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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버트 갠스-대중문화와 고급문화

by Casey,Riley 2023. 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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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중문화와 고급문화
허버트 갠스
    1장.대중문화와 취향문화
  
  이질적 사회에서는 자원과 권럭의 배분을 놓고 여러 상이한 집단간에 갈등이 있게 마련인
데, 이와 같은 집단간의 갈등은 경제적 영역과 정치적 영역에만 국한되어 일어나는 갓이 아
니라 문화적 영역에까지 확되대어  나타난다.서구사회에서 그러하듯이, 미국에서도 가장 오
랜 기간에 걸친 싸움이자 아마도 가장 중요한 문화적 갈등은 고급문화를 창조하고 향유하는 
교육을 잘 받은 사람들과,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매스미디어와 대중소비문화산업에 의해 
양산되는 대중문화를 즐기는 문화를 대중문화라고 말하면서,이들의 대중문화는 그것을 향유
하는 개객인에게는 물론 사회전체 에도  해로운 문화라고 비판하고 있다.그렇지만 고급문화 
주창자들의 이와 같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대중문화를 수용하는 대중들은 고급문화를 거부하
고 계속 매스미디어 내용물의 수용자와 대중소비상품의 고객이 되어 왔다. 
이른바 대중문화 비판론이 우리의 주목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것이 단순히 매스미디어 내용
물이나 대중소비상품과 같은 문제를 훨씬 넘어서는 어떤 문제에 대하여 논의하는 것이기 때
문이다.대중문화 비판론은 인간의 참된 생의 의미에 관한 논의이다.일반적으로 인생의 목적
에 관한 것으로  특히 노동작업을 벗어난 여가생활의 영역에서 인생의  문제를 깊이 생각게 
한다.대중문화 비판론은 또한 사회에서 어떤 문화와 누구의 문화가 지배문화가 되어야 하는
가, 한 시대에 여러 사회가 서로 문화적으로 경쟁할 때, 그리고 문화와 문명의 역사 속에서 
어떤 문화와 누구의 문화가 그 사회와 그 시대에, 그리고 국민의 대표문화가 되어야 하는가
에 관한 논의이다.그렇게 때문에 대중문화 비판론은 사회의 한 구성요소가 다른 구성요소에 
대해 가하는 공격이라 하겠다.다시 말해거 교양 없는 사람에 대한 교양 있는 사람들의 공격
이며, 세련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세련된 사람들의 공격이요, 문화적으로 부유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문화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의 공격이요, 문화적 비전문가들에 대한 문화적 전
문가들의 공격이다.이 모든 경우들은 결국 전자가 후자의 좋은 생활수준에까지 이르지 못하
고 있음에 대한 비판론이라 하겠다.

    1. 대중문화 비판론의 전망
  대중문화 비판론은 도시산업사회에서 사람들의 생활시간이 노동시간과 자유시간으로 구분
되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생겨났다.로웬달(Leo  lowenthal)과 피스크(Majorie Fiske)가 지적
했듯이 대중문화 비판론은 오늘날 매스미디어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대중적 문예물들이 풍
현하기 시작하던 18세기부터 기원한다.이와 같은  대중문학은 현재에 이르기 까지도 출판문
화나 영화문화 속에서 계속 상징적 문화로서 강조되어 왔으며 생활의 다른 여러 면에까지도 
확대되어 갔다.
  19세기 이래 대중문화 비판론으  최소한 미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여가시간(餘暇時間)에 대
한 유려였다.처음에는 여가로 인하여 점점 증가하는 음주와 성(性)의 문란에 대한 우려였으
나, 후에는 스포츠나 영화에 관하 텔레비전  시청과 그 수동성(受動性)의 조장에 관한 우려
이다.여가시간이 많아 질수록 대중문화에 더욱 깊이 탐닉하게 됨으로써 이것이 결국 무료함
과 불만, 급기야는 사회적 혼란까지  낳을지도 모른다는 데 대한 우려이다.여가시설에 관해
서 보면, 19세기나 20세기 초마 해도  비판은 음악실이나 선술집, 사창굴 등이 지닌 해독에 
집중되었으나, 1920년대에서 1950년대에 와서는 영화, 만화, 라디오, 스포츠 관람이 비판의 
초점이 되었고, 호경기였던 1950 연대에는 대중소비생활 전방데 대한 관심, 특히 쾌적한 교
외생활의 양식에까지 비판의 대상범위가 좁혀져  텔레비전 시청행위의 좋지 않은 효과에 집
중되었다.그러나 이와 같은 대중문화 비판론의 대상과 강조의 변화가 반드시 바판론 자체의 
변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비판론자르은 무엇이든 그때그때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다고 보
이는 것, 최소한 대중이 여가시간을 의미있게 보내는 생활을 위협하는, 명백히 드러나 보이
는 문제들을 공격했던 것이다.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부터 비판론은 두  가지 근본적인 방향전환을 맞았다. 첫째로
는, 대중문화 비판론이 새롭게 등장한  강력한 청년문화를 정치적 극력주의, 쾌락주의 혹은 
신비주의 나 허무주의라고  비판하면서 이를 새로운 공격의 대상목표로  삼음에 따라, 일부 
대중문화 비판론자는 대중문화에 대한 공격을 멈추었다.비판론자들의 이러한 과녁의 변화는 
청년문화 주창자들이 새로이 고급문화를  공격하자 귿댁가지 고급문화를 옹호하던 대중문화 
비판론이 그에 대항하여 반응함으로써  나타났다.예컨재 마르쿠제(Herbert marcuse)같은 급
진주의자는 고급문화를 대중문화와 마찬가지로  억압적이고 반혁명적인 지배계급의 종복(從
僕)이라고 규탄하였는데, 이러한 주장은 마르쿠제의 젊은 추종자들에 의해 더욱 직선적으로 
되풀이되었다.어떤 의미에서는 이전의 일부 대중문화 비판론자들이 마르쿠제의 비난의 타장
성을 결과적으로 인정하게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왜냐하면  최소한 일부의 비판론자들이, 
무의식적일는지는 모르지마, 대중문화의 보수성에서 긍정적인 측면을 발견하기 시작했던 것
이다.이에 대중문화 용호자들은 새호 등장한  청년문화를 반격하는 데 대중문화 비판론자들
과 나란히 공동 전선을 펴게 된 것이다. 
  둘째로, 전자보다 더욱 대중문화 비판론을  급선회시킨 것은 암시적이기는 하지만 고급문
화적 생각과 표현들이 대중문화 속에서, 대중문화에 의해 받아들여진 점이다.그럼으로써 대
중문화 비판론이 종식을 고하게 된 것이다. 
  이 점에 관해 글레이저(Nathan glazer)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현대사회의 문화를 논할 때 고급, 중급, 저급의 분류에 의해 비판이 
되었다.이제 그런한 것은 사라졌다. …왜냐하면, 고급의 아이디어가 이제 중급 정도의 수용
자에 의해 흡수되었기 때문이다.
  벨(Daniel Bell)은 이보다 더 나아가 예술(여기서는 고급문화예술을 뜻한다)이 점차로 자
율적인 것이 되어감에 따라 예술가들은 그의 사회적 위치에 의존치 않고 그 자신의 권한 내
에서 강력한 취향형성자(taste maker)가 되고 있다.즉, 한 개인의 `사회적 위치'(사회적 계
급이나 지위 등)가 더 이상  그의 생활양식이나 가치를 결정하지 않는다.…사회의 대다수에
게 이러한 명제가 여정히 진실일지도  모르나 …상당수의 사람들에게는 사회적 지위와 문화
적 양식의 관계, 특히 노동계급이니 중류계급이니 하는 전제적인 분류는 더 이상 의미가 없
다고 말하면서 상당수의 사람들이 계층적 지위에  딸 문화적 선택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이전
에 있었던 고급문화와 갈등은 사라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이 글레이저와 벨이 고급문화의 기준과 내용이 사회전반에 걸쳐 보다 더 광범위하
게 확산되어 간다고 지적한 점은  참으로 타당한 것이다.최소한 중상계층에게는 고급문화의 
기준과 내용이 받아들여지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그러나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아직 고급문
화와 대중문화의 구분이 사라져버렸다고는 할  수 없다.어떤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잡지를 
언뜻 보아도  대중문화는 여전히  고급문화와는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더구나 
1960년대에 풍미했던 청년문화가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시들해저,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고
급문화론자들에게 그렇게 위협적이었던 것이 사그라졌다.실상, 청년문화의 상당부분이 이제
는 상업적 대중문화로 흡수되어 버린 것이다.대중가요의 정상에 있던 비틀즈(The Beattles)
나 엘비스 프레슬리(Elvis Fresley)가 물러나고 롤링스톤즈(The Rolling Stones)가 그 자리
에 대신 들어앉게 되었다.물론 그들의 노래와 가사의 문화적·정치적 주제기 전자들의 그것
과 다르기는 하지만,  그래도 똑같은 점은 취향에 강력하게 호소하고.  같은 레코드 회사와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이다.그리하여 1960년대의 청년문화가  1970년대의 대중문화로 되엇
다.따라서 청년문화가 최조하여 사라지자 대중문화와 고급문화는 또다시 그 간걱이 넓게 벌
어지게 되고, 한때  주춤해썬 대중문화 비판론이 재등장하는 최소한의  근거를 마련해 주었
다. 
  대중문화 비판론의 재등장ㄹ을  일으키게 한 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실상 비판론의 
존재는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내용의 변화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지식인들이 사회에서 차지
하고 있는 위치,  특히 지식인들이 사외헤서 `기존질서의 지도적  위치'에 속하거나 속하고 
있다고 느끼는 그들의 의식과 관련된다. 
  지금까지 대중문화 비판론의 등장을 보면, 지식인들이 권력이나 그 권력을 표현해 줄수 
있는 그들의 신분이 획득했을 때에는 점차적으로 사라졌다.따라서 1940년대 후반에서 
1950년대에 걸쳐 대중문회에 대한 비판론이 그 절정에 달한 것은, 그 시기에 경제적 풍요와 
소비품과 기타 그에 수반되는 대중문화가 크게 상승한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 시대에 
지식인들이 갖는 부와 지위 그리고 권력이 사회변화에 상응해서 상승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실제로 이 시기에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대의 `문화적 무관심`에 
의해서, 또 매카니즘이 자유적이고 진보주의적인 지식인들에 대한 야만적인 공격을 한 결과 
지식인들의 영향력, 신분,권력 등이 크게 위축되었던 것이다.반면에 1960년대에는 
청년문화의 개화와 더불어 케네디와 존슨 대통령 시대에 지식인들의 경제수준이 높아졌으며 
권력 및 지위도 현저하게 상승했던 탓에 대중문화 비판론은 잠잠해졌다.
 현대사회의 한 부분으로 미국사회에 나타나고 있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경향을 보면, 
또다시 대중문화 비판론이 지식인의 문제의식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 것 같다.그 하나는 
학계의 침체현상이다.월남전이 진행되는 기간중의 경기침체는 고급문화 수용자들이 대부분 
자리잡고 있는 대학사회를 강타하였고, 대학인구의 위축과 미국정부의 정치,경제 정책으로 
대학사회에는 불경기가 몰아쳤다. 그 영향으로 다음 세대에 고급문화를 이끌어갈 
잠재인구인 학생들이 장학금 수혜헤택을 받기 어렵게 되었다.뿐만 아니라 닉슨 행정부는 
의도적으로 진보주의적 지식인들의 영향력을 격하시키려 했다.(기타의 전문직, 즉 예술을 
위한 민간 지원이 증가하기는 하였지만).이러한 반지성적인 정책은 포드 행정부에서도 
계속되고, 이것이 미국 중산층의 광범한 지지를 얻게 될 때, 대중문화에 대한 지식인들의 
비판론은 또다시 강력하게 재생된다.
  지식인의 위치에 잠재적 위협이 되고 있는 또 하나의 시대적 경향은 새로운 정치적 
추세속에서 나타난 평등주의 사상의 재등장이다.이 격렬한 평등주의 사상의 출현은 주로 
비지성적 바탕에서 나온 것이다.보다 더 향상된 생활수준을 기대하는 학생,여성,흑인,ㄱ;티 
불평등하게 대우받았던 집단의 사람들은 1960년대 후반부터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경기후퇴와 
인플레이션에 의한 심한 좌절감을 맛보면서 불평등에 대한 이들의 불만이 점점 고조되었다.
  비록 일부 지식인들이 이 평등주의 사상의 재론에 가담했지만,많은 지식인들, 특히 
인문주의 지식인들은 보다 더한 평등화는 고급문화에 위협이 된다는 생각을 갖고 이를 
반대하고 나섰다.이러한 견해가 전혀 이치에 닿지 않는 것만은 아니다. 경제적 측면에서 
보더라도,고급문화는 고급잡지,미술관,음악회 등 기타 고급문화를 보급하는 기관을 
지원하는 부유한 고객과 후훤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그런데 경제적으로 보다 더 평등하게 
된다는 것은 이러한 고급문화를 지원하는 고객과 후원자 수의 감소를 가져오거나 혹은 
최소한 거급문화에 대한 지원액수의 감소를 가져올 것이다.또한 일부 고급문화 옹호자들은, 
보다 더한 평등은 고급문화를 가려내는 엄격한 기준과 그 바탕을 위협할 것이라는 우려와 
함께, 여성이나 소수인종 사람들을 고급문화 생산기관에서 충원함으로써 고급문화의 질이나 
판단기준을 흐리게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고 있다.
  이와 같은 두 가지를 우리는 이해할 수 있지만, 타당한 근거는 없다고 
보아야겠다.왜냐하면 현재의 평등론이 어떻게 변화하던지 고급문화 수용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옹호할 충분한 권위와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예컨대,설혹 소득의 재분배가 
부자의 고급문화에 대한 지원액을 감소시킨다 해도,정부나 민간재단에 의한 고급문화의 
지원이 그 빈ㅂ부분을 다시 채워주게 될 것이다.또한 현재의 고급문화의 지원이 그 
빈부분을 다시 채워주개 될 것이다.또한 현재의 고급문화를 지원하는 실력자가 바뀌고 
고급문화기관들이 여성이나 소수인종 집단 사람들을 대거 고용한다 하더라도 고급문화의 
실연에는 크게 어긋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현재의 고급문화의 수준과 내용을 
결정하는 비판적 평가는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그런데도, 고급문화 옹호론지들의 우려는 
평등주의적 요구와 평등주의자의 대종을 이루는 미국 중산층들에 대해 항상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비판적 지식인들을 더욱 부추킬 것이다.그리하여 대중문화 비판론은 평등론적 
경향을 비판하는 논의로 표적을 바꾸어 다시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대중문화 비판이 앞으로 어떻게 나타났다 사라지든지간에 이 책은 고급문화와 
대중문화간의 갈등보다는 이 양자를 함께 이해하는데 관심의 초점을 둔 것이다.또한 
현대사회에서 대중문화나 고급문화가 다 같이 수행해 나가야 할 역할이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에 또한 관심을 두고 있다.그렇게 함으로써,어느 정도 문화적 갈등론을 
문회적 공존론 보다 더 높은 창조력을 발휘한 어떤 문화에서 보다 더 높은 창조력을 발휘한 
어떤 문화정책에 도달하고자 한다.

    2. 대중문화론의 주요 개념 정의.
  이 문제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기 전에 이 책에서 계속해서 사용되는 몇몇 주요  
개념,특히 매스컬쳐(Mass Culture),포플러 컬쳐(Popular Culture),그리고 양자에 모두 
관련되는 취향문화(Test Culture)에 대한 개념정의를 내려야 한다.
  대중문화란 용어는 독일어의 마스(Masse)와 쿨투르(Kultur)의 복합어이다.매스(Mass)란 
유럽사회에서의 비귀족적이고 교육을 받지 못한 계층으로,오늘날에 와서는 중하 이하의 
노동자계층 및 가난한 사람들을 부르는 말이다.쿨투르는 영어의 하이 컬쳐(high culture)로 
번역되는 고급문화로서 유럽사회의 교육을 잘 받은 엘리트에 의해 수용되는 예술음악,문학 
및 기타 상징적 산물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이러한 예술문화의 애호인들-교양있는 
사람들-의 감정이나 사고의 유형 등까지도 포함해서 말한다.그렇지만 매스컬쳐라고 할 때는 
문화적으로 세련되지 못한 다수에 의해 사용되는 상징산물을 뜻한다.
  확실히 매스 컬쳐란 말은 경멸조의 말이다.매스는 개인이나 집단의 성원이라기보다는 
분별 없는 군집이며,심지어는 폭도라는 뜻까지도 내포하고 있다.그래서 매스 컬쳐란 
vheeh의 비문학성을 뜻하게 된다.이런 부정적인 의미에 반해서 포플러 아트나 프플러 컬쳐 
같은 용어는 긍적적인 뜻을 갖고 있으므로 이 책에서는 후자를 사용하고자 한다.그러나 
이러한 용어 역시 두 가지 종류의 문화, 즉 고급한 것과 대중적인 것이 있음을 가정하는데, 
이 때문에 맥도널드(Dwight MacDonald)는 포플러 컬쳐란 용어를 쓰지 않는다.그는 
고급문화의 산물로 때로는 대중적이며, 그리고 매스 컬쳐라는 말이 대중적 소비라는 의미에 
가장 적절한 개념이라고 생각한다.그렇기 때문에 맥도널드는 오히려 매스 컬쳐란 용어가 
대중문화 개념에 보다 더 정당하다고 주장한다.따라서 맥도널드는 개념적으로 보아 
대중문화와 고급문화는 서로 함께 비교될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포플러 컬쳐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대중문화와 고급문화는 모두 
취향문화로서 오락,정보,인생의 미회의 기능을 수행하며,나름대로 취향이나 미학적 기준 및 
가치를 표현하고 있다.이들 취향문화들을 비교해 보면,고급문화는 다른 문화들과 많은 
유사점을 갖고 있음이 판명된다.
  취향문화들은 여러 가치와 그것들을 표현하는 문화형태로 이루어 진다(필자의 정의).이 
문화형태란,음악,미술,디자인,문학,연극,코미디,시가,비평,뉴스 등과 이들을 표현하는 
매체,즉 서적,잡지,신문,음반,영화,텔레비젼,그림,조각,건축 등이나,심미적 가치나 기능을 
표현하는 기구,의상 자동차등을 말한다.취향문화는 또한 정치적인 가치도 지니고 있다.물론 
정치적인 가치를 명시적으로 표현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이를 암시적으로 내포하고 
있거나,그렇지 않을 때라도 흔히 정치적인 결과를 띠게 된다.
  이 취향문화라는 개념은 하나의 추상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문화가치 자체를 불리시켜 
볼 수 있다.그러나 이러한 분리는 단지 분석적 목적과 차원에만 타당성을 
가진다.왜냐하면,문화란 그를 창조하고 사용하는 사람으로부터 떠나서 존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만약 떠나서 존재할 수 있는 문화라면 그것은 아무도 돌보지 않는 박물관 
속에나 내버려져 있을 그런 문화이다.따라서,취향문화는 그 문화의 창조자들과 향유자들을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다.취향문화의 수용자들이 서로 유사한 가치와 문화내용을 선택하게 
될 때 비럭 이들이 조직적인 집단이 아니라 비조직적인 집단일지라도,취향문화 공중 혹은 
취향공중(taste public)이라 불리게 되는 한 문화적 공중을 이루게 된다. 
  취향문화는 문화적 내용물을 공급하고 전달하는 매체,특히 대중매체까지를 포함한다.또 
이 연구에서 필자는 대중문화와 매스미디어 내용물을 서로 상호교환되는 개념으로 
사용하고자 한다.왜냐하면 오늘날의 대중문화는 대부분 매스 미디어 내용물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일부 대중문화는 아직까지도 가정이나 지역사회에서 문화적 
아마추어들에 의해 계속 창조되고 있다,
  더 나아가서,사람들이 갖는 심미적 가치와 그들이 수용하는 미디어 생산물과 절대적인 
상솬관계가 있는지는 의문이다.또한 미디어가 실제로 그 미디어를 수용하는 취향공중의 
가치를 반드시 잘 표현하고 있는지도 아직 실증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사실 여론조사에서 가끔 보고되는 매스미디어 내용물에 대한 사람들의 불만족 표시를 
보면 매스미디어의 내용과 그것을 선택하는 문화공증이 갖는 가치와의 관계 같은 문제에 
더욱 의문을 갖게 된다.더구나 사람들의 문화적 가치(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그 문화내용을 선택하게 되는지를 함께 검토하지 않은 채, 
단지 수용하는 문화내용만을 보고 추출할 수는 없는 것이다.사람들이 매스미디어로부터 
어떤 매스미디어 내용을 선택했다고 할 때, 물론 고급문화도 이런 경우 마찬가지겠지만, 
그것은 미디어가 그들의 가치를 잘 표현했기 때문이라고만 볼 수는 없고, 그보다는 그 
미디어 내용물이 기타 다른 내용물보다 그래도 좀 낫거나,혹은 덜 나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택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따라서 취향공중의 개념을 좀 더 명확히 한다면 서로 같은 문화내용을 선택한 
문화공중이라는 뜻보다는 서로 심미적 가치를 함께 나누는 문화공중이라고 하는 것이 
좋다.그렇기 때문에 서로 다른 가치를 갖고서도 같은 미디어 내용을 선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선택할 수 있는 문화적 내용들과 사람들의 미적가치 간의 관계나,이들 
문화적 내용물의 실제의 선택과 수용자의 가치 사이의 관계는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 연구에서의 그런 것이 밝혀질 때까지 우선, 현존하는 문화적 내용이 사람들의 
가치를 표현하며, 같은 문화적 선택을 하는 취향공중은 서로 유사한 가치를 갖고 있을 
것이라는 잠정적인 가정을 해보기로 한다.다음의 장들에서의 논의는 이런 가정 위에서 
전개된다.
  취향문화를 여기서는 광으로 정의했기 때문에 그 포함범위가 아주 
넓다.그렇지만,인류학자들의 문화에 대한 개념보다는 그리 넓지 않은 편이다.취향문화의 
개념범위를 한정시키기 위해서 취향문화의 개념이 갖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뜻을 
정리한다.
  첫째로는 취향문화를 여가문화(culture of leisure)또는 자유시간의 문화로 국한시켜 
조는 것이다.그러나 이렇게 되면 문화의 여가적 가치란 비여가적 가치와 따로 떼어서 놓을 
수 없다는 점에서 너무 좁은 의미로 사용되는 결과가 된다.
  둘째 방법은,취향문화를 심미적 문화(aesthetic culture)로서 국한시켜 보는 
것이다.그러나 이 졍우에는 심미적 가지와 실용가치의 구분에다 너무 그 뜻을 고착시키고 
있는 감이 있다.
  셋째 방법으로, 취향문화를 선택문화(culture which result from choice)의 뜻으로 
규정짓는 것이다.이를테면,취향문화란 사람들이 골라서 선택하게 되는 여러 가치나 
제도(문화)와 관련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문화이다.예를 들면,오늘날 냉장고는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문화적인 문화제품으로 되어 있어,냉장고 없이 생활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그러나 냉장고를 구입할 경제적 능력이 모자라거나 고급 냉장고를 들여 놓을 처지가 
못되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여러 가지 다양한 종류의 유형의 냉장고 중에서 어떤 것을 
구입할 것인가를 비교적 자유로이 선택 할 수 있게 되었다.이때 이 냉장고의 종류나 유형의 
선택은 그 사람의 취향문화를 적용한 선택인 것이다.
  그렇지만,정치적 태도나 활동 같은 것은 취향문화라고 하기 어렵다.물론 취향이 정치적인 
측면에 어떤 역할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정치행위가 선택의 문제라고 할 수는 없으며 
따라서 취향문화라고 볼 수 없다.사람들의 정치적 가치가 경제적 입장이나 그 사람의 
직업ㅂ, 혹은 종교 등에 의해 결정되는 한,선택은 주어진 조거하의 상황에서 이미 제한 
되었다고 볼 수 있다.더구나 사람들의 가치를 표현해 주는 구체적인 가시적 산물이 없는 
상태에서는 선택이 제한되었다는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미국의 어떤 공장 노동자가 미국 
공화당 지지자인 경우라도, 같은 공화당에 지지표를 던지는 공장 간부들과는 정치적 가치를 
달리하게 되는 것이다.또 어쩌면 이 양자가 공히 그들 자신의 가치를 표현해 주는 정당이 
없을 수도 있다.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만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그 외의 다른 것을 택하고 싶어도, 이러한 상황에서 주어진 것 중에서 
그래도 덜 나쁜 것을 택하게 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취향이 정치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는 
주로 선거사 압후보자르르 선택하는 때일 것이다.출마한 정치인들은 단순한 직업적인 
정객으로서보다는 인격체로서 나섰기 때문에 그들 고유의 문화적 위치(신분)를 드러내기 
마련이다.대부분의 미국 정치인들은 대부분 스스로 중류 문화계층에 속하는 정치인으로 
자신의 이미지가 부각되기를 원하며,또 실제로 중간급의 문화계층에 속하는 정치인이 
되고자 한다.
  넷째 방법으로, 취향문화를 부분문화(Partual culture)로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취향문화는 생활의 일부분에 필요한 가치와 상품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극소수의 고급문화 
혹은 대중문화의 중독자들이나 일부 전문적인 문화창조자들의 경우를 제외하면 취향문화는 
생활전반에 걸쳐 있는 것이 아니다.그러나 취향문화가 부분성을 띤 문화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문화의 여타 부분과 연결되어 있다.그러므로 취향문화의 가치가 그 문화를 수용하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다른 가치,예컨대, 작업이나 가정생활에 대한 가치등과 유사하게 
나타난다.이렇게 부분문화로서 여러 가지 종류의 취향문화가 존재하는 이유는 실은 미국과 
같은 사회가 문화적으로 복합적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미국문화라는 공핵은 이를 
둘러싸는 여러 하위 문화로 이루어져 있다.그런데 실상 이 공핵이 되는 미국문화는 그 
내용이 모호하고 한정된 것이어서 누구도 이를 명쾌히 설명하지는 못하였다.어쨌든 
결과적으로 취향문화를 하위문화들로 보눈 것이 보다 더 적절한 개념설명이라 하겠다.
  끝으로 다섯 번째 방법으로, 취향문화는 대부분의 경우 대부부의 사람들에게 
대행문화(vicarious culture)로 나타나는 것이다.이는 사람들의 실제 삶으로부터 
표출된(lived culture)가 아니고 오락물 속의 가공적 인물들이나 뉴스에 오르내리는 
인물들의 행동방식을 그려주는 그런 문화를 보는 것이다.대행문화와 생활문화의 관계, 
예술과 생활의 관계는 참으로 복잡하다.어떤 때는 이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모방하가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양자가 서로 여러 가지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별도로 진행되고 
있다.앞서 언급된 바 있는 고급문화든 대중문화든 지나친 문화의 탐닉자 또는 전문적 
문화창조가 같은 이들은 자신의 취향문화 속에 들어가 빠져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취향문화를 정보나 오락,자기 표현, 자기치료(Therapy)나 도피의 한 
수단으로 이용할 뿐 이를 생의 바깥에 두고 있다.수많은 조사연구에도 불구하고,아직도 
대중문화가 실제 생활문화에 미치는 영향이나 대행문화가 사람들에게 장용하는 기능은 
정확히 밝혀지고 있지 않다. 
  이 책에서 사용될 다른 용어들도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중문화는 고급문화를 제외한 모든 취향문화를 뜻하는 경우가 있다.취향문화는 문화적 
내용, 산물, 혹은 문화적 항목으로 이루어진다.여기서 내용이라 함은 영화나 혹은 영화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와 같은 것을 의미한다.문화적 내용물의 창조자라고 할 때, 이 뜻은 
고급문화를 창조하는 진지한 예술가와 대중문화의 예술가, 즉 매스미디어에 고용된 작가나 
연출자 모두를 의미한다.다만 여기서 창조자(creator)와 의사결정자(decision maker)는 
구별할 필요가 있다(예를 들어, 영화제작을 관장하는 영화 프로듀서는 문화창조라기보다는 
의사결정자이다.그러나 텔레비젼의 경우는 다르다.텔레비젼 푸로듀서는 영화의 감독에 비할 
수 있으며 창조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사람이다). 
  또한 심미적이란 말도 여기서는 퍽 넓은 의미로 사용된다.미(美)나 취향의 기준을 뜻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문화수용에서 표현하고 만족하는 다양한 정서적 지적 가치도 뜻하게 
된다.실제로 사람들은 심미적 기준을 고급문화에만 적용시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취향문화에 다 적용시키고 있다고 본다. 이 책의 용어 가운데는 더러 시장경제론에서 
원용한 것이 있는데, 이런 용어가 문화분석에 어울리게 매력있는 어휘가 아날지 모르지만 
비교분석을 용이하게 해 준다.모든 취향문화들이 서로 비교될 수 있다는 가정은 이 연구의 
주창의 핵심이며, 이는 앞으로 전개할 분석론이나 평가론에 기저를 마련해 준다.
    
    2장 대중문화의 비판론 
  대중문화 비판론은 약 2백 년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현대의 대중문화 현상에 
대한 현대적 비판론은 다음 네 가지 주제의 주장들이다.
  (1) 대중문화 생산의 부정적 측면
      대중문화는 고급문화와는 달리 바람직 한 것이 못 된다. 대중문화는 수용자에게 쾌락  
      만을 주기 위해서 영리추구에만 마음을 두고 있는 기업인에 의해 대량으로 생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2) 고급문화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
      대중문화는 고급문화를 차용하여 만들어진 것이며 이로 인해 고급문화가 저속해진다.  
      또한 고급문화를 창조할 많은 재능있는 사람을 빼내감으로써 재능있는 자원을 고갈시  
      킨다.
  (3) 대중문화 수용자에게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
      대중문화 내용물의 수용이 가져오는 결과는 가장 좋은 의미라 하더라도 피상적인 만  
      족을 가져다주는 정도이며, 가장 좋은 않은 의미는 수용자의 정서에 대단히 유해한   
      결과를 일으킨다. 
  (4) 전체 사회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
      대중문화가 사회적으로 광범위하게 파급되면, 문화, 문명의 질을 떨어뜨릴 뿐만 아니  
      라, 수용자의 수동성을 조장하여 전체주의에 이르게 될 위험성을 
가중시킨다.수동적인        수용자는 독재자의 선동을 위한 대중설득 기술에 쉽게 
말려들게 된다. 
  
  이상의 대중문화 비판론 속에 담겨 있는 개별 비판자들의 각각의 견해를 하나하나 지적할 
수는 없겠지만, 여기서 이 대중문화 비판론 네 주제를 좀더 자세히 논하고자 한다.그리고 
나서 이들 비판이 옳고 그름도 아울러 밝혀보고자 한다.불행하게도, 이들 비판론의 
주장들을 실증적으로 밝힌 조사결과가 거의 없기 때문에 필자의 개인적인 관찰이나 인상 
혹은 사변 등에 의존하는 경우도 더러 있을 것이다.많은 경우, 대중문화 비판론은 
실증적으로 밝힐 수 없는, 가치가 개입된 명제에 초점을 두고 있다.따라서 그런 경우에는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 가정들을 분석하여 타당치 않거나 부당ㅎ나 점을 밝힐 것이다.

    1. 대중문화의 상업적 특성
  대중문화가 생성되는 과정에 대한 비판은 다음과 같이 상호관련이 있는 세 가지 점이 
지적된다.즉 대중문화는 영리추구를 위하여 조직된 기업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 또 
이러한 이윤추구를 위해서는 대중에게 영합하는 동질적이고 규격화된 제품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는 점, 그리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창작자를 대량생산 공정의 한 노동자로 
전략시켜, 창작자 자신의 고유한 가치나 기량을 표현하는 것을 포기하게 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는 점이다.
  한 예로, 로웬달(Leo Lowenthal)은
    현대문명의 기계화된 작업과정에서 개인이 약화되고 대중문화의 출현을 초래하여, 이 
대중문화는 민족예술이나 고급예술을 대체하게 되었다.대중문화 내용물에서 예술의 
참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대신 대중문화는 각종 매스미디어에 실려서 대중문화의 참모습 즉 
표준화, 규격화, 보수성,허구, 조작된 서비성 상품(manipulated consumer goods)등의 
특성을 나타낸다.
  고 술회하고 있고, 맥도널드(Dwight ManDonald)는
    대중문화는 상부로부터 강요된 것이다.대중문화는 기업인에게 고용된 기술자에 의해 
가공된 것이며, 그 수용자는 수동적인 소비자일 뿐인 존재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다만 대중문화라는 상품을 살 것인가 사지 않을 것인가를 선택하는 정도의 
것이다.저급문화에 군림하는 기업주는 간단히 말해서, 이윤을 높이고, 그들의 지배적인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대중의 문화적인 수요를 악용하고 있는 것이다.(Dwight MacDonald, A 
Theory of Mass Culture, Rosenberg and White(eds), Mass Culture, P.55.)
    라고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비판은 고급문화, 즉 비상업적이고 이질적이며 표준화하지 않은 문화내용을 
생산하며, 수용자의 요구에 응하기보다 개개의 창작자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도록 복돋우는 고급문화와의 대비를 은연중에 내포하고 있다.

  1) 두 문화의 차이 
  대중문화의 생산과정과 관련된 세 가지의 비판적 주장을 뒷받침해 주는 실증적이고 
체계적인 증거자료가 희박하지만, 경제적인 조직으로서의 대중문화와 고급문화 생산의 
차이는 주장하는 것보다 그리 크지 않다.분명히 대중문화는 수용자를 최대한 확보하려는 
이윤추구의 기업들에 의해 공급되고 있기는 하지만, 고급문화의 경우도 역시 정부의 보조나 
부유한 독지가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는 마찬가지로 고급문화 수용자를 최대한 확뵤하려 
한다.비록 할리우드 영화사나 뉴욕 메디슨가 광고회사들의 치열한 경쟁과 시장성에만 눈이 
어두워져 있는 분위기에 대해서는 많이 언급되었지만, 미술관, 고급잡지나 서적출판사의 
세계도 고급문화 수용자를 대상으로 하는 치열한 경쟁의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실제로 
고객을 기만하고 경쟁자들보다 유리한 입장에 있어야 하겠다는 강박관념은 
대중문화에서보다 일부 고급문화에서 더욱 현저하게 나타나기도 한다.예컨대 미술계이서는 
시장이 극히 협소하기 때문에 사업으로서 경쟁을 더울 치열하게 만들고 있는 형편이다.
  대중문화와 고급문화의 가장 큰 차이는 전체 수용자의 크기와 이질성에 있다 
하겠다.고급문화는 극히 적은 수의 사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아마 그 수가 많아야 미국의 
경우 전국적으로 50만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그에 비해 인기있는 텔레비젼 프로그램은 
일시에 4천만 명 이상의 시청자를 가질  수도 있다.대중문화의 수용자는 그 수가 엄청나게 
많기 때문에, 그들은 더욱 더 이질적이게 된다.고급문화 수용자는 그 취향에 있어 개성이 
강하다고 자부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대중문화 수용자보다는 동질적이다.문화수용자의 
크기를 논하면서 대중문화가 고급문화와는 달리 대량생산적 문화라는 특성이 지적되고 
있지만, 고급문화 역시 책이나 음반, 영화 등의 경우는 마찬가지로 대량생산적인 문화라 
하겠다.원화를 구입할 수 있는 경제적 여유가 있는 고급문화 수용자는 대중문화 수용자와 
마찬가지로 대량생산된 원화의 복사물에 만족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보통사람의 수입 능력으로 구입할 수 있도록 문화를 염가로 생산하려는 대중문화 
창조자들은 대중문화 수용자들이 서로 공통으로 갖고 있는 심미적 수준을 찾아 문화내용을 
맞추어 나가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의미있게 생각하는 내용을 그 
문화내용으로 담을 수밖에 없다.그렇다고 그 결과 때문에 비판자들의 주장처럼 대중문화가 
고급문화보다 더욱 동질적인 내용으로 되는 것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대중문화는 보다 더 표준화되고, 도식적이며 상투적인 특성이나 구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그러나 고급문화라고 해서 이런 표준화로부터 아주 벗어난 것은 아니다.예를 들어 
이른바 순수문학 소설들이 청년예술가의 문제를 주로 다루고 있는데, 이는 
조이스나(J.Joice)나 로렌스(D.H.Lawerce)로부터 차용된 것으로, 전형적인 한 청년이 
예술가로서의 자기 자신의 모습, 창조적 개성을 발전시키려는 노력을 그려내는 등의 
도덕성을 보여주고 있다. 대중문화로서의 자기 자신의 모습, 창조적 개성을 발전시키려는 
노력을 그려내는 등의 도덕성을 보여주고 있다.대중문화로서의 서부극들은 고급문화의 
코미디와 비교할 때 크게 다른 것만큼 대중문화의 서부극도 대중문화의 홈코메디물과 
비교할 때 크게 다르다 하겠다.
  반대로, 단일 장르에서의 상이성 역시 고급문화의 경우보다 대중문화에서 더 적다고 말할 
수고 없다.바로크 실내음악에 여러 종류가 있듯, 록음악도 여러 다양한 종류가 있는 
것이다.다만 음악 연구자들이 주로 전자의 음악만 연구하거나 널리 알리고 있는 
것이다.고급문화에 있어 그 형식이나 실체가 평자드에 의해 논의되고 학자들에 의해 유파로 
분류되는 상이성처럼, 눈에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대증문화 역시 많은 
상이점을 갖고 있다.여러 가지 면에서 고급문화에서의 유파는 대중문화의 여러 양식과 같은 
것으로 비교될 수 있는 것이다.왜냐하면 양자가 다 그들이 당면한 창조적 문제를 풀어보는 
일 반성을 띤 표현이기 때문이다.
  각 취향문화들은 자신의 문화가 더 다양성이 있으며, 또 있어야 한다고 민감하게 
반응하며, 타문화에 대해서는 단조로울 것이라고 단정해 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실제로 
고급문화가 대중문화보다 더욱 다양성이 많은지 하는 문제는 보다 더 조심스럽게 두 문화를 
비교연구해 보아야 한다.두 문화내용이 갖는 그 독창성, 혁신적인 변화성, 실험정신 등과 
같은 것도 마찬가지로 조심스럽게 두 문화를 비교연구를 통해 관찰해 볼 문제인 것이다.양 
문화가 다 혁신이나 실험을 권장하지만, 그것이 수용자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에는 
아루어 질 수가 없는 것이다.고급문화의 경우는 문화적 실험이 창작자 당 시대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하더라도 후대에는 고전이 될 정도로 받아들여 질 수도 있다.그러나 
대중문화의 경우는 실험 당시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지 않으면 망각되고 만다.그렇지만 양 
문화 모두 문화적인 혁신을 일으키는 어렵고 극히 드물다.그런데도 창조적 혁신이 
고급문화에서 이루어 질 때는 크게 찬양되고 부각되는 데 반해, 대중문화에서는 으레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고급문화는 대중문화에 비해 시대성이 덜하여, 고전은 계속해서 
현대의 문화수용자들에게서 되살아난다.대중문화 역시 1960대 후반에 들어와서 복고풍에 
대한 향수로 이들의 상업성이 인정되자 대중문화의 고정이라 할 만한 것들이 다시 
등장하기는 했다.그러나 이 경우도 대개는 현대적인 형태로 다시 만들어졌을 뿐이다.

    2) 창작자의 차이 
  대중문화와 고급문화 창작자들의 창작동기, 방법 및 역할의 차이도 일반적으로 지적된 
것보더 훨씬 적다.많은 관련연구를 통해서 볼 때 창작자들은 대중문화에서는 물론 
고급문화에서조차 실제의 수용자든 상상속의 수용자든, 이들 수용자들과 커무니케이션을 
하고 있다.그렇기 때문에 흔히 말하는 것처럼 고급문화 창작자들은 각자 자신만을 위해 
밀폐된 곳에서 혼자 고독하게 창조작업을 하고 그 반면에 대중문화의 창작자들은  자신의 
창작가치는 극도로 억제하고 모든 가치를 수용자에게 두며, 그들에게 오락만을 제공한다는 
식의 고식적인 견해는 모두 그릇된 것이다.
  대다수의 대중문화 작가들도 고급문화의 예술과들과 마찬가지로 그들 스스로의 가치나 
취향을 표현하고자 하며, 수용자나 미디어 기업주들의 통제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이와는 
반대로 순수한 예술가들 역시 그들의 동료예술가나 예술수용자들의 긍적적인 반응을 얻기를 
바라고 있으며, 그들의 작품 역시 고급문화의 창작자들이 대상으로 하는 수용자들의 가치와 
타협한 결과이다.물론 일부 고급문화의 예술가들, 특히 자유기고가로 일하는 사람들은 
수용자의 가치보다 그들 자신의 가차를 우선하며, 자신의 작품이 소수에게만 받아들여지는 
것까지도 감수하면서 창작활동을 하는 경우도 있다.반면에 많은 대중문화의 창작자들, 특히 
고용되어 일하고 있는 이들은 비상품적인 것을 만들 수 없으며 보다 더 많은 수용자를 흡수 
할 수 있도록 대중문화 내용을 제작해야 한다.심지어 개인의 가치는 조금도 내세울 수 없는 
경우도 있다(이러한 것들이 양 문화의 기능의 차이인지, 문화창조제도 내에서의 직업적인 
지위에서 오는 결과인지는 좀더 검토해보아야 할 문제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대중문화의 창조자 역시 수용자에게 그 자신의 가치나 취향을 전하고자 
하며, 수용자의 취향을 높이고자 하는 대중교육자로 자처하기 한다.인기있는 텔레비젼 
연속극의 작가들을 인터뷰한 결과를 보면, 작가들은 자신의 가치를 반영하고자 하며, 특히 
도덕적이고 교훈적으로 전달하고자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그런데 텔레비젼 프로듀서들이 
이러한 작가의 창작가치를 거절하는 경우-실제로 가끔 거절을 한다-가 있는데, 이때 
프로듀서들은 작가 없이는 제작을 진행해 나갈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작가와 타협을 하게 
된다.대중문화의 작가들 역시 고급문화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가치를 양보하기를 
주저하기도 한다.그러나 제작을 하는데 있어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고 예산에 융통성이 있는 
영화나 연극의 경우 그같이 타협을 할 줄 모르는 작가는 다른 작가로 대체될 수도 
있다.그래서 영화나 연극이 공연(상연)되기까지 여러 명의 작가나 연출가를 거치기도 
한다.그런가 하면 고급문화의 경우에도 수용자를 고려하지 않고 창작하는 예술가들은 
매정하게 외면되기 마련이며, 이들의 작품은 미술관이나 도서관, 기타 학문적 연구기관에나 
가야 찾아볼 수 있을 정도가 된다. 
  작가와 프로듀서 간에 갈등이 되는 주요 이유 중에 하나는 대중문화에서 문화창작자와 
문화수용자 사이에 존재하는 계층의 차이나 교육적 차이와 관련돤 문제일 
것이다.고급문화의 경우는 이같은 차이가 존재하지 않거나 최소한 대중문화의 경우처럼 
심하지는 않다.많은 대중문화의 창작자들은 그들의 수용자보다 교육정도가 높고, 
신분상으로도 중산층 이상에 속하고 있으면서, 이를테면 중산층 이하의 수용자를 위해 
대중문화를 창조해야 하는 것이다. 때문에 가치나 취향에 있어 이들간에 어느 정도 차이가 
있는 것을 불가파하다고 하겠다.
  대중문화 창작자들은 그들의 수용자보다 높은 신분(지위)에 있기 때문에, 그들 자신의 
취향을 더 낮은 신분의 수용자에게 강요하라고 하지만, 프로그램 인기측정이나 극장 
매표성적에 크게 의존하여 활동하면서 가능한 한 보다 더 많은 수용자에게 작품이 
수용되도록 하려는 프로듀서들로서는 작가의 그와 같은 가치 및 취향의 강요를 막을 수밖에 
없다.텔레비젼 프로그램들(또는 영화)을 보는 수용자들이 계층적으로 연령면에서 아주 
이질적인 구성일 경우, 다른 수용자들에게는 잘 받아들여질 수 없을 것이다.이럴 때 
프로듀서와 작가와의 갈등은 대부분 어떤 수용자층-좀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이 수용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층-에 우선 순위를 둘 것인지에 대한 이견인 것이다.그런데 수용자가 
동질적인 경우에는 작가와 수용자의 간격은-그리고 프로듀서와의 간격도-훨씬 좁혀질 수 
있을 것이며, 또 실제 많은 경우에 작가들은 그들의 수용자와 취향을 공유하고 
있다.사실상, 대부분의 인기있는 대중문화 창작자들은 그들의 작품 수용자들과 
사회경제적*교육적으로 비슷한 배경을 갖고 있으며, 따라서 비슷한 취향을 가지고 있다.이 
점은 실제적인 혹은 이상적인 민속예술가와 그의 수용자를 위해 민속문화를 창조하는 
상황과 비슷하다.고급문화와 그 수용자와의 간격은 대중문화의 간격보다 훨씬 더 
좁혀진다.이는 수용자의 수가 적고, 보다 더 동질적이며 창작자의 보통 같은 교육 및 
계층적 배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작자와 수용사 사이에는 일정하나 간격이 있기 마련이다.그것은 
창작자는 그들의 작품(작업)으로 문화를 창조하는 일을 하고 있지만, 수용자는 그렇지 
못하며, 문화적 산물 자체에 창작자가 흥미를 갖는 것 만큼 수용자도 흥미를 가지거나 이에 
자아몰입(自我沒入)을 그렇게 많이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따라서 창작자에게 문화가 
그들의 인생자체의 기준아 되지만 수용자들은 문화를 정보나 수용자의 차이에 대해서는 
창작자 지향성(creator-oreientation)과 수용자 지향성(user-orientation)으로 나누어 
다음에 다시 논의를 하갰지만, 이는 고급문화는 물론 대중문화에서도 존재하는 문화에 대한 
각가 상이한 이해에서 오는 차이이다.또한 이는 예술가와 그들의 작품 수용자간에 존재하는 
가치와 취향의 차이라기보다는 예술가가 작품 수용자들로부터 갖는 소외가 보다 더 중요한 
원인이 되기도 한 것이다. 
  대중문화 비판자들은 창작자 지항적인 사람들이다.그래서 이들 비판론에 따르면 
문화사용자들 창작자의 뜻에 따라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창작자와 그 사용자의 견해차는 
있을 수 없으며, 문화를 창작자의 견해의 견해에 따라 다루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문화사용자들도 문화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가질 권리가 있는가, 또 이같은 
문화사용자들의 견해가 문화창조에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은 하나의 가치적 문제이다.이 
문제는 제 3 장에서 논의될 것이지만, 사용자들도 그러한 권리를 갖고 있다고 
본다.왜냐하면, 수용자 없는 문화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수용자가 창작자를 
필요로 하는 만큼 창작자도 수용자를 필요로 하며 이 양자는 문화 산물에 필수적이다.
  더 나아가서, 대중문화 창작자들이 수용자의 견해를 외면할 수도 있는 자유가 그렇게 
제한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고급문화 창작자들의 자유도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무한한 것만은 아니다. 실례로 할리우드 촬영소의 음악인에 관한 연구에서는, 영화의 
배경음악을 연주하는 음악인들은 교향악단에서 연주할 때보다 오히려 창조적이며, 
작업조건도 보다 더 자유스럽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모든 매스미디어에서 성공적인 
창작자들은, 고급문화의 경우에도 그렇지만, 수용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형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수용자에게 있어 중요한 요인과 대립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하고 싶은 
것이나 옳다고 생각되는 것을 일반적으로 자유로이 창작하는 사람들이다.물론 성공적인 
창작자들을 보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들이 일하고 있는 회사와 기관의 기본목표나 
정책을 받아들이고 있는 입장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게 된 사람들이기는 
하다.고급문화나 대중문화에서 젊은 신진 작가들은 문화에 대한 그들의 혁신적인 것이 
받아들여질 때까지, 또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 창작에 많은 방해를 받게 된다.
  실제로 창작자의 자유는 그들이 고급문화의 작가인가, 대중문화의 작가인가 하는 점에 
있다기보다는 개별적으로 작업하는 작가인가, 집단성의 매체속에서 작업하는 작가인가에 
의해 더 많이 좌우되는 것이다.또 소설가는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의 완성된 작품을 만들어 
낼수 있지만, 극작가, 영화작가, 음악가들은 불가피하게 집단적인 
사업(group-enterpreise)의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다. 또 그들의 작품은 최종적으로 
완성될 때까지 그 창작과정에 참여하는 집단의 타구원성에 의해 변경되기도 한다. 소수의 
수용자들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고급문화는 자주 사적인 미디어(individual media)를 
통해 전달되기도 하지만, 극작가와 연출자 사의의 예술적 갈등은 고급문화적인 연극이나 
대중적인 연극에서나 마찬가지로 존재하는 것이다.대중문화에서는 아마도 전체 수용자의 
어누 뷰뷴울 겨냥할 것인가에 대해 좀더 심한 이견과 갈등이 있겠지만 이것은 수용자의 
크기와 이질성의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가끔 고급문화의 내용물(작품)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게 되면, 대중적 인기를 끌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작품을 바꾸도록 창작자에게 
압력이 가해지기도 한다. 또한 대중ㅁ누화의 창작자들은 고급문화의 창작자들처럼 자신의 
이념을 강력히 주장하여 투쟁을 하기도 한다.그런데도 대중문화 창작자들을 다만 
수용자들이 원하는 것만 주는 기회주의적인 일꾼으로만 생각하는데, 이런 생각은 
불공평하고 부정확하며 피상적인 고정관념에서 기인한다.

