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 한 남자를 만났다
제 1 장
어둠속의 운명
비까지 머금은 몬순 기후 탓으로 그 도시의 날씨는 무척 후텁지근하고
음산했다 물 먹은 담요처럼 무겁게 내려앉은 오후의 하늘은 사람들을 인
내의 최저 한계까지 끌어내리는 듯했다
캘커타 시
도시를 가로지르는 우글리 강이 마치 거대한 공룡의 느릿느릿한 발걸음
처럼 흐르고 있어,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지쳐 버
리게 만드는 것 같았다
브리짓트 템플우드 부인은 이 무더위 속에서도 언제나처럼 딱딱하게 굳
은 자세와 기계적인 동작으로 부엌일을 감독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흡
사 성스런 의식을 치르고 있는 성직자와도 같았다
그녀는 항상 그래왔다 비록 지금은 이역만리 타국에 와 있을지라도,
그녀는 여왕과 국가에 충성을 다짐하고 복종했던 영국 귀족여성으로서의
확고한 자부심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삶을 시종일관 지배하고 있는
왕실에 충성심과 귀족으로서의 체통과 품위야말로 그녀를 이 미개의 땅
인도에서 온전히 살게 하는 가장 큰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녀 바바리언의 시중을 받으며 죠수아 경卿의 저녁식사를 준
비하고 있던 브리짓트 부인은 갑자기 주방에 뛰어들며 비명에 가까운 소
리를 지르는 한 하녀의 음성에 깜짝 놀라, 그만 손에 들고 있던 기름 주
걱을 마룻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마님! 마님"
"도대체 무근 일이냐?"
"마님, 빨리요 빨리 나와 보세요!"
여전히 고함을 지르는 하녀의 갈색 얼굴은 놀라움에 질려 있었다
"미국에서 오신 아가씨가 말에서 떨어지셨어요!"
하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브리짓트 부인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버렸다 오, 하나님! 신음처럼 이 말만을 되풀이하는 그녀의 눈동자가 초
점을 잃은 채 떨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하인들의 뒤를 따라 무거운 발걸
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오 하나님, 제발! 생길 수 있는 최악의 사태까지
도 상상하면서 그녀가 부지런히 방갈로를 지나 정원에 이르렀을 때, 마침
도랑에 빠진 몸을 일으키고 있는 올리비아가 보였다 올리비아 옆에는 마
치 자기 잘못이 아닌 것을 변명이라도 하려는 듯 쟈스민이라는 이름의 말
이 고개를 흔들며 서 있었다
이런 사태에 직면하여 그녀의 기분을 더욱 거슬리게 하는 것은, 도대체
올리비아를 도와 주는 것인지 아니면 엉큼하게 손을 움켜잡고 있는 것인
지 모를 하인 아들녀석의 뻔뻔스러움이었다
올리비아가 무사하다는 안도감이 일순 분노로 바뀌자 그녀의 입술이 파
르르 떨렸다 아주 짧은 순간, 그녀의 눈에서 불빛이 일렁였다 그러나
그녀는 비록 올리비아가 큰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하인들 앞에서 결코 귀
족을 야단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상기하고는, 한참 동안
묵묵히 참고 기다렸다가 올리비아가 도랑에서 완전히 빠져 나오자 엄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올리비아, 다치지 않았니?"
그녀가 진흙투성이가 된 엉망의 모습에도 아랑곳없이 싱긋 웃으며 활달
하게 대꾸했다
"그저 제 자존심만 약간 상처받았을 뿐이에요, 이모님"
그녀가 쟈스민을 힐끗 돌아다보고는 치마에 묻은 진흙을 툭툭 털어내며
한 마디 더 덧붙였다
"정말 아차하는 순간이었어요 전 쟈스민이 장애물을 쉽게 넘을 수 있
으리라고 믿었거든요 빌어먹을!"
브리짓트 부인의 얼굴이 순간 더욱 창백해졌지만, 그보다 더 빠르게 이
어린 숙녀의 상스러운 넋두리를 무시하기로 결심한 듯 얼른 얼굴을 펴고
는 다시 한번 물었다
"걸을 수 있겠니?"
"무릎만 좀 다친 것 같은데"
올리비아가 불안정하게 발을 딛고 일어서며 자신의 상처 부위가 어디까
지인지 보기 위해 흠뻑 젖은 치맛자락을 걷어올렸다 그녀는 매사에 엄하
기로 소문이 난 이모가 살벌한 눈빛을 보내고 있는데도 조금도 거리낌없
이 치맛자락을 비틀어 짜기 시작했다
브리짓트 부인은 하인들의 시선을 전혀 개의치 않고 허옇게 다리를 드
러낸 채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있는 올리비아의 모습을 보며 놀라움을 지
나 전율을 느꼈다 하인들 중 그 누가 이렇게 백인 아가씨의 종아리를 직
접 본 일이 있을 것인가 그들의 시선이 벌써 번들거리며 올리비아의 몸
에 흐르고 있는 것 보며 그녀는 몸을 덜덜 떨었다
"올리비아, 어서 집안으로 들어가거라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해야겠구
나 난 일이 끝나는 대로 곧 네게로 가마"
브리짓트 부인이 말을 마치고 돌아서려 할 때,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
며 달려오는 에스텔의 금속성과도 같은 음성이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엄마! 무슨 일이에요?"
브리짓트의 설명을 들을 필요도 없이, 에스텔은 곧 사태를 알아차렸다
그녀는 엉망이 되어 버린 올리비아의 모습을 바라보며 허리를 꺾고 웃기
시작했다
"그것 봐, 언니! 내가 말했었지, 쟈스민은 결코 그 울타리를 넘을 수
없을 거라구"
너무 웃은 나머지 숨이 턱턱 막힐 정도였으나 에스텔은 멈추지 않고 계
속 이종사촌 언니 올리비아를 놀려댔다 올리비아는 에스텔의 야유에 싱
긋 웃기만 할 뿐 아무 대꾸도 없이 치맛자락을 내라곤 진흙이 묻은 손을
탁탁 털어냈다
"자, 됐어 에스텔, 그만해라 이제 언니를 데리고 이층으로 올라가 목
욕할 수 있게 도와 주거라 상처도 좀 돌봐 주고"
더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는 듯 브리짓트 부인은 하인들을 향해 큰 소
리로 뭔가를 지시하고는 올리비아가 에스텔을 따라 집안으로 향하는 걸
지켜본 후에 부엌 쪽으로 향했다
다행히도 올리비아의 상처는 경미한 것이었다 부엌일을 대충 마치고
올라온 브리짓트 이모는 올리비아를 향해 다짐을 하듯 한번 더 이 문제를
짚고 넘어갔다
"올리비아, 이런 뜨거운 오후에 말을 타러 나간 것 자체가 상식에 어긋
난 일이었다 더구나 에스코트해 주는 사람도 없이 혼자서는!"
붕대로 감겨진 다리와 핑크빛 도는 피부를 무명천으로 감싼 채 흐트러
진 갈색머리를 드러내고 있는 올리비아의 모습은 브리짓트 부인의 눈에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보였다 더구나 이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올리비
아가 불쑥 내뱉은 말은 그녀의 심사를 더욱 뒤틀리게 하였다
"이모님, 제가 말에서 떨어진 건 더운 날씨 탓이 아니라구요 그리고
저도 이젠 이 지역에 대해 알 만큼은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에스코트해 줄
사람이 필요하지도 않구요"
"올리비아, 그건 네가 몰라서 하는 소리다 이곳의 무더위는 네가 알고
있는 그런 열대의 날씨가 아니야 흰 피부를 가진 사람에겐 심한 피부병
을 일으키게 할 수도 있는 더위란 말이야 게다가 이곳에선 언제 어디서
든지 난폭한 원주민들과 부딪칠 수가 있어"
에스텔이 엄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조소를 머금으며 급히 입을 열
었다
"아빠는 늘 올리비아 언니가 아주 멋진 승마 자세를 갖고 있다고 칭찬
해 오셨어요 언니가 낙마를 한 건 날씨 탓이아니라"
브리짓트 부인의 성난 눈빛 때문에 에스텔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그녀는 에스텔을 향한 차가운 시선을 금세 엄한 눈빛으로 바꾸며 다시 한
번 올리비아에게 말했다
"올리비아, 명심해라 이곳 인도에서는 여자 혼자 다니는 게 정말 위험
하단다 이곳에서 백인 여성은, 특히 젊은 여성은 원주민들의 호기심의
대상이기 때문에 항시 행동에 조심해야 돼 그들이 언제 무례한 행동을
해올지 모르기 때문이야"
들마처럼 제멋대로인 조카에게 자신의 엄숙한 경고를 얼마나 더 되풀이
해야 하나를 생각하면 한숨이 절로 나오는 일이었으나 브리짓트 부인은
참을성 있게 이곳 인도에서의 조심스런 행동을 강조했다 올리비아는 침
대에 반쯤 누운 채 팔꿈치로 몸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이모의 굳은 얼굴
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모님, 이곳 주민들을 그렇게 편협된 눈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사실 이곳 주민들은 아주 친절한 사람들이에요 제가 이제까지
만나본 어떤 사람들보다도 그들은 제게 언제나 친절히 대해 주었고,
때론 달콤한 차까지 주었어요"
올리비아는 거리낌없이 이모의 일그러진 시선을 마주보며 한 마디 더
덧붙였다
"그 차는 아주 훌륭했어요!"
브리짓트 부인의 얼굴이 험악하게 변해갔다 그렇게 더러운 소작농들의
차를 얻어 마시다니! 불결하고 예의도 모르는 손을 거친 그 더러운 차를
그녀는 정말 화가 나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렇게 엉망으로 교육받았을까
영국에서 올바르게 양육되었더라면 적어도 이렇게 엉망이 되지는 않았을
텐데
그러다 브리짓트 부인의 분노는 점차 이 어린 숙녀가 불쌍하다는, 일종
의 동정과 연민으로 변해갔다 그녀는 올리비아의 손을 잡으며 짐짓 부드
러운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이곳의 생활이 다소 생소하고 이질적으로 느껴질 거다, 올리비아 더
구나 네가 자라온 환경의 관점에서 본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런 식민지
사회 속에서 우리는 좀더 방관자적인 입장이 되어야 하는 거란다 우리를
보다 더 우월하게 하는 것은, 그리고 그 모든 걸 지탱케 하는 힘은 바로
그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배타성에서 나오는 거야 내 말을 알아듣
겠니?"
"이모님, 그런 우월성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그들과 함께 어우러졌을
때 더욱 확고히 드러나는 게 아닐까요? 아빠도 제게 늘 그렇게 말씀하셨
어요"
브리짓트 부인의 표정이 더이상 이 아이 앞에서 부질없는 말들을 늘어
놓을 필요가 없겠다는 식으로 변해갔다 하지만 그녀는 올리비아를 설득
하기 위한 마지막 한 마디를 빼놓지 않았다
"너의 아빠는 이상주의자로구나 게다가, 너의 아빠는 한번도 이곳에
와 보지 않았어 이곳 인도가 이교도 국가인데다가 미신의 악취로 어지러
운 나라라는 걸 직접 보지 않고서는"
그녀는 갑자기 말을 끊고, 자신이 쓸데없는 토론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
에 내심 화를 내며 올리비아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사실 그녀는 어린 올
리비아가 자신의 생각을 꽤 논리적으로 전개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올리비아의 그런 습관 역시 여성다움이라는 면에
서 생각해 보면 합당한 태도가 아니라고 믿기에, 브리짓트 부인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며 긴 문장의 마침표를 찍듯 말을 했다
"아무튼 앞으로 다시는 혼자서 승마할 생각은 말아라 이건 명령이야!
나느 네게 무슨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해서 원주민들과의 최소한의 대화
만을 허락한다!"
브리짓트 부인은 말을 마치고 한동안 올리비아를 응시하다가, 옆에서
조소를 머금고 있는 외동딸 에스텔에게 매서운 시선을 보내곤 방을 나가
버렸다 올리비이가 에스텔에게 다소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얼른 말
했다
"에스텔, 나는 네가 필요 이상으로 내 문제에 끼어드는 걸 원치 않아
가끔 나는, 네가 꼭 내게 무슨 큰 문제가 일어났으면 하고 바라는 아이
같더라!"
"언니! 나는 단지 엄마의 그 획일적이고 지독한 교육방법에 대해 항의
하자는 것뿐이야 엄마의 그런 태도에 우리가 인내하고 따라야 할 의무는
없다구"
"그분은 우리를 괴롭히려고 그러시는 게 아니야 그분은 그저 자신의
생활 원칙을 갖고 계신 것뿐이야"
올리비아의 설명에 에스텔이 눈에 분노를 담고서 돌연 화살처럼 빠르게
대꾸했다
"원칙? 언니는 그저 그 원칙 아래서 일 년만 참으면 되지만 난 평생 동
안 거기에 매달려야만 된다구 난 엄마의 그런 원칙이야말로 말도 안 되
는 것이라고 생각해 난 열여덟 살이 되면, 그때는 정말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 그때가 되면"
에스텔은 이를 악물고 올리비아를 쏘아보다가 이마 앞으로 흘러내린 곱
슬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올리며 말을 이었다
"돌아가신 사라 이모는 언니를 항시 한 사람의 인간으로, 어른으로 대
해 주셨는데 왜 나의 엄마는 그러지 않는 것일까 자매 간에 어떻게 그렇
게 판이할 수가 있을까 심지어 나는 먹는 음식조차도 엄마의 허락을 받
아야만 된다니까"
"에스텔, 우리집의 환경은 많이 다르잖니? 더구나 넌 지금껏 잘 지내왔
잖니?"
올리비아는 에스텔의 사고思考 속에 자리잡고 있는 그 욕구불만의 응
어리가 터져 버려 더 큰 문제로 비화되기 전에 재빨리 이야기의 주제를
바꾸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에스텔, 배가 시간 안에 도착해야 할 텐데 걱정이구나 네 드레스를
그대로 그 배 안에 묵혀 둘 수는 없지 않겠니?"
에스텔의 안색이 금세 다른 모든 걸 잊어버린 것처럼 밝아졌다 에스텔
은 다음 달로 다가온 자신의 열여덟 번째 생일을 위해 그녀의 아빠이자
올리비아의 이모부인 죠수아 경이 외국에서 사오기로 한 드레스와 파티
준비에 관한 이야기를 한 옥타브 올라간 재잘거림으로 수다를 늘어 놓기
시작했다
올리비아는 눈을 감고서, 마치 에스텔의 수다에 떠밀려 들어가듯 자신
의 그 친숙한 사념思念의 대홍수 속으로 빠져 갔다
지난 60일! 이런 사막과도 같이 메마른 곳에서 유배와도 같은 나머지
삼백다섯 날을 보내야 한단 말인가 난 절대로 오지 말았어야 했어 아빠
의 설득에 그렇게 쉽게 넘어가는 게 아니었어 그녀는 울적한 심정이 되
어 인도 행을 결정했던 자신의 판단이 완전한 실수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친숙해지려 애를 써도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 척박한 미
개의 땅, 아무리 동정심을 가지고 대하려 해도 마음으로 완전히 그들을
이해할 수는 없으며, 아무리 애정을 가지고 보려 해도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그들의 삶의 방식들
올리비아는 에스텔의 끝도 없이 이어지는 수다를 한 귀로 흘리며 생각
의 바닷속을 그렇게 떠다녔다
그때 브리짓트 부인도 현관 앞에 심은 부겐빌리아 나무의 가지 자르기
를 감독하는 일조차 거르면서 사색에 잠겨 있었다
아래턱에 배어 있는 완고함과 딱딱함, 순진함으로 빛나는 담갈색의 두
눈동자, 눈부신 미소가 머무는 올리비아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녀는 이 모
든 것이 그애의 엄마 사라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 생각했다 게다가 그녀
조차도 인정하고 있는 아버지 샘의 머리를 올리비아가 갖고 있다고 믿었
다
그녀의 그 소심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올리비아는 분명 실용적이고 똑똑
하고 어떤 고귀한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샘의 무능력으로 사라가 죽었다
고 믿어온 그녀는 샘의 그러한 이기적인 급진주의가 지극히 귀족적이어야
할 올리비아를 망쳐 놓았다고 생각했다
이곳에서의 올리비아의 자유분방함이 어느새 에스텔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고, 그 결과로 모둔 게 굳이 올리비아의 잘못은 아니지만 에스텔이
점차 반항적으로 변해간다는 사실은 브리짓트 부인 자신을 무척 당황스럽
게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에스텔의 장래를 염려하며 에스텔이 적당한
남자를 만나 결혼하기 전에 올리비아를 이곳으로 데려온 것이 실수가 아
니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수백 번 가졌다
저녁식사 시간 오후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어느새 거센 폭우로 변해
마구 창을 두드려대고 있었다 에스텔이 식탁에 앉으며 엄마에게 말했다
"아빠는 또 늦으실 건가요?"
"아버지께서는 사무실에서 아더와 함께 식사를 하신다고 우리에게 먼저
먹으라고 하셨다"
"많이 늦으실 건가요?"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참, 오늘 제인 워킨스가 소식을 알려 왔
는데 내일 아침에 드레스 두 벌을 가져온다는구나 미리 얘기해 두는데,
난 부라카나스의 파티를 위해 드레스 말고는 특별한 의상을 더 해줄 마음
이 없다!"
페워디 남작의 초대로 벌어질 부라카나스 파티는 매년 캘커타에 거주하
는 영국인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만드는 축제로, 올해의 파티는 일주일 뒤
로 다가와 있었다 그들 모녀의 이야기가 파티 문제에 맞춰지자, 에스텔
의 입에서는 자연스럽게 지금 올리비아에게 매료되어 있는 프레디 버커스
트가 튀어나왔다
에스텔은 지금 그가 올리비아를 향한 상사병으로 멍청하게 변해 있다고
수다스럽게 떠벌려댔다 에스텔의 말에 브리짓트 부인은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버커스트 씨가 올리비아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는 건 잘된 일이야 참!
내가 마음이 바빠 잊고 있었구나 좀더 일찍 올리비아에게 말했어야 하는
데 프레디 버커스트 씨가 다음 주에 있을 파티에서 너를 에스코트해
도 되겠냐고 묻기에 내가 기쁜 마음으로 응낙했다 너도 거기에 불만은
없겠지?"
올리비아는 자신에게 홀딱 빠져 버렸다는 프레디를 생각하니 모든 게
짜증스럽게 여겨졌고, 이모의 이 같은 일방적인 승낙에 당황스럽고 화가
났다
"제가 꼭 그 파티에 가야만 하나요? 전 그런 파티에는 어린 소녀들이나
간다고 생각해요"
올리비아가 다소 무례하게 대꾸하자 브리짓트 부인은 마음속으로 또 화
가 났다 도대체 이 어린애는 무엇이 잘못된 거지? 아일랜드계 아버지의
거친 성격이 이 애를 이렇게도 무례하게 만들었나? 그래도 그녀는 꾹꾹
눌러 참으며 신중하게 말했다
"안 간다면 버커스트 씨가 실망할 거야 그렇게 생각지 않니?"
"올리비아 언니는 프레디라는 사람을 근본적으로 싫어해요 엄마는 그
걸 알아야 한다구요"
"난 대영제국을 위해 그토록 헌신적으로 이 미개한 식민지에서 견디어
내고 있는 젊은이를 거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올리비아는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대영제국은 그런 프레디 같은 자들
의 도움없이도 그 자체로 충분히 유지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에스텔과
함께 낄낄거렸다
"엄마, 걱정 좀 그만하세요 올리비아 언니는요, 엄마가 그렇게 짝지어
주려 애쓸 필요가 없어요 게다가 프레디가 이 지역에 있는 전도유망한
유일한 청년도 아니구요 이제 그만 좀 해요, 엄마!"
브리짓트 부인의 눈이 순식간에 커졌고, 그와 함께 납덩이 같은 침묵이
무섭게 공간을 내리눌렀다 올리비아는 이모를 위해 억지로 미소까지 지
으며 그 침묵을 깼다
"이모님, 기꺼이 버커스트 씨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어요"
"그의 친절이 어쨌든 그렇게나마 받아들여지는구나"
사촌의 비양거림에 한 대 치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올리비아는 브리짓
트 부인에게 탁자를 물러나겠다는 용서를 구하면서 베란다로 도망치듯이
나갔다
미친 듯 들려오는 바람 소리와 함께 번개가 하늘을 톱니 모양으로 찢어
놓고 있었고 폭우가 세상을 온통 삼킬 듯이 쏟아지고 있었다 정원의 아
카시아 나무가 격렬히 흔들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올리비아는 만약 이
캘커타에서 사랑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런 밤의 절망과도 같은
분위기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베란다의 좁은 의자에 몸을 기대앉은 그녀는 이 하늘과 땅과 물이 이루
어내는 조화가 자신에게 주는 평안을 맘껏 누렸다 지구를 반 바퀴나 돌
아서 그녀가 와 있는 이곳 언저리와 자신의 근본으로부터 그렇게 멀리 떨
어진 숱한 거리 속에서도, 이런 대자연의 변함없는 생명력은 그녀에게 고
향을 느끼게 했던 것이다
그렇다, 고향!
순간, 그녀는 노스탤지어에 빠져들며 그리움의 고통에 가슴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잠시 후, 그녀는 애써 고향에의 아픈 그리움을 떨쳐
내며 맹세했다 나는 울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난 울지 않을 것이다
9시 무렵, 계속되던 폭풍우가 잠잠해지며 부드러운 바람이 대자연을 감
싸기 시작했다 열대 지방의 기적과도 같은 이런 기후 변화가 올리비아는
무엇보다 좋게 느껴졌다
죠수아 경의 도착과 함께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되었다 하인들의 재빠
른 움직임, 브리짓트 부인의 감독 하에 저장실에서 이뤄지는 수많은 동작
들이 그러했으며 죠수아 경의 껄껄 웃는 소리와 에스텔의 시끄러운 재잘
거림이 집안을 가득 채운 게 그러했다 잠시 후 묵직한 발자국 소리와 함
께 죠수아 경이 올리비아에게로 다가왔다
"쟈스민이 오늘 너를 던져 버렸다며?"
"예"
올리비아는 벌써 이 사실을 고자질한 사촌에게 책망의 눈초리를 띄우며
죠수아 경의 가벼운 키스를 뺨에 받았다
"많이 다치지는 않았니?"
"다행스럽게도 그 도량이 물로 가득 차 있었거든요"
"다행이라구?"
죠수아 경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난 네 이모에게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당부했
다 그리고 너 역시 다시는 그런 위험한 짓을 해서는 안 된다 알겠지?"
그는 잠시 곁에 있는 에스텔에게 미소를 보내고는 올리비아에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
"우린 오늘 아침 사무실에서 재미있는 시간들을 보냈단다 만약 네가
원한다면, 너희 미국인들이 하는 것처럼 사무실에서 나와서 함께 해도 좋
다 난 그 점을 나름대로 귀중하게 여기고 있는 사람이니까"
에스텔이 팔에 매달리자 그는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그와 동시에 올리
비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런 제한된 식민지 사회의 좁은 범위 내에
서 자극을 받을 만한 일이 있다면 그건 바로 뉴욕이나 시카고에서처럼 복
잡하고 냉혈적인 상업의 세계이리라고 그녀는 생각해왔다 그녀는 이모부
로부터 이미 동인도 회사에 관한 많은 것을 배웠었다
죤 컴퍼니와 바하드 컴퍼니로 대표되는 동인도 회사는 왕의 조령, 혹은
왕족들에 의해 점령된 인도지역 내에서의 각종 무역에 막대한 이윤을 창
조하는 세계적인 무역회사로 인도 내 영국 기업의 요새라고 볼 수 있었
다
죠수아 경의 권유는 순식간에 올리비아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뿐만 아니
라 당장이라도 그 세계에로 뛰어들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에 들뜨게 만들
었다
그러나 이러한 올리비아의 관심은 죠수아 경을 기쁘게 하는 반면 이모
에게는 괴로움을 던져 주었다 저녁식사 후 브리짓트는 그들의 방에서 남
편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여보, 난 당신이 그 어린애에게 이윤이나 추구하는 사업에 대해 가르
쳐 주는 것을 원치 않아요 그애에게 사업적 재능이 다분하다고는 생각지
마세요"
"하지만 그 아이는 아주 비상해 그애가 원한다면 그냥 내버려 두자
구!"
"그애 머리가 그렇게 좋다면, 좋은 영국인 신랑감을 찾는 데 쓰도록 하
는 게 어때요? 그 아이는 이제 그렇게 어린 나이가 아니라구요! 결혼 적
령기가 넘어 버린 스물셋이나 되는 애를 어쩌려구 그러는 거죠?"
올리비아의 결혼 문제에 관해서 특별히 예비해 둔 다른 의견이 없었기
에 그는 잠시 주춤했으나 계속해서 늘어 놓는 아내의 수다에도 불구하고
올리비아의 사업적 재능을 키워 주겠노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거의 열 시가 다 된 시간에 올리비아는 하녀가 커피 쟁반을 들고 들어
가는 것을 따라 죠수아 경의 방으로 들어갔다 죠수아 경과 회사의 부하
직원이자 오랜 심복인 아더 랜섬이 함께 브랜디를 마시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차茶 조약에 관한 문제들이 거론되면서 시작되는 열띤
논쟁과 차 수송에 석탄을 사용할 수 있는가에 대한 여부를 검토하는 대화
속에 올리비아는 곧 빠져들었다
화려함과 잔인함이 간간이 드러나는 죠수아 경의 언변과 정확하면서도
다소 조심스러운 성격의 랜섬은 계속해서 차를 수입하는 문제와 석탄을
이용한 쾌속선의 이용 가능 여부를 토론하고 있었다
그 속에 간간이 들려지는 '카라 칸타'라는 이름에 올리비아는 주목하다
가 그다지 좋게 말해지지 않는 그 사람에 대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그
들의 토론 속에 끼어들었다
"이제껏 두 분의 대화 속에 등장한 '카라 칸타'란 사람이 누구죠?"
두 사람은 놀랐다 그들은 올리비아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조차 잊고
있었던 듯했다 아무도 선뜻 그녀의 물음에 답을 주지 않다가 잠시 후 죠
수아 경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저 사업 경쟁자일 뿐이다! 그다지 중요한 사람은 아니야!"
죠수아 경의 무뚝뚝한 대답을 대신해 아더 랜섬이 서둘러 공손하게 대
답했다
"카라 칸타는 아주 무례한 악당 같은 놈이죠 캘커타에는 그런 되먹지
못한 작자들이 종종 있으니까"
조금 전 그들의 대화 속에서 느낄 수 있었던 카라 칸타에 대한 증오와
도 같은 느낌을 뒤로 하고, 올리비아는 방을 나섰다 등을 돌려 문을 닫
으려는 순간 눈에 들어오는 죠수아 경의 악의에 찬 증오의 표정으로 인해
올리비아는 얼어붙은 듯 한동안 그곳에 서 있었다
무서운 감정의 폭발 그저 잠깐이면 지나갈 그런 폭발이었지만 거
기에는 올리비아가 상상하기 어려운 추악한 면이 있는 것 같았다
"크로케 경기를 좋아하나요?"
프레디 버커스트가 그녀에게 물었다
"크로케? 글쎄요, 전 한번도 그걸 해 본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요"
프레디는 그 툭 튀어나온 눈으로 올리비아를 잠시 응시하더니 크게 소
리내어 웃기 시작했다
"당신은 정말 색다른 유머 감각을 지니셨군요 모든 미국인들이 당신처
럼 그렇게 재치가 뛰어난가요?"
"글쎄요 모든 미국인을 다 만나 보지 못해 정확히 대답해 드릴 수가
없군요"
그녀는 냉정히 대답했다 그녀가 부라카나스의 파티에 응해 프레디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이곳에 온 후 그는 줄곧 그녀를 홀로 내버려 두지 않
았다 그녀는 이 복잡한 파티장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도망칠 수 있는
어떤 통로도 없는 듯했다 한 젊은이의 추근거림을 피해 달아난 에스텔조
차 없는 파티장 안에는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올리비아는 자포
자기한 심경으로 손님들 사이를 돌며 하는 짧은 대화조차도 고행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의 무의미하고 일상적인 대화에 질려 있던 올리비아는 프레디가
잠깐 없는 틈을 타 베란다 쪽으로 재빠르게 나갔다 그 베란다는 정원 뒤
쪽과 길게 연결되어 있었다
정원은 황량했다 어둠 저편으로 벽이 제방처럼 높게 쌓여져 있었고,
정교하게 단장된 철대문은 굳게 잠겨져 있었다 올리비아는 자신의 스커
트 자락을 잡아올리며 다른 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늦은 시간이었으므
로 정원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렇게 혼자 될 수 있음에 절대적인 감사를 느끼며 올리비아는 찬 공기
를 힘껏 들이마셨다 칠흑 같은 밤하늘에 가득한 별무리는 그 밤을 유난
히 밝게 비치고 있는 둥근달과 함께 대자연의 순수함을 맘껏 토해내고 있
었다
은은한 달빛을 받으며 올리비아는 강쪽으로 걸어가 샌들을 벗고 앉았
다 항상 그래왔듯이 올리비아는 밤의 고독이 주는 자유와 평안에 빠져
무한한 해방감에 도취되었다 기억을 비집고 들어오는 비오는 날 밤의 아
빠와의 대화가 10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되살아났고, 그 아련한 추억에 의
해 그녀는 다시 대지의 경이로움과 그리운 사람들에 대한 간절한 보고픔
을 느꼈다
갑자기 그녀는 자기연민에 빠져들었다 수의처럼 뒤덮는 자기연민의 절
망감 속에서 그녀는 무릎에 얼굴을 묻고 스스로 맹세한 서약을 깼다 그
녀는 울고 있었다 얼마를 그렇게 울었을까? 눈물이 거의 다 마를 즈음
그녀는 한결 나아진 기분을 느낌과 동시에 이 어둠 속에서 혼자가 아닌
것 같은 두려움에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 자신을 강렬한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는 느낌 속에, 예민한 반응
을 보이고 있는 그녀의 시선에 숲속의 흔들림이 들어왔다 그녀는 본능처
럼 반사적 행동으로 손을 주머니 쪽으로 가져가 소형 권총의 존재를 확인
했다 도대체 누구인가? 무엇이 목적인가? 그녀는 벌어질 수 있는 곤란한
일을 피하기 위해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지 마세요 난 그저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지켜봤을 뿐입니
다"
교양 있는 영어의 구사를 듣고 다소 안도감을 느끼던 올리비아는 그의
다음 물음으로 인해 정신이 굳어져옴을 느꼈다
"왜 울고 계십니까?"
그럼 내가 우는 모습을 다 지켜보았단 말인가? 그녀는 마치 혼자만의
비밀을 들켜 버린 것 같아 화가 났다
"제가 너무 감정에 치우쳐 실수를 했군요 전 저 혼자인 줄 알았어요"
그녀가 단호한 목소리로 대꾸하자 그가 천천히 아래쪽으로 걸어 내려오
며 말을 했다
"우린 모두 혼자인 셈이죠 우리가 어떻게 세상에 나왔고, 또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 모든 문제들을 홀로 해결해 나가야 하는 거니까요"
의미 있는 한 마디였지만 올리비아는 화가 나고 당황해 있었기 때문에
그의 말을 무시했다 이 사람도 파티장으로부터 도망나온 또 한 사람의
도망자인가?
"전 누군가 날 몰래 훔쳐보는 따위의 일을 하는 건 좋아하지 않아요!"
"만약 나 때문에 기분이 상했다면 정말 사과를 드립니다 맹세코 고의
로 당신을 훔쳐본 것은 아닙니다 맹세코 난 내가 고독을 느낄 때는
밤에 개와 함께 이곳에 가끔 산책을 나오거든요"
올리비아는 먼 곳에서 들려오는 개짖는 소리와 함께 그가 다소 강조하
고 있는 고독이란 낱말도 놓치지 않았다
"사과하실 필요까지는 없어요 당신은 저를 잘 모르니까요 저의 고독
은 저 자신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일 뿐, 당신의 존재가 어떤 훼방이 된 건
아니니까요"
그의 조용함과 정중함 때문에 그에게 느꼈던 올리비아의 불쾌감은 어느
새 호기심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그가 큰
키에 이런 파티에 잘 어울리는 의상을 입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파티장에 오신 건가요?"
그가 다소 냉소적으로 들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캘커타는 참 이상한 곳이죠 그 규모나 상업적, 정치적 중요성으로는
수도로서 부족함이 없는데 사회적인 면에서는 시골 마을과 같거든요 이
런 시골 마을 같은 곳에서는 의미가 있건 없건 간에 모든 사람이 함께 어
울려야 하는 단순함이 있죠"
어떤 개운치 않은 느낌이 섞인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완전히 부정
할 수도 없었기에 그녀는 그저 약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단언
하듯 한 마디 더 덧붙였다
"난 이런 점이 폐쇄된 공동사회와 같다는 생각을 늘 하죠"
그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허탈하게 웃었지만, 그녀는 그가 갖고 있는
감정을 거의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밝힐 필요를 못 느끼
는 것인지 자신을 소개하려고 하지 않았고, 그녀가 누구인지 알려고 애쓰
는 것 같지도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올리비아는 자리가 불편해짐을 느꼈다, 그의 과묵함과
유난스런 정중함이 그녀에게 어색한 느낌을 안겨 주었기에 그녀는 곧 자
리를 떠나기 위해 일어섰다 그러다 정적을 깨뜨리며 들려오는 개짖는 소
리에 그녀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얼어붙듯 그 자리에 발을 붙이고 섰다
"무서워하지 마세요 먼저 해치지 않는 한 사람을 해치지는 않으니까
요"
그 남자는 그녀를 조용히 안심시켰다 잘 길들여진 개는 주인의 낮은
휘파람소리를 따라 그녀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올리비아는 덜덜 떨리는
가슴을 간신히 진정하고는 겨우 말했다
"당신은 어둠 속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것부터 시작해서 계속 날 놀라고
당황하게만 하는군요"
"내가 그렇게 당신을 놀라게 했다면, 당신은 내게 소형 권총의 방아쇠
를 당기는 것으로 인사말을 대신할 생각이셨나요?"
그녀는 깜짝 놀라서 자리에 다시 앉았다
"제게 소형 권총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죠?"
"지각 있는 미국여성들은 이런 불안정한 환경에서 거의 그렇지 않습니
까?"
그가 다시 웃었다 올리비아가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물었다
"제가 미국인인 것은 또 어떻게 아시죠?"
그가 좀더 편안하게 다리를 쭉 뻗으며 말했다
"캘커타는 일개 마을이고, 헛소문이 아주 많은 곳이기 때문이죠 그리
고 지각 있는 백인여성은 군계일학처럼 항상 돋보이는 법이구요"
올리비아는 그저 인사말처럼 들리는 그의 말속에, 대화가 불편하게도
개인적인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지금이 떠나기에 가장 적
당한 시간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그녀가 일어서자마자 개가 다시 또 으
르렁거렸기에 그녀는 재빨리 다시 앉으며 날카롭게 말했다
"당신의 이 보호자에게 내가 갈 수 있도록 비켜달라고 지시해 줄 수 없
나요?"
그는 개를 부르는 대신, 좀더 편안한 자세가 되어 말했다
"한두 사람을 제외한, 그 누구도 없어진 당신을 찾고 있지 않아요, 지
금 난 그걸 알고 있죠 그리고 당신은 그 한두 사람을 피하기 위해
여기에 혼자 있었던 거구요 지금 당신이 급히 돌아가려는 것은 당신의
의사와는 아무 상관없이 당신을 이리로 끌고온 그들에게 패배를 인정하는
게 아닐까요?"
그가 빈정거리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올리비아는 그의 지적이 매우 날
카롭다는 사실에 경이에 가까운 충격을 받았다 이모와 프레디는 아마 자
신을 찾고 있을 것이다 그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몸을 맡기다 우연히 부딪친 이 익명의 사람이 뭔가 부정할 수 없는 힘으
로 자신을 사로잡고 있다는 느낌으로 그녀는 불안해졌다 그녀는 머뭇거
리며 다소 신중한 태도로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제 이름을 알고 있죠?"
"물론"
"어떻게 저를 알고 있죠?"
"그저 사회적인 한 단면만을 알 뿐이죠 엄격히 말해서, 그 누구도 진
정으로 어느 누구에 대해 알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거죠"
"대단히 형이상학적인 대답이군요"
그녀는 비웃음을 날리며 말을 이었다
"아니면 매우 정확한 얼버무림이거나 당신은 철학자와 사기꾼 중 어느
쪽이시죠?"
그는 머리를 뒤로 제치면서 무엇인가 정말 유쾌한 듯 웃었다 올리비아
역시 웃음을 참지 못하고 그와 함께 웃었다
"당신은 종종 나조차도 나 자신에 대해 궁금해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 같군요! 어느 다른 한 사람이 될 수 없이는 또 다른 어떤 사람
을 경험하기는 어려운 일이라 생각해요 지금은 내가 그저 철학자와 사기
꾼 둘 다에 속해 있다고 말해 두죠 상황에 따라 변화될 소지가 가득한
"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는 비참할 정도로 냉소적인 기분이 드는군요"
"아마 냉소적인 인간이 되지 않고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어려울 걸
요"
그녀는 더욱 확고하게 말을 했다
"또 전 당신의 말에 시시한 싸구려의 느낌도 받았어요 제 아버지께서
는 세상에 대한 냉소는 겁쟁이들이 자신을 숨기는 편리한 방편이라고 말
씀하셨어요"
"당신의 아버지는 행동없이 말만 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셨을 겁니
다"
올리비아는 이렇듯 거리낌없이 말하는 익명의 남자에 의해 또 한번 놀
랐다
"당신이 저의 아버지를 알고 계신가요? 어떻게"
그가 잠시 머뭇거리다 재빨리 얼버무렸다
"전 그분의 저서를 좀 읽었습니다"
"어디서요? 인도에선가요?"
"샌프란시스코에서죠 그분은 석탄광을 따라 일을 하는 광산 노동자의
입장에서 글을 쓰셨더군요 그분의 진실된 감정과 그 깊이가 나를 매우
감동시켰죠"
"당신은 미국에 대한 일차적인 지식들을 갖고 계셨군요"
그녀는 갑자기 너무나도 고향이 그리워져서 무의식적으로 그에게 따뜻
해졌다
"당신은 미국에서 살았었나요?"
"예"
그는 갑자기 일어서서 돌을 들어 강가에 던졌다 이런 미묘한 그의 행
동은 이제 그 화제를 끝내겠다는 것을 시사하는 듯했다
"아버지와의 헤어짐이 당신을 그토록 불행하게 했나요?"
"전 그저 아버지가 보고 싶을 뿐 제가 불행하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그녀의 목소리 톤이 날카로워졌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고 또다른 물음을
던졌다
"그분은 아직도 신문기자와 같은 활동적인 일을 하고 계신가요?"
다소 건방진 뜻밖의 말이었지만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질문이었기에
올리비아는 정성을 다해 기꺼이 대답해 주었다
"아주 열정적으로 하고 계시죠 최근엔 하와이에서 태평양 근처에서 일
어난 노동자 대학살에 대한 보도를 하고 계세요 그런 잔인한 학살을 금
지할 법을 제정할 것을 촉구하고 계시죠"
"그분은 그 희망없는 일을 가능하리라 믿고 매달리고 있는 건가요?"
"아버지는 그저 자신의 원칙을 믿고 계실 뿐이에요 저 역시 불가능한
일인 건 알지만 앉아 있기보다는 싸우는 게 옳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누
구나가 하려는 것이 아닐지라도"
"나와는 생각이 다르군요 난 이길 승산이 있는 싸움만을 하죠 이 세
상은 패자에게는 아주 냉정하니까요"
"자신이 항시 이긴다고 생각하나요?"
"물론 항상!"
"항상이라구요?"
그녀는 그의 그런 자신감에 소름이 끼쳤다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대단히 운이 좋은 사람이겠군요 아니면 자기망
상에 사로잡혀 있거나 그것도 아니면 둘 다이든지"
"난 행운 같은 것은 믿지 않아요 망상 역시 바보들이나 하는 것이구
요 나는 깨끗지 못한 많은 일들을 하고 있지만 나 자신을 바보라고 생각
지는 않아요"
그는 비웃음이 섞인 듯한 말을 늘어 놓고는 잠시 어두운 저쪽을 응시하
다가 문득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은 대단한 위트를 가졌어요, 올리비아 양 난 당신에 관한 많은
정보를 갖고 있죠"
나에 대한 정보?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기억을 더듬으며 오늘 이 남자를
만날 수 있었던 가능성을 찾아보았지만 헛수고였다
"나에 대한 어떤 정보들을 갖고 있다는 거죠?"
어듬 속에서 부시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그가 담뱃불을 붙이는
걸 지켜보았다 그녀는 짧은 순간 속에서 그의 핏기 없는 얼굴과 검은색
머리칼을 보았다 창백한 그 얼굴이 풍기는 일말의 고독감이 웬지 모르게
그녀에게 슬픔으로 느껴질 때, 그가 그녀의 물음에 대답하기 시작했다
"난 브리짓트 부인의 유일한 여동생이 당신의 어머니라는 것을 압니다
그분은 당신이 일곱 살 때 사내아이를 낳다가 돌아가셨죠 당신 부모님의
결혼은 브리짓트 부인 가족의 반대 때문에 아버지의 가족이 있는 놀포크
에서 이루어졌고, 일 년 후 뉴오렌스에서 당신은 태어났죠 그 사이 당신
의 아버지는 어떤 직업도 찾지 못했고 그 덕분에 생활은 대딘히 어려움을
당했죠 부인의 죽음과 함께 산산이 부서진 그는 당신을 캘리포니아 행
화물 열차에 태웠고, 자신은 새크라멘토에 도착해 마켄드릭이란 사람의
도움으로 지금 당신의 집을 지었죠 그 후 그분은 당신이 가축과 말을 기
르는 일을 할 동안 그곳에서 집필을 하셨죠"
올리비아는 너무 기가 막혀 입을 벌리고 그저 그를 응시할 뿐이었다
그는 얼굴을 하늘로 향한 후 뭔가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그외에 다른 것은 아! 그렇군요, 당신의 아버지는 당신에게 놀랄
만한 기회를 주셨어요 보수적 사고방식에 철저하게 물든 영국인 이모를
통해 당신에게 부자 영국인 신랑을 만나게 해주려는 생각, 바로 그것이
죠 내가 알고 있는 바로는, 그 가장 적절한 상대가 캘커타 내에서 가장
전도유망하고 친절한 청년인 프레디 버커스트라고 알고 있는데 내가
뭐 빼먹고 이야기한 것이 있나요?"
그는 궁리하듯 잠시 침묵했으나 곧 머리를 흔들며 미소를 지었다
"아니 전부를 얘기했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최소한 이 모든 것들은 내
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는 당신에 관한 정보의 전부일 뿐 분명 더 많은
무엇들이 존재하겠죠 마을의 헛소문들이 완전한 것들이 아니기에"
그의 긴 이야기를 듣고 올리비아는 자신이 마치 허공에 떠 있는 듯한
무기력함을 느꼈다 잠시 동안의 침묵 속에서 올리비아는 점점 마치 난폭
한 일을 당한 듯한 느낌이 되었기에, 그녀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너무
짧은 순간이었기에 그가 미처 개의 행동을 통제할 틈도 없었다 개가 이
빨을 드러내며 다시 공격의 자세를 보였다 그가 순간적으로 개의 목덜미
를 붙들며 성난 눈빛으로 말했다
"당신은 갑자기 일어서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오만은 허세를 부리기 위해선 때로 멍청한 이유가 되니까요"
놀라움과 분노가 뒤섞인 채로 그녀는 몸을 떨며 그에게 이를 악물며 말
했다
"그 사나운 동물에게 저를 이 자리에서 떠나가게 하라고 명령을 해주시
겠어요?"
"왜요? 제가 진실을 말하고 있기 때문인가요?"
"아니에요 당신이 너무 불쾌한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난 그저 당신을
우연히 만났던 사람으로 끝내고 싶어요"
그녀는 너무 화가 나서 제대로 발음조차 할 수 없었다
"아, 그런 소리를 듣다니 정말 유감이군요 난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
난 기분으로 당신과의 우연한 만남을 즐기기 시작했는데"
더이상 화를 낼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난 올리비아는 자신이 바보가 되
어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왜 저를 그토록 계속해서 무시하는 거죠? 당신은 그런 태도가 당신의
존재를 보다 낫게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요?"
그는 잠시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왜, 당신은 내가 당신을 그렇게 무시하고 모욕한다고 느끼는 거
죠?"
그의 대꾸에 올리비아는 잠시 혼란해 하다 불쑥 입을 열었다
"당신은 왜 그토록 비영국적인가요?"
"당신은 왜 내가 그렇다고 느끼는 거죠? 어떠한 점이 그런가요?"
"저는 당신에게 당신이 원주민 같지 않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에요 다만"
그녀는 갑자기 말문이 막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면 원주민은 어떻게 보여야 합니까?"
이 간단한 물음에도 그녀는 그가 대단히 분노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
다
"노예적이어야 합니까? 맹종해야 합니까? 백인 아가씨의 발밑에 겸손하
고 비굴하게 있어야 하는 사람들입니까?"
"아니에요 결코 그런 뜻이 아니에요"
올리비아는 그의 깊은 오해에 두려움을 느끼며, 개의 존재를 잊은 듯
발을 내딛었다 즉시 개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당신은 내가 그런 것을 의미한 게 아니라는 걸 아실 거예요!"
"내가 말하는 것은 이 나라에서는 마치 백합처럼 흰색에서부터 푸르고
검은색에 이르기까지 각색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거죠 그 안에 내 색
깔은 영국 계통의 흰색이 아니라는 거죠"
그는 숨을 내쉬며 얘기를 맺고는 개를 안심시켰다 잠시 후, 그는 개를
먼저 보낸 후 결심이나 한듯 입을 열었다
"내 안부를 죠수아 경과 브리짓트 부인에게 전해 주시겠습니까? 내 이
름은 자이 라벤던입니다"
그는 자르듯 자신을 밝힌 후 가벼운 인사와 함께 개의 뒤를 쫓아 빠른
동작으로 뛰어갔다 그의 뒷모습을 계속 응시하던 올리비아의 눈에 힐끗
뒤돌아보는 그의 모습이 들어왔다 투명한 달빛처럼 맑게 고정되어 있는
눈은 그녀에게 특별한 느낌을 주었다 선명하게 대비되는 그의 창백한 얼
굴과 숱많은 검은 머리는 그가 예사로운 사람이 아니라는 걸 느끼게 했
다 잠시 후, 올리비아는 그에게서 느껴지던 석연치 않은 감정을 떨치기
위해 스스로를 끌어 당기며 걸음을 정원 쪽으로 옮겼다
에스텔이 그녀를 잡으며 물었다
"어디 갔었어? 모든 사람들이 언니를 찾아 헤맸는데 엄마는 아주
제정신을 잃고 걱정하고 계셔"
"시끄럽게 굴지 마, 에스텔 난 그저 화장을 고치기 위해 잠시 나갔었
던 것뿐이니까"
"어디에서? 정원에서? 난 언니가 몰래 빠져나가는 것을 다 보았었다
구"
에스텔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 불쌍한 프레디를 내버려 두고 어디 갔다 왔지? 그의 사랑을 시험해
보고라도 싶었던 거야?"
"엉뚱한 소리 마! 난 그저 신선한 공기를 마시기 위해 산보를 좀 했을
뿐이야!"
"글쎄 언니가 어디 있었던지 간에 내가 언니라면 서둘렀을 거야
엄마의 평화를 깨고 싶지 않아서라도"
잘난 척이라도 하듯 그녀는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서 있는 한 남자 친
구의 팔에 안겨 왈츠를 추기 시작했다 올리비아는 브리짓트 부인에게 용
서를 구하는 한편, 언짢았던 이모의 기분을 맞추고, 또 자신이 비웠던 시
간의 보상을 위해 폴카 리듬에 몸을 맡겼다
자이 라벤던
강가에서 우연히 만났던 사람이라고 접어두기엔 너무나 특별난 점이 많
았다 그에겐 그를 지배하는 독특한 분위기가 있었다 자이 라벤던이란
특이한 이름! 앵글로색슨 계통의 이름도 아니고 또 인도 사람의 이름도
아니었다
누가, 그리고 무엇이 그였던가? 유럽인으로 보기엔 그의 태도가 너무
야만적이며 자유주의가 너무 뿌리 깊었다 반면에 어떻게 인도 사람이 캘
커타와 같은 인종차별적 사회에서 백인 여성과 함께 뻔뻔스럽게 대화를
할 용기가 있을 수 있는가
아무튼 그녀가 생각하기에 자이 라벤던은 모든 면에서 이 지역에 부적
합했다 그녀는 파티를 끝내고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까지 그의 존재가 자
신의 생각을 어수선하게 흔들어 놓는다는 사실에 어지러움을 느꼈다
거의 늦은 밤이 되어 도착한 후 올리비아는 침실로 들어섰다가 갑자기
자이로부터 이모와 이모부에게로 전달되기를 요청받은 비밀 메시지가 생
각났다 그녀는 그의 안부 따위가 이모 부부에게 전해 주어야 할 만한 가
치가 있는 것인가의 의구심이 들었지만 결국 침실을 나와 이모부에게 말
을 전했다
"저 잊을 뻔한 말이 있어요, 이모부 제가 오늘 저녁 우연히 만난 사람
이 있는데, 그 사람이 이모부와 이모에게 안부를 전해 달라고 했어요"
"누군데?"
"자이 라벤던이라고 하던데요"
올리비아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마치 무언가 이상한 일에 홀린 듯 사람
들이 얼음조각처럼 얼어붙었다 램프로 가던 브리짓트 부인의 손이 멈춰
졌고, 걸음을 옮기던 죠수아 경의 다리가 마비된 듯 공중에 떠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서 뭔가에 관해 얘기하고 있던 에스텔도 입을 벌린 채 공
포스러운 듯한 표정이 되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올리비아는 잘 이해도 못하면서 각각의 사람들을
당황스런 눈빛으로 주시했다 그러나 그녀는 즉시 남은 얘기가 무엇이든
지 간에 자신의 목구멍 안에서 잊혀져야 된다는 판단을 했다
그 침묵은 아주 긴 시간 동안 눈에 띄는 긴장감으로 지속되었다 처음
움직인 사람은 브리짓트 부인이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멈추었던 팔을
떨어뜨렸다 그리곤 아무 말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내가 뭐라고 했길래 그러지, 에스텔? 내가 한 말 중에 잘못된 것이 도
대체 뭐지?"
브리짓트 부인이 몇 개의 알약을 먹고 침실로 돌아가고 죠수아 경 역시
경직된 얼굴로 할 말을 잃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흐르는 부자유스러운
침묵은 올리비아에게는 참기 힘든 괴로움이 되었다 에스텔이 그들 뒤에
있는 문을 살그머니 닫으며 말했다
"언니는 그 이름을 언급하지 말았어야 해! 그건 이 집안에서는 결코 용
납될 수 없는 일이야!"
"왜? 그가 도대체 뭘 어떻게 했길래 그러는 거야?"
올리비아는 계속 이유를 몰라하며 질문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나 역시 특별한 이유는 몰라 아무도 내게 이야기해 주지 않으니까
내가 아는 건 단지 모두 그를 싫어한다는 거야"
"그럼 무슨 이유가 있어야 하잖아!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고 따돌릴 만
한 못된 짓을 한 거야? 무슨 사업과 관계 있는 거야?"
"아마도 사람들은 그가 부도덕하고 파렴치하다고들 그래 출신 성
분이나 배경도 아주 나쁘고 게다가 그 역시 우리를 싫어해"
"우리를?"
"영국인들은 그가 우리를 인도에서 내쫓을 계획을 꾸미고 있다고 해
그는 제정신이 아닌가봐, 아마"
"그 사람이 영국인이 아니라서 그러는 거야?"
"꼭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그가 영국인이었다면 우리에게 어쩌면
좋은 이미지를 줬을 거야 그는 혼혈아야"
에스텔이 갑자기 목소리를 더욱 낮추며 물었다
"그와 무슨 얘기를 했어? 재미있는 일이라도 벌어진 거야?"
올리비아는 그런 사촌의 흥미를 무시하며 말했다
"정말 이해가 안 가 그의 주변 환경과 배경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
서 그가 뭘 어떻게 했다고 그러는 거지?"
"그의 배경을 확실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없어 심지어 캘커타의 모든
일을 알고 있는 드라몬드 부인조차도 그는 아빠처럼 혼자 사업에 관계하
고 있고, 그 누구보다도 좋은 운송 수단을 갖고 있어 그 점 역시 다른
사람이 그를 싫어하는 이유 중의 하나야"
"또 다른 이유는?"
"드라몬드 부인이 그러는데 그는 자신이 홍차를 야산에서 직접 재배한
대 언니도 알다시피 우리의 홍차는 중국에서 들여와 영국으로 보내야 하
는데, 그는 자신의 홍차를 직접 미국으로 보낸단 말이야 그게 바로 모든
사람의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거야"
에스텔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몰랐지만 분명한 것은 아직까지 아무
도 인도에서 홍차를 재배해 성공적으로 어떤 장소로 보내지 못했다는 것
이다 순간 그녀의 기억 속에서 무언가 떠올랐다
"카라 뭐라고 하더라?"
"맞아! 카라 칸타야 바로 자이 라벤던의 별명이야 그 사람이 언니에
게 그걸 말해 줬어?"
"아니야 이모부님과 랜섬이 지난 번에 그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들었
을 뿐이야 카라 칸타가 힌두계통의 사람임을 의미하는 거야?"
"응, 카라는 검다는 뜻이고 칸타는 바늘을 의미해 그는 갈가마귀처럼
검고 바늘같이 표독스러워"
"나도 그가 악한이고 모두들 대체로 그를 싫어한다는 것은 알겠어 하
지만 이모가 왜 그의 이름만으로도 그토록 놀라는지 잘 모르겠어 넌 알
고 있니?"
에스텔은 잠시 주저했다
"엄마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영국인들이 아무리 그를 싫어해도 사업적으로 그와 연관되어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잖아"
"그건 그렇지! 그가 부리는 일꾼들은 부지런하고, 그들 모두 그를 존경
해"
"그가 그렇게 사업상의 동반자라면 왜 오늘과 같은 파티에 모습을 보이
지 않은 거지? 분명 초대했을 텐데"
"초대라고? 그는 영국인들 사이에서 결코 무시될 수 없는 사람으로 간
주되긴 해 하지만 모두 그에 대해 기대를 갖거나 파티를 베풀지는 않아
폴리가 그러는데, 그는 지금 인디아 여자와 살고 있고 그 여자가 안주인
이래 게다가 지난 번엔 어떤 낯선 여자가 찾아왔는데 열흘 동안이나 그
와 함께 있었대, 글쎄"
올리비아는 그녀가 떠벌리는 이야기의 홍수에 제압된 듯했다
"이제 언니가 그 이름을 이 집에서 들먹일 수 없는 것이 이해가 돼?"
"넌 그에 대해 많이 알고 있구나"
"난 그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을 되풀이해서 말한 것뿐이야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들인 걸 나 혼자만 특별히 알고 있는 일들은 아니야
그런데 언니는 그에 대해 웬 호기심이 그렇게 많지?"
"난 그저 확실히 알고 싶은 거지 별 호기심은 없어 난 단지 내가 왜
그렇게 이모님을 괴롭게 했는지가 궁금했을 뿐이야 난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내가 언니라면 모든 것을 잊을 거야 엄마는 어쨌든 속을 알기 어려운
사람이니까"
에스텔이 하품을 하며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내 생각에는 언니가 다시는 그를 만날 것 같지 않은데, 그렇지 않아?"
"글쎄 그를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구나"
설명하기 힘든 조그만 후회와 아픔이 밀려왔다 잠들 무렵, 앞으로를
생각해서라도 이모에게 어떤 사과의 뜻을 전해야겠다고 올리비아는 결심
했다
이튿날 아침, 평소와는 달리 일찍 죠수아 경이 직장에 간 후 침실에서
혼자 차를 마시고 있는 브리짓트 부인을 발견한 올리비아는 곧바로 사과
를 했다
"저, 어젯밤 일을 사과드려요, 제가 어떤 식으로든 이모님의 마음을 아
프게 했다면 죄송해요 그건 절대로 고의가 아니었어요"
브리짓트 부인은 차를 든 손을 떨며 올리비아의 시선을 피했다
"나도 네 마음을 알아, 네가 잘못한 것도 없고 하지만, 이모부님
이 너에게 나중에 하실 말씀이 있을 거다"
그 말을 끝으로 납덩이 같은 침묵이 흘렀고, 그 이상의 어떤 말도 오가
지 않았다
올리비아는 고향과 호놀루루로부터 올 우편물을 기다리는 것으로 참기
힘든 향수병을 달래고, 또 그들에게 편지를 쓰는 것으로 위로 삼던 일이
그날 하루 종일 제대로 되고 있지 않음을 느꼈다 그녀의 생각은 자이 라
벤던 주변에서 떠돌고 있었으며 그 생각의 대부분은 그의 실제적 모습이
라기보다는 그의 주위에서 흐르던 보이지 않는 어떤 불투명한 분위기였
다
순간적으로 보여졌던, 그의 거만함 속에 숨은 적개심이 올리비아를 혼
란스럽게 했었다 그 점이 그와 함께 있을 때 그녀를 불편하게 했다 그
녀는 자이 라벤던이 자신을 이토록 당혹스럽게 하는 이유가 미국에 있을
때 남자와 접해 본 경험이 별로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긴 하루를 보
냈다
저녁식사를 하면서 웬지 평소와 다른 분위기가 흐를 때부터 예측했던
죠수아 경의 설교가 드디어 시작되었다 평소와 같이 사업서류들로 뒤덮
인 마호가니 책상에 편한 옷차림으로 앉아 있는 이모부는 사적인 대화를
위한 모습이었지만 그의 체격과 분위기는 커다란 책상과 더불어 그녀에게
중압감을 느끼게 했다 이모부는 유머와 위트가 섞인 이야기들을 서두로
하여 그들 사이에 흐르는 긴장을 풀어갔다 몇 가지 러시아인들에 대한
냉소가 있은 후 바로 담배에 불을 붙이며 이야기를 꺼냈다
"어젯밤 일에 대한 얘기인데, 올리비아"
"저 이모부님 그 일에 대해서라면 정말 죄송해요"
"그건 네 잘못이 아니다!"
후회가 담긴 그녀의 말을 일소에 붙이며 그가 얼른 덧붙였다
"넌 그저 순진한 생각 그대로를 말했을 뿐이야 네가 어떻게 그 작자의
음흉한 속을 알 수 있었겠니?"
음흉하다구요? 그와의 몇 마디 대화 속에 그런 뜻이 내포될 수 있을까?
솟구치는 의문을 눌러 참으며 올리비아는 자신의 발언을 자제했다
"그놈은 악당에 난봉꾼이고 협잡꾼이다 그것도 일류급의! 그놈이 감히
너를 유혹하려 하다니"
"그는 절 유혹하지 않았어요 그저 우연스럽게 만났을 뿐인 걸요"
"그놈이 자기의 신분을 잊고 너에게 말을 걸었다는 그 자체가 나쁜 거
야! 그놈은 권모술수에 능한 녀석이야 기회만 있으면 무슨 수단이라도
다 동원할 악당이야! 그래, 그놈이 너에게 예의바르게 행동했느냐?"
올리비아는 비웃는 듯한 이상한 질문에 나름대로의 방어를 했다
"예, 완벽하게 그뿐이었지 다른 아무것도 없었어요"
올리비아는 그와의 사이에 오간 가시돋힌 대화들을 발설하면 더 많은
문제를 가져올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아무 거리낌없이 거짓말을 했다
"그래 무슨 얘기들을 나눴니?"
죠수아가 겉으로는 우려의 표정이면서도 내심으로는 의혹이 넘치는 질
문을 던질 때, 올리비아는 당혹감을 감추며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했다
"저희는 그저 평범한 얘기들을 나눴어요 그 사람은 아버지가 미국 언
론계에 쓴 기사를 읽어 본 것 같았어요 우리는 대부분 그런 얘기를 했어
요"
그 말이 사실이건 아니건 죠수아는 긴장이 다소 풀리는 듯 안도의 한숨
을 쉬며 말했다
"그놈은 항상 신사인 체한단다 그런 점이 어제 너의 이모를 그토록 흥
분시킨 것이고 너도 잘 알다시피 이모는 도덕성과 근면을 인간의 가
장 고귀한 품성으로 여기고 있잖니 이런 면에서 그런 수준 낮은 깡패 같
은 놈이 실제로 너와 허물없이 한담을 나누었다는 것이 이모에게는 큰 충
격이었어 너도 이해하지?"
그가 미소를 지으며 올리비아를 지켜보다가 한 마디 더 덧붙였다
"물론 브리짓트가 정신을 잃은 것도 좀 지나친 것이긴 하지만, 우리가
그녀의 조그만 변덕이나 지나침을 받아 줘야 하지 않겠니?"
이모부가 솔직하고 명백하게 표현한 이모의 '변덕과 지나침'이란 말을
들으며 올리비아는 이모부가 지금 이모가 왜 그렇게 불쾌한 감정을 드러
냈는지에 대한 진정한 이유를 밝히지 않으려 함을 알아챘으나 다시 맞기
어려운 기회라 생각했기에 그 금기시된 이름을 무모하게 내뱉으며 굳어진
얼굴로 말했다
"그 사람 라벤던 그는 정확히 어떤 사람이고 또 무얼 하는 사람이
죠?"
"그는 차 사업을 하고 있다"
그의 퉁명스러운 대답 속에는 여전히 이유를 알 수 없는 증오가 서려
있었다
"중국에서요?"
"아니다 그는 직접 자신의 차를 재배하고 있어!"
이모부에게서 보여지는 불쾌감을 애써 외면한 채, 또 어떤 진실을 알고
싶은 생각에 올리비아는 계속 다그쳐 물었다
"그가 정말 그런 일을 하나요? 하지만 이모부님은 유럽계 경작인들이
심각한 노동 문제를 안고 있으며 중국산 차가 국내에서 재배되려면 적어
도 수 년은 더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는 토착 인도산 차나무를 재배하고 있어, 중국산이 아니라!"
"토착 인도산 차나무요? 전 차나무에 인도 원산지 것이 있는지 몰랐어
요"
"사실 인디아에도 수백 년 동안 토착 차나무가 있어 왔어, 하지만 지금
은 어디에도 없지 그게 바로 저번에 라벤던이 우리 대화의 주제로 나온
이유란다"
그의 입이 불쾌하다는 듯이 뒤틀렸다
"너의 이모가 바보스러우리만큼 감상적 행동을 보인 것에 대해서는 우
선 사과를 한다 분명 넌 놀란 모습이었으니까 우리가 너를 놀라게 한
것을 용서하고 이해해 주겠니?"
올리비아는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대로 복종했다
"자, 이제 우리 불쾌한 이야기는 그만 두는 게 어떨까?"
"예"
그녀는 자신의 절망감을 숨기며 기어드는 듯한 소리로 대답했다
갑자기 이모부가 온 얼굴에 미소를 띄며 물었다
"얘야, 얘기 좀 해보렴 우리와의 생활이 행복하니?"
"예 물론 행복해요! 그런데 왜 그런 걸 물으시죠?"
"가끔 네가 그렇지 않은 것 같아 보여서 하는 소리다 네가 원하는 만
큼 이곳의 생활이 만족스럽지 못할까봐 그런 거야"
"아버님이 그립고 보고 싶은 것을 빼면 모든 게 아주 만족스러워요 이
모부님이 이렇게 친절히 돌보아 주시는데 무슨 불편함이 있겠어요?"
그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네게 해주고 싶은 말은, 미국과는 여러 가지로 다른 이곳
에 네가 적응을 아주 잘해가고 있다는 거야 우리 가족 모두 감사한 마음
으로 너와 좋은 시간들을 보내고 있어 특히 에스텔에 대한 문제는
우린 그애를 너무 응석받이로 키웠어 늦게 본 자식이라 너무 애지중지했
나봐 이제는 그애를 다루는 게 쉽지가 않아 브리짓트나 나 모두가
하지만 아무튼 이제 잘되어 나갈 거야 그렇지?"
"에스텔은 겨우 열여덟 살이고 앞으로도 잘되어 갈 거예요 하지만 이
모부님과 이모님 모두 에스텔을 다루는 방법을 숙고해 보시는 게 어떨지
요? 에스텔은 지금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무척 독립적인 면을 보이고
있어요"
"독립적이라구?"
그가 놀라는 듯했다
"브리짓트는 그애가 벌써 많은 것을 혼자 처리하고 있다고 그러더군
"
그는 껄껄 웃었다
"그 아이는 확실히 엄마에게 어려운 시간들을 안겨 주고 있어 하지만
난 이해해 그게 바로 딸이 가진 특권이 아닐까?"
그는 대수롭지 않은 집안 문제라는 듯 손을 저으며 입을 열었다
"자, 한번 얘기해 보렴 버커스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그와 함께
있으면 즐겁니?"
"아뇨!"
올리비아는 즉각적이고도 단호한 음성으로 내뱉었다 이모부와 죠수아
경이 눈꼬리를 올리며 그녀를 응시하다가 희미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오, 얘야 이모가 그 얘길 들으면, 무척 실망하겠구나! 이모는 너희
둘이 잘되길 바라고 있어 너 역시 그 점을 모르는 바는 아닐 텐데"
"전 그 점이 미칠 듯이 부담스러워요"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문득 자이 라벤던을 떠올렸다 왜 그 순간 그가
떠올랐을까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죠수아가 웃으며 버커스트 집안의 재산과 배경을 칭찬하는 걸 들으며
올리비아는 신랄하게 대꾸하였다
"저는 버커스트에 대해 별 반감은 없어요 하지만 그의 재산이나 배경
좋은 집안은 저에게 아무런 호감을 주지 못해요 그는 이곳에서 아주 재
미있는 익살꾼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더군요"
죠수아는 머리를 뒤로 젖히며 크게 소리쳤다
"너희 미국인들은 참 솔직해 하지만 난 네 이모가 정신이라도 잃으면
어쩌나 하는 공포에서 벗어나고 싶구나 올리비아, 날 위해서라도 마음을
좀 편히 가져 주지 않겠니? 아무튼 난 너의 얘기에는 동의를 하니까"
그가 나오는 하품을 가리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이제 결론을 내려야 될
시간인 것 같다
"절 이렇게 도덕적으로 재무장시켜 주셔서 감사해요 제 얘기가 불쾌하
셨다면 용서하세요"
"그렇지는 않다 올리비아! 넌 참 좋은 아이야 버커스트와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내가 그러더라고 이모에게 전해 주렴 네 아버지가 널 별 문
제없이 키운 사실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겠다 네가 이렇듯 온순한 걸 보
면 자, 또 다른 문제는"
그는 얼굴을 심하게 찡그리며 발밑의 카펫을 쳐다보았다
"이제 할 말이 별로 없구나 라벤던, 그놈이 다시는 너의 길을 방해하
지는 못할 거다!"
그날 밤, 올리비아는 한동안 창문에 기대서서 부엉이의 울음 소리와 야
간 경비원의 호루라기 소리를 들었다 그런 후 책상으로 돌아와 아버지에
게 쓰던 편지를 마무리하고 일기를 썼다 편지와 일기, 모두에 그녀는 이
렇게 썼다
'지난 밤, 난 한 남자를 만났다'
그녀는 한동안 무엇을 더 추가해서 쓸 것인지를 생각한 끝에 망설임없
이 한 문장을 덧붙였다
'그를 다시 만나고 싶다'
에스텔 템블우드는 부모가 자식에 대한 희망을 거의 포기할 무렵인 결
혼 15년 만에 태어났다
그녀의 이름은 할머니로부터 하사받았고, 또 할머니의 많은 면을 물려
받았다 죠수아 이모부의 어머니는 미망인이 된 후 캘커타로 아들을 데려
와 죤 컴퍼니에 일자리를 얻게 했다 죠수아의 어머니는 죽을 때까지 독
재자처럼 가정을 이끌었고 며느리인 브리짓트 부인은 시어머니를 무서워
하면서도 존경했다
그 미망인의 죽음은 브리짓트 부인에게 안도의 한숨으로 찾아왔고, 그
러면서도 그녀가 시어머니를 존경했다는 사실은 죽은 여인의 초상화가 템
플우드 집의 식당 한쪽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
다 그 초상화에서 흘러나오는 엄한 눈초리는 그 가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조망하고 있는 듯해 보였고, 그것과 똑같은 눈빛이 성년식을 준비하
느라 바쁜 에스텔의 눈에도 자리잡고 있었다
하나하나의 작은 행사에도 부딪치는 모녀의 의견대립을 올리비아는 대
단한 인내심으로 중재했다 음식물 등 여러 가지 준비가 수백 명의 손님
을 위해 마련되었다 자신이 원하지도 않았고 또 감사를 받지도 못할 이
집안의 중재자 역할을 하면서 올리비아는 그저 이 큰 행사가 무사히 치뤄
지기만을 기도했다
그런데 에스텔의 성년식 축하파티가 열리는 동안 올리비아는 자신의 운
명의 방향을 바꿀 또 하나의 만남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매년 에스텔의 생일은 일촉즉발의 위기를 불러일으키는 몬순 기후의 태
풍이 있는 막바지에 치뤄졌다
화려하게 옷을 입고, 꽃으로 잘 장식된 잔디 위에서 흥분으로 상기된
얼굴이 된 에스텔은 누가 봐도 아름다운 한 사람의 숙녀였다 놀랄 정도
로 화려한 가문은 그녀에게 아주 잘 어울렸으며 부모에게 선물받은 값어
치를 알 수 없는 다이아몬드 머리 장식도 그녀를 화사하게 보이는데 한몫
했다 더구나 완전한 균형미를 갖춘 에스텔의 성인과 같은 인사, 키스,
악수 등의 태도는 올리비아를 퍽 놀라게 했다
그날 올리비아는 이모의 의지대로 허리를 꽉 죄는 화려한 옷에 굽높은
샌들을 신었는데 모든 것이 어색하기만 해서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
을 보며 스스로 놀라했다 그녀를 위해 이모가 빌려 준 에메랄드 목걸이
와 진주 귀걸이 등은 소박한 차림새에 익숙한 그녀에게 아주 생소한 우아
함을 자아냈다
올리비아는 그날 이모의 지시대로 하객들 사이를 오가며 짧은 대화와
즐거운 인사로 형식적 인사치레를 교묘히 처리해 나갔다 흥겨운 파티에
걸맞는 상류층의 농담과 한담 속에 짧은 웃음을 흘리는 올리비아의 팔을
에스텔이 끌어당겼다 나무 뒤쪽으로 올리비아를 데리고 간 에스텔이 다
급한 듯 눈을 번득이며 말했다
"저 언니 존에 관한 얘긴데, 그가 마구간에서 내게 키스를 했어
그게 당연한 걸까?"
