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할 때와 죽을 때
Erich Maria Remarque(E. M. 레마르크)
(저자 소개)
* E. M. 레마르크(Erich Maria Remarque)
독일의 소설가. 제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19살의 한 병사 보이머와 그 전우들의
생사를 그린 '서부전선 이상없다'로 세계적인 작가가 된 후, 반전사상으로 나치스에
쫓겨 미국으로 망명해 '개선문'을 발표, 두번째로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작품의 대부분은 전쟁이란 참상이 빚어낸 소용돌이 속에서 전쟁에 대한 철저한 반항,
불장난을 일삼는 무리들에 대한 타오르는 분노, 인간 생명의 절대적 존엄성의
재확인을 전쟁의 비극을 통해 부각시키고 있다. 그를 또다시 세계적인 작가로
부각시킨 이 '사랑할 때와 죽을 때'는 소련 대평원의 화약연기 속에서 펼쳐지는 두
남녀간의 애틋한 사랑을 리얼하게 그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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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보)
1898 독일 베스트팔렌의 오스나브뤼크에서 출생.
1916 (18세) 제1차 세계대전에 출전해 다섯 번이나 사선을 넘김.
1929 (31세) 처녀작 '서부전선 이상없다'를 발표, 일약 세계적 인기 작가로 발돋움.
1931 (33세) 전후의 양상을 그린 제2작 '귀로' 발표.
1932 (34세) 반전 작가로 나치스의 박해를 받고 스위스로 이주.
1933 (35세) 정권을 잡은 나치스에 의해 작품에 판금 분서 처분이 내려지고 독일
시민권을 박탈당함.
1937 (39세) '세 사람의 전우' 발표.
1939 (41세) 미국으로 망명함.
1940 (42세) 외국을 방랑하는 난민의 비운을 엮은 '너의 이웃을 사랑하라' 발표.
1946 (48세) 파리를 무대로 한 '개선문'을 발표해 발행부수가 200 만이 넘는 성공을
거두고 영화화 됨.
1947 (49세) 미국 시민권을 얻음.
1952 (54세) 망명가 소설 '사랑의 불꽃' 발표.
1954 (56세)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소련의 대평원을 배경으로 한 '사랑할
때와 죽을 때' 발표.
1956 (58세) '검은 오벨리스크' 발표.
1963 (65세) '리스본의 밤' 발표.
1970 (72세) 세계의 평화를 기원하면서 72세를 일기로 사망.
(주요 등장 인물)
그레버: 주인공. 짧은 휴가기간 동안 엘리자베스를 사랑하게 된다. 신념이 굳은
인물.
엘리자베스: 주인공의 연인. 아버지를 강제수용소에 빼앗기고 그레버에게 의지한다.
프레젠버어그: 그레버가 전쟁터에서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었던 고향 친구.
폴만: 그레버와 프레젠버어그의 고등학교 은사.
슈타인브레너: 나치스의 자동인형 같은 인물. 그레버의 총에 맞는다.
사랑할 때와 죽을 때
1
죽음은 소련의 대평원에서는 아프리카와는 다른 느낌을 갖게 한다. 아프리카에서도
영국군이 발사하는 격렬한 포화로 인해 전선에서의 시체는 오랫동안 묻혀지지 않은 채
그대로 뒹굴고 있을 때가 많았다.
그러나 태양의 움직임은 빠르게 다가왔다. 밤이 되면 숨이 콱 막힐 듯한 공기가
바람과 함께 전해져 왔다. 공기가 사자의 몸에 충만하고 사자들은 이국의 별빛 아래
유령처럼 자리에서 꿈틀꿈틀 일어났다. 마치 아무런 희망도 없는 최후의 전투에
참가라도 하고 있는 듯이. 그것도 이튿날이 되면 이미 움츠려들기 시작하여 그대로 땅
속으로 잠겨 드는 것처럼 대지에 방치되고 있었다.
그것은 나중에 운반할 때는 몹시 가벼워져 있었다. 몇 주일 지나서 발견된 시체는
해골만이 남고 갑자기 커진 군복 속에서 바짝바짝 말라갔다. 그것은 모래와 태양과
바람 속에서 건조해진 주검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소련에서의 죽음은 기름으로
인하여 끈끈하고 악취를 풍겼다.
며칠 동안을 계속해서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이 녹기 시작했다. 한 달 전에는 2 미터 이상이나 쌓였던 눈이었다. 파괴된
마을은 처음에는 까맣게 그슬린 지붕만이 보였다. 그것이 조금씩 조금씩 눈 속에서
묵묵히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창이 얼굴을 내밀었다. 3, 4일이 지나자 아치로
된 입구가 나타났다. 나중에는 눈 속으로 통할 수 있는 층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눈은
계속해서 녹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는 시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시체는 오래 전부터 파묻혀 있었다. 마을에서는 11월에서 다음 해 4월에 걸쳐 여러
번의 전투가 있었다. 점령했다가는 포기하고 방치했다가는 도로 탈환했다. 그후
눈보라가 휘몰아치면서 삽시간에 시체들을 깊이 묻어 버려 위생병들조차 쉽게 찾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마치 간호사들은 피로 물들인 침대 위에 시트를 펼치는 것처럼
거의 매일 내리는 흰 눈이 그 비극을 잠시나마 가려주었다.
최초로 나타난 것은 1월의 전사자였다. 이것은 제일 위에 빳빳하게 누워 있다가 4월
초에 눈이 녹기 시작하자 모습을 드러냈다. 시체는 바짝 얼어붙어 있었으며 얼굴은
회색으로 변해 있었다.
시체는 마을 뒤에 있는 언덕에 마치 널빤지를 묻는 것처럼 매장되었다. 먼저 눈을
삽으로 치우고 얼어붙은 땅을 파서 무덤을 만드는 일은 매우 힘들었다.
그것도 독일인의 시체만 묻어주고 소련인의 시체는 그대로 목장 안에 버려뒀다.
소련인의 시체까지 매장해줄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아군이 이 마을을 장악할 수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 연대는 후퇴하고 있다. 소련인의 시체는 현재
진격중인 소련군이 직접 매장하면 될 일이었다.
12월의 전사자 곁에서는 1월의 전사자가 갖고 있던 무기가 발견되었다. 총이나
수류탄, 그리고 철모는 시체보다 깊숙히 묻혀 있었다. 시체가 걸치고 있던 헐렁해진
군복 안쪽에 붙어있던 명찰은 쉽사리 떼어낼 수 있었다. 마치 익사하였을 때처럼 잔뜩
벌린 입에는 물이 괴고 있었다.
이런 시체는 운반할 때는 그대로 경직되고 있었으나, 들것에 실려 움직일 때마다
한쪽 다리가 흔들려 사자가 누군가를 부르는 듯이 보였다. 동공은 젤리처럼 광채를
상실하고 눈이 녹아 천천히 흘려 나왔다. 마치 소리 없이 울고 있는 것처럼.
갑자기 며칠씩이나 얼어붙었다. 눈의 표면이 잔뜩 굳어지면서 얼음이 되었다. 눈은
줄지 않았다. 마침내 바람이 불어대기 시작했다.
흰눈 속에서 회색의 물체 하나가 나타났다. 그것은 허공을 향하여 잔뜩 움켜 쥔
주먹이었다.
"저기에도 하나 있어." 샤우워가 말했다.
"어디?" 임메르만이 물었다.
"저기 교회 앞이야. 파낼까?"
"소용없어. 바람이 불면 자연히 눈이 녹겠지. 저기는 눈이 2 미터는 쌓여 있을 거야.
이 마을은 상당히 낮은 지대에 자리잡고 있어. 그래도 자네는 얼음 속에 구두를
적시고 싶은가?"
"바보 같은 소리 마라!" 샤우워는 야전취사장 쪽을 바라보았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무엇을 먹여줄지 모르겠군."
"캐비지야. 그래 봐야 돼지고기가 빠진 감자이지만"
"캐비지라 이번 주에 들어서서 벌써 세번째."
샤우워는 바지를 벗고 소변을 보기 시작했다.
"일 년 전에는 커다란 무지개와 같은 오줌을 누었었는데."
그는 괴로운 듯이 말하였다.
"군대식으로 당당하게 말야. 나는 기분이 좋았지. 식사는 일급이었고 오직
전진뿐이었어. 그래도 좀처럼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
그런데 지금은 소변도 군인처럼 볼 수 없게 됐단 말야. 아무런 희망도 없어."
임메르만도 배설 동작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오줌 싸는 것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 군대만 그만둘 수 있다면."
"나도 그래. 그렇지만 이런 상태로 가다가는 영원히 군대를 그만둘 수 없을 것
같아."
"그렇지. 죽을 때까지 영웅감이야. 아직도 무지개 같은 오줌을 갈기는 자들은
친위대 놈들뿐 일거야."
"그자들이라면 가능할 거야. 추잡한 일은 우리들이 해치우고 있는데 명예는 그들이
가로채고 있어. 우리는 2주일이나 3주일 동안을 싸워 겨우 도시를 점령하지. 그러면
뒤에 처진 친위대들이 와서 우리들보다 앞서 당당하게 입성하는 거야. 그자들이
환대를 받고 있는 꼴이라니! 그들은 언제나 두터운 외투에 고급장화를 신고 먹음직한
고깃덩어리도 도맡아 버리지."
임메르만은 히죽히죽 웃었다.
"그렇지만 그놈들도 이 도시를 가로채지는 못했어. 놈들도 지금은 우리와 같은 꼴을
하고서 퇴각하거든."
"우리와 같지는 않지. 우리는 사로잡은 자들을 사살하거나 불태우지는 않으니까."
"자네 오늘은 왜 그러지?" 임메르만은 언쟁을 중단하면서 놀란 얼굴로 물었다.
"자네는 갑자기 인간적인 면에서 얘기를 시작했어. 그렇지만 슈타인브레너가 엿듣지
않도록 조심해. 헌병대에 끌려가고 싶지 않거든. 저기 교회 앞의 눈이 내려앉는군.
이번에도 시체의 한쪽 팔이 나타나겠지."
샤우워는 그쪽을 바라보았다.
"이런 식으로 눈이 녹는다면 내일쯤에는 십자가 위에 걸리겠지. 여기는 공동묘지의
정면이야."
"그러면 저기가 공동 묘지란 말인가?"
"물론이지. 아직도 그것을 모르고 있었나? 전에도 한번 이곳에 주둔한 적이 있어.
10월말의 마지막 공격 때였지."
샤우워는 식기에 손을 뻗쳤다.
"식사 운반차가 왔다! 빨리 해. 그렇지 않으면 썩은 국물밖에 오지 않을 테니까."
팔은 차츰 길어졌다. 눈이 녹고 있는 것이 아니라 팔이 서서히 지면에서 솟아
나오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위협을 하고 있거나 구원을 청하는 손짓으로 보였다.
중대장은 걸음을 멈추었다. "저기 솟아 있는 건 무엇이냐?"
"소련군입니다. 중위님."
라에 중위는 색이 바랜 소매 끝을 주시했다.
"저건 소련군이 아니다."
뮤케 특무상사는 장화 속에서 발가락을 움직였다. 그는 중대장의 태도가
못마땅했다. 그는 부동자세로 중대장 앞에 서 있었다. 군대의 규율은 일체의 개인적
감정을 허용하지 않았다.그러나 속으로는 중위를 멸시하고 있었으므로 발가락을
꿈틀꿈틀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미련한 녀석 같으니! 보기 흉하다고? 꼭 시체를
처음 보는 놈 같군.
"저것은 독일군이다."
"사흘 동안 소련군의 시체밖에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튼 부하들을 시켜 즉시 파내도록 해. 그러면 알게 될 테니까."
라에는 자기 숙소로 돌아갔다.
"교만하고 멍청한 놈. 따뜻한 난로 옆에서 졸고 있다가 철십자 최고 훈장이나
자랑하겠다는 거야? 나도 네놈만큼 공은 세웠지만 그 따위 훈장 같은 것은 거저 줘도
안 받겠다."
"샤우워!" 그는 부르짖었다.
"임메르만, 이리로 와! 삽을 들고 오란 말야. 또 누가 있지? 그레버! 힐슈만!
베르닝! 슈타인브레너! 너는 이 작업을 감독해. 저기 보이는 손이다. 그것을 파내서
아군이면 잘 매장하는 거야. 내기를 해도 좋아. 저것은 절대로 아군이 아니다.!"
슈타인브레너가 다가왔다.
그는 어린애 같은 가느다란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얼마야?"
뮤케는 잠시 동안 망설였다. "3 마르크. 군표 석 장이다."
"다섯. 나는 5 마르크 이하로 내기한 적은 없어."
"좋아. 5 마르크다. 그렇지만 꼭 지불해야 돼."
슈타인브레너는 웃었다. 창백한 얼굴에 금발이 빛나고 있었다.
나이는 열아홉살로서 천사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야 물론. 뮤케, 또 다른
조건은?"
뮤케는 슈타인브레너를 두려워하며 조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열성당원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뮤케는 담배를 꺼내들었다.
"됐어. 담배는?"
"좋지."
"총통께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아. 슈타인브레너!" 임메르만이 빈정댔다.
"닥쳐!"
"너야말로 얌전히 계시지."
"기분이 몹시 상쾌한 모양이군."
임메르만은 웃었다.
"그렇게 쉽게 잊을 수 있나. 네가 무슨 뜻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도 잘 알고 있어.
나는 총통께서는 절대로 담배를 피우시지 않는다는 말밖에 안 했어. 여기 증인이 네
사람이나 있어. 총통께서 담배를 피우시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
"그만들 해!" 뮤케가 소리쳤다.
"빨리들 파내. 중대장의 명령이다."
"좋아, 가자." 슈타인브레너는 뮤케가 준 담배에 불을 붙였다.
"도대체 언제부터 근무시간에 담배를 피워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지?" 임메르만이
빈정거렸다.
"지금은 근무중이 아냐." 뮤케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자. 우물쭈물하지 말고 빨리 시체를 파내. 힐슈만, 너도 해!"
힐슈만이 다가왔다. 슈타인브레너는 히죽히죽 웃었다.
"너에게는 안성마춤의 일이지. 너희들 유대인의 피를 더욱 빛나게 해줄 테니까."
"나는 4분의 3이 아리안이야." 힐슈만이 반박했다.
슈타인브레너는 담배연기를 그의 얼굴에 내뿜었다.
"그것은 내가 알 바 아니다. 너의 4분의 1은 유대인이야. 총통의 자비로 너는
영광스럽게도 독일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단 말이야. 그러니까 소련의
돼지들을 빨리 파내. 저 돼지놈들은 어찌나 냄새가 지독한지 중위님께서는 견딜 수가
없으시다고."
"이건 소련군이 아냐."
그레버가 말했다. 그는 혼자서 송판조각으로 시체의 팔이나 가슴께의 눈을 파내고
있었던 것이다. 축축한 군복이 뚜렷하게 보였다.
"소련군이 아니라고?" 슈타인브레너는 그레버에게로 가까이 와서 내려다봤다.
"과연 독일군의 복장이군." 그는 얼굴을 돌렸다. "뮤케! 소련군이 아냐. 내가
이겼어!"
뮤케는 무거운 걸음걸이로 다가와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구덩이를
들여다보았다.
"잘 모르겠는데." 그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일주일 동안 소련군의 시체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어. 이것은 12월에 파묻힌
녀석일 거야."
"어쩌면 10월일는지도 몰라." 하고 그레버가 말했다.
"그때 우리 지대가 이곳을 통과했었으니까."
"바보 같은 소리 마라. 그 당시의 시체가 아직까지 남아있을 리 있는가."
"있지. 우리는 여기서 소련군과 야간전투를 했었고, 적들은 후퇴했었지."
"맞아." 샤우워가 말했다.
"우리 편의 시체는 발견하는 즉시 전부 매장했어. 그것은 분명해."
"분명하긴 무엇이 분명하단 말야! 10월에 많은 눈이 내렸고 우리는 그대로 전진하고
있었어."
"너는 그 말을 두 번이나 했어." 슈타인브레너는 그레버를 노려 보았다.
"다시 한번 들려주지. 그때 우리는 반격을 개시하여100 킬로미터 이상이나 전진하고
있었어."
"그런데 지금은 후퇴하고 있단 말이지?"
임메르만은 경고하는 것처럼 그레버를 손끝으로 쿡 찔렀다.
"그러면, 우리가 전진하고 있다는 말인가?"그레버는 개의치 않고 반문했다.
"전선을 단축하고 있는 거야." 임메르만은 중간에 나서서 비웃는 듯한 눈초리로
슈타인브레너를 노려 보았다.
"이미 일년이나 지났어. 작전상의 필요 때문이야.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라는 것은
누구나가 다 알고 있지."
"손에 반지를 끼고 있는데." 그때 갑자기 힐슈만이 말했다.
뮤케는 허리를 숙였다.
"금반지다. 결혼반지야."
모두들 그것을 보고 있었다.
그틈을 타 임메르만은 그레버에게 재빨리 속삭였다.
"조심해. 저놈은 항상 기회만 노리고 있거든."
"너야말로 조심해. 저놈은 나보다 너를 더 감시하고 있어."
"나는 상관없어. 나는 어차피 특별휴가 같은 건 바라지도 않으니까."
"이것은 우리들 연대의 배지다!" 작업을 계속하고 있던 힐슈만이 소리쳤다.
"그렇다면 소련군이 아니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군. 그렇지?" 슈타인브레너는
뮤케를 돌아보며 싱글벙글 웃었다.
"그래. 소련인이 아냐."
뮤케는 성난 듯이 대답하였다.
"5 마르크. 10 마르크쯤 걸 것을 잘못했는데. 자, 얼른 내놓게."
"지금 여기 없어."
"그럼 어디 있단 말인가? 국립은행에라도 맡겨두고 있단 말인가? 빨리 내놓으란
말야!"
뮤케는 사나운 눈초리로 슈타인브레너를 노려보았다. 그는 지갑을 꺼내
슈타인브레너에게 돈을 지불하였다. 그레버는 허리를 구부리고 힐슈만의 작업을
거들어주고 있었다.
"아 이것은 라이케 같은데." 그레버가 말했다.
"뭐라고?"
"우리 중대의 라이케 소위야. 여기 견장이 있어. 봐, 오른쪽 집게손가락의 끝이
없잖아."
"바보 같은 소리 하지마. 라이케는 부상당하고 본국으로 송환됐다고 들었어."
"라이케가 분명하다."
"얼굴을 씻겨 보자."
그레버와 힐슈만은 발굴작업을 계속했다.
"조심해." 뮤케가 호통을 쳤다.
"머리를 찍지 말란 말야."
드디어 얼굴이 눈 속에서 나타났다. 아직도 눈으로 가려져 있는 눈은 마치 조각가가
버려둔 미완성의 작품처럼 보였다. 파란 입술 사이에 금니 하나가 햇빛에 빛나고
있었다.
"라이케임에 틀림없어. 그때 여기서 부상당한 자는 라이케뿐이었으니까."
"눈을 털어내 봐."
그레버는 잠시 주저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눈을 털어냈다.
"라이케가 맞다!"
뮤케는 몹시 흥분했다. 그는 문제의 시체가 확인되자 직접 작업을 지휘했다.
"들어올려. 힐슈만과 샤우워는 다리를 들고 슈타인브레너와 베르닝은 팔을 들어.
그레버, 너는 목을 들어! 자, 여럿이 힘을 합해서 올리자."
시체가 움직였다.
"다시 한번. 하나, 둘, 셋, 올려!"
시체가 다시 움직였다. 시체 밑에 형성된 구덩이에 공기가 스며 들며 공허한 소리를
울렸다.
"특무상사님, 다리가 빠졌습니다!" 힐슈만이 부르짖었다.
"내려놓아!" 뮤케가 명령을 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시체는 밑으로
굴러떨어지고 힐슈만의 손에는 장화만이 들려 있었다. 장화 속에 괴인 물로 다리가
썩고 있었던 것이다.
"그 속에 다리가 들어 있나?" 임메르만이 빈정거렸다.
"장화를 옆에 두고 더 파 들어가." 뮤케가 힐슈만에게 명령했다.
"이렇게까지 됐을 줄이야 이봐, 임베르만, 너는 가만히 있어! 죽은 사람에게는
애도의 뜻을 표하는 것도 몰라?"
임베르만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뮤케를 바라보았지만 가만히 있었다.
잠시 후, 시체를 덮었던 눈이 모조리 제거되었다. 축축한 군복속에서 서류와 지갑이
발견되었다. 필적이 잘 분간되지는 않았지만 쉽게 읽을 수 있었다. 그레버가 말한
대로 작년 가을까지 이 중대의 소대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라이케 소위였다.
"중대장께 보고해야겠다. 여기서 대기하고 있도록."
뮤케는 중대본부로 달려갔다. 그곳은 이 마을에 남은 유일한 건물이었다. 라에는
불이 타오르고 있는 난로 곁에 앉아 있었다. 뮤케의 보고를 받자마자 라에는 시체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는 잠시 동안 라이케의 시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감겨주어라."
"안됩니다, 중위님."하고 그레버가 말하였다.
"눈두덩이 썩었습니다."
라에는 포탄으로 파괴된 교회를 바라보았다.
"저쪽으로 운반하도록 해. 관은 있나?"
"관은 전부 남겨놓고 왔습니다."하고 뮤케가 보고했다.
"특별한 경우를 생각해서 약간 남겨두었었는데 지금은 모조리 소련군의 수중에
들어갔습니다."
슈타인브레너는 킬킬거리고 웃었다. 라에는 웃지 않았다.
"만들 수 있는가?"
"시간이 좀 걸릴 것입니다." 그레버가 대답했다. "아마 마을에는 적당한 판자조각도
없을 겁니다.
라에는 머리를 끄덕였다.
"시체를 천막 위에 눕혀라. 거기에 싸서 묻기로 하자. 무덤을 파고 십자가를
만들어."
그레버와 샤우워, 임메르만, 베르닝 네 사람이 시체를 교회로 운반했다. 힐슈만은
묘한 표정으로 아직도 다리의 일부가 붙어 있는 장화를 들고 뒤를 따랐다.
"뮤케 특무상사!"
"네!"
"게릴라 포로들 네 명이 오늘 이곳에 압송된다. 내일 아침 일찍 총살하도록 하라!
상사의 소대에서 지망자를 모집하도록 해. 지망자가 없으면 지명으로 차출한다."
"네, 알겠습니다."
"도대체 어째서 우리가 집행해야 되지? 이런 혼란한 때에."
"제가 하겠습니다." 슈타인브레네가 유일한 희망자였다.
"좋다." 라에는 무표정한 얼굴로 응대했다. 그는 눈을 치우고 만든 길을 성큼성큼
걸어갔다. '또 난로가로 가겠지.' 하고 뮤케는 생각했다. '접시나 닦을 녀석
같으니라구! 게릴라를 서너 명 총살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놈들은 우리의 전우를 수백 명씩 죽였는데.'
"소련놈들이 빨리 오면 라이케의 무덤도 함께 파게 하면 될 텐데."
슈타인브레너는 말했다.
"놈들을 전부 부려먹는 거야. 내 생각이 어때, 상사."
"난 아무런 상관도 없어." 뮤케는 잔뜩 화를 내고 있었다.
'빼빼 마른 얼굴에 안경을 걸친 전봇대 같은 놈! 제1차 대전때의 중위 골동품.
승진도 못하는 멍청이 같으니라고. 중대장이라고? 지휘관의 자격이 없다.'
"너는 라에를 어떻게 생각하지?"
슈타인브레너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눈을 멀뚱멀뚱 거렸다. "그자는
우리들의 중대장이 아닌가?"
"그밖에는 어떤가 말야."
"그밖에라니?"
"아무것도 아냐." 뮤케는 무뚝뚝하게 대답하고 일어섰다.
"이만하면 깊이가 충분하지요?"
가장 나이가 많은 소련군 포로의 독일어는 듣기가 거북할 정도였다.
흰 턱수염을 기르고 무척 파란 눈을 한 그는 칠십 세 가량 되어 보였다.
"닥쳐라, 볼셰비키. 물을 때만 대답해." 슈타인브레너가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는 원기왕성했다. 그는 유난히 눈에 띄는 여자 게릴라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몹시 젊고 생기가 있어 보였다.
"더 깊이." 그레버가 말했다. 그는 슈타인브레너, 샤우워와 함께 포로를 감시하고
있었다.
"우리들의 무덤이오?" 소련인이 다시 괴상한 독일어로 물었다.
슈타인브레너는 가볍게 구덩이로 뛰어 내리면서 노인의 빰을 세게 갈겼다.
"이놈의 늙은이 닥치라니까! 이 것이 무엇이냐고?"
슈타인브레너는 싱글싱글 웃었다. 파리의 날개를 뜯고 있는 어린이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무덤은 당신네들 것이 아냐." 그레버가 대신 말해주었다.
소련인은 꼼짝하지 않고 서서 슈타인브레너를 노려보고 있었다 .슈타인브레너도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상대방을 경계했다. 소련인이 자기에게
덤벼들 것이라고 단정하고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소련인을 사살했다할지라도 비난할 사람은 없다. 이 노인은 이미
사형선고를 받았기 때문에 정당방위의 여부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슈타인브레너는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순간적으로 자기 자신을 망각하리만큼 소련인을 도발하고 있는 것은 일종의
장난인가, 살인을 합법적으로 보이게 하려는 의도 때문인가? 그레버는 판단이 서질
않았다.
소련인은 꼼짝하지 않았다. 피가 코에서 수염으로 흘러 내렸다. 만약에 내가 이와
똑같은 경우를 당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당장 죽더라도 적에게 달려들 것인지,
단지 몇 시간 목숨을 연장하기 위해 굴욕을 참을 것인가) 그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노인은 천천히 허리를 숙여 곡괭이를 들었다. 슈타인브레너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사살할 자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노인은 그대로 작업을 다시 시작하고
있었다. 슈타인브레너는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거기에 드러누워."
노인은 곡괭이를 놓고 조용히 옆으로 누웠다. 슈타인브레너가 구덩이 밖으로
기어올랐을 때, 눈덩어리가 노인에게로 굴러 떨어졌다.
"길이는 충분한가?" 그는 그레버에게 물었다.
"충분해. 라이케는 키가 큰 편이 아니니까."
노인은 위를 향해 눈을 크게 떴다. 하늘의 푸른빛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입가의 흰
수염이 숨을 들이실 때마다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슈타인브레너는 잠시 동안
그대로 누워있게 했다.
"나와!" 이윽고 슈타인브레너는 명령했다.
노인이 천천히 올라왔다. 축축한 흙이 외투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러면." 이렇게 말하고 나서 슈타인브레너는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너희들의 무덤을 파러 간다. 그렇게 깊이 팔 필요는 없어. 여름에
여우들이 너희들의 시체를 파먹어도 상관 없으니까."
이른 아침이었다. 한줄기의 빨간 띠가 지평선을 가르고 있었다. 밤사이에 다시
얼어붙은 눈이 바삭바삭 부서졌다.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있는 묘혈은 매우 침침했다.
"제기랄!" 하고 샤우워는 투덜거렸다.
"별놈의 일을 다 시키는군. 도대체 왜 우리가 해야 하는가 말야? 어째서 보안부
녀석들에게는 시키지 않지? 뭐니뭐니해도 그자들은 총살의 전문가가 아닌가. 이런
일에까지 우리를 부려먹다니 벌써 세 번째야."
그레버는 손에 총을 들었다가 감촉이 너무 싸늘해서 장갑을 끼었다.
"보안부 녀석들은 후방에서 몹시 바쁠거야."
"맞았어. 그자들은 최일선에 나타나지 않아. 슈타인브레너가 전에 보안부에
있었지?"
"그놈은 강제 수용소에 있었어. 반장인가 뭔가 했었지."
다른 사병이 왔다. 잔뜩 신나 있는 것은 슈타인브레너뿐이었다.
"알겠나? 그것들 가운데 암컷이 한 마리 있어. 그것은 내게 맡겨."
"너에게 맡기면 어떻게 하겠단 말인가?" 샤우워가 물었다.
"여자와 재미 볼 시간이 어디 있어. 진작에 서둘렀어야지."
"해보았어." 하고 임메르만이 대답했다.
슈타인브레너는 화가 나서 뒤를 돌아보았다.
"누가 그 따위 말을 했지?"
"하지만 그녀가 끝내 뿌리쳤어."
"웃기지 마. 내가 그 빨간 암소를 해치우려고 마음만 먹으면 식은 죽 먹기니까."
"그렇게 간단치 않을 걸."
"그만들 둬." 샤우워는 담배를 씹어댔다.
"여자를 혼자서 사살하고 싶다면 제발 그렇게 해. 나는 그런 일같은 건 흥미없어."
"나 역시."그레버였다.
다른 병사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날이 차츰 밝아졌다. 힐슈만은 시계를
보았다.
"이봐, 이런 일에 뽑힌 것을 감사히 생각해. 너의 눈물어린 유대인 근성을 뜯어
고치기 위해서는 좋은 기회지. 총살이라." 슈타인브레너는 탁 하고 침을 뱉았다.
"이런 깡패놈들에게는 아까울 정도야! 탄약의 낭비지. 목을 졸라 죽여야 돼."
"어디서 졸라 죽이지?"샤우워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디에 나무라도 있는가? 우선 교수대라도 세울까? 그런데 그건 무엇으로
만들지?"
"왔다." 그레버가 냉정하게 말했다.
뮤케가 네 명의 소련인을 데리고 나타났다.
앞뒤에 두 명씩 병사가 붙어 있었다. 늙은 소련인이 앞장 서고 바로 뒤에 여자와
젊은 사나이들의 순서로 오고 있었다. 네 사람은 묵묵히 묘혈 앞에 한 줄로 섰다.
여자는 살짝 구덩이 속을 내려다보았다. 빨간색의 모사 치마를 입고 있었다.
제 1소대의 뮬러 소위가 중대장 숙소에서 왔다. 라에 중위 대신에 사형 집행에
참석하기 위해서.
우스운 얘기지만 형식적인 절차가 갖추어졌다. 네 사람의 소련인이 게릴라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들은 정식으로 재판을 받고 살 수 있다는
가망도 없이 사형 선고를 언도받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을 확증할 필요가 있는가?
그들은 무기를 소지하고 있다고 고발당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장교 입회하에
총살당하기 직전인 것이다. 마치 그들이 불법이라도 한 것처럼.
뮬러 소위는 21세로서 이 중대에는 약 6주일 전에 배속되었다. 그는 사형수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면서 선고문을 읽었다.
그레버는 묘혈 앞에 침착한 태도로 서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젊고
어린애를 몇 명이라도 낳을 수 있을 것 같은 육체를 지니고 있었다. 뮬러가 읽는 것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것이 자기의 사형선고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자기의 건강한 혈관을 강하게 맥박치고 있는 생명이 몇 분 후에는
영원히 정지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싸늘한
아침공기에 몸을 맡긴 채 서 있었다.
그레버는 뮤케가 뮬러에게 속삭이는 것을 보았다. 뮬러는 고개를 들었다.
"그건 나중에 하면 안되는가?"
"지금이 좋습니다, 소위님. 간단합니다."
"좋아 자네 좋을 대로 하게."
뮤케는 앞으로 나왔다.
"저자에게 구두를 벗으라고 해." 독일어를 아는 늙은 소련인에게 말하면서 젊은
포로를 가리켰다.
노인은 그 사나이에게 나지막한 어조로 말을 전했다. 깡마른 사나이는 무슨
소리인지 알아 듣지 못하고 있었다.
"야, 이놈아!" 뮤케가 소리를 질렀다.
"구두를 벗으란 말야!"
노인은 되풀이하여 말했다. 사내가 겨우 알아듣고 잽싸게 구두를 벗었다. 한쪽
구두를 벗을 때 다른 쪽의 다리가 균형을 잃어 비틀거렸다. '어째서 저리 서둘지?
한시라도 빨리 죽고 싶은 걸까?' 하고 그레버는 생각했다.
사내는 자기의 구두를 두 손에 들고 그것을 비굴한 태도로 내밀었다. 좋은
구두였다. 뮤케가 다시 호통을 치면서 옆을 가리켰다. 사나이는 구두를 그곳에 놓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더러운 붕대가 감긴 맨발로 눈 위에 섰다. 누런 발가락이
붕대를 뚫고 앞으로 나왔다. 사내는 멋적은 듯 발가락을 구부렸다.
뮤케는 다른 사람들도 천천히 조사했다. 여자가 끼고 있던 모피 장갑을 구두 옆에
갖다놓도록 명령했다. 그는 잠시 빨간 색 치마를 쳐다보았다. 슈타인브레너는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었다. 뮤케는 여자의 치마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라에가 자기 방에서
사형 집행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뒤로 물러났다.
여자가 소련어로 재빨리 지껄였다.
"소원을 물어 봐." 뮬러 소위의 얼굴이 몹시 창백했다. 그가 이런 자리에 참석한 건
처음이었다.
뮤케는 늙은 소련인에게 물었다.
"저 여자는 소원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당신네들을 저주하고 있을 뿐입니다."
"저 여자는 당신들과 소련의 땅을 밟은 독일인들을 저주한다고 말하고 있소!
당신들의 자식도 저주하고 있소. 당신들이 우리를 사살하는 것처럼 우리의 자손들이
언젠가는 당신네들의 자손들을 사살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소."
"무례한 계집년 같으니라구." 뮤케는 여자를 노려보았다.
"저 여자에게는 어린애가 둘 있소. 나도 자식이 셋이오."
"뮤케, 이만하면 됐다." 뮬러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병사들은 차려 자세를 취했다. 그레버는 자기의 총에서 싸늘함을 느꼈다. 강철의
냉기가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을 감쌌다. 그의 곁에 힐슈만이 서 있었다. 비록
창백한 표정이었지만 꼿꼿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레버는 제일 왼쪽의 포로를
겨누기로 했다.
최초로 사형집행 명령을 받았을 때는 공중을 향해서 발사했었다. 그것은 이미 옛날
이야기다. 그런 짓을 해 보았자 총살당하는 자에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다른
병사들도 일부러 과녁을 빗나가게 했었다. 결국 재사격을 해야만 했고 포로들은 두
번씩이나 공포의 순간을 느껴야 했다. 한 여자는 목숨을 살려주는 줄로 알고 무릎을
꿇어 눈물을 흘렸었다. 그는 그 여자를 다시 생각해 내는 것이 싫었다. 어쨌든 그런
일은 또 일어나지 않았다.
"발사 준비!"
그레버는 조준기를 통해 포로를 보았다. 흰 수염과 파란 눈을 한 노인이 보였다.
가늠자는 그의 얼굴을 둘로 나누었다. 그레버는 가늠자를 내렸다. 전에 누군가의
아래턱을 명중시킨 적이 있었지. 가슴을 겨누는 것이 안전했다. 그는 힐슈만이 총구를
위로 쳐드는 것을 보고 포로의 머리 위로 발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뮤케가 보고 있어. 정조준을 해." 앞을 보면서 속삭였다. 힐슈만은 총구를 약간
내렸다.
"발사!"
그레버는 노인이 몸을 일으켜 자기를 향해서 달려온다고 생각했다. 순간, 잔뜩
부풀어오른 듯하다가 벌떡 나가자빠졌다.
노인의 몸은 반쯤 무덤 안으로 던져지고 나머지는 구덩이 밖으로 나와 있었다. 다른
두 사나이는 자기가 서 있던 자리에 쳐 박혀 있었다. 구두를 빼앗긴 사나이는 최후의
순간에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었다. 포로들은 아무도 결박을 하거나 눈을 가리지
않았었다.
그러한 절차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여자는 앞으로 쓰러졌으나 죽지는 않았다. 두 손을 짚고 몸을 일으키더니 얼굴을
들어 병사의 등허리를 노려보았다. 슈차인브레너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른 자들은 여자를 겨누지도 않았던 것이다.
늙은 소련인은 무덤 속에서 신음소리를 내다가 이내 조용해졌다. 다만 여자만이
병사들을 노려보면서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그나마 독일어를 아는 노인이 죽어버렸기
때문에 여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여자는 더 이상 앞으로 전진할
수 없는 개구리처럼 팔을 쭉 뻗은 채 쓰러져 있었다. 그녀는 잠시도 쉬지 않고 욕설을
퍼부어댔다.
뮤케가 가까이 다가가는 것도 모르고 욕설을 퍼붓던 여자는 마침내 목에서 총구를
느꼈다. 여자가 재빨리 고개를 돌려 뮤케의 손등을 물었다. 뮤케는 비명을 지르면서
왼손으로 여자의 아래턱에 일격을 가하고는 여자의 목에 총을 발사했다.
"어째서 그렇게 서투른가!" 뮬러는 소리를 질렀다.
"조준할 방법도 모르나?"
"여자는 힐슈만의 담당입니다., 소위님." 슈타인브레너가 능청스럽게 말했다.
"힐슈만은 아냐." 그레버가 끼어 들었다.
"조용히 해!"
그는 뮬러를 힐끔 보았다. 뮬러는 창백한 표정이 되어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뮤케는
다른 포로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젊은 사나이의 귀에 되고 다시 한번 권총을
발사했다. 그는 권총을 거두었고 여자에게 물렸던 손등을 손수건으로 감았다.
"의무대가 어디지?"
"우측에 있는 세 번째 건물입니다, 소위님."
"가 보라고."
뮬러는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여자는 축축한 땅 위에 쓰러져 있었다.
"구덩이 속에 쓸어 넣고 흙을 덮어라."
그는 어쩐지 약이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2
그날 밤, 천둥소리와 같은 굉음이 땅을 뒤흔들었다.
밤하늘에는 포화의 섬광이 번쩍번쩍 빛을 내며 포물선을 그었다. 열흘 전에 연대는
최전선으로부터 후퇴하고 지금은 예비대로 배치되고 있었다. 소련군은 시시각각으로
접근해왔다.
전선은 매일같이 이동했고 이제는 뚜렷한 경계조차 없었다. 소련군이 벌써 수
개월에 걸쳐 공격하고 있었으며 연대는 계속 후퇴만 했다.
그레버는 잠을 깼다. 요란한 소리 때문에 잠은 이미 멀리 달아났다. 그는 구두를
신고 밖으로 나갔다.
밤공기는 신선하고 따뜻하기까지 했다. 오른쪽 숲속에서 포탄이 파열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낙화산 조명탄의 불꽃이 공중에 가볍게 뜨더니 밑으로
빛을 쏟아내고 있었다. 아득한 저편에서 서치라이트가 비행기를 찾고 있었다.
그레버는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하늘에는 별들이 잔뜩 빛나고
있었다. 별은 그의 눈에 들어왔지만 어떤 감정도 일지 않았다. 그저 비행사에게는
좋은 밤이라고 생각했다.
"휴가를 즐기기에는 좋은 날씨지." 누군가가 그에게 말을 건넸다.
보초를 서고 있던 임메르만이었다. 연대는 예비대로 배치되고 있었지만 게릴라가
침투했다는 정보가 있어 밤에는 보초를 세우고 있었다.
"좀 빠르지 않아?" 임메르만이 말했다.
"교대하려면 아직 반 시간이나 남았어. 들어가서 눈 좀 붙이라고. 자네 나이라면
얼마든지 잘 수 있어. 자네, 몇 살이야? 스물 셋?"
"응."
"혹시 고향에 가고 싶어서 병이 난 게 아닌가?" 임메르만은 그레버의 얼굴을
살펴보면서 말했다.
"휴가는 어떻게 되었지? 갔다왔나?"
"아직. 전부 취소될는지도 몰라. 나는 지금까지 세 번이나 그런 일을 당했어."
"그건 그래. 도대체 얼마나 연기되고 있지?"
"6개월이야. 언제나 그런 식이지. 지난번에는 관통상을 입어 고향에 갈 수 없었어."
"괴롭군. 그래도 자네에게는 자격이 있잖아. 나는 틀렸어. 전 사회민주당
당원이거든. 반역분자로 찍혔어. 1000 년의 제국을 위한 밑거름이며 대포밥이 될
운명이지."
그레버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 임메르만은 소리내어 웃었다.
"독일이의 눈초리로군. 걱정하지 마. 모두들 불평하고 있어. 슈타인브레너도 역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냐." 그레버는 화를 내면서 대답했다. 임메르만이
정곡을 찔렀던 것이다.
"그렇다면 더욱 나쁘지." 임메르만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자기 자신이 깨닫지 못하면 큰 일이지. 이 영웅적인 시대에 밀고자들이 마치
우후죽순처럼 돋아나다니 우스꽝스러운 일이 아닌가?"
그레버는 잠시 주저했다.
"그렇게 잘 알고 있으면 슈타인브레너나 조심하시지."
"나는 슈타인브레너 같은 자는 티끌만큼도 걱정 안해. 그자도 나에 대해서는 어쩔
수가 없지. 전 사회민주당 당원쯤은 이미 관심조차 없어. 그렇지 않을까?"
그레버는 손에 입김을 불었다.
"추운데."
그는 정치적인 논쟁 따위에 말려들고 싶지 않았다. 다만 고향에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임메르만의 말이 옳았다. 불신은 제3제국의 가장 공통된
특징이다. 어디를 가나 안전하게 있을 수는 없다. 안전하지 않을 때는 입을 다물고
있는 것만이 상책이다.
"고국으로 돌아갔을 때가 언제였지?"
"2 년 전이야."
"오래 되었군. 돌아가면 깜짝 놀라겠는데."
그레버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깜짝 놀랄거야." 임메르만이 되풀이했다.
"많은 것들이 변했을 테니까."
"도대체 무엇이 변했단 말인가?"
"모든 것이 변했다. 가 보면 알 거야."
그레버는 순간 심한 공포를 느꼈다. 이런 공포는 때때로 아무런 이유도 없이 갑자기
엄습하곤 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세계에서는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지? 너는 휴가를 간 적이 없잖아?"
"물론 없지만 알고 있어."
그레버는 일어났다. 도대체 나는 왜 밖으로 나왔단 말인가? 그는 혼자 있고 싶었던
것이다. 고국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것은 거의 강박 관념이 되고 있었다. 단 2,
3주라도 혼자 있고 싶다. 그리고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산더미처럼 있다. 고국으로
돌아가서, 전쟁을 벗어나서.
교대 시간이다.
"샤우워를 깨워야겠어."
천둥소리와 같은 굉음이 밤새껏 계속되었다. 하늘까지 이어지는 빛나는 섬광.
그레버는 먼 곳을 노려보고 있었다. 소련군. 1941 년의 가을, '놈들은
마지막이다.' 라고 총통은 선언했다. 또 실제로 그런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때 모스크바와 스탈린그라드의 전선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진격을 멈춘
것이다. 마치 마술에라도 걸린 것 같았다. 갑자기 소련군은 대포를 쏘아댔고 총통의
연설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독일군의 전투사단은 계속해서 퇴각했다. 전군단이
항복했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승리가 패주로 일변했다는 소식이 모두에게
알려졌다. 카이로가 눈앞에 있었을 때 아프리카에서 있었던 것과 똑같은 패주였던
것이다.
그레버는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눈이 별빛을 반사해 확산시키고 있었다. 집들은
실제의 거리보다는 멀리 보이고 숲은 가까이 있었다. 어디선가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것 같았다.
1940 년 프랑스의 여름, 파리를 산책하는 듯했던 진격, 혼란한 도시에 난무하던
폭격기의 소리, 피난민과 일제히 진군하는 군대로 막혀버린 도로. 6월 중순의
풍성하던 밭과 숲. 은빛같은 거리와 카페 마침내 도시는 한 방의 총격도 없이
스스로 성문을 열었다. 그때 나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던가? 마음이 혼란되고
있었을까? 아니다. 만사는 그것으로 해결되는 것 같았다.
아프리카에서 매일같이 진격을 하고 있을 때는 어땠나. 바람에 실린 열기와 탱크로
어지럽혀진 사막의 밤. 그곳은 이국의 땅이었다.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프랑스가 있고
그 다음에 겨우 독일이 있다. 비록 이국의 국토를 잃었다 하더라도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마침내 소련에 왔다. 소련, 패주. 이번에는 고국을 사이에 두고 바다도 없다.
더구나 아프리카에서처럼 한두 개의 군단이 패배한 것이 아니다. 독일군 전체가
후퇴하고 있는 것이다. 승리하고 있는 동안은 만사가 질서정연한 것같이 생각되었다.
그렇지 않은 것은 무관심하지 않으면 위대한 목적 때문이라고 변명했다. 위대한
목적.
거기에는 언제나 양면이 숨어있다. 그중의 한 면은 처음부터 음산하고 비인간적인
것이 아닐까? 나는 정말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을까? 사실은 모든 것을 의심하고
구토증을 느끼면서도 애써 뿌리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샤우워가 기침하는 소리를 듣고 파괴된 집을 두서너 곳 더 돌아보았다. 샤우워는
북쪽을 가리켰다. 지평선으로부터 거대한 화염이 공중을 향하여 치솟고 있었다.
소리를 내면서 불꽃이 타올랐다.
"소련군이 벌써 저기까지 왔나?" 그레버는 깜짝 놀랐다.
"아니, 저건 아군 공병이야. 군사 시설물을 폭파하고 있는 거야."
"후퇴한단 말이로군."
두 사람은 귀를 귀울였다.
"오랫동안 파괴되지 않은 집은 구경한 적이 없어."
그레버는 라에의 숙소를 가리켰다.
"저건 아직 쓸만한데."
"저것이 쓸만하다고? 기관총이 여기저기에 구멍을 내고 지붕은 불에 타 형편
없는데도?" 샤우워는 한숨을 토했다.
"파괴되지 않은 거리도 오랫동안 보지 못했다."
"나 역시."
"너는 곧 보게 될 거야. 고국으로 돌아가서."
"그럴 수만 있다면."
샤우워는 멀리 불꽃을 바라보았다.
"우리들이 소련에서 모든 걸 파괴한 모습을 보면 두려운 생각이 들어. 놈들이 독일
국경을 넘는다면 어떤 짓을 할까. 그런 걸 생각해 본 적이 있나?"
"없어."
"우리 집은 동부의 프러시아(독일의 옛 왕국)에 있어. 1914 년에 소련군이 침공했을
때 도망하던 일을 지금도 기억해. 그때 나는 열 살이었지."
"국경까지는 아직도 멀어."
"경우에 따라서는 순식간에 도착할 수도 있어. 처음에 얼마나 빨리 진군했는지
알고나 있나?"
"아니. 그때 나는 아프리카에 있었어."
샤우워는 다시 북쪽을 바라보았다. 불기둥이 솟아오르고 격렬한 폭발음이 계속되고
있었다.
"저기서 아군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겠지? 놈들이 우리에게 똑같은
짓을 도대체 무엇이 남아 있겠나?"
"여기와 마찬가지겠지."
"그것이 마음에 걸려. 분명하니까."
"놈들은 국경까지는 못 왔어. 너도 엊그제의 연설을 들었지? 우리는 새로운 비밀
무기를 운반하기 위하여 단지 전선을 단축하고 있을 뿐이야."
"바보 같은 소리! 그 말을 믿을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그렇다면 처음엔 왜 진격을
했지? 만약에 국경선까지 밀리면 강화조약을 맺어야 해. 다른 방법이 없어."
"왜?"
"왜라니? 우리가 놈들에게 했던 짓을 놈들이 우리에게 하지 않을 것 같은가?
뻔하지."
"알겠어. 하지만 그자들이 끝내 강화조약을 맺지 않는다면?"
"누가?"
"소련이."
샤우워는 그레버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안 할 수가 없지. 강화는 강화야! 전쟁은 끝나고 우리는 살 수 있어."
"그놈들은 우리가 무조건 항복을 할 경우 강화조약을 맺으러 할 거야. 놈들은
독일을 점령하고 너 역시 집을 잃게 되지. 네 말은 그런 뜻이지?"
샤우워는 순간 당황했다.
"그건 그래." 마침내 그는 분명히 말했다.
"그러나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냐. 강화조약을 맺게 되면 더 이상 아무것도
파괴할 수 없을 테니까." 그는 얼굴을 찌푸리더니 갑자기 눈을 빛내며 교활한
농부처럼 말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조국은 상처를 받지 않을 수도 있지. 놈들의 나라만
파괴되었을 뿐이야. 그리고 언젠가는 철수하겠지."
그레버는 침묵했다. 어째서 다시 말려들었겠는가? 떠들어대는 것은 아무 소용도
없고 위험하기 짝이 없다. 신념도 마찬가지다. 소리도 없이 다가오는 것은 너무도
거대하고 막연하며 불길하여 얘기조차 할 수도 없다. 먹을 것과 추위에 대해서는
자유롭게 말한다. 그것이 죽은 사람에 이르면 모두들 입을 다문다.
그는 마을을 지나 막사로 돌아올 때 교회 앞을 지나쳤다. 작은 교회는 포탄으로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 있었다. 안에는 라이케의 시체가 안치되어 있었다. 엊저녁
병사들의 시체가 더 발견되었다. 그들을 내일 아침 군장하라는 라에의 명령이 있었다.
병사 중의 하나는 누구인지 알아 볼 수 조차 없게 얼굴이 짓이겨졌다.
그레버는 교회로 들어갔다. 시체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회중전등을 밝히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한 구석에 파괴당한 성상이 두 개 서 있고 그 옆에 찢어진 감자
자루가 두 개 놓여 있었다. 전에 이 방은 감자를 저장하는데 사용되었던 것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들어와 쌓인 눈 속에 체인도, 타이어도 없는 자전거가 한 대 놓여
있었다.
방 한복판에 천막을 깔고 그 위에 시체를 눕혀 놓았다. 그들은 거기에서 준엄하고
초연하게 잠들어 있었다. 이미 매사에 무관심한 표정으로.
그레버는 그곳을 나와 마을을 순찰했다. 그는 무덤을 팠던 언덕으로 올라갔다.
라이케의 묘혈은 두 병사의 시체와 함께 매장할 수 있도록 구덩이를 더욱 넓혔다.
물방울이 구멍 속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파 올린 흙더미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세 사람의 이름을 새긴 십자가도 세워져 있었다. 며칠 동안은 그것이 그대로
유지될 것이다. 그 이상은 안된다. 마을은 다시 싸움터로 변할 테니까.
그레버는 언덕 위에서 아득한 저편을 바라보았다. 빛은 눈을 기만했다. 사물을
확대시키고 희미하게 보이게 한다.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공기조차 차갑다.
모든 것이 이국적이다. 그레버는 갑자기 한기를 느꼈다.
흙더미에서 흙가루가 소리를 내며 구덩이 속으로 떨어졌다. 이런 딱딱한 흙
속에서도 구더기가 살 수 있을까? 만약에 구더기가 살고 있다면 내일부터 먹이는 실컷
먹게 된다.
우리는 구더기에게 풍부한 먹이를 선사하였다. 전우들의 고기뿐만이 아니다.
주검은 너무나도 많았다. 주로 적군에서 나왔지만 서서히 아군의 진영을 침투해
왔다. 어느 연대나 항상 보충병이 필요했다. 전우들이 하나 둘씩 사라져갔다. 가장
먼저 사귄 친구들은 지금 한 명 남았다. 제4중대장인 프레젠버어그 외에는 모두
죽었거나 병원에 입원했다. 운이 좋은 녀석은 병역 불능으로 본국으로 돌아갔다.
샤우워가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인가?"
"아니야.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는데. 소련군의 시체가 뒹굴고 있는 마구간에서
쥐새끼들이 놀더군."
샤우워는 게릴라들이 묻혀 있는 무덤을 보았다.
"저자들은 적어도 무덤 속에서 잠들 수 있군."
"그래. 자기들 무덤을 스스로 파야 했지."
샤우워는 탁 침을 뱉았다.
"불쌍하게도 그들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들의 땅을 파괴했으니까."
그레버는 의아스러웠다. 밤이 되면 생각이 변하게 된다. 그렇지만 샤우워는
고참인데다 결코 감정적인 사내가 아니다.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지? 후퇴하고 있기 때문인가?"
"물론이지! 언젠가는 우리도 똑같은 일을 당할 걸 생각해 봐."
그레버는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가급적이면 이런 생각을
뿌리치려고 했다.
"곤경에 빠지면 다른 사람들의 기분도 헤아릴 수 있게 되지. 이상하지. 모든 것이
잘돼 가고 있을 때는 그런 건 생각조차 않았는데."
"물론이야. 누구나가 다 그래!"
"그렇지. 하지만 그런 게 변명이 될 수는 없겠지."
"변명? 자기 목숨이 위험한 판국에 그까짓 변명이 무슨 소용이야?" 샤우워는
초조한 얼굴로 그레버를 응시했다.
"자네 같은 먹물들은 엉뚱한 생각을 잘하지. 우리가 전쟁을 시작하진 않았어.
따라서 전쟁의 책임을 질 필요까진 없어. 우리는 다만 의무를 수행하고 있을 뿐이야.
명령이니까, 안 그런가?"
"그렇지." 그레버는 지쳐버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3
일제히 사격을 가하는 요란한 소리가 창공 속으로 퍼져갔다. 돌담 위에 앉아 있던
새들도 도망가지 않고 요란스럽게 지저귀고 있었다. 새들은 이미 총성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천막 세 개가 눈 속에 반쯤 묻힌 채 놓여 있었다. 얼굴없는 병사의 시체를 두른
천막은 꼭 묶여 있었다. 라이케의 시체는 중앙에 묻혀 있었다.
병사들은 삽으로 흙더미를 헤치기 시작했다. 구덩이를 다 메우고도 흙이 많이 남아
있었다. 뮤케는 뮬러를 보았다.
"흙을 뿌려 밟을까요?"
"뭐라고?"
"밟아서 다지는 겁니다. 소위님. 그러면 남은 흙도 처리하고 그 위에 돌덩어리를
놓을 수도 있습니다. 여우나 이리들이 덤벼들지 못하게요."
"여기까지야 오지 않겠지. 무덤을 깊이 팠으니까. 게다가."
'무덤을 파헤치지 않아도 들판에 얼마든지 있다.'고 뮬러는 생각했다.
"바보 같으니라구. 왜 그런 생각을 했지?"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뮤케는 무표정하게 뮬러를 쳐다보았다. 이 녀석도 멍청한 놈이 틀림없어. 언제나
모자라는 녀석은 살아 있고 아까운 사람만 죽는다. 라이케처럼.
뮬러는 고개를 흔들었다.
"남은 흙으로 봉분을 만들어라! 그런 다음 머리맡에 십자가를 세워라."
"알겠습니다! 소위님."
뮬러는 중대를 정열시키고 도보행진을 시켰다. 그는 필요이상으로 소리 질렀다.
고참병들은 항상 자기가 하는 말을 심각하게 듣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대로였다.
샤우워, 임메르만, 그레버는 남은 흙으로 봉분을 만들었다.
"십자가는 오래 가지 못할 거야." 샤우워는 말했다.
"당연하지."
"사흘도 가지 않겠지."
너는 라이케의 친척이냐?" 임메르만이 물었다.
"그는 참으로 호인이었어."
"십자가를 세우나?" 그레버가 물었다.
임메르만이 힐끔 뒤를 보았다.
"휴가병이로군. 몹시 서두르는데."
"설마 자네는 서둘지 않겠지?" 샤우워가 물었다.
"나는 휴가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아. 너도 알고 있으면서 왜 묻는 거야? 나쁜 자식!"
"물론이지. 휴가를 보내면 넌 그대로 탈영할 거야."
"아마 돌아오기는 할거야."
샤우워는 탁 하고 침을 뱉았다. 임메르만은 비웃고 있었다.
"아마도 나는 자원해서 귀대를 할 거야."
"네가 무슨 짓을 할지 알게 뭐야? 그 꿍꿍이속은 아무도 모를거야."
샤우워는 십자가를 바르게 세워 삽등으로 몇 번인가 내리쳤다. 십자가가 깊이
박혔다.
"어때." 그레버에게 물었다.
"사흘도 못 갈 거야."
"사흘이라도 서 있으면 돼." 임메르만이 대답했다.
"좋은 걸 가르쳐 줄까? 샤우워, 사흘만 지나면 공동묘지의 눈이 녹아서 묘석이
나올거다. 그때 돌십자가를 가지고 와서 여기다 세우는 거야. 그러면 너의
노^36^예근성도 잠잠해지겠지."
"소련인의 십자가를?"
"상관없지. 하느님은 전 인류의 아버지시니까."
샤우워는 고개를 돌렸다.
"날강도 같으니라구. 너는 국제적인 날강도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 샤우워. 옛날에는 나도 안 그랬지. 십자가 얘기는 네가 먼저
끄집어냈어. 너는 어제부터 십자가 타령이었어."
"어제는 라이케를 소련군으로 착각했기 때문이야."
그레버는 삽을 들었다.
"그만 돌아가겠어. 이제 일은 다 됐겠지?"
"맞았어, 휴가병." 임메르만이 대답했다.
"다 끝났어."
그레버는 묵묵히 언덕길을 내려왔다.
분대는 지하 방공호 속으로 대피하고 있었다. 지붕의 틈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왔다. 그 밑에 네 사람이 웅크리고 앉아 카드 놀이를 하고 두 사람은 구석에서
잠들어 있었다. 샤우워는 편지를 쓰고 있었다. 지하호는 당의 거물급이 사용했던 듯
꽤 넓었다.
슈타인브레너가 들어왔다.
"최신 뉴스를 들었나?"
"라디오가 고장났어."
"멍청하긴. 취급 주위 지시가 있었잖아."
"그럼 네가 고쳐 봐." 임메르만이 말했다.
"어디가 고장이지?"
"전지가 없어."
"전지가 없다구?"
"그래." 임메르만은 슈타인브레너를 보고 히죽히죽 웃었다.
"그렇지만 너의 코밑에 전선을 연결하면 제대로 들릴 거야. 네 머리는 항상
충전되고 있으니까. 시험해 보시지."
슈타인브레너는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좀처럼 혀끝을 누를 수 없는 녀석이 있어."
"그런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맥스." 임메르만은 침착하게
말했다.
"넌 내 행동을 보고하고 있어. 그건 누구든지 다 아는 사실이지. 그런 일에 아주
적합한 인간이야. 미안하게도 나는 기계의 숙련공이고 훌륭한 기관총사수란 말야.
여기서는 그런 사람이 네 따위 것들 보다는 몇 백 배 필요하지. 네가 번번이
헛수고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았나? 그런데 자네는 도대체 몇 살인가?"
"닥쳐!"
"스물 정도는 됐겠군. 아니면 열아홉? 나이에 비하면 멋진 생활을 해왔군.
유대인이나 소위 국민에 대한 배신자들을 5, 6 년씩 쫓다니. 삼가 경의를 표하는
바야! 나는 네 나이 때 여자 뒤만 따라다녔어."
"잘 알고 있어!"
"아무렴, 어련하실려고?"
그때 뮤케가 입구에 나타났다.
"왜 그래?"
모두들 가만히 있었다.
"뭐냐고 묻고 있지 않은가!"
"아무것도 아닙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베르닝이 말했다.
"그저 얘기를 나누고 있었을 뿐입니다."
뮤케는 슈타인브레너를 보았다.
"무슨 일인가?"
"최신 뉴스를 들었어." 슈타인브레너는 몸을 꼿꼿이 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레버만이 듣고 있을 뿐이었다. 노름을 하고 있는
자들은 거기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편지를 쓰고 있던 샤우워는 고개를 들지 않고,
잠들어 있던 사람들 역시 코만 골아댔다.
"차렷!" 뮤케는 소리를 질렀다.
"너희들은 모두들 귀머거리냐? 최신 뉴스가 있다! 모두들 주목해. 이것은 공식
보도야."
"네." 임메르만이 대답했다.
뮤케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빈틈이 없었다. 노름에 빠져있던
사람들은 카드를 바닥에 덮어 놓았다. 샤우워는 절반쯤 몸을 일으키고 슈타인브레너는
허리를 쭉 폈다.
"중대 뉴스! '국민의 시간'에 발표. 아메리카에서 파업 발생 제강업계 완전
조업 중단 대부분의 군수공장은 가동 중지. 항공기 산업에 사보타주 발생
즉시 강화를 요구하는 시위운동이 전국에 파급. 정부는 동요하고 있음. 정부 전복의
쿠데타가 예상되고 있음."
모두들 침묵했다. 코를 골던 사람들은 눈을 비벼댔다. 뚫어진 지붕에서 눈 녹은
물방울이 물통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독일의 잠수함대는 아메리카 전 해안을 봉쇄했다. 어제 대형의 병력수송선 두 척과
군수품을 실은 화물선 두 척 격침. 이것으로 이번 주에는 3 만 4000 톤이 된다.
영국은 폐허 속에서 굶주리고 있다. 항로는 모두 차단되고 새로운 비밀무기가
완성되었다. 지금 우리는 무착륙으로 아메리카를 왕복할 수 있는 폭격기를 가졌다.
조국의 대서양안은 거대한 요새이다. 만약에 적이 침입을 기도한다면 우리는 1940
년도에 감행했던 것처럼 적군을 해중으로 구축할 것이다."
노름꾼들은 다시 카드를 들었다. 눈덩어리가 물통에 떨어졌다.
"좀더 안전한 참호로 옮길 수 없을까." 슈나이더가 말했다. 그는 붉은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슈타인브레너!" 임메르만이 불렀다.
"소련의 뉴스도 갖고 왔나?"
"왜 그러지?"
"이 가운데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있어. 예를 들면 휴가병인 그레버가 그렇지."
슈타인브레너는 잠시 망설였다. 그는 임메르만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당에 대한
충성심이 우선이었다.
"전선 단축 작전은 거의 완료되었다. 소련군은 큰 피해를 입고 거의 소멸되었다.
새로이 구축된 반격의 거점은 준비가 완료되었다. 예비군의 전략적 배치도 끝났다.
신무기를 보유한 아군의 반격은 적의 저항을 용서치 않을 것이다."
그는 손을 들었다가 그대로 내렸다. 소련 전선에 대해서 말하는건 사기를 북돋워
주지 못한다.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뻔히 보이는 것이다. 갑자기 슈타인브레너는
당황했다.
"진짜 중대한 뉴스는 엄중히 비밀에 붙여지기 때문에 지금은 발표할 수 없다.
확실한 건 금년 내로 적군을 섬멸한다는 것이다."
그는 발표를 중단하고 참호에서 나갔다. 뮤케가 그의 뒤를 따랐다.
"쓸개 빠진 녀석 같으니라구!" 잠을 자던 병사가 말하더니 이내 코를 골기
시작했다.
노름이 다시 시작됐다.
"섬멸이라?" 슈나이더가 말했다.
"우린 놈들을 해마다 두 번씩이나 섬멸했지."
"난 스무 번이나 섬멸시켰어."
"소련인은 선천적으로 배신자야." 임메르만이었다.
"핀란드에선 일부러 약한 척하였지. 그것이야말로 비열한 볼셰비키적 속임수지."
샤우워는 고개를 들었다.
"좀 조용히 해. 넌 모든 걸 알고 있겠지만."
"물론이지. 놈들은 전엔 우리의 동맹국이었지. 핀란드에 관해선 릴링 원수가 직접
말씀하셨어. 그래도 이의가 있나?"
"야, 이제 작작 좀 해라." 누군가가 벽 속에서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왜 야단들이지?"
"모두 조용해졌다. 카드 던지는 소리와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그레버는 웅클이고 앉아 있었다. 그는 사형집행이나 매장을 한 뒤에는 언제나 그렇게
하고 있었다.
저녁에 부상병들이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후송되는 병사들도 있었다. 그들은
회색의 평원으로부터 피투성이의 붕대를 감고 와서 반대편의 지평선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병원같은 것은 눈에 띄지 않고 회색 속에 가라앉을 것만 같았다. 모두들
굶주림 때문에 말할 기력조차 없었다.
그들은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 구급차도 없었으므로 남은 부상병들을 위하여
교회 안에 임시병원이 마련되었다. 포탄으로 파괴된 천장에는 감광판을 폈다.
지칠대로 지친 군의관 한 사람하고 간호사 둘이 들어와서 수술을 시작했다. 낮에는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들것으로 부상병을 실어 날랐다. 수술대 위에 하얀 등이 걸렸고
한쪽 구석에 성상의 조각을 세워 놓았다. 성모마리아가 손 없는 두 팔을 내밀고
있었다. 그리스도는 한쪽 다리가 없었다. 마치 수족이 끊긴 인간을 십자가에 붙여
놓은 것 같았다. 부상병들의 신음소리가 크게 들려오지는 않았다. 군의관에게는 아직
마취제가 조금 남아 있었던 것이다. 주전자와 니켈이 든 용기에서 물이 끓고 있었다.
절단된 다리와 팔이 중대장 숙소에서 운반해 온 통에 가득 채워지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개 한 마리가 나타났다. 아무리 쫓아내도 입구에서만 맴돌았다.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그레버는 의아했다. 그레버는 프레젠버어그와 함께
옛사제관 근처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프레젠버어그는 오들오들 떨면서 목을 내밀고 있는 그 털투성이를 응시했다.
"숲 속에서 기어 나왔겠지."
"숲 속에 먹을 거라곤 없을 텐데."
"먹이는 얼마든지 있어."
그들은 개에게 접근해봤다. 개는 언제라도 달아날 수 있도록 경계태세를 갖추었다.
두 사람은 걸음을 멈추었다.
"이건 마을의 똥개가 아닌데. 혈통이 좋은 개인걸?" 프레젠버어그가 혓소리를 짧게
냈다.
개는 두 귀를 쫑긋 세웠다.
"먹이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레버가 물었다.
프레젠버어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먹이는 저기에 얼마든지 있어. 불빛을 따라서 인가를 찾아 온거야. 이놈은 친구가
필요한 모양이야."
수술하다가 줄은 시체가 들것에 실려 나왔다. 개는 껑충 뛰며 뒤로 물러나더니
부동자세로 프레젠버어그를 바라보았다. 프레젠버어그는 개에게 말을 건내면서 한걸음
접근해 보았다. 순간 개는 다시 물러서면서 꼬리를 한두 번 흔들었다.
"무서워하고 있어." 그레버가 말했다.
"그래. 정말 좋은 개야."
"사람을 물어 버릴지도 몰라."
프레젠버어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우리들 역시도."
"어째서?"
"사람도 마찬가지야. 우리는 아직 선량하다고 믿고 있을 뿐이야. 그러면서 이놈처럼
따뜻한 마음과 빛과 우정을 찾아 헤매고 있는 거야.
프레젠버어그의 얼굴의 한쪽 부분이 씰룩 움직였다. 커다란 상처 자국이 선명한
반대 부분은 마치 죽어있는 것 같았다. 그레버는 그의 얼굴 경계를 이루는 면에서
미소가 사라지자 야릇한 느낌을 받았다. 저건 우연이었을까.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아. 모두 전쟁 탓이야."
프레젠버어그는 고개를 흔들며 산책용 지팡이로 구두 위의 눈을 떨어냈다.
"그렇지 않아, 우리는 기준이라는 걸 10 년 동안이나 고립시켜 왔었어. 소름이 끼칠
만큼 비인간적이고, 교민과 공포를 지켰어. '우리는 지배자적 민족이다. 다른 민족은
모두 노^36^예로서 우리에게 봉사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지배자적 민족! 도대체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지? 바로 여기가 좋은
해답이라고 할수 있지. 언제나 죄많은 인간보다 죄없는 인간에게 돌아가지."
"그레버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프레젠버어그는 그가 이 전쟁터에서 유일하게
믿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고향이 같았으며 오래 전부터 친구였다.
"넌 모든 걸 알고 있으면서 왜 이대로 있니?" 마침내 그는 말했다.
"왜냐구? 강제수용소 안에 있거나 병역 기피자로 총살당하지 않고 말이지?"
"그런 뜻이 아니야. 1939 년에는 소집될 나이가 아니었잖아. 어째서 지원을 했지?"
"그때, 나이가 많았지만 구경만 할 수는 없었어. 지금은 나보다 나이 많은 자들도
끌려오고 있어. 그런 것은 변명이 될 수가 없어. 여기에 있다는 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해결할 수 없지. 우리들은 스스로를 설득시킨 거야! 전시의 위기에 처한 조국을
저버릴 수 없다. 원인이 무엇이건 누가 전쟁을 시작했건 상관없다. 우리는 악을 막기
위해서 함께 싸웠다고 말하지만 이것 역시 자기 자신에 대한 변명에 지나지 않았지.
그뿐이야!"
그는 지팡이로 눈을 톡톡 털었다. 개는 벌써 교회 뒤로 달아났다.
"우리는 하느님을 시험한 거야. 알겠나?"
"모르겠어." 그레버는 그런 건 알고 싶지도 않았다.
프레젠버어그는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자네는 이해 못할 거야." 이윽고 그는 좀더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는 아직도 어리지. 히스테릭한 원숭이 춤과 이 전쟁 말고는 아는 게 없어.
나는 1차 대전에도 참전했었고 그 사이의 시대도 알고 있어." 그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미소는 파도의 물결처럼 얼굴에 번졌지만 절반을 넘지는 못했다.
"내가 오페라 가수였으면 좋았을걸. 텅 빈 머리에 호소력이 있는 목소리를 지닌
테너 말이야. 노인이나 어린이라도 상관없어. 전쟁에 졌어. 적어도 그 정도는 알겠지?"
"모르겠는데?"
"책임감이 있는 장군이라면 벌써 옛날에 그만두었을 거야. 우리는 여기서 헛된
싸움을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야." 그는 되풀이해서 말했다.
"부질없는 짓이야. 항복 조건을 완화시킬 수도 없어. 우린 마치 네로나
칭기즈칸처럼 군림했어. 우리는 모든 인간의 법칙을 짓밟았어. 우리들은."
"그것은 친위대야."
그레버는 절망적으로 외쳤다. 그는 임메르만이나 샤우워나 슈타인브레너를 피해서
프레젠버어그를 만난 것이었다. 그와 함께 강변에 있는 도시와 보리수가 서 있는
고향을 얘기하고 싶었다.
이쯤이면 전보다 더욱 악화되고 있다. 후퇴의 혼란 때문에 프레젠버어그와도
오랫동안 만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서 위안을 받고 싶었다 자기가
오랫동안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고국에서 천천히 생각해 보려고 했던 것, 가장
두려워하고 있었던 사실을 프레젠버어그에게서 들은 것이다.
"친위대." 프레젠버어그는 조소했다.
"게슈타포, 사기꾼, 광신자, 살인자, 미치광이, 다만 이런 무리들을 위해서 우리는
싸우고 있는 거야. 단지 놈들의 체면 때문에. 전쟁은 이미 옛날에 졌어."
조금씩 어두워져 갔다. 불빛이 새어나가지 않게 교회의 문이 닫혀 있었다. 창으로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지하실이나 방공호의 입구도 엄폐되었다. 프레젠버어그는
그것을 보고 있었다.
"두더지! 우리의 영혼까지도 멋지게 변신했어."
그레버는 담배를 꺼내 권했으나 프레젠버어그는 거절했다.
"너나 피워. 난 얼마든지 있어."
그레버는 고개를 흔들었다.
프레젠버어그는 미소를 지으며 한 개피 뽑았다.
"언제 출발하지?"
"모르겠어. 아직 서류가 안 왔어."
그레버는 담배 연기를 깊이 들여 마셨다가 토해냈다. 담배가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때로는 친구보다도 가깝게 느껴진다. 담배는 사람을 혼란시키지 않는다.
"모르겠어." 그는 다시 한 번 되풀이했다.
"요즘엔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 전엔 모든 것이 분명했었는데. 세상 모르게
잠들었다가 현재가 지나가 버리면 깨어나고 싶어. 이제야 비로소 눈이 뜨이는 것
같아."
프레젠버어그는 손등으로 얼굴의 상처를 눌렀다.
"괜찮아. 10 년 동안 놈들은 우리를 허위 선전으로 선동하고 다른 건 듣지도 못하게
귀를 막았으니까. 자네 폴만 교수를 아나?"
"전에 역사와 종교를 배웠어."
"고국으로 돌아가면 한 번 찾아보게. 아직 살아 계실 거야."
"그러지. 군인이라서 괜찮을까?"
"그럼"
"꼭 살아 계실 거야. 예순 다섯은 됐을걸."
"안부나 전해주게."
"알았어."
"그만 가 봐야겠어. 몸조심하게.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몰라."
"내가 돌아올 때가지 그리 길지도 않아. 겨우 3주간이야."
"그건 그래. 조심해."
"자네도."
프레젠버어그는 눈을 밟으면서 이웃 마을에 있는 자기 중대로 돌아갔다. 그레버는
그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마침내 돌아섰다. 교회의 문틈으로 한
줄기의 빛이 새어 나왔다. 입구 앞에 천막이 걸려 있었다. 왜 이런 곳에 밝은 빛이 켜
있을까. 그는 하마터면 집으로 착각할 뻔했다. 교회 밖의 눈 속에 파괴된 상이 서
있었고 그 옆에 망가진 자전차가 뒹굴고 있었다. 밖으로 내던진 것이다. 안에서는 단
한 평의 공간도 아쉬울 테니까.
그는 자기 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지하호를 향해서 걸었다. 폐허 속으로 노을이
물들고 있었다. 녹아드는 눈 속에서 10월에 묻힌 시체가 3구나 발견되었다. 그의
옆에는 오늘 오후 교회에서 죽은 부상병의 시체를 눕혀놓았다. 그 시체는 창백했으나
적의가 드러나 있었고 아직 생을 체념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4
모두 잠을 깼다. 지하호가 흔들리더니 귀가 쩡쩡 울리고 파편이 떨어졌다. 마을
뒤편에 배치됐던 고사포가 미친 듯이 발사되고 있었다.
"모두들 나가라!" 새로 온 보충병 중 한 명이 소리를 질렀다.
"조용히 해! 성냥불을 켜지마!"
"나가! 여기서 달아나야 해!"
"미련한 놈! 어디로 나간단 말야. 얌전히 있어! 넌 아직도 신병인가?"
쾅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지하호가 크게 흔들였다. 무엇인가가 암흑 속에서
굴러떨어졌다. 돌이나 나무 조각이 쪼개지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사람이 생매장되었다."
"조용히 해. 벽이 약간 무너졌을 뿐이야."
"나가! 우물쭈물하면 여기서 파묻혀 죽는다!"
희미하게 보이는 지하호 입구에 사람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바보 같은 자식!" 누군가가 욕설을 퍼부었다.
"그냥 여기 그대로 있어. 여기라면 포탄의 파편 세례도 막을 수 있다."
모두들 제각기 우왕좌왕했다. 보수공사를 하지 않은 지하호를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밖으로 뛰쳐나간 사람들이나 안에 남은 사람들 모두가 옳았다. 이제는 운명에
맡겨야 했다. 압사하든지, 파편에 맞아 죽든지.
그들은 모두 조심해서 숨을 쉬었다. 다음에 떨어질 것을 조용히 기다렸다.
이번에야말로 가까운 곳에서 터지기 쉬웠다. 몇 번이나 폭발음이 들렸지만 훨씬 먼
곳에서였다.
"개새끼!" 누군가가 또 욕을 했다.
"아군의 추격기는 어디로 갔지?"
"영국 상공으로 갔겠지."
"닥쳐!" 뮤케가 소리질렀다.
"스탈린그라드이겠지." 임메르만이 말했다.
"닥치라니까!"
그 때, 비행기의 프로펠러 소리가 들려왔다.
슈타인브레너가 부르짖었다.
"우리 비행기가 왔다!"
모두가 긴장돼 있었다. 기관포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연달아 폭탄 세 개가 마을
뒤에서 폭발했다. 한 줄기 빛이 지하호를 스쳤다고 생각되는 순간, 백, 적, 녹색의
빛이 소용돌이치며 뇌성과 암흑 속에 지면이 솟아 오르면서 작렬했다. 밖에서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가 터지고 지하호의 벽이 마침내 무너져내렸다.
그레버는 손을 휘저으면서 어둠을 뚫고 앞으로 앞으로 나갔다. 그는 교회를
생각했다. 지하호의 입구가 보였다. 몸을 움직여 보았다. 다친 데는 없는 것 같았다.
"제기랄!" 샤우워가 그의 곁에 있었다.
"가까운 곳이로군. 지하호가 폭삭 주저앉았어."
그들은 살금살금 기어나갔다. 밖의 소음에 뒤섞여서 뮤케의 호령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선가 날아온 돌이 그의 이마를 적중해 얼굴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빨리 파내! 누가 없지?"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레버와 샤우워는 부서진 파편과 돌덩어리를 집어내고
있었다. 철주와 커다란 돌덩어리 때문에 일이 더디었다. 앞을 거의 분간할 수 없었다.
보이는 건 오직 화염으로 덮인 하늘뿐이었다.
그레버는 파편을 헤치며 무너진 지하호의 벽을 따라 기고 있었다. 소음이 너무 커
신음소리를 그냥 지나칠까 봐 바닥에 귀를 바짝 대고 손으로 더듬기 시작했다. 바닥에
깔렸을 지도 모를 인간의 수족을 찾아내기 위해서.
그때 손이 움직이고 있었다.
"여기 누가 있다!" 그는 소리를 질렀다. 바닥을 파헤치면서 머리를 더듬었다. 머리가
잡히지 않았으므로 손을 잡아 당겼다.
"어디 있는지 말해 봐! 어디 있어?"
"여기야." 생매장된 사내는 거의 그의 귓전에서 속삭였다.
"당기지 마. 눌려있어."
손이 다시 움직였다. 그레버는 바닥을 파헤쳤다.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다! 누구 좀 와 줘!"
자리가 비좁아서 두 사람 이상 작업할 수가 없었다.
그레버는 슈타인브레너의 목소리를 들었다.
"저리 가! 얼굴을 밟지 마! 이쪽부터 파내자!"
그레버는 옆으로 비켰다. 동료들은 암흑 속에서도 민첩하게도 작업을 계속했다.
"이건, 누구나?" 샤우워가 물었다.
"누군지 모르겠어." 그레버는 허리를 숙였다.
사내는 입을 움직였으나 그레버는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기왓장을
들어내거나 바닥을 파헤치고 있었다.
"아직 살았나?" 슈타인브레너가 물었다.
그레버가 얼굴을 문질러 보았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모르겠어. 이삼 분전에는 숨이 붙어 있었는데."
소리가 들려왔다. 그레버는 사내의 얼굴 가까이 대고 크게 외쳣다.
"지금 꺼내 줄게! 내 말이 들리나?"
그는 미세하나마 볼에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슈타인브레너와 샤우워와 슈나이더는
헉헉 숨을 내쉬며 바쁘게 움직였다.
"이젠 아무 소리도 없군."
샤우워는 야전삽으로 무엇인가를 내리쳤다.
"여기 큰 돌이 박혀서 꼼짝도 안 해. 불과 도구가 있어야겠어."
"불은 안돼!" 뮤케가 소리를 질렀다.
"성냥을 켜면 끝장이다."
공습중에 불을 켜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그쯤은 우리도 잘 알고 있어!"
"이 상태로는 안되겠어. 앞이 보일 때까지 기다려야 해."
"그래."
그레버는 벽을 기대서서 하늘을 노려보았다. 아무 것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서서히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지만 이런 일은 무수히 많았다.
그는 묻힌 사내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만져보았다. 먼지와 흙을 닦아내고 입술을
만지다가 손가락이 이에 가 닿았다. 살짝 손가락을 무는 게 느껴졌다. 차츰 세차게
깨물다가 갑자기 힘이 빠졌다.
