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의혹
필립 롬버드는 아침 일찍 깨어나는 습관이 있었다. 그날 아침에도 그는
일찍 눈을 떴다.
그는 몸을 일으키며 조용히 귀기울였다. 바람이 좀 약해진 듯했으나 아
직도 불고 있었다. 빗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8시가 되자 바람이 다시 세
어졌지만 롬버드는 듣지 못했다. 그는 다시 잠들어 있었다.
9시 30분, 롬버드는 침대 끝에 앉아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그는 시계를
귀 가까이 갖다댔다. 그리고 이리 같은 이빨을 드러내며 중얼거렸다.
「언제까지나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10시 25분 전, 그른 블로어의 방문을 두드렸다. 블로어는 조용히 문을
열었다. 머리가 헝클어지고, 눈은 잠에 취해 있었다.
필립 롬버드가 말했다.
「잘 자고 있군. 아무 근심도 없다는 증거지.」
블로어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대체 뭐요?」
「아무도 오지 않았소? 차를 가지고 오지 않았느냔 말이오. 몇 시인 줄
알고 있소?」
블로어는 침대 옆에 놓인 조그만 여행용 자명종 시계를 어깨 너머로
보았다.
「10시 25분 전, 이만큼 잔 것 같지 않은데. 로저스는 어디 있소?」
「그건 내가 묻고 싶은 일이오.」
「뭐라고?」
「로저스는 아무데도 없소. 방에도 없고, 부엌에 불도 피워져 있지 않
소.」
블로어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어디 갔을까? 섬 어딘가에 나가지 않았을까? 옷을 입을 때까지 기다
려 주오.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는지 어떤지 물어 봅시다.」
롬버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모두의 방을 돌아보았다. 암스트롱은
옷을 다 입고 난 참이었다. 워그레이브 판사는 블로어와 마찬가지로 아직
자고 있었다. 베러 크레이슨은 단정하게 옷을 입고 있었다. 에밀리 브랜
트의 방은 비어 있었다.
그들은 저택 안을 돌아다녀 보았다. 로저스의 방은 롬버드가 말한 대로
비어 있었다. 침대에는 자고 난 흔적이 있고, 면도와 비누를 쓴 것같이
보였다.
롬버드가 말했다.
「일어난 것은 확실하오.」
베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딘가에 숨어서 우리를 노리고 있는지도 몰라요.」
「마음놓을 수 없소. 보일 때까지 우리는 서로 떨어지지 않는 게 좋겠
소.」
암스트롱이 말했다.
「이 섬 어딘가에 있겠지.」
블로어가 옷을 입고 나와서 함께 되었다. 수염은 아직 깎지 않은 채였
다.
「미스 브랜트는 어디 갔을까, 이상하잖소?」
모두들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에밀리 브랜트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비옷을 입고 있었다.
「바다가 아직 거칠어요. 오늘도 배가 못 뜨겠어요.」
블로어가 말했다.
「혼자 걷고 있었습니까? 위험하지 않습니까?」
「염려하지 마세요, 블로어 씨. 나는 잠시도 마음놓고 있지 않으니까요.
」
블로어는 쓴웃음을 지었다.
「로저스를 못 보았습니까?」
에밀리 브랜트는 눈썹을 찌푸렸다.
「아니오, 한 번도 못 보았어요. 왜 그러지요?」
워그레이브 판사가 수염을 깎고, 옷을 단정히 입고, 틀니를 끼우고 층
계를 내려왔다. 그리고 열려 있는 식당 안을 들여다 보았다.
「아침 식사 준비가 되어 있군.」
롬버드가 말했다.
「어젯밤 차려 놓은 건지도 모릅니다.」
모두들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접시와 포크와 나이프가 정연하게 놓여
있었다. 사이드 테이블 위에는 커피잔이 놓여 있었다. 커피 주전자를 놓
는 펠트 깔개도 놓여 있었다.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은 베러였다. 그녀는 판사의 팔을 꽉 잡았다. 스
포츠로 단련된 듯한 센 힘으로 팔을 잡히자 판사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는 부르짖었다.
「인디언이! 보세요!」
테이블 한가운데의 도자기 인형이 여섯 개밖에 없었다.
로저스의 시체는 곧 발견되었다. 가운데 뜰을 지나서 있는 좁은 빨래터
에서였다. 거기서 그는 부엌에서 쓸 장작을 패고 있었다. 조그만 도끼가
아직도 손에 쥐어져 있었다.
무거워 보이는 커다란 도끼가 문에 기대어져 있었다. 도끼날에 갈색 피
가 묻어 있었다. 그것은 로저스의 목덜미에 난 깊은 상처와 관련있는 것
이었다.
암스트롱이 말했다.
「확실해. 범인은 뒤에서 몰래 다가가 그가 몸을 구부리고 있을 때 일
격에 찍어 넘긴 거요.」
블로어는 도끼 자루와 부엌에서 가져온 듯한 행주를 살펴보고 있었다.
워그레이브 판사가 물었다.
「암스트롱, 이런 짓을 하려면 남자 힘이 필요하오?」
암스트롱은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여자도 할 수 있겠지요.」
그는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베러 크레이슨과 에밀리 브랜트는 부엌으로 가 있었다.
「그 아가씨도 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 아가씨는 스포츠로 단련된 타
입입니다. 미스 브랜트는 약해 보이지만, 그런 여자가 생각지도 못할 힘
을 지니고 있는 법이지요. 게다가 정신이 이상해졌을 때에는 뜻밖의 힘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판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블로어가 몸을 일으키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지문은 없소. 자루를 닦아 놓았소.」
갑자기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그들은 놀라서 돌아보았다. 베러 크레이
슨이 가운데 뜰에 서 있었다. 그녀는 크게 웃으며 높고 날카로운 목소리
로 외쳤다.
「이 섬에서 꿀벌을 치나요? 어디 가면 꿀이 있지요?」
그들은 여우에게 홀린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베러는 정신이 돈 것인
가.
그녀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떠들어댔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내가 미친 것 같나요? 내가 묻는 건 중요
한 일이에요. 꿀벌, 벌집 말예요! 모르나요. 저 저주스러운 자장가를 읽지
않았나요? 어느 방에나 걸려 있어요. 처음부터 경고하고 있었어요.
우리들이 재빨리 알아차렸다면, 바로 여기에 와 보았어야 했어요. 일곱
인디언 소년이 장작을 팼다. 그 다음 구절을 아세요? 나는 외고 있어요!
여섯 인디언 소년이 벌집을 건드리며 장난쳤다――그래서 묻는 거예요.
이 섬에서는 꿀벌을 치나요? 이상하지 않으세요? 아무래도 이상하지 않
으세요…….」
베러는 다시 웃기 시작했다. 암스트롱 의사가 앞으로 나아가 손바닥으
로 그녀의 뺨을 때렸다. 그녀는 숨을 멈추고 침을 삼켰다. 그리고 잠시
움직이지 않고 서 있더니 이윽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이제 괜찮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본디 상태로 돌아가 있었다.
베러는 가운데 뜰을 가로질러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걸어가며 말
했다.
「미스 브랜트와 아침 식사 준비를 하겠어요. 누구든 장작을 갖다 주지
않겠어요?」
의사의 손자국이 그녀의 볼에 빨갛게 남아 있었다.
그녀가 부엌으로 들어가자 블로어가 말했다.
「참 잘한 처지였소, 의사 선생.」
「참을 수가 없었소. 이런 상황에 여자의 히스테리까지 당하고 있을 수
는 없잖소.」
필립 롬버드가 말했다.
「그녀는 히스테리가 될 타입이 아니오.」
암스트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 아가씨는 똑똑하오. 꽤 침착하지요. 다만 충격을 받았을
뿐이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오.」
로저스는 살해되기 전에 꽤 많은 장작을 패놓았다. 그들은 그것을 주워
모아 부엌으로 날랐다.
에밀리 브랜트가 난로의 재를 끌어내고 있었다. 베러는 베이컨 껍질을
잘라 내고 있었다.
에밀리 브랜트가 말했다.
「고마워요. 되도록 서두르지요. 그렇지. 3,40분만 기다려 주세요. 난로
에 불을 피워야 하니까요.」
블로어가 조그만 목소리로 필립 롬버드에게 말했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알겠소?」
필립 롬버드가 말했다.
「이야기하는 편이 빠를 거요. 생각해 보았자 헛일이니까.」
전직 경감 블로어는 농담을 모르는 사나이였다. 그는 진지한 태도로 말
했다.
「미국에 이런 사건이 있었소. 노인 부부가 둘 다 도끼로 살해되었소.
집에는 딸과 하녀밖에 없었소. 하녀가 한 짓이 아니라는 것은 곧 증명되
었소.
딸은 중년에 접어든 독신이었소. 종교적 믿음이 깊은 여자로 도저히 살
인을 저지를 것으로 보이지 않았소. 끝내 그 여자는 무죄가 되었지만, 그
러나 신앙심 깊은 여자라는 것 외에 무죄가 될 만한 이유는 아무것도 없
었소.
나는 도끼를 보는 순간 이 이야기를 생각해 냈소. 그리고 나서 부엌으
로 가보니, 에밀리 브랜트는 아주 냉정하고 얼굴빛 하나 달라져 있지 않
았소. 아가씨 쪽은 정신이 홱 돌아 버렸소. 아마 그게 정상일 거요. 당신
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필립 롬버드가 말했다.
「그럴 거요. 그게 정상이겠지요.」
「그런데 노처녀 쪽은 앞치마를 두르고 냉정한 얼굴로 일하고 있소. 저
것은 로저스 부인의 앞치마겠지. 저 노처녀는 확실히 머리가 돈 것 같소.
나이든 독신녀에게 흔히 있는 일이오.
살인도 할 수 있을 거요. 믿음이 두터우니 자기를 신의 사도나 무언가
로 여기고서 말이오. 방에서는 늘 성서를 읽고 있소.」
「그것만으로는 정신이 돌았다는 증명이 되지 않소.」
그러나 블로어는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게다가 밖에 나갔었잖소, 비옷까지 입고――바다를 보러 나갔다고는
했지만…….」
롬버드는 고개를 저었다.
「로저스는 장작을 패고 있을 때 살해되었소. 일어나서 곧 피살된 거
요. 미스 브랜트가 했다면 밖에서 언제까지나 우물쭈물거리고 있지 않았
겠지. 침대로 돌아와 코를 골고 있으면 되는거니까.」
「당신은 중대한 점을 빠뜨리고 있소. 만일 자기가 한 짓이 아니라면
혼자서 밖을 돌아다니지 못할 것이오. 두려운 게 없으니까 아무렇지 않게
밖을 돌아다닐 수 있는 거요. 자기가 범인이니까 아무것도 두려운 게 없
지요.」
「흠……거기까지는 미처 생각지 못했는걸.」
그는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덧붙였다.
「나는 당신 눈에서 벗어나 있어 다행이로군.」
블로어가 거북스러운 듯 말했다.
「실은 처음에 당신을 의심했었소. 권총 문제며, 우리들을 힐난한 일도
있고 해서. 그러나 내가 잘못 생각했던 거요.」
그는 잠깐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당신은 나를 의심하지 않겠지요?」
「실례될 지 모르지만 당신이 이 같은 계획을 세울 상상력을 가졌다고
는 생각지 않소.
만일 당신이 범인이라면 참으로 훌륭한 솜씨라고 할 만하오. 나는 말없
이 모자를 벗어 보이겠소.」
그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었다.
「우리끼리 이야기인데, 내일까지 생명이 남아 있을지 어떨지 모르는
우리들이오. 전에 이야기한 위증은 사실이겠지요?」
블로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숨겨 보았자 별수없지. 랜더는 확실히 무죄였소. 나에게 부탁하는 사
람들이 있어 모두들 유죄로 몰고 말았소. 그러나 잘라 말하지만, 달리 증
인이 있었다면 나는 그런 증언을 하지 않았을 거요.」
「듬뿍 맛잇는 국물을 먹었다는 거로군.」
「그런데 구두쇠들뿐이었소. 나는 다만 승진했을 뿐이오.」
「그리고 랜더는 종신형을 받고 감옥에서 죽었겠지.」
블로어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죽을 줄 몰랐소.」
「뭐, 당신 운이 나빴던 거요.」
「내가? 그의 운이 나빴지.」
「당신도 그렇소. 왜냐하면 그 때문에 당신도 죽게 되었으니까.」
「내가?」
블로어는 롬버드를 쳐다보았다.
「내가 로저스나 다른 사람들 같은 지경을 당하리라고 생각하오? 농담
마오? 나는 그런 길은 밟지 않소.」
「뭐, 좋소. 나는 내기 따위는 질색이거든. 또한 당신이 죽는다고 해서
내가 얻을 건 없으니까.」
「롬버드, 무슨 말을 하는 거요?」
롬버드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안됐지만 블로어. 당신도 빠져 달아날 수는 없소.」
「뭐라고?」
「당신은 상상력이 모자라오. 함정에 빠뜨리는 데는 이유가 없지. UN
오윈같이 상상력 풍부한 범인이라면, 당신 목에 새끼줄을 감는 일쯤 아주
쉬울 거요.」
블로어는 얼굴이 새빨개지며 화를 냈다.
「그럼, 당신은 어떻게 되오?」
필립 롬버드의 얼굴에 대담한 표정이 나타났다.
「나는 상상력을 충분히 갖고 있소. 지금까지도 꽤 위험한 일을 당했지
만 언제나 무사히 헤쳐 나왔소. 아니, 더 이상 말하는 것은 그만두겠소.
그러나 이번에는 꼭 헤쳐 나가 보일 테요!」
달걀이 프라이팬에 넣어졌다. 베러는 난로 앞에서 생각했다. 어째서 그
토록 정신이 혼란되었을까? 그것은 잘못된 일이었다. 침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일이 있어도 허둥대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는데…….
「크레이슨 양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곧 시릴의 뒤를 따라 헤
엄쳐 갔습니다.」
왜 이런 일이 지금 생각나는 것일까. 모든 것은 지나간 일이다. 시릴은
그녀가 바위에 닿기 훨씬 전에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었다.
조수가 그녀를 앞바다로 밀고 나갔다. 그녀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배
가 올 때까지 바다 위에 떠 있었다. 모두 그녀의 용기를 칭찬했다.
그러나 유고는 잠자코 그녀를 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지금도 유고를 생
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어디에 있을까,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약혼했을까,
결혼했을까.
에밀리 브랜트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베러, 베이컨이 타고 있어요.」
「어머나……미안해요. 정신차리지 않아서.」
에밀리 브랜트는 마지막 달걀을 굽고 있었다. 베러는 새 베이컨을 프라
이팬에 넣으며 말했다.
「당신은 몹시 침착하군요, 미스 브랜트.」
에밀리 브랜트는 또렷하게 말했다.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정신이 혼란되지 않도록 자라났어요.」
베러는 기계적으로 생각했다――어린 시절에 억압당하여 그것이 여러
가지 점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녀는 말했다.
「무섭지 않나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그렇잖으면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건가요?」
죽음! 에밀리 브랜트는 가늘고 날카로운 송곳으로 뇌를 찔린 듯 느꼈
다. 죽음? 아니, 나는 죽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은 죽을지 모르지만, 나는
죽지 않는다! 이 아가씨는 모른다.
나는 물론 무서워하고 있지 않다. 브랜트 집안 사람은 누구나 그렇다.
모두 깊은 신앙심을 갖고 있다. 죽음을 두려워한 사람은 없었다. 모두 자
기와 마찬가지로 올바른 생활을 해왔다. 나는 수치스러운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따라서 나는 죽을 까닭이 없다.
「우리들은 모두 이 섬을 빠져 나갈 수 없소.」
누가 그런 이야기를 했던가. 물론 매커서 장군이었다. 그의 사촌이 엘
시 맥퍼슨과 결혼했다. 그는 죽음을 조금도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어쩌
면 기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당치도 않다! 신을 두려워하지 않다니! 죽음을 가볍게 여겨 스스로 목
숨을 끊는 사람조차 있다.
비트리스 테일러……어젯밤 그녀는 비트리스 꿈을 꾸었다――그녀의
방 창문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울부짖는 듯한 목소리로 들여보내 달라고
했다.
그러나 에밀리 브랜트는 그녀를 안으로 들여놓고 싶지 않았다. 만일 안
으로 들여놓으면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에밀리 브랜트는 번쩍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저 아가씨가 자기를 바라
보며 이상히 여기고 있었다.
그녀는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준비가 되었군요. 가져가요.」
기묘한 아침 식사였다. 모두들 말씨가 정중했다.
「커피를 따라 드릴까요, 미스 브랜트.」
「크레이슨 양, 햄을 들겠어요?」
「베이컨을 하나 더 드십시오.」
여섯 사람 모두 아무 일도 없었던 듯한 태도였다.
그러나 마음속에서는 여러 가지 생각이 참나무 숲 속의 다람쥐처럼 이
리저리 뛰어 돌아다니고 있었다.
(다음은 누구일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잘될까. 자신이 없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지. 시간
이 흐르면 해결될 거야.)
(신앙으로 똘똘 뭉쳐져 있다. 그래서 미친 것이다. 그러나 저 모습을 보
고 있노라면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아. 잘못되었는지도 모른다.)
(무엇이나 모두 기묘한 일뿐이야. 이래서는 머리가 돌아 버릴 것야. 털
실이 없어졌어. 진홍빛 비단 커튼도.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 조금도 예상
할 수가 없어.)
