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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요약본)동아시아 맞수 열전

by Casey,Riley 2023.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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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역사교사모임 외 지음 / 북멘토
이 책은 동아시아 역사 속에서 비슷한 길을 걷거나 전혀 다른 선택을 한 인물과 단체 등의 이야기
를 비교하고 대조하며 서술했다. 현재에서 출발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역연대기 방식 속에서
각자 다른 공간과 시간대를 산 인물들의 고민과 선택을 종횡무진 엮는 독특하고 흥미로운 구성으
로 동아시아 각국의 공통점과 차이를 넘어선 화합과 연대의 자리를 확인할 수 있다. 세찬 역사의
물결에 맞서 당당히 걸어간 뜨거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현재를 살아가는 지혜와 미래를 내다
보는 혜안을 길러 보자.

동아시아 맞수 열전
전국역사교사모임 외 지음
▣ 저자 전국역사교사모임 외
학생들이 즐겁게 공부하며 건강한 민주 시민으로 자라도록 하는 데 뜻이 있는 ‘살아 있는 역사 교육’을
실천하는 역사 교사들이 1988년에 만든 모임이다. 현재 전국 각 지역에서 2,000여 명의 회원이 활발
히 활동하며 지역사와 한국사, 동아시아사, 세계사 등 교과별 학습 자료를 개발하는 한편, 다양한 교육
방법 연구와 이론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역사 교육 전문지인 계간 「역사 교육」을 비롯해 여러 권
의 단행본을 펴냈으며 역사 교육의 대중화를 위해 힘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역사 선생님이 들려주는
친절한 동아시아사』,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1, 2』,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1, 2』, 『외국인을
위한 한국사』(한국어판, 영어판) 등이 있다.

▣ Short Summary
올해로 3년째 코로나19 위기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마스크 없이 동아시아 각국을 자유롭게 드나들었
던 때가 아주 오래전 일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와 세계 각국의 교류는 여전히 지속되
고 있습니다. 선사 시대부터 이어져 온 동아시아 지역의 교류가 우리 삶과 문화에 녹아들어 있는 데다
가,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더욱 긴밀해진 이웃 나라와 교류는 우리 일상에서 필수 불가결한 일이 되었
기 때문입니다.
중국이나 일본 거리를 지날 때 한국과 비슷한 느낌이 들어 놀랍기도 합니다. 사계절이 뚜렷한 기후,
높은 산맥과 큰 강으로 이루어진 자연환경, 쌀을 주식으로 하는 식생활, 유교를 바탕으로 한 예의범절
을 중시하는 태도 등 동아시아는 정말 닮은 게 많습니다. 동아시아 사람들은 자신이 태어난 시대와 나
라에서 최선을 다해 충실하게 살았습니다. 물론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해 남에게 피해를 입히고 ‘그럴
수밖에 없던 시대였다.’며 변명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역사는 똑같이 반복되지는 않지만 운율이 있다
는 말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 책에서 소개하는 인물들이 맞닥뜨린 상황을 우리가 똑같이 경험하는 일
은 없겠지만, 이들의 고민과 선택은 다가오는 역사를 살아갈 우리에게 지혜와 교훈을 줄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유사한 상황에서 비슷한 길을 걷거나 전혀 다른 선택을 한 동아시아의 인물, 단체 등을 서술
하고 있습니다. ‘맞수’라고 하면 흔히 맞서고 대립하는 구도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대립 구
도를 보여 주기보다는 시대에 ‘맞서’ 같거나 다른 방식으로 각자의 삶을 치열하게 산 사람들이나 단체,
개념을 이야기하고자 했습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현재에서 출발해 점점 먼 고대를 향해 여행하듯, 이 책은 현대에서 고대로 거슬러 올
라가는 거꾸로 된 연대기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가까운 과거부터 먼 과거에 이르기까지,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동아시아 맞수들의 치열하고 박진감 넘치는 스물두 편의 이야기를 통해 지금 여러분
이 당면하고 있는 상황과 앞으로 맞이하게 될 상황에 대처하는 데 도움이 되는 혜안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책은 전국역사교사모임에서 활동하는 전ㆍ현직 교수 일곱 명이 함께 만들었습니다. 그렇다고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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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맞수 열전

들만 읽는 학습서는 아닙니다. 동아시아 역사와 사람들의 삶에 관심이 있다면 누구든 흥미롭게 이 책
을 읽을 수 있습니다. 동아시아 국가 간의 교류가 더욱 긴밀해지고 교류와 소통이 사회의 필수 요소가
될수록 동아시아 지역의 갈등도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글쓴이들은 이 책에 한층 넓은
역사와 문화 이야기를 담아냄으로써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동아시아 전체를 조망하면서 다양한 삶의
방식을 발견하고 나아가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고민하기를 바랍니다.

