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향해 가슴을 펴라
잭캔필드
삶을 위한 안내서
10대는 우리 삶에서 가장 힘들고 또 가장 재미있는 시기이다. 10대를 지나면
우리는 너무나 많은 변화를 거치므로, 어떤것이 원래이고 어떤것이 변화인지도
구분할수 없을 지경이 된다. 자! 이제 여기 구조대가 나간다. 드디어 여러분을
위한 책이 나온 것이다. 세상을 향해 가슴을 펴라는 흥미진진한 10대를 유머를
잃지 않고 제 정신으로 또 성공적으로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지침서이다.
여러분은 이 책에 쓰인 이야기들을 읽고 공감하고 많은 교훈을 얻으며, 결코
비평을 당한다든지 훈계를 받는 느낌을 갖지 않을 것이다.이 책은 제니 칼쓰, 제
니퍼 러브 휴윗과 A.J.랭어 같은 유명인의 글 뿐만이 아니라, 여러분과 같은 10
대 청소년들이 직접 쓴 글들이 실려있다.
이 책엔 여러분을 웃기고 울릴 이야기들이 가득 담겨있다. 이 책은 여러분의
좋은 친구가 되어서, 여러분이 친구가 필요할 때 항상 옆에 있어줄 것이다. 그리
고 여러분에게 좋은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여러분이 세상을 좀더 밝은 눈으로
볼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여러분이 외로울 땐 동무가 되어주고, 여러분이 장래
에 대한 생각을 할 땐,‘그래, 너는 뭐든지 할 수 있어.네가 마음만 굳게 먹는다
면 말이야.’라고 말해 줄 것이다. 이책엔 첫키스,우정과 사랑, 미래에 대한 믿음
의 중요성,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존경, 죽음 ,자살과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 등 힘든 문제들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꿈을 실현한 사람들의 이야기, 실연한 사람들의 이야기, 너무 부끄러워하는 성
격에서 활발한 성격으로 바꾼 사람들의 이야기,자살을 하려다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 등 승리의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너무 슬퍼서 결국여러분을 울리고야 말
이야기도 들어 있다. 그리고 각 이야기들은 훈계로써가 아니라 여러분의 눈 높
이에서 친구처럼 다정하게 여러분의 가슴에 와 닿을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법
이 책은 여러분 마음대로 읽어도 된다. 앞에서부터 차근차근 읽어도 되고, 여
기저기 건너 뛰며 읽고싶은 부분부터 읽어도 된다. 여러분이 특별히 관심있어
하는 주제가 있으면 그것부터 읽어도 좋다. 라티나 죤슨이라는 고등학교 학생은
사랑에 대하여 라는 글은 읽은 후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저는 특히 첫실연을 재밌게 읽었어요. 제가 지금 그것과 비슷한 경험을 가지
고 있거든요 전 아직도 제 남자친구를 잊지 못하고 있답니다.
다이애나 버디간은 '암호랑이‘를 읽고 동감했다고 한다.
제가 기르던 고양이가 죽었을때 저도 그런 기분이었답니다.화도 내지 않고 부
정도 하지 않았고 미친듯이 울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마음의 고통은 무척 심했
어요. 이 이야기에 나오는 제스는 다신 애완용 동물을 기르지 않겠다고 결심했
을지도 몰라요.
이 책은 여러분이 다 읽은 후에도 계속 옆에 두고 싶어할 책이다. 우리는 여
러분이 이책을 되풀이 읽으며, 여러분에게 문제가 생기면 조언을 찾는 등 여러
분에게 많은 영감을 줄 안내서로 참고하길 바란다.
고등학생인 카라 샐즈버그는 먼저나온‘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에
대해서 이런 글을 보내 주었다.
자꾸만 자꾸만 되풀이 읽었어요.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는 제가 읽
은 책들 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책이에요.
다음은 열네살인 새논 리차드의 편지이다.
마음을 열러주는 101가지 이야기에 담긴 이야기들을 재밌게 읽었어요. 이책을
다 읽고 난 후 삶을 새로운 각도에서 볼 줄 알게 되었어요.
친구들에게도 들려주십시오.
책이 거의 완성되어 갈 무렵, 우리는 10대 청소년들 몇명을 골라서 이 책을
읽은 후 평을 해달라는 부탁을 했다.그 중 한소녀는 매일 방과 후 친구들이 그
녀를 찾아와 함께 읽었다고 했다.
이 책을 읽으며 여러분은 어떤 이야기는 혼자만 읽기 정말 아까우며, 친구와
함께 읽고 싶다는 생각은 할 것이다. 10대 청소년들이 친구에게 전화로 이 책을
읽어 주었다는 이야기와, 또 하나만 더 읽고 자자고 하다가 밤을 새웠다는 이야
기를 많이 들었다.
'나의 삶에서 라이앤 역을 맡은 A.J 랭어는 캠프를 갈 때 이 책을 가지고 가
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친구들과 함께 읽었다고 한다. 그리고 책을 다 읽은후 너
무 감동을 받아서 그들도 자신의 이야기를 써보기로 하고 ,그 다음날 모닥불 주
위에서 서로에게 읽어주었다고 한다.
또한 어떤 10대청소년들은 말로 잘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전달하고자 할 때
이 이야기를 사용했다고 한다. 이름을 밝히고 싶어하지 않는 어느 소녀가 다음
과 같은 글을 보냈다.
나는 내말좀 들어주세요를 친구 캐렌에게 꼭 읽어 주고 싶었어요. 캐렌은 나
와 가장 친한 친구지만 제 말을 잘 들어주지 않거든요. 그래서 그 시를 종이에
적어서 케렌에게 주었죠. 캐렌이 눈치를 챘나봐요. 이제 내 얘기를 잘 들어주거
든요.
여러분의 책입니다.
우리는 이 책이 10대 여러분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반영해야 한다고 생각했
다. 그래서 여러분이 진정으로 관심있어 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많은
애를 썼고, 그렇게 해서 알아낸 문제들을 걱정해 주는 마음에서 솔직히 표현하
고자 노력했다. 따라서 너무 훈계적이거나 고리타분한 이야기는 싣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이야기가 대강 정리된 후, 우리는 존 에프 케네디 고등학교의 학생들에게 이
야기를 읽어 달라고 부탁했다.그리고 학생들이 보낸 수백통의 편지를 받고우리
가 목적을 달성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 뿐만이 아니라 제 친구들을 위해서도 사고 싶은 책입니다.,제이슨 마틴스
책을 단 한권만 살 수 있다면 이책을 사겠습니다. 레지나 펀타닐라
이 책에 실린 시들을 제일 좋아합니다.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리차드 니노
고등학교 학생들의 의견에 관심을 보여주셔서 고맙습니다. 에드워드 쥬빅
1. 사랑에 대하여
사랑은 손에 쥔 모래와 같다.손바닥을 편채 가만히 있으면 흘러 내리지 않는
다. 하지만 도 꽉 잡으려고 손을 움켜쥐는 순간, 모래는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
고 손바닥엔 조금만 남게 된다. 사랑도 그렇다.
두 사람이 서로 존경하는 마음으로 서로의 자유를 인정하며 서로에게 조금의
여유를 주면, 사랑은 오래 머문다.하지만 너무 강한 소유욕으로 서로를 꽉 움켜
쥐면 사랑은 어느새 두 사람 사이를 빠져나가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카릴 재미
슨, 한모금 이론에서
실연
마음의 상처를 입으면 육체의 상처를 입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몸은 자연
적인 치료를 시작한다.
이 때 우리가 할 일은 자연이 우리를 치료할 것이라고 맏고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면 고통은 어느새 사라지고, 우리는 더욱 강하고 ,더욱 행복하고, 더욱 다감
하고,이해심 많은 사람이 될 것이다. 멜 콜그로브,실연을 극복하는 법에서
"그래서 헤어지자는 거야?"
나는 그가 대답하지 않가를 바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의 이별은 이
렇게 시작되었다.그리고 우리의 사랑은 이렇게 끝났다. 그와 함께 보낸 지난 몇
달은 내 짧은 삶에서 가장 행복하고도 가장 힘든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렇게 끝나다니,이게 연인으로서 우리의 마지막 대화라니,믿을 수가 없었다.
고등학생들간에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사랑이 실패로 끝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벤 이외는 아무도 사랑할수 없으며, 벤만이 나를 이해
할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 지난 한 달동안 그와 나 사이가 무척 힘들었
다는사실도 전혀 문제삼지 않았다. 지난 한달은 정말 힘들었다. 그와 함께 있어
도 더이상 즐겁지가 않았다. 우리 둘의 문제가 아니라,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다
른 것들에 대한 문제로 우리는 끊임없이 다투었다.
다음 날 나는 한껏 멋을 부리고 학교에 갔다. 나와 헤어진 것을 후회하게 해
주려는 속셈에서였다. 심지어 나는 전혀 상처 입지 않았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
고 그에게 말을 걸어서 , 헤어지고 나니 속이 시원하며 지금은 더 행복하다는
듯이 행동했다.
하지만 내 마음은 그것과 정반대였다.그를 바라보고 있으면 ,이제는 끝나버린
우리의 사랑과 그와 함께 보낸 즐거웠던 시간과 그로 인해 받은 쓰라린 상처 생
각이 나서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나는 학교에서 정신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돌아다니다 집에 와서는 울면서 잠이 들었다. 하루 종일 그에 대한 생각만 하고
그에 대한 얘기만 하고 밤이 되면 그의 꿈을 꾸었다. 그리고 친구들이 진저리를
낼 때까지 쉴새없이 그와의 상황분석을 했다.
‘어떻게 이렇게 끝낼 수가 있었지?’
내 자신이 반으로 찢겨져서 더 이상 완전한 인간이 아닌것같은 느낌이었다. 그
리고 어쩌다 그의 곁에 있을 때만 완전한 한 인간으로 돌아왔다.
어느날 저녁 , 더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가 전화를
받고 오분도 채 지나지 않아 나는 이성을 잃은채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 없이
혼자 서는 법을 잊었다고 나는 말 했다. 그래서 그가 꼭 내 곁에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벤 없는 리아는 상상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여지껏 모든 문제를 그와
함께 해결했으니, 이 큰 문제를 이제와서 나 혼자 해결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아직도 나를 좋아하고 걱정하고는 있지만 더이상 사랑하지는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는 다음 몇 주동안 나는, 그가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질투를
했다. 그래서 여보란 듯이 나도 아무 남자하고나 데이트를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정확하게 생각나지는 않지만 , 내 마음이 편해지기 시작
했다. 다시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했고,교내 동아리에도 가입을 했고 방과후엔
외출도 하게 되었다. 될수록 바쁜 하루를 보내려고 나는 최선을 다했다.
천천히 나는 벤 없이도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나는 어떤 방법으로 남을 도울수 있는지 깨닫게 되었
다. 또한 마음의 상처를 입고 괴로워 하는 사람들을 동정할 줄 알게 되었고, 그
하소연에 귀기울일 줄 알게 되었다.
천천히 나는 다시 미소 지을 수 있게 되었고, 마침내는 큰소리로 웃을 수 있
게 되었다. 벤에대한 생각을 한번도하지않고 하루를 보낼 수도 있게 되었다.학교
에서 그를 보면 손을 흔들어 주었다.하지만 아직 그를 친구처럼 대할 사신은 없
었다.상처가 완전히 회복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나는 그 상처를 일회용 반창고
로 대강 덮어두고 잊으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대신 상처가 자연적으로 치료될
때까지 고통을 참으며 기다렸다.그리고 내가 그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기억했다.
벤과 헤어지고 난 직후에 난 여러 남자아이의 뒤를 쫓아 다녔다.하지만 상처
가 완전히 회복되고 난 후에는 남자아이들이 나를 쫓아다니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정말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나 혼자 서는 법을 배우게 된것이다.그래서 지
금은 누가 곁에 있지 않아도 완전한 한 인간으로 남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지금 다시 사랑에 빠져 있다. 하지만 결국은 그와도 헤어지게 될 것이고,
또다시 어려운 시간을 지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벤과 헤어졌을 때만큼 큰 고통
을 느끼며 많이 울게 될것이다. 그렇다면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서 아무것도 하
지 않는 것이 옳은 일일까? 나는 나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인용문이 틀리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 누군가를 사랑했다 잃는 편이 훨씬 낫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기만 하면 아무리 깊은 상처도 이겨 낼 수 있기 때
문이다. 리아게이 16살
천생연분
종종 나는 딸 로렌에게 남편과 내가 어떻게 만나서 어떤 연애를 했는지를 들
려준다. 그래서, 이제 열여섯이 된 로렌은 자기와 천생연분인 남자가 같은반 옆
자리에 앉아 자기에게 데이트신청을 할지도 모르는데, 자기는 평생의 반려자를
만날 준비가 되어있질 않다고 걱정을 한다. 벌써 오래전에 남편과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남편 마이크와 나는 1964년 10월9일,친구 안드레아의 파티에서 처음 만났다.
우리는 정원을 사이에 두고 서 있다가 눈길을 마주치자 수줍게 웃었다. 그리고
파티가 끝날때까지 몇시간동안 다른 사람들은 상관도 하지 않고 둘이서만 얘기
를 나누었다. 그때 나는 열한살이고 마크는 열두살이었다.그일 후 나는 마이크의
여자 친구가 되기로 했고, 힘들게 한달동안 데이트를 하다가 헤어졌다.
그래도 마이크는 몇 달 후 성대하게 열린 그의 바이쯔마(유대인들의 성인식)
에 나를 초대해서 춤을 추자고 청하기까지 했다.
그로부터 몇년이 지난후에 마이크는 내가 비록 치아 교정기를 하고 있었고,
다리가 너무 가늘었고, 머리를 밖으로 말아 넘기기는 했지만 그에게는 누구보다
예쁘게 보였다고 말했다.
마이크와 나는 같이 아는 친구가 많았고, 같은 교내 동아리 들어 있었으므로
그후로도 몇년동안 같이 만날 기회가 자주 있었다. 내가 남자 친구와 헤어지겠
다고 결심을 하거나, 남자 친구로부터 버림을 받을 때마다 엄마는 이렇게 말했
다.
“걱정하지마, 넌 결국 마이크 랩하고 다시 데이트를 하게 될거야”
그러면 나는 있는 힘을 다해서 소리졌다.
“절대 안그럴꺼야! 엄마는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그러면 엄마는 내가 마이크 얘기를 얼마나 자주 하는지, 또 마이크가 얼마나
괜찮은 남자아이인지 되풀이해서 말해주곤 했다.
드디어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고등학교엔 멋진 남자들이 너무도 많았다. 그러
니 마이크가 내 친구와 데이트를 한다고 해서 조바심을 낼 필요가 없었다. 그런
데 왜? 나는 생각했다. 그런데 왜 미치겠는거지? 왜 버스를 기다리며 줄을 서는
동안 그와만 말을 하게 되는거지?
한번은 그가 짙은 곤색운동화를 신고 나왔는데 너무 멋졌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그렇게 멋진 운동화를 신은 사람은 없었다. 그 순간, 엄마의 말이 생각났지
만 나는 애써 잊으려고 노력했다.
고등학교 1학년이 끝나고 여름 방학이 되었을때 마이크와 나는 점점 더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게 되었다.물론 우리가 만날땐 항상 그의 여자 친구인 내 친구
와 다른 친구들이 동행을 했다. 그해 여름 마이크는 스페인어를 배우러 멕시코
로 떠났고 그가 없는 동안 나는 무척이나 그를 그리워 했다. 8월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 마이크도 우선 나에게 전화를 하고 우리집으로 찾아 왔다.알맞게 그을은
피부에 이국냄새가 물씬 풍기는 그는 너무 멋져 보였다. 비록 멕시코까지 갔다
오고도 스페인어를 한마디도 못하긴 했지만 겉모습만으로도 황홀할 정도였다.
바로 그날,1968년 8월 19일,마이크와 나는 우리집 현관앞에 서서 서로의 눈을 들
여다 보며 우리가 다시 데이트를 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당장 시
작할 수는 없었다. 그날 저녁 내가 다른 남자와 데이트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었
다. 나는 그 남자 아이에게 오늘부터 마이크의 여자친구가 되기로 했으니 오늘
은 일찍 집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 마이크도 몇번이나 헤어졌다 다시 만난곤 했
던 그의 여자 친구에게 이젠 정말 헤어져야겠다고 말했다.
우리는 얼마동안 우리의 관계를 비밀로 하다가, 한 친구의 파티에 참석해서
자랑스럽게 발표했다. 파티가 한참 무르 익었을 때 느지막히 도착해서 마이크와
나는 우리가 이제부터 공식적인 커플이 되었다고 큰소리로 선언 했다. 다들 ‘
결국은...' 이라고 중얼거렸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 나는 집을 떠나야 했다. 그러나
10주도 채 못되어 마이크가 다니는 대학 근처의 대학으로 전학을 하고 말았다.
1972년 6월 18일 마이크와 나는 결혼식을 올렸다. 내가 열아홉살이고 그가 스무
살일 때였다. 우리는 결혼한 학생들을 위해 마련된 기숙사에 신혼 보금자리를
꾸미고 대학을 마쳤다. 대학을 졸업한 후 나는 특수학교 교사로 취직을 하고 마
이크는 의과 대학에 전과를 했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지금 , 나는 아름다운 딸 로렌과 잘생긴 아들 알렉스를
보고 미소 짓는다.엄마 ,아빠의 연애 얘기를 듣고 두 아이는 고등학생들 사이의
사랑을 더욱 신중한 눈으로 보게 되었다.
그리고 마이크와 나는 두 아이에게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걱정하지마,어릴 때 한번 해보는 풋사랑 이니까.” 프랜 렙
가장 큰 실수
사랑하기 때문에 잃는것은 없다. 사랑을 표현하지 않고 감출때 우리는 많은
것을 잃게 된다. 바바라 드 엔젤리스
'꿈결의 선녀'같은 그녀를 처음 본 날은 평생잊지 못할 것이다.그녀의 이름은
수지 써머스(가명)이었다.그녀의 별같이 반짝이는 두눈과 호수처럼 잔잔한 미소
는 보는 사람을 (특히 남성들을) 자석처럼 끌었다.
물론 외모도 눈부시게 아름다웠지만, 언제까지나 내 마음속에 남아있는 것은
그녀의 내면의 아름다움이다.그녀는 진실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보살필 줄
알았고, 참을성있게 남의 말을 들어줄줄 알았다. 그녀의 재치있는 말을 듣고 있
노라면 갑자기 하루가 밝아졌고 , 그녀의 현명한 말은 꼭 필요한 순간에 찾아왔
다.그녀는 남자들 뿐만이 아니라 여자들의 사랑과 존경도 한몸에 받고 있었다.그
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조금의 오만도 없이 한없이 겸손했다.
말할 것도 없이 학교의 모든 남학생이 그녀를 선망했다. 물론 나도 그랬다. 나
는 하루에 한번 그녀와 함께 다음 교실로 걸어갈 기회가 있었고, 딱 한 번 그녀
와 단 둘이서 점심을 먹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야말로 구름위에 앉은 기분이었
다.
나는 생각했다.
'수지 써머스 같은 여자애가 내 애인이라면 다른 여자애들은 쳐다도 안 볼텐
데‘
하지만 이렇게 근사한 여자애가 아직 짝이 없을리가 없었다. 나보다 훨씬 멋
진 남자애와 데이트를 하고 있을게 뻔했다. 그래서 학생화장직을 맡고 있으면서
도 나는 상대도 안된다고 포기해 버리고 말았고 , 졸업식날 가슴아픈 이별을 했
다.
그로부터 1년 후 백화점에서 우연히 그녀의 제일 친한 여자친구를 만나 점심
을 함께 먹었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간신히 누르며 수지에 대해 물어보았
다.
‘글쎄, 더이상 네 생각을 하는것 같지는 않더라.“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물었다.
“넌 너무 잔인했잖아. 매일 교실까지 데려다 주며 그애에게 관심있는척 행동
했잖아. 네가 수지와 함께 점심 먹었던거 생각나니? 그 주 주말에 내내 수지는
네가 이제 전화를 걸어서 데이트를 신청할 거라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렸
단 말이야”
나는 거절 당할까봐 두려워서 한 번도 수지에게 내 마음을 고백하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데이트를 신청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그녀가 싫다고 했다면 ?
그럼 어떻게 되는 것이었을까? 물론 그녀와 데이트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그런
데, 어쨌든 그녀와 한번도 데이트를 못해봤다! 더 속상한 것은 , 만약 그녀에게
데이트를 신청했더라면 분명히 데이트를 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첫 키스 그리고 그 후에 생긴 일
아직 10대였을 때 나는 무척이나 수줍음을 탔는데, 그때 사귀던 남자 친구 또
한 수줍음이라면 나 못지 않았다. 우리는 조그만 시골 고등학교를 같이 다니다
가 2학년 때 데이트를 시작했다. 6개월 동안 데이트를 하며 손에 땀이 나도록
꼭 잡고 다니고, 영화 구경을 가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몇 번인가 키
스를 할 뻔한 적도 있었다. 우리 둘 다 키스를 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용
기를 낼 수가 없었다.
드디어, 우리집 소파에 앉아 있을 때 그가 첫 시도를 했다. 처음엔 날씨에 대
한 얘기를 했다. 진짜다. 그러며 그가 몸을 내 쪽으로 기울였다. 나는 그를 막으
려고 방석을 내 얼굴에 갖다 대었다! 그래서 그는 방석에 키스를 하고 말았다.
나는 너무도 키스가 하고 싶었지만 긴장이 되어서 그가 가까이 다가오도록 내
버려 둘 수가 없었다. 그래서 소파 밑으로 도망쳤다. 그가 더욱 가까이 다가왔
다. 그러며 우리는 영화에 대한 얘기를 했다(사실 영화 같은 건 관심도 없었지
만!). 그가 다시 몸을 기울였고, 나는 다시 그를 막았다.
나는 소파 끝으로 슬금슬금 옮겨갔고 그는 나를 따라 왔다. 그러면서도 우리
는 계속 얘기를 주고받았다. 드디어 그의 얼굴이 내 얼굴 쪽으로 다가왔을 때...
나는 벌떡 일어섰다!(다리에 쥐가 났었던 것 같다.) 나는 현관 옆으로 걸어가서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서며 조급하게 물었다.
“그래서 키스할거야, 안 할거야?”
“할거야.”
그가 대답했다. 나는 몸을 쭉 펴고 눈을 꼭 감고 얼굴을 쳐들고 입술을 삐죽
이 내밀었다. 그리고 기다렸다... 그리고또 기다렸다. ‘왜 가만 있는 거지?’ 나
는 살짝 눈을 떠보았다. 그의 얼굴이 바로 내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순간 나
는 씩 웃었다.
그래서 그는 내 이에 키스를 하고 말았다! 나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는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나는 그가 친구들에게 내 바보 같은 행동에 대해 말할까봐 걱정이 되었다. 나
는 정말 고통스러울 정도로 수줍음을 탔기 때문에, 그 후부터 고등학교를 졸업
할 때까지 남자 아이들만 보면 피해 다녔다. 그래서 결국은 그 후 한 번도 데이
트를 해보지 못했다. 학교에서도 복도를 걸어가다, 내가 관심 있어 하는 남학생
이 지나가면 재빨리 교실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가 다 지나갈 때까지 숨어 있
었다. 유치원 때부터 같이 학교에 다닌 남자애들인데도 말이다!
대학교 1학년이 되었을 때 나는 더 이상 부끄러움을 타지 않겠다고 단단히 마
음 먹었다. 그래서 자신감을 갖고 우아하게 키스하는 법을 배우기로 했고 그것
을 행동에 옮겼다.
봄 방학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서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카페로 가보았다.
그랬더니 거기 내 첫번째 키스 파트너가 앉아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로 걸
어가서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그는 등이 없는 높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를 양팔로 끌어안고 눕다시피 뒤로 젖혔다. 그리고 내
가 여지껏 했던 중 가장 진한 키스를 퍼부었다. 다시 그를 똑바로 앉히고 나는
승리에 빛나는 눈으로 말했다.
“이만하면 어때?”
그러자 그는 옆에 앉은 아가씨를 가리키며 나를 보고 말했다.
“메리 제인, 인사해. 내 아내야.”
이사
내가 아직 열여섯으로 고등학교 2학년일 때, 최악의 일이 일어났다. 부모님이
텍사스에서 아리조나로 이사를 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아리조나에 정착해야 한다며 부모님은 텍사스에서의 내 삶을 모두 정리하도록 2
주일을 주셨다. 내 생애 처음으로 얻은 일자리도 포기해야 했고, 남자 친구와 단
짝 여자 친구도 남겨 놓고 가야 했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낯선 곳에서 처음
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내 삶을 이렇게 망쳐놓은 부모님을 원망
했다.
친구들에게 나는 죽어도 아리조나에서 살기는 싫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텍사
스로 돌아오겠다고 약속을 했다. 아리조나에 도착해서는 만나는 사람마다, 내 남
자 친구와 단짝 여자 친구가 텍사스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알리는 것을 잊지 않
았다. 아리조나에서는 아무 친구도 사귀지 않을 작정이었다. 금방 텍사스로 돌아
갈 거니까.
드디어 개학을 하고 학교에 갈 날이 되자 난 더욱 침울해졌다.
마음은 온통 텍사스에 있는 친구들 생각뿐이어서 당장에라도 달려가고 싶었
고, 이제 내 삶은 끝났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기분이 점점
나아지기 시작했다.
제 2교시 회계학 시간에 그를 처음 보았다. 그는 키가 크고 날씬하고 정말로
잘생겼으며, 그렇게 아름다운 푸른 눈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본 적이 없었다. 나
는 교실 맨 앞줄에 앉아 있었고 그는 내 옆으로 세 번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밑져야 본전이라고 생각햐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 내 이름은 쉴라야. 네 이름은 뭐니?”
나는 심한 텍사스 사투리로 물었다. 그의 옆에 앉은 남자애가 자기에게 묻는
줄 알고 먼저 대답했다.
“마이크.”
“안녕, 마이크.”
그리고 나는 그의 파란 눈을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그런데 네 이름은 뭐니?”
그는 내가 자기 이름을 묻는 것인지 몰라서 당황하며 뒤를 한번 돌아보고 조
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크리스.”
“안녕, 크리스.”
나는 살짝 한번 웃어 주고 똑바로 앉아 수업 준비를 했다.
그 후 크리스와 나는 친구가 되어서 수업 중에 소곤소곤 떠들며 재미있는 시
간을 보냈다.
크리스는 학교 운동 선수였고 나는 교내 밴드부에 속했다. 고등학교에서는 운
동 선수들이 밴드부 여자애들과 데이트를 하면 친구들의 놀림을 받았다. 그래서
우리는 교내 행사가 있을 때나 겨우 얼굴을 볼 수 있었고, 그 외에는 회계학 강
의실에서 만나며 우정을 키워갔다.
그나마, 그 해 크리스가 졸업을 하며 우리는 다시 만날 기회를 잃고 말았다.
그런데 어느날 크리스는 내가 일하고 있는 쇼핑몰로 나를 찾아왔다. 나는 크리
스를 다시 만나게 되어 무척 기뻤다. 그는 내 휴식 시간까지 기다렸고 우리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제 그의 운동 선수 친구들의 간섭을 받지 않
아도 되었으므로 우리의 우정은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그래서 나는 텍사스에
두고 온 남자 친구의 생각을 덜 하게 되었고, 그 빈 자리를 크리스와의 우정으
로 메꾸었다.
텍사스를 떠나온 지 1년이 되었을 때, 이제는 아리조나가 내 고향이라는 생각
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졸업 파티의 파트너로 크리스를 초대했고, 그날 저녁 우
리는 크리스의 친구인 운동 선수 두 명과 그들의 여자 친구들과 함께 파티에 갔
다. 그리고 그날 저녁, 크리스와 나의 관계가 우정을 넘어서게 되었다. 크리스의
친구들이 나를 인정해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크리스는 우리의 관계에 대해 덜
긴장하게 되었고, 우리는 숨기지 않고 데이트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삶에서 힘든 시간을 지날 때, 크리스는 매우 특별한 사람으로 내게 다가
왔고, 결국 우리의 우정은 진실한 사랑으로 발전했다. 이제 나는 부모님이 나를
괴롭히기 위해서 아리조나로 이사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꼭 그런 것처럼 생각되었다.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이제 나는 안다. 아리조나로 이사가지 않았다면 크리스를 못 만
났을 테니까.
잊지 못할 사랑
브루스가 고등학교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어가면 누구든 한번쯤은 그를 바라보
게 되었다. 키가 훌쩍 크고 바싹 마른 몸의 그는 어느 모로 보나 제임스 딘을
닮았다. 그가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올리며 누군가와 진지한 대화를 할
때면 짙은 눈썹끝이 위로 찡긋 올라갔다. 그는 친절했고, 사려가 깊었고, 신중했
으며 벌레 한 마리 죽이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를 두려워했다.
어느날 브루스는 앞서 가는 나와 함께 걸으려고 다른 아이들을 제치고 내 옆
으로 걸어왔다. 그 즈음 나는 약간 우둔한 남자 친구와 헤어지려고 노력하던 중
이었다. 그 남자 친구는 정말 별 볼 일 없었는데, 나는 그와 헤어졌다가 습관적
으로 다시 만나곤 했다.
그날 아침 브루스는 내 옆으로 걸어와서 책을 들어 주며 즐거운 농담으로 나
를 웃게 만들었다. 나는 그가 마음에 들었다.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를 두려워했다. 그가 굉장히 똑똑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내가 진실로 두려워한 사람은 그가 아닌 바로 나 자신이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학교까지 같이 걸어가는 날이 점점 많아지게 되었다. 나는
학교 사물함 뒤에 숨어서 쿵쿵 뛰는 가슴을 끌어안고 그를 바라보며 그가 나에
게 키스를 할 것인지 생각해 보았댜. 벌써 몇 주일 동안이나 같이 다녔는데도
그는 키스할 시도 조차 않고 있었다.
대신, 그는 내 손을 꼭 잡거나 한 팔을 내 어깨에 두르고 있다가 수업에 들어
갈 시간이 되면 책 사이에 무언가를 끼워 주었다. 나는 서둘러 교실에 들어가서
책을 펼쳐보고, 책갈피 사이에서 멋있는 필기체의 글이 씌여진 종이 쪽지를 발
견하곤 했다. 그의 글들은 대부분 사랑과 정열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 깊이가 너
무 심오해서 당시 열일곱 살인 나는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그는 책과 카드와 편지 등을 나에게 보내 주었고, 우리집 거실에 나와 함께
앉아서 몇 시간 동안이나 음악을 듣곤 했다. 특히 그는 스티브 원더의 “너는
내 눈물을 기쁨으로 바꿔 놓았어”라는 노래를 좋아했다.
어느날 방과 후 직장에서 일을 하다가 그가 보낸 편지를 받았다. 편지엔 이렇
게 적혀 있었다.
‘슬플 때면 네가 그립고, 외로울 때면 네가 그립다. 하지만 네가 가장 그리울
때는 내가 행복할 때이다.’
그날 일을 마치고 작은 시골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가며 골똘히 생각에 잠기
던 기억이 난다. 차도에서 자동차들이 경적을 울리고, 길 양옆으로 늘어선 가게
들의 창문으론 따뜻한 불빛이 흘러나와 추위에 웅크리고 걸어가는 행인들을 유
혹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생각밖에 할 수가 없었다.
“행복할 때 내가 가장 그립다니, 희한하기도 하네.”
나는 그토록 낭만적인 성품의 남자와(브루스는 겨우 열입곱 살인데도 아이라
고 부를 수가 없었다.) 데이트를 하는 것이 몹시 불편했다. 그는 대화를 할 때는
항상 신중하게 신경을 써서 단어를 골랐고, 누구와 의견 차이가 생기면 상대편
의 의견을 끝까지 듣는 것을 잊지 않았고, 밤 깊은 줄 모르고 시집을 읽었고, 어
떤 결정을 내릴 때면 여러 가지 조건을 조심스럽게 타진해 보았다. 그리고 그는
항상 몹시 슬픈 듯이 보였는데 나로선 그 이유를 알수가 없었다. 지금 와서 돌
이켜보면, 그의 슬픔은 보통의 고등학생들과 너무 달랐던 데서 비롯되었던 것
같다.
브루스는 내가 전에 사귀던 남자 친구와도 너무 달랐다. 전에 사귀던 남자 친
구와 나는 대부분 영화관에 가서 팝콘을 먹고 친구들 뒷공론을 하는 것으로 시
간을 보냈다. 또 걸핏하면 싸우고 헤어져서 다른 아이들과 데이트를 하곤 했다.
우리는 헤어질 때마다 치열하게 싸웠기 때문에, 우리가 헤어질 때면 전교생이
관심을 보이며 누가 잘했고 누가 잘못했나를 따지곤 해서 마치 텔레비젼 연속극
같은 꼴이 되곤 했다.
나는 이런 얘기를 브루스에게 숨기지 않고 했고, 그러면 그는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그 친구와의 관계가 정리될 때까지 기다리겠노라고 했다. 그리고 “어린
왕자”란 책을 내게 주었는데, ‘마음의 눈을 통해서만이 사물을 똑바로 볼 수
있는 거야.’라는 대목에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그 답례로 나는 사랑과 시에 대한 편지를 정열적으로 써서 보냈다. 내가 그렇
게 정열적인 글을 쓸수 있다는 사실은 나도 전혀 몰라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
에게 거리를 두고 그가 너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했다. 내가 그만큼 똑똑
하지도 철학적이지도 못하다는 사실을 그가 알게 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난 팝콘과 영화와 친구들 뒷공론을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그런
생활이 휠씬 쉬웠기 때문이다. 어느 추운 날 길거리에 서서, 옛 남자 친구와 다
시 합치기로 했다고 브루스에게 말하던 순간을 나는 잊을 수 없다.
“걔가 나를 더 필요로 해.”
나는 조그만 아이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잖아.”
브루스는 두 눈 가득 슬픔을 담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 자신보다는 나를 위한
슬픔이었다. 내가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고, 그의 두 눈
을 통해서 나도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났다. 브루스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했다. 다음
해엔 나도 대학에 가기 위해 집을 떠났다. 크리스마스가 되어 고향에 돌아올 때
마다 나는 브루스의 집을 찾아갔다. 나는 그의 부모님을 무척 좋아했다. 내가 갈
때마다 그분들은 반갑게 맞으며 환영해 주셨고, 그분들의 따뜻한 태도를 보며
나는 브루스가 나를 용서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느 해 크리스마스 날 브루스가 내게 말했다.
“넌 글을 참 잘 썼었어. 정말이야.”
“그래.”
그의 엄마가 맞장구를 쳤다.
“넌 무척 아름다운 글을 쓰곤 했지. 네가 글쓰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
겠구나.”
“언제 제 글을 읽어보셨어요?”
내가 물었다.
“브루스는 네가 보낸 편지들을 내게 보여주었단다. 우리는 네 편지를 함께
읽으며 감탄을 금치 못하곤 했지.”
그러자 브루스의 아버지도 고개를 끄덕이셨다. 나는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모르
고 의자 깊숙히 눌러 앉아 얼굴을 붉혔다. 브루스에게 보낸 편지들에 뭐라고 썼
느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는 브루스가 무척 똑똑하다는 사실에 감탄하곤 했었는데, 그가 내 편지를
읽고 그 정도로 감동했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었다.
세월이 지나며 그와의 연락이 끊겼다. 그의 아버지로부터 마지막 들은 말에
의하면, 그는 샌프란시스코로 갔으며 거기서 요리사가 될 생각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 후 나는 몇 번의 연애에 실패하고, 드디어 멋진 남자를 만나서 결혼했
다. 내 남편은 나보다 훨씬 현명하고 똑똑한 사람인데, 지금은 나도 많이 성숙했
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남편은 나도 누구 못지 않게 똑똑하
다고 항상 용기를 북돋워준다.
내가 여지껏 사귄 남자 친구들 중에서 브루스만큼 기억에 선명히 남은 사람은
없다. 그가 지금 어디 있는지 나는 그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는 행복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니까. 많은 편에서 그는 나의 성장에 큰 도움을 주었고, 내가 팝콘과
영화와 친구들 뒷공론에 파묻혀 시간을 보내며 직시하지 않으려고 애쓰던 나의
한 면을 받아들이도록 도와 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내가 내 영혼을 바라
보고 내 자신 안에 숨어 있는 작가 기질을 발견하도록 일깨워 주었다.
베티 앤
다른 사람을 비평하는 사람들에게는 사랑할 시간이 없다. <테레사수녀>
실수.
우리는 모두 실수를 한다. 어떤 땐 운이 좋으면 그 실수를 지우개로 지울 수
가 있다. 종이에 쓰인 것을 지우개로 지워서 털어 버리고 나면 실수를 했었다는
흔적도 남지 않게 된다.
하지만 어떤 실수는 지워버릴 수가 없다. 아직 미숙할 때 저지른 실수건 좀더
성숙해서 저지른 실수건 마찬가지이다.
내가 이것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해 본 것은 중학교 3학년 때엿다.
그 해 나는 문장을 문법에 맞춰 분석해서 칠판에다 도형으로 그릴 줄 알게 되었
고, 운전 교습을 받아도 된다는 허가증을 얻었고, 처음으로 끈이 없는 브래지어
를 입어보았고, 부모님께 보여줄 수 없는 시를 썼다. 그리고 삶엔 지우개가 따라
다니지 않는다는 사실을 힘들게 배웠다. 일단 일어난 일은 다시 돌이킬 수가 없
다. 그건 상상으로도 불가능하다. 지우개는 없다. 열네 살 때 나는 나와 내 친구
들이 베티 앤에게 한 일을 지워버릴 수 있기를 너무도 간절히 바랐다.
베티 앤은 오하이오 주 클리브랜드 시에서 버지니아 주 리치본드 시에 있는
우리 학교로 전학을 왔는데, 그 당시 우리에게 클리브랜드는 마치 별나라처럼
여겨졌다.
"오, 안녕! 오우우우우....."
