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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잭 하긴스 솔로

by Casey,Riley 2023. 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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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로 (Solo)
                                잭 하긴스 著


       - 등장 인물 -
       존 미카리 - 명 피아니스트, 살인청부업자
       캐더린 라일리 - 심리학자
       에이서 모건 - 영국 육군 공정연대 대령
       미간 - 모건의 딸
       헬렌 우드 - 모건의 전처
       프렌시스 우드 - 헬렌의 남편, 성공회 신부
       쟝 풀 드비르 - 형사 변호사, 소련국방정보국(GRU)대령
       리엄 오헤이건 - IRA 과격파 장교
       세이머스 - IRA의 투사. 오헤이건의 부하
       브렌던 터리 - '엘렌의 자식들'의 수령
       하베이 쟈고 - 런던의 갱 조직의 보스
       요르고스 기카 - 그리스인 어부
       마리아 - 요르고스의 아내
       해리 베이커 - 런던 경시청의 주임총경
       조지 스튜어트 - 경시청의 경감
       퍼거슨 준장 - 영국 정보부 '그룹4'의 부장


       저자 소개
       잭 하긴즈(Jack higgins)
       1929년, 영국의 뉴게슬에서 태어났음.
       런던 대학교를 졸업한  뒤, 교직에 종사하다가  1947년부터 2년 동안 
     영국 육군 근위기병연대에 근무함.
       1960년부터문필 활동을  시작하여, 1975년에 <독수리는  날아 내려왔
     다>로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로 부상했다.
       그리고 <솔로(Solo)>는 1980년에 발표하자마자 선풍적인 인기를 끌러 
     베스트셀러 1위를 마크함과  동시에 500만부라는 경이적인 판매 실적을 
     올렸다.
       그밖의 작품으로는, <탈출항로>,  <모실해역>, <테러리스트에게 장미
     를>, <엑조세를 추격하라>, <재판의 날>, <비정의 날>등 다수 있다.

 

 
제 목 : ◈프롤로그◈

                                  프롤로그


       리전트 파크 근처의 높은 벽돌담으로 둘러싸인 저택의 문을, 그 크레
     타 인(人)은 숨어 들어갔다. 정원의 덤불속으로 발을 들여 놓자 그림자 
     속으로 파묻혔다. 그는 손목의  형광 시계에 흘깃 눈을 주었다. 7시 10
     분전, 아직은 조금 시간이 있다.
       크레타인은 검은 방한  코트 주머니에서 총신  끝에 소음기를 부착한 
     권총을 꺼냈다. 기능을 체크하고는 다시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그 저택은 당당한 규모였다. 그것도  그럴 것이, 이곳은 맥스웰 제이
     콥 코엔, 즉 친구들로부터  맥스 코엔이라고 불리우는 사나이의 소유물
     이었던 것이다.  코엔에게는 여러 가지 직함이  붙어있었다. 우선 세계 
     최대의 의류 회사의 회장이고,  영국의 사교계에서도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유태인의 한 사람이었다.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 모두로부터 사랑
     받고 존경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불행하게도 맥스 코엔은 또한  열렬한 유태 민족주의자로서, 일부 사
     람들의 눈에는 그것이 상당한 손해로 비치고 있었다.
       그런 것은 이 크레타  인에게 있어서는 아무래도 좋았다. 정치따위는 
     시시했다. 어린애들의  장난이었다. 그는  표적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묻는 일은  없었다. 묻는 것은 세부사항뿐으로,  이번 경우에는 그것을 
     철저하게 조사해 두었다.
       집에는 코엔과 아내와 가정부가 있다.  그 밖에는 아무도 없다. 고용
     인들은 모두 출퇴근하고 있었다.
       크레타 인은 검은 바라크라바 모자(역자주  : 눈만 나오고 귀까지 덮
     는 모자)를 주머니에서 꺼내  머리로부터 뒤집어 썼다. 눈과 코와 입밖
     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 위에 방한 코트의 모자까지 끌어올리고서 덤불
     을 나와 집 쪽으로 향했다.

       문에서 초인종이 울렸을 때, 맥스 코엔 가의 스페인인 가정부 마리아
     는 거실에 있었다. 문을 연 순간, 그녀는 소스라쳐 놀랐다. 눈 앞에 귀
     신이 오른손에 권총을 들고 서 있었던 것이다.
       털실로 짠 소름끼치는 복면의  틈새로 보이는 입술이 움직이자, 사나
     이는 약간 쉰 목소리로 강한 외국사투리가 섞인 영어를 말했다.
       "미스터 코엔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마리아는 거절하려고  입을 열었다. 권총이  겁을 주듯이 뻗어나오고 
     크레타 인은 안으로 들어와 등 뒤의 문을 닫았다.
       "목숨이 아깝거든 빨리 서둘러!"
       가정부가 등을 돌려  계단을 올라가고 크레타 인은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층계참을 걷고 있을 때, 침실 문이 열리고 코엔 부인이 모습
     을 나타냈다.
       지난 몇 년간 이러한 사건을  염려하면서 살아온 부인은 마리아와 복
     면의 사나이와 권총을 보고  반사적으로 침실로 뛰어 들어갔다. 그녀는 
       크레타 인은 마리아의 등을  계속 밀쳐대고 있었다. 가정부는 비틀거
     리다가 한쪽 구두를 잃어 버리고 주인의 서재 앞에서 멈춰섰다. 마리아
     는 잠시 주저하고 나서 문을 노크했다.
       맥스 코엔은 얼마간 놀라며 노크에  대답했다. 오후 8시 이전에는 서
     재에 있는 자기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엄하게 일러 두었기 때문이다.
       문을 열고 보니까  마리아가 문 앞에 서  있었다. 한쪽구두가 벗겨져 
     나갔고 공포의 표정을 띠고 있었다. 그때 마리아의 몸이 옆으로 밀려나
     고 크레타 인이 나타났다.  소음기가 달린 권총을 들고 있었다. 그것이 
     한 번 기침 소리처럼 울렸다.
       맥스 코엔은 청년 시절에 권투  선수였던 적이 있어서 한순간 링으로 
     돌아간 듯한 심정이 되었다.  정확하고 강력한 펀치를 안면에 강타당하
     고 넉아웃. 다음 순간 정신을 차려 보니까 서재에 벌렁 넘어져 있었다.
       그의 입은 정통파 유태교도가 하루에  서너 번은 읊조리는 낯익은 헤
     브라이어 기도를 목소리로 내려 하고 있었다.
       "들으라, 이스라엘이여, 주님이신 우리들의  야훼, 주님은 오로지 한 
     분뿐이시니라."
       그러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빚이 급속히 바래 가고 이윽고 암흑뿐
     인 세계가 찾아들었다.
       현관으로 크레타 인이 달려나가자, 999의 연락을 받고 달려온 최초의 
     경찰차가 거리 모퉁이를 돌아 다가오고 있었다. 다른 경찰차도 속속 뒤
     따라 모여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크레타 인은 재빨리 정원을 가로질러  어둠 속으로 뛰어 들어가서 담
     을 기어 올라가 다른 집 정원으로 뛰어 내렸다. 그곳에서 문을 열고 잠
     시 뒤에는 골목길로 들어섰다. 그는 모자를 벗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미 그의 풍채나  특징은 현장에 도착한  최초의 경관들이 코엔가의 
     가정부한테 알아내서 무선으로 알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200야드만 가면 리전트 파크의 나무숲 속으로 모습을 
     감출 수가 있다. 공원의  반대쪽에는 지하철 역이 있고, 옥스퍼드 서커
     스에서 갈아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는 도로를  가로질러 건너가기 시작했다.  브레이크를 밟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이봐, 거기 섯!"
       하는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경찰차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가  있었다. 그는 즉시 가장 가까운 골
     목으로 뛰어 들어가 달리기  시작했다. 언제나처럼 행운의 도움을 받아 
     주차하고 있는 자동차의 열을 따라 달려가는 동안에 마침 차에 올라 타
     려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문이 꽝 하고 닫히고 엔진이 걸렸다.
       크레타 인은 자동차의 문을 왈칵  열고 그 사람을 머리로부터 끄집어
     내린 다음 운전석으로 뛰어 올랐다.
       기어를 넣고 핸들을 끝까지 꺾었다. 앞차의 펜더 왼쪽을 들이받고 길
     로 달려나가 속력을 올렸다. 경찰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쫓아왔다.
       그는 베일 로드를 가로질러 버딩톤으로 들어갔다. 추격자를 따돌리려
     면 빨리 달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얼마 뒤면 이 
     지역의 모든 경찰차가 모여들어 물샐틈 없는 봉쇄선을 구축할 것이다.
       공사 중이라는 표시판이 보이고 화살표가 오른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양쪽이 창고로 가로막힌 일방 통행로는 좁고 어
     두웠다.
       그 길은 버딩톤 화물역으로 통하고 있었다.
       경찰차는 이미 가까이까지 육박해 오고 있었다. 몹시 가까왔다. 그는 
     속력을 높였다. 철로  밑의 터널로 들어가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 
     순간 전방에 사람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젊은 여자가 자전거에  타고 있었다. 아직 소녀로  갈색 코트를 입고 
     줄무늬 스카프를 목에 감고 있었다.
       소녀가 어깨 너머로  뒤를 돌아다보았을 때  공포로 창백해진 얼굴이 
     보였다. 자전거가 비틀거렸다.
       그는 핸들을 꺾었다. 왼쪽 펜더가  터널 벽을 스치며 불꽃을 튀겼다.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도폭에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리더니  소녀의 몸이 튕겨 올라가 본네트의 
     가장자리에서 밑으로 떨어져 나갔다.
       경찰차가 급브레이크를 걸며 멎었다.  크레타 인은 계속 달려서 터널
     은 빠져 나가 비숍 브리지 로드로 들어섰다.
       5분 후, 그는 베이스워터의 뒷거리에서 차를 세우고 켄딩톤 가든즈의 
     숲사이를 빠른 걸음으로 가로질러 퀸즈 게이트로 나갔다.
       도로를 건너 알버트  홀에 이르렀을 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어서 
     입장권 판매소까지 계단에 길다란  행렬을 이루고 있었다. 그날 밤, 놓
     칠 수 없는 음악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비엔나 필하모니가 브람스의 '
     성 안토니 코랄'을, 존 미카리가 라프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 
     C단조'를 연주하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1972년 7월 21일, 크레타 인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포스터에 실린 존 
     미카리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그 유명한 피아니스트는 검은 고수머리, 
     창백한 얼굴, 흑수정과도 같은 눈동자의 소유자였다.
       그는 음악회장의 뒷문 쪽으로 돌아갔다.  문들 중 하나에 <출연자 출
     입문>이 라는 전광 게시판이 붙어 있었다. 그는 안으로 들어갔다. 접수
     계의 수위가 스포츠 신문에서 눈을 들어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오늘 밤은 꽤나 춥군요!"
       "나는 추위를 그다지 못 느끼겠는 걸."
       하고 그는 대답했다.
       그는 무대 뒤로 통하는 복도를 걸어갔다. 문에 <분장실>이라고 쓴 표
     시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 그는 전등을 켰다.
       분장실로서는 놀랄 만큼 넓은  방으로, 가구도 집기도 적당히 갖추어
     져 있었다. 그곳에서 단 한  가지, 왕년의 좋은 시절을 바라본 적이 있
     는 것은 벽 옆에 놓여 있는 연습용 피아노,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만 같은 하프형 피아노였다.
       그는 권총을 주머니에서 꺼내 화장  가방을 열고 바닥판을 들어낸 뒤 
     그 밑에 숨겼다. 다음에  방한 코트를 벗어 방 구석에 집어던지고 화장
     용 거울 앞에 앉았다.
       그때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고 무대감독이 머리를 디밀었다.
       "무대에 나가기까지 45분이 남았읍니다, 미스터 미카리. 커피라도 갖
     다 드릴까요?"
       "아니, 괜찮소."
       하고 존 미카리는 대답했다.
       "커피는 체질에  맞지 않아서 말이오.  의사말에 따르면, 화학물질은 
     몸에 좋지 않다더군. 그러 나 홍차를 마실 수 있으면 좋겠는데......."
       "알겠읍니다."
       무대감독은 밖으로 나가려 다가 멈춰 섰다.
       "그런데 방금 라디오에서 속보가  있었읍니다. 리전트 파크의 자택에
     서 맥스 코엔이 누군가로부터  사살당했다고 합니다. 복면을 한 사나이
     로 도주했다고 합니다."
       "그건 보통 일이 아니로구먼."
       하고 존 미카리가 말했다.
       "경찰은 정치와 관계가 있다고 보고 있읍니다. 미스터 코엔은 유명한 
     유태민족주의자였으니까요.  작년에도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읍니다. 
     우편 폭탄이 보내져 왔었거든요."
       무대감독은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 이상한 세상이에요, 미스터  미카리. 도대체 어떤 인간이 그런 
     짓을 했을까요?"
       무대감독은 방을  나갔다. 미카리는 몸을  돌려서 거울을 들여다보았
     다. 희미하게 미소를 띠자 거울 속의 그도 마주 웃어 보였다.
       "어떤가...... 솜씨가?"
       미카리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제 목 : 제1장 첫번째 살인 그리고 첫경험 - 1

                         제1장 첫번째 살인 그리고 첫경험


       아테네로부터 400해리 가량 남쪽,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50해리 약간 못 
     되는 곳에  이도라 섬이 있다. 이곳은  옛날에 지중해에서도 가장 두려워할 
     만한 해운력을 자랑하는 섬이었다.
       18세기 중엽부터 많은  배의 선장들이 멀리는 아프리카까지  원정을 가서 
     교역을 하여 거만의 부를 쌓았다. 베니스의 건축가들이 불려와 웅장한  저택
     을 세웠고,  그것들은 오늘날에도 다른 어느  곳보다도 아름다운 이 항구에 
     남아 있다.
       후에 그리스가 오스만 터키의  압제하에서 고통을 받고 있었을 때, 이 섬
     은 그리스 본토로부터의 피난처가 되었다.  독립 전쟁 때, 터키 해군과 싸워
     서, 마침내 국가의 자유를 가져다 준 것은 이도라 섬의 뱃사람들이었다.
       그리스인에게 있어서 비치스, 톰바디스  부드리스 같은 이도라 섬의 위대
     한 선장들의 이름은 미국인에게  있어서 존 폴 존스, 영국인에게 있어서  롤
     리나 드레이크와 같은 매력적인 울림을 갖고 있다.
       이러한 위대한 선장들 사이에서 가장 명예로운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것
     은 미카리였다.
       미카리 가는 넬슨 제독이 동지중해에서 지휘를  맡고 있었을 때는 봉쇄선
     을 돌파하는 밀항선을 움직여서 번영하고, 1827년의 나바리노 해전 때는  영
     국, 프랑스, 러시아 연합 함대에 4척의 배를 제공하고 있다.
       미카리 일가의 자산은 해적 행위와 터키 전쟁  때 밀항으로 손에 넣은 것
     이었으나, 이것을 교묘하게  신흥 산업인 해운업에 투자하여 19세기 말에는 
     미카리가(家)는 그리스 최대의 자산가가 되었다.
       미카리 가의 사나이들은 모두  타고난 뱃사람이었다. 유일한 예외는 1892
     년에 태어난 디미트리스로,  그는 불건전하게도 책에 관심을 보여 옥스포드
     나 소르본 대학에 유학한  뒤 귀향하자, 아테네 대학에서 윤리 철학의  강사
     직을 얻었다.
       디미트리스의 아들인 요르고스가 얼마뒤 일가의 명예를 회복했다. 요르고
     스는 그 방면에서는  그리스에서 가장 전통이 있는 이도라  상선 학교에 입
     학했다.
       총명하고 천재적인  뱃사람인 요르고스는  22세에 처음으로 배의  지휘를 
     맡았다. 1938년, 항상 새로운  지평을 구하고 있던 요르고스는 캘리포니아로 
     옮겨 가서, 퍼시픽 스타  회사의 새로 건조한 화물여객선의 선장이 되어  샌
     프란시스코.도쿄 간의 항해를 맡았다.
       요르고스에게 있어서 돈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부친이 그의 명의로 당
     시로서는 큰 돈인 10만 달러를 샌프란시스코의 은행에 예금해 두고  있었다. 
     요르고스가 새로운 일자리를 선택한 것은  자신이 그렇게 하고 싶다고 원했
     기 때문이었다.
       요르고스에게는 배가 있고 바다가 있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부족한 것
     이 있었다. 그 부족한 것을 요르고스는  메어리 풀러 속에서 발견했다. 메어
     리는 고등학교의 음악교사인  미망인 아그네스 풀러의 딸로, 1939년 7월  오
     크랜드의 댄스 파티에서 처음으로 만났던 것이다.
       부친은 결혼식에 참석하여 두 사람을 위해  베스카데로 해안에 집을 사준 
     뒤, 수평 선의 천둥  소리처럼 이미 포성이 시끄럽게 들리는 유럽으로  돌아
     갔다.
       요르고스 미카리가 일본에로의 항해  도중에 있을 때, 이태리군이 그리스
     에 칩입했다. 배가  항해를 끝마치고 샌프란시스코에서 도크에 들어갔을 때
     는 독일군도 침략에 가담하고 있었다.
       1941년 5월 1일에는, 히틀러는 뭇솔리니의 체면을 유지시켜 주기 위해 유
     고슬라비아와 그리스에 침입하여 영국군을 쫓아냈다. 독일군은 불과  25일간
     의 군사 행동을 전개하고,  손해는 5천 명 미만의 사상자를 낸 것에 불과했
     다.
       요르고스 미카리에게 있어서 고국으로 돌아갈 방법은 없었으며, 부친으로
     부터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러고 있는 동안 12월의 일요일이 찾아와서, 
     나구모 중장이 지휘하는 공격 부대가 진주만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2월에는, 요르고스는 샌디에이고에서 종래의 일과  다름 없는 수송.보급선
     의 지휘를 맡고  있었다. 2주일 후, 그때까지 3년 동안  건강이 좋지 않아서 
     몇 번이나 유산했던 아내가 사내 아이를 낳았다.
       요르고스가 휴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불과 3일뿐이었다. 그때 요르고
     스는 교장이 되어 있던  장모를 설득해서 계속 자기 집에서 살도록  하고는, 
     이전에 그의 부하였으나 태풍 때문에  일본 해안에서 목숨을 잃은 그리스인 
     선원의 미망인을 찾아냈다.
       그녀는 40세, 건강하고 튼튼한 몸매의 카티나 파브로라는 크레타 섬 태생
     의 여인으로, 선창가의 호텔에서 메이드로 일하고 있었다.
       요르고스는 카티나를  집으로 데리고 돌아와  아내와 장모에게 소개했다. 
     검은 옷을 입고 머리에 스카프를 두른 모습의, 키가 작고 억센 체구의  그녀
     는 두 사람의 눈에 이상하게 비쳤다.
       그러나 아그네스  풀러는 키가 작고  땅땅한 농사꾼 출신의 그  여자에게 
     기묘하게 끌리는 것을 느꼈다.
       미망인 카티나는 18년의 결혼생활을 통해서 자식을  얻지 못하여 성모 마
     리아께 기도와 수천  자루의 양초를 바치고 필사적으로 기원했었다. 그러한 
     그녀에게 있어서, 갓난아기용 침대에 잠든 갓난아이를 보았을 때, 눈앞의 광
     경은 기적처럼 생각되었다.  카티나는 손가락을 갓난아이의 조그만 손에 부
     드럽게 대 보았다. 갓난애는  그것을 잡고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듯이 힘차
     게 쥐었다.
       카티나는 몸 안에서 돌덩이가 녹아  내려 가는 것만 같았다. 장모 아그네
     스 풀러는 카티나의 점은 얼굴에서 그것을 읽고 만족했다. 카티나는  단촐한 
     소지품을 정리하러 호텔로 돌아가서 그날  밤 안으로 미카리의 집으로 옮겨 
     왔다.
       요르고스 미카리는 종군하여  섬에서 섬으로 몇 번씩이나  배로 돌아다녔
     다. 그러나 마침내 1945년 6월 3일 저녁 때, 오키나와로 향하는 도중에 그의 
     배는 다케모토 대위 지휘의 이요 367잠수함의 공격을 받아 침몰했다.
       항상 병 때문에 시달려 오던 요르고스의  아내는 그 충격으로부터 회복하
     지 못하고, 마침내 2개월 후에 이 세상을 떠났다.

 
제 목 : 제1장 첫번째 살인 그리고 첫경험 - 2

       카티나 파브로와 소년의 외할머니는  둘이서 아이를 키웠다. 당연한 일이
     지만, 두 사람은 소년을 깊이 사랑하고 있었던 탓으로, 소년의 일에 관한 한 
     이상하리만큼 본능적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협력했다.
       아그네스 풀러는 하웰  스트리트 고교의 교장으로서의 직무상  가르칠 시
     간은 거의 없었으나, 아직도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다. 따라서 자기 외손자가 
     세 살이 되었을 때, 나무랄  데 없는 음정 감각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꿰뚫
     어 볼 수가 있었다.
       외손자가 네 살이 되자, 아그네스 풀러는 손수 피아노를 가르치기 시작하
     고, 얼마 뒤 외손자가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1948년, 아내를 잃은 디미트리스  미카리가 가까스로 미국을 다시 방문할 
     수 있었을 때, 그가 본 것은 하나의 경이였다. 미국에 있는 여섯 살 난 손자
     가 크레타 사투리가 섞인 그리스어를  유창하게 말하는 데다가 천사처럼 피
     아노를 잘 치는 것이었다.
       디미트리스는 소년을 무릎 위에 앉히고 키스를  하고 나서 아그네스 풀러
     에게 말했다.
       "이도라의 묘석  밑에서는 선조인 선장들이  모두 깜짝 놀라겠지요. 우선 
     처음에는 내가 철학자가 되었지요.  이번에는 피아노 연주가, 그것도 크레타 
     사투리의 피아노 연주가예요.  이런 재능은 하느님이 내리신 것임에 틀림이 
     없읍니다. 소중하게 키워야  합니다. 나도 전쟁 때문에  많은 재산을 없앴지
     만, 이 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무엇이든 줄  수 있는 정도의 돈은 있어요. 당
     분간은 이곳에 놓아둔다고 해도, 좀더 자라면 우리 쪽에서 뒷바라지를  하겠
     읍니다."
       그 이후 소년은 학교와 음악 교사를 그것도  최고 수준의 것을 부여 받았
     다. 그가 14세가 되었을 때, 아그네스 풀러는 집을 팔고 카티나와 함께 뉴욕
     으로 옮겨 갔다.  그 결과, 소년은 필요한 수준의 교육을  계속해서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소년이 17세의 생일을 맞이하기 직전, 어느 일요일의 저녁식사 전에 외할
     머니가 심장 발작으로 쓰러져 구급차가  병원에 도착하기 이전에 숨을 거뒀
     다.
       디미트리스 미카리는 그 무렵 아테네 대학의  윤리철학 교수가 되어 있었
     다. 그때까지  손자는 휴가를 이용해서 몇  번이나 조부를 방문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친밀한 사이였다.
       교수는 통지를 받는 즉시 뉴욕으로 달려갔으나, 도착해 보고 충격을 받았
     다.
       카티나가 문을 열고 손가락을 자기 입술에 갖다 댔다.
       "오늘 아침에 매장했읍니다. 더 이상은 기다릴 수가 없었어요."
       "손자 녀석은 어디 있나요?"
       하고 교수가 물었다.
       "저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피아노 소리가 굳게 닫힌 거실문 너머에서 희미하게 울리고 있었다.
       "어떤 태도인가요?"
       "마치 돌로 변한 것 같습니다."
       하고 카티나가 대답했다.
       "완전히 넋을 잃고 있읍니다. 외할머니를 깊이 사랑하고 있었으니까요."
       교수가 문을 열자 손자가  상복 차림으로 피아노 앞에 앉아  황혼녘에 숲 
     속에서 휘날리는 나뭇잎을  연상시키는, 기묘한 잊어버리기 힘든 곡을 치고 
     있었다. 왜 그런지 그 곡은 디미트리스 미카리의 마음을 견딜 수 없는  불안
     으로 가득 채웠다.
       "존."
       하고 교수는 그리스어로 말을 걸고 손자의 어깨에 손을 올려 놓았다.
       "그것은 뭐라는 곡이냐?"
       "가브리엘 그로브레스의  '르 파스토르'입니다.  외할머니께서 좋아하시던 
     곡이죠."
       돌아다본 소년의 눈은 얼굴에 뚫린 두 개의 검은 공동과도 같았다.
       "나와 함께 아테네로 가지 않겠니?"
       하고 교수는 물었다.
       "카티나도 함께 가는  거야. 한동안 나와 함께 살자.  감정의 정리가 끝날 
     때까지 말이다."
       "네, 그래요. 그것이 좋을 것 같아요."
       하고 존 미카리는 대답했다.
       한동안 존 미카리는 그렇게  지냈다. 아테네는 지극히 떠들썩하고 명랑한 
     도시로, 낮이나 밤이나 쉴새  없이 활동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즐거운  거리
     였다.
       왕궁 근처의 사치스러운 구역에 있는 커다란  아파트를 조부는 거의 매일 
     밤 손님들에게 개방했다. 작가, 화가,  음악가들이 다투어 찾아왔다. 특히 정
     치가들이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교수는 민주전선당의 일원이고, 당 기관지
     에 소요되는 경비 대부분을 부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제나  이도라 섬에 갈  수가 있었다. 그곳에 미카리가(家)는  두 
     채의 집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채는 조그만 항구의 뒷거리에,  또 한 채는 
     모로스 끝족의 인가와는 좀 멀리 떨어진 반도의 해안에 있었다.
       소년은 모든 시중을 들어  주는 카티나와 오랫동안 그 해안의  집에서 살
     았다. 조부는 거금을 들여 연주회용  그랜드 피아노 '브르츠너'를 보내 주었
     다.
       카티나가 전화로 전한 바에  의하면, 존 미카리는 한 번도 피아노에 손을 
     댄 적이 없다고 했다.
       결국 존 미카리는 아테네로 돌아왔는데, 파티 석상에서는 벽가에 서서 언
     제나 조심스럽게, 언제나  예의바르게, 파마를 한 머리칼에 창백한 얼굴,  흑
     수정과 같은 눈동자, 완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있어서 말할 수 없이  매력적
     이었다.
       존 미카리는 미소  한 번 지은 적이 없었고,  손님인 부인들은 그의 마음 
     속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저녁, 조부가 놀란 일이 일어 났다.  손님 한 사람이 소년에게 피
     아노곡을 청하자, 존 미카리는 주저하지 않고 피아노  앞에 앉아 바하의 '프
     렐류드와 푸가, E샵 장조'를  쳤던 것이다. 그 거울처럼 반짝이는, 얼음과도 
     같은 차거움을 지닌 곡에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칭찬의 말을 보내고 손님들이  돌아간 뒤, 교수는 발코니에 서서 결코 그
     칠 것 같지 않은, 이른 아침의 자동차의 왕래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손자에
     게 다가갔다.
       "그러니까 너는 다시 살아 있는 사람들의 세계로 되돌아오기로 결심을 한 
     모양이구나?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냐?"
       "파리로 갈 생각입니다."
       하고 존 미카리가 대답했다.
       "파리 음악원에요."
       "오, 그래? 연주회의 무대에 서 보겠다는 것이 너의 목적이겠지?"
       "할아버지께서 찬성해 주신다면요."
       디미트리스는 소년을 다정하게 끌어안았다.
       "너는 나의 모든 것이야. 이것을 이해해다오. 너의 소망은 나의  소망이야. 
     카티나에게 여행 준비를 하라고 일러야겠구나."
       존 미카리는 세느 강에서  멀지 않은 소르본 근처의 좁은  거리에 아파트
     를 구했다. 상점도 카페도 바아도 모두 갖춰진, 파리의 어느 곳에서 나 찾아
     볼 수 있는 일종의 마을로, 주민 모두가 알고 지내는 한 구역이었다.

 
제 목 : 제1장 첫번째 살인 그리고 첫경험 - 3

       존 미카리는 파리  음악원에 입학해서 매일 8시간에서 10시간  연습을 하
     고, 오로지 피아노에만 전념하여 다른  모든 것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고, 여
     자들조차 안중에 없었다.  카티나가 언제나처럼 식사나 가사를 돌보면서 그
     의 뒷바라지를 했다.
       1960년 2월 22일, 앞으로 이틀 후면 18세의 생일을 맞이하는 날, 음악원의 
     금상 입상의 좋은 기회가 되는 중요한  시험을 맞은 존 미카리는 밤새껏 연
     습을 계속했다.
       아침 6시 카티나가 새로 구운 빵과 우유를 사러 빵 가게로 갔다. 존 미카
     리가 샤워를 하고 가운의 끈을  매고 있으려니까 길거리에서 날카로운 브레
     이크 소리와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 왔다. 미카리는 창으로 뛰어가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카티나가 길가의 도랑에 쓰러져 있고, 빵이 길거리에 흩어져 있었다. 그녀
     를 치어서 넘어뜨린 시트로엔 트럭은 재빨리 후진했다.
       한순간 운전수의 얼굴이 보였으나,  자동차는 모퉁이를 돌아 자취를 감춰 
     버렸다.
       카티나는 몇 시간 뒤에 숨을 거뒀다. 존 미카리는 병원의 침대 옆에 붙어 
     앉아 그녀의 손을 잡고 손가락의  사후 경직이 시작되었어도 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경찰은 소극적이어서, 변명만 늘어놓고 있었다.
       "운이 나쁘게도 목격자가 없어요. 그래서 해결은 곤란합니다. 그러나 물론 
     수사는 계속하겠읍니다."
       그럴 필요는 없었다.
       존 미카리는 트럭 운전수의 얼굴을 잘 알고 있었다. 클로드 갸레이.
       행실이 좋지 못한 불량배로, 정비공을 두 명 두고 세느 강 근처에서 조그
     만 자동차 정비공장을 하고 있는 사나이다.
       존 미카리는 경찰에게 말을 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것
     은 자신의 손으로 처리해야  되는 일인 것이다. 그의 조상이라면 충분히 이
     해해 줄 것이다. 왜냐하면, 이도라  섬에서는 몇 세기에 걸쳐 복수의 율법은 
     절대적이었으니까.
       자기 가족에게 가해진 악행에 대해서 복수하지  않는 자는 혹독한 비난을 
     받는 것이다.
       더구나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날  오후 6시에 정비공장 건너편 쪽의 건
     물 그늘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차가운 흥분이 존 미
     카리의 온몸에 충만했다.
       6시 반에 두 명의 정비공이 퇴근을 했다. 존 미카리는 그 뒤 6분을 더 기
     다렸다가 도로를 건너 입구로 접근해 갔다.
       이중문이 밤의 어둠  속에 열려 있었다.  시트로엔 트럭이 도로에 머리를 
     두고 주차해 있었고, 뒷쪽은 콘크리트 바닥이 급한 경사를 이루며  지하실로 
     이어져 있었다.
       클로드 갸레이는 벽가의 장의자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미카리의 오른손
     이 레인 코트의 주머니로 미끌어져 들어가 나이프의 자루를 움켜 잡았다.
       그때 그는 좀더 간단한 방법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매우 시적인 색채를 
     지닌 보복 방법이 있었다.
       존 미카리는 시트로엔의 운전대에 몸을 구부리고  장갑을 낀 손으로 기어
     를 뉴트럴에 바꿔 넣고, 핸드  브레이크를 풀었다. 트럭은 경사 탓으로 움직
     이기 시작하고 차츰 속력을 더해 갔다.
       언제나처럼 절반은 술에  곤드레가 된 상태인 클로드  갸레이는 부딪치기 
     직전이 되어서야 트럭이 다가오는 것을  깨닫고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비켰으
     나, 그 순간 3톤짜리 트럭이 몸을 벽에 밀어붙여 찌부러뜨렸다.
       그래도 만족감은 조금도  없었다. 카티나는 이미 죽었다.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채 죽은 아버지나, 또한  희미하게 밖에는 기억하지 못하는 어머니, 그
     리고 외할머니처럼 카티나도 영원히 가 버린 것이다.
       존 미카리는 빗속을 몇 시간이 나일종의  방심 상태로 쏘다니다가 한밤중 
     가까이 되어 강둑에서 매춘부의 유혹을 받았다.
       여자는 40세였으나 훨씬 늙어 보였다. 그리고 아파트에 가서도 밝은 전등
     은 켜지 않았다.
       그 비정상적인 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존 미카리에게는 현
     실과 비현실과의 구별이  뚜렷하지가 않았다. 어쨌든 간에 그에게는 여성체
     험이 없었던 것이다.
       어색하고 서투른 동작이 금새 드러나자, 그러한 경우에 그런 종류의 여자
     들이 종종 나타내  보이는 장난기 절반의 다정함을 가지고  여인은 그를 신
     비로운 세계로 이끌어들였다.
       존 미카리는 그 자리에서  금새 섹스를 터득한 다음, 억제된 분노를 속에 
     품고 여자의 몸 위에서 움직였다.  매춘부는 몇 년 만에 한두 번 절정에 도
     달하고는, 그의 밑에서 비명을 지르며 또 한 번 요구했다.
       그 뒤에 여자가 잠들고 나자, 존 미카리는 암흑 속에 누워 자기가 여자를 
     그렇게 만드는 힘, 그토록 미치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
     랐다. 이상했다. 지금까지 줄곧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 온 것이 별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후 새벽  가까이 되어 다시금 거리를 걷기  시작했을 때, 존 미카리는 
     지금까지 느껴 보지 못한 강렬한 고독감을 맛보았다.
       이윽고 중앙시장까지 다다르자, 그곳은 활기에  차 있었고, 하역 인부들이 
     지방에서 올라온 짐을 트럭에서 내리고 있었는데, 그래도 사람들이 마치  물 
     속에서처럼 느릿느릿  움직이는 것 같이 보였다.  자신이 다른 세계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철야영업을 하는 카페에 들어가 홍차를 주문해  놓고 창가의 자리에 앉아
     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을 때, 옆 스탠드에  놓여 있는 잡지의 표지에서 한 
     얼굴이 이쪽을 보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전투복을 입은 깡마른 체구의 강인한 인상을  주는 사나이가 햇빛에 그으
     른 얼굴에 표정이 없는 눈으로 옆구리에 소총을 끼고 있었다.
       그 잡지를 집어 펼쳐  보니까 때마침 격전 중에 있는  알지에 전투에서의 
     외인부대의 역할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었다. 불과  1,2년 전 인도차이나와 
     베트남의 포로 수용소로부터 귀환했을 때, 마르세이유에서 조선소  노동자들
     에게서 돌팔매질을 당했던  사나이들이 지금 또다시 더럽고  불합리한 전쟁
     에 참가하여 프랑스의 전쟁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이었다.
       '희망 없는 사람들'
       이라고 기사의 필자는 부르고 있었다.  다른 곳으로는 갈 장소가 없는 사
     나이들.
       다음 페이지에는 또다른  외인부대 병사, 담가  상자리 위에서 반쯤 몸을 
     일으키고, 가슴에는  붕대가 감겨지고 피가 스며  나와 있는 병사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머리칼을 면도로  밀고, 뺨은 푹 패고, 얼굴도 고생 때문에 수
     척해 있고, 눈은 고독의 심연을 응시하고 있었다.
       미카리에게 있어서 그것은  바로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거울에 비치기라
     도 한 것만  같았다. 그는 잡지를 덮었다. 그것을 스탠드에  되돌려 놓고 떨
     리는 손을 멈추게 하려고 심호흡을 했다.
       머리 속에서 무엇인가가  울렸다. 그 소리가 또다시 나타났다.  존 미카리
     는 주위에  이른 새벽의 왁자지껄한 소음이  돌아온 것을 깨달았다. 세계가 
     다시금 되살아났는데도 그는  이미 그 일부는 아니었으며, 어제와는 단절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날씨는 이상스러우리 만큼 추웠다.  존 미카리는 일어서서 카페를 나오자 
     주머니에 손을 깊이 찔러 넣고 빠른 걸음으로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제 목 : 제1장 첫번째 살인 그리고 첫경험 - 4

       아파트에 돌아온 것은 새벽 6시였다. 방안은 회색이고 공허했으며 생명을 
     느끼게 하지 않았다.
       그가 외출했을 때  그대로 피아노의 뚜껑은  열려 있었고, 악보도 받침대 
     위에 놓여 있었다.  시험은 보지 못하고 말았으나,  지금에 와서는 아무래도 
     좋았다.
       존 미카리는 피아노 앞에  앉아 그 잊어버릴 수 없는 소품, 그로브레스의 
     '르 파스토르'를 천천히  감정을 담아 치기 시작했다.  외할머니의 뉴욕에서
     의 장례식 날, 디미트리스 미카리 할아버지가 찾아왔을 때 연주한 곡이다.
       최후의 음이 사라지자 존 미카리는 피아노의  뚜껑을 닫고 일어나 책상으
     로 다가가서 여권을 꺼냈다.  미국과 그리스의 2중 국적이기 때문에 여권은 
     두 개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방안을 둘러보고 나서 그는 밖으로 나왔다.
       7시에는 지하철을 타고 방사느로 향하고 있었다.
       그곳에 도착하자  빠른 걸음으로  거리를 걸어가 외인부대의  모집센터로 
     향했다.
       정오에는 존 미카리는 신분과 나이를 증명하기 위해 여권을 제출하고, 의
     사의 엄중한 검사를  통과하여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연대에 5년간 근무하
     는 계약서에 서명했다.
       이튿날 3시에는 3명의 스페인인, 한 명의  벨기에인, 8명의 독일인과 함께 
     마르세이유행 열차를 타고 쌍 니콜라 요새로 갔다.
       10일 후, 150명의 신입  대원과 알지에와 모로코에서 근무하는 다수의 프
     랑스 병사와 함께 존 미카리는  마르세이유를 출항하여 오랑으로 향하는 수
     송선에 탔다.
       그리고 3월 20일, 미카리는 최종적인 목적지에 도착했다. 시디 벨 압베스, 
     거의 1세기 전부터 외인부대의 활동 중심지가 되어온 고장이었다.
       군기는 절대적이었다.  그리고 훈련은 잔인할  정도로 효율적이고 유일한 
     목적을 위해 고안되어져 있었다.
       세계에서 최강의 전투원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존 미카리는 온 정력
     을 쏟아 처음부터 상관의 주의를 끌었다.
       시디 벨 압베스에서 몇 주일을 지난 어느 날, 존 미카리는 정보부로 불려
     갔다. 어떤 대위의 면전에서 그는 조부로부터 온 편지를 읽었다.
       조부는 그의 거처를 알고 그에게 번의를 종용하기 위해 쓴 것이었다.
       존 미카리가 대위를 보고 현상태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다고 말하자, 대위
     는 그러한 심정을 조부에게 통지하라고 말했다. 미카리는 대위 앞에서  당장 
     편지를 썼다.
       그 후 6개월 동안에 존  미카리는 낙하산 강하를 24회 행하고, 모든 현대
     무기의 사용법을 다  배우고, 가능하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정도의 육체적 
     능력을 지니게 될 때까지 단련을 받았다.
       미카리는 소총과 권총의 명수가  되고, 격투기에서도 부대에서 최고의 평
     가를 받아서, 그 때문에 동료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다.
       존 미카리는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고,  시내의 창녀집에도 몇번 밖에는 
     찾아가지 않았으나, 여자들은 다투어 그의 마음을 끌려고 했다. 그러한 것은 
     훨씬 전부터 흥미를 불러  일으키지 못했고, 그는 초연한 태도를 계속  유지
     해 왔다.
       존 미카리가 하급 하사관이 된 지 얼마 후, 최초의 출격이 있었는데, 1960
     년 10월, 연대는 라키  산악지대로 이동하여 몇 개월 동안 그곳을  제압하고 
     있던 강력한 농민 게릴라 세력을 공격했다.
       사실상 난공불락의 산꼭대기에  80명 가량의 게릴라가 수비를  굳히고 있
     었다. 연대는 전투의 결정적 단계에서 자살행위와도 같은 정면 공격을  감행
     하고, 존 미카리가 소속된 제3중대는 헬리콥터로 정상에 착륙했다.
       그 뒤의 전투는 처참한 백병전이었다. 존 미카리는 기관총 진지를 분쇄했
     다. 그 기관총 진지는 외인부대 병사를 20명 가량 살륙했고, 한때는 모든 부
     대원이 전멸을 당하지 않을까 하고 우려했던 곳이었다.
       그뒤 미카리가 바위 위에 앉아 오른손의 상처에 붕대를 감고 있으려니까, 
     스페인인 병사가 미친 듯이  웃어대면서 한 손에 목을 두개, 머리칼을  잡고 
     들어 가고 있었다.
       총성이 들리고 그 스페인인 병사는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
     때 이미 미카리는 몸을 피하고 있었다.
       존 미카리는  기관단총을 들어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 옆에서 일어난  두 
     명의 게릴라를 간일발의 차이로 한 손으로 쏘아 넘어뜨렸다.
       한동안 경사면에 서서 기다렸으나  더이상 움직이는 게릴라는 없었다. 이
     윽고 미카리는 바위에  앉아 자신이 이로 붕대를 감고는  담배에 불을 붙였
     다.
       그 후 12개월  동안 존 미카리는  알지에의 시가에서 싸우고, 산악지대의 
     반란군에 기습공격을 가하기 위하여 야간에  낙하산 강하를 세 차례나 감행
     하고, 헤아릴 수 없는 매복기습에서도 살아 남았다.
       미카리는 상이군인 훈장과 전공훈장을 수여 받았고, 1962년 3월에는 상급
     하사관으로 승진했다.
       이제 존 미카리는  '고참형'이었다. 이것은 4시간의 수면으로 한  달 동안 
     목숨을 부지하고, 필요가  있으면 하루 30마일을 중장비로 무장하고 강행군
     을 할 수 있는 외인부대 병사에게 주어지는 명칭이다.
       미카리는 남자와 여자는 물론이고  어린애까지 죽였다. 그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죽음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했다.
       훈장을 받은 다음, 존 미카리는 한동안 현역에서 떠나 케피에 있는 대 게
     릴라전 훈련소에 보내져 폭발물에  관한 지식을 모두 배웠다. 다이나마이트, 
     TNT화약, 플래스틱  폭탄의 취급법과 수십  종류의 효과적인 위장  지뢰의 
     장치 방법도 배웠다.
       7월 1일, 전과정을 수료하자 미카리는 귀대하기 위해 보급 트럭에 편승했
     다. 일행이 카스파의 마을을 통과하려고  했을 때, 100파운드 가량의 다이나
     마이트가 원격 조작에 의해서 폭발되어 트럭을 산산조각으로 날려 보냈다.
       정신을 차려 보니까, 그는 마을의 광장에 쓰러져 있었다. 기적적으로 목숨
     을 건진 것이다. 일어나려고 했을  때, 기관단총 소리가 들리고 가슴에 총탄 
     두 발을 맞았다.
       존 미카리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불을 뿜는 트럭의 잔해 옆에서 트럭 운
     전수가 안간힘을 쓰며 몸을 일으키려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4명의 사나이가 각종 무기를  손에 들고 나타났다. 그들은 운전수를 내려
     다보면서 웃었다. 미카리의 눈에는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
     으나, 운전수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얼마 뒤 총성이 들려왔다.
       4명의 게릴라는 미카리 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마을의 우물까지 몸을 끌
     고 가서 일어나 앉아 등을  대고 있었다. 손은 피가 스며 나오는 전투복 안
     쪽에 들어가 있었다.
       "아프지, 안 그래?"
       그 그룹의 리더가 프랑스어로 말했다.
       리더의 왼손엔 피에 젖은 단도가 들려 있는 것이 보였다.
       존 미카리는 카티나의 죽음 이후 처음 웃는 얼굴을 보였다.
       "아니, 그렇게 아프지는 않네."
       윗저고리에서 손을 꺼냈을 때, 그곳에는 스미스 앤드 웨슨 매그넘 권총이 
     쥐여져 있었다. 알지에의 암시장에서 몇 달 전에 손에 넣은 것이었다.

 
제 목 : 제1장 첫번째 살인 그리고 첫경험 - 5
       최초의 한 발은 리더의 머리를  박살내고, 두 발째는 등 뒤에 서 있는 사
     나이의 미간을 관통했다. 세 번째 사나이가 소총을 겨누려는 순간에, 미카리
     는 그 사나이의 배에 두 발을 쏘아 넣었다.
       네 번째 사나이는 공포감에 사로잡혀 무기를 버리고 도망치려고 했다. 미
     카리는 최후의 두 발로  그의 등골을 부쉈다. 그러자 사나이는 불타고 있는 
     트럭의 잔해 속에 꼬꾸라졌다.
       피어 오르는 연기 너머에  있는 집들에서 마을 사람들이 겁을  집어 먹은 
     얼굴로 모습을 드러냈다.  미카리는 권총에서 탄창을 빼내고 주머니에서 떨
     리는 손으로 한 줌의 탄알을 꺼내 꼼꼼히 탄창에 집어 넣었다.
       배를 맞은 사나이가 신음 소리를 내면서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미카리는 
     그의 머리를 쏘았다.
       존 미카리는 베레모를 집어  피가 흘러 나오는 상처를 막고  똑바로 앉아 
     다가오는 마을 사람들에 대비해서 권총을 바로잡았다.
       한 시간뒤, 외인부대의 순찰대가 미카리를 발견했을 때는, 그는 여전히 시
     체에 둘러싸여 의식을 잃지 않고 앉아 있었다.
       참으로 얄궂게도 다음날인 7월  2일은 독립기념일이 되었고, 7년 간의 전
     쟁이 끝났다.
       7월 27일, 존 미카리는 육군 수훈십자훈장을 수여 받았다. 그 이튿날 조부
     가 그가 있는 병원을 찾아왔다.
       조부는 70세가 되어 있었으나 건강은  아직 좋아 보였다. 침대 옆에 앉아
     서 한참 동안 훈장을 보고 나서 조용히 말했다.
       "사령부에 가서 얘기를 하고 왔다. 너는 아직 21세가 되지 않았으니까, 손
     만 잘 쓰면 제대를 할 수 있을 것 같더구나."
       "네, 저도 알고 있읍니다."
       조부는 거의 3년 전, 그  여름날 저녁에 아테네에서 입에 담았던 말을 되
     풀이했다.
       "너는 다시 살아 있는 사람들의 세계로 되돌아오기로 결심한 것 같구나."
       "물론입니다."
       하고 존 미카리는 대답했다.
       "언제든지 삶은 죽음을 압도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는, 존 미카리 상급 하사관이 명예 및 충성스러운 태도로 2년간 군무에 
     복무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훌륭한 상장을 받은 다음, 부상이라는 이유로  연
     한을 다 채우지 못하고 제대를 하게 되었다.
       그 상장의 내용에는  너무나 많은 공훈의  사실이 적혀져 있었다. 가슴에 
     명중한 두 발의 총탄은  왼쪽 폐를 심하게 손상시켰기 때문에, 미카리는  흉
     곽 수술을 받기 위해 런던 병원에 입원했다.
       그 후 존  미카리는 그리스로, 아테네가 아니라 이도라  섬으로 돌아갔다. 
     미카리가 살게 된  별장은 모로스 너머의 바다로 튀어나온  갑 근처에 있었
     는데, 배후에는 솔밭이 이어지는  산밖에 없었다. 황량한 미개척지로 육지로
     부터는 도보나 노새를 타고 갈 수 밖에 없었다.
       가사를 돌봐 달라고 하기  위해서 존 미카리는 하구의 돌출부에  지은 오
     두막집에 사는 농부의 노부부를 고용했다. 코스타스 노인이 필요에 따라  배
     를 띄우고 이도라 섬의 거리에서 식료품  같은 것을 사입하는 것 이외에 정
     원과 수도, 발전기의 유지를 맡았다.  그리고 그의 아내가 가사와 요리를 담
     당했다.
       대부분의 시간을 존 미카리는 혼자 보냈으나, 이따금 조부가 찾아와서 함
     께 머물렀다. 두 사람은 저녁에는 소나무 장작이 타는 난로를 앞에 두고  앉
     아서 모든 일들에 대해서 몇 시간이고 얘기를 나누었다.
       미술, 문학, 음악, 그 밖에 미카리가 전혀 무관심한 정치 얘기조차도 화제
     가 되었다.
       한 가지, 알제리아  문제는 화제에 오르지 않았다. 노인도  물으려고 하지 
     않았고, 미카리도 결코 입에 담지  않았다. 알제리아전쟁 같은 것은 전혀 없
     었던 것 같았다.
       전쟁의 2년 동안 그는 피아노에  한 번도 손을 대지 않았으나, 지금은 다
     시 치기 시작하여, 건강을 회복하기까지의 9개월 동안 피아노 앞에  앉는 시
     간이 차츰 많아져 가고 있었다.
       1963년 7월의 조용한 여름 날 저녁, 조부가  머무르고 있을 때, 존 미카리
     는 저녁식사 후에 바하의 '프렐류드와 푸가, E샵 장조'를 치기 시작했다. 이
     것은 아테네에서의 저녁, 그가  파리로 가기로 곁심한 날 저녁에 연주한  곡
     이다.
       몹시 조용했다. 테라스 쪽으로 열린  창 너머로는 해상 1마일 앞에 떠 있
     는 도고스 섬  뒤로 태양이 가라앉으려 하고 있고  하늘이 오렌지색으로 불
     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조부가 한숨을 지었다.
       "또 시작할 생각이 들은 모양이로구나."
       "네."
       존 미카리는 대답하고 손가락을 구부렸다.
       "이쯤에서 명백히 방침을 정해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존 미카리는 런던의  왕립 음악학교를 선택했다.  파크 레인 근처의 어퍼 

제 목 : 제1장 첫번째 살인 그리고 첫경험 - 6
       이전의 습관은 쉽게는  없어지지 않았다. 일주일에  세 번 미카리는 어떤 
     유명한 체육관에서 운동을 했다.
       외인부대에서의 체험은 뼛속까지  새겨져 있어서 완전히 잊어  버릴 수는 
     없었다. 그렇게 깨달은 것은 어떤 비오는 날 밤, 12시 조금 전에 그로브너광
     장에서 골목으로 들어간 곳에서 두 명의 젊은이에게 습격당했을 때였다.
       한 명이 등 뒤에서 덤벼들어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또 한 명이 옆집의 
     지하로 통하는 난간 옆에 있는 입구에서 모습을 나타냈다.
       존 미카리의 오른발이  날쌔게 움직여 상대방의 사타구니를  차고 뒤이어 
     무릎이 안면을 강타했다.
       그러자 젊은이는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꿇었다. 뒷쪽에 있는 사나이가 낭
     패한 나머지 팔의 힘을  늦췄다. 미카리는 몸을 흔들어 빼내고 오른쪽 팔꿈
     치를 작은 원을 그리면서  등 뒤로 휘둘렀다. 그러자 뚜렷이 턱뼈가 부서지
     는 소리가 들리고 습격자는 우는 소리를 내면서 무릎을 꿇었다.
       미카리는 습격자의 몸을  재빨리 타고 넘어서 폭포수처럼  쏟아붓는 빗속
     으로 순식간에 사라져 갔다.
       학교 안에서의 그의  평판은 3년간의 엄격한 생활을 보내고  있는 사이에 
     높아져 갔다. 성적은  좋았다기 보다는 뛰어나 있었다.  모두가 그것을 알고 
     있었으며, 미카리도 알고 있었다.
       미카리는 친구를 사귀지 않았다. 모두가 그를 싫어한  것은 아니다. 그 반
     대로 대단히  매력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 데도  접근하기 힘든 
     구석이 있었다. 아무도 뛰어 넘을 수 없는 울타리 같은 것이 있었던 것이다.
       여자는 많이 있었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 그의 욕망을 조금이나마 자극
     할 수 있는 여성은 없었다.  잠재적으로 동성애의 경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에게 있어서 여성 관계는 전혀 무관심한 것이었다.
       다만 존 미카리가 여성에게 미친 영향은 상당한 것으로, 섹스 기교가로서
     의 평판은 거의 전설의 경지에까지 도달해 있었다.
       음악에 관해서는 졸업하는 해에 미카리는 레일돈 금상을 수상했다.
       그래도 아직 충분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한 인간에게는 만족이란 
     것이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존 미카리는 비엔나로 가서 일 년 동안 호
     프만의 지도를 받았다. 최후의 연마를 가한 것이다.
       그리고 1967년 여름, 존 미카리는 준비를 완료했다.
       음악계에서 옛날부터 내려오는 농담  중에, 최초의 연주회의 무대에 올라
     가는 쪽이 그 무대에서 성공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고 하는 농담이 있
     다. 존 미카리는  그럴 마음만 있으면 어느  정도까지 돈의 힘을 빌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대리인에게 돈을 지불하면 런던이나  파리의 연주회장을 빌릴 수가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은 그의  자존심이 용서하지 않았다. 그는 세상 사람들의 마
     음을 사로잡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람들의  귀를 기울이게 하는 것이다. 그
     러기 위해서는 한 가지 방법 밖에는 없었다.
       그리스에서 짧은 휴가를  보낸 뒤, 존  미카리는 영국의 요크셔로 돌아와 
     세계에서 가장 명예로운  피아노 콩쿨의 하나인 리즈음악제에 참가했다. 여
     기에 입상하면 그 순간부터 명성과 연주여행이 약속되어 있었던 것이다.
       존 미카리는 3위에 입상하고, 그 즉석에서 유력한 대리인 3개사로부터 계
     약의 권유를 받았다. 그는 어떤 제의도 거부하고 한 달 동안 런던의  아파트
     에 틀어 박혀 하루 14시 간의 맹연습을  거듭한 뒤, 그 이듬 해 1월, 잘츠부
     르그로 갔다.
       그곳의 피아노 경연 대회에서 존 미카리는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48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당당히 1위로 입상했다. 그때 연주한 것은  라프마니노프
     의 '피아노 협주곡  제 4번'으로, 그 작품은 나중에 그의  간판 작품이 되었
     다.
       페스티발이 개최되고 있던 7일 동안  미카리의 조부는 잘츠부르그에 있었
     다. 파티가 끝나고 사람들이 돌아간  뒤, 조부는 발코니에 서서 시가를 바라
     보고 있는 손자의 곁으로 두 개의 샴펜 글라스를 갖고 왔다.
       "이제 세계는 너를 위해 있구나. 모두가 너를 찾고 있어. 어떤 기분이냐?"
       "별로예요."
       미카리는 이렇게 대답하고 차거운 샴펜을 마셨다.
       그때 돌연 웬일인지  4명의 농민 게릴라가 불타는 트럭을  돌아 웃으면서 
     다가오는 모습이 뇌리에 떠올랐다.
       "이렇다 할 느낌은 없읍니다."
       그로부터 2년  동안, 창백하고 핸섬한 얼굴에서  검은 눈동자로 응시하는 
     미카리의 포스터가 런던, 파리, 로마,  뉴욕을 장식하고, 그의 명성은 높아져 
     갔다. 신문이나 잡지는 2년간의  외인부대 생활과 훈장을 받았을 정도의 용
     감성을 떠들어댔다.
       그리스에서는 국민적 영웅이 되고, 아테네의 연주회는 언제나 초만원이었
     다.
       다만 1967년 4월의 군사  쿠데타 이후, 장교들이 정권을 잡고 콘스탄티노
     스 국왕이 로마로 망명하고 나서는 그리스의 사태는 달라져 있었다

제 목 : 제1장 첫번째 살인 그리고 첫경험 - 7

       디미트리스 미카리는 76세가 되었고  나이에 걸맞게 늙었다. 여전히 밤에
     는 자택을 개방하고 있었으나, 찾아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민주전선당에 호의를 가진 그의  활동 탓으로, 정부로부터 점점더 차거운 
     눈으로 보여졌고, 그가 발행하고 있던 신문은 몇 가지 구실 아래 이미  발행
     을 금지당하고 있었다.
       "정치 같은 것은."
       하고 미카리는 조부가 찾아왔을 때 말했다.
       "넌센스입니다. 어째서 스스로 골치 아픈 일에 말려드는지 모르겠어요."
       "그게 아니다. 내 경우는 제대로 일을 해나가고 있는 것이야."
       하고 조부는 미소를 지었다.
       "특권적 지위라고 말할 수 있는 입장에 있지 않느냐? 세계적인 명사를 손
     자로 두고 있으니까 말이다."
       "알겠읍니다."
       하고 존 미카리는 말했다.
       "과연 군사평의회가 권력을 장악하고 그  사람들은 미니 스커트를 싫어하
     고 있읍니다.  그래서 어쩌겠다는 것입니까?  나는 현재의 그리스보다 훨씬 
     지독한 장소에 있어 본 적이 있읍니다."
       "정치범은 헤아릴 수 없이  많고, 교육제도는 어린이의 사상 교육에  이용
     당하고, 좌익은 거의 말살되어 버렸다. 이래 가지고는 민주정치 발상의 땅이
     라고 말할 수가 있겠니?"
       그런 얘기들 중 어느  것 하나도 미카리의 마음을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
     다. 이튿날 존 미카리는 파리로 비행기를 타고 날아갔고, 그날 밤 쇼팡의 리
     사이틀에 출연했다. 국제적인 암 연구를 원조하기 위한 자선 연주회였다.
       한 통의 편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런던의 대리인인 부르노 피
     셔로부터 보내  온 것으로, 잉글랜드,  웨일즈, 스코틀랜드에로의 가을 연주 
     여행을 의뢰하는 것이었다.
       리사이틀이 끝난 뒤, 미카리가 분장실에서 그 편지를 읽고 있으려니까, 노
     크소리가 들리고 뒷문 수위가 얼굴을 디밀었다.
       "손님이 찾아오셨읍니다, 뭇슈 미카리."
       수위를 옆으로 밀어젖히고 머리가  벗겨  가는, 검은 수염을 기른 덩치가 
     큰, 억세 보이는 사나이가 모습을  나타냈다. 낡은 트위드 양복 위에 초라한 
     레인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오랜만이군, 존,  보고 싶었네. 쟈로일세. 제2공정연대  제3중대의 상사였
     고, 엘 케빌에서 함께 야간 투하에 참가했잖은가?"
       "기억하고 있네."
       하고 미카리가 말했다.
       "자네는 그때 발뒤꿈치를 다쳤었지."
       "그래서 게릴라가 방위선을 돌파해 왔을 때, 자네는 나와 함께 뒤에  남았
     었지."
       쟈로는 손을 내밀었다.
       "자네에 관해서는 신문에서 읽었지.  오늘 밤 연주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찾아왔네. 음악을 듣자는 것은 아닐세  . 나로서는 소귀에 경 읽기나 
     마찬가지니까 말일세."
       쟈로는 싱긋이 웃었다.
       "'시디 벨 압베스'의 옛날  친구에게 인사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걸세."
       그의 몸차림은 초라했고, 돈을 빌리러 온 것인지도 몰랐으나, 쟈로는 옛날 
     일을 생각나게 했다. 왜 그런지 그에게는 그리운 무엇인가가 있었다.
       "찾아와 주어서 반갑네. 마침  돌아가는 길 일세. 한 잔  하지 않겠나? 이 
     근처에 술집이 있을 거야."
       "사실은 말일세, 난 여기서  한블럭 떨어진 곳에서 자동차 정비공장을  하
     고 있네."
       하고 쟈로가 말했다.
       "난 그 위의 조그만 아파트에서 살고 있네. 마침 집에 좋은 술이 있네. 진
     짜 나폴레옹이야."
       "이거 첫 초대에 거절할 수야 없지."
       하고 미카리가 말했다.
       거실 벽에는 쟈로의  외인부대에서의 경력을 나타내는 사진이  빈틈 없이 
     붙여져 있고, 찬장 위에는 하얀  케피 모자와 견장들이 진열되어 있고, 방안
     은 온통 기념품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나폴레옹 브랜디는 최고급품으로 쟈로는 상당히 빨리 취해 버렸다.
       "자네는 그때 착출당해서 예의 그 반란에 참가했던 것 같은데......."
       하고 미카리가 말했다.
       "극우조직  OAS(역자주 :  미주기구=1948년에 결성되고 미국과 중남미의 
     경제, 정치, 군사의 협력을 목적으로 함)에 깊이 빠져 있었잖은가?"
       "그랬었지."
       쟈로는 호전적인 어조로 대답했다.
       "인도지나에서의 전투 때부터  참가했었네. 내가 디엔비엔푸에 있을  때는 
     말일세, 저 땅딸보  황색인종이 나를 6개월 동안이나 포로 수용소에  처넣었
     다네. 돼지  취급을 받았지. 그  다음엔 알제리아로  파견되었으나 대실패를 
     했네."


제 목 : 제1장 첫번째 살인 그리고 첫경험 - 8

       "이젠 OAS도 그다지 전망이 없지 않은가?"
       하고 미카리가 말했다.
       "저 늙은이는 바스티안 텔리를  공격했을 때, 본격적으로 한다는 것을  외
     신에 흘렸다구. 그 작자를 암살하려고 몇 번 시도했는지는 모르지만, 한번도 
     성공하지 못했지?"
       "응, 그래."
       쟈로는 술을 마시면서 말했다.
       "나도 한몫 단단히 했었지. 이것 좀 보겠나?"
       쟈로는 방구석에 있는  나무상자 뚜껑을 손으로 더듬어  자물쇠를 움켜쥐
     고 열쇠를 꽂아 열었다. 그 속에는  각종 무기가 있었다. 여러정의 기관단총
     과 각종 권총 및 수류탄이 들어 있었다.
       "4년 전부터 이렇게 보관하고 있네."
       하고 쟈로가 말했다.
       "4년 동안이나 말일세. 그런데 조직이 붕괴되어 버렸단 말야. 이젠 끝장일
     세. 요즘 사나이는 다른 방법으로 살아나가야 된다구."
       "자동차 정비 사업을 하면서 말인가?"
       쟈로는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댔다.
       "쉿! 이쪽으로 와 보게. 어차피 이 술병은 바닥이 났으니까 말야."
       쟈로가 수리장 안쪽에 있는 문 자물쇠를 열자, 색색으로 표시한 종이상자
     와 나무상자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는 상자 하나를 열더니 또 한  병
     의 나폴레옹을 꺼냈다.
       "얼마든지 있다네."
       하고 쟈로는 팔을 흔들었다.
       "여기엔 무엇이든지 다 있네. 자네가 마시고 싶은 술은 뭐든지 말일세. 담
     배, 통조림도 있다네. 주말까지는 깨끗이 다 처분할 수가 있네."
       "어디서 입수했는데?"
       하고 존 미카리가 물었다.
       "지나가는 트럭 짐칸에서 슬쩍한 것일세."
       쟈로는 술에 취한 채 웃었다.
       "아무 문제도 없네. 외인부대에 있을 때처럼 군인 복장을 하고 다니지  않
     아도 되고 말일세. 기억해 두게나. 뭐든지  필요한 것이 있으면 옛친구 쟈로
     에게 찾아오게. 나한테는  여러 가지 연줄이 있으니까  말일세. 무슨 물건이
     든 손에 넣을  수 있네. 약속하겠네. 자네가 벨 헵베스  이래의 전우이기 때
     문만이 아닐세. 자네가 없었더라면  난 아마 그때 그 게릴라한테 잡혀 가서 
     페니스를 뽑혔을 테니까 말야."
       쟈로는 이미 완전히 취해 있었다. 미카리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맞장구
     를 쳤다.
       "잘 기억해 두겠네."
       쟈로는 이로 콜크 마개를 땄다.
       "외인 부대에 건배! 세계에서 가장 결속이 강한 클럽에!"
       쟈로는 병 나발을 불고는 미카리에게 건네 주었다.
       일본에서의 연주 여행을 하던 중에 미카리는 조부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노인은 연로하여 몸이  쇠약해진 데다가 허리의 류마티스  탓으로 지팡이를 
     의지하여 걸어다녔다. 그것이  아파트의 타일을 바른 발코니에서 발을 헛디
     뎌 그 아래 길거리로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미카리는 중지할 수 있는  콘서트는 모두 취소하고 비행기로 귀국했는데, 
     아테네에 도착한 것은 1주일 후의 일이었다. 그가 없는 동안, 검시관은 장례
     식을 행하도록  명령하여 고인이 변호사에게  해 둔 지시에  따라서 유체는 
     화장되었다.
       미카리는 언제나처럼  이란으로 도피하여, 모로스  건너편의 반도에 있는 
     별장으로 돌아왔다. 아테네에서 이란의 항구까지는 소형 쾌속정으로 건넜다. 
     항구에는 코스타스 노인이 소형 증기선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증
     기선에 올라타자 코스타스 노인은 잠자코 봉투를 건네 주고는, 엔진에  시동
     을 걸어 배를 항구에서 떼어 놓았다.
       미카리는 한눈에 조부의 필적임을  알았다. 손가락을 약간 떨면서 미카리
     는 봉함을 뜯었다. 짧은 문면이었다.
       네가 이 편지를 읽을 때는  나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게다. 늦든 빠르든
     간에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그러니까 너무 슬퍼하지 말거라. 이제는 
     나의 그 어리석은  정치 이야기에 너는 진절머리를 느낄  필요도 없게 되었
     구나. 결국 최후는 아마 늘 똑같을 것이다.  나에게는 단 한 가지 확실한 것
     이 있었단다. 너는 나의 만년을 긍지와 기쁨으로 밝은 불을 켜 주었지만, 특
     별히 너의 애정에 고마움을 느낀다. 너한테 나의 사랑과 축복을 남긴다.
       미카리의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가슴이 조여  왔다. 별장에 도착하자마자 
     존 미카리는 등산화와  허름한 옷으로 갈아입고 산에 올라  녹초가 될 때까
     지 몇 시간이고 계속 걸었다.
       그날 밤은 아무도 살지  않는 농가에서 보냈지만,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
     했다. 그다음 날도 산에  올라가 계속 돌아다니다가 다시 지난 밤처럼 보냈
     던 것이다.
       3일째 되는 날에 미카리는  비틀거리는 다리를 끌고 별장에 돌아왔다. 코
     스타스 노인과 부인이  침대까지 미카리를 부축했다. 그리고 노부인은 미카
     리에게 약초를 먹였다.


제 목 : 제1장 첫번째 살인 그리고 첫경험 - 9
       미카리는 24시간 동안 푹 잠에 빠진 뒤 평온한 기분으로 잠을 깨고, 다시 
     자제심을 갖게  되었다. 이젠 괜찮았다.  미카리는 런던의  피셔에게 전화를 
     걸어서 연주를 다시 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어퍼 그로브나  스트리트의 아파트에는 편지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미카리는 그 중에서 대충대충 골라 읽어 보았다. 그중 한 통은 그리스  우표
     가 붙어 있고, <친전>이라고 써 있었다.
       그것은 그의 에이전트 앞으로  보내졌다가 회송된 편지였다. 미카리는 봉
     함을 얼른 뜯어 보았다. 내용은 백지에 타이핑되어 있었으나, 발신인의 주소
     나 이름은 없었다.
       디미트리스 미카리의 죽음은 사고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살해되었읍니다. 
     그 상황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최근에  민주전선을 위하여 활동해 왔기 
     때문에 정부의 어느  부문으로부터 압력을 받아 왔읍니다. 자유를 사랑하는 
     각계각층의 그리스 국민은, 정치법이  재판도 없이 투옥당하고 있다는 것과, 
     온갖 폭행, 고문, 살인이 자행되고 있는 실상을 문서로 정리하여 국제연합에 
     제출하려 하고 있었읍니다. 디미트리스 미카리는 그 문서가 있는 곳을  알고 
     있는 자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6월 16일 밤, 육군 정보부의 정치부문 책임자 
     요르고스 바실리코스 대령이  호위병 안드레아스 아레코 중사와  니코스 페
     트라키스 중사를 대동하고  그의 아파트를 방문했읍니다. 문서가 있는 곳을 
     알아내기 위하여 그들은  디미트리스를 마구 구타한 다음, 얼굴의 여기저기
     와 국부를 라이터로  지져댔읍니다. 이 고문의 결과,  그가 마침내 절명하자 
     바실리코스 대령은 사고사로  보이게 하기 위해서 유체를  발코니에서 떨어
     뜨리도록 명령했던 것입니다. 검시관은 명령받은 대로 보고서를 작성하였고, 
     실제로 유체도  보지 않은 채 화장시켰으므로,  학대나 고문의 증거는 아무 
     것도 남겨지지 않았읍니다. 아레코와 페트라키스 두 사람이 술을 마시며  한 
     말을, 우리들의 정치 목적에  호의를 가진 사람들 여러 명이 들었던  것입니
     다.
       미카리의 내부에서 분노가 불같이 치밀어 올랐다. 온몸을 감싼 그 육체적 
     고통은 이제까지 한 번도 체험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강렬했다. 그는  경련
     을 일으키면서 몸을 굽혀 무릎을 붙이자 마치 태아처럼 둥그렇게 되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렇게 하고 있었는지 그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저녁 때에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 채 어둠이  깔리고 있는 거리를 
     여기저기로 마구 헤매고  있었다. 마침내 미카리는 조그마한 다방에 들어가 
     커피를 주문하고 지저분한 테이블에 앉았다.
       그때의 기분이, 그때 파리의  시장 근처에 있는 카페에 들어갔을 때의 기
     분이 되살아 나는 듯했다. 누군가가 '런던 타임즈'지를 두고 갔다.  미카리는 
     신문을 손에 들고 기계적으로 눈을 주었다. 그렇게 하여 2면 아랫쪽에 조그
     마한 제목을 발견했을 때, 미카리의 몸은 금새 굳어졌다.
       <그리스 육군의 대표, NATO의 협의를 위하여 파리를 방문>
       기사를 읽을 것까지도 없이, 누구의 이름이 쓰여져 있는지 미카리는 예측
     할 수가 있었다.
       그 이후부터는 모든 일이  잘 풀려서, 마치 하느님의 계시라도 받은 듯이 
     전화벨이 울렸다. 부르노 피셔로부터였다.
       "존 미카리인가? 돌아와 주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나? 자네가 출연해 
     주어야 할 음악회가 두 개나 있네.  수요일과 금요일이야. 호퍼가 런던 교향
     악단과 '슈만의 E단조'를 협연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만  공교롭게도 손목
     을 뼈서 말일세......."
       "수요일이라구?"
       미카리는 자동적으로 물었다.
       "앞으로 3일밖에 안 남았잖은가?"
       "부탁하네. 자네는 이 곡을  두 번이나 레코드에 취입하지 않았나? 한  번
     의 리허설로 충분할 걸세. 분명 센세이션을 일으킬 걸세!"
       "음악회 장소는 어딘가? 페스티발 홀인가?"
       하고 미카리가 물었다.
       "아닐세. 영국이 아니고  파리라네, 미카리. 곧  파리행 비행기를 타야  할 
     텐데, 자네 상관 없겠지?"
       "응, 파리라도 괜찮네."
       하고 존 미카리는 조용히 대답했다.
       1967년 4월 27일 새벽에 그리스의 권력을 장악한  군사 쿠데타는 불과 몇
     명 안 되는 대령들에 의해서 극비리에 계획된 것으로, 그것이 성공의 큰  원
     인을 이루었다. 사건이 있은 직후의 신문 보도는 매우 상세한 것이었다.
       미카리는 파리로 출발하기 전에  오후 내내 대영박물관에서 보냈는데, 쿠
     데타 직후에 나온 신문잡지를 될 수 있는 대로 모두 빌려서 보았다.
       그가 찾고 있는 것은 사진뿐이었으므로 그렇게  시간은 많이 걸리지는 않
     았다. 미카리는 사진 두 장을 찾아냈다.  한 장은 '타임'지에 게재된 것으로, 
     키가 크고 핸섬하고 검고 두터운  수염을 기른 45세의 요르고스 바실리코스 
     대령이 사실상의 그리스  독재자인 파파도푸로스 대령과 나란히  찍은 사진
     이었다.