"아직 살아 있어! " 그레버는 큰소리로 말했다.
"연장을 찾으러 사람이 갔다고 말해 줘."
그레버는 다시 입술을 만져 보았다. 이미 무감각해져 있었다. 그레버는 움직이지
않는 그의 손을 꼭 잡은 채로 공습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마침내 도구를 갖고 와서 생매장된 사내가 구조됐다. 그는 라메르스로 , 빼빼마르고
언제나 안경을 끼고 있던 병사였다. 1 미터 가량 떨어진 바닥에 뒹굴고 있는 안경이
보였다. 안경은 그대로 있었으나 라메르스는 죽어 있었다.
그레버는 슈나이더와 함께 보초를 섰다. 짙은 안개 속에서 화약 냄새가 자욱한
가운데 교회의 한쪽이 파괴되고 있었다. 중대장 숙소도 마찬가지였다. 라에는 죽었을
것이라고 그레버는 생각했다. 그러자 건물 뒤에서 껑충이는 그의 모습을 보였다. 그는
교회의 정리작업을 감독하고 있었다. 부상병이 몇 사람인가 생매장되고 있었다. 남은
사람들은 밖에 눕혀 놓았다. 그들은 맨땅에 모포나 천막을 깔아 놓은 위에 누워
있었다. 그들의 눈은 하늘을 향해 열려 있었다. 구제를 바람이 아니라 하늘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레버는 폭탄구멍이 크게 뚫어진 곳으로 갔다. 구멍 속에도 안개가 끼여들고
있었다.
"저것은 무덤으로 알맞겠군." 슈나이더가 말했다.
"저 속에 가득 찰 만큼 많이 죽었어."
그레버는 고개를 흔들었다.
"저걸 메울 흙은 어디서 나지?"
"구멍 옆을 긁으면 돼."
"그래도 무덤이 지면보다 낮을 거야. 새로 파는 것이 좋아."
슈나이더는 붉은 수염을 문질렀다.
"묘지는 지면보다 높아야만 하는가?"
"아니, 다만 습관적으로 그럴 거야."
그들은 함께 걸어갔다. 그레버는 라이케의 무덤에서 십자가가 사라져버린 걸
보았다. 폭풍으로 어딘가 날아가 버렸을 것이다. 슈나이더는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휴가는 틀렸군."
두 사람은 귀를 기울였다. 전선은 갑자기 활기를 띠었다. 낙하산 조명탄과 로켓탄이
지평선을 향해 불꽃을 내뿜었다. 포화가 차츰 심해지고 규칙적으로 변해갔다. 지뢰의
폭발음이 계속해서 들려왔다.
"연속 집중 포격이군." 슈나이더가 말했다.
"우린 다시 전선으로 배치될 거야."
"그래."
그들은 다시 귀를 기울였다. 슈나이더의 말 그대로였다. 지금 들려오고 있는 것은
국지전이 아닌 것 같다. 격렬한 대포의 사전 공격이 불안정한 전선의 전면에 걸쳐
가해지고 있다. 내일 새벽에는 총공격이 시작될 것이다. 소련군은 2주일 전처럼
안개에 싸여서 전진해올 것이다. 그때 우리 중대는 마흔 두명이나 잃었다.
휴가는 날아가 버렸다. 사실, 귀가를 믿고 있지는 않았다. 그래서 부모님께도 알리지
않았다. 입대한 후로 겨우 2주일 동안의 휴가를 받았다. 벌써 2 년 전의 일이었고,
스무 살이 되었다.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다만 허무할 뿐이었다.
"어느 쪽으로 돌 텐가?" 슈나이더가 물었다.
"어디든. 오른쪽으로 갈까?"
"좋아, 난 왼쪽을 돌아보지."
안개가 점점 짙어만 갔다. 마치 걸쭉한 수프 한가운데를 건너고 있는 것 같았다. 그
표면을 슈나이더의 목이 헤엄쳐가고 있었다. 그레버는 마을 오른쪽을 돌아보았다.
마을은 안개 속에 가라앉았다가 다시 떠오르고 있었다. 그는 끝머리에서 일고 있는
전선의 불꽃을 바라보았다. 포격은 열기를 더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갑자기 탕! 탕! 총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슈나이더였다. 그때 낮게
부르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허리를 낮추고 안개 속에서 총을 겨누었다.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어디야?"
"여기다!"
그는 안개 위로 머리를 내밀다가 재빨리 옆으로 비켜섰다. 어디서고 총알이
날아오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가까운 곳에서 소리가 났다. 그러나 짙은 밤안개 때문에
좀처럼 거리를 측정할 수가 없었다. 서서히 슈타인브레너의 모습이 나타났다.
"개새끼들! 슈나이더의 머리를 쏘았어!"
게릴라들이 안개를 방패로 삼아 침투한 것이었다. 슈나이더의 붉은 수염이 좋은
표적이 되었다. 놈들은 모두 잠들었다고 단정한 모양이었다. 발굴 작업으로 놈들의
작전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나 슈나이더를 사살했다.
"안개 때문에 더 이상 추적할 수 없었어!"
슈타인브레너의 얼굴은 안개에 젖어 축축해졌고 눈이 번쩍번쩍 빛났다.
"조를 편성해서 다시 순찰한다. 라에의 명령이다. 너무 멀리 가지 않도록."
"알았어."
그들은 서로를 분간할 수 있는 사이를 두고 앞으로 나갔다. 슈타인브레너는
날카롭게 안개를 훑어 내리며 미끄러지듯 전진했다. 그는 유능한 병사였다.
"한 놈 잡고 싶어." 그는 빠르게 속삭였다.
"이 속에서라면 멋지게 해치울 수 있을 거야. 찍소리도 못하게 놈들의 입에 헝겊을
쑤셔넣고 팔과 다리를 벌려놓은 다음에 시작하는 거야. 눈알을 뽑으려면 힘껏
잡아당겨야 해. 너는 잘 모를 거야."
"나도 알지." 그레버는 말했다.
그는 슈나이더를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에 그가 오른쪽으로 돌고 내가 왼쪽으로
갔었더라면 죽은 사람은 나다! 그러나 감동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전에도 비슷한
일이 여러 번 있었다. 군인은 우연히 살아남기도 하는 것이다.
다른 조와 교대할 때까지 찾아 헤맸지만 한 사람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일선에서
타타타 기관총 소리가 들려왔다. 공격이 개시되었던 것이다.
"드디어 시작되었다!" 슈타인브레너가 외쳤다.
"최전선에 있었더라면! 이런 공격이라면 보충병이 많이 필요하지. 2, 3일만 싸우면
하사관이 돼."
"아니면 전차에 깔려 빈대뗙이 되겠지."
"바보 같은 소리 마! 그따위로 생각했다간 출세는 꿈도 못 꾸지. 최전선이라고 다
죽지는 않아."
그들은 지하호로 기어 들어갔다. 슈타인브레너는 모포를 깔아 잠자리를 마련했다.
그레버는 그를 응시했다. 이 스무 살 난 청년은 고참병 열 사람이 해치운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혼자서 죽였다. 그것도 전투에서가 아닌, 후방의 강제 수용소에서. 특히
그만의 방법으로 무자비하게 살해한 걸 자랑으로 알고 있었다.
그레버는 잠을 자려고 애썼지만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는 전선의 굉음에
귀를 기울여 보았다. 슈타인브레너는 곧 잠이 들었다.
날이 밝았다. 전선은 혼란스럽고 들뜨고 있었다. 전차가 출동하고 남쪽의 진지는
이미 허물어졌다. 비행기가 하늘을 정찰하고 수송대가 평원을 달려갔다. 부상병이
후송되고 중대는 전원 대기 상태에 있었다.
10시에 그레버는 라에의 호출을 받았다. 중대장은 아직 남아있던 석조가옥의 한
구석을 숙소로 삼고 있었다. 방은 서늘했다. 테이블 위에는 알코올 램프와 커피가
놓여 있었다.
"자네의 휴가통지서가 왔어." 라에는 말했다.
"허가가 내렸어. 어때, 뜻밖이지?"
라에는 그레버에게 악수를 청했다.
"잘 다녀오게. 빨리 출발하라고."
그레버는 방에서 나와 사무실로 갔다. 사무병은 스탬프를 찍고 서류를 넘겨주었다.
"재수 좋은데!" 그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특별 휴가라! 이렇게 전투가 심한데!"
"내가 선택한 건 아니야."
그레버는 지하호로 들어갔다. 그는 소지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속에는
어머니에게 드릴 소련의 성상이 있었다.
힐슈만이 종이쪽지를 들고 그레버 앞에 서 있었다.
그렇다, 휴가가 취소 당한 것이다!
"출발하나?" 힐슈만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레버는 휴, 한숨을 쉬었다.
"이건 우리 집 주소야. 안부를 전해줄 수 없을까?"
"알았어." 그는 그것을 받았다.
그레버는 구급차의 운전석 옆에 간신히 자리를 잡았다. 차는 마을을 우회하면서
짚단으로 표시한 도로를 달렸다. 교회 앞에서 중대가 정렬해 있었다.
"전선으로 출동하는 거야." 운전병이 말했다.
"큰일 났는 걸. 도대체 소련군은 어디서 많은 대포를 몰고 왔지?"
"아메리카야. 아니면 시베리아겠지. 시베리아에 공장이 많은 모양이야."
그레버는 장화에 모포를 끌어다가 덮었다. 순간, 자신이 탈주병 같은 생각이 들었다.
다른 중대원들은 모두 여기 있는데 혼자 고국으로 돌아간다. 모두가 전선으로
출동해야 한다. 나는 휴가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누군가가 쫓아와서 다시 끌고 가지나 않을까.
2, 3 킬로미터 가량 달리자 부상병을 실은 차가 도로에서 미끄러져 눈 속에 박혀
있는 모습이 보였다. 거기서 차를 세우고 차 안의 부상병들을 살펴보니 두 사람이
죽어 있었다. 시체를 내리고 눈 속에 묻혔던 사람들을 태웠다. 그레버는 세 사람을 다
태울 때까지 도와주었다. 두 명은 다리를 절단했고 한 명은 얼굴에 큰 부상을 입고
있었다. 뒤에 남겨진 사람들은 저주를 퍼붓거나 비명을 질러댔다. 그들도 모두
부상병이 갖는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에는 버려질 것 같은 공포감을.
그들은 계속 달렸다. 운전수는 등을 뒤로 젖혔다.
"두달 전이야. 기아가 고장났어. 차가 서 버렸지. 들것에 누워있던 우리는 모두 꽁꽁
얼어버렸어. 겨우 도착해서 보니 여섯 사람이 살아 있었어. 온몸이 언 채로."
그는 잎담배를 꺼내서 씹었다.
"걸을 수 있는 부상병들이 도로를 따라 걷고 있었어. 눈보라가 몰아치는
밤이었는데도. 그들이 우리 차에 덤벼들었어. 문이나 발판에 마치 벌떼처럼 매달리는
거야. 발길로 차 버렸지."
그레버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을은 이미 시야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보이는 건 먼 하늘과 끝없이 펼쳐지는 벌판뿐이었다. 차는 서쪽으로 서쪽으로
달렸다. 한낮의 태양이 던지는 빛으로 새하얀 눈이 창백하게 보였다. 그때 갑자기
가슴에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비로소 죽음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다! 바퀴 자국이
남은 눈이 1 미터,1 미터 멀어져 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길이만큼
안전하다. 서쪽으로 향한, 지평선 저편에만 존재했던 안전이었다.
운전수가 기어를 바꾸려고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레버는 담배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고마워." 운전수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나는 피우지 않아. 씹을 뿐이야."
5
열차가 정지했다. 위장한 정거장이 햇빛을 받으며 서 있었다. 정거장 주위에 있던
몇몇 집들은 이미 잿더미가 된 지 오래였다. 그 뒤로 임시로 세워진 막사는 지붕과
벽이 모두 위장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선로에는 차량들이 대기해 있었고 소련인
포로가 짐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이 역에서 지선이 본선과 연결되고 있었다.
부상병은 막사로 운반되었다. 걸을 수 있는 병사들은 벤치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특별휴가를 받은 병사가 서너 명 더 도착했다. 그들은 원대복귀가 두려워서
되도록 눈에 띄지 않도록 행동했다.
지루하고 초조한 시간이었다. 멀리서 비행기의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이
근처에 엄폐된 비행장이 있는 모양이다. 잠시 후, 비행편대가 정거장 위를 빙빙 돌면서
위로 상승하자 마치 종달새가 날고 있는 것같이 보였다. 그레버는 잠시 깜박했다.
종달새. 평화.
"휴가증!"
그는 두 명의 헌병이 외치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그들은 단 한번도 위험에 처한
적이 없는 것 같은 얼굴로 절도있게 행동하고 있었다. 군복은 깨끗했고 무기가
번들번들 빛을 발했다. 그들은 지나치게 씩씩했으며 건장해 보였다.
병사들은 묵묵히 휴가증명서를 꺼냈다. 헌병들은 하나하나 조사하고 나서 급료부를
요구했다.
"너희들은 셋째 막사에서 식사를 한다." 나이 많은 헌병이 말했다.
"깨끗이 씻어라. 도대체 그 꼴들이 뭐냐! 돼지새끼처럼 하고 고향에 가고 싶나?"
그들은 셋째 막사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개새끼들!" 텁석부리 사내가 씩씩거렸다.
"말이야 번지르르하지. 후방에서 호의호식하면서 우리를 죄인 취급해?"
"저놈들은 스탈린그라드에서 소속 연대를 잃은 자들을 몇 십명이나 사살했어." 다른
병사가 말했다.
"자넨 스탈린그라드에 있었나?"
"거기 있었다면 지금 여기 있을 수 있겠나? 그 지옥 구덩이에선 단 한 사람도
도망칠 수 없었어."
"이봐!" 나이가 많은 하사관이 말했다.
"너희들 일선에선 제멋대로 지껄였지만, 죽고 싶지 않으면 지금부터 입 다물어.
알았나?"
그들은 식기를 들고 줄을 서서 오랫동안 기다렸다. 추위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꼼짝않고 있었다. 이런 일에는 이미 만성이 되어 있었다. 마침내 고기와 야채가
조금씩 섞이고 감자조각이 몇 개 떠 있는 수프를 한 국자씩 받았다.
헌병들을 욕했던 병사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헌병들도 이런 걸 먹을까?"
"야, 쓸데없는 걱정마." 하사관이 비웃었다.
그레버는 수프를 마셨다. 집에 돌아가면 어머니가 요리해 주실거야.
그들은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헌병이 재조사를 시작했다. 부상병들이
쉴 새 없이 도착했다. 새로운 일단이 도착할 때마다 귀향장병들은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뒤에 남겨지게 될 것 같아서.
마침내 자정이 지나서야 열차가 편성되었다. 날씨는 더욱 추워지고 하늘에는 별들이
맑게 빛나고 있었다, 그들은 별을 쳐다보았다. 그것은 전쟁터에서 이미 잊고 지내던
것이었다. 단지 전쟁과 결부되어 좋고 나쁘고가 결정되었다.
부상병들이 먼저 열차에 실려졌다. 그들 중 세 명이 다시 내려 오게 되었다. 그
동안에 죽어 있었던 것이다. 들것은 역 구내에 방치되어 사자들의 얼굴이 드러나고
있었다.
다음에는 보행이 가능한 부상자들 차례였다. 그들은 세밀하게 조사를 받았다.
저들과 함께 타지 말아야겠다고 그레버는 생각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머리 위에서
비행기의 폭음이 들려왔다. 아군기라는 것을 알았지만 자꾸만 몸이 떨렸다. 전선에
있을 때보다도 더 두려웠다.
"휴가증!"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귀향장병들은 급히 서둘렀다. 헌병이 마지막 점검 때 발급했던 종이쪽지를 다시
받고 있었다. 그들은 재빨리 열차에 올라탔다. 이미 부상병 몇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귀향장병들은 한 곳에 뭉쳐 있었다. 헌병이 다시 명령을 내렸다. 그들은 기차에서
내려 정렬한 다음에 다른 칸으로 끌려갔다. 거기에도 부상병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레버는 되도록이면 창가에서 떨어져 가운데로 갔다. 포탄의 파편이 날아 와 무슨
꼴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기차는 출발하지 않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모두들 발차만을 바라고 있었다. 이윽고
밖이 조용해졌다. 두 사람의 헌병이 병사 한 명을 양쪽에서 잡고 가는 것이 보였다.
소련인 한 패가 탄약상자를 나르고 있었다. 친위대 두세 명이 큰소리로 떠들며
다가왔다. 그래도 기차는 움직이지 않았다. 부상병들이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렇게라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레버는 머리를 뒤로 기댔다. 기차가 출발하면 잠을 잘 생각으로 눈을 감았다.
잠은 올 것 같지 않았다. 소음에 귀를 기울여 보았다. 어둠에 익숙해지자 다른
사람들의 눈이 들어왔다. 오로지 눈동자만이 불안하게 반짝반짝했다.
기차가 쾅 하고 움직였다가 다시 정지했다. 고함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 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것이 두 개 밑으로 내려졌다. 또 두 사람이 죽은 것이다.
산 사람을 위하여 자리 두 개가 생겼다 그들은 모두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기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헌병, 친위대, 포로 갑자기 평원이 나타났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기차는 다시 정지할 것이다. 그러나 기차는 계속
미끄러지듯 나아갔으며 바퀴의 불규칙한 동요가 차츰 규칙적인 율동으로 변하고
있었다. 탱크와 대포가 보였다. 물끄러미 기차를 바라보고 있는 군인들. 그레버는 몹시
피로했다. 집 집으로 가는 것이다. 그는 웬지 기뻐할 수가 없었다.
눈이 내리는 아침이었다. 그들은 어느 정거장에서 커피를 배급받았다. 정거장은
작은 도시의 끝에 있었다. 도시라고 해봐야 텅 비었고 시체가 들것에 실려 운반되고
있었다. 기차는 다른 선로로 바꾸는 중이었다. 그레버는 커피 대용품을 받아 자리로
돌아왔다. 마음놓고 빵을 타러 갈 수도 없었다.
헌병들이 기차 안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경상자들을 찾아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경상자는 이곳의 위수병원에 남아 있어야만 했다. 이 소식이 빠르게 열차
안으로 퍼졌다. 팔을 다친 병사들은 몸을 숨기기 위하여 변소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앞 다투어 안으로 들어가려고 필사적이었다. 문이 열리려는 순간, 그들은 미친 듯이
서로 끌어당기고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왔다!" 갑자기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그들은 허겁지겁 흩어졌다. 두 사람이 변소 안으로 들어가서 쾅하고 문을 닫았다.
이 소동으로 쓰러진 병사는 찰과상을 입은 팔을 노려보고 있었다. 빨간 오점이 붕대에
번져 점점 확대되고 있었다. 또 한 사내는 승강구와는 반대쪽의 문을 열고 고심하던
끝에 눈보라 속으로 나갔다. 그는 기차의 바깥쪽에 몸을 착 붙이고 숨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별수 없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문을 닫아!" 누군지 낮게 외쳤다.
"닫지 않으면 발각된다.!"
그레버는 문을 닫아 주었다. 밑에 매달려 있는 사내의 창백한 얼굴이 살짝 보였다.
"난 집으로 돌아가고 싶단 말이야!" 붕대에 뭉친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부상병이 말했다.
"난 두 번씩이나 야전병원으로 후송되었는데, 그때마다 전선으로 돌아가야 했어. 난
집에 가고 싶어. 그만한 일은 충분히 했단 말이야"
그는 다치지도 않은 특별 휴가병들을 증오스런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이윽고 조사관이 왔다. 두 사람은 차 안을 조사하고 다른 두 사람이
밖에서 잔류 명령을 받은 부상병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 중의 하나는 하급
군의관이었다. "나가." 그는 부상 진단서를 재빨리 훑어보고 나서 무심히 말하고 다음
사람에게로 갔다.
한 사람이 명령을 받고도 꼼짝하지 않았다.
"나가란 말야, 영감." 군의관의 뒤를 따르던 헌병이 말했다.
"안 들려?"
사내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의 어깨에 걸린 붕대가 보였다.
"나가! 밖으로 나가!" 헌병이 다시 소리쳤다. 그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아무 것도
귀에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정면만 노려보고 있었다. 헌병은 그의 앞에 두 팔을
벌리고 섰다.
"너! 특별 호출을 받고 싶나? 일어서!"
사내는 여전히 침묵만을 지키고 있었다.
"일어서!" 헌병이 다시 소리를 질렀다.
"말하는 소리가 안 들리나? 이 새끼, 넌 군법회의감이야, 알았나?"
"걱정하지 마라!" 젊은 군의관이 말했다.
"미리 걱정하지 말고." 군의관은 장미빛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넌 피가 흐르고 있다." 군의관은 변소 앞에서 다투고 있던 다른 부상병에게
말했다.
"붕대를 갈아야 되니깐 밖으로 나가!"
"나는." 사내는 뭔지 말하고 싶어했다. 그때 다른 헌병이 군의관이 붕대를
갈아야 된다고 말한 병사에게 달려들어 한쪽 팔을 잡는 것이 보였다. 헌병들은 그
병사를 끌어내서 일으키고 있었다. 병사는 얼굴은 움직이지도 않고 가느다란 비명만
질렀다. 지원 온 헌병이 이번에는 그의 허리를 잡고 가벼운 짐짝을 들어내는 것처럼
차 밖으로 밀어냈다. 그는 기계적으로 행동했다. 병사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군의관이 물었다.
"붕대를 갈면 이 기차를 다시 탈 수 있습니까, 군의관님?" 피를 흘리며 사내가
물었다.
"잘 조사하기로 하지. 그렇게 될 거야. 여하튼 붕대를 다시 감아야 해."
사내는 비참한 얼굴로 나갔다. 그는 하급 군의관을 '군의관님'이라고 불렀지만
소용이 없었다. 헌병은 변소문을 열려고 했다.
"그렇지." 그는 멸시하듯이 말했다.
"이놈들은 항상 얼빠진 생각만 하고 있어."
"문을 열어!" 큰 소리로 명령했다.
문이 열리더니 병사 한 명이 밖으로 나왔다.
"이 새끼, 교활한 놈!" 헌병이 호통을 쳤다.
"왜 거기에 처박혀 있었나. 숨박꼭질이라도 하나?"
"설사에 걸렸습니다. 대개 변소라는 건 그 때문에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흥, 하필이면 지금 말이지?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아?"
병사는 상의를 올려 보였다. 거기에는 철십자 일급 훈장이 매달려 있었다. 그는
일부러 헌병의 가슴을 쳐다보았다. 물론 훈장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침착하게
말했다.
"당신이라면 믿을 거야."
헌병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군의가 끼여들어서 병사를 보지도 않고
말했다.
"나가 주게."
"내가 어떤지 아직 보지도 않았소."
"붕대를 보면 알 수 있어. 어서 나가!"
"알았소."
병사는 히죽히죽 웃었다.
"자, 이 칸은 이제 끝났지?" 군의는 신경질적으로 헌병에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헌병은 특별 휴가병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들은 각자 증명서를
손에 들고 있었다.
"네, 전부 끝났습니다."
변소 문이 소리 없이 열리고 병사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의 얼굴에서 땀이 비오듯
흐르고 있었다. 그는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친구는 갔나?" 그는 거의 속삭였다.
"그런 모양이야."
병사는 자리에 앉아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이마에 식은 땀이 흘렀다.
"난 그를 위해서 기도하겠어." 마침내 그는 입을 열었다.
모두 고개를 들었다.
"뭐?" 누군가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자넨 헌병을 위해서 기도하겠단 말인가?"
"아니. 나와 함께 변소에 숨어 있던 그 친구를 위해서야. 그는 나더러 변소에
남으라고 했어. 자기가 멋지게 처리하겠다고. 그 녀석, 어디 있지?"
"밖에. 그 녀석, 멋지게 했어. 그 새끼들의 약을 잔뜩 올려놓고도 뒷조사를 받지
않게 했지."
"난 그를 위해서 기도하겠어."
"아아, 좋아. 마음대로 해."
"진심이야. 내 이름은 율겐스야. 난 정말 그를 위해 기도를 드릴 테야."
"그래 좋아! 그만 잠자코 있어. 내일 기도하자고! 아니면 기차가 떠날 때까지
기다려." 누군가가 말했다.
"기도를 하겠어. 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집에 가야 해. 다시 병원으로 끌려가면
다시는 집에 갈 수 없어. 난 독일로 돌아가야 해. 아낸 겨우 설흔 여섯 살인데 암에
걸렸어."
"그는 고뇌에 가득 찬 눈초리로 한 사람씩 번갈아서 보았다. 한 사람도 대꾸하지
않았다. 그런 일은 너무 흔했다.
기차는 한 시간 후에 출발했다. 문 밖으로 나간 병사는 두 번 다시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아마도 붙잡혔을 것이라고 그레버는 생각했다.
정오에 하사관이 한 명 들어왔다.
"이발하고 싶은 사람은 없는가?"
"뭐라고?"
"나는 이발사다. 프랑스에서 들여온 고급 비누도 가지고 있지."
"기차가 달리고 있는데, 이발할 수 있나?"
"물론이지. 난 지금 장교실에서 오는 길이야."
"얼마야?"
"50페니히. 반 마르크지. 이 정도면 싼 편이지."
"좋다." 한 사람이 돈을 꺼냈다.
"조금이라도 피가 보이면 돈을 안 주겠어."
이발사는 면도기를 꺼내고 주머니에서 빗과 가위를 꺼냈다. 머리칼을 담아 놓는
커다란 봉지도 있었다. 그는 창가에 서서 면도날을 갈기 시작했다. 새하얀 비누
거품도 만들어졌다. 그는 능숙한 솜씨로 가위를 놀렸다.
세 사람째 깎고 그레버가 네 번째로 앉았다. 이미 끝난 세 사람은 이상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얼굴은 햇볕에 타 붉게 얼룩이 지고 비누거품으로 하얗게 된 턱이
햇빛에 빛나고 있었다. 반은 군인의 모습이었고, 나머지는 행복한 가장의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레버는 면도날이 살을 스치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 순간만은 집에라도 있는
것처럼 마음이 들떴다. 이발사가 상관이기 때문에 더욱더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깨끗한 양복이라도 입고 있는 느낌이었다.
기차는 오후에 다시 한 번 정거했다. 밖에는 야전 취사차가 와 있었다. 모두들
나가서 자기 몫을 받아 가지고 왔다. 율겐스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는 마치 다치지
않은 오른손 바닥에 눈에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손을 맞대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밤이 되어서야 국경에 도착했다. 모두 기차에서 내렸다. 휴가병들은 한곳에
모였다가 소독실로 끌려갔다. 옷을 벗어주고 벌거벗은 채로 앉아 몸에 붙은 이를
잡았다. 방안은 따뜻했으며 석탄산의 냄새가 강하게 나는 비누도 있었다.
그레버는 정말 오랜만에 따뜻한 방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전선에서도 이따금
난로를 피우는 때가 있었다. 그러나 불 가까이 가야만 온가를 느낄 수가 있었다.
방안은 구석까지 훈훈했으며 나중에는 뼈마디까지 부드러워졌다.
그는 멍청히 앉아 이를 잡아 죽였다. 그의 머리카락에는 이가 득실득실하였다.
온몸이 풀리면서 졸음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전우들의 창백한 육체와 동상에 걸린
발과 손이 보였다. 그들은 군인이 아니라 벌거숭이 인간이었을 뿐이다. 화제가 갑자기
바뀌었다. 이미 전쟁 따위와는 무관했다. 그들은 먹을 것과 여자 외에는 흥미가
없었다.
"마누라에게는 애가 있어." 베른하르트라는 사내가 말했다. 그는 그레버 곁에 앉아
손거울을 이용해 겨드랑이의 털에 붙은 이를 잡고 있었다.
"난 두 해나 집에 못 갔는데 태어난 지 14개월이나 됐더군. 그 여자는 내
자식이라고 우겨대는 거야. 내 어머니는 소련인의 피를 받은 것 같다고 편지에
적었어. 게다가 그녀는 10개월 전부터야 어린애에 대한 얘기를 적어 보내기 시작했지.
어떻게 생각하지?"
"뭐, 흔한 일이지." 대머리 사내가 관심 없다는 투로 말했다.
"시골에는 소련 놈들과 붙어서 생긴 애들이 얼마든지 있어."
"난, 그런 화냥년은 쫓아내 버린다." 다리에 붕대를 감고 있던 병사가 참견을 했다.
"더럽거든."
"더러워? 그게 무슨 뜻이지?" 대머리의 사내가 어처구니가 없었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전시에 그런 일은 어쩔 수 없어. 애는 사내인가, 계집애인가?"
"사내. 여편네는 나를 닮았다고 썼더군."
"사내라면 기르는 것이 좋아. 농장에서는 항상 일손이 모자라니까."
"절반은 소련인이야."
"상관 있나? 소련인은 아리아인이야. 조국은 군인을 많이 필요해."
베른하르트는 거울을 치웠다.
"그리 간단치만은 않아. 네가 그런 일을 당해도 그렇게 말할 건가?"
"그럼 생산요원인 고향의 황소 같은 놈들이 네 마누라에게 애를 낳게 하는 편이
좋단 말인가?"
"그렇지는 않아."
"그러면 돼잖아?"
"그녀는 나를 기다릴 수도 있었어." 베른하르트는 멋적다는 듯이 말했다.
대머리는 어깨를 움츠렸다.
"기다리는 여자도 있고 기다리지 않는 여자도 있어. 몇 년씩 집을 비우면 자기
마음대로 안되는 법이니까."
"넌, 결혼했나?"
"아니. 다행히도 난 미혼이야."
"소련인은 아리아인이 아냐." 지금까지 듣고만 있던 생쥐 같은 남자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모두가 그를 보았다.
"그건 잘못 알고 있는 거야." 대머리가 반박했다.
"그자들은 아리아인 족이다. 그들도 한때는 우리와 동맹국어였어."
"놈들은 야만족이야. 볼셰비키 야만족인 것만은 분명해."
"너희들, 둘 다 틀린다." 털복숭이 사내가 말했다.
"소련인이 우리와 동맹을 맺고 있을 때는 하등 인종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래."
"그렇다면 아이를 어떻게 하지?"
"조국에 인도하지." 생쥐가 권위를 내세우며 말했다.
"고통없는 안락사다. 방법이 있겠나?"
"그럼 아내는?"
"그건 당국에서 알아서 할 일이야. 낙인을 찍거나 삭발을 하거나 강제수용소를
보내거나 교수대겠지."
"당국은 마누라에게 아직 아무 짓도 안 했어." 베른하르트가 말했다.
"당국에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거야."
"알고 있어. 어머니가 밀고했거든."
"그래? 당국도 병이 전염되어 썩어버렸군. 그놈들도 강제수용소나 보내지. 아니,
교수대가 좋을까?"
"아아, 제발 날 좀 가만 내버려둬."
베른하르트는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때까지 방안을 왔다 갔다 하던 사내가 그들에게로 왔다.
"분명한 건 우리들은 초인이고 다른 놈들은 모조리 하등 인종이다. 지금 보통
인간은 누굴까?"
"스웨덴인." 대머리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아니면, 스위스인이다."
"천만에, 야만인이야." 저음이 말했다.
"도대체 백색 야만인이란 있을 수가 없어." 생쥐가 응수했다.
"없다고?" 저음은 그를 노려보았다.
그레버는 꾸벅꾸벅 졸았다. 저마다 여자에 대한 화제로 핏대를 올리는 중이었다.
그는 여자에 대한 상식이 빈약했다. 그들의 인종론은 그가 사람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는 것과 판이하게 달랐다. 사람은 각계나 출산의 능력 따위로 구분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자기가 참전했던 국가의 매춘부 몇 명밖에는 거의 여자를 모르고
있었다. 그 여자들은 독일의 여자 청년단들처럼 사무적이었다. 그러나 매춘은 그
여자들에게는 하나의 직업이었다.
그들은 옷을 원래대로 입었다. 갑자기 다시 사병이 되고 병장이 되고 상사가 되고
하사관이 되었다. 소련인의 아이가 생긴 사나이와 저음의 계급은 하사관이었다.
생쥐는 호위병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하사관이란 사실을 알자 몸이 움츠려들면서
침묵을 지켰다. 그레버는 상의를 살펴보았다. 아직 따뜻하고 초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그들은 막사로 전원 집합했다. 나치스의 정치장교가 일장 연설을 했다. 그는 뒤에
총통의 사진이 걸려있는 연단에 서서 '지금 조국으로 돌아가려는 제군들은 중대한
책임을 지니고 있다.'는 말부터 시작했다.
"전선의 상황을 일체 말해서는 안된다. 정세, 위치, 군대 배치, 이동에 대해서도
절대로 입에 담지 마라. 도처에 스파이가 침투하고 있다. 침묵을 지키는 것만이
안전하다. 함부로 비밀을 누설시킨다면 엄중한 처벌을 받을 것을 각오하라. 쓸데없는
비판도 반역행위이다. 전쟁은 총통의 지휘를 받는다. 정세는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다.
소련군은 섬멸 직전에 놓여 있다. 아군은 반격을 가하고 있다. 군대에 대한 보급은
일급이며 사기는 왕성하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지명이나 군대의 위치를 발설하는
건 반역죄이다. 민심 교란도 마찬가지이다."
장교는 일단 연설을 중단했다. 그러나 갑자기 어조를 바꾸어 말했다. "총통께서는
귀대 장병들에게 특별히 선물을 하사 하셨다. 식료품 꾸러미를 하나씩 줄 것이다.
이것은 군대의 보급은 윤택하며 전쟁 중에라도 선물을 가지고 갈 수 있다는 증거로서
고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반드시 전달해야 한다. 만약에 도중에 혼자서 먹어치우면
처벌을 받는다. 이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각자 목적지의 정거장에서 조사를 실시한다.
하이 히틀러!"
모두들 차려 자세를 취했다. 그레버는 국가를 합창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도 노래하지 않고 있었다.
"라인란트 지방의 휴가병은 삼 보 앞으로!"
그의 생각과는 다른 명령이 내려졌다.
몇몇 병사가 앞으로 나갔다.
"라인란트 지방의 휴가는 취소한다." 장교는 사무적으로 말했다.
그는 맨 앞에 서 있는 병사를 바라보았다.
"넌, 그럼 어디로 가겠나?"
"쾰른입니다."
"라인란트는 제한한다고 지금 말했잖아. 어디로 가고 싶나?"
"쾰른입니다." 병사는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저는 쾰른 출신입니다."
"쾰른에는 갈 수 없어. 그래도 모르겠니! 그 대신 어디로 가냐고?"
"다른 도시는 가고 싶지도 않습니다. 처자가 쾰른에 있습니다. 휴가 증명서는
쾰른행으로 되어 있습니다."
"쾰른은 안된다. 당분간 쾰른으로 가는 건 금지됐다."
"금지라고요?" 병사는 깜짝 놀랐다.
"왜요?"
"야, 너 미쳤나? 도대체 질문은 네가 할 일인가, 당국에서 할 일인가?"
대위가 와서 장교에게 귓속말을 했다. 장교는 고개를 끄덕였다.
"함부르크와 알사스의 휴가병은 앞으로!"
다들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라인란트 출신은 이곳에 남아라! 나머지는 선물 푸대를 받도록. 좌향좌! 앞으로
갓!"
휴가병은 정거장 앞에 서 있었다. 잠시 후 라인란트 출신들이 걸어왔다.
"어떻게 되었지?" 저음이 물었다.
"네가 들은 대로."
"그럼 어디로 갈 건가?"
"로덴부르크로. 거긴 누님이 살고 있어. 도대체 로덴부르크에 가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내 가족은 쾰른에 살고 있었어. 쾰른은 왜 못 가는거지?"
"모두들 같이 로덴부르크에 있을 거야."
"그렇지 않아. 내 마누라와 누님은 도저히 함께 살 수 없어. 대체 쾰른은 어떻게 된
걸까?"
그는 주위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눈물이 괴고 두꺼운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다들 집에 돌아가는데 난 왜 못 가는가 말야? 마누라와 자식들은 어디 있는
거야?"
"잠깐만." 저음이 말했다.
"별 수가 없어. 아내에게 전보를 치게. 그럼, 로덴부르크에서 만날 수 있어."
"여비는 누가 지불해 주지? 잠은 어디에서 자고?"
"네가 쾰른에 갈 수 없다면 네 마누라도 절대로 그 곳에서 나올 수 없어." 생쥐가
말했다.
"확실해. 규칙이란 건 대개 그런 거니까."
"어째서 그곳을 나올 수 없지?"
"스스로 잘 생각해 보라구."
쾰른 출신의 병사는 휴가병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송두리째 파괴되지는 않았을 거야. 그럴 리가 없어!"
"전선으로 되돌아가지 않은 걸 다행으로 생각해." 저음이 말했다.
"목적지가 차단되면 흔히 일어나는 일이니까."
그레버는 묵묵히 듣고 있었다. 온몸이 오들오들 떨리는 건 추운 날씨 탓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다시 한 번 유령과 같은 것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는 선로를 보았다.
그것은 가정과 평화를 향해 남겨진 유일한 길이었다.
"특별휴가라고?" 쾰른 출신의 사내가 허탈하게 웃었다.
"특별휴가라는 게 이런 건가?"
다른 사람들은 가만히 있었다. 그에게는 죄가 없었다. 모두들 자기들이 해당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아직 안전하지는 않다. 하나, 둘, 그의 곁을
떠나고 있었다. 불행은 전염된다.
기차는 천천히 움직였다.
6
이튿날, 새벽의 안개 속에서 풍경이 나타났다. 그레버는 창가로 옮겨 앉아 유리창에
얼굴을 맞대고 있었다. 그는 미개간지와 아직 눈이 남아 있는 밭고랑에 버려진
보리이삭을 보았다. 어디고 파괴당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한적한 평원. 포탄 군막도
지하호도 없다. 전형적인 시골의 모습이었다.
드디어 마을이 나타났다. 십자가가 빛나고 있는 교회, 지붕의 풍향계가 천천히 돌고
있는 학교. 선술집 그 앞에 마을 사람들이 서성거리고 있다.
집집마다 활짝 열어제친 창문, 빗자루를 든 하녀, 파괴되지 않은 창을 비추는
아침햇살 학교로 가는 어린이들. 얼마만에 어린이들을 보는 것인가! 그레버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이것이야말로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 있었다.
"무척 생소하게 보이는데." 함께 풍경을 바라보던 하사관이 말했다.
"그렇군."
조금씩 안개가 사라져갔다. 지평선으로부터 숲이 다가오고 길다란 길이 나타났다.
전기줄이 기차와 함께 달리고 있었다. 그것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한없이
이어지고 그 위로 새들이 날아다녔다. 평화로운 풍경이다. 전방의 굉음은 먼 후방에서
잦아들고 있었다. 비행기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레버는 오래도록 여행을 하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전우들의 얼굴조차 희미해졌다.
"오늘은 무슨 요일이지?" 그는 물었다.
"목요일이야."
"그래. 목요일."
"커피 좀 안 주려나?"
"주겠지. 여기는 옛날 그대로이니까."
배낭에서 방을 꺼내서 씹는 병사들도 있었다. 그레버는 기다리고 있었다.
커피에다가 빵을 적셔 먹고 싶었다. 집에서의 아침식사가 떠올랐다. 어머니는 청백의
줄무늬가 새겨진 식탁보를 씌우고 있었다. 꿀과 롤빵과 뜨거운 밀크를 탄 커피.
카나리아가 노래하고, 여름에는 창가의 장미색 제라늄에 햇살이 가득했다. 그런
아침이면 녹색이 짙은 잎파리를 손과 손에 문지르고 강한 이국적 냄새를 맡으면서
외국의 풍물을 공상하곤 했다. 그로부터 다른 나라는 지리도록 구경했지만, 그 때
꿈꾸던 거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다시 창 밖을 내다보았다. 그의 마음이 가라앉았다. 들일하는 사람들이 허리를 펴고
기차를 보고 있었다. 머리에 수건을 쓴 여자들도 보였다. 하사관은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들었다. 마주 흔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싫으면 그만둬. 촌놈 같으니라구." 하사관이 실망했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싸우고 있는지 모르겠군." 하사관은 흥분해 있었다.
"저들은 포로이거나 외국인 노동자일 거야."
"그 속에 여자도 끼여 있었어. 손을 흔들 줄도 모른단 말인가?"
"부상병에게 누가 손을 흔들겠나."
대머리가 말했다.
"멍청한 년들." 하사관은 쾅 하고 문을 닫았다.
"쾰른 같으면 이렇진 않아." 쾰른 출신이 말했다.
기차는 계속해서 달렸다. 도중에 굴 속에서 두 시간이나 서 버렸다. 차내에는
조명등이 없어서 그대로 암흑이었다. 그들은 어둠에 차차 익숙해졌으나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담뱃불이 빨갛게 빛을 내며 올라갔다 내려갔다 했다.
"이건 기계가 고장난 거야." 하사관이 입을 열었다.
모두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비행기의 폭음은 들리지 않았다.
"누구 로텐부르크에서 살아 봤나?" 쾰른에서 온 남자였다.
"오래된 도시지." 그레버가 말했다.
"가본 적이 있나?"
"없어. 넌?"
"나도. 거기서 난 어떻게 해야 하지?"
"넌 차라리 베를린으로 가는 것이 좋았을걸." 생쥐였다.
"휴가는 단 한번이니까. 베를린에는 여러 가지 일이 있어."
"그 곳까지 갈 여비도 없어. 잠은 호텔에서 자나? 처자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어."
드디어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야 가는군." 저음이 말했다.
"여기서 또 생매장되는 줄 알았지."
한 줄기 회색빛이 암흑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것은 차츰 은빛으로 변하다가 서서히
평원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바깥의 경치를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았던 사람들이
창가로 몰려들었다.
어떤 정류장에서 저음이 내렸다. 한 시간 후, 그레버에게 낯익은 모습들이 나타났다.
이미 황혼이 짙어지고 있었다.
그레버는 배낭을 짊어졌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도시가 보이기만을 기다렸다.
기차가 멎었다. 밖에서는 사람들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역 이름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또 만나세." 쾰른의 남자가 말했다.
"더 가야 해. 정거장은 시내 한 가운데에 있다."
"정거장이 바뀔 수도 있어. 물어 보게."
그레버는 문을 열었다, 사람들이 승차하고 있었다.
"여기가 베르덴입니다?"
한 사람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너무 급히 서두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레버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는 밖으로 나갔다. 역장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베르덴! 베르덴 손님 내리십시오!"
그는 사람들을 밀어붙이면서 역장에게 갔다.
"이 기차는 정거장까지 가지 않습니까?"
역장은 지쳤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베르덴으로 가는 겁니까?
"그렇소."
"승강장에서 오른쪽으로 가서 버스를 타시오."
그레버는 지금 걷고 있는 승강장을 도무지 기억할 수 없었다. 승강장은 생목재로
새롭게 다시 세워져 있었다.
"베르덴행이오?" 그는 운전수에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기차는 시내까지 안 들어가오?"
"네."
"어째서 안 갑니까?"
"거기까지만 갈 수 있습니다."
그레버는 운전수를 바라보았다. 더 이상 운전수에게 물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솔직히 말해 줄 리가 없다. 그는 버스에 올랐다. 구석에 빈자리가 있었다.
밖은 어두워져서 선로 같은 것이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으로 보일 뿐이었다. 선로는
직각으로 꺾여 시내를 향하고 있었다. 기차는 이미 선로를 바꾸고 있었다. 버스가
출발했다. 질이 나쁜 휘발유를 쓰고 있는 고물차였다. 메르지데스 고급 차 몇 대가
버스를 추월했다. 앞에 가는 차에는 나치스 장교들이 타고 다른 두 대에는 친위대의
장교들이 앉아 있었다. 버스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메르지데스가 옆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조용한 가운데에 어린아이가 통로에서 킬킬거리고 웃거나
장난을 하고 있었다.
그레버는 처음에 나타난 거리를 재빨리 살펴보다가 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거리는 파괴되지 않았던 것이다. 버스는 털털거리며 달리다가 수 분 후에 급정거했다.
"모두 내려주십시오."
"여기가 어딥니까?" 그레버는 옆에 앉은 남자에게 물었다.
"브람스가입니다."
"더 안 갑니까?"
"그렇소."
그레버는 그 남자의 뒤를 따라 내렸다.
"난 특별휴가로 돌아왔습니다."
"2 년만에 오는 거지요." 그는 아무에게라도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남자는 그를 돌아보았다.
"댁은 어디십니까?"
"하겐가 18번지입니다."
"그러면 구시가입니까?"
"변두리입니다. 루이제가의 모퉁이에 있지요. 거기서 카타리네 교회가 보입니다."
남자는 어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렇다면, 길은 알겠군요."
"네. 그것만은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 조심해 가시오."
"감사합니다."
그레버는 브람스가를 걷고 있었다. 집들은 옛날 그대로였다. 창문을 보았지만
모두가 어둡고 침침했다. 공습에 대비하고 있었으므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거였다.
거리에는 밝게 불이 켜져 있을 거라고 짐작했었다. 급히 거리를 지나쳤다. 빵집이
있었으나 빵은 없고, 쇼윈도에는 유리꽃병에 종이로 된 장미꽃이 두 송이 꽂혀 있었다.
그 다음에는 역시 아무것도 없는 식료품 가게가 나타났다.
바로 다음이 마구상이었다. 그는 이 가게를 기억하고 있었다. 전에는 박제한 말
한필이 언제나 쇼윈도에 서 있었다. 살며시 안을 들여다보았다. 말은 여전히 거기 서
있었다. 말 앞에는 옛날의 모습 그대로 박제사냥개가 사납게 짖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그는 끔직한 세월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변하지 않은 가게 앞에 잠시 서
있다가 다시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갑자기 마음이 너그러워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입구 옆에 서 있는 낯선 사나이에게 정다운 인사도 건넸다.
군화소리가 터벅터벅 울렸다. 이런 신발은 빨리 벗어버려야지. 더운물에 목욕을
하고 깨끗한 셔츠로 갈아입어야지. 그는 걸음을 재촉했다. 문득 무엇인지 타는 냄새가
났다.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굴뚝에서 나오거나 모닥불을 피우는 연기가 아니라 화재
같았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집들은 파괴되지 않았고 지붕에 불이 붙지도 않았다. 지붕
위에는 푸르른 하늘만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 거리는 화단이 있는 작은 광장에서 끝나고 있었다. 연기 냄새가 더욱 강하게
풍겨오고 있었다. 그레버는 코를 벌름거렸다. 어디서부터 나고 있는지 가늠조차
어려웠다. 이제 냄새는 도처에서 나고 있었다. 마치 잿가루를 하늘에서 뿌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다음 가도에서야 비로소 파괴당한 집을 발견했다. 그는 깜짝 놀랐다. 지난 몇
해 동안 파괴된 건물만 보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무렇지도 않았었다. 그는 마치
생전 처음으로 파괴된 현장을 보는 것처럼 눈을 부릅뜨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단 한 채 뿐이었다. 다른 집들은 모두 그대로였다. 그곳에서도 냄새는 맡아지지
않았다. 이 집은 옛날에 파괴된 것이었다.
그는 거리의 이름을 기억해냈다. 부레메르가였다. 하겐가는 아직도 멀었다. 그는
인적이 드문 거리를 빠르게 지나쳤다. 얼마 후, 폐허가 된 거리가 나오고 파괴된 집도
여러 채 보였다. 다만 앙상한 벽만이 남아 바퀴가 지나간 것처럼 우툴두툴한 모양을
공중을 향해 드러내고 있었다. 그레버는 그 옆을 지나갔다. 어둠 속에 검은
그림자들이 딱정벌레처럼 기어다니는 것이 보였다.
"여보세요!" 그는 소리를 질렀다.
"거기 누가 있습니까?"
그림자가 자취를 감추었다. 사람의 숨결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았다. 그는 그것이 다름아니라 바로 자기의 숨소리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달리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미칠 듯한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동공장이 있었던 걸 떠올렸다. 그것이 폭격의 목표물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습기가 차고 있는 파괴물들을 넘으면서 무턱대고 거리를 달렸다.
그레버는 자기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가 어렸을 때부터 걸었던 거리는 일변하여 방향을 정할 수가 없었다. 그의 옆으로
지나가던 여인에게 길을 묻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뭐라고요?" 여자는 섬찟하며 두 손으로 가슴을 눌렀다.
"저기, 저쪽 모퉁이를 돌아서."
여인이 가리키는 쪽으로 돌아섰다. 새까맣게 그슬린 나뭇가지가 하늘을 향해 뻗쳐
있었다.
그레버는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파악해 보려고 애썼다. 여기서 카다리네 교회의
탑이 보일 것이다 교회도 파괴가 됐는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는 이제
아무에게도 묻지 않았다. 한쪽에서 사람들이 발굴작업을 하고 있었다. 소방대원들이
뛰어다니고 하늘로 치솟는 연기 사이로 물줄기가 튀었다. 동공장 위가 빨갛게 달아
오르고 있었다. 그는 어느새 하겐가에 와 있었던 것이다.
7
굽어진 가로등에 거리의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 아래의 포탄 구멍을
향해 기울어져 있었다. 구덩이에는 무너진 벽과 철제 침대가 처박혀 있었다. 그는
그곳을 돌아서 계속 달렸다. 눈앞에 파괴되지 않은 집이 한 채 서 있는 것이 보였다.
'18번지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저 집은 18번지가 틀림없다. 신이시여,
제발 18번지이기를 !
그러나 집의 정면만 온전할 뿐, 안으로 들어가 보니 전부 허물어져 있었다. 피아노
한 대가 대들보 사이에 끼여서, 뚜껑은 떨어져 나가고 건반은 상어의 거대한
아가리처럼 빛나고 있었다. 마치 선사시대의 전설적인 동물이 격노해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정면의 현관은 활짝 열려져 있었다. 그레버는 그곳으로 뛰어갔다.
"조심해!"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조심하라고. 어디로 가는 거야?"
그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도대체 자신이 살았던 집이 어딘지, 아무 것도 생각해 낼
수 없었다. 전쟁터에서는 그 집을 눈앞에 그려보곤 했었다. 창, 현관, 층계
오늘밤은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조심해!" 처음에 주의를 줬던 사람이 다시 고함을 질렀다.
"벽돌이 떨어진다!"
그레버는 안을 들여다보았다. 층계의 끝이 보였다. 그 집이 몇 번지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공습경계 감시원이 왔다.
"여기서 무얼하고 있는 거야?"
"여기가 18번지입니까?"
"18번지?"
감시원은 철모를 똑바로 썼다.
"18번지가 어디에 있었느냐는 말이겠지?"
"있기는 했습니까?"
"물론이지. 넌 눈이 없나?"
"여기가 18번지 아닙니까?"
"18번지는 이미 없어."
그레버는 그의 옷을 잡아당겼다.
"잠깐만요."
그레버는 얼이 빠져서 말했다.
"난 농담할 시간이 없습니다. 18번지는 어디입니까?"
감시원은 그를 훑어보았다.
"놔. 놓지 않으면 이 호각으로 경찰관을 부를 테다. 이곳엔 들어오지 못해. 여기는
정리구역이다. 우물쭈물하면 체포당해."
"체포라고요? 난, 일선에서 돌아온 사람이오."
"대단하시군! 그러면 여긴 전선이 아닌가?"
그레버는 잡고 있던 옷을 놓았다.
"난 18번지에 살고 있었소. 내 부모도 여기 살았소!"
"이 거리에는 아무도 살지 않고 있어!"
"아무도?"
"난 잘 알아. 나도 전에 여기 살았으니까." 사내는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살고 있었어! 살고 있었지!" "우린 2주일 동안에 여섯 번이나 공습을 당했어. 일선
군인 아저씨! 그렇지만 자네들 악당은? 보면 알겠지! 나의 아내는? 저기다."
그는 바로 보이는 집을 가리켰다.
"누가 저것을 파 줄 것인가? 아무도 아니야. 죽어 버렸어! 구호반은 지금 파낸다
해도 소용 없다고 하더군. 폭파된 기록들, 사무국이나 정부기관에서 구제해야 할
것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다는 거야!"
그는 그레버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군인 아저씨, 하나 가르쳐 줄까? 자기에게 닥치기 전까진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아무도 아는 체를 안 해."
"훈장을 탄 용감한 군인 아저씨! 18번지는 저기야. 지금 발굴작업을 하는 곳이야."
그레버는 뒤로 물러났다. 발굴작업을 하고 있는 곳 그것은 거짓말이다!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야. 잠을 깨면 소련의 이름 없는 지하호 속에 있을 것이다.
여긴 소련이다. 독일 땅이 아니다. 조국은 건재하다.
고함 소리와 삽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많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수도관에서
터진 물이 엄폐된 불빛에 반짝반짝 빛났다. 작업 지시를 내리고 있는 남자에게로
뛰어갔다.
"여기가 18번지입니까?"
"뭐라고? 저리가! 넌 무얼 찾고 있는 거야?"
"양친을 찾고 있습니다. 내 부모는 어디 있습니까?"
"야!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우린 하느님이 아냐."
"내 부모는 살았습니까?"
"다른 데로 가보라고. 우린 파묻힌 사람을 파내고 있는 중이야."
"여기 사람이 묻혀 있습니까?"
"그래. 지금 장난하고 있는 줄 아나?"
그는 동료에게로 가 버렸다.
"중지! 조용히. 위르만 두들겨 봐!"
스웨터를 입은 청년, 흰 칼라가 새까만 노인, 군복의 바지만 입은 사내 등이
일어났다. 그들은 먼지와 땀으로 얼굴이 번들거렸다. 한 사람이 망치를 들고 벽돌더미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 밖으로 삐죽 나온 파이프를 두드려보았다.
"조용히!"
감독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주위가 조용해졌다. 망치를 든 사내가 파이프에 귀를 바짝 댔다. 사람들의 숨소리와
칠식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멀리서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사내는
파이프를 다시 한번 두들겨 보고 나서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응답을 하고 있지만 두드리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어요. 공기가 얼마 남지
않았을 텐데."
감독이 명령을 내렸다.
"저쪽으로! 오른쪽으로 말이야. 파이프를 좀더 두들겨서 공기가 들어가게 해."
그레버는 그의 곁에 서 있었다.
"여긴 방공 지하실입니까?"
"물론이지. 방공 지하실이니까 밑에서 사람 소리가 나지."
"그럼, 이집 사람들입니까? 공습경계 감시원은 여긴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그 녀석은 정신이 돌았어. 밑에서 응답이 오는 것으로 충분해. 사람이 살고 있는지
우리가 알 바가 아냐."
그레버는 배낭을 내렸다.
"저도 발굴작업을 돕겠습니다. 부모님이."
"그런 건 상관없어. 위르만! 교대자가 생겼다. 도끼가 남은 게 있나?"
두 다리를 다친 남자가 최초로 땅 속에서 나왔다. 철주가 그를 누르고 있었지만
다행히도 살아 있었다. 그레버는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낯선 얼굴이었다.
작업반원이 쇠톱으로 철주를 끊고 들것을 갖고 왔다. 그 남자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허공만 응시했다. 그의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동공이 넓어졌다.
입구를 넓혔다. 빈대떡처럼 납작해진 시체 두 구가 발견되었다. 그레버는 허리를
굽히고 시체의 얼굴을 재빨리 들여다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그의 가족들은
금발이었다. 작업반원들은 시체를 끌어냈다.
구름 속에서 달이 천천히 기어 나오고 있었다.
"언제 공습이 있었습니까?" 그레버는 교대하면서 물었다.
"어젯밤이야."
그레버는 손을 펴 보았다. 누구의 피인지 분간도 할 수 없는 검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맨손으로 기왓장이나 유리조각을 긁어내고 있는 것도 알지
못했다. 작업을 하던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폭탄의 증기로부터 발산된 산이 눈을
자극했다. 모두들 소매로 닦아 냈지만 눈물은 자꾸만 고였다.
"이봐, 군인 아저씨!"
그레버는 뒤를 돌아보았다.
"저건, 당신 배낭인가?"
눈시울이 붉어진 사내가 물었다.
"어디 있습니까?"
"저기. 누가 달아난다." 그레버는 머뭇거렸다.
"저놈이 훔쳤다. 내가 교대해 줄 테니까 빨리 쫓아가 봐."
그레버는 손가락이 가르키는 방향을 바라보다가 쏜살같이 달려갔다. 한 사람이
벽돌더미 위를 기어오르고 있었다.
배낭을 훔친 사람은 목에 때가 낀 노인이었다. 그레버가 허리띠를 밟아 버리자
노인은 배낭을 놓고, 두 손을 흔들며 비명을 질렀다.
즉시 순찰차가 달려왔다. 두 명의 친위대가 차에서 내렸다.
"왜 그래?"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레버는 대답하면서 배낭을 맸다. 비명을 지르던 노인도
침묵을 지켰다.
"여기서 뭘하고 있었지?" 중년의 소위가 물었다.
"증명서."
"저기서 발굴작업을 돕고 있습니다. 부모님께서 살고 계시기 때문에."
"증명서!" 소위가 더욱 준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레버는 입술을 깨물며 두 사람을 응시했다. 도대체 친위대가 사병을 조사할 수
있는 것인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은 무장을 하고 있다. 그는 휴가증을
넘겨주었다. 그 소위는 회중전등을 비춰가며 그것을 읽었다. 그레버는 온몸의 근육이
후들후들 떨리고 있는 것을 느꼈다. 마침내는 불이 꺼지고 그의 증명서를 돌려주었다.
"자넨 하겐가 18번지에 거주했었군?"
"그렇습니다." 그레버는 미칠 것만 같았다.
"저기입니다. 난 지금 발굴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부모님을 찾고 있습니다."
"어디서?"
"저깁니다. 지금 파내고 있습니다. 안 보입니까?"
"저기는 18번지가 아냐." 소위가 말했다.
"뭐라고요?"
"18번지가 아니라 22번지야. 18번지는 저쪽이다." 그는 철근이 비죽 나온 폐허를
가리켰다.
"그게, 정말입니까?"
"물론이지. 이 근처는 다 비슷비슷 하지만 저기가 분명하다.
그레버는 연기도 나지 않는 잿더미를 천천히 바라보았다.
"이 부근은 지난 주에 폭격을 당했어. 아니 훨씬 전인지도 몰라."
"모두." 그레버는 말이 막혀버렸지만 겨우 입을 열었다.
"모두 살아났는지, 잘 모르시겠죠?"
"그건 모르긴 해도 항상 몇 사람씩은 구조됐었어. 아마 자네 부모도 집에
없었을 거야. 공습 경보 중에는 대개 방공 지하실로 대피하니까."
"어디서 부모님이 계신 데를 알아볼 수 있습니까?"
"오늘밤은 소용없어. 시청이 폭격을 당해서 서류고 뭐고 엉망진창이니까. 내일 아침
구청에 가서 물어 봐. 한데 이 잔 왜 그러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 밑에도 사람이 묻혔습니까?"
"어디를 가나 시체야. 전부 꺼내려면 수많은 사람들이 동원 되야해. 개새끼들은
시에 무차별 폭격을 가하고 있다."
소위는 돌아섰다.
"여긴 금지구역이 됐습니까?" 그레버는 재빨리 물었다.
"왜?"
"저 공습경계 감시원이 그러던데요?"
"그 녀석은 머리가 돌았어. 해임된 사람이야. 있어도 상관없어. 적십자를 찾아가면
잠자리를 마련해 줄 거야. 그전 정거장이 있던 자리야."
그레버는 입구를 찾고 있었다. 한 군데, 통로가 정리되고 있었지만, 지하실 입구는
아무데도 보이지 않았다. 벽돌더미 위에 올라 서 보니 그 한복판에 층계의 일부가
나와 있었다. 옆집의 뒷벽이 정원쪽으로 쓰러져서 벽돌더미 위에 겹쳐졌다.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가 재빠르게 지나갔다. 조금 전의 그 노인으로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그건 고양이였다. 무심히 돌멩이를 집어서 던졌다. 그때 고양이가 시체를 뜯어
먹고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급히 벽돌더미를 넘어서 반대쪽으로 가
보았다. 분명히 자신이 살았던 집이었다.
눈에 익은 목조건물이 서 있고, 정원의 일부도 모양을 유지하고 있었다. 창백한
달빛이 폐허를 그대로 비추고 있었다.
집 뒤는 모두 벽돌더미에 묻혀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그레버는 귀를 기울여
보았다. 철주를 두드리고 나서 가만히 반응을 기다렸다. 훌쩍훌쩍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 오는 듯 했다. 바람이겠지 그는 생각했다. 바람일 것이다 잠시 후, 소리가
다시 들려오고 있었다. 그는 층계 쪽으로 뛰어갔다. 눈앞으로 숨어 있던 고양이가 휙
달아났다. 그는 숨을 죽이고 소리가 나기를 기다렸다. 자신의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있는 게 보였다. 가족들은 이 흙더미 밑에 깔려 있는 것이다. 그들은 살았으며, 지금
암흑 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껍질이 벗겨진 손으로 필사적으로 바닥을 긁으면서 나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점점 확신이 되어 있었다.
그레버는 돌멩이와 벽돌을 집어내다가 작업현장으로 급히 되돌아갔다.
"이봐요! 여긴 18번지가 아닙니다! 내가 18번지를 파내는 걸 도와주십시오!"
"뭐라고?" 감독이 몸을 일으켰다.
"여긴 18번지가 아닙니다! 내 부모는 저기에."
"어디에?"
"저쪽이오! 빨리 갑시다."
감독은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거긴, 이미 오래 되었어."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군인 아저씨, 좀 비켜주어야겠어. 난 일을 해야 하니까."
그레버는 배낭을 내려놓았다.
"저기에 부모님이 묻혀 있습니다. 난, 여러 가지를 많이 갖고 있습니다! 먹을 것도,
돈도."
사내는 눈물이 흐르는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것이 여기 묻혀 있는 사람들을 생매장하는 이유가 될 수 있을까?"
"그렇진 않습니다 그러나."
"이 밑에는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사람들이 있어."
"그러나 나중에."
"난 당신을 도와 여길 파냈습니다."
"이봐."
감독은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이 화를 냈다.
"답답한 소리 그만해. 새삼스럽게 그곳을 파낸다 해도 무슨 소용이 있지? 모르겠나?
그 밑에 사람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지 않아. 자, 더 이상 귀찮게 굴지 마."
그는 곡괭이를 들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레버는 꼼짝 않고 서서 작업중인
사람들의 등을 노려봤다. 들것이 보이고 방금 도착한 검시인들도 있었다. 터진
하수관에서 새어 나온 물이 거리에 넘치고 있었다. 그는 온몸의 힘이 쑥 빠져나가는
것처럼 느꼈다. 도저히 일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그레버는 지친 몸으로 간신히
18번지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무너진 벽돌더미를 보다가 돌멩이를 하나 집어서 던졌다.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파편의 산더미를 치운다 해도 철주와 콘크리트가 얽혀있다. 아마도
부모님은 피난하셨을 거야. 어쩌면 다른 지방으로 피난했는지도 모른다. 남부 독일의
어느 마을에 살아 있거나 로덴부르크로 갈 수도 있다. 어머니! 저는 텅 비어 있습니다.
저는 심장이 멈췄습니다.
그는 층계에 쪼그리고 앉았다. 저건 무엇이었을까? 하늘로 올라가는 층계가
아니었을까? 천사들이 날아다니지는 않았을까? 그 천사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비행기로 변했을까? 지구는 어디로 갔는가? 지구는 무덤으로 변했는가? 나는 무덤을
팠다.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어째서 나는 이 밑에 묻혀 있는 것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들것이 운반되었다. 그리고 조용해졌다.
8
날이 밝자, 그레버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파괴된 집^5,55^마침내
모든 것이 되살아났다.
고양이가 반쯤 묻혀 있는 물통 옆에 앉아서 얼굴을 씻고 있었다. 파괴 같은 것은
고양이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구청에 가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에
묻었던 피가 굳어 있었다. 물통 속에는 깨끗한 물이 약간 남아 있었다. 아마도
소방수나 빗물일 것이다. 수면에 비친 얼굴이 자기를 마주보고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배낭에서 비누를 꺼내 세수를 했다. 물은 금방 더러워지고 손에는 다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는 두 손을 햇볕에 내놓고 말렸다. 바지는 찢어지고 상의는
흙먼지로 더럽혀져 있었다. 손수건에 물을 적셔서 상의를 문질렀다. 그렇게나마 하고
나니까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배낭 속에는 빵이 조금 남아 있고, 수통에는 아직 커피가 있었다. 그는 커피에다
빵을 적셔서 먹었다. 여전히 뱃속이 허전했다. 밤새껏 소리를 지른 것처럼 목구멍이
껄끄러웠다. 고양이가 슬금슬금 다가왔다. 빵을 떼어 주자 조심스럽게 받아 물고서
구석으로 가서 빵을 씹었다. 그레버는 배낭을 메고 거리로 나왔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도시의 어디를 보아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집들은 이빠진 자국처럼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 있었고, 카타리네 교회의 탑은 무너져
있었다. 시내는 산산이 부서져 있었다. 마치 거대한 원시의 곤충이 굴을 파헤쳐 놓은
것처럼. 아직도 소련에 있는 것 같았다.
정면만 남아 있는 집의 문이 열리고 어젯밤의 공습경계 감시원이 밖으로 나왔다.
이미 집이라고도 할 수 없는 곳에서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는 듯이 문에서 나오고
있는 모습을 보자 기분이 이상했다. 그는 그레버를 보자 눈짓을 했다. 그레버는
망설였다. 이 사내가 미쳤다는 말이 생각났지만 그에게로 가까이 갔다.
감시원은 잇몸까지 드러내 보이며 말했다.
"넌 여기서 뭘 하지? 약탈을 하고 있나? 여기선."
"여보시오! 바보 같은 소리는 그만두고 내 부모가 어디에 있는지 제발 가르쳐
주시오. 폴 그레버와 마리 그레버라고 하는데 저 곳에 살고 있었소."
감시원은 수염투성이의 얼굴을 앞으로 내밀었다.
"아아, 자네였군! 군인 아저씨! 그렇게 큰소리로 고함을 치지 말게. 가족을 잃은
것이 자네뿐인가? 자넨, 저기 있는 걸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그는 방금 나온 집을
가리켰다.
"집 말이오?"
"아니, 저기 문 위에 있어. 자넨 눈이 없나? 저것이 만화 신문이라고 생각하나?"
문이 바람에 흔들리고 그 위에 종이쪽지가 잔뜩 붙어 있었다. 그레버는 그쪽으로
급히 걸어갔다.
그것은 행방불명이 된 가족을 찾는 주소와 전언들이었다. 잉크나 숯으로 문짝에
짧게 써 놓은 것도 있었지만, 대개는 종이에 써서 붙여놓고 있었다. '하인리히와
게오르규는 헤르만 숙부 댁으로 오라. 이르마는 죽었음. 모.'라고 씌어 있는 게 보였다.
바로 그 밑에 구두 상자 뚜껑에다 '부탁합니다. 쥬린게르 가 4번지 부룬히르테
슈미트를 아시는 분은 연락해 주십시오.'라고 쓴 것도 있었다. '오토, 우리는 지금
하스테 국민학교에 수용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엽서에 적어 붙인 것도 있었다.
그레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떤가?" 감시원이 물었다.
"자네를 찾는 이름이 있나?"
"부모님은 내가 돌아온 걸 모르고 있습니다."
미치광이는 웃음을 억지로 참는 것처럼 얼굴을 찌푸렸다.
"찾는 사람들의 행방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도 없어. 그건 아무도 몰라! 언제나 나쁜
놈들이 살아남기 마련이야. 악당들은 항상 안전해. 자넨 그 진리도 아직 몰랐나?"
"알고 있다오."
"그럼, 자네 이름을 적어 놓게. 불행한 자들의 명단에 올리란 말야! 그리고 무작정
기다리는 거야! 우리들과 함께 자기가 까맣게 될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감시원의 표정이 변해가고 있었다.
그레버는 등을 돌려 무엇인가 메모를 남기지 않았는데 벽돌더미사이를 구석구석
살폈다. 부서진 사진틀에서 히틀러의 초상화 한 장이 나왔다. 뒷면에는 아무 것도
인쇄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위쪽을 찢어서 연필을 꺼내고 잠시 생각하다가 '폴
그레버와 마리 그레버의 소식을 알고 싶음. 특별 휴가중인 에른스트.' 라고 썼다.
"반역이다." 감시원이 그의 뒤에서 말했다.
"뭐라고?" 그레버는 뒤를 돌아보았다.
"반역이다! 자넨 총통의 초상화를 찢었어!"
"이건 찢어진 채로 흙더미 속에 뒹굴고 있었소." 그레버는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
"자, 그런 억지는 집어치우고 제발 나를 혼자 내버려두시오."
종이를 꽂아 놓을 만한 것이 없었다. 다른 종이쪽지에 꽂아 놓은 압침을 두 개 빼서
겨우 글씨가 보이게 해 놓았다. 마치 낯선 사람의 관에서 꽃다발을 훔치기라도 한 것
같았다. 하지만 딴 방법이 없었고 그 종이쪽지도 다시 붙여놓았다.
감시원은 그레버의 어깨 너머로 지켜보고 있었다.
"좋아!" 그는 노래라도 부르는 듯이 말했다.
"군인 아저씨 승리, 만세. 애도는 금물이다. 상복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전투정신을
약화시킨다. 국가를 위하여 희생하는 걸 자랑으로 생각하게. 자네들이 제대로 임무를
수행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거야!"
그러더니 갑자기 방향을 돌려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레버는 감시원은 곧
잊어버렸다. 히틀러를 다시 찢어내어 문에 붙여 놓은 종이쪽지에서 발견한 주소를
적었다. 그것은 루제일가의 거처였다. 그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찾아가서 부모님의
소식을 묻기로 했다.
초상화의 나머지 부분에는 아까 메모했던 내용을 그대로 적어서 18번지로 갔다.
그는 그것을 남의 눈에 쉽게 띄일 수 있도록 돌과 돌 사이에 끼워놓았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한 셈이다. 그런 다음에 잠시 동안 벽돌더미 앞에서 서성거렸다. 그것은
무덤일 수도, 아닐 수도 있었다.
시계를 보았다. 구청에 가기에 적당한 시간이 되어 있었다.
행방불명자과의 접수계는 새로운 송판을 억지로 짜 맞추어 놓고 있었다. 생목에다
칠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송진 냄새가 그대로 배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차례를
기다리며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접수계에는 외팔이 남자 직원과 여직원이 앉아
있었다.
"성함은?" 가장 우측에 앉은 여자가 물었다. 납작하고 둥근 얼굴에다가 머리에는
빨간 리본을 매고 있었다.
"그레버. 폴 그레버와 마리 그레버입니다. 세무 서기. 하겐 가 18번지입니다."
"뭐라고요?" 여직원은 한쪽 손을 귀에다가 댔다.
"그레버." 큰소리로 되풀이했다.
"폴 그레버와 마리 그레버. 세무 서기."
"그레버, 그레버." 그녀의 손가락이 카드 위를 미끄러져 내려가다가 딱 멈추었다.
"그레버 네, 여기 있습니다. 이름은 뭐라고 하셨지요?"
"폴과 마리입니다."
"뭐라고요?"
"폴과 마리!" 그레버는 신경질을 냈다. 여러 가지 일을 당한 끝에 자기의 불행을
큰소리로 외쳐야 하는 것이 견딜 수 없었다.
"아니군요. 에른스트 그레버로 되어 있어요."
"그건 내 이름입니다. 가족 중에 그런 이름은 없어요."
"그럼, 아닙니다. 다른 그레버는 없습니다." 여직원은 고개를 들어 미소했다.
"며칠 후에 다시 와 보세요. 아직 다 보고 받지 않았으니까. 다음!"
그레버는 그대로 서 있었다.
"여기 말고 어디서 알아보면 되오?"
여직원은 머리에 꽂은 빨간 리본을 어루만졌다.
"호적과로 가세요, 다음."
그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어서 가만히 서 있었다. 너무도 어이없게 끝나버린
것이다. 아무 것도 얻은 게 없었다. 외팔이 남지 직원이 그에게 말을 건넸다.
"명부에 이름이 없다면 다행입니다."
"왜 그렇죠?"
"이건, 사망자나 중상자의 명부입니다. 보고되지 않았다면 행방불명입니다."
"그럼, 그 명부는 어디 있지요?"
과원은 매일 여덟 시간씩 타인의 불행을 취급해야 하는 사람답게 인내를 갖고 그를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세요." 마침내 그는 말했다.
"행방불명자 명부를 만들어서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런 명부를 만들어도
행방불명된 사람을 찾아낼 순 없겠지요. 행방을 안다면 행방불명자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안 그래요?"
"아마도 그렇겠죠." 그레버는 묵묵히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는 호적과로 갔다. 그곳은 시청의 모퉁이에 있었는데 아직도 산과 화약 냄새가
나고 있었다. 오랫동안 기다린 끝에 겨우 안경을 쓴 신경질적인 여자에게로 갔다.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여자는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여기선 아무것도 알 수 없어요. 서류가 타버려서 엉망이 되었어요 다행히 타지
않은 건 소방서의 멍텅구리 아저씨들이 물을 뿌려 놓았어요."
"어째서 기록을 안전한 장소로 옮기지 않았지요?" 그레버 곁에서 있던 하사관이
물었다.
"안전한 장소? 안전한 곳이 어디죠? 알고 있어요? 따질 것이 있으면 시장에게 가서
따져요." 여자는 축축하게 젖은 서류더미를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가리켰다.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야! 도대체 어떻게 될 것인지? 이쯤되면 누구나가 자기가
좋아하는 이름을 사용할 수 있겠어."
"그것이야말로 대단한 일이군. 안 그래?" 하사관은 침을 탁 뱉더니 그레버의
옆구리를 찔렀다.
"이리 오게. 여긴, 모두들 머리가 돌았어!"
두 사람은 시청 앞에 서 있었다. 주위의 집들은 모두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 광장의
비스마르크의 동상은 장화만 남아 있었다. 회색 비둘기들이 붕괴된 교회의 탑 위를
원을 그리며 날아다녔다.
"누구를 찾고 있소?"
"양친입니다."
"난 아내를 찾고 있어. 놀래주려고 귀가 소식을 안 전했지. 자네는?"
"마찬가지입니다. 공연히 부모님을 흥분시키고 싶지 않았으니까. 전에 휴가 날짜가
두 번이나 연기 됐었지요. 이번에 갑자기 휴가가 특명이 나와 편지 쓸 틈도
없었습니다."
"참 딱하군!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할 작정인가?"
"막연하기만 합니다. 독일 한복판에서 행방불명이 되다니,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래." 하사관이 비웃음과 동정이 섞인 눈으로 그를 보았다.
"자넨 깜짝 놀랄 거야. 난 아내를 닷새 동안이나 찾아 해맸어. 아침부터 밤까지
꼬박 닷새야. 아내는 마치 마술에 걸린 것처럼 이 지구에서 사라져 버린거야!"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부인은 반드시 어딘가에."
"사라져버렸지." 하사관은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다른 수천의 사람이 다 마찬가지야. 임시 수용소나 작은 마을로 강제 이주한
사람들도 있단 말야. 더러는 시골로 피난가기도 했어."
"시골에!" 그레버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스쳐갔다.
'그렇지! 시골은 안전하다. 부모님은 틀림없이 시골에 계실 것이다.'
"시골에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하사관은 멸시하는 듯한 말투로 빠르게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어쩔 수가 없지! 이 도시의 주변에는 스물 몇 개의 마을이 있다는
걸 알고 있나? 마을 미처 다 더듬어 보지도 못하고 휴가는 끝나겠지. 알겠나?"
그레버도 알고 있었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오로지 양친이 생존해 있기를,
어디에 있든지.
"내 말을 잘 들어보게." 하사관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이건 신중하게 계획을
세워야 돼. 무턱대고 찾아 나섰다간 시간만 버리고 끝내는 미쳐버릴 거야. 자넨
어떻게 할 생각인가?"
"아직 모르겠습니다. 아는 사람들을 서너 명 찾아가 볼까 합니다."
"모두가 말하기를 꺼려하고 있어. 난 그걸 짐작할 수 있었어. 잠깐만, 우린 서로
도울 수도 있어! 자네가 찾으러 다닐 때마다 내 아내의 소식도 물어주게. 난 자네
부모의 행방도 알아볼 테니까. 찬성하나?"
"좋습니다."
"좋아. 난 베차고 아내 이름은 아르마야. 하나 적어 두게."
그레버는 그것을 적고 자기 부모의 이름을 종이쪽지에 적어 베차에거 넘겨주었다.
베차는 그것을 한번 보더니 주머니에 넣었다.
"그레버, 넌 지금 어디에 있지?"
"아직 숙소가 없습니다."
"너 같은 휴가병들을 위한 임시 숙박소가 병영 안에 있어. 사령부에 보고하면
지정된 카드를 받을 수 있어. 벌써 갔었나?"
"아뇨."
"그럼, 48 호로 정하도록 하게. 병실로 쓰던 곳인데 다른 데 보다 여러 가지로 좋아.
나도 거기 묵고 있어."
베차는 담배꽁초를 꺼내서 바라보고 있다가 도로 집어넣었다.
"오늘은 병원을 돌아봐야겠어. 오늘밤 어디서 만나기로 하지. 어쩌면 어느 한쪽
소식을 알지도 모르니까."
"어디로 정할까요?"
"여기가 가장 좋다. 9시에."
"좋습니다."
베차는 머리를 끄덕이고 나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잠깐만." 그는 괴로운 듯이 한숨을 쉬었다.
"봄이다. 그런데도 난 닷새 밤이나 열두 명의 예비대 녀석들과 한 이불 속에서
잤어. 마구간의 살찐 말처럼 엉덩이가 푸짐한 아내를 품지도 못하고 말야."
가르덴 가의 세 번째 집은 그래도 멀쩡한 편이었다. 다만 지붕만이 불에 탔을
뿐이었다. 여기에 시그라 일가가 살고 있었다. 시그라씨는 그레버의 아버지와 친구
사이였다.
그레버는 층계를 올라갔다. 방이나 복도에는 모래와 물을 담아 놓은 통이 있고
사용법을 적은 종이쪽지가 벽에 붙어 있었다. 그는 초인종을 눌러 보았다. 막상
초인종에서 소리가 나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잠시 후, 나이 많은 부인이 문을 반쯤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시그라씨의 부인되십니까? 저는 에른스트 그레버입니다."
"네."
그녀는 잠시 동안 주저하고 있다가 마침내 말했다.
"들어와요, 그레버씨."
그녀는 문을 활짝 열더니 그레버가 들어서자 얼른 안에서 빗장을 걸었다. 누가
있는지 안에다 대고 큰소리로 말했다.
"에른스트 그레버, 폴 그레버의 아들이에요."
마침내 시그라가 싱글벙글 웃으며 거실로 나왔다. 그레버는 그가 몹시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떤 자들이 찾아올지 알 수 있어야지. 설마 자네가 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어.
일선에서 오는가?"
"그렇습니다. 지금 부모님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짐을 내려놓으시죠." 시그라 부인이 말했다.
"커피를 갖고 오겠어요."
그레버는 배낭을 한쪽에 내려놓았다.
"저는 먼지투성이입니다. 여기는 아주 깨끗하군요."