    2. 대중문화가 고급문화에 주는 위험.
  대중문화 비판론의 두 번째 주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비판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하나는, 대중문화는 그 내용을 고급문화로부터 격하시킨다는 비판이요, 또 하나는 
대중문화는 그 경제적인 흡입력으로 잠재적 고급문화 창작자들을 유혹해 냄으로써 
고급문화의 질을 떨어뜨린다는 비판이다.이같은 저속화 과정을 반 덴 하아그(Van Den 
Haag)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대중문화로 인하여 과거에 있었던 고급문화가 타락하게 되는 것은 직접적으로 대중문화와 
뒤섞이어 혼탁화되는 것으로 시작해서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바흐의 음악은 
스토코프스키(Stokowski)가 달콤하게 즐기도록 했고, 비제의 음악은 로저스(Rogers)와 
해머스타인(Hammerstain)에 의해 상스럽게 되었다.-프로이트(Freud)의 심리의 분석은 
신문지상을 통한 독자와의 상담 같은 칼럼으로 속화(俗化)했다.(즉, 어떻게 하면 잘 
적응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 같은 내용으로).고급문화의 타락은 또한 그 내용 일부가 
잘려나가거나 간추려지고 요약된 형태를 취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대중문화에 의해서 
고급문화의 내용은 삭제되고, 요약되며 단순회되고 개자되는데, 이렇게 되면 원작의 
내용과는 전혀 다르게 되며 원작이 주는 미적(美的)체험은 사라져버린다.
  두 문화 상호간의 서로 내용을 차용하는 것이 무엇이 나쁘냐고 의의를 제기하기도 
하지만, 대중문화는 고급문화로부터 내용과 형식을 빌어오고 있음으로 해서 비판을 받는데 
그 반대인 경우도 마찬가지로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알 필요가 있다.다시 말해서 고급문화도 
그 문화내용을 대중문화에서 빌려올 수 있다.이를테면 고급문화의 작곡가가 그의음악을 
재즈나 민속음악으로부터 빌려오고있는 경우라든지, 고급문화적 연극작품을 쓰는 작곡가가 
그의 작품을 민속과 신화로부터 빌려오는 경우라든지, 고급문화의 건축이 민간의 
건축양식을 원용하는 경우라든지, 고급문화의 미술가들이 원시미술을 차용하는 경우 등 
얼마든지 그 예를 들 수 있다.
  과거에는 고급문화는 민속예술로부터, 특히 서민들이 민속예술에 흥미를 느끼지 않게 된 
연후에 그 문화를 많이 차용했었다. 그러나 민속예술이 완전히 없어지자, 고급문화는 이제 
서민을 위한 문화로서의 과거 민속예술을 전승한 오늘의 상업적인 대중문화로부터 빌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과거 그들의 전임 작곡가들이 고급음악을 민속음악에서 
빌려오던 것처럼, 오늘날 순수음악 작곡가들은 대중음악으로부터 선율을 빌리고 있다. 
올덴버그(Klais Oldenburg)와 같은 현대미술가들은 상업미술이나 만화에서 자유로이 
빌렸다. 아마도 대중문화는 고급문화가 대중문화로부터 차용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취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현상의 상당한 이유는 대중문화 수용자가 고급문화 
수용자보다 더 많고, 따라서 높은 수요 때문에 보다 더 많은 문화적 생산물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만일 고급문화가 대중문화의 수용자가 필요로 하는 
것처럼 많은 양의 문화적 수유를 만족시켜야 하게 된다면, 고급문화도 지금보다 더 많이 
대중문화로부터 그 내용을 빌려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른다. 
  고급문화의 내용이나 형식이 대중문화에 의해 차용될 때, 그 고급문화는 변질된다고 
한다. 그러나 고급문화가 대중문화를 취했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그같은 현상은 일어난다. 
그런데 고급문화의 수용자들은 대중문화가 고급문화 내용을 차용할 때는 자신들의 
고급문화의 권의가 실추되며 이로 안해 고급스런 자신들의 문화가 오염된다고 불쾌하게 
여기는 반면,대중문화의 수용자들은 고급문화가 대중문화 내용을 차용하거나,대중문화가 더 
고급스러워질 때 이를 아주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문화의 저속화(低俗化)에 대한 비난을 옳게 이해하려면, 창작자 개인에 미치는 영향과 
전체 사회문화에 미치는 영향을 구별해야만 한다.고급문화 창작자들은 그들의 작품이 
변질되는 것을 보면 분명히 고통스럽겠지만,그 점은 대중문화 창작자도 
마찬가지다.그런데도 고급문화 창작자들만이 그들 문화의 변질을 문화의 저속화라고 부르고 
있을 뿐 대중문화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다.문화의 차용이 반드시 고급문화 자체의 저속화를 
가져오게 된다든지,그 생명력을 감소시킨다든지 하는 데 대한 실증적 증거는 아직 
없다.여전히 고급문화는 계속해서 창조되고 있으며,이전에 만든 그의 창작품이 대중문화에 
의해 취해졌다 해도 그 때문에 고급문화의 창조자들이 자신의 창조작업을 그만두게 
되리라고 생각되지도 않는다.
  대중문화가 고급문화 창조의 잠재적 인구를 고갈시킨다는 비난 역시 타당한 주장이 
못된다.오히려 대중문화에서 수입을 올린 일부의 작가들이 그 명성으로 인해 고급문화로 
유인될 수도 있는 것이다.또 고급문화 창작자들이 대중문화 창작활동을 통한 수입으로 
생활을 영위한다고 해서 반드시 고급문화에서의 그들의 창조성이 저하된다고 볼 수도 
없다.이같은 대중문화 비판론을 실증적으로 밝히기 위해,대중문화를 생산하는 것으로 
생활을 꾸리던 고급문화 창작자들을 고급문화에만 전념토록 하고 그 연후에 이들의 전후 
창작상황을 그 전과 비교연구해 보면 모를까,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이같은 비판론은 확실한 
근거가 없는 것이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만일 대중문화가 주는 금전적 보수가 고급문화에게 그렇게 유혹적인 
것이 아니라면,혹은 모든 고급문화 창작자들이 대중문화 분야에서 일을 하지 않는다면,더 
많은 고급문화가 있으리라는 주장도 확실히 알 수 없는 것이다.예를 들면,할리우드의 
순수작가들의 실패에서 볼 수 있듯이 고급문화 작가라고 해서 대중관객을 위해서 잘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또한 대중문화가 고급문화의 잠재적 창작자를 유인하여 빼내지 않는다고 
해서 반드시 고급문화가 더 활기를 띠지도 않는다.현재의 고급문화의 음악을 듣는 
수용인구가 줄지 않고 현재 수준으로 음악인구를 확보한다고 해서 바이올린 연주자들이 
연주할 기회가 더 많아지지는 않을 것이다.또 고급문화의 소설가들이 더 많이 늘어나 
작품의 공급량이 늘어난다면,오히려 현재 개개 소설가들의 적은 판매량 마저 더욱 
감소시킬지도 모른다.고급문화 창작자 수가 늘어나게 될 때,그들 사이의 경쟁도 그만큼 
심해지게 될 터인데, 이것이 고급문화의 활기를 더 진작시킬 것인가의 여부도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만일 대중문화가 없다고 한다면 고급문화 창작자들은 문화적 활동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생계를 유지할 도리밖에 없을 것이다.그렇게 되면,바이올린 연주자와 같은 경우,할리우드 
영화제작소 영화음악 연주나 브로드웨이 뮤지컬 공연음악 연주활동을 할 수 없게 되어 
음악연주로는 생활수단을 마련할 수도 없게 될 것이다.그렇게 되면 이들 음악예술가들은 
생계를 위해 아침 9시부터 저녁 5시까지 음악 아닌 다른 하찮은 노동작업에 매여서 
연주시간이나 연습시간조차 넉넉지 못할 것이다.음악 연주 뿐 아니라 순수문학 작가들도 
마찬가지로 창작활동의 기회가 줄어들 것이다.엘리엇(T. S. Eliot)이 그러했던 것처럼 
작가들은 출판사에서 종일 편집이나 교정 업무나 하고 있게 될 경우가 많을 것이다.
  고급문화를 순저히 경제적인 측면으로만 설명해 본다면,일종의 저임금 노동산업으로 
특징지어 묘사될지도 모른다.이 저임금 노동산업성 때문에 낮은 임금으로 노동을 하게 되는 
일부 고급문화 창조자들은 경쟁산업인 고임금의 대중문화로 옮겨갈 것이다.그래도 남으려는 
고급문화 창조자들은 저임금 노동자격이긴 하지만 신분은 높은 피고용자들이기 때문에 
거기서 얻는 정신적인 보상에 만족을 기대하면서 있다고 볼 수 있다.사회가 전반적으로 
풍요해지면,이러한 정신적인 보상만으로는 매력적일 수도 또 만족할 수도 없는 어려운 
상황에 이른다.그러면 고급문화 창작자들의 경제적인 기대상승을 어떻게 할 것인가.그것은 
이들 고급문화 창작자들의 수입을 증가시켜 줌으로써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지,경쟁산업인 
대중문화를 제거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보다 더 효과적인 
해결책으로는,상업성은 없지만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이들 고급문화를 지원하기 위해 높은 
이윤을 올리는 문화기업에게 세금을 매기는 방법이 그 하나일 것이다.

    3. 대중문화가 수용자에게 미치는 영향.
  대중문화 비판의 세 번째 주제는 더욱 심각한 것으로,대중문화가 수용자에게 악영향을 
끼친다는 비난이다.이 주장에 대해서는 많은 구체적인 영향에 관한 가정이 있다.즉 
대중문화는 대중을 피상적으로 또는 사이비적으로 만족시킴으로써 정서적으로 파괴한다는 
가정(假定),또 폭력과 성(性)을 강조하기 때문에 난폭하게 하고 저속화한다는 
가정,사람들에게 현실을 주시하는 능력을 약화시켜 현실도피적으로 만든다는 가정,음란한 
내용을 공급하기 때문에 정서적인 면에서뿐 아니라 지성적인 면에서 또한 파괴적이라는 
가정들이다.또한 대중문화는 사람들이 고급문화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저해하기 때문에 
문화적인 면에서 파괴적이라는 가정도 있다.
  예를 들면 맥도널드는 “대중문화는 심각한 현실 즉,성,죽음,좌절,비극 등도,그리고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기쁨이나 만족도 다 함께 의미를 갖게 하지 않는 저속하고 야비한 
문화이며, …대중은 여러 세대에 걸쳐 이같은 내용물에 의해 타락되어 이제는 그같은 
조잡하고 쾌락위주의 문화내용물을 오히려 요구하게 되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반 덴 하아그도 그와 유사한 견해를 밝히면서 다음과 같이 비판적으로 말하고 있다.
  모든 매스미디어는 개인적 체험을 메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사람들을 개인적 
체험으로부터 소외시키고,현실로부터,그리고 그들 자신으로부터의 도덕적인 소외를 
심화시킨다.사람들은 외롭거나 권태로울 때 매스미디어에 관심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그러나 매스미디어는 한번 관습이 되면 의미있는 경험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말살시킨다.습관은 점점 더 심화되어 중독처럼 부도덕한 데까지 이르고 만다.심지어는 
대단히 심오한 경험까지도 미디어에 의해 거의 비슷하게 단절되어,케케묵은 진부한 것으로 
만들어진다.…대중매체는 사람들의 생을 그대로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을 약화시켜 버린다.
  이와 같은 유해론적 비판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가정에 근거하고 있다.그것은 
대중문화가 책임을 져야 할 좋지 않은 행위가 실제로 존재하고 널리 퍼져 있다는 것,이같은 
행위유형이 대중문화의 내용물에 담겨 있다는 것,그리고 대중문화의 그런 내용이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가정이다.그러나 이같은 가정들이 실증적 자료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1) 대중문화의 영향
  우선, 대중문화에 노출되고 있는 대중들은 원자화(原子化)되어 있고,대중문화에 중독된 
상태에 있으며,저속한 현실도피자로,현실을 파악할 능력을 상실하게 된 존재로 묘사되고 
있지만,이것을 뒷받침하는 어떠한 실증적 증거도 없다.이같은 서술은 실증적으로 측정되기 
어려운 것이다.그같은 묘사는 그저 입에서 입으로 떠돌게 된다.그렇지만 지역사회 연구와 
같은 사회학적인 조사들을 통하여 대체적으로 드러난 것을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고립되고 원자화되어 있지는 않다.오히려 가족이나 동려집단의 구성원이며, 집단 내에서 
도덕적이고 친절하며,실용적인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그리고 때로는 상당히 
이타적이기도 하다는 것이다.그러나 어떤 긴박한 상황에서 또 위협적이거나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외부 집단인과 부딪혔을 때와 같은 상황에서는 사람들은 잔인할 정도고 지극히 
비정스러울 수도 있다.
  빈민조사들을 보면,전부는 아니지만,일부의 빈민은 사회적으로 지극히 고립되고 위축되어 
있으며 대중문화에 심하게 중독된 상태에까지 이르러 현실도피나 신경질적인 병리현상을 
보이고, 현실세계를 직시하려 하지 않고, 중독상태나 심각한 정신질환으로 빠져드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또한 빈민조사에 따르면 가난한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많이 
매스미디어를 이용하고 있고, 매스미디어를 더 깊이 신뢰하고 있다는 실증도 어느 정도 
있다.뿐만 아니라 정신질환에 관한 조사연구는 빈곤에 수반되는 계속적인 
긴장,위기의식,불안정 등의 요인들이 이러한 정신질환의 원인이 된다는 점을 또한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그런데 빈곤한 사람들은 대중문화가 생겨나기 훨씬 전부터 수세기 동안 높은 
비율로 병리현상의 희생자가 되어 왔고,대중문화 비판론자들이 크게 찬양하는 민속예술의 
만개(滿開)하고 있던 시대에도 이런 병리현상은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심지어 대부분의 빈곤한 사람들조차,대중문화 비판론자들이 
앞서 말한 바와 같은 그러한 행동을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볼 때,비판론자들의 유해론적 
비판은 타당하지 않은 것이다.하지만 대중문화 내용물 속에 비판자들이 지적하는 그런 
특성이 전혀 없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따라서 어떤 효과라는 것은 특정의 미디어 내용이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고 보아야 하며 결론을 내릴 문제인 것이다.대중매체의 영향에 
관한 오랜 조사연구들에서 밝혀진 것은,미디어의 효과는 단순한 파블로프식의 조건반사적 
효과론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비판론자들이 대중문화 내용만을 보고 그 
효과를 추출해 보는 효과론은 온당한 것이 아니다.그보다는 미디어의 내용은 사람들이 
선택하고 반응하는 여러 가지 자극 중의 하나일 뿐이다.
  많은 연구가 보여준 바에 의하면,사람들은 미디어가 제시하고 찬양하는 대로 그들의 삶을 
수동적으로 맞추어 나가려고만 한다기보다는 그들 개인이나 소속집단의 요구에 적합한 
미디어 내용물을 능동적으로 선택하고 있다.그리하여 사람들은 미디어 내용물에 굶주린 
고독한 개인들도 아니며 미디어가 제공하는 내용물을 무엇이나 노예처럼 받아들이기만 하는 
그런 존재도 아니다.그보다는 가족이나 부부,혹은 동년배집단 등 사회구성원으로 그 내용이 
그들 소속집단의 목표나 필요에 적합한 것일 때에만 미디어를 이용하는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수용자를 대중이라고 보는 데는 문제가 있다.더구나 일반 수용자들은 미디어 
내용물에 지나치게 과민한 반응을 보이는 대중문화 비판자들처럼 그렇게 그 내용물을 깊게 
주시하지도 않으며 비판자가 말하듯이 미디어에 의해 그렇게 지배받고 있지도 
않다.사람들은 미디어를 기분전환으로 접하고 있으며,그 내용을 그들의 실생활에 실제로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하지도 않는다.텔레비젼에 나오는 10대 연예인의 열렬한 팬인 
청소년들의 경우에도 연예인들을 그대로 모방하거나 이들 연예인들을 평가기준으로 해서 
이들 연예인들과 비슷한 사람과 데이트를 하기를 원하거나 배우자를 선택하려고 하지도 
않는다.신문지상에서 지적되고 있는 바와는 많이 다른 것이다.
  끝으로 미디어 내용의 선택은‘선택적 지각’에 따라 행해진다는 점이다.따라서 사람들은 
항상 그들의 가치와 일치하는 내용물을 선택하며 대립되는 경우에도 그들 자신의 가치를 
뒷받침해 주는 방향으로 해석하곤 한다.그렇기 때문에 미디어의 일차적인 효과는 새로운 
행위나 태도를 창조해 내는 데 있다기보다는 기존의 행위나 태도를 보강해 주는 데 있는 
것이다.
  근자에 와서 대부분의 효과연구는 텔레비전 폭력물의 영향,특히 어린이에게 미치는 
영향에 집중되고 있다.미국의 폭력 원인과 예방에 관한 조사 위원회(National Commission 
on 
the Causes and Prevention of Violence)가 1969년 실증조사들을 검토한 뒤,텔레비전은 
폭력을 강화시키고 합법화한다고 결론지었으나,텔레비젼과 폭력물 사이에 직접적이고 
의미있는 인간관계가 있다고 결론짓기는 주저하고 있었다.그렇지만 1972년 미국 보건위생 
자문위원회의 연구보고서(Report of the Surgeon General's Advisory Committee)는, 
텔레비전 시청과 폭력행위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두는 결론을 
내놓고 있다.
  그렇지만,현재까지의 조사연구를 일별해 보면, 미디어는 어떤 특정시기에 어떤 일부의 
사람들에 한해서만 폭력적인 태도나 행동을 조장한다는 사실이 발결된다.
  많은 실험실 연구에서,폭력영화가 젊은이들에게 즉각적 충동 및 행위를 유발하도록 
자극한다는 사실이 나타나고 있는 것도 확실하다(또 사실이다).그러나,이러한 효과가 
장기적으로 계속된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연구는 아직 없다.실험실 연구 이외의 
연구에서도 텔레비전 폭력물과 실제의 공격적인 행동과의 상관관계를 간혹 밝혀주고 있기는 
하지만,역시 텔레비전이 그 원인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밝히고 있지는 못하다.또 아직 밝힐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왜냐하면 실제생활에서의 공격성은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는 
집단갈등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인데, 이같은 갈등이 있기 바로 직전에 아동들이 텔레비전의 
폭력물에 노출되었다면 몰라도,그렇지 않다면 텔레비전이 공격성을 유발시킨 원인인지, 
아니면 본래 갖고 있던 갈등에 대해 텔레비전이 공격적인 표현을 하도록 하였는지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텔레비전이나 기타 매스미디어는 대부분의 아동들의 생활에 생각처럼 그렇게 
큰 역할을 하지 않는다.그보다는 아동들에게는 부모나 동년배집단에서 배우는 행동이나 
태도가 훨씬 중요하다.
  ‘외로운 아이들’(loners)은 어떤 면으로는 어떤 집단에도 속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흔히 미디어의 픽션이나 기타 환상물에서 대리만족(substitute satisfaction)을 찾게 
되고,그 때문에 공격성 프로그램으로 쏠리게 된다.이렇게 폭력적 행동을 일으킬 
선우경향(preposition)이 있는 사람이 매스미디어의 폭력물에 영향을 많이 받는 것과 
같이,정서적 장애가 있는 아동이나 성인이 매스미디어의 폭력물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 
간혹 실험적으로 밝혀졌다.
  만약 매스미디어가,대중문화 바판론자나 일부 조사연구자들에 의해 비난받듯이,폭력적 
행위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면 매스미디어가 출연한 이후의 사회는,특히 
미국사회를 예로 볼 때,계속적인 폭력의 증가를 보였어야 할텐데,그에 대한 역사적인 
연구는 그와는 반대로 매스미디어가 출연한 이래로 폭력범죄는 오히려 감소했음을 
보여준다.또한 여자와 남자,빈민과 비빈민은 다 같은 정도의 폭력적 경향을 나타내어야 할 
것이다.그러나 여러 효과연구 결과들을 보면,여자들의 경우 미디어의 폭력물을 보고 나서 
남자들처럼 그렇게 공격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또 경찰의 기록을 
보면,폭력범죄는 빈민층이나 남자에게서 더 많이 발견된다.더구나 매스미디어가 출연하기 
이전 시대부터 빈곤으로 인한 폭력이 많이 있어 왔다.이렇게 볼 때 매스미디어의 폭력물은 
저임금계층의 남아나 성인남자에 특히 영향을 미치며,이의 가장 주요한 원인은 
매스미디어에 있다기 보다는 현실에 폭력이 존재하는 실생활조건에 있다는 가정이 더 
타당성이 있다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여러 가지 면에서 폭ㄹ력적인 사회이다.즉,미국은 외국인이나 소수인종 집단에 
대해서,또는 이단자에 대해서 여러 형태의 폭력을 허용하고 있다.이같은 사회적 폭력은 
각종 매스미디어 내용에서 사실적으로 그리고 비사실적으로 적절히 반영되고 
발표된다.그러한 폭력의 대부분의 원인은 미국사회가 갖고 있는 불평등에 있다.즉,이질적인 
인구구성에 의해 사태가 악화되고 사회적 갈등이 생겨난다.이러한 갈등으로 인해 또다시 
갈등 속에 있는 사람들이 힘으로 해결하기 일쑤며,경찰력이 동원되기도 하는 
것이다.따라서, 모든 매스미디어가 폭력을 다루는 모든 프로그램을 금지할 것을 결정한다 
해도 폭력성이 의미있는 정도로 감소할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성문제와 관련한 매스미디어의 효과에 대해서고 비슷한 결론을 내릴 수가 있을 
것이다.에로틱한 영화가 사람들의 성적 충동을 잠시 일으킬 것이라는 데는 의심할 바가 
없다.그러나 이러한 영화는 오히려 유익할 수도 있다.따라서 반드시 성범죄로 치닫게 하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에 해롭다고 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미국의 외설물과 도색물 관계 
위원회(Commission on Obscenity and Pornography)의 조사보고에 따르면,성애(性愛)를 다룬 
미디어 내용물의 사용이 해독을 미친다거나,치유되어야하는 장가적인 (누적적인) 영향을 
일으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또 덴마크의 경험에서는 도색물 금지법의 철폐가 반드시 
성범죄의 증가를 유발시키지는 않았다는 것이 발견됐다.
  사실상,매스미디어가 성규범에 어떤 깊은 영향을 줄 수 있었다면,현대의 성에 대한 
태도나 성적 행위의 자유화는 오히려 이루어질 수가 없었을지도 
모른다.왜냐하면,매스미디어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성적 자유는커녕 아주 
청교도적이었다.이같은 보수성은 매스미디어 수용자의 다수인 구세대가 가질 소외감이 
두려워서, 실제 젊은 세대 사이에 팽배해 있는 성에 대한 자유스러운 태도변화에 비해 
성문제에 대한 매스미디어의 취급 태도가 훨씬 보수적으로 되어 왔기 때문이다.그리하여 
매수미디어 수용자들이 이들 매스미디어가 가르치는 내용처럼 행동한다면,이중의 
가치기준이 강력히 존재하고 있을 것이며, 젊은 여자들은 처녀의 순결성의 찬미자였어야 
했을 것이고,간통은 그저 도시근교에서나 간혹 볼 수 있어야 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미디어의 폭력물과 성적 내용에 과한 관찰은 대중문화의 다른 비판적 요소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대중문화의 내용물울 객관적으로 살펴보면,많은 것들이 해피엔딩으로 
끝나고 주인공은 초인간적인 엄격한 도덕성과 기타 장점을 갖고 있으며 해결할 수 없는 
여러 문제들도 주인공은 쉽게 해결해 낼 수 있는 것으로 전개된다고 하여,그 허구성이 
비판을 받는다.그러나 대중문화의 내용물에 대한 객관적인 측정방법으로는 수용자들이 
그둘이 보고 읽은 것에 부여하는 이 허구적 내용의 의미를 측정하지는 못한다.그러고 
그러한 의미는 비판자들의 의미와는 다른 경우가 많다.또 그러한 대중문화의 내용이 
바람직하지 않은 효과를 가져온다는 납득할 만한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예컨대 반 덴 하아그는 매스미디어가 ‘대리만족’을 제공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매스미디어를 문제해결의 수단으로 사용하거나 미디어에 실리는 허구(虛構)를 
현실을 설명하거나 이해하는 데 사용하는 사람은 거의없다.따라서 사람들은 매스미디어의 
내용을 액면가치 그대로 현실에 받아들이지 않는다.오히려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잠시 
휴식을 얻기 위해 매스미디어를 사용하며,이같은 매스미디어의 기능에는 환상적인 것이 
사실적인 것보다 더 부합되는 내용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상당수의 아동이나 성인 중에는 그럴 듯하게 정말 있는 것 처럼 꾸며진 
대중문화의 허구적 내용을 실제생활과 엄격하게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다.그러나 대부분의 아동들은 10세가 되기 전에 프리드슨(Eliot Friedson)의 연구에서 
지적되는 것처럼 나이가 들면서 분별력이 늘어나는 성장감산(adult discount)이 
생겨,자라나면서 미디어의 허구성을 점점 파악하게 된다.
  그럼에도 일부 아동들이나 성인들은 여전히 광고의 과대선전을 그대로 믿고 있는 것같이 
보이므로 이들을 그러한 과대광고로부터 보호하여야 할지는 모른다.그렇지만 이때에도 그 
광고의 호소력이 강한 효과를 일으킨 것은 사람들이 본래 그 광고의 상품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지,그 광고 자체가 전적으로 욕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힘을 가졌기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다.사람들이 자신에게 유용하고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물건을 원하는 것이 
잘못돠었다고 탓할 수는 없는 것이다.더구나 광고효과 연구나 광고회사 경영자들의 고민을 
보면,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본 광고내용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고 있거나 광고 메시지를 
잘못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성공적인 광고가 판매량의 명백한 상승곡선을 보여주고 
있지만,이는 구매자 일부 사람들의 행위를 반영하고 있을 뿐,아직 광고와 상품구매결정과의 
상관관계가 명확히 밝혀지지는 않았다.

    2) 뉴스의 영향
  뉴스 보도의 영향에 관해서는 아직 항문적으로 충분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이다.다만 지금까지 부분적으로 연구된 결과에 의하면,뉴스 미디어가 수용자의 
대부분이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보다 더 많은 뉴스를 제공하고 있으며,시청자들은 그들이 
좋아하는 방송국의 뉴스 프로그램에만 주목하려 하지는 않는다는 사실,그리고 그들이 
좋아하는 방송언론이에게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투영하고 있다는 사실 등이 
밝혀졌다.선전이나 다큐멘터리영화의 영향력에 대한 기존의 연구들은 그들이 수용자의 
태도를 거의 변화시키지 못했음을 보여주었다.1968년 미국 시카고에서는 민주당 전당대회 
중에 발생한 경찰의 난동을 전국적인 뉴스 미디어가 모두 보도하였음에도 불구하고,사건 
직후 실시된 여론조사에 의하면 거의 모든 피조사자가 시위측보다는 경찰에 입장에 서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20년 전의 투표행위 연구는 투표자가 매스미디어를 통해 보도되는 
뉴스에 의해 지지할 호보자를 결정하게 되지 않는다고 결론지었고,1960년의 닉슨과 
케네디의 텔레비전 토론에 관한 연구에서도 역시 비슷한 결론이 내려졌다.이 텔레비전 토론 
이후,지지 정당에 대한 충성도가 감소하여 많은 투표자들이 의사결정을 보류하거나 
무소속이 되었으며,정치후보들은 이들 유권자들에게 지지를 호소하는 노력으로 텔레비전을 
이용한 정치광고를 적잖이 했다.이같은 텔레비전 정치광고가 항상 효과적이었던 것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또한 1968년,1970년,1972년의 선거에서 선전을 주로 텔레비전에 
의존했던 후보들이 계속 패했음에도 불구하고,아주 극히 적은 수의 선거인에만 미친 
영향일지라도 선거에서 근소한 차로 승리했을 때에는 텔레비전의 의미는 아주 크다 
하겠다.정치광고의 이용에서 경쟁적인 후보-혹은 이슈-간에 그들이 갖는 재력이 
불균등하거나 부유한 후보가 매스미디어를 지배할 수 있을 때에는,매스미디어는 상당히 
해로운 작용을 하게 된다.이 경우 문제는 매스미디어에 있다기보다는 어느 한 쪽에만 
정치적인 이점을 가져다줄 수 있는 경제적인 불평등에 잇는 것이며,또 수용자들이 경제적 
위력을 가진 자로부터 민주적인 기구들을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뉴스 미디어가 미치는 영향은 대부분 정치광고의 결과라기보다는 뉴스보도의 결과이거나 
뉴스가 보도되는 양식에서 보는 결ㄹ과라고 볼 수 있다.일부 매스 커뮤니케이션 연구자들은 
뉴스 미디어의 일차적인 영향은 정치적 논쟁이 발생한 것을 보도하는 것과 같은 이른바 
‘의제설정’(agenda setting)에 있다고 주장한다.또는 채피(Steven Chaffee)가 말하는 
바와 같이 “매스 커뮤니케이션은 수용자가 정치적 문제에 대한 어떤 견해에 도달하는 데 
필요한 답을 제시하기보다는 논의되어야 할 보다 더 분명한 문제를 제시”하는 
것이다.그러나 분명한 것은 뉴스 미디어가 진공상태에서 그같은 의제설정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뉴스는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을 취재하고,취재원에 접근하여 취재를 
하거나 혹은 취재원이 제공하는 뉴스 중에서 ‘뉴스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취사선택하게 된다.비록 저널리스트들은 뉴스를 취재 보도함에 있어 객관적인 입장을 
취하고자 하지만,경재적·기술적·심미적인 고려는 그들의 직업적·개인적 가치와 
함께,그들이 뉴스를 취재하고 이를 취사선택하여 보도하는 데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예를 
들면, 저널리스트들은 대통령의 활동에 대해서 보다 더 완전히 보도하는 것을 그들의 
임무라고 생각하기-대통령의 활동은 전국적으로 수용자의 관심을 모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뉴스의 전형적인 예가 되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다-때문에 보도에 있어 대통령의 
경쟁상대나 대통령의 활동에 영향을 주는 압력단체도다는 현직 대통령에게 더 많은 비중을 
두게 된다.또한 저널리스트들은 논의되는 이슈에 대한 ‘양측견해’(both sides)를 모두 
보도함으로써 ‘혁명을 지켜’공평한 보도를 하려 하지만,실제로 미국언론은 
사회주의자들이나 극단적인 보수주의자들보다는 민주·공화 양 정당에 대한 보도에 더 많이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최근 수년간 저널리스트들은 그들의 의식적·무의식적 편향보도에 
대한 자각이 높아졌는데,여기에는 좌익과 우익 양편으로부터 받는 비판의 소리가 어느 정도 
그 원인으로 작용하였다.그러나 언론에서 편견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매일 일어나는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사건 중에서 뉴스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을 기자는 신속히 가려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들의 가치가 반영되기 
마련이며,이러한 작업을 하는 저널리스트 자신이 바로 미국사회의 한 성원인 까닭도 
있다.그들이 취급하는 사건을 조사,분석하고 개념화하는 데 있어,최소한 그들의 전문직업적 
입장,계층이나 연련집단 등,그들이 속한 사회의 견해 혹은 그와 관련된 가치나 이해관계를 
떠나서 보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저널리스트 개인의 가치가 수용자에게 미치는 영향은-그리고 그들이 어떤 사건을 뉴스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는가 하는 그 판단방법에서 오는 영향은-어쩌면 일반적으로 
생각되는것보다 작을지도 모른다.왜냐하면 사람들이 크게 관심을 갖는 사건과 문제에 
관해서는,그에 대한 정보를 뉴스 미디어를 통해서보다는 개인적인 소스-그리고 편견-에 더 
많이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뉴스 미디어는 아마도 사람들에게 그렇게 큰 관심거리가 되지 
않는,예컨대 자기 나라의 문제보다는 남의 나라의 사건이나 문제들을 알게 하는 데에 
오히려 영향력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예를 들면,미국의 뉴스 미디어들은 철의 장막 
뒤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적의를 갖고 비정하게 취재 보도해 왔는데, 이같이 해서 냉전을 
영속화하는 데 기여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매스미디어가 이러한 취재 보도를 통해 
미국의 반공주의를 스스로 앞장서서 직접 일으키거나 강화시키지는 않겠지만,저널리스트들 
자신은 공산주의에 대해 국민적 적개심을 함께 나누어 갖고 공감하고 있는 것이다.설혹 
적개심을 갖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들 뉴스 미디어를 운영하는 기업주들이 정치적·경재적인 
체제 면에서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강력히 반대하는 입장을 갖고 있기 때문에,기업주들은 
자신과 같은 가치,즉 가치적 편견을 표현하려 하지 않은 저널리스트를 자신과 같은 
가치표현을 하는 저널리스트로 바꿔버리고 말 것이다.
  뉴스 미디어의 주된 영향은 어쩌면 간접적인 것이기 쉽다.즉,저널리스트들은 그들이 취재 
보도하는 사회나 세계에 대한 상을 그려주고 있는데,정치가들이나 기타 사회적 
정책결정자들은 이렇게 저널리스트들에 의해 묘사된 사회나 세계상을 통해 그들이 처해 
있는 사회와 세계를 붙뿐만 아니라 이같은 사회상과 세계상에 대해 어떻게 여론을 일으킬 
것인가를 결정하려 한다.이렇게 될 때,뉴스미디어느 그후의 결과에 대한 간접적인 여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더구나 뉴스 미디어는 그들이 단순히 뉴스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사건을 취재 보도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어떤 이슈에 대해서나 집단 
혹은 지도자에게는 선전이 되고 다른 이슈나 집단 또는 지도자들은 가려지게 
되어,간접적이긴 하지만 수용자에게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사실 뉴스 미디어의 문제는-보통 매스미디어의 경우는 다 같겠지만-커무니케이션의 
통로안에 무엇이 또 누가 들어설 수 있는가의 문제로 나타난다.즉 사회의 다양한 
이익집단과 하위문화들이,자신들의 견해는 긍정적으로 다루거나 묘사하며 반대집단이나 
경쟁적 하위문화들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비쳐주는 뉴스가 커무니케이션 내용에 실리도록 
하기 위해서 서로 경쟁을 벌이고 있다.그리하여 이 경쟁에서 이 커뮤니케이션 통로에 누가 
가장 가까이 접근하게 되든지 가장 가까이 접근한 사람은 최소한 이 경쟁에서 수용자에게 
영향을 미치려는 시도를 해볼 기회를 포착하는 데에서는 일단 승리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뉴스 미디어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는 참으로 불공평하게 마련이다.즉,정부와 
같이 뉴스거리를 많이 갖고 있는 집단들이나,언론기관을 스스로 가질 수 있는 
집단들은,비조직적이고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사회의 여타 집단에 비해 언로에 더 많이,더 
가까이 접근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그리하여 빈민층은 난동이라도 일으키지 않는 한,주요한 
문제에 대해 그들 자신의 견해를 표현하기 위해 뉴스 미디어에 접근하기는 어렵게 
마련이다.빈민들이 때때로 난폭한 난동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3) 영향에 관한 연구결과의 요약
  매스미디어-뉴스,기타 정보 및 오락물-의 전반적인 영향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겠다.즉,지금까지 살펴본 바로는,어떤 특정한 종류와 형태의 매스미디어 내용물이 
전반적으로 계속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보기는 어렵다.다만 미디어 중독자들,이를테면 
정서적인 혹은 인지적인 차원에서 생활의 전부를 매스미디어에 의존하고 있는 
사람들이나,매스미디어 내용물이 보여주는 데에서 그들의 행위양식을 찾으려는,병리현상을 
내재적으로 선유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매스미디어가 부정적인 효과를 일으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반면에,생활의 전부가 고급문화에만 한정되어 있고 인간관계가 결핍된 
사람들에서도 그러한 병리현상은 다를 바가 없는데도 고급문화의 이러한 영향에는 비난이 
돌아가지 않는다).끝으로,어린이나 교육정도가 낮은 사람들은 미디어 접촉이 많고,성장과 
정에서 오는 연륜이나 교육이 가져다주는,환상적 내용과 사실적 내용의 구별능력을 
발전시키지 못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더 많이 미디어의 영향을 받을 것 같다.
  미디어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부정적인 효과를 가져오리라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그러나 이는 사회의 여타제도들,심지어 가족과 같은 경우까지도 마찬가지다.또한 
미디어 때문에 치러야 하는 사회적인 혹은 기타의 대가가 미디어가 갖는 이점보다 더 
비중이 크다는 증거도 없다.물론 소수에게만 해롭고 일부 사람에게만 대가가 지불되는 
제도는 어떤 것이나 다 없애야 한다는 주장도 있을 수 있지만,그러나 이같은 주장은 아주 
비현실적인 주장이라 하겠다.만일 그러한 주장을 확대해석 한다면,사회 전체가 송두리째 
없어져야 한다는 주장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그런데,재미있는 것은,미디어가 대중문화가 
해로운 것이라 해서 없애자고 주장하는 이들 비판론자들은 전쟁이나 빈곤과 같이 실제로 더 
해로운 존재인 기타 현상들의 제거에는 오히려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미디어 효과에 대한 괄목할 만한 연구가 모두 의식적인 효과만 측정하고 있을 
뿐,있을 수 있는 무의식적인 효과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더구나 그러한 연구들은 소수의 특정한 유형이나 특정내용에 대한 단기적 영향만을 
다루고 있을 뿐,그러한 내용이 결정되는 배경이나 상황이 미치는 영향,미디어 자체의 
영향등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고 있다.이를테면 영화나 텔레비전에 실리는 폭력물의 
효과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지만,폭력적인 성격을 지닌 주인공의 여러 가지 
유형에 따라 달리 나타나는 효과에 관한 연구는 거의 없다.또 중산층이라는 계층이 
전체적으로 처해 있는 상황이 미치는 영향이나 빈민층의 사람들에게 주는 오락물의 수효 
같은 것은 더욱 연구된 바가 없다.다만 그저 미디어의 종류에 따른 교육적 효용성의 차이를 
보기 위한 몇몇 연구가 있었을 뿐이다.  
  맥루한(Marshall McLuhan)은 미디어의 내용보다는 미디어 자체가 더욱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며-그는‘미디어는 메시지’라고 주장한다-텔레비전은 
사회를‘재(再)부족사회화’하며 세계를 하나의‘지구촌’으로 만들고 잇다고 
보았다.그러나 맥루한의 주장은 단지 부분적인 타당성이 있을 뿐이다.왜냐하면,매체의 
영사면에 대해서 높이 평가되는 것과 언어나 지적 분석에 대해서는 낮게 평가되는 것을 
텔레비전 미디어에서 그 이유를 찾으려고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어느 정도 옮지만,지적 
분석의 부족은 인쇄매체에서도 역시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을 그는 깨닫지 못하고 
있다.언어와 지적 분석 수준이 낮은 것은 아마도 미디어의 특성에서 생겨난 결과라기보다는 
미디어가 표현하던 이같은 지적 분석에 대해 이제는 수용자가 그 흥미를 잃게 되었다는 데 
더 많은 이유가 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텔레비전이 다른 나라의 생활에 대한 
사람들의 지식을 증가시킨 것은 사실이다.그러나 세계의 지구촌을 이루게 하는 범세계화 
지향은 텔레비전의 등장이 그 원인이었다기보다는,국가간의 정치적·경제적 상호의존성의 
증가로서 설명하는 것이 더 적절한 것이다.또 사회의 어떤 부분이 재부족사회화하는 것도 
현재의 핵가족제도가 경제적 기능이 없어지고 정서적 역기능이 나타나기 시작한 데 대한 
대안으로 나타난 것이다.
  마지막으로,매스미디어가 그렇게도 중요한 것이 된 사회에서의 생활 효과에 대한 연구를 
한 사람이 없었다는 점이다.라디오나 영화가 발명되기 전의 사회와 그후의 사회를 
비교연구해 보고자 한 사람도 없었고,최근 10년간 있었던,텔레비전의 등장 이전의 사회와 
이후의 사회를 비교연구할 수 있는 기회도 이미 놓쳐버렸다.이렇게 사회 전체에 
매스미디어가 새로 등장할 때의 매스미디어 그 자체의 효과는 그후에 개별 미디어의 개별적 
효과보다는 더 클 것이다.그리고 라디오,영화와 같은 이전의 미디어가 미치던 효과는 
텔레비전과 같이 나중에 등장한 미디어가 미치는 효과보다 더 클지도 모른다.이런 문제를 
놓고 그 효과를 이해하기 위해,현대적인 미디어가 아직 없는 일부 사회에서 매스미디어의 
등장이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가 지금이라도 이루어질 수는 있다.그렇지만 미디어의 
등장이 그와 동시에 나타나게 되는 사회의 다른 변화를 쉽게 분리시켜 놓을 수 없기 
때문에,매스미디어의 출연으로 그 미디어 자체만이 갖는 영향을 규명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 
대한 보다 더 근본적인 해답을 구하기가 어렵다.대부분의 경우 현대적 미디어는 많은 다른 
소비품목 및‘현대적’인 제도의 등장과 함께 나타났던 것이다.
  이러한 연구에 방법론적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현대적 미디어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의심할 수는 없다.예컨대 매스미디어는 민속문화의 쇠락에 가속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왜냐하면 사람들은 민속문화보다 훨씬 상업성을 띤 대중문화에 매혹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상업성을 띤 대중문화가 대부분의 경우 매스미디어를 통해,현사회 속에서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다른 생활양식들,이상들,그리고 생활태도 등을 사실적 표현이나 
허구적 구성을 통해 묘사함으로써,사람들이 사회를 이해하는 데 대해 전보다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해 줄수 있는 것이다.그리하여 매스미디어는 사회의 다양성을 보다 더 널리 
인식시켜 주게 되었으며,대부분의 경우 매스미디어는 그 내용에서 중산층의 문화나 태도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중산층의 문화의 확산을 더욱 촉진하였고,이들의 정치적 권력과 함께 
그 문화적 위력도 증가시켜 주었다.이렇게 매스미디어는 중산층의 문화내용물을 주로 
제공함으로써 하급노동계층의 문화를 실질적으로 소멸시키는 데-하급노동계층의 문화의 
쇠퇴는 다른 요소와 함께 설명되어야 하겠지만-큰 역할을 행사했다고 하겠다.
  미디어의 효과가 전반적으로 해로운 점보다 이로운 점이 더 많은가,아니면 해로운 점이 
더 많은가 하는 문제는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중요한 문제라 하겠으나,현재로서는 그 
연구가 현실적으로 적절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전반적으로 해롭다고 해서 이제 이들 
미디어를 제거해 버릴 수도 없고 미디어 없이 존재하는 이 거대한 현대사회를 생각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그보다는 현재의 매스미디어는 개선할 필요가 있는가,있다면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 더욱 중요한 그리고 현실적인 것이라 하겠다.
  미디어 효과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새로운 조사연구결과의 뒷받침을 받으면서 그 논의가 
계속되겠지만, 현재로서는 잠정적이지만 미디어 효과와 관련해서 적어도 한 가지 결론은 
내릴 수 있다.즉, 대중문화 비판론자에 의해 가정된 미디어 효과와 실증적인 조사연구가 
밝혀낸 미디어의 실제 효과와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결과적으로 비판론자들의 미디어 
효과의 정도,강도,해독 등에 대한 추리는 부당한 것으로 증명되었다.이같은 증명에도 
불구하고 비판론자들은 일반적으로 대중문화를 싫어하며,고급문화를 대하는 심미적 
기준으로 대중문화를 보기 때문에 그들이 보고 듣고 읽는 대중문화 내용물에서 충격을 받게 
된다.이들 비판론자들은 매스미디어 수용자도 그들과 같은 심미적 기준을 갖고 있고,또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매스미디어 수용자에 대한 자신들의 비판적 
견해를 필연적으로 강요하게 된다.
  그러나 거꾸로,대중문화를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고급문화와 접하게 될 때에도 사정이 
같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즉,이들 대중문화 수용자들은 이른바 고급문화 예술가들이 
연출해 내는‘일탈적’예술행위에 대한 찬미에 충격을 받게 된다.그리하여 대중문화 
수용자들은 대중문화 비판론에서 하는 비난과 비슷한 용어로 고급문화를 비난한다.예를 
들면 1960년대에 문화적·정치적 풍자는‘병적이며 구역질 나는 코미디’(sick comedy)로 
불렸고,미국의 급진적 코미디언 레니 브루스(Lenny Bruce)는 경찰과 법에 의해 무대에서 
쫓겨났고 그는 결국 자살하기에 이르렀다.고급문화의 옹호자나 대중문화의 옹호자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서로 공박한다.고급문화의 옹호자는 대중문화를 저속하고 병리적인 것이라 
하여 비난하는가 하면 대중문화의 옹호자는 고급문화를 지나치게 지적(知的)이고 
속물적이고 나약하며,고답적이고 위선적이라고 하여 역시 경멸조의 말로 공격한다.그런데 
이들의 공격의 방법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고급문화의 옹호자가 대중문화를 비난할 때는 
주로 책이나 문예잡지를 통해 표현하는데,대중문화의 옹호자는 경찰,성직자 혹은 정치적인 
활동무대를 이용한다.
  물론 고급문화론의 입장에서 공격을 가할 때 사용하는 무기는 다른 입장의 그것보다 훨씬 
강력하지만 여타의 점에서 그 공격과정은 비슷하다.양자 모두 각자 자기들의 문화적 
기준으로 다른 문화를 보면서 발견한 다른 문화의 내용이 수용자에게 악영향을 미친다고 
강력히 주장하면서 비판하고 있다.그들은 왜 각자의 기준으로 다른 문화를 대하는가,구 
기준은 왜 다른가,어떤 기준이 옳은가,또 그것은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평가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문제는 제 3장과 4장에서 다시 논의될 것이다.

    4. 대중문화가 사회에 미치는 해독.
  대중문화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비판론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에 근거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그 하나는 대중문화가 전반적으로 전체 사회의 취양수준을 저하시키며,따라서 하나의 
문명으로서의그 질을 훼손시킨다는 것이다.두번째 비난은 매스미디어가 
사람들을‘마비시키고’(narcotize) ‘원자화’(atomize)하기 때문에,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알살시키려 하는 정치선동가들의 대중설득 테크닉에 쉽게 말려들게 된다는 
비난이다.
  로젠버그(Bernard Rosenberg)는 이러한 비난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즉,“최악의 사태에 
이르는 경우,대중문화가 우리의 취양을 백치와시킬 뿐만 아니라,조야(粗野)한 것으로 
만들려고 위협하면서 전체주의에 이르는 길을 터놓고 있다.상호 연관된 모든 미디어가 함께 
그러한 목적으로 공모한다.”
  두 번째,비난을 좀더 확대해서 본다면 일견 신좌파적 입장과 일치하는가 하면 또 
우익에서 표명하는 것과도 일치하는데,이 두 입장은 다 같이 대중문화가 민주주의에 좋지 
않은 현상을 가져오는 문화라는 주장이다.마르쿠제의 견해에서 볼 수 있듯이 대기업들이 
현대의 테크놀러지를 장악하고 대중문화를 양산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이 대중문화 오락성을 
탐닉하면서 현재의 생활에 안주하도록 한다.그렇게 함으로써 대기업들이 빈곤을 방치해 
두며 제국주의적 전쟁을 하려는 사회적 제악에 대해 반대투쟁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노력을 무력화시키며,사회 내부의 불만이 스스로 드러나지 않는 한 그대로 방치한 채 
내버려두는 그러한 사회에 이르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또 프랑스의 보수주의론자 자크 에룰(Jaques Ellul)은 현대의 테크놀러지를 최악의 
적으로 본다.그는 테크놀러지가 바로 대중문화를 만든다고 본다.현대 대중사회가 
민주주의적 형태일진대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필요하다.그렇지만 시만으로서 
적절한 자격을 갖추는 데 필요한 그 수많은 양의 여타 지식을 흡수,소화시키기 어렵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실,가치,선동,표현이 뒤섞인 선전(宣傳) 내용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이 선전은 국가나 기타의 강한 기관에 의해 만들어지는 의도적인 것도 있으며 또 
대중문화에서와 같은 비의도적 선전도 있다.결국 현대 대중사회에서 시민은 비의도적인 
선전에 예기치 못한 희생물이 되어버리고 민주주의는 밀살된다고 에룰은 결론짓고 있다.