첫날 죤슨 선생님이 베티 앤을 소개하는데 마지가 소리 죽여 말했다. 마지는
정말 잘난 척하는 애엿다. 마지가 자기네 집이 가문 대대로 얼마나 돈이 많았는
지, 그래서 자기네 집이 지금 얼마나 부자인지 자랑을 하기 시작하면 아무도 그
애 말에 신경쓰지 않았다. 매일 오후 우리는 점심을 먹고 학교 계단에 앉아서
과자에 묻은 크림을 빨며, 체육관에 있는 자판기에서 소다수를 사먹게 동전 하
나만 달라고 마지에게 구걸했다. 그러면 마지는 유람선을 타고 한 여행과 요즘
뉴욕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한 얘기를 늘어놓았다. 그리고 건방진 목소리
를 높이 뽑아서는 자기는 <보고> 잡지에 나오는 모델들을 많이 알고 있는데,
그들은 맥주로 머리를 감으며, 자기 부모님은 포크 하나를 가지고 저녁을 다 먹
는 사람과는 자기를 결혼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우리가 감탄해 주기를 기
다렸다.
그러나 사실 마지는 자기에 대해서 매우 자신이 없어 했고, 우리 만큼이나 겸
손할 줄도 알았다. 그리고 그녀의 실생활은 구구단을 외우는 것보다 지루했다.
우리는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모두 다 마지를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우리는 모두 유치원부터 같이 다녔기 때문에 서로를 다 잘알고 있었다. 베티 앤
만 빼놓고.
그런데 베티 앤이 클리브랜드에서 농부 같은 옷을 입고, 양말목을 둘둘 말아
신고 와서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이상한 생각들을 늘어놓았다.
만약 마지만 베티 앤을 못살게 굴었다면 일이 그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
다. 그러면 베티 앤도 견딜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 마지와 합세했
다.
일의 시작은 베티 앤이 수잔 헨드슨보다 작문을 잘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부터였다. 수잔은 우리반의 작가였고, 우리는 모두 그녀를 자랑스러워했다. 우리
는 일주일에 한 편씩 작문을 지었는데, 수잔의 작문은 항상 훌륭했기 때문에 금
요일이 되면 작문 선생님은 수잔을 불러서 그녀의 작문을 읽도록 했다. 그러면
수잔은 연필을 귀 뒤에 꽂고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읽기 시작했다. 그 모습
이 우리에겐 어린 천재 작가처럼 보여서, 언젠간 그녀를 알았다는 사실을 자랑
할 날이 올 것이라고 믿었다.
베티 앤이 전학을 온 다음 주 금요일, 수잔은 손가락 사이로 연필을 빙글빙글
돌리며 그 주의 제일 우수한 작문으로 자기 작문이 뽑히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 주의 우수한 작문으로 베티 앤의 작문이 뽑힌 것이
었다. 그리고 베티 앤의 작문은 흑인 시인인 랭스톤 휴즈가 어떻게 흑인들의 대
변인이 되었나에 대한 것이었다. 반면 수잔의 작문들은 항상 <우수 경마 박람
회>나 <전람회의 개회식>에 대한 것이었다.
우리는 랭스톤 휴즈라는 시인에 대해선 들어본 적도 없었다. 더군다나 우리가
다니는 학교는 백인 시립 학교였고, 우리가 아는 어른들은 마틴 루터 킹마저도
못마땅하게 생각해서 비평을했다. 그런데 베티 앤은 랭스톤 휴즈의 '흑인 순결성
'과, '단풍나무 설탕 아이' (단풍 나무 설탕은 짙은 갈색이므로 여기서는 흑인의
이미지를 좋게 하는 말로 쓰였다.)에 대한 묘사와, 칼 샌드버그의 시는 인류가
입은 상처로부터 쏟아진 피의 노래와 같다고 한 랭스톤 휴즈의 말을 인용하며
작문을 지었던 것이다.
수잔의 작문은 <전화가 합선이 되었어요>라든가 <무지개가 하늘을 물들였어
요>라든가에 대한 것들이었다. 그런데 베티 앤은 스페인 내전이라든가 할램에
있는 흑인 빈민굴에 대한 작문을 지었다. 베티 앤이 작문을 읽고 있는데 죤슨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그때 마침 베티 앤은 랭스톤 휴즈의 시 중 수박에 대한
대목을 읽고 있었다(미국에 사는 흑인들은 특히 수박을 좋아하는 것으로 유명하
다.) 휴즈는 수박을 너무도 좋아해서 만약 영국의 여왕을 만난다면 자랑스러은
마음으로 수박을 대접할 것이라고 했다. 순간 아그네스 매터슨이 나를 바라보았
고(아니면 내가 먼저 아그네스를 바라보았는지도 몰랐다.) 우리는 여왕이 수박
먹는 모습을 함께 흉내냈다. 반 아이들이 배꼽을 잡고 웃었다. 그래서 베티 앤은
작문을 끝까지 읽을 수 없었다. 화가 나신 선생님은 베티 앤을 제외한 모든 아
이들에게 방과 후에 남아서 칠판 청소를 하라는 벌을 내렸다. 그 다음 날 베티
앤은 점심 시간에 샐러드를 먹다가 다음과 같은 쪽지를 발견했다.
'미안하구나. 하지만 우리 식당엔 수박이 없다.'
그 후부터 아이들은 무자비할 정도로 베티 앤을 놀려댔다. 그 아이가 입은 옷,
그 아이가 한 말, 그 아이가 먹는 음식 등에 대해 어떻게 하든 꼬투리를 잡았다.
사실 우리의 진정한 목적은 베티 앤을 놀려주자는 것보다는, 야생 동물 같은 무
리에 끼어서 한패가 되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지금은 알고 있지만 그때는 몰
랐었다. 그래서 베티 앤은 우리의 표적이 되었다.
베티 앤은 아파서 결석을 하는 날이 점점 많아졌다. 어떤 땐 일주일씩 학교에
나오지 않기도 했다. 그래도 아이들은 그 애에 대한 이야기를 그치지 않았다. 우
리에게 베티 앤은 외계에서 온 아이였다. 그래서 또한 바보였고, 폴락이었고(폴
란드 사람들을 얕잡아보고 일컫는 말), 마을의 천지였다.
그러던 어느날, 학교 프로젝트를 하도록 짝을 짓는데 나와 베티 앤이 한짝이
되었다. 선생님이 프로젝트를 내주던 날 모두들 자기 짝을 고를 기회가 있었는
데, 나는 수영 대회가 있어서 학교에 나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에 대해 모
두들 나를 놀렸고, 나도 친구들과 함께 웃었다.
프로젝트를 제출하기 하루 전 나는 베티 앤의 집으로 가서 같이 공부를 해야
했다. 우리가 공부하는 동안 베티 앤의 엄마는 과자를 내오고, 혹시 내가 음료수
를 마시고 싶은지 뭐 더 먹고 싶은것은 없는지를 거듭 물어보셨다. 베티 앤의
엄마는, 학교가 끝나고 베티 앤을 찾아온 친구는 나밖에 없다며 나를 만난 것을
무척 기뻐하셨다.
내가 베티 앤의 집에 있는 동안 나를 찾는 전화가 왔다. 마지였다. 그때 베티
앤의 엄마는 부엌에 계셨는데 마지는 전화기에대고 낄낄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단풍 나무 설탕이나 수박은 벌써 먹었니?'
그리고 마지는 내가 숨을 죽여 웃기를 기다렸다.
베티 앤의 엄마는 내게 등을 돌리고 서서 신경 쓰지 않는 척하셨다. 그런데
내게는 마치 마지의 말을 다 들어신 것처럼 생각되었다. 나는 얼른 전화를 끊었
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나는 우리가 베티 앤에게 여지껏 어떤 짓을 해왔는지
를 깨달았다.
'너희들은 왜 베티 앤을 좋아하지 않니? 베티 앤은 너희들을 좋아한단다.....'
그 질문을 들으며 나는 내가 너무도 바보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내 자
신이 바보같이 느껴진 적은 그전에도, 그 후에도 없었다.
만약 친절을 너무 베풀어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베티 앤은 그로부터 일주
일 내에 죽었을 것이다. 그녀의 집을 다녀온 후 나는 그 정도로 베티 앤에게 잘
해 주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베티 앤의 부모님은 그녀를 다른 학교로 전학시
키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베티 앤이 신경 쇠약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로부터 수년이 지나 대학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나는 딱 한 번 베티
앤을 보았다. 병원에서였다. 그녀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막대기로 치고 돌을 던지면 뼈를 부러뜨릴 뿐이지만, 사람의 혀는 영혼을 파
괴시킬 수 있다. 항상 말이 없는 조그만 열 살짜리 남자 아이는 학교 버스를 탈
때마다 친구들이 못살게 굴어서 집을 나가고 말았다. 신경이 예민한 중하교 3학
년짜리 여학생은 친구들이 너무도 못살게 놀리는 바람에 정신이 이상해지고 말
았다. 사람이 그정도로는 망가지지 않는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말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그리고 삶에는 지우개가 따라다니지 않는다. <이나휴즈>
험담
한 여자가 이웃에 대한 험담을 어디선가 듣고는 여기저기 떠들고 다녔다. 그
래서 며칠 안에 온 동네가 그 얘기를 알게 되었다. 그 험담의 주인공은 그 사실
을 알고 마음의 상처를 받고 괴로워했다. 그리고 나서 얼마 후 소문을 내고 다
닌 여자는 그 험담이 완전히 틀린 얘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진심
으로 후회하며 현명한 노인을 찾아가 어떻게 하면 이 실수를 만회할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현명한 노인이 말했다.
"시장에 가서 닭을 한 마리 사서 죽이십시오. 그리고 집에 갈때 닭털을 뽑아서
하나씩 길가에 떨어뜨리십시오."
이상한 충고도 다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여인은 노인이 시키는대로 했다.
다음 날 노인이 말했다.
"자, 이제 어제 왔던 길로 되돌아가서 털을 다 주워 오십시오."
여인은 어제 낡털을 떨어뜨렸던 곳으로 가보고, 그새 바람이 불어 닭털이 다
날려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몇 시간 동안 찾아 헤맨 끝에 여인은 세 개의
털을 발견하여 노인에게로 가지고 갔다.
"이젠 아셨나요?"
노인이 말했다.
"떨어뜨리기는 쉽지만 다시 주워오기란 불가능합니다. 남의 험담도 마찬가지여
서, 소문을 내기는 힘들지 않지만 그 실수를 완전히 만회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작자미상> <헬렌 하진스키 제공>
생명을 건져준 크리스마스 카드
친구를 얻는 것은 자신에게 귀중한 선물을 주는 것과 같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부끄러움을 잘 타고 내성적인 애비는 큰 도시 한가운데에 위치한 큰 고등학교
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학교를 다니며 외로움을 느끼리라고는 생각도 해보
지 못했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지 오래지 않아 애비는 자신이 다
니던 중학교를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다니던 중학교는 작지만 모두가 가
족 같은 그런 학교였다. 그런데 지금 다니는 고등학교는 너무 커서 사람들이 냉
정했고 불친절했다.
이 학교에서는 애비가 새로운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는지 관심을 기울여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애비는 매우 이해심이 많았지만, 너무 부끄러워했으므로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 가끔 친한 척하는 아이들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런 아
이들은 애비가 착하다는 사실을 이용해서 속여먹고 자기 이익을 챙긴 후 사라졌
다.
날마다 학교 복도를 이리저리 걸어다니며 애비는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되어갔
다. 그녀에게 말을 거는 사람도 없었고, 따라서 그녀가 말을 하는것을 들어본 사
람도 없었다. 그런 시간이 계속되며 애비는 자기가 똑똑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
도 자기 의견을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레서 애비는 더욱
입을 다물었고 마침내는 벙어리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얼마 전에 이혼한 애비의 부모님은 애비가 끝까지 친구를 사귀지 못할까봐 걱
정을 했다. 그리고 두 분이 이혼을 했으니, 애비는 속마음을 털어놓고 얘기를 나
눌 수 있는 친구가 어느 때보다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다. 부모님은 애비를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했다. 유행에 맞는 옷도 사주고 새 콤팩트 디스크도 사
주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애비가 자살을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모님도 알지 못했다. 종종 애비는
자기의 친구가 되고 싶은 만큼 자기를 좋아해주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며 울다
잠이 들었다.
새로 사귄 친구 태미는 도움이 필요한 척하며 애비가 그녀의 숙제를 다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재미있는 일이 있을 땐 애비를 끼워주지 않았다. 이런 일
을 겪으며 애비는 자신이 높은 벼랑 꼭대기에 간신히 서 있다는 느낌을 받곤 했
다.
여름방학 동안 일은 더욱 심각해졌다. 애비는 하루 종일 할일도 없이 혼자 지
내며 여러 가지 공상을 하곤 했다. 그래서, 결국 삶은 이런 것이니 도저히 살아
갈 필요가 없다고 믿게 되었다.
고등학교 2학년으로 진급하며 애비는 친구를 사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을 갖고 동네 교회의 청년부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곳의 아이들은 겉으
로는 애비를 환영하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모드 그녀가 자기의 그룹에 들어오지
않기를 바랐다.
그해 크리스마스가 되었을때 애비는 마음이 너무도 불안해서 수면제를 먹지
않으면 잠을 잘 수도 없게 되었다. 그렇게 그녀는 조금씩 조금씩 이 세상의 현
실로부터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부모님이 파티에 가고 없을 때, 애비는 동네에 있는 다리
로 가서 뛰어내리겠다고 마음 먹었다. 다리까지 걸어가기 위해 따스한 집을 나
서며 부모님께 쓴 편지를 편지함에 남겨놓기로 했다. 편지함의 뚜껑을 열다가
그녀는 몇장의 편지가 와 있는것을 발견했다.
누구에게 온 편지인지 궁금해서 편지들을 꺼내 살펴보았다. 한장은 친할아버
지와 할머니에게서 온 것이고, 두 장은 이웃이 보낸 카드였고... 그리고 나머지
한 장은 그녀에게 온 것이었다. 그녀는 성급히 봉투를 뜯었다. 교회 청년부에 같
이 다니는 한 남학생이 보낸 카드였다.
애비에게
그 동안 너와 얘기할 기회를 만들지 못한 것을 사과하겠어. 내 부모님이 지금
이혼 수속을 밟고 계시기 때문에 아무와도 얘기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어. 부모
님이 이혼을 하신후 내 기분이 어떨지에 대해 궁금한 점이 많은데 네가 나를 도
와 주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친구가 되면 서로 도와 줄 수 있을 것 같아. 일요일
에 교회에서 보자! 너의 친구 웨슬리 힐로부터
애비는 한동안 카드를 멍청히 들여다보다 읽고 또 읽었다. 평범하고 말이 없
는 자기를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자기의 친구가 되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애비는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자신이 매우 특별한 사람인 것 같
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당장 집으로 달려들어가 웨슬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에게 웨슬리
는 크리스마스에 찾아온 기적이었다. 우정이란 누구에게나 줄 수 있는 최대의
선물이니까. <테레사 피터슨>
내 말 좀 들어주세요
내 말 좀 들어달라고 부탁했는데
충고를 하기 시작하면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은 게 돼요.
내 말 좀 들어달라고 부탁했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고
설교를 하면
내 기분을 무시하는 게 되죠.
내 말 좀 들어달라고 부탁했는데
나를 돕기 위해서
무언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면
이상하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나를 돕지 못하는 게 돼요.
내 말 좀 들어주세요!
내가 부탁하는 것은 그것뿐이에요.
아무말도, 아무 행동도 하지 말고
그냥 듣기만 하세요.
충고는 적은 돈으로 살 수도 있어요.
동전 하나만 있으면 한 신문에서
디어 애비와 빌리 그래함의 조언을
다 읽을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나 혼자서도 일을 해결할 수 있거든요.
내가 무능한 것은 아니에요.
실망을 하고 비틀거릴지는 몰라도
무능하지는 않아요.
내가 혼자 할 수 있고, 내가 혼자 해야 할 일을
대신 해주면
나는 불안해지고 자신감을 잃게 되죠.
하지만, 비록 앞뒤가 맞지 않더라도
내 기분을 그대로 인정해 주면,
나는 내 기분을 이해시키려고
애를 쓰지 않아도 되고, 그러면
내 기분이 왜 이렇게 앞뒤가 맞지 않는지
생각해 볼 수 있게 되죠.
그러면 그것의 답을 찾을 수 있게 되고
더 이상 충고가 필요하지 않게 되죠.
앞뒤가 안맞는 것 같은 기분도
왜 그런 기분이 드는지 이해를 하고 나면
그럴 듯하다는 생각이 들게 되죠.
아마도 그래서 어떤 땐, 어떤 사람들에겐
기도가 효과가 있나 봐요.
하나님은 말을 안 하시니까요.
충고를 해주시거나, 잘못을
고쳐 주려고 하지 않으시니까요.
하나님은 그냥 들어시고
사람들이 혼자 해결하도록
내버려 두시니까요.
그러니 제발 내 말 좀 들어주세요.
그냥 듣기만 하면 돼요.
말이 하고 싶으면
차례가 될 때까지 잠깐만 기다리세요.
그럼 내가 들어 드릴게요. <작자미상>
울어도 괜찮아
진정으로 친한 친구란 성급하지 않게 많이 이해하고 믿음으로써 얻을 수 있
다. 삶의 불확실한 시간을 지날때마다 진정한 친구는 우리에게 둘도 없는 보물
이 될 것이다.
어제 저녁 몇 년 만에 처음으로 그녀를 만났는데 그녀는 무척이나 불행해
보였다. 자기 머리 색깔을 숨기려고 염색을 한 것처럼 괴로운 속마음을 숨기려
고 일부러 거친 척했다. 그녀는 말할 상대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소 우리는 함
께 걷기로 했다. 나는 얼마 전에 받아온 대학 원서 등 미래에 대한 얘기를 했고,
그녀는 얼마 전에 도망쳐 나온 집 등 과거에 대한 얘기를 했다. 그리고 그녀는
이미 헤어져 버린 애인에 대한 얘기를 했다. 내가 보기엔 여자를 휘어잡아야 직
성이 풀리는 남자와의 건전치 못한 사랑이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는 마약
에 대한 얘기를 했다. 아마 마약을 통해서 탈출구를 찾으려 했나 보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녀는 장래의 꿈에 대한 얘기를 했다. 내가 듣기엔 전혀 가능하지 않
으며 너무 물질적인 꿈이었다. 그녀는 친구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희
망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니까.
우리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처음 만났다. 그때 그녀는 앞니 하나가 빠지고 없
었고, 나는 이사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친구가 없었다. 내가 새로 전학 온 학교
의 이름은 174초등학교였는데, 운동장에 설치된 쇠로 만든 그네나 비웃는 듯한
아이들의 표정도 그 학교 이름만큼이나 차가웠다. 만화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나는 그녀에게 들고 있는 만화책을 보여달라고 했고, 그녀는 보여주고 싶은 마
음도 없으면서 그러겠다고 했다. 아마 그때 우리는 둘 다 누군가의 미소가 필요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곧 친구가 되어, 밤 늦도록 깔깔대며 떠들기도 하
고, 너무 추워서 학교에 가지 못하는 날엔 마주보고 앉아 따뜻한 코코아를 마시
기도 하고, 창가에 매달려 앉아 하염없이 떨어지는 눈송이를 바라보기도 했다.
어느 여름날 수영장에서 내가 벌에 쏘였을 때 그녀는 내 손을 꼭 잡으며, 자
기가 곁에 있으니 울어도 괜찮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울었다. 가을이면 우리
는 낙엽을 긁어 모아 잔뜩 쌓아놓고 차례로 낙엽 더미 속으로 뛰어들며 놀았다.
갖가지 아름다운 색깔로 엮어진 폭신한 낙엽 침대가 우리를 받쳐 줄 것을 알았
기 때문에 우리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가 다 커서 휘청대며 쓰러졌을 때는 아무도 받쳐 주는 사람이 없
었다. 그날 만나기 전까진 우리는 몇 달 동안 전화도 하지 못했고, 마지막으로
서로의 얼굴을 본 것도 몇 년도 더 되었다. 나는 캘리포니아로 이사를 갔고, 그
녀는 집을 뛰쳐나갔기 때문이었다. 그 후 우리는 전혀 다른 경험을 하며 살았고,
우리의 마음은 우리를 갈라놓은 몇 천 킬로미터의 미국 대륙만큼이나 멀어졌다.
지금 그녀는 그 미국 대륙을 건너 내게 왔다. 그녀의 말을 들으며 나는 우리 둘
사이에 놓인 거리를 의식했고,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그녀의 갈망을 눈치챘다.
그녀는 새 출발을 할 수 있는 힘을 모으고 싶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군
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나와의 우정을 필요로 했
다.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내가 곁에 있으니 울어도 괜찮다고 말했다. 그
러자 그녀는 울었다. 대프나 레난
우정의 교훈
"그런 사람들이 있다. 내가 변해가는 과정을 지켜 본 사람들. 내가 변할 수 있
도록 도와 준 사람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 전혀 알지 못하는... 나의 한 면
을 알고 있는 사람들.“
위의 글은 ‘나의 삶’이라는 연속극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 연속극엔 이해하
기 쉽게 표현된 철학적인 말귀가 많이 나오는데, 여기에 인용한 것은 매우 특별
한 우정에 대한 것이다. 나는 지금 나의 친구와 그런 소중한 우정을 나누고 있
다. 그것에 대한 얘기를 해주겠다.
나는 ‘나의 삶’이라는 연속극에서 라이앤의 역할을 맡고 있는데, 매 회가
거듭될수록 그 프로에 등장하는 극중 인물들이나 출거리의 전개에 깊은 감명을
받는다. 특히 라이앤과 라이앤의 친구 엔젤라의 활기 찬 우정은 감동적이기까지
한다.
엔젤라는 라이앤의 친구가 되는 것이 점점 힘들다고 생각한다. 라이앤은 노상
자기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친구들을 사귀며 자신을 망치거나,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자기 자신을 못살게 구는 타입니다. 엔젤라는 라이앤을 사귀며 그녀의
매력에 푹 빠져들지만 라이앤이 비사회적인 행동을 하거나, 손을 쓸 수 없을 정
도로 타락할때는 실망을 금치 못한다.
나는 라이앤의 역할을 하며 그녀의 행동 때문에 주위 사람들이 받는 절망과
실망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나도 그런 상황에 처해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두 친구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나서 두 사람의 우정이 변하기 시작할때가 있다.
그래서 같이 있어도 더 이상 따뜻한 감정은 느껴지지 않고, 대신 마음이 회의와
의심으로 가득 찰 때가 있다. 그럴 때 두 친구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 우정을 계
속할 것인가, 아니면 끝낼 것인가. 둘 중 어느 쪽이 더 가치 있는 행동일까?
나에게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중학교 1학년 때까지 제일 친하게 지내던 친구
가 있었다. 5년동안 우리는 떼어놓을래야 떼어 놓을 수 없는 사이였다. 그러다
내가 변하기 시작했다.
나는 다섯 살부터 열두 살까지, 같은 친구들과 같은 유치원을 다니고 같은 초
등학교를 다닌 후 중학교에 진학했다. 중학교는 초등학교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
였다. 그 동안 내가 알고 지내던 아이들이 모두 그 중학교로 진학해 왔다. 나와
함께 야구를 하던 리틀 야구단의 남자애들뿐만 아니라 내가 응원 단원으로 활약
하고 오빠가 선수로 뛰던 팝워너 축구팀 단원들과, 나와 함께 여름 연극학교를
다닌 많은 아이들을 그 중학교에서 다시 만났다. 더군다나 오빠가 그 중학교의
3학년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오빠 친구들은 나를 친동생처럼 귀여워해 주었
다. 또한 내가 그렇게 많은 아이들을 알고 있으니까, 학교에서 인기가 좋은 아이
들은 모두들 나를 자기 그룹에 끼워주었다. 그래서 나는 무척 즐거운 마음으로
중학교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수업 중 편지를 주고받을 친구가 항상 있었고,
같이 누군가의 흉을 볼 친구들도 많았고,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며 전화를 걸어
서 수다를 떨 친구들도 충분히 있었다.
나는 각기 다른 그룹의 친구들과 있을 때마다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모든 친
구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에 너무 열심히 집
착하다 보니까, 도대체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파악할 수 없게 되었다.
내가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다는 사실도 그때는 전혀 깨닫지 못했다.
나와 가장 친한 친구가 나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서서히 변해가는 내가 마음
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나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단
지, 그 친구가 나를 더이상 믿지 않는다고만 생각하고 그 친구를 원망했다. 그때
는 내가 나 자신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장 친한 친구가 나를 멀리
하는 것이 무척 속상하고 가슴 아팠다. 그래서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새로
운 친구들에게 더욱 적극적으로 달라붙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실수를 하기 시작했다. 어떤 실수는 대단치 않
았지만 어떤 실수는 심각했고, 그로 인해 새 친구들은 내가 그들이 원하는 타입
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내게 실망했고, 그때부터 모
든 일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내 친구임을 자처하고 다니던 아이들이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나에 대한 됫
공론과 소문이 마치 텔레비젼 연속극처럼 퍼지더니, 아이들은 나를 그들의 세계
로부터 추방하고 말았다. 학교에서 인기가 좋은 아이들도 내가 더 이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판단을 내리고는 멀리하기 시작했다.
한 걸음 물러서서 주위를 둘러보아야 할 시간이었다. 내 생애 그토록 힘들었
던 시간은 다시 없었다. 나는 외로웠고, 나자신이 너무도 실망스러웠다. 그래서
가장 친했던 옛 친구를 다시 찾았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서 그 친구에게 사과
하고, 아직도 너를 누구보다 좋아하고 진실로 보고 싶으며... 그 어느 때보다 네
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이해하지 못한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
보거나 전혀 감정이 담기지 않은 대답만 할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친구를
되찾으려고 더욱 열심히 노력을 해보았다. 하지만 한때 자매같이 지내던 우리의
우정은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나는 내가 그 친
구를 잃었으며, 변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의 우정은
아제 영영 사라진 것이었다.
학교에서 나는 더 이상 이 친구에게서 저 친구로 나비처럼 돌아다니지를 못했
다. 대신 휴식 시간이나 점심 시간이 되면 혼자서 이리저리 학교 안을 배회했다.
이제 더 이상 갈 곳이 없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나와 함께 유치원을 다니던 아
이들이 아직 서로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유치원 동창생 모임을 다
섯 내지 여섯 명의 동창생뿐만 아니라 초등학교를 거치며 새로 사귄 친구들 몇
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함께 같은 동네에서 자라며, 같은 초등학교를 다녔고,
같은 수업을 들었고, 끼리 끼리 생일 파티에 초대하며 사춘기 전 시기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겪은 친구들이었다.
그 유치원 동창생 모임이 이젠 꽤 커져 있었다. 동창생들은 자라며 새로운 친
구를 사귀었고, 내가 했던 것처럼 새 친구를 위하여 옛 친구를 버리는 대신, 새
로 사귄 친구들을 옛 친구들의 모임에 끌어들였던 것이다. 내가 한참 정신 못차
리고 못되게 굴 때는, 내 성인식 파티에 초대할 친구들의 명단에서 유치원 동창
들을 빼기도 했다. 그때 의아해 하던 엄마의 목소리가 아직도 들리는 듯하다.
"수지나 그렉같은 유치원 동창생들은 초대 안 하니?”
엄마는 내가 작성한 명단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엄마, 난 이제 그 애들이랑 안 놀아요."
내가 대답했다.
"그 애들은 내 새 친구들을 알지도 못하는걸요. 그리고 누구 한 명을 초대하면
나머지 애들도 다 초대해야 해요."
하지만 유치원 친구들은 그들의 성인식 파티나 크리스마스 파티에 나를 꼭 초
대해 주었다.
나는 이 친구들의 모임에 슬쩍 끼어들려고 여러 가지로 궁리를 했다. 절대 쉽
지는 않을 것이라는 각오는 되어 있었다. 친구들이 나를 냉정하게 대하고 따돌
린다 해도 할말이 없었고, 또 내가 한때 그들을 그렇게 대했으니 나도 그런 대
접을 받아 마땅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나는 한번 해보기로 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나는 아주 조금 노력밖에 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유치원 동
창의 모임에 끼어들 수가 있었다. 친구들은 나를 책망하지도 않았으며, 내가 편
안한 마음으로 함께 어울려서 그들과 한패라는 느낌이 들도록 해주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마치 유치원을 졸업한 이래 계속 그들을 만나온 기분이었다. 그 후
몇 달 동안 그들과 함께 어울리며 나는 점점 마음이 안정되어 갔다. 나는 다시
한번 변해가고 있었다. 난 좋아하는 사람들 속에서 새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그냥 잊고 넘어가지 못한 일이 있었다. 그들 모임에 끼기가
너무 쉬웠다는 것이었다. 내가 그들을 저버리고 새로운 친구들과 어울려 다닐
때 그들은 화가 나지도 않았단 말인가? 그들과의 우정이 조금도 중요하지 않은
듯 행동했던 나를 원망하지도 않고 아직도 나를 믿는단 말인가? 나는 이런 질문
들에 대한 답을 들을 때까진 그들의 모임에 완전히 낄 수가 없을것 같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달 후 난 답을 들을 수 있었다. 내 성인식에 초대하지 못
한 것을 사과하는 의미에서, 나는 그들을 초대해 야영 캠프를 가기로 했다. 해가
산등성이로 넘어간 후 우리는 모닥불 주위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깔깔대고 웃으
며, 마시맬로를 구워 먹고, 선생님들 흉을 보고, 유성을 하나 둘 세며 밤새도록
얘기를 했다. 지금이 내 마음속에 있던 질문들을 꺼낼 순간이라고 나는 생각했
다. 그리고 더듬더듬 묻고 나서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 어색한 시간이 흐르고,
한 아이가 입을 열었다.
"글쎄, 조금 속이 상하긴 했었어. 하지만... 잘 모르겠어. 우린 그냥 이해를 했
던 것 같아."
바로 그것이었다. 그냥 이해를 했던 것이었다.
그들은 변해가는 나를 지켜보며 내가 실수를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래서
실수를 통해 내가 내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나에게 알맞은 교훈을 얻도록 했다.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어색한 방법으로 자신을 바꾸려는 시도를 하며
슬픔과 기쁨을 겪게 된다. 그런일은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것이다. 삶이란 그런 것
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변함없는 친구로 자라게 된다. 친구들과 함께
성장하며, 함께 성장한 친구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서로를 무조건적으
로 사랑하고 이해하고 도와 주게 된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 내가 변해가는 과정을 지켜본 사람들. 내가 변할 수 있
도록 도와 준 사람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나의 한 면을
알고 있는 사람들."
이 말은 언뜻 듣기엔 무척 단순한 것 같다. 하지만 그토록 힘든 경험을 하지
않았다면 난 이 말의 진실한 무게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나와 가장 친했던 친
구와 학교에서 제일 인기가 좋은 친구들과 유치원 동창 친구들을 통해 나는 다
음의 두 가지를 확실히 알게 되었다. 나는 어떤 친구를 사귀고 싶어하며, 나는
어떤 친구가 되고 싶은지. A.J. 랭어
진정한 우정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뿐이다.
존 레논
엔젤라는 친구 샬롯이 요즈음 매우 힘들어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샬롯
은 항상 의기소침해 했고 우울해 했으며, 엔젤라를 제외하고는 아무하고도 말을
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걸핏하면 엄마에게 대들었고, 언니와는 치고받는 싸움
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엔젤라는 샬롯이 요즈음 쓰는 시들이 무
척 절망적이고 침울하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그 해 여름엔 샬롯에게 말을 거는 친구도 드물었다. 샬롯이 너무 힘들게 굴었
으므로 친구들은 그녀를 피하기 시작했다. 항상 우울해 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친
구하고는 같이 다니기가 싫었던 것이다. 또 샬롯과 친구가 되어보려고 조금 가
까이 다가가면 샬롯은 화를 내며 비평을 하거나, 침울해 하며 아무런 관심도 보
이지 않기가 일쑤였다. 샬롯과 진정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엔젤라 뿐이
었다. 엔젤라는 밖에 나가 친구들과 놀고 싶으면서도 고통스러워하는 샬롯과 함
께 있기 위해서 집 안에 머물렀다. 그러던 어느날 엔젤라는 이사를 가야 했다.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지금처럼 샬롯과 많은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이사를 간 첫날, 밖에서 새로 사귄 친구들과 놀면서도 엘젤라는 샬롯이 무엇
을 하고 있나 궁금해 했다. 해가 질 무렵 집으로 돌아왔을 때 엄마는 샬롯이 전
화를 했었다고 전해 주었다.
엔젤라는 당장 샬롯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벨만 계속 울릴 뿐 받는
사람이 없었다.
“샬롯, 엔젤라야. 전화해 줘.”
엔젤라는 친구의 전화 응답기에 메시지를 남겨놓고 끊었다.
30분쯤 지나서 샬롯이 전화를 했다.
“엔젤라, 너에게 할 말이 있어. 네가 전화했을 때 나는 지하실에 있었어. 총
구를 머리에 대고서... 자살을 하려고 말이야. 그런데 거실에 놓인 전화 응답기에
서 네 목소리가 들려온거야.”
엔젤라는 쓰러지듯 소파에 주저앉았다.
:네 목소리를 듣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이 퍼뜩났어. 그 사람이
바로 너여서 난 얼마나 운이 좋은지 몰라. 그리고 심리학자의 상담을 받기로 했
어.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나도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야. “
말을 마치고 샬롯은 전화를 끊었다. 엔젤라는 당장 샬롯의 집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두 친구는 현관 옆에 매달아 놓은 그네에 앉아서 함께 울었다.
작자미상
새 친구
오늘 정말 근사한 친구 한 명을 만났어.
그 친구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금방 알아 보았어.
내가 하는 말 모두를 그렇게 잘 이해하다니 이상하기까지 할 정도였어.
그 친구는 나의 고민을 들어주고 장래의 꿈에 대한 얘기도 들어주었어.
우리는 사랑과 삶에 대한 얘기도 했어.
그 친구는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것 같았어.
그 친구는 한 번도 나를 비평하지 않았어.
항상 내 기분이 어떤지를 알고 나뿐만 아니라, 내가 해결하려고 애쓰는 나의
걱정거리까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어.
그 친구는 자기가 말을하려고 내 말을 방해하는 적도 없었어.
대신 꼼짝않고 앉아서 참을성 있게 내 말을 끝까지 다 들어주었어.
내가 얼마나 고마워하는지를 그친구가 알았으면 했어.
그래서 안아주려고 가까이 다가갔다가 깜짝놀라고 말았지.
두 팔을 친구의 몸에 두르고 가까이 당기려하자,
그 친구가 다름 아닌 거울 속의 내 모습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지.
킴벌리 컬버거 제공
엄마는 한 번도 나를 포기하지 않았어요. 엄마는 나의 영웅이에요.
킴벌리 앤 브랜드
나는 바닥에 누워서 두 발을 마구 구르며 목구멍이 따가울 때까지 발작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내가 가지고 논 장난감을 치우라고 대리모가 말했기 때문이었다.
“당신을 좋아해요!”
그때 난 여섯 살이었고, 내가 왜 그렇게 항상 화를 내는것인지 나는 이해를
하지 못했다. 나는 두 살 때부터 대리모와 함께 살았다. 나를 낳아준 엄마는 너
무 가난해서 여섯 딸들을 기를 수가 없었다. 또한 우리 여섯자매는 아빠도 없었
고 우리를 보살펴줄 친척도 없었기 때문에 각기 다른 대리모의 집으로 보내졌
다. 나는 나이가 너무 어려서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무척 외로웠다. 그
리고 가슴속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을 표현할 능력이 없었다. 다만 발광
을 하며 화를 내는 것만이 내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내가 온순해질 기미를 보이지 않자 대리모는 나를 입양 기관으로 돌려보냈다.
내 첫번째 대리모가 그랬던 것처럼. 그래서 나는 내가 이세상에서 제일 나쁜 아
이이며,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다 케이트 맥캔이라는 이름의 여자를 만나게 되었다. 케이트 아줌마가 나
를 만나러 세 번째 대리모 집으로 찾아왔을 때 나는 벌써 일곱 살이었다. 케이
트 아줌마는 결혼을 하지 않았으며 입양할 딸을 찾고 있다고 대리모가 나에게
말해 주었다. 나는 케이트 아줌마가 나를 선택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
다. 나같이 못된 여자애와 평생 같이 살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
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케이트 아줌마는 나를 데리고 호박 농장으로 갔다. 나는 하루종일 재미
있게 놀기는 했지만 아줌마를 다시 볼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며칠 후 입양 기관 직원이 나를 찾아와서 케이트 아줌마가 나를 입양
하고 싶어하는데 아빠가 없는 집에서 살아도 괜찮겠느냐고 물었다.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이 한 사람만 있다면요."
내가 대답했다.
다음 날 케이트 아줌마가 다시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입양 절차가 끝나려면
1년을 걸리지만, 곧 나를 아줌마의 집으로 데려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
는 흥분으로 가슴이 떨리기도 했고, 겁도 났다. 케이트 아줌마는 나를 전혀 몰랐
다. 그래서 아줌마가 나를 더 잘 알게 되면 마음을 바꿀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케이트 아줌마는 내가 겁내고 있다는 사실을 금방 눈치챘다.
"네가 겁을 내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어. 하지만 한 가지 약속할게. 절대 너
를 돌려보내는 일은 없을 거야. 이제 우리는 가족이니까."
그렇게 말하며 눈물을 흘리는 케이트 아줌마를 보고 나는 놀랐다. 그리고 아
줌마도 나만큼이나 외로워한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달았다!
"알았어요... 엄마."
내가 말했다.
그 다음 주 나는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 이모, 사촌들이 될 사람들을 만났다.
벌써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껴안아주는 사람들속에 쌓여서 나는 기분이 좋다기
보다는... 희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의 집으로 이사를 간 후 생전 처음으로 내 방을 갖게 되었다. 방 벽에는
고운 벽지가 발라져 있었고, 침대에는 벽지와 어울리는 빛깔의 침대보가 덮여
있었고, 그 옆엔 고풍스러운 서랍장과 커다란 붙박이장이 있었다. 나는 종이 봉
지에 담아온 낡은 옷 몇 벌을 내놓았다.
"걱정하지 마."
엄마가 말하셨다.
"이제 예쁜 옷 많이 사줄게."
그날 저녁 새 침대에 처음 누웠는데, 안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제발 이
집에서 영원히 살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드렸다.