(바보 같은 녀석. 내가 한 말을 그대로 믿어 버리다니. 이유는 없어. 그
러나 충분히 경계해야 한다.)
(여섯 개의 조그만 도자기 인형……이제 여섯 개뿐――오늘 밤은 몇 개
가 될 것인가.)
「달걀이 하나 남아 있군요.」
「마멀레이드는?」
「고마워요. 햄을 드릴까요?」
여섯 사람……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행동하는 여섯 사람…….
제 목 : [애-크]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12
올린이 : 매직라인(한창욱 ) 96/11/24 22:28 읽음 : 69 [7m관련자료 있음(TL)[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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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꿀벌 살인
식사가 끝났다.
워그레이브 판사가 헛기침을 했다. 그는 낮고 위엄있는 목소리로 말했
다.
「모두 모여 의견을 나누는 게 좋을 것 같소. 30분 뒤 응접실로 모여
주기 바라오.」
모두들 곧 찬성했다. 베러는 접시를 포개기 시작했다.
「내가 치우겠어요.」
필립 롬버드가 말했다.
「모두 함께 날라다 드리지요.」
「고마워요.」
에밀리 브랜트는 일어섰다가 다시 앉아 한숨을 쉬었다.
판사가 말했다.
「어디 편찮으시오, 미스 브랜트?」
에밀리는 미안한 듯 말했다.
「죄송해요. 크레이슨 양을 도와주고 싶지만 어쩐지 머리가 어지러워
요.」
「어지럽다고요?」
암스트롱 의사가 그녀의 곁으로 갔다.
「무리도 아니지요. 아까 받은 충격이 크니까요. 무슨 약이라도…….」
「싫어요!」
그 말은 포탄이라도 터지듯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리하여 모두
를 놀라게 했다.
암스트롱 의사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녀의 얼굴에는 확실히 공포와
의혹의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의사는 어색하게 말했다.
「무리하게 권하지는 않습니다, 미스 브랜트.」
「약은 보기도 싫어요. 기분이 나아질 때까지 이대로 여기 조용히 앉아
있겠어요.」
모두들 식사 뒤처리를 했다.
블로어가 말했다.
「나는 가정적인 남자입니다. 도와드릴까요, 크레이슨 양.」
베러가 말했다.
「고마워요.」
에밀리 브랜트만 식당에 남겨졌다. 잠시 동안 부엌에서 이야기 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기분은 좋아졌으나 이번에는 졸음이 왔다. 그대로 잠
들어 버릴 것 같았다.
귀에 날개 소리가 들려 왔다. 방안 어디에서 들려 오는 것일까? 그녀는
생각했다. 꿀벌이다, 꿀벌이 있는 것이다.
이윽고 그녀의 눈에 꿀벌이 보였다. 창문 유리 위를 기어 다니고 있었
다. 아침에 베러 크레이슨이 벌 이야기를 했었는데.
꿀벌과 벌꿀……에밀리 브랜트는 벌꿀을 좋아했다. 벌집의 꿀을 모슬린
주머니로 거르면 뚝, 뚝, 뚝…….
방안에 누군가 있는 것 같았다. 흠뻑 젖어서 옷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비트리스 테일러가 강에서 올라온 것이다. 고개를 돌리기만 하면 그 모습
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돌아볼 수 없었다.
소리질러 누군가를 불렀으면 좋으련만, 그러나 그녀는 소리를 지를 수
없었다. 저택에는 달리 아무도 없다. 그녀 한 사람뿐인 것이다.
발소리가 들려 왔다. 바닥에 끌리는 듯한 조용한 발소리가 등뒤로 다가
왔다. 익사한 여자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가까이 오고 있다. 퀴퀴하니
습기찬 냄새가 코를 찔렀다.
창문 유리에서는 꿀벌이 날개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목덜
미를 찔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벌이 목을 쏜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응접실에서 에밀리 브랜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베러 크레이슨이 말했다.
「불러올까요?」
블로어가 당황하며 말했다.
「기다리시오.」
베러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모두들 이상스러운 듯 블로어를 보았다.
그는 말했다.
「어떻습니까? 나는 이렇게 생각하오. 지금 식당에 가면, 범인의 정체
를 알 수 있을 것이오. 그 여자가 우리들이 찾는 범인이라고 믿소!」
암스트롱이 물었다.
「동기는?」
「신앙이 너무 깊은 거요. 당신 의견은 어떻소?」
「있을 수 있는 일이오. 반대는 하지 않소. 그러나 증거가 없소.」
베러가 말했다.
「식사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참으로 이상했었어요. 눈이…….」
그녀는 몸을 떨었다.
롬버드가 말했다.
「그런 일로 판단할 수는 없소. 우리는 모두 정신이 어떻게 되어 있소.
」
블로어가 말했다.
「게다가 그녀는 레코드의 말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소. 왜 그랬을까요.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일 거요.」
베러가 의자에서 몸을 움직였다.
「그건 틀려요. 나에게 이야기했어요. 나중에.」
워그레이브 판사가 말했다.
「어떤 이야기를 했소, 크레이슨 양?」
베러는 비트리스 테일러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워그레이브 판사가 말했다.
「조리있는 이야기요. 사실을 이야기한 게 틀림없소. 크레이슨 양, 책임
을 느끼고 괴로워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소? 지나치게 엄격했던 것을
후회하는 태도는 없었는지요?」
「조금도 없었어요.」
블로어가 말했다.
「심장이 부싯돌같이 단단한 여자요. 그런 여자는 모두 그렇소! 질투
같은 거지요.」
판사가 말했다.
「벌써 11시 5분 전이오. 미스 브랜트를 불러오는 게 좋겠소.」
블로어가 말했다.
「손을 쓰지 않겠습니까?」
「지금으로선 어떻게 할 수 없소. 단순한 혐의에 불과하오. 그러나 암
스트롱에게 부탁해 미스 브랜트가 정신이상이 되어 있는지 어떤지 살펴
보도록 합시다. 그럼, 모두 식당으로 갑시다.」
그들이 식당으로 가니 에밀리 브랜트는 아까의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등뒤에서 보았을 때는 그녀가 그들이 들어온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그리 다른 점이 없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핏기가 없고 입술이 새파랬
으며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블로어가 말했다.
「죽어 있잖소!」
워그레이브 판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또 한 사람, 혐의가 풀렸소. 풀리는 게 늦어졌지만…….」
암스트롱은 에밀리 브랜트 위로 몸을 굽혔다. 그는 입에서 나는 냄새를
맡고 머리를 갸우뚱하며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롬버드가 기다릴 수 없는 듯 말했다.
「어떻게 죽었소? 우리들이 그녀를 이곳에 두고 나갔을 때는 아무 일
도 없었는데요.」
암스트롱의 주의가 그녀의 목줄기 오른쪽에 있는 상처에 쏠렸다.
「피하 주사 자국이오.」
창문에서 날개 소리가 들려 왔다.
베러가 외쳤다.
「보세요. 벌이――벌이……내가 말한 대로예요.」
암스트롱이 말했다.
「그녀를 쏜 것은 벌이 아니오. 사람 손이 주사기로 찌른 것이오.」
판사가 물었다.
「독은 무엇이오?」
「내 상상으로는 청산가리라고 생각합니다. 앤터니 머스턴의 경우와 같
은 것이지요. 아마도 질식해서 금방 숨졌을 겁니다.」
베러가 외쳤다.
「하지만 저 벌은――우연으로 보기에는…….」
롬버드가 말했다.
「아니, 우연이 아니오! 우리들 살인범의 세밀한 작품이오! 꽤 장난이
심한 사람 같소. 할 수 있는 한 자장가대로 하려 드는군.」
그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떨렸다. 오랫동안 위태로운 세상을 살아오면서
단련된 롬버드의 신경도 결국은 항복하고 만 듯했다.
그는 세차게 부르짖었다.
「미치광이야! 모두 미쳤어! 모두 미치광이야!」
판사가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우리들은 아직 이성을 갖고 있소. 누가 이 섬에 피하 주사기
를 가져왔소?」
암스트롱이 몸을 굳히며 자신없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가져왔습니다.」
네 사람의 눈이 의사에게로 쏠렸다. 그는 적의를 품은 의혹의 눈길을
의연히 받아 냈다.
「언제나 갖고 다니지요. 의사라면 누구나 갖고 있을 겁니다.」
판사가 말했다.
「당연한 일이오. 그 주사기는 지금 어디 있소?」
「내 방의 가방 속에.」
「확인해 보겠소?」
다섯 사람은 말없이 2층으로 올라갔다. 가방 속의 물건들이 바닥에 펼
쳐졌다. 피하 주사기는 없었다.
암스트롱이 거친 목소리로 외쳤다.
「누가 훔쳐 갔어!」
방안에 침묵이 흘렀다. 암스트롱은 창문을 등지고 서 있었다.
네 사람의 눈이 의혹과 적의에 차서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호소하는
듯한 눈길로 베러와 워그레이브 판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기어드는 목
소리로 말했다.
「틀림없이 누군가가 훔쳐 간 거요.」
블로어는 롬버드와 마주보았다.
판사가 말했다.
「여기에 우리들 다섯 사람이 있소. 이 가운데 하나가 범인이오. 나머
지 네 사람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해야 하오.
암스트롱, 당신은 어떤 약품을 갖고 있소?」
「그곳에 약품 상자가 있습니다. 조사해 보십시오. 수면제로서 트리오
날과 즐포날, 프로마이드 한 포, 중탄산 소다, 아스피린. 그 밖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청산가리는 갖고 있지 않습니다.」
「나도 수면제를 갖고 있소. 아마 즐포날일 거요. 수면제도 너무 많이
먹으면 생명이 위험하오. 그리고 롬버드, 당신은 권총을 갖고 있지요?」
「그게 어떻다는 겁니까?」
「암스트롱 약품, 나의 즐포날, 당신의 권총, 그 밖에 약품이나 총기류
가 있으면 한데 모아 안전한 곳에 놓아두기로 합시다. 그리고 나서 한 사
람씩 몸과 소지품 검사를 하는 거요.」
롬버드가 말했다.
「권총은 건네 줄 수 없습니다.」
워그레이브 판사는 엄격하게 말했다.
「롬버드, 당신은 몸이 건강하고 힘도 셀 거요. 그리고 블로어도 훌륭
한 몸집을 하고 있소. 당신들 두 사람이 싸우면 어떤 결과가 될지 모르
나, 한마디 확실히 해둘 게 있소.
나와 암스트롱 의사와 크레이슨 양은 블로어 편이 될 거요. 그러니 당
신이 끝까지 반대하면 자신을 위해 이로울 게 없지. 불리한 것이 확실하
니…….」
롬버드는 흰 이를 드러내며 내뱉듯 말했다.
「알았습니다. 따르지요.」
판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소. 그런데 권총은 어디에 있소?」
「침대 옆 테이블 서랍 속에 두었습니다.」
「우리 모두 함께 갑시다.」
필립 롬버드는 비웃는 듯한 미소를 띠었다.
「어디까지나 믿지 않는군.」
그들은 복도를 지나 롬버드의 방으로 갔다. 롬버드는 침대 옆 테이블로
재빨리 가서 거칠게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소리질렀다.
서랍은 텅 비어 있었다.
롬버드가 물었다.
「이해되오?」
그는 벌거벗고 있었다. 다른 세 사람이 방안 수색을 막 끝낸 참이었다.
베러 크레이슨은 복도에 나가 있었다.
수색은 돌아가며 행해졌다. 암스트롱, 판사, 블로어의 순서로 한 사람씩
방과 몸을 수색했다.
네 사나이는 블로어의 방에서 나와 베러 곁으로 갔다.
판사가 입을 열었다.
「예외가 있을 수 없음은 알고 있겠지요. 권총을 어떻게 해서든 찾지
않으면 안 되오. 당신은 수영복을 갖고 왔겠지요?」
베러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영복을 입고 이곳으로 나오시오.」
베러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리고 몸에 꼭 달라붙는 비단 수
영복을 입고 다시 나타났다.
워그레이브는 말했다.
「고맙소, 크레이슨 양. 여기서 기다려 주시오.」
베러는 방 수색이 끝날 때까지 복도에서 기다렸다. 그리고 나서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다시 나왔다.
판사가 말했다.
「이로써 이제 아무도 위험한 총기나 약품을 갖고 있지 않음을 알게
되었소. 이번에는 약품을 보관할 안전한 장소를 생각해 봅시다. 아마도
부엌에 은그릇을 넣어 두는 상자가 있을 텐데.」
블로어가 말했다.
「좋은 생각입니다만, 열쇠는 누가 갖습니까? 당신이 갖나요?」
판사는 대답하지 않고 걸어갔다. 모두들 그 뒤를 따랐다. 은그릇을 넣
는 조그만 금고같이 생긴 상자가 벽장 속에 있었다.
판사의 지시에 따라 그 상자 속에 약품을 넣고 열쇠를 채워 벽장 속에
넣었다.
판사는 상자 열쇠를 롬버드에게 주고 벽장 열쇠는 블로어에게 주었다.
「당신들은 둘 다 힘이 세오. 당신들 둘 가운데 하나가 열쇠를 차지하
기는 힘들 거요. 따라서 나머지 우리들이 열쇠를 손에 넣기는 더욱 어렵
소.
벽장문을 부수고 상자를 꺼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오. 그리고 소리가
날 것이오. 다른 사람들에게 눈치채지 않고 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하오.」
판사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그리고 아직 매우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소. 롬버드의 권총 행방이
오.」
블로어가 말했다.
「주인이 알고 있겠지요.」
필립 롬버드는 금방 얼굴빛이 달라졌다.
「무슨 소리요! 도둑맞았다는 것을 모르오!」
워그레이브가 물었다.
「맨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소?」
「어젯밤입니다. 잠자기 전 확인했을 때는 서랍 속에 분명히 있었습니
다. 만일의 경우 곧 쏠 수 있도록 해두었지요.」
판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아침 우리들이 로저스를 찾고 있을 때나, 또는 시체가 발견되었
을 때의 소란스러운 참에 도둑맞았겠지.」
베러가 말했다.
「집안에 숨겨 둔 게 틀림없어요. 찾아봐요.」
판사는 손가락으로 턱을 두드리며 말했다.
「아마 찾아봐야 헛일일 거요. 범인은 우리가 모르는 장소를 연구하는
데 충분한 시간이 있었을 테니까.」
블로어가 말했다.
「권총이 어디 있는지는 모르지만, 주사기가 어디 있는지는 압니다. 나
를 따라오십시오.」
그는 현관문을 열고 나가 저택을 따라 걸어갔다. 주사기는 식당 창문에
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떨어져 있었다. 그 곁에 도자기 인형이 산산이
부서져 뒹굴고 있었다. 다섯번째 인형이었다.
「여기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범인은 그녀를 죽인 뒤 창문을 열어
주사기를 던지고, 또 테이블 위의 인형을 꺼내 내던진 것이오.」
주사기에는 지문이 없었다.
베러가 말했다.
「권총을 찾아봐요.」
워그레이브 판사가 말했다.
「찾아봅시다. 그러나 우리들은 한데 뭉쳐 있어야 하오. 떨어지는 것은
범인에게 기회를 주는 결과가 되니까.」
그들은 집안을 샅샅이 뒤졌다. 지붕 위부터 지하실까지 빠짐없이 수색
했다.
그러나 결과는 헛일이었다. 권총의 행방은 아무래도 알 수 없었다.
제 목 : [애-크]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13
올린이 : 매직라인(한창욱 ) 96/11/24 22:30 읽음 : 72 [7m관련자료 있음(TL)[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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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어둠 속
「다섯 사람 중 한 사람이……다섯 사람 중 한 사람이……다섯 사람
중 한 사람이…….」
똑같은 말이 다섯 사람의 머리 속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공
포에 사로잡힌 다섯 사람, 서로 경계의 눈을 빛내고 있는 다섯 사람.
이제 마음의 동요를 감출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부러 마음
을 가라앉히려 애쓰는 이도 없었다. 그들은 서로 상대를 적대시했으며,
그들을 한데 묶어 놓고 있는 것은 자기 방어 본능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섯 사람 모두 인간이 아니었다. 동물로 변해 버린 것이었다.
워그레이브 판사는 나이든 거북이처럼 몸을 움츠리고 쉴새없이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전직 경감 블로어는 건장한 몸이 어딘지 모르게 굳어 보였다. 그의 걸
음걸이는 둔한 짐승과도 같았다. 눈은 언제나 핏발이 서 있었다. 흉폭함
과 우둔함이 뒤범벅되어 있는 듯한 인상이었다. 강한 자에게 쫓겨 죽을
힘을 다해 반격하려는 동물 같았다.
필립 롬버드도 쉴새없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의 귀는 아주 조
그마한 소리에도 날카롭게 움직였다. 가벼운 걸음으로 재빠르게 걸어 돌
아다니고, 때때로 흰 이를 드러내며 기분나쁘게 웃음지었다.
베러 크레이슨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의자에 몸을 파묻고 꿈꾸듯 똑
바로 앞만 지켜 보고 있었다.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치고 떨어져 사람 손
에 쥐어진 참새와도 같았다. 공포로 말미암아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다만
구원을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암스트롱은 안타까울 정도로 초조해 있었다. 쉴새없이 몸을 움직이고
두 손을 떨었다. 줄곧 담뱃불을 붙였다가는 이내 재떨이에 비벼 끄곤 했
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유난히 불안해 하는 것 같았다. 때때로 그는
이상한 말을 떠들어댔다.