괜찮네. 어서 의자에 앉게."
시그라 부인이 부엌으로 가 버리자 시그라는 그레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부모님 소식을 못 들으셨습니까? 구청에도 가봤지만 알 수 없었습니다."
시그라는 고개를 흔들었다. 부인이 다시 거실로 나왔다.
"우린 거의 밖에 나가지 않았어요." 그녀는 급히 말했다.
"오랫동안 집안에만 있었기 때문에 아무 것도 듣지 못하고 있어요."
"그럼, 두 분은 제 부모님을 만나지 못 하셨군요. 그렇지만 가장 최근에 만난 것은
언제입니까?"
"오래 전에 적어도 5,6개월은 되었지요. 그때는."
그녀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때는 어쨌다는 말씀입니까?" 그레버는 다급히 물었다.
"글쎄, 그렇지. 아주 건강하셨어요. 그후로는."
"여러 도시가 폭격 당했다는 소식은 전선에서도 듣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습니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않고 시선을 돌렸다.
"곧 커피를 가져올게요. 따뜻한 커피는 몸에 좋아요."
부인은 커피 세트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레버는 그것을 보았다. 그의 집에도
이런 것들이 있었다.
"허" 시그라가 혀를 찼다.
"혹시 부모님께서는 이동대와 함께 다른 곳으로 간 것이 아닐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여보, 에르윈이 가져온 쿠키가 아직 남아 있나? 있으면
그레버에게 좀 주지."
"에르윈은 어떻습니까?"
"에르윈?" 노인은 깜짝 놀라는 것 같았다.
"에르윈무사해요! 건강합니다!"
부인이 커피를 가져왔다. 조금밖에 남지 않은 과자 상자도 옆에 놓았다. 상표는
네델란드어로 적혀 있었다. 과자는 네델란드에서 갖고 온 것이었다.
부인은 그것을 그레버에게 권했다. 시그라는 아무 것에도 손을 대지 않고 테이블을
탕탕 두드리고 있었다.
"다른 것은 대접할 것이 없어요. 이 쿠키는 고급이지요."
"네, 아주 고급입니다. 고맙습니다. 저는 좀 전에 식사를 했습니다."
시그라 부부로부터는 양친의 소식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분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레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를 가면 알 수 있을까요?"
"우린 정말 아는 게 없어요."
"커피는 잘 마셨습니다." 그레버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숙소가 어딘가?" 시그라가 갑자기 물었다.
"찾아 보아야죠. 여의치 않으면 병영에서 잘 생각입니다."
"우리 집엔 방이 없어요." 시그라 부인은 급히 말하고 나서 남편의 안색을 살폈다.
"갈 곳이 없는 휴가병들에게는 군에서 침식을 주선해 줄 거^36^예요."
"그렇습니다." 그레버는 대답했다.
"자리를 잡을 때까지 배낭을 우리가 맡아 두는 게 좋지 않을까?" 시그라가 부인에게
말했다.
그레버는 부인이 살짝 눈짓하는 것을 보았다.
"괜찮습니다."
그는 문을 닫고 층계를 내려왔다. 시그라 부부는 무엇인가 두려워하고 있었다. 1933
년 이래 두려워해야 할 것은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루제 일가는 하르모니 클럽의 커다란 음악당에서 살고 있었다. 방에는 침대가 놓여
있고 벽에는 총통의 유화가 걸려 있었다. 침대 사이에는 트렁크, 병, 난로, 식료품,
반쪽만 남은 가구 등이 어지럽게 늘어 서 있었다.
루제 부인은 방 한복판에 놓인 침대에 멍청히 걸터앉아 있었다.
"당신의 부모?"
그녀는 한참 동안 생각하고 있었다.
"죽었어." 마침내 중얼거리는 것처럼 말했다.
"뭐라고요?"
"죽었어." 그녀는 되풀이했다.
운동복을 입은 사내아이가 달려와서 그레버의 무릎에 부딪쳤다.
그는 그 아이를 옆으로 밀었다.
"어떻게 그것을 아셨습니까?" 그레버는 몸이 달아올라 덜덜 떨렸다. "제 부모님을
보셨습니까? 어디서 보셨습니다?"
루제 부인은 지쳤다는 듯이 고개만 흔들어댔다.
"본 건 없어. 다만 불과 비명으로."
그녀는 여기서 말을 끊더니 두 팔을 축 늘어뜨린 채 꼼짝 않고 정면을 응시했다. 꼭
그림자 같았다.
"루제 부인." 그는 천천히 불렀다.
"잘 생각해 보십시요. 제 부모님을 언제 보셨습니까? 부모님께서 돌아가셨다는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부인은 초점이 없는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레나도 죽었어." 그녀는 중얼거렸다.
"그리고 오규스트도. 두 사람을 잘 알고 있겠지."
그레버는 두 아이의 이름을 희미하게나마 기억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언제나 버터
바른 빵을 먹고 있었다.
"루제 부인." 그는 그녀를 잡아서 흔들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제하고 있었다.
"제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것을 어떻게 아셨는지 가르쳐 주십시오! 제 부모님을
보셨습니까?"
그녀는 이미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레나."
"나는 그 아이를 못 봤어. 모두가 나를 가까이 가지 못하게 했어. 그 아인, 몸이
온전하지 못 했지."
그레버는 절망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침대를 밀어붙이고 한 남자가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루제였다. 그는 눈이 움푹 들어가고 몇 년 새에 몹시 늙어 있었다. 그는
슬며시 아내의 어깨에 손을 짚으면서그레버에게 눈짓을 했다.
"아내는 아직 아무 것도 모르고 있어, 에른스트."
여자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당신은 알고 있나요?"
"레나."
"만약에 알고 있다면"
그녀는 갑자기 큰 소리로 또렷하게 말했다.
"당신은 그런 짓을 한 인간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어요."
루제는 두렵다는 듯이 침대를 흘깃 쳐다봤다. 아무도 들은 사람이 없었다.
사내아이는 다른 아이들과 트렁크 사이에서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다.
"조금도 다름이 없어요." 여자는 다시 한 번 중얼거리고 나서 처음의 작은 덩어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루제는 그레버에게 눈짓을 했다. 그들은 한쪽 구석으로 갔다.
"제 부모님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부인께선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루제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내는 모르고 있네. 아이가 죽은 것을 보고 누구나가 다 죽었을 거라고 생각해.
저 사람은 약간 자네도 이미 짐작했겠지만."
그는 침을 삼켰다.
"아내는 얼마나 함부로 떠들어대고 있는지 그 때문에 난 밀고 당했어
여기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말야."
루제는 더러운 회색의 빛 속에서 아주 작게 보였다가 원래와 같은 모습으로 눈앞에
서 있었다.
"그럼, 살아 계시군요?"
"그건 나도 모르겠어. 요즘 모든 사정이 어찌나 악화됐는지 자넨 잘 모를 거야.
다른 사람들을 믿을 수 없게 되었어. 서로들 두려워하고 있다네. 자네 부모님은
무사히 계실 거야."
그레버의 숨결이 차츰 안정되었다.
"부모님과 우연히 마주친 적도 없습니까?"
"한 번 거리에서 뵌 적이 있지. 그러나 5주일 전일 거야. 그때는 아직 눈이 녹지
않았으니까. 좌우간 공습전이야."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건강하시던가요?"
루제는 얼른 대답을 못했다.
"아아, 그랬을 거야." 마침내 말하고 나서 꿀꺽 침을 삼켰다.
그레버는 부끄러워졌다. 전시에 5주일 전의 건강을 묻다니, 얼마나 경솔한가. 지금은
다만 '누가 살아남고, 누가 죽었는가'만 알면 된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는 정중하게 말했다.
루제는 피로한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에른스트, 상관없어. 지금은 모두 자기 입장만 생각하지. 세상에는 너무나도 불행이
많으니까."
그레버는 거리로 나왔다. 처음에 하르모니 클럽으로 들어섰을 때는 거리는 음산하고
모든 것이 죽은 듯이 가라앉았었다. 그러던 것이 갑자기 밝게 빛나고 있었다. 파괴된
가옥 대신에 살아있는 나무들이 눈에 들어왔다. 하늘이 푸르렀다. 부모님은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행방불명이 되었을 뿐이다. 구청에서 외팔이 직원이 그렇게 말했을 때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 이제는 희망으로 변했다. 그것은 잠시 동안이라도 부모님은 이미
돌아 가셨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9
그레버는 그 집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어두워서 번지를 확인할 수 없었다.
"어디로 가나?" 문 곁에 기대고 있던 남자가 물었다.
"여기가 마리가 22번지입니까?"
"그렇소. 누구를 만나러 왔소?
"위생 고문관 크루제입니다."
"크루제? 그 사람에게 무슨 용무요?"
그레버는 어둠 속에 서 있는 남자를 살펴보았다. 긴 장화를 신고 돌격대원의 제복을
입고 있었다.
"용건은 직접 크루제 선생께 말하겠습니다." 그레버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몹시 지쳤다. 뼈 마디마디에 피로가 파고들었다. 그는 하루종일 헤매고
다녔지만 양친의 소식은 어디서고 듣지 못했다. 이곳에는 친척이 거의 없었고, 알고
지내던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베차가 말한 대로였다. 도시 전체가 마술에
걸린 것 같았다. 모두가 게슈타포를 두려워하여 입을 다물고 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소개해서 그 사람을 찾아가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크루제 박사는 2층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레버는 박사를 잘 몰랐지만 어머니가 여러
번 박사에게 치료를 받았던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최근에 이곳에 왔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박사는 어머니의 새로운 거처를 알고 있을 수도 있다.
중년의 부인이 문을 열었다.
"크루제요?"
"그렇습니다."
여인은 묵묵히 그를 훑어 내렸다. 방문 가운데를 가로막고 서서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길을 내주지 않았다.
"지금 계십니까?" 그레버는 초조해져서 물었다.
"진찰을 받으러 오셨나요?" 마침내 여인이 물었다.
"아닙니다. 개인적인 일로 왔습니다."
"개인적인 일?"
"그렇습니다. 박사님께 알아 볼 일이 좀 있어서. 실례지만 사모님 되십니까?"
"어머나, 천만의 말씀이시지."
그레버는 눈을 치떠서 여자를 보았다. 오늘 그는 여기저기서 모든 형태의 경계와
증오와 회피 같은 것들에 시달렸지만 이런 대면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아시겠습니까? 난 다만 크루제 박사를 만나서 얘기할 게 있습니다. 그뿐입니다."
"크루제씨는 이곳에 없습니다." 그레버는 문 한쪽의 표찰을 가리켰다.
"그 표찰은 미처 떼지 못한 것이라오."
"그럼, 박사의 가족이 이곳에 살고 있는 게 아닙니까?"
여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레버는 정말 귀찮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때
여인의 뒤에서 문이 열렸다.
"누가 저를 찾으시죠?"
"나는 크루제 선생님과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게 퍽 어렵군요."
그레버는 재빨리 말했다.
"저는 엘리자베스 크루제입니다."
그레버는 얼굴이 지저분한 중년 부인을 쏘아봤다. 여인은 길을 비켜주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불빛이 너무 환해요!" 여인이 두 사람을 향해서 말했다.
"그렇게 전기를 많이 사용하는 것도 금지되고 있어요."
그레버는 그대로 멈칫했다. 스무 살 정도가 된 처녀가 마치 헤엄이라도 치는 것처럼
불빛 속에서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왔다. 그 순간 높은 이마, 검은 눈, 어깨까지
흘러내린 마호가니 색의 머리칼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어둠으로부터 나와
그의 앞에서 있었다.
"아버지께선 진료를 안 하신답니다."
"진찰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닙니다. 소식을 알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녀의 안색이 변했다. 급히 좀 전의 그 여자가 아직도 그 자리에 있는지
돌아보더니 빠르게 문을 열고 속삭였다.
"들어오세요."
그는 처녀의 뒤를 따라 불빛이 환한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그에게로 돌아서서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어머나! 나는 당신을 알고 있어요."
"내 이름은 에른스트 그레버입니다."
그레버는 그녀를 기억할 수가 있었다. 유난히 눈이 크고 술이 많은 머리칼을 지닌
말라깽이였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녀는 다른 지방의 친척에게로 가
있었던 것이다.
"엘리자베스로군! 설마 당신일 줄은."
"그로부터 7, 8 년이 되지요. 당신도 많이 변하셨군요!"
"당신도."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그대로 서 있었다.
"도대체 여기는 어떻게 된 거야? 당신은 마치 장군처럼 호위를 받고 있으니."
엘리자베스 크루제는 씁쓸하게 웃었다.
"장군이 아니라 죄수처럼이겠죠."
"뭐라고? 어째서 그럼, 당신 아버님은."
"잠깐만 기다려요."
그녀는 축음기가 놓여 있는 데로 가더니 그것을 돌렸다. 호엔후리드베르게르
행진곡이 울리기 시작했다.
"자 됐어요."
그레버는 납득할 수 없다는 시선으로 그녀를 보았다. 베차의 말은 사실인 모양이다.
이 도시에 있는 인간들은 모두가 비정상이다.
"저건 또 뭐요? 꺼 버려요! 행진곡이라면 지긋지긋하게 많이 들었어요. 그보다도
도대체 왜 당신이 죄수란 말입니까?"
"아까 그 부인이 엿듣고 있어요. 그래서 축음기를 틀었어요." 그녀는 그의 앞에
섰다. 숨결이 거칠어져 있었다.
"제 아버지가 어떻게 되셨지요? 아버지의 소식을 알고 계시나요?"
"나는 몰라요. 난 당신 아버님께 여쭈어 볼 게 있어서 왔소. 그런데 당신
아버님은?"
"제 아버지 소식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있군요."
"나는 박사님께 내 어머니의 주소를 여쭤보려고 했어요. 양친은 행방불명이오."
"그뿐인가요?"
"그렇소."
그녀의 얼굴에서 긴장감이 풀리고 있었다.
"그렇군요." 그녀는 지쳐 있었다.
"난 당신이 제 아버지의 소식을 전하러 온 줄 알았어요."
"도대체 박사님은 어디로 계신 겁니까?"
"강제수용소로 끌려가셨어요. 벌써 4개월째죠. 저는 혹시 당신이 아버지의
소식을."
"만일 알고 있다면 진작 말했지요."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공개할 수 없는 소식이라면 그럴 수도 없어요. 조심해야지."
조심. 하루종일 들었단 말이다. 호엔 후리드베르게르 행진곡이 견딜 수 없게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저런 건 그만 꺼도 되겠소?"
"그래요. 그리고 당신도 빨리 돌아가는 게 좋아요. 여기 사정은 방금 말한
대로니까요."
"난 스파이가 아니오." 그레버는 화가 나서 말했다.
"도대체 아까 그 여잔 뭐요? 그 여자가 박사님을 고발했소?"
엘리자베스는 축음기의 볼륨을 낮추긴 했지만 계속 돌아가게 했다. 갑자기 정적을
깨고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경보에요! 또 시작이야." 그녀가 속삭였다.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불을 꺼요! 항상 이렇다니까. 불이 너무 밝아요!"
그레버는 문을 벌컥 열었다.
"무엇이 어떻게 됐단 말이오?"
여자는 무엇인가 군소리를 내면서 입구로 나가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손잡이를 꽉
잡고 있는 그레버의 손을 떼고 문을 닫았다.
"정말 심술궂어. 어째서 저런 여자가 여기에 있소?"
"강제 입주자인 셈이죠. 경찰이 파견한 것이지요. 난 이 방에 거주하고 있는 것만도
다행으로 알아야 돼요."
밖이 시끌시끌했다. 여자들의 비명 소리와 아이들의 울음 소리.
경계경보의 신호가 더욱 커졌다. 엘리자베스는 레인코트를 입었다.
"방공호로 가야 해요."
"아직도 시간이 많아요. 그런데 당신은 왜 이런 곳에서 살고 있소? 저런 스파이와
함께."
"불를 꺼!" 여자가 또 소리를 질렀다. 엘리자베스는 급히 불을 끄고 창가를 향하여
미끄러지듯 걸어갔다.
"어째서냐고요? 저는 도망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녀는 창을 열었다. 갑자기 사이렌 소리가 방안으로 쇄도하고 요란하게 반항했다.
그녀는 밖으로부터 들어오고 있는 희미한 빛으로부터 도망치듯 제자리로 돌아왔다.
"저는 도망가는 것이 싫어요! 당신을 그것을 이해할 수 없나요?"
그레버는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 눈은 처음에 마주쳤을 때처럼 다시 까맣게
빛나고 있었으며 정열적인 힘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자기
자신을 방어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이 눈에 대해서 미친 듯이 호흡하고 있는 사이렌
소리와 창 밖의 혼란에 대해서.
"모르겠군. 나라면 미치고 말거요. 가망 없는 진지는 포기한다는 것이 병사들이
배우는 정칙이요."
"그렇다면 포기하세요!" 그녀는 몹시 흥분 돼 있었다.
"포기하고 절 그냥 내버려두세요."
그는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녀는 그것을 완강하게 뿌리쳤다.
"기다려!" 그는 고함을 질렀다.
"나도 함께 갈 테니까."
소음이 그들을 재촉했다. 소음은 방안에서도 입구에서도 층계에서도 메아리쳤다.
고막이나 피부의 표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찢고 들어와 피를 끓게 하고 온
신경을 자극시켰다.
"도대체 저 소리는 어디서 들려오고 있지?" 그레버는 부르짖었다.
"미칠 것만 같군."
문이 닫히자 소리가 멀어졌다.
"옆집에서 울리고 있어요. 우린 칼스푸라츠의 방공호로 가야해요. 이 집은 안전치
못해요."
수많은 사람들이 가방과 보따리를 들고 층계를 뛰어내려왔다. 회중 전등의 불이
켜지며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비췄다.
"혼자라면 따라 오시오!" 누군가 고함을 질렀다.
"혼자가 아닌데요."
그 사나이는 급히 달아나버렸다. 문이 열릴 때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뛰쳐나왔다. 마치 납 병정들이 우르르 장난감 상자에서 나오고 있는 것 같았다. 공습
경비원들이 사람들을 재촉하며 명령하고 있었다. 붉은 잠옷을 입은 채로 한 여자가
금발을 바람에 휘날리며 아마존의 용감한 용사처럼 달려갔다.
그들은 칼스푸라츠로 왔다. 방공호 입구에서는 잔뜩 흥분된 사람들이 서로 밀고
당기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공습 경비원들이 바쁘게 뛰어다니며 질서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엘리지베스는 걸음을 멈추었다.
"옆으로 들어가는 게 좋겠소." 그레버가 말했다.
"여기서 기다리기로 해요."
군중들은 어둠 속에 뭉쳐 있다가 차츰 지하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레버는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그녀는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는 것처럼 꼿꼿하게 서 있었다.
"용기가 대단하군요."
그녀는 그를 보았다.
"전 다만 지하실이 무서울 뿐이에요."
"빨리, 빨리!" 공습 경비원이 소리를 질렀다.
"층계로 내려가! 특별 호출을 받고 싶나?"
고 벽마다 출입구가 있었으며 전등이 켜져 있었다. 훌륭한 구조였다. 방석,
슈트케이스, 접는 의자 등을 가지고 온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 방공훈련은 이미
조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레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자나 아이들과
함께 방공호 속에 들어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창백한 불빛 아래서 사람들의 얼굴이 검게 죽어 있었다. 붉은 잠옷의 여인도 얼른
눈에 들어왔다. 그는 엘리자베스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도 회색으로 변해
굳어 있었으며 머리카락은 윤기를 잃고 있었다. 지하로 밀려와서 빛과 순결과 진실을
위해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
그의 맞은 편에 어린아이 두 명을 데리고 한 여인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움추려
있었다.
아이들은 여인의 무릎에 몸을 딱 붙이고 있었는데, 그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서
오직 눈동자만이 생생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눈은 소리가 울릴 때마다 입구를 향하고,
벽과 천장을 향했다가 다시 제자리에 돌아왔다. 그들의 눈동자는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사로잡힌 동물의 눈처럼 소리를 따라서 더듬거렸다. 그들의 눈은
어머니조차 알아 볼 수 없었으며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 것도 모르고 있으면서 오직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죽음을 가져올지도 모를
경보의 뒤를 쫓고 있었다.
답답한 공기가 서서히 변하고 있었다. 긴장이 풀렸다. 바깥의 소음은 여전했지만
어디선가 신선한 바람이 들어오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로 가득 차 있던 복도에
다시 새로운 사람들이 밀려 들어왔다.
"가 버렸다." 엘리자베스의 곁에 있던 노인이 말했다.
"다시 올지도 모르지." 다른 사람이 대답했다.
"이따금 그런 짓을 하지. 사람들이 지하에서 나오면 곧바로 다시 날아오거든."
두 아이가 몸을 움직이지 시작했다. 사내가 하품을 하고 갓난애가 울음을 터뜨렸다.
갑자기 여자가 북구신화의 시녀 바르키르처럼 소리를 질렀다.
"아놀드! 가스 잠그는 걸 잊고 왔어요! 저녁밥이 다 타버리겠어요. 당신은 왜
생각을 못 하셨죠?"
"걱정하지 마." 노인이 말했다.
"경계경보가 울리면 시에서 전부 잠그기로 돼 있어."
"걱정하지 말라구요? 시에서 가스를 다시 보내면 집안은 가스로 숨이 먹혀버려요!
그건 더 위험하지."
"경계경보 정도로는 가스를 끄지 않아. 공습경보에 한해서야." 구석에서 아는
척하는 목 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자베스는 핸드백에서 거울과 빗을 꺼내 머리를 빗었다. 지하의 불빛 아래서
빗은 마른 잉크로 만든 것같이 보였다.
"밖으로 나갔으면 좋겠어요. 숨이 막힐 것만 같아요!"
다시 반시간 동안을 기다리고 나서야 문이 열렸다. 사람들은 일제히 출구쪽으로
몰려들었다. 문 위에는 어디나 엄폐된 작은 전등이 켜져 있었다. 밖으로부터 달빛이
층계 위에 사각으로 비추고 있었다. 층계를 하나씩 오를 때마다 엘리자베스의 표정이
혼수상태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조금씩 살아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방공호 앞에 섰다. 엘리자베스는 지상의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시고
있었다. 마치 덫으로부터 벗어난 동물처럼 어깨와 머리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지하의 집단적인 무덤! 전 그곳이 딱 질색이에요. 거기 있으면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아요!" 그녀는 말하면서 민첩하게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차라리 폐허가 낫겠어요. 적어도 하늘은 보이니까."
그레버는 그녀를 보았다. 무수히 많은 층계는 그들이 방금 탈출한 지하의 세계로
통하고 있다. 그 앞에 서 있는 그녀에게서 무엇인가 강렬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오?"
"네. 또 갈 곳이 있나요? 전 이렇게 어둠침침한 거리를 방황하는 것에 질렸어요."
"이사할 순 없겠오? 물론 다른 사정이 있겠지만."
"어디로 가죠? 어디서 방을 빌려 주겠데요?"
"아니."
"저도 몰라요. 집 없는 사람이 수천 명이나 되요. 어디로 이사를 하죠?"
" 그래요. 이미 늦었소."
엘리자베스는 걸음을 멈추었다.
"갈 곳이 생겨도 전 안 가겠어요. 그건 아버님을 방관하는 거나 마찬가지죠."
"알았소."
그들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레버는 엘리자베스를 내버려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갑자기 피로가 밀려오고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부모님이 하겐가에서 자기를 찾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난 여기서 그만 실은 약속이 있는데 좀 늦었어요. 그럼 잘 가요,
엘리자베스."
"안녕히 가세요, 에른스트."
그는 거리에 서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빠르게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집까지 바래다 주어야 할 텐데 그는 어렸을 때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그는 방향을 돌려서 하겐가로 갔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달빛이 새로운 폐허와 정적을 지배하고
있었다. 하늘에 걸린 침묵의 부르짖음에 대답이라도 할 듯이.
베차는 시청의 층계 옆에서 기다리다가 그레버가 멀리서 오는 걸 보고 소리를
질렀다.
"어때, 좋은 소식 좀 들었나?"
"틀렸습니다. 당신은?"
"나 역시. 아무래도 병원엔 없는 것 같아. 이것만은 확실해. 병원이란 병원은 다
돌아다녔어. 지독하더군. 누가 뭐래도 여자와 아인 군인과는 달라! 우리 어디 가서
맥주나 한잔 할까?"
그들은 목로주점의 문을 열고 창가로 가 앉았다. 그 동안에 베차는 이 주점에 자주
드나들었던 것 같았다. 여주인은 주문도 기다리지 않고 맥주컵 둘을 가지고 왔다.
베차는 펑퍼짐한 엉덩이가 출렁이는 그녀는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나는 여기서 늘 외로이 앉아 있었다. 마누라도 역시 어딘가에 쓸쓸히 앉아 있을
거야. 이러니 사람이 미치지 않을 수 있나. 안 그래?"
"난 부모님이 어딘가에 앉아 계신 걸 확실히 알기만 하면 행복하겠습니다. 어디든지
상관없습니다."
"부모님하고는 얘기가 다르지. 실제로 부모는 그다지 필요한 존재가 아냐. 편안하게
있다는 소식이면 그것으로 됐지. 그러나 아낸 달라."
"그렇지, 우리들은 고급이야." 베차가 갑자기 떠들어댔다.
"우린 고기든 사탕이든 하나에서 열까지 준비된 휴가용 식량을 가지고 왔지만
그대로 썩고 있어."
그는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너는 나에 비한다면 행복한 편이야."
"자넨 배불리 먹고 사창궁이나 찾아가서 잠시나마 자기 불행을 잊을 수도 있지!"
"당신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베차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레버는 깜짝 놀라 그를 보았다. 고참병들이 이렇게 자기
아내에게 충실하리라고는 미처 생각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것들은 모두 바짝 말랐어. 나는 포동포동하게 살찐 여자가 아니면 기분이 안 나.
차라리 배낭을 끌어 앉고 자는 편이 낫지. 뚱뚱한 여자가 아니면 재미없어."
"어떻습니까. 그런 여자라면 여기 있습니다." 그레버는 여주인을 보고 손짓했다.
"잘못 보았어!" 베차는 펄쩍 뛰었다.
"저런 몸은 순 비계덩어리라서 파묻히기만 해. 좌우간 마누라와 같이 이중 쿠션
장치가 된 여잔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질 않아."
베차는 정면을 노려보면서 무엇인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레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로 가나?"
"모르겠습니다. 어디 갈 만한 곳이 있겠지요."
"사령부에 가 보았나?"
"네. 영내로 가는 허가증을 주었습니다."
"잘됐어. 반드시 48 호로 가도록 해."
"알겠습니다."
베차의 눈길이 여주인의 엉덩이를 집요하게 쫓고 있었다.
"난 좀더 여기 앉아 있겠어. 한 잔 더 마셔야지."
그레버는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밤바람이 찼다. 네거리로 나오니 레일이
폭탄구멍에 걸려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자기 자신의 구두소리가 저벅저벅
들려왔다. 누군가 또 한 사람이 자기와 함께 걷고 있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공허하고 싸늘했다.
병영은 변두리의 약간 높은 언덕 위에 있었다. 건물은 피해를 입지 않았고 안은
깨끗하기조차 했다. 연병장은 창백한 달빛을 받으면서 고요히 잠들고 있었다.
그레버는 정문으로 들어갔다. 휴가가 끝나버린 것 같은 씁쓸한 기분이었다.
지금까지의 생활은 그가 살았던 집과 마찬가지로 붕괴되었고 그는 또다시 전선으로
떠나야 하는 것이다. 위험하다는 사실만이 변함이 없이.
10
그로부터 나흘이 지났다. 연병장의 48 호실에서는 네 명의 사나이가 도박에 골몰해
있었다. 그들은 잠잘 때와 식사시간을 제외하고는 이틀 동안 계속 카드에 빠져
있었다. 그 중의 세 사람은 교대를 했고 한 사내만이 쉴 새 없이 도박에만 열중했다.
그는 룸메르라고 불렸는데 사흘 전, 휴가로 집에 돌아오는 날 아내와 딸이 매장
당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도 엉덩이의 흉터를 보고 마누라임을 겨우 확인했을
뿐이었다. 아내의 목은 벌써 달아나고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처자를 묻고 병영으로
오자마자 도박을 시작했다. 그는 누구와도 얘기를 나누는 적이 없었고 오로지
승부만을 겨루고 항상 이기기만을 했다.
그레버는 창가에 앉아 있었다. 그의 옆에 로이타 병장이 맥주병을 한 손에 들고서
붕대를 감은 다리를 창가에 올려놓고 있었다. 그가 이 방안에서는 가장 연장자였다.
48 호실은 특별휴가중인 불행한 병자들의 피난처일 뿐만 아니라 비전염성의 병실도
되고 있었다. 두 사람 뒤에는 휠드만 공병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3 년 동안
전쟁터에서 상실했던 수면을 3주일 동안에 몽땅 자 두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먹는
것만은 꼭 잊지 않았다.
"베차는 어디로 갔을까?" 그레버가 물었다.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지?"
"그 녀석은 하스테와 이브르크로 갔어. 낮에 자전차를 빌려 타고 말야. 이번에는
하루에 두 부락은 조사할 수 있겠지. 아직도 마을은 열 개가 넘고 여기저기
피난민들을 수용한 수용소가 있어. 그것도 몇 백 킬로밀터나 떨어진 곳에 있어.
도대체 어떻게 그 곳까지 갈 작정이지?"
"난 네 곳의 수용소에 두 사람 몫의 편지를 보냈어."
"회답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나?"
"확신은 없지만 그런 건 상관없어. 난 계속해서 편지를 쓸 거야."
"도대체 누구 앞으로 썼지?"
"수용소장과 만일을 대비해서 직접 베차의 아내와 내 부모 앞으로 보냈어."
그레버는 편지 다발을 꺼내 보였다.
"지금 우체국으로 갈 참이야."
로이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늘은 어디로 갔었지?"
"시립학교와 교회학교의 체육관에. 어떤 집회소의 호적과에도 다시 한 번 가 봤지만
소용없었어."
다른 사람과 교대하고 도박판에서 빠져 나온 사내가 두 사람 사이에 끼여들었다.
"특별휴가를 맡은 인간들이 왜 병사 안에서 어슬렁거리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그는 그레버에게 말을 건넸다.
"프러시아인은 가급적 멀리하라. 나라면 그것을 모토로 하겠어! 방을 하나 빌려서
사복을 입고 2주일 동안만이라도 인간다운 생활을 하겠어."
"사복만 입으면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는가?" 로이타가 물었다.
"당연하지. 그밖에 또 무엇이 있나?"
"알아듣겠나?" 로이타는 그레버에게 물었다.
"인생이란 간단하게 생각하면 간단한 거야. 자넨 사복을 가지고 왔나?"
"아니. 그런 건 하겐 가의 벽돌더미 밑에 묻혀버렸어."
"내가 빌려줄게."
그레버는 창 너머로 연병장을 바라보았다. 3개 분대 가량의 병력이 실탄의 장진법과
점검, 수류탄 던지기, 경례 등을 연습하고 있었다.
"휴가 전에는 집에 도착하는 즉시 군복 따위는 훨훨 벗어던지고 양복으로
갈아입으려고 했는데 지금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병사의 버러지."
카드에 열중해 있던 한 사내가 말하고 나서 소시지를 씹었다.
"보병 놈들은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지 그것조차 모르고 있어. 언제나 모자라는
인간들만이 휴가를 얻지."
그는 다시 카드에 손을 댔다. 그는 룸메르에게 4 마르크나 잃고 있었고, 오늘
아침에는 병원 군의관으로부터 병역가능이라는 선고를 받았다. 그 때문에 약이 올라
얼굴이 시뻘개져 있었다.
그레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로 가나?" 로이타가 물었다.
"우체국에 갔다가 어디든 또 가 봐야지."
로이타는 빈 병을 바닥에 놓았다.
"지금은 휴가중인 걸 알아야 해. 그리고 휴가가 곧 끝날 것이라는 것도."
"그것만은 잊지 않고 있지." 그레버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로이타는 조심스럽게 붕대를 감은 다리를 창가로부터 내려놓았다.
"내가 말하는 건 그런 뜻이 아냐. 부모님을 찾기 위해선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자기가 휴가중이라는 건 잊지 말라는 말이야. 휴가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으니까."
"알고 있어."
"좋아. 그것만 알고 있다면 됐어."
그레버는 문을 향해서 걸어갔다. 테이블에서는 여전히 승부가 한창이었는데
룸메르가 계속해서 이기고 있었다.
"몽땅 털려 버렸어!" 그레버를 '병사의 버러지'라고 불렀던 사내가 절망적으로
말했다.
"에른스트!"
그레버는 뒤를 돌아보았다. 키가 작달만한 돌격대장이 그의 뒤에 서 있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비로소 새빨간 볼따구니와 둥근 얼굴을 기억해냈다.
"빈딩그, 알폰스 빈딩그!"
"맞았어."
빈딩그의 표정이 밝아지면서 입이 벌어졌다.
"에른스트! 우린 천 년 동안이나 만나지 못했어! 도대체 어디 있다가 왔나!"
"소련에서."
"그럼 휴가를 맡았군. 그렇다면 축하해야지. 내가 있는 곳으로 가지. 그다지 멀지
않아. 고급 코냑이 있어! 전선에서 돌아온 옛 동창을 만나다니! 이쯤 되면 축배를
들지 않을 수 없지."
그레버는 그를 보았다. 빈딩그와 그는 2 년 동안 같은 반이었는데도 그에 대한 것도
거의 잊고 있었다. 알폰스가 돌격대에 입대했다는 소식은 소문으로 듣고 있었을
뿐이다. 지금 그 당사자는 번쩍번쩍 빛나는 장화를 신고 행복한 얼굴로 그레버 앞에
서 있는 것이다.
"가자, 에른스트."
그레버는 고개를 흔들었다.
"시간이 없어."
"에른스트! 친구끼리 한잔하는 거야. 우리는 죽마고우가 아닌가?"
죽마고우! 그레버는 대장의 배지를 단 제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빈딩그는
출세의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부모님을 찾는 일을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사내는 당의 보스였던 것이다.
"좋았어. 알폰스, 우리 한잔하러 가세."
"좋았어. 따라 오라구."
빈딩그는 교외의 작은 별장에 살고 있었다. 별장은 아무런 피해도 없이 수목들이
솟아있는 정원을 안고서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나뭇잎 사이로 새의 둥지가 보였으며
새들이 주위를 맴돌며 지저귀고 있었다.
빈딩그가 앞장서서 그레버를 집안으로 초대했다. 현관에는 암사슴의 뿔, 멧돼지의
목, 박제된 곰의 목 등이 걸려 있었다. 그레버는 깜짝 놀랐다.
"자넨 언제부터 훌륭한 수렵가가 되었나?"
빈딩그는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아무 것도 아냐. 난 단 한 번도 총을 만진 적이 없어. 장식품이지만 그럴듯하지?
게르만적이라고 할까!"
그는 융단을 깐 방으로 그레버를 안내했다. 벽에는 훌륭한 그림들이 걸려있었다.
"나의 소굴이 어떤가?" 그는 자랑스러운 듯이 물었다.
"있을 만하지. 안 그래?"
그레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당은 당원을 보살펴주고 있었다. 알폰스는 가난한
우유장수의 아들이었다.
"앉게, 에른스트. 어떤가, 나의 루벤스는?"
"뭐라고?"
"저 피아노 위에 걸려있는 그림 말이야!"
그것은 연못가에 서 있는 매우 육감적인 나체의 여인이었다. 금발의 여인은 유달리
엉덩이가 통통해 보였다. 이만하면 베차도 좋아하겠군.
"예쁜데."
"예뻐?" 빈딩그는 실망했다.
"이것은 참으로 훌륭해. 원수의 친애를 받고 있는 화상으로부터 구입한거야.
걸작이지! 난 이걸 소유한 자에게 다시 싼값으로 샀지. 참으로 근사하지?"
"물론 근사해. 단지 난 전문가가 아니라서. 난 이것을 보면 미쳐버릴 남자를 알고
있어."
"그래? 대수집가인가?"
"그런 건 아니지만 그는 루벤스의 전문가야."
빈딩그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건 반가운 얘기인데, 에른스트. 정말 기쁘다. 나도 내가 미술품의 수집가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몰랐지. 그런데 자넨 지금 무엇을 하고 있지? 얘기해 봐.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도와줄게. 난 다소 연줄이 있거든." 그는 교활하게 웃었다.
그레버는 약간 감동되었다. 휴가를 나온 이래 아무런 경계를 하지 않고
도와주겠다는 것은 처음이었다.
"자네에게 한 가지 도움을 청할 일이 있네. 나의 부모님께서 행방불명이 되셨어.
아마도 지방의 시골로 가셨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하면 찾을 수 있을까?"
빈딩그는 안락의자에 몸을 파묻고 있었다. 번쩍번쩍 윤기가 흐르는 장화는 난로의
그의 굴뚝처럼 그의 앞에 세워져 있었다.
"시내에 계시지 않다면 쉬운 일이 아니지. 그러나 한번 알아보기나 하지. 한 사흘은
걸릴거야. 어쩌면 더 걸릴지도 모르고."
"나도 각오하고 있어."
빈딩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진열장으로 가서 술병과 컵 두 개를 들고 왔다.
"에른스트, 우선 한잔하세. 자, 건배."
"건강하게, 알폰스."
빈당그는 술을 따랐다.
"그럼, 지금 어디서 묵고 있나? 친척집에 있나?"
"시내에는 친척집이 없어. 난 병영에서 침식을 하고 있지."
빈딩그는 잔을 내려놓았다.
"에른스트,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휴가를 즐기지도 못하고. 나한테 있어. 방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목욕탕도 있고 절대로 안전하지."
"자넨 여기서 혼자 살고 있나?"
"물론이지. 내가 결혼했다고 생각하나? 난 바보가 아냐. 나 정도의 지위에 있으면
여자들이 떼를 지어서 몰려들지! 여자들이 내 발 밑에 무릎을 꿇는 거야."
"정말이야?"
"무릎을 꿇고 말고. 어제도 하나 찾아 왔지! 상류계급의 귀부인이야. 그 귀부인은
융단 위에 무릎을 꿇고 있었어. 마치 분수처럼 눈물을 흘리며 무슨 말이라도
듣겠다더군. 그 대신 강제수용소에서 남편을 빼달라는 거야."
그레버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일이 가능한가?"
빈딩그는 웃었다.
"난 누구라도 수용소에 집어넣을 수 있어. 그렇지만 석방이란 건 그리 간단하지
않아. 물론 그 여자에게는 그렇게 말할 수 없지. 그건 그렇고, 이리로 오겠나?"
"당장은 어려워, 알폰스. 몇 군데 부모님의 소식을 알면 병영으로 연락해 달라고
부탁했어. 통지가 올 때까진 기다리고 있어야해."
"알았어. 어쨌든 자네가 잘 알아서 하겠지. 그렇지만 알폰스에게는 집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 주게. 식사도 최고급이야. 앞을 내다보고 잔뜩 준비해 놓았지."
"고맙네, 알폰스."
"고맙긴! 우린 동창이 아닌가. 서로 돕고 살아야지. 자네에게 숙제를 해달라고 많이
졸랐었지. 자네 부르마이스터를 기억하고 있나?"
"수학 선생이었던가?"
"ㅂ바로 그자야. 내가 상급반 2 학년 때 쫓겨난 것은 그자 때문이었어. 루시 에들러
사건으로 말야. 자네도 기억하고 있지?"
"물론." 그레버는 대답했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난 그자에게 그 사건을 덮어달라고 얼마나 사정했는지 몰라! 그렇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어. 그잔 좀처럼 내 말을 듣지 않았어. 도덕상의 의무니, 뭐니 하면서
말야. 그 때문에 우리 영감한테 실컷 두들겨 맞았지." 알폰스는 여기서 말을 끊었다.
"난 그자에게 톡톡히 보복을 했지. 강제수용소에 6개월 동안 집어넣었어. 그자가
거기서 풀려 나왔을 당시의 모습을 자네에게 보여주고 싶군. 그잔 나를 가르치는 것도
싫어했지만 난 녀석을 철저히 재교육시켰어. 재미있지?"
"그래."
그는 그레버가 일어나는 걸 보았다.
"벌써 가나?"
"이만 가야겠어. 난 불안한 마음을 안정시킬 수가 없어."
빈딩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심각하게 말했다.
"자네 사정은 잘 알겠네. 나도 정말 딱하게 생각해. 알겠지, 내 마음을?"
"알겠어, 알폰스." 그레버는 그가 또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급히
서둘렀다.
"이틀 후 다시 들러겠어."
"내일 오후에 오게. 다섯 시 반경에."
"좋아. 그 때까지 알 수 있을까?"
"글쎄. 좌우간 힘써 보지. 어쨌든 한잔할 수 있어. 그건 그렇고 병원에는 가
보았나?"
"가 봤어."
빈딩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물론 이런 말은 할 것이 아니지만 공동묘지는?"
"아니."
"가 보게. 거기에는 아직도 보고되지 않은 게 많이 있어."
"내일 가 보기로 하지."
"그게 좋아, 에른스트." 빈딩그는 무엇인가 안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일은 좀더 오래 있도록 하게. 되도록이면 동창끼리 덩어리가 되어야 해. 나
정도의 지위에 있으면 얼마나 쓸쓸한지 잘 모를 거야. 다들 이것저것 부탁만 하지."
"나도 그랬군."
"넌 달라. 내가 말하는 건 다른 사람에 관한 거야."
빈딩그는 아르마냑의 코르크 마개를 막더니 그 것을 그레버에게 내밀었다.
"에른스트, 가지고 가게. 고급 술이야. 반드시 도움이 될 거야. 잠깐만 기다려!"
그는 문을 열었다.
"크라이네르트, 종이 한 장! 아니, 봉투를!"
그레버는 술병을 들었다.
"그럴 필요없어, 알폰스."
빈딩그는 그의 말을 가로챘다.
"가지고 가게. 술은 얼마든지 있어." 그는 가정부가 가져온 봉투에 술병을 넣었다.
"조심하게, 에른스트. 절대로 용기를 잃지 말게! 그러면 내일 또."
그레버는 하겐가로 갔다. 그는 알폰스에게 다소 압도당하고 있었다. 돌격대장.
자기를 전면적으로 도와주고, 식사와 숙소를 제공하겠다고 말한 최초의 인간이
돌격대장이라니! 그는 술병을 외투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레버는 신문의 '사람찾기' 구실을 하고 있는 문 앞에 섰다. 그런데 그가 붙인
종이쪽지가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바람에 날아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다면
압정이라도 남아 있어야 했다. 압정까지 없어졌다면 사람이 떼어간 것이 분명했다.
그는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 혹시 무슨 흔적이라도 남기지 않았나
해서 샅샅이 훑어보았지만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는 다시 옛 집으로 달려가
보았다. 둘 사이에 끼워 놓은 종이쪽지는 그대로 있었으므로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사람이 손을 댄 흔적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는 마치 여우에게 홀린 것처럼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쪽에서
종이쪽지 같은 것이 날아오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없어졌던 쪽지였다. 그는 재빨리
펴 보았다. 여백에는 달필로 '그대 훔치지 마라.'고 씌어 있었다. 처음에는 무슨 뜻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침내 두 개의 압정이 없어진 걸 상기했다. 그는 옆에
붙은 '어머니로부터'의 전언이 네 개의 압정으로 꽂혀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머니란
분이 자기의 소유물을 도로 가지고 가면서 일종의 훈계를 남긴 것이다.
그는 납작한 돌을 두 개 집어다가 그 종이쪽지를 지면에 눌러 넣고 다시 집터로
갔다.
그는 폐허 앞에 서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녹색의 안락의자가 없어지고 대신에
신문이 몇 장 벽돌더미 사이에 끼여 있었다. 그는 신문을 끄집어냈다. 신문은 온갖
승리와 유명한 이름으로 메꾸어진 오래된 것으로서 군데군데 찢어지고 빛이 바래져
있었다. 그는 신문을 버리고 계속 더듬어갔다. 그러자 책이 한 권 뒹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의 옛 교과서였다.
그것은 교리문답서로서 숱한 문답이 수록되어 있었다. 그는 그것을 옆으로 밀고
다시 구석구석 뒤졌지만 더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는 잠시 집터에 앉아 있었다. 저녁 바람이 불어대면서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하느님은 전지 전능하시고 현명하시다. 하느님께서 행하시는 일은 모두가
옳고.'
그레버는 빈딩그가 준 술병을 꺼내 한 모금 마신 다음에 거리로 나왔다. 문답서는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거리는 어두어졌지만 어디서고 불을 켜지 않았다. 그레버는 칼스푸라츠를 걷고
있었다. 방공 지하실이 있는 근처에서 누군가와 충돌할 뻔했다. 반대 방향으로부터
급히 걸어오고 있던 청년 장교였다.
"조심하란 말야!" 젊은 장교는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
그레버는 그를 바라보았다.
"잘 알았어, 루드비히. 다음엔 꼭 조심하지."
소위는 눈을 크게 뜨더니 표정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에른스트, 너였군!"
루드비히 폴만이었다.
"웬일이야. 휴가인가?"
"그렇다. 넌?"
"끝나버렸어. 지금 원대로 돌아가는 중이야. 그래서 이렇게 급히 서둘렀지."
"재미있었나?"
"글쎄. 다음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가야겠어. 집에는 절대로 가지
않겠어!"
"어째서?"
"에른스트, 가족들은 재미없는 법이야. 내 휴가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어. 돌아와서
며칠이나 되지?"
"나흘."
"두고 보게. 차차 알게 될 테니까!"
폴만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려고 했다. 바람이 성냥불을 껐다. 그레버는 그에게
라이터를 켜 주었다. 순간 라이터의 불꽃이 폴만의 깡마른 얼굴을 비췄다.
"모두들 나를 언제까지나 어린애로 생각하고 있어." 그는 담배연기를 토해냈다.
"단 하룻밤이라도 집에 들어가지 않으면 책망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단 말야.
그저 집 안에서 시간을 함께 보내야만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어머니는 나를 아직
철부지 소년으로 알고 있어. 어머닌 휴가기간의 처음 절반을 눈물로 보내더니
나머지도 역시 내가 다시 떠나야 한다니까 울면서 보냈어. 그러니 어떻게 휴가를 즐길
수 있겠나?"
"네 아버지는? 아버지는 제1차 대전 때 군인이 아니셨던가?"
"그런 건 이미 잊고 있었어. 아버지에게 있어서 난 영웅이지. 아버진 내가 가슴에
달고 있는 깡통조각이 자랑스러워서 나와 함께 있는 걸 남에게 보여주려고 했어.
불쌍한 노인이지. 에른스트, 너도 부모님에게 잡히지 않도록 조심해."
"알았어. 조심하지."
"물론 그게 지나친 애정 때문이란 걸 알지만 그게 문제란 말야. 싫은 소리를 할
수도 없고 마치 죄인 같은 생각이 들거든."
폴만은 때마침 옆으로 지나가던 아가씨의 뒷모습을 힐끔 쳐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아가씨의 노란색 양말만 눈에 띄었다.
"덕분에 모처럼의 휴가를 영 잡쳐버렸네! 겨우 부모님을 설득시켜서 정류장까지는
따라오지 못하게 했지. 하지만 숨어 있다가 나타날지도 모르지." 그는 웃었다.
"처음부터 잘해야 돼. 적어도 밤엔 집을 빠져나가야 해. 무슨 구실이든지
만들어야지! 강습이나 야간 근무가 있다고 말야. 안 그러면 너도 나처럼 엉망으로
휴가를 보내게 될 거야."
"난 다를 거야."
폴만은 그레버의 손을 잡았다.
"제발 그래야지. 그럼, 넌 나보다 운이 좋은 셈이지. 학교에 가 보았나?"
"아니."
"그만두는 것이 좋아. 난 갔었지만 실망만 했어. 단 하나뿐인 훌륭한 교사가
파면당하고 있었어. 폴만 선생님 말야. 종교를 가르치던 기억하고 있겠지?"
"물론 만나 볼 생각이야."
"조심해. 블랙 리스트에 올라있어. 무턱대고 아무 데나 찾아가는 게 아냐. 에른스트,
우리의 짧지만 영광스러운 생을 위해서. 안 그래?"
"그렇지, 루드비히. 그저 공밥이나 얻어먹고 외국여행을 하고, 마지막엔 국(나라
국)장이다."
"언제 또 만날지 모르겠군." 폴만은 웃으면서 사라져갔다.
그레버는 목적도 없이 걷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시내는
무덤과 같은 암흑이 지배하고 있었다. 언제까지나 찾아 헤맬 수는 없고, 지루한 밤이
두려울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병영으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는
사람들을 찾아갈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그들이 당황하는 꼴은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자기가 찾아가면 모두가 곤혹스러워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타다 남은 가옥들의 지붕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던가?
후방 있는 섬? 안전. 은신처. 위안.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렇지만 희망의
섬은 죽음 속에 가라앉고 도처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머리 속에서도,
마음속에서도.
그는 영화관으로 들어갔다. 안은 그다지 어둡지 않았다. 불빛 없는 거리를 헤매는
것이나 술에 취하는 것보다 극장에라도 앉아 있는 편이 한결 좋을 것만 같았다.
11
공동묘지에는 햇빛이 비추고 있었다. 그레버는 포탄이 명중했다는 것을 알았다.
깨진 십자가와 묘비가 길바닥이나 주위의 무덤 위에 흩어져 있었다. 나무가 거꾸로
뒤집어져서 뿌리가 가지처럼 보이고 나뭇가지는 땅바닥을 기는 녹색의 뿌리가 돼
있었다. 마치 해조를 그대로 붙인 채 바다 속에서 끌어올린 이상한 식물과도 같았다.
무덤 안의 뼈들이 밖으로 뛰쳐나와 한데 쌓여 있었다.
교회 옆에 움막이 세워져 있었는데 감독 한 사람과 묘지기 두 명이 거기서 일하고
있었다. 감독은 그레버의 이야기를 듣자 손을 흔들면서 거절했다.
"틈이 없습니다. 점심 전에 열두 구의 시체를 묻어야 합니다. 당신의 부모가 여기
묻혀 있는지 우리가 어떻게 알겠소? 묘비도 없고 이름도 없는 무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시체를 대량 생산하고 있는 셈이죠."
"사망자 명단이 없습니까?"
"명단?" 감독은 묘지기들을 돌아보았다.
"이봐, 이분께서는 명단을 보시겠데. 들었나? 당신은 낮에 얼마나 많은 시체가
뒹굴고 있는지 알고 있소? 자그만치 이백입니다. 며칠 전에 공습이 있었을 때는
오백이었소. 그리고 지난번 공습에는 삼백이고. 불과 사흘 동안이오. 언제 또 공습이
있을지 모를 지경이오."
그레버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담배갑을 꺼내서 탁자 위에 놓았다.
감독과 묘지기들이 그것을 살짝 보았다. 그레버는 잠시 동안 기다리고 있다가
이번에는 잎담배를 세 개 나란히 놓았다. 그것은 그가 부친에게 드리기 위해서
소련에서 특별히 가지고 온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감독이 말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보겠습니다. 이름을 적어 주십시오. 한 사람이 묘지
사무소에 가서 물어보지요. 그 동안에 아직 기록되지 않은 시체들을 조사해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저쪽 교회 옆에 눕혀 놓았습니다."
그레버는 교회로 걸어갔다. 시신 중에는 이름이나 관, 꽃다발까지 있는 것도
있었지만 대개 흰 광목에 가려져 있을 뿐이었다. 그는 이름을 읽어보다가 이름이 없는
것은 광목을 일일이 들춰보았다. 그런 다음에 임시로 마련된 천막에 안치되어 있는
시체를 향해서 걸어갔다.
그중에는 두 눈을 감고 두 손을 가슴 위에 모은 것도 있었지만 대개의 시체들은
발견된 상태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팔은 몸에 바짝 붙여놓고 다리는 곧게 뻗도록 하여
되도록 자리를 조금씩 차지하도록 했다. 침묵의 행렬이 통과하고 있었다. 그들은
고개를 숙이고 창백한 얼굴로 죽은 가족들을 찾고 있었다.
그레버는 그 행렬 속에 가담했다. 그의 앞에서 가고 있던 여자가 갑자기 땅바닥에
주저앉아 흐느끼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묵묵히 그녀를 지나쳐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그들은 행렬이 끝났을 때에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레버는 되돌아왔다.
"교회에 들어가 보셨습니까?" 감독이 물었다.
"아니오."
"수족이 절단된 시체들이 거기 있습니다." 감독은 그레버를 바라보았다.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겠지만, 당신은 군인이 아닙니까?"
그레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시체들은 너무도 많이 보았었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았다. 묘지에 안치되어 있는 시체의 대부분이 여자와 아이들이라는
사실조차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그는 시체라면 넌덜머리 나게 보아왔다.
소련인, 네델란드인, 프랑스인 수족이 없는 시체들도 지금 여기서 목격한
시체와 마찬가지로 두 번 다시 바라볼 수 없는 끔찍한 것이었다. 소련의 추위에
그대로 동결된 시체, 부풀어오른 머리, 찢어진 입술, 게다가 오십 명이 한 덩어리가
되어 교수형을 받은 것들이 지금 본 것보다 훨씬 끔찍했던 것이다.
"묘지 사무소에는 기록이 없었소." 감독은 말했다.
"시에는 시체 안치소가 두 개나 있습니다. 가 보셨습니다?"
"네."
"그야말로 큰일입니다. 이렇게 되면 집단으로 매장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레버는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그런 것은 재난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우리는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많은 노동자들을 고용했지만 어림도 없습니다.
기술도 따라갈 수 없고 또한 종교상의 규정이 있지요."
그는 묵묵히 있다가 그레버에게 손을 흔들고 움막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충실하고
열성있는 주검의 관리인.
그레버는 몇 분 동안 기다리고 있어야만 했다. 장례의 행렬이 입구를 막고 있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목사는 무덤에 기도를 하고 친족들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빈딩그의 하얀 집은 아름다운 정원이 딸려 있었다. 잔디에는 새들의 연못이 있어서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 앞에 황 수선화와 튤립이 피고 있었으며 나무들
사이에는 대리석으로 된 소녀상이 빛나고 있었다.
가정부가 문을 열었다. 백발의 여인으로서 흰색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그레버씨죠?"
"그렇습니다.
"대장님은 지금 안 계십니다. 당의 중요한 회의에 참석하셨습니다. 당신에게 메모를
남기셨습니다."
그레버는 그녀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테이블 위에는 잘 포장된 병이 놓였고
그 옆에 편지가 있었다.
'지금 상태로는 자세히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너의 부모님이 사망했다거나
부상당했다는 보고는 없다. 아마도 지방으로 이동하셨을 거다. 내일 다시 들려주게.
보드카는 자네가 멀리 소련에서 돌아왔다는 것을 축하하는 뜻이니 오늘밤 실컷
마셔주기를 바란다.'
그는 술병과 편지를 주머니에 넣었다. 크라이네르트 부인이 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대장님은 안부도 전하셨습니다."
"내일 다시 들러겠다고 전해주십시오. 보드카도 고맙다구요."
크라이네르트 부인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대장께서는 몹시 기뻐하실 겁니다. 친절하신 분이니까."
그레버는 정원으로 나왔다. 친절하신 분. 알폰스는 자기가 강제 수용소에 집어넣은
수학강사 부르마이스터에게도 친절했단 말인가? 아마도 모든 인간은 어떤 사람한테는
친절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반대이겠지.
그는 술병과 편지를 만져보았다. 축하하기 위하여. 도대체 무엇을 축하한단 말인가?
부모님이 아직 살아계실 것이라는 희망? 그런데 누구와 함께 축하하라는 것인가?
병영의 48 호실 사람들과? 그는 보드카를 엘리자베스 크루제에게 가져가기로 했다.
그녀라면 자기와 똑같은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나에겐 아직 아르마냑이 남아있다.
여인이 문을 열었다.
"크루제양을 만나고 싶습니다." 그레버는 그대로 여자 옆을 지나치려고 했다.
여자는 문을 막고 서서 꼼짝하지 않았다.
"쿠루제는 지금 집에 없습니다. 잘 알고 계실 텐데요."
"잘 알고 있다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그녀가 당신에게 말하지 않던가요?"
"전혀. 몇 시에 돌아옵니까?"
"7시."
그레버는 엘리자베스가 외출했을 경우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보드카를 놓고 갈까
망설였지만 이 여자 스파이가 자기 마음대로 할 수도 있었다.
"좋습니다. 그 시간에 다시 오겠습니다."
밖으로 나와 시계를 보니 6시 조금 전이었다. 지루한 밤이 다시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휴가중이란 걸 잊지 마라.' 로이타는 말했었지. 물론 잊지는 않았지. 그러나
잊지 않았다는 것.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는 칼스푸라츠 광장의 벤치에 앉았다. 엄폐된 방공호가 커다란 두꺼비처럼
움츠리고 있었다.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엘리자베스와 다시 만나리라고는 자신도 모르고 있었다.
만약에 그녀가 집에 있었다면 아마도 보드카를 그녀에게 주고 그대로 발길을 돌렸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를 만나지 못한 지금은 7시가 될 때까지 지루하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엘리자베스가 직접 문을 열었다.
"당신이라고는." 그녀는 깜짝 놀라면서 말했다.
"난 또 당신의 성문을 지키고 있는 스파이 할멈인줄 알았지."
"주인은 지금 집에 없어요. 국가 사회주의 부인단의 회의에 참석했어요."
"그렇지. 그녀가 갈 수 있는 곳이지!"
그레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여자가 없으면 이 안의 분위기도 다르군."
"지금은 입구에 불이 켜져 있어서 그렇게 보이고 있어요. 전 그 여자가 나가자마자
곧 불을 켜놓는 걸요."
"그 할멈이 있을 때는?"
"잔소리가 심해요. 그것이 바로 애국심이라는 것이겠죠. 모두가 암흑 속에 있지요."
"맞았어. 우리를 그런 곳에 가둬놓고 싶은 거야." 그는 술병을 꺼냈다.
"보드카를 가지고 왔어. 어느 돌격대장의 술 창고로부터 가지고 온 거야. 옛 동창의
선물이지."
"당신에게 그런 동창이 있었어요?"
"그래. 당신이 원하지도 않는 사람과 한 집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말야."
그녀는 웃으면서 술병을 받았다.
"병따개가 어디 있는지 찾아보아야지."
그녀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엘리자베스는 검은 스웨터에 역시 검은 타이트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 없군요." 그녀는 서랍을 닫으면서 말했다.
그레버는 병을 들고 밑바닥을 탁 쳤다. 마개가 빠졌다.
"군대에서는 항상 이렇게 하지. 컵이 있을까?"
"내 방에 있어요."
그는 그녀의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또 외로이 하룻밤을 지내야 했는데
엘리자베스와 함께 있게 된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벽장에서 컵 두 개를 꺼냈다. 그레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늘은
방의 분위기가 다르게 보였다. 그녀는 그에게로 돌아섰다.
"우린 얼마 만에 다시 만난 거죠?"
"백 년은 되었을 거야. 난 어렸었고 전쟁 같은 것도 없었지."
"그런데 지금은?"
"어린 시절을 훌쩍 뛰어 넘어 나이만 먹었어. 신념도 상실했고 때때로 슬픈 생각이
들어."
"그게 정말이세요?"
그녀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 도대체 진실은 어디에 있지? 당신은 알고 있나?"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진실해야 할까요?"
"그렇진 않겠지. 그건 왜?"
"모르겠어요. 저마다 자기가 진실하다고 생각하는 걸 다른 사람들도 믿게 된다면
전쟁은 이미 끝났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레버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말이 재미있었던 것이다.
"관용이 결여된 셈이군."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버는 그녀의 컵에 보드카를 따랐다.
"한 잔 더 안 하겠어?"
엘리자베스는 망설이는 것 같았다.
"네, 들겠어요."
그는 보드카를 다시 따르고 병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오세요. 관용의 모범을 보여드리겠어요."
그녀는 앞장을 서서 입구를 지나 문을 열어 보였다.
"스파이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문도 안 잠그고 나갔어요. 그 여자의 방을 구경해
보세요. 그녀는 내가 집을 비우면 항상 내 방을 뒤지니까 신뢰를 배반한 건 아니죠."
방은 다른 가정과 다름이 없었지만 한쪽 벽에 꽃다발로 장식된 히틀러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그 밑의 테이블 위에는 검은 가죽 표지의 '나의 투쟁'이 놓여 있었다.
책의 양쪽에는 은촛대가 세워져 있었고 그 주위에 총통의 사진을 올려놓았다. 게다가
명예의 단검과 당원 배지. 그것으로 진열품들은 무게를 더 했다.
"그녀는 여기서 고발장을 쓰겠군."
"아니에요. 저기 있는 아버지의 책상에서 쓰고 있어요." 그레버는 그 책상을 보았다.
"그녀가 박사님을 고발했나?"
"그것은 잘 모르겠어요. 그 전부터 방 하나를 쓰고 있었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끌려가신 후, 하나 더 사용하게 되었어요."
그레버는 그녀를 돌아다보았다.
"방 하나를 더 쓰기 위해서 고발했는지도 모르겠군."
"모르겠어요.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럴 수도 얼마든지 있어요."
"그건 그래. 그녀도 광신도 중의 하나 같은데."
"에른스트." 엘리자베스가 물었다.
"광신은 개인적인 이익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세요?"
"아니지. 실제로는 일치하는 때가 많아. 이상하게도 인간은 항상 그런 사실을 잊고
있어. 아마도 사나운 독사는 자기 아이나 남편 같이 자신에게 귀중한 모든 걸
사랑하고 있었겠지. 그런데 도대체 그녀는 왜 당신 아버지를 무턱대고 고발하였을까?"
"아버진 선량한 분이지만 오랫동안 감시당하고 있었어요. 자기 집이라 해도
하루종일 당의 연설을 들으면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인간이 나타나는 법이에요."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셨지?"
엘리자베스는 어깨를 움츠렸다.
"아버진 독일의 승리를 믿지 않으셨어요."
"지금도 그것을 안 믿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어."
"당신도?"
"물론이지. 자, 저쪽으로 가지! 우물쭈물하다가 그 스파이한테 발각될지도 몰라!"
엘리자베스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발각될 염려는 없어요. 복도 문을 잠궈 놓았거든요."
그녀는 문으로 가서 빗장을 벗겼다.
"여긴 공동묘지 같군. 자, 저리로 가서 한잔 더 하지."
그는 보드카를 가득 따랐다.
"어째서 우리가 무척 나이가 들어버린 것 같은가를 알겠어. 너무 지저분한 것만
보았기 때문이야. 나이가 많으면 당연히 현명해야 할 사람들이 긁어모은 오물 말야."
"전 별로 나이가 든 것 같진 않아요."
그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기뻐할 일이로군."
"전 감금당한 것 같아요. 나이가 많다는 것보다 더욱 나쁜 일이죠."
그레버는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당신도 고발할 지 몰라. 이 아파트 전체를 독점할 생각인지도 모르지. 빨리
집을 옮기도록 해. 지금 세상이 어떻다는 것은 잘 알고 있겠지."
"네, 잘 알고 있어요." 엘리자베스는 말했다.
"내가 여길 떠나지 않는 한 아버진 언제라도 돌아올 것이라고 믿고 있어요. 내가
만일 이곳을 떠난다면 아버질 버리는 거나 마찬가지죠. 아시겠어요?"
"글쎄 어쩔 수가 없군."
"그래요."
그녀는 술 한 잔을 단숨에 마셨다.
"왔어!"
두 사람은 입구에서 들려오는 발자국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밖에서 무엇인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파이 부인이 한 바탕 욕설을
퍼붓고 나서 문을 쾅 닫았다.
"불을 그대로 켜놓고 있었어요." 엘리자베스는 살며시 속삭였다.
"우리 밖으로 나가요. 때때로 견딜 수가 없을 때가 있어요. 밖에 나가서 다른
얘기를 해요."
거리는 적막했다. 그들은 시내 쪽으로 들어섰다. 아파트 앞을 지나갈 때 창문마다
검은 색 커튼들이 죽음의 그림자처럼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보여 마치 시내 전체가 초상을 당한 것 같았다.
"모두 어디 있는 것일까? 오늘은 다른 날보다 조용하지 않는가 말야."
"이미 이틀째나 공습이 없었지요. 그래서 지금은 안심하고 집안에 틀어박혀 있는
거에요. 사람들이 나오는 건 공습이 있고 난 후의 일이죠."
"그것도 이미 습관화되었군."
"일선에서도 그렇죠?"
"그렇지."
그들은 파괴된 거리를 걷고 있었다. 실같은 구름이 하늘 한가운데로 흐르다가 빛을
가리고 있었다. 갑자기 벽돌더미 속에서 새까만 그림자가 나왔다가는 다시 들어갔다.
고요를 깨고 어디에선가 접시 부딪치는 소리도 들려왔다.
"고마운 일이로군요! 누군가가 먹고 있어요! 아니면 커피를 마시고 있거나. 어쨌든
살아 있어."
잠시 후, 그레버는 걸음을 멈추었다.
"엘리자베스, 집에 앉아 있는 것보다 더 쓸쓸한 생각이 드는데. 보드카를 가지고
올걸. 우리 술을 마시자고. 이 근처에 마실만한 데가 없을까?"
"난 술집에는 가고 싶지 않아요. 그곳은 창을 엄폐해서 마치 감금된 것 같아요."
"그럼 막사로 가지. 남아있는 보드카를 밖에서 마시면 돼."
"좋아요."
고요를 깨고 마차가 그들을 향해서 달려 왔다. 마부는 고삐를 끌어당겼다.
엘리자베스는 말이 자기 몸을 스치지 않고 지나갈 수 있게 벽돌더미 위로 올라갔다.
말이 그 앞을 아슬아슬하게 지나갔다.
그들은 병영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여기서 기다려, 엘리자베스. 술을 갖고 올게."
그레버는 연병장을 가로질러 48 호실로 갔다. 로이타는 노름꾼들 옆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베차는 어디 갔지?"
로이타는 책을 놓았다.
"또 허탕이래. 그래서 홧김에 자전거로 벽을 들이받았어. 울상이더군. 지금 술집에서
술을 마시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지. 왜 그래? 무척 지친 것 같은데?"
"또 나가야 해. 잠깐 찾을 것이 있어서."
그레버는 배낭을 더듬어보았다. 소련에서 보드카를 가지고 왔던 것이다. 빈딩그에게
받은 아르마냑도 있었다.
"아르마냑을 가지고 가게." 로이타가 말했다.
"보드카는 한 방울도 안 남았어."
"왜?"
"우리가 전부 마셔버렸어. 네가 진작에 내놨다면 좋았을 거야. 전우들 생각도
해야지. 하여튼 맛이 좋던데?"
그레버는 아르마냑을 꺼내 주머니에 넣었다.
"넌 어떻게 술을 구할 수 있었지?"
"샀어. 또 물어볼 것은?"
로이타는 싱글싱글 웃었다.
"없어. 자, 아르마냑을 가지고 어서 가게. 이 원시적인 카사노바. 수줍어하는 건
시간의 낭비야. 휴가는 짧고 전쟁은 길다."
그레버는 담배와 잔을 챙겼다. 그는 나오면서 룸메르가 여전히 열중해 있는 것을
보았다. 룸메르 앞에는 돈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병영은 이미 소등나팔을 불고 있었다. 그레버의 발자국소리가 복도에 메아리쳤다.
그는 넓은 광장을 가로질렀다.
"저런 아가씨를 잘도 나꿔챘군. 저건 장교용이야." 보초가 말했다.
그레버는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그녀는 담에 기대어 얌전히 서 있었다. 그는 보초의
어깨를 두드렸다.
"새로운 규칙이 정해졌어. 일선에서 4 년간 버틴 자에게는 훈장대신에 저것을 받을
수 있어. 모두 장군의 딸들이지. 너도 일선 근무를 지원하라고. 그리고 이 멍청아,
근무 중에 말을 하면 안된다는 수칙을 모르는가?"
그레버는 엘리자베스에게로 가까이 갔다.
"너야말로 멍청이지." 보초가 그의 등에 대고 투덜거렸다.
그들은 병영 뒤에 있는 언덕 위에서 벤치를 발견했다. 그곳에서 시내 전체가
내려다보았다. 시내 어디서고 불빛은 찾아볼 수 없고 다만 강물만이 달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레버는 아르마냑을 절반쯤 따라서 엘리자베스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잔을 돌려주었다.
"맘껏 마셔. 오늘밤은 술을 마시기에 적당하군. 우리의 따분한 인생을 위하여,
우리가 아직 살아있음을 위하여. 자, 쭉 들이키자고."
"좋아요. 모든 것을 위하여."
그는 컵에 넘칠 정도로 술을 부어서 들이켰다. 온몸이 확확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그는 너무도 허전했다. 아직까지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무런
고통이 없는 허전함이었다.
엘리스베스는 벤치에 앉아 다리를 모으고 두 팔로 무릎을 껴안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 위에서 밤나무의 싱싱한 잎이 달빛을 받아 파랗게 빛났다.
"새까맣군요." 그녀는 손끝으로 시내를 가리켰다.
"그런 것을 보는 게 아냐. 뒤를 봐, 경치가 달라."
언덕의 반대쪽에는 달빛이 뿌려지고 있는 도로, 마을 교회의 철탑, 숲이 이어지고
있었다.
"저 속에는 이 세계의 모든 평화가 깃들여 있을 거야. 안 그래?"
"네. 잠시 뒤를 돌아보고, 저쪽만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곧 그렇게 될 거야."
"당신은 믿고 있나요?"
"물론이지. 안 그렇다면 이렇게 살아 있지도 않을걸."
그는 그녀를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엘리자베스는 그에게 어깨를 기댔다.
"우리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이대로 있어요."
"좋아."
그들은 침묵 속에서 조용히 앉아 있었다. 한동안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엘리자베스의 몸이 꿈틀거렸다. 그레버는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런! 깜박 잠이 들었었어."
"나도."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레버는 수중의 바위에 해초가 흔들리듯이 자기가 편안히 잠들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소련에서 귀국한 후, 처음으로 평화를 느꼈다.
그들은 시내 한가운데로 걸음을 옮겼다. 거리는 다시 그들을 삼키고 싸늘한 취기가
몰려들면서 밀폐 당한 검은 창이 영구차의 행렬처럼 그들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부르르 온몸을 떨었다.
"옛날에는 집이나 거리에 빛이 가득 차 있었어요. 난 그걸 당연하게 생각했었지요.
이제야 비로소 없어진 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알겠어요."
그레버는 고개를 들었다. 하늘은 맑고 구름 한 점 없었다. 비행사들에게는 좋은
밤이었다.
"유럽은 거의 모두가 이런 형편이지. 다만 스위스만이 아직 밤에도 밝을 뿐이야.
비행사들이 중립국이란 걸 알게 일부러 밤에 환히 밝혀 놓고 있지. 비행편대를
거느리고 프랑스와 이탈리아 전선에 출동했던 친구가 내게 말해줬어. 스위스는 산의
섬이자, 빛과 평화의 섬이라고. 한쪽은 이미 다른 한쪽을 갖고 있지. 그 섬의 주위에는
암흑으로 덮여 있어. 독일이나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전쟁을 하고 있는
나라들이 빛 대신 암흑을."
"빛은 우리를 인간답게 했어요." 엘리자베스는 흥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을 거부하고 다시 혈거인이 되었어요."
빛은 과연 우리를 인간답게 만들었을까? 그레버는 의심스러웠다. 너무 엄청나게
들리지만 엘리자베스의 말이 옳을는지도 모른다. 동물은 빛을 지니고 있지 않다. 빛도
없지만 불도 없다. 그리고 폭탄도 없다.
그들은 마리가에 서 있었다. 그레버는 엘리자베스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를 보지 마세요. 술을 왜 마셨는지 난 술을 마시지 못해요. 긴장감이
풀리면서 어쩐지 자꾸만 슬픈 생각이 들어요."
"나도 마찬가지니까. 이것도 그 중의 하나야."
"어떤 것?"
"아까 우리들이 얘기한 것 말야. 뒤돌아 서서 반대 방향을 보지 말아야 해. 내일
밤은 거리를 방황하는 건 그만두지. 어딘가 밝은 곳으로 가기로 하지. 내가 찾아볼게."
"그러면 나보다 더 명랑한 여자를 구해야 돼요."
"난 그런 것은 필요 없어."
"그럼 무엇이 필요하죠?"
"난 명랑한 상대는 필요 없어. 동정하는 건 정말 싫어. 그런 것들은 낮에 얼마든지
만났어."
엘리자베스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그래요. 잘 알고 있어요."
"우린 그들과 달라. 형식적인 건 싫어. 내일 저녁, 시내에서 가장 밝은 곳으로 가서
식사를 하고 와인을 마시자. 단 하룻밤만이라도 유쾌하게 지내는 거야."
그녀는 그를 보았다.
"그것도 그 중의 하나인가요?"
"그렇지, 그 중의 하나이지. 당신의 옷 중에서 가장 멋있는 것을 입고 나와."
"좋아요. 8시에 오세요."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이 입 언저리에 닿아 있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부드러운 바람 같았다. 그가 미처 깨닫지도 못하고 있는 사이
엘리자베스는 집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12
"좋아! 인정할 수 있어." 베차가 말했다.
"난 술집 여편네와 잤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지. 난 뭔가 해야만 했어! 아니면,
휴가고 뭐고 무슨 의미가 있겠어? 난 순진한 송아지새끼처럼 그대로 일선으로 돌아갈
수 없었단 말야."
그는 펠드만의 침대에 걸터앉아 커피가 가득 든 반합 뚜껑을 들고서 두 발을 물통
속에 담그고 있었다. 자전거를 부수었기 때문에 발이 부르텄던 것이다.
"그런데 자네는?" 그레버에게 물었다.
"오늘은 무엇을 했어? 아침에 나갔었나?"
"아니."
"나가지도 않았단 말인가?"
"이 녀석은 잠만 잤어." 펠드만이 말했다.
"아침부터 아무리 떠들어대도 일어나지 않더군."
베차는 물통에서 다리를 빼고 발바닥을 들여다보았다. 발바닥이 잔뜩 부어오르고
있었다.
"이것 보라구! 난 기운깨나 쓰지만 발은 어린애처럼 부드러워. 태어났을 때부터
그랬지. 이런 발로 새 출발을 해야 되는데 말야."
"왜 그러지? 좀더 기분을 낼 수 있을 텐데." 펠드만이 빈정거렸다.
"여주인을 정복하지 않았는가 말야."
"아아, 그 여편네! 집어치워! 그런 건 아무 상관도 없어. 더구나 난 환멸을 느꼈어."
"일선에서 돌아온 자들은 처음엔 실망을 하지. 그건 누구나가 그래."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냐. 일이 제대로 되기는 했어. 그렇지만 썩 좋은 여자라고 할
순 없었어."
"단 한 번에 생각대로 할 수 있는가. 여잔 우선 분위기를 맞혀줘야 한다구."
"넌 아직 내 말은 못 알아들었어. 그녀는 정말 굉장했어. 그러나 두 사람의
영혼까지 합쳐지진 않았단 말야. 우린 한 이불 속에서 열심히 일을 진행하고 있었어.
글쎄, 전투가 막 벌어지고 있는 판에 난 너무 열중한 나머지 아르마라고 부른 거야.
그녀의 이름은 루이제야. 아르마는 내 마누라고."
"저런!"
"그건 실책이야."
"꼴 좋다." 노름 패거리들 중에서 한 사람이 말했다.
"그것을 보고 부정에 대한 천벌이라고 하는 거야. 그 여자가 널 실컷 두들겼으면
좋았을걸!"
"부정이라고 누가 말했지?" 베차는 두 다리를 내려놓았다.
"네가 말했지 않아! 아니면 바보냐?"
응수한 사내는 머리가 계란처럼 생기고 키가 작은 남자였다. 그는 독살스럽게
베차를 노려보았다.
베차는 잔뜩 약이 올랐다.
"저런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는 주위를 돌아보면서 물었다.
"부정이란 말을 입밖에 낸 것이 너 하나 뿐이야! 미련한 놈! 만약에 마누라가 곁에
있는데도 딴 여자가 잔다면 부정하다고 할 수 있겠지.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마누라는
여기 없어. 요는 그것이 문제야! 그것이 어째서 부정인가? 난 내 마누라만 만났더라면
그 여편네쯤 우습게 알았을 거야!"
"성인군자 같은 말씀에 일일이 신경 쓰지마." 펠드만이 베차를 위로했다.
"저 놈은 질투하는 거야. 한데 네가 루이제라고 부르니까 그 여잔 어쨌지?"
"루이제? 루이제가 여냐. 루이젠 그녀의 이름이야. 난 아르마라고 불렀어."
"그렇지, 아르마였지. 그래 어떻게 되었지?"
"여잔 도무지 알 수 없단 말야. 웃거나 수다를 떠는 대신 훌쩍훌쩍 울고 있었어.
악어 같은 눈물을 흘리는 꼴이라니. 생각해 보게. 몸집이 큰 여자는 우는 게 아냐."
로이타는 기침을 하면서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베차를 바라보았다.
"왜?"
"어울리지 않아. 몸집이 큰 여잔 울지 말고."
"네 마누란 네가 루이제라고 부른다면 웃을 거라고 생각하나?" 계란 머리가
독살스럽게 물었다.
"만약에 나의 아르마가 거기 있었다면." 베차는 태연하게 권위까지 내세우며
말했다.
"난 우선 내 앞에 있는 맥주를 마시지. 그런 다음에 다시 남은 술들을 모조리
마셔버리는 거야. 마지막에 내가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녀가 어찌나 사랑해주는지
구두 한 짝밖에 남지 않았어. 나의 아르마였다면 그 정도는 된다, 요 계란 대가리야!"
계란 머리는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의 말에 압도당한 것 같았다.
"그래서 넌 그런 아르마를 배반했군." 마침내 쉰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난 내 마누라를 배반하지 않았어. 내 옆에만 있었다면 그런 여자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단 말야. 이건 배반이라고 할 수 없어. 정당방위라구, 이 새끼야!"
로이타는 그레버를 보았다.
"넨 어젯밤 그 아르마냑으로 어떤 공로를 세웠지?"
"아무 일도 없었어."
"아무 일도?" 펠드만이 물었다.
"그런데도 송장처럼 축 늘어져 잠만 잤나?"
"그럼 왜 그렇게 피로를 느꼈는지 악마가 아니라면 도저히 모를 거야. 지금
당장이라도 다시 잘 수 있지. 마치 일주일 내내 한잠도 못 잔 것 같아."
"그럼 또 잠이나 자게."
"현명한 충고지." 로이타가 말했다.
"뭐니뭐니해도 수면의 대가이신 펠드만 선생의 충고니까."
"펠드만은 당나귀야." 계란 머리가 얼른 끼여들었다.
"그는 오로지 잠으로 휴가를 보냈어. 휴가를 오기나 했는지 모르겠군. 차라리
일선에서 잠이나 자면서 휴가를 가 꿈이나 꾸는 게 낫지."
"그건 네가 멋대로 생각하고 있는 거야. 사실은 그 반대이지."
펠드만이 반격을 가했다.
"난 잠을 자고 있을 때는 일선에서 싸우는 꿈을 꾸고 있어."