엄마는 나를 위해서 좋은 일을 많이 해주셨다. 교회에도 데려가고, 내가 좋아
하는 애완동물도 사주고, 승마와 피아노도 배울수 있게 해주셨다. 그리고 나를
사랑한다는 말을 매일 해주셨다. 하지만 엄마의 마음이 곧 변할 것이라는 생각
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정말 못되게 굴면 다른 엄마들처럼 나를 돌려 보낼거야.' 라고 나는 생
각했다.
그래서 엄마가 내 마음을 아프게 하기 전에 내가 엄마의 마음을 아프게 해주
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 싸움을 걸고,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울며 발악을 했다. 있는 힘을 다해 문을 쾅 닫고, 엄마가 말리면 때
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엄마는 한 번도 참을성을 잃지 않고, 언제나 나를 꼭 안
아주며 사랑한다고 말해 주셨다. 그리고 내가 화가 나서 어쩔 줄을 모르면 덤블
링대에 올라가서 뛰게 하셨다.
엄마의 집에 오기 전부터 나는 학교에서 낙제 점수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엄
마는 집에 돌아온 후 바로 숙제를 해야 한다고 엄격하게 말씀하셨다.
어느날 학교에서 돌아와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엄마가 들어 오셔서 텔레비
젼을 끄셨다.
"숙제를한 다음에 봐도 된다."
엄마가 말하자 나는 이성을 잃을 정도로 화를 냈다. 책들을 집어 마구 던지며
소리쳤다.
"난 당신이 아주 지겨워요. 이젠 이 집에서 살고 싶지도 않아요!"
나는 엄마가 당장 가서 짐을 싸라고 할 줄 알고 기다렸다. 그런데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물었다.
"날 돌려보내지 않을 거예요?"
엄마가 말하셨다.
"네 행동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절대 돌려보내지는 않을 거다. 우리는 이제 가
족이니까. 가족은 서로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 순간 나는 개달았다. 이 엄마는 내가 여지껏 경험했던 다른 엄마들과는 달
랐다. 이 엄마는 나를 돌려보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엄마는 진심으로 나
를 사랑한다. 그리고 나도 이 엄마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그 순간 깨달았다. 나는
엄마를 끌어안고 펑펑 울었다.
1985년, 드디어 입양 절차가 끝났을 때 우리 가족은 레스토랑에 모여서 파티
를 열었다. 난 누군가의 딸이 되었다는 사실이 무척 기분 좋았다. 하지만 불안한
마음은 아직도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 엄마가 정말 진심으로 나를 사랑하는
것일까, 라는 의혹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내 뜻대로 안 될
때마다 울며 발악을 하는 버릇은 그 후에도 계속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횟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지금 나는 열여섯 살이고 학교에선 우등생이다. 대거라는 이름의 말과 네 마
리의 고양이와 한 마리의 개와 여섯 마리의 비둘기와 뒷마당 연못에 사는 황소
개구리 한 마리를 기르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 수의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지
고 있다.
엄마와 나는 무슨 일이든 함께 하는 것을 좋아한다. 우리는 같이 쇼핑도 가고
말도 타러 간다. 사람들이 내가 엄마를 꼭 닮았다고 말하면 우리는 마주보며 웃
는다. 내가 엄마의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믿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나는 지금 말할 수 없이 행복하다. 내가 나이가 들면 결혼을 해서 아이를 갖
고 싶다. 하지만 그게 잘 안 되면 엄마가 했던 것처럼 입양할 아이를 찾을 것이
다. 무서워하고 외로워하는 아이를 찾아서 절대 포기하지 않고 기를 것이다. 엄
마가 나를 포기하지 않아서 나는 정말 기쁘다.
셰론 위틀리 <여성의 세계>잡지에서
엄마의 손
화려하게 차려 입은 부인 뒤에서
엄마가 두 손을 감추는 걸 보았어요.
나도 눈치를 챘죠.
그 부인의 손이 부드럽고 하얗고
깨끗하게 다듬어져 있다는 것을.
하지만 엄마,
엄마같이 열심히 일한 손을 가진 것은
수치가 아니에요.
그 부인도 엄마 같은 삶을 살았다면
엄마 같은 손을 가졌을 거예요.
하지만 그 부인의 두 손은
땔나무를 집 안으로 끌어들인 적도 없고
하나님이 주신 대지를 일군 적도 없어요.
살갗을 에는 강한 추위를
느껴본 적도 없고
흥분한 가축들을 위해
얼음을 부순 적도 없고
병든 가축을 돌본 적도 없고
말의 무릎에 붕대를 감아 준 적도 없어요.
엄마소의 몸에서 빠져 나오다
엉덩이에서 걸려버린 송아지를 끌어내 본 적도 없고
헛간의 가축들에게 물을 준 적도 없어요.
심지어는 청바지를 꿰매거나
구멍이 난 양말을
꿰매본 적도 없을 거에요.
그 부인의 손은
밤새도록 끙끙 앓는 어린 아들 옆에서
열이 나는 이마를 부드럽게 만져주지도 않았어요.
부엌 바닥을 닦아본 적도 없고
매일 매끼마다 설거지를 하지도 않았어요.
그리고 길을 잃은 아이를 이끌어본 적도 없어요.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두 손으로
크리스마스 선물을 직접 만들어 본 적도 없고
사과 껍질을 벗겨본 적도 없고
야채 통조림을 만들어 본 적도 없어요.
그 부인의 두 손엔
물집이 생겨본 적도 없고
못이 박혀본 적도 없어요.
그러니 다른 사람들을 위해 열심히 일한 흔적이나
제 마음속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친절함을
보여주지 못하죠.
사랑하는 엄마,
이제 아셨죠?
엄마의 손은 사랑의 손이라는 사실을.
엄마가 하나님을 뵈러 갈 때
하나님도 그걸 잊지 않으실 거에요.
토미 죠 캐스틸
성경책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한 젊은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그 젊은이가
사는 부유한 동네에선 부모님들은 졸업을 하는 자식들에게 자동차를 선물로 사
주었다. 빌과 그의 아버지는 졸업식이 다가오기 몇 달 전부터 적당한 자동차를
찾으러 다녔다. 그러다 졸업식 일주일 전에 빌에게 꼭 알맞는 차를 한 대 발견
했다. 빌은 졸업식 날 저녁에 그 차를 선물로 받으리라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
지 않았다.
그러니 드디어 졸업식 날 저녁이 되어서 아버지가 포장지에 잘 싸인 성경책을
내밀었을 때 빌이 얼마나 실망했는지는 가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빌은 너무도
화가 난 나머지 성경책을 힘껏 집어던지고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그리고 다
신 아버지를 찾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그는 집으로 돌아왔다.
어느날 저녁, 빌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물건들을 정리하다 문제의 성경책
을 발견했다. 그는 먼지를 쓱 문질러 닦고 책을 펼쳤다. 그런데 그 안에서 수표
한 장이 떨어졌다. 수표엔 고등학교 졸압식이 있던 날의 날짜가 적혀 있었고, 수
표의 금액은 그가 갖고 싶어하던 자동차를 사기에 충분한 액수였다. 작자미상
굿바이, 비키
살다 보면 우리들은 한 번쯤은 우리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감동을 받
게된다. 그런 감동은 우리가 존경하는 분과 대화를 하는 도중 올 수도 있고, 어
떤 경험을 통해 올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감동을 받는 순간부터 우리는 삶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된다. 나는 이런 감동을 내 여동생
비키에게서 받았다.
비키는 항상 다른 사람을 걱정해 주고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어 주는 성
품을 가지고 태어났다. 칭찬을 듣고 싶거나 신문에 실리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자기가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자기의 사랑을 나누어 주고
싶을 뿐이었다.
내가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여름 방학이 시작되었을 때였다. 어느날 아버지
가 전화를 하셔서, 비키에게 갑자기 문제가 생겨 병원에 입원을 했노라고 말씀
하셨다. 갑자기 쓰러졌는데 몸의 오른쪽부분이 모두 마비되었다는 것이었다. 처
음에 병원에서는 뇌일혈인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모든 검사가 끝난 후의 결과
는 그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악성 뇌종양이었다. 그래서 몸에 마비가 온 것이었
다. 의사는 앞으로 3개월이 남았다고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바로 전날 아무 문제도 없이 정상적인 하루를 보냈는데, 지
금은, 이토록 어린 나이에 삶을 마감해야 한다니!
처음에 충격과 허탈감을 어느 정도 극복한 다음, 나는 비키에게는 무엇보다
희망과 격려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비키가 이 시련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
하게끔 용기를 북돋워 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비키의 코치가 되기로
결심했다.
비키와 나는 매일 종양이 작아지는 장면을 생생히 머릿속에 그리며, 절대로
부정적인 생각이나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다음 글귀를 적어서 비키의 병실 문
에다 붙여 놓았을 정도였다.
“이 문을 들어오기 전에 모든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십시오.”
나는 비키가 종양을 이겨내도록 도와 줄 결심을 단단히 했다. 비키와 나는 한
가지 계약을 맺고 그것을 ‘50대 50’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내가 이번 쌍무의
50퍼센트를 맞고 비키가 나머지 50퍼센트를 맞는 것이었다.
8월이 되었다. 비키로부터 4,500킬로미터나 떨어진 대학으로 돌아갈 시간이었
다. 그런데 나는 학교로 돌아가야 할지 비키 곁에 남아 있어야 할 지 결정을 내
릴 수가 없었다. 나는 비키에게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네 옆에 남아 있겠다고
했다. 그러자 비키는 화를 내며 자기는 곧 괜찮아질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
다. 병원 침대에 누워 죽어가며 나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나는 곰곰히 생각을 해본 후, 만약 내가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병원에 남아
있으면 비키는 자기가 죽는가 보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
고 비키는 무엇보다 종양과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신념이 필요했다.
그날 저녁 난 병원을 떠나 학교로 출발했다. 비키가 살아 있는 것을 보는 것
은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그녀 곁을 떠나기는 무척 힘들었다.
그렇게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은 내 생애 처음이었다.
학교에 돌아와서도 나는 내가 맡은 50퍼센트의 싸움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매일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비키를 향해 말하며 어떻게 하든 비키가 들을 수 있
길 바랐다.
“비키야, 난 너를 위해 열심히 싸우고 있단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싸움을
중단하지 않을 거야. 너도 열심히 싸워라. 그러면 우리는 함께 종양을 물리칠 수
있을 거야.”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난 후에도 비키는 살아 있었다.
어느날, 나는 나이가 지긋하게 드신 분과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분은 비키의
병세가 나아지고 있는지 물었다. 나는 병의 상태는 계속 악화되고 있지만 비키
는 아직도 싸움을 중단하지 않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분은 이렇게 물으
셨다.
“비키가 자네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그러는 것은 아닐까?”
그분의 말씀을 듣고 나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럴까? 내가 너무 이기적인 것일까? 그래서 비키에게 싸움을 계속하라고
한 것일까?’
그날 밤 잠자리에 들기전에 나는 비키에게 말했다.
“비키야, 네가 많은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네가 싸움을 중단
하고 싶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만약 그러고 싶다면, 그래도 괜찮
다. 우리는 실패하지 않았어. 네가 끝까지 사움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네
가 여기보다 더 좋은 곳으로 가고 싶다면 나도 이해를 한다. 언젠가 우리는 다
시 만나게 될거야. 너를 사랑한다. 그리고 네가 어디를 가든, 나는 너와 함께 있
을 것이다.”
그 다음 날 아침 일찍 엄마가 전화를 하셔서 비키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주
셨다.
야구장에서 얻은 교훈
우리 앞에 항상 두 가지의 길이 있기 마련인데, 그 중 하나는 쉬운 길이다. 그
길을 택한 것에 대한 보상은 그 길이 쉬웠다는 것뿐이다.
내가 열한 살 때 나는 야구에 미쳐 있었다.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통해 야구
시합을 빠짐없이 보았고, 야구에 대한 책이란 책은 다 읽었다. 교회에 갈 때면
꼭 야구 선수 카드를 가지고 가서 나처럼 야구 카드를 모으는 아이들과 바꿀수
있는 기회를 노렸다.
그때 내가 가진 꿈과 희망은 모두 야구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언제든 어디서든 가리지 않고 야구를 했다. 친구들을 모아서 제대로 팀
을 만들어 하기도 했고,뒷마당에서 꼬마들과 하기도 했다. 형이나 아빠나 친구들
이 던지는 공을 받아주기도 했고,그럴 사람마저 없으면 현관 계단 벽에 고무공
을 던지고 받으며 지금 야구 경기가 벌어지고 있다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이런 태도와 마음가짐으로 1956년 소년 야구단에 가입해서 유격수를 맡았다.
나는 그렇게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리 못하지도 않았고, 그저 야구에 푹 빠
져 있었다.
골든은 야구에 미치지도 않았고 그리 잘하지도 못했다. 골든은 그 해 우리 동
네로 이사를 와서 야구단에 가입했는데, 야구에 대해서는 하나도 아는 게 없었
다. 공을 잡을 줄도 몰랐고, 칠 줄도 몰랐고, 던질 줄도 몰랐다. 심지어는 뛸 줄
도 몰랐다. 솔직히 말하자면 골든은 공을 무서워했다.
마침내 선수 명단을 발표하는 날이 왔을 때 나는 골든과 한 팀이 아닌 것을
확인하고는 크게 안심했다. 누구든지 적어도 한 게임의 반은 뛰어야 했는데, 골
든 때문에 우리 팀이 이길 확률이 조금이라도 높아지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
다. 다만 골든이 들어간 팀이 조금 불쌍할 뿐이었다.
연습을 시작한 지 2주일이 지났을 때 골든은 더 이상 연습에 나타나지 않았
다. 그 팀에 소속된 내 친구들 말에 의하면, 그팀의 코치가 잘하는 선수 두 명에
게 골든을 숲속으로 데리고 가서 잘 얘기해 보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두 선수는
골든에게 꺼져버리라고 했다.
그래서 골든은 꺼져버렸다.
당시 열한 살이던 나는 그 얘기를 듣고 무척 화가 났다.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리 코치에게 가서 그 얘기를 했다. 골든의 얘기
를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하며, 난 코치가 선수단 협회에 가서 보고를 할 것
이고 그러면 골든이 다시 야구를 할 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골든이
원래 자기의 팀으로 돌아가면 정의가 실현될
것이고, 그러면 우리 팀이 이길 확률이 다시 높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 생각은 완전히 빗나갔다. 코치는 골든이 그를 원하는 팀에 들어가
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를 올바르게 대우해 주고, 모든 선수들이 능력에 따라 공
정하게 대우를 받는 팀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골든은 우리 팀으로 들어왔다.
그 후, 아주 중요한 게임에서 9회 말 투 아웃일 때 골든이 홈런을 쳤다고 말
했으면 좋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그 해 시즌이 다끝나도록 골든은
파울볼 하나도 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는 외야수 였는데, 그가 서있는 쪽으로
날아간 공은 그 애 머리 위로 넘어가고 옆으로 지나갔다. 심지어는 그 애를 맞
고 다른 쪽으로 날아가기도 했지만 그 애가 잡은 공은 하나도 없었다.
우리가 도와줄려고 노력을 하지 않은것도 아니었다. 코치는 골든을 데리고 따
로 타격연습을 시켰고, 그애가 서있는 필드에 나가서 직접시범을 보이기도 했지
만 전혀 나아지는 기색이 없었다.
그 해 골든이 야구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배운 게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
다. 나는 확실히 배운 것이 많았다.번트를 하겠다는 것을 들키지 않고 번트하는
법을 배웠다. 더블 플레이일 때는 이루를 부드럽게 돌아가는 법도 배웠다.
그 해 여름 나는 코치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하지만 내가 배운 가장 중요
한 교훈은 야구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됨과 성실성에 대한 것이었
다. 사람은 누구나 그 사람 특유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 사람
의 타율이 3할이냐 3푼이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공을 잡을 수 있는지
아니면 놓치고 쫓아가야 하는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 공평하고 명예롭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동에 옮기
는 것이 승부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나는 그 해 배웠다.
그 해 여름 나는 그 코치에게서 가르침을 받는다는 사실이 무척 고마웠다. 그
코치의 팀에서 유격수를 맡았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 코치가 바로 내 아빠라는
사실이 무엇보다 자랑스러웠다.
척 무어맨
여기가 내 집이에요
자애심과 마찬가지로 평화도 가정에서부터 시작된다. 작자 미상
어떤 사람은 자라서 성인이 된 후에야 어린 시절이 소중했다는 사실을 깨달았
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어릴 때에도 내가 내 인생에서 가장 귀중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는 사실을 알았다. 나중에 커서 일이 잘 안풀릴때, 나는 어린 시절의 행복했던
추억에 매달려서 그 추억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았다.
우리집은 대식구인데 농촌에서 농장을 경영하며 살았다. 우리집엔 항상 사람
이 넘쳤고, 공간이 많았으며, 할 일도 많았다. 정원도 손봐야 했고, 건초도 썰어
야 했고, 말을 끌고 다니며 농장일도 해야 했으니 나는 자라며 심심하다는 말을
해본 적이 없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을 즐겨했다. 이런 일들은 나에겐 일 같지가 않았다.
나쁜 친구들의 꼬임에 넘어가 나쁜짓을 하는 일도 없었다. 내가 함께 어울린
친구들이라곤 우리 농장에서 기르는 동물들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가족
은 서로 사이가 매우 좋았고, 시골 외딴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일을 끝내는 저녁
이 되면 한 명도 빠지지 않고 모두 집에 모여 재미있게 놀았다. 저녁을 먹고 나
서 잠잘 시간이 될 때까지 게임을 하기도 하고 서로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며 웃고 떠들었다. 잠자리에 들어서는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며 농장에서 보낼
다음 날에 대한 생각에 젖어 있다보면 어느새 잠이 스르르 들었다. 어렸을 때의
내 삶은 이랬다. 그래고 내가 매우 운이 좋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열두 살일 때, 집안에 슬픈 일이 생겨서 내 삶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아버지가 심장 마비를 일으켜서 대수술을 받았던 것이다. 아버지는 원래 유전적
인 심장병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고 우리는 모두 겁에 질렸다. 의사는 아버지에
게 사는 방식을 완전히 바꿔야 한다고 충고했다. 즉, 더 이상 말을 훈련시킬 수
도 없고, 트랙터도 못탄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아버지는 더 이상 농장 생활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아버지 없이는 농장을 운영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래서 집을
팔고, 친척과 친구들과 정다운 고향을 뒤로 한채 서부로 이사를 갔다.
아리조나의 건조한 공기 덕분에 아버지는 점점 건강을 회복하셨고, 나도 새학
교와 새 친구들과 새로운 삶에 그런 대로 적응해 갔다. 나는 데이트를 하기 시
작했고, 친구들과 백화점을 쏘다니며 도시에서 자라는 10대의 갈등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환경 때문에 모든 것이 낯설고 이상했지만, 반면에 흥미롭고
재미있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변화는 갑작스러운 것일지라도 우리에게 좋은 영
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내 삶이 다시 한번 크게
변할 것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날, 로스앤젤레스에서 왔다는 연예계 매니저가 나에게 다가와서 연기를
해볼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런 생각을 해본적은 없지만 과히 나쁘지 않을
것 같았고, 사실 그런 제안을 받고 보니 관심도 생겼다. 그래서 시간을 두고 생
각해본 후 식구들과 의논을 했고,
나는 엄마와 함께 로스앤젤로스로 가서 한번 시도해 보기로 했다. 사실 내가 엄
청난 결정을 한 것인지 그때는 잘 몰랐다!
처음부터 엄마가 내옆에 꼭 있어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엄마와 나
는 이 일을 하나의 모험으로 생각하기로 했고, 연예계에서 나는 점점 성장하기
시작했다.
<비벌리 힐즈 90210>의 성공이 확실해지자 엄마는 이제 아리조나의 식구들에
게 돌아가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농장에서 자라던 조그만 여자 아이는 어느덧
자라서 큰 도시의 숙녀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나는 진심으로 내 일을 좋아했다. 그리고 꿈에도 상상해보지 못할 만큼의 성
공을 거두었다. 그런데...뭔가가 허전했다... 어두운 진공이 천천히 내 마음속으로
밀려들어와서 나의 행복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나는 뭔가 잘못되었는지 이해하
려고 애를 썼다. 더 열심히 일을 해보기도 하고, 반대로 일을 조금만 해보기도
했다.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도 하고, 옛 친구를 잃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내 마음속의 진공은 무슨 수를 써도 채워지지 않았다. 나는 밤에 파티와
나이트클럽을 찾아 다니는 것으로는 문제를 풀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래서 내가 가장 행복해지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내 삶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나는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서 말했다.
“엄마랑 아버지가 보고 싶어요. 엄마와 아버지 없이는 못 살것 같아요. 여기
다 집을 사겠으니 이리 이사 오세요.”
아버지는 처음엔 눈이 핑핑 돌아가는 도시생활은 싫다고 하셨다. 하지만 내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설득했다. 우리는 도시 근교에 집을 찾기 시작했다. 마당
에 가축들이 뛰어다니고 저녁때가 되면 텃밭에 가서 싱싱한 채소를 뜯어다 먹을
수 있는곳.
식구들이 푸근한 마음으로 찾아올수 있는 곳. 명절이 되면 다들 모일 수 있는
곳. 바깥세상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줄 수 있는 곳. 내 기억속에 남아 있는 어릴
적의 집.어느날 우리는 드디어 그런 집을 찾았다. 햇볕이 잘드는 따듯한 골짜기
에 있는 완벽한 농장이었다.
내 꿈이 실현되었다. 내 마음속에서 드리워진 어두운 진공이 사라지기 시작했
다. 그리고 그 자리를 안정과 평안의 감정이 메꾸기 시작했다. 나는 드디어 집에
온 것이다! 제니 갈쓰, 배우 <비벌리 힐즈,90210>
4. 사랑과 친절함에 대하여
친절한 말을 하면 자신감을 주게 되고
친절한 생각을 하면 뜻이 깊어지며
친절하게 베풀면 사랑을 받게 된다.
--리오 -쯔
암 호랑이
당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을 친절하게 대하십시오. 그 사람들은 당신보다 훨씬
힘든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플라톤
제스가 어떻게 내 병원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이미 어깨가 벌어지기 시작했고,
몸짓엔 어른스러운 단호함이 배어 있었지만, 운전 면허증을 받을 나이가 된 것
같지는 않았다. 그의 얼굴에는 아직도 어린 아이같은 순진함의 흔적이 남아 있
었다.
내가 그를 맞으러 대기실로 들어갔을 때 그는 애완 동물 운반함을 무릎에 올
려놓고, 운반함의 열린 문을 통해 고양이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그
는 순진한 학생답게, 틀림없이 내가 병이 든 고양이를 고쳐 줄 것이라고 믿고
찾아왔던 것이다.
아주 작은 고양이였다. 몸의 균형이 우아하게 잡혔고 특히 머리 모양이 섬세
했고 털의 무늬가 무척 아름다웠으며, 한 14년에서 15년은 되어 보였다. 등에 박
힌 점과 줄무늬와 또 약간 사나워보이는 얼굴 때문에 아이들의 눈에는 호랑이처
럼 보일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 고양이를 암호랑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나는 고양이가 어디가 아픈지 알아내기 위해 제스에게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
다. 제스는 아직 어른이 되지 않은 학생답게 간단하고 직선적으로 대답했다. 얼
마 전부터 고양이가 잘 먹지를 않고 하루에 두 번쯤 토한다고 했다. 그 동안 한
오백그램의 살이 빠졌는데, 고양이의 몸무게가 3킬로그램 정도인 것을 감안한다
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나는 암호랑이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고 예쁜 고양이라고 말해 주며, 눈과
입 안을 감시하고, 심장과 폐에서 나는 소리를 들어보고, 배에서 무엇이 만져지
는지 살펴보았다. 그러다 찾아냈다! 배 한가운데에서 덩어리가 만져졌다. 암호랑
이는 슬며시 내손에서 빠져나갔다. 내가 그덩어리를 만지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
었다.
나는 순진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제스를 한번 바라보고, 필시 그가 아주 어릴
때부터 길러왔을 고양이를 바라보았다. 그의 사랑하는 고양이가 종양에 걸렸다
는 사실을 그에게 말해 주어야 했다. 수술을 해서 제거한다 해도 1년을 살지 못
할 것이며, 그나마 죽을 때까지
고통스런 화학 요법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자면 돈도 많이 들지만 고양이도
무척 힘들어 할것이다. 그러니 이제 나는 제스에게, 고양이가 죽을 것이라는 말
을 해주어야 했다.
제스는 인생에서 가장 힘든 교훈을 지금 당장 배워야 했다. 살아 있는 것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이었다. 삶에서 죽음은 피할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 사실
을 어떤 식으로 제일 처음 알게 되었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생관을 바꿔
놓을 수도 있었다.
이제 제스는 어린 나이에 그것을 처음으로 배우려 하고 있었고, 나는 그가 그
것을 잘 배울 수 있도록 도와 주는 안내자가 되어야 했다. 나는 어떤 실수도 저
지르고 싶지 않았다.
완벽하게 그 일을 해내고 싶었다. 아니면 제스는 일생 동안 그 타격에서 헤어
나지 못할지도 몰랐다.
그의 부모님을 오시라고 해서 그 임무를 부모님께 전가하면 쉬울지도 몰랐다.
하지만 난
제스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벌써 눈치채고 있었고, 나는 그런 그를 모르는 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될수록 자상한 말투로 친절하게 고양이가 걸린 병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내가 설명하는 동안 제스는 경련을 일으키듯 내게서 물러나 앉았다. 자기의
얼굴을 내게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하지만 난 일그러지기 시작
하는 그의 얼굴을 벌써 보고 말았다. 나는 제스에게 시간을 주기 위해, 암호랑이
의 나이든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러며 내가 해줄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에 대해 설명했다. 우선 조직 검사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고양이가 집에서 조용히 죽도록 내버려 둘 수 있었다. 아
니면, 고통 없이 죽도록 주사를 놔줄 수도 있었다.
제스는 아무 말 없이 듣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요즈음은 고양이
가 너무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으며, 그것을 옆에 서 지켜보기가 힘들다고 말했
다. 제스는 온 힘을 다해 슬픔을 참고 있었고, 그런 그와 고양이를 바라보며 나
는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나는 그의 부모님께 연락해서 이 일에 대한 설명을 드리겠다고 말했다.
제스는 아버지의 전화 번호를 내게 알려주었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에게 전화
로 설명을 하는 동안 고양이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며 기다렸다. 얼마 후 나는
수화기를 제스에게 넘겨 주었고, 제스는 진료실 한구석을 걸어다니며 전화를 받
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아버지의 말을 듣고 있다가 정작 몇 마디 말을 할 때
는 목소리가 갈라져 잘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전화를 끊고 나에게로 얼굴을 돌렸을때는 더 이상 울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고양이를 안락사시키기로 아버지와 결정했다고 말했다.
그는 화도 내지 않고 그럴지 않을 것이라고 부정도 하지 않고, 미친듯이 울지
도 않으며 그저 담담하게 이 일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가 속으로 얼마나 큰고
통을 받고 있는지를 나는 짐작할 수 있었다. 고양이를 하룻밤 집으로 데리고 가
서 작별 인사를 하겠느냐고 묻자 그는 싫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몇 분간만 고양
이와 단둘이 있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 둘을 방에 놔두고 고양이가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도록 수면제를 가지
러 갔다.
제스가 어떤 고통을 겪고 있을지 생각하자 내 가슴에 슬픔이 차올랐고, 하염없
이 쏟아지는
눈물을 막을 길이 없었다. 제스는 이제 갑자기, 아무의 도움도 없이 홀로 어른
이 되어야 했다.
나는 진료실 밖에서 몇 분을 기다렸다. 얼마 후 제스는 문을 열고 나와서 이
제 준비가 되었다고 말했다. 주사를 놓는 동안 고양이와 함께 있고 싶으냐고 묻
자 제스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는 고양이곁에서 고양이가 평온하게 숨
을 거두는 걸 보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래서 제스는 내가 주사를 놓는 동안 고양이를 꼭 끌어안고 괜찮다고 속삭여
주었다.
고양이는 제스의 손에 얼굴을 묻고 조용히 잠속으로 빠져 들었다.
고양이는 편안히 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 고통을 받는 사람은 제스뿐
이었다. 나는 그에게 말해 주었다. 지금 너는 고양이가 편안히 쉴수 있도록 고통
을 받아들였으니, 고양이에게 그보다 더 좋은 선물이 없을 것이라고.
그는 알아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뭔가 빠진 것 같았다. 나는 내 임무를 완벽히 수행하지 못한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러다 갑자기 깨달았다. 나는 그에게 갑자기 어른이 되라고
요구했고, 그는 훌륭히 그 일을 해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어른인 것
은 아니었다.
나는 그에게 두 팔을 내밀며 내게 기대겠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그는 내게 기
댔다. 쥬디스 J. 죠니씨
마음의 빛깔
당신의 일부분을 주는 것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습니다.
랠프 월도 에머슨
작년 가을, 할로윈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날, 나는 <화요일의 아이들>이라는
단체에서 주최하는 축제에 참석해 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그 단체는 에이즈 바
이러스에 감염된 아이들을 돕고 있었다. 아마 내가 텔레비젼에 출연하는 배우이
기 때문에 나를 초청한 것 같았고, 나는 아이들을 돕고 싶은 마음에서 가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막상 축제에 도착해 보니 내가 배우라는 사실을 아는 아이들
은 몇 명 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내가 그날 하룻동안 그들과 놀아주기
위해서 온 언니나 누나라고 생각했고, 나는 그게 더 마음 편했다.
축제에는 여러 가지 행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 중 나는 유난히 많은 아이들
이 모여 있는 행사장으로 가 보았다. 그곳에는 정사각형의 헝겊과 물감이 준비
되어 있어서 누구든 원하기만 하면 한 장의 헝겊에다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나중에 그림이 그려진 헝겊들을 다 모아서 조각 이불을 만든 후, 이 단체를 위
해 평생 일하고 이제 얼마 있으면 은퇴를 하실 분께 드린다고 했다.
그 행사를 준비한 분들은 아이들에게 밝은 색깔의 물감을 나누어 주고, 조각
이불을 아름답게 만들 그림을 그리도록 부탁했다.
나는 이미 그림이 그려진 헝겊 조각들을 둘러보았다. 밝은 파란색 구름에 둘
러 쌓인 분홍색 하트도 있었고, 아름다운 주황색 황혼 속에 서 있는 초록색과
자주색 꽃들도 있었다. 그림들은 모두 밝고 긍정적이며 보는 사람의 기분을 들
뜨게 해주는 색깔들로 칠해져 있었다. 단 하나만 빼놓고는.
내 옆에 앉은 사내아이가 하트를 그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하트는 색깔도 짙
을 뿐 아니라 가운데가 텅 비어서 생명력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 아이
는 다른 친구들이 사용한 밝고 힘 있는 색깔을 피하는 것 같았다. 처음에 나는
그 아이가 물감이 모자라서 그런 색깔을 칠했나 보다고 생각했다. 아마 다른 아
이들이 밝은 물감을 다 써버려서 어두운 색깔만 남았나 보다고 생각했다. 그런
데 아이에게 그러냐고 물어보자 아이는 전혀 예상 밖의 대답을 했다. 아이는 자
기 마음이 항상 어둡기 때문에 그런 색깔을 칠했다고 말했다. 왜 그러냐고 물어
보자 아이는 자기가 아프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 자기만 아픈 것이 아니라 엄
마도 몹시 아프다고 했다. 그리고 자기의 병은 절대 낫지 않을 것이며 엄마의
병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아이는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를 도와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나는 아이에게 정말 안됐다고 말하고, 네가 왜 그렇게 슬픈지 이제는 이해를
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네가 하트를 어두운 색깔로 칠한 이유도 충분히 알겠
다고 했다. 하지만... 아무도 너를 도와 줄 수 없다는 것은 틀린 말이라고 했다.
너와 너의 엄마의 병을 고쳐 주지는 못하지만... 포옹 같은 것은 해줄 수 있으며,
내 경험에 의하면 포옹은 슬픈 사람들의 마음을 밝게 해주는 데 큰 효과가 있다
고 했다 그리고 네가 원하기만 한다면 내가 지금 당장 포옹을 해줄 것이고, 그
러면 내 말이 이해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아이는 당장 내무릎으로 기어올
라 왔고, 내 마음은 이 작고 귀여운 아이에 대한 사랑으로 터질 것 같았다.
아이는 한참 동안이나 내 무릎에 앉아 있다가, 팔짝 뛰어내려 가서 그림을 마
저 그렸다. 아이에게 이제 기분이 좀 좋아졌느냐고 묻자 아이는 그렇다고 대답
했다. 하지만 자기는 아직도 아프며, 자기를 낫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했다. 나는 이해한다고 말하고 슬픈 마음을 달래며 돌아섰다. 그리고
이 아이들을 돕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축제가 끝나 갈 무렵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데 누군가 내 옷자락을 잡아
당겼다. 뒤를 돌아보니 그 아이가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담고 서 있었다. 아이
가 말했다.
“내 마음의 빛깔이 변하고 있어요. 점점 더 환해지고 있어요... 포옹은 정말
효과가 있나봐요.”
집으로 돌아가며 나는 내 마음 또한 더욱 밝은 빛깔로 바뀌는 것을 느꼈다.
행복의 비밀
사랑을 받고 싶으면 당신 자신이 사랑스럽게 변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
람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벤자민 프랭클린
가족도 없고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도 없는 한 고아 소녀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어느날 소녀는 유난히 슬프고 외로운 기분으로 초원을 산책하다
가 가시 나무에 날개가 걸린 나비 한 마리를 발견했다. 헤어나려고 바둥대면 댈
수록 나비의 연약한 몸은 더욱 깊이 가시에 찔렸다. 어린 소녀는 몸을 굽혀 조
심스럽게 나비를 풀어 주었다. 나비는 훨훨 날아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아름다
운 요정으로 변했다. 소녀는 믿을 수가 없어서 두 눈을 비볐다.
“나를 구해 준 친절에 보답하기 위해서 소원을 하나 들어주겠다.”
요정이 소녀에게 말했다. 소녀는 잠시 생각해 보다가 대답했다.
“행복해지고 싶어요!”
“알았다.”
요정은 말하고 소녀의 귀에다 조용히 속삭였다. 그리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세월이 지나 소녀는 어른으로 자랐고, 그녀보다 행복한 사람은 어디에서도 찾
아볼 수 없었다. 사람들은 소녀에게 행복의 비밀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다.
“내가 어렸을 때 요정이 내게 가르쳐 준 대로 했죠. 그래서 행복하게 되었어
요.”
소녀가 더 나이가 들어서 죽게 되었을 때, 이웃 사람들은 그녀가 행복의 비밀
을 가르쳐 주지 않은 채 죽을까봐 걱정이 되어 몰려왔다.
“제발 말해 줘요.”
이웃 사람들이 애원했다.
“요정이 뭐라고 했는지 가르쳐 주세요.”
그러자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요정은 이 세상의 사람들이, 부유하건 가난하건, 늙었건 젊었건 관계없이 모
두 나를 필요로 할 것이라고 말했어요.”<연설가의 원전>에서
어떤 친절
천명의 사람이 기도를 드리는 것보다 한사람에게 한가지 친절을 베푸는 것이
훨씬 낫다. <간디>
프랭크 데일리는 꽁꽁 얼어붙은 땅을 내려다 보다, 차에서 뿜어져 나온 배기
가스로 검게 더럽혀진 눈을 옆으로 걷어찼다. 그리고 10번 버스에 올라타며 친
구인 노옴과 에드가 떠드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척했다. 친구들이 묻는 말엔
생각도 해보지 않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응, 그래, 밀톤에 대한 시험은 백 점 받았어... 아니, 오늘 저녁엔 안 돼. 공부
해야 해.”
프랭크는 친구들과 함께 밀워키 시영 버스 맨 뒷좌석에 풀썩 주저 앉았다. 다
른 아이들도 몇 명 있었는데, 그 중엔 다른 학교 학생들도 끼어 있었다. 버스는
뒤로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블루마운드가 서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프랭크는 양손의 엄지 손가락을 벨트 앞부분에 밀어 넣고 의자 깊숙이 기대
앉았다. 바로 한 달 전, 오늘처럼 춥고 모든 것이 회색으로 물들었던 어느날, 프
랭크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프랭크는 자기가 누구 못지 않게 농구를 잘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의
엄마는 그를 ‘올해의 최우수 선수’라고 불렀고, 그가 더 어렸을 때에는 ‘폭
격기’라는 별명을 붙여 주기도 했다. 그 생각을 하며 프랭크는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버스가 한쪽으로 기울었고 프랭크는 한 발을 뻗어 중심을 잡았다. 발
에는 엄마가 얼마 전에 사준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그래, 내 키 때문일거야.’
그는 생각했다.
‘그것밖에 없잖아. 164센티미터. 내가 말켓 고등학교에 새로 전학을 왔고 이
제 겨우 1학년이니까, 코치는 나를 한번 흘끗 보고는 너무 작아서 농구를 할 수
없다고 단정 지어버린 거야.’
새로 전학 온 학교에 적응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말켓 고
등학교는 남학생들만 다니는 천주교 학교였기 때문에 상급생들은 잘모르는 하급
생을 자기 그룹에 끼워 주지 않았다. 프랭크는 초등학교 때부터 운동을 잘해서
친구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으며 자랐기 때문에 적응하기가 더욱 힘들었다. 새학
교에서는 그를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말켓 고등학교에 오기 전에 프랭크는 운동뿐만 아니라 학업에도 우수한 성적
을 올렸다. 담임 선생님이셨던 앤더슨 선생님이 어느날 해주신 말씀을 프랭크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것 봐, 프랭크. 네가 농구에 쏟는 시간만큼만 공부에 쏟는다면 농구와 공
부를 다 잘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랭크는 앤더슨 선생님의 말씀을 따랐고, 그 후에는 공부도 누구보다 잘하게
되었다.
갑자기 버스 뒤쪽에서 시끄러운 경적 소리와 함께 바퀴 미끄러지는 소리가 들
렸고, 프랭크는 깜짝 놀라 노옴과 에드를 바라 보았다. 노옴은 눈을 반쯤 감은
채 창문에 머리를 대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따뜻한 숨결이 창문
유리에 커다란 안개를 그렸다.
