통 이보다 좀더 넓었다. 가까스로 흥분을 달랜  카터는 모래와 쓰레기로 계단을 
덯은 후 영국에 있는 자신의 후원자 카나본 경에게 전보를 쳤다.

  마침내 계곡에서 굉장한 걸 발견했습니다. 인장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굉장한 무덤입니다. 
경이 도착하실 때까지 다시 덮어 두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카터는 친구를 위해 근 한 달을 기다렸다. 카나본은 11월 마지막 주에 이집트에 도착했다. 
마침내 무덤을 여는 데 필요한 모든 준비가 갖춰졌다. 다시 계단을 치우자 이번에는 봉인된 
문 아래쪽에서 투탕카멘의 카르투슈가 나왔다. 그러나 막상 문이  열리자 쓰레기 더미 사이
로 고대의 도굴꾼들이 뚫어 놓은  게 거의 확실한 비좁은 통로가  보였다. 이전에 누군가가 
무덤에 들어간 게 분명했다.
  아래로 내려가는 30피트의 길이의 통로를 치우는 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 석회암 더미 사
이로 석화석고 항아리와 도자기 인부들이  도구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일행은 마침내 
두 번째 봉문에 다다랐다. 이번에는 누군가가 문을 열었다가  다시 봉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었다. 카터는 촛불을 집어 넣어 안의 분위기를 살피기 위해  복도 왼쪽 모퉁이 위에도 조
그만 구멍을 뚫었다. 뜨거운 공기 때문인지 처음에는 촛불이  불안하게 흔들렸지만 곧 이어 
카터는 굉장한 물건들을 목격했다.
  카터와 카나본이 구멍을 통해 들여다 본 방은 투탕카멘이 다음 세상에서 사용하게 될 소
지품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륜 전차와  조각상, 장기판, 아마포, 보석, 침대, 잠자는  의
자, 걸상, 심지어는 왕관까지 없는게 없었다. 물건들이 거의  훼손되지 않은 걸로 보아 고대
의 도굴꾼들은 현장에서 잡혔거나 중행랑을 쳤을 게 틀림없었다.  무덤은 거의 손대지 않은 
상태였다.
  미지의 파라오 투탕카멘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낼 모양이었다. 카터가 이 무덤을 발견했을 
무렵 고대 이집트 역사를 다룬 유명한  저서 두 권이 나와 있었다. 둘  다 피트리의 미국인 
동료 제임스 헨리 브레스티드가 쓴  책이었다. 약사가 되는 교육을  받았지만 브레스티드는 
이집트학이 약을 조제하는 일보다 훨씬  재미있음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는  상형 문자를 
공부하러 독일로 떠났다. 이집트학에 관한  한 유럽인들이 미국인들보다 한참  앞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브레스티드는 위대한 문헌학자인 아돌프 에르만 밑에서 공부하면서 미국인으로
서는 처음으로 이집트학 박사 학위를 땄다. 피트리가 탐험가였던  데 비해 브레스티드는 문
헌학자였다. 둘 다 이집트 역사의 그림을 완성하는 데 관심이  많았지만 둘은 다른 접근 방
식을 취했다. 피트리는 새로운 자료를 발견하고자 했다. 반면 브레스티드는 그 자료를  해석
하고자 했다. 금세기로의 전환기에 브레스티드는 고대 이집트의 모든 역사 기록을 기재하기 
위한 방대한 작업에 착수했다. 근는 11년 동안 나일 강을  오르내리며 신전과 무덤 벽에 있
는 그자들을 해석했다. 그 때문에 건강을 해친 적도 많았다. 1906년 11월 14일자 그의  일기
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우리는 아침 6시에 일을 시작해 하루 해가 지고 나서야 일을 마친다. 어제는 맹렬한 태양
이 위세를 떨치는 가운데 별화에 새겨진 내용을 베끼며  온종일 사다리 위에서 보냈다.오늘 
아침에 일어나 보니 한쪽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햇빛이 어른거리는 벽위에서 작업할 경우
에는 색안경을 끼고도 일을 하기가 어렵다.

  이러한 철저한 조사 작업 후 브레스티드는  이집트의 고대 기록이라는 다섯 권짜리  책을 
출간했다. 그러나 그는 투탕카멘의 통치기에서는  단 한 개의 기념물밖에 발견하지  못했다. 
다름 아니 투탕카멘의 누비아 총독이었던 후이의 무덤이었다.  나중에 브레스티드가 6백 페
이지에 달하는 이집트의 역사를 집필했을 때 투탕카멘에 대한 내용은 단 한 페이지도 채 안
됐다. 더 이상 설명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카터는 그 빠진 역사를 채우고 싶었다. 그뿐이
었다.
  투탕카멘의 무덤 발굴이 진행되는 동안 이집트학자들이 오랫동안 기다렸던 정보는 나오지 
않았다.호화로운 물건들이 발견되었지만 왕의 부모가 누군지 나아가 그의 짧은 통치기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려줄 단서는 어디에도 없었다. 전실에서 파피루스 상자가 발견되
자 모두들 흥분했지만 자세히 조사해 본 결과 수세기를 지나 오는 동안 노랗게 변색된 아마
포 뭉치임이 밝혀졌다. 결국 투탕카멘은 발견자들의 손아귀를 빠져 나가고 말았다.
  카터와 카나본의 반응은 서로 무척 달랐다. 수집가인 카나본은 유물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고고학자로서 그의 관심은 투탕카멘의 감춰진 역사를 발견하는데 있었다.
  카터는 투탕카멘이 후두부 가격으로 인해 고통을 겼었을 수도 있었다는 점을 까맣게 모르
고 있었다. 물론 음모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러나 75년이  지난 
지금도 투탕카멘의 짧은 생애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려줄 단서 즉 그의 죽음과 관
력됐을 단서를 찾기 위해 우리는 여전히 그의 무덤에 주목하고 있다.

    황금 성골곽
  보석은 물론 화려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무덤에서 발견된  가장 감동적인 물건은 한때 
투탕카멘의 조상이 안치됐던 황금으로 뒤덮인 조그만 목제  성골곽이었다. 높이는 1피트 반
밖에 안 됐지만 모양은 실물과 똑같았다.
  카터가 이 미니 성골곽이 문을 열자 바닥에 옴폭 들어간 두 개의 조그만 샌들 자국이  나 
있었다. 한때 조각상이 서 있던 자리였지만 고대의 도둑들이 훔쳐가 버린 모양이었다.성골곽 
외벽에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투탕카멘의 모습이 총  18장면으로 새겨져 있다. 활로 
습지의 새를 사냥하거나 꽃을 받거나 향유를 바르거나 간에 투탕카멘 옆에는 늘 안케센아멘
이 있다. 그녀는 투탕카멘에게 꽃을 갖다주거나 목에다 목걸이를 매주고 있다. 그녀는  투탕
카멘에게 꽃을 갖다주거나 목에다 목걸이를 매주고 있다. 투탕카멘이 사냥하는 동안 안케센
아멘은 그의 무릎에 앉아 다음에  쏠 화살을 들고 있다. 투탕카멘  왕이 신부 안케센아멘의 
손에 향수를 붓는 장면도 있다. 이는 공방에서 제작된 규격화된 장면들과는 거리가 멀다. 다
름 아닌 서로에게 헌신적일 뿐만 아니라 서로에게 싶이 빠진  젊은 부부의 모습이다. 두 사
람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나이에 결혼했지만 크면서 둘 사이의 애정은 아주 깊게 발전했
다. 성골곽에 새겨진 장면들은 두 사람이 계속해서 서로의 손을 만지거나 잡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은 사랑에 빠진 십대였다.
  성골곽에 새겨진 글귀 중에 고인인 투탕카멘을 진정한 목소리라고 언급한 부분이 전혀 없
는 걸로 보아 무덤에 넣기 위해 급히 만든 장례 용품이 아닌  게 분명하다. 어쩌면 이 미니 
성골곽은 안케센아멘이 남편에게 주는 선물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는 황금으로 쓴 그녀의 연
애 편지다. 투탕카멘과 안케센아멘 사이의 사랑은 이 미니 성골곽  말고 다른 데서도 볼 수 
있다. 심지어는 왕좌에서도 투탕카멘의 황금 칼라  위치를 바로잡아주고 있는 안케센아멘의 
모습이 보인다.
  왕과 왕비는 함께 놀이를 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투탕카멘은  각기 종류가 다른 세 개
의 놀이판을 다음 세상으로 가져갔다. 그가 가장 좋아했던  놀이는 세네트로 요즘의 모노폴
리 게임과 비슷했다.
  세네트 판은 가로 열 칸 세로 열 세줄로 구성돼 있다. 칸에  따라 아주 좋음과 물로 구별
되었다. 물은 모노폴리 게임의 감옥에 가다에 해당했다. 말은 체스의 졸과 비슷하게  생겼지
만 사자 머리 모양이었다는 점에서 그보다는 좀더 정교했다.  놀이 규칙에 대해서는 모르지
만 물과 같은 함정을 피해 먼저 판 끝에 도착하는 사람이 이기는 놀이였던 듯하다. 말의 이
동은 막대기를 던져 결정했다. 무덤  벽마다 세네트 놀이를 하고 있는  왕과 왕비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 걸로 보아 매우 인기 있는 놀이였던 모양이다.
  투탕카멘은 고급 포도주가 그득그득 담긴 거의 서른 여섯 개나 되는 단지와 함께 매장되
었다. 이집트인들은 포도주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무덤 벽에다  포도주 만드는 과정을 그리
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테베의 세네페르라는 한 귀족은  천정에 그려진 포도나무가 실물처
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 무덤 지붕을 울퉁불퉁한 상태 그대로 놔둘 정도였다. 나크트라는 또
다른 테베의 귀족은 사람들이 큰 통에서 포도를 밝는 모습을 그려 포도에 대한 애정을 과시
했다.
  투탕카멘 무덤의 포도주는 거의 보물 수준이었다. 단지마다 포도주  상인과 포도 산지 담
근 연도를 표시한 찌지가 붙어  있다.대부분의 단지에는 투탕카멘의 밭이라는  찌지가 붙어 
있다. 그 옆의 5년이라는 표시는 아마 포도가 수확된 해였지 않나 싶다. 그러나 재임 31년이
라는 찌지가 붙은 단지도 있었다. 이는 투탕카멘의 할아버지인 아멘호테프 3세의 포도주 창
고에 보관돼 있었던 게 틀림없다. 따라서 무덤에 부장할 무렵에는  30년이 훨씬 더 돼 있었
다. 투탕카멘의 무덤에 있던 포도주  단지 중에서 달다라는 찌지가 붙은  단지는 네 개밖에 
없었다. 투탕카멘은 시큼한 포도주를 좋아했다.
  투탕카멘은 운동 중에서 사냥을 제일  좋아했던 듯하다. 아마포 궤와  성골곽을 장식하고 
있는 장면은 사냥하는 왕의 모습이다.  타조 깃털 부채에도 전차에 올라탄  젊은 왕이 활로 
타조를 사냥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왕 뒤의 걸어 다니는  잉크 표지도 이와 똑같이 장식
된 타조 깃털 부채를 들고 있다. 물론 이 부채에 그려진 그림을  볼 수는 없지만 만약 그렇
게 작게라고 그릴 수 있었다면  또다른 타조깃털 부채였을 게 뻔하다.  말하자면 그림 안의 
그림의 그림이 될 뻔했던 셈이다. 투탕카멘은 아이벡스와 가젤 사냥도 즐겼다. 그의  무덤에
는 수십 벌의 활과 화살이 함께 묻혀져 있었다. 그가  다음 세상에서도 계속해서 사냥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무덤 속에 든 물건들은 투탕카멘이 무엇을 좋아했는지에 대해 많은 부분을 얘기해주고 있
지만 그가 누굴 좋아했으며  그를 둘러싼 사람들과의 관계는 어땠는지에 대해선 아무런 언
급이 없다. 그는 궁정의 대신들을  좋아했을까? 그들을 신뢰했을까? 아이의  지도를 기꺼이 
받아들였을까? 투탕카멘의 무덤은 그의 가족에 대해서도 별로  말이 없다. 안케센아멘을 제
외하고는 부모나 누이들 형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의 가족에 대해 애기하려면 너
무도 고통스러운 아마르나의 기억을 떠올려야 했기 때문일지고 몰랐다.
  그러나 하워드 카터는 무덤에서 투탕카멘의 할머니 때부터 내려온 굉장한 가보를  발견했
다. 안에 금박을 입힌 사람 모양의 관이  들어 있는 소형 관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소년 
왕에게 헌정된 이 소형 관에는 진기한 물건들이 가들 들어 있었다. 바깥쪽 관에서는 조그만 
채색 나무 관과 천 조각 투탕카멘의 할아버지인 아멘호테프 3세로 확인된 왕의 황금 좌상을 
싼 아마포 꾸러미가 나왔다. 나아가 투탕카멘의 할머니인 티이  왕비의 이름과 칭호가 새겨
진 안쪽 관에서는 머리카락이 발견되었다.
  그 전부터 왕의 무덤에서는 선대의 통치자나 가족들에게서 물려받은 조상 전래의  가보가 
발견되는 사례가 종종 있었다. 이밖에 친척이 사용하던 연고  단지나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
이 새겨진 갑충석이 부장되는 경두도 가끔 있었다. 티이  왕비의 머리카락은 존경해 마지않
는 할머지의 유품이자 이집트학자들이 투탕카멘의 혈통을 확인하는데 큰 몫을 한 귀중한 자
료였다. 그러나 티이 왕비의 미라를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될 뻔했던 단서를 제공하기도 했다. 
  빅토르 로레가 아멘호테프 2세의 무덤에서 신원 미상의 미라 세구를 발견했을 때만 해도 
미라의 주인을 밝혀낼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시에 찍은 사진 왼편
에 등장하는 미라에는 노부인이라는 호칭이 붙여져 있었다. 사진  속의 미라는 오른쪽 팔은 
옆구리에 왼쪽 팔을 가슴에 올려 놓고  있다. 이는 18왕조의 여자 왕족들이 취했던  자세다. 
그후 70년대 들어와 에드워드 웬트라는 시카고 대학의 이집트학자가 이 노부인이  하트셉수
트 여왕 아니면 티이 왕비일지도 모른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지문과 마찬가지로 머리카락도 사람다마 다르다. 투탕카멘의  조상 대대로 전해오는 물건 
중에서 발견된 머리카락이 노부인의 것과 일치한다면 문제의 미라는 티이 왕비가 확실했다. 
그러나 이집트 유물 위원회는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왕족의 미라에서 샘플 - 그게 머리카
락 몇 올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을 채취하는데 상당히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이 프로젝트가 정말 노부인이 덕망 높은 티이 왕비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
라는 점을 확신할 수 있어야 했다.
  1975년 파라오의 X-Ray를 찍으며의 저자인 제임스 해리스  박사는 허가를 얻기 위한 첫 
단계로 세팔로그램으로 노부인의 머리 부분을 찍었다. 세팔로그램은 두 개골의 치수를 정확
하게 재는 기술이다. 그런 다음 두 여자가 모녀지간이라고 할 만큼 유사한지를 확인하기 위
해 노부인에게서 나온 컴퓨터 데이터와 티이 왕비의 어머니인 투야의 미라에서 나온 데이터
를 비교했다. 실험 결과 둘 사이에 상당한 유사점이 발견되었다. 이로써 노부인이 티이 왕비
일 가능성이 아주 커졌다. 그제서야 노부인의 머리와 티이  왕비의 머리카락에서 샘플을 채
취해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화학적인 조합을 비교하기 위해 두 샘플을  전자 마이크로분석기로 정밀하게 분석되었다. 
그 결과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발견된 머리카락과 노부인이 머리에서 채취한 머리카락이  거
의 일치했다. 연구자들은 자신들이 티이 왕비를 발견했다고 단정지었다.
  무덤의 첫 번째 방에서 발견된 물건들이 왕의 알려지지 않은 과거를 드러내주지 않았다면 
투탕카멘 본인이 단서를 제공할 수도 있었다. 죽은 파라오는 전실 너머의 봉인된 널방에 누
워 있었다. 그러나 카터와 카나본은 방을 완전히 비우기 전까지는 그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전실의 물건들은 치우는 데만 1년 이상이 걸렸다. 물건의 무덤 내 위치를 기록하기 위해 뉴
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카터엑 해리 버턴이라는 전속 사진사를 보내주었다. 목제 물
건드르이 경우에는 너무 약해서 손을 대는 순간 바스라져 버리는  예가 간혹 있다. 이럴 때 
물건의 존재를 기록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사진뿐이다.버턴은  자신읜 경험을 뉴욕 타임
스 지에다 이렇게 썼다.

  흰개미 떼가 들끓던 17왕조의 무덤들을 치우던 때가 기억난다.  초기의 사진들은 말 그대
로 무덤에서 발견된 목제 물건들을 기록한 유일한 자료였다.  관들은 겉으론ㄴ 상태가 완벽
해 보였지만 손을 댄 순간 먼지로 변하고 말았다.
  이들 무덤에서 발견될 물건 중에  아주 매력적인 소형 소녀 조각상이  있었다. 이 조각상 
역시 겉으로는 상당히 튼튼해 보였다. 조각상은  혼자 서 있었다. 전체적인 방 풍겨을  찍고 
나서 조각상을 찍었다. 당시 나는 감광판 노출 시간을 2분으로 잡고 있었다. 그러나 웬걸  1
분 45초가 지나자 조각상이 갑자기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더니  먼지 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나는 그 즉시 플래시 스위치를 끄고는 렌즈 뚜껑을 덮었다.  다행히 원판 상태가 아주 좋았
다. 그 조각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에  대한 완벽한 기록을 가지고 있었
다. 이런 경우는 수도 없이 맣았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카너-카나본 발굴단과 공식적인 관계를 맺고 있지는 않았지만 투
탕카멘의 무덤이 발견됐을 당시 박물관에서 파견한  팀이 계곡 밖에서 발굴 잘업을  벌이고 
있었다. 이들은 가치를 따질 수 없는 물건들이 수도 없이  많다는 걸 알고는 팀을 카터에게 
보냈다. 일찍이 이집트에서도 투탕카멘의 경우처럼 엄청난 보물이 발견된 예가 없었기에 고
고학자 사회 전체가 지원 체계를 형성했다.
  부서지기 쉬운 물건들은 옮기기 전에 무덤 안에서 보강해야  했다. 목제인 경우에는 꼼꼼
하게 잘 포장하면 괜찮겠지만 가장 큰 골칫거리는 투탕카멘의  옷이었다. 아마포는 살짞 건
들기만 해도 부서져 내렸다. 그래서 맨 먼저 수천 개의  구슬과 황금 조각의 위치부터 찍어
야 했다. 옷이 먼지로 화하더라도 나중에 새 천에 장식들을  붙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
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직원인 아서 메이스는 의상  한 점당 무려 5만여 개의 구슬이  달려 
있다고 추정했다. 그는 크기가 비교적 작은 옷들은 밀납을 덮어 씌웠다. 이런 식으로 작업하
다 보니 웃궤 하나를 비우는데만 꼬박 3주가 걸렸다.  메이스와 버턴은 전실을 비우면서 다
음 방에 누워있을 소년 왕에 대해 이런저런 추측을 해보곤 했다. 특히 메이스는 그가 왜 죽
었을까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았다.

  사망할 당시 그는 아직 소년에 불과했으며 그의 후임자응 대신 아이였다고 믿을 만한 이
유가 있다. 아이는 그가 왕좌에 오를 수 있도록 적극 미는 한편  그의 짧은 통치기 동안 그
의 조언자로 활약했던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장례식을 준비한 사람도 아이였다.  어쩌
면 아이는 이제 자기가 직접 나서서 정부를 운영할 시기가 됐다고 판단하고는 그의 죽음을 
준비했을 수도 있다.