「이대로 가만히 있어선 아무것도 안 돼! 무언가 방법이 있을 거야! 예
를 들면 신호불을 피우든가…….」
블로어가 말했다.
「이런 날씨에도 불이 붙소?」
비가 다시금 세차게 퍼붓고 있었다. 바람은 포효하며 불어 닥쳤다. 후
려치는 듯한 빗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머리가 돌아 버릴 것 같은 기분이
었다.
그들은 모두 응접실에 있었다. 방에서 나가는 것은 한 번에 한 사람으
로 제한했다. 그들 사이에그것은 어느 틈에 묵계가 되어 있었다. 다른 네
사람은 한 사람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롬버드가 말했다.
「시간문제요. 날씨가 좋아지면 방법은 얼마든지 있소. 신호도 할 수
있고, 불을 피울 수도 있고, 뗏목을 만들 수도 있소.」
암스트롱이 웃음을 터뜨렸다.
「시간문제라고? 그런 소리를 해선 안 되오! 그때까지 우리들은 모두
죽고 말 거요!」
워그레이브 판사가 말했다. 낮고 똑똑한 말투였다.
「아니, 경계를 태만히 하지 않으면 염려없소. 경계만 잘하면…….」
점심 식사를 했다. 그러나 서로 말은 나누지 않았다. 다섯 사람은 부엌
으로 들어가 식량 저장고를 열고 통조림이 많이 비축된 것을 보았다. 그
들은 쇠고기 통조림 하나와 과일 통조림 두 개를 꺼내 부엌 테이블 둘레
에 선 채로 먹었다.
식사를 끝낸 뒤 한데 모여 응접실로 돌아와 의자에 웅크리고 앉아 다
시 서로 경계의 눈을 번뜩였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모두 지식있는 사람들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
들이었다.
(암스트롱임에 틀림없다. 이상한 눈초리로 나를 보고 있다. 그것은 미치
광이의 눈이다. 의사가 아닌지도 모른다. 그렇다, 의사가 아닐 것이다! 병
원에서 달아난 미치광이인지도 모른다. 의사 시늉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 그게 틀림없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할까, 큰소리를 지를까.
아니, 그에게 경각심을 줄 뿐이다. 더욱이 그는 정상적인 것처럼 보이거
든.
……지금 몇 시일까? 아직 3시 15분밖에 안 되었다. 하느님, 나는 미쳐
버릴 것만 같습니다. 그렇다, 암스트롱이다. 지금 나를 보고 있구나…….)
(나는 당하지 않는다! 당할 리 없다. 몇 차례나 죽을 고비를 넘겨 왔다.
그건 그렇고, 권총은 어디로 갔을까. 누가 훔쳤을까. 아무도 갖고 있지 않
다――그건 알고 있다. 모두 몸을 뒤졌다. 그러나 누군가는 반드시 알고
있을 것이다.)
(모두 머리가 돌았다. 죽음의 공포. 우리는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
다. 나도 두려워하고 있다. 그러나 두려워하고 있는 것만으로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영구차가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디서 읽었던가. 수상한
것은 저 여자다. 그렇다, 저 여자를 조심해야 한다.)
(4시 20분 전. 아직 4시 20분 전이다. 시계가 섰는지도 모른다. 나로서
는 알 수 없다.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지금 일어나고 있는데 어째서
우리들은 눈을 뜨지 못하는가. 눈을 떠라――응징의 날이다!
아니, 그런 일은 없다. 내 머리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산산이 부서져
버릴 것만 같구나.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게 사실로 여겨지지 않는다! 몇
시일까……뭐야, 아직 4시 15분 전이 아닌가…….)
(단단히 마음먹지 않으면 안 된다. 냉정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계획은 충분히 세워져 있다. 그러나 의심받으면 안 된다. 누구일까. 그게
문제다……그렇다, 그다.)
시계가 5시를 알렸다. 다섯 사람은 모두 놀라며 몸을 움직였다.
베러가 말했다.
「누구――차를 드시겠어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블로어가 말했다.
「마시고 싶군!」
베러는 일어섰다.
「준비해 오겠어요. 여기서 기다려 주세요.」
판사가 조용히 말했다.
「모두 같이 갑시다. 당신이 준비하는 것을 보고 있겠소.」
베러는 판사를 보고 소리높여 웃었다.
「그래요. 그편이 더 좋아요.」
다섯 사람은 부엌으로 들어갔다. 차가 준비되어 베러와 블로어가 마셨
다. 그리고 나머지 세 사람은 위스키를 마셨다. 새 병을 꺼내 고정되어
있는 사이펀을 사용했다.
판사가 파충류를 연상시키는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충분히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오…….」
그들은 다시 응접실로 돌아왔다. 여름인데도 방안이 어두웠다. 롬버드
가 전등을 켜려고 했으나,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켜질 리 없지. 로저스가 죽은 뒤로 모터가 움직이지 않고 있소.」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모두 힘을 합쳐 움직이게 합시다.」
판사가 말했다.
「부엌에 양초가 있소. 촛불을 켭시다.」
롬버드가 방을 나갔다. 네 사람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롬버드는 양초 상자와 조그만 접시 몇 장을 포개 들고 돌아왔다. 다섯
자루의 초에 불이 붙여져 방안에 놓였다. 시각은 6시 15분 전이었다.
6시 20분이 지났을 때, 베러는 그곳에 앉아 있는 게 견딜 수 없어졌다.
자기 방에 돌아가 후텁지근한 머리를 찬물로 식히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다가 문득 깨닫고 초를 가지러
되돌어와 불을 붙여서 접시에 촛불을 떨어뜨려 양초를 세웠다. 그리고 방
을 나와 문을 닫았다. 방에는 네 사나이만 남았다.
그녀는 층계를 올라가 자기 방문을 열자 그대로 그 자리에 못박힌 듯
멈춰 섰다. 코가 벌름벌름 움직였다. 바다……세인트 트레데닉의 바다 냄
새였다.
그렇다, 그녀가 잘못 알 리 없다. 물론 섬에 있으면 바다 냄새가 나는
법이지만, 이 냄새는 달랐다. 그날의 바닷가 냄새였다. 조수가 빠지고 바
위에 엉겨 붙은 해초가 햇볕에 말라 있었다.
「섬까지 헤엄쳐 가도 괜찮아요, 크레이슨 선생님? 왜 섬까지 헤엄쳐
가면 안 되나요?」
말을 듣지 않는 장난꾸러기! 이 아이만 없었다면 유고는 재산을 얻어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할 수 있었다.
유고……유고는 그녀 곁에 있었던 것일까? 아니, 방에서 그녀를 기다리
고 있었다.
그녀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갔다. 창문으로 불어닥친 바람이 촛불을
꺼버렸다. 촛불은 흔들거리다가 꺼졌다. 어둠 속에서 그녀는 갑자기 공포
에 몸을 떨었다.
그녀는 스스로 꾸짖었다.
「정신차리지 않으면 안 돼. 걱정할 것 없어. 네 사람은 아래층에 있다.
방안에는 아무도 없어. 있을 리 없다. 쓸데없는 일을 상상하고 있는 거야.
」
그러나 저 냄새――세인트 트레데닉 바닷가 냄새――그것은 상상이 아
니었다. 분명히 냄새가 났다.
그리고 확실히 누가 있는 것 같았다.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확실히
들렸다. 그녀는 귀를 기울이고 서 있었다. 갑자기 차가운 손이 그녀의 목
줄기에 닿았다. 바다 냄새나는 젖은 손이…….
베러는 부르짖었다. 공포의 절규였다. 구원을 청해 부르짖은 것이다. 아
래층에서 의자가 넘어지고 문이 열리며 발소리가 층계를 달려 올라왔다.
그러나 그녀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의식에 남아 있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공포뿐이었다.
그녀가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복도에 촛불이 흔들리고 남자들이 소리
지르며 방으로 들어왔다.
베러는 몸을 떨면서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다가 바닥에 쓰러졌다. 위에
서 굽어보며 그녀의 머리를 억지로 그녀의 무릎 사이로 밀어 넣으려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누구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별안간 고함 소리가 들렸다.
「저걸 보오.」
베러는 그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는 눈을 뜨고 머리를 들었다.
그녀는 남자들이 촛불을 비추어 보고 있는 곳으로 눈을 옮겼다. 폭넓은
젖은 해초가 천장에서 밑으로 늘어져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녀이 목줄기
에 닿은 것은 해초였다. 그것을 익사한 사람의 손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그녀는 발작을 일으킨 듯 웃었다.
「해초였군요. 그 냄새도 해초에서 났군요!」
그리고 나서 그녀는 다시 정신이 몽롱해졌다. 또 누군가가 그녀의 머리
를 무릎 사이로 밀어 넣으려 했다.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모두 그녀에게 무엇을 마시게 하려고 했
다. 글라스를 그녀의 입술에 갖다대고 있었다. 브랜디 냄새가 났다. 베러
가 기쁘게 그것을 마시려 할 때, 돌연 위험을 알리는 벨소리 같은 것이
그녀의 머리 속에서 울렸다. 그녀는 글라스를 밀어젖히고 고쳐 앉았다.
「이거 어디서 가져왔지요?」
블로어가 대답했다. 그는 그녀를 한 번 쳐다보고 나서 말했다.
「아래층에서 가져왔소.」
「마시지 않겠어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롬버드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훌륭하오, 베러. 기분이 좋아졌군요. 머리도 괜찮나 보오. 내가 새 브
랜디 병을 가져오겠소.」
그는 급히 방을 나갔다.
베러가 말했다.
「이제 괜찮아요. 물을 마시겠어요.」
암스트롱은 그녀를 도와 일으켜 세웠다. 베러는 의사의 부축을 받으며
세면대 쪽으로 가서 유리첩에 물을 따랐다.
블로어가 기분나쁜 얼굴로 말했다.
「이 브랜디에는 독이 들어 있지 않소.」
암스트롱이 말했다.
「어떻게 아오?」
「나는 아무것도 넣지 않았소. 당신은 나를 의심하는 거요?」
「당신이 독을 넣었다고는 말하지 않았소. 누가 병을 만졌는지 모르잖
소.」
롬버드가 새 브랜디 병과 병마개를 갖고 돌아왔다. 그는 베러 앞으로
병을 내밀었다.
「보오, 새것이오!」
그는 납으로 봉한 뚜껑을 따고 크로크 마개를 잡아 뺐다.
「술이 많이 있는 것은 고마운 일이야. 그러고 보니 오윈에게도 괜찮은
데가 있군.」
베러는 심하게 몸을 떨었다. 롬버드는 암스트롱이 가지고 있는 글라스
에 브랜디를 따랐다.
암스트롱이 말했다.
「마시는 게 좋소, 크레이슨 양. 충격이 컸으니까…….」
베러는 글라스에 입을 댔다. 곧 얼굴이 불그레해졌다.
롬버드가 웃으며 말했다.
「능숙한 범인도 이번만은 계획대로 하지 못했군!」
베러가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계획적이었을까요?」
롬버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포로 심장마비를 일으키는 일도 있겠지요, 의사 선생?」
암스트롱은 그 의견에 찬성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도, 그렇지 않다고도 말할 수 없소. 크레이슨 양은 아직 젊
고 건강하오. 심장이 약하다고는 생각지 않소. 아마도 그런 계획은 아니
었을 거요. 그보다는…….」
그는 블로어가 가져온 브랜디를 집어 들어 손가락에 찍어서 맛을 보았
다. 그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음…이상없는 것 같군.」
블로어가 얼굴빛이 달라지며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내가 독을 넣었다고 생각한다면 가만히 있지 않겠소.」
브랜디로 기운을 되찾은 베러가 화제를 바꾸었다.
「판사님은 어디계세요?]
세 사나이는 얼굴을 마주보았다.
「이상한데. 함께 온 줄 알았는데.」
블로어가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소, 어떻소. 의사 선생? 당신은 내 뒤에서 층계를
올라왔는데…….」
암스트롱이 말했다.
「뒤따라오고 있다고 생각했었소. 물론 우리보다는 느리겠지만.」
세 사람은 다시 얼굴을 마주보았다.
「아무래도 이상한데.」
「찾아야 돼!」
그는 문 쪽으로 달려갔다. 모두 뒤따라갔다. 베러가 맨 끝으로 따라갔
다.
층계를 내려가며 암스트롱이 외쳤다.
「워그레이브 씨! 워그레이브 씨! 어디 있습니까?」
대답이 없었다. 좀 가늘어진 빗소리가 들릴 뿐 저택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응접실 문가에 왔을 때 암스트롱은 얼굴빛이 달라지며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다른 사람들은 그의 등뒤에 겹치듯 서서 어깨너머로 들여다보
았다. 누군가가 외침 소리를 질렀다.
워그레이브 판사는 방 한구석에 놓인 등받이 높은 의자에 몸을 파묻고
있었다. 양쪽에 두 자루의 촛불이 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놀라게 한
것은 판사가 진홍빛 의상을 두르고 머리에 판사들이 쓰는 가발을 쓰고
쓰러져 있는 모습이었다.
암스트롱 의사는 다른 사람들을 제지하고 판사 곁으로 걸어 갔다. 취한
사람처럼 다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는 몸을 굽혀 판사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재빠른 동작으로
머리를 젖혔다. 가발이 마루 위로 떨어지고, 벗겨진 앞이마가 드러났다.
그 한가운데에 피가 엉킨 둥그런 상처가 있고, 거기서 무엇인가가 스며
나오고 있었다.
암스트롱 의사는 떨리는 손으로 판사의 맥박을 짚어 보았다. 그리고 세
사람을 돌아보고 말했다. 표정이 없는 목소리였다.
「사살되었소.」
블로어가 말했다.
「뭐라고! 권총으로!」
의사가 말했다.
「머리를 꿰뚫었소, 즉사요.」
베러는 바닥으로 몸을 수그려 가발을 보았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스 브랜트가 잃어버렸던 회색 털실이에요.」
블로어가 말했다.
「게다가 이건 욕실에서 없어진 진홍빛 커튼이오.」
베러가 속삭였다.
「이런 데 쓰려고 그랬군요.」
갑자기 필립 롬버드가 웃음을 터뜨렸다. 억지로 자아내는 웃음소리였
다.
「다섯 인디언 소년이 법률에 열중했다. 한 소년이 대법원에 들어가 네
소년이 되었다. 이것이 워그레이브 판사의 마지막 무대였던 것이오!
그는 이제 판결을 내릴 수 없게 되었소. 법정에 설 수도 없소. 죄없는
사람을 사형에 처할 수도 없게 되었소. 에드워드 시튼이 여기에 있었다면
얼마나 비웃었을까? 틀림없이 크게 기뻐했겠지!」
그가 너무도 큰소리로 떠들어댔기 때문에 세 사람은 놀랐다.
베러가 말했다.
「그렇지만 범인은 판사라고 당신이 말한 게 어제 아침 일이었지요.」
필립 롬버드의 얼굴빛이 달라졌다. 흥분이 가라앉은 것이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틀림없이 그렇게 말했었소. 나는 잘못 알고 있었던 거요. 또 한
사람, 범인이 아닌 것이 입증되었소. 좀 늦긴 했지만…….」
제 목 : [애-크]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14
올린이 : 매직라인(한창욱 ) 96/11/24 22:31 읽음 : 70 [7m관련자료 있음(TL)[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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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사라진 의사
그들은 워그레이브 판사의 시체를 그의 방으로 옮겨 침대에 뉘었다. 그
런 다음 아래층으로 내려와 홀에 선 채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블로어가 말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하지?」
롬버드가 말했다.
「먼저 무엇이든 먹읍시다. 먹어 두지 않으면 안 되오.」
그들은 부엌으로 들어가 소 혓바닥 통조림을 따서 기계적으로 입에 넣
었다. 맛이 형편없었다.
베러가 말했다.
「난 한평생 소 혓바닥 고기는 안 먹겠어요.」
그들은 식사가 끝나자 부엌 테이블에 앉아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블로어가 말했다.
「드디어 네 사람이 되었소. 다음은 누구 차례일까?」
암스트롱이 지그시 블로어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거의 기계적으로
말했다.
「충분히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오.」
블로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판사도 늘 그렇게 말했지. 그리고 죽어 버렸소!」
암스트롱이 말했다.
「어떻게 죽였을까?」
롬버드가 말했다.
「훌륭한 계획이야! 크레이슨 양 방에 그런 것을 걸어 놓아 우리들에게
그녀가 살해된 것으로 생각케 했소. 그리고 그 소동을 이용해 노인이 방
심한 틈을 노렸소.」
블로어가 말했다.
「어째서 아무도 권총 소리를 듣지 못했을까?」
롬버드가 머리를 저었다.
「크레이슨 양이 큰소리로 부르짖은데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대고 있었
소. 더욱이 우리들은 외쳐대며 뛰어 올라갔으니 들릴리 없지.」
그는 말을 멈추었다.
「그러나 이런 계략은 이제 성공할 수 없소. 이 다음에는 더욱 기발한
술수를 생각하지 않는 한 성공할 수 없을 거요.」
블로어가 말했다.
「틀림없이 또 생각해 내겠지.」
그 말에는 적의가 담겨 있었다. 두 사람은 눈을 마주보았다.
암스롱이 말했다.