프랭크는 눈을 비볐다. 지난 달, 학생 샤워장 문 앞으로 다가가며 가슴이 꽁꽁
얼어붙는 것 같던 기분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샤워장 문 위에 붙여진 선수
명단을 초조한 눈빛으로 읽어 내려가며 프랭크는 애타게 자신의 이름을 찾았다.
하지만 없었다. 어느 곳에도 그의 이름은 없었다. 프랭크는 마치 자신이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자신이 투명 인간이
된 것 같았다.
버스는 정부가 운영하는 훈련소 건물 앞에서 멎었고, 기사 아저씨는 뒤를 돌
아보며 아이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소리쳤다. 프랭크는 기사 아저씨를 바라보았
다. 대머리였기 때문에 아이들은 그에게 코작(한때 인기 높았던 텔레비전 형사물
의 주인공으로 대머리다.)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만삭의 여인이 은색으로 칠해진 손잡이에 매달려서 간신히 버스 안으로 몸을
끌어올렸다. 여인은 기사 아저씨 바로 뒷자리에 풀썩 쓰러지듯 앉았고 그 바람
에 두 발이 공중으로 들어올려졌다. 그 순간 프랭크는 여인이 신발을 신지 않은
것을 보았다.
코작은 온몸을 기울여서 운전을 하며 어깨 너머로 여인에게 소리쳤다.
“신발은 어쨌어요? 오늘 영하 15도는 되는 것 같은데 말예요.”
“신발 살 돈이 없어요.”
여인은 대답하며 다 떨어진 코트 깃을 여몄다. 버스 뒤에 앉은 학생들은 흘끔
여인을 바라보고 비웃는 웃음을 흘렸다.
“발 좀 녹이려고 버스에 탄 거예요.”
여인이 말을 이었다.
“아저씨만 괜찮다면 여기 앉아서 한 바퀴 돌아올려구요.”
코작은 대머리를 한 번 긁적이더니 다시 소리쳤다.
“도대체 어떡하다 신발 살 돈도 없을 지경이 되었죠?”
“아이들이 여덟 명이나 있어요. 그 아이들 신발 다 사주고 나니까 내 것 살
돈이 없었어요. 하지만 괜찮아요. 하나님이 나를 지켜 주시니까요.”
프랭크는 엄마가 새로 사준 나이키 신발을 내려다 보았다. 신발 덕분에 그의
발은 항상 따뜻하고 포근했다. 프랭크는 다시 여인을 바라보았다. 여인의 양말엔
구멍마저 뚫려 있었다. 단추가 거의 다 떨어져 나간 코트는 농구공만큼이나 부
른 배를 다 감추지 못한 채 얼룩투성이의 원피스를 드러내고 있었다.
프랭크의 귀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노옴과 에드에겐 신경도
쓰지 않았다. 대신 그는 차갑게 얼어붙었던 자신의 가슴이 따뜻하게 녹아오는
것을 느꼈다. ‘투명 인간’이라는 단어가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농구 때문은
아니지만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사람. 덤으로 사는 사람. 사회에서 밀려나 잊
혀진 사람.
프랭크는 생각했다. 그는 분명히 항상 신발을 신고 다닐 수 있을 것이지만, 그
여인은 아니었다. 프랭크는 의자 밑에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려 신발을 벗었다. 그
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눈치 챈 사람은 없었다. 이제 프랭크는 양말만
신은 채 눈속을 걸어 세 블록을 가야 했다. 하지만 프랭크는 추위를 타지 않았
다. 드디어 버스가 멈췄고 프랭크는 사람들이 다 내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의자
밑으로 손을 뻗어 농구화를 집어 들었다. 그는 재빨리 여인에게로 걸어가서 신
발을 건네 주며 말했다.
“이것 신으세요. 저보다 아주머니에게 더 필요한 것 같아요.”
그리고 프랭크는 서둘러 버스를 내리다 웅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하지만 상관
없었다. 그는 전혀 춥지 않았다. 여인이 그에게 소리쳤다.
“이것 봐요. 나한테 꼭 맞아요!”
코작도 소리쳤다.
“이것 봐! 이리 와봐! 네 이름이 뭐냐?”
프랭크는 돌아서서 코작을 바라보았다. 그때 노옴과 에드가 그에게 신발을 어
떻게 했느냐고 물었다.
프랭크는 여인과 코작과 친구들을 바라보며 흥분으로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
다.
“프랭크 데일리.”
프랭크는 조용히 말했다.
“제 이름은 프랭크 데일리예요.”
“프랭크야.”
코작이 말했다.
“난 20년 동안 이 버스를 운전해 왔지만 이렇게 아름다운일은 처음 본다.”
여인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고마워요, 청년.”
그리고 여인은 코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그랬죠? 하나님께서 나를 보살펴주실 거라고요.”
프랭크는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괜찮아요. 아주머니.”
그리고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별 것 아니예요. 그리고 크리스마스잖아요.”
프랭크는 서둘러 노옴과 에드를 따라갔다. 어느새 회색 하늘이 밝게 개어 있
었고, 집으로 걸어가며 그는 전혀 발이 시린 줄을 몰랐다.
바바라 A. 루이스
미소
그녀는 슬퍼 보이는 이방인에게 미소를 보냈다.
그녀의 미소를 보고 이방인은 기분이 나아졌다.
그래서 언젠가 그에게 친절을 베풀어 준 친구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친구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를 받고 몹시 기뻐한 친구는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고 팁을 후하게 주었다.
후한 팁을 받은 웨이트리스는 깜짝 놀라서
그 돈으로 복권을 샀고
그 다음 날 상금을 탔다.
그리고 그 돈의 일부를 거지에게 주었다.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거지는
감사히 그 돈을 받아 저녁을 사먹었다.
그리고 초라한 그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자신이 이제부터 큰 일을 당할 거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는 추위에 떨고 있는
강아지 한 마리를 주워서 집으로 데리고 갔다.
강아지는 폭풍우를 피해 집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된 것이 너무도 고마웠다.
그날 밤 그 남자의 집에 불이 났다.
강아지는 열심히 짖었다.
사람들은 강아지가 짖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나
모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때 목숨을 구한 사람들 중 한 소년이
자라서 대통령이 되었다.
이 모든 일이 한 푼의 돈도 들지 않은
미소 덕분에 일어났다.
메이슨-딕슨의 추억
클리브랜드 시에 있는 한 호텔에서 연회가 배풀어지고 있었다. 돈그레 그린은
연회장으로 들어오는 정부인사와 스포츠계 인사들을 초조한 눈빛으로 바라보았
다. 그들은 "소수민족을 위한 골프 장학기금 모금 파티"에 참여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도착하는 중이었다. 나는 그 파티에 흥을 돋구기 위한 연예인으로 고
용되었다. 올해 18살이고, 루이지애나 몬로 시에서 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인
돈드레는 그날 파티에 귀빈으로 초대되었다.
“긴장되니?”
내가 물었다. 잘생긴 얼굴의 돈드레는 빳빳이 풀을 먹인 셔츠에 예복을 차려
입고 있었다.
“조금요.”
그는 웃으며 속삭였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돈드레는 대부분의 학생이 백인인 고등학교에 다니는 평
범한 흑인 학생이었다. 비록 그와 수업을 듣는 학생들과 그의 친구들이 대부분
백인이었지만 피부 색깔이 문제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1991년 4월 17
일, 돈그레가 흑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사건이 발생했고 그 사건은 전국에 파문
을 일으켰다.
“신사 숙녀 여러분.”
사회자가 말했다.
“오늘의 귀빈 돈그레 그린 군을 소개합니다.”
관중들은 모두 일어서서 박수를 쳤고, 돈그레는 마이크 앞으로 걸어나가 이야
기를 시작했다.
“저는 골프를 좋아합니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지난 2년 동안 저는 세인트 패트릭스 고등학교 골프부의 맴버였습니다. 비
록 골프부에 흑인 학생은 저 한 명밖에 없지만, 루이지애나 주의 모든 골프 클
럽을 돌아다니며 백인 학생들과 시합을 하면서도 한 번도 어색하게 생각했던 적
이 없습니다.”
관중들은 앞으로 바싹 다가앉았다. 음식을 나르고 테이블을 닦는 호텔의 종업
원들마저 일손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나는 돈드레의 말을 들으며, 내 마음속
한구석에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어릴 때의 추억을 떠올렸다.
돈드레는 말을 이었다.
“우리 골프부는 몬로 시를 떠나 캘드웰 골프 클럽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시합을 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골프장으로 걸어갔
습니다.”
돈드레와 다른 골프부원들은 잔뜩 긴장을 하고 있었으므로 세인트 패트릭스
고등학교 스포츠부 담당인 제임스 멀피 선생님과 어떤 남자가 하는 이야기를 듣
지 못했다. 멀피 선생님은 잠시 동안 클럽 하우스에 들어갔다 나오셨다.
“3학년들은 모여라!”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빨리!”
돈드레를 비롯한 네 명의 학생은 선생님 주위로 모이며 선생님의 표정이 잔
뜩 굳어 있는 것을 보았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캘드웰 골프 클럽은 백인들만 이용할
수 있다고 한다.”
멀피 선생님은 잠시 말을 멈추고 돈드레를 바라보았다. 학생들은 믿을 수 없
다는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반응을 취해야 하는지 너희 3학년 학생들이 결정
해라.”
선생님이 말을 이으셨다.
“게임을 거부하겠다고 결정하면 우리는 이 시합에서 지게 된다. 게임을 하겠
다고 결정하면, 돈드레는 참가할 수 없게 된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32년 전에 있었던 추억 한 가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1959년 내가 열네 살때의 일이다. 나는 뉴욕 주 롱아일랜드시에 있는 흑인 빈
민가에서 엄마와 새 아버지와 함께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엄마는 병원에서 밤
마다 일을 하셨고, 새 아버지는 석탄 트럭 운전수로 일하셨다. 말할 것도 없이,
당시 우리의 생활 수준은 아메리칸 드림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졸업 기념 여행으로 워싱
턴 D.C.에 갈 예정이라고 하셨을 때는, 나만 못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전
혀 하질 못했다.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 D.C.를 관광한 후엔 메릴랜드 주에 있는
클렌 에코우 파크에도 들를 예정이라고 했다. 당시 나에게 클렌 에코우 파크라
면 지금의 디즈니랜드와 낫쯔베리농장과 매직마운트을 다 합쳐놓은 것만큼은 되
었다.
졸업 여행에 대한 안내문을 손에 들고 집으로 달려가는데 흥분으로 가슴이 쾅
쾅거렸다. 하지만 엄마는 드는 비용이 얼마인지를 보시고는 고개를 흔드셨다. 우
리집 형편으론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약 10초 동안 실망을 한 후 나는 여행 경비를 벌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그 다
음 8주 동안 집집마다 돌아다니면 사탕을 팔았고, 신문 배달을 했고, 이웃들의
잔디를 깎았다. 그래서 떠나기 3일 전에야 겨우 필요한 액수만큼의 돈을 모을
수 있었다. 나도 졸업 여행을 가게 된 것이었다!
여행을 떠나는 날 나는 흥분에 가득 차서 기차에 올라탔다. 내가 탄 차에 흑
인은 나밖에 없었다.
우리 호텔은 백악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고, 사업가의 아들인
프랭크 밀러가 나와 한 방을 쓰게 되었다. 프랭크와 나는 호텔 창문 밖으로 몸
을 내밀고, 지나가는 여행객들에게 물풍선(조그만 풍선으로 안에 물을 넣게 되어
있고 다른 물체에 닿으면 쉽게 터진다.)을 던지며 쉽게 우정을 다졌다.
매일 아침마다 우리들 백 명은 시끄럽게 떠들며 버스에 올라타 또 하루의 모
험을 하러 떠났다. 알링톤 국군묘지로 가면서는 학교 응원가를 몇 십 번이나 불
렀고, 포토맥 강을 따라 배를 타고 내려가면서도 목청껏 노래를 불렀다.
링컨 대통영 기념관은 낮에 한 번, 밤에 한 번, 두 번을 방문했다. 우리들은
36개의 대리석 기둥 그림자 사이를 걸어다니면 숙연한 마음으로 입을 열지 못했
다. 36개의 기둥은 링컨 대통령이 북군을 이끌고 애써 지킨 36주를 상징했다. 프
랭크와 나는 5미터가 넘는 석상 밑에 서서 대통령을 올려다 보았다. 대리석으로
만든 석상은 조명을 받아서 아름답게 빛났다. 우리는 남북 전쟁 중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게티스버그에서 링컨 대통령이 한 연설문을 함께 읽었다.
“...우리는 여기에 묻힌 영혼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할 것을 굳게 다짐한
다. 하나님께 맹세코 우리 나라는 새로운 자유의 탄생지가 될 것이다.”
프랭크는 사진을 찍어 준다며 똑바로 서라고 신호를 보냈고, 나는 링컨 대통
령의 얼굴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대통령은 마치 살아 숨쉬는 것 같았고 무척
이나 슬퍼보였다.
그 다음 날 아침, 나는 왜 링컨 대통령이 미소를 짓지 않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클리프톤.”
담임 선생님께서 부르셨다.
“잠깐 할 말이 있다.”
나와 함께 있던 아이들은, 그 중 특히 프랭크는 얼굴이 하얘졌다. 어제 저녁
창문 밖으로 물풍선을 던졌는데, 뚱뚱한 아주머니와 그 아주머니가 끌고 가던
푸들 강아지가 직통으로 맞았던 것이다. 정말 어리석고 위험한 짓이었지만 다행
이 다친 사람은 없었다. 그날 아침 우리반은 벌을 받지 않고 넘어간 것을 축하
하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오셔서 나를 보자고 하신 것이었다.
“클리프톤, 너 메디슨-딕슨 경계선에 대해서 아니?”
“모르는데요.”
나는 메디슨-딕슨 경계선이 물풍선과 무슨 관계가 있나 궁금해 하며 대답했
다.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전이었다.”
선생님이 설명하셨다.
“메디슨-딕슨 경계선이 메릴랜드 주와 펜실베이니아 주를 갈라 놓았었지. 말
하자면 노예 제도와 자유를 갈라놓는 선이기도 했단다.”
겨우 한가지 위기를 모면 했다고 생각했더니 다른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선생님의 눈시울이 젖어 오고 손이
떨리는 것을 보았다.
“오늘날엔....”
선생님이 말을 이으셨다.
“메이슨-딕슨 경계선은 남부와 북부를 갈라놓는 보이지 않는 선이 되었단다.
따라서 워싱턴 D.C.를 지나 메릴랜드 주로 들어 가면 보이지 않는 선을 넘어가
게 되는 것이란다. 그럼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된단다.”
선생님의 말씀엔 뭔가 불길한 뜻이 포함된 것 같은데 나는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왜 선생님이 저토록 흥분하신 거지?’
“글렌 에코우 파크는 메릴랜드에 있단다.”
선생님이 마침내 말씀하셨다.
“그 파크엔 흑인들인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 있어.”
그리고 선생님은 조용히 나를 바라보셨다. 그래도 나는 웃으며 선생님의 말씀
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조금 지나서야 말뜻을 알아들었다.
“그럼 난 파크에 못 간단 말씀이세요?”
나는 말을 더듬었다.
“내가 흑인이라서요?”
선생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셨다.
“미안하다 클리프톤.”
그리고 내 손을 잡으셨다.
“너는 오늘 저녁 호텔에 남아야 한다. 나와 함께 텔레비젼 영화를 보면 어떻
겠니?”
나는 혼동과 분노와 깊이를 알 수 없는 슬픔으로 뒤범벅이 된채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무슨 일이야, 클리프톤?”
내 방으로 돌아왔을 때 프랭크가 물었다.
“뚱뚱보 아줌마가 고자질 했니?”
아무 말 없이 나는 침대로 걸어가서 엎드려 울기 시작했다. 프랭크는 너무 놀
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중학교에 다니는 남자 아이들은 울지 않는다. 적어
도 친구 앞에서는.
파크에 못 간다고 해서 우는 것이 아니었다. 생전 처음으로 나는 흑인이기 때
문에 차별을 받았고, 그것이 어떤 기분인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북부에도 차별은 있었다. 하지만 나는 피부 색깔 때문에 식당이나 교회
나 파크 등에 가지 못했던 적은 없었다.
“클리프톤, 무슨 일이야?”
프랭크가 속삭였다.
“오늘 저녁 난 클렌 에코우 파크에 가지 못한대.”
나는 울며 대답했다.
“물풍선 때문에?”
프랭크가 물었다.
“아냐.”
내가 대답했다.
“내가 흑인이기 때문이야”
“그래? 그것 다행이구나!”
프랭크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웃기 시작했다. 물풍선 사건 때문에 벌 받는 것
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안심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난 심각한 일인 줄 알았네.”
나는 옷소매로 눈물을 닦고 프랭크를 노려보았다.
“나한텐 심각해! 흑인들은 파크에 못 들어간대. 난 너희들과 함께 갈 수 없단
말이야! ”
나는 소리쳤다.
“나한테 그보다 더 심각한 일은 없어!”
주먹으로 프랭크의 턱을 한 대 쳐서 웃지 못하도록 해주려고 하는데 프랭크는
이렇게 말했다.
“그럼 나도 안가지 뭐.”
다음 순간 우리들은 얼어붙은 듯 말을 잃었다. 프랭크는 미소를 지었다. 나는
죽을 때까지 그 순간을 잊지 못할 것이다. 프랭크는 나처럼 조그만 아이였다. 그
리고 나만큼이나 파크에 가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에겐 파크에 가는 것
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프랭크는 그 이유를 설명 하지도 않았다.
다음 순간 우리 방은 아이들로 가득 찼고, 모두들 프랭크의 말에 귀를 기울였
다.
“흑인들은 못 들어간대. 그래서 나도 안 가기로 했어.”
“나도.”
한 아이가 소리쳤다.
“나쁜 놈들.”
또 다른 아이가 소리쳤다.
“클리프톤, 나도 네 편이다.”
내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갑자기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우리 방에서 작은 혁
명이 일어나고 있었다. 롱아일랜드에서 온 열한명의 백인 소년들은 ‘물풍선 결
사대’를 조직하고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다.
“우린 안 간다!”
나는 그 한가운데 앉아서 고마운 마음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친
구들이 자랑스러웠다.
돈드레 그린의 이야기를 들으며 난 어릴 때의 추억을 회상했다. 그의 골프부
원들은 어릴 때의 내 친구들처럼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큰 손해를 보면서
도 친구를 지지할 것인가.
마침내 결정을 해야 할 순간이 왔을 땐 아무도 주저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 더러운 곳에서 얼른 떠나자.”
한 사람이 속삭였다.
“친구들은 아무 말 없이 돌아서서 타고 온 자동차를 향해 걸어 갔어요.”
돈드레가 말했다.
“의논할 필요도 없었어요. 하급생들도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우리를 따라
왔죠.”
돈드레는 친구들의 반응에, 그리고 루이지애나 주민들의 반응에 깜짝 놀랐다.
루이지애나 주 전체가 들고 일어나서 시정을 요구했다. 주 정부 의원회는 돈드
레의 날을 정하고, 만약 어떤 단체가 다른 단체를 초청한 후 인종 차별을 할 경
우엔 변호사 비용을 비롯한 일체의 손해 배상을 해야 한다는 법을 통과시켰다.
돈드레는 말을 마치며 눈물을 흘렸다.
“동료들과 코치 선생님이 내 편이 되주셔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인종
차별에 대항하는 좋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들
이 나에게 보여준 사랑은 이 세상의 모든 증오심을 정복할 것입니다.”
내 친구들도 나에게 그런 사랑을 보여주었다. 우리가 호텔방에 앉아 있는데
담임 선생님이 봉투를 흔들며 들어오셨다.
“애들아! 타이거즈 야구 게임 입장권을 열세 장 구했단다. 갈 사람 없니?”
호텔 전체가 우리들의 환호성으로 떠나갈 지경이었다. 우리들은 아무도 진짜
야구장에서 하는 진짜 야구 경기를 본 적이 없었다.
야구장으로 가는 도중, 운전 기사 아저씨는 링컨 대통령 기념관 앞에서 차를
멈추었고, 우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노란 빛깔의 따뜻한 조명을 받으며 의자
에 앉아 있는 대통령을 나는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아직도 그의 슬픈 입가와
피곤해 보이는 눈가엔 미소가 없었고 희망의 빛도 없었다.
‘...우리는 여기에 굳게 다짐한다.... 하나님께 맹세코 우리 나라는 새로운 자
유의 탄생지가 될 것이다....’
링컨 대통령은 연설을 통해서, 그리고 그의 삶을 통해서 자유는 공짜가 아니
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어떤 사람이 피부 색깔 때문에 파크에 들어가지 못한
다든지, 골프장에서 골프를 칠 수 없을 때마다, 자유를 위한 새로운 전쟁이 시작
된다. 어떤 땐 우린 주먹과 총을 가지고 싸워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가
장 효과가 있는 무기는 사랑과 용기를 보여주는 행동이다.
링컨 대통령이 게티스버그에서 한 연설을 들을 때마다 난 열 한 명의 내 백인
친구들을
생각하고 다시 한번 희망을 갖는다. 그날 밤 우리가 링컨 대통령 기념관 앞에서
잠시 멈추었을 때 대통령이 우리를 위해 미소를 지으셨다고 생각하고 싶다. 돈
드레가 말한 것처런.
‘그날 그들이 네게 보여준 사랑은 이 세상의 모든 증오심을 정복할 것입니
다.’<클리프톤 데이비스, 배우>
삶은 그런게 아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대하나이다.
하나 아이반호, 15세
고등학교 2학년에 다니며 나는 2학년을 위한 수련회의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 수련회는 2학년 여학생들만을 위한 것이며 목적은 우리의 삶과 삶에서 일어
나는 문제들, 즉 부모님, 친구, 남자친구 등에 대한 걱정과 관심사를 토론하자는
것이었다.
수련회가 끝나고 나는 무척 기분이 좋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수련회에서 많은
것을 배웠으며, 이제 그것을 생활에 적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수련회에서 받
아온 자료들을 생활 일지 속에 넣어두기로 했다. 나는 좋은 글들을 발견하면 항
상 생활 일지 속에 넣어 두곤 했다. 수련회에서 받아온 자료들을 일지 사이에
넣은 후, 별 생각 없이 일지를 서랍장 위에 올려놓고 짐 푸는 일을 계속했다.
수련회에서 돌아온 후 너무도 기분이 좋았기 때문에 나는 부푼 기대를 가지고
다음 주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 주엔 감정적으로 힘든 일들이 연달아 일어났다.
친한 친구 때문에 몹시 속상한 일이 있었고, 엄마와 크게 다퉜고, 시험 점수 때
문에 걱정이었는데 특히 영어 시험은 큰 걱정이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다가올
졸업생 축하 파티에 대한 걱정도 하기 시작했다.
정말로 나는 매일 밤 울며 잠이 들었다. 2학년을 위한 수련회에 다녀오면
내 삶이 진정되고 스트레스가 해소될 것이라고 기대했었는데, 이제는 그것도 그
때뿐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요일 아침에 눈을 떴는데 가슴이 답답했다. 그래서 일어나자마자 식구들에
게 신경질을 부렸다. 서두르지 않으면 지각까지 할 지경이었다. 나는 재빨리 옷
을 갈아 입고 양말을 꺼내기 위해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서랍을 꽝 밀어 닫는
데 생활 일지가 미끄러져 떨어지며 온 방 안에 흩어졌다. 나는 무릎을 꿇고 앉
아 종이들을 줍다가 그 중 한 장을 집어들고 읽기 시작했다. 수련회때 선생님이
나눠 주신 종이였다.
삶은 점수를 매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은 다른 사람들이 너를 어떻게 생
각하느냐에 대한 것도 아니고, 네가 누구와 데이트를 했으며,누구와 데이트를 하
는 중이며, 누구와 데이트를 하지 않았느냐에 대한 것도 아니다. 삶은 네가 누구
와 키스를 했으며, 어떤 운동을 즐기며, 어떤 여자나 남자를 좋아하느냐에 대한
것도 아니다. 삶은 너의 구두에 대한 것도 아니고, 너의 머리 스타일에 대한 것
도 아니고, 피부 색깔에 대한 것도 아니고, 네가 어디에 살며, 어느 학교에 다니
냐에 대한 것도 아니다. 또한 삶은 학교 성적이나 돈, 옷에 대한 것도 아니고,
어떤 대학에 입학하느냐에 대한 것도 아니다. 삶은 네가 많은 친구를 갖고 있느
냐에 대한 것도 아니고, 네가 친구가 없이 외톨이냐에 대한 것도 아니고, 사람들
이 너를 쉽게 받아들이냐에 대한 것도 아니다. 삶은 그런 것이 아니다. 삶은 네
가 누구를 사랑하느냐, 누구의 마음을 아프게 했느냐에 대한 것이고, 네가 자신
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대한 것이다. 삶은 믿음과 행복과 사랑에 대한 것이다.
친구와 우정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고, 마음속의 미움을 사랑으로 바꾸는 것이다.
삶은 질투를 피하고, 무지를 극복하고, 자신감을 얻는 것에 대한 것이다. 삶은
네가 무슨 말을 했으며, 어떤 뜻으로 그 말을 했느냐에 대한 것이다. 삶은 어느
한 사람이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삶은 네가 네 삶으로 다른 사람의 삶을 움직
여서, 그렇지 않았다면 얻을 수 없을 결과를 얻겠다고 선택을 하는 것이다. 이런
선택들이 바로 우리의 삶이다.
그 다음 날 영어 시험에서 나는 최고 점수를 받았다. 주말엔 친구와 함께 즐
거운 시간을 보냈고, 용기를 내어 내가 좋아하는 남학생에게 말을 걸었다. 그리
고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냈고, 엄마의 말을 잘 듣도록 노력했다. 졸업생 축
하 파티에 입고 갈 멋진 드레스도 샀고, 파티에 가서는 재미있게 놀았다. 운이
좋았거나 기적이 일어났기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마음을 달리 먹고 그에 따라
행동했기 때문이었다. 어떤 땐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올해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고, 얼마 있으면 3학년 여학생들을 위한 수
련회에 참석하게 된다. 2학년 때 받아온 그 종이는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그리
고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혼동될 때마다 꺼내서 들여다본다.
케이트 레이취트, 17세
먼저 좋아하십시오.
더 잘 알면 더 쉽게 용서할 수 있다. 잘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은 살아 있는 사
람 모두를 이해할 수 있다. 마담 드 스타엘.
내가 대학원에 다닐 때 사귀던 친구 크레이그는 이상한 힘이 있었다. 그가 교
실로 들어서면 갑자기 교실 안에 힘과 생기가 넘쳤다. 누구와 얘기를 하든 크레
이그는 그 사람에게 온 신경을 집중시켰고, 그래서 그 사람은 자신이 매우 중요
하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드 크레이그를 좋아했다.
어느 화창한 가을날 크레이그와 나는 도서실에 함께 않아 있었다. 나는 창문
밖을 내다보다가 한 교수님이 주차장을 가로질러 걸어가시는 것을 보았다.
“난 저 교수님을 만나는 게 싫어.”
“왜?”
크레이그가 물었다.
지난 봄 학기에 교수님의 수업을 듣다가 좋지 않은 감정으로 헤어졌다고 나는
설명했다. 교수님이 나에게 어떤 제안을 하셨는데 그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아
서 반박을 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교수님은 원래 날 좋아하지 않으시거든.”
크레이그는 창문 밖으로 교수님을 내다보며 말했다.
“네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도 몰라. 네가 겁이 나니까 그냥 교수님을 피하
고 있는지도 몰라. 그래서 교수님은 네가 교수님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시
고 네게 신경을 쓰시지 않는 걸거야.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를 좋아해 주는 사람
을 좋아하거든. 네가 먼저 교수님에게 친절하게 하면 교수님도 네게 친절하게
하실거야. 지금 가서 말을 걸어봐.”
크레이그의 말에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조금 주저하며 계단을 내려가
주차장으로 갔다. 교수님께 친절한 말투로 인사를 드리고 여름 방학을 잘 보내
셨는지 여쭤보았다. 교수님은 조금 놀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교수님과 얘
기를 하며, 나는 도서실에서 활짝 웃고 있을 크레이그를 상상했다.
크레이그가 내게 해준 얘기는 무척 간단한 것이었다. 사실 너무도 간단해서
내가 왜 그 생각을 미처 못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많은 다른 젊은이들처럼 나
는 아직 나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만날 때마다 그 사람들이
나를 평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은, 그 사람들도 내가 그들을 평가할까봐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그 사람들이 나
를 평가한다고 생각하는 대신, 그 사람들도 나를 알고 싶어하고 자신에 대한 얘
기를 내게 해주고 싶어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러지 않았다면 전혀
만날 기회가 없었을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예를 들면, 기차를 타고 캐나다 대륙을 횡단하다가 어떤 남자와 얘기를 하게
되었다. 그 남자는 마치 술에 취한 듯 비틀비틀 걸었고 말을 할 때는 발음이 정
확하지 않았으므로 기차에 동승한 사람들은 다 그 남자를 피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남자는 뇌일혈로 쓰러졌다가 회복을 하는 중이었다. 남자는 우리가 타고
가는 선로를 건설할 때 엔지니어로 일했다고 하며, 밤이 깊도록 그 선로 건설에
대한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수북한 뼈의 강’이라는 이름은 인디언 사냥꾼
들이 버리고 간 물소 뼈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했다. 그 외에도 남자는 거
인 잭에 대한 전설, 250킬로그램의 쇠붙이를 들어올린 스웨덴 선로공, 외로운 타
향에서 마음을 달래려고 토끼를 기르던 맥도날드라는 이름의 기관장 등에 대한
얘기를 해주었다. 아침 해가 떠 올라 서서히 수평선을 물들일 무렵 남자는 내
팔을 잡고 내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내 말을 들어줘서 고마워요. 다른 사람들은 들을 생각도 않는데.”
나한테 고맙다고 할 필요는 없었다. 고마워할 사람은 바로 나였으니까.
캘리포니아 주 오클랜드 시의 복잡한 거래에서 한 가족이 나를 붙들고 길을
물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가족은 호주 북서부 해변의 아주 외딴 마을에서
온 여행객들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그들의 고향에 관해 물었고, 우리들은 곧 친
해져서 함께 커피를 마시게 되었다. 그들은 커피를 마시며 등이 자동차 뚜껑만
큼이나 넓은 염수 악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새로운 사람들은 만날 때마다 나의 새로운 모험이 시작되었고, 나는 그들에게
서 좋은 교훈을 얻곤 했다.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힘이 세거나 외롭거나에 상
관없이 그들은 모두 나와 똑같이 꿈이 있고 세상에 대한 의혹이 있었다. 그리고
내가 열심히 듣기만 하면 모두들 재미있고 특별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수염이 덥수록히 난 늙은 떠돌이 거지는 대공황 때 먹을 것이 떨어지자 산탄
총으로 연못 물을 쏘아서 식구들의 저녁을 마련한 얘기를 해주었다. 산탄을 맞
고 기절한 물고기들이 수면으로 떠오르면 간단히 주워 담기만 하면 되었다고 했
다. 한 교통 결찰관은 투우사들과 교향악단 지휘자들을 자세히 관찰함으로써 손
놀림을 배웠다고 말했다. 한 미용사는 요양원에 입원한 환자들의 머리를 가꾸어
주고 그들의 미소를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값진 경험인가에 대해 말해 주었다.
우리는 이런 귀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그냥 흘려보낼 때가 많다. 모
두들 못생겼다고 생각하는 소녀, 옷을 맞춰 입을 줄 모르는 소년, 이런 사람들은
여러분과 똑같이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여러분과 똑같이
누군가 그들의 얘기를 들어주길 원한다.
크레이그는 바로 그것을 알고 있었다. 먼저 좋아하고, 그 다음에 따져본다. 먼
저 다른 사람들에게 여러분의 빛을 보내 보길 바란다. 그럼 그 빛은 백 배로 강
해져서 여러분께 돌아올 것이다. <켄트 널본.>
5. 배움에 대하여
우리는 교실 안에서뿐만 아니라 교실 밖에서도 많은 것을 배운다. 예를 들면,
매달리기, 그네타기, 짝발 뛰기 등도 배웠고 나와 가장 잘 어울리는 친구를 찾는
법도 교실 밖에서 배웠다. <제씨 브라운, 18세>
만약 알았더라면...
사람들은 이런 말을 자주 한다. 지금 내가 아는 걸 그때 알았더라면... 그다음
에 말이 어떻게 끝날지 한번 적어 본다.
내 마음속에서 속삭이는 소리에 더 귀를 기울일 것이다.
걱정은 덜 하고 인생을 더욱 즐길 것이다.
학창 시절은 다신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그리고 직장에 다닐
때가... 글쎄, 그건 나중에 알아보기로 한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
넘치는 힘과 팽팽한 피부를 가졌다는 사실을 감사히 여길 것이다.
안달하지 않고 재미있게 놀 것이다.
삶을 사랑해야 나도 아름다워진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부모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또 부모님들도 최선을 하고 계시다는 사
실을 믿을 것이다.
사랑에 빠진 기분을 더 즐기고,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덜 걱정할 것이다.
지금은 잘 안되지만...앞으로 좀더 나은 일이 생길 것이라는 사실을 알 것이다.
아이처럼 행동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좀더 용감해질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좋은 면만 보고 사귈 것이다.
인기가 많은 아이들이라고 무조건 따라다니지 않을 것이다
춤추는 법을 배울 것이다.
내 몸을 타고 난 그대로 좋아할 것이다.
친구들을 더 믿을 것이고,
믿을 만한 친구가 될 것이다.
더 감사할 줄 알고 고마워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킴벌리 컬버거>
집으로의 먼길
경험은 가장 혹독한 선생님이다. 하지만 경험보다 더 좋은 선생님은 이 세상
에 없다. <C.S.루이스>
나는 남부 스페인의 에스테포나라는 조그만 마을에서 자랐다. 내가 열여섯 살
이던 어느날 아침, 아버지는 30킬로미터쯤 떨어진 미하스라는 외딴 마을까지 자
동차로 당신을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셨다. 그리고 아버지가 일을 보는 동안 자
동차를 정비소에 맡기라고 하셨다. 나는 바로 얼마전에 운전 면허증을 땄는데
운전을 해볼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당장 좋다고 대답했다.
아버지와 함께 미하스까지 가서 오후 4시 정각에 모시러 오겠다고 약속을 한
후 근처에 있는 정비소에다 차를 맡겼다. 그리고 몇 시간을 기다려야 했으므로
정비소 근처에 있는 영화관에서 영화를 두 편 보기로 했다. 그런데 너무도 열심
히 영화를 보던 나머지 시간 감각을 잃고 말았다. 마지막 영화가 끝나고 시계를
보았다. 6시였다.! 두시간이나 늦었다!
영화를 보느라고 늦게 왔다는 사실을 아버지가 알면 화를 낼게 분명했다. 그
리고 다신 운전을 못하게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난 자동차가 고칠 곳이 많아서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고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차를 몰고 아버지와 만나기로 한 장소로 갔다. 아버지는 길가에 서서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계셨다. 나는 늦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자동차가 크게 고
장이 나서 시간이 많이 걸렸으며 될수록 빨리 온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그때 아
버지가 나를 바라보시며 지으신 얼굴 표정을 난 생전 잊지 못할 것이다.
“게이슨, 그렇게 거짓말할 필요를 느꼈다니 여간 실망이 아니구나.”
아버지는 다시 나를 바라보셨다.
“네가 오지 않아서 정비소에다 전화를 걸어 보았다.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말이다. 그랬더니 차엔 아무 문제도 없고, 네가 차를 찾으로 아직 오지 않았다고
하더라.”
나는 거짓말한 것이 부끄러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래서 영화관에 갔었으며,
영화를 보다가 늦었다고 더듬더듬 고백했다. 내 말을 들으시는 아버지의 얼굴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이 스치고 지나갔다.
“난 화가 났지만, 네게 화가 난 것이 아니다.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네가
아버지에게 그런 거짓말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니, 난 아버지로서 실패를 한
것 같다. 너를 자기 아버지에게도 진실을 말할 수 없는 아들로 길렀으니 말이다.
나는 지금부터 집으로 걸어가며,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생각을 해보
겠다.”
“하지만, 아버지, 집은 여기서 3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어요. 벌써 어두웠는데
걸어가실 수 없어요.”
아무리 사과를 하고 애원을 해도 소용없었다. 이번엔 정말로 아버지를 실말시
켜드린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난 내 생애에서 가장 힘든 교훈을 배워야
했다.
아버지는 먼지 낀 길을 걷기 시작하셨다. 나는 재빨리 차에 올라타서 뒤를 따
르며 아버지가 화를 푸시길 바랐다. 집에 다올때까지 나는 아버지께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애원을 했지만 아버지는 들은 척도 않으셨다. 그리고
묵묵히 생각에 잠겨서 고통스런 행진을 계속하셨다. 나는 시속 8킬로미터 정도
로 운전을 하며 아버지 뒤를 따라 집까지 왔다.
아버지가 육체적으로, 감정적으로 힘들어 하시는 것을 보며 나는 가슴이 미어
지는 것 같았다. 그토록 힘들고 고통스런 경험은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더할 나위 없이 성공적이었다. 그후 나는 한번도 아버지께 거짓말을 해
본 적이 없다. <제이슨 보카로>
감사의 가격
열한 살 때, 아버지는 토요일마다 나늘 데리고 외출을 하곤 하셨다. 우리는 공
원에 가서 놀기도 하고, 부둣가에 가서 배 구경을 하기도 했다. 특히 나는 낡은
전기제품을 파는 고물상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 가끔 아버지와 나는 몇 백 원짜
리 고물을 사서 분해해보기도 했다.
외출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면 아빠는 가끔 데어리 퀸이라는 아이스크림 가게
에 들러 백 원짜리 아이스크림을 사주셨다. 아이스크림 가게에 매번 들르지는
못했지만, 나를 너무 실망시키지 않을 정도로는 들르셨다. 그래서 외출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때면 나는 속으로 기도를 드리며, 아버지가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는 코너를 돌아 집으로 가지 않고 아이스크림 가게로 직진하시길 바랬다. 그
래서 그 코너는 나에게 입 안 가득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느냐, 아니면 실망
을 머금고 집으로 돌아가느냐 하는 중요한 갈림길이 되었다.