  내가 아는 한 이런 가능성을 제시한 이집트학자는 단 한  명도 없다. 그러나 나중에 보게 
되겠지만 메이스는 과녁에서 그렇게 많이 빗나가지 않았다.
  1923년 2월 16일 전실이 완전히 치워졌다. 벽을 뚫고 현실로 들어간 카터는 언뜻 황금 벽
처럼 보이는 물체와 마주쳤다. 그 물체는 투탕카멘의 시신을  에워싼 금박 목제 성골곽이었
다. 가로 16피트 8인치 세로 10피트 9인치의 성골곽은 현실을 거의 꽈 메우고 있었다. 그 덕
분에 카터는 성골곽과 벽 사이의 비좁은 공간에서 움직이느라 꽤 애를 먹었다.
  성골곽의 문이 모두 닫혀져 있는 바람에 카터는 그 안에 관 세 개가 더 들어 있다는 사실
을 몰랐다. 그중 하나는 투탕카멘의  석관이었다. 자세히 조사하려면 성골곽을 하나씩  뜯어 
내서 방에서 가지고 나가야 했다. 그러나 공간이 워낙 비좁아서 작업이 만만치가 않았다. 고
대 인부들의 작업도 이보다는 쉬웠다. 그들은 막 벌채한  튼튼한 목재로 성골곽을 조립했지
만 카터는 바싹 말라 있어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나무를 다루어야 했다.
  성골곽 조립 작업을 위해 목수들이 검은 잉크와 흰 잉크로 쓴 고대의 지시 사항이 아직도 
선명하게 보였다. 판벽널 앞쪽에는 앞을 뜻하는 상형문자가 뒤쪽에는 뒤를 뜻하는 상형문자
가 찍혀 있었다. 차례로 짜맞춰야 하는 성골곽 지붕에서도 이와 비슷한 상형 문자들이 발견
되었다. 인부들은 왕이 다음 세상으로 들어갈 수 있게 성골곽의 문이 서쪽으로 열리도록 하
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지 성골곽의 위치는 거꾸로 돼 있었다.  어쩌면 
투탕카멘은 다음 세상이 아닌 이 세상으로 걸어들어 왔을지도 모른다.
  성골곽을 분해하자 마침내 석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노란 규암 원석을 깎아 만든 석관 모
서리마다 날개를 단 아름다운 여신이 팔을  뻗쳐 투탕카멘은 보호하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분홍색 화강암 뚜껑은 나머지 부분과 똑같이 보이도록  하기 위해 노란색으로 채색
돼 있었다. 말하자면 인조 대리석의  시조였던 셈이다. 장례식을 급하게 준비하느라  원래의 
뚜껑이 깨진 게 분명했다. 그래서 분홍색 화강암 뚜껑으로 대체했던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여기서 또 문제가 발생했다. 이번에는 석공들의 실수로 뚜껑에 금이 갔다. 그래서  회반죽으
로 틈새를 메운 후 그 위에 덧칠을 했다. 
  무덤을 급하게 준비하면서 발생한 문제들은  카터의 작업을 더욱 어렵게  했다. 인부들의 
실수는 자주 목격되었다. 특히나 석관 뚜껑의 갈라진 틈 때문에 한 번에 들어올리기가 아무
래도 불안했다. 그래서 결국은 도르래를 가져다 뚜껑 밑에  밧줄을 묶어 위에서 감아올리는 
방법을 써야했다. 목표에 한 발짞 더 가까이 다가간 카터는 이렇게 썼다.

  왕들의 계곡이 새로운 테베 제국의 왕족 매장터가 되면서 발생한 여러 가지 기이한 사건
들에 비하면 현재의 장면은 그다지 재미있거나 극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1922년 11
월에 발견된 방들이 투트 앙크 아멘의 무덤이라는 게 확실해진 이후부터 우리는 이 순간을 
손꼽아 기다려 왔다. 그러나 곧 보게 될 장면 때문에 그러니까 33세기 전 고대 이집트 왕의 
매장 풍습을 본다는 생각 때문에 숙연함을 느끼거나 영향을 받는 사람은 우리 중 아무도 없
었다. 왕의 모습은 어떨까? 침묵이  진행되는 동안 우리 머릿속에서는  그런 생각들이 내처 
달리고 있었다. 도르래가 뚜껑을 들어올리기 위해 위치를 잡았다. 나는 시작 신호를 보냈다. 
긴장감이 감도는 침묵 속에서 둘로 쪼개진 거대한 석판이 1톤 하고도 1/4톤이 더 나가는 그 
거대한 석판이 들어 올려졌다.

  무덤에서 일하던 일행은 모여든 고위급 인사들과 함께 석관  안을 응시했다. 그러나 마치 
안개 저편을 보는 것 같아 자세한  사항은 전혀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은  한동안 석관 안을 
뚫어질 듯 쳐다보고 나서야 자기네가 보고 있는 게 석관 안의 관을 덮고 있는 거즈처럼  생
긴 성기고 얇은 싸개임을 깨달았다.
  카터와 일행이 싸개를 둘둘 말아 걷어내자 사람의 형상을  한 7피트 길이의 관이 나왔다. 
관은 투탕카멘의 모습과 비슷했다.장인의 솜씨는 그들이 기대할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뛰어
넘고 있었다. 상 하 이집트의 상징이자 파라오의 상징인 코브라와 콘도르가 앉아 있는 이마
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그 둘레를 아직까지도 전혀  손상되지 않은 소형 장례용 화환이 
에워싸고 있었다. 카터는 여기에 감동 받은 듯 상당히 감상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가장 감동적이었던 건 코브라와 콘도르를 둘러싼 조그만 화환이었다. 지아비를 여
읜 어린 왕비가 두 왕국의 젊은 지배자였던 남편에게 준 마지막 작별 선물이었다는 데 생각
이 미치자 우리 모두 가슴이 뭉클했다.
  만감이 교차하는지 다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침묵 속에서 가만히 귀기울여 본 
사람이라면 애도객들을 뒤로 한 채 먼 길을 떠나는 유령의 발자국 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리
라. 우리는 촛불로 발등을 비추며 열여섯 개의 계단을 지나 태양이 지배하는 푸른 세상으로 
다시 나왔다. 그러나 생각은 유명을 달리한 파라오의 관 위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 그의  관 
위에 적혀 있던 마지막 문구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오 어머니 누트시여 당신의 날개로 지지 않는 불멸의 별처럼 영원히 나를 감싸주소서

  화환은 파피루스를 기본 바탕으로 해서 올리브나무 이파리와 푸른 수련 꽃잎  수레국화로 
장식돼 있었다. 이 감동적인 기념물은 나중에 투탕케멘의 죽음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게 된
다.
  카터와 그가 이끄는 발굴 팀은 1,2 주 정도 지나면 미라를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직
사각형 석관 안에 있던 첫 번째 관은 이미 모습을 드러낸 상태였다.  그 안에 있던 첫 번째 
관은 이미 모습을 드러낸 상태였다. 그 안에 있는 관 두 개만 더 들어내면 투탕카멘의 미라
가 있을 터였다. 그러나 서로 꽉 맞물려 있어서 관을 분리하는 작업이 어려울 수도  있었다. 
그렇더라도 일단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역사에서 실종됐던 왕의 얼굴을 볼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카터가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순간을 향해 다가가자 투탕카멘은 옆으로 빗겨 나가기 
시작했다.
  다름 아니라 카나본 경이 카이로에서 모기에 물려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는 사건이 발생했
다. 그의 예기치 않았던 죽음은 무덤의 저주에 관한 소문은 몰고 왔다. 카터와 카나본은  초
자연적 힘에 대한 시각이 완전히 달랐다. 카터가 영혼을 믿지  않았던 데 비해 카나본은 그 
반대로 점쟁이나 심령술사를 자주 찾아갔다. 무덤의 저주에 관한 얘기를 제일 먼저 꺼낸 사
람은 카나본의 전속 심령술사인 벨마였다. 카나본이 죽은 후  벨마는 그가 강력한 초자연적 
힘에 희생됐다고 주장하면서 그와 마지막 만났을 때의 일을 책으로 였어 출간했다. 새로 발
견된 무덤을 열기 위해 이집트로 떠나기 전 카나본은  벨마에게 손금을 봐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벨마는 그의 생명선에서 흐릿한 반점을 읽고는 이렇게 경고했다. 경의 앞날에 큰 위험
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경의 손금에 따르면 그 위험은 아마  초자연적 힘 때문에 생길 겁니
다.
  벨마에게서 들은 얘기가 생각나 카나본은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벨마를 찾아갔다. 그러자 
벨마는 이번에는 수정 구슬을 들여다 보았다. 카나본도 수정 구슬 안을 들여다 보았지만 신
전말고는 뭐가 뭔지 통 알 수 없었다.  그 방면의 전문가인 벨마는 훨씬 더 많은  걸 볼 수 
있었다. 먼저 그녀는 고대 이집트의 장례식  장면을 보았다. 자세히 보니 나이가 지긋한  한 
관리가 관 안에 누워 있는 젊은 남자에게 황금 마스크를 씌워 주고 있었다. 잠시 후 자연은 
왕들의 계곡에서 황금 마스크를 씌어 주고 있었다. 잠시 후 장면은 왕들의 계곡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 모습으로 바뀌었다. 카나본이  대장이었다. 순간 이상한 섬광이 무덤을  더럽힌 
자들을 처단하라고 외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나타났다. 벨마가 본 마지막  장면은 신비한 
섬곽 세례를 받으며 홀로 서있는 카나본의 모습이었다.
  벨마는 카나본에게 사람들한테는 발굴 작업을  계속하지 못하는 지유를 적당히  둘러대고 
무덤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카나본은 옛날 사람들의 심력이 얼마나 센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내가 가서 확인해 보리다라고 말하며 가기로 결정했다. 카나본은 이 만남 
직후에 죽었다. 벨마는 카나본이 죽은 후 투탕카멘의 저중에 영원한 생명을 불어 넣는 굉장
한 이야기를 썼다.  
  
  이제 카터는 혼자서 모든 위기를 관리해야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런 일이 맞지 않았다. 
사람들을 다루는 데 필요한 사교술과 주변 사람들을 편하게 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카나
본이었다. 카터는 훌륭한 이집트학자이긴 했지만 고지식하고 신경질적인 데다 외교술이라고
는 약에 쓰려고 해도 도통 없는 사람이다.  카터는 친구이자  후원자인 카나본이 죽은 후에
도 계속해서 무덤 발굴 작업을 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무덤이 발견된 날부터 시작해
서 이집트 유물 관리국과 카터와 카나본 사이에 알력이 조성돼 있었다.
  여러 가지 갈등의 원인 중 하나는 언론을 다루는 문제  때문에 발생했다. 수백 명의 신문 
기자들이 무덤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벌떼처럼 달려들 게 뻔했기에 이를 막이 위해 카나
본은 런던 타임스지에다 독점권을 팔았다. 덕분에 바쁜 발굴자들은  한 명의 기자만 상대하
면 되었다. 그러나 이 같은 조치는 곧 이집트 기자들이  카터나 카나본과 직접 인터뷰할 수 
없다는 걸 의미했다. 이집트인들은 이를 영국의식민주의라고 보았다. 무덤 작업이  진행될수
록 갈등의 골은 점점 깊어만 갔다.
  석관 뚜껑은 1924년 2월 12일 에 들어올려졌다. 다음날  카터는 동료들의 부인을 관 개봉
식에 초대했지만 이집트 관리의 부인들에게는 초대장을 발송하지 않았다. 이에 이팁트 유물 
관리국은 유럽인 부인들이 신청한 허가증 발급을 거부했다. 이를 통해 이집트인들이 카터에
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분명했다. 즉 그들은 이건 우리 무덤이오. 당신네 무덤이 아니
란 말이로라는 무언의 항의를 하고 있었다.
  그들이 옳았다. 카터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고고학사상 가장 위대한 보물을 토오갈해야 하
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가 그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그는  그 무덤이 마치 자기 재
산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예를 들어 책을 눌러 놓은 서진으로 쓰려고 유물들을 자기 숙
소로 가져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는 중요한 인사들로부터 무덤을 보여 달라는 요청
을 여러 번 받았으나 그때마다 번번이 거절했다. 뿐만 아니라 이집트 유물 관리국의 요청마
저도 거절했다. 그는 이집트 유물관리국이라고 하더라도  작업하는 동안만큼은 자신을 방해
할 권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는 잠시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일하고 있었다. 카터가 
무덤 입구에 설치한 거대한 철문을 잉글레시 식민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그래서 이집트인들
이 이집트인 부인들도 참석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카터는 그 즉시 맞대응에 나섰다. 
  그는 축소르의 윈터 팰리스 호텔 벽에다 자신과 자신의 돌료들은 그와 같은 제약 아래서
는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무덤을 폐쇄하겠다는 공고를 붙였다. 이에 이집트인들은 경찰을 
보내 카터를 무덤에서 끌어냈다. 여기에 대해선  카터도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석관  뚜껑을 
공중에 매달아 놓은 채 미국으로 강연 여행을 떠났다.
  이집트 정부는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카터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둘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지면서 카터는 다시 이집트로 돌아와 작업을 재개했다. 하지만 포개져 
있던 세 개의 관 중에서 맨 위의 관 뚜껑을 벗겨낸 것이  1925년 10월이 돼서였다. 여유 공
간이라고는 없어 서로 꽈 맞물려 있는 관을 분리한다는 게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었디 때
문이다. 이 작업에만 거의 1년이 걸렸다. 뚜껑을 벗겨내자 6피트 8인치의 두 번째 관이 싸개 
밑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크기만 다를 뿐 나머지는 첫 번재 과노가 똑같았다.이 관에도 화환
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카터는 관을 보는 순간 미라의  상태가 썩 좋지는 않으리라는 생각
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상감 장식이 일부 떨어져 나갔다는  건 관에 습기가 있다는 의미
였다. 
  두 번떄 관의 상태가 의심스러웠기 때문에 뚜껑만이 아니라 관전체를 들어내기로  결정되
었다. 그토록 무거운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도 몰랐지만 일단 관을 끌어올린 다음 석관에 걸
쳐 놓은 나무 판자 위에 내려 놓았다.
  두 번째 관은 손잡이도 없었을뿐더러 바깥쪽 관과의 틈이 반  인치도 채 되지 않았다. 카
터는 안에 있는 들어올리는 대신 바깥쪽 관의 손잡이 고리가 완전히 안으로 들어가도록 조
인 다음 판자를 치우고 다시 석관 안으로 끌어내렸다. 이제 두 번째 관은 안에 여전히 관이 
들어 있는 채로 목제 받침대 위에 올려져 있었다.
  공간적인 여유가 생기면서 두 번째 관 뚱껑을 들어올릴 수가 있었다. 그러자 제일 안쪽에 
있던 세 번째 관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그토록 무거웠던 이유는 바로 이 관 때문이었다. 관은  거의 250파운드나 나가는 황금 덩
어리였다.
  관 위에 부은 마법의 연고 찌꺼기 때문에  꺼먼 막이 생겨서 황금관 뚜껑에 뭐가 새겨져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관 위에 연고를 부을 때 그 액이 두 번째 관 밑으로 흘러
들어 갔는지 관 두 개가 서로 딱 달라 붙어 있었다. 하지만  관 뚜껑에 손잡이가 있어서 서
로 딱 달라 붙어 있었다. 하지만 황금 관 뚜껑에 손잡이가 있어서 들어올리는 건 그다지 힘
들지 않았다.
  마침내 투탕카멘의 미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카터는 이 순간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런 순간에는 감정이 너무 벅차 올라서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다.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이 황금 관을 본 지가 3천  년 하고도 몇백 년의 세월이 지났다.  인간의 짧은 생애에 의해 
측정되는 시간은 사라진 문명의 엄숙한 종교 의식을 바로 코 앞에서 보는 듯한 장면 앞에서 
평소와 같은 침착함을 잃은 듯했다. 그러나 경외감에 기초한  그런 감상주의를 길게 설명해 
봐야 이익이 될 게 전혀 없다. 감정이라는 측면과 고고학적인 조사는 별개의 문제이므로 지
금까지 이름만 듣고 있던 즉 이름듸 그림자에 불과했던 젊은 파라오의 유해가 마침내 내 앞
에 누워 있었다.
 
  황금 관과 마찬가지로 미라에도 연고가  끼얹어져 있었다. 두 번째 관의  습기는 바로 이 
때문에 생겨났다. 다행스럽게도 그 유명한 황금 마스크가 파라오의 머리를 보호해주고 있었
지만 시신이ㅡ 나머지 부분은 상태가 좋지 않았다. 검시가 어려울 듯했다.
  연고를 녹이기 위해 카터는 관과 미라는 햇볕이 있는 밖으로 가지고 나갔다. 다음은 카터
가 그날 기록해둔 일지 내용이다.
  11월 1일 왕의 미라를 15호 무덤으로 옮겼다. 무덤에서 끌어 내  위로 올리는 데 열 명의 
인부가 필요했다. 몇 시간 동안 햇볕에 두었다. 오늘은 태양의 열기가 충분치 않아 관에  미
라를 고정시켜 놓은 시커먼 물질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도 못했다.
  11월 2일 관에서 미라를 떼어 놓는 데 햇볕이 아무 소용없음을 깨달았다. 결국 왕의 미라
는 관에 붙어 있는 상태로 조사할 수밖에 없겠다.

  카이로 대학교 해부학과  교수인 더글러스 데리에게  미라를 조사하는  책임이 맡겨졌다. 
1925년 11월 11일 데리는 알렉산드리아 위생국 국장인 살레 베이 함디의 도움을 받으며 미
라의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유물 관리국 이사인 피에르  라코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에서 카터에게 보내준 사진사 해리 버턴 그 외 이집트 관리 몇 명이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
었다.
  연고는 붕대와 화학 반응을 일으켜 붕대를 검게 변색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런 상태에서
는 붕대를 풀 수가 없었기 때문에 겉에다 뜨거운 촛농을  발랐다. 그래야 서로 엉겨 붙어서 
자르기가 편했기 때문이다. 촛농이 굳자 데리는 붕대를 세로로 길게  자른 다음 첫 번째 층
을 벗겨냈다. 그러자 싸개 안에서 부적과 보석이 나왔다. 모두 합해 143개의 굉장한  물건들
이 붕대 속에서 나왔다.
  마침내 잘생긴 젊은 투탕카멘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미라를 관에서  끄집어 내려고 
하자 성유가 응고돼서 관에 달라 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먼저  데리는 처음에는 끌을 그 다
음에는 열을 가한 칼을 이용해 미라를 떼워내려고 시도했다. 두 경우 시신에 심각한 손상만 
가져왔을 뿐 정작 미라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데리는 미라를 잘라서 들어내기로 했다. 
그리하여 미라는 세 번째 요추를 기준으로 반으로 잘려 나갔다.
  데리의 이러한 처치는 투탕카멘의 사망 원인을  밝힐 수 있는 증거가 얼마나  부주의하게 
다루어졌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카터는 신중한 조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양
이 얼마나 많은지는 신중한 조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양이 얼마나 많은지에 대해 
거의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미라를 데리의 거친 손길에 맡겨 버렸다. 투탕카멘의 
왕좌가 연고에 달라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면 그때도 카터는 톱으로 자르도록 내버려 두었을
까? 모르긴 해도 연고 성분을 화학적으로  분석해 손상을 가하지 않고도 왕좌를 들어낼  수 
있는 약품을 개발했으리라. 그러나 불쌍한 투탕카멘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미라는 데리
가 작업을 시작할 때도 상태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으나 작업이 끝나고 나서는 훨씬 더 
악화돼 있었다.
  긴 뼈의 양쪽 끝을 정확하게  보기 위해 미라의 관절에서 팔과  다리가 분리되었다. 이를 
통해 데리는 투탕카멘이 사망할 당시의 나이를 추정할 수 있었다.
  젊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뼈의 끝 즉 골단과 나이가 들면서 뼈로 바뀌는 연골 조직과의 결
합 정도가 느슨하다. 골단이 긴 뼈에 접합되는 평균 나이가  있기 때문에 접합의 정도는 나
이를 추정하는 믿을 만한 기준이 된다. 데리는 다리에서 가장 긴 뼈인 대퇴골 아래 쪽 끝을 
조사하기 위해 투탕카멘의 슬개골을 들어냈다. 작업은 아주 쉬웠다. 대퇴골에서 분리한 골단
은 상당히 유연했다. 투탕카멘은 정말 소년 왕이었다. 데리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
록했다.
  