▣ 차례
머리말 - 한 가지가 아닌 다양한 삶의 발견과 개척을 위하여
1. 수요시위 vs 금요행동 - 피해자의 투쟁과 가해국 시민의 양심
* 역사 부정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
2. 오윤 vs 도미야마 다에코 - 힘없는 서민의 삶에 주목한 화가
3. 김대중 vs 류샤오보 -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민주화 운동의 거목
4. 박헌영 vs 저우언라이 - 서로 다른 운명의 이인자
5. 호찌민 vs 수카르노 - 독립을 이끈 이들의 서로 다른 길
6. 양칠성 vs 탁경현 - 국가와 국가, 가해와 피해의 경계에 선 사람
7. 하세가와 데루 vs 오노다 히로 - 나라를 위한 애국, 나라가 원한 애국
8. 박열 vs 가네코 후미코 - 억압 없는 세상을 위해 투쟁한 연인
* 정의의 편에 선 변호사 후세 다쓰지
9. 형평사 vs 수평사 - 차별과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한 국제 연대의 움직임
10. 김마리아 vs 추근 -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 여성들
11. 룽훙 vs 윤치호 - 미국 유학길에 오른 두 사람의 다른 삶
12. 박상진 vs 판보이쩌우 - 국민이 주인이 되는 자주 국가를 꿈꾼 사람들
* 동아시아의 베스트셀러 『월남망국사』
13 이홍장 vs 이토 히로부미 - 중국과 일본이 선택한 근대화의 길
14. 이와쿠라 사절단 vs 보빙 사절단 - 일본과 조선의 외교 사절단이 만난 서양
15. 고종 황제 vs 메이지 덴노 - 동갑내기 국왕, 조국의 근대화를 추진하다
16. 이삼평 vs 김충선 - 전쟁으로 바뀐 삶을 산 사람들
17. 고려왕 왕만 vs 심왕 왕고 - 몽골과 관계 속 고려 왕실의 내부 투쟁
18. 배중손 vs 쩐흥다오 - 몽골에 맞선 두 무장에 대한 역사의 평가
19. 현장 vs 엔닌 - 불법을 찾아 여행을 떠난 스님들
* 신라의 구법승, 혜초
20. 선덕 여왕 vs 무측천 - 고대 동아시아의 여성 군주들
21. 공자 vs 관우 - 동아시아 문무의 대표로 추앙받은 사람들
22. 중화 vs 오랑캐 - 세상의 중심과 주변, 그 명백한 허구성
* 동아시아 각국의 독자적 천하 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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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이미지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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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맞수 열전

동아시아 맞수 열전
전국역사교사모임 외 지음
수요시위 vs 금요행동 - 피해자의 투쟁과 가해국 시민의 양심
어느 수요일, 서울 종로구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 피켓을 든 인파가 몰려들었습니다. “소녀상을 철거하
라!”, “위안부 앵벌이 STOP!” 어느 금요일, 도쿄의 미쓰비시 중공업 본사 앞에서는 조롱 섞인 외침이
들려옵니다. “너희가 일본 사람이냐, 한국 사람이냐? 한국이 좋으면 한국에나 가서 살아라!” 전자는 일
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수요시위’를 반대하는 집단의 구호이고, 후자는 근로 정신대 피해
자 문제 해결을 위해 열리는 ‘금요행동’에 쏟아진 야유입니다. 일제가 벌인 전쟁 범죄의 피해자들과 그
들에게 공감하는 시민들은 왜 거리에 나서야 했을까요? 상식적 요구를 하는 시민들에게 비난을 쏟아
낸 이들은 대체 누구일까요?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 동원의 역사적 배경: 1920년대 말, 세계 대공황 시기에 일본에서는 군부가 크
게 성장했습니다. 일본 군부는 1931년 만주 사변을 일으켰고 이듬해에는 만주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워
만주 일대를 지배했습니다. 일본 국민의 지지를 등에 업은 군부는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일제는 국제 연맹을 탈퇴하고 침략 전쟁을 이어 나갔습니다. 1937년에는 중일 전쟁을 도발해 중국과
전면전에 돌입했고, 같은 해 히틀러의 독일, 무솔리니의 이탈리아와 방공 협정을 완성하며 추축국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일제는 유럽 각국이 식민지 관리에 소홀한
틈을 타 연합국의 텃밭인 동남아시아를 점령하기 시작했고, 미국 등은 전쟁 확대를 차단하고자 일본에
석유와 철강 등 전략 물자 수출을 제한했습니다. 그러자 일제는 1941년에 하와이 진주만의 미국 기지
를 공습해 아시아 태평양 전쟁을 도발했습니다.
일제는 아시아 태평양 전쟁을 ‘대동아 전쟁’이라고 포장해 선전했습니다. 대동아 전쟁이란, 아시아 민
족이 서양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일본을 중심으로 ‘대동아 공영권’을 건설하자는 의미가 담긴 표현입
니다. 그러나 일제가 중일 전쟁 때 저지른 난징 대학살, 전시 체제하의 민간인 강제 동원과 일본군 ‘위
안부’ 운영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일제는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아시아 민족의 자유와 평화를
서슴없이 짓밟았습니다.
1938년 일제는 국가 총동원법을 제정해 모든 사람과 물자를 의회의 승인 없이 전쟁에 동원할 수 있게
만듭니다. 긴 전쟁으로 일본 국민의 삶도 궁핍해졌지만, 식민지 조선인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
다. 수많은 조선인이 일본군 ‘위안부’로, 군수 노동자로 강제 착취당하며 죽어 갔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수요시위, 조선 여자 근로 정신대 피해자에 대한 미
쓰비시 중공업의 손해 배상을 요구하는 금요행동은 이런 역사의 연장선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 아시아 태평양 전쟁이 끝난 지 45년이 지나도록 일
본군 ‘위안부’ 문제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가해국인 일본에서는 자성의 목소리가 없었고, 가
부장적 문화가 강하게 남아 있던 한국에서는 피해자의 목소리가 나오기 어려웠습니다. 1991년에서야
피해자 김학순이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고백했습니다. 이후 용기를 낸 몇몇 피해자들이 연대
해 일본 정부에 보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이 소송이 화제가 되어 일본 사회에도 일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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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맞수 열전