    1) 문화의 취향수준 저하
  대중문화에 대한 사회적인 두 가지 비난은 모두 부정확한 것으로 보인다.대중문화가 
사회적으로 취양수준을 저하시킨다는 주장은 공정치 못한 문화비교에 근거한 
것으로,이를테면 과거의 가장 좋은 문화내용물과 현재의 가장 나쁜 문화내용물을 비교하는 
식이다. 슈펭글러(Oswald Spengler)나 가센트(Jose Ortega y Gasset)는 오로지 역사 속의 
셰익스피어나 베토벤만 기억하고 있으며,그들만큼 재능이 뛰어나지 않았거나 작품이 다 
잊혀져 없어진 삼류음악가들도 역사 속에 많이 있었다는 것은 잊고 있다.또 그와 
마찬가지로,선택된 일부의 민속예술 내용은 상기하면서 오늘날의 대중문화 내용물 중 어느 
것보다 조잡하고 저속한 민속예술 내용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대표적 내용을 표본으로 한 문화의 비교에서 또 과거나 현재의 
사회에서 다수의 사람들이 수용하는 문화내용물을 고려하는 문화의 비교를 한다면 알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의 문화적 취양의 수준이 역사적으로 계속해서 향상되어 왔다는 
점이다.최근 대학진학 인구가 급증하고 있는 최근 십수년 간은 특히 그러하다.고전음악 
음반을 사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든지 독서클럽 회원의 수가 증가한다든지 하는 통계숫자가 
반드시 사람들이 더욱 교양을 갖추어 간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고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세미클래식 음악 정도만 해도 고답적 취양인의 음악으로 간주되었던 과거 제 2 차 
세계대전 전과 비교해 볼 때 지금은 취양수준에 있어 상당히 향상된 변화를 나타내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에 대해 또다시 반론으로 비판론자들은 대중문화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취양수준은 
이보다도 훨씬 높아졌을 것이라고 주장할지 모른다.그러나 그러한 주장 역시 뒷받침해 주는 
실증은 없다.실제로 공산주의 정부가 특히 동구세계에서 대중문화를 억제하고 관제적 
성격의 고급문화를 증진시키고자 하였으나,이러한 시도는 끝내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며 
결국 공산국가들도 서구의 대중문화와 같은 자국판 대중문화를 요구하는 대중의 청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2) 대중문화와 전체주의
  대중문화가 사회를 전체주의로 몰고 갈 것이라는 비판은,시회의 중앙 집단회와 
만하임(Karl Manheim)이 말하는 이른바 기능적 합리화(functional rationalization)가 
증가함에 따라,개인과 국가 사이에 존재하는 가족 및 1차집단들과 압력단체(voluntary 
association) 및 기타 2차집단들이 그 세력을 잃어버리게 되고,국가와 대면관계에서 
개인들이 무기력한 원자로서 전락하였다는 주장에 근거하고 있다.그리하여 만일 
정치선동가가 매스미디어를 장악하게 될 경우,현재 상업미디어에서 광고주에 고용된 
사람들이 상업선전에서 하려는 것과 같이 미디어는 국민들이 독재 체제를 받아들이도록 그 
대중설득의 테크닉을 사용할 것이라고 주장한다.이러한 주장은 히틀러(Adolf Hitler)나 
스탈린(Joseph Stalin)이 전체주의적인 통치를 유지하기 위해 매스미디어를 통제해서 
얻었던 현저한 효과 등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이와 같은 주장은 그 주장내용의 부분들을 좀더 해석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우선 
미디어의 통제문제를 볼 때, 국가가 필요한 경우나 국가적 목적이 있다면 국가는 사회의 
매스미디어를 장악할 수 있을 것이다.민주사회에서조차도 전쟁시와 같은 때에는 이러한 
상황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그러나 미디어의 효과문제를 놓고 볼 때 대중문화가 작은 
사회집단들이나 기타 이견을 만드는 그 원천을 파괴시킬 수 있는 그런 위력을 과연 갖고 
있는지 의심스럽다.앞서 거론한 바 있지만,미디어가 가족이나 동년배집단 등 1차집단을 
감소시키지 못했으며,영국에서는 매스미디어의 성장이 가장 급속히 진행되던 시기에도 여러 
압력단체들이 그 수나 세력에서 거듭 발전을 하고 있었다.이는 미디어의 영향과 관계되는 
현상이 아니라 그러한 자발적 집단에서의 적극적 활동에 참여하는 중산층이 성장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국가가 행사하는 위력이 점점 증가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사회가 위기에 
처하게 됨으로써 사람들이 그로부터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게 된 나머지,또 사회변화에 크게 
위협감을 느낀 나머지 이러한 사태들을 해결해 줄 것으로 믿어지는 어떤 강력한 지도자를 
찾아 그에게 힘을 서슴지 않고 부여하는 일이 가능한 것이다.이러한 경향은 국가권력의 
행사로 개인의 생활이 침해될 것을 두려워하는 급진주의적 집단에게서 흔히 발견된다.많은 
사람들이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고 지지하며,거기다가 매스미디어 소유자들이나 미디어 
수용자들에게 사회경제적인 구원을 약속이라도 하면,그리고 그것을 믿게 되면 그 지도자는 
매스미디어 통제권을 충분히 획득해 낼 수 있을 것이다.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강력한 
지도자를 지지하는 미디어의 역할은 지배적인 기존의 사회조류를 
‘재강화’(reinforcement)하는 것이 매스미디어의 특징적 기능이라고 볼 때 별로 새로운 
예외적인 역할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수용자의 다수가 독재자에 호의를 갖고 있다면,수용자들은 미디어로 하여금 
독재를 지지하는 내용을 제공해 주도록 요구하며 압력을 가할 수도 있는 것이다.그러나 
선거행위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그런 절대적 위력을 미디어가 갖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에 미디어가 독재를 받아들이도록 수용자를 설득할 수 있는가는 또 다른 
문제인 것이다.대중문화는 독재의 한 수단이 될 수는 있지만 독자적으로 전체주의 정부를 
수립하는 데 주역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매스미디어가 현재 있는 지배적 사회조류를 재강화하는 역할을 수행하여야만 할 
것인지 아닌지,아니면 전체주의와 같이 위험한 사태의 사회조류에 대항해서 방파제로서 
비판적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또 매스미디어로 하여금 
전자보다 후자의 역할을,즉 이미 이루어진 전체주의에 대한 저항적 역할을 하도록 과연 
기대해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사실 매스미디어가 이런 역할을 실제로 잘 수행하리라고 
본다면 그것은 착각이다.매스미디어가 전체주의를 지지하는 쪽으로 이미 기울어진 미디어 
수용 대중들을 무시할 수 있고 이같은 수용자로부터 미디어가 초연할 수 있지 않은 한 어떤 
미디어도 이같은 비판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하나의 제도로써 매스미디어가 그가 속해 있는 현실사회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을 만큼 스스로 충분히 강력한 조직이거나,사회가 
비민주화되더라도 이에 대항하여 그를 거부할 수 있을 만큼 정치·경제적으로 튼튼한 
조직체가 아닌 한 이러한 비판활동은 생각해 보기어려운 것이다.더구나 사회 밖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것은 더욱 기대하기 어렵다.
  사회조직으로서 미디어는 전체사회의 한 부분일 수밖에 없다. 매스미디어가 사회의 
세력이 없는 소수에게 문제가 되는 논쟁거리(controversial idea)와 모든 종류의 정치적인 
내용을 자유롭게 취급할 수 있을 때,또 정치집단이나 기타 압력단체에 의한 압력이나 
지배가 없이 자유로운 상황의 사회에 있을 때에는 민주사회의 일부로서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데 그들의 한몫을 다해 낼 수 있게 되겠지만,전반적으로 본다면 이는 전체주의 
사회에서 매스미디어가 전체주의를 옹호하는 데 몫을 다하는 것과 사정이 다르지 
않다.미디어는 사회의 정치적·문화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그 영향력이 크다고 믿기 
때문에,이를 위한 여러 압력,심지어는 미디어를 직접 장악해 보려는 시도 같은 것에 의해 
어느 사회에서나 미디어는 끊임없는 고통을 당한다.
  특히 텔레비전의 경우 받는 압력은 더욱 크다.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텔레비전이 정부에 
의해 통제를 받고 있다.민주적인 정부는 경우에도 민주주의를 신장시키는 것보다는 권력을 
계속 유지할 것인가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는 까닭에 정부에 의한 미디어 통제는 
바람직하지 못할 뿐이다.텔레비전 및 기타 매스미디어들이 상업적인 조직으로 사업이 
운영되고 있는 미국사회의 경우,미디어 내용물이 정치적으로 기업의 자유체제에 대해 
지나치게 비판적이지 않는 한,정치적인 통제의 문제보다는 이윤의 상업적 극대화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그렇게 볼 때 미국의 매스미디어는 이윤추구를 지지하는 한도 
내에서만 미디어의 민주적 역할수행을 지지한다고 볼 수 있다.또,미디어의 이러한 민주적 
역할도 미디어 자체나 이에 광고하는 광고주들이 반민주주의로 돌변하게되면 미디어의 
민주적 역할도 그 한계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상업회사로서 매스미디어는 정부의 장악하에 있는 매스미디어 보다는 그래도 
정치적인 통제로부터 좀더 자유롭다.즉,미국의 텔레비전은 어떤 점에서는 미국 
연방통신위원회를 통한 정부의 규제를 받고 있지만,연방정부의 압력이나 대통령으로부터 
받는 압력에 대항하여 전적으로는 아니지만 상당히 많이 미디어 자신의 자유를 보호할 수 
있게 되아 있다.민주사회에서 이상적인 해결책은 정부나 상업성 및 기타의 압력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비영리적이고 비국영 기관으로 이루어진 미디어가 되는 것이다.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런 경우의 미디어를 찾아보기가 어렵고 더욱이 상상하기도 
어렵다.비영리기구인 미국 공영방송(Public Broadcasting)의 경우를 보면 정부나 
정부결정기구의 고급공무원으로부터의 압력을 물리치고 방송이 자주성을 지켜나가는 데에 
있어 상업 텔레비전 방송에 비해 훨씬 많은 어려움에 처해 있다.
  마르쿠제적 비판론에서는 대중문화와 메스미디어가 실제로 어떻게 작용하는가 하는 것은 
취급하지 않고 있다.이 비판론은 평등적 민주주의라는 미르쿠제의 견해에 따라 인류평등을 
지향한다는 주창인 것이다.그리하여 평등적 민주주의에 입각한 마르쿠제적 비전을 이루려 
하지 않고 있는 매스미디어를 포함한 체제는 비민주적인 것으로 간주되며,따라서 이들을 
억제해야 한다는 것이다.마르쿠제는‘침략주의적 정책,군비확장,국수주의 및 차별대우를 
촉진하거나 공공사업이나 사회안정의 문제를 반대하는 집단이나 운동으로부터 의식표현이나 
집단의 자유를 박탈’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유감스럽게도 마르쿠제는 민주적인 
집단,민주적인 운동과 비민주적인 집단,비민주적인 운동에 대한 자신의 정의를 내리지 않고 
있으며,의사표명을 할 수 있는 자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고 할 수 없는 자는 또 어떤 
사람이어야하는지에 대해서도 충분한 설명을 하지 않고 유보사항으로 남겨두고 있다.
  마르쿠제가 대중문화현상을 위험하다고 보는 것은 대중문화현상이 수용자를 개인적으로 
해롭게 할 뿐만 아니라 수용자들로 하여금 정치적으로 현재의 상태를 개혁 없이 유지하는 
것을 받아들이도록 마비시키는‘마취작용’을 하기 때문이다.여기서 마르쿠제는 대중문화를 
비판하는 다른 비판론자들보다도 한발 더 나아가,사람들이 대중문화를 즐기게 되면서 
현존하는 정치·경제적 질서를 개혁하기 위해 사회를 뒤집는 혼란을 피하려 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그는 심지어,요즈음의 성규범이나 관습의 자유화까지도 반대하는데,성의 
자유화는 사람들을 그가 기대하는 사회변화를 위한 개혁적인 역할로부터 도피시키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른 대중문화 비판론자들과는 달리 마르쿠제는 정치적으로 억눌린 사람들을 대변해서 
발언하고 항의하고 있다.그는 현재에 많이 볼 수 있는 사람들의 반대견해,시민의 자유 및 
관용(그리고 문화)이 지나치게 잘 된 조직사회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이들이 기존 
정치체제를 변화시킬 힘을 발휘할 수 없다-실제로 이같이 반대견해나 시민적 자유를 
수용하면서도 통치할 수 있기 때문에 권력집단만 더욱 강력한 권력집단으로 만들어줄 
뿐이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그러나 대기업회사와 정치적인 엘리트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피억압자들로 규정하면서도,이들 피억압자들이 자신의 운명(그리고 자신의 
문화)을 규정지을 수 있는 권위에 관해서는 밝히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볼 때, 마르쿠제의 
비판론에 있어 문화의 유일한 역할이란 혁명의 도래를 촉진시키는 것이라는 혁명적인 
명제로 가장 잘 이해된다.
  문화-고급문화와 대중문화를 모두 포함에서-가 사람들의 정치적인 행동성을 무력화시키고 
그들의 관심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게 하는 도피성(逃避性)을 지적했다는 점에서,마르쿠제의 
비판론은 타당성을 가질지 모른다.그러나 정치행동을 무력화시키는 도피력은,예컨대 가족과 
같은 것이 가져올 수 있는 도피력에 비견하면 문화의 도피력은 미미한 것이다.그는 또한 
현재의 문화가 혁명적인 것으로 대체된다면,사람들이 모두 혁명가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같은 그의 비판론은 결코 옳지 않다.
  매스미디어가 전능적 힘을 갖고 사람들의 행위나 태도를 결정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하듯이,혁명적인 문화라고 해서 그 문화의 사용자를 모두 혁명가로 만들지는 못하는 
것이다.특히 문화가 혁명적인 엘리트에 의해 일반적으로 강요되는 상황일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심지어는 혁명이 진행되는 시기에도 반드시 모든 사람이 다 혁명에 참여하는 것은 
아니며,문화를 통한 현실도피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혁명에의 참여나 혁명적 문화란 
의미가 없는 것이다.대중문화로 인해서 전쟁이 도발되고 빈곤이 방치되고,인종주의나 
국수주의들이 조장된다든지,이로 인해 이에 대한 사람들의 지지가 과연 높아졌는지의 
여부,또 대중문화가 없어지거나 다른 것으로 대체된다면 사람들은 이들 전쟁,빈곤 등의 
사회악을 제거하는 데 보다 더 많은 노력을 경주할 것인지 아닌지의 여부를 결론지을 수 
없는 상태에서,설사 마르쿠제가 지향하는 뜻에는 동감한다 하더라도,대중문화를 하나의 
반혁명의 도구라고 보는 그의 주장에는 문제가 있다.
  마르쿠제의 비판론은 약점은 혁명적이 아닌 문화는 모두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데 
있으며,에룰의 비판론의 약점은 그가 선전(宣傳)을 지나치게 광범하게 정의하여 사용한 데 
있다.사람들은 뉴스 미디어로부터 쏟아져나오는 일시적인 것들이나,서로 상반된 정보의 
홍수에 휩쓸리게 되면 쉽게 혼란에 빠져 자신들의 선입관과 부합하는 정보만을 받아들이게 
되기 쉬우며,그러한 선입관에 맞추어 짜여진 선동적인 선전내용에 희생된다는 에룰의 
지적은 옳았다.그렇지만 에룰의 논의는 전체적으로 볼 때,두 가지 공감할 수 없는 점을 
갖고 있다.
  ㅊ첫째,모든 대중문화가 선전이라 한다면,선전이라는 용어를 너무 확대한 것으로 그 뜻이 
모호하고 그 의미를 잃는다.또한 모든 문화가 비민주적인 결과를 가져오며 현대사회는 
민주사회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에룰의 주장이라고 볼 수 있는데,현대사회가 민주적인지 
아닌지의 문제는 논자가 민주주의를 어떻게 개념규정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현대사회에 
대한 에룰의 비관적인 견해는 바로 그 자신의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에 의해서 직접 도출된 
것이다.에룰에게 민주주의는 선전이나 기타 사회적인 억압에 면역이 되어 먹혀들지 않게 된 
자율적인 개인들이 그들의 의견을 분명히 할 수 있고,이러한 공중의 개인 의견이 집결되어 
공중의 여론을 형성할 수 있는 때에만 존재한다.그러나 이러한 정의는 인류라든가 
여론형성이라는 것에 대한 탈사회적인 개념에 근거하고 있다.
  그는 현실세계에서 존재하지도 않은 완전한 자율적인 개인에 집착하고 있다.그는 
과거에는 그러한 자율적인 개인들이-따라서 민주주의가-존재한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역사적인 실증으로서도 보여줄 수 없는 것으로 그의 낭만적인 향수의 의미 정도일 뿐이라 
하겠다.즉,에룰은 민주주의를 도달할 수 없는 범주에 집어넣은 후 사회가 거기에 도달할 수 
없게 되니까 비민주적이라 치부하면서,그 사태에 대한 모든 비난을 선전과 문화에다가 
퍼붓고 있다.다른 대중문화 비판론자와 마찬가지로 에룰 역시 현대사회의 긍정적인 측면은 
전혀 보지 않고,보통 사람들을 파블로프의 실험에서 보는 실험견처럼 선전에 굴복당하는 
로봇으로 생각하는 것이다.그의 저술 전편에 담겨 있는 이 두 가지 주제가 그의 세부적인 
논술을 별수없이 왜곡시키고 있는 것이다.
  둘째는,에룰은 현대사회 전체에까지 확대해서 신랄한 비판을 가하면서,선전의 위험에 
대한 예를 모두 나치 독일,공산국가 소련,또는 자유주의 국가이지만 뉴스 미디어를 국가가 
깊이 통제하는 나라인 프랑스에 국한시키고 있다.그러나 영국이나 미국과 같이 오히려 
에룰이 보는 바와는 달리 미디어가 국가에 반대하고 도전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나라에 
대해서 충분히 분석하지 않고 있다.에룰의 확대된 개념정의에 따르면,미국이나 영국에서의 
선전은 국가에 반대하는 여론의 형성을 위해 정보를 제공할 수도 있듯이 나치나 소련의 
그것과는 그 정도나 내용에서 크게 다르다.실제로,미국에서의 저널리즘은 역사적으로 
정치적인 범죄를 폭로하는 것을 스스로의 사명으로 여겨 왔다.즉,닉슨의 워터게이트 
도청사건과 같은 경우에는 보는 것처럼 미국의 저널리즘은 국가의 선전을 폭로하고 국가의 
권력행사를 감소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모든 매스 커뮤니케이션이 의도적인 선전이든지 아니든지간에 어느 한편이나 다른 편의 
가치나 주장을 강변하기 위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고 하는 에룰의 주장은 아마도 적절한 
지적일 수 있다.그러나 정의 자체에서 매스 커뮤니케이션이 비민주적이거나 전체주의적인 
결말을 반드시 초래하게 된다고 뜻할 수는 없는 것이다.

    5. 대중문화 비판론의 근거와 편견
  지금까지 밝혀진 실증적 자료나 기타 예증을 통해 볼 때,대중문화 비판론은 그 전모가 
그리 설득력 있게 잡히지 않는다.비판론자의 주장과는 달리 대중문화는 고급문화와 그 
창조되는 방법에는 유사성이 많으며,고급문화에 대해 하등의 위협적 자세도 취하지 
않는다.더구나 예외적인 다른 방법으로 대중문화를 수용하는 극히 소수의 사람들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중문화 내용의 탓으로 돌려지는 좋지 않은 효과를 실제로 보여주고 있지도 
않다.전면적으로 그 효과가 미치지는 않는다고 본다면 대중문화가 사회나 민주적인 정부에 
대하여 위험의 원천이 된다는 결론도 내릴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대중문화 비판론은 대중문화 내용이 주로 심미적(審美的)으로 불만스럽다는 
논술이라 하겠다.이러한 부정적인 효과에 대한 논술은 부정확한 평가에 의해 
뒷받침되며,대중문화의 기능이나 사용에 대한 잘못된 개념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고급문화와 대중문화 양자에 대한 분석에 들어가기 전에 비판론이 존재하게 되는 
이유와 그 비판론이 오류를 범하게 만드는 주요한 편견이 무엇인가에 대해 먼저 논의하고자 
한다.

    1) 비판론자의 정치적 기능
  어떤 면에서 보면, 대중문화 비판론은 이미 계몽주의시대 출현한 것이다.당시 고급문화를 
지지하던 휴머니스트들은 개인의 자율성이나 독창성, 그리고 집단규범의 거부 등에 높은 
가치를 두었다. 이러한 휴머니스투적인 기준에 인도될 때 실현되는 이상적인 삶을 위한 
표현이자 요구가 바로 대중문화 비판론이다.이러한 기준이 고급문화의 창조에 도움니 
되느느 것이라는 점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그러나 이렇나 기준이 모든 사람들을 이상적 
삶으로 인도한다든지, 또 전체 사회적인 규모로서 적용해야 하는 가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으므로, 이 문제는 제 4장에서 또 다시 논의하게 될 것이다.그러나 또 다른 
면에서 대중문화 비판론을 보면, 이는 고급문화의 창조자들이나 그들을 지지하는 
문예비평가, 저술가들, 혹은 현대사회에서 나타나는 문화적 민주주의 경향에 불만을 느끼는 
수많은 사회비평가들-몇몇 사회학자들을 포함하여-이 과거 엘리트주의적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표현이요 요구이기도 하다.대중문화 비판론의 정치적 기능을 검토하기 위해서는 
대중문화와 그 비판론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산업화되기 이전의 유럽사회는 문화적으로 고급문화와 민속문화라는 두 종류의 문화로 
나뉘어 있었다.민속문화는 그 내용이 빈약하고 가내 공업적이었다.당시 농부들은 고립된 
마을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 농부들에 의해 만들어진 민속문화 내용은 쉽게 많은 
사람들의 눈에 띄는 가시적인 것은 아니었다.그에 비해 고급문화 수용자는 두시거주 
엘리트들-법과이나 귀족, 성직자, 혹은 부유한 상인들-로 시간적인 여유가 있고 교육을 
받았으며, 오락이나 예술에 경제적 여유가 많은 자들, 또 그들을 위해 문화를 생산하는 
소수의 창조자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해 줄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 지지를 받는 문화인 
것이다.당시 예술가나 지식인들은 모두 권력 주변에 가까이 있었으며 일부 예술가나 
지식인들은 그들을 고용한 사람들이나 아끼소 봐주는 후원자들의 지위와 특권을 함께 
나누어 가질 수 있었다.민속문화가 사회적 신분이 낮은 사람들의 문화이고 지역적으로 
고립된 문화였기 때문에, 고급문화가 한 사회의 공적이며 가시적인 문화를 사실상 독점하고 
있었다.
  경제적인 변화, 테크놀러지의 변화에 따라 시골사람들은 도시로 흘러 갔고, 거기서 
자우시간을 마련하고 예술과 오락을 향유할 수 있는 실수입도 갖추면서 그들은 한때 농촌을 
토대로 가졌던 민속문화를 버리고 상업적 대중문화의 고객이 되었다.이러한 도시 
대중문화는 곧 그 수에 있어서 고급문화의 창조자나 내용물을 능가하게 되었다.따라서 
고급문화는 오직 유일한 공적 문화와 가시적 문화로서 누렸던 독점적 위치를 상실하기에 
이르렀다.부유한 고급문화와 후원자들의 경제적 지원과 권력이 약화되면서 고급문화의 
창조자들은 특권층의 귀족사회에서 할 수 없이 물러나지 않으면 않되게 되었으며, 그들의 
문화를 지지해 줄 새?_로운 수용자를 다른 곳에서 찾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그 결과 
고급문화는 이른바 문화시장에서 대중문화의 경제적인 위치에 놓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고급문화를 창조하는 사람들에게도 위험스럽고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으로 
보였다.권좌의 세계와 그 주변에서 물러나면서 그들의 위신, 지지와 기반, 특권 등은 
감소되었다.거대한 대중예술시장의 발흥은 그들 고급문화 창조자에게 문화적 기준의 심각한 
저하를 의미했을 뿐만 아니라, 신분이나 교욱정도가 낮은 문화수용공중에게 문화의 적정 
기준으 세울 수 있었던 문화통제능력마저 상실함을 의미하였다.이러한 변화의 과정 속에서 
예술가는 지난날 그들의 고급문화 창작활동 후원자 밑에서 때때로 고통과 수모를 당해야 
했던 예속감과 굴욕감은 잊어버리게 되고, 심지어는 보장되다시피 하였던 고정적인 
고급문화 수용자나 후원자들의 경제적인 지지가만을 상살하기는 했어도 이들이 획득하게 된 
자기이 새로운 자유와 자신의 존엄성을 갖는 기쁨을 느끼지는 못하고 있었다.그들은 당면한 
그들 문화의 수용자문제 해결에 그들이 수용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애써 부정함으로써 
극복하려 했다.오로지 그들 자신이나 그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동료들을 위해서만 
창조를 했다.따라서, 그들은 고급문화 창작활동에서 자신의 경제적인 기반으로 의존해야 
했던 새로운 공중을 오히려 경멸할 뿐이다.심지어는 이들 새로문 공중이 예술가들에게, 
이전에 그들이 누렸던 것보다 더 큰 대가와 자유를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술가들은 
이러한 공중을 경멸했다.예술가의 천재론은 후에는 예술가에 대한 낭만적 이미지를 
만들었고 예술가에 대한 새로운 찬사론으로 바뀌었다.예술가의 천재성 찬마론이 생겨나면서 
예술인들이 귀족과 같이 할 수 없게 되면서 한 때 상실했던 그 권위를 다시 회복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필자는 이 부분 글 속에 있는 주장에 대해서 Peter Marsis에게서 시사받은 
바크다) 
  그러나, 고급문화의 창조자들은 심각하고도 급격한 신분과 권력의 변화를 경험했으며, 
그들  중 일부는 그벽한 사회적 몰락의 위험에까지 직면하기에 이르렀다.이같은 고급문화 
창저자들의 후원자인 엘리트 세계에서는 반동적인 정치, 사회문동의 발전을 가져왔다. 
예술가나 지식인들의 세계에서는 소설이나 기타 저술을 통해서 구질서의 몰락을 비판하는 
소리를 높였을 뿐 아니라 대중문화 비판론마져 형성하여, 이른바 분노의 이데올로기를 
낳았다.
  맨 처음 비판론이 발생한 것은 유럽에서였다.따라서 대부분의 비판론자가 유럽인이거나 
그들 자신들이 유럽 엘리트의 후예라 자처하거나 유럽 엘리트를 모방하려는 
미국인들이었다.그러나 서론에서 밝힌 바와 같이 미국적 대중문화 비판론의 바탕도 
있었다.이는 술이나 섹스, 나중에는 대중적 희가극이나 영화를 비판하는 십자군적인 입장을 
취했는데,빈곤한 사람들, 특히 유럽에서 이민 온 가난한 사람들이 청교도적 기준에 맞지 
않는 부도덕한 생활을 갖는다고 비난하는 미국 지배그룹인 와스프(WASP)의 엘리트들과 
보조를 나란히 하여 미국적 대중문제를 비판하였던 것이다.이들 비판론이 완성된 
이론으로는 발전을 보지는 못했으나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 있었던 개혁주의나 
반이민주의의 정치 저술에서는 드러났다.
  최근 수십 년 간 대중문화 비판론을 주장해 온 저자들은 대부분의 경우 두 종류의 정치적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로 나뉜다.한 부류는 보수주의자들로, 유럽의 예를, T.S Eliot, G.R 
레비스 및 오르테가 이 가 세트나 미국의 반 덴 하아그, R. 커셀 등이다.다른 부류의 
비판론자들은, 사회주의적 경향의 사람들로서, 맑스 이데올로기적 시각에서 대중문화를 
비판하고 있다.그러나 이들 모두가 사회주의자나 맑스주의자라고 할 수는 없다.이들 
사회주의적 입장의 유럽계 비판론자들로서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로웬달, 아르쿠제를 들 수 있으며, 미국의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 호우(Irving 
Howe), 멕도날드, 로젠버그 등을 들 수 있다. 대중문화에 대한 사회주의적 비판론은, 비록 
정치적 민주주의나 사회, 경제적 평등주의를 적대시하지는 않다는 점에서 좀 다르지만, 
보수주의자들과는 어떤 면으로 보면 다소 비슷하다.
  그러나 사회주의 비판론자는 문화적 문제의 원인분석에서는 보수주의 비판론자들과 
입장을 달리하게 되었다.보수주의자는 수용자를 무은력자나 무자격자들로 봄으로써 
대중문화의 문제원인을 설명하려는 데 대해, 사회주의자들은 대중사회와 문화를 공급하기 
위해 시장의 메카니즘을 사용하는 데에 잘못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또한 대중문화가 
민속문화를 말살시키고,사람들이 원하지는 않지만, 저항할 수도 예방할 수도 없는 상업적 
대중문화로서 대치되었다고 대중문화의 문제원인을 설명하려 한다.보수주의자들은 이른바 
대중(masses)이 갖는 정치,경제,문화적 면에서의 점증하는 권력에 대해 분개하여 
대중문화를 공격한다.반면에 사회주의자는 프롤레타리아니즘으로부터 해방된 이들 대중이 
고급문화를 받아들이지 하지 않으며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을 지지하려 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대중문화를 공격한다.
  대중문화의 발흥을 놓고 서로 설명을 달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두 비판론은 다 
같이 대중문화의 위력을 두려워하고, 문화적 민주주의가 바람직하다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또한 이 두 비판론은 고급문화에 심각한 위협이 되는 대중문화와 그 대중문화를 
제공하는 매스미디어 기업이나 이 대중문화를 수용하는 수용자로부터 고급문화를 
보호하여야겠다는 점에서 서로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2) 비판론의 역사적 편견.
  대중문화 비판론을 야기시키는  조건은 또 다른 주요한  편견을 낳게 했
다.첫째는 역사넉 오류인데, 역사적  과정을 퇴행적이라고 보는 비관적 견
해이다.이는 서로 협력적이고  통합적이던 옛날의 조그만 공동체사회가 거
대 도시산업사회로 바뀌고, 공동체사회의 민속문화가 대중문화로 대치되면
서부터 인생의  질이 계속 하락했다고 가정하고  있다.사회적 계층 하락의 
길을 걷는 집단의 사람으로서는 그러한 역사과정에 비판론을 갖는 것이 무
리는 아니다.그러나 그들의 오류는 그들의 영향력 상실을 지나치게 과장해
서 전번적인 사회형태가 악화되었다는 이론으로 확대하는 데에서 생긴다.-
흔히 지난시절이 좋았지-라고 과거의  일은 모든 것이 좋았던 것으로 되새
기느 말을 사람들은 일상에서 즐겨 쓰지만, 모든 실증적인 예증으로 볼 때 
옛 시대가 그렇게  좋았던 것만은 아니었다.대중문화 비판론자들은 지난날
을 보는 관점에서 역사과정을 옳개 분석하지 못하고 역사적인 오류를 범하
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론자들의 역시적 관점은 농부들이 민속문화를 창조하고 향유
하면서 행복하게 사는  낭만적인 장면을 상상하는 것으로 시작된다.그런데 
실제 많은 농부들이 봉건지주나 상인에게 가혹한 착취를 당하면서, 허기와 
질병, 일상  다반사로 일어나는 폭력 등을  견디면서 인간이하의 조건에서 
살았다는 것을 너무나 과소평가하고 있다.도시산업화가 시작하면서 ㅇ인생
의 질은 오늘날 비판론자들이  대중문화가 너무 폭력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한 폭력과 잔악성을 민속문화에 의해서 더욱 타락, 악화 되었
다.즉, 정신병원  광인들의 갖은 욕설짓거리와  죄인의 공개처형의 잔혹한 
광경들, 도처에서 볼 수  있는 주정꾼들의 추태 등은 초기 도시산업사회의 
민속문화가 보여주었던 주요한  하나의 특징이었다.초기의 농촌사회에서는 
그래도 민속문화가 이방인이나 이단자를 대할 때 말고는 그다지 저속한 문
화는 아니었다.그렇다고 해서  과거시대의 향수에 젖어 있는 비판론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인정이 넘치는 문화는 아니었다.
  실제로, 이른바 민속사회로부터 현대사회로 옮겨가는 과도기의 사람들에 
관한 연구를 통해 볼 때 현대사회에 대해 퍼붓는 비판론의 비난 대상은 사
실은 산업화되기 이전의 초기 산업사회가  옳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
다.또 이들 초기 산업사회가 좀더 발전되어 보다 어 풍요하게 된 연후에는 
이같은 비판론은 이미 적합치 않은 주장이 되고 말았다.민속사회에서의 공
동체적 결속에 대한 비판론자의 향수에도 불구하고 실제 산업화 이전의 사
회나 초기 산업사회에서의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무관심하였고 예속적이며, 
그들 자신의 복지에 대한 소견을  가질 능력조차 갖지 못한 고립된 개인들
이었다.자신을 보호하려고  권리행사를 할 수 있는  능력이 결핍된 그들은 
세속적인 혹은 종교적 엘리트에 의한 지배속에서 집단적 압력과 구속을 받
으면서 살아야 했다.현대 산업사회에 들어서서야 비로서 일반 사람들은 겨
우 그러한 압력으로부터 풀려 자유롭게 되기 시작했다.우선 경제적 빈곤의 
압력으로부터 벗어나 풍요를 이루면서 이들은 자기의 의사를 분명히 할 수 
있게 하였다.민주체제 사회에서라면 그들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개척, 결
정하게 되는, 러너가 지적한 바와  같은 참여적 사회의 성원이 될 수 있었
다.그러나 사람들의  참여가 늘어날수록 사회의  복잡성이 더욱 증대되고, 
사회의 권력과 기능들의 중앙집권화가 촉진된다.이러한 중앙집권화는 아이
러니컬하게도 사람들의 참여를  통해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능력을 
오히려 감소시키게 된다.거기에다  현대사회에서는 더 많은 교육의 혜택으
로, 사람들은  종속된 존재가 아닌 독립되  개안으로서의 자신을 생각하고 
발전할 수 있게 되었으며, 휴머니스트들이 주장하는 인간의 자율성과 개인
적 독창성이 갖는 가치를 원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쉴즈(E. Shils)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회의 새로운 질서는 미국의 경우 제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형성되었
다.이 새로운 사       회질서는 내외적 갈등이 다소 있기는 했지만, 개인
으로 하여금 전체사회에 좀더 가깝게       참여하는 느낌을,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 더욱 친근감을 드러내주게 했다.
    새로운 사회는 대중이 사회에  적극 참여하는 통합이 이루어졌다는 바
로 그런 뜻에서 대      중사회라 하겠다.사회의 중심-중심적인 제도와 이 
제도를 뒷받침라고 정당화시키는 중       심적인 가치체계-영역이 확대되
었다.대다수의 사회인구(즉, 대중)는 전근대적인 사회나      현대사회 초
기보다 사회의 중심부에 보다 더 가깝게 관계를 맺는 위치에 있게 되었다.  
    이전의 사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때로 대다수 사람들이 국외자로 태
어나고 국외자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대중문화는 일반 대중이 자각된 개인으로서의 그들의 주체성을 확립하고 
자기표현이나 창조성을 개발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그러나 대중문
화가 이들 변화를 직접  야기시키지는 않았다.다시 말해, 대중문화는 이들 
변화의 예들을 보여주고 변화에  관계되는 문제들을 제시하고 생각게 함으
로써 변화에 이르는 것을 도와주었을 뿐이다.
  예컨대, 매스미디어는 개인주의나  개인적 자유에 대한 강력한 옹호자가 
되어 왔다.즉, 텔레비젼 시대  이전의 할리우드 영화들은 대부분 주인공들
이, 물론 그들이 폭력적이거나 법의 범위를 넘어선 행동을 하기도 했지만, 
가부장적인 권위로부터 벗어나 그들의  독자적인 행동을 갖는 영웅적 개인
들을 즐겨 그려 왔다.즉, 중류  혹은 상류 계층의 생횔을 이상화해서 다룬 
영화들은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들이  미국화하고 중류계층을 이루는 데 도
움이 되는 역할모형을 제시했다.또한 가난한 이들에게 빈곤이 없는 삶이란 
어떤 것인가도 보여주었다.미디어가  사회적 계층상승에 대한 기대를 직접 
창조해 내지는 못했지만-이들  계층상승 기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오히
려 상대적 빈곤감만 더  일으켜주는 결과를 갖게 될지 모르지만-그러한 기
대를 갖도록 자극하여 주는 것으로 변화를 조장했다.
  라디오나 텔레비젼의 일일연극들은 이 연속극을 듣는 주부들에게 그들의 
고민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는 정보를 제공해 왔다.물론 이들 연속극에서
는 주인공들과  극주으이 문제들이 선정적이고  현실과 동떨어지게 꾸며져 
있지만, 이 드라마에서 주부 수용자들이 실제로 당면하고 있는 현실세계와
는 다른 그 내용이  보여주고자 하는 바는, 개인으로서의 사람들이 올바른 
지식을 갖추고  노력하면 자신들이 처해있는  애정문제나 사회적 문제들을 
자기 스스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서부극을 포함한 텔레비젼 
인기드라마나 멜로드라마는 극의 전개가  실제의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
이든 환상적인 가상의 상황에  근거한 것이든,수많은 종류의 도덕적, 윤리
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이를 윤리적으로 해결하는 내용이었다.
  오늘날의 텔레비젼  연속물들 속의 수많은  얘기를 인종차별, 국제결혼, 
사회적 일탈행위의 한용관계 등과  같은 문제를 다루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그러나 이들 문제들이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문제처럼 표현되는 것
은 아주 드물다.텔레비젼  드라마의 세계에서는, 현실세계에보다는 그러한 
문제들이 너무나 쉽게 해결되고 있다.그렇다 하더라도 이러한 텔레비젼 내
용들은 수용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처해 있는 현실상황에 적용, 문제해결을 
하는 데에 어떤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것이다 더 좋은 주택과 가정을 꾸미
게 하는 각종 가정잡지나 주부잡지들도 독자에게 좀 더 창조적으로 가정을 
꾸미게 해주고 좀더 심미적 만족감을 성취하는 방향으로 노력하게 한다.잡
지내용대로 하기에는 독자들의 경제적  능력으로는 어렵고 그 부담이 너무 
크기 때문에 기대로 실행해 볼 수는 없다.따라서, 연속극에서 좀더 전형적
인 현실 문제들이 왜  다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또한 가정생활과 주택꾸미
기에 관한 잡지들은 왜 값싸게 할 수 있는 실내장식이나 주택설계 등의 내
용으로 꾸며지지  않느냐고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또 그처럼 비판하기는 
쉽다.그러나 이와 같은 비판이 주장하는 내용이 미디어에서 다루어진다 해
도, 그 미디어  수용자들이 그런 내용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
다.
  지금까지 아무도 사회적으로 현실성 있는 내용의 연속극을 제작방송하려
고 한다든지, 독자의 경제적 형편에 맞도록 현실성 있는 주택이나 가정 꾸
미기 잡지를 만들려고 하지도  않았다.적어도 최근 수십년 동안에는 방송, 
잡지 등의 매스미디어가 이와 같이 현실성 있는 내용을 취급하려고 노력하
니 않았다는 사실로 보아,  이와 같은 내용의 잡지나 연속극들을 만들어서
는 그 성공을 거두기가  어려운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어쩌면 이러한 잡지 
독자들이나 텔레베젼 연속극 시청자들은 이들 미디어 내용물에서 현실적인 
내용보다 오히려 환상적인 내용을 어느 정도 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비판론자들은 대중문화가  단지 기만에 불과한  쾌락이나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고 보며, 이  때문에 대중문화를 경멸하고 있다.그러나 이와 
같은 비판론은 문화를 생각함에 있어 대중문화의 수용자들이 문화를 볼 때 
갖는 관점으로 보고  있지 않다.비판론자는 대중문화 수용자들도 자신들처
럼 높은 교육수준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또 가져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또 이들 수용자들은 항상 개인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독창성과 자기표
현을 할 수 있을 만큼 사회화되었고 교육을 받은 것처럼 생각한다.또 직접
적으로 합리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깊은 지식을 갖고 있다고 믿으
며, 대중문화를  통해 현실도피나 쾌락만을 추구할  하등의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비판론자들은  그들 자신의 문화인 고급문화의 완전
성을 너무나 과대평가하고  있으며-고급문화 역시 피상적 문제해결이나 현
실도피의 내용을 제공한다-사회구성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산층의 생활
문화에 대해서는 반대로 너무나 과소평가하고 있다.
  많은 노동자는 물론,  심지어는 중류계층의 사람들조차도 아직 전통적인 
부모세대의 문화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에 있으며,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의
식하는 개체가 되는 것을 아직도  배우는 과정에 있다.예를 들어, 어느 주
부가 그의 부모가 이웃사람들이 항상  했던 것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싫
어서 자신의 필요와 가치에 따른 방법으로 집안을 장식하여 꾸며보고자 하
는 생각이 될 때, 가정 잡지들은 자신의 방법으로 집안을 스스로 꾸며보려
는 이 주부독자의 너무나 정당하고 바람직한 자기 표현의 노력임을 확산시
킬 뿐 아니라,  여러 가지 다양한 취양문화들을  통한 집안 가꾸는 방법의 
예를 보여주면서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그녀 스스로 생각해 내어 발달시킬 
수 있게 해줄  것이다.마찬가지로 대중적 여성잡지들을 통해 쏟아져나오는 
그 많은 여성해방에 관한 글들은 여성들이 남성지배의 사회에서 자신의 자
유를 위해서 이제는 투쟁에 나서야 할 것이라는 생각과, 나서고 싶다는 느
낌을 갖게 한다.
  이와 같이 하자고 들면, 대중들이 민속문화나 봉건주의의 한계에 벗어날 
때에 대중에게  고급문화에 적극 참여하도록 유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또 
그렇게 함으로써 대중문화의 필요를 극복할 수 있었을 텐데도 어째서 대중
들이 고급문화에 적극  참여하지 않았는지 의문스러울지 모르지만, 사실상 
일반인은 고급문화를 도저히 가까이 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즉, 고급문화
를 지지하는 정치적, 사회적 엘리트들은 대중들이 엘리트의 활동영역에 일
반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중들이 엘리트들과 함
께 고급문화를 향유하는 데 필요한 선행조건이라 할 수 있는, 대중들의 경
제적인 능력  향상이나 지격 획득에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20세기에 
이르기 전까지만 해도,  경제적으로 풍족한 상류집단들은 경제적으로 빈곤
한 하류집단 사람들을 위한 교육을 거부해왔다.이는 가난한 사람들이 글을 
읽고 교육을 받게 되면 혁명을 일으켜 상류계층의 특권을 빼앗아갈 것이라
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오늘날에는 그러한 거부는 최소한으로 줄어들었다.그러나 대중문화 사용
자들은 매스미디어가 만들어내는 내용물에 오랫동안 습관화되어서 그 외의 
어떤 문화내용도, 즉 고급문화를 이제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로 인식
되어 왔다.사람들이 과연 그러한 상황인지의 여부는 더 연구가 필요하겠지
만, 아직까지 그 여부에 대해 실증적으로 해명한 사람은 없다.다만 매스미
디어 내용물이 어느 정도는 초기의 대중문화로부터 그리고 민속문화로부터 
취했을 것으로 보이는 역사적 예증은 있다.그러나 오늘날에 대중문화가 라
디오나 영화의 발명으로 비로서  그 존재가 시작된 것은 아니다.오히려 고
급문화와 마찬가지로 대중문화도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대중
문화 수용자를 단순히 매스미디어의  내용물이 습관화 시키는 과정 속에서 
형성된 결과만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과거나 현재나 여전히 고급문화 수용공증의 사회적·경제적 배경이나 교
육적 배경을 밝혀주는 자료들을  분석해 볼 때, 사람들이 고급문화에 참여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대중문화에 참여하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고급문
화 수용에 참여하는 데  필요한 선결조건인 경제적·교육적 자격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며, 이러한 자격을 갖출 수 있는 기회가 또한 주어지지 않았
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더 많은 사람들이 더 높은 수입과 더 좋고 
높은 인문교육을 받았다면,  현재의 대중문화를 수용하는많은 사람들이 고
급문화에 더욱 많이 참여할  수 있었을 것이다.이러한 가정과 이의 정책적
인 의미에 관해서는 제 4 장에서 다시 논의될 것이다.

    3) 비판론의 여타 편견
  앞에서 설명한 역사적 오류는 다시 두 가지 편견을 낳게 하였다.그 하나
는 미디어가 일반사람들이나 그들의 심리적 능력을 낮게 보는 노골적인 경
멸이다.미디어가 수용자를 미치  파블로프 실험의 개처럼 수동적인 존재들
로 만들며, 미디어가 원하는 어떠한 종류의 감정이나 지식도 주는 대로 그
대로 받아들이도록 사람들을 설득시킬 수 있다고 봄으로써, 앞에서 언급된 
내용 속에서 이미 그러한 경멸을 잘 드러내 보여준다.비판론 속에 담겨 있
는 대중문화 수용자들에 대한 저평가와 그러한 대중문화의 행사에 대한 역
할 비판론이 갖는 근본적인 오류를 쉴즈는 다음과 같이 잘 지적하고 있다.
    비판론은 대중문화가 사람들을 마취시키고 민주주의에 좋지 않은 영향
을 미치기  때문에, 또 고급문화를 파괴시키기  때문에 나쁘다고 주장하여 
왔다.그러나 이들  비판론자의 주장에 대한  실증적인 증거는 없다.오히려 
그에 반사되는 인상적인 증거로도 이같은 주장을 뒷받침해 주지 못한다.어
쩌면 아직도 우리는 진정한 문제는 보지 않고 있는 것 같다.즉, 왜 우리는 
대중문화를 좋아하지 않는가 하는 문제인데, 이는 대중문화에 대해서 우리
가 저항감을 느끼기 때문이다.그것은 어떻게 보면 우리가 노동계급이나 중
산층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어떤 사람들은 정치적인 배경  때문에 중산층보다 노동계급을 더욱 좋
아하지 않는다.그러나 그보다는 사실은 그들이 갖는 미적·도덕적 기준 때
문에 대중문화의 대상에 저항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이러한 사실은 시인
되어야 한다.그래야만 대중문화 내용물에 알맞는 미적 관점이나 도덕적 판
단의 체계를 이룰 수 있게 될 것이다.또 그럼으로써 대중문화의 실제적 결
과에 대한 허구의 얘기 같은 것이 더 생각나지 않을 것이다.
  역사적 오류에서 나온 두 번째의 편견은 오늘날의 전체 고급문화 내용이 
오늘날까지 존속되어 온 과거의  고급문화와 비교하여 더 훌륭해야만 한다
는 것이다.또  페리클레스 시대의 아테네 문화나  엘리자베스 시대의 영국 
문화, 르네상스 시대의 문화  등과 같은 고급문화 황금기의 문화수준에 도
달해야 한다는 것이다.이같이  비교해 보려는 논자들은 고급문화 황금기의 
사회에서 살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빈곤 속에서 (심지어는 기아 속에서) 살
았으며, 이러한  빈곤 속에서 살던 사람들이  지배엘리트층을 유지하는 데 
직접·간접으로 뒷받침이 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이들 지배엘리트들의 후
원으로 그 고급문화가 꽃필 수 있었다는 점은 물론 잊고 있다.그러한 비교
론은 또한 고급문화가 존속된 정도에  따라 그 사회의 질적인 정도를 판단
하려 하기 때문에, 이런  면에서 비판론은 사회가 추구하는 주요한 목표란 
가장 좋은 고급문화의 창조를  가능케 하도록 보장하는 것이며, 그외의 다
른 목표,  예컨대 일반사람들의 복지 같은  것은 사회목표로서는 부차적인 
것이라는 생각을 암암리에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핵심적으로 얘기한다면 대중문화 비판론은 오직 고급문화의 이익
에만 편중한, 그들이 향유하는  고급문화를 위하는 데에만 사회의 힘과 자
원을 최대로 배분하여 스스로의 이익만 도모코자 하는 주장인 것이다.고급
문화 옹호자는 누구나 마찬가지로 자기에게 유리한 것을 추구할 수는 있을 
것이다.그렇지만 이러한 자기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이를 마치 전체 공중의 
이익처럼 위장할 수는 없는 것이며, 사회가 전체적으로 고급문화만의 번영
을 꾀하려는 노력만으로 조직될 수는 없다.
  대중문화의 마지막 편견은 앞에서 논의된 바 있는 내용의 계속이라 하겠
는데 이른바 창작자  지향성의 문화만이어야 한다는 편견이다.그러나 어떠
한 문화내용이든간에  두 가지 관점-창작자의  관점과 사용자의 관점-에서 
평가될 수 있다.창작자의  관점에서는 문화가 수용자를 만족시키려는 어떠
한 시도도 거부하고 문화란 오직 그것을 창조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만 존재
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그렇지만, 수용자의 관점에서는 문화를 사용자의 
입장에서 보는 것으로, 문화가  수용자의 원망과 필요를 어느 정도 만족시
켜 주어야 하는가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
  고급문화는 창작자  지향적 문화라 할 수  있으며, 고급문화의 심미적인 
판단이나 비평적 기준은 이 창작자 지향성에 근거하고 있다.창작자의 의도
만이 결정적인 것이고, 수용자의  가치는 거의 관계없다고 보는 창작자 지
향의 비평은 수용자들의 압력으로부터 창작자들을 보호하는 기능을 수행하
고 있으며, 예술가들의 창조작업을  더 용이하게 해준다.그러나 이는 모든 
예술창조자들이 어느 정도는  그들의 수용자들에게 반응하면서 창작작업을 
하고 있다는 현실을 너무 간과한 감이 없지 않다.
  반면, 대중예술은 대체적으로  사용자 지향의 문화이며 수용자의 가치와 
원망을 만족시키는 것으로 존재한다.이것이 아마도 고급문화가 대중예술이
나 대중문화에 대하여 갖는 적대감의 주요한 이유가 되며 대준문화 비판론
이 소리를 한 옥타브  높이게 되는 이유인 것 같다.고급문화도 대중문화와 
마찬가지로 그 수용자를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고급문화의 경우
는 그 문화의 수용자  역시 수용자 지향의 고급문화를 조르기라도 할까봐, 
이른바 문화적 민주주의를 내걸고 수용자의 문화권리를 고급문화 창조과정
에서도 요구할까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래서 고급문화는 대중문화의 사용자 지향성을 공격하게 되며 고급문화 
내용을 빌려 가는 점에 대해 공격을 하게 된다.즉, 대중문화가 고급문화의 
내용물을 차용해서 수용자  지향의 형태로 전화시킨다는 것이다.더구나 고
급문화는 대중문화를 저질의 문화라고 보고,그 작가들이란 모두 도무지 신
통치 못한  자들이며,그 수용자들은 미적(美的)  감각이라곤 갖지도 못한, 
문화적으로 억압되고 빈곤한 사람들이라고 취급하려 한다.고급문화가 그의 
창작자 지향성의 문화적 성격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고급문화는 오직 
그들의 높은 심미적 기준에 의해서만 이끌어가고 있음을 계속 확인해야 하
며,고급문화의 창작자나 수용자들은 완전한 인간임을 또한 드러내야 한다.
그러한 이유로 고급문화는 높은 문화적 신분이나 권위를 계속 유지할 권리
를 갖고 있다는 것도 보장되어야 한다.
  그런데 고급문화가 그의 창작자  지향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우월한 문화
창조자로서 문화적 신분이 필요하며, 이러한 문화적 신분을 주장하려면 보
다 더 열등한 문화가 있어서  이와 비교해서 고급문화의 높은 문화적 신분
이 확인되고 우월성이 보여져야만 할 것이다.이러한 이유로 해서 대중문화 
비판론은 계속 존재할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비판론은  다분히, 고급문화의 문화적·정치적 특권을 보
호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자기방어의 이데올로기라 하겠다.그래서 다른 모
든 이데올로기에서 보는 것처럼  반대세력의 위력과 반대요소들을 계속 방
치, 존재케 함으로써 오는 유해한 결과들을 과장한다.고급문화가 문화시장
에서 독점성을 잃고  그 특권이나 권력을 어느  정도 포기했음에도 불구하
고,대중예술이 만개하고 있는 시대에도 그 고급문화 생명이 계속해서 생동
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고급문화를 보호하는 수단으로서의 이 자기방어적 
이데올로기는 비판론자들이 내세우는 것만큼 고급문화를 위해 그렇게 필수
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  확실하다. 이 이데올로기는 고급문화와 그 창조
자의 가치가 여타 사회와 문화의  희생으로 지켜질 수 있다고 하기 때문에 
또한 바람직하지  못하다.이러한 방어적 이데올로기로  고급문화를 지키려 
할 때, 허위로 위기의식을  조장하고, 기만적인 사회문제들을 조장할 것이
며, 이러한 가운데 대중예술을 적절히 이해하고 평가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3장.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비교분석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비교분석은 이들 두 문화내용이 보여주는 질(質)
에 대한 개인적인 판단으로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들 두 문화가 현실
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긍정하는 입장에서 사작되어야 한다. 이들 
두 문화의 존재를 긍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각 문화가 일부의 사람들에
게는 설혹 불만스럽다 할지라도, 많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욕구나 희망들을 
만족시켜 주는 문화이기 때문이다.
  이 연구는 모든 인간은  본래 심미적(審美的) 충동(衝動)을 갖고 있다는 
기본적인 가정에서 출발하고자 한다. 즉, 그들의 소망과 공포의 상징적 표
현에 대한  수용성이라든지, 사회에 대한 지식과  소망을 성취하고자 하는 
욕구, 그리고 가능하다면 일상적인 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면 하는 욕망 등을 갖고 있다. 때문에 어느 사회에서나 사회성원
들에게 예술, 오락, 정보들을 반드시 공급해 주어야 한다.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사회성원들이 스스로 예술이나  오락 및 정보를 만들어내는 창조자들
일 수도 있고, 그러한  창조자의 기능을 일시적으로 수행하도록 사회가 어
떤 사람을 뽑을 수도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현대사회에서처럼 사회가 그
같으 창조적 작업만을 전담하는 사람을 전문적으로 양성할 수도 있다.
  더구나 한 사회의 예술이나 오락 및 정보는 진공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
이 아니다.다시 말해서, 한 사회의 예술, 오락, 정보 등은 그 사회의 여러 
가치나 성원들의 필요와 성격에 맞도록 형식과 내용에 일정 수준에 도달한 
것이어야 한다.그렇기 때문에 어느  사회든 그 사회의 심미적 수준은 사회
의 여타  부분과 서로 관계되어 있다.그러므로  유목(遊牧) 종족이 지니는 
미(美), 예술, 여가는 오늘의  공장노동자들이나 지식인들의 미, 예술, 여
가 등과는 다른 것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일반적으로 작은 규모
의 동질적인  사회일수록, 또 전근대적인 사회일수록  문화적 다양성은 적
다.이런 사회는 미에 대한  단 하나의 고정된 개념, 한가지 예술양식(흔히 
종교적인 것), 한 가지의 거주양식 등 획일적인 것으로 발전되는 것이다.
  미국사회와 같은 경우는 노동의  분화와 이질성 및 다양성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져 있는 사회이기 때문에 잡지에서 좋아하는 사진을 벽에 오려 붙이
는 수준의 미적 감각의 표현에서부터 추상적 표현주의 그림작품을 즐겨 장
식하는 데에 이르는 여러 종류의 미술이 수용되고 있으며, 최신 유행의 록
음악으로부터 전자음악에 이르는 다양한  형태의 음악들이 또 서로 공존하
며 수용되고 있다.더욱 중요한 것은, 여러 종류의 심미적 기준들이 다양하
게 있어서 사람들은 이들 중에  어떤 것을 고를 기회가 공평하게 제공되어 
있다는 점이다.그에 따라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적절한 심미적 기준의 것을 
선택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런데 그러한 선택은  아무렇게나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소비자 행태
와 여가에 대한 조사를 보면, 각종 선택한 문화내용들 간에는 서로 상호관
계가 있음을 본다.즉,《하퍼스》(Happer's)나《뉴요커》(New Yorker)와 같
은 고급잡지를 읽는 독자들은 대개 외국영화나 공영 텔레비전 방송의 프로
그램을 더 즐겨 선택해 보는 경향이 있고, 고전음악(반드시 실내악이 아니
라도)을 즐겨 듣는 사람들이며,  스포츠로는 테니스를 좋아하고 가구는 현
대풍의 가구장식을 선택하며, 식도락을 즐기는 경향을 보인다.
  반면에《리더스 다이제스트》(Reader's Digest)  류를 구독해 읽는 독자
들이 즐겨 찾는 영화는 할리우드의 흥행성을 띤 오락영화이며 상업 텔레비
전에서 방송되는 홈 코미디물을  즐겨 시청하는 경향이 있고, 팝송이나 한
때 유행했던 뮤지컬 음악을 듣기 좋아하며 스포츠는 볼링장엘 드나드는 정
도이고, 가구 종류로는 고풍의 가구를 더 좋아한다.또 그림은 구상류의 것
을 더 좋아하고 가정적인 요리를 즐겨 먹는다.
  그런데《아르고시》(Argosy)같은 저급한 잡지를 탐독하는 독자들은 대개 
서부영화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고, 텔레비전은 주로 스포츠 프로그램을 많
이 보며, 스포츠 구경을  위해서 권투장이나 경마장에 자주 드나들며 즐기
고 있다.가구를 선택하는 일은  부인들이 알아서 하도록 하는데 다만 실속
있고 실용적인 것을 선택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문화내용물들을 선택하는 데에는 일정 유형의 관계
가 있는데, 이것은 여러 선택결정 과정에서 서로 비슷한 가치나 심미적 기
준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아니면 또  그들의 가치관을 반영하는 
문화적 내용물이 없을 경우에 최소한  그 중 그래도 그들의 가치나 심미적 
기준에 좀더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되는 문화내용물을 선택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같은 문화내용물을 선택케 하는  가치와 기준이 앞에서 설명한 취향문
화(taste culture)의  근저를 이루는 것이고, 공통의  가치나 기준을 갖고 
서로 유사한 문화내용물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이를테면 취향문화의 공중인 
취향공중(taste public)인 것이다.여러  종류의 상이한 취향문화들과 취향
공중들이 존재하는 까닭은 심미적  기준과 가치가 다양하게 있으며 심미적
으로 다른 견해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개개의 취향공중이 각기 독자적인 심미기준(審美基準)을 갖고 있기 때문
에, 주요 취향문화로서 모두 그들에게 맞는 나름대로의 미술, 음악, 건축, 
문학, 영화, 텔레비전 프로그램  등이 있으며 그리고 각각의 취향문화계에
는 모두 그 내용물을  만드는 나름대로의 작가, 예술가, 연기자, 비평가들
이 존재하게  마련이다.또한 각 취향문화 공중들이  원하는 심미적 요구를 
충족시켜 줄 문화기관들이 또한 있기 마련이다.
  모든 현대인들이 다 미술을  즐긴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고급문화 공중
은 원화(原畵)나  아주 고급한 모사품(模寫品)을  선택하며 때때로 화랑에 
들러서 이것들을 사들인다.그러나 취양이 좀 낮은 중급문화 정도의 공중은 
대량생산적 미술작품이나 모사품을 선택하고 있으며, 백화점의 그림가게에
서 주로 이것들을 구입하게 된다.그런가 하면, 좀더 낮은 하급 취향문화의 
가난한 사람들은 꼭 이름있는  극장에서 연극을 관람하여야 만족해 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면서 만족해 한다.그렇지 않
은 또 다른 사람들은 극장에서도 텔레비전에서도 연극같은 것은 아예 보려
고 하지 않고 축구경기나 프로레슬링을 보면서 즐긴다.
  따라서 이같은 문화의  비교분석방법은 지금까지의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를 갈라놓고 보는 이분법을 지양하게 할 뿐만 아니라 고급문화만이 심미적 
수준을 가지고 있고, 대중문화는 아무런 심미적 수준을 가지고 있고, 대중
문화는 아무런 심미적  의미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이론의 잘못된 점을 
바로잡을 수 있다.나아가서는 대중문화  역시 단일한 문화로 보지 않는다. 
따라서 문화가 얼마나 다양하게 존재하는가를 밝히는 실증적이고 개념적인 
작업은 누가 무슨 내용을 선택하며 선택된 내용들 상호간의 관계가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검토함으로써 어느  정도 드러내줄 수 있으리라고 본다.이러
한 취향문화를 다양성을 가진 개념으로 본 것은 이 연구가 처음은 아니다.
벌써부터  문화나  공중들을   고급(highbrow),  중급(middlebrow),  저급
(lowbrow)으로 구분할 수 있는  개념으로 표현해 왔던 것이다.이 책에서는 
이를 심미적 다원주의(aesthetic pluralism)라고 부르기로 한다.

