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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슈무엘 요세프 아그논] 정조의 맹서

by Casey,Riley 2023. 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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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의 맹서
    <아그논 작>

      1
  야파는 아름다운 해변의 도시. 대양의 파도가 그 해변의 키스하고, 날마다
푸른 하늘은 이 도시를 덮고 있다. 유대인, 기독교인 등 온갖
인종들이 모여서 장사, 노동, 혹은 배에 짐 싣는 일, 운송하는 일에
분망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일에는 전혀 관련 없는 사람들도 있다 예를
들면 학교 선생들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야곱 레흐니츠도 그러한 선생
중의 한 사람이다.
  야곱 레흐니츠는 소정의 학업을 마치고 박사 학위의 영예를 받은 후,
성질 가는 일단의 여행자들에 끼었다. 그는 그 고장이 마음에 들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조용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는 만약 여기에서 밥벌이만 된다면 이 고장에 머물리라고 혼자 말했다.
특히 그는 야파에 마음이 끌렸다. 왜냐 하면 레흐니츠는 식물학이
전공이었고, 다른 여러 자연과학 부문에도 박식했다. 자연 과학 부문은 이미
다른 선생들의 손에 맡겨져 있었고 라틴어와 독일어 자리만 비어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이 자리를 맡기게 된 것이었다. 때때로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리를 만드는 것이긴 하지만 레흐니츠야말로
이 일에 최적임자였다는 것은 말해 둘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이렇게 해서 레흐니츠는 일하게 되었다. 그는 자기의 직책을 충실히
이행했다. 그는 올바른 책을 선정해 주었고 지루한 내용으로 학생들을 못
살게 굴지 않았으며, 대부분이 독학을 한 동료 선생들에게도 지나치게
뽐내지 않았다. 학생들은 그를 좋아했고 동료들은 그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학생들에겐 친구로서 대해 주었기 때문이었으며 동료들에겐 자기를
동료로서 대해 주도록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한 그의 훤칠한 키, 굵은
목소리, 신사적인 태도,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스러운 눈길을 보내는 밤색 눈
등이 모든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게 했다. 한두 달도 안 되어 그
도시에서는 알려진 사람이 되었다. 물론 달들이 아버지보다는 그를 먼저
알았지만.
  이때는 이미 토지에 대한 투기 붐은 지나간 후였다. 이스라엘의 당에서
일확천금을 꿈꾸던 자들은 파산하여 없어져 버렸다. 이제 야파는 이 땅이
다른 곳과는 다르다는 것을 아는 그들의 측근 인물로 되어졌다. 야파는
자기와 더불어 일하는 정직한 일군에게만 혜택을 주고 있었다. 어떤 이는
장사에, 어떤 이는 이 땅이 필요로 하는 기술에 종사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해외에서 가지고 온 자금으로 생활하였다. 어떤 사람도 일상
생활에서 과분한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터어키에게 권력의 자리를
양보하고, 자기들의 출생지보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더 친절히 봐 주는 외국
영사관의 보호를 찾았다.
  꿈꾸던 사람들은 꿈에서 깨어나고, 행동파들은 이스라엘 땅이 이스라엘에
속한다는 것과 이곳이 이스라엘의 정신적 중심지가 되어야 한다는 데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종종 모여 이 나라와 사회에 관하여
논의했고 그들의 결의를 오데싸에 있는 오데싸 위원회에 보고하곤 했다.
그러는 동안 그들 개개인은 자기 아들 딸의 아버지, 아내의 남편이 되었고,
자기 친구들의 친구가 되었다. 삶은 고달프지 않았으며 별다른 일도 생기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조용히 지나갔고, 사람들은 크게 요구하는 것도 없었다.
그들의 요구는 한정된 것이었으며 쉽게 만족되었다. 잘 사는 사람도 작은
집에서 살며, 평범한 옷을 입고 소찬을 드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어른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차를 마시고 빵에다 약간의 샐러드나 몇 개의 올리브를
먹고는 일터에서 점심 때까지 일을 한다. 날이 어둡기 전에 집에 돌아온다.
그때면 사모바르가 끓고, 이웃 사람들이 찾아오면 차와 설탕에 절인 과일을
나누게 된다. 만일 학식 있는 사람이 좌중에 끼이게 되면 탈무드 말을 잘못
알고 사탕졸임 과일을 <잼>이라고 부른 여관 주인을 놀려 주는 일도
있었으며, 만일 농삿군이 끼이게 되면 포도나무를 뽑아 버리고 알몬드를
심어야겠다느니, 관리들이 뇌물먹는 얘기를 늘어놓곤 했다. 혹은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이 우연히 참석하게 되면 그는 예루살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얘기했을 것이다. 만약 그가 유우머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예루살렘식 농담으로 좌중을 즐겁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야파 사람들은
해외에서 오는 뉴스를 토론하는 일은 없다. 왜냐하면 외국 신문이 도착할
때는 벌써 그 뉴우스가 진부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야곱 레흐니츠는 어느 집에서나 따뜻하게 환영을 받았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 일부러 독일어로 말하려고 애쓰는 것을 고맙게 느꼈으며, 그
대신 그는 풍월의 러시아어로 말을 하며 그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아직은
히브리 말보다 러시아어와 이디시 말이 더 구세대 사람들에게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어가 통하지 않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레흐니츠
앞에서 그들은 독일어를 했다. 대부분의 독신 남자들처럼 그도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다. 그는 자기를 접대해 주는 주인들의 사고 방식과
완전히 일치하여 그들의 견해가 참으로 자기 자신의 견해인 양 느끼기도
했다. 때때로 그는 저녁 식사에 초대되곤 했다. 식사 후 가장이 자리를 잡고
앉아 최근의 오데싸 신문을 읽으면-그것이 히브리 말로 된 <하쉬로와지>
이건 러시아어로 된 <라즈비에트지>건-그는 그 집 딸들은 데리고 산책을
나가곤 했다. 그런 산책에는 늘 빛이 있었다. 만약 달이 없으면 별이
반짝였고 별이 없으면 처녀들의 눈이 발밑을 비쳤다. 다른 젊은이라면
여기에 자기의 전 세계를 발견하고 기뻐했을 것이다.
  그러나 레흐니츠의 가슴에는 다른 세계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것은
바다를 사랑하는 마음과 해양 식물에의 연구열이었다.
  야파의 기후가 사람들을 노작지근하게 정신을 빼 버리는 계절에도 그는
기운이 왕성하였다. 선주들에게 이익을 거져다 주는 바다, 상인들을 위하여
상품 실은 배를 운반해 주는 바다, 바로 이 바다로부터 야곱 레흐니츠는
그가 연구하는 식물을 채집하였다. 그는 벌써 다른 과학자들이 아직 보지도
못한 몇 가지 미지의 식물을 바다 밑에서 발견했다. 그는 그것들에 관해서
자기가 배운 대학 교수에게 써 보냈다. 교수는 이스라엘의 바다를 연구해
주는 학도가 생긴 것을 기뻐하면서 그 보고 내용을 비엔나의 왕실 동식물
학회지에 발표했다. 도한 교수는 자기 애제자에게 그 지역의 해초 연구가
그렇게 현저하게 되어 있지 않으니 조사를 꾸준히 하라고 당부했다. 
  레흐니츠는 누구의 격려를 받을 필요가 없었다. 만이 해변에 붙어 있듯이
그는 바다에 붙어 있었다. 날마다 그는 바다로 나가서 바다가 제공하는
것을 채집했다. 날씨만 좋으면 고깃배를 빌어탔다. 예멘 사람인 문지기
예히아는 그를 위해 값을 깎느라고 아랍 어부들과 실랑이를 벌리곤 했다.
배를 타면 그가 자신에게 말했듯이, 인류 최초의 조상들이 살던 곳까지,
멀리 바다로 나갔다. 그물과 쇠로 된 기구들을 사용하며 해변가에서 발견할
수 없는 해초를 끌어 올리는 그의 가슴은 짐승을 추격하는 사냥꾼처럼
뛰었다. 레흐니츠는 이제까지 한 번도 멀미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물 밑의
신비스러운 것들이, 조화의 기적들이 그에게 끈기를 주었다. 이 식물들은 물
속에서 마치 꽃밭 처럼, 덤불 처럼, 숲 처럼 자라고 있었다. 그 눈망울은
이러한 소금기를 없애고 납작한 접시에 놓는다. (누가 보면 그 빛깔들로
유황의 노란색, 티리한 자색, 또는 살빛이었다.) 바위의 돌출부에 붙어 있는
이것들은 맑은 진주, 올리브 열매, 산호, 공작의 털과도 같았다. 그는 사랑에
가득 차 <내 과수원, 내 포도원>이라고 중얼거리곤 했다. 바다에서
돌아오면 맑은 물로 채집한 해초를 씻어 끈적끈적한 소금기를 없애고
납작한 접시에 놓는다. (누가 보면 그가 먹으려고 샐러드를 만드는 줄로
착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해초에 열중하고 있기 때문에 먹는 것도
잊어버린다.) 그 후 그는 다시 그것들을 접시에서 집어 두꺼운 종이 위에
펼쳐 놓는다. 해초 자체에 포함된 점액때문에 쉽게 종이에 붙는다. 세계에
식물학자가 많아도 그 몇 사람만이 해초를 연구하고 있고, 더구나
팔레스타인 해안의 해초 생태, 번식 생장의 모양을 연구하는 사람은
레흐니츠 뿐이었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대학에서 시간이 나는 때만
가끔씩 다에 나가 식물을 조사하지만, 레흐니츠는 일년 내내 매일 바다로
나갔다. 날이 좋거나 궂거나, 낮이나 밤이나, 춥거나 따뜻하거나, 파도가
있거나 없거나, 다른 사람들이 자기들의 일에 바쁠 때나 잘 때나 그는
바다에 나갔다. 그의 연구가 육지의 식물을 분류하고 연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는 벌써 국내에서는 유명해져서 학회의 회원이 되었을 것이고, 낮에는
토론, 밤에는 회의 회합에 시간을 소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연구는 유태인들의 관심 밖의 먼 세계 였으므로 그의 미름을 그 고장에서도
알려지지 않았으며 모든 시간을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었다. 그는 꾸준히
연구 조사하여 많은 식물을 채집했다. 혹시 그도 알 수 없는 품종을
발견하면 해외에 보내어 선배들의 고견을 들어 보려고도 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해초에 그의 이름 따서<코로라파 레흐니츠>라고 명명을 했다.
오래지 않아서 호르스트 교수의 유명한 <지중해의 은화 식물>이라는 책에
지중해의 해초류에 관해 기고해 달라는 청탁을 받게 되었다.

      2
  레흐니츠가 이 방면에 흥미를 갖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그가 대학에 처음 들어갔을 때에는 특정한 학과의 전공이 없이 각 방면의
학문을 공부했다. 자연 과학이 다른 어떤 학과보다도 마음에 들어 특히
그것을 공부했다. 그때부터 그는 평생 상아탑에 파묻히는 영원한 학도가 될
것을 생각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호오머를 읽었다. 그는 파도의 목소리와
같은 소리를 들었다. 그때까지 그는 바다를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책을 덮고
귀를 기울였다. 그 목소리는 많은 파도 소리처럼 튀면서 없어져 갔다. 그는
벌떡 일어나 주위를 돌아보았다. 달은 구름과 별 사이, 중천에 떠 있었고,
대지는 고요했다. 그는 다시 책을 들어 읽었다. 또다시 그는 같은 목소리를
들었다. 그는 책을 놓고 침대에 누웠다. 목소리는 사라졌다. 그러나 그를
부르던 바다는 그의 앞에 끝없이 펼쳐졌다. 달콤하고 찬, 무서운 수면위에
달이 비쳤다. 다음날 레흐니츠는 파도에 쓸려 무인도에 와있는 사람처럼
넋이 빠졌다. 그로부터 매일 그랬다. 그는 점점 공부에 게을러지고 해양
여행담에 관한 책을 읽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동경은 더하게 되어
바닷물이라도 마시면 갈증이 풀릴 것 같았다. 그리하여 해양학을 전공할
생각이 들었다. 배의 선의가 될 생각으로 의학을 택했다. 그러나 해부실에
첫발을 들여 놓자마자 현기증을 느꼈다. 그는 의학이 자기 천직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러던 중 우연히 해초에 관해서 연구하는 친구를
방문했다. 여행에서 막 돌아온 이 친구가 채집하여 온 표본을 그에게 보여
주었다. 그것을 본 레흐니츠는 많은 식물이 바닷속에서 자라고 있음에
놀랐다. 또한 우리가 그것에 관하여 아무것도 모르고 있음에 놀랐다. 그는
친구와 헤어지자마자 자기가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아마 레흐니츠가 호오머를 읽던 일과 그 후에 생긴 일들은 전설같은
이야기로 들릴 것이다. 그러나 여하간 그가 자기 직업을 택하게 된
동기로는 다른 어떤 설명보다 그럴듯한 것이다.
  하여튼 그는 학업을 마친 후 이스라엘로 여행을 떠났다. 경비는 대학에서
받은 장학금과 코트홀트.에르리히 씨가 그에게 희사한 돈으로 마련했다.

      3
  야곱 레흐니츠의 이스라엘 여행을 도와 준 이 에르리히 씨는 전에
레흐니츠가 김나지움에 들어가는 것도 도와 준 분이다. 그는 부유한
상인이며 지도 상에서는 별로 면적을 차지하지 못하는 어느 작은 나라의
명예 영사였다. 그의 저택 정원이 레흐니츠네 집과 이웃하고 있었다. 야곱은
어렸을 때 영사의 외딸인 쇼샤나와 어울려 놀았다. 그녀는 변덕이 많은
아이였다. 야곱을 무척 좋아하여 자기들이 노는 데에 다른 계집애들을 끼지
못하게 하였다. <야곱은 내 거야. 나는 크면 그에게 시집갈 테야.>하고
말하기가 일쑤였다. 어느날 이 맹세를 더 굳게 하기 위해 그녀는 자기
머리카락과 야곱의 머리카락을 자라 섞어가지고 불에 태워서 두 사람이 그
재를 먹고는 서로가 약속을 지킬 것을 엄숙히 맹세했다.
  쇼샤나의 부모들은 야곱을 정성껏 대해 주었다. 그녀의 외딸이기 때문에
그녀의 사람을 받게 되면 자연 그녀의 부모로부터도 사랑을 받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소년은 영리하고 품행이 방정하여 귀여움을 받았다.
게루트르드 에르리히 부인은 몸이 허약한 분으로, 야곱을 특별히
귀여워했다. 부인은 가끔 선물을 줄 때에도 경우에 맞는 것을 주어 소년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않았다. 영사는 야곱의 아버지를 도와 그의 학비를
댈 수 있게 해 주었다. 야곱의 아버지는 수입이 적어 아들을 재능에 맞게
교육시킬 수 없는 형편이었다. 영사의 도움으로 야곱은 김나지움에
입학하였고, 후에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다.
  김나지움 1학년 때 야곱은 쇼샤나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여름에는
나비의 날개로 장식한 꽃다발을 만들어 서로 상대방에게 주었다. 겨울에는
정원의 연못에서 얼음을 탔다. 야곱은 쇼샤나에게 공부를 가르쳐 주었고,
그녀는 야곱에게 발끝으로 걷기 등의 예능을 가르쳐 주었다. 2학년이 되자
그들은 좀 떨어져 있게 되었다. 이것은 오로지 야곱의 아버지가 채권자에
몰려 집을 팔고 다른 동네의 아파트를 빌려 이사를 했기 때문이다. 그해
내내 야곱은 공부를 열심히 했다. 한편 쇼샤나는 부잣집 딸들이 흔히
즐기는 음악이며 그림 그리기며 스포오츠 등에 열중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완전히 헤어진 것은 아니었다. 영사의 부인은 매월 첫 안식일과
쇼샤나의 생일에는 으례 야곱을 초대하여 점심을 같이 했다. 이 일은
에르리히 부인이 병석에 누울 때까지 계속 되었다. 그래서 그 집에서는
손님을 받지 않게 되고 쇼샤나는 다른 도시의 기숙사가 있는 여학교로 가게
되었다.
  그후부터 영사는 1년에 두 번씩 야곱을 자기 사무실로 불렀다. 비단을
드리운 그 사무실 벽에는 커다란 두 개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하나는
부인의 초상화고 다른 하나는 딸의 거시었다. 에르리히 부인은 긴 드레스를
입었는데 그 옷단이 초상화 밑 언저리까지 내려가 있었다. 드레스 색은
푸른 하늘색이었다. 옷단의 주름이 초상화 틀까지 드리워졌기 때문에
부인은 안개 속을 걷는 것 같았다. 그 부인의 머리에는 머릿수건처럼 생긴
작은 모자가 씌워졌으며 그 끈은 목덜미를 따라 흘러내려 있었다. 한편
쇼샤나의 드레스는 무릎까지 닿는 짧은 것이었다. 그녀의 다리는
지금이라도 땅을 울리며 걸어갈 것 같았다. 햇살이 그녀의 초상화를 비칠
때 보면 막 달음질치려는 듯이 보였다. 벽에 걸리 이 두 초상화 외에도
책상 위에 두 개가 더 있었다. 이것도 역시 부인과 딸의 것이었다. 그
앞에는 맑은 물이 담긴 글라스에 물기를 담뿍 먹은 백합이 꽂혀 있었다.
영사는 무척 깔끔한 분이었다. 그는 손님을 접대하기 전에 책상 위에 있는
종이며 장부며 그 자리에 필요치 않은 것은 전부 치워 버린다. 그래서
야곱은 그 사무실에 들어갈 때, 여기는 오로지 초상화를 망보기 위해
세워진 방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갖곤 했다. 야곱이 들어가 의자에 앉아
영사가 일어나 글라스에 물을 붓는 것을 볼 때 이런 인상은 더욱 굳어졌다..
소년은 마치 초상화를 볼 권리가 없는 듯이 시선을 주인의 눈위로 던지기가
거북했다. 그러나 그 초상화들은 그의 마음에 마치 산 생명체처럼 강한
인상을 남겼다. 때때로 그는 에르리히 부인이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쇼샤나가 이슬을 머금은 백합을 물고 마구 달리는 것을 보았다. 영사는
야곱을 친절하게 대우해 주었고, "아주 컸는데"하며 그를 어른처럼 여겨
주었다.
  겨울이면 가끔 영사는 야곱을 데리고 코오피 하우스로 갔다. 그집 테이블
위의 식기는 모두 금제이며, 의자의 쿠션이 좋았다. 웨이터는 여사가
들어오는 것을 보자마자 곧 그가 좋아하는 코오피를 가져왔다. 이 집에서는
영사가 무엇을 시킬지를 잘 알고 있었기 대문이다.
  "젊은 친구를 위해서는 무엇을 주문할까?"
  영사는 야곱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리고는 크리임을 친 코코아와
케이크를 시키기가 일쑤였다. 두 사람은 어두울 때까지 함께 앉아 있었다.
헤어질 때 영사는 야곱의 부모에게 안부를 전해 달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여름이면 영사는 야곱과 고무 바퀴를 단 경쾌한 이륜마차에 탔다. 도시
밖으로 한 시간쯤 흔들리면서 시외에 있는 카다리넨호프에 갔다. 둘려 잇는
생울타리의 파란 햇가지가 검은 색으로 변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들은
둥근 화단과 황제의 동상이 있는 큰 공원으로 들어 갔다. 그 근처 어디에
소와 양의 우리가 있을 텐데 보이지도 않고 냄새도 나지 않았다. 공원
뒤에는 소나무 냄새를 품겨 내리는 산봉 우리가 우뚝 솟아 있었다. 공원
전체는 축제일처럼 복작거렸다. 그들은 양탄자와 같은 새로 깎은 잔디에
앉아서 이곳의 명물인 코오피를 마셨다. 코오피 맛은 아주 훌륭했다. 코오피
위에는 크리임이 일부는 단단하고 나머지는 막 녹으려는 눈덩어리처럼 떠
있었다. 또한 코오피와 더불어 치이즈와 양귀비씨와 건포도로 만든 과자도
약간 있었다. 또는 냄새가 식욕을 돋구어 주고, 먹으면 힘을 돋구어 준다는
흑빵이 있었다. 이것을 물방울이 맺혀 있는 처녀와도 같이 윤이 흐르는
버터에 찍어 먹었다. 그런 후 영사는 시가아를 꺼내 불을 붙이고 야곱의
공부에 관해서 얘기했다. 시가아 하나를 다 피우면 다시 새 시가아에 불을
붙이며 일어선다. "자, 가보지"하고 말하는 그의 억양에는 즐거움을 위해서
충분한 시간을 보냈으니 이제 가서 일하자 하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야곱은 황급히 일어났다. 그는 주인이 영사에게 코우트를 입혀 주는 것을
보고 있다가 그 사람이 자기에게도 와서 코우트를 입혀 주려 했기 때문에
얼굴을 붉혔다. 야곱은 땅을 보면서 영사 부인의 건강을 물었다. 영사는
시가아를 입에서 떼고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우리 집 사람의 몸이 나아졌다고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나."
  그렇게 말할 수 없는 처지에 있는 그는 한편 야곱을 슬프게 해서
헤어지고 싶지가 않은 듯 덧붙였다.
  "그러나 쇼샤나는 잘 있네. 편지가 자주 오지."
  그러자 야곱은 단정하게 인사를 드리고 말했다.
  "따님에게 제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지."
하고 말하는 쇼샤나의 아버지의 대답은 그것을 지나치는 말로서 하는 것이
아니라 꼭 그렇게 하겠다는 어조였다.

      4
  시간이 흘러 야곱은 김나지움에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갔다. 그동안에
그의 아버지의 경제 사정도 나아졌고, 이제 그도 가정교사로 학비를 벌 수
있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영사의 원조를 받을 필요는 없었지만 자기에
대한 영사의 애정은 변하지 않아 일년에 꼭 두번씩 만났다. 헤어질 대
영사는 수첩을 꺼내어 다음에 만날 날짜와 시간을 적고, 
  "그러면...여섯 달 후에, 그러나 자네는 내 사무실에 미리 전화를 해야
하네."
하고 일렀다. 그러나 그는 이 말이 야곱과 만나는 것을 피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잠깐 침묵 하다가 달은
세고서 말했다.
  "자... 반 년 후에!"
  한번은 레흐니츠가 약속한 날에 사무실로 전화를 했더니 영사는 분주하여
시간을 낼 수 없다고 얘기했다. 대신 하루 이틀 후에 전화해 달라고
부탁했다. 다음날 야곱이 학생을 가르치고 있는데, 그 학생의 아버지가 전에
한 번 얘기한 바 있는 영사의 이름을 말해 보라 하고는 사망 기사를
가리키며 신문을 내밀었다.
  "내일은 영사 부인의 장례식에 참석해야겠구만."
  그날 밤 야곱 레흐니츠는 뜬눈으로 샜다. 지나간 날들이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영사의 부인이 집에서나 집 밖에서 그에게 베풀어 준 친절들이
회상되었다. 야곱의 어머니도 물론 세상의 다른 어머니처럼 그를
사라하였고, 그도 어머니의 사랑에 아들로서의 사랑으로 답했다. 그러나
에르리히 부인에 대한 그의 애정은 보다 다른 것이었다. 그 사랑은
자연적인 원인으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물론 이유를 굳이
붙인다면 몰라도. 여하간 이유나 원인을 따질 필요는 없고 단지 결과만이
남아 있었다. 야곱은 사실 에르리히 부인이 앓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이 괴로왔으며 슬펐다. 그러나 부인의 사망 소식을 들은 그날 밤처럼
비통해 해 본 적은 없었다. 이제 쇼샤나는 어머니를 잃었다. 쇼샤나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 쇼샤나가 어미 없는 아이가 되었다는 사실에
대하여는 불쌍하다는 생각을 느끼지 않았다. 마음의 새로운 움직임이라고나
할까, 없어진 사람과 있는 사람에게 동시에 마음이 끌렸다. 두 사람에게 한
사람처럼 끌렸다.
  날이 새기 전에 야곱 레흐니츠는 일어나 묘지로 갔다. 야곱은 밤새
생각에 시달린 탓으로, 장례식에 늦은 줄로 알았다. 급히 서두르면 매장하는
최후는 보게 될 것으로 여겼다. 묘지의 문들이 열려있고 무덤들 사이
어디선가 땅을 파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는 소리 나는 쪽을 향하여 나무와
묘비의 사이를 지나 달렸다. 두 사람이 허리가 찰 정도로 땅을 파고 있었다.
다른 한 사람이 걸음걸이로 무덤의 크기를 재고 있었다. 파던 사람들이
레흐니츠를 보자 눈을 치켜 뜨면서 물었다.
  "당신한테 맞는지 알아보고 싶소?"
  그들은 레흐니츠더러 무덤 속으로 들어와도 좋다고 삽으로 가리켰다.
레흐니츠는 그들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 듣지 못하여 움직이지 않았다.
걸음걸이로 무덤의 크기를 재고 있던 사람이 레흐니츠에게 무엇 때문에
왔느냐고 물었다. 레흐니츠는 놀란 표정으로 그 사람을 쳐다보았다. 도대체
그따위 질문이 어디 있느냐! 나중에 에르리히 부인의 유해가 아직 집에
안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좋은 소식을 들은 듯했다. 부인은
죽었으나 아직 땅 위에 있어 위안이 되었다.
  에르리히 저택 문 앞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말이 없었다. 여러 사람이
모이더라도 입을 다물고 있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야곱의 어머니가 아들의
뺨에 흐른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의 아버지는 마치 땅이 꺼지지 않는다는
듯이 발로 땅을 누르고 있었다.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상제들이 영구를
들어 내어 검은 영구 마차에 올려 놓았다. 영구 마차에는 네 마리의 까만
말이 매여 있었다. 영구 주변의 화환에서 꽃 향기가 풍겼다. 나직한
울음소리가 향기와 섞였다. 나이 먹은 하녀가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손수건으로 입을 막고 있었다. 영구 마차가 출발할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에 쇼샤나와 그녀의 아버지가 나왔다. 쇼샤나는 검은 상복에 검은
베일을 얼굴에 드리우고서 아버지와 팔짱을 끼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야곱은 저도 모르게 쇼샤나에게 보이기
위하여 한 발짝 앞으로 나가려 했으나 곧 뒤로 물러났다. 영구 마차를
따라가는 쇼샤나는 한 번도 어머니의 영구에서 눈을 들지 않았다. 그리고
상가에서 문상을 거절한다고 신문에 냈으므로 야곱은 대신 편지로 애도의
뜻을 나타냈다. 