"그런데 넌 실제로 어디 있지?" 로이타가 물었다.
"뭐라고? 그야 물론 뻔하지."
"너 그게 확실하니?"
계란 머리가 말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게 바로 그거야. 계속 잠만 잘 바에야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란
말야. 멍청한 놈, 그것도 모르니?"
"그래도 잠을 깼을 때는 달라." 펠트만이 갑자기 화를 내더니 그대로 침대에 벌렁
누웠다.
로이타는 그레버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넌? 도대체 너의 영혼을 위해서 오늘 무엇을 할 생각인가?"
"어디로 가면 훌륭한 식사를 할 수 있는지 알고 있나?"
"혼자서 가나?"
"아니."
"그러면 게르마니아에 가게. 거기밖에 없네. 다만, 곤란한 건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군. 그런 전투복 차림으로는 어림도 없어. 장교용 호텔인데 레스토랑이 있어.
아마도 웨이터는 너의 훌륭한 모습에 경의를 표하겠지."
그레버는 자기의 초라한 군복을 내려다보았다.
"상의를 빌려줄 수 없겠나?"
"좋아. 그런데 넌 나보다 훨씬 가벼워. 그런 꼴로는 도저히 입구를 통과시켜 주지
않을 거야. 내가 어디 네 몸에 맞는 하사 정복을 빌려 보지. 바지도 함께. 그 위에
외투를 걸치면 아무도 눈치챌 수 없지. 한데 넌 어째서 아직도 졸때기지? 이미 소위가
되고도 남았을 텐데."
"하사관으로 진급했었는데 소위를 때려서 강등 당했어. 그때부터 진급이 중지되어
만년 졸개 신세지."
"좋아. 그럼 넌 하사관의 복장을 할 만한 도덕상의 권리가 있어. 만약에 부인과
함께 게르마니아에 가면 와인은 G.H.폰 뭄 제조의 1937 년산 요하니베르게르
콕스베르그를 주문하게. 이건 죽은 사람도 무덤에서 나오게 하는 최고급이지."
안개가 끼고 있었다. 그레버는 다리 위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강물은 쓰레기를
가득 띄우고 천천히 흘러갔다. 안개 저편으로 학교가 보였다. 그는 그것을 바라보다가
다리를 건너 교정으로 향하는 오솔길로 들어섰다. 습기가 차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커다란 철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는 교문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텅 빈
교정을 가로질러 강가로 갔다. 강을 마주보며 축축한 벤치가 놓여 있었다. 그레버는
항상 거기에 앉았던 사실을 떠올렸다. 그 무렵에 그가 꿈꾸고 있었던 것들은 하나도
실현되지 않았다. 그는 학교에서 곧바로 전쟁터로 향한 것이었다.
그레버는 묵묵히 강물을 바라보았다. 부서진 침대조각이 강물에 떠내려와 기슭에
박혀 있었다. 그 옆에 물에 젖은 베개가 해면처럼 뒹굴고 있었다. 그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는 되돌아 와서 교사 앞에 서서 잠깐 망설이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레버는
현관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침침한 층계와 강당, 회의실로 통하는 까만 문이
보였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감명도 느낄 수 없었다. 그는 폴만을 생각했다. '가 봤자
해로울 뿐'이라고 했던 그 녀석의 말이 맞았어. 그는 어쩐지 허전해지고 있었다.
교문을 나온 이후에 스스로 터득한 것들을 교실에서 배운 것과 완전히 모순되고
있었다. 교육은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입구 양쪽에 전사자를 위한 기념 사진이 있었다.
오른쪽의 사진은 1차 대전 당시의 전사자를 기념하고 있는 것이었고, 왼쪽의 사진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이번 전쟁에서 쓰러진 자들을 위해서 마련된
것이었다.
교정에서 수위를 만났다.
"무엇을 찾고 있소?" 노인이 물었다.
"아닙니다. 아무 것도 찾지 않습니다."
그레버는 그대로 걸어가다가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되돌아왔다.
"폴만 선생님의 주소를 알 수 없습니까? 여기서 교편을 잡던 분입니다.
"그분은 이미 그만두셨오."
"알고 왔습니다. 그런데 어디 살고 계실까요?"
수위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습니다. 어디에 계십니까?"
"전에는 얀프라츠 6번지에서 살았는데 아직도 거기 계신지 잘 모르겠소. 당신은 이
학교 학생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심메르씨는 아직도 근무하십니까? 교장 말입니다."
"물론입니다." 수위는 깜짝 놀란 것 같았다.
"물론 계시지요. 또 여기 계실 수 없는 이유도 없습니다."
그레버는 계속 걸었지만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짙은 안개 때문에
폐허가 된 거리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폐허는 어디고 다 비슷비슷해서 거리를 분간할
수 없었다. 그는 조금씩 안개에 잠기고 있었다. 마치 자기 자신이 자진해서 말려들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마침내 하겐가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는 옛 집터로 가서 살펴보았지만
아무런 전갈도 없었다. 돌아서려는 순간 기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리에는 인적이 끊겨 있었다. 다시 소리가 들려왔다.
그레버는 귀를 기울였다. 그것은 사방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공습
경비원이다.' 그는 생각했다. 그 미치광이다. 틀림없는 것이다. 그는 정면만이 서 있는
건물로 가서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사람이 안락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는 게
보였다. 그 의자는 그의 옛 집터에 있던 의자였다.
"왜 그래?" 공습 경비원은 깜짝 놀라 큰소리로 물었다.
소리는 여전히 들려오고 있었다.
"저건 무슨 소리입니까? 어디서 들리고 있습니까?"
경비원은 축축한 얼굴로 그레버에게 가까이 댔다.
"군인 아저씨로군! 조국의 수호자! 저것이 뭐냐고? 자네에겐 잘 들리지 않나? 저건
생매장당한 영혼들을 위한 진혼곡이야. 구원을 청하는 부르짖음이야. 빨리 파내 줘!
빨리 파내 줘!"
"바보 같은 소리!"
그레버는 서서히 밀려가는 안개 속으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검은 전선 같은 것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이 흔들릴 때마다 야릇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는 폐허의 높은 곳에 걸려 있던 뚜껑이 없는 피아노를 생각해 냈다.
전깃줄이 드러난 건반을 건드리고 있는 것이다.
"피아노다!"
"피아노! 피아노!" 경비원은 그레버의 흉내를 냈다.
"넌 저게 무언지 알고나 있나? 이 비양심적인 살인자! 장례식을 알리는 종소리인데
바람이 치고 있는 거야. 바로 하늘이 종을 치게 하고 자비를 베푸는 거야. 이
지상에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자비를. 너 같은 야만족들이 죽음이란 무엇인지 알기나
하나?"
경비원은 그레버에게 고개를 숙였다.
"도처에 시체가 있어." 경비원은 소근거렸다.
"어디를 가나 시체가 있네! 시체는 가슴을 딱 벌린 채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나
네놈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처치할 거야."
그레버는 거리로 나왔다.
"모조리 처치하는 거다." 경비원은 그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사자들을 위하여 하나하나 심판을 행하는 거다."
그레버는 더 이상 그를 볼 수가 없었다. 다만 소용돌이 치고 있는 안개 속에서 그의
쉰 목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그레버는 무턱대고 걷고 있었다.
"죽어라." 그는 중얼거렸다.
"하루빨리 죽어서 네가 지금 머물고 있는 죽음의 섬에 묻혀 버려라!"
그레버가 초인종을 누르자마자 즉시 문이 열렸다. 마치 문 뒤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어머나, 당신이었군요!"
루젤 부인이 깜짝 놀라면서 말했다.
"그렇소."
그레버는 엘리자베스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녀의 방에서 나왔다. 이번에는 루젤도 아무런 소리 없이 물러갔다.
"들어오세요, 에른스트. 곧 준비하겠어요."
그는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이것이 당신의 옷 중에서 가장 멋있는 건가?" 그는 엘리자베스가 입고 있는 검은
스웨터를 가리켰다.
"오늘밤에 외출한다는 것을 잊었어?"
"그것이 정말이었던가요?"
"물론이지! 나를 봐. 이것은 하사관의 정장이야. 내 친구가 빌려주었어. 당신과 함께
호텔 게르마니아로 가라고 했어. 그런데 장교가 아니라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
그건 당신에게 달려 있어. 다른 옷은 없어?"
"있지만."
그레버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보드카를 보았다.
"당신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아. 그런 것 잊어 버려. 루젤도, 이웃들도 모두 잊는
거야. 당신은 가끔씩 이곳을 빠져나가야 돼. 그렇지 않으면 미쳐버릴 거야. 자,
보드카를 한 잔 마시라구."
그는 보드카를 따라서 그녀에게 건넸다. 그녀는 그것을 단숨에 들이켰다.
"좋아요. 실은 나도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렇지만 당신이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지
몰라서 옷을 갈아입는 동안 잠깐 밖에 계세요. 타락했다고 루젤 부인에게 밀고
당하기는 싫으니까."
"밀고를 해도 소용없어. 군인을 상대하는 건 애국심의 발로라고 할 수 있으니까.
그래도 밖에서 기다리지."
그레버는 바깥에서 서성거렸다. 안개는 많이 걷혔지만 아직도 집들의 벽과 벽
사이에서 맴돌았다. 갑자기 2층의 창문이 열렸다. 양손에 드레스를 하나씩 든
엘리자베스가 어깨를 창 밖으로 내밀었다. 드레스가 바람에 날렸다. 하나는 금빛이고,
다른 건 색을 잘 분간할 수 없는 검은빛이었다.
"어느 것?"
그는 금빛을 가리켰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리고 창문을 닫았다. 그레버는 주위를
살폈다. 인적이 없는 거리는 몹시 어두웠다. 등화관제 위반을 발견한 사람은 없었다.
엘리자베스가 밖으로 나왔다. 반짝반짝 빛나는 금색의 긴 드레스를 입은 모습은
눈이 부실 정도였다. 그녀의 얼굴은 어둠 속에서 빛을 발했다.
"루젤 부인이 보았소?"
"네, 보았어요. 그녀는 입을 딱 벌린 채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어요. 그 여잔 내가
누더기를 걸치고 슬퍼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난 어쩐지 마음에 걸려요."
"마음에 걸리는 건 오히려 그럴 필요가 없는 인간들이야."
"난 두렵기까지 해요. 당신은."
"아니, 난 아무 생각도 안 해. 오늘밤에는 모든 걸 잊어버려. 이제부터 우린 단 한
번이라도 유쾌한 추억을 남길 수 있을까 시험해 보는 거야."
호텔 게르마니아는 파괴된 건물들 사이에 우뚝 서 있었다. 호텔은 가난한 친척들
사이에 끼여 있는 돈 많은 여자와 같았다. 벽돌더미는 깨끗이 치워져 있었기 때문에
폐허에서 죽음의 흔적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안내인은 손님의 가치를 파악하는 것 같은 눈초리로 그레버의 군복을 훑어보았다.
"주연실은 어디지?" 그레버는 상대방이 말하기도 전에 딱딱하게 물었다.
"홀은 오른쪽 끝에 있습니다. 지배인이신 프리츠씨와 말씀해 주십시오."
그레버와 엘리자베스는 복도를 걷고 있었다. 소령과 대위 두 사람이 그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레버는 경례를 했다.
"여기는 장군들이 우글우글하는 모양이야. 그리고 2층에는 군사기관이 있지."
엘리자베스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렇다면 너무 당돌하지 않아요. 혹시 발각되면 어떻게 하지요?"
"발각된다고? 하사관의 흉내는 보통이야. 나도 전엔 하사관이었어."
빼빼 마른 여자를 동반한 육군 중령이 나타났다. 중령은 그레버의 머리 너머로
정면을 보면서 걷고 있었다.
"만약에 발각되면 어떻죠?"
"별게 아니지."
"혹시 총살당하는 건 아닌가요?"
그레버는 살며시 웃었다.
"엘리자베스! 설마 그럴 리가 있을라구. 일선에선 내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럴 순
없어."
"그러면?"
"별게 아냐. 2주일 정도 구류를 받겠지. 2주일 동안 휴식인 셈이지. 어차피 2주일
후에는 일선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조금도 겁나지 않아."
지배인인 프리츠가 오른쪽 통로에서 나타났다. 그레버는 지폐를 한 장 슬며시 손에
쥐어주었다. 프리츠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물론 주연실로 가시겠죠?" 그는 앞장서서 그들을 안내했다. 프리츠는 기둥 옆의
테이블로 안내를 한 다음에 공손한 태도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레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래도 이 정도는 돼야지. 분위기에 익숙해지려면 다소 시간이 걸리겠군. 당신은
어때?"
그는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당신은 틀리는데." 그레버는 경탄했다.
"당신은 마치 단골손님 같군."
학처럼 생긴 나이 지긋한 웨이터가 메뉴를 가지고 왔다. 그레버는 메뉴를 받았다가
지폐 한 장을 끼워서 돌려주었다.
"우린 메뉴에 없는 게 먹고 싶은데 갖다줄 수 있을까?"
학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메뉴에 적혀 있지 않은 건 없습니다만 ."
"알았어. 우선 G.H. 폰 뭄 제품인 요하니스베르게르 콕스베르그 1937 년산을 한 병
갖다주게. 너무 차지 않은 걸로 말야."
학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잘 알겠습니다."그는 갑자기 경의를 표하면서 말했다.
"지금 오스텐드 카레이가 들어와 있습니다. 아주 신선하죠. 여기에 벨기에 샐러드와
파슬리 포테이토를 첨가하시면?"
"좋아. 그런데 오드볼은? 캐비어는 질색이야."
"물론입죠. 그 대신 슈트라스부르의 리비아가 있습니다."
학은 점점 신이 났다.
그레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다음에 네델란드 치즈는 어떻습니까?"
"그것도 좋지."
학은 자리에서 물러났다. 처음에는 그들이 길을 잃고 우연히 들어온 군인쯤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엘리자베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에른스트, 당신은 어디서 그런 걸 다 알았지요?"
"병영에 함께 있는 로이타에게서 들었어. 오늘 아침까진 이런 건 모르고 있었지. 그
사람은 식도락가야."
"그렇지만 돈을 메뉴에 끼워주다니!"
"그것도 로이타에게 배운 거야. 그 녀석은 이런 방면으로 훤하지."
엘리자베스는 유쾌하다는 듯이 웃었다. 웃음소리는 무척 자유롭고 부드러웠다.
"난 당신이 그럴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나도 당신이 그렇게 차리고 있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모르고 있었어." 그는
그녀를 보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엘리자베스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웃으면
금세 표정이 달라지는 것이 마치 어둠에 싸여있던 창문이 활짝 열린 것처럼 보였다.
"옷이 잘 어울리는 군." 그는 멋적은 듯이 말했다.
"이건 어머니께서 입던 옷이에요. 어젯밤에 좀 고쳤어요."그녀는 살짝 웃었다.
"사실 당신이 오기 전에 이미 준비를 마치고 있었어요."
"그럼 당신은 바느질을 할 수 있단 말이지?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얼마 전까진 할 줄 몰랐어요. 최근에 배웠지요. 난 군용외투를 매일 여덟 시간씩
깁고 있어요."
"정말이야? 그럼 근로봉사에 끌려 다니는군."
"그럼요. 스스로 지원했어요. 그렇게 하면 아버지를 구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레버는 고개를 흔들었다.
"당신에겐 어울리지 않아. 엘리자베스란 당신 이름도 그래. 누가 그런 이름을
지었지?"
"어머니가 지으셨죠. 어머닌 오스트리아의 남부 태생이었는데 이탈리아인 같았어요.
그래서 내가 파란 눈의 블론드로 태어나길 바라셨대요. 그리고 엘리자베스란 이름으로
정했지요. 어머니의 기대대로 안됐지만, 결국 이름만은 그대로."
학이 술을 가지고 왔다. 그는 보석을 다루는 것처럼 소중하게 병을 들고 조심스럽게
따랐다.
"고급 커트 글라스를 가져 왔습니다. 색깔이 잘 보이지요. 아니면 캐브레드가
좋을까요?"
"아냐, 이게 좋아."
엘리자베스는 웃었다.
"어머나, 너무 사치스러워요!"
"사치." 그레버는 컵을 들었다.
"사치라고? 그렇지! 엘리자베스, 우리 그것을 위해서 건배하는 거야! 난 2 년
동안이나 반합으로 음식을 먹고 있었지. 끝까지 무사히 먹을 수 있을까 의심하면서
말야. 그러니까 이건 사치가 아냐, 그 이상의 것이지. 평화이고, 안전이고, 기쁨이고,
축제이지."
그는 마셨다. 술이 서서히 스며들고 있었다. 그는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그녀도
부드러운 분위기에 녹아 들어가고 있었다. 전선에서 죽음과 서로 노려보고 있던
그에게 술은 단지 술만을 의미하진 않았다. 화려한 은제 접시들이나 우아하게 흐르는
음악 역시 그 이상의 것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것은 죽음과 파괴가 없는 생활, 이미
신화가 되어 바랄 수 없는 꿈이 된 생활을 위한 하나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인간이란 때때로 자기가 살아 있다는 걸 잊는 법이야."
"그건 이미 알고 있었어요."
엘리자베스가 웃었다.
학이 다가왔다.
"술은 어떻습니까?"
"참으로 훌륭해. 그렇지 않으면 오랫동안 단 한 번도 떠오르지 않았던 것들이
갑자기 되살아 날 수가 없지."
"그렇습니다. 마치 황금처럼 사면팔방으로 찬란한 빛을 발산하고 있습니다."
"첫 잔에 알 수 있었지! 단번에 위장으로 가지 않고 바로 눈으로 가서 세계를
놀라게 한다!"
"당신은 술에 조^36^예가 깊으시군요." 학은 비밀이란 듯이 그에게로 몸을 굽혔다.
"저기 오른쪽 테이블에서도 똑같은 술을 마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이걸 물
마시듯 하지요. 그런 자들은 차라리 우유를 마시는 게 좋을 것입니다."
학은 그들을 못마땅하다는 듯이 바라보면서 물러났다.
"오늘은 사기꾼을 위해서 운이 좋은 날이군. 엘리자베스, 술이 어때? 당신에게도?"
그녀는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댔다.
"난 꼭 감옥에서 탈출한 것 같아요. 그리고 사기죄로 즉시 체포당할 것
같은."
"그건 그래! 자기 감정을 두려워하고 있는 거야."
학은 카레이와 샐러드를 날라 왔다. 그레버는 느긋한 마음으로 그가 시중드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학은 술병을 들었다. 그는 마치 아들을 보살피는 어머니처럼 굴었다.
"일반적으로 모젤 와인에는 생선이 따르는 법이지만 카레이는 다릅니다. 이것은
나무열매와 같은 풍미가 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정말 그래."
학은 고개를 끄덕거리고 물러갔다.
"에른스트, 이렇게 잔뜩 주문해 놓고 값을 치를 수 있어요? 엄청나게 비쌀 텐데."
"문제없어. 2년치의 전투수당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니까. 이런 돈은 오래 갖고 다닐
필요가 없어." 그레버는 웃었다.
"2주일 동안만 지니고 있으면 돼."
두 사람은 엘리자베스의 집 앞에 서 있었다. 어느 새 바람이 멎고 안개가 몰려들고
있었다.
"당신은 언제 돌아가시죠? 2주일 후?"
"그렇지."
"금방이군요."
"길게 느껴지다가도 어느 순간, 너무 짧아져 있기도 하지. 전시에는 평화로울 때의
시간과는 다르지. 당신도 그만한 것은 알고 있을 거야. 여기도 일선과 마찬가지로
전쟁터야."
"똑같지는 않아요."
"아냐, 똑같아. 오늘밤 난 처음으로 휴가를 즐겼어. 학과 로이타, 그리고 당신의
금빛 드레스 덕분이지."
그녀는 그 앞에 서 있었다. 안개가 그녀의 얼굴을 이슬 머금은 과일처럼 적시고
있었다. 그레버는 이것들을 뒤에 남겨두고 병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하사관, 자넨 눈이 없나?"
하얀 턱수염을 기른, 작고 뚱뚱한 소령이 그들 앞에 서 있었다. 아마도 고무창이
달린 구두를 신고 슬며시 다가온 모양이었다. 소령은 노후 정리로 예비군에 돌려진
군인의 골동품으로서 현재의 계급을 방패로 허세를 부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레버는
이 노인을 당장 집어던지고 싶었으나 그런 위험한 짓은 할 수 없었다. 그는 관록있는
군인처럼 아무 소리도 않고 부동자세를 취했다.
노인은 그에게 회중 전등를 비추고 위에서 아래로 훑어 내려갔다.
그레버는 이것이 굉장한 모욕으로 생각되었다.
"특별복!" 노인은 언성을 높였다.
"안락의자에 앉아 군무를 수행하는 자가 아니면 입고 다닐 수 없을 텐데! 특별복을
입은 일선용사라! 대단하군! 넌 어떻게 후방에 있는 거지?"
그레버는 묵묵히 서 있었다. 자신의 초라한 상의에서 종군기장을 떼어 붙이는 일을
잊었던 것이다.
"여자를 끌고 다니는 재주밖에 없나?" 소령이 호령을 했다.
엘리자베스가 갑자기 몸을 움직였다. 회중 전등의 불빛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노인을 잔뜩 노려보다가 불빛 속에서 빠져 나와 그레버에게로 왔다.
소령은 헛기침을 하면서 그 자리를 물러났다.
"난 도저히 참을 수 없었어요!"
그레버는 어깨를 움츠렸다.
"저런 영감쟁이들은 어쩔 수가 없어. 부하들에게 경례를 받고 싶어서 거리를
방황하지. 그것이 그자들의 소일거리야."
엘리자베스는 웃으며 소령의 흉내를 냈다.
"넌 어째서 후방에 있지?"
그레버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 특별복을 입었다고 천벌이 내렸어. 내일은 사복을 입고 나서야지. 빌릴 곳이
있으니까. 그러면 우린 게르마니아에서 마음놓고 즐길 수 있어."
"또 거기로?"
"그럼 또 가야지. 엘리자베스, 나중에 일선에서 회상할 일은 그것 뿐이야. 내일 여덟
시에 다시 오겠소. 우물쭈물하면 그 노인이 또 와서 이번에는 급료카드를 꺼내보라고
할지도 모르니까."
그는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녀는 아무 저항도 없이 그에게 안겼다. 그는 그녀를
자기의 팔 안에 완전히 느끼고 있었다. 갑자기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간절히 원했다. 오로지 그녀만을 원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힘껏 껴안고
키스를 했다. 오늘밤 그녀를 놓고 싶지 않았다.
그는 다시 하겐가의 옛 집터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달이 갈라진 구름 사이로 화사한
빛을 던져주고 있었다. 그는 급히 돌 사이에서 종이쪽지를 끄집어냈다. 자세히 보니
한쪽에 연필로 무엇인가가 적혀 있었다. 그는 회중 전등을 찾았다.
"본국에서 물어라. 창구 15번"
그는 시계를 보았다. 이미 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렇지만 내일 아침 여덟 시가
마침내 부모님의 소식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우체국에서 그 쪽지를 보이기
위해서 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죽은 듯이 고요한 거리를 병영을 향해 걸어갔다.
13
우체국에 도착하니 건물의 일부는 아직도 남아 있었다. 입구는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대부분이 붕괴되고 소실되어 있었다. 어디에나 사람들이 들끓었다. 그레버는
잠시 기다리다가 15번 창구로 가서 종이쪽지를 내밀었다.
국원은 종이쪽지를 도로 그에게 주었다.
"신원을 확인할 무슨 증명이 있습니까?"
그레버는 급료카드와 휴가증을 제시했다. 국원은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도대체 무슨 전갈입니까?"
국원은 아무런 대꾸도 없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안으로 사라졌다. 그레버는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서류를 무심히 보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국원은 구겨진 소포를 손에 들고 돌아왔다. 그는 다시 한 번 소포에 적힌 이름과
그레버의 휴가증을 대조해 보았다. 이윽고 소포를 내밀었다.
"여기에 서명해 주십시오."
그레버는 소포에 적혀있는 어머니의 필적을 보았다. 어머니는 그것을 일선의
그에게로 보냈고, 그것이 또한 전선으로부터 회송된 것이었다. 발신인의 주소는
하겐가로 되어 있었다. 그는 영수증에 서명을 했다.
"이것뿐입니까?"
국원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또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런 뜻이 아니라 제 부모님의 새 주소를 알 수 있을까 해서."
"여기선 모릅니다. 2층의 배달과로 가서 물어보십시오."
그레버는 지붕이 절반밖에 없는 2층으로 올라갔다. 무너진 천장사이로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바라볼 수 있었다.
"새로운 주소는 없습니다."
창가에 앉아 있던 여직원이 대꾸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 소포를 하겐가로 배달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당신 구역의
배달부에게 알아볼 수는 있습니다."
"그 배달부는 어디에 있죠?"
여자는 시계를 보았다.
"지금 구역을 돌고 있어요. 오후 4시경에 들르면 만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모르겠는데 배달부가 알 수 있을까요?"
"물론 모르겠지요. 배달부도 우리에게 주소를 묻고 가니까. 그래도 배달부에게
알아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래야 안심할 수 있대요. 사람들이란 대개
그렇지 않아요?"
"아마도."
그레버는 소포를 들고 층계를 내려왔다. 날짜를 확인해 보니 3주일 전에 발송한
것이었다. 전선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그곳에서는 빨리 도착한 것이다. 그는
거리에 선 채로 소포를 풀어 보았다. 안에는 건과자가 한 봉지, 모사양말이 한 켤레,
담배, 그리고 어머니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그는 편지를 읽어보았다. 주소의 변경 사항이나 공습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는 편지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 마음이 안정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거리로 나왔다. 이번에야말로 새로운 주소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막막했다.
그는 빈딩그를 찾아가기로 했다. 반가운 소식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들어오게." 알폰스가 맞이했다.
"지금 막 최고급의 술을 마시려던 참이었어."
빈딩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친위대원 한 사람이 루벤스 그림 아래에 있는 커다란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누런 얼굴과 블론드 머리의 빼빼 마른 남자였다.
"하이니야." 알폰스가 정중하게 소개했다.
"하이니! 이쪽은 내 친구인 에른스트, 특별휴가로 소련의 전선에서 돌아왔지."
하이니는 몹시 취해 있었다.
"소련의 전선이라!" 그는 중얼거렸다.
"나도 갔었지. 여기보단 재미가 좋았어!"
그레버는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빈딩그를 보았다.
"하이니는 벌써 한 병 해치웠어. 집이 폭격 당했어. 가족들은 무사했지만 집이 폭삭
무너졌지."
"방이 넷이야." 하이니는 소리를 질렀다.
"가구는 모두 새것이었어. 피아노도 그렇고. 참 멋있는 피아노였지."
"하이니는 반드시 피아노의 원수에게 복수를 할거야." 알폰스가 말했다.
"자자, 에른스트. 자넨 무엇을 들겠나? 하이니는 코냑을 마시고 있지만 보드카도
있고 퀸메르도 있지. 자네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지 다."
"난 필요 없어. 단지 뭘 좀 알아낸 게 있는지 궁금해서 들렀어."
"아직 새로운 소식은 없어. 자네 부모님께서는 이미 시내에서 떠나셨다고 봐야 해.
아마 어디론가 이동중일 거야. 요즘 사정은 잘 알겠지. 개새끼들의 폭격으로 통신이
거의 마비되었어. 회복되려면 며칠 걸려야 돼. 자, 한 잔만 하라구."
"좋아, 보드카를 약간."
"보드카?" 하이니가 투덜거렸다.
"우린 보드카를 놈들의 아가리 속으로 퍼붓고 불을 질러버려야 해. 놈들을
화염방사기로 만들어 버린 적이 있었지. 어린것들이 깡충깡충 뛰는 꼴이라니 얼마나
웃었던지 허리가 부러질 지경이었어. 그때의 소련은 참 재미있었는데."
"뭐라고?" 그레버는 물었다.
하이니는 묵묵부답으로, 오직 정면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화염방사기!" 그는 다시 중얼거렸다.
"걸작이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그레버는 빈딩그에게 물었다.
"하이니는 여러 가지 일에 관계하고 있었다. 보안부에 있었으니까."
"보안부, 소련에서 말인가?"
"그렇지. 자, 한 잔 더 하게."
그레버는 술병을 들었다. 맑은 액체가 철렁철렁 흔들렸다.
"보드카는 몇 도나 될까?"
"상당히 도수가 높은걸. 70 퍼센트는 확실하겠지. 로스케놈들은 독한 술을
좋아하니까."
알폰스는 웃었다.
독한 술을 좋아한다 그렇게 도수 높은 술을 목구멍에 처넣고 불을 지른다면
확확 타오를 것이다. 그는 하이니를 보았다. 친위대의 보안부에 관한 얘기는
전선에서도 듣고 있었기 때문에 하이니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쯤은 그도 알고
있었다. 보안부는 독일 국민에게 생활권을 마련해 준다는 구실아래 전방에서 한꺼번에
몇 천 명씩 학살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시원찮은 건 닥치는 대로 섬멸했던 것이다.
더구나 이 집단살육이 너무 단조롭지 않게 친위대는 여러 가지 끔찍한 방법을 생각해
냈다. 그레버도 그 중의 몇 가지 방법을 알고 있었다. 슈타인브레너에게 여러 가지를
들었지만 화염 방사기는 처음으로 듣는 얘기였다.
"왜 병만 노려보고 있지?" 알폰스가 물었다.
"물어뜯지 않을 테니까 잔을 놓게."
그레버는 가만히 술잔을 내려놓았다. 당장에 뿌리치고 나가고 싶었지만 그대로 앉아
있었다.
"어때, 한 잔 더 안 하겠어?" 알폰스가 물었다.
그레버는 하이니를 보았다. 그는 잠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이 사람, 아직도 보안부에 있나?"
"아냐. 지금은 여기 있어."
"여기라니?"
"강제수용소의 대장이야."
"강제수용소의?"
"그럼. 한 잔만 더 하라구. 다음에 만날 땐 서로가 지금처럼 젊진 않을 텐데! 오늘은
달아나지만 말고 오래 놀다 가게."
"응." 그레버는 하이니를 보면서 대답했다.
"난 이제 달아나지 않겠어."
"겨우 철이 든 모양이군. 보드카를 한 잔 더 할까?"
"퀸메르나 코냑을 줘. 보드카는 질색이야."
하이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보드카는 안돼." 그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건 너무 아까워. 보드카는 우리가 마시고 벤젠을 사용했지. 벤젠이 훨씬 잘
타지."
하이니는 욕실에서 토하고 있었다. 알폰스와 그레버는 문 앞에서 있었다. 하늘에는
여전히 먹구름이 떠 있었다.
"하이니는 미친놈이야. 안 그래?"
알폰스는 소년이 피에 주린 인디언 추장에 대해서 말하는 것처럼 공포와 찬탄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저자는 자신을 지킬 수 없는 사람에게만 미치광이 짓을 하는 거야." 그레버가
대답했다.
"저 녀석은 한쪽 팔을 못 써. 그래서 정규군이 될 수 없는 거야. 1932 년에
공산당원들과 난투극이 벌어졌을 때 당하고 말았지. 그 당시의 얘기를 들어보니까
정말 굉장했어."
알폰스는 불꺼진 잎담배를 쭉쭉 빨았다. 하이니가 소련에서의 공명담을 떠 벌일 때
불을 붙였는데 너무 흥분해서 불이 꺼지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참 멋있는 생각을 했어. 안 그래?"
"너 역시 거기에 있었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나?"
빈딩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진 않아. 한 번쯤이라면 또 모르지. 그렇지만 난 그런 부류의 인간이 아냐."
하이니가 창백한 얼굴로 문에 나타났다.
"근무 개시!" 입에 거품을 물고 말했다.
"이미 늦었다. 시작된 모양이야. 그 돼지새끼들의 코를 뽑아놓고 말아야지!"
그는 정원의 오솔길을 쓰러질 듯이 걸어갔다. 비틀거리다가 대문 앞에서 모자를
똑바로 쓰고 어깨를 펴더니 마침내 자취를 감추었다.
"지금 KZ(강제 수용소)에서 저 손에 걸리는 놈은 혼이 빠져버릴 거야." 알폰스가
말했다.
그레버는 눈을 치켜들었다. 그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나, 알폰스?"
"놈들은 모두 조국에 대한 반역자야. 아무 죄도 없이 수용당한 게 아냐, 에른스트."
"부르마이스터도 국가에 대한 반역자인가?"
"그것은 사적인 문제지. 그리고 그 녀석에게는 별다른 일이 없었어."
알폰스는 웃었다.
"만약에 있었다면?"
"그건 그 녀석 운이 나쁜 탓이지. 요즘엔 재수없게 걸려드는 게 얼마든지 있어.
예를 들면 폭탄에 맞은 사람들이지. 이 도시에도 오천은 돼. 모두 강제수용소에 있는
인간들보다 훌륭한 인간들이지. 그러니까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건, 내가 알 바
아니고 책임도 없어. 내 책임도 아니고 네 책임도 아냐."
참새들이 잔디 한가운데에 있는 수영장을 향해서 날아가고 있었다. 그 중의 한
마리가 물에다 날개를 적시고 있었다.
알폰스는 그것에 매혹이라도 된 듯이 꼼짝도 않고 있었다. 하이니 따위는 이미
잊어버린 얼굴이었다.
그레버는 그의 만족스럽게 보이는 얼굴을 응시했다. 그리고 정의와 동정이 영원히
절망적이라는 것, 항상 이기주의와 무관심과 공포심에 부딪쳐서 난파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책임이란 건 그리 간단한 게 아냐, 알폰스." 그는 우울했다.
"그렇지만 에른스트, 심각해지지 말게! 자기의 행동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면 돼.
그것도 명령을 받지 않고 한 행동에 대해서만."
"우리가 포로를 총살할 때는 반대의 말을 하지. 당신들은 다른 사람들이 저지른
일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는 거라고."
"포로를 총살한 적이 있나?" 빈딩그는 재미있는 얘기를 들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레버는 대답하지 않았다.
"인질은 예외야. 그건 불가피한 예외야." 빈딩그가 말했다.
"무엇이든 불가피한 예외다." 그레버는 딱딱하게 말했다.
"자신이 하는 건 무엇이든지. 우리가 적국의 도시를 폭격할 때는 전략상의 필요
때문이야. 그러나 그들이 하는 건 비열한 죄악이지."
"맞았어! 제법 그럴듯한 생각을 하는데." 알폰스는 교활하게 웃었다.
"그것이 바로 정치라는 거야. 정의라는 것은 독일 국민에게 있어서 유용한 것이야.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다하고 있을 뿐이야. 우리에게 책임은 없어."
그레버는 문득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하이니를 발견했다. 거리에는 인적이 끊겼고
보도와 접한 모래땅 위에 노랑나비 한 마리가 나풀거리고 있었다. 100 미터 앞에서
하이니는 모퉁이를 돌았다.
그레버는 모래 위를 걷고 있었다. 모래는 발자국소리까지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만약에 누군가가 하이니를 처치하고 싶다면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가 된다. 한 명도 지나가는 사람이 없다. 거리는 마치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모래 위를 소리없이 접근할 수 있다. 하이니는 조금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때려
죽이거나 목졸라 죽이면 된다. 총을 쏘면 너무 소리가 커서 순식간에 사람들이
몰려든다. 하이니 따위는 얼마든지 교살할 수 있다.
그레버는 걸음이 빨라졌다. 알폰스는 나를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가
하이니에게 보복을 가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실 그럴 만한 이유는 얼마든지 있었다.
누가 복수하든 절호의 기회이다. 하이니는 없어져야 할 인간이다.
그레버는 손에 식은 땀이 흘렀다. 갑자기 온몸이 확확 달아올랐다. 어느 새
하이니를 30 미터 정도 따라잡고 있었다. 아직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모래
위를 잽싸게 뛰어가면 일 분 이내로 깨끗하게 처치할 수 있다. 하이니를 찌르고
그대로 달아나면 된다.
갑자기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도대체 나는 어디에 있는 거지? 그것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어째서 나는 이렇게 말려들어야만 했던가? 단순히 우연으로
시작된 일이 강박관념으로 변하고 있었다. 모든 것은 그가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과거의 모든 것,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잊고 싶었던, 그가
했거나 하지 않았던 모든 것들을 정당화시키고 있었다. 복수다. 그의 혼란된 머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상대는 내가 잘 모르는 인간이다. 나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은 인간이다! 하지만 엘리자베스의 아버진 하이니의 희생자 중에서 한
사람이 아닐까?
그는 하이니의 등을 잔뜩 노려보았다. 목이 말랐다. 어디선가 개가 사납게 짖어대고
있었다. 그는 섬찟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너무 취했다. 그만두자. 하이니 따위는
내가 알 바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살금살금 앞으로 나갔다.
그는 미처 단안을 내리지 못한 채 하이니 가까이 접근해 있었다. 그때 맞은 편의
대문에서 한 여자가 나오는 것이 보였다. 오렌지색 블라우스를 입은 그 여자의 손에는
시장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그레버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그레버는 우뚝 서 버렸다. 일시에 긴장이 풀리고 있었다. 여자는 그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안녕하세요." 여자는 친숙한 어조로 인사를 했다.
그레버는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등 뒤에서 여자의 발자국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눈앞에는 폐허가 전개되고 하이니는 벌써 다음 모퉁이를
돌아가고 있었다. 거리에는 다시 인적이 끊긴 상태였다.
그레버는 뒤를 돌아보았다. 한가하게 걸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왜 나는
달려가지 않는 것인가? 아직도 기회는 있다. 그러나 이미 틀려버렸다는 사실을 자기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여자는 아마도 나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제는 안된다.
만약에 여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나는 일을 저질렀을까? 무엇인가 다른 구실을
만들지는 않았을까?
그는 하이니가 돌아간 십자로에 당도했다. 하이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 다음
모퉁이에서 하이니는 다시 나타났다. 하이니는 거리 한 가운데에 서서 친위대 한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마침내 함께 걸어가기 시작했다. 집배원이 한쪽
모퉁이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의 바로 앞에서는 자전거를 끌고 나온 남자 두 사람이
마주보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미 끝났다. 그레버는 마치 깊은 잠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저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내 안에서 갑자기 빠져나간 것은 무엇인가? 나는
냉정하다고 믿고 있었지만 그렇지 못했다.
그레버는 신문을 사서 국방군 발표를 읽어보았다. 이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휴가기간만은 전쟁을 잊고 싶었던 것이다. 전선이 계속 후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신문에 소개된 지도로 지금 자신이 소속된 연대가 있을 만한 위치를 대강 알
수 있었다. 신문만으로 자세한 사항까지 알 수는 없었다. 국방군 발표는 군단의 일만
보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꼼짝 않고 서 있었다. 고국에 오고 나서 전우들을 단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기억은 돌덩어리가 되어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다시
떠오르고 있었다.
지면으로부터 고독이 소리 없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전황 뉴스는 그레버가 소속돼
있는 연대의 치열한 전투상황을 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고독은 소리도 없고
색깔도 없었다.
그때 바구니를 가슴에 안은 여인이 그의 어깨에 부딪쳤다.
"당신은 눈이 없어요?" 여자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보입니다." 그레버는 꼼짝 않고 서서 대답했다.
"그러면 어째서 물러서지 않죠?"
그는 침묵을 지켰다. 그는 자기가 왜 하이니를 미행했었는지 깨달았다. 그것은 그가
일선에서 항상 느꼈던 암흑 같은 거였다. 자기가 단 한 번도 대답할 용기가 없었던
의문, 수없이 회피해 왔던 절망이었다. 그것이 마침내 그를 궁지로 몰았던 것이다.
그는 지금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이제는 더 이상 피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결심을 굳게 했다. 폴만! 프레젠버어그는 폴만을 찾아가보라고 했다. 그것을 잊고
있었던 거이다. 폴만을 찾아가서 가슴속에 묻었던 이야기를 나누자.
"바보!" 무거운 바구니를 안고서 여자는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걸어갔다.
얀프라츠는 절반 정도가 파괴되어 있었다. 나머지 부분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고
창문이 약간 부서졌을 뿐이었다. 그곳에서는 여자들이 청소를 하거나 취사를 하면서
그날 그날의 생활을 꾸려가고 있었다. 그 반대쪽은 건물의 정면이 붕괴되면서 산산이
파괴된 방의 치부를 전부 보이고 있었다. 방에는 전투가 끝난 뒤 찢어진 깃발처럼
갈기갈기 떨어져 나간 융단이 늘어져 있었다.
폴만의 집은 파괴당한 쪽에 위치해 있었다. 위로부터 층계가 내려앉으면서 입구를
메워버린 그 집은 사람이 살고 있을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레버는 돌아서다가
집 앞에 널려있는 벽돌더미 위에 사람이 다닌 흔적을 발견했다. 그것을 따라서
들어가자 벽돌을 양쪽으로 밀어내고 파괴되지 않은 뒷문까지 통로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가 문을 두드리자 조심스럽게 열렸다.
"폴만 선생님." 그레버는 반갑게 말했다.
"왜 그러십니까?"
"저는 에른스트 그레버입니다. 선생님의 제자였습니다."
"아아, 그래? 그런데 무슨 일로 왔나?"
"한 번 찾아 뵙고 싶었습니다. 저는 지금 휴가중입니다."
"나는 이미 학교를 그만두었다." 폴만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파면당했다는 것도 알고 있겠군. 나는 이제 학생들을 만나지 않고
또 그럴 권리도 없네."
"저는 이제 학생이 아닙니다. 저는 군인입니다. 소련에서 돌아왔습니다.
프레젠버어그가 선생님께 안부를 전해달라고 해서 들렀습니다."
노인은 그레버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프레젠버어그? 그 사람이 아직도 살아있나?"
"열흘 전까지는 살아 있었습니다."
폴만은 여전히 그레버를 바라보다가 뒤로 물러났다.
"들어 오게."
그레버는 그의 뒤를 따라갔다. 복도를 지나고 부엌처럼 보이는 곳을 빠져나와서
짧은 통로를 걸었다. 폴만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문을 열고 큰소리로 말했다.
"어서 들어오게. 나는 자네를 경찰로 오해했지."
그레버는 깜짝 놀라서 그를 보았다. 비로소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폴만 선생은
누군가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일부러 큰소리로 말한 것이다.
방에는 녹색의 갓을 씌운 작은 석유램프가 켜져 있었다. 창문은 모조리 부서졌지만
창 밖에는 벽돌을 높이 쌓아놓고 있었기 때문에 바깥이 보이지 않았다. 폴만은 방
가운데에 서 있었다.
"이제야 자네를 알겠네. 밖은 햇빛이 너무 강해서 말야. 밖으로 나가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햇빛에 눈이 부셔. 여긴 석유램프만으로 충분해. 그러나 석유가 부족해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지."
그레버는 그를 자세히 보았다. 폴만은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더라고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변해 있었다. 방안에 있으니까 딴 세상에 와 있는 것 같았다. 벽에는 책이 잔뜩
쌓여 있었다. 폴만은 그레버의 시선을 쫓았다.
"나는 그래도 운이 좋았어. 책은 전부 끌어냈거든"
"저는 오랫동안 책을 본 적이 없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거의 아무 것도 읽지
못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책은 무거워서 배낭에 지고 다닐 수 없지."
"머리 속에 넣고 다니는 것도 힘에 겨웠습니다. 여러 가지 사건과 너무 동떨어져
읽고 싶지 않았습니다."
폴만은 부드러운 불빛을 통해서 그를 보고 있었다.
"자네는 왜 나를 만나러 왔지, 그레버?"
"프레젠버어그가 꼭 방문하라고 하던데요."
"자네는 그 사람을 잘 알고 있나?"
"그 친구는 내가 일선에서 믿을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 친구는 나에게
선생님을 뵙고 얘기를 나누라고 말했습니다."
"무슨 얘기를?"
그레버는 노인을 보았다. 이 노인에게 배우던 시절이 아득하게 멀리 느껴졌다. 그는
갑자기 자기가 다시 학생이 되어 개인생활에 대해서 질문을 받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어마어마한 장서로 가득하고 절반은 벽돌 속에 묻힌 이 작은 방안에서, 파면 당한
소년시대의 은사 앞에서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과거에
있었던 친절, 관용, 학식을 새롭게 구현하고 있었다. 창밖의 벽돌더미는 현재가 과거를
통해서 만들어낸 것이다.
"저는 과거 10 년 동안의 죄악에 내가 어디까지 관계되어 있는가를 알고 싶습니다."
폴만은 가만히 그를 지켜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구석으로 걸어갔다. 그는 책을 한
권 꺼내 펼쳐보다가 도로 제자리에 놓았다. 이윽고 그레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네는 자신이 지금 무엇을 묻고 있는지 알고 있나?"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아무 의미가 없는 말을 해도 목을 잘려."
"일선에서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인간들이 살해됩니다."
폴만은 자리로 돌아와서 앉았다.
"죄악이란 건, 전쟁 말인가?"
"전쟁을 일으킨 온갖 것들입니다. 거짓과 압제, 불법과 폭력입니다. 그리고 전쟁과
전쟁을 하는 방법입니다. 노^36^예 수용소, 강제 수용소, 비전투원의 대량학살을
자행한."
폴만은 오로지 침묵만을 지켰다.
"저는 제 눈으로 직접 목격을 하고 여러 가지 얘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또한 전쟁이
패배할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까지 전쟁을 계속하는 건 다만
정부와 당과 전쟁을 일으킨 인간들이 좀 더 권력을 연장해 더 불행한 결과를 초래할
뿐입니다."
폴만은 역시 묵묵히 있었다.
"자네는 그것을 모두 알고 있군?"
"지금은 알고 있습니다. 전부터 알았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또 일선으로 가야하는군?"
"그렇습니다."
"무서운 일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다시 가야만 합니다. 저는 정말 공범자가 되는 것입니까?"
폴만은 다시 침묵으로 돌아갔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것은 무슨 뜻이지?" 그는 거의 속삭이고 있었다.
"그 뜻은 선생님께서도 이미 알고 계십니다. 선생님은 저희들에게 종교를
가르치셨습니다. 저는 전쟁에 패한 사실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노^36^예와 살인자,
강제 수용소와 친위대의 대량학살과 비인도적 행위를 중지시키기 위해선 전쟁에
패해야 된다는 것도 잘 압니다.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 2주일 후에는 다시 일선으로
가서 전투에 가담하게 된다면, 도대체 저는 어디까지 공범자가 되는 것입니까?"
폴만의 얼굴이 회색으로 변하며 핏기를 잃어갔다. 그러나 눈동자만은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그 눈빛은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았지만 어디서 보았는지는 기억해 낼 수
없었다.
"자네는 다시 가야만 하는가?" 마침내 폴만이 물었다.
"물론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교수형이나 총살을 당할 것입니다. 아니면
탈주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 즉시 체포될 것입니다. 탈주를 막기 위한 경찰망과
스파이망은 철통과 같습니다. 성공한다 해도 어디에다 몸을 숨길 수 있단 말입니까?
나를 숨겨 주는 사람은 총살당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제 부모님께도
보복을 가할 것입니다. 죄가 아주 가벼워도 강제수용소로 끌려가고 거기서 죽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일선으로 복귀해서 총알을 피하지 말까요?
그것이야말로 자살행위입니다."
시계가 울렸다. 방에 파묻힌 고요를 둔탁한 음향이 망령과 같이 깨뜨렸다.
"또 다른 방법은 없냐?"
"스스로 자신의 몸을 불구로 만드는 겁니다. 대부분은 발각이 됩니다. 처벌은
탈영의 경우와 마찬가지입니다."
"본국으로 전근할 수는 없나?"
"안됩니다. 저는 무척 건강하고 그렇게 할 수 있다 해도 제 의분은 어쩔 수
없습니다. 사무실에 있다고 해서 공범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는 게 아닙니까?"
"그렇지." 폴만은 두 주먹을 쥐었다.
"죄악." 마침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죄악이 어디서부터 오고 어디서 끝나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있다. 모든 곳에서
시작되지만 어디서나 끝나지 않는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공범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는 하느님뿐이지."
그레버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하느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렇지 않다면 원죄라는 게 존재하지도 않을
테니까. 원죄는 수천 세대에 걸쳐 확대된 공범입니다. 그렇지만 개인으로서의 책임은
어디서 시작되는 것입니까? 우리는 다만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의 그늘에
숨어서 안심하고 있을 수 만은 없습니다."
"단순한 명령이 아니라 강제야."
그레버는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스도교 시대의 순교자들은 압제에 굴복하지 않았다." 폴만은 주저하면서
말했다.
"우리는 순교자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공범은 어디까지 책임져야 되는 것입니까?
보통 영웅주의라고 불리는 것은 언제 살인자가 되는 겁니까? 명분이 목적을 믿지 않을
때 입니까? 그 부분은 무엇입니까?"
폴만은 고뇌에 찬 눈초리로 그레버를 응시했다.
"내가 어떻게 그것을 말할 수 있지? 그것은 너무나도 책임이 커. 나는 자네를
위해서 그것을 결정할 수 없네."
"모두가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렇다."
그레버는 잠자코 있었다. 나는 왜 항상 질문의 화살만 던지고 있는 것일까? 어째서
이 노인을 괴롭히고 있는 것인가? 나는 이 노인에게 그가 일찍이 강의한 것과 나
혼자서 터득한 것에 대해서 설명을 요구하고 있는 것일까? 그는 폴만을 바라보았다.
노인은 면직 당하고 체포의 불안과 싸우면서 책에서나마 위로를 받고 있다. 오늘도
내일도 폐허더미에 숨어서 램프 곁에 앉아 있는 광경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선생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답을 구하는 건 결정을 회피하는 것밖에
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실은 스스로를 향해서 질문한 것입니다. 타인에게 먼저 묻기
전에 자기 자신에게 물을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폴만은 고개를 흔들었다.
"자네에게는 질문할 권리가 있어. 공범!" 그는 갑자기 말했다.
"공범이라고 하지만 자네가 무엇을 알고 있나? 자네들은 아직 어려서 스스로를
판단할 수 있기도 전에 거짓으로 중독 되고 말았어. 그렇지만 우리들은 눈앞에
보이는 것도 잠자코 있었어! 무엇이 이렇게 만들었는가? 나태한 마음? 무관심일까?
이기주의? 절망이라고 할 것인가? 자네는 내가 이 일에 대해서 모른 척한다고
생각하나?"
그레버는 폴만의 눈동자를 어디에서 봤는지 기억할 수가 있었다. 그것은 그가
총살한 소련인 포로의 눈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좋은 말씀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모자를 들었다.
"그레버, 벌써 가려고 하나? 자넨 어떻게 할 생각인가?"
"모르겠습니다. 생각해 볼 시간이 아직 2주일이나 있습니다. 순간 순간 생사의
기로에 있던 거에 비하면 아주 긴 시간입니다."
"또 오게. 출발하기 전에 다시 오겠다고 약속해 주게."
"약속해겠습니다."
"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지." 폴만이 중얼거렸다.
그레버는 벽돌로 가려진 창가의 책과 책 사이에 작은 사진이 있는 것을 보았다.
자기와 같은 또래의 군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었다. 폴만에게 외아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러나 아무 것도 묻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프레젠버어그에게 내 안부도 좀 전해주게."
"알겠습니다. 선생님께서 제게 말한 대로 그 친구에게도 말씀하셨습니까?"
"그래."
"제게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게 프레젠버어그에게 도움이 됐을까?"
"아닙니다. 아마 더욱 곤란했을 겁니다."
폴만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자네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지. 그러나 변명에 지나지 않는 답변은 하고
싶지도 않았어. 그런 답은 얼마든지 할 수도 있지. 하지만 모두가 입만 살아서
그럴듯하게 속이고 있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까?"
폴만은 망설이고 있었다.
"그렇지만 교회에서는 멋있게 하고 있다. '너의 이웃을 사랑하라.' '살인하지 마라.'
이 말에 대해서는 '시저의 것은 시저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라는 말이 가장
적절하지. 이것만 있으면 어떠한 연극도 해낼 수 있지."
그레버는 싱긋 웃었다. 폴만의 신랄한 입담이 아직 살아있었군. 폴만은 그를 보았다.
"자네는 침착하게 웃고 있군. 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지 않지?"
"저는 지금 부르짖고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들리지 않을 뿐입니다."
눈부신 햇살이 눈에 들어왔다. 그레버는 천천히 광장을 가로질렀다. 그는 오랫동안
질질 끌다가 마침내 판결을 받은 죄인이면서도 그 판결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인간
같았다. 겨우 끝났다. 그는 그것을 바라고 있었다. 휴가기간 동안 생각하기로 했던 것.
이제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절망이었다.
그는 폭탄으로 생긴 구덩이 옆에 앉아 있었다. 서서히 긴장이 풀리면서 마음이
허전해졌다. 그는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머리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잠시 후, 그레버는 눈을 떴다. 그의 앞에 광장이 펼쳐져 있었다. 그는 파괴된 집
앞에 서 있는 보리수를 바라보았다. 보리수는 꿋꿋하게 서서 거대한 나뭇가지들을
벌려놓고 있었다. 그는 보리수 옆을 지나서 파괴된 집들로 이어진 거리를 걸었다.
그는 자기가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간절히 원했다. 마치
휴전을 갈망하는 것처럼 밤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14
"오늘은 최고급인 위이너 슈니설이 있습니다." 학이 말했다.
"좋아." 그레버는 대답했다.
"그리고 당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조리 갖고 와. 모든 것을 당신에게
맡기겠어."
"술은?"
"그것도 당신 마음대로 해."
웨이터는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물러났다. 그레버는 엘리자베스를 바라보았다.
밖은 이미 땅거미가 지고 있을 것이다. 2주일, 2주간의 생명. 보리수가 빛을 포착하는
것처럼 2주일 동안의 생명을 붙잡아야 한다.
학이 돌아왔다.
"오늘은 요하니스베르게르 카렌베르그를 드시는 게 어떻습니까? 이것에 비하면
샴페인 정도는 소다수 같은 것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그것으로 가져 와."
"알겠습니다. 신선한 야채 샐러드도 곁들이겠습니다."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의 최후의 만찬이다.' 그레버는 생각했다. 사형수, 2주일
동안의 식사. 그는 그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오직 휴가 이외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많은 일들이 일어났었고 앞으로도 더 많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신문을 읽고 폴만과 이야기를 나눈 후, 그는 휴가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엘리자베스의 눈은 학의 뒤를 쫒고 있었다.
"당신의 친구 로이타씨는 참으로 고마운 분이군요. 덕분에 우리는 상류층의 인간이
되었어요."
"엘리자베스, 우린 단순히 상류층이 아닌 그 이상이지. 우리는 모험에 뛰어든
기사야. 평화의 기사란 말야. 전쟁은 모든 것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고 말았어. 단지
얼빠진 부르주아의 상징이었던 것이 지금은 위대한 모험이 되고 있어."
엘리자베스는 웃었다.
"우리가 지금 그렇게 된 것이죠."
"우리가 아냐. 바로 시대지. 그러나 불평할 수 없는 것이 분명히 있지. 그것은
권태와 단조로움이야."
그레버는 엘리지베스를 보았다. 그녀의 머리가 작은 모자 밑에 가려져 있었다. 마치
귀여운 사내아이 같았다.
"단조로움. 그렇다면 당신은 오늘밤 신사복을 입을 예정이었지요?"
"바꿔 입을 만한 데가 없었어."
그는 돌격대장 알폰스의 집에서 갈아입을 생각이었지만 폴만과 이야기하다가 그대로
왔던 것이다.
"우리 집에서 갈아입어도."
"당신 집에서? 루젤 부인이 있잖아?"
"루젤 부인 따윈 문제가 안돼요."
웨이터가 와인을 가지고 오더니 뚜껑만 열고 따르지는 않았다. 그는 고개를
한쪽으로 돌리고 잔뜩 귀를 기울였다.
"또 왔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왜 그러는지 이유를 들을 필요가 없었다. 순간 방안의 모든 소음을 죽이며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엘리지베스의 컵에 든 물이 찰랑거렸다.
"가장 가까운 지하실이 어디지?" 그레버는 학에게 물었다.
"호텔 안에 있습니다."
"그곳은 호텔 손님의 전용 아닌가?"
"당신도 손님이십니다. 지하실은 매우 견고합니다. 보통 지하실보다 안전하게
만들어졌지요."
"알았어. 그건데 위이너슈니설은 어떻게 되지?"
"그건 염려 없지만 지하실에서 드릴 수는 없습니다. 양해를 바랍니다."
"잘 알지."
그레버는 학의 손에서 술병을 빼앗아 잔에 가득 부어서 엘리자베스에게 주었다.
"이것을 마셔."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빨리 대피해요."
"아직 시간이 있어. 저건 최초의 경보니까 아무 것도 아닐는지도 몰라. 자, 술이나
마셔. 조금도 겁낼 필요가 없어."
"이분 말씀이 맞습니다." 학이 말했다.
"이런 귀중한 와인을 한 번에 마셔버리긴 아깝지만 이것은 특별한 경우니까."
학은 창백한 얼굴로 억지 웃음을 지었다.
"손님." 그는 그레버를 똑바로 쳐다봤다.
"전에는 하늘에 대고 소원을 말했지만 지금은 저주하고 있습니다. 참, 큰일입니다."
그레버는 엘리자베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서 마셔! 시간은 아직도 많아. 한 병쯤은 충분히 비울 수 있어."
엘리자베스는 술잔을 들더니 천천히 마셨다. 어떤 결연한 각오가 선 듯한
그러면서도 쫓기는 것 같은 몸짓이었다. 그녀는 컵을 놓고 싱긋 웃었다.
"조금도 겁나지 않아요. 나도 이런 일엔 익숙해져 있어요. 보세요. 그런데 내 몸이
왜 이렇게 떨리지요?"
"당신이 떨고 있는 게 아냐. 떨고 있는 건 당신이 지닌 생명이야. 그건 용기와는
관계가 없어. 용기는 자기 몸을 지킬 수 있을 때 솟아나는 거야. 그밖에는 모두
쓸데없는 허영이지. 우리에게 부여된 생명은 우리 자신보다 훨씬 이상적이지."
"알겠어요. 내게도 나눠주세요."
"저의 집에서는." 학이 두 사람 사이에 끼여들었다.
"우리 애는 지금 폐병을 앓고 있습니다. 겨우 열한 살입니다. 마누라가 그애를
지하실로 데리고 내려갈 때마다 무척 애를 먹지요. 그래도 저는 마누라를 도와줄 수
없습니다. 여기를 떠날 수 없으니까."
그레버는 다른 테이블에서 술잔을 집어다가 술을 가득 부어서 학에게 권했다.
"자, 우리 건배하자구. 고참병들의 사고방식은 모두 같지. 급할수록 침착하게
행동하라. 그렇지 않은가?"
"입으로 말하긴 쉽지만."
"맞았어. 우린 목석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니까. 자, 한 잔 쭉 들이켜 보세."
"근무 중에는 술을 못 합니다."
"이것은 특별한 경우야. 아까 당신이 말한 것처럼."
학은 주위를 살피고 나서 잔을 받았다.
"당신의 승진을 축하하는 뜻에서 건배를 해도 좋겠습니까?"
"무엇을 축하한다고?"
"하사관으로 승진한 것으로 축하하겠습니다."
"고맙군. 당신은 너무 날카로운 눈을 가졌군."
웨이터는 잔을 내려놓았다.
"도저히 단숨에 마셔버릴 수 없습니다. 이런 최고급 술을 그렇게 할 순 없지요.
아무리 특별한 경우라 해도 말입니다."
"과연 당신은 도사야. 그럼 그대로 가지고 가지."
"고맙습니다."
그레버는 엘리지베스의 잔에도 다시 와인을 따랐다.
"나는 우리가 얼마나 냉정한가를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이러는 게 아니야. 공습을
받을 때는 있는 대로 모조리 마셔버려야 돼."
엘리자베스는 그의 군복을 쳐다보았다.
"지하실에 장교들이 우굴우굴할 텐데 괜찮을까요."
"그런 걱정은 마, 엘리자베스."
"왜죠?"
"자연스럽게 행동하면 되지."
"그러면 발각되지 않나요?"
"쉽게 발각되지 않아. 남의 눈치를 보면 오히려 쉽게 발각되는 수가 있어."
술 저장고의 일부를 시멘트로 보강해 방공호로 만들어 놓았다. 의자와 테이블이
여기저기 놓였고 바닥에는 융단이 깔려 있었다. 벽은 새롭게 흰칠을 하고 라디오까지
갖추었으며 식기 선반에는 술잔과 함께 술병이 놓여 있었다. 그야말로 일류호텔의
방공호다웠다.
그들은 구석의 빈자리로 갔다. 손님들이 자꾸 몰려들었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 흰
야회복을 입은 아름다운 부인이 유독 눈에 띄었다. 그녀는 등을 완전히 노출시키고,
양쪽 팔에는 번쩍거리는 팔찌를 하고 있었다. 잉어처럼 얼굴이 조잡스러운 사내가
부인의 바로 뒤에 붙어서 오고 웨이터와 그들의 조수가 나타나서 병을 따기 시작했다.
"우리도 술을 가지고 올 걸 그랬지?"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연극이 지나치군."
"그럴 필요는 없어요."
엘리자베스의 말이 옳다. 쟁반을 돌리고 있는 웨이터를 성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것은 용기가 아니라 경박한 짓이다. 위험은 너무나도 분명하므로 저런 경박한
행동으로는 가려지지 않는다. 그것이 어느 정도로 심각하느냐는 무수한 죽음이 따른
후에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두번째 경보다." 누군가가 말했다.
"쳐들어온다!"
그레버는 그의 의자를 엘리자베스에게 밀었다.
"난 아무리 마음을 굳게 먹어도 무섭기만 해요."
"나도 그래." 그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그녀는 몹시 긴장 돼 있었다. 그는
갑자기 보호본능이 일어나서 팔에 힘을 주었다. 그녀는 위험을 깨닫고 몸을 도사리는
연약한 새에 불과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을 의미했다. 그녀는 불안감을 결코 숨기지
않았다.
그는 금발의 여인과 함께 들어왔던 사내가 자기를 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얼굴이
깡마른 중위였다. 금발의 여인이 웃었다. 옆 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내들의 시선이
일제히 여자에게 쏠렸다.
약한 진동으로 지하실이 떨렸다. 뒤따라 폭발의 굉음이 일어났다. 사람들이
수근거리는 소리가 딱 멎었다. 그러자 일부러 내는 듯한 웃음소리가 크게 이어지더니
세 번의 폭발음이 연달아서 들려왔다.
그레버는 엘리자베스를 꼭 껴안고 있었다. 금발 여인의 웃음소리도 그쳤다. 격렬한
충격이 지하실을 심하게 진동시켰다. 웨이터는 쟁반을 바닥에 놓고 배선함의 나선형
기둥에 매달렸다.
"당황하지 마!" 한 사람이 크게 외쳤다.
갑자기 벽이 흔들리더니 길게 금이 그어졌다. 소리를 내면서 전등이 깜박거렸다.
경련하는 불빛 아래로 모여있는 사람들 모습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불빛이
빛났을 때, 야외복을 입은 아름다운 여인이 그대로 앉아 있었다. 다시 번쩍거렸을 때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세 번째는 암흑 속으로 달아나려고 했다. 네 번째는 모두가 여자를
붙잡고 있었으며 그녀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때 불은 완전히 꺼져버리고 수없이
메아리치면서 반항하는 굉음 속에 지구의 전 중력이 빨려들어가 지하실이 둥둥 뜨고
있는 것 같았다.
"전기가 나갔을 뿐이야, 엘리자베스." 그레버는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어디서 전선이 끊어진 거야. 그뿐이야. 호텔은 아직 괜찮아."
그녀는 그에게 찰싹 붙어 있었다.
"양초! 성냥!"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어디 양초가 있을 텐데. 제기랄, 어디 있지? 회중 전등은 어디 있나?"
성냥불이 몇 개 켜졌다. 그것은 지하의 거대한 공간에서 작은 도깨비불처럼 보였다.
성냥불은 얼굴만을 겨우 비추고 있었다.
"이 호텔은 비상용 전등을 준비하지 않고 있나? 웨이터는 어디로 갔어?"
여기저기서 불빛이 움직이며 어지럽게 흔들렸다. 그럴 때마다 야외복을 입은 여인의
등, 번쩍번쩍 빛나는 보석, 멍청하게 벌린 입이 드러났다.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흐느끼는 소리가 차츰 강해지면서 미칠 것 같은 신음이 되어
견딜 수 없게 했다. 마치 거대한 강철의 유성이 일직선으로 지하실에 부딪치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격동했다. 불꽃이 흔들렸다가 금방 껴졌다. 지하실은 이미 허공에
떠 있지 않았다. 요란한 굉음이 모든 것을 분쇄하여 공중에 집어던지는 것 같았다.
그레버는 머리가 천장으로 튀어 오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두 팔로 엘리자베스를
힘주어 껴안았다. 그는 몸을 그녀에게 던져 바닥으로 쓰러뜨리면서 그녀의 머리 위로
의자를 .끌어당겼다. 그런 다음에 의자를 벽에 붙이고 천장이 내려앉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허물어지고 쪼개지고 하면서 우르르 쾅 폭음이 들려왔다. 거대한 괴수의 손아귀가
지하실을 송두리째 집어 던져서 폐나 위장이 몸집으로부터 빠져 나가는 둣 했다.
사람들은 이번에야말로 최후의 암흑과 질식이 몰려들 것이라고 생각하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최후의 순간 대신 거짓말처럼 지하실 안이 환해졌다. 바닥으로부터 불기둥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야외복을 입은 여인이 비명을 질렀다.
"난 죽고 싶지 않아! 사람 살려! 살려 줘요."
여자는 깡충깡충 뛰면서 두손으로 몸을 두드렸다. 그럴 때마다 손 밑으로 불꽃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군복이 여자의 몸에 덮여지며 그녀를 바닥으로 쓰러뜨렸다.
여자는 몸을 뒤틀며 울부짖었다. 그것은 어떤 굉음보다도 요란스러운, 도저히 인간의
소리라고 생각할 수 없는 괴성이었다.
그레버는 그의 밑에 깔려있는 엘리자베스의 머리를 가까이 끌어당기고 두 손으로
그녀의 귀를 막아 주었다. 마침내 화염이 사라졌다. 비명과 흐느끼는 소리는 의복과
살, 머리카락이 타는 냄새로 변했다.
"의사, 의사를 데리고 와! 의사는 어디에 있나?"
"뭐라고?"
"병원으로 데리고 가야 해! 제기랄! 앞을 볼 수 있어야지. 이 여자를 여기서
끌어내야 해."
"지금 바로?" 누군가가 물었다.
"어디로?"
모두들 잠자코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밖에는 고사포가 미친 듯이 포탄을 쏘아댔다.
그렇지만 폭격은 이미 끝나고 있었다.
"가버렸다! 끝났다!"
"잠깐 동안 이대로 있어." 그레버는 엘리자베스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움직이면 안 돼. 폭격은 이미 끝났어. 그러나 잠시 기다려 봐야 해. 또 다시 적기가
나타날지도 모르니까."
그때 국민학교 선생님 같은 엄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도 밖은 안전하지 않다. 고사포의 파편이 위험해!"
둥근 빛이 입구로부터 들어오고 있었다. 회중 전등의 불빛이었다.
바닥에 엎어져 있던 여지가 다시 비명을 질렀다.
"안돼요! 안돼요! 불을 끄세요!"
"불이 아니라 회중 전등이야."
암흑 속에서 꺼질 듯한 불빛이 흔들렸다.
"여기야. 이리로 오란 말야! 누구야? 그것을 갖고 있는 사람이 누구냐고?" 빛은
재빨리 방향을 돌리며 당황하고 있는 얼굴들을 비추기 시작했다.
"지배인 프리츠입니다. 식당이 무너져서 더 이상 여러분을 모실 수 없습니다.
계산을 해주시길 바랍니다."
"뭐라고?"
프리츠는 회중 전등의 불빛이 자신의 얼굴을 보이게 했다.
"공습은 끝났습니다. 그래서 계산서를 가지고."
"뭐야!"
"여러분." 프리츠는 암흑을 향해서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레스토랑에 대해서 모든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소리가 어디 있어!" 한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우리를 사기꾼으로 아나? 네 얼굴만 비추지 말고 이리로 와! 부상자가 있어."
프리츠는 다시 암흑 속으로 사라졌다. 불빛이 벽과 바닥 위를 방황하다가 군복
덩어리 위에서 정지했다.
"이게 뭐야!" 사내는 고함을 질렀다. 와이셔츠의 소매가 창백하게 보였다.
사내는 뒤로 물러났다. 이번에는 사내의 두 손을 비췄다. 지배인이 후들후들 떨고
있는 게 눈에 띄였다. 군복을 들어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그 사내는 다시 한 번 말했다.
"보지 마." 그레버는 엘리자베스에게 말했다.
"흔히 있는 일이야. 어디서나 벌어지고 있지. 공습은 아무 관계도 없어. 그러나
당신은 시내로 가서는 안돼. 공습이 없는 시골로 내가 데려다 주겠어. 내가 잘 아는
마을인데 그곳 사람들이 당신을 보호해 줄 거야. 우린 거기서 살 수 있어."
"들 것 갖고 와!" 무릎을 꿇고 있던 사내가 말했다.
"호텔에 들것이 있나?"
"네, 그런데 저, 저."
지배인은 그 사내의 계급을 알 수 없었다. 그가 입고 있던 군복의 상의는 다른
것들과 함께 여자 옆에서 뒹굴고 있었다. 그는 지금 허리에 단검을 차고 있을
뿐이었다.
"계산서 얘기는 죄송합니다." 프리츠는 풀이 죽어 있었다.
"부상자가 생겼으리라고 미처."
"빨리 들것이나 갖고 와! 아니, 내가 직접 가겠어. 밖으로 빠져 나갈 순 있나?"
"네."
사내가 바닥에서 일어나 상의를 걸치자 순식간에 소령으로 변했다. 불빛이 꺼졌다.
그와 함께 희망도 사라져 버리고 오직 여자의 흐느껴 우는 소리만이 남았다.
"완더!" 격렬한 남자의 목소리가 났다.
"완더, 우린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이제는 나가도 되겠지?" 누군가가 물었다.
"해제를 알리는 사이렌이 울리지 않았어." 학교 선생의 목소리였다.
"해제고 뭐고 알게 뭐야, 불은 어디에? 불은."
"의사가 필요해."
"완더!" 다시 격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벨하르트에게 뭐라고 말하면 되지? 뭐라고 말야."
"싫어! 싫어! 불은 싫어!" 여자가 부르짖었다.
불빛이 반짝했다. 이번에는 소령이 직접 램프를 들고 있었다. 그 뒤로 연미복을
입은 웨이터 두 사람이 들것을 들고 따라왔다.
"전화도 안돼." 소령이 말했다.
"전화선이 끊어졌어. 들것을 이리로!"
그는 램프를 바닥에 놓았다.
"완더!" 역시 그 사내였다.
"비켜!" 소령이 명령했다.
"그런 것은 나중이야."
그는 여자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이만하면 됐어. 곧 잠이 들겠지.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서 피하 주사 한 대를 남겨
놓고 있었지. 조심해서 들것에 태워!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구급차를 세워야 해!"
"알겠습니다. 소령님." 프리츠는 굽신거리며 말했다.
들것이 흔들리면서 밖으로 나갔다. 불에 타서 머리카락이 없어진 새까만 얼굴이 들
것 위에 실려 있었다. 여자의 몸은 테이블 덮개로 가려졌지만 움직일 때마다 유난히
젖가슴이 출렁거렸다.
"죽었나요?" 엘리자베스가 물었다.
"아냐. 위기는 면했어. 다시 머리카락이 나겠지."
"얼굴은?"
"눈은 뜨고 있었어. 상처는 별로 대단치 않아. 곧 깨끗해질 거야. 난 화상입은
사람들을 많이 봤지만 이건 그리 심한 게 아냐."
"도대체 어떻게 저런 끔찍한 일이 생겼지요?"
"옷에 성냥불이 붙은 거야. 너무 가까이 대고 성냥을 켰어. 이 지하실은 정말
훌륭해. 직격탄을 견뎌냈으니까."
그레버는 엘리자베스 머리맡에 세워놓았던 의자를 치우다가 깨진 유리조각을
밟았다. 주바의 문이 파괴되고 술병이 깨져 도처에 흩어지고 술은 검은 기름처럼 온
바닥에 흐르고 있었다.
"잠깐만." 그는 엘리자베스를 기다리게 하고 외투를 들었다. 그는 술 저장고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왔다.
"자, 가 볼까?"
호텔 밖에 여자를 태운 들것이 서 있었다. 웨이터들이 휘파람을 불어서 구급차를
불렀다.
"도대체 에벨하르트는 뭐라고 할까?" 뒤따라 오던 사내가 역시 격렬하게 말했다.
"아아, 참으로 재수가 없군! 그에게 무슨 말을."
에벨하르트는 그녀의 남편일 것이라고 그레버는 생각했다. 그는 어느 웨이터의
어깨를 짚었다.
"주연실의 웨이터는 어디 있지?"
"누구 말입니까? 오토입니까, 카알입니까?"
"학처럼 생기고 키가 작달막한 노인인데."
"오토로군." 웨이터가 그레버를 바라보았다.
"오토는 죽었습니다. 주연실의 천장이 내려앉아 밑에 깔리고 말았습니다."
그레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난 아직 계산을 안 했는데. 술 한 병이야."
웨이터가 이마에 땀을 닦았다.
"제가 받기로 하겠습니다. 무엇을 드셨지요?"
"요하니스베르게르 카렙베르그."
"최고급으로?"
"그래."
웨이터는 주머니에서 가격표를 꺼내 회중 전등을 비췄다.
"4 마르크입니다. 팁을 포함해서 4 마르크 반입니다."
그레버는 그것을 지불했다. 웨이터는 돈을 받아서 급히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레버는 그가 돈을 횡령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폐허를 따라 걸었다. 시가지 한 쪽이 빨갛게 타오르고 있었다. 하늘은
회색과 진홍으로 뒤섞이고 바람은 검은 연기를 사방으로 보냈다.
"당신 집이 괜찮나 가 볼까?"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우린 휴식이 필요해요."
그들은 처음 만났을 때 함께 들어간 적이 있는 방공호가 있는 광장으로 나왔다.
그곳은 마치 지하의 세계로 통하는 입구처럼 암흑 속에서 커다란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들은 공원의 벤치에 앉았다.
"배가 고프지? 당신은 아무 것도 먹지 않았어."
"괜찮아요. 지금은 먹을 수가 없잖아요."
그는 외투를 펼치고 주머니에서 술병 두 개를 꺼냈다.
"무엇을 들고 왔는지도 모르겠군. 이건 아마 코르크인가 봐."
엘리자베스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보았다.
"어디서 가지고 오셨어요?"
"술 저장고에서 가지고 왔지. 문이 파괴되고 술병이 모두 박살나 있었어."
"몰래 들고서?"
"물론이지. 활짝 열려져 있는 술 저장고를 보고도 모른 척하는 병사는 좀 모자라지.
군대는 십계 같은 게 해당 안돼."
"그렇겠군요." 엘리자베스는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어울리지 않는 건 또 얼마든지 있어요." 그녀는 웃고 있었다.
"당신에 대해서 과연 난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당신은 이미 지나치게 많이 알고 있어."
"당신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아요. 내 앞에 있는 당신은 원래의 당신이 아니에요."
그레버는 외투에서 병 두 개를 더 꺼냈다.
"이건 병 따개가 필요없어. 삼페인이야." 그는 마개를 감고 있는 철사를 벗겼다.
"이것을 마실 때 도덕적인 자책감 같은 건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그런 건 조금도 느끼지 않아요."
"우린 지금 목이 마르고 이것밖에 마실 것이 없으니까 이것을 마시는 거야. 우리는
아직 살아 있으니까."
엘리자베스는 씽긋 웃었다.
"그걸 일부러 설명하지 않아도 돼요. 다른 얘기를 해요. 당신은 술병을 네 병씩이나
몰래 갖고 왔으면서 왜 홀에서 마신 건 지불을 하셨죠?"
"그것은 처음부터 술값을 내기로 하고 주문한 것이니까. 그 값을 내지 않으면
떼어먹게 되는 셈이지."
주위는 정적에 싸였다. 붉은 노을이 점점 번져가고 있었다. 이 특이한 빛이 모든
것을 비현실적으로 만들었다.
"잠깐 저기 있는 나무를 보세요."
"꽃이 나고 있어요."
그레버는 그 나무를 보았다. 폭격으로 인해 거의 땅 속에서 뽑혀져서 뿌리의 일부가
허공을 향해 늘어지고, 나뭇가지가 잘려져 나간 나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얀
꽃이 활짝 피고, 그것은 저녁놀을 받아 적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저 나무 옆에 있는 집이 불에 탔어. 아마도 그 열기가 꽃을 피울 수 있었을 거야."
엘리자베스는 일어나 나무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벤치의 그늘에서 붉은
빛 속으로 들어갔다. 마치 무용수가 조명이 켜진 무대에 등장이라도 하듯이. 빛은
바람 속에 그녀를 밀어넣고 세계의 종말이나 구세주의 탄생을 고지하는 중세기의
혜성처럼 그녀의 등 뒤에서 타올랐다.
"활짝 피었어." 그녀는 중얼거렸다.
"이 나무는 지금 완전한 봄이로군요. 다른 건 전혀 문제가 안돼요."
"그래. 나무는 우리에게 중요한 걸 가르쳐 주고 있어. 오늘 오후 난 보리수에게서
많은 걸 느꼈는데 이번에는 이 나무에게 배우는군. 나무는 자라서 잎을 만들고 꽃을
피게 하지. 비록 찢기고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땅 속에 뿌리를 뻗고 성장을 멈추지
않아. 결코 불평을 하거나 자기 자신을 동정하는 일이 없어."
엘리자베스는 천천히 그레버에게로 다가왔다. 그녀의 얼굴은 광선에서 빠져나오듯이
암흑 속에 던져진 그의 곁에서 다시 따뜻하고 싱싱한 숨결을 내뿜었다. 그는 그녀를
자기에게로 끌어당겼다. 갑자기 나무는 하늘을 향해 힘차게 가지를 뻗고 만개한 꽃은
눈을 가리고 보리수가 되고 대지가 되고 하늘이 되고 엘리자베스가 되었다. 그는 그녀
안에서 숨쉬고 있었다.그녀는 그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15
48 호실은 매우 동요되고 있었다. 계란 머리와 도박에 빠져 있던 두 사내는
일선으로 복귀할 준비를 했다. 그들은 병역 가능자로 판명되어 수송대와 함께
전선으로 출발하려는 중이었다.
계란 머리는 새파랗게 질려서 로이타를 잔뜩 노려보고 있었다.
"멀쩡한 다리를 하고 있으면서! 기피자! 넌 남게 됐지만 한 집안의 가장인 난
전선으로 끌려가게 되었어!"
로이타는 침묵을 지켰다. 펠드만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봐! 넌 로이타 대신에 일선으로 끌려가는 줄 아나. 넌 병역 가능자이기 때문이야.
알았나? 바보같은 소린 그만두시지."