  이 부분은 스무 살쯤 되면 대퇴골과 연결된다. 대전자라고  알려진 대퇴골 상부의 돌기는 
본 뼈와 거의 붙어 있었지만 안쪽에 나 있는 틈은 연골 조직과의 접합이 아직 불완전한  상
태임을 보여주었다. 이 부분의 골단은 열여덟 살쯤에 완전히 붙는다. 슬개골 역시 머리 부분
과 목 부분은 붙어 있었지만 관절 가장자기의 접합선은 아주  선명했다. 이 부분의 골단 역
시 열여덟이나 열아홉 정도 되면 완전히 붙는다. 경골 역시 열여덟이나 열아홉 살쯤에 붙는
다. 경골의 경우에도 윗부분은 붙어  있었지만 아랫부분은 상당히 말랑말랑해 보였다.  경골 
아랫부분이 본 뼈와 완전히 붙는 나이가 일반적으로 열여덟 살 무렵이라는 점과 그의 다리   
뼈 상태로 미루어 보아 투탕카멘은 사망 당시 열여덟 살 이상 스무 살 미만이었던 것 같다.
  데리의 추측은 정확했다. 투탕카멘은 열여덟 살경에 사망했다. 사망 당시의 투탕카멘은  5
피트 6인치의 키에 젊은이답게 날씬한 몸매였다. 데리의 기술로는 그의 사망 원인을 밝혀낼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데리의 기술로는 그의 사망 원인을 밝혀낼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따
라서 의학 기술이 발달할 때까지 몇 세대를 더 기다려야 했다.
  투탕카멘은 손상되지 않은 상태로 발견된 최초의 파라오였기 때문에 유물 관리국은  그의 
미라를 카이로의 이집트 박물관으로 옮기는 대신 그가 발견된  곳에 놔두기로 결정했다. 다
시 붙여진 투탕카멘의 시신은 모래를 채운 나무 들것에 실려 제일 큰 관에 넣어진 다음  다
시 석관에 안치되었다. 그 이후로 투탕카멘의 미라는 오늘날까지도 석관 안에 들어  있다.관
광객들은 뚜껑이 열린 석관 안의 관을 들여다 보면서도 아직도 그 안에 미라가 누워 있으리
라는 생각은 거의 하지 못하리라. 
  현실을 비우고 나자 카터는 재보실이라고 이름 붙인 부속실을 치우기 시작했다. 현실에서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카터는 유물의 훼손을 막기 위해 재보실 입구에 판자를 쳤다. 그러나 
유물의 상태가 불안한 데다 마구잡이로 쌓아 올려져 있었기 때문에 방을 치우는 작업은 상
당히 까다로웠다. 그래서 작업이 완료된  건 1927년이 돼서였다. 재보실은 정교하게  조각된 
모형 배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이들 모형 배에는  투탕카멘의 옷가지와 장례의 신인 아
누비스 목각상 아름다운 설화석고 유골함이 보관돼 있었다. 유골함을 열자 투탕카멘의 장기
가 들어 있는 모형 관 네 개가 나왔다.
  또다른 나무 궤를 열자 두 개의 소형 관이 들어  있었다. 관 안에는 안케센아멘이 유산한 
태아 시신 두 구가 붕대에 싸인 채 안치돼 있었다. 하나는  1피트가 좀 넘었고 얼굴에 혼응
지로 만든 마스크를 쓴 나머지 하나는 10인치 정도 됐다.카터가  둘 중 몸집이 작은 태아의 
싸개를 벗겨내자 5개월 정도 된  여자 태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는 발굴자들이 처음으로 
접한 비극이었다. 두 명의 태아 중 한 명만 살았더라도  왕통을 이을 수 있었으리라 그렇게 
됬다면 이집트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터였다.
  몸집이 큰 태아는 1932년 데리 박사가 카스르 엘 아이니 병원 해부학과에서 조사를 위해 
넘겨 받을 때까지 붕대에 싸여 있었다. 싸개를 푼 데리 박사는 태아의 나이를 7개월로 추정
했다. 동생보다 4인치가 더 큰 이  태아는 미라로 만들어진 흔적이 전혀  없는 동생과 달리 
미라로 만들 만큼 충분히 성숙돼 있었다.  태아의 하복부 왼쪽에 1인치가 채  안 되는 절개 
흔적이 있었다. 복부 안쪽이 아마포로 채워져 있었지만 데리는  태아의 장기에 대해서는 전
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장기는 아직도 태아의 몸 속에 있을 확률이 높다. 만약 장기를 제거했다면 장기를 보관하
는 항아리가 발견됐을 터였기 때문이다. 데리는 태아가 작았음에도 불구하고 미라 제작자들
이 뇌를 제거한 후 두 개골 안에 아마포를 집어 넣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마포를 제거하기 
위해 두개골을 절단하자 그안에서 두 개골에 천을 집어 넣기 위해 사용됐던 철사가 나왔다. 
이는 미라의 몸 속에서 발견된 유일한 미라 제작 도구였다.  그러나 데리는 철사를 던져 버
렸다.
  데리가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발견된 세 구의 미라를 부적절하게 다루었다는 점에  대해서
는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데리의 무책임한 행동은 미라에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가져왔
을 뿐만 아니라 도저히 다시는 얻을 수 없는 귀중한  정보를 유실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
나 데리는 미라 연구가 아직 걸음마 단계에 있던 시기에 일을 했다. 그는 미라가 그 자체로
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선임자들의 전례를 따랐을 뿐이다.
  데리의 후임자들도 그와 같았더라면 우리는  과연 투탕카멘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말해줄 
단서를 얻을 수 있었을까?
  
    8. 죽은자는 말한다
  예전과 달리 요즘은 미라를 연구하는 데 비파괴적인 기술이  사용되고 있다. 만약 투탕카
멘이 지금 발견됐다면 그의 미라는 굳이 싸개를 풀 필요가 없는 컴퓨터 단층 촬영술과 같은 
고도의 기술을 이용해 조사됐으리라 . 데리는 부검과 초점을 주로 뼈에다 맞췄다. 그는 시신
의 연조직에 대하여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비단 데리 뿐만 아니라,  근육과 
내부 장기가  포함하고 있는  정보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DNA에 대한 지식도 없었다. 전자 현미경과 발달된 화학분석 기술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
이다. 데리의  시대에는 미라에게서 떼어낸  조직을 현미경으로 조사하는 방법이 있었지만, 
데리는 여기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하다. 
 우리 시대의 의학 전문가들은 사망 원인을 추정하기 위해 뼈뿐만 아니라 연조직에도 주목
한다. 오늘날의 부검의들은 장기와 근육조직에 이상한  물질이 들어있는지의 여부와 마지막
으로 먹은  음식물은 뭐며 그시기에  그 시기는 언제였는지 가장먼저 살핀다.  그 다음에는 
X-레이나 컴퓨터 단층 촬영술과 같은 기술을 이용해  뼈를 관찰한다. 뼈는 죽은 자의 나이
와 질병의 유무뿐만 아니라 , 둔기에 의한 외상 흔적이 있을 경우 그게 죽음의 원인으로 작
용했는지의 여부를 알려준다. 이러한 과정은 다른 데서는 얻을 수 없는 귀중한 정보를 제공
해준다. 
 그러나 오래 된 조직은 현대 의학자들에게 특별한 문제를  제기한다. 워낙 바싹 말라서 현
미경으로 관찰하기 위해 얇게 썰었을 경우 쉬이 바스라지기 때문이다 . 카이로 의과 대하게 
근무하는 마르크 아르망 루페르라는 프랑스인 내과전문의는 1909넌에 발행된 "영국의학잡지 
British Medical Jounal"에 게재된 한 논문에서 최초로 미라의 근육조직을  분리하면서 격은 
고충에 대해 얘기한 바 잇다. 르페르는 연조직을 알콜과  5퍼센트 탄산소다 용액에 담가 부
드럽게 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이 기술은 절개와 현미경 관찰을 가능하게 했다. 루페르가 질
병과 사망원인을 연구하는 병리학자였던데 비해, 데리는 현미경과 화학 분석과는 거리가 먼 
해부학자였다. 이 두 가람이 힘을 합쳤다면 트탕카멘과 태아들에 대해 훨씬 많은 정보를 얻
을수 있었으리라. 유산될 당시 태아들은 건강했을까? 유산 당시 안케세아멘은 병을 않고 있
었을까? 더욱이  사망 당시 투탕카멘의 몸에 병이 있었다는 증거는 없었을까?
 이들 질문에 대한 답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모든  증거를 재조사해야 했다. 그러나 놀랍
게도 증거 일부가 사라져 벼렸다. 1971년 F.필스  리크라는 영국인 치과의는 이집트 유물국
으로부터 투탕카멘무덤에서 발변된 태아의 X-레이를 재조사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
러나 그가 이집트 박물관에 있는 관을 열어 보니 태아의 미라들은 그 안에  없었다. 
 이 역시 데리의 실수였다. 오랫동안  조사를 위해 수많은 미라와  미라 조각들을 가져가긴 
했지만, 돌려준 적은 거의 없었다. 미라들은  그가 근무하던 카스르 엘 아이니 병원  창고에 
쌓여졌다. 그가 죽은 후, 미라들은 창고에 보관된 채 잊혀졌다. 그후 1922년 6월. 그 병원 창
고에서 528구의 미라와 미라 조각들이 발견됐다는 신문기사가 보도되었다. 거기에는 조세르 
왕의 발과 함께 두 면의 태아도 있었다. 기사가 나가기에  앞서 극소수의 인사들은 이 저장
물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한 명은 1978년 투탕카멘의 미아 X-레이를 찍은 R.G. 해
리슨이었다. 창고에 들른  그는 몸집이  큰 태아에게서 비정상으로 긴 오른쪽  쐐골과 척추 
측곡(척추가 왼쪽 또는 오른쪽으로 굽는 병)의 징후를 발견하고는 X-레이를 찍었다. 
 일찍이 데리는 작은 태아에 대해 "하복부  절개 흔적은 물론 , 그  외 시체를 보전 러리한 
흔적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 나는 이 점이 궁금했다. 왜 하나는 미라로 만든 반면, 다른 하
나는 그대로 내버려 두었을까? 둘다  똑같은 천에 싸여 고나속에 보관돼 있었다. 어쩌면 몸
집이 작은 o아는 너무 작아서 왕의 미라 제작자들이 작업을 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 궁금증을 풀어줄 태아의 미라를 조사하기 위해 카스르 엘 아이니 병원 해부학과 과장인 
포지 가벨라에게 젖화를 걸어 혹시 미라가 어디 있는지 아느냐고  물어 보았다. 당시 이 병
원은 한  미국인 인류학자로부터 소장하고 있는 미라의 분류와 보관에 드는 경비를 기부받
아 모든 걸 새로 분류하고 있었다. 가벨라 박사는 나의  물음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기
가 미라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미라를 조사하고  싶다면 병원으로 오라는 초대까지 
했다.
 나는 카스로 엘 아이니 병원에 도착하고 나서야 가벨라 박사가 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부인도 병원에서 해부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녀와 그녀 남편은  우리가 태아에게서 
얻어낼 수 있는 정보가 과연 어떤 건지 무척 궁금해 했다. 두  사람은 나를 조그만 나무 상
자들이 가득 쌓여 있는 창고로 안내했다. 상자에는  "중앙국 공주?", "고왕국 머리만"이라는 
흥미로운 찌지들이 붙어있었다. 나는 수년 동안 미라와 함께 일해왔지만, 이런 광경을  본건 
이때가 처음 이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상자를 일일이 열어보려면  적어도 몇 년은 창고에 
갖혀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실은 거리 아래쪽에 잇는 닭요리 전문 삭당에다 식
사를 주문하고 화도 될 뻔했다. 
 포지 가벨라 박사는 신발 상자보다 약간 큰 상자 두 개를 꺼내왔다. 뚜껑을 열자 투탕카멘
과 안케센아멘의 아이들이 그 안에 있었다. 당시 나는 1년 넘게 투탕카멘의 조각난 생을 이
어 붙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내게는 태아가 단순한 미라 이상이었다. 이들은 한 가족의 비
극을 반영하고 있었다. 투탕카멘은 당분가 석관에 봉인된 채로 남아 있을 테니, 이들 태아야  
말로 그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매개체인 셈이었다. 
 카이로행 비행기에 오르면서 나는, 처음 발견될 당시 해리  버턴이 찍은 태아의 사진을 가
져갔다. 그 사진 이후 어느새 70년이 지난 태아는 상태가 다소 나빠져 있었다. 그러나  바고 
악화된 상태 때문에 나는 내 질문에  답할수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작은  태아의  두 개골 
뼈가 서로 어긋나 있었다. 이 밖에도 복부 근처의 피부가 심하게 갈라져 있었다. 덕분에  우
리는 복강에서 비어져 나온 아마포 조각을 볼수 있었다. 두  가지 점에서 미루어 보아 작은 
태아 역시 미라 제작과정을 거친 게 틀림없었다. 데리가 트탕카멘의 미라에 얼마나 심한 손
상을 입혔는지가 생각나자, 태가에 손을 대고 싶은 마음이 싹가셨다. 그래서 나는 눈으로 보
기만 했다. 
 데리가 투탕카멘과 한 작업을 다시 조사해야할 시간이 드디어 와다. 그가 투탕카멘의 미라
를 무검한  건1925년이었다. 그러나 부검 결과, 사망당시 소년왕의 나이를 제외하고는 확인
된 게 거의 없었다. 이는 그의 사망 원인을 둘러싸고 갖가지 추측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마
른 체구와 젊어서 죽었다는 점 때문에 결핵이라는 주장이 제기 되었지만. 당시에는 이를 증
명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 투탕카멘을 그가 무덤에 놔두기로 한 이집트 유물 관리국의 결정 
때문에 미라에 대한 직접적인 추가 조사는 불가능했다. 시신을  카이로로 옮겨다면, X-레이
를 찍을 수 있었으련만.... .
  데리가 보기에는 이미 드러난 투탕카멘의 뼈X-레이를 찍는 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수
도 있다. 그러나 X-레이는 식습관과 질병에 대해  많은걸 이야기해주는 뼈 의 밀도를 보여
준다. 예를 들어, 심각한 병이 활동에 들어가기에 앞서 잠복하고 있다면 긴 뼈는 성장을  먼
춘다. 이때  x-레이를 찍어면 흰선이 나타난다. 투탕카멘의 미라를 찍은  x-레이는 그에 대
해 많은 부분을 얘기해주었을 태지만,1925년 당시 이집트에는 왕들의 계곡으로 가져갈수 있
는 휴대용 x-레이 기계가 없었다. 역사에서 유명한 이  왕은 x-레이를  찍기 위해 40년 동
안 기다려야 했다. 
 과학이 진정으로 미라의 가치에 눈을 뜨게 된 건  1960년대 들어와서였다. 조직 샘풀을 분
석하는 새로운 기술의 출현으로, 내과의와 보건 전문가들은  미라가  현대 질병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고병리학이 탄생했다.  고병리학이라는 
단어는 1892년R.W. 슈펠트라는 독일인 의사가 두 개의 그리스어를 섞어서 만든 말이다.  간
단하게 말해서 고병리학은 고대인들의 질병, 혹은 병리학적 상태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현대의 전염병을 이해하는 한편 감염 경로를 예측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통해 해당 질병의 
발전 과정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이집트의 미라 분석을 통해 고대 이집트인들의 발병 빈도
와 현대인의 경우를 비교함으로써, 현대인의 생활양식이 특정 질병의 원인인지 아니면 수세
기 전부터 있어온 질병인지를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동맥질환은 고지방 음식 외에도  현대 
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긴장 때문에  생긴다. 고대 이집트인들도 동맥 질환을  앓았다면, 
이같은 이론은 신빙성이 떨어지리라. 
   1960년대 들어와 과학 지식이 가히 기상천외한 속도로 증가하면서,전문화가 필수적이 되
었다. 그 결과 모든 분야의 논문을 소화할 수 있는 의사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었다. 모든 
질병을 다루는 일반개업의는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했다. 그 대신  전문가 팀이 대세가 되었
다. 미라 연구에도 같은 바람이 불었다. 한 명의 의사가 미라를 부검하는 기술과 다양한  조
직 샘풀을 분석하는 기술을 동시에  갖출 수 없다. 하물며 미라가  제공하는 방대한 정보를 
뽑아내는 데 필요한 식물학, 화학, 생물학에 대한 지식을  모두 가질수는 없다. 오늘날 고병
리학자들은 미라를 마치 환자처럼 다룬다. 다시 말해 손상을 최대한으로 줄이는 한편,  특별
한 문제를 연구할 필요가 있으면 전문가를 초빙한다. 예를 들어 혈액문제는 혈액학자를,  치
아문제는 치과의가 동원된다. 사실상 혼자서 일을 했던 데리는  그 때문에 투탕카멘의 미라
가 제공하는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고병리학이라는 분야가 꽃을 피우기 시잔한 건 1960년대 들어와서였다. 여기에는 리버풀대
학의 해부학자인 R.G.해리슨의 공이 컸다. 그는 이집트 왕족의 미라 연구가 오랜 질문에 새 
빛을 던져 주리 라고 믿었다. 그의 첫 번째 연구대상은  55호 고분에서 발견된 신비에 싸인 
미라였다. 해리슨은 사망 당시의 나이를 추정하기 위해 뼈를 조사하는 하편, X-레이를 찍었
다. 이 경우 흉골은 훌륭한 지표가  된다. 나이를 들면, 갈비뼈와 연결되는  흉골의 움푹 팬 
부분이 딱딱해진다. 나이가 들면 몸의 유연성이 떨어지는  건  그 때문이다. x-레이는 55호 
무덤에서 발견된 미라의 네 번째와 다섯 번째 갈비뼈가 최근에 붙었음을 보여 주었다. 이는 
사망 당시의 나이가 투탕카멘처럼 열아홉에서 스물이었음을  뜻했다. 척추에도 이와 동일한 
경화과정이 일어나지만 , 완전히 붙는 건 스물 네 살쯤이다. 55호 고분의 미라에서는 흉곽과 
척추가 아직 덜 굳어 있었다. 이는 스멘카레가 스물네살 이전에 죽었음을 뜻한다. 
 R.G.해리슨이 찍은 미라의 x-레이는 중요한 정보를 알려 주었다. 그는 "투탕카멘의 해부학 
특징과 x-레이상의 특징에 대한 재평가가 시급하게 필요하며, 그와 같은  조사가 멀지 않은 
미래에  가능하기를 바란다"는 탄원으로 자신의 보고서를 마무리 했다. 1969년 해리슨은 그
토록 바라던 기회를 포착했다. 그는 이집트 유물관리 위원회로부터 휴대용 x-레이 기계를가
지고 투탕카멘의 무덤에 들어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카터와  데리가 투탕카멘을 다시 
관속으로 들여보낸 이후로, 젊은 왕을 직접  보게 되기는 그때가 처음 이었다. 해리슨은  팀 
작업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알고 있었기에 방사선  전문가와 치과의사, 이집트학자를 데려
갔다. 헤리슨 일행은 새벽에만 일하도록 허락받았다. 그러나 관광객들을 위해 무덤을 24시간 
개방했기 때문에 그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고는 다들 놀라는 눈치였다. 해리슨에게도 놀라운
일들이 발생했다. 
  첫째, 미라의 상태가 기대했던 것보다도  훨씬 나빴다. 카터나 데리는 투탕카멘을  관에서 
들어내기 위해 두 토막으로 잘랐다는 얘기는 일절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x-레이를 무분별
하게 하나씩 찍어야 했다. 완전한 필름이 나올 때까지 머리를  찍은 다음, 사지를 찍고 , 그 
다음 다시 이곳저곳을 찍는 씩 이었다.  해리슨 일행은 단 이틀동안만 촬영 허가를  받았다. 
첫날, 일행은 시험삼아 찍은 필름을 그날 호텔화장실에서 현상했다. 다행히 일행이 묵고  있
던 룩소르의 특급 호텔 윈터  펠리스에는 널찍한 화장실이 딸려 있었다.  일행은 세면대 두 
개에 현상액과 정착액을 풀어  필름을 현상한 다음, 욕조에 담가 씻었다. 결과는 좋았다. 
 제일 먼저 몸통 x-레이부터 본 일행은 깜짝놀랐다. 흉골과갈비뼈 일부가 유실되 있었기 때
문이었다. 데리는 투탕카멘의 흉곽을 덮고 있던 수지 때문에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아마도 
투탕카멘은 미라 작업자의 작업장에서 거칠게 다루어졌던 모양이다. 거기에 나무 진을 입혀 
훼손을 감췄던 것이다. 일부에는 이 부분의 유실이 투탕카멘의  죽음을 몰고온 사건이나 의 
도적인 폭력의 결과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스멘카레의 흉골일부도 유실되 있었지만. 내 견해
로는 미라제작자들이 이 두 미라에 특별한 기술을 사용했던 듯 하다 . 그 것말고는 이 기한 
유사점에 대해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이런 내 견해에 대해 스멘카레가 아마르나에서 사망
한 점을 지적하면서 미라제작도 그기서   이루어졌어리라는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반면 투탕카멘의 미라는 테베나 멤피스에있는 작업장에서 제작된게 거의 확실하다 는  주장
을 펼쳤다. 해리슨은 이 문제에 대해 별다른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다. 그는 투탕카멘의 나이 
추정과 같은 다른 사안으로 옮겨 갔다. 
 투탕카멘의 미라에 적용했던 기준을 다시 적용한 결과, 사망 당시 투탕카멘의 나이가 열아
홉 살 정도였을 거라는 결론이 나왔다. 해리슨의 추정은 데리가  반 세기 전에 내린 결론과 
거의 일치했다. 척추X-레이는 투탕카멘이  결핵으로 죽었을 거라는  견해을 단번에 부정해 
버렸다. 일반적으로 결핵은 척추골 사이의 골단에 손상을 가져온다. 그러나 투탕카멘의 경우
는 아주 깨끗했다.
그러고 나서 해리슨은 두개골 X-레이를 조사했다. 이 두개골 X-레이는 나로 하여금 투탕카
멘이 살해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게  한 최소의 단서였다. 나중에  해리슨은 자신의 
발견 성과를 다운 BBC 타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두개골 하단을 찍은 X-레이의  농도를 지
적하며 이렇게만 말했다.
 정상적인 한계치를 벗어나진 않았지만, 실제로는  이 부분의 뇌를 덮고  있는 막조직 밑의 
출혈이 원인이 됐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후두부 가격이 원인일 수 있으며,  그래
서 사망했을 수 있습니다.