‘위안부’ 문제가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1992년 1월 8일 수요일, 당시 일본 총리였던 미야자와 기이치의 방한을 계기로 최초의 수요시위가 한
국에서 열렸습니다. 서른 명 정도가 집결한 최초의 수요시위에서는 “일본 정부는 정신대 희생자 위령
비를 건립하라!”, “역사 교과서에 정신대 강제 연행 사실을 명기하라!”고 쓴 현수막이 걸렸습니다. 이후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가 정례화되어 종로에 있는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
서 매주 수요일 정오 무렵에 열리게 되었습니다.
수요시위를 정례화하는 데에는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지금의 정의기억연대)을 비롯한 여
성 단체, 사회단체, 종교계, 평화 운동 단체 등의 지원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시위가 반복될수록 일
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시민의 관심도 커졌습니다. ‘위안부’ 문제 해결을 돕고자 하는 자원가와 전
문가들, 세계 여러 나라에서 활동하는 평화 운동가 등 외국인의 참여도 늘어 갔습니다. 2011년에는
1000번째 수요시위를 기념해 ‘평화의 소녀상’이 제작되었습니다.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 설치된 평화
의 소녀상은 ‘위안부’ 운동의 상징이 되었고, 운동을 시각화하고 확산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나고야 소송 지원회와 금요행동: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일본에서는 박경식 등 재일 조선인 역사
학자의 주도로 조선인 강제 동원 문제를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박경식이 저술한 『조선인 강제 연행
의 기록』은 일본 사회에 조선인 강제 동원 문제를 알린 선구적 연구입니다. 박경식의 연구 활동은 일
본 지식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고등학교 역사 교사였던 다카하시 마코토는 박경식의 강연을
듣고 조선인 강제 동원이라는 중대한 사건이 일본의 역사 교과서에 실리지 않은 것을 의아하게 여겼습
니다. 그리고 군수 산업 중심지인 나고야의 조선인 강제 노동 문제를 파헤치는 데 전념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미쓰비시 중공업에 강제 동원된 조선 여자 근로 정신대 여섯 명이 지진으로 희생되었는데도
회사 측에서 의도적으로 숨겼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그는 이 사실을 폭로하여 일본 내에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이후 그는 희생자 유족과 접촉해 나고야 소송 지원회를 결성했고, 1999년부터 미쓰비시 중공업을 상대
로 근로 정신대 피해자들의 손해 배상 청구 소송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재판부는 피해자의 손을 들어
주지 않았습니다.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어떠한 손해 배상 청구권도 주장할 수 없다.” 2005년 2월, 나
고야 지방 재판소는 한일 청구권 협정에서 개인 청구권 문제가 모두 해결되었다는 논리를 펼치며 피해
자의 청구를 기각했습니다. 6년간의 법정 투쟁이 무색하게 1심 재판의 판결 시간은 불과 10분도 걸리
지 않았습니다. 피해자들과 나고야 소송 지원회는 곧바로 항소했습니다. 2007년 5월에 열린 항소심에
서는 재판부의 입장에 진전이 있었습니다. 현 일본 정부와 전범 기업의 책임을 조금이나마 인정한 것
입니다. 그러나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개인 청구권 문제가 모두 해결되었다는 결론에는 변함이 없었고,
1심과 마찬가지로 원고의 청구가 기각되었습니다.
2007년 7월 20일 금요일, 나고야 소송 지원회는 미쓰비시 중공업 본사가 있는 도쿄 시나가와역 남쪽
출입구 앞에서 조선인 강제 동원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한 시위에 나섰습니다.
“5ㆍ31 나고야 고등 재판소, 미쓰비시 중공업의 강제 연행 강제 노동을 단죄!”
“5ㆍ31 나고야 고등 재판소 판결에 근거해 조선 여자 정신대 피해자의 구제 실현을!”
나고야 소송 지원회는 두 장의 현수막을 들고 통근자가 가장 많은 오전 8시 45분부터 한 시간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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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맞수 열전

시나가와역 앞에 머물렀고, 이후에는 미쓰비시 중공업 본사 현관 앞으로 이동해 12시 45분까지 시위
를 지속했습니다. 다섯 명이 함께한 조촐한 시위, 금요행동의 시작이었습니다.
수요시위와 금요행동,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까?: 2021년에 제1500차를 맞은 수요시위는 명실상부한
세계 최장기 지속 집회입니다. 금요행동은 2020년에 제500차를 맞았고 지금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는 한국과 일본 시민 사회의 성숙함을 보여 주는 자랑스러운 기록이지만, 한편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
제와 강제 동원 피해자 문제가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지표이기도 합니다.
수요시위는 많은 변화를 불러왔습니다. 한 자릿수에 불과했던 공식 피해자가 238명으로 늘었고, 30여
명의 인원으로 출발한 시위 인원은 연간 8만여 명이 참여하는 거대한 사회 운동으로 진화했습니다. 피
해자의 용감한 고발이 해외로 파급되어 일본군 ‘위안부’ 피해가 아시아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밝혀
졌습니다. 김학순의 피해 사실을 고발한 8월 14일은 2021년에 ‘세계 위안부 기림일’로 지정되어 세계
여성 단체 연대의 장이 되었습니다. 또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한국 내 활동을 넘어 전 세계의
전쟁 성폭력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인권 운동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금요행동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2008년 도쿄 최고 재판소에서 원고의 청구가 최종 기각되었지
만, 이후 한국 법원을 통하여 손해 배상 청구에 진전이 있었습니다. 2012년 광주 지방 법원에 미쓰비
시 근로 정신대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해 승소하고 위자료 6억 8,000만 원 배상 판결을 받아 낸
것입니다. 미쓰비시가 항소했으나 2018년 11월, 피해자들이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고, 2019년에는
한국 내 미쓰비시 자산을 압류해 피해자에게 지급하라는 판결이 나왔습니다.
나고야 소송 지원회의 헌신으로 지금도 금요행동은 지속되고 있습니다. 지원회의 꾸준한 노력이 한국
에도 여러 차례 조명되었습니다. 2019년에는 한국의 한 다큐멘터리 감독이 나고야 소송 지원회의 활동
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했고, 유명 방송사에서도 다큐멘터리를 제작했습니다. 2020년에는 나고야
소송 지원회의 주축인 야마카와 슈헤이의 에세이가 일본과 한국에서 출간되기도 했습니다.
누가 그들을 비난하는가?: 일본 정부는 일제의 식민 지배와 전쟁 범죄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 왔을
까요? 일본 정치권에서 사과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는 한일 관계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 주었습니다.
<고노 담화>
위안소의 설치ㆍ관리 및 위안부 이송에 구 일본군이 관여했다. 몸과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모든 분께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드린다. 같은 잘못을 결코 반복하지 않겠다. _1993년 8월, 고노 요헤
이 관방 장관
<무라야마 담화>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아시아 각국에 많은 손해와 고통을 주었다. 의심할 여지없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한다. _1995년 8월,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
그러나 이후 이어진 일본 정권들은 지속적으로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의 정신을 파기하고자 했습
니다. 게다가 2015년에는 한일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의 의사는 무시한 채 합의하고 일본군 ‘위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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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맞수 열전