어떤 땐 아버지는 일부러 먼 길을 돌아 집으로 가며 나를 놀리셨다.
“오늘은 이리 돌아서 집에 가고 싶구나.”
그리고 아버지는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는 코너에서 직진을 하고도 가게 앞은
그냥 지나치셨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잔인하셔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일종의 게
임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날은 아버지가 갑자기 생각이 난 듯
“아이스크림 먹고 갈까?”
하고 물으실 때였다. 그러면 나는
“그것 좋은 생각이에요, 아버지!”
하고 대답했다. 나는 항상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먹었고, 아버지는 항상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드셨다. 아버지가 이백 원을 건네주면 나는 재빨리 가게 안으로
들어가 아이스크림 두 개를 사오고 우리는 차 안에서 먹었다. 나는 아버지를 사
랑했고 아이스크림을 사랑했으니, 그 순간은 나에겐 천국이었다.
어느날 외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달콤한 제안
을 하시길 바라며 속으로 기도를 드렸다. 마침 내 아버지가 물으셨다.
“아이스크림 먹고 갈까?”
“그것 좋은 생각이에요. 아버지!”
그런데 그날 아버지는 이렇게 물으셨다.
“내게도 좋은 생각인 것 같다. 아들아, 오늘은 네가 나에게 아이스크림을 사
주면 어떻겠니?”
이백 원! 이백 원! 나는 속으로 계산을 했다. 돈은 있었다. 부모님은 일주일에
삼백 원씩 용돈을 주셨고, 심부름을 해드리면 돈을 조금 더 주셨다. 하지만 돈을
낭비하지 않고 저금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가르쳐 주셨다.
이제 내 돈을 내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려니 아이스크림쯤은 안 먹어도 될 것 같
은 생각이 들었다.
항상 내게 관대하신 아버지께 보답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그때
는 들지 않았다. 여지껏 아버지가 그 많은 아이스크림을 사주셨는데, 난 한 번도
사드리지 못했다는 생각도 그때는 들지 않았다. 그리고 난 그저 이백 원에 대한
생각만 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이기적인 구두쇠처럼 나는 그 지독한 말을 하고
야 말았다.
“그렇다면, 오늘은 안 먹겠어요.”
아직도 나는 내가 한 그 말을 잊을 수가 없다.
아버지는 그저
“알았다. 아들아.”라고만 대답하셨다.
그러나 코너를 돌아 집으로 향하며 나는 내가 잘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제
발 돌아가자고 빌었다.
“내가 사 드릴게요.”
나는 애원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괜찮다. 오늘은 먹고 싶지 않구나.”
라고 하시며 더 이상 내 말은 듣지도 않으셨다.
나는 내가 얼마나 이기적이었나, 얼마나 배은망덕했나를 깨닫고 몹시 괴로웠
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안하셨고, 실망하신 것 같은 눈치도 안 보이셨
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며 내 잘못을 더욱 깊이 뉘우쳤다.
그날 나는 관대함은 일방적으로 안 되고, 감사를 표현할 때는 ‘고맙습니다.’
라는 말보다 돈이 조금 더 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날 단돈 이백 원으
로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했다면 세상에서 제일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
었을 것이다.
할 말이 한 가지 더 있다. 그 다음 주 아버지와 외출을 마친 후 집으로 돌아
오며 아이스크림 가게에 가까이 왔을 때 나는 아버지께 물었다.
“아버지, 우리 오늘 아이스크림 먹고 갈까요? 제가 사 드릴게요.”<랜달 존스.>
기억해야 할 것들
1. 모든 사람이 다 나를 사랑해 주지 않아도 괜찮다.
모든 사람이 다 나를 사랑하거나 좋아해 주지 않아도 괜찮다. 나도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을 다 좋아하지 않으니까, 모든 사람이 다 나를 좋아하도록 바랄 수는
없다. 사람들이 나를 사랑해 주고 좋아해 주면 기쁘지만, 누군가가 나를 좋아하
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나쁜 사람인 것은 아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좋아하
도록 내게 강요할 수 없는 것처럼, 나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나를 좋아하라고 강
요할 수는 없다. 항상 다른 사람의 승인을 얻을 필요는 없다. 나를 승인하지 않
는 사람이 있다 해도 나는 여전히 괜찮은 사람이다.
2. 실수를 해도 괜찮다.
누구든지 실수를 한다. 실수를 했다고 내가 나쁜 사람이거나 가치 없는 사람
은 아니다. 그러니 실수를 했다고 언짢아 할 필요는 없다. 나는 열심히 노력을
했고, 그래도 실수를 했으니, 앞으로는 더욱 노력할 것이다. 나는 실수했다는 사
실을 인정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실수를 해도 괜찮다. 나는 내가 한 실수도 받
아들일 수 있고, 다른 사람이 한 실수도 받아들일 수 있다.
3. 다른 사람들도 다 좋은 사람들이고 나도 좋은 사람이다.
어떤 사람이 내가 싫어하는 행동을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은 아니
다. 그 사람이 한 행동을 내가 싫어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벌을 받아야 할 필요
도 없다. 다른 사람들이 내가 원하는 대로 자신을 바꾸어야 할 필요가 없듯이,
나도 다른 사람이 원하는 대로 나를 바꿀 필요가 없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나도 내가 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나는 다른
사람을 내 마음대로 조종하거나 바꿀 수 없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어야 한다.
4. 내 마음대로 조종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주위의 일들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도 괜찮다. 나는 그 일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고, 다른 사람들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고, 나 자신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바뀌지 않는다고 화를 낼 이유도 없고, 내
가 모든 것을 다 좋아할 이유도 없다. 어떤 것을 좋아하지 않더라고 나는 행복
하게 살아갈 수 있다.
5. 오늘 하루 내 기분이 어떨지는 나에게 달려 있다.
오늘 하루 내 기분이 어떨지는 , 또 내가 어떤 일을 할지는 나에게 달려 있다.
다른 어떤 사람도 내게 어떤 기분이 되라고 강요할 수 없다. 오늘 되는 일이 하
나도 없었다면, 그렇게 되도록 내가 내버려두었기 때문이다. 오늘 모든 일이 잘
되었다면 내가 긍정적인 사고 방식으로 잘했기 때문이다. 오늘 내 기분이 나쁜
것은 다른 사람들의 책임이 아니다. 따라서 그 사람들이 내 기분을 낫게 해주려
고 자신을 바꿀 이유가 없다. 내 삶을 책임져야 할 사람은 바로 나다.
6. 일이 잘못되더라도 난 잘 대응할 수 있다.
일이 잘못되지 않나 항상 노심초사할 필요는 없다. 보통은 모든 일이 잘 진행
되지만, 만약 일이 잘못되더라도 난 잘 처리할 수 있다. 따라서 걱정하느라고 힘
을 낭비하지 않아도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늘은 무너지지 않는다. 다 괜찮을
것이다.
7.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난 할 수 있다. 어려운 일이 닥칠 때 회피를 하는 것보다는 노력을 하는 것이
낫다. 문제를 회피하면 성공하거나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잃고 만다. 하지
만 노력을 하면 그런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가치가 있는 일을 위해서는 노력을
해볼 필요가 있다. 전부를 얻지는 못할지라도,, 조금은 얻을 수 있을 것이다.
8. 나는 능력이 있다.
내 문제를 다른 사람들에게 해결해 달라고 할 필요는 없다. 나에게도 충분한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을 보살필 수 있다. 나는 나에게 필요한 것
을 결정 내릴 수 있고, 나를 위해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러니 나를 보살펴 달라
고 다른 사람에게 의지할 필요는 없다.
9. 나는 바뀔 수 있다.
과거에 있었던 일 때문에 내가 어떤 성격의 사람이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성격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매일 아침 새로운 날이
시작되듯이, 물론 나는 새롭게 바뀔 수 있다.
10. 다른 사람들도 능력이 있다.
내가 다른 사람의 문제를 대신 해결해 줄 수는 없다. 다른 사람의 문제를 마
치 내 문제인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을 바꾸려고 노력하거나 그
사람의 삶을 고쳐 주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다른 사람들도 그런 일들을 할
능력이 있으며, 자신을 보살필 수 있고,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걱정을
해주고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모든 문제를 다 처리해 줄 수는 없다.
11. 나는 융통성이 있다.
어떤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데는 한 가지 방법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한 가지씩의 방법을 제시할 수 있다. 어느 한 사람이 제일 좋은 방법
을 제시할 수는 없다. 좋다고 생각되는 방법이 있으면 누구든 제시할 수 있다.
나에겐 어떤 방법이 다른 방법보다 더 낫게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사람
의 방법은 다 가치가 있으며, 사람들은 가치가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싶어한다.
작자 미상 엘리슨 스티븐슨 제공
버지니아 드비유 선생님, 어디 계신가요?
모든 사람의 삶에는 가장 성공적인 순간이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격려
를 통해서 그런 성공적인 순간을 성취할 수 있다.
죠지 아담스
우리는 서로 팔꿈치로 쿡쿡 찌르고 낄낄대며, 신디가 이상한 자주색의 마스카
라를 하고 왔다는 등 가장 최근에 일어나 일에 대해 떠들고 있었다. 버지니아
드비유 선생님은 목소리를 가다듬으시고 우리에게 조용히 하라고 말씀하셨다.
“자.”
선생님이 웃으며 말씀하셨다.
“오늘은 너희들이 자라서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인지에 대해 알아보겠다.”
그 말을 듣고 우리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우리의 직업이라고?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겨우 열세 살, 열네 살인데, 선생님이 오늘 머리가
좀 도셨나?
아이들은 보통 때도 버지니아 드비유 선생님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했다. 머리
를 항상 돌돌 말아서 뒤통수에 붙이고, 유난히 큰 앞니가 입술 밖으로 튀어나왔
기 때문이었다. 생김새가 그러셨기 때문에 아이들은 선생님을 잔인하도록 놀렸
고, 선생님에게 운동화를 던지기도 했다.
또한 선생님은 항상 과제를 많이 내주셨기 때문에 아이들은 더욱 화를 냈다.
선생님이 보기 드물게 똑똑한 분이라는 사실은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래. 너희들이 어른이 되어서 하고 싶은 직업에 대해 미리 알아보기로 하
자.”
그렇게 말하시는 선생님의 얼굴이 환히 빛났다. 마치 이 과제가 올해 우리에
게 가르쳐 주신 어떤 것보다 훌륭하다는 표정이셨다.
“너희들이 하고 싶은 직업을 골라서 조사를 하고 리포트를 쓰도록 한다. 그
리고 그 직업에 이미 종사하고 계신 분을 찾아가서 인터뷰를 하고 구두 발표를
해야 한다.”
아이들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겨우 열세 살에 앞으로 뭐가 되고 싶은지
아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이야? 하지만 나는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해보고 세 가
지로 축소를 시켰다. 나는 미술과 노래 부르기와 글 쓰기를 좋아했다. 그런데 미
술은 잘 못했고, 내가 노래를 부를 때마다 언니들이 입 좀 닥쳐, 라고 소리 질렀
다. 그럼 남은 것은 글 쓰기밖에 없었다.
드비유 선생님은 매일 수업 시간 중에 우리를 도와 주셨다.
“얼마큼 했니? 하고 싶은 직업은 결정했니?”
드디어 대부분의 아이들이 한 가지씩 직업을 택했다. 나는 신문 기자로 결정
했다. 따라서 지금 기자로 일하고 있는 분께 연락을 해서 인터뷰를 가야 했다.
나는 두려웠다.
나는 기자 아저씨 앞에 않아서 들릴락말락한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기자
아저씨가 나를 보고 물었다.
“연필이나 볼펜 가지고 왔니?”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종이는?”
나는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마침내 기자 아저씨는 내가 무척 겁내고 있다는 사실은 눈치채고, 기자가 되
면 꼭 해야 할 일 중 첫 번째를 가르쳐 주셨다.
“항상 종이와 연필을 가지고 다녀라.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
까.”
다음 한 시간 반 동안 기자 아저씨는 강도, 도둑, 화재 등에 대한 얘기를 들려
주셨다. 또한 일가족 네 명의 생명을 앗아간 화재 사건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
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살 타는 냄새가 나는 것 같으며, 그
끔찍한 기사를 쓰던 때를 잊을 수 없다고 하셨다.
며칠 후 나는 내가 조사한 것을 토대로 기자라는 직업에 대해 구두 발표를 했
다. 그리고 그 과제 종합 점수에서 만점을 받았다.
한 학년이 끝나갈 무렵, 드비유 선생님이 공부를 너무 많이 시켰다고 앙심을
품은 몇 명의 아이들이 선생님께 복수를 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파이를 들
고 기다렸다가, 모퉁이를 돌아오시는 선생님의 얼굴에 있는 힘껏 던졌다. 선생님
은 육체적으로는 큰 상처를 입지 않으셨다. 하지만 감정적으로는 너무도 큰 상
처를 입으셔서 며칠 동안 학교에 출근을 하시질 못했다. 그 소식을 듣고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 자신이 부끄러웠고, 선생님의 놀랍도록 훌륭한 교수
법을 고맙다고 생각하는 대신 선생님의 생김새 때문에 그토록 못된 짓을 한 교
우들이 부끄러웠다.
몇 년의 세월이 지나며, 난 드비유 선생님에 대해서나 장래 직업에 대한 과제
에 대해서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리고 대학에 진학해서 나에게 적당한 전공을
선택하느라 고심했다. 아버지는 아버지가 하시는 사업을 함께 하자고 권하셨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는 그럴 듯한 충고라고 생각했지만, 솔직히 나는 사업에
대해선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럴 때쯤 버지니아 드비유 선생님의 생각이 났고, 열
세 살 때 기자가 되고 싶어했다는 생각이 났다. 나는 아버지께 전화를 걸었다.
“전공을 바꿀 거예요.”
나는 일방적으로 선포했다. 아버지는 깜짝 놀라서 잠시 동안 아무 말씀도 못
하셨다.
“뭘로?”
마침내 아버지가 물으셨다.
“신문 방송학이오.”
나의 결정에 부모님은 실망을 하시는 것 같았지만 반대도 하지 않으셨다. 하
지만 기자라는 직업이 얼마나 경쟁이 심한지, 그리고 내가 얼마나 사람 만나는
것을 싫어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고 충고를 해주셨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나는 더욱 더 기자라는 직업에 끌렸다. 마치 기자
가 되기 위한 재질을 타고난 기분이 들었다. 기자가 되고 나자 생전 처음 만난
사람에게 스스럼 없이 다가가 무슨 일이 벌이지고 있냐고 물어볼 수가 있었다.
기자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으며 나는 전문적으로뿐만 아니라 사적으로도 사람
들에게 필요한 질문을 하고 답을 얻어낼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기자가 된 후
나는 더욱 자신감에 넘치는 사람이 되었다.
지난 12년 동안 나는 믿을 수 없이 신나고 만족스러운 기자 생활을 했다. 그
리고 살인과 여객기 추락과 같은 사건들을 다루며 내가 좋아하는 기삿거리가 무
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나는 비극적이면서도 아름답고 인간적인 기사 쓰기를 좋
아했다. 그런 기사를 다루다 보면 내가 어떤 면에서든 그들을 도와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느날 기사를 쓰다가 전화를 받으려는데 문득 추억의 장면들이 떠올랐다. 그
리고 버지니아 드비유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않아서 기사를 쓰고
있진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선생님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내가 기자와 작가가 되지는 않았으리라는 사실을
선생님은 모르실 것이다. 기자가 되지 않았더라면 난 아마도 사업가가 되어 매
일을 불행하게 살며 방황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선생님께서 내주신 그 과제 때
문에 올바른 직업을 찾은 아이들이 더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종종 이런 질문을 받는다.
“어떻게 기자가 될 생각을 하셨죠?”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 선생님이 한 분 계셨는데요...”
나는 항상 서두를 이렇게 꺼낸다. 그리고 선생님께 감사드릴 기회가 오기를
바란다.
누구든 학창 시절을 되돌아보면 아득하게 기억에 남는 선생님이 한 분 정도는
있을 것이다. 또 한 분의 버지니아 드비유 같은 선생님 말이다. 그렇다면 늦기
전에 찾아 뵙고 감사의 표현을 하도록 권하고 싶다. <다이애나 챕맨>
왜 그러지?
임명장을 받은 지 얼마 안 되는 메리라는 이름의 선생님이 나바호 인디언 보
호 구역으로 발령을 받았다. 매일 아침 메리 선생님은 전날 숙제로 내준 간단한
산수 문제 중 하나를 칠판에 적었다. 그리고 다섯 명의 인디언 학생들을 앞으로
나오게 한 후 문제를 풀라고 했다. 그런데 매번 다섯 명의 인디언 학생들은 문
제를 푸는 대신 아무 말 없이 서 있기만 했다. 메리 선생님은 이해할 수가 없었
다. 대학교에 다니며 배운 교육 이론은 다 떠올려보아도 도움이 되질 않았다. 피
닉스에서 선생님으로 일할 때도 이런 경우를 본 적이 없었다.
‘내가 뭘 잘못했나? 문제를 풀 능력이 없는 아이 다섯을 우연히 골랐나?’
메리 선생님은 생각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어.’ 마침내 선생님은 학생들에
게 뭐가 잘못되었는지 물어보았다. 그리고 어린 나바호 학생들의 대답에서 감격
적인 교훈을 얻었다.
학생들은 서로의 개성을 존중했으며, 그들 다섯 중엔 문제를 풀 능력이 없는
아이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어린 나이에도 아이들은, 교실 안에서 누
가 잘하나 승부를 겨루는 일엔 아무 의미도 없다는 사실은 이해했다. 만약 친구
중 한 명이라도 칠판 앞에 서서 망신을 당한다면 승자는 없다고 그들은 믿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공공연하게 보는 앞에서 승부 겨루기를 거부했
다.
그것을 이해한 후 메리 선생님은 방법을 바꾸어서 학생들의 산수 문제를 개인
적으로 검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무도 반 친구들 앞에서 망신을 당하는 일
이 없도록 했다. 아이들은 다 배우고 싶어했다. 하지만 자기가 잘 배우기 위해서
친구가 창피를 당하는 일은 할 수가 없었다. <연설가의 원전>에서
소크라테스
지혜와 통찰력을 얻고 싶어하는 한 소년이 있었다. 그는 그 마을에서 가장 현
명한 분인 소크라테스를 찾아가 자문을 구했다. 소크라테스는 여러 방면에 많은
지식을 갖고 있는 노인이었다. 소년은 현인에게 어떻게 하면 자기도 그와 같이
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말수가 적은 소크라테스는 말로 설명하는 대신 몸소
보여주기로 결심했다.
소크라테스는 소년을 바닷가로 데리고 가서 옷을 입은 채 물 속으로 걸어 들
어갔다. 그는 무언가를 증명하고 싶을땐 이런 식으로 호기심을 자극하는 방법을
좋아했다. 소년은 소크라테스의 지시대로 조심스럽게 물 속으로 따라 들어가서
물이 턱까지 오는 곳에 멈춰 섰다. 아무 말 없이 소크라테스는 두 손을 소년의
어깨 위에 얹었다. 그리고 소년의 눈을 들여다보며 있는 힘껏 눌러 소년을 물
속에 빠뜨리고 말았다.
소년은 몸부림치기 시작했고, 소년이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을때 소크라테스
는 소년을 놓아 주었다. 소년은 미친 듯이 모래 사장으로 달려나가서 소금물을
토해내고 힘껏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리고 복수를 하기 위해 소크라테스를 찾았
다. 놀랍게도 소크라테스는 어느새 모래 사장으로 걸어 나와서 소년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년은 소크라테스에게로 다가서서 성난 목소리로 물었다.
“왜 나를 죽이려고 했나요?”
노인을 대답 대신 침착한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얘야, 물 속에서 이젠 죽는구나 했을 때 네가 제일 원한 것이 무엇이냐?”
소년은 잠시 조금 전의 상황을 되살려본 후 조용히 대답했다.
“숨쉬기를 제일 원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환한 미소로 얼굴을 빛내며 소년을 보고 다정한 목소리롤 말했
다.
“아하! 네가 물 속에서 숨쉬기를 원했던 만큼 지혜와 통찰력을 원할 때 너는
그것들을 얻게 될 것이다.” 에릭 세이펄스톤 제공
도전의 날
기쁨을 나누면 기쁨은 두 배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슬픔은 반이 된다.
- 스웨덴 격언
내 이름은 토니다. 나는 이 세상에 나를 보살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
했기 때문에 항상 내가 나 자신을 보살펴 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도전의 날 행사를 위해 단축 수업을 하던 날 나는 생각을 바
꾸었다.
행사를 주최하는 사람들은 우리들이 서로 단결하여 사회의 휼륭한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도와 주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저 학교 수업을 빼먹고 싶
어서 행사에 참석했다. 행사에 이름만 적어놓고 슬쩍 도망나올 작정이었다.
나는 학교 강당에서 백 명쯤 되는 아이들과 큰 원을 그리며 앉았다. 평소 같
으면 네게 돈을 준다고 해도 어울리지 않을 아이들이었다. 나는 건방진 표정을
지으며 태연을 가장했지만 속으로는 조금 긴장이 되었다.
나는 아무에게도 안 보이도록 교실 맨 뒤에 앉아서 휴식 시간을 기다리거나,
학교를 빼먹고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는데 익숙해 있었다. 다음 순간에 무슨 일
이 일어날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는 상황에는 익숙해 있지 않았다.
나는 아이들이 옷 입은 꼬락서니를 흉보고, 뚱뚱한 여자 아이들을 놀려 주었
다. 어떤 여자 아이들은 잠옷을 입고 커다란 동물 인형을 안고 있었다. ‘정말
웃기네.’ 나는 생각했다.
우선 우리는 한 명씩 일어서서 마이크에다 대고 ‘크고 자랑스럽게’ 자기 이
름을 소개하는 것으로 행사를 시작했다. 어떤 아이들은 몹시 수줍어했다. 하지만
나는 가끔 랩을 흥얼거리며 다닌 경험이 있으므로 내 차례가 되었을때 아무것도
아닌 척 잘 해낼 수 있었다. 따라서 마이크를 잡는 순간 목덜미가 경직되도록
긴장했다는 사실을 눈치 챈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아주 험한 동네에서 자랐다. 그 동네에서는 자기의 약점을 보여주면 곧
바로 희생물이 되었다. 아주 어렸을 때 나는 내 친형들과 소위 내 친구라는 아
이들의 희생물이었다. 우리는 진정한 친구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싸우
고 서로를 못살게 구는 것이 우리의 정상적인 생활 방식이었다.
어쨌든 그날 강당에서 아이들이 게임을 하기 시작햇는데 내 눈에는 꽤나 바보
같이 보였다. 나는 조그만 아이들처럼 놀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내
가 어울려 다니는 친구들과 조금 뒤로 물러서서, 다른 아이들이 노는 것을 건방
진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조금 있자니까 나와 같이 뒤로 물러서 있던 아
이들이 다 게임에 참여해서 즐겁게 노는 것이었다. ‘왜 안 되겠어?’ 나는 생
각했다. 솔직히 나는 게임을 잘하지 못했지만 뒤에 혼자 앉아 있는 것보다는 훨
씬 나았다.
다음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나보다 더 무서워
하고 존경하는 아이는 카알 할 명밖에 없는데, 그가 행사 진행자를 도와서 어떻
게 하면 다른 사람을 잘 포옹할 수 있는지 시범을 보이고 있었다. 아이들은 그
모습을 보고 깔깔 웃었지만, 어쩐 일인지 나는 그를 비웃고 싶지가 않았다. 행사
진행자들은 우리에게 마음을 터놓고 진실한 감정을 서로 나누고, 비웃기보다는
칭찬을 하라고 계속 가르쳤다. 나는 그런 것엔 전혀 익숙치가 않았다.
다음에 우리는 ‘힘의 분배’라는 게임을 했다. 게임을 시작하기 전에 행사
진행자들은 억압에 대한 얘기를 했다. ‘웃기네.’ 나는 생각했다. ‘꼭 억압이
뭔지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잖아. 나 좀 보라고. 백인 사회에 박혀 사는 남아메
리카 살색 인종이야. 단지 내 피부 색깔 때문에 나를 갱 멤버라고 생각하는 가
게 주인들이나 선생님들이나 어른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나를 괴롭히고 이리저
리 떠민단 말이야. 그래. 내가 좀 사납게 굴 때도 있지. 하지만 친구들이 아무
이유 없이 총을 맞고 죽어가는 걸 보면서 어떻게 행동하란 말이야?“
행사 진행자들이 한 가지씩 질문을 하면, 그 질문에 ‘네.’라는 답을 할 수
있는 아이들은 앞에 그어놓은 선을 넘어가야 했다. 드디어 한 가지 질문이 나왔
고 몇몇 아이들이 선을 넘어 갔다. 그때까지도 나는 친구의 귀에 속삭이며 떠들
고 있었다. 진행자들이 조용히 하자고 했을 땐 그저 해본 말이 아니었다. 그들
중 한 명이 내게 다가와서 다정하게 어께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저 사람들이 너를 존중해 주었으면 좋겠지? 그럴러면 너도 저 사람들을 존
중해야 한다.”
진행자들은 계속 질문을 했고 아이들은 침묵을 지키며 선을 넘었다. 그러다
나도 ‘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나왔다. 나는 오직 나만이 이런 고통을
체험해 봤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구타를 당했거나 학대를 받아본 경험이 있습니까? 그러
면 선을 넘으십시요.”
나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선을 넘었다. 고개를 숙이고 선을 넘은 후 주위를 둘
러보았다. 고통을 숨기기 위해서 낄낄 웃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런데 고개를 들어 보니 반이 넘는 아이들이 나와 함께 선을 넘고 있었다.
우리는 침묵을 지키고 서서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순간 나는 세상에 태
어나서 처음으로 외롭지 않았다.
하나씩 하나씩 우리는 가면을 벗었다. 평소에 내가 놀리고 못살게 굴던 아이
들도 사실은 나와 마찬가지로 상처를 입었으며 고통이 무엇인지를 알고 잇었다.
나는 다시 선을 넘어 제자리로 갔다. 친구 하나가 나를 놀리며 장난을 치려고
했지만 난 전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진행자들이 다른 질문을 했고, 이번엔 아
이들 전부가 선을 넘었다. 남자들이 얼마나 여자를 깔보고 상처를 입히는지를
그때 처음 알았다. 몇몇의 친구들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고 그것을 바라보며
나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다음 질문은 갱단의 폭력에 의해서 가까운 사람을 잃은 경험이 있느냐는 것이
었고, 대부분의 아이들이 선을 넘었다. 그럴 수가 없었다! 내 가슴에 분노가 부
글부글 끓기 시작했고, 나는 눈물이 눈동자 뒤로 몰려드는 것을 느꼈다. 진행자
들은 계속 말했다.
“눈물이 밖으로 나오면 가슴 안에선 회복이 시작됩니다. 강한 남자만이 울
수 있습니다.”
나는 용기를 내어서 내 눈물을 남에게 보여줄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아직도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할까봐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눈물이 저절로
나오고 말았다. 나는 울었다. 그리고 내가 강한 남자라는 것을 눈물로 증명했다.
그날 강당을 떠나기 전에 우리는 한 사람씩 일어서서 자신이 겪은 괴로운 경
험을 친구들에게 들려주었다. 내 차례가 되었다. 나는 일어섰지만 친구들 앞에서
울어도 되는지 다시 한번 결정을 할 수가 없었다. 진행자들은 나에게 앉아 있는
친구들을 한번 들러보고 남자가 울어도 되는지를 결정하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울었다.
강당에 모인 아이들은 내가 그들 앞에서 눈물을 흘린 것에 대한 존경심을 보
여주기 위해서 모두 일어섰다. 그것에 힘 입어 나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몇 명의 아이들에게 복도에서 밀며 못살게 굴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너희들
이 나보다 가진 것이 훨씬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 아이들은
울며 한 사람씩 앞으로 나와서 나를 껴안아 주었다. 다른 사람과 사랑을 나누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그때 처음으로 알게 되었따. 언젠간 아버지와도 이런 사랑
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학교를 빼먹고 도망치려던 날에 내가 못살게 굴던 아이들에게 사과를 했고,
다른 아이들도 내게 사과를 했다. 원래 우리는 모두 한가족인데 그날 전까지는
몰랐던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마술이 아니었다. 그저 우리는 서로를 다른 각도에
서 보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제부터는 우리에게 달렸다. 단지 하루만 서로를 그런 각도에서 볼 것인가?
아니면 다른 사라들도 결국 우리와 똑같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진실한 자신을
재보여도 좋다는 사실을 그들이 배우도록 도와 줄 것인가? 앤드류 텔테스 제공
제발 제가 하지 않는 말을 들어주세요
내 말을 믿지 마세요.
내 얼굴 표정에 속지 마세요.
나는 가면을 쓰고 있느니까요.
천 개의 가면
그 가면을 벗기가 두렵답니다.
내가 쓰는 어떤 가면도
결국은 내가 아닙니다.
난 연기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으니
속지 마세요.
이렇게 부탁 드리니, 제발 속지 마세요.
난 언제나 안정된 척하죠.
자신 있는 척하는데 선수고
초연한 척하는데 도사입니다.
항상 마음이 잔잔한 척
내가 칼자루를 들고 있는 척
아무도 필요없는 척.
하지만 나를 믿지 마세요.
겉으론 아무 일도 없는 척하지만
그것은 내 가면일 뿐
항상 변하고 항상 숨기는 가면.
그 밑에 평온이란 없답니다.
그밑엔 혼동과 두려움과 고독이 있을 뿐,
하지만 난 그것을 감추죠.
아무에게도 말해 주지 않아요.
내 단점들을 생각하면 숨이 막히고
들킬까봐 겁이 납니다.
그래서 미친듯이 가면을 쓰고
그 뒤에 숨어요.
태연한 척, 고상한 척, 가면 뒤에 숨어서
연극을 하죠.
나를 잘 아는 눈길을 피하기 위해
하지만 바로 그런 눈길이 나를 구제합니다.
그런 눈길만이 나의 희망이라는 사실을
나는 압니다.
그런 눈길 뒤에 이해가 따라 온다면
사랑이 따라 온다면
그것만이 나를 놓아줄 수 있습니다.
내가 직접 만든 감옥으로부터
내가 힘들게 세운 장벽으로부터
그것만이 나에게 확신을 줍니다.
내가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믿게 해줍니다.
난 숨기 싫어요.
의미가 없는 엉터리 게임은 하기 싫어요.
그러니 나를 도와 주세요.
내가 싫어하는 척 뿌리쳐도
내 손을 꼭 잡아 주세요.
내가 싫어하는 척 뿌리쳐도
내 손을 꼭 잡아 주세요.
살아서 죽은 사람처럼 공허한 눈길을
내 얼굴에서 지워줄 수 있는 사람은
당신뿐입니다.
나를 희생시킬 수 있는 사람은
당신뿐입니다.
당신이 내게 친절할 때마다
상냥하게 나를 대해 줄 때마다
나를 진정으로 걱정해서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마다
내 몸에 날개가 자란답니다.
아주 작은 날개
작고 연약한 날개
그래도 날개임엔 틀림없어요!
당신에겐 힘이 있어요.
다시 한번 내게 생기를 불어놓어 줄 힘.
당신은 내게 삶을 불어넣어 줄 수 있답니다.
내가 누군지, 궁금하시죠?
난 당신이 잘 아는 사람이랍니다.
난 당신이 만나는 모든 남자이고
당신이 만나는 모든 여자랍니다.
작자 미상
스파키
스파키에게 학교는 정말 고욕이었다. 중하교 3학년 때는 모든 과목을 낙제했
고, 고등학교 때는 물리학 학년말 평점이 빵점이었다. 그 외에도 라틴어, 대수,
영어 과목을 낙제했다. 스파키는 스포츠도 잘하지 못했다. 어떡해서 학교 골프부
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시합 때마다 졌고, 패자 부활전에 나가면 거기서 또 패자
가 되었다.
스파키는 친구도 잘 사귀지 못했다. 다른 학생들이 그를 싫어한 것은 아니지
만 그에게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운동장에서 어떤 아이가 아는 척을 하면
스파키는 깜짝 놀라곤 했다. 그가 여자와 데이트를 했다면 어땠을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도록 그는 한 번도 데이트 신청을 해본적이 없
으니까. 거절을 당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스파키는 패배자였다. 그 사실은 그뿐만 아니라 반 친구들을 비롯해서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 스파키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렸을때부터 그는 일
이 잘 풀리면 다행이고, 그렇지 않으면 평범한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며 살기로
했다.
그러나 그에게 한 가지 매우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림이었다. 그는 자신의 미
술 실력이 뛰어나다고 믿었다. 물론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었지만.
고등학교 3학년 때, 졸업 앨범에 적당할 것 같은 만화를 몇 장 그려서 보내
보았지만 거절당했다. 그래도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자신의 그림 실력을 단단히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전문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월트 디즈니 회사에 편지를 보냈다. 그러자 정해진 주제
에 대한 견본 작품을 몇 점 보내라는 답장이 왔다. 스파키는 편지에 쓰인 대로
열심히 그려서 보냈다. 마침내 디즈니 스튜디오에서 연락이 왔다. 이번에도 거절
이었다. 스파키는 다시 한번 패배를 한 것이었다.
그래서 스파키는 자기의 자서전을 만화로 엮기로 하고, 어렸을 때 그의 모습,
즉 항상 자기만 하고 늘 성적이 부진한 아이의 모습을 그렸다. 그런데 그의 만
화가 오래지 않아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학교에서는 항상 지기만 했고, 보내
는 작품마다 거절을 당한 스파키의 본명은 챨스 슐츠이다. 그는 피넛이라는 제
목의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고, 연도 날릴 줄 모르고 공도 칠 줄 모르는 주인공
의 이름을 챨리 브라운이라고 지었다. <짤막하고 유익한 이야기들>에서
6. 정말 힘든 일에 대하여
얼굴이 공포로 일그러질 정도로 힘든 경험을 할 때마다 우리는 힘과 용기와
자신감을 얻게 된다.
“이렇게 힘든 일도 했는데, 이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라고 말할 수 있
게 되기 때문이다. <엘리노아 루즈벨트>
항상 함께 있을거예요
9월의 어느 조용한 밤, 열일곱 살 된 우리 아들 마이크는 갑자기 끝난 첫사랑
에 가슴 아파하며 소중히 아끼던 68년형 노란색 머스탱에 올라탔다.
그가 그토록 사랑하던 여자친구가 갑자기 다른남자와 약혼을 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바로 직후였다.
마이크는 보물처럼 아끼고 사랑하던 차 안에서 총구를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옆에 남긴 쪽지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미워할 줄 알았으면 좋겠어요... 엄마 아빠 잘못이 아니예요. 사랑해요. 마이
크. 저녁 11시 45분.’
그날 밤 11시 52분에 나는 큰아들 빅크와 함께 집으로 돌아와서 머스탱 옆에
차를 대었다. 7분만 일찍 왔더라면!
그 일이 있고 얼마 후부터 마이크에 대한 얘기가 여기저기서 들리기 시작했
다.
그 중엔 내가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마이크의 가장 오랜 친구인 대니는 마이크와 함께 유치원에 다닐 적 얘기를
해주었다.
유치원에서 졸업사진을 찍는 날이 되었는데 대니는 무서워서 찍을 수가 없었
다.
그러자 마이크는 ‘굉장히 쉬워. 이렇게만 하면돼.’ 라고 하며 활짝 웃어 보
였다.
지금도 마이크를 생각하면 그의 환한 미소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고등학교 때 잘 알고 지내던 여자 친구 한 명이 아빠 없는 아기를 낳자, 마이
크는 발벗고 나서서 아기 보는 일을 도와주었다.
또 친구 한 명은 갱단의 총에 맞아 쓰러졌다가 마이크의 간호 덕분에 건강을
회복한 적도 있었다.
마이크가 속한 학교 음악대가 플로리다에서 열리는 오렌지 보울 퍼레이드에
참여 했을 때는 앞 못보는 대원을 도맡아 도와주기도 했다.
한 젊은 엄마는 어느날 내게 전화를 걸어서, 한적한 길가에서 차가 고장났을
때 마이크의 도움을 받았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갑자기 차가 서버리자 그녀는 아이들과 함께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다.
그때 마이크가 차를 세우고, 자기가 나쁜 사람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운전
면허증을 보여준 후 차를 고쳐주었다.
마이크는 여인이 집에 안전하게 도착하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자기 차로 뒤를
따라왔다고 했다.
마이크가 친구들과 하는 자동차 경주에 참여하기 위해 새 트랜스미션을 사야
한다고 했다가, 왜 새것을 사지 않고 중고품을 샀는지에 대한 이유도 알게 됐다.
마이크는 새 트랜스미션을 사려고 주문했다가 취소하고, 중고품 시장에서 중
고 트랜스미션 두 개를 사서 하나를 가난한 친구에게 주었다.
그래서 그 친구도 마이크와 함께 경주에 참가할 수 있었다.
중고품을 산 후 마이크는, 중고차에 새것을 넣으면 자기가 원하는 대로 달릴
것 같지 않아서라고 우리에게 말했다.
마이크의 조카가 뇌성마비에 걸린 채 태어났다.
마이크는 호흡을 돕기 위해 조카의 목을 절개하고 삽입한 튜브를 바꾸는 법
과,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서 인공호흡을 시키는 법도 배웠다.
목에 삽입된 튜브 때문에 조카가 말을 할 수 없어서, 마이크는 조카와 함께
수화를 배워 수화로 노래를 부르곤 했다.
마이크가 죽은 후 그의 친구들이 잇따라 우리를 찾아와서 위로의 말을 해주며
자기들이 도울 일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럴 때마다 우리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너희들은 절대 이런 짓 하지마라. 자살은 절대 하지마. 힘이 들면 누군가를
찾아가서 도움을 청해라!”
마이크의 장례식이 있기 전 마이크의 친한 친구들이 슬픔을 함께 하기 위해
우리를 찾아왔다.
그들은 마이크와 함께 나누었던 즐거운 추억에 대해 얘기하며, 10대 청소년
들의 비극적인 자살에 대한 걱정을 했다.
그리고 우리는 어떻하면 10대 청소년들의 자살을 미리 방지할 수 있는지에 대
한 얘기도 했다.
그래서 노란 리본 프로젝트가 탄생되었다.