  신중한 해리슨은 후두부 가격의 가능성에 대해서만 언급했을 뿐 살해라는 말은 일절 꺼내
지 않았다.
투탕카멘의 살해 가능성이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해리슨이 대중적인 설명서만  냈을 
뿐 투탕카멘의 X-레이에 대한 철저한 과학적 연구 결과를 출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출연해  모호하기 짝이 없는 견해만을  제시했을 뿐, 책을 
통해 이를 공식적으로 확인하는 작업은 하지 않았다. 이 방면의 전문가들이 두개골 X-레이
를 그다지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았던건 그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정상적인 X-fp이가 아니라 미라의 두개골 X-레이를 다루고 있음에 주목해
야 한다. 우선 미라 제작 과정에 대한 지식과 더불어, 필름에 대한 세심한 관찰이 필요하다. 
X-레이는 두 군데(머리 윗부분과 뒷부분)의 두개골 내부가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있음을 보
여준다. 그러나 우리가 보고 있는 건 뼈가 아니라, 투탕카멘의 미라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두
개골 안으로 흘러들어간 수지다. 미라 제작자들은 비강을 통해 투탕카멘의 뇌를 제거한  후, 
혹시나 남아 있을 뇌를 마저 태우기 위해 뜨거운 수지를  두개골에 부었다. 그렇게 해서 두
개골 안으로 흘러들어간 수지는 그 안에서 단단하게 굳어졌다. X-레이 사진에서 뼈처럼 보
이는 건 그 때문이다. 투탕카멘의 두개골 사진을 자세히 보면 수지의 수평면이 겹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수지를 두 번에 걸쳐 부었음을 뜻한다. 물론 그때마다 미라의 자세도 바뀌
었다. 3,300년 전 미라 제작자의 작업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재구성해 보기로 하자.
투탕카멘의 시신이 미라 제작자의 작업대 위에 누워 있다고 상상해 보라, 코 안으로 삽입된 
갈고리가 비강 뒤쪽에 있는 사골을 부순다. 이제 갈고리는 두개골 안으로 들어가 뇌를 부수
기 위해 회전 운동을 한다. 이 작업이 끝난 투탕카멘은 거꾸로 뉘어진다. 머리가 들린  투탕
카멘은 중력에 의해 좀전에 반액체  상태로 바뀐 뇌를 코 밖으로  쏟아낸다. 이제 두개골에 
수지를 부을 차례다. 투탕카멘의 시신은 다시 바로 뉘어진다. 잠시 후 조그만 대롱 두  개가 
꽂힌 점토 주발에 뜨거운 수지가 채워진다. 콧구멍에 대롱이  끼워짐과 동시에 주발이 비스
듬하게 기울어진다. 수지가 코를 통해 두개골로 흘러들게 하기 위해서다. 중력이 수지의  경
로를 조절해준다. 투탕카멘이 등을 대고 누워 있기 때문에  수지는 두개골 뒤쪽에 웅덩이를 
형성한다. 수지가 식으면서 두 개의 수평면 중 한 개가 생겨난다. 두개골 뒤쪽에 남았을  수
도 있는 뇌조직을 완전히 태워 버린 건 바로 이 처음 부어진 수지다. 그러고 나면 투탕카멘
의 몸은 다시 뒤집힌다. 잠시 후, 턱을  하늘로 치켜들고 있는 타탕카멘에게 다시 한 번  더 
수지가 부어진다. 이번에는 머리 위쪽에  웅덩이가 형성된다. 이번에 부어진 수지는  두개골 
앞쪽에 남아 있는 뇌를 태우며 X-레이는 33세기전에 일어난 일을 이해하게끔 해준다.
 그러나 구개골 x-레이는 사망원인을 둘러싼  궁금증과 관련된 단서를 보여준다.  다름아닌 
투탕카멘의 두개골 내부에 있는 뼈조각이다. 혹시 이 조각이  사악한 의도로 파라오의 머리
에 가해진 그리하여 투탕카멘을 죽게 한 폭력으 결과는 아닐까?
 사실 이 작은 뼛조각은 이 경우  사람을 헷갈리게 하는 정보로, 혼란을  조성한 것 외에는 
한 일이 없다. 뿐만 아니라 연구자들이 살해 가능성을 제외하는데 톡톡히  한몫을 했다. 해
리슨이 자신의 이론을 과학잡지에  발표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그가 
후두부 가격에  대해 언급하는 것만 들었다. 연구자들은 그가 이  조각이 가격에 의해 제자
리를 이탈한 뼈라고 말할 줄 알았다. 그러나 해리슨은 그른식의  얘기는 한 번도 내비친 적
이 없었다. 대신 그는 문제의  뼈조각이 미라 제작자들이 뇌를 제거하기  위해 두개골 안에 
억지로 갈고리를 집어 넣는 과정에서 부러진 사골의 일부였을  거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
러나 이는 완전히 잘못된  명이다. 사골은 그리스어에서 온 말로 원래는 '가는 체'라는 뜻이
다. 사골에는 작은 구멍이 아주 많기 때문에 깨질  경우 사방으로 튀면서 조각조각부서지게
된다. 그러나 문제의 조각은 잘게 부서진 파편이 아니라, 상당히 견고하다. 따라서 두개골의 
일부가 아니라, 다른 뼈에서 나온 조각인게 틀림없다. 
 그러나 어떤 뼈에서 나왔는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문제의 뼈가 사후에 부러져 나왔다
는 해리슨의 견해는 옳았다. 다시 말해 이 뼈가 죽음을  몰고온 이유가 아닌 것만은 분명했
다. 여기서 논의의  전개를 위해 문제의 조각이 투탕카멘이 살아  있는 동안 후두부 가격에 
의해 생겨났다며 그후에 투탕카멘이 죽었다고 가정해보다. 이제 다시 한번 더 미라 제작 과
정을 상상해 보라. 뇌는 제거됐지만 문제의 조각은 아직도 두개골 안에 안아 있다. 이제  두 
개골 안에 수지를 부을 차례다. 투탕카멘의 몸은 작업대 위에 반듯하게 누워 있다. 조금  있
으면 조각은 두개골에서 가장 낮은 지점인 머리 뒷면으로  내려오게 된다. 수지가 식으면서 
조각은 수지 안에 박히게 된다. 만약 문제의 뼈가 두개골의  다른 뼈가 밀착돼 있다가 수지 
때문에 떨어져 나왔다면, 몸이 뒤집힌 상황에서 두개골 윗쪽에 부어진 두 번째 수지가 뼛조
각을 덮어 쌌을 확율이 높다. 즉 투탕카멘이 살해 되면서 문제의 조각이 생겨났다면 미라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수지 안에 박혀 있느라 x-레이에 나타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머리 윗 부분을 보면 뼈조각이 아주 선명하게 나와 있다. 어째
든 유일한 결론은 이 뼈가 사후에 떨어져 나왔으리라는 데서  찾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이  
조각은 사후에, 그것도 두개골에서 수지가 부어진 후에 떨어져 나온 게 분명하다. 
 수지가 두개골에 부어진 후에 뼛조각이 떨어져 나왔을 기회는 상당히 많았다. 천연 소다석
으로 수분을 제거하느라 투탕카멘의 몸은 한 달 이상 미라 제작자의 작업장에 있었다. 손상
이 가해지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미라제작자의 작업장에 있는 동안미라가 손상을 입는 경
우는 종종 있었다. 
 1929년 시카고 자연사 박물관에서 행해진 로이 무디의 x-레이 연구는 당시 미라 제작자들
이 얼마나 무성의하게 작업이 임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 중 한x-레이는  일곱 살짜리의 
소년의 미라를 관크기에 맞추기 위해 팔을  없앴을 뿐만 아니라 허벅지 아랫부분의  다리를 
잘라 버렸음을 보여주었다.  
 미라 제작자들의 성의 없는작업 태도와 관련해 내가 자주 인용하는 사례는 미니폴리스  예
술대학에 소장돼 있는 테샤트 부인의  미라다. '부인'이라는 호칭 때문에  어른일 것 같지만 
실상 테샤트는 십대'때죽었다. 컴퓨터 단층촬영결과 시신이 몹시 거칠게 다루어졌으며 그 때
문에 상당수의 뼈가 부러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두 다리 사이에 다른 사람의 두개
골이 들어가 있었다. 그게 왜 거기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다음과  같은 
추측이 가능하다. 즉 작업중에 다른 미라에서 떨어져 나온 머리가 제자리를 찾지 못한체 어
딘가에 잘못 놓여져 있었다. 그후 미라 제작자는 머리가 없는  없는 상태에서  미라에 붕대
를 감았고, 남는 머리가 나타났다. 남는 머리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난감해 하던 제작자는  
테샤트부인이 미라와 함께 싸버렸다. 
 테샤트 부인의 경우처럼 머리가 두 개 있는 미라는 두물지만, 몸의 일부가 없는 미라는 흔
히 볼 수 잇다. 전 이집트 공중 위생 위원회 회장인 마르크 아르망 루페르는 회장으로 재직
하던 당시 두 구의 미라에서 싸게를 벗겨낸 적이  있었다. "페르시아 점령기에 제작된 두구
의미라에 대한 연구 notes on Egyption Mummies Dating from  the persian Occupstion of 
Egypt"라는 논문에서 그는 미라 싸게에 관해 설명한 후, 미라의 딱한 처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미라 상태에서는 쉽게 부서지기 때문에 거칠게 다루면 뼈가 부러질수 있다. 
 루페르가 본 첫 번째 미라의 경우, 등뼈가 부러지자  몸을 고정시키기 위해 찔러넣은 막대
기가 아직도 그대로 몸 안에 박혀 있다. 이걸로는 충분치 못했던지, 미라 제작자들은 자신들
의 실수를 감추기 위해 미라의 안팎에다 뜨거운 수지를 마구 부었다.(투탕카멘의 미라 제작
자들도 갈비뼈의 손상을 감추기 위해 수지를  덧쉬워 실수를 감추는 이런 방법을  사용했을 
수도 있다. )
 루페르가 조사한 두 번째 미라는 미라 제작자들이  얼마나 나쁜 사람들인가를 보여주었다. 
겉으로는 첫 번째 미라와 비슷해 보였지만 발뼈는 복부에서, 팔뼈는 허벅지에 있어야 할 자
리에서 발견되었다.  게다가 환추(環椎:머리를 지탱해주는 척추 위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
름이다.)에서 출발해 대후두공에서 두개골까지 막대기가 질러져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미라의 싸게를 풀자 부러진 뼈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대부분의 미라가 이런 취급을 받
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투탕카멘의 두개골 조각이 미라 제작자의 작업장에서 떨어져 나왔으
리라고 추측하기란 그리 어럽지 않다. 그러나 다들 알다시피  투탕카멘의 미라가 당한 수모
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데리와 카터가 투탕카멘을 관에서 들어내기 위해 가한 폭력은 문서로 남아있다. 카터도 데
리도 투탕카멘에게 가한 행동을 자세하게 써서 출판하지는 않았지만, 초고 상태의 기록들은 
많은 편이다. 다음은 카터의 1925년11월 26일자 일기다. 
 오늘 작업은 미라에 집중되었다. 머리를 보니 몸이라는 게 확실했다. 마스크가 머리 두쪽에  
꽉다라붙어 있어서 떼어내려면 망치와 끌이 필요할 듯했다. 결국  우리는 뜨거운 칼을 이용
해 목적을 달성했다. 
 그렇다면 망치질과 끌질 때문에 뼈조각이 떨어져 나갔을 확률이 아주 높다. 따라서 문제의 
뼛조각은 사후에 생겼으며, 어느 모로  보나 투탕카멘의 죽음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볼
수 있다. 이는 해리슨이 투탕카멘의  두개골 x-레이를 찍고 나서  십년 후에 찍은 두  번째 
x-레이를 보면 훨씬 더 확실해진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미시간 대학교 치열교정
학과 교수인 제임스 해리슨박사는 이집트 당국으로부터 x-레이를 찍어도 된다는 허락을 얻
어냈다. 해리스는 그 전에도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에 소장돼 있던 왕의  미라x-레이를 찍은 
적이 있었다. 
 그는 미라 관계를 추적하기 위해 x-레이 상에 나타난 얼굴특징의 유사점에 주목했다. 직업
이 치과 이사였던 만큼, 해리스는 특히 치열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투탕카멘의  두개골의 
찍은 해리슨의 x-레이를 보고는 몹시 실망했다. 치아가 그가 기대했던 것만큼  선명치가 않
았기 때문이다. 이집트 박물관의 미라  작업을 끝낸후, 투탕카멘의 두개골을 찍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가 찍은 x-레이는 문제의 그 뼈가  정말 분리돼 있을 뿐만 아니라 수지에 
박혀  있지 않다는 걸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해리슨이 찍은 x-레이사진과 비교했을  때 
뼈의 위치가 달라져 있었가 때문이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는 그렇다. 그러나 해리스는 x-
레이를 찍기까지의 자세한 사항을 책으로  펴낸 적도 없을뿐더러, x-레이를  찍었다는 얘기 
조차 하지 않고 있다.
 해리스는 "왕의 미라들을 찍은 x-레이 도해서  An X-Ray  atlas of the royal Mummies"
라는 자신의 저서 색인에서 투탕카멘의  x-레이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색인에 표시된 대
로 378페이지를 찾아봐도  부분이 대해서는 전혀 나와 있지 않았다.  x-레이가 둥장하는 유
일한 곳은 책 뒤 포켓에  꽂혀 있는 마이크로 필름 카드다 .  이 카드로는 판독하기가 어려
워 해리스 박사에게 x-레이 복사를 부탁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마이크로 필
름 카드로 읽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내가 본 내용이 확실치 않을 수도 있다. 
 전문가 들이 투탕카메이 살해당했을 가능성을 무시하는 이유는 , 이집트학자의 고병리학자
들이 투탕카멘의  x-레이를 조사하면서 두 개골의 뼛조각을 보고는 이를 후두부 가격의 증
거라고 오판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문제의 뼈가 사후에 떨어져  나왔다는 데까지는 동
일한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문제의 뼈가 후두부 가격의 증거를 제시하는 건 아니라는 결론
을 내렸다. 해리슨이 발견한 두개골 하단의 검은 반점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살해 이론을 다룬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프로그렘을 진행하면서 나는 이 뼈에 대해서는  일
절 언급하지 않았다. 후두부 가격의 증거로는 적절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 직후  "로스엔젤
레스  타임지 " 지 기자가 방송에 대한 기사를 쓰면서 제임스 해리스 박사에게 의견을 물었
다. 여기서도 문제의 뼈가 후두부 가격의 증거로 들먹여 졌다. 다음은 그 기사의 일부이다.
 "그(해리스)는 뼛조각이 있다는 점을 확실하게 인정하고 있지만, 미라 제작  과정에서 생겼
을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니콜라스 리브스라는 투탕카멘 연구가 역시  다시 그 문제의 뼈를 언급하면서  "안탑깝게도 
해리슨이 이 부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출간하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 손상이(투탕카멘)
죽기전에 사고로 혹은 의도적으로 가해졌다고 믿었는지 어땠는지는 확실치 않다."
고 논평한바 있다. 
 해리슨과 해리스 외에도 후두부 가겨을 일장 연설을 할 수 있을 만한 제3의 인물이 있었지
만,그 역시 중요한 부분을 빼먹었다. 해리슨의 x-레이 팀에서 치과의로 일했던 F.필스 리크
는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나온 시신들 The Human Remains from Tomb of Tutankhamen"
이라는 책을 출간했지만, 자신이 그팀의 일원이었다. 는 사실에 대해서 아주 짧게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x-레이의 결과에  대해서도 일체 말이 없다.  그는 투탕카멘의 미라를 
분석하면서 반 세기 전에 데리의 부검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두 번에 걸쳐 찍은 투탕카멘의  x-레이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서가  아직껏 출간되지 않은 
관계로, 후두부 가격의  증거를 둘러싸고 상당한 오해가 있어왔다. 특히 x-레이를 읽어본적
이 없는 의학분야 밖의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오해의 정도가  훨씬 심했다. 아마르나 시대를 
연구하는 영국인 학자 시릴 알드레도 그런 경우에 속한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투탕카멘의)미라에 대한 최근의 재조사는 그에게 상처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상처 자국
으로 보아) 화살이 귀 왼쪽 부분의 두개골을 관통한 듯하다."
 평소와 달리 정보의 출처를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알드레드가 왜 하필이면 화살이라고 생
각했는지는 알수 없다. 
 투탕카멘의 x-레이를 둘러싼 오해와 혼란을 고려하건데, 투탕카멘의 죽음과 관련된 물질을 
재조사하는 게 당연했다. 나는 그  첫 단계로 해리슨의 x-레이를  복사하려고 했으나, 그는 
이미 1979년에 사망한 상태였다. 다행히 그의 동료인  R.C.코널 리가 아직도 리버풀 대학교
에 있었다. 친절하게도 그는 격려와는 거리가 먼 듯한 쪽지와 함께 x-레이를 보내주었다. 

 본 주제에 대한 초기의 출판물말고는이  사진들에 대해 달리 첨부할게 없어  유감스럽습니
다. .. 이전의 출판물에서 언급한 명확한 특징들은  논외로 치더라도, 18왕조의 미라 제작 과
정이나 그보다 더 중요한 사망 원인에 대해 특별한 시사점을 제기하진 못할 겁니다. 

  코널리는 해부에 대해 나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있는 자연인류학 교수였지마, 나는 혼자
서 x-레이를 사펴야 했다. x-레이가  도착하자, 나는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보기 위해 
필름을 내가 있는 대학의 방사선과로 가져갔다.  그들은 x-레이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지만, 
내가 원하는 새로운 정보를 얻어려면 우리 학교 의학 고문을 맞고 있는 윈스롭 대학병원의 
방사선과 과장인 제럴드 어윈 박사에게 보이는 수밖에 없었다.  어윈박사는 머리 외상 환자
들의  x-레이를 읽는데 상당히  노련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의 방사선 기술과 외
상 기술이 합쳐저서 뭔가 새로운 걸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었다. 
 먼저 나는 x-레이에 대한 해리슨의 설명이 나오는 bbc 비디오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나서 
투탕카멘의 두개골 x-레이를 면밀히 관찰했다. 그  역시 해리슨의 의견에 동의했다. 후두부
를 가격당했을 가능성이 아주 컸다. x-레이는 혈종의 증거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어윈 
박사는 이 밖에 다른 뭔가를 발견했다. 두개골 안의 응혈이  있을 만한 곳 근처에서 농도가 
진한 부분이 보였던 것이다. 이는  응혈위의 막이 석회질화됐음을 의미한다. 의사들은  이를 
만성경막하출혈이라고 부른다. 이런 현상이 생기려면 상당히 오랜시간이 필요하다. 이뿐만이 
아니라 어윈 박사는 가격이 일어났을 두개골 부위가 일반적인 외상환자의 경우와  다르다는 
점을 발견했다. 즉 투탕카멘의 경우에는 목과 두개골이 만나는 뒤쪽에 상처가 나 있었다. 따
라서 투탕카멘은 옆으로 혹은 엎드린 채로 자는 동안 뒤에서 가격당했다고 볼수 있다. 
 이모든 게 의미하는 바는 과연 뭘까? 우선 투탕카멘의 x-레이가  그가 살해되어음을 증명
하는 건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해두자 . 어떤 x-레이이 환자가 머리를 맞았다는  걸 보여줄 
수는 있지만 , 나아가 그 때문에 죽었으리라는 걸 보여줄 수는 있지만, 나쁜 의도를 가진 누
군가가 일부러 머리를 쳤다는 것까지 보여 줄수는 없다. 그러나 x-레이자체만으로는 배제할
수 없는 여러 가지 가능성은 늘 있게 마련이다. 더 군다나 x-레이를 해석하는  작업은 하나
의 예술이다. 똑같은 필름을 놓고도 전문가의 의견이 다른 이유는 이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x-레이는 하얀 부분(뼈)과 해석을 하려면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시커먼 부분이 있다 시커먼 
부분의 경우에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다를수 있다. 
 투탕카멘의 경우, 내노라하는 두 명의 전문가가 두개골에서 혈종의 증거를 보았다.  그렇다
면 투탕카멘은 여행하다가 머리를 다쳤을까? 혈종의 위치를 보아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사
고가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는 곳에서 후두부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는 증거만 으로서 
배심원단으로부터 유죄판결을 얻어내기가 곤란하리라. 그러나  추가증거가 있는지의 여부를 
알아보기 위하여 배심원단은 경찰에 철저한 조사를 요구하리라. 그러면서  x-레이에 미심쩍
은 상황증거라는 표찰을 붙이리라. 
 이제 많은 부분이 명확해 졌다. 문제는 혈종  위에 형성된 석회성 물질이다. 이 점에 대해 
어윈 박사는 까만 부분이 너무 약해서 확신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x-레이가 확실한 증거
를 제시한다고  단정짖기는 어렵다는 소견을 제시했다. 그러나 투탕카멘이  갑작이 죽지 않
았다는 가능성은 높아졌다. 이는 좀더 어려운 문제들을 제기한다. 투탕카멘이 석회화에 필요
한 최소한의 기간이 2개월동안 시름시름 앓았다면, 그의 의식상태는 어땠을까? 그의 상태가
비졍구식이 이전단계임을 명심하라. 여기에 덧붙여 이집트인들이  관을 이용해 음식을 공급
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는 점도 염두에 두기 바란다. 따라서 무의식 상태의  투탕카멘
은 두 달 이상 살지는 못했으리라.  그러나 이 부분의 음영이 진하게 나왔다면,  투탕카멘은 
의식이 오락가락하는 상태긴 했지만 적어도 음식을 공급받을 만큼의 의식은 있었다고  봐야 
한다. 그는 혈종이 뇌에 가하는 압력이 극심해질 때까지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은 뇌사 상태
에 빠져 폐렴으로 죽었을 확률이 높다.  
 투탕카멘이 시름시름 앓다 죽었으리라는 견해는 상당히 불확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살해 
이론에 영향을 주거나 하지는 않는다.  다만 나중에 중요해질수도 있는  수수께기 일부이기 
때문에 언급할 뿐이다. 사실 물리적  증거만으로는 증거를 입증하기가 불가능하다. 가령  뇌 
속에 총탄이 박혀 있을 경우에도 이 같은 사실이 살해  의도나 동기, 수단을 보여주지는 못
한다. 투탕카멘의 두개골 x-레이는 후두부에 가격당한  흔적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게 전부다. 살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상황 증거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살해 기회와 동기를 가진 누군가가 있었다는 점을 입증할 수 있을까? 이제  그 문제
를 짚어 보기로 하자.