「이제 네 사람밖에 없소. 그러면서도 우리는 누가 범인인지 아직 모르
고 있소.」
블로어가 말했다.
「나는 알고 있소.」
베러가 말했다.
「나도 알아요.」
암스트롱이 천천히 말했다.
「나도 짐작은 가는데…….」
필립 롬버드가 말했다.
「나는 확실히 알고 있소.」
다시금 그들은 얼굴을 마주보았다.
베러가 힘없이 일어섰다.
「머리가 아파요. 좀 자고 싶어요.」
롬버드가 말했다.
「그러는 게 좋을 거요. 서로 흘겨보고 있어 봤자 이익될 게 없으니까.
」
블로어가 말했다.
「나도 찬성이오.」
의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좋은 생각이지만 아무도 잠들 수는 없을 거요.」
그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블로어가 말했다.
「권총은 어디에 있을까?」
그들은 2층으로 올라갔다.
다음 행동은 희극의 한 장면 같았다. 네 사람은 저마다 자기 방문 손잡
이를 한손으로 잡고 복도에 섰다. 그리고 신호에 맞추듯 동시에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빗장을 내리고 자물쇠를 채웠다. 의자를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공포
에 쫓긴 네 사람의 남녀는 이리하여 다음날 아침까지 성채에 틀어박혀
있었다.
필립 롬버드는 문 손잡이 밑에 의자를 밀어붙여 놓고 마음놓이는 듯
커다랗게 숨을 내쉬었다.
그는 화장대 앞으로 가서 거울에 비친 자기의 얼굴을 신기한 듯 바라
보았다.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굉장히 야위었군.」
그는 승냥이 같은 미소를 지었으나, 그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
다. 그리고 서둘러 옷을 벗고 침대로 들어가 팔목시계를 침대 옆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런 다음 서랍을 열었다. 그는 서랍 속에서 권총을 발견하고 멍하니
그곳에 서 있었다.
베러 크레이슨은 침대에 누웠다. 한쪽에서 촛불이 타고 있었다. 끄고
싶지 않았다. 어둠이 무서웠던 것이다.
그녀는 몇 번이나 자신에게 되풀이 들려주었다.
「내일 아침까지는 무사하다. 어젯밤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늘 밤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겠지. 아니, 일어날 리 없어. 빗장을
걸고 열쇠를 채웠다. 아무도 들어올 수 없어…….」
갑자기 그녀는 한 가지 생각을 해냈다. 그렇다! 이 방에 있으면 된다!
열쇠를 잠그고 가만히 들어앉아 있는 것이다! 먹는 것은 아무래도 좋다.
구원의 손이 미칠 때까지 이 방에 있으면 안전하다! 하루든――이틀이든
――.
이곳에 있으면 된다. 그러나 있을 수 있을까. 몇 시간이나 아무와도 이
야기하지 않고 하는 일없이 생각만 하면서…….
그녀는 콘월에서의 일, 시릴에게 한 말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귀찮도록
매달리는 소년이었다.
「크레이슨 선생님, 왜 바위까지 헤엄쳐 가면 안 되나요? 나는 헤엄쳐
갈 수 있는데.」
거기에 대답한 것은 그녀의 목소리였던 것일까?
「물론 헤엄쳐 갈 수 있어, 시릴. 알고 있어요.」
「그럼, 가도 되지요, 크레이슨 선생님?」
「하지만 시릴, 어머니가 안 된다고 말씀하셨잖아. 그러니 이렇게 해.
내일 바위까지 헤엄쳐 가. 내가 바닷가에서 어머니에게 말을 걸어 눈치채
지 못하게 하겠어. 그리고 어머니가 알아 차렸을 때, 네가 바위 위에 서
서 힘차게 손을 흔들어 보이는 거야. 어머니는 틀림없이 깜짝 놀라시겠
지.」
「고마워요, 크레이슨 선생님.」
그렇다! 내일이 되면 유고는 뉴기니아에 간다. 그가 돌아왔을 때는 모
든 게 끝난 뒤일 것이다.
그러나 만일 잘 안 된다면? 시릴은 구조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가 말
하겠지.
「크레이슨 선생님이 괜찮다고 했어요.」
그래서 어떻다는 것인가. 그때는 좀 위협하면 된다.
「왜 거짓말하는 거야, 시릴.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
누구나 그녀를 믿으리라. 시릴은 끝까지 거짓말한 것이 되겠지. 그는
그리 정직한 소년이 아니었으니까. 물론 시릴 자신은 알고 있겠지만. 그
런 것을 마음에 둘 필요는 없다.
게다가 잘되지 않을 리 없다. 뒤에서 헤엄쳐 가면 된다. 헤엄치면서 따
라가지는 않는다. 아무도 의심할 수 없다.
유고는 의심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래서 이상한 눈초리로 그녀를 보았
던 것일까? 그래서 신문이 끝나자 서둘러 모습을 감춰 버린 것일까?
그는 한 번도 편지에 답장해 주지 않았다.
유고…….
베러는 침대 속에서 몸을 움직였다.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다. 아니, 유
고를 생각해선 안 된다. 가슴이 아프다! 이제 끝난 일이다. 잊어버리지 않
으면 안 된다. 아까는 왜 유고가 이방에 있는 듯 여겨졌던 것일까?
그녀는 천장을 올려다보고 방 한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검은 갈고리를
보았다. 해초는 거기에서 밑으로 늘어뜨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목줄기에 닿았던 차가운 느낌을 생각해 내고 몸을 떨었다. 그녀
는 천장의 갈고리가 무서워졌다. 그러나 갈고리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
다. 커다랗고 검은 갈고리에서…….
전직 경감 블로어는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있었다. 핏기어린 조그마한
눈이 표정없는 얼굴에서 빛나고 있었다. 먹이에 달려들려 하는 멧돼지처
럼 보였다.
그는 자고 싶지 않았다. 무서운 일이 바로 옆에까지 닥쳐오고 있는 것
이다. 열 사람 가운데 여섯 사람! 그토록 두뇌가 날카롭고 그토록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던 노판사도 다른 사람과 같은 운명이 되고 말았다.
블로어는 잔혹한 만족 같은 것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그 노인은 뭐라고 했던가. 충분히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애써 한 말이지만 이젠 경계할 필요도 없게 되었다. 언제나 자기만이
옳은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더니…….
이제 네 사람밖에 없다. 크레이슨, 롬버드, 암스트롱, 그리고 나다. 곧
누군가가 또 없어지겠지. 그러나 윌리엄 헨리 블로어는 아니다! 자기는
남의 전철을 밟는 사나이가 아니다!
(그러나 권총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것이 마음에 걸린다. 그 권총은…
….)
블로어는 침대 위에 앉아 눈썹을 모으고 조그만 눈을 가늘게 뜨고는
권총 문제를 생각했다. 정적이 깃든 저택 안에서 아래층의 시계가 시간을
알렸다. 12시였다. 마음이 좀 가라앉았다. 그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러
나 옷은 벗지 않았다.
그는 누운 채 경감으로 근무할 때처럼 모든 일을 처음부터 순서있게
생각해 나갔다. 주도면밀한 생각만이 마지막 결정을 짓는 것이다.
초가 거의 다 타들어 가고 있었다. 성냥이 바로 손닿는 곳에 있는 것을
보고 촛불을 불어 껐다. 이상하게도 어둠 속이 되자 그의 눈앞에 여러 가
지 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마치 천년의 공포가 눈을 뜨고 그의 머리
속에서 우위를 다투고 있는 듯했다.
여러 개의 얼굴이 공중에 떠올랐다. 회색 털실을 머리에 뒤집어쓴 판사
의 얼굴, 로저스 부인의 차가운 죽은 얼굴, 앤터니 머스턴의 괴로움에 일
그러진 보랏빛 얼굴…….
또 하나의 얼굴, 안경을 쓰고 조그마한 밀짚빛 수염을 기른 젊은 얼굴.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어디서 보았을까. 이 섬에서 본 얼굴은
아니다. 아니, 더 옛날에 본 얼굴이다.
아무래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리 자주 본 얼굴은 아니다. 경찰에 끌려
온 사나이 같은…….
그렇다! 랜더다! 어째서 지금까지 랜더의 얼굴을 잊고 있었을까? 어제
도 생각하려 했으나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뚜렷이 떠오른
것이다.
랜더에게는 아내가 있었다. 슬픈 얼굴을 한 여윈 여자였다. 14살쯤 된
딸도 있었다. 그들은 지금 어떻게 지낼까? 블로어는 처음으로 그 일을 생
각했다.
(권총! 권총은 어디로 갔는가. 그게 훨씬 중대한 문제다.)
생각하면 할수록 알 수 없어진다. 이 저택 안 사람이 갖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데…….
아래층에서 시계가 1시를 쳤다.
블로어는 갑자기 침대 위에 벌떡 일어나 앉았다. 무슨 소리가 들려 온
것이다. 들릴 듯 말 듯한 소리였다. 문 밖 어디선가 들려 왔다.
칠흙같이 어두운 집안에서 움직이는 사람이 있다. 얼굴에 땀이 흘러내
렸다. 누구일까. 복도를 조용히 걷고 있다. 무슨 일을 꾸미고 있음에 틀림
없다.
블로어는 소리나지 않게 침대에서 내려와 문 안쪽에 서서 귀를 기울였
다. 이미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히 소리가 들려 왔었다.
바로 문 밖에서 발소리가 들려 왔던 것이다. 그는 찬물을 뒤집어쓴 듯 긴
장했다. 누군가가 발소리를 죽여 어둠 속을 걷고 있다. 그는 귀를 곤두세
웠다. 그러나 그 소린 두 번 다시 들리지 않았다.
블로어는 새로운 유혹에 사로잡혔다. 문 밖으로 나가서 조사해 보고 싶
어진 것이다. 어둠 속을 돌아다니는 사람은 누구일까. 그러나 문을 여는
것은 위험하다. 그때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블로어는 가만히 선 채 귀를 쫑긋했다. 이번에는 여러 곳에서 갖가지
소리가 들려 왔다. 물건 부딪치는 소리, 옷자락 스치는 소리, 나지막히 속
삭이는 소리. 그러나 그 소리들이 망상에 의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별안간 망상에서 우러난 것이 아닌 소리가 들려 왔다.
겨우 들릴락말락한 발소리였다. 블로어처럼 귀를 곤두세운 사람에게나 들
릴까말까한 희미한 발소리였다.
발소리는 조용히 복도를 걸어 다가왔다. 롬버드와 암스트롱의 방은 층
계 건너편 복도에 있었다. 발소리는 그의 방 앞을 멈추지 않고 지나갔다.
블로어는 마음을 정했다. 누구인지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발소리는 그
의 방 앞을 지나 아래층으로 내려간 것 같다. 어디에 가는 것일까? 블로
어는 한번 마음을 정하면 재빠르게 행동하는 사나이였다. 몸집이 탄탄하
여 둔한 것처럼 보이나 뜻밖에 몸놀림이 가벼웠다.
그는 침대로 돌아가 성냥을 주머니에 넣고 전기 스탠드의 플러그를 뽑
아 코드를 스탠드 다리에 감았다. 크롬제 스탠드로 무거운 에보나이트가
붙어 있었다. 무기로서 안성맞춤이었다.
그는 발소리를 죽이며 문 쪽으로 가서 손잡이 밑에 밀어붙여 놓았던
의자를 치우고 소리나지 않게 빗장을 풀어 문을 열었다.
그는 복도로 나왔다. 아래층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 왔다. 블로어는
양말신은 발로 소리나지 않게 층계 아래로 달려갔다. 그때 왜 소리가 들
렸는지를 알았다.
바람이 완전히 자고, 아마 하늘도 맑게 개인 것으로 여겨졌다. 창 틈으
로 엷은 달빛이 새어 들어와 아래층 홀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블로
어는 정면 문으로 나가는 사람 그림자를 보았다.
그는 층계를 뛰어 내려가려다가 멈춰 섰다. 위험한 찰나였다! 그를 집
밖으로 끌어내려는 술책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방 사나이도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2층의 세 침실 가운데
하나는 비어 있을 것이다. 어느 방이 비어 있는지 그것만 확인하면 된다!
블로어는 급히 복도로 돌아왔다. 처음에 암스트롱 의사의 방문을 노크
했다. 대답이 없었다. 그는 잠깐 기다렸다가 필립 롬버드의 방으로 갔다.
곧 대답이 있었다.
「누구요?」
「블로어요. 암스트롱이 방에 없는 것 같소.」
「……기다려 주오.」
그는 반대편 복도로 뛰어가 끝에 있는 방문을 노크했다.
「크레이슨 양, 크레이슨 양.」
베러가 놀라며 대답했다.
「누구세요? 왜 그러세요?」
「걱정할 것 없소, 크레이슨 양. 기다려 주오. 다시 돌아올 테니까.」
그는 롬버드의 방으로 돌아왔다. 문이 열리고 롬버드가 왼손에 촛불을
들고 나타났다. 잠옷 위에 바지를 입고 있었다.
롬버드는 날카롭게 말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요?」
블로어는 급히 설명했다. 롬버드의 눈이 빛났다.
「암스트롱이라고? 그럼, 그 녀석이었을까?」
그들은 의사의 방 앞으로 갔다.
「블로어, 미안하지만 확인해 보지 않고는 믿을 수가 없소.」
그는 문을 요란하게 두드렸다.
「암스트롱! 암스트롱!」
대답이 없었다. 롬버드는 무릎꿇고 열쇠 구멍으로 방안을 들여다보았
다. 그리고 새끼손가락으로 열쇠 구멍을 후비며 말했다.
「안에 열쇠가 없소.」
블로어가 말했다.
「문 밖에서 자물쇠를 채우고 열쇠를 가져간 거요.」
롬버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있을 수 있는 일이오. 이번에야말로 잡아야 하오! 잠깐 기다려 주오.
」
롬버드는 베러의 방으로 뛰어갔다.
「베러!」
「어떻게 되었어요?」
「우리는 암스트롱을 찾으러 가오. 그가 방에 없소. 어떤 일이 있어도
문을 열면 안 되오. 알았소?」
「알았어요.」
「혹시 암스트롱이 돌아와 내가 살해되었다고 해도 믿어서는 안 되오.
알겠소? 블로어나 내가 부르지 않는 한 문을 열어선 안 되오.」
「알았어요. 나도 그처럼 바보는 아니예요.」
「좋소.」
그는 블로어 곁으로 돌아갔다.
「자, 갑시다! 수색이오.」
블로어가 말했다.
「주의하는 게 좋소. 녀석은 권총을 갖고 있으니까.」
필립 롬버드는 층계를 뛰어 내려가며 웃었다.
「그렇지 않소.」
그는 현관문을 열며 말했다.
「문고리가 풀려 있군. 돌아왔을 때 손쉽게 열 수 있게 되어 있소.」
그는 말을 이었다.
「권총은 내가 갖고 있소.」
그러면서 주머니에서 권총 총구를 내보였다.
「어젯밤 서랍 속에 돌아와 있었소.」
블로어는 저택 현관 앞에 멈춰 섰다. 얼굴빛이 달라졌다. 그것을 보고
롬버드가 말했다.
「걱정 마시오, 블로어. 당신을 쏘지는 않겠소. 같이 가는 게 싫으면 집
에 남아서 방안에 처박혀 있어도 좋소. 나는 암스트롱을 잡겠소!」
그는 달빛 속으로 달려나갔다. 블로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 뒤를 따
라가며 생각했다.
(스스로 위험한 곳에 뛰어드는 셈이지만, 그러나…….)
그는 권총 가진 범인을 상대한 일이 몇 차례나 있었다. 비록 어딘가 모
자라는 점이 있다 하더라도 용감하기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위험해도 사나이답게 싸우자. 눈에 보이는 위험은 두렵지 않다. 그가
공포를 느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위험인 것이다.
베러는 일어나 옷을 입었다. 그녀는 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믿음직스
러운 문이었다. 열쇠도 채워져 있다. 손잡이 밑에는 의자가 놓여 있었다.
사람의 힘으로는 밀어서 깨뜨릴 수 없다.
범인은 힘센 사나이는 아니다. 살인을 저지르는 데에도 힘보다 책략에
의하는 사나이인 것이다.
그가 쓸지도 모르는 수단을 그녀는 생각해 보았다. 롬버드가 말한 대로
두 사람 가운데 하나가 죽었다고 하며 그녀에게 달려올지도 모른다. 또는
중상을 입은 것같이 꾸며 문 밖에서 신음소리를 낼지도 모른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경우가 생각되었다. 저택에 불이 났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정말로 불을 지를지도 모른다. 그렇다,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두
남자를 집 밖으로 꾀어낸 뒤 미리 뿌려 놓은 휘발유에 불을 지른다.
그런데 자기는 아무것도 모르고 엄중히 방비된 방안에 있다. 정신을 차
렸을 때는 이미 늦다.
베러는 창가로 갔다. 뛰어내리자――여차하면 여기로 달아나자. 뛰어내
리지 않으면 안 되는데, 마침 밑에는 꽃밭이 있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 일기장을 꺼내 아름다운 글씨체로 쓰기 시작했다.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이다.
갑자기 그녀는 몸을 굳혔다. 무슨 소리가 들려 온 것이다. 유리가 깨지
는 듯한 소리였다. 아래층 어디에선가 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귀기울였
다. 그러나 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았다.