문제가 ‘최종적으로 불가역적으로’ 종결되었다고 선포해 운동에 중대한 차질을 빚기도 했습니다. 수요
시위, 금요행동에 대한 무분별한 비난도 운동의 동력을 훼손하고 있습니다. 한국에는 수요시위를 반대
하는 조직적인 움직임이 있으며, 일본에도 금요행동에 공격적으로 반응하는 시민이 많습니다.
현재 세계에서는 과거에 발생했던 역사적 상황이나 사실을 부정, 은폐, 왜곡하는 역사 부정의 흐름이
역사 해석의 장을 크게 뒤흔들고 있습니다. 진보적인 사회 변화에 반발하는 정서가 세계 여러 나라에
서 표출되고 있으며, 온라인 플랫폼은 역사 부정주의자를 수월하게 결집하도록 합니다. 역사 부정주의
자의 온라인 콘텐츠가 실제 수익으로 연결될 뿐 아니라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세력까지 합세해 상
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습니다. 금요행동의 핵심 인물인 야마카와 슈헤이는 그의 에세이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사죄하고 배상하는 것 말고는 길이 없다. 가해자가 배상하지 않으면 누가 피해자
에게 배상할 것인가? 이것은 회피주의와 인도주의의 싸움이다. 이 싸움에 참가하는 것이야말로 나 자
신이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보루(양심)인 것이다. (…) 인류의 역사는 인도주의에 의해 지탱되었다. _『인
간의 보루』
‘인도주의’라는 ‘인간의 보루’ 말고는 기댈 곳이 없는 사람들은 또다시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 미쓰비
시 중공업 본사 앞에 섭니다. 인도주의에 기반한 공동체가 일본 정부의 정치 논리와 전범 기업의 배상
거부 그리고 역사 부정주의에 맞서 승리하는 날이 언제쯤 올까요?

호찌민 vs 수카르노 - 독립을 이끈 이들의 서로 다른 길
호찌민과 수카르노는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과 지배에 맞서 조국의 독립을 이끌었던 인물입니다. 호찌
민은 프랑스의 식민지인 베트남에서, 수카르노는 네덜란드의 식민지인 인도네시아에서 서양 제국주의
에 맞섰고,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이 잇달아 무너지자 이를 기회로 조국의 독립을
달성했습니다. 독립 후에도 이들의 여정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에 의해 붕괴
직전까지 내몰렸던 프랑스와 네덜란드는 전쟁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자, 식민지였던 인도차이나반도
와 동남아시아 지역에 대해 또다시 야욕을 드러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호찌민과 수카르노는 조국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을까요?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다: 호찌민은 1890년 프랑스 지배하의 베트남 중부 응에안성에서 태어났습니다.
유학자였던 호찌민의 아버지는 1905년경 호찌민을 초등 수준의 프랑스식 예비 학교에 입학시켰고, 호
찌민은 꾸옥 응우(國語)와 프랑스어, 한문 세 가지 언어를 함께 익히며 서구식 학문을 배웠습니다.
1911년 사이공(지금의 호찌민시)에서 프랑스로 떠난 호찌민은 2년 가까이 알제리, 튀니지, 인도, 세네
갈, 수단, 마다가스카르, 미국과 영국 등 세계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혔습니다. 다시 프랑스
로 돌아온 호찌민은 프랑스에 사는 베트남인을 위한 조직을 결성하고 베트남처럼 식민 지배를 받고 있
는 조선 사람이나 튀니지 사람들과 교류를 이어 갔습니다. 1919년 1월에는 판쭈찐 등과 함께 프랑스의
베르사유에 모인 연합국 지도자들에게 <베트남 인민의 요구>라는 성명서를 내며 윌슨의 민족 자결주
의의 이상을 동남아시아에서도 적용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호찌민은 프랑스 사회당을 거쳐 프랑스 공산당에서 활동하면서 서구 제국주의의 식민지 민족 착취를
거세게 비판했고, 1923년에는 사회주의 혁명의 본고장인 소련으로 건너가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일명 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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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맞수 열전