    9. 미망인의 항변
  대부분의 살인 사건의 경우, 제1 용의자는 죽은 자 주변에 있다. 
  투탕카멘이 죽은 후에 발생한 불길한 사건들은 현재의 형사가 살인 사건이라고 생각할 만
한 단서를 충분히 제공하고 있다. 이 일련의 사건들은 투탕카멘의 미망인이 오래 전부터 이
집트의 숙적인 히타이트 왕에게 보낸 편지와 함께 시작된다.
  우리가 리 편지에 대해 알고 있는 건 히타이트인들이  훌륭한 기록 보관자였지 때문이다. 
그 동안 터키의 유적지에 있는 문서 보관소에 서는 땅 문서에서부터 군사 원정에 이르기까
지 모든 게 기록된 수천여 개의 점토판이 출토돼 왔다 금세기 초반에 보가즈쾨이라는 옛날 
수도를 발굴하던 중 다양한 사안들을 기록한 문서 보관소를  발견했다. 그 중에는 수필룰리
우마 왕 통치기에 왕의 아들인 무르실리스 2세가 쓴 점토판도 기여 있었다. 오늘날 이 점토
판은 '아들 무르실리스 2세가  말하는 수필룰리마 왕의 치적'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다. 
그 가운데 극도로 흥분한 안케센아멘의 편지를 언급한 부분이 바로 '일곱번째 서판'이다.
  한 마디로 이 편지는 아주 이상하다. 이집트 여왕은 이집트의 숙적인 히타이트 왕에게 편
지를 쓰면서 자신은 현재 몹시 두려우며  히타이트의 왕자와 결혼해 그를 이집트의  왕으로 
만들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이집트에서는 한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우리는 이  편지를 
매우 신중하게 조사해야 한다.

   카르케미시에 내려가 있는 동안, 아버지께서는 루파키와  타르훈타(?)....... 잘마를 아므카 
지방으로 보내셨다. 그래서 그들은 아므카를 공격해 아버지 앞에  포로와 가축과 양을 가져
왔다. 아므카에 대한 공격 소식을  전해 들은 이집트 사람들은  몹시 두려워했다. 이유인즉, 
그네들의 주인 니브후루이야가 죽었기 때문이다. 그  직후 이집트 여왕 다하문주(?)는 아버
지께 전령을 보냈다 전령이 가져온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남편이 죽었습니다. 나에게는 아들이 없습니다. 그러나 폐하께는 아들이 많습니다. 그 중 
한명을 내게 주신다면 내 남편으로  맞이하겠습니다. 내 하인들 중에서는  절대로 남편감을 
고르지 않겠습니다. 나는 두렵습니다."

  이 편지를 쓴 이집트 여왕은 다하문주이며, 그녀의 남편('그네들의 주인')은  니브후루이야
다. 그렇다면 이들은 누구였을까? 이 두 이름은 이집트어 발음을 히타이트식으로 음역한 것
이다. 즉 의미를 번역하려고 했다기보다는 소리나는 대로 옮겨 썼다는 얘기다. 카르투슈안에 
새겨진 두 개의 이름 중 하나가 네브-케페루-레인  점으로 보아 문제의 왕이 투탕카멘이었
다는 데에는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 히타이트인들은 다름 아닌 이 이름을 '니브후루이야'
로 음역했던 게 분명하다. 왕이  투탕카멘이라면 왕비는 그의 유일한  부인인 안케센아멘이 
틀림없다. 그러나 다하문주라는 이름의 경우에는 어느 모로 보나 안케센아멘과 비슷한 구석
이 전혀 없다. 그래서 추측컨데, '왕의 부인'을 뜻하는 이집트어인 타 헤메트  네쉐르라는 안
케센아멘의 서명을 보고 그렇게 음역한게 아닌가 싶다.
  불길하게도 안케센아멘은 두렵노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이집트 왕비를 
두렵게 했을까? 당시 그녀의 나라는 호렘헵의 강한 군대 덕분에  아주 안전했다. 게다가 행
정가 아이와 마야는 이집트에 제2의 번영을 가져왔다. 남편이  죽은 후 왕족 중에서는 최고
가 된 안케센아멘의 지위는 그 나라에서 가장 강력한 위치였을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왜? 
히타이트인들은 이집트 국경에서 멀리 떨어져 있긴 하지만 어째든 이웃나라에 속하는  아므
카에 대한 공격 때문에 여왕이 두려워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집트의 힘을 감안하건
데, 이 설명은 적절치 못하다. 히티이트인들은 안케센아멘을 동요시켰을 실제 사안을 거론했
다기보다는 자기네가 믿고 싶어하는 바, 즉 자부심을 설명하고 있는 듯하다. 
  진실은 투탕카멘의 죽음으로 안케센아멘이 혼자  남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  이전의 삶도 
변화와 혼란으로 가득 차 있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적어도 짐을 나눌 남편이 있었다. 그가 없
어진 상태에서 안케센아멘의 표현은 "내 하인들 중에서는 절대로 남편감을 고르지 않겠다."
는 아주 이상한 대목에서 절정에  달한다. 물론 이집트 여왕이 하인과  결혼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어났기에 안케센아멘에게 격에 맞지 않는 사람과 결
환하도록 압력을 가할 수 있었을까? 그녀를 그토록 두려움에 떨게 했던 힘의 정체는 무엇이
었을까?
  이집트가 왕 없이 오래 있을 수 없었다는 점을  고려하건데, 안케센아멘은 투탕카멘이 죽
은 직후에 문제의 편지를 썼던게 분명하다. 그러나 왕위 계승자가 분명치 않았다. 그녀와 투
탕카멘에게는 자식이 없었을 뿐더러, 안케센아멘이 마지막 왕족이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는 그녀와 결혼하는 사람이 이집트의  왕이 될 터였다. 안케센아멘의  편지는 그녀가 '하인' 
즉 평민과 결혼해야 항 처지에  이었음을 암시한다. 얼마나 절망했으면  적에게 남편감으로 
왕자를 달라는 편지를 썼을까 마는, 두 가지 선택 중에서 그나마 그 편이 낫다고 생각 했을
게 틀림없다. 이집트 역사상 여왕이 이집트 왕으로 만들기  위해 외국인에게 청혼한 사례는 
한 번도 없었다.
  투탕카멘의 군 사령관이었던 호렙헵의 무덤 벽은 안케센아멘이 얼마나 다급했는지를 보여
준다. 호렙헵은 자기가 격퇴한 히타이트 포로들 그림으로 무덤벽을 장식했다. 여기에는 이집
트 장군들이 투탕카멘 앞에다 수갑을 채운 히타이트 죄수들은 늘어 세우는 장면도 있다. 도
대체 어떤 상황이 안케센아멘으로 하여금 이런 사람들에게 남편감을 달라고 간청하게  했을
까?
  히타이트 왕에게 편지를 쓸 당시의 그녀의 처지를 상상해  보자. 이집트의 궁정 서기들은 
그 시절의 국제어였던 아카드어로 썼을 테지만, 궁정서기가 쓴  편지는 공식 문서 보관소로 
들어가 궁정의 정보로 기능했다. 그러나 안케센아멘은 그렇게 되기를 원치 않았다. 보나마나 
투탕카멘의 조언자였던 아이는 외국인이 이집트를 통치하는 걸 용인할 리가 없었다. 히타이
트 왕이 자기 손으로 직접 관리들을 임명한다면, 궁정에서의 자신의 지위가 위험에 처랄 게 
불을 보듯 뻔했지 때문이다. 히타이트와의 전투에 목숨을 걸었던  호렙헵 장군도 그런 편지
에 동의했들 리가 없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불구대천의  원수 밑에서 일해야 하는 상황
을 막으려 했으리라. 그래서 안케센아멘의 편지는 두 강대국 사이의 공식적인 문서가 될 수 
없었다 다시 말해, 그녀를 도울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임물, 즉 히타이트왕에게 보내는  개인
적인 호소문 형태를 띨 수밖에 없었다. 안케센아멘은 서기의 손을 빌리는 대신, 자신이 직접 
파피루스에 상형 문자로 편지를 썼다. 나중에 히타이트의 궁정  서기들이 변역했을 이 편지
에서 안케센아멘이 내건 조건은 자신의 호소를 들어줄 자신이 믿을 수 있는 한 사람이 전부
였다.
  안케센아멘의 이 같은 결정은 그녀의 성격이 어땠는지를 알려준다.  즉 그녀는 겁이 많고 
나약했다. 평화로운 아마르나에서 자란 탓에 그녀는  히타이트와의 격전이나 그들의 잔악한 
행동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을 구해줄 유일한  세력은 군대라고 믿었던 
게 분명하다. 즉 히타이트 왕자를  이집트의 왕으로 만든다면 그 날  군대가 자신을 구하러 
달려오리라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녀가 판단하기에 강력한 군대만이 그의 진로를 막을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은 과연 누구였을까?
  그러나 안케센아멘의 요청이 너무 황당하다 보니  히타이트 왕조차도 이를 믿을 수  없었
다. 
   이 소식을 접한 아버지는  각료회의를 소집하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런 일은 내 
생애 처음이노라!" 그리하여 아버지는 의전광인 하투사지티를 이집트에 보내셨다.  아버지는  
의전관에게 이건 명령을 내리셨다.,  "가서 자초지종을 알아보고 오너라.  아마도 그 자들이 
나를 속이려는 모양이도다! 분명 왕의 아들이 있을 터, 나에게 진실을 가져오너라."

  의전관의 여행은 길었다. 의전관은 토로스 산맥을 지나 동쪽에  있는 시리아의 알레포 고
원으로 간 다음, 거기서 다시 카네시 근처의 오론테스 강ㅇㄹ 건너 남쪽으로 전진하다 마침
내 이집트 국경을 넘었다. 누가 국경까지  그를 마중 나왔던 게 분명하지만, 과연  누구였을
까? 당시 이집트 궁정에서는 서로 입장이 다른 세력이 최소한 두 개 존재하고 있었다. 히타
이트 왕자와 결혼하기를 원하는 안케센아멘과 그녀에게 미지의 '하인'과 결혼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세력이었다. 안타깝게도 히타이트인들은 의전관인  하투사지티가 이집트에서 무엇을 
알아냈는지에 대해선 아무 기록도 남겨 놓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자기 나라에 돌아
갈 때 혼자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봄이 되면서 하투사지티가 하니 경이라는 전령과 함께 이집트에서 돌아왔다. 

  히타이트인들은 대사가 이집트에서 돌아왔을 때가 봄이었다고  말하고 았다. 그렇다면 이 
시기가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투탕카멘의 죽음과 일치할까? 장례 화환을 구성하고 있는 꽃
들을 보면 투탕카멘이 어떤 계절에 죽었는지 알 수 있다. 그  중 한 화환은 이집트에서는 3
월 중순에서 4월 말 사이에 피는 수레국화로 만들어졌다. 투탕카멘의 가슴 장식용 화환에서 
발견된 맨드레이크와 까마중도 3월과 4월에 피는 꽃이다. 따라서  투탕카멘은 3월 중순과 4
월 말 사이에 묻혔다. 매장 전 미라를 만들기까지 70일 이 소요 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의 
사망 시기는 그 전 해 12월이나 2월로 추정된다. 안케센아멘이 1월에 편지를 썼다면, 히타이
트 수도에는 2월에 도착했다고 볼 수 있다. 그 후 의전관(하투사지티)이 이집트에 갔다오는 
데에는 두 달이 채 안 결렸을 터였다. 사안이 사안인지라 아무래도 마음이 조급했을 하투사
지티는 여정을 앞당겨 문서에서 지적하는 봄인 4월쯤에  돌아왔으리라. 모든 증거가 일치하
는 바, 이는 실제 사건의 기록이다. 
  히타이트인들과의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이집트에서는 미라를 제작하고 관을 준비하고 무
덤에 부장할 가구를 만드는 등 투탕카멘의 장례 준비가  착착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집트는 
왕 없이 얼마나 오래 갈 수 있을 까? 안케센아멘은 얼마만큼 오래 버틸 수 있을까?
  히타이트인이 자신의 편지에 대한 답장을  가지고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안케센아멘은 
그 사람이 자신이 찾던 왕자라고 믿었으리라. 그러나 자신의 이상한 부탁을 확인하러 온 나
이든 의전관임을 발견하고는얼마나 실망했을까, 하투사지티가  이집트궁전에서 어떻게 지냈
는지 알 수는 없지만, 시간이 다  돼 감을 알고 절망에 빠진 여와의  모습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 너무 늦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두 번째 편지를  보냈
다.

   "어찌하여 폐하께서는 '그 자들이 짐을 속이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까? 내게  아들이 있
다면 나와 내 나라를 외국에 나누어 주겠다는 편지를 썼겠습니까? 내게 그런 말씀을 하시다
니 폐하께서는 날 믿지 않으시는 게로군요. 한때 내 남편이었던 사람은 죽었습니다.  그리고 
내게는 아들도 없습니다. 다른 나라에는 편지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폐하에게만 편지
를 썼습니다. 사람들한테서 폐하께 아들이  많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내게는 남편이  되겠지
만, 이집트에서는 왕이 될 겁니다."
  그리하여 마음이 넓으신 아버지께서는 여인의 말에  따라 아들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셨
다. 

  이집트 대사 하니는 안케센아멘이 편지에서 주장한  내용을 확인해 주었으리라. 수필룰리
우마는 하니에게 왕자를 이집트로 보냈다가 왕은커녕 볼모로 잡혀 있게 되면 어떻게 하느냐
고 물었다. 우리는 아들을 안케센아멘에게 보내기만 하면 모든 게 잘 될 거라며 수필룰리우
마를 달래는 하니의 목소리에서 진한 절망을 읽어낼 수 있다. 

   오 폐하! 이는 우리 나라의 수치이옵니다.! 우리에게 왕의 아들이  있다면 이처럼 외국에 
와서 우리의 통치자를 구걸하겠습니까? 우리의 주인이신 니부후루이야께서는  돌아가셨습니
다. 우리 주인의 부인은 혼자이십니다. 우리는 이집트의 왕위를 이어 받을 우리 주인의 아들
이자 우리 여주인의 남편감을 찾고 잇사옵니다. 우리는 다른 나라에는 간 적이 없습니다. 우
리가 온 곳은 여기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오 폐하!  우리에게 폐하의 아들 중 한 명을 주소
서!

  이는 자신의 후원자를 대신해 하니가 한 말을 히타이트인들이  옮겨 기록한 내용이다. 수
필룰리우마는 문서 보관소 직원에게 오래 전에  맺은 이집트와 히타이트 간의 평화  협정을 
가져오라고 한 다음 큰 소리로 읽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선포하였다. 

   오래 전 하투사와 이집트는 친구였다. 이제 서로를 위해 다시 친구의 맹세를 하노라.  따
라서 히타이트와 이집트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서로 틴구로 남을 것이니라!
  안케센아멘의 첫 번째 편지가 도착하고 나서 90일 쯤 지나 수필룰리우마는 이집트의 왕이
자 안케센아멘의 남편이 될 자신의  아들을 이집트로 보냈다. 그때쯤에는  투탕카멘의 미라 
제작과 의식을 위한 70일이 모두 지나 그의  시신은 자기 무덤에서 거의 한달여 동안 누워 
있었다. 히타이트 왕자가 신부를 얻기 위해 이집트로 떠난 시기는 바로 이 무렵이었다 .  서
판의 기록은 여기서 꾾겨 있으나, 드라마의 끝은 '역병 퇴치를 위한 무르실리스의 기도'라는 
다른 서판에서 계속된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들 중 한 명을 보내자, 그들은 그를 죽여 버렸다.  이에 
격노한 아버지께서는 이집트에 전쟁을  선포했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는  이집트의 보병과 
전차군단을 무찌르셨다. 그러나 우리 군대가 이집트인 포로들을 데려오는 과정에서 그들 사
이에 역병이 퍼져 하나 둘씩  죽기 시작했다. 히타이트 땅으로 오는  동안 포로들은 역병을 
온 나라에 퍼뜨렸다. 그날부터 히타이트 땅의 백성들은 죽어가고 있다. 

  히타이트 왕자는 이집트 국경에서 살해되었다. 과연 누가  죽였을까? 왕자는 필시 경호병
과 하인, 선물은 대동하고 있었을 게 틀림없다.  R다가 안케센아멘에게 모셔가기 위해 왕자
를 마중나온 이집트 관리들도 분명 있었을 터였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몇 명 안 되는 불
량배들에게 살육되었을 리는 없다. 막 이집트와 합치려던 히타이트는  아들만 잃었을 뿐 얻
은게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면 용의자는 기병대에 휴전의 깃발  아래 여행중인 외국 사자를 
살해하라고 명령할 권위를 가진 이집트인으로 좁혀진다.  히타이트 왕자와 안케센아멘이 결
혼할 경우 잃을게 가장 많은 사람은, 그렇게 되면 이집트의 왕좌에 앉을 기회를 놓칠 수 밖
에 없는 사람은 바로 '하인'이었다. 히타이트 왕자의 살해자와 투탕카멘의 죽음에 연루된 용
의자를 찾기 위해서는 이 '하인'이 누군지부터 밝혀내야 한다. 
  최초의 단서는 투탕카멘의 무덤 벽에서 발견된다. 