      5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야곱 레흐니츠가 이스라엘 땅으로 올 수 있었던
것은 대학에서 탄 장학금과 영사의 원조에서였다. 그가 학업을 마치고 박사
학위를 받았을 때, 에르리히가 축하하는 의미로 만찬에 초대하고 당분간
직장을 구하지 않아도 될 만큼 얼마간의 돈을 선사했다. 그러나 그 선물은
재정적 원조라기보다 이제까지 영사가 그를 위해 해준 모든 일과 다름없이
애정과 존경의 표시로서 준 것이다. 야곱은 매우 감동했으므로 그것을
거절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레흐니츠는 두 돈을 합쳐서 이스라엘로 가는
여행단에 끼었다. 거기에서 교사직을 얻게 되어 야파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그는 은인을 잊지 않았다. 레흐니츠는 일년에 두 번, 유대교 신년과
기독교 신년에 영사에게 연하장을 보냈다. 그의 첫 논문이 잡지에 발표되자
영사에게 발췌 인쇄된 것을 한 부 보냈다. 그러나 그는 쇼샤나에게는
편지를 내지 않았다. 어릴 적에 그들을 결합시켰던 모든 관계는 그들이
장성한 지금에 와서는 지속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야곱 레흐니츠는 야파 학교에서 교편 생활을 하고 있어 많은
학생들을 가르치며 교직원 회의나 학부형 회에서 그의 소임을 이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벌써 일부 학교에서는 부형들은 학교일에
참여하게끔 하고 있는가 하면, 한편 교사들에게도 공공 사회의 일에 대하여
발언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다. 사실 야파에서는 공중 집회에서
자기 의무를 기피하려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는 가운데에서도
레흐니츠는 시간을 내어 해초를 특별히 연구했고, 가끔 이 방면에 관한
노문을 썼다. <모든 일에는 할 시간이 있고, 모든 욕망을 총족시킬 계절이
있다.> 제 1차 대전 전 이스라엘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왜냐 하면 그
당시는 오늘날보다 시간이 몇 배나 더 길었고 사람은 남은 시간으로 자기
세계를 개척하는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정말 오붓하게
지냈다. 그들은 자신에 대하여 지나치게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레흐니츠는 그 도시의, 그를 환영해 주는 지식인들의 집에 자주 놀러갔다.
그 집에 애교 있는 딸이 하나 있으면 이 이상 좋은 일은 없었다. 딸이
둘이나 있으면 즐거움도 더하였다. 사실 이런 가정에 속하지 않은
처녀들로서 마음을 사로잡는 처녀들도 있었으나, 그들은 부모의 슬하를
떠나 이 고장에 홀몸으로 온 처녀들로, 시인이나 작가를 따랐던 것이다.
한편 집에서 사는 딸들은 자기 직업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교사나
학자를 더 좋아했다.
  그래서 교사이며 학자인 야곱 레흐니츠는 주로 이런 타이프의 처녀들과
사귀게 되었다. 이 처녀들은 아름다운 용모와 단정한 태도, 애교 있는
예절을 갖추고 있어 이스라엘의 가장 진정한 딸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야곱은 그들에게 자기 일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들에게 다른 나라의 땅과 바다에 관해서, 그 민족이나 종족에 대해서,
그들의 풍속이며 습관, 시와 신화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곤 했다. 그래서
만약 야파의 어떤 처녀가 희랍이나 로마에 대해서, 또는 사포나 메이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면 그녀의 그것을 야곱 레흐니츠로부터 배운 것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레흐니츠가 야파에 가기전에는 이런 종류의 얘기를
들어 본 처녀는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곳에도 예시바를 다닐
적에는 그런 것을 배웠다고 하는 박사가 수두룩했지만, 그들의 마음이 전에
배운 것들을외면한 듯 고전에 관한 지식은 모두 그들의 머리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레흐니츠는 이 방면의 지식을 상사와 자연의 세계가 잘
어울리는 소년시절에 획득해 두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고 이성이
성장해도 상상과 자연은 서로 갈등을 일으키지 않았다. 또한 야곱
레흐니츠가 출생한 오스트리아에서는<타향>에 있다는 의식들이 별로 없이,
자신뿐만 아니라 남에게도 즐거움을 주는 더 행복한 생각들이 마음을 쏟고
있었다.
  많은 처녀들이 야곱에게 사람을 느꼈으며, 그도 그들에게 사랑을 느꼈다.
어떤 처녀들은 결혼을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고, 야곱 쪽에서도 아마 아내를
고를 생각을 했을 것이다. 물론 그가 아직 결혼 생활을 꿈꾸거나 자기에게
가장 알맞는 여자를 결정한 것은 아니다. 하여튼 그는 라헬.하일페린을 찾아
가거나, 리아.루리아와 산책을 하거나, 아스나트.마가르고트를 방문하거나,
또는 라야.자브로도브스키를 상대로 잡담을 하거나, 혹은
미라.보르브지트스키와 떠들어 대거나, 혹은 가끔 타마라.레비를 만나기도
했다. 이따금 그는 밤에 그들 여섯 사람 전부와 함께 해변을 산책했다.
밤이면 물결은 모래에 키스하며 하늘은 대지를 포옹하고 있었다.
레흐니츠와 여섯 처녀를 합치면 전부 일고, 그들은 밤에 함께 산책하기
때문에 그 도시의 사람들은 그들을 <일곱 유성>이라고 불렀다.
  그들의 이 서어클은 모든 서어클이 밟는 경로를 거쳐 형성되었다. 제일
처음 레흐니츠는 리아.루리아와 산책을 하는 것을 습관으로 하였다. 그녀는
베를린에 있는 친척을 방문할 계획이어서 야곱으로부터 독일어를 배우게
되었다. 그녀는 회화 실습만이 필요한 것이었으므로 해변가를 거닐면서
렛슨을 받았다. 그녀가 사정이 생겨 베를린을 방문할 계획이 취소되고도
그들은 계속 산책을 하였다. 그러자 리아의 친구인 라헬.하일페린이 끼게
되었다. 야곱의 학교 재단이사인 그녀의 아버지는 가끔 레흐니츠를 자기
집에 초대하여 올리브를 대접하였다. 그 다음에는 아스나트.마가르고트가
들어왔다. 다음에 라야.자브로도스키와 센트페테르스브르크에서 온 그의
사촌 오빠가 들어왔다. 그러나 사촌 오빠가 그녀에게 시를 써 보내기
시작하자, 그녀는 그와 절교하고 대신 미라.보르브지트스키를 데려왔다.
그리고 미라가 타마라.레비를 데리고 왔다. 타마라는 레흐니츠.가 처음 이
고장에 왔을 때 그녀의 옆집에 하숙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섯 사람 중
그와는 처음부터 알고 있는 처지였다. 이렇게 <일곱 유서>이 형성되었다.
일곱 유성인 그들은 그 명칭을 지키기 위해서 더 이상 다른 사람을
가입시키지 않았다.

      6
  하누카가 다가오는 하루 전에 아프리카에서 야곱 레흐니츠에게 편지가
왔다.
  그것은 고트홀트.에르리히 씨로부터 온 것이었다. 영사와 딸은 일년 동안
세계 일주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귀로에 이집트를 지나 귀국하게 되었으므로
그 길에 성지, 특히 예루살렘 성지를 방문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 소식을 듣고 레흐니츠는 기뻤다. 첫째는 다시 영사를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고, 둘째는 다만 얼마만이라도 막중한 은혜를 갚을 기회가 생겼기
대문이었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는 많은 것을 원하지 않았다. 단지 그가
갈망한 것은 은인에게 감사를 표시하고 싶은 것뿐이었다. 이제 영사가
방문하게 되었으니, 야곱도 주인이 되어 자기 손님을 대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온갖 계획을 세워 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그는 영사에게 자기가
사는 나라를-샤론 평야, 갈릴리 등 유태인이 갈아먹는 땅을 보여 줄 시간을
갖고자 학교에서 휴가를 얻어야겠다고 중얼거렸다. 그는 영사와의 재회의
기쁨으로 흥분하여, 이스라엘에 단지 닷새나 엿새 만 머물겠노라고 영사가
각별히 말한 것을 잊었다. 5,6일 동안에 무엇을 제대로 구경할 수 있단
말인가.
  편지를 받은 후 레흐니츠는 영사와 그 부인에 대한 추억을 회상했다.
그의 집이며, 같이 한 오찬 등이 자꾸 생각났다. 다시, 정원에서 자기가
쇼샤나와 거닐다가 꽃을 따서 함께 묶거나, 정원의 연못에서 얼음을 타는
광경이 나타났다. 그의 환상 속에서 모든 계절은 융합되어 계절들의
아름다움과 좋은 점이 하나가 되었다. 그후 여름과 겨울이 몇 번이나
지나갔을까? 지금 저택은 잠겨 있고, 테이블은 침묵이 지배하고 있고,
정원의 꽃과 과일나무는 가꿀 사람이 없다. 에르리히 부인이 돌아가시고
쇼샤나는 아버지와 함께 세계를 두루 여행하고 있다. 영사는 상을 치른 후
마음의 안정을 얻지 못하여 이곳에서 저곳으로 여행하며 방랑함으로써
자기에게 조금도 쉴 사이를 주지 않는 데에서 기분 전환을 해 보려고 했다.
레흐니츠는 장례식 날을 회상했다. 꽃에 덮인 검은 영구차가 약간
흔들리면서 얼굴에 검게 베일을 드리운 쇼샤나가 따라갔었다. 지금 야곱은
아무리 노력해도 쇼샤나를 성장한 여인으로는 머리에 그릴 수 없었다.
때때로 베일이 들리면 거기에 나타나는 것은 어린아이였다. 정원에서
발끝으로 뛰어 나비를 잡고 나비와 꽃으로 다발을 엮어 목에 거는 이런
아이. 그 이후 수많은 해가 지나가고 수많은 해가 지나가고 수많은 해가
왔지만, 야곱은 아직 그녀의 잊을 수 없는 변덕을 회상했다.

     7
  영사는 레흐니츠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는 온다고 한 그 시간에 왔다.
그날, 야곱이 교무실로 들어가자 키가 크고 매력적인 처녀를 데리고 온,
좋은 옷을 입은 나이먹은 분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야곱이
그의 은인에게 인사를 한 후-혹시 그 전인지 모르겠다-쇼샤나가 따뜻하고
잘 생긴 손을 자기에게 내밀면서, 친근한 말투로서 어릴적 친구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그를 예전의 소년인 양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
속에는 과거를 후회하면서 현재와 과거를 이것 저것 비교해 보려고 애쓰는
듯한 표정이 어려 있었다. 야곱은 당황했다. 그는 쇼샤나가 그렇게 허물없이
친근한 말로 대해 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가슴이 뛰고
당황하여 그녀의 시선을 바로 볼 수 없었다. 그도 역시 과거로 생각이
돌아갔으나, 현재 자기 앞에 선 쇼샤나와 그 옛날의 쇼샤나를 비교하지는
않았다.
  레흐니츠는 영사가 오는 날에 대비하여 수많은 계획을 세워 두었다.
영사에게 즐거움을 주거나 도움이 될 일은 모두 생각해 보았었다. 그리하여
영사에게 하루하루의 스케줄을 말하려 했다. 그러나 이제 막상 은인을
눈앞에 대하자, 계획은 곧 머리에서 사라져 버리고, 오히려 그가 지시를
기다리게 되었다. 영사는 포켓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보더니 점심
시간이라고 하면서 야곱에게 함께 식사할 시간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리하여 야곱은 그들을 따라 호텔로 갔다. 가끔 영사의 왼쪽으로 걷다가
가끔 쇼샤나의 뒤를 걷거나 하면서.
  이 호텔은 레흐니츠의 학교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독일인 지구에
자리잡고 있었다. 주위엔 넓고 아름다운 정원이 있었다. 관목이며, 꽃이며,
잘 자란 나무가 있고, 감귤 나무들이 독일인 지구에서 학교까지 뻗쳐
있었다. 레흐니츠는 혼자서, 또는 처녀 친구 한 사람과 가끔 그 정원에서
산책했었다.
  또다시 야곱은 영사의 식탁에 손님으로 불리워 갔다. 비록 여기가 옛날
영사의 집은 아니지만, 또한 게르트르드 에르리히 부인이 상좌에 앉아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는 몸가짐을 예전과 다름없이 하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예절을 지켜서, 말을 걸어오기 전에는 말하려 하지 않았다. 에르리히 씨가
어떻게 지내고 있느냐고 묻자 그는 머리를 들어 영사의 눈을 보면서
대답했다.
  "저는 지금 유대인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읍니다. 독일어와 라틴어를
좀 가르칩니다. 봉급은 많지 않지만 저는 부족하게 지내지는 않습니다. 방
값도 싸고 식비도 비싸지 않으며 옷에도 많은 돈을 쓸 필요가 없읍니다
여기서는 돈 많은 사람도 옷에 사치를 하지 않습니다. 이 나라는 아주 적은
것에 만족하고 있읍니다. 더구나 이곳에는, 자신은 학자가 아니지만 학자를
존경하는 지성인도 좀 있읍니다." 
이 대복에서 레흐니츠는 얼굴을 붉혔다. 자신을 학자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네 연구는 어떤가?"
하고 에리리히가 묻자 레흐니츠는 대답했다.
  "여기는 아무 것이나 할 시간이 있읍니다. 심지어 내 연구도 그렇지만
쓸모없는 일을 할 시간도 있읍니다."
  에르리히 씨는 야곱이 자기의 연구를 관철하려는 정신과, 세상의 반응에
대한 약간의 지식을 보여 준 그의 대답을 흐뭇하게 느끼는 듯 했다. 여하간
레흐니츠의 연구가 유용한 것일 것이므로 누군가는 그런 것에 관심을
가져야 했다. 쇼샤나는 두 사람의 대화에는 관심도 두지 않고 자신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녀가 얘기에 귀를 귀울였건 그렇지 않았건, 그녀의 눈을
보건대 레흐니츠의 연구의 가치를 의심하지는 않았다.
  에르리히는 포도주 한 잔을 레흐니츠에게 따르고 자기도 한 잔 들면서
이야기했다.
  "우리는 여행 중에 우연히 나이 먹은 고명한 교수 한 분을 만난 일이
있어. 아주 지식이 심오하더군. 한 번은 내가 바다에서 이상하게 생긴
식물을 집어 구분한테 보였더니, [이것은 야파에서 연구하고 있는 젊은
오스트리아 사람이 발견하기 전까지는 모르고 있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
사람의 이름을 따서 <코로라파 레츠니치아>라고 합니다.]라고 말하더군.
자네는 오스트리아 사람이고, 야파에서 살고, 레흐니츠는 자네 성이니, 그게
바로 자네겠지? 자네 이름이 먼 외국에서까지 이야기될 정도로 이름이
났으니 나는 참 기쁘네. 잔을 들게. 자네 건강과 연구의 성공을 위하여
건배하세!"
  야곱이 머리를 수그리고 잔을 더듬어 쇼샤나가 집어 그의 손에 쥐어
주었다. 쇼샤나는 다시 자기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녀는 가끔 음식을
그에게 보내 주는 외에는 그에게 관심을 표시하지 않았다. 야곱은 혼자
생각했다. 그녀의 처음에 자기에게 너무 반갑게 행동한 것을 후회하고
있으리라. 웨이터가 와서 각자 앞으로 작은컵에 따른 블랙코오피를 가져다
주었다. 향기가 풍겼다. 그 향기는 그에게 다른 사람의 시선을 받지 않고
코오피를 마시면서 혼자서 책을 읽었던 자기 방을 생각하게 했다. 그는
코오피를 내려다 보았다. 표면에 옅은 자주색 거품 하나가 일고 있었다. 그
거품은 불꽃처럼 껌벅이는 작은 눈들로 차 있었다.
  "설탕은 치지 않고 마시는가?"
하고 영사가 물었다.
  "네, 네."
하고 야곱은 대답했으나 아직 설탕을 칠 것을 잊고 있었다.
  쇼샤나가 은제 집게를 들어 각설탕 하나를 그의 컵에 넣어 주었다. 
  "하나 더?" 
하고 물으면서 그녀는 덩어리 하나를 또 집었다.
  "고마와."
하고 그는 말했다. 가득 든 컵에 설탕을 넣으면 코오피가 흘러 넘을텐데,
쇼샤나가 그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려서 그러지 말아야 할텐데, 하고 그는
생각했으나, 다시 생각하니 괜찮을 것 같기도 했다. 처음 설탕 한 개로
코오피가 흐를 염려가 없기 대문이었다. 코오피는 설탕을 넣을 것을
계산해서 따르는 것이다.
  영사가 시가아 케이스를 꺼내서 하나를 야곱에게 권하고 하나를 자기가
집었다. 그는 레흐니츠의 팔을 잡고 왔다갔다 거닐었다. 그들은 시가아가
반이나 탈 때까지 연기를 내면서 재를 털지 않았다. 영사는 라운지의
가운데에서 정지하더니 재를 떨며 말했다.
  "자, 여기 왔군, 다시 함께 앉지."
하고 말하고는 소파 있는 쪽으로 걸어가 자기는 쇼샤나와 마주 않고,
야곱은 자기 오른편에 앉혔다.
  그는 딸을 넘겨다 보더니 다시 야곱을 향하여 말하였다.
  "자네, 오후에는 바쁠 줄 아네. 그러니 저녁에 와서 함께 식사하게,
쇼샤나 그게 좋겠지?"
  쇼샤나는 머리를 끄덕여 동의 나타냈다. 그녀는 자기 동작에 마음을 쓰고
있는 것은 분명히 아니겠고, 그 동작을 자신은 모르겠지만 보기에
아름다왔다.
  사실 레흐니츠는 그날 오후 한가했다. 그러나 영사가 그를 바쁠 것이라고
선언한 이상 이의를 말할 수 없었다. 그는 어떤 학술책에서 읽은 것을
회상했다. 우리를 독촉하는 영혼은 움직임이 다른 외부 요소의 도움 없이는
우리를 행동하게 할 수 없다. 그리고 이들 외부 요소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영혼의 움직임은 하사요, 단지 내적 혼돈을 초래할 뿐이다.
레흐니츠는 기실 저녁에 다시 이리로 온다는 사실로 자신을 위로할 수
있었으나, 그는 그 사실로써 위로를 찾지 못했다. 저녁 때까지는 황량한
시간이 끝없이 뻗쳐 있기 때문이다. 
  호텔을 나선 그에게선 기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는 도중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들이 여기 있는 동안, 나는 최선을 다하자. 만사가 잘되길 바랄
뿐이다. 그러나 그들이 가면 나는 다시 혼자 몸이 된다. 왜 내가 필요치
않은 걱정을 사서 할까? 그만큼 소용없는 짓이지. 나는 있는 힘을 다하여
노력할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쇼샤나, 만약 나한테 실망했어도, 만약
네가 전에 나에게 베푼 사랑을 내가 아직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도
나를 욕하지 마라. 우리는 이제 소꿉 장난을 하는 어린애가 아니다. 나이를
먹고 성장한 어른이다. 우리가 서로 사이좋게 대하지 못하다니 얼마나
슬픈일인가!"

      8
  그날 오후, 레흐니츠는 정말 한가했다. 한가한 날이면, 시간이 남아도는
오후, 레흐니츠는 자기 방에 돌아가서 혼자 코오피를 끓여 먹고 책을 읽곤
했다. 실컷 읽은 후 일어나서 채집한 표본들을 분류하거나 새로운 표본들을
찾아 바닷가를 거닐었다. 그러나 오늘은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그는
이미 코오피를 밖에서 마셨기 때문에 코오피를 끓이는 데서 오는 만족감은
반으로 줄어들었다. 그는 주전자를 불에 얹어 놓고, 불길이 연소기 구멍에서
올라와 주전자를 감싸는 것을 지켜보곤 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물이
부글부글 끓어 솟았다가 가라앉았다가 하면, 코오피 알맹이를 물에다
흔들어 붓고, 방안에 가득해지는 향기를 맡았다. 이것 말고는 바닷가를
거니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바닷가의 산책도 그다지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그는 호텔에서 너무 많이 먹었고, 또 포도주를 마셨기 때문에 몸이
노곤했다. 영사가 있는 자리에서 그가 한 말이 몇 가지 그의 마음 속에
되살아났다. 별로 실언을 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말할 수 없는 노곤함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의 상상은 이리저리 방황했고, 생각을 한가지 문제에다
집중할 기력이 없었다.
  레흐니츠가 혼자 있는 것을 리아.루리아가 가까이 와서 보았다. 
  "선생님, 세상이 다 선생님의 것이라는 듯이 야파의 장거리에 서
계시는군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레흐니츠는 웃옷의 단추를 채우고 대꾸하였다.
  "내 기분은 세상에 내가 있을 장소가 없는 것 같은데."
  리아는 곱다란 두 눈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선생님, 무슨 일이 있었던 게 아닌가요?"
  그녀의 목소리는 염려와, 좋은 충고나 제안을 생각해 내려는 의지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의 얼굴도 그를 충고하고 고민으로부터 구해 주고 싶은
갈망을 말해 주었다. 
  레흐니츠는 머리를 저었다.
  "아무 것도 아니야. 단지 사람이란 대낮에 한가해지면 뭘 해야 좋을지
모르게 되는 거야."
  리아가 말하였다.
  "산보해서 좀 나아진다면 산보라도 잠깐 할까요? 라헬.하일페린을 찾아
가기로 약속했으니 그애네 집으로 가요. 그애도 같이 가겠다고 할 거예요."
  그녀는 팔목 시계를 보며 말했다.
  "그애가 지금 저를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어떻게 하시겠어요?"
  레흐니츠는 단조로운 이디시 말투로 대답하였다.
  "가구 말구."
  그녀는 웃었다.
  "그럼 가요."
  "가자."
  마음을 가볍게 해 준다면야 한 처녀와 같이 거닐건 두 처녀와 같이
거닐건 문제될 것은 없었다.
  리아.루리아는 일년 전에 베를린으로 갈 생각을 포기했을 때부터 독일어
회화 공부를 집어치웠지만, 야곱과의 산책은 계속하였다. 누구든지 그들이
함께 거니는 것을 보면, 꼭 알맞는 한 쌍이라고 할만하였다. 그리고 야곱과
리아는 각자 자기 나름으로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다만 야곱은
라헬.하일페린과 자기 자신에 관해서나 자신과 다른 처녀에 관해서나,
우리가 곧 알게 되는 바와 같이, 비슷하게 생각하였다. 그리고 아마 그 두
처녀들과 각각 제나름으로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리아는 이제 어리지 않았다. 그녀는 벌써 스물 셋이나 넷은 되었다.
그녀는 풍만한 체격이었다. 얼굴은 길지도 않고 둥글었으며 이마에는 주름
하나 없었다. 그녀의 머리칼은 회색 섞인 금발이었으며, 몸은 통통하였다.
그녀의 몸에는 위엄이 있어 만나는 사람마다 감명을 주었다. 그녀는 자기가
왜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지 영문을 몰라서 놀라와 하는 것이 태도에
나타났다. 한편 그녀의 곁의 사람들을 싫증나게 할까 봐 말을 적게 하였다.
그러나 바로 이 과묵이 그녀의 매력을 더해 주었다. 그녀가 입만 열면
얼마나 슬기로운 말을 들려줄까 하는 인상을 풍기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얼굴빛은 짙은 편이었다. 밝은 청록색 옷을 입고 목에는 가벼운
목걸이를 둘렀으며, 바닥이 두꺼운 시골 신발이 그녀의 키를 더 크게
하였고 걸음걸이를 크게 하였다. 그녀의 팔은 둥글고 따뜻했으며, 눈들은
누가 무엇을 하는 것을 보건 즐거워 보였다. 이 눈들은 무슨 일을 보건
처음에는 놀란 빛을 띠다가도 나중에는 다 맞아들이는 것이었다. 그것은
라헬이 더 어여쁜 처녀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성경에서 은유를 빌리자면, 한
그루의 종려나무처럼 날씬하다. 한 온스의 군살도 없는 처녀였다. 이 처녀의
눈은 늘 차가운 무관심 상태를 보이고 있었으나 때로는 환히 빛나고, 웃음
짓는 그 입술을 보면 상대방이 찾기 전에 기꺼이 마음을 주고 싶어지는
그러한 처녀였다. 그러면 라헬은 왜 배우자를 얻지 못하였나? 아마도
그것은 상대방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요구 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것을 주고 싶어지도록 이끄는 리아 때문이었으리라. 이러한 현상의 이유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은 그것에 끌려가는 것 같다.

      9
  라헬과 리아는 좋은 가문의 처녀들이었다. 그들의 아버지들은
<개척인>의 역사 속에 높은 자리를 차지했다. 그 아버지들 중의 하나는
위대한 아하드.아함과 편지 거래를 한 사이로, 그에게서 <나의 존경하는
친구>라고 불린 사람이었다. 리아의 아버지는 그의 의견이 오데싸 시의원회
및 릴리엔블룸과 우씨쉬킨으로부터도 존중을 받을만큼 무게가 있었다.
  두 사람의 생애에는 많은 고난이 있었다. 리아의 아버지인
예히엘.루리아는 예시바의 학생으로 시작하여 전통적 방식으로 토라에
투신하였다. 때로는 학문 자체를 위해서, 때로는 랍비로서의 생활이
제공하는 신분 보장을 위해서, 때로는 랍비로서의 생활이 제공하는 신분
보장을 위해서, 때로는 그것이 가져오는 위신을 위해서, 도 때로는 토라
없이는 아무런 생활 방도도 상상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변혁의
바람이 예시바의 벽을 뚫고 불어왔고, 그중에는 광복의 새 희망을 가져다
주는 정화의 바람도 있었다. 예시바의 학생들 사이에서도 하나님의 예언과
시온으로의 복구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이스라엘의 성지에서 이스라엘의
후예들을 구제할 움이 돋아난다는 등의 이야기들이 오가기 시작하였다.
그중에는 자만으로 실행을 동반하지 않는 학생들도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자기네들이 마음으로 추구하던 바를 일생 동안에 성취한 자들도 있었다.
예히엘이, 이스라엘 땅에서 유대인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살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 그는 그곳에 가서 일을 통해 토라를 실천하리라 결심하였다.
그는 이주에 끼어 한 손에는 탈무드를 들고, 또 한 손으로는 씨를 뿌리며,
또는 쟁기 위에 예루살렘 탈무드를 들고, 또 한 손으로는 씨를 뿌리며, 도는
쟁기 위에 예루살렘 탈무드를 얹고 그 쟁기의 뒤를 따라가며 토지를
경작함과 동시에 이스라엘 대지의 토라를 수행하는 농부가 외었다. 러시아
황제의 군대에 징집당할 때가 오자 그는 나라를 등지고 이스라엘로 달아나,
예루살렘에 있는 예시바들 중의 하나에 입학했다.
  그는 이렇게 토라에 따를 수 있었으나, 애써 일을 하여도 토라를 완전히
달성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예시바들은 정신적으로는 개척자와
멀었고, 예루살렘 사람들은 토지에서 일하는 것을 이단시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만 해외에 있을 때에 이스라엘 대지에서의 생활에 크나큰 희망을
걸었었는데, 성지에 와서 보니 그의 희망이 반이나 사라지게 된 셈이었다.
그러나 그는 해외에서 하던 것과 똑같이 그의 공부를 계속하였다. 이제
결혼하여 한 딸의 아버지가 되자, 그는 앞날의 생계를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아내의 지참금 나머지의 전부를 가지고 장사에 손을 댔다.
그 결과 그는 아내의 돈을 몽땅잃었고, 남은 것이라고는 토라밖에 아무
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 토라조차도 헛점투성이었다. 언젠가 그는 우연히도,
정착지를 한 바퀴돌며 헌납 상태를 감독하는 사람과 함께 길을 가게
되었다. 거기서 그는 유대인들이 들과 포도원에서 일하고 있는 것들 자기
눈으로 보았다. 당시 예루살렘 주민들 중 정착 농민들의 평판이 좋은 것은
못되었지만, 예히엘은 이런 것을 모두 무시하고 예루살렘을 나와 자진해서
어떤 농부의 일꾼으로 고용되었다. 그는 자기 스스로를 노동자로
만들었으며, 노동자가 겪는 고통을 겪었다. 그는 마침내 성지의 흙을 갈게
된 것을 기뻐하였다. 그러나 그 후 오래지 않아 정착지의 농민들은 토지를
로스차일드 남작의 관리인에게 양도하게 되어, 노동에서 오는 기쁨도
사라졌다. 예히엘은 다른 농촌으로 옮기고 또 다른 곳으로 전전하다가 상부
갈릴리에 와서 교사가 되었다. 그는 교사직에 온갖 정력을 기울였으나
거기에서 만족을 어지는 못하였다. 그의 생도들이 그가 가르치려고 애쓰는
데에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학교를 그만두고 야파로 내려왔다. 그곳에서 베를린에 사는
처가쪽 친척들의 도움으로 삽, 전기용 가위 등 농사 기구를 파는 가게를
시작하였다. 촌 마을에서 오는 사람이면 아무래도 그가 좋은 친구이고 좋은
의논 상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라헬의 아버지인 보리스.하일페린이 걸어온 길은 이와는 좀 달랐다. 어릴
때부터 그는 현대식 교육을 받았고, 학업을 마치자 벽돌공장의 경험자가
되었다. 그의 집은 시온주의자들의 집회소로, 나중에는 <정치적
시온주의자들>의 집회소가 되었다.
  우간다 논쟁이 일어났을 대에 하일페린은 갑자기 벽돌 공장의 일을
그만두고 <시온의 시온주의>단체를 떠났다. 그는 가족을 데리고
이스라엘로 이주하여, 전에 절친하게 서신 왕래를 한 바 있는 빌루운동
회원들이 있는 개척민 정착지에 들어갔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서 그들
사이에 분쟁이 생겼다. 마음과 정신으로 뭉쳤다고 생각한 이동지들과 함께
화목하게 살지 못한다면 나머지 동료들과는 얼마나 더 못 살 것인가 하는
결론을 얻게 된 그는 그들과 헤어지고, 다른 곳으로 가 아랍인에게서 땅을
빌어 그와 온 가족이 보통 농부처럼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그의 아이들이
자라 학교에 들어갈 때가 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마을이나 마을
근처에는 학교다운 학교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농장을 떠나 야파로 와서
석회, 양회 등 건축 자재를 취급하는 가게를 열었다. 그의 장사는 루리아의
경우와 같은 이유로 순조롭지 못하였다. 둘이 다 장사에 익숙치 못했고,
시기도 경기가 없는 때였다. 또 그들은 자기들의 장사 보다는 이 땅의
정착지 문제에 더 관심을 쏟았다. 어쨌든 그들은 주어진 분수에 만족하였다.
이스라엘 땅에 사는 특권을 누리는 것을, 한 사람은 신에게, 또 한 사람은
운명에게 감사하였다. 루리아는 하일페린의 결심이 굳은 것을 존경했고,
하일페린은 루리아의 성실성을 높이 샀다. 젊은 세대들도 그들은
존경했는데, 이러한 미덕들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이 그저 존경 받는
사람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의 집은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되었고,
교사나 작가들은 그집 사람처럼 출입하였다. 오후 네시부터 밤 열 시까지
사모바에는 불이 꺼지지 않았고, 차가 손님을 기다렸다. 두 사람은 다
레흐니츠 박사를 좋아하였다. 라헬의 아버지는 레흐니츠 박사가 오스트리아
제국 출신이라 러시아 말을 못하는 것을 벼로 개의치 않았다. 리아의
아버지는 그것을 오히려 좋아하였다. 사실은 레흐니츠가 갈리시아에서 왔다
하더라도, 자기가 갈리시아 여자와 결혼했기 대문에 그런 것을 꺼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개화된 사람에 어울리게 레흐니츠에게는 의사를
밝히라고 서두르지 않았다. 딸을 가진 아버지로서 결정적 순간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10
  라헬은, 레흐니츠가 가르치는 학교에 다니는 남동생으로부터, 귀중한
손님들이 그의 선생을 찾아 왔다는 말을 이미 들었다. 노신사는 외국에서
온 같은 나이의 사람들처럼 허리가 굽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딸은 키가
날씬하였고 어여쁜 모습이었다. 그 처녀가 입은 옷은 이곳에서는 아무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옷이라는 것이었다.
  라헬은 레흐니츠를 만났을 때 말했다.
  "손님들이 오셨다는 말이 있더군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분들이예요?"
하고 그녀가 물었다.
  "고향에서 온 사람들이야."
  "그 처녀는 누구죠?"
  "노신사의 딸이야."
  "예뻐요?"
  "그거야 보는 사람의 눈나름이지."
  "내 동생이 그 처녀 이야기를 하더군요."
  레흐니츠는 얼굴을 들었다.
  "동생은 뭐라고 그래?"
  "왜 말씀 좀 안 해 주세요? 통 말을 안 하시네요."
  "말할 게 별로 없어.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집은 에르리히 씨의 집 옆에
있었고, 이웃끼리 흔히 그렇듯이 나는 구분의 집에 드나들었어. 에르리히
부인이 돌아가고, 그보다 전에 부모가 다른 동네로 이사한 후부터는, 거리가
멀고 전처럼 친숙하지 못해져서 나는 찾아가는 것을 중지했어. 그런데 지금
영사와 그의 딸이 세계일주 여행중에 아프리카에서 귀국하는 길에 여기
들려 4,5일쯤 지내는 거야."
  "그러면 그 처녀는?"
하고 라헬이 물었다.
  "영사의 딸 말이예요."
  "그녀는 자기 아버지와 같이 다니지. 집에 가는 길에 성지를 구경하러 온
거야."
  라헬은 좀 이상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고, 그녀의 눈은 평상시의
무관심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레흐니츠는 얼굴을 붉혔다. 그는 영사가
베풀어 준 많은 은혜를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도 그것이 신통치 않은 듯이
감사하다는 태도를 거의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리아를 건네어 보았다.
  "라헬, 레흐니츠 박사님을 좀 성가시게 해 드리지 마라."
  리아가 말하였다.
  "아무것도 할 얘기가 없으시다는 걸 몰라?"
  "혀에는 아무것도 없을지 몰라도."
  라헬이 말하였다.
  "마음에는 무엇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것 좀 얘기해 줘요, 박사님."
  "그 여자는 애 은인의 달이야."
  그의 음성이 라헬을 놀라게 하였다. 라헬은 몇 마디 말을 시작하다 말고
생각에 잠기다가, 다시 말하였다.
  "그 여자와는 언제부터 알고 재냈지요? 한 이웃에 살았다죠?"
  레흐니츠가 대답했다.
  "우리는 한 이웃에 살았지만, 내가 김나지움에 들어가고부터는 그녀를
보지 못했어."
  "재미있군요, 참 재미있군요."
하고 라헬이 말하였다.
  "뭣이 그리 재미있어?"
리아가 물었다.
  "재미있지 뭐, 안 그래요, 박사님?"
  리아가 말했다.
  "우리 산보나 가는 게 좋겠네. 이렇게 집안에서 시간을 허비하는건
아까와요. 라헬, 준비됐어?"
  "그래, 준비됐어."
  "그렇다 그거죠?"
  "그럼 가자."
  "어디로 갈까요?"
  "오, 아무데로나 발 닿는 데로 가지. 박사님 의견은 어떠세요? 미크베로
갈까요? 아니면 사로나로 갈까요?"
  레흐니츠가 말하였다.
  "나는 저녁식사에 초대받아서 멀리는 갈 수는 없어."
  라헬은 웃었다.
  "그 처녀 곁을 떠나신 지 한 시간밖에 안 됐는데, 벌써 도로 가고
싶으시군요."
  레흐니츠는 시계를 쳐다보고 말했다.
  "어떻든 잠깐은 산보할 수 잇지."
  "박사님이 그 장소에 가야 할 시간까지 돌아갈 것은 제가 책임지죠."
하고 리아가 말했다.
  야파 사람들이 특별한 행선지가 없을 대 그렇듯이 그들은 돌아서 해안을
따라갔다.