"아니! 당연하다면 왜 마구간 같은 곳에서 키스를 하겠어?"
올리비아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말했다 바로 그때 죠수아 경이 나타났
다
"잠깐 시간 좀 내줄 수 있겠니, 얘야? 네가 보고 싶어할 것도 같은, 매
력이 넘쳐흐르는 사람이 하나 있어!"
그의 목소리에 이상한 긴장감이 있어 보였다 그녀는 갑자기 따분한 이
야기를 해야 하는 임무와는 달리 어떤 자극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에 차 재빨리 동의했다 그들은 정원의 한쪽 구석으로 걸어갔
다 저 멀리 강의 경치를 조망할 수 있게 배치된 자리에 40대 초반의 남
자가 하인 두 명의 호위를 받으며 앉아 있었다 그 사람은 일어서서 앞으
로 걸어나왔다
"오, 고귀하신 마하라자 영주님! 저의 조카딸 올리비아 오렌키입니다,
올리비아는 영주님이 동경하던 미국에서 최근 도착했습니다 올리비아,
인사드려라 킬티나갈의 마하라자 전하시다 이곳 인디아 사람들에게 가
장 존경을 받고 계신 왕가의 한 분이시다"
'마하라자'라는 이름은 손님 목록에 없었고 이모 역시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기에 올리비아는 잠시 긴장한 모습으로 말없이 서 있다가 당혹
감 속에서도 재빨리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고, 마하라자는 응대의 표시로
공손하게 웃으며 절을 했다
"당신을 알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미스 오렌키, 난 당신 나라에 대해
강한 호기심과 열정을 갖고 있어요 특히 그 특유의 용기와 근면에 대해
서"
"우리가 용기가 있어 보인다면 그건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영주님 하
지만 근면은 우리 스스로의 힘이라 생각해요 우리나라는 근면한 생활을
요구하고 있고 우린 정말 근면하게 열심히 생활하고 있어요 아직은 생활
이 불투명하니까"
그는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님은 가끔씩 완곡한 은총을 주시기도 하죠 좀더 나은 내일을 위
해 겪어야 할 오늘의 시련 같은 것이죠"
"그래요 영주님 말씀이 맞아요"
그들은 작은 웃음을 주고 받았다 그는 위압감을 주는 왕관과 왕가 복
장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상당히 비슷한 취향을 갖고 있어 보였다 올리비
아가 그에게 궁금한 듯 질문을 던졌다
"영주님, 아메리카에 대해 어떤 지식이 있으신가요?"
"슬프게도 없어요 아직 운나쁘게도 당신네 나라를 방문할 기회를 갖지
못했어요 하지만 난 이곳에서 수많은 미국인 방문객들을 만나고 있죠
또 미국의 신문을 보며 유쾌한 시간들을 갖고 있어요"
그는 뒤이어 다가올 미국의 선거에 대한 해박한 상식을 털어 놓았고 그
밖에도 미국 사회 저변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함으로써 올리비아를 놀라
게 하였다 두 사람은 제방 곁의 포장길을 따라 거닐기 시작했다 미국의
정치 풍토와 선거 일정에 관한 얘기들이 익어가면서 마하라자는 자연스럽
게 올리비아의 아버지에 관한 얘기를 했다
"내가 듣기로는 당신의 아버지가 매우 저명한 집필가라고 하던데 사실
인가요?"
"예, 맞아요 저희 이모부님이 그러시던가요?"
"아니오, 한 친구에게서 들었어요 캘커타는 무슨 일이든 누구에게나
쉽게 알려지는 고장이니까요"
올리비아는 숨을 가다듬었다그에게 말한 사람을 추측하기란 그리 어려
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 역시 발걸음을 멈추며 물었다
"제가 그 친구분이 누구인지 물어 봐도 될까요?"
"당신은 이미 그를 만나 본 적이 있어요 그 친구는 자이 라벤던입니
다"
그런 화제의 급변은 올리비아가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것이었기에 그만
한순간 중심을 잃을 뻔했다 라벤던이 정말 자신에 대해 마하라자에게 얘
기했단 말인가? 무엇을? 왜? 무엇때문에?
"아 그래요 만나 본 것 같군요"
그녀는 시선을 강으로 던지며 물었다
"영주님은 라벤던 씨를 아세요?"
그는 즉시 대답을 하지 않고 뭔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한참 후에 대답했
다
"자이 라벤던은 그 누구도 잘 모릅니다 아마 그 자신조차도 잘 모를
걸요 다만 내가 그를 알고 있다는 것은 그가 나를 알고 있다는 거죠"
그것은 그녀를 웃게 만들었다 언어의 형이상학 어쩌면 이렇게 그의
말투를 닮았을까
"라벤던 씨는 어느 누구도 어떤 사람을 진정으로 알 수는 없다고 말했
었지요"
"엄밀히 말하면 그의 말이 옳죠"
이 대화의 흐름은 몇 주 동안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그 사람에 대
해 알고 싶어하는 애타는 심정을 스스로 확인하는 계기를 주었고 그녀는
또 그런 자신의 태도에 놀랐다
"영주님께서는 그를 친구라 생각하시나요? 유럽의 사회에 만연한 그의
좋지 못한 평판에 대해서도 알고 계신가요?"
"물론! 하지만 그 평판이 그에게 나쁜 것만은 아니에요 그는 오히려
그 사실을 즐기고 있어요 그는 유럽인들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도 알고 있고, 실제로 그는 그런 평판을 만들려고 열심이에요 그런 자신
의 노력이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그에게 큰 만족을 주는 일이기도 하구
요"
"그건 왜죠? 세상 그 누가 자신이 모든 사람에게 무뢰한이나 악한으로
따돌림당하는 것을 즐기겠어요?"
"그 '왜'라는 것에 대한 대답은 오직 라벤던만이 할 수 있는 것이겠죠
그의 동기 역시 그 사람만큼이나 불투명하니까요"
"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저 역시 그게 가치 있는 일인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군요"
부관이 그에게 담배를 권하기 위해 그들 사이로 다가왔기 때문에 잠시
침묵했고, 그로 인해 중단된 둘 사이의 분위기는 대단히 미묘해졌다 마
하라자가 대화의 실을 풀어내기 전까지 그들은 한동안 말없이 거닐었다
"자이는 나와 가장 친한 친구예요 내가 그만큼 존경하는 친구도 없어
요 그건 그가 신들과도 싸울 수 있는 용기를 갖고 있기 때문이죠 하지
만 난 가끔 자이 라벤던이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그녀는 문득 예전에 이모부와 랜섬이 하던 말 중에 그를 미친 개라 불
렀던 게 떠올랐다
"제정신이 아니라고요?"
"어떤 면에서는 그렇죠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다른 많은 사람
들이 부질없는 어떤 강박관념과 망상에 사로잡혀 있듯이 자이 라벤던 역
시 마찬가지죠"
마하라자는 제방 위 맨땅에다 올리비아를 위한 자리를 마련해 주고는
자신은 그 반대편 쪽에 앉았다
"왜 그토록 그 사람에게 관심을 두는 거죠?"
올리비아는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갑자기 입안이 뒤말리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곧 마음의 평정을 찾으며 말했다
"그건 그와 만난 시간이 너무 짧았기 때문이에요 그를 만난 순간 뭔가
색다른 느낌을 받았거든요 전 라벤던 씨 같은 사람은 많이 만나 보질 못
했어요"
"많이요?"
그는 웃었다 그의 목소리 톤을 통해 올리비아는 자이 라벤던의 이야기
가 끝이 날 것이라는 추측을 했다 그녀 마음속에 담긴 숱한 의문과 질문
의 파도를 애써 삼킨 채 그녀는 평범한 화제로 돌아왔다
대화를 통해 올리비아는 마하라자가 밝고 고상한 성격의 소유자로, 그
가 누구와 어울리더라도 좋은 분위기를 이룰 것이라 느꼈다
"올리비아가 잘 보살펴 드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영주님"
그들이 파티장으로 다시 돌아오자, 죠수아 경이 즉시 그들과 합류했다
"올리비아는 아주 총명하죠 제 생각엔 영주님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리
라 판단되는데요 이 아이의 나라 사람들이 그렇듯 모든 면에서 솔직하거
든요"
"예, 그래요 난 올리비아 양의 그런 솔직하고 신선한 면에 매료되었습
니다"
마하라자가 시원스레 동의했다
"이런 시간을 갖게 되어 정말 즐거웠어요"
올리비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제겐 그렇게 편한 시간만은 아니었어요 전에 한번도 영주님 같은 분
과 시간을 보낸 적이 없거든요 제가 좀더 정보나 지식을 갖지 못해 죄송
합니다"
"그건 모르시는 말씀이에요 난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아주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괜찮으시다면 다음에 당신을 초대하는 영광을 갖고 싶
은데요"
그가 죠수아 경에게 몸을 돌렸다
"물론 당신과 브리짓트 부인, 그리고 그 발랄한 에스텔 아가씨도 함께
요"
일요일 이른 아침
화이트 타운을 가로지르며 위치해서 도시 속의 공터로 불리우는 마이덤
공원은 아침 일찍부터 승마자와 산책자, 그리고 보행자들로 가득 차서 매
우 활기찬 모습이었다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올리비아는 집안이 혼잡해지기 전에 일어나 승마
를 위해 집을 나섰다 에스텔의 생일 파티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
는 바람에, 브리짓트 부인과 가족, 하인 모두는 지난 밤의 고된 노동으로
세상 모르고 자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이를 틈타 올리비아는 쟈스민을
타고 집을 나섰다
이른 아침의 장미빛 햇살 속에서 저수지와 산보길을 지나자 곧 나타난
장엄하고 우아한 건물들은 올리비아를 언제나처럼 한껏 매료시켰다 고향
에 대한 끝없는 향수에도 불구하고 올리비아는 인도가 너무 많은 호기심
을 불러일으키는 나라임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 그녀는 세속적
인 것과 종교적인 것, 낡은 것과 새로운 것, 미신의 존재와 놀라운 고대
의 지혜, 신사적인 것과 야만적인 것, 잔인함과 동정심의 이상한 혼합체
를 항시 볼 수 있었다
흔히 외국인들의 눈에는 이곳은 모순된 것들로 가득 차 있고, 이상한
질병, 무더운 기후가 가져오는 갑작스런 죽음에 대한 연민 때문에 삶은
자주 대단히 비극적인 것으로 비쳐졌다 그러나 그녀는 가끔 이곳 인도가
봄에 꽃이 피는 것과 같이 모든 것이 풍요롭고,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곳
이라는 생각에 젖곤 했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쉬르퍼 시장은 붐비고 있었다 비스듬한 천막 아래
빽빽이 들어선 상점들이 진열해 놓은 대바구니, 청동으로 만들어진 우상
들, 도자기와 주방용품들, 특별하게 전시된 신선한 꽃들은 올리비아를 충
분히 들뜨게 했다
그녀는 큰 힌두교 사원의 반대편에서 말을 내려, 길거리 한쪽에서 밀가
루 반죽에 버터를 발라 커다란 나무 탁자 위에 진열해 놓고 있는 한 과자
가게 앞에 섰다 그녀는 그것을 보자마자 인도 과자를 맛본 적이 없었기
에 그 과자를 먹고 싶다는 유혹과 싸워야 했다
"철부지 아가씨! 내가 당신이라면 말이오, 기꺼이 한번 맛보겠소 그것
들은 먹기에 더할 나위없이 안전한 거요"
올리비아는 누군가 바로 옆에서 그녀에게 던져온 갑작스런 충고에 놀라
아무런 대꾸도 생각할 수 없었다 낯선 얼굴, 그러나 생김새와는 달리 친
숙한 낮은 음색의 목소리, 날카로운 눈동자, 자이 라벤던이었다
"난 그 과자들을 보장할 수 있어요 올리비아 양"
그녀의 침묵을 무시한 채 그는 돌아서서 그 과자 장사와 몇 마디 말을
나누더니 먹음직스럽게 만들어진 과자 묶음을 집어들었다 그는 그녀의
팔꿈치를 가볍게 잡고 쟈스민의 고삐를 풀도록 했다
"따라와요 내가 당신이 편안히 식사할 수 있는 곳을 제공해 드릴 테니
"
올리비아는 아무 말없이 온순하게 거리를 가로질러 그를 따라갔다 그
들이 검은색의 넓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에야 비로소 그녀는 분별력
을 되찾고 물었다
"당신은 어디로 나를 데려가는 거죠?"
문의 빗장을 벗기면서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희미하게 웃으며 대꾸했
다
"내 집으로 가는 겁니다"
곧 그녀의 눈이 의심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당신은 이 근처에 살고 있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요?"
그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잠시 그녀를 쳐다보다가 아무 대꾸도 없이, 입
가의 미소도 지우지 않은 채 집안으로 들어갔다
바보 같다고 느끼면서 그녀는 더이상 묻지 않고 그를 따라 들어갔다
세련되게 꾸며진 안뜰을 지나자 서늘한 분수가 눈에 들어왔고, 아치형의
베란다를 지나 문 안으로 들어섰다
"이제 안으로 들어갈까요?"
이층 발코니에서 주인의 목소리가 들리자 개가 시끄럽게 짖어대기 시작
했다 갑자기 그녀는 걱정이 되었다
"나는 정말로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데"
그녀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가는 게 좋겠어요"
그녀는 부딪쳐오는 그의 시선을 도저히 피할 수가 없어, 그들 사이에
이미 전에 한번 흐른 바 있는 서먹함을 다시 한번 맛보았다 조각 작품이
그렇듯 상당히 많은 노력을 해서 도려낸 듯한 그의 입술에 또다시 희미한
미소가 나타났다
"올리비아 양 한 가지 우스운 게 있어요 우리가 지난번 우연히
만났을 때, 당신은 대단히 훌륭하게 자기방어를 했는데 지금 당신은 용기
를 어디다 내버리고 이렇게 내게 두려움을 느끼는 거죠?"
그가 내뱉듯이 말을 남기곤 느린 걸음걸이로 먼저 들어갔고 올리비아는
선택의 여지없이 따라 들어갔다 그의 그녀에 대한 예의범절이 처음 만났
을 때보다 전혀 나아진 게 없다고 느꼈지만,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만남
이었기에 그녀는 다소 흥분이 되어 있었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크고 넓
은 응접실에 들어서자 그가 방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앉으세요 혹시 의자가 더 좋겠습니까? 내가 듣기에 서양 여자들은 바
닥에 앉는 것을 원시적이라고 해서 좋아하지 않는다던데"
"고마워요 전 바닥에도 곧잘 앉아요"
"모든 서양 여성이 한결같이 의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나보군
요"
그의 비아냥거림이 순간 괴롭힘으로 느껴졌다 그가 태연히 다리를 편
하게 쭉 뻗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아침식사는 했나요?"
"아뇨"
"잘됐군요"
그의 얼굴을 주시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계속 바라보
았다
"당신은 제가 이모부와 이모에게 전한 당신의 안부가 그들에게 어떤 동
요를 일으켰을까 걱정하지 않나요?"
"안부를 보낸 확실한 이유가 그건데요?"
그의 순수한 고백은 그녀를 더욱 괴롭게 했다
"당신은 그것이 나에 대한 더러운 속임수나 야비한 전갈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다소간의 차이는 있지만 더러운 속임수란 미국에서조차 생활의 일부인
것입니다"
"난 달라요! 네 이모부님에 대한 당신의 경쟁심이 무엇이든 간에 당신
이 날 이용할 권리는 없어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그 야비한 수단에 대
해 당신은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해요!"
그녀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나는 나 자신이 스스로 양심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그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난 신사가 되기 위해 어떤 구속을 받길 원하진 않아요"
"당신은 정말 당신의 그 악의에 찬 평판을 즐기고 계신가요? 정말 그래
요? 난 그게 그저 유치하고 심술궂은 짓으로밖에는 생각되지 않아요"
"심술궂음은 때론 즐거움을 가져다 주지요"
그의 가벼운 말투 안에 그녀를 향한 감정의 편린들이 꾸밈없이 드러나
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당신은 나에 대한 그런 악의에 찬 평판을 믿지 않으므로, 아마
적어도 내 죄를 용서할 거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어요"
그의 얼굴에서 어느새 부드러움이 사라지고 굳어진 강한 윤곽만이 남아
있었다 그러한 그의 모습은 지금껏의 매력과 마찬가지로 올리비아의 마
음을 세차게 흔들어, 자신의 믿음에 대한 확신을 잃게 했다
"라벤던 씨 솔직히 전 당신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어요"
그녀가 일부러 오만한 위엄을 갖추고 말하자 그가 즉시 반문했다
"하지만 지난 밤 마하라자에게 털어 놓은 나에 대한 당신의 폭넓은 의
구심으로 미루어 생각해 볼 때, 아마 당신은 지난번보다는 지금이 나에
대해 한층 더 잘 아는 것이 아닐까요?"
올리비아는 상당한 자제력으로 놀라움을 참았다 난 겨우 몇 시간 전에
마하라자를 만났을 뿐이데 그러면 이 사람은 그 얘기들을 이미 들었
단 말인가? 그녀는 이 고장에서 화살처럼 빠르게 퍼지는 소문의 속도에
존경심마저 일었다
"마하라자 영주가 당신에게 그러던가요?"
"마하라자는 신사이기 때문에 그런 말은 하지 않소 난 다른 정보통을
가지고 있소"
그을린 얼굴이지만 다소 창백한 표정, 그러면서도 무엇이든지 꿰뚫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차가운 눈, 넓은 이마와 그 밑에 우뚝 자리잡고
있는 매부리코, 이 모든 외모는 올리비아에게 그가 귀족처럼 보이게 하기
에 충분하였다 거의 신경을 쓰지 않은 옷차림이지만 그의 외모는 입은
옷에 따라 매번 달라질 듯이 보였다
라벤던이 그의 허리띠에 달려 있는 시계를 힐끗 보며 말했다
"오후에 항해 예정이던 선박 중에 하나가 문제가 생겨 곧 나가 봐야겠
는데요"
그의 긴급한 출발에 대해 올리비아는 자기도 모르게 실망을 느꼈다 그
때 그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난 '곧'이라고 말했지, '지금'이라고 하지는 않았어요 아직
아침식사를 위한 시간은 있어요"
그가 손가락을 머리 뒤로 깍지를 끼며 눈꺼풀을 반 정도 찡그리면서 불
쑥 말했다
"왜 당신은 나를 두려워하죠?"
"두려워한다구요? 당신은 확실히 자만에 빠져 있군요!"
"그럼 됐어요 아무 생각없이 한 말입니다 미안해요 우리 중 누구도
이 만남을 당신의 친척들에게 알려 줄 것 같지도 않고, 나 역시 더이상
전할 안부도 없어요"
그는 자신의 조소나 즐거움, 비난과 분노 등의 감정들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 말을 들으니 다소 안심이 되는군요"
올리비아도 빈정거리며 맞장구쳤다 잠시 침묵 그러다 그녀는 화제를
바꾸기 위해 응접실 구석을 둘러보며 가볍게 물었다
"당신의 직업은 무엇인가요?"
올리비아는 '당신은 차 수출업자지요?'라고 묻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건 그녀가 확실하게 다른 사람에게서 그의 정체에 대해 듣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기 때문이었다
"지금 알려진 바로는 건달, 도덕적 타락자, 바람둥이, 무법의 악당 등
이죠 하지만 때에 따라 변하죠"
웃음을 참기가 어려웠다 이 말들은 언젠가 이모부가 사용한 묘사와 흡
사한 것들이었다
"당신은 그렇게 불려지는 것을 자랑하는 거예요? 그런 것들이 즐겁나
요?"
"자랑이나 즐거움, 그 무엇도 아닙니다 단지 하나 확실한 것은 그런
것들이 나와 전혀 관계없는 것들이라는거죠"
"그럼 당신과 관계있는 것은 무엇이죠?"
라벤던은 어느 쪽이든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창밖으로 시선을 옮
겼다 다소 난처해 하는 듯 보였지만 곧 그의 시선은 냉랭해졌다
"아무것도 없어요"
미소가 돌아왔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공허한 듯이 보였다
"아무것도 나와 관계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없어요"
순간 올리비아는 어리석게도 그를 자극할 수 있는 어떤 것, 그 무엇을
말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는 다시 완전히 다른 어조로 말했다
"난 버커스트 마님이 이번만은 아들의 선택에 찬성할 것을 압니다 그
분은 대단한 정력과 활력을 갖춘 여성이죠"
"버커스트 마님이라구요?"
"프레디 선생의 어머니 말이오 그분은 돈과 명예, 그리고 프레디를 위
한 단거리 출전선수죠 나는 당신이 그 집에서 많은 경쟁의 연속을 발견
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내가 당신에 관해 알고 있는 지식에 비해, 나의 일상사에 관해 당신이
그토록 많이 알고 있는 점이 놀랍군요"
그녀는 재빠르게 덧붙였다
"아는 것인지, 아니면 흥미가 있는 것인지 모르지만"
그가 가볍게 웃으며 한동안 그녀를 주시했다
"당신이 나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 느낀다면, 그건 당신이 알려고 애
를 쓰지 않았기 때문일 거요 나에 관해 무엇이든 알고 싶다면 내게 왜
묻지 않나요?"
올리비아는 그의 여전한 어처구니없는 자만이 싫어졌다
"내가 물었다면, 당신이 얘기했을까요?"
"하지만 당신은 어쨌든 물어볼 수는 있어요"
그녀는 그의 대꾸에 그만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식사 시
간이 되었다 한 젊은 여인이 큰 은접시를 가지고 들어왔고, 그 뒤를 따
라 더 많은 하인들이 연이어 음식을 들고 들어왔다
올리비아의 시선은 곧 그 여인에게 집중되었다 검고 윤이 나는 눈동자
가 백단향처럼 매끄러운 피부에 박혀 있었다 큰 귀에 자연적인 우아함을
지닌 그 여인은 날씬하고 관능적인 몸매를 갖고 있었으며, 올리비아 옆을
스쳐가는 그녀의 몸동작 속에서 장미를 생각나게 하는 강한 향취가 풍겨
왔다 가벼운 오한이 올리비아의 몸에 전해져왔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이
여인이 자이 라벤던의 정부情婦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소개도 하지 않았다 대신 흐트러짐없이 말했다
"당신이 본 것처럼 수자타는 최고의 요리사죠 음악에 탁월한 재능을
가진 여인이기도 하죠"
그녀의 이름이 언급되자, 여인이 가볍게 미소지었지만 단지 그에게만이
었다 그러나 올리비아가 곁눈질로 슬쩍 본 그녀의 모습은 수줍음과 요염
이었지 사랑과 동경은 아니었다
그녀가 탁자에 마지막 접시를 놓기 위해 몸을 굽힐 때 그녀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얇은 차드르가 벗겨져 미끄러져서 가슴에 고정되었다 당황
함이나 주저함없이 라벤던은 차드르를 원래의 위치로 조정해 주기 위해서
앞으로 다가갔다 그들 사이에 눈길이 오가고 그의 손은 그녀의 어깨 위
에서 필요한 시간보다 더 오래 머물렀다
빠른 행동, 빠르게 주고받는 눈길이었지만 올리비아에게는 어느 정도
그들이 뚜렷한 관능적 감정을 주고받은 인상이어서 가슴이 뜨거워지고 목
이 달아오르는 느낌을 주었다 미소가 아직 그녀의 붉은 입술 위에 남아
있었다 수자타가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한번도 올리비아를 쳐다보지 않
았다
그들은 곧 식사를 시작했고, 라벤던은 수자타에 대한 한마디의 언급도
없이 식사 코스와 그 준비에 대한 간단한 설명에 이어 일에 대한 얘기만
했고, 올리비아는 넋이 빠진 채로 듣고 있을 뿐 실상은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녀가 바로 라벤던의 가정과 침대를 공유하는 여자인가? 그런
상상이 그녀의 머리를 파고들었고, 그것이 그녀는 까닭 모르게 싫었다
"뜨거울 때 드세요 자레비스는 식으면 맛이 없어요"
그녀는 곧 현실로 돌아와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웃으려 애쓰며 말했
다
"이런 수고를 할 필요는 없었는데 전 단지 이곳이 어떤 곳인가 궁
금했을 뿐인데요"
"그 수고는 내가 한 게 아니오 난 그저 주문만 했으니까 수자타는 손
님을 기쁘게 하길 좋아합니다"
그녀는 이 집에 들어온 자신의 분별없는 결정을 후회했지만 이미 무언
가를 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어쨌든 음식은 맛이 있었으므로 그녀는 생각
의 파도를 억지로 떨치며 계속 음식에 손을 내밀었다
"오후에, 당신의 배는 중국으로 항해하나요?"
"아니오 난 더이상 중국과 교역하고 싶지 않아요"
물론 그녀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중국과의 교역은 가장 큰 부를 약속해 주지 않나요?"
"난 이미 부자이고, 더이상은 필요없어요"
"사업에는 분명 끊임없는 욕망의 추구가 있을 텐데요?"
"물론 그렇지만 내가 선택한 것은 다른 것이에요 내게 있어서 돈은 수
단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그럼 목적이 뭐죠?"
힐끗 그를 보았을 때, 갑자기 그가 뭔가 불편해 한다는 게 느껴졌다
그날 밤 강가에서 느꼈던 팽팽한 긴장감이 그를 불안하게 하는 듯했다
그는 일어서서 창가로 갔다
"근본적으로, 생존은 절대적인 환경에서 보장되는 겁니다"
올리비아는 일어서서 마하라자가 정확하게 표현하면서도 폭로하기를 거
절했던 그의 '강박관념'을 떠올리며 다시금 놀랐다
한참의 침묵 끝에 그가 양미간을 좁히며 불쑥 말을 뱉었다
"내게 말해 줘요 당신의 이모부가 마하라자 영주에게 뇌물을 바친 게
석탄 때문인가요?"
갑작스런 질문에 깜짝 놀랐지만 그녀는 침착하고 온화하게 대답했다
"내가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비록 내가 안다 해도 말씀드릴 수도
없구요 그분이 왜 석탄을 얻기 위해 뇌물을 주어야 했죠?"
"그가 뇌물을 주건 안 주건 석탄을 얻을 수는 없을 거요 당신 이모부
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판매를 막기 위해 마하라자와의 우정을 이용하겠다는 그런 뜻인가요?
당신 선박을 위한 석탄의 독점을 위해서?"
"아! 이제야 당신이 나에 관해 잘 알게 되었군요!"
올리비아의 깨달음은 그에게 큰 만족을 준 듯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런
특별한 논쟁을 발전시키길 원치 않았다 그녀를 당혹케 하는 것은 라벤던
의 직업적 윤리관이 아니고 남자들이 갖는 그 저급한 이기심, 그리고 그
에 따른 근본적인 모순이었다
그녀는 지금껏 그렇게 모순되고, 그렇게 고집불통이고, 자기 의견에 대
해 책임감이 없는 사람을 결코 만난 기억이 없다 그녀는 수많은 질문을
하고 싶었지만 하인이 손 씻을 물을 갖고 들어와 식탁을 치웠기에 기회를
놓쳤다
"저 때문에 아침식사가 즐겁지 못했겠네요"
"난 즐거웠어요 난 당신처럼 일찍 일어나 승마와 운동하기를 즐기죠
그건 우리가 공통된 취미를 향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죠"
잠시 말이 중단되었다
"다른 사람들 중에서"
그의 이야기가 끊긴 순간은 잠시였지만 언급되지 않은 생각들로 가득
찬 올리비아는 입이 바짝 탔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누구?"
그는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을 주시하는 그의 얼굴은 알 수 없는
어떤 검정으로 일그러졌다
"자, 우리 이제 서로에 대한 지나친 호기심에 대한 막을 내리기로 합시
다"
그가 벌떡 일어나서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이리와요 우리는 이제 나가야 해요 안 그러면 내 배가 때를 놓치게
되어 경쟁자들이 기뻐하게 될 테니 그 배는 던디에서 정시에 용선계
약을 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나는 계약을 취소당할 테니까요"
그녀는 일어나면서 얼른 그로부터 팔을 뺐다 그런 미미한 육체적 접촉
조차도 그녀를 불안하게 했다 그녀는 재빨리 승마용 장화를 신으며 말했
다
"아침식사 대접에 감사합니다 잘 먹었어요"
"당신은 아마 어디에도 없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즐겼
을 겁니다"
"음식을 맛있게 잘 먹었다는 저의 감사와 평가를 수자타에게 전해 주세
요"
"그녀는 감사를 기대하지 않아요 그것이 그녀의 기쁨이니까"
그는 성급히 돌아서서 방을 걸어 나갔다 올리비아는 천천히 뒤를 따라
가며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였다 그는 몇 살일까? 단정하기는 불가능했지
만 그의 몸에 충만한 활력과 에너지는 젊음의 한복판에 있는 남성의 절정
기를 알려 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가에, 혹은 그의 눈빛 속에 숨어 있어 얼핏 보이는 어두
운 그림자는 세상의 피곤함을 간신히 숨기고 있었고, 그것은 그가 나이
이상의 세파를 헤치며 살아온 듯한 느낌을 안겨 줘 그녀를 당황하게 했
다
정원에서 그녀는 쟈스민 곁에 함께 있는 그의 애마를 보며 감탄했다
붉은 눈에 말꼬리를 사납게 흔드는 그 말은 그녀가 본 중에 가장 완벽한
것이었다
"이 말은 너무 사납고 훈련이 안 돼서 당신에게 매우 위험하겠는데요"
"그렇긴 해요 그래서 내 두뇌가 필요한 거죠"
라벤던은 놀라우리만치 부드럽게 애마의 이마를 애무하며 귀에 대고 무
엇인가를 속삭였는데, 그것은 마치 인간적 친교를 맺고 있는 듯이 보였
다
"말에게 뭐라고 했나요?"
"사람과 말 사이에 한 약속은 신성한 것이죠 그걸 묻는 것은 아주 무
례한 일이에요 이 말의 이름은 '사탄'인데, 가끔씩 이 녀석은 정말로 나
쁜 짐승이 되죠 그건 아마 자신의 이름에 대한 평판을 정당화시키기 위
해서 일 거예요"
"하지만 주인만큼은 무례하지 않을 거예요"
라벤던은 올리비아의 가혹한 말에 아주 잠깐 당황한 듯했지만 곧 작은
미소를 머금고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마도 그래요 분명 그럴 겁니다"
그가 한동안 계속 웃다 다시 말했다
"나의 하인 바하도르가 멀찍이서 당신을 집까지 호위할 겁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요"
"필요합니다"
그는 확고하게 즉시 복종을 요구하며 그녀를 가로막았다
"난 당신이 미국인이기에 도전과 독립적인 자세를 갖고 있다는 걸 알아
요 하지만 지금 내 행동은 그저 예의로 생각하고 받아들이세요"
올리비아는 아무 말없이 말에 올라탔다 라벤던은 말이 떠나기 전에 올
리비아가 말에 잘 앉았는지를 확인했다 헤어지는 순간에, 올리비아는 아
까부터 계속 입 안에서 맴돌던 질문을 기어이 던졌다
"당신의 무례한 행동들에 대한 답례로 질문을 하나 해도 되겠어요?"
조심스러움이 그의 얼굴에 떠올랐지만 대답만은 흔쾌했다
"무엇이든지!"
"당신은 어느 정도는 유럽인의 피를 이어받았죠? 당신이 부분적으로 속
해 있는 인종들을 싫어한다고 말하는 것은 위선이 아닐까요?"
그녀는 그가 답을 해줄지가 의심스러웠다 잠시 동안 그의 턱은 고정됐
고 눈빛은 어두웠지만 곧 답을 했다
"내가 그 인종에 부분적으로 속해 있기 때문에 미워할 권리가 있고, 그
이유는"
잠시 말을 멈춘 동안, 그의 눈이 다시 냉랭해졌다
"미국에서 가축의 엉덩이에 낙인을 찍듯, 인도에서 영국인의 사생아는
영원히 그 얼굴에 낙인이 찍힌다는 것입니다"
그는 사탄을 타고 옆구리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폭발적인 스피드로 도
로 속으로 사라졌다 그의 대답 안에 깃든 극도의 조소에 떨며 그녀는 잠
시 움직이지 못했지만 바하도르가 기다리고 있음을 깨닫고 쟈스민을 앞으
로 재촉했다
인간이 스스로의 마음속에서 운명의 순간들을 규정할 수 있는지 없는지
에 대해 올리비아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이 라벤던과의 예기치
못한 두 번째 만남이 자신을 매우 혼란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느
낄 수 있었다
그녀는 그 수수께끼 같은 남자에게 명백히 매혹당해 있었다 하지만 그
녀는 자신이 그를 좋아하는지조차 아직까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
이 라벤던 그는 거칠고 고집세고 거만하며 증오와 냉소로 뒤틀려 있는
남자였다 그는 목적 달성을 위해 그 순간에 필요한 수단이 무엇이든 그
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받기 전에 비열한 행위를 과시하는데 있어 아무
고려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올리비아를 사로잡았다 몇 사람을 빼놓고는 한결같이 그를
비난하고 있는데도 그의 영상은 한순간의 멈춤도 없이 그녀를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안 돼 집으로 돌아가면서 그녀는 몇 번이나 스스로를 질책하고 책망하
며 그를 거부했다 지난 며칠 동안의 심적 동요와 정신적 메마름이 어디
서 왜 왔었는가를 생각하노라니 그녀는 진실로 그를 멀리해야 한다는 결
론에 다시금 이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 그 모든 방향 감각의 상실 원인은 자이 라벤던이었다 며칠 전
만 해도 그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원했지만 이제 되살아난 외로움, 과거
로부터의 이상한 소외감 때문에 그녀는 우연이든 아니든 다시는 자이 라
벤던을 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브리짓트 이모님이 포트마우드에서 입항한 새로운 배와 그 배의 승객
중 프레디 버커스트의 어머니가 있다는 사실을 올리비아와 에스텔에게 알
리며 그곳으로 저녁에 드라이브 나갈 것을 권했다 그건 바라던 일 중에
하나였기에, 올리비아는 곧 신선한 공기를 마시러 나갈 것을 결정했다
올리비아와 에스텔은 가끔 죠수아 경과 브리짓트 부인을 동반해 산책길에
올랐지만 오늘 저녁에는 브리짓트 부인도 죠수아 경도 모두 선약이 있었
다
"잘됐어"
에스텔은 부모님의 부재가 기쁜 듯 말했다
"언니, 우리 이제 그의 배를 보러 가자 그의 쾌속선 중의 하나가 오늘
입항했거든"
올리비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이 라벤던을 피하기로 한 그녀의
결정은 이렇듯 처음부터 방해를 받았다 아니 오히려 그녀는 무의식적인
흥분조차 느끼고 있었다
"그 쾌속선은 홍콩에서 뉴욕까지 104일이 걸렸고, 뉴욕에서 캔턴까지
겨우 81일밖에 안 걸렸어 이건 정말 믿기 힘든 일이야"
확실히 그것은 믿기 힘든 위업이었다 에스텔의 왕성한 관심은 한층 더
발전해 나갔다
"수잔이 그러는데"
그녀는 마차에서 마치 누가 듣기라도 하는 듯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그 사람이 원주민 무희 출신의 아름다운 정부에게 줄 드레스를 새로
맞췄대, 글쎄"
"에스텔 난 네가 그런 값싼 소문들을 듣고 다니지 않았으면 좋겠구
나!"
올리비아의 비난은 자신이 의도했던 것보다 더 날카로웠다
"값싼 것들이라구? 만일 내가 그런 소문을 듣지 않는다면 어떻게 세상
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고 배울 수 있겠어, 언니?"
"네가 정말 세상 일을 배우고 싶다면 책과 신문을 통해서도 충분히 배
울 수 있어"
"난 그런 일을 얘기하는 게 아냐, 언니 난 진짜 뉴스거리를 말하는 거
야 어쨌든 수잔 어머니의 재단사가 그러는데 그는 많은 물건들을 진품
고르듯 샀다는 거야"
"에스텔, 마차를 세우고 걷는 게 어떨까? 그냥 앉아 있기에는 아까운
너무 좋은 저녁인데"
그녀는 에스텔의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도로로 내려섰다 그녀는 스
스로에게 매우 화가 나 있었다 에스텔의 어리석은 수다가 불유쾌한 상상
을 한번 더 불러일으킨 것이다 수자타의 육감적인 육체, 라벤던의 쾌락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저녁은 정말로 사랑스러웠다 서서히 붉어지는
하늘을 가로질러 흐르는 구름은 마치 붉은 홍학처럼 보였다 산책길과 정
원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저기 좀 봐, 저 거대한 배!"
에스텔이 갑자기 올리비아의 팔에 매달리며 한곳을 가리켰다 올리비아
는 에스텔이 가리키는 지점을 보며 범선을 찾으려고 애썼다 에스텔이 건
네 준 오페라 안경에 초점을 맞출 때 올리비아의 눈에 거대한 산 같은 배
의 모습이 들어왔다
어수선한 선박의 틈바구니에 세 개의 큰 돛대를 지닌 쾌속선이 거대함
과 우아함을 자랑이라도 하듯 어떤 다른 선박보다 더 높게 우뚝 서 있었
다 올리비아가 물었다
"세 갈래로 갈라진 뱃머리의 기묘한 특색이 저 배의 상징이니?"
"응 그건 '트리슐'이라고 하는 삼지창이야 이교도의 신神인 시바가
사용한 것이라고 크리스톤이 말했어"
"그게 무엇을 의미하지?"
올리비아는 지난 번에 지나친 몇몇 힌두 사원 위에서 본 같은 형태의
삼지창을 떠올리며 물었다
"누가 알겠어? 이교도들이 숭배하는 것들을"
에스텔이 쾌속선 위를 살펴보기 위해 한참 두리번거리다 무엇을 발견한
듯 가벼운 한숨과 함께 '오, 저 사람!'하고 내뱉었다
에스텔의 떨림은 곧 그녀에게도 전염되었다 즉시 환상의 불꽃이 올리
비아의 마음에 솟구쳤다 쾌속선의 갑판 위에서 어딘가를 보고 있는 자이
라벤던이 보였던 것이다
"난 저 사람에 대해 또다른 것을 알았어"
에스텔의 목소리가 올리비아의 환상을 방해했다 그녀 자신의 유치함에
당황하며, 그에 관한 또다른 소문이 알고 싶어 에스텔을 부추기지 말아야
지 하고 생각했지만 마음과는 달리 큰소리로 묻고 말았다
"무엇을?"
"사람들이 그러는데 그 사람은 사생아私生兒래 그럼 어머니와
아버지가 결혼도 하지 않고 그를 낳았다는 건데, 두려운 일이지 않아?"
그 소식은 올리비아를 놀라게 하지 않았다 유럽인종과 아시아인종간의
결합으로 태어난 유라시안들은 그 종족 자체가 대부분 서출의 형태로 태
어난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엄마는 사생아들은 죄악의 씨앗으로 태어난 것이라고 말했어"
"사생아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여자에게서 태어났어 부정행위
를 한 것은 우리 인간이지 신이 아니야 그런데 넌 누가 그의 아버지인지
를 알고 있니?"
"사람들이 그러는데 그의 아버지는 주정뱅이 영국인 선원이거나, 적어
도 이 항구에 배를 대는 백인이었을 거래 어머니는 하녀 출신인데, 남자
가 여자를 유혹하고는 도망쳤대"
"그의 아버지는 그후 돌아오지 않았니?"
"자세한 것은 나도 몰라 드리몬드 부인의 말로는 자이 라벤던이 제일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거래"
갑자기 말을 끊고 에스텔은 뭔가 두렵다는 듯이 손으로 입을 막았다
올리비아는 그녀의 그런 태도에 자신도 모르게 분노를 느끼며 불쑥 내뱉
었다
"집에서 이모님이 그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을 싫어하신다면 나도 거론
하지는 않겠어 하지만 그게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모두 그에 대해 얘기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니까 그렇게 두려워하지 마, 에스텔!"
"하지만 난 그에 대해 더 얘기하고 싶지 않아 난 그저 언니가 물어 봐
서 모든 것을 얘기했을 뿐이야"
물론 그것은 사실이었다 올리비아는 억지로 그녀 마음속에 뒹구는 다
른 모든 질문을 누르며 에스텔을 달래곤 막막한 심정으로 부두 쪽으로 걸
으며 말했다
"이리 와 그런 얘기는 그만하고 방파제에 무슨 소동이 벌어졌나 가 보
자"
부두는 무질서했다 이제 막 도착한 유럽인들과 그들을 맞이하는 사람
들이 뒤섞여 있었다 그런데 그 왁자지껄한 소음 사이로 올리비아와 에스
텔의 귓가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기막힌 우연이군요 오늘 우리 어머니가 도착하셨는데,
며칠 후 두 분은 우리와 함께 점심을 하셔야 할 겁니다"
프레디 버커스트가 예의바르게 말했다 그를 본 순간, 까닭모를 짜증과
분노가 치밀었지만 올리비아는 억지로 웃으며 물었다
"이번이 어머님의 첫번째 인도 방문인가요?"
"아닙니다 여기에서 아버님이 대영제국을 위해 일할 때 몇 해 동안 사
셨죠 이 저주받은 나라를 마다 않고 받아들이신 강한 분이시죠"
"언니는 당신의 어머니를 만나기를 바라고 있어요, 버커스트 씨"
"정말입니까?"
그가 놀라운 듯 물었다
"그럼, 두 분 다 다음 일요일에 톨리 클럽에서 있을 파티에 저와 함께
하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그곳에서는 열광적인 폴로 게임이 있어요 어
머님께 말씀드려 부리짓트 부인에게도 초청의 편지를 띄우겠습니다"
올리비아는 화가 났지만 에스텔은 아무렇지 않은 둣 말했다
"폴로 게임? 그건 바로 어제 올리비아 언니가 영국인들이 즐기는 야만
적인 게임이라고 불평한 경기죠, 아마 하지만 설명을 좀 해주시면 언니
도 그 경기를 좋아하게 될 거예요"
그가 기쁨으로 얼굴이 자주빛이 되었다
"경기의 세부사항을 당신에게 설명할 수 있는 기쁨을 제게 주시겠습니
까? 올리비아 양! 다음 일요일 오찬을 허락하시는 겁니까?"
"잠깐만요"
올리비아의 날카로운 시선을 피해 에스텔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방금 샤 로테를 봤어요 저쪽에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그녀가 손을 흔들고 사라졌다 프레디 버커스트의 흠모하는 시선에 갇
혀 올리비아는 한발짝도 움직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전 오랫동안 그날 밤 당신을 홀로 둔 실수를 사과하고 싶었어요 제가
사과 편지를 썼어야 했는데 당신은 그날 저의 행동들을 무척 싫어하
고 계시지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전 다 잊었는 걸요"
"그래요? 정말입니까? 난 당신이 날 나쁘게 생각하지 않기를 바랬어
요"
프레디는 마치 천국이 열린 듯한 표정이 되었다
"난 결코 당신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녀는 그 자리를 빠져 나가기 위해 미친 듯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허사
였다
"저기, 저의 어머니가 보이는군요 이제 그만 가봐야겠어요 그러면 일
요일에 전 기다리기가 힘들 것 같군요"
그가 급히 자리를 떴다
톨리 클럽에서의 점심에 초대하는 편지가 브리짓트 부인에게 정식으로
도착했다 이모의 호들갑에 올리비아는 절망적인 느낌이 되었고, 그녀는
버커스트 부인이 절대적으로 자신을 싫어하게 되기를 기원했다
그날 밤에 침실에서 브리짓트 부인은 그의 남편을 붙잡고 한바탕 수다
를 늘어 놓았다
"여보 난 당신이 버커스트 가家에 대해 나쁘게 말하지 않았으면 해
요 올리비아가 프레디에 대해 편견을 가지지 않도록 해주세요"
죠수아 경은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불만스러운 듯 말했다
"버커스트는 걸어다니는 바보의 표본이오 게다가 내 간섭 때문에 그
아이가 가질 새로울 만한 편견도 없고"
"좋아요 저도 프레디가 지적知的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시인해요
하지만 그가 가진 것은 그가 그렇지 못한 것을 충분히 보상할 수 있어요
올리비아는 여왕처럼 살 수 있다구요"
"올리비아도 바보 같은 왕과 함께 사는 여왕이 되길 원하지는 않을 거
요 게다가 만일 내가 나의 딸을 위해 그를 탐탁치 않게 여긴다면, 질녀
에게도 마찬가지인 거요 난 어찌 되었든지 간에 아둔한 버커스트 가와
동족이 되는 게 싫소"
"올리비아에게는 훌륭한 결혼이 필요해요 난 그애를 말죽을 끓이는 카
우보이와 결혼시키기 위해 미국으로 돌려 보낼 수는 없어요 올리비아는
그애 아빠가 머리에 채워 준 쓰레기 같은 것들이 아닌, 영국에서 버젓한
사람들과 어울리며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해야 해요 당신은 그애의 생각
을 모르나요?"
"여보, 그애를 그냥 내버려둬요 하고 싶어 하는 일이 아니면 시키지
말아요 올리비아는 기운을 내고 있고, 머리도 좋은 애야 그애가 우리와
함께 있는 동안 즐거울 수 있도록 해줘요 그애가 다른 것을 바라지 않는
다면 그애의 나이가 좀더 들었을 때 보냅시다 그앤 그애의 아버지를 사
랑하고 있어 당신이 인정하든 안 하든 그애는 영국이 아닌 신세계 태생
이야 그걸 우선 받아들이고 시간이 되면 그애를 보내 줍시다"
"그애를 돌려 보낸다구요? 진정이에요, 여보?"
"진정이오, 만일 그애가 원한다면"
"그애 같은 나이에는 자신이 뭘 원하는지 잘 몰라요 사라가 샘과 도망
쳤을 때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았나요? 그앤 배고픔과 고통, 그리
고 무서운 질병을 통해 그걸 알았어요"
"사라는 샘과 행복했어, 당신의 관점에 맞춰 사실을 왜곡하지는 말아
요, 브리짓트 그것은 훌륭한 결혼이었소 가난했지만 훌륭했소 샘은 아
내를 사랑했고,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어"
갑자기 브리짓트 부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여보, 난 이애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것을 해주고 싶어
요 난 그렇게 해야만 해요 난 사라에게 큰 상처를 줬어요 만일 내가
없었으면 그앤 아직 살아 있었을 거예요"
그녀는 고통스러운 듯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했다 죠수아 경은 그녀의
갑작스런 감정의 표출에 놀라 그녀의 어깨를 팔로 감싸안았다
"자, 브리짓트 그런 생각은 하지 말아요 이제 사라는 이미 죽었
소 지난 시간을 돌이킬 수는 없어 무슨 일이 있어도 그렇게 자신을 학
대하지는 말아요 올리비아를 부유한 얼간이와 결혼시킨다고 해서 사라를
살아 돌아오게 할 수는 없소"
"그건 알아요 하지만 난 적어도 보상을 해주고 싶어요, 여보 만약 내
가 사라의 결혼을 그토록 반대만 하지 않았다면 그앤 문명화된 안락한 런
던에서 살았을 거고, 올리비아도 어엿한 귀족 가문의 숙녀로 자랐을 거예
요"
"그건 당신의 생각일 뿐이야, 브리짓트 샘은 사라를 만나기 전부터 영
국을 떠날 생각을 갖고 있었어 내가 그를 런던에서 만났을 때 그렇게 말
했었어 사라는 올리비아보다 더 물질적 풍요에는 관심이 없었어 그녀는
어디를 가서 어떤 환경에 처하든 샘을 따르는 게 행복이라고 믿고 있었
어"
그밖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으므로 그는 그녀의 등을 두드렸
다
"그리고 그는 그리 나쁜 사람이 아니야 그는 이상을 꿈꾸는 가난한 개
혁운동자였지만 올리비아에게는 감탄스러울 만한 교육을 시켰어"
그의 이야기를 중단시키며 브리짓트가 말했다
"난 사라를 사랑해요 난 그애에게 용서를 받기 위해 무엇인가를 해주
고 싶어요 하지만 내겐 다른 방법이 없어요 내가 그애의 영혼과 더불어
평안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올리비아를 통해서만 가능해요 적어
도 난 올리비아에게 평생 잊지 못할 결혼식을 해주고 싶어요 그게 사라
에게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 같아요"
"결혼을 원하지 않는 젊은 여자에게 결혼을 강요할 수는 없어 브리짓
트!"
그가 한숨쉬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내가 그애에게 강요를 한다구요?"
그녀는 놀란 듯 말했다
"난 그럴 생각은 없어요 올리비아가 순전히 자신이 원해서 프레디와
결혼하게 하려는 거예요"
죠수아 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아내가 불쌍하다는 생각에
머리를 저으며 침대에서 일어나 셔츠를 입기 시작했다 브리짓트 부인의
얼굴엔 공허가 가득했다
"그가 그애와 만날 계획을 했던 것일까요"
그녀는 그를 쳐다보지 못했다 그의 손이 공중에서 잠시 멈추었다
"터무니없는 소리! 올리비아는 그날 밤 그저 우연히 밖에 나갔던 것뿐
이야!"
"자이는 악마의 화신이에요, 여보"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래 그는 하수구의 쥐새끼이고 분별력 없는 부랑아에 불과해, 브리
짓트"
그는 분명히 화가 났다 브리짓트의 붉은색 입술을 제외하고 그녀 얼굴
에는 혈색도 움직임도 하나도 없었다
"그는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 행동해요 당신은 그때 신께서 주신 기회
를 놓치지 말고 그를 죽였어야 했어요!"
그가 굳게 말했다 "다른 기회가 또 있을 거요"
그녀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어느날 그가 모든 걸 폭로하면 어떻게 하죠? 그때 당신의 나약해질 모
습을 어떻게"
그는 화가 나서 그녀의 턱을 손으로 잡았다
"당신은 모든 것을 잊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는 것을 알아야 해!"
거칠게 그녀를 떼어 놓고 의자 위에 있는 옷을 움켜잡은 그는 탈의실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녀는 그가 사라진 곳을 응시했다 그녀의
두 눈에는 두려움과 증오가 섞여 있었다
제 2 장
돌아오지 않는 시간
올리비아의 벵갈 행 여행은 무덥고 지루한 것이긴 했지만 캘커타에서
외지로 나가는 최초의 경험이었기에 마음은 지극히 설레이고 있었다
사실 캘커타는 정치적이고 상업적인 분위기와 전역에 퍼져 있는 동인도
회사의 영향력 등으로 짙은 유럽적 색채를 띄고 있어서 그녀에게 인도의
향토적 특성을 알게 하기엔 부족한 것이었다
지금 마차의 창밖으로 전개되는 시골 풍경은, 비록 그것이 얼핏 본 정
도에 불과하지만 그녀에게 새로운 경이를 안겨 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열대지방 특유의 강우기인 지금, 벵갈로 가는 길은 짙푸른 초원처럼 논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간간이 야자수잎으로 엮은 지붕을 한 초가집이 한가
로이 서 있었다
올리비아 일행을 실은 마차는 무장한 승마 시종侍從까지 거느린 대행
렬이었는데 그 인상적인 모습에도 불구하고 논에서 벼를 심고 있는 농부
들의 주목을 별로 받지 못했다
올리비아를 초대한 장본인인 마하라자 영주가 기거하는 킬티나갈 궁전
이 멀리 보이기 시작할 무렵부터 그녀의 가슴은 더욱 설레었다 그녀가
궁전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이미 명령을 받은 듯 제복을 입은 보초들이
일제히 허리를 굽히며 그녀를 영접했다
아름답게 꾸며진 궁전이었다 그녀가 지나쳐온 농촌의 소박함과는 거리
가 먼 그 궁전은 작은 폭포를 이룬 것 같은 꽃들과 보리수 등으로 잘 손
질된 화원에 둘러싸여 있어 마치 동화 속의 천국 같은 느낌을 주었다 마
차가 흰 대리석으로 된 현관 계단에 닿자, 시종들에 둘러싸여 그녀를 기
다리고 있던 마하라자가 만면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
"킬티나갈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올리비아 오렌키 양"
그가 올리비아가 마차에서 편안히 내릴 수 있도록 친히 다가서며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이런 지나친 격식과 예의에 부담을 느끼면서도 최선을
다해 예의를 차렸다
"어서 와요, 올리비아 양 당신을 누구보다 먼저 제 아내 킨잘에게로
모셔야겠어요 그녀는 지금 당신을 기다리느라 며칠 전부터 조바심을 치
고 있어요 아내는 사실 영어회화 연습을 위해 선생을 구하고 있는 중이
거든요 물론 그것만이 올리비아 양을 기다리는 모든 이유는 아니지만 말
입니다
"벵갈에도 영어를 할 줄 아는 여성은 많지 않은가요?"
"제 아내는 영국 여인들과 어울리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물론 남
자들 앞에 나타나지도 않구요"
이런 체계와 관습이 인도 전역에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것임에도 불구하
고 자신이 그것을 기억하지 못했다는 점에 당황해 하며, 그녀는 이모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모는 프레디 버커스트의 식사 초대에 상당히 흥분해 있었는데 공교롭
게도 마하라자 영주의 초대장이 도착했던 것이다 그 초대장엔 올리비아
만을 특별히 초대하는 글이 간단히 적혀 있었는데 더욱 기이한 것은 초대
날짜가 프레디의 날짜와 겹쳐서 이모에게는 상심과 고민을, 그리고 올리
비아에겐 환희의 탈출구를 제공했던 것이다
죠수아 경이 선뜻 마하라자 영주의 초대에 먼저 응해야 한다고 결정함
으로써 버커스트 부인을 만나고자 하는 이모의 열렬한 희망을 무산시켜
버렸다 올리비아도 없이 이모와 에스텔만 초대에 응하는 건 아무런 의미
가 없기에, 이모는 너무나 낙담한 나머지 이렇게 중얼거렸었다
"원주민 여자들, 특히나 상류계급의 여자들은 지독한 권태에 빠져 있단
다 방구석에 처박힌 채 얼빠진 공상이나 하든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수다를 떠는 것이 하는 일의 전부라고나 할까"
영주의 아내 킨잘이 사는 궁전은 이름을 알 수 없는 키가 크고 잎이 우
거진 나무들로 가려져 있었다 그녀는 넓직하고 햇볕이 잘 드는 발코니에
서서 올리비아를 기다리고 있다가, 마차가 나타나자 서둘러 달려 나왔다
"불편한 길을 달려오느라 장시간 고생이 많으셨겠어요 휴식이 필요할
텐데"
"아니에요, 목욕 정도만 하면 괜찮을 것 같아요 무더운 날씨에 땀을
좀 흘린 것 말고는 별로 피곤하지 않아요"
킨잘은 30세 중반 정도에 좀 마른 체격에다 적당한 키, 거무스름하지만
매끄러운 피부, 그리고 빈틈없고 지적으로 보이는 눈을 가진 여인이었다
그녀가 구사하는 영어는 영주만큼은 유창하지 못했지만 비교적 정확해
서, 올리비아에게 더욱 친근감을 느끼게 했다 잠시 동안의 한담이 끝난
후에, 영주가 업무를 이유로 저녁식사를 약속하고는 자리를 뜨자 실내에
는 두 여인만이 남게 되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짧고 할 얘기는 많은 것 같아요, 올리비아
양"
그녀가 손짓으로 하녀를 부르곤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의 숙소는 제 방의 바로 옆에 마련해 놨어요 목욕물을 데워 놓았
을 거예요 당신이 이 집에서 편안히 머물 수 있도록, 제가 하녀와 필요
한 몇 사람의 하인을 대기시켜 놓았으니 언제든 일을 시키도록 하세요"
올리비아는 이런 번거로움을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지만 일단 그
들의 친절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인도의 전통 풍습이 손님에 대해
이렇게 관대하게 호의를 베푸는 것이라면 그 법도에 따라야겠다고 생각했
던 것이다
올리비아를 위해 마련된 숙소는 향기로운 식물들로 채워져 있는 안뜰과
접해 있어 꽤 매력적인 정취를 자아내는 장소였다 백색 대리석 벽과 아
름다운 조각이 새겨진 천장, 아치형 창을 가진 실내의 곳곳에는 얼핏 보
아도 세심한 배려가 깃든 흔적이 역력했다
올리비아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욕조에 장미잎으로 향기를 낸 따뜻한
물이 채워진 걸 보고는 자신에 대한 환영이 기대 이상이라는 사실에 두렵
고 당황스러워졌다 여성 취향의 화려한 목욕가운과 비단 슬리퍼 등을 보
며 그녀는 이 모든 따뜻한 배려가 그녀 자신에게 주는 것인지 아니면 이
모부의 대리인으로서인지 궁금해지기까지 했다
목욕 후에, 그녀는 킨잘의 거실로 안내되어 간단한 다과를 나누며 다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이곳이 제 집처럼 느껴져서 참 편안해요"
올리비아가 킨잘의 배려에 감사하며 서두를 꺼내곤, 여행 중에 보았던
광경들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을 던졌다 그런 사소한 질문에도 정성을 다
해 답변해 주는 킨잘의 모습은 여러 면에서 그녀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날카로우면서도 고전적 아름다움을 가진 대부분의 벵갈인들처럼
이목구비가 뚜렷한 그녀는 특히 맑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어 올리비아를
무척 편하게 해주었다
올리비아는 자신이 지금 킨잘에 관해 관찰을 하듯이 그녀 역시 올리비
아를 세심히 관찰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정말 킨잘은 올리비아의 마
음속 깊은 곳까지라도 꿰뚫어보겠다는 듯이 그 큰 눈동자로 세심히 올리
비아를 응시하고 있었다
잠시 후, 하녀 하나가 점심식사 준비가 완료되었음을 알려왔다 킨잘은
이웃한 방으로 그녀를 안내하며 말했다
"당신이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몰라서 전부 인도식 식사를 준비했어
요 혹시 원하는 음식이 있으면 개의치 말고 말해 주세요"
"아뇨, 전 뭐든지 잘 먹어요"
올리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자이 라벤던과 우연히 함께 했던 인도식 아
침식사를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올리비아는 낮은 의자의 쿠션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는 전통적인 자
세로 식사를 시작했다 올리비아는 킨잘의 세심한 설명에 따라 코스마다
구분해서 사용하는 개인용 그릇을 이용해 인도 요리의 재미를 즐겼다 식
사가 끝난 후, 두 사람은 발코니의 시원한 그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대
화를 이어 나갔다
"미국인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무기를 잘 다룬다는데 그게 사실인가요?"
"우린 사냥을 위해서만 무기를 사용하는 건 아니에요 사막이나 광산촌
같은 무법지대를 여행하면서 무기없이 떠나는 미국인은 거의 없지요 농
장들이 민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소도둑떼들의 위협도 있구
요"
"소도둑이라고요?"
"예 밤에 소를 지키지 않으면 감쪽같이 잃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아
빠는 제게 어릴 적부터 사격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저의 아버지도 그러셨어요 인도 역시 우리 나름의 무법지대가 있거든
요 사실 저는 어릴 적부터 권총 다루는 법을 배웠어요"
올리비아는 권총을 쥘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섬세하고 작은
그녀의 손을 쳐다보았다 사냥이나 사격이 남자만의 영역으로 엄격히 구
분되는 인도에서 왕족의 후예가 사격을 배웠다는 것은 의외였다 더구나
킨잘은 자신이 권총을 다룰 수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 이상의 긍지를 갖고
있는 듯했다
"인도 역사 속에는, 침략자들에게 남편을 잃은 왕후나 공주들이 그들과
맞서 싸우기 위해 차드르를 벗어 던지고 전쟁터로 달려나간 경우가 아주
많아요"
심지어 섬약하게까지 보이는 킨잘이 불의에 대항해 몸을 던질 수 있다
고 말하는 대목에서 올리비아는 큰 감동을 받았다 섬세한 얼굴의 어디에
그런 단호함이 숨어 있는 것일까 올리비아는 그것이 어쩌면 인도 여인들
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신앙심에서 나오는 힘일지 모른다고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이었다
"자, 이제 당신의 집안에 대해 얘기해 줘요 올리비아 양, 전 당신의
집안이 농사를 지어 꽤 성공한 것으로 들었는데요"
"사실 미국에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일할 수 있는 땅이 있어요 저의
집의 경우엔 소를 기르죠 최근 들여온 번식력이 강한 버팔로란 이름의
소 이외에도 우리집의 낙인이 찍힌 소만 해도 수백 마리이니까요"
"그렇게 많은 소를 기르려면 인부들도 많이 필요할 텐데요"
"물론 그렇죠 우리도 꽤 많은 수의 소몰이꾼을 고용하고 있어요 아버
지가 여행을 자주 다니시기 때문에 그 모든 걸 감독하는 책임 중 많은 부
분이 제 몫이에요"
"당신의 아버님은 작가라고 하던데, 그분은 주로 무엇에 대해 쓰시나
요?"
"미국사회의 저변에 깔린 문제들, 즉 노예제도나 농장에서 열악한 근무
조건에 시달리고 있는 노동자들에 대해 쓰십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회
에 자각을 일깨우고, 보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사회문제를 풀어 나가도록
하시는 거죠"
아버지에 관해 말할 적마다 늘 그래왔듯이, 올리비아는 자부심에 차서
허리를 곧추세웠다
"아빠는 매사에 정의를 신봉하시죠 지금은 하와이에서 태평양 일대에
서 벌어지고 있는 많은 문제들을 취재하고 계시구요"
그녀의 일상에 대한 킨잘의 끝없는 호기심이 질문되어질 때마다 올리비
아는 가능한 한 성실히 답변해 주었다 물론 그녀는 그렇게 자신에게 깊
은 관심을 가져 주는 사람에게 집안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즐거웠지만 동
시에 이상스런 감정을 떨치기 어려웠다 뭐랄까, 킨잘이 마치 올리비아의
모든 것을 샅샅이 인터뷰한다고나 할까
발코니에서의 대화는 자리를 옮겨 울타리가 고르게 처진 산책로를 따라
걸을 때도 계속되었다 미국인들의 극히 사소한 일상사에서 정치제도와
경제상황에 이르기까지 킨잘은 마치 상식에 굶주린 것처럼 무수한 질문을
던졌다
한참 걷다 보니, 장미덩굴이 늘어진 꾸불꾸불한 숲이 나타났고 이어서
보리수나무 사이로 장중하게 건축된 신전神殿이 나타났다 올리비아의
시선이 신전 꼭대기로 고정되었다 거기엔 포트마우드 항에서 보았던 쾌
속선의 삼지창 기둥이 우뚝 서 있었던 것이다
"저건 무엇을 의미하죠?"
"그건 힌두교의 숭배자가 있는 곳엔 어디에나 있는 일종의 수호부적이
에요 원래는 시바의 무기인 트리슐로, 우리는 삶이 세 가지 힘으로 구성
된다는 믿음을 갖고 있어요 시바는 힌두교의 파괴신으로, 사람들은 시바
가 저 삼지창으로 세상을 파괴한다고 옛부터 믿어왔어요 그것이 바로 자
이 라벤던이 삼지창을 자신의 상징으로 삼은 이유죠"
올리비아의 뇌리에 폭발적인 충격이 부딪쳐왔다 두 사람 사이에 감돌
았으나 입밖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자이 라벤던의 실체가 킨잘에 의해 마
침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올리비아는 전율했고, 그 느낌
은 오래 갔다 그녀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가 파괴하려는 건 사물인가요, 아니면 사람인가요?"
"둘 다 아마 그는 끝내 자기 자신까지도 파괴하고 말 거예요"
누군가에게 이와 비슷한 말을 들은 것 같았으나 너무나 격렬한 감정에
휘말려 있느라 미처 생각을 정리할 수가 없었다
"자이는 내부에 억제될 수 없는 분노와 증오심을 키우고 있어요 그것
이 그를 세상과 영원히 떼어 놓고 있는 거예요 그는 다른 방식으로는 살
수도 없고, 아마 절대로 그렇게 살려고도 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가진 분노의 진정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이의 영혼 속엔 상상하기 힘든 파괴의 본능이 있어요 이것이 그의
이성을 점차 무너뜨려 악의와 증오로 나타나는 거예요 난 정말 그가 그
렇게 종착을 향해 무분별하게 달려나가는 걸 원치 않아요 그런데 올
리비아 양, 자이에게 관심이 있나요?"
이 질문은 마하라자가 했던 것과 똑같았다
"전 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어요 전 그를 아주 잠깐 만났을 뿐이에
요"
진정하려고 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마구 떨리고 있었다
"설령 당신이 백 번을 만난다고 해도, 그를 제대로 알 수는 없을 거예
요 남편이 그러더군요, 자이는 꼭 양파 같은 사람이라구요 그에 대해
이제 알겠다고 느낀 순간, 그는 뜻밖의 또다른 껍질로 돌변한다더군요"
킨잘이 웃었고, 올리비아 역시 씁쓸히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자이는 말
했었다 아무도 자신 이외의 사람을 진정으로 알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
는 법이라고
"매년 자이는 신성한 피의 맹세로 우리와 형제를 약속하지만 때때
로 그는 미친 사람 같아요 날 너무 놀라게 하거든요"
주술에 걸린 듯 이야기를 듣고 있었지만 올리비아는 내심 화가 났다
킨잘은 왜 내게 이런 이야기를 거리낌없이 하는 것일까 나에 대한 일조
의 경고일까 만약 그렇다면 무슨 이유에서인가
황혼이 깃들 무렵에 킨잘은 올리비아와 얘기를 나누느라 깜빡 잊고 있
던 신전에서의 저녁 의식을 지내기 위해 자리를 떠나야 한다며 양해를 구
했다 멀리서 조용히 그녀의 의식을 지켜보는 올리비아의 가슴엔 숱한 생
각의 조각들이 제멋대로 춤을 추고 있었다 신전의 꼭대기에 있는 삼지창
은 이미 어둠에 묻혀 보이지 않았지만, 자이가 파괴하려 하는 이 세상 모
든 것은 어둠 속에서도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
올리비아를 위한 저녁식사는 말할 수 없이 성대하였다 인도의 전통적
춤과 연주, 그리고 그 앞에서 벌어진 만찬은 이국의 정취를 한껏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마하라자 영주는 킬티나갈 궁에서 계획하고 있는 야심찬 계획과 구상에
대해 일일이 설명해 주었는데, 단 두 가지 문제만은 끝까지 거론하지 않
았다 석탄 문제와 자이 라벤던 이 두 가지 화제가 계획된 의도 아래 일
부러 빠진 것임을 그녀는 확신하고 있었다
만찬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마하라자 영주가 행복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냥을 위한 베이스캠프는 정글 안의 요지에 이미 설비되어 있습니다
해가 뜨기 전에 그곳에 도착하려면, 우린 새벽녘에 출발해야 해요"
킬티나갈 궁으로의 초대장을 들고 온 마하라자 영주의 시종이 이미 그
녀에게 사냥 계획을 전한 바 있었다 영주가 직접 호랑이 사냥에 참석할
것이며 가능하다면 올리비아도 베이스캠프까지 동행했으면 한다는 내용이
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미국의 황야에서 거침없이 성장했던 올리비
아는 자신의 내면에 자리한 야성이 불끈 고개를 드는 느낌이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올리비아는 브리짓트 부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던 것이다
내일 새벽에 사냥길에 나서려면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했으나 오늘 하
루 동안 벌어졌고, 보았고, 들었던 모든 일들에 의한 충격이 그녀를 쉽게
잠들게 할 것 같지 않았다
"저는 잠들기 전에 독서를 하는 습관이 있거든요 이모부님께서 말씀하
시기엔 영주님의 궁전에 많은 책을 소장한 도서관이 있다고 하던데 잠시
책을 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올리비아의 부탁은 마하라자 영주를 기쁘게 한 것 같았다 그녀는 마하
라자의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온갖 책으로 가득한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당신이 우리와 함께 있게 되어 진실로 기쁩니다 당신에게도 행복한
방문이 되길 바랍니다"
마하라자 영주가 이 말을 남기고, 올리비아가 맘껏 책을 볼 수 있게 배
려하고는 돌아갔다
습기를 머금은 황토 같은 아늑한 향기로 가득한 도서관에서 올리비아는
미끄러지듯 의자에 앉아 손이 가는 대로 책을 집어들었다 어학과 역사에
관한 책들이 주종을 이룬 엄청난 규모의 도서관 안에서 그녀는 문득 고향
의 셜리 멕켄드릭 도서관을 떠올리며 향수에 젖었다
그 도서관의 구석에 앉아서 얼마나 많은 희망으로 가슴을 태우며 청춘
의 한복판을 줄달음쳐 왔던가 책을 펼칠 때마다, 그 내용에 흠뻑 빠지면
서 무슨 일인가 금방이라도 일어날 듯싶은 충동에 마음 졸이던 때는 또
얼마나 많았던가
사실 그녀는 킬티나갈 궁에 도착한 이후부터 줄곧 무슨 일인가 일어나
길 기다리는 마음으로 부질없이 불안해 했었다 어떤 재촉감이 그녀의 둥
을 떠밀어 수없이 뒤를 돌아보며 그것이 무엇인지 보고자 했었다
옆방에서 11시를 알리는 괘종시계의 아득한 여음이 귓가에 울릴 때, 그
녀는 조용히 일어서서 의자를 단정히 정리하고 돌아섰다 바로 그 순간이
었다 독서에 빠져 있느라 하루 종일 그녀를 짓누르던 불안감으로부터도
꽤 멀리 벗어나 있던 그 순간, 멀리 떨어진 모퉁이에 그녀의 마음을 하루
종일 흔들어댔던 사람의 환영幻影 같은 희미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가슴을 감싸듯 팔장을 끼고, 입구에 놓인 책상 위에 기댄 채 비스듬히
서 있는 그가 처음 보였을 때, 올리비아는 애써 그것이 단순한 환영일 뿐
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끝내 입을 열어 그녀를 향해 말을 했
다
"왜 그렇게 놀라는 거죠?"