제 목 : 제1장 첫번째 살인 그리고 첫경험 - 10

       또 한 장은 런던의 그리스인 망명자들이  간행하는 잡지에 게재되어 있었
     다. 거기에는  바실리코스가 두 명의 중사와  나란히 서 있었다.  그 아래의 
     사진 설명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학살자와 그 부하>
       미카리는 그 페이지를 신중히 잘라내서 숨겨 갖고 나왔다. 다음날 아침에 
     파리에 도착한 미카리는  그리스 대사관에 찾아가서 문화담당관  메로스 박
     사를 만났다. 메로스 박사는 매우 반가와했다.
       "아니, 이거 미카리 씨 아니오? 정말  반갑군요. 당신이 파리에 올 줄이야 
     꿈에도 생각지 못했소."
       미카리는 사정을 설명했다.
       "물론 파리 신문에는 몇몇 광고를 내서 연주하는 것은 나이지, 호퍼가  아
     니라는 것을 팬들에게  통지해 두었읍니다만, 이쪽 대사관에도 알려 드리고 
     싶어서 찾아왔읍니다."
       "그것 참 고마운 일이군요.  대사님께서도 기회를 놓치시면 틀림 없이  화
     내실 겁니다. 뭐 좀 마실 것을 드릴까요?"
       "입장권은 제가 준비하겠읍니다."
       하고 미카리는 메로스 박사에게 말했다.
       "대사님의 입장권과 함께 오실 분의 입장권을 말입니다. 마침  아테네에서 
     이쪽으로 고관께서 내왕했다는 기사를 읽었읍니다만."
       메로스 박사는 세리를 따른 글라스를 건네 주면서 얼굴을 찌푸렸다.
       "반드시 문화적인 흥미를 가진 분들이라고는 말할 수 없읍니다.  정보부의 
     바실리코스 대령입니다만. 고상한 말투로 말하자면......."
       "네, 그래요."
       하고 미카리가 말했다.
       메로스 박사는 흘끗 시선을 손목시계에 주었다.
       "저기 오시는군요. 보시겠읍니까?"
       미카리는 창가로 다가갔다. 검정색 메르세데스가 안뜰에서 대기하고 있고, 
     운전수가 자동차 옆에 서 있었다. 거기에 바실리코스 대령이 아레코  중사와 
     페트라키스 중사를 거느리고  입구의 계단을 내려왔다. 아레코 중사는 운전
     수와 앞좌석에 앉고, 바실리코스 대령은 뒷좌석에 앉았다.
       그 메르세데스 앞에는 그리스기가 꽂혀 있어서 착각할 리가 없었지만, 그
       "열 시 정각이로군요."
       하고 메로스 박사가 말했다.
       "일전에 체류했을 때와 똑같습니다. 저래도 그분의 위장이 정상이라면  상
     당히 건강한 남자임에 틀림  없어요. 낮의 일과로 쌍 시르에 있는 육군사관
     학교에 갑니다. 무돈의  숲과 베르사이유를 지나서 말이오.  대령님은 그 코
     오스의 경치를 마음에 들어한다고 운전수가 말하더군요."
       "숨을 좀 돌릴 시간은 갖지 않습니까?"
       하고 미카리가 말했다.
       "단조로운 분이신가보군요."
       "그분은 소년을 좋아하신다더군요. 단지  소문인지도 모릅니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읍니다. 그분의 머리 속에서는 음악가는 매우 낮은  지위로밖
     에 생각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미카리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물론 만인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것은 무리겠지요. 하지만 대사님과  당
     신만은 꼭 참석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메로스 박사는 미카리를 전송하러 정면 입구까지 따라 나왔다.
       "당신의 조부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나도 마음이 아팠소.  당신
     한테는 크나큰 충격이었을 겁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빨리 연주 활동을  재개
     하시다니...... 당신의 용기에는 그저 감탄할 뿐입니다."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합니다."
       하고 미카리가 말했다.
       "조부님은 제가 아는 한 최고의 인물이었으니까요."
       "그리고 당신을 무척 자랑으로 여기셨지요?"
       "물론입니다. 조부님의 사망을 서글퍼한 나머지 연주 활동을 재개하지  않
     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최대의  배신이 될 겁니다. 이번  파리 여행은 추모의 
     촛불에 불을 붙이는 나름대로의 방식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미카리는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가서는 렌트카에 올라탔다.
       그날 오후, 존 미카리는 런던 교향악단과 리허설을 가졌다. 지휘자의 컨디
     션은 최고였다. 지휘자와 미카리는 금새 호흡이 맞았다.
       그러나 지휘자는 그 다음  날 2시부터 4시까지 다시 리허설을  갖자고 부
     탁했다. 연주 시작은 7시 30분부터였다. 미카리는 동의했다.
       그날 오후 5시 30분, 미카리는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도
     로가에 정차한 낡은 시트로엔 속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쟈로가 핸들을  잡고 
     있었다.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알려 주면 안 되겠나?"
       하고 쟈로가 불평을 늘어놓았다.
       "나중에 말해 줄께."


제 목 : 제1장 첫번째 살인 그리고 첫경험 - 11

       미카리는 쟈로에게 담배를 내밀었다.
       "뭐든지 부탁할 일이 있으면 찾아오라고 말했잖나?"
       "그러긴 그랬지만......."
       바로 그때, 그리스기를 달은 검정색  메르세데스가 지나갔다. 그러자 미카
     리는 절박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저 차를 미행해 주게. 서두를 필요는  없네. 저 친구는 스피드를 40 이상
     은 내지 않을 테니까."
       "그렇지도 않아. 이 차는 고물차란 말야."
       하고 시동을 걸면서 쟈로가 말했다.
       "그 이유는 간단하네. 대령은 풍경 감상을 좋아하거든."
       하고 미카리가 말했다.
       "대령이라니?"
       "잠자코 운전이나 하게."
       메르세데스는 무돈 숲을 가로지르는 도로로 들어섰다. 황혼이 질 때의 공
     원은 조용하고 인기척이 없었다. 메르세데스와의 간격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때 한 대의  오토바이가 후래쉬를 점멸시키면서 맹렬한  스피드로 지나
     갔다. 그 사나이는  헬멧에 선그라스를 끼고, 검정색  케이프 모양의 코트를 
     걸치고 서브머신 카빈을 어깨에 둘러멘, 좀 불길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오토바이는 메르세데스를 추월하여 사라져 갔다.
       "제기 랄!"
       하고 쟈로는 창 밖에 침을 탁 뱉았다.
       "요즘엔 CRS(공화국 치안 경비대)의  똥돼지들이 모두 저렇게 멋진 오토
     바이를 타고 돌아다닌다니까. 저놈들은 폭력 진압용 경찰이라구."
       미카리는 싱긋 웃고는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속도를 늦춰 주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어."
       "도대체 어떻게 할 셈인데?"
       그때서 비로소 미카리가 이야기를 했다.  시트로엔은 매우 흔들렸다. 쟈로
     가 급브레이크를 밟아서 도로가에 차를 세웠던 것이다.
       "자넨 지금 제정신이 아니야. 그건 도저히 무리라구!"
       "아냐, 자네가 도와주기만  하면 할 수 있어. 나한테  필요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다 제공해 줄 거지?"
       "그거야 어쩔 수 없지 뭐. 하지만  말야, 전화로 한 마디만 하면 경찰에겐 
     충분하다구."
       "자네 머리는 좀 둔한 편이로군."
       하고 미카리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존 미카리일세. 로마, 런던, 파리, 뉴욕에서 연주를 하고  있네.그런 
     내가 이런 미친  짓을 할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을 거야. 어떻게 내가 
     이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조부님은 우연히 발코니에서 떨어져 죽었거
     든. 법원에서는 그렇게 판단하고 있네."
       "중단해 주게!"
       쟈로는 울부짖듯이 말했다.
       "하지만 자넨 도둑놈일세. 그건 그날  밤, 정비공장에서 그런 물건들을 보
     여주었을 때 확실히 알았네. 게다가 자네는 OAS에도 깊숙히 관여하고 있잖
     은가?"
       "그런 것은 아무도 증명할 수가 없을 걸세."
       "아냐, 증명할 수 있어.  자네 이름을 가지고 OAS와 관계가  있다고 약간 
     흘리기라도 하면, 제5부는 가만히 있지 않을 걸세. 그 그룹의 절반은 알지에 
     이래의 자네 옛친구들이니까  무슨 짓을 할 것인가는  뻔하지 않은가? 자네
     를 테이블  위에 올려 놓고서  중요한 부분에 코드를  연결하고서 스위치를 
     넣을 걸세. 자네는  30분도 채 되지 않아서 몽땅 지껄여댈  걸세. 그래도 놈
     들은 믿지  않겠지. 그리하여 좀더  알아내려고 고문을  계속할거야. 결국에 
     가서는 자네는 죽든가, 침을 흘리는 백치가 될걸세."
       "알았네. 좋아. 자네를 돕겠네."
       하고 쟈로는 중얼거렸다.
       "고맙네. 자네는 정직하게 살아가기만 하면 되는 걸세. 자, 그럼 가자구."
       미카리가 창을 열자  차가운 밤 공기가 뺨에 스쳤다.  최근 몇 년 동안은 
     미카리는 이  순간처럼 생의 충실감을 느낀  적이 없었다. 온신경이 완전히 
     하나로 되어 긴장되어 있었다. 마치 무대의 신으로부터 라이트를 받으며  피
     아노에 다가가기 직전의 한순간, 박수가 터져 나오고 커다란 물결처럼  밀어
     닥쳐 오는 바로 그 순간과 마찬가지였다.
       그 다음 날 오후에 조금 지나서  메르세데스를 운전하는 대사관의 운전사 
     파로스는 핸들을 꺾어  베르사이유를 왼쪽으로 보면서 무돈  숲으로 들어섰
     다. 아레코 중사가  옆에 앉아 있었다. 페트라키스  중사는 뒤의 보조석에서 
     서류를 읽고 있는 바실리코스 대령과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간막이  유리는 
     닫혀 있었다.
       오후에는 비가 계속 억수같이  쏟아져서 공원에는 사람 그림자도 없었다. 
     운전사 파로스는  언제나처럼 자동차를 천천히  몰고 있었는데, 저물어가는 
     어둠 속을 뒤에서 라이트를 켜고 다가오는 자동차가 있음을 알았다.  제복인 
     검정 레인 코트와 헬멧을  쓴 CRS(공화국 치안 경비대) 대원이 메르세데스 
     옆에 다가와 차를 세우라고 손으로 신호를 보냈다.




제 목 : 제1장 첫번째 살인 그리고 첫경험 - 12

       비를 막기 위하여 칼라를 세우고 검정 안경을 쓰고 있어서, 파로스로서는 
     상대방의 얼굴을 전혀 알아볼 수가 없었다.
       "CRS 대원입니다."
       하고 아레코 중사가 말했다.
       간막이 유리가 열리고, 바실리코스 대령이 말했다.
       "무슨 용건인지 물어 보게."
       메르세데스가  정지하자, 그  CRS  대원은 자동차  앞에  멈추고 육중한 
     BMW(역자주 : 독일의  고급 오토바이)에서 내리더니 스탠드를  세웠다. 그
     가 가까이  다가왔다. 레인 코트는  흠뻑 젖어있고, 가슴에는  MAT49 자동 
     카빈이 늘어뜨려져 있었다.
       아레코 중사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무슨 일입니까?"
       하고 거친 프랑스어로 물었다.
       CRS 대원이 포케트에서  손을 꺼내자, 45구경 콜트가 쥐어져  있었다. 미
     국 육군이 제2차 대전 중에 사용하던 타입이었다.
       사내는 아레코의  심장을 명중시켰다. 그러자  중사의 몸은 메르세데스에 
     내던져지더니 일단 튀었다가 옆의 웅덩이에 쓰러졌다.
       보조석에 앉아  간막이에 등을 보이고  있던 페트라키스 중사는  제2탄을 
     두개골에 정통으로 맞았다. 그는 앞으로 쓰러져 즉사하여, 마치 기도하고 있
     는 것처럼 대령의 옆좌석에 고개를 쳐박았다.
       바실리코스 대령은 몸을 움츠리고 공포에 몸을 떨고 있었는데, 그의 제복
     에는 핏방울이 튀어 있었다.
       파로스는 핸들을 움켜  쥐고 있었다. 콜트의  총구가 자기 쪽으로 향해진 
     것처럼 온몸을 떨고 있었다.
       "제발...... 제발 살려 주세요!"
       최근 여러 해 동안,  존 미카리는 아테네의 사교계의 가장 엄격한 요구에
     도 합격할 정도로 고상하고 품위있는 그리스어를 구사해 왔지만, 지금은  아
     주 오래 전에 유모 카티나한테 배운  크레타 섬 농민의 악센트로 돌아와 있
     었다.
       미카리는 운전석에서 파로스를 끌어냈다.
       "넌 누구냐?"
       바실리코스 대령에게 눈을 응시한 채 미카리가 물었다.
       "파로스...... 디미트리스 파로스입니다.  단지 대사관의 운전수일 뿐입니다. 
     저에게는 아내와 자식이 있읍니다."
       "이런 못된 파시스트  똥돼지놈을 위해서 일하지 말고  좀더 나은 직장을 
     찾으란 말야."
       하고 미카리가 말했다.
       "자, 빨리 꺼져! 이 공원을 빠져 나가!"
       파로스가 비실거리며 사라지자, 바실리코스 대령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느님, 도와 주소서."
       "하느님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하겠나?"
       미카리는 크레타 사투리틀 중지하고, 검정 안경을 벗어 들었다. 놀라는 표
     정이 대령의 얼굴에 나타났다.
       "자넨가? 아니, 설마......?"
       "할아버지의 원수!"
       하고 미카리가 말했다.
       "좀더 천천히 시간을 두고 처치하고  싶지만, 그럴 여유가 나한테는 없다. 
     하지만 누구한테 복수를 당하고 있는가를 알고 지옥으로 꺼져라!"
       바실리코스 대령이 다시  말하려고 입을 열었을  때, 미카리는 차 안으로 
     들어가 미간에 대고 총을 쏘았다. 무시무시한 총탄이 그를 즉사시켰다.
       한순간 후, 미카리는 BMW를 밀어  스탠드를 들어 올리고서 그곳을 떠났
     다. 한 대의 자동차가 베르사이유 쪽으로  스쳐 지나갔다. 그 자동차가 메르
     세데스로 다가가더니 마침내 정지하는 것이 미러에 비쳤다.
       특별히 문제될 것은 없다. 미카리는 오토바이를 갈랫길로 몰아 숲 속으로 
     사라졌다.
       저녁때의 그 시각에는 공원에 사람 그림자도 없었다. 공원의 반대쪽의 눈
     에 띄지 않는  도로에서 쟈로는 낡은 시트로엔 트럭  옆에 서서 머뭇머뭇하
     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적재함 문을 땅바닥까지 기울여 놓아서 트랩처럼  되
     어 있었다. 그는 뒷바퀴를 수리하고 있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나무들 사이를 빠져 나와 다가오는  BMW의 소리가 들려 왔다. 미카리가 
     나타나서 오토바이를 적재함문  위로 끌어올려 짐칸에 집어 넣었다. 쟈로는 
     즉시 적재함문을 올리고, 서둘러 트럭을 돌리고 나서 운전대에 올라탔다. 한
     동안 도망치고 있는데, 왼편쪽 저멀리서 경찰차의 크랙숀 소리가 들려 왔다.
       미카리는 차고의  난로 앞에 서서 CRS의  제복을 작게 잘라서  불태우고 
     있었다. 플라스틱으로  된 헬멧도 불 속에  집어 던졌다. BMW  오토바이는 


제 목 : 제1장 첫번째 살인 그리고 첫경험 - 13

       거의 모든 것이 전부 플라스틱이었으므로 잘 탔다.
       미카리가 2층으로 올라가자 쟈로는 테이블에  나폴레옹 병과 글라스를 앞
     에 놓고 앉아 있었다.
       "전부 세 명이지?"
       하고 쟈로가 말했다.
       "자넨 도대체 어떤 인간인가?"
       미카리는 봉투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약속대로 1만 5천 프랑일세."
       그리고는 포케트에서 콜트를 꺼내들고 말했다.
       "이건 내가 갖고 있겠네. 나 스스로 처분하고 싶으니까."
       미카리는 발길을 되돌려 도어 쪽으로 향했다. 쟈로가 물었다.
       "어디 가는 거야?"
       "음악회가 있어서."
       하고 미카리가 대답했다.
       "자넨 잊고 있었나?"
       그리고는 시계를 보았다.
       "아직 30분 남았어. 지금 떠나지 않으면 늦겠어."
       "놀랍군 그래."
       하고 말한 뒤 쟈로는 격한 어조로 덧붙였다.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어쩌려고 그러나? 혹시 자네 일을 냄새라도 맡으
     면 어쩔 셈이냐구?"
       "그렇게 되지 않도록 바라는 수밖에 없지 뭐. 나와 자네를 위해서 말일세. 
     음악회가 끝나면 돌아올께. 그래, 11시쯤 될 거야. 괜찮겠나?"
       "그래, 좋아."
       쟈로는 지친 듯이 대답했다.
       "난 어디 갈 곳도 없으니까."
       미카리는 렌트카를 타고 나왔다. 기분은  평정을 되찾아서 좋은 편이었고, 
     위구심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쟈로는 왕년에 가졌던 그  유능함
     을 상실하고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확실히 
     알제리아 시절의 그가 아니었다.
       유감스런 일이지만 쟈로를 어떻게든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잠시 덮
     어 두기로 하자. 지금은  콘서트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미카리가 오페라좌에 
     도착한 것은 공연 시작 바로 15분 전으로, 옷을 갈아입을 시간도 부족할  정
     도였다. 그런데도  어떻게 해선가 준비를 마치고  무대 옆에 서서 지휘자가 
     올라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카리는 지휘자 뒤를 따라  우뢰 같은 박수 갈채를 받으며  무대 앞으로 
     나왔다. 음악회장은 대만원이었다.  메로스 박사와 그리스 대사  부처가 3열
     째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메로스 박사는 통로 쪽 좌석에 앉아 있었다.
       피아노 협주곡 E단조는, 슈만이 콘서트 파아니스트였던 아내 클라라를 위
     해서, 처음에는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1악장으로 이루어진  환상곡으
     로 작곡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슈만은 이것을 3악장의 협주곡으로 개
     작했는데, 이것을 '런던  타임즈'지의 음악란 담당 비평가는  야심적인 노작
     이라고 평가했다.
       그날 밤, 이 곡은 미카리의 손에 의해 광채를 발하여 청중들을 완전히 매
     료시켰다.
       그런데 간주 부분을 연주하고  있는데, 그리스 대사 부부와 문화담당관이 
     수행원이 갖고 온 전언을 듣고 자리에서 곧 퇴장했을 때, 상당한 동요가  음
     악회장에 일어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쟈로는 텔리비젼 뉴스를 지켜보고 있었다.  해설자에 의하면, 살인 사건은 
     분명히 정치적인 이유에 의한 것이며, 그것은 범인이 운전사를 도망치게  해
     준 사실과, 희생자를 파시스트라고 부른 사실에 의해서 증명되고 있다. 아마 
     파리에 망명중인 수많은  그리스인 반정부 그룹 중 하나가  손을 뻗쳤을 것
     이다. 이 사건에는  유력한 수사상의 단서가 있다. 용의자는 크레타인,  그것
     도 크레타섬 출신의 농민이다.  이것은 운전사가 단언했다. 크레타 사투리를 
     들었다는 것이다.
       유체의 사진, 특히 메르세데스의 뒷좌석에  있는 자는 너무나도 생생했다. 
     쟈로는 왕년의 미카리의 공적을 떠올렸다.
       음악회가 끝나면  다시 돌아오겠다고 미카리는 말했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한 가지밖에 있을 수가 없다.
       아직 시간이 있는 동안에 외출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누구한테 
     의논을 하면 좋을까? 물론 경찰은 안 되고, 범죄 동지도 좋지 않다.
       절반은 술취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돌연 묘안이 떠올랐다. 바로 그 인물
     은 그의 변호사인 쟝 폴 드비르 선생이었다.
       최고의 형사 전문 변호사로 어느 누구나 다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분
     이다. 쟈로 자신도 이제까지 두 번이  나 교도소에 들어갈 것을 구제받았다. 
     드비르 변호사라면 좋은 방법을 가르쳐 줄 것이다.
       지금쯤 드비르 변호사는 물론 사무실에 있지 않고 아파트에 있을 것이다. 
     3년 전에 부인이  암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그는  독신으로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아파트는 빅토르 유고 거리에서 들어간 낭테르 거리에 있다.



제 목 : 제1장 첫번째 살인 그리고 첫경험 - 14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목소리가 들려 왔다.
       "네, 드비르입니다."
       "선생님이세요? 접니다, 쟈로입니다. 만나뵙고 싶어서요."
       "또 일을 벌였나, 쟈로?"
       하고 드비르 변호사는 기분 좋게 웃어댔다.
       "그럼 내일 사무실로 찾아오게. 9시면 어떤가?"
       "내일까지 기다릴 수가 없읍니다. 선생님."
       "하지만 그랬으면 좋겠네. 난  지금 저녁식사를 하러 외출해야 하니까  말
     일세."
       "선생님, 오늘 밤 뉴스 보셨읍니까? 무돈의 숲 사건 말입니다."
       "그 살인사건 말인가?"
       드비르 변호사의 어조가 약간 달라졌다.
       "보았네만."
       "그 일로 만나뵙고 싶습니다."
       "자네 지금 차고에 있나?"
       "네."
       "그럼 15분 후에 여기로 와 주게."
       쟝 폴 드비르 변호사는 올해  나이 55세이다. 파리 법조계에서 형사 재판
     에 관한 한 가장 성공을 거둔 변호사였다. 그는 의뢰인을 위하여 법률의  범
     위 내에서 모든 술책을 부렸지만, 처리 방법은 공정하고 철저하고 정확했다. 
     고풍스런 타입의 신사인  드비르 변호사는 여러 차례  경찰에게 유리하도록 
     협력해 왔으며, 그런 쪽에서는 평판이 좋았다.
       쟝 폴 드비르 변호사의 가족은 1940년, 나찌스의 슈토카 급강하 폭격기가 
     캬레를 폭격했을 때 전멸했다. 드비르 변호사 자신은 눈이 나빠서  군복무를 
     하지 않았다.
       한편, 법률사무소에서 사무원으로 근무하고 있다가 수많은 동포들과 함께 
     동독과 폴란드로 끌려가서 강제 노동을 했다.
       전생이 끝났을 때, 다른 수많은 프랑스인과 마찬가지로 드비르도 철의 장
     막 저쪽에 억류되었으나, 간신히  1947년에 다시 프랑스로 돌아왔다. 캬레에 
     있던 가족들은 모두  타계했으므로, 드비르는 파리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
     하기로 하고 그와 같은 경우의  사람들에게 부여하는 정부의 특별 장학금을 
     이용하여 파리 대학에 들어가 법률 공부를 했다.
       여러 해가 지난 뒤 쟝 폴 드비르는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
       1955년에 비서와 결혼을 했지만, 아이는 낳지  못했다. 아내는 늘 앓아 누
     웠고, 위암으로 2년간 고생하다가 결국 세상을 떴다.
       이러한 불행은 드비르 변호사에  대한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게 하여, 경찰
     이나 법조계뿐만 아니라 범죄자들 사이에까지 동정의 공기가 퍼져 나갔다.
       이 성실하고 훌륭한  프랑스인이 사실은 그럭저럭 25년  동안이나 조국을 
     떠나 있는 우크라이나인,  니콜라이 아시모프 대령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참
     으로 아이러니칼한 얘기다.
       그는 아마 서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소련 스파이였을 것이다. KGB(역자주 
     : 국가보안위원회, 즉 소련의 비밀 경찰)가 아니라 그 만만치 않은 라이벌인 
     GRU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적군 정보부'의 공작원인 것이다.
       제2차 대전이 끝나갈 무렵부터 소련은  각지에 스파이 양성소를 설치하고
     서, 각각 특정한 나라의 특색을 훈련시키고 있었다.
       예를 들면, 그라시나에서의 공작원들은  영국의 어느 도시와 똑같이 만들
     어 놓은  도시에서 서방측의 생활과  똑같은 생활을 하면서  영어를 말하는 
     나라에서 활동하는 훈련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아시모프는 2년 동안, 환경, 문화, 요리,  복장 등 모든 것을 프랑스식으로 
     만들어 놓은 그로스니아에서 그러한 훈련을 받았던 것이다.
       아시모프의 모친이  프랑스인이었으므로 처음부터 다른  공작원보다 유리
     했다. 그의 진보는  놀라웠고, 마침내 1946년, 폴란드에서 가혹한 생활에  견
     디어낸 프랑스인 강제노동자들 속에 가담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그래서 아시모프는 1945년에 시베리아 탄광에서 폐렴으로  죽은 쟝 폴 드
     비르로 가장하여 강제수용소에 입소했다. 그리하여 1947년에 아시모프는  조
     국 프랑스로 귀환했던 것이다.
       드비르 변호사는 쟈로에게 또다시 브랜디를 권했다.
       "자아, 단숨에 마시게나. 자네에게는 필요할 거야. 정말 놀라운 얘기로군."
       "선생님을 믿어도 괜찮겠지요, 선생님?"
       하고 쟈로는 격앙된 어조로 말했다.
       "요컨대 경찰놈들이 조금이라도 냄새를 맡게 되면......."
       "안심하게나, 쟈로."
       하고 드비르 변호사는 달래 듯이 말했다.
       "전에도 내가 얘기했잖은가? 변호사와  의뢰인의 관계는 사제와 고해자와 
     마찬가지라고 말일세. 즉  내가 알고 있는 자네와  OAS와의 관계를 정보부 
     SDECE에 흘린다면......."
       "하지만 저는 어떻게 하면 좋죠?"
       하고 쟈로가 물었다.


제 목 : 제1장 첫번째 살인 그리고 첫경험 - 15


       "선생님께서 텔리비젼으로 그 뉴스를  보았다면, 그 작자가 어떤 짓을  저
     질렀는지 잘 알 게 아닙니까?"
       "정말 엄청난 사건일세."
       하고 드비르 변호사가 말했다.
       "물론 나도 그의 피아노 연주를  즐겨 듣고 있긴 하지만 말일세. 정말  피
     아노 연주 솜씨는 일품이지. 막연히 기억하고 있지만, 젊었을 적에 2년쯤 외
     인부대에 근무했다는 것을 잡지에서 읽은 것 같아."
       쟈로가 말했다.
       "그래요. 옛날에 그 친구가  알지에에서 살아난 얘기를 들으면 놀라실  거
     예요. 그때 카스파에서는 폐에  두 방이나 맞고도 네 명의 게릴라를 권총으
     로 해치웠다구요. 단지 권총만으로 말예요."
       드비르 변호사는 또다시 쟈로에게 브랜디를 권했다.
       "얘기를 좀더 들려 주게나."
       그래서 쟈로는 자꾸만 지껄여댔다. 이야기가 끝났을 때는 완전히 취해 있
     었다.
       "하지만, 저는 어떻게 하면 좋죠?"
       "11시였지, 그 사람이 돌아온다고 한 것은?"
       하고 드비르 변호사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지금 10시일세. 코트를 갖고 오게. 함께 차고로 되돌아가세. 내가  운전하
     는 게 좋겠구먼. 자네는 교차로를 무사히 빠져 나가지 못할 테니까 말일세."
       "차고에 간다고요?"
       하고 쟈로는 혀꼬부라진 어조로 말했다.
       "뭣하러 차고에 가시겠다는 거죠?"
       "그 작자와 만나고 싶으니까. 자네를 위해서 말일세."
       그리고는 쟈로의 어깨를 두드렸다.
       "나를 믿지 못하겠나, 쟈로? 자네를 도와 주기 위해서일세. 자네는 도움을 
     청하러 나한테 찾아온 것 아닌가?"
       쟝 폴 드비르 변호사는  침실에 들어가 새까만 오바 코트를 입고, 언제나 
     쓰고다니는 홈부르그 모자를 손에 들었다. 그리고나서 침대 옆에 있는  책상 
     서랍을 열어 자동 권총을 꺼냈다. 어쨌든간에 지금 들은 얘기가  사실이라면 
     그는 이제부터 솜씨가 뛰어난 살인자를 만나러 가는 것이었다.
       드비르 변호사는 권총의 무게를 헤아렸지만, 이것이 일생 중 최대의 찬스
     가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어 권총을 서랍에 도로 집어넣었다. 방에 돌아와
     보니 쟈로는 또 브랜디를 마시고 있었다.
       "이봐, 쟈로, 이제 그만 나가세."
       하고 드비르 변호사는 밝은 어조로 말했다.
       음악회는 대성공이었다. 존 미카리는 열광적으로 앵콜을 요구하는 수많은 
     청중들로부터 몇번이고 호출당했다. 마침내  미카리는 그 요구에 응했다. 흥
     분의 함성이 터져 나오더니 드디어 그가 피아노 앞에 앉자, 장내는 물을  끼
     얹은 듯이 조용해졌다.
       잠시 시간을 두었다가  존 미카리는 가브리엘 그로브레스의 '르파스토르'
     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미카리는 렌트카를 차고에서 조금  떨어진 장소에 세우고, 줄기차게 내리
     는 빗속을  걸어서 정면 입구의 쪽문으로  미끌어져 들어갔다. 레인 코트의 
     오른쪽 포케트에는 아직도 콜트가  들어 있었다. 어둠 속에 서서 권총의 손
     잡이를 찾으면서 그는 위의 아파트에서  희미하게 흘러 나오는 음악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미카리는 다리를 조심스럽게 떼어 놓으면서  2층으로 올라가 도어를 열었
     다. 거실은 어두컴컴했다.  테이블 위에 있는 스탠드만이 켜져 있고,  쟈로는 
     취한 채 가볍게 코를 골고 있었다.
       그 곁에는 나폴레옹 빈 병이  하나 놓여 있고, 또 하나도 4분의 1쯤 비어 
     있었다. 포터블 라디오에서 조용히 음악이 흘러 나오고 있고, 마침 아나운서
     가 바실리코스 대령과 그의 부하  암살범인에 대한 경찰의 대규모적인 수사 
     속보를 전해 주고 있었다.
       미카리는 손을 뻗쳐서 라디오의 스위치를 끄고, 포케트에서
       콜트를 꺼냈다. 그때 온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약간의 프랑스 사투리가 
     섞여 있는 능숙한 영어였다.
       "만약 그것이 바로  그 권총이라면, 그걸로 이  사내를 살해하는 것은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되는 셈일세."
       드비르가 방 구석의 어둠 속에서 모습을 나타냈다. 의연하게 오바 코트를 
     입고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또 한 손에는 홈부르그 모자를 들고 있었다.
       "경찰 친구들은 이 사람의  시체에서 탄환을 꺼내서 감정한 결과,  바실리
     코스와 그 부하 살해에 사용했던  것과 동일한 권총에서 발사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겠지. 어떤가, 안 그런가? 그건 똑같은 권총이겠지."
       드비르 변호사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렇다고 해서 경찰이 자네를 찾아내지는 못하겠지만, 그처럼  완전한 범
     죄를 이 한 번의 경솔한 행위로 먹칠할 우를 범할 필요는 없잖을까?"
       미카리는 자기 옆구리에 콜트를 내리고 기다렸다.


제 목 : 제1장 첫번째 살인 그리고 첫경험 - 16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쟝 폴 드비르일세. 직업은 형사 전문변호사. 이 사람은 나의  의뢰인일세. 
     오늘 밤에 나한테 찾아와서 모두  말해 주었네. 알고 있겠지만, 우리들은 특
     별한 사이일세. 다시 말하자면, 나는 고해를 듣는 사제인 셈이지. 1,2년 전에 
     이 사람은 OAS와 관계를 갖는  어리석은 자였지만, 내가 궁지에서 구해 주
     었네."
       드비르가 코트 안쪽에 손을 집어 넣자마자, 미카리의 콜트가 쓱 올라왔다.
       "담배를 꺼내려던 참일세, 안심하게나."
       드비르는 은으로 만든 담배 케이스를 꺼냈다.
       "나는 벌써 여러 해 동안 총을 쏘아보지 못했네. 그런 소란스런  물건하고
     는 인연이 없다네.  지금 사건의 진상을 알고 있는 것은  우리들 두 사람과, 
     저 가련하게도 술취한 친구뿐일세. 저 사람은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않았네."
       "그럼 당신은 저 친구를 신용하고 있소?"
       "이 친구는 마치 겁먹은 토끼처럼  되어 유일한 안전한 곳, 즉 나한테  찾
     아온 것일세."
       "그리고는 모두 얘기했단 말이오?"
       "자네한테 살해당할 거라고 걱정하고 있더군. 정말 두려워하고 있었네. 자
     네에 대한 얘기를 모두 해 주더군. 알제리아, 외인부대. 예를  들자면 카스파
     에서의 일까지 말일세. 그때의  일은 저 친구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던 모양
     일세. 이번 사건의  배경도 전부 가르쳐 주더군.  바실리코스 대령이 자네의 
     조부님을 고문하고 살해했다는 사실도 말일세."
       "그래서?"
       미카리는 인내심 깊게 기다렸다.
       "나는 그럴 마음만 있었다면,  오늘밤 아파트를 나오기 전에 사건의  진상
     을 편지로 쓸 수가 있었네. 그 편지가 SDECE의  고위 간부에게 배달되도록 
     하라고 메모를 붙여 비서 앞으로 우송할 수도 있었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단 말인가요?"
       "그렇네."
       "왜 그랬나요?"
       드비르 변호사는 창 쪽으로 다가가서  창문을 열었다. 비는 끊임 없이 내
     리고 있었다. 밤의 어둠 속에서 자동차의 경적 소리가 들려 왔다.
       "가르쳐 주겠나? 자네는 보통 때도  공원에서 말한 것처럼 크레타 사투리
     의 그리스어를 쓰고 있나?"
       "아니오."
       "그럴 거라고 생각했네.  바실리코스와 그의 부하들을 파시스트라고  말한 
     것도 포함해서, 그건 운전사에 대해서는 정말 효과적이었네. 물론 그 탓으로 
     오늘 밤에 그리스 국내에서는 그 작자들이  손을 쓸 수 있는 모든 공산주의
     자, 선동가, 민주전선 당원들을 체포하고 있을 걸세."
       "그들의 운이 나빴기 때문일 거요."
       하고 미카리가 말했다.
       "나는 정치에는 진절머리가 났소. 자아, 용건을 얘기해 주겠소?"
       "아주 단순한 것일세. 미스터 미카리. 혼란...... 혼란이야말로  나의 일이지. 
     나의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서방세계에  가능한한의 혼란을 만들어내는 것이 
     나의 확정된 임무일세. 자네가 불러일으킨 것과 같은 혼란, 무질서, 공포, 불
     안이 말일세. 왜냐 하면, 아테네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과 같은 사태가 파리
     에서도 일어나기 때문일세. 만약 그렇게 되면, 날이 밝으면 좌익의 선동가는 
     잠적하든가, 경찰의 손에 의해  체포되든가 할 걸세. 공산주의자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자도 말일세. 사회당은 그런  사태를 달갑지 않게 생각하지. 마침내 
     노동자도 달갑지 않게 생각하게 될 테지. 그렇게 되면, 선거를 앞에 둔 정부
     에게 있어서도 사태는 귀찮은 것이 되거든."
       미카리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자네와 마찬가지로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사나이일세."
       "동구권의? 아마 더 멀리 모스크바에서 왔겠죠?"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네."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정치라면 딱 질색이오."
       "이 점이야말로 이상적인 조건일세. 나는 그런 인물을 찾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당신이 원하는 것은 뭐요?"
       "내가 요구했을 때, 자네는 무돈의 숲에서 한 것과 같은 일을  되풀이하는 
     것일세. 아주 가끔  특별한 경우에 한해서 말일세. 이건 우리  두 사람 사이
     의 완전한 비밀 계약, 그리고 특수한 계약일세."
       미카리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협박이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게나. 자네는  지금 나를 살해할 수가 있네. 쟈로
     도 말일세. 그러고  나서 사라져도 아무도 모른 채 끝날  공산이 크네. 도대
     체 누가 자네를  의심하겠나? 작년에 버킹검 궁전에서  개최된 특별 리셉션
     에서 자네는  여왕 앞에서 연주할 정도의  인물일세. 런던의 히스로 공항에 
     내렸을 때, 자네는 어떤 대우를 받는가?"


제 목 : 제1장 첫번째 살인 - 17 (이 사이로 술병을 억지로


       "VIP용 대합실에 안내되겠죠."
       "그럴 걸세. 세계의 어느  곳에선가 세관에서 최후로 짐을 조사받은  것이 
     언제인지 기억할 수 있겠나?"
       사실이 그렇다.
       미카리는 콜트를 창가에 놓고 담배를 꺼냈다. 드비르 변호사가 불을 붙여 
     주었다.
       "한 가지 확실히 해둘 게 있네. 자네와 마찬가지로 나에게도 정치는  어떻
     게 되든 상관 없네."
       "그럼 왜 지금과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거죠?"
       드비르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내가 하고 있는 것은 게임에 지나지  않네. 나는 운이 좋은 편이지. 대부
     분의 사람에게는 즐길 수 있는 게임 같은 게 없으니까 말일세."
       "하지만 나에게는 즐길 수 있는 것이 있단 말인가요?"
       하고 미카리가 말했다.
       드비르는 고쳐 섰다. 이제는 두 사람 사이에는 기묘한, 마음을 끌어당기는 
     친밀감이 떠올랐다. 창가에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에게 밤공기를 타고 비 
     냄새가 들어왔다.
       "자네의 음악? 그렇게  생각하지 않네. 나는 창조적인 예술가를  애처롭게 
     생각할 때가 많네. 음악가, 화가,  작가들...... 모두 일시적일세. 특히 무대 예
     술은 짧거든. 부풀어 오르는 기분은 매우  짧은 걸세. 그 다음에는 침체되어 
     버리지. 섹스와도  같은 것이지. 오비디우스는  2천 년이나 전에  그 사실을 
     매우 적절하게 써 놓았는데, 그 이래 아무  것도 변한 게 없다네. 섹스를 한 
     다음에는 누구나 기분이 우울해지거든."
       드비르의 목소리는 온화했으며, 어조 또한 차분하고 교양적으로 느껴졌다.
       한순간 미카리는 자신이 이도라 섬의 별장에서, 불타오르는 소나무 불 앞
     에 앉아서 조부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오늘 밤은......  다르네. 자네는 그것을 즐겼거든.  위험한 한 순간 
     한 순간을 말일세. 한 가지 예언해  두겠네. 내일 음악평론가들은 자네의 오
     늘 밤의 연주는 최고의 것이었다고 칭찬할 걸세."
       "그렇소."
       하고 미카리는 솔직이 말했다.
       "훌륭히 연주했소.  지배인은 금요일에는 한  자리의 공석도 없을 정도로 
     입장할 것이라고 말했소."
       "알제리아에서는 자네는  닥치는대로 죽였을 걸세.  마을 사람  전체를...... 
     여자나 아이들도......  그런 전쟁이었지. 하지만  오늘 오후에는 자네가 죽인 
     것은 똥돼지였네."
       미카리는 창가에서 밤의 어두움을 바라보았다. 카파 마을에서 불타오르는 
     트럭 저쪽에서 게릴라가  나타났던 광경이 떠올랐다. 그가 강경하게 죽음을 
     거부하면서 빨간 베레모로  상처를 틀어막고 기다리고 있는  쪽으로 게릴라
     는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 당시 그는 이미 네 번이나 죽음의 신을 쳐부수었다. 그때도 역시 오싹
     오싹하는 흥분을 느꼈던  것이다. 그렇게 말하자면 무돈의 숲에서 해치웠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조부의 원수를 갚을 작정이었지만, 그러나 그다음부터는.......
       미카리는 두 손을 들었다.
       "악보를 주시겠소? 어떤  협주곡이라도 이름을 대 주면  완벽하게 해치울 
     테니까요."
       "아닐세, 자넨 그 이상일 걸세."
       하고 드비르는 조용히 말했다.
       "자네는 쭉 훌륭히 해 왔네. 자네는 알고 있을 걸세."
       미카리의 입에서는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런데 모두 털어 놓았을 때 누구를 생각하고 있었소?"
       하고 미카리가 물었다.
       "그게 마음에 걸리나?"
       미카리는 은근한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전혀......."
       "좋아. 그럼  우선 유태인들이 '미쓰바'라고  부르는 것을 주겠네. 갚음을 
     바라지 않는 선행을 말일세. 자네에 대한  선물일세. 자네의 연주 예정이 11
     월의 첫째주에 베를린에서 개최할 수 있게 할 수 없나?"
       "베를린의 연주 날짜는 내가 결정할 수 있소. 언제라도 내 마음대로  정할 
     수 있소."
       "그럼 잘 됐네. 스테파나키스  장군이 11월 1일에 베를린을 방문하여  3일
     간 체류하네. 자네는  흥미가 있을 걸세. 그는  바실리코스의 직접 상관이니
     까 말일세. 그에게는 자네도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잖은가? 하지만 지금은 
     이 쟈로를 우선 처치해야 할 것 같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우선 이 나폴레옹을 좀더 먹이세. 고급 꼬냑을 먹이기엔 좀 아깝지만  하
     는 수 없지."
       드비르는 흐트러진 쟈로의 머리칼을 잡아 머리를  위로 향하게 하고서 이 
     사이로 술병을 억지로 집어 넣었다. 그리고는 어깨 너머로 미카리를 보았다.


제 목 : 제1장 첫번째 살인 - 18 (한도를 3배나 넘는 알콜이)


       "금요일 연주회 입장권을 꼭 준비해 주기 바라네. 그 기회를 놓치면  후회
     하게 될 테니까 말일세."
       그 다음 날 아침 5시 30분, 날이 밝기 시작했을 때에도 여전히 비가 억수
     같이 내리고 있었다.  그 지역 담당 순찰  경관이 기야니 거리 건너편 세느 
     강변에 설치되어 있는 배 인양을 위한 경사면에 서 있었다.
       코트는 완전히 젖어 있고  매우 비참한 기분으로 그는 마로니에  나무 아
     래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안개가 강의 수면에서 약간씩 피
     어 오르고, 경사면 끝의 물속에 무엇인가가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시트로엔 트럭의  짐칸으로, 앞부분은 물에 쳐박혀 
     있었다. 경관은 차가운 물  속에 들어가서 심호흡을 하고 난다음 손으로 더
     듬어 도어의 손잡이를 찾아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쟈로를 껴안고 수면에  얼
     굴을 내밀었다.
       1주일 후에 행해진  검사에서, 운전사의 허용  한도를 3배나 넘는 알콜이 
     혈액 속에 있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검시관의 판정은 간단했다.
       <사고에 의한 사망.>
       금요일의 연주회는 그 이상 바랄  수 없을 정도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내
     무장관 자신이 리셉션에 참석하여 구석  쪽에서 그리스 대사와 밀담을 나누
     었다. 호의적인 기자들이  미카리 주위에서 물러가자 드비르 변호사가 다가
     왔다.
       "참석해 주어서 반갑습니다."
       라고 미카리는 말하고 악수를 했다.
       "무슨 말씀을?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아서  나에겐 영광이라구. 자네 정말 
     멋지게 해냈어. 정말 훌륭했다구!"
       미카리는 사람들로 붐비는 실내를  돌아다보았다. 정부 요인들도 섞여 있
     고, 파리의 주요 인물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이상하게도 급히 여기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군중 속의 고독인가?"
       "그런 것 같아요."
       "나도 25년 전에 똑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네. 크나큰 도박이었지. 위험한 
     모험이었네. 언제까지 참아낼지는 나도  모르네. 오로지 최후의 날을 기다릴 
     뿐일세. 도어의 노크 소리가 들리기를 말일세."
       드비르는 미소를 지었다.
       "그것에는 독특한 흥분이 있거든."
       "끊임 없이 긴박스런 도취에 빠져 있는 듯한 흥분 말인가요?"
       하고 미카리가 말했다.
       "당신은 자신의 최후의 날이 찾아올 거라고 생각하고 있소?"
       "아마 전혀 예상치도 못했을  때, 생각지도 못한 어리석고 자질구레한  이
     유로 찾아올지도 모르지."
       미카리가 양해를 구했다.
       "좀더 노시다 가세요.  내무장관과 인사를 해야  하니까요. 나중에 만납시
     다."
       "알았네."
       내무장관은 그리스 대사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당연히 우리들은 전력을 다하여  이 사건 해결에 힘쓰고 있읍니다.  프랑
     스의 명예가 더럽혀졌으니까요. 그러나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크레타 사투리
     를 쓰는 사람은 지상에서  모습을 감추어 버린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는 못할 것입니다. 언젠가는 체포할 겁니다, 약속드립니다. "
       미카리는 그쪽으로 다가가면서 그것을 들었다. 그는 미소를 떠올렸다.
       "각하, 오늘 밤은 두 분께서 이렇게 참석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나야말로 영광이오 뭇슈 미카리."
       내무장관이 손가락 소리를 내자,  웨이터가 쟁반에 샴페인을 따라 서둘러 
     다가왔다. 세 사람은 글라스를 집어 들었다.
       "정말 경탄할 만한 연주였소."
       그리스 대사가 글라스를 쳐들었다.
       "친애하는 미카리 씨에게, 그리고 자네의 천재성에 축배를!"
       그리스는 자네를 자랑으로 생각하고 있네. "
       미카리가 자기 글라스를 들어 응하고 있을 때, 쟝 폴 드비르는 거울 속의 
     자신에게 건배를 했다.
       요르고스 스테파나키스 장군이  서베를린의 힐톤 호텔에 들어간  것은 11
     월 2일 오후였다. 호텔 측에서는  4층의 스위트 룸을 장군에게 제공하고, 그 
     옆 방을 수행원에게 제공했다. 게다가 특별한 배려로 담당 웨이터와  메이드
     를 그리스인으로 배치했다.
       메이드의 이름은 크시아스 부다키스로,  올해 19세의 검은 머리칼과 올리
     브색의 피부를 가진 몸집이 작은  아가씨였다. 2, 3년쯤 지나면 체중이 눈에 
     띄게 불어나겠지만, 아직 그런 염려는 없었다.
       그날 밤, 종업원용 열쇠를  들고 스위트 룸에 들어온 그녀는 검은 스타킹
     에 짧은 검정색 제복을 입어서 변명의 여지가 없이 매력적이었다.
       장군은 8시에 돌아오겠다고 했으므로, 그녀는 재빨리 침대를 정돈하고 대
     충 방을 치웠다. 그리고는  침대보를 개서 옷장 속에 집어넣으려고 문을 열
     었다.


제 목 : 제1장 첫번째 살인 - 19 (손이 뻗어와 목을 조여)

       그 속에 검은 스웨터와 바지를  입은 사내가 서 있었다. 바라크라바 모자
     를 쓰고 눈과 코와 입밖에 보이지 않았다. 허리에는 로프를 두르고 있었다.
       그녀가 그것을 알아챘을  때, 손이 뻗어와서  목을 조여와서 소리도 지를 
     수가 없었다. 그  손에 장갑을 끼고 있음을 알았다. 마침내  그녀는 어둠 속
     으로 끌려갔다. 문이 닫히고, 방안은 틈새로 밖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사내는 손가락끝의 힘을 약간 늦추었다. 공포를 느낀 나머지 그녀는 본능
     적으로 그리스어로 말했다.
       "제발 살려 주세요!"
       "아니, 넌 그리스인이구나?"
       그녀가 깜짝 놀랐다.  사내도 같은 언어로 말했던 것이다.  사내가 사투리
     를 쓰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금새 깨달았다.
       "어머, 당신은 크레타 태생이군요."
       "그렇다."
       사내는 그녀의 몸의 방향을 바꾸고 목 주위에 가볍게 손을 대었다.
       "가만히 있으면 너한테는 손대지 않겠다. 하지만 내 말을 듣지않고, 그 녀
     석에게 알리려고 하면 그땐 넌 끝장이야."
       "알았어요."
       하고 그녀는 신음 소리를 냈다.
       "좋아. 그 작자는 몇 시에 돌아오지?"
       "8시요."
       사내는 흘끗 손목시계를 보았다.
       "아직 12분 남았군. 잠시 기다리고 있어야겠구먼."
       사내는 그녀를 부둥켜안은  채 벽에 기댔다. 이제 그녀는  무섭지 않았다. 
     적어도 처음처럼 무섭지는 않았다.
       한 손으로 허리를 껴안기고  있어서 남자의 몸을 느끼게 되어  오히려 묘
     한 흥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 비벼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은근
     히 비벼댔지만 마침내 대담해졌다.
       코시아스 부다키스는 전에 느껴 보지 못한 흥분을 느끼고 있었다. 사내가 
     벽에 그녀를 밀어 붙이고, 검은 제복을 허벅다리 위까지 걷어 올렸을 때, 어
     둠 속에서 그녀는 그를 맞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었다.
       사랑의 행위가 끝나자  사내는 다정스럽게 그녀의 손목을  뒤로 결박하고 
     귀에 대고 속삭였다.
       "자아 네가 원하던 대로 해 주었으니까 얌전히 있어야지."
       그는 또다시 매우 다정스럽게 손수건을 입에  감아서 재갈을 물리고 나서 
     기다렸다.
       열쇠를 찔러 넣는 소리가 나고, 문이  열렸다. 스테파나키스 장군이 두 명
     의 수행원과 함께 들어왔다.
       세 명 모두 제복 차림이었다. 장군은 뒤돌아다보며 말했다.
       "나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어야겠다. 45분 뒤에 오도록!"
       두 사람이 경례를 하고 나가자, 스테파나키스 장군은 도어를 잠갔다. 모자
     를 침대 위에 내던지고, 그는 상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그 등 뒤에서 옷장 문을 열고 미카리가 걸어 나왔다. 오른손에는 소음 방
     지기를 부착한 권총을 쥐고 있었다. 스테파나키스 장군은 깜짝 놀라  상대방
     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미카리는 바라크라바 모자를 벗었다.
       "무슨 짓인가?"
       하고 장군이 말했다.
       "자네가... 자네가 바로 그 크레타 인인가?"
       "베를린에 잘 오셨소!"
       하고 말하면서 미카리는 방아쇠를 당겼다.
       미카리는 실내의  전등을 모두 끄고  다시 바라크라바 모자를 쓰고  나서 
     창문을 열고 허리의 로프를 풀었다. 몇 초 후에는 그는 로프를 타고 4층 아
     래에 있는 어두운 차고 지붕을 목표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러자 그다지 어려움은 없었다.  왕년에 모로코의 해안에 있는 가스파에
     서 훈련을 받을 때는, 외인부대의 공정 대원은 300피트 절벽을  하강하지 못
     하면 낙제였던 것이다.
       무사히 지붕에 내려서자 미카리는 로프를 끌러서 재빨리 허리에 매고, 차
     고 끝을 뛰어 넘어 땅바닥으로 내려섰다.
       미카리는 골목에 늘어선 쓰레기통 옆에 멈춰  서서 바라크라바 모자를 벗
     어 잘 개어서 포케트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쓰레기통 뒤에서 흔한 종이 봉
     투를 끌어당겨서 싸구려 레인 코트를 꺼내 입었다.
       얼마 뒤, 미카리는 복잡한 석양의 거리를 기세있게 걸어가 호텔로 돌아왔
     다. 9시  30분에는 그는 베를린  대학에 갔다. 초만원을  이룬 연주회장에서 
     미카리는 바하와 베에토벤의 리사이틀을 가졌다.
       그다음 날 아침,  쟝 폴 드비르 변호사는 베를린으로부터  전보를 받았다. 
     그것은 매우 간단한 내용이었다.
       <당신의 미쓰바에 감사,  아마 언젠가 당신을 위하여 똑같은  일을 할 수 
     있을 겁니다.>
       발신인의 이름은 없었다.


제 목 : 제2장 이름없는 스파이 - 1

                       제2장 이름 없는 스파이

      영국 비밀정보부,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DI 5'로 알려진 이 조
    직은 공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으며, 법률상으로조차 인정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실제로는 런던의 웨스트 엔드, 힐톤 호텔  근처의 흰 
    벽돌과 붉은 벽돌로 세워진 커다란 빌딩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의 직원들은 얼굴도 이름도 숨긴 채,  영국에 있는 외국 스
    파이의 활동을 억제하기  위하여, 그리고 한층  더 심각한 문제로 
    대두된 유럽의 테러리스트 그룹의 활동을 억제하는 일이  점점 더 
    증가되어서, 끊임 없는 지력을 총동원한 싸움에 시간을 보내고 있
    었다.
      그런데 DI 5는 수사밖에 할 수 없고, 체포권은 없다. 그 효력은 
    최종적으로는 스코틀랜드 야드 '스페셜 브랜치'(특수부)의  협력에 
    달려 있다. 체포하는 것은  스페셜 브랜치의 직원이고, 따라서 DI 
    5의 인간은 법정에 나서거나 하는 일은 결코 없다.
      그러한 이유로, 맥스웰 코엔이  총살되던 날 밤, 9시 조금  지나
    서 크롬웰 로드의 유체 안치소  밖에 경찰차가 멈추더니, 해리 베
    이커 주임총경이 차에서 내려 계단을 급히 올라갔던 것이다.
      해리 베이커 총경은  요크셔 인으로 웨스트 라이딩의 해리팍스 
    출신이었다. 경찰관이 된  지 25년이나 되었다. 따라서 세상  사람
    들로부터 미움을 받기에 충분할 정도로 경찰 생활을 한 셈이다.
      그런데도 1일 3교대제  탓으로 주말에는 7주간에 1회 꼴로밖에 
    가정에 돌아가지  못했다. 그 결과,  아내는 5년 전에  이유한마디 
    없이 짐을 싸가지고 집을 나가 버렸다.
      해리 베이커 주임총경은  백발이 성성하고 코가 찌부러져 있었
    다. 그것은 젊었을  적에 럭비를 했다는 증거물인 셈이었다.  그리
    고 언뜻 보기에 마음씨  고운 복서와 같은 인상을 풍기는  사나이
    였다.
      그런데 그게 착각으로, 해리 베이커  총경은 스페셜 브랜치에서 
    가장 민첩한 두뇌를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부하 형사인 조지 스튜어트 경감이 로비에서 담배를  피우
    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담배를  바닥에 버리고 발로 비벼 끄
    고서 다가왔다.
      베이커 총경이 말했다.
      "좋아, 얘기해 주게나."
      "14세의 소녀로, 미간 헬렌 모건이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스튜어트 경감은 메모장을 펼쳤다.
      "모친은 미세스 헬렌 우드로, 에섹스의  스티풀 대럼 교구 성공
    회 신부인 프랜시스 우드와  결혼하고 있읍니다. 30분전에 그분한
    테 전화로 알렸읍니다. 지금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중입니다."
      "잠깐 기다려 주게."
      하고 베이커 총경이 말했다.
      "좀 얘기가 복잡한 것 같구만."
      "그 아가씨의 하숙집  여주인이 와 있읍니다.  미세스 카터라는 
    여자입니다."
      스튜어트 경감이 <대합실>이라고 쓰여진 방문을 열어 주자, 베
    이커 총경이 안으로 들어갔다.
      창가에 앉아 있던 부인은 몸이 억세  보이는 중년 부인으로, 갈
    색 레인 코트를 입고 있었다.  부인의 얼굴은 눈물로 얼룩져 있었
    다.
      "베이커 주임총경입니다. 이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책임자입니
    다, 카터 부인."
      하고 스튜어트 경감이 말했다.
      "저한테 얘기해 주신 것을 주임총경님께 다시  말씀해 주시겠읍
    니까?"
      부인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간은 우리 집에  하숙하고 있읍니다. 모친은  에섹스에 있구
    요."
      "네, 그래요? 그것은 저도 알고 있읍니다."
      "미간은 이탈리아 콘테  스쿨에 다니고 있었읍니다.  알고 계시
    죠? 노래와 무용, 연기  같은 것을 가르치는 곳입니다. 미간은  무
    대에 서는 것이  꿈이었어요. 그래서 저의  집에 하숙했던 것입니
    다."


제 목 : 제2장 이름없는 스파이 - 2


      여주인은 끈기 있게 되풀이해서 설명했다.
      "그런데 오늘 밤에는?"
      "오후 내내 이번에  있을 뮤지컬의 리허설을  하고 있었읍니다. 
    조심 하라고 그렇게 주의를 주었는데도 그만......."
      하고 카터 부인은 멍청한 눈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두워지고 나서는 자전거를 타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그랬건
    만."
      잠시 침묵이 흘렀다.
      베이커 총경은 부인의 어깨에 손을 얹고 나서 스튜어트  경감에
    게 고개를 끄덕여 두 사람은 방을 나왔다.
      "에반즈 선생은 아직 안 왔나?"
      "이쪽으로 오고 있읍니다. 유체를 보시겠읍니까?"
      "아니, 싫어. 불쾌한  일은 나중으로 돌리세.  나한테도 두 딸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게. 어쨌든 모친이  정식으로 시신을 확인한 
    다음에 에반즈 선생한테 해부하도록 하게."
      "미스터 코엔에 관해서 새로운 정보는 뭐 없읍니까?"
      "아직 살아있네. 머리에 탄환이 들어 가서 숨을 쉬고 있을 뿐일
    세. 지금 수술 중이야."
      "헬렌 우드 부인을 여기서 기다리실 겁니까?"
      "응, 그러세. 본부에서는 내가 있는  곳을 알고 있을 테니까. 그
    런데 자네 커피라도 한 잔 빼오지 않겠나?"
      스튜어트 경감이 나가자 베이커 총경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
    리고는 창문 너머로 밖을 내다보았다.
      베이커 총경은 오래간만의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스페셜 브랜
    치는 각종 임무 중에서  외국으로 오는 원수나 요인의 신변  보호 
    임무를 늘 맡아 왔다. 그들은 이 특수한 임무에 아직까지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고, 스페셜 브랜치  내에서는 그 사실을 긍지로 여
    기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밤의 맥스웰 코엔의 사건, 이 사건은 어딘지 좀 색
    다른 것이었다. 이 런던에서 가장 악질적인 국제 테러가 자행되었
    던 것이다.
      스튜어트 형사가 커피가 든 종이 컵을 두 개 들고 나타났다.
      "힘을 내십시오. 범인은 잡히고 말 테니까요."
      "내 생각으로는 무리일 것 같네."
      하고 해리 베이커 총경은 스튜어트 형사에게 말했다.
      바로 그 시간에, 존 미카리는 다시  무대로 돌아와 청중들의 기
    립 박수를  받았다. 그리고  나서 음악가들로부터  '블루런'이라고 
    불리우는 통로로 내려왔다. 그랬더니  그곳에서 무대 감독이 기다
    리고 있다가 타올을 건네 주었다.
      미카리는 얼굴의 땀을 닦았다.
      "해냈어!"
      하고 미카리가 말했다.
      "모두들 더 연주를 원한다면, 화요일  입장권을 파는 수밖에 없
    지 뭐."
      미카리의 말씨는 매력적이고 고상해서, 사람들은 상류층의 보스
    톤 미국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미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입장권을 원하고  있읍니다. 미스터 
    미카리."
      하고 무대 감독은 미소를 떠올렸다.
      "분장실에 샴페인이 놓여 있읍니다. 누군가 손님이 갖다 놓았나 
    봅니다."
      "21세 이하는 손님이라고 부르지 말게나, 조지."
      하고 미카리는 미소를 지었다.
      "이번 주에는 주로 젊은 청중들뿐이었으니까."
      분장실에서 미카리는 연미복과 셔츠를 벗고,  타올 가운으로 갈
    아입었다. 그리고 화장대 위의 포터블 라디오의 스위치를 넣고 샴
    페인 병에 손을 뻗었다. 글라스에 얼음을 넣어 샴페인을 따랐다.
      차거워진 샴페인 한 잔을 맛보고  있으려니까, 라디오의 음악이 
    중단되고 임시 긴급 뉴스를 전했다.
      오늘 밤 정체불명의 암살자한테 습격을 받은 맥스웰 코엔  씨의 
    수술은 성공했다. 맥스웰 코엔 씨는  현재 경찰의 엄중한 경비 속
    에서 집중 치료를 받고 있는데, 완전히 회복될 전망이다.
      외국의 뉴스 소오스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검은 구월단'이  이 
    습격의 실행자로 지명되고 있다. '검은 구월단'은 알  파타하의 과
    격파로, 1971년에 팔레스티나 혁명에  대한 모든 적들을 말살시키
    기 위하여 결성되었다. 맥스웰 코엔을 노린 것은 그가 시오니즘을 
    강력히 지원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제 목 : 제2장 이름없는 스파이 - 3
옐
      미카리는 잠시 눈을 감았다. 불타오르는  트럭이 뇌리에 떠올랐
    다. 네 명의  게릴라가 다가오고 있다.  나이프를 손에 든  리더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고 있다.  마침내 이미지는 터널의 어둠으로 
    변하고, 소녀의 공포에 질린 하얀 얼굴이 흘끗 지나갔다.
      존 미카리는 눈을 뜨고 라디오의 스위치를 끄고는 글라스에  비
    친 자신에게 건배했다.
      "이봐, 완벽하고는 거리가  멀다구. 완벽한 것이 아니라  실패작
    이야."
      그때 도어를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미카리가 문을 열자,  통
    로에는 아가씨들로 가득 차 있었다.  대학의 마크가 들어 있는 스
    카프를 두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여대생들인 모양이다.
      "들어가도 괜찮지요, 미스터 미카리?"
      "좋아요."
      미카리는 미소를 떠올렸다. 언제나의 교만스런 매력이 되돌아왔
    다.
      "전인생이 위대한 미카리와 함께 여기에 있도다. 어서 들어와요, 
    염려하지 말고."
      베이커 주임총경은 시체  안치소의 현판에 프랜시스 우드 성공
    회 신부와 함께 서 있었다. 우드씨에게는 특별히 성직자다운 분위
    기는 없었다.
      베이커 총경은 그를 60세쯤으로 보았다. 장신의 약간 마른 편인 
    남자로, 흰 머리가 섞여 있었다. 검정 카아코트에 파란  폴로 네크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당신의 부인입니까?"
      하고 베이커 총경은 입구 쪽에서 미세스 카터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 헬렌 우드 부인 쪽을 보며 말했다.
      "훌륭히 참으시고 계시군요."
      "원래 철두철미한  성격의 여성이라서요, 주임총경님.  아시겠지
    만, 아내는 그림을 그리고 있읍니다. 수채화가 특기입니다만, 옛날 
    성을 사용하고 있는데 상당히 유명하답니다."
      "모건이라는 성입니까?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읍니
    다. 미세스 우드는 미망인이었읍니까?"
      "아닙니다, 주임총경님. 이혼했읍니다."
      프랜시스 우드 성공회 신부는 약간 웃었다.
      "놀라셨지요? 영국 성공회가 이런  일을 다 인정했으니 말이오. 
    이유는 간단합니다. 고풍스런 말로 하자면, 나한테는  때마침 개인 
    재산이 있었지요. 나  스스로 뭔가 해나갈 수가 있었읍니다.  우리
    들이 결혼한 것은 내가 이 직업을 그만두고 있을 때였는데, 그 후 
    1, 2년이 지나자 지금의 주교가  편지로 스티풀 대럼 교구의 일을 
    알려 왔던 것입니다. 우주의 중심과는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이지
    만, 스티풀 대럼의 사람들에게는 6년  동안이나 교구 성공회 신부
    가 없었으므로, 기꺼이 나를 받아들여 주었읍니다.  여기에 덧붙이
    자면, 우리 주교님은 진보적인 분으로 평판이 나 있읍니다."
      "그런데 저  소녀의 아버지한테는 어떻게  연락을 취하면  되지
    요? 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드가 대답을 하지 않고 있는데 미세스 카터가 돌아가서  우드 
    부인이 두 사람  쪽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37세라는 것을 베이커 
    총경은 스튜어트 경감한테 보고를  받아 알고 있었지만, 나이보다 
    10년은 더 젊어 보였다.
      칙칙한 블롱드 머리를 얼굴에서 뒤로 넘긴 헤어 스타일로  목덜
    미 근처에서 잡아맸다.  그녀의 뛰어난 미모, 침착스런 동공은  베
    이커 총경이 난생  처음 보는 아름다움이었다.  우드 부인은 낡은 
    군용 트렌치 코트(역자주 :  허리띠가 있는 레인 코트)를 입고 있
    었는데, 거기에는 전에는 대위의 세  개의 별 견장이 빛나고 있었
    다는 것을 베이커의 형사로서의 예리한 눈이 코트의  뚫어진 구멍
    을 보고 추측했다.
      "이런 것을 부탁드리는 것은 미안합니다만, 정식으로 신원 확인
    을 해 주셔야 합니다, 미세스 우드."
      "괜찮으시다면 안내해 주십시오, 주임총경님."
      하고 우드 부인은 낮으나 아름다운 목소리로 말했다.
      병리학자 닥터 에반즈가  두 명의 조수를 대동하고 검사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하얀 까운과 고무 장화, 암록색의  고무장
    갑을 끼고 있었다.