      11
  너무 딱딱하지도 않고 너무 푸석푸석하지도 않은 사장은 좋은 냄새를
풍겼다. 그리고 사장 위 땅에서 그리 멀리 않은 곳에 하늘은 신선한
구름들로 가득 차 있었다. 반쯤은 은빛이 도는 납색이었고 반쯤은 붉은
황금빛이었다. 이 구름들 위로는 보다 작은 구름들이 동물, 새들의 형상을
짓기도 하고 동틀녘의 형상을 이루기도 하였다. 유비의 안개가 그 위로
베일처럼 덮여 있었다. 안개는 찢겨서는 열리고, 정처 없이 흘러 나아갔다.
파도 소리가 점점 더 요란해져 갔다. 바다는 만조가 되어 그 심연에 평안을
결한 어떤 존재처럼 해변의 가장자리 위로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새로운
조개껍질을 내던지고 있었다.
  라헬은 속이 텅 빈 조개껍질을 주워 자기 귀에 갔다 댔다. 리아는
무엇인가를 말하려 하다 마음을 고쳐 먹고 잠잠히 있었다. 그녀는 허리를
구부려 자기도 조개껍질을 주워서는 그 속에 속살인 후 바다로 던져
벼렸다. 레흐니츠는 파도가 내버리고 간 해초를 주워 살피면서 말했다.
  "저녁 시간을 물어 둘 걸 잊었구나. 큰일났는데."
  라헬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렇게도 배가 고프세요?"
  "아니야, 그렇지만 그저..."
  그녀는 웃었다.
  "그럼 물어 봅시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야지, 가는 게 낫겠어."
  리아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참 아름답다! 그냥 구고 가다니 섭섭하군!"
  라헬이 웃으면서 말했다.
  "바다는 오늘 내일 사이에 달아나진 않아."
  "그럴 테지."
  여전히 바다 쪽으로 눈을 향하며 리아가 말했다.
  "내 말을 믿지 못하겠어?"
  리아는 웃었다.
  "그러면 가 보자."
  그들은 되돌아 호텔까지 걸어왔다. 그때 쇼샤나가 호텔 뜰에서 산책을
하고 있었다. 라헬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그녀 앞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마침내 그녀는 한 손으로 이마를 누르면서, 
  "저 처년 정말 예뻐! 누구지?"
하며 감탄을 했다.
  레흐니츠는 그녀를 잠잠하게 해 놓고선 속삭이듯,
  "바로 그 여자야, 영사의 딸이야."
하고 말했다.
  "아, 그렇군요."
하고 대답하는 라헬의 목소리는 달라져 있었다.
  "거만한 여자인 게 분명하군."
  "네가 어떻게 그걸 알아?"
하고 리아가 말했다.
  "그 여자가 거만하다는 걸 어떻게 나느냐고? 레흐니츠 박사에게 답례할
대 그 머리 움직임을 너는 못 봤어?"
  그러나 레흐니츠는 그것을 알아보았다. 영사가 그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을 때도 그녀는 이와 비슷하게 머리를 숙었던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의식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들의 의식에서
우러나오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감정을 지배하는 정신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도 아니다.
  리아는 힐끔 야곱의 두 손을 보았다.
  "빈 손으로 모임에 가시게 됐군요. 손님들에게 줄 꽃을 어디서 구해다
드릴까?"
  야곱은 조금 당황했다. 정말 꽃을 가져가는 일은 생각 했었어야 할
것이었는데도, 아무런 준비도 해 두지를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리아에게
기대를 거는 눈길을 보냈다. 그녀는 호텔 입구 바로 앞에 있는 꽃밭을
응시하며 그를 동정하고 있었다.
  그때 라헬이 안을 냈다.
  "미라가 바로 이웃에 살고 있어. 미라가 없다면 라야 집에 가서 알아보자.
페테르스부르크의 사통이 주는 꽃 속에 라야는 파묻혀 있지 않을까?
레흐니츠 박사님, 걱정 마세요, 선생님을 빈 손으로 가게할 우린
아니니까요."
  레흐니츠는 애걸하는 표정이 되어 그녀에게 눈길을 돌렸다가 감사의
표시로 모자를 벗고는 "고마와"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라헬은 말을 이었다.
  "정원의 저 여자만 아니라면 안에 들어가 짐군으로부터 꽃을 가져올 수도
있겠지만, 검둥이의 손에 쥐인 수선화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
레흐니츠 박사님, 왜 말씀을 않으세요? 이야기를 해주세요. 대신의 등에
업혀 의사당에 갔다고 하는 아프리카 여왕 이야기 같은 거 말예요."
  리아는 그녀를 껴안고 부르짖었다.
  "라헬, 참 착한 애야."
  "그렇고 말고. 라야의 사촌이 그애에게 준 꽃을 가져와서 레흐니츠
박사님을 통해 저 여자에게 보낸다니 말이지. 원래가 미라의 꽃이라면 더욱
좋겠는데. 처음에 그애가 라야의 사촌에게 준 거라면 말이지! 레흐니츠
박사님, 용서하세요. 별로 악의는 없어요. 악수를 하고 화해를 해요...리아,
넌 지금 춥지 않니?"
라헬은 친구의 어깨에 한 팔을 걸치곤 목에 입을 맞추었다.
  "리아, 너의 목에선 짠 내가 나."
  답례로 리아는 라헬을 껴안고 오랜 키스를 하며 말했다.
  "나는 무엇이 좋고, 무엇이 그른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는걸."
  리아는 친구가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며 눈길을 땅으로 돌렸다.

      12
  레흐니츠는 저녁 식사를 하기 반 시간쯤 전에 도착했다. 쇼샤나는 현관
옆에 서서 호텔 사무원이 그녀 앞에 펼쳐 놓은 그림 엽서를 보고 있었다.
야곱을 보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여 아는 체를 하고 다시 엽서 쪽으로 눈을
돌려 몇 장인가를 다시 보려고 내려놓고 있었다. 영사는 아래층 열람실에서
신문을 펴보고 있었다. 레흐니츠를 보자 그는 시가아를 입술에서 떼고 식탁
위에 신문을 내려놓은 다음 손을 내밀었다.
  "모처럼 신문 보시는 걸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하고 레흐니츠가 말했다.
  영사는 안경을 벗었다.
  "새 소식이라곤 별로 없군. 세상 움직임은 여전하고, 신문들도
구태의연해. 신문이란 자기들 생각대로 우리들을 세상사에 참여시킨단
말이야. 이 신문이란 자기들 생각대로 우리들을 세상사에 참여시킨단
말이야. 이 신문이란 건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들을 한데 같이 묶어
의견들을 꼭 같도록 만들어 주니까. 하긴 그들간에도 의견이 다를 수
있겠지만, 바로 그 다르다는 것도 그들의 견지는 근본적으로 마찬가지라는
것과, 오직 다른 것은 세부적인 점이란 걸 증명해 줄 뿐이거든. 앞으로는
아마 아프리카의 야만인을 제외하곤 모든 인간들이 다 같은 의견을 같게
될거야. 아프리카의 미개인들만이 하나님이 그의 창조물에 심어 놓은
개성을 지켜갈 수 있을 거야. 이런! 내가 철학을 논하고 있군 그래! 어쨌든
너무 철학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내 말에도 일말의 진리는 있어. 그러나
자넨 틀림없이 여기에서도 재미있는 인간들을 찾아냈을 테지!"
  여기까지 말하고 난 영사는 웨이터를 불러 저녁식사엔 특별석을
마련하라고 이르고, 그게 안 되면 손님들이 다 식사를 끝낼 때까지
기다리겠노라고 덧붙였다. 그는 다시 레흐니츠를 향하여 말했다.
  "자네가 시장하지 않다면 말일세. 아깐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더라?
신문이었나? 아니 사람들에 관해서였어. 자넨 이곳에서 재미있는 사람들을
찾아 내었나?"
  "재미없는 사람들이 어디 있읍니까? 저에게는 사람마다 다 제 매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인간을 모르고, 아는 사람도 많지 않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르겠읍니다만, 하긴 또 야파에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러시아
사람들이라 그런지도 모르지요. 러시아 사람들은 거의 다 가볍습니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가볍기 때문에 그들은 어느 한가지 흥미에
완전히 빠져 버리는 일이 없읍니다. 토론은 유일한 예외이지만. 그 점에서는
그들 모두 마찬가지지요."
  영사는 담뱃재를 재떨이에 털었다.
  "자네가 이 러시아 사람들 사이에서 한 해만 더 살면 그들도 누구나
마찬가지라는 걸 알고 될 거야. 무엇에 관해 논쟁을 하나? 논쟁할 만한 게
무엇이 있는가?"
  "그저 누가 말만 끄집어 내기만 하면 곧 논쟁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쌍방이 같은 입장이라도 커다란 논쟁 없이 그냥 넘기는 일은 없읍니다."
  "매우 재미있는데."
하고 영사가 말했다.
  레흐니츠는 영사가 다 타지도 않은 재를 떨어뜨린 채 열중하고 있는 것을
보며 말을 이었다.
  "사실 그 자체는 그다지 흥미가 없지만 토론 과정만은 재미가 있지요.
일의 전후 사정이야 어떻든간에 자꾸 반복되니까요. 그리고 그린베르크가
무슨 말을 하면 베르크그린의 반박을 받으리라는 건 처음부터 알 수
있으니까요."
  에르리히는 미소를 띠었다.
  "여보게, 그 이름은 자네가 지은 거지?"
  "그렇습니다."
하고 레흐니츠가 말했다.
  "그린베르크나 베르크그린으로 불리는 사람이란 이곳에는 없읍니다만
거꾸로만 부르면 서로의 이름이 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읍니다."
  "그럼 세다파르딤계 사람들은 어떤가?"
하고 영사가 물었다.
  "저는 그들을 잘 모르고 있읍니다. 그들은 자기네들 집에만 머물고,
아슈케나짐계 사람들과는 어울리지 않아요. 사회적인 감각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다 자신들을 왕좌에서 내쫓긴 사람들로 생각하고서 우리
아슈케나짐들이 뻔뻔스럽게 지배하고 있는 거라고 여기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예멘계 사람들은 나도 좀 알고 있읍니다. 민첩하고 일종의 겨자처럼
재치 있는 종족들인데, 매우 근면하고 성서 읽기와 기도에 열심들이지요.
우리 학교에도 예멘 사람 문지기가 있읍니다. 왕자와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고, 눈에 띄는 것 하나하나가 심오한 사색의 자료를 제공하는 것
같더군요. 한 번은 나에게 이렇게 물었읍니다. [다윗 왕이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고요? 바닷물이 육지에 올라오지 않도록
경계를 정했다는 거죠: 그런데 바닷물이 육지에 올라온다는 것은 무슨
의미지요?"
  "그래서 자넨 무어라고 대답했지?"
  "무어라고 할 수 있겠읍니까?"
하고 레흐니츠가 반문했다.
  "아무 대답도 못하고 일이 제대로 안 된 걸 아쉬워할 때처럼 한숨만
쉬었읍니다."
  "대답 중엔 그게 최고야."
하고 영사가 말했다.
  "그런데 이거 나만 담배를 피우고 자네에겐 권하질 않았죠. 하기야 이
좋은 향기로운 공기 속에서 담배를 피운다는 건 확실히 죄악이지. 하지만
어쩌겠나, 습관이 되어 버린 걸. 신문을 읽고 있거나 누구에게 말을 하고
있을 때도 담배를 피우게 되지. 그런데 신문을 읽지도 않고 누구와
이야기를 하지 않을 때는 또 지루해서 피우거든."
  자기들의 약점을 조롱하면서도 그것에 만족하고 있는 사람처럼 그는 껄껄
웃었다.
  "자아, 시가아가 싫으면 코냑이나 한모금 하지."
  영사는 코냑 맛을 보고 난 뒤,
  "참 좋은데."
하는 말은 연발했다. 두 잔째를 마신 뒤 그는 한층 더 풍성한 찬사를
보냈다.
  "이 코냑은."
하고 레흐니츠는 영사에게 말했다.
  "리숑 러시옹 산 입니다. 거길 한 번 가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유럽에선
볼 수 없는 포도 압축기가 있읍니다."
  영사는 자기 아래 사람에게 선심을 쓰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시간이 있을는지 모르겠네. 아무래도 성지에 왔다가 예루살렘을 안 가
본대서야 말이 안 될 거고. 이젠 나흘밖에 안 남았어. 자넨 이미 거기를 가
보았겠지만 말이야. 여기 오는 도중에 관광객들을 만났는데 예루살렘
인상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사람들도 있더군. 먼지와 거지들뿐이라고
그러더군. 거지들과 먼지뿐이라고 말야."
  "그 관광객들은 기독교인들입니까? 아니면 유대인들입니까?"
  "그게 무슨 상관인가? 그곳은 기독교인들에게도 성지인데."
  "물론 그들에게도 성지이지만, 그들에게는 조국이 있읍니다."
  "그게 어떻단 말인가?"
  레흐니츠는 얼굴을 붉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만약 예루살렘의 공기가 야파만큼 좋다면."
하고 영사는 말을 이었다.
  "그러면 되는 건데 말이야. 난 어디서도 야파만큼 깨끗한 공기는 못 봤어.
노 남작도 그렇게 말하더군. 자넨 그이를 알고 있지? 아프리카에서 장군을
지냈다던가, 왕의 보좌역을 지냈다던가 하여튼 그런 고관이었대. 야곱,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나도 여기에 자리를 잡을까? 내 선친의 조부께선
노경에 예루살렘으로 와서 그곳에서 돌아가셨어. 내가 어린애였을 때
일이지만 사자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왔는데 선친께서 무언가를 주시던 일을
기억하고 있어. 그리고 해마다 그곳에서 인쇄물이 나왔는데, 설날이면
부친은 곳곳으로 기부금을 보냈지. 성지를 위해서라면서 내게도 접촉이
오고 나에게 이민 개척 은행의 주를 사도록 하라고 권하더군. 난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지. [당신네들이 원하는 게 자선이라면 다소 드릴 용의가
있읍니다. 하지만 이민 개척을 위한 주와 성지가 무슨 관계가 있소?
늙은이들이야 죽으러 그곳으로 간다 하겠지만 젊은이들이야 무엇하러
가겠소?]라고 말이지. 여보게, 자네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니네. 자네야
연구를 위해 왔으니까. 학문이란 어느 곳에서나 통하는 것이니까."         
   
  레흐니츠가 대답을 하려고 할 때 웨이터가 다가와서 식탁이
마련되었노라고 알렸다. 영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꽤 짧게 앉아서 이야기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다른 손님들은 끝나서
나갔나 보지. 웨이터, 우리 딸애가 저녁식사에 나올 준비 되었는지 알아
봐."

      13
  그들 셋이 저녁 식탁에 앉자 영사는 쇼샤나에게 물었다.
  "그래, 넌 어떻게 하루를 보냈어? 점심 후로는 못 본 것 같은데."
  쇼샤나가 대답했다.
  "그건 우리 손님에게 물어 보세요. 말해 줄 거예요."
  "레흐니츠 박사가 어떻게 안단 말이냐?"
  야곱은 머리를 숙이고 박사가 계속해 묻는 말을 들었다.
  "그럼, 박사, 에르리히 양을 어떻게 하루를 보냈지?"
  레흐니츠가 쇼샤나가 한 일들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잠시 동안 그는
라헬과 리아와 함께 거닐고 있다가 정원에 있던 쇼샤나의 모습을 보았지만,
그녀는 이미 사라지고 남은 기억이란 그녀의 끄덕임 뿐이었다. 그는
어리둥절해서 쇼샤나 쪽을 보았다.
  영사는 미소를 띠었다.
  "분명히 두 사람 사이엔 무슨 비밀이 있군. 그럼 자, 레흐니츠 박사,
하루를 어떻게 지냈는지 물어 볼까?"
  이번엔 쇼샤나가 <나에게 물어 봐요.>라고 말하겠지, 하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쇼샤나는 아무 말도 없었다.
  영사는 세 사람의 잔에 줄을 채우고 건배를 들었다. 레흐니츠는 술을
마시면서 내일은 두 분 다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고 있을 일이며, 그들이
야파로 돌아와서 다시 떠나게 되면 자기는 다시 혼자가 될 것을 생각했다.
  쇼샤나는 아버지의 왼편에 자리를 잡고 야곱과는 마주 보고 있었다.
그녀의 영혼은 그녀 존재 깊은 곳에 들어갔거나 완전히 그녀의 육체를 더나
버렸거나 한 것만 같았다. 미풍이 불어 들어오고 있었다. 레몬과 오렌지의
향기가 식당 안을 그득히 채웠다. 식탁 위의 램프는 밝은 광채로 빛을 더
내고 있었고, 램프의 흰 바탕 양쪽은 빨간 빛을 띠고 있었다. 호텔의 정원과
과수원 숲으로부터는 재코올의 울음소리가 들려 왔고, 조롱 속의 앵무새가
그 울음소리에 잠을 깨고 같이 울기 시작했다. 바다가 갑자기 잠을 깨고
파도가 쿵쿵거렸다. 상쾌한 바다 냄새가 야파를 띠처럼 두르고 있는
정원들과 작은 숲들의 향기에 뒤섞였다.
  영사는 잔을 들었다.
  "가서 내 동포들에게 말하게. 혹한에 피를 얼리며 그들이 캐비지를 놓고
앉아 있는 동안 우린 여기 열린 창가에서 식사를 하고 있노라고! 쇼샤나,
추운가? 웨이터, 이젠 무엇을 가져와야지. 블랙코오피인가? 난 밤에
코오피를 마시면 잠이 안 와. 시대가 다르면 습관도 다른 모양이지. 옛날
사람들은 잠을 자게 해 주는 것을 마셨다는데 이제 우린 깨어 있으려고
애를 쓰거든. 결국 이 세상엔 깨어 있을 만큼 가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인가? 정원에서 오는 저 냄새들은 무언가 다시 살아나게 하는군.
쟈스민과 오렌지꽃 냄새가 섞인것이지?"
  쇼샤나는 말 없이 앉아 있었다. 그 취하게 한다는 향기들이 그녀에겐
졸음을 가져다 주는 것 같았다. 한 마디도 없이 그녀는 식탁에서 일어나
부친의 이마에 키스를 했다.
  "너, 방으로 가려는 거냐?"
하고 영사가 물었다.
  "그래요, 아버지."
  에르리히 씨는 딸의 볼에 키스를 하고 잘 자라고 했다. 쇼샤나는
야곱에게 손을 내밀고 떠나갔다. 
  영사는 딸이 떠나가는 것을 지켜보며 말했다.
  "쇼샤나는 좀 피곤해 있어. 내일 예루살렘은 갈 것 같지가 않은데. 자넨
뭘 할 텐가?"
  레흐니츠는 그의 수첩을 꺼내 보았다.
  "내일 오후는 쭉 한가합니다."
  "그럼 우리들과 점심이나 같이 하도록 하게."
하고 영사가 말했다. 
  "쇼샤나와 나는 언제나 자네와 함께 있는 걸 좋아하네."
  "내일은 미크베 이스라엘에 가 보지 않으시겠읍니까?"
  "그게 어딘데?"
  "여기서 한 시간쯤 걸으면 됩니다."
  "걸어서?"
  영사는 놀란 듯이 말을 되받았다.
  "거기까지 마차를 타고 갈 수도 있지요. 거기서 리숑까지는 한 시간쯤
됩니다."
  "그런데 사로나란 무엇인가?"
  "사로나는 기독교계 독일인들의 조그만 마을입니다."
  "어디 있지?"
  "바로 이 근처입니다."
  "내가 듣기로는."하고 영사가 말했다.
  "그들은 아주 훌륭한 농부들이고 신앙심이 두터운 사람들 이라던데.
어디로 갈지 내일 결정하도록 하지. 점심은 열 두 시 반이야. 왕성한 식욕을
가지고 오게. 그러면 우리들도 식욕이 날 테니까."

      14
  정오에 레흐니츠가 왔을 때 쇼샤나는 거기 없었다. 전날 밤을 자기가 산
그림 엽서들을 보느라고 거의 뜬눈으로 보냈던 것이다. 호텔 보이가 아침에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을 때에는 창가에서 졸고 있는 채로였다. 드러누워
조금 휴식을 취하라는 부친의 간청을 마지못해 따랐다.
  "오늘 점심에 쇼샤나는 나오지 않아."
하고 영사가 말했다.
  식사는 말 없이 진행되었다. 영사는 거의 먹지를 않았고, 식욕도 없는 것
같았다. 분명히 기분이 좋지 않구나, 하고 레흐니츠는 생각했다. 그의
방문객들에게 미크베 이스라엘과 리숑 러 시옹 일대를 보여 주려 했던 그의
계획은 쇼샤나의 피로 때문에 모두 하사가 되고 말았다.
  코오피를 마시면서 영사는 생각난 것처럼,
  "자네, 무슨 말을 하려던 것 같았는데."
하고 말했다.
  레흐니츠는 별로 말할 의도는 없었던 것이지만 말을 하라는 요청을 받은
이상 잠시 생각해 본 되 억지로 입을 열었다.
  "선생님, 미크베 이스라엘로 가 보시겠읍니까? 아니면 리숑 러 시옹으로
가 보시겠읍니까?"
  "미크베 이스라엘이 아니면 리숑 러 시옹이라?"
하고 영사는 그의 말을 되풀이했다.
  "우리들이 온갖 곳을 다 찾아가 본 지금에 와서 리숑 러 시옹 같은
조그만 마을이나 미크베 이스라엘 같은 농업학교는 대단한 건 아니지. 말이
나온 김에 말이지만 도대체 왜들 정착지에 그렇게 길고 겹친 이름들을
붙이는 거지? 우리들의 조상들은 꽤 늙도록까지 살았지만 야파라든지
하이파, 아크레, 가지와 같이 짧고도 아름다운 지명을 택했는데. 사람의
일생이 짧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도 이렇게 긴 이름을 붙인다는 건
이해할 수가 없어."
  야곱이 떠나려 할 때 쇼샤나가 나타났다. 그녀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고
동작에 무관심하였다. 아침 일곱 시부터 하녀가 침상으로 점심을 가져온
이때까지 일곱 시간을 꼬박 자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가세요?"
하고 야곱에게 말했다.
  "응"
하고 그는 그녀를 깨울까 봐 두려운 듯 낮은 소리로 말했다.
  "한 시간 후에 돌아와 주실 수 있으세요? 같이 산보나 하시지요."
하고 쇼샤나가 말했다.
  야곱은 시계를 보고, 시간을 알아 본 뒤 오겠노라고 약속했다. 
  한 시간 안에 그는 돌아왔다. 쇼샤나는 따뜻한 옷을 입고 호텔 아래층에
앉아 벽 위의 석판화를 보고 있었다. 야곱이 다가왔을 때 그녀는 마치 그도
그 그림의, 아니 그 그림이 걸려 있는 그 벽의 한 부분이기라도 한 것처럼
꼭 같은 눈초리로 그를 보았다.
  그는 잠시 기다린 후 말했다.
  "산보를 한다고 하잖았어?"
  "산보를?"
  놀란 듯이 쇼샤나는 그의 말을 되풀이했다.
  "그렇지만 확실히 산보를 하고 싶다고 했었는데?"
  쇼샤나는 그가 마치 자기를 속이려고나 하고 있는 것처럼 그를 뚫어지게
보다가 일어났다.
  "좋아요, 가요."
하고 말했다.