탈린 학교)에서 단기 과정을 수료하며 코민테른의 일원으로 활약했습니다.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에서
열린 코민테른 제5차 세계 대회에서 호찌민은 각국의 공산당 대표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재 자
본주의라는 뱀의 독과 생명력은 본국보다 식민지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식민지는 산업 원료를 공급합
니다. 식민지는 군대에 병사를 공급합니다. 장차 식민지들은 반혁명의 요새가 될 것입니다. 자본주의
는 식민지를 통해 자신을 부양하고, 자신을 방어하고, 사회주의자인 우리를 탄압하는데, 동지들은 왜
식민지를 무시합니까?”
1924년 11월, 호찌민은 열차를 타고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해 동쪽 끝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 다시
배로 갈아타 중국 광저우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베트남 혁명 청년회’를 결성했고, 1930년에
는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 나갔습니다. 그러던 중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일
어나자 베트남을 식민지로 차지하고 있던 프랑스가 독일에 의해 무너졌고, 이 상황을 틈탄 일본이 베
트남을 침공했습니다. 이러한 국제 정세 속에서 호찌민은 베트남으로 돌아와 1941년 베트남 독립 동
맹(이하 베트민)을 조직하고 이후 독립운동에 매진해 1944년 12월에는 최초의 정규군인 베트남 해방
군을 조직했습니다.
1945년 8월, 일본 패망 후 수도 하노이를 장악한 호찌민은 식민지 시기 프랑스의 괴뢰 정부를 대표하
던 바오 다이 황제를 끌어내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45년 9월 2일, 퓌지니에 광장(지금의 바딘 광
장)에서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1791년 프랑스 혁명의 인권 선언문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모든
사람은 자유롭게,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으며, 이 자유와 평등의 권리는 평생 유지되어야 한
다.’” 베트남을 지배한 프랑스인이 내세우는 가치를 오히려 베트남 독립의 명분으로 외친 호찌민의 연
설에 베트남 국민은 열광했고, 프랑스와 일본의 제국주의가 짓밟고 간 베트남에 잠시 평화가 찾아왔습
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인도네시아로 해방시키다: 1901년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자와섬 수라바야에서 태
어난 수카르노는 네덜란드 대입 준비 학교를 거쳐 반둥에 있는 테크니스호게 스쿨(지금의 방둥공과대
학)에서 토목과 건축을 전공했습니다. 이때 이슬람 민족주의 지도자였던 쪼끄로아미노토의 딸과 혼인
했고, 많은 민족 운동가들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1927년 수카르노는 인도네시아 민족당(PNI)을 세우며
민족 운동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인도네시아를 지배하고 있던 네덜란드 당국은 수카르노의
행보를 감시하다가, 1929년 그를 재판정에 세웠습니다. 수카르노는 ‘인도네시아는 고발한다’라는 연설
을 포함해 뛰어난 웅변으로 청중을 사로잡았고 전국적으로 주목받게 됩니다. 징역형을 살던 수카르노
는 1931년에 특사로 풀려났으나 다시 체포되어 수마트라섬 서쪽 해안에서 유배 생활을 했습니다.
긴 유배 생활이 이어지던 1941년, 수카르노에게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아시아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이 1941년 말부터 보르네오섬, 수마트라섬, 자와섬 등을 빠르게 장악하고 수마트라섬 남부에 있
던 팔렘방의 유전을 차지했습니다. 일본군은 자와 해전에서 네덜란드 해군을 격파했고, 네덜란드 식민
지 정부는 호주로 도망쳤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수카르노는 유배 생활에서 풀려나 1942년 바타비아
(지금의 자카르타)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바타비아로 돌아온 수카르노는 네덜란드를 몰아낸 일본군
과 동행하며 서양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연설을 이어 갔습니다. “알라를 찬양하라. 알라는 죽음의 골짜
기에서 마침내 나에게 길을 보여 주셨다. 그렇다. 인도네시아의 독립은 오직 대일본 제국의 힘을 빌려
성취될 수 있을 것이다. 평생 처음 나는 자신을 아시아의 거울로 비춰 볼 수 있었다.”
이후 수카르노는 일본군이 요구하는 노동자 강제 징용과 물자 징발에 적극적으로 협력했습니다. 징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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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맞수 열전