우리는 10대 청소년들이 생명을 잃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인 자살을 방지하
기 위한 단체를 설립하기로 했다.
마이크가 죽은 지 며칠 되지 않았을 때 우리는 엽서만한 크기의 종이에다 다
음과 같은 글귀를 인쇄했다.
노란 리본 프로젝트
-사랑의 마음으로 마이클 엠을 추도하며.
이 노란 리본 카드는 생명줄입니다. 당신을 걱정하고 도와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 카드를 만들었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데 어떻게 도움을 청할 지 모르겠으면, 이 카드를 상
담원이나 선생님이나 목사님이나 부모님이나 친구에게 가지고 가서 이렇게 말하
십시오.
"난 이 노란 리본을 써야 해요!”
마이크가 그토록 좋아하던 머스탱을 기억하는 의미에서 노란 리본을 만들어
카드에 붙이자고 누군가가 제안했고, 우리는 그렇게 했다.
장례식 날 우리는 식장 앞에다 바구니를 놓고 노란 리본 카드 오백장을 담아
놓았다.
장례식이 끝났을 때 바구니는 텅 비어 있었다.
그리고 마이크의 노란 머스탱은 백 송이의 노란 장미로 뒤덮였다.
마이크가 살아있을 때 적극적으로 남을 도운 것처럼 우리는 마이크의 죽음을
애도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돕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노란 리본 프로젝트는 벌써 세계적인 활동을 벌여 많은
청소년들의 목숨을 구했다.
우리는 노란 리본 프로젝트에 감사를 표하는 편지를 많이 받고 있으며, 그 중
몇개를 소개한다.
“당신들의 도움으로 우울증에서 헤어날 수 있었어요.”
“자살을 하려고 몇 번이나 시도를 했죠. 그러다 노란 리본 카드를 발견하고
호주머니에 넣어 갖고 다니다 친구에게 보여주었어요.
친구는 내가 자살을 할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상담을 받을 수 있
도록 도와 주었어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목숨을 끊으려는 사람들에게 누군가가 걱정하고 있
다는 사실을 알려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마이크가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남긴 편지에 이런 글이 쓰여있었다.
‘몸은 떠나도 마음은 항상 함께 있을 거예요.’
청소년 단체에서 강연을 할 때마다, 또 도움을 필요로 하는 10대 학생들로부
터 편지를 받을 때마다 나는 마이크가 우리에게 남긴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깨
닫곤 한다. <대일 엠과 달 엠>
엠씨 부부가 받은 수많은 편지 중 일부를 이곳에 인용한다.
제 이름은 제시카이고 저는 지금 고등학교 3학년에 다니고 있습니다.
책에 실린 마이크의 이야기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아 이 편지를 쓰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저는 5년동안 우울증과, 자살을 하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다 헤어났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저를 도와 주지 않았다면, 저는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난 주에 저희 학교 3학년 친구가 총으로 자살을 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그에게 다가가서 진실한 마음으로 관심을 보였다면, 그의 목숨
을 구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니 저에게 노란 리본 프로젝트에 대한 정보와 조언과 리본을 보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저는 전부터 10대 청소년 자살에 관한 문제를 널리 알리고 싶었지만 어떻게
할 줄을 몰랐습니다.
도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제시카 메이져스>
노란 리본 프로젝트에 관해 알게 된 후, 제 가족과 친구들이 얼마나 귀중한지
를 새삼 깨달았습니다. 만약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서 노란 리본으로 생명
을 건진다면 저는 노란 리본 프로젝트를 만들어주신 여러분을 더욱 고마워하게
될 것입니다. <니콜 니로>
두 달 전 저는 제가 무척 사랑하던 남자친구와 헤어졌고, 그 고통과 허전함을
이길 수 없어서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삼킨 약들이 호흡장애를 일으켰기 때문에 하룻밤을 중환자실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저는 전 과목에 A를 받는 학생이고, 모든 일이 제가 원하는 대로 잘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제가 자살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는 사실에 저도 충격을 받
았습니다.
그리고 제 앞날이 희망에 차 있다는 것과, 제가 죽으면 부모님이 도저히 견디
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노란 리본을 두 개 보내주셨으면 합니다. 하나는 제가 가질 것이고, 하
나는 저와 가장 친한 친구에게 줄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젠 베터>
내 이야기
나는 자살에 대해선 생각을 해본 적도 없다. 자살이라는 것은 감기에 걸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상태이다. 바로 얼마 전까지도 멀쩡했는데 갑자기 아파지
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살에 대한 얘기를 할 때마다 ‘난 절대 그런 짓 안해.’
라고 생각하곤 했었다. 사람들이 도대체 왜 그런 바보같고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 얘기를 하자면, 나는 그저 마음의 고통에서 헤어나고 싶었다. 그런데 그 정
도가 심해지자 고통을 멈추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할 것 같았다.
나는 열여섯 살인데 학교에 다니는 동안엔 아빠와 함께 살고, 여름 방학 동안
엔 엄마와 함께 산다. 그리고 나는 두분 다 나 때문에 불편해 하신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엄마의 집엔 내 방도 따로 없다. 엄마는 항상 중요한 일로
바쁘시기 때문에 내가 엄마를 필요로 할 때도 곁에 계신 적이 없다. 엄마는 그
렇게 생각 안 하실지도 모르지만, 나는 항상 그렇게 느낀다.
그때 나는 친구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 보통 아이들과 다른 나의 생활 환경
때문에 친한 친구를 사귀기가 힘들었고, 그나마 내 친구로 남아 있는 아이들도
나를 도와 줄 수가 없었다. 내가 처한 문제가 ‘너무 심각하기 때문’이라고 친
구들은 말했다.
참... 그날 내 남자 친구인 죤이 나를 버렸다는 얘기도 했던가? 나는 이미 첫
번째 남자 친구로부터 실연을 당한 경험이 있었다. 첫번째 남자 친구는 내가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는 사람으로 변했다고 말했고, 이제는 죤도 내 곁을 떠났다.
사실 죤과 더 이상 함께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 문제가 된 것은 아니었다. 문제
는 나 자신이었다. 도대체 나는 어디가 잘못된 거지? 왜 다들 나를 사랑할 수
없는 거지? 왜 일이 좀 힘들어지면 다들 도망을 가는 거지? 나는 혼자였다. 내
머릿속에서 조그만 목소리가 자꾸만 속삭였다.
‘틀린거야. 네가 망친거야. 넌 부족한 게 너무 많아. 누구든 네가 어떤 사람
이라는 걸 알아내면 너를 사랑할 수가 없게 되는거야.’
나는 너무도 모자라는 사람이기 때문에 부모님조차 나를 사랑할 수 없는 것이
라고 생각했다. 너무 고통스러울 때면 누군가에게, 남자 친구에게, 여자 친구에
게 전화를 하고 싶어진다. 그래서 얼마나 힘이 드는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말
하고 싶어진다. 그러면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한다.
“야, 정말 미안해. 너를 다치게 하고 싶진 않았어. 잠깐 기다려. 내가 당장 갈
게.”
나는 울며 전화했다. 그래서 너무 고통스럽다고 말했다. 만나서 얘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나를 도와 줄 수 없다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는 엄마 방으로 가서 진통제, 수면제, 안정제를 마구 꺼내 먹었다. 이제 얼
마 있으면 고통이 멈출 것이다.
그 다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너무 끔찍하므로 생략하겠다. 전혀 색다른
고통이었다. 육체적으로는 더 이상 몸을 가눌수 없을 때까지 토했다. 감정적으로
는 세상에 태어난 이래 그 어느 때보다 두려웠다. 나는 죽고 싶지 않았다(통계에
의하면, 자살 행위를 한 직후에 죽고 싶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그래서
살려고 노력을 하는 사람은... 대부분 죽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살려고 노력
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죽어버린 사람은? 그 생각을 하면 더욱 슬퍼진다.). 다행
히도 나는 죽지 않았다. 하지만 몸이 많이 상했다(지금도 위가 몹시 아프다.). 그
리고 나 때문에 여러 사람이 놀라고 상처를 입었다. 나 자신도 놀랐으니까. 하지
만 나는 죽지 않았다. 죽지 않고 살아서 얼마나 기쁜지는 말로 설명하기가 힘들
다.
사람들이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낼 때마다 나는 몸을 움추린다. 이
글도 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들과 고통 속에서 살아가
는 사람들을 돕고 싶었다.
그날 이후 벌써 한달이 지났다. 그동안 나는 오백번은 웃었을 것이다. 오줌이
찔끔 나오도록 웃는 그런 웃음 말이다.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심리학자에게
상담을 받고 있고, 우리는 벌써 많은 진전을 보여서 나는 나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엄마와 아빠도 더 나은 부모가 되기 위한 상담을 받고 있다. 그리
고 나는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며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
게 되었다.
나와 같이 힘든 경험을 한 친구를 사귀었다. 내 감정이 정말 힘들어질 때도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살아 있다는 사실이 어
떤 것인지 우리는 안다. 옛 친구들과도 다시 만나기 시작했으며 전보다 더욱 가
까워졌다. 또 나는 일을 해서 오십만원을 벌었고 그것을 별 죄의식 없이 몽땅
나를 위해 썼다. 그리고 나는 나 자신을 용서하기 시작했다.
참... 다정한 남자 친구를 사귀었다. 그는 나의 이야기를 다 알고 있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 천천히 하기로 약속했다.
그날 내가 살아니지 못했더라면 이 모든 것과 더 많은 것을 놓쳤을 것이다.
어떤 땐 삶이 너무 힘들고 고통스럽다. 나의 경우엔,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가 없었다.
나는 지금 나 자신을 받아들이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그리
고 결국 모든 일은 변하며, 고통은 어느새 사라지고 행복이 찾아온다는 사실을
배우고 있다. 고통이 또 찾아올지도 모르지만, 그러면 행복도 다시 우리를 찾아
온다. 바닷가의 파도처럼 왔다... 가고... 다시 왔다가... 또 가고... 숨을 내쉬고 들
이쉬듯이. 리아 게이, 16세
누군가가 그 아이를 가르쳤어야 했는데...
나는 생일파티에 갔어요.
그리고 당신이 가르쳐 준 말을 기억했어요.
술을 마시지 말라고 당신이 한 말을.
그래서 나는 소다수를 마셨고,
그런 내가 자랑스러웠어요,
그럴 것이라고 당신이 말한 것처럼.
친구들이 설득하려고 했지만
음주 운전은 하지 않겠다고 말했지요.
내가 올바른 선택을 했으며,
당신의 충고가 옳았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어요.
파티가 끝나고
아이들은 차를 몰아 집으로 돌아갔어요.
나는 내 차에 올라탔어요.
올바른 선택을 했으니
집에 무사히 도착하는 것은 문제가 없지요.
다음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나는 모르고 있었어요.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었어요.
나는 지금 길바닥에 누워 있어요.
경찰관이 말하는 소리가 들여요.
“술 취한 아이가 그랬어.”
아, 소리가 아득히 사라져요.
내 몸에서 나온 붉은 피가
내 주위에 흥건히 고여 있어요.
나는 울지 않으려고 있는 힘을 다하고,
응급 요원의 말소리가 들려요.
“이 아이는 틀렸어.”
그 아이는 몰랐을 거예요.
그가 술이 취해 하늘을 나르듯
운전했기 때문에
내가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의 삶을 망친다는 사실을 알면서
왜들 그러지요?
아, 고통이 백개의 칼처럼 내 몸을 찔러요.
동생에게 무서워하지 말라고 말해 주세요.
아빠에게 용감하시라고 말해 주세요.
아빠의 딸을 누이러 무덤으로 갈 때.
누군가가 그 아이를 가르쳤어야 했는데...
술을 마시고 운전하면 안된다는 사실을.
그 아이의 부모님이 그 아이를 가르쳤다면
내가 죽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점점 숨을 쉴 수가 없어요.
너무 무서워요.
이제 나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는데
나는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질 않아요.
엄마, 여기 누워 죽어가는 동안
내 손을 잡아 주세요.
사랑한다는 말을, 안녕이라는 말을
하고 싶어요.
제인 왓킨스 제공
딱 한잔
분즈빌 마을 근처를 지나는 128번 고속도로 옆에 조그만 십자가 하나가 세워
져 있다. 만약 이 십자가가 말을 할 수 있다면, 다음의 슬픈 이야기를 들려줄 것
이다.
7년 전 나의 형 마이클은 친구의 농장에 놀러 갔었다. 형과 친구들은 저녁을
먹으러 레스토랑에 가기로 했고, 친구 죠우는 딱 한잔밖에 안 마셨다며 자기가
운전을 하겠다고 했다.
기분 좋게 네 친구는 자동차로 꼬불꼬불한 길을 운전해 갔다. 그 길이 어디서
끝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런데 갑자기 차가 미끄러지며 반대 차선으로 빙
글 돌아서, 마주 오던 차와 충돌했다.
그날 저녁 우리는 집에서 따뜻한 벽난로 앞에 앉아 “ET"를 보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새벽 2시에 경찰관이 찾아와 엄마를 깨우고 끔찍한 소식을 전해
주었다. 마이클이 죽었다는 것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엄마와 누나가 울고 있었다. 나는 어리둥절해서 졸린 눈
을 비비며 물었다.
“무슨 일이야?”
엄마가 깊이 숨을 들이쉬고 나를 불렀다.
“이리 와 봐라.”
그래서 나는 고통으로 이르는 힘든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끝이 없는 길이었
다. 그날을 생각하면 아직도 아프다.
단 한 가지 내 마음의 고통을 덜 수 있는 방법은, 이 이야기를 남들에게 들려
주는 것이다. 그래서 단 한잔의 술이라도 마신 사람이 운전하는 차에 타려다가
당신이 내 이야기를 기억하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기를 바라는 것뿐이다.
죠우 형은 친구들을 죽음으로 이끌었다. 그래서 살인죄로 기소되어 감옥살이
를 했다. 하지만 진짜 형벌은 자기가 한 짓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죠우
형은 다시는 사라지지 않을 고통을 우리 가슴에 심어주었고, 그것에 대한 악몽
으로 평생을 시달릴 것이다. 그리고 그 악몽은 또한 평생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사랑하는 마이클 래디쉬에게 이 글을 바친다.
크리스 래디쉬, 13세
개비야, 너 어쩜 그렇게 말랐니?
나는 전 과목에 A를 받고, 학교 활동에도 열심히 참여함으로써 이른바 타의
모범이 되는 학생이다. 적어도 전에는 그랬었다.
일의 시작은 매우 간단했다. 그때 나는 몸무게가 56킬로그램 정도 나갔다. 그
래서 뚱뚱하지는 않았지만, 몇 킬로그램쯤 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 친구 한
명이 헬쓰 다이어트를 했는데 결과가 무척 좋았다. 살이 많이 빠져서 몰라보게
예뻐졌고, 친구들이 그 아이만 보면 멋있어 보인다고 칭찬을 했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었다.
나는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바보 같은 텔레비젼을 보며 끊임없이 콜라를 마시
고 감자칩을 먹는 대신 건강에 좋은 음식을 골라먹고 운동을 시작했다. 그러자
2주일도 지나지 않아서 살이 빠지기 시작했다. 나는 기분이 좋아져서 입는 옷에
도 신경을 더쓰게 되었고, 내가 세련되어 보인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
기분은 사실 생전 처음이었다. 학교에 가면 모두들 한 마디씩 했다.
“개비, 너 정말 멋있어 보인다.”
“개비, 너 너무 예뻐졌다.”
“개비, 너 어쩜 그렇게 말랐니?”
그런 칭찬을 들으면 하늘을 날 것 같았다. 그렇게 기분 좋은 칭찬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우리집 가훈은, 무엇이든 항상 더욱 노력해서 더 좋게 향상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겨우 2킬로그램 빠졌는데 이런 칭찬을 들
으면 5킬로그램 정도 빼면 굉장하겠네! 지금까지는 1000칼로리를 줄였으니까
500칼로리를 더 줄이면 어떨지 상상을 해보란 말이야! 바로 그 순간부터 나는
‘식욕 감퇴증’이란 병을 향해 굴러 떨어지기 시작한 것 같다.
나는 학교 성적뿐 아니라 학교 활동에도 뛰어난 성과를 거두고 있었지만, 몸
무게를 줄이며 얻는 성취감에 비하면 그런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였다. 아마 몸
무게를 빼는 것은 완전히 내 뜻에 의해 내 힘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인
것 같았다. 나는 급격한 속도로 몸무게를 줄여나갔다. 1킬로그램을 줄일 때마다
기쁨에 넘쳤다. 하지만 그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고, 그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
다시 1킬로그램을 줄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일시적인 기쁨에 중독이 되었
던 것 같다. 그 당시에는 그 기쁨을 맛보기 위해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처음으로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던 날이 생각난다. 그 날 밤 잠자리에
들었을 때 뱃속이 텅 빈 것을 느꼈다. 하지만 또 내가 그만큼 더 날씬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런 기분이 느껴질 때 나는 성취감을 느꼈고 성공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자리에 누워서 이렇게 생각했다.
‘아무것도 안 먹고 하루를 버틸 수 있다면, 왜 이틀은 못 버티겠어?’
그래서 난 거의 날마다 아무것도 먹지 않게 되었고, 결국은 3일을 아무것도
안 먹고 견딜 수 있게 되었다. 언제부터인지 잘 생각나지는 않지만 친구들은 더
이상 나를 칭찬해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아, 내가 너무 지나쳤구나라고
논리적인 결론을 짓는 대신, 실패를 하고 있으니 더욱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
다.
하루에 사과 한 알만 먹어도 밤에 침대에 누워서, 실패를 했다고, 난 너무 뚱
뚱하다고 자책을 했다. 결국은 위에 음식물이 조금만 들어 있어도 너무 많이 먹
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음식이 더럽게 보이고 음식만 보면 구역질이 났다.
의지가 약하다고 나 자신을 나무랬다. 내 삶 전체가 지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래서 조금만 더 강한 의지로 나 자신을 다스리면 행복이 찾아올 것이라고 생
각했다. 하지만 사실은, 행복은 벌써 오래 전에 멀리멀리 달아나고 없었다. 그리
고 내 삶은 1킬로그램을 줄일 때마다 느끼는 순간적인 성취감과 기쁨을 위해 바
쳐졌다.
사실 내 마음 한구석에선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 생각은
너무 힘이 약했다. 그래서 내 병에 완전히 압도당해 버렸다. 난 도움이 필요했
다. 하지만 누구의 도움을 받는다는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다. 나를 도와 주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하는 사람들에게조차 내가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선생님들, 학교 간호사님, 친구들 모두가 내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
었다. 그래서 나는, 난 괜찮으며 아무 문제도 없다고 그들을 설득해서 나를 내버
려두게 만드느라 고심했다. 그때 그들이 정말 내 말을 믿었을까? 아니면 내가
도움을 받을 마음의 준비가 될 때까지는 도와 줄 수가 없다고 생각했을까?
어느날 저녁 아버지는 스테이크를 사오셨다. 그리고 나를 불러 식탁 의자에
앉게 한 다음 그것을 먹으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내가 스테이크를 먹는 것
을 지켜볼 것이며, 절대 안 먹겠다는 말을 해선 안 된다고 하셨다. 나는 그럴 수
없다고 울며불며 아버지에게 매달렸다.
나는 접시 위에 놓인 흉측한 괴물을 바라보았다. 나의 최대의 적, 완전 지방이
었다. 한 입만 먹으면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가고 말 순간이었다. 나는 절대 이
것을 먹을 수 없으며, 아버지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이것을 먹게 하지 않
을 것이라고 설득해야 했다. 나는 이건 미친 짓이라고 울며 아버지께 애원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꼼짝도 않으셨다. 내가 먹을 때까지 밤새도록 여기 앉아 있
겠노라고 하셨다. 나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선택! 단 한 가지 내가 내 마음
대로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이어야 했는데 내게 선택이 없다는 말에 나는 감정적
으로 폭발을 하고 말았다. 더 이상 아버지도 상관없었고, 아버지가 얼마나 상심
을 하실지도 상관하지 않았다. 내가 느낄 수 있는 감정은 분노와 증오뿐이었다.
나는 순간 아버지를 증오했다. 내가 얼마나 비정상적으로 변했는지를 아버지 때
문에 깨달았고, 그래서 고통을 받아야 했으므로, 그 가증스럽고 사악한 음식을
먹으라고 명령한 아버지를 증오했다. 평생 나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살았다.
좋은 성적, 모범이 되는 행동, 상장, 이 모든 것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서 받으려고 노력했다. 진정으로 나를 위한 일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음식을
안 먹는 것, 살을 빼는 것, 이것만은 나의 일이었다. 그것만은 유일하게 나 자신
의 선택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인데, 아버지는 그것마저 빼앗아가려 하고 있었다!
나는 할 수 없이 음식을 먹었다. 그날 밤 침대에 누워 더 이상 날씬하지 않다
고 생각하며 엉엉 울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밤새 한 잠도 자지 않고 생각해 본 후 결론을 내렸다. 내가 증오하는 것은 아
버지가 아니었다. 바로 나였다! 내 삶의 주도권이 나에게 있지 않다는 사실도 깨
달았다. 생전 처음으로 나는 나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똑바로 알게 되었다. 내가
내 삶의 주도권을 잡아야 했는데 지금은 병이 나를 잡아 흔들고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모든 것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회복을 하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천천히 나는 가족과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회복하기 시작했다.
지금 나는 매우 정상적인 몸무게를 유지하고 있으며, 전혀 몸무게를 달아보지도
않는다. 패션잡지들을 열심히 사보는 것도 그만두었다. 비록 내가 유행에 뒤떨었
지는 몰라도 기분은 최고다!
가브리에라 톨테스, 17세 킴벌리 컬버거 제공
마지막 소원
열여섯 살이 크리스 하트는 어느 모로 보나 평범한 소년이 아니었다. 크리스
는 키가 2미터를 넘었고 몸무게는 120킬로그램이나 되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크리스는 교내 미식 축구부에서 선수로 뛰었는데, 110킬로그램이 넘는 역도를
들고 일어설 수 있었고, 앉은 채로는 200킬로그램을 들 수 있었다. 그러다 오스
테오제닉 살코마라는 암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았다. 암은 한동안 자취를 감추었
다가 그가 2학년이 된 해에 재발했다. 1993년,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기 얼마 전
의사 선생님은 크리스에게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했다.
같은 해, 크리스가 살고 있는 동네의 라디오 방송국에서는 가장 멋있는 크리
스마스 카드를 보내는 사람에게 상으로 소원을 들어준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 다니는 사람 한 명이 크리스 이름으로 방송국에 카드를 보냈다. 방송국
에서는 크리스의 카드가 제일 멋있다고 결정을 했고, 그때만 해도 난 이 사건으
로해서 나의 삶이 달라지리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크리스의 첫번째 소원은 그의 트럭에 달 스테레오 시스템을 갖는 것이었으므
로 동네 전자 가게에서 간단히 들어주었다. 두번째 소원은 달라스 카우보이의
미식 축구 경기장에서 관람하는 것이었는데, 크리스는 경기를 관람한 것뿐만 아
니라 선수 휴게실로 가서 몇몇 선수들을 만나보기까지 했다. 크리스의 세 번째
소원은 약간 민감한 성격의 문제여서 들어주기가 힘들었다. 그는 빨간 머리를
가진 여자 친구와 데이트를 하고 싶다고 했다.
한 가지 말하고 넘어갈 것이 있는데, 내 머리는 빨간색이다.
어느날 밤 아버지는 교회에서 돌아오셔서 크리스와 그의 세가지 소원에 대해,
특히 세 번째 소원을 강조하셨다.
“아버지, 난 그 애를 알지도 못해요.”
내가 말했다. 어떻게 크리스와 데이트를 하란 말이지? 우리는 같은 학교에 다
니지도 않고 얼굴을 한 번 본 적이 없는데, 목사님이신 아버지는 크리스를 몇
번 만난 적이 있는 데 매우 좋은 아이이고, 키가 크고,‘뼈대가 굵다’고 하셨
다. 그래서 나는 잠시 주저하다 승낙을 하고 말았다.
데이트 날짜는 크리스마스 일주일 전으로 잡혔다. 그 전에 크리스와 나는 전
화로 몇 번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크리스는 정말 좋은 아이인 것 같았지
만 막상 그날이 오자 긴장이 되어서 나는 친구에게 같이 가자고 했다. 크리스가
나를 데리러 우리집에 왔을 때 나는 그의 키가 얼마나 큰지를 보고 깜짝 놀랐
다. 그는 무지무지하게 컸을 뿐만 아니라 화학요법을 받느라고 머리가 다 빠져
서 대머리였다. 밖에서는 모자를 쓰고 다녔지만 집 안에서는 예의를 지키느라
벗었기 때문에 대머리가 다 드러났다. 우리는 함께 피자를 먹으러 갔고, 크리스
는 너무 커서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갈 때 몸을 구부려야 했다. 사람들이 흘끔흘
끔 우리를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 후 크리스는 학교가 끝나면 우리집으로 찾아오게 되었고, 우리는 함께 얘
기를 하거나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들었다. 그는 미식 축구를 못하게 되어서 슬
프다고 말했다.
발렌타인 데이에 나는 내 친구와 함께 맛있는 저녁을 만들어서 그녀의 남자
친구와 크리스를 초대해 선물을 교환했다. 크리스는 곰 인형과 새로 나온 CD를
선물로 받고 무척 좋아했다. 그리고 나에게 2학년과 3학년을 위한 졸업 파티에
자기의 파트너가 되어달라고 부탁했다.
그 후 나는 지금 생각해봐도 너무 부끄러운 짓을 하고 말았다. 크리스와 그의
세 가지 소원에 대한 기사가 동네 신문에 실렸을 때였다. 기사와 함께, 크리스와
내가 그의 트럭 앞에 서서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이 실렸고, 사진 밑에는 우리가
데이트를 하고 있다는 글이 적혀 있었다. 학교 친구들이 그 기사와 사진을 보고
나를 놀리기 시작했다. 나는 못 들은 척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던 어느날 학교에
서 인기가 좋은 3학년 선배 한 사람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봐, 그 아이 친구로는 네가 제일인가 보지?”
나는 몹시 괴로웠다. 나는 2학년이었고, 이사온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나는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 주길 바랐다. 사람들이 나를 이상한 아이로 생각하는 것
은 참을 수가 없었다.
크리스가 전화를 했다. 나는 지금 바빠서 전화도 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
후에도 크리스가 전화를 할 때마다 계속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래서 크리스는
더 이상 나를 찾아 오지 않았고, 우리는 더 이상 데이트를 하지 않았다. 밤이 되
면 난 울며 잠이 들었다. 내가 그에게 못된 짓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
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가 없었다.
크리스의 졸업 파티가 다가오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전화를 걸어야 했다. 엄마
친구가 나를 위해서 아름다운 드레스를 만들어 주셨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함께 가겠다고 크리스와 약속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전화를 걸었고,
우리는 졸업 파티가 시작되기 전에 친구들과 함께 저녁을 먹기로 계획을 세웠
다. 크리스가 나를 데리러 왔을 때 우리는 처음엔 별로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근사한 예복에 운동화를 신고 있었는데 꽤 멋있어 보였다. (그의 발에 맞는 검은
구두를 찾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크리스는 살이 많이 빠져서 손에 낀
반지가 자꾸만 흘러 떨어졌다.
우리는 친구들과 함께 저녁을 먹으며 옛날처럼 웃고 농담을 했다. 졸업 파티
가 열리는 강당으로 가는 길에 크리스는 몸이 아프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주
차장에서 잠시 기다리며 그가 힘을 되찾을 때까지 기다렸다. 강당은 이집트 스
타일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모두들 춤을 추며 즐겁게 놀았지만, 크리스는
몸이 안 좋았기 때문에 앉아서 보기만 하겠다고 했다. 신나게 춤추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얘기를 하고 있는데, 디제이가 음악을 멈추고 미식 축구부 한 명이 마
이크를 잡았다. 그는 크리스에 대한 얘기를 했다. 크리스가 얼마나 특별한 친구
인가를 설명한 다음, 그를 이 파티의 귀빈으로 모시겠다고 말하며 그에게 상패
를 주었다. 크리스는 세상에 태어나서 이처럼 기쁜 날은 없었다고 말했다.
그날 밤 이후론 난 학교 친구들이 뭐라든 상관하지 않았다. 크리스는 내 친구
였다. 다만 내가 그에게 못되게 행동한 것을 그가 용서해 주기를 바랬다.
그 해 봄 크리스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다. 의사들은 앞으로 2주일 정도 더
살 수 있겠다고 말했다. 그 2주 동안 나는 매일 그를 찾아갔다. 그는 방 한가운
데에 놓인 어마어마하게 큰 침대에 누워 있었고, 우리는 함께 얘기를 하거나 텔
레비젼을 보았다.
크리스는 죽음에 대한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그가 죽음에 대한 얘기
를 할 때마다 나는 마음이 무척 괴로웠다. 아버지는 그의 얘기를 들어주는 것
만으로도 그를 도울 수 있다고 하셨다.
크리스는 정신을 집중하기가 점점 더 힘들어졌다. 죽기 며칠 전에는 사람을
잘 알아보지도 못했다. 토요일 오후에 나는 마지막으로 그를 방문했다.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그가 나를 불렀다. 그리고 포옹을 해달라고 했다. 나는 그를 힘껏
껴안았고, 그는 내 귀에 속삭였다.
“사랑해.”
나에게 그런 말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나를 용서했다는 사
실을 알았다.
일요일 아침 예배가 끝나고 나는 집으로 갔다. 엄마와 아빠는 함께 점심을 먹
으러 레스토랑에 가자고 하셨지만, 왠지 집에 빨리 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
어서 싫다고 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크리스의 아빠가 전화를 하셨다. 크리스가
죽어가고 있었다. 나는 당장 레스토랑으로 전화를 걸었고, 부모님은 즉시 달려
오셔서 나를 데리고 크리스에게 함께 갔다.
가족들과 식구들이 크리스의 침대 주위에 모여 서 있었다. 그는 천천히 깊은
숨을 들이쉬고 있었다. 나는 그의 옆에 섰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아무 말도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크리스티가 왔다.”
아빠가 말씀하셨다.
“여기 모두들 모였다. 우리는 모두 너를 사랑한단다.”
나는 안녕이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하나님이시여.”
아버지가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크리스와 함께 하시고, 그의 가족과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과 함께 하여
주소서. 사랑하는 당신의 품으로 크리스를 받아 주셔서 저희가 평화를 느낄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나는 크리스를 보려고 고개를 들었다. 그는 마지막 숨을 힘들게 들이쉬고, 숨
을 거두었다.
그날로부터 2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나는 아직도 크리스가 그립다.
<크리스티나 갤로웨이>
안네 프랑크
그녀의 진짜 이름은 아넬리스 마리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를 안네 프랑크
라고 불렀다. 어떤 때 그녀의 엄마는 몹시 화가 나거나 기분이 침울해지면 그녀
의 진짜 이름을 불렀다.
다른 10대 소녀들과 마찬가지로 안네 프랑크는 삶을 사랑했다. 한순간 콧노래
를 부르며 낄낄대다가도, 누군가가 그녀를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거나, 무서운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면 눈물을 참으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사랑
에 빠지는 것이 어떤 기분일까 궁금해 했다. 그리고 첫 키스를 했을 때는 어떤
기분일까 궁금해 했다. 그리고 첫 키스를 했을 때는 일기장의 한 면이 다 차도
록 그 얘기만 했다. 그녀는 특히 조숙하거나 머리가 뛰어난 소녀도 아니었다. 학
교에서 성적은 잘해야 중간 정도였다. 그녀는 특별히 아름답지도 않았다. 하지만
활기에 넘쳤고, 자유 분방했으며, 마음이 아플 때도 미소를 지을 줄 알았다. 이
런 성격도 그녀의 목숨을 구해 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녀를 우리의 가슴에 새
겨 영원히 잊혀지지 않도록 해주었다.
안네 프랑크.
정말 신기하다. 세상에서 제일 잘 팔리는 책 중 하나가 작가도 아니고 철학자
도 아니고 세계 지도자도 아닌 어린 소녀에 의해서 쓰여졌다니. 그것도 다락방
에서.
그 다락방에서 안네는 두 번의 생일을 맞았다. 1942년 어느 여름날, 그녀의 가
족이 허둥지둥 몇 개의 가방을 꾸려서 쏟아지는 빗속을 걸어 암스테르담 시를
가로질러 갔을 때, 그래서 그녀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잡화상 위 창고에 숨었을
때 그녀는 겨우 열세 살이었다. 1944년 8월 1일, 그녀가 열다섯 번째 생일을 맞
은 지 2개월이 지났을 때 나치 경찰들이 문을 부수고 들이닥쳤다. 서랍들을 다
열어제치고 침대 속까지 뜯어보며 그들은 보석을 찾아 주머니에 집어넣고 숨겨
둔 돈을 찾았다. 그리고 안네와 그녀의 가족들의 등을 밀어 층계를 내려가서 대
기하고 있던 트럭에 태워 사라졌다. 빨간 줄무늬가 있는 일기책 한권 바닥에 떨
어졌지만 아무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안네는 열여섯 살 때 베르겐 벨젠 수용소에서 발진티푸스에 걸렸다. 엄마는
과로로 죽었고, 언니는 영양 실조로 죽었다. 그녀의 아빠만이 살아남았다가 소련
군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도착했을 때 해방되었다. 안네는 이런 사실에 대해선
알지 못했다. 그녀는 열일곱 살 생일을 맞은 지 석 달 만에 죽었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후, 2000명의 젊은이들이 그녀와 다른 희생자가
쓰레기같이 던져져 묻힌 무덤에 꽃다발을 바치기 위해, 베르겐 벨젠 수용소까지
비를 맞으며 행진했다는 사실도 그녀는 알지 못했다.
‘열세 살 소녀가 솔직히 마음을 털어 놓을 때 그 말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녀의 일기책 첫 장에 적힌 말이다. 물론 틀린 말이다. 그녀의 일기책은 30개
언어로 번역이 되었으며, 그녀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암스테르담 시 프
리젠그라흐트 운하 옆에 있는 그 다락방은 이제 박물관이 되었다.
프랑크 씨 가족이 잡혀간 지 일주일이 되었을 때 그들의 친구 중 한 명이 일
기책을 발견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 안네의 아버지에게 건네 주었다. 1947
년, 두 개의 독일 출판사에게서 거절을 당한 후 그 일기책은 “안네의 일기”라
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그 후, 빛이라곤, 꺼질 줄 모르는 10대 소녀의 영혼에
서 나오는 빛밖에 없던 그 다락방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게 되었다. 항상
꿈에 젖어 있는 사춘기 소녀의 눈을 통해서, 우리는 점점 어두워지는 세상을 지
켜볼 수 있고, 삶의 구석구석에 암처럼 퍼지는 공포를 느낄 수 있다.
라디오에서 전해 오는 이야기가 아무리 절망적이어도 안네는 요정과 곰과 늙
은 난쟁이에 대한 행복한 얘기를 썼다. 밖에선 온 세상이 미쳐가는데도 안네는
그녀만의 조그만 비밀공간에 앉아, 탁구를 치는 것과, 기분 좋게 얼굴에 비치는
햇빛에 대해 썼다. 가슴에 자리잡은 외로움을 감당할 수 없을 때도 그녀는 결국
모든 사람들은 다 좋으며, 언젠가 선이 승리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랬나? 앞으로도 계속 선이 이길까?
안네가 일기를 쓰기 백 년쯤 전에, 영국의 한 늙은 학자는 입에 시가를 물고
부드러운 가죽 소파에 앉아서 이런 불멸의 말을 남겼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
그런데 안네는 이것을 증명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보다 더 심오한 말을 했다.
‘결국 가장 날카로운 무기는 친절하고 상냥한 우리의 마음씨이다.’<이나휴즈>
7. 도전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도와 줄 수 있는 작은 일은 얼마든지 있다. <샐리 코크>
성공이란 무엇인가?
성공이란 무엇이냐 하면,
많이 웃고 자주 웃는 것이다.
현명한 사람의 존경을 받는 것이고
아이들의 사랑을 받는 것이다.
솔직한 비평가의 칭찬을 듣는 것이고
거짓 친구의 배반을 참아내는 것이다.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의 장점을 찾아내는 것이다.
건강한 아이를 낳든, 조그만 정원을 가꾸든,
사회 조건을 향상시키든지 하여
이 세상을 좀더 낫게 만들고 하직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았기 때문에 다른 한 사람이 좀더 쉽게
숨을 쉴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공이다. <랠프 월도 에머슨>
도전 2000년!
북 캐롤라이나 주 애쉬빌 시에 있는 얼윈 중학교 3학년에 다닐 때 나는 학생
회장직을 맡았다. 얼윈 중학교의 총 학생수는 천 명이나 되었으므로, 그 학생들
을 대표하는 학생 회장으로 선출된 것을 나는 큰 명예로 생각했다. 얼윈 중학교
의 학생들은 졸업을 한 후 모두 얼윈 고등학교로 진학을 했고, 학교에서는 졸업
식 순서의 하나로 3학년 학생 모두가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었다는 것을 확인
하는 순서를 가졌다. 그리고 나는 졸업생을 대표해서 연설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나는 이번 연설은 한 학생이 간단하게 보고를 하는 정도로 넘어갈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우연히 2000년에 고등학교 졸업을 하게 되었으므로
(대부분의 미국 고등학교는 4년제이고 이글은 1996년에 쓰여졌다.) 그만큼이나
특별한 연설을 하고 싶었다.
나는 며칠 저녁을 침대에 누워서 어떤 내용의 연설을 할까 생각해 보았다. 여
러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지만 학생 전체를 대표할 수 있을 만한 내용은 생각
나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날 저녁, 갑자기 생각이 떠올랐다. 얼윈 고등학교는 우
리 시에 있는 어떤 고등학교보다 자퇴율이 높았다. 그렇다면 우리 학년 전체가
한 명의 자퇴도 없이 함께 졸업하자는 목표를 세우면 좋을 것 같았다. 우리 학
년의 모든 학생이 함께 고등학교 1학년으로 진학해서 한 명도 빠짐없이 함께 졸
업을 한다면 우리 나라 공립 학교의 역사에 남게 될 것이었다. 굉장한 일이었다!