자이 라벤던! 올리비아의 가슴에 세찬 격랑이 휘몰아쳤다 그가 천천히
몸을 세우고는 다시 말을 했다
"내가 오리라는 걸 모르고 있었나요?"
"아뇨! 알고 있었어요"
그녀가 즉시 대답했으나, 의외의 대꾸를 내뱉은 자기 자신에 대해 적잖
이 놀라고 있었다
갑자기 모든 게 확연해졌다 죠수아 경이나 브리짓트 부인이 이 초대에
오지 못하도록 처음부터 못을 박은 마하라자 영주의 통고, 킨잘의 긴 설
명, 그리고 죠수아 경이 마하라자 영주의 비위를 맞출 천금의 기회
를 놓친 걸 안타까워하며 올리비아를 환송하던 일도 떠올랐고, 프레디 버
커스트의 초대장을 든 채 낭패해 하던 이모의 표정도 그 위에 겹쳐졌다
그렇다 이것은 자이 라벤던이 그녀를 다시 만나려고 배후에서 마하라
자를 조종한 것이 분명하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모든 것을 깨달았다
그가 그녀 곁으로 다가와서는 그녀가 보았던 책들 중의 하나를 집어들
며 물었다
"읽어 본 책 중에서 유익한 내용이라도 발견했나요?"
"예, 아주 많아요"
그녀는 침착해지려고 애쓰며 한 마디 더 덧붙였다
"훌륭한 도서관이에요"
"올리비아 양은 대단히 영특한 시림이군요 그저 대충 읽어 보고도 배
운 게 많다니"
올리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도대체 날 얼마 동안이나 지켜본 것일까
용수철처럼 튀어오르듯 올리비아가 재빨리 대꾸했다
"당신은 늘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누군가를 훔쳐보는 걸 매
우 즐기시는군요"
이렇게 거침없이 말을 하긴 했지만, 그녀는 자갈밭 위를 달리는 마차바
퀴처럼 뛰어대는 맥박을 느끼며 몹시 불안해졌다
"당신은 양심의 가책도 없이 무분별한 행동에 광분하는 사람 같아요"
"아마 그럴 거요"
그가 거리낌없이 대답하고는 이런 분위기가 꽤나 유쾌한 듯 말을 이었
다
"우리, 밖으로 나가는 게 어때요? 너무 답답하지 않나요?"
어리석은 짓인 줄 알면서도 올리비아는 불쑥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내일 있을 사냥에 함께 가실 건가요?"
"물론이죠! 나를 위해 당신을 초대한 마하라자 영주의 배려에 기꺼이
답례를 해야 하니까!"
"당신을 위해 나를 초대한 거라구요?"
올리비아가 가늘게 한숨을 쉬며, 서가書架 쪽으로 시선을 돌린 채 물
었다
"왜 그런 수고가 필요했는지 물어 봐도 될까요?"
이렇게 물으면서도, 마하라자나 그의 아내와의 대화를 통해서도 완전히
파악될 수 없었던 것들이 갑자기 하나의 확연한 실체로 다가오는 것을 느
꼈다
아무 대꾸도 없이 성큼성큼 앞서 걸어나가는 그를 따르려 올리비아는
매우 빠른 걸음걸이로 걸어야 했다 도서관을 나와 복도를 지나고, 어둠
이 깃든 밖으로 나와 정원을 가로질러 중간쯤 왔을 때, 그가 갑작스레 멈
춰서는 바람에 하마터면 두 사람이 마주칠 뻔했다 그가 조심스러운 음성
으로 말했다
"당신과 나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반된 계급 출신이에요 하지만
, 웬지 우리 사이엔 어떤 친밀감이 느껴져요 그러나 난 그런 친밀
함은 원하지 않기 때문에, 왜 그것을 느껴야 하는지 알고 싶은 겁니다
이것은 나를 아주 혼란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올리비아는 거의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온 뜻밖의
말들은 그녀의 깊은 곳에 헤아리기 힘든 큰 감명의 회오리를 일으켰다
"저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잘 안 가는군요"
"이해가 안 간다구요?"
그는 그녀의 거짓말에 더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대신 그가 혼잣
말처럼 중얼거렸다
"거 참 안됐군요"
올리비아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는데 그가 다시 중얼
거렸다
"우리는 정말 융화되기 힘든 정반대의 위치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당신은 저를 적으로 여기시나요?"
그가 대답도 없이 슬며시 외면한 채 다시 걷기 시작했다 기운 빠진 모
습으로 그의 뒤를 쫓는 올리비아는 아직도 감명의 회오리 안에 있었다
그가 뭔가 확실히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친밀함'이란 언어를 사용해 두
사람 사이의 현재 상태를 나타냈던 것이다 그렇다면 라벤던 역시 첫번째
만남 이후부터 줄곧 혼란의 느낌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일
까
인적이 끊긴 잔디밭을 가로질러 가는 동안 어떠한 접촉도 대화도 없었
지만 올리비아는 두 사람이 보이지 않는 끈으로 꽁꽁 묶여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소리 없는 의사소통과 드러나지 않는 감정의 통로가 이
어둔 밤에도 강력한 빛을 발하며 두 사람 사이에 놓여 있는 것이다
"포트마우드로 배를 보러 갔었어요"
불편한 침묵을 깨기 위해 그녀는 생각나는 대로 에스텔과 함께 보았던
그의 쾌속 범선에 대해 언급하였다
"다른 배들보다 훨씬 더 눈에 잘 띄더군요"
"혼자 왔었나요?"
"저의 이종사촌인 에스텔과 함께요"
"아, 에스텔 템플우드 말이군요"
파이프 담배를 꺼내들며, 그가 에스텔에 관해 별다른 언급없이 간단히
대꾸했다
"그런데 당신은 왜 시바의 삼지창을 상징물로 삼은 거죠?"
"그건 왜 묻죠?"
"그것은 당신을 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한 위협인가요? 당신을 그
들에게 드러내기 위한 또 하나의 살벌한 경고인가요?"
"둘 다를 의미할지도 모르죠"
"그건 당신이 남을 위협하는 행동을 즐기고 있다는 걸 의미하나요?"
자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올리비아는 잠시 그의 대답을 기다리다 그에
게 꼭 던지고 싶은 질문을 기어이 뱉어냈다
"그 공포가 오히려 당신을 먼저 두려움에 떨지 않게 했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당신은 당신의 적들을 이겨왔나요? 그들에게 쓰라린 패배를 안겨
줬나요?"
그는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그는 저만큼 나무가 우거진 곳으
로 걸어가더니 뭔가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게 보입니까?"
그가 가리키는 것은 섬뜩할 정도로 붉은색을 띠는 어떤 식물이었다
"야생버섯이죠 이것들은 특유의 발광체를 갖고 있어서 밤에도 빛을 발
하는 겁니다 놀랍죠?"
그는 인도의 야생버섯에 관한 아름다움과 서정성을 상세히 설명해 주었
다 그 순간, 올리비아는 새로운 것이면 아무리 사소한 발견이라도 곧잘
넋을 잃곤 하던 아버지를 떠올리며 자신의 내면에 대해서는 언제까지나
감추려고만 하는 이 양파 속 같은 남자의 중앙에 이르고픈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당신은 인도에서 교육을 받았나요?"
그가 어두운 하늘에 시선을 던지며 메마른 음성으로 말했다
"제도상으로나 내가 처한 환경으로나 학교문을 두드리기는 어려웠어요
모든 건 세상의 경험으로 대신했지요"
"그 경험이란 것도 인도에서였나요?"
"모든 곳에서 교육이란 제도는 세상의 어느 곳에서나 대개 비슷한 것
이니까요"
언젠가 그녀의 아버지는 말한 적이 있다 세상을 진실로 알게 하는 것
은 오히려 세상 그 자체라고 삶을 배울 수 있는 곳은 오히려 삶 그자체
이지 학교는 아니라고 학교는 다만 세상을 지나게 하는 차표 한 장에 불
과한 것이라고
어둠 속이었지만 그녀는 냉담하게 굳어 있는 그의 눈을 볼 수 있었다
그 눈빛은 그녀와 나머지 시간 동안 나란히 산책을 하고 숙소로 다시 돌
아오는 어둔 밤길 내내 변하지 않고 있었다
숙소에 가까이 다다르자 두 명의 하녀가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라
밴던이 나타나자 재빨리 몸을 숨기는 게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올리비아는 최소한 이곳에서는 라벤던과의 해후가 이모부 내외에게 보고
될 위험성은 없으리라는 걸 느꼈다
"엽총을 다루어 본 적이 있소?"
오랜 침묵을 깨고 그가 불쑥 물어왔다 눈빛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똑바로 쏠 줄은 알아요 목표물을 정확히 맞추었느냐 하는 건 그 다음
문제지만요"
그가 올리비아의 대꾸에 큰 소리를 내어 웃었으므로, 그녀는 짧은 시간
안에 어느새 따뜻해진 그의 눈빛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 다음
순간이었다 그가 갑자기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던 것이다
"당신은 부모님으로부터 아주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눈을 물려받았
소 누구든 그 눈을 보면 당황할 수밖에 없는"
그의 손은 차가웠다 그녀는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여전히 손은 그녀
의 뺨에 닿아 있었다
"엄마는, 그분은"
그녀의 목소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작아져갔다 그의 손이 올
리비아의 뺨에서 조심스럽게 머리 쪽으로 옮겨갔다 풍성한 그녀의 머리
칼 속에 손을 묻으며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올리비아, 당신은 대단히 상처받기 쉬운 영혼을 가진 여성이오 난 그
걸 알 수 있소"
"저 역시 당신이 나비의 날개보다도 더 연약한 날개짓으로 세파를 헤쳐
나가고 있다는 걸 알아요 당신은 스스로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남자인
체하지만, 전 그렇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어요"
그가 한숨을 길게 쉬며 손을 떼더니 갑자기 돌아서며 떨리는 음성으로
간단히 한 마디를 남겼다
"당신 때문에 혼란스러운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인가 보군 좋은 밤 지내
길"
올리비아는 미동도 하지 않고, 어둠 속을 똑바로 응시한 채 한참 동안
서 있었다 몸도 마음도 모두 감각을 잃었으며 세상마저도 온통 정지되어
있는 듯싶었다 그러면서도 온몸을 불안에 떨게 만드는 그의 손끝의 감촉
만은 낙인처럼 그녀의 뺨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어쩌면 그 순간의 자이 라벤던은 그녀 삶의 궤도를 변경시키고 있었는
지도 모른다 그녀를 23년 동안 온전히 평온케 하던 삶의 궤도가 그의 존
재로 인해 마치 휘몰아치는 바람에 흔들리듯 안정감을 잃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지상에서 오직 한 사람밖에 없었다 그는 바로 야성
적인 본능의 소유자인 자이 라벤던이었다
마하라자 영주 일행이 베이스 캠프로 사용할 오두막집은 정글 속 깊은
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이른 아침 막 떠오른 눈부신 아침해가 대자연을
생동감 있게 연출해 내고 있었다
무장 기병대가 올리비아와 킨잘이 탄 마차를 호위했고, 사냥에 참가할
남자들은 처음부터 말을 탔다 마하라자 영주와 라벤던은 총과 화약, 그
물 등 사냥도구를 챙기느라 여념이 없었는데 그녀는 되도록 그들과 시선
이 부딪치지 않도록 애를 썼다
정글에 다다를 무렵, 영주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인사의 말을 해왔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사냥이 끝나면 멋진 시간을 만
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녀의 존재를 거의 의식하지 않는 것 같은 라벤던에게 힐끗 고개를 돌
리면서 그녀가 말했다
"여행은 아주 편했어요 물론 말을 타는 것보다야 못하지만요"
"이해하십시오, 올리비아 양 당신에게 말을 타게 할 수는 없어요 저
의 백성들은 보수적이라 말을 탄 여성을 보는데 아직 익숙지 않거든요"
그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듯이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
를 끄덕였다
아침식사가 끝난 후에, 킨잘이 그녀에게 다가와 말하기를 자신은 직접
정글에 갈 수 없으므로 베이스 캠프에 남아 있겠다고 했다 올리비아는
자신도 그녀와 함께 남겠다고 고집했으나 그것은 마하라자 영주에 의해
거절되었다
"몇 명이 사냥에 참가할 거죠?"
"여덟 명입니다 두 마리 코끼리에 두 명씩, 그리고 도보로 네 명이
죠"
자이는 마하라자 영주와 함께 탈까?
코끼리 등 위에 설비된 상교象轎는 편안하게 올라 앉을 수 있게 되어
있긴 하지만 두 사람의 프라이버시를 완벽하게 보장해 줄 정도로 넓은 공
간이 아니기 때문에 그녀는 그가 제발 영주와 함께 타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이런 소망은 출발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리고 거대한 코
끼리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이미 깨어져 있었다 마하라자 영주
를 실은 코끼리가 킬티나갈 성의 깃발을 펄럭이며 앞서 걸어 나갈 때, 그
녀는 영주 옆에 앉은 청년이 전형적인 무사 복장을 한 킬티나갈의 병사인
것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자이가 당신과 함께 타고 가겠다고 했어요"
망연해 하는 그녀의 귓가에 킨잘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녀의 표정에 석
연치 않은 빛이 감돌자 킨잘이 얼른 덧붙였다
"당신은 그가 싫은가요?"
올리비아의 두 뺨이 붉게 물들었다 이 여인은 내가 그를 싫어한다고
말하길 원하는 것일까 아무튼 그녀는 자이가 타고 있는 코끼리 쪽으로
걸어갔다 막상 가까이 다가가서 바라본 코끼리는 너무 엄청난 체구여서
그 위에 있는 자이가 손을 뻗어 그녀를 잡아 올리려 할 때, 그대로 그의
손을 잡지 못하고 잠시 버둥거려야 할 정도였다
장엄한 의식의 행렬이었다 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곳으로 천천히 나아
가는 두 마리의 코끼리와 앞뒤로 두 명씩 걸어가는 장대한 체격의 병사가
이 행렬의 전부였지만 모든 사람의 눈엔 비장한 빛이 가득 넘치고 있었
다
정글의 무수한 나무 잎사귀 사이를 뚫고서 멀리서 북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마하라자 영주의 병사들이 이미 선발대로 정글 깊숙이 들어가 호
랑이를 영주가 있는 쪽으로 몰고 있는 것이었다
라벤던은 때때로 눈을 가늘게 뜨고서는 라이플 총을 앞쪽으로 겨냥한
채 침묵을 지키며 앉아 있었다 그의 갈색 손은 무척 억센 듯 보였지만,
놀랍게도 손가락은 매우 섬세하게 생겼다 그를 훔쳐보는 게 스스로도 싫
었지만, 그녀는 그대로 계속 그를 쳐다보며 어젯밤 자신의 뺨을 어루만졌
던 손을 떠올렸다 한번의 몸짓과 아주 짧은 순간의 접촉 그럼에도 그녀
는 밤새 잠들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왜 결혼을 하지 않았죠?"
올리비아는 예상할 수 없는 순간에 예기치 않은 질문을 불쑥불쑥 던지
는 그의 태도에 이제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저의 이모님과 똑같은 소리를 하는군요"
"질문에 대답을 듣고 싶은데요"
"그 대답을 할 의무가 제겐 없을 텐데요"
"아니오, 당신에겐 대답할 의무가 분명히 있소"
"그건 왜죠?"
"그건, 내가 그걸 알고 싶기 때문이오"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터뜨리며, 올리비아가 한 옥타브 올라간 목소리로
또박또박 대답해 주었다
"결혼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결혼하지 않았어요 대답이 되었나요?"
"미국 청년들은 혈기왕성하고 적극적이어서 당신처럼 아름답고 적령기
에 있는 여자를 그대로 놔둘 리가 없을 텐데, 혹시 정혼한 남자라도 있
소?"
그의 날카로운 눈이 올리비아의 얼굴에 퍼져 나가는 홍조를 놓치지 않
고 주목하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 의미를 알기 어려운 미소가 번지는 걸
무시한 채 올리비아가 재빨리 물었다
"미국에서 오래 살았나요?"
"그렇소"
"그곳에서 뭘 했죠?"
이 질문에 대하여 그가 아주 간단하게 대답을 해서 그녀를 조금 놀라게
만들었다
"많은 것들을 했소 일하고, 배우고, 돈도 벌었소"
"무엇을 배웠죠?"
사냥의 제1원칙은 신중한 자세와 침묵, 그리고 예리한 시선이다 그래
서 그들은 아까부터 속삭이듯 이야기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배운 게 무엇
이냐고 묻는 올리비아에게 그가 다소 거만하게 대꾸했다
"내게 그곳에서 무엇을 배우지 않았느냐고 묻는 게 더 좋을 거요"
"그럼 당신은 미국에서 무엇을 배우지 않았나요?"
"나는 미국 대통령이 되는 법을 배우지 못했소"
"그건 왜 하지 않았나요?"
"그것은 단지 내가 해볼 마음을 먹지 않았기 때문이오 만약 하려고 했
다면, 난 반드시 했을 거요"
그가 숲을 향해 싱긋 웃었다
"난 반드시 승리한다는 말을 당신에게 이미 한 것 같은데, 기억하나
요?"
자만심으로 꽉 찬 등을 꼿꼿이 세운 채, 그가 하늘을 향해 웃었다 올
리비아가 그의 오만함을 향해 뭔가 한 마디 해주고 싶어 막 고개를 돌려
입을 여는 순간, 그가 갑자기 정글 어딘가를 향해 황급히 시선을 던지며
긴장한 태도로 입을 다무는 걸 보고 그녀 역시 정면을 응시하였다
바로 조금 전에 야생의 정글을 뒤엎어 버릴 듯한 광란적이고 급박한 북
소리가 울려 퍼졌었다 그러나 이제 정글은 삽시간에 바닷속 같은 침묵으
로 가라앉아 버렸다 숨막히는 듯한 긴장의 시간이 고무줄처럼 팽팽하게
그들 모두의 신경을 묶어 놓고 있었다
잠시 후에, 정글 안쪽으로부터 천지를 삼켜 버릴 듯한 맹수의 포효가
들려왔다 호랑이들이 최후의 무덤으로 찾아 들어오는 포효인 것이었다
올리비아의 심장 박동이 급속도로 빨라졌다 자이가 반쯤 일어서서 재
빠른 동작으로 무기를 재점검했다 그의 권총집에 들어 있는 신형 리벌버
총을 힐끗 보며 올리비아는 이제 거의 생존의 가망성이 없어진 야수에 대
해 연민을 느꼈다
몰이꾼들은 이제 더이상 북을 칠 필요가 없었다 네 명의 병사가 창을
던질 모든 준비를 마치고서 호랑이가 접근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두
마리의 코끼리는 긴장한 채 사냥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올리비아의 긴장은 거의 극에 달하고 있었다 침을 삼키는 소리조차도
세상의 모든 새벽을 깨울 수 있을 만큼 크게 들렸다 야수들의 최후의 발
악에 대해서는 이미 들어 알고 있었으므로, 지금은 잠시도 긴장을 풀어서
는 안 될 시간이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한동안 정글은 침묵의 바다 그대로였다 호랑이
들이 분명히 그들이 있는 쪽으로 달려왔는데도, 꽤 많은 시간의 경과에도
불구하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들은 기다렸다 그리고 그 기다림은 20분 정도 지나자 마침내
끝이 났다 영원히 움직이지 않을 듯싶던 목표물이 천천히 행동을 개시했
던 것이다 호랑이는 주의깊게 몸을 세우더니 주르르 미끄러지듯 걸어 나
오기 시작했다 엄숙하리만치 완전한 위용을 드러냈을 때, 지축을 흔드는
총소리가 들렸다 첫방아쇠를 당기는 것은 매번 마하라자의 특권이었으므
로 그가 호랑이의 심장을 향해 첫발을 쏘았던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총알은 호랑이에게 치명타를 입히지 못했다 분노한
호랑이가 정글이 흔들거릴 정도로 포효하는 순간, 영주의 탄식도 함께 터
져 나왔다
"제기랄!"
거의 동시에 또 한발의 총성이 정글에 울려퍼졌다 이번에는 자이였고,
이번의 발사는 거구의 짐승을 명중시켰다 그가 재빨리 재장전을 하며 한
번 더 겨냥을 하는 순간, 호랑이는 어느새 바위 뒤로 잽싸게 몸을 숨겼
다
"내가 놈을 놓치다니, 제기랄!"
자이가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호랑이가 분노의 포효를 계속하며 고통
에 몸을 뒤척이다가 다시 뛰쳐 나왔다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 눈앞에
전개되는 걸 보며 올리비아는 상교 안의 손잡이를 잡고 사시나무 떨듯 덜
덜 떨고만 있었다
그때였다 아까부터 기회를 엿보고 있던 건장한 체격의 병사 넷이 거의
동시에 호랑이에게 예리한 창을 던지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창은 눈깜짝
할 사이에 호랑이의 몸을 꿰뚫었고, 고통에 못 이긴 호랑이는 다시 덤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올리비아는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반쯤 절규에 가까운 소리를 내다가
자신의 입을 손수건으로 틀어막았다
"단단히 잡아요! 코끼리가 언제 날뛸지 모르니까!"
그러나 이미 코끼리의 행동은 시작되고 있었다 흡사 나팔 소리 같은
이상한 괴성을 내며 두 마리 코끼리가 호랑이 쪽으로 달려 나갔다 두 마
리 코끼리들의 포위를 받고 있는 호랑이는 이제 총구로부터 불과 몇 피트
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올리비아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 그녀를 절망스런 시
선으로 응시하는 거대한 동물의 머리가 눈에 들어왔기에 그녀의 모든 감
각은 거의 마비되어 버린 듯했다 그때였다 라벤던의 목소리가 굳어 버
린 그녀의 귓전을 때렸다
"이제 당신이 정말 총을 쏠 수 있는지를 내게 보여 줄 차례요!"
공포 속에서, 그녀는 자이 라벤던을 노려보았다 미쳤어요? 그녀가 이
글이글 타는 시선으로 이렇게 묻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계속해서 말
했다
"빨리!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거요?"
라벤던이 거칠게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고는 다른 손으로는
재빨리 권총을 뽑아들었다 코끼리가 계속 움직이는 바람에 상교 안의 두
사람은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그의 움직임은 놀랍도록 민첩
했고, 그녀의 등이 그의 가슴에 밀칙돼 있는데도 조금도 부자연스런 동작
이 아니었다 그가 권총을 올리비아에게 건네 주며 냉정히 소리쳤다
"자, 이제 녀석의 앞머리 부분을 겨냥해요"
주저하면서, 그리고 두려워하면서 그녀는 몸을 움츠렸다 그의 시선이
차갑게 그녀를 재촉하는 게 느껴져왔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을 간신히
들어올려 고통에 차 몸부림치고 있는 호랑이를 겨냥하였다
"빨리 방아쇠를 당겨요!"
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호랑이를 향해 한 발의 총알을 발사
하였다 즉각적으로 조그만 공포감이 일었고, 눈앞이 캄캄해져 왔다 그
녀는 자기가 호랑이를 명중시키지 못했으리라고 생각하며 힘없이 권총을
떨어뜨렸다
그러나 곧 그녀는 호랑이의 두 눈 사이에 박힌 구멍에서 선혈이 쏟아지
는 것을 보았고, 절망의 눈빛을 허공에 던지며 짐승의 거대한 머리가 푹
꺾이는 것도 보았다
그러나 아직 정글 안의 혈투는 끝난 게 아니었다 갑작스런 총성에 놀
란 코끼리가 미친 듯이 내달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상교 안에
뒤얽힌 채 나동그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한동안 그들은 팔과 다리가 뒤얽
힌 상태 그대로 질주하는 코끼리의 등 위에 있었다 엄청난 속도감, 그리
고 충격적인 흔들림, 여기다 어디선가 풍겨 오는 피비린 내 모든 게
뒤죽박죽이었고, 그녀가 정신을 잃은 건 그 직후였다
깨어났을 때, 그녀는 나무 밑의 카펫 위에 누워 있었다 사방은 조용히
정리돼 있었고, 그녀로부터 얼마쯤 떨어진 곳에서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빙 둘러서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녀는 머리를 들어 하녀가 건네 준 물을 마시고는 눈을 깜박였다 폐
속으로 들어오는 신선한 공기를 느끼는 순간, 자이의 걱정스런 눈빛이 시
야에 들어왔다
"괜찮소?"
올리비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 잔의 물을 더 요구했다
"당신은 기절을 했었소"
그의 음성이 무척 부드럽게 느껴졌다
"호랑이는 죽었나요?"
"훌륭했었소!"
그가 춤을 추고 있는 군중들을 가리키며 또 말했다
"저 사람들은 당신의 용맹성을 칭송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 거요"
그의 눈빛 또한 너무 부드러워서 그녀는 잠시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그
때 영주가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며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로 말했
다
"훌륭한 사격솜씨였어요 정말 훌륭해요, 올리비아 양"
그녀가 뭔가 변명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억지로 입을 여는 순간, 자이
가 재빨리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저길 봐요, 올리비아!"
살아 있을 적 모습만큼이나 눈부신 호랑이의 거대한 몸체가 풀밭에 함
부로 누운 채로 있는 게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노랗고 검은, 그래서 더
욱 아름다워 보이는 호랑이의 비참한 최후를 보며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동정심이 일었다
"당신의 눈물을 호랑이 때문에 낭비할 필요는 없소 수많은 마을 주민
이 저 녀석에게 희생되었으니까"
자이의 설명에 마하라자 영주가 동의의 뜻으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올리
비아에게 보냈다
베이스 캠프로 돌아오자, 잔치는 더욱 성대해졌다 마하라자는 매우 기
쁜 듯 더 크게 술잔치를 벌였고, 몇몇 흥분한 마을 사람들이 올리비아와
자이에게 화환을 씌우고는 그들을 에워싸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자이는
그녀가 당황해 하고 뭔가 계속 변명하고자 하는 표정을 즐기기라도 하려
는 듯 싱글싱글 웃으며 말없이 서 있기만 했다
마을 사람들과의 파티가 끝난 후에도 올리비아와 자이, 그리고 영주 내
외를 위한 파티는 베이스 캠프 안에서 계속되었다 식사를 하고 술을 나
누며, 대부분의 시간은 사냥에 관한 얘기로 채워져 분위기는 매우 편안했
다 갑작스런 탈진상태에서 회복된 지 얼마되지 않는 올리비아도 이런 분
위기에 휩쓸려 간간이 모험담을 털어 놓을 수 있었다
그런데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마하라자가 갑자기 자이에게 말했다
"자이, 왜 그렇게 급히 돌아가려고 하는 거지? 내일 아침에 출발을 하
면 안 되겠나? 난 자네와 오늘밤에 할 이야기가 많아"
자이가 단호히 머리를 저으며 대답했다
"안 됩니다 캘커타에서 나를 기다리는 아주 중요한 문제들이 있습니
다"
영주가 눈살을 찌푸리면서 그 문제의 내막을 캐어물었으나 자이는 다만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올리비아는 그제서야 그가 한 시간 안에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뜻밖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슬픔의 뭉게구름이 억제하
지 못할 빠른 속도로 가슴속에서 퍼져 나가고 있었다
한 시간 뒤, 올리비아는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의 갈피를 겨우 추스르면
서 베이스 캠프 아래쪽 마당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한편으로는 그의 존재에 대해 부인할 수 없는 불편함을 느
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이렇게 불시에 떠난다는 사실에 실망을
느끼고 있었다
정말이지 내가 원하는 실체는 무엇인가 그녀 스스로도 해답을 제시하
지 못하는 이 물음 때문에 그녀는 주체하기 힘든 곤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바람이 부는대로 움직이는 바람개비처럼 변화무쌍한 그 남자에
게 매력을 느끼고 있는 자신을 보며, 자기가 헤어나기 힘든 미로 속에 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모든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안개바다와도 같
이 희미해서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것 투성이였다
불가능해! 그녀는 그에게 매료되고 있는 자기 자신을 향해 얼마나 많이
이렇게 중얼거렸는지 모른다 그렇다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이모부, 이
모, 그리고 수자타의 얼굴이 뇌리에 스쳤고 그의 오만함과 세상에 대한
복수심이 떠올랐다 그렇다 그에게 쏠리는 마음의 고삐를 하루 빨리 다
른 방향으로 돌려야만 해
그러나 이런 생각과는 상관없이, 마당에서 그가 떠나기 위한 준비가 모
두 완료되었다고 느꼈을 때 그녀는 그의 출발 모습을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우습게도 아래쪽으로 달려 내려갔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여전히 생각하였다 그의 출발을 조금이라도 지연시
키기 위해 의미도 없는 말을 주고받고, 그를 한번 더 보려고 서두는 이런
마음은 어떤 의미에서는 먼 후일 언젠가 아픔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었다
그녀가 밖에 나가자, 때마침 한 발을 들어 말을 타려던 그가 동작을 멈
추고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
"듣기로는, 올리비아 양의 가족 모두가 프레디 버커스트의 초대를 받아
발락폴을 방문할 계획이라는데"
"그런 얘기가 있었어요 이모님은 이모부님에게 휴식이 필요하다고 느
끼고 계시니까요"
"하지만 당신은 그들과 함께 거기에 가고 싶지 않잖소?"
그의 말은 정곡을 꿰뚫고 있었지만, 그녀는 순간적으로 그의 폭력과도
같은 확언을 부인하고 싶었다
"아뇨! 난 가고 싶어요 도대체 왜 내가 원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가고 싶다구요? 좋아요, 하지만 당신은 그 친구에게서 항상 멀찍이 떨
어져 있어야만 해요 그 프레디 버커스트에게서!"
그의 매서운 눈빛을 피하지 않고 응시하며, 그녀가 차갑게 내뱉었다
"당신은 그를 비난할 아무 권리가 없어요 그런 무례함이야말로 바로
내가 당신에게 화를 내는 이유란 걸 알아야 해요"
그가 피식 웃었다 그러면서 아주 가볍게 말을 받았다
"글쎄, 만일 말이오, 만일 당신이 발락폴에 가고 싶지 않다면, 가지 않
아도 돼요 그건 내가 약속하지!"
올리비아는 놀라움에 입을 벌린 채, 사라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망연히
노려볼 뿐이었다
그날 밤 늦은 시간, 그녀는 육체적, 정신적 피로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역설과 혼돈 속에서 되도록 현실을 직시해 보려고 애를 썼다
그렇다 그에 대한 나의 호기심은 결코 이론적으로 따져질 것이 아니
다 그에 대한 나의 호기심은 단순히 그가 비정상적인 차원의 사람이어서
가 아니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우리 두 사람에겐 눈에 보이지 않는 어
떤 유사함, 어떤 의미의 유대감이 있는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는 그가 자신의 영혼을 뒤흔드는 열렬한 매력이
있는 남자임을 부인할 수 없었다 이모부의 적개심에 가까운 악평에도 불
구하고, 그가 이미 거부하기 힘든 커다란 그림자로 그녀의 내면을 장악해
버린 것도 부인할 수 없었다
"제게 그 사람에 대해 말해 주세요"
늦은 밤이었지만, 그녀는 하녀를 통해 킨잘과의 면담을 요청했고, 킨잘
은 올리비아가 말하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되묻지 않았다
"그렇게 하죠 어느 누구보다도 당신은 알 권리가 있으니까요"
"왜 그런 말을 하죠?"
"왜냐하면 그건 자이가 당신에게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 관심은 쉽게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또 자주 일어나는 것도 아니에
요"
그녀는 짧게 한숨을 쉬다 올리비아에게 속삭이듯 덧붙였다
"하지만 그에 관해 알게 됨으로써 당신은 커다란 보상을 강요받게 될지
도 몰라요"
그녀의 커다랗고 파르스름한 눈동자 안에는 연민의 빛이 가득했다 그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상'은 또 무엇을 뜻하는지 물어 보기에 앞서
서 올리비아는 다른 고려들은 불필요하다는 듯이 간단히 말했다
"어쨌든 그에 대해 말해 줘요 전 그의 모든 걸 알고 싶어요"
올리비아의 조급함에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는 하녀를 불러 카펫
과 쿠션을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할 이야기가 많은 시간을 요할 만큼 길
기 때문이었다
마하라자 영주의 부친은 킬티나갈 성의 황제와도 같은 신분임에도 민심
의 동태와 생활상을 알아보려고 자주 신분을 숨기고 서민들 틈에 끼어 지
냈다 때로는 산간벽지를 여행하기도 하고, 간혹 허름한 옷을 입고 도시
를 배회하기도 하면서 거기서 얻은 지혜를 정치에 반영하곤 했던 것이다
하루는 여행길의 피로함을 풀기 위해 어느 초라한 여관에 머물게 되었
는데, 그곳에서 그는 우연히 식당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 소년 하나를
보게 되었다 그 소년은 남루한 옷차림에다 몸도 매우 쇠약해 보였지만
무척이나 부지런하고 진실한데다가 어찌나 맑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는
지 단박에 관심을 끄는 것이었다
혼혈아라 그다지 호감을 주는 인상은 아니었지만, 소년에겐 이상하게도
사람을 잡아끄는 무엇이 있었다 뭐랄까, 표정 속에 수많은 사연을 담은
듯한, 그리고 맑은 눈빛에도 불구하고 타인에 대한 이유를 알 수 없는 반
항심 같은 것을 소년은 갖고 있었다
영주가 소년을 불러 이름을 물었지만, 그 아이는 마치 이 간단한 질문
에도 큰 모욕을 받기라도 한 듯이 굳은 표정을 짓더니 마지못해 대꾸하는
것이었다
영주는 소년의 태도와 그애가 처한 비천한 환경에 대한 동정심으로 동
전 한 움큼을 주었는데, 이에 대해 소년은 즉시 눈살을 찌푸리며 동전을
땅에 내던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때 소년이 내뱉은 대답은 영주에게 충격
을 안겨 주었다
"제가 일하지 않은 돈은 받지 않습니다 전 거지가 아니니까요"
자신의 삶조차 제대로 영위해 나가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그토록 강한
자존심을 찾아보기는 어려운 일이었기에 소년의 오만함은 감동과 충격을
주었다 이 어린 소년의 어디에서 이런 독립적인 오만함이 나오는 것일
까 또 이 소년의 무엇이 그토록 강한 자아를 만드는 것일까
그날 이후 영주는 자주 그 여관에 머물며 소년을 눈여겨보았다 심지어
그는 소년의 신임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몇 달이
지난 후에야 소년의 태도는 차츰 부드러워졌고, 둘 사이에는 우정 같은
정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좀체로 웃지 않았으며 자신의 출생에 관한
얘기도 결코 하는 법이 없었다
그 대신, 소년의 이야기는 거의 바다와 배, 그리고 드넓은 세상에 관한
것들이었다 영주가 킬티나갈에서의 취직이나 학교교육 등을 제의해도 소
년은 매번 거절했다
"그럼 넌 뭘하고 싶은 거지? 평생 이렇게 접시나 닦으며 살 예정은 아
니겠지?"
그러자 소년은 평상시의 얼버무리는 답변 태도와는 달리 확신에 찬 대
답을 하는 것이었다
"전 이 세상에서 제일 부자가 되고 싶어요 그리고 언젠가는 꼭 그렇게
될 거예요"
"대단한 야망이로구나 하지만 그 야망을 이루기 위해 최소한의 시작은
해야지"
"전 벌써 시작했습니다"
"그래? 하지만 실제로 좀더 나은 삶을 영위하려면 능력의 개발이 필요
하지 않겠니?"
"저에겐 손과 머리라는, 꽤 성능이 좋은 장비가 있어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소년이 두 눈을 빛내며 또박또박 뱉어내는 대
답에는 뭔가 거부하기 힘든 설득력과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 마력 같은
게 있었다
소년은 이 말과 함께 매우 신중하게 한 마디 더 덧붙였다 그때의 소년
의 모습은 마치 전혀 다른 시간대로 옮겨 놓은 것처럼 낯선 표정이었다
단호하고 확신에 찬, 심지어 입고 있는 남루한 옷차림마저도 유별나게 보
이는 그런 모습이었던 것이다
"저는 제 목표를 실현시키는데 제 모든 생을 바칠 거예요"
영주는 또한 이 말을 뱉은 직후의 소년의 얼굴에 이상하리만치 노골적
인 증오가 가득한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애의 증오와 원한을 주의깊게
보면서 영주가 계속 질문을 던졌지만, 소년은 더이상의 말을 회피한 채
고개를 돌리는 것이었다
영주가 다음 기회로 질문을 미루고, 두 달쯤 후에 다시 그 여관에 갔
을 때는 이미 소년이 자취를 감춘 뒤였다 여관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그
소년이 어디론가로 밀항했다는 소문의 편린만 영주에게 전할 뿐이었다
킨잘의 긴긴 이야기가 끝났다 올리비아는 쿠션에 비스듬히 기대어 맑
은 하늘 가득히 흐르는 은하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흐르는
눈물 때문에 아름다운 은하수를 볼 수 없었다
"그후에, 여러 해 동안 자이에 관한 소식을 들은 사람은 없어요 자이
역시 인도엔 자신의 소식을 전할 친척이 있지도 않았대요 그러다 아버님
이 몇 년 후에 돌아가셨으니 자이에 대해서, 그리고 두 사람 사이의 기이
한 우정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이제 한 사람도 없이 모든 사연이 세월의
흐름 속에 묻혀 버리고 말았던 것예요"
그후 킬티나갈의 영주가 된 마하라자는 아버지에게 그 소년에 대해 들
은 바가 있긴 하지만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고, 그나마도 세월이 자이에
대한 기억마저 흐리게 만들어 버렸다
다시 세월이 흘렀다 어느날, 여관의 늙은 하인에게 한 젊은이가 찾아
와 12년 전의 일을 말하며 그때 자신에게 그토록 친절했던 노인이 누구인
지를 물었다
그 젊은이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자이 라벤던이었고, 그는 늙은 하인의
또렷한 기억력으로 인해 마하라자에게 안내될 수 있었던 것이다
마하라자 영주는 자신의 희미한 기억 속에서 간신히 되살려낸 접시닦기
소년의 이미지와 지금 눈앞에 보이는 나무랄 데 없는 신사의 모습을 하나
로 묶어내는 데 다소 시간이 걸렸지만 그가 의심할 바 없는 자이 라벤던
이라는 사실에는 확신이 섰다
사치스럽다 할 정도로 잘 차려입은 옷차림, 능숙한 신사도, 그리고 외
국풍의 자신감 넘치는 행동이 마하라자 영주의 주목을 받지 않을 수 없었
고, 라벤던도 고단하고 메마른 삶 속에서 유일하게 자신에게 친절했던 노
인의 아들 마하라자에게 호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후 그들은 절친한 친구가 되었지요"
지금껏 장황한 설명을 한 사람은 킨잘이었는데 목이 바싹 마른 쪽은 올
리비아였다 자이가 걸어왔을 그 험난한 삶의 여정을 짐작하는 것만으로
도 이미 그녀의 가슴을 짓이겨 놓는 것 같았다 그가 부딪쳤을 세상의 많
은 장벽들이 얼마나 수없이 그를 아프게 했을 것인가 그가 빠져 허우적
거렸던 세상의 많은 함정들이 얼마나 악랄하게 그의 발목을 붙잡았을 것
인가
"그의 아버지는 누구인가요?"
"우리는 몰라요 자이가 우리에게 말해줄 리가 없구요 소문에는, 다만
영국인 선원이였다고 해요 하지만 누구도 그가 누구인지 확실히 알지 못
해요"
"그럼 그의 어머니는 누구죠?"
그녀가 주스로 목을 축이며,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를 진정시키려 했지
만 킨잘은 이미 그녀가 깊은 충격을 받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자이의 어머니는 산간지방에서 온 원주민이었다고 해요"
"그분은 돌아가셨나요?"
"언젠가 제 남편이 그걸 자이에게 물은 적이 있는데, 그가 매우 화를
내며 다시는 그런 질문을 하지 말아 달라고 하더래요 그후, 다시는 그
문제를 거론할 수 없었던 거죠"
전부는 아닐지라도, 아주 조금은 그의 고집을 이해할 것 같았다 그런
그의 고집이야말로 과거뿐만 아니라 오늘의 자이를 지탱케 하는 거의 유
일한 힘일 것이다
"그는 미국 쪽으로 밀항을 했었나요?"
"두 번쯤 세계일주를 했다고 해요 그때 항해술을 배웠구요 그가 언젠
가 말하더군요 자신을 진정한 남자로 만든 곳이 바로 미국이라구요 보
스턴 상인이 그를 종업원으로 고용했는데, 그가 하도 열심히 일하자 결국
동업자로 삼았대요 그 상인의 이름이 바로 라벤던이었다고 해요"
"라벤던?"
"그래요 그때까지도 자이는 아버지의 성과 이름을 알지 못했기에 '자
이'라는 이름 하나로 살아왔던 거죠"
묵직한 무엇이 목젖을 건드리는 것 같았다
"'자이'는 승리자란 뜻이죠 당신은 그가 승리자가 되는 것 이외에는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는 사람이란 걸 알아야 해요 그것은 그조차도 감
추지 않는 내부의 강박관념이기도 해요"
"그가 어렸을 때 말한 그 '목표'란 것은 실현되었을까?"
"그건 아직도 여전히 비밀스런 부분으로 남아 있어요 자이는 농담처럼
그 문제는 다 잊었다고 말하지만"
"당신은 그 말을 믿으시나요?"
"아뇨 만일 그 목표가 실현되었다면, 그가 여전히 그렇게 광기와 분노
를 가지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요"
킨잘이 쿠션에 기대었던 몸을 일으키며 갑자기 한숨을 뱉었다
"난 올리비아가 걱정돼요"
"무슨 뜻이죠?"
올리비아가 반짝이는 두 눈을 크게 뜨며 젖은 눈망울로 물었다
"올리비아, 내가 지나친 걱정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난 우리의
우정을 생각해서 자이 라벤던이 위험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당신에게 알릴
의무를 느껴요"
모든 사람이 그런 말을 했었다 이모부도, 마하라자 영주도, 심지어는
에스텔조차도,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자이 라벤던 자신조차도
"그러나 내 말은, 영국인들이 그를 위험한 존재라고 느끼는 것과는 사
뭇 달라요 그는 어떤 일도 서슴지 않는 사람이에요 더구나 그에겐 수많
은 여자들이 있어요 그는 한결같이 그 여자들을 육체적 만족을 위해 이
용할 뿐이죠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나요?"
고개를 끄덕이는 올리비아의 가슴 한쪽에 큰 구멍이 뚫리는 것 같았고
그 구멍으로 찬바람이 서슴없이 들이치는 느낌이었다
"하기는, 자이만을 책망할 수는 없겠죠 그는 부자이고, 매력적인 남자
니까요"
"수자타처럼요?"
이 이름을 입에 담으면서, 올리비아는 순간적으로 자존심이 상하는 걸
느꼈다
"그 여자를 만난 적이 있나요?"
"한 번요"
올리비아는 짤막하게 그때의 상황을 설명했고, 그 말끝에 어리석게도
또다른 경솔한 질문을 덧붙였다
"두 사람이 사랑에 빠졌었나요?"
"사랑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에요 그는 처음부터 사랑이란 걸
인정하려고도, 받아들이려고도 하지 않아요 아마도 그는 영원히 사랑에
빠지지는 않을 거예요"
킨잘이 마지막 말에 힘을 주어 강조했지만, 올리비아의 귀에는 그저 피
상적으로 들렸다 그녀는 자이가 수자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에만
주목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 그것이 자신을 안도케 하는지 명확히 따져
볼 생각도 없이, 그녀는 그 순간에 그와의 접촉 때 느꼈던 부드러운 숨결
과 감촉, 그리고 그의 눈동자 속에 있던 구름만큼 흐릿했던 무엇인가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녀는 킨잘이 자신의 표정을 보지 못하도록 슬며시 얼굴을 돌리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게 말씀해 주신 것 모두를 충분히 이해해요 하지만 왜 제게 그런
경고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가 궁금해지는군요 솔직히, 전 그에게 관
심이 있고 그의 환경이 남다르다는 사실에 호기심을 갖고 있어요"
그녀는 자신의 거짓말을 좀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 억지로 미소를 지었
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제가 살아온 방식과 전혀 다른 사람에 대한 호기
심일 뿐, 그에 대한 하찮은 관심 때문에 그의 수많은 여자 중 하나가 되
지는 않을 테니 안심하세요"
그녀의 강조에도 불구하고 킨잘의 얼굴엔 어떤 감정의 파도도 비치지
않았다
"난 할 말을 다했어요 당신이 이곳에 온 게 나로선 정말 기쁘지만 이
곳에 오게 된 동기가 무엇인지를 당신은 알아야 해요 내가 지금껏 만나
본 백인 여성들과는 달리 당신은 정말이지 너무나 순수한 영혼을 가진 여
자예요 그것이 나를 기쁘게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나를 무척 아프게 해
요 나의 말에 당신의 기분이 상하지 않았으면 해요"
"물론 전 조금도 불쾌하지 않아요"
그녀 자신이 생각해 봐도 그 대답은 어색하기 짝이 없는 힘이 억지로
들어 있었다 이미 그녀는 혼란스런 감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어졌던 것이다 그의 실체는 그녀의 마음속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제멋대로 떠돌고 있었다 불쾌한 것이 아니라 불안했으며, 그녀
를 움직였던 그의 매력들이 전부 자신의 헛된 상상력에서 나온 게 아닐까
하는 혼돈이 세찬 회오리를 이루며 뇌리를 채웠던 것이다
올리비아는 킬티나갈에서의 나머지 방문기간 동안 누구도 더이상은 자
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아 차라리 안도하였다
매일처럼 반복되는 이모와 에스텔의 장황한 수다에 질려 버린 올리비아
는 귀를 막은 채 한쪽 구석에서 아버지로부터 온 편지를 읽다가 조용히
이층으로 올라왔다
그녀는 그리움과 행복이 교차되는 심정이 되어 아버지의 편지를 다시
펼쳤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는 일이지만 읽을 때마다 새로이 다가오는
아버지의 인자한 모습은 그때마다 여전히 그녀를 목메이게 했다
대부분의 내용은 만족스럽게 진행되고 있는 취재 여행에 관한 것이었
고, 나머지 부분은 한창 열기가 달아오르고 있는 대통령 선거에 관한 내
용과 호놀루루가 태평양 지역의 항구도시로서 얼마나 중요한지에 관한 역
설이었는데 올리비아에게 보내는 아버지로서의 당부는 편지 말미에 아주
적게 언급되어 있었다
'사랑하는 딸아 이모님이 네게 부여하는 모든 기회를 최대한 이용하거
라 네가 살아온 것들과는 다른 관습들로 인해 힘겨우리라는 건 잘 알지
만, 매일 잠자리에 들 적마다 어딘가에 너의 삶을 이 세상 무엇보다 소중
히 여기는 아빠가 항시 네 마음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 주
렴'
읽을 적마다 올리비아를 눈물나게 하는 이 대목이야말로 아버지가 언제
나 그녀에게 들려 주던 다정한 한마디였다 올리비아는 편지를 접어 가슴
에 소중히 품으며 아버지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그녀가 한참을 그렇게 아버지와 마음의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노크 소
리와 함께 이모가 들어왔다
"올리비아, 버커스트 부인으로부터 내일 점심식사를 함께 하자는 초대
를 받았었는데 네게 말하는 걸 잊고 있었구나 오전 10시쯤 떠나면 될 거
야"
잠시 브리짓트 부인을 응시하다, 올리비아는 더 늦기 전에 자신의 마음
을 털어 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모님이 절 위해 애쓰시는 것에는 정말 감사드려요 하지만 이모님께
분명히 드릴 말씀이 있어요 저는 버커스트 씨와의 결혼엔 아무 관심도
없어요 그에게 어떠한 희망을 주는, 그래서 그로 하여금 착각을 일으키
게 하는 행동은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애야, 난 지금 결혼에 대해서 얘기하는 게 아니다 그저 사교적인 만
남을 갖자는 것뿐이야 그 일에 대해서는 너도 별로 반대하지 않겠지?"
그녀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또 한가지 말해 줄 게 있다 나는 네가 지난 주말에 몸이 아팠다고 했
으니 킬티나갈에 갔던 것을 절대로 말해선 안 된다 명심하겠지?"
그날 오후에, 죠수아 경이 다른 날보다 일찍 귀가를 했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몹시 어두워 집안 분위기가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그가 한마디 말
도 없이 곧바로 서재로 들어가자 에스텔이 엄마를 붙잡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빠가 왜 저렇게 화가 나신 거죠?"
브리짓트 부인은 아무 대답도 없이 그저 창백한 얼굴로 서서 서재로 통
하는 문만을 응시했다 저녁식사 시간이 되었어도 그는 여전히 서재에 틀
어박혀 있었다 에스텔의 식사 권유도 못 들은 체하고 그렇게 혼자만의
시간을 고집하여 더욱 가족들을 긴장시켰다
시간이 꽤 지나 밤이 깊어갈 무렵에 브리짓트 부인은 남편을 위한 음식
을 쟁반에 준비해서는 올리비아를 불렀다
"이모부께서는 아마도 사무실에서 발생한 문제들에 대해 너와 얘기하고
싶어할는지도 모르겠구나 네가 이모부께서 왜 저토록 화가 나셨는지 이
유를 좀 알아 보렴"
사실 죠수아 경은 가족들에게 무척 관대하고 친절한 편이어서 좀체로
이런 일이 없었다 아무리 사업상의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집에 들어오면
절대로 그 문제에 얽매어 가족들을 긴장시키는 법이 없었다 그랬기에 브
리짓트 부인이 에스텔과 함께 몹시 긴장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던 것이
다
서재는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커튼 사이로 겨우 새어 들어오는 희미한
달빛으로 그의 윤곽을 알아낼 수 있을 정도였다 인기척을 듣고 그가 침
통한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지?"
"저예요 이모님께서 드실 것을 좀 갖다 드리라고 해서"
"고맙구나 앉아라, 올리비아"
달빛에 물든 그의 얼굴은 너무나 침울해 보였다 게다가 가라앉아 버린
목소리가 더욱 그의 조심어린 심정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어디 편찮으신 건 아니신지"
한동안 그는 입을 다문 채 어둠만을 뚫어져라 응시하기만 하더니, 긴
한숨과 함께 말했다
"구프타로부터 좋지 않은 소식이 왔단다 아편 위탁판매소가 운송 중에
약탈을 당했다는구나"
"약탈이라구요?"
구프타는 죠수아 경의 심복으로, 벵갈을 중심으로 하는 인도 북부 지방
의 판매 대리인이다 인도인이지만 평소에 죠수아 경에게 충성을 바치는
사람으로 꽤 능력 있는 상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가 마차에 아
편을 싣고 어떤 지역으로 운송하던 도중에 괴한들의 공격을 받고 막대한
양의 아편을 모조리 탈취당했다는 것이다
죠수아 경은 이 보고를 받고 즉시 뭔가 의혹이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
었다 즉, 구프타가 물건을 잃었으나 몸에 상처 하나 입지 않고 멀쩡하다
는 사실에 주목했던 것이다 아편을 탈취해가면서, 후환을 전혀 두려워하
지 않고 사람을 해치지 않았다는 사실은 누가 보아도 이해하지 못할 일이
아닌가
영국인들이 인도를 지배하고 있는 한, 이렇게 그들의 권위와 체면을 손
상시키는 일을 벌이는 인도인은 절대로 용서하는 법이 없었다 더구나그
것이 동인도 회사의 사업과 돈에 관련된 문제라면 더욱 눈에 불을 켜고
범인을 잡는 게 상례였다
"구프타 그 녀석이 감히 내게 거짓말을 하고 있어"
희미한 아픔이 올리비아의 가슴을 저몄다 제발 아니기를 바라지만, 그
녀는 그 사람이 이 사건에 연루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지울 길이 없
었다 킬티나갈에서 그는 떠나기 전에 말했었다 만약 당신이 발락폴에
가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가지 않아도 돼요 그건 내가 약속하죠
과연 그는 무엇을 믿고 감히 그런 단언을 했던가
"왜 구프타가 그런 거짓말을 했을까요? 이모부님은 항상 그를 충실한
심복으로 대하셨는데"
"왜냐구? 그건 뻔한 거야 원주민들의 충성심이란 몇 푼의 돈 앞에서
얼마든지 변할 수가 있는 거야 더구나 상대가 영국인이라면 그들은 언제
든 모습을 바꾸게 되지"
자이 라벤던 그는 왜 그 많은 영국인들 중에 하필 죠수아 경을 공격의
목표로 삼았을까 오래 전부터 가슴을 파고 들던 의문이 비로소 시퍼런
날을 세운 비수가 되어 올리비아의 의식을 찔렀다
"중국 광동廣東에 가면 아편은 거의 열 배 이상의 이익을 얻을 수 있
지 아편은 그렇게 확실히 확보해 놓을 가치가 있는 물건이란다 중국인
들과의 거래는 신용이 첫번째인데, 우리는 지금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하
고 있어"
그녀는 벵갈 일대에서 번창하고 있는 아편 재배에 대해 죠수아 경으로
부터 수없이 많이 들어왔었다 중국과의 해상무역에서 아편은 불가피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중국산 차는 외국인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
고 있어 중국 무역의 중추적인 물품이 되고 있었다 그 반면 아편은 중국
정부의 절대적인 유입 금지조치를 받고 있는 상품이지만 중국인들의 일상
에 깊이 관계되어 있어 자연스럽게 두 물품의 교환무역이 동인도 회사의
주업이 되다시피 했던 것이다
죠수아 경이 심지어 이 두 가지 물품의 이중무역없이는 동인도 회사도,
영국왕실도 존재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만큼
막대한 양의 차와 아편이 수출입되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아편의 경우였다 중국의 절대적 수입 금지정책은 아편을 은밀
한 거래 아래 중국 대륙으로 유입되게 만들었고, 그만큼 중국 상인들은
기밀과 신용을 첫째로 삼았던 것이다 이것을 모두 꿰뚫고 있는 범인은
죠수아 경의 사업에 치명타를 입힐 속셈으로 아편 운송 마차를 습격했고,
지금 범인의 게획대로 죠수아 경은 큰 상처를 입은 것이었다
"경찰은 범인을 잡을 만한 증거를 찾았나요?"
"그들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할 거야 원주민들은 결코 밀고를 하지
않을 테니까"
그의 입술이 분노로 비틀어지는 듯하더니 다시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
다 올리비아는 대화의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
"마하라자 영주에게서 온 편지 내용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격려
가 되는 내용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는 킬티나갈 성의 금 장식 문양이 새겨진 종이를 꺼내 다시 한번 읽
어 보고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확실히 격려가 되는구나 이 편지는 네가 갖고 있는 게 좋겠
다"
"그분이 이모부님의 제안을 받아들였나요?"
"아직은 하지만 곧 때가 올 것이다 혹시 그가 지난 주말에 네게
무슨 얘기라도 했니?"
올리비아는 이미 킬티나갈에서의 일들을 모두 이모부 내외분께 설명을
했었다 물론 자이 라벤던과의 일에 대해선 일체의 언급이 없었지만
"그분은 돈에 욕심이 있는 사람 같지는 않았어요"
"욕심도 정도의 문제란다 돈이란 아주 달콤한 유혹이고 그 역시 그 유
혹을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그는 지금 엄청난 돈이 필요해 지난 수년 동
안 킬티나갈의 탄광 사업은 뾰족한 수익을 올리지 못했는데, 나는 탄광업
진출과 동시에 즉각적인 소득을 제시했어 문제는 가격의 차이인데, 그가
제시한 액수가 너무 높구나"
그가 피곤한 듯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올리비아는 이모부가
처한 입장을, 그리고 그에게 가해져오는 보이지 않는 압박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모부님, 저희와 함께 발락폴로 가서 며칠 휴식을 취하시는 게 좋겠
어요 그곳은 낚시를 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라 들었는데 그렇게 잠시 쉬
시면 괜찮아지실 거예요"
"발락폴? 쓸데없는 소리! 나는 경찰의 조사가 끝날 때까지 이곳을 떠날
수가 없어 네 이모가 에스텔과 널 데리고 갈 거다"
그가 천천히 한 묶음의 종이를 집어들자, 그녀는 그와의 대화가 끝났음
을 눈치챘다
그날 밤 늦게, 침대에 오르면서 그녀는 자이 라벤던이 했던 말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발락폴에 가고 싶지 않다면 안 가도 된다고 했고, 그것도
부족해서 그것을 약속한다고 했던 자이 쓰라린 감정이 어느 때보다도 심
하게 그녀의 마음속을 뒤덮었다
올리비아는 자이의 행동이 치솟은 복수심에 무분별한 조종을 받고 있다
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복수심 그러나 과연 무엇에 대한 복수심이란 말
인가 무엇을 얻어내기 위한 복수심이란 말인가
그날 밤도 그녀는 석연치 않은 꿈에 시달리면서, 알지 못하는 곳으로
무작정 달려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버커스트 부인과의 다과를 겸한 대화는 그녀만의 일방적 주제 선택으로
점점 지루해져 갔다 침묵 속에서 간간이 필요한 대답만을 하던 올리비아
는 차츰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에스텔과 창가에 나란히 서서 작은
소리로 얘기를 나누고 있는 프레디는 그다지 편안해 보이는 얼굴은 아니
지만 올리비아를 볼 때만큼은 표정이 밝아졌다
"나는 우리 집안에서 프레디가 취하고 있는 조치들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요 하인이 너무 많은데다가 다루는 방법도 너무 관대한 면이 없지
않아요"
그녀는 아들을 곁에 두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 이렇게 비판했는데, 막상
프레디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오히려 히죽히죽 웃는 것이었다 브리
짓트 부인이 기다렸다는 듯이 동조하였다
"맞아요, 하인들은 엄격히 다루어야만 한다구요 그들은 채찍을 맞아야
더 빨리 달리는 한 마리 말과 같은 존재들이니까요"
"내 아들은 또 돈에 대한 관념이 전혀 없어요 저 아이는 나무에서 열
매가 열리듯 그렇게 쉽게 돈을 구하는 것으로 알고 있을 정도니까요 하
지만 저 애가 정말로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은 다른 데 있지요"
프레디는 명목상으로는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은 보스였지만 좀처럼
회사에 나가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실상 그가 회사에 나가지 않아도
윌리라는 스코틀랜드 태생의 영업자에 의해 잘 운영되고 있고, 업무도 비
교적 단순한 담배판매 대리점이었기 때문에 그가 굳이 회사에 나가 할 일
도 없었다
아무튼 프레디 버커스트는 여성들에게 꽤 인기가 있었다 그건 어쩌면
그의 성격 탓일지도 모른다 뭇 여성들에게 지나치리만치 친절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화를 내지 않는 좋은 성격에다 그는 금상첨화격으로 많은 돈
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어서 결혼을 해야겠군요 가정을 가지면 남자는 변하게 마련이니까
요"
브리짓트 부인이 올리비아를 슬쩍 바라보며 단언할 때, 그녀는 당황한
나머지 질끈 눈을 감았다 에스텔은 응접실 구석구석을 관찰이라도 한다
는 듯이 그들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지만 실내의 대화 분위기에 따라 조
심스럽게 어깨를 흔들고 있어 얼마나 민감하게 이쪽에 신경을 쓰고 있는
가를 보여 주었다
"올리비아 양, 대서양을 건너 먼 여로를 마다하지 않고 이곳까지 왔는
데 느낌이 어때요?"
마침내 버커스트 부인의 질문이 올리비아에게 쏟아지기 시작한 것은 그
녀가 두 중년부인의 지루하기 짝이 없는 대화에 지칠대로 지친 뒤였다
그녀는 공손한 웃음을 머금으며 짧게 좋다고만 대답했을 뿐 더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브리짓트 부인이 재빨리 올리비아의 말을 대신해 주었다
"올리비아는 여행을 즐기는 편이에요 많은 남자들이 그러는 것처럼 이
아이의 아버지도 자신의 일에 열심이라서 지금 태평양 한가운데에 가 있
답니다 취재여행이죠 그래서 올리비아는 앞으로 1년 동안 저희와 함께
있을 예정이에요"
납득할 수 있다는 듯이 버커스트 부인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올리비아의 집은 캘리포니아에 있지만, 실은 다른 곳에도 저택과 농장
을 소유하고 있답니다"
올리비아는 이모의 거짓말에 분노와 놀라움으로 입을 벌렸지만, 이모는
그녀가 끼어들 틈을 주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만일 엄마만 생존해 있어도 올리비아를 신분에 맞는 사교모임에 자주
내보냈을 텐데, 이 아이는 엄마 대신 맡아야 할 많은 책임 때문에 그럴
기회를 좀체로 갖지 못했었죠"
그리고 몇 마디 더 입에 발린 거짓말을 보탠 후에, 이모는 프레디를 향
해 고개를 돌리며 민첩하게 일어섰다
"프레디 씨, 에스텔과 제게 집을 구경시켜 주시지 않겠어요?"
버커스트 부인도, 그리고 올리비아도 브리짓트 부인이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즉각 알아차렸다
"프레디, 뭐하고 있지? 어서 두 분을 안내해 드리려무나"
그들이 방을 빠져 나가자, 올리비아는 이모의 일방적인 언행에 격분했
고 뒤이어 벌어질 버커스트 부인의 끔찍한 심문에 대해서는 눈에 띌 정도
의 노여움을 가지고 기다렸다 버커스트 부인은 올리비아가 첫인상으로
느꼈던 바 그대로 대단히 근엄한 표정을 잃지 않은 채 한동안 그녀를 정
면으로 응시하다가 불쑥 물어왔다
"올리비아 양, 좀더 살이 쪄야겠어요 히프가 너무 작은 것 같아요 좋
은 번식력을 가진 종족은 결코 야위지 않았어요 그 비밀은 바로 엉덩이
에 있는 거예요 올리비아 양, 이제 내게 호랑이 사냥이 기대한 만큼 잘
됐는지 얘기해 주지 않겠어요?"
올리비아는 숨이 격렬히 차오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내가 주말을 호랑
이 사냥으로 보냈는지 알았을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 모두는 때때로 악의 없는 거짓말을 할 때
가 있으니까 만일 내가 올리비아였더라고 실속 없는 사람들과의 공허한
대화보다는 사냥을 택했을 거예요"
마침내 올리비아는 성실하게 지난 주말의 거짓말에 대해 사과했다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하게 되었어요 저는 사냥을 무척 좋아합니다
부인의 말씀대로 알맹이도, 관심도 없는 대화로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제
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었거든요"
버커스트 부인의 입가에 뜻밖에도 작은 미소가 번졌다 그녀가 부드럽
게 부풀어오른 빵을 올리비아에게 건네 주며 다시 말했다
"캘커타에 대해선 어떻게 보았나요?"
"솔직히 말씀드려서 인도는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은 매력을 지니고 있지
만, 또 한편으로 많은 불합리한 면도 지닌 나라예요"
"어떤 점이 그렇게 불합리하게 보였나요?"
"글쎄요 인도 사회가 매우 폐쇄적이고 평면적이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특히 여자들에겐 더욱 그렇죠 저는 이런 환경에 그다지 익숙하지 못하거
든요"
버커스트 부인의 시선이 예리하게 그녀의 얼굴과 온몸을 파고 들고 있
었다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일부러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다
시 말했다
"이곳에서의 제 생활은 모든 면에서 놀라울 정도로 평온해요 단지 저
를 둘러싸고 있는, 그리고 저에게 가해지는 부자연성에는 적응하기가 쉽
지 않더군요"
올리비아는 버커스트 부인에게 자신의 생각을 이 기회에 솔직히 털어
놓겠다고 미리 결심하고 있었다 이 기회가 아니라면 다시는 얘기할 기회
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버커스트 부인은 올리비아의 상기된, 그리고
도전적인 얼굴을 세심히 살피고 있었다
"제가 너무 솔직했다면 용서해 주십시오 이렇게 하는 것은 단지 우리
미국인의 생활방식일 뿐이에요 저는 이 기회에 저를 주인공으로 해놓고
이야기되고 있는 문제에 대해 확실하게 제 입장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녀의 도전적인 언사에도 불구하고 버커스트 부인의 입가에는 여전히
잔잔한 미소가 머물고 있어 올리비아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난 용기가 있으며 무엇이든 솔직하게 털어 놓는 여성을 좋아해요 그
건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일이니까 내 느낌으로 우리는 정말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군요 그런데, 1년 후에 미국으로 돌아간다는 건 사실인가
요?"
"예,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기간을 연장한다든지 하는 문제는 재고의 여지가 없겠군요"
올리비아의 뇌리에 자이 라벤던의 모습이 떠올랐지만 그녀는 곧 자신에
게 화를 내며 그 생각을 떨쳐 버렸다
"인도에서의 생활도 즐겁지만 홀로 계시는 아버님을 생각하면 1년 이상
머무르긴 힘들어요"
그녀는 잠시 말을 끊었다 이모가 말한 온갖 거짓들을 생각하며, 아버
지에 대해 그렇게까지 격상된 인물로 묘사한 것이 과연 현명한 처사였을
까에 대한 의문을 가졌다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어요 난 격식을 따지는 일 따위는 질색이니
까 올리비아 양, 내 아들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무책임하리만치 대담한 질문이었기에 올리비아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당황하였다 그녀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버커스트 부인을 바라보았다
"물론 프레디는 올리비아 양에게 푹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어
요"
버커스트 부인은 잠시 한 순간이라도 흩어짐이 없는 태도로 올리비아를
응시하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전혀 놀라운 일은 아니지 올리비아 양의 출중한 외모나 솔직한
성격을 보고 반하지 않을 남자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올리비아 양은 내
아들이 좋아하는 만큼 그 아이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은 인상이에요, 내
말이 맞나요?"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고서 올리비아는 고개를 푹 숙였다 이 근엄한
여인에게 가장 적절하게 대답하려면 어떤 말부터 시작해야 할까
"내 아들은, 솔직히 얘기해서 얼마든지 좋은 아내감을 얻을 수 있는 청
년이에요 부유하고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났고 외아들인데다가, 가업을
이어받아서 촉망받는 청년실업가로 발돋음할 수 있을 거예요"
올리비아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직은 입을 열 때가 아니었으며,
버커스트 부인의 이야기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난 그 아이가 그다지 활동적이고 현명한 젊은이는 아니라는 것
도 잘 알아요"
"저 그것은"
버커스트 부인은 자신의 말에 이견을 제시하려는 올리비아의 시도를 재
빨리 제지하였다
"올리비아, 내 아들의 이런 결점을 받아들이기까지에는 다소 오랜 시간
이 걸렸어요 그 아이는 지적인 인물이 아닌데다가 술주정뱅이에 의지가
약한 사람이에요 한때 이런 문제들이 나를 몹시도 괴롭힌 게 사실이지
만, 그러나 지금은 아니에요 난 확실한 현실주의자니까요 나는 그 아이
가 만일 현명하지 못하고, 예의도 없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그
런 여자와 결혼을 한다면 얼마 못 가 인생을 망치게 되리라는 걸 잘 알고
있어요"
이미 버커스트 부인의 목소리는 한풀 꺾여 있었고 근엄하던 얼굴엔 슬
픈 그림자가 비치고 있었다
"지금 내 아들은 파멸로 달려가고 있어요그 아이는 과다한 음주에 양
심의 거리낌도 느끼지 않고 거리의 매춘부들과 놀아나고 있어요 하지만
난 어느 편이냐 하면, 남자란 바람둥이에 술주정뱅이라 해도 확실한 자기
목표만 있다면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그러나 프레디에게는 그
런 목표도 설계도 아무것도 없어요 무절제한 생활과 허약한 몸, 거기다
미래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
올리비아는 충격을 받았다 버커스트 부인으로부터 받았던 차갑고 엄숙
한 인상은 어느새 뇌리에서 사라져 버리고 지금 눈앞에는 한 어머니의 비
참하고 절망스런 얼굴만이 존재하고 있는 듯했다
"프레디를 구하기 위해서는 여자의 도움이 필요해요 훌륭한 성품과 지
혜를 가진 여자 말이에요 그 여자가 프레디를 사랑하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내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요 그를 잘 보살펴 주고, 그의 잘못을
이해해 주고, 그리고 후손을 이어 줄 그런 여자면 난 만족해요"
올리비아는 버커스트 부인의 절망을 조금은 이해하면서도, 이 말에는
강한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충분한 능력과 좋은 성격을 가진
여자가 무엇이 답답해서 이런 최악의 거래에 동의를 할 것인가 사랑이
결핍된 그런 결혼생활이 얼마나 유지될 것이며, 유지된다 한들 무슨 희망
과 보람이 있겠는가
올리비아의 마음을 꿰뚫듯이 버커스트 부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올리비아, 사랑은 시간과 함께 흘러가는 것이지만 물질은 항시 남아
있는 거예요 잘 생각해 봐요 적어도 이 인도땅에서 버커스트 가家의
부인이란 칭호로 환영받지 못할 곳은 어디에도 없어요 돈만 있으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는 세상이니까"
그녀가 잠시 말을 멈추고 올리비아의 얼굴을 찬찬히 응시하였다
"게다가 한 가지 빼놓은 사실이 있는데, 그건 그애가 무능력하긴 하지
만 아주 착한 성품을 갖고 있다는 거예요 그 아이의 아내가 되는 여자는
다른 아내들에게서는 찾기 어려운 많은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을 거예
요 내 말이 이해되나요?"