     15
  쇼샤나는 말 없이 걸어갔고, 그녀의 곁에서 걷는 야곱도 말이 없었다.
그녀에게 무언가 말해 주고 싶은 것은 많았어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말 없이만 걷는다는 건 불가능한 것 같아 그는 그녀의 주의를 끌
화제를 찾고 있었다. 바로 그때 그녀의 길을 가로지르는, 고행 중인
아랍인이 있었다. 그 아랍인은 맨발이었고 허리로부터 위쪽은 벗고 있었다.
허리춤엔 두 개의 창이 꽂혀 있었고, 가느다란 긴 머리는 손질이 가지
않았으며, 눈은 번득이고 있었다. 걸어가면서 그는<알라카림>을 외치고
창을 살에 뒤틀었다. 한편 한 떼의 사람들이 그의 뒤를 따르면서
[알라카림]을 되풀이 하고 있었다. 레흐니츠는 걸음을 멈추고 쇼샤나에게
그 의미를 옮겨 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고행자를 보지도 않았고 그의
말을 귀담아듣지도 않았다. 그들은 곧 노아의 아들 야페트가 야파를 세울
때 심은 아홉 그루의 종려나무에까지 이르렀다. 종려나무는 하나는 자신을
위해서, 또 하나는 아내를 위해서, 나머지 일곱은 일곱 아들을 위해 심은
것이었다. 느브갓네살이 이스라엘 땅을 황폐하게 만들었을 때 그는 이
나무들을 뿌리째 뽑아 자기 정원에 심었지만 바빌론에서의 포로생활로부터
돌아온 유대인들은 그 나무들을 다시 가져와 원래의 자리에다 심었다는
것이다. 그 신선한 초록빛 나무 꼭대기가 은빛 구름을 지탱하고 있는 듯한
이 아홉 그루의 종려나무들은 살랑거리며, 번득이는 초록빛과 은빛의
잎들로 왕관을 이루고 있었다. 잎들은 통풍이 잘 되는 그들의 동굴 속에서
가벼운 미풍이 불어 와 흔들 때마다 빛깔을 달리하고 있었으며, 잎들의
섬유질들은 해뜬 후 소나기의 빗방울처럼 떨고 있었다. 그 광경은 언제나
레흐니츠를 감동시켜 주는 것이었는데 쇼샤나에게 그것을 말해 줄 기회를
갖게 된 지금은 더욱 그러했다. 그는 팔을 뻗쳐,
  "쇼샤나, 저걸 보아요."
하고 큰 소리를 쳤다. 쇼샤나는 그를 보지 않고 그 종려나무들도 보지 않은
채 고개만을 끄덕였다.   
  왜 나는 지금 이 모든 것을 그녀에게 보이고 있는 건가? 그는 그녀가
그토록 피곤한 때에 걷고록 데려 온 것이 괴로와져서 스스로 물어 본
것이었다. 소리를 높여 그는 말했다.
  "호텔로 돌아가고 싶지?"
  그녀는 머리를 끄덕여 동의했다.
  "그래요. 그러나 우선 해변가를 걸어요. 아주 가깝지요?"
  그녀는 긴 치마를 조금 치켜올리면서 걷기 시작했다.
  바다는 잠잠하고 매우 푸르렀다. 파도들은 서로의 머리를 부딪치며 깨져
그 아래의 물결과는 어울리지 못하게 된것처럼 보였다. 어제는 만조였는데
바다는 해안에서 물러가고 넓은 모래사장을 남겨 놓았다. 거기엔 단 한
사람의 어부만 있을 뿐 아무도 없었다. 야곱은 온 지구의 땅덩이를 다 준다
해도 쇼샤나의 기분을 돋굴 수 있는 그 무엇을 얻고 싶었다. 그러나 세상의
어떤 것도 그가 있다는 것조차 의식치 않고 그의 곁을 걷고 있는 이 공주를
깨울 수는 없었다. 야곱은 쇼샤나와 함께 쇼샤나의 집에서 놀던 때들을
회상해 보았다. 그들은 연못가에서 금붕어들에게 먹이를 주기도 했었다.
그러나 바다를 보고 허리에까지 물에 들어가 있는 어부를 보았을 때 지나간
일들을 이야기할 마음은 나지 않았다.
  쇼샤나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나와 우리집 정원에서 어떻게 놀았던가를 기억하고 있어요?"
  그는 낮은 소리로
  "기억하고 있지."
하고 말했다.
  "됐어요."
하고 쇼샤나는
  "갑시다."
라고 말했다.
  그러다가 그녀는 다시 발길을 멈추었다.
  "우리들이 어떤 놀이를 했는지도 기억하죠?"
  야곱은 걸어가며 그 놀이들을 세세히 말하기 시작했다. 세세한 점을
하나하나 들 때마다 그녀는
  "맞았어요, 맞았어요. 잊은 줄 알았는데."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마치
  "그런 걸 잊을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이야."
하고 말하려는 듯이 가슴에 손을 얹었다.
  쇼샤나는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걸음은 계속하고 있었고, 그녀의 곁을
야곱도 끌려가듯 따랐다.
  "피곤하지 않아?"
하고 야곱이 물었다.
  쇼샤나는 대답했다.
  "아니, 저 건너편엔 무엇이 있나요?"
  "오래된 회교도 묘지지."
  "아직도 죽은 사람을 거기에 묻나요?"
  "요새는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더군."
  "그리로 가 봐요."
하고 쇼샤나가 말했다.
  그들이 묘지에 이르렀을 때 쇼샤나는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우리들이 함께 한 그 맹세를 기억하고 있어요?"
  "기억하고 있지."
하고 야곱이 대답했다.
  "한 마디 한 마디 다?"
  "그래 한 마디 한 마디 다."
  "그렇다면 되풀이해 봐요."
  야곱은 그들이 맹세한 골자를 되풀이 했다.
  "한 마디 한 마디 다 기억한다고 하고선. 그럼 한 마디 한 마디 다 제게
말해 봐요."
  그는 망설이다가 한숨을 쉬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우리는 불과 물을 두고 우리들의 머리카락을 두고, 우리들 심장의 피를
두고, 우리들은 장차 서로 결혼하여 남편과 아내가 되고, 이 세상의 어떤
힘도 영원히 우리들의 이 맹세를 깨뜨릴 수 없는 것입니다."
  쇼샤나는 말 없이 고개만을 끄덕였다. 조금 뒤 그녀는
  "이제 가도 좋아요."
하고 말했다.
  그들은 걸어갔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걸음을 멈췄다.
  "그런데 야곱, 어떻게 생각해요? 이제 우린 그 맹세에서 풀려 나왔나요?"
  심장이 심한 고동을 쳐서 그는 한 마디도 말할 수가 없었다.
  "야곱."
하고 부르며 그녀는 말했다.
  "당신은 당신의 약속을 지키나요?"
  여전히 그는 말을 못하고 그녀를 빠안히 쳐다보았다.
  "당신의 맹세를 지킬 각오가 되어 있나요?"
라고 쇼샤나는 물었다.
  야곱은 콘 소리로 고함을 치듯 말했다.
  "그래, 되어 있어. 되어 있어요."
  도중에 그녀는 손을 내밀고 잘 가라는 인사를 했다.
  "내가 바래다 주는 걸 원치 않어?"
하고 야곱은 말했다.
  "그럴 필요는 없어요."
  "길을 잃을지도 모르는데."
  "난 길은 잃지 않아요."
하고 쇼샤나는 말을 이었다.
  "난 내가 한 번 갔던 곳은 결코 잊지 않아요. 잠결에서라도 그래요."
  말할 수 없는 전율이 레흐니츠의 몸을 스쳐갔다. 그의 머리카락이
오싹해졌다. 
  "그러나, 그래도..."
하고 그는 속삭였다.
  "정말 오겠으면 그렇게 해요. 하지만 도중에서 이야긴 말아요.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요."
  그들이 호텔까지 왔을 때 그녀는 자기의 약혼자에게 손을 내밀고 잘
가라는 인사를 했다.

      16
  레흐니츠는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사람이 잠을 잘 때 몸을 돌리는
습관이 있다고 하지만 그날밤의 레흐니츠에게는 들어맞지 않았다. 잠자리에
들자마자 일어날 때까지 그는 기둥처럼 꼼짝 않고 누워 있었다.
  이 멋진 수면은 오후에 쇼샤나와 함께 해변을 거닐었던 결과였다. 이제
그는 손을 내밀고 부드러운 커어튼을 뚫어보듯 시계를 보았다.
  "이런!"
하고 그는 소리를 질렀다.
  "내 시계가 틀리지 않는다면 알몸인 꼴로 학교까지 뛰어야겠군!"
  그러나 옷을 입지 않고 학교까지 뛰어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데다
사람이란 또한 세수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레흐니츠는 침대에서 뛰어
나와 세수대야에 물을 채우고 머리를 넣어 세수를 마친 후 면도까지 했다.
에스쿨라피우스신이 그를 도와 주어서 턱 위에 상처도 내지 않고, 피부에
찢긴 자국도 내지 않을 수 있었다. 마침내 그는 침대 위에 젖은 면도
도구를 팽개치고 옷을 입고서 학교로 달렸다.
  학생들은 다들 교정이나 복도에 모여 있었다. 집에서 가지고 온 빵이나
과자를 먹고 있는 아이들도 있었고, 서로 웃기려고 운을 넣은 익살맞은
즉흥시를 짓고 있는 아이들도 있었다. 이런 소동으로 그들은 종을 치러
문간에 와 서 있는 문지기를 보지 못했다. 마침내 문지기를 보자 그들은
주위로 모여들어 그의 손을 붙잡고, 어떤 아이들은 방해를 하려고, 어떤
아이들은 종치기를 도와 주려 하고 있었다. 그럴 때에 레흐니츠가 나타나자
아이들은 그의 뒤를 따라 교실로 들어 갔다.
  곧 그들은 자기 자리에 가 앉았다. 교단에 올라가서 레흐니츠는 학생들을
휘둘러 보았다. 결석한 학생은 없었다. 선생이 학생들에 둘러싸였을 때는
언제나 그렇듯이 기분이 좋았다. 그는 남학생이나 여학생이나 모두 매우
좋아하는 그 쩡쩡하게 울리는 쾌활할 목소리로 가르치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흥미를 일깨워주는, 열의를 차분히 가라앉힌 음성으로 설명을
하고, 읽어도 주고 하면서 철자가 어려울 것같은 단어는 일일이 흑판에
적어 주었다. 종이 울리지 않았다면 그는 계속해서 가르쳤을 것이고
아이들은 계속 앉아 있었을 것이다. 수업이 끝난 뒤 그는 지우개로 흑판을
닦고 교실 밖으로 나갔다. 그제야 그는 아침도 전날 저녁도 굶었다는 것을
기억하며 배가 고프다는 것을 의식했다.
  레흐니츠는 직원실로 갔다. 교사들은 모여 앉아 차를 마시거나 무지기의
아내가 매일 구워 주는 도우넛을 먹거나 하고 있었다. 또 어떤 사람은 이
빵을 차에 적시어 책을 앞에 고정시켜 놓고 읽으면서 먹고 있었다.
레흐니츠는 그들 곁으로 의자를 당기곤 손매듭으로 식탁을 쳐서 박자를
맞추며 합스부르크의 국가를 콧노래로 불렀다. 이 동작을 보고 문지기
예히아가 와서
  "리비, 무얼로 하실까요?"
하고 그에게 인사를 했다. 문지기는 그를 언제나 '리비'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레흐니츠가 세속적인 학문에 있어 대단한 학자일 뿐 아니라, 또한
말할 것도 없이 토라에도 깊은 조예가 있으리라 단정했기 때문이다. 더우기
레흐니츠가 처음 야파에 왔을 때 수염을 기르고 있었던 까닭도 있었을
것이다.
  "무얼로 할까?"
하고 레흐니츠는 그의 말을 되풀이했다.
  "나에게는 배부름을, 당신과 전 이스라엘 사람에겐 행복을."
  "물론입지요."
하고 문지기가 대답했다.
  레흐니츠는 예히아의 거무틱틱한 얼굴과 크고 까만 눈동자를 보았다.
  "큰 잔에 블랙코오피로 주구료."
  문지기는 코오피를 갖고 왔다. 레흐니츠는 잔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얼굴 표정을 감추기라도 하듯 머리를 수그렸다. 그는 한 모금을 들이킨
다음 코오피에 설탕을 넣고 다시 한모금을 마셨다. 그동안 예히아에 대해
영사에게 했던 말들을 생각해 내려 하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잔을
들이켰다. 동료 교사들은 일어나 교실로 가고, 그도 또한 밖으로 나왔다.
  자, 이 친구야 하고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우린 교정에서 거닐어도 좋고,
아니 사무실에 가서 '레흐니츠 박사님'에게 붙인 편지가 있나 없나를
알아보아야겠군.
  레흐니츠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전날에도, 아니, 그렇군, 그 전날에도 그는
사무실엘 들르지 않았다. 끊임 없이 사무실에 드나들면서 편지가 왔나
안왔나를 알기 위해 우편물을 모두 뒤지고 살펴보는 교사들도 있었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지금만 해도 수업이 비어 있어 무얼 해야 할지
모르지만 않았더라도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사무장은 그의 작은 책상에 앉아 손에 펜을 쥔 채 장부에 코를 박고,
그렇게 시시하게 볼 수만도 없는 레흐니츠라는 존재가 나타난 것을 모른 체
하고 있었다. 시간이 여유가 있고 들어온 용무도 잊어버리고 있던
레흐니츠도 또한 사무장의 존재를 망각하고 있었다. 그는 벽 위의 그림들을
보고 그림들 사이의 공간들을 쳐다보았다. 사무장은 눈을 힐금 올렸다간
다시 내리고 쓰던 것을 계속했다. 틀림없이 저 벽에 걸린 초상화의 저명
인사는 엄격하고 꼿꼿한 표정이 자기에게 가장 잘 어울린다고 믿고 있겠지,
하고 레흐니츠는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표정을 짓고 있을라고.
귀하로 말하면 존함은 잘 모르겠읍니다만 지으려고 하시는 표정은 정확히
어떤 거지요?
  사무장이 점장이 스틱 같은 코를 쳐들자 두 사람의 눈길이 마주쳤다.
  "나에게 편지 온 것이 있읍니까?
하고 레흐니츠가 물었다.
  사무장은 눈이 둥그레져서 그를 쳐다보았다.
  "우체국에서 편지가 오는 시각이 언제인데요? 오전 중인가요?
오후인가요? 편지는 오후에 와요. 아침도 제대로 소화가 되지 않는 이
시간에 물어서 무슨 소용이 잇겠어요?"
  "내게 어제 편지가 와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어제라고요?"하고 사무장은 놀란 어조로 큰 소리로 말했다.
  "배가 어제 입항했다는 말씀인가요? 보세요, 배가 들어오지 않았어요.
하여간 편지를 갖고 온 배는 없었어요. 레흐니츠 박사, 아마 국내 우편을
말하는 것이지요? 국내 우편이라면 물론 다른 문제입니다."
  "네, 네."
하고 이 논리의 대가가 화제를 합리적인 방향으로 옮겨 줄 것을 고마와
하며 말했다.
  "네, 사실 국내에서 오는 편지를 말한 것이지요. 예컨대 바로 야파 같은
데서 온 것 말입니다."
  사무장은 편지 뭉치에 손을 얹고 말했다.
  "국내 편지는 정말 온 게 있읍니다. 그러나 레흐니츠 박사님께 온건
없군요. 말하자면 이스라엘에서 온 것은 없어요. 야파에서 온 것은 없어요.
아시겠지만 야파도 이 나라의 일부지요."
  "네, 그럼요."
하고 레흐니츠는 대답했다.
  왜 나에게 '네'란 말을 연발하고 있어? 하고 사무장은 생각했다. 자기한테
온 편지가 없는데도 '네'만 하면 무슨 소용있어? 독일인들이란 이상한
사람들이야! 그들에게서 순종의 습관을 버리게 할 수는 없을까. 저 자는
어제 다른 처녀들을 물리치고 비엔나일지도 모르는 오스트라이에서 온 새
처녀를 끌어내었지. 자, 그들이 어딜 산보했던가? 해변가였지. 언제였던가?
바로 바다가 차져서 싸늘 할때야. 감기에 든 교사라! 흠!
  사무장은 재채기를 했다.

      17
  학교종이 다시 울렸다. 레흐니츠는 제정신으로 돌아와 밖으로 나왔다.
다음 수업까지는 아직 시간 영유가 있었다. 생각이 난 듯 도서실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이스라엘에서 발견되는 각종의 광물.식물, 그리고
박제된 동물들과 날짐승들이 많다 해서 일명 <자연 교실>이라고 부르는
방이었다.
  책들은 자물쇠를 채워 둔 캐비닛 속에 들어 있었다. 자기에게 없는
책들을 읽어 보고 싶었지만 사무장에게 열쇠를 달라 할 마음 더욱 없어서
선 채로 박제된 표본을 훑어보고 있었다. 이 박제들은 일류신의 애정을
증명해 주는 것이었다. 일류신의 이러한 사랑이야말로 이 짐승들에게
그들의 사후에까지 생명을 준 것이었다. 이 제비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고
레흐니츠는 생각했다. 제비는 마치 졸고 있는 듯했다.
  방에서 나와 그는 마치 새를 깨울까 봐 두려워 하는 듯이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는 직원실로 돌아갔다. 직원실은 텅 비어 있었고 책상엔 빵도
과자도 치워져 있었다. 그 대신 책상 위엔 공책들이 있었고, 소책자들과
교과서들 가운데 새 수학 교본이 한 권 들어 있었다. 그는 이것을 주워
올렸다가 다시 내려놓고 다시 주어선 안을 들여다보았다. 숫자를 점검하곤
<검사필>이라고 적었다.
  다시 종이 울리자 레흐니츠는 가야할 시간이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마치
기억력을 더듬으려는 듯이 손으로 이마를 쓰다듬었다. 나는 무얼 원하고
있는 것일까? 하고, 그는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그러나 교탁에서 학생들을
맞대고 섰을 때까지고 그 대답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레흐니츠는 눈을 들고 두 눈으로 학생들을 둘러보려 했다. 그러나
눈꺼풀이 무겁고 무릎이 떨려 왔다. 그는 두 다리를 겹치고 눈을 껌벅인
다음 다시 교실을 둘러보았다. 남녀 학생들은 여느 때나 다름없는 줄에
앉아 있었지만 그들 위로는 구름이 걸려 교실을 딱딱하고 불투명한 그
무엇으로 만들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여러분, 우리가 어제 끝으로 한 곳은..."
하고 말을 꺼냈다. 그러나 그는 기운이 빠지는 것을 느끼며 울고 싶어졌다.
그는 눈을 감고
  "어제는 에."
하고 되풀이했다. 학생들은 교사의 마음이 이미 학교에 없다는 걸
알아차리고 모두들 제멋대로의 일은 좇기 시작했다. 라헬의 남동생은
주머니에서 소설을 꺼내 무릎에 얹고 읽기 시작했다. 그의 좌우 양옆에
앉은 아이들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소녀들이 하는 짓은 더 심했다.
라야의 여동생은 종이로 만든 뱀을 아스나트의 여동생의 코 앞으로 날렸다.
아스나트의 동생 또한 태양을 향해 작은 거울을 쳐들고 반사광으로
친구들의 눈을 부시게 하고 있었다. 레흐니츠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고, 그의 눈은 슬픔으로 아렸다. 그가 친구처럼 대하는
이 애들이 어쩌면 이다지도 심한 짓을 하다는 말인가?
  "거긴 무얼 읽고 있지?"
  그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질렀다.
  하일페린이 태연하게 그의 책을 내보이며 <사나인>이라 했다.
  "그게 뭔가?"
  "소설입니다."
  "무엇에 관한 것이지?"
  "선생님, 아직 다 읽지 않아 모르겠읍니다."
  "모른다고! 네가 뭐 아는게 있어? 그리고 넌 거기서 뭘 해?"
  지적된 소녀는 몸을 흠칫하면서 공책을 치워 버렸다.
  "네 생각은 어떤가?"
하고 레흐니츠가 말했다.
  "네가 그린 것은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거냐? 볼 만한 가치가 없다고?
그렇다면 할 가치가 없는 일에 왜 시간을 낭비하는 거지? 이봐, 내 귀여운
친구 마가르고트 양! 너로 말하면, 내가 만약 너와 같이 좋은 거울을 갖고
있다면, 난 너의 얼굴에 갖다대고 한 사람 대신 두 사람의 부지런한 학생을
보겠어. 정말 여러분, 내 생각에도 나는 지금 지나친 농담을 하고 있어.
그게 내가 여기 와 있는 목적은 아니야. 하지만 여러분들도 소설을 읽기
위해 학교에 온 건 아니잖아? 이제 곧 예히아가 종을 치면 우린 집으로
돌아가겠어. 우리가 집에서 무얼할까는 문제야. 사람이란 한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그 대신 무엇을 해야 할는지는 이미 모르게 되는 거야. 벌써
예히아가 종을 치는군. 여러분 안녕, 안녕."

      18
  이제부터 무엇을 할 것인가고 레흐니츠는 자문했다. 영사의 호텔엔 갈 수
없어. 점심 시간이 다가왔고 점심엔 초대를 받지 않았어. 만약 간다면
쇼샤나는 마치 내가 그녀를 소유하고 있고, 내가 좋아하는 때면 언제든
나타날 권리를 갖고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고 할거야. 아니, 그건 안돼, 하고
그는 중얼거렸다. 열 두 시 반이었다. 반시간이면 식당은 손님들로 가득 찰
것이다. 급히 서둘지 않으면 점심도 먹지 못할 것이다. 그는 거기서
이틀이나 식사를 하지 않았으니까 식당의 여주인은 그가 오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때 갑자기 그는 둘째 번 수업 전 휴게시간 중에 생각하려고 애를 쓰던
것을 기억해 냈다. 오늘 밤, 아니 어젯밤 아니 그 전날 밤 확실치는 않지만,
그는 저녁식사 때 쇼샤나의 방으로 초대되었던 것이다. 그녀의 방은
조그맣고 기분이 좋았다. 식탁은 빵과 마토스 버터와 밀크, 토마토와 오이,
계란과 치이즈 등으로 식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테이블의 한가운데에는
딸기 쟁반이 있었고, 딸기 위에는 붉게 물든 설탕가루가 뿌려져 있었다.
방엔 향기로운 냄새가 가득했다. 쇼샤나가 차를 들여오기 위해 밖으로
나갔을 때 그는 그녀의 옷장을 바라보고 그 위에 있는 한 다발의 백합에
눈이 갔다. 그는 열 두 개의 백합을 세고서, 미신을 믿지는 않지만 열
세개가 되지 않은 걸 알고 기뻐했다. 그리고 그는 쇼샤나와 무슨 말을
했던가? 그들은 쇼샤나의 아버지인 영사를 포함해서 여러 사람들 이야기를
했었다. 이상한 것은 쇼샤나가 영사 이야기를 할 때 마치 그가 그녀의
아버지가 아니라, 그의 아버지인 것처럼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영사가
화제가 오르면 [물론 그에 대해서 잘음 모릅니다만 아마...]이런 식의
말투였다. 야곱은 음색엔 거의 입을 대지 않고 그 때문에 쇼샤나도 많이
먹지 않았다. 그녀가 더 먹어야 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자기의 식욕을 억지로 일으키진 않았다. 식사가 끝난 후 그녀는 쇼파에
가서 앉고 그는 그녀를 마주 보는 의자에 앉았다. 쇼샤나는 그에게 [여기
앉아요]하면서 보다 편안한 장소를 그에게 안내했지만 그는 어깨에 고통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그가 앉아 있던 의자를 떠나지 않았다. 쇼샤나를 지치지
않게 하기 위해 그는 아홉 시엔 떠나기로 결심했는데, 그 시간이 왔는데도
그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들은 라헬과 리아, 그리고 쇼샤나의 어머님
에르리히 부인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 또한 이상한
일로서, 쇼샤나는 자기의 어머님이 어디서 태어났는지를 그가 말해
줄때까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시계를 보고 열 시가 가까운 걸
알았다. 떠나야 할 시간이 라고 쇼샤나에게 말했으나 그녀는 아직 아홉
시가 안되었다고 말했다. 그가 다시 [열 시인데]하고 말하자 쇼샤나는 놀라
[정말 그래요?]하고 자기의 시계를 고쳤다. 조금 뒤 그가 가려고 일어나자
쇼샤나에도 밖으로 그를 따라 나왔다. 그들이 반쯤 왔을 때 그는 도로
돌아서 그녀를 바래다 주려 했지만 그녀는 이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집으로 향해 가고, 그 동안 그는 전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차표를 산
후 차 안으로 들어갔다. 전차는 만원이 되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중에
전차는 여러 번 더 많은 손님을 싣기 위해 정거를 되풀이했다. 두 젊은
친구가 차 안으로 들어와 한 친구가 자기 친구의 무릎 위에 앉았다. 그들이
오토바이닝게르와 그의 저서 <성과 성격>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귀에 들어왔다. 차로 한 여행은 한 시간이나 계속되었는데도 이상하게
야곱은 자기가 다시 쇼샤나와 함께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가
쇼샤나의 집을 떠난 것인 열 시였고, 쇼샤나가 중도에까지 그를 따라왔고,
전차간에서도 한 시간을 보냈고, 집에서도 한 시간을 보냈는데 아직 열 한
시가 못 되어 있었다. 도대체 그가 거의 열 한 시에 쇼샤나와 같이 있다는
건 어떻게 된 것일까?