"난 하고 싶은 말은 참지 못한다." 계란 머리는 소리를 질렀다. "난 죽으러 가니까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네놈들이 여기 남아서 먹고 싸고 놀음을 하는 동안 난
일선으로 끌려가서 전투를 해야 돼. 난 일가의 가장이야! 그런데 저기 앉아 있는 저
꾀병쟁이는 다리를 불리려고 물만 잔뜩 퍼 마시고 있어!"
"그건 너도 할 수 있었을 텐데?" 로이타가 물었다.
"내가? 천만에! 난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도 책임을 회피한 적이 없어."
"그렇다면 불평할 게 없잖아."
"뭐?" 계란 머리는 헛점을 찔리자 얼굴을 붉히며 씩씩댔다.
"넌 네 스스로 비겁하지 않다는 걸 자랑으로 알지. 그런데 왜 불평만 일삼지? 그
자랑을 위로 삼아서 얌전히 좀 계시지."
"뭐라고? 뭣 때문에 걸고 늘어지는 거야! 넌 그런 짓밖에 할 수 없지. 이
돼지새끼야! 그러다가 너도 걸려들 줄 알아. 내가 네 놈을 가만둘지 알아?"
"제발," 병영 가능자로 편입된 또 한 사람이 끼여들었다.
"자, 빨리 나가봐야지!"
"저 주정뱅이 대신 가장인 내가 일선으로 끌려가야 하는 법이 있는가 말야. 난 다만
공평하게 처리해 주기를 바랄 뿐이야."
"공평 좋아하네. 넌 군대에서 그런 게 존재한다고 생각하나? 자, 가자. 이것 봐,
우린 뭐 그렇다고 해서 기피자들을 고발할 생각은 없어. 그저 입으로만 떠들고 있을
뿐야. 그럼 잘 있게! 몸조심들 하라구."
도박을 하고 있던 두 사내는 미친 듯이 날뛰는 계란 머리를 질질 끌고 나갔다.
창백한 얼굴에 식은 땀을 흘리며 뒤돌아서서 욕설을 퍼붓는 계란 머리를 두 사내가
밖으로 밀어냈다.
"바보 같은 놈!" 펠드만은 로이타에게 말했다.
"일류 배우답게 연극도 잘도 하는군! 내가 휴가를 잠으로 채운다고 놈이 떠들어대던
일을 기억하지?"
"그잔 많이 잃고 있었어." 갑자기 룸메르가 말했다. 그때까지 그는 구경만 하고
있었다.
"33 마르크야! 그 돈을 돌려주려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수송대는 아직 출발하지 않았으니까."
"뭐라고?"
"그 녀석은 아직도 밖에 있어. 그렇게 마음에 걸리면 돈을 돌려 주면 되잖아?"
룸메르는 밖으로 나갔다.
"저 녀석도 돌았군." 펠드만이 말했다.
"전쟁터에서 돈으로 대체 무엇을 하지?"
"또 도박을 하면 되지."
그레버는 창가로 갔다. 분견대가 집합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이들과 노인만 보이는군." 로이타가 말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이곳에 이르기까지 사람만 만나면 남김없이 사로잡았지."
분견대는 정렬을 했다.
"룸메르는 왜 그러지?" 펠드만이 깜짝 놀라면서 물었다.
"저 녀석, 또 떠들어대기 시작했어!"
펠드만은 잠옷 차림이었다.
"계란 머리가 저기 서 있는데, 잠을 자면서 전선의 꿈을 꾸는 것과, 전선에서 고국을
꿈꾸는 것 중에서 어느 편이 좋은지 직접 체험할 수 있겠지."
"우리도 곧 그렇게 된다!" 로이타가 말했다.
"다음은 내 차례야. 군의관 녀석은 '참다운 독일 민족은 도망가기 위한 다리는
필요없어. 앉아서라도 싸워야 된다.'고 하더군."
구령 소리가 들리더니 마침내 분견대는 출발했다. 그레버는 마치 망원경을 거꾸로
들고 보는 것처럼 그것을 바라보았다. 점점 멀리 사라져 가는 병사들은 어느새 장난감
총을 지닌 인형이 되어 있었다.
"계란 머리가 불쌍하군." 로이타가 말했다.
"그 녀석은 나에게 화를 냈다기보다 자기 아내에게 화를 낸 거야. 일선으로 떠나면
아내가 자기를 배반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어. 마누라가 결혼수당을 받는 걸 생각하면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 마누라가 정부와 놀아나는 동안 한 푼도 남지 않을 테니까."
"결혼 수당? 그런 것도 있었나?" 그레버가 물었다.
"도대체 넌 어디 가 있었나?" 펠드만이 고개를 흔들었다.
"월 200 마르크라는 돈이 여자 손으로 들어오게 되어 있지. 굉장하지? 여자들은
그것 때문에 군인하고 결혼하기를 원해."
로이타가 창가에서 뒤를 돌아보았다.
"자네 친구인 빈딩그가 왔었어."
"무슨 일로? 혹시 남긴 말이라도?"
"집에서 파티가 있다고 꼭 참석해 달래."
"그것뿐이야?"
"그래."
룸메르가 들어왔다.
"계란 머리를 만났나?" 펠드만이 물었다.
룸메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는 아내가 있어." 그는 가뿐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말을 했다.
"그런데도 전쟁터로 가야 하다니."
그는 얼른 돌아서서 침대에 몸을 던졌다.
"계란 머리가 저런 꼴을 본다면!" 펠드만이 속삭였다.
"저 녀석은 내버려 둬." 로이타가 나무라듯이 말했다.
"너도 언제 우는 소리를 하게 될지 몰라. 안심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
몽유병자 역시도." 그는 그레버를 보았다.
"넌 얼마나 남았나?"
"열흘."
"열흘! 아직도 그렇게 많이!"
"지금까지는 지루했지만 오늘 아침에 눈을 뜨니 너무 짧더군."
"아무도 없어요."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루젤 부인도, 아이들도 모두 없어요. 오늘은 우리가 독차지했어요."
"좋았어! 오늘밤 그녀가 한마디라도 잔소리를 한다면 죽이려고 작정하고 있었어.
어젯밤에도 말다툼을 했나?"
"그 여잔 나를 매춘부 보듯 해요."
"어째서? 어젯밤 우리가 여기서 한 시간밖에 같이 있지 않았을 텐데!"
"그저께 당신이 여기서 밤을 지샌 일이."
"우린 단단히 잠그고 축음기를 틀고 있지 않았는가 말야, 도대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
"모르겠어요." 엘리자베스는 살며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이 그레버의 눈과 마주쳤다. 처음 만났을 때, 내 눈은 도대체 어디에 붙어
있었던 것일까?
"그런데 암늑대는 대체 어딜 간 거야?"
"아이들을 데리고 농촌으로 갔어요. 구호모금을 위해서죠. 내일 밤까지 돌아오지
않아요. 오늘밤과 내일 낮 동안은 우리만의 세상이에요."
"내일까지! 당신 공장에서 일해야 되겠지?"
엘리자베스는 웃었다.
"내일은 일요일인걸요. 일요일엔 쉬고 있어요."
"일요일! 난 전혀 몰랐어! 그러면 밝은 대낮에 당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군.
우린 언제나 밤에만 만났지."
"정말! 그랬었군요." 엘리자베스는 깜짝 놀라면서 말했다.
"나도 밝은 낮에 당신의 모습을 본 적이 없어요." 그녀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눈길을 돌렸다.
"우린 열에 들뜬 것 같은 생활을 하고 있어요."
"다른 수가 없잖아?"
"그렇긴 해요. 내일 대낮에 서로의 모습을 마주본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은 하느님에게 맡기기로 하지. 오늘밤은 어젯밤 갔던 레스토랑으로 갈까?
게르마니아가 문을 닫아서 아쉽군."
"집에서 보내기로 해요. 내가 요리를 만들어 드릴게요."
"여기서?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아?"
"루젤만 없으면 여긴 낙원 같아요."
"그럼, 여기 있기로 하지. 음악이 없는 밤이라 아마도 멋질 거야. 난 당신을
두고 돌아가지 않아도 되고, 저녁식사는 어떻게 하지? 당신, 정말로 요리를 할 줄
아나?"
"해 볼게요. 배급을 조금 받은 것 외엔 요리할 만한 게 없거든요."
두 사람은 부엌으로 갔다. 그레버는 엘리자베스가 배급받은 것을 바라보았다. 거의
아무 것도 없었다. 약간의 빵과 꿀벌 대용품, 마가린과 계란 두 개, 사과 몇 개가
전부였다.
"아직 배급표가 남아 있으니까 받아 올 수도 있어요."
그레버는 서랍을 닫았다.
"배급표는 그냥 두라고. 필요할 때가 있을 테니까. 오늘은 다른 수단을 강구해야지."
"집안에선 아무 것도 손을 댈 수 없어요." 엘리자베스는 놀란 것 같았다.
"루젤 부인은 자기 물건을 훤히 알고 있어요."
"난 절대로 도둑질할 생각은 없어. 적국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처럼 징발하러 나갈
뿐이야. 알폰스 빈딩그란 사내가 나를 파티에 초대했어. 파티에 참석해야지! 날 위해
준비한 음식을 잔뜩 안고 오겠어. 30분 후에 돌아오지."
알폰스는 두 팔을 벌려서 그를 환영했다.
"잘 왔네. 어서 들어오게! 오늘은 내 생일이야! 친구들이 몇 명 와 있지."
실내는 담배 연기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알폰스." 그레버는 복도를 지나면서 급히 말했다.
"난 곧 돌아가야만 해."
"돌아간다고? 에른스트, 도대체 그런 말이 어딨어?"
"자네가 초대했다는 걸 알기 전에 선약을 한 사람이 있어."
"무슨 상관인가! 갑자기 공식적인 회합에 출석하게 됐다고 하면 돼." 알폰스는 크게
웃었다.
"게슈타포의 장교 두 사람이 와 있어! 당장 소개해 주지. 약속한 친구에게
게슈타포에 끌려갔었다고 들러대게. 그러지 말고 이리로 데려오든지."
"그건 안돼."
"어째서? 우리에게 불가능은 존재하지 않아."
그레버는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알폰스, 벌써 짐작했을 텐데. 네가 생일축하 파티를 열 줄은 전혀 몰랐어. 난 네게
먹을 것 좀 얻으려고 들른 거지. 난 지금 누군가를 만나러 가야 하는데 여기로 데리고
올 수는 없어. 이제 짐작하겠나?"
빈딩그는 잇몸까지 보이면서 웃었다.
"알았어. 영원히 행복을 약속한 여성인가? 마침내 행동을 개시했군! 자넨 틀렸다고
체념했는데 그만하면 알겠어. 그래, 좋아. 그렇지만 여기도 괜찮은 여성이 둘이나
있어. 어때, 한번 만나보지 않겠어? 아르마란 여성은 참으로 유쾌한 여자야
저기 하이힐을 신은 금발말야. 그녀는 부인 강제수용소의 소장이야. 네가 마음에
있다면 오늘밤 톡톡히 재미를 볼 수 있지. 저 여잔 일선 장병이라면 누구라도
좋으니까. 참호의 냄새가 그녀를 흥분시키는 모양이야."
"난 그렇지도 않아."
알폰스는 입술을 깨물며 웃었다.
"아르마의 몸뚱이에서 풍기는 강제 수용소의 냄새를 맡으면 자네도 참을 수 없을걸.
슈테게만이란 녀석은 완전히 빠져 있어. 소파에 앉아 있는 저 뚱보가 바로 그
주인공이야. 내 취향은 아니지. 저기 구석에 있는 아담한 아가씬 어떤가?"
"일류인데."
"그래? 마음에 든다면 얼마든지 양보하겠네."
그레버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수는 없어."
"알았어. 그렇다면 자네가 발견한 여성은 확실한 상류층이겠군. 좋아, 양해하지. 이
알폰스도 신사야. 우선 부엌으로 가서 자네가 좋아하는 걸 찾아볼까? 그런 다음에
축배를 드는 거야. 딱 한 잔이라구. 어떤가?"
"좋아."
부엌에는 크라이네르트 부인이 흰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야유회의 진수성찬이다! 자넨 운이 좋아! 뭣이든 좋아하는 걸로 가지고 가게. 아니
크라이네르트가 멋지게 포장해 놔요. 우린 지하실에 갔다올 테니까."
지하실에는 구경하기도 힘든 물건들이 잔뜩 저장되어 있었다.
"모든 건 알폰스에게 맡겨."
빈딩그는 싱글싱글 웃었다.
"만족스럽게 해주지. 자, 첫 개시로 프랑스제 통조림 두 개를 받게나."
그레버는 통조림을 받았다. 알폰스는 여기저기를 뒤졌다.
"네덜란드에서 온 아스파라거스가 두 통. 그대로 먹어도 되고 데워 먹어도 좋아.
그리고 여기 프라하의 햄이 한 통. 복숭아 통조림도 있군. 그것보다도 딸기가 좋지
않을까?"
그레버는 번쩍번쩍 빛나는 장화를 신고 앞에 서 있는 짧은 다리를 보았다. 그
다리를 사이에 두고 특산품과 통조림이 높게 쌓여 있었다. 문득 엘리자베스의 초라한
배급품이 떠올랐다.
"두 가지 다 가져갈 수 있다면 좋겠지."
알폰스는 이를 드러냈다.
"맞았어! 마침내 자네도 옛날도 돌아갔군. 에른스트, 세상을 비관해 봤자 별수 없어.
안되는 건 어차피 안돼. 손에 들어오는 건 꽉 움켜잡아. 걱정 따윈 목사에게 맡겨
두라구."
알폰스는 사닥다리에서 내려와 다른 지하실로 갔다. 거기에는 술병이 가득 저장되어
있었다.
"여기에도 멋진 전리품이 많아. 우리들의 적군이 이런 것 미시면 술의 신에게
노여움을 사지. 자, 무엇으로 할까? 보드카? 아르마냑? 폴란드산 매실주도 있어."
술은 게르마니아에서 갖고 온 것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나 빈딩그의 말이 옳다
전리품은 전리품이다. 네게로 가는 것은 놓치지 마라.
"샴페인도 있어. 난 이런 건 좋아하지 않지만 로맨스엔 어울리는 술이지. 한 병
가지고 가게. 이게 있다면 오늘밤은 성공이야!"
빈딩그는 호탕하게 웃었다.
"내가 즐기는 술이 무엇인지 아나? 퀸메르야. 그것도 한 병 주지. 퀸메르를
마시면서 알폰스도 생각해 주게."
두 사람은 다시 부엌으로 갔다.
"크라이네르트, 꾸러미를 둘로 나눠요. 하난 음식물, 하난 술병으로. 병과 병
사이에는 종이를 끼워서 술병이 깨지지 않도록. 이만하면 됐나, 에른스트?"
"이걸 다 가지고 갈 수 있을까?"
빈딩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알폰스는 무엇이든지 도중에 그만두는 법이 없지."
빈딩그의 눈은 번들거리고 두 뺨은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마치 새의 둥지를
발견한 소년이 흥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레버는 그의 친절에 감동했지만
알폰스가 하이니의 소련에서의 체험담을 듣고 있을 때도 지금과 같은 표정이 되었던
것을 상기했다.
빈딩그는 그레버에게 윙크를 해 보였다.
"최고급 커피도 준비했지. 그건 내일 아침 몫이야. 내일은 일요일이니까 절대로
서두르지 마라. 그럼 들어가 볼까? 내 친구를 소개하지. 게슈타포에 있는 슈미트와
호프만이야. 저들은 도움이 될 수 있는 인간이지. 잠깐이면 돼. 그리고 나를 위해서
건배해 주게. 내가 가진 모든 걸 그대로 보존할 수 있도록!"
"저것을 부엌에 놓아둘 순 없어요."
엘리자베스의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감춰야겠어요. 루젤이 보고 나를 암매상으로 밀고할 거에요."
"미처 생각을 못했군! 어떻게 매수하는 방법이 없을까? 우리에게 필요 없는 물건을
주든지."
"필요없는 것?"
그레버는 웃었다.
"당신의 소중한 벌꿀 대용품. 아니면 마가린."
"그러나 어려울걸요. 그 여잔 배급표만으로 살아가는 것을 자랑으로 아니까."
"내일밤까지 먹어치우기로 하지."
"그래도 전부 먹을 수는 없을 테니 나머진 어떻게 하지?"
"내 방에 숨겨두기로 해요. 책이나 옷 속에."
"그녀가 냄새를 맡는다면?"
"난 아침마다 자물쇠를 채우고 나가는 걸요."
"그녀가 똑같은 열쇠를 갖고 있다면?"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들었다.
"참, 그것을 생각 못했군요."
그레버는 술병을 들었다.
"그것은 내일 걱정하기로 하고 지금은 먹는 일에나 열중해 보자고. 우리의 생일로
알고 테이블 가득히 차려. 파티를 하는 거야!"
"통조림도?"
"통조림은 장식용이야. 뚜껑을 열 필요는 없어. 우선 상하기 쉬운 것부터 먹어
치우기로 하지. 술병도 나란히 세워놓고. 도둑질과 뇌물로 당당하게 입수한 전 재산을
말이야."
"게르마니아에서 갖고 온 것도?"
"물론이지. 그건 충분한 대가를 치른 거야."
그들은 테이블을 방 한가운데로 옮긴 다음에 포장지을 전부 벗기고 매실주와 코냑과
퀸메르의 마개를 땄다. 샴페인만 그대로 두었다.
"멋지군요! 그런데 무엇을 축하하지요?"
그레버는 엘리자베스에게 술잔을 넘겼다.
"우린 모든 것을 축하하는 거야. 여러 가지로 따로따로 축하할 시간이 없어. 첫째는
당신과 내가 여기 있다는 것, 또 이틀간이나 둘만이 지낼 수 있게 된 것을 축하하는
거야!"
그는 테이블을 돌아서 엘리자베스를 가슴에 안았다. 그는 그녀를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제2의 자신이 끝없는 생명력으로 잠겨드는 것 같았다. 더욱 새롭고 가슴 벅찬
희열이 그의 내부에 퍼졌다.
창은 활짝 열려 있었다. 바로 맞은 편에 보이는 집에 어젯밤 명중된 직격탄의
파편으로 엘리자베스 방의 창문은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그녀는 등화관제용의 검은
종이로 창문을 가리고, 그 위에 엷은 커튼이 쳤다. 커튼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방안은 불을 켜지 않아 어두웠다. 열어 놓은 창문으로 간간이 발자국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기침을 했다.
"도시는 거의 잠들었군요. 난 몹시 취했고요."
그들은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테이블에는 음식 찌꺼기와 마시다 남은
술병들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들은 그것을 치우지 않고 다시 배가 고파질 때까지
기다렸다. 보드카는 마셔버리고 코냑은 침대 밑의 바닥에 세워놓고 있었다.
그레버는 침대 옆의 작은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았다. 그는 어둠 속에 누워 있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 평화로운 마을에 있는 듯 했다. 샘물이 솟아나고 보리수에는
꿀벌들이 윙윙 거리며 몰려든다 멀리서 바이올린 소리가 들려왔다.
"곧 달이 뜨겠군."
이제 달이 뜰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부드러운 달빛, 단순한 생물의 행복, 그것은
이미 여기에 존재한다. 잠들지 않고 순환하는 우리의 피 속에 있다.
그는 폴만과의 대화를 떠올렸지만 그것은 아득한 옛날로 느껴졌다. 그토록 처절하게
절망하고 나서 다시 이런 정열을 발산할 수 있다는 것이 이상했다. 그러나 어차피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의문에 잠겨있는 동안은 그것 이외의 사실은 깨닫지
못하기 마련이다. 열렬히 기대했던 것이 사라져버릴 때, 비로소 새로운 눈이 뜨이고
공포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한 줄기의 빛이 창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빛은 재빨리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다.
"벌써 달이 나왔을까?"
"그럴 리가 없어요. 달빛은 저렇게 하얗지 않아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자베스는 침대에서 일어나 침실용 슬리퍼를
신었다. 그녀는 창가로 가서 살며시 밖을 내다보았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녀의 나신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그녀는 조금도 부끄러워
하지않았다.
"방공단의 작업반들이에요. 삽과 곡괭이를 들고 맞은 편 집에 모여 있어요.
지하실에 사람들이 묻혔을까요?"
"전신주를 수리하는 중인지도 모르지."
"맞아요."
엘리자베스는 그레버에게로 돌아왔다.
"난 때때로 공습이 있고 난 다음에 이곳으로 돌아왔을 때 차라리 아파트가 불에 타
버렸길 바라고 있어요. 집도 가구도 옷도 그리고 기억조차도! 당신은 이해할 수
있겠죠?"
"이해하고말고."
"그렇다고 아버지에 대한 추억까진 아니에요. 다른 것들 공포라든가,
실망이라든가, 증오 같은 것. 집이 타 버리면 그 모든 것이 끝나버리니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그레버는 엘리자베스를 응시했다. 밖에서 스며든 창백한 빛이 그녀의 어깨까지
이어졌다. 곡괭이를 내려찍는 둔탁한 소리와 삽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찬물에 담궈 둔 술병을 가져와요."
"게르마니아에서 가지고 온 것?"
"터져 버리기 전에 마셔야지. 그 대신 빈딩그가 준 술병을 담그고. 공습이 언제
있을지 몰라. 이런 탄산가스가 가득 찬 병은 쉽게 폭발하지. 집안에선 수류탄만큼이나
위험해. 잔은?"
"물 마시는 컵밖에."
"샴페인은 그게 어울려. 우린 파리에서 그렇게 했지."
"당신은 파리에도 갔었군요."
"전쟁초에 거기 있었지."
엘리자베스는 잔을 들고 그의 곁에 앉았다. 그는 천천히 뚜껑을 뽑았다. 샴페인이
컵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거품이 일었다.
"파리에선 얼마나 계셨죠?"
"약 2주일간."
"프랑스인들은 당신들을 증오하고 있었겠죠?"
"글쎄, 잘 모르겠는데. 우릴 환영하진 않았겠지. 난 그런 건 신경쓰지도 않았고 알고
싶지도 않았어. 다만 우리가 배운 사실만을 믿고 있었던 거야. 하루 속히 전쟁이 끝나
노천 카페의 양지에 앉아 이국의 포도주를 음미하고 싶었지. 그때 우리들은 아주
젊었으니까."
"젊었으니까? 마치 오래된 옛날 얘기를 하는 것 같군요."
"실제로 그렇게 생각되는 걸."
"그럼 당신이 늙었나요?"
"아직 젊지. 하지만 그 시절에 비하면 무척 늙은 것 같아."
엘리자베스는 창가에서 흔들리는 빛 한가운데로 컵을 치켜들었다.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이 컵을 흔들며 거품이 이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레버는 그녀의
어깨에 파도치는 긴 머리카락, 잔등에서 부드럽게 이어진 척골의 선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필요는 없다. 이 사람은 옷을 벗고 있을 때는 이 방도,
루젤 부인도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 사람 역시 바깥의 공포, 잠들지 못하는 밤, 지금
막 발굴하려는 사자들의 세계에 속한 사람이다. 그렇지만 우연이나 공허, 무의미한
세계의 인간이 아니다. 이미 그렇지는 않다.
"나도 당신과 함께 파리에 가보고 싶어요."
"전쟁이 끝나면 갈 수 있겠지."
"프랑스인들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줄까요?"
"그럴 거야. 파리는 조금도 파괴하지 않았으니까."
"그럼?"
"다른 나라처럼 많이 파괴되지는 않았어. 곧 끝나버렸으니까."
"그렇지만 증오를 받을 만한 것을 파괴했는지도 모르죠."
"그럴지도 모르지. 전쟁이 오랫동안 계속되면 여러 가지를 잊게되니까. 프랑스들도
우리를 증오할 수 있지."
"다른 나라로 가고 싶어요. 전혀 피해가 없는 나라로."
"그런 나라는 거의 없을 걸. 아직 마실 것이 있나?"
"네, 아직도 많이. 또 어디에 갔었지요?"
"아프리카에."
"아프리카에도? 당신은 많은 걸 보셨겠군요."
엘리자베스는 두 개의 잔에 술을 가득 부었다. 그레버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현실이 아닌 것 같았다. 그것은 술 때문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지만 모두 무의미하게만 들렸다.
"또 다른 나라에도?"
돛단배였다. 강물에 둥둥 떠 있는 돛단배를 구경한 것은 어디였을까?
"네덜란드에도 갔었지. 그것은 전쟁이 막 시작될 무렵이었어. 운하에 배가 다니고
있었어. 그 배는 돛을 달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소리를 내지 않고 미끄러지듯
나갔어."
"네덜란드. 우린 전쟁이 끝나면 그곳에 갈 수 있어요. 코코아를 마시고, 빵과
네덜란드산 치즈를 먹고, 해가 질 무렵의 돛단배도 구경할 수 있을 거에요."
그레버는 그녀를 보았다. 먹는 것. 전시 중에 인간의 행복은 먹는 것과 결부되고
있는 것이다.
"이미 네덜란드엔 갈 수 없겠지요."
"우리 군대는 그곳을 유린하고 아무 경고도 없이 노트르담을 파괴했으니까. 3 만
명의 사상자가 났어. 네덜란드에선 우리를 받아주지 않을 거야. 엘리자베스."
그녀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갑자기 컵을 바닥에 힘껏 팽개쳤다.
"결국 아무 데도 갈 수 없군요! 우린 어째서 한낱 꿈으로 스스로를 기만하는 거죠?
우린 갈 곳이 없어요. 우리는 감금됐으며 저주를 받았어요!"
그레버는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눈동자가 유리알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는 바닥을
살펴보았다.
"불을 켜고 유리조각을 모아야 돼. 잠깐 기다려요. 우선 창문을 닫을 테니까."
엘리자베스는 전등을 켜고 가운으로 몸을 가렸다. 방안이 밝아지자, 그녀는
부끄러워졌던 것이다.
"나를 보지 마세요.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당신은 훌륭해. 당신 말이 옳아. 당신은 이런 곳에 있을 만한 사람이 아니야."
"내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알고 싶어요."
그레버는 웃었다.
"그건 나도 몰라. 어쩌면 서커스가 적당할지도 모르지. 아니면 바로크식의
대저택이나. 강철로 만든 가구에 둘러싸여 있거나 천막 안에. 어쨌든 소녀의 방은
아니지. 난 당신을 처음 보았을 때 당신을 보호해 주고 싶었어!"
"난 정말 보호를 받고 싶어요."
"모두들 그럴 거야. 우린 보호도, 원조도 없이 살아왔지."
그는 신문지를 바닥에 펼쳐놓고 유리를 쓸어모았다.
'전선, 다시 단축되다. 오레르 주변의 격전.'
그레버의 눈에 신문의 제목이 크게 확대되어 들어왔다.
그는 재빨리 신문지를 뭉쳐서 휴지통에 버렸다. 밖에서 수색대의 해머소리가 높게
들려왔다. 테이블 위에는 알폰스에게 받은 선물들이 늘어 서 있었다.
"이것을 정리해야지. 더 이상 보고싶지 않아요."
"어디에다?"
"부엌에. 루젤이 오기 전에 나머진 숨겨야 해요."
"내일 밤엔 많이 줄어 있을 거야. 루젤 부인이 앞당겨서 돌아오면 어떻게 하지?"
"그래도 상관없어요."
그레버는 깜짝 놀라면서 그녀를 보았다.
"내가 하루하루 달라지는 모습에 나 역시 놀라고 있어요."
"하루하루가 아니라 매시간마다 달라지고 있어."
"당신은?"
"나도 마찬가지야."
"그것이 좋은 현상일까요?"
"그래. 그렇지 않더라도 상관없어."
"무슨 일이 일어나도 괜찮다는 건가요?"
"그렇지."
엘리자베스는 불을 껐다.
"난 숨이 막힐 것 같아요."
그레버는 창문을 열었다. 순식간에 들어온 바람으로 인해 커튼이 춤을 추었다.
"달이 떴어요."
지붕 위에 잔뜩 부풀어오른 노오란 공이 걸려 있었다. 그레버는 두 개의 잔에다
코냑을 절반쯤 따랐다. 그 중에 하나를 엘리자베스에게 권했다.
"이번에는 이걸 마시기로 하지. 어두운 곳에서는 포도주 맛이 제대로 안 나."
달이 차츰 높이 떠오르면서 금빛을 내리고 있었다. 그들은 천장을 보고 누워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돌렸다.
"우린 어떻게 될까요? 행복과 불행 중에서."
그레버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양쪽 다 해당되겠지. 이런 시대에는 당연할 거야. 행복만을 누리고 있는 건
동물밖에 없어. 아니, 동물의 행복도 완전할 순 없겠지."
"그런게 어떻든 상관없어요."
"맞아."
"중대한 일이 있기는 해요?"
"물론!"
그레버는 온 방안에 퍼지고 있는 싸늘한 빛을 느꼈다.
"우리는 아직 죽지 않았어."
16
일요일 아침이었다. 그레버는 하겐가에서 서성거렸다. 주위가 약간 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물통이 없어지고 층계가 있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처음의 통로는 벽을
돌아서 안마당으로 바뀌었고 안마당에서 사선으로 건물의 잔해를 향해서 통로가
만들어져 있었다. 작업반이 정리작업을 시작한 듯했다.
그는 몸을 움츠리고 입구를 통과하여 절반쯤 묻혀 있는 방으로 왔다. 그곳은 원래
이 집의 세탁실이 있던 자리였다. 거기서부터 낮고 어두운 통로가 이어졌다.
그는 성냥불로 앞을 비춰 보았다.
"거기서 뭐해?"
갑자기 등뒤에서 고함소리가 났다.
"빨리 나와!"
그는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지만 어두워서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밖으로
나왔다. 지팡이를 짚은 사내가 떡 버티고 서 있었다, 사내는 사복 차림에다 군용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넌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거야?" 그는 소리를 질렀다.
"난 여기에 살던 사람이오. 그런데 당신은?"
"바로 내가 여기 살고 있어. 알았나? 물론 너 같은 건 여기 살 수도 없어. 무엇을
훔쳐내려고 왔나?"
"그런 소리하지 마라." 그레버는 지팡이와 군용외투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내 부모님도 여기 살고 계셨고, 난 입대하기 전까지 여기 살았어. 알겠나?"
"누구라도 그렇게 말할 수 있지."
그레버는 사내의 지팡이를 잡고 조심스럽게 그를 밀어내면서 통로를 빠져 나왔다.
그레버가 밖으로 나오자 한 여자가 어린애를 데리고 다가왔다. 그 뒤를 또 다른
사내가 곡괭이를 들고 따라오고 있었다. 여자는 집 뒤에 세워져 있던 창고에서 나온
듯했다. 지팡이를 든 사내는 반대쪽에서 접근해 왔다. 그들은 그레버를 사이에 두고
섰다.
"왜 그래?" 곡괭이를 들고 있던 사내가 절름발이 사내에게 물었다.
"저 놈을 여기서 잡았어. 이 근처를 배회하는 게 수상쩍단 말야. 자기 부모가 여기
살고 있었다나."
곡괭이를 든 사내가 적의를 품은 웃음소리를 냈다.
"또 할 말이 있나?"
"없다." 그레버가 말했다.
"그런 건 갑자기 생각해 낼 수도 없겠지, 안 그래?"
사내는 곡괭이를 높이 치켜들었다.
"내가 셋 세는 동안 여기를 떠나라! 그렇지 않으면 골통을 부셔놓을 테니까.
하나."
그레버는 측면으로부터 덤벼들면서 그에게 일격을 가했다. 사내가 맥없이 쓰러졌다.
그레버는 사내의 곡괭이를 빼앗았다.
"이제야 속이 시원하시겠지. 자, 경찰을 부르고 싶으면 큰소리로 불러 봐!"
사내가 천천히 일어났다. 코밑으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만 두는 것이 좋을걸." 그레버는 말했다.
"난 군대에서 격투하는 방법을 훈련받았어. 자네들은 여기서 무엇을 하는 거야.
어서 말해 봐!"
여자가 앞으로 나섰다.
"저희들은 여기 살고 있어요. 그것이 왜 나쁜 일인가요?"
"나쁘다고는 할 수 없지. 난 부모님께서 여기 살고 있었기 때문에 찾아온 것
뿐이야. 그건 나쁜 일인가?"
"그럼, 그게 사실인가?" 지팡이의 사내가 물었다.
"물론이지! 도대체 여기에 훔칠 만한 것이라도 있단 말인가?"
"난 휴가로 돌아왔기 때문에 다시 가야 하오. 문 앞에 꽂아놓은 종이쪽지를 보았소?
'아버지와 어머니의 소식을 알고 싶습니다.' 라고 적혀 있는 것. 내가 쓴 것이오."
"그건 당신의 필적이었군." 절름발이가 말했다.
"물론이오."
"그렇다면. 당신도 짐작했겠지만 우린 폭격으로 집을 잃었소. 때문에 이곳에
형식적인 잠자리나마 마련했던 것이오."
"그럼, 정리도 당신들이 했소?"
"일부분이지. 모두가 일을 도와주었소."
"모두라니?"
"도구를 갖고 있는 친구들이오."
"시체가 나왔소?"
"아니오."
"정말!"
"그렇소. 전에는 있었는지 모르지만 우린 한 구의 시체도 발견하지 못했어."
"내가 알고 싶은 게 바로 그것이었오."
"그렇다면 남을 구타할 필요까진 없었을 텐데요." 여자가 말했다.
"이 사람은 당신의 남편이오?"
"그런 건 당신이 알 필요가 없잖아요? 남편이 아니라 오빠에요. 어머나 피를 흘리고
있네."
"코피정도야."
"입에서도 피가 나요."
그레버는 곡괭이를 들었다.
"이 사람은 이것으로 무엇을 하려고 했었소?"
"당신을 치려던 건 아니었어요."
"난 얻어맞을 때까지 마냥 기다릴 바보가 아니란 말이오."
그는 재빨리 곡괭이를 벽돌더미 속으로 던져버렸다. 모두가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이가 곡괭이를 가리키며 벽돌더미 위로 기어올라갔다. 여자가 얼른 아이를
붙잡았다. 그레버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가건물 옆에 놓인 물통이 눈에 띄었다. 나무로
된 층계는 훌륭한 장작이 되었을 것이다. 이 일가가 폐허를 정리하면서 가건물을 세운
것이다. 그들은 지금 분명히 벽돌더미 속에서 긁어모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느님께서 물려주신 양식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아이는 건강해 보였다. 이렇게
죽음은 극복되었으며 폐허더미 위로 다시 꽃이 필 것이다.
"빨리도 해치었군."
"머리 위에 지붕이 없을 때는 동작이 빨라야지." 절름발이가 대꾸했다.
그레버는 그만 돌아가기로 했다.
"혹시 고양이를 못 보았소? 흑백의 반점이 박혀있는 고양이인데."
"우리 로오자인걸." 아이가 말했다.
"아냐!" 여자가 깜짝 놀라며 경계를 했다.
"우린, 고양이 같은 건 구경도 못했어요."
그레버는 그대로 돌아섰다. 가건물 속에는 다른 인간들도 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짧은 시간에 그토록 많은 일을 해치울 수가 없다. 아마도 의용단들도
협력했을 것이고 또 한 밤에는 강제 수용소의 죄수들이 정리작업을 위해 시내 도처에
파견되고 있다.
그는 천천히 걸었다. 그는 자기 자신이 초라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레버는 조금도 피해를 입지 않은 거리로 나왔다. 상점에는 대형 진열장의
유리조차 깨끗했다. 멍청하게 걷고 있던 그는 깜짝 놀라 걸음을 멈췄다. 누군가가
자기를 향해서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마치 유령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앞으로 한 발자국만 더 내밀면 금세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존재했었던
기억만이 남을 듯이.
그는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서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간신히 두
눈동자만 툭 튀어나와 있을 뿐, 얼굴의 형태는 창백한 빛으로만 남아 있었다. 싸늘하고
야릇한 공포가 스며들어 오고 있었다. 그것은 공황이 아니며 끔찍한 혐오도 아니었고
도망에로의 절박한 부르짖음도 아니었다 그것은 만성적이면서도 비개인적인
공포, 눈에 보이지 않고 냄새도 없는 진공의 세계에서만 볼 수 있는 공포였다.
그는 거리에 서 있었다. 도대체 뒤에 남겨지는 것은 무엇일까? 만약에 내가
사라지면 그 자리에 무엇이 남게 되는가. 그것은 무다. 몇 명의 사람들, 부모님이
살아있다면 그들과 약간의 친구, 그리고 엘리자베스 그들만이 기억 속에 잠시
머물다가 없어질 것이며 그것조차 얼마나 오랫동안 남을 것인가는 미지수이다.
"에른스트." 그의 이름이 들린 것 같았다.
그는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목발을 한 사내가 거기 서 있었다. 하겐가에서 만난
절름발이 사내다! 그때 지나가던 자동차의 불빛이 그 사내의 얼굴을 비췄다가
사라져갔다. 그는 절름발이가 아니라 동급생이었던 뮤치히였다.
"칼! 너였군 그래. 네가 여기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벌써 반년이나 되었어."
그들은 서로의 모습을 보았다.
"설마 이런 꼴이 되어 있을 줄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겠지?" 뮤치히가 말했다.
"무엇을?"
뮤치히는 목발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바로 이것 말이야."
"그래도 넌 지옥에서 빠져 나온 셈이야. 난 다시 돌아가야 해."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도 있지. 만약에 전쟁이 2, 3 년 더 계속된다면 운 좋은
셈이지. 그러나 6주일만에 끝나버리면 굉장한 불행이야."
"어떻게 6주일만에 끝날 수 있지?"
"난 다만 만약에 그렇다면."
"물론 그렇겠지."
"언제 한 번 들르지 않겠나? 벨그만도 함께 있어. 두 팔을 잃었지."
"지금 어디들 있나?"
"시립병원의 절단자 병실에 있어. 거긴 전부 우리가 점령했지. 한 번 오라구."
"알았어. 곧 찾아갈게."
"정말? 모두들 말은 잘 하지만 한 녀석도 얼굴을 안 내민다."
"난 정말이야."
"그래 우린 무척 재미있게 지내. 적어도 우리 방에 있는 녀석들은 모두가
그렇지."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이미 3 년 동안이나 만나지 못했던
친구였다.
"그럼 잘 가, 에른스트."
"칼, 너도."
두 사람은 굳은 악수를 나누었다.
"넌 지베르트가 죽은 걸 알아?" 뮤치히가 물었다.
"아니, 전혀!"
"6주일 전이었지. 그럼 라이너는?"
"라이너? 난 정말 몰랐어."
"라이너와 링겐. 그들은 같은 날 아침에 죽었지. 브류닝은 머리가 돌았고, 홀만도
죽었어. 넌 전혀 모르고 있었군."
"몰랐어."
"벨그만이 소식을 들은 모양이야. 그럼, 조심하게 에른스트! 우릴 잊지 말고 꼭 찾아
주게."
뮤치히는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반대쪽으로 갔다. 죽은 사람들에 비하면 자기의
불행은 아무 것도 아니다 불행이 확실히 가벼워졌겠지. 그레버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쪽 다리를 무릎 위에서 절단 당했다. 뮤치히는 전쟁이 나기 전,
동급생들 중에서는 가장 우수한 단거리 선수였다.
그레버는 그를 동정해야 할지, 부러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뮤치히의 말은
옳았다. 앞으로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서 행복과 불행이 정해진다.
그가 돌아서자 엘리자베스는 흰 가운을 입고 침대에 앉아 있었다. 타올을 터번처럼
머리에 돌려서 감은 그녀의 자태는 무척 아름다웠다.
"난 일주일 분의 목욕물을 다 써 버렸어요. 아마 루젤 부인이 잔소리를 할
거^36^예요."
"멋대로 하라지. 그 여잔 목욕물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을 거야. 참다운 국가
사회주의자들은 목욕을 자주 안 해. 그들에게 청결은 유대인적인 악덕이야."
그는 창가로 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회색으로 변한 하늘과 폐허, 거리는 한산하기만
했다. 마주 보이는 창가에서 한 남자가 하품을 하고 있었다. 피아노 소리에 섞여서
발성연습을 하는 여자의 높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레버는 양장점의 거울 앞에서
느꼈던 공포와 의문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과연 뒤에 남는 건 무엇일까?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는 완전한 나의 것일까?
그녀를 만나서 사랑한 시간은 짧다. 나는 다시 일선으로 돌아가야 한다. 몇 년 후,
그녀는 나를 잊어버리고 마는 것이 아닐까?
그는 창가에서 몸을 돌렸다.
"엘리자베스, 우린 결혼해야 돼."
"결혼한다구요! 왜죠?"
"왜냐고? 우린 서로를 안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며칠 후에 난 전선으로 돌아가야
해. 우린 진정으로 서로를 원하는 가도 모르고 있고, 또 그걸 알기 위해선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해. 그러니까 결혼해야 돼."
그녀는 그를 뚫어지게 보았다.
"우리는 너무 고독하기 때문인가요?"
"아니."
그녀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서만은 아니지."
"그럼?"
그는 그녀의 호흡이 고르게 되기를 기다렸다. 그녀의 젖가슴이 잔뜩 부풀어올랐다가
서서히 내려앉았다. 그녀의 팔과 손목은 내 것이 아니듯이 그녀의 생각과 생활도 나
자신과 같을 수도 없다. 그녀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자기 자신도 어째서
갑자기 결혼할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그녀가 알 수 있을까?
"만약에 결혼한다면 당신은 루젤 부인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되지. 군인의
아내로서 보호를 받게 되니까."
"그래요?"
"물론이지."
그녀의 쏘는 듯한 눈길을 느끼자 그레버는 멋쩍은 생각이 들었다.
"다소 도움이 될 수는 있을 거야."
"그런 건 결혼의 이유가 될 수 없어요. 루젤 부인 따위, 조금도 겁나지 않아요.
결혼이라고요? 그럴 시간이 어딨죠?"
"왜 없지?"
"서류와 허가증과 아리아인의 혈통증명서, 건강진단서 그런 걸 다 만들려면
몇 주일이나 걸려야 해요."
몇 주일. 그녀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지껄였다. 그때 나는 또 어디에 있을까?
"군인은 달라. 전시의 결혼은 특별 대우를 받지. 하루 이틀이면 끝나. 막사에서
얘기를 들었어."
"당신은 거기서 그런 생각을 하셨나요?"
"그렇진 않아. 오늘 아침에야 비로소 그런 생각이 들더군. 그렇지만 막사에선 이런
문제를 놓고 토론들을 하지. 휴가 나와서 많이들 결혼했어! 당연하지. 일선에서 돌아온
병사가 결혼을 하면 그 아내는 매달 수당을 받게 돼. 200 마르크나 되지. 그것을
고스란히 국가에 기부할 필요가 있나? 자기의 목을 내놓았다면, 자기의 권리는 왜
포기하지?"
"그리 생각한다면 그렇겠죠."
"내 말이 바로 그런 뜻이야." 그레버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세대주는 대부금을 받을 수도 있어. 1000 마르크는 될 거야. 당신은
결혼하면 외투공장에 나가지 않아도 되는데."
"아니에요. 그건, 또 다른 얘기죠. 공장에 가지 않는다면 하루 종일 집에서 무엇을
하죠?"
"그렇군."
순간 그레버는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도대체 놈들은 어떻게 할
셈인가? 우리는 아직 젊으며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 우리들의 어버이가 일으킨
전쟁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우린 곧 헤어져야 해. 결혼을 하면 떨어져 있어도 덜 외로울 거야."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 나와 결혼하고 싶지 않아?"
"그래도 고독이 반으로 줄지는 않아요. 우린 더욱 고독해질 거에요."
발성연습을 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음계가 높아지자 소리가
갈라져서 듣기에 거북할 정도였다.
"나중에 취소할 수도 있어. 그것이 마음에 걸린다면 이혼을 해도 되지."
"그럼, 왜 결혼을 하지?"
엘리자베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 어제와 몹시 다르군요."
"어떻게 다르지?"
그녀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이제 그만하기로 해요. 우린 지금 함께 있어요.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해요."
"당신은 결혼하고 싶지 않군."
"그래요."
그는 그녀를 보았다.
"난 모든 걸 선의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엘리자베스가 다시 웃음을 머금었다.
"때때로 그것으로 난처해질 때가 있어요. 아직 술이 남았을까요?"
"매실주가 있지."
"폴란드산? 전리품이 아닌 것?"
"퀸메르가 한 병 있을 거야. 그건 독일제야."
"그럼, 그걸로 한 잔 주세요."
그레버는 부엌으로 가면서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는 잠시동안 빈딩그의 선물
앞에 서 있다가 돌아섰다.
엘리자베스는 창가에 기대어 서 있었다.
"하늘이 회색으로 변했어요. 비가 올 것 같아요. 아이, 따분해!"
"따분해?"
"오늘은 우리의 첫 번째 일요일이고 우린 외출할 수도 있었는데, 교외는 이미
봄인걸요."
"나가고 싶나?"
"아니, 전 루젤이 집에 없는 것만으로 충분해요. 당신은?"
"난 아무래도 좋아. 내가 늘 생각하던 자연은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은 따뜻한
방이야. 난 지금 그곳에 있지. 당신은 밖으로 나가고 싶겠군. 극장에라도 갈까?"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집에 있기로 하지. 밖에 있으면 하루가 금방 지나가 버릴 거야."
그레버는 엘리자베스에게로 다가가 그녀를 꼭 껴안았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괴고
있었다.
"내가 너무 어리석었지?"
"아니에요."
"그럼 당신은 왜 눈물을."
그는 그녀를 안은 두 팔에 힘을 주면서 창문 너머로 눈길을 돌렸다. 파괴된 집의
지하실로 통하는 방공호 속에서 전쟁놀이를 하는 아이들 몇 명이 눈에 띄었다.
"우린 조금도 슬퍼할 필요가 없어."
발성연습을 하던 가수가 다시 목청을 돋우더니 사랑의 노래를 미친 듯이 부르고
있었다.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 노래는 불안정한 음성으로 계속
이어졌다.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 세월이 가고 고통이 있을지라도 이 몸은 그대를
사랑한다!"
"그래요. 우린 슬퍼하지 않아도 돼요." 엘리자베스는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오후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먹구름이 더욱 짙어지면서 한 곳으로 뭉치고
있었다. 그들은 불도 켜지 않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레버는 단조로운 빗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쯤 소련에서는 온갖 것들이 수렁
속에 빠지는 흙탕물의 계절이 시작됐을 것이다.
"그만 가야겠군. 루젤이 올 시간이야."
"상관없어요." 엘리자베스는 졸린 눈을 비비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비가 오기 때문에 예정보다 빨리 오게 될지도 몰라."
"비가 오니까 오히려 늦을 수도 있어요."
엘리자베스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혹시 빗길에 차가 그렇다면 운이 좋은 편이지."
"당신, 박애주의자가 아니군요." 엘리자베스가 속삭였다.
그레버는 창문을 때리는 빗줄기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만약에 결혼하게 되면 난 일선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도 있지."
엘리자베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째서 저와 결혼하겠단 생각을 했지요?" 그녀가 다시 속삭였다.
"당신은 나에 대해서 아직 잘 모르는 걸요."
"난 당신을 일 년 이상이나 알고 지냈어."
"어째서 일 년이나 되죠? 우리의 관계를 어린 시절부터 헤아릴 수는 없어요. 그건
옛날 얘기니까."
"지금 그런 식으로 날짜를 따지고 있는 것이 아냐. 내가 이곳에 도착한 지 거의
2주일이 돼. 이것은 일선의 15개월에 해당되지. 난 당신을 아주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느낌이야."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들었다.
"난 그렇게 생각해 보진 않았어요."
"나 역시. 방금 깨달았어."
"언제?"
"당신이 잠들어 있는 동안에, 비가 내리니까 어두운 방안에서 갖가지 상념이
떠오르더군."
"무슨?"
"인간이 자기 손을, 총을 쏘거나 수류탄을 던지는 이외의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 것인가 뭐, 이런 생각들."
그녀는 그를 바라보았다.
"낮엔 왜 그런 말씀을 하시지 않았죠?"
"차마 할 수가 없었지."
"수당이라든가 대부금 얘기보다는 오히려 그게 나을 것 그랬군요."
그레버는 고개를 들었다.
"결국 그게 그거야. 다만 표현 방법의 차이지."
그녀는 무엇인가 알아들을 수 없게 중얼거렸다.
"말이란 중요한 것이에요. 적어도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난 표현력이 부족해. 시간이 지나면 당신도 깨닫게 될 거야."
"시간!" 엘리자베스는 한숨을 쉬었다.
"별로 없지요."
"없지. 어제는 많았어. 그러나 또 내일이 오면 어제는 시간이 많았었다고
생각하겠지."
"당신은,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믿고 있나요?"
"글쎄 그걸 알기 위해선 더 많은 시간들을 우린 함께 보내야해."
"그런데 왜 결혼하겠단 말을?"
"하지만 난 이미 당신 없는 생활은 생각할 수 없어."
엘리자베스는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은 당신과 다른 사람 사이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은
안 드세요?"
"아마도 그러나 그건 아무도 알 수 없어. 그리고 나도 또한 지금에 와서 그런
생각을 할 수는 없고."
엘리자베스는 그의 팔에 안긴 채 고개를 그에게로 했다.
"당신은 차츰 의식이 뚜렷해지는군요. 이제 낮에 했던 말은 하지 않고 있어요. 물론
지금은 밤이니까 그럴 수도 있죠. 그 때문에 난 일생 밤을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그럴 리는 없겠지."
"그래도 우린 역시 그것을 무시할 수는 없어요."
"무엇을?"
"수당."
순간 그레버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럼, 당신은 결혼을?"
"우리가 일 년 동안이나 사귀어 왔다면, 결혼은 당연하잖아요? 거기에다 이혼도
가능하다니까."
그녀는 그에게 안겨서 편히 잠들었다. 그는 빗소리를 들으면서 오랫동안 눈을 뜨고
있었다.
17
"필요한 건 무엇이든지 갖고 가게." 빈딩그가 문 옆에서 말했다.
"내 집처럼 드나들란 말이야."
"알겠어."
그레버는 욕탕 안에서 서서히 온몸을 폈다. 한쪽 구석에 던져진 군복은 몹시
초라하고 더러웠다. 그 옆에 로이타가 빌려준 양복이 걸려 있었다.
빈딩그의 욕실은 벽을 녹색의 타일로 박고 자기의 니켈판으로 번쩍번쩍 빛이 나게
꾸며져 있었다. 소독제의 악취가 나는 막사의 목욕탕에 비하면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프랑스제의 목욕용 타올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뜨거운 물은 얼마든지 쓸 수 있었다.
그레버는 모든 잡념을 잊고 뜨거운 물에 몸을 푹 담그고 있었다. 사람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는 것은 따뜻함이나 물, 지붕, 빵, 고요, 자신에 대한 자신감과 같이
극히 단순한 것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남은 휴가를 전쟁 따위는 잊어버리고
행복하게 보내리라고 생각했다.
로이타의 말이 옳다. 휴가는 쉽게 오지 않는다. 그는 군복이 눈에 잘 띄지 않도록
의자를 구석으로 밀어붙였다. 그런 다음에 욕실용염제를 한 움큼 집어 즐거운 듯이 탕
속에 뿌렸다. 그것은 전시의 사치이면서 동시에 한줌의 평화였던 것이다.
그는 몸을 말리고 나서 천천히 옷을 입었다. 군복 대신에 입은 신사복은 몹시
산뜻하고 가벼웠다. 그는 거울에 자기의 모습을 비춰 보았다. 이대로 일선에
나타난다면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을 것 같은 미숙한 젊은이가 깜짝 놀란 듯이
마주보고 있었다.
"마치 처음으로 성찬식에 참석하는 미성년자같군." 알폰스가 말했다.
"전혀 군인답지 않군. 갑자기 왜 그러지? 결혼이라도 하나?"
"물론이야." 그레버는 깜짝 놀라면서 대답했다.
"어떻게 알았지?"
"자네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어. 전과는 달라. 전엔 빼앗긴 뼈다귀를 찾아헤매는 개
같았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군. 그런데 정말로 결혼할 생각인가?"
"그럼."
"에른스트, 잘 생각해 봤나?"
"아니."
빈딩그는 당혹한 것처럼 그레버를 보았다.
"이미 몇 년 동안이나 심각하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네."
알폰스는 잇몸까지 드러내고 웃더니 고개를 들어 냄새를 맡았다.
"무엇일까?" 다시 코를 벌름거렸다.
"자넨 욕실용염제를 사용했군!"
그레버는 손을 코에다 댔다.
"아무 냄새도 맡을 수 없는데?"
"자네는 모르겠지만 난 알 수 있어. 즉시 발산시켜야 해. 처음에는 잘 모르지만
점점 꽃 향기 같은 게 온몸에 퍼져. 코냑을 마시면 냄새가 사라질 거야."
빈딩그는 술병과 잔 두 개를 가지고 왔다.
"에른스트! 마침내 결혼을 하나? 진심으로 축하하네! 난 계속 독신으로 남겠지만
말이야. 그런데 자네의 아내가 될 여잔 내가 만난 적이 있나?"
"아니."
그레버는 코냑을 들이켰다. 그는 결혼을 인정한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났다.
"한 잔 더 하게. 매일 결혼할 순 없을 테니까."
"아니."
빈딩그는 잔을 내려놓았다.
"무슨 도움이 필요하다면 이 알폰스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도움이라니? 이런 건 간단히 끝나고 말 텐데."
"자넨 그렇지. 군인이니까."
"우린 전시의 결혼이니까 아무런 서류도 필요 없어."
"그러나 자네 아내는 다를 거야. 일을 서두르다 보면 알 수 있지. 만약에 너무 오래
걸리게 되면 내가 도와주겠어. 자네도 알겠지만 내 친구들 중에 게슈타포의 장교도
있으니까."
"게슈타포가 전시의 결혼과 무슨 상관이 있지?"
알폰스는 싱긋 웃었다.
"에른스트, 게슈타포가 관여하지 않는 건 하나도 없어. 자넨 병사라서 잘 몰라.
그러나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어. 자네가 유대인 아가씨와 결혼하진 않을 테니까.
공산당원의 딸과 결혼하는 것도 아니겠지? 그렇지만 일단 조사하는 것이 규칙이야."
그레버는 애써 내색하지 않았지만 내심 놀라고 있었다. 만약에 조사가 시작되면
엘리자베스의 아버지가 강제수용소에 있는 사실이 알려질 것이다.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알폰스, 그게 정말인가?"
빈딩그는 다시 잔에 술를 따랐다.
"물론. 그렇지만 조금도 걱정할 필요는 없어. 자넨 설마 자네의 고귀한 아리아인의
피를 야반적인 인간이나 국가의 적이 더럽히게 할 생각은 없겠지. 안 그래?" 그는
싱글싱글 웃었다.
"그것은 그래."
"에른스트! 전에 게슈타포 친구들을 만난 적이 있지? 너무 시간을 끌 것 같으면
그들이 도와줄 거야. 약간 압력을 가해야지. 그 녀석들은 거물급이야. 특히 리제는. 그
코안경을 낀 깡마른 친구말야."
그레버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엘리자베스는 그의 주장으로 오늘 아침에 서류를
갖추기 위해 시청으로 갔다. 만약에 놈들이 그녀를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게
된다면 그렇지만 날씨가 사나워지면 몸을 숨긴다는 것이 옛날부터의 관습이
아닌가? 만약에 게슈타포에게 발각된다면 아버지가 끌려갔다는 이유만으로
엘리자베스를 강제수용소로 보낼는지도 모른다.
그는 몸이 확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만약에 놈들이 그녀를 조사하게 된다면
어떻게 할까?
그레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른스트, 왜 그래? 자넨 아직 잔을 비우지도 않았군. 너무 행복에 겨워서
그러나?"
그는 스스로 자신의 농담에 만족해서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레버는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몇 분 전까지 그는 좋은 친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권력의 대표자로 변하고 있다.
"에른스트, 어서 술이나 들어."
그레버는 잔을 놓았다.
"알폰스, 부탁이 있어. 설탕을 2 파운드 가량 주지 않겠나? 두 포대로 나누어서 1
파운드씩 말이야."
"각설탕 말인가?"
"아무것이나 상관없어."
"그건 얼마든지 줄 수 있지. 그런데 왜 설탕이 필요하지?"
"실은 그것으로 어떤 인간을 매수할 생각이야."
"매수하겠다고?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을 텐데? 더욱 좋은 방법이 있어. 내가 한 번
해 볼까?"
"아니, 그런 게 아냐. 설탕은 도움을 좀 받은 사람이 있는데, 선물하려고."
"좋아. 그럼 결혼 축하 파티는 우리 집에서 하도록 해. 알폰스가 훌륭한 증인이
되어 주겠어."
그레버는 그의 제의를 생각해 보았다. 15분 전이었다면 그 그늘에 숨을 수도
있었으나 지금은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모든 일은 이 알폰스에게 맡겨두게! 자넨 오늘밤 여기서 자는 거야. 알겠나? 다시
군복을 입고 병사로 돌아갈 필요는 없어. 내가 열쇠를 주고 갈 테니까."
그레버는 망설였다.
"알겠네, 알폰스."
빈딩그의 표정이 밝아졌다.
"좋아, 좋아. 우린 여유있게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눌 수도 있지. 아직 그런
기회가 없었으니까. 이리 오게, 자네의 방을 안내해 주지."
그는 그레버의 군복을 들고 상의에 달린 훈장을 바라보았다.
"자네, 훈장 탄 얘기를 내게 해주어야 돼. 아주 대단한 공로를 세웠겠지."
그레버는 고개를 들었다. 빈딩그의 얼굴은 언젠가 친위대의 하이니가 술에 취한 채
보안부에서의 공로담을 자랑할 때와 똑같은 표정으로 변하고 있었다.
"새삼스럽게 얘기할 것도 없어. 그건 다만 연공으로 받은 것뿐이니까."
루젤 부인은 그레버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마침내 말끔한 신사복이 그레버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당신이었군? 쿠루제양은 지금 없어요. 그만한 건 이미 알고 있을 텐데."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그를 적의에 찬 눈초리로 훑어보았다. 그녀의 자색 유니폼 상의에는
스와스치카를 꽂은 핀이 빛나고 있었다. 기름이 번들번들한 머리카락은 잔뜩 헝클어져
있고 오른손에는 걸레가 들려 있었다.
"쿠루제양에게 선물을 하고 싶은데, 이것을 좀 전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루젤은 의아한 듯한 표정으로 그를 보더니, 이윽고 설탕꾸러미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하나 더 있습니다. 실은 쿠루제양에게 당신은 모범적으로 당과 공공을
위해서 희생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여기에 설탕 1 파운드가 있는데 마침
아주머니에게도 단 것을 좋아할 만한 나이의 아이가 있으시죠? 이것을 드리고
싶습니다."
루젤의 얼굴은 공식적인 표정을 띠고 있었다.
"우린 그런 물건은 필요 없어요. 우리는 총통께서 허락하신 물건만을 자랑스럽게
받고 있어요."
"당신의 아이도?"
"그렇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올바른 태도입니다." 그레버는 자색의 상의에다 시선을 고정시켰다.
"후방에 있는 부인들이 모두 부인과 같다면, 일선에서 싸우고 있는 병사들은 더욱
든든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건 부정한 게 아닙니다. 이것은 휴가로 귀향하는 병사들이
가족에게 선물할 수 있도록 총통께서 하사하신 것입니다. 제 가족은 행방불명입니다.
그러니까 거절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루젤의 표정이 다소 누그러졌다.
"당신은 일선에서 오셨나요?"
"물론입니다."
"소련에서?"
"그렇습니다."
"제 남편도 소련에 있습니다."
그레버는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무척 놀랍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소속은 어디죠?"
"중앙군단에 배속되어 있습니다."
"거기는 지금 평정합니다."
"평정하다구요?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중앙군단은 지금 치열하게 전투하고 있어요.
남편은 최전방에 있어요."
최전방! 마치 전선이라는 것이 지금도 존재하고 있는 것같이 말하고 있군! 그는
순간적으로 명예로운 총통의 조국에 대한 저쪽의 설정은 어떤지 이 부인에게 말해주고
싶은 충동을 꾹 눌렀다.
"휴가를 오신다면, 기쁘시겠습니다."
"남편은 때가 되면 옵니다. 애당초 특별한 은혜 같은 건 바라지도 않습니다."
"저 역시." 그는 냉정하게 말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전 2 년만에 나왔습니다."
"그러면 계속 거기에 계셨나요?"
"그렇습니다. 물론 부상당했을 때는 제외하고."
그레버는 확고부동한 당의 여투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도대체 나는 왜 이 여자
앞에서 자신을 변명하고 있는 것일까? 이런 여자는 차라리 사살하는 쪽이 훨씬 낫다.
루젤의 아이가 나왔다.
"어째서 갑자기 사복을 입으셨죠?"
"군복은 세탁소에 맡겼습니다."
"그래요? 나는 또."
루젤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레버는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는 그런 루젤 부인이 끔찍했다.
"그렇다면 좋아요. 우리 애를 위해 설탕을 받기로 하겠어요."
그녀는 꾸러미 두 개를 받았다. 그레버는 그녀가 두 손으로 무게를 비교하고 있는
것을 지켜보았다. 내가 나가면 틀림없이 엘리자베스의 꾸러미를 뜯어 볼 것이다.
그리고 설탕 이외에 아무것도 없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랄 것이다.
"하이 히틀러!" 그레버도 루젤이 하는 대로 따라서 했다.
그는 밖으로 나왔다. 문지기가 문 옆에 서 있었다. 돌격대원의 바지와 장화를 신은
작달만한 사내였다.
그레버는 걸음을 멈추었다. 이러한 허수아비조차 위험스러운 존재가 되었다.
"오늘은 날씨가 좋군."
그는 담배를 꺼내 한 개비를 뽑아 그에게 권했다.
문지기는 투덜거리면서 그것을 받았다.
"제대했소?" 그레버의 옷차림을 흘낏거리며 물었다.
그레버는 고개를 흔들었다. 엘리자베스에 대한 말을 하고 싶었지만 망설이다가 그만
두었다.
"일주일 후에는 다시 가야 해."
문지기는 담배가루를 토했다.
"맛이 없소?" 그레버가 물었다.
"아니, 나는 잎담배를 더 좋아하거든."
"잎담배는 귀할 텐데?"
"그렇소."
"난 고급 잎담배를 갖고 있는 사람을 잘 알고 있는데, 기회가 되면 구해다 주겠오."
"최고급이오?"
"물론, 그 사람이 바로 돌격대장이오."
"돌격대장?"
"그렇소. 알폰스 빈딩그라고 나와 가장 친한 친구요."
"빈딩그가 당신의 친구라고?"
문지기는 그레버를 쳐다봤다. 그레버는 그의 눈초리가 뜻하는 바를 알고 있었다.
빈딩그와 친한 친구라면 어째서 보건 고문관인 쿠루제가 강제수용소에 강금되어
있는지 도저히 닙득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여러 가지 오해도 풀리고, 만사가 제대로 해결될 거야."
"그렇겠죠." 문지기는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그레버는 시계를 보았다.
그레버는 거리를 거닐었다. 매수의 일보는 우선 성공적이었으나 곧 새로운 불안이
그를 사로잡았다. 어쩌면 오늘 한 행동은 가장 서투른 짓일는지도 모른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갑자기 사복이 원망스러웠다. 모든 게 옷 탓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는 잠시라도
군대의 규칙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기분을 만끽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순식간에 불안과 근심의 세계로 빠져버렸다.
밤까지는 엘리자베스를 만날 수도 없었다. 서류신청을 서둘렀던 게 후회스러웠다.
어제 아침에는 결혼이 그녀를 보호할 것이라고 몇 번이고 강조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것이 위험이 되고 있었다.
"축제 기분을 내서 어떻게 할 작정이지?"
그는 눈을 치떠서 올려다보았다. 키가 작은 소령이 눈앞에 서 있었다.
"국가의 비상시국이란 것을 넌 모르는가!"
그레버는 갑자기 어리둥절해서 소령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는 마침내 겨우 그
이유를 깨달았다. 자기 자신이 사복을 입은 사실을 잊고 소령에게 경례를 했던
것이다. 노인은 자기를 놀리고 있는 줄로 착각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절대로 고의가 아니었습니다."
"뭐라고? 뻔뻔스러운 놈 같으니라구! 넌 왜 군대도 안 갔지?"
그레버는 노인을 세심하게 살폈다. 그는 언젠가 엘리자베스와 함께 만난 적이
있었던 바로 그 소령이었다.
"너 같은 병역 기피자는 하루 속히 땅 속으로 꺼져버리란 말이야!" 소령은 소리를
질렀다.
"너를 체포하겠어!"
"그럴 수는 없습니다. 잘 알고 계실 텐데. 자, 이제는 나를 내버려 두시오. 난
걱정거리가 많은 사람이니까."
"뭐라고?" 소령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더니 코를 벌름거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래서 군복을 입지 않았군! 이 남창 같은 놈! 남자가 향수나 뿌리고 나다니니,
원."
노인은 침을 탁 뱉고 나서 그레버를 노려보다가 사라져버렸다.
그는 게슈타포 본부가 보이는 거리에 서 있었다. 입구의 복도에서 젊은 친위대원이
하품을 하면서 서성거렸다. 친위대의 장교 두 사람이 싱글싱글 웃으면서 밖으로
나오는 게 보였다. 그때 한 사나이가 주저하면서 정문을 올려다본 다음에 주머니에서
종이쪽지를 꺼냈다. 그것을 읽고 난 그는 주위를 돌아보고 마치 작별을 고하는 것처럼
하늘을 쳐다보다가 위병소를 향해서 걸어갔다. 친위대원은 그의 호출장을 읽고 나서
통과시켰다.
그레버는 그 자리에서 돌아섰다. 힐슈만은 이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에 최고 훈장을
받게 되면 아버지는 강제수용소에 끌려가지 않을 것이란 믿음으로 최후를 지원했던
힐슈만. 그는 힐슈만에게 양친을 찾아보겠다는 약속을 했었다.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주소를 적은 쪽지는 어디로 간 것일까? 지금 당장
힐슈만과의 약속을 지키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처럼 생각되었다. 그것이
엘리자베스와 관련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재빨리 주머니를 뒤졌다. 마침내
급료부 속에서 쪽지를 찾아냈다.
힐슈만의 집은 아담한 3층집이었다. 그는 3층으로 올라가 초인종을 눌렀다. 이윽고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고 창백한 얼굴이 밖을 내다보았다.
"힐슈만 부인을 만나고 싶습니다."
"바로 접니다."
"저는 댁의 아드님과 같은 중대에 있습니다."
여인은 물끄러미 그를 보았다. 그것은 궁지에 몰린 동물의 모습과 흡사했다.
"댁을 방문해 달라는 아드님의 부탁을 받았습니다. 저는 휴가중이라서 사복을 입고
있습니다."
"그래요?" 여인은 문을 활작 열었다.
"들어오세요. 저."
"에른스트 그레버입니다."
여인은 앞장서서 그레버를 거실로 안내했다. 그녀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걷고
있었다.
거실에는 벽 쪽으로 긴 의자가 놓여져 있었다. 그레버가 그 의자에 앉으려고 하자
부인은 재빨리 다른 의자를 권했다.
"여기가 더 편해요. 저것은 침대 대신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레버는 작은 의자에 앉았다.
"저는 2주일 전까지 아드님과 함께 근무했습니다."
부인은 그대로 서 있었다. 그녀의 눈은 냉정했지만 손은 안정감을 잃고 후들후들
떨렸다.
"저 좋으시다면 뭣 좀 드실거라도?"
그레버는 갑자기 갈증을 느꼈다.
"고맙습니다. 물이나 한잔."
"네, 그럼." 힐슈만 부인은 방안을 둘러보았다.
"알겠어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그녀는 방에서 나가다가 걸음을 멈추고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도대체 왜
그러지? 공포에 질려있는 인간들은 얼마든지 보았지만 이건 정말 지나칠 정도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걸려있는 그림을 보았다. 모두 복제였다. 하나는 꽃이
만개된 밤나무 그림이었고, 다른 하나는 플로렌스 소녀의 옆 모습을 그린 것이었다.
그때 힐슈만 부인이 돌아왔다. 그녀는 적색 와인을 담은 작은 잔과 빵 두 조각이 놓인
쟁반을 내려놓았다.
그레버는 포도주를 한 모금 마셨다.
"아드님께서는 무사히 있습니다. 제가 휴가 올 무렵에는 예비대로 배치되고
있었죠."
부인은 그를 뚫어지게 보았다. 그는 다시 포도주를 마셨다. 아들은 지금 어디
있는가, 식사는 어떤가, 위험하지 않은가 등등 어머니들이 당연히 궁금해 할 것들을
질문하지 않은 데에 그레버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요. 잘 있단 말이죠?" 마침내 그녀는 겨우 한 마디했다.
"지금은 일선이나 여기나 별다른 차이가 없습니다. 위험하기는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부인은 역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레버는 혼자서
그림을 구경하다가 한 아이를 발견했었다. 긴 의자 밑의 종이상자에 숨겨놓은 것을
보았던 것이다. 혹 눈치라도 채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 뿐입니다." 마침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인은 소리도 없이 그레버와 함께
문이 있는 곳까지 따라 왔다.
"아드님에게 전할 말씀이 없으십니까? 저는 일주일 후에 출발합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전해드리겠습니다. 편지나 선물이 있으시면 제가 다시 오겠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레버는 깜짝 놀라 그녀를 보았다. 그는 부인이 자신을
믿지 않는 게 분명하다고 단정하고 급료부를 꺼냈다.
"제 증명서입니다. 저는 지금 사정이 있어서 사복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그녀는 급료부를 뿌리치기라도 할 듯이 손을 치켜들었다.
"그 애는 죽었습니다." 그녀는 거의 속삭이고 있었다.
"뭐라고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아드님과는 며칠 전에 얘기를 나누었었는데."
"죽었습니다." 그녀는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사흘 전에 통지가 왔어요."
그레버가 더 물으려고 하자, 그녀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됐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나를 혼자 있게 해주세요. 그 아인 제발!"
그녀는 문을 닫았다. 그레버는 하나하나 층계를 내려갔다. 그는 힐슈만을 생각해
내려고 애썼다. 그에 대해서는 힐슈만이란 성만 알 뿐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는
도중에 층계 위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이 집에서는 힐슈만의 동생이 그의 어머니에
의해서 숨겨져 있다. 아마도 그 아인 유대인의 피가 흐르기 때문에 강제수용소가
두려워 그렇게 숨은 것이리라. 절망적인 암흑이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만한 일로
몸을 숨긴다면 엘리자베스의 신변에 어떤 일이 일어날는지 모른다!
그레버는 퇴근시간이 되기 훨씬 전부터 공장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엘리자베스가
나올 때까지 긴장을 풀지 않았다. 혹시 공장 안에서 체포되는 것은 아닌가 걱정하고
있는데, 그녀의 모습이 입구에 나타났다. 그녀는 양복 차림의 그를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어머나, 아주 젊어졌는데요."
"난 젊다는 실감이 나질 않아. 오히려 100 년은 더 늙은 것같아."
"왜 그렇죠? 예정보다 빨리 출발해야 하나요?"
"아냐. 그것은 걱정없어."
"그럼, 양복을 입어서?"
"모르겠어. 좌우간 난 이 양복과 함께 온 세상의 고통을 혼자서 짊어진 것 같은
기분이야. 그건 그렇고 서류는 어떻게 되었지?"
"됐어요." 엘리자베스는 말했다.
"점심시간을 이용했어요."
"이미 제출했단 말이지? 그럼, 어쩔 수 없군."
"왜 그러시죠?"
"아무 것도 아냐. 다만 걱정이 되니까. 어쩌면 우리가 실수를 저질렀는지도 몰라.
당신에게 불리하게 될 지도 모르니까."
"왜?"
그레버는 망설였다.
"게슈타포가 결혼 신청자의 신원조회를 하는 모양이야."
엘리자베스는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당신 무슨 소리를 들으셨군요?"
"아니, 아무 것도 듣지 못했어. 갑자기 두려워졌을 뿐이야."
"우리가 결혼을 하면 내가 체포된다는 말인가요?"
"그런 건 아냐."
"그럼 뭐죠? 아버지가 강제수용소에 수감된 사실이 발각될지도 모른다는 뜻이죠?"
"그것도 아냐." 그레버가 말했다.
"그건 다 알고 있어.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당신이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았으면
좋겠어. 게슈타포가 무슨 짓을 할는지도 모르고 놈들이 무슨 속임수를 쓸지 알 수
없어. 그건 당신도 잘 알고 있겠지. 게슈타포에게 정의를 기대하는 건 정말 멍청한
짓이라고."
엘리자베스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럼, 우린 도대체 어떻게 하죠?"
"나도 하루종일 생각했어. 정말 속수무책이야. 만약에 신청한 서류를 취소하면, 그땐
의심 받을지도 모르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야릇한 눈초리를 했다.
"그래도 역시 취소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엘리자베스, 이미 늦었어. 이제는 모든 것을 운에 맡기는 수밖에."
그들은 무작정 걷고 있었다. 그레버는 광장을 끼고 공장이 들어서 있는 주위를
살펴보았다.
"여긴 한 번도 폭격을 당하지 않았나?"
"네."
"공장이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겠군."
"커다란 지하 방공호가 몇 개나 있어요."
"안전해?"
"아마도."
그레버는 그녀를 보았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정면만 바라본 채 걸음을 빨리 옮겨
놓고 있었다.
"제발! 내 말의 진의를 알아줬으면 좋겠어. 난 다만 당신이 걱정되어서 그래."
"내 걱정은 마세요."
"당신은 걱정이 안돼?"
"이제는 걱정할 일도 없고, 조금도 두렵지 않아요."
"난 그렇지 않아.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지금까지 몰랐던 새로운 걱정이 자꾸
생겨나거든."
엘리자베스는 그를 보면서 싱긋 웃었다. 그는 웃는 그녀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난 어제 열변을 토했어. 그것은 잊지 않아. 자신의 사랑이 진실인지를 알기 위해선
우선 걱정부터 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글쎄, 잘 모르겠군요."
"이놈의 양복은 다신 입지 않겠어. 난 일반 시민들의 생활이 부러웠었지."
엘리자베스가 또 웃었다.
"그게 어디 양복 탓인가요?"
그녀는 그의 옆에서 태평스럽게 걷고 있었다. 그는 엘리자베스가 달라졌음을
느꼈다. 이 사람은 매일매일 달라지고 있다. 전에는 이 사람이 두려워하고 내가
태연했었는데, 지금은 그와 반대가 되고 말았다.
그들은 히틀러 광장을 통과했다. 저녁 노을이 한층 더 짙어져서 그들의 얼굴과 손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레버는 맞은 편에서 다가오는 사람들을 보았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각각 자기의 운명을 지고 바쁘게 걸어간다. 사람들은 갖은 게 아무 것도 없을
때는 쉽게 판단을 내리기도 하고 용감하게 행동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단 무엇인가를
지니게 되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져 버린다. 그것은 모든 일을 간단하게 바꾸거나,
아니면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만다.
그는 숨을 들이마셨다. 전보다 안전해진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위험이 당장
찾아오는 것도 아니다.
18
베차는 소지품을 정리하고 있었다. 동료들이 그의 주위에 몰려들었다.
"그러면 찾았단 말인가?"
그레버가 물었다.
"물론 그렇지만."
"어디서?"
"거리에서 만났어. 게라와비르가의 모퉁이에 있는 우산가게 앞에 서 있었어. 난
처음엔 그녀인지도 몰랐지."
"그 동안에 어디 있었을까?"
"에르후르트 근처의 수용소에 있었던 모양이야. 자, 들어보게! 난 우산가게 앞에
있었으면서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어. 내가 그대로 지나가려니까 아내가 나를 부르는
거야. '베차, 저를 모르겠어요?' 하면서 말야.
베차는 말을 끊고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렇지만 체중이 80 파운드나 줄어든 여자를 내가 어떻게 알아보겠어?"
"수용소 이름이 뭐지"
"잘 모르겠어. 임간 캠프 2 호라고 생각되는데 아내에게 물어보지. 하여튼
들어보라구. 난 그녀를 멀뚱멀뚱 바라보면서, '아르마, 당신이었군.' 했어.
'저^36^예요!'하고 아내가 대답했지. '베차! 전 당신이 돌아왔을 거라고 믿고 있었어요.
그래서 이곳에 돌아왔어요.'하는 게 아니겠어. 난 언제까지나 아내를 쳐다보고만
있었지. 전에는 맥주공장의 살찐 말처럼 뚱뚱하던 여자가 반으로 줄어서 서 있는
거야."
"키는 얼마나 큰가?" 펠드만이 흥미있다는 듯이 물었다.
"160센티미터 정도는 되지."
"그러면 표준이라고 할 수 있겠군."
"표준? 야, 바보 같은 소리 말아." 베차는 펠드만을 노려보았다.
"내겐 아니야! 내가 보았던 그녀는 옥수수대처럼 보잘것없었어. 난 네 기준의
표준적인 체중 같은 건 흥미없어. 난 아내의 엉덩이에 깔리고 싶단 말야. 그런데 대체
우린 왜 싸웠지?"
"넌 말이야. 우리들의 경애하는 총통과 사랑하는 조국을 위해서 싸우진 않았어."
로이타가 말했다.
"3 년이나 일선에 있었으면, 그만한 것쯤 이미 옛날에 알았어야 돼."
"내 아내의 체중을 놓고 왜들 야단을 떨지?" 베차는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며
날뛰었다.
"그만둬!" 로이타가 한쪽 손을 들어 경고했다.
"네가 멋대로 생각하는 건 자유지만 그걸 함부로 입밖에 내놓지 마! 넌 네 마누라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도 다행으로 생각해야 돼."
"그야 물론 나도 기뻐. 그러나 옛날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느냐 말야."
"그렇지만 베차!" 펠드만이 말했다.
"네가 다시 뚱뚱하게 살찌우면 되지 않겠어."
'"그럴까? 그런데 무엇을 먹여야 뚱뚱해지지. 배급표? 그 참새눈물만한 식량."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
"말로는 쉽지!" 베차는 비통한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휴가는 사흘밖에 남지 않았어. 사흘 안으로 어떻게 뚱뚱해 질 수 있겠어? 그녀가
한가롭게 목욕이나 하고 하루에 일곱 번씩 먹는다 해도 그건 불가능해. 고작해야 몇
파운드?"
"그러나 지방이 문제라면 네겐 그 비계덩어리 여주인이 있잖아?"
"문젠 바로 그거야! 난 아내만 만난다면 그 여잔 거들떠볼 생각도 안 했어. 원래가
난 성실한 남편이지 바람둥이가 아냐. 하지만 지금은 그 여주인이 낫겠군.
"넌 정말 둔한 인간이야." 로이타가 말했다.
"난 둔하지 않아. 난 무엇이든지 완전하게 느낄 수 있어. 그게 나의 결점이라고 할
수 있지. 그래서 도저히 그 여자에게 만족할 수 없었어. 쳇, 시골뜨기들은 이해하지
못할 거야."
베차는 마지막으로 남은 소지품을 배낭에 꾸렸다.
"당신 부부는 어디서 숙박할 예정이지?" 그레버가 물었다.
"혹시 아파트라도?"
"물론 갈 수 없어. 모조리 타 버렸으니까! 그래도 여기보다는 폐허가 된 지하실이
더 편해. 하나 불행한 건 아내가 전처럼 날 즐겁게 해줄 수 없다는 사실이지. 물론 난
아내를 사랑하고 있어. 그러나 그런 체중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가 없는 거야.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지?"