이해한다고 해도 함부로 동의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올리비아
는 깊은 숨을 들이키며 일어서서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이렇게 불쾌한
대화가 아무런 거리낌없이 지속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모가 의도적으로 자신을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몰아 넣었다는
사실에 굴욕감과 분노를 느끼며 그 방을 뛰쳐나가고 싶은 걸 가까스로 인
내하면서 다시 버커스트 부인 앞에 섰다
"저에 대한 터무니없는 높은 평가에는 진실로 감사드려요 하지만 그건
분명 제게는 과분한 칭찬입니다 그리고 전 부인께서 제안한 내용이 더
확대되기 전에 그것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저는 부인의 아드님에 대해서 추호도 개인적인 감정을 갖고 있지는 않지
만 이같은 비열한 거래엔 모욕을 느낍니다 제가 확실한 대답을 회피할
수도 있겠으나 부인께서도 솔직한 걸 좋아하신다니 여기서 말씀드리지요
저는 부인의 제안을 결코 받아들일 생각이 없습니다"
여태까지 침착성을 잃지 않고 있던 버커스트 부인의 표정이 조금 흔들
리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전히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해 난 올리비아의 아버지가 무엇하는 누구인지에 대해선 관
심이 없어요 올리비아가 브리짓트 부인의 여동생의 딸이라는 것만으로
내가 생각하는 최소한의 가문의 조건에 만족해요 그저 올리비아가 무엇
을 하는 누구인지에만 나의 관심은 쏠리고 있어요"
"하지만 부인께서는 그것마저도 전혀 모르시잖아요?"
"사람은 나이가 들면 조금씩은 점쟁이가 되는 법이에요 한눈에 상대방
을 읽을 수 있게 된다는 뜻이에요 올리비아 양은 젊고 건강하며 무엇보
다 건전한 품성을 가진 여자예요 자신만의 강한 의지와 자신감도 있구
요 난 올리비아를 처음 본 순간 알 수가 있었어요 난 우리 가문의 며느
리가 되기 위해서 나의 비위나 맞추고 돈에만 신경을 쓰는 여자들에겐 정
말 진절머리가 나요"
올리비아는 자신이 자칫하면 헤어나기 힘든 함정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오랜 생각 끝엔 겨우 한 마디 말만을 해주었다
"부인께서 진저리를 친 많은 여성들 중에 적어도 그런 여성이 한 명쯤
은 있겠지요"
결코 그럴 생각은 아니었지만, 올리비아는 스스로 이 말이 버커스트 부
인에게 비웃음의 충고로 들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올리비아 양! 난 60이 넘었어요 내가 농장 경영주의 며느리로 배운
것이 있다면 그건 훌륭한 종마種馬를 골라내는 일일 거예요 오늘 올리
비아는 이 집에 들어오면서 브리짓트 부인처럼 저택 안을 두리번거리지도
않았고, 심지어 웃지도 않았어요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올리비아는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터뜨렸다 세상에 자신의 며느리를
고르는데 이런 잣대를 가지고 있는 시어머니가 어디 있을까
"아마 다른 여자들 같으면 지난 주말의 나의 초대를 결코 거절하지 않
았을 거예요 그 어떤 다른 약속이 있다고 해도 말이에요"
버커스트 부인이 쓸쓸하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설득되
어질 리도 없지만, 올리비아는 부인의 이런 자상한 태도에 경계심을 느끼
며 몸을 움찔했다
"실례를 무릅쓰고 올리비아에게 그런 제의를 한 것을 이해해 주었으면
해요 결코 나는 오늘 내가 한 말이나 행동에 대해 후회하지 않아요"
끓어오르는 분노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버커스트 부인의 용기와 솔직함
에는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오만한 부인에게 그건 결코 쉬운
호소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었다
"제 대답이 부인의 기대에 어긋나 죄송합니다"
올리비아의 정중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버커스트 부인은 그녀의 손을 꼭
쥐며 간청하듯 다시 말했다
"괜찮아요 올리비아가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말해 준 것만으로도 고
맙게 생각해요 그러나 올리비아, 부탁이 있어요 오늘 내가 제안한 것을
조금만 더 신중히 생각해 줘요 난 오늘 올리비아에게 내 속마음을 모두
털어 놨어요 만일 더 생각해 본 후에도 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면,
프레디나 나난 힘들고 괴롭겠지만 그 결정에 따를 수 밖에 없겠지요 프
레디가 조만간 올리비아에게 구혼할 생각인 것 같았지만, 분명 일을 망쳐
놓을 것이기에 내가 먼저 언질을 준 거예요 놀랍고 불쾌하겠지만, 날 용
서해 줘요 난 정말 겉치레엔 신물이 난 사람이에요"
버커스트 부인의 예리한 눈동자를 눈물이 희미하게 가로막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푹 숙였다 부인의 참담한 표정을 더이
상 마주볼 용기가 없기 때문이었다
"프레디가 무엇을 하든지간에, 그애는 여전히 나의 아들이고 난 그애를
무척 사랑해요 그 아이가 하루하루 자신의 인생을 망쳐가는 걸 지켜본다
는 건 어떤 의미에선 내게 최악의 고문이에요"
올리비아는 부도덕하고 모욕적인 계획을 꾸미거나 연출해 내는 사람들
에게 동정을 느끼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 여겨왔지만 이 순간만큼은 버
커스트 부인에게 동정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
는 다시 한번 못을 박았다
"제가 어떤 일로 해서든 부인을 위로해 드려야 되겠지만, 프레디 씨와
의 일로 부인께 희망을 드리는 일은 없을 거예요"
"올리비아 양, 나는 그저 다시 한번 생각해 달라는 것뿐이에요 그리고
이 일은 당분간 우리 두 사람만의 비밀로 해요 브리짓트 부인은 화려한
걸 좋아하는 분이라 사정을 알면 분명히 올리비아를 재촉할 거예요 그런
내가 원치 않아요"
에스텔을 앞세운 이모와 프레디가 가까이 왔기 때문에 더이상 얘기를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올리비아는 안도감이 밀려옴을 느끼며 이모를 향해
일어섰다
이모의 수다가 다시 시작되고 있을 때, 그녀는 그들로부터 좀 멀찍이
떨어져서 버커스트 부인을 바라보았다 그녀에 대한 동정심이 아직도 올
리비아의 마음 밑바닥에 고여 있는 것은, 그래서 마음이 여전히 아픈 것
은 결코 프레디 때문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올리비아는 그렇게 단호하고
매정하게 이 문제를 거절해 버린 자기 자신의 행동에 약간의 후회가 밀려
옴은 어쩔 수가 없었다
제 3 장
불같은 사랑
"그의 배가 내일 부두에 닿는다는 얘길 들었어 석탄 엔진으로 간다는
그 배 말이야 아빠가 또 불같이 화를 낼 텐데"
에스텔이 침대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수다를 늘어 놓기 시작했다
애써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이미 올리비아의 맥박은 쿵쾅쿵쾅 뛰기 시작
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세관 사무실에서 일하는 제니퍼의 사촌이 말하더래 생각해 봐, 그의
배가 겨우 한 달만에 캘커타와 런던 사이를 항해하는 걸 모든 사람
들이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구 그는 항상 그렇게 사람들을 깜짝깜짝
놀라게 한다니까"
에스텔은 원래 사업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 늘 개인적인 화제
에만 매달렸다
"하루라도 런던에 있어 봤으면 언니는 프레디와 결혼하면 런던에
서 살게 되겠지?"
"난 프레디와 절대로 결혼하지 않아!"
그녀는 괜시리 화가 나서 이 한 마디를 남기고는 방을 뛰쳐 나갔다 그
러나 에스텔의 가벼운 입보다 그녀를 더 화나게 하는 게 있었다 그건 내
일 아침 프레디와의 산책 약속이었다 아침부터 그 얼빠진 남자와 지루한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하다니, 정말이지 그건 생각할수록 화나는 일이었다
어제 버커스트 부인과 작별하고 나올 무렵이었다 갑자기 이모가 프레
디를 향해 소리쳤던 것이다
"어때요, 프레디 우리 올리비아에겐 아침마다 공원을 산책하는 습관이
있는데 내일 아침 함께 아침 공기를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갖는 게"
프레디의 눈이 반짝 빛이 났고, 버커스트 부인의 얼굴에도 한자락 희망
의 빛이 어리는 걸 보며 올리비아는 도저히 그 자리에서 거절할 수가 없
었다 이모에게 화가 나고, 무엇보다 단호히 거절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
에게 화를 내면서 그녀는 말없이 서 있었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영광이지요 제가 아침 일찍 공원으로 나가겠습
니다"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채 상당히 흥분된 어조로 말을 하는 프레디를 보
며, 그리고 뭔가 말을 하려는 듯 강렬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는 버커스트
부인을 보며 올리비아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이튿날 아침, 동트기 전의 어스름한 잿빛 풍경 속에서 프레디는 무척
흥분한 모습이었는데 혈색이 없는 핼쑥한 얼굴에 붉게 충혈된 눈은 그가
무척 초조해 하고 있다는 걸 보여 주었다
"어디로 산책을 나가시겠어요?"
"저는 그냥 내키는 대로 매일 1마일 정도씩 달리고 있어요 오늘은 식
물원 쪽으로 가고 싶어요 숲이 참 좋더군요"
그가 기쁜 듯 눈을 반짝이며 앞장서 가기 시작했다 올리비아는 그의
그늘진 안색과 피곤에 찌든 듯한 두 눈, 꽤 나이가 들어 보이게 하는 꾸
부정한 어깨를 보며 웬지 안됐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들은 캘커타 시내에서도 가장 번화한 상업지역으로 변해 가는 스타우
티 거리를 지나 관공서가 늘어서 있는 칼리카타 지역을 지나쳤다 거기서
조금 더 걸어가면 죠수아 경과 자이의 사무실이 있는 올리브 거리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최초로 개인 증기선을 성공적으로 귀환시킨 자이의 사
업 수완을 생각하노라니 그녀는 프레디와의 동행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조
금 상쾌해지는 걸 느꼈다
식물원에 도착했을 때, 그녀의 기분은 이미 유쾌하게 변해 있었다 더
구나 막상 프레디와 얘기를 나누다 보니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유
머러스한 남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런던과 옥스포드에서의 탈선행위와 별로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갈
수 없었던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의 극성에 대해 무한정 솟아나는 샘물과
도 같이 이야기를 쏟아 내어 그녀를 놀라게 했다
그는 어머니의 극성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좋은 아들이고자 노력
하는 듯했다 신경과민에 가까운 자신에 대한 관심에 때론 신물이 난다고
도 했으나 그것 때문에 어머니를 향한 사랑이 사라질 리는 만무하다고 말
했다
올리비아는 그와의 대화가 그런대로 부담없는 것이어서 자연스럽게 그
에 대한 방어태세를 늦추었다 놀라운 것은, 프레디의 이야기들이 대부분
자기에게 불합리한 내용이거나 자신의 비평이지 결코 다른 이에 대한 험
담이나 악평은 끼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그는 악의라곤 없는 사람 같았다 오직 있다면 지나칠 만큼 자기
자신에게 화살을 겨냥하는 겸손이 있을 뿐이었다 실은 그 겸손이 자기비
하에 가까운 것이 문제였지만
그러나 올리비아의 그런 유쾌함도 짧은 순간으로 끝이 났다 활기찬 산
책을 마치고, 한숨 돌리기 위해 벤치에 막 앉으려는데 그가 말했던 것이
다
"올리비아 양 드릴 말씀이 있어요"
올리비아는 금세 얼어붙고 말았다 그가 할 말이 무엇인지는 충분히 예
상되기에 그녀가 황망히 입을 열었다
"제발 말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이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의 작은 턱이 갑자기 굳어지고 눈빛이 창백해지는 게 보였다 그럼에
도 그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난 얘기해야 해요 난 이 말을 마음속에서 꼭 발산시켜 버려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난 미쳐 버릴지도 몰라요"
그가 너무나 안돼 보여서 올리비아는 더이상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녀
를 외면한 채, 그가 더듬더듬 말을 이어갔다
"난 그다지 대단한 남자가 아니라는 걸 알아요 난 사람들이
날 보고 바보라고 부르는 것도 잘 알고 있어요 나는 당신의 머리카락 한
올만큼도 못한 인간이라는 걸 잘 알아요 올리비아, 당신은 너무나 아름
답고, 총명하고 너무나 완벽해서"
목 안에서 말이 뒤엉켜 버린 듯 그가 심하게 기침을 한 다음에 고개를
푹 숙이며 다시 덧붙였다
"나는 당신을 어떤 힘을 빌려서라도 반드시 내 아내로 맞고 싶어
요 내 아내가 되어 주실 생각이 없으신지요"
마지막 말은 혼신의 힘을 다 쏟는 것 같았다 놀랍게도 그는 마치 밤길
을 내내 달려온 사람처럼 지친 표정으로 벤치에 꺼지듯 앉았다
이미 아침의 금빛 태양이 대지를 적시고 있었다 그녀는 그 활기찬 대
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연민과 곤혹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사랑도 관심도 없는 남자로부터 이런 식으로 구혼을 받아도 가슴에 파문
이 일기는 마찬가지라는 사실에 놀라워하면서 그녀는 잠시동안 침묵에 잠
겼다
이렇게 무방비상태로 상처받기 쉬운 남자에게 무슨 말을 해야 덜아픈
상처가 될까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에게 위안이 될 거절의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올리비아, 지금은 부디 아무 말씀도 하지 말아 주세요 나는 당신이
차라리 아무 말씀도 안 했으면 좋겠어요"
프레디의 말은 그녀를 안심시켰으나, 그는 더욱 처절한 표정이 되어 심
지어 숨까지 헐떡거렸다
"만약 당신이 거절하신다면, 난 산산이 부서져 버릴 겁니다 내게 마음
을 다져 먹을 시간을 주신 다음에 거절해 주세요"
올리비아는 그 제안에 수긍하는 자신에게 비겁함을 느끼면서도 그런 집
행유예에 안도감을 함께 느꼈다
"좋아요 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어요"
올리비아가 억지로 밝은 음성으로 대꾸하자 그가 다소 안도하는 표정으
로 되물었다
"무엇이든지 말해 보세요"
"오늘 나눈 얘기에 대해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아 주세요 당신의 어머
니에게나 저의 이모님에게도 말이에요"
"좋습니다 당신의 대답이 있기 전까지 꼭 비밀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내게도 조건이 하나 있어요"
"뭐죠?"
올리비아가 다시 긴장하며 묻자, 그가 실로 엉뚱하기 짝이 없는 제안을
내놓는 것이었다
"나는 당신만은 나를 바보로 생각지 말아 달라는 겁니다"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는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동의해요 거래가 성립되었군요!"
그들의 악수와 협상은 잠시 후에 그들에게 다가온 말발굽의 소음 때문
에 깨어졌다 미끄러지듯 그들 앞으로 나타난 인도 전통 복장의 사내가
올리비아에게 불쑥 흰 봉투를 전달했다 의아스런 표정으로 받아든 그 봉
투에는 죠수아 경과 아더 랜섬의 소인이 찍혀 있었다
웬일이지? 걱정이 된 그녀가 재빨리 봉투를 찢어 내용을 읽어 내려갔
다 거기엔 아더 랜섬의 펜글씨가 급히 쓰여져 있었다
'죠수아경께서 급히 찾고 계십니다 이 편지를 전달하는 사람이 올리비
아양을 에스코트해 줄 것입니다'
그것이 편지 내용의 전부였으므로 올리비아의 의아심은 더욱 깊어졌다
"이모부님께 무슨 일이 있나요?"
그렇지만 그 사내는 영어를 못 알아듣는 듯 고개만 저었다 불길한 예
감이 뇌리를 꿰뚫고 지나갔으나, 어떤 일이 생겼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가 봐야겠어요 이모부님이 이런 식으로 절 부르신 것을 보면 뭔가 급
한 일이 생긴 것 같아요"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프레디를 남겨 놓고 올리비아는 급히 돌아섰다
또 하루의 뜨거운 낮을 알리는 열대지방의 태양이 벌써 공원부근에 무수
히 햇살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영국에서 최근에 도착한 죠수아 경의 배는 '수선화 호號'라는 아름다
운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2주 후로 예정된 새로운 항해를 위해 그 배는
지금 짐이 하역되고 다시 선적되면서 반대편 기슭에 정박하고 있다
우글리 강의 도도한 물결을 다리 아래로 굽어보면서 올리비아는 생각에
잠겼다 또 어떤 새로운 재앙이 이 아침의 호출을 불렀을까 또 어떤 도
발이 죠수아 경의 가슴에 파문을 던졌을까
수선화 호에 오르기 위해서는 작은 범선을 타고 가야 했다 워낙 거대
한 선박이기 때문에 부두에서 멀찍이 멀어진 곳에 정박한 것이다 작고
보잘것 없는 범선들 사이를 지루하게 헤쳐 나간 후에 목적지에 다다르자,
두 명의 선원이 올리비아가 사다리로 그 배에 오르는 것을 도왔다
인도에 온 이래 처음으로 배에 올라 보는 것이기에 그녀는 긴장과 활기
를 찾았다 사다리의 반쯤 올랐을 때, 은빛으로 변한 햇살이 바닷물을 온
통 하얀 색깔로 만들어 놓은 듯해서 그녀는 잠시 현기증을 느꼈다
몰려드는 어지러움을 이겨내려고 재빨리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을 때,
그녀는 눈앞에 펼쳐진 뜻밖의 상황에 너무 놀라 심장이 멎는 듯했다 뱃
머리에 우뚝 선 기둥 꼭대기에 내걸린 장식이 그녀의 뇌리에 비수처럼 꽂
혔다 그것은 금빛의 삼지창 표식이었다
그제서야 그녀는 오늘 아침에 그녀를 경악시킨 그 편지를 보낸 장본인
이 자이임을 알아차렸고 자신이 오른 배도 수선화 호가 아니라 자이의 배
인 것을 깨달았다
"당신은 또 나를 당황스럽게 했어요 전 이모부님께 무슨 끔찍한 일이
라도 일어난 줄 알았어요"
올리비아가 보인 즉각적인 반응은 명백한 분노였다 그녀를 배로 잡아
끌어올린 뒤에도 여전히 그녀의 손을 쥔 채 자이가 심술궂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내가 아는 한, 당신의 이모부는 지금 매우 건재한 채로 침대 속에 있
을 거요"
그의 손을 뿌리쳐 빼내며, 올리비아가 격한 음성으로 내뱉었다
"그런 비열한 속임수를 써서 내게 할 말이 무엇인가요?"
"내게는, 당신이 그 얼간이 같은 친구에게 이끌려 새벽부터 공원을 어
슬렁거릴 정도만큼은 용건이 있소 당신은 남편감을 찾아 아침부터 거리
를 배회할 정도로 비참해진 거요?"
올리비아는 너무 분해서 거친 숨을 내쉬면서 배 난간에 기대었다 삼지
창의 날카로운 창끝이 하늘을 찌르고 있는 섬뜩한 모양에 작게 진저리를
치며 그녀가 거칠게 내뱉었다
"왜 그런 것이 당신의 관심사가 되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군요 왜
내가 당신의 그 비열한 염탐의 대상이 되어야 하죠?"
"염탐이라고 했소?"
그가 화난 얼굴로 올리비아 앞에 우뚝 다가서더니,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쳤다
"물론 그럴 필요는 없었소 하지만 난 그렇게 했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소 알겠소?"
그가 한동안 삼킬 듯이 올리비아를 노려보았다 올리비아도 그 시선을
회피하지 않았다 언제든지 볼 수 있는 희미한 어둠이 그의 눈가에 여전
히 자리하고 있었는데, 솟아오르는 분노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바라본다는
것은 언제나처럼 아픔이었다
자이가 천천히 시선을 바다 쪽으로 돌리며 그녀의 마음을 헤집어 놓는
말을 한 것이 그런 아픔을 일시에 가라앉게 했다
"이봐요 당신은 사소한 논쟁으로 계속 시간을 허비하겠소, 아니면 내
배를 둘러보겠소?"
올리비아는 순간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기억해 냈다 자이의 배!
에스텔이 그렇게 입에 침이 마르게 얘기했던, 석탄 엔진으로 런던과 캘커
타 사이를 30일 만에 갈 수 있다는 그 놀라운 배에 와 있는 것이다
그녀는 방금 전까지의 분노를 거짓말처럼 잊어버리곤 활짝 웃으며 대답
했다
"당신의 배를 보고 싶어요"
"당신이 그렇게 하리라 믿고 있었소 이 배에 오른 최초의 외부 방문객
이란 영예가 당신에게 주어진 거요"
"정말 영광이군요 제가 왜 이 영광을 차지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
만요"
올리비아는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갑판으로 걸어갔다 낯선 풍경이
눈앞에 펼쳐질 때, 그녀는 점점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
다 예기치 못한 그의 접근, 그녀를 이곳에 끌어들인 계략, 그리고 무엇보
다도 그녀가 이제부터 맞닥뜨리게 될 개인적 위험들이 그녀를 혼란케 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배는 볼거리를 매우 많이 가지고 있었다 엄청난
양의 물건들이 쌓여 있고, 그것을 끌어내리느라 분주한 선원들의 발걸음
도 처음 보는 장면이었고, 수많은 밧줄과 깃발과 비릿한 바닷내음도 신기
했다
"이 배가 그렇게 많은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쾌속선이군요"
그가 냉소를 머금었다
"난 이 배가 왜 그런 파문을 일으키는지를 이해 못하오 자, 아침식사를
하겠소, 아니면 계속 배를 둘러보겠소?"
아침식사를 준비할 정도로 내가 이곳에 오리라는 것을 철저히 믿은 것
일까 그의 완벽한 계산에 놀라며 그녀가 대답했다
"전 배를 계속 둘러보고 싶어요 전 당신이 제게 준 영광을 충분히 누
리고 싶거든요"
그는 아침식사를 하고 배를 둘러보아도 늦지 않는다며 투덜거렸으나 올
리비아의 의견에 순순히 따랐다 어쩌면 그는 이 배를 소유한 것에 대한
자부심을 천천히 시간을 들여 올리비아와 함께 누리고 싶어했는지도 모른
다 올리비아는 그의 그런 심정을 어느 정도는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았
다
그의 배는 '강가 호號'라고 명명되어 있었다 거대하면서도 우아한 몸
체에 층층으로 제작된 돛을 가지고 있는 강가 호는 빛나는 흰색으로 갑판
위에 몇 문의 대포까지 정착되어 있어 올리비아를 놀라게 했다
"이 대포는 30초 간격으로 발사될 수 있소 대포없이 항해를 하는 건
자살행위요 바다엔 악랄한 해적들이 수없이 많기 때문이오 하지만 당신
이 보는 것처럼 강가 호는 무적이오 이 배에는 예기치 않은 뜻밖의 사고
란 없소"
강가 호의 장점들을 하나하나 열거하는 동안 그의 태도는 점차 부드러
워져 얼굴엔 미소까지 번졌다
그러다 올리비아는 깨달았다 그와 함께 함으로써 생기는 위험요소들이
오히려 그녀의 즐거움을 더해 가고 있다는 것을 이모부 내외의 격렬한
증오와 많은 사람들의 배척을 알면서도 그와 이렇게 동행한다는 것이 그
녀에게 은밀한 기쁨을 준다는 건 뜻밖이었지만, 아무튼 그녀는 즐거웠고
그와 더 오래 함께 하고 싶은 심정을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의 부드러운 태도에 용기를 얻어, 에스텔이 말한 적이 있는
소문을 들춰냈다
"당신의 머리에 현상금이 걸린 적이 한번 있었다던데, 사실인가요?"
"한번이라구? 날 무시하는군! 중국인들은 외국인의 머리엔 현상금을 더
걸죠 그들은 외국인의 머리가 가보家寶라도 되듯이 벽에 거는 걸 좋아
해요 그들은 내 머리를 잘생긴 박제로 만들어 진열하려고 생각한 것 같
소"
"어떻게 벽에 걸리는 걸 피했죠?"
"그 대신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더 유혹적이었거든!"
"돈으로 사면권을 샀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소 아주 양심적이고 훌륭한 거래였소 동인도 회사는 아편과 더불
어 자신의 양심까지 팔면서 이익을 얻지만 나는 절대로 그렇지 않소!"
아편 얘기에, 올리비아는 이모부가 빼앗긴 위탁 화물에 대한 해명을 요
구할까 하고 망설였지만 마음을 바꾸었다 그가 자신의 짓이었다고 당당
히 고백할 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자, 밑으로 더 내려갑시다"
배의 여기저기를 둘러보게 하면서, 그는 올리비아에게 낯선 용어들을
섞어 일장연설을 계속 늘어 놓았다 그녀는 자신이 숨막힐 정도로 정력적
인 남자의 일터 안에 와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숨이 찼다 그의 우렁찬
목소리와 자신에 찬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
낄 정도였다 그의 풍요로움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그녀가 거의 참기 어려
울 정도로 자극적인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과 자이 라벤던 사이를 이끌고 있는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대해서는 더이상 당황해 하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마음의 벽을 두드리는 게 들려왔다 그래, 난 이 사람에게 매료되어 있고,
난 그것을 거부할 어떤 힘도 가지고 있지 않아 그렇게 나는 이 사람으로
부터 쏟아져 나오는 자력과도 같은 힘에 끝도 없이 끌려갈 뿐이야
"이 배가 뉴욕에서 처음 진수되었을 때만 해도, 이 배의 성공적인 항해
를 믿는 사람은 별로 없었죠"
"그건 왜죠?"
"혁명적이라 할 만한 선수船首 때문이죠 즉 석탄 엔진의 장착 때문에
다른 배보다 뱃머리가 훨씬 컸던 겁니다 그러나 이 배가 불과 80일 만에
뉴욕에서 홍콩까지 달려오자 누구보다 앞장서 비난했던 영국인들이 찬사
를 보내더군요 그들은 심지어 선박 건축의 경이라고 추켜세웠죠"
"그렇다면 영국인들 역시 곧 이런 배를 만들려고 할 거예요"
"벌써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결코 이 배를 설계한 존 윌리스를
능가하진 못할 거요 그는 미국에서 첫째로 꼽는 선박 설계사죠"
그는 비단처럼 부드러운 갑판의 나무 판넬을 어루만지며 만족스런 미소
를 짓더니 더욱 큰 음성으로 말했다
"이 배는 움직이는 한 폭의 시詩라고 할 수 있소 자, 이제 배의 아름
다움을 봤으니 반대로 추악한 것들도 보여 주겠소 그러면 당신은 왜 내
가 이 아침부터 일에 매달려야 하는지를 알게 될 거요"
"추악한 것들이라구요? 이렇게 완벽한 아름다움 속에도 추악한 것이 존
재할 수 있나요?"
씨익 웃으며 그가 앞장섰다 배의 내부는 어두웠으며 수면 밑에 있어
느낌이 별로 안 좋은 냄새가 났다 그들은 복도의 미로를 통해 거대한 조
개껍질같이 생긴 방으로 들어갔다
그 방은 검은 보일러, 압력기계, 잡다한 각목들이 뒤엉켜 있었는데 불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유독가스를 내뿜고 있었다 그 역겨운 냄새를 참다 못
해서 올리비아는 쿨룩쿨룩 기침을 했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말하는 진보의 대가요 보일러들이 풀가동되면
시커먼 연기들이 분출되고, 용광로가 포효하듯이 소리를 지르며 타들어가
죠 그뿐만이 아니오 선미船尾 아래 페달의 작동으로 인해서 귀를 멀게
할 정도로 거센 소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 열기는 지옥의 광란 같은 뜨거
움이오"
그때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두 눈만 허옇게 드러낸 사내 하나가 들어
와 구석에 있던 삽을 들려고 하자 자이가 즉각 제지시켰다 자이는 그가
종종걸음으로 사라지자, 낮은 욕설을 퍼부으며 보일러를 세게 걷어찼다
"저 사람들은 별과 바람과 신만을 죽어라 신봉하는 단순한 선원들이라
오 나는 그들에게 그런 믿음을 버리고, 대신에 엔지니어에 대해 경의를
표하라고 한다오 이제 바다는 과거에 생각했던 공상 가득한 낭만의 세계
가 아니오 바다가 가진 그 제멋대로의 매력은 여전히 날 유혹하지만, 이
제 바다는 혁명적인 기술의 발달로 인해 서서히 베일이 벗겨지고 있는 것
이오"
바다에서의 삶이, 그것에 생명을 건 삶이 더이상 자신을 매료시키지 않
는다고 말하는 듯한 그의 고백에 그녀는 믿기 어려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
았다
"그렇다면 왜 당신은 그렇게 불만족스럽게 생각하는 삶에서 빠져 나오
지 못하는 거죠"
올리비아의 신랄한 물음에 그가 혼잣말을 하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
다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끝없이 이어지는 지루한 경주를 하
고 있는 거요"
"당신은 거기서 벗어날 수 있어요"
"아니! 그러기엔 너무 늦었소"
그의 대답은 신속하고 날카로웠다 보일러실의 매캐한 유독가스를 한동
안 더 마신 후에, 자이가 천천히 다음 코스로 그녀를 안내하였다 승무원
들의 숙소와 주방 등은 생각했던 것보다 청결하였다
"전 당신이 고용인들을 잘 대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겠어요"
그녀가 감동해서 한 말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대답에는 가시가 들어
있었다
"왜 그것이 당신을 놀라게 하는 거요? 당신은 그들이 존엄성을 갖고 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요?"
"저야 물론 그렇게 생각해요 그러나 그렇지 않은 선주들도 많잖아요?"
"그건 그들이 수챗구멍 속의 벌레들처럼 살아 보지 않았기 때문이오
난 그렇게 살았소 자, 갑시다"
그는 몸을 곧게 펴고, 주머니 속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흘깃 쳐다보더니
금세 쾌활한 표정이 되어 말을 했다
"아침식사 시간이오 오늘 우리는 진짜 영국식 아침식사를 하게 될 거
요"
실용적이면서도 편안한 분위기를 가진 그의 선실은 개인의 방이라기보
다는 사무실같이 정리돼 있었다 장식은 별로 없는, 그래서 오히려 더 편
안해 보이는 그의 방에 들어서면서 올리비아는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의
성격은 그가 겉으로 가지고 있는 줄기찬 증오심과 반항심보다 훨씬 부드
러운 것일지도 모른다고
아침식사를 담은 그릇들이 흠잡을 데 없이 정결하고 정돈된 모습으로
들어왔지만 그녀는 잘 먹을 수가 없었다 그가 식사도 하지 않고서, 그녀
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기 때문이었다 그 어색함을 이겨내려고 무의미한
대화를 애써 만들어 나가느라 그녀는 정성스레 준비된 식사를 제대로 맛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처음 중국무역에 흥미를 느꼈을 때는 어떤 선박으로 항해했나요?"
"첫번째 배는 폐선소에서 빌린 돛단배였소 그 배에는 앞갑판에 녹슨
총 한 정이 달려 있었고, 작동되지 않는 소형 무기들이 수북이 널브러져
있었소"
과거에 대한 회상은 그의 기분을 한껏 좋은 상태로 만들어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소년 같은 얼굴이 되게 하였다
"처음부터 그런 배를 가지고 출항을 했지만 난 어떤 손해도 본 적이 없
소 항해 때마다 내 주머니는 두둑해졌으니까"
그가 만면의 미소를 머금으며 지긋이 눈을 감았다
"멋진 나날이었지"
"그런데 왜 돌아왔죠?"
이것은 잘못된 질문이었다 그의 눈이 조심스레 커져 갔고 부드러움도
다시 석회석처럼 굳어 갔다
"그건 인도가 내 고향이기 때문이오"
당신에겐 돌아올 어떤 고향도 없어요 올리비아는 그의 면전에 대고 이
렇게 소리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내게 진실을 말해 줘요 당신을 다시 올 수밖에 없게 만든 마음의 번민,
당신이 실현하고자 했던 그래서 반드시 인도로 올 수밖에 없었던 진정한
이유가 뭔가요?
그러나 그녀는 한 마디도 입밖에 낼 수가 없었다 그들을 연결하는 선
線은 여전히 가늘었다 만일 그것이 툭 끊어진다면 그녀는 그의 삶 뒤편
에 드리워져 있는 어두운 그림자를 공유할 기회를 놓치게 되고, 영원히
그의 인생과는 결별해야 되리라는 걸 느꼈던 것이다
그런 위험을 무릅쓸 용기가 그녀에겐 없었다 그의 비밀 속으로 뛰어
들고픈 강렬한 욕망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렇게 함으로써 생길 위험에
대처할 능력이 자신에게 없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이다
"당신은 왜 그렇게 나에 대해 알려고 하오, 올리비아?"
그의 입술에 자신의 이름이 올려지는 느낌은 뺨을 달아오르게 할 만큼
오싹한 것이었다 그의 갑작스런 질문에 그녀의 가슴은 또다시 쾅쾅 울리
기 시작했다
"그건 제가 알고 있는 게 너무 없기 때문이죠"
"왜 더 아는 게 필요한 거요?"
"그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에요"
"예를 들자면?"
그녀는 힘들여 침을 꿀꺽 삼키고는 턱을 쳐들며 과감히 물었다
"왜 그렇게 저의 이모부님을 곤경에 몰아 넣으려고 하죠? 당신은 이모
부님의 위탁판매품인 아편을 약탈했어요 그렇죠?"
그는 잠시 대꾸가 없었다 신랄한 질문이 그를 화나게 한 것이 분명했
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아주 비장하게 그가 말문을 열었다
"난 죽음을 파는 행위를 좋아하지 않소"
결국 그는 그녀가 던진 무례한 질문과 비난을 부인하지 않음으로써 약
탈행위를 인정했다
"당신은 아편중독자가 사는 소굴에 가본 적이 있소?"
고개를 저으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올리비아의 눈에 불안감이 흘렀
다
"당신은 가까운 사람 중에 아편중독자를 둔 적이 있소? 그에게 한 발짝
두 발짝 죽음이 다가오는 걸 보면서도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고 지켜보
아야만 하는 참담한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겠소?"
질문을 내던지는 그의 표정은 불 같은 격정을 담고 있었고 미미했지만
손을 떨기까지 했다 올리비아가 몸을 굽혀 손을 그에게 얹으려 했지만,
그가 벌떡 일어서며 뿌리쳤다 그녀는 혼란과 당혹감 속에서 간신히 말했
다
"전 그런 경험들을 가지고 있지 않아요 하지만"
"그럼 먼저 가서 그것을 경험으로 배워 봐요! 그런 위선적이고 언변 좋
은 비난으로 나를 책망하려고 여기에 온 것이오?"
그의 고함은 참을 수 없을 만큼 무례한 것이었다 올리비아는 그의 이
런 부당하고도 공격적인 언사에 대해 분노가 치미는 걸 느꼈다
"제가 스스로 당신에게 왔나요? 당신이 저를 여기 오도록 속임수를 썼
잖아요?"
"속임수를 쓰긴 했지만 강요한 적은 없소!"
그가 목소리를 낮춰 차갑게 내뱉었다 올리비아는 어처구니가 없어 차
마 반박을 할 수조차 없었다
"당신이 가고 싶었다면 언제든 여기서 떠날 수가 있었소!"
그가 뒤돌아 성큼성큼 선창을 향해 걸어갔다
"나는 당신의 사소한 호기심에 끌려 들어가기 싫소 올리비아, 난 질문
당하는 건 딱 질색이오 특히 인도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
람들에겐"
그녀는 그의 오만한 말투에 굴욕을 느꼈다 절규하듯이, 두 주먹을 힘껏
움켜쥐고서 그녀가 그의 등에다 대고 소리쳤다
"난 멍청한 어린애가 아니에요 내가 이해하려고 했다면, 이해하지 못했
을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
그가 돌아섰다 그녀를 향해 서 있는 그의 얼굴엔 어느새 평형이 깃들
어 있었다 그의 입가에 잔잔히 머물고 있는 엷은 미소를 보며, 올리비아
는 또다시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왜 아편을 약탈했냐고 물었소? 나는 그렇게 해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했소 단지 그것뿐이오"
올리비아의 도전적인 태도는 허물어지고 말았다 순전히 충동적이었지
만, 그녀는 그 도전에서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자이 라벤던 앞에
서는 매번 어쩔 수 없이 허물어지고 만다는 걸 다시 확인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뒤늦게지만, 또하나 확인한 것이 있다 그녀의 굴복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그녀는 그가 그토록 싫어하는 호기심의 제물이 되었다는 사실과 그
녀의 접근으로부터 그가 한 발 뒤로 물러섰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표정은 차가웠고, 그의 눈은 경계의 빛으로 가득했다 눈물이 나려
고 해서 그녀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두 눈을 손으로 훔쳤다
"전 정말 혼란스러워요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당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내가 말해 줄까요?"
자이가 냉정이 말했다 눈물을 글썽이며, 그녀는 간신히 고개를 들고 그
의 냉담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는 당신이 프레디 버커스트와 결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그녀는 놀라움에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서서 그를 노려보았다 고통
이, 분노가, 실망이 그녀의 전신을 훑었다
"진정이오, 올리비아 당신의 이모는 당신을 위해 참으로 현명한 선
택을 한 거요 프레디 버커스트는 비록 얼간이긴 하지만, 무척 선한 사람
이오 그는 당신에게 잘해 줄 거요"
그녀는 몹시 상처를 받았다 둔기로 머리 한쪽을 세게 얻어맞은 듯이
어지러웠고, 무엇보다 마음이 부서지는 것만 같아 견디기 어려웠다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닌 당신이 내게 그런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는
거죠?"
그녀의 음성은 낮았지만 격분해 있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내가 터무니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당신에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는
거요"
그녀가 자이에게로 걸어갔다 휘청대고는 있지만, 분노 때문에 아직 침
몰할 정도는 아니었다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악평을 오히려 자부심으로 생각하면서, 오
히려 의기양양하게 행동하는 당신의 태도에 정말 구역질이 나요 당신이
지금까지 쌓은 부와 명성이 내겐 아무 의미도 없지만 그것 역시"
올리비아의 말은 더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그가 삼킬 듯이 눈을 크게
뜨고 버럭 소리를 쳤기 때문이다
"프레디와 있어야만 당신은 안전해!"
"무엇으로부터 안전한 거죠?"
"나로부터! 나는 당신에게 상처를 주게 될 거요, 올리비아"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꽉 쥔 주먹이 허리 아래에서 덜덜 떨리고 있었
다 터져나오려는 눈물을 참으며 그녀가 소리쳤다
"왜 난 이런 얘기를 계속 들어야만 하죠? 당신은 왜 내게 늘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하는 거죠?"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으려 했으나, 눈물은 기어이 뺨을 적시고 말았
다 울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끝내 흐르고 만 눈물엔 고통이 묻어 나왔다
"당신이 지금 서 있는 그곳에, 본래부터 그런 수수께끼가 있어 왔기 때
문이오"
그녀의 고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냉정함과 완고함을 가지고 그
가 내뱉었다
"정확히 내가 있다는 그곳이 어디죠?"
머리 한구석에서는 그녀가 스스로를 발가벗기고 있으며 자신의 품위를
형편없이 떨어뜨리고 있다는 경고가 있었으나 그녀는 그대로 멈출 수가
없었다 어떤 무서운 강박감에 쫓기듯 그녀는 계속 자신의 감정을 노출시
켰다
"그곳은 바로 나의 내부에 있소"
이 말이 품고 있는 의미는 백 마디 채찍질보다 훨씬 잔인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는 놀라 침묵했다 그녀의 침묵까지도 무시한 채 그가 몸을
곧게 펴고는 뒷짐을 진 채 몇 걸음 걸었다
"그래요, 난 이 아침에 당신을 이곳에 오도록 속임수를 썼소 그렇게 하
지 말았어야 하는데 하지만 나는 당신이 관계된 일에 대해서는 올바
른 정신으로 판단을 내릴 수가 없소, 올리비아 매번 난 성급해지고, 오류
를 범하게 되는 거요 난 그것을 이해할 수도 없고, 좋아하지도 않지만
그것이 여전히 날 혼란스럽게 하고 있소"
그녀는 그의 가면을 벗겨 버리고픈, 그의 교활하고 잔인하며 비굴한 갑
옷을 확 잡아당기고픈, 그가 그녀로 하여금 마음의 껍데기를 발가벗도록
했던 것처럼 자신 또한 그의 껍데기를 벗겨 내고픈 격렬한 충동에 사로잡
혔다 그러나 그녀는 손을 움켜쥔 채, 단지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을 뿐이
다
"당신의 마음속에는 제가 담고 싶은, 꼭 그렇게 해보고 싶은 어두운 부
분이 있어요, 자이"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입 밖에 내는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저를 밖에 둔 채 문을 닫으려 하지 마세요 자이, 제발 그렇게 하지 말
아요"
그녀에겐 자신의 마음을 덮어 가릴 만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
다 그러나 이제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된단 말인가 그의 입에서 프레디 버
커스트가 거론되고, 그에게 가는 것이 안전하다고 말해지는 상황 아래서
그녀가 마음의 노출을 두려워할 게 무엇이란 말인가
"수자타 때문인가요?"
그녀의 마음은 고통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그 말에 마음이 황폐하게
되어, 그녀는 더이상 자신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수자타?"
놀라움에 그의 눈이 커졌다
"아니오, 수자타 때문이 아니오 당신이 이해할 만한 그 어떤 것 때문도
아니오, 올리비아"
그가 갑자기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마치 갑자기 발악을 하는 야수
처럼 그가 올리비아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내게 더이상의 질문을 하지 말아요 난 당신에게 대답을 할 수가 없소
아니, 하지 않겠소!"
그의 암회색 눈동자가 화염에 휩싸인 듯했다 올리비아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당신이 나에 대해 갖는 호기심은 그건 고통이오 난 당신의 그 호
기심이 불쾌해요, 알겠소? 난 불쾌해서 못 견디겠단 말이오!"
그들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선실 저 끝쪽 벽에 걸린 멋진 시계만이 빠
르게 재깍거리는 소리를 냈다 쿵쾅쿵쾅거리며 심장이 거친 소리로 뛰는
것도 가끔 들렸다 그들 사이를 갈라 놓은 의심과 절대감은 아무런 해소
의 기미도 보이지 않은 채 두 사람은 그 침묵의 납덩이 밑에 깔려 있었
다
그녀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그녀의 두 눈은 자신이 어둠 속
에서 헤매고 있다는 느낌과 똑같이 어두움으로 가득 찼다 그렇게 한참
동안 어둠 속에 갇혀 있던 올리비아가 가늘게 한숨을 쉬며 멍한 상태에서
깨어났다
"이제 가봐야겠어요"
그가 뭔가 잘 들리지 않게 투덜거리며 그녀 쪽으로 걸어와선 나지막이
속삭였다
"울지 말아요, 올리비아"
그녀는 자신이 울고 있었음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돌아선
채 조용히 뺨을 닦았다
"늦었어요 떠나야 해요"
그녀는 그를 바라볼 용기가 없었다 그에게 마음의 껍데기를 벗어 던진
걸 부끄럽게 여기지는 않지만, 더이상 노출시킨다는 건 두려웠다
"올리비아, 난 당신이 우는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소"
갑자기 그가 올리비아의 얼굴을 만졌다 손가락을 그녀의 눈 위에 대고
눈물을 손가락 끝으로 닦아 내며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차라리 우리가 만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래요"
자신도 모르게 그의 말에 동의하는 순간에도 공허한 눈물은 계속 흘러
내렸다 아주 부드럽게 그가 그녀를 자기 품으로 끌어들였다
"당신은 정말 상처받기 쉬운 여자인 것 같소"
그의 속삭임이 그녀의 머리칼에 파묻혔다 그녀에게 전해지는 그의 숨
결에 올리비아는 몸을 떨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눈을 감은 채, 그녀는 자
신의 입술을 그의 목에 댔다 두툼한 그의 목덜미가 차갑게 느껴졌지만
소금기 밴 그의 피부는 그녀의 입술에 황홀함을 전해 주었다 그녀의 관
자놀이에다 대고 그가 무엇인가를 계속 속삭였지만 그녀는 하나도 들을
수 없었다
"올리비아, 나는 당신에게 할 말이 없소 당신은 무고한 희생자가 될 테
니까"
희생자라구? 이 말만은 알아들었으나 그 말마저도 곧 이슬이 햇살에 의
해 풀잎에서 사라지듯 그녀의 아물거리는 의식 속으로 흡수되었다
그가 이렇게 가까이 있는 것, 그의 몸의 열기, 깃털처럼 부드러운 손으
로 자신을 어루만지는 그가 그녀를 황홀하게 했다 쓰디쓴 기억이나 아픈
현실은 멀리 날아가 버렸다 그녀는 지금 폭풍우에 맞서서, 결코 가져 보
지 못했던 보금자리를 찾은 한 마리 작은 새였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화석처럼 굳어 버린
시간이 그녀의 현재의식을 모조리 삼켜 버렸다 그가 자신의 목을 두르고
있는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풀어 내려 놓을 때까지 그녀는 그렇게 완전한
무의식상태였다
아주 재빨리 그가 그녀의 얼굴을 스치듯 감싼 채 자신의 입술을 그녀의
입술에 대었다가 뗐다
"자, 이제 가요"
황홀함에서 깨어난 그녀가 눈을 떴다 그는 그녀로부터 자신을 다시 회
수해 갔다 몸도, 마음도 그녀가 그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을
때, 그는 다시 냉담한 사람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조용히 그가 그녀를 이끌고 갑판 위로 올라갔다 안개 같은 그의 눈에
는 이제 어떤 감정도 없는 듯했고 입술은 완고하게 다물어져 있어 그들을
이어 줄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 하인 바하도르가 당신을 안전하게 데려다 줄 것이오 남의 눈에 띄
지 않도록"
자이 라벤던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의 머리 뒤편에 있는 태양 때문에
그녀는 너무 눈이 부셔서 그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녀는 자신이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고 해도 그것이 자신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당신을 다시는 만나지 않겠어, 올리비아!"
그녀가 사다리 로프가 있는 곳으로 발을 옮기기도 전에 그가 급히 사라
져 버렸다 이별의 악수를 청하는 손조차 내밀지 않았다 눈으로조차도 그
녀를 바라보는 걸 거부하고 그는 그렇게 그녀를 떠나보냈다 그녀의 눈엔
허망한 푸른 바다만 가득했다
버커스트 부인 일행을 초대하는 일로 분주한 브리짓트 부인과는 대조적으로 에
스텔은 친구와 마차를 타러 나가려고 했던 약속 때문에 연신 불평을 하고 있었는
데, 에스텔의 머리 손질을 해주느라 올리비아는 그 수다스런 불평불만을 고스란히
들어 줄 수밖에 없었다
"귀찮아 죽겠어 엄마는 도대체 왜 오늘 같은 날 버커스트 부인을 초대한 거
지?"
"내일 그분이 떠나시니까 그러는 거야 만약 네가 오늘밤 파티에 참석하지 않겠
다면 이모님께 미리 허락을 받아야 될 거야"
"그걸 엄마가 허락할 것 같아? 어쨌든 나는 마차를 타러 나갈 거야 엄마 몰래
뒷문으로 빠져 나갈 테니까!"
"그건 잘못이야, 에스텔 누굴 속이는 것은 옳지 못해"
올리비아는 갑자기 말을 멈추고 에스텔 몰래 얼굴을 붉혔다 내가 누구에게 이
런 충고를 할 수 있을까 나 스스로 모든 사람을 기만하고 있으면서 에스텔에게
거짓이 얼마나 나쁜 일인가를 충고하다니
올리비아의 생활은 거짓과 위선의 연속이었다 프레디와의 아침 산책을 계속하
고 있다는 것도 거짓된 삶의 대표적인 예였다 그에게 헛된 희망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단호히 그것을 거부하지 못하는 모순된 행동은 아침마다 그녀에
게 갈등을 안겨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와 있으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남자로, 그녀가 여태 만나 본 사람 중에 요구사항이 가장 적은 사람이었다 그것
이 그녀를 마음 편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와 함께 있으면 오히려 올리비아는 혼
자만의 세계에 몰입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어 차라리 좋았던 것이다
그러나 자이 라벤던을 향해 오로지 한 방향으로만 치닫는 생각으로부터 벗어나
려는 올리비아의 노력은 아주 작은 성공만을 거두고 있을 뿐이었다 고통과 자기
비하의 휘감기는 굴욕감들을 그저 잠시 동안 억제할 수 있었을 뿐이다
그녀는 자기의 냉정함과 오만함 때문에 그를 싫어했으면서도 아무런 사고의 여
과도 없이 그를 마음속에 자리하게 한 자기 자신을 혐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절망의 어둠 속에서도 감정의 메아리는 여전히 가슴을 흔들었고 희망의 불빛
은 깜박이고 있었다 그녀는 때로, 그 사람과 자신 사이에는 가냘픈 선이 연결돼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올리비아에게 다시는 만나지 않겠노라고 말했었다 그렇다는 것은, 올리비
아에게 있어서는 살아 있으면서도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그녀에게 그
가 운명지운 것이지만 그녀는 결코 그것을 두 사람 관계의 끝이라 여길 수가 없
었고, 받아들이려 하지도 않았다
버커스트 가족을 위한 파티엔 10여 명 정도의 손님이 참석했다 프레디는 여전
히 올리비아의 뒤를 쫓아다니며 마치 그녀의 하인 역할이라도 맡겠다는 태도였다
"죠수아 경의 일은 어떤가요?"
프레디의 물음은 그녀를 당황하게 만들어, 곧바로 두 사람의 첫 아침산책 때의
일을 상기시켰다 사려 깊게도 프레디는 그 이후 줄곧 그 일에 대해 함구해 주었
었다
"아, 예 그것은 이모부님께서 어떤 사소한 문제에 대해 제 의견을 듣고 싶
어했던 거였어요"
또다른 거짓말을 늘어 놓고 있구나! 나는 벌써 자이 라벤던으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했으며, 앞으로 얼마나 더 하게 될까
올리비아는 죄의식 때문에 거의 충동적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그의 어리석음에
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가 그에게 줄 수 있는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은 것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매번 그녀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손의 접촉, 주고받는 시선, 그리고 희미한 미소 멀리서 두 사람의 표정을
세심히 주시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올리비아가 가는 곳이면 바늘처럼 날카로운
그 사람의 시선이 늘 따랐다 그 사람은 바로 버커스트 부인이었다
올리비아의 회피에도 불구하고, 그 둘은 아래층 응접실에서 끝내 마주쳤다 그
짧은 둘만의 시간을 이용해서 버커스트 부인이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에 들어갔다
"내가 한 가지 빠뜨린 말이 있어요, 올리비아"
올리비아는 조심스럽게 기다렸다
"내 제안을 거절한 이유가 혹시 올리비아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인
가요?"
그것은 실로 예상을 훨씬 벗어난 질문이었기에, 당황한 그녀는 즉시 대답을 하
지 못하고 물끄러미 버커스트 부인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잠시 올리비아의 얼굴을
응시하던 버커스트 부인이 스스로 질문을 이끌어내며 말했다
"알았어요 그렇다면 지난번 우리가 나눈 이야기들은 마음속에서 깨끗이 지워
버려요 만일 올리비아가 그게 사실이 아니라 재고할 여지가 남아 있다면 문제가
다르지만요"
"죄송합니다 제가 저의 상황을 해명했어야 했는데"
정확히 무엇이 자신의 상황이며, 누구와 관련된 일의 해명인가에 대한 설명도
없이 그녀는 또 한번 이렇게 얼버무렸다
"어떤 해명도 필요치 않아요 만약 올리비아가 그러고 싶다면, 그것은 이모님께
하는 게 좋을 거예요 그분은 아직도 자신의 노력이 결실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으니까요"
이상하게도, 그날 저녁 올리비아를 지탱해 준 것은 프레디였다 어떤 주의도 대
답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곳에 프레디가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내일은 우리가 한동안 여기를 떠나게 될 아침입니다 내일, 당신과 말을 타고
싶습니다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의 침울한 어투에, 그녀는 거의 동의를 할 뻔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가 이별
의 감정으로 잘못하다가는 키스까지 요구할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얼
른 생각을 고쳐 먹었다
"아마 그럴 수 없을 것 같아요 독감 기운이 있거든요"
그녀는 코를 훌쩍이며 손수건을 꺼냈다
"예 그럼 그만두기로 하죠"
그가 큰소리를 내며 웃었다 올리비아도 웃었다 물론 프레디는 올리비아의 즐
거움이 몇 주 동안이나마 그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까닭이 없었다
올리비아가 말을 타고 시市 동편에서 남북으로 흐르고 있는 마라타 수로를 찾
은 것은 단순한 호기심 외엔 아무것도 아니었다 프레디가 떠나 버렸기 때문에 올
리비아는 속박에서 풀린 듯이 해방감을 느꼈다
긴 수목들이 늘어선 오솔길은 새소리로 가득차 있었다 천천히 말을 달리던 올
리비아는 거대한 거미줄이 낮은 나뭇가지들 사이에 얽혀 있는 걸 보며, 그 섬세함
을 보려고 말고삐를 풀고 내려섰다
검은빛의 큰 거미 한 마리가 거미줄 위에 매달려 있는 걸 멍하니 바라보던 올
리비아는 어디선가 개짖는 소리가 들리고, 그 개가 점점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
는 것을 느끼곤 등골이 오싹해졌다 언젠가 이모가 말하기를, 인도엔 버려진 미친
개들이 무수히 많으니 한적한 길에서는 특히 주의해야 한다고 던 것이다
그녀는 재빨리 쟈스민을 타려고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그보다 한발 앞서서, 그
녀가 발을 제대로 떼기도 전에 한 마리 커다란 개가 그녀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녀는 놀랐다 눈앞이 캄캄해져 왔고, 다리의 힘이 쭉 빠져 나가는 것 같
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 개가 그다지 호전적이지 않다는 사실과 그녀 주위를 빙빙 맴
돌 뿐, 몸을 건드리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다음 순간 올리비아는 가
슴의 벽이 뻥 뚫리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 개가 입에 물고 있던 무엇인가를 올
리비아의 발 밑에 떨어뜨렸던 것이다
모든 것이 비로소 확연해졌다 그 개는 자이의 개였고, 발 밑에는 그날 강가 호
에 놓고 온 그녀의 손수건이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가슴만 구멍이 뚫린게 아니었다 머리 속이 갑자기 텅 비어 버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목이 메이고 손이 떨려왔다
더이상 그 자리에 서 있을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갑자기 힘을 얻은 듯이 쟈스
민에 황망히 올라타고는 개가 달려가는 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개가 수로 옆
의 숲 속으로 맹렬히 달려 나가는 걸 보는 그녀의 가슴은 그를 다시 볼 수 있다
는 행복감으로 당장 터져 버릴 갓만 같았다
그는 숲 속의 둥근 바위 위에 웅크린 채 앉아 있었다 자이 옆에는 그의 애마인
사탄이 고개를 푹 수그린 채 풀을 뜯고 있었다
그가 인기척을 듣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잠시 동안 두 사람의 시선이 고정되
었다 그는 거의 알아보기 힘든 웃음을 입가에 머금은 채 그렇게 한참 동안 올리
비아를 응시하다가, 부시시 일어서서 쟈스민의 고삐를 잡아 주며 그녀가 말에서
내리는 것을 도와 주었다 천천히 그에게 기대어 땅에 내려선 올리비아는 그의 얼
굴에서 뭔가 감정의 편린이라도 찾아내려 했지만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위해 팔을 열었고, 거기에 그녀는 미끄러지듯 안겨들었다
그녀에게 기대어 그가 미세하게 몸을 떨며 뇌까렸다
"올리비아, 날 용서해요"
그녀는 그의 가슴에 귀를 대고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었다 쿵쾅쿵쾅 그의
심장은 그렇게 소리내어 고동치면서 수천 마디의 말보다 더 많은 얘기를 그녀에
게 들려 주고 있었다 그녀 뺨에 닿은 그의 숨결은 뜨겁고도 고르지 못했다 그녀
는 헝클어진 그의 셔츠에 입을 맞추었다 아무 말도,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
다
"내가 당신에게 상처를 주고, 당신을 울렸소 날 용서해요"
올리비아는 자신의 얼굴을 지긋이 누르고 있는 그의 가슴으로부터 신선한 체취
를 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며칠 동안의 비참함과 답답함이 황홀한 행복감
속에 잊혀져갔다 그가 격렬히 그녀의 목과 뺨에 키스를 퍼부었다
"사람들은 내 속에 광기가 숨겨져 있다고 하는데, 그들 말이 맞는지도 모르오
난 정말, 내 속에 광기가"
그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있는 동안에도 그녀는 단지 그의 품에 안겨 그
를 만질 수 있다는 사실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았고,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았으며, 더이상은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정말이오, 난 때로 나 자신도 억제하지 못할 광기에 빠질 때가 있소 올리비아,
당신은 그것을 알아야 하오"
"알고 있어요"
그녀는 간단히 그의 말을 수긍했다
"알면서도 놀라지 않는단 말이오?"
"전혀 놀라지 않아요"
"올리비아, 나는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는 독을 갖고 있소"
그는 깊은 혼란에 빠진 듯 계속 그렇게 자기 비난의 말을 거듭했다
"당신이 원한다면, 그것들을 내쫓을 수 있어요 당신을 돕고 싶어요"
"아니오, 난 그것을 쫓아내길 원치 않아 그것이 없다면 난 존재할 수 없게 되
니까 내 말을 알아듣겠소? 난 미쳤소!"
그가 갑자기 거칠게 웃기 시작했다 그러나 허리를 꺾으며 웃으면서도 그의 얼
굴은 고뇌에 차 있었다
"전 그것을 이해할 수 없어요 당신이 그걸 설명해 주지 않는 이상 제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걸 알고 계시잖아요"
샘솟는 사랑으로 인해 여전히 떨리고 있는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
어넘겨 주며 그녀가 말하자 그가 물기에 젖은 음성으로 내뱉었다
"당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어떤 설명도 할 수가 없소"
"적어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어떤지는 제가 판단하도록 해줘요"
"그럴 수 없을 거요 당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대해 어떤 판단도 내릴 수 없
을 거요"
그렇다면 저로 하여금 이해하도록 해줘요! 그녀는 이렇게 소리치고 싶었으나 입
을 닫았다 그를 궁지에 몰아 버림으로써 다시 있을지도 모르는 어떤 위험에 빠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가 다시 고통스런 회색빛 눈을 고정시킨 채 그녀를 무정하
게 소외시키고 혼자만의 거대한 침묵 속으로 빠져 버렸어도 그녀는 그를 독촉해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 달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녀는 쉴새없이 그의 내면에 깊숙이 틀어박힌 그 무엇인가를 엿볼 수 있는 틈
새를 찾았지만 허사였다 그만큼 그의 비밀스런 침묵의 벽은 두텁기만 했던 것이
다
"당신은 너무 순결하여 슬픔을 모르는 사람이오, 올리비아"
스스로 그 침묵의 벽을 허물며, 그러나 여전히 그녀와의 공유를 허락치
않을 고통을 담아 그가 갑자기 말했다
"당신은 존재하지도 않고 기대하지도 않았던 내 삶 속에, 철 지난 계절
에 갑자기 몰아친 태풍처럼 들어왔소 난 내 근본이 뿌리째 뽑혀져
나가고 흔들리는 내 자신을 느끼고 있소 이런 낯선 감정에 맞서 싸워야
하다니, 난 정말 혼란스럽기만 하오"
올리비아는 간신히 유지되고 있는 듯한 그의 마음의 균형을 깨뜨릴까
숨을 죽이며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의 진실한 의미를 깨닫기 위해 몇 번이
고 그것을 음미했다
"그것들과의 싸움 필요가 있나요? 그 모든 걸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불가능한 일인가요?"
"그건 정말이지 불가능한 일이오"
단정적인 말이었지만, 그가 여전히 혼란에 빠져 있음을 알기에 그녀는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저 역시 모든 것이 뿌리째 흔들리고 뽑히는 걸 느껴요 제가 느끼고
있는 당신을 향한 감정들도 기실 제가 원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에요
당신 역시 저에게 어느날 갑자기 몰아친 폭풍처럼 찾아왔어요"
그녀는 깊이 숨을 내쉬었다 슬픔이 커다란 파도의 모습으로 그녀의 뇌
리를 적시고 있었다
"적어도 무엇인가 제게 갚아야 할 빚이 있는 것처럼 말이에요"
"그렇소, 난 무엇인가 당신에게 갚을 게 있소 그것은 당신이 스스로의
생각 속에 나를 포함시킴으로써 많은 위험을 감수하고 있기 때문에, 당신
에게 다시 한번 경고를 해야 하는 빚이오 그것은 곧 내 의무도 된다고
생각하오"
"의무라구요?"
"나는 지금 그 말 이외에는 다른 어떤 단어도 생각해낼 수가 없소"
"그렇다면, 이 아침에 개를 보내서 저를 여기로 불러오도록 한 것도 의
무감에서 나온 건가요?"
그가 당황해하며 애써 부인하려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장황하
고, 또다른 혼란을 가중시키는 말일 뿐이었다
"난 순전히 이기적인 이유에서 당신을 찾기 위해 나의 개를 보냈소 나
로 인해 상처받은 당신의 두 눈이 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오
그 기억은 내게 수치심과 죄의식을 함께 강요했고, 난 거기에 견딜 수가
없었소 그것은 그렇소, 그것은 내가 당신에게 상처를 입힌 것보다
훨씬 더 내가 싫어하는 감정들이오"
이제 두 사람은 숲 속 바위 위에 나란히 앉아 있다 그녀는 그의 어깨
가 맥없이 떨구어지고, 열정이 담겨 있던 목소리도 점점 잦아들어 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래요, 난 당신을 다시 보고 싶다는 비열한 욕구 때문에 당신을 여기
로 부른 거요"
비열하다구요? 구름 사이로 뻗어 나온 강렬한 햇빛은 그녀를 빛의 세계
속에 있도록 해주었으나 비열이라는 단어를 뇌까리는 그녀의 마음속엔 어
떤 빛도 없었다 그녀는 그의 포옹과 따스한 입술의 감촉을 갈망했지만
단지 그가 자기 곁에 가까이 있다는 것만으로 애써 만족하면서 말했다
"그건 저도 원했던 거예요 당신은 그걸 아셔야 해요"
그녀의 속삭임은 떨렸다 지금 당장 그런 말을 하지 못한다면 영원히
후회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멍한 미소를 지으며 손
으로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나는 이제까지 나 스스로의 결단력에 의지해 수많은 결정을 내려왔소
그중엔 많은 것이 잔인한 결정이었지 하지만 지금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아주 중요한 결정 하나를 당신이 내려 주도록 요청해야겠소"
그녀는 다시 숨을 멈췄다 그가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부드럽게 감
쌌으나 눈동자엔 차디찬 빛이 가득했다 그녀는 차라리 눈을 감았다
"난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을 것 같으니까, 당신이 다시는 나를 만나
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려 주오 반드시, 올리비아!"
냉기가 그녀를 휘감아 버렸다 이처럼 잔인한 결정을 내게 내리라구?
다시는 이렇게 나란히 있을 수 없는 그런 결정을? 내게 자진해서 그의 입
술을, 그 입술의 감촉을, 머리를 만지는 손의 접촉을, 이토록 감미로운
눈빛을 하고 나를 응시하는 두 눈을 포기하라구?
그의 견고한 장벽 뒤에 숨겨진 그 공허하고 우울한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내 일생을 사막으로 만들 결정을 내리란 말인가?
그런 결정은 내 생명의 한복판에 비수가 꽂히듯 엄청난 비극을 의미한다
는 사실을 이 사람은 모른단 말인가
올리비아는 그의 두 손을 자신의 얼굴에 갖다대었다
"전 위험을 부담하는 것이 두렵지 않아요 당신을 볼 수 있는 한 어떤
것도 두렵지 않아요?"
그가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치 올리비아의 몸에서 뭔
가 실마리를 찾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당신은 왜 그토록 자진해서 재앙을 불러들이려는 거요 당신을 몰아대
는 그런 고집은 도대체 무엇이지?"
그녀는 희미하게 웃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떨렸으나 그가 알아듣기에는
충분히 명료했다
"그것은 사랑이란 이름의 고집이에요"
'사랑'이란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음미하는 그의 입엔 약간의 비
웃음이 드리워져 있었다 올리비아에게 있어 그 말은 얼마나 필사적인지,
또 그녀가 얼마나 많은 부분을 드러내 놓고 있는지 그는 도무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 같은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너무 무모한 일이오 난 가끔
나 자신에게조차도 비난을 받는다오 나는 그렇소, 나는 정말 용서받
기 힘든 사람이란 말이오"
"전 당신이 하겠다고 선택하는 어떤 것도 참을 수 있어요"
"어떤 것도?"
"그래요, 어떤 것도요!"
눈물이 차오름을 느끼며, 그녀가 격렬히 소리쳤다 그녀는 가슴이 아팠
다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자랐던 한 소년의 가슴에, 이렇게 성인이
되어서까지도 그의 가슴에 너무나 보편적인 말조차 알아듣지 못할 만큼
큰 사막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에 그녀는 가슴이 짓이겨지는 듯한 아픔
을 느꼈다
"나는 당신이 킬티나갈에서 나에 관한 많은 것을 들었으리라 믿소 그
말의 아주 작은 부분만이라도 알아들었더라도, 당신은 도저히 그런 말을
할 수 없을 텐데 당신이 느끼는 것은 사랑이오, 아니면 동정이오?"
가장 평범한, 그러나 가장 진심이 담긴 말 한마디에조차도 그는 의심하
고 거부하는 것이다 그녀는 소리쳐 울고 싶었다
"제가 당신에 대해 동정심을 느꼈다면, 그건 당신을 이 지경으로 가치
없게 만드는 그 외곬수에 대한 동정이에요!"
그의 팔이 그녀의 말의 힘에 밀려 내려오듯 어깨를 스쳐 허리로 미끄러
져 내려왔다 그가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안으며 더할 나위없이 부드럽게
그녀의 뺨에 입술을 갖다대었다
"올리비아, 난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나약한 사람이오"
"당신이 약하다구요?"
"약할 뿐만 아니라 제정신도 아니오 아주 나쁜 것들만으로 가득 채워
진"
스스로 말을 끊으며, 그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당신은 나로 하여금 당신으로부터 자꾸만 멀리 있을 수가 없게 해요,
올리비아"
그의 팔에 안긴 채, 자신의 힘으로 그의 장벽을 깨뜨림으로써 그가 가
진 방어태세가 허물어져가고 있음을 즐거워하며 그녀가 물었다
"왜 멀리 있으려고 하나요?"