졸업식 날 내가 한 연설은 겨우 12분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짧은 연설
이 일으킨 파동은 믿을 수 없을만큼 컸다. 나는 졸업생들에게 다 함께 고등학교
에 진학해서 다함께 졸업함으로써 역사에 남자는 도전을 했고, 그 말을 들은 관
중들은 부모님, 조부모님, 선생님 할 것 없이 모두 폭발적인 박수를 보냈다. 나
는 학생들에게 다 함께 졸업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며 각 학생의 이름이 쓰여진
상장을 보여주었다.
마침내 내가 연설을 끝냈을 때 관중들은 모두 기립 박수를 보내 주었고, 나는
너무 흥분해서 자제력을 잃고 눈물을 흘리지 않도록 애를 써야 했다. 나의 도전
이 이토록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킬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여름 방학 내내 나는 우리의 도전을 현실로 옮길 수 있는 프로그램을 짰다.
공공 단체들을 찾아가 연설을 했고, 친구들과 만나 의논을 했다. 그리고 얼윈 고
등학교 교장 선생님을 찾아가서, 학생들이 개인적인 이유로 어려운 시기를 지나
며 자퇴할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될 때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학생들로 구성된
‘자퇴 방지 경비대’를 조직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 학년을 쉽게 구
별할 수 있도록 디자인된 티셔츠를 만들어 판 후, 그 수익금으로 우리 학년 주
소록을 만들겠다고 제안했다. 또한 우리 학년이 한 명의 자퇴생도 내지 않고 한
학기를 마칠 때마다 파티를 열고 싶다고 했다.
“그것보다 더 잘해 줄 수 있지.”
교장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만약 너희 학년이 자퇴생을 한 명도 내지 않는다면 중간 고사가 끝날 때마
다 파티를 열어주겠다.”
그건 정말 신나는 일이었다. 우리 학교에선 6주마다 한 번씩 중간고사를 보았
고, 6주 동안 학교에 오는 날 수는 겨우 30일이었다. 이제 모든 계획이 대강 잡
혀가는 것 같았다.
여름 방학 동안 우리의 도전에 대한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기 시작했
다. 그에 힘 입어 나는 텔레비전과 라디오에 출연하게 되었고, 한 신문사에서 내
가 쓴 특별 기고를 실은 후부턴 미국 각지에서 전화가 쇄도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나는 뉴욕에 있는 CBS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신문에 실린 내 기사를 보았다
며, <48시간>(시사 문제를 주로 다루는 현장 취재식 프로그램)이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우리 학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싶다고 했다. 또 ‘검은 보복
자’로 알려져 있고, 전국으로 방영되는 라디오 토크쇼 진행자인 켄트 햄블린은
<켄트 햄블린, 미국과 얘기하다>라는 1996년 8월호 잡지에 우리의 얘기를 다루
었다. 그리고 자기 방송에 출현해서 우리의 도전에 대한 얘기를 해 달라고 초청
했다. 나는 이 모든 일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졸업식 날 연설 도
중, 만약 우리가 다 함께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다면 우리는 미국 전역에서
가장 유명한 학년이 될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이 글은 쓰고 있는 지금, 우리 학년의 긴 여행이 얼마 전에 시작되었다. 학교
가 시작된 지 12주가 지났다. 우리는 우리의 도전을 크게 적어서 교장실 앞의
게시판에 붙여놓았다. 그리고 그 건너편엔 커다란 모래 시계를 그려서 걸어놓았
다. 모래 시계 위칸엔 조그맣게 동그란 자석들이, 졸업을 하기 위해 우리가 3년
동안 학교에 나와야 하는 날짜 수만큼 붙어 있다. 우리가 임명한 자퇴 방지 경
비대가 모래 시계를 관할하고, 매일 모래 시계 위칸에 있는 자석 하나를 밑칸으
로 내린다. 이런 방법으로 우리는 전교생이 현재의 상황을 지켜볼 수 있도록 했
다. 처음 시작할 땐 모래 시계 위칸에 720개의 자석이 있었는데 지금은 60개가
밑으로 내려갔고, 그 결과로 우리는 두 번의 파티를 즐겼다. 자석들이 매일 하나
씩 내려가는 것을 보는 것은 정말 즐거운 일이다.
4년이나 계속될 우리의 힘든 여행이 이제 막 시작되었다. 하지만 벌써 우리가
이룬 업적은 상당하다. 우리보다 1년 위인 학년은 두 번째 중간 고사가 끝날 때
까지 13명의 자퇴생을 냈다. 우리 학년은 아직 한 명의 자퇴생도 내지 않았고,
자퇴 방지 경비대는 우리 학교에서 제일 큰 규모의 학생 단체가 되었다.
우리 지역의 사업체들도 순전히 학생들로 운영된 프로그램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인정해서 우리를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은행들과 자동차 대
리점과 가구 상점과 식당과 많은 다른 업체들이 자퇴 방지 경비대의 일원이라는
카드를 보여주면 전 가족에게 할인해 주었다. 어떤 단체들은 자퇴 방지에 큰 활
약을 한 학생들에게 줄 상금과 상품을 보내왔다.
얼윈 고등학교 ‘도전 2000년’의 학생들은 여러분의 학교도 같은 도전을 하
도록 권하고 싶다. 전국적으로 2000년에 졸업할 모든 학생들이 한 명의 자퇴도
없이 다 함께 졸업할 수 있다면 그처럼 근사한 일이 없을 것이다! 누가 알겠는
가?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제이슨 써미, 15세>
마음의 불빛을 환히 밝히세요
다른 사람들에게 불빛을 비추어 주는 사람들은 항상 그보다 더 환한 빛에 둘
러싸여 있게 마련이다. <제임스 M. 배리>
30년도 더 전에, 나는 남 캘리포니아에 있는 매우 큰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그 학교는 총 학생 수가 3,200명이 넘었는데 그야말로 없는 인종이 없
었다. 그래서 자연적으로 학교 분위기는 매우 살벌했다. 칼, 파이프, 체인, 브래
스 넉클(네 손가락을 넣어 손에 낄 수 있도록 쇠붙이로 만든 것)뿐만 아니라 장
난감 총을 조제해서 만든 권총도 흔히 보였다. 갱단끼리의 싸움은 주중 행사처
럼 빈번했다.
1959년 가을 나는 축구 경기장에서 축구 시합을 보고 여자 친구와 함께 경기
장을 나섰다. 사람들로 붐비는 복잡한 길을 걷고 있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나를
발로 찼다. 뒤를 돌아보니 동네 갱단 멤버들이 브래스 넉클을 착용한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첫번째 주먹이 날아들어 당
장 내코뼈를 부러뜨렸다. 주먹이 사방에서 쏟아졌다. 열다섯 명이 나를 둘러싸고
마구 때렸다. 결국 나는 몇 개의 뼈가 부러지고, 뇌진탕을 일으키고, 내출혈을
하는 등 심한 부상을 입어 수술을 받아야 했다. 만약 머리에 한 대만 더 맞았다
면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라고 담당 의사가 말했다. 다행히도 갱들은 내 여자 친
구는 건드리지 않았다.
내가 회복을 한 후에 친구 몇 명이 찾아와서 말했다.
“가서 그 자식들 혼 좀 내주자!”
그게 우리들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었다. 놈들의 공격을 받으면 어떻게 보
복을 하느냐가 제일 중요한 문제였다. 나는 ‘그러자!’라고 부르짖고 싶었다.
신나게 복수를 해주면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하지만 잠시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본 후 싫다고 했다. 복수는 해결책이 아니었
다. 보복은 단지 갈등을 고조시키고 강화시킬 뿐이라는 사실은 역사를 통해서
몇 번이고 증명이 되었다. 우리는 이 비생산적인 악순환을 중단할 수 있는 색다
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각 인종 단체를 찾아다니며 의논을 한 결과 ‘형제 위원
회’라는 동아리를 만들어서 타민족 간의 관계 개선에 나섰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학교 분위기를 더 밝게 만드는데 관심이 있는지를 깨닫고 놀랐
다. 반대를 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극소수의 학생들과 교수들과 학
부모들은 다민족 간의 교류를 강렬히 반대했다.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많은 사
람들이 우리 동아리에 가입해서 긍정적인 앞날을 만드는 데 협조하겠다고 말했
다.
1년 후 나는 학생 회장에 출마했다. 나 외에 두 명의 강력한 후보자가 있었는
데, 한 명은 학생들 사이에서 영웅 취급을 받는 미식 축구 선수였고, 다른 한 명
은 캠퍼스에서 인기 만점의 학생이었다. 하지만 나는 3,200명 중 대다수 학생들
의 지원을 받아 학생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종전과는 다른 방법으로 해결책을
찾도록 노력해 볼 기회를 얻었다.
인종 문제를 완전히 해결했다고는 하지 않겠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이 서로 만날 수 있도록 다리를 연결해 주었고, 다른 인종의 단체들이 대
화를 통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 주었고, 문제가 생겼을 때에는 폭력에
의지하지 않고 해결할 수 있는 법을 배우도록 도와 주었고, 가장 어려운 시기에
도 서로를 신용하는 법을 배우도록 힘썼다. 사람들이 서로 대화를 하려는 의지
를 보일 때 얼마나 훌륭한 결과를 얻을 수 있는지...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오랜 세월 전 갱단의 공격을 받았을 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경험을 통해서 난 증오로 보복을 하는 대신 사랑으로 감싸안으라는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마음의 불빛이 약한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불빛을 환히
밝힐 때 우리는 진정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게 된다. <에릭 알렌보우>
굴
옛날 옛적에 굴이 하나 있었는데
그 얘기를 해주겠다.
모래 한 알이 굴 껍질
안으로 들어갔다.
겨우 한 알이지만
굴은 몹시 쓰리고 아팠다.
비록 생긴 건 그래도
굴도 느낄 줄 아니까
내 운명은 왜 이다지도
모질어서 내가 이 고생을 하냐고
굴이 원망을 했을까?
정부를 비난하고
선거를 하자고 외치고
바다가 자기를 보호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을까?
아니다.
굴은 껍질 안에 얌전히 누워서
생각했다.
흠, 이 모래를 빼낼 수 없으니
더 낫게 만들어야겠다.
항상 그러듯이
세월이 흐르고,
굴에겐 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말았으니,
그 굴은 요리용 굴이 되어 스튜에 쓰였다.
그리고 굴을 그토록 괴롭히던
작은 모래 알은
풍요롭게 빛나는
아름다운 진주가 되어 있었다.
이제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굴이 아무것도 아닌 모래 한 알로
근사한 진주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우리 마음속에 들어온
하찮은 것으로
무엇을 만들기 시작한다면
못할 일이 있을까?
작자 미상
가장 성숙한 행동
몬로 고등학교의 학생이라면 누구든 그 규칙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감히 그 규칙을 어기지 못했다. 아무도.
몬로 고등학교의 점심 시간은 항상 똑같았다. 점심 시간 전 마지막 수업이 끝
났다는 종이 울리기 시작하자마자 학생들은 학생사물함 앞으로 떼지어 몰려들었
다. 그리고 학교 식당에서 점심을 사먹지 않는 학생들은 도시락을 들고 캠퍼스
안뜰로 향했다. 안뜰은 캠퍼스 중앙에 있었는데 꽤 넓었으며 나무라곤 한 그루
도 없었고 바닥은 콘크리트로 발라져 있었다.
안뜰 가장자리에 교내의 여러 그룹들이 끼리끼리 모였다. 마약을 하는 아이들
은 안뜰 남쪽에 모였고, 그 옆으로 펑크족이 모였다. 동쪽은 흑인 학생들이었고,
그 옆으로 공부 벌레들이 모였다. 운동 선수들은 북쪽에, 파도타기광들은 운동
선수들 옆에 모였다. 유색인종을 깔보는 학생들은 서쪽에 모였고, 파티를 좋아하
는 학생들은 교내 식당에 모였다. 모두들 자기 자리를 알고 있었다.
이런 자리 다툼 때문에 점심 시간이 되면 긴장이 감돌았다. 물론 안뜰 가장자
리를 둘러싸고 생기는 긴장감도 말할 수 없이 팽팽했지만, 안뜰 한가운데에 비
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안뜰 한가운데는 출입 금지 구역이었다.
몬로 고등학교 학생은 아무도 안뜰을 가로질러 가지 않았다. 반대편으로 가야
할 일이 있으면 가장자리를 빙 돌아서 갔다. 그래서 다른 그룹 학생들 사이를
뚫고 온갖 눈총을 받으며 가야 했다. 모두들 이런 불문의 규칙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도 안뜰을 가로질러 가지 않았다.
봄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한 학생이 전학을 왔다. 그녀의 이
름은 리사였다. 리사는 이 동네의 특성을 잘 몰랐다. 다른 주에서 이사를 왔기
때문이었다. 리사는 명랑한 학생이었지만 친구를 금방 사귀지는 못했다. 살이 찐
데다가 부끄러워했고, 입고 다니는 옷이 세련되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리사가 몬로 고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첫날이었다. 수업이 바뀔 때마다 그녀
는 교실을 찾느라고 쩔쩔매었다. 그러다 몇 번이나 수업 시간에 늦었다. 수업이
시작된 다음에 교실문을 열고 들어가며 그녀는 부끄러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선생님들은 대부분 화를 내시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떤 분은 벌써 정원 초과인
데 새 학생이 또 왔다며 짜증을 내셨다.
이런 곤경을 겪으며 리사는 아침 수업을 모두 마쳤고 이제 점심 시간이 되었
다. 점심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리사는 한숨을 쉬며 학생들이 꽉 들어찬
복도로 들어섰다. 학생들 사이를 간신히 뚫고 그녀의 사물함에 도착했다. 그런데
자물쇠가 열리지 않았다. 세 번, 네 번, 다섯 번이나 노력을 한 끝에 갑자기 문
이 열렸다. 사물함 앞에 서서 고민을 하다가 리사는 오후 수업에 필요한 책들을
다 가지고 가기로 했다. 그리고 다음 수업이 있는 건물 앞 층계에서 점심을 먹
기로 했다. 그러면 점심을 먹은 후 책을 가지러 사물함에 올 필요가 없으므로
수업에 늦지 않게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리사는 캠퍼스를 가로질러 다음 수업이 있는 건물까지 걷기 시작했다. 복도를
지나서, 계단을 내려가고, 잔디밭을 가로질러, 보도를 따라, 안뜰을 가로질러...
리사는 한 손엔 집에서 싸온 도시락을 들고 다른 손엔 몇 권의 무거운 교과서
를 들었다. 그러다 팔이 아프면 도시락과 책들을 바꿔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책들을 너무 많이 갖고 온 것 같았다. 맨 위에 있는 책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그
래서 리사는 학생들 앞을 지나가며 책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맨 위에 얹은
책이 미끄러질까봐 계속 주시하며 팔이 아플 때마다 이 손에서 저 손으로 바꿔
들고 겨우겨우 앞으로 나가느라고 리사는 주위를 둘러볼 틈이 없었다.
그러다 뭔가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너무 조용했다. 그녀는 알 수 없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몇 백 개의 눈이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잔인하고 분노에 가득 찬 눈이었다.
동정심이라곤 털끝만큼도 없는 눈이었다. 증오에 가득 찬 차가운 눈이었다. 리사
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녀는 얼어붙은 듯 멈춰 서서 정신 나간 눈으로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꼼짝
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안 돼! 이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되는 거야!
그 다음에 일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는 학생들도 정확히 기억을 할 수가 없었
다. 어떤 학생은 뭔가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리사는 어쩌다 넘어져서 안뜰 한가운데에서 다리를 쫘악 벌린 채 눕고 말았
다.
학생들이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마치 악몽 같은 전류가 안뜰 가장자리를
빙빙 돌며 점점 좁혀져 리사를 꽁꽁 묶어놓은 것 같았다.
리사는 누은 채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학생들이 그녀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노래를 부르는 듯한 거친 목소리로 외치
기 시작했다.
“너! 너! 너! 너!”
무자비한 광란이 시작되었다.
리사는 아직도 안뜰 한가운데에 누워서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때 가장자리 어디선가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사람이 있었다. 키가 큰 소
년이었다. 그는 마치 한 걸음 한 걸음의 보폭을 재기라도 하듯 단호한 발걸음으
로 걸었다. 그리고 학생들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향하여 똑바로 걸어갔다.
학생들은 안뜰 한가운데에 또 한 학생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점점 목소리를
줄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소년은 당당한 발걸음으로 침묵 속을 걸었다. 그리고 콘크리트 바닥에 누
워 있는 리사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소년이 리사에게 다가왔을 때 안뜰은 너무도 조용해서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소년은 망설임 없이 무릎을 구부리고 흩어진 점심과 책들을 주웠다. 그리고 리
사를 바라보며 팔을 잡아주었다. 리사는 그의 도움을 받고 일어섰다.
소년은 리사가 중심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와 주고, 함께 안뜰을 가로질러 걸어
서 학생들이 조용히 바라보고 있는 가장자리를 빠져나갔다.
그 다음 날 몬로 고등학교 점심 시간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점심 시간 전
마지막 수업이 끝났다는 종이 울리자마자 학생들은 사물함 앞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학교 식당에서 점심을 먹지 않는 학생들은 도시락을 들고 안뜰을 가로질
러 갔다.
캠퍼스 여기저기에서 모여든 학생들은 자기 그룹끼리 모이는 대신 안뜰을 마
음대로 걸어다녔다. 만약 여러분이 지금 몬로 고등학교를 방문한다면 안뜰을 가
로질러 자유롭게 걸어다니는 학생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후 많은 시간이 자났다. 난 그 남학생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직도 모른다.
하지만 그날 그의 행동을 본 사람들은 아무도 그를 잊지 못할 것이다.
아무도.
<수잔 도에님> 리온 벙커 제공
부러진 날개
당신이 태어날 때 날개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왜 인생을 벌벌 기며
살고 싶어합니까? <루미>
어떤 사람들은 실패자란 낙인이 얼굴에 찍힌 채 태어났다. 대부분의 어른들
은 불량 청소년을 볼 때 그런 선입견을 갖는다. 날개가 부러진 새는 높이 날
수 없다.’라는 격언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티제이 웨어는 학교에서 날이면 날마다 그런 취급을 받았다. 고등학교를 시작
할 때 그는 동네에서 가장 악명 높은 불량 학생이었다. 학기가 시작될 때마다
선생님들은 자기 반 학생 명단에 티제이의 이름이 들어가 있으면 몸을 떨었다.
그는 말이 별로 없었고, 질문을 받아도 대답을 안 했고, 걸핏하면 싸움을 했다.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학년마다 거의 전 과목을 낙제했다. 그래도 선생님
들은 다신 티제이를 자기 반에 넣고 싶지 않아서 매번 다음 학년으로 진급을 시
켰다. 따라서 티제이는 매년 상급생이 되었지만 배운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주말동안 열리는 지도자 수련회에서 티제이를 처음 만났다. 티제이가 다
니는 학교 학생 전체가 수련회에 참가하도록 되어 있었다. 수련회의 목적은 학
생들로 하여금 지역 사회 활동에 적극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405명의 학생
들이 등록을 했는데 그 중에 티제이가 끼어 있었다. 수련회 장소에 막 도착을
하니까 그 지역 사회의 지도자 되시는 분들께서 학생 명단을 보여주며 충고를
해주셨다.
“학생 회장에서부터 티제이 웨어까지 각종 학생들이 다 모였습니다. 티제이
웨어는 이 동네 역사상 가장 많이 경찰서를 들락거린 학생으로 알려져 있습니
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사람들이 티제이를 소개할 때는 항상 이런 식으로 우선
그의 나쁜 면을 들춰낸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련회가 시작되었는데도 티제이는 다른 학생들과 떨어져서 벽에 등을 기댄
채 어디 귀여운 짓들 좀 해봐라 하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는 토론회에도 참
여하지 않았다. 별로 할 말이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서로 협동을 해야 하는 게
임을 할 때부터 서서히 끼어들기 시작했다.
그 해 학교 내에서 일어난 일 중 긍정적인 일들과 부정적인 일들의 목록을 작
성할 때엔 티제이는 완전히 방어 자세를 풀고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티제이는
그 방면에 대해선 할 말이 많았다. 티제이 그룹에 있던 학생들은 그의 의견을
환영했다. 갑자기 티제이는 자신도 한 그룹의 일원이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고,
학생들은 그를 그룹 리더로 뽑았다. 티제이는 좋은 의견을 많이 내놓았고, 학생
들은 열심히 들었다. 사실 그는 꽤 똑똑한 학생이었으며 항상 새로운 아이디어
가 풍부했다.
그 다음 날 티제이는 수련회의 모든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수련회가
끝나갈 때쯤 그는 집 없는 사람들을 돕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싶어했다. 그는
가난과 굶주림. 집 없는 서러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다
른 학생들은 그의 열성적인 관심과 아이디어에 감탄을 했다. 그래서 그를 프로
젝트의 의장으로 뽑았고, 전교 학생 회장이 그의 지시를 받게 되었다.
월요일 아침 티제이가 학교에 도착했을 때 학교에서는 난리가 나 있었다. 몇
명의 선생님들이 교장 선생님에게 달려가 어떻게 티제이를 의장으로 뽑을 수가
있냐고 항의를 하고 있었다. 이 프로젝트는 우리 학교가 처음으로 학교 밖으로
나가 하는 행사로서, 지역 사회에 공헌을 하기 위해 음식을 모아야 하고, 행사
기간을 3년으로 잡은 중대한 일일 뿐더러 시작이 중요한 것인데, 어떻게 티제이
같은 열등생의 손에 맡길 수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티제이의 범죄 기
록은 교장 선생님 팔 길이보다 더 깁니다. 분명히 모은 음식 중 절반을 훔쳐갈
것입니다.’라고 덧붙였다. 코크웰 교장 선생님은 이 프로젝트의 목적은 숨어 있
는 학생의 재능을 발굴해서 그 학생이 진정한 변화를 보일 때까지 계속 협조를
해주는 것이라고 선생님들을 설득했다. 그래도 선생님들은, 믿을 수가 없으며 이
제 실패는 맡아놓은 것이라는 듯 고개를 흔들며 교장실을 나갔다.
2주일 후 티제이와 프로젝트 임원들은 70명의 학생을 이끌고 나가 통조림을
모으기 시작해서, 그 학교가 생긴 이래 최고의 기록인 2,854개의 통조림을 모았
다. 그 지역엔 집 없는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한 센터가 두 개 있는데, 학생들은
모은 음식으로 두 센터의 선반을 가득 채워 주었다. 그리고 그 지역에 사는 가
난한 사람들에게 75일 동안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나눠 주었다. 다음 날 동네 신
문들은 이 일을 티제이의 사진과 함께 전면 기사로 실었다. 그리고 티제이가 다
니는 학교에서는 이 기사를 오려 학생들 모두가 볼 수 있도록 게시판에 붙였다.
티제이는 이제 큰일을 해낸 능력 있는 학생으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누구보다
유능한 지도자가 될 수 있는 학생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그는 날마다 게시판에
붙은 자신의 사진을 보며 이 사실을 기억했다.
그 후 티제이는 학교에 결석을 하는 날이 없었고, 선생님들이 질문을 하면 반
드시 대답했다. 그는 두 번째 프로젝트에서도 의장으로 선출되어. 300장의 담요
와 1,000켤레의 신발을 모아 센터에 기증했다. 그리고 그가 가난한 사람들이 1년
동안 필요로 하는 음식의 70퍼센트를 해결해 주기로 했다.
티제이를 통해서 우리는, 날개가 부러진 새는 치료를 받아야할 뿐이라는 사실
을 배워야 한다. 일단 날개를 회복하면 다른 어떤 새보다 높이 날 수 있게 된다.
학교를 졸업한 후 티제이는 직업을 구했다. 그리고 누구보다 생산적인 삶을 살
며, 누구보다 잘 날고 있다. <짐 헐리한>
세대 교체
그 부인은 벤치에 앉아 새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빵 조각을 새에게 던져 주고 있었다.
나는 땋아 내린 머리에 구슬(히피를 상징하는 차림새)을 찰랑이며 부인 옆에
앉았다.
그리고 가난과 베트남 전쟁 등
부인의 세대가 우리에게 물려준 고통에 대한 얘기였다.
조용히 부인이 대답했다.
“일생 동안 변화를 위해 싸웠다네.”
오늘 젊은이에게 내 꿈을 주겠네.
작은 일을 통해서 큰 변화를 일으켜보게.
미래는 젊은이의 손에 달려 있다네.
만약 일이 잘 안 되어서 용기를 잃으면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게.
비난할 사람을 찾지는 말게나.
무엇에든 영감을 받아 다시 한번 일어서게.
젊은이가 만든 변화는 곧 인정을 받지 못할지도 모르네.
하지만 젊은이 때문에 한 작은 아이가 꿈을 갖게 될 수도 있지.
자, 일을 시작하게. 그리고 조그만 일을
해결해서 인류를 돕도록 하게.
일생 동안 변화를 위해 싸웠다네.
오늘 젊은이에게 내 꿈을 주겠네.“
오늘 나는 산책을 하다가,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듣고 있는 10대 소년을 만났다.
소년은 음악을 줄였고
우리는 몇 분 동안 얘기를 나누었다.
소년은 집 없는 사람들과, 거리를 가득 메운 범죄에 대한 얘기를 했다.
그리고 나에게 아저씨의 세대는 무엇을 했냐고,
배고픈 사람들에게 밥을 주고
집 없는 사람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할 수 없었느냐고 물었다.
조용히 나는 대답했다.
일생 동안 변화를 위해 싸웠다.
오늘 너에게 내 꿈을 주겠다.
네가 우리의 세계를 더 나은 것으로 만들기를 바란다.
열심히 일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다음 세대는 그들 나름의 변화와 꿈을 갖고 올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라.
다행히 운이 좋으면 넌 조그만 싸움에서 승리를 거둘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때가 되면 넌 구세대가 될 것이고,
이런 질문들에 대답을 했다는 추억을
간직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미래는 네 손에 달려 있다.
일생 동안 변화를 위해 싸웠다.
오늘 너에게 내 꿈을 주겠다.“
페니 켈드웰
꼭 돌아올께요.
세상엔 수많은 고통이 있듯이 수많은 극복도 있다. <헬렌 켈러>
병실에 거의 가 왔을때 린다와 바압 새밀은 서로를 껴안았다. 린다는 병실 문
손잡이를 잡으려고 손을 뻗으며 혼자 중얼거렸다.
“침착해야 해. 그 아이를 더 흥분하게 해선 안 돼.”
1988년 12월 23일,밖에는 진눈깨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올해 열다섯 살이 된
크리스 새
밀은 다섯 명의 친구와 함께 그의 고향인 코네티것 주 토링톤시에서 근처 워터
베리로 운전해 가고 있었다. 그러다 시끄럽게 웃고 떠들던 아이들의 소리가 갑
자기 비명으로 바뀌며 그들이 탄 차는 얼음 위에서 미끄러져 길가에 세워진 난
간을 들이받았다. 크리스를 비롯한 세명의 아이들은 뒷창문을 뚫고 밖으로 튕겨
나갔고, 그 결과로 한 명은 즉사하고
다른 한 명은 심한 부상을 입었다.
크리스는 도로 중앙 분리대에 앉은 채 자신의 왼쪽 넓적다리에서 쏟아져 나오
는 피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앉은 곳으로부터 6미터 떨어진 곳
에, 도로 난간에 부
딪쳐 잘라져 나간 그의 다리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크리스는 응급 수술을 받기 위해 즉시 워터베리 종합병원으로 옮겨졌고, 그의
부모님은
거의 일곱시간이나 기다린 후에야 아들을 만날 수 있었다.
린다는 병실 침대에 누워 있는 아들의 모습을 보자 눈물이 쏟아졌다. 토링톤
시의 우편
배달부로 일하고 있는 바압은 아들의 손을 꼭 잡았다.
“아빠, 다리를 잃었어요”
크리스는 아버지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바압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들
의 손을 더욱 꼬옥 잡았다. 잠시 침묵이 흐른후, 크리스가 말을 이었다.
“이제 다신 농구를 할 수 없게 되는 건가요?”
바압 새밀은 감정이 격해졌다. 크리스는 어렸을 때부터 농구에 온 정열을 쏟
았고, 그의
동네에선 벌써 장래가 유망한 농구선수로 잘 알려져 있었다. 세인트 피터즈 중
학교 3학년에 재학중이던 해에는 시즌 평균41점을 획득해 모두를 놀라게 했고,
토링톤 고등학교 1학
년에 진학한 후엔 두 번의 학교 대표팀 경기에서 61점의 점수를 올렸다.
“언젠가 수천명의 관중이 모인 노트르담 경기장에서 경기를 할 거예요.”
크리스는 활짝 웃으며 부모님께 말하곤 했다.
“그럼 꼭 오셔서 제가 경기하는 모습을 보셔야 해요”
이제 불구자가 된 아들을 바라보며 바압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이다 무
겁게 입을
열었다.
“크리스야, 너를 보러 사람들이 많이 왔단다. 지금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어.
마틴 코치도 왔다.”
그러자 크리스는 갑자기 활짝 웃으며 결의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코치님께 다음 시즌에 뵙겠다고 전해 주세요. 전 농구를 계속할 거예요.
”
그 후 칠일 동안 크리스는 세 번의 수술을 받았다. 의사들은 거칠게 잘려나간
다리의 동맥과 신경줄과 근육을 보고는 다리를 연결할 수 없겠다고 처음부터 말
했다. 따라서 크리스는 인조다리를 사용해야 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문병객이 끊이지 않았다. 크리스는 문병을 온 사람
들이 동정을 할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난 괜찮을 거예요.”
그는 불굴의 의지와 굳건한 믿음과 강한 영혼의 소유자였다. 대부분의 의사와
간호원들
은 그런 그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크리스, 지금 심정이 어떻지?”
어느날 한 정신과 의사가 물었다.
“네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드니?”
“아뇨.”
크리스가 대답했다.
“그래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괴롭거나 화가 나지도 않아?”
“아뇨. 될수록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해요,”
정신과 의사는 끈질지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한 후 병실을 나갔다. 그러자 크리
스가 부모님께 말했다.
“저 의사 선생님이야말로 정신과 도움이 필요한 것 같아요.”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에도 크리스는 힘과 평형 감각을 회복하는라고 열심
히 노력했다. 건강이 조금 회복되자 친구가 벽에다 매달아 준 장난감 농구 골대
에 공을 던겨 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목발을 사용할 준비 단계로, 윗몸의 힘를
기르기 위한 물리 치료와 평형 감각을 향상시키기 위해 물리 치료를 받았다.
병원에 입원한 지 2주일이 지났을 때 새밀 가족은 크리스를 휠체워에 태워서
토링톤 고등학교에서 열리는 농구 시합에 데리고 갔다.
“크리스에게서 눈을 떼면 안 돼요.”
크리스가 농구 시합을 보다가 격한 반응을 일으킬까봐 간호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시끄러운 체육관으로 들어서며 크리스는 이상할 정도로 말이 없었다. 그가 관
중석 앞을 지날 때 친구들과 동료 선수들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흔들어 주
었다. 그때 토링톤 고등학교의 교감인 프랭크 맥가우엔 선생님께서 마이크를 통
해 관중들에게 알렸다.
“오늘 우리의 가장 특별한 친구가 찾아왔어요! 여러분! 우리 모두 크리스 새밀
을 환영해 줍시다.”
크리스는 깜짝 놀라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체육관에 모인 900명의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서 그를 응원하며 박수를 쳐주었다. 크리스는 눈물을 흘렸다. 평생
잊을 수 없은 날이었다.
1989년 1월 18일, 사고가 난지 한 달도 되지 않아서 크리스는 퇴원을 하고 집
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뒤떨어진 학교 공부를 보충하기 위해 매일 오후 가정교
사의 지도를 받았다.
공부를 하지 않는 아침 시간에 워터베리 종합 병원에 가서 물리 치료를 받아
야 했다. 살을 찢는 것 같은 육체적 고통이 매일 되풀이 되었다. 어떤 때는 부모
님과 함께 텔레비젼을 보며 고통를 참아내기 위해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날씨가 몹시 추운 어느날 오후, 크리스는 목발을 집고 일어나서 집 밖으로 나
가 주차장 문앞에 섰다. 그가 처음으로 농구를 배운 곳이었다. 주차장 문 위에는
아직도 농구 골대가 달려 있었다. 목발을 내려놓고,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것
을 확인하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공을 집어들고 오른쪽 다리로 깡충
깡충 뛰며 골대로 던지기 시작했다.
몇 번이나 균형 감각을 잃고 아스팔트 위로 나가 떨어졌다. 그리고 다시 던
지기 시작했다. 겨우 15분 동안 던졌느데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 ‘생각보다 시
간이 오래 걸리겠는데,‘ 크리스는 생각하며 천천히 집으로 돌아왔다.
3월 25일 부활절 주일에 크리스는 처음으로 인조 다리를 착용했다. 그리고 너
무도 기뻐서 에드 스키위 박사에게 당장 농구를 시작해도 되느냐고 물었다. 크
리스가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깜짝 놀란 스키위 박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너무 서두르지 말고 한버 진전을 보자.”
하지만 스키위 박사는 농구는 고사하고, 인조 다리를 착용하고 잘 걷게 되기
까지만 1년이 걸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크리스는 집 지하실에서 인조 다리를 착용하고 걷는 연습을 했다.
한 다리로 농구를 하는 것도 힘들지만 인조 다리를 착용하고 하는 것은 더욱
힘들었다. 대부분의 공은 골대도 맞지 않고 비껴 갔고, 그는 아스팔트 바닥으로
나가 자빠지기 일쑤였다.
너무 힘이 들면 크리스는 엄마가 해준 말을 기억했다. 무슨 방법을 써도 용기
가 생기지 않던 어느날 그는 엄마에게 자기가 정말 농구를 다시 할 수 있을 것
같으냐고 물었다. 엄마가 대답하셨다.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할거다. 하지만 난 네가 다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엄마 말이 맞는다고 크리스는 생각했다. 그리고 즉시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
했다. 하지만 농구를 할 수는 없었다. 수업이 끝난 후에 그의 친구들은 운동장에
서 농구를 하며 놀았다. 처음 몇 주 동안 그는 친구들이 코트안에서 재빠르게
뛰어다니는 것을 옆에서 구경했다. 그러던 5월의 어느날 오후, 그는 코트 안으로
들어갔다. 깜짝 놀란 친구들이 그를 지켜보며 길을 내주었다.
처음부터 크리스는 골대에서 멀찍이 떨어져 공을 던졌다. 그리고 공이 골망으
로 들어갈 때마다 짜릿한 흥분을 느꼈다. 하지만 드리볼을 하거나 공을 던지려
고 뛰거나 리바운드를 잡으려고 뛰어오를 때마다 그는 넘어졌다.
“자, 힘내, 크리스! 넌 할 수 있어!”
친구들이 소리쳤다. 하지만 그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무슨 수를 써도
예전처럼 할 수는 없었다.
여름 방학 시합 중 그는 리바운드를 잡으려고 너무 심하게 뛰다가 인조 다리
발목을 부러뜨렸다. 한 발로 뛰어 코트를 나오며 그는 생각했다.
‘할 수 없는지도 몰라. 내가 너무 억지를 쓰는 것인지도 몰라.’
크리스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한 가지밖에 없다는 결정을 내렸다. 더 열
심히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계획을 짜서 슛팅, 드리볼, 역도를 매일 연습
했다. 연습이 끝난 후엔 조심스럽게 인조 다리를 떼어내고 , 살갗을 보호하기 위
해서 잘려진 다리 위에 네 겹으로 신은 양말을 벗었다. 그리고 신음을 하며 여
기저기 생긴 물집 위로 비누질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가끔씩 예전처럼
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기 시작했다.
‘할 수 있어! 내년이 아니라 올해에!’
추수감사절 다음 월요일에 교내 농구부 코치인 바압 안젤로티 코치는, 기대에
한껏 부풀었으면서도 잔뜩 긴장을 하고 있는 학생들을 불렀다. 토링톤 고등학교
농구부에 들어가려고 시험을 보러 온 학생들이었다. 안젤로티 코치는 그 학생들
중에 크리스 새밀이 끼어 있는 것을 보았다.
이틀 동안 시험을 보며 크리스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뛰었다. 수비 선수들 사
이로 교묘히 빠져나가고, 상대 선수가 놓친 공을 잡으려고 몸을 던지는 등, 자기
가 잘할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다른 선수들
과 함께 매일 체육관을 열 바퀴씩 도는 것도 빠지지 않았다. 다른 선수들보다
훨씬 느리기는 했지만 절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달렸다.
시험이 끝난 다음 날 아침 크리스는 합격자 명단을 보려고 친구들과 함께 달
려갔다.
“최선을 다했어.”
다른 학생들 어깨 너머로 자신의 이름을 찾으려고 고개를 기웃거리며, 그는
중얼거렸다. 그런데 있었다! 새밀. 그는 다시 농구부의 선수가 되었다!
안젤로티 코치는 어느날 선수들을 모아놓고 회의를 열었다.
“우리는 매년 농구부의 주장을 뽑는다. 주장은 학년에 상관없이 다른 선수들
의 모범이 되는 선수여야 한다. 올해의 주장은... 크리스 새밀이다.”
선수들은 박수를 치고 소리를 지르며 기뻐해 주었다.
사고가 난 지 1년이 되려면 꼭 8일이 모자라는 12월 15일 저녁, 250명의 사람
들은 크리스 새밀이 다시 선수 생활을 시작하며 처음 출전하는 경기를 보려고
관중석으로 몰려들었다.
크리스는 선수실에서 자주색 농구복으로 갈아입으며, 긴장으로 두 손을 떨었
다.
“크리스, 잘할거야.”
안젤로티 코치가 말해 주었다.
“그래도 첫날이니까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라.”
크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압니다.”
그리고 조용히 덧붙였다.
“고맙습니다.”
곧 크리스는 시합 전 연습을 하러 동료 선수들과 함께 경기장으로 달려 들어
갔다. 관중들이 일제히 일어서서 환호를 보냈다. 다시 한번 토링톤 고등학교 농
구부 선수복을 입은 아들을 보고 새밀 부부는 눈물을 삼켰다. 린다는 조용히 기
도 드렸다.
‘하나님, 제발 저 애가 창피를 당하지 않도록 도와 주십시오.’