      19
  식사를 마친 뒤 레흐니츠는 식당에 남아 있지도 않았으며, 그의 하숙으로
돌아가지도 않았다. 영사가 야파에 도착한 이래로 그의 습관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점심 시간에 휴식을 취하고 자기의 코오피를 끓이고 책을 읽고
하던 때들은 선사시대의 일인 것 같았다. 그는 혼자 생각했다. 영사는
지금쯤 오후의 낮잠을 자고 있겠고, 쇼샤나는 자기 방에서 사진을 정리하고
있겠지. 만약 그녀가 방안에만 머물러 있는다면 난 호텔 앞엣 산책을 해도
될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정원을 거닐고 있다면 그저께처럼 그곳을
산보해도 괜찮겠지. 그러나 그저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있었는데 오늘은
혼자서 걷게 되는 것이 다르다.
  쇼샤나가 도착했던 날 라헬과 리아와의 산책은 쇼샤나 앞에서 좀 자신을
갖도록 해 주었던 것이다. 그 산책이 쇼샤나로 하여금 질투심을 일으키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는 마찬가지겠지만 또다른
이유에서였다. 그 산책은 야곱 레흐니츠가 이 세상 다른 사람과 유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과 또한 그 여자, 쇼샤나 에르리히도 세상에서 유별난
여자는 아니란 걸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인즉 그날 그는 라헬과 리아와
같이 산책할 생각은 아니었으며, 더욱이 그 두 사람과 함께 산책하리라는
마음은 더욱 없었다. 뭐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그 사건을 더 깊이 파고들면
또 하나의 진실이 여기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레흐니츠가 산책할 때는
그 이름이 라헬이건 리아건 또는 아스나트건 라야건 미라건 타마라건간에
어떤 처녀를 데리고 나가는 습관이 있었던 것이다.
  아름다운 고장에서 자란 사람은 자기 고장의 여러 가지 매력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들이 우연한 기회에 다른 아름다운
마을을 가 보게 되면 그 새로운 곳의 새로운 곳의 새로운 매력이 눈에
띌뿐만 아니라 그들이 언제나 더불어 살아 왔던 곳의 아름다움에도
처음으로 눈이 뜨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레흐니츠에게도 쇼샤나가
야파에 도착했을 때 그가 이미 가깝게 지냈던 처녀들의 아름다움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우리는 리아.루리아와 라헬.하일페린에 관해선 이미 이야기한 바가 있다.
그들은 친구들이었지만, 라헬이 보다 머리가 빠른 편이었고, 리아는 보다
동정심이 많은 여자였다. 리아는 친구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지만 그런
대로 그녀의 두 눈은 젊음과 선량한 마음씨로 빛나고 있어서 마치 천사들의
보금자리만 같았다. 말은 그렇게 야무지지 않다고 하더라도, 듣는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해 주는 것이었다. 그들이 소풍을 가서 앉아 쉴 때 모두를
위해 식사를 마련하는 것은 리아였고, 그녀는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 몫을
가졌나를 돌봐 주고 다른 사람들의 안녕에 관심을 쓰는 나머지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것은 잊어버리는 여자였다. 라헬로 말하자면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하는 한 마디로 잘라 말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비록 과오를
저질렀다 해도, 화를 낼 수 없는 것이고, 만약 그녀가 좋은 일을 했어도
그녀는 그것 때문에 자기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아무 가식없이 이야기
할수 있는 부류의 사람이다. 그러나 이 미덕은 또한 결함이기도 하다. 왜냐
하면 모든 것이 그녀에게 달려 있고 당사자에게 의존되지 않으므로 자기를
위해서는 속수무책이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아스나트.마가르고트를 관찰해 보자. 그녀는 키로프
출신이었는데, 그녀의 부친은 사업에 실패해서, 그런 경우의 대다수
사람들은 미국으로 달아나는데 이스라엘로 달아났다고들 했다. 사업실패로
타인의 돈을 써 버린다는 것은 커다란 범법이어서 사기한 돈을 그
소유자에게 돌려 줄 때까지는 속죄가 되어지지 않는 것이며, 설사 갚는다고
해도 용서받고 완전히 죄가 씻어지는지는 의심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는 그렇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기가 한
짓을 해서[정착]이란 실제적인 문제이며, 유럽에서 갑자기 떠난다 해도
가는 곳이 반드시 미국일 필요는 없다는 걸 증명해 줌으로써 자기가
이스라엘이 큰 공헌을 한 것처럼 행동했다.
  아스나트는 리아.루리아나 라헬.하일페린처럼 키가 큰 처녀였다. 부드럽고
매끈하게 짠 초록빛이 도는 갈색 옷을 입고, 꼬인 끝부분이 무릎 밑까지
내려오는 은제 끈으로 엮은 띠를 매고 있었다. 그러나 키스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녀 곁에 두세 시간을 앉아 있으면 놀라운 일이지만 그녀를
껴안고 싶은 마음이 거의 미칠 지경으로 일게 된다. 그리고 그녀 역시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는 그 무엇이
있었다. 기껏해야 그녀의 허리띠에 드리워진 두 개의 술장식을 집어 들고,
입센의 극 따위에 대해 이야기를 계속하거나 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세상엔 정해진 완고한 습관이 있는데, 어쩌다 그 길에서 이탈하고픈 생각이
든다해도 아스나트와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녀의
강철같이 파아란 눈동자는 당신의 영혼을 올리브 열매처럼 작은 조각들로
산산이 쪼개 버리는 힘을 갖고 있다. 이 일이 한층 더 놀라운 것은,
아스나트의 화제란 모두가 현대인의 여러 문제라 할 것들로, 바로 가장
친밀감을 자아내는 것들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작은 손가락으로
그녀를 만질 수조차 없으니 말이다. 그러면 아스나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던가? 그녀는 많은 것을 원했고, 또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면서 또 많은 것을 원하고
있었다. 여름날 밤에 그녀가 리숑 러시옹까지 걸어갈 마음이 생겨 같이
가자고 초대받았다고 하자. 그래서 세 시간이나 모래 언덕을 그녀와 함께
거닐게 된다. 밤에 가서 밤에 오는 이 산책에는 나갈 때나 들어올 때나
띠의 술장식조차도 건드리지 못하게 한다.
  라야.자블로도프스키는 아스나트의 친척이었지만 키나 생김새에 있어서
그들 두 사람만큼 판이한 처녀는 또 없을 것이다. 아스나트는 큰 키에 빠른
기지를 보여 주는 얼굴이었는데, 라야는 어린애만한 키에 기지라곤 빠른
것도 느린 것도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모랫빛의 머리카락에 입술은
덜 익은 과일맛을 본 것 같고, 날개로 머리를 뒤덮는 잘못된 버릇을 가진
새와 같았다. 그녀의 친구들 중엔 그녀를 너무 이기적이라고 말하는 축도
있었고, 심술궂다고까지 말하는 축도 있었다. 그런데도 라야에게 이끌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이 두 가지의 성질, 즉 자기애와 악의가, 언제나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유우머에 감추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돌 위에 비단 스카아프를 펼치고 그 위에 앉아 있는 것을 본
누군가가 이를 이상한 짓이라 하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천만에, 내 스카프가 아니예요."
  평생을 통해 라야는 러시아 어로든 히브리 어로든 끝까지 읽은 책은 한
권도 없었다. 누구나가 다 화제에 올리는 책들까지도 끝까지 읽지 않았다.
그녀는 시험에 두 번이나 실패하고 학교를 중퇴했지만 아무런 후회도 하지
않았다.
  "결국은."
   그녀는 말하는 것이었다.
  "배운 건 잊어버리게 마련이야. 나로 말하면 처음부터 배우려는 수고를
하지 않고 잊어버리는 거지."
  그러면 도대체 이 처녀가 어떻게 레흐니츠 클럽의 일원이 된 것일까?
산다는 것은 원래가 한번 어떤 집단에 속하게 되면 다른 사람들과 아무리
달라도 그 집단에 묶이게 되는 것이다.
  미라.보르브지트스키라는 라야의 이웃이었는데, 그녀의 아버지
니우마.보르브지트스키는 예전엔 샤론 정착지의 야경원이었다. 그는
도적들까지도 몹시 무서워하는 인물로, 순찰 도중에 도적떼를 만나면 한
사람을 쳐들고 마치 도리깨질을 하듯 휘둘러 그들을 어이없게 만드는
것이었다. 미라는 라헬, 하일페린까지도 포함해서 야파에 있는 어떤 처녀
보다도 더 민첩했다. 어렸을 적 그녀의 아버지가 안장없는 말에 그녀를
타게 하고 그녀의 겁에 질린 울음에도 아랑곳 없이 그 말을 언덕 위로
달리도록 했었기 때문이었다. 미라는 여전히 안장 없는 말을 타는데 익숙해
있었고, 가끔 가다가는 마차의 끌채 사이로부터 말을 타는데 익숙해 있었고,
가끔 가다가는 마차의 끌채 사이로부터 말을 잡아타고서는 샤론까지 가기도
했다. 생김새는 소녀의 우아함을 지니고 있었지만 멋진 남자를 닮은 점이
있었다. 그녀가 어린 아이이고 그녀의 아버지가 여전히 야경원이었던 때
그들은 마릉의 변두리에 살았었는데, 그녀의 어머니는 아랍족들에 대한
방비책으로 그녀에게 남장을 시켰던 것이다. 그녀의 예의 범절은 처녀의
것이었지만 거동은 사내다운 데가 여전히 있어서 남녀 친구들에게도
한결같이 호감을 샀다.
  마지막으로 타마라.레비에 관한 이야기를 좀 해 보자. 그녀의 부친은
사고로 죽은 의사였다. 어느 장마철의 몹시도 캄캄한 밤에 그는 당나귀를
타고 정착지에 있는 한 환자를 방문하러 가고 있었다. 당나귀가 와디에
빠져 의사는 익사하고 말았다. 타마라는 큰 아파아트에서 어머님과 함께
단간방에 살고 있었다. 그 어머니는 라비의 딸로서 자기의 지체에 대한
의식은 컸지만 생계를 유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녀는 환자들을
돌보아 주었으며, 때로는 남편이 그녀에게 아무런 유산도 남기지 않고
죽었기 대문에 이제 그녀는 자기 힘으로 자신과 딸의 생계비를 벌어야 했고
딸이 양가의 다른 처녀들과 똑같은 교육을 받게 되도록은 해야 했다.
모녀는 서로 매우 사랑했지만, 그것은 또한 그들을 심각한 갈등에 빠지게
했다. 까닭은 수입이 상당한 어떤 학교의 사무장이 타마라에게 구혼을 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어머니가 이 짝을 찬성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타마라
자신은 결혼에 반대하지 않았으나 그가 비록 레흐니츠가 가르치는 학교에
좋은 지위는 가졌을망정 하필이면 이 사람과 해야 할 이유는 알 수 없었던
것이다.
  타마라의 머리카락은 잿빛의 회색이었고 그녀의 눈은 푸르렀다. 혹은
눈이 회색이었고 머리카락이 푸르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용모를
훤하게 밝혀 주고 눈을 부시도록 만드는 푸른빛 나는 광채 때문에 이 두
빛깔은 스스로 양쪽의 어느 빛깔로도 되는 것 같았다. 첫눈에 그녀는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녀의 가슴에 수선화나 카아네이션이 꽂혀
있지 않으면 그녀에게 가슴이 있는 것도 놓쳐 버리게 될 것이다. 그녀의
본명은 타마르였으나 타마라고 불리어지기를 좋아했다. 우리에게 그토록
귀여운 사람이었으니까 우린 그녀가 택한 대로 불러 주기로 하자. 그녀의
대화는 별로 현명하지는 않았다. 좀 어리석은 편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러나
그녀의 입술은 그녀의 가슴에 단 빨간 꽃이 코 끝에 껴안긴 것과 아주
흡사하게 남의 마음을 껴안아 주었다. 어느 때 한 번 레흐니츠는 그녀의
입술에 그의 입술을 갖다 대었다. 그때 그 입술은 가볍게 떨었고 보답으로
그의 입술을 스쳤을 따름이었다. 도저히 스친 것이라고도 할 수 없는
스침이었다. 하나님, 만약 그것이 키스의 그림자라면 진짜 키스는 어떠한
것입니까? 이 세상 어떠한 여자에게도 그녀의 입술과 같은 그런 입술은
없었다. 입술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손만 한번 닿아도 키스와 같았다. 그러나
그런 걸 알고 있는 사람이 야파에 있었던가? 타마라는 또한 이러한 미덕도
갖고 있었다. 그녀는 결코 불평을 한다거나 화를 내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녀는 단지 남을 우러러보며 당신이 하는 말은 무엇이건 고마운 선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코끝을 살피면서 그녀의 얼굴의
밝음이 당신을 부드러운 푸른 안개 속에 감싸도록 내맡기며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앉아 잇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레흐니츠는 단 한 번
타마라에게 키스를 하고는 그런 일을 되풀이하지 않았다. 그녀의
선생님이고 선생이 제자에게 키스를 한다는 것은 자존심이 용서하지
않았다. 비록 이런 짓을 하는 교사들이 있다 해도, 또 타마라는 이미 졸업을
하고 이젠 그의 친구들 속에 들어 있다 하더라도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레흐니츠는 키스한 것이 뉘우쳐지는 때도 있었고, 혹은 한 번 더 해보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되는 때도 있었다. 여하튼 그녀와 단 둘이 있을 기회가
생기지 않은 것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한 가지만도 아니다.
학교 사무장이 그녀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것은, 한 때의 향락을 위해
타인의 일생을 망친다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것만 해도
야곱이 그녀에 대하여 조심하는 이유가 되지만 그는 마움속에 또 하나의
이유를 숨겨 두고 있었다.

      20
  이상스러운 외마디 소리가 레흐니츠의 연상을 멈추러 제정신으로
돌아가게 했다. 그저께 밤에 호텔에 있는 새장 안에서 재코올의 울음소리를
흉내내던 앵무새가 지금은 정원에 와서 시계 치는 소리를 흉내내고 있었다.
앵무새 앞에는 흰 옷을 입고 파나마 모자를 쓴 늙은 남작이 서 있었다.
남작이 사과 하나를 내미니까 앵무새는 한쪽 다리로 딛고 서서 다른 다리를
뻗어 사과를 잡아 쪼아 먹기 시작했다.
  "도련님, 맛있어?"
하고 남작이 물었다. 앵무새는 윗주둥이를 움직이며 대답했다.
  "도련님, 맛있어?"
  "귀여운 새야."
  남작이 레흐니츠에게 말했다.
  "어떤 사냥꾼이 잡아 먹으려고 한 것을 내가 샀지. 어떤 데서는 말이야.
알겠나, 앵무새 고기를 먹는단 말이야...빌어먹을."
  그가 앵무새를 향해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하고 앵무새는 흉내냈다.
  남작은 껄껄 웃고 새에게 야단을 쳤다.
  "빌어먹을."
  그는 새한테 말했다.
  "빌어먹을, 하고 말하는 놈이 어디 있니!"
  앵무새는 소리쳐 대답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레흐니츠는 남작과 헤어져 호텔로 갔다. 이제는 영사가 낮잠에서 깨어나
심심풀이로 시가아에 불을 붙였겠지, 하고 그는 생각했다. 가보기로 하자.
아마 심심하던 판에 내가 가면 기뻐하겠지. 쇼샤나가 뭐라고 할까? 아무
말도 안 할거야, 그녀는 별로 말이 없는 성격이니까. 어떤 사람들의 침묵은
이쪽을 두렵게 한다. 그들의 마음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위대한 생각들로
가득 차고, 그 위대한 생각 때문에 말을 안 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모든 지혜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믿고, 그들
앞에서는 위축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그들의 침묵이
보통 아닌 자신에게서 나왔을 분이지. 앵무새 발톱만치도 우리보다 나을
것이 없다. 우리가 위축해 버리기 대문에 그들이 우리 위에 솟아오르는
것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를 과소 평가하는
것인가? 이건 특별히 연구해 볼 만한 문제이다. 그러나 그럴 시간적여유가
없다. 이미 네 시가 지났고, 영사는 벌써 일어나 권태에 빠져 있겠다. 나는
시간을 너무 자기 고찰에만 바쳤고, 현대극에서는 길다란 독백은 어울리지
않는다. [빌어먹을!] 저쪽에서 흘러오는, 버터로 굽는 과자 냄새가 괜찮군.
예히아의 아내는 무엇이건 기름으로 굽는단 말이야. 이곳 유대인들은
버터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고, 또 동양 사람들은 소기름보다 올리브
기름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계관의 차이 문제가 아니라, 그저
기호의 문제일 뿐이다. 마치 세파르의 선생이
[4분의 1]시간이라고 하는 대신 [1시간의 4분의 1]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4분의 1시간이나 지났는데도 나는 아직 밖에서 긴 독백을 하고
있다.
  레흐니츠는 호텔로 들어갔다. 호텔에는 아무도 없었고, 웨이터들만이
탁자를 바로 놓기도 하고 코오피를 나란히 놓기도 하고 있었다. 그는
두리번두리번하면서 걸어 들어갔다. 손님들은 한 사람도 거기에 없었다. 그
높으신 손님들은 아직 방에 들어앉아서, 아무것도 아닌 자들인 이 사람들이
마실 것과 먹을 것을 다 차려 놓을때까지 기다리고 있겠지,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아닌 자들 중의 하나다. 네게 음식을 차릴
능력은 없지만, 적어도 하나님은 남을 권태로부터 구출할 능력을 네게
주셨다.
  "도련님, 맛있어?"
하고 그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호텔 사무원이 레흐니츠를 보고
말하였다.
  "선생님께 편지가 와 있읍니다."
  "편지?"
  레흐니츠는 더듬거렸다. 갑자기 그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사무원이 편지를 가져왔다. 레흐니츠는 그것을 받아 가지고 밖으로 나왔다.
정원을 거닐다가, 나무 밑에서 발을 멈추었다. 편지를 들고 나무에 기댔다.
쇼샤나한테서 온 편지인가? 쇼샤나가 내게 뭐라고 했나보자. 편지를 뜯어
봐야지. 그러나 그가 편지를 뜯어 보니 그것은 쇼샤나에게서 온 것이
아니고 그녀의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었다. 다시금 가슴은 몹시 뛰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떤 기쁜 일을 기다리는 때의 빠른 고동이 아니라,
무언가 재난을 예상하는 자가 느끼는 그런 고동이었다.
  그는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 보았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쇼샤나가 그녀의 아버지에게 바닷가에서 있었던 일들을 모두 일러바쳐서,
그가 나한테 편지로 꾸지람을 주는 것이로군, 하고 그는 생각했다.
레흐니츠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 늙은이가 나에게 자기 식탁에서 빵
부스러기를 좀 던져 주었다고 해서, 내게 이래라 저래라 말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늙은이, 당신의 빵 부스러길 두었다가 개한테나
주시오. 나는 내 힘으로 먹고 살 수 있소. 학계에서의 내 명성도 당신이
만들어 준 것은 아니오. 빌어먹을, 돈깨나 있다는 사람들아! 그 사람들이
먹다 남긴 걸 조금만 얻어 먹어도 바로 사람을 통째로 산 줄 아는 모양이란
말이야. 영사님, 당신이 내게 해 주신 모든 것에 깊이 감사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내 영혼까지 산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당신의 따님이 나를 따를
생각이라면 나는 그녀를 곧 채어가겠읍니다.
  그는 이렇게 혼자 중얼거리면서 편지의 사연을 들여다보았다. 편지를
읽는 동안 그의 눈은 빛나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꾸짖는 것이라곤 없었고,
그 대신에 사과하는 편지였다. 영사와 그의 딸은 미리 그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떠난 것이었다. 게다가 영사는 안부와 함께 정중한
인삿말까지 적어 보낸 것이었다. 그리고 야파로 돌아오는 즉시 다시
만나자고 덧붙여 있었다. 
  레흐니츠가 그 편지를 읽은 것은 잘한 것이었다. 편지를 읽어 가자 가슴
속에 얽힌 모든 괴로움이 살졌다. 그는 정신을 다시 차리고 생각해 보았다.
이제까지 쇼샤나에게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그녀의 아버지에게 할 때에는 언제나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용감해졌다. 지금 그에게로 가서 딸을 내놓으라고 하면
깜짝 놀랄 것이다. 아니야, 따지거나 다투지 않고, 큰소리 치지도 않고,
허리를 굽히고 얼마나 쇼샤나를 사랑하는지를 그가 스스로 이해할 때까지
얌전히 행동하겠다. 만일 그녀가 맹세한 대로 일생의 반려자가 정말 되어
준다면, 행복을 알리는 천사들이 날개로 우리를 덮고 우리들의 결혼 식장을
만들어 줄 때까지 기다리겠다.
  레흐니츠는 이렇게 생각함에 따라 정신이 더 가벼워짐을 느꼈다.
아버지의 듯을 거역하면서까지 쇼샤나를 빼내어 오려고 생각하다니, 그런
짓을 할 힘이라도 가진 것처럼 참 어리석은 생각을 했구나! 그순간
레흐니츠는 자기가 원수인 줄 알고 쫓아갔다가 그 원수가 자기 친구였다는
것을 발견한 사람처럼 생각되었다. 이 겸손한 생각이 그에게 힘을 주었다.
그는 스스로를 돌이켜 보며 말했다. 이제까지도 나는 이렇게 곧잘 지내왔다.
나의 앞날도 이럴 것이고, 나는 이렇게 거쳐 나아갈 것이다.

      21
  에르리히 씨는 예루살렘에 예정했던 것보다 오래 머물렀다. 거기있는
동안에 그의 처의 제삿날이 돌아왔기 때문에 그는 성도에서 그날을
기념하고 싶었다. 그날은 즐거운 하루였다. 그는<슬픔의 벽>에서 추도의
기도를 올리고 거기 있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의연금을 주었으며, 여러
자선원들을 방문했던 것이다. 그가 본 것들중에서 흡족하게 보인 것은
마음에 접어 두었다. 나머지는 눈을 단데로 돌려, 그 도시와 그 경우를
생각해서 결점이 있어도 눈을 감아버렸다. 그는 또 햐아레이 제데크 병원을
방문하고, 거기서 어떤 의사와 사귀게 되었는데, 그 의사는 환자를 위해
자기 잠을 희생하고, 안식일이나 축제일 말고는 베개를 베는 일이 없을
정도의 신자이며, 검소한 생활비 이상의 보수는 받지 않는 사람이었다.
에르리히 시는 병원벽에 이름들이 새겨져 있고, 그 이름표마다 병원의
경영비나 환자의 간호를 위해서 돈을 기부한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고, 자기도 환자용 침대의 유지를 위한 기부금을 내기로 했다.
이것이 죽은 부인의 영혼을 위로하고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기념이 되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영사는 그 도시가 마음에 들었다. 정말 그가 자신의 눈으로 본
예루살렘은 말로만 듣던 예루살렘이나 상상해 보던 예루살렘과는 달랐다.
거기에는 없어도 되는 것이 있는 것도 많았고 있어야 좋을 것도 많았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좋을지, 또는 어떻게 진행시켜야 하는지를
실지로 잘 모르는 이사, 예루살렘은 그대로 놓아 두는 것이 제일 좋을
것이다.
  레흐니츠는 다시 야퍄 호텔에서 영사와 마주 앉았다. 날씨는 쌀쌀하고
공기는 축축했다. 그들 앞에 놓인 구리 화로에는 뜨거운 숯불이 타고
있었다. 영사는 굵은 시가아를 입에 물고서 양털 담요를무릎 위에 덮고
있었다. 때로는 시가아로, 혹은 화롯불로 양손을 따뜻하게 하면서 쬐었다.
쇼샤나는 해리 모피로 만든 외투를 입고 조금 멀리 떨어져 있었다. 숯불이
서로 속삭이고, 화로도 숯불의 묽은 빛을 반사하며 속삭이고 있었다. 방은
점점 따뜻해지고 공기도 더 건조해 갔다. 몸을 감싸는 감미롭고 노곤한
기분이 대화 속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밖의 바다에서는 먼 곳에서 우짖는
맹수의 포효처럼 파도소리가 들려 왔다. 영사는 시가아의 재를 털고 말을
했다.
  "오늘도 해변을 산보할 수가 없겠는 걸."
  그러자 레흐니츠는 얼굴을 붉혔다. 영사는 나와 쇼샤나가 같이 산보한
것을 말하는 것이나 아닌가?
  그러나 사실 영사는 그의 출발을 늦추게 한 푹풍우 몰아치는 날씨를
투덜댔을 뿐이다. 게다가 그는 레흐니츠년 이상이나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돌아다니다 온 후라, 여행하지 않아도 좋게 된 것이 기뻤다. 가본 곳은 셀
수도 없고 이름들을 기억할 수도 없을 만큼 많았다. 그가 방문한 곳마다
그곳의 이름을 수첩에 적어 두지 않았더라면 어디를 갔었고 어디를 안
갔었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쇼샤나도 지체하게 된 것을 기뻐했다. 그녀는
많은 사진을 찍었고 지체하게 된 것을 모아 와서 이제 그것들을 정리하고
싶었다.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던 날 그녀는 몹시 지쳐 있었다. 밥도먹다 말고
그녀는 자기 방으로 가서 자리에 누웠다. 그러나 다음날 저녁에는 식사를
오래 끌었다. 청하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사진첩과 기념품을 가져다가
야곱에게 보여 주었다. 그녀는 그가 물건 하나하나를 알아보고, 꼭 알맞는
이름을 대는 것을 보고 놀랐고 그보다도 그녀가 골라 모은 물건들에 진지한
관심을 가져 주는 것이 더욱 즐거웠다. 그것이 고마워서 그녀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그에게 들려 줌으로써 그것을 갚고 싶었다. 그날 밤 쇼샤나는
야곱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 중의 하나는 이러하였다.
  "옛날에 나와 결혼하고 싶어한 왕이 한 분 있었어요. 이 왕은 종려나무
잎사귀로 만든 훌륭한 궁전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리구 부인이 둘이나
있었구요. 이 두 부인들 가운데서 하나는 귓바퀴에 정어리 깡통을
장식용으로 달고 있었지요. 또 한 부인은 내가 야파에 돌아오던 날 당신과
함께 걷고 있던 처녀하고 꼭 같이 생겼어요. 당신이 두 소녀들과 거닐고
있었고, 어느 소녀가 어느 소녀인지 모르기 때문에, 둘 중에서 누가 왕의
부인처럼 생겼는지 말할 수가 없어요."
  영사가 절반은 농담, 절반은 놀랍다는 듯이 소리쳤다.
  "자네도 처녀들을 데리고 산보를 다 가나? 나는 학자들은 전혀 연구에만
파묻혀 있는 줄 알았지! 그렇지 않다면 학문이란 경쟁자를 보아도 질투하지
않는 속편한 마누라 같단 말인가? 쇼샤나야, 그 두 처녀들이 예쁘더냐?"
  쇼샤나는 야곱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그건 당신이 말해야 해요."
  "만일 말이다."
  그녀의 아버지가 말을 받았다.
  "야곱이 제 자존심을 생각한다면, 그 처녀들 이상으로 아름다운 여지는
없다고 대답할 거고, 만일 네 체면을 생각한다면 그 처녀들이 예쁘지
않다고 말할 게다. 그러니 얘, 네가 말해 보아라. 그 처녀들이 예쁘더냐?"
  쇼샤나가 대답했다.
  "레흐니츠 박사가 예쁘다고 생각하시는 걸요."
  "그럴 어떻게 아니?"
  영사가 물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녀들을 데리고 와서 저한테 과시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과시하려고 데리고 왔던 것은 아닙니다."
하고 레흐니츠는 주장했다.
  "아니라고요?"
  "아니지요! 사실을 이렇게 된 겁니다. 그날 오후에 이곳을 떠난 후 길에서
우연 그녀들을 만나서 함께 걸었지요. 그리고 만찬에 초대 받았으면서도
언제 시작하는지 알지 못해서 웨이터에게 물어보러 갔었어요. 그래서
그녀들이 저와 함께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제게 주신 꽃은 그녀들 중에 하나가 준 겁니까, 둘이 다 준
겁니까?"
  "당신의 얘기가 부분적으로는 맞아요."
  "그녀들은 당신에게 꽃을 갖다 주려고 나온 것이지요. 그러나 내가
당신에게 실지로 준 것은 호텔의 정원사에게서 가져온 것입니다."
  "그녀들은 제가 오늘만 여기 있고 내일은 떠날 줄로 알았지요?"
  "그렇게 생각하기 쉽지요."
  "그랬다면 그녀들의 생각은 틀렸어요."
  "정말 틀렸군요."
하고 야곱이 대답했지만, 기뻐해야 할지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쇼샤나는
말을 이었다.
  "아버지 온 겨울을 여기서 지내려고 하셔요. 아빠, 그렇지요?"
영사는 무언가 물어 볼 것이 있다는 듯이 딸을 들여다보더니 동의의 표시로
머리를 끄덕였다.
  "아가, 그렇다. 여기서 겨울을 지낼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생각해 보고
있는 중이다. 너희들은 유럽의 겨울철이 얼마나 엄격한지 알지 못하지만,
나는 따뜻한 나라에 익숙해지니 이젠 더 견디기 어려워졌어."
  쇼샤나는 식탁에서 일어나 아버지의 머리를 양 손을 감싸 쥐고 이마에
입맞추었다.
  "아빠, 최고야!"
그녀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22
  그날 오후, 레흐니츠는 우편국에 갔다가 도중에서 시장을 걷고 있는
쇼샤나와 만났다. 그녀는 양팔에 도자기를 잔뜩 안고 있었다. 가는 곳마다
그곳의 토산물을 사는 것이 습관인 것 같아, 이곳 야퍄에서도 여러 가지
물병들과 도자기를 샀다. 그것들을 다 무엇에 쓸까? 그 중에 몇 개는
가지고 갈지 모르지만, 모두 다 호텔에 놓아 두고 갈지도 모른다. 왜냐 하면
틀림없이 더 마음에 드는 것을 찾아 낼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들고 갈까?"
하고 야곱이 물었다. 쇼샤나는 잠깐 동안 그를 바라보더니 물병 두개를
내밀었다.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깨어질 테면 깨어지라고 그러지요. 이런게 이
시장에 수두룩한 걸요."
  "그렇다면 내게 더 줘. 깨지지 않도록 조심할 테니."
하고 야곱이 말하였다. 그들은 함께 시장 밖에서 마차를 타고 떠났다.
쇼샤나가 말했다.
  "저는 마차가, 걸어다니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믿었는데, 갑자기 당신이 절 마차에 태우니까, 이제는 말과 마차가 무섭지
않아졌어요. 그런데 왜 놀란 얼굴을 해요?"
  "나는 정말 놀랐어. 그렇게 여행에 익숙하면서 마차가 길가는 데에
방해가 된다고 하니."
  "나는 먼 여행에 익숙해 있어서 가까운 거리도 차를 타면 더 쉽게 갈 수
있다는 것을 잊어버렸지요."
  "하자만 먼 여행보다 이 짧은 거리가 더 피로해 보이는데."
  "큰 것은 사람의 힘에 크게 보탬이 돼요. 오, 저 아름다운 종려나무를
봐요! 몇 구룬가?-여덟? 아홉인가요?"
  "아홉 그루이지."
하고 야곱이 대답했다.
  "나는 생전 저렇게 아름다운 종려나무를 본 적이 없어요."
  그는 그녀에게 그전에 보여 준 일이 있지 않느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다시 생각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열대 지방에서 이보다 더 훌륭한 것을 보았을 텐데?"
  "더 훌륭한 것을요? 생전 못 보았어요."
하고 그녀는 되풀이했다.
  "마부 아저씨, 잠깐 멈춰 줘요-내 정신이 어떻게 된 건가? 전에 꼭 한 번
본 일이 있군요! 꿈속에서가 아니라, 야곱, 깨어 있을 때예요!"
  그녀는 말하면서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마부에게 갑시다, 하고 이르고는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호텔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야곱에게 말하였다.
  "괜찮으면 정원으로 같이 가요. 마부더러 도자기를 호텔에 내려 놓고
가라고 그래요. 그이한테 어느 나라 말로 말하였지요? 히브리어지요?
그런데 히브리어는 성경에 있는 말 아니예요? 그렇다면 이 마부도 성경에
있는 말을 하겠군요. 야곱, 당신도 그렇구요, 이곳에 사는 당신들은 얼마나
훌륭할까! 이 벤치에 앉아요. 당신이 나와 뜻을 같이하리라는 것을 알아요.
오늘 제게 얼마나 많을 일을 해 주었는지. 제 도자기들을 들어다 주었고,
마차에 태워 주었고, 여기까지 데려다 주었고, 사람들에게 착한 일을 한다는
것은 참 좋은 거예요. 우리들도 착해야 해요. 악하지 않아야 해요. 정말
나는 그렇지는 않아요. 나는 너무 게을러서 사람들이 나를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을 고쳐 줄 수가 없어요."
  야곱이 말하였다.
  "당신을 나쁜 사람이라고 할 사람은 결코 없겠지."
  "당신은 결코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겠지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떻게 알아요?"
  "나 자신을 기준으로 해서 세상 사람들을 판단하지."
  "하지만 모든 사람들을 당신 자신의 표준으로 평가한다는 것은 자만심이
아닐까요?"
  "그와는 정반대지. 오히려 그것은 미덕이지.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당신의 잘못된 생각을 고쳐 줄 수가 있으니까."
  "꼭 당신 아버지같이 말을 하는군. 그 어른은 인간이 서로 다투어야 할
것이 무어냐고 물으시거든."
  "나는 지금껏 아무하고도 다투어 본 일이 없어요."
  "당신은 다툴 필요가 없지요. 사람들이 모두 당신이 소원하는 대로
하려고 몰려드는 판이니까."
  "사람들 모두가 내 소원을 들어 준다는 거지요? 나를 빼놓고 말이지요.
나는 이따금 나 자신이 의지라고는 전혀 없고,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이건
아무런 이유도 없이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되는 때가 있어요. 나는
단추의 수를 세어 보고 일에 결정을 내리는 어린애보다 더 경박한
셈이예요. 나 같은 처녀에게 필요한 것이 뭐겠어요?"
  여급사가 조그마한 식탁을 차려 놓고 물었다.
  "뭘 가져올까요?"
  "아무것도 필요없어요."
하고 쇼샤나가 말하였다.
  "쇼샤나, 그것봐요. 당신은 굳센 의지를 가지고 있어. 아무것도 먹고 실지
않으니까 아무것
도 필요치 않다고 바로 말하지."
하고 야곱이 말했다.
  쇼샤나는 얼굴을 붉혔다.
  "나는 정말 꾸지람을 들어도 할 수 없어요. 당신이 무얼 좀 들고
싶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전혀 못했어요. 뭘 들고 싶지 않아요? 그럼 그냥
앉아서 얘기해요."
  쇼샤나가 야파에 온 이후 이것이 야곱과 쇼샤나가 만난 가장 즐거운
자리였다. 이 자리는 새로운 것과 오래 된 생각들이 함께 섞여져 있었다.
새롭다는 것은, 그녀와 함께 정원에 앉아 본 것은 이것이 처음이고, 오래 된
것이라 함은 그들이 어렸을 때에 이와같이 그녀의 집 정원에 함께 앉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착한 신은 우리에게 가끔 분에 넘치는 혜택을
주시는 법이다. 여기 푸른 나뭇가지 사이에 야곱과 쇼샤나가 마주 않아
있다. 때는 바야흐로 겨울이고, 그들의 어린 시절의 정원은 눈에 덮여
있으며 연못에는 얼음이 깔려 있다. 이제는 유년기를 벗어나 서로 성장한
지금 나비를 쫓고 화환을 엮는 마음씨는 인제 두 사람에게는 없다. 그들은
자기들 이야기와 바깥 세상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 바깥 세상은 그들의
세상에 속하는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대로는 착한 신들이 죽음을
타고난 인간들을 순간 동안에 영원을 보도록 해 준다. 그러면 이 시간이
끝이 없고 한이 없도록 계속하게 해 달라고 신들에게 빌어 보자.
  쇼샤나는 섬세한 손들을 타자 위에 올려 놓았다. 야곱은 그녀의 어머니가
식탁에 손들을 얹어 놓았을 때에 들여다보곤 하던 것처럼 그녀의 손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럴 때면 그 손에 입맞추고 싶어지는 충동을 느꼈다.
인간의 추억들은 가까이, 때로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지금 야곱은
그가 우연히 아인 로겔의 있는 일류신의 집에 갔을 때를 회상했다. 그때
일류신은 짐승의 가죽을 널빤지 위에 펼치고 있었다. 그는 일을 하는
도중에 그의 손들을 이 손들처럼 펼치고 있었다. 야곱이 자기의 생각에
놀라고 있을 때에 앵무새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빌어먹을!"
쇼샤나는 파르르 떨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야곱이 웃으며,
  "앵무새가 그랬을 뿐이야."
하고 말했다.
  "지금 마악."
그는 말을 계속했다.
  "나는 일류신이라는 박제사를 생각하고 있었다. 저 새가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아주 이상한 데가 있어. 내가 일류신을
생각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 저 앵무새가 [빌어먹을]이라고 소리를
쳤거든."
  "일류신이라고요?"
  "아니야, 일류신이야."
  쇼샤나는 말하였다.
  "어제 저녁에 당신의 여자 친구들이 저에게 주라고 당신한테 가져온
꽃들을 딴 것으로 바꾸었다고 하셨는데, 그걸 바꾼 건 무슨 뜻이지요?"
  야곱은 볼을 붉혔으나 쇼샤나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있었다.
  "무슨 뜻이냐구?"
하고 그는 되물었다.
  쇼샤나는 눈을 여전히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더 나은 꽃이 있길래 바꿨지."
  "그럴듯한 대답이군요. 이젠 진짜 이유를 말해 주어요. 이 다음에 알게
되겠지요. 아인 로겔에 있는 박제사 이름이 뭐라고 하였지요?"
  "그의 이름은 일류신이지."
  쇼샤나는 눈을 떴다.
  "그렇지, 일류신."  
  "그런데 일류신이 우리하고 무슨 관계가 있어?"
하고 야곱이 물었다.
  "당신이 그 사람 이야기를 한 이상 이름이 무언지 알고 싶었지요. 이젠
알았으니까 그 사람 이야기는 안 해도 돼요. 가축하고 야수들은-이집트에
있는 미이라를 제외하고는-어떤 사람에게도 허락되지 않는 특권을 누릴 수
있지요. 담배 안 피우셔요? 급사를 불러서 담배를 가져 오라고 하지요.
주민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 나라, 이집트의 지혜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이집트산 궐련을 가져오기로 해요."
  그리고는 답배 부탁을 하려던 것은 전혀 잊어버리고 쇼샤나는 말을
이었다.
  "우리의 이 세상에서의 삶은 그림자 같은 것이예요. 그리고 우리가 오래
살았대야 고생만 하는거죠. 모든 고난과 수고에서 해방되어 땅 속에 파묻혀
있는 미이라들은 얼마나 다행일까. 내가 그들 중에 하나처럼 될 수
있었다면!"
쇼샤나는 눈을 크게 떠서 이 세상의 고통에서 해방되어, 휴식을 갈망하는
듯한 눈초리를 했다.
  "당신 어머니 장례식이 있던 날부터 나는 당신의 모습을 본 일이 없어."
하고 야곱이 말하였다.
  "그리고 바로 그 날에도 당신은 보이지 않았어. 쇼샤나는 이 세상과는
아주 먼 것처럼 보였어."
  "야곱, 아니예요, 그때 나는 세상이 나에게 멀리 덜어져 있는 것처럼
느꼈어요. 그리고 지금 나는 아직도 세상의 일부가 아닌 채로 여기 있는
거예요."
  "그때 이후로 당신은 조금도 행복하지 못했어?"
  쇼샤나는 말도 하지 않았고 움직이지고 않았다. 건너다 보던 레흐니츠는
그녀의 슬픔을 이해했다. 그는 말을 하려고 했으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다. 주저하면서 그는 말하였다.
  "쇼샤나, 슬픈 일이 있나? 무엇 대문에 그리?"
  그녀는 깜짝 놀라 제정신으로 돌아갔다.
  "야곱, 무얼 물었지요?"
  "무엇이 당신을 그렇게 슬프게 하느냐고 물었어."
  쇼샤나는 웃었다.
  "당신은, 한 가지 이유밖에는 없다는 듯이, [무엇이냐?]고 묻는군요.
이유는 많이 있어요. 그리고 하나하나가 슬프게, 아주 참 슬프게 하는
거예요."
  "왜 그럴까?"
  "저도 모르겠어요."
그녀는 말을 하다가 멈추고 침묵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당신은, 아니 우리 둘은 아직 젊고 장래가 얼마든지 있어."
  "하지만 우리 앞에 놓인 그 장래가 우리 뒤로 지나간 과거보다
나으리라고 당신은 생각하세요?"
  "그것에 관해선 생각해 보지 않았어."
  "저도 안 해 봤어요."
  "그럼 어떠한 근거에서 그런 말을 했어?