"그것은 그것은 내가 욕망의 노예가 되는 일에 익숙치 않기 때문
이오 난 누구한테 명령받는 일에 익숙하지 않아요"
그의 말이 그녀의 감정을 할퀴었다 그녀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그의
품으로부터 벗어나며 말했다
"난 당신한테 명령한 적이 없어요"
"당신은, 내가 당신을 생각할 때 나로 하여금 꼼짝 못하도록 명령하오
내가 깨어 있든 잠들어 있든, 언제든 당신 생각만 하라고 명령하는 거
요"
이 말을 하고서, 그가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 대었다 그런
피부의 스침이, 그 짧은 접촉이 그녀를 들뜨게 할 때 그가 난폭하게 내뱉
었다
"그런 감정은 내가 지금껏 알았던 그 어떤 여자보다 더 당신을 갈망하
고 있기 때문에 생긴 것이오"
그리곤 그가 그녀를 다시금 끌어안았다 그의 포옹은 거칠고 폭력적인
것이었지만, 여전히 달콤했다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르는 분노가 사그라
지지 않는 그의 촉촉한 입술 역시 그녀에게 마술이 되어 다가오고 있었
다
그것은 그에 대해서 그녀가 꿈꿔왔던 모든 소망의 완성이었고, 그녀가
마음속의 비밀장소에서 그와 함께 유희했던 환상의 모든 것이었다
"올리비아"
그가 신음처럼 그녀의 이름을 뱉으며 애무를 계속하면서 힘들게 말을
이었다
"당신은 알고나 있소? 내가 얼마나 당신을 원하는지를 말이오!"
그가 이를 악무는 걸, 그의 피가 뜨겁게 요동치는 걸, 그의 숨결이 폭
풍처럼 거세지고 있다는 걸 그녀는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 얼마나 자신의 열망을 잠재우려 애쓰는지도 그녀는 알 수가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움켜잡고 있는 그의 손힘이 너무 강해서 눈물이 나오려 할
정도로 아팠지만 참았다
"당신을 사랑해요, 자이"
이 짧은 한 마디 안에 들어 있는 수천 가지의 의미를 그는 알까 이런
의구심 때문에 그녀는 급히 말을 보탰다
"제가 가진 건 무엇이나 다 당신 소유예요"
그녀를 응시하는 그의 눈이 마구 흔들렸다 땀에 젖은 이마와 고집스러
워 보이는 뺨, 그리고 굳게 닫은 입술이 흔들리는 그 눈동자 때문에 오히
려 더욱 단호해 보였다 잠시 후, 그의 손이 떨구어졌다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올리비아 두번 다시 그 말을 하지 마오"
"진실이에요!"
"당신은 너무 쉽게 자신을 희생물로 만드는군!"
"그래도, 제 말은 모두 진실이에요"
그와는 더이상의 논쟁이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차라리
가만히 앉아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돌을 집어들고서 거칠게 숲 속으로
던지고 있었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그의 개가 신바람이 나서 덤
불 속으로 가서는 돌들을 물고와 그의 발 밑에 가져다 놓았다 그의 발
밑에 많은 돌들이 쌓이고, 개가 지쳐 헐떡일 때쯤 되어서야 그는 거칠게
숨을 쉬며 그 의미 없는 일을 멈췄다 어느새 그의 표정은 상당한 자제력
을 되찾고 있었다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오 아니면, 당신의 이모부가 하인을 시켜 경
찰을 부르게 할거요"
올리비아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쟈스민의 고삐를 풀어 그녀
에게 돌아서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녀는 또다시 불안에 빠졌다 그
는 분명 다시 뒤로 퇴각해 버린 것 같았다
"당신을 다시 볼 수 있을까요?"
그녀의 두 눈이 도전적으로 빛났다 그 사람처럼 아무 말없이 돌아선다
는 건 그녀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다 그의 우울한 눈이 그녀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당신은 진정으로 그러길 원하오?"
"예, 진정으로!"
그가 시선을 알 수 없는 어느 곳에 고정시킨 채 말했다
"그럼, 그렇게 되겠지"
"그게 언제쯤일까요?"
"곧"
그녀는 벌써 불같이 이는 조바심을 억지로 참았다
"얼마나 빨리요?"
"아주 빨리"
"제가 어디 있는지 당신이 어떻게 아시죠?"
어리석은 질문이라 생각했지만 그대로 지나칠 수가 없어서 재빨리 물어
보았다 그러자 그가 부드러움을 담아 즉시 대꾸하였다
"난 당신이 어디 있는지 항상 알고 있지"
그녀의 손등에 가볍게 입맞춤을 하곤, 그가 쟈스민의 옆구리를 철썩 때
렸다
올리비아는 자신이 그의 시야에서 멀어질 때까지, 그가 묵묵히 거기 그
대로 서서 자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리라는 걸 알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그 어느 아침보다 선명해 보였다 그녀는 이제
자신의 결심이 결코 철회되어질 수 없는 선택임을 알았다 온갖 장애물들
이, 위험과 함정들이 모두 하찮게만 여겨졌다 그녀는 이 하나의 사람만
으로 전세계를 가진 것처럼 자신만만해져 있었다
어찌 되었든, 그녀는 반환점에서 너무 멀리 지나 있는 것이었다
올리비아와 자이의 게임은 더욱 격렬해졌다
그의 말대로 그들은 다음날 아침에 다시 만났다 그후 그는 매일 아침
그녀를 만났다 그녀에게 있어 매일매일은 완벽하게 다듬어지길 기대하
는,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다이아몬드와 같은 심정으로 시작되었고 또 그
렇게 끝을 맺었다
그녀는 그가 언제 나타날지 알지 못했지만 그는 그림자처럼 항시 나타
났다 그녀의 소재에 대한 그의 관찰은 정확했다 그는 그녀가 하는 모든
것, 그녀가 만나는 사람, 그녀가 떠올리는 생각 등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자의건 타의건 그녀는 항시 그의 초점거리 내에 있는 것 같
았다
단 한번도 그가 그녀를 못 찾아낸 적은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자신이
마치 패배감과 환희를 동시에 맛보며 그녀에게 돌아오는, 둥지를 찾는 비
둘기와 같은 존재라고 말하곤 했다
올리비아는 밤엔 태양이 더디 떠오름을 원망했고, 그와 함께 하는 시간
속에서 남은 시간을 계산했다 그가 그녀의 시야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예
측할 수 없는 현실 상황이 그녀로부터 그를 데려갈까봐 두려움에 떨었다
그녀는 그러는 가운데 참을성 있게 그의 다양한 기분들 모두를 알아채
는 법을 배웠다 그에 대한 그녀의 육감은 그의 보통 사람과 다른 부분,
미세한 근육의 떨림, 극히 제한된 입술의 경련 등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느낌을 모조리 감지할 수 있을 만큼 예민해졌다
그녀는 때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그의 말투에도 익숙해 갔고, 그가
대답을 회피할 때 캐묻지 않는 일에도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때때로 그가
불타는 듯한 광기로 그녀에게 무정하게 할 때도, 오히려 그녀는 비둘기
날개처럼 부드러운 때를 기억하며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녀는 그가 소유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그가 그것을
강하게 억제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녀는 그것조차 기쁘게 받아들
였다 그녀는 그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는 황홀한 아침 시간에 도취되
어, 앞뒤를 헤아리지 않고 마음껏 그를 만나고 또 만났다
어느 일요일, 교회에서 돌아오는 길에 올리비아를 포함한 처녀들이 에
스텔과 함께 뒤에 남는 것을 보고 브리짓트 부인이 죠수아 경에게 말했
다
"요즈음 올리비아가 눈에 띌 정도로 좋아 보이지 않나요, 여보? 아마
프레디의 헌신적인 사랑 때문일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난 이곳에 프레디가 없기 때문에 저애가 그토록 활기에 찬 것 같은
데"
그는 억지로 교회에 끌려온 게 불만인 듯 코웃음치며 냉랭히 말했다
"얼토당토 않은 소리예요, 여보 올리비아가 프레디에게 호감을 갖고
있어요 프레디도 벌써 자기 농장에서 그애에게 많은 편지를 보냈구요"
"그건 프레디의 열렬함을 말할 뿐이지, 올리비아도 그렇다는 것은 아니
잖아? 난 올리비아가 회답하는 것을 곤혹스러워 하지 않나 싶어"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에스텔에게 물어 봐야겠어요 그리고, 여보 에
스텔에 관한 얘기인데요, 난 정말로 저애를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당신이 저애에게 좀 강경한 태도를 보여 주세요 아주 강경한 태도 말이
에요"
"당신은 내가 다른 걱정할 일들에 묻혀 있다는 생각이 안 들어? 그런
사소한 일들로 내 시간을 허비하게 하다니 그애가 그렇게 함부로 뛰
고 까불면 고삐를 조금만 늦춰요 에스텔 같은 말괄량이에게는 그 방법이
최고니까"
"고삐를 늦춰서 그 말도 안 되는 팬터마임을 하도록 내버려두라는 거예
요? 지금 정신이 있으세요, 여보?"
"팬터마임? 무슨 팬터마임 말이오?"
하지만 죠수아 경은 그녀가 몇 번이고 말한 적이 있는 그 말을 다시 시
작하기도 전에 이미 다른 생각에 잠겨 들고 있었다
마하라자 영주로부터 킬티나갈의 축제기간 동안 다시 한번 그녀를 초대
한다는 편지가 도착했다 그녀는 감격했으나 가능한 모든 변명을 담아 완
곡하게 거절하는 회신을 보냈다 지금 캘커타를 떠난다는 것은 그녀에겐
상상할 수 없는 일이며, 마하라자로부터 듣게 될 자이에 관한 경고가 두
렵게 느껴지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다, 두려움이었다 아무리 억제하려고 해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마
음 저 밑바닥의 두려움
그녀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느낌이 들었다 그가 날 받아들이지 않는
다면 나의 미래는 어디를 향해 갈 것인가? 그는 나를 받아들였는가? 그녀
는 알 수 없었다 그는 한번도 얘기한 적이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결단은 오직 현재를 제외한 시간들을 지워 버리는 일뿐이었다
"당신을 이렇게 무사히 계속 만날 수 있다니, 캘커타도 그렇게 대단한
도시는 아니군요?"
"당신이 나를 만나는 것이 무사하다고 생각하오?"
그녀는 그가 한 말이 둘의 관계가 폭로될 위험에서가 아니라 그녀의 말
투를 다시 비꼬고 있음을 알아채고 화난 듯 말했다
"그럼요"
"그렇다면 당신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덜 똑똑하군"
이 아침, 그의 기분은 저조한 게 분명했다 조바심과 안절부절못하는
불안이 그의 몸짓에 간간이 섞여 있었다 의아해 하는 올리비아에게, 그
가 내심의 생각을 불쑥 말했다
"프레디가 곧 돌아올 텐데, 그를 다시 만날 셈이오?"
"그를 피할 수는 없어요"
그녀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프레디 버거스트에 관한 화제는 다소 골
치 아픈 문제였지만, 그가 평상시와는 다른 질문 태도를 보이고 있음에
그녀는 내심 기뻤다
"당신은 그와 결혼할 생각이오?"
그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을 때 그녀는 그를 놀려 주고 싶은 가
벼운 충동을 느꼈지만, 그의 태도가 이미 원래의 빗나간 언행 습관으로
돌변해 버렸기 때문에 포기했다
"아뇨 그것이 설령 당신이 제게 제의한 일이라 할지라도요 당신
은 제게 했던 말을 기억하세요?"
그녀는 자신이 처한 유리한 위치를 적절히 이용했다
"물론, 내가 한 말은 기억하고 있소"
그가 갑자기 허리에 찬 권총을 꺼내 들어 건너편에 서 있는 나무를 향
해 방아쇠를 당겼다 녹색의 잘 익은 열매가 굉장한 총성과 함께 사방에
흩어졌다
"난 그때 화가 나 있었소"
그녀는 두 팔로 무릎을 감싸안았다
"당신은 지금 또 화가 나 있군요"
"나는 화나지 않았소"
그는 주먹 쥔 한 손으로 다른 손바닥을 치며 외쳤다 그는 곧 주먹을
내리고 말했다
"맞아! 난 지금 화가 나 있소 난 처음으로 내가 탐욕스럽다는 것을 발
견했기 때문에 화가 나 난 그것을 떨쳐 버릴 수가 없소, 지금!"
그는 몹시 성이 나서 투덜거렸다 그녀는 그에게로 다가가 용감하게 말
했다
"그럼 당신의 그 욕심에 그대로 빠지세요 그걸 떨쳐 버리려고 하지 마
세요"
그는 급히 머리를 저으며 물러섰다
"아니, 그래선 안 돼 그럴 수는 없소! 당신은 내게 불가능한 것을 요
구하고 있소!"
"하지만 저는 당신을 사랑해요, 자이"
그녀는 오지 않을 반응을 기대하면서 수없이 반복해서 그 말을 속삭였
다 그의 부드러움, 격앙된 고백, 키스와 애무, 그것들에 숨겨진 그의 그
녀에 대한 강렬한 욕구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번도 그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대신 그는 말해 왔고, 지금 또 그 말을 했다
"당신은 나 같은 남자를 사랑해서는 안 되오!"
"당신은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남자예요!"
"나의 운명을 유혹하지 말아요, 올리비아 당신은 지금 나를 패배시키
려고 하고 있는 혼란을 내 안에 만들어 놓으려 하고 있어"
그렇다면 그 혼돈들로 하여금 날 사랑하게끔 내버려 둘 수는 없나요?
그러나 이러한 그녀의 열렬한 호소는 입밖에 내어지지 않았다 대신 그녀
가 느끼는 고통이 분노로 표출되었다
"그리고 당신은 어떤 것에도 패하는 것을 참을 수 없죠, 안 그래요?"
"난 이제껏 어떤 것에도 저 본 적이 없소"
극도로 오만에 가득한 얼굴이 그녀 앞에서 빛났다
"당신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고 있소, 올리비아!"
그녀는 다시 참기 힘든 상처를 받았다
"전 당신에게 아무것도 요구한 적이 없어요 당신의 그 소중한 시간의
부스러기들을 제외하고는요"
"당신은 내게 요구하지 않으면서 요구하고 있소 난 그것을 거역할 수
가 없소 내가 그러한 시간의 부스러기조차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이 날 화
나게 만든다는 거요"
"그렇다면 더이상 절 만나지 마세요!"
그녀는 그에게서 몸을 홱 돌렸다
"저는 당신없이도 잘해 나갈 수 있어요 자이, 제가 그럴 수 있다는 것
을 당신은 알 거예요"
"당신이 그렇다면 그럴 테지"
그는 넋이 나간 듯 이렇게 중얼거리더니, 격노에 휩싸인 그녀를 남겨
두고 사탄의 안장에 올라 질풍같이 사라져 버렸다
올리비아는 집으로 돌아오며 내내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3일 동안 그
녀가 자책과 상실감에 싸여 교외를 배회했지만 그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다시 또 원점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러나 4일째의 아침, 그는 그녀 앞에 나타나 다시는 그녀가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두 팔로 힘껏 안았다
"내가 말했던 것은 다 지워 버려요"
그는 떨리는 입술로 그녀의 얼굴에 격렬한 키스를 퍼부으면서 목쉰 소
리로 속삭였다
"그 모든 말들을 모조리 지워 버려요 올리비아, 날 용서해 주오 용서
해 줘 "
그녀는 이미 용서했다 그녀는 불행해 보이는 그의 상아빛 얼굴에 나타
나는 모든 불행을 입맞춤으로 지워 없앴다
"이것은 새로운 경험이오 내게는 이런 관계는 당신의 사랑
은 나에 대해 자동 인형 같은 거요 나는 그 자동 인형이 작동한다는 사
실을 아오 단지 나는 그것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당황스러울 뿐이오
당신은 당신이 지금 나를 화나게 만들어서 안됐다는 표정이군"
"제가 당신을 화나게 만든다구요?"
그녀는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가 갑자기 호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그녀에게 주는 것으로 수많은
다른 말들을 대신했다 그들 어깨 위로 내리퍼붓는 햇살에 눈부시게 빛을
발하는 유리 팔찌였다
"오 자이, 너무 아름다워요"
그는 손수 그녀의 팔에 서툰 동작으로 끼워 주었다
"난 당신이 내게 준 것에 비해 아무 것도 해줄 게 없소 당신을 기쁘게
할 무엇이든지 말해 봐요 보석, 황금 아름다운 옷들 어떤 것이
든지"
"당신의 일부를 주세요"
그녀는 손을 천천히 돌리면서 유리 팔찌들이 부딪치는 소리에 감격해
했다
"지금 주신 것으로 충분해요 전 어떤 보석도 옷도 필요 없어요"
"하지만 난 여자들은 모두 보석이나 예쁜 옷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냉정하게 쳐다보았다
"당신이 지금까지 만나 왔던 여자들은 그것들을 좋아하겠죠 그들 속에
나를 끼워 넣지는 마세요!"
"맙소사!"
그는 두 손을 번쩍 들었다
"난 지금까지 여자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배웠다고 생각했
소 하지만 캘리포니아에서 온 한 건방진 여자가 지금 와서 내게 교육이
불완전한 것이었다고 하는군, 좋아!"
그는 몸을 기울여 그녀 코끝에 키스했다
"하지만 적어도 당신의 소중한 시간의 일부를 내게 준 것에 대해, 그
보답으로 당신에게 뭔가를 주고 싶소 말해 봐요"
제발 단 한번만 제게 말해 주세요 단 한번만, 당신이 날 사랑하고 있
다는 것을 그것만이 내가 받을 수 있는 최상의 선물이라는 것을 당
신은 모르시나요? 이렇게 외치고 싶었지만, 말 대신에 그녀는 단지 미소
만 지었다
"전, 당신이 여성들에 대해 광범위한 교육을 받았다는 지난 삶에 대해
알고 싶어요 그것이면 당신이 진 빚을 갚기에 충분한 거예요"
그는 쾌활하게 웃었다 이 아침은 적어도 그가 자신의 삶 일부를 그녀
에게 공개하는 드문 시간이었다 세심하게 위장되어 있는 그의 세계의 가
장자리로 올리비아는 넋을 잃은 채 빠져들었다
유머 있고 매혹적인 말투로 그는 중국, 미국, 태평양에서 있었던 일들
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마주친 여인들에 대해서는 짧은 언급으로
그녀의 질투를 자아내며 그는 자신의 발자취를 얘기하며 즐거워했다
"당신은 그렇게 많은 비도덕적인 일을 한 것에 대해 수치를 느껴야 해
요"
"내가 만일 금욕적 생활을 유지했으면 당신이 더 기뻐했을까?"
"당신이 그렇게 하려고 맘을 먹고 있었다 해도, 그럴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은 안 해요"
"그렇지 않아 난 마음먹은 것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해내"
"그럼, 잘난 체도 안 하겠다고 마음먹어 보지 그러세요?"
"당신은 항시 내게 불가능한 것만 요구하는군!"
완전무결한 아침이었다 끝내기 싫은 이 아침의 만남임을 알리듯 그가
그녀를 꼭 껴안았다 그녀의 뺨에 대고 있는 그의 뺨은 거칠었지만, 그래
도 그녀가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로 관능적인 것이었다
"제가 미국에 있었더라면 우리에게 이런 만남은 존재하지 않았을 거예
요"
"그렇지 않아, 올리비아 그래도 난 당신을 알았을 거요 바람이 당신
의 향기를 내게 실어다 주었을 테니까 "
"제가 사막 한가운데에 있었을지라도요?"
"당신이 아예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올리비아, 나는 "
그 말은 목에 걸린 생선 가시처럼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말하
세요 말하세요 제발 내 사랑, 한번만 간절한 바램에도 불구하고
그는 말하는 대신 고개를 저으며 미소지었다
그는 실낱같이 위태로운 자제력을 가지고 한줄기 키스만을 남긴 채 떠
나갔다 올리비아는 그가 남긴 잔해들을 쓸어모으며, 그것들에 마저도 가
득한 감사를 느꼈다
불확실한 방향으로 흐르는 구름처럼 그렇게 떠다니며 자신의 일에만 몰
두하는 사이, 올리비아는 집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녀는 산책 후 돌아왔을 때, 이모가 울고 있는 것
을 보고 놀라움에 몸을 떨며 물었다
"에스텔 때문인가요?"
한참 후에 이모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난 그애를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올리비아 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그 사람은 끔찍한 사람이야 올리비아, 너도 알고 있지? 그
힐스라는 극단의 매니저 말이야 그 무식하고 교양 없는 남자에게 에스텔
이 빠져 버린 것 같다 에스텔이 기어코 그 무대에 서야겠다고 "
올리비아는 이모를 동정하면서도 적당한 위로의 말을 찾아내지 못했다
"이모님, 이건 사춘기의 소녀가 거쳐 가는 하나의 단계일 뿐이에요 에
스텔은 어려운 과도기를 잘 헤쳐 나갈 거예요 우리가 모두 그랬던 것처
럼 잘 극복할 거예요"
"너도 그랬다고? 올리비아, 난 네가 에스텔에게 나쁜 영향을 끼칠까봐
한때는 걱정을 했었단다 하지만 내가 틀렸구나 너는 그애에게 축복의 의
미로 이곳에 온 거야 에스텔이 네가 가진 도덕적 힘의 일부라도 갖기만
을 난 바랄 뿐이다 "
올리비아는 그 동안의 무심함과 이모의 괴로움에 대한 안쓰러움으로,
이제부터라도 에스텔이 빗나가지 않도록 자주 충고해 줘야겠다고 결심했
다
그날 그녀는 스트랜드 가街를 달리는 저녁 산책을 이용해 단도직입적
으로 에스텔에게 물었다
"에스텔, 넌 지금 너의 자유로운 행동으로 엄마를 괴롭히고 있다는 생
각을 하지 않니? 그리고 지금 이곳에 없는 너의 보이프랜드 존에게도 잘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안 드니?"
"흥, 엄마 아빠 모두 이제 내게는 관심조차 없어 이제 내가 죽든 살든
관심이 없다구!"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아빠는 언제나 사업상 바쁘시고, 엄마는
"
"난 팬터마임을 할 거야 이번엔 엄마도 날 막지 못해"
에스텔의 턱이 완강함으로 굳어졌다
"아버지께 말씀드려서, 그분을 네 편에 서게 만들지 그러니? 이해를 시
켜 보렴"
"아빠에게? 아빠는 지금 그 소중한 석탄 외에는 눈에 들어오는 게 없으
시다구 내 존재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구!"
"석탄이 중요하다는 것은 너도 알잖니, 에스텔"
"그래, 그건 나도 알고 있어 자신의 딸보다도 훨씬 중요하지!"
올리비아는 에스텔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다 전에 없던 것들을 발견
하고는 놀랐다 반짝이는 두 눈 대신 흐릿하고 맥빠진 눈동자가 긴장과
불안에 싸인 여윈 얼굴에 박혀 있었다 에스텔도 분명히 이모만큼 불행해
보였다 올리비아는 재빨리 에스텔을 두 팔로 껴안았다
"넌 절대로 절대로 아버지가 널 더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돼"
그녀는 에스텔이 가진 고통의 핵심을 알아차리면서 말했다
"더이상은 날 사랑하지 않고 있어, 올리비아 언니 정말이야, 더이상은
아니야 "
그녀는 훌쩍이기 시작했다
"바보 같으니라구 사랑하는 마음은 언제나 그렇게 겉으로 말해지는 게
아니야, 마음의 소리는 종종 침묵을 지키잖니? 그건 너도 알잖아?"
"그럴 까?"
"물론이지 그런 소리는 눈을 감고 들어야 해"
"하지만, 그걸로는 충분치 않아"
"오히려 네가 그것을 충분하게 만들어야 해, 에스텔"
에스텔은 긴 한숨을 쉬었다
"그래, 언니 말이 옳은 것 같아"
"나 역시 그것이 네게 충분해지도록 노력하겠어"
올리비아는 선뜻 자신의 뜻을 받아들이는 그녀에 대해 불안해 하면서,
조만간 이모부를 찾아가 딸에 대한 아버지로서의 무관심을 얘기해야겠다
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사흘
사흘 동안 모습조차 보이지 않은 자이 라벤던에 대한 불안과 억측이 그
녀를 괴롭힘으로써 에스텔에 관한 그녀의 걱정은 잊혀질 수밖에 없었다
안 올 것인가? 아니면 바쁜 것일까? 갑자기 내가 싫어진 것일까? 내가 그
를 화나게 하고, 싫게 한 것이라면
그녀는 새로운 공포들에 사로잡혔다 그녀에게 이제 그는 마치 아편과
도 같은 존재가 되어 그가 없이는 하루도 몸과 마음을 다스릴 수 없는 순
간들이 늘어갔다 그녀는 자신의 이런 힘겨움 속에서도, 그의 변덕에 종속
이 된 채 매번 이렇게 흔들리는 자신에 대해 분노했다
그녀는 그가 자신에게 이처럼 혼란스런 감정의 멍에를 씌울 권리가 없
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그를 밖에서 드러내 놓고 찾아볼 권리와
확실한 대답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이 그의 생각
을 조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이상 그의 기분에 따라서 춤추는 행위
들을 계속할 수도 없으며, 계속하지도 않을 것이라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판단 속에서 그녀는 일찍 말을 타고 나가, 쉬르퍼 시장 부근에 있
는 자이의 집 검은 대문을 두드렸다 그곳은 수자타가 머물고 있는 집이
었고, 자이의 안내로 한번 들어가 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
그녀는 화가 난 얼굴에 망설임을 담고서, 문을 열고 나온 낯선이에게
물었다
"자이를 만나고 싶은데요"
"지금은 집에 계시지 않는데요"
올리비아는 전신의 무너짐을 느끼며 실망에 젖어 물었다
"자이는 강가 호에 있나요"
"글쎄요"
"언제쯤 돌아오실 것 같나요?"
"글쎄요"
올리비아는 그 남자가 신중하게 상황을 살피는 것을 보며 그가 자이의
지시에 잘 따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 그럼 그 여자는 집에 있나요?"
그녀는 망설이던 한 마디를 입 밖으로 꺼냈다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일으키지 않은 채 그가 말했다
"그분은 떠나셨습니다"
공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가 버렸다구? 그와 함께?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아세요?"
"아마, 왔던 곳으로 갔겠죠"
올리비아는 더이상의 물음에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를 바보
라 욕하며 자신의 이름도 남기지 않고 떠났다 그녀는 홀로 강가에 앉아
자신을 비참하게 만든 자이 라벤던을 저주하고, 자신을 이렇게 되도록 용
납한 자기 자신 또한 저주했다
집에 돌아와 방에 틀어박힌 그녀는 다시는 그를 만나지 않을 것이며,
그를 자신에게서 철저히 제거해 나가리라 결심하였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 카리히드 사원 근처에서 자이 라벤던은 바람처럼
또다시 나타나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가 말을 타고 가는 바로
옆을 질풍처럼 질러가는 사탄과 거기에 탄 그의 모습에 놀라 말에서 떨어
질 뻔했지만 그는 태평스럽게 흘깃 그녀를 쳐다볼 뿐이었다 그를 쫓아
안전하게 야외로 나오자, 그녀는 그의 품에 안겨들며 그가 자신을 버린
게 아니라는 안도감에 훌쩍거렸다
그는 그녀의 행동에 놀라 애정이 담긴 두 손과 위로의 말로 그녀를 달
래면서도 불쑥 그 투박한 어투로 말을 뱉어냈다
"어제 왜 날 찾아왔소?"
"왜냐고요?"
올리비아는 어제 느꼈던 자신의 분노를 불현듯 상기하며 그의 품에서
빠져 나왔다
"어떻게 그렇게 제게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을 할 수가 있나요?"
그는 그녀를 진정시키며 잘라 말했다
"정확히 4일이 지났을 뿐이오"
그녀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전 당신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어요 당신에게는 고작 4
일이었을지 몰라도 제겐 40년보다도 긴 시간이었다구요"
"당신은 나에 관해 너무 많이 생각하는 게 탈이오"
"당신은 이런 비참한 운명을 선택한 것이 바로 저라고 생각하는군요?"
"당신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소 그러니 그걸 택하도록 해요"
"제게 프레디와 결혼하라는 것은 정말 죽음과도 같은 삶의 길로 내모는
것이에요 "
그가 시선을 먼 곳에 고정시킨 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당신은 나를 너무 많이 사랑하고 있소, 올리비아 그러지 않도록 스스
로 다짐을 해요"
그녀는 지금까지 그의 다양한 감정을 접해 보았지만, 지금 그의 모습은
전에 보았던 격노도, 가끔씩 튀어 나오던 부드러움도, 원인을 알 수 없는
안절부절도 아닌, 그녀의 가슴에 찬바람이 일게 하는 무관심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그를 사랑하는데 있어 그로부터 받아야 되는, 그리고 그녀
가 감수해야만 되는 모든 상황을 예비해 두고 있어왔지만 무관심은 아니
었다 그녀는 가슴이 부서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제 자신을 당신처럼 되도록 다짐하라는 건가요? 세상을 향해 마음에
독을 품고 대항하라는 건가요?"
그의 무관심에 가슴이 찢긴 채, 그녀는 그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 알 수
없는 베일을 벗겨낼 수 있기를 바라며 소리쳤다
"당신이 말하는 다짐은 무엇인가요? 당신에게 있어 난 그런 다짐의 일
부일 뿐인가요?"
그녀는 차라리 애원했다 그녀 몸 속의 하나하나가 그를 향해 뻗쳐가서
팽팽해졌다
"원인이 무엇이든 당신 고통의 반은 제 것이 될 거예요 왜 제게 당신
은 아직도 어둠만을 주시나요?"
그녀는 그의 목을 감싸며 입술을 맞췄다
"당신 삶의 한 자리를 제게 주세요, 자이'
그는 바로 대답하지도 않았으며 그녀를 밀어내지도 않았다 그저 그녀
의 등줄기를 흐르는 그의 손끝에는 갈망의 무게만이 실려 있었을 뿐이었
다 그러다 그가 머뭇거리며, 그녀의 가슴을 휘젓는 말을 뱉어내었다
"당신은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소 내 마음속에 당신은 지금
쯤은 그것을 알아야 하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가 멈춰 서며 그
세계 속의 모든 것이 화석처럼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가 채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그가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난 듯 불쑥 소리쳤다
"나는 가야 하오"
"가다니, 어디를 간다는 거죠?"
"세관소에"
그녀는 그의 목에서 손을 풀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도날드슨이 프레디에게 계속적인 번영을 약속할 위탁 판매품을 보내
왔소 난 서류와 물품을 대조해야 하오 가끔 서류상의 물건과 실제 물품
이 다를 수가 있거든"
그녀는 오늘 그가 자신의 마음속에 담고 있는 감정의 일부분을 내보였
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그가 흔들리는 음성으로 고백한 말 중에서 이미
그녀가 그의 마음속에 자리를 잡고 있다는 말에 감격했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그녀가 말했다
"당신은 고객에 대해 의심이 대단하군요 프레디의 대리인이 아편에는
손을 대지 않는 걸 아시잖아요"
"틈이 보이면 그들은 모두 아편에 손을 대지"
"그들이 아편을 밀수해 유럽으로 가져간다는 거예요?"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어떻게요?"
"화물에 숨기거나, 안내원들이 몸에 지니고 가거나, 선원을 통해 숨겨
가는 거요 아무튼 밀수에는 숱한 방법들이 있소 유럽에도 아편 중독자
들, 지독한 아편 소굴이 있소 그들이 어디서 아편을 얻는다고 생각하오?"
"당신은 그럼 혼자 이 세계를 떠맡으려는 거예요?"
"아니, 전 세계의 반만이오 지금 현재로는 그것으로 충분해요 자, 갑시
다 약속 시간을 놓치겠소 안 그러면 런던의 마약 소굴이 승리를 할 테니
"
아편 거래에 대한 라벤던의 강박관념이 논리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
았지만 그녀는 애써 논쟁을 피했다 그녀는 다시 한번 차 상자를 이용해
아편을 밀수하는 걸 자이가 막으려 한다는 이유만으로 죠수아 경이 그에
게 그다지도 적개심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이틀 후에, 라세라 축제의 종결을 알리는 침례식浸禮式이 있소 그것
이 보고 싶소?"
올리비아는 기쁨으로 숨이 막혔다
"예, 그래요 조각상들이 어디에서 침수되지요?"
"강의 위아래 쪽 돌층계에서 주로 밤에 행해지는데 퍽 다채롭지 불편
함을 참을 수 있겠소?"
"그럼요 불편하건 말건 전 참을 수 있어요"
"좋아, 내 마차가 밤에 당신집 모퉁이에서 기다릴 거요"
"몇 시에요?"
"어두워진 후부터 있을 테니 올 수 있을 때 와요"
"제 이모부님의 집을 알고 있나요?"
라벤던이 그녀가 말에 오르는 것을 도우며 크게 웃었다
"캘커타에 사는 사람 중 누가 죠수아 경의 집을 모르겠소?"
올리비아가 말의 고삐를 잡았을 때, 그의 표정은 밝음을 잃고 다시 슬
픔에 잠기는 듯했다
"당신은 내가 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오, 올리비아 나는 바라건데"
"그러지 마세요"
그녀는 몸을 기울여 그의 입술에 손가락을 댔다
"아무것도 바라지 마세요 그런 행운을 바라는 게 아니라 불운을 비는
거예요 무엇이 오든, 오도록 내버려 두세요 저는 그것을 견딜 수 있어
요"
그가 작은 소리로 무엇인가 말하고 돌아섰을 때,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그 말이 집에 다다랐을 무렵에야 강하게 머리 속에 자리했다
"나 역시 그럴 수 있기를 기원하오"
지금 당장에는 그 말의 뜻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녀에게, 지금 당장에는
라세라 축제일이었다
침례식은 내일 시작될 것이다 자기들의 회교 사원 안에 모셔진, 10명의
무장한 여신이 새겨진 거대한 조각상들이 이 축제의 마지막을 알리며 사
람들에 의해 침례의 의식에 동원될 것이고, 사람들은 거기에 열렬한 경배
를 바칠 것이다
먹을 것들과 함께 북소리를 비롯한 온갖 악기 소리, 웃음소리 등이 인
도인 거주 지역에서 들려왔다 에스텔의 집에서도 그 집에 속한 엄청난
수의 하인들이 그들 나름의 제단을 만들고, 그들이 신성시하는 조각상을
모셔왔다
"이 소음, 소음! 이런 불경스런 의식들을 조용히 자기들끼리 하면 안 되
는 거야? 왜 우리 모두 이렇게 시달려야 하는 거지?"
브리짓트 부인의 불만 섞인 넋두리에 올리비아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일 년에 한 번뿐인 걸요, 이모님 그들에게는 의미 있는 행사구요"
"일 년에 한 번뿐이라는 게 고마울 뿐이다 아니면 우린 모두 귀머거리
가 됐을 테니"
그녀는 이모의 계속된 트집에 질려 슬그머니 밖으로 나와 아카시아 나
무가 아름답게 가지를 뻗은 곳 아래 자리를 잡고 폭풍의 언덕이라는,
그녀를 사로잡기에 충분한 연애 소설을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 내려갔다
얼마쯤 시간이 지나갔을까 정원 저 끝에 하인인 자하랄이 공손한 모습
으로 서서는 그녀에게 저녁때 있을 자기들의 경배 예식에 참여할 수 있는
지를 물었다 그녀는 진한 감동으로, 이모의 반대를 예상하면서도 후에 사
과 드릴 것을 결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밀리 브론테의 격정적인 소설과 함께 그럭저럭 저녁이 되었다 에스
텔도 죠수아 경도 없는 식사가 순조롭게 이뤄졌다 그녀는 자하랄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몸을 움직이다가 새삼 자신이 이제껏 하인 숙소에 정
식으로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것을 깨달으며, 자신의 무심함에 죄책감마
저 느꼈다
숙소에 들어서며, 그녀는 하인들의 숙소의 규모와 그 안에 있는 여자와
하인들의 숫자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 저녁에 그들은 모두 새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 수수한 분위기에서조
차 호화로운 빛의 색채를 반짝이고 있었다
모든 열광의 중심은 제단이었다 요란한 장식과 화려하고 잡다하게 세
워진 우상은 10개의 각기 다른 종류의 무기들을 갖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매혹되었다 어둠 속에서 치러지는 그들 의식의 경건함에는
입 밖으로 내어지지 않는 마음 찡한 행복감이 있어 보였다 신앙심에 빛
나는 그들의 눈동자를 보며 올리비아는 자기도 모르게 감동이 된 나머지
그녀가 갖고 있는 모든 돈을 헌금한 후 조용히 물러 나왔다
그녀가 집에 되돌아왔을 때 죠수아 경이 돌아와서 식사를 끝내고 서재
에 있었다 집에 아직 돌아오지 않은 에스텔 때문에 속이 상한 탓인지 이
모님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죠수아 경의 서재를 찾아 들어갔다
"저, 이모부님 에스텔에 관한 얘기인데,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이모부님이 꼭 들어 주셨으면 해요'
"에스텔?"
그는 올리비아의 얼굴이 심각한 것을 보곤 조금 놀라는 것 같았다
"왜? 그애가 아픈가?"
"아뇨 에스텔은 적어도 육체적으로는 완벽하게 건강해요"
그의 시선이 공허해지고, 그 눈동자에는 지금 그녀의 말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표정이 나타났다 그녀는 재빨리 그의 무관심 사이로 뛰어
들었다
"전 이모부님이 지금 어떤 일에 몰두하고 계신지 잘 알아요 하지만 에
스텔은 그렇지 못해요 에스텔은 이모부님이 요즘 너무 바쁘신 이유로 관
심을 기울여 주지 않자, 그게 아빠가 자기를 더이상 사랑하지 않기 때문
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더이상 그앨 사랑하지 않는 거라구? 맙소사,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그가 희미하게 동요되는 것 같았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하지만 에스텔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요 그리고 그 불만을 이모님께 퍼붓고 있어요 이모님은 지금 속수무책이
세요 전 이모부님께서 얘기할 시간을 좀 내주셨으면 해요"
"누구하고? 브리짓트하고?"
"아뇨, 에스텔하고요 그앤 지금 팬터마임에 맘을 두고 있어요 이모님
은 그것을 적극 반대하시구요 이모부님께서 이모님을 설득해서 허락을
하도록 해주세요 그것이 에스텔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진 않을 거라고 생
각해요"
그녀는 숨을 돌린 후, 에스텔이 참가하려고 하는 팬터마임과 극단에 대
해 소상히 말했다 죠수아 경은 그녀가 말하는 동안 적어도 겉으로는 듣
는 일에 전념했다 그녀는 이야기를 마친 후, 대답을 기다리는 자세로 의
자에 앉았다 한참 후에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가 우리에게 거절을 했단다"
그것이 그가 한 말의 전부였다
"예? 뭐라구요?"
올리비아는 이제껏의 화제와는 전혀 다른 죠수아 경의 언급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지만 본능처럼 곧 재빠른 반응을 보였다
"이모부님의 제안을요?"
"그래, 오늘 아침에 그의 공식적인 거절을 통보받았다"
그가 갑자기 가소롭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원숭이 한 마리를 잡는데는 한 가지 이상의 방법이 있어, 한 가지 이
상의 방법이"
올리비아는 이모부님의 관심을 에스텔 쪽으로 돌이킬 수가 없었다 그
녀는 그에게 미칠 듯한 실망과 분노의 기분을 삭힐 시간을 주는 것이 낫
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 순간의 이 깨달음이 그녀의 삶 속에서 내린 결정 중
두 번째로 나쁜 결정임을 몰랐다 그리고 가장 나쁜 결정을 한 것이 바로
내일 그녀 앞에 다가올 줄은 더욱 알지 못했다
드디어, 침례식 날이 되었다
죠수아 경이 집을 나간 직후, 어젯밤에 늦게 귀가한 탓으로 어머니와
다툰 에스텔이 또 집을 나가 버렸기 때문에 아침 식탁에서 브리짓트 부인
의 또 한 차례의 폭발이 예상되었지만 올리비아는 자신의 열망에 사로잡
혀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아침 나절은 폭풍의 언덕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지만, 한나절의 시간
은 고정돼 있는 듯 그녀를 지겹게 했다 그녀는 곤두서 있는 신경을 진정
시키려고 한가로이 하인들의 숙소 근처를 배회하다 몸서리쳐지는 광경들
을 목격했다
어젯밤엔 축제의 열기와 불빛 속에서 놓쳐 버렸던 하인들의 영락되고
박탈당한 생활의 현실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오물이 막힌 하수구에 모인
파리떼와 바퀴벌레, 흩어진 쓰레기들이 풍기는 악취 등은 마치 전쟁 후의
폐허를 연상하게 했으며, 그녀를 더욱 놀라게 하는 것은 그 쓰레기 더미
로 몰려드는 어린이들의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었다
올리비아는 구역질을 느꼈다 그리고 분노했다 왜 이들은 이런 삶에 만
족하고 있는가? 주인이 보장해 주지 않는 건강한 삶이라 할지라도 왜 스
스로 쟁취하려 하지 않는가? 그녀는 고향에 있는 가축들조차도 이들보다
는 나은 삶을 영위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하인을 붙들고 물어 보려고 과감하게 숙소로 들어가 사방을 둘
러봤다 그녀가 들어간 방구석에 한 물체가 움직이려 애쓰는 것이 눈에
띄었다 사람이었다
"어디가 아픈가요?"
"예, 몸이 좀 안 좋아요"
"약은 먹고 있나요? 병명은 알고 있어요?"
"소용없어요 곧 죽을 텐데요, 뭘"
좌절감에 몸을 떨고 있는 그녀에게 자하랄이 나타나며 말했다
"가세요, 아가씨 이곳은 아가씨가 계실 곳이 못 됩니다 마님께서 아시
면 큰 일이에요 마님은 아가씨께서 이곳에 오시는 걸 싫어하세요"
올리비아는 또다른 분노를 느꼈다 그의 말투는 그가 그녀의 세계에서
환영을 받지 못하는 것처럼 그녀 역시 그들의 세계에 끼지 말라는 경고같
이 들렸다 그녀는 무력감에 정원으로 몸을 옮겼다
누구에 대한 분노인가? 사람들을 인간 취급조차 안 하는 이 집 사람들
에 대한 것인가, 아니면 이런 불공평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는 그들을
향한 것인가? 이것도 아니면 이들의 실상에 그토록 무관심했던 한심한 자
신을 향한 것인가?
저녁을 알리는 시계를 보면서 그녀는 아버지의 말을 상기했다
'세상은 잔인함, 불공평, 기근으로 가득 차 있단다 만약 네가 그것에 대
해 무엇을 할 수 있거든 하여라 하지만 해줄 수 없다면, 안락의자에 앉아
서 동정하는 것으로 그들에게 피해를 주고 모욕하지는 말아라'
실용주의 덕택인지, 피곤함에서 오는 건망증 때문인지, 올리비아는 사색
의 시간을 잃었다 이모부님도 에스텔도 돌아오지 않았기에 이모와 식사
를 마친 올리비아는 자이와 약속한 침례식 참관이라는 야간 모험을 위해
적당히 양해를 구하고 식탁에서 물러났다
시계 바늘이 11시 30분을 가리켰다 올리비아는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
을 억제하며 외출복을 입고 침대에 앉아 있다가 늦게서야 돌아오는 에스
텔의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에스텔이 잠들 때까지 15분 정도 있
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10분 남았다 5분
그런데 그녀의 방문이 갑자기 열리며 에스텔이 걸어 들어왔다
"언니가 여태 깨어 있어 정말 다행이야 언니에게 해야 할 중요한 얘기
가 있어"
아, 하나님 지금은 안 돼요, 지금은 에스텔과 이야기를 나누다가는
자이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갑자기 올
리비아는 무엇에 쫓기듯 격렬한 초조감에 사로잡혔다 그런 초조감을 애
써 감추며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미안해, 에스텔 난 막 자려던 참이었어 난 지금 무척 졸립거든 그 얘
기는 내일 아침에 하면 안 되겠니?"
에스텔이 머뭇거렸다
"에스텔, 만약 팬터마임에 관한 문제라면 내가 이미 아빠께 말씀을 드
렸어"
"팬터마임에 대한 얘기가 아니야"
에스텔의 어조에서 느껴지는 그 무엇이 올리비아를 침묵하게 했다 이
아이가 혹시 밖에서 무슨 일을 저지른 게 아닐까? 그때 복도에 걸려 있는
시계가 종을 쳤다 자정이다! 침례식은 자정 이후에도 계속될까? 자이의
마차가 기다림에 지쳐 가 버리면 어쩌지? 그녀는 조급해졌다
"솔직히 말해서 에스텔, 난 지금 편두통, 아니 감기 아무튼 그런
것들로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아 에스텔, 미안하지만 내일 얘기하면 안 되
겠니? 약속할게! 내일은 온종일 함께 얘기하자구나"
에스텔은 다소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빈정거렸다
"좋아 그럼 내일 해 언니 시간을 빼앗아서 미안해"
올리비아는 안도감에 에스텔의 빈정거림도 잊은 채 그애가 방을 나간
뒤를 이어 살금살금 뒤 유리창을 통해 대로로 통한 낮은 담을 넘어 재빨
리 마차에 몸을 실었다
그녀는 이미 자이를 제외한 이 세상의 모든 존재를 잊은 듯했다 올리
비아는 에스텔에 대한 생각을 잊었다 죠수아 경도 잊었고, 브리짓트 부인
도 잊어 버렸다
그녀가 운명의 남자를 만나기 위해 마차가 어둠 속을 달리고 있을 때,
그녀는 진정 에스텔을 그렇게 대뜸 쫓아낸 일이 일생 중 가장 큰 실수였
다는 것을 몰랐다 그로 인해 그녀가 치러야 할 엄청난 대가에 대해서도
에스텔이 하고자 했던 말의 아주 작은 일부분이라도 올리비아가 귀담아
들었더라면 삶의 방향을 가리키는 시계 바늘이 너무나 판이한 곳으로 향
했으리라는 것을 그 순간의 그녀가 어찌 알 수 있었을까 그녀가 떠 안고
가야만 할 숙명을 위해 어쩌면 신神마저도 굳게 입을 다물고 그 같은
함정을 예비해 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마차가 멈춰 선 선창가에서 보는 보름달은 세상을 삼키려는 듯 차갑게
월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는 밝게 빛나는 달빛 아래 흑단처럼 검은 머
리를 반짝이며 서 있었다 정교하게 금으로 가장자리를 장식한 실크로 된
옷을 입고 이전에 그녀가 느끼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는 강가
호에서 내려진 대형보트 옆에 서 있었다
차가운 월광 그늘 아래서 그는, 어느 명문 가문의 귀족처럼 보였다 그
의 귀족스러움과 누구든 그를 거역할 수 없게 만드는 몸짓 속에 올리비아
의 숨결은 더 얽혀갔다 그가 그녀를 보트에 오르는 것을 돕는 사이 그녀
는 말했다
"당신은 꼭 두 세계에 존재하는 사람 같군요"
"모두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겠지"
그의 얼굴은 달그림자를 등에 지고 있어 명확히 보이지 않았지만 굳은
표정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단둘이 아니라는 점에 다소 실망했
지만, 배가 미끄러져 나가면서 올리비아는 자신이 그의 숨결과 맥박의 박
동을 느낄 수 있는 거리에 있는 것으로 만족했다
"어디로 가고 있죠?"
"침례식이 가장 잘 보이는 곳으로"
그는 그녀가 미미하게 떨고 있음을 눈치채고 눈살을 찌푸렸다
"당신은 왜 숄을 가져올 생각을 하지 않았소?"
두꺼운 스커트와 울로 된 긴 팔 블라우스를 입고 있는 그녀는 이 정도
면 충분히 따스할 것이라 생각했었다
"생각은 했지만 잊어버렸어요"
그는 아무 말없이 자신의 숄을 벗어 그녀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둘러 주
었다 올리비아는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그의 두 눈을 더듬었으나 그
눈은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오늘 밤은 웬지 그의 기분을
읽어 낼 수 없는 사실에 다소 불안을 느꼈다
그녀는 침묵이 그녀에 대한 무관심은 아닐지라도 그의 긴장을 대변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눈이 여전히 자신의 모든 생
각들을 읽어내려고 자신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음에 따스함을 느꼈고, 최
고급 천으로 만들어진 숄의 따스함 속에서 육체적 안락함을 느끼며 불안
감을 떨쳐 버렸다
"당신도 집에서 침례의식을 치르나요?"
"그렇소"
"신앙심에서 우러나오는 건가요?"
"사람들의 기대 때문이오"
사람들이라구? 수자타 때문인가?
"내 직원들과, 뱃사람들 말이오 너무 가난해서 스스로 제사를 드리지
못하는 사람들의 기대를 채워 주기 위해서 치르는 행사요"
"그 의식에서 당신은 무엇을 기원하나요?"
"난 신에게 바칠 감사의 말도, 내 미래를 위한 어떤 선물에 대한 기대
도 갖고 있지 않소 내 운명은 그저 내 자신의 것일 뿐이니까"
항시 느꼈던 것처럼 그의 냉소는 다시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
러면서 동시에 그녀는 그가 그토록 잔인하게 다져가는 고집과 자신 속에
숨겨 두는 비밀의 성채城砦를 습격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혔다 그의
고집은 그녀가 느끼기에 그녀가 지금껏 보았던 그 누구의 것보다 더 잔인
한 것이었다
그는 돈으로 살 수 있는 모든 게 풍족한 반면, 돈으로 살 수 없는 모든
것이 부족했다 이름도 남기지 않은 채 그를 버린 아버지는 누구였을까?
자이는 누구나가 느끼고 그리워하는 부정父情을 갈망해 본 적이 있을
까? 그의 어머니는 책임질 수 없는 아이의 탄생을 저주하지는 않았을까?
그녀는 정말 죽은 것일까? 알려지지 않은 그의 아버지는 이미 죽었을까?
그는 부모 중 누구에게 저 눈동자를 선물받았을까?
"쓸데없는 생각들은 하지 말아요, 올리비아!"
그가 그녀의 생각의 잔해를 정확히 읽어내며 말했다
"당신이 지금부터 보게 될 것 외에는 아무 생각도 말아요 그래야 할
이유가 있으니까!"
이유라구? 그녀는 꼬집어낼 수 없는 불안을 느꼈다 그는 이렇듯 언제
나 바로 곁에 있지만 도달하기 어려운 마음속 깊은 동굴로 너무 무정하게
숨어 버려 그녀가 감히 끼어들 수 없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분
명 자신이 느끼고 원하는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또한 그 역시 마찬가지
로 그녀를 느끼고 원하지만 고의로 냉랭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알
았다
"잘 보도록 해요"
강의 본류로 올라가자 강둑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규칙적으로 리드미컬하게 울리는 북소리가 심오한 메시지를 남기듯 둑 위
를 맴돌았다
북소리 속에서 그녀는 숨을 죽였다
그녀는 경의에 휩싸여 침묵한 채 오랫동안 그 모든 광경들을 바라보았
다 그들은 강둑 가까이로 다가서 있어 의식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과
조각상들의 세밀한 부분까지 볼 수 있었다
매번 조각상이 물 속에 빠질 때마다 낮은 신음소리들이 흘러나왔고, 그
거룩한 행사가 끝난 뒤에 그들은 둑 위로 물러 나가 한번의 뒤돌아봄도
없이 쏜살같이 흩어져 갔다
올리비아는 자이와 조용히 앉아 라세라의 마지막 의식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넋잃은 눈을 서서히 거두며 라벤던을 쳐다보았다 그의 회색빛 두
눈에는 너무나도 뚜렷한 어떤 물음이 담겨 있었기에 올리비아는 본능적으
로 멈칫했다 자이 라벤던은 그녀가 무엇인가 말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
다 아니면 무엇인가를 간절히 말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직감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전 언젠가 쿠아툴리에서 이 조각상들이 대단한 배려와 헌신으로 제작
되어지는 것을 봤어요"
이게 그가 원하고 있는 대답인가?
"그 조각상들이 제단에 올려져 있는 10일 동안은 사람들에 의해 퍽 소
중히 다뤄지고 경건히 숭배되더군요"
"계속해요"
그녀의 고정된 시선 속에는 겹겹의 가면을 쓴 채 어둠 속에 묻힌 그의
얼굴이 들어왔다
"하지만 그 조각상이 물에 내려질 때 사람들은 모두 거칠고 조심성 없
는 행동이었어요 갈 때는 또 아무도 뒤돌아보지 않더군요"
"아!"
그가 알 수 없는 탄성을 발했다 그와 동시에 그가 참기 힘든 속박에서
풀려난 듯 재빨리 몸을 움직였는데, 달빛에 드러나는 그는 그녀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유령과 같은 낯선 모습이어서 문득 그녀를 얼어붙게 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냉랭함과 신중함이 섞여 있었다
"당신이 말한 그것이 바로 이 침례식의 교훈이오 그들은 사랑하지만
떨어져 초연한 채 있으라고 가르치는 거요 서로가 필요할 때일수록 관계
를 끊고 결코 후회하며 뒤돌아보지 말라고 가르치지"
올리비아는 몸을 떨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그럴 수 있소 그래야만 하오 하지만 후회가 없다고 해서 고통이 없는
것은 아니오"
그의 말이 다시 부드러워졌다
"보시오"
그녀의 시선이 강가로 옮겨졌다 그들의 거부 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
침례 의식을 마친 사람들은 거의 자취를 감춘 뒤였다 그러나 남아 있는
사람들은 갖가지 모습으로 자신들의 슬픔을 참아내고 있는 듯했다
올리비아는 가슴이 서늘해짐을 느끼며 지금 자신에게 무엇인가가 다가
오고 있음을 느꼈다 따뜻한 숄의 느낌 속에서도 그녀는 알 수 없는 비극
의 예감 때문에 눈물을 참으며 물었다
"당신은 스스로를 힌두교인이라 생각하세요?"
"내가 나 자신을 어떤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면, 그렇다고도 할 수 있
지"
"그럼, 당신 역시 뒤도 안 돌아보고 저런 거부 의식을 할 수 있겠군요?"
"그래요"
한 치의 망설임도 담겨 있지 않았다
"후회도 없이요?"
"그럼, 후회없이"
"그러면 고통도요?"
순간적인 망설임이 곧 대답으로 변했다
"그렇소"
그가 내뱉은 한 마디 한 마디에 그녀는 자신이 혼자뿐인 차갑고 공기
없는 공간으로 내던져짐을 느꼈다 무덤 속과도 같은 침묵이 그들 사이를
메웠다 그가 한 말의 엄청난 의미에 얼이 빠진 올리비아는 흩어져가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배가 많은 선창에는 자이의 하인이 마차를 대기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
다 인적이 끊어진 채 황량한 선창가에는 달빛이 유난히 밝았다 그녀의
가슴에 퍼지고 있는 절망스런 종소리와는 아무 상관없이 사람들은 모두
돌아갔다
자이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가 마차에 오를 수 있게 도와 주며 느낌
없는 어조로 말했다
"당신을 다시는 볼 수가 없을 거요, 올리비아"
그 말은 사실 그가 이 밤 내내 그녀에게 하고 있던 것이었다 메아리처
럼 가슴에 퍼져가는 그 말이 실상은 오늘 밤 처음 만난 때부터 그가 그녀
에게 했던 말임을 뒤늦게야 알았다 그녀의 마비된 입술은 '왜'라는 단어
를 만들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가 이처럼 불쑥 사형선고를 내리
곤 어둠 속으로 마차를 달려 나가자 그제서야 그녀가 소리쳤다
"마차를 멈춰요!"
요란한 말밥굽 소리가 그녀의 뒤늦은 절규를 삼켰다 이처럼 잔인하고
부당한 선고를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지만, 그녀에겐 지금은 반
항할 여력도 없었다 올리비아는 자신의 사고력이 마비되어감을 느꼈다
단 한가지 끊임없이 떠오르는, 대답이 주어지지 않는 질문만을 빼놓고는
왜?
그녀는 자신이 이미 죽었거나 곧 죽을 것이라 생각했다 입이 마르고
건조한 채 칼칼했다 간신히 눈을 뜨자 그녀에겐 안개 속에 가리워진 이
모, 에스텔, 닥터 험프리스의 말소리가 들렸다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액
체가 강제적으로 입으로 들어오며, 누군가 자신에게 자라고 명령했다 의
식과 무의식 사이를 오가는 악몽에 시달리면서도 그녀는 긴 잠을 잤다
"기분이 나아졌니, 얘야?"
부드러운 가을햇살이 비치는 날씨 좋은 어느 아침에 완전히 의식을 회
복하며 눈을 뜬 올리비아의 눈에 걱정으로 주름진 이모의 얼굴이 들어왔
다 이모는 그녀를 일으켜 침대에 앉힌 다음 따뜻한 우유를 먹였다
"감사한 일이구나 의식이 깨어서 험프리스 박사님이 심한 추위로
온 학질이라고 하셨단다 열이 내렸으니 곧 괜찮아질 거야"
올리비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우유를 마셨다 이모의 뒤에는 에스텔이
올리비아와 단둘이 있게 되기만을 기다리며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시선을
피하는 에스텔을 보며 올리비아는 무엇인가 기억의 꼬리를 잡아 끌어올리
려 했지만 허사였다
그녀는 단 한가지, 라벤던을 다시는 못 보게 되리라는 것 외에는 생각
조차 할 수 없는 탈진상태에 다시 빠져 잠 속에 묻혔다 그러다 테이블을
정리하며 나는 유리컵 부딪치는 소리에 잠을 깬 그녀의 코끝에 향긋한 레
몬차 향이 들어왔다
"얘야, 기분이 어떠냐?"
죠수아 경이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
"좋아졌어요, 고맙습니다"
그녀의 가늘고 여린 목소리는 원래의 생기를 잃고 있었다
"다행이다 네 상태 때문에 걱정을 많이 했는데 이제는 얼굴에 화색이
돌고 안심을 해도 되겠구나"
그의 기분은 활기로 넘쳐 보였다
"더이상 새벽 승마는 하지 말아라 적어도 상태가 회복되기 전까지는"
못한다 더이상 새벽 숭마는 못한다 이제 새벽 승마는 아무 의미도 없
다 이제 정원산책을 허락받을 만큼 원기를 회복하고 있는 그녀는 마음이
이렇게 다 타 버린 상태에서도 다시 건강을 되찾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
게 느껴졌다 그녀는 오히려 회복하고 있는 것이 괴로웠다
올리비아가 회복되자 브리짓트 부인은 어느날 오후 가구 경매에 참석하
기로 했다
"그 경매는 아르메니안 사람들 집에서 열리는데 여러 가지 쓸 만한 것
들이 있다 더구나 난 정말 에스텔 방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그
애 방은 지금 한심할 지경이야"
에스텔! 올리비아는 급격한 동요를 일으키며 선명하게 기억을 떠올렸다
"에스텔은 지금 어디 있죠? 이모님! 전 이틀이나 그애를 못 봤어요"
"그애는 일주일 동안 프링글스에 갔단다 너도 펜워시스에 있던 그 멋
진 해군대위를 기억하지? 그의 누이 앤이 애들을 데리고 왔어 앤은 에스
텔의 친구가 되어 줄 정도로 친절하거든 에스텔이 가 버려서 싫으니,
올리비아? 네가 아픈 동안에 그애는 굉장히 모범적으로 바뀌었단다"
"모범적으로 바뀌었다구요?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올리비아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모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
다
"그래, 모범적으로 그애가 그 우스운 팬터마임에 대해 아빠가 꾸중을
하자 한마디 대꾸도 없이 그만뒀다니까"
"이모부님이 허락하지 않으셨어요?"
"물론이지 난 어쨌든 이렇게 일이 쉽게 끝나서 너무 안심이 된단
다"
그간의 사정에 대해 더 캐묻고 싶었지만 그녀는 물음을 삼켰다
"저 역시 안심이에요 에스텔이 마음을 잡고 이모님 말씀을 잘 듣게 되
었다니 기뻐요"
"그앤 몇 주 만에 처음 내게 키스를 해주고 떠났단다 내 속을 상하게
해 미안하다고까지 히면서 말이야"
브리짓트 부인이 의자 위에 있는 숄을 집어들며 덧붙였다 그 숄은 자
이가 그날 밤 그녀에게 주었던 것이다
"이 숄은 내가 본 것 중에서 최고로 훌륭한 것이야 크리스마스 선물로
에스텔에게 이런 숄을 사주고 싶은데 그 장사를 부를 수 있겠니? 이건 정
말 최고급품이야, 올리비아 이것 비싸니?"
올리비아는 잠든 척하면서 입을 다물었다
에너지가 재충전되자 오히려 그녀는 숱한 고통의 의문 속으로 빠져 들
었다
왜 자이는 이런 식으로 한마디 경고조차 없이 날 버린 것일까? 그녀는
지금까지 있어왔던 하나하나의 사건들에 대해 냉철히 자성해 보았다
자이는 나의 사랑을 원치 않았다 그저 내가 그에게 내 사랑을 떠 안겼
을 뿐 그는 날 만나길 피했고, 난 그에게 항복을 요구하며 추적했다
그는 내게 수없이 경고를 했지만, 그것을 무시한 것도 나였다 그가 마지
못해 던진 감정의 파편과 순간적 입맞춤과 자제된 애무의 편린들을 돌이
킬 수 없는 거대한 산처럼 받아들인 것도 나였다 그래, 그가 날 버린 것
이 아니다 그는 날 한번도 받아들인 적이 없으니까
그러나 이런 논리적 자기성찰도 그녀의 고통을 덜어 주진 못했다 깊어
만 가는 고뇌의 절망 속에서도 그도 역시 그녀를 사랑했으리라는 한 줄기
희망에 매달리고, 그 역시 지금 이 순간 고통을 감내하고 있으리라며 스
스로를 위로했다 점차 그녀는 그 고통을 참을 수 있게 되었고 절망감을
억제하면서, 언젠가 그를 다시 만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런 어느날 오후, 마차 한 대가 시끄럽게 문을 통과해 집으로 들어와
섰다 뜻밖에도 만취한 죠수아 경이 마차에서 뛰어내리더니 올리비아를
향해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아주 멋지구나 정원처럼 네 뺨에도 붉은 장미가 핀 것 같구나"
그의 고함과도 같은 소리에 소년 하인 레만이 뛰어나오자, 그는 레만에
게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올리비아는 그의 비정상적이며 비인격적인 행
동에 놀라 물었다
"기분이 좋지 않으세요, 이모부님? 오늘은 웬지 이모부님답지 않으
신 것"
"나답지 않다구?"
그는 잠시 어깨를 들썩여 보이고는 또다시 거침없는 욕설을 퍼부었다
"그 말똥 같은 머리를 가진 창녀의 아들놈! 내가 전에 그 썩어빠진 얼
간이에게 말했었지 반드시 본때를 보이겠다구!"
올리비아는 이해할 수 없는 이모부의 호통에 어리둥절해져서 물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누구에게 하는 말씀이세요?"
그는 올리비아의 물음엔 대답도 않고 때마침 하인이 가져다 준 쟁반을
던지며 욕설을 퍼부었다 죠수아 경은 취해 있었다 그녀는 그가 이렇듯
만취한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지금 그의 횡설수설은 분명 불길한
것이었다 그가 초점 없는 몽롱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다시 입을 열
었다
"슬로컴이 이번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거야 이번엔 절대로 그냥
끝내지 않을 거야"
"뭘 그냥 끝내지 않는다는 거죠?"
올리비아가 참을성없이 재차 물었다
"제 질문에 대답해 주세요, 이모부님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알
고 싶어요"
그녀는 이모부의 팔을 잡고 흔들며 거의 명령조로 말했다 그러나 그는
올리비아의 물음엔 아무 대답도 않은 채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바로
그때, 마차가 서는 소리가 들리며 랜섬이 내려서는 게 보였다 그녀는 마
당을 가로질러 가 그를 맞으며 말했다
"오, 하나님 당신이 오셔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이모부님은 지금 몹
시 취하셔서"
"알고 있소 그 때문에 왔지"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그는 사무실에서 온종일 마셔댔소 브리짓트 부인은 있나요?"
올리비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나마 잘됐군 부인이 봤으면 기절했을 테니"
그가 막 마당을 가로지르려 할 때 그녀가 그의 팔을 잡으며 막았다
"왜 이모부님께서 하루 종일 술을 마신 거죠?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죠? 그렇죠?"
그는 단순히 고개만을 끄덕인 후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갑자기 극도
의 피로감이 몰려오는 걸 느꼈다 악명 높은 치안판사 슬로컴이 개입된
이 일에는 자이와 관련된 어떤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요 자이가 했던 그 말은 이 사건과 어떤 연관
이 있는 게 아닐까 시작과 끝을 도저히 맞춰 볼 수 없는 사건들에 무력
감을 느끼며 방에 올라가 휴식을 취하던 올리비아는 이모부가 침대로 옮
겨지는 소리를 들으며 다시 서재로 나와 랜섬을 만났다
"이모부님은 잠이 드셨나요?"
"감기나 걸리지 않았으면 저런 바보 같으니!"
그는 긴장감을 감추지 못한 채 의자에 앉아서는 눈을 감고 두 손으로
눈을 지그시 눌렀다 올리비아는 질문을 잠시 보류했다
"한 잔 하시겠어요, 랜섬 씨?"
"고마워요 죠수아 경께서 이렇게 대취하기는 아주 오랜만이군"
목이 마른 듯 단숨에 위스키를 들이키는 랜섬에게 올리비아가 더이상
못참고 물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씀해 주세요, 랜섬 씨"
"죠수아 경께서 뭐라고 합디까?"
그의 목소리는 불안한 듯 떨렸다
"아무것도 조리 있게 말씀하신 것이 없어요"
그는 구구한 변명보다 책상 위의 신문을 집어들어 그녀에게 건넸다
"내가 말하는 것보다 이것이 훨씬 더 명확할 겁니다"
병이 나 있는 동안 신문을 접하지 않았던 그녀는 신문의 헤드라인을 보
고 깜짝 놀랐다
'킬티나갈 탄광 폭발로 1명 사망'
그녀는 빨리 나머지를 읽었다
'며칠 전 발생한 이 폭발로 갱도가 무너져 경비원 한 명이 죽었다 이
일로 탄광은 사포타지가 계속되고 있으며, 경찰은 폭발에 쓰여진 다이너
마이트 잔해를 찾기 위한 수사를 진행 중이다
폭발 당시 몇몇 증인들이 탄광 부근에서 말을 탄 괴한이 급히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 사람은 캘커타 거주자로 이 사건에 유력한 혐의
를 받고 있으며, 현재 슬로컴 치안판사가 킬티나갈의 마하라자 영주에게
강력한 협조 요청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 신문은 치안판사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었다
'5명의 증인들에 의해 확인된 그 유력한 용의자는 캘커타 관할권 내에
있다 그래서 마하라자 영주는 곧 그를 고발하게 될 것이다'
그녀는 입이 바싹 타며, 몸에 서늘한 한기를 느꼈다
"이 캘커타 거주자란 자이 라벤던을 말하는 건가요?"
"증인들이 한결같이 그렇게 증언했소"
"라벤던이 탄광을 폭파하고, 직원까지 죽였다구요?"
"라벤던은 변덕스럽고 예측이 불가능해 복수심도 강하고 특히 영
국인들에게는 그가 만약 우리에게 해를 입힐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자신에게 불리한 일도 서슴치 않고 했을 거야 그 탄광이 폭파되었기 때
문에 적어도 한 달 동안은 그 누구도 석탄을 얻지 못해"
그의 설명에 올리비아는 극도로 불안해졌다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어요!"
그녀는 성난 듯이 말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소, 그는 더구나 그는 이 일로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고 했지 영국인들에게 위협을 가하고 보험금도 타내기 위한 수단
으로 말이야 누가 그 미친 녀석의 마음 속을 알겠어?"
"그가 무고한 경비원까지 죽이면서 그렇게 했다구요? 그런 생각은 해
볼 가치도 없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맞아, 그게 그의 오산이었지 침례식날 밤에는 모든 사람들이 술을 마
시며 놀 것으로 예상했거든 물론 다른 사람들은 그랬지 하지만 그
경비원은"
"침례식날 밤이라구요? 폭발이 그때 일어났나요?"
랜섬이 신문을 가리켰다
"증인들은 라벤던이 그의 검은 말을 타고 탄광지대 밖으로 달려나가는
것을 봤다고 증언했지"
올리비아는 정신을 가다듬고 신문을 집어들어 날짜를 확인했다 그리곤
나지막이 소리쳤다
"그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 그들 모두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구요!"
두 눈을 크게 뜨고 랜섬이 그녀를 한동안 조용히 주시했다 그의 안색
이 창백해지며 잔을 든 손이 떨리고 있었다
"어떻게 그토록 확신할 수 있는 거지, 올리비아 양? 부탁이오, 내게 말
해 줘요 죠수아 경께서 부지불식 간에 말을 했소? 솔직하게 말해 줘요
난 모든 것을 듣고 싶소"
그녀는 그의 태도에 당황해 하며 애써 냉정을 찾았다
"이모부님께서는 제게 아무 말씀도 안 하셨어요 그저 횡설수설하셨죠
제게 라벤던이 어떤 건件으로 고발당할지를 말씀해 주세요"
"라벤던은 마하라자 영주에 의해 고발될 겁니다 아무리 동업자지만 고
발한다면 못할 것도 없지"
랜섬의 얼굴이 알 수 없는 초조감으로 어두워지고 있었다 랜섬 역시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그는 뭔가 대단
히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표정을 살피며 올리비아가 따지
듯 물었다
"이 일들에 대한 라벤던의 반응은 어떤가요?"
"그는 자신의 반응을 전혀 드러내 놓지 않고 있소"
"그럼 그는 이 일들이 꾸며진 일들임을 밝히려 하고 있지 않다는 거예
요?"
그는 그제서야 비로소 그녀의 격렬한 반응을 주목하며 놀라운 듯 내뱉
었다
"무슨 이유로 그 일이 꾸며진 것이라는, 그토록 강한 확신을 갖고 있
죠?"