    벽화 속의 인물
  알다시피 왕족이 아닌 이집트인들은 신에게 자신들이 얼마나 다음 세상에서 살고  싶어하
는지를 보이기 위해 무덤 벽을 일상 생활을 담은 그림으로 장식했다. 개중에는 관이나 유골
함을 만드는 목수와 장인들의 모습을 비롯해 장례 준비 과정을 그리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 
심지어는 장례식을 그려 넣는 사람도 있었다. 
  투탕카멘의 아버지 시대에 테베 시장을 지냈던 라모세의 무덤에는 장례식 과정 전체가 그
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무덤에는 머리 받침과 샌들, 옷을 비롯해 다음 세상에서  필요
한 모든 게 갖춰져 있다. 우리는 라모세의 무덤 벽화에서  그의 미라가 무덤에 안치되는 동
안 돈을 받고 일하는 직업적인 조문객들이 울부짖으며 머리에 모래를 끼얹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왕족의 무덤은 이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왕족의 무덤 벽에는 귀족들의  무덤에
서 발견되는 일상생화에 대한 묘사 대신, '사자의 서'나 '대문의 서'  혹은 '명부의 서' 와 같
은 종교적인 내용이 새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투탕카멘의 무덤 한 쪽 벽면에는 일상 생활, 
즉 파라오의 장례식이 그려져 있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투탕카멘의 무덤에 대한 관심이 주로 보물과  미라, 가구에 쏠려 있었
다. 그 바람에 벽화는 거의 주먹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다른 왕릉에서 발견된  벽화들과는 
유사점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완전하게 연구돼 있지 않은 상태다. 
  왕들의 무덤을 보면, 벽 전체가 파라오의 영생을 기원하는  종교적인 장면과 글귀로 장식
돼 있다. 이들 글귀는 대개"말하면 이루어진다"라는 마법의  주문으로 시작된다. 이집트인들
은 말하거나 쓰거나 그리면 실제로  일어나게 된다고 믿었다. 예를  들어 "신들이 파라오를 
환영하고 있다" 고 말하면 정말 그대로 일어나게 된다.  누군가가 죽은 왕이 다음 세상에서 
죽은 자의 신인 오시리스의 영접을 받는 모습을 본다면 , 정말 그대로 일어나게 된다.  이집
트인들은 마법의 주문에 관한 한 탐욕스럽다고 해야 할 정도로 집착이 강했다. 따라서 글귀
와 장면이 많으면 많을 수로 좋았다.
  그러나 투탕카멘의 무덤은 다르다. 이 무덤의 경우에는 관을 안치한 현실에만  벽화가 있
다. 아마 그의 갑작스런 죽음 후에  무덤을 준비할 시간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리라.  현실에 
들어서면 한쪽 벽면에 밤의 열두 시간을  지키는 열두 마리의 개코원숭이가 투탕카멘이 다
음 세상에서 다시 태어날 때까지 밤을 지나 무사히 여행을 마 찰 수 있도록 돕는 게 이들의 
임무다. 투탕카멘의 관 둘레에 성골곽을  설치하고 나서 만들어진 현실  봉인용 칸막이벽도 
중요한 종교적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벽에는 투탕카멘이  서방의 여신인 하토르에게서 생명
을 부여받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그 뒤로 자신의 임무를  성공리에 마친 뒤 생명의 상징인 
앙크를 손에 든 자칼의 머리를 한 장례의 신 아누비스가 서 있다.  그러나 이 두 개의 벽화
에서는 투탕카멘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없다. 실제 사건 기록과 투탕카멘의 살해자에 대한 
단서를 제시해 주는 건 나머지 두 벽이다. 
  먼저 동쪽 벽을 보면, 장례 행렬이 투탕카멘의 미라를  무덤으로 운반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리라는 썰매에 실린 성골곽 안에 안치돼 있다. 하얀 머리끈을 동여맨 열두 명이  향도
들이 왕의 미라를 무덤으로 운반하고 있다. 그들 중에는 민머리에 관복을 입은 상 이집트와 
하 이집트의 최고 관리인 펜투와 우세르몬트도 끼여 있다. 
  이 벽의 경우에도 그다지 특별한 점은 없다. 이제 마지막으로 북쪽 벽이 남아 있다.  투탕
카멘의 무덤을 찾는 관광객이라면 한 변쯤은 꼭  보고 지나가는 이 벽은 책 통해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벽이 투탕카멘의 죽음을 둘러싼  실질적인 단서를 포함하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테베 귀족들의 경우에는 무덤 벽에다 입을 여는 의식을 그리는 예가 종종 있었지만 투탕
카멘의 무덤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이런  의식을 묘사한 왕릉은 없었다.  이집트에 전통적인 
종교를 부활시킨 왕이 막상 자신의 무덤에서는 전통을 위반하다니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
다. 투탕카멘 무덤의 벽화를 본 사람들은 열이면 열 변화된 회화 양식에 감동받았다.  
  북쪽 벽은 미라 모습은 한 오시리스 형상의 투탕카멘이 똑바로 서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머리 위에 새겨진 상형 문자는 이 인물이 오시리스가 아니라 상 이집트와 하 이집트의 
왕인 투탕카멘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벽화 속의 투탕카멘은  제물인 송아지 다리와 함께 
의식용 깃털이 놓여진 키 작은 탁자 앞에 서 있다. 탁자 맞은편에는 표범 가죽을 걸친 점으
로 보아 최고 사제쯤 되는 남자가 서 있다. 사제는 투탕카멘의 입을 행해 입을 여는 도구를 
치켜들고 있다. 알다시피 이는 죽은 자에게 다시 숨결과 생명을 불어넣는 의식이다.  사제가 
표범 가죽만 걸쳤다면 전통적인 의식처럼 보였겠지만, 이 인물은  이집트 역사를 통틀어 이 
장면을 가장 이상하게 연출하고 있다.  다름 아닌 최고 사제의 머리에  얹힌 파라오의 왕관 
때문이다. 다시 말해 투탕카멘의 후계자가 의식을 집전하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 그의  머리
위에 새겨진 글귀가 그의 신분을 밝히고 있다. 그는 총리 대신 아이였다. 
  투탕카멘의 죽음 직후에 발생한 사건들을 재구성해 보면, 아이가 어째서 투탕카멘의 무덤 
벽에 등장하게 되었는지 분명해 진다. '하인'은 다름 아닌 아이였다. 안케센아멘은 그와의 결
혼을 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을 쳤다. 
 
  1. 투탕카멘이 죽자마자 매장과 무덤 장식을  위한 준비가 시작되었다. 어쩌면 그가  죽기 
전이었을 수도 있다. 필시 총리 대신  아이가 이 모든 과정을 감독했으리라. 그래서  아이는 
벽에 파라오 모습을 한 자신을 그리라고 명령할 수 있었다. 
  2. 아이의 모습이 파라오처럼 그려지자, 안케센아멘은 히타이트 왕에게 '하인' 과 결혼하지 
않아도 되게 아들을 보내달라는 편지를 썼다. 
  3. 안케센아멘과 결혼하기 위해 여행 길에 오른 왕자는 왕자가 안케센아멘과 결혼할 경우 
잃을 게 가장 많은 사람에 의해 이집트 국경근처에서 살해된다. 
  4. 아이가 이집트의 왕이 된다. 

  무덤의 그림과 사건 기록들을 종합해 보건대. 히타이트 왕자를 살해한 제1 용의자는 아이
로 좁혀진다. 나는 투탕카멘의 살해자도 그였다고 믿고  있다. 아이는 정부를 좌지우지했다. 
투탕카멘의 죽음과 그의 후계자를 결정하는 시기 사이에서 궁정의 최고 권력자는 총리 대신
인 아이였다. 그의 지위는 최근에 죽은 왕의 미망인보다도 높았다. 궁정 수비병은 물론 군대
까지도 쥐고 있던 아이는 안케센아멘에게 자신과 결혼하도록 압력을 가할 수  있었다. x-레
이가 제시하는 대로 추악한 범죄가 투탕카멘의 죽음 몰고 온 사인이라면 우리는 왕을 죽임
으로써 가장 득을 보는 사람이 누구였을지 부처 물어야 한다. 답은 명확하다. 투탕카멘의 죽
은 아이에게 왕간을 쥐어 두었다. 왕이  된 후의 아이가 어떻게 해서 이집트의  왕이 될 수 
있었는가와 안케센아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이다.  
  
  뉴베리의 반지
  아이가 어떻게 해서 파라오가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1931년  봄 카이로의 한 골동품 가
게에서 발견되었다. 당시만 해도 이집트 학자들이 시장에 어떤 물건이 나왔는지, 그 중에 혹
시 흥미로운 명문이나 역사적인 중요성을 띤 그림이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골동품가게를 
찾는 모습은 흔한 광경이었다. 초기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에 소장돼 있던 수천 개의 갑충석  
목록을 작성한 바 있는 이집트 학자 퍼시 뉴베리도 갑충석을 찾아 자주 골동품 가게를 방문
했다. 1931년 봄, 로베를 블랑샤르라는 상인의 가게에서 갑충석이 든 상자를 조사하던 중 뉴
베리는 아이와 안케센아멘의 카르투슈가 새겨진 푸른색 파양스 반지를 발견했다. 같은 반지
에 카르투슈가 두 개 있다는 건 오로지 한가기 의미밖에  없었다. 즉 아이가 미망인 안케센
아멘과 결혼한게 분명했다. 그들은 왕과 왕비였다.
  뉴베리는 그 즉시 하워드 카터에세 편지를 썼다.

  친애하는 카터 선생님께,
  제가 블랑샤르의 가게에서 아이 와의 두 번째 이름 옆에 안케센아멘의 카르투슈가 새겨진 
반지를 발견했다는 사실을 아시면 놀라실 겁니다. 이는 아이  왕이 투탕카멘의 미망인과 결
혼했다는 의미로 밖에 해석될 수 없습니다. 푸른색 유약을 칠한  이 반지는 동쪽 델타 지역 
어딘가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 반지에 대한 뉴베리의 논문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해 주었다. 아이는 안케
센아멘과 결혼함으로써 파라오가 됐으나, 대부분의 살인 사간이 그렇듯이 문제가  발생했다. 
다름아닌 반지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뉴베리는 블랑샤르의 가게에서  반지를 본 후 거기에
새겨진 명문을 베껴두긴 했지만 사지는 않았다. 아마 나중에  반지의 역사적 가치를 모르는 
관광객이 사간 모양이었다. 그렇게 해서 반지는 사라져 버렸다. 그로부터 몇십 년이 지나 일
부 이집트 학자들이 '뉴베리의 반지'가 정말 존재했는지에 대해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1970년대 초반 베를린의 이집트 박물관에서 뉴베리의 반지와 거의 흡사한  반지
를 사 들였다. 그러나 박물관측에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반지를 전시하지 않았다.  그래
서 난 내 눈으로 직접  반지의 중요성을 확인하고 싶었다. 나는  박물관을 방문해 큐레이터 
한 명을 붙잡고 그 반지에 대해  물어 보았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런  반지에 대해선 금시 
초문이라고 했다. 내가 겨우 충격을 수습하고  나서야, 우리 둘은 사장이 어떻게 된  건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원래 배를린에는 이집트 박물관이 동독과 서독 두 군데에 있었다. 그러다
가 최근 들어 박물관이 합쳐지면서 큐레이터들이 상대편 박물관에 소장됐던 물건들을  완전
히 파악하지 못해 일어난 일이었다. 반지는 정말 있었다. 한 달 수 나는 문제의 반지를 손에 
쥘 수 있었다. 
  반지의 상형 문자는 1931년 뉴베리가 베낀 내용과 일치했다.  그러나 내 판단으로는 그가 
본 반지가 아니었다. 뉴베리가 발견했던 반지가 맞다면 '푸른색 유약'이 칠해져 있어야 했지
만, 내가 입수한 반지는 흰색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3천년 전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게 틀림없었다. 아이가 투탕카멘과 결혼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게다가 나는 베를린의 이집트 박물관에서 제1 용의자의  얼굴과 마주치게 되었다. 플라스
틱 유리 진열장에서 나를 응시하고 있는 주인공은 돌로 조각하기에 앞서 제작된 아이의 실
물 크기의 석고 마스크였다. 강한 턱 선과 굵은 목을 지니 성인 남자의 얼굴이었다.  아이가 
아마르나 시절에 만든 무덤에서 나온 초상화와 거의 일치했다.  진열장 안에 전시된 아이의 
음흉한 얼굴을 들여다 보던 나는 그의 윗 입술에서 빨간 줄을 발견했다. 그 순간 나는 피라
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나야 그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그를 안좋게 보았겠지만,  지나
가는 행인이라도 그런 인상을 가진 사람을 저녁 식사에 초대하지  는 않을 것 같다. 안케센
아멘이 그와 결혼했다면 그녀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뉴베리 역시 하워드 카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 점을 궁금하게 여겼다. 그는 그녀를 추
적할 방법까지도 제시했다. 
  
  아이의 무덤을 보기 서쪽 계곡으로 갈 계획은 없으신지요? 만일 가게 된다면 흥미로운 점
을 발견하시게 될 겁니다. 석관이 있는 방 한쪽 벽면에 왕비와 함께 잇는 아이 왕이 있더군
요.....
  아이 뒤에 있는 왕비인 듯한 인물은 과연 누굴까? 안케센아멘이라는 이름이 다 들어갈 만
큼 카르투슈의 크기가 넉넉한가? 몇 년 전에 이 무덤에 갔다가 작성한 기록이 있지만 이 점
에 대해서는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 하지만 구미가 당기는 사안입니다. 시간이 괜찮다면 한 
번 가 보십시오. 가는 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시간이 되면 내가  직접 
룩소르로 가 보겠지만 5월 말 까지는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언제 한 번 카이로로 오십시오.
그럼 건투를 빕니다..   당신의 벗 , 퍼시 E. 뉴베리

카터가 뉴베리의 제안대로 아이의 무덤을 보기  위해 서쪽 계곡으로 갔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다. 워낙 외진 곳에 있기 때문에 아이의 무덤을 찾는 이는 거의 없다. 아이는 파라오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원래 투탕카멘이 짓기 시작했던 이 외"딴 무덤을  자신의 무덤을 점찍었
다. 아이는 파라오로서 왕들의 계곡에 묻힐 자격이 있었음에도 서쪽 계곡을 택했다.  이로써 
아이는 투탕카멘의 왕좌와 부인뿐만 아니라 무덤까지 거머쥐었다. 
  초기의 이집트 여행자들은 서쪽 계곡을 일정에서 제외시켰다. 그  만큼 고립돼 있었기 때
문이다. 그후 1798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에 따라 나선  과학자들이 서쪽 계곡을 발굴하
던 중 아멘호테프 3세의 무덤 옆에 있는 이 무덤을 발견했다. 보석을 찾던 벨초니가 1818년 
우연히 이 무덤을 발견할 때까지 미 발굴 상태로 남아 있던  점으로 보아, 당시 d아이의 무
덤은 암석 잔해로 있었을 확률이 높다. 

  프랑스 학자가 발견한 무덤은 서쪽 계곡에 있었다. 무덤 입구는 열려 있었지만, 그 전까지
는 아무에게도 알려져 있지 않았다. 무덤에 가보니 크기도 크기려니와 보존 상태도 아주 양
호했다. 
  내 호기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계곡 쪽으로 더 올라가  보니 아주 외진 곳에 쓰레기 
더미와는 잘라 보이는 돌무더기가 있었다.  나는 근처에 있던 막대기를  집어들어 돌무더기 
사이의 구멍에 쑤셔 녛었다. 막대기는 아주 깊이까지 들어갔다. 나는 그 즉시 구르나로 돌아
가 무덤을 열 인부들을 수배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래 전부터  앓고 있던 눈병이 그 무
렵 더 도지는 바람에 나는 거의 앞을 분가할 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인부들을 데리고 계곡으로 갔지만 눈의 상태가 너무 나빠서 예의 그 장
소를 찾는데 한참 애를 먹었다. 돌을 몇 대 들어내니 근처의 모래가 안쪽으로 흘러들어가는 
게 보였다. 우리는 입구에 아주 가까이 있었던 것이다. 돌을 모두 치우는 데는 두 시간도 채 
안 걸렸다. 나는 양초를 가져오라고  해서 안으로 들어갔다. 내  뒤로 아랍인들이 따라왔다. 
물론 내가 무슨 위대한 발견을  했노라고 떠들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벽화에 그러진 
진기한 인물들과 방의 크기, 방 한가운데 있는 석관으로 보아 신분이 높은 사람임이 분명했
다.  

  벨초니는 몰랐지만, 그가 발견한 건 아이 왕의 무덤이었다. 이미 고대 시기에 도굴돼서 벨
초니의 흥미를 끌 만한 물건은  거의 없었지만, 투탕카멘 사후에 진행된  일들을 알고 있던 
뉴베리는 무덤의 그림들이 안케센아멘의 운명에 대한 궁금증 일부를 풀어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아이의 무덤에는 파라오가 다음 세상에서 신들의 환영을 받는 전통적인 장면들이  재현되
고 있지만, 한쪽 벽면은 아주 특이하다. 아이는 투탕카멘의 무덤에 그려진 장면, 즉 밤의 시
간을 지키는 열두마리의 개코원숭이를  자기 무덤에도 고스란히 옮겨  놓았다. 무슨 이유에
서인지 아니는 죽은 선왕과 자신을 일치시키고 있었다. 또  다른 벽면에는 습지에서 사냥하
는 아이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의 옆에는 그의 부인인 왕비가 서 있다. 
  파라오의 경우, 배우자와 함께 영원의 문턱을 넘기 위해 무덤에 왕비의 모습을 그리는 사
례가 왕왕 있었다. 그건 투탕카멘도 마찬가지였으리라. 특히 안케센아멘은 어릴 적부터 친구
이자 헌신적인 아내가 아니었던가, 지금까지 나는 투탕카멘의 무덤  안에서 수십 차례에 걸
쳐 강의를 진행해왔다. 물론 그때마다  제자들에게 벽화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있지만,  살인 
이론에 대해 생각하기 전까지는 거기에 안케센아멘이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서로에 
대한 헌신과 벽화가 그려질 때 안케센아멘이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하건대, 이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이가 무덤 벽화 작업을 비롯해 투탕카멘의 장례 준비 일체를 진행하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투탕카멘의 무덤에 안케센아멘이 보이지 않는다는 게 충분히 이해
가 된다. 아이는 투탕카멘이 죽자마자  안케센아멘과 결혼할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아이는 
그녀가 첫 남편과 함께 영원히 지내는 걸 원치 않았다. 
  아이가 투탕카멘의 무덤에 안케센아멘을 그리지 못하게  했다면, 안케센아멘은 아이의 무
덤 벽에 등장해야 한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라면 그녀는 거기에 있어 마땅하다. 아이가  그녀
와의 결혼을 통해 왕이 됐다면, 그녀는 이집트의 왕비, 즉 '왕의 위대한 부인'이었다. 
  카터나 혹은 다른 누군가가 그녀의 두 번째 남편 무덤에서 그녀를 찾았다는 기록은 없다. 
18왕조 후기의 복잡한 사건들에 관심을 가진 뉴베리나 다른 사람처럼 나 역시 그녀의 운명
이 궁금했다. 그래서 나는 아이의 무덤을 조사하기로 했다. 
  서쪽 계곡을 형성하는 황량한 와디를 걸어올라가면서, 나는 젊은 왕비의 자취를 볼 수 있
으리라는 희망에 부풀었다. 나는 무덤 안으로 들어가기 무섭게 아이가 그의 왕비와 있는 장
면부터 살폈다. 그녀는 '왕의 위대한 부인'이 라는 상형 문자의 내용에 걸맞게 아이 뒤에 당
당하게 t 있었다., 그러나 이 왕비는 누굴까? 카르투슈 안의 이름은 지워져 있었다. 이 왕비
는 두 사람 중 한 명일 수밖에 없다. 아마르나에서 그와 함께 있던 아이의 첫 번째 부인 테
이 아니면, 그와 결혼할 때도 이미 이집트의 왕비였던 안케센아멘이었다.
  카르투슈가 지워져 있었지만, 누군지는 분명했다. '안케센아멘'이 쓰여  있었다고 하기에는 
카르투슈의 길이가 너무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테이'라면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아이 뒤에 
서 있는 사람은 두 번째 부인이 아니었다. 안케센아멘은 역사에서 사라져 버렸다. 테이는 독
자적인 권력을 쥐고 있던 강한  여자였다. 그녀는 아마르나에서 아케나텐에게  황금 칼라를 
하사받은 유일한 여자였다. 게다가 아마르나 시절에 네페르티티의 유모로 있었기 때문에 안
케센아멘을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테베에서도 젊은 왕비의 시중을 들었을 수도 있다. 아이
가 왕이 되자 테이는 일거에 높은 지위에 올라섰다. 그러나  안케센아멘이 살아 있는 한 절
대 '왕의 위대한 부인'이 될 수 없었다. 

  사라진 증인
  안케센아멘의 마지막 행적은 히타이트 왕에게 보낸 그녀의 두  번째 편지다. 여기서 그녀
는 자신은 진실을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히타이트 왕자와 결혼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
음을 재차 강조한다. 베를린 박물관의 반지는 그녀가 그후에도, 그러니까 적어도 아이가  결
혼할 때까지는 살아 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후그녀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안
케센아멘의 흔적이 지워져 있는 기간은  3천 년 동안만이 아니다.  그녀는 투탕카멘의 무덤 
벽에서 남편의 영원한 동반자 모습으로 그려져 있어야 했다.  게다가 아이와의 결혼 직후에 
죽었다면, 그의 무덤에 조금이라도 언급돼 있어야 한다. 모든 걸 떠나서 그녀의 무덤은 어디
에 있는 걸까?
  지금까지도 안케센아멘의 무덤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녀의 무덤이 정말로  존재했다면, 
이미 예전에 깨끗이 도굴당했다 하더라도 흔적은 있어야 한다. 안케센아멘이 이집트의 왕비 
자격으로 묻혔다면, 그녀의 무덤에는 가구와 옷가지,  보석, 관이 있었을 게 분명하다.  고대 
이집트의 무덤 도굴꾼들이 가구건 보석이건 할  것 없이 값나가는 물건들은 깡그리  가져가 
버렸다 해도, 그래서 무덤이 난장판이 됐다 해도, 남아 있는 잔해가 그곳이 한때는 안케센아
멘의 무덤이었음을 보여줄 터였다. 장기를 담아두었던 항아리 파편이나 옷과 화장용품을 넣
어두었던 나무 상자 조각, 혹은 도둑에게는 전혀 쓸모없지만 안케센아멘의 이름이 새겨졌을 
물건들은 남아 있을 터였다. 왕비의 이름과 함께, 왕비는 죽었으면 이들 물건이 그녀의 무덤
에서 나왔음을 알리는 징표가 있을  터였다. 즉 죽은 자의 이름  옆에 붙는 '진실한 목소리' 
라는 어구 말이다. 
  이집트인들은 죽은 자를 위해 '그는 서방으로 갔다'라든지 혹은 '서방인'과 같은 완곡 어구
를 많이 사용했다. 이는 "세상과 작별을 고하다"라는 우리의 표현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들은 
죽은 자가 마흔 두 명의 신이 지켜보는 진실의 전당에  나타난다고 믿었다. 여기서 죽은 자
는 자기가 다음 세사응로 들어가도 된다는 허락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게 된다. 
아무한테도 해를 끼치지 않았으며, 이웃의 밭에서 물꼬를 돌려놓은  적도 없으며 등으로 시
작하는 '사자의 서' 125장은 그때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는 지를 가르쳐 주는 이종의 모범 답
안인 셈이었다. 진술이 끝나면 한쪽에 진실의 깃털이 올려진 저울에 심장을 달게 된다. 오늘
날의 정의의 저울 개념은 여기서 나왔다. 저울이 균형을 이루면, 죽은 자는  '진실한 목소리'
로 인정받아 다음 세상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저울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면, 죽은 자의 
심장은 '심장 포식자'에게 먹혀 존재 자체가 사라지게 된다. 그 후 세월이  지나면서 '진실한 
목소리'는 '고인'과 동의어로 쓰이게 되었다.  따라서 안케센아멘의 무덤에 있던  물건이라면 
그녀의 이름 다음에 '진실한 목소리'라는 어구가 붙어 있어야 한다. 
  아무리 심하게 도굴당한 무덤이라도 점유자의 흔적은 남아 있다. 
  골동품 시장에 나온다든지, 아니면 도굴된 무덤을 조사하던 발굴자들에 의해 깨진 조각이
라도 발견되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집트의 두 명의 왕과  결혼한 안케센아멘의 경우에는 전
혀 단서가 없다. 물론 우리가 아직 그녀의 무덤을 찾지 못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제대로 묻
히지도 못한 채 이름마저 역사에서 지워져 버렸거나, 언젠가  그녀의 무덤이 발견되기를 기
대해 보지만, 후자의 경우가 그녀의 최후였을까 봐 두렵다. 