제 목 : 제2장 이름없는 스파이 - 4

      실내는 형광등이 너무 밝아서 눈이  아플 지경이었고, 스텐레스
    로 된 수술대가 6대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도어에서 가장 가까운  수술대 위에 소녀가  하얀 시트에 덮인 
    채 머리에 베개를 베고 누워  있었다. 헬렌 우드와 남편이 가까이 
    다가갔다. 베이커 총경과 스튜어트 경감이 그 뒤를 따라갔다.
      베이커 총경이 입을 열었다.
      "기분이 좋으실 리야 없겠지만, 미세스 우드, 하지만  어쩔 수가 
    없읍니다."
      "네, 부탁합니다."
      하고 우드 부인이 말했다.
      베이커 총경이 고개를 끄덕이자, 닥터 에반즈는 시트를 올려 머
    리만을 보여 주었다. 소녀의 눈은 감겨져 있고, 얼굴에  상처는 없
    었지만, 머리에는 하얀 고무 후드가 씌워져 있었다.
      "맞습니다."
      하고 헬렌 우드 부인은 조용히 말했다.
      "미간입니다."
      닥터 에반즈가 소녀의  얼굴을 다시 덮자, 베이커  총경이 말했
    다.
      "됐읍니다. 나가실까요?"
      "이젠 저 아이를 어떻게 하실 건가요?"
      하고 우드 부인이 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프랜시스 우드가 입을 열었다.
      "해부하지 않으면 안  돼요. 법률로 정해져 있으니까.  법률상의 
    사인을 확정하기 위해서 그러는 거요."
      "여기에 있고 싶어요."
      하고 부인이 말했다.
      이번에는 베이커 총경이 본능적으로 의중을 간파했다.
      "정 원하신다면 여기에 계시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5분도 채 지
    나지 않아서 고깃간에 있는 느낌이  들 겁니다. 그런 딸아이의 기
    억을 간직하고 싶지는 않으시겠지요?"
      그것은 잔혹한 말이었다. 용서  없었다. 너무나 충격을 받아  부
    인은 그 즉시  반실신 상태에 빠져  남편에게 쓰러졌다. 스튜어트 
    경감이 달려와서 남편을 도왔다. 그들은 함께 그녀를 방에서 데리
    고 나왔다.
      베이커 총경이 닥터 에반즈 쪽으로 향하자, 의사의 얼굴에는 동
    정의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래요, 나도 알고 있소, 닥터. 산다는 것은 정말 고욕이오."
      베이커 총경도 밖으로 나왔다. 닥터  에반즈는 돌아서서 고개를 
    끄덕였다. 조수 한 명이  녹음기 스위치를 켜고, 또 한 명의  조수
    가 시체의 시트를 걷었다.
      닥터 에반즈는 차가운 사무적인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시각, 1972년 7월 21일 오후 11시 15분. 담당의, 런던 대학의학
    부 법의학 강사 마빈  에반즈. 해부 사체, 여성, 14세 1개월.  미간 
    헬렌 모건. 사망, 동일 오후 7시 15분경, 뺑소니 차 사고에 의함."
      닥터 에반즈가 고개를  끄덕이자 조수 한  명이 머리의 후드를 
    벗겨냈다. 그러자 생생한 커다란 두개골절이 나타났다.
      닥터 에반즈는 아까와  똑같은 기계적인 어조로 자신의 동작을 
    상세하게 설명하면서 메스를 쥐고 두개골 주위를 잘라 나갔다.
      프랜시스 우드가 스윙 도어를 밀고 안으로 들어서자 베이커  총
    경과 스튜어트 경감이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내의 상태는 좋아졌읍니다. 지금 차 속에 있읍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하시겠읍니까? 호텔에 가실 겁니까?"
      "아닙니다. 아내가 집으로 가고 싶다고 해서요."
      "이렇게 밤 늦은 시각에  에섹스 시골길을 운전하는 것은  위험
    합니다."
      "저는 1950년 겨울에는 포병대의 종군 신부로  한국에 있었읍니
    다. 백만의 중공군이 만주에서  쳐들어와서 우리들을 남한으로 퇴
    각시켰을 때였죠. 나는 깊은 눈 속을 400마일이나 베드 포드 트럭
    을 운전했는데, 적들은 거의 뒤꽁무니까지 추격해오고  있었죠. 우
    리는 그때 운전수가 부족했답니다."
      "지독한 방법으로 운전 기술을 익혔다는 말씀이시군요."
      하고 베이커 총경이 말했다.


제 목 : 제2장 이름없는 스파이 - 5


      "인생에서 재미있는  것은 말입니다,  주임총경님, 아주  지독한 
    체험을 하면  대개는 덤 같은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는  사실입니
    다."
      그들은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 한담을 나누고  있고, 두 사람 모
    두 그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베이커 총경이 다시 한 마디 했다.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읍니다. 상사로부터 전화가 있
    었읍니다. 수사상의 이유로 따님의  죽음과 코엔씨 사건의 관련에 
    관해서는 공개하지 않을 겁니다. 당신과 부인께서는 이 점을 양해
    해 주셔야 하겠읍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주임총경님,  알고 계시겠지만 제 아내는  이 
    무서운 사건을 될 수  있는 대로 비밀리에 처리해 주기를  강력히 
    바라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는 프랜시스 우드는 문 쪽으로 가더니 발을 멈추었다.
      "잊을 뻔했군요. 당신은 미간의 부친에 대해서 물으셨지요?"
      "그렇습니다. 어디로 연락을 취하면 됩니까?"
      베이커 총경이 고개를 끄덕이자, 스튜어트  경감이 수첩을 꺼냈
    다.
      "상당히 힘들 겁니다. 그는 우리 나라에는 없읍니다."
      "그럼, 외국에 있단 말씀인가요?"
      "그건 생각하기 나름이지요. 벨파스트가 지금 그가 있는 곳입니
    다. 그의 이름은 에이서 모건  대령이고, 낙하산 연대 소속입니다. 
    국방성의 모처에 문의하면 대령과  연락을 하는 데 협력해 줄  것
    입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나보다는 당신네들이 더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네, 그 일이라면 맡겨 두십시오."
      "그럼, 이만 실례하겠읍니다."
      성공회 신부의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스튜어트 경감이 한 마
    디 했다.
      "낙하산 연대의 에이서 모건 대령이라면,  이런 사건을 알게 되
    면 기뻐할 리가 없겠죠?"
      "이렇게 살벌한 시대에 자넨 소극적인 말만 하고 있구만."
      하고 베이커 총경은 매우 호되게 꾸짖었다.
      "총경님께서는 그분을 알고 계시죠?"
      "응, 그래."
      베이커 총경은 곧장  수위실에 가서 스코틀랜드 야드에 전화를 
    걸어서 스페셜 브랜치의  부장이며 부총감이기도 한 조  하베이에
    게 연결해 달라고  부탁했다. 오늘 밤에는  부장이 자기 집무실에 
    간이 침대를 갖다 놓고  야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베이커  총경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해리 베이커입니다."
      하베이 부장이 나오자 베이커가 말했다.
      "지금 시체 안치소에 있읍니다. 바로  그 범인이 도주하던 중에 
    파딩턴의 터널에서 치어 죽인 아가씨 말인데요, 방금 모친이 신원 
    확인을 끝내고 돌아갔읍니다. 미세스 헬렌 우드라고 합니다."
      "그 아가씨의 이름은 모건이었잖은가?"
      "모친이 이혼했답니다, 부장님.  그 후 성공회 신부하고  재혼했
    읍니다."
      하고 베이커는 잠시 망설였다.
      "그런데 부장님께서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이 있읍니다. 그 아
    가씨의 부친이......."
      또다시 베이커는 우물거렸다. 그러자 하베이 부장이 재촉했다.
      "말하게, 해리. 뭔데 그러나?"
      "에이서 모건이랍니다."
      그 순간 침묵이 흘렀다. 하베이 부장이 입을 열었다.
      "알았네. 이것으로 충분하네."
      "내가 마지막 소식을  들은 건 그가 스페셜  에어 서비스(SAS) 
    대원과 오만에 있을 때였네. 그게 어떤 조직인지 알고  있나, 스튜
    어트?"
      베이커 총경은 자기 사무실 창가에 서  있었다. 한밤중이 좀 지
    나 있었는데도 비가 유리창을 때리고 있었다.
      스튜어트 경감이 그에게 홍차 컵을 건네 주었다.
      "잘 모릅니다."
      "군에서 말하는 엘리트 부대일세. 군은 이 조직을 될 수 있는대
    로 비밀로 해 두고  싶어하네. 현역 군인이 지원하고 있거든.  3년
    은 근무해야 할 걸세."


제 목 : 제2장 이름없는 스파이 - 6


      "그런데 도대체 무슨 활동을 하고 있죠?"
      "다른 부대나 조직이 할 수 없는  거치른 일이지. 영국 육군 속
    의 'SS'라고 하면 정확할 걸세. 지금은  오만의 설탄 밑에 파견되
    어, 산악 지대에서 반란을  일으킨 마르크스주의자의 진압에 임하
    고 있네. 그 친구는 말레지아의 비상 사태 때에도  개입했었네. 그 
    말레지아에서 나는 처음으로 그 친구를 알게 되었네."
      "총경님이 거기에 가 있었다는 것은 금시초문입니다."
      "파견 근무인 셈이지. 저쪽에서 중국인 공산주의자의 지하 조직
    을 처치곤란해 하고  있어서, 경찰의 힘을 빌려 보자는  것이었지. 
    그래서 모건과 만났던 것일세."
      "어떤 사람입니까?"
      하고 스튜어트가 물었다.
      "어딘지 모르게 특이한 사람인가요?"
      "자넨 정말 족집게로구먼. 자네 말 그대로일세."
      베이커 총경은 파이프에 천천히 담배를 집어 넣었다.
      "그 친구는 50세쯤 되었을 걸세.  웨일즈의 광부의 아들로 론더 
    출신이지. 제2차 대전 초기에 어떤 체험을 했는지는  잘 모르지만, 
    그 친구가 아른헴에  강하하여 고생한 공정 부대원이었다는  것은 
    확실하네. 그 당시는  중사였네. 나중에 장교 임명을 받아  소위로 
    되었다네."
      "그 다음에는요?"
      "팔레스티나에 갔지. 거기서 최초로  도시 게릴라를 경험했다고 
    자주 말하더군.  그리고 나서  알스터 라이플  연대로 전속되었을 
    때, 한국 전쟁에  참전했네. 중공군한테 포로로  잡혔지. 1년 동안 
    수용소에 잡혀 있었는데, 그때 세뇌용 약 탓으로 머리가 돌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네."
      "그건 또 무슨 뜻입니까?"
      "그 친구는 귀국하고 나서  혁명 전쟁의 새로운 개념이라고  그
    가 부르는 것에 관해서 논문을 썼네. 모 택동을 성서라도 되는 것
    처럼 계속 인용하면서 말일세.  참모본부는 그가 공산주의자로 되
    었든가, 아니면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게 되었다고 
    판단한 것 같네.  그래서 그는 말레지아에 파견되었고, 거기서  나
    는 그와 알게 되었던 것일세. 잠시 함께 일한 적도 있네."
      "그래 성과는 있었읍니까?"
      "우리들은 승리했네. 제2차 대전 후, 공산주의자의  반란을 분쇄
    시킨 예는 말레지아밖에 없었으니까 말일세."
      "그리고 나서 모건 씨는 어떻게 되었읍니까?"
      "키프로스 분쟁 동안에 내가 똑같은  임무로 파견되어 있을 때, 
    니코시아에서 우리는 재회했다네. 그때 마침 그 친구는 영국을 떠
    나오기 전에 결혼했다더군. 지금 생각이 난 것인데, 바로  저 아가
    씨의 나이와 합치되는군 그래. 그  후 1967년에 그가 아덴에 있다
    는 소식을 들은  기억이 있네. 왜냐하면, 크레타 지방에서  매복하
    다가 위기에 처한 아가일  앤드 서덜랜드 고지 연대를 구출한  공
    적으로 특수훈장을 받았다더군."
      "모건은 대단한 분인 모양이군요."
      "응, 그렇다네. 자네 말  그대로야. 철저한 군인이지. 가족도  가
    정도 그것 때문에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사람일세. 아내가 도망갔
    다고 들어도 나는 별로 놀라지 않았네."
      "딸에 대한 얘기를 들으면 어떻게 나올까요?"
      "나도 잘 모르겠네. 그건 자네 상상에 맡기겠네, 스튜어트."
      바람이 창문을 흔들어대고 밖에서는 비가 테임즈 강 쪽에서  지
    붕을 세차게 두드리고 지나갔다.


제 목 : 제3장 시베리아에서 날아온 기러기 - 1

                   제3장 시베리아에서 날아온 기러기

      그런데 그날은 벨파스트에서도 이상한 사태가 일어났다. 알스터 
    전투의 역사 속에서 피의 금요일로 후세에 알려진 사건이었다.
      오후 2시 10분, 최초의 폭탄이  스미스필드 버스 정거장에서 폭
    발했다. 최후의 폭발은  3시 15분, 케이브힐 로드  쇼핑센터에서였
    다.
      전부 합쳐서 22개의 폭탄이 시내의  여기저기서, 그것도 사람들
    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서  폭발했다. 그렇게 되자 신교도나 가톨
    릭의 분간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날 하루에 9명이 사망하고 130
    명이 부상당했다.
      심야가 되었어도 아직 군은 출동중이었다. 그날의 폭파 중 12건
    이나 영국 해병대 제40코만드의  담당 지역인 뉴 로지 로드  지구
    에서 일어났다.
      뉴 로지 로드에서 약간 들어간, 기와  조각과 유리 파편이 흩어
    진 골목에서 수십 명의 해병  대원이 벽가에 웅크리고 있었다. 길 
    반대쪽에서는 전에는 콘버즈  실렉트 바아였던 건물이 화염에  싸
    여 불타고 있었다.
      장교 두 명이 길 한가운데 서서 주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명
    은 해병대 중위이고, 또 한  사람은 공정부대의 빨간 베레모를 쓰
    고 군복 칼라를 열어 놓았으나 계급장 같은 것은 보이지 않고, 방
    탄조끼도 입고 있지 않았다.
      거무스름한 얼굴에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이제는 경멸밖에 느끼지  않는 자포자기의 표정을 떠올리
    고 있었다. 몸집은 작으나 어깨가 딱 벌어져 있고,  부단의 생명력
    이 넘쳐 흐르고 있었는데, 대나무 지팡이로 오른쪽 무릎을 두드리
    고 있는 것이 한층 더 그것을 돋보이게 했다.
      "저 공정 부대원은 누구지?"
      하고 해병 대원 한  사람이 작은 목소리로 옆의 동료에게 물었
    다.
      "참모부의 특수부문을 좌지우지하는 모건  대령이야. 보통 사람
    이 아니래."
      하고 옆에 있던 사내가 대답했다.
      75야드쯤 떨어진 아파트의 평평한 지붕 위에서 두 명의  사내가 
    난간 근처에 웅크리고  있었다. 한 사람은 리엄 오헤이건으로,  지
    금은 알스터의 IRA 과격파의 주임정보 장교였다. 차이스 야간 쌍
    안경으로 콘버즈 바아의 바깥 상태를 관찰하고 있는 중이었다.
      곁에 있는 젊은 사내는 영국군과 IRA쌍방의 저격수들에게 인기
    가 있는 전통적인 303 구경 리  엔필드 라이플을 들고 있었다. 적
    외선 영상보강장치가 되어  있어서 어둠 속에서도 표적을  확인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젊은이는 라이플의 총신을  난간에 기대고서 눈을 가늘게 뜨고
    서 그 장치를 들여다보았다.
      "우선 저 공정 부대 놈을 해치웁시다."
      "아냐, 자네가 처치해서는 안 돼."
      하고 오헤이건이 온화하게 말했다.
      "왜 안 됩니까?"
      "내가 안 된다면 안 돼."
      한 대의 랜드로바가 바로 아래의 모퉁이를 돌아서 모습을  보이
    더니, 또 한 대가  바로 그 뒤에 나타났다. 자동차는 필요  최소한
    의 것만 남기고 모두  뜯어내서 운전수와 뒷좌석에 세 명씩  웅크
    리고 앉아 있는 군인들은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놓고 있었다.
      빨간 베레모에 방탄조끼를  입은 공정 부대의 유능하고 터프한 
    젊은이들로, 언제라도 스털링 서브머시건을  쏠 수 있도록 준비하
    고 있었다.
      "저것 좀 보세요! 저 녀석들 마치 쏴 달라고 말하는 것  같군요. 
    저런 걸 해치우지 않다니 말도 안 된다구요?"
      "그렇게 하면 너도 끝장이야."
      하고 오헤이건이 말했다.
      "저놈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보이고 있는지  다 알고 있단 말야. 
    저 오픈 디스플레이 전법은 아덴에서 완성된 작전이야. 양쪽의 자
    동차에 탄 대원들은 서로 원호해 주고 있는 거야. 방해가 될 장갑
    판이 없으니까 즉석에서 응전할 수가 있단 말야."



제 목 : 제3장 시베리아서 날아온 기러기 - 2


      "음흉스러운 SS놈들!"
      하고 젊은이가 욕설을 퍼부었다.
      오헤이건은 소리를 내서 웃었다.
      "일단은 국왕의 명을 받은 사람들에게 자네 지금 뭐라고 했나?"
      아래에서는 에이서 모건이  한 대째의 랜드로바의 운전수 옆에 
    올라타자, 두 대는 함께 사라졌다.
      해병대의 중위가 명령을 하여, 그 부대도 일어나서 모습을 감추
    었다. 그러자  거리는 조용해졌다. 코헌즈  바아 안에서는  아직도 
    화염이 활활 치솟으며 타고 있더니,  때마침 열을 받은 가게 안의 
    병들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구 아까와라, 저 고급 위스키!"
      하고 리엄 오헤이건이 중얼거렸다.
      "사회민주당의 동지가 말한 것처럼,  언젠가는 아일랜드가 해방
    되고 통일될 뿐만 아니라, 성실한 남자의 집이라면 어느 집에라도 
    위스키를 물처럼 자유롭게 마실 수 있는 날이 틀림없이 올 거야."
      오헤이건은 싱긋 웃고는 소년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아, 세이머스, 우리도 여기서 나가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시내 중심 지구의 기지에 할당되어,  500여 명의 병력을 수용하
    고 있는 로얄  가의 그랜드 센트럴  호텔의 사령관실에서, 에이서 
    모건 대령은 책상 옆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는 손에 든 통신지에 멍한 눈을 주었다. 총사령부로부터 그것
    을 전하러 온  젊은 참모장교가 거북스러운듯이 몸을  움적거리고 
    있었다.
      "총사령관님께서 심심한 애도의 뜻을  전한다고 하셨읍니다. 죄
    송합니다. 대령님을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비행기로 런던에 모셔 
    오라고 명령을 내리셨읍니다."
      모건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 참 친절하신 말씀이로구먼.  하지만 <모터맨> 작전은 어
    떻게 하고?"
      "대령님의 임무는 다른 분께  인계될 것입니다. 국방성으로부터
    의 명령입니다."
      "그럼 즉시 짐을 싸겠네."
      어딘가 멀리서 예리한 폭발음과 기관총  소리가 들려왔다. 젊은 
    장교의 얼굴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신경쓸 것 없네. 저건 벨파스트의 밤 음악이니까 말일세."
      하고 에이서 모건 대령은 말하고는 방을 나갔다.
      스티풀 더램은 에섹스의 블랙워터 강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
    에 있었다. 습지와 작은  강이 있는 지방으로, 키가 큰 풀숲이  눈
    에 보이지 않는 인간의 손으로 늘 다시 색칠을 하는  것처럼 색깔
    이 변하고,  가는 곳마다에서 끊임없이  물소리가 들려온다.  거의 
    새들밖에 살지 않는 벽촌. 얕은 여울에는 빨간다리 도요새나 시베
    리아에서 겨울을 나기 위해  남하해 온 기러기 등이 무리지어  놀
    고 있었다.
      마을은 조그맣고 인가는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데, 색슨 시대로
    부터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적어도  교회의 지하 성당은 그 정도
    로 오래 되었고, 그 나머지 부분은 노르만 시대의 것이었다.
      프랜시스 우드 성공회 신부는 묘지에서 낡은 수동식 풀깎는  기
    계를 사용해서 길가의 풀을 깎고 있었다.
      그때 은색 스포츠카가  문 앞에 멈추더니  에이서 모건 대령이 
    내렸다. 양복바지에  감색 폴로네크 스웨터,  게다가 갈색의  보머 
    자게트를 입고 있었다.
      "오래간만이네, 프랜시스."
      하고 모건이 소리쳤다.
      프랜시스 우드는 스포츠카에 눈을 주며 말했다.
      "자네 아직도 이 차를 몰고 다니나?"
      "응, 돈을 벌 때까지는 어쩔 수 없지."
      "뭐라고 애도의 뜻을 전해야 할지 모르겠네, 모건."
      "장례식은 언제 지낼 건가?"
      "내일 오후 2시 반에."
      하고 프랜시스 우드가 대답했다.
      "자네가 직접 거행할 건가?"
      "자네가 반대만 하지 않는다면......."


제 목 : 제3장 시베리아서 날아온 기러기 - 3
1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게,  프랜시스. 헬렌은 어떻게  지내고 
    있나?"
      "아직 제정신이 아니라네.  지금 강둑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네. 
    만나보고 싶으면...... 하지만 신중을 기해 주기 바라네."
      "왜?"
      "미간의 죽음이 특수한 상황이었다는 것은 들었겠지?"
      "차에 치어서 죽었다면서?"
      "그것뿐만이 아니라네, 모건."
      모건 대령은 당혹한 듯이 상대방을 응시했다.
      "그 얘기를 좀 들려 주게."
      모건은 오솔길을 걸어서 묘지 문을 빠져 나와 기와지붕에  낡은 
    석조 건물의 사제관을 돌아서, 강둑으로  난 길로 강 입구 쪽으로 
    걸어 갔다.
      그녀의 모습은 멀리서 보아도 금방 알  수가 있었다. 결혼한 해
    에 그가 사 준 낡은  군용 트렌치 코트를 입고 화판을 앞에  두고 
    앉아 있었다.
      모건이 가까이 다가가는 인기척에 우드 부인은 어깨 너머로  흘
    끗 뒤돌아보고는,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모건은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그녀  뒤에 서 있었다. 물론 그
    것은 그녀가 좋아하는 수채화였다. 습지와 바다와 비를 머금은 잿
    빛 하늘을 그린 풍경화로 정말 훌륭한 그림이었다.
      "정말 멋있군."
      "안녕하세요, 모건?"
      모건은 풀숲에 나란히  앉고 나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녀는 
    그대로 그림을 계속 그리고 한 번도 눈을 돌리려 하지 않았다.
      "벨파스트는 어때요?"
      하고 그녀가 물었다.
      "그저 그래."
      "그것 참 잘 됐네요. 당신한테는 그게 어울릴 테니까요."
      모건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난 전에 그 말이  우리들 사이에 특별히 꼭 맞는 말이라고  생
    각했었어."
      "천만에요, 모건,  이 세상에서  내가 무엇인가에  어울렸을지는 
    몰라도, 당신한테만은 어울리지 않았어요."
      "난 거짓 모습을 보이려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어."
      "결혼 첫날 밤, 우리는 함께 침대에 들어갔지만, 그  다음 날 아
    침 나는 완전한 타인과 함께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 지긋지
    긋한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당신은  즉각 지원했어요.  키프로스, 
    보르네오, 아덴, 오만, 그리고  이번에는 아이리쉬 해 건너편의 저 
    수라장에 말예요."
      "그 때문에 급료를 받고 있는 거라구. 당신은 내가 무엇을 위해 
    안달복달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잖아?"
      그녀는 화를 벌컥 냈다.
      "네, 알고 말고요. 하지만, 키프로스  때는 어땠어요? 거기서 당
    신이 퍼거슨을 위해서 한 일은 무엇이었죠?"
      "도시 게릴라 소탕도 일종의 전쟁이라구.  루울이 서로 다를 뿐
    이야."
      "무슨 루울이요? 고문과  세뇌? 인간을 까치발로  벽에 세우고, 
    그리고 머리에 물동이를 올려  놓은 채 24시간 동안 방치해  두는 
    것인가요? 니코시아에서 신문으로부터  비난받았던 것은 바로  그 
    짓 때문이었잖아요?  벨파스트에서도 아직 그  방법을 쓰고  있나
    요? 아니면 좀더 손쉬운 방법을 고안해냈나요?"
      모은 어두운 표정으로 일어섰다.
      "이런 얘기 아무리 해도 소용 없는 짓이라구."
      "왜 내가 떠났는지 아세요?"
      하고 우드 부인이 말했다.
      "뭐가 최후의 결심을  하게 만들었는지 아세요? 당신이  아덴에 
    있을 때였어요. 신문에, 순찰대가  매복해 있는데도, 당신이 저 저
    주스런 지팡이 외에 아무 것도 갖지 않은 채, 걸어서 크레타에 들
    어갔다는 것이 써  있었어요. 장갑차 앞에  나와 대포를 쏘아가면
    서, 게릴라들에게 창가에 나와  자기를 쏘아 보라고 도전했다더군
    요. 그것을 읽고 일면을  장식한 당신 사진을 보았을 때, 나는  짐
    을 쌌다구요. 그때 나는 나  자신이 10년 동안이나 걸어다니는 시
    체와 결혼 생활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죠."
      그러자 모건이 말했다.


제 목 : 제3장 시베리아서 날아온 기러기 - 4


      "내가 딸아이를 죽이지는 않았어, 헬렌."
      "네, 알아요. 하지만 당신과 똑같은 누군가가 죽였어요."
      그 이상 잔혹스런 말투는 없었을 것이다. 모건의 얼굴에서 모든 
    색깔이 사라졌다.
      그 순간 그녀는 두 손을 벌려 이 남자를 다시 한 번 가슴에  껴
    안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 남자의 믿기 어려운 생명력을,  늘 그녀
    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던 이  남자의 존재의 본원적인  핵을 
    마치 지배할 수 있게 자기 품에 속박하고 싶어졌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정말 어리석은  것이다. 이제까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실패로 끝날 것은 뻔한 것이다.
      우드 부인은 느끼고 있던 동정심을 억누르고 차갑게 말했다.
      "프랜시스한테 장례식 절차 얘기는 들었어요?"
      "응, 들었어."
      "집안 식구끼리만 지내려고 해요. 치안상의 이유로 겉으로는 코
    엔의 사건과는 관계 없는 것으로  되어 있으니까, 그 점은 부담이 
    없어요. 그 아이를 보고 싶으면 그랜덤 장의사로 가  보세요. 조지 
    스트리트의 풀 앤드 선 회사라구요.  그럼 전 이제 집에 가봐야겠
    어요, 모건."
      모건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서 그녀를 응시하고 있다가 이
    윽고 발걸음을 떼어 놓았다.
      미스터 헨리 풀은  안쪽 문을 열고서 시체  안치실로 안내했다. 
    그 주위에는 꽃 향기가 흘러  넘치고, 테이프에서 흘러 나오는 음
    악이 그 장소에 어울리는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양쪽에 6개씩 조그만 방이 나란히  있었는데, 미스터 풀은 그중 
    한 방으로 모건을  안내했다. 조그만 방 안에는 꽃이  가득 차 있
    고, 떡갈나무 관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 뚜껑은 절반쯤 열려  있
    었다.
      젊은 조수 한 사람이 관 저쪽에 서 있었다. 모건이 이 장의사를 
    찾아왔을 때 최초로 응대한 남자로, 가베이라고  하는 사람이었다. 
    검정 양복에 검정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소녀는 눈을 감고 입술을  약간 벌리고 있는데 연한 홍조를 띠
    고 있었다. 얼굴은 짙은 화장을 하고 있었다.
      "최대한으로 노력을 해 보았읍니다, 미스터 풀."
      하고 가베이가 말하고는 모건에게 눈을 옮겼다.
      "두개골의 손상이 너무 심해서요. 정말 고생했읍니다."
      그러나 모건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작별을  고하려고 딸아이의 
    얼굴을 내려다보았을 때, 위액이 목구멍 끝까지 치솟아 올라와 숨
    이 막힐 것만 같았다. 모건은 등을 홱 돌려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
    갔다.
      그날 오후 늦게,  모건이 스튜어트 경감의 안내로  해리 베이커 
    주임총경의 사무실에 들어서자, 베이커  총경은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베이커 총경이 뒤돌아섰다.
      "해리!"
      "저 성공회 신부한테 들었지?"
      "응."
      모건이 의자에 앉자 베이커가 부하를 소개했다.
      "이쪽은 조지 스튜어트 경감일세."
      베이커가 책상 저쪽에 앉자 모건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베이커, 자 말해 보게나. 나한테 뭣을 가르쳐  줄 수 있
    겠나?"
      "뭐든지 다 가르쳐 주겠네."
      하고 베이커 총경이 말했다.
      "기밀 등급 우선순위 1위. 스페셜 브랜치는 필요한 것밖에 가르
    쳐 주지 않네. DI 5의 담당이지. 최근에 세력이 강해진 '그룹 4'는 
    수상 직속으로, 테러나 파괴 활동 등의 전사건의 처리를 조정하고 
    있네."
      "책임자는 누구인가?"
      "퍼거슨."
      "그래. 이제야 좀 알 것 같구먼. 언제 만날 수 있나?"
      하고 모건이 물었다.
      베이커 총경은 손목시계에 눈을 주었다.
      "앞으로 35분쯤 후에, 캐벤디쉬 스퀘어에 있는 그의 아파트에서 
    만나기로 했네. 거기가 좋을 것 같다기에."


제 목 : 제3장 시베리아서 날아온 기러기 - 5


      하고 베이커는 일어섰다.
      "자, 가세. 내가 안내할 테니."
      모건 대령도 일어서며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
      "이건 명령일세, 옛친구."
      하고 베이커는 웃었다.
      "그것을 지키지 않는 인간을 퍼거슨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는 
    자네도 잘 알고 있잖나."
      찰스 퍼거슨 준장은 몸집이 크고 온화한  얼굴을 하고 있고, 사
    이즈가 너무 큰 느낌이 드는  헐렁한 주름진 양복을 입고 있었다. 
    그의 외관에서 군인다운 구석은 근위연대의 넥타이뿐이었다.
      흐트러진 백발에 이중턱, 모건과 베이커가 들어갔을 때 불 곁에
    서 '파이넌셜 타임즈'지를  읽기 위해 쓰고 있던  반달형 안경 등
    이, 어딘지 모르게 시시껄렁한 대학 교수와 같은 인상을 풍겼다.
      그는 지금 영국 정보부의 '그룹 4'의 부장이었다.
      "어이, 모건, 잘 왔네."
      너무 큰 소리로, 마치 3류 유랑극단의 노배우가 객석 뒤까지 들
    리도록 소리치는 것 같았다.
      퍼거슨 준장은 문  입구에서 참을성있게 기다리고 있는 부관인 
    하사관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됐네, 킴. 차를 3인분 타 오게나."
      그루카 인 킴이 나가자, 모건은 방 안을 둘러보았다. 아담  양식
    의 벽난로도, 그 속에서 타오르고 있는 불도 모두  진짜였다. 다른 
    부분도 역시 조지 왕조풍으로, 두터운 커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
    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어때, 어울리나?"
      하고 퍼거슨 준장이 말했다.
      "둘째 딸아이 에리가  꾸민 것일세. 지금 실내  장식 일을 하고 
    있다네."
      모건은 창가로 다가가서 밖의 광장을 바라보았다.
      "장군님은 언제나 빈틈 없으시군요."
      "자넨 관심이 없나, 모건? 그건 그렇고 우리 얘기나  끝내세. 나
    를 만나고 싶어했다면서?"
      모건은 방 반대쪽  가죽 팔걸이 의자에  앉아 파이프에 담배를 
    재고 있는 베이커를 흘끗 쳐다보았다.
      "베이커의 얘기로는 그 반대였던 것 같습니다만."
      "그랬던가?"
      하고 퍼거슨 준장은 쾌활한 어조로 말했다.
      킴이 돌아와서 불 옆에 쟁반을 놓고  방을 나갔다. 퍼거슨이 차
    주전자를 집어 들었다.
      "제발 부탁입니다."
      하고 모건이 격한 어조로 말했다.
      "좋아, 모건. 자네는 이미  맥스웰 코엔을 쏜 작가가 패딩턴  터
    널에서 자네 딸을 치어  죽인 작자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들었
    다 그말이지?"
      "그렇습니다."
      "그래서 자네는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  자를 붙잡고 싶단 말이
    지? 우리들도 마찬가지일세. 거의 모든  정보 기관들이 그렇게 생
    각하고 있을 걸세. 그 사나이에  관해서 우리들이 확실히 알고 있
    는 것은, 최근 3년 동안에 전세계 곳곳에서 똑같은 행위를 되풀이
    하고 있고, 또 완전히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것뿐일세."
      "그것에 대해서 어떤 조치가 취해지고 있읍니까?"
      "안심하게나. 그건  우리들에게 맡겨  주게. 국방성과도  연락을 
    취했으니까 말일세. 이러한 특별한 상황이기 때문에 자네한테 1개
    월의 휴가를 준 것일세."
      퍼거슨 준장은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나 같으면 딸아이를 장례지내고 나서 얼마 동안은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떠나겠네, 모건."
      "정말로 그렇게 하실 것 같습니까?"
      흥분하면 언제나 그렇듯이  웨일즈 사투리가 강하게 튀어 나왔
    다. 모건은 베이커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자네라면 어떻게 하겠나? 파리? 나도 그래 볼까?"
      베이커 총경은 난처해진 얼굴이 되었다. 퍼거슨이 대답했다.
      "가을에는 자네의 승진도 고려되고 있네.  이미 내정이 되어 있
    는지도 모르지만, 자네  나이로 준장이 되면, 퇴역할 때까지는  적
    어도 소장이 될 수 있을 걸세."


제 목 : 제3장 시베리아서 날아온 기러기 - 6


      "누구를 위해서죠?"
      "이런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네,  모건. 이제까지 열심히  뛰지 
    않았나?"
      "찢어진 바지를 입고 모병 사무소에 찾아왔던  웨일즈의 광부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죠?"
      모건은 도어를 난폭하게 닫고 뛰쳐 나갔다.
      "이건 너무 심한 것 아닙니까?"
      하고 베이커가 말했다.
      "일부러 그랬네. 주임총경.  저 사람은 비등점에 도달하면  틀림
    없이 되돌아올 걸세."
      퍼거슨은 다시 차주전자를 손에 들었다.
      "자아, 우리 한 잔 더 마실까요?"
      스티플 대럼의 성 마틴 성당 내부는 휑뎅그레하지만 그런  대로 
    간소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천장까지 연결된 노르만 양
    식의 기둥에는 인간이나 동물의 모습이 가득 조각되어 있다.
      이 성당이 세워졌을  무렵에는 피난처로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
    에 마루 가까이에는 창문이 없다. 높은 천장 근처에 있는 둥근 채
    광창으로부터 빛이 들어올 뿐이어서 성당 내부는 어두컴컴하다.
      2시 조금 지났을 때, 해리 베이커와 스튜어트가 왔다.  프랜시스 
    우드 성공회 신부가 제의로 갈아입고 포오치에 서 있었다.
      "주임총경님과 형사님,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유감입니다만, 전해 드릴 말씀이 없읍니다."
      "붙잡지 못했다는 말씀이신가요?"
      우드 신부는 온화한 미소를 떠올렸다.
      "비록 체포했다 하더라도, 지금의 우리들에게 있어서 무슨 차이
    가 있겠읍니까?"
      "어제 모건 대령을 만났읍니다. 대령의  심정은 다른 것 같았읍
    니다."
      "모건을 잘 아시나보죠."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거의 모두가 걸어서 왔고,  분명히 
    촌사람들이었다. 우드 신부가  인사를 하고 있는데, 성당 마당  안
    쪽에 있는  사제관의 정원으로 통하는  문이 열리고 그의  아내가 
    나타났다.
      그녀는 상복을 입지 않고, 회색의 플리츠 스커트에 갈색 구두와 
    스타킹을 신고 있었다. 머리는 베이커가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
    지로 빌로드 리본으로 뒤로 잡아매고 있었다. 상황으로 보아 부자
    연스러울 정도로 침착해 보였다.
      우드 부인은 베이커 총경에게 고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주임총경님."
      베이커는 그때만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떠오르지가 않았다.
      프랜시스 우드가 그녀의 뺨에 가볍게 입맞추자, 우드 부인은 성
    당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영구차가 묘지  문 앞에 멈추자,  얼마 
    안 있어 관은  그 장소에 어울리는 상복  차림의 해리 풀과  아들 
    및 네 명의 조수의 어깨로 옮겨졌다.
      프랜시스 우드 성공회 신부가 앞으로 나와 일행을 맞이했다.
      베이커가 스튜어트에게 속삭였다.
      "이런 장면에서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아나, 자네? 저 친구
    가 오늘 벌써 두 차례나  매장하고 왔을 거라는 사실일세. 똑같은 
    영구차, 똑같은 상복, 그리고  그럴 듯한 표정...... 이런  것에도 뭔
    가 의미가 있는지 난 도통 이해가 안 간다네."
      "모건 대령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요."
      "그렇구먼."
      베이커는 그렇게 말하고 다가온 장례 행렬에 가담했다.
      "안으로 들어가세."
      두 사람은 성당 안의 중간쯤에 있는  좌석에 앉고, 장례 행렬은 
    그대로 앞으로 나아갔다.
      프랜시스 우드 신부가 매장을 위한 기도서를 읽기 시작했다.
      <주께서 말씀하셨읍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 나를 믿는 
    자는 죽더라도 살리라. 살았을 때 나는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
    으리라.>
      제대의 난간 앞에  관이 놓여지고, 운구해 온  남자들이 물러났
    다. 잠시 사이를 두었다고 우드 신부가 계속 기도서를 읽었다.
      <주여, 당신은 우리들의 영원한 피난처이시니.......>
      성당 문이 열리고 큰 소리를 내며  닫혔으므로, 우드 신부는 말
    을 끊고 기도서에서  얼굴을 쳐들었다. 성당  안의 모든 사람들이 
    그쪽을 바라보았다.


제 목 : 제3장 시베리아서 날아온 기러기 - 7


      에이서 모건 대령이 성장을 하고 거기에 서 있었다. 반들반들하
    게 닦은 샘 브라운  벨트가 빛나고 있고, 상의  포케트 위의 SAS 
    견장 아래에 훈장이 죽 달려  있었다. 모건 대령은 빨간 베레모를 
    벗어 들고 뒷좌석에 앉았다.
      헬렌 우드 부인만이 뒤를 돌아다보지 않았다. 맨 앞줄의 좌석에 
    홀로 앉아서 어깨에 힘을  넣고 꼼짝 않고 앞쪽을 응시하고  있었
    다.
      일순간의 사이를 두었다가  그녀의 남편은 크고 분명한 목소리
    로 기도서 낭독을 계속했다.
      참석자들이 성당  마당으로 나오자  멀리서 천둥번개를 치면서 
    쏟아져 내린 소나기가 길에  깔은 포석에 묻은 흙들을 씻어  내렸
    다.
      "일생 최대의 매듭인 셈이지."
      하고 베이커가 말했다.
      "장례식으로 말하자면 10의 중  8회까지는 비가 내리거든. 그래
    서 난 이걸 준비해 왔지."
      베이커는 준비한 우산을  펴서 스튜어트와 함께 마을 사람들의 
    행렬 꼬리에 붙어 방금 파 놓은 묘지 쪽으로 비석  사이를 걸어갔
    다.
      거의 모든 참석자들이 조심스럽게  한 발 뒤로 물러서 있는 속
    에서 헬렌 우드 부인은 남편과  마주보고 묘지 가에 섰다. 에이서 
    모건 대령은 신부 뒤에 서  있었다. 빨간 베레모를 약간 앞쪽으로 
    기울여 쓰고 있었다.
      프랜시스 우드는 빗발이 강해짐에 따라 약간 목청을 높여  죽은
    이를 위한 기도를 바치고 있었다.  정해진 때에 우드 부인이 한쪽 
    무릎을 꿇고서 한줌의 흙을 묘혈  속에 던져 넣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얼굴을 들었을 때, 모건이  앞으로 
    나와 남편과 나란히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프랜시스 우드는 막힘 없이 기도를 계속했다.
      <부활을 확신하며 바라오니,  흙을 흙으로 돌아가게 하시고  재
    를 재로, 티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소서.>
      모건 대령이 빨간 베레모를 뻗어 묘지 속의 열린 관 위에  떨어
    뜨렸다.
      헬렌 우드 부인은 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천천히  일
    어섰다.
      모건은 발길을 돌려  비석 사이를 대담하게 걸어나와 성당으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몇 분 후, 프랜시스 우드가  성당에 돌아와 보니 모건
    은 맨 앞줄의 좌석에  앉아 팔짱을 끼고서 제대를 올려다보고  있
    었다.
      우드가 말을 걸었다.
      "이봐, 모건? 자네는 기도하러  온 게 아니겠지. 그렇다면  무엇
    을 구하고 있나?"
      "자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  지금 밖에서 한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필요 없네."
      하고 모건이 대답했다.
      "그게 바로 죽어 없어질  우리 딸아이의 영혼을 받아들이는  자
    비로운 하느님을 찬양하는 거라면  말일세. 도대체 그게 어쨌다는 
    건가, 프랜시스?"
      "난 잘 모르겠네, 모건. 나에게 있어서는 신앙의 문제일세. 하느
    님은 우리들 모두를 위하여 목적을 갖고 계시다는 게 신앙일세."
      "정말 자넨 그런 식으로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지겠구먼."
      모건은 벌떡 일어나서 설교대로 나 있는 계단을 올라갔다.
      "알았네, 모건. 자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보게."
      성당 뒷쪽에서는 베이커와  스튜어트가 성당문 근처의 어둠 속
    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모건이 말했다.
      "나는 자전거를 탄 소녀를, 살인을  하고 도망치는 미치광이 앞
    에 내팽개치는 하느님의  자비 같은 것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고 
    있네. 그런데 자네도  흥미가 있겠지만, <검은 구월단>이라는  아
    랍의 테러리스트 그룹이 큰 소리  쳤단 말야. 멋진 통보라고 생각
    하겠지. 모두 말뿐이라구."
      모건은 부자연스런 평정을  보이며 설교대 끝을 주먹이 하얗게 
    될 정도로 꼭 움켜 잡았다.


제 목 : 제3장 시베리아서 날아온 기러기 - 8


                                  2
      결혼 피로연은 T호텔에서 오후 3시부터 시작되었다.
      청첩장에는 3시  30분부터 주례사가  있다고 씌어  있으므로 
    그때까지는 손님이 거의 다 와 있었다.
      칵테일 파티이기  때문에, 손님은  서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테이블이 여러 군데  놓여 있고 손님은 그것을 둘러싸고  음식
    을 먹으면서  글라스를 쥐고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여자들은 
    기모노나 화사한 양장을 하고 왔다. 정면에는 유곡일쌍(六曲一
    雙)의 금병풍이 펼쳐져  있고, 커다란 꽃꽂이가 장식되어 있었
    다. 손님들은 가벼운 미소를 띠고 경중한 모습들이었다.
      신랑은 젊은 공무원이었고 신부는 모 백화점  중역의 딸이었
    다. 두 사람은  회장 입구에 서 있었다. 좌우에 중매인  부부가 
    나누어 서 있고, 신랑측과  신부측의 양친이 서서 들어오는 손
    님들의 인사를 받고 있었다.
      와카코는 친구와 함께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신부가 친
    구라는 것만이 아니라 양친이 중매인인 것이다. 지금 아버지는 
    늠름한 체구에  예복을 걸치고  부드러운 미소를 띠우며  신부 
    옆에 서 있었다. 같이 선 누구보다도 당당한 모습이었다.
      R성(省)의 국장으로서 모임에 출입이 잦은 탓도 있었겠지만, 
    신랑이 자기의 부하직원이라 여기에 와 있는  손님 가운데에도 
    젊은 부하직원이 많았던 것이다.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지만 
    눈에 뜨이지 않는 위엄이 느껴졌다.
      어머니는 눈을 아래로 내리뜨고 서 있었다.
      오래간만에 짙은 눈화장을 했기 때문에, 늘 보아온 와카코에
    게도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젊었을 때는 와카코를 닮았을 것
    이라고 사람들이 소곤댔다.
      [너희 어머니 정말 아름다우시다 얘.]
      사사키 가츠코나 다른 친구들도 와카코에게 말했다.
      와카코는 친구들이 하는 말이라 그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중
    학교 시절에도 그랬지만, 고등학교 시절에도  어머니가 PAT의 
    모임 같은 것으로 학교에 오는  것이 퍽 기뻤다. 어머님 참 예
    쁘시다, 하고 급우들이 몰려와서 이야기하는 것이 정말 기뻤던 
    것이다.
      회장의 입구에 서  있는 어머니는 화장을 한 탓인지  10년이
    나 젊어 보였다. 기모노가  너무 화사하지 않을까 하고 떠들썩
    하였지만, 오히려 소박한 느낌마저 주었다.  그러나 아버지와는 
    달리 수줍은 듯한 표정이었다.
      [얘!]
      칵테일 글라스를 손에  쥔 사사키 가즈코는 먼 곳을  바라보
    라는 듯한 눈짓을 하고 소리쳤다.
      [저기 좀 봐, 와카코야.]
      하고 와카코의 팔을 살짝 꼬집었다.
      키가 큰 젊은 남자가 신랑 앞에 서서  웃으면서 인사하고 있
    는 것이 보였다.
      검정 양복이 몸에 잘 맞았다.
      [고대인 아냐?]
      청년 손님은  신랑 곁에서 떨어져,  그의 부모들에게 인사를 
    한 다음 회장으로 들어오는 참이었다.
      와카코는 깜짝 놀랐다. 틀림없이 그때의 그 청년이었다.
      스와에서도 만났고, 신다이지에서도 본 그 얼굴이었다.
      [온다, 이리로.]
      사사키 가즈코가 소매를 끌었다.
      손님은 모두 2백  명은 넘어보였다. 장내는 빽빽하였으나 가
    만히 숨어서 관찰하기에는 편리하였다.
      청년은 테이블이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키가 커서 눈에 잘 
    뜨였다. 예복 차림의 검정  양복이 여간 어울리는 것이 아니었
    다. 저 사람이 스와의 동굴에서 때묻은 마대가방을,  구겨진 점
    퍼 어깨에 메고 있던 그 사람이라고는 상상이 되지 않았다. 헝
    클어진 머리카락도 오늘은 잘 다듬어져 있었다.
      청년은 와카코가 여기 있는 줄 모를 것이다. 꽃 같은 아가씨
    들이 한무리 있다는 것은  눈으로 보아 알겠지만, 그는 그녀의 
    얼굴에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제 목 : 제3장 시베리아서 날아온 기러기 - 9

      "알제리아에 있을 때, 아랍  격언을 들은 적이 있어요. 무슨  일
    이든 알라신의 생각대로 되느니라. 아무리 주도 면밀한 계획을 세
    워도 언젠가 누군가가 없어야 할 장소에 모습을 나타냅니다. 고장
    을 모르던 총이 고장을 내거든요.  그것이 언젠가 내 생명을 빼앗
    아가게 되지요.  당신도 아마 생각지도  않았을 때 그렇게  될 거
    요."
      "그럴 수도 있겠지. 그 터널에서  마주친 자전거를 타던 아가씨
    처럼."
      하고 드비르가 말했다.
      "그 아가씨는 정말 안 됐어요. 피하려고 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
    어요. 런던의 두  개의 석간지에 조그맣게 기사가 나왔는데,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국이 왜 코엔 사건과 결부시켜  생각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래, 나도 그것을 생각하고 있었네. 그래서 런던의  우리 직원
    한테 조사시켜 보았네. 그 아가씨의 부모는 오래 전에 이혼했다는 
    거야. 부친은 공정  부대의 대령으로 모건......  에이서 모건이라더
    군. 지금은 아일랜드에서  근무하고 있네. 런던  대사관의 KGB가 
    친절하게도 자료를  컴퓨터로 조사했는데, 대단한  기록이 나왔다
    네. 파괴활동과 도시  게릴라 기술, 고도의 심문 방법의  전문가라
    네. 한국에서 중공군 포로로 끌려간 일까지 있네. 군이  그런 사나
    이의 윤곽을 숨기려고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이 사건에 대한 
    공식적인 취급도 이것으로 설명이 될 걸세."
      "그 친구들은 <크레타 인>에 대해서도 숨기고 있어요."
      미카리는 스푼으로 커피를 저으면서 말했다.
      "그게 어때서 그런가? 다른 누군가에게로  공적이 되돌아갈까봐 
    걱정인가?
      그러자 미카리는 소리를 내어 웃었다.
      "정말 어이가 없군요."
      "결국엔 그렇게 될지도 모르지."
      드비르는 커피를 손에 들고 창가에 앉았다.
      "<붉은 여단>에서 IRA에 이르기까지  전세계의 혁명 세력에게 
    있어서 <크레탄 러버>는  살아 있는 전설일세.  하지만 조심하게
    나. 서방측 모든 나라의 정보 기관의 파일에는, 자네의  작전 하나
    하나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니까 말일세.  대중의 눈으로부터 
    될 수 있는  대로 숨김으로써, 자네를 체포할 수  있는 기회를 될 
    수 있는 대로 크게 하려고  하고 있네. 그리고 대중들은 승리자를 
    좋아하거든. 자네한테 인기가 쏠리거나 하면 곤란하지 않겠나?"
      "그것도 일리가 있군요."
      드비르는 호주머니에서 접혀진 노트 쪽지를 꺼내 내밀었다.
    만체스터와 에딘바라도 바꾸었네. 기억한 다음 태워 버리게."
      "알았소."
      하고 미카리가 말했다.
      "요즘의 공연은 만족스러운가?"
      "그저 그래요. 알버트 홀의 음향은 아무래도 마음에  안 들지만, 
    분위기는 좋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휴식을 취하고  있나? 무엇을 할 작정인가?  이
    도라 섬에 갈 생각인가?"
      "그 전에 우선 켐브리지에서 2, 3일 보낼 생각입니다."
      "캐더린 라일리 심리학  박사하고? 벌써 습관이 되어  버렸군그
    래. 진정인가?"
      "그녀는 친구일 뿐이라구요."
      하고 미카리가 대답했다.
      "그 이상은 아니라구요. 하지만 지저분한 세상에서 좋은 친구를 
    얻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미카리는 웜업 슈츠의 오른쪽 주머니의 지퍼를 내리고 자동  권
    총을 꺼냈다. 길이는 6인치  정도, 총신이 기묘한 모양을 하고  있
    었다. 미카리는 그것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드비르가 총을 집어들어 보았다.
      "이건 뭔가?"
      "체코의 체스카입니다. 이  모텔은 전쟁 중에  독일군이 공장을 
    점령하고 있는 동안에 제조되었소. 매우 효과가 높은 소음기가 설
    치되어 있지요."
      "도움이 되던가?"



제 목 : 제3장 시베리아서 날아온 기러기 - 10

      "정보부가 사용하고 있던 것입니다."
      드비르는 권총을 살며시 내려 놓았다.
      "자네는 항상 권총을 갖고 다니나? 공원에서 조깅할  때도 말인
    가?"
      미카리는 커피를 따르고 밀크와 설탕을 넣었다.
      "당신은 지금도 청산 캡슐을 갖고 다니지요?"
      "물론이네."
      "GRU의 규칙이겠죠?"
      "그렇지."
      "왜 나한테는 주지 않죠?"
      그러자 드비르는 어깨를 흠칫해 보였다.
      "자네가 그런 것을  사용할 상황 같은  것은 생각할 수가  없기 
    때문일세."
      미카리는 미소를 지으며 체스카를 집어 들었다.
      "아까 말한 대로, 정말 전혀 예기치 못한 순간이  와서, 그 친구
    들이 나를 체포해 갈 때에는 나는 이것을 갖고 있을 겁니다. 비록 
    그곳이 알버트 홀의 그린 룸이라 하더라도 말이오."
      "그래, 자기 자신을 쏘아 버리겠다는 건가? 적한테 등을 보이지 
    않고, 병사에게 어울리는 최후지."
      하고 드비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목소리에는 진정이 서려 있
    었다.
      "이봐, 미카리. 자네는 정말 로맨틱한 생각을 가진 바보일세. 자
    네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지 않나? 최후의 사무라이라고."
      미카리는 창을 열고 발코니로 나와 비가 그치고 햇볕이  내려쬐
    는 공원을 건너다보았다. 따스한 하루가 될 것 같았다.
      존 미카리는 뒤돌아섰다.
      "오스카 와일드가 이렇게 말했읍니다. 인생은 무상의 한 순간으
    로 이루어지는 불쾌한 한 때라고 말이오. "
      "요컨대 자네는 켐브리지와  라일리 박사에게로 돌아가고  싶은
    가 보지?"
      하고 드비르가 말했다.
      그러자 미카리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한 마디 했다.
      "그래요. 오스카 와일드가 생각하고 있던 것 이상의 '무상의 한
    순간'이니까요."


제 목 : 제4장 복수의 칼날 - 1

                          제4장 복수의 칼날

      에이서 모건 대령은 저녁 때  리즈에 도착했다. 거기서 A 65호
    선으로 요크셔 계곡을  향해 오트레, 일크레, 스킵톤을 거쳐서  어
    두운 고지로 올라갔다. 그 주위는 아무도 살지 않는  황야로, 때때
    로 나지막한 산꼭대기가 보일 뿐이었다.
      마럼 마을은  요크셔의 울퉁불퉁한  석회암 지대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모건은 주위가 어두워질 때쯤에  그 마을을 지나 1마일쯤 차를 
    더 달려서, 마침내 대문을 발견했다. 그 안에 들어가자, 반 에이커 
    정도의 정원의  나무들 사이에 회색의  석조로 된 오두막집이  서 
    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은 지금은 헬렌의 재산이지만, 확인해  보
    니 열쇠는 이전에 언제나 숨겨 놓던 돌 밑에 있었다. 모건은 문을 
    열고서, 짐을 가지러 자동차로 돌아왔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약간 습기 냄새가 났다. 그러
    나 난로에는 불을 땔 준비가  되어 있었다. 모건은 성냥으로 불을 
    붙이고, 침실 두 개와 욕실이 있는 2층을 보러 올라갔다.
      찾고 있던 것은 옷장 서랍에 있었다.  예전에 사용했던 등산 용
    구이다. 등산화, 고쥬로이의 바지와  두터운 털 스웨터, 그리고 침
    낭도 끄집어내어 난로 주위에 늘어놓았다.
      모건은 찬장에서 스카치 병을 꺼내 들고 침낭 속으로  기어들어
    가 난로 옆에 드러누웠다.
      벽난로 쪽으로  몸을 옮겨가며 위스키를  마셨다. 듬뿍  마셨다. 
    딸아이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안돼. 나중에  하기로 하
    자. 그러다가 모건은 잠들어 버렸다.
      마럼에서 2마일쯤 되는 곳에  고딜 스카의 절벽으로 통하는 오
    솔길이 있었다. 에이서 모건은 딸아이의 열두 번째 생일날에 함께 
    그곳에 놀러 갔다.
      그날 아침, 억수 같은 비로 축축해진 지면을 조심스럽게 발걸음
    을 떼어  놓으며 가로질러 가면서  모건은 딸의 흥분된  목소리를 
    들었다. 두 사람이 바위 끝을  돌아서자 드디어 절벽이 보였을 때
    의 환성! 그리고 그 가운데서 흘러 떨어지는 폭포는 비 때문에 보
    통 때보다 수량이 많았다.
      더 이상 앞으로 가려면  왼쪽에 있는 험한 암벽을 기어오를 수
    밖에 없다. 그때 모건은 딸을 밀어 올리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
    여 바로 뒤에서 올라갔다. 그 다음에는 고생하면서 허물어지기 쉬
    운 돌밭을 기어 오르자, 폭포 위를 넘어 계곡을 따라 오솔길이 계
    속되고 있었다.
      모건은 짙은 안개와 빗속을  완전히 과거에 사로잡힌 채 몇 마
    일이고 계속 걸었다. 마치 딸이 지금도 거기에 있어서,  앞쪽의 안
    개 속으로 뛰어갔다가는  다시 모습을 나타내면서 무엇인가를  발
    견했다고 소리치는 것 같은 환상에 사로잡혔다.
      잠시 동안 모건은 국민학교를 갓졸업한 14세 때의 자신의  소년 
    시절로 되돌아갔다. 아침  5시에 일어나서 엄마가  만들어준 치즈 
    샌드위치와 홍차 병을 들고 산을 넘었다. 매일 아침 6마일이나 되
    는 험한 산길을 걸어서, 아버지의 생명을 빼앗았던 탄광에 출근했
    던 것이다.
      그는 그 출근 첫날을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케이지(광산의 승
    강기)가 2000피트를  내려갈 때는 정말  메슥거려서 죽을 뻔했다. 
    어둠과 절망과 혹심한 노동의  그 악몽과도 같은 경험을 잊을  수
    가 없었다.
      그리고 첫교대가 와서 다시 6마일이 나 되는 길을 걸어서  되돌
    아왔다. 너무나 지쳐  있어서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날 밤, 난로 앞에서 낡은 아연 대야 속에 앉아, 몸을 씻어  주
    던 엄마를 바라보면서 그는 단  한 가지를 확신하고 있었다. 이보
    다는 좀더 나은 일이 틀림 없이 있을 것이다. 이 고장에서 도망치
    고 싶다고 모건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확실히 그보다 더 나은 일은 있었다.  천성적으로 연기를 잘 하
    는 자, 위대한 외과의나 음악가가 될 만한 재능을 타고난 자가 있
    듯이, 에이서 모건은 선천적인 병사였다. 타고난 지휘관이었다.



제 목 : 제4장 복수의 칼날 - 2


      성직에 어울리는 자가 있듯이, 에이서  모건에게 있어서 군인생
    활은 천직이었다. 그런 연유로  정말 아이러니칼하게도 전쟁이 모
    건을 구해 주게 되었다. 전쟁은 모건을 론다에서 영원히 끌어내서 
    군대로 보냈다.
      모건은 오솔길을 크게 돌아서 마럼으로  되돌아왔다. 그런데 그 
    도중에 바위 아래에 커다란 둥근  돌이 있었다. 그곳은 딸과 함께 
    비를 피해 샌드위치를 먹었던 곳이다.
      모건의 내부에서 울적한 고뇌가 드디어 파열했다.
      "안 돼!"
      하고 모건은 소리쳤다.
      "안 된단 말야!"
      하고 또 한  번 소리치고는, 마치 악마로부터  피하려는 것처럼 
    미끄러운 지면에 발을 헛딛으면서 계곡으로 굴러 떨어졌다.
      문득 정신이 들었을 때는, 옛날에 본  기억이 있는 석회암의 오
    솔길로 나와 있었다. 이 길은 마럼 고브의 높이 240피트의 절벽으
    로 통하고 있었다. 바람이 안개를  거두어 가고 눈 아래에 계곡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최초로 경험하는 분노가  모건의 내부에서 시뻘건 용암처럼 부
    글부글 끓어올랐다.
      "어디 두고 보자, 나쁜 놈!"
      하고 모건은 소리쳤다.
      "내 그냥 두지 않을 테다!"
      모건은 석회암 길을 가로질러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뛰어  내려
    갔다.
      그 다음 날 정오, 모건은 캐벤디쉬  스퀘어의 저택 문을 노크했
    다. 말쑥한 흰 상의에 놋쇠  단추를 빛내면서 그루카인 부관인 킴
    이 문을 열었다. 모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저벅저벅 안으로 
    들어갔다.
      퍼거슨 준장은 거실에서 책상에 앉아서 반달형 안경을 코  끝에 
    걸고서 산더미 같은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퍼거슨 준장은 얼굴을 들고는 코안경을 벗었다.
      "자넨 너무 심한 장난을 쳤더구먼. 가련하게도 스튜어트 경감은 
    돌아와서 대환영과는 거리가 먼 환영을 받았다네. 자네 덕분에 그 
    사람 진급이 2년은 늦어지게 될 걸세."
      "전 그놈을 꼭 붙잡고 말겠읍니다, 퍼거슨 준장님."
      하고 모건이 말했다.
      "무슨 일이든 준장님 말씀대로 따르겠읍니다. 당신 방식대로 하
    겠읍니다. 그러니까 저한테 기회를 주십시오."
      퍼거슨 준장은 일어나서 창가로 갔다.
      "베이컨은 이렇게 말했네. 복수는  일종의 야만스런 정의이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일세. 전혀 도움이 안  되네. 자넨 
    너무 감정적이야. 자넨 이미 25세의 청년이 아니잖은가?"
      퍼거슨 준장은 딱 잘라 거절했다.
      "안 되네. 자네는 휴가를  모두 끝까지 지내고 나서, 그  다음엔 
    벨파스트로 되돌아가야 하네."
      "정 그렇다면 퇴역하겠읍니다."
      "퇴역할 수가 없네,  자네의 경우는. 기밀상의 문제가  있으니까 
    말일세. 자네는 특별한 존재일세. 자네는 우리와  최후까지 군대에 
    머물러 있어야 하네. 왕년의 그 좋은 전쟁때처럼 말일세."
      "알았읍니다."
      모건은 몸을 방어하듯이 두 손을 올렸다.
      "휴가를 1개월 주신다고 했죠? 그럼 1개월 시간이  있는 셈이군
    요."
      퍼거슨 준장이 대답도 하기 전, 모건은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모건 대령은 상당히 침착해져 있었고  그리고 냉정을 되찾았다. 
    마??零袈?격정을 파열시키고 미친 듯이 남쪽으로  차를 몰
    아 달려갔으므로 격정은 좀 가라앉았다.
      모건은 다시 냉정하고 빈틈 없는, 객관적으로  사물을 볼 수 있
    는 전문가로 되돌아와 있었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손을 댈 것이냐가 문제였다.
      4시 조금 지나서 모건  대령이 그레샴 플레이스의 아파트 거실
    에 앉아 여러 종류의 신문에서 저격 사건 기사를 다시  읽고 있는
    데, 입구의 벨이  울렸다. 도어를 열고 보니,  해리 베이커 총경이 
    가죽으로 만든 서류 가방을 들고 서 있었다.
      베이커는 성큼성큼 서슴 없이 안으로 들어왔다.



제 목 : 제4장 복수의 칼날 - 3



      "스튜어트를 골탕먹였다면서? 뭐  아직 젊은 사람이니까 큰  공
    부가 되었겠지만 말일세."
      모건 대령은 베이커 뒤를 따라 거실로 돌아오자, 양손을 포케트
    에 찔러 넣고서 선 채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베이커, 무슨 용건인가?"
      "퍼거슨 준장께서 전화를  걸어 왔네. 자네가  또 찾아왔었다고 
    하더구먼."
      "나한테 이 건에 손을 대지 말라고 경고했다는 얘기도 하던가?"
      "응."
      "그래서?"
      베이커는 파이프를 꺼내 담배를 집어넣기 시작했다.
      "모건, 자네는 니코시아에서 내 목숨을 구해 주었네.  자네가 없
    었더라면 EOKA의 저격수한테 머리가  날라갔을 걸세. 자네는 나
    를 밀어붙이고 내 대신 자네가 등에 한 방 맞았었지."
      "하지만 누구나 실수는 범하는 법일세."
      "만약 이런 꼴을 퍼거슨 준장한테  들키면 난 끝장일세. 하지만 
    난 상관 없네."
      하고 베이커 총경은 서류  가방을 열고 갈색 봉투를 꺼내 테이
    블 위에 내던졌다.
      "이봐, 모건.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이것이 전부일세. 그다지 많
    은 정보는 아니지만. 맥스웰 코엔을 저격하고, 자네 딸  미간을 살
    해한 놈은, 우리가 '크레타의 연인'이라고 부르고 있는 사내일세."


제 목 : 제5장 계획된 사랑 - 1

                          제5장 계획된 사랑

      베이커 총경이 난로 앞에 서서 불을 쪼이고 있는 동안 모건  대
    령은 서류철을 읽기 시작했다.
      "거기에 적혀 있는 대로 그 사나이가 최초로 등장한 것은, 1969
    년, 바실리코스 암살 때일세. 그때 신문이  그놈에게 <크레타 인>
    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지."
      "운전수가 그놈이 크레타 인의 사투리를 썼다고  증언했기 때문
    인가?"
      "그 서류철에 의하면, 1개월 뒤의 스테파나키스 장군 사살 때에
    도, 서 베를린의  힐튼 호텔의 메이드가  크레타 사투리를 확인했
    네."
      모건 대령은 계속 읽어 나갔다.
      "스테파나키스 장군이 방에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옷장 속
    에서 그 아가씨와 그 짓을 했다는 얘기는 모두 진실인가?"
      "응, 그렇다네."
      "그래서 그것이 바로 '크레타의 연인'이라는 별명이 붙게 된 이
    유로군."
      "그 밖에도 비슷한  경우가 그곳에 적혀 있을  걸세. 그리고 그 
    부다키스라는 아가씨는...... 강간을 당한 게 아닐세. 정신과 의사가 
    그 아가씨를 면접 했는데, 그 의사의 소견으로는,  그녀는 그 남자
    한테 완전히 반해 있었다는 거야."
      "이 서류철에 적혀 있는 설명으로  보면, 많은 그리스인들이 놈
    에게 성원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되는군."
      하고 모건 대령이 말했다.
      "바실리코스도 스테파나키스 장군도  잔인한 학살자였던 것  같
    아."
      "그럴테지."
      하고 베이커 총경이 말했다.
      "그들의 동지는 크레타의 평범한 백성으로, 그리스의 현재의 정
    치체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 저항 운동의 영웅일세. 현재의  정부
    는 파시스트거든.  그래서 무엇인가 저항운동을  하기로 생각했던 
    것일세. 훌륭한 일이지.  그러나 단 한 가지  중요한 점이 틀리네. 
    그 때부터, 그 녀석은 세계  곳곳에서 계속적으로 암살로 손에 피
    를 물들이고 있네.  물론 언제나 그럴  듯한 테러리스트 그룹들이 
    자기들이 한 짓이라고  떠들어 대고 있지. 그러나 우리들은  물론, 
    세계의 주요 정보기관들은 그것이 <크레타 인>의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네.  그 <크레타 인>의  방법은 독특하고, 절대로  실수가 
    없네. 그 뒤를 읽어 보게. 알게 될 테니까."
      베이커는 난로 곁에 앉아서 파이프의 불을 다시 붙이고, 모건은 
    서류를 다시 읽어 내려갔다.
      크레타 인은 1970년 6월,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의 피레네 산맥
    에 있는 바스크  지방에서, 라파엘 가레고스  대령을 호텔 방에서 
    살해했다. 그 수법은  서 베를린의 스테파나키스  장군 암살 때와 
    비슷했다.
      범행에 대한 성명서는 오랫동안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목적으
    로 하여 싸우고  있는 바스크 민족주의운동  그룹인 ETA가 내었
    다.
      같은 해 9월, 브라질  비밀 경찰의 장관, 세베로 파루사오  장군
    이 리오데 쟈네이로에서 암살당했다.
      범인은 교통 경찰관으로, 시내에서 교외에  있는 장군의 자택으
    로 향하는 도중의 한적한 도로에서 장군의 차를 세웠다. 바실리코
    스를 암살할 때와 똑같이 살해당한 사람은 장군과 호위뿐. 운전수
    는 무사했다.
      또 그해 11월, 그는 보스톤의 보험회사직원 조지 헨리 데일리를 
    죽였다. 신문에는 나지 않았지만  데일리는 사실 세르게이 크라코
    프 소령이라고! 5년 전 소련군이  베를린에 설치한 정보부에서 미
    국으로 망명한 사람이었다.
      CIA는 모든 잔꾀를 부려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믿고 그에게 보
    험회사 직원이라는  신분을 주었던  것이었다. 그의  처의 증언은 
    <크레타 인>과  완전히 일치한다. 범인은,  그녀도 죽일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1971년에는 토론토에서 경제학자 헨리 잭슨이  살해됐다. 이 사
    람도 역시 망명하여 이름을 바꾼 소련의 정보원이었다.
      그 해의 훨씬 후에는, 이스탄불의 이스라엘의 총영사가  당했다. 
    이때는 터키인민 해방군이 범행 성명을 내었다.
      그 다음에,  유달리 화려한 사건이  일어났다. 칸느영화제  중에 
    일어난 사건이다. 이태리 영화 감독 마리오 폴라니 살해이다. <붉
    은 여단>에 대항하는 파시스트 조직 <검은 여단>이 범행 성명서
    를 발표했다. 뭇솔리니를 조소하는  영화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이 
    조직은 여러 번 폴라니를 협박한 적이 있었다.
      "그러면, 광신적인 마르크스 주의자는 아니라는 뜻이군."
      하고 모건이 말했다.