가만가만히 걷고 있는 발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층계를 밟는
소리, 옷스치는 소리. 그러나 정말로 들렸는지 어떤지 알 수 없었다. 그리
고 블로어가 그랬듯, 그녀는 자기가 망상에 사로잡힌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에 더욱 뚜렷이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래층에서 사람
이 걷고 있다. 소리도 들려 왔다. 그리고 층계를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리
더니 이어서 문이 열리는 소리, 닫히는 소리, 지붕으로 올라가는 발소리,
이윽고 발소리는 그녀의 방쪽으로 복도를 걸어왔다.
롬버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베러, 아무 일도 없었소?」
「네, 어떻게 되었어요?」
블로어의 목소리도 들렸다.
「안으로 들어가게 해주오.」
베러는 의자를 치우고 열쇠를 돌린 다음 다음 고리를 풀고 문을 열었
다.
두 사나이는 숨을 죽이고 있었다. 발과 바짓가랑이가 흠뻑 젖어 있었
다.
그녀는 다시 말했다.
「어떻게 되었지요?」
롬버드가 대답했다.
「암스트롱이 없어졌소.」
베러가 큰소리로 외쳤다.
「뭐라고요?」
롬버드가 말했다.
「섬에서 사라져 버렸소.」
이어서 블로어가 말했다.
「그렇다! 요술쟁이같이 사라져 버렸소!」
「하지만 그럴 리 없어요. 어딘가에 숨어 있을 거예요.」
블로어가 말했다.
「아니, 숨어 있지 않소. 이 섬에는 숨을 곳이 없소. 아무데도 없소. 달
이 밝은데 보이지 않을 리 없소.」
베러가 말했다.
「저택으로 돌아왔을지도 몰라요!」
블로어가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집안도 찾아보았소. 찾는 소리가 들렸을거요. 그는
여기에 없소.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소!」
베러가 말했다.
「믿어지지 않아요.」
그러자 롬버드가 말했다.
「그러나 틀림없소. 틀림없다는 사실이 있소. 식당 유리창이 한 장 깨
어져 있고, 테이블 위에 인디언 인형이 세 개가 되어 있소.」
제 목 : [애-크]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15
올린이 : 매직라인(한창욱 ) 96/11/24 22:33 읽음 : 73 [7m관련자료 있음(TL)[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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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마지막 세 사람
세 사람은 부엌 테이블에 앉아 아침 식사를 했다. 밖에는 태양이 빛나
고 있었다. 쾌청한 아침이었다. 태풍은 완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날씨의 변화는 세 사람의 기분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악몽에서 깨
어난 듯 느껴졌다. 아직 위험은 남아 있지만, 대낮의 위험이었다. 밖에서
태풍이 미친 듯 불어닥치고 있던 때 그들을 감쌌던 공포의 분위기는 이
미 사라져 버렸다.
롬버드가 말했다.
「섬의 가장 높은 곳에서 거울로 신호를 보냅시다. 언덕에 올라 있는
사람의 눈에 띄면 SOS라는 것을 알아차리겠지. 그리고 밤이 되면 신호불
을 피웁시다. 다만 장작이 얼마 남지 않았고, 놀고 있는 거라고 생각할지
도 모르지만…….」
베러가 말했다.
「신호를 알아차리는 사람이 반드시 있을 거예요. 해지기 전에 꼭 구하
러 와줄 거예요.」
「날씨는 좋아졌지만 파도가 아직 높소. 내일이 아니면 배를 섬에 댈
수 없을 거요.」
베러가 부르짓듯 말했다.
「이곳에서 또 하룻밤을 보내야 하나요?」
롬버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24시간만 버티면 되오. 24시간만 무사하면 이제 우리들 세상이오!」
블로어가 기침을 하면서 말했다.
「그러나 사태를 잘 관찰해 두지 않으면 안 되오. 암스트롱은 어떻게
되었을까?」
롬버드가 말했다.
「증거가 하나 있소. 인디언 인형이 세 개밖에 남지 않았소. 암스트롱
은 죽은 거요.」
베러가 말했다.
「그렇다면 왜 시체가 없지요?」
블로어가 말했다.
「그렇소. 어디 있을까?」
롬버드는 머리를 저었다.
「그것이 이상하단 말이오. 짐작이 안 가오.」
블로어가 말했다.
「바다에 집어 던져 버렸는지도 모르오.」
롬버드가 날카롭게 물었다.
「누구일까? 당신인가! 나인가! 당신은 그가 집에서 나가는 것을 보았
소. 그리고 내 방으로 와서 함께 수색하러 나갔소. 내가 범인이라면, 나는
그를 죽인 뒤 시체를 치울 시간이 없었소.」
블로어가 말했다.
「그건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알고 있는 게 하나 있소.」
「뭐요.」
「권총이오. 당신은 권총을 갖고 있소. 줄곧 갖고 있었는지도 모르오.」
「무슨 말이오, 블로어. 모두 몸과 방을 수색당했잖소?」
「그전에 숨겨 두었다가 나중에 찾아왔다고 생각되오.」
「서랍 속에 되돌아와 있었다고 한 말을 못 믿는 거요? 나 자신이 이
토록 놀란 일은 태어나서 처음이오.」
「그런 일이 믿어질 거라고 생각하오! 암스트롱이든 그 밖의 누구든 한
번 훔친 권총을 돌려줄 리 없소.」
롬버드는 어깨를 으쓱하며 내뱉듯 말했다.
「나로선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소. 나 자신도 믿어지지 않으니
까.」
블로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도 믿지 못하오. 그래, 더 좋은 구실이 생각나지 않소?」
「그게 내가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소?」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소.」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뿐이오.」
「롬버드, 당신이 정직하게 말하고 있다면…….」
「언제 내가 정직하지 않았소? 나는 한 번도 거짓말한 적 없소.」
블로어는 상관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당신이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다면 취할 행동은 하나밖에 없소. 당신
이 권총을 갖고 있는 한 나와 크레이슨 양은 당신 생각대로 될 거요. 권
총을 약품과 함께 두고 당신과 내가 열쇠를 갖는 게 가장 공평한 일이오.
」
롬버드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는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바보 같은 소리를 해선 안 되오.」
「찬성하지 않는 거요?」
「찬성할 수 없소. 권총은 내 것이오. 내 몸을 지키기 위해 필요하오.」
블로어가 말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밖에 없소.」
「내가 UN 오윈이라는 거요? 어떻게 생각하든 당신 마음대로요. 그러
나 내가 오윈이었다면 왜 어젯밤 당신을 쏘아 죽이지 않았겠소? 스무 번
쯤이나 기회가 있었는데.」
블로어는 머리를 저었다.
「그건 알 수 없소. 무슨 까닭이 있었겠지.」
베러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두 사람 모두 머리가 전혀 돌아가지 않는군요.」
롬버드가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뭐라고?」
「두 분 다 저 자장가를 잊고 있어요. 거기에 증거가 있잖아요.」
그녀는 자장가 한 구절을 외었다.
「네 인디언 소년이 바다로 나갔다. 한 소년이 훈제 청어에 먹혀 세 소
년이 되었다. 훈제 청어――그것이 실마리예요. 암스트롱은 죽지 않았을
거예요. 인디언 인형을 하나 줄여 죽은 것같이 보인 거예요.
당신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암스트롱은 아직 섬에 있어요. 훈
제 청어로 사람 눈을 멀게 한다는 이야기가 있잖아요(사냥개를 길들일 때
훈제 청어를 쓰는 데서 유래된 말로, <길에 훈제 청어를 놓는다>는 주의
를 다른 데로 돌린다는 뜻임).」
롬버드가 말했다.
「그렇군. 크레이슨 양이 이야기한 대로일지도 모르오.」
블로어가 말했다.
「그렇다며누 녀석은 어디에 있을까? 집 안팎을 모두 찾아보았잖소.」
베러는 비웃듯 말했다.
「권총을 찾을 때도 보이지는 않았지만, 집안 어딘가에 있었잖아요?」
롬버드가 말했다.
「사람과 권총은 크기가 다르오.」
「그렇다 해도 내 말은 틀림없다고 생각해요.」
블로어가 옆에서 말했다.
「하지만 스스로 실마리를 주기야 할까? 훈제 <청어>라고 하지 않고
다른 말을 써도 되었을 거요.」
베러는 열을 올리며 말했다.
「아직도 모르겠어요? 범인은 미치광이예요. 자장가대로 죽이고 있으
니, 미친 녀석이 하는 짓이지요. 판사에게 진홍빛 커튼을 씌우고, 로저스
는 장작을 패고 있을 때 죽였으며, 로저스 부인을 언제까지나 잠에서 깨
어나지 못하게 했고, 미스 브랜트가 죽었을 때 벌을 날아다니게 해둔 일
등 정상적인 정신을 지닌 사람의 짓이 아니예요! 모두 자장가대로 되어가
고 있어요.」
블로어가 말했다.
「과연 당신 말대로요.」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그러나 이 섬에 동물원은 없소. 이 다음은 자장가대로 되지 못할 거
요.」
베러가 큰소리로 말했다.
「있어요! 동물은 우리들이에요! 어젯밤의 우리들은 인간이라고 할 수
없었어요. 우리들이 동물이에요.」
그들은 오전 동안 절벽 위에서 육지 쪽으로 거울을 반사시키며 보냈다.
응답은 없었다. 하늘은 높푸르고 상쾌한 미풍이 불고 있었다. 그러나 아
직 파도가 높아 바다에 배는 한 척도 나와 있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섬을 수색했다. 의사의 모습은 아무데도 없었다.
베러는 서 있는 곳에서 저택을 바라보았다.
「밖에 있는 편이 무섭지 않아요. 이젠 저택 안으로 들어가지 말기로
해요.」
롬버드가 말했다.
「좋은 생각이오. 확실히 여기 있으면 안전하오. 가까이 오는 사람이
있으면 멀리서도 보이니까.」
「여기에 있어요.」
블로어가 말했다.
「밤에는 어쩌오.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오.」
베러는 몸을 떨었다.
「나는 참을 수 없어요. 이젠 집안에서 밤을 지낼 수 없어요!」
롬버드가 말했다.
「자물쇠를 채우고 있으면 무서울 것 없소.」
그녀는 중얼거렸다.
「그럴지도 모르지만……이렇게 햇볕을 쬐고 있으니 기분이 좋아요.」
그녀는 손을 길게 뻗으며 생각했다.
(이상한 일이다. 이렇게 있으니 행복에 감싸여 있는 것 같지만, 정말은
아직 큰 위험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기분이 조금도 들지 않는
다. 내가 죽는 일 따윈…….)
블로어는 팔목시계를 보았다.
「2시군. 점심 식사는 어떻게 하지?」
베러가 말했다.
「저택으로 돌아가기 싫어요. 나는 여기 있겠어요.」
「하지만 뭐든지 먹어 두지 않으면…….」
「난 소 혓바닥 통조림을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빠요.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요. 2, 3일쯤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괜찮아요.」
「나는 한끼도 식사를 거르고 싶지 않소. 당신은 어떻게 하겠소, 롬버
드?」
「나도 소 혓바닥 통조림은 먹고 싶지 않소. 크레이슨 양과 여기 있겠
소.」
블로어는 망설였다.
베러가 말했다.
「난 괜찮아요. 당신이 없더라도 롬버드 씨가 나를 쏠 것 같지 않아요.
」
블로어는 말했다.
「당신이 그렇다면 할 수 없지만 서로 떨어지지 않기로 약속했으니까.
」
「사자굴로 들어가자고 한 것은 당신이잖소. 뭣하면 내가 함께 가도 괜
찮소.」
「아니, 안 되오. 당신은 여기 있어 주오.」
롬버드는 웃었다.
「아직도 나를 경계하고 있소? 죽이려면 지금이라도 둘 다 죽일 수 있
소.」
「그런 그것은 계획과 틀리오. 한 번에 한 사람씩……죽이는 방법에 특
색이 있거든.」
롬버드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군. 당신은 잘 알고 있구먼.」
「알고 있다뿐이겠소. 그러나 혼자 저택으로 가는 것은 기분좋은 일이
아니군.」
롬버드는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내 권총을 빌려 달라는 거요? 대답은 <노>요. 거절하겠소.
모처럼의 부탁이지만, 그리 간단히 내줄 수는 없소.」
블로어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저택 쪽으로 뻗어 있는 가파른 언덕길
을 올라갔다.
롬버드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동물원에서 먹이 주는 시간이군. 동물은 습관에 충실하니까!」
베러가 근심스러운 듯 말했다.
「혼자 가는 게 위험하지 않을까요?」
「아니, 그럴 리 없소. 암스트롱은 무기를 갖고 있지 않고, 힘은 블로어
가 두 배나 세니까, 그뿐 아니라 아무리 생각해도 암스트롱 집안에 있을
리 없소. 나는 알고 있소.」
「그럼, 블로어가…….」
「그렇소.」
「정말 그렇게 믿나요?」
「알겠소? 당신은 블로어의 이야기를 들었겠지. 그가 말한 게 사실이라
면, 나는 암스트롱의 실종과 관계없소. 그의 이야기가 그것을 증명해 주
오.
그러나 그에 대해서는 알 수 없소. 발소리를 들었다는 것이며, 밖으로
나가는 사람 그림자를 보았다고 한 건 거짓말일지도 모르오. 그전에 암스
트롱을 죽였는지도 모르오.」
「어떤 방법으로?」
롬버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모르오. 그러나 우리는 블로어만 경계하고 있으면 되오. 저 사
나이에 대해선 아무것도 아는 바 없소. 경감이었다는 것도 터무니없는 이
야기인지 모르오.
머리가 돌아 버린 부자인지, 탈옥한 흉악범인지, 어떤 인간인지 알지
못하오. 단 하나 틀림없는 건 지금까지의 살인이 모두 그의 짓으로 여겨
진다는 것뿐이오.」
베러는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가 우리를 습격해 온다면…….」
롬버드는 주머니의 권총을 두드려 보였다.
「내게 맡겨 주시오. 당신은 나를 믿고 있을 거요. 나는 당신을 쏘지
않소.」
「누군가를 믿지 않고는 있을 수 없어요. 그래도 정말을 말한다면, 당
신 생각은 틀렸다고 여겨요. 나는 지금까지도 암스트롱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갑자기 그녀는 롬버드 쪽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늘 누군가가 보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나요?」
롬버드가 말했다.
「신경 탓이오.」
「그럼, 느끼고 있군요.」
그녀는 떨며 롬버드 옆으로 몸을 살짝 붙였다.
「난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판사 두 사람이 미국의 작은 도
시에 왔지요. 그들은 어디까지나 정의를 주장하며 아무리 작은 일도 용서
치 않았어요. 왜냐하면 그들은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었던 거예요.」
롬버드는 눈썹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하늘에서 왔단 말이오? 아니, 나는 그런 일은 믿을 수 없소. 이 사건
은 어디까지나 인간 냄새가 짙에 풍기고 있소!」
베러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나는……때때로…….」
롬버드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것은 양심 때문이오.」
그는 잠시 묵묵히 있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그 아이를 물에 빠뜨렸군.」
베러가 외쳤다.
「아니예요! 당신이 그런 이야기할 권리는 없어요!」
그는 웃으며 말했다.
「분명히 빠뜨린 것이오. 이유는 모르겠소. 아마 남자가 관련되어 있었
겠지. 그렇지요?」
심한 피로가 갑자기 베러를 덮쳐 왔다. 그녀는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남자가 있었어요.」
롬버드는 부드럽게 말했다.
「고맙소. 그것만 들으면 충분하오.」
베러가 별안간 고쳐 앉았다. 그녀는 큰소리로 외쳤다.
「무슨 일일까요. 지진이 아닌지 모르겠군요.」
「아니, 그렇지 않소. 그러나 이상한 소리가 난 것 같소. 땅이 울리는
소리가 들려 온 듯한데. 그리고, 외침 소리가 들린 것 같소…….」
그들은 저택을 지켜 보았다.
롬버드가 말했다.
「저쪽에서 들려 왔소. 가봅시다.」
「아니, 가기 싫어요.」
「마음대로 하오. 나는 가보겠소.」
베러는 체념한 듯 말했다.
「좋아요, 같이 가겠어요.」
그들은 비탈길을 올라 저택 쪽으로 갔다. 테라스에 밝은 햇빛이 비치고
있었다. 그들은 정면으로 들어가지 않고 저택을 끼고 돌기 시작했다.
동쪽 테라스에서 그들은 블로어를 발견했다. 블로어는 커다란 흰 대리
석으로 머리를 맞고 테라스의 돌 위에 넘어져 있었다.
롬버드는 위를 쳐다보았다.
「저 창문은 누구의 방이오?」
베러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 방이에요. 저것은 벽난로 위에 있던 시계예요. 그래요, 곰 모양을
하고 있었어요.」
그녀는 다시 한 번 떨리는 목소리로 되풀이했다.
「곰 모양을 하고 있었어요…….」
롬버드는 그녀의 어깨를 눌렀다.
「이제 알았소. 암스트롱은 저택 안에 숨어 있소. 내가 가서 잡겠소!」
베러는 그의 팔을 붙들고 외쳤다.
「안 돼요. 이제는 우리 차례예요! 우리들이 찾으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롬버드는 발을 멈췄다.
「그럴지도 모르겠군.」
「아무튼 내가 옳았다는 것을 인정하겠지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말대로요. 틀림없이 암스트롱이오. 그러나 어디에 숨어 있었을
까? 그토록 찾았었는데…….」
베러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어젯밤에 못 찾았다면, 지금도 찾을 수 없어요. 그것이 상식이에요.」
롬버드는 그 말을 받아 말했다.