"휴가는 얼마나 남았나?"
"사흘."
"그 동안 어떻게 즐기는 척할 수 없을까?"
"이봐." 베차는 나지막이 말했다.
"여자라면 침대에 누워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남자는 틀려. 차라리 그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걸. 오히려 만나서 괴롭군."
그는 배낭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로이타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그레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넌? 네 계획은 어때?"
"난 보충대로 가 보겠어. 또 무슨 서류가 필요한지 알아볼 생각이야."
로이타는 히죽히죽 웃었다.
"넌 베차의 불행을 보고 실망을 한 모양이군. 안 그래?"
"내가 두려워하는 건 그런 게 아냐."
"엉망진창이다." 보충대의 사무병이 말했다.
"일선은 엉망진창이야. 그럴 때는 어떻게 하는 건지 알아?"
"물론 몸을 숨겨야지. 그런 건 애들도 알고 있어. 그게 나와 무슨 관계가 있지? 난
휴가중이야."
"나도 그건 알고 있지." 사무병은 그레버를 응시했다.
"오늘 하달된 명령을 본다면 그게 과연 가치가 있을까?"
그레버는 담배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위장이 오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저기압이야." 사무병은 사무적으로 말했다.
"막대한 손실. 보충병을 즉시 보내라. 긴급한 사유가 없는 휴가병은 즉각 송환하라!
이만하면 알겠나?"
"알겠어. 긴급한 이유란?"
"가족의 사망 및 중대한 가정문제의 처리, 그리고 중병..."
사무병은 담배를 집었다.
"그러니까 자취를 감추란 말이야! 널 찾아낼 수 없다면 송환할 수도 없어. 휴가가
끝날 때까지 숨어있는 거야. 그럼, 난 보고하는 거야. 주소 변경 신고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처벌은 않겠지. 어차피 일선으로 복귀하면 그것으로 끝나."
"난 결혼하는데 그것도 이유가 될까?"
"결혼한다고?"
"그래. 그래서 찾아왔어. 급료부 외에 어떤 서류가 필요하지?"
"결혼! 그건 충분한 사유가 된다."
사무병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긴급한 사유에 해당하지. 그런데 왜 그런 위험한 짓을 하지? 너와 같은 일선
돼지들은 서류 같은 건 필요없어. 그러나 필요한 경우엔 날 찾아와. 몰래 만들어 줄게.
그런데 넌 그럴듯한 옷이라도 있나? 설마 그런 누더기를 걸치고 장가갈 생각은
아니겠지?"
"여기서 교환할 수 있나?"
"보급계의 특무상사를 찾아가서 사정해 봐. 좌우간 내 얘기를 하라고. 이런 좋은
담배가 또 있나?"
"없지만 구할 수는 있어."
"내가 아냐. 특무상사에게 주는 거야."
"알았어. 한데 전시결혼에 여자는 어떤 서류가 필요한지 알고 있나?"
"잘 모르겠는데. 별로 까다롭지는 않을 거야. 하여튼 빨리 해치워야 하니까."
사무병은 시계를 보았다.
"보급계로 가게. 지금 상사가 있을 거야."
그레버는 보급계가 있는 건물로 들어섰다. 보급계는 다락방에 있었다. 특무상사는
몹시 뚱뚱했으며, 안경알의 색이 좌우가 다른 걸 끼고 있었다.
"그렇게 사람을 흘끔흘끔거리는 게 아냐." 그는 호통을 쳤다.
"안경알을 본 적이 없나?"
"있긴 하지만 이렇게 색깔이 다른 건 처음이군요."
"이건 원래 내 것이 아냐." 특무상사는 파랗게 빛나는 눈을 가리켰다.
"친구에게 빌렸어. 내 것은 어제 깨졌지. 이런 건 셀룰로이드로 만든 게 안전하지."
"그건 불에 약하지요."
상사는 그레버의 훈장을 보면서 실쭉거렸다.
"그건 그렇고, 자네에게 줄 옷은 없어. 모두가 자네가 입고 있는 것보다 못한
것들뿐이야."
그는 파란 눈으로 날카롭게 그레버를 쏘아보았다. 그레버는 빈딩그에게 받은 담배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상사는 그것을 흘끔 보고 나서 상의 한 벌을 꺼내 왔다.
"이것밖에 없어."
그레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안주머니에 소중하게 간직한 코냑을 꺼내 담배의 옆에
놓았다. 상사는 자리를 비우더니 더 좋은 상의와 거의 신품에 가까운 바지를
내보였다.
그는 바지를 뒤집어 보았다. 가장자리에 미세한 얼룩이 묻어 있었다. 그레버는
묵묵히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가 다시 코냑병을 쳐다보았다.
"피가 아니라 고급 올리브유지. 그 옷의 주인은 이탈리아에서 돌아왔어. 그런 건
벤젠을 사용하면 금방 지워진다구."
"그렇다면 직접 지워서 입을 것이지 어째서 교환을 했을까?"
상사는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말을 제법 잘하는군. 그 녀석은 전선의 냄새가 풍기는 군복이 필요했었어. 지금 네
군복처럼 말이야. 밀라노의 사무실에서 2 년간이나 자기 약혼자에게 일선에서 전투에
참가하는 것처럼 편지를 써 보냈다는 거야. 그래서 샐러드를 엎지른 바지를 입고
사랑하는 약혼녀를 만날 수 없었던 거지. 그건 여기 있는 것 중에서 최고로 좋은
옷이야."
그레버는 상사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교환 조건을 더 유리하게 할 만한 물건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면 이렇게 하면 어떨까? 교환하지 않아도 돼. 너의 너절한 군복도 가지고 가.
넌 특별복이 생긴 셈이지."
"수량을 채우려면 헌 옷이 필요하지 않소?"
상사는 그런 것쯤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창문으로 스며든 햇살이 그의 파란 안구에
비쳤다.
"수량 따위가 맞았던 적이 있었나? 알고 있으면 말해보시지?"
"나 역시."
"그럼 좋아. 자, 가 보라구."
그레버는 시립병원 앞을 지나가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뮤치히가 갑자기 떠올랐다.
한 번 찾아가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는 망설이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선행을 하면
뜻밖의 행운이 찾아올는지도 모른다는 미신같은 게 그를 병원으로 떠밀었다.
지체절단병들은 2층에 있었다. 아래층은 중환자나 수술을 받고 아직도 누워 있는
병사들이 수용돼 있었다. 그것은 공습을 받을 때 즉시 지하실로 옮기기 위해서였다.
지체절단병들은 혼자서 피신할 수도 있고 서로 도움을 줄 수도 있다. 다리를 절단한
자는 팔이 없는 병사 두 명의 목에 팔을 감고서 지하실로 갈 수도 있었던 것이다.
"자네였군!" 뮤치히가 말했다.
"설마 자네가 오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어."
"실은 나도 그랬지."
"고맙네, 에른스트. 슈트크만도 여기 있어. 넌 그 녀석과 함께 아프리카에 갔었지?"
"응."
슈트크만은 오른팔을 잃은 동료들과 카드를 하고 있었다.
"야, 에른스트. 네가 도대체 웬일이지?"
슈트크만은 이상하다는 듯이 그레버를 훑어 보았다. 불구가 된 그는 본능적으로
자신과 같은 상처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냥 지나칠 수 없었어."
모두가 그레버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슈트크만과 똑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휴가를 왔지." 그는 멋쩍은 듯이 말했다.
육신이 멀쩡하다는 게 무슨 죄악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난 또, 네가 아프리카에서 호되게 당했으니까 아^36^예 귀국이라도 한 줄 알았지."
"거기서 소련으로 쫓겨갔지."
"그래도 넌 운이 좋았군. 다른 녀석들은 모두 포로가 되었어." 슈트크만은 한쪽
팔을 흔들어 보였다.
"이만해도 다행이라고 할 수 있지."
한가운데에 앉아 있던 사나이가 들고 있던 카드를 바닥에 팽개쳤다.
"도대체 카드를 하는 건가, 잡담을 하는 건가?" 그는 몹시 화가 나 있었다.
그레버는 그의 양쪽 다리가 절단된 사실을 알았다. 더구나 오른손에는 손가락이 두
개나 없었다.
"계속하게." 그레버가 말했다.
"난 괜찮아."
"한 판만 끝낼게." 슈트크만이 말했다.
그레버는 뮤치히와 나란히 창가에 걸터앉았다.
"아놀드는 모른 척해. 저 녀석 오늘 몹시 저기압이야."
"저 한복판에 앉아있는 사내?"
"음. 마누라가 어제 면회를 왔었지. 그러면 저 녀석은 이틀씩 언제나 저기압이야."
"너희들 거기서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지?" 아놀드가 소리를 질렀다.
"우린 지금 옛날 얘기를 하고 있어. 왜 안되는가?"
아놀드는 중얼거리면서 도박을 계속했다.
"여긴 언제나 재미있어." 뮤치히는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들은 여러 가지 재미있는 놀이로 시간을 보내. 아놀드는 비밀
공제조합원이었지. 간단치 않아. 그런데 저 녀석의 아내가 그를 속이고 있거든.
아놀드의 어머니가 귀띔해 주었어."
슈트크만은 카드를 테이블 위에 던졌다.
"제기랄! 크로버로 단단히 잡으려고 했더니, 한 사람이 잭크를 석 장이나 잡고 있을
줄이야."
아놀드는 계속 투덜거리면서 카드를 섞었다.
"결혼상대로 한쪽 팔이 없는 게 나을까, 한쪽 다리가 없는 게 나을까?" 뮤치히가
물었다.
"슈트크만은 외팔이가 더 낫다는데 말야. 하지만 한쪽 팔로는 여자를 안을 수
없잖아?"
"그런 건 걱정하지 마. 중요한 것은 살아있다는 사실이야."
"그건 그래. 하지만 그것만으로 일생을 지탱할 수는 없어. 전쟁만 끝나면 모든
사정이 달라져. 그땐 우린 영웅이 아니라 불구자로 전락하겠지."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의수나 의족의 보조술이 상당히 발달했잖아?"
"내가 말하는 건 그게 아냐. 과연 무얼 할 수 있을까?"
"우린 전쟁에 승리해야 돼." 아놀드가 갑자기 큰소리로 말했다. 그는 두 사람의
얘기를 엿듣고 있었다.
"기분 전환을 해야겠다. 이건 이제 지겨워졌어."
그는 적의를 품고 그레버를 보았다.
"기피자들이 모두 일선으로 가게 된다면, 이렇게까지 후퇴할 필요가 없을 거야."
그레버는 묵묵히 있었다. 불구가 된 인간과 싸움을 할 수는 없다. 수족을 잃은
자들의 주장이 항상 옳은 것이다. 폐를 관통했거나 포탄의 파편이 위장 속에 들어간
병사라면 얼마든지 싸울 수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불구자들과는 싸움이 안된다.
아놀드는 다시 카드를 계속했다.
"넌 어떻게 생각하나?" 뮤치히가 물었다.
"문스터에 여자 친구가 있어. 우린 편지를 계속 주고받고 있지. 그녀는 내가 다리를
부상당한 줄로 알고 있어. 절단한 사실을 알리지 않았어."
"두 번 다시 일선으로 돌아가지 않게 된 것만도 다행으로 생각해야지."
"물론 그렇지. 하지만 언제까지나 이대로 있을 수는 없잖아."
"너희들 얘기를 듣고 있자니 마음이 울적해지는데." 노름을 구경하던 한 남자가
말했다.
"술이나 잔뜩 퍼먹고 사내답게 굴란 말야!"
슈트크만은 웃었다.
"넌 왜 웃어?" 아놀드가 물었다.
"잠깐 이런 생각을 해 봤어. 만약에 오늘밤 우리들 머리 위에 폭탄이 떨어진다면.
그리고 그 자리에 재만 남게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레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대체 아군의 고사포는 어떻게 된 거야?" 아놀드가 그레버를 향해서 소리를
질렀다.
"전부 일선에 가 있나? 여긴 하나도 없어."
"거기도 없어."
"뭐라고?"
그레버는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일선에선 신무기를 감추고 대기해 있어."
아놀드는 그레버를 노려보았다.
"뭐라고! 넌 우리가 패전한 것처럼 말하잖아. 바보 같은 놈. 넌 내가 1차 대전 후의
상이군인들처럼 휠체어에 앉아 성냥이나 팔라는 게냐? 우린 당당한 권리가 있어.
총통께서 약속하셨어!"
그는 흥분해서 테이블에 카드를 던졌다.
"라디오를 틀어!" 두 다리가 없는 사내가 말했다.
"음악을."
뮤치히가 라디오를 틀었다.
라디오에선 불쾌한 금속성의 연설의 홍수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그는 다이얼을 얼른
돌렸다.
"그대로 둬!" 아놀드가 거칠게 말했다.
"왜 그러지? 항상 듣는 연설인데."
"그대로 두란 말야! 당의 연설이야. 열중한다면 나의 사정도 호전될 거야!"
뮤치히는 한숨을 쉬더니 다이얼을 돌려놓았다. 승리를 예찬하는 연설자의 외침이 온
방안에 울려퍼졌다. 아놀드는 몹시 심각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슈트크만이
그레버에게 눈짓을 하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버는 그에게 가까이 갔다.
"조심하게, 슈트크만." 그레버가 속삭였다.
"난 이제 가야겠어."
"무슨 좋은 일이라도?"
"그런 건 아냐."
그레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에 있던 병사들의 눈길이 일제히 그의 뒤를 쫓고
있었다. 그는 마치 발가벗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되도록 천천히 걸음을 떼어놓았다.
그렇게라도 해서 흥분한 불구자들을 진정시킬 수 있다면 좋겠다고 그레버는 생각했다.
그는 모두들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폴만에게 갔다. 노인은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즉시 문을 열었다.
"그레버, 자네였군?"
"그렇습니다. 잠깐 여쭐 게 있어서 들렀습니다."
"어서 들어오게. 다른 사람에게 알릴 필요가 없지."
그들은 램프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담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지만 폴만이
피운 것 같지는 않았다.
"무슨 말인가?"
그레버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선생님 방은 이것뿐입니까?"
"왜?"
"한 2, 3일 동안 어떤 사람을 숨겨야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가능할까요?"
폴만은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지명수배된 사람은 아닙니다. 다만 만약의 경우를 위해서 어쩌면
그럴 필요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나를 찾아왔나?"
"선생님 외에는 믿을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레버는 왜 폴만을 찾아왔는지를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최악의 경우, 은신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게 누구지?"
"제 약혼녀입니다. 그녀의 부친은 지금 강제수용소에 있습니다. 그녀도 혹시
체포될까 봐 걱정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요즘은 조심하는 게 상책이지. 필요하다면 이 방을 사용하게."
"정말 감사합니다."
폴만은 싱긋 웃었다.
"고맙습니다." 그레버는 다시 인사를 했다.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그들은 책장 앞에 서 있었다.
"자네가 적당한 걸 뽑게."
그레버는 고개를 흔들었다.
"책은 제게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 알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일치되고 있습니까? 이 책들, 시나 철학이 돌격대나 강제수용소, 무고한
인간들의 대량 학살과 같은 비인도와 말입니다."
"그건 절대로 일치할 수 없어. 그저 동시에 공존하고 있을 뿐이다. 만일 여기 있는
책들을 저술한 사람들이 살아있다면 대부분이 강제수용소로 끌려가겠지."
"그럴 겁니다, 선생님."
폴만은 그레버를 응시했다.
"자네, 결혼할 생각인가?"
"그렇습니다."
노인은 책 한 권을 뽑았다.
"자네에게 줄 것이 없네. 이걸 갖고 가세. 읽을 필요가 없어. 그림이 있을 뿐이지.
좀처럼 책이 읽히지 않을 땐 그림만 뒤적이면서 밤을 새운 적이 있지. 그림과
시만으로도 램프에 석유가 있는 한 얼마든지 견딜 수 있어. 그러다가 불이 꺼지면
기도밖에 할 수 없었지만."
"그렇군요."
"난 자네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지. 자네가 한 말도 곰곰이 생각해 봤어. 하지만
그에 대한 해답은 없네."
폴만은 주저하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믿음 하나만은 꼭 지니고 있어야 돼. 아니면 우리에게 무엇이 남겠는가?"
"무엇에 대한 믿음입니까?"
"하느님이야. 또 인간의 마음에 있는 선이지."
"선생님께선 그것을 의심한 적이 없으십니까?"
"물론 없지."
그레버는 공장으로 갔다. 바람이 불면서 구름이 지붕 위를 흘러가고 있었다. 어두운
광장을 가로질러 일단의 군인들이 행진하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 배낭을 메고 있었다.
일선으로 귀대하는 도중이었던 것이다. 그는 파괴된 집의 정원에 솟아있는 잿빛
보리수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이 나무를 처음 대했을 때 느꼈던 잔뜩 부푼 생명의
소용돌이가 어깨와 근육으로 전해졌다. 이상하다 나는 폴만 선생님을 동정하고,
선생님은 나를 도울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선생님을 만날 때마다 생명의 환희를
느낀다.
19
"서류? 잠깐만 기다리시오."
담당자는 안경을 벗으며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그러더니 창구와 실내를 구분하고
있는 벽을 돌아 안으로 들어갔다.
그레버는 그것을 지켜보다가 주위를 살폈다. 출입구에는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문 옆으로 가 있어." 그는 살며시 말했다.
"저기서 기다려. 내가 모자를 들면 즉시 폴만에게 가. 나도 곧 따라갈 테니까."
엘리자베스는 망설였다.
"가라니까!" 그는 재촉했다.
"어쩌면 그 늙은이가 누군가를 부르러 갔는지도 몰라.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
"혹시 나에게 물어 볼 말이 있는지도 몰라요."
"그런 건 바로 알게 돼. 그럼 당신이 잠깐 밖에 나갔다고 말 할게."
그는 창가에 서서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며 방긋
웃다가 이윽고 사람들 속에 묻혀버렸다.
"쿠루제양은?"
그레버는 뒤로 돌아섰다. 담당자가 자리에 앉고 있었다.
"곧 옵니다. 그런데 일은 제대로 되고 있습니까?"
담당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결혼할 계획이요?"
"가급적 빨리 할 생각입니다. 제 휴가가 거의 끝나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즉시 결혼할 수도 있습니다. 군인인 경우에는 간단하고 신속합니다."
그레버는 그가 들고 있는 서류를 보았다. 담당자는 싱긋 웃었다. 갑자기 그레버는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서류는 다 갖추어졌습니까?" 그는 말하면서 모자를 들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잘 되었소. 그런데 쿠루제양은 어디에?"
그레버는 모자를 창구에 놓고 뒤돌아 서서 엘리자베스를 찾았다. 출입구에는
사람들로 북적댔기 때문에 좀처럼 그녀를 찾을 수가 없었다. 순간 창구에 놓은 모자에
생각이 미쳤다. 모자는 두 사람만의 신호였었는데, 그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그는 급히 말했다.
"곧 데려오겠습니다."
그는 재빨리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문 밖의 기둥 뒤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 있었군! 모든 게 잘되었어, 엘리자베스."
그들은 창구로 돌아왔다. 담당자는 그녀에게 서류를 넘겨주었다.
"당신은 보건 고문이신 쿠루제씨의 따님이 맞습니까?"
"네."
그레버는 심호흡을 크게 했다.
"나는 당신 아버지를 알고 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그를 바라보았다.
"혹시, 제 아버지 소식을 들으셨나요?"
"그런 건 아니오. 당신도?"
"네."
담당자는 안경을 벗었다. 근시의 파란 눈에 물기가 어려 있었다.
"희망을 잃지 마시오." 그는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았다.
"부디 행운을 빕니다. 당신이 제출한 서류는 내가 직접 처리했소. 당장이라도
결혼할 수 있소. 모든 건 내가 주선해 드리지요."
"오늘 오후에 하겠어요." 엘리자베스가 대답했다.
"2시라도 괜찮겠어요?"
"그렇게 합시다. 장소는 국민학교 운동장이오. 지금은 거기에 호적과가 있으니까."
"고맙습니다."
그들은 문 앞에 서 있었다.
"지금 당장하면 안 돼? 그럼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을 텐데."
엘리자베스는 미소를 지었다.
"난 준비해야 할 것이 있어요. 당신은 잘 모르겠지만 2시 15분 전에 데리러
오세요."
그레버는 망설이다가 말했다.
"정말 간단하게 끝났어. 난 또 무슨 일이 일어날까 봐 조마조마 했었지! 어째서
그렇게 겁을 먹었을까?"
"아니!"
"그렇지 않아?"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버지 역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지나치게 조심하는 건 바보라고 생각하셨어요.
지금 세상에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면서. 하지만 바로 그런 일을 당하고 말았어요.
우린 운이 좋았을 뿐이죠."
그레버는 거리를 걷다가 '옷 수선' 이라고 써 붙인 가게를 발견했다. 캥거루처럼
생긴 남자가 앉아 군복을 깁고 있었다.
"이 바지의 얼룩을 뺄 수 없겠소?"
주인은 고개를 들었다.
"여긴 수선하는 곳이지, 세탁소가 아닙니다."
"그건 알고 있소. 다림질이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당신이 지금 입고 있는 옷 말입니까?"
"그렇소."
주인은 투덜거리면서 일어나더니 바지에 묻은 얼룩을 자세히 살폈다.
"피가 아니라 기름이오. 벤젠으로 쉽게 뺄 수 있소."
"그렇게 잘 알면 직접해 보시오. 이건 벤젠으로는 어림도 없소."
"그럴지도 모르겠소. 나보단 당신이 더 잘 알 테니."
주인은 커튼 뒤로 가서 헌 바지와 흰 셔츠를 가지고 나왔다.
"얼마나 걸리겠소? 결혼식에 입을 옷이오."
"한 시간이면 충분하오."
그레버는 옷을 갈아입었다.
"그럼, 한 시간 후에 오겠소."
주인은 난처하다는 듯이 그를 쳐다봤다. 가게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로 알았던 것
같았다.
"내 옷이 훌륭한 보증이 될 것이오. 난 도망가는 게 아니오."
"당신의 군복은 국가의 것입니다. 좌우간 다녀오시오. 그 동안 이발이나 하시오.
결혼한다면 이발을 해야겠소."
"그런 것 같군요."
그레버는 밖으로 나와 이발관으로 갔다. 바짝 마른 여자가 혼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 남편은 일선에 있지요. 그래서 제가 대신 맡고 있어요. 앉으세요."
"이발을 하고 싶소."
"전 솜씨가 좋답니다. 세발도? 고급 비누가 조금 남았어요."
"아, 부탁하오."
여자는 제법 솜씨가 있었다. 이발을 하고 나서 비누와 타올로 머리를 깨끗이 한
다음에 빗질을 했다.
"머릿기름을 바를까요? 프랑스제의 브리양딘느죠."
그레버는 깜박깜박 졸다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냄새는 어떻소?" 그레버는 알폰스의 욕실용염제를 떠올렸다.
"그야 물론 머릿기름 냄새겠죠."
그레버는 병을 들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기름이 썩은 냄새 같은 게 풍기고 있었다.
승리의 시대는 이미 아득한 옛날이 되었다.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머리는 짧게 깎지 않은 부분이 꼿꼿하게 서 있었다.
"좋소. 약간만."
그는 계산을 마치고 수선하는 집으로 갔다.
"아직 이릅니다." 주인이 말했다.
그레버는 잠자코 자리에 앉아 주인이 다림질하는 것을 구경했다. 일시에 긴장이
풀리면서 졸음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파리가 날아다니고 아이론은 수증기를
만들어냈다.
"이만하면 됐습니다."
주인은 그레버에게 바지를 건네주었다. 바지의 얼룩은 거의 지워져 있었다.
"좋소!" 그레버는 흡족했다. 바지에서 벤젠 냄새가 났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발은 어디에서 했소?"
"일선으로 출정한 군인의 아내가 했소."
"마치 자신이 깎은 것 같군요. 잠깐 기다리시오."
주인은 가위로 대충 손질을 했다.
"자, 이만하면 괜찮군."
"얼마요?"
주인은 사양했다.
"내고 싶거든 1000 마르크를 내시오. 아니면 한 푼도 안 받겠소. 결혼 선물로
생각하구려."
"고맙소. 꽃집이 어디에 있는지 아시겠소?"
"슈피헤른가에 한 집 있습니다."
꽃가게는 열려 있었다. 두 명의 여자 손님이 화환 값을 흥정하는 중이었다.
"이건 생화이기 때문에 값이 비쌉니다."
한 사람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점원을 보았다.
"그렇지만 터무니없군! 자, 밖으로 나가지. 다른 가게로 가서 싸게 사야겠어."
"사시지 않아도 좋습니다." 여점원이 빈정거렸다.
두 여인은 발을 동동 구르면서 밖으로 나갔다. 여점원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그레버를 보았다.
"손님께서도 화환을 원하시나요? 아니면 관에 덮으실 건지? 보시다시피 꽃은 얼마
안되지만 무척 아름답게 만들어졌지요."
"난 조화는 필요없소."
"그러면?" 여점원은 깜짝 놀랐다.
"꽃이 약간 필요한데."
"꽃? 백합이 있지만."
"그것 말고. 결혼식에 사용할 것이오."
"결혼식에는 백합이 적격이죠. 백합은 무구한 처녀의 상징이랍니다. 요즘엔 꽃을
좀처럼 구할 수 없어요."
"그렇겠군요. 혹시 장미는 없소?"
"장미라뇨? 이런 계절에 무슨 장미가 있어요? 지금 온실은 야채만 재배해요."
그레버는 진열대를 유심히 보았다. 마침내 스와스치카 모양의 화환 그늘에서
황수선화 한 다발을 발견했다.
"이걸 주십시오."
여점원은 황수선화에 물을 뿌렸다.
"죄송하지만 신문지에 싸서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포장지가 없거든요."
그레버는 값을 치르고 밖으로 나왔다. 그는 곧 꽃이 거북하게 느껴졌다. 모두가
꽃을 든 자신을 향해 흘낏거리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꽃을 밑으로 해서 꽃다발을
들다가 나중에는 겨드랑이에 끼고 걸었다. 꽃을 싼 신문지에는 노란꽃 옆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사내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국민재판의 의장이었다. 그는 기사를
읽어보았다. 네 사람이 독일의 승리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해서 처형됐다는 기사였다.
그들의 목을 작두로 내리쳤다 그레버는 신문지를 막 구겨서 던져버렸다.
호적과는 국민학교의 운동장에 있었다. 그곳은 등산용 로프의 끝이 벽에 매여서
울타리를 만들고 있었다. 로프 사이에는 히틀러의 초상이 걸렸으며 그 밑에는
스와스치카가 있었다.
두 사람은 기다려야만 했다. 그들 앞엔 중년의 병사가 여자와 함께 서 있었다.
여자는 가슴에 돛단배 모양의 브로치를 달고 있었다. 남자는 몹시 흥분해 있었으나
여자는 침착하게 행동했다. 여자는 우리는 공모자라고 말하는 것처럼 엘리자베스를
보고 싱긋 웃었다.
"결혼 증인." 호적과 서기가 말했다.
"당신의 결혼 증인은 어디 있소?"
병사는 어리둥절했다. 처음부터 증인은 없었다.
"전시 결혼에는 증인이 필요없다고 생각했소." 이윽고 그는 대답했다.
"그렇지만 형식은 갖춰야 합니다."
병사는 그레버를 돌아보았다.
"어떻습니까? 좀 도와주지 않겠소? 서명만 하면 됩니다."
"좋습니다. 그럼, 당신들은 우리의 증인이 되어 주시오. 나도 증인이 필요하단
생각을 못했기 때문에."
"그런 걸 누가 생각했겠습니까?"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잊지 않았다면 당연한 것이오." 서기가 아니꼽다는 듯이
말했다.
그는 병사들의 말투에서 모욕감을 느낀 것 같았다.
"당신들은 총도 없이 전쟁터에 나갑니까?"
병사는 서기를 노려보았다.
"그건 얘기가 다르잖소. 증인은 총하고는 다르오!"
"그런데 증인은 있습니까?"
"여기 있는 나의 전우와 부인이 증인이오."
서기는 불만스러운 눈으로 그레버를 보았다. 그는 아마도 문제를 간단히 처리하는
게 재미없는 모양이었다.
"신분증을 가지고 있소?" 그레버에게 물었다.
"물론. 우리도 결혼을 할 거요."
서기는 느릿느릿 서류를 들었다. 그는 엘리자베스와 그레버의 이름을 호적부에
기입했다.
"여기에 서명하시오."
네 사람이 각각 서명을 했다.
"총통의 이름으로 축하드립니다." 서기는 병사와 병사의 아내에게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그레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당신의 증인은?"
"여기 있소." 그레버는 두 사람을 가리켰다.
서기는 고개를 저었다.
"한 사람만 증인이 될 수 있소."
"그건 왜 그렇죠?"
"당신들은 아직 독신이죠? 하지만 저들은 이미 결혼이 성립된 부부입니다. 증인으론
독립된 두 사람이 필요합니다. 아내는 자격이 없습니다."
그레버는 관리의 말이 사실인가, 아니면 생트집을 잡는 것인가 판단이 서지를
않았다.
"증인이 되어 줄 사람이 없겠소? 혹시 사무원이라도?"
"이런 직위에 있는 사람으로서 그런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서기는
냉정하게 말했다.
"증인이 없으면 결혼할 수 없습니다."
그레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왜 그러오?"
그들에게로 다가와 묵묵히 듣고 있던 중년의 남자가 물었다.
"결혼 증인이라면 내가 서 주겠소."
그는 엘리자베스 옆에 섰다. 서기는 싸늘한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신분증이 있소?"
"물론 있지."
중년 남자는 재빨리 신분증을 꺼내 테이블 위에 던졌다. 서기는 그것을 보더니 벌떡
일어섰다.
"하이 히틀러! 친위대 대장님!"
"하이 히틀러!" 친위대 연대장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이제부터 연극은 그만해 둬. 알았나? 군인에게 그런 태도로 굴다니, 넌 도대체
뭐지?"
"알겠습니다, 연대장님! 저 죄송하지만 여기 서명 좀 해주시겠습니까?"
그레버는 친위대 연대장인 힐테브란트가 자기의 증인이 됐음을 알았다. 첫 번째
증인은 크로츠 공병이었다. 힐테브란트는 그레버 부부와 악수를 나누고 크로츠
부부에게도 악수를 청했다.
서기는 교수형 집행을 위에서 늘어뜨린 것 같은 로프 뒤에서 히틀러의 '나의 투쟁'
두 권을 꺼냈다. 그는 지극히 사무적으로 말했다.
"국가의 선물입니다."
서기는 힐테브란트의 뒷모습을 흘겨보고 있었다.
"사복을 입고 있으니 알아 볼 수가 있나."
두 부부는 평행봉 앞을 지나서 출구로 갔다.
"당신은 언제 출발하시죠?" 그레버는 공병에게 물었다.
"내일입니다." 크로츠가 대답했다.
"우린 국가에 기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전사를 하더라도 적어도 마리의 걱정은
조금 덜 수가 있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크로츠는 배낭의 끈을 풀었다.
"덕분에 무사히 결혼식을 마쳤습니다. 여기 브른스윅크 소시지가 있습니다.
받으십시오. 난 농촌 출신이라 이런 것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실은 서기에게 줄
생각이었는데 생각해 보십시오! 저런 녀석에게 줄 수 없지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런 놈들에게 호의를 베풀 필요는 없습니다!" 그레버는
소시지를 받았다.
"대신에 이것을 받아 주십시오. 결혼선물로 이것밖에 드릴 게 없습니다."
"그건 저도 한 권 받았습니다."
"상관없습니다. 이것으로 당신은 두 배나 행복해 질 것입니다. 한 권은 부인께
드리십시오."
크로츠는 '나의 투쟁'을 들었다.
"정말로 주시는 겁니까?"
"제게는 필요가 없습니다. 집에 많으니까요."
"그럼 감사합니다."
그레버는 급히 엘리자베스의 뒤를 쫓았다.
"난 알폰스 빈딩그에게 알리지도 않았어. 녀석을 증인으로 세우고 싶지 않았어.
돌격대장의 이름을 우리 이름과 나란히 하고 싶지 않더군. 그 대신 친위대 연대장이
증인이 되었지."
그들은 마르크프트라츠를 가로질렀다. 마리 교회의 지붕 위로 비둘기가 날아다녔다.
그레버는 엘리자베스를 보면서 우리는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한 만큼
행복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들은 교외의 외딴 숲속 공지에서 뒹굴고 있었다. 빈터에는 여러 가지 꽃들이 피어
있고, 미풍이 가볍게 꽃잎을 흔들었다. 엘리자베스는 일어나 않았다.
"저쪽에 보이는 것이 무엇일까요? 마치 마법에 걸린 숲 같군요. 아니라면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걸까? 나무라는 나무는 모두 은빛으로 빛나고 있어요. 당신에게도
보이나요?"
그레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게 뭐죠?"
"굉장히 얇은 알루미늄이야. 초콜릿을 싸는 은종이 같은 것이지."
"숲에 가득 걸려 있어요. 어디서 생겨 났을까요?"
"비행기에서 다발로 뿌렸지. 무선통신을 방해하려는 의도지. 은박지가 공중에서
날아다니면 전파를 교란시키니까."
"어머나, 시시하군요. 내겐 마치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보여요. 그런데 전쟁과 관련이
있다니! 우린 겨우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공지 주위의 수목에는 나뭇가지마다 은박지가 걸려 반짝반짝 빛났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오르며 그것은 평화의 축제가 되어 붕붕 떠다녔다.
엘리자베스는 그레버에게 기댔다.
"저 숲은 우리가 생각했던 대로 바라보기로 해요.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좋아."
그레버는 외투 주머니에서 폴만에게 받은 책을 꺼냈다.
"비록 신혼여행을 갈 순 없지만 스위스의 풍경이 가득 실려 있어. 전쟁이 끝나면
그곳으로 가서 우리의 보금자리를 꾸미는 거야."
"스위스! 밤에도 불을 환하게 밝히고 있는 곳이죠."
그레버는 책을 펼쳤다.
"지금은 그곳조차 어두워. 병영에서 들었는데 우리 정부가 요구한 모양이야.
등화관제를 하라는 최후 통첩을 받았으므로 어쩔 수가 없었겠지."
"그건 왜 그렇죠?"
"스위스의 상공을 아군기만 통과한다면 상관이 없겠지. 그런데 지금은 적기도
통과하고 있거든. 폭탄을 가득 싣고 말야. 불빛이 있으면 위치가 드러나잖아."
"그렇다면 틀렸군요."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해. 언젠가 전쟁이 끝나서 우리가 스위스로 가면, 그곳의
경치는 이 그림들과 똑같이 변함없지.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그림책이라면 결코 그럴
수가 없어."
"독일의 책도 그렇겠죠?"
"그래."
그들은 스위스를 구경했다.
"산뿐이군요. 스위스에는 산 말고는 없나요? 따뜻한 남쪽은 없나요?"
"물론 있지! 여기가 스위스의 이탈리아야."
"로카르노군요! 여기서 평화회의가 열렸었지요. 전쟁을 또다시 일으키지 않겠다고
결의를 한."
"그랬었지."
"그것도 오래 못 갔어요."
"그래. 이 그림이 바로 로카르노야. 종려와 오래된 교회들, 마조레 호수도 있어.
이곳의 섬에는 진달래가 피었어. 태양이 빛나고 평화가 있는 곳이지."
"아! 거긴 어디죠?"
"포르트론코라고 부르지."
"좋군요." 엘리자베스는 즐거운 듯이 웃고 있었다.
"우리 그곳을 꼭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가기로 해요."
그레버는 책을 덮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빛나는 은빛이 눈을 가렸다. 그는
엘리자베스를 안았다. 그녀는 숲 속의 풀과 섬세한 나뭇잎과 연약한 꽃잎이 되어
있었다. 나뭇잎이 차츰 크게 확대되면서 마침내 지평선을 덮었다. 그는 두 눈을
감았다.
바람이 멎더니 금세 어두워졌다. 멀리서 육중한 소리가 낮게 들려왔다.
대포다 어디일까? 여긴 어딘가? 전선은? 그는 엘리자베스의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 근처에 포좌가 있을까? 사격 연습을 하는지도
모른다.
엘리자베스가 몸을 움직였다.
"어디죠?" 그녀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여기를 폭격할까요?"
"비행기소리가 아냐."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레버는 몸을 일으키고 귀를 기울였다.
"저것은 포탄도, 대포도 아냐. 천둥소리야."
"천둥이 치기에는 아직 이르지 않아요?"
"그건 일정한 시간이 없어."
이번에는 번갯불이 번쩍 빛났다. 인조의 폭풍우를 알고 있는 그들은 번갯불이
인공적이라고 생각했다. 천둥소리조차 비행기의 굉음과 구별이 되지 않았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종려나무 밑으로 달려갔다. 머리 위로
나뭇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아득하게만 들렸다.
그들이 숲속에서 벗어나자 지붕이 있는 전차의 정류장이 보였다. 정류장에는
친위대원 세 사람이 많은 사람들 틈에 섞여 있었다. 젊은 친위대원 한 사람이
엘리자베스에게 곁눈질을 했다.
얼마 후, 비가 그치기 시작했다.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분간할 수 없군. 어디로 갈까?"
"오른쪽으로."
그들은 어둠침침한 거리로 나왔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한 줄로 늘어서서 땅을 파고
있었다. 순간 엘리자베스는 긴장했다. 그녀는 노동자들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들의 옆을 걸어가면서 마치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레버도 노동자들의 옷에 번호표가 붙어 있는 것을 알아챘다. 그들은 강제수용소에
수용된 수인으로서 아무도 고개를 들지 않고 묵묵히 일만 했다. 두 사나이가 쓰러져서
매점 옆에 누워 있었다.
"야, 임마!" 친위대원이 소리를 질렀다.
"이리 와! 접근은 금지다!"
엘리자베스는 못 들은 척하고 더욱 서두르면서 수인들의 얼굴을 훑어갔다.
"야! 너 내 말이 안 들려?"
친위대원이 욕설을 퍼부으며 다가왔다.
"왜 그러지?" 그레버가 물었다.
그레버는 뒤에 다른 친위대원이 뛰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분대장이었다.
그레버는 엘리자베스를 불러 세울 수가 없었다. 아무리 불러도 돌아오지 않을 게
분명했다.
"우린 무엇인가 찾고 있었어."
"무엇을? 빨리 말해 봐!"
"여기서 브로치를 잃어버렸어. 다이아몬드가 박힌 돛단배인데 어젯밤 이곳을
지나가다가 떨어뜨린 게 분명해. 혹시 못 보았어?"
"뭐라고?" 그레버는 거짓말을 되풀이했다. 엘리자베스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갔다.
"아무것도 못 보았어." 분대장이 대답했다.
"정신이 없군!" 친위대원이 말했다.
"신분증 있나?"
그레버는 그를 쏘아보았다. 당장이라도 때려눕히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친위대원은 스무 살이 채 안된 것 같았다. 슈타인브레너의 얼굴이 친위대원의 얼굴
위에 겹쳐졌다가 사라졌다. 이윽고 그는 침착하게 말했다.
"난 신분 증명서뿐만 아니라 대단히 훌륭한 증명서도 있지. 게다가 친위대 연대장인
힐테브란트는 내 친구다. 흥미가 있다면 보여주지."
친위대원은 비웃었다.
"그것뿐인가? 아, 총통은 작은 아버지시겠지?"
엘리자베스는 대열의 끝에 당도해 있었다. 그레버는 천천히 시간을 끌면서 결혼
증명서를 꺼냈다
"잠깐 가로등 밑에 가 보게. 이걸 읽을 수 있겠지? 내 결혼 증인의 서명과 날짜를.
이제 알았겠지만 오늘이다. 또 물어 볼 것이 있나?"
친위대원이 증명서를 자세히 살펴보자 분대장이 가까이 와서 어깨 너머로 살짝
엿보았다.
"힐테브란트의 서명이군." 분대장이 인정했다.
"알겠소. 그러나 이곳은 금지되어 있지요. 우리도 방법이 없소. 브로치는 정말
안됐지만."
"정말 미안하게 됐소. 금지구역이라면 찾는 걸 포기하겠소. 어쨌든 명령은
명령이니까."
그는 엘리자베스를 향해서 뛰어갔다. 분대장이 그레버 옆으로 바짝 붙어 따라오고
있었다.
"혹시 브로치를 찾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럼 어디로 전할까요?"
"힐테브란트에게. 그게 제일 간단하오."
"알겠습니다." 분대장이 예의를 지키며 말했다.
"찾아보았나?" 그는 엘리자베스에게 물었다.
그녀는 방금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몽롱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제 잃은 브로치에 대해서 분대장님에게 얘기했어." 그레버는 급히 말했다.
"만약에 찾게 되면 힐테브란트에게 전해주시겠데."
"고맙습니다." 엘리자베스는 깜짝 놀라면서 대답했다.
분대장은 그녀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믿어 보십시오. 우리 친위대는 모두 신사입니다."
엘리자베스는 수인들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것이 분대장의 주의를 끌었다.
"만일 저 새끼들이 감추었다면 틀림없이 찾아내겠습니다." 분대장은 난폭하게
말했다.
"놈들이 지쳐서 쓰러질 때까지 조사해보겠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여기서 떨어뜨렸는지, 그게 분명치 않아요. 어쩌면 숲속에서 잃었는지도 몰라요.
아, 거기서 잃어버린 것 같아요."
분대장은 싱글싱글 웃었다. 그녀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정말 숲속이 맞는 것 같군요." 그녀는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분대장의 웃음이 얼굴 전체로 퍼졌다.
"물론 거기는 우리의 관할 밖입니다."
그레버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는, 뼈만 남은 수인 곁에 서 있었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담배를 꺼내자마자 재빨리 방향을 바꾸면서 수인에게로 떨어뜨렸다.
"감사합니다." 그는 분대장에게 말했다.
"내일 숲속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찾게 될는지도 모르겠소."
"하이 히틀러! 그리고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고맙소."
그들은 묵묵히 걷고 있었다. 마치 홍학의 무리가 날고 있는 것처럼 진주조개와
장미빛이 어우러진 구름이 하늘을 가로질렀다.
"전 정말 큰 실수를 했군요.
"괜찮아. 그게 바로 인생이야. 궁지에서 빠져나왔다고 생각하는 순간, 새로운 위험에
직면하게 되는 거야."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당신은 브로치와 힐테브란트로 저를 구해주셨어요. 당신은 훌륭한
거짓말쟁이군요."
"그건 10 년 동안 조국이 내게 가르쳐 준 거야. 자, 집으로 돌아가지. 나는 이제
당신의 아파트로 옮길 권리가 있으니까."
"저는 내일 공장에 나가지 않아도 돼요. 이틀 동안 휴가를 받았어요."
"그런 말을 지금에서야 하다니!"
"내일 아침까지 말하지 않을 작정이었어요."
그레버는 고개를 흔들었다.
"사람 놀라게 하지 마! 부탁이야. 우리에겐 지금 그럴 시간이 없어. 우린 지금 단 일
분이 귀해. 이제부터 신혼의 기분을 만끽하는 거야. 아침식량은 충분한가?"
"충분해요."
"좋아. 내일은 요란하게 아침식사를 하기로 하지. 행진곡을 틀어놓고 말야. 그리고
루젤 여사가 도덕적 분개로 가슴이 탄다면 결혼 증명서를 내밀고 실망하는 꼴을
감상해야지. 그 여자가 친위연대장의 서명을 본다면 표정이 어떻게 변할까?"
엘리자베스는 싱긋 웃었다.
"그다지 심술궂게 굴진 않을 거에요. 그저께 당신에게서 받은 설탕을 전해주면서
당신이 훌륭한 남자라고 칭찬하던데요. 왜 갑자기 변했는지 알겠어요?"
"난 모르겠는데. 아마도 매수되었겠지. 우리들의 조국은 지난 10 년 동안에 그것을
완전히 터득했으니까."
20
정오에 공습이 있었다. 구름이 잔뜩 끼고 마침 점심시간이었으므로 거리에는
사람들로 몹시 붐볐다. 그레버는 공습 경비원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지하 방공호에
들어가도록 지시를 받았다. 처음에는 단순한 경보라고 생각했지만 최초의 폭발을
감지하는 순간, 재빨리 입구 가까이로 접근했다. 문이 활짝 열려지면서 그레버는
쏜살같이 밖으로 뛰쳐나왔다.
"들어가!" 경비원이 밖에서 소리를 질렀다.
"거리에 있을 수 있는 건 공습 경비원뿐이야!"
"나도 경비원이다!
그는 공장을 향해서 달렸다. 엘리자베스를 만나게 될지는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공장이 폭격의 중요 목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만히 있을 수는 도저히
없었던 것이다. 그는 길모퉁이를 돌았다. 그때 바로 앞에 서 있던 집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것은 공중에서 산산조각으로 분해되어 폭음 속에서 사방으로
내려앉았다.
그레버는 도랑 속으로 뛰어든 다음에 손으로 귀를 막았다. 두번째의 폭발이 그의
뒤에서 작렬했다. 돌조각이 우박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면서 세차게 고개를 흔들고 귀를 잡아당겼다. 다시 이마를 두들기며 의식을
회복하려고 노력했다. 순식간에 거리는 온통 불꽃의 바다로 변했다.
사람들이 공포에 들뜬 눈으로 입을 딱 벌린 채 그가 있는 쪽으로 몰려왔다. 그들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결코 소리가 되어 나오지는 못했다. 그들은 저마다 입과 귀가
막힌 사람들처럼 들리지도 않는 소리를 지르면서 그의 옆을 지나쳤다. 그 뒤를 의족을
한 사내가 이미 죽은 비둘기를 가슴에 안고 급히 달려오고 마지막으로 커다란 셰퍼드
한 마리가 따라오고 있었다.
길가의 집 앞에 다섯 살 가량의 여자아이가 한 명 서 있었다. 그 아이는 갓난애를
꼭 껴안고 있었다. 그레버는 뛰어가다가 그 자리에 멈춰섰다.
"어서 방공호로 돌아가!" 그는 소리를 질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디 가셨지? 넌 왜 혼자 있지?"
아이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벽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그레버는 경비원이 자신을
향해서 무슨 말인가를 외치고 있음을 알았지만 그 소리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레버도 욕설을 퍼부었지만 자신의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경비원은 몸짓을
하면서 계속 소리를 지르고, 그레버는 두 손으로 아이를 가리켰다. 마치 유령의
무언극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경비원은 한쪽 손으로 그를 잡으려고 하면서 다른 손으로는 아이를 안으려고 했다.
그레버가 그를 뿌리치는 것과 동시에 갑자기 완전히 무중력 상태가 되더니 하늘을
향해 마음껏 뛰어오를 수 있을 것같이 발이 땅끝에서 떨어졌다. 문이 활짝 열린 옷장
같은 게 선사시대의 새처럼 그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강력한 선풍이 그를
사로잡고 빙빙 돌렸다.
그레버는 화염을 잔뜩 마셨다. 폐에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는 듯했다. 그는
길바닥에 쓰러져서 머리를 땅에 대고 숨을 죽이고 있었다. 이윽고 머리가 파열할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면서 고개를 들었다. 잿더미가 된 집으로부터 빠져나온 층계 위에
계집애의 시체가 뒹굴고 있었다. 갓난애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폭풍에 떠밀려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을 것이다.
그는 벌떡 일어나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어떻게 공장이 있는 광장까지
당도할 수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공장은 피해를 입은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공장의 오른쪽에 새로운 폭탄 구멍이 하나 생겼을 뿐이었다.
공장의 공습 경비원이 그를 가로막았다.
"내 아내가 여기 있어!"
그레버는 소리를 질렀다.
"제발 들어 가게 해줘!"
"여긴 통행금지야! 방공호는 저쪽 끝에 있어."
"국가에서 금지 안 한 것이 있나? 비켜줘! 그렇지 않으면."
경비원은 안마당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철근 콘크리트의 토치카가 있었다.
"기관총과 감시대다! 들어 가고 싶으면 들어가! 이 얼빠진 놈아."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었다. 기관총은 안마당을 완전히 제압하고 있었다.
"감시대라고!" 그는 흥분해 있었다.
"그따위가 무엇 때문에 필요한가? 다음엔 변소에도 감시대를 배치해야 될 거야.
여긴 죄수라도 가두었단 말인가? 군용외투 공장에서 무얼 감시하겠단 말이냐?"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어마어마한 것들이 있어."
경비원은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
"여기선 군용외투만 만들지 않아. 그러니까 노동자만 있는 게 아니라구. 어떤
군수공장이나 강제수용소의 죄수들을 2--300 명씩 부려먹고 있어. 알겠나?"
"알았어. 그럼 여기 방공호는 어때?"
"방공호가 어떤지 내가 알게 뭐야? 난 밖에서만 근무해."
"방공호는 안전한가?"
"물론이지. 자, 이만 꺼져버려! 누구도 밖으로 나올 수 없어. 저 사람들이 벌써 너를
목격했어. 사보타주를 선동하는 자를 감시하는 거야."
폭격은 멎었지만 지상에서는 계속해서 고사포를 발사하고 있었다. 그레버는
광장으로 달려갔다. 그는 방공호가 열리지 않아서 광장 한쪽 끝에 새로 생긴 폭탄
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었다. 구덩이 속은 화약 냄새로 질식할 것만 같았다. 그는
가장자리로 기어 나와서 공장을 노려보았다.
'여기는 전쟁의 방식이 다른데.' 그는 생각했다. 일선에서는 각자가 자신만 걱정하면
된다. 그렇지만 여기에서는 제각기 가족을 거느리고 있으며 또한 혼자서 당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같이 당하고 있다. 그는 다섯 살짜리 계집애의 시체를 떠올리고
자신이 본 수많은 시체들을 떠올리고 부모님을 떠올리고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는 이런 일을 빚어낸 인간들에게 증오를 느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빗방울이 악취가 풍기는 지상으로 부드러운
눈물처럼 떨어졌다. 비는 지면을 때리고 다시 튀어 오르면서 사방을 점점 어둡게
했다. 그때 제2의 폭격기 편대가 하늘에 나타났다.
마치 누군가가 가슴을 두 쪽으로 잘라내는 것 같았다. 굉음이 머리를 마비시키더니
공장의 일부가 부채꼴처럼 펼쳐진 불꽃 앞에서 까맣게 되어 공중으로 솟아올랐다가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그레버는 거대하게 치솟고 있는 불꽃을 노려보았다. 그는 다시 공장의 정문으로
달려갔다.
"넌 왜 또 왔어?"
"공장에 폭탄이 명중한 걸 모르나?" 경비원이 소리를 질렀다.
"나도 알아. 어디야? 혹시 외투부가 아닌가?"
"외투는 훨씬 뒤야. 바보 같은 녀석!"
"그게 정말인가? 내 아내는."
"네 아내고 뭐고 다 방공호로 피신했어. 부상자와 시체만 남아 있지. 자, 방해하지
말고 빨리 가!"
"모두 방공호로 피신했다면서 어째서 사상자가 생겼지?"
"강제수용소에서 온 놈들이야. 그들은 방공호에도 들어갈 수 없어. 그들을 위해서
특별 방공호라도 만들어야 하나?"
"아니."
"이제는 날 혼자 있게 해줘. 그래도 군인인데 겁쟁이로군! 폭격은 이미 끝났어."
그레버는 머리를 들었다. 고사포만이 여전히 포효하고 있었다.
"한 가지만 물어 볼게. 외투부가 무사한 지를 알고 싶어. 나를 들여보내 주든지
자네가 알아봐 주게. 도대체 당신은 결혼도 안했나?"
"물론 했지. 나도 아내 때문에 마음이 조마조마해."
"그러면 알아봐 주게. 그렇게 한다면 당신 아내는 무사하게 될 거야."
공습원은 그레버의 어깨를 흔들었다.
"야, 넌 머리가 돌았나? 네가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냐?"
공습원은 전화가 있는 사무실로 들어갔다가 다시 밖으로 나왔다.
"전화를 해봤어. 외투부는 무사한 모양이야. 다만 강제수용소에서 온 자들이
직격탄을 맞았다더군. 넌 결혼한 지 얼마나 되었지?"
"5일."
경비원은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다.
"왜 진작 말하지 않았지? 그렇다면 얘기가 다르잖아."
이제 끝났다. 시내는 죽음의 냄새로 가득하고 온통 불바다로 변해 있었다. 빨간 불,
노란 불, 하얀 불, 붕괴된 건물 위로 쥐처럼 살살 기어 다니는 불. 하늘을 향해
타오르는 불, 불이 된 시체와 부상자. 사람이 집에서 비명을 지르며 뛰어나와 미친
듯이 달려가다가 곤두박질친다. 살이 타는 냄새가 바람에 실려 퍼진다.
"인간 횃불이다." 그레버의 옆에 있던 남자가 말했다.
"어떻게 할 수도 없어. 그대로 타버리는 거야. 살은 물론이고 뼈까지 모두 타버리는
거야."
"어째서 끌 수 없지?"
"전부 진화하려면 한 사람당 한 개씩의 소화기가 있어야 해. 비록 그것을
갖춘다해도 얼마나 도움이 될까? 저 악마와 같은 약품은 모든 걸 태울 수 있지."
"살려줄 수 없을 바에야 차라리 빨리 죽여 주는 게 낫겠군."
"그런 짓을 하면 살인죄로 교수형을 받을 뿐이야. 미친 듯이 달릴 때 쏠 때면 쏴
보라구."
그레버는 그 남자를 보았다. 철모를 쓴 남자는 대부분의 이가 빠져나가서 입 주위가
이상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럼,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서 있으란 말인가?"
"이론적으론 그렇지. 아니면 담요를 덮어서 불을 꺼야지. 하지만 누가 모포를 들고
다니겠나? 그리고 자기 몸에 불이 붙었는데 가만히 있을 사람이 어딨어."
"그야 물론. 그런데 대체 당신은 뭐야? 방공단인가?"
"난 시체 운반대야. 물론 부상자도 운반하지. 아, 겨우 마차가 왔군."
버는 말 한 마리가 불길 사이로 수레를 끌고서 허둥대는 것을 보았다.
"구스타프, 잠깐만!" 사내가 외쳤다.
"더 이상 마차가 들어 올 수 없어. 여기서부터 날라야지. 들것을 갖고 왔나?"
"두개야."
그레버가 사내의 뒤를 따라가 보자, 벽돌더미 뒤에 시체가 뒹굴고 있었다. 도살장은
차라리 질서정연하다. 여기서는 인간의 육체가 갈가리 찢어진 채 불에 타고 있는
것이다. 아직도 시체에 걸려 있는 헝겊조각들.
한쪽에는 어린애들의 시체가 난잡하게 널려져 있었다. 아이들은 튼튼하지 않은
방공호에 피신했다가 폭격에 맞은 것이다. 산산이 흩어진 손과 발, 멋대로 흐트러진
책가방. 아! 죽은 고양이 앞에는 새까맣게 그슬린 시체가 있었다. 시신은 남녀의
구별을 도저히 식별할 수 없었다. 성기는 물론이고 가슴까지 불에 타서 만지면 부서질
것만 같았다. 금반지가 하나가 타 들어간 손가락에서 반짝 빛났다.
"눈." 한 사람이 괴성을 질렀다.
"눈동자가 타 버리다니!"
시체는 마차에 자꾸만 쌓여갔다.
"린다." 여자가 들것 뒤에 따라오면서 부르짖었다.
"린다! 린다!"
태양이 나오면서 비에 젖은 거리를 비추고 쓰러지지 않은 나무들은 녹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비가 그친 뒤의 햇빛은 신선하고 더욱 강렬했다.
"이런 일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 누군가가 말했다.
그레버는 뒤돌아보았다. 적색 모자를 쓴 우아한 여인이 아이들의 시체를 지켜보고
있었다.
"절대로! 언제까지나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
경비차가 왔다.
"자, 저리들 가! 여기 서 있으면 안돼. 빨리들 가라구!"
그레버는 발길이 닿는 대로 걸었다. 도대체 무엇을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인가? 이
전쟁이 끝나면 용서해야 할 것과 용서받지 못할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엘리자베스의 집은 무사했으나 앞집에 소이탄이 떨어져서 지붕에 불이 붙고 있었다.
문지기는 거리를 서성거렸다.
"어째서 불을 끄지 않지?" 그레버가 물었다.
문지기는 시내에서 타오르고 있는 불꽃을 가리켰다.
"어째서 저것은 끄지 않지?" 이번에는 문지기가 반문했다.
"물이 없나?"
"물은 약간 있어. 그러나 수압이 약해. 도저히 물줄기가 지붕까지 올라갈 수 없어."
거리에는 의자, 슈트케이스, 새장에 넣은 카나리아, 그림, 옷, 보따리 등이 너절하게
널려 있었다.
"아래층까지 불이 옮겨 붙을까?" 그레버가 물었다.
"소방대가 빨리 안 오면 그럴 수도 있지. 다행히 바람이 잠잠하군. 우리는
수도꼭지라는 수도꼭지는 모조리 틀어 놓고 불길을 막고 있지만 더 이상은 도리가
없어. 그건 그렇고 잎담배는 어떻게 되었지?"
"내일 꼭 갖다줄게."
그는 엘리자베스의 아파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방은 당장에 위험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엘리자베스의 침실 앞 창문으로 루젤 부인이 허둥지둥하는 모습이 보였다.
루젤은 흰색 보퉁이를 소중하게 안고 있었다.
"나도 짐을 꾸려야지. 그래도 괜찮지?"
"물론이지." 문지기가 대답했다.
아파트의 문은 열려 있었다. 복도는 여러 가지 물건과 보따리들로 발 디딜 틈도
없었다. 루젤이 입술을 깨물고 눈물을 흘리면서 그의 옆을 지나갔다. 그는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그는 창가의 의자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문이 꽉 닫힌 방안에서 바깥의
세계와 격리된 평화로움을 느꼈다. 그는 잠시 그대로 창가에 앉아 있었다. 이윽고
침대 밑에서 슈트케이스 두 개를 찾아내고 무엇부터 꾸릴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우선 엘리자베스의 옷부터 시작하기로 하고 옷장에서 당장 입을 옷 몇 가지를
꺼내고 내의와 양말을 챙겼다. 그 동안에도 밖에서는 사람이 부르짖는 소리와
갖가지의 소음이 들려왔다. 밖을 내다보았다. 소방대는 아직 당도하지 않았고 분주히
물건을 나르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모피외투를 걸친 여자가 작은 상자를 안고
맞은 쪽의 폐허에 놓인 안락의자에 앉아있는 게 보였다. 아마도 상자에는 소중히
간직한 보석이 들어 있을 것이다 그레버는 엘리자베스의 보석을 찾기 시작했다.
가느다란 금팔찌와 브로치가 나왔다.
두 채의 집이 서서히 타올랐다. 소방대는 아직도 오지 않았다. 가옥들은 그다지
중요한 재산이 아닌 것이다. 무엇보다도 급한 군수품 공장이 불타고 게다가 시내
곳곳이 화염에 휩싸여 있었다.
사람들은 가구와 물건들을 될수록 많이 끄집어냈다. 그들은 그것을 어디로 옮겨야
할 것인가 막막했다. 짐을 운반한 방법도 없지만 옮겨놓을 만한 장소도 없었다. 집
앞의 거리는 밧줄로 차단되고 그 양쪽에는 여러 가지 생필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어떤 가족은 식탁과 의자를 내놓고 둘러앉았고 또 다른 가족은 한쪽 자리를
차지하고서 그곳은 자기들의 영토라는 듯이 사람들의 통행을 막았다.
그레버는 엘리자베스의 방에서 가죽으로 된 의자를 갖다 놓고 거기에 앉아서
슈트케이스와 다른 짐들을 지키고 있었다. 피해를 입지 않은 한 집에 짐을 맡기려고
했다. 그러나 그 집에서는 창문으로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지만 아무리 벨을 눌러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다른 곳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레버가 체념해 버리고 자리로 돌아오자 빵과 음식을 싼 꾸러미가 없어져 있었다.
그는 나중에서야 식탁에 둘러앉아 있던 가족들이 음식을 뻔뻔스럽게 먹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엘리자베스가 비상선을 돌파해서 불빛을 받으며 서 있었다.
"엘리자베스?" 그는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그녀도 뒤를 돌아다보았으나 그레버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문앞에 까만 물체가 서
있고 오직 머리카락만이 타오르듯이 붉게 빛났다.
"여기야!" 그는 다시 소리를 지르면서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그에게로 달려왔다.
"여기 계셨군요! 고마위요!"
그는 그녀를 힘껏 안았다.
"당신을 데리러 갈 수 없었어. 당신의 물건을 지켜야 하니까."
"저는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몹시 걱정했어요."
"난 아무렇지도 않아."
그녀는 그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미처 그 생각을 못했군. 난 당신만을 걱정하고 있었어."
그녀는 아파트를 올려다보았다.
"여기는 어떻게 되었죠?"
"지붕에 불이 붙었어."
그녀는 아직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길 한쪽에 물통과 컵이 놓여 있었다.
그는 컵에 물을 따라서 엘리자베스에게 주었다.
"이것을 마셔!"
"이봐요! 그건 우리 물이에요!" 뒤에서 여자가 악을 썼다.
"컵도 우리 거야." 이번에는 사내아이가 소리를 질렀다.
"마셔."
그레버는 엘리자베스에게 말하고 나서 뒤돌아섰다.
"공기는 어때? 그것도 당신들 것인가?"
"이대로 돌려주세요."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아니면 통 속의 물을 저 사람들의 머리에 쏟아버리든지."
그레버는 컵을 그녀의 입술에 댔다.
"아냐, 마셔. 당신 줄곧 달려왔지?"
"그래요."
그레버는 물통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에게 소리를 지른 사람은 식탁에 둘러앉아
있는 가족 중의 한 명이었다. 그는 다시 물을 따라서 들이키고 컵을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그들도 조용히 있었다. 이윽고 그레버가 뒤돌아서자 꼬마가 즉시 달려와서
컵을 식탁에 옮겨놓았다.
"치사한 것들!"
문지기가 식탁의 가족을 향해서 소리를 질렀다. 그는 일어나서 길게 하품을 하다가
다시 누워 버렸다.
"여기 옷보따리가 있어. 모두 당신 옷이야. 당신 아버지 사진도 이 속에 있어. 아직
늦지 않았으니까 가구도 꺼낼까?"
"다 타도록 내버려두세요."
"아직도 여유가 있는데?"
"그대로 두세요. 그러면 모든 게 끝나버릴 테니까."
"무엇이 끝나지?"
"과거가. 과거는 어쩔 수도 없어요. 다만 무거운 짐이 되어 우리를 억누르죠.
우리들은 모든 걸 새로 시작해야 돼요. 과거는 이미 타버렸어요."
"가구는 팔 수도 있어."
"여기서?" 엘리자베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리에서 경매를 할 순 없어요. 보세요. 모두들 가구에 둘러싸여 있어요."
커다란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루젤 부인은 우산을 펼쳤다. 꽃이 달린 모자를
꺼낸 여자가 그것을 쓰고 있다가 급히 벗어서 옷 속에 감췄다. 문지기가 잠에서
깨어나 재채기를 했다. 그레버는 그의 배낭에서 개인용 텐트를 꺼냈다. 그는 외투를
엘리자베스에게 벗어 주고 텐트를 침대 위에 세우기 시작했다.
"오늘밤 잘 곳을 마련해야 돼."
"비 때문에 불이 꺼질지도 몰라요. 다른 사람들은 모두 어디서 밤을 새울까요?"
"글쎄."
"여기서도 얼마든지 잘 수 있어요. 당신의 텐트와 외투를 이용해서."
"그럴까?"
"피곤해서 어디라도."
"빈딩그의 집에 빈 방이 있는데, 거긴 싫지?"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저었다.
"폴만 선생님께 가도 되고."
"잠깐 기다려 봐요. 우리 방은 아직 타지 않았으니까."
엘리자베스는 군용외투를 입고 빗속에 서 있었다.
"뭐든 마실 게 있었으면 좋겠어."
"있어. 짐을 꾸릴 때 책장 뒤에서 보드카를 발견했어. 그걸 잊고 있었군."
그레버는 침구를 풀었다. 그 속에는 술병뿐만 아니라 술잔도 숨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않도록 해. 조심하지 않으면 국민의 불행을 비웃고 있다고
루젤에게 밀고를 당할 테니까."
엘리자베스는 잔을 들고 쭉 마셨다.
"멋지군요! 제겐 이것이 필요했어요. 담배도 있어요?"
"전부 가지고 나왔지."
"그럼 우린 필요한 건 전부 갖춘 셈이군요."
"가구를 더 꺼낼까?"
"경비원이 길을 막고 있어요. 그리고 갖고 와 봤자 별수도 없어요. 오늘밤을 어디서
지내든 그걸 가져갈 순 없으니까요."
"한 사람이 피난처를 찾고 한 사람은 짐을 지키면 돼."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흔들며 보드카를 마셨다. 아파트의 지붕이 무너지더니 곧
이어서 층계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거리에서 지켜보던 거주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격렬한 불꽃이 창 밖으로 튀어나오고 있었다.
"우리 방은 아직 괜찮군."
"오래 걸리지 않을 걸세."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한 남자가 대꾸했다.
그레버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건 또 왜 그렇습니까?"
"우리보다 당신들이 운이 좋으란 법은 없어. 난 저기서 23 년이나 살았어. 그게
지금 불타고 있는 거야."
중년의 남자는 대머리가 벗겨져 있었다.
"나는 이건 우연의 문제지,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의의 문제야. 그 뜻을 알 수 있다면!"
"잘 모르겠지만 탓이라고 할 순 없으실 겁니다." 그레버는 웃었다. "아직도 그것을
믿고 있다면 당신은 힘든 인생을 살게 될 겁니다. 보드카를 한 잔 드릴까요? 화를
내기보다는 이게 괜찮습니다."
"고맙지만 사양하겠소. 이제 당신 방이 내려앉으면 그게 필요할 테니까."
윗벽이 무너져 내려앉기 시작했다. 그것은 엘리자베스 방의 바닥을 뚫고 밑으로
떨어졌다. 루젤 부인은 우산으로 얼굴을 가리고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식탁에
앉아있던 가족들은 알코올 스토브에다 커피 대용품을 끓이는 중이었다. 안락의자에
앉아 있던 여인은 의자의 등을 신문지로 가리고 비를 막아 보려고 애를 썼다.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도 들려왔다.
"우리의 2주간의 보금자리가 타고 있군."
"정의다!" 대머리가 만족스러운 듯이 말했다.
"내기를 했었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군요. 당신이 이긴 게 틀림없으니까."
"난 유물론자가 아냐."
"그럼 어째서 불평을 하셨죠?"
"저건 내 집이야. 자넨 내 기분을 몰라."
"모르는 게 당연하오. 독일 제국은 나를 젊었을 때부터 세계 유람자로
만들었으니까."
"그것을 감사히 생각해야 돼."
대머리는 입에 손을 대고 헛기침을 했다.
"어쨌든 보드카 한 잔 얻어 마실 수 있겠지?"
"이제는 안되오. 그보다는 기도나 올리시오."
루젤의 방에서 불꽃이 튀어나왔다.
"책상이 타고 있어요." 엘리자베스가 속삭였다.
"스파이의 책상 속에 든 보고서와 함께!"
"난 거기에 석유를 한 병 뿌려놓았지. 그런데 우린 이제 어떻게 하지?"
"잘 곳을 찾아야죠. 찾지 못하면 거리에서 자기로 해요."
"거리나 공원에서."
그레버는 하늘을 보았다.
"텐트로 비는 막을 수 있지만 의자와 책은?"
"여기 그대로 두고 내일 결정하는 게 좋겠어요."
그레버는 배낭을 지고 침구를 어깨에 둘러멨다. 엘리자베스는 슈트케이스를 들었다.
"이리 줘. 난 짐을 나르는 것에 익숙하니까."
불똥이 사방으로 튀었다. 루젤이 비명을 지르면서 깡충 뛰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숯불이 밧줄로 차단한 거리를 넘어서 그녀의 얼굴에 명중했던 것이다. 엘리자베스의
방에서 화염이 솟구쳤다.
"그만 가요." 엘리자베스가 재촉했다.
그레버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컵을 가지고 달아났던 꼬마가 이미 그들의
의자를 차지해 앉아 있었다.
"루젤이 깡충깡충 뛰는 동안에 핸드백을 슬쩍했지. 서류가 가득 들어 있어. 불 속에
던져 버려야지. 누군가가 강제수용소에 끌려가지 않아도 될 거야."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두 번 다시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레버는 오랫동안 서서 문을 흔들어 보았다. 그러나 굳게 닫힌 문을 열리지
않았다. 그는 뒤돌아섰다.
"폴만 선생님은 집에 안 계셔. 아니면 소리를 못 들으셨든지."
"다른 데로 옮기셨는지도 몰라요."
"다른 데 어디로? 혹시나."
그레버는 다시 문 앞에 섰다.
"아냐. 게슈타포는 오지도 않았어. 어떻게 할까? 방공호로 갈까?"
"싫어요. 이 근처에 있을 곳이 없을까요?"
주위는 이미 어두워졌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하늘에는 타버린 건물의 까만 잔해가
세로로 서 있었다.
"여기 지붕이 약간 나와 있군. 한쪽으로 텐트를 걸고 다른 쪽엔 외투를 걸치기로
하지."
그레버는 대검으로 지붕을 두들겨 보았지만 내려앉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폐허에서 쇠막대기 두 개를 찾아냈다. 그것을 지면에 꽂고 그 위에 천막을 걸쳤다.
"이것이 커튼이야. 다른 한쪽에 외투를 걸면 텐트가 될 거야. 괜찮겠지?"
"도와줄까요?"
"아니. 짐이나 지키고 있어."
그레버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파편과 돌멩이를 치웠다. 그런 다음에 슈트케이스를
들여놓고 침구를 풀었다. 배낭은 머리맡에 놓았다.
"이만하면 훌륭해. 난 지금까지 이보다 훨씬 못한 곳에서 살고 있었어. 물론
당신에겐 그런 고생을 시키고 싶지 않지만."
"저도 이제 익숙해지고 있어요."
그레버는 엘리자베스의 레인코트와 알코올 스토브를 꺼냈다.
"빵을 도둑 맞았지만 배낭 속에는 통조림이 두 개나 있어."
"요리할 냄비는?"
"반합이 있어. 그리고 빗물이 있고, 또 보드카도 남았지. 뜨겁게 스튜를 만들까?"
"그보다 보드카를 마시겠어요."
그레버는 스토브에 불을 붙였다. 창백한 불빛이 텐트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는 콩
통조림을 땄다. 그들은 그것을 데워서 결혼증인인 크로츠에게서 받은 소시지와 함께
먹었다.
"폴만 선생님을 기다려 볼까, 잠을 잘까?"
"자는 게 좋겠어요."
"옷을 입은 채로 자야 해."
"피곤해서 금방 잠들 것 같아요."
엘리자베스는 구두를 벗어서 밤 사이에 도둑을 맞지 않도록 배낭 앞에 놓았다.
그레버는 그녀에게 모포를 덮어주었다.
"어때?"
"호텔 같은데요."
그는 엘리자베스의 옆에 드러누웠다.
"집이 없어져서 마음이 아프지?"
"아니. 난 처음 공습을 당한 후로 단단히 각오하고 있었어요. 그 뒤부터는 모든
소유물은 남에게 빌린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건 그래. 그러나 항상 그런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모르겠어요." 그녀는 중얼거렸다.
"희망이 사라진다면 또 모르죠."
그녀의 호흡이 규칙적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레버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일선에서 병사들이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소망이라고 말하던 것 중의 하나
지붕과 침대와 여자, 그리고 조용한 밤 바로 이것이었던가.
21
그는 문득 잠을 깼다. 희미한 발자국소리가 저벅저벅 들려왔다.
그는 조심스럽게 모포에서 기어나왔다. 엘리자베스는 몸을 뒤척이다가 다시
잠들었다. 그레버는 텐트 밖으로 나갔다. 폴만이 돌아왔는지도 모른다. 혹시 도둑이나
게슈타포가 왔을 수도 있다. 그들은 이런 때에 흔히 나타나는 것이다. 만약에
게슈타포라면 미리 폴만에게 귀띔을 해야 한다.
어둠 속에서 두 개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그는 숨을 죽이고서 그들을 뒤따라갔다.
그러나 도중에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벽이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그는 몸을
움츠렸다. 그림자 하나가 뒤를 휙 돌아다보았다.
"누구야?" 폴만의 목소리였다.
그레버는 얼른 모습을 드러냈다.
"폴만 선생님, 접니다. 에른스튼 그레버입니다."
"그레버? 자네가 웬일이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단지 집에 불이 나서 갈 곳이 없었습니다. 하루밤만이라도
방을 빌릴 수 없을까 해서."
"누구와?"
"저와 제 아내입니다. 전 며칠 전에 결혼을 했습니다."
"좋아."
폴만이 다가왔다.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빛났다.
"내가 오는 걸 보았나?"
"네."
그레버는 주저하다가 대답했다. 지나친 조심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엘리자베스를 위하는 것도 아니며, 지금 폐허의 어딘가에 숨어 있는 사람을 위하는
것도 아니다.
"선생님, 저를 믿으셔도 괜찮습니다."
폴만은 이마를 문질렀다.
"그래." 그는 좀처럼 단안을 내릴 수 없는지 그대로 서 있었다.
"자네는 내가 혼자가 아닌 걸 목격했지?"
"그렇습니다."
폴만은 마침내 결심을 한 것 같았다.
"좋아, 들어오게. 오늘밤만이라고 했지. 그리 넓지는 않아."
두 사람은 모퉁이를 돌아갔다.
"괜찮아." 폴만은 앞의 그림자를 향해서 말했다.
폐허 속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폴만은 자물쇠를 열고 그레버와 그 남자를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폴만은 다시 안으로부터 현관문을 잠궜다.
"자네 아내는 지금 어디 있지?"
"밖에서 잠들어 있습니다. 간단하게 천막을 만들었습니다."
폴만은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그레버, 미리 말해두겠는데,혹시 누군가에게 발각되면 위험할지도 몰라."
"알고 있습니다."
폴만은 기침을 했다.
"나 때문에 위험하다는 거야. 나는 지금 혐의를 받고 있어."
"잘 압니다."
"자네 아내도?"
"그렇습니다." 그레버는 잠깐 사이를 두고 나서 대답했다.
또 한 사람의 남자는 그레버의 등 뒤에 묵묵히 서 있었다. 그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폴만은 커튼을 내리고 작은 램프에 불을 붙였다.
"이름은 모르는 게 좋아. 이름을 모르면 누설할 우려도 없으니까. 에른스트와
요셉으로 충분하지."
요셉은 마흔 살 정도의 남자로서 유대인처럼 보였다. 그는 침착한 태도로
그레버에게 미소로 인사를 한 다음에 옷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여기도 안심할 만한 곳이 못 돼."
폴만이 자리에 앉으면서 말했다.
"요셉은 오늘밤 여기서 지내야 해. 어제까지 거처하던 아파트가 없어졌기 때문이야.
내일은 다른 은신처를 찾아 보아야지. 여기도 위험해. 요셉, 이유는 그것뿐이야."
"알고 있습니다." 요셉이 대답했다.
뜻밖에도 목소리가 굵직했다.
"에른스튼, 자네는 내가 모종의 혐의를 받고 있는 걸 잘 알 것이다. 이런 시각에 내
집에 있다가 게슈타포에게 발각되면 어떻게 된다는 것쯤 잘 알고 있겠지?"
"네."
"오늘밤은 무사할 거야. 시내가 혼란하니까. 그러나 안심할 순 없지. 그래도
괜찮은가?"
그레버는 묵묵히 폴만과 요셉을 번갈아 보았다.
"저는 조금도 두렵지 않습니다. 어차피 2, 3일 후 일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아내의 경우는 사정이 다릅니다. 아내는 계속 여기서 살아야 합니다. 미처 그 생각을
못했습니다."
"나는 자네를 쫓아내려고 그러는 게 아냐."
"잘 알고 있습니다."
"밖에서 밤을 샐 수 있겠소?" 요셉이 물었다.
"가능합니다. 비를 맞지 않도록 텐트를 쳤습니다."
"그럼 거기 있도록 하시오. 당신과 우리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셈이 되지. 내일
아침 일찍 짐을 이리로 옮기시오. 당신이 가장 걱정하는 건 그게 아니오? 짐은
카타리네 교회에 맡길 수 있소. 그 교회의 집사가 허락할 거요. 그는 참으로 훌륭한
인물이오. 낮엔 자유롭게 거처를 구하러 다닐 수 있소."
"그게 좋겠군, 에른스트. 요셉은 이런 일에 대해선 나보다 밝아."
옛날과 마찬가지로 자기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이 노인에게 그레버는 무한한 애정이
솟구쳤다.
"알겠습니다, 선생님. 소란을 피워서 죄송합니다."
"무엇이건 용건이 있으면 아침 일찍 오게. 처음에는 천천히 두 번, 그리고 재빨리 두
번 두들기도록. 조용하게 말이야."
"알았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레버는 텐트로 돌아왔다. 엘리자베스는 아무것도 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아침 6시에 잠을 깼다. 짐마차가 크게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전 아주 푹 잤어요. 그런데 여기가 어디죠?"
"얀푸라츠야."
"그렇군요. 오늘밤은 또 어디서 자죠?"
"그건 낮에 생각하기로 하지."
그녀는 다시 누웠다. 텐트와 외투 사이로 실오라기 같은 햇살이 들어오고 새들의
지저귐이 주위에 가득했다. 그녀는 외투를 걷어 올렸다.
"마치 집시같군요." 그녀가 말했다.
"안 그래요? 이런 생활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어젯밤 폴만 선생님을 만나보았어. 필요한 게 있으면
선생님을 깨우면 돼."
"필요한 건 없어요. 참, 커피가 있는지 모르겠군요. 여기서 요리를 만들어도
괜찮겠죠?"
"그것도 금지돼 있겠지. 그러나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우린 집시니까."
엘리자베스는 머리를 빗기 시작했다.
"집 뒤의 항아리 속에 깨끗한 빗물이 고여 있어. 세수 정도는 할 수 있을 거야."
"주위를 돌아보고 싶어요. 마치 시골에 온 것 같군요. 옛날 같으면 로맨틱하겠죠?"
그레버는 웃었다.
"지금도 그래 소련의 진창에 비한다면 말야. 결국은 비교하기 나름이지."
그는 침구를 똘똘 말았다. 재빨리 스토브에 불을 붙이고 물을 끓였다. 갑자기
엘리자베스의 방에서 그녀의 배급표를 두고 나온 게 생각났다. 세수를 하고 돌아온
그녀의 얼굴에 생기가 넘쳤다.
"당신 배급표를 갖고 있나?"
"아니. 책상서랍에 두었었죠."
"야단났군! 왜 그걸 빠뜨렸을까? 시간은 충분했는데."
"당신은 더 중대한 걸 생각했겠죠. 배급표는 새로 신청하면 되잖아요. 배급표를
불에 태운 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죠."
"그러나 오래 걸릴 거야. 독일 관리들은 세상의 종말이 올 때까지 저울을 손에서
놓을 수 없어."