제 목 : 제5장 계획된 사랑 - 2


      "칸느의 사건  말인가? 그것은 불가사의한  사건이었지. 프랑스 
    경찰은, 폴라니가 체재중인 호텔을  요새와 같이 엄중히 경비하고 
    있었어. 부근에는 기동대,  호텔 내부에는 사복 차림의 호위  경비
    를 세워서 말일세.  그 호텔에는 많은 사람들이 투숙하고  있었지. 
    유럽의 국왕 다음 가는 거물들과, 당시 헐리웃에서 스타라고 간주
    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네. 피아니스트인 존 미카리, 소피아  로
    렌, 데이빗 니븐, 폴 뉴만, 기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유명한 사
    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네."
      "그 많은 사람들 한가운데서 놈은 살인을 했다는 말인가?"
      "사건의 경위는 아주 단순해. 폴라니는 저녁식사를 하러 내려가
    려고 여자 세  명과 함께 15층의 자기 방에서  나왔지. 방 입구에 
    두 사람, 엘리베이터 앞에 또 한 사람의 경관이 있었네."
      "그런데?"
      "<크레타 인>은 복도 끝에 모습을  나타내어, 권총 2발을 심장
    에 쏘았어. 그  거리에서 말이야. 그리고는 섬광과도 같이  비상계
    단을 이용하여 도망쳐 버렸어."
      "단서는 전혀 없는가?"
      "아예 지상에서 사라져 버렸어. 프랑스 경찰이 철저하게 조사해 
    보았지만 아무 것도 찾지 못했네.  유명인들은 대부분 그날 밤 떠
    나겠다고 소란을 피웠다네."
      "그 후로는?"
      "서류철에 있어. 작년 11월, 프랑크프르트  대학을 방문중이었던 
    동독의 재무장관 헬무트 크라인을 죽였어. 그때도 대학 구내는 엄
    중히 경계되고 있었다네. 놈은  리제로트 호프만이란 아가씨와 함
    께 잠복하고 있었어.  그 아가씨는 나중에  바타 마인호프 그룹의 
    공산주의 공명자로 판명되었는데, 적군파의 지령으로 소총을 갖고 
    들어와, 그가 가지러 갈 테니 그때까지 소지하고 있으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더군."
      "그래서, <크레타 인>이 나타났는가?"
      "어두워진 뒤에, 여느때와 같은 복면 모자를 쓰고서 말이야."
      모건은 다시 서류를 자세히 읽었다.
      "이 기록에 의하면,장관은 10시 조금지나 총장의 자택에서 개최
    된 리셉션의 자리에서  떠났어. <크레타 인>은  야간용 조준경을 
    사용하여 3백 야드의  거리에서 쏘아 죽였다네, 단  한 발에 말일
    세."
      "그 후로 <크레타  인>은 모습을 감추고  말았어. 여자는 총을 
    처분하려 다가 잡혔지.  사건의 상세한 것은  대부분 그 아가씨를 
    심문한 결과 밝혀진  걸세. 아마도 놈은  베를린에서 힐튼 호텔의 
    메이드에게 한 것과  같은 짓을 한 것 같아.  이 아가씨도 스스로 
    자진해서 그자와 섹스를 한 것  같아. 그녀는 형무소로 호송 도중 
    적군파의 전투부대의 도움으로 도망쳤네."
      "그녀는 그길로 완전히 사라졌나?"
      "그랬는데, 금년 2월 런던의 어떤 브띠끄에서 일하고 있는 것을 
    체포했지. 그녀는 캄덴 타운 출신의 웨이터 해리 파라라는 남자와 
    결혼했다고 주장했지만, 그런 남자는 없었어. 물론  그것이 사실이
    라면, 그녀는 영국  국민이라는 말이 되겠지. 그러나 동서  양쪽의 
    독일이 그녀의 송환을  요구해 왔어. 당연히  시민권 운동 그룹은 
    그녀를 인도하지 말라고 주장하고  있지. 지금은 켐브리지 근처에 
    특별 구치 센터에 있네. 정부로선 골치거리라네."
      "상상이 되는군."
      모건은 잠시 말없이 서류를 읽어 내려갔다.
      "이 아가씨에 관한 심리학자의 보고는 훌륭하군, 누가 썼나?"
      "라일리라는 여성이야. 캐더린 라일리 박사.  미국인으로 켐브리
    지의 어느 대학의 특별  연구원이지. 정기적으로 호프만을 방문하
    는 허가를 받고 있네."
      "어떻게?"
      "테러리즘이 전문이거든. 라일리 박사는 투옥 중의 유럽의 유명
    한 테러리스트에겐 거의 면접이 허용되어 있어. 물론 상대방의 기
    분에 따라서지만. 18개월  정도 전에 '테러리스트 현상'이란  책도 
    펴냈지."
      "생각나는군. 그 책이라면 나도 한 번 읽었지."
      모건은 담배에 손을 뻗쳤다.
      "그러니까, 그놈은 불과 3년이 안 되는 기간 동안에 열 명 이상
    의 주요 인물을 말살했군. 대단한 놈이로군."
      "그런데, 그에겐 명확한 원칙이 없네."
      라고 베이커는 말했다.
      "반파시스트 투사라고 생각되던  크레타의 농민이 나중에는  동
    독의 각료나 공산주의자인 영화 감독을 죽이고 있네."
      "그런데 이젠 또다시 특이한 파시스트를 노렸네."
      "게다가, 소련으로부터의 중요한  망명자 두 사람. 미국이나  캐
    나다의 정보부가 충분히 경계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자를 죽
    였어."



제 목 : 제5장 계획된 사랑 - 3


      모건이 말했다.
      "국제 테러 전선의 최근의 정세는 어떻게 되어가나?  나는 알스
    터에 관여하고 있어서 그 방면에는 좀 어두워졌어."
      "최근에는 세계 각지의 그룹간에 명확한  연관이 되어 있네. 예
    를들면, 텔아비브 공항의 학살에  참가한 일본인은 레바논의 테러
    리스트 훈련 캠프에서 훈련을 받았지. 사용한 무기는 주로 수류탄
    과 카라시니코프지만  이것들은 바타 마인호프  그룹이 제공했지. 
    팔레스틴 해방 전선도 관계가 있지."
      "대단한 연관이로구만."
      "우리들이 얻은 정보로는, 금년 오월 더블린에서 게릴라 조직의 
    비밀 회의가 열렸는데, 세계 각지에서 모택동주의자와 세태반항자 
    대표가 참석 했다더군."
      "IRA가 주최 역할을 맡았나?"
      "IRA에도 여러 분파가 있지."
      "모택동주의자, 새태반항자, 그런 것은  어찌 되었든 상관 없어. 
    내가 알고 싶은 것은 크레타 인에 관한 정보뿐이야."
      모건은 펜을 손에 잡더니 메모 용지를 끌어당겼다.
      "놈에 대해서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체격이 작다는 것."
      라고 베이커가 말했다.
      "그러나, 힘은 대단히 강하다는 것."
      "대단히 머리가 좋은  놈이야. 그리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데 
    아무런 장애도 받지 않고 있다는 사실."
      "군인이군."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나?"
      "작전의 진행 방법, 엄밀도, 조직성. 놈은 목표를 결정하면 그것
    만을 노리고, 항상 분별있게 굴고 있어. 여러번 범행  현장에 있던 
    사람들을 살려 주고 있어. 예를 들자면 파리나 리오에서의 운전수 
    같은 경우 말이야."
      "그렇지만 미간은 예외였지."
      "그래."
      모건은 냉정하게 수긍했다.
      "놈은 내 딸을 개같이 치어죽였어. 놈의 유일한 과오였네."
      모건은 자기가 작성한 메모를 보고 있었다. 베이커가 계속 말했
    다.
      "제일 중요한 것을 잊지 말게나. 놈은 크레타 인이라는 사실 말
    일세."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영어를  구사하는 크레타 인 말인
    가? 훈련을 받은 군인으로 전 세계를 여행한다?"
      모건은 머리를 흔들었다.
      "나 같으면 그곳은 이렇게 수정하겠어.  우리들이 쫓고 있는 사
    람은 어쩌다가 그런 기분이 나면 크레타 인으로  행세하는 사람이
    라고."
      "그래? 그럼 그런 사람을 어디서부터 찾기 시작하겠나?"
      모건은 어깨를 움추렸다.
      "모르겠어...... 아직은 말이야. 호프만이란 여자 말이야, 무엇인가 
    알고 있을거야.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을 순순히 불지 않았을지도 
    몰라. 그 라일리 박사는 방문해 볼 만한 가치가 있을 것  같군. 자
    네 만나본 적이 있나?"
      "그 영광은 얻었지만,  그녀는 경찰관을 싫어해. 맥카시  상원의
    원이라면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게  위원회 같은 데 불러낼 수  있
    을까 하는 정도의 여자지. 그것은  어쨌든 그 서류에 기록되어 있
    지않은 것이 한 가지 있네. 코엔의 머리 속에서 끄집어 낸 탄환에
    서 흉기는 모젤 권총이라고 판명되었지만, 그것이 대단히 보기 드
    문 것이야. 구경 7.63밀리의 1932년 모델로 원형의  소음기가 달려 
    있어. 전쟁 중에 독일의 일부의 보안부대가 사용했던 걸세."
      "아, 그 모델이라면 알고 있지."
      모건이 말했다.
      "적은 수량밖에 제조하지 않았어."
      "맞았어. 특히 최근에는 거의 나돌지 않으며 구할 수가 없는 걸
    세. 컴퓨터에 의하면 이때까지 영국 내에서 살인용으로 쓰인 것은 
    단 한 번뿐이었어. 작년 런던  델리에서 군의 정보부 하사관이 살
    해된 사건 한 건뿐일세."
      "<크레타 인>이? 알스터에서?"
      모건은 깜짝 놀랬다.
      "아니, 테렌스 머피라는  그 지방의 살인청부업자야. 그놈은  도
    망치다가 패트페란이란 사람과 함께 코만도의  순찰에게 사살되었
    어. 재미있는 것은 페란이란 놈도 똑같은 총을 한 자루 갖고 있었
    다네. 그와같은 권총  두 정을 유출했다는  상인을 찾아 보았지만 
    찾지 못했어."
      "흥미 있는 가능성이군."
      모건은 조용히 말했다.



제 목 : 제5장 계획된 사랑 - 4



      "코엔을 쏜 총도 출처가 같을지 모르겠군."
      "지금 그쪽에 촛점을 맞추고 있어. 그러나 정직하게  말해서, 그
    때도 그렇게도 찾지 못할 정도였는데......."
      베이커는 서류철을 집어 서류 가방에 다시 넣었다.
      "이젠 자네도 <크레타  인>에 관한  정보를 나와 같은  정도로 
    알고 있는 거야. 이제부터 어떻게 할 셈인가?"
      "조만간 무슨 생각이 떠오르겠지."
      "그렇겠지."
      베이커는 씁쓸하게 말하고 문을 열었다.
      "이것으로 이젠 신세를 갚을 것도 없게 되었네 모건. 기억해 두
    라구."
      "잠깐 기다려!"
      모건은 코트를 집어들고 베이커의 뒤를  쫓았다. 건물 입구까지 
    오니, 베이커가 길  저쪽으로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모퉁이에  서
    서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건은  안으로 다시 들어가 급히 차
    고로 내려가 포르세에 타고 엔진을 걸었다.
      캐벤디쉬 스퀘어의 퍼거슨의 아파트 정면,  나무 아래서 모건이 
    기다리고 있자니까 택시가 서고 베이커가 내렸다.
      베이커는 운전수에게  돈을 지불하고 아파트  속으로 들어갔다. 
    2, 3분 기다렸다가 모건도 뒤따라 들어갔다.
      킴이 문을 열자 모건은 서슴없이 거실로 걸어 들어갔다. 퍼거슨
    은 책상 앞에 있고 책상 위엔 서류철이 있었다. 베이커가 옆에 서 
    있다.
      "웬일인가?"
      베이커가 불쾌하게 말했다.
      퍼거슨이 한숨을 쉬었다.
      "아니, 이런 실례가 어디 있나 모건?"
      "알겠읍니다."
      라고 모건은 말했다.
      "이런 음흉스런 수작은 그만  두시죠. 준장님은 그 '크레타  인'
    이란 놈을 잡고  싶어하고 나도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확실하게 드러내놓고 말하고, 처리하면 어떻겠읍니까?"
      "그래, 맞았어. 그거야. 무엇 하나 공공연하게 할  수가 없어. 그
    것이 중요한 점이야."
      "아, 그렇습니까?"
      모건은 힐끗 베이커를 보았다.
      "아마도 나는 이 오랜 동료로부터  받은 호의에 감사하고, 야만
    인과 같이 사납게 혼자 조사를 시작하리라고 기대하셨던  것 같군
    요. 그래서, 실패하면 나 혼자의 책임으로 떠맡기고...... 그렇지요?"
      퍼거슨은 몸을 의자 등에 기대었다.
      "그래서, 해 보겠나  모건? 사납게 일어나서  한번 조사해 보겠
    나? 가치가 있는 일을?"
      "그 모젤 권총 말입니다."
      라고 모건이 말했다.
      "그것을 조달한 무기의 밀매자를  찾아 내면 단서가 잡힐  겁니
    다."
      "도대체 그런 정보를 어디에서 얻을 생각인가?"
      라고 베이커가 물었다.
      "벨파스트죠."
      "벨파스트?"
      라고 베이커가 기가 막히다는 듯이 말했다.
      "자네 지금 제정신으로 말하는 건가?"
      "그곳에는 다른 편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옛날의 인연으로  기
    꺼이 나를 도와 줄 것 같은 사람이 있지."
      "리엄 오헤이건 따위의 사내들 말인가? 옛날 함께  싸운 인연이 
    있다고? 머리통에 총알이나 얻어 맞는 것이 고작일걸."
      "그 밖에는, 모건?
      라고 퍼거슨이 끼어들었다.
      "그 밖에 필요한 것이 없나?"
      "벨파스트로 떠나가기 전에, 리제로트  호프만이란 아가씨를 만
    나고 싶습니다. 내일 아침이 적당하겠읍니다만."
      "라일리 박사에게 연락해 놓게."
      라고 퍼거슨은 베이커에게 지시했다.
      "그리고, 그 서류철에 기록되어 있는 저격사건 전체의 리스트를 
    주십시오. 날짜, 장소, 출구 등."
      모건은 입구로 향했다. 퍼거슨이 말했다.
      "모건, 이쪽에는 자네는  1개월의 휴가를 떠난  것으로 되어 있
    네."
      "물론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무엇이든 우리가 도울 일이 있으면......"
      "알고 있읍니다."
      라고 모건은 말했다.
      "주저하지 않고 전화하겠읍니다."



제 목 : 제5장 계획된 사랑 - 5


      "코엔을 쏜 총도 출처가 같을지 모르겠군."
      "지금 그쪽에 촛점을 맞추고 있어. 그러나 정직하게  말해서, 그
    때도 그렇게도 찾지 못할 정도였는데......."
      베이커는 서류철을 집어 서류 가방에 다시 넣었다.
      "이젠 자네도 <크레타  인>에 관한  정보를 나와 같은  정도로 
    알고 있는 거야. 이제부터 어떻게 할 셈인가?"
      "조만간 무슨 생각이 떠오르겠지."
      "그렇겠지."
      베이커는 씁쓸하게 말하고 문을 열었다.
      "이것으로 이젠 신세를 갚을 것도 없게 되었네 모건. 기억해 두
    라구."
      "잠깐 기다려!"
      모건은 코트를 집어들고 베이커의 뒤를  쫓았다. 건물 입구까지 
    오니, 베이커가 길  저쪽으로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모퉁이에  서
    서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건은  안으로 다시 들어가 급히 차
    고로 내려가 포르세에 타고 엔진을 걸었다.
      캐벤디쉬 스퀘어의 퍼거슨의 아파트 정면,  나무 아래서 모건이 
    기다리고 있자니까 택시가 서고 베이커가 내렸다.
      베이커는 운전수에게  돈을 지불하고 아파트  속으로 들어갔다. 
    2, 3분 기다렸다가 모건도 뒤따라 들어갔다.
      킴이 문을 열자 모건은 서슴없이 거실로 걸어 들어갔다. 퍼거슨
    은 책상 앞에 있고 책상 위엔 서류철이 있었다. 베이커가 옆에 서 
    있다.
      "웬일인가?"
      베이커가 불쾌하게 말했다.
      퍼거슨이 한숨을 쉬었다.
      "아니, 이런 실례가 어디 있나 모건?"
      "알겠읍니다."
      라고 모건은 말했다.
      "이런 음흉스런 수작은 그만  두시죠. 준장님은 그 '크레타  인'
    이란 놈을 잡고  싶어하고 나도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확실하게 드러내놓고 말하고, 처리하면 어떻겠읍니까?"
      "그래, 맞았어. 그거야. 무엇 하나 공공연하게 할  수가 없어. 그
    것이 중요한 점이야."
      "아, 그렇습니까?"
      모건은 힐끗 베이커를 보았다.
      "아마도 나는 이 오랜 동료로부터  받은 호의에 감사하고, 야만
    인과 같이 사납게 혼자 조사를 시작하리라고 기대하셨던  것 같군
    요. 그래서, 실패하면 나 혼자의 책임으로 떠맡기고...... 그렇지요?"
      퍼거슨은 몸을 의자 등에 기대었다.
      "그래서, 해 보겠나  모건? 사납게 일어나서  한번 조사해 보겠
    나? 가치가 있는 일을?"
      "그 모젤 권총 말입니다."
      라고 모건이 말했다.
      "그것을 조달한 무기의 밀매자를  찾아 내면 단서가 잡힐  겁니
    다."
      "도대체 그런 정보를 어디에서 얻을 생각인가?"
      라고 베이커가 물었다.
      "벨파스트죠."
      "벨파스트?"
      라고 베이커가 기가 막히다는 듯이 말했다.
      "자네 지금 제정신으로 말하는 건가?"
      "그곳에는 다른 편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옛날의 인연으로  기
    꺼이 나를 도와 줄 것 같은 사람이 있지."
      "리엄 오헤이건 따위의 사내들 말인가? 옛날 함께  싸운 인연이 
    있다고? 머리통에 총알이나 얻어 맞는 것이 고작일걸."
      "그 밖에는, 모건?
      라고 퍼거슨이 끼어들었다.
      "그 밖에 필요한 것이 없나?"
      "벨파스트로 떠나가기 전에, 리제로트  호프만이란 아가씨를 만
    나고 싶습니다. 내일 아침이 적당하겠읍니다만."
      "라일리 박사에게 연락해 놓게."
      라고 퍼거슨은 베이커에게 지시했다.
      "그리고, 그 서류철에 기록되어 있는 저격사건 전체의 리스트를 
    주십시오. 날짜, 장소, 출구 등."
      모건은 입구로 향했다. 퍼거슨이 말했다.
      "모건, 이쪽에는 자네는  1개월의 휴가를 떠난  것으로 되어 있
    네."
      "물론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무엇이든 우리가 도울 일이 있으면......"
      "알고 있읍니다."
      라고 모건은 말했다.
      "주저하지 않고 전화하겠읍니다."
 
제 목 : 제5장 계획된 사랑 - 6
      캐더린 라일리가 한계에 다다르고 있을 때 구원의 손길이  뻗쳐
    왔다. 그것은 켐브리지라고 적힌 영국의 소인이 찍힌 항공 우편으
    로, 어느 날 아침 우편함에 끼워져 있었다.
      편지는 그녀가 일찌기 공부한 뉴홀 대학에서 특별 연구원의  지
    위를 약속해 왔다.  그녀는 그것에 달라붙어, 남겨진 유일한  피난
    처로 도망친 것이었다.
      그녀에게 있어서는 무엇이든 잘 되어 나갔다. 마치 고향집에 돌
    아온 것 같았다. 그곳에는 일이 있고, 책이 있고, 눈이 부실정도로 
    아름다운 켐브리지의 풍경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아름다운 1972년 4월의 어느 날 아침, 그녀는 
    처음으로 존 미카리와 만났다.
      출판사로부터 금요일까지 돌려달라는  요청을 받은 저서의  제5
    판의 조판을 그녀는 밤을 새워 읽었다. 그리곤 잠자리에 들지않고 
    그대로 보통날처럼 하루를  시작했다.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자전
    거를 끄집어내어 고요하고  아름답고 쾌청한 아침의 공기를  마시
    며 시내중심을 향하여 다리를 젓기 시작했다.
      15분 후, 그녀는 캄 냇가 쪽으로  완만하게 내려가는 잔디 정원
    을 따라 소로를 달리고 있었다.
      지난 밤의 철야 작업에 만족하며 깨끗한 새벽 공기를 즐기면서, 
    상쾌한 기분에 감싸여  있는데 누군가가 따라오는 소리가  나더니 
    미카리가 옆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아주 산뜻한 곤색 운동복과 운동화를  신고, 흰 타올을 목
    에 걸고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라고 그가 말했다.
      그녀는 금방 그 얼굴을 알아보았다.  2주일 정도 전부터 언제나
    의 사진을 실은 포스터가 켐브리지 일대에 붙여져  있었으므로 잘
    못 볼 리가 없었다.
      "네, 상쾌한 아침이군요."
      금새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아, 당신도 미국인이군요,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이군요. 교환학
    생입니까?"
      아일랜드 인의 피가 곧  표면에 나타나 그녀는 큰 소리로 웃었
    다.
      "학생이었던 것은 벌써 옛날 이야기에요. 여기서는 지금 연구원
    이라고 불려지고 있죠.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읍니다.  캐더린 라일
    리. 캘리포니아 출신이에요."
      "아, 이거 놀랍군요.  나도 그래요. 나는 미카리, 존  미카리라고 
    합니다."
      캐더린 라일리는 주저하면서 미카리가 내민  손을 잡았다. 근질
    근질한 듯한 흥분과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짜릿한  느낌이 아랫배
    를 꿰뚫고 지나갔다.
      "네, 알아요. 오늘 밤 런던교향악단과 라프마니노프의  4번을 연
    주하시지요?"
      "당신도 와 주겠죠?"
      "농담인가요? 표 매출 첫날 매표구가 열리기를, 전날 밤부터 줄
    지어 선 학생들이  있었을 정도에요. 그것이  마지막 그 연주회의 
    표는 한 장도 손에 넣을 수가 없어요."
      "어처구니가 없군."
      라고 미카리는 말했다.
      "당신이 사는 곳은?"
      "뉴홀이에요."
      "정오까지 표를 보내겠소."
      거절할 수가 없었다. 아니, 거절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고맙습니다."
      "연주회 후에 트리니티 대학에서 나를 위한 리셉션이 열립니다. 
    그 초대장도 함께 보내도 괜찮겠읍니까? 리셉션은  어차피 피곤하
    기만 할 테지만 당신이 와 준다면 그렇지는 않겠지요."
      그녀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미카리는 손목시계를 쳐다보더
    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 오늘 아침은 4시간 동안 리허설이 
    있읍니다. 프레빈은 엄격한 선생이라서...... 그럼 오늘 밤에!"
      미카리는 발길을 돌리더니 잔디 정원을  뛰어갔다. 상당히 빠른 
    속도였다.
      캐더린 라일리는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바라보았다. 그의 마음 
    속에 감추어진 힘을  느끼며,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흥분을 
    느꼈다.
      리셉션 홀에서 캐더린 라일리는 홀 저쪽에 있는 미카리를  바라
    보고 있었다. 비로드 양복에  실크 셔츠 목에 건 황금 십자가.  모
    두가 완전히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  있었다. 여러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어딘가 마음은 딴 곳에 가 있는 듯, 끊임 없
    이 무엇을 찾으며 실내를 돌아보고 있었다.
      이윽고 캐더린을 발견한 그는 활짝 미소를 지으며 지나가는  웨
    이터의 쟁반에서 샴페인 잔 두 개를 집어들고, 곧바로 일직선으로 
    캐더린 쪽으로 걸어왔다.
      "당신 대학에 전화했었어요."
      라고 미카리가 말했다.
      "왜 말해 주지 않았죠? 라일리 박사- 당신은 뉴홀의 특별  연구
    원이라고 하더군요."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지요."
      "오늘 밤의 나는 어떻습니까?"
      "잘 아시잖아요?"
      캐더린은 그렇게 말하며 샴페인을 받았다.
      갑자기 기묘한 표정이 미카리의 눈에  나타났다. 마치 생각지도 
    않던 것을 발견한 듯한 표정이었다.
      미카리는 미소를 지은 채 유리잔을 비웠다.
      "캐더린 라일리, 기지와 감성과 세련된  음악의 취미를 갖고 있
    고, 이제 3분 이내에  나를 이곳에서 데리고 나가, 켐브리지를  안
    내해 줄 훌륭한 가톨릭 여성이여!"
      "유태교입니다."
      라고 캐더린은 말했다.
      "어머니가 그랬으니까요."
      "좋아요 정정하죠. 캐더린 라일리. 훌륭한 유태 여성! 그럼 요리
    도 잘 하시겠군요?"
      "그럼요, 물론이죠."
      "훌륭합니다. 어쨌든, 이곳을 나갑시다.  작은 보트로 달빛 속으
    로 나가 그 첨탑이  번쩍번쩍 빛나는 로맨틱한 광경을 보고  싶군
    요."
      30분 정도 지났을  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보트에서 내렸을 
    때는, 두 사람 모두 흠뻑 젖어 있었다.

제 목 : 제5장 계획된 사랑 - 7
      뉴홀 앞에서 택시에서 내리자 비는 더욱 거세게 쏟아져  캐더린
    의 방문 앞에  도착했을 때엔 두 사람은  더 이상 젖을래야  젖을 
    수 없을 정도로 흠뻑 젖어 있었다.
      캐더린이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미카리가  그녀
    의 팔을 잡았다.
      "아니, 첫날에는 내가 문지방을  넘겨 주겠소. 그리스의 옛 풍
    습대로. 우리들은 민족의 전통을 중요시하니까."
      그리고, 새벽 3시가 되어서야 겨우 두 사람은 움직임을  멈추었
    다. 침대 속에 누운  채로 미카리가 담배에 손을 내밀었다.  캐더
    린은 그쪽으로 향했다.
      "좋았어요. 이렇게 좋은 것인지 모르고 있었어요."
      "자요."
      미카리는 부드럽게 말하고 그녀에게 팔을 돌렸다.
      비가 그치고  달빛이 실내를 비추고  있었다. 미카리는 상당히 
    긴 동안,  그대로 담배를 피우면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표정은 심각했다. 잠이 든  캐더린이 희미한 신음소리를 내자  그
    는 본능적으로 그녀에게 돌린 팔에 힘을 주었다.
      "이 나무가 있는 것은, 밀턴의 덕택이라는 것을 아세요?"
      라고 캐더린이 물었다.
      두 사람은  크라이스트 칼리지의 페로스  가든에서, 그 위대한 
    시인이 손수  심었다고 전해져 내려오는  뽕나무 밑에 앉아  있었
    다.
      "전혀 관심이 없어."
      미카리는 그녀의 뒷목덜미에 입술을 갖다 대었다.
      "이런 날에는 모든 것이 하찮은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군.  켐
    브리지의 화창한 봄이라고 하는데,  당신은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
      "금주까지는 그래요. 그리고 나서는 휴가죠."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 캐더린.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을  말이
    야. 폭력, 살인, 테러리즘. 여성에게는 맞지 않는  분야지. 아니, 
    그게 아니지. 여성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도 맞지 않지."
      "아, 그럴지도 모르죠."
      라고 캐더린은 말했다.
      "그러면, 당신이 알제리아에서 외인부대에 있었던 일은  어떻게 
    되나요? 잡지 기사에서 읽은  적이 있어요. 그 당시 당신은  어떤 
    일을 했죠?"
      미카리는 어깨를 움츠렸다.
      "나는 그때 철부지 아이였어. 충동적으로 입대했었지. 기분  내
    키는 대로 말이야. 그러나 당신은--당신은 진심으로  그들의 행동
    을 연구하고 있어. 어젯밤 누구에게서 들었는데, 당신은  독일 여
    자, 바타 마인호프 그룹과 연관이 있는 여자를 조사하고  있는 것 
    같더군. 그 여자가 이곳에 와 있는 줄은 몰랐어."
      "네, 그녀는 탱메어에 있어요.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정부의 특별시설이죠."
      "역시, 당신은 공식적으로 그녀를 조사하고 있군."
      캐더린은 주저했다.
      "네, 그런 형식이 아니고서는  그녀를 만날 수가 없거든요. 하
    지만 그녀의 신뢰는 얻고 있다고 봐요."
      "프랑크프르트에서 신문이 <크레타  인>이라고 부르고 있는  남
    자가 동독의 장관을 죽였던  날 밤, 그 여자는 범인을 자기  방에 
    숨겨 두고 있지 않았을까?"
      "그래요."
      "나도 그곳에 있었지. 대학에서 콘서트가 열려서."
      두 사람은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모르겠군, 경찰은 그 여자에게서 범인의 특징을 들었을  텐데, 
    충분한 단서를  말이야. 독일인은 그런  점에서는 철저한  편이거
    든."
      "그 남자가 복면을 하고  있었던 것을 아세요? 눈과 코와 입에 
    구멍이 있는 모자 말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그 여자로서는  특징
    을 말할 수 없을 수밖에요. 설령 그럴 생각이 있다 해도."
      "그건 무슨 뜻이지?"
      캐더린 라일리는 웃었다.
      "그 와중에도 그 남자는 그녀와 사랑을 나누며 시간을 보낸  것 
    같아요."
      "복면을 쓴 채로? 그것 참 대단했겠군."
      "글쎄요, 나는 시험해 본 일이 없어서 모르겠는걸요."
      얼마 뒤 강에 띄운 보트 속에서 미카리가 말했다.
      "캐더린, 나는 이도라 섬에 별장을 갖고 있어. 어딘지 알아?"
      "네 알아요."
      "그 별장은 해안선 외진  곳에 있지. 그곳으로 가자면 배를 이
    용하던가, 걷던가, 당나귀를  타고 산을 넘지  않으면 안 돼.  물
    론, 산을 넘어 쭉  전화선이 연결되어 있지. 그러니까 혹시  길을 
    잃으면 전주만 따라가면 돼."
      "길을 잃다뇨?"
      "금주 말부터 휴가라고  했잖아? 당신도 이도라의 별장으로 오
    면 어떨까 해서 말이야. 3주일 정도 휴가이고, 그  뒤에는 비엔나
    야, 생각해 보겠어?"
      "벌써 결정했어요."
      나중에 드비르 변호사에게 거는 전화에서 미카리가 말했다.
      "당신 말대로 관계를 맺었소. 그 귀여운 독일 화물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보증할 수 있어요. 걱정 말아요."
      "좋았어. 그럼  그쪽 문제는 해결되었군.  이제부터 어떻게 할 
    참인가?"
      "토요일에 3주일간의 예정으로  이도라로 출발할 겁니다.  라일
    리 박사와 함께."
      이 말엔 드비르도 놀랬다.
      "설마, 왜지?"
      "내가 원하기 때문이죠."
      라고 미카리는 대답하고 수화기를 놓았다.

제 목 : 제6장 죽음을 추구하는 사나이 - 1
                     제6장 죽음을 추구하는 사나이
      
      
      캐더린 라일리는 자신의 연구실 창가 책상에서 점심을 먹고 있
    었다. 야채 샌드위치에 차가운 우유, 그리고  성적이 나쁜 학생이 
    쓴 어설픈 논문이 눈앞에 놓여 있었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고 모건이 들어왔다. 검은  스웨터에 
    회색 양복, 되는 대로 어깨에 걸친 트랜치 코트가 군대 냄새를 풍
    기고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 사나이가 누군지 짐작은 하고 있었으나 캐더린은 그렇게 말
    했다.
      "모건입니다. 에이서 모건.  특별 수사부의  베이커 총경에게서 
    연락이 있었을 텐데요."
      캐더린은 한 손에 샌드위치, 다른 한  손에 펜을 들고 앉은  채 
    상대를 쳐다보았다.
      "모건 대령이시죠? 에이서 모건. 공정 연대에 계시는......."
      "그것이 중요하다는 듯한 말투군요."
      "당신이 한국에서 돌아와 국방성에 제출한 논문을 읽어 보았읍
    니다. 우연히도 그것이 내 전문분야이기 때문에요."
      "공감할 만한 점이 있었읍니까?"
      "아니에요, 천만에 말씀이에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저로서는 전혀 없었어요. 키프로스에서 EOKA와의 분쟁 때 당
    신이 일으킨 불유쾌한 사건 말인데요, 나는  조사해 보았어요. 대
    령님, 그 당시 신분은 당신에게  나치스 친위대 쪽이  어울린다고 
    떠들어대고 있었어요."
      "테러활동의 목적은 공포를 일으키게 하는데 있오."
      하고 모건은 말했다.
      "레닌도 그렇게 말했죠. 1921년에 이미 마이클 콜린스는 그  신
    조를 실천하고 있었오. 그는 한 지방이 국가를 타도하는 데는  이 
    방법밖에는 없다고 말했오. 당신은  도시 게릴라가  전문이라면서
    요? 박사님, 그렇다면 나에 못지 않게 그들의 방식을 잘 알고  있
    겠군요. 무차별한 폭탄투쟁, 동기가 없는 테러, 죄도  없는 사람들
    에 대한 의도적인  학살. 그것도 여자와  어린애들까지 포함해서. 
    키프로스에서 나는 그것을 중지시키겠다고 결심하고 실행한 것입
    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게슈타포를 연상시키는  심문 기술을 구사해
    서 말이죠?"
      "아니오."
      하고 그는 말했다.
      "그것은 틀립니다. 내가 응용한 것은 모두 중국인의 특별  대우
    로부터 습득한 것이지요. 만주의  티파이라는 수용소에서  그들이 
    개인교습을 해준 겁니다."
      캐더린은 앉은 채 모건을 쳐다보면서 화를 내야 마땅하다는 것
    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되지를 않았다.
      캐더린이 무엇보다도 모멸하고 있는 짓을 이 사람이 모두 실현
    하고있을 텐데도 이상한  일이었다. 제복을 걸친  권위, 군대라는 
    기계, 그것들은 또한 그녀 자신의 조국의 젊은이들을  짓이겨서는 
    베트남으로 뱉아내버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해리 베이커의 얘기에 따르면 당신이 싫어하는 것은 경찰이라
    고 하던데요."
      하고 모건이 말했다.
      "그 사람은 잘못 알고 있었군요. 아무래도 싫어하는 것은  제복
    인 것 같군요."
      "그럴지도 몰라요."
      모건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좀 나아진 것 같군요. 조금만 더  있으면 웃는 얼굴이 되겠오. 
    입술가장자리가 밑으로 쳐지지 않고 위를 향하기 시작했으니까."
      "싫어요."
      캐더린이 말했다.
      모건이 책상 모서리에 걸터 앉았다.
      "호프만이라는 아가씨와 만나게 해주겠오?"
      "베이커 총경의 얘기로는 당신을 만나게 하는  것은 맥스웰 코
    엔 사건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라면서요? 특별  수사부에서는 그 
    사건이 또 크레타 인의 소행이라고 믿고 있나보죠?"
      "그렇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호프만에게서 범인에 관한 단서를  얻을 수 있
    다고 생각하고 있나요?"
      캐더린은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그 아가씨가 설사 뭔가를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당신에게는 
    얘기하지 않을 거예요."
      "그 사나이와 육체 관계가 있기 때문에?"
      캐더린은 머리를 흔들었다.
      "당신으로서는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그 아가씨와 같은 인간에
    게 있어서는 그는 신과도 같은 존재예요. 그들이 믿고 있는  것의 
    상징!"
      "잠깐, 내가 알아맞혀 보지요. 폭력의 순수성."
      캐더린은 서랍을 열고 노란색의 작은 책을 한 권 꺼냈다.
      "얼마 전에 소르본느의 친구가 이것을 보내 줬어요. 학생  단체
    의 하나가 만든 거예요. 학생은 교육을 받기 위해 대학에  다니는 
    것일 텐데, 그 교육이라는 것이......."
      캐더린은 책자를 펼쳤다.
      "데모 참가자에 대한 이 충고를 들어보세요. 경관을 때릴  때는 
    가죽 장갑을 반드시 착용할  것. 신문지를 몸에 감아둘  것. 총의 
    개머리판의 충격을 약화시켜 준다. 데모가 시작되기 30분 전에 한 
    알, 최루탄이 날라오기 시작했을 때 또 한 알 먹어두면 깨스를 마
    셨을 때의 구역질을 억제할 수 있다."
      "그건 처음 듣는 얘기인데요. 기억해 둬야겠군요."
      하고 모건이 말했다.
      "그런데 그 아가씨와는 언제 만날 수 있읍니까?"
      "할 수 없군요. 그렇게 소원이라면 헛수고를 해 보시죠. 자동차
    는 있읍니까?"
      "밖에 세워 두었읍니다."
      "3시에 만날 약속을 해 놓았어요. 그곳까지 20분이 걸리니까  2
    시 반에 나를 데리러 와 주세요. 그럼, 이만."
      모건은 서류 가방과 코트를 집어 들었다.
      "당신은 언제나 그런 식으로 머리를 뒤로 묶고 있나요?"
      "그것이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죠?"
      "나 같으면 묶지 않고 늘어뜨려 두겠는데요. 그렇게 하면, 당신
    도 언젠가는 진짜 여자처럼 보이게 될 거요."
      모건의 뒤에서 문이 조용히 닫혔다. 캐더린은 어처구니가  없어
    서 입을 딱 벌린 채 앉아 있었다.


제 목 : 제6장 죽음을 추구하는 사나이 - 2

      탱메어 특별 구치센터의 면회실은 놀랄  만큼 쾌적했다. 무늬가 
    있는 벽지에 색깔이 맞는 카페트,  테이블이 하나 있고 현대풍 의
    자가 몇개. 창살이 끼어 있는  창문이 오히려 어울리지 않을 정도
    였다.
      "굉장히 쾌적하군......."
      모건이 뜰을 바라보고 얼마간 야유조로 말했다.
      "이곳은 보통  교도소가 아니고 또  교도소로서 만들어진  것도 
    아니에요."
      하고 캐더린 라일리가 말했다.
      "이곳은 정신의학의 시설로서......."
      "치료와 회복을 목적으로 하고  신이 선하다는 것을 우리  모두 
    기뻐 하도다."
      캐더린이 뭐라고 대꾸를 하기 전에 문의 자물쇠가 열리고  호프
    만이 연행되어 왔다. 여자 간수가 밖으로 나가 쇠를 잠갔다.
      호프만은 몸집이 작고 평범한 용모에 금발을 짧게 자르고  청바
    지와 뎃님 셔츠를 입고 있었다.  모건 쪽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능
    숙한 영어로 물었다.
      "함께 온 사람은 누구죠?"
      "모건 대령이에요. 당신에게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있다고 하는
    군요."
      캐더린 라일리는 담배를  꺼내 그녀에게 한  개피 권하고 불을 
    붙여 주었다.
      "크레타 인 말인데,"
      하고 모건이 입을 열었다.
      미스 호프만은 휙하니  얼굴을 돌려서 쳐다보고는 다시 캐더린
    에게 눈을 돌렸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런던에서 사람이 살해되었어요. 유명한  유태민족주의자였어요. 
    <검은 구월단>이 자신들이 했다고 성명을 발표했지만  경찰은 크
    레타 인이 한 짓이라고 믿고 있어요."
      호프만은 모건을 향해 주먹쥔 손을 들었다.
      "인민에게 힘을!"
      "어떤 인민 말이지? 어처구니 없는 아가씨로군."
      그 아가씨는 묘하게  애매한 표정을 띠고 팔을  내렸다. 모건이 
    서류 가방을 열고 사진 다발을 끄집어냈다.
      "기분 전환을 위해 아가씨가  현실과 접촉해 볼 생각이  있지나 
    않을까 하고 생각했지. 당신의 크레타 인이 지난 몇 년 동안에 걸
    쳐서 해 온 일들을 말이야."
      처녀는 테이블로 다가가고 캐더린도 옆으로 갔다.
      "이것은 바실리코스 대령, 파리에서  자기 자동차의 뒷좌석에서 
    살해된 장면이오. 보다시피  두개골이 풍지박산이 나 있오. 그  옆
    에 무릎을 꺾고 쓰러져 있는 것은 그의 경호원 중의 한 사람이고. 
    뇌가 드러나 보이고 있오!"
      모건이 차례차례로 크레타 인의 희생자의  사진을 보였지만, 그 
    아가씨는 조금도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최후의 사진은 미간이었
    다. 패딩턴 터널에서 촬영된  것으로서 발견되었을 때와 마찬가지
    로 도랑 속에 쓰러져 있었다.
      "이것은 누군가요?"
      "내 딸."
      하고 모건은 말했다.
      "14세였지. 그 사나이는 코엔을 쏜 뒤  훔친 차로 도주 중에 이 
    아이를 받은 거야."
      호프만은 사진을 내려 놓고는 전혀 무관심한 얼굴로 캐더린  라
    일리를 돌아다보았다.
      "이제 가도 돼요?"
      그 말을 듣고 캐더린 라일리는 전혀 그녀답지 않게  다짜고짜로 
    호프만의 뺨을 때렸다.
      모건이 그 사이에 끼어들어 캐더린의 양팔을 잡고 낮지만  강한 
    어조로 타일렀다.
      "진정해요, 내버려 둬요"
      두 사람 뒤에서 호프만은 문 있는 곳으로 가서 벨을 눌렀다. 잠
    시 후 문이 열리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갔다.
      모건의 어깨 너머로 미간의 사진이 똑똑하게 보이고 있었다. 캐
    더린 라일리는 피에 물든 그 얼굴에 가슴 속이 메스꺼워졌다.
      "미안합니다."
      하고 그녀는 중얼거리 듯이 말했다.
      "아아, 캐더린."
      하고 그는 말했다.
      "규칙의 첫째는 사과하거나 용서를  빌어도 안 되고 변명  또한 
    통하지 않는 것이오. 자, 이곳을 나가서 어디서 한 잔 합시다."
      "에이서 모건?"
      하고 그녀는 말했다.
      "이상한 이름이군요."
      "성서에서 따온 것이오."
      그렇게 말하고 그는 잠깐  동안 진짜 웨이즈인 같은 태도를 보
    였다.

제 목 : 제6장 죽음을 추구하는 사나이 - 3
      "어머니가 신앙심 깊은  분이었지요. 나는 어렸을 때 일요일에
    는 반드시 두 번씩 교회에 가곤 했지요."
      "그것은 어디 있을 때 얘기인가요?"
      "웨일즈의 론다 벨리에 있는 마을이었오. 탄광과 쓸모 없는  돌
    더미뿐인 고장이었지요. 도망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마을이었어
    요. 아버지는 내가 여덟 살 때 낙반 사고로 죽었오.  회사는 어머
    니에게 주 10실링의 연금을  주었지요. 나도 14세가 되자  갱도로 
    내려갔오. 그 후 4년 뒤에 군대에 들어갔고 그것으로 끝장이오."
      "한 번도 과거를 뒤돌아보지 않았나요?"
      "좋았었지요."
      모건이 말했다.
      "군인이라는 직업이 말이오.  그처럼 내게 딱 들어맞는다고 느
    낀 일은 없었지요. 군대도 내게 잘해 주었어요.  아른햄에서 중사
    가 되고 그 후 전선에서의 임명으로 소위가 되었오.  전쟁이 끝났
    어도 군대는 나를 내쫓지 않고 샌드허스트 사관학교에  보내 주었
    지요."
      "당신의 학력은?  그런 장소에서  곤란한 일은  당하지 않았나
    요?"
      "괜찮았오. 아무리 멍청이라도 나이프와 포크의 사용법  정도는 
    알고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웨일즈 인이라는  자부심이 있었지요. 
    잉글랜드 녀석들은 설사 이튼을 나왔다 해도 이쪽이  앞서 있다고 
    하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오."
      모건은 미소를 띠고 캐더린을 놀려대는 듯한 말투가 되어  있었
    다.
      "웨일즈 사람들은 인테리들이라구요.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해주
    었지요. 나는 크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을 읽었을 뿐만  아니라 손
    자(孫子兵法)도 알고 있었오. 굉장히 어려운 학문이더군."
      "당신은 대단한 괴짜였군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오. 남보다 앞서지 않으면 안  되었으니
    까요. 예를 들면 외국어  같은 것도 그래요, 웨일즈 말을  자유롭
    게 구사할 수 있으면 다른  나라 말 같은 것은 모두 쉽다는  얘기
    입니다."
      두 사람은 캄강의 둑에 있는 술집 밖에 놓인 조그만 탁자를  사
    이에 두고 앉아 있었다.  기울어지기 시작한 햇살이 더없이  좋았
    다.
      "부인은 어땠어요? 그런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나요?"
      "내가 보는  한에서는 그녀는 확고한  태도로 받아들이고 있었
    오."
      모건은 어깨를 추슬러보였다.
      "그것도 아주 먼 옛날에  끝났오. 그녀는 군인 생활을 좋게 생
    각하지 않았오.  아니 그보다는 나의  생활 방식을  싫어했다고나 
    할까. 그녀는  직업적인 화가로 꽤나  잘 그렸오. 우리들은  어떤 
    일요일 아침 국립 미술관에서 만났지요. 인생에서  흔히 저질러지
    는 기념비적 과오의 하나였지요.  아마 군복과 빨간 베레모  탓이
    었을 게요."
      "부인은 그것이 마음에 들었군요?"
      "오래 가지는 못했오."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녀는 EOKA와의 전투가 한창 치열할 때 키프로스를  방문했었
    지요. 어느 날 우리들은 기갑 연대의 군의관의 뒤를  따라 니코시
    아의 시내를 자동차로 달리고  있었오. 그 군의관은 비번일  때는 
    토로에도스 산맥의  마을들을 찾아다니며  농민에게 의료  봉사를 
    하고 있는  사람이었지요. 그가  어떤 신호에서  차를 멈췄을 때 
    EOKA의 테러리스트가 두 명  뛰쳐 나와 그의 머리통을 창  밖까지 
    날려 보냈오."
      "그래서 당신이 그들을 상대했군요?"
      "물론이오. 무기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두 명 모두 죽였어요?"
      "그렇소. 운 나쁘게도  그 중의 하나는  아직 15세의 소년이었
    오."
      "부인은 그것을 용서할 수 없었군요?"
      "서구의 인간들이란  모두들 팔이라든가,  어깨라든가, 그러한 
    적당한 장소를 쏘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위험한  지
    경에 빠지면 한  가지 일을 할  여유밖에는 없지요. 쏴  죽이는거
    요. 그것도 확실하게 죽이기  위해서 반드시 두 발씩. 그렇게  하
    지 않으면 상대방은 쓰러지면서 반격을 시도할지도 모르니까요."
      "그 후부터 부인은 달라지기 시작한 건가요?"
      "그 소년의 일은  그렇지도 않았오. 내가  그런 행동을 취하는 
    것을 본 것이 원인이었겠지요. 내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고 말했
    었오. 때마침 그때 임신해  있었던 탓도 있겠지만, 그녀는 그  이
    후 절대로 나와 잠자리를 함께 하려고 하지 않았오."
      "미안해요."
      "당신이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어요. 그녀는 인생을 믿고 있
    지요. 그런데  나를 일종의 처형관리로  본 거예요. 지금  그녀는 
    시골 교구의  성공회 신부와 결혼해서  살고 있지요.  이것저것할 
    것 없이 모든  것을 믿고 있는 사람으로  두 사람은 그런대로  잘 
    살아나가고 있지요."
 
제 목 : 제6장 죽음을 추구하는 사나이 - 4
      캐더린 라일리는 말투를 바꿨다.
      "따님의 일은 정말 안 됐다고 생각해요."
      "내가 어리석었오."
      하고 그는 말했다."
      "조금 전의 그 아가씨에게  쇼크를 주면 무엇인가 얘기하게  되
    리라고 생각한 것이 어리석기 짝이 없었오."
      "그녀와 같은 인간에게  있어서 그것은 종교와  같은 것이에요. 
    싸르트르와 같은 사람들이  부르짖는 넋두리를 그대로 모두  믿고 
    있는 거죠. 폭력을 신성시하는 신비주의적인 관점을  말이에요. 테
    러리스트는 낭만적인  사고 방식을 좋아합니다.  자신들이 혁명의 
    영웅이라고 주장하면서  전쟁의 루울 따위는  무시해버리는 거죠. 
    인민의 대변자라고 하면서  대변하는 것은 항상 자기네  이익뿐이
    에요."
      "크레타 인은 어떨까요, 어떤 인간일까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죠?"
      모건은 그 점에 대해서 베이커와 나눈 얘기를 들려주고  그들이 
    도달한 결론을 얘기했다.
      캐더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나도 동감이에요. 군대 경험이라는 점만은 동의할 
    수 없지만요."
      "어째서?"
      "쿠바는 벌써 몇 년째나  전 세계로부터 모아 온  테러리스트에
    게 우수한 군사  훈련을 제공하고 있어요.  그리고 소련도 최근에
    는, 모스크바의 파트리스  루뭄바 대학에 거의  모든 나라에서 온 
    학생들을 모아 놓고  있어요. KGB는 항상 유망한 인재에  눈독을 
    들여오고 있었으니까요......."
      "알고 있오. 하지만 크레타 인에게는  그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
    다고 생각돼요. 병사가 다른  병사를 알아내는 본능이라고나 할까
    요. 그와 같은 사나이를 움직이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알고 싶
    은 것이오. 이데올로기는 아니오...... 그 사나이의 살인에는 일정한 
    패턴을 찾아볼 수가 없오."
      "심리학자의 의견을 듣고 싶으세요?"
      "물론이오."
      "좋아요...... 들어보세요.  이전에 나는 그랑프리  경주차 선수의 
    연구에 참가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알게 된 것인데 그들은 스트
    레스가 쌓이면 쌓일수록 잘 기능하는 거예요. 그들의 거의 대부분
    이 최대한으로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을 때만 진정으로 살고, 자
    기 능력 최대의 활동을  나타내보이는 거예요. 입상하는 그랑프리 
    선수라는 것은 진로를  방해하는 차를 언제든지 코스로부터  밀어
    내 버릴 수 있는 인간이라구요. 그 이미지는 결정적으로 남성적이
    긴 하지만 어떤 여자보다도  자동차나 엔진 같은 장사 밑천  쪽을 
    더 사랑하고 있지요. 레이스는 완전한 도전으로서,  패배하면 죽음
    이 있을 뿐이에요. 항상 흥분을 가져다 주는, 절대로  만족하는 법
    이 없는 게임이에요."
      "끊임 없는 도전, 한 사람의 인간이 맞받아 싸운다......."
      모건은 미간을 찌푸렸다.
      "무엇에 관해서 맞서서 싸우는 걸까......?"
      "아마,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일 거예요. 틀림 없는 정신병  체질
    이에요. 그렇지 않다면  살인에 수반되는 죄의식에  견딜 수 없을 
    걸요."
      "그리고 죽음을 추구하고 있다. 당신은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거
    요? 그 사나이에게는 죽음의 소망이 있다고?"
      "범인이 그것을 아주  조금이라도 의식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추락하는  비행기에서 죽음에 직면한  테스트 파일로트의 
    테이프를 들어 보면 공포의  절규 따위는 지르지 않고 어디가  고
    장이 났는지 계속해서  찾으면서 얘기를 하고  있어요. 그 사람도 
    그런 종류의 인간이에요."
      캐더린은 잠시 망설였다.
      "내 상상으로는 당신과 많이 닮은 인간이에요."
      "좋아요, 그렇다면 그놈에게 이길 기회가 있는 셈이군요."
      모건은 손목 시계에 눈을 보냈다.
      "이젠 그만 가야겠군. 오늘 밤 런던에서 약속이 있어서."
      함께 자동차로 돌아가면서 캐더린 라일리가 말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할 생각이죠? 이 이상 당신이 할 수  있는 일
    은 없는 게 아닐까요?"
      "아니요, 코엔을 저격한 총이  있오. 그 총의 출처를 캐낼  수만 
    있다면."
      "캐낼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벨파스트에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을 알고 있오. 그 사람을 만나
    봐야겠오."
      캐더린이 차에 올랐다. 모건이 문을 닫고 반대 쪽으로 돌아가서 
    운전석에 앉았다.
      "돌아가면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자기도 놀란 일이지만 그녀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원하신다면요."
      하고 대답하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원하지 않는다면 이런 질문을 할 리가  없지 않겠
    오?"


제 목 : 제6장 죽음을 추구하는 사나이 - 5
      시큐어리티 팩터스 사는  그레이트 포틀랜드 가에서 옆으로 들
    어간 좁은 골목길에 있었다.
      7시 조금 지나 모건은 그 계단을 올라가 사무실이라고 쓴  문에 
    손을 댔다. 문은 잠겨  있었으나 안에 불이 켜져 있었다.  모건은 
    벨을 누르고 기다렸다. 유리창에  사람 모습이 비치고 문이  열렸
    다.
      조크 켈소는 55세였으나  짧게 깎아올린 회색 머리칼에도 불구
    하고 아직 40세 정도로  보였다. 키는 6피트가 넘고 햇빛에  그을
    리고 팽팽한 몸매를 하고  있었다. 같은 편이라면 도움이  되겠지
    만 그 이외에는 접근하기가 꺼림칙한 인간이었다.  스코틀랜드 근
    위보병연대에서 공정연대로  옮겨, 25년간의  재직중 5년은  연대 
    배속 상급상사로서 모건을 섬기고 있었다.
      "잘 있었나, 조크?"
      모건은 안으로 들어갔다.
      "보안 일은 어떤가?"
      켈소는 앞장 서서 작지만  정연한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깨끗
    이 정돈된 책상,  녹색의 서류 캐비넷,  빈틈 없이 깔린  카페트. 
    그 방이야말로 회사의 진짜 업무가 행해지고 있는 장소였다.
      이 사무실로부터 수많은 용병이 콩코나 수단, 오만, 그밖의  많
    은 추악한 전쟁터로 보내져갔다.  조크 켈소는 죽음을 장사로  하
    고 있다. 본인은 물론, 모건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켈소는 두 개의 종이컵에 위스키를 따랐다.
      "미간 얘기는 들었읍니다, 정말 안 됐읍니다."
      "죽인 사나이를 찾고 싶네, 크레타인이라고 불리우는 놈일세."
      하고 모건이 말했다.
      "말할 필요도 없겠읍니다만 대령님,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읍니다."
      "알고 있네, 조크. 한 가지 단서가 있네. 성공할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벨파스트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네."
      "군복을 벗구요?"
      켈소는 괴로운 표정이 되었다.
      "놈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대령님. 당장 대령님을 노
    릴 텐데요."
      "오헤이건에게 전해 주게."
      하고 모건은 말했다.
      "내일 오후부터 벨파스트의  유로파에 있겠다고, 꼭 만나야 할 
    용건이 있다고 말일세. 할 수 있겠나?"
      "네, 진심으로 그렇게 하기를 원하신다면요."
      "물론일세, 조크. 부인이 죽고 나서 어떻게 지내고 있나?"
      "잘 해 나가고 있읍니다.  딸 에이미가 아직 집에 있기 때문에
    요. 제법 제 시중을 들어 주고 있읍니다."
      "벌써 20세 가량은 되었겠지? 약혼이라도 해 놓았는가?"
      "천만에 말씀입니다."
      켈소는 소리를 내서 웃었다.
      "그 아이는  똑똑해서요. 자기 손으로  꽃집을 하고 있읍니다. 
    꽤나 잘 되어 나갑니다. 특히 배달 쪽에서요.  아이들이란 눈깜짝
    할  새에 자라더군요.  아직 어린애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어느
    새...."
      켈소는 무안한 듯이 입을 다물었다. 모건은 종이컵의  위스키를 
    마시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오늘은 꽤나 춥군. 나도 나이를 먹은 모양이야."
      "하지만 한국 정도는 아닙니다, 대령님."
      "그렇군."
      모건이 조용히 대답했다.
      "그 추위에는 아무도  못 당할 걸세.  돌아오면 다시 연락하겠
    네."
      켈소는 발소리가 계단을 내려가기를 기다렸다가 수화기를  들어 
    택시를 불렀다.


제 목 : 제6장 죽음을 추구하는 사나이 - 6
      20분 후, 택시는 포토벨로 로드의 '하프 오브 에린'이라는 술집 
    앞에서 켈소를 내려 주었다. 그 이름이 말해 주듯이 런던의  아일
    랜드인이 자주 드나드는 술집이었다.
      술집 안은 붐비고 있었다. 구석에서 노인이 아코디온을  켜면서 
    아일랜드의 유명한 전승 민요 '용감한 로버트 에미트'를 연주하고 
    있었다. 켈소가 들어갔을 때는 마침 손님들 모두가 목소리를 맞춰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였다.
      "매국노, 반역자, 간첩으로서 재판을 받았으나  아무도 나를 비
    겁자, 겁장이라고는 부르지 못한다네. 나는 영웅으로서 살고 영웅
    으로서 죽어 간다네."
      적의가 담긴 시선을 받으면서 켈소는  손님사이를 휘집듯이 하
    며 '내실'이라고 쓴 방으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세 명의 사
    나이가 작은 탁자를 둘러싸고 카드를 하고 있었다.
      정면에 앉은 덩치 큰 사나이는 패트릭 머피라고 하며 IRA의 정
    치부문인 신페인당 런던 북부의 조직책이었다.
      "조크 켈소, 무슨 일인가?"
      "중요한 얘기가 있네."
      하고 켈소가 대답했다.
      머피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은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무슨 일이지?"
      "오헤이건에게 전갈이 있네."
      "어떤 오헤이건에게 말인가?"
      "내게는 시치미 떼지 말게, 머피.  우리들은 오랫동안 군대밥을 
    함께 먹은 사이가 아닌가? 오헤이건에게 에이서 모건이 내일부터 
    유로파에 체제한다고 전해 주게. 개인적인  용건으로 될 수  있는 
    한 빨리 만나보고 싶다더군."
      "어떤 개인적인 용건이지?"
      "그것은 그가 말할 걸세."
      켈소는 문을 열고 손님을 비집고 밖으로 나가자 기다리게 해둔 
    택시에 올라탔다. 차가 달리기 시작했을  때 켈소는 얼마간  식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내실에 남은 머피는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카운터에 몸을 
    기대고 여주인을 불렀다. 그는 1폰드 지폐를 두 장 건네 주었다.
      "10펜스 동전으로 바꿔 줘, 노라.  벨파스트에 전화를 걸어야겠
    으니까. "
      "바꿔는 주겠지만 우리 전화는 안 되나요?"
      "이 전화는 곤란해. 누가 도청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여주인은 어깨를 추슬러 보이고 돈이 든 서랍에서 동전을 꺼내 
    주었다. 머피는 뒷문으로 해서 밖으로 나가자 거리 모퉁이의 공중 
    전화박스를 향해 걸어갔다.
      다음날 아침, 9시 조금 지나 캐더린 라일리의 서재 문을 노크하
    는 사람이 있었다. 캐더린이 얼굴을 들자 미카리가 나타났다.
      "언제 이곳에 왔어요?"
      캐더린이 물었다.
      "오늘 아침 새로 사들인 중고 세스나 기로 날아왔지. 이틀 가량 
    비어 있고 그 뒤에 연주회가 파리, 베를린, 로마에서 있어. 그  후
    엔 한동안 이도라에 가 있을까 하고 생각하는 중이야. 휴가를  얻
    을 수 있겠어?"
      "모르겠어요."
      캐더린은 그의 팔에 안겨 그때마다 반드시 솟구쳐 오르는 육체
    적인 흥분을 느끼고 있었다.
      "이번 학기는 일이 빡빡히 밀려 있어요."
      "알겠어, 그렇다면 오늘 아침에 당신이 특별히 말을 잘  들으면 
    세스나를 조종하도록 해 주겠어."
      "당신보다는 훨씬 착한 아이예요,  존 미카리. 잘  알고 있으면
    서."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 모두 비행을  무엇보다도 좋아하고 있
    었던 것이다.
      "옷을 갈아 입을 테니까 10분만 기다려 주세요."
      "5분이야."
      미카리가 책상에 걸터 앉아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는 동안에 
    캐더린은 침실로 사라졌다.
      "그럼 이번 주는 바빴던 모양이군. 무엇을 하고 지냈지?"
      "다른 때와 마찬가지에요."
      캐더린은 큰 소리로 대답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호프만이라는 처녀의 일 정도지요. 이상한 
    사정으로 어제 만나 보았어요."
      "그래?"
      미카리는 문 있는 곳까지 가서 몸을 기댔다.
      "얘기해 봐요."
      두 사람이 밖에 있는 자동차로 걸어가는 도중 미카리는 구실을 
    만들어 학교로 되돌아가 최초에 눈에 띈 공중전화로 파리에 전화
    를 걸었다.
      드비르가 나오자 간단하게 용건을 말했다.
      "모건이라는 사람의 완전한 신상 서류가 필요해요. 알고 있어야 
    할 것은 전부. 사진을 포함해서 완전한 서류 말입니다. 런던의 친
    구들에게서 얻을 수 있겠읍니까?"
      "물론이지. 오늘 저녁 7시 이후라면 언제든지 가능하겠지. 런던
    의 사서함으로 받을 수 있을 걸세. 자네가 난처한 입장에 빠져 있
    다는 얘기인가?"
      "그는 문제의 독일 화물을  만났읍니다. 아무 것도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말예요. 내 정보에 따르면 그는 지금 사용된 도구의  뒤
    를 쫓을 단서를 찾아 알스터로 향하고 있어요."
      드비르는 킬킬거리며 웃었다.
      "엉뚱한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군  그래, 막다른 골목길로  말일
    세."
      "그러게 말입니다."
      하고 미카리는 말했다.
      "하지만 준비를 해 두는 것이 좋겠죠. 계속 연락하겠어요."

제 목 : 제7장 악마의 자식들 - 1



                         제7장 악마의 자식들



      벨파스트의 유로파  호텔은 그레이트  빅토리아가에 있는데 그 
    12층짜리 건물은 바로  이웃에 있는 역보다  훨씬 높다. 1971년에 
    개업한 이래 IRA에 의한 폭파 사건이 25회 이상이나 일어났다.
      모건은 4층에 있는  자기 방의 창가에  서서 그 놀라운 기록을 
    생각하면서 버스 정류장과  프로테스탄트 파의 본거지 샌디  로우
    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벨파스트 만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동풍이 황량한 시가지의 초
    라한 거리에 비스듬히 비를 짙뿌리고 있었다. 모건은 안정을 잃고 
    조바심을 하고 있었다. 이곳에 온  지 이틀째가 되는데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줄곧 호텔에만 머물러 있었고 방을 비운 것은 아랫층의  식당이
    나 바아에 갈때 뿐이다. 어젯밤은  거의 밤새껏 암흑 속에서 창가
    에 앉아 보냈다.  밤의 정적을 깨뜨리고  이따끔 폭탄의 작렬음과 
    단속적으로 울리는 소화기의 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모건이 초조해 하고 있는 것은,  오늘이 금요일로서 지금으로부
    터 48시간 가량 뒤인 7월 31일, 월요일 오전 4시에는 '모터맨'  작
    전이 시작되기 때문이었다. 영국군이 행하는 작전으로서는 스웨즈 
    이래의 최대  규모의 것이었다.  벨파스트와 렌데델리의 IRA에게 
    지배당한 이른바 출입금지  지역의 전역에 침공이 계획되어져  있
    다. 이 작전이 개시된다면 오헤이건은 한동안 완전히 몸을 감추어 
    버릴 것이다. 발견만 되지  않는다면 남쪽의 아일랜드 공화국으로 
    도망칠지도 모른다.
      마침내 견디다 못해  모건은 윗저고리를 입고 엘리베이터를 타
    고 로비로 내려갔다. 그는 바아에 있겠다고 프론트 계원에게 말해
    두고 카운터 앞의 의자에 앉아 위스키를 주문했다.
      오헤이건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걸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에는 
    두 사람의 사이가 너무 많이 벌어져 버린 것이리라.
      모건이 위스키를 한 모금  마셨을 때 제복을 입은 포터가 어깨
    를 건드렸다.
      "모건 대령이십니까? 택시가 왔읍니다."
      나이가 든 운전수는 깎지 않은 수염이 더부룩했다. 뒷좌석에 앉
    은 모건은 거울을 통해 자기를  응시하는 눈을 깨달았다. 한 마디
    의 말도 나누지  않은 채 자동차는 짙어  가는 어둠과 내리는  비 
    사이를 뚫고 달려갔다.
      큰거리의 모퉁이 마다에는  병사들이 서 있었으나 교통량은 상
    당히 많고 길을 오가는 사람들도 놀라울 정도로 많았다.
      자동차는 가톨릭 터프  롯지 지구를 왼쪽으로 하고 폴스로드의 
    어딘가에 있었다. 모건이 그렇게 깨달았을 때 노인은 지저분한 옆
    골목으로 차를 끌고 들어갔다.
      골목의 끝은 건축현장이었다. 차가 다가가자 높은 문이  열렸다. 
    차가 안으로 들어가고 뒤에서 문이 닫혔다.
      문 위에 조명등이 한 개 달려  있어서 작업장을 비추고 있었다. 
    그 옆에 '킬로이스 베이커리'라고 차체에  페인트로 쓴 낡은 포드
    의 벤이 서 있다.
      주위는 조용하고 빗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다. 운전수 노인이 처
    음으로 입을 열었다.
      "내리는 것이 좋겠소 손님."
      지금이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하고  모건은 생각했다. 여러모로 
    생각해 낸 도박이 성공하느냐  실패 하느냐가 밝혀지는 순간이다. 
    모건은 침착하게 담배에 불을 붙이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벤의 그늘에서 검은 방한  코트의 모자를 쓴 체격이 좋은 사나
    이가 카라시니코프를 겨누고  모습을 나타냈다. 모건은  기다렸다. 
    발소리가 나고 어둠 속에서 두  번째 사나이가 모습을 보였다. 벨
    트가 붙은 낡은  레인 코트에 트위드 모자를 쓴  키가 큰 사나이. 
    아직 젊고 소년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가까와 옴에 따라 모
    자챙 밑의 얼굴이 보였다. 고뇌를  담은 검은 눈동자가 마음의 고
    통을 얘기해주고 있었다.
      "입장을 생각해서 얌전하게 행동해 주시겠읍니까, 대령?"
      그 말투에서 벨파스트  출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소년은 
    자기의 임무를 잘 알고 있어서 모건이 벤의 차체에 손을  대고 몸
    을 지탱하자 익숙한 솜씨로 그의 몸을 수색했다.
      결과에 만족하자 소년은 벤의 뒷문을 열었다.
      "좋습니다, 대령. 여기에 타십시오."
      모건에 이어 소년도 벤에 올라타고 또 한 사람이 총을 건네  주
    고 문을 닫았다.  그 사나이가 운전석으로  가는 것이 들렸다.  곧 
    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목적지까지는 10분 정도 걸렸다. 벤이  멈추자 운전수가 돌아와
    서 문을 열었다.  소년이 뛰어내리고 모건도 뒤따랐다. 거리는  황
    폐한 광경을 나타내고  있었으며 유리조각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
    었다. 가로등은 거의 부서지고 반대쪽의 창고는 기와 조각과 벽돌
    의 산으로 변해 있었다.
      늘어선 조그만 테라스  하우스에는 엉성하게 닫혀진 커튼의 틈
    새로 얼마간 불빛이 새어  나오는 이외에는 거의 사람이 사는  기
    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소년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성냥을 멀리 
    던졌다.

제 목 : 제7장 악마의 자식들 - 2




      모건도 뒤를 따랐다. 길모퉁이에 조그만 카페가 있었다.  소년은 
    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 갔다. 대단한 술집은 아니었다.  한쪽에
    는 갈색으로 칠해진 박스석이 늘어  서 있고, 반대 쪽에는 대리석
    을 씌운 카운터가 있고  가스를 사용하는 구식의 커다란 홍차  끓
    이는 기구가 놓여져 있었다.
      손님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얼룩투성이의 앞치마를 걸친 백
    발의 여인이 한 사람 홍차기구 옆의 의자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
    다. 여인은 모건을 힐끗 쳐다보고는 소년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
    다.
      가장 안쪽의 박스석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대령님을 이곳으로 모셔오너라. 세이머스."
      리엄 오헤이건은 홍차잔을  옆에 놓고 에그  앤드 칩스를 먹고 
    있었다. 40대  초반의 검은 고수머리의  사나이였다. 옷깃을  열어 
    젖힌 뎃님 셔츠와 돈키  자켓을 입고 마치 조선소의 작업원이  집
    으로 가는 도중에 카페에 들려 밥을 먹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오랜만이로군, 모건."
      하고 그는 말했다.
      "잘 지내는 모양이군."
      소년이 카운터로 가서  홍차를 두 잔 주문했다.  모건은 의자에 
    앉았다.
      "너무 어리지 않은가?"
      "누구? 세이머스 말인가?"
      오헤이건이 소리를 내서 웃었다.
      "1969년 8월의 폴스로드에서는 누구도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았
    네. 신교도의 폭도들이  그곳을 불살라 버리고  살고 있던 가톨릭 
    교도의 가족을 쫓아냈을 때 말일세.  그날 저녁 거리를 지키며 놈
    들을 쫓아낸 것은  얼마 안 되는 IRA였지만 세이머스도  그 속에 
    끼어 있었다네."
      "그때는 겨우 16세 정도였겠군."
      "18세였어."
      하고 오헤이건이 정정했다.
      "그는 45구경 권총을 들고 왔었지. 할아버지가 제 1차 대전에서 
    가지고 돌아왔던 권총이었네.  그날 저녁 내 옆에서 싸웠다네.  그 
    이후 내 시중을 들어 주고 있지."
      "자네 시중을 들다니?"
      "권총을 쥐어주면 그 애 만큼 잘 쏘는 놈은 아직 본  적이 없을 
    정도일세."
      세이머스가 홍차잔을 가져다 모건의 앞에  놓았다. 자기는 카운
    터로 돌아가서 의자에 앉아 홍차를 마시면서 입구를  감시하고 있
    었다.
      "대단한 소년이군."
      오헤이건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무슨 볼일인가, 모건?"
      "1950년 겨울, 한국에 있었을 때  자네는 알스티 소총연대의 징
    집병 가운데서도 가장 형편 없는 소위였어."
      "옛날 얘기지."
      하고 오헤이건이 말했다.
      "하지만 당신과 같은 덩치  큰 사나이가 부속품을 달고  나타났
    을 때 우리들은 모두 감탄했었지.  훈장이니 뭐니를 잔뜩 달고 있
    어서, 이 녀석이야 말로 진짜 군인이라고 생각했었다네."
      "임진강에서 중공군에게 포위당해  연대가 퇴로를 뚫지  않으면 
    안 되었을 때, 자네는 다리에 총을 맞아 나는 자네를 구하러 돌아
    갔네. 자네를 끌고 탈출했었지. 그때 일로 자네는 내게  빚진 것이
    있어."
      오헤이건은 입술을 문지르고  주머니에서 위스키 병을 꺼내 홍
    차에 탔다. 오헤이건은 모건의 홍차에도 똑같이 했다.
      "빚은 깨끗이 갚았지  않나? 그 '피의 금요일'에  말일세. 모건, 
    자네는 한밤중에 루이스 가에 서 있었지. 마침 불타고 있던 '코헌
    즈 바아'의 앞이었어. 그 소년과 나는 길 건너 쪽의 지붕 위에 있
    었어. 그 녀석은 당신의 머리를  날려 보내고 싶어했지만 내가 말
    렸던거야. 그러니까 뭔가 특별한 보상을 기대하고 왔다면 시간 낭
    비일세."
      "자네들에게는 멋진 날이었지."
      하고 모건은 신랄하게 말했다.
      "140명이나 사상자가 생겼으니까."
      "풋내기 같은 소리는 집어 치우게.  1943년 7월 영국 공군의 폭
    격으로 함부르크에서 일어난 대화재에서는 사흘  동안에 히로시마
    의 원자폭탄보다 더 많은 사람이  죽었지. 2만미터의 상공에서 폭
    탄을 떨어뜨리는 것과 카페의 탁자 밑에 플라스틱  폭탄을 장치하
    는 것과의 차이를 말한다면 조종사에게는 자기가 한  일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뿐일세."
      "이런 일을 언제까지나 계속할  생각인가, 오헤이건? 이런 폭력
    이나 살인을."
      "아일랜드가 통일될 때까지 계속할 걸세."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겠나? 모든  것이 끝나 버리면  무엇을 
    할 생각인가?"
      오헤이건은 얼굴을 찡그렸다.