「그건 그렇지만…….」
「어딘가에 은밀히 숨을 곳을 만든 거예요. 오래된 저택에 있는 밀실
같은 것을 만들어 놓았을 거예요.」
「이곳은 그런 저택이 아니오.」
「하지만 만들 수는 있어요.」
필립 롬버드는 고개를 저었다.
「첫날 아침 우리들은 저택 안을 면밀히 살펴보았소. 그런 곳은 없었
소.」
「하지만 있을 거예요.」
「그렇다면 보고 싶소.」
베러가 소리쳤다.
「그래요, 보고 싶겠지요! 그는 그것을 알고 있는 거예요. 거기서 당신
을 기다리고 있어요!」
롬버드는 주머니에서 권총을 반쯤 꺼내 보였다.
「나는 이것을 갖고 있소.」
「하지만 당신은 블로어는 괜찮다고 말했어요. 암스트롱은 상대가 안
된다고 했지요. 게다가 블로어는 방심하지 않았을 거예요. 당신은 암스트
롱이 미치광이라는 것을 잊고 있어요. 미치광이는 여느 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일을 생각해 내요.」
롬버드는 권총을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돌아갑시다.」
이윽고 롬버드가 말했다.
「밤이 되면 어떻게 할 거요?」
베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재촉하듯 말했다.
「그것은 생각지 않았소?」
그녀는 몸을 떨며 말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나는 무서워서…….」
롬버드는 위로하듯 말했다.
「오늘 밤은 날씨가 좋소, 달도 떠 있고. 절벽 위에 있을 만한 곳을 찾
아봅시다. 그곳에 앉아서 아침이 되기를 기다리면 되오.
그러나 잠들면 안 되오. 끝까지 경계해야 하오. 만일 누가 온다면 내가
쏘아 죽이겠소! 그러나 그 얇은 옷으로는 춥겠지.」
베러는 차갑게 웃었다.
「춥다고요? 죽어 버리면 더 차갑게 돼요.」
필립 롬버드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군, 그 말대로요.」
베러는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 듯 몸을 움직였다.
「여기에 가만히 있으면 미칠 것 같아요. 좀 걸어 다니도록 해요.」
「좋겠지.」
그들은 바다 쪽으로 내밀어진 바위 위를 천천히 걸어갔다.
해는 서쪽으로 기울이고 있었다. 부드러운 금빛 햇살이 두 사람의 몸을
감쌌다.
베러가 갑자기 신경질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헤엄칠 수 없는 게 안타깝군요.」
롬버드는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갑자기 그가 말했다.
「저게 무엇일까? 저기 큰 바위 곁에 보이는 것은……아니, 조금 왼쪽
바위 곁이오.」
베러가 말했다.
「옷 같은데요.」
「헤엄치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
롬버드는 웃음지었다.
「이상한데. 해초겠지.」
「가봐요.」
걸어가며 롬버드가 말했다.
「옷이군. 틀림없는 옷이오. 구두도 있군. 여기를 따라 가봅시다.」
그들은 바위 사이를 지나 가까이 갔다. 갑자기 베러가 멈춰섰다.
「옷뿐이 아니예요. 사람이에요.」
그것은 바위 사이에 끼어 있는 사람이었다. 만조 때 떠밀려 올라온 것
같았다. 그들은 바로 옆의 커다란 바위 위에서 들여다보았다. 보랏빛이
되어 버린 얼굴, 섬뜩해 보이는 물에 빠져 죽은 얼굴…….
롬버드가 말했다.
「보시오! 암스트롱이오…….」
제 목 : [애-크]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16
올린이 : 매직라인(한창욱 ) 96/11/24 22:37 읽음 : 70 [7m관련자료 있음(TL)[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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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시간이 흘렀다. 세계는 어지럽게 돌았다. 때는 움직이지 않고……가만
히 멈춰 천년을 흘려 보냈다.
아니, 1, 2분 지났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바위 위에 서서 죽은 사나이
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베러 크레이슨과 필립 롬버드는 조용히 머리를 들
고 눈을 마주보았다.
롬버드는 웃었다.
「이제 알았소, 베러.」
베러가 말했다.
「섬에는 아무도 없어요. 우리 두 사람뿐…….」
거의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였다.
롬버드가 말했다.
「그렇소. 이로써 우리 입장도 알게 되었군.」
「저 대리석 곰이 어떻게 떨어졌는지 모르겠어요.」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훌륭한 계략이야. 뛰어난 솜씨야.」
그들은 다시 눈을 마주보았다. 베러는 생각했다. 왜 이 사나이의 얼굴
을 조심해 보지 않았던가. 승냥이. 그렇다, 승냥이의 얼굴이다. 저 무서운
이빨을 보면 안다.
롬버드가 말했다. 무서운 울림을 띤 목소리였다.
「드디어 끝이다. 겨우 진실이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은 끝났
다.」
베러는 조용히 말했다.
「알고 있어요.」
그녀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매커서 장군은 바다를 보고 있었다. 언제였
던가, 어제였던가. 아니, 그저께였던가. 그도 그렇게 말했다.
「이것이 종말이오…….」
그는 그때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기뻐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베
러는 그 말에 반발을 느꼈다. 아니, 종말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녀는 죽어 있는 사나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가엾어라.」
롬버드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뭐라고? 그게 여자의 동정인가?」
「그래요. 당신은 전혀 가엾게 생각되지 않나요?」
「적어도 너에 대해서는 느끼지 않아. 기대하지 말아 주기 바란다.」
베러는 다시금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옮겨야겠어요. 저택으로 날라 가요.」
「다른 피해자와 동무가 되게 하려는 건가? 일은 확실하게 하지 않으
면 안 되니까. 나라면 그곳에 그대로 내버려두겠어.」
「아무튼 파도가 미치지 않는 곳까지 끌어올려요.」
롬버드는 웃었다.
「소원이라면.」
그는 몸을 굽혀 손을 뻗었다. 베러도 그 곁으로 가서 도와주었다.
롬버드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즐거운 일은 아니군.」
그들은 만조가 되어도 물결이 닿지 않는 곳까지 가까스로 시체를 끌어
올렸다.
롬버드는 몸을 쭉 펴며 말했다.
「기분이 좀 좋아졌소?」
「그래요.」
베러의 말투가 그를 흠칫 놀라게 했다. 그는 당황하여 돌아보았다. 주
머니에 손을 대보지 않아도 비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베러가 2야드
쯤 뒤로 물러서서 권총을 그에게 겨누고 있었던 것이다.
롬버드가 말했다.
「뜻밖의 동정을 보인 것은 그 목적 때문이었군!」
베러는 고개를 끄덕였다. 권총을 꼭 쥐고 겨냥한 채였다.
죽음은 필립 롬버드의 바로 곁에까지 이르러 있었다. 죽음이 이토록 가
깝게 그에게 닥쳐온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굽히지 않았
다.
「권총을 돌려줘.」
베러가 웃었다.
「돌려주지.」
그는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어떻게 할까, 설득해 볼까, 말을 잘 들을까,
그보다도 뛰어들까, 지금까지 롬버드는 언제나 위험한 길을 골라서 걸어
왔다.
그는 천천히 말했다.
「내 말을 들어 주오. 나는…….」
그러면서 그는 달려들었다. 표범같이 재빠르게 덤벼들었다. 저도 모르
게 베러는 방아쇠를 당겼다. 롬버드의 몸이 허공에서 멈추더니 땅바닥에
쿵 떨어졌다.
베러는 총구를 겨눈 채 조용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경계할 필요는
없었다. 필립 롬버드는 죽어 있었다. 심장을 꿰뚫려서…….
베러의 마음에 안식이 찾아왔다. 드디어 모든 것이 끝났다. 이제 아무
것도 무서워할 게 없다. 신경을 위협하는 것은 없다. 섬에는 그녀 혼자밖
에 없으니까.
그녀 외에 아홉 구의 시체……그러나 이제 마음에 걸릴 것은 없다. 그
녀는 살아 있는 것이다. 그녀는 그곳에 털썩 주저앉았다. 행복과 평화를
느끼면서, 공포로부터 풀려 나서…….
베러가 가까스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해는 바닷속으로 가라앉
고 있었다. 아무것도 생각할 기분이 나지 않았다. 공포에서 풀려 난 안도
감에 몸을 움직일 기분도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지금 배고픔을 느끼고 졸음이 왔다. 졸음이 훨씬 강했다. 침대
에 몸을 던지고 언제까지나 자고 싶었다. 내일이 되면 구조선이 오겠지.
그러나 지금으로선 그런 일은 아무래도 좋았다. 섬에 있는 것은 이제 두
렵지 않았다. 그녀 말고는 아무도 없는 것이다.
베러는 일어나서 저택을 바라보았다. 이제 무서할 필요없다! 그녀를 기
다리고 있는 공포는 없어진 것이다! 어디에나 있는 근대 건축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겨우 한두 시간 전까지는 저택만 보아도 몸이 부들부들
떨렸었다.
공포――공포란 얼마나 불가사의한 것인가. 그것도 이제는 지나가 버렸
다. 그녀는 무서운 위험을 이겨낸 것이다. 재빠르게 머리를 써서 그녀를
파멸시키려는 적을 때려눕혔다.
그녀는 저택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해는 거의 져서 서쪽 하늘이 짙은
오렌지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베러는 생
각했다. 지금까지의 일은 꿈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지쳐 있었다. 손발이 아프고 눈꺼풀이 무겁게 내리덮이는 듯했
다. 이제 두려워할 것 없다. 자는 것이다. 이제 마음 푹 놓고 자는 것이
다. 인디언 소년이 오직 하나 남겨진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미
소를 떠올렸다.
그녀는 현관문으로 저택에 들어갔다. 저택 안도 평화로 가득 차 있었
다. 베러는 생각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거의 모든 방마다 시체가 눕혀져
있는 집에서 잠자려 하지 않겠지.
부엌에 가서 무엇이든 좀 먹는 게 좋잖을까. 베러는 잠시 생각하고 나
서 아무것도 먹지 않기로 결정했다. 몹시 지쳐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식당문 앞에서 발을 멈췄다. 테이블 한복판에 인디언 인형이 세
개 남아 있었다.
베러는 웃었다.
「아직 있었니? 늦었잖아…….」
그녀는 인형을 두 개 집어 창문 밖으로 내던졌다. 인형은 테라스 돌 위
에 떨어져 부서졌다.
그녀는 남아 있는 마지막 인형을 손에 쥐고 말했다.
「너는 나와 함께 있어 줘. 우리는 이긴 거야.」
홀은 벌써 어두컴컴했다. 베러는 인형을 쥐고 천천히 층계를 올라갔다.
「한 인디언 소년이 뒤에 남았다. 마지막 구절이 어떻게 끝나더라? 그
렇지, 그가 결혼하여 아무도 없었다――.」
결혼해서……이상하게도 그녀는 다시금 유고가 집안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 유고는 2층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문득 베러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바보 같은 생각을 하면 안 돼. 너무 지쳐 있는 거야. 피곤하니까 엉
뚱한 생각을 하게 된 거야.」
그녀는 느릿느릿 층계를 올라갔다.
다 올라갔을 때 그녀의 손에서 무언가 떨어졌다. 카펫이 부드럽고 두터
워서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베러는 권총을 떨어뜨린 것을 알아차리
지 못했다. 그리고 조그마한 인형만을 손에 꼭 쥐고 있었다.
저택은 고요 속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빈집 같지는 않았다. 유고가 2
층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한 인디언 소년이 뒤에 남았다. 마지막 구절이 무엇이었더라? 결혼한
다고 한 것 같은데, 아니 다른 말이었는지도 몰라.」
그녀는 자기 방문 앞까지 왔다. 유고가 방안에서 기다리고 있다. 그녀
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녀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저것은 무엇
일까――천장의 갈고리에서 늘어뜨려진 게 있었다. 목을 조르는 올가미가
만들어져 있는 게 아닌가. 의자도 그 밑에 놓여 있다. 목을 맨 뒤 발로
차 던지기 알맞도록.
이것이 유고가 그녀에게 바라는 일이었다. 그리고 물론 그것이 마지막
구절이었던 것이다.
「그 소년이 목을 매어 아무도 없었다.」
작은 도자기 인형이 그녀의 손에서 떨어졌다. 인형은 바닥을 굴러가 난
로 재받이에 부딪쳐 깨어졌다. 그녀는 그것도 깨닫지 못했다.
베러는 자동 인형처럼 앞으로 나아갔다. 이것이 종말인 것이다. 여기서
물에 젖은 차가운 손이――물론 시릴의 손이었다.
그녀의 목에 닿아…….
「바위까지 헤엄쳐 가도 좋아, 시릴…….」
그건 살인이었던 것이다. 그 말만으로 살인이 이루어진 것이다. 뜻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뒷날이 되어도 그 일은 언제까지나 잊혀지지 않았다.
베러는 몽유병자처럼 지그시 앞을 지켜 보며 의자에 올라섰다. 가느다
란 올가미에 목을 넣었다.
유고가 그곳에 있어 그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을 지켜 보고
있었다.
베러는 의자를 차 던졌다…….
제 목 : [애-크]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에필로그>
올린이 : 매직라인(한창욱 ) 96/11/24 22:39 읽음 : 96 [7m관련자료 있음(TL)[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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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에필로그
런던 경찰국 부경찰국장 토머스 렉 경은 초조해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믿을 수 없어!」
메인 경감은 정중하게 말했다.
「그러시겠어요.」
「열 사람이 섬에 죽어 있다. 살아 남은 것은 한 사람도 없다. 그런 엉
터리 같은 일이 있나!」
「그러나 사실입니다.」
「죽인 자가 있을 게 아닌가?」
「그것을 모르겠습니다.」
「검시 결과 단서가 없나?」
「없습니다. 워그레이브와 롬버드는 권총에 맞았습니다. 워그레이브 머
리를, 롬버드는 심장을 꿰뚫렸지요. 에밀리 브랜트와 앤터니 머스턴은 청
산가리 중독으로 죽었습니다.
로저스 부인은 수면제를 과용했고, 로저스는 후두부가 쪼개졌습니다.
암스트롱은 익사했습니다. 매커서는 후두부를 얻어 맞고, 베러 크레이슨
은 목매어 죽었습니다.」
부경찰국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지독한 사건이군. 처음부터 끝까지.」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초조한 듯 말했다.
「스타클헤이븐 마을 사람들로부터 아무것도 들은 게 없는가? 아무도
모른다고는 하지 않았겠지.」
메인 경감은 어깨를 으쓱했다.
「조그만 고기잡이 마을로 순박한 사람들뿐입니다. 오윈이라는 사람이
섬을 샀다는 것밖에 알지 못합니다.」
「섬의 매매 등 잔일을 한 자가 있겠지?」
「아이적 모리스라는 남자입니다.」
「그는 뭐라고 하던가?」
「아무 말도 듣지 못했습니다. 죽었습니다.」
부경찰국장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리스라는 남자에 대해 조사해 보았나?」
「조사했습니다. 그리 신통한 인간이 아닙니다. 3년 전 베닛의 증권 사
기 사건에 관련되어 있더군요. 증거는 없었지만 관계가 있었던 게 확실합
니다. 마약 밀매도 했던 것 같으나, 역시 증거를 잡지 못했습니다. 굉장히
조심성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이번 인디언 섬 사건에 관련되어 있다는 거로군.」
「그렇습니다. 섬의 매매 계약을 그가 했습니다. 더욱이 실제 매수인은
따로 있다는 것을 그도 밝혀 두고 있습니다.」
「돈은 누가 냈지? 거기에 무슨 단서가 없던가?」
메인 경감은 미소를 지었다.
「그게 없습니다. 모리스는 그런 점에서 꼬리를 잡힐 인간이 아닙니다.
영국에서 으뜸가는 회계사를 동원해도 소용없을 겁니다. 이미 베닛 사건
때 우리는 쓴 잔을 들이켰습니다. 이번에도 매수인 이름을 아무리 수소문
해도 모르겠습니다.」
부경찰국장은 한숨을 쉬었다.
메인 경감은 말을 이었다.
「스티클헤이븐에서도 그가 오윈이라는 사람의 대리인으로서 모든 일
을 처리했습니다. 섬에서 1주일 동안 육지와 교통을 끊고 지내는 내기를
할 테니 어떤 구조를 청하더라도 모르는 체 해 달라고 마을 사람들에게
설명한 것도 모리스입니다.」
「그런 말을 듣고도 마을 사람들은 수상히 여기지 않았단 말인가?」
메인 경감은 어깨를 으쓱했다.
「인디언 섬이 본디 미국의 젊은 부호 엘머 롭슨의 것이었던 사실을
잊고 계십니까? 롭슨은 내내 기상천외한 파티를 열고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도 처음에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으나 차차 익숙해져서 인
디언 섬에 대한 일이라면 어떤 이야기를 들어도 놀라지 않게 된 것 같습
니다.」
부경찰국장은 쓴웃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메인 경감은 말했다.