    1. 취향문화와 공중
  취향문화들은 총체성을 갖는  가치체계들이 아니며 취향문화의 공중들도 
조직적인 집단들이 아니다.취향문화란  유사한 가치들끼리의 문화체계라고 
볼 수 있으며, 그 내용 면에서도 항상 그렇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대부분
은 이같이  유사성을 띤 내용물의 집합인  것이다.또 취향문화를 수용하는 
공중도 유사한 가치를 가짐으로써  여러 문화내용 중에서,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개 유사한 것을 선택하게 되는 사람들을 묶에서 일컫는 집합체
라고 하겠다.여기서 집합체라고 할 때에 이것은 실제적으로 동일장소에 모
여 있는 그런 집합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조사 연구자들을에 의해 분류개념
으로 만들어진 분신적인  개념으로의 집합체인 것이다.물론 취향공중이 실
제로 집합을 이룰 때도  있기는 하다.예컨대 즐겨 시청하는 텔레비전 프로
그램이 중단될 때 이에 항의하는 시청자집단의 경우나, 외부로부터 고급문
화가 위협을 받을 때 이를  지키려고 하나의 집단을 형성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분석적 집합체는 사회조사자들이 설정한 바에 의한 집단 구분을 위한 
경계영역을 가질 수 있으나, 이 격계영역으로 그어진 선 역시 분석을 위한 
인위적 설정이다.
  사람들이 여러 취향문화 중에는 어떤 문화를 선택하게 하는 데에 여러 
요인이 작용한다. 특히 선택하는 사람들의 계층, 연령, 종교, 인종적 
배경, 출생의 지역적 특성, 주거지의 특성들의  요인들이 중요한 것이며, 
이와 힘께 또한 특정 형태의 취향문화를 원하게 만드는, 그들이 갖고 있는 
퍼서널리티의 요인들도 작용하게 된다.그런데 오늘날에는 인종, 종교, 
지역적 차이와 같은 요인들은 결정요인으로으로서 현저하게 사라지는 
대신, 연령이나 계층적 요인이 하위문화(subculture)의 다양성을 이루는 
주요한 근거로 더 많이 작용하게 되었다.그래서 오늘날 젊은이들은 문화적 
혁신(innovation)을 일으키는 주요 추신세력으로 등장하고 있다.적어도 
변화를 겪고 있는 모든 사회에서는 그렇다 하겠다.만일 이 젊은이들이 
새로운 문화내용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경우에는 그들끼리 뭉치기라도 하려 
하는데, 이렇게 해서라도 이들 젊은이들은 어느 정도나마 여타의 
연령집단들과 스스로를 분리시켜 하나의 연령집단으로서 집단의식을 
표현해 보고자 하게 된다.서구사회에서 볼 때 이들 젊은이들이 문화혁신에 
추진세력이 되는 이유는 이들은 비교적 여가가 많은 연령계층이거나 
최소한 문화수용에 경제적 여유가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또한 
젊은이들은 보다 더 다양한 종류의 문화내용들을 필요로 하는 집단이기 
때문에, 더욱 새로운 문화를 늘 꾀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여러 취향문화들 사이에서, 그리고 여러 
취향공중들 사이에서 분화(differentiation)가 이루어지는 주요한 
근거는,이들이 차지하는 사회, 경제적 수준, 다시 말해서 
사회계층(class)이다.사회학자들이 계층을 구분, 설명하는 데 사용하는 세 
가지 수준이 있는데-수입, 직업, 그리고 교육-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운 교육이다.(여기서 교육이라 함은 반드시 정규 학교교육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고 매스미디어나 가타 다른 스포츠를 통해 습득하는 학습내용도 
전부 포함하는 것이다).그렇게 보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교육정도가 
낮은 사람들을 위해서는 성인만화가 있고,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에게는 엘리엇의 문학 같은 것이 적절히 존재하는 것이다.둘째, 
현대사회에서는 심미적 수준과 취향이 가정과 학교에서의 학습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어느 정도의 교육을 이수하였는가가 그 사람들이 어떤 
문화를 선택하였는가를 설명하는가를 설명하는 데 다른 어떤 것보다 가장 
적절한 지표가 되는 것이다.그런데 이러한 두 이유에 의해서 사람들의 
문화선택에 중요한 결정요인이라고 여겨지는 교육은 개인이 속해있는 
사회경제적 위치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비록 그 상관관계가 
완전하지는 않지만, 취향문화와 그 취향공중은 그들의 사회경제적 수준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한 사회에서 취향문화와 공중이 보여주는 
취향수준의 폭과 범위는 그 사회에 존재하는 계층구조의 폭과 범위에 따라 
정해진다.
  따라서, 이 연구는 사회학자 워너(Warner)의 사회계층이론을 도입해서 
취향문화와 공중을 구분해 보기로 한다.그의 구분기준은 비록 문학적으로 
표현하는 데는 좀 반약한 용어이긴 하지만 비교적 가치중립적인 용어라는 
이점을 갖고 있다.즉, 상급이라 해서 긍정적으로 보고 하급이라고 해서 
보지 않는 가치중립적인 구분도식이다.이러한 워너의 계층구분론을 
적용함으로써 이 연구에서는 어느 한쪽 문화에 미학(美學)이 결어되어 
있다거나 하는 평가를 내리지 않고 중립적인 문화분석의 카테고리가 
되도록 한다.
  이렇게 해서 구분된 다섯 개의 취향공중과 그들의 문화는 상급문화(high 
culture), 중상급 문화(upper middle culture), 중하급문화(lower-middle 
culture), 하급문화(low culture)와 신민속 하급문화(quasi-folk low 
culture)이다.이 다섯 개로 나눈문화유형의 구분은 어느 정도 분석의 
편리성에 따라 만들어지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분석목적이 다르면 그 
구분방식도 다를 수 있다.예를 들면 문화정책을 수립한다고 할 때에는 더 
많은 세분화가 필요할 지 모르며, 공중과 문화를 보다 더 세분해 볼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또한 이 분석의 구분 서술방식은 많은 제한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이들 문화의 분석은 일반적으로 미국이 현대사회를 특징적으로 
대표하거나 상징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미국사회의 문화를 다루고 
있다.그러나 미국사회를 다루는 데에 인종, 종교, 지역적인 요소들 및 
기타 미국사회에 내재하는 이질적 요소들을 고려에서 제외시켰다.다만, 
소수 민족의 인종적 하위문화에 대해서는 작은 항목으로 간략히 
언급되기는 할 것이다. 또 각 취향문화의 공중은 모든 연령을 구분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주로 성인과 성인의 문화내용을 다루고 있다.그러나 
청년문화는 작은 항목으로 간단히 논의되지만 다루고 넘어갈 것이다.
  둘째, 이 논문은 문화와 그 공중이 웅결성이 있고, 문화내용의 
구문경계가 분명히 그어진체계로 봄으로써 다소 확대, 과장된 바가 없지는 
않다.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도 앞서도 밝힌 바와 같이 어디까지나 
분석적인 개념으로 만들어진 집합체이지 실재하는 집합체로 본 것은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 번 밝혀둔다.결과적으로 이 논술은 여러 문화와 
공중들 사이의 경계선을 분명하게 긋고 강조하는 면이 없지 않다.왜냐하면 
실제로는 여러 문화의 내용들이 서로 겹쳐 있게 되는 부분이 얼마든지 
있을 수도 있고, 또한 서로 다른 두 공중들이 두 문화 또는 그 이상 여러 
문화를 계속적으로 수용하는 공중일 수도 있으며, 따하서 한 문화의 
공중이 아니라 여러 문화의 공중이 되는 경우도 있다.또한 논술에서는 
공중과 문화를 비교적으로 동질적이고 정태적인 것으로 취급하지만 실제의 
공중은 이처럼 동질적이며 정태적인 것은 아니다.각 공중들과 문화들은 
전통적이라든지 관습적이라든지, 진보적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구분되는 
것과 같은 많은 하위문화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고급문화에서 때로 
학문적이라든지 사회주류, 전위적인 것 둥이 언굽되는 것처럼).연령 역시 
집단의 하위문화와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은 확실한데 이는 젊은이들은 
전통사회보다는 진보주의적 경향에 더 기울어져 있다는 데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셋째, 이 책에서는 문화의 논의를 증심으로 해서 그 문화이 공중을 
설명하기보다는 그 공중이 수용하는 문화를설명하고자 한다.이같이 공중의 
논의에 좀더 초점을 두는 것은 공중의 성격보다 더 분명하고, 문화의 
그것에 비해 기준도 보다 다 안정된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문화는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특정한 유행문화 같은 것은 더욱 그러하다.이같은 문화가 
계속 변하게 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취향문화가 여가를 위한 문화이며 
사람들은 언제나 색다른 것을 원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며, 또 다른 
면에서는 사회변화의 진동이 문화에까지 미친 탓도 있을 것이다.어쨋든 
문화변동은 근래에 와서 그 진행이 가속화되었다.하나의 진보적인 
문화형태가 일반화되는가 하면 일반화된 문화형태가 다른 새로운 진보적인 
문화형태로 대치되는 등 그 변화속도가 빨라졌는데, 특히 고급문화예술의 
경우 현저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대중문화에서의 변화는 주기적인  현상이긴 하지만 그 특유의 형
태를 보인다.특히 영화나 텔레비젼 프로그램들은 단기적으로 그 변화가 주
기성을 갖고 있다.어떤 해에는  서부극이 최고의 시청률을 보이는가 하면, 
그 다음해에는 수사극이 대신하여 높은 인기를 차지하게 되며, 또 다른 해
에는 홈 코메디가 인기있게 되고  그리고는 또 다시 서뷰국이 다시 인가를 
얻게 되는 식의  변화주기성을 보여준다.이러한 프로그램에서의 변화는 때
로, 리스본이 지적한 바  있느 -주변적인 미비한 차이-라는 형태를 나타낸
다.1970년대의 인기있는 텔레비젼의  프로그램은 1950대의 그것과 그리 다
를 바가 없거나 그 이전에 있었던 B급 영화와 그리 다를게 없다.그러나 여
기서 주목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변화는 아마도 취향문화 공중들의 크기가 
상대적으로 변화되었다는 사실이다.이러한 변화는 소득이 늘어나고 교육수
준이 높아짐에 따라 저소득과 저교육수준이 수용해오던 하급문화는 쇠퇴되
고 대신  중상급문화와 중하급문화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크게 늘어나 
이루어 진 것이다.
  넷째로, 문화와 공중에 대한 서술은 엎서 구분한 바 있는 창작자 지향성
과 사용자 지향성 구분을  고급문화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적용하지 않았다
는 점이다.그러나  보다 더 본격적인 문화분석을  하려면 창작자 지향성과 
수용성 지향성을 두 문화에서  모두 밝혀야 할 것으로 믿는다.어떤 문화에
서든 전문적으로 창작하는 사람들은  수용자들이 그 문화내용에 괸해 갖는 
견해와는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다.뿐만 아니라  오늘 날 문화수용사 중 
많은 사람들이, 특히 취미생활이나 부업적인 활동을 통해서 아마추어 창작
자가 되기도 한다.그러한 활동에서는 수용자도 창작자 지향의 수준에서 문
화행위를 하며,  이는 단순한 사용자로서 적응하던  심미적 기준과는 다를 
것이다.
  따라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고전음악의 감상자라면, 음악에 대해서는 
단지 음악의 청자의 입장에서  평가하게 되겠지만 미술은 창작자의 입자에
서 하게 되는 것이다.중하급문화 수준의 텔레비젼 프로그램을 수용하는 사
람이 자동차를 개조해서 쾌속하게  만드는 자동차 기술자인 경우, 그는 동
년배 집단이 시청하는 같은 종류의 텔레비젼 프로그램을 좋아히지만, 자동
차 구입할 때라면 디트로이트산의 일반 소비형 세단차를 선택하는 그의 동
년배 집단 사람들의 사룔자 지향의 선택기준과는 다를 것이다.즉, 그는 자
동차에 관해서는 창작자 지향의 기준을 적용할 지도 모른다.그렇다고 하더
라도 이 개조차 제조자는 아마도 그의 차를 디자인하는 심미적 안목에서는 
그의 취향문제 수준을 벗아나지 못할 것이다.그의 취향범위를 넘어서서 중
급문화와 상급문화의 자동차광들에게  수용되는 유럽경주용 자체의 다자인
에는 이르지 못하고 그의  취향수준인 드트로이트산 신형모델에 더 가까운 
디자인일 것이다.
  다섯째,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여기서  서술하고 있는 취향공중과 
취향문화는 알반공중을 대상으로 일반적인 취향문화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
다.즉, 이 논술에서의 취향문화에는  여러 전문분야 및 과학분야에서 존재
하는 전문적인 취향문화에 관한  것은 취급하지 않고 있다.예를 들어서 사
회학 분야의 경우, 거대 이론가들인 기능주의자, 맑스주의자들 및 가타 수
리론적 모델을 통한  사회학이론을 정립하는 학자들은 사회학의 상급문화, 
즉 고급문화에 속한다 하겠으며,  일반 독자들을 위해 글을 쓰는 사회학적 
내용을 인기저술가들은 사허ㅣ학의  하급문화, 즉 저급문화에 속한다.그리
고 사회학의  중굽문화에 속하는 사람들로는  교과서류의 내용의 지지자들
인, 소규모의  실증연구를 행하며 이를 전문지에  발표하는 연구자들을 들 
수 있다.이러한 분류의 설명은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느낌이 없지 않다.왜
냐하면 대규모의 실증적인 조사연구를 총괄하는 연구프로젝트의 행정을 맡
고 있는 사회학자들이 있는가  하면, 연구활동을 많이 하지 않은 사회학자
들도 많은데 이들은 이러한 분류 중 어디에도 해당되자 않기 때문이다.
  인문과학 분야에서는 전문적인  문화내용과 비전문적인 일반적 문화내용
이 서로 겹쳐지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즉, 인문과학에서 전문문화와 일반
문화의 문제는 다른  부야에서의 이문제와눈 다르다.전문적인 문화의 경우
는 주로 대학에서 연구한는  교수, 학자드에 의해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적국적으로 혹은 극제작으로  이름이 있는 저명한 저술가들에 의
해서, 또는 대학에서 가끔 몸담을 뿐인 자유예술가들 혹은 자유기고가들에 
의해서 이루어 진다.기술적으로  어려운 창작물이 다른 분야에서라면 전문
문화라고 여겨질  수준의 문화내용인데도, 인문분야에서는  일반문화 중의 
상급문화에 속하게  된다.그래서 문화의 경우  일반상급문화의 공중이라면 
전문적이며 기술적인 비평도 읽고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교육을 받
았거나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그렇기 때문에 문학부문에서는 지극히 한
정되고           아주 심오한 내용의  사회과학계통의 논문들은  일반 상
급문화 잡지에서는 거의 볼 수가 없는 것 같다.그 이유는 일반공중은 문학
분야와는 달리 사회과학의 전문적인  글들을 이해하리라고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며 또한  상급문화가 문예적인 연구분석에  대해서는 달갑지 않으며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여섯째, 취향문화는 널리 보급된  내용물들, 특히 상업적으로 널리 보급된 
제품들로 묘사된다.그렇기 때믄에 여기서는 문화의 상업적인 면을 너무 두
드러지게 강조했을지도 모른다.그  문화의 비상업적 측면의 제품을 소홀히 
다룰 수 있다.즉 오늘날에도 종교적 이유로 혹은 의식적 필요애 의해 가정
이나 지역사회에서 예술이나 오락  혹은 정보성있는 비상업적 내용을 만들
고 있지만, 이 분석은 이들 모두를 고려하지는 않았다.이들 가정에서 또는 
지역사회에서 창조하는 문화내용 중 어떤 것을 지역성을 살려 전국적인 상
업문화 내용을 각색한 내용할 수 있으며, 과거 민속문화에 바탕을 둔 차용
문화이거나 새로운 독창적인 것일 수도 있다.
  일곱째, 앞서 기술한 여섯 가지  공중과 문화에 대한 서술은, 특히 구분
된 취향문화들의 특징이라고 규정한  서술은 너무 짧고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이기 때문에 극히 조약한 묘사가 될는지도 모른다.어떤 퓌향문화를-상급
문화의 경우  뿐만 아니라-몇 개의 글귀로  설명한다는 것은 무모하기까지 
한데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더구나  이런 간략적인 서술 조차 완전한 것은 
아니어서, 문화상호간에 비교할 수  있는 몇 개의 선택된 문화적 요소만을 
취급, 강조한 점도 없지 않다.그래서 구분된 각 취향문화에서 문학이나 예
술 부분만을 주로 언급하였다.끝으로 이 개략적인 서술은 너무나 일반적인 
것이어서 각 개인들이나 개별문화 항목들을 분류할 수 없으며 또한 너무나 
개략적인 서술인 까닭에 모든  사람들이나 모든 문화내용들을 특정한 취향
공중으로 분류할 수 있는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지표가 될 수 없으며 이를 
위한 방법론적인 지침도  제공하지 못한 점이 안타깝다.다양한 취향문화에 
대한 인종적 분석이 여기서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끼지만 그에 대한 문제는 
다음 기회에 다루기로 하겠다.

    2. 취향공중의 구분과 그 문화.                
    
    1) 상급문화                        
   상급문화는 다른 취향문화와는  달리 문화의 창조자들과 비평가들에 의
해 지배되고  있으며, 문화의 사용자들은 창조자의  수준과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이 상급문화는  이를테면, 소수의 순수작가, 미술가 들의 
문화이다.그리고 그 문화는  수용공중은 상당수가 창조자들로 구성되어 있
다.이와 같은 상굽문화의 사용자는 다음의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창작자 지향의 상급문화의  수용자들로서 그들 자신들은 직접 창
작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문화를 인식하는 데에 창작자의 견지에서 그 문화
를 본다.둘째는, 문화의 수용자 지향의 사람으로 그 자신이 상급문화에 참
여하지만 더른 더 낮은 문화를  수용하는 사람 또는 이용하는 사람과 마찬
가지로, 창조자의 작품 창조과정이 어떻게 이루어 졌는가, 또는 창작자 작
품 속의 문제의식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보다는 문화산물  자체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있다.그러나 상급문화의 창조자들과 상급문화의 두 종류의 사
용자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모두 다 같이 최
고의 교육을 받은 상류, 중상류 계층의 사람들로서 주로 고등교육기관이나 
전문직 종사자들이라는 점이다.
  상급문화는 다른 취향문화와 그  내용을 비교해 보면, 어떤 면에서는 그 
다양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예컨대 상급문화는 고전적인 문화 내용과 함께 
현대적인 내용을 다 같이 포함하고 있으나 이들 문화내용은 형식이나 내용
에서는 다양하지만 이들의 수용지군은 동일하다.이초롬 서정문화는 단순하
고 서정적인 중세의 노래가  있는가 하면 복잡한 형식의 현대문화도 있고, 
원시예술과  함께  현대의  추상적  표현주의가  있으며,  고대의  서사시
(Beouwulf)와 함꼐 현대의 난해시(제임스 조이스의 Finnegan's Wake)가 포
함된다.(다른 취향문화 역시 고전을 취급하고는 있지만 상급문화와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적고  또 비교적 현대물이나 현대와 관련되는 내용을 
주로 다루고 있다).그뿐만 아니라 상굽문화는 다른 문화에 비해 그 변화의 
정도가 빠르다.20세기만  보더라도, 상급문화예술은  표현주의, 인상주의, 
추상주의, 관념주의 등  여러 형태로 변화를 거쳐  왔다.사실 변하지 않는 
것이란 상급문화를 문화창조자들과 사회 엘리트 계층으로 구성된 문화수용
자들이 계속 지배해 왔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변화를  거듭하는 상급문화에도 다른  문화와 확연히 구분되는 
다른 몇 가지 변치 않는 요소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아마도 불변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시대에 따라 그 강조부분이 상이하기는 하지만, 상급문화는 
형식,본질,표현방법,현시적 내용과 암시적인  상징성등과 관계있는 문화산
물의 창조라는 것이며 이에 명백한 주목을 해왔다는 점일 것이다. 
    최근에 와서는  상급문화의 미술과 음악에서  예술형식에 대한 변혁과 
새로운 실험이 이루어 지고  있으며, 소설이나 건축에서도 그 정도는 약하
지만, 이것은 지배적인  현상이었다.마찬가지로 사회과학에서는 그 방법론
이 연구관심을  지배해 왔다.예술의 내용에 관한  기준에 관해서는 시대에 
따라 변화가  그다지  많지 않다.그리하여 불변의 본질적인 기준으로 상급
문화는 항상 작품의 분위기나 감정의  전달에 보다 더 높은 가치를 둠으로
써, 수용자에게 문회내용의 상당  부분이 여러 가지 차원에서 이해되고 받
아들일 수 있게 하는 특징을 갖는다.상급문화적인 소설이나 연극들은 작품
상의 플롯보다는  작품속에서의 주인공들의 성격전개를  더욱 강조하고 있
다.남녀 주인공들을 통해서 철학적,  심리적 또는 사회적 금분문제들을 깊
이 사색하는데, 이들 작품의  주인공들은 흔히 작가 자신의 모습을 통해서 
그려진다. 때문에 이와 같은 상급문화의 많은 문학작품들은 개인의 소외문
제와 개인과 사회의 갈등문제들을 다루면서 현대사회에서의 예술창조 작가
들 자신이 경험하는 무력한 역할을 그려내고 있다.
    상급문화에서 현대의 논픽션물은  근본적으로는 문학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과거에는 이 논픽션은 사회현실을 분석한다는 점에서 소설가 쪽에 기
울어져 있었으며, 이와 함꼐 사회현실을 묘사하고 파헤치는 소설내용을 비
판적으로 분석한다는 점에서는 비평가에게로 또한 기울어져 있었다.그러나 
어느 한 저명한 비평가가  주장한 것처럼, 소수 소설들이 사회묘사와 고발
이라는 주요한 기능을 이미 상실했다고 하는 오늘 날에는 논픽션은 논술가
적이며 저술가적인 세계로 더 기울어지게 되었다.논픽션 문화물로서, 또한 
상급문화적 문예수준에 이른 사회과학자들의 글도 읽혀질 수 있겠지만, 이
미 말했듯이 상급문화는 사회과학적인 글에 대해 흔히 적대적인 태도를 갖
고 있다.그 까닭은 사화과학자들은 너무 전문적이며 잘 알 수 없는 학술용
어들을 많이 쓰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며 (그런데 문예비평에서 쓰는 전문
적인 용어에 대해서는 비난하고 있지 않다), 또 한편으로는 이들 사회과학
자들 입장에서 보면 문학적 관찰 표현이나 자서전적인 인상표현 등은 비실
증적이며 비과학적이라 하여 받아들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상급문화는 소수의 수용자들에 의해서만 향유되고 있으며 다른 문화공
증들을 배제함으로써 자기들만의  문화라고 하여 높은 긍지를 갖는다.이처
럼 상급문화는 소수 공중에게만 봉사하는 전용물이기 때문에 매스미디어에 
실려 다수의 공중에게 널리 전파되는 것을 피한다.
    즉, 미술의 경우 원화를  주로 화랑을 통해서만 보급한다.그리고 서적
의 경우,지원을 받는 출판사나 상업적인 출판사에 의해 간행되는 상급문화
적인 책들은 시장성을 제한한 판매로 인해 재정적 손해를 가져온다해도 이
를 감수하면서 출판되며 또  이를 자랑스럽게 여긴다.또한 저널의 경우 상
급문화적 잡지로는 이른바  독자가 한정된 소규모 잡지(small magazine)들
이 있다.상급문화적 연극은 주로 유럽이나 뉴욕의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집
중적으로 공연되고 있거나   부정기적인 동인극단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
다.상급문화는 아직 전파매체를  거의 받아들이려 하지 않지만 영상매체의 
경우는 가끔 좋은 영화라면 이를 받아들이고 있으며 이는 중상급문화 수용
자와 공유되는 문화이기도 하다.텔레비전전에서도 약간의 상급문화적인 내
용은 존재하며 이러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도 역시 상급문화 수용자와 공
유하는 문화인데 이는 주로 공영 텔레비전젼을 통해 방송되고 있다.
    상급문화는 창작자  지향의 문화이기 때문에  연기자 쪽보다는 작품의 
창작자 쪽에게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따라서 그 스스로의 독자적
인 연기를 창조해 내서 연출창조에 기여할 수 있음을 보여주지 못하는 한, 
이들 연기자들은 각광받는  스타라기보다는 연출자와 극작가의 창작표현을 
위한 수단적 존재이며 하나의 도구로밖에는 여겨지지 않는다.상급문화에서
는 때로는 비평가가 창작자보다 더욱 중요하게 평가되기도 한다.그 이유는 
상급문화에서 비평가들은 창조된 문화내용물이 상급문화로 인정받을 수 있
는 하나의 수준작품이 될 것인지의 여부를 결정하며 또 이들은 상급문화에
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미학적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사람들이기 때문
이다. 이들  비평가들은 미학적인 쟁점을  제기하고, 미학적 문제논의에서 
제시된 이견은 때때는 창작자들의 다음 창작작업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영화평론에서  거론되는 작가이론의 전개같은 것인데, 작가
이론은 영화가 전적으로 연출자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이론이다.이 작
가이론에 따라 비평가들이 영화감독을 작가로 추앙해 줌으로써 영화감독의 
지위를 향상시켜 주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감독들에게 영화제작에서 그들
의 역할범위의 확대를  권장하였다.비평가들과 창작자 사이의 심미적 관점
의 차이는 제도화까지 되는 경우도  더러 있으며 이를 통해 이념적인 분파
를 형성하게도 된다.영화제작에서 감독의 역할문제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
를 갖는 것은 물론 영화내용이나 그 제작기법에서도 어떤 것이 보다 더 예
술영화에 적합한 것인가에 대해  기존의 영화이론과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표현하는 전위 영화제작자나 영화비평가들의  존재가 바로 심미적 관점 차
이의 제도화와 분파형성의 한 예라 하겠다.
    상급문화에서 최고의  충복은 창작자 지향의  공중이라 하겠다.그러나 
상급문화는 그 스스로  고유한 심미적 기준을 설정하고  사회 전체를 위한 
적절한 문화를 공급하여야 한다는 것을 자처하는 사명감을 가진 문화이다.
대중문화 비평론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느 아 상급문화의 문화적 사명
감은 좀 과장된 것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상급문화는 사회 전체와 여타 취
향문화를 위해 고유한  지도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상급문화는 창작자에 
편향된 문화이고 이 창작자들은 고도의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이러한 상급
문화는 추상적 차원에서 정치적,  사회적, 철학적인 여러 문제들이나 사회
적으로 좀더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해 여타 문화의 경우보다는 더 자주, 더 
체계적으로, 또 더욱 집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그러나 이렇나 지적은 상
급문화만이 모든 본질적인 문제를 다루고 하급 문화들은 모든 본질적인 문
제를 외면한다는 뜻은  아니다.대중적 오락물에서도 도덕적인 문제들이 계
속 취급되고 있으며 철학적  문제도 역시 자주 취급되고 있다.그러나 이들 
대중문화에서는 주로 구체적인  경우를 보이면서 이를 취급하고 있다.그와
는 반대로 상급문화는 일상적인  생활영위와 같은 평범한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을 보이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문제는 상급문화의 수용자
에게는 문제의식의 범위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상급문화 수용자는  창작자 지향의 수용자와  사용자 지향의 수용자의 
두 부류로 나뉜다는 점은 이미 설명한 바 있는데, 전자는 문화를 창작자의 
관점에서 보지만 후자는 전자와 똑같은 상급문화를 선택하면서도 전자와는 
달리 창작자의 입장과는 관계없이 소비적인 입장에서 즐기기 위해 그 문화
를 선택하게 된 것이다.바꾸어 말하면 사용자 지향의 수용자들은 상급문화 
창조자들이 기대하는 것 같은 심미적  작업은 하려고 하지 않는 다는 것이
다.이들 수용자군은 상급문화보다는  낮은 다른 취향문화 수용자와 마찬가
지로 문화를 통해 즐거움을 느낄 수 있고 통찰력과 정보를 얻을 수 있으면 
그만인 것이다.그들은 그 문화가 어떤 과정을 통해 창조되었는가에 대해서
는 그다지 알려고 하지 않으며  관심도 없다.또 어떻게 보면, 창작자나 창
작자의 입장에서 문화를 보는 수용자들처럼 상급문화 창조작업을 완전하게 
이해하지도 감상하지도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상급문화는 이를테면 전문
가를 위한, 전문가에 의한  창조물인데 아마추어 수준의 사용자 지향의 수
용자들이 이를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용자 지향의 수용자는  어쩌면 창작자 지향의 수용자보다 그 
수가 훨씬 많고, 더 높은  경제적, 시회적 지위를 누리고 있을는지도 모른
다.왜냐하면, 미술, 음악, 시  등 상급문화를 지원하는 일군의 후원자들이
나, 예술을 통해 상업적인  이윤을 추구하거나 예술품 상점으로 문화 신분
을 가지려고 하는 예술품 수집가들은 모두 그러한 수용자 집단에 포함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더구나 이 수용자들은 고도의 교육을 받은 전문가들이나 
경영자들이고 고급문화 창작자들로 지가 분야에서는 한 사람의 창작자들이
지만 타분야에서는 비전문가적인 수용자가 되는 상급ㅁ누화 창작자들도 이
에 포함되고 있기 때문이다. 
    상급문화의 창조자들은 때로는 이같은 문화수용자들을 교양 없는 속물
아니면 무작정 추종하는 무리로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마치 인기있는 유
향가 가수 주변에 몰려드는 팬들처럼, 이들은 상급문화의 창작된 작품보다
는 창작한 사람에  대해서, 그리고 그의 유명도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그러나 이러한 문화에 대한 반응양상은 창작자와 수용자들 가운데 어
떤 사람들은 상급문화의  수용자가 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사회적 신분에 
더 관심을 두고 있다.그런데  창작자들 가운데서도 그런 사람이 더러 있는 
것도 사실이다.사용자 지향의  수용자와 함께 상급문화를 받아들이고 있지
만, 이들은 창작자나 비평가의 전문적인 평론이나 학문적인 비평을 중요시
하기 보다는, 이  문화에서 쉽게 즐기고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나 방식에 
끌리는 경향이 있다.그래서  이같은 수용자들은 비평가의 작품비평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창작자 개인의 인물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며 이와 같
이 창작자에게 쏠리는 경향이 때로는 유명한 창작자를 스타처럼 만들게 된
다.지금까지  이같이  스타가  된  상급문화의  창작자로는,  울프(Thomas 
Wolfe),  헤밍웨이(Ernest   Hemingway),샐리져(J.D.  Salinger),  볼드윈
(James Baldwin),메일러(Norman  Mailer)와 같은 작가들을  들 수 있다.이 
중에서 메일러는 주로  중상급문화의 수용자들에게 인기있는 뉴저널리스트
나 저술가가 되었다.
    사용자 지향의 수용자는 그  층이 두텁고 부유하기 때문에 상급문화의 
상업적 판매자들은 이  수용층을 대상으로 하려고 한다.그리하여 문화내용
을 이들 수용층에서 대중적으로 수용될 수 있게끔 문고판의 형태에 적절한 
내용으로  만들거나  이에  맞게  작품내용을  변형시키기까지  한다.예컨
대,1960년대 중반 손탁(Susan  Sontag)이 고급문화 창작자들만의 공식적인 
형태로서 진영(camp)의 형성을  주창했는데, 사용자 중심적인 사람들도 이
를 오락의 하나로 즐길 수 있다고 보고 수용하게 되었다.
    상급문화의 수용자들은 그들의  문화내용이 대중화되면 상급문화의 창
작자나 창작자  지향의 수용자는 새로운  화실을 열거나 <뉴욕  리뷰 오브 
북>(New York Review of Book)같은 새로운 잡지를 만듦으로써 새로운 그들
만의 문화창구를 찾으려  한다.사실 이러한 변화과정은 상급문화의 내용면
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왜냐하면 새로운  문화의 창조를 추구하는 
창작자들은 그의 예술이 지나치게  대중화된다고 느껴질 때 또다시 새로운 
예술세계로 그 방향을 돌리고자  하기 때문이다.-어떤 사람들은 그의 예술
이 계속 대중화되고 인기를 얻음으로써 계속 수입을 올리려고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게 보면 1960년대에  팝 아트, 옵 아트,극소예술,사진적 사실
주의, 개념예술 등과 같은  새로운 예술형태들이 나타나는 그런 급격한 예
술의 변화가 추상적 표현주의  예술이 사용자 지향의 공중에게 대중화되던 
때에 나타났다는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그와 같은 새로운 예술 
가운데 어떤 것은 사용자  지향의 사용자에게 쉽게 받아들여졌지만 고급문
화의 어떤 전위적인 실헙적인  것, 이를테면, 프랑스의 구조주의적인 창조
물들이나 무계음 전자음악 같은 것은 거의 대중화되지 못하고 있다.
    상급문화의 사용자 지향의 공증은  상급문화만 수용하고 있는 것은 아
니다.상급ㅁ누화 아닌 문화도 수용한다.마찬가지로, 창작자 지향의 수용자 
역시 상급문화만 받아들이지는  않는다.상급문화는 항상 너무 진지하기 때
문에 수용자자들은 보다 더  하위의 문화내용들에서 즐거움을 구하려는 것
이다.그리하여 상급문화  공중이 스포츠팬이 되거나  탐정소설을 탐독하게 
되며, 그들이 생각하기에도 저속한 것이라고 여기는 영화나 텔레비전전 프
로그램까지도 즐겨 보는 사람이  될 수 있다.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와 
같은 선택이 이무렇게나  이루어는 것은 아니어서, 상급문화의 스포츠팬은 
대개  하급문화적인  레슬링보다는  야구나  미식축구를  보며,  스필라인
(Mickey Spilline)의 저급한  대중소설보다는 해머트(Dashiel Hammet)ㅡ이 
덜 저급한 대중소설을  골라 읽을 것이다. 이같이  두 종류의 문화에 걸쳐 
있는 문화수용의  양각현상(straddling)은 문화에  보편적인 현상이다.즉, 
중상급문화 수용자가  하급문화를 기웃거리기도 하고,  하급문화 수용자도 
때로는 미술관이나 음악회에 가보기도 하는 것이다. 

      2) 중상급문화
    중상급문화는 비교적 좋은 대학  교육을 받은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
들, 기업의 경영자들 또는  간부들과 이들의 부인들로서 인구의 다수를 점
하는 중산층 사람들의  취향문화이다.이 문화의 취향공중들은 교육을 많이 
받기는 하였지만 문화창조자나 문화비평가가될정도으 또는 그와 동등한 수
준의 높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아니다. 또 상급문화의 사용자 지향의 수
용자들이 상급문화를 창조자의 입장에서 수용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들도 중상급문화를  창작자의 입장으로 접하거나  수용하고있지 못하며, 
그렇다고 그 위의 상급문화를 사용자로서 만족을 느낄 수도 업는 사람들이
다. 그들은 고급스런 문화를 갖기를 원하고 있다. 또 '문화인' 또는 '교양
인'이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들이 좋아하는 종류의 문화란 형식이 지나
치게 새로운 것일  수가 없고, 형식이나 방법론의  문제 같은 것은 그들의 
문화에서 그렇게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지 않는  비교적 고착된 문화이다. 
따라서 중상급문호의 문예물은 상급문화에  비해 이른바 문학성 면에서 본
다면 그다지 높지 못하다.  또 미술이나 음악은 상급문화에 비해 추상성이 
훨씬 덜하다. 상급문화의 소설이나 연극 등에 비해 이 문화는 작품의 주인
공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는 하지만 작품 속으 분위가나 인물으 성격전
개보다는 플롯을  더 강조하나. 내용 면에서  본다면 중상급의 문화공중이 
갖는 보편적인 관심과 시대적인  관심을 드러내는 내용들인데, 이는 이 계
층 사람들의 경제적 사회적 역할을 반영하는 것이라 하겠다. 예를 들면 중
상급문화 수용자는 그들이 속해 있는 사회조직체나 공공기관에서 일상생활
을 통해 일어날 수 있는 활동이나 사고 및 감정들을 표현하는 작품의 내용
을 더 좋아한다. 이들 중상급 문화의 수용자들은 적더도 남자 슈용자의 경
우에는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사회에서 영향력이 있는 위치의 사람들
이기 때문에 이들 수용자들을  위한 작품의 주인공들은 상급문화의 내용에
서처럼 사회적으로  소외된 개인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묘사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과 사람간에나  과료기구 또는 자연과의) 경쟁속에서 그들의 
목적을 성취하는 증격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주이공들로 나타난다. 따라서 
중상급문화의 수용자들은  개인의 성공이나 사회계급  또는 신분의 상승을 
내용으로 다룬 소설, 연극, 전기물들을 수용하고 있다. 중상급문화의 여자 
수용자인 경우는, 남성우위의  취업전선에서 남성과 경쟁하는 여성의 노력
을 다룬 내용의  작품으로 직장과 결혼하다시피 하여  가정을 돌보지 않고 
직업적인 일에만 몰두하는 남편을  가진 부인들의 문제를 다룬 작품, 혹은 
최근에 와서는 여성해방의 필요성이나 문제를 다룬 잘품들을 즐겨 읽고 있
다. 
    중상급문화 공중은 현재의 사회동태  및 사회 지도급 인사들의 행동과 
작업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어 다른 취향문화 공중들 가운데서도 노픽
션 내용을  가장 많이  택하고 수용하게 된다.  <타임>(Time)이나 <뉴스위
크>(News Week)  같은 뉴저널리즘적인 시사잡지의 독자가  바로 이 문화의 
수용자들이다.  또한  논픽션류   소설이나  <오늘의  심리학>(Psychology 
Today) 같이 대중화된 사회과학 등의 기타 논술, 칼럼의 독자들이 이 계층
이다. 
    중상급문화에서 음악은 19세기  작곡가들의 교향곡이나 오페라를 주로 
수용하며, 약간의 예외는 있지만 대개 19세기 이전의 고전음악이나 현대음
악, 그리고 실내악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브로드웨이 뮤지컬은 한때는 
중상급문화의 수용자를 위해 제작되었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그렇지만도 않
은 것 같다. 물론 <헤어>(Hair) 같은 뮤지컬의 경우를 보면 중상층의 젊은
이들은 컨트리 뮤직보다는 록음악(melodic rock)에 더 쏠리고 있어 젊은이
들이 주요 관객이 되고  있기는 하다. 중상급문화로서 더욱 구별해 내기가 
쉽지 않은 것은 미술분야이다.  미술의 경우는 상급문화 공중중에 주로 사
용자 지향의 공중들 상에 널리 대중화된 상급문화적인 미술들을 이 중상급 
공중들로 하여금 그들의 미술문화로 자리잡게 하였는데, 이는 사업적인 미
술상들의 선전이 크게 작용한 결과이다. 
    그렇지만 중상급문화의 공중이 상급문화의 공중과 문화를 함께 공유한
다고 보기는 어렵다. 단지 중상급문화가 상급문화의 일부를 차용하고 있는 
정도일 뿐이며, 중상급문화가 상급 문화에서 창작을 시작했던 일부 창작자
들을 그들의 문화에  끄어들여 그 작품을 차용하고  있을 뿐이다. 예컨대, 
1960년대에 중상급문화  계층의 영화 관객들은  유렴의 영화감독 베르히만
(Ingmar Bergman)이 밝은 작품들을 만들자 그의 영화에 몰려 들었고 이 유
럽 영화감독은 일약 중상급문화의 스타가 되었다. 그러나 그후 베르히만의 
작품이 또다시 점차 철학적이 디고 염세적으로 어둡게 흐르게 되자 중상층
의 관객을 많이 잃었다.  이와는 반대로 아서 밀러(Arther Miller)나 노면 
메일러의 경우 이들은 상급문화  속에서 작가생활을 시작했지만 그후 반드
시 본인들의 의도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들 작가의 수용자층이 
바뀌거나 확대되어 보다 더 하위적인 문화수용자들을 독자층으로 포함시켰
다. 따라서 대중문화  비판론자들은 이 중상급문화 -이를 맥도널드(Dwight 
MacDonald)는 "미드컬트'(med cult)라고 불른다  - 에 대해 대단히 적대적
인 감정을 갖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중상게층의 수용자가 바로 고급문화를 
차용하면서도 때로는 변조시키기까지  하여 고급문화를 잠식하면서도 고급
문화를 애용하는 수용자가 되기는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상급문화 수용자는 문하의 창작자를 '스타'로 보고 있다. 작품을 보
기보다는 창작자를 쳐다본다. 그들은 동일 종류의 미디어가 상급과 중상급
의 내용을 다 같이 공급할 경우 - 때로는 중하급문화와 중상급문화 내용이 
다 같이 공급되는 경우  - 상급문확적인 것과 중상급문화적인 내용을 선별
하는 데  도움을 얻기 위해  평론이나 리뷰에 많이 의존한다.  <뉴욕 타임
즈>(New York Times)나  중상급 문화내용의 잡지에서 영화비평, 미술비평, 
음악비평, 서평을 맡은 논평가들이 내용이 상급 문화내용으로 너무 철학적
이거나 실험적으로 다루거나, 또는 너무 하위급의 문화들에서나 보는 것처
럼 지나치게 상투적인 것이거나 저속하게 다룰경우에는, 그런 글을 비평란
에서 취급하지 말라는 의견을 제시함으로써 미디어가 이 수용자 독자를 위
해 중상급적인 내용에 적극적이기를 요구한다.
     중상급문화는 이른바 고급  미디어나 권위있는 매스미디어를 통해 공
급된다.  <하퍼스>,<뉴요커>,<뉴욕>(New York),  <플레이보이>(Playboy)나 
<미즈>(Ms.), <보그>(Vogue)와 같은 잡지가 그것인데 중상급문화의 공중은 
이같은 잡지를 정기구독하고 있다. 이들 공중은 장서용으로 신간서적을 구
입하며 베스트셀러를 만들어주는  역할도 한다. 이들은 브로드웨이 연극의 
주요 곤객을  이루며, 외국영화나 탈할리우드적인  독립프로더션의 영화를 
즐겨보고 있다. 또 비상업 공영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주로 보는 시청층으로
서 대형기획물 다큐멘터리나 우수한 텔레비젼 극을 즐겨시청한다. 또한 이
들은 대도시에 있는 미술관들과 음악 연주홀을 자주 찾는 주요 관람자들이
다.
    대학진학 인구의 급상승으로 인해  중상급 수용자의 수와 그들의 경제
적 여유가 증가됨에 따라 중상급문화는 모든 위향문화 중에서도 가장 급속
하게 성장하는  문화가 되었다. 많은 대학생들이  재학중의 여가시간을 이 
문하수용으로 보내게 된다. 그러나 이같은 대학재학중에 있었던 중상급 문
화수용은 졸업후에도 게속되어 외국영화의 폭발적 인기라든지 장서용 서적
의 구입증가 같은  새로운 문화현상을 가져왔으며, 이른바'고급'잡지의 판
매부수를 1960년대에 그 배로 늘어나게 만들었다. 또한 뒤에 다시 이 문데
를 다루게 되겠지만, 이들은  청년문화 현상을 일으켰다. 그와 참께, 이들 
젊은 수용자들은 작가 본네가트나 헤세(Hesse), 토키엔(J.R.R. Tolkien)교
수를 스타로 만들었고 진보적인  중상급문화가 발달할수 있는 추진력이 되
었다. 뿐만아니라 이러한  문화현상은 <애틀랜틱>(Atlantic)이나 <뉴요커> 
같은 잡지의 편집 정책상의  변화까지 가죠오게 하였으며, 보다 더 생동하
고 더 '적절한'내용으 편집,  다시 말해서 보다더 진보적인 내용의 잡지로 
만들게 하는 등12) 지금까지의  전통적인 중상급 문화성격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3) 중하급문화
  양적으로 본다면 중하급문화(lower-middle culture)는 미국사회의 지배적인 취
향문화이면, 그 문화수용에서  지배적인 공중층을 이루고 있다. 중하급문화의 수
용층은 중산층 및  중하층의 사람들로 보통 사무원이나 초등학교 선생,  기타 저
급의 정신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다. 좀 나이가  든 연령층의 사람들인 경우는 
고등학교 졸업 정도의  학력을 가진 사람들이 보통 이 계층의  문화공중이며, 젊
은 연령층의 사람들이라면 보통 주립대학이나 초급대학을 마쳤거나 아녀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 여기 해당된다. 
  중하급문화의 공중은 이른바 '문화'라는 것에 그리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는
다. 그들은 보통 '문화'라고 할 때  그것은 상급문화나 중상급문화를 지칭하는 것
으로 알고 있으며, 독자적인  세련성을 가진 상급, 중상급문화나 그 제도를 과거
에는 그리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반드시 그렇지만
은 않게  되었다. 그렇지만 아직도  이 계층의 문화수용자들은  추상적인 예술은 
싫어하며 또한 대부분의  상급문화나 중상급문화를 거부하고 있으나  이제는 '문
화'라는 말은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게끔 되었다. 또 보다 더 많은 수용자를 확
보하려 하고, 그러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문화내용물까지도 변화시켜  보려 하는 
여러 문화산업기관들은 이 수용층 사람들을 문화에  참여하게 하였다. 벌써 여러 
미술관에서는 이들 중하층의 생활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모양의 제품이나 예술품 
등이 전시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슬관에서의 (내마음의 
할렘) 같은 전시로, 이런 그림은 알려진 화가들의 그림들이다.  또 중하급 정도의 
잡지의 광고나 삽화에는  상급문화나 중상급문화의 예술작품들이 차용되고 각색
되어 있다. 중하급문화의  영화나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만드는  제작자들은 상급 
또는 중상급문화의  순수소설이나 드라마들을 각색한다. 또  이들은 (매시) 같은 
중상급문화의 수용자를 위한 영화를 중하급  수용자를 위한 텔레비전 (매시)연속
물로 개작하였다. 
  중하급문화에서 미학은 그  내용에 강조를 둔 것이다. 형식은 내용을  알기 쉽
게 하거나 재미있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라야 한다. 드라마류는 이 문화가 
갖는 가치나 감정을  표현하고 재확인해 주고 있으며, 깊은 탐식적인  내용도 있
긴 하지만 보통은  모든 문제들이 결말 부분에 이르면 풀리게  마련이다. 주인공
은 평범한 보통사람일 수 있겠다. 그런데 이  주인공들은 언제나 모두 전통적 가
치나 종교와 같이 전통적으로 존중되러 온 사회제도 등의 타당성을 인정하는 내
용으로 묘사되어, 결국은 다수인의 가치를 따르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예를 들면,  중하급문화의 홈드라마들은 억제할  수 없는 성적  충동이나 기타 
가정 파괴적인  영향들로부터 어떻게 전통적 가치를  지키고 질서를 유지하는가 
하는 문제를  주로 다루고 있다.  또 상급문화와 중상급문화나  대립은 내세우지 
않고 있다. 특히 이 문화의 사용자 지향의  수용자들은 작품을 쓴 작가나 연출가
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작품에 누가 출연하는가에 큰 
관심을 둔다. 즉  이들은 창작자보다는 이야기속에 담긴 작품에 대한  비평담 같
은 데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친구나 이웃사람들의 이야기가 작품
에 대한 선택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친다. 
  현재의 매스미디어 수용자는 대부분  이 문화계층의 사람들이 그 주류를 이루
고 있어서, 매스미디어는 이들을 주요 수용대상으로  삼고 내용물을 제작하고 있
다. 시사잡지의  경우, 중하계층의 문화공중들은  중상계층공중들과 같은 종류의 
잡지를 읽고  있기는 하지만 중상계층의  문화공중들은 주로 (라이프)나  (루크), 
(코스모폴리탄) 같은 잡지나 여러 여성잡지, 가정잡지,  취미잡지 등을 즐겨 읽고 
있으며, 지난 20년간 이들 잡지의 발행부수를 크게 증가시켰다. 이들 중하계층의 
문화수용자는 문고판으로  수백만 부가 팔리는 재클린  수잔이나 해롤드 로빈스 
같은 통속작가들이 쓴  인기작품의 주요 독자층을 이루고 있다. 또한  이들은 보
통 아주 호화스러운 뮤지컬이나 대작영화를 즐겨  관람하고 있다. 어쨌든 이들이
야말로 미국오락영화의 가장 충실한 관객이며 텔레비전의 가장 충실한 시청자군
을 이루고  있다. 텔레비전의 코미디, 연속극,  쇼 등 인기도가  높은 프로그램은 
바로 이들을 대상으로 만들고 있다. 
  이들은 매스미디어를 통해  보도되는 사회현상이나 돌아가는 세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보다는 자신들이 속한 중하급의  계층문화에 있어 중요한 요소인 
도덕적 가치의 유지를 미디어를 통해 확인 받는데  관심을 쏟고 있다. 따라서 이 
계층문화에서는 중상급문화의 수용자와  달리 극화하지 않는 사실류의 문화내용
을 그리 줄려 수용하려 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개인문제를 상담해주거나 집이나 
자동차 또는  기타 제품들의 관리를  어떻게 하는가를 가르쳐주는  내용, 스스로 
자립해서 생활하려면 어떻게 하는가 등을 다루는 내용의 사실류를 제외하고는)
  그 대신  최근의 세상사를 화두로  꾸민 소설, 중요한  인물이나 유명인사들의 
전기를 극화한 소설을  읽거나, 이를 극화한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를  즐겨 본
다. 그 내용은 도덕극을  현대화하여 각색한 것으로, 죄를 지은 주인공은 불행한 
결말에 이르게 된다든지,  악을 근절시키고 무너진 중하급계층의  도덕적 가치를 
재구성하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들이다. 수잔이나  로빈스의 소설에는 정치가나 예
술인, 대기업 경영인,  쇼의 운영자나 매니저들, 그리고  상급˙중상급 계층의 중
요인물 등이 등장하는데, 이들 주인공들은 결국  끝에 가서는 중하계층의 도덕성
을 지켜나가는 쪽으로 행동하는 것이-혹은  행동했어야 하는 것이 -옳다는 사실
을 깨닫게 되는  사람들이다. 또한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중하급계층의 수용자들
은 텔레비전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같은 것은 잘 시청하지 않는다.  대신 흑인 
등 소수인종에  대한 것이나 경제적 착취,  그리고 법의 공정한 집행  등과 같은 
문제들을 주내용으로 다룬 오락물들을 즐겨 보며,  이러한 문제들이 극화되어 허
구로 꾸며지는 것을 특히 좋아한다. 예컨대, 홈드라마나 추리극 혹은 1960년대에 
인기있던 서부극(보난자)같은 드라마가 그것이다. 
  이러한 프로그림들은 그  내용을 해결이 가능한 사회문제에  국한시켜 다룬다. 
즉 이들  프로그램들은 중하급계층의 도덕적 기준이  명백히 드러나고 적용되는 
사회문제들로 한정해서 다루고 있는 내용들인 것이다.  또 이 계층문화는 여타문
화와 달리 수용자를 알 수  없는 것으로 혼란시킨다거나 용납될 수 없는 것으로 
당혹하게 하는 그런 내용과 방법으로 주제를 취급하지 않는다.
  중하급문화의 미술은 주로 낭만적인 구상화가 많고 추상화나 극단적인 자연주
의 작품은 외면한다. 지난  십수 년 동안 가격이 비싸지 않은  문화나 쉽게 그려
진 그림을 판매하는  화랑들이 급작스럽게 많이 생겨났다. 이 사실로  미루어 보
면, 현지의 중하급문화 수용자는 과거보다는 훨씬  많이 미술품들을 즐겨 구입하
게 되었을 뿐 아니라 추상적인 상급문화나 중상급문화의 미슬품이라도 그들에게 
맞게 대중적으로 개작한 것이라면  이를 수용할 태세를 갖추게 되었다. 즉, 페닝
거와 같이 입체파의 모사품처럼 입체파의 화풍을 보다 더 구상적인 것으로 개작
한다든지, 파스텔을  사용하여 보다 더  부드럽고 낭만적인 것으로  만든 옵아트 
등이 그것이다. 상급문화 작품의  모사화까지도 중하급계층의 문화시장에서 발견
되는데, 예를 들면  세잔이나 고흐의 풍경화나, 드가의  무도화, 뷔페의 도시정경
을 그린 그림 등이 있다. 
  오늘날에 와서는  중하급문화는 점차 분파로 나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즉, 
과거의 전통적이고 관습적인 입장을  있는 그대로 지키려는 것과 앞을 내다보며 
변화를 수용하는 진보적인 입장의 것으로 나누어져 그 사이의 차이가 점점 깊어
지고 있다. 이는 다른  문화에서의 분화폭보다 더욱 현저한 것으로 나타난다. 문
화적인 갈등을 보이고 있는 것은 대부분 성문제를 취급하거나 이를 묘사하는 내
용이다. 전통주의자들은  매스미디어에서 성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해 
아직도 보수적인  데 반해, 진보적인 사람들은  (코스모폴리탄)과 같은 잡지에서 
성문제를 다룬 소설이나 수잔과 로빈스의 소설의 경우와 같이 성문제를 다룬 텔
레비전 다큐멘터리들이나, 요즘에 와서는  텔레비전 오락물에서까지도 다루게 되
는 성문제에 대한  솔직한 취급을 더 좋아한다. 1972년경에는 낙태나  성불능 같
은 내용이 (올 인 더 패밀리)나 (모드)같은 텔레비전 오락프로그림에서 다루어졌
으며, (메리 타일러 무어 쇼)에서는 성생활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고 암시만 
하고 있지만, 여주인공은 때때로 외박을 하기도 한다.
  성이나 기타 금기로 되어 온  문제들을 다루는 데 대해 어떤 수용자는 항의하
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항의는 큰소리로 외쳐대는  보수적인 전통주의자들에 
한정되어 있고, 그 밖에 이를 보통 관습적으로  받아들이는 입장을 취해 오고 있
던 사람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으며,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평하는 중상계층의 논
평가들은 오히려  이 변화에 찬사를  보내고 있다. 텔레비전이나  기타 대중적인 
미디어에서 어린아이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내용물에 금기된 사항이 들어 있을 
때에는 초등학교에서 성교육을 실시하자고 주장했을 경우와 마찬가지로 거친 저
항의 소리가 더 높이 그리고 널리 일어나게  된다. 전체적으로 볼 때 중상급계층
의 양식있는 사람들은 그 자신이 성에 대해 갖고 있던 가치를 이제는 바꾸고 있
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어린아이들에  대해서는 변화된 현재의 성도
덕으로부터 이들을 보호하고 싶은 생각을 감하게 갖고 있으며 여기서 오는 상당
한 모순과 갈등을 안고 있다.
  중하급문화는 상급문화와 다를  바 없이 현재 빠른 변화를 보인다.  그러나 이
같은 중하급문화의 빠른 변화도 새로운 문화형태들을 만들어내는 문화 혁신적인 
변화라기보다는 상위적인 기존의  중상급문화를 수용, 개작해 보는  정도의 실험
적인 것이라  하겠다. 중하급문화의 급속한  변화는, 중하급문화의 수용자들에게 
어떠한 내용의 오락을 보일 것인지에 대해 언제나 골똘히 생각해야 하는 메스미
디어 내용의 창작자나 일부  매스미디어의  정책결정자를 미로에 빠지게 하였다. 
즉 인기리에 방영되던 텔레비전  연속물의 시청률이 갑자기 떨어지면 새로운 프
로그램들이 그 대신  들어서고, 그래도 여전히 높은 시청률을 올리지  못하면 새
로운 편성을 할 때  이들 프로그램들은 또다시 탈락한다. 또는 어떤  것은 그 편
성기간이 채 다  끝나기도 전에 다른 프로그램으로 대치될 때도  있는데, 그렇게 
프로그림이 새것으로 개편되는 속도가 과거에 비해 현저히 빨라졌다는 것이다. 
  수용자가 어떤 것을 원하는지, 수용자에게 호감을  주는 내용물이 무엇인지 정
확하게 알아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나 (라이프)
같은 잡지는 독자들에게 좀더 호감을 얻을 수  있는 내용을 갖추기 위해, 그리고 
독자층을 보다 더 넓히기  위해 잡지 편집정책마저 대담하게 바꾸어보았지만 이
같은 시도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여러 가지 시도에도 불구하고  이들 잡지는 
결국 실패하여 그만 종간을 맞게까지 된다. 그렇게  된 원인은 실은 이들 잡지의 
주요 독자들이 그 잡지의 편집이나  내용을 좋아하지 않은 데 있었던 것은 아니
고, 잡지를 이용하여  광고주들이 텔레비전 광고를 더 좋아하게 되어  그리로 옮
겨갔기 때문이었다. 