제 목 : 제7장 악마의 자식들 - 3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자네들은 어쨌든 승리를  손에 거머쥘 생각이겠지? 그렇게  믿
    고 있을 테지.  그렇지 않다면 의미가 없을테니까. 아니면  끝나는 
    것을 원하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닌가?  영화사의 스튜디오에서처럼 
    영구히 계속되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지는 않은가? 일어서라, 공화
    국이여! 총과  트렌치코트. 나의 목숨을  아일랜드를 위해 바치노
    라!"
      "웃기는 소리 작작해! 모건."
      오헤이건이 가로막았다.
      "내 딸 미간을 기억하고 있나?"
      오헤이건이 끄덕였다.
      "몇살이 되던가? 14세나 15세쯤 되었을 텐데."
      "지난 주 맥스웰 코엔이 살해된 얘기는 들었겠지?"
      "그것은 '검은 구월단'이 한 짓일세. 우리가 한 짓이 아니야."
      "범인은 경찰에 쫓기자 자동차를 훔쳐 도주했네. 미간은 자전거
    로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패딩톤 터널을 지나가고 있었지. 그놈
    은 미간을  들이받았어. 무참하게  도랑에 틀어박고  도망쳐 버렸
    지."
      "저런 죽일 놈 보았나!"
      "자네를 놀래 줄 생각은 없네. 피의 금요일도  비슷한 것이었지. 
    지금와서 한 사람쯤 더 죽었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는 일일세."
      오헤이건이 심각한 얼굴을 했다.
      "알겠네, 모건. 자네의 요구는?"
      "보안상의 이유로 신문에는 전부 발표되지 않았지만  그 범행의 
    범인은 '크레타 인'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인물 같네."
      "'크레타의 연인'말인가? 그놈에  관해서는 나도 들은  적이 있
    네. 동서양 진영의 주요 인사들을 살해한 일종의 국제적인 살인청
    부업자지."
      "맞았어, 그놈은 극히 진귀한 권총을 사용해서 코엔을 살해했네. 
    소음기가 부착된 모젤로서 대전 중에 히틀러 친위대  보안부를 위
    해 만들어진 권총일세. 현재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모델이지."
      "알겠네. 그것을 공급한 판매인을 찾아내려고 하는군?"
      "맞았어. 특별 수사부의 얘기로는 영국  내에서 그런 타입의 권
    총이 사용된 살인의 기록은  한 건밖에는 없는데 그것은 런던  델
    리에서 육군 정보부의 중사가 머피라는 IRA의 테러리스트에게 당
    한 사건뿐일세.  머피는 도주 중에  코만도 부대에게  사살되었지. 
    함께 있던 페란이라는 사나이도 사살되었네."
      "그들이 어디서 그 권총을  손에 넣었는지를 알고 싶다는  말인
    가?"
      오헤이건은 어깨를 추슬러 보였다.
      "한가지 문제가 있네."
      "뭔데?"
      "머피와 페란은 우리들과 같은  과격파가 아니었다네. 처음에는 
    그랬지만 작년 9월 브렌던  터리가 이끄는 '엘린의 자식들'이라는 
    분파에 가담했었지."
      "그 사나이의 얘기는 들은 적이 있어. 역시 자네들과 같이 폭력
    의 순수성을 믿는 무리들이겠지?"
      "브렌던은 그런 놈이지. 완전히 미쳐 있다네. 매일  밤 빠뜨리지 
    않고 성모마리아에게  촛불을 밝히지만  대의를 위해서라면  로마 
    교황을 죽이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인간들이지."
      "자네가 물어 보면 모젤 권총의 출처를 말해 줄까?"
      "말해 줄지도 모르지."
      "오헤이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알아내고 싶네. 나에게  남겨진 
    유일한 단서일세."
      오헤이건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 목 : 제7장 악마의 자식들 - 4





      "꼭 그놈을 잡아내고야 말 각오로군. 무엇 때문이지...... 정의 때
    문인가?"
      "정의 따위는 아니야.  그놈이 죽는 꼴을 이  눈으로 보고 싶을 
    뿐이야."
      "그것이 진심인가? 하여간 좋아.  한번 해 보겠네. 유로파로  돌
    아가서 기다리고 있게나."
      "어느 정도?"
      "이틀...... 길어야 사흘만 기다리게."
      "재미가 없는 걸."
      "왜, 안 된다는 거지?"
      지금에 와서 뒤돌아 서기에는 모건은 지나치게 깊이 들어와  있
    었다.
      "월요일 저녁이면 벨파스트는 완전히 포위되어 개미새끼  한 마
    리 못 빠져 나올 걸."
      "재미 있는 얘기군."
      오헤이건이 말했을 때 문이 기세 좋게 활짝 열렸다.
      세이머스는 이미 일어서 있었고, 오헤이건은 주머니에서 재빨리 
    권총을 꺼내 탁자 밑에서 겨냥을 대고 있었다.
      천박하게 생긴 몸집이  큰 사나이가 바로  입구를 들어선 곳에 
    서서 술에 취한  듯이 몸을 비틀거리고  있었다. 지저분한 코트를 
    걸치고 새빨갛게 충혈된 눈을  하고 있었다. 오헤이건이나 모건에
    게는 전혀 눈도 주지  않고 세이머스를 무시한 채 비틀비틀  카운
    터로 걸어와 쾅하고 양손을 짚었다.
      "자금 모금을 하러 다니는 길이오."
      사나이는 나이가 든 여주인에게 말했다.
      "조직의 자금을 위해  10파운드를 내시오, 주인 아주머니.  그러
    면 용서해 주지.  돈을 안 내면 이 가게를  못하게 만들어 버리겠
    어."
      여주인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홍차를  찻잔에 따르자 스푼
    으로 설탕을 집어 넣고 카운터 위로 밀어보냈다.
      "그것을 마셔요, 술을  깬 다음  집으로 돌아가요. 가게를  잘못 
    찾아왔어요."
      사나이는 한 손으로 찻잔을 밀어 버렸다.
      "10파운드야, 아주머니. 이런 술집은 단숨에 때려 부술  수 있다
    구."
      세이머스의 오른손에 권총이  나타나 사나이의 턱을 노리고 있
    었다. 소년은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았다. 입을 연 것은  오헤이
    건이었다.
      "IRA냐? 어떤 여단이지?"
      사나이는 멍청한 얼굴로 노려보았다.
      "그 녀석을 밖으로 끌어내라, 세이머스."
      소년은 사나이의 몸을 휙하니 돌려 비틀거리는 몸을 문  밖으로 
    밀어냈다. 오헤이건이 뒤를 따르고 모건도 밖으로 나갔다.
      사나이는 비에 젖어 아직도 불이 들어오는 몇 개 안 되는  가로
    등 밑에 서  있었다. 그 옆에서  세이머스가 권총을 겨누고  있다. 
    오헤이건이 걸어 가서  앞에 멈춰서서 사나이의 사타구니를  난폭
    하게 차 올리자 사나이는 소리를 지르며 무릎을 꺾었다.
      "알겠지? 어떻게 하는지를."
      하고 오헤이건이 말했다.
      세이머스는 옆으로 다가가  권총의 총신을 사나이의 오른쪽 무
    릎 뒤에 갖다대고 한방으로 무릎을 관통시켰다.
      사나이는 고통의 비명을 지르며 길  위를 나뒹굴렀다. 오헤이건
    이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무덤 속에는 영국군놈들과 싸우다 죽은 선량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데 너희들 같은 쓰레기들이 그 무덤에 침을 뱉고  있는 거
    야."
      마침 그때, 문짝 같은 필요 없는 부착물을 제거한 랜드로바가 2
    대, 거리의 모퉁이를 돌아 급정거를 했다.

제 목 : 제7장 악마의 자식들 - 5





      모건은 몇 사람인가의 군복을 보았다. 조명등이 켜졌다.
      "꼼짝 마라!"
      확성기에서 단호한 명령이  들려왔으나 오헤이건과  세이머스는 
    이미 카페의 옆골목으로  뛰어들어 가 있었다.  모건도 뒤를 쫓아 
    정신 없이 달렸다.
      골목길의 끝은 6피트 가량의  벽돌담으로 세 사람이 정신 없이 
    그것을 뛰어넘었을 때 선두의 병사가 골목길로 뛰어 들어왔다. 세 
    사람이 내려선 것은 건축  현장이었다. 암흑 속에서 더듬거리면서
    도 나무 문 쪽으로 서둘러 갔다.
      세이머스가 쪽문을 열고  세 사람이 거리로  나선 것은 선두의 
    병사가 담을 넘은 것과 거의 동시였다.
      세이머스와 오헤이건은  자기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모건은 그  뒤를 따라 어두운 뒷골목을 구불구불 
    빠져 나갔다.
      추격자의 기척이 차츰 멀어져 갔다. 마침내 작은 운하의 제방에 
    다다랐을 때 세이머스는  풀숲 옆에 멈춰  섰다. 주머니에서 소형 
    회중 전등을 꺼내 스위치를  켰을 때 거리의 중심부 쪽에서  엄청
    난 폭발이 일어났다. 거의 간격을 두지 않고 다시 세 번째 폭발이 
    일어났다.
      오헤이건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오늘 밤만은 시간이 딱 들어맞았군."
      그는 모건에게 싱끗이 웃어 보였다.
      "어떤가? 자네는 자칫 잘못했으면 자기 편에게 총을  맞을 뻔했
    네. 얄궂은 세상이지."
      "이제부터 어떻게 할 텐가?"
      모건은 물었다.
      "여기서 나가는 거지. 열어라, 세이머스."
      회중 전등의 불빛 속에서 세이머스가 풀숲을 헤치자 모건의  눈
    앞에 맨홀의 뚜껑이 나타났다.  뚜껑을 쳐들고 세이머스는 쇠사다
    리를 내려갔다.
      모건은 한순간 망설이다가  내려가기 시작하고 그 뒤를 오헤이
    건이 따르고 뚜껑을 다시 덮었다.
      터널은 좁아서 기어서 전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세이머스는 
    벽의 선반에서 커다란 램프를 집어들고 스위치를 켰다.
      소년이 앞서 나가고 모건도 뒤따랐다. 멀리서 큰 소리를 내면서 
    물이 흘러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모건은 커다란  터널의 가장자리에 있는 콘크리트 둑으
    로 나왔다. 램프의 빛으로 터널의  중앙을 갈색의 물이 거품을 내
    면서 흘러가는 것이 보였다. 말할 수 없이 불쾌한 냄새가 코를 찔
    렀다.
      "신교도들의 오물입니다.  걱정 마세요, 대령님.  이제부터 바로 
    밑을 빠져 나가 아도라에  있는 아군의 한가운데로 나가게 될  테
    니까요."
      세이머스가 말했다.
      "그 다음에는?"
      하고 모건이 물었다.
      "이런 상황 아래서는, 우리들은 오늘  밤 안으로 거리를 빠져나
    가는 것이 좋겠군."
      하고 오헤이건이 말했다.
      "자네도 말이야, 모건."
      "그것은 무리일세. 그런 폭파  사건 뒤에는 안 돼. 거리를  나가
    는 도로는 모두 철저히 봉쇄되어 있을 걸."
      "걱정 말게. 방법은 있으니까."
      하고 오헤이건이 말했다.
      "깜짝 놀라게 해 주지. 자아, 가볼까?"
      그들은 20분 가량 후에 높은 벽돌담으로 둘러싸인 공장의  마당 
    같은 곳으로 나왔다.

제 목 : 제7장 악마의 자식들 - 6





      소년이 건물 쪽으로 돌아서자 램프의 빛을 받아 공장이  폭파로 
    심하게 파괴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창문은 모두 철판으로 가려져 
    있었다.
      커다란 자물쇠가 걸린 문 앞에서 오헤이건이 열쇠를 꺼냈다.
      "이곳은 런던에 있는 어떤 회사의  위스키 창고였었지. 세 번째
    로 폭탄을 장치했더니 회사도 이곳을 포기해 버렸네."
      오헤이건이 문을 열고 모건과 세이머스가  안으로 들어갔다. 오
    헤이건이 문을 닫고 소년이 어둠 속을 더듬었다. 찰칵하는 소리가 
    나고 전등에 불이 들어왔다.
      "친절하게도 전기는 끊지 않고 그냥 두었더군."
      하고 오헤이건이 말했다.
      모건은 차고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중앙에 시트를 씌운 자동
    차가 있었다. 오헤이건이 다가가서  시트를 벗기자 군용 랜드로바
    가 나타났다. 전면에 '긴급--폭탄처리반'이라고 쓴 표시판이 붙어 
    있었다.
      "이 정도면 어떤가?"
      하고 오헤이건이 말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정지당한 적이  없다네. 그러니까 마음 놓고 
    있게, 모건."
      오헤이건은 랜드로바의 뒤로  돌아가서 문을 열고 전투복을 던
    져 주었다.
      "필요한 것은 모두 이곳에 있지.  하기야 당신에게는 계급이 낮
    아져서 불마이겠지만 말일세.  대위의 계급장밖에는 없으니까.  나
    는 중사이고 세이머스는 운전수일세."
      "목적지는?"
      하고 모건이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거지?"
      "그 권총의 출처를 알고 싶겠지? 좋아, 브렌던 터리에게 물어보
    러 가세나."
      자동차가 시외를 향해 앤트림 로드를 달려가고 있는 동안  그것
    은 마법의 주문과  같은 효과를 나타냈다.  세 곳의 검문소에서는 
    헌병이 즉각 손을 흔들며 통과하라고 신호했고 네  번째에서는 검
    문 때문에 정지당한 자동차가 열을 짓고 서  있었는데 세이머스는 
    경적을 울리면서 반대차선으로 직진해 갔다.
      바리미나의 교외에서 오헤이건이 공중전화 앞에서 차를  세우라
    고 말했다. 전화 박스에는  3분 정도밖에 있지 않았다. 돌아온  오
    헤이건은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그가 기다리겠다고 했네. 그레나리프 가도를 지나 앤트림 산맥
    을 빠져 나가겠어."
      모건이 말했다.
      "나에 관해서는 어떻게 설명하겠나?"
      오헤이건은 빙긋이 웃었다.
      "자네는 아직도 웨일즈 말을  할 수 있겠지? 브렌던 녀석은  아
    일랜드 말을 지껄이기를 좋아하네.  그가 맥쇼판과 함께 교도소에 
    있을 때 배운 것일세. 웨일즈 말과 아일랜드 말... 틀림  없이 공통
    되는 점이 있을 걸세."


제 목 : 제7장 악마의 자식들 - 7
      
      
      
      
      
      산으로 들어가 20 마일  가량 들어간 곳에  왼쪽으로 코레이를 
    가리키는 표시판이 나타났다. 세이머스는 그쪽으로 구부러져서 돌
    담으로 쌓인 구불구불한 좁은 길을 산쪽으로 자꾸만 올라갔다.
      회색의 서광이 비칠 무렵, 자동차는 밤나무에 뒤덮인 작은 대지
    에 도달했다. 문을 활짝 열어 놓은 헛간과 낡은 지프가 한 대  보
    였다.
      그리고 남자 두 사람이 그 옆에 서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농장 
    노무자와 같은 차림으로 한  사람은 누덕누덕 기운  골덴 상의와 
    모자, 젊은 쪽은 작업복과 장화를 신고 있었다.
      "모자를 쓴 쪽이 팀 패트 케오로 터리의 심복일세. 또  한 사람
    은 재키래퍼티. 저 녀석은 약간 미친기가 있네. 항상 터리의 말대
    로 움직이고 있는데 그것이 성미에 맞는 모양이야."
      하고 오헤이건이 설명했다.
      세이머스가 차를 세우자 두 사람이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미스터 오헤이건."
      하고 케오가 말했다.
      "랜드로바를 헛간에 넣고 나면 우리가 지프차로 농장까지 안내
    하겠어요."
      오헤이건이 세이머스에게 눈짓을 하자 소년은  차를 헛간에 집
    어 넣었다. 세 사람이 자동차에서 내려 밖으로 나오자, 케오와 래
    퍼티가 헛간의 문을 닫았다.
      오헤이건은 기관단총을 어깨에 메고 모건은  38구경 군용 권총
    을 표준형 홀스터에 넣고 있었다.
      "친선 방문이 아닙니까, 미스터 오헤이건?"
      하고 케오가 말했다.
      "바보 같은 소리 작작하게, 케오. 빨리 농장으로 가세. 아침식사
    를 좀 대접해 주게나. 어젯밤은 대단했다네."
      농장은 초라했으나 작은 분지에 있어서 산등에 가려 바람을 피
    할 수가 있었다.
      부속 건물은 황폐하기 짝이  없었고 뜰의 진흙탕도  형편 없이 
    질척거렸다.
      브렌던 터리는 키가 크고 핸섬하고 얼굴이 긴 사나이였다. 마치 
    세계와 그 주민을 끊임 없이 재미 있어 하는  듯이 입술의 한 쪽 
    끝을 말아 올리고, 영원한 비웃음이 담긴 미소를 띠고 있었다.
      터리는 입구에서 그들을 맞이했다. 잠에서 마악 깨어난  모양으
    로 파자마 위에 낡은 가운을 입고 있었다.
      "오헤이건!"
      하고 그는 큰 소리를 질렀다.
      "그 빌어먹을 군복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잘 와 주었군,  자아 
    들어오게나."
      그들이 터리를 따라 부엌으로 들어가니까  난로에서 장작이 타
    고 있었다. 아침의 찬 기운에 검은 쇼올로 어깨를 감싼 노파가 요
    리용 스토브로 아침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할머니라면 걱정 없네. 귀가 멀어서 아무 것도 들을 수가 없으
    니까. 야아, 세이머스."
      하고 터리는 소년의 어깨를 두들겼다.
      "진짜 행동을 일으키고 싶거든  찾아오게. 자네 자리는  지금도 
    비워 놓았어."
      "현재의 자리로 만족하고 있읍니다, 미스터 터리."
      터리는 몸을 돌려 수상하다는 듯이 모건을 보았다.
      "이분은 누구신가?"
      "옛날 친구일세. 자유 웨일즈 군의 디  루이스야. 69년 가을 총
    을 들고 우리를 도와 주었지. 기억하고 있겠지? 아주 나쁜 시기였
    지만?"
      "그렇다면 웨일즈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말할 수 없다면 웨일즈 인으로서는 최하지."
      하고 모건은 고향말로 대답했다.
      터리는 매우 기뻐했다.
      "대단한 일이군. 유감스럽게도 한 마디도  모르지만 말일세. 그
    럼 할머니가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에  제대로 하루를 시작하는게 
    어떤가?"
      터리는 위스키 병과 글라스를 꺼내 놓았다. 오헤이건이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이르지 않을까?
      "짧은 인생일세, 안 그런가?"
      터리는 매우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이런 곳까지 오게 되었나?"
      "별일은 아니고 어젯밤은 시내가 조금 시끌시끌해서 말일세, 그
    리고 이 친구가 카디프에서  나를 찾아오지  않았겠나? 그에게서 
    얘기를 들어 보게나."
      모건은 터리가 내미는  글라스를 받아들고  자못 웨일즈인다운 
    발언으로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이번에야말로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길 결의를 굳힌 
    것입니다, 미스터 터리. 잉글랜드 놈들과 웨일즈의 독립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는 것은 모두 헛일입니다."
      "우리들은 700년이나 놈들과 얘기를 해  왔지만 그래서 어떻게 
    되었다고 생각하나?"
      터리가 맞장구를 쳤다.
      오헤이건이 뒤를 계속했다.
      "이 친구와 동료는 소음기가 부착된 권총을 찾고 있다네.  내게 
    구하는 방법이 있을 거라구  하길래 작년에 죽은  당신네 부하들 
    일을 생각해 냈지. 머피와 페란의 일 말일세.  그 두 사람이 갖고 
    있던 것은 소음기가 달린 모젤 권총이 아니었었나?"
      "맞아, 그 총을 손에 넣는 데 애를 먹었지."
      "어디서 구했었는지 가르쳐 주지 않겠나?"
      "쟈고 형제에게서야. 런던 제일의 악당들이지."
      터리는 모건에게 몸을 돌렸다.
      "그들이 아직도 당신이 원하는  물건을 갖고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만 놈들에게는 조심해야 해요. 돈이 있다는 것을 알면 자기 
    할머니의 무덤까지도 파헤쳐서 시체를 팔 인간들이니까."

제 목 : 제7장 악마의 자식들 - 8
      
      
      
      
      
      터리는 이상하게도 마음을 안정시키지 못하고  눈에 광채를 담
    고 있었다.
      그는 위스키를 꿀꺽 마시고 오헤이건에게 말했다.
      "자네가 와 줘서 일이 잘 됐네. 얘기하고 싶은 일이 있어. 운동 
    전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일세."
      "허어, 무슨 일인데?"
      오헤이건은 관심과 동시에 경계심을 나타내고 있었다.
      "거실로 가세. 이쪽이야,  아침식사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으니
    까."
      터리는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는 것 같았다.
      "2,3분밖에는 걸리지 않네. 두 사람은 기다려 주겠지?"
      터리는 등을 돌리고 앞장서서 거실로 들어갔다. 오헤이건은  모
    건과 세이머스에게 힐끗 눈을 보내고 마지못한 듯이 따라 들어갔
    다.
      "문을 닫아 주게."
      터리는 짜증스러운 듯이 말하고 나서 낡은 마호가니 책상의 서
    랍을 열고 지도를 꺼내서 펼쳤다.
      오헤이건이 가까히 다가가 보니 지도는 스코틀랜드의 서해안과 
    아우터 헤브리디즈 제도가 그려진 것이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
      "이 섬은 스케리보어일세."
      터리가 손가락질했다.
      "미사일 기지가 있지. 내 부하의 하나인 마이클 벨은 그곳의 기
    술 하사관이었다네. 속속들이 그곳을 잘 알고 있지."
      "그래서?"
      "2주일마다 한 번씩 목요일에 장교 한 사람과 9명의 병사가 그
    라스고 공항에서 말레그까지 자동차로 가서  그곳에서 배로 스케
    리보어 성으로 건너가고 있다네. 그래서 어떤 목요일에 그 트럭이 
    말레그로 가는 도중에 잠복했다가 나와 9명의  부하가 그들과 바
    꿔치기를 해 버리면 어떻게 되겠나? 물론 마이클 벨도 데리고 가
    는 거지."
      "무엇 때문에?"
      하고 오헤이건이 물었다.
      "그 계획의 목적은?"
      "그 섬에서 그들은 '헌터'라고 하는 중거리 미사일을  실험하고 
    있네. 핵은 아니지만 새로운 타입의 폭약으로 굉장한 폭발력이 있
    지. 일발 명중하면 런던의 시가지 사방 1마일은 날아가 버릴 걸."
      "자네 미치지 않았나?"
      오헤이건이 화가 나서 말했다.
      "런던에 로케트를 쏘다니? 무슨  짓을 하려는  건가? 우리들이 
    싸워 온 것을 모조리 망가뜨리려고 하는 거야?"
      "그렇지만 그것 밖에는 방법이 없는 걸. 모르겠나? 적의 심장부
    에까지 싸움을 끌고 들어가는 거야."
      "한꺼번에 몇천 명의 사람을 죽이고 세계의 여론을 전면적으로 
    적으로 삼을 작정인가?"
      오헤이건은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터리, 현재 외국의 많은 사람들의 눈에는 우리들이 군대에  대
    항하는 용감한 소집단으로 비치고 있어. 이런 식으로 나간다면 우
    리들이 최후에는 승리할 걸세. 영국군을 격파해서 멸망시키는  것
    이 아니라 불편하게 만들어서 스스로  이곳에서 물러나게 만드는 
    것이지. 아덴이나 키프로스나 그밖의 이곳저곳에서 한 것처럼  말
    일세. 그러나 그런 짓을 했다가는......."
      오헤이건은 다시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미치광이 같은 짓일세. 군사위원회가 그런 계획을 승인할 턱이 
    없지. 마치 여왕을 저격하는 것과 같은 짓이란 말일세--역효과라
    구."
      "그러면 이 일을 군사위원회에 얘기할 생각인가?"
      "당연하지. 달리 어떻게 하리라고 생각하나? 나는 알스터  담당
    의 주임 정보 장교일세."
      "알겠네."
      터리는 기가 죽어서 말했다.
      "내가 잘못 생각했네. 위원회의 뒷받침이 없이는 어쩔 수가  없
    겠지.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지. 식사가 되었는지 가 보고 오겠네."

제 목 : 제7장 악마의 자식들 - 9
      
      
      
      
      
      터리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모건과  세이머스와 케오가  식탁에 
    앉아 있었다. 터리는 문턱까지 가서  지프차 안에서 기름을  치고 
    있는 래퍼티를 발견했다.
      래퍼티가 일어나서 얼굴을 돌렸다.
      터리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놈들을 해치워 버려 래퍼티. 세 녀석을 한꺼번에 날려  보내는
    거야. 실수를 해서는 안 돼, 알겠지?"
      "알았읍니다, 미스터 터리."
      "그 소련제의 연필형 시한 장치가 좋겠읍니다. 그것과 플라스틱 
    폭탄이."
      래퍼티는 감정을 조금도 나타내지 않고 말했다.
      "그럼, 시작해."
      터리는 부엌으로 돌아갔다.
      마침 오헤이건이 거실에서 나온 길이었다. 지도를 옆구리에  끼
    고 오른손으로 기관단총을 언제든지 쏠 수 있도록 겨누고 있었다.
      "갑자기 식욕이 없어졌네."
      밖에서 지프차의 엔진이 실리고 달려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어디를 가는 건가?
      "우유를 가지러 가네."
      하고 터리가 말했다.
      "이곳에는 암소가 없어서 말일세, 오헤이건. 바보 같은 짓은 관
    둬."
      "알았으니까 내 옆에 다가오지 말게."
      오헤이건은 모건과 세이머스에게 턱짓을 했다.
      "자, 두 사람 모두 내 뒷쪽을 경계해 줘."
      그들은 마당으로 나왔다. 농장의 문 있는 데까지 왔을 때  문턱
    에서 터리가 고함을 쳤다.
      "오헤이건, 내 말 좀 들어보게."
      오헤이건은 오히려 걸음을 빨리했다. 모건이 물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지?"
      "당신과는 관계 없는 일이야. 군사위원회와 관계가 있는 문제일
    세."
      오헤이건은 머리를 흔들었다.
      "저 미친녀석, 내가 그런 계획에 찬성하리라고 생각한 것부터가 
    이상하지."
      그들은 언덕을 넘어서 헛간까지 갔다. 문은 닫힌 채로 있고  지
    프차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오헤이건이 헛간의 문을 열었다. 모건은 등을 돌리고  오헤이건
    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랜드로바의 문이 꽝하고 소리를 내서 오헤이건이 탄 것을 알았
    다. 그때, 요란한 폭발음과 함께 뜨거운 공기가 밀려 와서 모건은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무릎을 세우고 일어나  돌아보니까 세이머스가  일어서려 하고 
    있었다. 금속파편이 박힌 팔을 움켜 쥐고 있었다.
      헛간은 불바다였다. 랜드로바의 잔해가 맹렬한 불꽃을 뿜어  올
    리고 있었다.
      모건은 엔진 소리를 깨닫고 세이머스를 일으켜 세워 숲 사이에 
    밀어 놓고는 자기도 그 옆에 웅크리고 앉았다.
      지프차가 다가오고 있었다. 차가 멈추고 래퍼티가 내려섰다.
      래퍼티는 한 손을 얼굴 앞에 가리고 열기를 피하면서 될 수 있
    는 한 가까이 왔다. 모건은 일어나서 덤불에서 나갔다.
      "래퍼티?"
      래퍼티가 휙하고 몸을 돌렸을 때 모건은 기관단총이  텅 빌 때
    까지 세 번에 나누어 사격을 가했다.
      래퍼티는 뒷쪽으로 날아가서 헛간의 불 속에 쓰러졌다.  모건은 
    그곳에 기관단총을 던져 넣고 세이머스를 안아 지프차에 태웠다.
      운전석에 올라 타고 모건이 물었다.
      "자네를 돌봐 줄 의사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나? 안전한 의
    사가?"
      "하이버니안 노인병원. 발리메나 쪽으로 2마일 간 곳."
      세이머스는 그 말만 하고 정신을 잃어버렸다.
      모건은 화장실에서 전투복을 벗어 세탁물  바구니에 밀어 넣었
    다. 그 밑에는 보통 양복을 입은 채였다. 패스포드를 확인하고 나
    서 얼굴과 손을 씻고 조그만 수술실로 돌아갔다.
      이 병원의 책임자인 듯한  켈리라는 늙은 의사와  젊은 수녀가 
    어깨와 팔을 붕대로 칭칭  감은 세이머스의 위에  몸을 구부리고 
    서 있었다. 세이머스는 눈을 감고 있었다.
      켈리 의사는 모건에게 얼굴을 돌렸다.
      "이제는 잠이 들게 되겠지요. 지금  주사를 놓았으니까요. 일주
    일 가량이면 다시 신품처럼 될께요."
      세이머스가 눈을 떴다.
      "가는 겁니까, 대령님?"
      "런던으로 돌아가겠어. 할 일이 있어서  말이야. 그런데 자네는 
    성을 가르쳐 주지 않았더군."
      소년은 허약하게 미소를 지었다.
      "키건입니다."
    다.
      "내가 도와 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언제든 전화해 주게."
      모건은 문 쪽으로 걸어갔다.
      "왜지요, 대령님? 왜 그놈들은 그런 짓을 했읍니까?"
      "내 생각으로는, 터리는 어떤 계획을 생각해 냈는데 오헤이건이 
    그것에 찬성을 하지 않은 것 같아. 오헤이건이 군사위원회에 보고
    하겠다고 말했지. 터리는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 그의 방식대로 손
    을 썼다...... 그런 얘기겠지."
      "반드시 지옥에 떨어뜨리고야 말겠어요."
      세이머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눈을 감았다.


제 목 : 제7장 악마의 자식들 - 10
      
      
      
      
      
      최초에 눈에 띈 공중전화 박스에서 모건은 리스본의 육군 정보
    본부에 전화를 걸어 되도록 알스터 사투리를 흉내내서 브렌던 터
    리와 '엘린의 자식들'의 거처를 가르쳐 주었다. 하기야 그들이 그
    곳에 그냥 남아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 뒤 모건은 벨리메나에서 벨파스트행 기차를 타고 똑바로 유
    로파 호텔로 가서 그곳을 체크아웃했다. 3시에는 공항에서 런던행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존 미카리는 헬싱키로 향하는 도중 스웨덴의 2만  8천 미터 상
    공에서 에이서 모건의 자료를 읽고 있었다.
      런던의 소련대사관의 국방성 정보국 직원은  문자 그대로 완벽
    한 일을 하고 있었다. 모건의 경력을 모든 측면에서 철저하게  조
    사했을 뿐만 아니라 알고 있는 협력자에 대해서도 사진을 첨부하
    여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퍼거슨은 대테러 부대인 '그룹 4'의 책임자로서 거론되고 있었
    고, 베이커도 있었다. 하긴 미카리는 그  요크셔 태생의 사나이를 
    잘 알고 있었다. 드비르가 특별 수사부 요원의 서류를 갖고  있어
    서 미카리는 이전에 몇 시간에 걸쳐 그들의 사진을 본 적이 있었
    다.
      파리나 베를린을 위시해서 자주 방문하는 대도시에서 그와같은 
    일에 관계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미카리는 얼굴을 외우고 
    있었다.
      "미카리는 다시 한 번 에이서 모건의  사진을 찬찬히 들여다보
    고 의자등에 기대서 생각에 잠겼다.
      걱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모건이 자기에게까지  접근해올 
    수는 없을 것이다. 단서 하나, 힌트 하나 없다. 그에게 이르는  길
    은 완벽하게 은폐되어져 있다.
      금발의 스튜어디스가 미카리에게 몸을 구부렸다. 풍만한 육체를 
    영국 항공의 감색 제복이 유감 없이 강조하고 있다.
      "헬싱키에서 연주를 하십니까, 미스터 미카리?"
      "네, 내일 밤, 국립 교향악단과 브람스의 1번을 연주합니다."
      "입장권을 구할 수 있으면 꼭 들으러 가겠읍니다. 이틀간  체제
    하게 되니까요."
      퍽 귀여운 느낌의 아가씨였다. 미카리는 나른한 듯이 미소를 지
    어보였다.
      "어디에 숙박하는지 가르쳐 준다면 한 장 보내 주겠오.  그리고 
    끝나면 파티가 있으니까 만일 달리 볼 일이 없으면......."
      스튜어디스는 얼굴을 상기시키고  가슴의 융기가  흰 나이론의 
    엷은 블라우스로부터 터져나올 것만 같았다.
      "꿈만 같아요, 마실 것을 갖다 드릴까요?"
      "샴펜을 반 병......."
      미카리는 창 밖을 바라보았다. 왜  그런지 몹시 피곤한  느낌이 
    들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번 연주회는 마음이 내키지를 않았다. 
    현재 필요한 것은 휴가다. 런던에 돌아갈 필요는 없다. 연주가 끝
    나면 헬싱키에서 아테네로 가자. 직행편이 없어서 파리에서  뮨헨 
    경유가 된다고 하더라도 오후에는 아테네에 도착할 수 있다. 그곳
    에서 이도라로 가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기만 해도  마음이 들떠서  스튜어디스가 샴펜을 
    가져왔을 때는 기분이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샴펜을 천천히 마시며 그 차가움을 즐기면서 어느 틈엔가 미카
    리는 모건의 신상 서류를 펼치고 다시 한 번 처음부터 읽고 있었
    다.

제 목 : 제8장 시체를 팔아먹는 장사꾼 - 1
      
      
      
      
      
                     제8장 시체를 팔아먹는 장사꾼
      
      
      하베이 쟈고는 욕실의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쳐 보고 꼼꼼히 
    살폈다. 빨간 빌로드의 상의! 목에 감은 흰 스카프, 금발의 머리칼
    에도 조심스럽게 빗질이 가해져서 당당한 관록이 붙어 보였다.
      하베이 쟈고는 지금도 언제든지 15라운드를 뛸 수 있는 헤비급 
    권투선수처럼 보였다. 실제로 그는 젊었을 때 권투선수로서  주저 
    앉은 코, 눈 가장자리의 상처가 그것을 얘기해 주고 있었다.
      코의 모양은 고칠 수도 있었으나, 여자들은 주저 앉은 코를  더 
    좋아했다. 일종의 억센 부드러움을 그에게서 느끼기 때문이다. 그
    러나, 그의 눈은 본성을 나타내 보이고  있었다. 냉엄하고 잔혹하
    고 매정한 눈.
      그날 아침, 쟈고는 몹시 불쾌했다. 전날 그의 산하에 있는 수많
    은 사업 중의 하나가 경찰의 수색을 당한 것이다. 벨그그라비아에 
    있는 그 집은 그가  고용한 아가씨들이 특별히  유명한 인사들의 
    성욕을 달래 주는 장소였다.
      두 사람의 귀족과 세 사람의 국회의원이 경찰에 일시적이긴 하
    지만 구류되었으나 그런 일을 쟈고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머리가 아픈 것은 자신들의 경계체제였다. 아가씨들을 위해  지불
    하는 벌금이나 밤의 수입이 주는 것도 문제가 아니었다.
      쟈고 자신이 이 사건으로 검거당하는 따위의 일은 전혀 없었다. 
    경영자는 다른 사람의 명의로 되어 있다. 대역을 준비해 둔  것이
    다. 골치거리는 풍기 단속반으로부터 아무런 예고가 없었다는  것
    이었다.
      쟈고의 조직이 수색을 당하지 않도록 매주 상당한 수당을 그들
    에게 지불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의 목을 자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쟈고는 거실로 들어가서 펜트하우스의 창가에 섰다. 그린  파크
    에서 버킹검 궁전 일대를  바라본다는 것은 지금까지  그의 기쁨 
    중의 하나였다.
      그래서 쟈고는 이곳을 샀던 것이다. 그가 자라난 스테프니의 뒷
    골목으로부터 이곳에 오기까지 출세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
    다.
      몸집이 작은 필리핀인 하녀 마리아가 쟁반에 커피를 얹어 갖고 
    들어왔다. 그녀가 컵에 커피를 따라 건네 줄 때까지 쟈고는  기다
    리고 있었다.
      "고마워."
      하고 쟈고는 말했다.
      검은 드레스와 스타킹을 단정하게 차려 입은 하녀가 나가자 동
    생인 아놀드가 들어 왔다.
      아놀드는 쟈고보다 10살 아래로 머리 숱이 적고  뺨이 움푹 패
    고 영양 불량에다가 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외관과는 달리  경리에 관해선,  컴퓨터와 같은 
    두뇌의 소유자였다.
      "사랑스런 엉덩이를 가지고 있군, 저 애는."
      하고 쟈고가 말했다.
      "그러나 그녀에게 철저히 물어 보겠어,  아놀드. 정말로 따끔하
    게 할 테니까. 항상 말하고 있지. 집  안의 아이들에게는 손을 대
    지 말라구."

제 목 : 제8장 시체를 팔아먹는 장사꾼 - 2
      
      
      
      
      
      이미 마리아와 관계가 있는 아놀드는 형에게 들키는 것을 몹시 
    겁내고 있었으나 태연하게 대답했다.
      "알고 있어, 형."
      "어젯밤의 손해는 얼마나 되지?"
      "만 3천에서 만 5천 파운드에요. 그렇지만 법적 수속이  남아있
    으니까 더 이상 명확하게는 계산할  수가 없어요. 여자들  중에는 
    전과가 3회 이상되는 사람도 있다구요. 형, 교도에 수감될지도 몰
    라요. 최고의 변호사를 필요로 하게 되면 더 많은 돈이 들어갈 걸
    요."
      "돈은 얼마든지 들어가도 좋아 아놀드, 문제는 따로 있어. 풍기
    단속반 녀석들 말이야, 누가 배반했는지 그것을  알고 싶어. 오늘 
    중으로 말이야."
      "그것을 지금 조사하고 있는 중이에요."
      하고 아놀드가 말했다.
      "형을 만나겠다는 녀석이 있어요, 이름은 모건!"
      "무슨 용건이래?"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것을 전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아놀드는 아직 미드랜드 은행의 띠가 붙은 채로인 20파운드 지
    폐 다발을 쟈고에게 건네주었다.
      "500 파운드에요."
      쟈고는 그것을 자기 코끝으로 가져갔다.
      "이 냄새는 언제 맡아도 좋군, 좋아. 그 녀석을  들여보내. 어떤 
    용건인지 들어보지."
      모건은 목이 긴 스웨터를  입고 군대용 트렌치  코트의 단추를 
    채운 채였다. 쟈고는 자기 손으로 위스키를 따르고 모건을 쳐다보
    았다.
      "미스터 모건입니다."
      하고 아놀드가 말하고 문 옆에 섰다.
      "사실은 대령이오."
      쟈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래서 어떻단 말입니까? 정중하게 경례라도 하라는 말씀인가
    요?"
      그는 500파운드를 집어 들었다.
      "나는 바쁜 사람이라서요, 이 정도의 돈을 갖고는 긴 시간 얘기
    를 할 수가 없읍니다.  빨리 용건을 말하든가, 아니면  그냥 방을 
    나가 주었으면 좋겠는데요."
      "지극히 간단한 용건이오."
      하고 모건은 말했다.
      "지난 주에 코엔이 살해되었오. 그때 사용된  권총은 모젤 7.63
    밀리, 나치 친위대가 사용했던 원형 소음기가 달린 1932년 모델이
    었오. 요즘에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물건이오. 당신의 조직은 
    작년에 IRA에 그것을 두 자루 팔았더군요."
      "누가 그런 말을 합디까?"
      아놀드가 끼어 들었다.
      모건은 시선을 쟈고에게 못박은 채였다.
      "브렌던 터리라는 사나이였오. 어제  그와 알스터에 함께  있었
    오."
      "이봐요, 그런 근거도 없는......."
      아놀드가 말을 시작했으나 쟈고가 손으로 제지했다.
      "당신은 경찰이 아니오. 목적이 뭡니까?"
      "코엔을 죽인 사나이가 도주 중에 내 딸을 치어죽였오. 그 사나
    이를 찾고 싶소."
      "이제야 알겠군."
      하고 쟈고가 말했다.
      "그 녀석이 사용한 모젤의 출처가 다른  것과 같다고 생각하고 
    있읍니까?"
      "그것이 당연한 생각 아니오?"
      모건은 주머니에서 다시 돈 다발을 꺼내 테이블 위에 던졌다.
      "500파운드 더 추가하겠오. 미스터 쟈고, 알고 있겠지만 정보를 
    준다면 지불할 생각이오."
      "그것만 갖고는 무리지요."
      "얼마가 필요하오?"
      "또 천 파운드."
      "좋소...... 언제 가르쳐 주겠오?"
      "그런 말단적인 사항까지 내가 취급하고 있지는 않으니까요, 그
    쪽을 담당한 부하에게 물어 봐야 하니까 시간이 걸리겠지요. 급하
    다면 오늘 밤까지 조사해 두겠읍니다.  나는 체시에 클럽을  갖고 
    있읍니다. 체인워크에 있는 '프라밍고'라는 곳이지요. 오늘 밤 9시
    경 그곳에서 만날까요?"
      "좋습니다."
      모건이 뒤로 돌아서서 문 쪽이 멀어가자 쟈고가 말했다.
      "모건 대령, 나머지 천 파운드를 가져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물론이지요, 미스터 쟈고. 약속은 지킵니다."
      "그 말을 들으니까 기쁘군요."
      "당신도 약속을 지키시오."
      쟈고가 은근히 말했다.
      "그것은 협박입니까, 대령?"
      "글쎄요, 생각해 보니까 그런 것 같군요."
      모건은 그렇게 대답하고 밖으로 나갔다.

제 목 : 제8장 시체를 팔아먹는 장사꾼 - 3
      
      
      
      
      
      침묵이 흘렀다. 쟈고가 물었다.
      "너도 들었지, 아놀드? 저런 건방진 소리를 들은 건 처음인 걸. 
    이런 모욕을 당하고서야 참을 수 없지.  장사에 영향이 미친다구, 
    나는 모건 대령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기로 했다. 아주 특별한  관
    심을 말이야. 오늘 밤 솜씨좋은 젊은 친구들을 두 사람  대기시켜 
    둬라. 특히 주먹이 센 놈으로."
      "알았어요, 형."
      아놀드가 나가려고 하자 쟈고가 덧붙였다.
      "또 한 가지 말해 둘  것이 있어. 앞으로는 아일랜드  놈들에게 
    무기를 파는 것을 중지해. 놈들은 일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린
    다니까. 이제부터는 아랍인만을 상대로 하는 게 좋겠다."
      아파트로 돌아오자 모건은 커피포트의 스위치를 넣고 시큐어리
    티 팩터스 사로 전화를 걸었다. 조크 켈소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안도하는 것 같았다.
      "돌아왔읍니까? 잘 됐읍니다. 오헤이건은 만나 보았나요?"
      "짧은 시간이었지만 만나기는 만났네."
      하고 모건은 말했다.
      "유감이지만 오헤이건은 죽었네, 자동차에 폭탄이 장치되어  있
    었지. 함께 죽지 않은 것 만도 천만 다행일세."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켈소가 물었다.
      "문제의 건은 단서가 잡혔읍니까?"
      "음, 그래서 전화를 걸었네. 쟈고 형제에  대해서 뭔가 알고 있
    는 것이 있나?"
      켈소가 말했다.
      "아마 런던에서 가장 유력한 갱일 겁니다. 마피아조차도 그  형
    제에게는 눈치를 볼 정도입니다. 아놀드라는 깡마른 녀석은  수완
    가지요. 형인 하베이도 바보는 아닙니다. 놈은 프로 권투선수였읍
    니다."
      "불쾌한 놈들이더군. 그들을 오늘 만나보았네."
      "그런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는 놈들입니다. 작년에  이태리계 
    도박사인 파첼리라는 사나이가 쟈고의 도박장에서 주사위를 손바
    닥에 감춰 가지고 속임수를 쓰려고 했읍니다. 쟈고라는 녀석이 어
    떻게 한 줄 아십니까? 오른손 손가락의 첫째 관절을 모조리 정원 
    가위로 잘라 버렸읍니다. 당신이 내게  알리고 싶은 것은  쟈고가 
    모젤의 출처라는 것이지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네, 나는  오늘 밤 놈들과 만나기로  되어 
    있어. 체인워크의 '프라밍고'라는 곳인데 고급스러운 클럽 인가?"
      "각계의 톱크라스밖에는 가지 못하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쟈고도 고상하게 행동한다는 말이겠군. 그런데  그는 
    어떻게 돈을 벌고 있나?"
      "도박 클럽, 관할구역으로부터의 세금 징수,  고급 매춘시설 등
    을 통해서 입니다."
      "그것뿐인가?"
      "또 한 가지 다른 사업을 벌이고 있는데 우리 친구들도 관여하
    고 있읍니다. 체인워크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첼시 클리크 근처에 
    있읍니다. '웨더비앤드 선즈'라는 도료 회사지요."
      "그런데?"
      "사실은 물타기 공장이라고 불리우고 있는 곳입니다. 놈들은 종
    종 스카치 위스키를 실은 트럭을  고속도로에서 강탈하고 있읍니
    다. 그것은 물을 가득  타서 약하게 만듭니다. 그들은  병 만드는 
    공장도, 최고품의 라벨도 모두 갖추고 있어서 그 위스키를 전국의 
    클럽에 팔고 있읍니다."
      "그래서 경찰은 그 일을 모르고 있는가?"
      "손을 댈 수가 없읍니다. 검거 직전까지 몰고 가면 반드시 어디
    선가 방해의 손길이 뻗습니다. 나 같으면 놈들에게 접근하지 않겠
    어요. 당신이 철저하게 해치운다면 얘기는 다르지만요!"
      "물론 나는 하겠네. 하고말고."
      
      모건이 책상 앞에 앉아서  스미스 앤드 웨슨  매그넘의 손질을 
    하고 있으려니까 전화가 울렸다. 캐더린 라일리에게서였다.
      "돌아와 계셨군요."
      하고 캐더린이 말했다.
      "그렇소, 어제 저녁에."
      "일은 어땠어요?"
      "오늘 밤 결과를 알게 될 거요. 당신은 어디서 전화를  걸고 있
    나요, 켐브리지에선가요?"
      "아니에요, 지난 2,3일 런던에  있었어요. 타비스톡  클리닉에서 
    일을 하고 있어요. 뉴욕에 한 달  동안 가 있는 동료의  아파트를 
    빌렸어요. 켄싱턴의 다우로 플레이스에요!"
      "그런데,"
      하고 모건은 말했다.
      "나는 오늘 밤 런던 최고의 악당과 체인워크의  '프라밍고'에서 
    만날 예정이오."
      "그러나, 그곳은 런던에서도 굴지의 최고급 클럽일 텐데요."
      "그렇다고 하더군요. 당신이 예쁜옷을 입고 머리를 단정히 빗고 
    온다면 함께 데리고 가도 좋소."
      "꼭 데려가 주세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곳은 모든 것이 나무랄 데가 없었다.  은은한 조명, 감미로운 
    음악, 빈틈 없는 웨이터, 최고의 사치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모건과 캐더린 라일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으로 구석의 가
    장 좋은 좌석으로 안내되었다.
      급사장이 손가락을 튕기자 샴펜 버켓트가 날라져 왔다.
      "미스터 쟈고로부터의 인사입니다. 오늘 밤 손님들은 미스터 쟈
    고의 초청객이시니까요."
      레스토랑의 훨씬 윗쪽에 있는 사무실에서  하베이 쟈고는 검은 
    빌로드의 야회복을 입은 찬란한 모습으로  장식적인 격자를 통해
    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녀석과 동행한 여자의 얼굴은 꽤나 쓸 만한 걸  아놀드, 미
    인이구나. 자, 보라구. 누가 봐도 알 수가 있어."
      "저 사나이는 어때요 형? 저 녀석이  대령인가 뭔가 하는 놈이
    지요?"
      "쓰레기지."
      하고 쟈고는 말했다.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올바른 
    인생길에서 벗어난 놈이지."
      "저 녀석을 이리로 부를까요?"
      "아직 괜찮아. 식사를 즐기라고 내버려둬. 그 뒤 디저트 대신에 
    맛을 보여 주겠다. 어떠냐, 아놀드?"


제 목 : 제8장 시체를 팔아먹는 장사꾼 - 4
      
      
      
      
      
      "남성 관계는 어떻습니까?"
      하고 모건이 그녀에게 물었다.
      "당신과는 상관 없는 일이에요."
      "그렇다면 행동과 정열의 배출구로는 어떤 것을?"
      "하늘을 날으는 거예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12년 전부터 조종사 자격증을 갖고 있어요. 실제로 솜씨가  꽤
    나 좋은 편이죠."
      급사장이 와서 정중하게 모건에게 귓속말을 했다. 그는  샴펜을 
    마시고 있는 캐더린을 남겨두고 그를 따라가 '종업원 전용'이라고 
    쓰인 문으로 들어갔다.
      카페트를 깐 계단이 있고 위에서 아놀드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쪽입니다, 대령."
      모건은 계단을 올라가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 방은 쟈고의 자랑이며 기쁨이었는데  런던에서 최고의 실내 
    장식가의 손으로 꾸며진 것이었다.
      모든 것이 중국제로서 미술품 가운데는 쟈고가 거액을 들여 손
    에 넣은 것도 있었다.
      쟈고는 책상 너머에 앉아서 씨거를 피우고 있었다.
      "잘 오셨읍니다, 아랫층에서는 실례가 없었겠지요?"
      "대우가 좋았소."
      하고 모건은 말했다.
      "그러나, 당신과 마찬가지로 나도 바쁜 몸이라서요 미스터 쟈고. 
    당신이 약속한 정보를 들어볼까요?"
      "천 파운드를 더 내놓겠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안 그러냐 아놀
    드?"
      하고 쟈고가 말했다.
      모건은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냈다.
      "먼저 그쪽 얘기부터 들어봅시다. 그 다음에 이걸 주겠오."
      쟈고가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일이 난처하게 되어 버렸읍니다. 당신이 원하는 정보를 
    손에 넣을 수가 없었어요."
      "입수할 수 없는 거요, 아니면 입수하고  싶지 않았던 거요, 어
    느 쪽이지요?"
      하고 모건이 물었다.
      "그 문제를 생각하고 지내면 기나긴 겨울 밤이 즐겁겠는 걸."
      "그럼, 오늘 낮에 지불한 천 파운드는?"
      "내 시간은 워낙 비싸 놓아서요."
      쟈고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대령을 밖으로 안내해 드려라.  아놀드, 나는 볼  일이 있으니
    까."
      모건은 문 앞에서 멈춰 서서 옻칠을 한  탁자에서 중국제의 커
    다란 화병을 집어 들었다.
      "19세기 초기의 것이군. 특별히 진귀한 것은 아니지만 좋은  화
    병이지."
      모건은 화병을 바닥에 떨어뜨려 산산 조각을 냈다.
      "잘 알아둬. 이것은 아직 시작이야."
      하고 말하고 모건은 밖으로 나갔다.
      쟈고가 책상을 돌아서 뛰어왔다. 박살이 난 화병을  내려다보면
    서 굳어버린 듯이 서 있었다.  얼굴의 근육이 실룩실룩  움직이고 
    있었다.
      이윽고 쟈고는 동생을 돌아다보았다.
      "어떻게 하는지 알고 있겠지? 녀석들에게 교묘하게 처리하라고 
    말해. 그 녀석이 병원에서 나올 때 평생 지팡이를 짚고  다니도록 
    해 주라구!"
      모건은 자동차를 클럽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주차해  놓았었다. 
    걸어가면서 캐더린 라일리는 팔을 그의 팔에 끼었다.
      그녀가 말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가르쳐 주려고 하지 않았군요?"
      "그러는 것이 보통이지요!"
      "이제부터 어떻게 할 생각이세요?"
      "그 사나이에게 생각을 고쳐먹게 만드는 거요."
      두 사람은 자동차를 세워 둔 골목으로 구부러졌다.
      아놀드 쟈고는 두 명의 사나이와 모퉁이에 서 있었다. 한  명은 
    몸집이 작고 수염이 덥수룩하니 자라고 있었다.
      또 한 사람은 키가 적어도 6피트는 되고 험상궂고 광대뼈가 튀
    어 나온 얼굴에 손이 큰 사나이였다.
      "알겠지, 베일리?"
      하고 아놀드가 말했다.
      "멋지게 해 치워버렷!"
      "내게 말겨 두세요, 미스터 쟈고."
      두 사나이는 걷기 시작해서 길 옆에 자동차가 즐비하게 늘어진 
    포도를 전진해 갔다. 베일리가 멈춰 서서 몸집이 작은 동료를  제
    지했다. 모건과 캐더린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베일리는 불안한 듯이 한걸음  내디디었다. 높은  빅토리아조풍 
    집의 지하로 통하는 계단에서 모건이 바람처럼 나타나 몸집이 작
    은 사나이를 붙잡아 돌아서게 한 다음 하복부를  무릎으로 차 올
    렸다.
      사나이는 신음 소리를 내면서 주저 앉았다. 베일리가 돌아다 보
    자 웅크리고 신음 소리를 내는 동료 너머에 모건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가로등 때문에 얼굴을 뚜렷이 알 수 있었다. 캐더린이 그
    의 뒤에서 다가왔다.
      "나를 찾고 있는 거겠지?"
      베일리는 재빨리 움직였다. 그 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양다리가 날쌔게 차올려진 다음 공중제비를 해서 비
    에 젖은 포도에 힘껏 내던져졌다.
      가까스로 일어나자 모건이 오른 손목을 잡고 비틀어 올려 무쇠
    같은 힘으로 등에 밀어붙였다. 근육이 찢어져 나가고 그는 고통의 
    비명을 질렀다. 모건은 같은 모습으로 누르면서 그를 난간을 향해 
    머리부터 밀어 던졌다.
      모건은 캐더린의 팔을 잡고 포도를 걸어가 자동차 쪽으로 향했
    다. 그가 부축해서 차에 태웠을 때 캐더린이 말했다.
      "그런 방법이 좋다고 당신은 진심으로 믿고 있는 모양이군요."
      "재미 있군요."
      모건이 그녀의 옆자리에 앉으면서 말했다.
      "나의 이런 난폭한 파시스트적인  행동을 보고도  당신이 화를 
    안 내다니요, 당신과 같이 훌륭하고 순진한 자유주의적인  학자가 
    말입니다."
      "저 두 사람은 고용된 것 같군요."
      하고 캐더린은 말했다.
      "당신이 미스터 쟈고를 몹시 화나게 만들었나보죠?"
      "글쎄,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요."
      모건은 그렇게 말하고 자동차를 출발시켰다.
      모건은 캐더린이 묵고 있는  아파트 앞에 차를  멈추고 문까지 
    그녀를 배웅했다.

제 목 : 제8장 시체를 팔아먹는 장사꾼 - 5
      
      
      
      
      
      "들어왔다 가지 않으시겠어요?"
      하고 캐더린이 물었다.
      "할 일이 있어서요."
      "어떤 일?"
      "하베이 쟈고에게 예의를 가르쳐 줘야겠오."
      "도와 드릴 수 없을까요?"
      "어림도 없는 소리를. 내가 하려고  하는 일은 어느 모로  보나 
    범죄 행위요. 잘 안 될 경우 당신을 말려들게 하고 싶지는 않소."
      캐더린 라일리에게 반론할 틈을 주지 않고 모건은 계단을 내려
    와서 자동차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거리의 훨씬 아랫쪽에 주차
    외우고 나서 차로 돌아가 곧장 떠나갔다.
      
      캐벤디쉬 스퀘어의 아파트에서 퍼거슨은 혼자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뒷쪽의 전축에서 들려오는 글렌  밀러 
    악단의 부드러운 음악뿐이다.
      청년 시절에 친숙해진 빅밴드 째즈의 음악에 귀를 기울이는 것
    이 그의 은밀한 도락이었다.
      글렌 밀러뿐만 아니다. 루우스톤 악단이나 죠 로스 악단과 같은 
    영국의 백밴드도 좋아했다. 그것은 퍼거슨에게 전쟁에 대한  회구
    의 정을 되살려 주었다.
      1940년, 그 무렵은 힘이 들었다. 그러나  최소한 누구나가 자신
    의 입장을 알고 있었다--자기가 어디까지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참다운 적은 사실은 국회의 의자에  앉
    아 있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아마 그럴 것이다.
      왼쪽에 놓인 빨간색 전화가 작은 소리로 울렸다. 퍼거슨은 시계
    를 보았다. 10시가 다 된 시각이었다. 그는 수화기를 들었다.
      "이름을 말하게."
      "베이커입니다."
      "오늘은 늦게까지 일하고 있는 모양이로군, 주임 총경."
      "책상일입니다. 얼마나 골치가 아픈지 알고 계시죠? 에이서  모
    건이 무사히 벨파스트에서 돌아왔다는 것을  알려 드리려고 걸었
    읍니다. 어젯밤 히드로 공항에 그가 도착한 것을 보안담당 부원들
    이 보았읍니다."
      "그러나 그가 그쪽에 있는 동안에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우리
    는 모르지 않는가?"
      "그렇습니다."
      "리스본의 군 정보부에 오헤이건에 관해서 조회해 보았나?"
      "네, 그러나 그의 행방은 알 수가 없읍니다. '모터맨' 작전이 현
    재 진행 중이라서 무리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그건 그렇고 오늘 밤 모건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
      "켐브리지의 심리학자 라일리 박사와 무슨 볼  일이 있어서 외
    출한 것 같습니다. 박사는 다우로 플레이스의 아파트에  머무르고 
    있읍니다. 모건은 8시 반에 그녀를  데리고 나갔읍니다. 호화로운 
    장소로 가는 모양으로 두 사람 모두 성장을 하고 있었답니다."
      "그래서 어디로 갔다고 하던가?"
      "모르겠읍니다, 부하가 놓쳐 버렸읍니다."
      "놀라운 일이군."
      하고 퍼거슨이 말했다.
      "우리들은 멍청하게 미행에서 따돌림이나  당하라고 그런 인간
    들에게 급료를 지불하고 있나?"
      "하지만 이런 종류의 일에 있어서는 모건은 전문가입니다. 벌써 
    몇 년째 계속해 오고 있다는 것은 당신도 알고 계실 겁니다. 말레
    이지아, 키프로스, 아덴, 지금은  알스터. 그는 밖에  나가는 즉시 
    미행자를 냄새 맡을 수가 있읍니다. 그런 본능이 갖춰져 있는  겁
    니다.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해 오는 데 그것을 몸에 익힐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알겠네, 주임 총경. 찬사는 그만 두게. 자네 얘기대로라면 그가 
    미행을 싫어할 경우에는 뒤를 따라갈 방법이 없다는 말이로군."
      "자동차 6대로 팀을  편성해서 중앙으로부터  무선으로 충분히 
    통제하면서 한다면 또 모르겠지만!"
      "아니, 그런 짓은 그만 두게."
      하고 퍼거슨은 말했다.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자네 부하를  모조리 철수시켜 주게. 2,3
    일 모건을 멋대로 행동하도록 내버려 두세. 그렇게 하면 뭔가  방
    법이 나오겠지."
      퍼거슨은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 전화의 반대 쪽에서는 해리 베
    이커가 인터폰의 단추를 눌러 옆방에서  대기하고 있는 경사에게 
    말했다.
      "조지, 그레셤 플레이스에 있는 맥켄지를 철수시키게."
      "알겠읍니다. 그에게 다른 지시는 없으십니까?"
      "나중에 알려 주겠네!"
      베이커는 수화기를 내려 놓고는 휴 하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고 
    나서 책상 위에 산적해 있는 서류를 읽기 시작했다.

제 목 : 제9장 살인청부업자의 연인 - 1
      
      
      
      
      
                      제9장 살인 청부업자의 연인
      
      
      잠복을 그만 두고 철수하도록 맥켄지가 무선연락을 받았을  때, 
    그것과는 관계없이 모건은 방을 나와 뒷 마당의  담을 뛰어 넘어 
    폰트 스트리트의 모퉁이에서 택시를 잡아 탔다.
      모건은 그날 오후 일찌감치 목표로 삼은 장소를 꼼꼼히 정찰했
    기 때문에 이제부터 해야 할 방법은 정확히 결정되어 있었다.  택
    시 운전수에게는 킹스로오드의 센트 마크스  대학에서 멈추어 달
    라고 부탁했다. 거기서 첼시  클리크까지는 빠른 걸음으로  5분도 
    걸리지 않는다.
      '웨더비 앤드 선즈' 도료 공장은, 발전소의 맞은편, 클리크에 튀
    어나온 선창 위에 있었다. 모건은 보이지 않는 곳에 멈추어 서서, 
    부드러운 검은 가죽장갑을 꽉  고쳐 끼고 자켓  주머니에서 눈만 
    뚫린 모자를 꺼내 푹 덮어 썼다.
      정문에는 빗장이 질러져 있고, 몇 개의 방법용 라이트가 환하게 
    비쳐지고 있었다. 경비견을 주의하라는 표시도 있으나 그런  것은 
    별로 염려할 것이 없었다.
      오후에 예비 조사를 했을 때부터, 이미 침입로는 결정되어 있었
    다. 물 밑에 깔려 있는 콘크리트 봇둑이다.  그 봇둑은 강철 기둥
    으로 짜 맞추어 만든 선창 쪽까지 뻗어 있고  그 선창 위에 공장
    이 있다.
      모건은 재방을 내려가서 물에 들어가  처음에는 천천히 걸어나
    가며 물살이 어느 정도인가를 알아보았다. 물살은 별로 세지 않았
    고 깊이는 장딴지 부근까지였으며 봇둑의  넓이도 꽤 넓었다.  다
    만, 더러운 물이끼 때문에 미끈미끈해서 발밑이 다소 불안했다.
      2, 3분쯤 지나 봇둑 끝에 도달했다. 모건은 잠깐 멈추어 섰다가 
    정비용 사다리를 타고 선창에 올라가 공장 뒷뜰로 들어갔다.
      2층으로 통하는 비상계단이 있었다. 꼭대기까지 올라가 보니 입
    구에는 철제 빗장이 질러져 있고, 그 끝에 작은 자물쇠가 걸려 있
    다.
      모건은 왼쪽 장화에서 2피트 길이의 쇠지레를 꺼내어 자물쇠에 
    질러넣고 비틀었다. 자물쇠는  금방 부러져 나갔다.  모건은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 다음부터는 예비 지식이 없는 영역이었다.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생각조차 해 둘 수 없었다. 무엇과 맞닥뜨리게 될
    지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다.
      회중전등을 키고 조심스럽게 살펴보니 그 층은 병조림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모든 것에 강한 알콜 냄새가 배어 있다. 그는 구석에 몇 개인가 
    놓여져 있는 드럼통 중에서 뚜껑 한 개를  열어서 냄새를 맡아보
    았다.
      공업용 알콜이었다. 그렇다면 쟈고가 고급 스카치에 섞어  놓은 
    것은 물보다도 훨씬 더 해로운 것이다. 사람이 그걸 마시면  목숨
    이 위태로울 만큼 유해한 것이다.
      창문에서 앞뜰이 내려 다보였다. 문  옆에 작은 경비실이  있는
    데, 제복 차림의 경비원이 의자에 앉아 책상 위에 발을 올려 놓고 
    무언가를 읽고 있고 어마어마하게  큰 경비견이 그  옆 마루에서 
    잠들어 있었다.
      조심해서 나무계단을 내려오니까 넓은 차고가 있었다. 2대의 벤
    과 1대의 3톤 트럭에 수십 상자의 위스키가 실려 있었다.  최고급 
    스카치 상표가 붙어 있으나 단순히 외관만 최고급일 것이다.
      차고에는 양쪽으로 열리는 큰 문이  있고 빗장이 걸려  있었다. 
    창문으로 들여다보니까, 경사진 도로가 아랫뜰로 통해 있었다. 그
    곳이라면 경비원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등불이 켜진 가옥의 창문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모건은 잠시 생각하고 나서, 2층 병조림실로 올라가 공업용  알
    콜 드럼통 한 개의 뚜껑을 열고 밀어 넘어뜨렸다. 안에 들어 있던 
    알콜이 흘러 나와 마루 바닥에 퍼져 나갔다.
      모건은 다시 아랫층으로 되돌아왔다. 트럭 운전대에 상체를  처
    박고 기어를 뉴트럴에 넣고 핸드 브레이크를 풀었다. 그리고 문의 
    빗장을 뽑고는 살그머니 양쪽으로 문을 열어 제쳤다.
      경비실 쪽에서는 아무 것도 움직이는 기색이 없었다. 그는 트럭 
    뒤로 돌아가, 등을 대고 밀었다. 트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
    에는 천천히, 그리고  앞바퀴가 경사로에 걸렸다.  갑자기 속력이 
    가속화되면서 그는 균형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모건이 일어서서 계단 쪽으로 달려가는 동안에, 무거운  트럭은 
    계속 전진해 뜰을 가로질러, 문짝과 충돌했다.  문의 이음매가 부
    서져 나가고, 트럭은 바깥의 도로에서 멈추어 섰다.
      그때 모건은 이미 병조림실 중간쯤까지 도달해 있었다. 그는 멈
    추어 서서 성냥을 그어,  마루에 흐른 공업용 알콜에  던졌다. 그 
    순간, 가스폭발과 같이 불길이 치솟아 모건은 불길바람에 쫓겨 비
    상계단으로 뛰어 나갔다.
      봇둑 중간쯤에서 멈추어 뒤를 돌아다보니까, 2층 창문에서 불길
    이 내뿜고 있었다. 그는 돌아서서 다시 물속을 걸어와 도로에  오
    르자 서둘러서 그곳에서 떠나, 킹스 로오드로 통하는 미로와 같은 
    뒷골목으로 들어갔다.
      이 소식을 들었을 때, 쟈고는 그때까지도 클럽에 있었다.