  용의자 명단
  이 경우에는 '후두부 가격'을 암시하는 투탕카멘의 두개골 x-레이와 안케센아멘이 히타이
트 왕에게 보낸 편지, 살해된 히타이트 왕자, 평민(하인)과 결혼한 후 역사에서 사라져 버린 
안케센아멘이 단서다. 모든 게 추악한 범죄였다는  의심을 품게 한다. 우리는 한 사람의  죽
음, 즉 투탕카멘의 죽음에서 출발했다. 그후 우리는 히타이트 왕자 살해 사건과 왕녀의 의심
스런 실종을 접했다. 이 세 명의 죽음은 연관돼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주요 용의
자들은 어떤 이들일까? 대부분의 살인 사건에서처럼, 죄책감에  의해 드러나게 되는 실수를 
포착하기 위해서는 용의자들의 추후 행동을 세밀히 관찰해야 한다.

  총리 대신 아이
  투탕카멘이 죽은 직후, 아이는 자기가 섬겼던 젊은 왕의 무덤에 자신의 모습을 그리게 했
다. 암 여러분은 그가 살인자였다면 희생자에게서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지려 했을 거라고 생
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정반대의 상황이 발생했다. 그러나 투탕카멘을 죽인  아이가 
전임 군주의 마지막 의식을 집전하는 왕으로 보이고 싶어했던  데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다. 
즉 이를 통해 왕좌에 대한 권리를 합법화하는 한편,  후계자로서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서였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자신의 모습은 무덤 벽에 그리게 했지만, 정작 투탕카멘의 부인
인 안케센아멘은 빼버렸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안케센아멘을 위해 다른 계획
을 준비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후 아이는 투탕카멘이 시작했던 서쪽 계곡의 무덤을 차지
해서는 투탕카멘의 무덤 벽에 있던  그림과 똑같은 그림을 그리게 했다.  이로써 아이는 닷 
한 번 더 전임 파라오와 자신을 연결시켰다. 투탕카멘과의 관계를 더욱더 간도하기 위해, 아
이는 새로 부여받은 파라오의 이름에 '신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추가하기까지 했다
  아이는 60대에 왕위에 올랐다. 그는 왕이 된 지 4년이 채 못 돼서 죽었다. 재임기 동안 그
가 남긴 흔적은 투탕카멘보다도 적었다. 아이의 무덤은 무덤  도굴꾼들에 의해서 심하게 훼
손됐지만, 그의 무덤 벽에서 그의 이름을 지우는 공식적인 신성 모독은 그전에 이미 일어났
다. 기념물에 가해지는 이러한 저주는 고대 이집트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이름은 굉장히 중요한 마법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죽은
자의 이름을 말하면 다시 그를 살릴 수 있다" 고  말해질 정도였다. 어떤 사람의 이름이 그
의 기념물에서 지워졌다면, 그는 더 이상 존재하지 못했다. 즉 마지막 흔적이 지워짐과 동시
에 그 사람은 영원히 저주를 받게 되는 것이다. 아이가  다음 세상에 들어가는 기쁨을 누리
지 못하게 하려는 이러한 시도는 다른 데 까지 확대 되었다. 하인상인 우샵티들도 파괴되었
다. 금전가치가 없었기 때문에 무덤 도굴꾼들 조차도 우샵티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는 형편
이었음에도, 아이의 무덤에서는 파괴가 워낙 철저해 그가 왕이었다는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아이가 명부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누군가가 단단치 벼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장군 호렘헵
  호렘헵 장군이 아이의 뒤를 파라오가 됐기 때문에, 아이의  무덤 파괴를 명령했을 유력한 
용의자는 그다. 호렘헵이 어째서 그런 일을 했을지 이해하기  위해선 그의 경력부터 살펴보
아야 한다. 호렘헵은 투탕카멘의 아바지 통치기에 군 행활을 시작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아
마르나로의 종교 이민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대신 다음 파라오인 투탕카멘  밑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군대총사령관', '왕의 대리인'. '왕의 작업 감독자' 등을 비롯해 호칭만 해도 열 개
가 넘었다. 출신은 미천했지만, 호렘헵은 젊은 파라오를  섬기며 출세가도를 달렸다. 상으로 
내려진 사카라에 있는 그의 대형  무덤은 투탕카멘의 관리들 중에서 제일  규모가 크다. 그 
당시에는 일 개인이 돌은 캐기 위해 원정대를 보내거나 무덤을 장식하기 위해 수백명의 노
련한 장인등을 고용한 수는 없었다. 파라오가 내린 선물이 아니 한 불가능한 일이었다. 호렘
헵은 자신의 무덤 벽에 누비아, 리비아, 시리아 등지에서의  군사 활동을 그려 넣었다. 아케
나텐이 잃어버렸던 이집트의 외국 영토 지배권을 되찾은 사람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평화주의자 파라오였던 아케나켄에 대한 한 전사의 분노가 어느 정도였을지  충분
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히타이트 왕에게 보내는 안케센아멘의 편지를 접한 그의 반응은 
그보다 훨씬 강했으리라. 호렘헵은 목숨을 걸고 히타이트와 싸웠다. 그러나 왕비는 그들  중 
한 명과 결혼해 그를 이집트의 군주,  다시 말해 호렘헵의 왕으로 만들고 싶어했다.  따라서 
호렘헵이 히타이트 왕자를 살해하는데 연루되어 있었다 할지라도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
다. 루브르 박물관 이집트  분과 큐레이터인 데스로슈-노블쿠르 여사는  호렘헵을 히타이트 
왕자 살해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하는 데 추호의 망설임도 없다. 

  히타이트의 자난자 왕자는 예정대로 경호원과  함께 출발했다. 그러나 호렘헵의 경찰,  즉 
'말 탄 이집트 사람들'이 도중에 그를 살해해 버렸다. 

  적어도 군 총사령관의 묵인 없이 히타이트  왕자를 도중에서 가로채라고 영령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었을까?
  호렘헵은 아이의 통치기 동안 계속해서 총사령관직을 지냈으나, 연로한 아이가 죽자 군대
를 쥐고 있던 호렘헵은 스스로 왕임을 선포했다. 이제야 비로소  두목이 된 그는 자신의 진
짜 성격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호렘헵은 자신을 출세시켜 준 장본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투탕카멘의 모든 흔적을  지워 
벼렸다. 1차 목표는 투탕카멘이 할아버지인 아멘호테프3세을 위해 완성한 룩소를 신정의 열
주랑이었다. 거기에 그려진 오페트 축제 장면들은 그대로 놔두었지만, 투탕카멘의 이름을 지
우고 댓니 자기 이름을 집어 넣었다. 어쩌다 신들이 룩소르  신전 벽을 내려다 보았다면 자
기를 칭찬했으리라. 신심이 깊은 사제들이 그의 영혼을 위해  공물은 바치던 투탕카멘의 신
전도 철저히 파괴 당했다. 한때 신전 입구에 서 있던  두 개의 거성에서도 투탕카멘의 이름
이 지워져 있다. 거상을 자세히 조사해 보면 카르투슈가 다른 상형 문자들보다 깊게 새겨져 
있다. 아이가 1차로 손을 댄 후 그 위에 다시 호렘헵의 이름을 덧입혔기 때문이다. 이  거상
의 경우, 젊은 얼굴을 빼면 투탕카멘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투탕카멘이 옛 전통의 복원을 선언하며 카르나크  신전에 세운 석주에도 더 이상은  그의 
이름이 없다.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에 있는 이 석주를 모기 위해 걸음을 멈추는 방문객들은 
다른 상형 문자보다 조금 깊게 새겨진 호렘헵의 이름을 보게 되리라. 투탕카멘의 생을 끼워 
맞추는 작업이 어려웠던 이유는 호렘헵이 그의  흔적을 워낙 철저하게 지워 버렸기  때문이
다. 대부분의 군인들이 그렇듯이, 그 역시 한 번 일을 시작했으면 끝을 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그렇다면 이 몰염치한 말소 행위의 동기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 투탕카멘에 대한 분노? 
그래서 살인까지 저질렀던 걸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투탕카멘의 이름에 대한 호렘헵의 
공격은 개인적인 게 아니었던 듯하다. 젊은 왕의 무덤을 그대로 와두었을 뿐만 아니라, 부분
적인 도굴 후 무덤을 재봉인한 사람도 그였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이 같은 말소 행위는 
역사를 다시 쓰는 방대한 작업의 일부였다. 호렘헵은 아마르나  시대의 흔적뿐만 아니라 투
탕카멘과 아이를 위시해 거기에 연관됐던 사람들까지도 지워 버렸다. 
  호렘헵이 취임할 당시만 해도, 카르나크에는 아케나텐의 아텐 신전들이 아직 남아 이었다. 
그러나 호렘헵의 통치가 막을 내릴  쯤엔 아텐 신전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게 된다. 
먼저 호렘헵은 아텐 신전들을 철거하라고 명령했다. 그런 다음  거기서 나온 벽돌들을 카르
나크의 거대한 출입문을 만드는 데  다시 사용했다. 뿐만 아니라  아마르나가 존재했었다는 
증거를 철저하게 없애기 위해 그는 아케나텐의 도시로 일꾼들을 보내 건물이란 건물은 하나
도 남김없이 모조리 파괴하라고 지시했다.
  아케나텐과 투탕카멘, 아이에 대한 기억을 지우는 일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호렘헵은 
자신의 통치 연도 개시일을 아멘호테프 3세가 죽은 직후로 잡았다. 아이의 후임자였던 
호렘헵은 재임 1년으로 시작해야 옳았지만, 그 대신 30년으로 시작했다. 그리하여 
아멘호테프 3세가 죽은직후에호렘헵이 왕위를 이어받은 것처럼 뤘다. 그 사이  의 29년, 즉 
아케나텐과 스멘카레 , 투탕카멘, 아이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다음 호렘헵은 자신이 
평민으로 그려져 있는 사라라의 무덤으로 석공들을 보냈다, 석공들은 호렘헵의 이마에 
왕권의 상징인 코브라를 새겨 넣었다. 사람들이 그를 일개 장군이 아니라 파라 오로서만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모든 정황으로 보아 호렘헵의 역사 다시 쓰기 작업은 개인적인 복수가 아니라 정부 차원
의 정책이었다. 아마르나와 거기에 연루된 사람들은 모포리 지워져야 했다. 이를 위해  허구
까지 가세했다. 아비도스에서 발견된 왕의 이름을 적은 공식 기록에 보면 호렘헵이 아멘 
호테프 3세의 이름 직후에 나온다.
  그러나 아마르나와 관련된 것이라면 물건이든 사람이든 닥치는대로 파괴했던  호렘헵에게
도 한 가지 예외는 있었다. 그 와중에서도 투탕카멘의 무덤은 무사했다. 반면 타이의 무덤과 
아제나텐의 무덤은 그렇지 못했다. 여기에는 단순한 감상주의가 작용했던 것 같다.
  호렘헵은 투탕카멘 밑에서 출세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막강한 권력과  부를 쥐어 준 투탕
카멘에게 애정을 느끼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리하여 젊은  파라오는 지상의 공식적인 기록
에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무덤에 서 평화롭게 잠잘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호렘헵을 '법과 질서의 파라오' 라고 부른다 그는  '인품이 훌륭한 사람들'
을 중심으로 궁정을 재편했을 뿐만 아니라, 관리들의 뇌물 수수를 철저하게 금했다. 그는 이
렇게 물었다. "백성들이 네 사무실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 누가 정의를 어
긴단 말인가? 군인 출신으로서 그는 범죄자들에게도 호된 벌을 가했다. 예를 들어, 부당  취
득을 한 사람들은 코를 자른 후  추방했다 도둑질하다 잡힌 사람은 곤장  1백 대를 맞았다.   
  27년의 재임기 동안 호렘헵은 이집트에 예전의 영광을  가져오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신
들을 위해 신전과 성소를 세우는 한편, 아주 먼 곳까지 군대를 파견했다. 마침내 그가  왕들
의 계곡에 있는 무덤에 묻혔을 때, 이집트는 그가 처음 왕위에 오를 때에 비해 훨씬 좋아져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살인과 무관했다는 뜻은 아니다.
 
  살해 용의자 기소 
  투탕카멘이 의문에 휩싸여 죽은 후, 또 다른 살인  사건(히타이트 왕자의)이 발생했다. 그
후 다시 제3의 살인 사건(안케센아멘의)이 발생했을 수 있다. 이 세 명의 죽음은 연관돼 있
었을까, 그렇다면 살인자는 한 명이었을까?  모든 정황 증거로 보아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총리 대신 아이와 호렘헵으로 좁혀진다. 이 둘에 대해 따로따로 생각해보자. 
  가장 강력한 범죄 증거는 고소인측인 히타이트의 문서 보관소에  남아 있다, 이집트에 전
쟁을 선포했던 사실로 미루어 보건대, 히타이트인들은 왕자 살해 사건을 이집트의 공식적인 
침략 행위로 간주했다. 그들은 이 사건에 이집트 정부의 고위급 관리들이 연루돼 있다고 믿
었다. 그중에서도 호렘헵과 아이는 유력한 용의자로 거론되었으리라, 이 두 사람은 각기  강
한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군인인 호렘헵은 평생을 바쳐 히타이트와 싸운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원수
들 중 한 명이 그의 왕이 되려 하고 있었다. 따라서 호렘헵 입장에서는 히타이트 왕자를 제
거해서라도 권력자들이 이집트인 왕을 뽑도록 만들어야 했다. 이에  비해 아이의 동기는 훨
씬 개인적이었다. 그는 그저 왕이 되고 싶었다 안케센아멘이 히타이트 왕에게 편지를 쓸 무
렵, 아이는 투탕카멘의 무덤  벽화를 그리는 화가들에게 자신을  파라오처럼 보이게 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안케센아멘을 제외한 이집트의 권력자들에게 히타이트는 도저히 신뢰
할 수 없는 적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히타이트 왕자가 이집트 국경을 넘어선 안 되었다.
  게다가 아이와 호렘헵에게는 이 일을 해치울 수 있는 수단도 있었다. 아이는 이집트의 총
리 대신으로서 정부를 쥐락펴락하고 있었다. 외국인과  결혼하려는 안케센아멘의 계획을 들
었다면, 국경 수비대에게 히타이트인들이 항복을 가장하고 쳐들어올 테니 경계를 강화 
 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건 일도  아니었으리라. 호렘헵 쪽에서도 전차  군단을 보내 왕자와 
그 측근들을 없애는 일 정도야 식은 죽 먹기였으리라.  히타이트가 이집트를 지배하려 한다
는 소식을 들은 병사들은 목숨을 걸고 그 불미스러운 사건을 막으려고 했을 게 틀림없다.
  호렘헵과 아이는 각기 동기와 수단을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서로  묵인했을 수도 있다. 
왕이 되고 싶어했던 아이는 히타이트 왕  밑에 들어가는 걸 죽기보다도 싫어하는  호렘헵과 
접촉한다. 그리하여 군사령관은 아이의 추잡한 계획에 동의한다.
  이들 사건이 오늘날에 일어났다면, 호렘헵과 아이는 따로따토 신문을 받은 후 검찰측으로
부터 상대방에 대한 정보와 형량을 맞교환하자는 제의를 받았으리라 결국 이 둘에게는 히타
이트 왕자 살해 사건의 공모자라는 판결이 나왔을 가능성이 제일 크다.
  나머지 두 명의 의심스러운  죽음, 즉 안케센아멘과 투탕카멘의  죽음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오늘날 같으면, 동기와 수단을 가진 사람들을 면밀히 조사한 후 그중에서 제 1용의자
를 골라 기소했으리라. 투탕카멘이 살해되었다면, 용의자는 호렘헵보다는 아이일 확률이  높
다. 물론 둘 다 강한 동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수단은 아이에게만 있었다. 상황 증거는 아이
보다 1세기 전에 총리 대신을 지낸 케크미레의 무덤 벽에 있다 무덤은 명문과 일상  생활을 
묘사한 그림으로 장식돼 있다. 글자건  그림이건 두 경우 모두 고대  이집트의 총리 대신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 레크미레는 이집트 땅에서 나오는 사치품이란 사치품은 손대지 못하는 
게 없었을 뿐만 아니라 연일 산해진미 가 그득한 연회를 베풀었다. 하인들이 엄청난 숫자늬 
손님들 시중을 드는 동안 악사와 무희들이 흥을 돋구었다.  레크미레는 자신의 높은 신분을 
자랑하고 싶은 나머지 총리 대신으로서의 자신의 책무를 세세히 기록했다 일례로 그의 무덤 
벽에 새겨진 명문 중에는 이런 내 용이 담겨 있다. "총리 대신의 인가 없이는 그 누구도 왕
의 거처를 드나들 수 없게 하라." 이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시피, 외부인의  궁전 출입을 책
임졌던 유일한 사람은 총리 대신이었다. 따라서 젊은 왕이 잠자는 동안 누군가를 시켜 투탕
카멘의 뒤통수를 내리치게 하는 일쯤은 아이에게는 식은 죽 먹기였다. 아이는 굳이 자기 손
에 피를 묻힐 필요가 없었다. 나이도 나이였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권력의 자리에 앉아 있었
다. 그의 명령을 기꺼이 수행할 아첨꾼들은 도처에 널려 있었다. 
  그렇다면 아이는 과연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써야 했을 만큼 강한 동기를  가지고 
있었을까? 성인기로 접어들면서 투탕카멘은 스스로 결정을 내릴 만한 능력을 쌓아나갔을 게 
틀림없다. 그리하여 그를 통제하기가 점점 어려워졌으리라. 이에 영리한 아이는 자신의 권력
과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음을 피부로 느꼈으리라. 거기다 안케센아멘이 아들을 낳기라도 한
다면(비록 두 번이나 유산을 하긴 했지만 아직 젊으니 충분이 부서지고 말  터였다 그는 자
신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음을 절감했으리라. 아이는 파라오가 위대한  국가를 거의 파멸 직
전으로 몰아가는 모습을 지켜본 궁정의 측근이었다. 그후 왕좌는 아이가 보기에는 어린아이
에 불과한 자에게 넘어갔다, 나라의 포든 조직을 주물렀던  아이가 왕자의 탄생으로 자신의 
통치 능력이 사장되는 걸 과 연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물론 아니었으리라. 그는 파라오가 
될 자격이 충분했다.
  아이가 파라오가 되려면 빠른 시일 내에  두 명이 죽어야만 했다. 그들 중  한 명은 누가 
보더라도 살해당했다. 여기에 안케센아멘의 강제 결혼과 그 뒤에  이어진 그녀의 죽음을 연
결해 보면. 연쇄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고 믿을 만한 근거가 충분하다.
 