진정을 하려고 애썼지만 크리스는 코트에서도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시합
전 연습에서 그가 던진 공은 대부분 골대를 맞고 튀어나왔다.
“침착해, 크리스.”
코치가 속삭였다.
“서두를 것 없어.”
드디어 시합이 시작되었고 크리스는 가드를 맡았다. 처음 시작부터 그는 동작
이 유연하지가 못하고 어색했다. 다른 선수들을 겨우 따라가기는 했지만 평소의
그답지 않게 공에 대한 감각을 잃고 있었다. 몇 번 공을 던질 기회가 있었지만
골대도 맞추지 못했다. 보통 이런 경우엔 관중들은 ‘에어 볼! 에어 볼!’이라고
소리치며 빈정대지만 그날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8분 동안 코트에서 뛴 후 크리스는 교체되었다. 그리고 전반전 2분을 남겨놓
고 다시 들어갔다. ‘잘해, 크리스.’그는 자신에게 속삭였다. ‘이 순간을 위해
서 그 동안 연습했잖아. 잘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지.’ 그리고 몇 초 안에 그
는 골대에서 6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공을 넘겨 받았다. 다른 어느 선수에게도
힘든 거리였다. 3점짜리였다. 망설임 없이 그는 높이 뛰어 올라 경쾌한 곡선을
그리며 공을 던졌다. 공은 간단히 골 안으로 들어갔다. 깨끗한 슛이었다.
관중들은 체육관이 떠나라 박수를 치고 소리를 지르며 환호를 보냈다.
“그렇지, 크리스! 잘했다!”
아버지가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에 격한 감정이 북받혀 있었다.
1분 후 크리스는 다른 선수들을 제치고 리바운드를 잡아 다시 골대에 맞추며
골 안에 넣었다. 다시 한번 관중들의 환호가 터졌다. 크리스는 절뚝거리며 두 주
먹을 허공에 치켜들었다. 이런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린다의 얼굴에 눈물이
쉴새없이 흘렀다.
“해냈구나, 크리스!”
린다는 감격에 겨워 중얼거렸다.
“넌 드디어 해냈어!”
크리스는 끝까지 최선을 다하며 관중들을 열광시켰다. 꼭 한번 중심을 잃고
코트 바닥에 넘어졌을 뿐이었다. 게임 종료를 알리는 벨이 울렸다. 토링톤이 이
겼고, 이번 경기에서 크리스는 11점을 올렸다.
그날 밤 집에서 크리스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나 괜찮게 했지요, 아빠? 그렇죠?”
“훌륭했다.”
바압은 말하며 아들을 끌어안았다.
게임에 대한 얘기를 좀 하고 크리스는 아직도 흥분에 겨워하며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오늘 밤은 겨우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린다는 잠을 자려고 불을 끄며 사고 직후 물리 치료를 받고 돌아오는 차 안에
서 크리스가 했던 말을 생각했다. 조용히 창문 밖을 내다보고 있던 크리스가 갑
자기 말했다.
“엄마,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제 알겠어요.”
깜짝 놀란 린다가 물었다.
“왜지?”
창문 밖에서 눈길을 떼지 않고 그는 간단히 대답했다.
“하나님은 내가 잘할 거라고 생각하신 거예요. 내가 잘할 거라고 생각하시고
내 목숨을 구해 주신 거예요.”
잭 카바나그
새밀은 토링톤 고등학교 2학년과 3학년 때에도 농구부 선수로 뛰었다. 그리고
토링톤 고등학교 테니스부에서 단식과 복식 선수로도 활약했다. 그는 매사추세
츠 주 스프링필드 시에 있는 웨스턴 뉴욕 잉글랜드 대학에서 테니스 선수로 뛰
었고, 웨스턴 뉴욕 잉글랜드에서 시 대표 농구 선수로 활약했다. 그리고 토링톤
지역에서 하계 리그 선수 대표로 뛰기도 했다. 새밀은 학교를 졸업한 후 농구
코치가 되는 것이 희망이다.
진정한 높이
꿈을 꾸며 상상의 계획을 세워보지 않은 사람은 원하는 바를 달성할 수 없다.
우선 꿈 속에서 시작해야 한다.
손바닥에서 땀이 났다. 수건을 집어들고 땀을 닦았다. 물잔을 마시고 갈증을
식혔지만 그의 열정은 식힐 수가 없었다. 전국 청소년 올림픽 대회였다. 깔고있
는 아스트로터프 바닥이 오늘 치뤄야 할 시합의 열기만큼이나 뜨거웠다. 바는 5
미터 18센티미터나 더 높은 높이였다. 마이클스톤은 여지껏 장대 높이 뛰기를
해온 어느해보다 큰 도전을 앞에 두고 있었다.
마지막 달리기 경주가 한시간 전에 끝났지만 2만여 관중들은 경기장을 떠나지
않은 채 관람석을 꽉매우고 있었다. 육상경기대회에서 장대높이 뛰기는 가장 화
려한 경기였다. 기계체조 선수의 우아함과 보디빌딩의 강한힘을 합쳐 놓은 경기
였다. 또한 잠시나마 하늘을 난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었다. 이층집만큼의 높이
를 날아 오르는 것은 보는 환상적인 아름다움이었다. 그러나 오늘 그리고 지금,
마이클 스톤에게 그것은 현실이고 꿈이뿐아니라 일생 일대의 도전이었다.
마이클은 아주 어렸을때부터 하늘을 나는 꿈을 꾸었다. 어렸을 때부터 엄마가
비행에 대한 책을 많이 읽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엄마가 읽어주는 책들은 대부
분 하늘을 날며 내려다보이는 경치를 자세히 설명했다. 엄마는 책을 읽으며 흥
분을 감추지 못하고 정열적으로 설명을 했기 때문에 마이클의 꿈은 항상여러가
지 색갈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그중에서도 마이클은 다음과 같은 꿈을 되
풀이 꾸었다.
그는 시골길을 달리고 있다. 바바닥에 자갈과 흙덩이가 느껴진다. 황금빛으로
물든 보리밭 옆을 달리다 보면 앞서 가던 기차도 따라잡고 만다. 어느 한순간에
마이클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그의 몸은 가볍게 공중으로 떠오른다. 그리고
독수리처럼 하늘을 난다.
하늘을 날며 내려다 보는 경치는 전날 저녁 엄마가 읽어준 책에 따라서 달랐
다. 하지만 어느 곳을 가든 그는 엄마에게서 물려받은 예리한 눈과 자유로운 정
신으로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자세히 보아두었다.
반면 그의 아버지, 버트 스톤은 몽상가가 아니었다. 그는 고집센 현실주의자였
다. 그는 노력과 땀 외에는 아무것도 믿지 않았다. 그의 좌우명은, '갖고 싶으면
노력을 해서 얻어라!'였다.
열네 살때부터 마이클은 아버지의 말을 따랐다. 그는 조심스럽게 자세히 짜여
진 계획에 따라 역도 훈련을 시작했다. 하루는 역도연습을 하고 다음날은 달리
기 연습을 하길 매일 되풀이했다. 훈련계획은 그의 코치이자 트레이너인 아버지
가 세웠다. 마이클은 코치라면 누구나 침을 흘릴 만큼 굳센 목적의식과 결심과
인내력을 가지고 있었다. 학교에선 우등생이고 집에선 외동아들인 그는 틈이 날
때마다 아버지를 도와 농장일도 열심히 했다. 무슨 일에든 완벽을 추구하는 그
의 고집은 또한 집념이자 정열이었다. 마이클의 엄마인 밀드레드 스톤은 아들이
인생을 좀 쉽게 살기를, 그리고 그가 어렸을 때처럼 자유로운 영혼을 꿈꾸길 바
랐다. 그래서 아들과 남편에게 그런 얘기를 해보았다. 하지만 남편은 재빨리 말
을 가로 막고 웃으며 말했다.
갖고 싶은게 있으면 노력을 해서 얻어야해.
따라서 오늘 마이클이 이룩한 모든 것은 그의 피나는 노력의 결과이다. 그가
5미터 18센티미터의 바를 문제없이 넘고 나서 자신도 깜작 놀랐다거나, 기쁨에
넘쳤다거나, 의기 양양했다면 그런 눈치를 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어서서
환호성을 지르는 관중들도 아랑곳 없이, 그는 바를 넘고 푹신한 깔개 위에 떨어
지자마자 다음 비행 준비를 시작했다. 지금 막 그의 개인 기록을 깼다는 사실도,
이제 한명만 더 물리치면 전국 청소년 올림픽 대회의 장대 높이 뛰기에서 금메
달을 딴다는 사실도 그에겐 상관없는 것 같았다.
5미터 23센티미터의바를 넘었을 때도 그는 밖으로 감정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에게는 단지 끊임없는 준비와 집념이 있을 뿐이었다. 그는 그의 경쟁자가 경
기를 치르는 동안 누워서 관중들의 소리에 귀를 귀울였다. 그리고 관중들이 신
음 소리를 낼 때 그의 경쟁자가 마지막 도전에서 실패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번 시합에서 이때까지의 기록을 보면 그가 경쟁자보다 많은 실수를 했다. 그
러므로 그가 승리를 하려면 이번 도전에서 성공을 해야 했다. 만약 성공을 하지
못하면 그는 은메달을 따게 된다. 절대 부끄러운 일은 아니지만, 마이클은 자신
이 금메달을 따지 못한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그는 누운채 몸을 돌려서 손가락을 세워 팔 굽혀펴기를 세 번 했다. 그리고
군대식 팔 굽혀펴기도 세 번 했다. 그런 후 자신의 장대를 집어들고 일어서서
런웨이 앞에 섰다. 17년의 생애에서 가장 큰 도전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런웨이가 오늘은 좀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는 짧은 순간 동안 깜짝 놀
랐다. 그러다 갑자기 찬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순식간에 깨달았다. 바가 그의 개
인 기록보다 23센티미터나 더 높게 고정되어 있었다. 전국 기록보다 겨우 2센티
미터가 모자라는 높이야. 그는 생각했다. 그 순간 마음이 몹시 초조해졌다. 그는
긴장을 풀려고 몸을 흔들었다.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긴장은 더욱 심해졌다. 왜
이러는 거야. 지금 이러면 안돼. 그는 자신을 타일렀다. 마음이 더욱 초조해졌
다. 아니, 공포라고 표현해야 더 나을 것 같았다. 이제 어떻게 하지. 그는 한 번
도 이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그는 왠지 모르게 그의 영
혼 깊숙한 곳에서부터 엄마의 얼굴을 떠올렸다. 왜, 지금 이런 긴박한 순간에 왜
엄마 생각이 나는 거지. 대답은 간단했다. 엄마가 항상 그에게 말했었다. 마음이
초조하거나 긴장이 되거나 두려울 때는 숨을 깊이 들이쉬라고.
그래서 그는 엄마의 충고를 따랐다. 긴장을 풀려고 다리를 흔든 후 장대를 발
옆에 놓았다. 그리고 팔과 윗몸의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산들바람이
불었는데 지금은 느겨지지 않았다. 그의 등줄기를 따라 차가운 땀이 흘렀다. 그
소리가 관중들에게까지 들릴 것 같았다. 관중석은 숨소리 하나 없이 조용했다.
멀리서 종달새 울음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들으며 마이클은 이제 내가 하늘
을 날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런웨이를 뛰어가며 그는 뭔가가 신선하게 색다르면서도 매수 친숙한 느낌이
든다고 생각했다. 발바닥에 와닿는 런웨이가 어렸을 적 꿈에서 달렸던 시골길
같았다. 자갈과 흙덩이와 황금빛 보리밭이 런웨이를 달려가는 그의 마음을 채웠
다. 그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꿈에서처럼 날기 시작했다. 힘 하나 들
이지 않고 그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하지만 이번엔 꿈이 아니었다. 현실이었다.
모든 것이 슬로우 모션으로 움직였다. 얼굴을 스쳐가는 공기가 그 어느 때보다
상쾌하고 신선했다. 마이클은 당당한 독수리처럼 하늘을 날았다.
관중들의 환호 소리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깔개에 떨어지는 충격 때문이었는
지, 마이클은 현실로 돌아왔다. 깔개에 누워 부드러운 햇빛을 얼굴 가득 받으며
그는 활짝 웃는 엄마의 얼굴 외에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아버지도 미소
짓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 소리내어 웃고 계실지도 몰랐다. 아버지는 흥분을
하면 항상 그러셨다. 먼저 미소를 지으시고 나중에 조금 소리를 내어 웃으셨다.
하지만 그날 마이클의 아버지는 미소짓지도 않았고 웃지도 않았다. 그는 아내를
얼싸안고 엉엉 울었다. 그렇다. 갖고 싶으면 노력을 해라고 소리지르시던 아버지
는 아내의 품에 안겨 겉잡을 수 없이 울었다. 밀드레드는 남편이 그렇게 우는
것을 본 일이 없었다. 남편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들
이 너무도 자랑스러위서 흘리는 눈물이었다.
사람들이 몰려와서 마이클을 둘러싸고 그의 생애에서 이룬 가장 큰 성취에 대
해 축하를 해주었다. 그날 마이클은 5미터 35센티미터를 넘어 전국 청소년 올림
픽과 국제 청소년 올림픽의 기록을 동시에 세웠다.
방송국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광고 출연 제의를 받으며, 또 감동을 받은
관중들의 축하를 받으며 이제 마이클의 삶은 많이 달라질 것이다. 그가 전국 청
소년 올림픽 대회에서 금메달을 땄기 때문이 아니다. 세계 신기록을 세웠기 때
문도 아니고, 자신의 개인 기록을 25센티미터 갱신했기 때문도 아니다. 마이클은
장님이기 때문이다. <데이빗 내스터>
헬렌 켈러와 앤 셜리반
지식은 사랑이고 빛이고 선견이다. <헬렌 켈러>
헬렌 켈러는 두 살 때 병이 들어서 눈이 멀고 귀가 멀었다. 그 후 5년 동안을
그녀는 암흑과 공허의 세계에서 살았다. 그녀는 두려웠고, 외로웠고, 마음을 기
댈 곳이 없었다. 다음은 그런 헬렌 켈러가, 그녀에게 삶의 전환을 마련해 준 선
생님과 처음 만난 날에 대해 쓴 것이다.
내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날은, 나의 스승인 앤 맨스필드 셜리반 선생님이 나
를 찾아오신 날이다. 선생님을 만나기 전까지의 나의 삶과 선생님을 만나고 난
후의 나의 삶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달랐고, 그 현저한 차이를 지금 생각해
보면 신기하기까지 하다.
1887년 3월 3일이었다. 3개월만 있으면 난 일곱 살이 되었다. 그날 오후 나는
얼떨떨하면서도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현관 문 앞에 서 있었다. 엄마가 수화로
해준 내용과 사람들이 바쁘게 돌아다니는 것으로 보아 무언가 특별한 일이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나는 밖으로 나가 계단 위에 서서 기다렸다. 오후의 햇빛이
인동 덩굴 나무 사이를 뚫고 들어와 위로 쳐든 내 얼굴에 내려앉았다. 나는 남
부 지방의 향긋한 봄을 맞으러 피어난 꽃잎과 나무 잎사귀를 무의식적으로 만지
작거렸다. 지금부터 내 삶이 경이롭게 바뀌려고 한다는 사실을 나는 모르고 있
었다. 지난 몇주 동안 나는 분노와 슬픔에 끊임없이 시달렸고, 설명할 수 없는
무기력을 격렬한 싸움으로 표현했다.
안개가 자욱이 낀 날 바다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만져질 것처럼 짙은 하얀
안개 속에 갇혀서, 커다란 배가 추를 내리고 고동을 울리며 안개 속을 더듬어
육지를 향해 다가오는데,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은 불안에 가슴을 떨며 기다리는
기분이었다. 선생님을 만나 교육을 받기 전엔 난 그 배와 같았다. 그런데 나는
나침반도 없고 고동도 없고 육지가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도 몰랐다.
빛 빛을 주소서
나의 영혼은 이렇게 소리쳤고, 그날 나는 사랑의 빛을 받게 되었다.
발자국 소리가 다가오는 것을 들었다. 나는 엄마인 줄 알고 손을 내밀었다. 누
군가가 내 손을 잡아서 끌어당겨 나를 안아주었다. 나에게 세상의 모든 것을 가
르쳐 주시고, 나를 사랑해 주러오신 분이었다.
우리집에 도착하신 다음 날 선생님은 나를 그분의 방으로 데리고 가서 인형을
주었다. 퍼킨스 연구소에서 공부를 하는 장님아이들이 나에게 보낸 선물이었다.
물론 난 그런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인형을 가지고 놀고 있는데 선생님
이 내 손바닥에 천천히 ㅇ - ㅣ - ㄴ ㅎ - ㅕ - ㅇ 이라고 손가락을 이용해 쓰
셨다. 나는 즉시 이손가락 게임에 흥미를 느끼고 흉내를 냈다. 마침내 손가락으
로 인형이라는 말을 잘 쓸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어린애다운 기쁨과 자랑스러
움을 감추지 못했다. 당장 계단을 뛰어내려가서 엄마에게 달려가 손가락으로 인
형이라는 단어를 써 보였다. 하지만 그때 난 내가 단어를 쓰고 있다는 사실이나,
심지어는 단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몰랐다. 단지 원숭이처럼 손가락을
움직여 선생님 흉내를 내었을 뿐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무었을 하는 것인지 이해를 하지 못하면서도 손가락을 이용해
서 많은 단어들 쓰는 법을 배웠다. 그 중에는 모자, 핀, 컵 등의 단어와 앉다, 서
다, 걷다 등의 동사도 있었다. 그리고 선생님이 우리집에 오신 지 몇 주가 지나
서야 이 세상의 모든 물건엔 이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어느날 내가 새 인형을 가지고 놀고 있는데 선생님이 오셔서 다른 인형 하나
를 내 무릎에 얹으셨다. 그리고 ㅇ - ㅣ - ㄴ ㅎ - ㅕ - ㅇ이라고 쓰시며, ㅇ -
ㅣ - ㄴ ㅎ - ㅕ - ㅇ이라는 것은 내 무릎에 놓인 두 개의 인형 모두에게 적용
이 된다는 사실을 가르치려고 하셨다. 그날 아침 선생님은 나에게 ㅋ - ㅓ - ㅂ
은 컵을 가리키는 것이고 ㅁ - ㅜ - ㄹ은 물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
시키려고 애를 쓰셨다. 하지만 나는 계속 그 두 개를 혼동했다. 그래서 선생님은
실망하시며 그 일을 잠시 그만두셨다. 그리고 지금 인형을 가지고 다시 시도를
해보시는 것이었다.
선생님이 자꾸 같은 단어를 반복하자 나는 화가 나서 새인형을 집어들고 바닥
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인형이 깨져서 발 밑에 흩어지는 소리를 듣고 즐거워했
다. 나는 불같이 화를 낸 후 후회도 하지 않았고 슬퍼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 인
형을 사랑하지도 않았다. 항상 어둡고 조용한 세계에서 사는 나는 어떤 것에 대
해 연민을 느끼거나 다정한 감정을 갖지 못했다. 선생님이 깨진 인형을 방 한구
석으로 치우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나를 괴롭히는 것이 없어졌으므로 나는 매
우 만족해 했다. 선생님이 나에게 모자를 갖다 주셨다. 따뜻한 햇빛이 비치는 밖
으로 산책을 나간다는 신호였다. 나는 아직 단어의 존재를 몰랐으므로 나의 생
각을 머릿속에서나마 언어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밖으로 나간다는 생각
에 좋아서 깡충깡충 뛰었다.
우리는 인동 덩굴의 향내를 따라 오솔길을 걸어 우물로 갔다. 우물 주위엔 인
동 덩굴 꽃이 많이 피어 있었다. 누군가가 펌프로 물을 긷고 있었다. 선생님은
펌프 주둥이 밑에 내 손을 대었다. 그래서 한 손으로 쏟아지는 시원한 물을 느
끼게 하고 다른 손에 물이라는 단어를 처음엔 천천히, 그리고 빨리 쓰셨다. 나는
가만히 서서 선생님의 손가락에 온 신경을 모았다. 갑자기, 오랫동안 잊고 있었
던 것 같은 어떤 것이 안개 속에서 나타났다. 잊어버렸던 생각이 다시 떠오른
느낌이었다. 그리고 언어의 신비가 나에게 다가왔다. 그 순간 나는 ㅁ - ㅜ - ㄹ
이란 것은 지금 내 손 위로 쏟아지는 시원한 것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살아있는 단어가 나의 영혼을 흔들어 깨우고 빛과 희망과 기쁨과 자유를 주
었다. 아직 장애물은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 장애물도 서서히 사라졌
다.
우물을 떠나 집으로 향하며 나는 배우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이 세상 모
든 것에 이름이 있었고, 이름 하나를 배울 때마다 나에겐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
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가 만지는 모든 것이 삶의 기쁨으로 떨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세상을 새롭고 신비스러운 마음으로 대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집
안으로 들어서며 내가 깨뜨려버린 인형 생각이 났다. 나는 방 구석으로 가서 깨
어진 인형 조각을 주워들었다. 다시 붙여보려고 노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나는
내가 한 짓을 깨닫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후회와
슬픔을 느꼈다.
그날 나는 새로운 단어를 많이 배웠다. 어떤 단어들이었는지 지금은 생각나지
않지만, 그 중엔 엄마, 아빠, 여동생, 선생님 등이 있었다. 그런 단어들은 나에게
세상의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그날 저녁 잠을 자려교 침대에 누웠을 때의 나보
다 행복한 아이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는
내일이 빨리 오기를 바랐다.
파크비유 중학교의 무덤 파는 아이들
사람들은 일이 잘못되면 항상 자기 환경 탓을 한다. 나는 환경이라는 것을 믿
지 않는다. 이 세상에선 자기가 원하는 환경을 찾아나서는 사람들이 성공한다.
그들은 자기가 원하는 환경을 찾지 못하면, 자기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낸다.
<죠지 버나드쇼>
학교 교육의 목적은 질문에 맞는 답을 고르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학교 교장
의 목적은, 학생들이 자신의 능력으로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지를 경험을 통해
배움으로써, 그들이 자신을 믿도록 하는 것이다. 학생들은 악기를 가지고 아름다
운 음악을 만들고, 붓과 캔버스를 가지고는 그들의 눈에 비친 세상을 그린다. 그
리고 친구들과 협동해서 열심히 일하며, 불리한 조건을 이겨내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는 법을 배운다. 하지만, 맞는 답에 동그라미를 치거나 맞음, 틀림을 쓰
는 방법으로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교훈을 배우지 못한다.
'우리들은 승리자가 될 자질을 갖고 태어났다.'
로버트 레드포드가 주연을 맡은 <제러미아 죤슨>이라는 영화가 나오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중학교 2학년인 우리 학급에서는 그 영화에 대한 토론이 벌어
졌다. 우리는 강하고 거친 산 사나이가 또한 무척 친절하고 상냥한 성격을 가졌
다는 것에 대한 얘기를 했고, 그가 너무도 자연을 좋아해서 항상 자연의 일부가
되고 싶어했다는 얘기도 했다. 그때 로빈슨 선생님께서 이상한 질문을 하셨다.
제레미아 죤슨의 무덤이 어디 있을 것 같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토록
산을 좋아했던 산 사나이가 남 캘리포니아 주 샌디에이고 고속도로에서 90미터
쯤 떨어진 곳에 묻혔다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로빈슨 선생님께서 물으셨다.
"그럼 너희들은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거냐?"
"물론이죠!"
우리가 합창했다.
"그럼 그것을 수정해야 된다고 생각하니?"
선생님께서 의미 있는 미소를 지으며 물으셨다.
"네!"
우리는 아직 어린 아이들다운 순진함으로 활기차게 대답했다.
로빈슨 선생님은 잠시 침묵을 지키며 우리를 바라보셨다. 그리고 그 후부터
우리가 삶을 보는 관점을 바꿔 놓을 중요한 질문을 하셨다.
"그럼, 너희들이 그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지? 우리는 아직 어린 아이들인데. 우리가 뭘 할
수 있겠어?
"방법은 있다."
선생님이 말을 이으셨다.
"큰 도전을 해야 할 것이고, 실망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방법은 있다."
그리고 선생님은 우리들이 열심히 일할 것이고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고 약속
을 하면 도와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선생님께 약속을 하며 우리들은 이때까지 우리가 살아온 삶에서 가장 큰 모험
을 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우리는 우리를 도와 줄 수 있을 만
한 사람들 모두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중엔 시의원, 주의원, 연방 의원도 있었
고 공동 묘지 회사의 대표도 있었고 로버트 레드포드 씨도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오기 시작했다. 다들, '이런 일에 관심을 보여두어서
고맙기는 하지만 우리가 도울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라고 말했다. 다른
때 같으면 우린 이쯤에서 포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로빈슨 선생님께 절대 포기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기 때문에 다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우리는 더 많은 사람에게 우리의 생각을 알릴 필요가 있다고 결정하고 신문사
에 연락했다. 그리고 마침내 <로스앤젤레스 타임즈>의 기자 한 명이 우리를 찾
아와서 인터뷰를 했다. 우리는 우리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설명하고 아무도 도
와 주려는 사람이 없어서 무척 실망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우
리의 일에 관심을 보여주었으면 한다는 말도 했다.
"로버트 레드포드 씨에게서 연락이 왔니?"
기자 아저씨가 물었다.
"아뇨."
우리는 대답했다.
이틀 후 우리에 대한 기사가 1면에 실렸다. 기사에는, 미국의 영웅이 죽은 후
정의롭지 못한 대접을 받고 있으며 우리가 그 일을 바로잡으려고 하는데 아무도
도와 주는 사람이 없고, 심지어는 로버트 레드포드 씨조차 관심을 보이지 않는
다고 쓰여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레드포드 씨의 사진이 실렸다.
그날 수업을 받고 있는데 로빈슨 선생님께 전화가 와 있다고 사무실 직원이
부르러 왔다. 전화를 받고 돌아오시는 선생님은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지으셨
다.
"지금 누구한테 전화가 왔는지 알아?"
로버트 레드포드 씨였다. 그는 하루에도 수백 통씩의 편지를 받기 때문에 우
리 편지를 읽지 못했다고 사과하며 우리가 하는 일을 도와 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갑자기 우리 일을 도와 주겠다는 학생들도 늘었을 뿐 아니라, 우리는
더 영향력 있고 발언권이 강한 그룹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모든 서류를 구비해서 제출하는 데 수개월이 걸렸다. 그리고 마침내
로빈슨 선생님과 몇 명의 학생들은 공동 묘지로 가서 산 사나이의 유해를 파내
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제러미아 죤슨은 낡은 나무 관에 넣어져서 묻혔기 때문
에 남은 것이라곤 썩은 나무 판자 몇 조각과 몇 개의 뼈뿐이었다. 공동 묘지 일
꾼들은 남은 유해를 조심스럽게 주워서 새 관에 담았다.
그리고 며칠 후 와이오밍 주에 있는 한 목장에서 제어미아 죤슨을 기념하는
식이 열렸다. 그의 유해는 그가 그토록 좋아하던 야생의 자연 속에 묻어주었다.
로버트 레드포드 씨가 관의 한 모퉁이를 들고 따라갔다.
그 후부터 우리 학교 학생들은 우리를 '무덤 파는 아이들'이라고 불렀다. 하지
만 우리는 우리를 '꿈을 쫓는 아이들'이라고 생각한다. 그 해 우리가 배운 것은
그저 어떻게 움직이느냐, 무덤을 옮기는 것 같은 간단한 일을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단계를 거쳐야 하느냐 정도가 아니었다. 우리가 배운 교훈은, 절대 포기하
지 않는 것만큼 강력한 힘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직 10대인 어린 아이들이 모여
서 큰 일을 해내며 우리는 승리자가 될 자질을 갖고 태어났다는 사실을 배웠다.
<키프 앤더슨>
어른이 된다는 것
접시를 다 닦고 싱크대도 닦아 놓고 나면 수챗구멍 속 맨 밑바닥에 모이는 것
이 있다. 여기선 편의상 '그것'이라고 부르겠다. 평균의 지능을 가진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어른이라면 그것은 너무 커서 수챗구멍 속으로 내려가지 못한 음식 찌
꺼기이며, 단백질과 탄수화물과 지방과 섬유질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말하자면 음식 비듬인 셈이다.
또한 그것은 우선 음식을 끓일 때 뜨거운 열로 소독되었고, 접시를 닦을 때
세제로 위생 처리되었으며, 그 후엔 따뜻한 물로 잘 헹궈졌다. 그러니 걱정할 것
이 없다.
그러나 설거지를 하도록 징집당한 10대 청소년들은 누구나 그런 설명은 다 거
짓말이라는 것을 안다. 수챗구멍 속에 있는 그것은 치명적인 독물질로 우리의
건강을 해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더 이상 끔찍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열세 살이었을 때는 나는 우리 엄마가 그다지 위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하
지 못했지만, 엄마가 맨손을, 수챗구멍 속에 넣어서 그것을 꺼내 쓰레기통 속에
던질 때는 한없이 위대해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엄마가 티스푼을 찾으려고 맨
손을, 젖은 쓰레기통에 넣어서 휘휘 젖는 것도 보았다. 정신 나간 사람만이 보일
수 있는 용기였다. 엄마는 커피 찌꺼기와 야채수프 찌꺼기가 뒤섞인 속에서 티
스푼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것을 닦으라고 나에게 건네 주었을 때 나는 정신을
잃을 뻔했다. 죽겠다고 작정을 하지 않았다면, 고무 장갑과 방독면과 스테인레스
부젓가락이 없이 그 티스푼을 받아들 아이는 한 명도 없을 것이다.
한번은 학교에서 '오도어'라는 프랑스 단어를 배운 적이 있다. 선생님이 그 단
어의 뜻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더러움'이라고 설명하셨을 때 나는 그것이 무
슨 말인지 금방 알아들었다. 우리집에서 저녁마다 보니까. 수챗구멍 속에서 접시
를 닦으며 엄마에게 그 프랑스 단어에 대한 말을 했더니 엄마는 '우리 아들이
이렇게 바보라니!'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그리고 내가 방금 먹어서 뱃
속으로 들어간 저녁도 그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설명하셨다. 더군다나 내 뱃
속에 있는 음식물은 내 몸속의 배수구로 들어가며 씻기지도 않았으며 이 순간
썩어가고 있다는 말도 하셨다. 만약 엄마가 그 설명을 들을래, 아니면 나무 판자
로 머리를 한 대 맞을래라는 선택권을 주셨다면 나는 기꺼이 나무판자를 택했을
것이다.
나는 부모님끼 식기 세척기와 음식 찌꺼기 분쇄기를 사자고 오랫동안 졸랐다.
그 기계들은 사람들이 끔찍한 음식 찌꺼기를 만지기 싫어서 만들어 낸 문명의
이기임에 틀림없었다.
부모님이나 객관적인 어른이 무슨 말을 하든 상관없었다. 수챗구멍 속에 든
그것은 우리에게 치명적이며 세균이 득시글거린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것을 만지면 문둥병도 걸릴 수 있고 그것보다 더 심한 병에 걸릴 수 있다. 어
쩌다 그것을 만졌다면 손을 살갗이 벗겨지도록 문질러 비누로 씻고 잘 헹굴 때
까지는 자기 몸의 다른 부분을 만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더 심한 경우엔,
그것은 모두들 잠든 밤에 잘게 부서지고 진득하게 뭉쳐져서 돌연변이처럼 갑자
기 살아난 다음 슬그머니 수챗구멍 속에서 기어 나와 온 집안에 퍼진다.
그럼 왜 고무 장갑을 사용하지 않냐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고무 장갑은 계
집애들이나 낀다. 더군다나 엄마도 맨손으로 하셨는데 내가 낄 수는 없다. 우리
아버지는 평생 싱크대 옆 1미처 이내론 접근해 보신 적이 없다. 엄마는 아버지
가 게으르기 때문이라고 말하신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도 싱크대 안의 그것에
대해 나만큼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느날 저녁을 먹고 나는 아버지께, 예수님은 한 번도 설거지를 해본 적이 없
고 수챗통에서 그것을 꺼내본 적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버지도 그 말에 동
의하셨다. 아버지와
내가 신학적인 토론을 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수챗구멍의 그것보다 더 지독한 것들로 변기가 막히면 압축
기를 들고 화장실로 들어가셨다. 아버지가 그 일을 하실 때면 난 그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그 작업을 하신다는 사실조차 알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난 어른이다. 어른이 된 지 벌써 꽤 오래 되었다. 어떤 땐 난
고등하고 졸업식에서 연설하는 장면을 상상해 본다. 먼저 나는 졸업생들에게 묻
는다.
"여러분 중 독립적이고 자기 일은 자기가 해결하는 어른이 되고 싶은 사람은
손을 들어 보십시오."
모두 다 신나서 손을 들 것이다. 그러면 나는 어른이 되면 해야 할 일들의 목
록을 나눠 준다.
-수챗구멍을 닦는다.
-막힌 변기를 뚫는다.
-아기가 똥을 싸거나 오줌을 쌌을 때 치워준다.
-코를 닦아준다.
-아기가 시금치를 먹다 바닥에 토하면 닦아낸다.
-오븐에 덕지덕지 낀 기름 때나 기를 걸름기를 닦는다.
-고양이가 변기로 사용하는 모래 상자를 갈아주고 개똥을 치운다.
-쓰레기를 쓰레기통으로 가져가 버린다.
-구정물을 퍼낸다.
-집에서 기르는 애완 동물이 차에 치어 죽으면 묻어준다.
졸업생들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어야만 어른이 된다고 말해준다. 어떤 학생
들은 이 정도에서 어른이 되는 것을 포기할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알 것은 알
아야 한다.
위의 목록보다 더 지독한 일들도 있다. 내 아내는 의사인데, 가끔 자기가 병원
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를 내게 말해 준다. 나는 차마 그 말들을 여기에 적을 수
가 없다. 나도 그 말을 안 들었더라면 하고 바랄 정도다. 그런 일을 하는 사람
과, 그것도 그런 일을 한다고 자랑스러워하는 사람과 같이 산다는 생각을 하면
속이 울렁거린다.
지저분한 것을 자기가 치워야 할 분량만큼 치우는 것은 어른이 되기 위한 자
격 시험이다. 우리 삶의 쓰레기를 내다 버리는 것은 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한
조건이다.
아직 어릴 땐 우리는, 그들이 우리를 정말로 사랑한다면 쓰레기를 갖다 버리
라는 심부름은 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른이 된 후엔 우리는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스스로 쓰레기를 갖다 버린다. 여기서 그들이란 우리 가족뿐
아니라 인류의 가족도 포함한다.
옛말이 틀리지 않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지저분한 일이긴 하지만 누군가가 꼭 해야만 하는 일이
다. <로버트 풀검>
10대 청소년의 권리헌장
친구에 대한 권리
우리는 모두 친구를 가질 권리와 특권이 있다.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점과
싫어하는 점에 근거해서 친구를 선택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사
람을 나 혼자 싫어할 수도 있고, 내 친구들이 끼워주지 않는 사람을 나 혼자 좋
아할 수도 있다. 우정이란 매우 개인적인 것이다.
우리는 친구들에게 믿을 만한 사람이 되라고 요구할 권리가 있다. 우리가 친
구에게 무슨 얘기를 해주고 아무에게도 그 말을 하지 말하고 하면, 그 친구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또한 친구도 우
리에게 그렇게 요구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안다. 만약 친구가 약속을 지키지 않
으면, 그 친구는 우리의 믿음과 우정을
배반하게 된다.
친구와는 솔직해야 한다. 친구가 만약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속상하게
하는 일을 하면 친구에게 솔직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우리도, 친구가 우
리에게 솔직히 얘기하면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들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친
구를 비난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친구끼리는 서로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얘
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우리가 내린 결정을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어떤 친구들은 우리가 내
린 결정을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친구들은 그 결정을 존중해 주어
야 하며, 우리는 우리가 내린 결정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부모님과 어른들에 대한 권리
어른들은 우리의 감정을 존중해 주어야 하며, 강아지등의 감정에 비교하면(어
렸을 때의 사랑을 영어로 강아지 사랑이라고 함.) 안 된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
은 매우 강하며 어떤 땐 우리를 혼동에 빠지게 한다. 어른들이 우리의 감정을
무시하지 않고 신중하게 대해 주고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면 훨씬 도움이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한 결정을 내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모든 결정이
아니라 일부만.). 만약 우리가 실수를 하면 그것으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좀더 책임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모님들이 싸움을 하실 때는 될수록 우리들이 관여되지 않게 신경을 써 주시
기 바란다. 모든 관계에서 어떤 땐 다툼이 불가피한다는 사실을 우리도 이해한
다. 하지만 우리가 부모님들의 다툼에 관여가 되면 우리는 너무 괴롭다. 부모님
들 사이의 문제에 우리가 끌려들어가지 않도록 해주시기 바란다.
우리는 어른들을 존경할 것을 약속하며, 그 답으로 어른들도 우리의 의견을
존중해 주실 것을 부탁드린다.
모두에게 바라는 것
우리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을 권리가 있다. 그리고 우리도 여러분을 그렇게
사랑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의견을 솔직히 표현할 권리와, 우리 자신을 사랑할 권리와, 우
리의 감정을 숨기지 않을 권리와, 우리의 꿈을 쫓아갈 권리가 있다. 우리를 걱정
하는 대신, 우리를 믿음으로써 우리를 도와 주시기 바란다.
-리사 게이(16세), 제이미 옐린(14세)
리사 거메닉(14세), 하나 아이반호(15세)
브리 에이블(15세), 리사 로쓰바드(14세) -
또 다른 책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이 책을 기쁜 마음으로 만들었다. 여러분도 이 책을 읽는 동안 그만큼
의 기쁨을 맛볼 것이다. 우리의 사랑의 결실인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보내 줄
분은 다음 주소를 이용하기 바란다.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다. 이 책에 실린 이야기를 읽고 여러분의 삶에 달라
진 면이 있으면 말해 주고, 그리고 어떤 이야기가 제일 마음에 드는지도 알려주
기 바란다.
또, 여러분이 직접 쓴 이야기나 시, 다른 책이나 잡지에서 읽고 마음속에 간직
하고 있는 이야기들을 보내 주길 바란다. 이 책에 담긴 이야기나 시도 대부분은
당신과 같은 독자분들이 보내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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