    4)하급문화
  하급문화는 더욱  오래 된 중하급계층 이하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그 주요 
수용자는 숙련공이나 준숙련공,  서비스 노동자, 준숙련 사무원들로서 이들은 직
업교육의 중고등학교 과정을 받은  사람이며 흔히 일반 고등학교를 중퇴한 정도
이다. 1950년대까지  미국에서는 하급문화가  지배적인 취향문화였으나 그  이후 
중하급문화에 의해  밀려났다. 하급문화의 공중이  아직도 많긴 하지만  그 수는 
계속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그 이유는 중하급 이하의 계층사람들, 특히 
육체노동자들조차도 이제는 교육기간이  길어져서 이 계층의 전반적인 교육수준
이 크게 향상되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과거에 소외되었던 도시의  하층 젊
은 노동자들이나 멀리 외롭게 떨어져 있는 농촌의 젊은 농업노동계층 인구의 단
절의 벽이 무너지고 텔레비전과 기타 중하급문화적인 메스미디어에 노출된 데에
도 원인의 일부가 있다.
  하급문화의 공중은 이른바 문화라는  것에 대해 아직도 거부반응을 보이고 있
으며 심지어는 적대감조차  갖는다. 그들은, 문화란 자신들에게는 무미건조한 것
일 뿐 아니라 사람을 여성적으로 나약하게 만들고 생동하는 박력을 없애주며 문
화내용이란 일종의 죄받을 짓들이나 다름없는 내용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 
점에서 지식인들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미국의 전 부통령 애그뉴는 미국 중상층
의 대학생들을 나약한  속물이라고 풍자하였던 것이다. 그 때문에 이  계층의 사
감들은 에로틱한 내용을 검열하려는 교회나 경찰 등 정부적 차원의 노력을 때때
로 지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액션물이나 멜로드라마를 아주 좋
아하지만, 폭력물 내용에 대한 검열에 대해서는 이를 지지하기를 주저한다. 
  하급문화의 미학적 기준은 내용면을  강조하며 형식은 단지 부수적인 것일 뿐
이다. 또 그  기대의 사회문제나 이슈를 다룬 추상적인 사상의  내용물에 대해서
는 흥미를  갖지 않는다. 소설이나  공연물의 허구화에서도 이같은  내용을 다룬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따라서  상급문화나 중상급문화를 차용하거나  개조해서 
하급문화를 만들지 않는다. 이들은  단지 도덕극 같은 것을 아주 좋아하는데, 그
것도 주로 가족이나 개인적인 문제를 다룬 내용과 그러한 문제와 관련되는 가치
관에 국한된 것이다. 따라서 하급문화의 내용은  이들 노동계층 사람들의 전통적
인 가치를 지키면서 이와  대립적인 새로운 행위양식이나 이러한 행위양식을 유
발하는 자극적인  충동에 대해 그  유혹을 어떻게 물리치고  극복하는가, 그리고 
이 전통적 가치를 지키는 데 어떻게 성공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려는 내용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하급문화의 내용이 보여주는 이 계층의 지배적인 가치는 중하급문화의 그것보
다도 더 과장되고 더 극화된다. 즉, 선과 악이 명확히 구분되고 대비되며 강조되
고 있다. 소설이나 연극은 멜로드라마적이며, 그 세계는 주인공인 선인의 세계와 
이를 해치는 악인의  세계로 뚜렷이 갈라져 있고  주인공은 항상 결말에 가서는 
악인을 누르고 승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노동계층의 세계에서는 문화내용뿐  아니라 실제의 사회생활 면에서도 남녀의 
                              성차별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어,  가족생활에서조차 그 차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물론 구별이나 
차별이 점차 줄어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같이 성별에 의해  남녀의 차별을 
두는 사회현상은 상급문화의 내용물에도 그대로 반영되게 된다. 즉, 내용에 있어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이 뚜렷하게 나누어지며, 그런 차별의 색채  없이 남
녀를 공평하고 동등하게  취급하는 내용은 보기 드물다. 그러한 성의  차별을 두
는 노동계층 사람들의 가치관이 할리우드의 액션영화나 텔레비전 프로그램-스포
츠 프로그램은 물론이고-이나 남성 독자들을 위해서  만들어지는 모험잡지들, 여
성 취향의 고백잡지 같은 데에 잘 나타난다. 
  남성 취향 액션물은 전형적으로 영웅적인 개인을 주인공으로 하여 도덕질서를 
위반하는 범죄와 폭력에  대항하고, 또 자연적인 재앙으로부터  사회를 구하고자 
하는 영웅적인 투쟁과  노력들을 묘사한다. 그 경우 어느 쪽이나  얘기하고자 하
는 문제는 언제나  도식적이고 분명하다. 예컨대, 중하급문화의 서부극의 경우는 
대개 농장주와 농부 사이의  갈등을 주로 다루지만 하급문화의 서부극은 범인이
나 범법행위자들과 싸우는  카우보이의 이야기를 주로 다룬다.  중하급문화 서부
극의 주인공이, 그 자신이  하는 행동이 사회적으로 유익한 것인가, 자기가 지지
하는 그 입장이 과연  옳은 것인가 하는 문제나, 혹은 자기가  처한 상황에 대해 
어느 정도 회의도 갖고 고민도 해보는 사감들인  데 반해, 하급문화 서부극의 주
인공은 그렇지 않다. 
  즉, 하급문화의 주인공은  노동계층의 행위규범을 표현하는, 그렇다고 어느 계
층에 속해 있는  것으로 되어 있지도 않은  탈계급적인 사람으로 설정되어 있으
며, 다만 남성다움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면서 선한 역할의  여자와의 관계에서는 
아주 수줍어 하지만 악역의 여자와의 관계에서는  성적인 야성을 나타낸다. 이러
한 하급문화의 서부극 주인공들은 단신으로 혹은 마음 맞는 남성 짝패들과 함께 
악인들을 일망타진한다.  그런데 그는 그  싸움의 성공을 하늘의  뜻으로 여기고 
정부나 기타 제도화된 권위를 믿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클라크 게이블, 게리 
쿠퍼, 존  웨인은 이러한 하급문화의  서부극 주인공의 전형적인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액션영화의 젊은 스타들 중에  아무도 이들 과거의 스타들이 누
렸던 인기수준에 이르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은 현재의 상급문화가 이미 기울어
져 가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한편, 여성적인 문제에 관해 고백잡지에서는, 남서의 사랑을 얻기 위해 남성의 
성적 요구에 응해 주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결혼할 때까지는 그래도 순결을 지
켜야 할 것인가 하는 노동계층 소녀들의 갈등  같은 것이 주로 다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남녀의 문제에 있어서 양자를 같이 동정적으로 취급하는 가정 드
라마는 극히 드물다.
  하급문화에서는 연기자야말로 두르러지게  돋보이는 존재가 되어 스타로 군림
할 뿐만 아니라  수용자들이 찾는 대리접촉자로서 나타난다. 예컨대, 하급문화의 
젊은 수용자들은  팬 잡지를 통해  배우들과 간접적으로 만나는  것이다. 더구나 
이들 문화수용자들은 사생활을 가진  한 인간으로서의 개인과 극중의 역을 연기
하는 인물을 잘  구별하지 못하며, 그들에게 널리 알려진 극중의  이미지가 그대
로 그들의 실제의 모습이기를  기대하고 그런 모습으로서 자신들의 우상으로 군
림해 줄 것을 바란다. 한편 그들에게 우상을  만들어준 작품의 작가들이나 그 제
작자들은 전혀 이들 수용자들로부터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하급문화는  메스미디어를  통해 그 공중에게 공급되고 있다. 그런데  이 문화
공중의 수가 적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계층문화의 고유내용으로 보여지
는 경우는 드물고, 중하급문화와 그 내용을 같이 나누어 가지고 있다. 하급 문화
내용 중에는 중하급계층의  내용인데도 하급문화 수용공중이 자기네 노동계층의 
가치에 맞게 나름대로 재해석하는 것도 있을 수 있다. 이를테면, 필자가 다른 연
구에서 발견한 바로는, 노동계층 사람들은 수사물  프로그램을 시청할 때 프로그
램이 보여주는 주인공인 경찰관의  도덕성에 대해서는 오히려 의문을 갖고 범인
을 잡는 데에 경찰관보다  이를 도와준 노동계층의 극중인물들에 대해서 호감을 
가지면서 자신들의 처지와 동일시하려 한다. 그들은  또 다른 프로그램이나 광고
물에 등장한 중하급계층  문하내용물의 주인공들이나 가치들에 대해서는 조롱을 
보내며 비판을 가하고 있다. 
  물론 순전히 하급문화적인 매스미디어 내용이 존재하기는  한다. 그러나 이 계
층의 문화공중은 이러한 내용을 싣기 위해 전국적인 규모의 광고주가 광고를 게
재하도록 영향을 줄 수 있는 구매력이 없기  때문에, 미디어는 대단히 많은 수를 
가진 수용공중을  위한 문화공급이지만 질적으로 저급한  기술로 제작비를 적게 
들여 내용물을 제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이로써 미디어의  경제적인 손실을 
막고자 한다. 더구나 교육정도 마저 극히 낮기  때문에 이  계층공중은 인쇄미디
어의 경우 신문, 잡지조차  그리 많이 읽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타블로이드
판으로 된 읽기 쉬운 일간지와  주간지류를 읽는 게 고작인데 어떤 것은 그래도 
가두판매고가 매우 높은  신문도 있다. 물론 이들이 다루고 있는  내용은 유영인
사에 대한 것이거나 일반인이라도  그들의 폭력행위와 같은 선정적인 내용-어떤 
것은 새로 만들어낸 행동도 있다-을 다루고 있다. 
  대부분의 할리우드 영화가 텔레비전에  관객을 뺏기기 전까지 영화는 이들 하
급문화 공중을   대상으로 만들어졌다. 물론 텔레비전을  하급문화와 중하급문화
의 공중을 다 같이 주요  시청층으로 하고 있지만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가진 주
요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하급문화 정도의 수용자를  광범위하게 대상으로 하고 
있다. 예컨대 서부극이나 (루실 볼 쇼)나 (레드 스켈턴 쇼)같은 코미디 프로그램, 
(애드 설리번 쇼)같은 노래와 곡예 프로그램,  (비벌리 힐빌리스)같은 시추에이션 
코미디 시리즈(농촌 출신의  농업노동자들이 세련된 도시의 중산층 생활에  뛰어
들어 중산층 생활의 허를 발견하는 내용의 코미디), 혹은 (로렌스  웰크 쇼)의 음
악 프로그램 등이  그것이다. 이들 프로그램 가운데 일부는 하급문화  계층의 수
용자 수가 줄어들고 구매력이  감소함에 따라 전국 네트워크 프로그램 편성에서 
탈락되었다. 다만 네트워크 에 직속되지 않은  지방의 독립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는 아직도 이들 프로그램이 재방송되고 있는데 이러한 지망의 독립 텔레비전 방
송국들이 오늘날 하급문화  계층을 위한 주요 미디어로 되어 있다.  지방의 독립 
라디오 방송국은 이들 텔레비전의  하급문화 프로그램을 즐겨 보는 시청자를 대
상으로 록음악이나 컨트리  뮤직을 들려주고 있으며, 타블로이드판  상급 신문들
이 독자의 주목을 끌기 위해  만들어낸 선정적인  헤드라인 방법을 모방하여 음
악적으로 이같은 효과를 내는 헤드라인을 사용해 보는 식의 뉴스도 내보내고 있
다. 
  하급문화의 미술은 공중의 성별에 따라 그  선호내용이 다르게 나타난다. 남자
들은 잡지에 실려  잇는 에로틱한 여자 사진이나  그림을 오려서 그들이 일하는 
공장이나 작업장의 벽에  붙여 놓고 즐겨 본다. 그런가 하면  여자들은 종교적인 
내용의 미술이나  조야한 원색을 쓴  모사화를 벽에 붙이기를  좋아한다. 집안을 
꾸미는 데에서도 그와  같은 하급문화 수준의 미적 감각이 반영된다.  즉 그들은 
현란한 색채로 요란하게 치장하기를  좋아한다. 상급문화나 중상급문화의 공중은 
순수하고 단순한 맛을 풍기는 장식이나 치장에 더 미적 가치를 두는 데 비해 하
급문화의 공중은 아주 화려하게 꾸민 것을 더  좋아한다. 이러한 미적 감각은 전
통적인 측면에서 보면 로코코  식에 가까운 장식이라 하겠고 현대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분별없는, 이른바 할리우드제 현대장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5)신민속문화
  신민속 하급문화는 민속문화와  제2차 세계대전 전에 있었던 상업적 하급문화
의 혼합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을 고비로 농촌지역의 민속문
화나 종족적 차원의 문화에서  벗어나서 새로 출현한 문화내용을 대상으로 생성
된 문화이다. 이 신민속 하급문화는 많은 가난한 사람들의 취향문화이기도 한데, 
이들은 비숙련노동이나 서비스업에  종사하며 초등학교 졸업 정도의 학력밖에는 
없는, 교육수준이 아주 낮은  사람들이다. 이들 중 대부분은 농촌에 살거나 아니
면 농촌 출신의 도시인으로서 유색인종들이다. 이들도  일반 하급공중처럼 그 수
는 많지만 신분이 워낙 낮고  구매력도 신통치 않기 때문에 문화에 대한 그들의 
요구는 문화산업에서 거의 주목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일반 하급
문화와 거의 같은 문화내용을 수용하고 있다. 
  이 신민속 하급문화에 대한 연구자료는 아직  극히 빈약하다. 그래서 현재로서
는 이 문화의 성격을 정확히 규정지어 말하기 좀 어렵겠지만 이렇게 말할 수 있
을 것 같다. 즉  신민속 하급문화는 일반 하급문화의  내용과  비슷한 성격의 문
화지만 그보다는 훨씬 단순한 내용의 문화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신민속 
하급문화도 하급문화처럼  성차별을 다루고 있으며  멜로드라마, 액션 코미디물, 
도덕극 등이 또한 그 내용의 주를 이룬다.  이 계층의 문화공중의 읽을거리도 역
시 일반 하급문화처럼  타블로이드 신문잡지나 만화 등이다.  신민속 하급문화의 
수용공중이 즐겨 찾는  영화는 모험극이나 액션영화들이다. 요즘  이국의 빈민굴
에 있는 삼류 영화관이나 뒷골목 영화관에서 상연하는 낡은 서부극들이 이런 영
화에 속하는데, 스페인어밖에  모르는 많은 멕시코계 관객들을  위해서는 멕시코
에서 제작되는  액션영화나 눈물 짜는 멜로드라마류  영화들이 이곳 극장가에서 
상영되고 있다. 
  이 신민속  하급문화는 메스미디어에 의해 외면당하고  전혀 다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 수용자들은  다른 어떤 문화수용자보다도 민속적인 요소를 많이 
보존유지하고 있다. 이렇게 보존된 이 계층의  민속문화는 가두축제에서 또는 기
타 사회적인 모임과  행사가 있을 때에나 재창조되어 보여진다. 그것도  아마 순
수 원형이라기보다는  어느 정도 현대화된  내용물일 것이다. 이  문화 수용층의 
청년들은 최근에 와서는 공공건물이나  자동차에 아주 공들여 채색한 장식과 원
색의  낙서 같은 것은 통해서 이 계층의  문화적 표현을 한다. 이 낙서의 내용은 
보통 미국사회가 그들 문화를 무시한  데 대한 항의와 저항의 표시로 그들 신민
속문화를 만들어 내는 창작자의 주소나 이름으로 채워져 있다.
  
    3. 청년문화, 인조문화
  지금까지 취향문화 수용자와 취향문화를 간략하게 다룬 이 연구에서는 최근에 
등장한 청년문화나 흑인, 푸에르토리코인, 기타  인종적인 문화, 그리고 유럽에서 
건너온 이민들의 후세들 사이에서 재형성되어 나온 소수민족문화들에 관한 것은 
취급되지 않았다. 이같이  지금까지의 연구분석에서 이들 문화를  제외시킨 데에
는 이유가 있다. 이들 문화는  이미 전술한  바 있는 취향문화에서 잠시  파생되
어 나온 지류라고  보기 때문에 굳이 따로  문화계층의 구분으로 취급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1) 청년문화
  1960년대 후반에  표면상으로 보아 새로운 문화가  젊은이들 사이에 출현했는
데, 이 새로운  문화는 기성세대에 의해 청년문화라고 불렸으나 탄생하자  곧 좌
절을 겪게 되었다.  청년문화는 아주 새로운 문화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실은 전
적으로 새로운 것은 아니며 또한 청년문화라 해서 젊은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문
화도 아니다.  또 이 문화는 청년문화라는  하나의 명칭으로 불릴 수  있을 만큼 
그렇게 동질성을 지닌 문화도 아니다. 
   사실 지금가지 완전히  새로운 문화의 탄생이란 없었다. 이  청년문화의 경우
에도 새로운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도 알고 보면 대부분 제1차 세계대전 후에 나
타난 적이 있었던 보헤미아적 문화와 유사하며  1950년대, 1960년대 초의 비트나 
히피의 문화와도 비슷한  점이 많다. 예를 들면 아무렇게나 차려  입은 옷차림이
나, 깍듯한 예의범절 같은 것은 비웃고 일부러 지키려 하지 않는 것이라든지, 다
다이즘이 그러했던 것처럼 고급문화나 예술의 전통적인 형태를 거부하는 것이라
든지, 마약을 복용하는 것, 그리고 흑인문화나 민속문화로부터 그 문화내용을 빌
려온다든지 하는  점, 그리고 그들이  갖는 급진주의적 가치관  등으로 특징되는 
이 새로운 문화의 모든 내용들은 이전에 있었던 고급문화적 전위예술에 이어 내
려오는 문화내용물들이다. 다만  이 새롭게 보이는 청년문화는  이전의 고급문화 
형태가 보다 더  하위의 취향문화로 하향 확산된 것인데, 문화공중의  수나 문화
내용물의 광범위한 정도가 그러한 사실을 잘 뒷받침해  준다. 그 내용을 보면 마
약문화적 포스터와 장식품, 새로운  록계통의 음악이나 민속음악, 영화, 신문, 사
이키델릭 조명이나 멀티미디어  예술, 넥타이를 매는 정장식의  의상에서부터 남
녀를 구별할 수 없는 유니섹스식 의상에 이르는 새로운  패션의 등장 같은 것을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새로운 문화산물들은  취향문화와는 직접 관계가 없
는 다른 종류의 새로운 문화적 양상, 예를  들면 새로운 가족생활 양식이나 새로
운 공동생활 형태 같은 것들과 합쳐서 상호 보완되어 새로운 문화로 나타난다.
  이러한 여러 혁신적  문화내용들이 매스미디어를 통해서는 단일한 문화내용의 
부분처럼 자주 묘사되었지만 실제로 이들은 서로 다른 몇 종류의 문화로 나누어 
그 기원을  추적해  볼 수 있는 것들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 문화내용들은 크게 
다음 두 수준으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즉 하나는 이  연구에서 총체문화라고 부
르는 문화로서, 사회의  전통적인 주류문화와는 동떨어져 독자적으로  존재해 보
려는 문화이며 주류사회의  문화나 그 사회를 변화시키거나  전복시키고자 한다. 
또 다른  하나는 부분문화라고 부르는  문화로서, 전술한 보든  취향문화와 같이 
사회의 주류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 참여하고 사용해 보는 문화이다.  
  총채문화는 그 특징에 따라 다섯 종류로 다시 분류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정통 히피문화에서  시작한 것으로, 문화적 기준이나  문화산물이 마약
이나 복용하고 마약음악을 듣는 취하고 몽롱해져 사는 식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정통 히피문화가 마약과 음악의 문화가 되어버린 감이 없지 않다.
  둘째는 공동생활 문화인데 이는 가족생활 혹은  공동생활, 경제적 생활의 새로
운 형태를 만들어냈다. 이들  공동생활 문화의 내용은 목가적인 사회, 원시 부족
사회적인 생활, 가족의 확대 등을 강조하고 있다.
  셋째는 정치지향의 문화로, 여러 다른 분파가  있지만 반드시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혁명을  통해 미국의 자본주의를 없애고 대신 급진적 
사회주의나 무정부사회로 대치시키려 하는 문화이다. 
  이들 세 종류의 문화는  서로 전혀 관련이 없는 상호배제적인 성격이라기보다
는 하나의 공동테마를 추구하고  있으면서 서로 강조점을 달리하고 있을 뿐인데 
어떤 사람들은 이 중  둘이나 세 문화에 다 참여하는 경우도  있다. 다만 마약문
화에 심취하고 있는 사람은 다른 문화의 사용자보다는 쾌락주의적이며 신비적이
라고 할  수 있다. 또 공동생활  문화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사회개혁에  보다 더 
깊이 인간적으로 연계되어 있고, 정치적 문화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혁명에 몰두
하고 있으며 마약  사용이나 신비주의, 보다 더 확대된 개방  등을 반혁명적이라 
하여 비판, 반대한다.
  넷째는 네오다다이스트로  부를 수 있는 문화로서  '이피'가 그 전형적인 예가 
될 수 있다. 이  문화는 앞의 세 가지 문화의 혼합물이라고 할 수  있지만  보다 
더 새로운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형태를  창조해 내는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창조도 창조 자체가 이 집단의 저항목적이 아니고 현사회의 주류
에 편승하고 있는 제도를 비판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개혁을 주장하고 있다. 
  다섯째는 종교적인 문화로 이른바 '예수쟁이 문화' 나 헤어크리슈나 유파와 같
은 경우를 들 수  있다. 이는 다른 네 가지의 새로운  문화에 대항하는 전통주의
자들의 반응의 하나로 출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 내용은 종교지배적 사회에 
있는 절대적인 도덕률을  지키고 흔히 성적 금욕주의를 주장하며, 탈정치적이고, 
마약 금지의 생활을 지키는 것을 설교하고 있다. 
  이러한 다섯 가지 유파로 갈라지는 총체적 문화에 참여하는 사람의 수는 미국
에서 전국적으로 10만 명  내외로 소수지만 그들의 활동을 매스미디어가 광범위
하게 취급하고 있기  때문에 그 영향력은 크게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총체문화
는 그 참여자 수의 많고 적음이 문제 이상의 중요한 의미를 띠고 있다. 즉, 총체
문화는 부분문화에,  그리고 부분문화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표본적인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부분문화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수를 합쳐 거의 백만 명에 대
한 효과를 내는 것과  같다.  총체적 문화에 몰두하는 사람들은  거의 다 가족을 
부양할 책임이 없는  젊은이들이며, 그들 중 상당수는 가족을 갖게  되면 부분문
화의 사용자로 위치를 옮긴다. 그렇지만 공동생활적  문화는 비록 거의 독신녀들
만이 참여하고 있지만  아주 가족문화적이다. 공동체적 혼숙의  생활에 참여하는 
사람은 여러 공동체를 여기저기 옮겨 아니면서 생활해 보다가 그들에게 맞는 생
활양식을 가진 공동생활체를 찾으면 거기에 자리잡고 계속적인 혼숙 공동생활을 
하게 된다. 이들 총체적 문화는 사회의 주도세력으로부터 적대를 당하기 때문에, 
더 성장할  수 있는지, 부분문화에 영감을  주는 원천 이상으로 계속  존속할 수 
있는지는 좀더 시간을 두고 보아야 알 수 있을 것이다. 
   부분문화는 이를테면 총체문화의  시간제 문화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적. 사회적으로 주요 세력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를 수용하고 
지원한다. 이들은 부분문화에의 참여를  저녁시간이나 주말에만 한하여 한다든지 
해서 시간제적인 문화공중이  되는 것이다. 전시간을 총체문화에  참여하는 이는 
창작자 지향의 사람들이며  스스로 새로운 미국문화, 새로운  현대문화의 창조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예술가로 자처한다. 반면에 부분문화에  참여하는 사람들
은 사용자  지향의 사람들이다. 이들  부분적 문화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총체적 
문화에 참여하는 사람들보다  그 수가 많기 때문에 부분문화의 산물,  특히 음악
이나 포스터, 의상  등과 같이 상업적으로 판매되는 그런 내용물의  수용자를 이
루고 있다.
  사실 부분문화 중 어떤 것은  여러 다양한 취향문화 중 가장 새로운 전위분파
로 형성되고 있는  것도 있다. 가장 새로운 전위형태의 문화로  형성되는 까닭은 
이것이 문화제품일 뿐만 아니라 창작자 지향의  총체문화의 내용을 빌려서 개작
하기 때문이다. 또  사회의 주류를 이루는 주요 문화산물과 유사한  것으로 개작
되기 때문인 것이다. 히피들에 의해 처음  독창적으로 인디언 스타일이나 새로운 
예술형태로서 포스터가 만들어졌는데, 이것은 중상급 혹은  중하급 예술에 더 가
깝게 변형되어서 크게 인기를 끄는 대중적 포스터가 되었다. 
  부분문화는 그것이 총체문화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이긴 하지만,  수용하는 계
층구분에 따라 부분문화에도  또다시  그 분화가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이런 분
화는 어느 정도 사회문화의 주류를 이루는 각 취향문화의 기준들을 반영하고 있
다. 이렇게 분화된  각 부분문화는 그것이 반영된 사회주류의 각  취향문화에 대
해 급진적 전위문화로서  영향을 준다. 로스잭이 말하는 반문화는 그  문화의 지
향목표나 표현방법, 형식  또는 섬세성에서 노동계층 젊은이들의  마약과 음악의 
문화에 가깝다기보다는 사회  주류문화 중 상급문화에 더 가깝다. 물론  이들 문
화는 가치관에서 서로 공통점을  갖고 있기는 하다. (빌리지 보이스)나 (롤링  스
톤)과 같은 잡지에 실리는 중상급의 부분문화 내용물들과 뉴욕의  그리니치 빌리
지나 로스앤젤레스의 선셋 스트립의 거리에서 볼 수 있는 중하급의 부분문화 내
용물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는 것이다. 서로 다른 급의 부분문화를  수용하는 이
들 두 계층간의 취향의  차이에 대해서 연구된 바는 아직 없지만,  이 양자는 현
재 다 같이 록 종류의 음악을 즐기고  있다. 그러나 중상급계층의 청년들은 록음
악 중에서도 내면적인 실험성을  띤 종류의 것이나 정치내용 성향의 민속음악적
인 록음악을 선택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데  비해, 중하급이나 하급 계층의 수
용자는 사랑을 해서 고통을 받는다는 류의 내용을 노래하는 서정적인 노래나 실
험성이 없는 일상적인  록음악을 더 즐겨 선택하고 있음을 본다.  그렇기 때문에 
보다 고급한 취향을 가진 수용자에게는 밥 딜런이 인기가 높으며 하급문화 수용
자들 사이에서는 행동적인 재니스 조플린이 더 인기가 있다.
  다양한 부분문화들간에 있는 차이 중에 또 다른  특성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로스잭에 따르면 반문화는 테크놀러지에 크게  반기를 들고 있는 문화인데, 
다른 부분문화들 중에는 이  테크놀러지를 평화적으로 사용하는 데 동조를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뮤지컬이나 영화, 기타 미디어  등 그들 문화에 새로이 발명된 
테크놀러지를 적극적으로 채택, 수용하고 있다. 또 어떤 공동체적 생활집단을 대
량으로 생산되는 상품들을 거부하고  스스로 의복과 가구를 만들어 쓰고 있는가 
하면, 또 다른  공동 혼숙적 생활집단에서는 이러한 상업적 제품들을  즐겨 사용
할 뿐 아니라  최신의 건축기술을 자리네 생활  속에서 실제 실험적으로 이용해 
보기도 한다.
  그렇지만 역시 총체문화와 부분문화는, 전술한 바와  같이 가치관에서 많은 공
통점을 갖고 있다.  이들 문화들은 사회 주류문화가 보여주는 여러  측면에 대해 
어깨를 나란히 하여 반대의 대열에 서 있다.
  특히 사회의  호전적 경향에 대하여,  사회 내의 세대간  불평등이나 경제적인 
불평등에 대해 추구되어야 할 사회적 차원의 가치와 이를 실현하기 위해 만들어
진 실제 공공정책  사이에 커다란 갭이 있음을  보여주는 사회의 위선성에 대하
여, 이들 모든 청년문화들은  공동전선을 펴고 저항한다. 또한 이들 문화들은 모
두 알콜보다는 마약에  의존한다. 또 개인적 관심을 넘어서서 모두  공동체를 더 
강조한다. 물론 "내가 할 일만 하면 된다" 고 하는 사람이 더러 있기는 하겠지만 
역시 대부분 공동체적 혼숙생활을   강조하는 그들은 합리성과 이성보다는 감성
적 표현에 더 기울어져 있는 문화이며, 인쇄문화보다는 영상문화로서 음악, 미술
을 더 좋아하는 문화이다. 또 주류사회가 갖는  성에 대한 기존규범을 이 문화들
은 다 같이 거부한다. 물론, 이제 전통적 성규범은 이들 문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젊은 사람들에게도 더 이상 신성 불가침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는 실정
이기는 하다. 
  끝으로 이 문화의 모든  젊은이들은 연령으로는 여전히 미성년자 취급을 받아
야 하는 사회적 위치일 수밖에 없다. 특히  완전한 직업인이나 근로자가 된 나이
에 이르지 못한  젊은이들이 사회에서 갖는 어정쩡하고  모호한 입장의  문제가 
공통으로 반영되어 있으며,  그에 대한 젊은이들의 반응을 다 같이  보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절에서 볼 때에는 지금까지 살펴본 여러  문화들을 청년
문화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명명하는 것이 가능한  것도 같다. 물론 청년문화라고 
명명한다 해도 그들의 사회주류에 대한 저항은 청년이라는 세대 차이에서 온 문
화에 있다기보다는 근본적인  가치관의 차이에 더 많은 이유가 있다.  그리고 이
들 가치관이라고 해서  전부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가치관의 차이에는 
사회계층의 차이라는  요인이 더 많이 작용하고  잇는 것이다. 즉,  젊은 문화적. 
정치적 급진주의자들은 주로 중상급계층의  전문직 종사자들로 이루어졌으며, 이
들은 한편으로는  기업 경영자들인 상급.  중상급 계층의 사람들이  갖는 가치를 
비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 경영자들은 추종하는 하급노동계층의 가치도 반
대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현존하는 경제체제와도 투쟁하고 있다. 즉,  이는 현지
의 경제체제를 움직이고 있는  자본주나 기업 경영자에게 생계유지를 위해 의존
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 자본가나 경영주를 지지하게  되는 정신 노동자나 육체 
노동자들에 대항하는 투쟁이다. 
  그들은 또 사회가  관료화되어 가는 데 대해 투쟁한다. 특히  지적이며 전문적
인 작업이  관료화하는 데 강력히  저항한다. 이같은 관료화  속에서 지식인들과 
전문직 종사자들은 그들의 지적 활동이나 작업에 대해서 통제받게 될 위험이 있
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젊은 급진주의자들은 기업이  지배하는 사회를 비판하는 
사회주의적 대중문화 비판자들과 같은 입장에서 싸우게  된다. 그렇지만 이 양자
는 같은 입장에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가치관을 주창하고 있다.  젊은 급진주의
자들은 완전히 다른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것이 지 고급문화를 옹호하는데 
대해서는 특별한 관심은  없다. 사실은 급진주의와 대중문화  비판론자들은 급진
주의자를 낭만적인 혁명가라고  공격하고 심지어는 이들을 좌경 파시스트라고까
지 말한다. 급진주의자들은 대중문화  비판론자들을  현상유지에 급급한 테제 옹
호론자들이라고 비난한다. 이들 두 집단간의 많은  갈등의 쟁점은 대학사회의 존
재가치에 집중되어  있다. 급진주의자들은  대학사회가 대기업 경제에  의존하고 
따라서 대기업 경제체제를 지지하는 기준을 갖고 있다고 보고 그 존재가치를 부
정하는 데 대해,  대중문화 비판론자들은 대학사회가 고급문화의  주요 보고이며 
재정적 기반이기 때문에 대학사회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보고 이를 옹호하고 있
다. 
  그러나 보다 더 장기적인 역사적 안목으로  보면, 급진주의자나 대중문화 비판
론자나 다 같은 부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이 양자가 주창하는 이상이나 
지적하는 문제점들이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급진주의자나 비판론자들은 모두 도
시산업사회로 변화함에 따라 생기는  사회의 희생물 또는 피해부분을 다시 회복
시키고 이들을 옹호하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제2장에서도 밝
혔듯이 대중문화 비판론자들은, 상업적  대중문화의 성장과 발전으로 고급문화는 
그 문화적  지배권을 상실했다고 개탄하면서 고급문화의 편에 서서 희생된 고급
문화를 옹호하려고  한다. 한편, 많은  급진주의론자들은 도시화,  상업화에 따라 
중상급계층의 직업에 관료화되어  간다고 이에 대항하는 후방공격을  가했다. 그
리하여 어떤 급진주의자는 생활의 여유 없이도 향유할 수 있는 그런 대중문화의 
모색보다 노동이 줄어들면서 생기는 시간의 여유에 바탕을 둔 새로운 문화를 모
색하고 있다. 즉, 사람들이 주당  40시간의 작업밖에 하지 않게 될 때 이들의 문
화적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새로운 문화를 모색하고 있다. 이화  함께 또 다
른 급진주의자들은 특히 '자신의 일은 자기  스스로 하면 될 것'이라고 강조하며, 
수동예술이나 기타 개인 숙련기술을 익히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지적이고 전문적
인 작업이 조립공장의 제품화되는 현상에 크게 반발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 보면 급진주의자와 대중문화 비판론자 사이의 쟁점은 민주주의적 
이상의 중요성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즉 급진주의자는 방법이  때로 비민주
적일 때도 있지만 새로운 문화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오 비민주적인 방법
도 수용될 수  있다고 인정하는 데 비해, 대중문화 비판론자는  이러한 비민주적
인 면을 공격한다. 그런가 하면, 대중문화 비판론자들은 고급문화의 보존을 원한
다. 그래서 고급문화의 보존을 위해서는 이를  지원하는 사회의 주도세력인 경제 
정치적 제도가 때로는  비민주적임에도 불구하고 이들 제도를  지지한다. 그리하
여 급진주의자들은 대중문화 비판론자들이 이를 현  정치. 경제 제도들의 비민주
적인 방법을 눈감아주는 것이라 하여 또한 공격을 퍼붓는다. 

    2) 흑인문화
  의식적이고 총력을 기울여 창조시킨 미국의 흑인문화는 1960년대 후반기에 와
서야 모습이 드러났지만 적어도 백인들에게는 결코  새롭게 나타난 것은 아니다. 
새로이 드러나 보이는  흑인문화이지만, 푸에르토리코 문화, 중국문화가 기타 다
른 소외되었던 미국의 여러 소수인종 집단의 문화들과 함께 근래에 와서 발전을 
하고 있는 바, 흑인문화만이  새삼스럽게 출현한 것은 아니다. 미국에 흑인이 있
어 온 이래 모든 문화부문에서 흑인문화 내용이  항상 존재했다고 할 수 있으며, 
백인들은 1세기 이상 계속해서 흑인들의 음악으로부터 창작내용을 빌려 왔던 것
이다. 그러면서도 흑인문화가   새롭게 보이는 것은 그 흑인문화의  생동력이 크
게 늘어난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근래에 와서 백인들의 문화적 생동력
보다 훨씬  더 현저하게 나타났다.  이렇게 흑인문화가 새로운  생동력을 보이게 
된 것은  교육받은 흑인 중산층이  늘어났기 때문이며, 흑백  인종차별의 장벽이 
다소 완화된 데에도  그 원인이 있다고 하겠다. 또 한편으로는  흑인의 민권운동
이나 흑인의 지위향상  운동을 통한 흑인문화의 필요가  커진 데에도 원인이 있
다. 
  사실, 흑인문화 내용에 보다 더 새로운 요소는  -포에르토리코나 기타 다른 소
수인종의 문화에서도  보는 것처럼- 미국에서  흑인들의 사회적. 정치적  지위를 
개선코자 하는 인종적 민족감정 같은 것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새로운 
흑인문화의 내용을  보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다분히  정치적인 주장을 담고 
있다. 이같이 정치적  의미를 띠게 되는 흑인문화는 인종적 평등에  대한 문화적 
기초를 확립하기 위한 흑인의  전통과 정체성의 인정을 표현하고 요구하며 정당
화하는 내용인 것이다. 
  최근 이 흑인문화는 급격하게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부분문화로 남아 
있다. 흑인들은 아직도 백인들과 함께 백인들이  만든 취향문화를 함께 수용하고 
있다. 흑인들의 심미적 기준이나 여가, 기타 소비습관들도 같은 사회경제 계층이
나 같은 연령층 백인들의 그것과 다름이 없다.  물론 흑인들은 흑인 라디오 방송
의 청취자가 되고 흑인 신문이나 잡지를 읽는 독자가 되고 흑인영화를 관람하며 
텔레비전의 흑인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있기는 하지만, 흑인들은  백인들이 백인
을 위해 만든 미디어를 또한  수용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흑인이 백인보다 더 많
이 백인 미디어를  수용하고 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물론 백인  내용물의 문화
와 흑인 내용물의 문화를 똑같이  놓고 선택할 기회를 주기 전에는 이를 일반화
시켜 말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의 흑인들은 압도적인 백인 취향성의 미디어 내용
물을 즐기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몇몇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선호도 조사를 보면 완전히 흑인만으로 만
들어진 오락 프로그램과 백인만으로 만들어진 오락 프로그램을 가설적으로 상정
하여, 보고 싶은 프로그램을 어느 한 쪽만 선택하라고 했을 때, 대다수 흑인들은 
흑인만의 오락물을 택하겠다고 했으나, 흑백의 두  문화내용이 적절히 배합된 오
락 프로그램도 선택할 수 있게 했을 때에는 거의 모든 흑인들이 어느 한 쪽으로 
편향된 내용보다는 흑백이 함께 배합된 오락 프로그램을 더 좋아하는 것으로 나
타났다.

    3)소수인종문화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주해 온  사람들은 자신들의 취향문화도 함께 갖고 이민
했다. 그런데 이들은 일부 유태인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교육을 잘 받지 못
한 농부이거나 종일 일을 해야 하는 노동자나 남의 경작지에서 일하며 살아가는 
농부들이었다. 때문에 이런  사람들의 취향문화란 저급하고 빈약할 수밖에 없다. 
이들이 갖고 온  취향문화란 어려운 생활속에서 겪는 좌절, 피해를  잊게 해주거
나 좌절의 상심을 달래줄 수 있는 그런  내용의 문화였다. 따라서 이들의 취향문
화들은 가족생활이나 식생활 혹은 종교와 같은 것은 강조하는 내용들이었다. 
  이들 문화는 어떤 점에서 보면 이민인들의 모국언어로 인해 갖고 온 자기들의 
문화가 이민 초기에는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민인들의 2세 시대에 들어서
면서 이 취향문화들은 곧  이주지 문화와 접촉하면서 일어나는 문화이식에 의해 
침식당하였다. 즉, 부모세대가 갖고  온 취향문화는 이들 2세들의 늘어난 여가를 
치워줄 수 있을 만큼 내용이 풍부하고 윤택하지  못했다. 또 이들의 문화는 지나
치게 종교적이어서 보다 더 세속적인 여가활동을 바라고 선택하려는 2세들을 만
족시키지 못하였다. 
  게다가 이민인들의 취향문화는 주로  민속문화였거나 신민속 하급문화였다. 이
민 2세와 후손들은 사회적  계층이나 신분이 점차 높아지면서 보다 더 세련되고 
높아진 신분에 맞는  취향문화를 원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이민 첫  세대가 가져
온 하급문화의 낮은 수준과 질을 더 높이거나,  또는 그들 모국에서 더욱 고급한 
민속문화를 새로이 수입하여 수용하는 방법이 있었다.  그러나 그 어떤 방법보다
도 이주지에 있는 상위급의 문화를 선택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더 쉽다고 생각되
었다. 일부  유태인들의 취향문화처럼 미국화되는  속에서도 남을 수  있는 예도 
있었지만, 폴란드, 이탈리아, 그리스와 같은 나라  사람들이 갖고 온 그들의 농촌
문화는 미국에 와서는 사실상 소멸했고, 다만  전통적인 음식이나 종교적 의식에
만 그 자취가 남아 있을 뿐이다.- 물론 미국의 소수민족들이  가끔 벌이 는 민속
축제 같은 데서  더러 이들의 토착문화인 노래나 춤이  실연되는 것을 볼 수 있
다. 
  이탈리아나 폴란드 혹은  기타 유럽이민들의 3,4대에 와서  그들의 민족문화가 
다시 재출현하게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아직도 이들의 후예  중에 소수
의 지식인이 보여주는 것 말고는 이같은 소수인종문화의 재등장 현상을 믿을 만
한 실증적인 예는 아직 없다. 사실 가장  최근의 지역공동사회에 관한 연구를 보
면 이민 3,4대에 이르면 거의 완전히  미국문화에의 동화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비록 문화의 소화흡수가 아주  더뎌서 그들의  소수민족문화적인 가정이나 사
회구조가 계속 지속되긴 하겠지만, 오늘날의  '소수민족의 모습'은 슈퍼마켓 같은 
속에서 팔고 있는 피자나 콘비프 통조림 또는 쉬스 케바브같이 이미 범종족화하
여 모든 종족의  사람이 즐겨 먹는 음식으로  되어버린 민속문화에서 찾아볼 수 
있고, 소수민족 젊은이들은 이에 만족하면서 같은  또래의 미국인 젊은이들과 별
다른 바 없이 생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새로이 등장하거나 더욱  눈에 띄게 나타난 소수민족문화 현상은 흑인 
정치활동의 증가와 활성화에 대한  도시의 백인 노동계층 사람들의 반응과 함께 
생겨난 소수민족정치와 같은 것에서 볼 수  있다. 소수민족들은 미국문화에 일방
적으로 굴하게 되는 문화이식에  저항하여 달리 유권자 자격을 내세워 종족적으
로 균형이 잡혀져  있을 것을 주장한다. 그리하여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 소수
민족의 자부심이 높아진 예를 더러 볼 수 있는데, 예컨대, 마피아와 같은 조직적 
범죄가 이탈리아인들과 동일시되는 스테레오타입식 인식에 이탈리아인들은 항의
하였으며, '폴리쉬 농담'으로 폴란드인들의 어리석음을  조롱하는 데 대해 폴란드 
사람들은 저항하였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경우 정치적 활동은 범소수민족적인 것이었다. 즉, 어떤 종
족의 배경을 가진 노동계층의 정치가들은 과거처럼 출신민족집단의 지지만 받는 
것이 아니라 그가 대변하는 노동계층의 모든 소수민족집단의 유권자들로부터 지
지를 받게 된다. 특히 백인이든 흑인이든간에  중상급계층 출신 개혁가에 대항하
여 출마했을  때는 더욱 그러했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  소수민족성이라는 것은 
하층계급의 변조된 표현이라  하겠다. 예를 들면 프로카치노가  1968년 뉴욕주지
사 선거에서 린제이에 대항하여 출마했는데 이때 그는 이탈리아 사람을 위한 선
거운동을 하지 않고  '부유한 자유인'에 대항하는 가난한 '약자'를 대변하는  후보
라는 기치를 내세워  선거유세를 했다. 선거운동 기간 중 어떤  형태의 내용으로
든 자기 민족의 자부심이나 주체성의  감정이  나타날 수 있었겠으나 선거가 일
단 끝난 뒤에는 이같은 감정은 다 없어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선거기간 중에 있
었던 자부심이 각 소수민족문화들의 재등장으로 발전했다고 시사하는 흔적은 없
다. 

    4. 취향공중과 취향문화의 사회구조
  개개 취향공중과 취향문화들의  분석에서 지금까지의 연구들은 취향공중과 그 
문화가 밀접히 연관되어  있으며, 또 이들 공중과 문화가 속해  있는 전체사회와
도 상호연관이  깊다는 점에 대해서 소홀해  온 감이 없지 않다.  그런데 실제로 
취향공중과 취향문화들은  각각 독자적인 집합체로 존재할  뿐 아니라 구체적인 
취향구조속에서 이를 구성하는 부분들로서도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
다. 이 취향구조는 서로 다른 여러 공중들과  문화들 간에 일어나는 관계들이 모
여서 생성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들의  총화인 취향구조는 또다시  이 구조가 
속해 있는 더 큰 전체사회라는 구조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이다. 