이번엔 그녀에게 이미 답변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 남자에 관한 소문들 때문이죠 랜섬 씨조차도 제게 말씀하셨잖아
요? 그는 유난히 거만한 사람으로, 특히 거래에 있어서 정도를 벗어나는
짓은 안 하는 사람이라고 이런 점에서 그가 이런 섣부른 행동들을
했다고 믿기는 어려워요 그가 그토록 서툴게 뒤처리를 했을 거라고 생각
하나요? 다섯이나 되는 증인들의 눈에 빤히 확인되어지게 하는?"
"내가 지적했던 것처럼, 그는 급한 나머지 자신에게 불리한 짓을 저지
르"
"그는 생사가 걸린 불리한 짓은 하지 않아요!"
자신이 흥분한 것을 깨달으면서, 그녀는 애써 자제력을 되찾으며 말했
다
"전 지금 자명한 것에 대해 말하고 있어요 아무리 어리석은 판사라도
능히 알아챌 수 있는 자명한 것을 이건 호기심인데, 랜섬 씨도 그가
죄가 있다고 믿나요?"
그의 얼굴이 즉각 굳어졌다
"내가 어떻게 믿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올리비아 양 중요한 것은 치
안판사 슬로컴의 생각이오 그는 라벤던만큼이나 복수심이 강한 사람이에
요 그는 마음속에 종잡을 수 없는 많은 생각을 갖고 있소"
그의 어깨가 피로로 축 늘어졌다
"많은 나쁜 음모들이 꾸며지고 있어 난 두렵소 게다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난 머리 속이 뒤죽박죽이오 슬로컴은 사실이
어떻든지, 그가 죄가 있든 없든 간에 자신이 원하는 형태로 일을 만들 것
이오 이미 자이에게 불리한 여론들이 그를 부추기고 있어 그것이 어디에
서 어떻게 끝날지는 정말 모르겠소"
또다시 그가 그의 이름을 무의식 중에 말했다 올리비아는 랜섬이 많은
것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감지했지만 자기 자신을 노출시키
지 않은 채 계속 질문할 용기는 없었다
"라벤던이 앞으로 어떻게 반박할 것이라는 소문은 없나요?"
랜섬은 무서운 얼굴이 되었다
"미친 개가 문제가 닥칠 때 도망가는 것을 봤소? 미친 개가 몽둥이를
든 폭도를 만났을 때 달아나는 걸 봤소? 그런 개는 즐거이 그 폭도들과
맞서고 싸울 태세로 덤벼들지 그는 고소에 대한 반박도, 변론에 대한
수단에 대해서도 어떤 힌트도 주지 않고 있소 아마 언제라도 슬로컴이
오기만을 기다리겠지"
그가 손을 들어 체념의 몸짓을 했다
"난 솔직히 말해서 대단히 두렵고 불안해요 그건 내가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는 그의 복수심 때문이라오 자이는 스스로를 너무나도 잘 다스리
는 아이니까"
브리짓트 부인이 귀가했기 때문에 얘기는 끝이 났다 랜섬은 죠수아 경
이 대취한 이유를 애써 둘러댔고, 올리비아는 불안과 격노에 휩싸여 방으
로 돌아갔다 그들은 자이 라벤던에게 올가미를 씌워 기어이 파멸시킬 준
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그녀만이 오직 그의 무죄를 입증할 수 있었다 그날 그
사건이 일어난 시각에 그녀가 그와 함께 있었으므로
죠수아 경은 전날 밤의 행동을 기억하지도, 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냉정
한 얼굴로 침묵만을 지키며 그 일에 관해서 일체의 언급도 하지 않았다
올리비아는 어제 일로 이모부 내외 사이에 설전이 오갔음을 예측하긴 했
지만 그들을 화해시킬 엄두는 내지 못했다
그러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자이와 놓인 상황이 어떻든 간에 자이의 위
험에 관해 무관할 수 없음을 알고 그 일에 대한 명확한 상황을 알고 대처
하기 위해 이모부를 찾아 서재로 들어갔다
그는 청동으로 만들어진 중국 수나라 때의 종鍾을 닦다가 그녀를 보
며 어제 일은 잊은 듯 반가운 기색을 했다
"깨어 있었니? 그럼 이리 오너라 내가 이것을 닦는 동안 함께 얘기나
할까?"
그녀는 책상 위로 다가서며 얘기의 실마리가 돼 줄 신문을 집어들었다
"도대체 누가 이런 잔인하고 야만스런 일을 저지를 수 있죠? 이토록 형
편없이 자기 위신을 추락시킬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믿기 어려워요"
그의 관심이 여전히 그 청동 제품에 쏠려 있는 채로 흘리듯 말을 했다
"분명, 누군가는 그럴 수 있겠지"
그녀는 신문을 읽는 체했다 그러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려 보았다
"어둠 속에서 목격자들은 실수를 할 수도 있었을 거예요 아니면, 축제
일이었기 때문에 술에 취해 있었을 수도 있구요"
그의 무표정했던 눈이 순간 번뜩였다
"달은 보름달이었어 술에 취해 있었건 아니건 실수는 없었을 것 같다"
그녀는 무관심한 듯 애쓰면서도 가슴이 옥죄어지는 것을 느꼈다
"여기엔 슬로컴 씨가 현장에 갔다고 써 있는데, 그가 거기서 중요한 뭔
가를 찾아냈을까요?"
"내일 그가 오면 알게 되겠지"
이런 화제들에 이모부가 언짢아하고 있는 게 명백했지만 그녀는 그것을
무시한 채 용감하게 문제의 핵심을 파고 들었다
"그렇다면 동기는요? 누군가 얘기한 것처럼 보험금 때문인가요? 전 어
떻게 그럴 수 있는지 이해가 안 가요"
그녀는 용의자가 라벤던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교묘히 시사했다 그
녀는 애써 웃으며 계속 얘기했다
"사업가들 중의 몇몇 사람들은 가끔 참 놀라운 일들을 저지르는 것 같
아요 아버님께서도 예전에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미국에도 보험금을 타
내기 위해 작은 회사의 소유자들이 방화죄를 범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구
요"
그녀의 말들에도 죠수아 경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이 사건은 그 폭발로 사람까지 죽었으니, 범인은 살인죄로도 기소가
되겠군요"
죠수아 경은 그녀의 말을 듣고 뒤늦게서야 안경 너머로 조용히 그녀를
응시했다
"넌 그 문제에 대해 아주 자세히 알고 있는 듯하구나, 얘야"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는 그 정도죠, 뭐 랜섬 씨는 이 일의 결과에 대
해서 많은 추측과 논란이 생길 것이라고 하던데요 만일 그 범인이 살인
죄로 구속된다면 몇 년을 교도소에서 보내야 하나요?"
그녀의 심장은 고통스럽게 고동쳤다 그의 얼굴에 어렴풋한 변화가 일
어나더니, 시선이 허공에 멍하니 머물렀다 깊은 침묵을 주시하며 그의 내
부의 변화에 대해 알려 애썼지만 허사였다 잠시 후, 그가 다시 냉정을 되
찾으며 침묵을 깼다
"그래, 만약 슬로컴이 그렇게 결정한다면 적어도 십 년, 아니면 그 이상
아마 그 사람은 그런 결정을 내릴 거야 그는 마하라자로 하여금 그
를 고소하도록 유도할 테니"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죠?"
"어떻게라구? 머리 좋은 네가 그런 질문을 하다니 얘야, 킬티나갈
은 정치적으로는 독립되었을지도 몰라도 경제적으로는 그런 상태와 거리
가 멀단다 지금 그곳에는 언급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게 하나도 없단다 마
하라자는 그의 백성의 생계에 필요한 것들을 반드시 우리를 통해 사야 한
단다 그게 바로 그에게 고도의 압력을 가할 수 있게 하는 키포인트지"
올리비아는 고통을 느끼면서 랜섬이 한 말을 떠올렸다 그 사건이 거짓
이건 아니건 간에 그들은 라벤던을 제거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가지고
있소
고통의 무게에 위해, 올리비아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묻고 싶었던 가장
궁금한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혐의를 받고 있는 그 캘커타 거주자란 카라 칸타를 의미하나요"
"그래"
"만약 그가 자신이 어떤 변론을 제시한다면요?"
"슬로컴은 받아들이지 않을 거다 그는 슬로컴이 받아들일 만한 어떤
것도 제시할 수 없을 거야"
올리비아는 그의 확신에 찬 결론에 분노가 아닌 한기를 느꼈다 그녀는
침착해지려 애쓰면서 어쩌면 자신의 전 생애가 걸려 있을지도 모를 질문
을 던졌다
"그렇다면 제가 아는 한, 그 기소의 성공은 그 다섯 명의 증인들에 달
려 있겠군요 만약에, 아주 만약에 이 용의자가 그날 밤 킬티나갈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명백히 입증할 수 있다면 사건은 어떻게 되죠?"
그의 두 눈이 의혹과 관심으로 번뜩였다 그건 그녀의 어떤 질문보다도
더 그를 격노케 한 것이었지만, 그는 자신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그것이 만약 입증된다 하더라도, 무용지물이 될 거다 왜냐하면 그는
그곳에 있었으며, 그가 다른 곳에 있었다는 것을 입증할 만한 어느 것도
갖고 있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 그를 위한 철저한 사형이 준비돼 있었다 나무가 구해지고, 로
프가 이미 제자리에 준비된 채 집행인은 무기를 휘두를 준비를 마치고 있
는 것이다
"이제서야 전 이모부님께서 원숭이 한 마리를 잡는 데는 한 가지 방법
이상의 것이 있다고 말씀하신 말의 진의를 알 것 같아요"
그는 그녀의 경멸을 알아챘지만 그에 대해 설명하지는 않았다 만일 그
가 그것을 설명했다 해도 그것은 더이상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었을 테지
만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낸 달빛 아래서 사공이 놀라움이 가득 담긴 시선
으로 올리비아를 자세히 쳐다보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사공의 손바닥에
은화 몇 닢을 올려 놓았다
"지금은 약속한 액수의 반을 드리고, 나머지 반은 내게 답장을 갖고 오
셨을 때 드리겠어요"
그녀는 유창해진 힌두어로 뜻을 전했다 사공의 눈을 가득 메웠던 졸음
은 어느새 사라지고, 그는 곧 고개를 끄덕이며 알아들었다는 표시를 했다
"이 편지입니까, 아가씨? 잘 알겠습니다"
올리비아는 약속했던 첫번 몫을 그에게 주며 편지를 건넸다
"꼭 답장을 갖다 주시는 것을 잊어서는 안 돼요"
"저 그런데 라벤던이 베에 없으면 그땐 어떻게 하죠?"
"아뇨, 그분은 분명 거기에 계실 거예요"
그녀는 확신에 찬 대답을 했다
"그 편지는 꼭 그분에게만 전해야 해요 그분을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전해 주어선 안 돼요 알아들으셨죠?"
그 사공은 고개를 끄덕인 후, 올리비아를 혼자 남겨 두고는 한밤중에
밀려오는 졸음을 삼키며 노를 저어 앞으로 나아갔다
그 작은 배가 강을 가로질러 어둠 속으로 점점 사라져가는 것을 보며
올리비아는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밤의 바닷바람에 절망과도 같은 한기를
느꼈다 그녀는 외투를 끌어당기며, 추위 속에서 그 사공이 돌아올 때까지
밤을 새우며 견딜 준비를 했다
열 시도 채 안 된 시각이었지만 거리는 황폐한 사막처럼 공허했고, 길
잃은 개들은 쓰레기통의 버려진 음식을 찾아 헤매며 배고픈 울음 소리를
발했다 올리비아는 준비한 담요 위에 무릎을 바짝 조이고 치맛자락을 다
리 앞으로 모으며 앉았다
몸을 흔드는 추위 속에서도 그녀의 눈은 어둠 속을 가로질러 그 작은
배가 도착했을 만한 강가 호의 위치를 더듬고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두움
속에서도 그녀는 그 배의 모습을 분간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 갑판에서
밖으로 내비치는 불빛 하나조차도 확실하게 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어딘가 저 어두움 속에 자이가 있을 것이며, 지금 이 순간 그녀가 보낸
편지를 읽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편지는 이모부의 복수심과 외고집이 가득 찬 승부 근성의 꿈을 뒤로
한 후에 즉각 그에게 쓰여진 것이었다
지금 그 누구도 그녀가 살며시 집을 빠져 나온 사실을 알지는 못할 것
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그 사실을 알고 모르고는 이제 그녀에겐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적어도 내일이 되면 모든 캘커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될 것이고, 그후엔 그들의 편견과 동원될 수 있는 모든 상상
력들이 그녀를 휘감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내일이 오면 그녀는 옥터로니 기념비의 꼭대기까지 올
라가 있을 것이며 자이 라벤던을 향한 그녀의 사랑도 세상에 공표될 것이
었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물살을 가르는 소리에 그녀는 순간 긴장했다 그가
벌써 돌아오고 있는 것일까? 회신을 받아 가져오는 것일까? 하지만 되돌
아온 사공의 손에는 그녀가 보낸 편지가 그대로 남겨져 있었다 편지는
뜯어 본 흔적조차없이 보낼 때 그 모양 그대로였다
"배에 그가 안 계셨나요?"
"예, 아가씨"
올리비아는 기대가 완전히 부서져내림을 느꼈다
"누가 당신에게 그런 얘기를 해줬죠? 누구를 만나고 왔나요?"
"그분이 배에 안 계신다고 해서 갑판 위로는 올라가 보지 않았는데요"
그가 주춤대며 말했다
"그럼 누가 당신에게 그분이 배에 없다는 말을 했죠? 그게 누구 목소리
인지 기억해요? 기억을 더듬어 봐요 당신은 그가 누구인지 분명히 알 수
있을 거예요"
그녀는 거의 유일한 희망을 담아 그에게 말했다 그 남자는 생각해내려
애쓰다 더듬거리며 말했다
"저 글쎄요 도무지 생각이 나질"
"그의 하인 바하도르의 목소리가 아니던가요?"
그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 맞아요 그의 목소리였어요"
그는 종종 그 배에 고용되는 사공이었기에 바하도르의 목소리를 알 수
있었다 올리비아는 남은 은화를 그의 손에 쥐어 주었다
"이걸 다 드릴 테니 절 그 배로 데려다 주시고, 얘기가 끝날 때까지 기
다려 주세요"
그는 생각지 않은 제안에 놀라면서 은화를 보며 기뻐했다 그녀는 다시
희망에 차서 환해진 얼굴로 이제 뭔가 될 것 같은 확신을 가졌다 왜냐하
면 갑판에 바하도르가 있다는 것은 자이 역시 배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
하기 때문이었다
희망 속에서 두려움과 자신감이 교차되고 있는 그녀를 실은 작은 배는
강을 가로질러 다시 가고 있었다
그녀는 문득 분노를 느꼈다 그는 그녀가 보낸 편지의 내용조차 읽어
보지 않고 돌려 보냈던 것이다 그는 혹시 그다지 중요한 일도 아닌 것에
대해 한밤중에 위험을 무릅쓰고 편지 한 장을 전하려는 나의 무모함을 비
웃고 있는 것이 아닐까?
좁혀지는 거리 속에 올리비아의 분노는 용기를 잃은 두려움으로 변해갔
다 자이가 자신에게 화를 낼 수도 있으며, 또 자신을 만나는 것조차 거부
할지도 모른다 그녀는 고통스러운 듯 눈을 감았다
그러다 그녀는 어이없을 정도로 대담한 자신의 탈출이 주는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배를 다시 되돌리고픈 감정을 가까스로 누르며 이제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판단했다 이 밤의 고요 속에서 그녀의 심장
만이 큰 소리로 요동을 치고 있었다
그녀는 주저함 속에서도 작은 배는 이미 강가 호에 닿아 있었다 그쪽
에서 먼저 알아채고는 소리를 질렀다
"거기 누구 있소?"
사공이 올리비아를 쳐다보며, 그녀의 지시를 기다렸다 올리비아가 작은
소리로 지시하자 그쪽을 향해 응답의 소리를 외쳤다
"여자 한 분이 계십니다"
잠시 찰나적인 놀라움의 침묵이 있었다
"그 여자분이 뭘 원하시는 겁니까?"
"그 배를 타고 싶어하세요'
또 한 번의 침묵이 흘렀다
"무슨 용건인지요?"
"라벤던과 볼 일이 있으시답니다"
위로부터 속삭이는 듯한 의논의 소리가 들려오자 그녀의 심장은 자동적
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가 배 안에 있다!
"지금은 어떤 방문객도 만나지 않으시겠답니다"
올리비아의 표정은 굳어졌다 그녀는 다시 사공에게 지시했다
"이 여자분께서는 꼭 전할 말씀이 있으시답니다 만약 5분 내에 사다리
가 내려오지 않는다면 닻을 연결한 사슬을 타고서라도 올라가시겠답니
다"
의논의 소리가 좀더 길게 들려오더니, 누군가 갑판 안쪽으로 들어가는
발자국 소리와 함께 정적이 주위를 감돌았다 그렇게 얼마를 더 기다렸을
까 자신의 무모한 시도를 인정하며 한풀 기가 꺽인 그녀의 얼굴이 갑자
기 환희의 표정으로 바뀌었다 밧줄이 아래로 내려왔고 그녀는 곧 도움을
받아 갑판으로 올라갔다
바하도르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과 놀라움을 담은 눈으로 그녀
를 주시했다 하지만 그는 그녀에게 곧 존경을 담은 예를 갖춘 인사를 했
다 그녀 역시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하고는 말했다
"자이에게 내가 꼭 만나고 싶어한다는 말을 전해 줘요"
그녀는 인도에서 명문가의 주인이 하인에게 말하는 듯한 어느 정도의
권위를 담아 말을 했다 그녀는 땀이 맺힌 이마를 닦으며 크게 숨을 내쉬
었다 오, 하느님 그가 과연 나를 만나 줄까요? 그가 나의 뜻을 받아들여
줄까요?
그녀는 혼자만의 중얼거림을 누가 들을까 두려워하며 조심스럽게 갑판
위에 앉아 있었다 창백한 얼굴로 자기 자신에게 이 한밤의 방문 목적이
공식적임을 다짐했지만 다시 자이를 만난다는 흥분을 가라앉힐 수는 없었
다 바하도르가 돌아와 그녀만큼 굳어진 얼굴로 자이의 말을 전했다
"주인님께서 찾아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셨습니다 하지만 지금
은 뵙고 싶지 않으시답니다"
그는 당황함으로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그러면 언제쯤 시간이 날지 알아봐 줘요 난 서두르지 않겠어요"
그녀는 괜찮다는 표정으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난 밤새도록이라도 기다릴 수 있어요"
바하도르가 자리를 뜬 후 그녀는 두 번이나 되는 거절로 의기소침해졌
다 하지만 그녀는 곧 마음을 굳게 다졌다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 이곳까
지 왔는데 그를 못 만나고 갈 수는 없어!
얼마쯤 후, 바하도르가 조금은 부드러워진 모습으로 그녀에게 다가오며
따라오라고 했다 감격의 충동이 가슴을 쳤다 낯익은 복도를 계속 걸으며
그녀는 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끝내 당신이 나를 거절할 수 없는 것처럼
나 역시 당신을 거역할 수 없습니다 당신과의 이 숙명을
자이는 책상에 앉아서 글을 쓰고 있었다 올리바아와 눈이 마주쳤으나
그는 곧 고개를 숙이고는 다시 쓰고 있던 일을 계속했다 그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올리비아는 창백한 모습으로 문에 기대선 채 그를
응시했다 자이가 휘갈겨 쓰고 있는 펜의 움직임만이 공허한 정적을 메웠
다
소매를 팔뚝까지 올린 그는 한 손으로는 뭔가를 쓰느라 분주히 움직이
고 있었고, 한 손으로는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올리고 있었다 전등에 반사
된 그의 얼굴은 무엇인가에 골몰해 있는 듯 매우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
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자기가 써내려 가고 있는 펜끝에만 집중하고 있
었다
그녀는 대담하게 책상 앞으로 나갔다 가슴이 더이상 모멸감으로 황폐
한 사막이 되기 전에 그에게 말을 던져야만 했다 그는 여전히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자신이 무슨 대단한 양보나 한 듯 계속 글을 쓰면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올리바아, 당신은 여기 오지 말았어야 했소 당신이 나를 지금 얼마나
어렵게 하고 있는지 알고 있소?"
어렵게 하고 있다구? 겨우 이런 말뿐인가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전 그저 공식적인 자리를 마련하려 했을 뿐이에요 제가 온 용건부터
얘기하죠 제가 온 이유는"
"난 당신이 왜 이곳에 왔는지 잘 알고 있소 당신이 지금 취하고 있는
그 귀족적인 제스처는, 당신에게는 대단히 부자연스럽고 불필요한 것이
오"
"부자연스럽다구요? 그럼 이런 상황에서 제가 아무 말없이 그저 가만히
앉아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나요?"
"어떤 기사도 정신에서 날 돕기 위해 방문한 것이라면 당신은 지
금 이곳을 떠나는 게 좋겠소 듣기로는 아직 병에서 회복도 안 됐다던데
"
"걱정인가요? 당신이 그런 걱정을 할 자격이나 있다고 생각해요?"
그녀의 경멸 섞인 조소에도 그는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올리비아의 화
는 극도에 달했다
"당신은 말을 할 때 상대방에 갖춰야 할 최소한의 예의도 갖추지 않는
군요 왜 내 눈을 쳐다보지 못하는 거죠? 날 쳐다보는 게 그토록 두렵나
요?"
그는 천천히 쓰기를 멈추며 펜을 내려 놓았다 그는 의자에 비스듬히
기댄 채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선실 안을 밝히는 등잔불의
희미함 속에서 그녀는 가슴이 부서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난 두려워하지 않소, 그 어느 것에도 난 당신이 날 걱정해 주는 것에
감사할 뿐, 다른 아무 것도 없소"
그가 다시 펜을 들어 쓰기 시작했다
"당신도 이제 날 위해 더이상의 걱정은 할 필요가 없소"
그녀는 지탱하기 어려운 어지러움을 느끼며 의자를 당겨 앉았다
"지금 당신이 어떤 죄를 뒤집어쓰게 되었는지나 알고 있어요?"
"난 항시 무엇인가에 의해 갖가지 모함을 받지 지금 당신이 뭘 말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군"
"당신은 살인죄를 뒤집어쓰고 있다구요!"
"그렇군, 그건 나도 알고 있소"
"한 마디 부인도 없이 그렇게 인정하나요?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
고 있는지 알고나 있어요?"
그녀는 계속해서 그가 지금 얼마나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는가를 설명
했다
"내 피난처는 이미 정해져 있소 그곳이 당신처럼 여성적인 부드러움이
넘치는 곳은 아니지만 당신이 나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지는 않도록 해줄
피난처, 당신의 명예는 아무런 손상도 받지 않고 그대로 지켜질 것이오"
"당신은 지금 내 명예를 걱정하고 있는 거예요?"
그녀는 그의 고집스러움이 참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떤 곳이 당신의 피난처인가요? 말해 줘요, 자이!"
"그게 어디든지 그건 당신이 걱정할 문제가 아니오"
그의 이 한 마디는 그녀의 가슴을 있는 대로 들쑤시는 말이었다 그녀
는 주먹을 불끈 쥐고 분노 때문에 덜덜 떨며 그를 노려보았다
"내 말의 의미는, 내가 당신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뜻이오 올리비아,
내가 당신에게 부탁하는 것은 날 혼자 그냥 내버려 달라는 것이오"
그의 펜이 화가 난 듯 속도를 빨리 할수록 올리비아의 분노 역시 격앙
되어져 참을성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녀는 미친 듯이 소리지르며
무엇이든 던져 버리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분노로 가득 찬 그녀는 발을
구르며 다가가 그의 손에서 펜을 뺏어 있는 힘껏 방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것도 모자라 그녀는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종이들을 집어 던졌다
"당신이 어떻게 나를 이따위로 취급을 할 수 있어요? 어떻게 감히 나를
"
그 순간이었다 그가 그녀의 떨고 있는 몸을 뒤에서 와락 껴안았다
"오, 하나님!"
그녀는 거칠게 돌아서며 그의 뺨을 때렸다
"당신은 사형을 당해야 마땅해요!"
그는 그녀의 욕설에는 아랑곳없이 천천히 손을 풀더니 조용히 마룻바닥
에 흩어진 종이들을 모아 책상 위에 얹었다
"이건 당신이 간섭할 문제들이 아니오, 올리비아 섣불리 불 속으로 뛰
어들려 하지 말아요"
그녀는 고통스럽다는 듯 눈을 감았다 분노 때문에, 그러나 그것보다는
가슴 속 가득한 애정 때문에 그녀는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당신이 치러야 할 전쟁이라면 그건 바로 내가 치러야 할 전쟁
이기도 해요 난 벌써 그 일을 내 것으로 여기고 있어요"
"난 지금 당신에게 이 일로부터 벗어날 기회를 주고 있는 거요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해요"
그가 의자에 앉으며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몇 번의 비밀스런 만남, 그리고 몇 번의 키스 난, 이런 것들이
인생의 모든 것을 결정지을 수 있을 만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는 생각
지 않소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소?"
그녀는 그가 던지고 있는 비수와도 같은 말의 잔인성에 상처받고 고통
받았다
"그게 우리 관계의 모든 것이란 말이에요, 자이?"
그가 갑자기 일어섰다
"올리비아, 난 내가 하는 말들로 인해 당신이 더이상 상처받는 것을 원
치 않소!"
그는 그녀를 외면했다
"아뇨! 당신 때문에 상처받은 건 아무것도 없어요 정녕 아무것도"
그녀는 타는 눈빛으로 그의 앞에 다가섰다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음에 대답할 수 있나요?"
그는 일단 그녀의 도전을 받아들였다
"물론이오 만약 그게 당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하지만 당신은 내게
아무것도 아니오, 올리비아 당신은 아무런 의미도 내게 주지 못했소"
"난 믿을 수 없어요 난 절대로 당신의 그 말을 믿지 않아요"
그녀는 다시 터지는 격분으로 폭발하고 있었다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올리비아는 손을 들어 있는 힘껏 그의 뺨을 쳤다 그가 사줬던 유리팔
찌가 그의 얼굴에서 산산히 부서지며 그의 얼굴엔 피가 맺혔다 그럼에도
자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회색빛 눈이 잠시 깜박이더니 느리게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것이 나와 나를 둘러싼 모든 걸 견뎌내겠다고 한 약속의의미인가?
만약에 내가 무엇인가를 선택해야 하고, 당신이 그 선택에 포함될 수 있
으려면 당신은 견뎌낼 게 아주 많소 만약 견딜 수 있다면, 아무 말 말고
그냥 나가시오 올리비아"
다시 한번 손을 들어 그를 내려치려는 순간, 이미 그것을 안 자이가 그
녀를 붙잡았다 잠시 그와 몸싸움을 하던 그녀가 힘없이 바닥에 내던져졌
다
"정말 믿을 수가 없군요!"
그녀는 찢어지는 듯이 소리질렀다
"난 정말 당신을 믿을 수가 없어요"
그는 재빨리 그녀를 잡아올리며 손목을 심하게 비틀었다 그녀는 소리
를 지를 뻔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부릅뜬 두 눈이 그의 얼굴을 파고
들자 그가 자신의 행동에 놀란 듯 그녀를 놓고 방 안을 서성이기 시작했
다
"도대체 누가 지금 나를 나라고 생각하겠소, 올리비아 도대체 무엇이
당신에게 그럴 권리를 준 것이오? 지옥도 불사할 것 같은 용기, 억지로
캐묻고 대답하길 종용하고 왜 그토록 나의 일에 관계하려는 것이오?
난 당신의 그런 간섭이 지겹고 힘들어 그 밑도 끝도 없는 호기심에 진절
머리가 나 난 당신의 그 굉장한 상상력이 지겹단 말이오, 올리비아!"
악의에 찬 그의 눈동자에는 잔인한 불만이 쌓여 있었다
"당신은 내가 마치 모든 해답을 갖고 있는 것처럼 묻고 있소 난 당신
에게 빚진 게 없소, 아무것도! 당신 지금 내가 하는 말을 듣고 있소?"
그가 잠시 그녀를 쳐다보더니 곧 다시 서성대기 시작했다
"난 당신을 미워하기 시작했소 나라는 존재는 그저 당신의 그 환상에
찬 머리 속에서 창작해낸 로맨틱한 상대에 불과하오 그 창작들은 있지도
않는 것이며 존재해 본 적도 없소 당신이 하고 있다고 믿는 그 사랑은
망상에 불과해 난 당신의 그 어줍잖은 망상이 점점 자라나는 것에 대한
부담감을 더이상 느끼고 싶지 않소"
그는 그녀의 차가운 시선에 주춤한 듯 낮은 목소리로 말을 했다
"이 배에서 당장 내려요, 올리비아 아니면 내가 강제로 당신을 내려 놓
겠소"
고통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하지만 그녀는 용기를 내어 내면의 감성이
지시하고 있는 보복을 시도하려고 고개를 수그리며 웃었다
"자이, 당신은 거짓말쟁이에요 당신은 당신의 냉정한 판단에도 불구하
고 사실은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있어요 난 내 확신에 대해 그것을 지킬
용기를 갖고 있어요 당신은 내가 그날 밤의 당신의 알리바이를 주장하리
라는 것에 대해 불신하고 있지만, 동시에 당신은 내가 나 자신의 명예를
기꺼이 버릴 수 있다는 것도 어느 정도는 느끼고 있어요"
그녀의 눈이 경멸과 멸시의 빛으로 반짝였다
"만약 당신이 내 증언을 원하지 않는다면, 나도 고집하지는 않겠어요
또 당신이 나를 더 만나지 않겠다면, 그것도 받아들이겠어요 물론 상처를
받겠지요 하지만 내가 무엇을 받아들이건 간에 그것은 단지 당신이 당신
안에 존재하는 나의 의미를 줄이고, 또 당신 감정을 부인하는 것에 지나
지 않아요 당신은 지금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숨기기 위
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당신이 늘상 내뱉는 증오라는 감정은 당
신 안에 존재조차 하지 않아요 그것 역시 거짓이라구요 당신은 나를 사
랑하고 있어요, 자이"
짧은 고통의 순간들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바람이 부는 것, 그리고 바다가 숨쉬고 있는 사실이 확실한 이상 당신
은 나를 사랑하고 있어요 그리고 내일 아침 해가 떠오르기 전까지 당신
의 모든 거짓으로 위장된 말들을 없애 버리겠어요 당신께 약속하죠"
"여기서 이제 그만 나가지, 올리비아"
차갑고 냉정한 말이었다
"예, 나가겠어요 하지만 당신은 먼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내게
인정해야 해요"
그가 마침내 마지막 한 치의 자제력마저 상실한 듯 으르렁거리는 사자
처럼 그녀에게 다가와 그 큰 손으로 그녀의 목을 비틀기 시작했다 광기
로 뒤덮인 그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졌으며, 그의 엄지손가락이 그녀의
숨통을 흔들고 조이는 모습 속에는 사람의 이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
다
올리비아는 숨을 쉬려 노력했지만, 단지 눈앞에 검은 장막이 쳐지는 것
만 느낄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짧은 고통의 의식 속에서도 딱딱한
조개껍질을 부수고 있는 듯한 승리감을 맛보았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자신이 끝도 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 들고 있다는 느
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후 그녀는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올리비아는 미세하게 숨을 쉬기 시작했다 그
녀는 점차 호흡하기에 편안함을 느끼며 어렴풋한 의식의 한가닥을 잡고
기억을 되살리려 애썼다 그녀는 미소지었다 그녀의 입은 사향향기 속에
묻혀 있었고 사랑하는 이의 체취를 느낄 수도 있었다 그러다 그녀는 희
미하게 들려오는 그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왜 당신은 날 홀로 내버려 두지 않는 거요?"
그 소리는 도움을 갈망하는 탄원과도 같은 것이었다
"왜 이토록 날 고문하고 있는 거요, 올리비아"
자이가 얼굴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고 있음을 느끼며 그녀는 그의 몸에
자신을 밀착시켰다 그의 다부진 몸이 그녀를 격정적으로 안았지만 그녀
는 여전히 그가 내부의 거친 악마 같은 것과 싸우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
다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그녀는 그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묻었다
"아무 말 말고 그대로 있어요, 자이"
그녀는 편안함에 파묻혀 사랑의 목소리로 그를 위로하며, 그의 그 악마
같은 성격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
후 키스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당신을 사랑해요, 자이"
그가 또 갑자기 얼굴을 찡그리며 몸서리쳤다
"올리비아, 날 사랑해선 안 되오 그것은 지금보다 더 당신을 힘들게 하
고, 삶을 낭비하는 일이 될 거요 난 방금 당신을 죽일 뻔했소 내가 사랑
받을 아무 가치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나타낼 더이상의 무슨 증거가 필요
하겠소?"
"하지만 난 당신이 날 사랑하고 있다는 또다른 증거를 당신의 눈을 통
해 볼 수 있어요"
그녀는 미소를 머금은 채 그의 얼굴을 만졌다
"당신은 있지도 않는 것을 내 눈 속에서 찾아내려 애쓰는군"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런 것이 당신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해도, 날 위해서는 존재하고
있어요"
"가요, 제발 후회될 일을 저지르기 전에 빨리 떠나라구"
가라구? 어디로 가란 말인가? 그녀는 궁금했다 지금 그녀의 품 안에
자신의 전부를 갖고 있는데 어디로 가라는 말인가?
"후회할 것은 없을 거예요, 자이 난 이미 당신의 것이에요"그는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그녀에게 화가 난 듯 그녀를 흔들어 댔다
"난 당신에게 아무것도 줄 수가 없소 난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단 말이오"
"당신은 당신도 모르게 이미 내게 무언가를 주고 있어요, 자이"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는 그의 이마에 서린 땀을 닦아 주었다
그의 눈에서 그녀를 갈망하는 번뜩임이 일어나며, 그의 손이 그녀가 누
워 있는 침대의 베개 사이에 묻힌 머리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자신의 갈망과 어떤 얽매임 같은 고집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
었다
"왜 당신은 아직까지도 꿈 속에 갇혀 있는 거요? 왜 메아리도 없는 이
런 일에 허덕이는 거요?"
"우린 똑같아요 단지 당신이 아직도 쓸데없는 망설임을 계속하고 있을
뿐이에요"
올리비아는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그의 태도에 더이상 속을 수는 없다
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에게 키스하며, 그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장막을
헤치려고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당신이 날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남자인 것을 내게 증명해 봐요, 자이
라벤던!"
그녀의 도전적인 말의 회답은 빠르고 거칠었다 그의 마지막 피난처는
산산히 부서졌다 그는 조심성을 내던지고 그의 팔에 그녀를 가둔 후 거
칠게 단추를 뜯어내며 옷을 찢었다 모든 망설임과 두려움을 버리고 그의
손이 불꽃처럼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스쳤다
그의 눈은 침대에 누운 그녀의 정교한 몸매에 취해 있었다 길고 가는
다리, 넓게 조각된 가슴, 붉은 장미빛 같은 입술에 정열이 실린 애무가 쏟
아졌다 그의 눈이 지나치는 곳마다 그의 입술이 따라갔고, 그 사랑으로
그녀는 힘이 빠져갔다
그녀의 몸을 더듬는 그의 손길이 빨라지며 그녀의 신음소리도 높아갔
다 그녀는 자신의 몸에서 발견되어지고 있는 새로운 사실들에 놀라움과
황홀함으로 나뭇잎처럼 떨고 있었다 그녀는 다가올 어떤 혼란을 덮어 버
리려는 듯 얼굴을 베개에 묻어 버렸다
그는 그녀의 머리를 받쳐들고는 그의 혀로 그녀의 모든 달콤함을 마시
며, 그 안에서 그녀에게 마실 수 있는 것을 만들고 있었다 지금 그곳엔
되돌아올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존재치 않았다 그들 사이에 남아 있었던
불편함들은 사랑의 전희前戱에 묻혀 만족스러움으로 변했다 올리비아는
사랑의 느낌으로 충만해 있었고, 그녀를 원하는 그의 요구에서 행복을 느
끼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몸을 덮고 있던 모든 옷들을 벗어 버렸다 그녀의 시야에
단단하고 팽팽하게 긴장된 근육질로 되어진 그의 몸이 들어왔다
얼마나 지났을까? 올리비아가 떠지지 않는 눈을 간신히 떴을 때 자이는
그녀에게 팔베개를 해준 채 곁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어깨 위로 손을 가
져가 뺨을 그의 가슴에 기대며 속삭였다
"당신을 사랑해요, 자이!"
그녀는 그의 목에 가벼운 키스를 하며 그가 목에 걸고 있는 은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그녀는 한번도 이런 평화스런 느낌, 이렇게 완전한 평온함
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가볍게 그녀의 머리 위에 키스를 했다
"당신은 내게 너무 과분한 사랑을 주고 있군 "
피곤함이 섞인 그의 낮은 목소리에는 헤아릴 수 없는 행복감이 들어 있
는 것 같았다
"모두가 내 잘못인 것 같소"
"당신은 나를 완전한 여자로 만들었어요"
"아니, 그것은 꼭 이렇게 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오 이렇게 되
어선 안 됐었는데"
고개를 돌린 그의 머리를 자신에게로 잡아 끌며 그녀가 말했다
"아뇨, 꼭 이렇게 되어져야만 할 것들이었어요 우리가 처음 만난 순간
부터 우린 이런 모습의 운명을 갖고 있었어요"
그의 한숨이 더욱 깊어갔다
"날 사랑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위험한 일이오, 올리비아"
"이것이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에요"
그는 또 한번의 부드러운 키스를 그녀에게 해주며 고개를 흔들었다
"당신은 이곳에 오지 말았어야 했소, 올리비아 당신은 오늘 여기서 있
었던 일을 곧 후회할 거요 내가 당신을 받아들이지 말았어야 했는데, 비
난받을 사람은 바로 나요 나 자신이오!"
당신이 나로 하여금 이렇게 되도록 만들었다구요? 그것은 서로 같
이 나누었던 것들이 아닌가요? 그런 질문들이 혀끝에서 맴돌았지만 그녀
는 삼켰다
"무슨 일을 행했건 그것은 내가 원해서 한 일들이에요 자이, 난 당신을
너무 사랑해요"
그가 한숨을 지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난 당신에게 그 무엇도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오"
그의 내면의 고통과 갈등은 아직도 마무리 되어지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녀는 열심히 그를 설득했다
"나는 벌써 많이 가졌는 걸요 당신은 내게 유일한 사람이에요, 자이
나의 행복한 순간들을 망치려 하지 말아요 난 당신이 이제 마음대로 하
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어요"
그녀는 그를 더욱 가까이 안으며 그의 가슴을 더듬었다
"당신, 이 흉터는 어디에서 생긴 거죠?"
"싸움에서"
그녀는 손가락 끝으로 어깨부터 그 상처의 선을 따라 가슴 한복판까지
쭉 내려갔다
"칼에 다친 상처인가요?"
그가 머뭇거리다 간신히 말을 했다
"아니, 채찍에 맞은 상처요"
작은 탄식과 더불어 그녀는 상처 하나하나에 키스를 했다
"나의 입맞춤들로 당신의 모든 상처를 지울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는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당신은 사랑을 무슨 만병통치약인 줄 알고 있군"
"예, 맞아요 어떤 사람이 만약에 사랑받기를 허락해 준다면 말이에요"
올리비아는 잠시 생각에 빠져 있는 그의 얼굴을 자세히 쳐다봤다
"왜 그러는 거죠? 왜 당신은 나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를 그처럼이나 두
려워하는 거죠? 그 이유가 도대체 뭐예요, 자이?"
그는 얼굴을 돌려 천장을 응시하며 말했다
"왜냐하면 그건 나를 겸손하게 만들고, 내 안에 있는 나를 허약하게 만
들기 때문이오 또 나의 정신을 딴 곳에 쏟게 하고, 나를 겁쟁이로 만들기
때문이오"
그는 공허한 웃음을 터트렸다
"아마도 내가 겸손해지는 것에 익숙치 않기 때문인가 보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예요 사랑은 나를 겸손하게 만들고 있어요 나
를 깎아내리고, 나의 정신을 빼앗고, 나를 공포에 떨게 해요 난 당신이
원하는 모든 모습으로 변해가요 하지만 이런 나의 사랑하는 마음을 멈추
라고는 하지 마세요"
그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가 그런 시선으로 한참 동안 그녀를
응시하다가 마치 어린애와 같이 흥분된 음성으로 속삭였다
"당신의 사랑은 정말로 특이한 것이오, 올리비아 순수하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며, 이기적이지 않은 그런 진실한 사랑 난 이제껏 그런
사랑을 믿지 않았소 하지만 당신의 그 사랑이 나를 좌절의 늪에 빠뜨리
며, 날 당황하게 하고, 날 죽어가게 하고 있소"
그가 그녀의 손에 키스를 했다
"맞아요 난 여지껏 당신에게 거짓말을 했소 당신은 기적처럼 내 인생
에 들어왔지 하지만 당신은 그 사랑이 나를 좌절의 늪에 빠뜨리며, 날 당
황하게 하고, 날 죽어가게 하고 있소"
그가 그녀의 손에 키스를 했다
"맞아요 난 여지껏 당신에게 거짓말을 했소 당신은 기적처럼 내 인생
에 들어왔지 하지만 당신은 나의 추악함에서 일찍이 벗어나야 했소 나와
함께 했던 순간들은 당신에게 아주 나쁜 결과들만을 안겨다 줄 것이오"
그러면서도 그는 더욱 힘껏 그녀를 안았다
"당신은, 당신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결코 알 수 없을 거요"
그녀는 눈을 감으며 말했다
"제게 말해 주세요, 제가 어떤 의미인지"
"난 당신에게 해줄 말이 없소 아무 말도"
그는 아주 오랫동안 그녀를 응시했다 간절한 눈빛 속에는 그녀에게 해
줄 아무런 말도 없다는 방금 전의 얘기와는 달리 너무나 많은 말을 담고
있었다 그녀가 그의 입술에 키스를 했을 때, 그가 슬픈 미소와 함께 갑자
기 자신의 목에 걸려 있는 은목걸이를 풀어 그녀에게 걸어 주었다
"난 여지껏 이것을 제외하고는 내게 가치 있는 것이 있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소 그래서 난 당신에게 줄 것이 이것 밖에 없소"
그의 얼굴에 상념이 스쳤다
"이것은 나의 어머니가 쓰시던 유품이오"
올리비아는 놀라 잠시 침묵에 빠졌다 이제껏 단 한번도 그의 입에 올
려지지 않았던 어머니란 말이며, 뭔가 각오하고 전해 주는 선물의 의미
속에는 굉장한 존엄성까지 담겨 있는 듯했다 그녀는 그것에 입맞춤을 한
뒤 뺨에 가만히 갖다 대었다 말을 꺼내기엔 감동이 너무 컸다
상자 모양으로 된 그 목걸이는 무거웠지만 속은 텅 비어 있었고 열 수
있도록 장치되어 있었다 그것을 막 열어 보려는 순간, 그가 그녀를 막았
다
"그것은 내 어머니가 남긴 것이오 절대로 그것을 열어 보아선 안 되
오 그것을 내게 약속해 줘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았지만 묻지 않
았다 그녀는 오늘밤 그로부터 큰 보석을 받아든 느낌이었다 그는 그녀에
게 자신의 세계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사
랑을 소유한 것이다
그녀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사촌 마무드가 보낸 편지에 의하면 놀포크엔 지금 여름이 한창이라고
하는구나 항구는 배들로 가득 차 있고, 휴일에는 소풍객들로 메워져 활기
가 넘친다는 거야"
브리짓트 이모는 생각에 잠긴 듯 짧은 한숨을 토했다 그녀는 올리비아
가 묵묵히 식사를 하는 것을 보고 말했다
"나는 네가 그렇게 힘없이 굴지 않았으면 좋겠다, 올리비아 넌 지금 심
정이 꽤 복잡한 모양이구나 지금 침대에서 나온 거니?"
"예, 이모님 저 조금 피곤해서 그래요"
"잠을 충분히 잤는데도 그렇다는 건 생각이 많기 때문이지"
벌써 오후 4시가 다 되었다 강가 호에서 돌아온 후 9시간이나 수면을
취했는데도 그녀는 기분이 상쾌하지 않았다 그녀는 곧 어젯밤의 사랑을
기억하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밤의 사랑의 기억 속에서도 그녀는 헤어
지는 순간 자이가 보였던 빛나던 눈물을 특히 잊을 수가 없었다
당신은 나를 믿소? 그렇다면 나를 굳게 믿는다고 약속해 주오 무슨 일
이 우리 사이에 일어나더라도 굳게 나를 믿는다고
올리비아는 혼란스러웠다 자이가 그런 말끝에 덧붙이고 싶었던 다른
진실된 말이 분명 있는 것 같았지만 그의 눈빛이 너무 비장해서 그녀는
그걸 캐어물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런 고민 끝에 그와의 관계를 이모에게 털어 놓을 때가 왔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자이와의 일을 더이상 가슴 속에 숨겨둬야 할 이유
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모님, 말씀드릴 게 있어요"
"그래? 말해 보거라"
"저 제가 어떤 사람을 사랑하게 됐는데요 제가 이모님께 정직
하지 않으려 했던 것은 아닌데요"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며 말을 잠시 멈추었다 하나님! 도와 주세요 용
기를 주세요! 브리짓트 부인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나도 알고 있단다, 얘야 그 이름을 밝히려 애쓰지 말아라, 올리비아
난 앞을 못 보는 장님이 아니니까! 그 청년이 왜 그토록 많은 편지를 보
내왔겠니?"
그녀는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네 시간을 가지면서, 그 시간 속에서 너의 것들을 만끽하도록 해 그
다음에 내게 네가 어떻게 좋았고 어떻게 준비되었는가를 말하거라, 올리
비아!"
올리비아는 당황한 느낌으로 이모를 응시했다
프레디 버커스트! 올리비아는 그가 떠오르자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이
모님은 내가 말하고자 하는 사람이 프레디라고 믿고 계신 것인가? 올리비
아는 자신이 선택한 행동으로 인해 이 집안의 가족들이 받을 충격들 때문
에 면목이 없어짐을 느꼈다
하지만 자신의 심정을 굳히며, 그녀는 모든 것의 결과가 어떻든 간에
자신의 선택에 떳떳이 직면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내가 한 말
들은 스캔들이 될 것이며, 나 역시 이 집에서 자연스레 나가야 할 것이다
자이는 날 어디로 데려갈 것인가? 그녀의 온몸이 그를 향한 새로운 그
리움으로 가득 찼다 그녀는 행복감에 젖은 채 헤어질 때 본 그의 눈물을
상기하고 그가 한 근심어린 약속들에 관해서 생각했다
그래요, 난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요 그래요, 결과가 어떻게 되든지 간
에, 그 결과가 얼마나 쓰고 견딜 수 없는 것이건 간에 난 더이상 이 비밀
스런 사랑을 혼자서 부둥켜 안고 있지는 않겠어요
"뭐가 필요하니?"
이모는 만면에 행복한 미소를 머금은 채 올리비아를 올려다보았다
"그이와 함께 차 한잔하며 얘기하면 좋을 텐데 그이는 요즘 뭔가
에 미쳐 있는 사람 같으니"
올리비아는 이모부가 언급되자 기분이 언짢아짐을 느꼈다 어젯밤 자이
는 말했었다 이 모든 음모의 뒤에는 죠수아 경이 음흉하게 도사린 채로
오직 자이를 파멸시킬 한 가지 생각만을 하고 있다는 그 말을 자이는 슬
픈 미소와 함께 그녀에게 들려 주었었다
왜죠? 그녀가 물었을 때, 자이의 시선은 그녀의 가슴을 꿰뚫을 듯 향하
고 있었다 그 시선이 실은 은목걸이에 꽂히고 있었음에도 그녀는 열정에
찬 그의 눈빛만을 의식하느라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죠, 왜 저
의 이모부가 당신을 그렇게 악의에 찬 음모로 파멸시키려는 거죠? 올리비
아의 물음만 공허하게 선실 안에 울려퍼질 뿐이었다
그날 오후에, 다른 날보다 일찍 귀가한 죠수아 경을 위해 올리비아는
찻잔을 들고 장미정원 속으로 들어갔다
"이모님께서 이모부님께 차를 좀 갖다 드리라고 하셨어요"
죠수아 경은 차를 옆으로 비껴 놓고 기쁨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올리비아, 넌 장미가 이천만 년 전에도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니?"
"아뇨"
"이것을 좀 보거라"
그는 그녀의 냉정함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네 이모가 작년에 프랑스에서 수입한 것들이지 굉장하지 않니?"
올리비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죠수아 경은 그 핏발처럼 붉은
꽃들이 있는 오솔길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침체된 분위기 속에서 그의 뒤
를 따라가던 올리비아에게 간교한 눈빛을 발하는 죠수아경이 무엇인가를
말할 준비를 하고 있는 듯했다
그녀의 맥박이 갑자기 막 뛰기 시작했다 새로운 공포들이 그녀에게 엄
습했다 그가 어떤 새로운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 것일까? 그녀는 과감하
게 웃었다
"전 슬로컴 씨가 킬티나갈에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는데요 무슨 뉴
스거리라도 있나요?"
"그것이야말로 내가 기다리던 건데, 마하라자 영주가 더이상 책임을 추
궁하지 않겠다고 말했다는 거야 물론 그건 그의 특권이긴 하지"
"그럼, 그 유력한 범인으로 꼽히던 사람의 혐의는 풀린 건가요? 그 사
람은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뜻인가요?"
그녀의 심장이 어떤 희망 속에서 심하게 고동쳤다
"물론, 그는 책임을 면하게 될 거야 하지만 자유롭지는 못할 거야"
그녀는 뭔가 결정된 듯한 그의 얼굴을 관찰했다 그는 입을 꽉 다문 채
어떤 어려운 일에 심혈을 기울이는 사람처럼 그녀의 질문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앞으로 더 나아갔다 그녀 역시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는 의자가
마련된 곳까지 걸어가 외투를 벗어 의자에 걸며 말했다
"증인 중의 하나가 사라졌다 그것도 가장 확실하던 증인이 말이다"
"예?"
"난 지금 네게 그가 실종되었다고 말하는 거다, 올리비아"
"실종이라구요?"
그녀는 입 안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
"거기에 무슨 의미라도 있는 건가요?"
"별다른 것은 없어 난 그저 그가 실종된 게 아니라면 죽었으리라 생각
한다"
올리비아는 거의 숨을 멈춘 채 물었다
"죽었다구요? 삼촌이 그걸 어떻게 단정하실 수 있죠?"
"직감이지 순수하고 단순한 직관에 의해서 알 수 있는"
그는 고개를 돌리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다 알다시피 라벤던이 그를 죽였어 그가 죽이지 않은 게 차라리 이상
하지"
"왜죠?"
그의 눈빛이 송곳처럼 그녀를 관통했다 그녀는 그의 시선을 떨쳐 낼
수 없었다 그의 암시는 끔찍할 정도로 명확했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확신하시는 거죠?"
"근거라구? 오, 그래 난 원주민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어 그들 마음속
에 있는 잔꾀도 게다가 라벤던의 마음은 마치 내 자신의 마음인 양 파악
할 수가 있거든"
잔뜩 얼어서 올리비아는 기계적으로 물었다
"그럼 그 증인의 시체를 찾은 그때엔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언제쯤 그
시체를 찾게 될까요?"
"그러면 라벤던은 교수형에 처해질 거다!"
그는 일어서서 어깨를 똑바로 펴며 얘기했다
"내가 오늘 집에서 저녁을 할 수 없다고 이모에게 전해 주겠니?"
그가 자리를 뜬 후에도 올리비아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도 잊고
여전히 그곳에서 불안과 공포에 떨며 서 있었다
브리짓트 부인은 베란다에 앉아서 맞은편에 앉아 있는 올리비아를 향해
행복이 가득 찬 음성으로 자신의 편지꾸러미 속에 쌓여진 화제들을 늘어
놓고 있었지만 정작 올리비아는 허공에 눈을 고정시킨 채 이모의 어떤 말
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은 정말 끝도 없는 생각의 울타리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그녀는 무엇인가를 해야만 했다 그러나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
고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순간의 지체도 없이 자이에게 경고
를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이모부는 이미 또다른 음모를 획책
하고 있는 것이었다 자이가 도저히 빠져 나가지 못하는 올가미가 이모부
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브리짓트 이모가 노스탤지어에 빠진 심정 속에서 늘 말해 온 그녀의 어
머니와 이모의 어린 시절의 일화가 시작됐다 올리비아는 평상시엔 어머
니와 관련된 얘기들을 듣기 즐겼지만 오늘은 너무나 큰 좌절과 공포감이
억눌려 있기 때문에 결국 이모의 이야기를 중간에서 자르며 자리를 떠났
다
그녀는 이층 자신의 방에 돌아가 떨리는 손끝을 진정시키며 급히 편지
를 썼다 물론 자이가 모든 것을 알고 있을 수도 있지만, 그녀는 그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해 그에게 알려 주고 싶었고, 그에게 연락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똑똑해 보이는 하인 소년에게 은화 한 닢과 편지를 건네며 몇
번에 걸쳐 자세한 지시를 내렸다 그 경고는 바로 방심하지 말고 그에게
편지를 전하라는 것이었다 소년은 이를 드러내 웃어 보이고는 민첩하게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녀는 불안으로 주저앉으며 그 편지가 늦지 않고 제때에 도착하기만을
빌었다 여전히 심상치 않은 기운이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가운데
그녀는 베란다로 다시 돌아갔다
이제 거의 어두워졌다 브리짓트 부인은 여전히 조용히 앉아 편지 한
장을 읽고 있었다 봉투의 글씨가 에스텔의 것이 분명하였기에 올리비아
는 에스텔이 프링글스에서 머물 기간의 연장을 청해 온 것이리라고 대수
롭지 않게 생각하며 편안히 눈을 감고 앉았다
그러나 그녀가 다시 눈을 뜨고 이모를 보았을 때, 이모는 그 편지를 쥔
채로 미동도 않고 있었다 그녀는 곧 그 편지에 예상치 못한 어떤 불길한
내용들이 적혀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브리짓트 이모는 멍한 눈빛을 벽
쪽으로 고정시킨 채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그녀는 재빨리 일어나 이모에
게로 갔다
"이모님?"
그녀는 가볍게 이모의 어깨를 쳤다
"이모님, 괜찮으세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브리짓트 부인은 그녀의 존재도, 그녀의 부름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방금 전 행복에 잠겼던 그녀의 얼굴은 창
백하게 굳어진 채, 벽쪽 어딘가에 고정된 시선은 살아 있다는 느낌을 주
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숨조차 쉬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놀라움에
올리비아는 이모의 어깨를 뒤흔들었다
"제발, 이모님 뭐라고 말씀 좀 해보세요 저를 좀 바라보세요 뭐가 잘
못된 거죠? 어디가 편찮으세요?"
그녀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그러다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던 편지가
손에서 떨어져 내리며 베란다 밑 화단 곁으로 날려 갔다 여전히 움직이
지 않는 이모에게 공포를 나타내며 올리비아는 그곳으로 뛰어 내려가 편
지를 집어들었다
그건 분명 에스텔에게서 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진정 이모가
기대했던 것이 전혀 아니었다 편지를 쥔 올리비아의 손끝에도 미미한 경
련이 전달됐다 그 안에 무엇이 쓰여져 있는지는 더이상 볼 필요도 없었
다 그 편지의 서두에 모든 것이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자이 라벤던이 오늘 오후 강가 호를 타고 항해를 떠났다
그리고 그 배엔 에스텔이 함께 타고 있었다
너무나 많은 일이 벌어져 있었다
의식을 잃은 브리짓트 부인은 이미 위층으로 옮겨졌고 하인들은 각기
병원으로, 사무실에 있는 죠수아 경을 찾아서 올리비아가 건네 준 메모를
가지고 뛰어 나갔다
"제발 빨리와 주세요 이모님이 많이 아프세요"
죠수아 경이 크게 놀랄까 봐 그녀는 대충의 사실만을 요약해 썼다 그
녀는 뭔가를 해야만 할 상황 하에서, 조용하고 절도있게 일들을 지시해
갔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텅빈 채 종잡을 수 없는 먹구름이 꿈틀거리는 혼
란의 극단에 있었다 자이가 에스텔과 함께? 그것이 갖는 엄청난 의미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으나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했다 그 두 사람이 함
께 캘커타를 빠져 나가 영국으로 향했다는 것 에스텔은 연분홍빛 가슴으
로 자이를 따라 바다로 갔다는 것 강가 호엔 그 두 사람만의 공간과 시
간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 결국 올리비아는 자이의 버림을 받았다는 것
그녀의 부름에 다행스럽게도 닥터 험프리스가 가장 빨리 도착했다 침
대 앞으로 다가선 그는 응급치료를 하면서 중얼중얼 불평을 했다 그가
그녀의 맥을 짚고는 말했다
"특별히 나쁜 곳은 없군 무슨 일로 이렇게 기절까지 한 거지? 어떤 충
격을 받을 만한 일이라도?"
"이모님께서는 영국에서 온 사촌의 편지를 읽다가, 그 속에 매우 친한
친구분이 돌아가셨다는 내용을 보고는 실신하셨어요"
올리비아는 그럴싸한 거짓말을 했다 닥터 험프리스는 안심이 된다는
듯 몇 마디를 덧붙였다
"정이 많으신 분이군 우선 해야 할 응급조치는 다 했으니 걱정하지는
말아요"
그는 올리비아에게 브리짓트 부인을 도와 행할 몇몇의 지시를 하곤 방
안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죠수아 경은 아직도 일을 하고 있나 보지?"
"예, 하지만 곧 오실 거예요 제가 전갈을 보냈거든요"
"죠수아 경에게도 그다지 큰 걱정은 말라고 전해 줘요"
빠른 걸음으로 현관 앞까지 걸어가던 그가 진료가방을 마차에 집어 넣
으며 물었다
"이 조그만 아가씨는 도대체 어디로 가서 안 보이는 거지?"
지난 삼십 년 동안 캘커타에서 닥터 험프리스에게서 도움을 받지 않고
태어난 유럽인 아이는 없었다 그 중에서도 그는 에스텔을 가장 귀여워
했다
"그앤 주말을 친구들과 함께 보내고 있어요"
의사가 가고 난 후에 올리비아는 뜨거운 차를 마시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아무런 느낌으로도 다가오지 않는 눈앞에 닥친 현실에 대해서 생
각했다 더 많은 거짓말이 이모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필요할 것이며,
에스텔의 사라짐을 설명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많은 거짓말이 필요할 것이
다
그 와중에서 죠수아 이모부가 이 밤에 겪어야 할 큰 충격도 그녀에 의
해 고려되어져야 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앞으로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전혀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자신의
모든 능력이 중단되어진 것만 같이 느껴졌다
죠수아 경이 집에 돌아왔을 때, 그의 기분은 놀라움도 섞여 있었지만
오히려 화를 더 많이 내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브리짓트는 내가 집을 떠날 때만 해도 멀쩡한 모
습이었는데 무슨 일이 벌어진 거냐? 험프리스는 왔다 갔니?"
"예, 닥터 험프리스가 이모부님께 아무 걱정 말라고 말씀하셨어요 심각
한 문제는 없을 거라고 하셨어요"
"심각한 것은 없다구?"
그의 기분이 다시 명랑해지며 음성이 높이 올라갔다
"그럼 왜 나를 이렇게까지 불러들였느냐? 너의 전갈 때문에 나의 일이
얼마나 많은 지장을 받은 줄 알기나 하는 거냐?"
"예,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 전갈은 험프리스 박사가 오기 전에 보낸
것이에요"
올리비아는 그의 분노가 오히려 애처롭게 보였다 그는 자이와 에스텔
이 함께 떠난 강가 호 사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올리비아
는 그를 아래층으로 인도했다
그의 표정에는 거만하다거나 경직되었다거나 화가 났다거나 하는 아무
런 표정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무슨 일이냐는, 질문이 가득 찬 눈
을 치켜뜨고 있을 뿐이었다 올리비아는 아무 말 없이 에스텔의 편지가
담긴 봉투를 그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모의 방으로 슬며시 들어
갔다
그 이후, 그가 다시 집을 나서는 걸 알리는 말발굽 소리를 그녀는 들을
수가 없었다 죠수아 경은 그날 저녁 그 집을 나가지 않았다
그날 밤 커튼이 드리워졌을 무렵, 올리비아는 불면으로 인해 의자에 않
아 생각에 잠겨들었다 브리짓트 이모는 그 순간만큼은 모든 것을 잊어버
린 듯 망각의 강이란 은총 아래 편안히 잠들어 있었다
그러나 이 평안이 얼마나 지속될 것인가? 파라핀 전등이 서랍장을 낮게
비출 때 그녀는 그 주위에서 일어나는 명백한 자기 파괴의 순간을 볼 수
있었다 주홍빛 날개끝을 가진 나방이 그 램프 주위를 날다 결국엔 땅바
닥에 떨어져 뒤틀린 채로 죽어가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아무런 동정의 느
낌도 없이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자이와 에스텔!
그날 밤은 지나가고 있었다 벽에 걸린 무거운 괘종시계는 그녀로 하여
금 그 침묵의 순간들을 똑딱거리며 지나가게 해주고 있었다 파라핀 전등
이 파라핀 액液이 모자란 듯 바지직하며 사그라들고 있었고, 그로 인한
주위의 어두움 때문에 그녀는 밤이 더 깊어가는 것을 알지 못했다
오로지 심장의 고집센 박동만이 확고하게 그녀에게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모든 것은 아직 보이지 않는 실제의 그림
자였고, 주변의 정적은 침묵의 강을 통해 죽음의 임박을 알리는 것 같았
다
자이와 에스텔?
다행스러운 일일까? 가끔 잠이라는 것을 통해 그녀를 망각에 들어가게
하고, 그것들은 어떤 깊어진 비현실성을 남기기도 하고 슬픔을 가시게도
하면서 크나큰 방향의 상실감을 던진다
어떤 방망이가 위아래로 매달려 있는 것처럼 그녀는 꿈과 현실을 방황
하며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그녀가 누구인지, 왜 그녀가 그러는지에 대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자이와 에스텔
밤이 지나간 것을 알리는 듯 커튼 사이로 빛이 들어왔다 정원은 이른
아침의 새소리를 시작으로 깨어나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일어서 무감각해
진 팔다리에 힘을 주려는 둣 긴 기지개를 켰다 브리짓트 이모는 아직까
지 잠들어 있었다 올리비아는 그녀를 깨우지 않고 대신 찬물로 세수를
한 후 머리를 단정하게 땋아 내리고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죠수아 경은 말이 없었다 올리비아는 그가 정원 쪽에서 등을 구부리고
앉아 늦가을의 차가운 기운들을 끌어안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그
옆에 차 쟁반을 놔 주고는 외투라도 걸쳐 주기 위해 그것을 가지러 안으
로 들어갔다
그가 돌아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 밤 동안 확 늙어 버린 듯했다
그의 눈동자는 물이 고여 있는 풀장처럼 보였고, 그 눈들은 움푹 들어가
있었다 그녀의 이모부는 10년은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나약함으로 아침
햇살 속에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간단한 아침 인사조차 나눌 수 없는 그
런 침묵 속에서 그들은 서로 다른 생각 속에 잠겨 마치 장례식의 심각함
처럼 장엄하게 차만 마셨다
그때 죠수아 경의 긴 한숨 섞인 가벼운 경련을 보았다 아무 말 없는
그의 얼굴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그의 그런 슬
픔을 그냥 남겨둔 채로 쟁반을 챙겨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모두 각각 그들 자신의 고독을 승화시킬 개인적인 시간이 필요
했다 그들은 지금 그들 자신만을 위해서 울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누
가 올리비아를 위해 울어 줄 수 있을 것인가?
하루를 알리는 일상들은 아무 변화도 없다는 듯 시작되고 마무리 되었
다 그저 그 집의 하인들은 어두운 얼굴로 아무런 말 없이 어떤 나쁜 일
이 일어났는가보다 하는 마음으로 자기 일에 바빠 있었다
오로지 한 소년만이 올리비아에게 자신의 전갈을 들고 갔을 때 강가 호
는 이미 떠났었다고 얘기하며 편지가 들어 있는 봉투를 그녀에게 전했다
그녀는 그 봉투를 돌려받기 무섭게 갈기갈기 찢어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
다
"그래 난 알고 있었어"
브리짓트 부인이 쉴새없이 뒤척거리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그녀의 이마
에 찬 물수건을 놓아 주며 얼굴을 어루만져 주었다
"에스텔?"
브리짓트 부인의 눈이 허공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아니에요 올리비아예요"
이모가 신음 소리를 내며 다시 잠들려고 애썼다 올리비아는 닥터 험프
리스가 설명한 몇몇 가지 약들을 섞어 그녀의 입에 떠넣어 주었다 그리
고 그녀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에스텔과 자이
점심식사 전에 닥터 험프리스가 다시 와 잠든 환자를 검진했다 올리비
아는 검진을 마친 그를 응접실로 데려가 일상적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는
특히 추문에 강한 사람으로 올리비아는 이 집안에 일어난 전체적인 사실
과는 거리가 먼 얘기들로 에스텔의 갑작스런 영국여행에 관해 얘기해 주
었다
가족들의 주치의로서, 템플우드 가의 오랜 친구로서 그는 이 집안의 일
을 거의 속속들이 알고 있었지만, 올리비아의 설명은 오랫동안 준비되고
계획된 것들이었기에 그녀가 한 말을 의심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정말 대단한 일이군요 언제 그렇게 죠수아의 마음이 부드럽고 관대해
졌지? 정말 믿기 어려운 일이군요 난 정말 에스텔을 귀여워했는데
그래서 브리짓트가 그렇게 몸져 누운 거군 아마 에스텔이 보고 싶어 그
럴 거야 참, 존은 휴가여행 중인 것 같던데 그것과 관련이 있을 것 같군
아무튼 죠수아는 안에 있나요? 오늘 아침 그의 사무실을 지나치다 마차가
있는 것을 보지 못했거든"
"예 이모부님은 집에 계세요 그런데 아직 주무시고 계세요"
"그래요 이모부가 일어나면 전해 줘요 일어나기가 힘들 때는 더운
목욕물에 몸을 담고 있으라고"
그는 검진가방을 집어들며 덧붙였다
"올리비아, 이모부가 최근들어 계속 긴장한 상태에서 일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 같으니 잘 좀 보살펴 줘요 그리고 그렇게 스트레스 쌓이는 일은
계속 생각지 말라고 전해 줘요"
올리비아는 미소지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모부님도 이제는 알게 되셨을 거예요"
그녀는 자신이 이렇게 미소를 짓고, 즉석에서 만들어 낸 얘기들을 적절
하게 해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점심시간 후에 랜섬이 가급적 빨리 오겠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오전에
그녀가 하인을 시켜 보낸 편지의 답신이었다
죠수아 경에게 한 시간 전에 들여보낸 음식이 그대로 나왔고, 브리짓트
이모에겐 정해진 시간에 약을 먹였다 그녀는 음식을 전혀 입에 대지 않
고 진한 블랙커피로만 배를 채움으로 인해 오는 복통을 느꼈다
에스텔의 도피 행각은 명백한 많은 장애물을 그녀 앞에 만들어 놓고 있
었다 가장 큰 장애물은 무엇보다 템플우드 가에서 평화를 표면에 내걸고
그 뒤에 뭔가를 숨기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일반인들의 의문일 것이다 평
화? 그녀는 자신이 사용한 이 평화라는 단어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슬며
시 웃음지었다 평화라는 이름과 관련된 그 어떤 것이라도 이 집에서 다
시 느낄 수 있게 될 것인가?
"제기랄 이런 일이 생기다니!"
오후에 도착하여 올리비아로부터 사실을 전해 들은 아더 랜섬이 첫번째
로 내뱉은 말은 이것이었다 올리비아 앞에 우뚝 선 아더 랜섬은 잠시 동
안 숨도 제대로 못 쉰 채 얼굴색이 변하고 있었다 그의 입은 연신 뭔가
를 중얼거리고 있었고 땀에 젖은 이마를 닦는 그의 얼굴 표정은 실로 무
서웠다
"왜 나를 좀더 일찍 부르지 않았소?"
그는 떨리는 손으로 에스텔의 편지를 올리비아에게 되돌려 주었다
"난 정말 모르겠어, 정말 모르겠다구 도대체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
그들은 정원으로 걸어나와 담 옆의 의자에 앉았다
"랜섬 씨께서 지금 어떤 중요한 일을 하고 계신 걸 알았기 때문에 연락
이 좀 늦었어요 놀라실 것 같기도 하고, 또 이모부님께서도 알리지 말라
고 하셨어요"
그는 정말 고뇌에 찬 모습으로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올리비아의 얼굴은 돌처럼 굳어 있었다
"랜섬 씨 전 랜섬 씨가 걱정을 하기 전에, 제가 이제껏 해왔던 모든 것
을 아셔야 한다고 생각해요"
올리비아는 차근히 긴 설명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소견
도 아무런 덧붙임 없이 있는 그대로를 얘기했다 이모의 증상을 포함한
올리비아의 설명을 듣고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자세한 상황
들을 이해하고 있는 듯했다
"자이 라벤던, 그놈이 이런 악마 같은 짓을 하다니! 이런 음란한 짓을
꾸미다니"
그의 얼굴이 혐오로 일그러지고 있었다
"자이 라벤던, 분명히 그는 미친 게 틀림없어요 그건 랜섬 씨와 이모부
님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죠"
올리비아는 자신이 하고 있는 말에 깜짝 놀랐다 잠시 동안 그녀는 자
신이 지금 제정신인가 의심스러웠다 랜섬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래, 그놈은 미쳤어 그놈은 항시 미친놈 같았어 복수가 어느 때는
물론 정당화될 수도 있어 하지만 이 방법은 안 돼 이 방법은 안 된다
구!"