제 목 : 제9장 살인청부업자의 연인 - 2
      
      
      
      
      
      "어떻게 된 일이야?"
      하고 쟈고가 물었다.
      "누군가가 그 일에 끼어들려고 하는건가, 다른 상대인가?"
      "글쎄, 잘 모르겠군요, 형."
      라고 아놀드가 말했다.
      "그래서, 한길에서 발견한 트럭에 있던 스카치는? 그  스카치의 
    출처는 어디지?"
      "수출용예요. 하리지 항으로 운반해 가려던 참이었어요. 요전날 
    밤, 트럭 운전수들이 들리는 크로이든의 카페 밖에서 우리 일당이 
    가지고 온 거라구요."
      "빌어먹을!"
      하고 쟈고는 말했다.
      "경찰 놈들은 철저하게 냄새를 맡고 다니는데, 얼간이 같은  놈
    이 발견되기 쉬운 곳에 지문을 남기고 다니는지도 모르잖아!"
      "경찰이 형을 찾아 내지는 못할 걸요."
      하고 아놀드는 자신 있게 말했다.
      "그곳은 머피라는 머리가 약간 이상한 아일랜드 인의 이름으로 
    세를 낸 곳이에요."
      "그렇다면 그놈을 다음 비행기로 아일랜드로 돌려보내.  그리고 
    어제부터 있었던 것으로 해 두라구."
      "걱정할 것 없어요 형. 그 놈은 이미 그쪽에 가 있으니까요. 술
    주정뱅이라 벌써 몇 년 전부터 머리가 돌아 있어요. 그래서 그 남
    자를 골랐던 거예요."
      전화 벨이 울렸다. 쟈고가 수화기를 들었다.
      "네, 무슨 일입니까?"
      "이제는 말할 기분이 되었나. 미스터 쟈고? 그렇지 않으면 좀더 
    정신을 차리게 해 줄까?"
      라고 모건이 말했다.
      "죽일 놈!"
      "그런 말은 전에도 들은  적이 있지. 다시  용건으로 돌아가세. 
    모젤의 출처에 관한 얘기로 말이야. 정보를 알려 주면 더 이상 자
    네를 괴롭히지 않겠네."
      아놀드는 탁상 스피커로 전화 내용을  듣고 있었다. 그가  말을 
    하려고 하자 쟈고가 손으로 제지했다.
      "알았어. 당신이 이겼어. 내 밑에서 그  물건을 취급한 것은 골
    드맨이라고 하지. 하이미 골드맨, 그 놈과  연락을 취해서 당신에
    게 전화하겠어."
      "약속하는 거지?"
      모건의 목소리에는 비양거림이 섞여 있었다.
      쟈고는 손목시계로 시선을 돌렸다.
      "한 시보다 늦게는 안 돼."
      그는 수화기를 놓고 자신이 스카치를 따르러 갔다. 그것을 천천
    히 마시면서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놀
    드는 마음 속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쟈고의 그러한 태도는 전에도 
    본 적이 있고, 그 의미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좋아, 아놀드. 이놈은 자네가 맡도록 해. 앤디를 불러. 앤디 포
    드 말이야. 그리고 다우로 플레이스로  가서 모건의 여자  친구를 
    잡아 오도록 해. 워핑에서 만나자."
      쟈고는 힐끗 손목시계를 보았다.
      "한 시간 내에 처치해 버려."
      "형, 이놈은 특별한 놈이에요. 왜 놈이  알고 싶어하는 것을 가
    르쳐 줘야 하죠? 그놈과 상대하는 것은 그만 끝내 버려요."
      "그럴 작정이야. 하이미 골드맨의 이름을 알리는 정도로 결말을 
    짓지, 그 이상은 가르쳐 주지 않겠어."
      "아이고 맙소사!"
      아놀드가 말했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는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어. 그놈은  공
    장을 박살냈어. 그리고 그것뿐만이 아니라 그놈은 나를  협박했단 
    말이다. 이 나를 말이야!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지 않니?"
      그는 동생의 볼을 가볍게 때렸다.
      "자, 착수해. 밤새 걸려서는 안 돼."
      그리고 아마 40분쯤 후에 모건의 전화벨이 울렸다.
      "자, 대령. 당신의 승리요. 워핑의 파마즈  워프에서 만나세. 부
    두에 센트리 수출회사라고 쓴 창고가 있소. 나는 30분 후에, 그쪽
    으로 가겠오. 당신이 재미 있는 예의 거래를 한 남자와 같이 말이
    오."
      "그것 참 고맙군."
      하고 모건은 말했다.
      "앞으로 얼마 지불하면 되지?"
      "처음에 결정한 잔액이면 되겠소. 받아서 안된다는 이유도 없으
    니까 말이오."
      쟈고는 화가 난 듯한 어조가 되도록 노력했다.
      "앞으로는 더 이상 접근하지 말아 주게. 경찰과의 분쟁은  만들
    고 싶지 않으니까. 시간도 걸리고 돈도 들고, 어쨌든 나는 철저한 
    자본주의자이니까 말이야."

제 목 : 제9장 살인청부업자의 연인 - 3
      
      
      
      
      
      모건은 수화기를 놓고, 책상 오른쪽의  서랍을 열어 우선  월셔
    -PPK를, 계속해서 가즈웰 사이렌사를 꺼내었다.
      그는 멜로디도 되지 않는 휘파람을 불면서, 월셔에  사이렌사를 
    장착시켰다. 그 다음에는 탄환을 전부 꺼내서,  천천히 서둘지 않
    고 신중하게 다시 채워 넣었다.
      그 창고는 오래 된 석조물로서, 영국 상선대가 세계를 제패하고 
    있던 저 빅토리아조의 범선이 화려했던 시대에 세워진 것이었다.
      그 안에는 상자가 가득 차 있었다. 쟈고는 롤스로이스 실버  샤
    도의 뒷좌석에 캐더린 라일리와 나란히 앉아서, 브랜디를  마시고 
    있었다.
      "정말 마시고 싶지 않아, 아가씨?"
      "당신 따위는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라고 캐더린이 말했다.
      "너무 심한 말인 걸?"
      아놀드는 도어 옆에 서 있고,  몸집이 작고 거무스름한  냉혹한 
    얼굴의 스코틀란드인 포드는, 겨울에  아메라카 군인이  사용하는 
    것과 같은 녹색의 두건이 붙은 자켓을 입고 상자 더미에 앉아 있
    었다.
      포드는 총신을 짧게 자른 단총을 갖고 있었다.
      "그것을 눈에 띄지 않게 감춰."
      라고 쟈고는 말하고, 좌석용 깔개를 내던지면서 손목시계를  봤
    다.
      "놈은 언제올지 몰라."
      그들의 훨씬 위에 있는 비상용 통로에서, 모건은 그 상세한  상
    황을 꼼꼼히 조사하고 있었다.
      포드가 단총을 가지고 있고, 아놀드는 도어의  옆에, 쟈고는 롤
    스로이스의 뒷좌석에 캐더린과 함께 있는 것이 모두 보였다.
      아주 조용히 모건은 비상계단을 내려와서  빠른 걸음으로 통로 
    끝에 자신의 자동차 포르세가 있는 곳까지 왔다. 물론 쉽게  이루
    어지지 않으리라고는 예측하고 있었다. 그에 대한 대비도 하고 있
    었다.
      그러나 지금, 캐더린으로 인해서 그는 화가  나 있었다. 운전석
    에 앉았을 때, 그의 두 손은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놀드가 말했다.
      "놈이 오고 있다. 소리가 나는데."
      밖에서 포르세 6기통의 엔진 소리가 들리더니, 그 소리가  멈추
    고 곧 조용해졌다. 쪽문이 열리더니 모건이 모습을 나타냈다.
      군용 트렌치 코트를 걸치고 두 손을 주머니에  깊숙히 찔러 넣
    고 있었다.
      캐더린은 자동차의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나와 
    모건 쪽으로 달렸다.
      "함정이에요 모건!"
      하고 캐더린이 외쳤다.
      "이 사람들은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모건은 그녀에게 두 팔을 돌렸다. 하베이 쟈고가 큰 소리로  웃
    으면서, 자동차에서 나왔다. 한 손에 브랜디 병을, 다른 손에 은제 
    컵을 들고 있었다.
      "걱정할 필요는 없소."
      라고 쟈고는 말했다.
      "결국 여기에 있는 우리들은 모두 친구니까 말이야. 그렇지  않
    소, 대령?"
      모건은 미소를 띠면서 캐더린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캐더린이 
    이제까지 본 적이 없는 차가운 미소였다.
      캐더린은 비로소 모건의 눈에 이상한  금빛의 반점이 반짝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놈들이 거칠게 굴던가?"
      "아니요."
      "그것 참 다행이군."
      모건은 자신의 뒷쪽으로 그녀를 밀어제치고 쟈고 쪽을 보았다.
      "자네 친구는 단총을 무릎 덮개 밑에 감추었을 때, 방아쇠를 일
    으켜 세우는 것을 잊어버린 것 같구만."
      "앤디!"
      쟈고가 외쳤다.
      앤디 포드는 이미 깔개를 휙 내던지고, 엄지손가락을  방아쇠에 
    갖다 대고 있었다.
      모건은 손을 트렌치 코트 앞으로 쑥 내밀었다. 그의 손에는  월
    셔가 쥐어져 있었다. 그는 두 번 발사했다. 단총이 허공으로 날리
    고, 몸집이 작은 스코틀랜드 인은 몸이 뒤로 젖혀진 채  상자더미 
    위에 쓰러졌다.
      캐더린으로부터 갑자기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모건은 그녀의 
    손가락이 어깨에 죄어들고 있는 것을 느꼈다.
      "밖에 나가 있어요."
      하고 그는 말했다.
      "차 안에서 기다려요."
      "모건-이제 그만 둬요."
      "차에서 기다리라니까!"
      캐더린은 그곳을 떠났다. 그녀의 뒤에서 쪽문이 조용히 닫혔다. 
    쟈고와 아놀드는 자동차 옆에 나란히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그만 가르쳐 주게, 쟈고. 부탁하네. 사실대로 말해 주게."
      "알았어."
      하고 쟈고가 말했다.
      "내가 잘못했어. 시험을 해본  것뿐이니 너무 나무라지  말게나 
    모건. 자네나 나는 모두 올바른 길에서 벗어난 인생이지, 서로 이
    해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겠나?"
      "그렇지."
      모건은 신중히 겨냥해서 쟈고의 왼쪽 귀의 일부를 날려 버렸다.

제 목 : 제9장 살인청부업자의 연인 - 4
      
      
      
      
      
      쟈고는 뒤에 있는 자동차 쪽으로 몸이 기울어졌다. 옆머리를 누
    르고 있는 손가락 사이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아놀드가 달려들어서 양쪽 옷깃을 잡았다.
      "놈에게 가르쳐 줘 형, 부탁이야. 저놈은 돌았어. 두  사람 모두 
    죽게 된단 말이야."
      "알았어! 알았다니까!"
      라고 쟈고는 말했지만, 고통 속에서도 남자의 독특한  외고집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실은 이렇게 된 일이라구. 하이미 골드맨이 알스터의 아일랜드 
    놈들에게 다른 것과 함께 그 두 자루의 모젤을 팔았어.  이번에는 
    2주일 전에 그 사나이는 여기서 재고를 조사하고 있었지. 특별 재
    고품이란 것을 말이야. 그 사나이는 언제나 수요일 밤에 재고  조
    사를 하곤 했지.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복면을 한 수상한  놈이 
    그늘에서 나타나서는 낡은 지폐가  천 파운드 들어  있는 봉투를 
    내던지면서 사이렌사가 붙어 있는 권총을 요구했던 거야. 어떤 친
    구로부터 부탁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말이야!"
      "그리고는?"
      "하이미가 있는 곳에는 소음기가 부착된 모젤이  한 자루 남아 
    있었지. 그래서, 탄환을 한 상자 붙여서 건네 주자 복면의 사나이
    는 사라졌다더군."
      "역시 그랬었군."
      모건은 월셔의 총구를 올렸다.
      "이번에는 오른쪽 귀를 날려 보낼까?"
      "사실 그대로를 말한 거야. 맹세한다니까."
      라고 쟈고는 외쳤다. 비로소 그의 목소리에는 마음  속으로부터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모건은 총구를 내렸다.
      "좋아, 유감스럽지만 정말인 것 같군."
      모건은 포드 쪽을 바라보았다. 포드는 위를 향해 입을 크게  벌
    린 채로 쓰러져 있고 쭉 뻗힌 한쪽 다리가 상자에 얹혀져 있었다.
      "저 사나이를 어떻게 처리할지 모르겠지만, 자네들  나름대로의 
    방법이 있겠지."
      모건은 입구 쪽으로 향했다. 문을 여는 순간 쟈고가 소리를  질
    렀다.
      "깨닫게 해 주고야 말겠다, 모건. 이 빚은 꼭 갚고야 말겠어!"
      모건은 뒤를 돌아보면서 점잖게 말했다.
      "아냐. 자네는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거야. 냉정히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을 깨끗이 잊어 버리는 것이 제일 좋다는 것을 깨닫게 될 
    걸."
      모건의 뒤에서 문이 닫혔다. 엔진이 걸리고 자동차의 소리가 멀
    어져 갔다.
      쟈고의 옆 머리와 손과 어깨는 온통 피투성이었으나 그는 아직 
    자제력을 잃지 않고 있었다.
      "형!"
      하고 아놀드가 공포에 떨면서 말했다.
      "괜찮아. 전화로 조단 선생에게 알려. 내가 사고를 당했다고 알
    리란 말이야. 베일리 스트리트에 있는 그 개인 병원에서 합류하기
    로 하지."
      아놀드는 앤디 포드 쪽으로 힐끗 시선을 보냈다.
      "이 녀석은?"
      "또 한 놈의 젊은 주정뱅이가 어딘가로 사라진 것으로 하면 돼. 
    클럽의 샴에게 전화를 걸어. 뒷처리 일꾼을 급히 이리로 보내라고 
    전하란 말이야. 내일 아침까지는 여기를 깨끗이 해놓고 싶으니까. 
    그놈은 새 헨돈 바이파스에 버리면 돼. 그곳에서는 하룻밤에  5백 
    톤의 콘크리트를 기초 공사용으로 흘려보내고 있지. 기술의  진보
    란 참 고마운 거지? 자, 나를 도와서 차에  태워 줘. 그리고 네가 
    운전을 하라구."
      야아드는 지시한 대로 했다.
      "미안해요, 형."
      그는 눈물을 찔끔거리며 말했다.
      "걱정할 것 없어, 아놀드. 그 놈이 말한 대로야. 모두 물에 흘려 
    버리고 잊어 버리자구."
      그는 동생의 볼을 가볍게 두드리고는 정신을 잃었다.


제 목 : 제9장 살인청부업자의 연인 - 5
      
      
      
      
      
      다우로 플레이스에 도착하자, 모건은 엔진을 끄고 캐더린  쪽으
    로 향했다.
      "아까는 미안했소."
      "아녜요, 괜찮아요."
      라고 그녀는 말했다.
      "당신은 궁지에 몰려 있어요 모건, 지금 알았어요. 당신은 자신
    의 신비적인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하는 거예
    요. 오늘 밤, 자칫 큰일날 뻔했던 일에 당신은 나를 끌어들였어요. 
    그런데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요? 그렇게 해서  다소는 목적 달성
    에 가까와졌나요?"
      "그렇지 않소."
      "이제 됐어요. 내 기질에는 당신은 너무  강렬한 것 같아요. 지
    금부터 곧 짐을 꾸려 켐브리지로 돌아가겠어요. 오늘 밤 안으로."
      "아까 일로 걱정이 된다면 그럴 필요는  없소. 쟈고는, 경찰 신
    세를 지는 것을 무엇보다도 싫어하니까."
      "그가 그 시체를 손쉽게 처치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정말 기
    가 막히군요. 모건, 그래도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녀는 차에서 내려 도어를 거세게 닫았다. 모건은 핸들 앞에서 
    꼼짝 않고 버튼을 눌렀다. 전동식의 창문이 소리도 없이 내려지면
    서 열렸다.
      "정말 미안해요."
      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달리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잖소. 그렇지 않소?"
      모건은 엔진을 걸고 달려갔다. 캐더린은  그 자리에 잠시  서서 
    포르세의 소리가 점점 사라지는 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리고는 지친 발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가  맥없이 열쇠를 꺼내
    어 문을 열었다.

제 목 : 제10장 석양속의 격투 - 1
      
      
      
      
      
                        제10장 석양 속의 격투
      
      
      새벽녘의 희미한 빛 속으로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을 때,  바리
    미나에서 2마일 떨어진 앤트림 산속에서 세이머스  키건은 그 농
    가의 뒷문으로 통하는 샛길을 오르고 있었다.
      키건은 뼛속까지 지쳐 있었으며, 오른쪽 팔은 의사가 흰 천으로 
    달아매주기는 했지만 몹시 아팠다.
      그가 접근해 오는 것을 부엌 커튼 뒤에서 팀 패트 케오가 지켜 
    보고 있었다. 터리는 난로 옆 테이블에서 베이컨 에그를 먹고  있
    었다.
      팀 패트는 기관총을 끼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키건이군요.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쫓아 보낼까요?"
      "아직 괜찮아."
      라고 터리가 말했다.
      "그놈의 목적을 물어 보라구."
      팀 패트가 문을 열었다. 세이머스 키건이  서 있었다. 티이드의 
    모자를 쓴 그의 얼굴은 창백하고, 통증으로  굳어져 있었으며, 벨
    트가 부착된 낡아빠진 트렌치 코트는 호우로 흠뻑 젖어 있었다.
      "놀랬는걸. 마치 시체가 걸어 다니고 있는 것 같은 꼴이군."
      라고 팀 패트가 말했다.
      "미스터 터리를 만나게 해 주겠소?"
      하고 세이머스 키건이 물었다.
      팀 패트는 세이머스를 부엌으로 끌고 가서 익숙한 솜씨로 몸을 
    수색했다. 트렌치 코트의 왼쪽 포켓에서 콜트 오토매틱을  발견해 
    테이블 위에 놓았다.
      터리는 식사를 하면서, 소년을 바라보았다.
      "무엇을 원하지?"
      "당신은 솜씨가 좋은 사나이라면 언제라도 써 주겠다고 말했었
    죠 미스터 터리."
      터리는 자기 자신이 두 잔째의 홍차를 따랐다.
      "그 팔은 왜 그랬나?"
      세이머스는 매달은 붕대를 내려다보았다.
      "부러져 버렸어요, 미스터 터리."
      "그러면 한 가지 문제가 있는데."
      라고 터리는 말했다.
      "그건 말이야, 세이머스는 오른손에 총을  가지면 최고야, 라고 
    오헤이건은 언제나 선전하고 있었지. 그러나 왼손이라면 헛간  문
    짝조차 명중시킬 수가 없다고도 말했었단 말이야."
      "당신이 기회를 준다면, 한두 달  안에 이전과 같이 될  겁니다 
    미스터 터리."
      소년의 거칠어진 얼굴에는 필사적인 표정이 나타나 있었다.  터
    리는 성냥개비로 이를 쑤셨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세이머스. 정직히 털어 놓고 이야
    기 하지만 자네는 이쯤해서 영원한  휴식을 취해도 된단  말이야. 
    자네도 그렇게 생각지 않나 팀 패트?"
      "그렇게 생각하다마다요, 미스터 터리."
      팀 패트는 미소를 지으면서 기관총을 꺼내 쏠 자세를 취했다.
      세이머스는 어깨를 움추리고 잠시 머리를 숙이고 있었으나,  얼
    굴을 들었을 때에는 진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할 것이라고 나도 생각하고 있었던 참입니다. 
    미스터 터리."
      세이머스는 달아맨 붕대 속에 감추어 두었던, 총을 발사해서 팀 
    패트를 즉사케 했다.
      사나이의 거대한 몸집이 빙글빙글 돌면서 뒤에 있는 찬장에 부
    딪쳐, 사기그릇이 마루바닥으로 우르르  쏟아지는 동안에, 터리는 
    테이블 서랍을 열고 미친 듯이 안에 있는 총을 찾고 있었다.
      세이머스가 쏜 두 발째의  총알이 터리의 왼쪽  어깨에 명중해 
    터리는 한 바퀴 굴러서 의자에서 떨어졌다.
      터리는 잠깐 동안 거기에 몸을 굽히고 있다가, 고통스러운 소리
    를 지르면서 일어서려고  애를 썼다. 세이머스는  다시 발사했다. 
    탄환은 터리의 두개골을 격파시켰고, 그는 머리부터 난로로  쓰러
    져 타오르는 장작 위로 뻗어 버렸다.
      터리의 자켓에 불이 붙어서 갑자기 불길이 솟아 올랐다. 세이머
    스는 잠시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곧 발길을  돌려 밖으로 나
    갔다.

제 목 : 제10장 석양속의 격투 - 2





      모건은 잠을 자려고 했으나,  단속적으로 밖에 잘 수가  없었다. 
    6시가 조금 지났을 때 그는 단념  하고 부엌으로 갔다. 커피를 마
    시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 상태로 보아 공중전화에서 걸려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동전 소리가  들렸고 틀림 없는  알스터 사투리가 들려왔
    다.
      "대령님이세요? 저는 키건입니다. 세이머스 키건입니다."
      "지금 어디에 있는 건가?"
      "바리미나에서 멀지 않은 곳입니다. 당신에게는 알리는 것이 좋
    을 것이라고 생각해서요.  저는 터리와 팀  패트 케오를 끝장내고 
    방금 돌아왔읍니다."
      "영구히 말인가?"
      "관 뚜껑이 닫힐 때와 같이 말입니다."
      침묵이 흘렀다. 모건이 말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할 작정인가?"
      "남쪽에 가서 잠깐 쉬겠어요."
      "그 다음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까 대령님? 일단  들어가면 이탈할 
    수없는 것이 IRA의 규칙이라는 것을 알고 있잖읍니까. 당신은 훌
    륭한 분이에요. 그렇지만, 적입니다."
      "이 다음에 우리들이 만났을 때, 그것을 잊지 않도록 하세."
      "우리 양쪽을 위해서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야겠군요."
      전화가 끊겼다. 모건은 잠시 서 있다가 수화기를 놓았다.
      "일어서라 공화국이여! 세이머스 키건."
      라고 모건은 낮은 소리로 말하면서 발길을 돌려 부엌으로  되돌
    아갔다.
      모건은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피로감이 느껴지고 왠지 기
    분이 우울했다. 아까 사나이를 죽인 탓은 아니다. 그런  일은 이제
    까지 몇 년 동안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겪었다. 더구나 후회
    는 하지 않는다. 게다가 어차피 포드는 직업적인 살인 청부업자인 
    것이다.
      "자네도 역시 그렇지 않은가?"
      라고 모건은 웨일즈 말로 나지막히 자신에게 말했다.
      "그렇지 않다 해도 적어도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
      그리고 그는 캐더린  라일리에 관한 일과, 그녀의  말을 생각해 
    보았다. 그녀가 말한 대로였다. 목적에 조금이라도  가까와진 것은 
    아니다. 가능성이 있는 단서라고는 두 가지뿐이다.  리제르트 호프
    만이라는 여성과 모젤  권총뿐이었다. 그러나, 그 양쪽 모두  막다
    른 골목길에 부딪혀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남아 있단 말인가? 테이블 위에는 코엔 습격  사
    건을 제각기 다른 각도에서 진술한 신문과 잡지가 놓여 있었다.
      그것들을 몇 번이나 숙독했던가? 모건은 잡지를 가까이  끌어당
    겨, 한 번 더 관련 기사를 훑어보았다.
      다 읽고 나서, 그는 커피를 한 잔 더 따르고 의자 뒤에  기댔다. 
    물론, 미간이 터널에서 치어 죽은 것은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매
    스콤은 이 두 사건을 연관시키는 것을 허가받지 못했던 것이다.
      그 기사는 실려 있기는 했지만, 전혀 다른 면에서 흔히 있는 뺑
    소니 사고로 취급되었다. 훔친 차에  타고 있던 운전수가 한 여학
    생을 치고는 차를  베이스워터의 클레이번 힐 가아든에  유기했다
    고 적혀 있었다.
      모건은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않고 상기했는데, 왠지 아직 크레
    타 인이 타고 간 차를 버린 장소를 찾아가 보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보러 갈 만큼의 가치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비
    가 올 듯한 음울한 런던의 오전 6시, 앞길이 꽉 막혀 있는 상태에 
    있을 때, 그곳을 찾아가는 일밖에는 또 다른 할 일이 없었다.
      모건은 클레이번 힐 가아든에 포르세를  주차시키고, 앉은 채로 
    무릎에 런던 지도를 올려 놓고  해당되는 페이지를 펴서 그날 밤, 
    크레타 인이 필사적으로  질주한 코오스를 사태가 틀어지고  나서
    의 당혹감을 상상하면서 더듬어 보았다. 크레타 인은 타고간 자동
    차를 버리고 난 다음 어떻게 했을까?
      모건은 자동차에서 내려, 보도를 걸으며  자연스러운 행동을 취
    했다. 린스타 테라스에 접어들자 불과  수 야드 앞이 교통량이 많
    은 베이스워터 로드이고 그 맞은편이 켄딩톤 가든즈였다.
      "여기서부터는, 내 입장이었으면 아마 이렇게 하겠지."
      라고 모건은 혼자 중얼거렸다.
      "곧장 도로를 가로질러 어둠 속으로 들어가  필사적으로 달려서 
    맞은편으로 나간다."
      도로를 가로질렀을 때 모건은 자연히 가장 가까운 입구를  골라 
    샛길을 통하여  라운드 폰드를 오른쪽으로  바라보면서 지나갔다. 
    이른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이따금씩 조깅을 하러 나온  트레이닝
    복 차림의 사람들이라든가, 개를 산책시키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
    난 사람들이 있었다.
      모건은 알버트 홀 맞은편, 퀸즈 게이트로 나갔다.  거기서부터라
    면 여러 가지 방향이 가능했다. 우선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지하철
    이었을 것이다. 일단 지하철을 타면, 가능성은 무한히 커진다.
      모건은 지금 온  켄딩톤 가든즈로 되돌아가서 린스타 테라스와 
    베이스 워터  로드와의 합류점으로 돌아가  쏟을 곳 없는  분노를 
    느끼며 멈추어 섰다.
      "너는 어딘가로 갔을 것이다, 이 악당아!"
      라고 그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어디로 갔을까?"
      모건은 도로를 가로질러  퀸즈웨이 쪽으로 보도를 걷기 시작했
    다. 물론, 가망이 있을 리는 없었다. 모퉁이에 있는 이태리 레스토
    랑 앞에서  맥없는 발걸음을 멈추고  담배에 불을 붙였을  때에도 
    이미 소용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레스토랑의 메인 윈도우 옆에, 몇 장인가의 포스터가 붙여져 
    있었다. 창백하고 핸섬한  얼굴이 최초로 그의 주목을 끌었다.  흑
    수정과도 같은 눈, 그리고 미카리의 이름이 새까맣게 인쇄되어 있
    었다.
      모건은 일어나 나가려고  하다 문득 무엇인가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어서 되돌아서서 포스터를 읽었다.

제 목 : 제10장 석ㅎ煐湛?격투 - 3





      베이커가 보여 준 재료에는 크레타 인이 '검은 여단'을 위해 이
    태리 영화 감독을 사살했을 때,  칸느 영화제에 와서 호텔에 체재 
    중이던 저명 인사 속에 미카리가 있었다고 진술되어 있었다.
      모건은 포스터에 기재된 날짜를 보았다. 1972년 7월 21일,  금요
    일, 오후 8시--라고 적혀 있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정말  미치광이 짓만 같았다. 그래도  모건은 
    정신을 차리자, 발길을  돌려 급히 린스타 테라스로 돌아왔다.  그
    는 거기서 잠시 서서  크레타 인이 차를 버리고 여기에  나타났을 
    때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저 멀리 나무 숲 위로 알버트 홀의 도움식 지붕이 보였다. 모건
    은 재빨리 도로를 가로질러 공원으로 들어갔다.
      모건은 알버트 메모리얼에서  계단을 내려와 이른 아침의 자동
    차 물결을  헤쳐가면서 켄딩톤 고아를  차로 질러서 알버트  홀의 
    정면 입구 앞에 섰다.
      게시판에 여러 가지  콘서트 프로그램을 광고하는 포스터가 붙
    여져 있었다.
      다니엘 바렌보임, 앙드레 프레빈, 믈라  린파니, 그리고 존 미카
    리. 비엔나 필하모니와 존  미카리에 의한 라프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 C단조. 1972년 7월 21일, 금요일 오후 8시.
      "그렇구나!"
      하고 모건이 소리쳤다.
      "그놈의 목적지는 바로 여기였어. 틀림 없어. 그래서  그놈은 버
    딩톤 터널을 통과했을 거야.  그렇기 때문에 베이스워터에서 타고 
    가던 자동차를 버렸던 거라구!"
      모건은 발길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그곳을 떠났다.
      그것은 터무니  없는 상상이었다. 그렇지만  모건은 플레이스에 
    돌아오자, 또다시 신문을  보기 시작했다. 코엔 사건과 미간의  죽
    음과는, 22일, 토요일자 '데일리  텔레그래프'지의 각각 다른 페이
    지에 실려 있었다.
      음악란을 펴자 그곳에 나와 있었다.  전야의 콘서트를 문제삼은 
    음악 담당 기자의  긴 비평이 있고,  나란히 피아니스트의 사진이 
    실려 있다.
      모건은 잠시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핸섬하고 진지한  얼굴, 
    검은 머리,  눈. 물론 어처구니없는  일이라고 생각되었지만  그는 
    서가로 가서 '인명록'을 꺼내 미카리의 항목을 찾았다.
      미카리의 항목을 읽어 내려가자 2, 3줄의  문장이 눈에 확 띄었
    다. 미카리가 외인부대의  공정대원으로서 알제리아에서 싸웠다는 
    조항이었다.
      그것을 읽은 모건은 더 이상 어처구니 없는 상상이라고  여기지 
    않게 되었다.
      오전 9시가 지나서 부르노  피셔의 비서는 골든 스퀘어에 있는 
    그의 사무실의 도어 열쇠를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코트를 
    벗을 사이도 없이 전화 벨이 울렸다.
      "안녕하세요, 피셔 사무실입니다."
      하고 그녀는 응답했다.
      "피셔 사장님 나오셨읍니까?"
      웨일즈 사투리가 상당히 강한 남자 목소리였다.
      비서는 책상 가장자리에 앉았다.
      "사장님은 11시 전에는 나오지 않으세요."
      "그분은 존 미카리의 대리인을 맡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만."
      "그렇습니다."
      "나는 루이스라는 사람입니다."
      라고 에이서 모건은 말했다.
      "나는 음악 대학원생인데, 현대의  콘서트 피아니스트를 테마로 
    해서 논문을  쓸 생각입니다. 그래서,  미스터 미카리와  인터뷰를 
    하고 싶어서 말입니다."
      "그것은 무리일 것 같군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분은 헬싱키에서 콘서트를 막 끝내시고 곧장  그리스로 휴가
    차 떠나셨읍니다. 그리스 이도라에 별장이 있거든요."
      "그러면 그분은 언제 이쪽으로 돌아오실까요?"
      "10일 후에 비엔나에서 콘서트가 있으니까 아마  아테네에서 직
    접 그쪽으로 가실 겁니다. 그분이 언제 런던으로 돌아오실지는 모
    르겠군요. 게다가, 당신을  만나 줄 것이라는  보증도 할 수  없구
    요."
      "유감이군요."
      하고 모건이 말했다.
      "그분이 연주 여행하러 가신  도시 중에서 특히 좋아하시는  도
    시에 관해서 알  수 있을까요? 좋아하는 물건이  라든가, 그 이유 
    같은 것도 말입니다."
      "파리를 좋아하시죠."
      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분은, 다른 어느 도시보다도 파리와 그리고 런던에서 연주를 
    많이 하시죠."
      "그러면 프랑크프루트는?"
      라고 모건이 물었다.
      "거기서 연주한 적도 있나요?"
      "있을 겁니다."
      "확실합니까?"
      "작년에 그분이 프랑크프루트 대학에서 콘서트를 열었을 때, 동
    독의 장관이 암살된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죠."
      "갑사합니다."
      라고 모건이 말했다.
      "아주 많은 도움이 되었읍니다."
      모건은 전화 옆에 앉아서 그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어딘지 잘
    못 되어 있음에 틀림없다. 너무나도 단순하기 짝이 없다.
      그 때 전화벨이 울렸다.
      캐더린 라일리였다.
      "모건, 죄송해요. 전 그 사건 이후로 영 진정할 수가 없어요."
      "지금 어디에 있소?"
      "켐브리지의 뉴홀에 돌아왔어요."
      "여기에서는 오늘 아침, 깜짝 놀랄 만한 일이 있었오."
      라고 그는 말했다.

제 목 : 제10장 석양속의 결투 - 4





      "그날 밤, 크레타 인이  자동차를 버리고 간 길에 가서,  거기서
    부터 그 사나이가 더듬어 갔다고 생각되는 코오스를  걸어 보았었
    오."
      "물론, 모두 가정에 불과했겠죠?"
      "그랬더니 켄딩톤 가든즈를 가로질러서 알버트 홀로  나가게 되
    었소. 거기서 한 장의  포스터를 보고 문득 생각이 났지. 여러  장
    의 포스터가 있었지만 어느  것보다도 관심을 끈 것은 미간이  죽
    던 날 밤 8시부터 시작되는 콘서트의 광고였소."
      "콘서트의?"
      그녀는 몸 속에  어떤 차가운 것이 지나가고,  호흡이 가빠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존 미카리가 연주한 라프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 그 
    이름이 직감적으로 떠올랐소. 폴라니라고  하는 이태리 영화 감독
    이, 1971년 칸느 영화제 때 묵고 있던 호텔에서 크레타 인에게 사
    살되었는데 프랑스 경찰의 엄중한  경비에도 불구하고, 크레타 인
    은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었지. 미카리는 그 시기에, 또  같은 호텔
    에 묵고 있었던 많은 저명 인사 중의 한 사람이었단 말이오."
      "그래서요?"
      "작년, 프랑크프루트에서 동독의 장관이 사살되었을  때, 대학에
    서 누가 콘서트를 하기로 되어 있었는지 알아맞혀 봐요."
      캐더린 라일리는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모건, 그런 어처구니  없는 얘기가 어디  있어요? 존 미카리는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의 한 사람이며 국제적으로도  아주 유
    명한 사람이에요."
      "그는, 젊었을 때 외인부대에서 2년간 있었소."
      라고 모건은 말했다.
      "그다지 가능성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추적해 볼  가치는 
    있다고 생각하오."
      "당신의 그러한 의심을 베이커 총경에게 말했나요?"
      "천만에. 이것은 내가  직접 알아낸  사실이오. 좀더 조사해  볼 
    작정이오. 당신에게는 연락이 끊기지 않도록 하겠소."
      그가 전화를 끊자 캐더린은 주소록을 꺼내서 서둘러 부르노  피
    에 있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부르노 씨--캐더린 라일리예요."
      "이렇게 아침 일찍 무슨 용건이신가요?"
      "존은 헬싱키에서 언제 돌아오죠?"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는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답니다.  곧
    장 아테네로 가서 이도라섬으로  건너갔읍니다. 연락을 취하고 싶
    를 알고 있겠죠? 그런  벽촌이라도 한 가지 좋은 점은 전화가  있
    다는 사실이죠."
      캐더린은 전화기를 놓고 주소록의 다른  페이지를 넘겼다. 이도
    라의 좋은 점. 그것은 다이얼로 자동적으로 직접 연결된다는 점이
    다. 그녀는 푸시버튼으로  일련의 긴 숫자를 두드렸다. 사이를  두
    고 세 번 시도해 보고 나서야 겨우 연결되었다.
      "존, 당신이에요?"
      "캐더린! 지금 어디에 있지?"
      그는 매우 즐거운 것 같았다.
      "켐브리지에요. 2, 3일 틈을 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쪽에 폐를 
    끼쳐도 좋을지 모르겠네요?"
      "당연하지. 언제 이곳에 도착하지?"
      그녀는 손목시계를 힐끗 보았다.
      "정돈해 놓을 것이 좀 있지만, 오후  비행기에는 탈 수 있을 것 
    같군요. 늦어도 저녁  비행기라면 틀림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섬
    에 도착할 수 있는 것은 내일 아침이 되겠죠."
      "선착장에 코스타스를 대기시켜 놓겠어."
      전화를 끊고 나서 그녀는 오랫동안 몸을 꼼짝달싹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정말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오는군! 절대로  그럴 수는 없어! 
    그때 그녀는 자기가  마음속으로부터 에이서 모건을 미워하고  있
    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모건은 프리트 스트리트에 있는 '데일리 텔레그래프' 사의 광고
    부 카운터에서 기다렸다. 5분 전에 용건을 전한 젊고 붙임성 있는 
    여인이 두터운 자료집을 안고 돌아왔다.
      "존 미카리. 그 사나이에 관해서는 자료가 아주 많군요."
      라고 그녀가 말했다.
      그대로였다. 모건은 그것을 테이블로 갖고 가 편히 앉아서 차분
    히 조사하기 시작했다. 물론, 빠진 것도  있었다. 오려 낸 것은 주
    로 영국과 미국의 신문에서였었으나 프랑스의 것도 조금 있었다.
      어떤 콘서트의 비평이  바실리코스 암살의 날짜와 일치하고 있
    었다. 그 밖에,  토론토에서 러시아 인이 사살된 날짜와  일치하는 
    비평도 있었다.
      '파리 마치'지의 가사도 있었다. 모건은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프랑스어 실력은 그다지 좋지 못했으나 요지를 이해할  수는 있었
    다.
      기사에는 외인 부대에 있었을 때의 미카리에 관한 것이  기술되
    어 있었으며, 특히 카스파에서의 사건을 생생히 묘사하고 있었다.
      다음 페이지를 넘기자 사진이 실려 있었다. 그 중 한 장에는 미
    카리는 공정대원의 베레모에 아무렇게나 기관단총을 들고 있었다. 
    다른 클로즈업의 사진에서는 잘 단련된 외인 부대의  병사로서 정
    규의 흰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 새파랗게 젊고 늠름한 얼굴, 짧게 깎아 올린  머리, 무표정한 
    눈, 그리고 입, 그 모두를 모건은 바라보았다.
      모건은 자료를  덮었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크레타 인을  끝내 
    밝혀낸 것이다.

제 목 : 제10장 석양속의 결투 - 5





      한 시가 조금지났을 때, 베이커는 킴의 안내로 퍼거슨의 방으로 
    들어갔다.
      퍼거슨 준장은 난로  옆에서 점심으로 좋아하는 샌드위치를 먹
    으면서 언제나와 같이 '더 타임즈'를 읽고 있었다.
      "흥분해 있는 것 같군 주임 총경!"
      "에이서 모건이 11시 비행기로  아테네로 출발했읍니다. 히드로 
    공항에 주재하고 있는 스페셜 브랜치의 근무자들은 그를  출입 정
    지시킬 권한이 없어  그 통지는 겨우겨우 우리들에게  도달했읍니
    다."
      "그가 출발한 시간으로 보아 당연히 영국항공을 탔겠지?"
      "올림픽 항공입니다."
      "비애국적이로군."
      "여러 가지 조사해 보았읍니다. 모건은  전화로 예매를 하고 빠
    듯이 10분 전에 표를 받으러 온  것 같습니다. 손가방을 한 개 가
    지고 있었을 뿐이었읍니다."
      "그리스야."
      라고 퍼거슨이 말했다.
      "그것과 크레타 인. 어딘지 이 둘은 합치하는 것  같아. 맘에 들
    지 않는군."
      "아테네에 있는 스페셜 브랜치 요원들에게 지시해서  그를 붙잡
    을까요?"
      "그건 안 돼!"
      "알겠읍니다. 그곳 대사관에 있는 DI 5의 요원은?"
      "있고말고. 루커 대위. 주재 무관의 보좌역으로 되어 있지."
      "모건이 도착하면 그 사나이에게 미행시키면 어떨까요?"
      "그것도 한 가지 방법이지  주임 총경. 그러나, 자네 자신이  지
    적한 대로, 에이서 모건을 미행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그것을 허용
    할 때에 한한다는 불행한 사실이 있단 말이야. 그러나,  자네가 루
    커에게 연락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게. 이 빨간색 전화를 사용하면 
    대개는 빨리 해결된다네."
      퍼거슨은 '더 타임즈'로  눈을 되돌렸다. 베이커는 책상 쪽으로 
    다가가서 빨간색 전화를  사용해 지급으로 아테네의 영국  대사관
    에 연결을 부탁했다.
      세관 수속을 마치고 모건이 나타났을 때,  찰스 루커 대위는 기
    둥에 기대어 신문을 읽고 있었다.
      루커 대위는 더운 여름  기간에 그리스 인의 많은 사람들이 즐
    겨 입는 주름투성이의 린넨 슈트를 입고 있었다. 이것이라면 혼잡
    한 공항에서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해 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직업 군인은 대개는 평복을 입고 있어도 서로 군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경우, 모건이 알아 차리기는  매우 용이했다. 왜냐하면, 그는 
    남의 얼굴에 관해서는  백과사전적인 기억의 소지자이고 도시  게
    릴라전법과 기술에 관한 연구  그룹을 대상으로, 1969년에 샌드하
    스트에서 강연했을 때, 루커가 맨  앞 줄에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퍼거슨은 빈틈이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특별한 것도  아
    니다.
      모건은 환전 카운터로 가서 2백 파운드를 건네 주고 그에  상당
    한 금액의 드라크마를 받고서, 입구에서 밖으로 나와 택시를 불렀
    다.
      최후로 아테네에 온 것은 2, 3년 전에  NATO 회의에 참석했을 
    때였다. 그는 그때  숙박했던 호텔을 상기했다. 생각해 보니  그의 
    목적에는 그 호텔이 딱 알맞을 것 같았다.
      "크리스토 가에 있는 그린 파크 호텔을 알고 있소?"
      "네."
      운전수는 대답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뒷쪽에서 찰스 루커는 이미 검은 메르세데스를 타고  운
    전수의 어깨를 두드리고 있었다.
      "앞에 가는 저 택시, 녹색의 푸조. 저놈을 바싹 따라가 주시오."
      루커는 모건에게 사관학교에서 강연을 받은  것을 상기했다. 이
    런 인연이 되었다는 것이 재미 있었다.
      루커는 미소를 띠면서 뒤에 기대어 담배에 불을 붙였다.
      모건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아테네 시간으로 하면 두 시간 빠르
    게 해 놓아야 하기 때문에 지금은 4시 45분이다.
      "오늘 밤 이도라로 가는 수중익선을 타려면 아직 시간에  댈 수 
    있겠소?"
      하고 그는 물었다.
      "네."
      라고 운전수는 대답했다.
      "여름 운항이 되어 있어서요. 저녁때가  되어도 아직 밝아 늦게
    까지 출항하니까요. 이도라  행의 마지막 편은  피레프스에서 6시 
    반에 출항합니다."
      "시간은 어느 정도 걸리는지 압니까?"
      "8시에 도착합니다. 아주 멋진 코스죠. 경치가 좋아요. 요즘은 9
    시 반경이 되지 않으면 어두워지지 않으니까요."
      운전수는 어깨 너머로 언뜻 뒤돌아보았다.
      "그러면 피페프스로 모실까요?"
      모건은 뒤따라오는 메르세데스를 염두에 두고 고개를  가로저었
    다.
      "아니오, 내일 가겠오. 호텔로 가 주시오."
      "네! 손님은 영국인 치고는 그리스어를 잘 하시는군요."

제 목 : 제10장 석양속의 결투 - 6





      키프로스 섬에서 EOKA의  테러리스트를 쫓던 지독한 3년간에 
    익힌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모건은 말했다.
      "니코시아에서 2, 3년간 일한 적이 있었소. 영국의  와인 회사에
    서 말이오."
      운전수는 눈치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도 요즘은 좋아지고 있어요. 마카리오스가 잘 알아서 하고 
    있나봅니다."
      "그렇게 됐으면 좋겠는데."
      이제 시간의 여유가 없었다. 그린 파크 호텔에 도착해서 모건이 
    운전수에게 요금을  지불하고 있으니까  검은 메르세데스가  옆을 
    천천히 지나 몇미터 앞의 연석이 있는 곳에 멈추었다.
      모건이 계단을 올라가서  회전 도어로 들어가려  할 때 루커가 
    자동차에서 내려 그 뒤를 따랐다.
      호텔 안으로 들어가자 모건은 프론트로 가지 않고 그대로  지나
    쳐서 2층으로 향했다.
      루커는 잠시 멈추어 로비의 게시판에 나온 그날의 통화  환률을 
    바라보는 척하다가 모건이 처음 층계 모퉁이를 돌아가자  다시 뒤
    쫓기 시작했다.
      2층으로 올라가 그곳 구조를 훤히 알고 있는 모건은 선물  가게 
    앞을 재빨리 지나쳐 안쪽 좁은 계단으로 내려갔다.
      그곳은 철야 영업을  하는 1층 레스토랑이었다.  모건은 테이블 
    사이를 빠져서 호텔 옆쪽 출입구로 호텔 밖으로 나갔다.
      그때 루커는, 여전히 2층에서 다음에는  어디로 갈까 하고 망설
    이고 있었다.
      루커는 선물 가게의 젊은 여점원에게로 다가갔다.
      "친구가 조금 전에 이리로 올라왔는데요.  갈색 가죽 가방을 들
    고 레인코트를 입고 있어요. 어쩌다가  그와 뿔뿔이 헤어진 것 같
    습니다."
      "아, 그분요. 레스토랑 계단으로 내려가셨어요."
      갑자기 좋지 않은 예감이  들어서 루커는 단번에 두 계단씩 내
    려갔다. 물론, 에이서 모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모건은 그때 이미 맞은편 공원을 절반이나 가로질러 가고  있었
    다.
      모건은 목표했던 대로 택시  정거장으로 나가 맨 앞에 서 있는 
    택시를 탔다.
      "피레프스로 갑시다."
      라고 그는 운전수에게 말했다.
      "6시 반에 출발하는  이도라행 플라잉  돌핀 호를 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너무 빡빡하군요 선생님."
      라고 운전수가 말했다.
      "아무래도 시간에 댈 자신이 없읍니다."
      "시간에 대면 5백 드라크마를 내겠소."
      라고 에이서 모건은 말했다. 그가 가죽 손잡이를 붙잡자 운전수
    는 히쭉 웃으면서 자동차의 물결 속으로 기운차게 달려 나갔다.
 
제 목 : 제11장 야간 비행 - 1






                          제11장 야간 비행


      히드로 공항에서  캐더린 라일리가  포터에게 짐을 들려가지고 
    영국 항공의 탑승 카운터로 뛰어든 것은 정확히 3시 30분이었다.
      젊은 접수계원이 그녀의 탑승권을 보았다.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이미 승객 탑승이 끝났읍니다. 지금은 태
    워 드릴 수가  없읍니다. 7시 비행편을  이용하시면 안되시겠읍니
    까?"
      "좋아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렇게 해 주세요. 오늘 밤 안에 아테네에 도착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그는 확인을 하고 돌아왔다.
      "문제 없이 도착할 수 있읍니다.  약간 늦어지겠지만 그리스 시
    간으로 0시 30분 도착입니다."
      "상관 없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섬까지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차피 내일  아침에 건너기는 
    매일반이죠."
      "알겠읍니다, 부인. 그러면 수속을 하겠읍니다."
      이번에는 퍼거슨이 베이커에게  전화를 걸어서  아테네로부터의 
    나쁜 소식을 전했다.
      "방금 루커에게서 전화가 있었네. 그는 에이서에게 따돌림을 당
    했네. 그것도 간단하게 말일세. 말투를 들어보니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더군."
      "정말 한심스럽군요."
      이번에는 자제심을 잃은 베이커가 투덜거렸다.
      "당신은 도대체 어디서 그런 백치들을 모아 왔읍니까?"
      "전능한 신의 특별한 배려일세, 총경, 신의 행동에  의심을 품는
    다는 것은 우리들 무력한 인간이 할 짓은 아니라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미코버 씨처럼 조용히 앉아서 사태가 호전되는  것을 기대하는 
    걸세."
      퍼거슨은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모건은 충분한  여유를 두고  프레프스의 수중익선이 발착하는 
    부두에 도착했다.  특별히 붐비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승선권을 
    사서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날씨가 온화한 황혼녘이었기 때문에 플라잉 돌핀 호는 최고  속
    도로 운행할 수 있어서 죽마와 같은 다리로 수면 높이 질주했다.
      경치는 꽤나  장관이었다. 사로니코스만의 푸른  물에 둘러싸인 
    사라미스 섬, 에이나 섬, 포로스 섬의 웅대한 모습, 그것들이 저녁 
    놀속에서 화려한 색깔로 빛나고 있었다.
      모건에게는 그런 경치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는 갑판에 나
    가 난간에 몸을 기대고  서 있었을 때조차 공허하게 하늘을  바라
    보며 단 한 가지 일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존 미카리의 일이었다. 맞닥뜨리면 어떻게 될까. 모건은  무기를 
    갖고 있지 않았다. 공항에서 신체  검사를 하기 때문에 만일 무기
    를 반입하려다가 체포당할 위험은 피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
    다.
      물론, 언제라도 두 개의 손이 있다. 맨손으로 싸우는 것은  처음
    이 아니다. 양손을 내려다보니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드디어 이도라 섬이 나타났다. 그것은 석양 속에서 산허리의 흙
    이 노출되어 변화가 없는  거대한 파시리스크의 석상을 연상시켜, 
    몹시 낙담을 안겨  주는 모습이었으나, 플라잉  돌핀 호가 만내로 
    들어가자 일변하여 이도라의  거리 그 자체의 매혹적인  아름다움
    이 나타났다.
      집들이 계단을 이루면서 산허리의 위쪽으로 이어지고  구불구불
    한 자갈이 깔린 좁은 길이 그물눈처럼 퍼져 있었다. 초저녁이라서 
    그런지 떠들썩한 사람들의 무리가 선술집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모건은 해안 거리에 있는 도르미톤 수도원 근처에서 야외  카페
    의 탁자에 자리를  잡았다. 다가온 웨이터가  약간은 영어를 했기 
    때문에 모건은 그리스어를 쓰지 않고 맥주를 주문했다.
      "미국인이십니까?"
      하고 웨이터가 물었다.
      "아니, 웨일즈인이오."
      "나는 웨일즈엔 가본 적이 없어요.  런던은 가본 적이 있읍니다
    만, 첼시의  킹스로드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일했었지요. 일년  동
    안."
      "그래서, 그 이상 못 견디겠던가?"
      "너무도 추워서요."
      하고 웨이터는 미소지었다.
 
제 목 : 제11장 야간 비행 - 2





      "이곳의 관광 시즌은 멋있읍니다. 아름답고 따뜻하지요."
      그는 손가락에 키스를 했다.
      "아가씨도 많지요,  여행자도 많아요.  선생님은 휴가로  이곳에 
    오셨읍니까?"
      "아닐세."
      하고 모건은 말했다.
      "나는 신문기자인데 피아니스트인  존 미카리의 인터뷰를  위해 
    왔오. 그는 이곳에 별장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오만."
      "네, 모로스 너머의 해안에 있읍니다."
      "그곳에는 어떻게 가나?"
      모건은 물었다.
      "버스가 있오?"
      웨이터는 웃었다.
      "이곳 이도라에는 승용차도 트럭도  없읍니다. 법률로 금지되어 
    있지요. 어디를 가든  노새나 두 다리로 걸어갈 수밖에는  없어요. 
    노새를 타고 가는 것이 좋겠지요. 섬의 내륙부는 울퉁불퉁한 산지
    로 그곳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옛날 그대로 살고 있지요."
      "그럼 미카리는?"
      "그분의 별장은 여기서 해안을  따라 7킬로 가량 들어간 곶  안
    에 해안을 내려다보는 소나무 숲에  둘러 싸여 있읍니다. 매우 아
    름다운 곳이지요. 생활용품 같은 것을  나르기 위해 그는 모터 보
    트를 사용하고 있읍니다."
      "그곳까지 가는데 보트를 빌릴 수는 없오?"
      웨이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당신을 초대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하지요."
      모건은 낙담한 듯한 모습을 해 보였다.
      "그렇다면 어쩌면  좋지? 멀리  이곳까지 찾아와서  헛걸음질을 
    치게 되었으니."
      모건은 지갑에서 100드라크마의  지폐를 한장 꺼내서  조심스럽
    게 테이블 위에 놓았다.
      "당신이 어떻게든 도와 준다면 큰 도움이 되겠는데......."
      웨이터는 슬그머니 지폐를 집어들고 재빨리 그것을  윗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글쎄요, 어디 한번 힘써 보겠읍니다. 내가 그에게  전화를 걸어
    보겠어요. 그가 선생님을  만나겠다고만 하면 갈 수가 있지요.  좋
    습니까?"
      "그건 고마운 일이군."
      "선생님의 성함은?"
      "루이스요."
      "알겠읍니다. 여기서 기다려 주십시오. 2분 가량  후면 돌아오겠
    읍니다."
      웨이터는 술집 안으로 들어가 책상이 있는 곳까지 가서  전화번
    호부를 들쳐보고 나서 벽에  붙어 있는 전화의 수화기를 들고  다
    이얼을 돌렸다. 미카리가 직접 받았다.
      "미카리씨이십니까? 저는 '니코'의 웨이터 안드레아스입니다."
      그는 그리스 말로 얘기했다.
      "무슨 일인가요?"
      "이곳에 아테네로부터 수중익선을 타고 온 사람이 와 있는데요, 
    선생님의 별장에 갔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신문기자인데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누구일까, 미국인인가요?"
      "아닙니다. 웨일즈인이랍니다. 이름은 루이스입니다."
      "웨일즈인이라고?"
      미카리는 얼마간 흥미를 느낀 말투가 되었다.
      "그 얘기를 들으니까 마음이  동하는군. 알겠오, 안드레아스, 지
    금은 기분도 좋으니까 만나보기로 하겠소. 하지만  한시간 뿐이오. 
    그 이상은 안 된다고 전해요. 보트를 보내 줄 테니까 배가 도착하
    거든 그 사람에게 가르쳐 줘요."
      "알겠읍니다, 미카리씨."
      웨이터는 모건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당신은 운이 좋았어요.  그가 만나겠다고 했읍니다. 하지만  한 
    시간뿐이라고 합니다. 보트를  보낸다고 했어요. 이곳에  도착하면 
    내가 가르쳐 드리지요."
      "그것 참 잘 됐군요."
      하고 모건은 말했다.
      "시간은 어느 정도 걸릴까요?"
      "식사를 하실 시간은 충분히 있읍니다."
      웨이터가 싱끗이 웃었다.
      "생선 요리를 드시지요. 오늘 것은 매우 싱싱 하니까요."
      모건은 주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잘 먹고 또 그것을 즐기고  있
    었다.
      마침 식사가 끝났을 때 웨이터가 그의 어깨를 건드렸다.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까  흰 모터 보트가 항구로 들어 오
    는 중이었다.
 
제 목 : 제11장 야간 비행 - 3





      "선생님을 모시고 가서 소개를 해드리겠어요."
      보트가 안벽에 쿵 하고 부딪치자 열 살 가량 되어 보이는  소년
    이 로프를 들고  부두로 뛰어 올랐다.  저지의 스웨터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웨이터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자 소년은 밝은 미소를 
    보였다.
      "코스타스의 손자인 니코스입니다. 이 사람이 코스타스입니다."
      코스타스 메로스는 몸집이  왜소하고 억세 보이는 노인으로 얼
    굴은 줄곧 계속해 온 해상 생활로 햇빛에 타서 짙은  마호가니 빛
    이 되어 있었다.
      그는 선원모자를 쓰고 체크 무늬의 셔츠에 누덕누덕 기운 바지, 
    항해용 장화를 신고 있었다.
      "외면으로만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하고 웨이터가 속삭였다.
      "할아버지는 시내에 굉장히 큰집을 두 채나 갖고 있어요."
      그리고 이번에는 소리를 높여 말했다.
      "루이스 씨예요."
      코스타스는 무뚝뚝했다. 그는 형편없는 영어로 말했다.
      "곧 떠나야 합니다, 나리."
      그는 조타실로 돌아갔다.
      "아마 어두워지면 악마에게 잡혀 간다고 믿고 있나 보죠?"
      하고 웨이터가 말했다.
      "모두들 그래요 저런 노인들은요. 할머니들의 절반은 자기가 마
    녀라고 믿고 있구요, 그럼 다시 만납시다, 루이스 씨."
      모건이 올라타자 소년도 로프를 감으면서 그의 뒤를 따랐다. 모
    터 보트는 항구를 나와 한때는 엄중히 방비되어지고  있던 포대를 
    지나쳤다.
      그곳에는 지금도 터키 군의 내습에 대비하고 있는 것처럼  베네
    치아 시대의 대포가 바다를 향하고 있었다.
      쾌적한 황혼이었다. 그러나, 4마일 가량 건너쪽의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연안은 이미  자색의 어스름한 빛속에 스러져가고  이도라 
    섬의 해안에는 이집 저집의 창에 불이 켜져 있었다.
      코스타스가 출력을  올리자 배는 일직선으로  매진했다. 모건은 
    조타실에 들어가 그에게 담배를 권했다.
      "어느 정도 걸릴까요?"
      "15분이나 20분입죠."
      모건은 해질녘의 바다를 바라다보았다. 멀리  수평선 위의 웅대
    한 도코스섬 너머로 태양이  갈아앉자 바다 위는 잉크를 부운  듯
    이 검어졌다.
      "기가 막히게 아름답군."
      하고 그는 말했다.
      노인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얼마뒤 모건은 단념하고 객실로 내
    려갔다. 그곳에서는 소년이 테이블을 향해 앉아 스포츠 신문을 읽
    고 있었다.
      모건은 소년의 어깨 너머로 들여다보았다.  일면은 유명한 리버
    풀의 축구팀을 크게 다루고 있었다.
      "축구를 좋아하는 모양이구나?"
      하고 모건이 물었다.
      소년은 기쁜 듯이 웃으면서 사진을 가리켰다.
      "리버풀-- 좋아하세요?"
      영어는 조금밖에 모르는 것 같았다.
      "글쎄다, 나는 카디프 암스 파크 같은 곳에서 오후를 보내고 싶
    은 쪽이지만  그렇지만 분명히 리버풀의  물에도 좋은 것이  있을 
    거야. 그것을 인정해 줘야겠지."
      소년은 다시 활짝 웃어  보이고 벽장 있는 곳으로 가서 안에서 
    값비싼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끄집어냈다.
      그는 그것을 모건에게 향했다. 프래쉬가  번쩍이고 앞쪽에서 인
    화지가 나왔다.
      "비싼 장난감을 갖고 있구나. 누가 주었지?"
      "미카리 선생님이 주셨어요."
      하고 니코스는 대답했다.
      "좋은 아저씨예요."
      모건은 사진을 빼들고  자연적으로 상이 나타나는 것을 응시했
    다. 그는 우울한 얼굴로 사진 속의 자신을 노려보았다.  색채가 뚜
    렷이 나타났다.
      "그렇지."
      하고 그는 느릿느릿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단다."
      벌써 사진은 완전히 나와 있었다. 니코스는 그의 손에서 사진을 
    받아들고 높이 쳐들었다.
      "잘 찍혔어요?"
      "으응."
      모건은 그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정말 기가 막히게 잘 찍히는구나."
 
제 목 : 제11장 야간 비행 - 4





      전화가 울렸다.
      미카리가 받자 또 캐더린 라일리였다.
      "아직도 히드로 공항의 국제선 출발 라운지에 있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연발인 모양이에요."
      "안 됐군."
      "당신답지 않은 말투군요."
      "지금 나답지 않은 기분이야."
      "아뭏든 새벽에 떠나는 첫 번째 수중익선에는 탈 수  있을 거예
    요."
      "코스타스를 마중하러 보내겠어. 이상한  남자와 친해져서는 안
    된다구."
      전화를 끊었을 때 가까와 오는 엔진 소리가 들려 왔다. 그는 망
    원경을 손에 들고 넓은 테라스로 나갔다.
      그의 눈에는 아직 밝아서 보트가 하구로 들어와 조그만  잔교로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그곳에는  코스타스의 노처 안나가 기다리
    고 있었다.
      잔교의 선단에는 전등이 한 개 켜져  있었다. 소년이 조모를 향
    해 로프를 던지고 모건이 난간을 넘어 그의 뒤를 따랐다.
      미카리는 잠시 동안 모건에게 망원경의 촛점을 맞췄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미카리는 난로에서 소나무 장작이 활활 타고 있는 거실로  돌아
    왔다. 꼬냑을 충분히 따르고 얼음을  넣고 나서 책상 서랍에서 월
    셔 권총을 꺼내 재빨리 총구에 소음기를 끼었다.
      무기를 벨트에 꽂자 그는  글라스를 손에 들고 방을 돌면서 창
    을 모두 열어 놓았다.
      밤 바람이 방안을 마당의 꽃향기로 가득 채웠다.
      그리고 나서 그는 피아노  옆의 커피 탁자에 있는 독서용 스탠
    드만을 남기고 모든 불을  끄고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를  시작했
    다.
      잔교로부터 언덕길을 5, 60피트 올라가자 조그만 오두막이 있었
    다. 문턱에서 개가 모건을 보고 짖기 시작했다. 안나가  개를 진정
    시키고 그녀와 소년은 안으로 들어갔다.
      코스타스는 말 없이 계속 언덕을 올라가고 모건은 뒤를 따랐다.
      뜰이 층계식으로 되어 있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올리브 나무로 
    가장자리가 둘러쳐지고 동백꽃, 가데니아,  하이비스키스의 화분이 
    놓여 있어서 따뜻한 밤공기에 쟈스민의 방향이 떠돌이 있었다.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하게도 귀에  남는 곡이었다.  한 
    순간 그는 길 위에서 우뚝  멈췄다. 코스타스도 걸음을 멈추고 뒤
    를 돌아다보았으나 여전히 무표정했다.
      다시 모건은 걷기 시작했다.
      그들은 별장으로  이르는 계단을 올라갔다.  그것은 불규칙하게 
    뻗어나간 커다란 단층집으로  그 고장의 석재로 만들어졌고  초록
    색 미늘창이 달려 있고 지붕은  기와가 얹혀 있었다. 도처에 부겐
    빌리아가 만발해 있었다.
      쇠로 테를 두른  참나무로 만든 문이 있었다.  코스타스는 서슴 
    없이 그것을 열고 앞장서서 들어갔다.
      안쪽의 문이 집의 두  부분을 이어주고 있는 것 같았으나 캄캄
    했다. 먼 구석 쪽에 열어 놓은 문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희미한 빛
    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피아노 소리도 또렷하게 그곳에서 들려왔
    다.
      코스타스는 그곳으로 안내하여 모건에게 들어가라고 몸짓을  하
    고는 들고 온  보따리를 내려 놓고 말  없이 집을 나가  현관문을 
    닫았다.
      "들어오시지요, 미스터 루이스."
      하고 미카리가 말을 걸었다.
      모건은 방안으로  들어 갔다. 그곳은  안쪽으로 길다란  방으로, 
    간소한 가구를 갖추고 벽은 회반죽 벽에다 바닥에는  벽돌을 깔았
    다.
      난로에서는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연주회용 그랜드 피아
    노 앞에 미카리가 앉아 있었다.
      "코트를 벗으시지요."
      모건은 트렌치 코트를  옆에 있는 의자에  집어 던지고 몽유병 
    환자처럼 천천히 걸어갔다. 목은 바짝 마르고 숨이 찼다.
      피아노 소리가 마음 속 깊은 곳까지 뒤흔들어 놓고 있었다.
      "이 곡을 알고 계십니까, 미스터 루이스?"
      "네."
      하고 모건은 목쉰 소리로 대답했다.
      "가브리엘 그로브레스의 '르 파스토르'지요."
      미카리는 놀랐다는 얼굴을 했다.
      "대단한 취미와 지식을 갖고 계시군요."
      "천만에요."
      하고 모건은 말했다.
      "우연히도 내 딸이 연습하던 곡의  하나였을 뿐입니다. 왕립 음
    악학교에서 피아노의 5급 자격을 따기 위해서였지요."
      "아아, 그 일은 정말 안 됐읍니다."
      하고 미카리는 말했다.
      "나도 그녀를 피하려고 했읍니다, 대령."
      이제 모건은 어떠한 종류의 놀라움도 느끼지 않았다. 그는 말했
    다.
      "그래요, 그건 알고 있오. 파리에서 바실리코스를 죽였을  때 당
    신은 운전수를 살려 주었지. 베를린의 힐튼  호텔에서는 메이드를, 
    그리고 리오에서 장군을 해치웠을 때도 운전수는 살려 줬지. 당신
    은 자기를 뭘로 생각하고 있는 거요-- 신이라고?"
      "그것이 게임의 규칙이지요. 그들은 표적이 아니었을 뿐이오."
 