에 끌려갔던 수많은 인도네시아인은 일본군의 가혹 행위와 굶주림에 시달렸고, 많은 이들이 죽어 갔습
니다. 그러나 수카르노는 독립을 위해 이 정도 희생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미드웨이 해전
이후 동남아시아에서 일본군의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지만 수카르노는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습
니다. 그는 계속 일본에 협력하며 인도네시아인으로 이루어진 부대인 조국 수호단 등을 조직했고, 일
본 덴노(천황)로부터 훈장까지 받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일본군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사실 때문에
수카르노는 훗날 전범으로 낙인찍히기도 했습니다.
1945년 패망 직전의 일본은 수카르노에게 거짓으로 독립을 약속했습니다. 수카르노는 일본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고 일본의 약속을 믿고 독립을 준비해 나갔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덴노가 공식
항복을 선언하자 수카르노는 독립 선언을 머뭇거렸고, 이를 답답하게 여기던 청년들이 수카르노를 납
치해 즉각 독립을 선언해야 한다고 설득했습니다. 수카르노는 밤새 고민한 끝에 8월 17일, 자카르타에
있는 자택에서 독립 선언문을 낭독했습니다. “일본군 점령 기간에도 민족의 독립을 달성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한 번도 중단된 적이 없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는 다만 그들에게 허리를 굽혀 절하듯 모
였을 뿐입니다. 이제 진정으로 우리의 운명과 조국의 운명을 우리 손으로 결정해야 할 순간이 왔습니
다. 자신의 운명을 자신의 손으로 개척할 충분한 용기를 가진 민족만이 자력으로 일어설 수 있을 것입
니다.”
멀고도 험한 진정한 독립의 길: 덴노의 항복 선언 이틀 뒤인 8월 17일, 수카르노는 인도네시아의 독립
을 선언했고, 9월 2일에는 호찌민이 베트남의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한편 제2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는
동안 나치 치하에서 숨죽이고 있던 프랑스와 네덜란드는 연합국 일원으로 승전국이 되었습니다. 프랑
스는 베트남 등 인도차이나 전체를,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 일대를 다시 차지하려 했습니다.
1946년 3월, 호찌민은 프랑스와 하노이 협정을 체결하며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독립을 인정받았습니
다. 그러나 프랑스는 곧바로 협정을 깨고 수도 하노이로 진격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되었습
니다. 호찌민은 주변국의 지원을 받으며 프랑스의 공세를 막아 냈습니다. 그러자 미국이 인도차이나반
도에 공산주의가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프랑스를 지원했고 베트남은 냉전의 격전지가 되었습니다.
호찌민은 예순 살이 넘는 나이에도 배낭을 메고 농민 복장을 한 채 전선을 돌면서 베트남 군사들과 함
께했습니다. 호찌민과 베트민 지도자들은 1954년 1월 중순부터 5만여 명의 베트민 정규군, 약 5만 명
의 지원군, 물자 수송에 참여한 노동자 10만여 명을 동원해 디엔 비엔 푸의 프랑스군 기지를 공격했습
니다. 전투 시작 4개월 만에 베트민군은 디엔 비엔 푸를 점령하고 프랑스군의 항복을 받아 냈습니다.
이렇게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베트민의 승리로 막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전쟁 직후 개최된 제네바 회담에서 베트남을 북위 17도선 경계로 나누고, 2년 후 베트남 전 지
역에서 총선거를 실시해 통일 정부를 수립한다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제네바 회담의 결정에 반발한
호찌민은 프랑스와 싸워 이겼는데도 웃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하노이로 돌아와서도 개선 행진이나
승전 기념식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한편 남베트남에서는 미국의 지원을 받은 반공주의자 응오 딘 지엠이 대통령이 되었고, 남베트남의 공
산주의자들은 남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일명 베트콩)을 조직해 저항했습니다. 호찌민이 이끄는 북베트
남은 남베트남의 베트콩을 지원하기로 결정했고, 미국은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는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남베트남 정부를 적극 지원했습니다. 어느덧 베트남 문제는 북베트남과 미국의 대결로 치닫고 있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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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맞수 열전

니다.
응오 딘 지엠 정부의 거듭된 부패와 실정이 이어지자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지금의 호찌민시)에서
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남베트남은 혼란에 빠졌고, 호찌민은 이 상황이 베트남 통일에 유리하게 작용
할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이 무렵 미국은 통킹만 사건을 구실로 남베트남에 군대를 파병했습니다. 남
베트남 내 미군의 규모가 20만 명을 넘어섰고, 북베트남 정부군도 미국과 전쟁을 준비하며 규모를 늘
려 갔습니다.
한편 인도네시아 독립 선언 이후 수카르노는 어떤 길을 걸었을까요? 연합군의 일원이었던 영국군은 자
와섬에 상륙해 일본군을 무장 해제시켰습니다. 영국군은 수카르노의 독립 선언을 무시하고 통치권을
다시 네덜란드 식민지 정부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이러한 영국군의 행위는 수카르노를 비롯한 인도네시
아의 민족 지도자들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1946년 1월, 수카르노는 수도를 욕야카르타로 옮겼고, 인도네시아 공화국군은 네덜란드군에 맞서 치
열하게 싸우며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을 이어 나갔습니다. 수카르노는 인도네시아 국내 정치 세력들 간
의 분열을 방지하고자 ‘판짜실라’를 내세웠습니다. 판짜실라란, 민족주의와 국제주의(인본주의), 민주주
의, 사회주의(사회정의), 신앙을 모두 포괄하는 이념입니다. 수카르노는 반네덜란드ㆍ반일 투쟁에 노력
했던 사람들, 네덜란드에 협력했던 사람들, 일본군에 기대며 성장한 사람들과 이슬람 근본주의자, 공
산주의자 등 다양한 이들에게 화합의 메시지를 보내며 통합을 이끌어 나갔습니다.
이렇게 국내외의 혼란을 극복한 수카르노는 1949년 5월, 네덜란드와 ‘레엠-판 로에이언 조약’을 체결
하며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을 끝낼 수 있었습니다. 이후 헤이그 원탁 회의에서 “네덜란드는 네덜란드
령 동인도의 모든 영토를 인도네시아에 이양한다.”고 결정했고, 1949년 12월 27일 인도네시아 연방
공화국이 수립되었습니다. 5년 가까이 독립 전쟁을 치르면서 인도네시아인은 내부의 갈등을 넘어 통합
된 국민이 되어 갔습니다.
두 지도자의 서로 다른 길: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었지만 어느덧 70대 노인이 된 호찌민은 정치 일선에
서 물러나 일반 국민과 함께 일상을 나누며 살았습니다. 베트남 국민은 호찌민을 “호 할아버지”라고
부르며 존경하고 사랑했습니다. 자신의 건강이 전과 같지 않다고 느낀 호찌민은 베트남 인민에게 남길
유언장을 작성했습니다. 호찌민의 건강이 점점 나빠지던 1968년 1월, 베트민 정부군은 뗏(베트남의 설
날) 공세를 시작하며 미국과 전면전에 나섰고, 이 공세로 베트남 통일의 열망을 대내외에 드러냈습니
다.
베트남 국민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호 할아버지’는 독립을 선언한 지 24주년이 되던 날인 1969년
9월 2일, 생을 마감했습니다. ‘호 할아버지’는 베트남 인민들에게 남긴 유언장에 “전쟁의 상처를 빠르
게 치유하고 베트남 인민의 생활 수준을 높여야 한다.”는 당부를 담았습니다. 또한 자신의 장례식을
치르느라 인민의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조용히 화장해 달라는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마지막까지
국민을 생각하고 청빈하게 살았던 그의 인품을 잘 보여 줍니다.
한편 독립 이후 수카르노는 인도네시아 국내에서는 대통령에게 권력을 집중시키며 통치 기반을 다졌고,
국제적으로는 반둥 회의를 개최하며 인도네시아를 제3세계의 중심 국가로 이끌어 나가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독재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1960년, 수카르노는 의회를 해산하고 국회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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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맞수 열전