왕비 안케센아멘 
 
  죽음은 물론 무덤과 시신에 대한 기록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안케센아멘의 살인 
사건은 다른 사건들에 비해 공소 유지가 훨씬 어렵다. 사실 우리는 그녀가 두려워하고 있었
으며 어떻게든 하인과의 결혼을 막아보려다가 아이와 결혼한 후 역사에서 사라져  버렸다는 
것 외에는 그녀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그녀에 대한 살해 동기를 이  자리에
서 모두 열거해 보는 수밖에 없다. 안케센아멘과 결혼한  아이는 이집트의 왕이라는 칭호와 
권력을 거머쥐게 되었다. 따라서 아이에게는  더 이상 안케센아멘이 필요치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그랬기로서니 어째서 자신의 새 부인을 그토록 빨리 제거해 버린 걸까? 아마 안케센
아멘은 투탕카멘의 죽음에 자신의 새 남편이 연루돼 있다고 판단하고는 그를 비난했으리라. 
결국그녀는 히타이트 왕에게 자신의 두려움을 호소했다.
  여기서 우리는 스무 살의 안케센아멘과 남편을 공유해야 했던 아이의 부인 테디에 대해서
도 고려해 봐야 한다. 아이 쪽에서도 조강지처와 젊은 왕비를 맞바꿀 의사는 없었다. 알다시
피 테이는 사회적으로 상당히 높은 지위에 올라 있던 여자였다 따라서 두 번째 부인으로 만
족했을 리가 없다 어쩌면 테이는 안케센아멘의 살해를 지원했거나 사주했을지도 모른다. 결
국 아이의 무덤은 그의 충실한 부인 테이를 '왕의 위대한  부인'으로 묘사한 그림으로 장식
돼 있다. 반면 안케센아멘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호렘헵 장군 역시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 아이는 상속자가 없는 연로한 파라오였다,  그가 
죽으면 이집트의 왕좌는 먼저 차지하는 사람이 임자가 될 터였다. 게다가 군대를 업고 있는 
호렘헵으로서는 그 문제에 관한 한 누구보다도 유리한 입장에  있었을 터였다. 그런 상황에
서 안케센아멘은 그가 왕위에 오르는 데 장애물이 될 수 있었다. 호렘헵은 그녀가 두 번 유
산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는 그녀가 다시 또 수태할 수 있음을 뜻했다. 아이  왕과의 
사이에서 아기가 생긴다면, 나아가 그 아기가 사내 아기라면, 왕좌에 대한 호렘헵 의 야망은 
그걸로 끝일 터였다. 여기에 덧붙여 물론 증거는 없지만, 투탕카멘이 살해될 당시 그의 아이
를 임신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동기들은 과연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 내 생각으로는 물론 추측일 따름
이지만, 투탕카멘 외에 나머지 두 사람도 아이가 살해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히타이트 
왕자의 경우에는 로렘헵도 연루돼 있었다. 나는 호렘헵이 투탕카멘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 
보면서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으리라고 믿고 있다. 나이든 후계자가  평민이 왕이 되는 길을 
열어 놓는다면, 머지않아 또 다른 평민, 즉 그 자신이  왕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고해서 그가 투탕카멘을 죽였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아직 그  같은 일을 해낼 만한 수단이 
준비돼 있지 않았다. 물론 죽을 각오가 돼 있다면 누구든 간 큰 암살자가 될 수 있다. 그러
나 호렘헵이 암살을 명령했다면, 호락호락하지 않은 아이를 먼저 처리했을 것이다. 어느  모
로 보나 그의 차례는 제2인자 다음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호렘헵 쪽에서는 아이와 싸
울 이유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안케센아멘을 죽일 필요도 없었다. 부인이 아무리 젊다 하더
라도 아들을 낳기에는 아이의 나이가 너무 많았지 때문이다.
  결국 투탕카멘의 때이른 죽음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건  모조리 아이 손에 떨어졌다, 그는 
파라오를 해치울 수 있는 수단뿐만 아니라 잡히지 않을  수단까지도 가지고 있었다. 아이에
게는 히타이트 왕자가 이집트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끔 해야 할 이유도 있었다. 그와 억지
로 결혼한 불쌍한 안케센아멘은 투탕카멘의 죽음과 관련해 아이의 죄를 추궁할 수 있는 이
집트 유일의 인물이었다 왕관을 얻기 위해 이미 두 사람을 살해한 아이로서는 자신의 왕좌
를 지키기 위해 한 사람쯤 더 죽이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으리라.

  나일게이트 
 
  아이가 정말 투탕카멘을 살해했다면. 어떻게 그 일을  무사히 해치웠을까? 여기에는 저마
다 일리가 있는 몇 가지 답이 있다. 투탕카멘이 살던 시기의 사람들은 지배자가 어처구니없
는 짓을 저지르더라도 그에 대항해 반기를 들지 않았다,  일반인들은 국사에 책임이 없었기 
때문이다. 즉 결코 만나지 않는 두 개의 평행선이 사회를  관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반 백
성과 파라오가 맞부딪칠 일은 없었다. 따라서 고대 이집트인들은  아이에 대항해 반기를 들
지 않았으리라,
  대관식을 거친 파라오는 신성해졌다. 다시 말해 태양신 레의 아들인 지상의 신이  되었다. 
파라오는 너무 동떨어진 곳에 존재했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이 그를 만난다는 건 꿈조차 꿀
수 없는 일이었다. 텔레비전과 라디오, 신문이라는 매체가 있는 오늘날의 현대 세계에  서는 
국민들이 일생 동안 지도자를 한 번도 보지 않고 죽을 수 있다는 걸 상상하기란 좀처럼  쉽
지 않다, 그러나 이집트의 백성들은 투탕카멘이 죽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뿐이었다. 파라
오의 지병이나 사망 원인을 알리는 벽보가 붙지 않았다고 해서 그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
람은 아무도 없었으리라. 늘 그래 왔듯이 이전의 신이 또 다른 신으로 대체됐을 뿐이었다.
  아이가 살인을 저지르고도 무사할 수 있었던 두 번째 이유는 정의의 심판말고는 그를 기
소할 장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우리야 감시와 균형 체계에 너무 익숙해 있어서 법 
밖에 존재하는 사람을 상상하기가 어렵지만, 파라오가 죽으면 총리 대신이 곧 법이었다.  상
황은 워터게이트와 비슷했다. 우리의 최고 관리에 해당하는 대통령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수도 있겠지만, 이 땅의 최고  법관인 법무장관도 그의 범죄 행위에  연루돼 있었다 그러한 
상황 아래서 범죄 사실이 아무리 확실하다  하더라도 어떻게 대통령을 기소할 수  있었겠는
가? 그래도 워터게이트에서는 하원과 상원이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뭔가 조치가 취해졌다. 
그러나 고대 이집트에는 국회가 없었다.  다시 말해 아이에게 법적 절차를  집행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었다, 아이의 이러한 면책 특권은 호렘헵을  제치고 그를 범인으로 지목하는 
또 다른 이유다.
  아이가 무사히 살인을 해치울 수 있었으리라는 증거는 총리 대신 라모세의 무덤에 새겨져 
있는 한 줄의 문장에서도 발견된다. "아무도 총리 대신을 벌하지 못하게 하라." 총리 대신은 
이집트의 법관 중에서 지위가 제일 높았다 다시 말해 그 자체가 최고 법원이었다. 투탕카멘
이 죽어 버렸기 때문에 살아 있는 사람들 중에서는 아무도  아이를 벌할 수 없었다, 게다가 
법의 테두리 밖에 있었기 때문에 굳이 완전 범죄를 꾸밀 필교도 없었다.
  그 당시에는 왕을 죽이고도 정말 무사할 수 있었다. 범죄 사실이 행여 기록으로 남겨졌다 
하더라도 지워 버리면 그만이었다, 일례로  호렘헵은 왕위에 오른 뒤 아케나텐과  투탕카멘, 
아이의 기록을 비롯해 아마르나의 이단에 연루됐던 모든 사람의 흔적을 깡그리 지워 버렸다
_ 내가 보기엔 투탕카멘에 대한 귀중한 정소를 포함해  모든 게 파괴되었다. 아이는 투탕카
멘의 통치 행위와 고문들과의 관계는 물론, 살인에 대한  단서까지 말끔히 삭제해 버렸으리
라.
 
  피고측 답변 
  동료들에게 살인 이론을 내비치자, 격론이 벌어졌다. 동의하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그
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토론은 늘 흥미진진했고 합리적이었다. 그러나  내가 
교육 방송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나가 살인 이론을 공개적으로 언급하면서 모든  상황이 
달라졌다.
  모름지기 기록물은 이야기를 간단하고 솔직하게 진술해야  한다, 시청자들은 고대 이집트
에 친숙하지 않기 때문에 쉽게 흥미를 잃을 수 있다 그래서 이해가 잘 되게끔 요점을  간단 
명료하게 짚어 주는 게 중요하다. 프로그램은 반응도 좋고 시청률도 높았지만, 그렇다고  해
서 살인 이론이 맞다고 할  수는 없다. 외계인과의 조우를 다룬  프로그램도 시청률이 높지 
않은가.
  프로그램이 나간 직후, 가까운 동료 몇 명이 나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투탕카멘에 관심
이 있는 사람이 나 하나뿐이 아님을 알게 된 건 바로  그 무렵이었다, 한 동료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어이 보브, 호렘헵이라는 생각은 안해 봤나?" 내가 아이를 모략한다고 생각하는 
동료도 있었다. 그 동료는 아이를 투탕카멘의 할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보고 있었다. 나는 긴 
토론과 장문의 편지들이 오가고 나서야 반대쪽 입장이 전혀 거론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
았다. 나는 아이를 기소한 검사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아이 의 변호사라면 뭐라고 말했을까? 
이 자리를 빌어 반대쪽 의견을 제시할 수 있어 기쁘다.
  피고측 변론은 아이의 인품을 강조하면서 그가 40년 이상이나 성실한 결혼 생활을 유지한 
가장이자 궁정의 일원이며 투탕카멘은 물론  그의 아버지까지 모신 충신이었음을  지적하는 
내용으로 시작했으리라. 아텐을 섬기는 종교인으로서 그는 아마르나의 자기 무덤 벽에 아텐 
성가를 새겼다 게다가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투탕카멘의 장례를  주관했다. 그런 그의 노력 
덕분에 집안 대대로 때려오는 가보를 비롯해  왕이 생전에 아끼던 물건들과 아름다운  장례 
물품, 황금 관이 무덤에 부장되었다. 누가 뭐라 해도  아이는 투탕카멘을 사랑했다. 그는 자
고 있는 왕을 살해할 반역자가 아니라 왕가의 충실한 하인이었다.
  55호 고분에 묻힌 투탕카멘의 형 스멘카레는 왕가에 대한 아이의 충성심을 보여주는 또다
른 증거다. 무덤에서 발견된 관과 미라, 장례 용품은 아마르나의 무덤들이 파괴되리라는  걸 
예측한 누군가가 관과 미라를 테베로 옮겨 보존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당시의 상황을 고려
하건대, 이 또한 아무나 하지 못할  헌신적이고 용감한 행동이었다. 아이가 그렇게 했던  게 
거의 확실하다. 이 모든 점으로 미루어 보건대 아이는 연쇄 살인범이 아니라 왕가의 헌신적
인 친구이자 후견인이다.
  종교 운동이 어떤 식으로  발전하는지를 조사해 본다면, 아이의  이러한 행동들이 왕가의 
충실한 하인의 행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세나텐의 비전은  테베에서 처음 발표되었을 때
만 해도 신선하고 흥미로웠을 뿐만 아니라 미래 지향적이었다,  늘 그렇듯이 대다수의 사람
들은 전통적인 종교에 집착했지만, 젊은이 중 일부는 아텐의  진실한 신도가 되었다 수세기 
동안 지속돼 온 교리에서 해방된 그들은 카리스마적인 파라오를 따라 사막에 새 도시를 건
설했때, 그 당시 젊은 축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아이도 아케나텐의 최초의 이민자 중에 끼여 
있었다. 아마르나에서 최고 지위에 오른 아이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새로운 종교를 섬겼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현명했던 덕분에 제일 먼저 이성을 되찾았다.  일이 잘못되고 있음을 개달
은 순간. 아이는 어린 투탕카멘을 이끌고 옛날 신들에게로 돌아갔다. 그는 역이민과  전통적
인 가치의 복원을 지휘했다. 이는 사리사욕을 위해 정략적인 길을 걸은 사람의 경우가 아니
었다. 그는 이성을 되찾은 신도 였다.
  이렇게 해서 아이의 인품과 선의를 입증해 보인 피고측 변호인은 이제 호렘헵이 히타이트 
왕자 살해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임을 주장한다, 매복을 하려면  호렘헵 장군의 동의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의 묵인이 있어야 했다, 히타이트와 싸우며  그들에 대한 증오를 키운 
사람은 아이가 아니라 호렘헵이었다. 제1용의자를 선택해야 한다면, 필요할 때 신속하고  강
력한 행동을 취하도록 훈련받은 군대 지휘관인 호렘헵이 제일 유력하다.
  안케센아멘의 살해 용의자와 관련해서는 아무도 없다는 게 지적되어야 한다. 젊은 왕비의 
남편이 죽었다 그 당시의 여자가 남편의 죽음 앞에서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게 특별한 일일
까? 두려움에 떨었던 건? 그건 세상에서 제일 당연한 일이다. 십여 년 동안 젊은 부부와 나
라를 인도했던 아이가 계속해서 이집트를 통치했다는 점도 당연할 일일 수 있다. 그가 형식
상 안케센아멘과 결혼했다고 해서 이상할 건 전혀 없다.  그는 안케센아멘의 충고자로 남아 
있으면서 미지의 하인으로부터 그쳐를 구하는 한편, 이집트라는 거대한 나라가 무사히 굴러
가도록 했을 뿐이다.
  몇 달이 안 되는 짧은 기간 내에 세 명이 죽었다는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이를 음모라고 
봐야 할 이유는 도대체 뭔가? 히타이트 문서 보관소에 그보다 훨씬 이치에 맞는 설명이 남
아 있지 않은가? 이집트에 대한 복수전을 기록한 히타이트  서판 끝 부분에 모면, 히타이트
로 끌려온 이집트인 죄수들이 역병을 퍼뜨렸다는 설명이 나와 있다 따라서 그당시 이집트에 
역병이 돌았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가까운 관계에 있던 두 사람이 짧은 기간 안에 죽
었다는 게 말이 되지 않을까? 투탕카멘과 안케센아멘을 죽인 건  아이가 아니었다. 다시 말
해 역병이었다. 피고 측 변론은 여기서 끝난다.
  지금까지는 아이가 살인자라는 이론에 대한 강한  부정론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하나하
나 조사해 보자.
 
검사측 논고 
  앞에서 지적한 대로 아이는 아마르나의 자기 무덤 벽에 그 긴 아텐 성가 전문을 새겨  넣
었다, 그러나 이는 그 당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상당히 정치적인 무덤 장식이었
다. 아케나텐의 비위를 맞추는 일 중에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어디 있었겠는가? 아이는 왕
들의 계곡에 있는 자신의 두 번째 무덤을 장식하면서 전통적인 신들만 등장시켰을 뿐, 아텐
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이 없었다.  이게 전통적인 신들에 대한 종교적인  헌신을 보여준 게 
아니고 뭐겠는가? 그 당시 아이는 신(들)을 정략적 수단으로 삼았던 듯하다. 아이에게는 확
고한 종교적 신념이 없었다. 궁정을 다시 테베로 옮기도록 배후 조종했던 게 그 증거다.
  아이가 투탕카멘을 정성껏 매장했다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살인자의 행동 이상은 아니다. 다시 말해 이는 본인이 고인을 사랑했음을 보여주기 위한 일
종의 전시 행동이었다. 아이는 투탕카멘의 무덤에 자신의 초상화까지 부장했다. 이 역시  투
탕카멘과의 친밀했던 관계를 과시하기 위한 제스처에 불과하다. 젊은  왕이 죽은 후 아이는 
투탕카멘을 기리기 위해 조그만 신전을 완성했다. 내가 보기에 투탕카멘에 대한 이 모든 배
려들은 의심의 눈길을 다른 데로 돌리는 한편, 자신이 적법한 후계자임을 알리기 위한 치밀
한 계획의 일환이었다. 아이가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투탕카멘의 미망인인 안케센아멘
과 결혼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인자한 할아버지 아이가 미지의 '하인' 으로부터 안케센아멘
을 구했으리라는 추측은 근거가 희박하다. 아이는 이집트 최고의 권력자였다. 다시 말해  아
무도 그를 위협할 수 없었다. 만약 그가 안케센아멘을  협박하는 누군가를 제거하고자 했다
면, 그녀가 두려워했던 사람이 아이 본인이 아닌 한 그러라고 명령만 내리면 됐다.
  55호 고분의 발견은 많은 질문을  제기했다 그중에서도 스멘카레와 아마르나의  물건들을 
재매장한 사람이 과연 누구였는가라는 질문이 가장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테베에서의 아
이의 위치를 고려하면 아이가 바로 그 사람일 수도 있지만, 왕가의 충성스러운 하인이 그랬
다고만은 볼 수 없다. 어쩌면 가족을 그리워했던 투탕카멘이  가족의 유골을 테베로 가져오
라고 명령했을 수도 있다. 55호 고분은 투탕카멘이 죽은 후  아이의 명령 아래 열렸던 듯하
다. 그래서 투탕카멘의 장례 때 스멘카레의  장기를 보관했던 소형 관이 전용될 수  있었다. 
이는 왕가의 납골소를 존경하는 행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호렘헵이 불쌍한 히타이트 왕자를 살해한 범인이었다는 점에 대해선 나도 동의하는  바이
다. 그런 행동에는 군대가 필수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호렘헵은 히타이트 왕을 섬기지  않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했을 터였다, 그렇다. 히타이트 왕자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사람은 
호렘헵이었다. 그렇다면 아이는 전혀 책임이 없을까? 모르긴 해도 그런 행동을 하려면 이집
트 총리 대신의 인가가 있어야 했으리라. 이 사건의  경우 단독 범행이었다고 생각하기보다
는 아이와 호렘헵이 공동 전선을 폈다고 상상하는 편이 훨씬 쉽다. 아이에게는 군대의 승인 
없고서는 공격할 능력이 없었을 테고, 호렘헵은 정부의 인가  없이는 정당성을 부여받지 못
했으리라.
  안케센따멘의 살해와 관련해서는 피고측의 변론이  어느 정도 타탕하다. 이  문제에 관한 
한 투탕카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물적 증거가 없다. 게다가  히타이트 왕자의 경우와 마찬
가지로 살인자에 대한 기록도 없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건 상황 증거밖에 없다.  두려움에 
떨던 젊은 여인이 사라졌다. 하인과는 절대로 결혼하지 않겠다던 그 여인은 그후 평민인 아
이와 결혼했다. 물론 그 여인이 강제로 결혼할 수밖에 없었다 하더라도, 결혼 직후 살해되었
다고 볼 수는 없다. 현대의  법 체계로는 안케센아멘의 살해 건으로  아이를 기소하는 일은 
불가능하리라.
  투탕카멘과 안케센아멘이 역병으로 죽었다는  주장은 흥미롭지만, 이집트의  기록에는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이 전혀 나와  있지 않다 다른 시기에 역병이  창궐했다는 기록은 있으나, 
그 당시 이집트에 역병이 돌았다는 증거는 없다 정말 그랬든 아니든 히타이트인들이 자신들
의 고통을 적의 탓으로 돌렸다고 해서 그다지 놀랄 필요는 없다. 매독의 경우에도 독일인들
은 '프랑스 병' 이라고 불렀던 반면 프랑스인들은 '독일 병' 이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그러나 여러분은 우리가 현재 법정에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3천
여 년 전에 죽은 목격자들을 소환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이 자리에서 우리가 밝혀내야 할 건 
유죄 판결이 아니라, 이 모든 사실에 대한 가장 합리적인 설명이다. 아이에 대한 혐의는  여
러 가지가 복합돼 있다. 후두부 가격을 암시하는  X-레이와 하인과 결혼할 수밖에 없는 두
려움을 호소한 미망인의 편지, 그녀의 약혼자였던 히타이트 왕자의 죽음, 그녀가 아이와  결
혼했음을 보여주는 반지, 투탕카멘의 무덤에  등장하는 아이의 초상, 그후 갑작스레  발생한 
미망인의 실종이 그렇다. 사실 하나하나만으로는 범죄 사실을 입증할  수 없지만 종합해 보
면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 어쩌면 세 사람  모두가 살해됐음을 암시한다. 사건 전체를 
잇는 가장 유력한 끈은 아이다. 투탕카멘의 죽음으로부터 제일 많은 수혜를 입은 사람은 그
다. 누구보다도 유리한 기회를 가졌던 사람도 그다 모든 정황 증거로 미루어 보건대, 아이가 
상 이집트와 하 이집트의 왕이자 두 땅의 주인인 투탕카멘을 살해한 범인이라는 설명이 가
장 합리적이다.

  에필로그
범죄자는 절대 짐을 벗을 수 없다, 결국 영원히 지속되는 건 정의다.
프타호테프(B.C2275년경)
 
  투탕카멘이 매장되고 장례 행렬이 떠나자 인부들이 무덤을 봉인했다.  그러나 그 직후 도
둑들이 무덤에 침입했다. 그들은 투탕카멘의 활에서 화살촉을 떼어내는 한편(당시에는 청동
이 귀했다)아마포와 연고를 비롯해 죽은 왕의 무덤에서 나왔다는 의심을  사지 않을 귀중품 
들을 훔쳤다. 보나마나 그들은 발각될까 봐 급하게 행동했을 게 뻔하다. 그들은 얼핏 보기에 
황금처럼 반짝거리는 관을 끌고 나왔지만, 나중에 금박을 입힌 목제 관이라는 걸 알고는 계
단에다 버리고 도망갔다. 다음날 도둑들이 체포되자, 왕의 무덤 감독관이기도 챘던 재무  대
신 마야가 관리들을 이끌고 와서 무덤을 재봉인한 후 다시는 도둑들이 들지 못하게 석회암 
더미를 쌓아 입구를 막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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