제 목 : 제11장 야간 비행 - 5





      "게임이라고?"
      모건은 말했다.
      "그래, 그게 무슨 게임이라는 거요?"
      "알고 있으시겠지요,  당신도 오랫동안  그것을 해  왔으니까요. 
    최후의 순간에 목숨을 거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스릴에 찬  게임을 
    말입니다. 이 게임 이외에 이처럼  정신을 앙양시켜 주는 것이 있
    다고 당신은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읍니까?"
      "당신은 미쳤군."
      하고 모건이 말했다.
      미카리는 약간 놀란 것 같았다.
      "어째서? 옛날에 나는  군복을 입고  같은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훈장을  받았지. 당신의 입장도  꼭 같은 거요.  당신이 
    거울을 들여다보면 아마 내가 비치고 있을 걸."
      곡이 달라졌다. 이 번에는 협주곡인 모양으로 생기와 활력에 넘
    쳐 있었다.
      미카리는 말했다.
      "흥미 깊은 일은 당신이 혼자서 이곳까지  왔다는 것이오. DI 5
    나 특별 수사부는 어떻게 했읍니까?"
      "나는 직접 당신을 만나보고 싶었지."
      모건이 양손가락의  관절을 구부리며  전진하자 피아노 소리는 
    크레센도로 변했다. 미카리가 말했다.
      "이 곡을 좋아합니까? 프로코피에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4번 B
    샵 장조--왼손을 위한--이지요."
      그의 오른손이 피아노  위에 나타났다. 월셔 권총을  잡고 있었
    다. 모건이 옆으로 몸을 날리는  순간 탄환이 왼쪽 어깨를 스쳐갔
    다.
      모건은 커피 탁자  위의 스탠드를 낚아채서 소케트에서 코드를 
    뽑았다. 방안은 암흑으로 변했다.
      권총이 한 번,  두 번, 발사되었다. 그러나  모건은 이미 가까이 
    있는 창으로 탈출해 있었다. 그는 테라스를 달려나가 10피트 밑의 
    정원으로 뛰어내려 털썩하고 착지했다.
      아랫쪽 오두막에서 다시 개가 짖어대고 있었다.
      모건은 올리브 나무 사이를 빠져 좌우로 몸을 피하면서  벼랑쪽
    을 향해 뛰었다.
      주저하지 않고 뒤따라  테라스로 뛰어나온 미카리는 그를 추적
    했다.
      모건은 벼랑에 이르러 그 이상 피할 길이 없다는 것을 알고  망
    설였다. 주위는 거의 시커먼  암흑으로 변해가고 수평선은 오렌지
    빛 불꽃 같은 줄무늬가 되어 있었다.
      아주 짧은 순간,  오렌지빛이 섞인 황금빛 밤  하늘을 배경으로 
    그의 완전한 그림자가 떠오르고 미카리는 달리면서 발포했다.
      모건이 비명 소리를 냈다. 탄환이 그를 배후의 공간으로 밀어내
    고 모습이 사라졌다.
      미카리는 아래쪽의 암흑을 응시했다. 뒤에서  발소리가 나고 한 
    손에 엽총, 다른 한 손에 전지를 든 코스타스가 나타났다.
      미카리는 그 전지를 받아들고 스위치를 켜고 바위 사이에서  무
    섭게 소용돌이치는 파도를 비쳐 보았다.
      "손자는 자고 있오?"
      하고 그는 물었다.
      "네."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라일리 박사가 새벽 배로 아테네에서 올  것이오. 마중
    을 나가 줘요."
      미카리는 테라스로  돌아왔다. 노인은 검은  바다를 내려다보며 
    성호를 긋고 발걸음을 돌려 오두막으로 물러갔다.
      그로부터 거의 한 시간 뒤 쟝 폴 드비르는 파리의 아파트로  돌
    아왔다. 그는 법조계의 동료가 주로 참석하는 연중 행사인 만찬회
    에 가 있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동료들은 중년 신사가 자극을 찾아 자주 방문하는  몽
    마르뜨르의 어떤 술집에서  밤의 즐거움을 계속하기로 되어  있었
    다.
      드비르는 그곳에서 슬그머니 빠져 나온 것이다.
      그가 코트를 벗고 있을 때, 전화가 울렸다. 미카리였다.
      "한 시간이나 계속 걸었소."
      "식사를 하러 나가 있었네, 무슨 골치거리라도?"
      "문제의 웨일즈 인이 나타났었소. 내게  대해서 모두 알고 있더
    군요."
      "허어, 어떻게 알아냈을까?"
      "전혀 짐작도 가지 않아요. 그가  나에 관해서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않았다는 것은 확인했어요.  나와 직접 대결하려는 생각밖
    에는 없었던 모양이더군요."
      "잘 처리했겠지?"
      "영구히 처치해 버렸오."
      드비르는 미간에 주름을 잡고 생각하고 나서 결단을 내렸다.
      "상황을 보건데 만나서 의논하는 것이  좋겠군, 내일 아침 아테
    네행 비행기를 타면 이도라에는  그곳 시간으로 1시쯤 도착할  수 
    있을 걸세. 그렇게 하면 되겠나?"
      "좋습니다."
      하고 미카리는 말했다.
      "캐더린 라일리가 아침에 도착하겠지만 신경쓸 것 없어요."
      "물론이지."
      하고 드비르는 말했다.
      "될 수 있는 한 다른 때와  변함없이 행동하세. 그럼 다시 만나
    세."
      미카리는 다시 브랜디를  한잔 따르고 책상으로 다가가서 모건
    의 서류를 펼쳤다.
      그는 사진을 찾아내 어둡게 일그러진 얼굴을 응시하고 나서  그
    것을 뜯어내고 나머지 서류를 불에 던져 넣었다.
      미카리는 피아노 앞에  앉아 손가락의 관절을 조절하고 무한한 
    감정과 섬세함을 담아 '르 파스토르'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제 목 : 제12장 지폐의 위력 - 1





                         제12장 지폐의 위력


      요르고스 기카는 72년의  생애를 대부분 어부로서 보내고 태어
    났을 때 그대로의 조그만 집에 계속 살고 있었다.
      그곳은 미카리의 별장의 훨씬 위쪽에 해당되고 솔밭에 둘러  싸
    여 있었다.
      네 명의 자식들은 모두 몇 년 전에 차례 차례로 미국으로  이주
    하고 고기잡이를 거들 수  있는 것은 아내인 마리아밖에 남아  있
    지 않았다.
      그러나, 배를 띄우는 데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그가  어떻게 
    체면을 지켜 나가려고  하든간에 그녀는 항상 남편과  마찬가지로 
    억세었고 배의 조작도 능숙했던 것이다.
      일 주일에 두 번  그들은 자극과 약간의 돈벌이를 목적으로 언
    제나 밤중에 나가서 그물을 던져 넣고, 그리고는 등불을 끄고 4마
    일의 해협을 가로질러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연안에 있는  술집까
    지 간다. 이드라에서 날개돋친 듯이 팔리는 탈세품인 담배를 사입
    하는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그들은 그물있는 곳으로 와서 물고기를 잡는  것
    이다. 그 방법은 언제나 원만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그날 밤 물고기를 불러들이기  위해 마리아가 뱃머리의 
    커다란 두 개의 나트륨  등을 켜자 물고기가 아니라 사람의  손이 
    그녀 쪽으로 뻗어 오르고 뒤이어 피투성이 얼굴이 나타났다.
      "아니, 이렇게 큰 가오리가 있나!"
      요르고스가 소리치면서 때려 잡으려고 노를 치켜 들었다.
      그것을 마리아가 밀어젖혔다.
      "그만둬요, 당신 어떻게  된 것 아녜요?  사람이라는 것을 몰라
    요? 배로 끌어올릴 테니까 도와 줘요."
      모건이 배 위에 길게 눕자 그녀가 몸을 살펴 보았다.
      "이 사람은 총을 맞았군."
      하고 남편이 말했다.
      "내가 모르고 있을 줄 알아요?  두 군데로군요. 살이 찢겨져 나
    갔어요. 어깨와 그리고 왼쪽 팔이에요. 탄환이 관통해 나갔군요."
      "어떻게 한담? 이드라의 의사에게 데리고 가야 할까?"
      "무엇 때문에요?"
      마리아는 경멸조로 말했다. 이드라의 나이  먹은 아낙네들은 모
    두 그렇지만 그녀도 약초로 고치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의사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경찰 문제도 있구요. 이 일을  보고할 필요가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담배 문제가 시끄러워질 걸요."
      그녀의 가죽과 같은 얼굴에 주름이 잡히고 미소가 나타났다.
      "요르고스, 당신은 감옥에 들어가서  고생하기에는 지나치게 나
    이가 먹었다구요."
      모건이 눈을 뜨고 그리스 말로 얘기했다.
      "경찰은 안 됩니다, 다른 일은 무슨 짓을 해도 상관 없지만."
      그녀는 돌아보며 남편의 어깨를 탁쳤다.
      "저봐요, 말을 했어요. 바닷물에  빠졌던 사람이 말이에요. 이런 
    곳에서 죽기 전에 얼른 육지로 데리고 갑시다."
      그들이 조그만 말발굽  모양의 만에 있다는  것을 모건은 알고 
    있었다. 그곳에는 좁다란 모래 사장이 있고 위쪽의 산에서 소나무 
    숲이 덮치듯이 늘어져 있었다.
      잔교는 커다란 돌덩이로  만들어져 있고 깊은 곳까지 뻗어나와 
    있었다. 이와같이 외진 곳에 만들어져 있는 것이 이상했다.
      그는 모르고 있었지만, 그것은 150년 가량 전에 만든  것이었다. 
    그리스 독립전쟁 때 이곳에는 이드라의 무장선 20척이  대기해 있
    다가 멋 모르고 연안으로  접근해 오는 터키 함대의 배를  급습했
    던 것이다.
      비는 이미 멎었고, 모건은 노인의 부축을 받아 기슭으로 올라가
    면서 달빛 속에서 몇 채의 폐옥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이상하
    게 머리가 어찔해서 약간 비틀거렸다.
      마리아가 팔을 뻗어 놀라운 힘으로 그를 바로 세웠다.
      "쓰러지면 안 돼요, 도련님. 힘내라구요."
      웃음 소리가 났다.  모건은 웃은 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도련님이라구요? 아주머니."
      하고 그는 말했다.
      "나는 이래봬도 50년 가량-- 피비린내 나는 긴 50년을 살아 왔
    읍니다."
      "그렇다면 인생에서 놀랄 일 같은 것은 없겠구만."
      어둠 속에서 움직임이 있은 다음, 요르고스  영감이 한 채의 집
    에서 노새를 끌고 나타났다. 안장은 없고 등에 담요와,  나무와 가
    죽으로 만든 전통적인 화물용 안장만이 놓여 있었다.
 
제 목 : 제12장 지폐의 위력 - 2





      "나를 어떻게 할 건가요?"
      하고 모건이 물었다.
      "여기에 타는 거예요, 도련님."
      그녀는 솔밭 쪽을 가리켰다.
      "저 산으로 가는 거예요. 그곳은  안전하고 따뜻한 잠자리도 있
    으니까."
      그녀는 손등으로 그의 얼굴을 건드렸다.
      "나를 위해서 해주겠죠? 조금만 참아 줘요. 그래야 당신을 무사
    히 데려갈 수가 있어요."
      웬일인지 모건은 몇년 만에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하겠어요, 아주머니."
      그는 웨일즈 말로 대답하고 있었다.
      "집까지 데려다 주세요."
      총탄상의 쇼크는 매우 커서 대개의 사람은 신경 계통이  일시적
    으로 마비된다. 통증이 오는 것은 한참 시간이 흐른  뒤로, 모건의 
    경우도 나무 안장을 움켜 잡고 있는 동안에 찾아왔다.
      노새는 소나무 사이를  누비며 바위가 울퉁불퉁한 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요르고스가 앞에 서고  마리아는 왼쪽에 붙어 걸으면서 
    모건의 허리띠를 잡고 있었다.
      "괜찮겠어?"
      그녀는 그리스 말로 물었다.
      "네."
      하고 모건은 대답했다. 머리가 이상했다.
      "나는 죽지 않아, 미카리 녀석을 위해서 죽을 수는 없어."
      통증은 불에 달군 인두처럼 날카롭고 용서가 없었다.
      한국, 아덴, 키프로스. 그러한 낡은  상처가 한꺼번에 입을 벌려 
    그의 몸은 고통으로 짓찢기고 양손은 생명 그  자체에 매달리듯이 
    나무 안장을 꽉 움켜쥐었다.
      마리아는 그것을 알아차렸다. 벨트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의 늙은  목소리는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깊고 
    힘차고, 고통을 달래 주었다.
      "꼭 잡고 있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내가 괜찮다고 할 때까지는 놓아서는 안 된다구."
      그것을 최후로 모건은 아무 것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반 시간 
    뒤, 그들이 산  위의 조그만 농가에  도착하여 요르고스가 노새를 
    매고 부축해서 내리려고 뒤돌아보았을 때 모건은 안장  위에서 의
    식을 잃고 있었다.
      모건의 손이 너무나도 강하게 안장을 움켜 잡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손가락을 한 개씩 펴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캐더린 라일리는  지쳐 있었다. 야간  비행기를 타고,  아테네의 
    호텔에 4시간 있는 동안 한잠도 자지 못하고 더위  때문에 뒤척거
    리다가 새벽 일찍 일어나 택시를 잡아타고 달려온 것이다.
      이도라로 가는 이른  새벽의 항해 동안  그 완벽한 경관조차도 
    조금도 그녀의 마음을 끌지 못했다.
      캐더린 두려워하고 있었다. 모건이 암시한  일은 바보스러운 것
    이었고,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 일은 전혀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미카리에게 몸을 주었고, 미카리는 부친이 죽은 이후 줄곧 
    거부되어 오고 있던 인생의 기쁨을 그녀에게 가져다 주었다.
      '말뿐이야, 그냥 얘기해본 것뿐일 거야.'
      하고 자신에게 타일러 보았으나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캐더린 라일리는 플라잉 돌핀 호로  이도라에 상륙했다. 코스타
    스가 앞으로 다가와 그녀의 여행 가방을 받아들었다.
      캐더린은 코스타스와 함께 있을  때 한 번도 마음의 평정을 느
    낀 적이 없었으며, 항상 그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느낌을 받고 있
    었다.
      코스타스는 좀처럼 말을 하지 않았고,  실제보다도 영어를 못하
    는 체하고 있었으며, 항구를 나오고 나서 그녀가 조타실에 들어갔
    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니코스는?"
      하고 그녀는 물었다.
      "데리고 오지 않았나요?"
      코스타스는 대답하지 않고 다만 조종장치에만 열중해 있었다.
      "니코스는 아테네에 있는 어머니 집에 갔나요?"
      곶을 지나자 배는 속력을 냈다. 그래서 그녀는 단념하고 선미에 
    가서 앉아 아침이 태양을 올려다보고 부신 눈을 감았다.
      잔교에 다가가자 미카리가  안나와 소년과 나란히 서서 기다리
    고 있었다.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두터운 흰 스웨터에 색이 바랜  청바지를 
    입고 그는 깨끗한 이를 드러내고 쉴새 없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녀의 두려움은 점점 더 강해지고 배에서 내리려는 것을  부축
    하려고 미카리가 손을 내밀었을 때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가 없었다. 그의 미소가 우려의 표정으로 바뀌었다.
      "캐더린, 무슨 일이오?"
      그녀는 눈물을 참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굉장히 피로해 있어서  그래요, 히드로 공항에서  꼼짝 못하고 
    몇 시간 보낸 뒤 밤새껏 비행해서 아테네에 도착했는데, 또 그 호
    텔이 형편 없는 곳이라서......."
      미카리는 양팔로 그녀를 포옹하고 다시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가 그랬지, 뜨거운 목욕물만 있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
    다고. 당신이 지금 필요한 것은 바로 그거야."
      미카리는 그녀의 여행  가방을 집어 들고 코스타스에게 그리스 
    말로 뭐라고 지시했다.
      별장으로 가는 길을 오르기 시작했을 때 캐더린은 물었다.
      "뭐라고 했어요?"
      "정오에 또 이도라로  나가라고 말했어. 파리에서  오는 손님이 
    있어서. 프랑스인 변호사  쟝 폴 드비르이지. 그에 관해서는  당신
    에게도 얘기한 적이 있을 걸."

제 목 : 제12장 지폐의 위력 - 3





      "그 사람도 이곳에 묵나요?"
      "아마 오늘 밤뿐이겠지. 중요한 서류에  내가 서명을 하지 않으
    면 안 되어서 이곳까지 찾아오는 거니까."
      미카리는 팔에 힘을 주고 그녀의 뺨에 키스했다.
      "하지만 그런 것에는 신경쓰지 않아도 돼. 욕실로 안내해 주지."
      뜨거운 목욕은 얼마간 효과가 있었다. 그녀가 몸을 눕히자 뜨거
    운 물이 심신의 모든 아픔을  빨아들여 갔다. 그곳에 미카리가 얼
    음으로 차게 한 샴펜에  브렌디 섞은 것을 크리스탈 술병에  넣어 
    가지고 왔다.
      "어머나, 예뻐라."
      하고 캐더린이 말했다.
      "그런 술병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어요."
      "17세기의 베네치안 글라스지. 이도라  함대의 제독이었던 우리 
    조부의 또 그 조부가 나바리노의 해전에서 터키  군함으로부터 빼
    앗은 거요."
      미카리는 싱긋이 웃었다.
      "뒤로 몸을 기대고 이걸 들여마셔  봐요. 그동안에 나는 점심을 
    만들 테니까."
      "당신이?"
      하고 그녀가 말했다.
      미카리는 문턱에서 뒤돌아보며  미소를 짓고 그 독특한 제스쳐
    로 양팔을 크게 벌렸다.
      "당연한 일이지, 위대한 미카리에게는 불가능이란 없으니까."
      샴펜과 브랜디는 즉시 온 몸에 퍼져나갔으나 그 취기는  어딘지 
    모르게 낯선 것이었다. 몽롱하니 감각이 둔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
    히려 선명해져 왔다.
      지금 그녀는 분명히 깨달았다. 이런 일이  줄곧 계속될 리는 없
    다. 마음 속에 맺혀 있는 것은 언젠가는 표면에 나타날 것이다.
      캐더린은 욕실에서 나오자 타올로 된 가운을 걸치고 침실로  가
    서 경대 앞에 앉아 머리를 손질했다.
      가벼운 발 소리가 들리고 거울 속에 미카리가 나타났다. 입구에 
    서 있었으나 짙은 선글라스 때문에 표정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오?"
      캐더린은 앉은 채  거울에 비치는 그를 꼼짝  않고 바라보았다. 
    이상스럽게도 말이 손쉽게 흘러 나왔다.
      "모건이라는 웨일즈인 대령을 기억하고 있어요?  리제로트 호프
    만을 만나러 갔던 사람 말이에요."
      "물론이지, 코엔을 살해하고  도망친 크레타 인에게  딸을 잃은 
    사람 말이지?"
      "어떻게 그 일을 알고 있지요?"
      "당신이 말해 주지 않았오?"
      그녀는 기억해 내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군요, 얘기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어요. 그것은  비밀로 
    해 두기로 했었으니까요."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그녀가 있는 창가로 걸어왔다.
      "비밀이라고? 우리들 사이에서도?"
      "그 사람은 당신이 크레타 인이라고 믿고 있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미카리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가 뭐라고?"
      "크레타 인이 코엔을 살해한 날 밤 당신은 알버트  홀에서 연주
    회를 열고 있었다고 그는 말했어요. 그곳은 크레타 인이 자동차를 
    버린 켄싱턴 가든즈의 건너쪽이라구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폴라니가 살해되었을 때 당신은 칸느의 영화제에  참석해 있었
    다고 그는 말했어요."
      "헐리웃의 절반은 그곳에 가 있었는 걸."
      "그리고 동독의 재무부 장관 크라인이 저격당했을  때는 프랑크
    푸르트 대학에서."
      그는 앉아 있는 그녀  쪽으로 돌아서서 어깨에 양손을 올려 놓
    았다.
      "그것은 나도 얘기하지  않았오? 기억하고 있겠지?  켐브리지의 
    연주회에서 우리들이 처음으로 만났을 때였지. 호프만이라는 아가
    씨와 암살의 상황에 관해서  얘기하고 있을 때 내가 그때  프랑크
    프르트에 있었다고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오?"
      모든 것이 뇌리에 떠오르고 그녀는 안도의 신음 소리를 냈다.
      "네, 그래요. 지금 생각 났어요."
      미카리는 그녀를 팔로 껴안았다.
      "그 사람은 머리가 이상한 거야. 그런데 그 사람은 아무나 붙들
    고 그런 소리를 떠들고 다니는 것일까?"
      "아니에요."
      하고 그녀는 부인했다.
 
제 목 : 제12장 지폐의 위력 - 4





      "내가 특별 수사부의  베이커라는 총경에게 얘기했느냐고  물었
    더니 얘기하지 않았다고 말했어요. 이것은 자기 문제이지 다른 누
    구의 문제도 아니라고 대답하더군요."
      "언제 그런 말을 했지?"
      "어제 아침 일찍-- 전화로."
      "그 이후 그 사람과는 못 만났오?"
      "못 만났어요-- 그 사람은 조금 더 조사해 볼 생각이라고 말했
    어요. 내게 계속 연락을 하겠다면서."
      그때 눈물이 흘러 나왔다.
      "그 사람은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닐까요?  너무 걱정이 
    돼요."
      "걱정 할 것 아무 것도 없어. 아무 것도...."
      미카리는 그녀를 침대로 데리고 가서 이불을 들쳤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수면이오."
      캐더린은 어린애처럼 온순하게  침대에 누워 몸을 떨면서 눈을 
    감았다. 얼마 뒤 이불이 젖혀지고 미카리가 옆으로 들어왔다.
      캐더린은 그의 어깨에 자신을 얹고 얼굴을 파묻었다.
      미카리는 한 손으로 그녀를 안고 한  손으로 가운을 벗겼다. 그
    리고 나서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겹쳤다.
      캐더린은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강렬한 정열을 담아 그를 끌
    어안았다.

      드비르는 테라스의 난간에 기대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건
    너편에는 오후의 열기 속에서 도코스 섬이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미카리가 양손에 글라스를 들고 프랑스식 창으로 들어왔다.
      "당신은 지금도 고급 나폴레옹에  얼음을 넣어 맛을 망치는  것
    을 좋아하겠죠?"
      "그야, 물론이지."
      드비르는 글라스를 받아들고 몸짓으로 바다 쪽을 가리켰다.
      "정말 기가 막히게 아름답군, 자네는  이 아름다운 것을 잃게되
    겠군."
      미카리는 글라스를 난간에 올려놓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건 또 무슨 뜻이죠?"
      "지극히 간단한 말이지,  자네는 이제  끝장이야. 우리 두  사람 
    모두. 모건이 자네를 찾아냈다면 언젠가 또 다른 사람이 찾아내겠
    지. 아니, 내달이냐, 내년이냐 하는 얘기는 아닐세.  그러나 2년 후
    에는 확실하겠지."
      드비르는 미소를 띠고 어깨를 추슬려 보였다.
      "아니면 이번 수요일경일까?"
      "만약 내가 체포된다고 해도, 체포한 놈이 누구든지간에 그놈에
    게 당신 일을 폭로하리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당신을 팔아  먹으
    리라고 믿어요?"
      "잔인한 고문은 게슈타포와 함께 끝나 버렸다네."
      하고 드비르는 말했다.
      "요즘에는 팔에 주사 바늘을 꽂고 삭시닐코린을 잔뜩 집어넣지. 
    그 약은 인간을  죽음의 바로 앞까지  몰고 가지. 끔찍한  약일세. 
    그 경험은 너무나 무시무시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번  다시 그
    런 경우를 당하고 싶어하지 않게 되네."
      그는 조용하게 미소를 지었다.
      "나 같으면 얼른 털어 놓아 버릴 걸? 존, '크레타의  연인'도 마
    찬가지일 거야."
      1마일 밖의 바다 위를  수중익선이 스페차에를 향해 달리고 있
    었다. 미카리는 말했다.
      "그래서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고향으로 돌아갈 시기가 온 것일세, 동지!"
      "그리운 고향 러시아로 말입니까?"
      미카리는 소리를 내서 웃었다.
      "당신에게는 과연 고향일지 모르지만 내게 있어서는  아무런 의
    미도 없어요. 또 그렇게 한다고 해서 당신은 어떻게 될까요? 고국
    을 떠나서  너무 오랫동안 외국에서  살지 않았나요?  모스크바의 
    구므국영 백화점의 특설 매장에서 물건을 살 수 있는 VIP 카드는 
    받을 수 있겠지만 서방 세계의  백화점과는 비교도 안 되죠. 레닌 
    묘에 들어가기 위해 붉은  광장의 행렬에 서 있어도 당신은  파리
    를 그리운 마음으로  회상하게 될 걸요.  샹제리제와 비에 촉촉히 
    젖은 마로니에 가로수의 향기를 말입니다."
      "꽤나 시적이군. 그러나 현실은 달라지지 않네. 나의  나이 많은 
    할머니는 다리 관절이 아파  오면 24시간 이내에 비가 온다는  것
    을 알아 맞히고는 했지. 나도 그런 식으로 위험을 냄새 맡을 수가 
    있다네. 지금이 후퇴할 시기야."
      "당신에게 있어서는 그럴지도 모르죠."
      하고 미카리는 완고하게 말했다.
      "그렇지만 나는 달라요."
      "그럼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드비르는 정말 난처해 하고 있었다.
 
제 목 : 제12장 지폐의 위력 - 5





      "아무래도 모르겠는 걸."
      "그날 그날을 살아가는 거죠."
      "그렇다면 그 특별한 날--  그들이 자네를 막다른 골목에 몰아
    넣는 날이 온다면?"
      미카리는 헐렁한 캐시미어  스웨터를 입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허리가 움푹 들어간 곳에  벨트로 찬 스프링 홀스터가 눈에  띄지 
    않았다. 그의 오른손이 월셔 권총을 든 채 나타났다.
      "내가 쓰던 체스카를  기억하고 있나요? 그것은 런던용  권총이
    었죠. 이것은 이도라용이오.  이전에도 말했다시피 언제든  준비는 
    갖춰져 있소."
      그때, 전화 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미카리는 실례하겠다고  말하
    고 나서 집안으로 들어갔다.
      드비르는 난간에 걸터 앉아 도코스 성 쪽을 바라보면서  꼬냑을 
    음미하고 있었다.
      물론 미카리의 말이 옳다. 파리야말로 유일한 도시였다.  런던도 
    나쁘지 않다. 현재의 그에게 있어서 모스크바 따위는 아무런 가치
    도 없었다.
      드비르는 모스크바의 겨울을  생각해 내고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더구나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없는  것이나 마
    찬가지다. 사촌이 한두 사람, 가까운 친척은 없다. 그러나 달리 어
    떤 선택의 여지가 있단 말인가?
      프랑스식 창으로 미카리가 웃으면서 나왔다. 한손에 글라스,  또 
    한손에 나폴레옹 꼬냑의 병을 들고 있었다.
      "인생이란 정말 멋진 것이군요."
      미카리의 얼굴은 흥분으로 빛나고 있었다.
      "부르노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어요. 내 대리인인 부르노 피셔말
    입니다. 조금 전에 앙드레  프레빈이 그에게 전화를 걸어왔다는군
    요. 이번 토요일 밤 프로므나드 콘서트의 최종일 연주건으로 말입
    니다. 메어리 슈레더가 존  아일랜드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기
    로 되어 있었죠. 그런데 그녀는 테니스를 하다가 팔목을 다쳤다는
    군요. 바보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대신 자네더러 연주해 달라고 하던가?"
      "프레빈은 연주 곡목의 변경을 주장하고 있어요. 내게 라프마니
    노프의 4번을 연주하라고 말입니다. 우리들은  이전에 그 곡을 공
    연한 적이 있기 때문에 리허설을  많이 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알
    겠읍니까? 오늘은 목요일이니까 오늘 저녁 비행기를  타면 내일은 
    런던에 닿을 수 있죠. 그러면 이틀 동안 리허설을 할 수가 있다구
    요."
      드비르는 미카리가 그토록  발랄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안 돼, 존."
      하고 그는 말했다.
      "지금 런던에 돌아갔다가는 자네에게 최악의 사태가  찾아 올지
    도 몰라. 그런 예감이 든다구."
      "프로므나드 콘서트에요, 드비르."
      하고 미카리는 말했다.
      "유럽 음악계에서 가장 중요한 연주회 시리즈란 말이에요. 아니, 
    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연주회라고도  할 수가 있죠. 그 마지막
    날 저녁에 출연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아요?"
      "아니, 나는 들으러 간 적이 없으니까."
      "그렇다면, 인생에서  최고의 경험을  못한 셈이군요.  마루에서 
    천장까지 청중이 가득 차죠. 모든  좌석이 매진되고 무대 앞 통로
    에는 사흘 동안이나 표를  사려고 줄을 서 있던 젊은이들이  어깨
    를 맞대고 밀고 당기고 하죠.  그런 무대에서 연주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상상해 보라구요."
      "으음."
      하고 드비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상할 수 있네."
      "아니요, 안 돼요. 당신은 상상할 수 없어요."
      하고 미카리는 말했다.
      "아냐, 상상할 수 없을 거야."
      미카리는 단숨에 꼬냑을 들이키고 그것을 하늘 높이 던져  올렸
    다. 그것은 햇빛 속에서 광채를 발하면서 낙하하여 아랫쪽 바위에 
    부딪쳐 산산이 부서졌다.
      캐더린 라일리는 잠을  깨고 누운 채로  한동안 자기가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해 내려고 애썼다. 그녀는 혼자였다.  시계를 보니까 
    2시 30분이 되어 있었다.
      캐더린은 몸을 일으켜  청바지와 간단한 흰 블라우스를 재빨리 
    입고 샌달을 끌고 미카리를 찾으러 나갔다.
      거실에는 보이지 않았으나 얘기 소리에 끌려 테라스로 나가  보
    니까 미카리는 드비르와 서 있었다.
      미카리는 그녀에게로 다가와  허리에 팔을 두르고 뺨에 키스를 
    했다.
      "기분은 좋아졌오?"
      "그런 것 같아요."
      "쟝 폴 드비르, 이쪽은 내 인생의 빛 캐더린 라일리 박사입니다. 
    말을 조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 그녀는 당신이 한 말을 정신 분석
    에 거니까."
      "박사님, 만나 뵈서 영광입니다."
      드비르는 정중하게 그녀의 손에 키스를 했다.
      미카리는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고 그녀의 양손을 잡았다.
      "조금 전에 부르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오. 내게 메어리 슈레
    더 대신 연주를 해 달라고  프레빈이 부탁해 왔다는 거요. 라프마
    니노프를 연주하라고."
      그 작품은 그가 최고의 찬사를 받은  협주곡이고, 그가 특히 장
    기로 삼는 협주곡이었다.
 
제 목 : 제12장 지폐의 위력 - 6





      라프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4번-- 캐더린은  그 곡을 잘 알
    고 있었다.
      "언제지요?"
      "토요일-- 프로므나드 콘서트의 최종일."
      "최고로 멋지군요."
      그녀는 솟구쳐 오르는 기쁨을 나타내며 미카리의 목에 팔을  감
    았다.
      "하지만 토요일이면 내일 모레예요."
      "알고 있오. 충분히 리허설을 하기  위해서는 오늘 저녁 아테네
    를 떠나는 비행기를 타지 않으면 안 되오. 상관없겠오? 모처럼 이
    곳까지 먼 길을 왔는데."
      "괜찮아요."
      캐더린은 프랑스 인 쪽을 보았다.
      "그래서 당신은요? 당신도 함께 가세요?"
      미카리가 대신 말했다.
      "아니, 드비르 씨는 파리로  돌아가야 하오. 그는 서류에 내  서
    명을 받기 위해 온 것뿐이니까.  뛰어난 재능을 지닌 젊은 음악가
    들의 육성에 협력하려고  파리와 런던의 기업이 거출한  신탁기금
    이 있는데, 그는 그  기금의 볍률면을 맡아 갖고 있오. 파리의  근
    교에 커다란 성관을 구입할 참이오. 준비가 갖춰지면 우리들은 영
    재 교실을 열 예정이오."
      "우리들이라니요?"
      "나는 무료로 협력하기로 했오. 다른 유명한 음악가들도 그렇게 
    해 주기를 기대하면서 말이오."
      캐더린은 그때까지의 두려움들이 모두 바보스러운 꿈처럼  생각
    되었다. 그녀는 미카리를 포옹했다.
      "훌륭한 계획이군요."
      "고마워, 그런데 뭘 좀 먹지 않겠오?"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은 공기만 마셔도 살 것  같아요. 산책을 가려고 생각하는
    데 괜찮겠어요?"
      "괜찮다마다, 좋을 대로 해요."
      미카리는 다시 그녀에게 키스했다.
      "그럼, 이따가!"
      미카리는 베란다의 끝에  서서 캐더린이 마당을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멋지군."
      하고 드비르가 말했다.
      "대단한 연기력이었네. 나까지  믿을 뻔했는 걸.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나?"
      "뭐, 차츰 배우면 되죠."
      하고 미카리가 말했다.
      "몇 년 지나면 익숙해져요. 거짓, 기만,  연습-- 몇 번이고 연습
    을 쌓는 거예요. 그것이 비결이죠."
      그는 미소지었다.
      "그런데, 또 뭘 마시겠읍니까?"
      기카 부부의 밭은 산  위의 솔밭에 둘러쌓인 조그만 분지에 있
    었다. 한쪽 옆에는 거칠고 아름다운 협곡이 날카롭게 잘려져 있었
    고, 고대로부터의 층계식  밭이 아직 흔적을  남기고 있고 도처에 
    올리브 나무가 있었다.
      집은 단층으로 지붕에는 빨간  기와가 얹혀 있고 벽은 희게 칠
    해져 있었다. 거실과  부엌을 함께 트고  침실은 두 개,  바닥에는 
    돌을 깔고 벽에는 조잡하게 회반죽을 발랐는데 그  의도대로 내부
    는 무더운 여름이라도 서늘하고 어두웠다.
      모건이 밖으로 나가자  노부부는는 햇살이 비치는 벤치에 걸터 
    앉아 있었다. 마리아가  생선의 배를 가르고 있었고, 그것을  요르
    고스가 파이프를 빨면서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나다녀서는 안 될 텐데."
      하고 마리아가 다정하게 꾸짖었다.
      모건은 허리까지 벌거벗고 있었다. 오른쪽  어깨와 왼쪽 팔에는 
    청결한 린넨이 솜씨 좋게 감겨져 있었다.
      모건은 노쇠를 느꼈다. 이처럼 피곤하고  완전히 소모되어 버린 
    것은 몇 년 만의 일이었다.
      "자아, 앉아요."
      요르고스가 벤치의 자기 옆 자리를 두드렸다.
      "기분은 어떤가?"
      "나는 내달이면 50이 되는데요,"
      하고 모건이 말했다.
      "지금 처음으로 그 나이를 뼈저리게 느꼈읍니다."
      마리아가 소리를 내어 웃었다.
      "이 영감은 당신보다 25년이나 나이를 더  먹었는데도 지금까지
    도 토요일밤이면 나를 침대에 끌어넣으려고 한다니깐."
      요르고스는 모건에게 그리스의  담배를 권하고 불을 붙여 주었
    다.
      "어젯밤, 당신은 재미 있는 얘기를 하더군. 미카리의  이름을 들
    먹거렸지. 당신에게 그런 짓을 한 것이 그놈인가?"
      "그는 당신들의 친구입니까?"
      하고 모건이 물었다.
      노인은 퉤,
      하고 침을 뱉고 일어섰다.
      "기다리고 있게."
      그는 집으로 들어가서 자이츠 망원경을 들고 돌아왔다.
      "이런 것을 어디서 구했읍니까?"
      하고 모건이 물었다.

제 목 : 제12장 지폐의 위력 - 7





      "전쟁 중에는 나도  EOKA에 가담해서 크레타  섬에서 싸웠지. 
    그때 나치 돌격대원에게서  빼앗은 걸세. 이리 오게. 보여주고  싶
    은 것이 있으니까."
      그는 솔밭을 빠져  나가 한참 걸어갔다. 모건은  영문을 모르는 
    체 뒤를 따랐다. 노인이 멈춰 서서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밑을 보게."
      눈 밑에는 솔밭  사이로 협곡이 하구까지  이어지고 그 하구의 
    위에 미카리의 별장이 있었다.
      요르고스가 망원경의 촛점을 맞추고 모건에게 건네 주었다.
      "잘 봐요, 저 아래쪽을. 저 계단식 밭은 저  돌들은 모든 노새들
    에게 운반시켜 우리  조상들이 만든 것일세.  그런데 모두 미카리 
    녀석이 훔쳐가고 말았네."
      모건이 자세히 보니까 수  없이 이어지는 계단식 밭이 눈에 들
    어왔다. 올리브 나무가 자라고 있기는 하지만 잡초가 무성하고 경
    작은 하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모건은 요르고스 영감을 보았다.
      "존 미카리 말씀인가요?"
      "그의 증조부 얘기일세. 하지만  무슨 차이가 있겠나? 미카리는 
    미카리지. 옛날에는 기카 일족도 대단했네. 옛날에는  모두에게 존
    경받고 있었다네. 그런데 지금은...."
      모건은 망원경을 다시 눈에 대고 별장  쪽을 보았다. 별장 밑의 
    마당이 눈에 들어왔다.
      그 길을 캐더린 라일리가 잔교 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곳에
    서는 니코스 소년이 낚시를 하고 있었다.
      "이것 놀랬는 걸."
      하고 모건이 말했다.
      노인은 망원경을 빼앗아 자기가 들여다보았다.
      "아아, 저 여자라면 전에도 왔었지. 미국인이야."
      "전에도?"
      하고 모건이 물었다.
      "그렇다네, 저 여자를 알고 있나?"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하고 모건은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이 없어졌어요."
      요르고스가 말리려고도 하기  전에 모건은 발길을 돌려 소나무
    사이를 비틀거리면서 내려갔다.

      몹시 무더운 대기 속을  캐더린은 계단식 밭을 지나 마당 쪽으
    로 갔다. 오두막 옆을 지나가려니까 조그만 검은 개가 짖었다.
      늙은 안나가 부엌에서 손을 흔들었다.  캐더린이 넓은 콘크리트 
    계단에 내려가보니까 니코스가 낚시질을 하고 있었다.
      바닷물은 수정처럼 맑고  떠 있는 모터  보트가 수면에 깨끗이 
    비치고 있었다. 니코스가 웃는  얼굴로 뒤돌아보고 캐더린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야스--"
      캐더린은 조금밖에 모르는 그리스 말을 써서 인사를 했다.
      니코스는 기쁜 듯이  미소를 띠며 낚시줄을 당겼다.  그는 벌써 
    열두 살로 학교를 그만 두어도 괜찮을 나이였다.
      미망인인 모친은 아테네의 호텔에서 일을 하고 있으며, 그는 현
    재 코스타스 부부와 함께  살면서 뱃일을 돕고 낚시하는 법을  배
    우고 있다.
      캐더린은 소년이  좋아하는 사람의 하나였다.  어디에든 강아지 
    새끼처럼 졸졸 따라다녔다.
      니코스는 청바지의  주머니에서 지저분한  상자를 끄집어 내서 
    할머니가 만든 터키 과자를 내밀었다.
      그 과자는 지나치게  달아서 캐더린은 싫었으나 거절하면 소년
    이 실망할 것이 분명했다. 캐더린은  가장 작은 조각을 집어 입에 
    던져 넣고 될 수 있는 한 빨리 삼켜 버렸다.
      캐더린은 콘크리트의  계단에 앉았다. 니코스가  옆에 쭈그리고 
    앉아 셔츠의 주머니에서 몇 장의 폴라로이드 사진을 꺼냈다.
      "어머, 여전히 이런 것을 찍고 있구나?"
      하고 그녀는 말했다.
      니코스는 한 장씩 보여주었다. 코스타스,  안나, 테라스에 서 있
    는 미카리, 선미에 앉아 있는 그녀 자신의 것도 있었다.
      "잘 찍은 것 같아요?"
      하고 그는 물었다.
      "굉장히 잘 찍었구나."
      그리고 나서 그는 전날  밤 선실에서 찍은 에이서 모건의 사진
    을 보여주었다.

      캐더린은 그 사진을 응시했다. 그것이 얘기해 주는 사실을 이해
    하기까지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이것은 어디서 찍었지?"
      하고 그녀는 작은 소리로 물었다.  그리고는 돌아앉아 니코스의 
    팔을 잡았다.
      "언제 찍은 거지?"
      하고 물었다.
      "이사람은 언제 이곳에 왔었지?"
      니코스는 영문을 몰라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는 먼저 배
    를, 그리고 사진을 가리켰다.
      "언제지?"
      니코스의 얼굴이 환해졌다.
      "어젯밤에요. 이도라에서."
      그는 돌아서서 별장을 가리켰다.
 
제 목 : 제12장 지폐의 위력 - 8





      "저 집으로."
      "하지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녀의 손가락이 니코스의 팔에 파고 들었다.
      "이 사람은 어디 있니?"
      그녀는 다시 사진을 흔들어 보였다.
      "이 사람은 어디 갔어?"
      "가 버렸어."
      하고 소년은 말했다.
      "가 버렸어."
      니코스는 조금 무서워져서  몸을 떨어뜨리고 사진을 줍기 시작
    했다. 모건의 사진을 캐더린의 손에서 빼앗으려고 했을 때 그녀는 
    순간적으로 거칠게 반응해서 심하게 소년을 밀쳐 버렸다.
      캐더린은 발길을 돌려  사진을 움켜 쥔  채 계단을 뛰어올라가 
    좁은 해변을 달려갔다. 하구의 반대쪽에 솔밭 속으로 통하는 오솔
    길이 있었다. 그녀는 그곳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길이 어디로  통하고 있는가는 전혀  생각하지도 않고 다만 
    한 가지 일만을 의식하고 있었다.
      미카리가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을.

      오솔길은 험하고 바위투성이어서  그녀가 신고 있는 가벼운 샌
    달로는 올라가기가 힘들었다. 쉽게 올라갈  수 있는 것은 노새 정
    도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맹목적으로 계속 올
    라가기만 했다.
      이윽고, 헤엄치듯이 하면서 산마루에 이르고  조그만 대지로 나
    왔다.
      지칠 대로 지쳐서  그녀는 쓰러질 듯이 통나무에  걸터 앉았다. 
    손에는 아직도 모건의 폴라로이드 사진을 들고 있었다.
      캐더린은 공허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나서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가까이서 움직이는 기척 소리가 들렸다. 얼굴을 들어 보니 나무 
    사이로 모건의 모습이 보였다.
      한순간 그녀는 자신이 정신을 잃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모건."
      하고 그녀는 말했다.
      "당신이에요?"
      모건은 돌진해 와서 통나무에 앉은 그녀에게 다가오자 한  손으
    로 목을 움켜 쥐었다.
      그녀는 숨이 막혀 그의 힘에 대해서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곳에 요르고스 기카가 달려오고 있었다.
      요르고스 영감은 모건의 머리칼을 잡고  힘껏 뒤로 잡아당겼다. 
    그것이 너무나도 심했기 때문에 모건은 고통을 느낀  나머지 비명
    을 지르고 그녀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쓰러졌다.
      팔의 붕대에서 피가 스며나왔다. 모건은 쓰러진 채 그녀를 보았
    다.
      "당신은 전부 알고  있었어. 그 녀석에게  경고를 했지? 그래서 
    어젯밤 그놈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무슨 일이 있었나요?"
      하고 그녀는 둔탁한 어조로 말했다.
      "그놈이 내게 총을 쏘아 나는  벼랑에서 바다로 떨어졌어. 여기 
    있는 노인과 할머니가  구해 주지 않았더라면 지금쯤은  물고기의 
    밤이 되어 있었을 테지."
      "그럼 그가 크레타 인이로군요. 당신이 말한 대로였어요."
      "당신은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고 말할 셈인가?"
      그녀는 다시 통나무에 앉아 구겨진 폴라로이드 사진을 집어  그
    에게 주었다.
      "그것을 보고 난  다음에 나와 존  미카리에 관한 설명을  들어 
    주세요."

      요르고스 영감의 모습은 그곳에서 사라져  있었다. 그녀가 얘기
    를 시작하자 몸을 돌려 그곳을 떠난 것이다.
      얘기가 끝났을 때 모건은 한동안 잠자코  앉아 있었다. 그의 이
    마에 땀이 배어 있는 것을 그녀는 보았다.
      "내가 한 얘기를 믿어 주시겠어요?"
      모건은 몸을 일으켜 그녀의 옆에 앉아 어깨에 팔을 둘렀다.
      "아무래도 두 사람 모두 형편 없는 얼간이 짓을 한 것 같군."
      "아아, 모건. 나는 당신을 좋아해요."
      그녀는 모건의 어깨에  머리를 얹었다. 상처를 입지  않은 쪽의 
    팔이 힘차게 그녀를 안았다.
      "그래? 나의 웨일즈적인 남성미가 당신에게 어울리는 모양이군. 
    다만 나는 20년 가량 나이를  더 많이 먹었지. 그러니까 헛소리는 
    집어 치웁시다. 그보다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오,  드
    비르라고 당신은 말했지? 쟝 폴 드비르."
      "네."
      "그 사나이에게 반드시 남모르는 이면이 있을 거야."
      모건은 몹시 떨고 있었다. 눈에 핏발이  서고 얼굴은 땀으로 젖
    어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건가요?"
      "모르겠오. 이런 상태만 아니라면 저곳으로 내려가 놈과 결판을 
    내버리겠는데 보다시피 이런 꼴로는  그것도 불가능하지. 숨만 깊
    이 쉬어도 까무러칠 것 같아.  다행히도 그 녀석이 토요일 저녁에 
    나타나는 장소는 알고 있는 셈이지. 알버트 홀의 무대."
      모건의 고통은 매우 심했다. 그것은 그녀로서도 알 수 있었다.
      "당신은 누워 있지 않으면 안 돼요, 모건."
      "그 녀석은 오늘 밤  아테네로 떠난다고 했지? 그리고 런던  행 
    야간 편을 탄다고?"
      "그래요."
      "당신은 물론 그와 함께 가주겠지?"
      그녀는 그곳에 앉은 채 무릎에 양손을 포개고 무표정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제 목 : 제12장 지폐의 위력 - 9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앞으로도 잠자리를 함께 하라는  건
    가요, 모건?  당신이 나타날 때까지  그를 온전히  지키기 위해서
    요?"
      그녀는 일어섰다. 그 얼굴은 이상스럽게 평정했다.
      "나는 당신을 불쌍하게  생각해야만 되겠지요? 하지만 그럴  수
    가 없어요. 당신도 그와 마찬가지로 제정신이 아니라 무엇에 씌워 
    있는 거예요. 두 사람은 서로 닮았다구요."
      그녀는 걸어서 멀어져 갔다. 모건은  일어서려고 했으나 다리의 
    힘이 없어진 것을 알고 목쉰 소리로 말했다.
      "캐더린, 부탁이오!"
      "그것과 그 사람과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죠, 모건?"
      하고 그녀는 말하고  뒤돌아보지도 않고 소나무 사이로 사라져
    갔다.
      뒤에서 발굽 소리가 들리고 요르고스가  노새를 끌고 나타났다. 
    마리아도 함께였다. 몹시  화를 내고 있었다. 그녀는 모건의  이마
    에 손을 짚었다.
      "바보 같은 짓을. 열이 이렇게 높은데 죽고 싶은가?"
      그러나, 모건은 더 이상 한  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어쩐지  물
    속에 있는 것 같고 모든 것이 슬로우 모션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양쪽에서 마리아와  요르고스가 들어올려  안장에 태우고 솔밭 
    사이를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누워 있던  침대에 다시 눕혀졌을  때는 그는 온몸을 
    심하게 떨고 있었다.
      요르고스가 담요를 덮고 마리아는 부엌으로 가서 컵을 들고  돌
    아왔다.
      "마셔요, 도련님."
      하고 그녀는 명했다.
      지독한 맛으로 모건은  구역질을 했으나 그래도 캐더린 라일리
    의 일을 생각하면서 꿀꺽 넘겼다.
      "그 처녀가 불쌍해요."
      하고 그는 웨일즈 말로 얘기했다.
      "좋은 아가씨인데.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는 암흑이 그를 삼켜버렸다.
      캐더린이 들어갔을  때 미카리와  드비르는 뒷곁의 테라스에서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거실의  창 뒤에서 한동안 그들을 바
    라보다가 바아로 가서 진 토닉을  한잔 가득 따랐다. 어느새 미카
    리가 다가와서 그녀에게 팔을 감았다.
      "생각보다는 일찍 돌아온 것 같군."
      "너무 피곤해서 그래요."
      미카리는 그녀의 목덜미에  키스를 하고는 그녀를 자기 쪽으로 
    돌아서게 했다. 그 얼굴에 근심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얼굴이 형편없는 걸."
      "알고 있어요. 개처럼  매일 일만 하다가  밤늦게까지 비행기를 
    타고 어젯밤은 또 아테네에서 고생을 했어요."
      그녀는 말을 끊었다. 그 다음에 입을  뚫고 나온 것은 의지와는 
    반대되는 것이지만 그러나, 일단 말을 꺼낸 다음에는 취소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줄곧 생각하고 있었어요. 이곳에 앞으로  이틀 동안 더 머물러 
    있으면 안 될까요?"
      미카리는 한순간 망설이더니 미소를 띠었다.
      "그것도 좋겠지. 휴식이 약이 될 게요. 그러나  토요일에는 런던
    으로 돌아와 줘요. 꼭. 될 수 있는 한 내게 가까운  좌석을 준비해 
    두겠오. 당신이 그곳에  있는 것이 내게는 필요하다고. 함께  나누
    는 것, 추억에 남는 것이 말이오."
      미카리는 그녀를 힘껏 끌어 안고 키스를  했다. 놀랄 만큼 자연
    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누가 뭐래도 그는 같은  남자였다. 그
    녀는 몇 번씩이나 몸을 맡긴 것이다. 처음부터  '크레타의 연인'이
    었다. 단 한  가지 다른 것은 지금은 그녀가  그것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
      "상관 없다면 저쪽에서 좀 누워 있고 싶어요. 머리가 뻐개질 듯
    이 아파서요."
      "괜찮고 말고."
      그녀가 가버리자 드비르가 테라스에서 들어왔다.
      "그녀를 없애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왜요?"
      하고 미카리가 조용히 말했다.
      "그녀는 아무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어요."
      "자네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군."
      "내게는 그 말의 의미가 분명치 않아요. 나는  그녀를 좋아해요, 
    진심으로. 그녀가 옆에 있거나 얘기 상대가 되어 줄 때 나는 지금
    까지 사귄 어떤 여자보다도 즐거운 기분이 되곤 해요."
      "그녀의 마음 속에는 벌써 의혹의 씨가 뿌려져 있네. 그것이 언
    제 싹틀지 모르는 걸세."
      "꽤나 멋진 표현이군요. 당신답지 않아요."
      미카리는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의 손가락이 '르 파스토르'를 
    멋대로 치기 시작했다.

제 목 : 제13장 연미복 속의 권총 - 1





                       제13장 연미복 속의 권총

      모건은 어렸을 때처럼 탄광에서 돌아오는 길에 산을 넘고  있었
    다. 그는 지평선에 펼쳐진 철판  같은 모양의 먹구름이 몰고올 무
    시무시한 천둥번개비보다 먼저 돌아가려고 달려가기 시작했다.
      비가 쏟아졌다. 억수같이 퍼부어서 금새 온몸이 흠뻑 젖어 버렸
    다. 얼마나 추웠던지 뼛속까지 떨릴 정도였다.  모건은 고통스러워
    서 소리를 지르고 울면서 산중턱을 내려와 산기슭에  있는 마을에 
    당도하였다.
      오솔길을 비틀거리며 걸어가자 그녀는 작은 시골집의  출입구를 
    열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는 검은  니트의 숄에 감싸여 
    있었기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손을 잡자 따뜻한 느낌이 전해져왔다.
      "어머니!"
      라고 그는 말했다.
      "굉장히 추워요. 지독한 추위예요."
      그는 위를 향해 머리를 베개에 묻고  있었다. 그녀가 허리를 구
    부리자 숄이 흘러 떨어졌다.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캐더린 라일리
    였다.
      "괜찮아요, 모건. 저는 여기 있겠어요, 주무세요."
      "네, 어머니."
      그는 눈을 감고 시키는 대로 했다.
      모건은 꿈도 없는 잠에서 깨어나 머리 위의 그물가지에  도료를 
    칠한 천장을 바라보면서 누워 있었다.
      모건은 다시금 자신을 되찾았다. 피부는  오싹거렸고 팔뚝과 어
    깨가 몹시 쑤시는 것이 정신을 차린 것을 깨닫게 해 줄 뿐이었다.
      가까이에서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도끼로  장작을 쪼개는 낮고 
    리드미컬한 소리도 났다. 모건은  모포를 밀어제치고 일어서 보았
    다. 이제 머리는  아프지 않았다. 상처 때문에 느껴지는  통증뿐으
    로 그것이 도리어 좋았다. 통증  탓으로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았
    다.
      요르고스가 통나무를 쪼개 장작을 만들고  있었다. 마리아는 양
    지에서 벤치에 앉아 소금물에 절여진 모건의 자켓의  터진 솔기를 
    깁고 있다. 그의 지갑이 그녀의 옆에서 말려지고 있고 패스포드와 
    그리스 지폐도 놓여 있다.
      마리아는 한손을 들어 모건의 볼에 댔다.
      "그것 봐요. 열이 내렸죠?"
      그녀는 요르고스에게 말했다.
      "여보, 의사 따위보다 솜씨가 좋은  것이 누군지 똑똑히 알겠지
    요?"
      요르고스는 도끼를 놓고 다가왔다.
      "당신은 마법사로군."
      라고 그는 말했다.
      "당신의 선대 여인들은  모두 그랬지. 모두들  인정하듯이 말이
    야."
      "그래, 기분은 좋아졌죠?"
      라고 마리아는 물었다.
      "훨씬."
      "좋았어. 당신은 오랫동안 잤어요. 잠이 필요해서 한  모금도 마
    시지 않고 자도록 내버려 둔 거예요."
      모건이 그의 로렉스에 눈을 주자  8시였다. 그는 이상하게 어찔
    어찔한 것을 느끼며 송림을  벗어나 산등성이까지 걸었다. 손으로 
    빛을 가리며 눈아래의 해안 옆에 있는 미카리의  별장을 내려다보
    았다. 요르고스 영감이 옆으로 왔다.
      "그들은 떠났나요?"
      "모두 떠나 버렸어!"
      "그 여자도?"
      노인을 가리켰다.
      "저기 그녀가 오고 있어."
      2백 피트 아래서  그녀가 나무 숲  속에서 트인 장소에 나타나 
    잡초가 자라 무성한 오래 된 계단식 밭 속을 지그재그로  난 좁은 
    길을 더듬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선글라스를 끼고 티셔츠와 낡은 
    면 스커트를 입고 숄더백을 메고 있었다.
      "저 아가씨는 자네의 일을 걱정하고 있네. 그녀가  말이야. 나는 
    그렇게 생각해."
      라고 노인은 그리스 어로 말했다.
      "자네가 누워 있는 침대 옆에 한동안 앉아 있었어."
      모건은 조심스럽게 통나무에 걸터 앉았다.  그는 시선을 그녀에
    게서 뗄 수가 없었다. 노인은 그리스 연초 상자와 성냥을 그의 옆
    에 놓았다.
      "마리아에게 커피를 보내라고 말하지."
      라고 요르고스는 말하고 오두막 쪽으로 걸어갔다.
      10분 후, 그녀는 송림에서 모습을 나타내 모건이 통나무에 걸터
    앉아 연초를 피우고 있는 것을 보았다. 잠시 멈춰 서서 그를 바라
    보았는데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서 그녀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
    다.
      "당신은 내 옆으로 다시 돌아온 건가?"
      "그런 셈이죠."
      그녀는 풀 위에 앉아  모건 쪽을 향해 나무에 기대어 숄더백을 
    내려 놓았다.
      "그 속에 뭐가 들어 있지?"
      라고 그가 물었다.
      "샌드위치와 와인 한 병요. 코스타스는  제가 매일 산책을 즐기
    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면 그 노파와 소년은?"
      "아아, 그들은 이도라에  있는 미카리의 타운 하우스에  갔어요. 
    매년 이때쯤이면 관광객에게 때때로  집을 개방하곤 하죠. 상당한 
    박물관이에요. 터키와의 전쟁의 유품이라든가 그런 류의 물건들이 
    가득해요."

제 목 : 제13장 연미복 속의 권총 - 2





      두 사람 사이에는  그런 대화만으로는 풀릴  수 없는 어색함이 
    있었다. 모건은 말했다.
      "당신은 왜 남았지?"
      "어쩔 수 없었어요."
      라고 그녀는 말하고 선글라스를 벗었다.  얼굴은 지독하게 창백
    하고 눈은 애처로운 빛을 띠고 있었다.
      "나는 미카리에게 피곤하다고 말했어요. 하루나 이틀 더 머물러
    도 괜찮겠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승낙하던가?"
      "내가 알버트 홀의 자리에  공연이 시작될 때까지 간다는  조건
    으로요."
      "그랬군. 그래서 그놈은 어젯 밤  비행기에 탄 건가? 그리고 드
    비르도 함께 갔나?"
      "어젯밤이라고요?"
      그녀는 천천히 머리를 저었다.
      "당신은 어딘가에서 하루를 잃어 버린 것 같군요.  모건, 오늘은 
    토요일, 토요일 아침이에요. 그들은 그저께 밤에 떠났어요."
      모건은 그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워 멍청히 그녀를 쳐다봤다.
      "그러면 당신은 내가 30시간이나 잤다고 말하는 거요?"
      "네, 그래요. 네네, 당신은 줄곧 잠들기 어려운 듯이 뒤척였지만 
    마리아가 치료법을 알고 있었어요. 그녀의 약초는 정말 대단한 것
    이었어요."
      "그렇다면 콘서트는 오늘 밤이라는 얘기로군."
      그는 튀어오르듯 일어나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알고 있소? 그놈은 내일부터 또 제멋대로 할 거야."
      "그는 어제 나에게  전화했어요. 알버트 홀에서  프레빈과 줄곧 
    같이 있었다고요. 오늘도 아마 그곳에 있을 거예요. 오늘  밤의 콘
    서트 리허설로요. 그러니까 극히 간단한 일이에요.  당신은 스코틀
    랜드 야드의 베이커에게 전화를 거는 것만으로 일은 끝나요."
      오랜 침묵이 흘렀다. 모건은 말했다.
      "그래, 그렇게 하는 것도 가능하겠지."
      "그렇지만 당신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겠지요?"
      모건은 다시 통나무에 걸터앉아 담배를 물었다.
      "설명을 조금 해 주지. 퍼거슨과 나는 이전부터  각별한 사이야. 
    그는 만만치 않은 사나이지. 당신은 놀라겠지만 그는 처음부터 내
    게 이렇게 하도록 하게 만든  거야. 나를 이면의 수단으로써 이용
    해서 그들이 실패해 온 것을 나라면 성공시킬지도  모른다고 희망
    을 걸었던 것이지.  어쨌든 내게는 특별한  원동력이 있으니까...... 
    증오가!"
      "그 점에서는 그의 통찰력이 맞았군요."
      "그래, 다만 그놈을 밝혀낸  지금, 나는 내 손으로 미카리를  처
    치하고 싶어."
      "눈에는 눈으로, 당신에게는 그  방법밖에 없나요? 피에는 피로 
    갚는 방법밖에는?"
      "그 방법이 뭐가  나쁘단 말이지?  내가 이 그리스에서  그놈을 
    고발한다면 모든 사람이 반드시 나를 비웃을 거야. 그놈은 국민적 
    영웅이니까. 만일,  그놈을 영국에서 체포한다면  코엔을 쏜  죄로 
    15년 형을 받겠지. 그것도 놈의  범행이라고 증명할 수 있다면 말
    이야. 그놈이 저지른 다른 살인은 외국에서의 짓이라는 점을 잊으
    면 안 돼. 독일과  프랑스, 그들은 자신들의 차례가 올 때까지  기
    다리지 않으면 안 되겠지."
      "그래서요?"
      "얼마 후, '검은 구월단'이라든가 '붉은 여단' 그런 류의 조직이 
    어느 날 아침 영국 항공의 여객기를 하이젝킹하겠지. 승객과 승무
    원을 돌려 받으려면  존 미카리를 석방하고 리비아든가  쿠바든가 
    그런 나라로 이주시키라고 요구하게 될 거야."
      "그래서 당신은 그가 죽는 것을 보고 싶은 거군요."
      "내게 준비가 됐을 때에."
      "제가 베이커에게 연락하면 될 거예요."
      모건은 머리를 옆으로 저었다.
      "하지만 당신은 그렇게 하면 안돼.
      "어째서요?"
      "당신은 나에게 빚이 있으니까."
      그는 자신의 팔뚝, 그리고 어깨에 손을 대며 얼굴을 찡그렸다.
      "나는 죽을 뻔했어. 죽지  않은 것은 당신 덕분이 아니야.  쟈고
    의 건을 꺼내도 소용 없어. 그놈은 빗나갔고, 당신도  그것을 알고 
    있지."
      순간, 캐더린은 벌떡 일어섰다.
      "알겠어요, 모건.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해서 지옥에나 가세요."
      "그러면 당신은?"
      "오늘 런던으로 돌아가요. 런던에서 그대로 켐브리지로 향할 거
    예요. 이제  충분해요. 당신과 존  미카리는, 모건, 당신들은  닮은 
    사람들이에요!"
      "그러면 베이커에게는 전화를 걸지 않을 건가?"
      "하지 않겠어요. 내게서 될 수 있는 한 먼 곳에서 미친 듯이 피
    비린내 나는 게임을 벌이라구요."
      캐더린 라일리는 서둘러 사라졌다. 모건은 서서 그녀가 가는 것
    을 바라보고서 발길을 돌려 요르고스의 오두막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장작을 패고 있던 요르고스 영감이 손을 멈췄다.
      "그녀는 갔나?"
      "네, 피레프스행 다음 수중익선은 몇 시에 떠나죠?"
      "10시 반이야. 내 배로는 댈 수 없어."
      "그럼 그 다음 편은?"
      "정오부터 1시간 후에."
      "저를 태워다 주시겠어요?"
      "원한다면."
 
제 목 : 제13장 연미복 속의 권총 - 3





      모건이 집안으로 들어가자  마리아는 여전히 그의 쟈켓을 수선
    하고 있었다.
      "내 셔츠는 어디 있죠?"
      "끈에 걸어 햇볕에 말리고 있지. 당신을 위해 빨아뒀거든."
      늙어 가죽 같은 얼굴에서 눈이 가슴츠레하면서 올려다보았다.
      "그래도 이놈은 내 마법으로라도 분명히 고치지 않으면."
      마리아는 그에게 패스포드를 건네 주었다.  바닷물이 스며든 결
    과 햇빛의 열로 몹시 뒤틀려져 있었다. 모건이 패스포드를 열려고 
    하자 그의 손 안에서 나뉘어져 찢어져 버렸다.
      "아차!"
      라고 그는 웨일즈 어로 말했다.
      "이것만은 꼭 필요한데. "
      "난처하게 된 건가?"
      라고 노파는 물었다.
      "난처해질지도 모르겠군요. 덕분에 완전히  사정이 바뀔지도 모
    르겠군요. 어쨌든 해보긴 하겠지만 말입니다."
      별장에서 캐더린 라일리가  마침 꽃꽂이를 끝냈을때 전화가 울
    렸다. 수화기를 들자 귀에 미카리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어, 아직 있었소? 지금쯤 벌써 이곳에 와 있지 않으면 안 되는
    데."
      "괜찮아요."
      라고 그녀는 말했다.
      "지금 코스타스와 떠날 참이었어요. 쾌속보트를  이용하려고 요. 
    그래서 10시 반에 떠나는  피레프스 행 수중익선에 시간을 댈  거
    예요. 당연히 이곳 시각으로 1시 30분  출발의 비행기는 탈 수 있
    겠지요."
      그녀는 자신도 놀랄 만큼 평정했다.
      "그쪽은 어때요?"
      "순조로와."
      그의 목소리에서 활력이 넘쳐 흘렀다.
      "프레빈은 천재야. 최고의  지휘자라구. 나는 전에도 그와  일을 
    했지만 일을 끝내는 데는 오늘 하루 걸릴 거야. 그래서 당신이 도
    착했을 때 내가 없어도 걱정하지 말아. 당신은 열쇠를 갖고 있지? 
    어쨌든 오늘 밤엔 틀림없이 그 특등석에 와 앉으라구."
      전화는 끊겼다. 그녀는 수화기를 든 채  잠시 서 있다가 그것을 
    놓았다.
      돌아다보자 코스타스가 문  안쪽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
    다. 그 얼굴, 그 검은 눈에는 뭔가가 있었다. 모든 것을 깨닫고 있
    는 것 같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어리석게만 느껴졌다.
      캐더린 라일리는 슈트케이스  2개를 운반하도록 지시하고  레인
    코트를 집었다.
      "자, 준비는 다 됐지?"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고 코스타스의 앞으로 가 문을 열었다.
      드비르는 하이드 파크의  끝, 파크 레인의 옆의  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하면서 미카리가  대단한 속력으로 달려오는 것을  바라보
    고 있었다. 그 검은 트레이닝 웨어에는 바지 양 다리에 진홍의 줄
    무늬가 한 개 쳐져 있다. 그는 몇 야드 앞까지 와 멈춰 서서 양손
    을 허리에 댔다. 호흡은 조금도 흐트러져 있지 않다.
      드비르는 말했다.
      "자네는 결코 그만두지 않는군?"
      "습관이라는 것을 버리기가 쉬운가요 어디?"
      미카리는 드비르와 나란히 도로 쪽으로 걸었다.
      "그러면 들으러 오지 않을 수 없었다는 말이군요?  다행히도 캐
    더린의 박스에 또 한 좌석을 잡아 놓았어요."
      "캐더린은 여기에 와 있나?"
      라고 드비르는 물었다.
      "오는 중입니다. 오늘  아침 이도라에 있는  그녀와 통화했는데 
    마침 출발하려던 참이라고 하더군요."
      "그래."
      드비르는 끄덕이고 침착한 어조로 계속했다.
      "그래서 말인데, 나는 자네의 콘서트를 들으러 온  것이 아니야, 
    존. 여기 온 목적은 자네를 만나러 온 것이야."
      미카리는 멈춰 서서  드비르 쪽을 쳐다보았다. 한손이  허리 뒤
    에, 트레이닝 웨어에 숨겨진 체스카로 뻗어갔다.
      드비르는 손을 들어 막았다.
      "아니, 안 돼. 이봐, 그건 오해야."
      그는 봉투를 꺼냈다.
      "우리들 두 사람의 표야. 가드위크를  11시 15분에 떠나는 파리
    행 에어 택시를 예약해 두었어.  자네가 알버트 홀에 출연해도 충
    분히 시간에 댈  수 있는 시각이야.  프로므나드 콘서트의 마지막 
    밤에는 프로그램의 전반에 협주곡을 연주하게 되어 있을 걸?"
      "그것을 탄다면?"
      "파리에 도착해서 모스크바행  비행기를 타는 거야.  모든 것이 
    준비 완료되었어.  오늘 자 '파리  쏘와르' 지에 자네가  모스크바 
    음악학교에서 상급 클라스를  대상으로 연속 수업을 할  예정이라
    는 기사가 실렸어."
      미카리는 잠시 멈추어 서서 파크 레인 너머를 가만히  응시하고 
    그리고서 사벤타인 쪽을 보았다. 깊게  숨을 쉬고 위를 향해 얼굴
    에 비를 맞았다.
      "멋있군."
      하고 그는 말했다.
      "런던의 오늘 아침,  이런 곳은  어디에도 없을 겁니다.  당신은 
    파리의 젖은 마로니에의 향기가 좋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드비르의 어깨를 손을 놓았다.
      "미안합니다. 그 결정에 따를 수가 없어서."
 
제 목 : 제13장 연미복 속의 권총 - 4





      드비르는 어깨를 움추렸다.
      "아직 만 하루가 남았으니까 다시 생각해 보게나."
      "하루 종일 리허설을 합니다."
      라고 미카리는 말했다.
      "그러니까 이제 가지 않으면 안 돼요, 프레빈은 나보다 먼저 왔
    을 때는 자신이 차를 끓이겠다고 하며 다른 사람의 말은  듣지 않
    죠. 그런데 그 차가 지독히 맛이 없거든요."
      "자네 아파트를 써도 괜찮겠나?"
      "물론, 괜찮죠. 그렇지만  나는 콘서트 전에는 아파트에  돌아갈 
    시간이 없을 거예요. 혹시 마음이  변해서 콘서트를 들으러 올 경
    우를 대비해서 당신의 표를 매표소에 맡겨 놓겠어요."
      두 사람은 보도가에 서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렸다. 미카리는 
    드비르의 어깨를 두드렸다.
      "멋진 밤이 될 겁니다. 드비르, 내 인생에서 최고의  밤이 될 것
    이라는 느낌이 드는군요."

      늦은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비행기가 하강을 시작하자 캐더린 
    라일리는 지시대로 벨트를 매고 좌석의 등에 기대었다.
      지쳐 있었다--이제까지 경험한 적이 없을 정도로  지쳐 있었다. 
    피로와 분노와 좌절감. 활약중인  심리학자로서 그녀는 이 증후군
    을 잘 알고 있었다. 어렸을 때에  본 어두운 숲속의 꿈과 같이 어
    느 길로 가면 좋을까 헤매고 있는데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사악
    한 것이 순식간에 쫓아온다.
      눈을 감자 존 미카리가 아니라 에이서 모건의 거무스름하고  준
    열한 얼굴과 고통을 띤 눈이 떠올랐다.
      느닷없이 그녀는 확실히 알았다. 자신이 틀렸던 것이다.  모건은 
    당신은 나에게 빚이 있다고  말했었다. 그렇다면 그에게 대해서는 
    성의를 갖고 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게다가 그것을 실제의 행동
    으로 나타내는 방법밖에 없다.
      마치 팔에 주사를 맞은  것과 같이 새삼스러운 활력이 몸 속에 
    퍼져 나갔다.
      캐더린 라일리는 기대감을 갖고 비행기를 내려 제일 먼저  세관
    으로 가서 패스포드를 제시하고 가장 가까이에 있는  특수 요원을 
    즉시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2시 반을 조금 지났을 때, 찰스  루커 대위는 아테네의 영국 대
    사관의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갔다.
      그가 들어서자마자 전화가 울렸다. 수화기를  들자 영사의 직무
    도 갖고 있는 이등서기관인 벤슨의 전화였다.
      "여어, 찰스. 자네가 돌아오면 알려 달라고 현관에  있는 사람들
    에게 부탁해 두었었지. 여기서 1시간  정도 전부터 귀국하기 위해 
    임시 패스포드를 발행해  달라고 하며 한  남자가 기다리고 있어. 
    정식 패스포드가 훼손되어 버렸다는군."
      "그런 것은 내 담당과는 관계 없잖아."
      "그래 찰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  남자
    는 부랑자 같은 모습으로 왔는데 그의 패스포드의  나머지 부분을 
    조사했더니 현역 장교로 당당한 대령이더구만. 이름은 모건."
      루커는 이미 수화기를 내동댕이치고 집무실에서 달려나가고  있
    었다.
      모건은 형편 없는 몰골이었다. 백골이 섞인 검은 머리칼은 집시
    처럼 어지럽고 수염은  길게 자라 있었다.  린넬 상의는 소금물에 
    절여져 줄어들어서 어깨 주위가  꽉 끼게 되어 솔기가 틀어져  있
    었다.
      "오오, 자넨가."
      루커가 대합실로 오자 모건은 말했다.
      "지난 번 공항에서 자네는 요란하게 변장을 하고 있었지."
      그 모습을 보고 루커는 전율을 느꼈다.
      "어떻게 된 겁니까? 괜찮습니까?"
      "물론, 괜찮지가 못해."
      라고 모건이 말했다.
      "피와 창자와 피아노  줄로 몸이 합쳐진  것 같지만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야. 나는  임시 패스포드와 오늘  오후에 출발하는 첫 
    런던행 편의 표가 필요해."
      "사실은 그것은 약속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우선 다른 
    곳에 상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당신에 관해서는 엄중한 명령이 
    내려와 있기 때문에."
      "퍼거슨 준장의 명령인가?"
      "네 그렇습니다."
      "그러면 자네는 DI 5로군. 1969년에  내가 사관학교에서 자네들
    을 가르쳤던 것이 쓸모 있었던 모양이군."
      "저를 기억하고 계십니까?"
      "물론 기억하고말고. 나는 사람의  얼굴을 잊어버리지 않아. 자, 
    복잡한 절차는 생략하고 전화를 하게."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루커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몸을 구부렸다.
      "당신의 소매에서 배어 나온 건 피가 아닙니까?"
      "그런 것 같군. 이것은 어느 신사가  월셔 PPK로 내 몸에 바람
    구멍을 낸 것이야. 수고하는 김에 의사도  불러 줄 수 있을까? 입
    이 무거운 인물로 말이야. 비행기에 탈수 없게 되는 사태는 딱 질
    색이야."
 