그는 고개를 흔들며 강력히 현실을 부정하려고 하다가 불쑥 내뱉었다
"올리비아, 이런 짓보다 더 나쁜 행동이 있다고 생각하오?"
"아마 없을 거예요"
올리비아는 공평한 입장에서 얘기했다
"아마라구? 이 사건으로 인해 가장 고통당하는 것은 순진한 에스텔과
브리짓트 부인이오"
그녀는 그가 그렇게 말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의 말에 울타리를 치고
대항하기도 이제는 힘겨웠다 그가 너무 빨리 화을 내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아니면 너무 늦었거나
"난 죠수아 경께 가봐야 겠소"
랜섬은 고통에 찬 얼굴로 일어서며 걸음을 옮겼다
"난 그들에게 뭐라 위로의 말을 해줘야 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무엇이
라도 해줘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소 올리비아 양, 당신이 지금은 이 집안
을 지탱할 수 있게 하는 기둥과 같은 존재군요 신께서 당신이 이 일을
굳건하게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실 것을 믿어요"
올리비아는 힘없이 미소지었다
밤이 깊어 갔다 아더 랜섬은 죠수아 경의 서재로 들어가 밀담을 나누
기 시작했다 아마 랜섬의 출현이 죠수아 경에게 많은 위로가 되었으리라
올리비아는 그 일에는 간섭을 않고 조용히 이모의 침대 곁에 앉아
그녀가 깨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이모의 의식이 더이상 그렇
게 잠을 자는 것으로 감정을 순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실제적으로 이모의 마음에 얼마큼의 상처가 있게 되어도 그것을
그렇게 가슴속에 담아 둔 채 밀린 숙제처럼 보류하고만 있어서는 안된다
고 생각했다
에스텔이 사라졌다 아마 영원히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그
것은 물론 피상적이긴 하겠지만 어떤 충분한 연극을 필요로 했고 그것이
그런 충격들에 대한 치료의 시작일 것이다
브리짓트 부인이 낮은 신음 소리를 내며 머리를 좌우로 크게 흔들고 있
었다 알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리며 숨이 차서 헐떡이는 모습은 정말 가
련했다
그녀는 지금 바로 앞의 미래조차 있을 수가 없는 듯해 보였다 그러나
올리비아는 감정을 냉정하게 유지한 채 태연히 앉아 갑자기 닥칠지 모를
위기 상황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빠져 나오려는 몸부림처럼 브
리짓트 부인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올리비아는 그녀의
어깨를 누르며 진정시켰다
"여기 있어요, 여기요 제가 바로 옆에 있어요"
브리짓트 부인은 굉장한 힘으로 올리비아의 손을 뿌리치며 다시 소리질
렀다
"오! 내 아기 오, 나의 어린 아기야!"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울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조리에도 맞지 않
는 말들을 계속하며 흐느꼈다 올리비아는 다시 마음을 굳건하게 다지며
자리에 앉았다 반드시 왔어야만 하는 상황이 왔다 그것이 너무나 잔인하
다 할지라도 왔어야 할 것이 온 것이다
그녀의 이런 슬픔, 이런 슬플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해서 부정할 만한
어떤 것도 없었다 브리짓트 부인은 곧 광기를 담은 부르짖음을 시작했다
곧 문이 열리며, 랜섬과 죠수아 경이 들어왔고 그 뒤엔 하인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에스텔을 내게 데려다 줘요, 여보 제발 내 아기 에스텔을 데려다 줘요
저를 불쌍하게 여겨서라도 제발"
브리짓트 부인은 눈물을 펑펑 쏟으며 남편의 팔을 붙들고 정신나간 사
람처럼 간청했다 죠수아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여보"
그러나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랜섬은 문을 닫고 창문께로 가 그곳에
조용히 서 있었다 브리짓트 부인은 조리 없는 말들을 횡설수설 늘어놓다
가 얼굴을 베개에 묻고 가슴을 치며 자신을 학대하고 있었다
죠수아 경은 그 곁에 조용히 앉아 그녀의 감정이 가라앉기만을 기다렸
다 아직도 이런 일이 일어난 사실을 믿기 어렵다는 모습이었다 랜섬이
그녀의 고통을 더이상 참고 볼 수 없다는 듯 침대 곁으로 다가서자 올리
비아가 그것을 막았다
"이모님을 그대로 내버려두세요, 랜섬 씨 지금 이모님께서 무슨 일을
하시건 간에 그냥 내버려두세요 그것만이 나중에 이모님께서 이 일을 받
아들이게 할 유일한 방법이에요"
랜섬은 행동을 멈추고, 얼굴을 찌푸린 채로 그녀를 흘깃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창가로 돌아갔다 브리짓트 부인의 격렬한 울부짖음을 보며
올리비아는 지금 자신이 눈물을 흘려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두 뺨에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음을 알았다
그렇게 흐르는 눈물을 참으려 했기에 그녀의 목은 타기 시작했고, 꽉
쥔 주먹 때문에 손톱이 갈라지는 것 같았다
죠수아 경은 마치 꿈을 꾸고 있는 사람처럼 좌절감을 맛보면서,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울부짖는 여인이 누군지 확실하지 않은 것처럼 브리짓트
부인을 유심히 바라보다 그녀의 손을 잡았다
"여보"
그녀는 뭔가에 찔린 사람처럼 움찔하더니 신경질적으로 침대 커버를 잡
아당기며 다시 소리치기 시작했다
"내 옆에 오지 말아요 들려요? 내 옆에 다 시는 가까이 오지 말아요
당신 난 정말 참을 수가 없어요 당신, 바로 당신 때문에 내 딸이 이
렇게 되어 버린 거예요 당신의"
"조용히 해!"
그는 제정신이 돌아온 양 그녀 앞에 바로 서며 그 진실로 못나고 추악
한 분노를 폭발시켰다
"그 무슨 말도 이 이상의 비난은 안 될 거요 더이상 한 마디도 내 앞
에서 지껄이지 마!"
올리비아 곁에 자리한 랜섬은 마치 숨쉬는 것을 잊은 사람처럼 굳은 얼
굴이 되어 버렸다 큰 한숨을 내쉬던 브리짓트 부인은 마치 채찍으로 한
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일순간이었지만 조용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의 눈에는 독기가 서려 있었고, 죠수아 경 역시 마
찬가지였다 그러다가 그들 사이에 올리비아가 기절할 만한 어떤 말들이
엮어 나왔다 천천히, 침착해진 모습으로 브리짓트 부인은 자세를 고쳐 앉
았다
"전 지금 조용하고 싶지 않아요! 조용하지 않겠어요 아니, 더이상은 침
묵을 지키지 않겠어요"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독이 되어 찌르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무서운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당신은 그날 내가 본 게 무엇이었는지 결코 잊을 수 없을 거예요 그
것은 악의 씨를 뿌리는 장면이었어요 나는 당신의 손이 왜 거기에 머무
르고 있었는지 알아요! 나는 그날 모든 것을 보았어요 당신의 모든 것을
"
그녀의 그 순진한 어린애와 같은 동공이 커지고 있었다
"당신은 이제까지 내 인생마저도 기만해 왔어요 내가 용서할 수 있는
"
그의 손바닥과 그녀의 뺨이 부딪치는 소리가 날카롭게 허공에 울려 퍼
졌다 브리짓트 부인이 숨을 헐떡거리며 말도 못한 채 쓰러졌고, 그런데도
발악과도 같은 말이 안 되는 소리를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 순간에 그 누구의 움직임도 없었다 죠수아 경은 랜섬의 손길을 뿌
리친 채 구겨진 얼굴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가 좀 주춤한 태도를 취
했으나 얼굴빛이 거의 질려 갔다 그는 눈을 내리깔며 나지막이 말했다
"내가 잘못했소 나를 용서해 줘요"
다시 한번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다, 그가 불안정한 걸음걸이로 방을 빠
져나갔다 브리짓트 부인이 신음 소리를 한동안 내다가 베개에 얼굴을 묻
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올리비아는 눈앞에 펼쳐진 이해할 수 없는 대화와 광경들로 가슴이 부
서지듯 아파옴을 느꼈다 그놈의 짐승 같은 자이 라벤던이 모두 그렇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단말마와도 같은 이 한 마디 외침이 그녀 스스로의
목소리로 그녀의 가슴에 메아리치고 있었다
고맙게도 아더 랜섬은 하룻밤을 더 머무르라는 올리비아의 제안을 받아
들였다 그가 그녀에게 집안의 기둥이 되라고 말해 주었던 것처럼 그녀는
정신의 균형을 유지하고 유지해서 그녀 자신을 버티려고 필사적으로 노력
하고 있었다
간단한 식사가 끝난 후 그들은 통나무 장작이 타오르는 거실에 앉아 있
었다 브리짓트 부인은 식사를 거부한 채 조용히 방에 혼자 누워 있었으
며, 죠수아 경은 서재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랜섬은 자신이 그를 위해
할 일이 없음을 슬프게 여기며 말했다
"죠수아 경을 그대로, 그가 할 수 있는 그대로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소
"
랜섬은 또 한번의 충격 때문에 떨리는 음성으로 이야기했다
"자이는 복수란 것을 잘못 가르침 받은 어린애처럼 사용하고 있어 그
가 한 짓은 정말 추악하고 혐오스러운 일이야!"
"에스텔은 더이상 어린애가 아니에요 에스텔도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어요"
그녀는 그 말을 하면서도 자신을 경멸했다 에스텔이 거의 절망적으로
자신에게 얘기하기를 원했을 때, 그녀는 고개를 돌렸던 것이다 에스텔은
무언으로 그녀의 도움을 원했었다 그애는 그때 자이에 관해, 자이와의 탈
출에 관해 올리비아에게 이야기하려고 했었다
그애가 가장 자신을 필요로 하고 있을 때 그녀는 그 필요한 것을 제공
하지 않았던 것이다 올리비아가 에스텔이 하고자 했던 얘기들에 귀를 기
울였다면 그들의 운명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만약에 그녀가 이모부를 계속 설득하고 그가 그녀의 설득을 받아들여서
팬터마임 연극을 에스텔에게 하게 했더라면, 에스텔이 과연 그와 같이 극
단적으로 반항적인 행동을 했었을까?
화가 나면서, 올리비아는 그녀가 하고 싶지 않았던 추측들로 눈을 번뜩
였다 그녀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던 간에 그는 가고 없는 것이다 가 버
리고 없는 것이다 그녀의 무모했던 사랑의 허탈한 뒷면만 낙엽처럼 남긴
채 한마디 말도 없이 떠나간 것이다 그녀는 일어섰다
"이제 그만 돌아가 쉬어야겠어요 랜섬 씨께서도 좀 쉬세요"
올리비아의 눈동자는 피곤에 지쳐 있었다 그러나 닫혀질 것 같았던 그
눈동자는 그와 헤어지려는 순간 갑자기 힘이 들어갔다 그래서 그녀는 다
시 앉았다 그녀는 자신이 어떤 질문을 하고 어떤 대답을 바라는 지도 모
른 채 물었다
"브리짓트 이모님께서 말씀하시려던 그 말의 의미가 뭐죠? '나는 왜 당
신의 손이 거기에 머물러 있었는지 알아요' 이게 무슨 뜻인가요?"
랜섬은 두 눈을 감았다
"그것은 아주 오래 전의 옛날 얘기입니다 올리비아, 그냥 그대로 내버
려두는 게 좋겠어요"
"그것이 그토록 오래 전의 옛이야기라면 왜 여태껏 잊지를 않고 그렇게
그 얘기를 하며 화를 내는 거죠?"
그는 잠시 동안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 같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아마 당신이 맞을 거요 너무 많은 거짓말이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숨겨져 왔소"
그는 장작 하나를 집어 불 속에 집어넣으며 우두커니 불을 쳐다보았다
"죠수아 경이 언젠가 자이를 죽도록 때린 적이 한번 있소 그때 자이는
여덟 살이었소 그분은 한번 매를 들면 그치지 않았지"
꿀꺽 침을 삼키며 그녀는 아더 랜섬을 바라보았다 30년 넘게 죠수아
경의 충직한 부하로 일하고 있는 그의 늙은 얼굴에 수심의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우리들 모두는 그날 뭔가가 일어날 것을 알았소 죠수아 경은 그
렇게 그를 때리다 불현듯 정신을 차리고 채찍을 멈췄지"
20여 년 전의 먼 기억 속을 헤매며, 랜섬은 그의 머리를 슬프게 흔들었
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난 오히려 그가 그때 채찍을 멈추지 않았기
를 바라고 있지만"
그 상처 그녀가 차갑게 느꼈던 상처가, 그녀가 자신의 사랑으로 지워
주고 싶어서 수백 번 입맞춤을 해주었던 그 채찍의 상처가 다시금 그녀의
메마른 입술에 느껴졌다 그녀는 그녀의 입술에 피가 흘러 비릿한 느낌이
스며들 때까지 깨물었다
그러나, 그러나 이제 그의 그런 상처는 더이상 그녀 생활의 일부가 될
수 없었다 그녀의 삶으로부터 그가 매정하게 도망쳐 버렸기에
"내게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말씀해 주세요"
그녀는 이 목소리가 자신의 것이었는지조차도 느끼지 못한 채 말을 했
다
랜섬은 우울하게 웃었다
"올리비아 당신은 모르는 일이겠지만, 사실 자이는 이 집에서 태어났
소 그는 항시 복수심에 찬 그릇된 일만 벌이고 있는, 신의 잘못된 창작물
중의 하나였지"
그는 타오르는 장작의 불빛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녀는 그가 지금
무슨 얘기를 하고 있건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이렇듯 장작의
불빛이 뜨거짐에도 불구하고 얼음 위에 앉아 있듯 모든 게 차갑게만 느껴
졌다
"그는 뒤뜰에 있는 하인들이 사는 방에서 태어났소 그의 어머니는 언
덕 위에 있는 부족 출신의 소녀였지 어느날 하인 하나가 그녀가 우리집
앞에 지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소 게다가 그녀는 만삭의 몸이었지
내가 하인들을 시켜 그녀에게 쉴 곳을 주라고 지시한 그날 그곳에서 그녀
는 아이를 낳았소 내 기억으론 그날 궂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어"
그는 주머니 속에서 여송연을 꺼내 불을 붙였다
"그녀가 회복된 후에도 난 그녀를 그 아이와 함께 이 집에 머물게 했
소 왜 그렇게 했는지는 나도 모르겠소 아마 난 한 명의 노예를 더 거느
리게 될 것에 만족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오 아무튼 그녀는 정원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소 내 기억에 그녀는 매우 부지런하고 열심히 일했으며, 일하
는 솜씨도 아주 야무졌어요"
그는 자신이 주제를 다소 벗어나고 있음을 알고는 잔기침을 했고, 올리
비아는 참담했을 자이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자 문득 가슴이 아려와 억지
로 기침을 했다
"하인들이 그러더군,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절대로 밝히지 않고 있다고
그래서 우린 그녀를 그냥 마렌이라고 부르거나 정원수의 아내라고 불렀
소"
올리비아는 무의식중에 자신의 손이 목에 걸린 목걸이로 가고 있는 것
을 느꼈다 자이 라벤던은 그의 탄생에 관하여 말했었다 그가 첫번째 숨
쉰 것에 대하여, 그의 회색 눈이 처음 떠졌을 때에 관해 얘기해 주었었다
그러나 그가 이 집에서 태어났다니 그렇다면 자이는 태어난 그 순
간부터 이미 죠수아 경과 숙명의 인연을 맺었단 말인가 그의 이모부에
대한 그칠 줄 몰랐던 증오와 복수심을 떠올리며 올리비아는 작게 진저리
를 쳤다 무엇이 그를 복수의 화신이 되게 했던가를 짐작하기엔 아직 때
가 일렀지만 그의 탄생의 비밀을 알기 시작한 지금에서야 그녀는 그의 황
폐했던 가슴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인이 거쳐갔던 숙소에서! 전 생애를 고통과 절망으로 보내고, 그것으
로 야위어 갔던 그녀와 함께! 그녀는 결국 죽었는가? 그녀는 고향으로 왜
다시 돌아갈 수 없었을까? 자이의 이름 없는 어머니는 어떻게 죽어 갔을
까? 랜섬은 올리비아가 아무 말없이 자신의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한동
안 멍하니 바라보다가 말을 이어갔다
"난 그애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소 심지어 어린애였을 때에도 그에게
는 무언가 위협적인 요소가 도사리고 있었기에 그 아인 내성적인 성
격의 소유자로, 가슴속에 비밀이 많아 보였다오 그것이 바로 나를 불안하
게 하는 요소였지 정말로 자이는 결코 어린애가 아니였던 것 같소 태어
난 날로부터 그앤 성인이었던 것 같았다오 그 아이에게는 그런 기묘한
섬뜩함이 있었소"
그는 자이가 마치 옆에 있기라도 하다는 듯이 어깨를 움츠리며 약간 떨
었다
"그앤 내게 말을 건넨 적이 한번도 없었지 한번도 웃지도 않았소 그
아인 오로지 저주, 원망스러움, 노여움이 들끓는 분노의 눈으로 항시 어딘
가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소 난 그애의 그런 시선이 싫었소 그 시선 속
에는 저주가 담겨 있는 것 같았거든 그래서 난 집에 있을 때에는 그
애 어머니를 안채 가까이로는 오지 못하게 했소"
그는 다시 한번 잔기침을 한 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다시 천천히
말을 잇기 시작했다
"어느날 죠수아 경, 브리짓트 부인, 그리고 죠수아 경의 어머니가 저녁
을 먹기 위해 우리집에 왔던 적이 있었소 식사 후에 브리짓트 부인이 뭔
가를 가지러 식료품 저장실에 갔다가, 그곳에서 먹을 것을 훔치고 있는
그 소년과 마주쳤소 그녀는 놀라 그애를 꾸짖으며 때렸지 그때 그애가
미친 듯 브리짓트 부인에게로 달려들어 손에 피가 나도록 물었던 거요
죠수아 경은 아내의 손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보고 화가 나서 그애를 잡
아다가 채찍으로 때렸고, 그애를 감싸는 그애 어머니까지 함께 때렸소 피
가 사방으로 튀었지 물론 그 아이도 이를 드러낸 채 으르렁거리며
성난 개처럼 달려들었지 그애의 엄마는 그애를 대신해 맞으며 그애에게
그만 하라고 울부짖었소 하지만 죠수아 경은 마치 사냥의 포획물처럼 자
이를 다시 들어올려 미친 듯이 채찍을 가하다 어느 순간 갑자기 주춤하며
물러섰소 자이의 몸으로부터 뭔가를 발견했던 것이지 브리짓트 부인은
구석에 울며 서 있었고, 죠수아 경의 어머니 스텔라 템플우드 부인은 이
광경을 지켜보며 조용히 벽장에 기대어 서 있었지 그런데 죠수아 경이
그렇게 포획물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의 어머니가 눈을 치켜 뜨며 냉정히
명령했다오 '그애를 죽여라, 죠수아 사냥꾼은 잡은 포획물에 상처만을 남
기는 법이 아니란다' 그분은 항시 그처럼 정확하고 엄정하게 하인을 대하
는 노인이었다오 난 정말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소 그분은 정말 내가
본 여성들 중 가장 냉정한 피를 갖고 계신 분이었소 누구보다도 이기적
이고 지독한 분이셨지"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이마에 흐른 땀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거의 광적인 순간이었소 난 그것을 말려야만 했으나, 그분은 아들을
통째로 조종하고 계셨지 잠시 멍하던 그가 항시 그래 왔던 것처럼 그분
의 말에 즉각적인 복종의 태세를 갖추었소 그제서야 내가 그를 막았소
내가 그를 막았던 게 옳은 일이었겠지?"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
"오늘, 나는 그것이 새삼스레 궁금하다오"
그는 다리를 한번 쭉 펴더니 탁자 위에 준비되어 있던 술을 따라 마셨
다 그가 올리비아를 향해 시선을 돌렸지만 그녀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
다
"그리고, 그날 밤 그애와 그애의 어머니 모두 사라졌지 난 그때 아무
것도 관여않고 의사를 그들에게 보내기만 했었다오 그 소년과 어머니 모
두가 너무 심하게 맞았기 때문에 치료를 받아야만 했소 하지만 그들은
의사가 도착하기 전에 그곳을 이미 떠났고, 하인들을 풀어 백방으로 찾았
지만 허사였소 후에는"
그가 몸을 움츠렸다
"난 고백할 게 있소 그건 내가 그들을 구제하지 않은 게 아니다라는
점이오 그 소년은 시작부터가 문젯거리였지 훔치고, 거짓말하고, 줄기차
게 나쁜 행동만 했지 사실 난 그애가 없어졌다는 사실에 기뻤소 게다가
그 사람들은 너무 거칠었어 그들은 폭력으로 살아가는데 익숙한 사람들
이었지 그들은 필요에 따라 사람을 이용하고, 서로의 상처를 긁고 할퀴었
소 그들은 그렇게 그들의 방법으로 자신들의 삶을 영위해 가고 있었던
거요 그래서 난 그들이 어디에선 살아남을 것이라고 확신했소"
그가 아주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 일은, 그 시절에는 사실 한치의 중요함도 없었던 그런 사건이었던
것 같소"
올리비아는 불에 물을 끼얹으며 일어났다 이제 빨갛게 타다 남은 연기
에 그을린 재만이 남았다 조심스럽게 그녀는 불이 피워진 곳을 살핀 뒤,
재를 깨끗이 치웠다 랜섬은 아무 말없이 그녀의 서두름 없는 움직임을
지켜보면서 난로가로 다가서며 말했다
"이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 오로지 당신만이 조용하고 고귀하게 자신을
지키고 있군요"
올리비아는 힘들게 웃었다
"그럼, 라벤던 씨를 잘게 부숴 버릴 도끼를 들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
저라는 뜻인가요?"
"아니오, 그런 게 아니오"
그가 서둘러 반박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잘못이 아닌 것에 대해 너무 강박관념을 갖고 있
소 그건 자이가 당신에게도 좋지 않은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의미한
다고 생각해요"
"아마, 랜섬 씨 말씀이 맞을 거예요"
올리비아는 그에게 동의를 표했다
"어떤 경우건 그는 우리 모두에게 몰인정한 사람으로 남겠군요"
잠시 후, 올리비아는 그녀의 방에 홀로 남게 되었다 무거운 피곤이 그
녀의 머리를 오히려 가볍게 해주었다 돌이켜 보면 그녀는 자신을 피곤으
로 지치게 하는 일들을 차라리 환영했다 지치고 지쳐서 밤이 되면 쉽게
꿈도 꾸지 않고 잠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아더 랜섬과의 얘기를 떠올리며 베개에 얼굴을 묻고 속으로 무
섭게 속삭였다
아직은 아니다 아니, 아직은 아니기를 아직도 제대로 되어져야 할
것들이 많았고, 깨진 사기 접시들을 다시 접합해 내는 것처럼 더 많은 얘
기들의 조각을 붙여 모아야만 했다 또 이 상황에서 새고 있는 구멍의 틀
을 막아 줄 얘기들을 지어내야만 했다
그녀는 지금까지의 상황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얘기를 랜섬과 다시 한
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날 밤 그녀는 꿈도 꾸지 않은 채 잠들 수 없
었다
닥터 험프리스가 올리비아의 구구한 설명이 끝난 후에 침묵으로 잠시
동안 멍하니 있다가 내뱉었다
"글쎄, 난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너무 많은데 브리짓트가 단순히
친구의 죽음이나 에스텔이 휴가를 보내러 영국에 간 것에 충격을 받아 그
토록 오랜 시간 동안 나쁜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게 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그는 생각에 잠긴 듯 인상을 찡그렸다
"올리비아, 넌 에스텔과 동행한 그 남자가 누군지 알 수 있니?"
"에스텔은 누구에게도 비밀을 털어 놓지 않은 것 같아요 나에게 조차
말하지 않았는 걸요 그애는 내가 말릴 것을 알고 있었을 거예요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사랑의 도피행을 완전히 성공시키기 위해 비밀을 확실히
지킨 것 같아요"
그 순간에 의사는 올리비아의 정직함에 관해 아무 의심도 안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태도는 여전히 매우 미심쩍은 것이었다
"어리석은 놈! 그런 멍청한 짓을 그애는 아마 후회할 거야 물론이
지, 후회하구 말구"
그는 머리를 흔들며 숨을 한번 내쉬었다
"죠수아 경은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지?"
"매우 안 좋으세요 계속 술만 드시고 계세요 저 한가지 더 부탁
드릴 게 있어요 험프리스 선생님"
그녀는 가볍게 얼굴에 붉은 빛을 지으며 일부러 살짝 웃기까지 했다
"이제 선생님도 아시겠지만 저희 측에선 총체적인 판단을 위해, 어떤
필사적인 도피처가 필요해요 특히 브리짓트 이모님께서는, 이번 스캔들을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피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순간적인 작은 소문
일지라도 그분의 명예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거구요"
그는 그녀가 말하는 의미를 알아차리고 씩 웃었다
"올리비아, 요사이 의사들은 약을 처방하는 것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
하고 있지 나 때문에 뭘 걱정하지는 말아요 물론 올리비아가 이런
일을 얼마나 쉬쉬하면서 지속해 나갈 수 있을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말이
야 하지만 걱정 말아요 만약 사람들이 이 일에 대해 알게 되더라도 그게
내 입에서 새나간 소리는 아닐 테니까"
그는 브리짓트 이모가 어떤 드문 이유로 충격을 받아 이상한 열병에 걸
렸다는 소문을 퍼뜨려 달라는 청은 거절했지만, 만약 누군가 그 소문을
먼저 퍼뜨린다면 그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고 막지 않는 한에서 도와 주겠
다고 말했다
죠수아 경의 경우는 사람들을 납득시키기가 비교적 쉬웠다 사업의 골
칫거리들은 최근 그의 건강을 매우 악화시켰으며, 아내의 심각한 상황도
그를 더욱 가엾게 만들고 있었다 또한 사랑하는 딸을 보고 싶어하는 마
음에서 푹 쉬는 것이라고 하는 게 그의 입장에서는 훨씬 자연스러웠다
올리비아는 자기 자신의 문제를 돌볼 틈이 없었다 아니면 그녀 자신이
자신을 돌볼 틈을 만들지 않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녀는 일상적인 힘든
일들과 자신이 할 수 있는 한도의 모든 일거리를 만들어서 일하고 있었
다
그녀는 방문객들을 반갑게 맞아들이고, 질문에 응답하며 새로운 거짓말
과 변명들을 만들어냈다 그런 그 자신에 사실은 그녀도 어이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어떤 힘의 기둥이며, 덕을 갖춘 귀족이며, 이기심 없고 기
지에 찬 여인으로 사람들의 입에 칭송된다는 사실에 지겨움을 느꼈다 결
국 그녀는 그렇게 희망을 잃어갔다 그녀의 마음은 하루하루 재가 되어
까맣게 타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울어야 했다 오, 하나님 당신은 얼마나 많이 저를 필요로 하시
나이까?
그러나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그녀는 아주 황폐한, 그리고 텅 비어 황
막한 사막에 홀로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렇게 시들어 죽어가고 있
었다
배신의 칼날은 날카로웠으며 상처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 상처에 자신이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에 몸을 떨었다 킬티나
갈의 밀림 속에서 그녀가 쏜 최후의 탄환에 선혈을 뿜으며 죽어갔던 호랑
이처럼 그렇게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았다 자이는 그렇게 그녀의
가슴에 배반의 방아쇠를 당긴 것이었다
혼란과 절망의 와중에서 단지 하나의 기원만이 그녀를 미치지 않도록
돕고 있었다 아버지로부터 오고 있는 편지 다발과 고향의 그리운 사람들
로부터 오는 편지들이 그녀를 구원해 주는 등불 같은 것이었다
그 편지들은 그녀의 중심점이 되어 주었으며, 그녀가 실재하고 있는 것
을 확고하게 알게 해주었으며, 이 세계에서 그녀를 그나마 버티며 쉴 수
있게 했고, 그녀에게 이곳의 모든 게 끝이 났을 때 그 언젠가 돌아갈 곳
이 있다는 기쁨을 안겨 주었다
끝이 났을 때? 아니, 그것은 틀린 말이었다 이 모든 것은 결코 끝날 일
이 아니었다 그녀를 구출하기 위한 도피는 이런 세계로부터가 아니라 그
녀 자신의 운명으로부터의 도피여야 했다 그러나 그 도피가 가능한 것인
가? 그건 거의 불가능했다
아버지에게서 온 편지 중 하나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넌 여태까지 네 인생에 충격을 던진 어떤 남자도 만나지 못했다고 했
는데, 더이상 찾아볼 의사가 있기는 한 것인지 그런 일에 관해 답장을 좀
해주련?'
이런 아이러니컬한 슬픈 질문 때문에 올리비아는 울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울지 않았다 그것들이 그녀에게 더이상 아무런 느낌도 주지 못했
기에
브리짓트 부인은 육체적으로는 회복이 된 것 같았지만 정신상태는 아직
도 멍한 것 같았다 그녀는 거의 말도 없었고 울거나 소리치는 일도 없었
다 그저 혼자서 여러 시간을 생각하며 보냈으며, 생존을 위한 최소량의
식사만 했고, 올리비아가 이끄는 대화에도 묵묵히 응답했다
올리비아는 험프리스가 얘기했던 대로 최대한 부드럽게 이모에게 그동
안 일어난 사실들에 대해 얘기했다 브리짓트 부인이 자기 의견에 대한
표시가 없었기에 그 이야기를 이해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그녀
는 에스텔에 대한 일말의 언급도 없었고, 튀어 나오는 에스텔의 이름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또한 자기 남편에 대한 언급도 없었다 외견상으로 그녀는 지극히 평온
해 보였다 그저 초점 없는 눈만이 신체 부위를 떠나 존재하는 듯이 보였
으며, 흥분을 억지로 자제하는 걸 나타내는 듯 손만이 그녀의 양 무릎 위
에서 계속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닥터 험프리스의 지시대로 죠수아 경과 브리짓트 부인이 따로 방을 쓰
게 되어 죠수아 경의 물건들이 아래층으로 옮겨진 것은 에스텔이 떠난 지
닷새가 지난 날이었다
"그들에겐 모두 당분간은 개인적인 공간이 필요해 브리짓트 부인이 죠
수아 경의 술 냄새를 견디기 힘들거든"
죠수아 경은 한번도 이층에 올라오지 않았다 그가 집에 있을 때는 마
치 서재에 투옥된 사람 같았다 이 쓰디쓴 상황이 온 후 죠수아 경과 브
리짓트 부인은 서로 각자의 존재에 대해 인식하는 것을 중단했다
발락폴에서 당분간 머물기로 한 아더 랜섬의 결정은 그의 마음과 감정
을 좀더 밝게 해보겠다는 소박한 뜻에서 나온 것 같았다
"난 낚시를 하면서 휴일을 보낼 수 있겠군 그곳은 매우 편안한 곳이
지"
랜섬과 올리비아는 하루의 일과를 끝낸 후에 활활 타오르는 불가에 앉
아 잡담을 나누었다 올리비아는 지난 며칠 동안의 일들이 자신에게 힘든
일이었다면 그에게도 역시 쉽지 않은 시간들이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정말 한계에 다다른 사람처럼 초췌해 보였다
"슬로컴이 이 지루한 일 전부에 대해 슬슬 막을 내릴 준비를 하더군
"
그가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새가 새장에서 날고 있는 한 굳이 그 새장을 지킬 필요는 없는 거지"
그가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감고 있다가 갑자기 며칠 전에 얘기되다가
중단된 어린 자이에 대해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내 생각엔 한 육 년 정도 지난 어느날이었던 것 같소 아니면, 조금 더
후에 그가 돌아온 거요, 어느날 갑자기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던 자이
가 어느날 아침에 죠수아 경이 그가 문 앞에 마치 죽은 사람이 살아
나온 것처럼 홀연히 나타나 서 있는 것을 보았지"
반사적으로 올리비아는 자이가 문 앞에 서 있는 것처럼 시선을 문 쪽으
로 옮겼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무언가를 계산하고 있었다 여덟살,
그리고 육 년 그러면 열네 살 그는 분명 그때 여인숙에 있었을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녀는 그가 오늘 그런 식으로라도 돌아온다면 환영하
며 받아들일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미친 듯 그가 갑자기 그리워졌다
"그는 문 앞에 서서 뭘 하고 있었죠?"
"아무것도! 그냥 서서 바라보고만 있었을 뿐이오 마차를 타고 집을 막
나서려는 바로 그때, 죠수아 경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애를 그저 바라만
보았지 그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소 처음에 죠수아 경은 그애를 그렇
게 무시했지만, 자이는 매일 아침 문 앞에 와 서 있었다오 죠수아 경은
지나가고, 그애는 그냥 그렇게 지나가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런 의미 없고도 이상한 날들이 며칠 계속되자 죠수
아 경은 그 눈빛을 아주 싫어했고, 급기야는 극도로 화를 내었지"
그의 말이 잠시 중단됐다 그는 먼 옛날의 그때 그 순간을 회상하면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애는 우리집에서 팔 년이나 살았지만 난 이상하게도 그의 이름조차
도 알려 하지 않았소 내게 그앤 항시 '그 아이' 아니면 '그 나쁜 놈'이라
고 불릴 일만 생겼으니까 내가 그애의 이름을 알게 된 건 하인들이 그애
어머니가 그애를 '자이'라고 부른다는 소리를 전해 듣고 나서라오"
"전 그 뜻이 '승리'라는 얘기를 들었어요"
올리비아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그것이 그에게 참으로 적당한 이름이라
생각했다
"아무튼 그 후 잠을 못 자고 맞아야 하는 아침들이 죠수아 경에게 시작
되었소 죠수아 경은 두려워하며 그 소년에게 겁을 느꼈지 하지만 소년은
어떤 해도 끼치지 않았소 그런 어느날 죠수아 경이 마차 밖으로 소년을
향해 한 움큼의 동전을 집어 던졌소 하지만 소년은 동전에는 아무 관심
도 보이지 않다가, 처음으로 죠수아 경의 마차 앞으로 다가가 서툴지만
연습된 영어로 얘기했소 '죠수아 템플우드 경이 내게 줄 수 있는 것은 아
무것도 없어요 당신의 돈, 당신의 사업, 당신의 명성, 그리고 당신의 삶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내가 다 갖고 갈 거예요!' 이렇게 외치고 도망치
듯 사라진 그를 죠수아 경은 다시는 보지 못했어"
"그렇게 해서 또 한번의 6년이 지났겠군요"
"그래요 그리고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는 아주 다른 사람으로 변
해 있었소 놀라운 모습으로 그는 아무런 사전 통보도 없이 죠수아
경의 사무실로 들이닥쳤어 안하무인격의 건방지고 차가운 회색 눈동자가
악마의 화신처럼 그를 노려보고 있었어 그 눈은 어린 시절의 증오보다도
차가운 냉정함과 확신 같은 것을 발하며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있는 둣
했지 불과 20살 안팎의 그는 세련된 매너, 화려한 의복을 갖추고 자제된
모습으로 인사를 꾸벅하며 완벽하게 다듬어진 세련된 영어로 죠수아 경에
게 말했지 '나는 당신에게 내가 이렇게 살아 있음을 알려 주려고 온 것입
니다 죠수아 경! 난 결코 잊지 않을 겁니다' 그러고는 그는 싱긋 웃더니
인사를 하고는 사라졌지"
랜섬은 일어서 창가로 가 문을 열고는 찬바람을 맞았다
"올리비아, 난 그리 예민한 사람이 아니오 죠수아 경 역시 마찬가지지
만 하지만 우리는 솔직히 말해 흔들렸소 예상치 못한 그의 부활, 게
다가 믿을 수 없는 그의 변신에 기분이 나빴고, 자이가 남기고 간 냄새에
우리는 섬뜩함을 느꼈던 거요 그에게는 보통사람에게서는 느껴지지 않는
그런 냄새가 나고 있었소 나는 그날 그가 몹시 무섭게 느껴졌소 우
린 그 후에 그가 자신을 라벤던이라 부른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
열린 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 때문에 폭죽처럼 흩어지고 있는 장작 불
빛을 보며, 올리비아는 그것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런 후, 그는 마침내 오랫동안 연기되었던 숙명에 대해 실행을 하기
시작했지 지금 그는 정말 확실하게 그 숙명들을 실행에 옮기고 있고
지금 우리가 슬퍼해야 할 일은, 그 순진한 에스텔의 가치없는 운명이야"
고통이 밀려 오고, 아픈 감정의 잔물결이 홍수 같은 원한으로 살아 났
다 나의 운명엔 과연 누가 슬픔을 느껴 줄 것인가? 그녀는 마음속으로
소리내어 울고 있었다
그날 밤 올리비아는 처음으로 에스텔이 남겼던 편지를 읽으며 어떤 새
로운 고통에 젖어들었다 에스텔은 호기심이나 동정에서 자취를 감춘 것
이 아니라, 그녀 속에서 일어나는 거대한 고통의 물결을 터뜨릴 통로를
찾기 위해 도피한 것이었다 그녀는 정당한 분노 속에서 돌파구가 필요했
고 그녀는 자신의 인생에 무언가의 보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올리비아는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사랑하는 나의 엄마, 아빠!
엄마, 아빠가 이 편지를 읽으실 때 난 벵갈과 영국으로 가는 항해를 위
해 자이 라벤던과 함께'
올리비아는 양심의 가책으로 후회하고 있는 두 단락을 건너뛰었다 에
스텔은 자신의 상황에 맞게 자유를 지니지 못한 '새장 속의 새'같은 느낌
이 지겹고, 자기 한 사람에 대한 넘치는 사랑에 대해 타인들이 헐뜯고 증
오하는 것이 참을 수 없이 불공평한 것이라고 적고 있었다
그 다음 장에서 에스텔은 자이 라벤던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다 정당함
을 가지고 있는 자가 누명을 쓰는 것, 그리고 그의 강인한 성격과 강력한
반항심조차에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으리라는 것을 언급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자이를 사랑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요 오히려 전 그게
전적으로 자랑스러워요, 그를 사랑하는 것이 나는 나의 인생을 그에
게 맡기고 있어요 나의 그런 믿음은 영원히 동요되지 않을 거예요 정말
전 열여덟이 된 이후 처음으로 행복합니다'
그 편지는 만약 사람들이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자신들의 사랑
에 대해 격려를 해주어야 한다고 끝을 맺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들의 사
랑을 확신하며 그 사랑이 언제까지나 계속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이런
식으로 떠나게 되어 정말 미안하다고 덧붙이고 있었다
편지를 읽던 올리비아는 여지껏 발견하지 못했던 갈색 봉투 바닥에 접
힌 또 하나의 편지, 즉 자신 앞으로 쓴 편지가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분
노로 그것을 태울까도 생각했지만 읽는 것이 이미 칼로 찔린 상처가 아무
는 속도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고 읽어 내려갔다
나의 사랑하는 언니, 그리고 나의 유일한 친구
올리비아 언니에게 감사하다고 해야 할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하겠어
요 언니는 내게 인생에 있어 완전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셨어요
언니로 인해 그에 관해 갖게 된 내 관심은 언제나 떠날 줄 몰랐으며, 또
언니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시각으로 그를 볼 수 있었어요
경멸과 증오로 그를 보는 대신에 그를 어떻게 동정해야 하는가는 언니
가 가르쳐 준 거예요 그가 갖고 있는 감정들은 사람들에게 거부되었죠
우리집에서도 그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은 절대 허락되지 않는 일이었지
만, 지금 그의 이름은 내 온 가슴 속에서 당당히 메아리치고 있어요 또
그 메아리가 나의 가슴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구요 내가 그의 이름으로
인해 이렇게 내 가슴을 가득 채울 수 있으리라고는 한번도 생각해 본 적
이 없어요
난 언니에게 정말 모든 것을 말하고 싶었어요 나의 사랑하는 언니 난
언니가 내가 느끼고 있는 것을 진정으로 이해해 줄 넓은 마음을 지닌 유
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아! 그런데 언니가 내 말을 듣지 않으셨
죠 아마 그게 더 좋았을지도 몰라요 언니의 높은 이상, 그 책임감과 정
직함으로 행동하는 모습을 생각하면, 언니는 사실을 알고난 후 분명 날
설득해 단념시켰을 테니까요
내가 자이를 덜 사랑하게 돼서가 아니라 언니의 그 논리에 맞는 소름끼
치는 설득력 때문에 포기했을 거예요 난 지금 쉬르퍼에서 이 편지를 쓰
고 있어요 자이의 멋지고 놀라운 집들 중의 하나가 여기에 있거든요 잠
시 후면 난 자이에게로 가야 해요 언니, 우리가 언젠가 감탄했던 스트랜
드 가에서 본 그 놀라운 쾌속 범선을 기억해요? 난 정말 언니가 그것을
보았으면 하고 바래요 그것은 정말 굉장한 배예요 우리는 일곱 개의 바
다를 항해하기로 되어 있어요 자이가 그렇게 말했죠 난 정말 그것을 기
다릴 수조차 없이 흥분되어 있어요, 올리비아 언니 결국 난 넓은 곳, 넓
은 세상으로 나가 그 넓은 세상의 비밀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에요 우
리의 것이 아닌, 나의 것 말이에요
언니가 믿든지 믿지 않든지 간에 난 아빠, 엄마의 고통이 얼마나 심할
까에 정말 고민하고 있답니다 맑은 하늘에 낀 먹구름처럼 엄마, 아빠의
고통이 나를 괴롭히고 있어요 나는 언니의 지혜와 동정심, 그리고 사람들
이 내게 베풀었던 사랑을 알아요 그래서 언니가 날 대신해서 나의 엄마,
아빠에게 위로와 사랑을 전해 그분들이 내가 저지른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도록 노력해 주실 것을 믿어요
언니는 언제까지나 내가 했던 딸 노릇보다 훨씬 더 나은 모습으로 그분
들과 함께 하실 거죠? 그분들은 언제까지나 언니가 필요할 거예요 그리
고 언니도 언니의 아빠에게 언니가 충만하게 해주었던 것처럼 나의 부모
님들의 그런 필요를 채워 주시리라 믿어요
언니, 이 어처구니없는 동생을 언제까지나 사랑하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난 자이에게 언니에 관해 아주 많은 얘기를 했어요 신은 언젠가 내가 그
에 대해 알고 있는 것만큼 언니도 그에 대해서 알 수 있게 해주실 거예
요 그리고 언젠가는 언니도 내가 그에 대해 갖고 있는 사랑을 알 수 있
을 거예요
언니, 이제 난 빨리 이 편지를 마쳐야 해요 자이의 하인이 날 마차에
데리고 가려고 기다리고 있어요
나의 사랑하는 언니, 안녕
하지만 이것이 마지막 헤어지는 인사를 하는 것은 아니기를 모든 것은
언니가 나에게 주었고, 나에게 가르쳤어요 나는 언니에게 영원히 빚을 진
거고, 난 그걸 언니에게 언제나 감사해요 나는 항시 언니의 훌륭한 점들
과 경쟁하려 했었어요 그 경쟁이 결국 운명을 인도하는 횃불처럼 나를
바꿔 놓았어요 내 인생도 언니처럼 밝아진 거죠 언니가 이것을 읽고 있
는 순간, 난 언니에게 언니 역시 언젠가 존경할 만한 사랑을 하게 될 거
라 생각했어요 언니 이제 정말 그만 써야겠어요
그녀의 편지를 손에 들고 올리비아는 멍하니 오랫동안 앉아 있엇다 그
녀 안의 모든 것은 정지 상태였다 그녀는 태풍의 눈 안에 있었다 세상이
어질어질한 게 내부적으로는 오로지 섬뜩할 만한 고요만 있었다 그녀는
침대로 가서 누운 후 눈을 감았다 덮인 눈꺼풀 위로 어둠이 깔렸다 그녀
의 인생도 어둠에 물들고 있었다
제 5 장
잊혀진 남자
에스텔의 도피가 일어난 지 4주가 지난 지금, 그들은 모두 얼마간의 안
정감을 찾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 자신들을 위해 생각해 낸 치료 방법으
로 미흡하나마 상처난 부위를 치료하기 위해 침묵으로 순간을 견뎌 내고
있었다
브리짓트 부인은 종교에 몰두했다 그러나 경련 증세를 보이는 손은 성
경책을 꼭 붙들고 있었지만, 텅빈 눈은 성경책의 어느 한구석에도 박혀
있지 않은 듯했다 올리비아는 피곤함을 자신의 유일한 구원인 양 일을
자초해 미친 듯 노동의 가면 속에 자신을 감추었다 지금 올리비아가 마
음속에 갖고 있는 단 하나의 바램은 하루 속히 하와이의 아버지 곁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었다
"난 죠수아 경과 브리짓트 부인이 우리와 함께 오늘 저녁 산책을 나왔
으면 했는데 가끔의 산책이 그들의 슬픔을 경감시키는 데 훨씬 도움
이 될 텐데"
랜섬이 올리비아와 함께 죠수아 경의 저택 뒤편 후원을 걷다가 불쑥 말
을 했다
"다른 모든 감정과 마찬가지로 슬픔이란 것도 마음속에서 시간을 통해
완전히 치유되려면 얼마 동안은 그대로 머물러 우리를 괴롭힐 거예요 하
지만 그분들도 곧 후회할 거예요 스스로 어른 흉내를 냈지만 그애가 철
부지인가요? 전 그애에게 깨닫고 후회할 시기가 올지조차 의문스러운 걸
요"
"아마도 그걸 거야"
랜섬이 그녀 말에 동의했다
"하지만 내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그들이 그저 외관상으로만 서로 후
회하는 표정을 짓는 거라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에스텔의 도피는 가족 전부를 그 비극적인 드라
마에 끌어들여 템플우드 가 전부를 철저하게 위협했다 그들 사이에선 끊
임없는 분노, 말없는 힐책, 황폐하게 정지된 사고들, 그리고 서로간의 혐
오만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거의 말을 안 했으며, 서로 간의 배타적인 공
간을 만들어 서로를 제한하고 있었다 그것은 참으로 비극이었다
하지만 올리비아에게 걱정이 되는 것은 이 문제로 인해 파생된 또다른
이유에서였다 죠수아 부부는 서로 거리를 유지하며 양쪽 모두 팽팽하게
맞서면서도 동시에 올리비아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아주
절실하게 이럴 때, 어떻게 그들을 떠날 수 있단 말인가?
12월의 마지막 주를 알리는 크리스마스가 소리도 없이 지나갔다 각종
모임에의 초대도 모두 거절된 채 선물 교환도, 잘 장식된 크리스마스 트
리도 없었다 프레디 버거스트와 그의 어머니가 캘커타에 도착했다는 소
식과 더불어 안부 인사의 편지가 왔을 때에 이르러서야 그들은 악몽과 같
았던 1848년이 살며시 빠져 가고 새해가 왔다는 것을 알았다
프레디! 오랫동안 그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그녀는 지금 뭔가
생각을 정리해서 그에게 어떤 회답을 주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올리비
아는 확실하고 명료하게 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면서도 그에게
되도록 상처가 안 되도록 노력하려 했지만 그가 끊임없이 자신을 설득해
옴을 알고는, 그것조차 그만두기로 했다
그들이 캘커타로 돌아온 직후 바로 올리비아는 랜섬에게 하와이로 갈
배표를 예매해 줄 것을 부탁했었다
프레디의 또 한번의 열렬한 구애 편지에 맞닥뜨리자, 그녀는 곧 아버지
가 새 책을 집필하는데 지금 대단히 분주할 뿐만 아니라 하와이에서 새
로 사들인 땅을 혼자 힘으로 가꾸는 바람에 건강이 악화되어 천식이 재발
했다고 얼버무리며 랜섬에게 돌아가는 문제를 슬며시 꺼냈던 것이다
이렇게 친절하고 진실한 벗에게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 부끄럽고 미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를 짓누르고 있는 절망은 그녀 양심의 가장자리를
둔탁하게 마비시키고 있었다
"그것을 원한다면 그래야겠지, 올리비아"
그는 애써 실망한 표정을 감추며 그녀의 얼버무림을 그대로 받아들였
다
"올리비아, 그토록 이곳을 떠나고 싶어하는데 우리 욕심으로만 여기에
붙잡아 두려는 것도 이기적인 생각이겠지 하지만, 우리는 아마도 올
리비아가 떠나간 그 순간부터 곧바로 당신을 필요로 할거요"
확실히 충격을 받은 듯해 보였지만 그는 곧 이 일에 대한 언급을 피하
며 재빨리 화제를 돌려 자신의 킬티나갈에의 방문에 대해서 그녀에게 얘
기하기 시작했다
그는 킬티나갈에서의 지지부진한 사업에 대해 그녀에게 얘기하고 있었
지만 그녀는 그의 말에 거의 귀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그저 지금 올리비
아가 생각하는 것은, 그의 말에 재빨리 떠오르는 마하라자와 킨잘의 존재
에 대한 반응뿐이었다
그날 밤 올리비아는 다시 한번 조용히 흐느꼈다 처음에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교묘하고 조직적인 방법으로 스스로를 완벽한 파멸로 몰고 왔는지
를 생각하며 울었다 그녀는 그때 이제껏 들어보지 못한 경각의 소리를
들었다 그 속에서 그녀는 이제껏 그녀가 전혀 인식하지 못한 부분들의
새로운 느낌들을 찾아내었다
자이도, 에스텔도, 그 누구도 진정한 배신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녀
스스로가 자신을 기만하고 배신한 것이라 생각했다
시간 그녀에겐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녀는 우습게도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만병통치약으로 알고 있는 이 시간이라는 것조차도 그녀 자신에
게는 어떤 치료 효과도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치 자이 라벤
던이 그랬던 것처럼 시간 역시 그녀를 완전히 버릴 준비를 하고 있는 듯
느껴졌다
올리비아는 자신에의 새로운 인식 이후 죠수아 이모부를 만나는 것을
일부러 계속 피했다 그녀는 그에게 어떤 연민도 느끼지 못했고, 그런 자
신의 감정들을 숨기기도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감정이 어떻든 간에 집을 떠날 결심을 했다는 것
을 그에게 알리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브리짓트 이모에게는
나중에 그녀의 마음 상태가 이 사실을 받아들일 만큼 충분히 회복된 후
알리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올리비아는 어느날 오후 아더 랜섬이 신경통이 재발한 이후 낚시를 못
가게 되었을 때, 죠수아 경에게 물고기가 풍부한 홀리의 낚시터에 함께
가자고 제안함으로써 그 말을 할 기회를 만들었다 숲을 통해 쭉 나 있는
작은 길이 있는 그곳은 사슴과 유럽산 들소들이 마치 자기들의 천국인 양
뛰노는 곳으로 유명했다
소총을 팔에 끼고 따뜻한 모자를 귀까지 깊숙이 눌러 쓴 그는 필요한
장비를 들고 오는 하인들을 멀리한 채 올리비아보다도 앞서 한참 동안을
조용히 걸었다
숲속의 고요함과 경치를 만끽하며 걷는 동안 올리비아는 마음속으로 자
신이 해야 할 말들을 정리했다 물론 그녀는 솔직할 것이며, 또 솔직해야
만 한다고 느꼈다 그녀는 더이상 머뭇거릴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죠수아
이모님이 뭐라 하건 떠나려는 그녀의 결심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었으
니
이상한 일이지만, 그녀에게 그 말을 꺼낼 기회를 부여한 것은 죠수아
경이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낚싯대를 조립하기 시작하던 그가 그녀에게
시선을 두지 않은 채 말했다
"난 네가 나와 함께 있어 주어 무척 기쁘단다, 얘야 난 네가 우리들에
게 해준 모든 것에 대해 늘 감사하고 싶었어"
느린 속도로 띄엄띄엄 말하고 있는 그의 목소리에는 긴장감이 돌아 여
느 때와는 달라 보였다
"우리에게 덮인 모든 불행은 우리 모두의 몫이란다"
올리비아는 등이 뻣뻣해지도록 힘주어 똑바로 앉으며 멀리 보이는 숲에
시선을 던졌다
"이모부님, 전 특별히 감사를 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어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더가 그러더군 우리가 추문에서 벗어난 것 모두가 너의 기지 때문
이었다고 브리짓트도 네가 없었으면 살기 힘들었을 게다"
그는 노련한 솜씨로 낚싯줄을 강물 한가운데로 던졌다 올리비아는 갑
작스런 혼란에 빠져 뭔가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말
하는 의미가 무엇이든 간에 지금 그것은 그녀의 관심 밖의 것이었다 그
녀는 이 낚시 여행의 주목적을 상기하며 솔직하게 말했다
"이모부님께서 제게 감사하다고 말씀하셨죠? 그럼 제가 그 감사의 대가
에 대한 어떤 보상을 요구해도 될까요?"
그는 놀란 듯 했지만 고개를 끄덕거렸다
"만약 너의 요구가 내가 해줄 수 있는 능력 안의 일이라면 반드시 그래
야겠지 하지만 만약 네가 나와 브리짓트와의 화해를 원하고 있다면,
난 그에 대해 정말 고마운 마음을 갖겠지만 말이다"
죠수아 경은 낚시를 하며 잠시 말없이 앉아 있다 머리를 흔들며 말했
다
"네 요구는 내 힘으로 할 수가 없는 것 같다 차라리 달을 따 달라고
하지 그러니? 그럼 더 쉽게 네게 주었을 텐데"
올리비아는 분노에 차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고집은 왜 이렇게도 끝
이 없단 말인가
"전 이모부님 안에 존재하는 복잡함을 이해할 수 없어요 하지만 그 자
만심, 불안에 찬 원망 그런 게 아직도 마음에 남아 있을 필요는 없다
고 생각해요 이모님께서도 좋아하실 거예요 이모부님께서 먼저"
"그건 네가 틀렸다, 올리비아 어느 것도 그녀를 기쁘게 할 수는 없어
난 해야 할 최선을 다하고 있단다"
올리비아는 이해를 포기했다 그들은 각각 나름대로의 삶을 살아 나가
야 했기에 그녀는 조용히 해야 할 말들을 시작했다 더 늦기 전에, 더 마
음이 흔들리기 전에
"말씀드릴 게 있어요 아버님께 돌아가야겠어요 제가 필요하다고 편지
를 하셨어요"
낚싯대를 잡고 있는 그의 손이 잠시 떨린 채 조용했다 이모부의 침묵
에 부끄러움을 느끼면서도 그녀는 준비된 거짓말을 다시 한번 했다
"태평양으로 가는 배편을 예매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거예요"
"태평양? 그래 그 일은 아더가 도와 줄 거야"
그의 표정이 잠시 모호한 듯 찡그린 인상이 되더니 갑자기 말을 이었
다
"브리짓트가 말은 안 해도 영국에 가고 싶어하던데, 네가 좀더 기다렸
다 함께 영국에 가 줄 수 없겠니? 내가 그곳에서 집으로 갈 수 있게 알선
해 주겠다 비록 항로는 좀 우회하겠지만"
그는 걱정스러운 표정에 억지 미소를 지으며 미안해 했다 올리비아의
얼굴에 핏기가 가시며 몸은 걱정과 불안으로 떨렸다 기다리라구? 불가능
한 일이야! 죠수아 경은 그녀의 얼굴을 살피고는 실망한 듯 중얼거렸다
"그래 그게 부담스러운 일이라는 건 나도 알아 넌 이미 우리에게
많은 걸 해줬지 내가 또 이런 부탁을 해선 안 되는데"
그녀는 갑자기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들은 여전히 그녀를 딸처럼 여기
며 필요로 했다 그러나 그녀는 꼭 돌아가야만 했다 만약 이모부가 달을
따 달라고 했다면 그게 더 쉬웠으리라, 난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녀는 막연하게 느꼈던, 자신 앞에 다가올 폭풍이 현실화되어 냉혹하
게 자신 안에서 살아 꿈틀거리고 있음을 알았다
막연하게 느꼈던 폭풍 자신 안에서 냉혹하게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 그
렇다, 그녀는 이미 살아서 꿈틀대는 새 생명을 자신 안에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자이 라벤던의 아이였다
단 하룻밤의 결합, 그 뜨거웠던 밤의 부딪침으로 그의 아이를 갖게 됐
다는 건 무슨 숙명의 또다른 계시일까
미처 생각지 못한 숙명의 씨앗을 자신의 몸 안에 뿌린 채 올리비아가
남몰래 흘려 온 눈물의 의미를 자이는 알 것인가 바로 이것이었다 올리
비아가 슬퍼하고, 분노하고, 절망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자이 라벤던
의 아이를 가지고 있다는 바로 그것
운명의 사슬은 이미 그녀가 이곳 인도에 올 때부터 그녀와 자이 라벤던
을 꽁꽁 묶어 놓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그녀로 하여금 오늘 자
이의 아이를 잉태케 하고, 자이로 하여금 비극의 바람처럼 그렇게 떠나게
했는지도 모른다
비극의 바람은 자이를 올리비아로부터 빼앗아 갔지만, 아직도 그녀 가
슴에 그의 씨앗을 남겨 놓고 또다른 비극의 바람을 일으키려 하고 있다
그녀가 지금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그 비극이 다시 시작되기 전에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에게 알려져 사생아의 사생아를
임신했다는 사실에 손가락질을 받느니 하루 빨리 이곳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그것뿐이었다 슬픈 숙명 속의 그녀가 지금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것
은
집으로 돌아왔을 때, 하와이로부터 온 편지와 크리스마스 선물꾸러미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편지를 들고 방으로 들어갔는데 놀랍게
도 아빠의 편지와 함께 샐리 아줌마와 그녀의 아이들 편지도 함께 들어가
있었다 샐리 아줌마는 아빠가 캘리포니아에 있을 때 가까이 지냈던 친절
한 여인으로 두 아이와 함께 홀로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하와이에
와 있다구?
아버지는 곧 샐리와 결혼할 것이라는 것을 서두로 올리비아가 그 청혼
에 찬성해 줄 것을 바라며, 샐리와 결혼한 후에도 올리비아 어머니의 자
리는 영원히 소중하게 남아 있으리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는 또
올리비아 역시 그들과 함께 사는 즐거움을 나누기를 갈망한다고 썼다 그
사이 올리비아의 눈에 생기가 넘쳤고, 마음은 행복으로 가득 찼다
그렇다 그녀는 그들이 언젠가 결혼할 것이라는 사실을 예감했었다 그
녀는 또한 자신은 정말로 샐리를 사랑했고, 그 아이들인 데니와 딕도 자
신과는 이미 형제와 다름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흘러
내리는 눈물을 무시한 채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거기엔 또 올리비아가 그동안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늙은 아버지를 돌
봐 준 것에 대한 고마움과 괴로웠던 것에 대해 적혀 있었고, 올리비아 역
시 결혼해 행복한 가정을 꾸미면서 삶을 성장시키고 발전시키기를 바라는
아버지로서의 간절한 소망을 나타내고 있었다
아버지는 또 올리비아에게 어떤 순간 속에서도 신념과 자신감을 잃지
않는 대담함으로 진실을 위해 자신을 시험해 보라고 권하고 있었다 아버
지는 또 그녀가 지난 편지에 자이를 다시 만나고 싶다고 썼던 내용에 대
해, 그에 대한 사랑에 확신이 섰는가 하는 여부를 묻고 있었다
그녀는 계속 읽어 내려갈 수가 없었다 그녀는 고통을 참으며 아버지와
샐리에 대한 편지의 내용을 머리에 담았다 그들은 한가족이 된 것이다
아마 농장은 전원적인 하와이의 계곡에 위치할 것이며, 그 안의 집은 빵
굽는 신선한 냄새로 가득 찰 것이다 문밖에 위치한 해변엔 아이들이 놀
수 있는 흰 설탕과 같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며칠 뒤, 브리짓트 부인은 무릎에 성경책을 펼쳐 놓은 채 정원에 앉아
올리비아가 말하는 침착하고 조용한 결심을 듣고 있었다 말이 끝나자, 올
리비아가 그녀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제게 그동안 너무 잘해 주셨어요 이모님! 전 여기 있는 동안 정말 행
복했었어요 하지만 전 이제 아빠에게로 돌아가야만 해요"
"그래, 안다, 애야 알고 말고"
그녀는 넋이 빠진 채 올리비아의 뺨에 키스를 해주었다
"이모님은 곧 런던에 가실 거예요 이모부님께서 함께 가실 거예요 이
모님도 항시 가고 싶어하셨잖아요? 이번 봄은 놀포크에서 브로드 가족들
과 함께 소풍을 가며 지내실 수 있을 거에요"
자신의 말을 경청하는 이모의 표정에 힘입어 그녀는 계속 말을 이었다
"이모님과 이모부님 간에는 오직 두 분밖에는 없어요 두 분 모두 똑같
이 고통받고 있는 거예요 이모님이 이모부님을 용서해 드리세요"
그녀의 머리가 세차게 흔들렸다
"그것은 오직 주님만이 결정하실 수 있어 복수만이 오직 그의 것이지"
복수라구? 올리비아의 가슴에 그 한 마디가 세찬 여운을 남겼다 그럼
에도 올리비아는 그것을 무시하고 하던 말을 계속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에요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일이에요 이모님은
그것을 이제 받아들이셔야 해요 에스텔의 도피도 마찬가지구요"
그녀의 목소리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에스텔도 돌아올 거예요"
"돌아온다구? 내가 이런 일이 벌어진 후에 그애의 귀향을 받아들일 것
이라 생각하고 있는 거니?"
그녀의 격렬함과 일그러지는 표정에 올리비아는 심히 놀랐다 절망의
앙금이 쌓여 아무것도 없이 상처만 남은 이 순간에도 이분은 여전히 도덕
적 심판을 언급할 수 있으실까?
"모든 사람들은 살아가며 실수를 하고, 또 용서를 받아요 이모님께서도
에스텔을 용서하셔야 해요"
그녀는 자신의 삶을 파멸시키는 데 협력한 그 누군가를 변호하고 있다
는 사실에 쓰디쓴 미소를 머금었다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정녕 진심에
서 우러나오는 것일까
"넌 훌륭한 아이다, 올리비아 하지만 넌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어 아
무것도"
그녀는 성경책을 들고 일어서며 무서운 태도로 그녀 곁을 떠났다
올리비아는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떠나기 전에 고려해야 할 모
든 문제들을 머리 속에서 접었다 그녀의 이모부나 이모 모두 각각의 운
명의 도표에 그려진 고뇌의 짐들을 따로따로 지닌 채 살아가야만 하는 것
이다 그녀가 마치 지금 자신 몫의 짐을 싣고가는 것처럼 말이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짐의 무게에 눌려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
다 그녀가 그 짐들에 참고 견디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가슴 구석구석의 초대받지 않은 곳까지 다가왔었던 자이 라벤던에 대한
생각에 대항해 그녀 자신을 강하게 채찍질했다 그는 떠났으며, 다시는 그
를 볼 수 없을뿐더러 그녀 역시 그것을 원하지도 않았다
그가 그녀의 삶에 남긴 추억의 편린들을 그리워하고 괴로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이 그녀에게 없어서는 안 될 것이었지만 말이다 그녀
는 그저 지금 돌아가 아버지와 샐리 아줌마의 품에 안겨 편안히 잠들기만
을 원했다
오, 하나님 그럼에도 당신은 어찌 이토록 저를 두려움에 떨게 하시나요
태평양의 호놀루루로 향해가는 오스트리아 배가 들어왔다 올리비아는
흥분된 정신을 가다듬고 떠날 채비에 여념이 없었다 쇄도하는 프레디의
편지에 대한 답변을 떠날 그 순간으로 미루며
브리짓트 이모와 죠수아 이모부 모두 그녀의 임박한 출발에 대해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이 문제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올리비아는
출항 일자에 앞서 킬티나갈의 킨잘에게 편지를 띄웠다
그녀는 편지를 통해 라벤던이 특별 승객과 동행한 채 그녀를 떠났으며,
자신이 떠나기 전에 킬티나갈에서 하루이틀 정도 머물 수 있는지를 물었
다 킨잘은 곧 그녀의 결정에 어떤 의문도 제기하지 않고, 다가오는 토요
일에 마중하러 나오겠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이젠 킨잘과 마하라자 영주와 만나고 나면 그녀가 인도에서 할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호놀루루 행 오스트리아 배에 몸을 싣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올리비아가 떠나기 일주일 전 수요일에 브리짓트 부인이 목욕탕
에서 자살을 기도하는 불상사가 일어남으로써 또 한번 집안이 발칵 뒤집
혔고, 그녀의 떠남에 어떤 불길한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도대체 자네는 뭘 생각하고 있었나, 죠수아? 자넨 브리짓트가 이 지옥
같은 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모르나?"
험프리스 박사는 땀을 비오듯 흘리면서 핏기 없는 얼굴로 화를 내며 기
진맥진한 채 서 있다가, 독한 위스키를 마시며 풀썩 주저앉았다 모두 하
얗게 질려 아무 대답도 못했고, 두 손을 깍지낀 채 무표정하게 앉아 있는
죠수아 경은 바닥만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었다
"자네는 더이상 브리짓트를 이곳에 내버려 둬선 안 돼, 죠수아! 그녀는
손이 순간적으로 약간 떨렸기 때문에 혈관을 완전히 못 끊은 거야 만약
목욕탕에서 그녀가 쓰러지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가망이 없었어 이미
그녀는 거의 치사량의 피를 흘렸다구!"
죠수아 경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저 아더 랜섬만이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을 뿐이다
"그래요, 부인은 영국으로 돌아가야만 해요 죠수아 경께서 확실하게 부
인을 돌볼 겁니다 제가 몇 주에 걸쳐 죠수아 경께 얘기를 했었지요"
험프리스 박사는 죠수아 경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흔히 있는 일처럼 브리짓트는 다시 자살기도를 할지도 모르네"
그는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그가 간 후 집안엔 침묵만이 감돌았고, 그
누구도 그 침묵을 깨뜨릴 용기가 없는 듯했다 올리비아는 창가에 기대어,
아무 생각 없이 창밖의 정원 풍경만 바라보았다
만약 그때 이모가 쓰러지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또
이모가 자살기도를 하면 어떻게 하지? 하인들은 다 소용없다 이모에겐
지금 정성어린 간호가 필요한데, 간호원이 그렇게 정성으로 돌봐 줄까?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고통의 절규가 길길이 뛰며 그녀를 괴롭혔다 이
것은 내 책임이 아니야 내 문제가 아니라구! 하나님은 알고 계시겠지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녀의 외침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그저 침묵 속
에 묻혀졌을 뿐
"브리짓트가 영국으로 가고 싶어한다면 난 반대하지 않아"
죠수아 경이 마침내 한 마디 하곤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랜섬을 잠
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난 이곳에 계속 머물 생각이야 난 내 일을 잘 처리할 능력이 있고 또
이곳에서 해야 할 일도 있어 그건 브리짓트도 잘 알고 있지"
죠수아 경은 이 말을 남기곤 누구의 의견도 들어볼 생각도 없는 듯이
급히 그곳을 나갔다 랜섬은 절망으로 팔을 내리쳤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야 하느냐구? 죠수아 경의 저 고집통은 누구의
말도 듣지 않을 거야"
그는 올리비아를 향해, 이 문제를 무시하듯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올리비아 양, 다음 주에 떠날 채비를 했소? 짐은 다 꾸리고?"
"예"
"내가 도울 일은 없겠소?"
"고맙습니다만 없어요 이미 제게 충분히 잘 해주셨어요"
"당신이 여행할 동안 먹을 마른 반찬과 몇가지 여행도구들을 챙겨 주겠
소 당신도 알다시피 배 안에 설치된 기구들은 그다지 편한 것들이 아니
니"
올리비아는 물밀 듯 밀려드는 공포감과 싸우며 랜섬의 배려에 대해 감
사함을 표시했다 그녀는 천천히 관 속을 향해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이 세상의 온갖 절망이 관뚜껑을 하나씩 관통했으며 그 속은 어둡고 축축
했다 관 주위의 모든 것들이 그녀를 향해 달려와 그녀를 질식시키려 하
고 있었다
"제가 이곳을 떠난 후 그분들께 어떤 일들이 생길까요?"
랜섬은 쓰디쓴 미소를 지었다
"난 가능한 한 죠수아 경에게 부인과 함께 영국에 가라고 설득해 보겠
소 잘 되길 바래야겠지 또 간호원은 분별력 있고 책임감도 강하다고 험
프리스 박사가 장담하더군 이제 우리 자신과 신께 모든 것을 맡겨야 하
지 않겠소? 하지만 만약 브리짓트 부인이 또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한다면
"
그는 말끝을 맺지 못하고 침묵했다
"이번의 오스트리아 배가 떠난 후 태평양으로 가는 배가 언제쯤 있을까
요?"