엘리자베스는 소리를 내고 웃었다.
"공장에서 조퇴를 하고 배급표를 받으러 가겠어요. 집이 타버렸단 보증은 문지기가
해주겠죠."
"당신 출근할 생각인가?"
"가야 해요. 집이 탄 건 사유가 될 수 없어요."
"그런 공장은 불이나 나버렸으면 좋겠어."
"그래요. 그래도 결국은 다른 공장에 배치 되겠죠. 더 지독한 데로 갈지도 몰라요.
무기를 만드는 공장은 싫어요."
"그냥 빠지는 게 어때? 어제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모르니까. 크게
다쳤다고 하면."
"그것 역시 증명이 필요해요. 공장에도 의사와 경찰이 있어요. 만약에 거짓이
탄로나면 처벌을 받아요. 시간 외의 노동이나 휴일을 취소하거나 심하면
강제수용소로 보내서 애국주의 교육을 시키죠."
엘리자베스는 반합 뚜껑에 뜨거운 물을 붓고 커피를 탔다.
"제가 이틀 동안의 휴가를 즐긴 사실을 잊지 마세요. 한꺼번에 무리한 부탁을 할 순
없어요."
그녀는 아버지를 위해서는 그럴 수 없다고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게 아버지에게
도움이 된다고 믿으면서 그는 그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악당놈들! 사람을 아주 달달 볶는군!"
"자, 커피. 절대로 화내지 말기! 우린 그럴 틈이 없어요."
"그러니까 화가 나는 거야, 엘리자베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알고 있어요. 우리는 함께 지낼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어요. 당신의 귀대 날짜는
다가오고. 당신이 있는 동안만이라도 일을 쉬었으면 좋겠지만."
"당신의 용기는 대단해."
그녀는 그에게 키스를 하고 살며시 웃었다.
"이제 출근을 해야지. 오늘밤에는 어디서 만날까요?"
"글쎄? 지금은 마땅한 장소도 없지.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지. 내가 공장으로
갈게."
'만약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공습이나 교통 마비 같은.'
그레버는 잠시 생각했다.
"난 짐을 꾸려서 카타리네 교회로 가겠어. 그곳에서 만나도록 하지."
"밤에도 문이 열려 있나요?"
"밤에 올 생각인가?"
"그야 알 수 있나요. 언젠가는 여섯 시간이나 방공호 속에 갇혀 있었어요. 최악의
경우, 말이라도 전해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지만 안심할 수 없어요."
"그렇다면 우리 두 사람 중의 한쪽이 사고가 생길 수도 있단 말야?"
"그래요."
그레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날 갑자기 사람들의 행방불명이 되고 있는 사실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오늘은 폴만 선생님께 부탁할까? 아니야, 거긴 불안해."
"빈딩그다!" 그레버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거기라면 안전해. 그 녀석 집을 알지? 그 녀석은 우리가 결혼한 걸 모르고 있지만
상관없어. 내가 미리 말해두지."
"또 식량을 징발하러 가나요?"
그레버는 유쾌하게 웃었다.
"그 생각을 미처 못 했는데? 정말이지, 우린 먹을 것이 필요해. 그러니 한 번 더
타락해야지."
"우린 오늘밤도 여기서 자나요?"
"그건 곤란해. 난 낮에 다른 장소를 찾아볼 생각이야."
"그럼, 전 출근을 하겠어요."
"선생님께 맡겨놓고 공장까지 나도 함께 가겠어."
"그럴 틈이 없어요. 늦어서 뛰어가야만 해요. 그럼 저녁까지 안녕!"
그는 그녀를 배웅했다. 폐허만 남은 자리에 아침 이슬이 수정처럼 반짝 빛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뒤를 돌아보고 손을 흔들다가 늦었다는 시늉을 하면서 빠른
걸음으로 뛰어갔다. 그레버는 그녀의 그런 모습이 무척 사랑스러웠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다보고 손을 흔들었다. 이윽고 광장의 끝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레버는 전선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전선에서는 일단 작별하고
나면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절대로 알 수 없다. 이런 긴장을 행복한 신혼생활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여덟 시에 폴만이 집에서 나왔다.
"자네 먹을 거라도 있는가? 빵은 조금 있는데."
"고맙습니다. 우린 배불리 먹었습니다. 카타리네 교회에 다녀올 동안 짐을
맡아주시겠습니까?"
"좋아."
그레버는 짐을 옮겼다. 요셉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자네가 돌아왔을 때, 내가 없을지도 몰라. 천천히 두 번, 그리고 재빨리 두 번
노크를 해. 요셉이 열어줄 테니까."
"집시의 생활과 마찬가지입니다. 설마 이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폴만은 지쳤다는 듯이 희미하게 웃었다.
"요셉은 그런 생활을 3 년간이나 계속하고 있어. 처음 몇 개월 동안은 전차 속에서
밤을 세웠지. 밤새껏 빙빙 도는 거야. 그것도 공습이 있기 전 얘기지, 지금은 그렇게
할 수도 없어."
그레버는 배낭에서 쇠고기 통조림을 한 개 꺼내서 폴만에게 주었다.
"남은 겁니다. 요셉에게 주십시오."
"고기인가? 자네도 필요할 텐데?"
"괜찮습니다. 그에게 주십시오. 그런 사람들이 살아남아야 합니다."
노인은 잠자코 있다가 구석에 놓여 있던 지구의를 빙그르르 돌렸다.
"여기를 보게. 이게 독일이야. 엄지손가락으로 가려버릴 수도 있어. 지구의 미세한
일부분이지."
"그야 그렇죠. 그렇지만 그 일부분이 세계의 큰 부분을 정복했습니다."
"비록 정복은 했지만 신망은 얻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가 정복한 부분을 그대로 차지하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10 년
내지 20 년, 아니면 50 년. 승리는 유력한 설득자도 등장시킬 겁니다."
"우리는 승리하지 못했어."
"그것은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될 수 있다."
폴만은 지구의를 계속 돌리고 있었다.
"세계는 정지하고 있지는 않아. 일시적으로 자기의 조국에게 절망했다고 세계를
믿지 않으면 안된다. 일식이라는 게 있긴 하지만 밤이 영구히 지속될 수 없지. 적어도
이 지구상에서는 절대로."
폴만은 다시 지구의를 반대로 돌렸다.
"자네는 다시 시작할 만한 일이 남았느냐고 물었다. 교회는 소수의 어부들과 카타콤
안의 몇몇 충실한 사람들, 로마의 투기장에서 살아 남은 소수인들로 시작됐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나치는 뮌헨에서 맥주를 마시던 소수의 광신자로부터
시작됐습니다."
폴만은 싱긋 웃었다.
"그건 맞는 말이다. 그러나 전제정치가 오래 계속되는 법은 없어. 인류는 편안한
대로를 걸어서 진보해오진 않았어. 항상 밀거나 찌르고 전진이나 후퇴, 경련을
일으키면서 한 발자국씩 내디딘 거야. 우리들 인간은 너무 교만했어. 우리는
피투성이의 과거를 정복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 난 나가 봐야 해." 그는 모자를
들었다.
"이건 선생님께서 주신 스위스의 그림책입니다. 비에 젖었습니다. 전 꿈과 희망을
잃었었지만 이 책을 보고 되찾았습니다."
"잃어버린 꿈을 다시 찾을 필요는 없어."
"있습니다. 그밖에 또 무엇이 있을 수 있습니까?"
"신념이다. 꿈은 언제라도 새롭게 창조할 수 있어."
"그렇군요.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목을 매어 죽는 편이 더 현명할 것입니다."
"자네는 아직 젊어." 폴만은 외투를 입었다.
"이상하다 나는 청춘이라는 걸 전혀 다른 각도에서 들여다봤어."
"저도 그랬습니다."
요셉의 말이 옳았다. 카타리네 교회의 집사는 짐을 맡아주었다. 그레버는 배낭을
그곳에 맡기고 주택과를 찾아갔다. 주택과는 학교의 표본실로 옮겨져 있었다.
표본실에는 지도와 진열품을 나열한 유리상자가 아직도 보존되어 있었다. 유리상자를
통해서 알코올병에 담긴 파충류들이 보였다. 직원은 매우 친절한 백발의 부인이었다.
"당신의 이름을 임시수용소의 명단에 기입해 두겠어요. 주소가 있나요?"
"없습니다."
"그러면 가끔씩 문의해 보세요."
"도움을 줄 수 있습니까?"
"어려워요. 당신보다 먼저 신청한 사람이 6000 명은 돼요. 직접 찾아보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는 얀푸라츠로 돌아와 폴만의 방 앞에 서서 한참 동안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잠시 기다렸다가 남아있는 엘리자베스의 물건을 확인하기 위해서
마리가로 갔다.
엘리자베스의 아파트는 문지기가 살던 층까지 불에 타 있었다. 방금 소방대가
다녀갔는지 여기저기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엘리자베스의 소지품은 물론이고
밖으로 들어냈던 안락의자도 남아있지 않았다.
문지기가 자기 아파트의 커튼 뒤에 있는 것이 보였다. 그레버는 문지기와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옛날의 일이었으며 이제 새삼스럽게 지킬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알폰스를 만나기로 결심했다. 어쨌든 양식이 필요했다.
단지 그 집만이 폐허가 되어 있었다. 황수선화가 햇빛을 받아 금빛으로 빛났으며
나무들은 바람에 흔들렸다. 그렇게 거리는 아침햇살을 받으며 평화롭게 잠들어
있었다. 빈딩그의 집만이 까맣게 타 정원에 생긴 폭탄구멍을 향하여 기울어져 있었다.
구멍 속에는 더러운 물이 잔뜩 고여서 그 속으로 파란 하늘이 들여다보였다.
그레버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꼼짝않고 서서 그것을 바라보았다.
알폰스에게만은 불행한 일이 일어날 수 없다고 단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천천히
건물에 접근했다. 그 화려했던 수영장은 형태가 완전히 무너지고 사슴의 뿔이 풀밭
위에 서 있었으며 고급 융단이 야만족 정복자의 깃발처럼 나뭇가지에 걸려 펄럭였다.
나폴레옹 브랜디병이 화단에서 뒹굴었다.
그레버는 술병을 잘 살펴보고 나서 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뒤로 돌아갔다. 부엌의 입구는 그대로 유지되어 있었다. 문을 열자 무엇인가가
움직이는 기척이 들렸다.
"크라이네르트 부인입니까?" 그는 큰소리로 물었다.
잠시 후, 대답 대신에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더니 가정부가 밖으로 나왔다.
"불쌍하신 주인 어른! 그렇게도 친절하셨는데!"
"왜 그러오? 그 사람이 부상이라도?"
"죽었어요. 그분은 돌아가셨어요. 그렇게 좋은 분이었는데!"
"죽었어?"
"주인께서는 지하실에 피신해 계셨는데 그 지하실까지 파괴되었습니다."
"이 집 지하실은 대형폭탄엔 견디지 못합니다. 그런데 왜 사이델푸라츠의 방공호로
가지 않았죠? 여기서 얼마 걸리지도 않는데."
"주인께선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그리고 저."
크라이네르트 부인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여자 손님이 계셨어요."
"뭐요? 대낮에?"
"그날 밤부터 여기 머물고 있었죠. 블론드 머리의 몸집이 큰 부인이었지요.
대장님은 그 부인을 좋아하셨답니다. 제가 치킨 요리를 갖다 드리고 나서 공습이
시작됐어요."
"그럼, 그 부인도 죽었소?"
"네. 대장님은 파자마를 입은 채로, 부인은 얇은 잠옷을 입고 있었어요. 그런
모습으로 발견되었지요. 저로선 어떻게 할 수도 없었죠. 대장님의 시체가 그런 식으로
발견되다니."
"그런 것은 상관없소. 그보다 더 훌륭하게 죽을 수 있는지 모르겠군."
"하지만 너무 갑자기 당한 일이라."
"그것은 90이 되어도 마찬가지요. 장례식은 언제요?"
"모레 9시입니다. 벌써 입관을 했지요. 보시겠어요?"
"어디 있소?"
"지하실 창고에 있습니다. 집의 뒤쪽으로는 정면에 비해 피해가 거의 없는
편이지요."
그들은 부엌을 지나서 지하실로 갔다. 지하실은 깨어진 유리조각들이 한쪽 구석에
모아져 있고 바닥에 쏟아진 포도주와 통조림 냄새로 가득했다. 지하실 한가운데에
관이 안치되어 있었다.
"어떻게 관을 금방 구했소?"
"당에서 마련해 주셨습니다."
"장례식은 여기서 하오?"
"그렇습니다."
"나도 참석하겠소."
"돌아가신 대장님께서 무척 기뻐하실 겁니다."
그레버는 부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생전에 대장님은 항상 당신을 좋아하고 반기셨지요."
"그렇소.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대장님을 시기하지 않는 사람은 당신뿐이라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또 당신은 일선
군인이시고."
그레버는 잠깐 관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조금 후회가 되었지만 아무런 느낌도 안
드는 자신이 울고 있는 여자 앞에서 부끄럽다는 생각을 잠깐 했을 뿐이다.
"이것을 모두 어떻게 할 생각이오?" 그는 저장품을 보았다.
"필요한 대로 얼마든지 가져가세요. 어차피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 차지할 텐데요."
"부인이 보관하는 게 좋겠오."
"제 몫은 따로 두었어요. 그레버씨, 필요한 건 전부 고르십시오. 여기 오셨던
당원들도 깜짝 놀라고 있어요. 저장품이 많으면 절대로 좋지가 않아요. 꼭 혼자서
은닉한 것 같으니까."
"아마 그렇겠지."
"그러니까 많이 갖고가세요."
"가족은?"
"아버지가 계십니다. 대장님께서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잘 알고 계시죠?
하여튼 물건은 다른 창고에도 많이 있어요. 무엇이든지 잔뜩 골라 보세요."
"필요한 건 무척 많소. 그런데 어떻게 운반을 하겠소?"
"몇 번이라도 다시 오세요. 어차피 다른 사람들에게 넘어갈 바에야 그레버씨, 당신은
군인입니다. 안락의자에 앉아 세월을 보내는 나치 당원들보다 더 많이 가질 권리가
있어요."
어쩌면 그럴는지도 모른다 엘리자베스도, 요셉도, 폴만도 분명히 권리가 있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 사양한다면 바보밖에 안된다.
얼마 후, 그 집에서 벗어났을 때 그는 비로소 자기가 알폰스와 함께 죽지 않은 것은
정말 우연의 일이었음을 깨달았다.
요셉이 문을 열었다.
"빠르군요." 그레버가 말했다.
"자네가 오는 걸 보고 있었지." 요셉은 문에 뚫린 작은 구멍을 가리켰다.
"내가 아까 뚫어 놓았지. 다소 도움이 돼."
그레버는 테이블 위에 꾸러미를 놓았다.
"저는 교회에 갔었는데 집사가 오늘밤은 거기서 묵어도 좋다고 했습니다. 소개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젊은 사람이었나?"
"나이가 많던데요."
"그분은 나를 교회의 직원으로 꾸며서 일주일 동안이나 숨겨 주었어. 갑자기 검색이
있었는데 오르간 속에 숨었었지. 젊은 녀석이 밀고를 했기 때문이야. 그 녀석은
종교적 반유대주의자였어. 그런 것도 있지. 우리가 2000 년 전 옛날에 그리스도를
죽였다는 거야."
그레버는 꾸러미를 풀었다. 주머니에서는 정어리와 고기 통조림이 나왔다. 요셉은
그것을 보고 있었으나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상당한데!"
"나눕시다."
"나눌 정도로 여유가 있나?"
"보시다시피 유산을 상속 받았습니다. 돌격대장에게 말입니다. 마음에 걸립니까?"
"천만에. 오히려 입맛이 더 나는군. 자넨 이런 선물을 받을 만큼 돌격대의 간부들을
잘 아나?"
"어쨌든 대장만은 친했지요. 그다지 악의는 없는 사람이었죠."
요셉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인간은 동시에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걸 믿지 않으십니까?" 그레버가 물었다.
"자네는 그것을 믿나?"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이 약해서 사람들에게 이용당하는 경우엔."
"그렇게 해서 돌격대의 대장이 될 수 있을까?"
요셉은 웃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지. 살인자는 언제나 살인자지. 그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게 상식인데. 그런데 실제로는 그것도 존재의 일부분일 뿐, 살인자가 되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끔찍한 불행을 야기시키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단 말야. 안
그런가?"
"그렇습니다. 하이에나는 언제나 하이에나지요. 하지만 인간은 더 다양한 존재인
것입니다."
요셉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제 수용소의 대장 중에는 제법 유머가 풍부한 사람이 있어. 또 매우 친절한
친위대원도 있지. 또한 선한 면만을 보고 끔찍한 일에 눈을 가리면서 시대의 일시적인
소산으로 자신을 기만하는 사람도 있어. 그들은 탄력성있는 양심을 갖고 있지."
"그리고 두려워하는 인간도."
요셉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레버는 침묵을 지키다가 침착하게 말했다.
"저는 당신을 돕고 싶습니다."
"난 혼자야. 잡히지 않으면 살아남는 거지." 요셉은 마치 남의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가족은?"
"있었지. 동생이 하나, 누이들이 둘, 또 아버지와 처자식이. 모두 죽어버렸지. 둘은
맞아죽고, 하나는 병으로 죽고, 나머지는 독가스로."
그레버는 그를 묵묵히 쳐다보았다.
"강제수용소에서?"
"그렇지." 요셉은 냉정하게 대답했다.
"거기는 설비가 아주 편리하게 되어 있어."
"그래서 당신은 탈출한 겁니까?"
"탈출했지."
"당신은 우리를 얼마나 증오할까요?"
요셉은 어깨를 으쓱했다.
"증오한다! 그건 일종의 사치야. 증오한다면, 그야말로 경계심을 잃게 되니까."
그레버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밖에는 잿더미가 높게 쌓여 있었다.
"자네는 다시 일선으로 돌아가나?"
요셉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습니다. 당신을 쫓는 악당들이 좀더 권력을 연장할 수 있도록 싸우기 위해
돌아갑니다. 당신을 체포해서 교수형에 처할 수 있게 말입니다."
요셉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지 않으면 총살될 것 같아서 가는 겁니다."
요셉은 대답하지 않았다.
"만약에 탈주를 한다면 놈들은 내 부모님과 아내를 강제수용소로 보낸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가야만 합니다."
요셉은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저는 갑니다. 제 말이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몇 백만
명의 인간에게 얽매인 이유입니다. 당신은 저를 경멸할 겁니다."
"그렇게 자책하는 게 아냐." 요셉은 타이르는 것처럼 말했다.
그레버는 그를 응시했다. 그가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도 자네를 경멸하지 않아. 단지 자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뿐이지.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가? 그렇다면 난 폴만 선생님을 경멸해야 하나?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도와주는 사람을 경멸할까? 그들이 없었다면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자네는
아직도 순진해."
요셉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것은 마치 유령의 미소처럼 그의 얼굴을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사람은 너무 떠들어 대면 못 써. 그리고 반성해서도 안돼. 지금은 더욱. 마음이
약해지니까. 그러기엔 아직 일러. 자기 자신을 위험에서 지킬 방법만을 생각해야 돼."
그는 통조림을 책 뒤에 감추어 놓았다.
"이건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될걸세. 고맙네."
그의 그런 행동이 몹시 서툴러서 자세히 살펴보니 손가락의 관절 부분이 하나도
보이지를 않고 손톱은 모두 빠져 있었다. 요셉은 그레버의 시선을 느꼈다.
"강제수용소에서의 기념이지. 거기 소대장의 휴일놀이의 희생이 되었지. 그
소대장은 크리스마스에 양초 대신 이 손가락에 불을 붙였어. 차라리 발가락을
사용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남의 눈에 쉽게 발각될 우려는 없지. 항상 장갑을
끼고 있을 수도 없고."
그레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 헌 군복과 급료부를 드린다면 도움이 되겠지요? 불에 타버렸다고 하면
그만입니다."
"고마워.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어. 난 루마니아인으로 변장할 생각이니까. 폴만
선생이 그런 묘안을 생각했지. 난 '철의 전선'의 일원으로 당원 행세를 하는 거야. 내
얼굴은 제법 루마니아인과 비슷해. 상처도 공산당 놈들에게 당했다고 하지. 자네는
침구와 가방을 다 가지고 가겠는가?"
그레버는 자기가 방에서 나가기를 요셉이 바라고 있음을 알았다.
"당신은 여기에 계시겠죠?"
그레버는 자기 몫으로 남겨놓았던 통조림을 모두 그에게 주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해. 많이 갖고 다닐 수도 없어. 난 곧 이곳을 떠나야 해."
"담배. 담배를 잊고 있었다. 거기에는 담배가 많습니다. 갖고 올까요?"
요셉의 표정이 변했다. 그의 얼굴에서 긴장감이 풀리며 입 언저리에 잔주름을
만들었다.
"담배?" 마치 친구의 소식이라도 듣는 것처럼 반갑게 말했다.
"그거라면 얘기가 다르지. 담배는 양식보다도 중요해. 물론 기다려야지."
22
카타리네 교회의 회당에는 이미 많은 군중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슈트케이스나 보따리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대부분이 여자와
아이들이었다. 그레버는 침구와 가방을 들고 사람들 틈에 섞여 있었다. 말상을 한
노파가 그의 옆에 앉았다.
"피난민이라고 쫓아내지 않았으면 좋겠어. 여러 가지 소문을 들었어. 먹을 것이
별로 없다느니, 농부들이 아주 인색하다는 얘기를."
"저는 그래도 상관없어요." 깡마른 아가씨가 대꾸했다.
"전 여기서 빠져 나갈 수만 있다면 좋겠어요. 무슨 일을 당할진 모르지만 죽음보단
낫겠죠. 우리들은 소유물을 모두 잃었으니까, 도움을 받는 게 당연해요."
"며칠 전에 라인란트에서 피난민을 태운 열차가 이곳을 통과했는데 정말
처참했지요. 피난민들은 멕크렌부르그로 보내졌어요."
"그곳은 부농들이 많이 사는 곳인데."
"부농!" 노파는 성난 듯이 소리를 내고 웃었다.
"농부들과 함께 살려면 뼈빠지게 일해야 돼. 그래도 배불리 먹을 수 없지. 이런
사실은 총통님께 알려야 해!"
그레버는 두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등 뒤로 교회에 딸린 정원의 녹음이
눈부시게 빛났다.
"우린 무료로 숙소를 제공받아야 해요. 우린 전쟁의 희생자니까요. 전쟁의 희생자!"
아가씨는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붉은 코의 집사는 어깨가 축 늘어지고 바짝 마른 남자였다. 그에게 게슈타포의
수배를 받는 사람을 숨겨 줄 수 있는 용기가 있으리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집사는 사람들을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번호표를 나누어주고 나서
같은 번호가 적힌 번호표를 일일이 짐에 붙였다.
"오늘밤, 너무 늦지 마십시오." 그는 그레버에게 말했다.
"교회는 그다지 여유가 없습니다."
카다리네 교회는 대단히 큰 건물이었다.
"여유가 없다고요?"
"그렇습니다. 건물은 크지만 숙소로 사용하는 건 아랫방과 복도뿐입니다."
"늦게 온 사람들은 어디서 잡니까?"
"회당에서도 자고 마당에서도 잡니다."
"교회의 방들은 모두 방공시설을 갖추고 있습니까?"
집사는 부드러운 눈길로 그레버를 보았다.
"교회를 처음 세울 때는 아무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암흑의
중세시대였으니까요."
그레버는 정원을 지나서 밖으로 나왔다. 교회는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었다. 교회의
꼭대기에 높게 세워져 있던 탑이 쓰러지고 유리창도 대부분이 부서졌다. 참새들이 그
창가에 앉아 지저귀고 있었다. 완전히 무너져버린 신학교 바로 옆에 방공호가 있었다.
그레버는 안으로 들어갔다. 방공호는 교회에 소속되어 있던 옛날의 술창고를 보강한
곳이었으므로 술통을 놓던 받침대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공기가 축축하고 싸늘했다.
방공실 안 깊숙한 곳에 무거운 쇠고리와 사슬들이 사각으로 새겨진 천장의 돌에
걸려있는 게 보였다. 지하실은 술창고가 되기 전까지는 이단자나 마녀의 고문실로
사용되었던 사실을 그레버는 알고 있었다. 그들의 손은 쇠사슬로 묶여 천장에
매달려서 자백할 때까지 새빨갛게 달군 부젓가락으로 고문을 당했다. 고문에 견디지
못하고 자백을 하면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그리스도적인 사랑의 이름으로 처형을
당했던 것이다. 모는 것이 옛날과 조금도 다름없다고 그레버는 생각했다.
강제수용소의 고문자들은 훌륭하신 선배들로부터 그대로 전수를 한 셈이다, 그리고
그들 역시 똑같은 제자를 대대로 갖게 될 것이다.
그레버는 아드러가를 거닐고 있었다. 저녁 6시였다. 그는 하루종일 방을 찾아
헤맸지만 허사였다. 지칠 대로 지쳐서 오늘은 단념하기로 결심했다.
이 지역은 그야말로 잿더미만 남아 있었다. 그는 무작정 걷고 있다가 갑자기 눈이
번쩍 뜨였다.
처음에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폐허 한복판에 작은 2층집이 서 있었던 것이다.
약간 기울어졌지만 아직도 모든 게 그대로인 채로. 그는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기뻤다.
어느 쪽으로 가든지 조금만 걸어 가도 딴 세계에 온 것처럼 폐허만이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아담한 정원 속에 서 있는 이 집은 기적적으로 구원된 것이다. 정면의
문에는 '위테 여관 겸 레스토랑'이라고 씌어 있었다.
그는 열려져 있는 정원의 문을 지나서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는 유리창 한 장
깨지지 않은 것을 보고도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게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다. 문 옆에는 하얀 반점이 있는 갈색 사냥개 한 마리가 잠들어 있고
화단에는 꽃들이 활짝 핀 모습으로 반기고 있었다.
홀은 텅 비어 있었다. 선반에는 잔 서너 개가 놓여 있을 뿐, 술병은 보이지 않았다.
벽쪽으로 붙은 세 개의 테이블이 있고 그 주위에 의자들을 놓았으며 가운데 테이블
위에는 티롤 지방의 풍경화가 걸려 있었다. 히틀러의 초상화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중년의 부인이 들어왔다. 그녀는 색이 바랜 푸른색 브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하이 히틀러' 대신에 '구텐 아벤트'라고 인사를 했다. 그레버는 그녀의
인사를 받으면서 실제로 그런 기분을 느꼈다. 저녁에는 누구나가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그는 다만 마실 것을 얻을 생각이었다. 목이 타는 것처럼 갈증이 심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밤 엘리자베스와 함께 이곳에서 지내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여기서 저녁식사를 할 수 있습니까?"
부인은 망설이고 있었다.
"나는 배급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급히 말했다.
"여기서 식사를 할 수 있다면 근사한 추억이 될 겁니다. 뜰에서라면 더욱. 나는 곧
일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나와 아내의, 2인용 배급표를 갖고 있습니다. 만약에
좋으시다면 통조림을 드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 집에는 콩 요리밖에 없습니다."
"좋습니다. 오랫동안 먹어보지 못했지요. 여덟 시쯤 와도 되겠습니까?"
"언제라도 오세요. 준비해 놓을 테니까."
그레버의 옛 집터에 있던 표찰 밑에 편지가 꽂혀 있었다. 어머니로부터 온 편지로
전선으로부터 반송된 것이었다.
그는 겉봉을 뜯었다. 편지의 내용은 매우 간단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일 시를 떠난다.' 편지에는 행선지를 알리지 않았다. '너는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조심하기 위한 안전조치에 지나지 않는다.
날짜를 보았다. 그가 귀국하기 일주일 전에 부친 것이었다. 편지에는 공습에 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항상 검열을 경계하고 신중을 기하셨다.
편지를 부친 그 다음날 폭격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마도 훨씬 전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부모님께서 지방으로 옮기실 리가 없다.
그는 편지를 읽고 나서 천천히 주머니에 넣었다. 양친은 살아 계시다
이번에는 그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주위를 돌아다보았다. 하겐가도 역시 폐허가
된 다른 거리와 똑같은 모습을 지니고 있다. 18번지를 에워싸고 있던 공포와 고뇌는
말끔히 사라져버렸다. 지금은 고요와 깨어진 벽돌더미가 있을 뿐이었다.
그는 심호흡을 크게 했다. 아무런 기쁨도 느낄 수 없었다. 항상 지고 다니던 무거운
짐이 벗겨졌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두 분은 살아 계시다. 이것으로 무엇인가가
끝났다. 그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마지막 공습이 있던 날, 이 거리에도 폭탄이 떨어졌다. 입구의 정면만이 위태롭게
남아있던 그 집도 완전히 붕괴되어 버렸다. 언제나 '사람 찾기' 구실을 해주었던
문짝이 벽돌더미 속에 박혀 있었다. 그레버는 머리가 돌아버린 공습 경비원이
궁금했다. 마침 그 당사자가 거리를 가로질러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군인 아저씨, 아직도 여기 있었나?"
"그렇소. 당신도 여기 있었군."
"자네에게 온 편지를 보았나?"
"보았소."
"어제 오후에 왔어. 이제 자네 편지를 떼어버려도 되겠지? 다섯 사람이나 그 자리를
기다리고 있어."
"아직은 곤란하오. 2, 3일만 참아 주시오."
"지금이 중요해."
공습 경비원은 선생님이 학생을 꾸짖기라도 하는 듯이 날카롭고 준엄하게 말했다.
"자네는 내가 많이 봐줬어."
"당신은 신문의 편집인이라도 되오?"
"공습 경비원은 질서유지를 위해서 여러 가지를 한다. 요전에 공습이 있고 난 후, 세
아이를 잃어버린 미망인이 있다. 그런데 그것을 발표할 장소가 없다."
"그럼 내 자리를 사용하시오. 내 우편물은 옛집으로 오니까."
경비원은 그레버의 종이쪽지를 뜯어서 그에게 주었다. 그레버가 그것을
찢어버리려고 하자 경비원이 급히 막았다.
"군인 아저씨, 돌았는가? 그런 건 찢는 게 아냐. 그건 자기의 행운을 찢는 거나
마찬가지야. 한번 구원을 받으면 언제든지 구원을 받을 수 있지. 그 쪽지를 지니고
있는 한은."
"그 말이 맞는 것 같군."
그레버는 쪽지를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나 역시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소. 당신은 어디서 살고 있소?"
"나는 떠나야만 했지. 으슥한 창고를 하나 발견했어. 지금은 거기서 쥐들과 함께
재미나게 살지."
그레버는 고개를 들었다.
"나는 협회를 하나 만들 생각이야. 가족이 폐허 속에 묻힌 사람들을 위해서다.
우리는 협력해야 돼. 안 그러면 시에서 아무 대책도 세워주지 않아. 적어도 사람이
묻혀있는 장소라면 어디든지 목사가 기도를 올려야 해. 신성한 장소가 되도록. 어때?
내 말을 알아 듣겠나?"
"알겠소."
"그런 짓은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지. 물론 자네는 아니지만. 자네는
따분한 편지를 받았어!"
그의 초췌한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지면서 고뇌와 격조의 표정이 나타났다. 경비원은
다급히 돌아서더니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레버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발길을 돌렸다. 그는 부모님이 살아계신 것을
엘리자베스에게는 당분간 말하지 않기로 했다.
엘리자베스는 혼자서 공장 앞 광장을 가로질러서 그레버에게로 걸어왔다. 그녀의
키가 훨씬 작게 보였다.
"전 휴가를 얻었어요." 그녀가 속삭였다.
"얼마나?"
"사흘. 마지막 사흘이죠."
그녀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사정 얘기를 했더니 휴가를 허락했어요. 나중에 작업시간을 충당해야하지만, 그런
건 조금도 상관없어요. 일거리가 많을수록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죠."
그레버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침내 우리는 헤어져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여러 가지 사실을 알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서로 마주보았다. 두 사람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인적이
없는 광장에 서서 언제까지나 그렇게 서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진실한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레버는 공장에서, 방공호가 아니면 방안에서 고독하게 기다리고 있을
엘리자베스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믿을 수 없는 이유 때문에 다시 위험
속으로 떠나야 하는 그레버를 보고 있었다. 절망감이 그들을 엄습했다. 그와 동시에
무한한 애정이 두사람의 머리 위로 쏟아져내렸다. 그들은 사랑이라는 마법에 취해서
그 자리에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한없이 무력했으며 그것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야만 했다.
"그럼, 우린 앞으로 사흘 동안 함께 있게 되었군."
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보였다.
"그래요. 내일밤부터."
"고마운 일이군. 우리에겐 2주일이나 마찬가지야. 전처럼 날짜를 계산한다면 말야."
"그래요."
"우린 어디로 가죠? 그리고 어디서 자죠."
"교회의 회당에서. 날씨가 따뜻하면 뜰에서 자도 돼. 이제부터 우린 콩으로 근사한
저녁식사를 하는 거야."
폐허 한가운데에 꿋꿋이 서 있는 위테 레스토랑의 모습이 보였다. 그레버는 그
건물이 무사하게 서 있는 게 순간적으로 이상하게 생각되어서 마치 신기루처럼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들은 정원을 지나서 안으로 들어섰다.
"어때?"
"전쟁이 들어올 수 없는 평화의 집 같군요."
"오늘밤부터는 계속 그럴 거야."
꽃밭에서는 그윽한 꽃향기가 풍겨오고 있었다. 주인이 화단에 물을 뿌린 것이다.
사냥개가 꼬리를 흔들면서 돌아다녔다.
위테 부인이 다가왔다. 부인은 깨끗하게 세탁된 흰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뜰이 좋으시겠어요?"
"네, 뜰에서. 그리고 전 세수를 하고 싶은데"
"이리로 오세요."
부인은 엘리자베스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2층으로 안내했다. 그레버는 부엌을
지나서 정원으로 나왔다. 정원에는 적색과 흰색의 테이블 덮개를 덮은 탁자와 의자 두
개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 위에 접시와 컵들이 놓이고 물주전자도 있었다.
그는 주전자에서 물을 따라서 마셨다. 물은 차고 포도주보다 달콤했다. 정원은
생각했던 것 보다 더 넓고 아늑했다.
엘리자베스가 왔다.
"이런 곳을 어떻게 알았죠?"
"우연이지."
"참으로 아름답군요. 그런데 이상해요. 전 이곳이 전혀 낯설지가 않아요."
"나도 이곳을 처음 보았을 때 그런 느낌이 들었었어."
"모든 게 옛날처럼 보존되어 있는 것 같아요. 당신과 나, 이 정원이 그렇지만
무엇인가, 눈에 띄지 않는 어떤 게 빠진 것만 같아요. 그것만 있으면 모든 건 옛날
그대로의 모습일 것 같아요."
그녀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부인이 콩 수프를 가지고 왔다.
"배급표를 드리겠습니다. 많진 않지만, 이만하면 충분할 겁니다."
"이렇게 많이는 필요없어요." 부인이 말했다.
"완두는 항상 있는 거니까 소시지 값만 받겠어요. 그리고 뭘 좀 마시겠어요? 맥주가
약간 남아 있는데."
"좋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맥주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부인이 곧 맥주를 가지고 왔다. 그레버는 두 개의 잔에 맥주를 가득 부었다. 그들은
맥주를 마셨다. 맥주는 굉장히 차고 맛이 좋았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면서 천천히
식사를 하고 있었다.
어두워졌다. 탐조등의 불빛이 어두운 하늘에 길게 줄을 그었다. 그 빛은 구름을
뚫고 더 높은 곳을 향해서 올라갔다. 부인이 수프를 더 가지고 왔다.
"많이 드세요. 젊은 분들은 많이 드셔야 합니다."
"저희들은 아주 훌륭한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샐러드와 치즈를 가져오겠어요."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이제 모든 게 갖춰졌군요."
"달과 정원이 있고, 음식은 풍족하게 있고 밤이 그대로 남아 있다! 멋져요!"
"사람은 항상 이렇게 생활하고 있었어. 모두들 그걸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던
거야."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주위를 살펴보았다.
"여기선 폐허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군요. 정원의 나무들이 폐허를 가려주고 있어요.
아직도 이런 곳이 남아 있었다니!"
"전쟁이 끝나면 그런 나라로 가야지. 어디를 가나 파괴되지 않은 거리, 밤이 되면
불을 환하게 밝히고 공습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 나라로."
"우리들을 받아줄까요?"
"스위스 같은 나라는 받아주겠지."
"그럼 스위스의 화폐가 필요하겠군요. 어떡하죠?"
"카메라를 갖고 가서 거기서 팔면 돼. 그러면 2, 3주일은 충분할거야."
엘리자베스는 허리를 잡고 웃었다.
"그렇지 않으면 보석이나 모피외투를? 우리가 갖고 있지도 않는."
부인이 샐러드와 치즈를 가지고 왔다.
"여기가 마음에 드세요?"
"네, 대단히. 더 있어도 괜찮겠죠?"
"물론, 오랫동안 계셔도 좋습니다. 그럼 커피를 갖고 오겠어요."
"커피까지? 오늘은 우리가 왕이라도 된 것 같군."
엘리자베스가 또 웃었다.
그레버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공장에서 나올 때의 지친 표정과는
정반대로 밝고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생활한다는 건 아름다운 일이죠. 우린 그것을 거의 모르고 있어요. 다른
사람들에겐 당연한 일도 우리에게는 멋진 모험이에요. 배급표가 필요없는 식사,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상점, 주위를 돌아보지 않아도 얘기를 할 수 있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든가 이를 위하여 긴 세월이 필요하겠죠. 그러나 공포심은
차츰 사라지고 가끔씩 떠오른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들의 기쁨으로 변할 거에요."
"그래." 그레버는 겨우 대답했다.
"그럴 거야, 엘리자베스. 그러고 보니 우리의 앞날에는 많은 행복이 기다리고 있군."
그들은 그 집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그 동안에 위테 부인은 잠들어 있었으므로
그들은 단 둘만의 호젓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달이 높게 떠 있었다. 대지와 싱싱한 푸른 잎의 냄새가 한층 더 강렬하게 전해졌다.
그 향기가 잿더미에서 나는 냄새를 몰아내고 있었다. 관목의 사이사이로 고양이가
쥐를 쫓고 있었다. 시내에는 쥐가 들끊었다.
한밤중이 되어서야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화의 섬을 떠나는 것만 같았다.
"몹시 늦었군요." 그들이 교회에 당도하자 집사가 말했다.
"잘 곳이 없소."
오늘 아침에 만났던 사람이 아니었다. 젊은 집사는 깨끗이 이발을 하고 있었으며,
그의 태도는 완고하고 도도했다. 요셉을 고발한 자가 바로 이 녀석임에 틀림없다고
그레버는 생각했다.
"마당에서 잘 수도 없겠습니까?"
"거긴 피난민들이 더 많소. 그런데 당신들은 어째서 임시수용소에 가지 않소?"
자정이 다 됐는데 이런 질문을 하다니.
"우린 하느님을 더 믿고 있습니다."
집사는 날카롭게 그레버를 쳐다보았다.
"여기서 자겠다면 푸른 천장 아래서 자야 하오."
"상관없습니다."
"당신들은 결혼했소?"
"그렇습니다. 왜 그러시죠?"
"여기는 하느님의 집이오. 결혼하지 않은 남녀는 함께 잘 수 없소. 회당에는
남자부와 여자부가 따로 마련되어 있소."
"부부도 마찬가지입니까?"
"물론이오. 회당은 교회의 소유니까. 여기서는 육적인 욕망이 존재할 수도 없소.
그리고 당신들은 결혼한 것 같지가 않소."
그레버는 결혼 증명서를 꺼냈다. 그는 니켈로 된 테의 안경을 걸치고 나서 달빛에
그것을 비추고 읽어 보았다.
"며칠 안됐군."
"종교문답 가운데 기간에 대해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조항은 하나도 없소."
"교회에서 식을 올렸소?"
"이보시오, 우린 몹시 피로하오. 내 아내는 하루종일 공장에서 중노동을 했소.
이의가 있으시다면 우리를 쫓아내보시오. 그러나 그리 간단하진 않을 것이오."
"무슨 일이지?"
소리없이 다가온 신부가 뒤에 서 있었다.
집사가 두세 마디 설명하자 신부가 제지했다.
"베벨, 전능하신 하느님을 모독하는 게 아냐. 이분들이 여기서 밤을 새워야 하는
것만도 실로 가슴 아픈 일이다."
신부는 그레버를 보았다.
"내일 지낼 곳이 마땅치 않으면 밤 9시에 제7관으로 오시오. 나는 비덴데이크라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신부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그 자리를 떠났다.
"자, 우리를 안내해 주시오! 하느님의 하사관님, 소령님이 당신에게 명령을
내리셨소. 당신은 복종해야 돼. 교회는 몇 세기에 걸쳐 성공한 유일한 독재체제다.
마당이 어디요?"
집사는 성기실을 지나 그들을 뜰로 안내했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미사용의
법의가 살짝 드러나고 있었다.
"신부님의 묘 위에서 잠을 자면 안되오. 알겠소?" 베멜이 투덜댔다.
"저기 회당 옆에서 자란 말이오. 그리고 절대로 함께 잘 수 없소. 따로따로 자야
하오. 옷도 벗을 수 없고."
"구두는?"
"구두도 안되오."
그들은 회당으로 걸음을 옮겨 놓았다. 그레버는 텐트와 모포를 잔디 위에 깔고서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그녀는 큰소리로 웃고 있었다.
"뭐가 그리 우습지?"
"그 집사의 하는 짓이 너무 우스워서. 그리고 당신도."
"알겠어."
그레버는 가방을 벽에 기대어 놓고 그 앞에 배낭을 베개처럼 놓았다. 그때 갑자기
여자의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싫어! 싫어요! 아아 아."
비명은 숨가쁜 절규로 변했다.
"조용히 하라고!"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여자가 다시 비명을 질렀다.
"조용히 하라니까!"
다시 아까보다 더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순간, 비명소리가 뚝 그쳤다.
"저러니까 우리는 지배자적 민족이지. 꿈 속에서도 명령에 복종하고 있으니."
그들은 자리에 누웠다. 그들이 차지한 벽쪽으로는 두 사람밖에 없었다. 폭탄으로
파괴된 탑 뒤로 둥근 달이 걸려 있었다. 신부들의 오래 된 무덤가에도 한줄기의 빛이
내리고 있었다. 뜰 중앙의 장미넝쿨 속에 커다란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다.
23
교회의 무너진 탑 주위에 제비가 날아다녔다. 아침햇살이 모든 것들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레버는 스토브를 싼 보따리를 끌렀다. 취사가 허가되어 있는지 알 수
없었으나 병사들의 습관에 따르기로 했다. 그는 반합을 들고 수도를 찾아다녔다.
수도는 석상 뒤에 있었는데 붉은 턱수염의 사내가 입을 딱 벌린 채 거기에 잠들어
있었다. 그는 외발이었다. 사내가 벗어 놓은 의족이 바로 옆에 놓여 있었다.
그레버는 회당 안을 슬쩍 들여다봤다. 과연 집사가 말한 대로 잠자리는 남녀가
따로따로 마련되었으며 남쪽에는 여자들만 모여 있었다.
그가 돌아오자 엘리자베스가 일어나 있었다. 그녀는 회당 안에서 보았던 혈색 없는
얼굴들과는 달리 생기가 돌았다.
"세수할 곳을 발견했어. 사람들이 모여들기 전에 가지. 종교단체는 언제나
위생시설들이 불충분해. 신부들의 세면장을 알려줄게."
그녀는 웃었다.
"당신은 여기서 커피나 끓이세요. 어쩜 도둑맞을지도 몰라요. 어느 쪽으로 가면
되죠?"
그는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녀가 뜰을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어찌나 잠을
곱게 잤는지 옷은 금방 다림질이라도 한 것 같았다. 그는 그녀의 뒷모습을 사랑스런
눈길로 쳐다보고 있었다.
"하하, 주님의 마당에서 음식을 끓이는군!"
집사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더구나 슬픔의 면류관 상 앞에서!"
"기쁨의 면류관은 어디 있소? 있다면 그리로 가겠습니다."
"여긴 전부 신성한 땅이오. 당신은 신부님들이 잠들어 있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가?"
"난 지금까지 공동묘지를 돌아다니며 밥을 지어 먹었소."
그레버는 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어디로 가면 좋은지 말하시오. 여기에도 주보나 임시 취사장 같은
게 있소?"
"주보?"
집사는 마치 썩은 과일이라도 씹은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여기에 말이오?"
"나쁘진 않을 것 같소."
"당신 같은 이단자들은 그렇게 생각하겠지. 그리스도의 성역에 음식점이라니!
그야말로 신에 대한 모독이다!"
"그건 모독이 아니오. 그리스도가 약간의 빵과 생선으로 몇 천명을 배불리 먹게
했다는 건 당신도 잘 알 것이오. 자, 비키시지. 지금은 전시야."
"주임 사제 비덴데이크님께 너의 모독을 고하겠다!"
"마음대로 하라구, 이 살쾡이 같은 놈아. 난 쫓겨나면 그만이야!"
집사는 짐짓 위엄을 보이면서 물러갔다. 그레버는 빈딩그의 유산 가운데 하나인
커피 봉지를 뜯고 냄새를 맡았다. 그는 커피를 끓일 준비를 서둘렀다. 그윽한 향기가
피어오르며 즉시 반응을 일으켰다. 무덤의 그늘에서 잠들어 있던 사내가 재채기를
하면서 가까이 왔다.
"한잔, 어때?"
"비켜주게. 여기는 하느님의 집이야. 여긴 시주를 주진 않아, 받기만 하지."
엘리자베스가 오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산책이라도 하는 것처럼 경쾌한 걸음걸이로
걸었다.
"어디서 커피를 얻었죠?"
그녀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
"빈딩그의 유산이지. 빨리 마시지 않으면 저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밟히고 말거야."
태양은 어느새 슬픔의 면류관 석상 위에 내려앉고 있었다. 그레버는 배낭에서 빵과
버터를 꺼냈다. 주머니칼로 빵을 자르고 버터를 발랐다.
"진짜 버터군요. 이것도 역시 빈딩그의?"
"모든 것을 거기서 얻었지. 이상해 그는 내게 무척이나 친절했는데 난 녀석이
결코 좋아지지 않았어."
"그럴 수도 있어요."
엘리자베스와 그레버는 나란히 배낭 위에 앉았다.
"저는 일곱 살 때 이런 식으로 살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난 빵장수가 되고 싶었어."
그녀는 유쾌하게 웃었다.
"대신에 빵을 공급하는 사람이 되었군요. 지금 몇 시나 되었을까요?"
"짐을 정리해 놓고 공장에 바래다 줄게."
"아녜요. 그보다는 되도록이면 이 양지쪽에 오래 있도록 하세요. 짐을 싸려면
시간이 너무 걸리고, 또 전부 맡기려면 오랫동안 기다려야 하니까. 회당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어요."
"알았어. 여기서 담배를 피워도 되겠지?"
"글쎄요? 그렇지만 당신에겐 상관없겠죠."
"쫓겨날 때까지 나 하고 싶은 대로 해야지. 오늘은 옷을 홀랑 벗고 잠을 잘 수 있는
곳을 찾아내야겠어. 비덴데이크 사제에게 가고 싶지 않지?"
"폴만 선생님 쪽이 낫겠어요."
"8시 10분 전이야. 당신 출발해야 돼. 공장으로 마중 갈게. 만약에 무슨 일이 있을
경우, 위테 부인의 정원이나 바로 이 자리야."
"알겠어요." 엘리자베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의 휴가기간 동안에 하루종일 떨어져 있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군요."
"오늘밤은 뜬눈으로 새우는 거야. 그러면 허무하게 보낸 하루를 충당할 수 있지."
그녀는 그에게 키스를 하고 급히 나섰다. 그레버는 누군가의 웃음소리를 듣고 화가
나서 뒤를 돌아다보았다. 젊은 여자가 사내아이를 붙잡고 원기둥 사이에 서 있었다.
아이는 여자의 머리카락을 잡고, 여자는 아이를 부둥켜안고서 킬킬거리고 있었다.
그는 짐을 꾸리고 반합을 닦으러 갔다. 의족의 사내가 그를 따라오고 있었다.
"이봐."
그레버는 걸음을 멈추었다.
"커피를 마신 건 자네가 아니었나?"
"맞아. 우린 남김없이 마셔버렸지."
"그것은 나도 알아."
사내는 커다란 파란색의 눈을 갖고 있었다.
"내가 말하는 건 찌꺼기야. 그걸 버리려거든 나를 주게. 재탕을 할 수 있으니까."
"좋아."
그레버는 찌꺼기를 모조리 그에게 주고 짐을 맡기기 위해 예치소로 갔다. 경망한
집사와 한바탕 싸울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처음으로 대하는 붉은 코가
나와 있었다. 그는 성찬식의 포도주 냄새를 풍기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지기는 불에 탄 아파트의 창가에 앉아 있다가 그레버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그레버는 안으로 들어갔다.
"혹시 편지 온 게 없나?"
"있지. 당신 부인 앞으로. 수취인이 쿠루제로 되어 있어. 그러니까 틀림없겠지."
그레버는 편지를 받았다. 그는 문지기가 묘한 눈초리로 지켜보고 있는 것을
눈치챘다. 그것은 게슈타포로부터 온 편지였다. 가슴이 철렁했다. 봉투를 뒤집어보니까
이미 뜯어 본 흔적이 뚜렷이 나타나 있었다.
"언제 왔지?"
"어젯밤."
그레버는 문지기가 읽어 보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엘리자베스에게 오전 11시
30분까지 출두하라는 통지서였다. 그는 시계를 보았다. 11시가 거의 다 되고 있었다.
"좋아, 겨우 도착했군! 이 편지가 오기를 오랫동안 기다렸지."
그는 편지를 주머니에 넣었다.
"또 없나?"
"그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문지기는 무엇인가를 찾는 듯한 눈초리로 반문했다.
그레버는 웃었다.
"우린. 아파트가 필요하지. 적당한 곳이 없나?"
"몰라. 당신은 계속 있을 건가?"
"곧 떠나야지. 그러나 내 아내는 방이 필요해."
"그래?" 문지기는 고개를 흔들었다.
"만약에 구해준다면 수고한 값을 톡톡히 낼 텐데!"
"그래?" 문지기가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레버는 그곳을 떠났다. 문지기의 시선이 등에서 느껴졌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건물의 잔해를 흥미진진하게 쳐다보는 척하다가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겨놓았다.
그는 길모퉁이를 돌자 재빨리 편지를 꺼냈다. 인쇄물이었기 때문에 편지에서는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엘리자베스의 이름과 날짜만이 찍혀 있었다.
그는 종이쪽지를 잔뜩 노려보았다. 거기서 죽음의 냄새가 풍겨오고 있었다.
그레버는 카타리네 교회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자신도
모르는 일이었다.
"에른스트!"
그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요셉이 군용 외투를 입고 서 있었다. 그는 그레버를 못 본
것처럼 재빨리 안으로 들어갔다.
그레버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느릿느릿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성기실 옆
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요셉이 조심스럽게 눈짓을 했다. 그레버는 제단 앞으로
갔다가 다시 주위를 살펴보고 나서 그의 옆에 앉았다.
"폴만이 잡혔어." 요셉이 속삭였다.
"뭐라고요?"
"오늘 아침에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었어."
그레버는 문득 폴만의 체포가 엘리자베스의 출두 통지서와 무슨 관련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요셉을 보았다.
"폴만 선생님이!" 그는 겨우 한 마디를 했다.
요셉이 고개를 들었다.
"또 무슨 일이 있나?"
"아내에게 호출장이 왔습니다."
"언제 출두하라고 했지?"
"오늘 11시 30분입니다."
"호출장을 갖고 있나?"
"네."
그레버는 요셉에게 편지를 넘겨주었다.
"선생님은 어떻게 잡혀가셨죠?"
"잘 몰라. 돌아가 보니까 문 앞의 돌이 다른 곳에서 뒹굴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걸
짐작할 수 있었지. 폴만이 끌려가면서 그 돌을 걷어찼던 거야. 그게 암호였어. 한 시간
후에 폴만의 책들을 자동차에 싣고 있는 것을 보았지."
"뭔가 선생님과 관련될 만한 게 있었습니까?"
"그런 건 없을 거라고 생각해.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건 모조리 묻어버렸어. 물론
통조림도."
그레버는 요셉이 들고 있는 쪽지를 보았다.
"마침 선생님께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여쭤 볼 생각이었지요."
"그래서 나도 여기로 온 거야. 게슈타포의 끄나풀이 잠복해 있는 게 확실해."
요셉은 호출장을 돌려주었다.
"자네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모르겠습니다. 당신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도망가지."
요셉이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나 혼자 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볼 생각입니다."
"만일 자네 부인에게 용건이 있다면 자네에겐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을 걸세."
그레버는 등골이 서늘했다. 그러나 요셉은 사실을 그대로 말했을 뿐이다.
"만약에 아내를 체포할 생각이라면 폴만 선생님의 경우와 똑같은 식으로 체포했을
겁니다. 무엇인가 다른 일이 있을 수도 그래서 일단 제가 먼저 갈 생각입니다."
그는 자신이 없게 말했다.
"그렇다면 달아날 필요는 없어."
"부인은 유대인인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얘기가 다르지. 유대인이라면 달아나야 해. 부인이 지방으로 여행을
떠났다고 할 순 없을까?"
"안됩니다. 근로봉사자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요셉은 잠시 생각했다.
"어쩌면 자네 말대로 다른 일인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구태여 호출장을 보낼 필요가
없을 텐데."
"장인이 강제수용소에 있습니다. 아내와 함께 한집에 살고 있던 여자가
밀고했는지도 모릅니다."
요셉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장인의 체포와 관련이 되는 서류들은 모두 찢어버리게. 편지라든가 일기 같은 걸
말야. 그런 다음에 혼자 가 보게. 자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지?"
"그렇습니다. 아침에 받았기 때문에 공장에 있는 아내에게 연락할 수가 없었다고
말할 생각입니다."
"그게 좋겠군. 자네야 어차피 일선으로 돌아갈 몸이니까. 자네에겐 손대지 않겠지.
부인의 은신처가 필요하다면 내가 알려주지. 좌우간 다녀오게. 우린 오후에 여기서
다시 만나세."
요셉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비덴데이크 신부님의 고해실이야. '외출' 이란 표찰이 걸려 있는 곳이지. 그 표찰이
걸리면 한두 시간 동안 편안하게 잘 수 있지."
그레버는 밖으로 나갔다. 지금까지 교회 안의 싸늘하고 어둑한 곳에 있었기 때문에
밖으로 나오자 햇빛에 눈이 부셨다. 따가운 햇빛은 게슈타포의 도구가 되어 그에게로
쏟아졌다. 그는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가 알고 있던 모든 것들이 손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달아난 것 같았다. 벤치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는 남자는 자기로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평화의 상징처럼 보였다. 거리에서 대화를 나누고 웃음을 터트리는
것은 그에게는 이미 별세계의 풍경이었다.
그레버는 게슈타포의 건물로 들어가서 호출장을 제시했다. 친위대원은 호출장을
대충 보더니 그를 부속 건물로 데리고 갔다. 통로는 어디에나 환기되지 않는 사무실
특유의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지정된 방에서 기다려야만 했다. 그 방에는 이미 세 사람의 남자가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사내는 안마당을 향한 창가에 서 있었다. 그는 두 손을 뒤로
돌리고 피아노라도 치듯이 오른쪽 손가락으로 왼쪽 손등을 두드렸다. 다른 두 사내는
의자에 앉아 정면만 주시하고 있었다. 그레버가 들어서자, 그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리고 바라보다가 얼른 시선을 돌렸다.
잠시 후, 안경을 쓴 친위대원이 들어오고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레버는 문에서
가까운 곳에 서 있었다.
"자네가 여기에 무슨 볼일이지?"
친위대원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일반적으로 군인은 군법회의의 권한 밑에 놓여
있었다.
그레버는 편지를 제시했다. 친위대원은 그것을 읽어내려갔다.
"이건 당신에게 보낸 게 아냐. 쿠루제양 앞으로 발송했어."
"그녀는 제 아내입니다. 우린 얼마 전에 결혼했습니다. 지금 아내는 군수품
공장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제가 대신 출두했습니다."
그레버는 만일의 경우를 위해서 가지고 온 결혼 증명서를 꺼냈다. 친위대원은
단안을 내릴수 없는지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기 시작했다.
"좌우간, 지하실의 72 호실로 가 보게."
그는 그레버에게 서류를 돌려주었다. 지하실은 게슈타포의 건물 중에서도 가장
평판이 나쁜곳이었다.
그는 계단을 하나씩 내려갔다. 그를 향해서 걸어오고 있는 두명의 남자를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모든 위험이 시작되고 있는 사람과 자유의 몸이 되어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서로 교차되었다.
72 호실은 굉장히 큰 방이었는데 칸막이를 이용하여 몇 개의 사무실로 나뉘어져
있었다. 직원이 그레버에게서 편지를 받아들었다. 그레버는 엘리자베스 대신에 출두한
이유를 설명하고 결혼증명서를 제시했다.
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을 대신해서 서명하겠소?"
"네"
직원은 두 통의 서류를 책상 너머로 건네주었다.
"여기에 서명을 한 다음에 이렇게 쓰시오. 엘리자베스 쿠루제의 남편이라고. 그리고
결혼한 날짜와 호적과의 이름을 기입하도록. 서류 한 통은 가져가도 좋소."
그레버는 아주 천천히 서명을 했다. 인쇄물을 읽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지만,
무슨 내용인지도 전혀 모르고 서명만 하기는 싫었다.
"그런데 그 재는 어디로 갔지?"
그는 마침내 호통을 쳤다.
"홀트만, 넌 또 엉망진창이로군. 빨리 쿠루제의 꾸러미를 가져오란 말야."
칸막이 저쪽에서 누군가가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레버는 자신이 검속중인
수인 베른하르트 쿠루제의 유골 수령증에 서명했음을 알게 되었다. 서류에는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사인을 밝히고 있었다.
직원은 칸막이 뒤쪽으로 갔다가 담배상자를 가지고 나타났다. 상자는 밤색 종이로
포장을 한 다음에 끈으로 묶여 있었다.
"이것이 재다." 직원은 졸린 눈으로 그레버를 응시했다.
"자네는 군인이니까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는 없지만 절대 침묵을 지켜야만 한다.
사망통지는 일체 허락되지 않는다. 신문에 내거나 우편으로 알릴 수도 없다. 장례식도
물론 금지다. 알겠나?"
"알았습니다."
그레버는 담배상자를 받아들고 그곳에서 벗어났다.
그는 엘리자베스에게는 비밀로 하기로 했다. 그녀가 나중에 알게 되느냐는 우연에
맡기기로 했다. 그러나 알아 낼 수 없을 것이다. 게슈타포는 더 이상 통지를 하지
않을 테니까. 현재의 고민, 그녀를 혼자 남겨두어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지금
그녀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알린다는 것은 그야말로 잔인한 짓이다.
그는 카타리네 교회로 걸음을 재촉했다. 거리에는 생기가 넘쳐흘렀다. 위협이
사라지고 그것이 주검으로 변해서 돌아왔다. 그렇지만 낯선 인간의 주검이었다. 그는
이미 그런 주검에 익숙해져 있었다. 엘리자베스의 아버지는 그가 어렸을 때 몇 번
보았을 뿐이다.
그는 옆구리에 낀 담배상자를 느끼고 있었다. 아마도 쿠루제의 유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재일 것이다. 홀트만이 다른 재를 내놓을 수는 얼마든지 있다. 강제수용소
직원들이 이런 일에 일일이 신경을 쓰는 일은 절대로 없다. 대량 소각에 있어서
개개인의 재를 따로 구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화부가 삽으로 떠서 봉지에
담으면 그것으로 끝나버린다. 어째서 그런 짓을 하는지 그레버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은 잔학한 행위와 관료주의가 결부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유해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는 망설였다. 어딘가의 폐허에 묻어 버릴 수도 있다.
아니면 공동묘지에 묻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허가를 얻어야 하고 또
묘 자리도 필요하다. 그러면 엘리자베스가 눈치를 채게 된다.
그는 교회로 들어서서 베덴데이크 사제의 고해실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고해실에는
'부재중'이라는 표찰이 걸려 있었다. 그는 녹색의 커튼을 젖혀 보았다. 요셉이 그를
보았다. 그는 금방이라도 그레버를 걷어차며 달아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레버는
그곳을 지나쳐서 성기실 옆의 좌석으로 갔다.
이윽고 요셉이 왔다. 그레버는 담배상자를 가리켰다.
"이것이었습니다. 장인의 유해입니다."
"이것뿐인가?"
"네. 그런데 폴만 선생님의 소식은?"
"아니."
그들은 함께 유해상자를 보았다.
"담배상자로군. 흔히 봉지에 넣어 주는데 이건 실제로 관인 셈이지. 어디에 모실
생각인가? 이 교회에?"
그레버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결정을 내렸다.
"회당의 뜰로 하겠습니다. 거긴 공동묘지와도 같으니까."
"그런데 당신은? 제가 뭐 도와드릴 일이라도 있습니까?"
"저 옆문으로 빠져나가서 혹시 수상한 자들이 없는가 보고 오게. 난 이곳을 떠나야
해. 이제부터 반유대주의자인 집사가 당번이야."
"알겠습니다."
그레버는 태양 아래에 서 있었다. 잠시 후에 요셉이 밖으로 나와서 그레버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행운을!"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행운을 빕니다."
그레버는 되돌아갔다. 때마침 회당의 정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날개에 빨간 반점이
있는 두 마리의 나비가 흰꽃이 만발한 나무 주위를 날아다녔다. 그레버는 묘지를
조사하기 위해서 그쪽으로 갔다. 무덤은 세 개나 폭삭 허물어져 있었다.
그는 강제수용소에서 사망한 카톨릭 교도의 유해임을 쪽지에 적어 상자에 넣었다.
나중에라도 상자가 발견될 경우를 생각해서였다.
그는 대검으로 잔디를 자르고 바닥을 파서 상자를 묻은 다음에 흙을 뿌렸다.
다행히도 이 유해가 베른하르트 쿠루제의 것이라면 그는 성역에서 안식처를 얻은
셈이다.
그레버는 회당의 돌담에 기대고 앉았다. 돌담은 햇볕을 오랫동안 받아 따뜻했다.
어쩌면 신을 모독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베른하르트 쿠루제는 카톨릭 신자였다.
신자들은 화장이 금지되어 있다. 그렇지만 지금은 전시니까 교회에서도 묵인할
것이다.
아니다. 쿠루제의 유해가 아니라 개신교 교도나 정통파 유대인을 포함한 다른
희생자들의 유해일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상관 없을 것이다. 여호와의 신도, 개신교의
신도도 굳이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리에서 무명용사의 묘를 본 적이 있었다. 무명용사의
묘는 프랑스의 위대한 전투를 기념한 개선문 밑에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도록
장식되어 있었다. 그에게는 신부 브류멜의 묘비가 세워져 있고 그 밑에 담배상자가
묻혀 있는 잔디밭이 그것과 동등하게 느껴졌다.
"우린 오늘밤 어디서 자죠? 교회?"
"아냐. 기적이 일어났어. 오늘 위테 부인에게 갔었어. 거기서 빈 방을 하나 얻었어.
부인의 딸이 거주하던 방인데 며칠 전에 시골로 간 모양이야. 우린 거기서 묵을 수
있어. 그리고 내가 떠난 후에도 당신은 그 방을 사용할 수 있을 거야. 짐은 벌써
옮겼어. 당신의 휴가는 어떻게 됐지?"
"네, 받았어요. 이제 당신은 나를 기다리지 않아도 돼."
"고마워! 오늘밤은 밤이 새도록 얘기하다가 내일 낮에 실컷 자기로 하지."
"응. 별이 나올 때까지 정원에 앉아 있어요. 전 그전에 모자를 사야 해요."
"모자를?"
"오늘 같은 날은 모자를 사야 해요."
"모자는 왜? 오늘밤에 쓸 작정인가?"
엘리자베스는 자지러지게 웃었다.
"그것도 그렇죠.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모자를 사는 상징적인
행동이죠. 모자는 깃발을 의미해요. 행복할 때도 사고 불행할 때도 살 수 있는. 당신은
이해 못할 테죠."
"잘 모르겠는데. 그래도 하나 사기로 하지. 그리고 당신의 자유를 축하해야지.
그것이 저녁식사보다 더욱 중요해. 그런데 모자를 파는 가게가 있을까? 아,
의료권은?"
"갖고 있어요. 그리고 전 모자를 파는 가게를 알고 있어요."
"좋아. 당신의 금빛 드레스에 어울리는 모자를 사지."
"어떤 모자이든지 사기만 하면 돼요."
진열장의 유리가 부서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그들은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모자 두 개가 걸려 있었는데 하나는 조화가 꽂혀 있고 다른 하나는 부드러운 새깃으로
장식을 한 모자였다. 어느 것도 엘리자베스에게 어울릴 것 같지 않았다. 그레버는
그녀와 모자를 번갈아서 쳐다보았다.
백발의 부인이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상점은 창문마다 등화관제가 되어 있었다.
그레버는 두 여자의 대화가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는 문 옆에
놓인다 부서져가는 의자에 앉았다.
여주인은 전등을 켜고 상자에서 재료를 끄집어 냈다. 회색의 어두컴컴하던 가게가
마술의 동굴로 변했다. 파란색, 빨간색, 장미색 등 현란한 모자의 색깔이 확
타올랐다가 구석구석 퍼져나갔다.
모자들은 그 좁은 공간에서 축제라도 즐기는 것처럼 현란했다. 엘리자베스는 그림
속에서 방금 빠져 나온 것처럼 빛의 홍수 속을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그레버는 묵묵히
그런 색의 세계를 지켜 보고있었다. 그는 두 여자의 속삭이는 듯한 대화를 내용도
모르면서 듣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샘물이 조용히 흘러가는 소리처럼 평화롭게
들렸다. 그레버는 이 현실과 동떨어진 행복 속에 서서히 잠기고 있었다.
24
하늘에는 무수한 별이 떠 있었다. 돌담을 기어오른 야생의 포도넝쿨이 소리없는
시계의 추처럼 바람에 휘날렸다.
"전 지금 울지 않아요. 혹 눈물을 보이더라도 조금도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우는
게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무엇인가가 그렇게 시키고 있는 거에요. 때때로 울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러나 그건 너무 행복하기 때문이죠."
그녀는 머리를 그의 어깨에 기대고 가슴에 안겨서 눈을 감고 있었다. 침대는 검은
호두나무로 만든 것이었다. 똑같은 호두나무로 된 화장대가 구석에 있고, 창가에는
작은 테이블과 두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전 몹시 행복해요. 지난 2주일 동안에 너무 많은 일이 생겨서 내 안에 모두 채울
수 없을 정도라고요."
"난 당신을 어느 시골에 있게 하고 싶어."
"당신이 떠난 다음에는 전 어디에 있으나 마찬가지에요."
"그렇지 않아. 시골은 공습을 받을 우려가 적으니까."
"곧 여기도 폭격이 끝나겠죠. 시내도 이제 폐허가 다 됐으니까요. 전 이 방이 몹시
마음에 들어요. 더구나 위테 부인도 있고."
그녀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전 곧 안정을 찾을 거에요. 제가 지금 흥분해 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전 지금
몹시 행복해요. 단조롭고 지루한 암소의 행복에는 비할 수도 없어요."
"암소의 행복? 그런 건 아무도 바라지 않아."
"그래야 오랫동안 견뎌낼 수 있을 것만 같아요."
"난 다만 그것을 인정할 수 없을 뿐이야."
엘리자베스는 그레버를 보았다.
"당신, 졸리지 않아요? 실컷 자고 싶지 않으세요? 내일밤이 지나면 그렇게 할 수도
없어요."
"기차 안에서도 얼마든지 잘 수 있어. 도착하려면 2, 3일 걸리니까."
"침대에서 잘 수 있을까요?"
"아니, 내일밤만 지나면 야전용 침대나 건초 위에서 자야 해. 곧 익숙해지지. 이제
더워지잖아. 겨울이 견디기 힘들지."
"또 겨울을 소련에서 보내게 될지도 모르겠군요."
"이런 식으로 후퇴만을 계속하다가 겨울까지는 폴란드나 독일에 주둔하게 될지도
모르지. 그렇게 되면 그다지 춥지는 않아."
이번에는 '언제 다시 휴가를 오시나요?' 하고 물을 차례다. 이제 그런 것은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녀는 물어야 하고 나는 대답할 의무가 있다. 빨리 끝내는 것이
좋다. 나는 지금 완전히 이곳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다. 그때였다. 밤의 정적을 깨고
사이렌 소리가 크게 들렸다.
"여기 있기로 해요. 전 옷을 입고 허겁지겁 방공호로 달려가긴 싫어요."
"알았어."
그레버는 테이블을 한쪽으로 밀어붙이고 밖을 내다보았다. 밤하늘은 맑고 창문으로
달빛이 들어왔다. 현실과 동떨어져서 마치 꿈속의 밤을 맞이한 것처럼 대화를
나누기에 적합한 밤이었다. 위테부인이 문 밖으로 나오는 게 보였다. 부인의 얼굴은
몹시 창백했다. 그는 창문을 열었다.
"지금 막 깨우려던 참이었어요." 부인은 소음 속에서 소리를 질렀다.
그레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공호 라이프니츠가." 토막토막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손을 흔들었다. 부인은 집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창가에 서서 기다려
보았다. 부인은 다시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녀도 집에 남아 있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는 오히려 그게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부인은 이 집을 떠날 필요가 없다. 정원과 집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마력의 보호를
받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무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으며 포도넝쿨조차도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평화의 작은 섬은 파괴의 폭풍을 거부라도 하듯이 화사한 달빛
아래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레버는 뒤돌아 섰다. 엘리자베스는 일어나 앉아 있었다. 어꺠에서 구부러진
부분에 부드러운 그늘이 지고 유방이 실제보다 더 크게 보였다. 그녀는 갑자기
먼곳에서 온 사람처럼 밖의 소음에도 아랑곳 없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세계의 종말에 직면해 있는 정원처럼 신비로운 베일에 싸여있는 듯이 보였다.
"위테 부인도 그대로 집에 남았어."
"이리 오세요."
그는 침대를 향해 걸어가면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거울 속에 있는
얼굴은 그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남자였다.
"어서요."
그는 그녀에게로 머리를 숙였다. 그녀는 가슴에 그를 안았다.
"난 조금도 무섭지 않아요."
"오늘밤에는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그는 자기 자신이 어떻게 그런 믿음을 갖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의 믿음은
정원이나 집, 엘리자베스의 어깨와 그를 충만시킨 고요한 달빛과 연결된 것 같았다.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그는 다시 힘주어 말했다.
그녀는 몸을 덮은 천을 바닥에 던지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누워
있었다. 그녀의 허리에서부터 탄력있는 긴다리가 죽 이어졌다. 나신은 어깨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면서 가늘어졌다가 다시 배꼽 근처에서 오목해지고 있었다.
넓적다리는 살이 잔뜩 부풀어올라 양편으로부터 검은 삼각형을 향하여 돌입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젊은 여자의 성숙한 육체로서 이미 소녀의 신체는 아니었다.
그는 그녀를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몸을 바짝대고 다리를 감았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손이 서로 얽혀서 상대를 사로잡고, 깊은 곳으로 받아들였다. 두
사람의 사이에는 약간의 틈도 없이 오로지 두 육체만이 존재했다. 그것은 최초의
요란한 격정이 아니었다. 서서히 흐르다가 한곳에서 범람하여 모든 게 소용돌이치면서
마침내 자기를 잊었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아득한 곳으로부터 돌아와 있었다. 그는 귀를 기울였다.
자신이 얼마나 멀리 떠났었는지 알 수 없었다. 밖은 조용했다. 무엇인가 착각하고
있는 것인가. 그는 옆으로 누운 채 다시 귀를 기울였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폭발하는 소리도 안 들리고 고사포도 날지 않는다. 그는 눈을 감고 똑바로 누웠다.
다시 눈을 떴다.
"오지 않았어. 엘리자베스."
"왔어요." 그녀가 속삭였다.
그들은 나란히 누워 있었다. 그레버는 바닥에 버려진 흰 천과 활짝 열려진 창문을
바라보았다. 밤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시간은 원래의 고요 속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창밖의 포도넝쿨이 다시 바람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그림자가 거울 속에서 움직이고, 밖에서 소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레버는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그녀는 아직도 눈을 감은 채 입을 벌리고 깊은 숨을
쉬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언제나 오랫동안 먼
곳에 가 있다. 그도 그렇게 자신을 망각하고 싶었다. 그녀에게서 두려움 같은 게
느껴졌다. 그녀는 어딘가에, 그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곳에 가 있는 것이다. 그를
두렵게 하는 게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갑자기 혼자만 내동댕이쳐진 것 같은 허전함이
밀려왔다. 그는 엘리자베스 옆에서 고독감을 느꼈다.
엘리자베스가 눈을 떴다.
"비행기는?"
"모르겠는데."
그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배가 고파요."
"나도 그래. 먹을 건 얼마든지 있어."
그레버는 자리에서 일어나 빈딩그의 통조림을 갖고 왔다.
"이것은 치킨이야. 토끼고기, 설탕에 조린 과일도 있어."
그레버는 통조림을 땄다. 엘리자베스가 가만히 누워서 기다리는 모습이 무척
귀여웠다. 그녀는 아직도 신비로운 어둠 속에 있었으므로 재빨리 분주한 주부로
변신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물건을 볼 때마다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난 알폰스에게 나쁜 짓을 한 것만
같아."
"그 사람도 남에게 악한 짓을 했었어요. 그것으로 상쇄할 수 있어요. 당신 장례식에
갔었나요?"
"아니. 제복을 입은 당원들이 들끓어서 그만두었지. 다만 힐테브란트 연대장의
조사를 들었을 뿐이야. 힐테브란트는 우리 모두 알폰스를 본받아 그의 유지를
완수해야 한다고 말했어. 적군과 싸울 때는 냉혹하고 무자비해야 한다더군. 그러나
빈딩그의 최후의 소원은 그게 아니야. 알폰스는 파자마 바람으로 잠옷만 걸친 채
블론드의 여자와 창고에 있었으니까."
그레버는 고기와 과일을 위테 부인이 빌려준 접시에 담았다. 그리고 빵을 자르고
포도주를 땄다. 엘리자베스는 옷을 입지 않고 침대 앞에 서 있었다.
"당신은 군용외투나 깁고 있는 여자 같지는 않아. 마치 매일같이 체조라도 하는 것
같군."
그녀는 웃었다.
"체조라고요? 체조는 절망했을 때 하는 게 아닌가요?"
"그런가? 난 그런 생각은 해보지 않았어."
"절망했을 때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을 때까지 체조를 하거나, 지칠 때까지
뛰어다니거나 방 청소를 하고, 머리가 아플 때까지 머리를 빗기도 해요."
"효과가 있나?"
"절망이 쓰러뜨리기 전까지는.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을 때 말이죠.
최후의 절망에 빠지면 쓰러지는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그리고 생명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거죠. 숨을 쉴 수 있을 만큼의 알량한
생명이죠. 생활을 위한 목숨이 아니구요."
그레버는 잔을 들었다.
"우린 우리의 나이에 비해 너무 많은 절망을 알고 있어. 잊어버리도록 해야지."
"우린 또 잊는 거에 너무 능숙하거든요. 그것도 함께 망각하고 싶어요."
"좋았어. 토끼고기를 먹게 해준 크라이네르트를 위하여!"
그들은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레버는 두 개의 잔에 다시 술을 따랐다. 달빛이
술잔 속에 들어 와 있었다.
"모두들 잠든 밤에 일어나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정말 좋군요."
"그래. 당신은 젊고 건강한 하느님의 딸이야. 군용 외투의 노^36^예가 아니고. 나도
이 순간만은 군인이 아냐."
"그런 뜻에서 또 한 잔!"
"마셔야지."
엘리자베스는 잔을 내밀었다.
그레버는 웃었다.
"그와 동시에 우린 비탄에 잠기고 심각한 대화를 나누어야만 했어. 그런데 우린
토끼 한 마리를 거의 다 먹고 하느님께 감사하고 있거든."
"그게 좋아요."
"만약에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게 선물이라고 할 수 있어."
"그건 일선에서 배운 철학인가요?"
"아니지. 여기서 배웠지."
"어쨌든 좋아요. 우리가 그것을 배울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약간의 행운이 필요할 뿐이지."
"우린 그것도 발견했나요?"
"그렇지. 우린 지상에 있는 걸 모두 찾아냈어."
"이미 끝나버렸으니까 당신은 슬프시겠죠?"
"끝난 게 아냐. 약간 변했을 뿐이지."
그녀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나는 슬퍼. 내일 당신과 작별할 생각을 하면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아. 비탄에
잠기지 않으려면 한 가지 해답밖에 없어 당신을 만나지 않았던 것으로 하는
거지.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난 슬픔 대신에 공허함을 안고 떠나겠지."
엘리자베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표현 방법이 서툴렀는지도 몰라. 내 말을 이해할 수 있겠지?"
"응. 당신은 멋지게 표현하셨어요. 그 이상 더 어떻게?"
그녀는 일어나서 그에게로 왔다. 그는 그녀를 느끼는 순간 견딜 수 없는 불꽃이
온몸에 타올랐다. 그는 모든 것은 하나이고, 출발은 귀환이며, 소유는 상실이며, 삶은
죽음이며, 과거는 미래임을 알았다. 항상 닿는 곳마다 돌처럼 변하지 않는 영원의 상이
존재하고 있으며, 아무것도 말소할 수 없다 그때 그는 대지가 활처럼
팽창해지더니 순간적으로 튕겨나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엘리자베스를 꼭
안고서 그녀와 함께 오로지 한곳을 향해서 뛰어들고 있었다.
마지막 날 오후였다. 그들은 정원에 앉아 있었다. 고양이가 살며시 그 앞을
지나갔다. 새끼를 밴 고양이는 주위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느릿느릿 걸었다.
"전 아기를 낳고 싶어요." 엘리자베스가 갑자기 말했다.
그레버는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기? 어째서?"
"어머나! 왜라니요?"
"어린애! 이렇게 소란한 시대에! 당신은 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럼요?"
그는 그녀를 뚫어지게 보았다.
"엘리자베스, 난 지금 당신에게 키스하고 부드럽게 굴어야 하는데 그게 잘 안돼. 난
아직 어린애에 대한 생각은 해보지 않았어."
"당신은 그런 생각을 하실 필요가 없어요. 그것은 당신과 아무런 상관도 없어요.
저도 확신은 없어요."
"어린애! 우리가 이 전쟁에 알맞게 성장한 것처럼 그애도 자라면 새로운 전쟁을
겪어야 되겠지."
또 고양이가 다가오더니 부엌으로 통하는 길을 살금살금 걸어가고 있었다.
"아이들은 거의 매일 태어나고 있어요."
그레버는 히틀러 유겐스트나 자기 부친을 고발했다는 어린이가 떠올랐다.
"왜 그런 말을 하지? 결국 희망에 지나지 않겠지. 그렇지 않을까?"