  "내가 뭐라고 그랬지요?"
  "아까 말했었지 않아."
  "[사람의 속에는 심령이 있고 전능자의 기운이 사람에게 총명을
주시니라.]고요. 그저 뜻없이 해 본 소리예요."
하고 쇼샤나는 말했다.
  야곱도 기문이 우울해졌다. 이것이 나의 아내가 되려고 하는 처녀로구나
하고 는 생각하였다. 꾸짖는 눈길로 그녀를 보고 또 생각했다. 이 처녀는
나와 결혼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깊이 생각해 보니 그녀 없이는 온
세상이 암담해지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자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 왔다. 야곱은 몸을 떨었다.
 "사람들이 오는가 보군!"
쇼샤나가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하였다.
  "아빠하고 노 남작하고예요."
가까이 오는 발소리와 함께 영사는 상스럽게 웃음을 터뜨렸다. 늙은 남작이
그에게 상스러운 이야기를 해 주었음이 틀림없었다. 웃음소리는 야곱의
귀에 거슬렸다. 그는 항상 영사를 점잖은 사람으로 알아왔다. 그런데 지금은
경박하게 소리 높이 웃고 있지 않은가. 쇼샤나가 일어서며 말하였다. 
  "가요."
  그들은 함께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린 소녀 하나가 손에 바구니를
들고 가까이 왔다. 야곱이 그 소녀를 향해서
  "너 여기서 무얼 하고 있니?"
하고 물었다.
  "우리 엄마가 레몬을 사 오랬어요."
그는 몸을 굽혀 그 소녀를 공중으로 안아올렸다.
  "너를 바구니와 함께 홀랑 데려갈까 보다. 만일 내가 너를 데려 가면
너의 엄마가 뭐라고 그럴까?"
어린이는 슬프게 대답했다.
  "그럼 엄마는 외로와하실 거야."
야곱은 웃었다.
  "너의 엄마한테 네가 영리한 소녀라고 그래라."
  "네, 엄마한테 얘기할께요."
소녀가 대답했다.
  "내가 가르치는 여자의 동생이지."
  "당신하고 이 정원에서 같이 거닐던 처녀 중의 한 사람인 말인가요?"
  야곱은 잠깐 주저하다가
  "당신이 그 두 처녀들을 보니까 어때 보였어?"
  "참 예쁘게 생겼어요."
하고 쇼샤나가 대답하였다.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는걸."
  "나는 진심을 말했을 뿐이예요. 하지만 당신에게는 그 외에도 친구들이
있겠지요, 그렇지요? 그분들 얘기좀 해 주세요."
  야곱은 그녀에게 이야기를 들려 주기 시작하였다. 그가 타마라의
이모저모를 이야기하기에 이르자, 쇼샤나는 그를 천천히 들여다 보았다.
  두 노인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남작은 배를 쥐고 웃고 있었다. 이번에는
영사가 더 짜릿한 이야기를 해서 남작의 이야기를 능가한 듯 싶었다.
  "너희 둘이 여기 있구나."
하고 영사가 말하였다.
  "녜."
  쇼샤나가 대답하고는 야곱이 마차를 불러서 자기를 호텔로 데리고 돌아온
친절을 칭찬하기 시작하였다.
  "좋은 반려자를 발견한 자에게 행복이 있을지니라."
남작이 이렇게 말하고 야곱에게 호의적인 시선을 보냈다.
  "쇼샤나, 너는 춥지 않으냐?"
  "아니요, 너무 춥지도 않고 더웁지도 않아요. 아빠, 저는 아주 기분이
좋아요."
  영사는 잠깐 동안 딸을 바라보고 있더니 남작과 함께 가버렸다. 쇼샤나의
제의로 두 사람은 다시 함께 앉았다.
  "한 번은."
하고 쇼샤나가 말을 시작했다.
  "내가 죽은 꿈을 꾸었어요. 행복하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내 몸은 사람 사는 세상에서 생각할 수 없는 아주 편안한 감각을 느꼈어요.
그것은 형언할 수 없이 좋은 느낌이어서 나는 아무것도 원치 않았고
요구하지도 않았어요. 그것은 마치 내가 끝없는 푸른 허공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다음날 아침에 저는 어떤 책을 펴고
거기서 아무도 자기가 죽은 꿈을 꾸지 않는다는 것을 읽었어요. 만약
그렇다면 아마도 그것이 꿈이 아니라 세상에 있었던 일인가 봐요. 하지만
그렇다면 제가 죽은 뒤에 어떻게 살아있어요? 야곱, 저에게는 수수께끼예요.
당신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믿으셔요?"
  "아니, 죽은 사람의 부활이란 것을 나는 믿지 않지."
하고 야곱이 말하였다.
  "물론이라는 말 하지 마세요. 당신의 물론이라는 말을 들으면 저는
눈물이 나와요."
그녀는 말하면서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쇼샤나는 그녀가 말한 푸른 하늘 속을 헤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녀의 야곱의 눈을 마주 바라보았다. 그녀는 손수건을
꺼내서 눈을 씻고 다시 눈을 떠서 절대적인 애정을 담아서 그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에 그녀가 말하였다.
  "내가 눈을 감을 테니, 야곱, 내 눈에 키스해 줘요."
  야곱 자신의 눈에도 눈물이 괴었다. 눈물이 괸 채 그는 입술을 그녀의
젖은 눈썹에 갖다 댔다.

      23
  행복한 일은 가끔 뜻하지 않게 찾아오는 법이다. 레흐니츠의 경우도
그러하였다. 이제까지 레흐니츠와 해초의 표본을 교환한 바 있는 뉴욕의
어느 노학자가 그에게 대학의 어떤 지위를 하나 마련해 보려고 나선
것이다. 이 제안이 받아들여져 레흐니츠는 그곳으로부터 초청장을 받았다.
이미 높은 명성을 얻기는 했지만 레흐니츠는 자기가 아직 젊었고 그
분야에서 자기보다 우수한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초청을 대학에서 받을 줄은 예상하지 못하였다.
  그날 아침 그는 침대에 누워서 반쯤 깨어 있었다. 그의 생각들은 여러
방향으로 달리고 있어써 어디로 향해 가는건지 자기 자신도 알수 없었다.
사람의 몸이 움 직이지 않고 마음도 쉬고 있는 때가 있는가 하면, 정신이
엇갈리어 여러 가지 생각으로 흐트러질 때도 있다. 한편 몸이 가만히
있는데 마음은 안정을 얻지 못하고, 또는 마음은 분주히 돌아다녀도 아무런
생각도 가져오지 못하는 때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두 가지 상태가
한꺼번에 겹치는 때도 있는데 그럴 때면 마음은 이쪽저쪽으로 방황하여
몸은 가만히 있는데도 몸이 편안하지 않고 마음속에는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레흐니츠는 침대에서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일어나도 아무 소용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아무런 이익도
없는 이런 무감각 상태에 심신을 내어 맡기고 있을 대에 누군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뛰어 일어나서 문을 열었다. 거기에는
우체부가 편지를 가지고와 있었다. 레흐니츠는 중요한 일을 훼방당한
것처럼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그 편지를 받았다. 우체부는 편지 주머니를
어깨에 똑바로 둘러메고 가 버렸다. 한편 레흐니츠는 편지를 읽었다. 이것은
확실히 좋은 소식이었다. 설혹 그가 교수직의 임명을 예기하고 있었더라도
아주 좋은 소식임에 틀림없었다. 하물며 이런 소식이 갑자기 왔을 때에는
그 기쁨이 몇 배 컸다.
  레흐니츠는 자기에게 어떠한 은혜가 베풀어지면 그때마다 때로는 행복의
신들에게, 때로는 유일하신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렸다. 이번에는 그는
잠자코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 그의 마음을
어둡게 한 것이 그것이 무엇이었던간에,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는 옷을 갈아입고 자기보다 영어를 잘 하는 사람을 찾아가려고 나섰다.
편지의 사연이 무엇인지를 이미 알았으니까 실은 그럴 필요는 없었다. 그
사람도 자기가 이해하고 있는 이사의 것을 말해 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는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레흐니츠에게 손을 내밀면서
  "축하합니다. 교수님!"
하고 말하였다.
  아마도 레흐니츠는 그 경우를 당해서보다 그 사람의 언행을 보고 더
놀랐을 것이다. 도 그리고 아마도 레흐니츠 자신보다 그 사람이 더
이소식을 놀랍게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날이 다 가기 전에 온 야퍄
사람들이, 학교에서 가르치던 한 젊은 교사가 이제까지 들어 보지도 못한
명예를 얻었다는 것을 알았다. 왜냐 하면 그때만 해도 일반 사람들이
학문상의 명예를 우러러보았기 때문이고, 게다가 그 명예에 알맞는 봉급이
딸려 있어서 더욱 그러하였다. 상당한 학자이면서도 대학 강사도 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가운데서 단지 교사에 지나지 않는 한 청년이
일류대학 교수로 일약 발탁되었다는 것이다.
  레흐니츠의 시대에는 여러 학자들이 이미 이스라엘 땅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중에는 성지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즉, 순수한
학문의 분야와는 직접 관계 없는 민족주의 사상, 혹은 종교적 또는
사회주의적 사상을 위하여 하는 이차적인 것이었다. 그들 주의 몇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하고 그들의 의견은 세상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것도 새로운 학자들이 맨 앞에 나설 때까지의 일이었다.
레흐니츠에 있어서는 그의 연구를 다른 것에다 종속시키는 일은 없었다.
그는 오직 순수한 연구만을 위해서 애쓰며 수고하였다. 그에게는
춘하추동이 다 똑같았다. 바깥의 폭풍우나 폭염이 그를 멈추게 하지는
못하였다. 그는 야파의 근해에서 해초를 수집했을 뿐만 아니라, 하이파,
아코, 하데라, 카에사레아 등의 근해에서도 수집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레흐니츠가 이 지방에 같은 전문 분야에 흥미를 가진 학자가 없어서 단지
혼자서 그의 연구를 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 고립 상태는 잘못하면
연구자의 기를 꺾는 수도 있지만 참된 학자에게는 그것이 오히려 축복이
될수도 있다 왜냐 하면 만약에 그가 새로운 발견을 하면 그 의의를 혼자서
자기 머리에 접어 두면 되는 것이고 쓸데없는 토론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때문이다. 젊은이의 체력, 우수한 학식, 분별 있는 눈으로 레흐니츠는
연구하고 조사하고, 미세한 사항들과 일반적인 원리들을 아울러 집성해
이들로부터 완전한 체계를 구성하였다. 그 관찰력에 못지 않게 발견한 것을
글로 표현하는 능력에 있어서도 그는 뛰어났다. 그의 <키레네 해초의
생태에 관하여>가, 그리고 더우기 그의 군생 해초에 관한 연구가 그의
명성을 떨치게 했다. 그리고 생물학자와 식물학자의 석상에서 발표자
대부분이 그의 이름을 언급하였고, 그와 견해을 달리하는 학자들도 그에게
최대한의 찬사를 보냈다.
  번잡한 야파는 그 번잡함을 더해 갔다. 대학교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들까지도 대학교수에 임명된 이 젊은 철학박사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레흐니츠와 만나면 아는 사람이건 아니건 멈춰서서 그에게 축하를
드렸다. 그의 친지들은 그를 초대하여 그 일을 치하하고 축배를 올렸으며,
어디를 가나 축일과 같은 호화판상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또한, 사람들이 무슨 일을 했건 그것은 모두 학문을 통해서 한 것임을 알아
두어야 한다. 딸을 가진 부모들은 레흐니츠가 이제는 교수로까지
출세했으니 영사가 그를 결코놓아 보낼 리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 딸들 자신이 쇼샤나 에르리하기 야파에 오던 날부터
레흐니츠가 발을 끊었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지금은 더욱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에 대한 친밀감은
지금까지와 다르지 않았다. 리아는 첫날 에르리히네 처녀한테 주라고 전한
것과 같은 꽃을 보내 주었다. 타마라는 배처럼 생긴 과자를 구워서 그
위에다 설탕으로 만든 작은 미국 국기를 꽂아 그에게 주었다.
라헬.하일페린도 그에게 일부러 축하 편지를 써 보냈다. 그러나 이것은
라헬에겐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말은 유창 하게 할 수 있었지만 막상
앉아서 편지를 쓰려고 하니까 첫 구절에서 벌써 막히고 말았다. <나의
친애하는 선생님>이라고 해야 한, 아니면 <친애하는 레흐니츠 박사>,
아니면 <나의 매우 친애하는 친구 레흐니츠 씨>
  레흐니츠에게 있어서는 사람들이 호의를 보여 주는 것에 감동을 받았다.
그에게 원한 품고 있었던 학교 사무장까지도 이것이 자기의 일이기나 한
것처럼 그의 출세를 기뻐해 주는 것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레흐니츠의
학교 동료들은 그의 출세를 기뻐했다. 어떤 의미로는 그들은 동료중의 한
사람인 레흐니츠가 이렇게 명예를 얻은 것을 즐거워했고 다른 의미로는
그의 명예는 곧 자신들의 명예라고 즐거워하였다. 니이체 이래 이렇게 젊은
나이로 대학교수로서 임명된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이기 때문이 이 명예가
얼마나 큰 것인가는 상상하고도 남는 일이었다.
  레흐니츠는 새로 취임하는 데에 관한 대부분의 사무를 시간이 해결하게끔
미루어 두었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상시의 생활로 되돌와왔고,
다만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전에는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던 사물을
보살피게 되었다.

     24
  레흐니츠는 쇼샤나의 아버지가 둘 사이에 무엇이 오고 갔는지를 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쇼샤나 같은 처녀는 자기에게 생긴 것은 감추어 둘
수 없는 성미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가 사실의 진상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지는 의심스러운 일이었다. 쇼샤나의 시야는 그의 시야와는
달라서, 그녀는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자기 머릿속에 그린 대로만
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찌 되었 건 야곱은 쇼샤나와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그에게 말할 적당한 계기를 찾지 못해서 유감이었으나
한편으로는 좀 다행스럽기도 하였다. 영사가 그를 꾸지람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는 영사와 털어놓고 이야기할 계기를 찾지 못한 것과 꼭 마찬가지로
쇼샤나에게 말을 걸어 볼 기회가 발견되지 않았다. 그녀가 그를 피한 것은
아니지만 명백히 호의를 보인 것은 아니었다. 가끔 그녀가 그에게 선의를
가졌더라도 터놓고 이야기할 기회는 주지 않았다. 어째서 쇼샤나는 그를
이렇게 교묘히 멀리하는 것일까? 자기 족에서도 어째서 말을 할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일까? 그것은 다만 그들이 함께 있을 때에는 대화가 요점에
이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와 헤어질 때가 되면 나는 어떻게 해야 된, 어떻게 해야 되나를
자문하면서 우두커니 서 있을 때가 반복되었다. 그러나 이 자문에 대하여
아무런 해답이 떠오르지 않았으므로 그는 이 문제를 시간이 해결할 문제로
여겨 버렸다.
  레흐니츠는 남달리 수동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이 자기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쇼샤나가 자기 몫의 역할을 할
대까지 기다리기로 하였다.
  영사와 그의 딸은 귀국하지 않았다. 반대로 그들은 자리잡고 살 작정임이
확실해졌다. 복덕방들이 아파트와 주택의 도면을 들고 출입하기 시작했다.
레흐니츠는 그런 사람들을 보자 창피한 생각이 들었다. 전에는 그는 영사
앞에서 이스라엘의 사람을 극구 자랑했었지만 이제는 정신적인 중심지에
속하지 않는 유대인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영사는 그 사람들을 책망하지 않았다. 사람이 먹고 살아야 하는
이상 이 가난한 나라에서 그 불쌍한 사람들이 달리 무얼 해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조그만 이익이 올 것 같으면 그들은 하고 싶어서건
아니건간에 말을 둘러치기도 하고 거짓말도 하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 영사와 그의 딸은 호텔에 머물었다. 레흐니츠는 일주일에
두세 번씩 그들의 초대를 받아 때로는 점심을, 때로는 저녁을 같이하였다.
쇼샤나가 참석하지 않았을 때에는 그녀의 아버지가 야곱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애는 피곤한 것 같아. 머리가 아프대."
  그의 어조는 말뜻보다 더 서글펐다.
  어느 날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세 사람이 함께 테이블에 둘러앉아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쇼샤나가 이야기 도중에 갑자기 말을 끊더니 그만
잠들어 버린 것이다. 처음에 레흐니츠는 그녀가 이야기 도중에 흔히
그러듯이 그저 눈을 감았을 뿐이거니 하였다. 그러나 그는 정말 잠자고
있는 것을 알았다. 다음날 레흐니츠는 늙은 의사 호프만이 에르리히 씨와
함께 호텔에서 걸어 나오는 것을 보았다. 의사가 작별하고 간 뒤에 영사는
레흐니츠를 알아보았다.
  "자네 왔군."
하고 말하더니, 이어
  "앉게 야곱, 앉게."
하고는,
  "오늘은 쇼샤나 없이 우리끼리 식사하세 그애는 머리가 아파."
  영사는 전에도 여러 번 딸을 참석시키지 않고 식사를 했는데도, 마치
이것이 새로운 일처럼, 또 새로운 만큼 괴로운 것처럼 행동했다.
  식사를 하면서도 영사는 쇼샤나가 자리에 없기 때문에 손님 대접두 몫을
할 의무가 있는 것처럼 야곱을 대접하는 데에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식사를 마치자 그는 야곱을 끌고 식당 끝에 있는 소파로 가서 미국과 뉴욕,
그가 부임하여 갈 대학, 그리고 빌헬름 황제의 대학 교수 교환 계획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전에 물어 본 일이 없었는데, 자네 어떻게 되어서 그 분야를 전공하게
되었나?"
하고 영사가 물었다.
  "저는 처음에 식물학을 공부하고 있다가, 식물학에서 해양식물을
연구하게 되었지요. 말하자면 고등식물에서 하등식물로 좁혀 간 셈이지요.
그래서 해초를 연구하게 된 것입니다."
  야곱은 이렇게 말하면서도 거기에는 이 밖에도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런데 이 해초들도 병이 있나?"
하고 영사가 물었다.
  "이 세상 생물 가운데서 병이 안 걸리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읍니다."
  갑자기 야곱의 눈이 놀라움으로 둥그래졌다. 그가 마주 보고 있던 사람
뒤에 새로운 한 폭의 경치가 펼쳐져 있지 않는가. 전에는 본 일이 없는
것을 포착하려고 애쓰는 화가와 같은 심정이었다. 영사의 정원에 있던
연못이 그의 기억속으로 되살아 왔다. 그 연못에서 잘던 수초가 그를
매혹시키고 놀라와 하게 했던 것이다. 결국 바로 그때부터 그의 마음이
해초에 끌린 것이나 아닌지? 그가 처음 쇼샤나와 함께 그 연못으로 들어가
젖은 수초를 건져낸 지 이십 년 이상이나 지났다. 이상한 것은 그 이십 년
동안 그때의 일이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는 일이다. 그 순간 그의 눈에는
그와 똑같은 둥근 연못이 관목과 화초가 우거진 정원 가운데서 있고,
쇼샤나가 꽃을 따서 화환을 만들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그러자 갑자기
쇼샤나가 연못 속으로 뛰어들어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생각할 사이도
없이 그녀는 다시 떠올라 왔다. 인어처럼 온통 젖은 해초로 뒤덮여 있었고,
머리카락에서는 물이 줄줄 흘러 내렸다. 그녀의 머리카락에 생각이 미치자
그에게는 또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바로 그날, 쇼샤나가 제 머리카락
하나와 야곱의 머리카락 하나를 잘라서 한데 섞어 태운 재를 함께 먹으면서
서로의 사랑을 지킬 것을 맹세했던 것이다. 쇼샤나가 그녀의 머리카락과
자기의 머리카락을 섞어 태운 재처럼 그들이 맹세한 그날과 그녀가 그에게
그때의 일을 생각나게 해 주던 바닷가에서의 그날이 합쳐서 하나가 되었다.
야곱이 회상에 잠겨 앉아 있으려니까 영사는 회중시계를 꺼내며 말하였다.
  "자네도 피곤한 것 같군. 사양할 필요는 없네. 자네 같은 젊은 사람은
잠이 중요하지."
  야곱이 집으로 돌아가려고 일어서자 영사는 쫓아오듯 말하였다.
  "난 여기 오래 머물지 않게 될 것 같네. 우리는 얼마 안 있어 비엔나로
떠날 거야. 우리가 여기에 있는 동안 언제든지 자네가 찾아와 주어야
즐겁겠네."
  야곱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쇼샤나 건강은 어떻습니까?"
  영사는 그를 험하게 바라보며 대답하였다.
  "나도 알았으면 좋겠네만."
  그리고 영사는, 야곱 쪽이 자기가 말한 것보다는 더 많이 알고 있지
않는가 하는 태도로 야곱을 다시 바라보았다.