절반을 대통령이 지명하도록 제도를 바꾸며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수카르노의 이러한 정치 방식은 얼
마 후 우리나라 박정희 정부의 유신 체제 당시 설치되었던 ‘통일 주체 국민 회의’의 모델이 되기도 했
습니다.
이후 수카르노의 인도네시아는 서파푸아를 침공했고, 연이어 말레이시아 연방과 전쟁을 벌였습니다.
내부적으로는 군 세력과 공산당 세력의 권력 다툼이 이어졌고 1965년 일어난 9ㆍ30 쿠데타로 수하르
토와 군부가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수하르토는 9ㆍ30 쿠데타의 책임을 공산당에 돌리며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학살하고 수카르노를 집에 가두었습니다. 3년 남짓한 시간 동안 누추한 방에서 기거하
며 병세가 악화된 수카르노는 1970년 6월 21일, 자카르타 자신의 방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홍장 vs 이토 히로부미 - 중국과 일본이 선택한 근대화의 길
동아시아에서는 개항 후 서구식 개혁을 통해 근대화를 전개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처
음 전개된 근대화 운동은 양무운동(洋務運動)입니다. 이홍장은 그의 스승 증국번과 함께 양무운동을
주도했으며 주로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여 군대를 강화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지속적으로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여러 개혁을 추진하는 데 앞장선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제국 헌법의
기초를 마련했으며 초대 총리대신을 역임했고 두 번째로 총리가 되었을 때는 청일 전쟁을 지휘했습니
다. 동학 농민 운동을 계기로 일어난 청일 전쟁 당시 이홍장과 이토 히로부미는 청나라와 일본의 실질
적 지도자였습니다. 두 사람이 주도한 개혁은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었을까요?
근대를 배우다: 이토 히로부미는 조슈 번(지금의 야마구치현)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하급 무사의
양자로 입양되었습니다. 열여섯 살 때 해안 경비 임무를 수행하면서 만난 지휘관의 소개로 요시다 쇼
인이 세운 사설 학당 쇼카손주쿠에 입학해 학문을 배웠습니다. 훗날 메이지 유신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이론가로 활약한 요시다 쇼인은 하급 무사 출신이었으나 서양의 문물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학당을 열어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그곳에서 존왕 사상과 서양 문물의 우수함을 배
웠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양이론자였습니다. 양이(攘夷)는 서양 세력을 배척한다는 뜻입니다. 이토는
일본을 위협하던 영국 공사관에 불을 지르고, 덴노(천황)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인물을 사살하기
도 했습니다. 이러한 행동을 인정받아 이토는 신분이 오르고 유명해졌습니다.
이 무렵 조슈 번에서는 서양을 이기려면 서양을 배워야 한다는 주장이 일어나면서 당시 세계 최강국이
던 영국에 유학생을 파견하게 되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다섯 명의 유학생 중 한 명으로 선발되었
는데 영국에서 유학하는 동안 영국의 발달한 문물을 접하고 양이론을 버리게 됩니다. 이후 이토는 영
국 등 서양과 관련된 교섭을 담당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다져 나갔습니다. 메이지 유신이 성공적으로
끝난 후에는 태정관에게 폐번치현의 건의서를 제출했습니다. 폐번치현의 건의서는 “다이묘들에게 분배
되어 있던 번을 폐지하고 토지와 인민을 조정에 바치며, 번의 건강한 자를 병사와 관리로 삼고 번에는
현을 설치해 덴노가 직접 다스리도록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한편 중국의 이홍장이 근대를 접한 것은 태평천국군을 진압하면서부터였습니다. 이홍장은 영국인 고든
이 이끌던 상승군이 전투에서 번번이 승리하는 주요 원인이 우수한 서양 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
다. 태평천국 운동이 진압되자 이홍장은 전쟁 때 세운 공로를 인정받아 조정에서 발언권이 커졌고 영
국과 러시아의 지원을 받으며 군수 산업에 투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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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맞수 열전