    1) 취향, 사회구조 및 정치
  취향문화와 이것이 속해 있는 좀더  큰 사회와의 관계에서 더욱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문화의 정치성이다.  물론 대부분의 취향문화가 외견상  정치성을 명백히 
드러내는 것은 아니지만 거의  모든 문화내용이 정치적이 되거나 정치적인 결과
를 가지고 가치를 표현하고 있다. 이를테면  가장 단순한 텔레비전 홈코미디조차 
남성과 여성의 관계,  그리고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 등에 대해  무엇인가를 언급
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이 드라마에서 이들의 관계가 권력의 문제나  권력의 가
치를 포함하는 것일진대,  그러한 관계가 현실적으로 문젯거리로  등장하기 전까
지는 그 내용이  갖는 정치적 의미를 시청자들은 미처 느끼지  못할지 모르지만, 
이 드라마는 분명히 정치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광고에서 여자를 
성적 대상의 상징물로 사용해 왔지만 여성해방운동이 태동되면서 비로소 이러한 
광고내용이 정치적인 문제가 되었다.     
  앞서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대중문화 비판자들도  보수적인 정책지향이라든
지 사회주의 정책지향을 주창하여  왔는데 이러한 것은 대중문화 비판론의 정치
적인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새로운 급진주의론적 문화나  흑인문화의 주장자
들은 이런 점에서 기여한  바가 크다고 하겠다. 그것의 하나로, 이들은 상급문화
든 하급문화든 사회의 주류를 이루는 취향문화가 내포하고 있는 문화 뒤에 숨어 
있는 정치적인 가정들을  밝혀냈으며, 모든 문화는 그 속에 반드시  정치적인 뜻
을 함축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잇다. 대중문화에 대한  사회주의적 비판론자들은 
대중문화 속에  담겨 있는 보수주의적인  정치적 가치를 이미  지적했다. 그러나 
고급문화 속에 담겨 있는 보수주의적인 정치적 가치에 대해서는 잘 논하려고 하
지 않는다. 이렇게  고급문화를 지키고 옹호하는 사회주의적  대중문화 비판론자
들이나 보수주의적 대중문화 비판론자들은 급진주의론자나 호전적인 흑인주의론
자들이 이 고급문화  속에  담겨 있는 보수주의적인 덩치 가치들을 밝혀내고 이
를 비판하고 나서자 매우 당황하였다.
  이들 급진주의론자들이 강도  높게 비판한 또 하나의 중요한 것은,  문화가 정
치보다 상위에 위치할  수는 없고 정치의 하부구조라고 주장한 점이다.  이에 대
해 일부 고급문화 옹호론자들은 문화의 정치화라고 하며 몹시 개탄하고 있다. 
  이러한 문화의 정치화는 고급문화에  담겨져 있는 숨은 정치적인 가치들을 표
면으로 드러나게 했고 이들 가치들에 대한  논란을 야기시켰으며, 급기야는 문화
가 보수적이라느니, 급진적이라느니  하는 문화의 비평논쟁으로 몰고  가게 되었
다. 
  여러 가지 다양한 취향문화들이  갖는 그 정치적인 가치들을 정확하게 밝혀내
기란 아주 어렵다. 왜냐하면 앞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이들 문화와 연관되어 있
는 문화산물들은 가시적인 것이지만 문화를 선택하는 사람들의 가치는 비가시적
이다. 그렇다고 가시적인  문화산물을 통해서 비가시적인 문화를  수용하는 사람
들의 가치를 유추해 낸다는 생각은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큰 것이다. 예를 들면 
하급문화의 내용물은 흔히 보수적인데도 불구하고 그 하급문화를 수용하는 대부
분의 노동계층이나 빈민계층 사람들은 결코 그 문화내용처럼 보수적이 아니라는 
점이 많은 조사를 통해서도 밝혀졌다. 따라서  하급문화 계층이 보수적인 영향이
기 때문에 이 문화를 즐겨 수용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가치를 표현해 주는 
문화적 내용이 따로 없기 때문에 그 내용을 수용하는 것이다. 
  여러 다양한 취향문화들이 표현되어야 할 정치적 가치를 극우적 가치에서부터 
극좌적 가치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가 넓다. 그런데 실제로 미디어는  대개 극단
적인 가치의 내용물을 다루기를 피하려 한다.  그러나 상급문화는 다른 문화보다 
그 문화내용에 극단적인 내용을 더 많이  포함하고 있다. 상급문화에서 극단적인 
가치는 주로 문화의 거전무렝서 볼 수 있는데,  그중 진보적인 견해를 가진 수용
자들은 상급문화가 이 때문에  우익에 위치하게 되는 것을 불명예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중상급문화는  진보적인 내용, 보수적인 내용,  중도적인 내용을 모
드 갖추고  있다. 그러나 그 외의  여타 모든 취향문화 산물들은  주로 중도적인 
가치의 것이 아니면  보수적인 가치표현으로 기울어진 것이다.  이같이 여타문화
가 보수적 경향의 가치내용을  갖게 되는 이유는 매스미디어의 소유자들이나 경
영자들이 갖는 보수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이에 반영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때때로 수용자들   중에, 많은 수는  아니지만, 말 많고 언성이 높은 
보수주의자들의 비위를 심히 건드려  그들과 적대감을 갖는 모험을 하고 싶어하
지 않기 때문이라는 데도 그 중요한 이유가 있다. 
  때로 이같은 소수의 보수주의적 압력집단들은 미디어의 정책의 변화를 요구하
는 공중의 여론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정치적으로 논란이 되는 텔
레비전 프로그램의 경우 여론을  일으켜 그 프로그림의 방송을 금지시키는 경우
들인데, 이런 경우는 흔히 지방 방송국에나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도에 지나지 
않기는 하다.  그러한 압력이 전국적 규모의  뉴스와 연예. 오락 미디어들에게는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것은 전국적 규모의 미디어들이 그러한 보수주의적인  (혹
은 진보주의적인 )  압력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전국적 
규모의 매스미디어들은 비록 나중에  회사의 정책이나 이의 실천에 대한 재고와 
변경을 하더라도  일단은 이러한 보수주의나 진보주의적  집단의 압력에 쉽사리 
굴복하려 하지 않는다.
  실제로 미디어의  보수성은 흔히 정치적인 것에서보다는  문화적인 것에서 더 
쉽게 발견된다.  미디어의 제작자들은 검열이나  자율사항들을 통해서 미디어 종
사자들이 일컫는 이른바'오지' 의 신성모독이나  성적인 음란행위, 극단적인 범죄
행위와 같은 내용을 미디어에서 삭제해 내는 것이  다. 아마 이런 이유로 텔레비
전이 성규범이나 행위양식 등의  내용에 있어서 좀더 진보적으로 취급하지 못하
고 늘 뒤져 있는지도 모른다. 
  흑인 연기자들이 대거 출연하고 흑인문화 내용을  다른 연예. 오락 프로그램이 
텔레비전 편성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흑인 빈민지역에서 소요의 격변이 일어
나고, 이를 본  미디어의 경영간부들이 결국 흑인 인권 운동자들에  관심을 갖고 
주목하지 않을 수 벗는 상황에까지 이른  연후부터이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더 
많은 흑인 연예인들의 출연과 흑인의 고용증대를 그렇게 오랫동안 요구하였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흑인 소요가 크게  있게 되니까 비로소 그 실현
이 시작된 것이다. 1970년에 이르러서는 텔레비전  시청률이 가장 높은 골든아워 
시간대에도 여러 종류의 흑인 코미디 연속물들이 생겨났다. 예를 들면 (아버지와 
아들)이나 (좋던  시절) 등이 그것인데, 이것들은  흑인 시청자뿐만 아니라  백인 
시청자에게까지 인기를 끄는 프로그램이 되었다. 이  두 프로그램은 모드 코미디
물로서, 흑인 주인공들이 적잖은 중산층의 규범을  감수해야 하는가 등의 계층적 
문제를 취급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계층적 문제와  함께 흑인 프로그램들이 다루는 내용은 흑인들
에 대해 백인들이 갖는 고정관념이나 편견들에 대해서 또는 흑인들을 대하는 백
인들의 행위양식이나 백인  지배적인 제도들에 대해서, 전투적인  흑인들의 비판
과는 좀 다르지만, 꽤 문제의식을 던져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코미디 유
형으로 처음  만들어진 프로그램인 (올 인  더 페밀리)에 나오는  젊은 흑인이웃 
그로이를 통해서 그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이 젊은  흑인이웃은 프로그램에서 
항상 두뇌가 명석한 청년으로 그려지는데, 그가  보여주는 흑인문제에 대한 비판
적인 관찰이 그저 유머러스한 항변에  그치지 않게 이끌어나가는 몇 안 되는 성
공한 흑인 출연자의 하나이다. 
  흑인문제를 다루는 것과  마찬가지로 텔레비전을 다른 중하급문화의 미디어들
과 같이 여성해방운동이나 생태학  같은 이 시대의 중요한 문제들을 인기드라마
나 코미디의 내용으로  취급했다. 물론 이러한 내용이 인기 드라마나  코미디 속
에 포함되는 것은 제작자가 수용자에게 도움이 되는 프로그램을 생각해서라기보
다는, 제작자 개인적으로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평소에 관심을 가졌다거나 아니
면 언제나 새로운 이야깃거리의  아이디어를 찾고 있는 프로그램 창작자의 입장
에서 고안해 내기 때문인 경우도 많다고 하겠다. 
  고급문화나 대중문화의  내용이 갖고 있는 정치적인  의미를 밝혀 설명하기란 
더욱 어렵다.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미디어의 효과에 관한  연구결과를 들어 
매스미디어가 정치적인 태도나 행위변화에 미치는 영향이란 아주 한정된 것이라
고 주장되기는 하지만,  흔히 정치가들이 선거구민들의 동태를  파악하는 하나의 
지표로 뉴스 미디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만 보더라도 텔레비전 논설이나 신문
의 사설 등이 독자들의 흥미에 따라 미치는 것보다 어쩌면 더 많은 정치적인 영
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더구나 뉴스 미디어들은  사람들에게 정치적 언도를 열어 
정치활동을 보도함으로써 더욱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또 미디어
가 사람들에게 지위의 합법성을 부여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미디어의 정치적 역
할이 크다 하겠다.  미디어가 그 수용자에 대하여 실제적으로 미치는  정치적 영
향은 학문적인 효과연구가 보여주는  것보다는 더 클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일반
인이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는 그 영향력이 훨씬 제한되고 작은 것임에 틀
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가들은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과장된 정치적인 
영향력을 가진 미디어관을 통해 매스미디어를 보려고 한다. 
  언론인들은 수용자들보다  진보적인 경향이  있다. 그들은 객관적으로  초연한 
태도로 보도하려고는 하지만, 그들이 갖고 있는  진보적 가치는 기사의 취재내용
에 영향을 미친다. 전국적 뉴스 미디어들은  극적인 사건이나 사건내용들을 좋아
하기 때문에 때로  급진적 활동 등을 보도하게 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적
대적인 내용이 되지 않도록 가능한  한  중간적인 지역으로 몰아보는 노력을 한
다. 그리하여 이들  언론인들은 미국사회에 존재하는 사회적  다원주의를 그들의 
미디어에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하게 된다. 즉 그들은 중간 사회계층과  중간 연
령의 시각에서 뉴스를  보고자 한다. 따라서 청년,  흑인, 가난한 사람들, 중하급 
노동계층의 견해에 대해서는 간단히 일별하고 말게  된다. 지방 방송국이나 지방
지의 내용은 이보다 더 보수적인 경향을  보인다. 상급문화와 중하급문화는 여러 
종류의 의견지를 갖고 있어 다양한 그리고 상반되는 여러 가지 견해들이 실리고 
표명될 수 있다.  그런데 하급의 취향문화는 여러 의견이 제시되는  내용을 원활
하게 공급할 미디어를  스스로 갖고 있지 못하다. 가난한 사람들은  잡지를 소유
할 여유도, 구매할  만한 여유도 없기 때문에 그들의 견해나  요구들이 공적으로 
표명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미디어에 내재하고 있는 정치적  가치에 대한 비판은 주로 우익집단과 좌익집
단 양쪽에서 시작되었다.  그 이유는 매스미디어들이 객관적으로  보도한다고 하
면서도 은연중에 스며들어가 있는  좌우 극단론에 대한 적대적인 어감들에 대해 
그들은 분개하기 때문에, 또 한편으로는 매스미디어가  더욱 자세하게 그들의 견
해나 활동을 보도해 주면,  더 많은 수용자들이 그들의 편에 서서  동조할 수 있
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좌우의 미디어  비판론자들은 뉴스 미디어도 다른 
모든 정치집단과  마찬가지로 미디어 자체의 공정한  입장을 진작시키고 이같은 
자체의 견해를 표현하기 위해서 존재한다고는 느끼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보기
에 실제로 뉴스 미디어들은 정치적 패자보다는  그 승자에게, 순수 정치조직보다
는 큰 주요  정치조직에 더 많이 미디어의 이용기회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지적한다는 점에서 그들의 비판론에는 주목해 볼 만한 가치가 있
다고 본다.
  뉴스 내용 외의 매스미디어의 내용이 비정치적인 것이라고 본다면 대중문화를 
너무 정치적으로만 취급하려는 입장은  올바르지 않고 또 적절하지도 못한 것이
라 하겠다.  그렇지만 마르쿠제와 같이  혁명적인 견해를 가진  입장에서 본다면 
비록 직접 정치를  다루는 것은 아니라도 모든 취향문화가 정치적인  것이며, 이
를 혁명적인 이념으로 발전시키지 못한다면 정치적인 반동을 유발시킬지도 모르
는 것이다. 즉, 클리버의 말을 빌리면 해결에 기여하지 못하는 문화는 문제만 더 
만드는 것이 된다.  비혁명적 관점에서 문화를 볼 때에도 사회의  여타 견해들을 
배제시키고 한 가지의 견해만 표현 묘사할 때,  또 하나의 가치관이나 태도를 여
타의 것보다 더 강조하고 재강화하는 문화내용으로  갖추고 있는 한, 취향문화도 
스스로 선택,  수용하는 한 공중으로서든  혹은 한 시민으로서든  간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정된 정도의 관심만을 정치에 돌리고  있다. 이것이 대부분의 취향문
화들이 그 정치적 내용을 명시적으로는 취급하려 하지 낳는 이유인 것이다. 
  따라서 모든 문화가 정치적이라는 주장이 옳다고 하는 것은 정치가 중요한 의
미를 띠고 있는  사람에게만 합당한 것이고, 그 외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취향문
화가 내포하고 있는 정치적 가치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도 않고 이를 알려고도 
하지 않기 때문에 그 주장은 합당치 않은  것이 된다. 그러한 문화내용에 정치적 
가치가 지배적인 사회가 되더라도  이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역시 일반적으로 비
정치적일 것이다. 문화의 가면을 거듭 벗겨 뒤에  숨은 정치적 가치의 정체가 드
러나게 하더라도, 특히 권력에 소외된 집단에 의해  가치 위에 씌운 문화의 껍데
기를 계속해서  벗기더라도 그 문화내용에  큰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할 것이다. 
예를 들면, 흑인들의 저항으로 흑인들이 부유해지는  현상과 함께 1960년대 후반
부터 흑인 주인공이나 흑인 등장인물이 나오는 영화를 많이 만들게 되었지만 이
들 영화의 내용은 대부분 이전의 것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 그리하여 이들 흑인
영화들도 여전히 같은 계열, 같은 종류의  '백인' 영화와 똑같은 가치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2) 취향구조
  모든 취향문화와 취향공중은  취향구조라는 틀 속에 공존하고  있으며, 취향구
조는 문화와 수용공중 사이의 관계를 확립시키고  또 용이하게 한다. 취향문화와 
취향공중 간의 관계는  평화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을 수도 있고,  갈등적인 관계
를 이루고 있을 수도  있다. 이는 어떤 공중은 여러 종류의  취향문화 중에서 하
나 이상을 선태하여 가지게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반면에 하나의 취향문화
가 여러 종류의 취향문화 공중들에 의해 공동으로 수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같은 평화적 또는 갈등적 관계를 가진 취향구조가 존재하게 되는 가
장 중요한 이유는  취향공중들이 속하고 있는 더욱  큰 전체사회의 특성 때문이
다. 다시  말해서 전체사회는 위계질서를  이루고 있는데 이  위계질서적 구조의 
특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취향공중과 취향문화는  사회의 위계질
서 속에 위치하고  사회 위계질서에 영향을 받고 있으며, 결국  취향구조 자체도 
위계적인 질서를 이루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의 문화나 서로 밀접하게 
가까이 있는 두  개 정도의 문화를 취향문화로 선택하고 있지만,  때로는 사람들
이 선택한 두 문화의 위계가  서로 인접해 있지 않고 아주 차이가 많을 수도 있
어서 고급한 취향문화와 아주 저급한 취향문화를  함께 걸치를 문화현상을 '문화
적 양각'이라고 부르는데,  이 현상을 하향적으로 두  층의 문화에 두 발을 걸칠 
수도 있다. 한 고급문화 수용공중이 토요일에  미술화랑에 들러 그림을 감상하고 
돌아와서 다음날인 일요일에  가벼운 읽을거리로 탐정소설류를 읽거나 텔레비전
의 축구경기를 본다든지, 또는 상급문화 공중이나  중급문화 공중이 저속한 소극
을 관람하러 간다든지 하는 경우가 문화적 양각현상이라 하겠다. 
  중하급문화나 하급문화 수용공중이  일년에 한두 번씩 고급문화 미술전시회를 
여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찾아 관람하게 될 때, 이는 상향적인  문화적 양각현
상이라 하겠다. 상향적인 문화적 양각은 때로는  분명하게 사회적 신분을 높이고
자 하는 동기에서 이루어질 때가 있다. 즉, 사람들이 자신의 신분을 더 높이려는  
신분추구적인 목적으로 또는 그들 자녀에게 문화적 계층상승을 일으켜줄 목적으
로,'더욱 고급한'문화를 선택하게 되는 경우가 그것이다.
  하향적인 문화적 양각은  카타르시스나, 혹은 틀에 박힌  문화의 일상성으로부
터 벗어나 휴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가지는  문화행위이다. 그런데 이 하향적
인 문화적 양각은,  특히 고급문화 수용공중의 경우를 좋고 볼  때에는 고급문화 
이외의 여타문화가 가지는 낮을 신분과  이에 대한 낮을 평가 때문에 한계를 갖
게 된다.  또한 좀더 하위의 문화내용  중에서도 문화적 양각에 허용될  수 있는 
하위의 문화제품들을 비공식적으로  규제하여 소수의 문화품목만 고급문화 공중
에게 수용되도록 한정함으로써 하향적인 문화적 양각이  제한을 받고 있다. 간혹 
고급문화 수용공중이나 고급문화 관계 출판물들은 하향적 문화수용에 허용될 수 
있는 문화품목과 그렇지 못한 품목을 명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미트포드
는 하향적인 문화적  양각으로 고급문화 공중에게 허용  될 수 있는 문화제품을 
'사용가'로 하고, 그렇지  못한 문화제품을 '사용불가'라고 하여, 문화내용물을  선
별하기도 했다. 고급문화수용공중들은  신분에 대한 고려 때문에  대중문화 수용
공중이 이미  다 향유하고 버린  연후에야 그 문화를  취해 보려 한다.  그 예로 
1960년대,1970년대에 와서야 험프리 보가트가  출연한 영화들이나 버클리의 헐리
우드 뮤지컬들이 좀더  고급한 문화공중들 사이에 널리  인기를 모은 사실을 들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바  있지만, 고급문화의 한 분야에서는 창작자 지향인  사람이 다
른 분야에서는 사용자 지향적일 수도 있고,  자신의 전공분야에서는 창작자 지향
적이지만 그 외의  분야에서는 중급문화까지도 더 즐겨 선택할 수도  있다. 손탁
은 " 취향과 관련된 여러 가지 사실 중에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취향을 고르게 
발달되지는 않는 경향을 보인다는 점이다. 한 사람이 (예컨대 고급문화에서 창작
자 지향인 사람이 ) 미술에서  높은 취향성을 갖고 있으면서, 인간관계에서 좋은 
성품을 갖고 사상 면에서도 높은 지식을 같이 갖는 경우란 드물다"고 말하고 있
다. 그런데 모든 취향문화 수용공중에는 창작자  지향성이나 사용자 지향성이 혼
합되어 있다. 그리고 손탁의 표현을 빌리면, 그림을 그리는 중하급문화에 속하는 
사람들이 미술에는 좋은 취향을 갖고 있을 수  있지만, 다른 문화 내용에서는 그
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문화의  선택을 불변하는 고정된 것일  수 없기 때문에 문화를 
선택하는 데에 문화의 상.  하향적 이동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어떤 사람이 사회
적으로 그의 신분에  계층상승이 이루어진다면, 이에 따라  문화적으로도 상승하
게 된다는 것이다.  보통 그러한 문화적인 향상은 학교교육 기간  중에 나타나게 
되는데, 대학생활은 그에게 좀더 고급한 취향문화로  이동하게 하는 주요 원인이 
되는 것이다. 또 계속적으로 있던 문화적 상향이동성도, 이들 젊은 문화수용자가 
가정을 갖고  스스로 부모의 위치에 있게  되면서, 또 이들이 갖는  독서의 양과 
내용의 다양성이 줄어들고 연극이나 영화를 관람하는 횟수가 감소되면서 취향의 
상향이동은 정지하게 된다. 이들이 나이가 더  들게 되면 문화적으로 하향이동성
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는 사람들이 젊은  시절에 만족해하던 문화내용들이 이제
는 지나치게 어렵거나 당혹한 것이 될 때에 그들의 취향은 하향 길을 걷게 되기 
때문이다. 
  또 문화내용이 한  취향문화에서 다른 취향문화로 옮겨짐으로써도 수용변화가 
나타난다. 즉, 상급문화 수용자를 위해 쓰여진  상급문화의 단행본 책이 (하퍼스) 
지에 게재되어 중상급 문화공중에게 수용되는  내용으로 옮겨질 수 있고, 이 (하
퍼스) 지의 작품내용이 또다시 더 쉽게 편집되고  일부 삭제되기도 해서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알맞게 실리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원저에서는  주요 논점이었던 
부분이 하급문화의 간행물에 와서는  그저 흘려 넘겨버리는 대수롭지 않은 말로 
되기도 한다. 이렇게  한 문화가 다른 문화에서부터 그 내용을  차용해 받아들일 
        때, 본래의 내용은  그 받아들인 문화계층의 수용자에게  이해되고 받아
들여질 수  있도록 수절을 거치게  된다. 대중문화 비판론자가  분개하는 측면이 
바로 그 점인 것이다. 
  때로, 특정한  문화내용물이나 공연의  실연자가 여러 종류의  문화수용공중들 
모두에게 인기를 끌어 크게  성공을 거두는 것을 볼 수 있다.  (피넛)이나 (포고)
같은 연재만화나, 찰리  채플린, 마릴린 몬로같은 영화배우들이  그 좋은 예이다. 
이같이 문화내용이 다문화계층적  호소력을 지니게 되는 것은,  일반적으로 말해
서 모든 수용공중 각자가 요구하는 것들이 그 속에 담겨 있어 그런 내용 속에서 
모든 공중들이 각각 자기가 원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
에 채플린은 하급문화적으로 보자면 우스꽝스러운 지팡이를 든 희극배우요 어릿
광대이지만, 좀더 상금문화의 관점에서 보면 사회에  대한 풍자적 비판자인 것이
다. 한 문화산물이  모든 취향문화 공중에게 다 같이 받아들여지는  경우는 드물
게 볼 수 있을 뿐이다. 이는 모든  취향문화가 공유하는 미적 기준에 부합하여야 
하는 경우란  지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아름답다는 것, 즐겁다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데 대해서 문화간에 다 같이 의견의 일치를 볼 수 있는 영역이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끝으로, 어떻게 보면 가장  중요한 점인데, 그것은 여러 취향문화들이 같은 미
디어에 실려서 제공되기 때문에  여러 문화내용들은 하나의 미디어를 서로 공유
하게 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상업  텔레비전 방송의 경우를 보면, 실제적으로
는 우선 하급문화 수용공중이나 중하급 수용공중을  위해서 프로그램을 제작, 방
송하고 있으며, 좀더 고급한  문화내용의 프로그램은 미연방통신위원회가 요구하
는 공공서비스 프로그램  규정을 지키는 정도의 방송을 하고 있을  뿐이지만, 텔
레비전 방송은 본래  모든 취향문화의 내용들을 프로그램으로  제공하여야 한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편성하는 경영자가 노심초사 노력하는 것은 주요 취향문화
들의 수용공중 모두에게,  또 여러 연령집단에게 광범위하게, 합당하게 받아들여
질 수 있는 내용을 찾아내고자 하는 점일  것이다. 할리우드가 예산을 많이 들여
서 영화를 만들 때에는 가능한 한 많은 관객을 동원할 수 있는 내용으로 기획한
다. 그리하여 예를 들면,  모든 연령의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 스타들을 출연진
으로 해서라도 관객동원에 부심하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문화적인 내용이 상업적으로 보급되기 때문에 취향구조도 다른 상업
적 활동과 마찬가지로 경제적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즉, 경제적 법칙에 의해 이
를 살펴본다면, 상품 제조자들이나 그들을 고용하는  회사들은 제조된 상품을 살 
경제적 여유가 있는 고객들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  팔고, 이를 구매할 능력이 없
는 사람을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다. 이들 제품 판매자들은 될수록  그들의 상
품시장을 확보해 두려  하고, 그들에게 손해가 되는 경쟁을 될수록  피하려 하고 
있다. 그런데 한편 제품의  구매자 입장에서 보면, 구매자는 구매하는 행위를 통
해 판매자에  대해 통제력을 발휘하려고  한다. 이들의 관계는  또다시 정치적인 
법칙으로도 설명해 볼  수 있다. 문화창조자들은 정책대안을  제시하는 정치가들
이라 하겠으며, 문화수용자들은 정책내용을  선택하여 투표하는 유권자와 같으며 
선택할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급진주의론자들에 비유해 볼 수 
있겠다. 
  전국적인 방송망을 갖고 있는 텔레비전 방송국은 기업체들이나 정당들이 서로 
경쟁하듯이 미디어도 서로  경쟁을 하고 있다. 또 이들 방송국의  경영자들은 정
치가들이 유권자들을 대하는 것처럼 시청자들이 무엇을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을 
알아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는 취향의 선택이라는 것이  정당의 선택에
서와 같이 사람들의 사회경제적인 배경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따라서 이 
관련은 비교적 변하지  않는 고정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
람들의 사회경제적  배경의 분석을 통해서 방송의  경영자들은 시청자의 취향을 
알아내려 한다. 그런데 방송 시청자의 취향은  유권자의 '정치적 취향'보다 덜 가
변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텔레비전이나  영화의 인기스타들이 인기있는 정치가보
다 더 오래 그 인기생명을  누리게 된다. 예컨대, 텔레비전 쇼 진행자 에드 설리
번이나 코미디언 밥 호프의  인기생명은 같은 정당 출신 의회의원들끼리 이어서 
활동한 정치생명의 기간을 합친 것보다도 더  길었다. 매스미디어의 활동은 정치
활동과 유사한 점이 많다.  일시에 여러 종류의, 그리고 여러 층의 취향공중으로
부터 인기를 얻어야만하게 되어 있는 매스미디어는, 여러 계층으로 구성된, 심지
어는 반대하는  입장의 압력의 압력집단가지 포함하는  선거구민을 가진 정당이 
행동하는 것과 같은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문화를 수용하는 공중 쪽에서 취향문화를 볼 대에 공중은 그들 스스로 압력집
안으로 자처할 수도  있게 된다. 왜냐하면 공중도 미디어가 그들이  원하는 내용
을 창조하도록 하기  위해 다른 공중들과 경쟁을 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텔레비
전 채널이  제한되어 있는  것처럼 문화자원이 부족하고  제한되어 있는 상황일 
때, 또 추상도가 높은 것을 추구하는 상급문화와  추상성에 대해 적의를 품고 있
는 하급문화 사이처럼 공중간에 서로 상반된 가치가  함께 존재할 때, 이들 공중
들 사이에는 갈등이 생기기 쉽다. 그러나  이들은 조직화된 집단으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갈등적 관계의  공중이 서로 직접 부딪칠 결전의 장소가 없
다. 그래서 갈등은 보통  창조자와 문화를 공급하는 자 사이에서 일어나게 된다. 
앞서 지적한 바도  있지만, 매스미디어의 창조과정은 집단과정이다. 그리고 때로
는 이 창조집단 성원들은 그들 스스로 갈등적 위치에 있는 취향공중들을 대표하
는 것으로 자처하며, 이에  대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래서 제작할 창조내용
을 정할 때 어느 공중의  취향에 최우선권을 주어 반영할 것인가에 대해 창조집
단 내에서 자기가 대표하는 공중의 취향을 주장하며 서로 경쟁하는 것이다. 
  문화적 갈등과 문화적 권력투쟁에  대한 특히 재미있는 한 예는 포르노영화의 
규제에 대한 것인데, 이 문제는 지금까지 꽤 많이, 거의 주기적으로 논란되어 온 
것이다. 포르노 영화를  많이 즐기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문화적  특성이나 이와 
관련되는 이유는 물론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포르노 영화는 그  내용에서 하급
문화적 규범을 강력히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중급문화나  고급문화의 수용공중
들이 포르노 영화는 거의 만들지 않고  있어, 중급문화나 고급문화의 수용공중들
이 포르노 영화를  관람하게 된다면, 그들은 이 영화의 하급문화적인  표현과 장
식들에 의해 심미적으로 고문과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다. 이 포르노 영화의 허
용을 가장 강력히 반대하는 사람들은 일반 영화나 소설에서 에로틱한 내용을 담
는 것까지도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반대하고 나선다. 그 결과  하급문화의 포르
노 영화뿐 아니라 상급문화와  중하급문화에 들어 있는 약간의 에로틱한 내용들
까지 모두  다 규제대상이 되는  법률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점에서 상습문화의 
수용공중과 중하급문화  수용공중들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시민의 기본자유권을 
지키는 여러 민간단체들과 손잡고  그들 자신의 문화를 보호하는 운동을 벌이기
도 했다. 
  '사회사치의 회복'이 다소 작품내용이  들어 있을 경우 외설물로 취급될 수 없
다는 미 대법원의 판결에  의해, 과거에는 에로틱한 테마를 다룬 상급.중상급 문
화를 보호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73년 대법원은  검열사항을  지방에다 위임했
다. 상급.중상급 문화의  옹호자 세력이 약하고, 성문제에 대해  보수주의적인 사
람들의 정치적인 권력이 강한 지방에서 반외설적인 지배는 이들 중급과 상급 두 
문화에 대한 검열이라는 형태로 나타날 위험성이  있다. 그리하여 때로는 에로틱
한 내용의 검열은  하나의 겉으로 내놓은 구실이고, 실질적인 이유는  성적인 것
이 아닌 다른 동기를  갖고 있을 수 있다. 즉, 정치적. 문화적  권력을 장악한 자
들이 자기를 위협하는  그런 내용을 삭제하기 위해  또는 성의 표현문제가 아닌 
다른 이유를 위해 악용할  수 있는 것이다. 
  정치에서처럼 문화에서도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힘을 갖고 있는
가 하면, 어떤 사람은  문화의 힘으로부터 완전히 소외되어 있다. 가난한 사람들
이나 노인들, 기타 구매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소외된 사람의 경우라 하겠다. 또
한 생산자인 창조자는  소비자인 수용자보다 더 많은 권력을 지니고  있다. 왜냐
하면 수용자가 항의함으로써 미디어의 내용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역시 수용자들은 창조자들이 제공하는 미디어의 내용을 받거나 거부하는 것밖에
는 다른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소 이윤이나 권력을  추구하는 다른 사회구조들과 마찬가지로 취향구조도 
위계적으로 불평등하다. 취향문화를  만들어내는 매스미디어와 그 외  상업적 광
고주에게도 경제적 지배의  위계가 있다. 그것은 이중하급계층의  수용자가 가장 
그 수가 많고 또 가장  구매력도 많이 지니고 있기 때문에 중하급계층 수용자를 
상업적으로 가장 주요  대상으로 하는 경제적 지배의 위계인 것이다.  이러한 경
제적인 지배는 또 어느 정도 정치적 권력과도  연결되어 있다. FCC 조차 일차적
으로 중상급계층의 수용공중이 필요로  하고 관심을 갖는 공익 프로그램 제작을 
요구하는 것에 소극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중상급공중은 그들의 문화에 대
한 공공의 지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 왜
냐하면, 공영 텔레비전이나 뉴욕의 링컨센터 같은  문화센터 뒤에 있는 사회지도
자들은 항상 중상급계층의  기업인들이기 때문이다. 이들 대부분은  너무 상급문
화에 대해 언짢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상급문화보다는 중상급문화를 더 좋아
하고 지원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렇게  되면 지원이 약해진  상급문화 내에서는 
전위문화 내용이 점차 크게 자리잡으며, 이  중 급진론자들은 위계구조마저 거부
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문화산물이 차용되거나 개작되는 것과 같은  것을 막
기에는 상급문화는 너무나 무력하다. 

    3) 취향의 위계구조
  취향의 위계구조는 이 취향구조가 속하며 그 일부를 이루고 있는 전체사회 계
급의 위계구조와는 좀  다른 점이 있다. 미국의 사회계급의 위계구조와는  좀 다
른 점이  있다. 미국의  사회계급의 위계구조에서는 중상급계층이나  상급계층이 
중산층의 근로계층이나 중하급계층보다는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다.  물론 미국 
중산층 사람들은 그들이  어떤 특정한 정치적 이슈에 관심을 가졌을  때는, 스스
로의 방식대로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런데 취향의  위계구조에서는 중산층이 
더욱 강력한 힘을  적어도 간접적인 방법으로는 발휘할 수 있는데,  이는 매스미
디어가 대상으로 하는 가장 중요한 수용자가 중하급계층이기 때문이다. 
  사회계급의 위계질서적 구조 속에 갈등이 있는  것처럼, 취향의 위계질서의 구
조 속에도 갈등은 존재한다. 그러나 취향공중들  사이의 갈등은 계급간의 갈등과
는 다르다. 왜냐하면,  정치적으로 활동적인 압력집단 조직 속에서는 취향의식보
다는 오히려 계급의식이  더 많이 나타나게 되기 때문이며, 문화적인  문제와 같
은 것은 계급의 문제만큼 사람들에게 그렇게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기 때문
이다. 또 수용자들이  문화적 문제에 영향을 주기 위하여 정치적  압력을 발휘하
는 데에는  그리 익숙해 있지 않기  때문에도 그런 것 같다.  시청자들이 그들이 
좋아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방송중단을 항의하기 위해 방송국과 접촉하는 경
우를 때로는 볼 수가 있다. 그러나 그들은  매일 방영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내
용을 보면서, 어린이  프로그램의 경우는 때때로 논란이 되지만 그  외의 프로그
램에 대해서는, 그리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더욱 중요한 것은, 다른 종류의 불평등에  대해서는 분개하면서 문화적 불평등
에 대해서는  사람들은 그렇게 분개하는  일이 적다는 점이다.  가나한 사람들이 
그들보다 수입이 많은 집단이 갖는  권력이나 재력 같은 것은 갖고 싶어 안달하
는 데 비해,  하급의 취향공중이 상급 취향문화에 참여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고 해서 심한  박탈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그들은 수입이 많고  문화적으로 상급
인 사람들과 똑같이  교육받기를 원하지만, 이는 문화적인  상향이동을 바라서라
기보다는, 더  좋은 직업을 갖기  위해서이며 사회적 신분이  높아지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수입이  더 많아지고 신분이  높아졌을 때에도 
흔히 그  전에 갖고 있던 취향문화의  수준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  그들은 좀더 
좋아진 수입으로  가구를 사들이고 집을  가꾸며, 보트를 사고  휴가를 즐길지는 
모르지만, 더 좋은  음악을 듣고 좋은 그림을 감상하면서 생활하는데  신경을 쓰
지 않는다. 
  또 교육의 상향이동이 반드시  문화의 상향이동을 꾀하려는 노력을 하게 하지
는 않는다. 예컨대 많은 조그만 삼류대학의  교수들이 그들의 여가활동에서는 중
하급의 취향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문화적 불평등에 대해서는 상
대적인 박탈감이 없기 때문에 소득의 차이가 나는 다른 여러 집단들간에 일어나
는 갈등이나 종교집단간의 갈등에  비해 취향이 서로 다른 문화수용공중간의 갈
등은 훨씬 은근한 갈등인 것이다. 
  취향의 위계구조는 계급의 위계구조와는  다르지만, 신분의 위계구조와는 상당
히 비슷하다. 권위라는 점으로 본다면 상급문화는 정상에 있는 문화이고, 하급문
화는 맨 바닥에  있는 문화이다. 어떤 문화를 선택하는가에 대한  결정에는 신분
에 대한 고려가 함께 작용한다. 그리고 좀더  저급한 신분의 문화가 좀더 고급한 
신분의 문화내용을 빌릴  때, 그 고급한 신분은 그들의 향유  문화내용에서 그보
다 저급한 신분이 차용해간 문화제품을 그들의  문화항목에서 빼버리게 된다. 앞
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베르히만의 영화가 1960년대에  중상급의 영화관객에
게 인기를 모으자, 그에 대한 상급문화 영화관객들의 지지는 사라져버렸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러한 문화적인 권위는 다른 종류의 권위
들보다는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사회적  신분이 높아진 사람들은 그 
새로운 신분을 가진 이웃과 급격히 친교를 맺게  되지만, 그러한 신분에 맞는 새
로운 취향문화를 취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특히 중급. 하급 신분의 
사람들의 경우에 맞는 말이다. 그것은 문화적인  상향이동에 중요한 교육이 그들
에게는 부족하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상급의 취향문화가  하급의 취향문화
보다는 더 권위적이지만, 그러나 사람들은 다른 종류의  권위 같은 것은 갖고 싶
어하면서도, '문화적 권위'는  갖고 싶어하지도 않고 흥미도  별로 보이지 않으며 
열망하지도 않는다. 
  고급문화의 권위는 역사적으로 엘리트와의  동맹관계에서 생겨난 것이며, 미국
에서는 상류사회의 빈번한 결연으로 탄생한 것이다. 또, 마찬가지로 고급문화 수
용공중이 갖는 자체의 높은 신분과  이들이 공언할 수 있는 자신의 문화적 전문
서에 의해서 그  권위가 만들어진다. 그런데 고급문화 자체의 공중과  그의 전문
성에 의한 문화권은 많은 학자나 비평가, 창조자에 의해 뒷받침되고 정당화된다. 
모든 취향문화들이 서로  자기네의 기준이 최고라고 주장하겠지만,  그래도 고급
문화의 주장이 가장 경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 
  또한 중요한 것은  고급문화는 여타 문화와 달리 그 기준이  명시적이며, 어느 
정도는 성문화까지 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고급문화에서는 항상 문예 저
널지들을 통해 그 기준을 적용하는  예를 볼 수 있고 이 관계학자들이나 비평가
들 간에 논란이 된다. 대부분의 권위있는 대학에서는  이 고급문화의  기준을 가
르치고 있다. 사실 그렇게 권위있지 않은  조그만 대학에서까지도 고급문화의 기
준을 가르치고 있으며-이런 대학의 경우 영문과 같은 학과가 고급문화를 지키는 
요새가 된다-때로는 그것이 유일한 문화기준으로 되어 있기도  한다. 그 외의 다
른 취향문화의 기준들은 별로 논의의 대상이 되지도  않고, 학교 같은 데서 흔히 
가르치고 있지도 않다. 이들 기준들은 또한 명시되어 드러나지도 않고, 성문화되
어 있는 것도  아니다. 고급문화를 제외한 여타 문화의 기준들은  눈에 보이지는 
않는 그 실용성에  목적을 두고 있다. 결과적으로 고급문화는 그  수용공중의 크
기나 이들의 신분이 시사하는 것 이상의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하겠다. 
  이러한 고급문화의  영향력을 매스미디어에서도 마찬가지로  느껴진다. 왜냐하
면, 매스미디어 내용을 창조하는 대부분 사람들이  고급문화 기준을 그들 작품에 
적용하고 있지 않지만 그 기준을 숙지하고는  있기 때문이다. 신문이나 대중잡지
를 통해 영화, 연극, 텔레비전에 관한 비평을 하는 비평가들은 더구나 이 고급문
화의 기준을 숙지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들 비평가들이 비평란에 글을  쓸 때에
는 이러한 고급문화 기준은 적용하지 않고,  대개 중상급문화의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 그들이 쓴 비평을 읽는 수용자들은  대부분 중하급계층의 사람들이기 때문
이다.
  그런데 비평가들은 독자의  이러한 저취향수준을 고려하지는 않고,  이보다 상
위에 있는 중상급문화나 상급문화의  작품을 주로 논하고 있다. 예를 들면, 하급
문화의 독자층을 대상으로 하는  신문인 (뉴욕 데일리 뉴스)지의 비평들은, 때로
는 이 신문의  독자들은 전혀 관람하려 하지  않는 연극이나 외국영화들에 대해 
평론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대부분의 이 계층  사람들이 자주 보는 텔레비전 주
간연속물들이 새로 편성되어 방송되는데도 신문, 잡지의  평자들은 이 새 프로그
램들에 대해서는 취급하려 하지 않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급문화의 취향공중
들은 그들이 시청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그 자신들이 각자 비평가 노
릇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동료나 가족 사이에서  서로 얘기를 나누는 중에 텔레
비전 프로그램들에 대해서 자기들이 보고 느끼는 대로  평을  하게 되는데, 이렇
게 해서 이 사람들이 느끼는 비평들이 점차  여러 입을 통해서 퍼져나가게 된다. 
이러한 비평을 가리켜  매스미디어에서는 구전이라고 하는데, 이  구전은 대중소
설이나 영화, 텔레비전 프로그램들을 크게 '히트'시키는 데 있어 신문, 잡지에 발
표되는 어느 전문비평보다 훨씬 더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 결과, 성공을 거둔 대
중문화 창작자가 전문비평가들에 의해  그의 작품이 고급문화의 기준에 맞지 않
는다고 하여 공격을 받게 될 때, 이들 대중문화 창작자들은 흔히 말하기를, 그들
이 존중하는 유일한  비평가는 수용자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수용자들이 그
들 작품을 좋아하고 수용하고 있는 한은,  전문비평가들의 이같은 판단은 그릇된 
것이거나 아니면 적절치 못한 것이라고 또한 반격한다. 
  그런데도 공적으로  지배적인 세력을 갖고 있는  상급의(그리고 중상급의)문화
비평은 상급 및 중상급 양 문화의 미적 기준에 대해 경의를 표해줄 것을 요구한
다. 특히 좀더 교양인이 되고자 하는 데에 가치를 두는 사람들이나, 사회적 계층
에 있어서 상향적  이동을 하고 잇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렇나 경의를 요구한
다. 상급문화의 미학적  기준에 대한 경의는 신분성의 고려와 더욱  관련을 갖고 
있다. 즉, 모든 문화의  수용자들은 자기들 신분보다 낮은 신분의 사람들에게 인
기있고 그들이 즐겨 수용하는  문화내용을 자신도 수용하고 있다는 것을 공개적
으로 인정하기를 싫어하고  이 사실을 감추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공
적으로 높이 평가해서 얘기하는 문화내용과 실제로 사적인 입장에서 개인적으로 
선택하여 즐기는 문화내용  사이에는 거리가 생기는 것이다.  상급문화 주창자들
은 그러한 공적 평가와 사적  선택 사이에 차이가 생기는 것은 그들 상급문화의 
심미적 기준이 보편타당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증거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상급문화의 주창자들은 또한 결론지어 말하기를, 사람들은 
현재 그들이 선택한 문화내용보다 더 고급한 문화내용을 선택할 수 있기를 원하
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좋다고 말하는 문화내용은 선택하지 않으며, 나
쁘다고 생각하는 문화내용을 오히려  더 즐겨 선택한다는 모순된 논거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현상의 해석은 다 정확하지 못한 것이다. 이는 
다른 취향문화들이 갖는 미적  기준은 고급문화의 그것과 달리 불가시성이 있기 
때문에, 즉 잘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에 느낄  수 없다는 점을 모르고 하는 말이
며, 또 뒤이을 문화의 기준들의 불가시성을 반증하는 것이다. 
  상급문화를 제외한 모든  다른 문화들이 갖는 미적  기준의 불가시성은 또 몇 
가지 사실을  설명해 준다. 하나는  문화의 미적 기준들도  상급문화의 기준처럼 
문화의 좋은 내용과 나쁜 내용을 가려내는 척도들을 갖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지 
않고 가려져 있을 뿐이라는 점이다. 그런데도  일부 대중문화 비판론자들은 오직 
상급문화에서만이 수용자가 우수한  문화내용과 그렇지 못한 문화내용을 구분하
는 기준이 있고, 그 기준에 의해 우수한  내용을 평가하고 선택하므로 문화를 이
루게 하고 있으며,  그밖에 다른 하위의 여러 문화들에서 수용자들은  더 우수한 
내용을 가려낼 것이 없는 서로 비슷한 질의 문화내용들 중에서 우열의 평가작업
이 없는, 단순한  택일을 하게 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서부극 같은 대중
문화 형태의 텔레비전 드라마를 즐겨 보는  시청자의 경우도, 상급문화의 연극관
객이 우수한 연극과  그렇기 못한 연극을 구별하는  평가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
로, 우수한 서부극과  그렇지 못한 서부극을 구별하는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이
다. 이들 연극관객의 판단은 아마 서부극 관객의  판단보다 더 세련된 판단일 것
이고, 그들의 문화의 미적 판단기준에 보다 더  명백하게 근거하는 판단일 수 있
을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차이는 단지  상급문화 판단기준이 갖는 명시적인 성격 때문이
고, 또 이들 연극관객과 같은 상급공중은  자기들이 문화기준에 근거해서 판단하
는 방법에 대해  교육과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며, 또한 그들의  판단이 전문적인 
비평가들의 문화비평에 의해 도움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에 반해, 
텔레비전의 서부극 시청자들에게는  명시적인 기준이 별로 없고,  판단하는 훈련
도 부족하며, 자신들의 평가 관점을 맞추어 비교해 볼 수 있는, 그리하여 그들의 
비판감각을 더 날카롭게 해 줄 수 있는 전문비평의 뒷받침도 부족한 것이다. 
  이같이 두 문화공중간의  차이는 심미적 훈련의 양의 차이에 그  원인이 있지, 
미에 대한 관심도에 차이가 있다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상급문화 수용공
중이 추상적 표현주의 회화나  최근의 이탈리아제 가구를 보면서 아름답게 느끼
는 것처럼, 하급문화 수용공중은 달력의 그림과  조야하게 제조된 가구를 보면서
도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즉, 이 두 문화공중들은 그들의 미적 느낌
을 실제 심미적으로  옮겨놓는 표현능력에는 차이가 있다.  상급문화 수용공중인 
한 주부는 학교 다닐  때 실내디자인에  관해서 배웠을 수도  있겠고, 또 전문적
인 실내장식가를 고용해서  집안을 꾸미겠지만, 가구 정도나 겨우 마련할  수 있
는 다른 문화공중의 주부나 장식 전문가가 스스로 형태나 색깔을 고르고 가구들
을 적절히 배치하듯이 여타  문화공중의 주부들도 스스로 형태나 색깔을 고르고 
각각의 가구들을 적절히  배치하고 있다. 이들 두 문화의 주부간에는  미적 기준
에 대한 훈련에서 차이가  있다. 미적 기준을  실제 행동으로  옮겨놓게 하는 자
원과 기술면에서도 차이가  있다. 그들이 선택한 데에 대한 정당한  이유를 설명
할 수 있는 능력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다. 그리고 물론, 이들은 미적 기준의 내
용이나 무엇을 아름답다고  보는가에 대해서도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차
이에도 불구하고 이 두 문화공중들이 모두 자신이 좋아하는 미를 추구하고 있다
는 점에 대해서는 동일한 것이다. 

    취향문화와 그 공중의 평가론 
  이 연구는 각 취향문화들을 서로  비교 분석하는 데 다른 여러 사회학적 평가
분석에서 그러한 것처럼, 규범적 의미와 가치적  판단을 내리는 평가이론을 전개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같은 평가이론을 그 자체로서는 사회학적일 수가 없다. 왜
냐하면 가치판단들의 결과가  더러 검증될 수 있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가치판
단 자체는 실증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취향문화에 대한 평가행위는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으로 구분된다. 사적 평가
는 자신의 사생활을 위한 개인적 선택이고 공적 평가는 사회의 공공복리를 고려
해서 내리는  공적인 선택이며, 더  나아가서 이것은 국가의  공공정책의 입안을 
목표로 내리는 선택인 것이다. 때문에 이 두  가지의 평가행위는 자연히 서로 다
른 별개의  평가작업이라 하겠다. 예를 들면,  한 사회학자가 그의 사생활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어느 한 취향공중에 속하는  사적인 개인이라 할 수 
있으며, 자신의 개인취향 수준에 맞는 문화내용을 선택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의 개인적 취향수준에 따라 다른 취향문화의 내용이나 수준에 대해서는 다른 사
람들처럼 그도 자신의  개인적 관점에서 평가를 내린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마
찬가지로 다른 취향문화들의 내용이  너무 고답적이어서 또는 너무 저급해서 마
음에 들지 않으면 이같은 문화내용들에 대해서 자신의 사적 기준에 의해 비판을 
가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  사회학자가 공적인 정책을 위한 입장에 
서서 그 문화를  평가하게 되는 경우라면 그는  그가 사적으로 선택하는 문화를 
또 자신의 사적 평가를,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게 된다. 뿐만 아
니라 그의 공적  평가내용에는 오히려 그와는 다른  의견을 갖는 다른 사람들의 
여러 사적 평가들을 반드시 고려에 넣어야 할  것이며, 공공정책 내용에 이들 의
견과 기준들이 반영하도록  하여야 한다. 공공정책이 다수  사람들의 취향이라는 
이유로 이에  전적으로 예속, 지배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이들을 전적으로 
외면하는 정책이어서는 안된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대중문화 비판론자들의 주장은 바로  그런 오류를 범해 왔
다. 즉, 비판론자들은 자신의 사적인 평가를 공적인 정책주장으로 그대로 옮겨놓
았으며, 다른 많은 삶들의 사적 평가들을 아예 외면할 뿐만 아니라, 이들의 취향
문화를 몰아내고자 했다.  그리하여 비판론자들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문화수
준에서 생활할 것을, 그리고  그들의 고급문화를 수용할 것을 요구하여 왔다. 그
렇지만 이같은 비판론자들의  요구는 민주사회나 비획일적인 다원사회에서는 있
을 수 없는 무리한  요구이다. 이는 비판론자들이 요구하는 것같이, 자신들의 문
화수준만이 바람직하고 그 외의  문화는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다른 취향문화 공
중의 주장이나 요구가 비판론자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
리한 요구인 것이다.
  고급문화의 보편성의 주장이 그 타당성을 가지려면 대중문화 비판론자들은 대
중문화가 해롭다는 것을 반드시 입증해 내야 할 것이다. 즉, 이들의 주장이 보편
타당성을 갖기  위해서는 대중문화가 대다수 시민들의  목표달성을 위한 노력에 
저해요인으로 작용하거나, 일부  소수인의 목표에라도 아주 심각한  위협으로 등
장함으로써  사회와 사회성원에  해를 끼친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증명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비판론자들은 이 문제를 실증적으로  증명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대다수 사람들은 비판론자들이 주장하는  이 고급문화의 기준을 함께 
공유하려고도 하지 않고 있다.  때문에 이  연구에서는 이제 모든 문화의 취향수
준들을 동시에 고려에  넣는 새로운 문화의 공적  평가의 이론을 정립하고자 한
다. 
  이같은 문화의 공적 평가이론은  다음의 두 가지 문제를 밝히는 작업에서부터 
시작된다. 다시 말해서,  좋은 취향문화나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취향문화란 어떤 
문화인가 하는 문제와,  좋은 공중이라든지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공중이란 어떤 
공중인가 하는 두 가지 문제를 우선  검토하면서, 새로운 평가이론을 전개하고자 
한다.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취향문화라면 최소한 다음의 기준을  만족시키는 것
이어야 한다. 
  첫째, 그 취향문화는 그 문화수용자들의 요구에 따라 이루어져야 하며, 그들의 
요구가 표현되는 내용의  문화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수용자가  희구하는 심미적 
만족, 정보, 오락 등의 내용을 제공하는 문화이어야만 바람직한 취향문화인 것이
다. 
  둘째, 바람직한 취향문화는  그 문화의 창조자들에게 물질적으로나  또는 기타
의 방법으로 창조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해줄  수 있어야 한다. 즉, 창조자들은 
한 문화의 창조에 기여해 보겠다는 동기를 갖고 문화창조에 기여해 보겠다는 동
기를 갖고 문화창조에  기여할 것을 스스로 충분히 알고 있어야  하며, 문화창조
에 기여할 창작이  또한 창조자로서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내용과도 부합될 수 
있어야 할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 문화를  수용하는 사람이 바라는 문화내용이어
야 한다. 아니면, 최소한  수용하는 사람들이 이 창조물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
일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이상적으로 말한다면, 바람직한 취향문화는 수용자와 
창조자 양자의 요구가 일치, 종합되는  것이어야 하며, 둘 중 한 쪽이 다른 쪽을 
지배하려 하지 않고  가능한 한 양쪽이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 공생적인 관계를 
이루게 하는 문화이어야 한다. 
  셋째로, 좋은 취향문화는 사회적으로나 심리적으로 해로운 것이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해서 문화의  사용자나 창조자에게, 또는 사회의 여타 부분에  해를 끼치
지 않는 문화이어야 한다. 
  이와 같은 기준은 말할  것도 없이 바람직한 취향문화를 규정하는 기준으로서
는 너무나 단순한 감이 없지  않다. 따라서 많은 문제들이 제기될 수 있으며, 이 
때문에 좀더  자세한 분석을 통한 설명이  필요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사회의 
대부분의 문화자금들이 대중문화 쪽으로  기울어지면, 결과적으로 대중문화는 고
급문화와 고급문화  수용자들에게 해롭게 된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고급문화를 고갈시키는  저해부분을 상쇄시킬 수 있게끔,  고급문화에 대해 
공공보조지원을 할 수 있는 방법도 있으므로 이같은 주장은 적절치 않다. 
  바람직한 취향문화의 판단기준으로  앞서 언급한 것 이외에,  문화적 생동성이 
추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화적 생동성의 개념을 조작적으
로 정의할 수는  있을지라도, 결국 생동감이란 것은 문화뿐만 아니라  다분히 그 
문화의 소유자가 보는 관점에 달려 있는 것이며,  보는 사람에 따라 생동감의 정
도가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바람직하고 또 좋은 취향문화란 
문화 사용자들로  하여금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그들의  성장을 도와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즉, 문화의 성장성이 또 하나의 기
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획일적 사회가 아닌 다원사회에서라면, 사람들
은 누구나 여러 가지 문화 중에서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으며 이 선택과정에
서 대개 자신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내용의 문화를 선택하겠지만,  만약 그들이 
그러한 성장을 원하지 않는다면 문화는  그들의 성장에 대해 어떤 작용도 할 수
는 없는 것이다. 또한 바람직한 문화라면  사회적으로 타당성을 갖는 문화이어야 
하며, 공공이익에  기여하는 문화이어야 한다는 기준을  첨가할 수 있겠지만, 이 
기준을 따르면, 제2장에서  문화에 대해 지적한 바 있듯이  정치지향의 문화보다
도 더 짙은 정치적 도구의  문화로 전락될 위험이 있다. 뿐만 아니라, 어떤 문화
가 공익성을 지닌 문화이며 어떤 문화가 비공익적인 문화인가에 대한 판정을 해
보려는 시도 자체에서 이미 문화적 독재주의의 가능성을 드러내게 된다. 
  사실 바람직한 취향공중의 경우는  이를 단정하는 기준조차 만들 필요가 없다
고 본다. 대중문화 비판론자들은 취향공중이 된다고  하면서 공중을 문화에 맞추
려는 주장을 하고 있지만, 이 이론은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문화를 공중에다 맞
추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즉, 고급문화뿐만 아니라  모든 취향문화는 그 문화의 
공중인 사용자와 창조자의 수준에 있어야 하는 것이지 그 공중이 문화의 수준에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물론, 문화가 공중에게 해를 끼치게 되
어서는 바람직한 문화가  될 수 없는 것이 명백하지만, 구해한  문화라는 것만으
로 충분히 바람직한  문화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보다는 그  문화수용공중인 사
용자와 창조자들에게 적극적으로 봉사하는 그런 문화라야 바람직한 문화라 하겠
다. 그런데 그와는  반대로 문화에다 수용자를 맞추고 문화가 수용자네  의해 도
리어 봉사를 받게  되며, 문화가 공중을 떠나 혼자 고독하고  플라토닉한 이상의 
세계에 머물러 있을 때 그 문화는 바람직한 문화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대중문화 비판론자의 주장에서 볼 수 있듯이,  만약 문화가 절대선으로 간주된
다면, 여러 사회들을  그들이 갖는 고급문화의 질의 정도에 따라  서로 비교하여 
어느 사회가 더 좋은가를  쉽게 평가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와 같이 
문화만이 절대선이고, 그렇기  때문에 문화에 준해서만 사회의  평가가 내려져야 
한다는 논리는 지극히 위험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바람직한 사회를 평가해 보는 
중요 기준으로서 그 사회가  갖는 문화수준은, 사회의 다른 기준들, 특히 전체성
원에게 그 사회가 어느 정도로 상당한 생활수준을 영위케 해주고 있는가를 보여
주는 기준보다 더 중요하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한  사회가 이룬 문화
적 업적, 특히 고급문화적 업적을 기준으로  해서 역사적으로 바람직한 사회들을 
비교해 보려 하는  것은, 사회적 엘리트층의 활동만을 보고 이  엘리트들의 문화
활동이 가능하도록 뒷받침해 온 여타  계층 사람들의 그 많은 희생과 대가는 전
혀 고려하지 않은  비교, 연구이기 때문에 옳지 않다고 본다.  즉, 공공장소에 세
워진 하나의  예술적인 기념비는 퍽  아름답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동자들의 피땀을  짜내는 착취가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이 기념비는 사람들에게 너무나  아름답게 보이기 때문에 역사상의 여러 건축물
들과 비교되면서, 단연 모든 건축물들을 제쳐놓는  문화수준의 기준으로 될지 모
른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를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문화라고 하여야 할지는 의문
이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앞으로  전개하고자 하는 이 연구의  문화평가이론은 취
향문화에 취향공중들의 요구와 기준을 관련시키는 이론인 것이다. 물론, 이 비교
론은 어느 정도  지나치게 단순화했다는 약점을 안고 있긴 하다.  왜냐하면 이같
은 비교방법은, 취향문화들이 모든 문화내용에 같은  가치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가정 위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이론이 갖는 이같은 가정은, 실제로
는 확실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취향문화에서나  앞서 언급한 세 가지 기
준조건에 따라서 볼  때, 문화내용 중에서 어떤 부분은 바람직한  내용이지만 다
른 부분은 바람직하지 못한 내용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 적절
한 비교평가 방법은 각 취향문화마다 문화내용  하나하나를 각각 분리하여 비교, 
검토해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근래에 와서 고급문화의 전위적 음악은 너무나 
격식화되고 불모화되었음이 지적되는데, 이  때문에 전위적인 고급문화의 음악은 
그 수용자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러면서  이들 비
판자들은 현대 대중음악이 오히려 훨씬 생동감이  있고, 만족감을 주는 음악이라
고 주장한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이들 음악  수용자들에 대한 주장이 적중한 것
이라 하더라도, 그 주장을 고급문화의 다른  내용에까지 확대 적용해서 대중문화
에 대해 찬사를 보낼  수도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비교평가  문제가 있기는 하
지만, 이 평가론에서는 그러한 세부적인 문화항목의  비교까지 취급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일반적인 서술론에만 한정하고자 한다. 따라서  반드시 모든 취향문화 내
용의 각 문화항목에 다 적용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1. 취향문화와 공중에 대한 두 가지 가치적 판단
  이 평가론은  두 가지 가치적인  판단에서 출발한다. 그  하나는 취향문화들에 
대한 가치적 판단이요, 또 하나는 취향공중들에 대한 가치적 판단이다. 
  만약 취향문화를 선택하는 취향공중을 고려하지 않고 취향문화들만 서로 비교
한다면, 더 고급한 문화일수록 더  좋은 문화라고 말할 수 있다. 최소한 더 고급
한 문화일수록 그보다 저급한 문화보다는   다루는 내용은 광범위하고 풍부하며, 
보다 더 정보적인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평가론의 첫  번째 가치적 판단은 좀더 고급한 문화가  좀더 강력하게, 
더욱 더 오랫동안 심미적 만족감을 지속시켜 주기 때문에 저급한 문화보다는 더 
바람직하고 좋은 문화라고  가정한다. 하지만 이 가정은 아직도 여러  종류의 수
용공중을 대상으로 한 실증적인 검증을  거쳐야 할 문제로 남아 있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판단을  내릴 때도, 필자는 대중문화에 의한 심미적  충족감은 거짓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Van  den Haag나 기타 대중문화 비판론자들과는 의견을  달
리하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는 모든 종류의 문화는 진실된 충족감을 가져다준다. 
다만, 좀더 고급한 문화가 이같은 충족감을 주는  데 더 효과적이라고는 말할 수 
있겠다.)
  또 좀더 고급한  문화는 그 수용공중들의 교육수준이 더 높으며,  여타의 문화
들보다도 더 광범위하게 인생의 문제를 취급하고 있고 더욱 더 풍부하게 사상과 
상징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고급 취향문화의 내용범위는  다른 취향문화들에 
비해 더 넓고 포괄적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좀더 고급한 문화는 이보다 하
급한 문화공중의  이해와 범위를 넘어서는  철학적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좀더 고급한 문화는 이보다 저급한 문화로부터도 그 문화내용을 광
범위하게 하급문화로부터 문화의  차용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에  비해 하
급문화는 그 수용공중이 갖는 낮은 교육수준 때문에 고급문화로부터 문화내용을 
차용하는 데에 스스로 크게 제약을  받고 있다. 결국, 좀더 고급한 문화는 그 문
화의 수용공중에게 더욱  적절한 정보내용을 제공함으로써, 이들이  처한 사회적 
현실이나 문제를 이해하는데, 그리고  시민으로서 역할을 다 하는 데에, 다른 하
급의 문화가 그들의 문화공중에게 베푸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도움을 주고 있
다 하겠다. 
  여기서도 고급문화에 대한 이러한 가정은 실증적인 검증을 통해서 뒷받침되어
야 할 문제이기는 하지만, 이같은 가정을 인정하고  이를 좀더 간단히 다시 표현
해 본다면, 더  고급한 문화일수록 그 문화수용자에게 갖는 기능은  하급의 문화
가 그 문화수용자에게 갖는 것보다 더 기능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가치적 판단은 어쩌면  고급문화 주창자들의 논조와 자못 비슷하다 하
겠다. 그래서  이같은 문화의 가치적  판단을 가지면 대중문화  비판론이 그러한 
것처럼 문화를  수용하는 사람들의 성격과 희망을  너무 무시하는 문화평가론이 
되기 때문에, 이것만 가지고는 문화정책을  위해서는 불충분하다. 앞서 말했듯이, 
이같은 판단의 주장은 오직 문화만이 중요하고 그 문화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중
요하지 않다는 논리이다.  그러므로 만약 이러한 가치판단이  공공문화정책의 기
저가 된다면, 이는 문화를 수용하는 국민의  의사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문화를 
강요하게 될 수도 있으며, 이같은 일들은  전체주의적 캠페인이나 전체주의 정권
이 일찍이 시도했던 문화정책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민주적 사회가 갖추어야 할 문화정책으로  타당한 가치적 판단은, 문화
가 국민들에 의해 수용되어야 하며  수용하는 국민 없이 문화가 존재할 수는 없
다는 논리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문화는 그 문화의 수용공
중을 전제로 하지 않고는 평가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문화평가는 반드시 문
화공중을 함께 평가할 수 있는 평가기준을 요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취향문화의 경우에도 이를 선택하기 위해서 각 공중들은 어느 정
도의 교육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취향문화의  평가기준으로서 교육이 아마도 가
장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그들이 갖는 교육수준과 일치하는 취향
문화를 선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들의 교육정도에 맞지 않는 취향문화를 
선택할 것을 기대해서는 안될 것이다. 문화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면, 이는 가
상한 일이라고 칭찬  받을 수는 있다. 그러나 이같은 노력의  행위를 사회적으로 
전형적인 것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며, 따라서  모든 사람들에게 이 사람처럼 문
화의 영웅적인  노력과 행동을 수행하도록  요구하고 기대할 수도  없다. 그같은 
문화적 영웅주의가 장려할 만하고 또 설혹  필요하다고 느껴진다 하더라도, 전쟁
과 같은 긴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사회가 모든 사람에게 이같은  영웅적 행위를 
하도록 공공정책으로 강요할 수는 없다. 
  고급문화를 선택, 수용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최소한 인문과학을 전공하거
나 이를 강조하는  대학교육을 받아야 한다. 따라서 고등학교 졸업  정도의 사람
에게 이같은 고급문화의 선택,  수용을 기대할 수는 없다. 또한 대학졸업자라 하
더라도 인문분야의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를 기대하기 어렵다. 이러한 
이유에서도, 대중문화 비판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모든 대학교육을 받은 사
람들은 고급문화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은 결코 옳은  주장이라 할 수 없다. 고등
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이나 대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이나 모드 자기의 교육수준
과 미적 감각의  기준에 따라 적합함 문화내용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하
며, 이러한 선택을 인정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자기의 교육
수준과 미적 감각기준보다 다소 떨어지는 문화내용을 계속적으로 선택 수용하고 
있을 때에 한해서  부정적인 비판을 받아야 한다. 대학교육을 이수한  사람이 통
속적인 탐정소설류만  읽고 있다면, 이는  그들의 교육수준에 비해  낮은 수준의 
문화내용을 계속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상태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런 하위의 문
화내용을 선택하는 데 대해 비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들이 프루
스트의 작품을 읽고 있다고  할 때, 칭찬해 줄 수는 있지만  이들이 그러한 높은 
수준의 작품을 당연히  읽고 즐겨야 한다고 기대할 수는 없다.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이러한 행위는 공공정책으로서의 평가논리의 내용이 될 수는 없다. 
  따라서 이 평가이론에서는 사람들이 문화를 통해  심미적 만족을 추구하며, 문
화의 선택, 수용이  수해자들의 가치와 취향수준을 표현한다면,  그들이 선택, 수
용하는 문화가 고급한 것이든  저급한 것이든 모두 동등하게 가치있고 바람직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하급문화 공중에 속하는 어떤 사람이 달력에  있는 그림
을 오려  붙이고 이를 감상하며 즐기고  있는 데 반해, 고급문화  공중에 속하는 
어떤 사람은 추상적  표현주의 화풍의 원화와 같은 미술을 선택,  감상하며 즐긴
다고 볼 때, 이  양자는 모두 각자 자기들의 수준과 교육  정도에 관련되는 내용
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뿐만 아니라, 이 양자는 모두 자기들이 선택한 
내용을 통해서 정서적인 그리고 지적인 보상을 받을  수 있으며, 양자 모두 이로 
인하여 그들의 인생에 나름대로  새로운 지식, 새로운 느낌, 새로운 이해를 보태
게 된다. 
  이들은 교육적 배경이나 이전의 경험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그 보상의 내용이 
각각 다를지는 모르지만, 각자는 그 적절한 선택에서  경험에 또 다른 새로운 보
탬이 된다.
  사람들의 문화적 선택에 대한 평가는 선택하는 문화내용만을 가지고는 올바르
게 내릴 수 없으며, 그 선택으로 인하여  야기되는 이른바 심미적 보상의 증가분
과 비교해야 한다. 이  심미적 보상의 증가분이란, 사람들이 어떤 문화내용을 선
택, 수용함으로써 이 문화가 그들의 기존 경험에  얼마만큼 새롭게 더 보탬이 되
고 있는가, 또  그들이 자기실현을 하고자 기울였던 노력에 얼마만큼  새로운 보
탬이 되고 있는가  하는 보탬의 증가분을 말하는 것이다. 이같은  증가분의 보상
은 고급문화 수용공중에게서도 마찬가지로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보상
은 문화내용의 질이나 수준과는 무관할 것이며,  그보다는 공중의 과거경험을 넘
어서게 하며  얼마만큼의 자기발전을 새로이 가져오게  하는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심미적 보상의 내용이  측정될 수 있고, 또한  보상에서 
개인의 배경이나 경험들을  제하고 볼 수만 있다면, 아마도 상급문화  공중에 속
하는 사람은 하급문화 공중에  속하는 사람보다 그들의 문화선택에서 받는 보상
보다 크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차이는 문화내용에 의한 것이
라기보다는 고급문화 공중이 그들  문화의 심미적 기준에서 받은 훈령에서 기인
한다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상습문화 공중들은 문화에서 더 많은  것을 끄집어
낼 수 있으며, 이렇게 끄집어낸 것들을 그들의  정서적 생활과 지적 생활의 여타 
국면과 더  잘 연관시켜 볼 수  있다. 그리하여 그 추가적인  보상부분은 그들이 
상급문화 공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만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
들이 받은 심미적  훈련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다. 만약 상급문화  외의 하위문화
의 취향공중에게도 그들의 기준에  입각해서 상급공중의 그것과 같은 정도의 양
과 질의 심미적  훈련이 주어진다면, 또한 만약 그들에게도 상급문화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하위의 취향문화에 대한 활발한 학문적 연구와  평론의 도움이 
주어진다면, 하위공중이나 상위공중이나 그 보상은 마찬가지이다.)
  이 연구의 두 번째의 가치적 판단의 명제는 다음과 같다. 
  모든 취향문화들의  평가는 그 문화를 수용하는  취향공중을 고려한 평가여야 
하며, 문화내용의 어떤  항목에 대한 평가도 그 문화항목을 수용하는  공중의 심
미적 수준이나  공중의 특성과 관련되는  평가여야 한다. 또  모든 취향문화들은 
그들 공중들이 갖는 특성들과 수준들을 반영하는 데에 서로 동등한 가치가 있다
고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연구의 주장은, 모든 취향문화들이 그 자체로서  동등한 가치
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취향문화를 그 공중들과 관련시키면서 평가할  때에 비
로소 모든 취향문화들은 서로 동등한 가치가 있는 문화라는 것이다. 
  이같은 가치적 판단의 두 번째 명제는 고급문화의 우월성을 주장하였던 첫 번
째 명제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모순성은 각 취향공
중 사이에 있는 차이를 고려하고, 또 여러  취향공중들이 갖는 가치나 문화적 훈
련에서의 차등성을 인정하는 평가가 될 때, 그 모순성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더 
고급한 취향문화일수록 더 바람직한 문화일 수 있다.  다만 이 문화가 그 수용자
와 관계없이 추상적이며  독립적으로 문화만을 평가할 때에만 그럴 수  있다. 그
러나 현실세계에서는 문화란 수용자를  떠난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며 또 추상적
인 개념일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바람직한 사회문화로써 고급문화만 존재케 
하는 고급문화 지향성만의 정책은, 하급 취향공중에게  고급한 문화를 수용할 능
력을 갖추는 데 필요한  사회적. 경제적. 교육적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는 올바른 정책의 지침이나 방향이 될 수는 없다. 대중문화 비판론자들, 특히 보
수적인 비판론자들은 자기네들만  고급문화를 수용할 능력을 갖추고  있고, 하금
공중은 그러한 능력을  위한 경제적 수준과 교육  정도를 갖추고 있지 못한데도 
그들이 수용할 수도 없는 고급문화에 충성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들 비판론자들은 고급문화를 선택, 수용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 능력을 
키워주고 능력을 갖추도록 하는 방안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으면서, 이들을 
포함하는 전체사회가 고급문화의 사회가 되기만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 이들 
보수주의론자들은 고급문화를 위한 자원,  권력이 최대한으로 활용되는 공공정책
을 요구하면서도 이 고급문화 공중이  수의 증가를 가져오게 할 수 있는 사회정
책이나 경제정책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고
급문화를 옹호하는 사회를 주장하지만 이에 전반적인 참여는 불허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가치판단의 두  명제를 문화정책을 위한 하나의 명제로 다시 
묶어보면 다음과 같다. 사회는  모든 사람들이 보다 고급한 취향문화를 선택, 수
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데에 필요한 교육적 기회 및 기타의 기회를 최대한
으로 마련할 수 있는 정책을 추구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교육적 기회가 이
루어질 때까지는 현재의 고등학교 교육 정도 수준의 사람에게 대학 수준의 교육
을 필요로 하는 고급문화를 선택하고 수용하기를  요구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렇
기 때문에 하위의 문화들을  희생해 가면서 고급한 문화만을 지키고 발전시키려
는 문화정책은 잘못된 것이다. 더 나아가서  하위의 문화공중들이 자신의 교육수
준에 맞는  심미적 기준을 적용하여  문화선택을 하는 것에  대해 비판한다든지, 
또는 그들의  교육 정도나 심미적  수준이 반영되는 취향문화를  수용, 향유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그릇된 것이다. 
  이같은 연구의 정책적 가치판단을 심미적 상관주의라고  하겠다. 이는 앞서 언
급한 바 있는  여러 종류의 취향문화들이 서로  함께 존재함을 인정하는 심미적 
다원주의 개념을 여기서 규범적으로 재론하는 것일 뿐이다. 
  이 연구가 공공정책으로서 제시하고자  하는 두 가지의 대안적 정책안은 다음
과 같다. 첫 번째 안은 문화적 상향이동의  정책이다. 즉, 모든 사람들이 더 고급
한 취향문화를 선택, 수용하도록  하는 안인데, 이를 위한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
는 모든 사람들은  반드시 더 높은 교육.  사회. 경제적 수준으로 향상되어야 한
다. 따라서 사회가  이와 같은 향상을 위한 기회를 줌으로써  문화적으로 상향이
동을 가능케 하는 공중정책을 시행하는 방법이다. 
  이 문화적 상향이동 정책일 채택될 수 없는 경우,  그 두 번째 안은 문화적 다
원정책이다. 이것는 사회에  현존하는 모든 취향공중들이 바라는  문화적 요구와 
그들 수준에 맞는 여러 층의 문화내용들을 균형있게  창조, 공급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정책이다. 
 