     25
  쇼샤나의 아버지가 그에게 말하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들이 말해 주었다.
영사의 딸은 이곳에서는 들어 보지도 못한 이상한 병에 걸려 매우
괴로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다리가 말을 안 들어 걸을
때에는 비틀비틀하다가 넘어져 버린다는 것이다. 말을 할 때에도 혓바닥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서 마치 자면서 말하는 것같았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잠뿐이었다. 아무 때건 어떤 경우이건, 대화를 하다가, 또는 걸어가다가,
혹은 밥 먹는 도중에 문득 졸곤 하였다. 어떤 때에는 진종일 잤고 깬
후에는 다시 잠들었다. 라야의 아버지인 의사 자브로도브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이 병은 하도 이상스러워서 얼른 병명을 뭐라고 부를 수가 없군요.
에르리히 씨의 따님의 출신 지역을 생각하건대 수면병에 걸린것이 아닌가
염려 됩니다. 혈액 검사를 해 보면 제가 말씀드린 것을 곧 증명 할 수는
있읍니다만 증세 자체로 봐서는 독충한테 물렸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들은 바로는 환자가 하루 종일 자고 간신히 일어나서 먹고 마십니다.
성격에도 대단한 변화가 일어나서 전에는 생기 발랄했었다는데 지금은
무감각 해졌읍니다. 하지만 얼굴 색은 변하지 않았고 예쁜 것도 전과
다름없다고 하는 이도 있겠지만, 그러나 제가 의학도였을 적에 이와 똑같은
병에 걸린 환자가 초기의 몇달 동안은 정상적인 외양을 유지하고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던 것을 목격한 일이 있읍니다. 우리가 이 병을 초기에
치료한다면 병을 작 고쳐 완쾌시킬 수도 아직 충분히 있읍니다. 여기에
어떤 귀금속에서 추출해 낸 염분이 있는데 이것을 체내에 주입하면 독소가
감소되고 환자가 건강을 되찾을 수 있읍니다."
  쇼샤나의 병의 치료는 손이 갈 정도로 곤란한 것이 아니고 간호하는
데에도 어려울 바가 없었다. 그러나 조심스런 감독이 필요하였다. 그녀는 제
방안 침대에 눕혀졌고 친절한 간호원이 돌보았다. 그녀의 방 앞을 지나가는
사람은 누구나 환자를 방해하지 않고 잠자는 상태가 어떤가를 알아보려고
발소리를 죽이면서 걸었다.
  레흐니츠는 전에 그러하였듯이 쇼샤나의 아버지를 방문하곤 하였다.
그때에는 일 년에 두 번씩 방문했었지만 지금은 일주일에 두 번씩 왔다.
영사는 그를 전보다 더 따뜻이 대해 주었고, 마음에 내키는 화제가
떠오르든지 생각나는 일이 있으면 터놓고 이야기 하였다. 그래서 그는
여행한 이야기 도중에서 만난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그리고 그가 본
특이한 일들을 설명하였다. 자기가 늘 살아 오던 땅을 떠나 보면 제 땅을
의심할 만한 일들을 보는 수가 있는 모양으로, 이것이 멀고 먼 낯선 땅에
여행했을 때는 얼마나 더할 것인가. 영사는 때때로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하고 등장 인물과 장소를 혼동하기도 했다. 본 것이 많기 때문에
쉽사리 이 사람을 저 사람으로 바꾸고 이 장소를 저 장소로 잘못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이번에는 내가 전에 한 번도 이야기한 일이 없는
것을 들려 주지, 하고 말할 때에는 이미 백 한 번이나 한, 똑같은 이야기를
되풀이 하려는구나, 하고 생각하면 틀림이 없다. 그렇지 않으면 영사는 말을
중간에서 멈추고는 생각났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한다. 
  "이 이야기는 벌써 내가 자네에게 했지 않나? 레흐니츠, 자네 좀 심한데,
늙은이에게 이미 들은 이야기를 자꾸 하도록 하다니."
  그러면 야곱은 대답한다.
  "아닙니다, 전혀 새로운 얘기입니다."
  그러면 영사는 아무 염려 없이 이야기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전에
이야기한 일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역시 이야기를 계속한다. 그것은
우리가 일생을 두고 부르는 노래와 같은 것이다. 노래는 우리의 영혼을
고무하고, 그 노래는 처음 부르던 시절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호텔 하인들이
와서 영사 앞에 놓인 담뱃재가 가득 찬 재떨이를 치우고 빈 재떨일 바꾸어
놓는다. 그러고는 공손한 목소리로,
  "영사님, 뭐 주문하실 것 없읍니까?"
하고 속삭이듯이 붇고는 오던 때와 마찬가지고 조용히 물러갔다.
  이따금씩 영사는 에르리히 부인이 살아 있던 옛날을 회상하였다. 그
당시를 말할 때에는 하나도 실수 없고 세밀한 점까지 정확하여 틀릴 때가
없었다. 이상한 일로 과거가 다시 한 번 재현한 것이다. 야곱도 쇼샤나에
관해서 묻지 않았고, 그녀의 아버지도 쇼샤나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따금 두통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처럼 머리를
움켜쥐고
  "머리가 아픈 것처럼 괴로운 건 없어."
할 때에는 마치 그가 쇼샤나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언젠가는 푸림제 전날인데, 레흐니츠는 이때쯤이면 항상 선생과 학생들이
함께 가곤 하는 국내 여행에 가려 하고 있었다. 여행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때였다. 산, 골짜기, 숲이 온통 초록으로 덮이고 산야는 신의
동산처럼 꽃피는 계절이었다. 레흐니츠는 여행가기 전에 인사를 하러 왔다.
영사는 그에게서 시선을 때지 않았다.
  "자넨 젊은 신처럼 싱싱하고 활짝 피어나고 있군 그래."
하고 외쳤다. 그는 야곱의 팔을 붙들고 정원으로 인도하여 갔다. 글에게는
이 젊은이가 만물이 새로와지는 봄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도 또한 산과
골짜기에는 가지 않아도 적어도 호텔의 정원에서만이라도 다시 젊어지고
싶었다.
  정원의 꽃은 만발하고, 레몬나무는 향훈을 풍기고, 종려 나무의 잎은 푸른
하늘로 뻗었다. 하늘조차 꽃피어 모든 나무와 덤불 위에 손을 뻗고 있는 것
같았다. 영사는 너무도 깊이 감동해서 저 덤불의 아름다움을 경탄할 말을
찾지 못하였다. 갑자기 그는 손을 내밀더니 말하였다.
  "쇼샤나는 우리가 볼 수 있는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고 저기서 누워만
있구나."
  야곱의 입에서 한숨이 터져 나오더니 이렇게 물었다.
  "쇼샤나는 지금은 좀 어때요?"
  영사는 야곱의 손을 거머쥐고 말하였다.
  "내 딸의 남편 감으로 자네보다 더 나은 사람을 바래본 적은 없네.
그러나..."
  야곱은 눈을 내리뜨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말은 멈취지고 침묵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래도 쇼샤나의 아버지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야곱은 다시
머리를 쳐들고 바라보았다. 쇼샤나의 아버지는 그의 시선을 느끼고 한숨을
쉬면서 말하였다.
  "우리는 머지않아 노텡겔 의사를 보러 비엔나로 가네. 그 의사가
쇼샤나의 병을 고치 수 있도록 기도하세. 자네가."
  그는 말을 계속했다.
  "여기 자네가 있어서..."
  그러나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는 야곱의 부모가 보낸 편지가
생각나서 그 사연을 기억해 내려 하였으나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야곱에게
말하였다.
  "자네한테 이걸 좀 물어 보겠네. 가령 내가 정당한 주인에게 돌려주려
하고 있는 어떤 귀중한 물건을 꼭 붙들고 있다고 하세. 그런데 갑자기
주인한테 도달하기 전에 내 손에서 빠져나가 둘다 빈 손이 된 셈이네. 손에
쥐고 있던 나도, 받으려고 손을 내밀었던 사람도 빈 손이 되었네그려."
  그렇게 말하며 그는 손을 내려다보면서 그 물건이 어떻게 빠져 나갔는지
영문을 몰라하는 것 같았다. 마침내 그는 레흐니츠에게 오른손을 내밀어
작별 인사를 하며 말하였다.
  "자 이젠 가세."
  그러나 그는 노인들이 하듯이 레흐니츠의 손을 잡은 채 두 사람 사이에
생긴 온정에 매달리고 있었다. 레흐니츠도 이것을 깨닫고 온정을 줄 수
있는 것을 기뻐하였다.
  영사는 레흐니츠가 뭔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레흐니츠에게서는 건강하고 싱싱한 뺨을 한 젊은이를 보는데, 쇼샤나는
의사가 말한 것보다도 더 중한 병을 앓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표정은 갑자기 울분으로 변하였다. 날보고 어쩌라는 말이야?
하고, 그는 생각하였다. 그는 손을 놓고 간단히 말하였다.
  "잘 가게."
  전에는 이런 식으로 대접받은 일이 없었기 때문에 노인의 곁을 떠나는
레흐니츠의 마음이 무거웠다. 그가 걸어가고 있을 때에 영사가 자기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착잡한 생각들이 그의 마음을 차지하였다. 희망과
기대, 이에 대항해서 불안과 슬픔이, 그가 돌아서면 차라리 안듣는 것이
나을 것을 듣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일으켰다.
  "오, 하나님."
  그는 입속말로 기도하였다.
  "뜨거운 자비로 저를 구해 주소서."
  영사는 말하였다.
  "여행 갔다 오면 우리한테 들르는 걸 잊지 말라고 말하려고 불렀네."
  레흐니츠는 가슴에 손을 대고 대답하였다.
  "오겠읍니다."
  영사는 다시 악수를 하며 여행 잘 다녀오기를 바랐다. 그의 표정은 다시
그전 애정으로 돌아갔다. 레흐니츠도 다시 마음이 가뿐하여졌다. 이젠 여행
준비를 시작해야지, 하고 그는 생각하였다. 그리고 가지고 갈 물건들을
하나하나 마음속으로 헤아려 보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뒤범벅이 되어
머릿속에 나타났던 것들이 나중에는 저절로 정리되어 져서 다시 헤아릴
필요가 없었다.

      26
  쇼샤나의 병세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며칠을 두고 잤고,
깨어났다가는 다시 잠들었다. 이 무슨 기구한 운명인가? 쇼샤나가 무슨
죄를 졌단 말인가? 불손한 태도 때문이라면 그것은 병 때문이 아닌가? 병
때문에 사람들에게 정상적으로 친절히 대할 수가 없었던 것이 아닌가?
세상에 아무도 바라볼 자격이 없어 보일 만큼 아름다운 눈을 감고 있는,
홀로 서 있는 종려나무같이 의젓한 모습의 이 매혹적인 처녀가 일생을 잠든
채 보내야 하는 운명의 주인공이라고 누가 생각하려 할 것인가?
  쇼샤나는 자리에 누워 있고, 그녀의 방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잠을
깨지 않게 하느라고 모두 조용히 걷는다. 실제로 그녀의 체험은 깊은 잠속
깊이에서 행해지기 때문에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야곱이 그녀를 본 지도
여러날이 지나다. 그러는 동안에 그녀의 아버지는 나이보다 더 늙어 보였다.
비록 딸의 병과 같은 병에 걸린 것은 아니지만 그도 정신의 긴장을 뺏겼다.
다른 사람들은 눈을 뜨고 있는 때인데 그는 말하는 도중에 잠에 빠지기가
일쑤였다. 잠이 깨면 한숨 쉬며 말하는 것이었다.
  "잠에 자고 싶을 때에는 깨어 있고, 낮에 사람들하고 얘기하고 싶을
때에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겠단 말야."
  레흐니츠는 자기가 난처함을 느끼고 호텔은 자구 드나들지 않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가 안부를 물으려고 영사를 방문했을 때에 영사는 요새
며칠 왜 들르지 않았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두 사람의 관계에는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반대로 영사는 야곱에게 새로운 애정을 느꼈다. 그러나
늙음이 영사에게 너무 갑자기 내리덮쳐서 눈에 띄는 노색을 어쩔 수
없었다.
  대학 교수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이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졌을때에는
모두들 야곱에게 전보다 더 친절을 보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기들이나
자기네 딸들을 위한 무슨 속셈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레흐니츠 박사와
쇼샤나 에르리히와의 장래는 이미 결정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쇼샤나가 병에 걸리자 그들은 다시 그에게 눈독을 들이기 시작하였다.
부모들의 소망이란 어떤 때에는 의지가 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그렇지
않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희망이 바로 절망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쇼샤나 에르리히의 잠자는 병은 부모들에게 이러한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딸들의 경우는 이와는 달랐다. 모든
기대에도 불구하고 레흐니츠와의 이별을 생각하면 그들의 가슴에 남는 것은
소외감뿐이었다.
  레흐니츠는 이제 미국으로 여행할 차비를 하였다. 그는 도중에 양친을
뵙기 위해서 유럽에 잠시 체류하기로 계획 하였다. 양친을 뵌지도 삼
년이나 흘렀다. 방학 여행을 할 때에 나폴리에 있는 해양식물 연구소에만
가고 집에는 가지 않은 때문이었다. 그가 어머니한테 집에 갈지도 모른다는
편지를 보낸 날부터 어머니는 창가에 앉아 그의 편지를, 또는 영사가
야파에서 보내 온 편지를 다시 읽었다. 바로 이때, 야파에 있는 야곱은
자기가 쇼샤나와 함께 다시 어린애가 된 상상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 짧은
스커어트를 입은 쇼샤나는 나비를 좇아 가기도 하고 꽃을 따서 화관을
만드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사실은 영사의 집은 황량하게 비어 있었고
레흐니츠의 부모는 오래전에 그 이웃에서 이사해 나갔다. 그러나 아버지의
집이 그의 마음에 떠오를 때면 으례 그것은 영사의 집 옆에 있었다.
  레흐니츠는 다시 자기 일로 돌아왔다. 많은 것을 한꺼번에 정리하여
파악하는 상상력은, 또 이것을 구체적인 개개의 것을 분해하고 그것이 또한
하나의 정리품으로 집합 하지만, 이번에는 그것이 여러 박에서 성립한 일대
드라마가 되어 전체가 크게 하나로 결합된다. 레흐니츠는 분주하게
현미경을 들여다보니 기뻤다. 보잘 것 없는 작은 물건은 이따금 우리에게
큰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특히 그 작은 물건들이 모여서 큰 물건이 될 때
그러하다. 초록색,빨강,갈색,청색을 띤 보잘 것 없는 해초, 맛도 없고 향기도
없고 지상에는 같은 족속도 없지만 레흐니츠에게 있어서는 지상에 있는
모든 나무들, 풀꽃, 관목보다 더 귀중하였다. 가장 작은 물질에서 헤아릴 수
없는 즐거움을 찾는 사랑과 기쁨의 힘으로 그의 정신도 더 상장하고 더
원숙하여 갔다.그리고 이와 더불어 평온도 점점 찾아왔다.
  그는 쇼샤나 에르리히가 야파에 온 이래로 제쳐 놓았던 조사 연구를
애정을 가지고 다시 하기 시작했다. 학문은 다른 여자를 질투하지 않는
마음 편한 여인이다. 그녀에게 돌아오면 다른 천 명의 첩들에게서 찾아
보지 못했던 것을 발견한다. 장방형의 맑은 유리쟁반속의 소금물에 떠서
눈물처럼 소금물을 스며내면서 해초들은 얼마나 많은 나날을 견디어
왔는가? 그러나 레흐니츠가 돌아와서 눈물을 닦아준 지금 해초들은 너무도
사랑스럽게 그를 올려다보기 때문에 다른 일들은 모조리 잊어버렸다.
  해변가의 아름다운 도시 야파에는 각계 각층의 사람들로 붐볐다. 무역,
노동, 선박업, 운송업에 바쁜 사람들이 각자 자기의 생업을 추구하고 자기의
일에 골몰하였다. 이러한 활동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야곱
레흐니츠가 그러하였다. 그러나 그가 게으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모든
사람들보다도 더 분주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가 그다지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이 해초에는 무슨 필요성이 있는 건가? 별들은 하늘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세상과 거기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빛을 보내 주며, 꽃들은 지상을
장식하고 좋은 향기를 창조되었다. 그러나 향기도 맛도 없는 저 바다의
해초들은 인류에게 무슨 즐거움을 준다는 말인가? 그러나 야파에서,
이스라엘의 땅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레흐니츠와 꼭같이 해초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레흐니츠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그에게 명예를 바치려고 한다. 그것이 전부였다.

      27
  동료들과 학교의 이사들이 한데 모여 레흐니츠에게 장도를 축하하여
송별연을 마련하였다. 처음에는 세미라미스 호텔에서 개최할 예정이었으나
마침내 레흐니츠가 가르치던 학교에서 하기로 결정되었다.
  사람들은 레흐니츠를 상석에 앉히고, 좌우에는 교장.교감이 앉았으며,
이서 교사들과 이사들은 서열에 달라 자리를 잡았다. 식탁에는 포도주,
과자, 오렌지, 편도, 피넛과 여러 가지 계절에 따른 실과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교장이 일어서서 입을 열었다.
  "여러분, 우리가 왜 여기에 모였는지는 잘 아실 것입니다. 지난 삼년 동안
우리와 함께 지낸 도료 한 분이 지금 우리를 떠나 국외로 부임하려고 하고
있읍니다. 우리가 얼마나 이 일을 서운하게 여기는지는 제가 새삼스러이
말할 필요가 없읍니다. 그러나 우리는 섭섭한 마음에 못지않게 기쁜 마음을
금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분이 훌륭하고 명예로운 지위로
가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분의 명예로 인하여서 우리도
명예를 얻게 되었으니, 본인은 이분의 건강을 위해서, 우리 모두들 위해서,
그리고 레흐니츠 씨와 같은 선생을 모신 우리 학교를 위해서
건배하겠읍니다!"
  축배를 든 다음 이번에는 교감이 다음과 같은 말을 시작하였다.
  "교장께서는 여기 계신 우리의 친구가 훌륭하고 명예로운 지위로
출세하여서, 즉 어떤 외국의 대학교에 교수로 가시게 되어서 서운하면서도
기쁘다고 말씀하셨읍니다. 레흐니츠 씨는 왜 떠나는 겁니까? 그것은 이곳에
대학교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대학교를 갖고 있었다면 이분은
이곳을 떠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분은 우리 대학교에서 가르치셨을
것임니다. 친애하는 동료 여러분, 본인은 어젠가는 누군가가 거론해야 할
문제를 내가 제기하는 바입니다. 우리에게는 왜 대학교가 없읍니까? 그것은
우리가 너무도 낮은 것에 만족해 있기 때문이며, 그래서 우리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있읍니다. 왜 비웃는 것입니까? 우리는 무슨 일을 하건 그
사람들이 비웃지 않은 적이 있읍니까? 우리가 여기에다 학교를 창립했을
때에 그들이 우리를 비웃지 않았읍니까? 우리를 사깃군 이라고 부르지
않았읍니까? 지금은 비웃던 그자들이 우리 학교에 취직 자리를 구걸하러
옵니다 본인은 대학교의 경우가 고등학교와 같다고 말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잘난체하는 자하고 타인을 조롱 잘 하는 자처럼 완전히 똑같은
것은 이 세상에는 없읍니다. 그자들은 때와 장소를 막론하고 똑같으니까요.
오늘은 비웃지만 내일은 아연실색합니다. 그리고 모레는 거기서 무슨
이득을 취할 수 있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마지막에는 모든 아이디어를
제공한 것은 자기들이었다고 뽐냅니다. 결론으로 본인은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도 머지않은 장래에 대학을 세워서 우리의 친구 레흐니츠
씨를 초빙하여 강의를 하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세계의 모든 대학교에서
예루살렘에 모인 학자들이, 그리고 온 이스라엘의 학자들이 성산에서
심오한 지식을 가르칠 때 그 대학교는 얼마나 훌륭한 대학 이겠읍니까!
친애하는 친구 여러분, 이러한 대학교는 본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대학이라고 하는 것은 유대교 연구를 위한 학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유대교 연구를 아침, 낮, 밤으로 이미 배가 부르도록
배웠읍니다 본인이 말하는 대학교는 참된 대학교를 의미합니다. 다른
학문의 중심지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모든 형태의 학문을 배우는 대학교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 동료 레흐니츠 씨에게 한말씀
드리겠읍니다. 친애하는 레흐니츠 씨, 우리가 당신이 떠나는 것을 섭섭해
하듯이 당신이 우리 자신의 대학교로 돌아올 것을 기뻐할 것입니다 당신의
나감과 당신의 들어옴에 축복 있기를! 건배합시다."
  이 축사가 끝나자 박수 소리가 실내를 울렸다. 드디어 침묵이 다시
흐르고, 축배가 계속되고 번갈아 축배를 한 후 자정이 지나서야 사람들은
모두 가벼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28
  영사가 야파로 온 후부터 레흐니츠는 전에 가깝게 지내던 집들을
방문하는 것을 완전히 그만두었다. 그는 언제든지 영사에게 도움이 되도록
드나들었으나 이제는 좀처럼 그를 만나지 않고 방안에 들어 앉아서 자기
연구에만 전심 하였다. 해초를 집어다가 잘라서 현미경으로 조사하고는
종이 위에다 붙이고 그 종이를 접어서 커다란 표본책에다 끼우고, 거기에다
해초의 이름, 출생지와 바다에서 건져 낸 날짜를 기록하였다. 레흐니츠는
2백 개에 가까운 종을 야파, 하아파, 아코, 카에사레아, 하데라등의 근해에서
채취하였다. 야곱 레흐니츠만큼 지중해의 해초를 많이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오늘날에는 2백종
이상의 지중해 해초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져 있고, 전문가들은
더많이 알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레흐니츠의 시대에는 그에 비견할
만큼 해초를 많이 수집한 사람은 없었다. 그것들은 건조되어 종이에
붙여져서 표본책에 끼워져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한 줄 한 줄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아름답게 그린 화가의 화첩을 들여다보는 거시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는다. 해초의 인상은 종이에 붙고 발리 들어가서 표면에 확실하게
드러난 윤곽을 나타내지 않는다. 그러나 물 한 방울만 떨어뜨리면 곧
부드러워져서 살아 있는 식물을 보게된다. 높은 것이건 하등의 것이건
한결같이 손을 대는 창조적 예술가의 작품인 것이다. 레흐니츠가 희열을 못
이겨 흘린 눈물 한 방울이 해초에 떨어져서 해초가 부드러워질 때도
많았다.
  바다는 매일 새로운 해초를 산출하였고, 야파의 딸들은 달 아래 바닷가를
산책하였다. 파도가 그들의 발자국에 입맞추었고 레흐니츠가 줍던 해초들을
엄청나게 던져올렸다. 그러나 레흐니츠는 거기에는 없었다. 그는 자기
방으로 가져와서 탁자 위에 올려놓은 것만으로도 충분하였다. 소금물이
담긴 유리제 물통 옆에 앉아 책장마다 가득히 채워진, 이미 채집 정리한
표본책을 앞에 놓고 눈을 번쩍이면서 그것을 바라보는 것은 그야말로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었던 것이다.
  이것만이 레흐니츠가 하는 일이었다. 그는 방안에 앉아 일에 전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이 하는 일에는 긍정적인 측면과 동시에 반드시
부정적인 측면도 있게 마련이다. 레흐니츠의 경우 그 부정적인 면이라는
것은 자기 연구의 방해가 되는 것 모두를 무시했다는 점에 있다. 수업이
끝나면 곧장 집으로 돌아가 연구를 했다. 그는 너무도 연구에 골몰한
나머지 코오피 끓일 알코올램프에 불붙 이기를 잊어버리거나, 불을
붙이고도 물이 끓어넘쳐서 불을 꺼 버릴때까지도 코오피를 주전자에 넣기를
잊어버리곤 하였다. 학부형이나 여자친구들하고 차를 들던 것도 그만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래서 그는 여러 가족들과 좋은 사람들로부터
이방인이 되었다. 그런데 그 사람들 중에서 그 당시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어도 장래에는 중요한 인물로 성장한 사람이 많았다.
그들이야말로 이스라엘의 땅에 살고 새 나라의 초창기에 이스라엘의 여러
일선에서 활약한 건국자가 된 것이다. 그들이 이스라엘로 온 이유는 많고
가지각색이었다. 그러나 찾아온 동기가 모호했던 사람들은 오히려 역사에
남아 이름들이 조각되었지만 직접 나라의 부흥을 위해서 특별히 온
사람들은 잊혀져서 후세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사람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옳겠다.
  레흐니츠는 이 사람들과 그들의 딸들로부터도 관심을 돌려 버렸다.
이때가 레흐니츠의 생애에 있어서도 가장 충실한 시기라고 생각하였다.
쇼샤나에 대한 커다란 애착으로 인해서 다른 소원들은 모두 마음에서 쫓아
버렸다. 지금은 그 커다란 애착마저 흐릿해졌다. 그는 미국으로건
유럽으로건 여행할 준비를 해야 함은 알고 있었다. 영사도 얼마 안 있어
떠나려 하고 있으니 혼자 가느니보다는 그와 쇼샤나하고 다 같이 가는 것이
좋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연구는 그의 마음을 앞으로 다가오는
여행에서 앗아가 버렸다. 야파 사람들은 그가 대학에서의 강의 준비를 해야
함을 알고, 그를 방해하지 않도록 조심하였다. 그리고 레흐니츠도 환상적인
욕구로 자신을 훼방하지 않았다. 시간이 있었다면, 그는 그다지도 잘 돌봐
주신 신들에게 찬사와 감사를 드렸을 것이다. 

     29
  어느날 밤 레흐니츠는 혼자 방안에 앉아 있었다. 문들은 닫혀 있었고
커어튼은 내려져 있었으며 전등은 해초들이 펼쳐 놓여진 탁자위를 비치고
있었다. 한 때 그의 방은 꽃과 그 향기로 가득 차 있었으나 이제 그 앞에는
향기를 맡으려고 코를 가까이 하는 사람이 없는 해초와 그가 미국에 가서
강의하려고 미리 준비하고 있는 자료들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날 밤은
조기에는 평소와 다름없는 밤 이었으나 레흐니츠에게는 인간이 일생
중에서도 한 번, 혹은 두 번 정도만 맛볼 수 있는 그런 특이한
하룻밤이었다. 그는 하나의 일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은 마음에서부터
사라지고 마지막에는 그 한 가지 일도 사라진다. 즉 하나의 의지 대문에
자기의 의지를 포기하는 것인데 결국은 그 하나만의 의지도 포기되어 모든
것으로 자유로와지는 것이다.
  레흐니츠는 일생을 통해서 지금처럼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 본 적은
없었다. 그는 쇼샤나 에르리히 때문에 라헬, 리아, 아스나트, 라야와 기타의
사람들을 멀리하였다. 지금은 앓고 있는 쇼샤나에 대한 희망도 끊어졌다.
여행을 앞두고 있었지만 오직 연구에만 유일한 목표로 하기 위해서 그
생각도 쫓아 버렸다.
  레흐니츠가 원래 온건한 젊은이이고 여자 꽁무니를 쫓아 다니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은 익히 알려진 바이다. 그래도 사람은 사회적 존재이어서
어여쁜 아가씨들에게서, 어떤 사람들에게서보다도 더 많은 애정을 느끼게
되는 법이다. 때로는 그의 숨겨진 생각들이 이성의 울타리를 뛰어 넘을지도
모른다. 영사의 도착과 함께 레흐니츠는 이성을 되찾았다. 그러나 일을 다시
시작할 떼에야 회복되는 평정을 희생으로 해서였다. 레흐니츠가 쇼샤나의
수난을 비탄하지 않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느냐구 누가 묻는다면, 그에 대한
대답은 이러했을 것이다. 아무리 정확한 언어로도 이름할 수 없는 요소들이
그러한 생각을 억제하는 데에 작용하였다고. 그리하여 레흐니츠는 모든
번거로움에서 해방되어 방안에 편히 앉았다. 이것은 그가 쇼샤나의 병과
고통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착한 신들은 레흐니츠에게 은혜를 베푸시어 마음의 평정과 휴식과 동시에
기쁨으로 일에 열중하도록 해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은혜는 오래 가지
않았다. 신들은 시기심이 많아서 지나치게 우리가 성공하는 것을 보면
사자를 보내서 그것을 부숴 버린다. 누구나 이것을 스스로의 체험을 통하여
배운다. 그것을 아직 배우지 못한 사람은 지금 레흐니츠의 경우를 보도록
하라. 이 밤의 아름다움과 고요한 마음의 평정에 관해서는 그만하고, 그
대신 레흐니츠가 어떻게 그 고요한 휴식을 잃었는가를 이야기하기로 하자.
  레흐니츠가 혼자 앉아 있는데 가볍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는 타마라가 들어왔다. 들어와서 가만히 섰다. 그녀는 레흐니츠의
방에 들어온 적이 전에는 한 번도 없었다. 젊은 남자의 방에 들어와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녀의 태도 전체에서, 그리고 얼굴에 안개와 같이
피어 오르는 기쁜 빛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타마라는 문지방에 주춤하고 서서 방 주인이 들어오라고 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은 아침 이슬을 머금은 꽃잎처럼 가볍게 떨렸다.
레흐니츠는 그녀를 팔에 안지는 않았지만, 손을 잡고 안락의자에 앉혔다.
타마라는 겸손한 처녀였다. 그녀는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 주리라고는 감히
생각도 못했고, 더구나 레흐니츠 박사 같은 위대한 학자가 그러리라고는
엄두도 못 내었다. 그녀가 온 이유는 다만, 그녀도 외국으로 가게 되어
있었고, 레흐니츠도 떠나려 하고 있으므로 용기를 내서 방문하러 온 것이다.
  타마라는 야파 김나지움을 졸업하였고 지금은 의학을 공부하기위해서
유럽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것은 의사인 그녀의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기 위함이었다. 그녀는 조각과 도기만들기도 하게 되어 자기의 참된
소질이 어느 것에 있는지를 결정하기가 힘들게 되었다. 인체는 수많은
비밀을 담고 있어서 그녀의 손은 이 형체를 창조하려고 여러 가지 형태를
만들어 본다. 그녀는 때로는 피와 살로 된 인간을 생각했고 때로는 돌로 된
인물을 생각했다. 레흐니츠에게는 타마라가 하는 이야기가 별로 지혜를
담고 있지는 않아도 크게 감동했다. 그는 갑자기 무엇을 원하는지 잘
모르고 있는 그몸을 얼싸안고 타마라의 입술에 키스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때 층계를 올라오는 발자국 수리만 아니었더라면 그렇게 하였을
것이다. 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러 날과 밤 동안 방문객들에게
열리지 않았던 이 문이 오늘 밤은 두 번이나 열렸다.