그의 눈에 희망의 빛이 반짝였다
"여기엔 샌프란시스코를 경유해 호놀루루로 가는 배편이 아주 많아요
내가 한두 달쯤 후에 출항할 배편을 알아봐 줄까요?"
올리비아는 한기를 느꼈다 한두 달? 안 돼! 그건 불가능해! 지키지 못
할 약속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 더구나 한두 달 후라면 그녀가 감추고 싶
어하는 새생명의 모습이 더욱 크게 그녀 안에 자리할 것이다 그녀는 조
용히 자리를 나왔다
브리짓트 부인은 메마른 손목을 붕대에 숨긴 채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
었다 그녀의 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있다면 공허한 침묵뿐 그녀
곁에는 험프리스 박사의 말대로 젊고 유능해 보이는 간호원이 붙어 서서
그녀에게 필요한 사항들을 하인들에게 일일이 지시하고 있었다 간호원이
나간 후 올리비아는 브리짓트 부인 곁으로 다가섰다
"기분이 좀 어떠세요? 이모님 제가 뭐 도와 드릴 일이 없나요?"
브리짓트 부인은 초점없는 눈을 천장에 고정시킨 채 아무 말도 안했다
그러나 잠시 후 그녀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내가 네게 너무나 큰 잘못을 하는구나 난 네 엄마에게도 잘못했는데
난 네 엄마가 모든 것을 빼앗긴 채 미국으로 갔을 때만큼 또 네게
상처를 줘서 보내려 하고 있구나"
그녀의 말은 작았지만 또렷했다 올리비아는 새로운 충격으로 떨고 있
었다
"이모님은 우리들 어느 누구에게도 잘못하신 게 없어요 그리고 이모님
이 절 돌려보내는 게 아니라 제가 원해서 가는 거에요 전 그래야만 하거
든요 이모님, 그래야만"
"하지만 내가 어떻게 속죄를 하겠니? 죽음에 대한 약속은 신성한 것인
데 난 아무것도 못했어, 아무것도 네 엄마는 결코 날 용서하지 않을
거다 난 아직 그애에게 책임이 남아 있는데"
그녀의 목소리가 고조되며 미친 듯 허공에 부서졌다
"이모님은 이모님의 삶에 대한 책임만을 느끼시면 돼요 하지만 죽음은
아니에요!"
올리비아는 일어나 앉으려 애쓰는 브리짓트 부인을 부드럽게 제지했다
"에스텔이 돌아왔을 땐 그애에게도, 또 이모부님에게도"
"너무 늦었다 모든 게 너무 늦었어"
"아니에요 그건 아니에요"
올리비아는 초조함과 당황스러움에 자기도 모르게 버럭 소리쳤다
"이모부님과 이모님이 함께 영국에 가면 알 수"
"난 영국엔 다시 안 간다 난 그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을 거다 내 인생
에 남은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모님의 삶은 끝난 것이 아니에요 이모님께서는, 이모님이
느끼고 있는 지난 날의 잘못들에 대해 용서를 구할 필요가 없어요 만약
그래도 용서받길 원하신다면, 제가 엄마의 대리인으로서 이모님을 백 번
천 번 용서하겠어요"
그녀는 침묵을 유지하며 잠시 앉아 있다가 조용하고 평온한 음성으로
말했다
"좋아, 올리비아 난 네게 네 엄마에게 할 용서를 빌겠다 하지만 그 누
구도 내가 원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도록 강요할 수는 없다!"
우유부단했던 시간들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올리비아가 눈부시게 빛
나는 킬티나갈의 아침을 맞으며 킨잘을 만났을 때는, 형언하기 힘들만큼
매몰찬 결심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게 당신이 정말로 원하는 일인가요, 올리비아?"
올리비아가 도착한 킬티나갈의 그 따뜻한 환영에서, 킨잘은 어떤 비난
도, 어떤 위안도, 그리고 어떤 도덕적 심판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올리비
아가 품안에 뛰어들어 울음을 터뜨렸을 때에도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전 당신의 경고에 쾌히 주의를 했었어야 됐어요 전 지금 괴로워요, 킨
잘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괴로워요"
"저런, 어쩌지요? 당신의 그 열정적인 미국 정신은 다 어디 갔어요?"
킨잘은 그녀의 울음을 덮어 주려는 듯 재치 있는 가벼운 유머로 대해
주었다
"더이상 열정적인 정신은 없어요 이미 전 부서질 대로 부서진 걸요"
창백한 미소가 올리비아의 얼굴에 나타났다 곧 사라졌다
"전 당신의 힘이 필요해요, 킨잘 저의 연약함을 그나마 보일 수 있는
사람은 지금 오직 당신뿐이에요 전 돌아갈 곳도 없고, 저 자신에겐 없는
신념과 고상함과 용기를 가지려 애쓰는 것에 지칠 대로 지쳤어요"
그들은 마하라자의 아름다운 궁전 베란다에 앉아 호수에 잠기는 저녁
노을의 향취에 젖어 있었다 올리비아는 킬티나갈에로의 귀환을 통해 자
신에 대해 냉정한 판단들을 했다 그녀는 이미 자신의 고통의 근원을 어
느 정도 알고 있는 킨잘에게, 그녀에게 관련된 모든 일들의 세부적인 내
용을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해 갔다
그때 올리비아는 홀가분함과 행복감을 느꼈다 올리비아에게 있어 킨잘
에게 하는 심정의 토로는 자존심과 허영심을 벗어 던지고 진실을 구해 내
는 것이었다
그녀는 기나긴 설명에서 아무것도 빠뜨리지 않고 모든 것을 드러냈으
며, 그녀 스스로를 거의 자기비판 같은 진실로 자신을 혹평했다
인내심과 이해심을 갖고 그녀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킨잘의 눈엔 동정
의 빛 따위는 없었다 올리비아가 말을 마치며, 스스로 그녀에게 어찌 해
야 하는지를 물었을 때 그녀는 비로소 하나 하나를 묻기 시작했다
"올리비아, 정말 그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 왔어요? 정말 그것이 당신
이 원하는 거예요?"
처음으로 그녀의 편안했던 눈빛이 책망의 눈초리로 바뀌며 반복해 물었
다 올리비아의 입이 굳어졌다
"예, 내가 자이를 잊는데는 어떤 도움이 필요해요 내 마음속의 기억은
시간 속에 묻혀지고 희미해질 거예요 내게는 더이상 포기하고 버릴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아요"
"그럼, 올리비아는 그것을 신중하게 생각한 끝에 얻은 결론이라는 것을
내게 믿게 할 수 있어요?"
"난 지난 며칠 동안 계속 생각해 왔어요"
"그럼, 당신은 당분간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심을 해야 해
요"
"내게 그렇게 하라고 강요하는군요 만약 이모님이 또 자신을 학대
하는 행위를 한다면 내가 어떻게 편안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겠어요?
그리고 난 그분을 사랑해요 킨잘, 내가 지금 떠난다는 것은 곧 그분의 죽
음을 의미하는 것과 같아요"
그녀는 흐느끼며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내가 돌아간다면 그분은 또다시 자살을 기도할 거예요 킨잘, 난 어떻
게 해야 하죠? 내가 뭘 선택해야 하는가요?"
킨잘은 그녀의 손을 얼굴에서 부드럽게 떼어놓았다
"올리비아, 난 당신과 얘기하고 또 함께 슬픔을 나눌 수 있어요 그러면
마음이 좀 가벼워질 거예요 올리비아, 난 당신에게 결정을 강요할 수는
없어요 그것은 당신 혼자만이 할 수 있는 거예요"
올리비아의 얼굴이 다시 굳어졌다
"난 이미 결심했어요 내가 뭘 선택하든지 간에 자이 라벤던의 아이를
내 손으로 키울 수는 없어요!'
"당신의 고귀한 생명체를 고의로 없애려고 하는 거예요, 지금?"
"그래요,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어요"
"당신은 그 아이가 한때 그와 사랑해서 얻게 된 것이라는 사실을 잊으
려는 건가요?"
"사랑이 아니라 자기기만이었어요 사랑이란 말은 그에겐 없는 말이에
요 킨잘, 당신이 언젠가 내게 분명히 경고했던 말이죠?"
"하지만 당신 스스로 그를 받아들였어요, 올리비아 당신은 그 사실을
잊었나요?"
"아뇨 하지만 그를 잊기 위해서 먼저 내 몸과 마음 모두에서 그를 내
쫓아 버려야만 해요"
그녀는 목이 메었다
"킨잘, 난 정신적 육체적으로 불륜한 관계를 가졌어요 난 적어도 이 한
가지 사실에 대해서는 자유롭지 못할 거예요"
킨잘의 시선은 준엄하고 확고했다
"올리비아 당신은 한 생명을 낳아 키워 본 적이 없어요 그 생명은 다
시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에요 당신은 나중에 돌이킬 수 없는 결과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그 생명은 두 육체로부터 하나가 된 거예요 내 속에 있는 다른 하나
를 없애기 위해 난 기꺼이 그것을 희생시키겠어요"
"그럼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묻겠어요"
그녀 이마의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당신은 사회가 미혼모와 그 자식들에게 가하는 비난 때문에 두려워하
는 건가요?"
처음으로 올리비아는 심사숙고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내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달라질 거예요 내
가 미국에 있다면, 난 사람들의 눈초리엔 아무 신경도 쓰지 않을 거예요
그건 우리 아버지도 마찬가지일 거구요 하지만 이곳 캘커타는"
그녀의 말투엔 두려움이 가득 찼다
"재미있는 얘깃 거리로 오가며, 사회 속의 부도덕이 되어 괴롭힘을 입
느니 아이를 죽이는 편이 나을 거예요 내가 이곳에서 아이를 낳는다면
그건 겨우 뼈대만 갖추고 살고 계신 이모부님과 이모님을 완전히 파멸시
키는 결과를 낳을 거예요 예, 그래요 만일 자이가 나중에 내게 다른
관점에서 얘기를 한다고 해도 난 이 아이에게 생명을 줄 마음이 없어요"
이제 아무 할 말도 남지 않았다 침묵의 순간이 지나고 킨잘이 미소를
지었다
"올리비아 당신은 용감한 여자예요 아마 당신 판단이 옳을 지도 몰라
요 우리는 미래를 먼저 생각해야 하니까요 옳지 못한 과거를 잊고 새로
운 시작을 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죠"
그녀는 일어나 하녀를 손짓으로 부른 후 재빠르게 뭔가를 명령했다 그
러자 하녀는 뜨거운 물이 든 항아리, 바나나 잎들, 색깔 있는 액체가 담긴
병 두 개, 그리고 큼직한 기구들이 놓인 큰 그릇들을 가지고 왔다
"지금 뭘하고 있는 거죠?"
올리비아가 마른 입술을 적시며 물었다
"무엇이든 간에 당신의 뜻대로 진행하고 있는 것일 뿐이에요 이 하녀
는 경험이 많은 사람이에요 이번의 올리비아의 경우는 쉽다고 하며 안심
하라고 했어요 그녀에게 대강 언제 아이를 가졌는지 말할 수 있겠어요?"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정확한 시기를 말하는 그녀의 가슴에 자이와
의 사랑 만들기의 아픈 추억들이 화살처럼 사정없이 뛰어들었다 그 악의
씨앗을 갖기 위한 것은 자이의 본뜻이 아니었다 그제서야 그녀는 그것이
바로 자신이었다는 것을 알고 그 숙명을 저주했다
그가 그녀를 포옹한 것은 그녀의 기쁨과 일시적인 로맨틱한 욕구를 충
족시켜 주기 위한 것이었고, 그녀 자신의 희열을 위한 것이었다 그처럼
그녀가 열렬히 그를 원했기 때문에 그의 아이를 갖게 된 것이다
갑작스런 절망감 때문에 올리비아는 킨잘의 손에 매달렸다
"내 곁에 있어 줘요, 제발 나 혼자서는 너무 무서워요"
차가운 손가락이 그녀의 젖은 이마를 매만졌다
"그럼요 당신과 함께 있겠어요 하녀가 시작해도 되겠냐고 묻는데 괜
찮겠어요"
올리비아는 잠시 초연함을 유지한 채 울었다 그러다가 스스로 절망을
물리치며 올리비아는 다시 냉정을 되찾았다
"좋아요, 시작하세요"
주문과도 같은 낮은 중얼거림을 들으면서 올리비아는 은컵에 든 약을
마셨다 그녀는 곧 눈이 감기고 심한 무감각증이 사지로 번져 가는 것을
느끼며 사방이 조용하다고 생각했다 올리비아는 입술에 무언가 닿는 느
낌을 받으며 킨잘의 음성을 들었다
"이것을 마셔요"
따뜻한 액체가 올리비아의 목을 타고 들어가 몸안에서 빠르게 번져 갔
다 올리비아는 희미한 의식의 심연 속에서 킨잘의 소리를 들었다
"이제 끝났어요 아침이 되면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돼 있을 거예요"
모든 것이 끝났다 올리비아의 흐릿한 정신 속으로 꿈과 환상이 무심한
모양새를 하고서 아무런 요구 없이 들어왔다 촉감으로 알 수 있는 기억
의 순간들이 그녀 위에서 춤추었다 뺨 위에 닿은 공단처럼 매끄러운 손
가락 끝, 그녀의 가슴을 촉촉히 적셔 주는 실크처럼 부드러운 말투, 그녀
의 입술에 와 닿는 키스의 촉감들이 그녀를 감싸고 귀에는 안개 같은 그
림자의 속삭임이 들려 왔다
'그래, 맞아요 난 당신을 사랑하오'
그녀는 땀에 흠뻑 젖은 채 잠에서 깨어났다 올리비아가 햇빛에 젖은
킨잘을 보았을 때 그녀의 입가엔 만족의 미소가 곧 떠올랐다
"당신이 원치 않았던 일이 끝났어요, 당신은 당신을 구속했던 불륜이라
는 것에서 벗어난 거에요 이 사실이 믿어지나요?"
올리비아는 말을 못하고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눈을 꼭 감았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일까? 하나님, 제가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전 자이가 저에
게 준 그의 일부를 지워 버렸어요 그가 절 사랑했건 안 했건 간에 그가
제게 준 그의 피의 일부, 육체의 일부를 파괴했어요
올리비아는 아픈 가슴이 되어 목에 걸린 목걸이를 꼭 쥔 채 그것을 입
에 대고 작은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킨잘이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
다보며 말했다
"울고 있나요? 당신은 마치 불행한 것처럼 보이는 군요 올리비아, 어제
의 결정을 후회하고 있는 건가요? 사실대로 털어놔 봐요"
"지금 그게 무슨 문제가 되겠어요? 이제 모든 게 끝났어요, 끝났다구요
"
"당신이 원한 건 이게 아니었나요?"
킨잘의 부드럽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올리비아, 이제 엎질러진 물이에요 변덕을 피우고 소동을 부려도 이제
원상태로 되돌릴 수는 없어요 올리비아, 당신은 이제 이 상태로 자신을
지켜 나가야만 해요"
"나도 알아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올리비아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울음을 터뜨렸다
"킨잘, 당신이 날 경멸한다 해도 난 아무렇지 않을 거예요 나도 나 자
신을 경멸하고 있으니까요 정말 난 살 가치조차 없는 사람이에요"
킨잘은 아무런 위로도 동정도 그녀에게 베풀지 않았다 그저 올리비아
의 자책을 침묵으로 듣고 있었다
"당신은 아직도 자이를 사랑하고 있군요, 그렇죠?"
올리비아의 전신이 떨려 왔다
"그래요 난 아직도 그를 사랑해요 그는 내 일부이며 전부로서 항시 내
곁에 존재했었어요 그가 날 버리고 떠났다는 사실에, 난 그의 아기조차
용서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난 무자비하게 그의 아이를 지우는 길을
선택한 거죠"
킨잘이 다시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
"그럼 당신은 지금 그의 아이를 낳고 싶을 만큼, 그에 대한 확고한 사
랑을 아직도 갖고 있나요?"
올리비아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당신의 사랑이라는 것이, 적어도 자이와의 비밀의 사랑으로 인해 아이
를 낳는 불명예를 감수할 만큼 충분한 것인가요?"
올리비아는 다시 한번 움찔했다
"나도 모르겠어요, 나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당신은 이걸 알아야 해요, 올리비아 자이는 당신에게 몹쓸 짓
을 했어요 자이가 당신을 배신하고 갔어도 그의 아이를 낳아 진실로 사
랑하며 기를 자신이 있어요?"
질책처럼 들려 오는 킨잘의 물음에 올리비아는 자기도 모르게 화가 났
다 킨잘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처참하리만치 가혹한
이 숙명에 대해서
"사실 난 하나님께 그를 맘껏 비난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지만 그게 그렇
게 쉽게 되지는 않았어요 그는 다른 방법으로 날 속인 것은 없어요 그는
그저 자기 자신에게 충실했을 뿐이에요 그래요, 그가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질 수 있었던 만큼 그날 밤은 날 사랑했기 때문에, 그날 갖게 된 그의
아기를 난 사랑할 수 있어요"
그녀는 목이 메어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킨잘은 말없이 그녀를 두
팔로 꼭 안으며 목이 메인 채 말했다
"자이가 다시 당신의 사랑을 차지한 것 같군요 그건 아주 확실한 사실
같아요 하지만 올리비아, 자이는 다른 사람들과 달라요 그는 바람 같고
물 같은 사람이에요 그를 소유할 수는 없어요 당신은 고통스럽겠지만 그
를 잊고 그날 당신이 그에게 한 약속을 지키세요 당신이 어디에 있든지,
언젠가 그는 당신을 꼭 찾아올 거예요?"
"그럼, 그동안 난 어떤 생활을 해야 하는 거죠?"
"기다려요, 올리비아!"
킨잘은 재빨리 말했다
"그리고 무엇을 할지 생각하세요 좋든 싫든 간에 당신은 매우 지혜로
운 여성임에 틀림이 없어요 난 당신을 믿어요 곧 해답을 스스로 찾을 거
예요"
"그렇지 않아요 지금 제게 남은 것은 하나도 없는 걸요 더이상 나아질
것이라곤 하나도 없어요"
킨잘은 호흡을 고정하며 낮은 웃음을 지었다
"늦지 않았어요 내가 정말 아무 반대 없이 당신의 그 경솔한 결정을
따를 것이라고 믿었나요?"
그녀는 온화하게 올리비아의 이마에 키스했다
"올리비아, 내가 줄곧 당신에게 말한 것은 당신이 다시 분별력을 찾고,
그 분별력 아래 행동하길 바래서였어요 그리고 당신이 그걸 갖게 되어
정말 기뻐요"
그녀는 그간의 과정을 설명했다
"그 하녀가 당신에게 준 것은 그저 잠드는 약에 불과했어요 그러니까
안심해요 당신의 아이는 아무런 해도 입지 않은 채 안전한 상태니까요"
놀라움에 올리비아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우두커니 그녀를 쳐다보기
만 했다
"그 하녀가 그렇게 한 건 전적으로 나의 판단에 의해서였어요 아직도
많은 시간이 남아 있기에 그러니 그동안 침착하게, 그리고 충분히 잘
생각해 봐요 올리비아, 난 물론 당신이 진퇴양난의 처지에 놓여 있는 것
을 알고 있어요 당신은 어느 것을 선택해도 고통을 당하게 될 테니까요"
올리비아의 배에 손을 놓고 그녀가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당신이 이곳에서 사는 것은 물론 당신을 무척이나 구속하는 일이 되겠
지만, 당신은 하루 중 얼마 동안은 당신만의 생명력을 느끼게 될거예요
앞으로 4주가 지나면 아이를 지우는 것은 위험해요 당신은 고통스럽겠지
만 어떤 선택을 하든 난 당신의 그 선택을 존중하고, 당신을 계속 사랑할
것이라는 것을 알아 줘요"
올리비아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만약 당신이 인도에 머문다면 기쁜 마음으로 당신의 소식을 기다리겠
지만, 만약 이곳을 떠난다면 그래도 하나님께 당신을 지켜봐 달라고 기도
하겠어요"
올리비아는 더이상 아무 말도 못했다
프레디 버거스트는 말할 수 없을 만큼 놀라고 있었다 잠시 동안 그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올리비아는 반복해서 그에게 말했다
"프레디 씨, 제 말뜻은요, 만약 당신이 아직도 날 아내로 맞이하고 싶어
한다면 내가 당신의 청혼을 승낙하겠다는 거예요"
이른 아침이었다 그들은 정원의 맑은 분위기 속에 앉아 있었다 그는
지금 떨리는 손을 누르며, 믿을 수 없는 꿈을 꾸고 있는 사람처럼 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한 채 떨고 있었다 그가 마침내 큰 한숨을 내쉬며 말했
다
"오, 하나님 정말 믿을 수가 없어요 올리비아, 그게 사실인가요"
"사실이에요"
프레디의 의문에 답하는 올리비아의 눈에는 어떠한 생명력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공허하기만 했다
"당신의 제안이 아직도 유효한가요, 프레디?"
그는 전기에 감전된 듯 벌떡 일어섰다
"물론이에요 제게 정말 당신 같은 여성을 아내로 맞을 자격이 있
을런지"
"전 하루라도 빨리 결혼하고 싶어요 그럴 수 있나요?"
"빨리 결혼하자구요?"
그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듯했다
"얼마나 빨리요? 내일 아니면, 오늘? 오늘이 좋겠군요 당신이 원한다면
"
"바보같이 굴지 마세요, 프레디 다음 주쯤이면 좋겠어요 간소하게, 소
란 피우지 말고 우리 가족들만 함께 했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겉으로는 무척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아무런 힘도 감정도 들어
있지 않은, 슬픔도 기쁨도 없는
"당신이 바란다면 우리 둘만의 사랑의 도피도 좋아요 난"
"이렇게 서두르는 결혼에 당신 어머니가 화를 내시진 않을까요?"
"그건 걱정 말아요 제가 바란다면 그대로 들어 주실 거예요"
"기다리세요 전 아직 할 말이 더 있어요 당신은 내 말을 들어야만 해
요 제게는 조건이 하나 있어요"
"하나의 조건이라구요? 그저 하나뿐인가요? 전 당신의 모든 것을 받아
들일 수 있어요 당신의 모든 것"
"프레디, 제발 그만두세요!"
그녀는 억제되었던 조절 능력에 금이 가는 것을 느꼈다
"제 조건은 그렇게 평범한 것이 아니에요, 프레디 당신은 나의 제안을
자세히 듣고 확실한 대답을 해줘야 해요 아마 당신의 제안을 취소하고
싶을지도 모를 테니까요"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취소라구요? 난 내가 그런 바보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올리비아, 하지
만 당신 생각이"
"프레디, 내 말을 듣고 신중하고 깊게 생각하세요"
"예, 그러겠어요"
"제가 당신의 청혼을 허락하는 이유는 순전히 나의 이기심 때문이
에요 첫째 당신에게 확실히 말씀드릴 것은 전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요"
그는 안심이 되어 보였다
"그것뿐인가요? 그것은 이미 알고 있어요 난 당신만큼 완벽하고 현명
한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아니에요 그게 전부가 아니에요 프레디, 제발 더 들으세요 당신은 제
가 지금 말을 꺼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를 거예요"
올리비아는 감정을 억제하며 긴 한숨을 토해냈다
"전 지금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갖고 있어요 전 이 아이가 사생아가 되
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결혼이 필요한 거예요"
프레디의 눈이 얼어붙는 듯 그대로 그 순간에 머물고 있었다
"다른 남자의 아이? 누구의"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에요, 프레디 제가 남편이 필요한 것에 대한
당신의 충분한 이해가 필요해요 제 아이에게 당신의 정이 필요해요 전
그 아이에게 당신의 성을 나눠 주고 싶어요"
프레디는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겼다 올리비아는 그의
좌절과 당황한 얼굴을 지켜보면서 문득 한가닥의 연민을 느꼈다
"전 아직도 당신을 항시 친절하고 점잖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 점 때문에 당신을 존경하고 있어요"
그녀는 갑자기 자신의 모습이 우스워졌다 지금 그에게 하고 있는 경건
치 못한 제안이 그의 어머니가 자신에게 했던 제안과 아주 흡사한 것으로
인식됐고, 어떻게 이런 자신의 입장만을 고려한 제안을 감히 할 수 있는
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이런 위선적 제안이 차
라리 그에 의해 거절 되어지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러나 프레디는 그녀의 위선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 사람은, 그는, 당신과 결혼하길 원하지 않나요?"
"그는 사라졌어요"
"예? 어디로"
"그건 상관없는 일이에요 그는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그럼 당신은 그 사람을 사랑했었나요?"
그는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아니에요 그는 나를 강제로 범했어요"
많은 거짓말 중의 또다른 거짓말을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이 남자에게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이기심 때문에 특별한 양심의 가책조
차 느끼지 못했다
프레디는 뜻밖에도 욕설을 퍼부으면서 마구 화를 내며 말했다
"내게 그 야비한 놈의 이름을 말해 줘요 그 녀석을 찾아내 남은 인생
을 끝내 줄 테니"
슬픈 듯 올리비아는 미소지었다
"프레디, 그 사람은 당신이 그렇게 노력할 가치조차 없는 사람이에요
이제 그런 얘기는 그만하고 제 질문에 당신의 대답을 말해 주세요 당신
은 아직도 저와 결혼을 하고 싶은가요?"
그는 괴로운 듯 다시 한번 침을 꿀꺽 삼키곤 잠시 올리비아를 바라보다
가 힘주어 대답했다
"올리비아, 난 그렇게 변덕이 심한 사람이 아닙니다 난 물론 당신과 결
혼을 하겠어요"
"그럼 이 아이를 당신의 아이로 받아 줄 수 있나요?"
"물론이에요!"
그는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가락에 입맞춤을 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조건에서도 당신을 포기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가 없어요"
올리비아의 목구멍이 칼칼해졌다 프레디의 맑고 순수한 푸른 눈을 바
라보며, 그녀는 아직도 말하지 못한 채 그의 이해를 받아야 할 이야기들
에 대해 두려움이 생겼다
갑자기 그녀는 자신을 에워싼 모든 것에 분노를 느꼈다 왜 프레디는
나의 이런 어처구니없는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는가? 충동적으로 그녀는
그의 나약함에 부끄러움을 느끼면서도 똑같은 양의 분노를 느꼈다
"잘 생각하세요, 프레디"
그녀는 잠긴 목소리로 얘기했다
"당신은 정말 이 온갖 추악한 상황에서도 절 받아들일 수 있겠어요?"
"난 어떤 상황에서도 당신을 받아들일 수 있어요"
그는 간단히 말했다
"당신도 알다시피 난 당신을 사랑해요"
그녀는 침묵했다 착한 천성을 타고 난 이 남자에게 감사해야 하는가
그는 지금 그녀가 재가 되는 것을 막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또한 그의 순진무구함을 이용
해 자신을 바보로 만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갑자기 자신이 비참하게 느껴지면서 절망감이 엄습해 옴을 느꼈
다 그녀는 붉어지는 얼굴을 큰 외투로 가렸다 그러다 그녀는 그가 그녀
의 어깨를 잡는 것을 느끼며 그대로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제가 약속드릴 게 있어요, 프레디 제 아이가 태어난 후에, 만약에 당
신이 원한다면 그 아이를 데리고 영원히 당신으로부터 사라지겠어요 당
신의 저에 대한 의무는 그것으로 끝이 날 거예요 저는 당신이나 당신 가
족들에게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어요"
"당신은 내가 그것을 원치 않으리라는 것을 알 거요, 올리비아 당신에
대한 의무도, 또 그 아이에 대한 나의 의무도 모두 나의 인생을 위한 것
이 될 겁니다 명예나 영광 따위는 내게 없어도 좋아요"
그의 팔이 그녀를 강하게 보호해 줄 것 같이 죄어졌다 일찍이 자이 라
벤던이 그녀의 인내와 겸손한 사랑에 불평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프레디가 같은 방법으로 그녀의 운명에 다가서게 된 것이다
"아니에요, 이모님 전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올리비아는 어리둥절해 있는 이모에게 거듭 자신의 입장을 확인시켰다
"전 프레디의 청혼을 받아들였어요"
브리짓트 부인의 얼굴이 환해지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간구에 대해
이처럼 확실히 응답해 준 것을 감사했다 그녀가 갑자기 서둘며 얘기하기
시작했다
"물론 넌 흰 드레스를 입겠지? 장미꽃이 수놓아진 중국 스타일이 어떨
까?"
그녀는 마치 어떤 생기가 불어 넣어진 것처럼 활기에 찼다
"푸른색 리본이 있는 긴 베일을 주문하도록 하자 특별히 아주 긴 것으
로 난 장엄한 분위기를 좋아한단다, 넌 어떠니?"
이모의 말을 중단시키는 게 마음이 아파 잠시 동안 듣고 있던 올리비아
는 최대한의 부드러움을 담고 얘기했다
"이모님, 저희는 조용한 결혼식을 올렸으면 해요 이모님은 아직 완쾌되
시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전 이모님께 어떤 부담을 드리고 싶지 않아요
게다가 사람들이 에스텔에 대해 질문을 할 것이고 아무튼 우리에게
는 그런 사치스런 결혼식을 준비할 시간이 없어요 우리는 다음 주에 결
혼하기로 했어요"
"다음 주"
그녀는 말을 맺지 못하며 눈동자가 휘둥그래지더니 곧 안색이 어두워졌
다
"많은 사람에게 알릴수록 저는 많은 질문들을 받게 될 거예요 이모님
은 지금 에스텔이 집에 없어서 생겨나는 그들의 비웃음과 조롱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으신가요?"
그녀는 브리짓트 이모의 필요 이상의 반응을 저지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느끼는 잔인한 말을 조용히 했다 브리짓트 부인이 조용해지며 결국 의자
깊숙이 앉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난 네게 기억에 남을 그런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 주고 싶었단
다 네가 평생 잊지 못할 그런 결혼식을"
올리비아는 속삭였다
"준비가 어떻든 간에 결혼식은 저에게 영원히 기억될 거예요 제가 영
원히 잊지 못하는 제가 이모님께 약속드릴 수 있어요"
올리비아의 말투에서 어떤 괴로움도 발견하지 못한 채 브리짓트 부인은
행복한 듯 웃음을 지었다
브리짓트 부인이 이처럼 쉽게 속아 줄 상대였다면 버커스트 부인은 처
음부터 그런 상대가 아니었다
"다음 주에 간소한 결혼식을 올리겠다구?"
버커스트 부인이 응접실 소파에 앉아 그들 사이의 비밀을 하나도 놓칠
수 없다는 듯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묻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말없이 앉아
자신의 발만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프레디는 어머니의 이런 태도가 불
만이라는 듯이 큰 소리로 명확하게 대답했다
"예, 어머니"
"브리짓트 부인의 건강 때문도 아닌 것 같고 그렇게 서두르는 이
유가 뭐지?"
프레디가 호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싱긋 웃더니 올리비아를 쳐다보았다
버커스트 부인은 손잡이가 달린 오페라 안경에 손을 갖다 대며 올리비아
를 향했다 그녀도 분명 웃고 있었다
"난 이런 요구들이 분명 내 아들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건 모두
올리비아 양의 의견이 아닌가요?"
어쩌면 이토록 예리한 판단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예, 그래요 버커스트 부인"
버커스트 부인의 가식적인 밝고 행복스러워 하는 모습 뒤에 내재된 고
요한 침착성으로 인해 올리비아는 두려움을 느꼈다 또한 올리비아는 지
금 버커스트 부인의 반응이 어떤 것이건 간에 그녀가 빈틈없이 빠르게 머
리 회전을 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브리짓트 부인은 좀 어때요? 이제는 죠수아 경이 방문객이 와도 좋다
고 했다고 하던데"
"이모님은 많이 좋아지셨어요 고맙습니다"
올리비아는 이미 그녀가 이모의 자살 소동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도 비교적 안전한 테두리 안에서 대답했다
"이모님은 이제 거의 회복되셔서 2,3일내에 모든 일을 마무리 지으실
수 있을 만큼 원기를 찾으셨어요"
마무리를 짓는다? 이 말이 주는 의미는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
"그리고 에스텔 말인데 영국으로 갔다구?"
"예, 그래요"
그 정도에서 버커스트 부인은 더이상 브리짓트 부인과 에스텔에 대한
언급을 멈추었다
"그러면 내가 브리짓트 부인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겠다고 전해 줘
요 그리고 프레디, 내 생각으로는 네가 이제 곧 죠수아 경을 찾아뵙고,
정식으로 허락을 받는 게 예의일 것 같다"
"프레디 씨는 오늘 오후에 이모부님과 만날 약속이 되어 있어요"
그것은 올리비아의 재빠른 대답이었다 프레디의 얼굴에 기쁨의 빛이
역력했다
"아, 그러믄요 맞아요"
버커스트 부인은 한동안 의자에 깊숙이 기대서 손톱 끝만 쳐다보더니,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죠수아 경과 브리짓트 부인의 반대가 없는 한, 특별히 그럴 이유
도 없지만 서둘러서"
그녀는 잠시 말을 끊고, 부채를 만지작거리며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흔
쾌하게 선언했다
"그래, 내가 승낙하지 난 너희들의 결혼을 승낙한다 이 늙은이가 된다
안 된다 하는 그런 결혼식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니까"
버커스트 부인은 올리비아를 향해 애써 부드럽게 웃었다
"사랑하는 올리비아, 난 정말 안심이 돼요 결국 올리비아가 내 아들을
불쌍한 처지에서 구해 주는군요 난 정말 기쁜 마음으로 이 결혼을 축복
해 주고 싶어요"
"물론 우리는 그런 축복 받는 생활을 할 거예요"
이것은 올리비아의 답변이었다
그날 밤 올리비아는 킨잘에게 편지를 썼다
'킨잘, 당신의 말이 옳았어요 해결책은 있었어요 결국은 모든 장애를
제거한 것 같아요 순간적으로 나 자신에 대한 인간적 실망감 때문에 거
짓말에 대한 흔들림이 있었지만, 난 하고 말았어요 난 결혼 반지와 함께
그의 성을 따르게 될 터이고 또 품위를 갖춘 아내라는 자리를 얻게 될 거
예요 그는 내가 그에게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것을 알면서도 아
무런 요구 없이 날 받아들였어요'
유난히 맑은 1월의 어느날 아침, 올리비아 오렌키는 프레디 버커스트와
사랑을 약속했다 그 사랑은 자상하고 복종적인 남자가 그녀의 곁에 죽음
이 그들을 갈라 놓을 때까지 함께 있겠다는 약속을 동반하고 있었다 그
것은 그녀가 신과 사람들 앞에서 영광스런 프레디 버커스트 부인이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 약속은 템플우드의 집에서 간소하게 치러졌다 어떤 의미에서, 올리
비아에게 있어 그날은 그녀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아무 감
각도 없이, 그저 가슴에 뭔가 묵직하고 둔탁하게 느껴지는 것이 살아서
끝없이 그녀를 두드리고 있음을 느낄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몸을 치장하고 있는 신랑으로부터 받은 예물과 약속, 서
둘러 디자인하긴 했지만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웨딩드레스는 그녀를 겉
으로나마 아름답고 행복한 신부로 만들어 주기에 충분했다
결혼 반지가 그녀의 영혼을 판 대가로 손가락에 끼워져 있었다 프레디
로부터 받은 그 많은 보석들을 보며 그녀는 기쁨과 자부심을 갖기보다는
자기 자신이 이런 거짓 넘치는 상황에서 축출되어야 할 사기꾼이라고 느
껴졌다
또한 그녀의 엄마가 24년 전 어느날 결혼을 할 때 받지 못했던 지참금
의 몫이 그녀에게 포함되어 있었다 그녀는 그와의 결혼으로 인해 런던의
로이드 은행에 꽤 많은 구좌를 갖게 된 것이다
"올리비아, 난 이 순간을 24년이나 기다렸어 난 네 어머니가 이 지참금
을 거절했던 것처럼 네가 거절하는 것을 허락치 않겠다 이건 죽은 네 엄
마에게 내가 놓을 수 있는 가교이며, 그애가 고생한 것에 대한 보상이야
넌 내게 죽은 네 엄마에게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겠니? 난 네
가 꼭 이 지참금을 받아 줬으면 좋겠구나"
"제가 이모님의 그런 생각을 모르는 게 아녜요 하지만"
"너의 부모가 도망쳤을 때, 아버님께 말씀드려 지참금을 못 주게 한 게
나야 그래서 그애가 미국에서 그렇게 고생하며 가난하게 살다 죽은 거고
내가 그애를 죽인 거야 내가 그애를 죽인 거라구"
새롭게 밀려드는 고통으로 인해 흔들리고 있는 브리짓트 부인을 바라보
며 그녀는 더이상 거절할 수가 없었다 이모의 가슴 속에 내재되어 있던
죄의식을 보며 올리비아는 더이상 아무 말도 못하고 그 의견에 따르겠다
고 했다
브리짓트 부인은 결혼식이 있기 며칠 전에 올리비아 앞에 검은 천으로
싼 상자와 열쇠를 건넸다
"그리고 이것은 에스텔에게 갈 몫이었지만 네가 갖거라"
그녀의 얼굴엔 마치 에스텔로 인해 자신이 받았던 충격을 모두 잊은 듯
한 편안함이 있었다 올리비아는 그것을 선뜻 받을 수 없었다
"전 에스텔 몫에는 손대고 싶지 않아요, 이모님 그걸 제게 주시는 것은
공평치 못한 처사예요 언젠가 에스텔이 돌아오면"
"그앤 돌아오지 않아! 그앤 더이상 존재하지 않아!"
브리짓트 부인이 아주 조용하고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존재하
지 않는다구요! 그녀는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런 그녀의
저항을 알아채지 못했다 올리비아는 모든 것을 체념한 채 받았다 그리고
속으로 그녀는 자기가 그것을 대신 지켜 줄 뿐이라고 생각했다
브리짓트 부인의 정성으로 결혼식 아침식사는 풍성하게 준비되었다 죠
수아 경은 그저 손님들 사이를 멍한 채로 걷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랜섬
이 죠수아 경에 의해 일어날지 모를 순간의 실수를 미연에 막기 위해 한
순간도 한눈을 팔지 않고 따르고 있었다
브리짓트 부인이 공공연하게 눈물짓는 것과는 달리 버커스트 부인은 한
두 번 남의 시선을 피해 눈물을 닦을 뿐, 방 안의 커다란 의자에 조용히,
그리고 당당한 모습으로 앉아 날카롭게 올리비아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
보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계속되는 억지 웃음에 턱이 얼얼하고 구토기가
느껴졌으나 이 결혼식의 주인공으로서 그곳을 빠져나갈 방법은 없었다
이런 가장무도회를 지속시키는 죄악을 계속 저지르면서 난 확실한 결혼
생활을 해나갈 수 있을까? 계속해서 그녀의 가슴을 찌르는 이 질문에 대
한 답변을 유보한 채 그녀는 이미 저질러진 일을 원점으로 돌릴 수는 없
었다
올리비아는 시갈로 행하는 배 여행을 하며 속이 좋지 않음을 느꼈다
그녀는 어떤 점에도 개의치 않는 포기 상태였기 때문에 프레디와의 신혼
여행에 동의했었다 프레디의 배려는 너무나 자상했다
"힘들어도 먹도록 해요, 내 사랑!"
그는 이미 배 여행에는 익숙한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녀에게만 신경
을 썼다
"코코아와 카레를 곁들인 생선을 좀 갖다 줄까요?"
그녀는 큰 음식그릇들을 옆으로 치우며 그에게 잠시 동안 혼자 있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고맙게도 그는 순순히 선실을 나갔고, 올리비아는 '나
올리비아는 그의 이름 안에도, 그 사람 안에도, 그 어떤 것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뇌까리며 잠이 들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누군가 그녀를 짓누르며, 거친 숨을 쉬며 껴
안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소리를 지르며 깨어났다 만취한 프레디였
다 그가 마치 미친 짐승처럼 퍼붓는 키스로 올리비아는 거의 숨을 쉴 수
가 없었다
"프레디, 제발"
구역질이 났다 온몸이 빠개지는 듯한 고통과 절망이 엄습해 왔다 그녀
는 그를 격렬하게 물리치며 반항했다
그의 입에선 구역질나는 냄새가 나며, 동시에 그의 손은 그녀의 몸 구
석구석을 더듬고 있었다
"아, 하나님 당신은 정말 매력적이야"
그는 딸꾹질을 했다
"날 미치도록 만드는군"
그녀는 그의 혀가 입 안으로 들어와 자신을 괴롭히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몸을 거칠게 더듬는 그의 손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한순
간, 그녀가 있는 힘을 다해 그를 밀어내자 그가 욕을 하며 팔에 힘을 빼
는 순간을 이용해 그에게서 빠져나왔다
"프레디, 당신 지금 취했어요 그리고 난 그 냄새를 참을 수가 없어요!"
"그래, 난 취했소!"
그가 다시 그녀의 팔을 잡았다
"당신 생각에 어느 멍청이가 결혼식날 술에 취하지 않을 것 같소? 이리
와, 이제 그만 나를"
그의 커다란 손에 힘이 가해지더니 그녀를 껴안으며 입고 있던 잠옷을
갈기갈기 찢기 시작했다 그녀의 고통스런 비명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
의 입술을 물어뜯고 핥는 끔찍스런 키스를 계속했다 놀란 올리비아가 강
하게 그를 밀쳤다
"프레디, 제발 지금은 몸이 좋지 않아요 내일 약속해요 내
말 좀 들어 줘요"
그녀는 혐오감과 모욕감으로 울음을 터뜨렸다 그가 한동안 심하게 욕
을 하더니, 갑자기 정신을 차린 듯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받치며 당황
한 얼굴로 물었다
"내가 당신을 무섭게 했나요? 난 당신을 다치게 하고 싶지는 않아요
하지만 당신에게 남자가 처음은 아니잖소?"
그녀는 비참한 공포와 더불어 충격을 받았다 당신에게 남자가 처음은
아니잖소? 이 말이 내포하고 있는 수백 마디의 의미에 몸을 떨며 올리비
아는 프레디를 두렵게 바라보았다 프레디! 지금 당신이 말하고 있는 거예
요? 자상하고 친절하던 바로 그 사람이 말하고 있는 거예요? 당신이 바로
내가 알던 그 프레디인가요?
더이상 생각할 틈이 없었다 그녀를 향한 그의 집요한 공격이 다시 시
작되었다 올리비아는 사력을 다해 그를 거부했지만 그는 이미 이성을 잃
은 채, 그저 야수처럼 그녀를 범하는 일에만 골몰하고 있었다 그의 거친
손길이 그녀를 찌르고 꼬집고 때리며 뼈를 자르듯 덤벼들었다 뜨겁고 악
취 나는 숨결을 토하는 그는 그저 짐승 같았다
그녀는 혐오감으로 치를 떨면서도 그의 그 계속되는 강간과도 같은 행
위를 피할 수 없었다 그는 마침내 그녀를 소유하자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올리비아는 그 추악한, 한가닥의 열정도 즐거움도 없는 육체의 결
합에 내내 비통한 눈물만 흘렸다
그 폭행이며 강간인 타락한 행위에 낙담하며 상처를 받았지만, 올리비
아는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가 없었다 무슨 명목으로 누구에게
구조를 청한단 말인가? 그는 지금 엄연히 그녀의 법적인 남편이며, 무엇
보다도 그녀 자신이 원해서 그와 결혼했던 것이다 그것이 설사 강간과
같다 해도 부부간에는 일종의 권리였던 것이다
그녀는 그런 육체적 항복을 통해 자신을 소리 없는 죽음 속으로 몰아갔
다 그녀의 존재는 더러운 욕정으로 찌꺼기로 모욕당하고 추악한 욕구의
도구로 사용됐다
그녀는 울었다 그 하염없는 눈물 속에서 집을 그리는 새처럼 그녀의
마음은 언젠가 한번 살았던, 금지된 구역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다
른 이의 팔에 안겨 있었으며 그가 깃털 같은 입술로 키스를 했다 사랑이
넘치는 부드러움과 열정으로 눈이 부셨다
그래요, 난 당신을 정말 사랑하오
누구였던가, 내게 이렇게 말했던 사람이 누구였던가 그 말을 남기고 몰
인정하게 떠나간 사람이 누구였던가 자이, 내 사랑 나의 인생 나의 모든
것 지금 어디 있나요? 그녀의 마음속에 말없는 메아리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왜 당신은 내가 이렇게 되도록 날 포기했나요 왜?
그녀의 마음이 이렇게 꿈결을 헤맬 때 프레디는 그녀와의 정사에 만족
한 듯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목욕탕으로 가 아픈 몸
을 빡빡 문질러 닦고, 깨끗한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패배와 자포자기로 선실로 돌아온 그녀는 잠을 들 수가 없었다 그녀는
배의 둥근 창을 통해 밖을 보며 의자에 웅크리며 앉았다 그녀 내부의 모
든 것은 울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가에 물기는 다 말라 있었다
그녀는 손으로 배를 어루만졌다 아주 이상하고 익숙치 않은 무언가가
그녀의 심장 속에 느껴졌다 뭔가 살아서 꿈틀대는 느낌 그렇다! 그
녀는 결코 이제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이제 결코 다시는 혼자가 아니
었던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살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겠는가 온갖
모멸과 굴욕과 절망 속에서도 이 새 생명 하나만으로도 삶의 이유는 충분
하지 않겠는가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좋은 아침이오, 내 사랑 뜨거운 우유를 가져왔는데 오늘은 기분이 좀
나아졌소?"
올리비아는 깨어나면서부터 움찔했다
그녀를 잡고 있는 그의 숨결 속엔 알코올 냄새가 아직 남아 있었지만,
그의 표정은 불안과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올리비아는 고개를 돌렸다
프레디의 얼굴이 사과처럼 붉어졌다
"내가 어제 매우 취했었나 봐요 바보같이 내가 어제 너무 거
칠었나요? 그랬나요?"
거칠었냐구? 올리비아는 천천히 일어나 우유컵을 받아서 조금씩 마시며
단 한번의 시선도 그에게 주지 않았다
"왜 기억을 못하는 거죠?"
그녀가 비아냥거리듯 물었다
"글쎄요, 사실은 내가 잊을 수 없다는 것을 당신도 알 거예요 너무 급
하게 달려들었어요 결혼식날 밤이라"
씩 웃는 어설픈 표정 속에 그 자신의 행동에 대한 어떤 두려움이 보였
다 올리비아는 놀라움을 숨기며 그를 주의깊게 관찰했다 그에게는 어떤
구실을 대려고 하는 의도도, 어떤 부끄러움이나 교활함도 보이지 않았다
항시 그랬듯 그에게 있는 그 진지하고 어리석을 정도의 순진함만이 존재
했다 그녀는 당황하며 물었다
"당신 정말 어젯밤의 일들을 기억 못하는 건 아니에요?"
그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어지며 그녀의 손을 잡더니 입을 맞췄다
"그래요 내가 만약 술에 취한 상태에서 당신에게 무례하게 행동하고,
말했다면 날 용서해 줘요 하지만 난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소 그
것만은 당신이 날 믿어야 해요 꼭 나를 믿어야 해요"
그녀는 그의 숨결 속에서 다시 한번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지만
애써 참으며 미소를 지었다
"아니에요, 당신은 거칠지도 않았고 무례한 어떤 말도, 행동도 하지 않
았어요 당신은 지금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녀는 그의 고통스러워하는 불안한 모습에 오히려 안쓰러움을 느꼈다
"올리비아, 내가 술을 마시는 게 싫은가요?"
"예, 그것은 싫어요 그리고 술을 마시면 모든 기억을 잊어버리는 게 싫
구요"
"좋아요, 그렇다면 앞으로 술을 끊겠어요 지금부터 한 방울도 입에 대
지 않겠소 물론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노력해 보겠소 당신이 기쁠 수 있
는 일이라면 난 꼭 그렇게 하겠소"
물론 그녀는 그를 믿지 않았다
"만약 그것을 약속해 줄 수 있다면, 당신이 내게 준 보석들보다 더 당
신을 믿겠어요"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어제와 같은 야만스럽고 짐승 같은 행동들이 이
남자에게서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빌며 말했다
"물론이오 난 그것을 약속해요 사나이로서 나의 부인, 날 믿어 줘
요"
프레디는 그녀를 위한 배려와 그녀를 위한 손과 발이 되기만을 기다린
사람처럼 그녀에게 대했다 그녀가 대화를 원하면 얘기했고, 원치 않으면
침묵으로 복종했다 올리비아는 그가 진심으로 자신에게 사과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녀는 그를 동정했다 불쌍한 프레디!
그는 자기 잠재의식 속에 풀지 못한 감정의 찌꺼기들을 갖고 있는 것이
다 술에 취한 상태가 아니라면 생각조차 나지 않고 무의식 속에 감춰져
조심스럽게 가라앉는 모든 부도덕한 감정들이 술을 마시게 되면 그의 혀
를 통해 일시에 분출되는 것이다 그는 어떻게 이런 이중성을 가지고 살
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날 밤 그는 맑은 정신으로 그녀 곁에 누워 두려움과 비슷한 불안을
느끼며 약간 떨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전날의 고통으로 감정이 아직
순화되지 않은 그녀를 이해하는 듯 사랑의 표시로 그녀를 어색하게 더듬
거리고 있었다
어쨌든지 간에 그녀는 메스꺼운 구역질나는 감정을 가라앉히며 생각했
다 흥정은 흥정일 뿐이다 얼마의 희생이 따르더라도 난 그를 치러야만
한다 프레디도 일종의 흥정의 기분이 가슴 속에 차 있을 것이다
그녀에게 있어 그 흥정은 그렇다고 깨버릴 수도 없는 것이었다
캘커타와는 달리 겨울이 없이 일 년 내내 덥고 축축한 이곳 신혼여행지
시갈의 공기가 그녀의 모든 힘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잘 정리된 짐과 싹
싹한 하인들이 그들을 반겼지만 올리비아는 거의 아무것도 못 먹고 누워
만 있었다
그들이 이곳으로 신혼여행을 온 이유는 이곳에 버커스트 가의 친척 친
지들이 집단으로 살고 있다는 것과 지금 이곳에서 열리고 있는 버커스트
가 사람들의 폴로 경기 때문이었다 프레디는 그 경기의 열광적인 팬이었
다
"당신도 오늘 오후에 열리는 폴로 경기에 오겠어요?"
그들이 시갈에 도착한 지 이틀째 되던 날이었다 올리비아는 손수건으
로 입을 막고 경련을 가라앉히면서 말했다
"프레디, 난 그 경기가 속행되는 그 시간 내내 앉아 있기 힘들 것 같아
요 제가 거기서 갑자기 아프다고 하면 당신이 얼마나 당황스럽겠어요"
"아"
그가 의기소침해지며 주춤했다
"아픈 게 얼마나 지속될 것 같소?"
그가 갑자기 어색하게 물었다 그의 그런 태도에 올리비아는 부끄러움
을 느꼈다
"하지만 만약 아침 내내 쉰다면 그 경기를 볼 수도 있을 거예요 전 아
직 당신이 경기하는 것을 본 적이 없잖아요? 저도 당신처럼 폴로 게임을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녀가 달을 따다 주었어도 지금보다 그렇게 기쁘고 행복해 하진 않았
을 것이다
"와, 난 정말 기쁘오 그 녀석들 모두 당신을 보고 싶어해요 특히 그
녀석들의 부인들은 난 그들에게 경기가 끝난 후 맥주 한 잔씩 대접
하겠다고 말하고 싶은데 집에서 해도 되겠소?"
그가 그녀의 눈을 피하며 물었다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 같아
그녀는 거절하지 않았다
"집에서 하도록 해요 제가 하기보다는 하인들이 알아서 할 테니까요
전 그저 이것저것 지시만 할 테니 별일이 없을 거예요"
그가 기쁨에 넘쳐 그녀를 포옹했다
"아! 하나님, 난 세상 모든 사람에게 외치고 싶어요 내가 얼마나 좋은
아내를 맞이한 행운의 사나이인가를 보라고 외치고 싶소!"
올리비아는 차라리 울고 싶었다
사교적 입장에서 버커스트 가의 새신부들은 폴로 경기에 참관하면서 남
편의 친지들과 교류를 나누는 전통에 따라야 했다 오후 경기에서 올리비
아는 프레디를 위해 사교적이 되기 위한 눈물나는 노력을 했다 거기 참
석한 모든 여자들이 속으로는 버커스트 가의 상속자를 유혹한 천박한 미
국 여자라고 올리비아를 욕하면서도 자신의 곁에서 갖은 아첨을 다 떨고
있는 것을 올리비아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남자들은 비교적 친절했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모두 올리비
아의 매력과 지성에 반한 듯했다 프레디는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가 친구
나 동료들 사이에 드러나고 있는 것에 굉장히 기뻐했다
그날 밤, 올리비아는 프레디를 친구들 앞에서 인색하게 만들고 싶지 않
았기에 많은 음식을 정성들여 만든 후 그와 함께 충분한 양의 맥주를 주
문했다 그러나 그들이 몇 시간에 걸쳐 흥청거리며 놀면서 분위기가 무르
익어 갈수록 올리비아는 점점 더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배에서의 첫날 밤
처럼 프레디가 술을 마시면 어떤 지경이 될까?
그런데 새벽 4시가 조금 더 돼서 침실로 들어온 그는 선잠이 든 채 쉬
고 있는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 올리비아는 온몸이 굳어짐을 느꼈다 그는
그녀에게 몸을 기댄 채 그녀의 이마에 입맞춤했다 올리비아는 주의깊게
그에게서 풍기는 냄새가 있는지를 살폈다 그가 웃었다
"올리비아, 오늘 밤 당신은 내게서 아무런 냄새도 맡지 못할 거요 아무
도 내게서 술 냄새를 맡지 못할 거야 아무도!"
그는 자랑스럽다는 듯 소리 높여 얘기했다 작은 탄성을 지르며 올리비
아가 일어났다
"아, 프레디 당신 오늘 저녁 내내 술을 마시지 않았군요"
"한 모금도 술 냄새조차 안 맡았소 봐요, 내 사랑! 오늘 내게서 장
미 향기가 나는 것 같지 않아요?"
그가 큰 소리로 말했다
"아, 프레디 나의 사랑"
올리비아가 진심에서 한 말이었다 그녀는 그의 머리를 안아들어 키스
를 해주었다 천천히 그의 눈에 눈물이 고여갔다
"올리비아, 당신은 알고 있소? 지금 이 키스가 당신이 원해서 내게 해
준 첫키스인 것을?"
그녀는 다시 그에게 열정적인 키스를 해주었다
"당신은 나와의 약속을 이렇게 지켜 줌으로써 나로 하여금 당신 안에서
더욱 가치 있는 사람이 되게 해줬어요 만약 이것이 우리 두 사람의 힘으
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당신의 어머님도 무척 기뻐하실 거예요"
"난 당신이 내게 무엇을 주든지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겠소 나의 올
리비아!"
그가 숨을 급히 몰아 쉬었다
"난 더이상 당신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겠소"
그녀에게서 빠져 나온 그는 그녀의 가슴에 머리를 묻고는 빠르게 잠들
었다
올리비아가 신혼여행에서 캘커타로 돌아온 지 사흘 만에 버커스트 부인
의 호출이 있었다
그들이 없는 동안 두 사람만의 새 보금자리는 잘 꾸며져 있었다 올리
비아는 음악실, 서재, 도서실, 무도회장 등을 갖춘, 사치의 극치를 이룬 아
파트의 굉장한 구조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마치 군대와 같이 말끔히 정리
돼 있는 정원을 바라볼 수 있는 베란다와 식물원 뒤로 있는 마구간, 부엌,
하인들의 숙소, 이런 모든 구조물들이 그녀를 압도했다
그녀가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이후 그녀의 시어머니는 열쇠꾸러미를 그
녀에게 넘겨 주었다 그것은 자신의 권위를 포기하겠다는 상징적 의미였
으며, 올리비아가 이 집안의 새로운 안주인으로서 버커스트 부인의 책임
을 대신해 이행해야 한다는 의미도 무언으로 곁들어 있는 것이었다
"이제 우리가 얼굴을 마주 대하고 어떤 얘기를 나눠야만 할 때가 온 것
같구나"
햇살이 가득한 아침, 그녀가 아무런 미소도 없이 담담한 표정으로 올리
비아에게 말을 건넸다
"우린 서로 솔직하기로 했었지, 그렇지?"
올리비아는 입술을 적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올리비아, 내게 왜 그렇게 서둘러 프레디와 결혼하기를 원했는지
에 대해 얘기해 주지 않겠니?"
그녀는 근엄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난 네가 어떤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느끼고 있다고 알고 있었는데
"
"예, 그랬어요"
그녀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럼, 네가 원하는 대로 그 사람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거냐?"
"아닙니다"
그녀는 순간 무심코 터지는 웃음을 참으며 턱을 약간 들고 얘기했다
"어찌됐건 전 프레디를 사랑하지 않고, 그 사실을 프레디도 이미 알고
있어요 어머님의 말씀 중에서도 그와의 사랑은 조건 중의 하나가 아니었
어요 그렇죠? 어머님은 그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를 용서하고 보살펴
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셨죠 제 생각에는 이런 모든 조건들은 다 충족
되었다고 보는데요"
버커스트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건 맞다 난 아직도 네가 내 아들의 완벽한 아내로서 부족함이
없다는 생각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어 그리고 그 일은 지금 네가 나에게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고 넌 정직한 아이고,
존경받을 만한 용기가 있어 게다가 프레디가 더 이상 술을 마시지 않게
했다는 점에서도 넌 그의 좋은 아내로서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난
그애의 어머니로서 그애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모두 건강하길 바라
고 있어 그런 면에 있어서 어떤 부분들은 네게 대단히 감사하고 있단다
그런데 네가 그렇게 많은 좋은 행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올리비아"
그녀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넌 내 아들 몫의 십자가를 진 게 아니야 넌 프레디의 입장을 고려해
결혼한 것이 아니라 네가 선택해서 내 아들의 부인이 된 거야 난 지금
네가 왜 그를 선택했는지에 대한 진정한 이유를 알고 싶어 올리비아
그 진실이 뭐지?"
올리비아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듯한 충격에 몸을 떨었으나 솔직하기
로 결심을 했다
"전 지금 임신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애는 프레디의 아이가 아니에
요"
작은 놀라움의 탄식 소리와 함께 버커스트 부인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해 가며 시선이 허공을 향했다
"그러면 프레디도 그 사실을 알고 있겠구나"
올리비아는 자신이 낼 수 있는 모든 용기를 내어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그에게 얘기하지 않은 문제는 없어요 전부 다 고백했어요 전 어떤 남
자라도 지금의 나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으리라는 것을 알아요 전
프레디에게 영원히 갚지 못할 그런 빚을 진 거죠"
정말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버커스트 부인이 웃기 시작했다
"난 네가 어떤 도덕적인 독립성을 지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프레디의
아내로서 인정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네가 그렇게 내 말을 문학적으로,
정말 그렇게 빨리 받아들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 말을 남기곤 한동안 올리비아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그녀가 화살을
쏘듯 한 마디를 던졌다
"왜, 그 사실을 미리 얘기하지 않았지?"
"만약 제가 말씀드렸다면, 어머님께서는 저와 프레디의 결혼을 허락하
셨을까요?"
"물론 아니지 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애를 설득시켜 못하게 했을 거
야"
그녀는 무겁게 뒤로 몸을 기대고 앉았다 긴 한숨과 함께 허공에 맴돌
던 시선을 거두어들이며 그녀가 다시 말했다
"난 이 세상에 그렇게 저렇게 맞게 살고 있는 한 여자에 불과해 앞으
로 내게 더 이상은 충격을 주지 않기를 바란다 내게 너에 대해 고려하는
것은 네가 프레디를 덜 사랑하는 그 문제가 아니고, 네가 네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와 사귀었다는 점이다 물론 난 이보다 더 심한 경우도 본 적이
있다 유럽의 왕족들은 그들 아버지의 진짜 이름을 갖기가 어려웠다고 하
니까 올리비아, 난 그저 현실적인 문제를 걱정하는 거야 너도 알겠
지만 프레디는 너와 결혼함으로써 우리 가문의 미래를 더럽히게 된 거
야"
그녀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애의 아버지는 누구냐?"
올리비아의 턱이 굳어졌다
"죄송해요, 어머님 전 아직 그것을 밝힐 마음의 준비까지는 되지 않았
어요 전 언젠가 프레디에게 제가 아이를 낳으면 사라져 주겠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물론 그가 원한다면 말이죠 권리 포기나 법적 서류 절차가
무엇이든지 제 사인이 필요하다면 전 모든 지위를 포기하는 것에 기꺼이
사인하겠어요 또 유산 상속 문제에도 확실한 말들이 저희 사이에 오갔어
요"
버커스트 부인이 웃음을 지었다
"올리비아, 너희 미국인들은 참으로 실용적인 것만 자신에 맞게 생각하
는 사람들이구나 네 생각에는 정말 그게 전부일 것 같으냐? 그것이 네가
고려해야 할 일의 전부라고 생각하니? 만약 그 아이가 남자인 경우, 그
아인 모든 직위를 확실히 물려받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제가 그런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올리비아가 외쳤다
"만약 어머님께서 바란다면 제 아이와 저에 대한 사망신고로 상속권과
그 모든 권리를 소멸시키셔도 돼요 전 그저 제 아이가 성을 갖고 태어나
는 그것만을 원하고 있어요"
"올리비아, 네가 아직까지 생각지 못하고 있는 게 있구나"
버커스트 부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떤 경우에도 영국인의 작위라는 것은 그토록 쉽게 얻거나 포기되는
것이 아니야 네가 죽지 않는 한 프레디는 다시 결혼할 수가 없고 그 말
뜻은 곧 버커스트의 직계 손인 프레디가 죽게 되면 그 뒤를 이을 직계 자
손이 끊어진다는 의미야!"
처음으로 그녀가 동요된 모습을 보였다
"그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프레디의 사촌 중 아주 추악한 자가
있는데, 그가 물론 프레디를 대신해 대를 이어 줄 수도 있지만 그 사람의
부인은 술집 작부 출신인데 그런 여자에게 남작 부인의 작위를 줄 수는
없다 만약 그렇게 해야 한다면 그 일을 난 죽어 무덤 속에서도 혐오스러
워 하고 있을 거다"
일이 복잡하게 얽혀 가자 올리비아는 더이상 앞으로의 문제를 생각하기
가 어려웠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어떤 해결책이 있을까요?"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해 난 네 몸 속에 있는 아이가 우리 집의
성을 갖고 태어나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아 만약 그애가 남자애라면 사라
졌거나 죽었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발표해야 할 것이다 운좋게 그애가 여
자애라면 문제는 간단해진다 내가 얘기하는 것을 명확히 이해할 수 있겠
지?"
올리비아는 버커스트 부인의 말을 알아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이제 이야기를 정리해 보도록 하자 지금 네가 가진 아이가
남자아이든 여자아이든 간에 넌 프레디의 아들을 우리 가문을 위해 낳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마지막 말은 마치 벼락처럼 올리비아의 뒤통수를 쳤다 그녀는 그저
그렇게 담담하게 결론을 내리고 있는 시어머니가 섬뜩하고 무서웠다 물
론 버커스트 부인에게 아들의 결혼 문제는 심각한 것이겠지만, 올리비아
입장에서는 그저 현재 빠진 함정에서 헤어나기 위해 자신의 편리와 필요
만을 채우려 한 선택이었지 않은가
"올리비아, 넌 프레디에게 빚을 졌다고 했지?"
당당하고 무정한 목소리였다
"그 누구도 프레디가 한 일에 찬성하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그애 뿐만
아니라 너 역시 바보 같은 짓을 한 거야 넌 영국인 어머니와 미국인 아
버지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미국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미국인이라 볼 수
있지 그래서 넌 이런 복잡한 문제들에 대해 알 수 없었겠지만 프레디는
너보다 확실히 짚고 넘어갔어야 했는데
올리비아는 자신도 모르게 버커스트 부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프레디에게 진 빚을 갚기 원한다면 방법은 있어 물론 네가 꼭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너의 의무는 전적으로 도덕적인 문제
란다 난 너를 줄곧 보기 드문 정신을 가진 여성이라 생각해 왔단다 그리
고 지금은 내가 너를 처음 평가했을 때보다 훨씬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
고 있음을 알겠구나"
그녀가 잠시 말을 중단하곤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올리비아를 바라
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내게 말해 주겠니? 네가 왜 이런 상황 속에서 너의 그런 용기조차 왜
곡되어지는 선택을 해야 했는지"
내가 사회적으로 부여잡고자 했던 그 지위의 의미가 이토록 높은 신분
상승을 의미한 것일까? 올리비아는 전혀 뜻밖의 방향으로 치달은 자신의
선택의 결과에 놀라워하며 그녀에게 말했다
"물론 제 용기는 그것을 선택하지 못하게 했어요 하지만 시간이 주어
진다면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어요 더이상 프레디 가문의 손실을 그냥
지켜볼 수는 없으니까요 만약 신께서 제게 그런 능력을 주신다면 제가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해 프레디 가문이 프레디에서 끝나도록 내버려 두지
는 않겠어요"
버커스트 부인은 올리비아의 손을 잡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넌 정말 훌륭한 젊은 여성이다, 내 아가야 너의 그 결정은 우리 가문
에겐 정말 끔찍스런 것이었지만 지금 난 네가 조금도 부끄럽지 않다"
그녀의 목소리는 진심을 얘기하고 있는 듯 진지하기만 했다
"내 아들의 입장에서 보면, 여전히 너의 상황 자체가 불안스런 일이지
만 올리비아, 지금은 그를 버리지 말아라 그게 내가 말할 수 있는 전부이
다"
그녀는 올리비아의 손을 놓으며 얘기를 계속했다
"그리고 만약 내 아들이 장래 어느날에 너를 거절한다면 네가 어떻게
할 것인지를 얘기해 주겠니? 미국으로 돌아갈 수 있느냐?"
미국이라구? 그녀는 고통으로 무감각해진 듯 눈을 감았다 자신이 마치
지금 피할 수 없는 진흙탕 속에 빠져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그녀는 단호히 대답하였다
"예 그렇게 하겠어요"
그녀는 또다시 자기도 모르게 거짓말을 했다
"이모님께서 영국에 돌아가시는 문제를 검토하고 계시기 때문에 거기에
머무를 수도 있어요"
"네가 깨닫지 못한 상황이 또하나 있는데 알고 있느냐? 올리비아, 넌
그 아이를 캘커타에서 낳아서는 안 된다"
올리비아가 얼굴을 찡그렸다
"왜 안 돼죠?"
"그 결과에 대해 생각해 보거라, 아가야! 그 늙은 여우같은 험프리스가
네가 예정일보다 일찍 아이를 출산하는 것을 모를 바보겠니? 우린 험프리
스에게 그것을 알릴 수는 없다 만약 그렇게 되면 너와 프레디는 가문을
망쳤다는 비웃음을 사게 될 것이고 넌 부정한 아내라는 오명을 받게 돼
프레디 역시 그가 원하든 원치 않든 사람들로부터 부정한 아내를 둔 불쌍
한 남편이 되는 것이다"
다시 한번 올리비아는 혼란해졌다 이 문제에 대해 그녀는 깊이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올리비아는 이런 문제를 놓고 시어머니라는 존재와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이 우스웠다 그러면서 그녀는 버커스트 부인이 예사 사람이 아니라
는 것을 알았다 노부인은 너무나도 특이하게 규범 외적인 것들을 잘 이
해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세요?"
"네가 어디로든 가서 우리를 잘 알지 못하는 의사를 통해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출산 후 6주쯤 지나면 캘커타로 돌아
오너라 그때는 아무도 이상해 하지 않을 테니"
더 많은 거짓말, 더 많은 속임과 현혹 하나님, 이것들의 끝에는 무
엇이 있는 것입니까?
"프레디에게는 지금 우리가 나눈 얘기는 전부 얘기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구나 난 내 아들이 지금보다 더 많은 상처를 입는 것을 원치 않는
다"
"예, 어머님 그에게 아무 말도 안 하겠어요"
버커스트 부인의 얼굴이 부드러워졌다
"그 남자와 관련해 한 가지 문제가 더 있는데, 얘기하마"
그녀는 올리비아에게 시선을 맞췄다
"그 남자가 혹시 앞으로라도 너의 인생에 개입할 여지가 있는지 알고
싶구나"
"그럴 리는 없습니다"
"그는 아이에 대한 것을 모르고 있느냐?"
"그는 알지도 못하고, 관심조차 없어요"
"그럼 너는 너는 아직도 그를 사랑하고 있느냐?"
올리비아는 조사 받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
다 다만 강하게 머리를 흔들었을 뿐 그렇게 힘껏 입술을 깨물었을
뿐
그것은 자이의 배신에 대한 강렬한 반발이면서 자신의 지나온 삶에 대
한 부정의 몸짓인지도 몰랐다 자이가 돌아와 그녀의 인생에 다시 개입한
다고 해도 절대로 절대로 그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기에, 그녀의 선택은
그만큼 확고부동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말 자이가 다시 돌아온다면 어떻게 하지? 그의 아이를 바라
보는 그의 시선을 어떻게 하지? 두 사람의 사랑의 씨앗을 통해 새로이 펼
쳐진 숙명의 바람을 어떻게 하지?
정말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녀는 대답을 찾을 수 없었
다 다만 입술을 깨물며 눈을 감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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