"당신은 아이가 필요하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잘 모르겠어. 평화의 시대라면 또 얘기가 다르겠지. 난 이런 건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우리 주위는 모두 황폐하였고 대지는 몇 년이고 방치될 거야. 이런 환경 속에서
어떻게 어린애를 바랄 수 있지?"
"그러니까 필요하죠."
"그에 맞서 싸울 수 있도록 교육시키기 위해서죠. 만약에 이런 사태를 비판하는
모든 사람들이 아이를 낳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요? 야만인들만 애를
낳아야 하나요? 만일 그렇게 된다면 누가 이 세상에 참다운 정의를 실현할 수 있죠?"
"당신은 그런 뜻에서 애가 필요하단 말인가?"
"그렇지는 않아요. 이건 지금 막 떠올랐어요."
그레버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의견에 반대할 만한 이유는 한 가지도
없었으며 너무도 지당한 말이다.
"당신은 어찌나 머리가 비상한지 내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어. 아직 결혼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실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어. 그런데도 당신이 불쑥 어린애 얘기를
끄집어내니."
엘리자베스는 웃으면서 일어났다.
"당신은 이 문제의 가장 단순한 면을 모르고 있는 거죠. 결국 제가 원하는 건
당신의 아이라는 거라구요. 그럼 전 위테 부인과 밤참을 상의해보겠어요."
그레버는 정원에 혼자 앉아 있었다. 하늘은 온통 구름으로 덮여 있었다. 오늘
하루도 끝나버렸다. 오늘은 시간을 훔치고 있었다. 휴가를 24시간이나 넘긴 것이다.
그는 출발계는 제출했지만 아직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한 시간 후에는 출발해야
한다.
그는 다시 한 번 우체국에 가 보았다. 그러나 부모님으로부터는 감감 무소식이었다.
위테 부인은 엘리자베스를 계속 머물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이 집의 지하실을
조사해 보았다. 지하실의 깊이는 충분하다고 할 수 없었으나 퍽 견고한 편이었다.
라이프니치의 공설 방공호도 가 보았다. 그곳은 시내에 있는 방공호에 못지않은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평온 속에서 있었다. 부엌에서 냄비와 접시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긴 휴가였다. 그에게는 3주간이 아니라 3 년이었다. 두 사람은 대지를 꾹 딛고
서 있는 것 같았지만 언제나 위태위태했다.
엘리자베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갑자기 벽이
쓰러지면서 벽 저쪽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먼 미래가 흔들렸다. 처음에 휴가를 나왔을
때는 자기 자신을 지탱해 줄 무엇인가를 찾아내 소유하고 싶다고 희망했었다.
그렇지만 아기 같은 것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는 나뭇잎 사이로 차츰 짙어가는 저녁 노을을 바라보았다. 아기에 대한 생각은
끝이 없을 것이다. 벽에 묶인 생명이 그것을 초월할지도 모른다는 것,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생명이 자신이 볼 수도 없는 미래의 생명에 전달하기 위한 확실한 소유물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때, 그는 불가사의함을 느꼈다.
"기차는 6시에 출발해. 짐은 다 꾸려놓았어. 그럼, 난 여기서 헤어지고 싶어.
지금 내 앞에 있는 당신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며 떠나고 싶어. 요전에 왔을 때는
어머니가 정거장까지 따라왔었지. 부득이 따라오시겠다는 거야. 나나 어머니나 무척
힘든 일이었어. 난 그것을 잊기 위해 긴 시간을 소모했지. 언제나 역에서 울고 있는
여자만 보였어. 당신, 내 심정을 이해하겠어?"
"네."
"좋아. 그럼 내 말대로 하는 거야. 당신은 내가 다시 군대에 끌려가는 모습을 보지
말란 말야. 난 여기서 이대로 작별하고 싶어. 이 돈을 받아. 일선으로 가면 돈 같은 건
필요없어."
"저도 돈은 필요없어요. 에른스트, 내게 필요한 돈은 스스로 벌어서 쓰겠어요."
"일선에선 돈을 쓰고 싶어도 쓸 데가 없어. 이것으로 우선 옷을 사라고. 당신
모자에 어울리는 멋진 옷으로."
"저는 이 돈으로 당신에게 선물을 보내겠어요."
"아무것도 보내지 마. 거기에는 여기보다 먹을 것이 많아. 그보다 당신 옷을 사라고.
이것으로 부족할까?"
"충분해요. 구두까지 살 수 있는 걸요."
"그럼 됐어. 이왕이면 금색 구두를 사요."
"알겠어요. 금색으로 사서 두었다가 당신이 돌아올 때 신고 마중가겠어요."
그레버는 배낭에서 어머니에게 드리려고 가지고 왔던 흙색의 성상을 꺼냈다.
"이건 내가 소련에서 얻은 거야. 당신이 갖고 있어."
그녀는 성상을 받지 않았다.
"싫어요. 그건 다른 사람에게 주세요. 이만 가 보세요. 그걸 받으면 마지막 이별이
될 것만 같아요."
그는 성상을 바라보았다.
"이건 파괴된 집에서 얻었지.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을 못했군."
그는 성상을 도로 배낭에 넣었다. 그것은 많은 천사들을 새겨 넣은 성 니콜라이
상이었다.
"상관없다면 교회로 가지고 가겠어요. 우리가 하룻밤 잔 적이 있는 카타리네
교회로."
"거기서는 받지도 않을 거야. 서로 종교가 다르니까.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을 위임
받은 사람들이 서로 배척하고 있지."
그는 이 성상을 쿠루제의 유해와 함께 브류멜 신부의 묘 속에 묻지 않은 게
후회스러웠다. 그러나 만약에 그렇게 했다면 이중으로 신을 모독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곧장 걸었다. 그의 걸음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배낭은 무겁고 역까지의 길은 멀기만 했다. 첫번째 모퉁이를 돌고 난 후, 많은 거리를
지나쳤다. 아직 엘리자베스의 머리카락에서 나던 향수 냄새가 그의 몸에서 가시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이내 후덥지근한 공기 속의 썩은 냄새와 뒤섞여버렸다.
둑을 넘었다. 린덴 거리의 안쪽 가로수들은 새까맣게 그슬려 있었다. 그 반대쪽은
개울로 막혀 있었으며 지푸라기와 부서진 침대의 조각들이 둥둥 떠내려가고 있었다.
'만약에 지금 당장 공습이 시작된다면 나는 대피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발차 시각에
늦어도 구실이 생기는 셈이다. 내가 다시 엘리자베스에게로 돌아간다면 그녀는 뭐라고
할 것인가?'
그는 생각을 해 보았지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정거장에서 기차의 발차
시간이 늦어지고 있기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대화를 다시 시작해야 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런 도움도 될 수 없다. 공습중에는 기차도 떠날 수 없으므로 그는
예정대로 기차를 탈 수 있을 것이다.
기차는 이미 출발 준비를 완료하고 있었다. 몇 개의 객차에는 '군 전용차'라고 씌여
있고 보초가 서류를 조사하고 있었다. 그레버가 하루 늦은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레버는 기차에 올라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잠시 후에 다시 세 명의
병사가 승차를 했다. 하사관과 상처가 남아있는 병장, 나머지 한 사람은 포병이었다.
포병은 자리에 앉자마자 무엇인가를 먹기 시작했다. 임시 취사차가 역 구내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젊은 학생 간호사가 철제 스와크치카를 브로치 대신 단
연상의 간호사와 함께 나타났다.
"커피!" 하사관이 말했다.
"잠깐만 보자고!"
"우리가 아냐." 병장이 대답했다.
"저것은 처음으로 출정하는 보충병 수송대에게 주는 거야. 전에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 아마 연설도 있는 모양이야. 우리에겐 그런 게 필요없지만."
피난민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짐을 들고 두 줄로 서서 커피가 끓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친위대 장교 두 명이 멋진 승마복 차림에 장화를 신고 학처럼
구내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휴가를 끝내고 돌아가는 병사들 세 명이 객실로 들어섰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이 창문을 열고 상반신을 밖으로 내밀었다. 밖에는 아이를 안은
여자가 서 있었다.
그레버는 아이에게 눈길을 주고 나서 여자를 바라보았다. 색깔이 바랜 여름 옷
밖으로 여자의 주름잡힌 목덜미와 축 늘어진 유방이 드러나 있었다.
"그럼, 하인리히!" 여자가 말했다.
"그래. 조심해, 마리. 그리고 사람들에게 안부 전해요."
"네."
그들은 묵묵히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악기를 든 사나이들이 그 여자의 옆에 서
있었다.
"멋있는데!" 병장이 말했다.
"젊으나 젊은 대포밥들이 음악의 전송을 받으며 출전한다. 이런 건 이미 옛날에
집어치워야 했는데."
"우리에게도 커피 한 잔쯤 선심 쓸 수 없을까?" 하사관이 말했다.
"뭐니뭐니 해도 우리는 고참병의 자격으로 출전하는 거다!"
"밤까지 기다려야지. 그러면 나오는 게 있을 거야."
행진의 발자국소리와 구령이 들려왔다. 보충병이 도착했다. 그들은 거의 전부가
연소자들로 채워져 있었으며 건장한 연장자는 드문드문 보일 뿐이었다. 연장자들은
돌격대나 친위대에서 밀려난 사람들이었다.
"수염을 깎을 필요가 없지." 병장이 말했다.
"저것 좀 보게, 저 젊은이들을! 어린애가 아닌가 말야. 일선으로 가면 저 사람들을
안고 싸워야 되겠지."
보충병들은 정렬을 했다. 하사관이 큰 소리로 구령을 하자 곧 정숙해졌다. 누군가가
연설을 시작했다.
"창문을 닫아!"
병장이 창 밖의 아내를 바라보고 있는 사내에게 말했다.
사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연설자의 음성은 마치 양철 성대에서 나오는
것처럼 꽝꽝 울려퍼지고 있었다. 그레버는 좌석에 등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하인리히는 계속 창가에 서 있었다. 병장이 계속해서 소리를 질렀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그는 슬픈 눈빛으로 마리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마리도 똑같이
남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레버는 엘리자베스가 오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마침내 연설이 끝났다. 악기를 든 사나이들이 '독일 국가'와 '홀슈트 뷔셀'을
연주했다. 차내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들 꼼짝도 하지 않았다.
보충병들이 지정받은 객차에 오르기 시작했다. 간호사가 커피를 들고 그들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잠시 후 간호사가 기차에서 내릴 때에는 손에 빈통이 들려져
있었다.
"갈보년 같으니라구!" 병장이 말했다.
"고참병을 말려죽일 작정인가?"
구석에 앉아서 무엇인가를 허겁지겁 먹고 있던 포병이 고개를 들었다.
"뭐라고?"
"갈보라고 했다. 그건 그렇고 넌 대체 뭘 먹고 있는 거냐?"
포병은 샌드위치를 다시 먹기 시작했다.
"돼지고기." 그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돼지고기라." 병장은 객실 안에 있는 병사들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는
동의를 구했지만 포병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하인리히는 여전히 창가에 서 있었다.
"숙모님께도 안부 전해." 그는 간신히 말했다.
"네."
그들은 다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왜 출발을 안 하지?" 누군가가 물었다.
"벌써 6시가 지났어."
"아마 장군을 기다리고 있을 거야."
"장군이라면 비행기로 가시겠지."
그들은 다시 반 시간을 더 기다렸다.
"이제는 그만 가 보라구." 하인리히는 기다리는 동안 가끔씩 되풀이하여 말했다.
"기다리겠어요."
"꼬마에게 저녁을 먹여야지."
"천천히 먹여도 괜찮아요."
두 사람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요셉에게도 안부를." 하인리히가 말했다.
포병은 잠들어 있었다. 이윽고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럼, 잘 있으라구. 마리."
"당신도, 하인리히!"
기차의 속도가 차츰 빨라졌다. 마리는 기차를 따라 함께 뛰어오고 있었다.
"꼬마를 잘 키워야 해."
"알았어요. 하인리히, 당신도 조심하세요."
"알았어! 알았어."
그레버는 객차의 옆에 바짝 붙어서 달리고 있는 여인의 수심에 찬 표정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마치 남은 몇 초 동안만이라도 하인리히를 볼 수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듯이 달리고 또 달렸다.
그때 그는 언뜻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그녀는 정거장의 창고 뒤에 서 있었다!
그때까지 기차 안에서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순간적으로
믿어지지 않았지만 오직 그녀의 얼굴만이 뚜렷이 보이는 것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하인리히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잠깐만 비켜!"
그레버는 갑자기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어째서 정거장까지 혼자 왔는지 이유 같은
것은 알 필요도 없었다.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보아야 한다. 가장 중요한 말을 잊고
있었다.
그는 하인리히의 목덜미를 뒤로 끌어당겼다.
"리자에게도 안부를 전해!" 하인리히는 소란한 차량의 굉음을 누르겠다는 듯
큰소리로 말했다.
"비켜줘! 내 아내가 저기 있어!"
그레버는 한쪽 팔로 하인리히의 어깨를 잡아서 세게 당겼다. 하인리히는 뒷발질로
그레버의 무릎을 걷어찼다.
"조심하라고!" 하인리히는 소리를 질렀다.
여자의 목소리는 이미 들리지 않았다. 그레버는 하인리히의 무릎을 걷어차고 어깨를
흔들었다. 하인리히는 한쪽 손으로 창문을 잡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기차가 방향을
바꾸었다. 그레버는 하인리히의 어깨 너머로 간신히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자꾸만 작아지면서 그대로 창고 앞에 서 있었다. 그레버는
하인리히의 지푸라기 같은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흔들었다. 아마도 그녀는 흔드는
손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의 손인지는 끝내 모르고 말 것이다. 정거장은 이미
보이지 않고 멀어지기만 했다.
하인리히는 맥없이 창가를 떠나버렸다.
"이 새끼." 그레버는 하인리히에게 충동적으로 달려들려다가 멈추고 말았다.
하인리히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레버는 올렸던
손을 내렸다.
"악당!"
"그게 무슨 소리야?" 병장이 물었다.
25
이틀 후, 그는 소속 연대의 소재지를 찾아내고 중대본부에 보고했다. 특무상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다만 사무병이 홀로 멍청하게 앉아 있었다. 마을은 그레버가 전에
보았던 위치보다 120 킬로미터나 서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여긴 어때?"
"지독하지. 휴가는?"
"그저 그렇지. 뭐 달라진 것이라도 있나?"
"그야 많지. 우리가 지금 어디 위치하고 있는지 보면 알걸."
"모두들 어디 갔지?"
"일개 소대는 참호를 파고 있고 또 한 소대는 시체를 묻고 있어. 오후에 돌아올
거야."
"여러 가지 변했나?"
"차차 알게 되겠지. 자네가 여기를 출발했을 때 누구누구 있었는지 난 잘 몰라.
보충병들이 많이 왔어. 모두 어린애들이야. 마치 겨울철 파리새끼처럼 맥없이
죽어가고 있지. 전쟁이 어떤 것인지 전혀 모르고 있어. 음, 중사 하나가 새로 왔어.
선임 하사관이 죽어버렸거든. 뚱보 마이네르트 말야."
"일선에서 전사했나?"
"아니야. 변소에 앉아 있다가 비계덩어리와 함께 공중으로 날아갔어."
사무병은 하품을 했다.
"형편이 어떤지는 곧 알게 될 거야. 그런데 자넨 왜 고국에서 다리에 파편이라도
맞지 않았지?"
"글쎄. 그럼 좋았을 텐데. 가장 좋은 생각은 살아있는 동안엔 떠오르지 않는
법이야."
"나 같으면 며칠 더 놀다 오겠어. 네 하나 빠졌다고 해서 신경을 쓰는 자는 아무도
없어."
"그것도 돌아오고 나서야 생각나던걸."
그레버는 마을을 살펴보았다. 마을은 그가 전에 주둔하고 있던 전방이나 다름이
없이 어디나 황폐되어 있었다. 한가지 다른 게 있다면 눈이 녹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모든 것이 축축했다. 진흙은 마치 구두를 벗기려는 것처럼 꽉 잡고 놓지 않았다.
그러므로 큰길에는 송판을 길게 깔아놓았고 사람들은 그 위로만 다녔다.
날씨는 따뜻했다. 그레버는 고국에 있을 때보다 오히려 전방에서 따스함을 느꼈다.
그는 전선의 굉음에 귀를 기울였다. 격렬한 포성이 높아졌다가 사라져가고 있었다.
사무병이 지정한 방공호를 찾아서 빈 자리에 소지품을 놓았다. 그는 한 이틀 늦게
귀대하지도 못한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는 밖으로 나왔다. 마을의 전면에는 참호가 여기저기에 있었지만 지금 그곳은
물로 채워졌고 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물에 젖어 있었다.
그레버는 되돌아왔다. 거리에서 중대장인 라에를 만났다. 라에는 안경을 걸친 학의
모습을 하고서 송판 위를 조심스럽게 걷고 있었다. 그레버는 그에게 보고를 했다.
"자네는 운이 좋았어. 자네가 출발하고 나서 모든 휴가가 취소되었지."
그는 그레버를 보았다.
"어때, 다녀온 보람이 있었나?"
"네, 있었습니다."
"잘됐군. 여기는 흙탕물 속에 앉아 있는 것과 같지. 모두 일시적일 거야. 곧 강화된
예비진지로 후퇴하겠지. 예비진지를 보았나? 그곳을 지나왔겠지."
"아닙니다."
"보지 못했나?"
"네."
"여기서 40 킬로미터 가량 떨어져 있지."
"그곳을 통과한 것은 어젯밤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때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렇겠지."
라에는 그레버의 표정을 집요하게 살폈다. 그는 무엇인가를 그레버에게 묻고 싶은
눈치였다. 그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자네 소대장이 전사했어. 뮬러 소위 말야. 신임 소대장은 마츠소위야."
"알겠습니다."
라에는 지팡이로 축축한 땅을 쿡쿡 찔렀다.
"이 모양으로 땅이 질면 소련군도 대포와 전차를 앞세우고 전진하지는 못할 거야.
덕분에 우리는 부대를 재편성할 수 있지. 모든게 일장일단이 있는 법이야. 안 그래?
돌아와 줘서 고맙네. 지금은 젊은 보충병을 훈련해야 할 고참병이 절대적으로
필요해."
그는 흙탕물을 건너뛰었다.
"그곳은 어때?"
"여기와 비슷합니다. 공습이 빈번합니다."
"그렇게 심한가?"
"다른 도시는 잘 모르겠지만 하루 건너 한 번씩 공습이 있었습니다."
라에는 그에게 확실한 정보를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레버는 침묵만을
지켰다.
오후에 분대원들이 돌아왔다.
"휴가병!" 임메르만이 말했다.
"왜 이런 난장판으로 돌아왔지? 어째서 탈영하지 않았어?"
"어디로?"
임메르만을 머리를 긁적거렸다.
"스위스로."
"그걸 모르고 있었군. 탈영병을 위한 특별 호화 열차가 매일 스위스로 출발하고
있어. 폭격을 받지 않도록 지붕에 적십자를 새기고 말야. 그리고 스위스 국경에는
'환영'이라고 쓰인 개선문이 나란히 서 있는데 말이지? 그런데 넌 언제부터 그런 말을
마음대로 하게 되었지?"
"나는 언제나 하고 싶은 말은 해. 우린 지금 후퇴하는 중이야. 패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100 킬로미터씩 퇴각할 때마다 말이 조금씩 자유로워지지."
임메르만은 옷에 묻은 진흙을 털어냈다.
"뮬러는 죽었어. 마이네케와 슈나이더는 후송을 했고. 뮤케는 엉덩이를 맞았는데
바르샤바에서 죽은 모양이야. 그리고 또 베르닝! 그는 오른쪽 다리를 잃고,
출혈이 너무 심해 죽어버렸어."
"힐슈만도." 그레버가 말했다.
"힐슈만? 그 녀석이 왜?"
"녀석도 죽었지?"
"바보 같은 소리 마! 그래, 저기 앉아 있잖아."
그레버는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과연 임메르만의 말대로 힐슈만은 술통 위에
앉아 반합을 열심히 닦고 있었다. 맙소사!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아니, 저 녀석 어머니는 힐슈만이 죽었다는 보고를 받고 있었는데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그레버는 힐슈만에게로 갔다.
"네 어머니를 만났었지."
"그게 정말인가? 그럼 약속을 잊지 않았군? 난 네가 찾아가리라고는 생각지도 않고
있었어."
"어째서?"
"난 여지껏 다른 사람과의 약속을 기대한 적이 없거든."
그레버는 그가 거의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우리 어머닌 어떠셔? 내가 잘 있다고 전해드렸나?"
"힐슈만, 네 어머니는 네가 전사한 걸로 알고 있어. 중대로부터 통지가 왔었나 봐."
"뭐라고? 그런 일이 어떻게?"
"네 어머니가 직접 그렇게 말씀하셨어."
힐슈만은 그레버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난 거의 매일 어머니께 편지를 보내고 있는데?"
"어머니는 그 편지는 네가 전에 보낸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어.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나? 힐슈만은 딱 한사람뿐이야."
"그건 그래. 누군가 고의로 그런 짓을 한 게 아닐까?"
"일부로 그런 장난을 할 녀석이 있을까?"
"혹시나 슈타인브레너가."
"그 녀석, 아직도 살아 있었나?"
"물론이지. 그 녀석은 특무상사가 죽고 나서 이틀간 본부에서 근무한 적이 있지.
마침 사무병이 입원을 했고."
"만약에 그런 짓을 했다면 그야말로 악랄한 문서위조 행위지."
"그렇지."
"그런 문서에는 라에가 서명하도록 되어 있어."
"우리 어머닌 그것을 알지 못해. 우리 어머니에겐 어떤 서명이나 마찬가지야."
그레버는 슈타인브레너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악질적으로 장난을 했군. 도저히 믿을 수 없는데. 그런데 그 병신 같은 새끼가 왜
그런 짓을 했을까?"
"나를 교육시키기 위해서겠지. 난 유대인의 피가 섞여 있어. 우리 어머닌 뭐라고
말씀하셨지?"
"의외로 침착하셨어. 넌 즉시 어머니께 편지를 보내야 돼. 내가 말한 것을 그대로
쓰는 거야. 내가 방문했던 일을 기억하실 테니까 말야."
"어머니에게 편지가 도착하려면 오래 걸리겠지."
그레버는 힐슈만의 입술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보았다.
"함께 중대본부로 가지. 본부에서 정정 전문을 치게 하는 거야."
"그건 안돼."
"왜? 그 이상의 일도 할 수 있어. 우리는 슈타인브레너를 고소할 수도 있는 거야."
"안된다. 난 도저히 할 수 없어. 난 그것을 증명할 수가 없어. 더구나 고소도 할 수
없단 말야. 넌 그것을 모르겠어?"
"알겠어, 힐슈만." 그레버는 거칠게 대답했다.
"그렇지만 이런 일은 언제까지나 계속되지는 않을 거야."
그레버는 저녁을 먹고 나서 슈타인브레너를 만났다. 슈타인브레너는 햇볕에 그을린
건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의 눈이 재빠르게 무엇인가를 탐색하고 있었다.
"고국의 사기는 어때?"
그레버는 반합을 내려놓았다.
"우리는 국경에 도착해서 친위대 장교로부터 국내의 정세를 한마디도 발설해서는
안된다고 경고를 받았어. 그렇지 않으면 엄벌에 처할 것이라고."
슈타인브레너는 웃었다.
"난 친위대 소속이야. 내게는 무슨 말을 해도 상관없어."
"그렇다면 더욱 말할 수 없지. 엄벌이란 군의 계획을 사전에 내통한 자로서
총살형을 받는 거야."
슈타인브레너는 웃음을 딱 그쳤다.
"넌 그럴듯하게 말하고 있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다만 대위가 우리에게 했던 말을 되풀이했을 뿐이야."
슈타인브레너는 교활한 눈초리로 그레버를 훑어보았다.
"너, 결혼했지?"
"어떻게 알았지?"
"난 무엇이든지 알고 있지."
"본부에서 보았군. 알면서 왜 묻지? 넌 본부는 잘 가지 않았잖아?"
"난 내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는 언제든지 본부에 있을 수 있어. 나도 이번에
휴가를 가게 되면 결혼할 생각이야."
"정말인가? 그런데 누구하고?"
"결혼 상대자는 친위대 사령관의 따님이야."
"그야 그렇겠지."
그레버가 빈정거렸지만 슈타인브레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혈통이야 서로가 일급이지."
그는 자신의 말에 열중해 있었다.
"난 노르딕 프리지안계이고 여자 쪽은 라인 섹슨계이지. 우린 양친으로부터 모든
원조와 인종상의 연금을 받기로 돼 있어. 아이들은 당연히 교육상의 특권을 받는다.
당에서 부여하는 이익의 일체를 수령할 수 있어. 5 년이 지나면 내 아내는 모범적인
어머니로서 부인 부대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을 수 있지. 만약에 쌍둥이나 세 쌍둥이를
낳는다면 총통께서 직접 이름을 지어주시는 거야. 그렇게 되면 난 일생을 보장받는
거지. 자, 상상해 보라고!"
"지금 상상하는 중이야."
"바로 민족의 품종개량이지. 우리는 유대인을 근절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순혈종인
게르만인도 개조해야 돼. 새로운 지도자상의 민족으로 말야."
"넌 유대인을 많이 근절시켰나?"
슈타인브레너는 히죽히죽 웃었다.
"만일 네가 내 행동기록을 본다면 그런 걸 물어보는 게 미안할거야. 그 무렵에는 참
멋있었지!"
그는 비밀이라도 털어놓을 듯이 그레버에게로 몸을 내밀었다.
"난 말야. 전속 신청을 했어. 친위대 사단으로 복귀하려고. 거기로 가야 멋지게
솜씨를 발휘할 수 있지. 또 출세할 수 있는 기회도 많고. 아주 규모가 대단하지.
더러운 소련놈들에게는 일일이 군법회의 같은 게 필요없어. 그냥 송두리째 처치해
버리는 거야. 전엔 한나절 만에 폴란드인과 소련인 배반자들을 300 명이나 해치웠지.
그래서 여섯 사람이나 공로훈장을 받았어. 여기서 체포하는 건 시시한
게릴라들뿐이야. 그런 건 아무리 죽여 봤자 훈장을 받을 수 없어. 네가 없는 동안에
고작 6, 7 명을 처치했을 뿐이야. 소탕부대나 친위대의 보안부에선 하루에도 몇 천
명씩 잡아들이고 있지. 그러니까 출세를 하려면 그리로 가야 돼."
그레버는 대평원의 붉은 노을을 바라보았다. 새가 저녁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슈타인브레너라는 사나이는 완전한 당의 소산물이다. 녀석은 건강하며 완벽하게
육체적 단련을 받았지만 자기자신의 사상은 찾아볼 수 없고 완전히 비인간적으로
훈련됐다. 이 녀석에게는 총기 수입이나 체조나 살인이나 모두 똑같은 일에 속한다.
"너, 힐슈만의 어머니에게 사망통지서를 발송했지?"
"누가 그런 말을 하던가?"
"난 이미 알고 있었지."
"그래? 네가 무슨 수로?"
"알고 있어. 장난치고는 그럴듯하던데."
슈타인브레너는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는 남이 비웃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언제나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의 잘생긴 얼굴이 만족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너 역시 그렇게 생각하나? 통지서를 받아 든 그 할멈의 상판을 상상해 봐!
그렇다고 내가 어떻게 되는 것도 아냐. 힐슈만 녀석은 무서워서 끽 소리도 못할
테니까. 사무적인 착오라고 해명하면 그것으로 끝나버리는 거야. 흔히 있는 일이니까."
그레버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용기가 대단해."
"용기? 그만한 일에 무슨 용기가 필요하겠나! 장난으로 할 수도 있지."
"그렇지 않아. 반드시 용기가 필요하지. 그런 짓을 하면 다음에는 자기가 죽게
되니까."
슈타인브레너는 통쾌한 듯이 웃어댔다.
"바보 같은 소리 마라! 그건 할머니들이 지껄이는 미신이야."
"절대로 미신이 아냐. 그런 짓을 하는 인간은 자기 자신의 죽음을 초래하고 있는
거야.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봐, 설마 그게 진실이라고 단정하는 건 아니겠지."
"난 진심으로 믿고 있어. 너도 믿어야 해. 이건 옛날부터 전해지는 게르만 민족의
신앙이야. 난 네 장화를 신고 싶지는 않아."
"머리가 돌았군!"
슈타인브레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이제 웃지 않았다.
"난 그런 못된 짓을 한 녀석을 둘이나 알고 있어. 둘 다 죽어버렸지. 한 놈은
그래도 운이 좋았던 편이야. 실탄이 사타구니에 명중했으니까. 덕분에 성불구자가
되었지. 너도 그 정도로 면죄를 받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쌍둥이나 세 쌍둥이는 낳을
수 없어. 그야 물론 다른 녀석이 대신 수고 좀 하면 되겠지만. 당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건 피가 순수해야 한다는 것이니까. 개인은 전혀 문제가 안되는 거야."
슈타인브레너는 그레버를 잔뜩 노려보았다.
"이봐, 너 정말 이상해졌구나. 넌 전에도 그랬었나?"
슈타인브레너는 꼼짝않고 서 있다가 이윽고 그 자리를 물러났다. 그레버는 상체를
약간 뒤로 젖혔다. 일선으로부터 굉음이 들려오고 까마귀가 어지럽게 날아 다녔다.
그는 전방을 한 번도 떠나보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자정에서 2시까지 척후를 나갔다. 그의 순회 구역은 마을을 한 바퀴 도는
것이었다. 곳곳마다 파괴된 건물의 잔해가 전선의 포화를 배경으로 새까맣게 서
있었다. 포구에서 토해내는 섬광으로 명암이 공존하면서 깜박깜박 하늘이 흔들렸다.
아무런 예감도 없이 일시에 고통이 밀려왔다. 그는 여행중의 며칠 동안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마비되고 허탈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지금 온몸을 갈가리
찢어 놓는 것처럼 고통이 되어 새롭게 각인되고 있었다.
그는 그대로 서서 기다렸다. 이런 마음의 흐트러짐은 적어도 냉정하게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평정은 쉽게 찾아오지 않았고 다만 모든 것을 상실했다는 고통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영구히 잃어버린 것이다. 어디를 보아도 가교는 없었다. 그는 그의 내부로
온 신경을 돌렸다. 미세하나마 소리가 들릴 것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는 진창에 빠진 구두를 빼내려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구두의 밑창에 축축한
흙뭉치가 착 달라붙어 있었다.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소리없이 흘렀다.
"지치겠는데." 샤우워였다.
그는 파괴된 가옥 앞에 서 있었다.
"적어도 사방 1 킬로미터 이내는 엿들을 수 있지. 그런데 넌 무엇을 하는 거야.
체조라도 하나?"
"샤우워, 결혼은 했을 테지."
"물론이지. 농장을 갖고 있는데 결혼을 안 할 수 있지. 여자가 없으면 농장은
지탱할 수 없어."
"결혼한 지 얼마나 됐지?"
"15 년 그런데 왜?"
"결혼하고 나서 그런 긴 세월이 지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무슨 소리야! 도대체 무엇이 어떻다는 말인가?"
"자네를 항상 묶고 있는 쇠사슬 같은 것 말야. 무엇인가 항상 가슴속에 머물고
있으면서 언제나 그곳으로 가고 싶어 하나?"
"쇠사슬이라니, 무슨 뜻인가? 물론 나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하지. 솔직히 오늘도
종일 그런 생각을 했어. 지금은 씨앗을 뿌리고 나무를 심어야 하는 시기지! 그런
생각을 하면 미칠 것만 같아."
"난 자네의 농장에 대해서 묻는 거 아니라 마누라에 대해서 묻는 거야."
"그것도 마찬가지야. 아까도 말했지만 농장은 여자가 없으면 절대로 안돼. 그런데
그게 어떻게 됐다는 거야? 물론 걱정이야 되지. 더구나 임메르만은 전시의 포로들은
혼자 있는 여자와 동침한다는 말을 멋대로 지껄이고 있어."
샤우워는 코를 풀었다.
"그 녀석은 이렇게 떠들어대지. 여자가 한 번 남자 맛을 알게 되면 남자 없이는
도저히 안된다는 거야. 반드시 다른 사내를 찾는다는 거야."
"아아, 바보 같으니라구!" 그레버는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
"그 쓸개 빠진 놈은 여자란 다 똑같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야말로 바보의
온상이지."
26
그들은 이미 구별할 수 없었다.
얼굴은 물론이고 군복조차 제대로 분간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병사들은 철모를
보거나 목소리를 듣고서야 겨우 아군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참호는 이미 오래 전에
무너져 내렸다. 유산탄의 구덩이와 방어진지의 꾸불꾸불한 선이 바로 전선이었다.
전선은 항상 변하고 있었으며 이미 비, 굉음, 야음, 폭발의 섬광, 흙탕물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드디어 제공권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적군의 비행기가 분쇄한 것이다. 굵은
빗발이 사납게 뿌려지고, 그와 함께 폭탄이나 수류탄이 유성처럼 날아들었다.
탐조등의 불빛은 흩어진 구름 사이를 요란하게 왔다갔다했으며 고사포의 포화는
격동하는 지평선의 굉음을 뚫고 사방으로 울려퍼졌다. 불덩이가 된 비행기가 순식간에
추락하고, 예광탄이 불을 토하는 비행기를 쫓아서 먼 곳으로 사라졌다. 황백의 낙하산
조명탄은 허공을 밝히고 있다가 벼랑에서 떨어져나가 듯이 사라졌다. 그러면 다시
맹렬한 사격이 발사된다.
12일째였다. 처음 사흘은 방어선을 유지할 수 있었다. 철조망을 가설한 진지는
포격을 잘 견뎌냈다. 마침내 외곽의 진지가 붕괴되었다. 방어선에는 적군의 전차가
돌입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시 몇 킬로미터 후방에서 대전차포가 전차대의 돌파작전을
저지시켰다. 미명의 하늘 아래에서 전차가 마치 뒤집어진 딱정벌레처럼 전복되어
바퀴를 공전시키고 있었다.
징벌대대는 길을 정비하고 무전을 복구하기 위해서 투입되었다. 그들은 거의 엄호도
받지 않고 작업을 해야 했으므로 두 시간 동안에 반 이상이 희생되었다. 전투기의
엄호도 없는 폭격기가 철조망 진지를 향하여 저공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6일째는
진지의 절반 이상이 쓸모없게 되어 버렸다. 진지는 단지 엄폐물에 지나지 않았다.
소련군은 야습을 기도했으나 그대로 격퇴되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노아의 대홍수가 시작된 것 같았다. 병사들은 이제
동료의 얼을 보고도 구별조차 하기 어려웠다. 그들은 제각기 포탄 구덩이의 질퍽한
속을 같은 보호색을 지닌 벌레처럼 기어다니고 있었다.
중대는 간신히 두 개의 기관총을 장치한, 파괴된 진지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곳의
배후에는 소수의 투척병이 서 있었다. 다른 병사들은 포탄 구덩이와 파괴된 돌벽의
잔해 뒤에 잠복하고 있었다. 라에가 한쪽 진지를, 마츠가 다른 하나의 진지를 방어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사흘이나 사수했다.
이틀째, 탄약이 거의 바닥났다. 소련군은 간단하게 방어선을 돌파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잠잠했다. 해가 기울어 질 무렵, 독일군의 비행기 두 대가 날아와서
탄약과 식량을 투하했다. 병사들은 그중의 일부를 끌어당겨서 게걸스레 먹어치웠다.
야간에 원군이 도착했다. 공병대가 통나무 길을 완성했다. 한 시간 후에는 포병에
의한 준비 포격도 없이 기습적으로 공격이 감행되었다. 전방 50 미터 거점에서
소련군이 갑자기 공격을 개시했다. 소련군이 던진 수류탄 중에는 불발탄도 여러 개
있었다.
작렬하는 섬광 속에서 그레버는 눈앞에서 철모를, 그 밑의 하얀눈, 크게 벌린 입
뒤로 수류탄을 던지려고 움직이는 적군의 팔을 보았다. 그는 재빨리 보충병의
수류탄을 빼앗아 움직이는 팔을 향해서 던졌다. 수류탄이 폭발했다.
"안전핀을 뽑으란 말야!" 그는 보충병에게 호통을 쳤다.
"당기지 말고 젖히라구!"
두 번째의 수류탄은 불발이었다. 그는 다시 수류탄을 던지면서 적군의 수류탄이
자신을 향해서 날아오는 것을 보았다. 그가 바닥에 바짝 엎드리는 것과 동시에, 등에
채찍으로 두들겨맞는 듯한 충격과 흙덩어리가 내려덮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손을 뒤로 뻗으면서 고함을 질렀다.
"빨리, 빨리! 수류탄을 내 놔!"
그는 수류탄이 넘겨지지 않자 비로소 뒤를 돌아다보았다. 뒤에 있던 보충병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그의 손에 잡힌 것은 물컹한 살덩어리였다. 그는 수류탄을 찾아서
마지막 두 개의 안전핀을 뽑았다. 적군의 그림자가 포탄 구덩이를 살며시
기어오르다가 훌쩍 뛰어넘는 것이 보였다. 그는 진흙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이제는 잡혔다. 잡혀버렸다. 그는 조심스럽게 구덩이의 한쪽으로 달라붙었다. 이대로
있으면 진흙더미가 보호해 줄 것이다. 낙하산 조명탄의 빛이 보충병의 사지가 갈가리
찢겨져서 사방에 흩어진 모습을 적나라하게 비추고 있었다. 수류탄이 보충병의 배에
맞아 폭발한 것이다. 그의 몸이 그레버를 구해준 셈이다.
그는 포탄 구덩이 속에서 머리를 내밀지 않고 가만히 누워 있었다. 오른쪽
진지에서는 기관총을 발사하고 있었다. 드디어 왼쪽 진지에서도 사격을 개시했다.
진지가 활약하고 있는 한 절대로 절망할 필요가 없다. 양쪽의 진지에서는 이 지점에
빗발 같은 탄알을 퍼붓고 있다. 적들은 더 이상 오지 않을 것이다. 아군 진지의
일부분이 겨우 돌파됐을 것이다.
그는 진지의 뒤쪽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머리가 지근지근했지만 의식만은 점점
또렷해졌다. 선명한 상념이 의식 속에 있었다. 이것이 노련한 병사와 보충병의
차이였다. 보충병은 지레 겁을 먹고 당황하기 때문에 한층 위험하다. 만약에
소련군들이 전진해 온다면 죽은 척하고 있으면 된다. 진흙탕 속에서 사람을 찾아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는 구덩이에서 기어나와 다음 구덩이 속으로 재빨리 뛰어들었다. 그는 물을
한모금 마시고 나서 다시 기어나왔다. 그 구덩이 속에는 시체가 둘 있었다. 그는
앉아서 기다렸다. 그때 수류탄 소리가 들리고 왼쪽의 진지 근처에서 폭발하는 게
보였다.
소련군이 진지를 돌파해 양쪽에서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기관총이 불을 토하고
있었다. 이윽고 수류탄의 폭발음이 잠잠해지더니 이번에는 사격을 개시했다.
그레버는 순식간에 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었다. 적군은 또 공격을 가해 올 것이다.
놈들은 큰 구덩이부터 하나하나 병사들을 찾아낼 것이다. 작은 구덩이 속에 들어가
있는 게 안전하다. 갑자기 사나운 빗발이 쏟아졌다. 기관총에서 불이 번쩍번쩍 하다가
잠시 중단되더니 내리 포격이 시작되었다. 오른쪽 진지에 직격탄이 명중했다. 비가
내리는 전선의 아침이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그레버는 여명이 떠오르기 전에 탈출할 수 있었다. 그는 무작정 뛰어가다가 움직일
수 없게 된 전차 뒤에서 샤우워와 두 사람의 보충병을 만났다. 샤우워의 코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으며 보충병은 배가 찢어져서 창자가 나와 있었다. 상처를 동여맬 만한 게
전혀 없었지만 설사 붕대를 감는다 해도 소용이 없었다. 차라리 빨리 죽는 편이
좋았다. 다른 보충병은 다리가 부러져 있었다. 그는 포탄 구덩이 속에 추락을 했는데
질퍽질퍽한 바닥에서 왜 다리가 부러졌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전차 속에는
새까맣게 탄 승무원들의 해골이 보였다.
연락 장교가 왼쪽 진지에서 빠져나왔다.
"진지 옆으로 집합!" 그는 목이 쉬어 소리가 재대로 나오지 않았다.
"저 구덩이 속에도 누가 있는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위생병이 있습니까?"
"모두 죽었거나 부상당했다."
장교는 진지로 갔다.
"군의관을 데려올게."
그레버는 배에 빗물이 스며들고 있는 보충병을 향해서 말했다.
"없으면 붕대라도 갖고 오겠어."
보충병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진흙위에 누워 있었다.
"들것에 태워서 너를 끌고갈 수는 없어."
그레버는 다리가 부러진 병사에게 말했다.
"이런 진창을 끌고다닐 수는 없어. 우리에게 매달려서 성한 다리로 깡충깡충 뛰란
말야."
그들은 양쪽에서 부상자를 부축하면서 구덩이쪽으로 조금씩 옮기고 있었다. 긴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한 발자국도 걸음을 떼어 놓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보충병을 진지 근처에 있는 벽의 잔해 뒤에 세우고 위생병이 발견할 수 있도록
벽에 철모를 걸어놓았다. 그 근처에 소련병이 두 명 엎어져 있었다. 한 사람은 목이
달아나 버렸으며 다른 사람은 땅에 쓰러져서 주위를 온통 빨간 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들은 더욱 많은 소련병들의 시체를 보았다. 그에 못지않은 아군의 시체도
발견되었다. 라에는 왼쪽 팔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한 시간 후에 보급기 한 대가
하늘에서 여러 개의 상자를 투하했다. 그러나 너무 앞쪽으로 떨어뜨렸기 때문에
적군의 수중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다시 7 명으로 숫자가 늘어났다. 오른쪽 진지에도 몇 명인가가 모여 있었다. 마츠
소위는 전사했다. 라이네케 특무상사가 지휘를 대신해서 하고 있었다. 탄약은
조금밖에 남지 않았고 수류탄 투척병들은 모두 전사하였다. 그러나 중기관총은 아직
쓸만했다.
징벌 중대로부터 열 명의 지원병이 왔다. 그들은 탄약과 통조림 등을 운반해 왔고
들것을 가지고 와서 부상병들도 실어갔다. 그중의 두 사람은 미처 전진하기도 전에
공중으로 날아가버렸다. 포격으로 오전 중에는 일체의 연락이 차단되고 있었다.
오후가 되자, 비가 그치고 태양이 얼굴을 내밀었다. 전방의 날씨는 순식간에
무더워지고 진흙이 말라 딱딱해졌다.
"적은 경탱크로 공격해 올 거야." 라에가 말했다.
"제기랄, 대전차포는 어디 있지? 대전차포가 없으면 우리는 전멸이다!"
폭격은 멈추지 않았다. 오후에 융카 보급기 한 대가 다시 날아왔다. 보급기는
메사슈미트기의 호위를 받고 있었다. 적군의 슈트르 모빅기가 나타나서 이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적기 두 대가 격추됐다. 이어서 메사슈미트기가 두 대 떨어졌다. 융카기는
앞으로 전진할 수 없었다. 보급상자는 훨씬 후방으로 떨어졌다. 메사슈미트기가
적기에 맞서 공중전을 전개하였다. 아군기는 소련기보다는 훨씬 속력이 빨랐다.
그러나 공중에는 아군기의 세 배에 해당하는 적기가 까맣게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아군기는 부득이 달아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튿날, 시체 썩는 냄새가 바람에 실려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레버는 진지 안에
앉아 있었다. 아직도 22 명이나 남았다. 라이네케도 이와 비슷한 숫자의 병사들을
반대편에 집합시켜 놓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전부 전사했거나 부상당했다.
처음에는 120 명의 병사들이 있었다.
그레버는 식사를 마치고 총기를 닦고 있었다. 그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지금은 단지 한 개의 기계에 불과할 뿐이다. 그는 거기에 앉아서 대기하고 잠을 자고
언제나 자기 자신을 방어할 태세를 갖추고 있으면 되는 것이었다.
이튿날 아침, 적군의 탱크가 급습했다. 대포와 기관총 때문에 진지는 밤새껏
고립되어 있었다. 한밤중에 끊긴 무전은 몇 번이나 복구했으나 연결되는 즉시
절단되었다. 중대로부터 약속된 지원병은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독일의 포병은
조금씩 약화되어 갔다. 소련군의 포화는 치열했다. 진지는 두 번이나 직격탄을
받았지만 견뎌내고 있었다. 그것은 이미 진지라고도 할 수 없었다. 마치 바다
한가운데에서 폭풍우를 만난 배처럼 흙탕물 속에 잠겨있는 콘크리트 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레버는 어깨에 경상을 입었지만 상처에 코냑을 약간 뿌렸을 뿐이다. 진지는
이제는 폭풍우를 만난 선박이 아니라 대해의 밑바닥에서 흔들리고 있는 잠수함이었다.
시간조차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병사들은 어둠 속에 뭉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레버는 불과 2주일 전에 거닐었던
고국의 도시는 이미 까맣게 잊었다. 휴가와 함께 엘리자베스라는 여인도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모두가 죽음과 죽음 사이에 내재한 꿈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은 오로지 진지가 있을 뿐이었다.
소련군의 경탱크대가 전진을 개시했다. 보병들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중대는
탱크를 그대로 통과시키고 뒤따르던 보병에게 십자포화를 퍼부었다. 달아오른
기관총의 총신이 병사들의 손에 화상을 입혔다. 그들은 쏘고 또 쏘고 마구 갈겨댔다.
소련군의 대포는 이미 그들을 포격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탱크 두 대가 반전을
하면서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기관총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병사들은 틈을
노려 간간이 저격했다. 진지가 비틀거린다고 느끼는 순간 콘크리트가 갈라졌다.
"수류탄!"
라이네케가 고함을 질렀다. 그는 한 다발의 수류탄을 어깨에 걸치고 입구쪽으로
갔다. 그는 사격이 일제히 끝나자 진지의 엄호를 받으며 밖으로 기어나갔다.
"기관총 사수는 저 탱크를 공격하라!" 라에가 명령했다. 기관총은 불꽃을 내며
라이네케를 엄호했다. 라이네케는 한 다발의 수류탄으로 탱크를 폭파할 목적으로
천천히 우회하면서 탱크에 접근해 갔다. 그러나 그것은 무모한 짓이었다. 소련군의
기관총이 다시 불을 뿜어댔다.
이윽고 한 대의 전차가 사격을 멈췄다. 아무도 탱크가 폭발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해치웠다!" 임메르만이 소리를 질렀다.
기관총은 다른 탱크를 향해 실탄을 퍼부었다. 드디어 탱크는 방향을 돌리더니
자취를 감췄다.
"여섯 대를 격파했다!" 라에가 외쳤다.
"놈들이 되돌아온다. 기관총은 일제히 사격 개시!"
"라이네케는 어디 있지?"
엠메르만이 물었다. 모두들 대답하지 않았다. 그후 라이네케의 모습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오후에도 저항을 계속했다. 양쪽의 진지는 무너진 지 오래됐지만 사격은
멈추지 않았다. 탄약이 바닥이 나 있었다. 병사들은 휴대용 식량을 먹고 구덩이 속에
괴인 흙탕물을 마셨다. 힐슈만은 손에 관통상을 입었다.
태양이 구름을 뚫고 빛을 쏘아댔다. 진지는 피비린내와 화약냄새가 진동했으며
평원에 버려진 시체들은 잔뜩 부풀어올랐다. 잠들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잤다. 진지가
현재 고립되어 있는지, 후방과의 연락이 가능한지도 알 수 없었다.
밤이 되자 포격은 한층 더 격렬해졌다. 점점 소리가 커지던 포격이 갑자기 딱
그쳤다. 그들은 적군의 대습을 예상하고 밖으로 기어나갔다. 부동자세로 두 시간
이상을 기다려도 적군은 조용하기만 했다. 이 초조한 두 시간이 대격전보다 병사들을
더욱 애타게 했다.
드디어 소련군이 공격을 시작했다. 중대는 두 대의 기관총으로 싸워야만 했다.
그들은 포탄 구덩이 속에 진을 치고 그것으로 간신히 사수하고 있었다. 적군은 다시
후퇴를 했다. 소련군은 그들을 실제보다 강력하게 보고 있었다. 그 덕분에 그들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두 번째의 공격으로 샤우워가 머리에 총탄을 맞고 즉사했다. 샤우워의 주검 앞에서
힐슈만이 허리를 구부리고 달리다가 푹석 넘어졌다. 그레버는 그를 구덩이 속으로
끌어당겼다. 총탄에 명중된 그의 가슴에서 피가 철철 흘렀다. 그레버는 그의 상처를
살피다가 피에 젖은 지갑을 발견하고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이미 그의 어머니가
받았던 전사통지서는 이제 사실이 되어 버렸다.
아군은 제2의 방어선에 당도했다. 잠시 후, 또 후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예비진지가 제1선이 되었다.
그들은 다시 후방에서 집결했다. 중대에서 살아 남은 사람은 30 명 정도였다.
이튿날은 지원을 받아 원래의 120 명으로 충원되었다.
그레버는 야전병원에서 프레젠버어그를 만났다. 막사에 임시로 설치된 병원은
시설도 아주 빈약했다. 그레젠버어그는 왼쪽 다리에 부상을 입고 있었다.
"먼저 자르고 보겠다는 거야. 그래서 내일 후송되게 손을 써 놨지. 경험있는
의사에게 보이고 싶어서."
프레젠버어그는 쇠로 된 틀을 무릎에 끼고 야전용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의 간이
침대는 활짝 열린 창가에 있었다. 창 밖에는 대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바람에 실려 온
야생화의 향기와 병실의 썩는 냄새가 대비를 이루었다.
"라에는 어떻게 되었니?" 프레젠버어그가 물었다.
"팔을 맞았어. 경상이지."
"입원했나?"
"중대에 남았어."
"그렇겠지."
프레젠버어그의 얼굴이 움직였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절반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돌아가고 싶지 않은 사람이 많이 있어. 라에도 그렇지."
"어째서?"
"체념이지. 희망도, 갈 곳도 없으니까."
그레버는 양피지처럼 창백한 프레젠버어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럼, 자네는?"
"글쎄 모르겠어. 우선 이것부터 어떻게 해야지."
그는 쇠틀을 가리켰다.
평원으로부터 따뜻한 바람이 불어왔다.
"이상한데." 프레젠버어그가 말했다.
"눈이 내리고 있을 때, 이 나라에는 절대로 여름이 오지 않을 것 같았어. 하지만
여름은 어김없이 왔고 벌써 지긋지긋하단 말야."
"그래."
"고국은 어때?"
"글쎄 도저히 양쪽을 결부시킬 수 없어. 휴가와 전투를. 전에는 그게
가능했는데 지금은 안돼.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어. 도대체 무엇이 진실인지 모르겠어."
"그걸 아는 사람은 없어."
"나만은 알고 있다고 자부했었지. 그곳에 있을 때는 이만하면 됐다고 만족했었는데
이제는 모든 게 뒤죽박죽이야. 고국에서 나는 다시는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고
결심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해."
"자넨 고통이 심하겠군."
프레젠버어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여기에는 생각지도 못한 게 있었어. 모르핀. 한 대 맞았는데 아직도 효과가 있어."
"병원 열차가 오나?"
"구급차지. 그게 가장 가까운 역까지 부상병들을 수송하는 거야."
"여긴 1 명도 남지 않게 될 거야. 이제 자네마저 가 버리는군."
"아마도 놈들은 다시 우리를 만나게 할 거야. 그때 다시 와야지."
그들은 서로 마주보았다. 두 사람은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난 그것을 믿어. 적어도 모르핀이 떨어지지 않는 한."
그는 그레버에게 손을 내밀었다.
" 조심하게." 그레버는 겨우 한마디했다.
"물론이지. 지금은 물이 흘러가는 대로 따라가야지. 생명의 원시적인 충동이야.
옛날엔 이렇지 않았어. 그것도 일종의 기만에 지나지 않을 거야. 그래도 그속에는
희망의 조각이 묻혀 있었어."
그레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프레젠버어그는 야릇한 미소를 절반만 보였다.
그레버는 중대가 배치돼 있는 마을로 돌아왔다. 짙은 저녁놀이 하늘의 색깔을
바꾸고 있었다. 비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질퍽하던 땅이 굳어졌고 버려진 밭에서
이름모를 꽃들과 잡초가 자라났다.
일선에서 포성이 울려퍼졌다. 불현듯 모든 것들이 낯선 존재로 다가오며 각각의
결합체가 산산이 흩어지는 것 같았다. 그레버는 이런 느낌을 왕왕 느꼈었다. 한밤에
문득 눈이 떠지고 자기 자신의 위치가 어딘지 분명치 않을 때, 이런 기분에
사로잡혔었다. 그러나 그런 상태가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인간은 언제든지
원점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길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것은 공포가 아니었다. 그레버는 두 손을 주머니에 감추고 주위를 돌아다보았다.
늘 대하는 광경이었다. 황폐한 논과 밭, 소련의 석양, 그리고 아득한 전선에서
번쩍이는 섬광 변함이 없는 전선의 풍경과 함께 절망의 오한이 심장을 찌르고
있었다.
그는 주머니 속에서 만져지는 엘리자베스의 편지를 떠올렸다.
그녀의 따뜻함과 사랑의 감정이 손바닥으로 퍼져서 가슴까지 올라왔다. 그러나
그것은 말끔히 정리된 방안을 밝히는 램프가 아니라 늪가의 어지러운 도깨비불이었다.
그 뒤를 따라가면 갈수록 수렁은 점점 깊어질 뿐이었다. 그는 돌아가는 길을 찾기
위하여 불을 밝히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는 집을 세우기도 전에 불을 먼저 밝혔던
것이다. 그는 그 불을 폐허더미에 내려놓았다. 그러나 빛은 폐허를 더욱 쓸쓸하게
장식하였을 뿐이다. 그는 고국에 있을 때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그 빛을 열심히 뒤쫓았다. 따라가기만 하면 충분하다고 믿으면서.
그러나 그것은 엄청난 착오였다.
그는 엘리자베스의 편지를 꺼내 읽어보았다. 석양의 붉은 노을이 똑같은 색으로
종이를 물들였다. 그는 편지의 내용을 암기하고 있었지만 또 다시 편지를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그는 그럴수록 자꾸만 고독해졌다. 휴가는 그토록 짧았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도 길었다.
그는 편지를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엘리자베스의 편지를 본부에 와 있던
부모님의 편지와 함께 소중하게 간직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부질없는 일이다.
프레젠버어그의 말이 옳았다. 이제는 모든 것이 지긋지긋하다. 나 자신의 목숨이
위험한데 세계의 고민까지 떠맡을 수는 없다. 엘리자베스! 어째서 자기는 그녀를 마치
잃어버린 물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떠올렸을까? 나는 그녀의 편지를 갖고 있다. 그녀는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이다!
마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 마을을 재건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거리에는
가로수가 폐허를 따라서 길게 이어졌다. 옛날에는 폐허 대신에 정원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을 것이다. 이제 옛자취는 간 데 없고 보충병이 버찌를 줍고 있었다.
27
"게릴라!"
슈타인브레너는 입술을 씹으며 소련인들을 주시했다. 그들은 마을 광장에 서
있었다. 남자와 여자가 각각 2 명씩 있었는데 여자 한 명은 무척 젊게 보였다. 그들은
모두 오늘 아침에 끌려왔다.
"게릴라 같진 않은데." 그레버가 말했다.
"틀림없다. 왜 아니라고 하지?"
"가난한 농부처럼 보이는데!"
슈타인브레너느 히죽히죽 웃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이 세상에 죄인은 하나도 없어."
'그건 그렇다. 네 녀석이 훌륭한 증거지.'
라에가 왔다.
"이자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중대장이 물었다.
"여기서 체포했습니다." 특무상사가 대답했다.
"일단 감금하고 나서 명령을 기다릴까요?"
"여긴 할 일이 산더미 같다. 왜 연대로 보내지 않았지?"
라에는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 연대는 이미 일정한 위치가 없었다. 본부에서는
사람을 파견해서 포로들의 말을 들어 보고 나서 그들에 대한 지시를 내리는 게
고작이었다.
"마을에 영주의 저택이었던 집이 있습니다." 슈타인브레너가 말했다.
"거기에 창고가 있는데 문도 단단하고 쇠창살도 있습니다."
라에는 그를 보았다. 슈타인브레너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에게
맡기면 포로들은 탈주를 기도할 것이고, 그것이 곧 그들의 최후가 될 것이다.
라에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레버, 자네가 이들을 감시하게. 슈타인브레너에게 창고의 위치를 파악해서 안전
여부를 조사하도록. 그리고 반드시 보초를 세우고 나에게 보고하라."
포로 중의 한 사람은 다리를 절뚝거렸으며 젊은 여자는 맨발이었다. 슈타인브레너가
젊은 사내의 등을 툭 쳤다.
"이 새끼야! 빨리 도망가!"
사내가 뒤돌아섰다. 슈타인브레너는 키들키들 웃으며 팔을 들었다.
"달아나! 달아나라구! 넌 자유의 몸이다!"
인이 무슨 말인가를 소련어로 빠르게 말했다.
젊은 사내는 달아나지 않았다. 슈타인브레너는 장화로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달아나란 말야! 이 바보새끼야!"
"그만둬!" 그레버가 제시했다.
"넌 라에의 명령을 들었지?"
"이놈들을 여기서 달아나게 하면 어떨까?" 슈타인브레너가 속삭였다.
"남자만 말야. 10 미터 가량 갔을 때 뒤에서 쏘는 거야. 여자들은 감금했다가
어두워지면 젊은 여자를 끌어내는 거지."
"더 이상 간섭하지 말고 어서 꺼져! 포로들의 지휘는 내가 맡았어."
슈타인브레너는 젊은 여자의 풍만한 가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여자의 짤막한
치마 아래로 미끈한 다리가 보였다.
"놈들은 어차피 총살당할 거야. 우리가 아니면 보안부가 직접 처치하겠지. 그러니까
우리는 저 젊은 여자를 즐겁게 해줄 필요가 있어. 넌 휴가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되니까."
"닥쳐! 넌 네 신부감이나 생각하고 있어! 친위대 사령관의 따님 말야. 라에가
너에겐 창고의 위치를 알려주라고 했을 뿐이야!"
그들은 하얀 집으로 통하는 길을 걷고 있었다.
"여기야."
슈타인브레너는 말끔히 수리된 작은 건물을 가리켰다. 건물은 석조물로서 쇠창살
문은 밖에서 자물쇠를 채우게 돼 있었다.
그레버가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마구간이나 창고로 사용했던 게 분명했다. 포로들은
도구가 없으면 밖으로 탈출할 수 없었다. 그는 일일이 검사를 해서 도구가 없는 것을
확인해 두었다.
그는 문을 열고 포로들을 한 사람씩 들어가게 했다. 따라온 두명의 보충병이 총을
겨누면서 보초를 섰다. 그레버는 문을 닫고 자물쇠를 채웠다.
"물에 빠진 원숭이새끼 같군."
슈타인브레너가 눈동자를 굴리면서 말했다.
"바나나! 바나나! 야, 이 원숭이들아! 바나나가 먹고 싶지 않나?"
그레버는 보충병들을 돌아다보았다.
"너희들은 이곳을 지키는 거야. 만약에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모두 너희들
책임이다. 나중에 교대시킨다."
"너희들 가운데 독일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있는가?" 그는 포로들에게 물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나중에 짚을 보내주기로 하지. 가자." 그레버는 슈타인브레너에게 말했다.
"푹신푹신한 침대도 바치지."
"가자! 너희들, 철저히 경계해야 돼. 알겠나?"
그는 창고가 안전하다는 것을 라에에게 보고했다.
"두 사람을 차출해서 감시하도록! 며칠 후, 정세가 호전되면 처리할 수 있겠지."
"알겠습니다."
"인원이 더 필요한가?"
"아닙니다. 창고는 안전합니다. 저 혼자서도 충분합니다."
"좋아, 그렇게 하자. 보충병은 빠른 시일내에 전투 기술을 습득해야 된다."
라에는 도중에 말을 중단했다. 그는 무척 불안해 보였다.
"전황은 자네도 잘 알고 있겠지? 그럼 가 봐."
그레버는 소지품을 챙겼다. 그의 소대에는 그가 알고 있는 사람이 몇 명밖에
없었다.
"간수가 되나?" 임메르만이 물었다.
"그럼, 거기서는 실컷 잘 수 있겠지. 보충병들을 훈련시키는 것보다 훨씬 낫지."
"잘 틈이 어딨어. 일선이 어떤지 알고 있나?"
"엉망진창이겠지."
"소련군이 여러 개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있어. 겨우 한 시간 동안 별별 소문이 다
떠돌고 있지 적들이 대공세를 취했어. 또 후퇴하게 될 거야."
"독일 국경을 넘어 퇴각한다면 이 전쟁이 중지될 것 같나?"
"넌?"
"아니."
"나도 역시. 도대체 조국의 누가 전쟁을 중지시킬 수 있지? 물론 참모본부는 어림도
없고. 절대로 책임을 떠맡지 않을 거야."
임메르만은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앞서 전쟁때는 급히 임시내각을 수립해 뒷처리를 시킬 수도 있었지. 불쌍한
바보들은 목을 내밀며 휴전에 서명을 하고 일주일만에 조국을 배반했다고 비난을
받았어. 그러나 그런 일은 두 번씩이나 있을 수 없지. 전체주의 정부의 전면적인
패전뿐이야. 교섭상대가 될 당이란 게 없어."
"공산당을 제외한다면 말이지." 그레버가 씁쓸하게 말했다.
"난 잠이나 자겠어. 내 멋대로 생각하고 마음대로 말하고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한다.
그것이 나의 마지막 소망이야."
그레버는 배낭을 들고 야전 취사장으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수프, 빵, 소시지 등을
받았다.
이상할 만큼 조용한 오후였다. 보충병들이 짚을 갖다 놓았다. 일선에서 계속 포성이
들려왔지만 그것도 오늘만은 기세가 꺾인 것처럼 느껴졌다. 창고 앞에는 잔디가
깔리고 옛날에 산책을 하던 길의 가장자리에는 꽃이 피어 있었다.
그레버는 창고의 맞은편에 보이는 정원 속에서 작은 집을 발견했다. 그곳에서도
창고를 감시할 수 있었다. 그 안에는 책도 꽤 여러 권 있었으나 모두 비에 젖어서
글자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는 그중에서 읽을 수 있는 책을 한 권 찾아냈다. 그는
이내 책을 덮었지만 삽화가 그를 사로잡았다. 그것은 다름아닌 그리움이었다. 본문이
프랑스어로 시작되는 책에는 무척 낭만적인 삽화가 들어 있었다.
그는 산책길을 따라서 걷다가 연못가로 나왔다. 연못에는 피리를 부는 반인반양의
석상이 세워져 있었다. 그 석상도 책과 마찬가지로 제1차 대전 이전부터 존재한
시대의 유물이었다. 그레버가 태어나기 이전의 시대였다. 전쟁도 또한 시대의
소산물이었다.
그는 연못가를 한 바퀴 돌고 나서 포로들을 가둔 창고로 되돌아왔다. 그는 쇠창살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처음부터 있었던 게 아니라 나중에 따로 만든 것이었다. 어쩌면
이 저택과 정원의 소유자가 저 쇠창살 안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노파는 잠이 들었고 젊은 여자는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남자들은 선 채로
기울어 가는 태양을 직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레버를 쳐다보았지만 여자는 결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포로 중에서 가장 연장자가 그레버의 거동을 일일이 주시했다.
그레버는 그곳을 떠나 풀밭에서 마음껏 뒹굴었다.
저녁이 되자, 보충병이 포로들의 식사를 운반해 왔다. 저녁식사는 완두콩 수프에
멀겋게 물을 탄 것이었다. 보충병은 포로들이 그것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접시를 가지고 돌아갔다. 잠시 후 돌아온 보충병이 그레버에게 보급된 담배를
내밀었다. 담배는 다른 날보다 훨씬 많이 들어 있었다. 이것은 나쁜 징조였다. 훌륭한
식사와 담배의 다량 보급은 절박한 전투 전날에 한해서 지급이 되었다.
"오늘밤은 두 시간 이상 교육받을 것을 명령받았습니다."
보충병이 말했다. 그는 심각한 눈초리로 그레버를 보았다.
"전투 연습과 수류탄 투척과 총검술입니다."
"중대장님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거야. 무엇을 벌하기 위해서 그러는 게 아냐."
보충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마치 동물원에 갇힌 짐승이라도 구경하는 것처럼
소련인들을 쳐다보았다.
"저들도 역시 인간이야."
그레버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소련인입니다."
"그래, 소련인이다. 총을 겨누고 여자만 한 사람씩 밖으로 나오게 해."
그레버는 지시를 내렸다.
"모두 구석으로 가. 그리고 할머니 혼자서 나오도록 해. 나중에 모두 나오게 해줄
테니까."
연장자가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을 했다. 포로들은 시키는 대로했다. 보충병이 총을
겨눈 가운데 노파가 앞으로 나왔다. 그레버는 물을 열어 노파를 밖으로 끌어내고 다시
잠궜다. 노파가 통곡을 했다 노파는 총살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이 여자에게 말해. 다만 용변을 보게 하는 것뿐이라고."
그레버는 연장자에게 말했다.
연장자가 얼른 노파에게 말했다. 노파는 이내 조용해졌다. 그레버와 보충병은
저택의 한쪽으로 노파를 데리고 갔다. 노파가 그곳에서 나오자, 이번에는 젊은 여자를
밖으로 나오게 했다. 젊은 여자는 조심스럽게 행동을 했다.
남자들의 경우는 더욱 간단했다. 그는 그들을 창고 뒤로 끌고가서 한눈 팔지 않고
지켜 서 있었다. 젊은 보충병은 사투라도 벌이는 듯한 태세로 총을 겨누고 있었다.
그레버는 다시 문에 자물쇠를 단단히 채웠다.
"가슴이 두군거리던데요." 보충병이 말했다.
"그래?"
그레버는 총을 내려놓았다.
"돌아가도 좋다."
그는 보충병이 눈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이윽고 담배를 한
개비씩 나눠 필 수 있도록 노인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성냥불도 쇠창살 안으로 넣어
주었다. 포로들이 모두 담배를 피기 시작했다. 담뱃불이 어둠 속에서 빛나며 그들의
얼굴을 밝혀주고 있었다.
그레버는 젊은 여자가 눈에 띄자 엘리자베스가 못 견디게 보고 싶었다.
"당신, 참으로 좋은 사람."
노인이 그의 눈치를 살피면서 아주 천천히 말했다.
노인은 쇠창살에 얼굴을 맞대고 있었다.
"전쟁 졌다. 독일군 당신은 좋은 사람."
"바보 같은 소리 마라."
"상관없소 갑시다 우리들과 가겠소?"
주름투성이의 얼굴이 젊은 여자를 향했다가 다시 그레버에게로 돌아왔다.
"우리 함께 갑시다 그리고 숨어서 우리와 좋은 생활, 우리는 아무 죄
없어."
그 말은 매우 선명하게 전해졌다.
그레버는 그곳을 떠났다. 그들은 아무런 죄도 없을 것이다. 무기도 발견되지 않았고,
게릴라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만약에 그들을 풀어준다면 나는 무엇인가 보람있는 일을
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죄없는 인간을 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과 함께
달아날 수는 없다. 그쪽으로는 갈 수 없다. 언제나 탈출하고 싶다고 갈망하는 그만의
세계로 도달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는 샘터까지 거닐다가 다시 돌아왔다.
"가세요. 좋소 우리와 함께."
그레버는 담배와 성냥을 노인에게로 디밀었다.
"이거 피라고. 오늘밤은."
"삽시다 당신은 젊어. 그러면 당신은 전쟁, 끝입니다 당신, 좋은
사람 우린 죄가 없습니다."
그것은 비록 낮았지만 결의가 든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살아요' 하는 말을
암거래 상인이 '버터'하고 유혹하는 것 같았다. 매춘부가 '사랑'이라고 말하면서 절박한
심정으로 속이려는 것처럼. 마치 그것을 흥정이라도 하고 있는 듯이.
그레버는 그 소리에 차츰 이끌려가는 자기 자신을 느꼈다.
"닥쳐!" 그는 노인에게 호통을 쳤다.
"다시 한 번 그런 소리를 했다간 상부에 보고하겠다."
그는 주위를 순찰했다. 일선은 더욱 소란해지고 있었다. 첫번째 별이 나타났다.
갑자기 고독에 사로잡히면서 차라리 참호의 악취 속에서 전우들과 함께 자는 편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잠을 청하기 위해 정원의 작은 집에 짚을 깔았다. 잠이 든 사이에 포로들이
탈출을 시도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탈출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일선은 굉음으로 요란했다. 비행기가 요란스럽게 하늘을 날고 기관총이 콩 볶는
소리를 연달아서 냈다. 거기에 뒤섞여서 폭탄이 폭발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그레버는
귀를 기울였다. 그야말로 대전투가 벌어진 것 같았다. 만약에 놈들이 창고를 파괴하고
탈출한다면 그는 밖으로 나와 창고로 갔다. 포로들은 모두 잠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노인의 창백한 얼굴을 확인하고 나서 창고에서 벗어났다.
밤이 깊어졌다. 그는 일선에서 치열한 전투가 전개됐음을 알았다. 대포는 아군
진지를 훨씬 넘어서 포격하고 있었다. 이제는 마을에서 가까운 곳에서도 포탄이
터졌다. 그레버는 아군 진지가 얼마나 약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교전의 단계를
하나하나 분석해 볼 수도 있었다. 곧 전차대의 총공격이 시작될 것이다.
그레버는 깜짝 놀라 잠을 깼다. 포탄은 이미 마을 위를 통과하고 있었다. 그는
창고를 바라보았다. 쇠창살로 소련인들이 꿈틀꿈틀 움직이는 게 보였다. 멀리서
슈타인브레너가 달려오고 있었다.
"후퇴다!"
슈타인브레너가 고함을 질렀다.
"소련군이 방어선을 돌파했다. 전원 마을에 집합! 모두 소지품을 휴대하고."
그는 그레버에게로 달려왔다.
"저 안에 있는 놈들을 즉시 처치해야지."
그레버는 자신이 긴장하고 있음을 느꼈다.
"명령서는?"
"명령서?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냐! 넌 적군이 공격해 오는 소리도 안 들려?"
"들린다."
"그럼, 잘 알겠군. 놈들을 끌고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대로 처치하자구."
슈타인브레너의 눈이 파랗게 타오르고 있었다.
"안돼. 여기 책임자는 나야. 명령서가 없으면 어서 꺼져!"
슈타인브레너는 웃었다.
"알겠어. 그럼, 네가 놈들을 쏘아라."
"싫다!"
"너나 나, 한 사람은 놈들을 처치해야 돼. 함께 끌고 갈 수는 없어. 이 병신아, 빨리
하란 말야. 자, 나도 협력하지."
"안돼. 쏘지 마."
"안된다고?"
슈타인브레너는 눈을 치떠보았다.
"안돼?"
그는 천천히 되뇌었다.
"넌 네가 한 말을 알고 있나?"
"알고 있어."
슈타인브레너의 안색이 변했다. 슈타인브레너가 권총을 잡는 순간, 그레버는 총을
들고 그를 쏘았다. 슈타인브레너가 비틀거리다가 앞으로 쓰러졌다. 그는 아이처럼
한숨을 쉬었다. 그의 손에서 권총이 미끄러졌다.
그레버는 물끄러미 시체를 바라다보았다. 포탄이 정원 위를 통과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창고로 걸어갔다. 이윽고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활짝 열었다.
"가라!" 그레버는 말했다.
소련인들은 그를 웅시했다. 그들은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총을
떨어뜨렸다.
"가. 어서 나가란 말야!"
그는 손가락을 펴 보이면서 말했다.
젊은 남자가 조심스럽게 한 발자국 밖으로 내딛었다. 그레버는 그들에게 등을
돌리고 슈타인브레너가 쓰러져 있는 곳으로 왔다.
"살인자."
그는 말했다. 그러나 누구를 향한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슈타인브레너를
들여다보았지만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살인자!"
그는 다시 되풀이해서 말했다. 그것은 슈타인브레너와 자기 자신과 그밖에 전쟁을
일으키고 그 전쟁의 희생자가 된 숱한 사람들을 향한 병사의 절규였다.
그때 여러 가지 상념이 서로 충돌하기 시작했다. 그의 안에서 돌멩이가 하나
튀어나간 것 같았다. 무엇인가가 영구히 결정되고 말았다. 이미 아무런 실체도 느낄
수 없었다. 무슨 일이든지 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탈진한 몸이 허공으로
날아 오르지 않도록 꼭 붙들고 있어야 할 것만 같았다. 머리가 빙빙 돌았다. 그는
한걸음 한걸음 걷고 있었다. 그 무엇인가 중대한 일을 저질러야 한다!
그는 소련인들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젊은 여자를 앞세우고 한 덩어리가 되어
허겁지겁 달아나고 있었다. 젊은 사내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사내는 뜻밖에도 총을 들고 있었다. 그는 총을 치켜들고 겨누었다. 그레버는 검은
총구를 보고 있었는데, 그것이 차츰 확대되었다. 그는 크게 부르짖고 싶었다. 급히
소리를 질러야 할 것들이 무수히 많았다.
그레버는 총에 맞은 것을 느끼지 못했다.
다만 그의 시야에 잡초가 들어왔을 뿐이다. 밟혀서 짓이겨진 한 포기의 풀이 점점
키가 커지고 있었다. 그는 전에도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있었다. 그것이 언제였을까?
그는 도저히 기억해 낼 수 가 없었다. 마침내 풀이 무럭무럭 자라나 온 하늘을 가리게
되었다 그는 눈을 뜨지 않았다.
(작품 해설)
(E. M. 레마르크의 삶과 문학세계)
1. 생애와 작품
망명 작가인 레마르크(Erich Maria Remarque)는 1898 년, 독일의
오스나브뤼크에서 태어났다.
레마르크는 18세의 어린 나이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몇 차례나 사선을
넘었는데, 이때 체험한 전쟁의 참상이 후에 발표한 그의 소설에 잘 나타나고 있다.
그는 종전 후 한때 시골의 국민학교 교사로 재직한 적도 있으나 얼마 후
퇴직하였다. 그 동안의 경위는 그의 두번째 작품인 '귀로'의 주인공에게 투영되어
있다. 실의와 좌절에 빠진 나날을 보내던 레마르크는 몇몇 직업을 전전하다가 9
년간이나 무명의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1929 년 제1차 세계대전의
전장에서의 체험을 소재로 한 '서부전선 이상없다'를 발표, 기록적인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일거에 세계적인 작가로 발돋움했다. 이 책은 18개월 동안에 25개국어로 번역,
발행부수만도 350 만을 넘었다.
이것은 한 병사의 눈에 비친 전쟁의 갖가지 양상의 기록이고, 같은 입장에서 전후의
양상을 그린 것이 제2작이 되는 1931 년에 발표한 '귀로'이다. 두 작품이 모두
반전적인 감정이 노골로 드러나 있었기 때문에 그는 나치스의 박해를 받았다.
레마르크는 33 년 나치스가 정권을 잡자 스위스로 이주했다가, 39 년에 미국으로
망명해서 시민권을 얻었다. 나치스는 그의 작품에 판금 분서 처분을 내렸고, 아울러
그의 독일 시민권을 박탈하였다.
그후의 레마르크는 헤밍웨이를 비롯한 미국 작가의 영향도 받았는데, 망명해
있으면서도 그의 붓은 꺽일 줄을 모르고 잇따라 문제작을 발표했다.
제3국으로부터의 정치적 망명자의 비운을 그린 '너의 이웃을 사랑하라'를 낸 후,
파리를 무대로 한 '개선문'을 발표해 발행부수가 200 만이 넘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계속해서 망명가 소설 '생명의 불꽃'을 내놓는 등 전쟁을 모티브로 독자들에게
인간의 절망과 공포를 일깨우고 생명의 존엄성을 재확인시켰다.
그리하여 전쟁이란 괴물이 사랑도 앗아간 '사랑할 때와 죽을 때'를 1954 년에 출간,
세계적으로 명성을 더욱 다지면서 망명 작가 중에서도 가장 행복한 생애를 마쳤다.
일찍이 전쟁의 허무함을 뼈저리게 느낀 레마르크는 세계의 평화를 호소하면서 1970
년 72세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소설은 현대 인간의 운명을 흥미 깊은 줄거리 속에 시대적 비평과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알맞게 뒤섞어가며 효과있게 썼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것이 그의
처녀작 '서부전선 이상없다'에 이미 나타난 것을 생각한다면, 이 작가가 현대라는
시대에 대하여 얼마나 예민한 예술적 후각을 가지고 있었던가를 엿볼 수 있다.
2. '사랑할 때와 죽을 때'에 대하여
레마르크의 다른 소설과 마찬가지로 '사랑할 때와 죽을 때'도 전장에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해서 '전쟁에 의해서 파괴된 세대의 삶과 죽음'을 리얼하게 그리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소련의 대평원. 인류가 만들어낸 비극인
전쟁이 그 끝을 향해서 소용돌이치고 있을 때, 독일군은 적국의 전선에서 서서히
다가오는 패전의 그림자를 느끼고 있었다.
주인공 그레버는 전쟁터에서 2 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오지만 고향의 거리는 전쟁을
치르는 동안 황폐해질대로 황폐해져 있었다. 전쟁에 참전해서 그가 무수히 보아 온
것은 아무렇게나 버려진 시체와 죽음의 냄새였다. 그러나 고국에는 오히려 전선보다
더한 비정함이 감돌았던 것이다.
그가 간신히 찾아간 집은 폐허더미가 되어 있었고 양친은 행방불명이었으며, 늘
꿈꾸던 평화 대신에 불신과 억압. 기아와 도둑질이 난무했다.
짧은 휴가기간 동안에 소년시절의 친구 엘리자베스와의 재회와 사랑, 그리고
이별 주인공은 사랑하는 아내와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오자, 비로소 완전한
자유와 행복이란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그가 누렸던 일상의 삶 속에서 존재했음을
깨닫는다.
주인공 그레버는 소유는 상실이며 출발은 곧 귀환임을 스스로에게 확인시키면서,
그가 그토록 거부했던 그 전쟁 속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도 역시 전쟁의 희생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일선으로 돌아와보니 이미 많은 전우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그레버 자신도 죽음이 그의 가까이에 있음을 느낀다. 드디어 전선이 무너진 채
아무 명분도 없는 대전투가 벌어진다. 마침내 전쟁이란 괴물은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모두 집어삼키고 만다.
1954 년에 발표된 '사랑할 때와 죽을 때'는 인간성에 대한 신뢰와 불신이 조화되지
않는 갈등, 현실의 압도적인 부조리에 직면한 인간 속에 생겨나는 절망과 삶의 충동,
낡은 가치와 그 수호자들에 대한 젊은 세대들의 자포자기적인 분노가 특히 잘 나타나
있다.
비인간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인간성의 회복을 호소해 대중의 호응을 받은
이 작품은, 제2차 세계대전이 남긴 빼어난 전쟁소설로 지금도 많은 독자를 사로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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