      30
  생각에 잠겼던 레흐니츠가 정신을 차렸을 대에는 자그마한 타마라가
방안에 앉아 있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였다. 라헬과
리아가 들어왔다. 그들은 처음부터 방문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으나, 집 앞을
지나가다가 이야기 소리가 새어 나오는 것을 듣고, 레흐니츠가 그다지
바쁘지 않구나 생각하여 들어왔던 것이다. 이 점에서는 그들이 분명히
옳았다.
  타마라는 안락의자 끝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라헬과 리아를 미워하지도
않고 질투심도 없이 쳐다보았다. 혹시 다소나마 질투심이 있었다면, 그것은
자기보다 더 나이를 먹어서 야곱과 거리낌없이 이야기할 수 있다는
연장자들에 대한 나이 아래의 여자가 느끼는 그런 감정일 뿐이었다. 그녀는
머리를 숙이고 블라우스에 단 카아네이션의 향기를 맡으며 연장인 라헬과
리아와 더불어 자리를 같이하는 것을 기뻐하였다. 
  레흐니츠는 물통과 해초를 치우고 현미경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마른
해초 몇 가지만 탁자 위에 남아 있었지만, 그것들은 하나씩 표본책에 넣고
남은 불필요한 것들이었다. 일을 제쳐 놓은 지금, 손님 접대할 일밖에는
없었다. 그는 손님이 오면 늘 무엇인가 단 것을 대접하였다. 그러나 초콜렛,
과일,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 사실 영사가 야파에 온 후로는 그런 것의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손님들을 지켜보는 제우스 신이 주인에게,
차는 모든 경우에 환영받는 물건이니 차를 끓여 내라고 암시를 주었다.
그래서 레흐니츠는 알코올램프를 꺼내서 불을 붙였다. 알코올은 지난날
라헬.하일페린이 들리곤 하던 때와 같이 불 붙었다. 라헬은 앉아서 바늘
구멍으로 치솟아 펄럭이는 불꽃을 응시하기도 하고, 반대쪽에 놓인 거울에
비치는 불꽃을 바라보면서, 레흐니츠는 미국으로 가고, 다시는 그를 보지
못하겠구나, 하고 혼자 생각하였다. 아마도 그는 마음속에서 나를
잊어버리고, 나를 알기 전에 나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듯이 더는 나를
생각하지 않겠지. 그리고 아마 내가 이 방에 같이 앉은 것도 이것이
마지막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레흐니츠를 쳐다보았으나, 차와 설탕을 꺼내고
있는 그의 등밖에 보지 못하였다. 그녀는 빈정대는 버릇이 있는 입술을
오므리고 레흐니츠가 탁자 위에 남겨 둔 해초 두세 개를 집어 들었다.
버릴래도 차마 마음이 내키지 않아서 버리지 못한 것이었다. 그녀는
그것들을 손에 쥐고 땋기 시작하였다. 그와 동시에, 또는 그보다 조금 전에
리아.루리아가 일어나서 차 끓이는 일을 몽땅 가로맡았다. 그녀는 항상 모든
일을 자기가 떠맡는것이 버릇이었다. 
  작은 버어너는 문과 작은 탁자 사이에 놓여 있었고, 물은 바글바글
끓었다. 그러나 다 끓어도 주전자가 너무 작어서 처녀들 모두에게 나누어
주기에 충분하지는 못하였다. 차는 내버려두고 다른 이야기를 하기로 하자.
물이 담긴 버어너는 점점 끓어올라 갔다. 반대쪽에는 타마라가 소파 끝에
앉아 있었다. 라헬은 탁자 옆에서 일종의 화환 같은 것을 엮고 있었다. 그때
노래 한 가락이 그녀의 마음속으로 찾아든다.

  한 총각이 샘물 옆에 앉아
  꽃을 땋아 꽃다발을 만드네.

  그러다가 그녀는 상처에 바르는 옥도정기 같은, 냄새가 나는 이런 식물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놀라왔다.
  리아가 말하였다.
  "나 좀 봐,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여기 서 있네. 아스나트를 만나러
가겠다구 약속했는데!"
  "리아, 너는 약속만 하고 다니는구나."
라고 라헬이 말하고는 화환을 엮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약속을 했는걸 어떡해? 바람 맞힐 수 있어?"
  "오, 아스나트보고 지칠 때까지만 기다리라고 해. 그건 그렇고 타마라, 넌
어디 갈 데가 있어?"
  "마가르고트 양한테 갈까 하고요, 레흐니츠 박사가 반대 안 하시면요."
  "천만에."
하고 레흐니츠가 말하였다.
  라헬이 웃으며 말하였다.
  "리아하고 나만 가지고도 부족하신 모양이죠! 누굴 또 불러 올까요?"
  그러나 타마라가 막 떠나려 할 대에 아스나트와 그녀의 친척인 라야가
들어왔다. 아스나트는 더 기다리지 않기로 하고, 라야.자브로도브스키와
함께 산보를 나와서 레흐니츠의 집을 지나가다가 이야기하는 소리를 듣고
들어오기로 한 것이었다.
  사실 아스나트는 레흐니츠를 방문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와서 보니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야도 역시 그러하였다. 레흐니츠를 위해서
방문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즐기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자기 성격대로
행동했기 때문에 어디를 가나 마음 편했다. 이렇게 해서 처녀 다섯이
레흐니츠의 숙소에 모여, 각각 자기 나름의 이유로 오긴 했지만 그와같이
있게 된 것을 기뻐하였다.
  "빠진 사람이 아직도 있어요?"
하고 라헬이 물었다.
  "미라만 여기 오면."
하고 리아가 말하였다.
  "전원 집합이 될 텐데."  
  "그래, 하지만 그애에게 줄 잔은 어디 가서 가져오지?"
하고 라헬이 말하여다.
  "저는 차 안 마셔요."
타마라가 참견하였다.
  "얘야."
하고 라헬이 말하였다.
  "너만 입이 있니?"
  타마라는 또 고개를 숙이고 블라우스에 달린 카아네이션 향기를 맡았다.
  "타마라, 너를 놀리려고 그런 건 아니었어."
하고 라헬이 덧붙였다.
  타마라가 말하였다.
  "알아요, 하일페린 양, 기분 안 상했어요."
  차를 들고 나서 아스나트가 말하였다.
  "산보나 합시다. 찬성하는 사람은 손을 들 것."
  "발을 드는 게 나을걸."
하고 라헬이 말했다.
  "그래야 출발할 수 있으니까."
  "나는 그전에 주인님이 침대를 만들어 드려야지."
하고 리아가 말했다.
  "그래야 주인님이 돌아와서 곧 잠자리에 들수 있지. 그런데 어디로
가지?"
  "어디로?"
하고 아스나트가 말하였다.
  "물론 바닷가지."
  "그리고 미라네 집을 지나갈 때에 그애도 불러 내자. 찬성하는 사람?"
하고 누군가가 말을 보탰다.
  그래서 레흐니츠는 전부 여섯 병인 그 속에 끼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들과 인연이 끊어져 기뻤지만 이제는 그들이 돌아와서 기뻤다. 신들의
질투심은 어떤 때는 이렇게 어떤 때는 저렇다고 정할 수가 없어서 우리는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 알 수가 없다.

      31
  바다는 달빛 어린 흰 파도를 잠옷으로 입고 한없이 넓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해변은 길게 뻗쳐 있었고, 달빛은 모래 사장과 바다에 내려 앉았다.
기분 좋은 미풍이 레흐니츠와 여섯 처녀의 볼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그들은
도중에 미라를 불렀고, 그녀는 칠인조의 정수를 채우려고 다려왔던 것이다.
이러한 밤과 이렇게 기분 좋은 바람이 결합했을 때 일곱 사람들의 마음은
한층 더해만 갔다.
  라헬과 리아, 그리고 아스나트는 레흐니츠의 바른쪽에서, 라야와 미라 및
타마라는 왼쪽에서 걸었다. 이따금 처녀들은 자리를 바꾸어, 왼쪽에 있던 세
사람이 오른쪽으로 넘어 오고, 오른쪽에 있던 사람이 왼쪽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언제나 레흐니츠를 가운데다 두려고 애썼다. 그리고 레흐니츠는
처녀들에게 둘러싸여서 일년 전, 이년 전, 삼십년 전의 아름다운 밤들에
그러했던 것처럼 자랑스러운 기분으로 따라 다녔다. 바로 그 순간의 그의
마음 속에는 전혀 쇼샤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에 관한 추억은, 자고 있는
그녀의 눈 주위를 싸고 있는 금빛 눈썹처럼 그의 마음 주위를 싸고 있었다.
  라헬.하일페린은 행복해 하는 외양을 꾸미고 있었으나 리아.루리아는 정말
행복하였다.
  "이러한 밤에..."
하고 그녀는 소리쳤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커다란 그리움의 감정이 그
아름다운 목소리 속에 떨고 있었다. 그녀는 이 밤의 노래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라서 가냘픈 팔들을 내뻗고 우주의 허공을 쳐다보았다. 밤은 그
허공에다 별빛의 장관을 맡기고 있었다. 
  "이러한 밤에..."
  그녀는 다시 외쳤으나 또 멈추고 말았다. 그러나 가슴속에 끓어오는
감동을 진정할 수 없어
  "얘들아, 얘들아, 저거 봐! 보기만 해!"
하고 말할 뿐이었다.
  바다와 창공, 하늘과 땅, 그사이의 모든 공간이 하나의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다. 창공으로 빛나는 둘러싸인 고요, 아니면 공기처럼 투명한
창공이었다. 바다 위와 바다 아래로 달빛은 꿈 꾸는 처녀처럼 달렸다.
모래조차 달빛을 맞아 흔들흔들 움직이는 것 같았다. 모래처럼, 주위의
공기처럼 처녀들과 함께 레흐니츠는 꿈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것 같아
놀래어 서 버렸다. 머리 위를 쳐다보면 뜀박질 하는 달이 있었고, 바다를
바라보면 거기에도 해면 위를 떠 있는 달이 있었다. 하늘과 땅, 육지와
바다가 혼연일체가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다른 더 큰, 아무도 볼 수 없는
그 무엇 속에 담겨져 있었다.
  라헬은 리아의 손을 잡고, 리아는 아스나트의 손을, 아스나트는 라야의
손을, 라야는 미라의, 미라는 타마라의, 그리고 타마라는 라헬의 손을 잡아
레흐니츠를 둘러싸고 춤추었다. 라헬이 손을 놓고 머리 위의 달을
치켜보면서 바다를 향하여 무릎을 꿇었다. 아스나트는 가만히 일어서서 두
손을 허공으로 내밀어 피아노를 치는 시늉을 했다.
  "내 말 좀 들어 봐, 타마라."
하고 미라가 말하였다.
  "만약 여기 말이 한 필 있었으면 이 세상 끝에서 끝으로 막 달려
볼거야!"
  "얘들아."
하고 라야가 말하였다.
  "누구 미라에게 줄 말을 호주머니에 넣고 있는 사람 없어! 오, 미라, 미라,
나도 호주머니에 말이 없으니 어쩌면 좋지? 말 안 타고 걸아갈 수 없니?"
  "라야, 너를 위해서 내가 걸어서 갈까."
  미라는 타마라를 팔로 얼싸안고 웃으며 대답하였다. 타마라는 머리를
미라의 가슴에 대고 말하였다. 
  "언니는 좋은 친구야."
  "꼬마야, 기다려, 잠깐만."
 라야가 타마라에게 외쳤다.
  "내 신발 속에 모래가 가득해."
  그녀는 타마라에게 기대어서 신발을 벗어 모래를 쏟았다. 
  갑자기 리아가 소리쳤다.
  "저기 봐 모두들! 저기 바다 위에 있는 저게 뭐죠? 바다 위에서 무엇이
번쩍이고 있다!"
  그들은 바다와 불빛을 지켜보았다. 그것은 지나가는 배에서 비치는
불빛이었다. 배 위에 탄 사람들만이 그 배가 이스라엘 땅으로 오는 건지 딴
데로 가고 있는 것인지 알일이었다. 그러나 야곱 레흐니츠와 같이 걸어가는
여자들에게는 배가 어디로 향해서 가고 있는지는 알 바가 아니었다. 일곱
사람은 말 없이 서서 불빛이 바다 위에 떠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바다는
배와 불빛을 둘러싸고 있었다. 불빛은 가라앉았다가 떠올랐다가, 다시
가라앉았다는 다시 떠올랐다. 이와 비슷한 배를 타고 야곱은 머지않아
끝없이 먼 이국으로 여행을 떠날 것이고, 야곱이 그들을 보지 못하건 또는
그들이 거기에 있는 줄을 알건, 우리는 지금처럼 바닷가에 서서 멀어져
가는 불빛을 전송할 것이리라. 이 배에 탄 승객들은 그들이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모르겠지만. 그래서 처녀들은 서로의 허리를 끌어안고 바다를
바라보며 묵묵히 서 있었다. 마침내 그들은 배에 대한 생각을 버리고
무엇인가 잃기라도 한 것처럼 슬퍼하였다.
  마음속에 생각이 떠오르면 입으로는 말이 나오는 법이다. 리아는 그들
모두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큰 소리로 말하였다.
  "레흐니츠 박사님, 아까부터 여쭈어 보고 싶었는데요, 언제 미국으로
떠나시나요?"
  라헬이 말하였다.
  "우리 박사님이 어떻게 그다지도 긴 여행을 그대로 할 수가 있으실까?"
  "<그대로>란 건 무슨 뜻이니?"
  "혼자서라는 말이야."
하고 라헬이 말하였다.
  "<혼자서>라는 건 또 무슨 말이지?"
  "부인 없이라는 뜻이지."
라헬이 말하였다.
  리아는 야곱의 손을 잡고 용서해 달라는 듯이 꼭 쥐었다.
  라헬은 덧붙였다.
  "레흐니츠 씨의 손을 먼저 잡은 사람이 미국으로 함께 갈 특권을
차지하기로 결정하지 않은 것은 참 유감스러운 일이야."
  리아는 손을 움츠리고 대꾸하였다.
  "라헬, 나쁜 애같으니!"
  아스나트가 말하였다.
  "하지만 리아야, 그분의 손을 잡은 너는 나쁘지 않니?"
그때 타마라가 다가와 야곱의 손을 잡았다.
  "타마라, 너는 암만 그래도 소용없어."
라헬이 말하였다.
  "우리가 누구든지 먼저 그분의 손을 잡고 말한 것은 다음 사람에
해당되는 거야."
  타마라는 레흐니츠의 손을 자기 가슴에 대고 블라우스에 단 카아네이션을
냄새맡았다.
  "나는 왠진 몰라도."
하고 미라가 말하였다.
  "내가 뛴다면 말 탄 사람도 나를 따라오진 못할 거야."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뛰어가기 시작하였다. 리아가
그녀를 불렀다.
  "미라, 미라, 너무 멀리 가지 마라!"
그러나 미라는 듣지 않고 벌써 멀리 갔고, 계속해서 달려가고 있었다.
  라야가 타마라에게 말하였다.
  "타마라, 다리 묶인 새 모양으로 꼼짝 않는구나. 너도 다리 좀 시험해
보지?"
  타마라는 자기가 뛰는 것이 야곱을 기쁘게 해 줄 것인지를 알아보려는
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그를 쳐다보면서도 발이 저절로 쳐들려
뛰어가고 말았다.
  아스나트는 허리띠의 술을 앞뒤로 흔들며 말하였다.
  "레흐니츠 박사님이 저 대단한 주자들 중의 하나를 부인으로 삼지
않는다면, 누구를 부인으로 택할는지 난 모르겠어요."
그렇게 말하자, 허리띠의 술이 그녀의 손에서 빠져 내려가고 다리가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노도 뛰고 싶어?"
하고 라헬이 조롱하였다.
  "네가 뛰면 나도 뛰겠어."
그녀가 대답하였다.
  "아니, 너나 뛰어라."
하고 라헬이 말하였다.
  "내가 뭘 들고 있어? 가시나무 올개민가? 레흐니츠 박사님, 제가
잊어버리고 박사님의 해초를 가지고 나왔네요. 내 말 좀 들어 봐, 얘들아.
경주에서 이긴 사람은 이 화환을 씌워 주기로 하자."
그녀는 자기가 엮은 해초를 높이 쳐들고 되풀이하였다.
  "누구든지 아긴 사람이 이 왕관을 차지하기. 리아, 왜 그리?"
  "희랍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
하고 리아가 말하였다.
  "그 사람들은 이렇게 했어. 젊은 남자들이 경주에서 이긴 사람은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처녀한테 왕관을 받았어. 그렇지 않아요. 레흐니츠
박사님?"
이렇게 말하고 나자 그녀도 다리가 떨려 옴을 느꼈다. 그녀는 라헬에게
말하였다.
  "나하고 같이 뛸래?"
  "뛰어라, 리아, 뛰어!"
하고 라헬이 말하였다.
  "네가 화환을 탈는지 몰라."
  바로 이때 다른 처녀들이 돌아왔다.
  "얘들아."
하고 리아가 말하였다.
  "만약 너희들이 조금 저에만 여기 있었어도 멋있는 얘기를 들었을걸
그랬다."
  "우리가 못 들은 멋있는게 뭔데?"
하고 아스나트가 물었다.
  "이 화환이 보여?"
리아가 말하였다.
  "일등을 한 사람은 레흐니츠 박사님이 바다에서 채집한 해초로 만든 이
화환을 쓰기로 모두들 합의했어. 레흐니츠 박사님, 찬성하세요?"
  "그래."
레흐니츠는 머리를 끄덕이며 말하였으나 그의 얼굴은 창백해지고 가슴은
설레기 시작하였다.
  리아가 주장하였다.
  "희랍 사람들은 남자를 뛰게 했지, 여자를 뛰게 하지는 않았어."
  아스나트가 대꾸하였다. 
  "하지만 남자들은 다 죽고 그 대신 우리는 살아 있으니까 우리가 대신
뛰는 거야. 찬성하시죠, 레흐니츠 박사님? 찬성이예요, 아니예요? 왜 말씀
안 하세요?"
  레흐니츠는 대답하였다.
  "좋아요."
그러자 그의 가슴은 더욱 설레었다.
  "됐어요."
아스나트가 말하였다.
  "얘들아, 한 줄로서. 자, 어디를 출발점으로 하고 어디를 결승점으로
한다?:
  그녀는 세미라미스 호텔 쪽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세미라미스를 출발점으로 하자."
  "그리구 결승점은?"
  "옛 회교도 묘지까지로 하지. 레흐니츠 박사님, 우리하구 줄맞춰
서서<하나, 둘, 셋> 하세요. <셋> 할 때에 출발해요. 라야, 줄을 넘어가지
마라. 타마라, 레흐니츠 씨가 소리 지를 때까지 발을 들면 안 돼,
알아들어?"
  "알아들었어요."
  "알아들었으면 네 자리에 가만있어. 그럼, 낙타처럼 그렇게 목을 내밀지
말고."
  처녀들은 모두 세미나미스 호텔의 발코니가 바다를 보고 있는 곳에 와서
한 줄로 섰다. 그리고 결승점으로 택한 옛 묘지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그들은 레흐니츠를 위한 자리를 비워 주면서 자기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맨
가운데에 선 레흐니츠는, 경주할 자세를 잡고 있는 처녀들은 좌우로
둘러보고, 라헬의 팔에 낀 화환을 본 후 다시 처녀들을 보면서, 이 중에서
누가 화환을 머리에 쓰게 될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그는 손이 떨리고
가슴이 몹시 뛰어서 좀처럼 입에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모래는 축축하고
단단하게 굳어져 있었다. 달은 어스름한 바닷가를 내리비쳤고, 어스름한
바닷가는 달빛을 반사하는 거울이었다. 아직 화살을 당겨 본 적이 없이
잔뜩 팽창해진 활처럼 나란히 서 있는 여섯 처녀들은 각각 출발하라는
구령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구령 소리는 아직껏 내려지지
않았다. 레흐니츠는 조금 전에 합의했던 것을 다 잊어버린것 같았다. 또는
잊어버리지 않았기에 이렇게 지체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였다. 한 처녀가
물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리나?"
다른 처녀가 말하였다.
  "레흐니츠 박사님, 어서 구령을 불러요!"
  그래서 야곱은 두려워 떨면서 불렀다.
  "하나!"
좌우의 처녀들도 모두 흥분에 떨었고, 발 밑의 모래까지도 떨었다.
레흐니츠도 떨고 있었다. 아마 처녀들보다도 더 떨었을 것이다. 갑자기
라헬이 부르짖었다.
  "잠깐, 야곱, 기다려요!"
그녀는 자리를 떠나 레흐니츠 앞에 꿇어앉더니, 팔에서 화환을 뽑아 그에게
전하고는 돌아가서 동료들과 함께 섰다. 
  "자, 박사님."
그녀는 말하였다.
  "<둘, 셋> 하세요."
레흐니츠는 그녀의 말을 들은 것 가기도 하고 듣지 못한 것 같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의 입술 사이로 말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하나, 둘, 셋!"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처녀들은 일제히 달리기 시작했다.

  32
  야곱은 라헬.하일페린이 그의 탁자 위에서 발견한 말린 해초로 엮어 만든
화환을 꼭 쥐고 있었다. 그는 주위를 안절부절하며 둘러 보았다. 여섯
처녀들은 나란히 뛰어갔다. 드디어 그 중에서 한 처녀가 마치 뜨개질하는
여자의 손에서 떨어진 실꾸러미처럼 선두에 서서 뛰어갔다. 그러다가
그녀는 다시 뒤따라 온 친구들의 일단에 합쳐졌다. 줄은 다시 깨어지고
하나는 여기, 하나는 저기서 뛰었다. 또한 처녀가 잠깐 나머지 처녀들을
모두 뒤로 떨어뜨리더니, 다시 따라 잡혔다. 무리는 다시 합쳐지더니 다시
흩어졌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쫓아갔지만 마지막에는 눈이 아프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그는 뛰닫는 처녀들을 지켜보았다. 그는 귀를
곤두세우고 그들의 발 소리를 들으려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밀물이
들어오고 있어써 파도소리의 훼방에 의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파도 소리가 끝없이 퍼지는 바다를 앞으로 하고 레흐니츠는 눈을 감아
버렸다. 그의 눈꺼풀 뒤에는 무릎을 꿇고 앉은 어머니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조그마한 소년이었고, 어머니는 그의 칼라 주위에 새 넥타이를
둘러주고 계셨다. 그날은 쇼샤나의 생일이어서 영사의 집에 초대를 받아
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이가 내 어머니는 아니야. 쇼샤나의 어머니도
아니라는 건 말할 것도 없다. 한 분은 멀리 떨어져 계시고, 한 분은
돌어갔으니 말이다. 내가 눈을 뜨면 이것이 오직 환상의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해질 거야. 그러나 그 환상은 당장에 그의 모친과
쇼샤나의 모친을 보여 주기까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하나의 육체는 두 개로
될 수 없으므로 이것은 아무리 해도 그의 어머니도 쇼샤나의 어머니도
아니었다. 그러면 그녀는 누구인가? 쇼샤나였나? 쇼샤나는 병들어 누워
있으니까 절대로 아니다.
  그가 눈을 떠서 처음으로 본 것은, 정말로 본 것처럼 생각한
환상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이는 물론 그의 어머니나, 쇼샤나의 어머니나
쇼샤나 자신도 아니었다. 그이는 이제 리아, 라헬, 아스나트, 라야, 미라 및
타마라였다. 야곱은, 화환을 이 손 저 손으로 옮겨 쥐면서, 나란히
달리다가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로 다투며 뛰고 있는 처녀들을 건너다
보았다. 라헬이 어린 양처럼 가벼워서 아마 일등을 할 것이다. 그러나 한
걸음 한 걸음 주의 깊게 뛰는 라헬을 앞질러 내었고 미라가 리아를 따라
내었다 미라는 체조와 달음질에 익숙해서 당연히 그럴 만하였다 이런
생각을 할 사이도 없어 그녀도 아스나트의 뒤로 쳐졌고, 라헬과 라야가 그
둘을 따라내었다. 꼬마인 타마라는 희박한 공기 속으로 사라졌다. 공중으로
삼켜져 들어간 것으로 생각 되었다. 그러나 다시 나타났다. 그런가 하면
다시 공중으로 삼켜져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분명 그녀는 모두를
지나쳤다. 처음에는 누가 누구를 앞지르건 야곱에게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타마라가 다른 처녀들을 모두 이기면 어떻게 하지, 하고 조금 섭섭한
생각이 들었다. 좌우간 옛 묘지의 결승점까지는 아직도 멀었고 그녀가
거기에 도달하기 전에 처녀 중의 하나가 뒤따라 내리라고 생각하니 조금
위안이 되었다. 정말 누구인지 타마라를 앞서 달리고 있는 것이 보였지만
상당히 거리가 멀어서 누구라는 것은 분간 할 수 없었다. 야곱은 눈을 감고
최종 결과를 시간에 맡겼다. 그러나 시간은 정지하고 야곱의 뜻을 존중하지
않았다. 
  시간이 꽤 지났다. 레흐니츠는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어떻게 되었나? 하고
그는 자문하였다. 지금쯤 돌아와도 좋을 텐데 아직 한 사람도 안 오네. 그는
눈을 떠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늘과 땅, 육지와 바다는 혼연일체가 되고,
바다의 파도는 점점 높아졌다. 파도는 천둥처럼 부딪쳐 오는데, 처녀들의 발
소리는 여기에 부딪쳐 들리지 않는다. 왜 돌아오지 않을까? 그는 자신에게
다시 한 번 물어 봤다. 바다는 더 거대해지고 파도는 육지를 향하여 치고
있는데 처녀들의 발 소리는 들리지 않고,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갔을까? 어디로 사라졌나?
  레흐니츠는 화환을 팔에 걸치고 뛰기 시작하였다. 겨우 그녀들이 있는
장소에 도착해 보니 처음에 보지 못하던 여자 하나가 그 중에 있었다.
그녀는 잠옷을 입었는데 자다가 갑자기 깨워진 것 같은 표정이었다.
처녀들은 잠자코 무서워하며 서 있었고, 그들과 함께 쇼샤나 에르리히가 서
있었다. 그녀는 경주에 참가한 모든 사람들을 앞질렀던 것이다. 리아도,
라헬도, 아스나트도, 라야도, 미라도, 타마라도 그녀가 뛰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그래도 각자는 경주하는 동안에 누군가 앞서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누군가가 설마 야곱의 친구인 쇼샤나 에르리히인 줄은
몰랐다. 여러 날 여러 주일을 잠들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던 바로
그녀인 줄은 몰랐다. 두려운 생각이 앞서 그들은 화환도 잊어버렸고,
야곱과의 약속도 잊어버렸다. 야곱도 이 모든 것을 잊고 쇼샤나 앞에 서
있었다. 
  문득 쇼샤나의 속눈썹 사이로부터 그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야곱은 눈꺼풀을 감고 속삭이는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쇼샤나, 정말 여길 찾아온 건가?"
  쇼샤나의 속눈썹이 그렇다는 표시를 했다. 그녀는 두 손을 내밀어 야곱의
팔에서 화환을 받아서 자기 머리에 얹었다. 
  여기서 야곱 레흐니츠와 쇼샤나 에르리히의 이야기를 끝마치기로 한다.
이것은 엄숙한 맹세를 교환하고 서로 약혼한 쇼샤나와 야곱의 이야기다.
처음에는 이 이야기를 <일곱 명의 처녀들>이라고 부를까 생각했었으나,
역시 이 맹세에 따라 <정조의 맹세>라고 부르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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