이홍장, 정권을 잡다: 이홍장은 스물네 살에 진사시에 합격해 관직에 나갈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당시
청나라는 영국과 벌인 아편 전쟁에서 패한 직후였습니다. 베이징에 있는 한림원에서 공부하던 이홍장
은 출세의 발판이 될 인물인 증국번을 만났고, 그에게 유교와 학문을 배우며 베이징에서 관리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때 중국 남부 지역에서 태평천국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연전연패하던 정부군과 달리
중국번과 이홍장이 거느린 군대는 지방 지주들의 지원을 받으며 태평천국군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
었기 때문에 이들의 명망은 조정에도 알려졌습니다. 증국번과 이홍장의 군대는 마침내 태평천국 운동
의 근거지인 난징을 공격해 태평천국 운동의 막을 내리게 했습니다.
1869년 청나라 조정은 한족인 이홍장에게 최고의 자리라 할 수 있는 직예총독과 북양통상대신이라는
벼슬을 내려 주었습니다. 직예총독은 베이징을 둘러싼 네 개 성을 관할하는 임무를 맡은 최고의 실권
을 가진 벼슬이었습니다. 이홍장은 자신이 지휘하면서 태평천국군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회군을 해
산하지 않고 휘하에 두고 유지했습니다. 총독 관직과 군사권을 장악한 이홍장은 실세 중의 실세였습니
다. 1896년 이홍장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받은 대우는 황제급이었다고 합니다. 이홍장은 영국의 글래
드스턴, 독일의 비스마르크와 함께 세기의 영웅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이토, 정치와 중심에 서다: 1872년에 이토 히로부미는 이와쿠라 사절단에 포함되어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를 돌아보며 서양의 근대 문물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사절단에서 돌아온 후 그는 근대 문물을
수용하는 데 적극적이었으며 유창한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정치적 지위도 올라갔습니다.
이 무렵 일본에서는 인민의 권리를 확대하자는 자유 민권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습니다. 메이지 정
부는 이들을 진압하면서도 서양 열강을 모델로 삼아 근대화를 추진했기 때문에 입헌 정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헌법을 만들 준비를 하게 됩니다. 이토는 헌법을 제정하는 데 핵
심적인 역할을 하면서 덴노의 신임을 얻었습니다. 이토는 강경한 무사가 아니었고 일본의 상황은 유럽
과 다르다고 보았기 때문에 군주, 즉 덴노를 중심으로 하는 헌법 제정을 주장했습니다.
청일 전쟁에서 이홍장과 이토가 대결하다: 1876년 조선의 개항 후 일본 정부는 조선의 개화파를 지원
하면서 여러 방면으로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이 일어나면서 일본에 대한 반감이 커졌고, 청나라가 군대를 파견해 진입하면서 청나라의 영향력이 강
해졌습니다. 청나라는 조선을 속국처럼 여기며 내정을 간섭했습니다. 그러던 중 1894년 조선에서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농민군에 계속 패하던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군사를 요청했습니다. 청나라
는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면서 톈진 조약에 따라 일본에 이를 통보했습니다. 그러자 일본도 조선에 군
대를 파병했습니다.
이토는 조선에 군대를 파병함으로써 일본이 처한 정치적 어려움을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당시 일본 국
내 정치 상황이 매우 혼란스러웠고, 내각에 불만을 품은 의원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때 조선에 파
견되었던 주조선 공사 오오토리와 군사령관은 군을 동원해 경복궁을 점령했고, 이어 풍도 앞바다에서
청나라군을 공격하면서 청일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토는 총리로서 히로시마에 대본영을 설치하고 전
쟁을 지휘했습니다. 대본영에는 메이지 덴노도 함께 있었습니다.
일본군이 청군을 공격했지만 청나라는 대규모 전쟁으로 이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일본과
의 전쟁보다는 서태후의 환갑 잔치를 어떻게 치를지가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평양 전투에서 청
나라군이 일본군에 패배하고, 황해 해전에서 북양 함대가 격파되면서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기울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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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속전속결로 일본군이 청나라 영토를 침략하자 청나라는 강화를 서두르게 되었습니다. 승기를 잡
은 일본은 조선에 영향력을 더욱 확대하며 개혁을 강요하고 침략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청나라는 전쟁을 마무리하는 회담에 전권 대신으로 이홍장을 임명했습니다. 이홍장의 회담 상대는 이
토 히로부미였습니다. 양국을 대표하는 실권자가 회담장에 앉아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조약의 결과 청나라는 일본에 배상금 2억 5천만 냥을 지불하고 대만을 할양했습니다. 청나라가 지불한
배상금은 일본의 2년치 세금 수입을 훨씬 넘는 액수였습니다. 일본은 배상금의 80퍼센트 이상을 군비
를 확장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청나라는 배상금을 지불하기 위해 서양의 여러 나라에서 차관을 들여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일본에 당한 수치를 기억하는 이홍장은 다시는 일본 땅을 밟지 않겠다고 결
심했고, 미국 방문 후 중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배가 요코하마에 정박했을 때에도 땅에 내리지 않았다
고 합니다.
이홍장과 이토 히로부미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이홍장과 이토 히로부미는 서양 열강의 힘을 알고 협
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면서 군사력을 강화하고자 했습니다. 서양 강대국은 자신의 요구를 받아들이
려는 이들을 협상 대상자로 좋아했습니다. 군부나 강경파가 서양의 요구를 거부하고 무조건 싸우자고
주장할 때 이홍장과 이토 히로부미는 적절한 타협을 이끌며 열강의 요구를 수용했습니다. 따라서 서양
열강과 협상이 필요할 때는 청나라와 일본 정부도 이들을 회담에 내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홍장과
이토 히로부미는 서양 정세에 대해 잘 알았고, 이를 활용해 권력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홍장과 이토 히로부미는 공통적으로 서양 열강의 막강함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이 보았던 서양은 서
로 달랐습니다. 이홍장은 서양 무기의 우수성은 알아보았지만 서양의 정치나 사회 제도에는 관심을 갖
지 않았습니다. 반면 이토 히로부미는 서양 무기와 기술의 우수함은 그들의 사상과 제도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서양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과 관심을 가진 두 사람이 청나라와 일본의 근대화
를 주도했기 때문에 두 나라의 근대화 과정과 전개는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홍장은 전제 군주 국가 체제 속의 고위 관료였고 그를 있게 한 것은 서태후의 지원이었습니다. 서태
후는 적극적이고 전면적인 개혁보다는 전통 왕조 체제 내에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자 했습니다. 반
면 말단 무사 출신인 이토 히로부미는 메이지 유신 후 무사들의 불만이 팽배해질 때 그들을 제압하면
서 덴노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막부 체제 안에 있는 고위 관료와 무사, 조정 대
신들의 특권을 없애야 했고, 이를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서구식 개혁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런 후에 덴노 중심 체제를 만들었고 이토 자신은 그 체제에서 최고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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