    2.문화적 상향이동 정책
  문화적 상향이동 정책을 모든 사람들이 중상급계층의  수입, 교육 정도나 기타
의 중상급계층의 특성을 갖추게만 된다면, 누구나  중상급의 문화내용을 또는 어
쩌면 상급문화의 내용까지도 선택, 수용하리라는 가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문화적 상향이동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아마도 전부는 아니겠지만 대부
분의 사람들은 중상급  문화내용 정도까지는 선택하게 될 것이다. 왜  그런가 하
면 아주 고급한 상급문화를 수용하려면 아무래도 사상과 상징을 통한 깊은 감정
적 참여가 필요한데,  중상급계층 정도의 사람으로서는 이같은  사상이나 상징에 
의한 갚은 참여를  따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들이  이 중상
급문화 정도에 참여하기만 하더라도  그 사회의 전반적 취향수준은 크게 향상될 
것이 틀림없고, 또한  이 중상급문화를 통해서도 왕성하게 창작의 꽃도  피울 수 
있는 것이며,  현재보다는 훨씬 다양한  문화내용을 이루어놓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때 하급 취향문화는 쇠퇴할  것이고, 그 문화가 사회에 보여주던 
다양성도 따라서 감소될  것이다. 그렇다고 이같은 없어져가는 문화의 다양성이, 
반드시 가난한 사람이 있어서 또  교육을 잘 받지 못한 사람들이 있음으로 해서 
필요했던 그런 다양성이었으며 또 그런 문화였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와 같은 문화적 상향이동 정책은 다음의  몇 가지 이유 때문에 그대
로는 채택되기 어려운 정책이라 하겠다. 
  첫째, 모든 사람들이 경제 및 교육  수준을 중상급계층의 것으로 끌어올린다는 
것은 현재로서는 확실히  불가능한 것이다. 모든 사람들의 수입을 그  정도로 끌
어올린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며, 모든 사람들의  교육수준을 중상
급계층의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것도 좋은 학교나 좋은 선생의 수가 극히 제한
되어 있는 한,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런 이유만으로도,  이 상향적 문화이동 
정책을 부분적으로 보완되거나  수정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실제로 이 
정책이 실시되더라도 현실적으로는  일부 사람들만 중상급계층으로 향한 이동기
회를 가지게 되며, 그것도 아마 그 외의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기회의 희생 위
에서 이루어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둘째로, 상향적 문화이동 정책은 수입구조나 교육기회  구조에 대한 상당한 사
회적 재개편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같은 사회의 재개편정책을  원칙적으론 받아
들일 수 있다 해도, 그 정책은 오히려  다른 이유에서 재개편되는 정책이어야 할 
것이다. 즉,  빈곤이나 기타의 경제적 불평등  상태를 바로잡기 위한,  또 인종적 
차별이나 정치적 불평등과 같은  것을 제거하기 위한 사회 재개편정책이어야 한
다고 본다.  다시 말해서 평등주의정책을  사람들의 수입의 격차를  좁혀주는 데 
그 목적이 있어야지,  일부 사람들만을 중상급계층의 신분으로  높여줌으로써 그
들의 취향수준을 상향시키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물론 평
등주의적 경제정책을  추구함으로써 일부  사람들의 취향수준을 간접적으로나마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며, 또 최소한 문화선택의  기회를 높여줄 수는 있을 것이
다.  그렇지만 이같은 경제적인 평등정책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만으로는 사회는 
중상급 수준의 취향으로 끌어올릴 수는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빈자를 위해 
중상급계층의 수입구조를  재개편함으로써 중상급문화의 취향수준을 떨어뜨리지
는 않는다 해도, 이들의 취향을 표현하는 경제력이  오히려 감소될 수도 있는 것
이다. 결국 문화의  상향이동보다는 경제적 평등주의에 보다 더 큰  중요성을 부
여하는 공공정책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같이 경제적 평등주의에 더 큰 중요성을 부여하는 정책결정은 다음의 두 가
치판단에 근거하고 있다. 하나는,  좋은 삶은 어떤 취향수준에서도 다 영위될 수 
있는 것이라고  보는 판단이며, 다른 하나는,  좋은 사회를 결정짓는 기준으로서 
한 사회가 갖는 전체적 취향수준은  그 사회에 사는 사람들의 안녕 복지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를 좀더 직설적으로 표현한다면, 고급문
화이든 어떤 다른 수준의 문화이든간에 사회의 공공정책에서 문화의 상향이동의 
실현을 정책의 최우선에 두어야  할만큼 현재로서는 문화향상이 사회에 어떤 것
보다도 그렇게 더  긴요한 것은 아니다. 적어도 하급문화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
고 있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밝히지  못하고 있는 현재로서는 더욱 그러하다. (흥
미있는 것은 대중문화를 비판해 온  주요론자의 한 사람이 이 점에 대해서는 동
감을 표시하고 있다.  즉, Van den Haag는  말하기를, "사람은 고급문화 없이도 
행복하게 또 잘 생활할  수가 있다. 소크라테스가 성찰 없는 인생은  결국 살 가
치가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을 때, 이는 생의 의미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사람, 생
에 대해서  지적으로 그리고 어쩌면  정신적으로만 보려는 사람,  사고력이 깊은 
사람인  한 철학자의  말이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Van  den 
Haag가 고급문화를 자기성찰과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은 의미가 없으며, 그와 함
께 고급문화를 수용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개인적 느낌을 말한  뿐이다. 자기성
찰은 고급문화 밖에서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공공정책으로서의 중요성의 순위로서 문화에 대한 가치판단은 여가
의 수단으로 문화가 사용될 때 특히 적용된다.  그러나 문화가 정치적 수단일 경
우에는 이같은 가치판단이 쉽게 적용될 수는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만약 취향
문화의 선택 수용이 정치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지만--또는 어느 취향문화 창조
자가 의도적으로 이같은 정치.  경제적인 면에서 사람들이 수행해야 할 역할, 능
력을 무력화시키려고  하게 될 때,  문화에 대한 중요성이  순위로서 가치판단을 
또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제2장에서 언급했듯이 일부  급진주의적 비판
론자나 사회주의적 대중문화  비판론자들은 대중문화가 그들이 필요하다고 생각
하는 정치적 행동을 못하도록 무력화시키거나, 최소한  다른 데로 관심을 돌리게 
하고 있으며,  이른바 허위의식을 조장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같은 
장에서 이러한 비판에 대해서 또한 이미  언급했듯이, 혁명적 대중문화를 수용하
도록 사람들에게 강요한다고 해서  그들이 모두 혁명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
닌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급진적인  문화변동이나 문화개혁, 또는 문화성장의 필요 자체
를 여기서  부인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문화란 그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에게 문화의 
존재의미는, 그들이  문화를 통해 인간으로서  자기실현을 이룩하고, 여가시간을 
만족스럽게 보내는  것이다. 이같은  자기실현이나 여가선용에 이용하는  문화가 
반드시 고급 취향수준에만  있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심미적 수준을  추구하고, 그런 기준에 맞는 문화내용을 찾아낼  수 있다
면, 자기실현이나 여가시간의 무료감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여가생활의 만족감을 
취향문화의 모든 수준에서 가능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미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수입의 증가와 교육의 개선으로 상당
한 문화의 상향적 이동을 가져왔다. 또한 미국의 경우, 볼과 한 세대가 지나가기
도 전에 사회의  지배적인 취향문화가 하급문화에서 중하급문화로 상승되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앞으로의 새 세대에서 전개될 경제적. 기술적 변화들이 더욱 
더 작업시간과 작업일을 단축시켜 사람들의 여가가 더  길어질 때, 이 여가에 선
용될 좀더 고급한 문화수용을 위한  상향적 문화이동 정책이 더욱 요청될 수 있
겠다. 그렇지만 앞으로 여가시간이 더욱 증가된다고 해서, 현재에 있는 여가활동
의 열망이 모두 충족되어, 수용할 취향문화의 고갈이 생긴다고 볼 수는 없다. 전
문가들은,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이 더욱 많아진 여가시간을  처리할 수 없게 되었
고, 이에 따르는 무료감은 사회질서에 위협을 주게  된다고 자주 그 위기를 이야
기하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은  아직도 충분한 여가시간을  갖지 못하고 
있으며, 작업 외에  그들이 하고 싶어하는 일들을 하기에는 여가시간을  너무 짧
다. 
  현재 텔레비전 시청률이 그렇게 높은 것은,  사람들이 자녀들을 잠자리에 들게 
한 후 자신들이 잠자리에  들기까지 두 시간 정도의 시간이 있는데,  그 두 시간
의 여가를  즐기는 데에는 텔레비전  시청이 아주 안성맞춤이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만약 좀더 많은 여가시간을 갖게 될  때, 사람들은 저녁의 여가시간을 지
금처럼 텔레비전 앞에서만  보내지 않고 가끔은 다르게 보낼 것이다.  만약 그들
이 지금보다 좀더 긴 주말을 더 많이 갖게  된다면, 또 지금보다 더 장기간의 휴
가를 갖는 시대가 온다면  모든 종류의 취향문화에서 야외에서든 실내에서든 지
금과는 다른 방식의 여가활동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 
  사실상 사회질서에 대한 실제적인 위협은 더욱  많아진 여가시간이 아니라, 실
업이나 저임금 등에  의해 생기는 사회적 무용감과 분노이다. 이와  같은 사회적 
무용감이나 분노는 여가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가 그 자체
나 레크리에이션 전문가들이 선전하는  여가를 좀더 유효하게 보내기 위한 고안
으로서의 레크리에이션 등은 무력감에  빠져 있는 이들을 스스로 사회적으로 유
용한 존재로 느끼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같은 사회적 무용감은 가난한 사
람들 사이에 팽배해 있다. 특히 가난한 노인과 청년에게 그러하다. 물론 이 가난
한 사람들은 대중문화적 생산품을 살 경제적 여유가  없기 때문에, 또 이들의 필
요를 위해서 만들어진 문화산물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여가를 선용할 기회가 
적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당장 필요로  하는 것은, 이같은 여가를 잘 
보내기 위한 문화산물이 아니라, 좋은 직업, 더  나은 수입, 그리고 더 나은 교육
인 것이다.  이같은 문제들이 해결된 연후에,  비로소 그들은 여가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이들 가난한 사람들을 빈곤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려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는 공공정책은 자기실현과 여가를 만족
시키는 데에 가로놓여 있는 많은  저해요인들을 함께 제거해 줄 수도 있을 것이
다.

    3.문화적 다원주의와 하위문화의 편성정책
  문화적 상향이동 정책적 대안으로  미적 감각의 상대주의적 개념과 문화적 다
원주의의 일반론에 근거한, 또 하나의 바람직한 문화정책을 제의한다. 이 정책은 
각 취향공중들의  상이한 구체적인 문화기준들을 모두  표현해 주고 만족시키는 
문화내용을 창조한다. 이러한 문화정책을 하위문화 편성론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편성이란 말은 좀  어설픈 감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문화적 다원주의라는 용어 
대신 하위문화 편성이란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다원주의라는 말의 사용을 피
하는 이유는 근래에 와서 이 용어가 너무나 다양한 뜻으로 사용되어 왔을 뿐 아
니라, 정치적 표어로 이용되는가 하면 경멸의 뜻으로도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편성이란  용어는 라디오나 텔레비전의 방송용어에서  차용한 것인데, 
이 연구가 문화정책에  관해 앞으로 제안할 많은  사항들 중에는 특히 텔레비전 
문화에 적용되는 내용들이 많으며  또한 텔레비전 미디어는 오늘날 가장 강력한 
매스미디어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 수용자의 수적인 면에서, 텔레비
전은 어떤 미디어보다 강력한 매스미디어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 연구의 정책적 
논의내용들은 텔레비전 미디어에 많이 적용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외의 미디어
에도 함께 적용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취향문화 일반에 걸쳐 적용될 수 있을 것
이다. 여기서 편성이란 용어 앞에 하위문화라는 접두어를  붙인 것은 이 책 서장
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취향문화는  사실상 하위문화의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
다. 
  현재의 편성제도는 일부 문화의  취향공중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다
른 취향공중들은 편성에서 제외되어 전혀 그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되어 있다. 또 
이들 편성이 대상으로 하는 취향공중들은 문화내용을 모두 공통으로 가질 수 있
는 기준 위에  있어야 한다. 즉 취향공중들이  갖는 기준들을 서로 조금씩 양보, 
절충시키는 통합적인 편성으로 되어 있다. 이같은  현 편성제도와는 달리 새로운 
문화정책으로 제안한  하위문화 편성정책은 모든 취향공중들의  심미적  기준을 
더욱 잘 표현할  수 있으면, 그 취향문화 내용을 구체적으로  만들어내는 편성제
도이다. 여기서 사용된 취향공중이란 용어는 앞에서  사용해 왔던 용어의 의미보
다는 좀더 협의의 개념으로 계층, 연령, 기타  요인 등에 따라 세분되는, 더 분명
하며 구체적인 집단개념을  말한다. 이러한 취향공중의 개념을  염두에 둠으로써 
하위문화 편성은 사춘기에 아직  들어서지 않은 청소년 중에서도 전위의 하급문
화 공중을 위한 편성이라든지, 전통적인 중상급계층에  있는 흑인 청소년을 위한 
편성과 같이 구체적으로 세분화된 문화공중이 존재하는  한 계속해서 그 세분화, 
구체화는 세분화된 문화공중이 존재하는  한 계속해서 그 세분화 과정이 이루어
지게 된다. 그러나  이들 공중의 크기라 더욱 세분화됨으로써 공중의  수가 너무 
적어  이들만을  위한 문화창조의 경제적 비용  및 기타 비용이 너무 클  때, 그 
세분화의 진행은 한계에 다다르게 된다. 
  하위문화 편성정책이  시행될 때 문화수용자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과 필요로 
하는 문화내용을 더 쉽게  발견할 수 있고 선택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이 정
책을 사람들의 심미적  만족감이나 기타의 만족감을 더욱  증가시켜 줄 수 있는 
문화정책이 될 것이다.   더욱이 하위문화 편성정책은 문화적 다원성을  더욱 높
여주어, 그 사회의 전체문화를, 그것이 고급하든 저급하든 산에 더욱 발전시키고 
풍부하게 해줄 수  있다고 본다. 뿐만 아니라 문화정책을 통해서  현재 매스미디
어에 의해 외면당하고 있는 소외된 일부 취향공중들이 어떤 사람들이며 어디 있
는가를 알아내어, 이들에게 자신들의 취향문화를 좀더  공급받을 수 있도록 해주
며 문화혜택을 균등하게 누릴 수 있게 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미국과 같은 많
은 현대사회에서 매스미디어로부터 문화혜택을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사람
들이 오히려 매스미디어로부터  오랫동안 가장 외면당해 왔던  것이다. 취향문화 
공급혜택을 가장 잘 받지 못한 집단은  저급문화의 취향공중들이며, 어느 취향문
화층 공중에서나 노년과  중년층들이 가장 소외되어 왔다. 이 문제를  더 일반적
으로 말한다면, 구매력이  아주 낮으며 매스미디어에서 광고하는  상품들을 구입
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 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광고하는 상품들을 구입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 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취향문화의 창조와 공급의 혜택
을 잘 받지 못하는 인구집단이라 하겠다. 
  우선 현재의 빈민층 사람들을 위한 하위문화 편성이 가장 절실히 요청되고 있
다. 왜냐하면, 현재의 매스미디어 편성에서는 이들 빈민들을 아주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현재  매스미디어는 주로 중류계층을 강조하는  문화내용을 공급하
고 있다. 이러한 문화내용을 접하는 빈민들은 그  풍요를 보면서 자신들은 그 부
를 소유하지 못하고 살아야 하는 것을 느끼게  됨으로써, 심한 심리적 부담을 갖
게 되는 그런 편성이다. 빈민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취향문화를 
가질 권리가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도 혜택을 나누어줄 수 있는 하위문화 편성이
라는 새로운 문화정책이 필요한 때이다. 
  새로운 하위문화 편성은 현재의  매스미디어 내용과는 달리 이들 빈민들의 관
심과 이익에 초점을 둔 문화내용과 주제를 다루게  된다. 또한 빈민들 자신의 관
심과 이익의 시각에서 문제들을 보고 취급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이 하위문
화 편성에 따르면, 빈민들을 위한 드라마의 내용과  주제 및 인물 설정시 빈민들
을 현재 흔히 보는 것처럼 개인적 사정에  의해 경제적 곤란으로 파멸하는, 현대
사회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존재로 묘사하거나 불운하기만 한 희생물로서 취급하
지 않고, 참된 인간으로 표현할  것이다. 빈민들은 사회경제체제의 희생물이지만, 
그들의 참담한 생활에 대한 내용을 매스미디어에서 취급함으로써 풍요하게 잘사
는 계층의 사람들에게  빈민들에 대한 죄의식이나 연민의 정을 갖게  만든다. 그
들과 함께 미디어 내용물을 수용하는 빈민들은 그 문화내용을 진실로 아끼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위문화 편성이 빈민들의 현재의  생활조건을 당연한 것으로 받
아들이도록 하려는 것은 아니다. 어떤 매스미디어의  내용도 수용자로 하여금 특
정의 단일한 반응만을 일으키게 할 수는 없지만,  즉 하위문화 편성은 빈민 자신
들의 경험이나 관심,  문제와 관련되는 예술, 정보  및  연예오락을 공급해 주며 
그들의 가치와 목표를  수락하고, 그들의 심미적 기준과 언어 및  예술형태에 호
소하는 문화를  이룩하는 것이다. 이 빈민이라는  말도, 가난하지만 아주 고도의 
이질적인 잡다한  사람들을 통틀어 지칭하기 위해  중류계층 사람들이 만들어낸 
집단개념이기 때문에, 하위문화 편성을 통해서   이들 빈민들의 성격과 연령층에 
따라 여러 종류로 다시 세분화되어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위문화 편성은 미국사회에서  여러 소수인종 집단에 대한 더 많
은 문화내용이 다양하게 존재하도록 해줄 것이다.  미국에서 민권운동에 의해 매
스미디어들은 흑인문화를 다루는 프로그램을 좀더 많이  만들게 되었고, 더욱 많
은 흑인 연예인들이  미디어에 출연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흑
인 대다수가 원하는 바 그들의 다양한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에는 텔레비
전이나 라디오 방송, 영화, 심지어는 신문, 잡지의 경우마저 그 수가 너무 적다. 
  미국의 경우, 유럽계 이민의 종족문화를 매스미디어의  정규 내용물로  제작해
야 할  정도로 소수인종의 수용층 인구가  충분히 많은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매스미디어들은 이들 소수인종  집단들, 특히 노동계층의 소수인종  집단 사람들
의 관심과 가치를 외면하여, 고작  (올 인 더 패밀리)와 같은 텔레비전 프로그램
을 통해  소수인종 집단의 가치내용이  취급되며, 사람들은 이를  즐기는 정도라 
하겠다. 그런데 하위문화  편성을 할 때에는 이민해 온 소수인종이나  기타 하위
노동자들의 문화적 진공상태를 메꾸어줄 수 있는 것이다.
  현재의 편성현상에서 보면  고급문화의 수용공중조차도 텔레비전이나 여타 매
스미디어가 외면하고 있는 소수집단의 수용자군에 속하고  있다. 그런데 이 하위
문화 편성을 쓰게 되면  고급의 취향공중에게도 그들의 문화가 불평등하지 않게 
공급된다. 물론 고급문화  공중은 매스미디어가 아니더라도 따로  문화의 창조와 
공급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여타의 취향문화 공중이  매스미디어에서 자신
들의 문화를 취급해 줄 것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보다는 그 필요의 정도가 훨
씬 덜하다. 
  끝으로 하위문화 편성은 창작자와 수용자간에 있었던 기존의 관계에도 변화를 
가져다준다. 현재의 편성의 경우 창작자는 여러  취향문화들을 다 같이 만족시켜 
줄 수  있는 내용을 창작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 하위문화 편성에  따르게 되면 
모든 창작자들은 좀더 세분화된  취향문화 중에서 별도의 구체적인 한 문화만을 
위해서, 또 그 취향문화를 통해서 창자활동을 하게 된다. 즉 창작자는 자신이 선
택한 어느  한 취향공중만을 위해서 창작을  하게 된다. 이때 이  작품의 공중은 
그 창작자와 심미적  기준을 서로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흔히 창작자들이 갖고 
있었던 소외감 같은  것은 크게 줄어든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의  창작자들은 이
제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창작활동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며,  동시에 이들의 수
용자들은 지적으로나 정적으로나 더 깊고 강렬하게 작품을 통해 공감하게 될 것
이다. 하위문화 편성정책은 문화의 창조자들과 수용자들을  서로 더 가깝게 해주
는 것으로서, 이 정책이 이상적으로 구현되는  상황에 이른다면 과거 사회에서나 
볼 수 있었던 민속예술가와 민속수용자 간에 가졌던 일치된 그러한 관계를 현대
사회에서 재현시킬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더욱 창조자 지향의 대중문
화를 만들어낼 것이다. 

    4. 하위문화 편성정책의 찬반론
  하위문화 편성의 정책론을 좀더 발전시키기 위해 이 이론에 대한 반론으로 예
상되는 다음 일곱 가지 문제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첫째, 하위문화 편성론은 국민들에게  고급문화를 수용하도록 권장하지는 않고 
오히려 열등한 문화내용만 공급해 주는 문화정책으로 될 수 있다고 보는 반대주
장이다. 이와 같은 반론을 일면 타당성 있는 주장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러한 주
장이 타당성을 가지려면 대중문화는  열등한 문화이기 때문에 만약 이러한 열등
한 대중문화들의  공급이 끊기기만 한다면 사람들은  결국 고급문화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대중문화 비판론자들의 논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논리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여러  차례 밝혔지만, 고급문화 수용
을 위한 자격과  능력에는 높은 교육적. 경제적 수준이라는 조건이  선행되기 때
문에, 고급문화는 언제나 이를 갖춘 일부 소수만의 문화로 될 수밖에 없다. 따라
서 고급문화의 경우 대중문화  비판론자들이 원하는 대로 소수공중의 독점과 배
타성만이 지속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교육수준과 사회. 경제적 계층에 
맞는 문화를 선택할 수  있고 또 선택하려 할 것이다. 따라서  이에 역행하여 그
들의 교육적.  경제적 배경과 상이한  문화를 선택하도록 강요하는  어떤 정책도 
실효를 거두기 어렵다. 소련 정부가 국민들로  하여금 공산주의의 공식문화를 수
용하도록 그렇게 강력한 설득과 갖은 노력을 다  했지만 결국 실패하게 된 것도, 
그리고 영국의 BBC 방송이 과거 10년 동안 텔레비전 방송을 독점하면서 시청자
들에게 상급문화나 중상급 문화내용을  수용하도록 했던 노력이 실패한 것도 모
두 정부정책으로서는 수용자의 기호를 쉽게 바꿀 수 없음을 보여주는 예라 하겠
다. 그런데 하위문화  편성론은 이와 같은 수용자의 기호가 갖는  타당성과 정당
성을 인정해 주는 것으로 이들의 기호를 반영하는 여러 종류의 취향문화들이 각
각 좀더 발전되고 풍요롭게 되도록 촉진시키는 정책이라 하겠다. 
  둘째, 하위문화 편성론은 국민이 문화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필요에 따른 문화
내용을 공급하기보다는  국민이 원하는 것에 영합하는  문화내용만 공급해 주는 
문화정책이며, 따라서 현재의 매스미디어가  저지르고 있는 수용자에게 영합하는 
행위를 정당화시켜  주는 이론이라고 비판하는  반론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국민이 갖추어야 할 필요가  무엇인지, 또 본인 아닌 다른 사람이  그 필요를 대
신 생각하고 판단해서 공급해 준다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가 의심스럽다. 
이와 같은 주장이나 생각을 개혁자들에게 꿈으로나  남아 있는 것이다. 개혁자들
은 어째서 행위를  하는 본인들이 좋아서 선택하는 것은 나쁘고,  자기네들이 이
들을 대신해서 바람직한 내용을  판단해 주어야 하는가에 대해선 충분한 내용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문화면에서 그러하다. 다른 사람들은 대신해서 선택
하는 좋은 것,  바람직한 것들이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개혁자들 자신들에게 
좋은 것이요, 바람직한 것으로  나타나는 경향이 많다. 즉 개혁자들에게 더 많은 
자원, 더 좋은 직장, 더 높은  신분을 마련해 줄 수 있는 그러한 좋은 문화인 경
우가 많은 것이다. 이들 개혁자들이 좋은  문화라고 주장하는 문화내용을 사람들
이 무조건 수락하고  수용하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달리 문화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는 한 이 이론은 개혁의 노력을 부정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이 하위문화 편성론이  반드시 문화개혁을 배제하는 이론은 
아니라는 것이다. 더구나 하위문화 편성은 사람들이  단순히 원하는 내용을 주도
록 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내용이라고 자신들이 판단하기 때문에  원하게 되는 
내용을 주도록 하는 정책이다. 또한 이  편성정책에서도 여러 층의 취향공중간에
는 비록 문화내용의 질적 우수성을 규정짓는 데 적용하는 기준들이 다르기는 하
지만, 고급문화가 최고의 문화내용을 추구하려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타의 모
든 취향문화들도 자신들의 문화기준에서 각기 최고의  내용을 추구하고 있다. 좋
은 문화내용을 찾는 것은 고급문화 공중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고 여타의 문화
공중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취향공중들이나 모두 자신들의 판단에  따라 좋다고 
생각되는 내용의 예술,  정보, 오락물을 바라보게 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러
므로 현실도피를 결사적으로 찾고 있는 사람들이 아닌 한 나쁘다고 판단하는 문
화내용을 의도적으로 추구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설혹 사람들이 더러 현실도
피를 찾고 있다고 해도 이것은 오락이 갖는  여러 기능 중의 하나로서, 누구에게
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며  단지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욕망을 만족시켜 줄뿐이
다. 이는 고급문화 공중과  여타의 문화공중 모두에게 마찬가지로 있을 수 있다. 
누구나 때때로 필요로  하게 되는 이러한 현실도피는  그리 문제삼지 않아도 될 
것이다. 아마도 저급의  취향공중일수록 고급공중보다는 더 많은  현실도피를 원
하고 있다는 사실은 지적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들 공중이 더 많은 현실도피를 
원하는 것은 문화 자체보다는  그들이 사는 생활조건의 어려움 속에서 조금이라
도 그 어려움을 잊어보려는 심리적 결과일지도  모른다. 또한 그들은 현실도피를 
한다고 해서 자신들에게 그리 큰 처벌이 가해지는 상황이 아니라면 생활의 어려
움을 잠시라도 잊게 하는 문화내용을 접해 보겠다고  생각할 수 있다. 문화는 진
공상태에서 선택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향유하는  도피적 문화내
용물을 박탈함으로써 하급공중들을  문화적으로 개혁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무모
한 정책이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이러한 정책은  빈곤의 원인보다는 그 결과만을 
다스리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도피적 문화내용이 이를  수용하는 사람이
나 사회에 대해 해를 끼친다는 확고한 실증이 있다면야 당연히 이들 문화내용의 
공급을 막겠지만, 아직 그러한 실증이  없는데 그럴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사람
들이 나쁘다고  판단되는 문화내용에만 지나치게 탐닉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도피라기보다는 자기학대적인 행위로서, 문화적 선택
의 한 행위라고 보기보다는 사회적인  그리고 개인적인  병리현상과 더 많이 관
계되는 문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겠다. 
  수용자가 원하는 문화내용을 준다고  하는 이 하위문화 편성론은 그렇다고 해
서 현재의 상업주의적 매스미디어가  행하고 있는 것을 정당화시켜 주려는 것은 
아니다. 상업주의적 매스미디어의 정책결정자들은  수용자들이 원하는 것을 존중
하며 따라서  그들이 원하는 문화내용을 공급하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현재의 
편성을 옹호하고 있다. 그러나 이 새로운 하위문화 편성정책에 의하면, 사람들이 
그냥 원하는 내용이 아니라  사람들이 판단하여 좋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원하게 
되는 문화내용을 미디어가  공급하게 한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 미디어들은 
이러한 정책을 추구해 본 적이 전혀 없다.  이들 현재의 상업적 미디어들은 그들
이 주장하는 것처럼 수용자들이  그냥 원하는 것조차도 들어주고 있는지 의문이
다.
  그러한 의문을 갖게 하는 한 가지 예로 한 텔레비전 시청률 조사결과를 들 수 
있다. 이에 따르면 현재의 대부분의 방송 프로그램 내용에 대해, 특히 오락 프로
그램에 대해 시청자들은  상당히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은  불만은 고급
취향의 시청공중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상업방송이 그렇게  그들이 원
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프로그램을 편성,  제작한다는, 심지어는 그에 영합까지 
한다는 바로 그 하급의 시청공중들에게서도 높은 불만이 나타나고 있다. 
  더구나 현재와 같은 편성으로  텔레비전 방송이 시청자가 원하는 내용이나 시
청자가 판단해서 좋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프로그램 내용으로  편성, 제작
할 수 없는 것은,  프로그램의 편성, 제작에 참고하기 위해 시청자들로부터 얻은 
반응자료라는 것들이 아주  불완전하거나 빈약한 데도 그 원인이 있을  수 있다. 
전국 방송망을 갖고 있는 미국 상업 텔레비전방송의 프로그램 편성은 약 1200가
구를 표본으로  한 닐슨시청률 조사결과에  크게 의존하여 결정된다.  그런데 이 
1200가구를 표본대상으로 한 닐슨 시청률 조사방법은 텔레비전 수상기의 스위치
가 커져 있는가 꺼져 있는가를 보는 정도이지,  수상기 앞에서 얼마 동안 시청자
가 어떻게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지를 조사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를 보완하
기 위해 간단한 비조사자들의 시청일기를 통해  자료를 수집하는 정도이다. 그렇
기 때문에 이와 같은  시청률 조사방법으로는 시청자들의 프로그램에 대한 평가
를 정확히 측정할  수 없다. 또한 전체 시청인구의 시청태도의  다양성을 설명해 
줄 수 있을 만큼 표본의 크기가 충분한 조사라고도  할 수 없다. 물론 표본을 더 
크게 한다고 해서 현재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내용이 크게 개선될 것이라고 보지
는 않는다. 다만 시청자들이 프로그램에 대해서 내리는  평가까지 볼 수 있는 시
청률 조사방법이라면 수용공중이 만족하는  것은 어떤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어떤 것인지,  그 강도가 어느 정도인지까지도  나타나며, 하위문화 편성은 어느 
부분에서 가장 절실히 요청되고 있는지도 제시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여타의 매스미디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그 수용자의 반응을 알아보려는 조
사는 불완전하고 또 문제점도 많다. 영화에서는  영화관 매표구의 상황으로 축적
하고 있지만 이 방법은 오직  영화를 보러 왔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을 뿐 관람
한 영화에 대한  관객의 반응이나 평가를 보여주지는 못한다. 잡지의  경우 독자
조사라는 것이 있어서 게재내용에 대한  반응을 보여준다고 하지만 이 역시  주
로 광고부서에서  행하고 있으므로 구독자가 급격히  감소되는 현상이 나타나는 
때를 제하고는 그 잡지의 편집방향에  대한 반응을 보기 위해 조사를 하는 경우
는 드물다. 또 현실적으로 매스미디어들은 수용자들이  원하는 것이나 그들의 심
미적 기준에 맞는  내용물을 모여주는 문제에는 그리 관심이 없는  것이다. 그들
은 광고 쪽에 더 신경을 쓰고 있으며 수용자들이 광고하는 상품들을 구매하도록 
설득하는 데에 더  힘을 기울이고 있다. 즉 이들 매스미디어들은  수용률을 높일 
수 있는 미디어 내용물을 싣고  있지만 이것은 광고주들을 위한  배려이지 수용
자들의 심미적 기준을 만족시켜 주겠다는 결의와는  거의 무관한 것이다. 이러한 
미디어들은 광고주들에게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천 명 당 얼마라는 산출방법에 
의한-가장 많은 수용자를 확보해 주게  되며 따라서 미디어의 각 내용물 항목엔 
될수록 많은  수용군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그에 비해  하위문화 편성정책은 
미디어 내용을 더욱  더 다양하게 해주며 그  결과 개개의 내용물에는 수용군이 
더 적어진다. 
  셋째로 하위문화 편성은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내용물이나 모든 사람들
이 문화를 통해 보편적으로 추구하거나 개인적으로 이룩하려고 하는 목표달성을 
저해하는 내용물을 만들어내도록 장려하는 정책이 될  것이라는 비판이 있다. 이
와 같은 비판은 대부분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파괴적이며 자기파괴적이라는 가정
을 전제로 해서만 타당한 주장이 된다. 그러나  이같은 전제는 받아들여질 수 없
는 것이다. 더구나 하위문화 편성은 수용자가 좋은  내용이라고 판단할 때 그 문
화내용을 원하게  되며, 그렇게 되면  수용자가 원하는 문화를  공급한다고 보기 
때문에 해로운  내용물이라고 밝혀지는 순간 수용자들은  그 내용물을 거부하게 
마련이다. 
  이미 제 2  장에서 논의된 효과론에서 지적되었듯이 어떠한  문화항목, 심지어 
한 종류의 전체문화라도  그 영향은 무시될 만큼 작다고 하겠다.  이 문화항목의 
문제를 결정적으로 해명하게 될 조사연구가 더욱  요청되고 있다. 현재까지의 연
구자료로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되어  제거해야 된다고 주장될  문화내용과 
문화항목으로 인한 피해가  어떤 것이든지, 그러한 피해보다는  이러한 문화내용
이나 항목을 제거하기 위한 검열행위가 가져오는 해악이 더욱 크다는 것만은 밝
혀져 있다. 물론,  매스미디어에 자기의 가치관에 어긋나는 폭력내용이나 성애적 
내용 등이 담겨졌을  때, 이들 내용을 보지 않거나 자녀들에게  보여주지 않으려
는 사적 검열행위를 하는 것은 가능할 수  있다. 그렇지만 수용자들의 사적인 검
열행위를 대신해서 정부나  매스미디어가 내용검열을 하거나, 그러한  내용을 수
용하고자 하는 다른  수용자들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을  요구할 수는 없는 것이
다. 더구나 하위문화  편성론의 문화 메뉴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문화내용
을 추가시켜 주고 있기 때문에, 좋지 않다고  느끼면서도 다른 더 나은 내용물이 
없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그것을 선택하게 되는 지금과 같은 경우는 사라질 것이
며, 오히려 모든 사람들은 보다 더 많은 선택의 여지를 갖게 될 것이다. 
  넷째로, 하위문화  편성은 각 취향공중  자신들의 심미적 기준에  맞는 문화를 
선택케 하는 수용자의 권리를 존중하는 정책이기  때문에, 그 중요성에서 창작지
향의 문화보다 사용지향의  문화의 정당성을 더 강하게 드러낸다. 그  결과 창작
자 지향 문화의 중요성을 부차적으로 보게 되는  정책이라 비판을 받을 수 있다. 
더구나 창작자 지향성의  강조가 고금문화의 특성이라고 볼 때, 이  하위문화 편
성정책은 고급문화를 위협하는  것이며, 많은 사람들을 문화의  능동적인 창작자
에서 피동적인 사용자로 변화시킬 위험이 있다고 비판할 것이다. 
  하위문화 편성은 문화를 수용하고 이용하는 사람들도 문화내용을 창조하는 사
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권리를  가졌다는 점에서, 그 사용
자 지향의 문화의 중요성과 존재가치의 타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
고 해서 사용자 지향의  문화가 고급문화를 위협하거나 문화수용자를 더 피동적
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아직까지 사용자 지향의  문화가 고급문화에 해를 끼친다
는 아무런 실증적  증거는 없다. 오히려 하위문화 편성은 문화의  다양화를 더욱 
촉진함으로써 그보다 하위의  다른 취향문화들을 활성화시키는 것처럼 고급문화
도 더욱  활성화시킨다. 더구나 이같은  사용자 지향성을 강조하는  문화에 의해 
가장 손상을 받는 창작자들은 고급문화의 창작자들이  아니라-왜냐하면, 이들 고
급문화 창작자들은 그들이 갖는 권력, 사회적 신분  및 이 문화공중의 심미적 기
준에 의해 잘  보호되고 있기 때문이다-오히려 대중문화의 창작자들  쪽이다. 그 
이유는 대중문화 창작자들의 예술적 자율성은 더 많은 수용자를 끌어야 하는 필
요에 의해서 때때로  제약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위문화 편성은  대체로 창
작적 자율성을 더  높여주는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문화가 더욱  다양화되면 각 
문화내용을 수용하는 수용군도  좀더 분화되어 적어지게 되며,  따라서 창작자들
은 그들의 작품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는 수용군을 만나게 될 수 있
기 때문이다. 
  사용자 지향의 문화에  대한 고급문화의 공격을 앞에서도 본 바와  같이, 고급
문화 창조자들을 위해 최대한으로 그 이용자를  보장해 주고, 고급문화를 양적으
로나 질적으로나 가장  높은 창작기록으로 세우려는 기도가 그 밑에  깔려 있다. 
어떻게 보면 이들  공격은 현시대 문명이 지난  시대의 것들보다 더 우수하다는 
문화사적 기록을 남기고자  하는 점이 없지 않다. 그렇지만 전체  사회의 취향수
준에 관심을 두는 것이나 타 사회들의 문화수준을 경쟁적으로 비교해 보려는 것
은 한  사회의 공공정책의 목표설정으로는 적절하지  못하다. 다시 말해서, 현재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이  복지와 생활의 만족감이 더 중요한 것이지,  결국 아무 
의미도 없는 문화기록을 남기려는 경쟁 같은 것을 벌여 존재하지도 않는 기록자
를 상대로 문화적 기록을 쌓아 올리는 데에 열중하는 것은 공공정책으로서는 무
모한 일이다. 설혹  과거 엘리자베스 시대의 영국사회 문화가 아무리  현대 미국
사회의 문화에 비해 훨씬 우수하였다 하더라도 현재의 미국사회에서 엘리자베스 
시대의 영국사회를 재현시키기 위해 미국을 개조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문화가 사용자 지향성을  갖는 것에 대한 타당성을  인정한다고 하는 것이 곧 
더 많은 사람들을 수동적인  문화사용자로 만들어버린다는 우려도 근거 없는 주
장이다. 왜냐하면 이  하위문화 편성은 사람들이 아마추어적인  창작자가 되거나 
전문적인 창작자가 되는  것은 막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하위문화 편성
정책을 더 많은 문화적  다양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다양성을 위해서는 전문지식
이 있는 문화창작자들을 더  많이 필요로 하게 된다. 그렇게 볼  때에 문화의 수
용자들이 물리적으로 수동적이며 눈에  띄는 창작행위가 없다고 해서 이들 수용
자를 피동적으로 만들었다고 공격을 가하는 것은,  수용자의 정신적인 활동 면을 
도외시하는 너무나 지나친 청교도적인 판단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가장 좋은 해결방안으로서의 문화정책은 문화의 창작자든 
사용자든 어느 하나만을 특별히 강조하지 않고 모두 똑같이 중요하게 다루는 것
이라 하겠다. 그런데 바로 이 하위문화 편성이 이상적인 상황에서 시행될 때, 문
화창작자들에게는 그들의 원하는 작품의  창작과 그들이 원하는 공중에 의한 작
품수용을 가능케 해주며,  문화사용자들에게는 여러 가지로 진열된  문화내용 중
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해주고 사용자들도 원할 때
는 언제나 스스로 창작자가 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다섯째, 하위문화 편성이 전국민을 하나로 통합해서  다루지 않고 구체적인 여
러 취향공중들로 나누어  개별문화의 공중들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사회계층에 
따르는 사회적 위계와 인종적 차별을 문화에까지  확산시키게 되며, 또 취향위계
를 고착화시키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을 들어  비판할 수 있다. 이미 밝힌 
바와 같이 하위문화 편성은 각 취향공중의 존재를 드러내고 그 존재가치를 인정
해 주고 있다.  그런데 하위문화 편성은 이들 각 취향공중들의  욕구를 충족시키
게 된다는 점에서  취향의 위계질서를 반영하는 문화구조를  가져온다. 그렇다고 
해서 하위문화 편성이 문화에서 없던 위계질서를 새로 창조해 내는 것은 아니며 
기존의 위계적  구조를 눈에 보이게  가시화시켜 줄뿐이다. 오히려  여러 문화적 
자원들이 취향문화들에게 더욱 공평히  그리고 동등하게 분배된다면, 취항문화들
이 비록  위계화되어 있다 하더라도 더  동등하게 취급해 주는 것이  될 것이며, 
현재보다는 불공평한 대우를 받는 문화가 줄어들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 편성에 의하면 취향문화에서나 취향공중에서 어떤 부분도 불공평하게 차별
대우 받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어떤  문화내용이든간에 수용자들이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선택할 폭넓은 선택의 자유를 그들에게  주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이 새로운 편성이야말로 현재의 편성방법보다 사람들을 훨씬 덜 차별적-
그래서 덜 계층적 -으로 만들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 더 다양한 문화내용
을 갖도록 해주며, 더 다양한 내용의 제공은  보다 더 많은 취향문화들의 선택과 
탐색을 가능케 해주는 문화정책이기 때문이다. 
  여섯째, 문화편성은 매스미디어가 갖는  사회결합 기능을 약화시킨다고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일시에 전국에  걸쳐 같은 
내용을 대하게 하여 동시에 한  곳에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는 매스미디어가 가
질 수 있는 위력을  감소시키게 될 것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그렇지만 이
같은 위력을 발휘하는 기능이  현재의 미디어 편성제도하에 있다고 해서 그렇게 
흔히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쩌다 대통령의 암살 등과 같은, 극히 드
문 극적인 상황에 처할 때에나 전국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일시에 텔레비전 앞에 
모여 동일한 내용의  프로그램을 보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설사  모든 사람들이 
이같이 동일한 텔레비전의 프로그램을 시청하거나 동일한 잡지내용을 읽게 된다
고 하더라도 매스미디어가 과연 사회결합을 높여주는 기능을 할 수 있는지의 여
부도 확실치 않은 것이다. 설혹 같은 내용을  수용한다 해도 거기에는 여전히 각 
수용자는 자신의 시각을 통해서 그 내용을 보게 된다는 또 다른 문제가 있기 때
문이다. 사회계층과 인종의  차별에 의해 잘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의 경
우 분열된  사회의 부분들에게 각자가  필요로 하는 자원이  공평하게 주어지고, 
사회적으로 공통적인 기준에 따르는데 대한 보상이 있을 때에만 그 결합성이 높
아질 수 있는 것이다. 
  하위문화 편성은 모든 사회부분에 대해 어느 정도 자원의 할당을 하게하기 때
문에 비록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사회의 결합성을 높여주는 데 기여할  수 있다. 
하위문화 편성은 각 취향공중들이  갖는 심미적 기준에서 각각 최고수준을 이루
도록 동등한 기회를 줌으로써 각 문화의 질을  상향시킬 수 있다. 그렇지만 이같
은 문화정책으로는 통합적 사회에 필요한 평등의  기본구조를 이루는 데는 한계
가 있는 것이다. 
  일곱 번째, 하위문화  편성은 각 취향공중의 수준에 적용되는 정보나  여타 정
보내용을 제공하는  것이며, 그 결과  현재의 하급 취향공중에게  흔히 공급되는 
피상적인 정보내용을 더 많이 양산하여 이를  더욱 광범위하게 확산시킬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수용자들은 민주사회  시민의 한 사람으로 올바른 역할을 다하
지 못하게  되며,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자신이 처해 있는  문제해결을 위한 
충분한 지식을 갖추지 못하게 된다는 주장에 의해  비판을 받게 된다. 좀더 알기 
쉽게 말한다면, 하위문화 편성이 시행될 때 그나마 있는 현재의 방송과 신문, 잡
지의 보도나  다큐멘터리 수준을 더욱 저수준으로  악화시킬 것으로 우려된다는 
것이다. 분명히 하위문화  편성을 한다고 해도 그 보도나 기타  정보내용이 현재
보다 크게 더 개선될 것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새로운 편성론에 
따르는 정보활동이 모든 취향공중에게  뉴욕 타임즈나 그 수준급의 텔레비전 정
보 프로그램을  공급하게 된다는 의미나  보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현재의 상급공중이나 중상급공중이 향유하는  같은 종류나 양의 정보를 모든 취
향공중들에게 제공하게 되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하위문화  편성의 보도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 중에서  해당 취향공중에게 좀더 직결된 사건들에 대한 
뉴스와 정보를 더 집중적으로  제공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예컨
대 하위공중을 위한 보도는 전국적으로 노동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이나 기관들의 
문제를 강조하는 특성을 갖게 된다. 그 결과  사람들은 자신이 관심을 갖는 문제
나 사건들에  대해서는 현재보다 더 많이  알게 되며, 뉴스에 대해서도  보다 더 
큰 관심을 갖게 된다. 
  하지만 하위문화 편성이 보도내용이나 기타 정보내용에 대한 수용자들의 관심
을 아주 극적으로는  증가시켜 주지는 못할 것이다. 설혹 그렇게  극적으로 증가
시켰거나, 그리고 이로  인해 더 많은 뉴스내용을 알았다하더라도 이것이  곧 사
람들이 개인적 역할이나 시민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행동에 아주 극적인 변
화를 가져온다고 보기는  어렵다. 현재의 미디어효과 연구결과가  보여주는 바에 
의하면, 사람들의  행동이 그렇게 매스미디어에  의해 쉽게 영향받고  변경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지 않다. 또 텔레비전  시청자 조사가 보여준 바에 의하면 
사람들은 텔레비전에서 보도나  정보지식의 내용물보다는 연예오락물을 더 요구
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사실 인간들은 어떤 사실이나 지식  등을 그저 부어 넣기만 하면 수용하는 항
아리와 같은 존재는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그들이  직접 관심을 갖는 문제에 대
해서만 행동하고,  그 때문에 가지가 관심을  갖는 문제와 또 그  자신의 가치에 
의미있는 정보내용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은  앞에서도 언급한 선택적 지
각에 의해 자신의 가치에  어긋나는 정보내용을 거부하거나 취사선택 과정을 거
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불충분한 정보나  심지어는 그릇된 정보의 통합으
로 때때로 자신이  희생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 그릇된 정보를  스스로 받아들이
고자 하고  심지어는 그릇된 정보를 더  즐겨 찾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나  정보를 제한하는 처사가 타당성을 갖는다는 주
장이나 이를 인정하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만약 사람들이 자기가  듣기를 원하
는 내용에만 귀를  기울이고 그렇지 않은 내용에는 귀를 막으려  한다면, 그들이 
원하는 바에 어긋나는 내용을 아무리  큰 소리로 외쳐도 들리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지적  때문에 소리를 높여 이야기하려는 
사람이 자신감을  잃어도 안되겠지만, 그렇다고  소리를 높이기만 하면  듣게 될 
것이라는 잘못된 자신감을 갖게 되어서도 안된다.  이상 살펴본 설명들이 사실이
나 사상을 검열하는 데에 정당성을 뒷받침해  주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도 안된다. 
왜냐하면 언제나 누군가가 그와 같은 사실들과 사상 또는 기타 종류의 문화내용
들은 언제나 문화적 선유경험이나 선택적 지각에 의해서 걸러질 때 왜곡되는 것
이다. 
  이에 더하여, 사람들이 불충분하고 그릇된 정보에  기울어지는 영향 때문에 민
주주의가 위협을 받게 된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 문제에 대해 우리는 공포
감을 거두고  좀더 사려깊이 살펴보아야  하겠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대부분의 
두려움은 민주주의가 형성되는 역사적 과정의 경험에서 비롯된다. 즉, 이같은 문
제가 제시된 때는 주로 교육받은 엘리트만이  시민으로서 간주되던 시대였다. 그
러나 민주주의 이론에 의하면 오늘날 여전히 모든 시민들은 사회의 모든 문제에 
대하여 올바른 지식을  갖춘 시민이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렇지만  경험에 의
하면 민주주의는 시민들이 그와 같이 교육을 받지 못했어도 그 기능을 다 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교육을 잘 받지 못하고, 충분한 정보를 가질 수 없거나 가지려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의 관심사이며 이해관계가  있는 문제가 위기에 처하
게 된다면 일반적으로 그들도 합리적으로 이에 대처하여 행동하게 된다. 
  좀더 적절한 설명으로  바꾸어 말하면, 사람들은 그들이 갖고 있는  정보를 가
지고 판단해서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되는 목표들과 관련해서 합리
적으로 행동한다. 이들은 어쩌면 다른 사람들이  추구하는 목표와는 다른 목표들
을 추구할는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사람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에 반하는 
방향으로 투표할 수도 있는데 이같은 투표행위의 결정은 이들이 이에 관한 충분
한 정보를  갖지 못한 것이 그  원인이 아니라, 경제적 이익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또 다른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들이 갖는 목표들은 다른 사
람들이 갖는 목표들과  서로 상충되는 수도 있다. 교육을 받지  못한 유권자들에 
대해 갖는 교육수준이 높은 유권자들의 반대는 그들간에 있는 목표의 근소한 차
이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런데 교육수준이 높은  사람들이 목표에 근소한 차이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런데 교육수준이 높은  사람들이 목표에 대한  정보를 더욱 
충분하고 정확하게 받게 될 때, 그들이 잘못  가졌던 목표차이는 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식인의  민권운동에 대한 교육받지 못한  유권자들의 무관심과 
같은 경우, 텔레비전에서  이에 대한 보도와 해설을 아무리 많이  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무관심에 그렇게  의미있는 정도의 큰 변화를 가져올 수는  없다. 이같은 
많은 보도와 해설은 백중지세의 선거의 경우라면 그 당락을 좌우할 정도로 표의 
향방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노동계층이나 중하층의 많은 사람들이 
갖는 그런 문제에  대한 그들의 낮은 관심을 변화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민권문
제에 대한 이들의  저조한 관심에 대해 변화를 일으키려면, 국가가  이 민권운동
을 노동자나 중하층 사람 자신들이 스스로 중요하게 느껴지는 그런 문제로 다루
게 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하위문화의 보도편성은 정보수준을  어느 정도는 높여주게 된다.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이론으로 정보의 필요성에 대해서 재평가를 요하게 된다. 즉, 민주사회
로서 존재는 데에 필수적이며  그 기능수행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정보의 
종류가 어떠한 것이어야 하며,  정보량은 어느 정도여야 하고, 정보의 분석적 복
잡성은 어느 수준이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재검사와 재평가를 요하게  된다. 새
로운 보도편성은, 사람들은 어떠한 조건하에서 새로운  사건과 지식에 대한 정보
를 추구하는가에 대한  이해를 요한다. 특히 어떤 조건하에서 자신의  가치에 대
해 회의를 갖게  되는가를 알아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정치활동에  직접 참여
할 수 있을 때, 또는  직접 참여하려는 의사가 있을 때에 한해서, 현대보다는 다
른 양식의 취재, 보도를 원하게 되는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잠정적으로 뉴스나 
지식을 전달하는 새로운 보도방식을 실험해 보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예컨대 
여러 취향공중들에게  인기있는, 허구적이거나  준 허구적인 창작작품의  형태를 
빌어 보도할 수  있을 것이다. 싱클레어의 래니 버드 소설들이나  아니면 최근의 
논픽션 소설 류에서 보여주는 것같이, 국내  정치문제나 국제 정치문제들을 허구
형식을 빌어 텔레비전의  인기 드라마에서 다루는 방식도  한번 시도해 볼 만하
다.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나 사회의 문제를 이해하고 그 해결에 도움이 되는 그런 
문화내용을 찾아낸다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사람들은 문화내용을  수용하는 데 
있어서 현실의 문제를  이해하는 혜안을 갖고자 하기도 하지만, 반면  현실에 눈
을 감고 도피하고자 하기도 하며 그 결과  오락물만 추구하게 된다. 고급문화 공
중이라면 다른 공중에 비해 현실의 냉혹한 문제를 더욱 직시할 것으로 여겨지지
만, 이같은 현실의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다루는 문화내용의  정도에서는 여타의 
취향문화와 별 차이 없이 이들 고급공중의 취향문화인 고급문화에서도 마찬가지
로 매우 드물게 취급된다. <고도를  기다리며>가 텔레비전의 일일 연속극보다는 
더 진지하게 현대사회에서의 인간의 기본적· 실존적 문제를 표현하는 작품이지
만 이것이 수용공중들이 자신의  삶의 상황에서 부딪치는 문제들을 직시하는 데
에는 그다지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또  설사 도움이 되는 내용이라 하더라도 
고급문화 공중이라 해서 여타  문화공중보다 현실문제를 더 많이 직시하게 되는
지도 의문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해서,  어떤 취향문화에서나 그 수용공중에게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는 내용을  담으려 하지 않으며 공중에게 불쾌한 지식이나 
사건을 다루려 하지도 않는다. 특히 이같은 문제에  별 해결책이 없을 때에는 더
욱 그러하다. 고급문화의 경우에 문제들은 추상성과  상징적 방법으로 가려져 있
으며, 대중문화의  경우는 지나친 단순화와 과장,  그리고 사이비 사실주의 속에 
가려져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고급한 것이든  저급한 것이든 문화를 근본적으
로 자신이나  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 사용하려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새로운 하위문화 편성으로 문화의  이같은 목적과 기능을 대폭 바꾸고자 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기대일 것이다.