제 목 : 제14장 라스트 콘서트 - 1





                        제14장 라스트 콘서트


      이럭저럭 6시에 캐벤디쉬 스퀘어의 퍼거슨의 아파트 현관  벨이 
    울려 킴이 나가 보니 베이커와 모건이 서 있었다.
      퍼거슨은 식당에서 테이블  끝에 앉아 내프킨을 칼라에 두르고 
    혼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좋은 냄새군요."
      라고 모건이 말했다.
      "뭡니까?"
      "비프 웨링턴이야. 그르카 인이면서도 킴은 전통적인 영국 요리
    에 재능이 있어. 그런데 자네는 그 꼴이 뭔가?"
      "이전만큼 젊지 않다는 증명이겠죠."
      모건은 사이드보드의 곁에 가서 브랜디를  따랐다. 퍼거슨이 베
    이커에게 물었다.
      "문제는 없는가 주임 총경?"
      "모건은 까딱하면 시간에 댈 수  없을 뻔했읍니다. 제가 기다리
    고 있는 동안에 안개가 급속히  퍼져 왔읍니다. 그 상태라면 히드
    로 공항은 앞으로 두세 시간 정도면 완전히 폐쇄될 것입니다."
      퍼거슨은 글라스의 클라레트를  잠시 홀짝홀짝 마시고 뒤로 기
    댔다.
      "그래서, 모건?"
      "그래서라니요? 무슨 뜻입니까?"
      "멍청한 짓은 그만 둬.  자네가 '크레타의 연인'을 찾으러  그리
    스에 갔던 것은 확실해. 자네는  내 부하의 미행을 고의로 따돌리
    고 그리고서 4일 후에는 탄환을 두 군데 맞고  너덜너덜한 패스포
    드를 갖고 나타나 급히 영국에 돌아가고 싶다고 했지 않은가."
      "어쨌든 관광객이 많아서요."
      라고 모건이 말했다.
      "저는 기다릴 수가 없었을 뿐입니다."
      모건은 글라스를 들었다.
      "이젠 돌아가도 될까요? 하룻밤 푹 자고 싶어서요."
      퍼거슨이 베이커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베이커가 거실의  도어를 
    열었다. 그곳엔 캐더린 라일리가 서 있었다.
      "웬일이오?"
      모건이 기분이 상한 듯 말했다.
      "바보 같은 흉내는 내지 말게 모건. 라일리 박사는 모두 자네를 
    위해 생각해 지극히 어려운 상황하에서 행동을 취했어. 박사가 모
    든 얘기를 해 주었네."
      캐더린 라일리는 창백한 얼굴로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모건은 
    그녀를 무시하고 내뱉았다.
      "그놈은 지금 어디 있읍니까?"
      "미카리말인가? 알버트 홀에서 앙드레 프레빈과  리허설을 계속 
    하고 있지.  프레빈이란 남자는 완전주의자니까  그들은 콘서트가 
    시작될 때까지 그곳에서 계속 있을 거야."
      "머뭇거릴 수가 없읍니다."
      "어째서 서두를 필요가 있지?"
      퍼거슨은 또 한 잔 클라레트를 따랐다.
      "우리들은 그를 무대에서 체포할 수도 있지만  그럼으로써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주임 총경에게 들어보게."
      모건이 그쪽을 향하자 베이커는 끄덕였다.
      "엄중히 경계하고 있네. 모든 출입구를 감시하고 있지.  평소 군
    중정리에 배치하는 제복경관 외에 50명 정도 더 배치했네. 대부분
    이 사복으로 전원이 무기를 휴대하고 있네. 비밀 수사반에서 긴머
    리의 무리까지 동원해 팬과 함께 표사는 행렬에도 배치시켰네."
      홀의 전화가 울리자 베이커가 그쪽으로  나갔다. 퍼거슨이 말했
    다.
      "그러니까 자네도 잘 알겠지? 그는 어디로도 도망칠 수가 없어. 
    그에게 연주를 하게 하는 거야. 쇼를 중단시킬 수는  없어. 어떻게 
    해서든지 라프마니노프의 4번은 절대로 중단시킬 수 없어. 프로므
    나드 콘서트의 마지막 밤에  존 미카리가 연주를 하는 것은  음악
    계에서 최대급의 사건이야. 나는 절대로 무시하고 싶지 않아."
      캐더린 라일리가 급히  몸을 돌리더니 거실로  들어가 손 뒤로 
    도어를 난폭하게 닫았다. 퍼거슨이 한숨을 쉬었다.
      "정말로 여자라는 존재는  생물 중에서 가장  비뚤어진 존재야. 
    어째서 미카리 따위에게 끌린 걸까?"
      베이커는 메모를 갖고 돌아왔다.
      "이도라에 있던 미카리를 방문한 드비르라는 프랑스인  같은 남
    자가 지금 미카리의 아파트에 있읍니다. 프랑스 정보부에 그에 관
    해서 조회를 했더니 그쪽  사람들은 내 머리가 이상한 게  아닌가
    고 생각하더군요. 그는 파리에서는 대단히 유명한 형사변호사랍니
    다. 하지만 그런대로 그쪽 사람들이 그를 컴퓨터로 조사해 주었읍
    니다."
      "그랬더니?"
      라고 퍼거슨은 재촉했다.
      "한 가지 흥미  있는 점이 있었읍니다. 전쟁  중에 그는 나치스 
    밑에서 노예 노동을 했었읍니다. 동유럽에 끌려 가서 탄광 등에서 
    일한 수천 명 중에 있었던  겁니다. 살아남은 자는 1947년에 소련
    에 의해 귀국할 수 있었읍니다."
      퍼거슨이 빙그레 웃으며 모건 쪽을 향했다.
      "그것을 들은 자네 소감은 어떤가? 모건?"
      "KGB인가요?"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전후 몇  년간이나 그들의 주요한 목
    표는 프랑스의  정보 조직, 그것에  침투하는 것이었어.  나로서는 
    소련의 군정보부 쪽의 가능성이  강하다고 생각해. 드비르에 관한 
    이야기에 의하면 그의 태도는 내가 전부터 KGB에는 빠져 있다고 
    생각해 왔던 거야."
 
제 목 : 제14장 라스트 콘서트- 2





      "이튼교 출신의 괴짜라는 말입니까?"
      "지당한 신사야."
      퍼거슨은 내프킨으로 턱을 닦았다.
      "그러나 미카리 같은  남자가 전혀 놀랄 만한  것은 아니지. 왜 
    그랬을까 모건? 그의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짐작할 수가 없군요.  그놈이 경험을 어디에서 쌓았는지는,  그 
    점만은 알고 있읍니다만. 그놈은 18세 때 외인부대에 입대해 낙하
    산대원으로서 알제리아에서 2년간 근무했읍니다."
      "그것 참 로맨틱한 남자로군."
      "죄송합니다만."
      라고 베이커가 참견했다.
      "드비르의 일인데요, 그를 당장 잡아 올까요?"
      "잠시 기다리게 주임 총경."
      퍼거슨은 모건 쪽으로 향했다.
      "자 모건, 이제부터 자네는 옆방에  가서 라일리 박사와 화해를 
    하는 것이 현명 하지 않겠나?"
      "결국 지금부터의 이야기는 나에게  들려 주고 싶지 않단  말씀
    이군요?"
      "그렇다네."
      베이커가 거실의 도어로 다가가 열었다.  모건은 잠시 망설이다
    가 거실로 들어갔다.
      캐더린 라일리는 아담 양식의  난로 앞에 서서 양손을 화로 선
    반 위에 놓고 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얼굴을 들어  장식으로 금박 도금을  입힌 거울에 비친 
    모건을 보았다.
      "당신은 지도에도 없는 지옥에 있는 것 같은  상태였어요. 모건, 
    저는 당신을 그런 상태인 채로 방치해 둘 수는 없었어요."
      "호오, 당신은 말재주가 보통이 아니군."
      라고 그는 말했다.
      "약속하지. 반드시 당신이 깨닫게 해 주겠어."
      "모건, 부탁해요."
      그녀의 목소리가 비통하게 울려 퍼졌다.
      "알고 있소."
      라고 그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감정의 포로가 되어 이성을 잃고 있어.  그런데, 누구를 
    위해서인가? 나인가 아니면 그를 위해선가?"
      캐더린은 가만히 모건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안색은  한층 더 
    파랗게 질렸고, 입을 열었을 때  목소리는 지독히 낮게 깔려 있었
    다.
      "며칠 전 밤에 우리들은 당신을  양쪽에서 안고 닦았어요. 마리
    아와 제가요. 당신은 몇 번 부상했죠? 5번,6번? 그래도  그런 것은 
    표면적인 상처에 지나지 않아요. 불쌍한 분이에요, 당신은."
      그녀는 모건의 옆을  빠져 나가 문을 열고  옆방으로 들어갔다. 
    퍼거슨이 올려다보고 베이커가 그녀 쪽으로 향했다.
      "그만 돌아가도 되겠읍니까?"
      라고 그녀는 물었다.
      퍼거슨은 문쪽에 서 있는 모건 쪽을  힐끗 쳐다봤다. 그녀는 몸
    을 앞으로 내밀고 양손을 식탁 위에 놓았다.
      "부탁입니다!"
      라고 그녀는 재촉했다.
      "이젠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요."
      퍼거슨이 물었다.
      "그러면 어느 곳으로 가실 예정입니까 라일리 박사?"
      "다우로 플레이스의 친구의 아파트를 쓰기로 했어요. 그곳에 제 
    차를 놓아두었읍니다. 저는 다만 될  수 있는 한 빨리 켐브리지로 
    돌아가고 싶을 따름입니다."
      퍼거슨의 얼굴은 극히 평정했고, 입을 열었을 때 목소리는 놀라
    울 정도로 온화했다.
      "그러면 당신이 하고 싶은  것이 켐브리지로 돌아가는 거란  말
    입니까, 정말입니까?"
      "네네."
      그녀는 힘없이 대답했다.
      "좋습니다."
      퍼거슨은 베이커 쪽을 보며 끄덕였다.
      "라일리 박사를 차에 태워 드리게  총경. 그 다우로 플레이스로 
    모셔다 드리게. 우리는 필요하면  언제라도 켐브리지로 연락할 수
    가 있으니까."
      캐더린 라일리는 문 쪽을 향해 가는  베이커의 뒤를 따랐다. 문
    을 열었을 때, 퍼거슨이 소리를 질렀다.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읍니다, 박사님. 당신이  첩보활동과 관련
    이 없다고 확실히 알 때까지는 출국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당신을 
    도중에서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킴이 덮개를 덮은 접시를 들고 들어왔다. 퍼거슨이 말했다.
      "오오 푸딩인가, 잊은 건가 하고 생각하고 있었지."
      그는 앉아서 다시 한 번 내프킨을 목에 두르고 킴이 식사  시중
    을 들었다.
      "독특한 치즈 케이크를 그랑 마르니에에  적신 것이로군. 좀 먹
    어보게나 모건."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라고 모건은 말했다.
      "그러나 괜찮으시다면 브랜디를 한 잔 마시고 싶습니다."
      "들게. 그 어깨가 많이 쑤시나?"
      "맹렬하게 쑤시는군요. "
      라고 모건은 말했다.
      사실 아프기도 했지만 브랜디를 글라스에 철철 따를 때는  고의
    로 과장해서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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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제14장 라스트 콕서트 - 3





      모건이 브랜디를 마시고 있을 때  베이커가 돌아왔다. 퍼거슨이 
    물었다.
      "문제는 없었나?"
      "없었읍니다."
      "좋아, 미카리는 전혀 밖에 나가지 않았나?"
      "그렇습니다. 그곳의 주차장에 설치되어  있는 이동본부에 전화
    를 해 보았읍니다.  가장 새로운 정보로는  그들은 마침 리허설을 
    끝낸 참이었읍니다."
      퍼거슨은 힐끗 손목시계로 시선을 보냈다.
      "6시 15분이로군.  그러면 콘서트는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로 
    시작해서 다음이 하이든의 교향곡 '시계'지. 그렇다면 미카리는  8
    시 45분경에 무대에 올라가  그 뒤 9시 30분부터 휴식에 들어  가
    겠군."
      "그러면 그때에 그를 잡습니까?"
      "휴식 중의 리셉션이 끝나고 난 후가 좋겠다고 생각해. 그는 주
    빈이니까. 잊어선 안 돼. 그가 그곳에 없으면 조금  이상한 상태가 
    되고 말 테니까. 될  수 있는 한 보통 때와 다름  없이 연출해 주
    게."
      "저도 함께 가게 해 주십시오."
      "미안하지만 그럴 수는 없어 모건. 자네의 기분은 잘 알지만 자
    네의 임무는 끝났어. 자네가 관련된 것은  여기까지야. 지금부터는 
    경찰의 일이야."
      "알겠읍니다."
      라고 모건은 한손을 들었다.
      "물러설 시기는 알고  있읍니다. 아무래도 이제  돌아가는 편이 
    좋을 것 같군요."
      모건이 문 쪽으로 걸어 가자 베이커가 말했다.
      "기다리게나. 집까지 데려다 줄 테니까."
      모건이 나가자 퍼거슨이 말했다.
      "과연 물러설 시기를  알고 있을까?  그가 저런 식으로  얘기할 
    때는 오히려 마음에 걸린다니까. 그를 집까지 전송해 주게.  이 일
    이 끝날 때까지 그의 아파트를 철저히 감시시키게."
      "걱정하실 것 없읍니다. 지금 모건의 상태로는 문까지 걸어가는 
    것도 무리일 정도이니까요."
      "만일 에이서 모건의 그런 말을 믿는다면."
      라고 퍼거슨은 말했다.
      "자네는 이 세상 모든 것을 믿겠군."
      알버트 홀의 무대  안에 있는 음악실에  미카리가 들어갔을 때 
    셔츠는 땀으로 흠뻑 젖고 그는 흥분으로 떨고  있었으나 컨디션은 
    좋았다.
      지금까지 지독한 리허설을  이틀 동안 계속했기 때문에 콘서트
    의 예측은 매우 밝았다.
      문이 열리고 무대 감독이 낡은 놋쇠 쟁반에 커피 포트와 컵, 밀
    크, 그리고 설탕을 차려 가지고 들어왔다.
      "히드로 공항에 알아 보았나?"
      미카리는 타올로 몸을 씻으면서 물었다.
      "네. 아테네로부터의 오후 편은 두 대 모두 도착했고 마지막 편
    도 안개가 깔리기 직전에 착륙했다고 합니다."
      "좋았어, 잊지 말고 라일리 박사의 표를 표파는 곳에 준비해 두
    도록 하게. 그리고 드비르 선생의 것도."
      무대 감독이 문을 열자 프레빈이 도착했다.
      "준비는 순조롭게 되고 있나?"
      "네."
      라고 미카리는 대답했다.
      "아까 연주는 어땠읍니까?"
      "나쁘지 않았어."
      프레빈은 싱끗 웃어 보였다.
      "그런대로 쓸 만했어."
      "쓸만했다고요?"
      미카리는 소리를 내어 웃었다.
      "선생님, 선생님이 지금까지 갈망해 온 연주를 오늘 밤 바로 제
    가 해 보겠읍니다."
      그는 프레빈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 기분전환으로 맛 있는 차를 드실까요."
      그들이 그레셤 플레이스에 도착하자 베이커는 운전수에게  기다
    리라고 명령하고 모건과 계단을 올라 입구까지 갔다.
      모건이 말했다.
      "한 잔 하고 가겠나?"
      "시간이 없네."
      베이커는 모건에게 담배를 주고 자신도 불을 붙였다. 두 사람은 
    포치에 서서 담배를 피우며 내리는 비를 바라보았다.
      "이럴 때 어떤 기분일지 생각해본 적이 있나 베이커?"
      "섬세한 감정 따위는 벌써 예전에 없어져 버렸어.  모건, 자네의 
    경우는 25년 정도 늦은 셈이지."
      "그럼 나는 어떻게 하면 좋지?"
      "아직 쓰러지지 않았을 때 침대로 가서 눕는 거야."
      경찰차가 길 저쪽 끝에  와서 멈추고 스튜어트 경감이 두 명의 
    제복 경관을 데리고 나타났다.
      그들은 계단 밑에까지 와서 멈췄다.
      베이커가 소리를 질렀다.
      "이 모건 대령은 이제부터  집에서 쉴 것이다. 만일, 그의  기분
    이 변해 어떤 이유에서든  이 집에서 나가려고 하면 즉시  구류를 
    하라. 자네들 중 한 명은 차  속에서 이 출입구를 경계하고 또 한 
    명은 정원을 돌며 안쪽에서 돌도록."
      "4시간이 지나면 이 임무는 끝날 것이다."
 
제 목 : 제14장 라스트 콘서트 - 4





      스튜어트가 경관들에게 말하자 그들은 지정한  장소로 갔다. 스
    튜어트는 베이커에게 물었다.
      "다른 일은?"
      "없다. 차에 타게 스튜어트. 금방 나가겠네."
      모건이 말했다.
      "이런 짓을 하는 게 합법적인가 베이커?"
      "퍼거슨 준장은 그것이 걱정이  되면 일이 끝날 때까지  자네를 
    구류해 둘 거야."
      "어떤 구실로?"
      "우선은 수상한 인물이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총탄상을 입
    고 있다는 것이 적절히 수상한 인물을 뒷받침해 주기도 하고."
      베이커는 홈통에 담배를 던졌다.
      "분별있게 굴게나 모건. 푹 자라구."
      베이커는 계단을 내려가 경찰차의 뒷좌석에 스튜어트와  나란히 
    앉아 차는 달리기 시작했다.
      모건은 길 저쪽의 또 한 대의 차를 바라보며 운전석의 젊은  경
    관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 안으로 들어갔다.

      조크 켈소가 텔리비젼으로 럭비 경기중계를 보고 있을 때  전화
    가 울렸다.
      검은 머리의 미인으로 자란 딸 에이미가 에프론에 손을  닦으며 
    부엌에서 나와 전화를 받았다.
      "모건 대령님이세요 아버지."
      켈소는 텔리비젼을 끄고 에이미에게서 수화기를 받았다.
      "대령님."
      "조크, 약간 곤란한 일이  생겼네. 내가 나가지 못하도록 집  앞
    에 경찰차가 한 대,  암뜰에도 경관이 한 명 감시하고 있네.  퍼거
    슨 준장이 나를 멀리 있게 하려고 말이야. 자네 힘으로 어떻게 안 
    되겠나?"
      조크 켈소는 웃었다.
      "놀랍군요 대령님. 그런 일이라면 즉시 옛날 솜씨를 부려보죠."
      모건은 수화기를 놓고  책상 서랍을 열고 월셔  PPK를 꺼냈다. 
    탄창을 정성들여 조사하고 소음기를 부착시켰다.
      그는 극심한 피로를 느끼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런 상태로는 난
    처하다. 그는 목욕탕에 들어가 욕조  위의 서랍을 열고 자색의 캡
    슐이 들어 있는 작은 병을 찾아냈다.
      군에서는 그 캡슐을 벨파스트탄이라고 부른다.  휴식 따위가 불
    가능한 절박한 사태 때 심신을 반듯하게 해 주기 위한  약이기 때
    문이다. 두 알씩 4시간 마다 먹으면  24시간 동안은 자지 않고 싸
    울 수 있다.
      단, 문제는 그 뒤 일 주일 동안은 죽은 듯이 된다는 점이었다.
      모건은 두 개의 캡슐을  컵의 물과 함께 마시고 거실로 돌아와 
    창가에 앉아 기다렸다.

      7시 15분이 막 지났을 때였다.
      드비르는 미카리의 아파트 주방에서 커피를 끓이고 있었다.
      현관의 벨이 울렸다.
      순간, 드비르는 흠칫  놀라 경계를 하며 손을  멈추고 한손에는 
    커피 깡통, 또 한손에는 스푼을 든  채 주방 문이 있는 곳까지 걸
    음을 옮겼다.
      벨이 다시 한 번 울렸다. 분명히 미카리는 아니다. 그는  열쇠를 
    갖고 있다. 열쇠를 잃어버렸을 수도 있지만 콘서트가 열리기 바로 
    직전인 지금 시각에 올 리가 없다.
      물론, 캐더린 라일리일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그녀라면  열쇠를 
    갖고 있을 것이다.
      드비르는 벨소리를 무시하기로 했다. 그러자 그 순간 열쇠 구멍
    에서 무슨 소리가 나며 문이 열리고 퍼거슨이 들어왔다.
      그 뒤에는 베이커가 열쇠 여는 도구를 들고 서 있는 것이  보였
    다.
      퍼거슨이 말했다.
      "고맙네 주임 총경. 자네는 계단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퍼거슨은 근위여단의 장교가  좋아하는 형의 커다란 외투를 입
    고 있었다. 우산에서는  빗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의자에  걸
    터앉았다.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지독한 날씨로군."
      퍼거슨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나를 알고 있소?"
      직무의 성질상 서방제국의  중요한 정보 관계자의 얼굴을 모두 
    기억하고 있는 드비르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왔다고 그는 생각했다. 25년 동안  이 순간이 언제 올지 
    늘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이 가장 예기치 않은 때 문을 통해 들어
    온 것이다.
      드비르의 조끼에는 한  포켓에서 다른 포켓으로 회중시계의 사
    슬이 늘어져 있고 거기에 금세공의 사자 장식이 붙어 있었다.
      드비르는 무심한 동작으로 사자 장식을 잡으려고 했다.
      퍼거슨이 말했다.
      "그곳에 숨겨져 있읍니까? 청산가리 캡슐이? 대단히  낡은 방법
    이군요. 전쟁 중에는 우리들에게도 지급됐었죠. 나는  언제나 자신
    을 버리고 싶었던 사람입니다. 효과는 빠르다고 했지만 저는 그것
    을 마신 친위대  장군을 본 일이 있는데  그는 마시고 나서  20분 
    가량 절규를 했었읍니다. 소름이  끼칠 만큼 처절한 죽음이었읍니
    다."
      퍼거슨은 사이드보드 쪽으로 가 위스키 병의 뚜껑을 벗겨  냄새
    를 맡았다. 그리고는 끄덕이며 글라스에 따랐다.
 
제 목 : 제14장 라스트 콘서트 - 5





      드비르는 말했다.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말이오?"
      퍼거슨은 창 쪽으로  다가가서 비가 퍼붓는 거리를 내려다보았
    다.
      "글쎄요, 당신으로서는  필사적으로 영웅적인  탈출을 시도하는 
    일도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소련 대사관으로 무사히 도
    망쳐 그 나라로 돌아간다 해도 그들이 당신을  환영해 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군요.  당신도 드디어 실패하는 날이 왔읍니다.  듣기
    로는 그들은  실패한 경우 그다지  환영하지 않는다더군요.  물론, 
    극형에 대해서는  문명적인 태도로 임하겠지요.  인간을 매달거나 
    하지는 않겠죠. 그 대신 강제수용소로 보내겠지요.  솔제니친의 말
    을 믿는다면 수용소는 극히  즐거운 장소가 아닙니다. 모스크바는 
    솔제니친의 작품은  서방측의 악의있는  선전이라고 늘  주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그러면, 다른 방법은?"
      라고 드비르가 물었다.
      "프랑스는--당신은 프랑스인이죠.  틀립니까 드비르  선생?--당
    신의 본국 송환을 요구할 권리가  있읍니다. 게다가 그 나라의 정
    보부 무리는 1968년의 사파이어  사건으로 KGB가 침투해 있다고 
    말해진 이래 소련의 첩보원에게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으니까요. 
    당신은 틀림없이 제5부로 돌려지겠지요. 그들은 정보를 서로 뺏는 
    것에 관해서는 완전히 옛날 식으로 하고 있읍니다. 지금까지도 전
    기의 힘을 믿고  있다고 하더군요. 특히  남성에게 중요한 부분의 
    곳곳에 전선을  감으면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
    다."
      "그러면 그쪽은?"
      라고 드비르는 물었다.
      "당신네 쪽은 무엇을 제공하겠소?"
      "죽음이죠, 물론."
      라고 퍼거슨은 유쾌한 듯이 말했다.
      "우리들이 방법을 생각하겠읍니다. 자동차  사고는 언제라도 쓸 
    수 있읍니다. 특히 불에 태우는 것이 좋습니다. 자동차가  불에 타 
    버리면 신원 확인이 도저히 불가능하게 되죠."
      "그리고 그 다음에는?"
      "평화적으로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묻힙니다. 정형 수술이 기적
    을 일으킬 수 있으니까요."
      "마땅한 정보와 바꾸고?"
      퍼거슨은 위스키 병 쪽으로 가서 또 한 잔 따르고 테이블  끝에 
    앉았다.
      "1943년, 내가 특수작전부에 소속해  프랑스의 레지스탕스와 협
    력해 행동하고 있었을 때, 내통자 덕분에 파리의 게슈타포에 잡혀 
    본부로 끌려간 적이  있었죠. 그들은 이전부터  고무 호스를 쓰는 
    고문의 효과를 믿고 있었어요. 극히 불유쾌한 것을."
      "당신은 탈주했읍니까?"
      "쟈크센하우젠의 강제  수용소로 보내지는  도중의 열차에서요. 
    그러나 옛날 얘기지요."
      퍼거슨은 창가로 가서 다시 한 번 길거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때는 훨씬 간단했지요. 우리들은 자신의 입장을 알고 있었읍
    니다.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가를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오랜 침묵이 계속되었다.
      퍼거슨은 뒤를 돌아다보지 않고 말했다.
      "물론 지금이라도 청산가리를 삼킬 수가 있겠죠."
      "나보고 선택하라는 말이오?"
      "영국의 페어 플레이 정신이라는  것이지요. 나는 윈체스터에서 
    감독을 맡은 적이 있어서요."
      퍼거슨이 몸을 돌리자 드비르는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 손바닥
    의 한가운데에 작고 검은 캡슐이 한 개 놓여져 있었다.
      "놀라운 방법이오. 진심으로 감사드리겠소."
      "훌륭합니다."
      퍼거슨은 캡슐을 신중히 집어올렸다.
      "마음을 좀먹는 물건이지요."
      퍼거슨은 그것을 마루바닥으로 떨어뜨려 구두 뒷굽으로  짓밟았
    다.
      "자, 이젠 어떻게 하죠?"
      라고 드비르가 물었다.
      "네, 멋진 콘서트는 어떻습니까?"
      퍼거슨이 말했다.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오늘 밤  알버트 홀에서 존  미카리가 
    라프마니노프의 4번을 연주한다고 합니다.  좀처럼 자주 오지않는 
    기회지요."
      "틀림 없이 그럴 것입니다."
      드비르는 검은색 오바를 입자 도어 옆의 모자걸이에서 검은  홈
    브르크를 벗겨 쓰고 은장식이 붙은 지팡이를 들었다.
      "저의 하찮은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시지 않겠읍니까?  당신은 
    KGB입니까, 아니면 GRU입니까?"
      라고 퍼거슨이 물었다.
      "GRU입니다."
      라고 드비르는 대답했다.
      "니콜라이 아시모프 대령이오."
      그 이름은 그의 입에는 이화감이 있었다. 퍼거슨은 미소지었다.
      "생각했던 대로군요.  당신의 태도는  KGB로서는 독특한  점이 
    있다고 모건에게 말했었죠. 자아, 그러면 가실까요?"
      퍼거슨은 문을 열고 정중히 한쪽으로  비켜섰다. 드비르가 앞서 
    나갔다.
      그것과 같은 시각에 내리는 빗속에서 혼잡한 노스 사큐라  로드
    를 달리고 있던  캐더린 라일리는 MGB스포츠 카의  핸들을 꺾어 
    골목으로 들어가 브레이크를 밟아 차를 세웠다.
      캐더린은 엔진을 끄고 핸들을 쥔 채 잠시 그대로 앉아 있었다.
      거센 심장의  고동이 자신에게도 느껴졌다.  이윽고, 긴  한숨이 
    뿜어져 나왔다.
 
제 목 : 제15장 살인자에게 카네이션을 - 1





      그녀가 가고자 원하는 곳은  세계에서 한 곳밖에는 없었다. 그
    곳은 켐브리지는 아니었다.
      캐더린은 다시 한 번  엔진을 걸고 길끝까지 가서 런던의 중심
    을 목표로 하여 돌아가기 시작했다.




                     제15장 살인자에게 카네이션을

      알버트 홀의 무대  뒤에 있는 분장실에서  미카리는 거울 앞에 
    서서 흰 넥타이를 고쳤다.
      그리고 나서  화장케이스를 열고  이중바닥에서 체스카 권총이 
    끼어 있는 스프링 홀스터를 끄집어 냈다. 허리의 벨트  뒤에 그것
    을 차고 그 위에 단추구멍에 흰 카네이션이 꽂혀 있는  우아한 검
    은 연미복을 입었다.
      무대의 오케스트라는 음악팬들에게  널리 '시계'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하이든의 교향곡 101번 D장조의 종결부에  들어가 있
    었다.
      그는 문을 열고 통로로  나갔다. 연주가가 무대로 나가기 위한 
    경사진 통로인 불런의 건너쪽 끝에 무대 감독이 서 있었다.
      미카리는 조금 더 걸어가서  지휘대에 서 있는 프레빈과 그 배
    후의 상수 쪽 맨 앞자리! 즉 캐더린 라일리를 위해 비워  둔 박스
    석이 보이는 곳까지 갔다. 캐더린도 드비르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몹시 낙담을 하고 곧장 분장실로 되돌아오자 동전을  찾아
      완전히 일 분  동안 그는 전화벨을  울려 댔다. 일단 수화기를 
    내려놓았다가 다시 한 번 시도해 보았으나 역시 허사였다.
      "제발 와 줘, 캐더린."
      그는 중얼거렸다.
      "도대체 어디 있는 거지?"
      문이 열리고 무대 감독이 고개를 디밀었다.
      "10분 전입니다, 미스터 미카리.  오늘 밤도 어김 없이 초만원
    입니다."
      미카리가 밝게 웃었다.
      "못  다리겠군."
      "차를 가져다 드릴까요?"
      "부라이언, 알다시피 그게 나의 유일한 약점 일세."
      무대 감독이 나가자 미카리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방안을  왔다
    갔다하면서 초조한 듯이 빨아댔다.
      그는 갑자기 멈춰서더니 담뱃불을 끄고 벽가에 놓인 피아노  앞
    에 앉아 손가락의 관절을 몇 번 구부리고 나서 음계  연습을 시작
    했다.
      모건의 아파트 앞에서  감시하는 경찰차의 경관이 흥미를 느낀 
    것은 가까이 다가와서 멈춘  미니 벤의 색깔이었다. 그것은  밝은 
    황색이었다.
      <꽃에 관한  모든 것,--24시간 배달  서비스>라고 차체에 빨간 
    글자로 적혀 있었다.
      벤의 운전수는 천으로  된 모자를 쓰고  자동차와 같은 색깔의 
    레인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그 색깔이 빗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운전수는 선물용의 커다란  꽃다발을 차에서 꺼내 계단을 올라
    가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모건이 문을 열었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꽃다발이
    었고 뒤이어 황색  레인 코트를 입은 사람이  방 안으로 들어  왔
    다.
      문을 닫고 돌아서서 알았는데 그것은 아주 매력적인 젊은  여성
    이었다. 그녀가 모자를 벗고서야 처음으로 안 것이다.
      "대체 당신은 누구요?"
      레인 코트의 단추를 풀고 있는 그녀에게 모건은 물었다.
      "에이미 켈소에요, 대령님. 마지막으로 뵙고 나서 저도  약간은 
    나이를 먹었으니까요. 하지만  얘기하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이 
    레인 코트를 입고 모자를 써 주세요. 집 앞에 미니  벤이 있어요. 
    그것을 타고 파크 가로 가 주세요. 아버지가 흰색  포드 코티나를 
    타고 기다리고 있읍니다."
      "하지만 당신은 어떻게 하지?"
      모건은 레인 코트를 입으면서 물었다.
      "자동차를 파크 가에 버려두고 가시면 돼요. 5분도 안 되어  제
    가 가지러 갈 테니까요. 자, 빨리 가세요 대령님."
      모건은 망설이다가 모자를 쓰고 문을 열었다.
      "옷깃을 세우세요."
      모건의 뒤에서 문이 닫혔다. 그녀는 황색 레인 코트 밑에  가벼
    운 레인 코트를 또 하나 입고 있었다.
      그녀의 양손이 머리 위에 뭉쳐 놓은 머리칼에 뻗었다. 핀을  뽑
    자 어깨까지 흘러내렸다.
      미니 벤이 달려가고  난 뒤 2분  가량 있다가 경찰차의 경관은 
    에이미 켈소가 출입구에서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잠깐 멈춰  서서 비를 바라보고는  계단을 내려와 바쁜 
    걸음으로 걸어갔다.
      경관이 상찬의 눈길로  지켜보는 가운데 그녀는 모퉁이를 돌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 처녀가 파크 가의  황색 미니 벤까지 걸어가서 운전석에 올
    라타고 어딘가로 사라지는  것을 목격했다면 경관은 좋아하고  있
    지만은 못했을 것이다.
      캐더린 라일리가 알버트 홀의 유리로 된 현관을 바쁜  걸음으로 
    들어서서 로비에  이르렀을 때 두  사람의 제복 경관에게  얘기를 
    하고 있던 해리 베이커가 먼저 그녀를 보았다.
      그녀가 입장권 매장으로 향하는 것을 베이커는 서둘러 가서  막
    았다.

제 목 : 제15장 살인자에게 카네이션을 - 2





      "실례합니다, 박사님. 여기는 웬일입니까?"
      "내 입장권이 마련되어 있읍니다."
      베이커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그녀의 팔을 잡고 강제적으로  밖
    으로 끌고 나갔다. 직원용의 조그만  주차장에 눈에 띄지 않는 벤
    이 주차되어 있었는데 그곳이 특별 수사부의 작전 본부였다.
      퍼거슨의 차가 옆에  서 있고 그는  뒷좌석에 드비르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준장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켐브리지로 가지 않았읍니까?"
      "마음이 변했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가 치는 피아노를 다시 한 번 듣기로 했어요."
      "그것뿐입니까? 설마 어리석은 생각을......."
      "무슨 말이지요,  준장님? 그에게 경고라도  하리라고 생각하나
    요? 하지만 어디로 도망치겠어요?"
      "그건 그렇군요."
      퍼거슨이 시인했다.
      캐더린은 퍼거슨의 뒤에 보이는 드비르를 보았다.
      "당신도 한패인가요, 뭇슈 드비르?"
      "그런 것 같군요, 마드모아젤."
      그녀는 다시 퍼거슨에게 시선을 옮겼다.
      "이젠 가도 되겠지요?"
      "네, 좋습니다, 박사님.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은 이 최후의 
    일막에 걸맞는 사람이니까요."
      그녀는 발길을 돌려 정면 현관으로  서둘러 돌아갔다. 퍼거슨이 
    몸을 구부리고 차 안을 들여다보았다.
      "이제 그의 연주가 시작될 시간이군요, 들어가 볼까요, 선생?"
      드비르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만두겠오,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피아노라는 
    악기에는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해서요."
      이때 분장실에서 미카리가  거울 앞에서 넥타이를 고치는 것을 
    프레빈이 문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노크 소리가 들리고 무대 감독이 얼굴을 디밀었다.
      "여러분, 나가실 차례입니다."
      프레빈이 미소를 띠고 손을 내밀었다.
      "행운을 빌겠오, 존."
      미카리는 양팔을 크게 벌렸다.
      "행운 따위는 필요 없읍니다. 위대한 미카리에게는 무엇이든 가
    능합니다."
      알버트 홀은 초만원으로 모든  좌석이 꽉 차고 그 밖에도 천오
    백 명의 청중이 무대  앞의 난간에까지 어깨를 비벼대며 몰려  있
    었다. 그 대부분은 가장복 차림의 젊은이나 학생으로서 이것이 프
    로므나드 콘서트 최종일 밤의 관습이었다.
      그리고 먼저 프레빈이 무대에 나타나고 미카리가 그 뒤를  이었
    을 때의 환성은 그가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큰 환성
    이었다.
      그의 혈관에 피가  소리내어 흐르고 흥분과  고양된 감정이 온 
    몸에 가득 찼다.
      그는 그곳에 서서 몇 번이나 절을  했다. 프레빈도 소리를 내서 
    웃으면서 박수를 치고 있었다.
      미카리는 무대 바로 옆, 맨 앞줄의  박스석에 시선을 보내 캐더
    린 라일리가 그곳에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는 오케스트라 단원 사이를 누비고 그곳으로 다가가 단추  구
    멍에서 카네이션을 빼내 그녀에게 던졌다.
      캐더린은 그것을 받아들고 꼼짝 않고 마치 꿈이라도 꾸고  있는 
    모습으로 미카리를 응시하고 나서 꽃에 입을 맞추고  다시 그에게 
    던졌다.
      청중이 들끓고 그  속에서 미카리는 피아노  있는 곳으로 가서 
    앉았다.
      모든 소리가  숨을 죽였다. 완전한  정적이 찾아왔다.  프레빈은 
    피아노 바로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약간 몸을 돌려 미카리를 보았다.  그 얼굴은 지금은 진지
    했다. 지휘봉이 내려지고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시작하자 미카리의 
    손가락은 건반과 융합되었다.
      이즈음 켈소는 코티나의 핸들을 꺾어 프린스 콘서트 로드로  들
    어가 보도에 붙여 차를 세웠다. 그는 엔진을 건 채로 모건을 돌아
    다보았다.
      "이 밖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요, 대령님?"
      "자신이 소중하다면 나와 만났다는 것을 잊어 버리게."
      "될 대로 되겠지요."
      하고 켈소가 말했다.
      낡은 트렌치 코트를  입고 켈소에게서 얻은  트위드 모자를 쓴 
    모건은 자동차에서 내려 차 안을 들여다 보았다.
      "고맙네, 이젠 여기서 사라지는 거야."
      코티나는 순식간에 멀어져 갔다. 모건은 옷깃을 세워 비를 피하
    면서 알버트 홀의 뒷쪽으로 돌아갔다.
      그는 알버트 공의 동상  옆에 멈춰 서서 뒷문 근처를 살펴보았
    다. 계단 밑에  제복 경관이 세 명  서 있었다. 실제로 눈에  띄는 
    다른 모든 문에도 최소한  한 명의 경관이 빗속에서 코트를  번쩍
    이며 서 있다.
      그때 한대의 트럭이  모퉁이를 돌아서 나타나 분장실 입구에서 
    멎었다. 차체에는 런던에서 가장  유명한 양조회사의 이름이 붙어 
    있었다.
      모건이 보고 있으려니까 모자와  코트를 입은 인부가 서 너 명 
    내려와서 문턱에 서 있는  두 명의 경관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맥주 상자를 내리기 시작했다.

제 목 : 제15장 살인자에게 카네이션을 - 3





      모건은 재빨리 도로를  가로질러 건너가서 트럭의 그늘에 서서 
    기회를 기다렸다. 두 명의 젊은  경관이 머리를 맞대고 웃고 있었
    다. 인부가 한  사람 나와서 상자를 둘러 메고  다시 안으로 들어 
    갔다.
      모건은 날쌔게 트럭 뒤로 돌아가 다음 상자를 받아들고  똑바로 
    입구로 걸어갔다.
      경관들은 무엇이  우스운지 킬킬거리고  웃었으나 그들은 이미 
    뒷쪽에 있었다. 모건은  분장실 수위를 왼쪽으로  보면서 그 앞을 
    통과하여 우측으로 꺾어져 낭하로 들어가 그대로 전진했다.
      몇 야드 앞쪽에 다른 인부가 가는 것이 보였다. 분명히 바아 쪽
    으로 가고 있었다.
      우측에 열려진 문이 있고 그곳에서 계단으로 통하고 있었다. 모
    건은 재빨리 그곳으로 숨어  들어가 그늘에 상자를 내려 놓고  윗
    쪽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이미 오케스트라의 소리가 뚜렷이 들려  오고 있었다. 피아노의 
    소리도 가까웠다.
      모건은 알버트 홀에 많은 구불구불한 긴 낭하의 하나로  들어섰
    다. 반대 쪽에 '출구'라고 쓴 문이 있었다.
      그가 그 문을 열고  들어가니까 그곳은 통로의 끝으르 그 앞에 
    계단이 있어서 무대의 좌측 돌출 부분으로 통해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곳에 존 미카리가 있었다.
      최종악장의 끝에 가까왔다. 오케스트라가 주제를 연주하고 있는 
    동안 미카리는 기다리며  손가락을 구부리고 심호흡을 하면서  최
    후의 움직임에 필요한 엄청난 체력 소모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는 얼굴을 들어 앙드레 프레빈을 응시하면서 기다렸다.  그때, 
    지휘자 너머 쪽, 통로의 상단에  문이 열리고 에이서 모건의 모습
    이 나타났다.
      그 충격은 어머어마했다. 한 순간 미카리는  앉은 채로 돌로 변
    한 것 같았다.  그를 지켜 보고 있던 캐더린  라일리는 그 시선을 
    좇았다.
      그러나, 모건은 이미  문 안으로 들어가서 모습이  보이지 않았
    다.
      안 되겠다, 하고 미카리는 생각했다. 저 사나이는 살아 있다. 저 
    녀석은 살아나서 나를 노리고 찾아왔다.
      '무사도'라는 말이 뇌리를 스쳐갔다. 사무라이의 고독을  능가하
    는 깊은 고독은  없다. 아마 정글의  호랑이의 고독밖에는 그것에 
    필적하는 것이 없을 것이다.
      미카리는 두렵기는 커녕 맹렬한 기쁨, 일종의 환희를 전신에 느
    꼈다. 프레빈이 날카롭게 신호를  보내고 미카리는 협주곡의 드라
    마틱한 피날레에 몰입했다. 그 곡은 그의 넓은 레퍼터리 가운데서
    도 특별히 장기로  삼는 것이었는데 지금까지의 어떤  연주보다도 
    월등한 솜씨로 그것을 연주해냈다.
      연주가 끝나자, 그의 음악 경력을 통해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
    했을 정도의 환성이 청중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모두들 박수를 치고  있었다. 오케스트라의 단원들도,  프레빈도 
    난간에 몰려 선 청중들도 그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미카리가 앞줄의 박스석을 올려다보니 캐더린 라일리가  일어서
    서 난간을 붙잡고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프레빈이 그의 
    팔을 잡고 통로 쪽으로 끌고 갔다.
      분장실 밖에 무대 감독이 양손에 샴펜을 들고 서 있었다.
      "이런 연주는 들어본 적이 없읍니다."
      하고 그가 얘기하는  중에도 함성은 커져서 청중들은 미카리의 
    이름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미카리는 미지근한 샴펜을 단숨에 마시고 싱긋이 흰 이를  드러
    내 보였다.
      "제 연주가 괜찮았읍니까, 선생님?  아니면 그저 그런 수준이었
    읍니까?"
      분명히 대단한 감동을 느낀 프레빈은 그를 위해 건배했다.
      "이보게, 인생에는 때때로 위대한 순간이 있다네. 오늘  밤이 바
    로 그러한 순간이었다네. 고맙네."
      미카리는 미소를 띠고  조금더 샴펜을 마시면서 시선을 프레빈
    의 뒷쪽, 중앙 통로가 합류하고  있는 통로 끝으로 보내고 모건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 사나이는 틀림없이 이  건물의 낡은 미로와 같은 통로를 자
    유롭게 움직여다니며 어딘가의 그늘에 숨어 있을 것이다.
      이도라의 별장에서의 대결  때 그 사나이는  자기 손으로 너를 
    처치하고 싶다고 말했다.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고 생각할 이유 
    같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결국,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던 것이다.
      함성이 한층 더 강해졌다. 프레빈이 말했다.
      "자, 우리들이 얼굴을 보여 주지  않으면 그들은 무대로 뛰어들
    걸세."
      두 사람이 다시 무대에 나타나자 청중들이 소리치기 시작했다.
      "미카리! 미카리!"
      그리고 꽃다발이 차례로 던져졌다. 대학의  스카프나 모자도 날
    아왔다. 이제는 청중 전원이 일어서서 박수를 치고 있었다.
      숭고한 예술적 경험을 함께한 것에 대해 그에게 감사하고  있는 
    것이었다.
      미카리는 고개를 숙이고, 미소를 짓고, 양손을 들어올리고  캐더
    린 라일리에게 키스를 던졌다.
      무대에서 떠나는 데는 한 가지 방법  밖에는 없다. 그는 그것만
    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불런을 통해 낭하로 가는 방법으로서 
    그 앞에는 모건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그것은 틀림없었다.
      다음 순간, 미카리는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
    다. 그는 제1 바이얼린과 악수를 나누고  그 옆을 빠져 나가 난간 
    가까이까지 갔다. 12피트 밑에는  돌출부의 낭하로 이어지는 통로
    가 있다.
      그는 앞으로 몸을 기울여 청중에게 손을 흔들었다.
      "여러분들은 정말 훌륭한 분들입니다. 제 음악을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미카리가 말했다.
      그는 난간에 다리를  걸치고 사뿐하게 통로로 뛰어내려 청중의 
    시계에서 갑자기 사라졌다. 비명이 몇 군데서 일어나고 소동이 벌
    어졌다.
      그러나, 그는 무사히 내려 서 있었다. 통로의 문이 꽝하고  소리
    를 내서 닫히고 그는 사라졌다.
      그러자, 웃음 소리와 더불어  천둥 같은 박수가 터졌다.  청중은 
    물론 오케스트라 단원들조차도 알버트 홀의 오랜 역사  속에서 목
    격된 가운데 가장 이색적인 퇴장이 될 것이 틀림 없는  이 유명한 
    피아니스트의 행동에 웃음과 갈채를 보냈다.


제 목 : 제15장 살인자에게 카네이션을 - 4





      돌출부로 통하는 낭하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휴식 시간을 바아에서 보내려고 언제 사람들이 모든 층
    의 낭하로 쏟아져나올지 몰랐다. 세  번째 문으로 나가 그는 뒷문
    으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아래 보이는 로비에서  해리 베이커가 두  사람의 제복 경관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미카리는 당장 그를 알아보고 발길을 돌려 
    계단을 다시 올라갔다.
      틀림 없었다. 모건이 손을  쓴 것이다. 미카리는 아직도  조용한 
    낭하를 달려가 뒷문으로 통하는 문으로 향했다.
      그곳에 도착하여 문 틈으로  보니까 두 사람의 경관이 비를 피
    해 안쪽에 서 있었다. 알버트  홀에서의 그의 경험으로는 이런 일
    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의 육감은 정글의  야수처럼 위험을 냄새 
    맡고 지금까지 오랜 세월을 살아  남았으나, 지금 그가 심각한 곤
    경에 빠졌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그는 몸을 돌려 온 길을 다시 뛰어가기 시작했다. 흰 타이에 검
    은 연미복을 입은 우아하고 고독한 모습이었다.
      이윽고, 앞쪽 모퉁이에서 앙드레 프레빈과  야회복을 입은 많은 
    사람들이 나타나 그를 향해 밀려왔다.
      눈깜짝할 사이에 미카리는 흥분한 팬에게 둘러싸였다. 프레빈이 
    말했다.
      "조금 전에는 무슨 일인가? 목이라도 부러뜨리고  싶었나? 아무
    리 프로므나드  콘서트의 마지막 날  밤이라고 해도 그건  너무했
    네."
      "조촐하게 전설을 하나 추가하려고 했을 뿐입니다. "
      하고 미카리가 말했다.
      "그런데 모두가 프린스  콘서트 룸에서 자네를  기다리고 있네. 
    켄트 공작 부인, 그리스  대사, 수상들이 말일세. 그들을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되네."
      프레빈은 웃었다.
      "여기는 영국이니까."
      그는 미카리의 팔을 잡고 억지로 끌고 갔다.
      프린스 콘서트 룸으로 통하는 계단은 혼잡해 있었기 때문에  캐
    더린 라일리는 전력을 다해 사람들을 헤치고 나가지  않으면 안되
    었다. 가까스로 문까지 다가가자  제복을 입은 보이에게 차단당했
    다.
      "초대장을 보여 주십시오, 부인."
      "갖고 있지 않아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러나 나는 존 미카리의 개인적인 친구예요."
      "오늘 밤은 모든 분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읍니다."
      그는 사람들로 붐비는 계단 쪽을 몸짓으로 가리켰다. 일단의 학
    생들이,
      "미카리! 미카리!"
      하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유리문을 통해서 저쪽 방안이 보였다. 우아한 의상을 입은 귀부
    인과 주로  야회복 차림의 신사들로  붐비고 있었으나 단지  해리 
    베이커 총경만은  짙은 곤색양복을 입고  문쪽에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캐더린은 보이의 어깨 너머로 손을 뻗어 유리문을 두드렸다. 보
    이가 제지했을 때  베이커가 뒤돌아보았다. 그는  한 순간 험악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으나 곧 문을 열어 주었다.
      "들여 보내게, 내가 아는 사람이니까."
      베이커는 그녀의 팔을 잡고 구석으로 데리고 갔다.
      "헛일입니다, 박사님. 그는 끝장이에요.  당신이 나설 여지가 없
    읍니다."
      "그건 알고 있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베이커는 잠시 그녀를 뚫어질 듯이 들여다보고는 한 손으로  그
    녀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고는 고개를 저었다.
      "여자들이란 모두 마찬가지군, 평생  영리해지지 못하고 만다니
    까."
      영국 수상 에드워드 히드는 그 자신도 음악가로서 뛰어난  재능
    의 소유자여서 미카리의 손을 열의를 갖고 잡았다.
      "정말 비범했읍니다, 미스터 미카리. 평생 잊지 못할  밤이 되겠
    읍니다."
      "감사합니다."
      미카리는 프레빈의 안내를 받아 켄트공작  부인에게로 갔다. 그
    녀는 언제나처럼 매력적이고 총명했다.
      "당신들 두  사람이서 라프마니노프의  4번을 레코드로  녹음한 
    일은 아직 없지요, 어떻습니까, 이번에?"
      프레빈이 빙긋이 웃었다.
      "아직 못했읍니다. 그러나 확실히 말할  수 있읍니다만 존이 오
    늘밤과 같은 연주만 해 준다면 불원간 이루어질 것입니다."
      미카리는 얘기를 나누는 두 사람을 남겨 두고 방안을  돌아다니
    면서 몇 사람과 악수를 나누었다.  멈춰 서서 그리스 대사와 얘기
    를 했으나 자기가 무엇을 얘기하고 있는지 내용은 염두에 없었다. 
    그의 눈은 쉴새 없이  방안을 둘러보며 사람들 속에 숨어서  이쪽
    을 응시하는 모건의 험상궂은  얼굴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
    고 절반쯤 기대하고 있었다.
      그 모건이 아니라 캐더린 라일리가 문옆에 베이커와 나란히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미카리는 쓴 웃음을 지었다. 한꺼번에 여러 가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미카리는 캐더린 쪽으로 걸어가려고 했다.  그때 사람들 틈으로 
    퍼거슨과 쟝 폴 드비르가 보였다.  벽가에 서서 샴펜을 마시고 있
    었다.
      미카리는 주저하다가 그들 쪽으로 걸어갔다.
      "쟝 폴."
      하고 그는 태연한 어조로 말을 걸었다.
      드비르가 말했다.
      "이쪽은 퍼거슨 준장일세, 알고 있지?"
      미카리는 안주머니에서 우아한 담배 케이스를 끄집어 냈다.
      "이름만은 들어서 알고 있읍니다. 담배를 피우시겠읍니까?"
      퍼거슨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제 목 : 제15장 살인자에게 카네이션을 - 5





      "그런데 불사신의 모건 대령은? 그는 이곳에 오지 않습니까?"
      "글쎄요, 그가 무료하게  침대에 누워 있을지는  모르지만 목하 
    자택 감금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상태에 놓여 있읍니다. 물론 오늘 
    밤의 이 연주회 동안만이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
    했지요. 그는 자기 손으로 당신을 죽이고 싶어하고 있어서요."
      "자택감금이라구요?"
      미카리가 웃었다.
      "정말 당신은 오늘 밤을 즐겁게 만들어 주는군요, 준장."
      후반 개시 5분 전을 알리는 벨이 울렸다. 퍼거슨이 말했다.
      "도망칠 곳은 없네, 알고 있겠지?  영국의 경관이 즐겨 쓰는 말
    로 한다면 얌전하게 따라오는 것이 몸에 좋을 걸세."
      "그런데 말입니다, 준장. 내가 얌전하게 행동한 적이 있었나요?"
      그리스 대사가 미카리의 어깨를 쳤다.
      "콘서트의 후반에 우리들의 박스로 와 주었으면 영광이겠소."
      "기꺼이 가겠읍니다. 대사 각하."
      하고 미카리는 말했다.
      "2, 3분 동안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가 돌아서자 퍼거슨은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오늘 밤의 당신의 연주는 앞으로 오랫동안 잊지 못할 걸세. 그
    러나 이것이 당신의 묘비명이 되는  것을 바라지는 않네. 그 점을 
    생각해 주게."
      퍼거슨이 드비르의 팔을 건드렸다. 프랑스  인은 서글픈 미소를 
    띠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내가 경고를 했었지? 자네는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지."
      "그런데 당신 생각도 틀렸소."
      미카리가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내주 수요일이 될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오늘은 토요일 
    밤이잖소?"
      그들은 문을 나갔다. 미카리는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
    이 그의 주위를 물 흐르듯이 지나갔다.
      베이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캐더린  라일리는 여전히 벽
    가에서 기다리고 서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직 많은 사람들
    이 있었다.
      미카리는 사람들을 헤치고 그곳까지 갔다.  양손을 주머니에 찌
    른 채 입에는 담배가 물려 있었다. 그가 미소를 지었을 때 캐더린
    의 가슴은 찢어져 나갈 것 같았다.
      "당신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오?"
      "분명히 알게 된 것은 이도라에서였어요. 모건이 부상한 상태로 
    산에 있는 것을 보았을 때였어요."
      미카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당신에게 중요한 일인지도 모르니까 지금 말해 두겠는
    데 그의 딸은 완전한 사고였어.  나는 피하려고 했지만 그것이 불
    가능했었지."
      "왜 그랬어요, 존?"
      미카리는 그녀 옆의 벽에 몸을 기댔다.  짧은 순간이지만 두 사
    람 사이에는 완전히 격의가 없어졌다.
      "모르겠어, 항상 모두가  나의 관심을  끌려고 하는 것  같았어. 
    아마 그래서 자연히 이렇게 되고  만 것이겠지. 문제는 내가 우수
    했다는 것이었을 거야. 하지만  당신은 심리학 박사야, 선생, 당신
    이 설명을 해 줘야지."
      "당신에게는 재능이 있었어요. 특히 뛰어난 천부적인 재능이 말
    이에요. 오늘  밤, 당신은 그것을  나타내 보였어요.  그리고 결국
    은......."
      "말에 지나지 않는 거야."
      하고 그는 말했다.
      "아무 것도 영속하는 것은 없어. 모든 것은 사라져가는 거야."
      그리스 대사가 일행과 함께 걷기 시작하자 미카리는 그녀의  팔
    을 잡고 그 뒤를 따라갔다.
      "그런데 얘기를 들어 보면  이곳에는 몇 마일이나 되는  통로가 
    미로처럼 뻗어 있어서  똑바로 된 통로는  하나도 없다는군. 모든 
    통로가 환상을 이루고 구부러져 있다는 얘기지. 어느 모퉁이에 에
    이서 모건이 숨어 있을지도 몰라."
      "그럴 리는 없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퍼거슨 준장이 그 사람을 아파트에 감금해 두었는 걸요."
      "그 방법은 실패로 끝난 것 같더군.  20분 가량 전에 당신 좌석
    의 바로 밑에 있는 통로의 출구에  그가 서 있는 것을 보았어. 내 
    연기의 종막에 또 하나 여흥을 더 하게 되겠지."
      캐더린은 그의 팔을 잡고 붙들어 세운 뒤,
      "무슨 짓을 할 생각인가요?"
      "물어보나마나지. 그리스 대사 일행의 좌석에 앉아 후반을 들을 
    생각이지. 전통적인 레퍼토리지. 엘가의  '위풍당당', '영국 뱃노래 
    환상곡' 그리고  최후로 모두가 기립해서  '예루살렘'을 열창하는 
    거야. 이것이 프로므나드 콘서트의 마지막 밤이라는  거지, 에이서 
    모건이 있다 해도 이것을 놓칠 수는 없어."
      캐더린은 두려운 듯이 그에게서 떨어져 가장 가까운 문  쪽으로 
    뛰어갔다. 미카리는 대사 일행의 맨  뒷쪽을 걷고 있다가 약간 걸
    음을 늦추고 지나치던 다음  낭하로 통하는 문 안으로 휙하니  몸
    을 날려 들어가서 일행의  발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그늘에서  기
    다렸다.
      짧은 정적이 있은 뒤 오케스트라가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미카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아, 들키는지, 도망치는지, 어디 한 번 해볼까?"
      그리고 그는 인기척이 끊긴 낭하로 들어갔다.

제 목 : 제16장 복수의 날 - 1




                          제16장 복수의 날

      해리 베이커가 뒷문의  로비에서 제복을 입은 경감과 얘기하고 
    있는 것을 캐더린 라일리는 보았다.
      그녀는 보기에도 몹시 지쳐 있어서 베이커는 그녀의 양팔을  부
    축했다.
      "여기에 웬일입니까?"
      "에이서 모건이,"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가 이곳에 와 있읍니다--이 건물 어딘가에요. 미카리가 휴식 
    시간 조금 전에 모건을 보았다고 합니다."
      "무슨 소리야!"
      하고 베이커는 외쳤다.
      "지금 미카리는 어디에 있읍니까?"
      "그리스 대사 일행과 함께 후반을 듣고 있어요."
      베이커는 그녀를 강제로 의자에 앉혔다.
      "알았읍니다, 당신은 여기 있어야 합니다."
      그는 경감과 짤막하게 몇 마디 말을 나누고 계단을  뛰어올라가 
    모습을 감췄다.
      퍼거슨과 드비르는 주차장에 세워둔 준장의 리무진의  뒷좌석으
    로 돌아가 있었다. 그곳에  사령차로부터 경사가 내려와서 퍼거슨
    을 불러냈다. 한참 있다가 퍼거슨이 자동차로 돌아왔다.
      "말썽이라도 생겼읍니까?"
      하고 드비르가 물었다.
      "그런 모양입니다. 에이서 모건이 건물 안에 있나 봅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말하고 있던 자택  감금으로는 그의  행동을 
    봉쇄할 수가 없었군요. 그러나 당신은  이렇게 될 것을 계산에 넣
    고 있었지요?"
      퍼거슨은 말했다.
      "'크레타 인'과 존 미카리. 모든 것이 밝혀지겠지요. 필연적으로 
    말입니다. 그 결과 그는 어떤 처벌을 받게 될까요? 교수형이 아니
    라 종신형이지요.  아뭏든 문명적이고 자유로운  요즘 세상이니까
    요. 그와같은 인물에게 있어 그런  형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상상
    할 수 있읍니까?"
      "그래서 당신은 대신 모건에게 사형집행을 시키고  싶은 거로군
    요?"
      "에이서 모건은 언제나  사형집행인으로서 제법 잘해  왔으니까
    요. 어쨌든 미카리가 살아 있어도 직접 우리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를 않습니다.  당신은 도움이 되지요.  더구나 미카리가  죽어 
    버리면 당신의 입장이 아주 단순해지겠지요."
      "정말 멋지군요."
      하고 드비르가 말했다.
      "다만 중요한 점을 한 가지 당신은 못 보고 있군요."
      "그게 뭔데요?"
      "그러니까 미간에 총알을 맞고  쓰러지는 것은 당신의 부하  쪽
    이 될 것 같다는 얘기입니다."
      해리 베이커는 계단을  내려와 뒷문 쪽 로비로  왔다. 캐더린이 
    일어나자 그는 말했다.
      "그리스 대사의 좌석에는 미카리가 없더군요. 보고 왔읍니다."
      그는 경부를 보고 조그만 소리로 속삭이기 시작했다.
      그 사이 캐더린의 존재는 잊혀졌다. 그녀는 살며시 계단을 올라
    가 다음부터는 달려서 모습을 감췄다.
      그녀는 리셉션이 열렸던  프린스 콘서트룸 밑의 계단에서 멈춰
    섰으나 어떻게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홀 쪽에서  '위풍당당'의 감동적인  음조가 조그맣게 들려왔다. 
    그러자 그때 당돌하게, 위쪽으로부터 물 흐르는 듯한 피아노 반주 
    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이번만은 도망칠 길이 없다.  미카리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탈
    출할 길은 없었다.  최후의 방벽은 있다.  어둠 속에 숨어  회장에 
    울려 퍼지는 '위풍당당'을 들으면서 그는 카스파를 생각해 냈다.
      타오르는 냄새, 다가오는 네  명의 게릴라. 그는 앉아서  우물에 
    기대 앉아 도망치려는 생명에 열심히 매달려 있다. 친구들은 모두 
    나를 오랫동안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주 오랫 동
    안.
      미카리는 조용히 말했다.
      "너를 편안하게 해 주마."
      미카리는 오른쪽에 있는 어두운 계단을  올라갔다. 끝까지 올라
    가자 그곳에 있는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프린스  콘서트룸을 들여
    다보았다.
      물론, 그가 예상하고 있던  대로 방안에는 사람이 없었다.  그곳
    에 있는 유일한 인물은 멀리 있는 길다란 거울에 비치는  자기 자
    신이었다. 오랫동안 그를  따라다녀 온 그  음울하고도 우아한 모
    습.
      "좋아, 친구."
      그는 말을 걸었다.
      "마지막이야, 그러니까 멋지게 한 번 해 보자구."
      구석의 창가에 연주회용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그곳으
    로 걸어가면서 그는 담배  케이스를 꺼내 그리스 담배를 한대  꺼
    내 물고 불을 붙였다.
      피아노의 뚜껑을 열고 의자에 앉았다. 권총을 꺼내 언제든지 쏠 
    수 있도록 건반 옆에 놓았다.
      "자, 덤벼라, 모건."
      그는 조용히 말했다.
      "어디에 있는 거야?"
      그는 감정을 담아 멀리서 들리는 오케스트라에 맞춰 '위풍당당'
    을 치기 시작했다.

제 목 : 제16장 복수의 나날 - 2





      계단에 발 소리가  들리고 나타난 것은  모건이 아니라 캐더린 
    라일리였다. 그녀는 문턱에 기대서  호흡을 가다듬고 나서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미친 짓이에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거죠?"
      "엘가를 치고 있지. 꽤나 즐거운 곡이라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
    군."
      미카리는 담배를 입가에 물고 피아노를 덮어 누르듯이 하고  참
    으로 발랄하게 음을 살려가며 연주하고 있었다.
      음은 아랫층의 구부러진 낭하를 흘러갔다.
      분장실의 통로 옆의 그늘에  숨어 있던 에이서 모건은 곧장 계
    단을 올라갔다. 그의 손은 트렌치  코트의 주머니에 넣은 월셔 권
    총을 쥐고 있었다.
      그 음은 경부와 나란히  뒷문의 로비에 서 있던 베이커 총경의 
    귀에도 도달했다.  그도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경부와 두  사람의 
    경관도 곧 그 뒤를 따랐다.
      "부탁이에요, 존. 당신에게 내가 조금이라도 소중하다면."
      "응, 당신은 소중했었지."
      미카리는 미소지었다.
      "켐브리지의 강가에서 만난  아침을 기억하고 있어? 그것은  내
    가 계획한 것이었어. 호프만이 내게 있어 위험한가 아닌가를 확인
    하기 위해서 당신을 만날 필요가 있었거든."
      "지금은 나도 알고 있어요."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아.  사실은, 당신은 지금까지 단 한  사
    람 내가 진심으로 마음을 바친 여인이었어."
      그때, 문 뒤에서  에이서 모건이 모습을 나타내  문을 가로막고 
    섰다.
      미카리는 피아노를 치던 손을 멈췄다.
      "꽤나 오래 걸렸군 그래?"
      멀리서 오케스트라는 '영국 뱃노래 환상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모건이 말했다.
      "나는 지금 이곳에 있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전쟁터는 움직이는 시체의 장소라고 하더군."
      미카리는 미소를 지었다.
      "오자(吳子)라고 하는 중국의 전략가가 까마득한 옛날에 그렇게 
    말했지. 당신과 나의 관계를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하네, 모건. 
    이렇게 되고 보면 우리들 사이에는 이미 선택의 여지는 없군."
      미카리는 손을 날쌔게 뻗어 체스가를  잡았다. 캐더린 라일리가 
    절규하면서 양팔을 벌리고 두 사람 사이로 뛰어들었다.
      "그만둬요, 존!"
      주저하면서도 미카리가 일어서려고 했을 때,  모건은 한쪽 무릎
    을 꿇고 월셔를 두 번 쏘았다.  탄환은 두 발 모두 미카리의 심장
    을 꿰뚫었다. 미카리는 뒤로 몸을  젖히고 피아노 의자 위로 나가 
    떨어지면서 순간적으로 절명했다.
      그때서야 베이커와 세 명의 경관이  도착했다. 모건은 넙적다리
    에 권총을 댄  채 문턱에 서 있었다. 베이커가  미카리 위에 몸을 
    구부리고, 캐더린 라일리는 양손을 옆에 축 늘어뜨린 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당신을 쏠 수 있었어요, 모건."
      그녀는 힘없이 말했다.
      "다만 내가 방해를 해서, 내가 방해를 해서 그는 주저했던 거라
    구요."
      베이커는 일어서서 체스카를 들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 틀렸읍니다. 그는 누구도 쏠 생각이 없었읍니다. 이 총에
    는 탄환이 들어  있지를 않습니다. 자, 보세요.  그는 탄창을 미리 
    뽑아 두었어요."
      경부는 바아의 뒷벽에 달려  있는 내선 전화에 대고 낮은 소리
    로 말했다.
      "사령차에 연결해 주게. 퍼거슨 준장을 부탁하네."
      캐더린 라일리는 앞으로  걸어나와 미카리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흰 셔츠의  가슴은 피로 물들어  있었으나 얼굴은 조금도 
    더러워지지 않았고, 눈은 감겨 있고 희미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캐더린은 이마의  머리칼을 걷어올리고  나서 아주 조심스럽게 
    단추 구멍에서 흰 카네이션을 빼냈다.
      그 카네이션은 박스석에 있을 때 그가  던져 준 것이었다. 그녀
    는 그 꽃에 키스를 하고 나서 그에게 다시 던져 주었던 것이다.
      그녀는 몸을 돌려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모건의 옆을 빠져  방에
    서 나갔다.
      "캐더린!"
      하고 부르며 모건은 뒤를 쫓아가려고 했다.
      베이커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내버려 두게, 모건. 그리고 그 총을 이리 주게."
      모건이 월셔를 건네 주자 베이커는 탄환을 뽑았다.
      "조금은 속이 시원한가? 이제 미간이 살아날 것 같은가?"
      모건은 미카리에게 다가가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왜 그런 짓을 했을까?"
      "글쎄, 내 생각에는 이런 것이 아닐까? 모건, 자네는  총의 명수
    지. 그러나 그는 자기 쪽이 더 잘 쏜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그래
    서 이번만은 난처해진 것일세. 그는 자네에게 이겨도 도망칠 곳이 
    없었으니까."
      "저런 어리석은 녀석 보았나!"
      하고 모건이 말했다.
      "그건 견해  차이지. 그런데 오늘  '데일리 텔레그라프'를  읽었
    나? 육군의 장성 승진자 명단이 실려 있더군. 자네는 드디어 해냈
    어. 준장이야, 이제는 마음만 먹으면 퍼거슨과 맞먹을 수도 있네."
      그러나 모건은 더 이상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몸을 돌려 낭하로 달려나갔다. 그
    곳에는 아무도 없었고 마침 캐더린 라일리가 저쪽  끝의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길이었다.

제 목 : 복수의 날 - 3  << 최 종 회 >>





      "캐더린!"
      하고 모건은 외쳤다.
      그가 달려가는 것과 동시에 회장에서는 '영국 뱃노래 환상곡'이 
    끝나서 청중이 우뢰와 같은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정면 로비로 통하는 계단  위에 모건이 이르렀을 때 캐더린 라
    일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모건은 두 단씩 계단을 뛰어 내려가 유리로 된 현관을 빠져  나
    갔다. 그 등 뒤에서  오케스트라와 코러스와 청중 전원이 '예루살
    렘'의 장엄한 곡을 합창하기 시작했다.
      비가 심하게 내리고 도로는 자동차로 붐비고 있었다. 모건이 계
    단을 내려가자 퍼거슨이 다가와 우산을 받쳐 주었다.
      "축하하네, 모건."
      "당신의 희망대로 되었군요, 그렇지요?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
    었읍니다. 우리들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지요. 옛날과  똑같이 더
    러운 방법이지요, 언제나 그랬읍니다."
      "하여간 잘 해냈네."
      모건은 자꾸만 주위를 살폈다.
      "그녀는 어디로 갔읍니까?"
      "저쪽일세."
      퍼거슨은 턱을 쳐들어 길 건너를 가리켰다.
      "내가 자네라면 서둘러 가 보겠네, 모건."
      그러나 좍좍 쏟아지는  빗속에서 자동차를 피하면서 모건이 거
    리의 반대 쪽으로 건너갔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캐더린은 이미 알버트  기념탑 옆을 지나  공원의 암흑 속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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