「더욱이 그들을 섬으로 실어간 프레드 내러컷이라는 사람이 흥미로운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 손님은 롭슨 씨의 손님들과 전혀 달랐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조 신호가 있었다는 말을 듣고, 모리스의 명령이 있었는데도 불구하
고 내러컷이 배를 띄운 것은 초대된 사람들이 롭슨 씨의 손님들과 달리
평범한 사람들뿐이었기 때문이랍니다.」
「그가 보트를 띄운 것은 언제인가?」
「11일 아침, 언덕 위에 있던 보이 스카우트들이 구조 신호를 알아차렸
습니다. 그러나 파도가 거칠어 배를 띄운 것은 12일 오후였습니다. 그때
까지 섬에서 빠져 나온 사람이 없는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태풍 뒤에
바다가 거칠었으니까요.」
「헤엄쳐서 육지로 건너올 수는 없는가?」
「1마일 넘게 떨어져 있고 파도가 거칠어 도저히 헤어칠 수 없습니다.
만일 헤엄쳐서 육지에 닿은 사람이 있었다면, 보이스카우트들이나 절벽
위에서 바다를 보고 있던 사람들 눈에 띄었을 겁니다.」
「저택에 있던 레코드로 어떤 단서를 잡을 수 없었나?」
「제가 조사했습니다. 레코드는 극장이며 영화의 음향 효과를 부탁받고
있는 회사에서 제작되었습니다. 아이적 모리스를 통해 UN 오윈이라는 사
람이 주문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아마추어 연극에 사용한다고 했답니다.
원고는 타이프라이터로 쳤으며, 레코드와 함께 찾아갔다고 합니다.」
「레코드의 내용은 어떤가?」
메인 경감은 한층 더 주의깊게 대답했다.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헛기침을 하고 말을 이었다.
「가능한 조사는 모두 했습니다. 맨 처음 섬에 왔던 로저스 부부에 대
해 말씀드리면, 그들은 확실히 미스 블레이디의 집에서 일했습니다. 미스
블레이디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독살의 의심은 없습니다.
다만 입회했던 의사의 증언에 의하면, 어딘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면
로저스 부부가 적절한 응급 처치를 태만히 했다는 겁니다. 이것은 도저히
증명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다음은 워그레이브 판사입니다. 레코드에 있는 대로 시튼 사건에 판결
을 내린 판사입니다. 덧붙여 말씀드린다면 시튼은 분명 유죄였습니다. 사
형된 뒤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그즈음에는 열 사
람 가운데 아홉 사람은 시튼의 무죄를 믿고 있어 판사의 판결문이 그를
유죄로 이끌었다는 소문이 쫙 퍼졌던 것 같습니다.
크레이슨이라는 아가씨가 가정교사로 있었던 집에서 어린아이가 익사
한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사건과 아무 관계없었던 것 같습
니다. 정말은 소년을 구출하러 조수에 밀려 나가 위험한 찰나에 구출된
듯합니다.」
부경찰국장은 이야기를 재촉했다.
「그 다음은?」
메인 경감은 한숨돌린 뒤 말했다.
「다음은 암스트롱 의사입니다. 이름난 의사로 할리 거리에 진찰실을
갖고 있습니다. 동료 의사 사이에 평판이 좋고, 부정한 수술을 했던 흔적
도 없습니다.
그러나 1925년 아직 리스모어 병원에 근무하고 있을 때, 그가 수술한
크리스라는 여자가 수술대 위에서 죽은 것은 틀림없습니다.
복막염이었는데, 수술이 서툴렀는지도 모릅니다. 아직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경험 부족은 범죄가 되지 않습니다. 물론 동기도
없습니다.
그 다음은 에밀리 브랜트입니다. 비트리스 테일러라는 아가씨는 그녀의
집에서 일하던 하녀였습니다. 임신해서 해고된 뒤 투신 자살했습니다. 뒷
맛이 개운치 않은 이야기입니다만, 이것은 범죄가 되지 않습니다.」
「바로 그걸세. 바로 그 점이야. UN 오윈이라는 법률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사건에 제재를 가하려 했던 거야.」
메인 경감은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머스턴이라는 젊은이는 늘 위험한 운전을 하던 사나이로, 운전면허증
을 두 차례나 압수당했습니다. 존과 루시 캠즈는 그가 케임브리지 부근에
서 치어 죽인 어린아이들입니다. 그 때 그의 친구들이 증인이 되어 사건
은 가벼운 벌금으로 해결되었습니다.
매커서 장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비난받을 점없
는 훌륭한 군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서 리치먼드는 그의 부하로 프랑스
전선에서 전사했습니다. 장군은 그를 사랑했으며, 두 사람 사이에 마찰이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즈음 사령관들이 부하를 너무 희생시킨다는 중상모략이 있었
던 것 같습니다. 매커서 장군 경우도 이런 종류의 중상인 것으로 생각합
니다.」
「있을 수 있는 일이지.」
「필립 롬버드는 해외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법에 저촉되는 일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고, 담이 큰 사나이로 좋은 일
만 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으므로 우리들 눈이 미치지 않은 곳에서 살인을
저질렀는지도 모릅니다. 끝으로 블로어입니다만…….」
메인 경감은 잠시 말을 멈추고 머뭇거렸다.
「아시다시피 경감을 지낸 사람입니다.」
부경찰국장은 내뱉듯 말했다.
「블로어는 나쁜 녀석이야.」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옛날부터 그렇게 여겨 왔어. 그는 꽤 잔꾀 많은 녀석이어서 결
코 꼬리를 드러내지 않아. 랜더 사건에서도 틀림없이 위증하고 있었어.
나는 그것을 꿰뚫어 보았으므로 해리스에게 조사시켰으나 증거를 잡지
못했지. 지금도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렉 경이 말했다.
「아이적 모리스는 죽었다고 했지? 언제 죽었나?」
「8월 8일 밤입니다. 수면제를 과용했는데, 사고인지 자살인지 지금까
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내 추측을 말할까?」
「상상은 하고 있습니다.」
「모리스의 죽음은 우연이 아닐세!」
메인 경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씀하실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부경찰국장은 책상을 두드렸다.
「이런 기괴한 사건은 들은 바 없어! 열 사람이 벌거벗은 바위투성이
섬에 죽어 있는데, 범인도 동기도 살해 방법도 알 수 없다니!」
메인 경감은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동기에 대해서는 추측할 수 있습니다. 묘한 정의감을 가진 미치광이
가 있어 법률로는 벌줄 수 없는 죄를 벌하려 했던 겁니다.
범인은 그와 같은 근거에서 열 사람의 인물을 고른 것으로 생각됩니다.
열 사람 모두 정말로 범죄를 저질렀는지 어떤지는 문제가 되지 않고…….
」
부경찰국장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경감의 말을 가로막았다.
「기다려 주게. 그 점은…….」
그는 말을 멈췄다. 메인 경감은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다. 렉 경은 한숨
쉬며 머리를 저었다.
「이야기를 계속하게. 실마리가 잡힐 듯 생각되었는데, 아무래도 확신
이 서지 않는구먼. 다음 이야기를 듣세.」
메인 경감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결국 사형 집행받을 사람이 열 명 있었던 셈입니다. 그리고 사형은
순조롭게 집행되었지요. UN 오윈은 계획대로 사형을 집행한 뒤 섬에서
모습을 감춰 버렸습니다.」
「그러나 모습을 감추었다고 해도 어떤 방법으로 사라졌는지 설명이
필요한데.」
「말씀드릴 필요도 없이 거기가 중요한 점입니다만, 관계자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오윈이라는 사람은 섬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열 사람
가운데 하나가 오윈이었다고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경찰국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이런 가정 아래 사건을 조립해 보았습니다. 요행히 인디언 섬
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베러 크레이
슨이 일기를 쓰고 있었지요. 에밀리 브랜트도 쓰고 있었습니다.
워그레이브는 메모를 남겼습니다. 간단한 것이었으나 요령있게 씌어 있
었지요. 블로어도 메모를 했습니다. 이들 일기와 메모를 종합해 보니 죽
은 것은 다음과 같은 순서였습니다.
머스턴, 로저스 부인, 메커서, 로저스, 미스 브랜트, 워그레이브…… 워
그레이브가 죽은 뒤부터는 베러 크레이슨의 일기에 암스트롱이 밤중에
저택을 나가 블로어와 롬버드가 뒤쫓아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블로어
의 수첩에는 다만 <암스트롱, 모습을 감추다>라고 씌어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상의 자료를 참고로 하여 거의 완전하게 사건을 해결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암스트롱은 익사했는데, 만일 그가 그 미치
광이였다면 다른 사람들을 살해한 뒤 절벽 아래로 뛰어내려 자살했거나
또는 육지로 헤엄쳐 가려다 익사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 경찰의 증언이 있습니다.
의사는 8월 13일 아침, 섬으로 건너가 시체를 검진했습니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암스트롱은 이미 죽은 지 36시간 이상 지나 있었다고 합니다.
그 밖에는 실마리가 될 만한 증언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만, 암스트롱의
시체는 파도에 밀려올 때까지 8시간 내지 10시간 가까이 물 속에 있었다
고 합니다. 이 증언으로 추정해 본다면, 암스트롱은 10일부터 11일 사이
의 밤 동안 바다에 빠진 게 됩니다.
그것은 이러한 이유에서 설명됩니다. 우리는 그의 시체가 파도에 밀려
바위 사이에 끼어 있었다고 생각되는 곳을 발견했습니다. 바위와 바위 사
이에 그의 것으로 보이는 옷과 머리칼이 좀 붙어 있었지요.
아마도 11일의 만조 때 떠올랐을 것이며, 조사해 본 결과 오전 11시 전
후로 보입니다. 11일 오후부터는 파도가 차츰 가라앉기 시작하여 만조 때
의 수위도 낮아졌습니다. 따라서 암스트롱은 10일반 다른 세 사람을 죽이
고 그날 밤 바다로 들어갔다는 추리가 됩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빠뜨릴 수 없는 사실이 있습니다. 암스트롱의 시체
가 만조 때에도 파도가 미치지 않는 곳까지 끌어올려져 있는 겁니다. 아
무리 파도가 높다 해도 그곳까지는 물결이 닿지 않습니다.
더욱이 어떤 자에 의해 땅 위로 끌어올려진 흔적이 뚜렷합니다. 따라서
암스트롱이 죽은 뒤에도 살아 있는 자가 있었다는 게 확실합니다.」
메인 경감은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이상의 사실에 의해 11일 아침의 일을 추정한다면 이렇습니다. 즉 암
스트롱은 이미 모습을 감춰 버렸습니다. 아마도 물에 빠진 것이겠지요.
남아 있는 것은 롬버드, 블로어, 베러 크레이슨 세 사람이었습니다.
롬버드는 사살되었습니다. 시체가 바닷가에 있었지요. 암스트롱의 시체
가까이에. 베러 크레이슨은 자기 방에서 목매어 죽었습니다. 블로어의 시
체는 테라스에 있었습니다. 머리를 무거운 대리적으로 맞았는데, 그 대리
석은 머리 위의 창문에서 떨어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부경찰국장이 날카롭게 말했다.
「누구 방 창문인가?」
「베러 크레이슨의 방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이 세 사람의 경우를 따로
따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먼저 필립 롬버드입니다. 그가 대리석을 떨어뜨
려 블로어를 죽이고 베러 크레이슨을 어떤 방법으로 죽여 방안에 목매달
아 놓은 뒤 바닷가로 가서 권총으로 자살했다고 하면, 누가 그의 손에서
권총을 가져갔는가 하는 점이 설명되지 않습니다. 권총은 층계 바로 곁에
있는 워그레이브의 방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지문은 있었는가?」
「있었습니다. 베러 크레이슨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녀가…….」
「우리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녀가 롬버드를 죽인 다음 권총을 갖
고 저택으로 돌아와 대리석을 떨어뜨려 블로어를 죽인 뒤 자살했다고 생
각해 보았습니다.
베러의 방 의자에 그녀의 구두에 붙어 있던 해초 찌꺼기가 남아 있었
습니다. 먼저 의자에 올라가 올가미를 목에 걸고 의자를 차버렸다고 생각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의자는 차인 채 나둥그러져 있지 않고 다른 의자와 가지런
히 벽 쪽에 놓여 있습니다. 결국 베러 크레이슨이 죽은 뒤 다른 사람의
손으로 치워진 겁니다.」
「음.」
「그러면 남은 건 블로어입니다. 그러나 그가 롬버드를 살해하고 베러
크레이슨을 목매단 다음 밖으로 나와 실이나 끈으로 대리석을 매달았다
가 자기 머리에 떨어뜨렸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런 방법으로 자살하는 이는 없을 겁니다. 특히 블로어는 그처럼 번거
로운 일을 생각해 낼 사나이가 못 됩니다. 무엇보다도 첫째, 아시다시피
블로어는 법률의 손이 미치지 않는 범죄에 대해 벌하려고 생각할 만한
사나이가 아닙니다.」
부경찰국장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네.」
메인 경감은 다시 말을 이었다.
「따라서 열 사람 외에 다른 누군가가 섬에 있었다는 게 됩니다. 열 사
람이 차례로 죽은 뒤 뒤처리를 한 자가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그는 어디
에 숨어 있었을까요? 그리고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구조대가 섬에 닿을 때까지 섬에서 나간 자는 없었다고 스티클헤이븐
마을 사람들은 확신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절대적으로 확실하도록
봅니다. 그러나 이것이 확실하다면…….」
메인 경감은 말을 멈췄다.
「그것이 확실하다면?」
메인 경감은 깊게 숨을 내쉬며 머리를 저었다. 그리고 몸을 앞으로 굽
혔다.
「그것이 확실하다면 누가 열 사람을 죽였을까요?」
제 목 : [애-크]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완결>
올린이 : 매직라인(한창욱 ) 96/11/24 22:40 읽음 : 113 [7m관련자료 있음(TL)[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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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선장이 런던 경찰국에 보내 온 고백서
나는 어릴 때부터 내 성격에 모순이 많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러
한 내 성격에 로맨틱한 꿈이 용솟음치는 일면이 있었다.
중요 서류를 병에 넣어 바다에 띄우는 것은, 어렸을 때 모험 소설을 읽
은 뒤부터 나의 꿈이었다. 이 꿈은 지금도 깨어지지 않았다. 내가 이 고
백서를 병에 넣어 바다에 던지는 것은 그 꿈을 실현하고 싶어서다.
아마도 이 고백서가 발견되는 것은 백에 하나 있을까말까 한 일이리라.
따라서 이 고백서가 발견되지 않는 한――이것은 나 스스로의 만족감인
지 몰라도――이 살인 사건의 수수께끼는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로맨틱한 꿈을 동경하는 외에도 여러 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다.
죽음을 목격하는 일에서 병적인 즐거움을 맛보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였
다. 나는 어렸을 무렵 벌이나 그 밖의 동물을 잡아 여러 가지 실험을 했
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그때부터 나는 죽인다는 것에 말할 수 없는 쾌감
을 맛보았다.
그러나 이 성격과는 전혀 모순되는 성격을 또한 지니고 있었다. 강한
정의감이다. 죄없는 인간이나 동물이 죽거나 괴로움 받은 것은 나로선 참
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결국 정의가 행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강하게 느꼈다.
내가 직업으로서 법률을 선택한 것도 이런 성격 탓이었다. 이 점은 쉽
게 이해되리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심리학자라면 곧 이해하리라. 법률을
실시하는 직업은 내 본능을 만족시켜 주었던 것이다.
범죄와 형벌에 깊은 흥미를 갖고 있던 나는 모든 종류의 미스터리 소
설과 괴기 소설을 즐겨 읽었다. 그리고 스스로 교묘한 살인 방법을 생각
해 내고는 혼자 즐거워하곤 했다.
이윽고 내가 판사가 되었을 때, 지금까지 숨어 있던 내 본능이 머리를
쳐들었다. 법정의 피고가 차츰 몰려서 고뇌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나의
더없는 쾌락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밝혀 두어야 할 것은, 죄없는 사람을 법정에서 볼 때에
는 아무 즐거움도 느끼지 못했다. 피고가 무죄임을 알고, 배심원을 유도
하여 무죄 판결을 내린 일이 적어도 두 번은 있었다. 그러나 우수한 경찰
력은 결코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다. 살인 용의로 내 앞에 나타나는 피고
는 대부분 유죄였다.
에드워드 시튼의 경우도 그 가운데 하나다. 그의 용모와 태도는 배심원
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확실한 증거가 있었고, 범죄자에 대
한 내 지식으로 추리해도 그가 살인을 저지른 것은 확실했다. 더욱이 그
를 믿고 있었던 노부인을 죽인 증오할 만한 살인이었다.
나는 <목매다는 판사>라는 별명을 듣고 있었지만, 이것은 올바른 별명
이 아니다. 나는 언제나 정의의 입장에 서 있었다. 감정에 호소하는 변호
인의 변론에 의해 배심원의 감정이 동요되는 것을 막은 데 지나지 않았
다. 배심원의 주의를 확실한 증거로 향하게 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몇해 전부터 내 마음속에 변화가 일어났다. 나는 그것을 알아차
리고 있었다. 자신을 억누르는 힘이 약해지고, 범죄를 재판하는 일보다
스스로 범죄를 저지르는 것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정직하게 고백하면 나는 스스로 살인을 하고 싶어졌던 것이다. 나는 이
일을 예술가가 자기를 표현하려는 욕구라고 해석했다. 나는 범죄 예술가
가 되려고 생각했다. 판사라는 직업에 억압되어 온 내 꿈이 차츰 머리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살인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
고 그 살인은 평범한 살인이어서는 안 된다. 전례가 없는 살인이어야 한
다!