    5. 하위문화 편성론의 실제
  이론적으로 하위문화 편성정책을 시행하는  데는 다음과 같은 세 단계의 과정
이 필요하다.
(1) 모든 중요한 취향공중과  문화, 그리고 그들의 심미적 기준들이 우선 밝혀져
야 한다.
(2) 현재 취향기준에  맞는 문화내용을 잘 공급받지 못하고 있어  소외된 취향공
중이 이 중에 어떤 사람들인지가 밝혀져야 한다.
(3) 이에 필요한 문화내용이 창조되어야 한다.
  하위문화 편성의 실제를 분석하기 전에  이 세 단계에 대해 좀더 자세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현실생활에서 문화가 이같은 조직적인 계획  절차에 따라 
제조되는 것이 아니며,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된다는 점을 함께 밝히고 넘어
간다.
  모든 취향공중과  그 문화들을 모두  밝혀내기란 여간 어려운  작업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들 공중과  문화는 이미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조직화된 집단이거나 
체계적인 문화가 아니며 더구나  이들의 심미적 기준은 대부분 표현되지도 않고 
명시되지도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같이 어려운 취향공중과 문화를  밝히는 연구작업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영역에 걸친 실증적 조사가 유효하다.
  그 하나는 모든  문화내용물에 대한 착실한 내용분석을 하는 것이다.  이를 통
해 여러  문화내용물 중에 서로 유사한  것이 추출되고, 이런 유사한  것이 서로 
묶어질 때 취향문화로 간주될 수 있다.  이때 문화내용의 유사성은 주제내용에서
뿐만 아니라 그 문화산물이 이루는  구조, 언어, 시각적 복합성 및 그 밑에 깔려 
있는 세계관의 특성을 이루는 가치와 가정들,  그리고 문화내용물에 내재하는 심
미적 기준면에서도 취급되어야 한다.
  실증적 조사의 두 번째 부분은 수용자가 모든 매스미디어와 예술에서 갖는 선
택내용에 대한 질적  연구와 양적 연구이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사람들이 무엇
을 선택하고 있으며,  이들의 선택이 어떻게 유사하게 묶여 지는가가  밝혀질 것
이다. 또한 심층적인 면접조사를 통해서 사람들의 심미적 기준을 밝혀낸다. 그리
하여 현재 있는 문화내용물에 대해-또 문화내용의 구성물에 대해-사람들이 좋다
고 본다든지, 또는  나쁘다고 본다든지 하는 평가와 왜 그런가  하는 평가이유를 
찾아낼 수 있으며, 만약  자유롭게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을 때  어떤 덧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선택할 것인가를  알아볼 수 있다. 이와 함께 또한  인터뷰를 통해
서 어떤  문화공중이 현재 매스미디어(또는  계급미디어)에 의해 가장  소외되어 
있는 사람들이며, 어떤 사람들이 좀더 많은  문화내용을 필요로 하거나 원한다고 
말하고 있는가, 문화적으로 소외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좀더 그 혜택을 마련하여 
준다고 할 때 어떤  것을 더 원하는가 등을 밝혀줄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
들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조사자에게 잘  말하려하지 않고, 다만 현재  있는 것 
중에서 새롭거나  색다른 것을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소외된  공중들은 적어도 
현재의 문화내용에서 느끼는 그들이 원하는 것과 현실의 갭은 지적할 것이다.
  실증조사의 셋째  부분은 첫째· 둘째 부분을  종합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유사한 문화들끼리의 묶음들과 유사한 선택의 묶음이나 유사한 심미기준의 묶음
과의 관계의미를 살펴본다. 그리하여 어느 문화묶음이  사람들에게 더 많이 선택
되며 중요시되는지, 또 취향공중들과 그 문화들을  배열할 때 문화묶음들이 어느 
정도 서로 확연히 구별해 볼 수 있는지를 밝혀준다.
  이 실증조사를  통해 앞에서 지적한 하위문화  편성의 시행 3단계  중, 첫째와 
둘째 단계에 관계되는  문제를 해명해 줄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실증조사를 
누가 실제로 하려고 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또 하려 한다 해도 비용을 부담하
려는 사람이 있을지, 심지어는 이 조사결과를  창작자들이 받아들여 참고할 것인
지조차 확실치는  않다. 현재 대부분의  창작자들은 조야한 단계에  있는 수용자 
조사결과나 수용자가 분명히 표명하는  반응을 따르는 데에 강한 거부반응을 보
이고 있다. 즉,  그들은 창작자 자신이 만족할 수 있는  작품이면, 결국 수용자도 
만족할 것이라는 것이며 수용자의 요구에 너무나 지나친 관심을 두면 그것은 창
작과정의 간섭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매스미디어의 경영간부들은 수용자
조사 결과자료를 활용하는  데 있어 창작자들보다는 적극적이다.  하지만 미디어 
간부들이 창작자들로  하여금 조사결과를 그들의 창작에  고려하도록 하는 데는 
아직도 어려움이 있다.
  창작자들이 수용자들의 요구에 응하면서  창작을 하려 하지 않는 것은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  왜냐하면 비단 매스미디어에서까지도 창작은  어디까지나 결국 
개인이 행동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들이 행하는  창작의 복잡성도 충분한데 수용
자의 기준이나  요구까지 배려함으로써 만드는 또다른  어려움과 창작의 제약을 
원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만 대중문화에서 창작자와 경영자의  갈등의 대부분
은 수용자들이 창작내용물을 수용할 것인가 아닌가에 대한 이견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이를 밝혀줄 수 있는 더 적절한  수용자 조사방법이 있다면 
이같은 갈등문제는  지혜롭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같은 조사가 
창조성의 여지를 이주  없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잘된 조사라 
하더라도 라라비가  표현했듯이 '감추어져  보이지  않고, 아직 완전히 형성되지 
않았으며, 충족되지  않고 있는 상태의 공중이  원하는 것'까지 밝혀주지는 못한
다. 이러한 조사가 창작자와 매스미디어 경영자에게  보여주는 것이란 고작 수용
자들이 과거에 어떤 것을, 그리고 어느  정도로 만족스럽게 선택하였는가 정도일 
뿐이다. 이러한 과거에 행한 문화선택이나 현재  공중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관한 조사자료가 앞으로의 새로운  문화내용 창조에 직접으로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어느 시사잡지 편집장이  말했듯이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잡지 
표지는 언제나 변함없이 '빨간 바탕에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것이 조사결과 이지
만, 그렇다고 매호마다 이같은  빨간 바탕의 미녀를 표지로 만드는 잡지는 없다. 
모든 예술과 오락에서 신기성과  충격성은 창조자와 수용자에게 모두 중요한 작
품의 요소가 되고 있다. 그런데 조사자료는 이같은 것을 제공해 주지는 못한다.
  하위문화 편성을 시행하는 계획의  세 번째 단계는 새로운 문화창조를 실제적
으로 이루는  단계이다. 실제적인 문화창조  단계에서는 앞서 본  실증적 조사에 
의거하는 것보다는  시행계획자의 상상력에  의형 이루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문화란 체계적 계획에  따라 창조된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문화내용
은 지금까지의 문화를 수용하던 창작자들과 사용자들이 기존 문화내용물에 만족
할 수 없게 될  때, 또한 기존문화의 내용물이 더 이상  그 수용공중이 요구하는 
데에 따를 수 없게  될 때 나타나게 된다. 이 점은 이미  제3장의 청년문화와 인
종문화를 논의하는 가운데  문화적 혁신에서 언급한 바도 있다. 이렇게  해서 이
루어지는 새로운 문화내용물의 창조과정은 체계적 계획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창
조과정보다 훨씬 바람직스럽다고  본다. 지나치게 체계적인 계획에  의한 문화창
조는 그것이 설혹 수용자  조사를 참작하는 경우라 하더라도 엘리트주의적 방법
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문화창조가 자유방임적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주
장은 아니다. 수용자들이 현재의 문화내용물에 대한  불만이 없다 하더라도 문화
를 위한 기금을  조성하기 위해 법을 만들거나 창조자를 크게  양성하고, 이들의 
고용을 증대시키는 방안을 마련한다든지 하면 새로운 문화창조를 일으키는 자극
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화계획이 어떻게 이루어지든지 간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문화는  이들 전문가들만이 그 결정을 담당하는 것보다는  모든 사
람들이 참여하여 결정하는 방법이 더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1) 소외된 문화공중을 위한 편성
  하위문화 편성을 현실적인 정책으로  시행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현재 어떤 문
화계층의 사람들이 문화로부터 가장  소외되어 있는가를 우선 밝혀내야 할 것이
다. 그런 다음  현재 활동하는 기성창작자들이나 앞으로  활동할 신인창작자들의 
소외를 밝혀내고, 그리고  매스미디어들이 이들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문화내용
을 적극적으로 창작할 수 있도록 하는 유효한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소외공중을 밝혀내는 것은 본래 실증적 연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작업이겠지
만, 간단한 인상적인  조사만으로도 어느 정도 계층간의  불균형적인 문화공급의 
격차를 알 수  있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노인들이나 소수인종  집단의 사람들은 
텔레비전 문화에서는 물론  여타 대부분의 매스미디어로부터도 문화적으로 소외
되어 온 공중들인 것이다. 오늘날 노인들이나  소수인종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에
게 그들이 처해 있는 사회적 상황을 적절히 이해할 수 있도록 이에 필요한 정보
나 지식을 공급해 주는 신문, 잡지, 방송  등의 매스미디어는 너무나 적다. 또 이
들의 심미적 만족감을  충족시켜 주기 위한 소설이나 텔레비전 드라마,  영화 등 
창작작품들 역시 너무 희소한 상태이다. 이들뿐만  아니라 노동자나 빈민계층 사
람들을 위한 저급문화나 신민속문화의 공급도 또한  크게 부족하다. 한편 현재의 
편성내용에는 노인뿐만 아니라 중년사람들을 위한 문화내용마저 매우 부족한 상
태이지만, 젊은층의 사람이라  하더라도 구매력이 높은 부유한  독신자를 제외하
고는 미혼의 젊은이들을 위한 문화 역시 충분히 공급되지 않고 있다.
  오늘의 대중문화는 그  대부분이, 도심지에서 좀 떨어진 경치 좋은  지역에 사
는 여유있는 중산층  사람의 문화라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  문화의 내용을 
자세히 보면 도시  중심지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이나 농촌 또는 지방의 
조그만 마을을  주제로 다루는 내용이 아주  드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의 
대중문화 내용에는  전통적인 가문들이 많고 대도시가  모인 동부나 할리우드가 
있는 캘리포니아의 서부 등 일부  지역의 문화만 주로 다루어지고 있으며 그 외
의 지역에 사는 대부분 미국인은 대중문화 내용에서 외면되고 있다.
  대중문화 내용에서 소외된 지역의 사람 중에는 더러 자신들의 생활과 다른 계
층이나 지역의 사람들을 다루는 내용도 즐길 수 있고 애용할 수 도 있다. 즉, 자
신은 노인이나 중년이지만  소설이나 영화, 텔레비전에서 젊은  주인공들이 활약
하는 것을 보면서 즐길  수 있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즐기
지 못한다면, 그는 젊음의 내용에 대해 지극히 이질감을 느끼게 될 것이며, 그러
면서도 별달리 어떻게 다른 것을 선택해 볼 수 있는 여지를 갖지 못하고 소외된 
상태에 있을 수밖에 없다.
  이같은 문제는 미술부문에서  보다 더 비관적인 상태로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손쉽게 진열된 미술작품은 대부분 상급이나 중상급 미술문화의 작품들이며 여기
에 상급과 중상급  미술을 개작한 다소의 중하급미술이 들어 있다.  따라서 하급
문화의 미술작품은 주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다. 그래도 하급문화의 종교미술
의 경우는 종교상들이 더러 있어서 그것에서  판매되고 있다. 그러나 하급문화의 
세속적인 일반미술의 경우는 그 창작과 공급이 아주 희소한 상태여서 하급 미술
공중에게 공급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음악문화는  각종 음악들을 들려주고 있다.  레코드산업이 호경
기를 맞아 다양한  음악들이 취입되고 제작되며, 이러한 각종 음악들은  각 방송
국을 통해서나 음반으로 레코드가게를 통해서 판매, 공급되고 있다. 그러나 일반
인들은 여러 종류의 음악을 방송을 통해서 들을  수는 있겠지만, 자신이 그 음악
의 음반을 구입해서 즐기고자 할 때에는 아직도  어려움이 많다. 다시 말해서 일
반인은 레코드가게에서 어떤 종류의 음악이나 마음대로 구입할 수 있는 것은 아
니다.
  문화적 소외의 문제는 문화의  사용공중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문화의 창조
자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확실히 현재의 상황에서는 어떤 창조자는  다른 창
조자보다 더 좋은  창작의 여건을 누리게 되어 있다. 그런데  하급문화의 창작자
들은 다른 어떤 계층의 문화  창작자보다도 가장 그 조건이 나쁘며 부자유한 상
태에 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좀처럼 
매스미디어를 가까이하고 이를  이용할 기회가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연재의 매스미디어들은 그 창작자들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고도로 관료화된 제도
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매스미디어의 경영자들은 언제나  창작내용에 새로운 
변화가 없다고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새로운 아이디어를 갖고 있는 이들 하급문
화 창조자들의 미디어 접근을 쉽게 허용하지  않는다. 물론 매스미디어를 이용해 
보려는 이들은  자기 나름대로 독특한 스타일이라고  스스로 만들어 내세우지만 
그 대부분은 기존의  미디어 내용을 다시 개작한 내용물일 경우가  허다하다. 그 
중에는 독창적인 창조자들도 있지만  이들의 작품은 전국망을 가진 텔레비전 프
로그램으로 만들어져 널리  공급되기가 어렵고 가까운 친구들이나 이웃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일이나  하게 될 뿐이다. 과거에는 이들 하급문화  창조자들의 아
이디어를 살리기  위해 지방에 공연장이 있었으며  나이트클럽도 성업을 이루었
다. 또한 값싼  영화를 제작하는 영화사도 많이 있어서 이들  재능있는 창작자들
에게 기회를 줄 수 있었으며, 그들의 재능을  연마하여 창작물을 발표 또는 공연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러한  것들이 거의 사라졌다. 그 대신 
고도로 관료화된 매스미디어가 등장했다.  이들 매스미디어는 하위문화 창조자들
의 새로운 아이디어나  새로운 재능에 커다란 기업적  모험을 걸려고 하지 않는
다.
  소외된 매스미디어의 수용자를 찾아내는  일은 이들에게 문화혜택을 줄 수 있
는 방법을 찾아내는 일보다는 쉬운 편이다. 한  예를 들면 대부분의 소외된 사람
들은 미디어 내용물을 수용할 경제적 능력을 갖추지 못하여 '무료'로 즐길 수 있
는 상업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보면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는 빈민가에서 쉽
게 찾아낼 수 있다.  그런데 문화의 소외인구를 밝혀낼 수 있다  하더라도 이 계
층을 문화적으로 소외시키는 매스미디어 산업의 근본적인 구조적 문제와 경제적 
장애는 여전히 남아 있다.
  때문에 하위문화 편성이 실효를 거두기 위해서는 매스미디어의 구조적 차원에
서 일대 변혁이 있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더 세분화된 그리고 더 적은 수
의 수용군을  위해서도 매스미디어가 문화내용물을 제작할  수 있도록 구조적· 
제도적 개혁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대의 기존 매스미디어
가 독점적 지위를  버리고 좀더 다양성을 갖도록 분산되어야 할  것이다. 매스미
디어를 다양화시키는 분산이 어렵다면  새로운 매스미디어 기업이 더 많이 생기
게 해야 할 것이다. 예컨대, 미국의 경우 뉴스는 텔레비전 3사의 보도국과 세 시
사잡지가 독점하다시피 하여 같은 계층의 수용자를 놓고 서로 치열한 경쟁을 벌
임으로써 나머지 수용자들을  외면하고 있다. 그러나 하위문화  편성정책을 시행
하여 매스미디어가 모든 수용공중들을 동등하게 수용하게 하려면 적어도 현재의 
세 개의 미디어에서 여섯 개 내지 열두 개로  그 수를 늘여야 하며, 이 미디어들
은 현재처럼 동일한 공중을 향해  서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 다른 공중을 
찾아 경쟁하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면서도 이들  미디어들이 동일한 공중을 놓고
서도 여전히 서로 경쟁을 하도록 해야 하는데,  이것은 한 방송국이나 한 잡지가 
공중 전체를 혼자 독점하는 미디어 상황이 지극히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현재 소외된 공중에게 보다 더 많은 문화혜택을 주고 문화수용의 격차를 
좁히는 하위문화 편성이 시행되면  곧 수용자 여론조사를 위해 현재의 방법이나 
이를 약간 보완 또는 수정한 조사방법에 의해서라도 새 문화편성 정책의 성과를 
평가해 보는 작업을  실시하여야 한다. 그 조사결과는 어느 정도  시행착오 단계
로서 시작된 하위문화 편성의 다음 편성 내용물을 창작하는 데 참조하고 반영하
게 된다. 이와 함께 미디어 비평가들이 각  취향문화의 기준에 의한 평론을 하게
만 된다면 이들의 비평은 미디어  내용에 대한 수용자의 반응을 보여주는 또 하
나의 피드백 메커니즘 역할을 하게 되며 이 역시 다음의 문화편성과 내용제작에 
반영될 수 있다.
  하위문화 편성을  위하여 이같은 비판가들이나 창작자들을  새로이 길러 내는 
일은 그래도 쉬운  편이다. 그러나 앞서 지적한 기존 매스미디어  산업의 변혁을 
일으키거나 새로운 매스미디어를 만들어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
하면 미디어들이 하위문화 편성정책을  따를 경우 지금까지 누렸던 높은 상업적 
이익을 더 이상 올릴 수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변혁에 대한 미디어의 저항은 
엄청나게 클 것이다. 수익성이 줄어든다는 판단은  최소한 단기적 차원에서는 그
렇게 보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하위문화  편성제도를 택할 경우 현재의 편성방
법에 의하는 것보다는 제작비용 부담이 높아지는데 그것은 문화공급이 현재보다 
다원화되고 세분화됨으로써 편성내용물에 대한  단가가 높아지면, 때로는 직접적
으로나 간접적으로 문화산물에  대한 부담능력이 없는 수용자를  대상으로 제작, 
공급되어야 할 경우마저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하위문화 편성을 이행하는 새로
운 미디어가 종래의 종합편성을 하는 기존 미디어와 병존하여 경쟁해야 할 처지
에 있게 될 때 하위문화 편성 미디어는 기존 미디어보다 제작기술상에서도 열등
해서는 안될  것이다. 하위문화 편성은  현재보다 세분화되고 그래서  적은 수의 
수용자를 대상으로 하면서도 여전히 보통 때와 같은 높은 제작비를 요하게 되는 
편성이기 때문에 미디어들은  부담감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그러한 미디어들이 
이를 택하는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장기적 안목에서 볼  때 하위문화 편성이 상업적으로 반드시 그렇게 
불리한 것만은  아니며 오히려 이윤을 더  높일 수도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새로운 편성에 의할 때 수용자들의  욕구를 현재의 편성에 의한 것보다 더 적절
히 만족시켜 줄  수 있으며, 따라서 수용자의  수는 더욱 증가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광고주의 상업적 관심이  되는 상품광고에 의한 잠재적 구매력이 지금보다 
더 높아지게 되기  때문에 미디어의 상업적 가치는 더욱 높아진다.  물론 하위문
화 편성을  실시하더라도 제작비가 현재보다  더 떨어지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시청자나 독자 천 명당 소요되는 미디어의 제작단가가 현재의 것보다 더 값싸게 
내려갈 수는 없겠지만, 편성된 미디어 내용에 대해  수용자가 가질 수 있는 만족
도를 더욱 높여주기 때문에  수용자는 현재의 편성내용에서 더욱 강한 주의력을 
미디어 내용에 두게  된다. 따라서 여기에 함께 실리는 광고내용에도  그만큼 더 
주의를 집중시킬 수 있게 되어 광고효과를 현재보다  더 높여주는 것이 된다. 결
과적으로 하위문화 편성을 시행할 때 장기적인 안목에서 본다면 상업성은 더 높
아질 수 있다고  하겠다. 더구나 현재의 문화 편성방식에 의해서는  소외되어 온 
사람들이 이 하위문화 편성에  의해서 새로 공중군에 편입됨으로써 미디어 내용
물의 상업적 고객의 수는 크게 늘어나게 된다.  이에 따라 광고판매 또한 늘어나
게 될 뿐 아니라 새로운 광고주마저 유치할 수 있게 된다.
  그렇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즉 구매력이 약한  저소득 수용
자를 대상으로 과연 상업성을 토대로 해서 좋은  문화제품이 생산, 공급될 수 있
을지 의문이 있을 수 있다. 또한 소외되었던  부유한 고급 수용자를 위한 하위문
화 편성을  시행할 때 이를 위해  새로운 매스미디어를 만들려면, 또  이를 위한 
새로운 창작자를 발굴하고 그  문화수용자를 모으려면 어느 정도 외부로부터 재
정적 자원이  있어야 한다는 문제가  있다. 물론 대중문화가  반드시 이윤추구의 
상업적 기업에 의해서만 만들어지고 보급되어야 할  본질적인 이유는 없다. 지금
까지 비영리기관은  항상 고급문화의 창조활동이나 그  문화의 보급에만 참여해 
왔으나 근래에 와서는 청년문화나  흑인문화의 창조와 보급에도 어느 정도 적극
적인 역할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비영리적 기관이 벌이는  고급 문
화활동은 비교적 적은  규모로서만 이루어져 왔다. 이렇게 볼 때  향후 하위문화 
편성이 실시된다면 그 문화내용을 주도적으로 창조하고 보급하는 것은 이윤추구
를 하는 기업이나 아니면  공영방송공사와 같은 비교적 큰 규모의 비영리기관에
서 일하고 있는 전문적으로 훈련된 전문가들에 의해 이루어지게 될 것으로 예상
된다.

    2) 하위문화 편성 시행에 따르는 재원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아무리  비영리 운영체라 하더라도 그 운영에 필요한 재
원을 누군가가 갖고 있어야 한다. 하위문화  편성을 위한 재원으로서는 ①수용자
의 부담, ②광고주의  스폰서, ③기존 미디어의 지원,  ④정부지원 등의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수용자가 부담함으로써  재원을 마련하는 경우, 현재의 매스미디어 내용
에 대해서 사람들이 그리 강한  참여냐 의견을 갖고 있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보
아 새로운 편성을  요구하여도 이를 위한 별도의  경영적 부담은 가지려고 하지 
않을 것  같다. 즉 이들이 상업방송을  통해서 '무료'로나 거의  시청료의 부담이 
없는 프로그램을 공급받고 있는 한, 새로운  하위문화 편성의 취지가 어떠하든지 
수용자들은 이를 위한 별도의 부담을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둘째로, 기존의 편성방법에  의해 대량으로 거대한 시청자군에게  상업적인 선
전을 기대하는 광고주들이 하위문화  편성에 따르는 적은 수의 시청자를 상대로 
하는 세분화된  문화내용에 선뜻 나서서  스폰서가 될 것인지  의문이다. 따라서 
광고주에게 하위문화 편성을 위한 재원을 기대하는 것도 현실성이 없다.
  세 번째의 재원으로서 매스미디어 산업 자체의 재원에  기대해 볼 수 있다. 이
론적으로 본다면 현재 방식의 상업 미디어들로 하여금 하위문화 편성을 하는 미
디어들을 지원하도록 하는 제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기존의 상업 미디어들
이 상업활동에 의해서 얻은  높은 수익 중 그 일부를, 하위문화  편성을 하는 미
디어들을 지원하는 기금으로  돌릴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마련해  보는 것이다. 
이런 것은 미국의 상업 텔레비전이 초기의 공영방송에 대해 지원해 주었던 예에
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미국의 상업 텔레비전들이 비영리  공영 텔레비전을 
지원하였던 것은 한편으로는  시청자들에게 그들이 상업활동으로 이윤추구만 일
삼지 않고 공공지원과 같은 좋은 일도 많이 수행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국민
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고 자신의 위상을 높여보려는 속셈이 있었겠고,  다른 한
편으로는 상업성이 거의 없는 중상급 이상의 공중을 위한 프로그램을 편성 제작
할 때 갖는 부담을 공영 텔레비전에게 넘겨줌으로써 스스로의 무거운 짐을 덜어
보려는 속셈도 없지  않았다. 어쨌든 하위문화 편성을 위한 재원을  기존의 매스
미디어에 의존한다는 것 역시  그 실효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사실 어느 누구
도 심지어는 정부마저도 강제로 현재의 매스미디어들이 벌이는 상업활동을 변화
시키거나 그들의 상업이윤의 일부를  하위문화 편성을 위한 새로운 미디어나 문
화내용에 할애하도록 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없다. 결국 가
장 가능한 방법은 재원을 정부에 기대해 보는 것밖에 없다는 결론이다.
  정부가 문화재원을  마련하는 데에는 우선 하위문화를  편성하고자 하는 민간 
미디어를 뒤에서 지원해 주는 방법이 있겠고, 유럽  여러 나라에서 볼 수 있듯이 
국가가 직접 경영하는 국영 미디어를 통해서 하위문화를 편성하게 하는 방법 또
한 생각할 수 있다. 그중 어떤 형태에  의한 미디어 경영지원이든 정부의 지원에
는 근본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가 있다. 즉 정부가 문화내용물의  창작활동에 직
접 참여하게 될 때 정치적인  반대자들의 문화활동에 대한 지원이 거부될 수 있
다든지, 논쟁이 예상되는  내용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대한  지원이나 정치적으
로 정부를 곤란케  하는 내용의 문화활동에 대한 지원을 거부하거나,  그 언론자
유마저 거부하며 심지어는  억압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문제들은 정
부가 운영하는 국영 미디어에서 더욱 드러난다.
  미국의 공영방송은 정부의 예산지원을 받고 있는데,  이 공영 텔레비전 방송사
가 보도 프로그램이나  기타의 정치성을 띨 수  있는 프로그램의 제작에 대해서 
정부의 영향력을  피하면서 지원을 기대하기는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이런 
문제는 민영 미디어가 하위문화 편성을 위해 정부의 간접적인 지원을 받게 되는 
경우에도 나타나, 정부의  영향력을 배제시키면서 지원받기는 더욱  어려운 것이
다. 그렇다 하더라도  오늘날 정부는 홍보와 교육적 활동을 통해서  각종 문화활
동을 이미 지원하고  있으며 공공 텔레비전이라든지 대학 도서관, 기타  여러 문
화예술기관에 대해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문화예술기관들은 
주로 중상급 공중을 위한 문화창조기관들이라는 점에서 이들처럼 부유하지 못한 
하위의 공중을 위한 문화를 창조하는 기관에 대해서도 정부의 이같은 적극적 지
원을 기대할 수 있으며, 또한 정부의 재정적  지원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도 충분
한 타당성을 가질 수 있다.
  하위문화 편성을 위한 재원을 정부를 통해서 마련할 때 발생하는 문제를 극복
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은 문화편성자들에게 지원하는 정부의 역할에 한계선을 
긋고 그 범위  내에서 정부가 지원활동을 벌이게 하는 방법이다.  그것은 수용층
이 너무나 적기  때문에, 또는 수용자가 너무 가난하기 때문에  시장성이 적어서 
일반 상업 미디어에서는 도저히 그들을 위해서 상업적으로는 문화내용을 제작할 
수 없는  그런 하위문화의 편성만을  지원하게 한다든지 하는  것이다. 수영자의 
수가 너무 적은 고급공중이나  교육정도가 너무 낮은 저급공중을 위한 하위문화 
편성에 대해 정부의  지원 예로서는 전미 인문과학진흥재단이나 지역교육위원회
와 같은  정부 산하기구에 지원사무를  관장하는 부서를 설치하는  방법이 있다. 
또 상업 미디어들에 의해 소외된 빈민공중을 위한 하위문화 편성을 지원하는 것
이라면 정부의 빈민구제 사무를  관장하는 기구 내에 지원부서를 설치해서 돕는 
방법이 있다. 또  소외된 노년의 문화공중을 위한 하위문화 편성지원  관계를 위
해서는 노인문제전담 정부기관에서  지원사무를 관장케 하며, 청소년을  위한 하
위문화 편성지원은 청소년문제시책을  맡고 있는 보건, 교육 및 후생성  내에 설
치, 관장토록 한다.
  그런데 이런 방법으로 정부가 하위문화  편성의 지원활동을 하게 될 때 두 가
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첫째는 하위문화  편성의 지원업무를 맡는 기관 중에 
더러는 이러한 문화생활의  지원업무를 담당할 능력이 없을 수 있다.  또 능력이 
있더라도 이러한 문화사업은 이들 기관이 즐겨 다루려  하지 않을 수 있다. 특히 
대중문화를 다루는 일을  그들은 즐겨 하지 않는다. 둘째는 정치적  성격을 띠는 
문제인데, 정부에서 예산  확보를 위해서는 언제나 더 많은 사람들에게  그 혜택
이 돌아간다는 대의명분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인문과학진흥재단도 상급 및 중
상급의 문화활동을 지원해  주도록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더 많은 인구를 가진 
저급계층의 문화를 지원하는  데에 사용하려고 한다. 그런가  하면 교육위원회에
서는 전통적으로 대중문화가  설혹 교육목표에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대중문화와 
같은 데에 대한  재정적 지원에는 저항이 크다. 하위문화 편성지원에  대한 정치
적 장애는 그  해결이 더욱 힘들다. 말하자면 정부는 노인이나  청소년을 지원하
는 새로운 활동  안이라면 곧 그 지원을 추진하지만, 빈민층에  대한 지원활동은 
정치적으로 그리 활발하지 못하다. 그래서 하위문화  편성에 대한 정부의 지원에 
대한 대안적 방안으로 전국민을  대상으로 하여 모든 하위문화를 지원하는 방법
이 있는데, 국민 한 사람당 얼마씩 문화비를 책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정부
다 일인당 연 5달러를 책정할 때 미국의 문화지원액은 연 1조 달러에 달하며 이 
액수는 인구의 증가와 더불어 불어나기만 한다.
  이렇게 책정된 지원금을 미국의 공영방송공사와 비슷하게 새로 독립기구를 신
설하여 여기에 준다. 이 신설 지원기구의  최고정책 결정위원회는 흔히 공공기구
의 이사회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저명한 실업가와 공직자로서 구성되는 위원회
가 아니라 각 취향공중을 대표하는 창작자는 물론 그 수용자까지 포함하는 위원
회가 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공중은 공평하게 문화기금  사용을 할당
받게 될 것이다. 특히 지금까지 소외되었던  공중에게 공정하게 문화혜택 지원금
이 할당될 수 있게 된다. 물론 지금까지는  정부의 지원을 받아 온 독립기관들이 
참된 독립적인 기관의  위치를 지킬 수가 없었다. 또한 지원금의  할당도 선거결
과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었으며 강력한 권력을 가진 정치가들의 요구를 들어주
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힘없는 약한 빈민계층  사람들이나 소수인종 
집단을 위한 문화에 대한 지원은 잘 이루어질  수 없었다. 따라서 소외되었던 구
체적인 문화공중을 위한 편성에 좀더 지원해 주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렇다 해도 여전히 신설된 지원기구나 기존의  지원기구나 모두, 물의를 자아
내는 편성이라든지 정치적 강자의  노여움을 일으키는 편성은 지원하려 하지 않
을 것이다.  이처럼 짙은 내용물의  제작편성 지원은 현재와  마찬가지로 정부가 
아닌 민간재단으로부터 지원을 받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정부는 
민간재단의 하위문화  편성에 대한 재정적 지원이  활발해지도록 제도적 장치를 
해야 한다. 정부는  민간재단들이 정치적 압력에 굴복해서 할 수  없이 지원하게 
할 것이 아니라,  세금혜택 등을 통해서 이윤을 문화에 환원하고  문화를 지원하
게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하겠다.
  그리고 물의를 일으킬 문제성 있는 내용물의 편성에 대한 재정적 지원은 자금
이 영세하더라도 개인들의  지원이나, 정치적· 문화적 추진운동에  의해서 추진
될 수 있을 것이다. 청년문화와 흑인문화를 일으킨 젊은이, 흑인 및 기타 소수인
종 집단들은  정부의 도움 없이  새로운 문화를 이루어놓았다.  앞서도 말했듯이 
문화혁명을 일으킨 가장 강력한  원동력은 널리 팽배했던 새로운 문화출현을 위
한 욕구였다.  이같은 원동력에 대한  공공지원이 있었지만 그러한  지원이 만약 
없었다 하더라도 그 문화변동을 추진한 원동력은 여전히 작용하였을 것이다.

    6. 문화적 다원주의를 향한 전망
  이 연구에서 논의된 정책적 제안이 받아들여져  채택될 가능성은 적다. 왜냐하
면 현재 대부분의 매스미디어들은  그런대로 현 체제에서 상업적 수익성을 높이
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의 미디어  구조를 개편할 필요를 느끼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막강한  힘을 소유하고 있어서 체제를 개혁하려는 어떠한 
노력도, 심지어는  정부의 노력마저도 좌절시키려고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정부 역시 현상  유지적이며 구태여 현상을 깨뜨릴 이유가 없다고  본다면, 정부
도 미디어 개편을 하고자 서둘러 행동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현재의 미디
어 체제에 대해 불만을 갖고  그 구조적 변화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조직적 운동
이 강력히 이루어진다면 그때는 정부도 이를 추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그렇게 변혁을 요구할 정도로 현재의 매스미디어
의 문화내용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지  않고 있으며, 설사  불만스럽다 하더라도 
그들은 변혁을 일으킬 만큼  충분히 강력한 조직적인 수용집단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국민들은  정부가 문화영역에 간섭하려고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않
는가에 대해 오히려 언제나 의혹의 눈으로 보고  있다. 사람들은 정부에 의해 그
런 기도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정부가 언론인과 뉴스 미디어를 억압하지나 않을
까 두려운  눈으로 주시하게 된다.  그뿐 아니라 미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정부가 
문화적 창조활동에 간여케 하는 정치적 압력은 가능한 한 자제해 왔다.
  그렇지만 하위문화 편성은 다른 이유들 때문에 기존 미디어를 통해서 또한 자
연적인 문화변화에 따라서, 이 연구가 제시하는 것같이 완벽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그 방향으로 진행되어  가고 있다. 약간의 하위문화 편성은, 여러 출판인들
이 서로 다른 취향공중의 독자를  대상으로 책을 내고 있는 출판계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과거부터  항상 존재해 왔다. 잡지계에서도 하위문화 편성이  점차 늘
어나고 있다. 즉, 각  연령층 집단에 따른, 또 흥미와 관심에 따른  여러 층의 독
자를 대상으로, 과거의  종합잡지들을 대신하는 전문지를 내고 있다. 영화에서도 
과거와 같이 일시에 많은 관객을 동원해 보려고 만든 값비싼 호화판 대형영화가 
이제는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텔레비전에서도 이러한 하위문화  편성적 경향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과거 
텔레비전 편성은 다른  미디어와 비교해 볼 때  다양한 공중집단을 그리 염두에 
두지 않은 편성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일부  광고주들이 그들의 상업광고를 일시
에 많은 시청자에게 호소하는 것보다 잠재적 구매자에게 선전하는 것이 더 효과
적이라고 판단하면서부터 그들은 특정  연령층의 시청자나 성별 및 수입에 따라 
세분된 계층을 향한  프로그램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다. 비록  이러한 경향이 
하위문화적 광고이기는 하지만  하위문화 편성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특히 
텔레비전이 주요 대상시청층으로 생각하고 있는 중하급 취향공중을 위한 편성에 
영향을 미쳤다. 그렇지만  오늘날 텔레비전에서 이같이 하위문화  편성의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고는 하나  그 정도는 아직 미미한 것이다. 텔레비전은  여전히 중
류 또는 중류  이상 계층으로 수입에 여유가 있고, 젊은층의  사람들에게 호소할 
수 있는 내용의  편성이 많다. 아직까지도 노인층이나 빈민 또는  준빈민층을 위
한 편성은 거의  없다. 공공 텔레비전은 주로 중상급 문화내용을  공급하기 위한 
방송을 해왔다. 그리고 약간의  하위 취향계층의 아동들을 위해 <세서미 스트리
트> 와 <일렉트릭 컴퍼니>와 같은 어린이 프로그램을 방송하고 있을 따름이다.
  UHF와 CATV와 같은  기술혁신으로 더 많은 텔레비전 채널을 사용할  수 있
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각  취향공중에게 더욱 다양한 프로그램을 방송할 수 있
게 되었다. 가장  최근에 등장한 것은 비디오인데 이는 시청자  각자가 가정에서 
보고 싶은 프로그램을  마음대로 선택해서 볼 수 있게 해준다.  뉴미디어를 가지
고 문화편성을 어떻게 새로이 할 것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그것은 이 텔레비
전의 새로운 기술품에  상업적 가치가 어느 정도 담겨질지, 또는  상업적 시장가
치가 과연 이  새로운 미디어에 있는 것인지조차  확실치 않은 데에 기인하는지 
모른다.
  CATV와 비디오는 아직은 그 값이 비싸기 때문에 일부 부유층 사람에서만 하
위문화 편성으로 이용될 수 있고, UHF 채널은 도시를 중심으로 해서 너무나 적
은 수의 수용군을 갖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그리 대중적인 중요성을 띠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새로운 미디어들도 전국망을  가진 현재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과 경쟁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제작할 수 있도록 충분한 재정적 능력을 갖추게 
된다면, 장래에는 가난한  취향공중에게도 유용한 하위문화 편성  미디어로 등장
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기술혁신에 따라 하위문화 편성은 더욱  강화되어 갈 것이다. 기술혁신
으로 이미 영화, 텔레비전,  인쇄물 제작 등이 염가로 가능하게 되었고 제작과정
도 과거보다  훨씬 간단해졌다. 그리하여  경제적 측면에서 본다면  앞으로 더욱 
하위문화적 편성체제로 진행될 것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적어도 부유한 문화
공중을 상대로 해서는  더 많은 하위문화 편성이 실현될 것이  확실하다. 하위문
화 편성을  지향하는 경향으로 최근에  개발된 영화나 텔레비전  카메라, 그리고 
텔레비전 녹화기의 사용과  조작기술이 단순화됨으로써 이제는 비영리적인 군소 
영화 제작회사들과 텔레비전 제작회사들도 크게 제작비를 들이지 않고도 훌륭한 
문화작품을 창조해 낼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아직도 이들의 작품이 주요 도시의 
영화관에서나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서  수용자에게 보여질 수 있는 기회를 갖기
는 어려운 상태이다.
  아마도 문화적 다원주의를 더 강력히 실현시키도록 하는 가장 큰 원동력은 문
화의 사용자들로부터 나온다고  하겠다. 그래서 여러 소수인종이나 민족집단, 여
성, 청소년, 노동자집단,  기타 사회적으로 소외 받았던  사람들이 스스로의 신분
이나 주체의식을 갖게 됨으로써 새로운  문화를 또한 요구하게 될 것이고 그 문
화의 창조를 강력히  밀고 나갈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하여 좀더  하위문화 편성
으로 진행되어 나갈  것이다. 이에 더하여 사람들은 앞으로 더욱  다양한 관심을 
가질 것이며 자기표현을  위한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될 것이다.  동시에 사람들
의 작업시간은 점점  더 단축되고, 이에 따라 여가시간이 늘어나면  사람들은 더 
다양한 문화를 더  많이 요구하게 될 것이다. 연휴기간이 길어지고  주 4일 또는 
5일 근무제가  채택되기 시작하면서 여행이  많아졌으며-그리하여 여행문화마저 
생겨났다-여름별장, 보트, 스키, 등산용구 등의 판매가  크게 인기를 끌기 시작했
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의 여가가 늘어나면서 취향문화는  실내문화에서 야외문
화로 바뀌고, 취미활동은 참관활동에서 참여활동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란 이같은 문화변동이 그다지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나 가난한 계층의 사람
에게도 곧  있을 것인지는 그  전망이 밝지 않다.  흑인문화라든지 청년문화마저 
실은 주로 부유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문화라고 하겠다. 하위문화  편성은 누
구보다도 이들 가난한  빈민과 준빈민에게 절실하게 요구되지만,  이들은 누구보
다도 그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될 수도 있다. 거기에는  그들의 경제적 
조건이 너무나 주요한 문제로 되어있다. 지금까지  이들은 경제적으로 너무나 박
탈되어 온 계층  사람들이다. 이들은 현재로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  더 좋은 
직업과 더 좋은 보수가 문화보다 더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이다. 그런 이들 빈민
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하위문화 편성을 실현시키도록 구매력을 통한 상업적 
압력이나 정치적인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제는 하위문화 편성을 
실행에 옮겨야 할만큼 다른  어떤 것보다도 '문화'가 중요한 사회적 의미를 갖게 
되는 시간만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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