나는 다시금 어렸을 때의 꿈을 갖게 되었다. 사람들을 놀라게 할 불가
능한 일을 해치우고 싶어졌다. 살인! 그렇다, 아무래도 살인을 해야 한다!
어떻게 보면 모순된 것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지금까지는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정의감이 그 의욕을 억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죄없는 자가 괴로움
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이윽고 전혀 우연한 일로부터 어떤 생각이 내 머리에 떠올랐다. 내가
어느 의사와 이야기하고 있을 때였다. 그는 이름없는 시골 의사였는데,
<법률의 손이 미치지 않는 살인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한 예로서 요즘 일어난 어느 노부인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노부인의 죽음은 가정부 부부가 어떤 흥분제를 그녀에게 주지 않아서 일
어났다는 사실을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가정부 부부는 노부인이 죽음으
로써 상당한 재산을 받게 되어 있었다.
의사의 말에 의하면, 이런 사건은 아무래도 증거를 잡을 수 없다는 것
이었다. 그는 노부인의 죽음이 일종의 살인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법률의
손이 미치지 않는 살인이라는 것을…….
모든 것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내가 나아갈 길이 확실해졌
다. 그래서 나는 단 하나의 살인이 아닌 대규모의 살인을 행하기로 결심
했다.
나는 어렸을 때 즐겨 듣던 자장가를 생각해 냈다. 열 인디언 소년의 자
장가였다. 인디언 소년이 하나씩 모습을 감춰 간다. 아무래도 피할 수 없
는 냉혹한 운명――어린 마음에 강한 인상을 받았던 것이다.
나는 비밀리에 희생자를 찾기 시작했다. 나는 그 경과를 자세하게 기록
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탐색했다. 예상 밖의 수확이 있
었다.
암스트롱 의사 사건을 알게 된 것은 내가 어떤 요양원에 들어가 있었
던 때였다. 나를 돌봐 주던 간호사는 금주론자로 알코올의 해독을 실증하
기 위해 술취한 의사의 수술을 받다가 죽은 환자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간호사가 근무했던 병원의 이름을 물어 수첩
에 적어 넣고 필요한 사실을 탐색해 들어갔다. 의사와 환자의 이름을 알
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매커서 장군 사건은 클럽에서 전쟁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알았다. 그
리고 아마존 강의 탐험에서 돌아온 사나이가 해외에서 필립 롬버드가 한
행동을 나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어떤 노부인은 엄격한 청교도인 에밀리 브랜트와 그 하녀에 대한 이야
기를 들려주었다. 앤터니 머스턴은 그 같은 죄를 저지른 많은 사람 속에
서 골라냈다. 언제나 위험한 운전을 하고 있으면서 사람을 치어 죽이고도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는 그의 행위는 사회에 해독을 주며 살아 있을 자
격이 없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전직 경감 블로어의 이름은 내 동료로부터 들었다. 랜더 사건에는 그리
관심을 갖지 않았다. 경관은 법률의 심부름꾼이며 어디까지나 성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의 말은 그들이 관직에 있음으로써 언제나 신용되는
것이다.
베러 크레이슨의 일을 안 것은 대서양을 횡단하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밤늦게 끽역실에서 나와 유고 해밀턴이라는 호남 젊은이와 만났다. 유
고는 침울한 얼굴로 흠뻑 술을 마시고 있었다. 상대만 있으면 자기 고민
을 털어놓고 싶다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큰 기대없이 그와 이야기했다. 물론 대화를 끌고 갈 함정을 준비
하는 걸 잊지 않았다. 놀랍게도 바로 반응이 왔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의
말을 기억하고 있다.
「말씀대로입니다. 살인이란 세상에서 생각하고 있는 그런 게 아닙니
다. 독약을 쓴다든지 절벽에서 떨어뜨린다든지, 그런 것만 살인이 아닙니
다!」
그는 몸을 앞으로 내밀며 내 눈앞에 얼굴을 바싹 갖다댔다.
「나는 살인을 저지른 여자를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정말은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습니다. 이토록 괴로
운 마음은 없을 겁니다! 나를 위해 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자란 무서운 존재입니다. 그처럼 아름답고 마음씨 고운 아가씨가 그
런 일을 하다니――나는 도저히 믿을 수 없습니다! 어린아이를 바다로 꾀
어내 빠져 죽게 하다니――여자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
까?」
「확실히 그 여자가 한 짓이오?」
「확실하고말고요! 아무도 그렇게 생각한 사람이 없습니다만, 나는 곧
알았습니다. 돌아와서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알았던 겁니다. 그리고
그녀도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을 겁니다. 다만 그녀가 모르고 있
었던 것은, 내가 그 아이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뿐입니다.」
그는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그의 이야기에 따라 베러 크레
이슨의 이름을 탐색해 내기는 쉬운 일이었다.
또 하나, 열번째의 희망자가 필요했다. 나는 그것을 모리스라는 사나이
로 결정했다. 본디 음흉스러운 인물이었다. 그가 저지른 많은 죄 가운데
에도 마약 밀매도 있었는데, 내 친구의 딸을 마약 중독자로 만든 것도 그
였다. 그녀는 21살의 젊은 나이로 자살했다.
이렇듯 희생자를 찾고 있는 동안 내 계획은 차츰 형태를 갖춰 갔다. 희
생자 선정이 끝난 어느 날, 나는 할리 거리의 어느 의사를 찾아갔다. 그
곳에서 내 계획에 마지막 손질이 가해졌다.
나는 지난날 어떤 수술을 받은 일이 있었다. 나는 의사와의 회견을 통
해 다시 한 번 수술받는다 해도 효과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 의사는 그
일을 나에게 말하지 않았으나, 나는 말 뒤에 숨어 있는 진실을 금방 알아
차렸다.
그러나 내 기분을 의사에게 고백하지는 않았다. 나는 자연이 명령하는
대로 죽을 때가 오기를 기다릴 수는 없었다. 아니, 나의 죽음은 타오르는
흥분의 불꽃에 싸여서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죽을 때까지 짧은
시간을 화려하게 살고 싶었다.
나는 여기서 인디언 섬의 살인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말하지 않
으면 안 된다.
섬을 사들이는 일은 모리스에게 부탁하여 내 이름을 숨겼다. 그런 것은
그가 가장 자신있게 하는 일이었다.
다음에 희생자들을 고르면서 얻은 지식으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유혹
의 먹이를 던졌다. 내 계획은 하나도 빗나가지 않았다. 내가 초청한 손님
은 8월 8일 인디언 섬에 와닿았다. 그 속에는 나도 들어 있었다.
모리스는 이미 처치되었다. 그는 소화불량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나
는 런던을 떠나기 전 그에게 한 봉의 약을 주고 자기 전에 먹도록 이르
며, 내 위장병도 이 약으로 나았다고 덧붙였다.
그는 조금도 의심하는 기색없이 내 말을 믿었다. 나는 그가 기록이나
메모를 남기지 않는 인간임을 알고 있었다.
섬에서의 죽음의 순서에 대해서는 신중한 고려를 했다. 내 손님들의 죄
는 저마다 그 질이 달랐다. 가장 죄가 가벼운 자부터 죽여 가야 했다. 냉
혹한 살인을 행한 자가 마지막으로 남아서 맛보는 고통과 공포를 죄가
가벼운 자에게 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앤터니 머스턴과 로저스 부인을 맨 처음 죽일 사람으로 골랐다. 한 사
람은 즉사였고, 한 사람은 자다가 편안하게 죽었다. 나는 머스턴을 거의
모든 사람이 가진 도덕적 책임감을 지니지 않은 인간이라고 인정했던 것
이다. 로저스 부인의 범죄가 남편의 꼬임을 받아 행해진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이들 두 사람이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경찰 당국의 수사에 의해 쉽게 밝혀질 것이기 때문이다.
청산가리는 벌을 죽이는 데 쓸 약품으로서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레코
드 소리로 말미암아 혼란 속에서 머스턴의 빈 글라스에 집어 넣는 것은
간단했다.
나는 저마다의 죄가 문초되고 있을 때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보고
모두들 자기 죄를 의식하고 있음을 알았다. 오랫동안의 법정 경험에 의한
내 추리는 틀림없었다.
나는 요즘 통증이 심할 때의 수면제로서 트리오날을 먹고 있었다. 약의
분량을 줄여 트리오날을 치사량만큼 모아 두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로저스는 아내에게 줄 브랜디를 가져와 글라스를 사이드 테이블 위에
놓았다. 나는 그 테이블 곁을 지나면서 정량 이상의 트리오날을 글라스에
넣었다. 아직 의혹이 일지 않았던 때였으므로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
었다.
매커서 장군은 조금도 고통을 느끼지 않고 죽었다. 그는 내가 등뒤로
가까이 간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물론 나는 테라스를 떠나는 시간을 신
중히 택해야 했지만, 모든 것은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내가 예상하고 있었던 대로 섬이 수색되고, 섬에는 우리들 일곱 사람
외에 아무도 없다는 게 확인되었다. 이 사실은 모두의 의혹을 높였다.
나는 처음부터 내 계획을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예상하고 있
었다. 나는 이 역할을 할 사람으로 암스트롱 의사를 골랐다. 아무튼 그는
우직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얼굴만 보고도 내가 누구인지 알았으며,
나같이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이 살인을 저지르리라고는 전혀 믿지 않
았던 것이다.
그의 의혹은 필립 롬버드에게 쏠렸고, 나는 거기에 동의했다. 나는 그
를 꾀어 모두의 눈을 멀게 하는 계획을 돕게 할 작정이었다.
방은 구석구석까지 수색되었으나, 아직 몸을 수색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그러나 말할 나위도 없이 이제 곧 몸의 수색이 행해질 것이었다.
8월 10일 아침, 나는 로저스를 죽였다. 그는 장작을 패느라 내가 가까
이 가는 소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는 그의 주머니를 뒤져 식당 열쇠
를 찾았다. 그는 전날 밤 식당문에 열쇠를 채워 두었던 것이었다.
로저스의 시체가 발견된 혼란을 틈타 나는 롬버드의 방에 몰래 들어가
권총을 훔쳐냈다. 나는 그가 권총을 갖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정말
은 내가 모리스에게 지시해서 롬버드에게 권총을 준비하도록 시켰던 것
이다.
아침 식사 때 나는 커피를 따르면서 남아 있는 트리오날을 에밀리 브
랜트의 잔에 넣었다. 우리는 그녀를 식당에 두고 나왔다.
얼마 뒤 나는 식당으로 살며시 들어갔다. 그녀는 거의 의식이 없었으므
로 청산가리를 주사하기가 아주 쉬웠다. 벌을 날게한 것은 어린아이 장난
같은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나로서는 큰 뜻이 있었다. 나는 되도록 자
장가대로 충실하게 살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바로 뒤 내가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 일어났다. 아니, 내가 자
진해서 제안한 것이다. 우리는 엄중한 신체 검사를 하게 되었다. 나는 권
총을 안전한 곳에 숨기고 이미 청산가리도 트리오날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나는 암스트롱에게 먼저의 계획을 실행하지 않으면 안 되
겠다고 말했다. 그것은 간단한 계획이었다. 내가 다음 희생자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범인은 동요할 게 틀림없다. 게다가 죽은 것으로 꾸며 놓으면
나는 자유롭게 집안을 돌아다니며 범인의 모습을 살필 수 있다고 말했다.
암스트롱은 이 계획에 열의를 가졌다. 그날 밤 우리는 이 계획을 실행
했다. 앞머리에 붉은 흙을 조금 바르고, 붉은 커튼을 휘감고 털실을 머리
에 얹어 연극 준비가 다 되었다.
촛불은 끊임없이 흔들리고 빛은 밝지 않았으며 내 몸을 진찰하는 것은
암스트롱으로 정해져 있었으므로 실패할 염려가 없었다.
내가 걸어 놓은 해초를 발견하고 크레이슨 양이 저택 안이 쩡 울릴 만
큼 큰 외침 소리를 질렀다. 모두들 2층으로 뛰어 올라가고, 나는 죽은 사
람 같은 모습을 취했다.
그들이 나를 발견했을 때, 모든 것은 우리 두 사람의 예상대로 조금도
빗나가지 않고 이루어졌다. 암스트롱은 그의 역할을 능란하게 해냈다.
그들은 나를 2층으로 옮겨 내 방 침대에 눕혔다. 내가 죽은 원인에 관
심을 갖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모두들 공포로 정신을 잃고 서로 의심하
고 있었던 것이다.
2시 15분 전, 나는 저택 밖에서 암스트롱을 만났다. 나는 그를 저택 뒤
에 있는 절벽 끝으로 꾀어냈다. 그곳에서는 가까이 오는 자의 모습이 보
이고, 침실은 반대쪽에 있으므로 발견될 염려가 없다고 말했다.
암스트롱은 조금도 의혹을 품지 않았다. 그러나 자장가 가사를 생각해
냈더라면 당연히 경계하고 있어야 했다. <훈제 청어……>, 훈제 청어가
사냥개의 주의를 산란하게 하는 것과 같이 그는 주의력을 다른 데 빼앗
겨 버렸던 것이다.
그 뒤는 간단했다. 나는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며 소리쳤다.
「저것은 동굴 입구가 아닌가!」
그는 절벽 아래를 굽어보았다. 내가 등뒤에서 힘껏 떠밀자 그는 파도가
소용돌이치는 바닷속으로 떨어졌다. 나는 저택으로 돌아왔다. 블로어가
들은 건 내 발소리였던 것이다.
나는 암스트롱의 방으로 들어갔다가 몇분 뒤 이번에는 좀 발소리를 크
게 내며 방을 나왔다. 층계를 내려왔을 때 2층에서 방문열리는 소리가 들
렸다. 현관문으로 저택 밖에 나왔을 때, 그의 눈에 내 그림자가 보였을
것이다.
잠시 뒤 그들은 내 뒤를 쫓아왔다. 나는 저택 옆을 돌아 열어 두었던
식당 창문으로 들어갔다. 나는 창문을 닫고 유리를 깼다. 그리고 2층에
올라가 내 방 침대에 누웠다.
나는 그들이 다시금 저택 안을 수색하리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
체를 자세히 살펴보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암스트롱이 시체인 양 꾸미
고 숨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할지라도, 시트를 조금 젖혀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다. 사실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났다.
나는 아직 롬버드의 방에 권총을 도로 갖다 놓는 일을 말하지 않았다.
저택 안을 수색했을 때 내가 어디에 권총을 숨겨 놓았었는지 흥미를 갖
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식량 저장고에 통조림이 많이 쌓여 있었다. 나는
맨 밑의 통조림을 땄다. 비스킷 통조림이었다고 생각한다. 권총을 그 속
에 넣고 본디 모양대로 두었다.
나는 통조림 더미를 밑까지 살펴보는 사람은 없으리라고 믿었다. 더욱
이 맨 위에 있는 통조림도 아직 손이 닿지 않았던 것이다.
내 예상은 정확했다. 진홍빛 커튼은 식당 의자 덮개 밑에 숨겼다. 털실
은 의자 쿠션에 작은 구멍을 내어 감추었다.
이리하여 내가 예상하고 있었던 대로의 장면이 되었다. 남겨진 세 사람
은 서로 의심을 품고 있었으므로 어떤 일이든 일어날 가능성이 있었다.
더욱이 한 사람은 권총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저택 안에서 창문으로 그들의 모습을 관찰했다. 블로어가 혼자 저
택으로 돌아왔을 때 준비해 두었던 대리석을 떨어뜨렸다. 블로어는 제거
되었다.
나는 베러 크레이슨이 롬버드를 쏘는 것을 창문 너머로 보았다. 용감하
고 굳건한 아가씨였다. 나는 처음부터 그녀라면 롬버드와 겨루어도 승부
가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그녀의 방에 무대를 꾸몄다.
그것은 심리적 실험으로 흥미있는 것이었다. 그녀 자신의 죄의식과 한
사람을 더 죽인 바로 뒤에 일어나는 마음의 동요에 무대 장치에 의한 암
시를 더함으로써 그녀를 자살로 이끄는 일이 가능할 것인가.
나는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내 예상은 옳았다. 베러 크레이슨은 옷장
그늘에서 지켜 보고 있는 내 눈앞에서 목을 매달았다.
드디어 마지막 장면이 되었다. 나는 의자를 일으켜 벽 쪽에 붙여 놓았
다. 그리고 나서 권총을 찾았다. 층계에 떨어져 있었다. 나는 그녀의 지문
이 지워지지 않도록 조심했다.
나는 마침내 이 고백서를 끝낼 때가 되었다. 다 쓰고 나면 병에 넣어
바닷속으로 내던질 작정이다. 왜? 그렇다, 왜 그런 일을 하는 것일까. 내
야심은 아무도 풀 수 없는 살인을 고안해 내는 것이었는데.
그러나 어느 예술가도 예술 그 자체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다른 사
람에게 인정받기 바라는 욕망을 갖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부끄러움을
참고 고백하지만, 나 또한 내가 얼마나 교묘하게 살인했는가를 인정해 주
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인디언 섬 살인 사건의 수수께끼를 해결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경찰 당국은 나보다 더 현명할지 모른다. 내가 생각하기에
는 적어도 세 개의 실마리가 있다.
첫째로 경찰 당국은 에드워드 시튼이 유죄인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섬에 모인 열 사람 가운데 하나는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으므로, 역설적으
로 말한다면 그가 범인인 게 분명하다.
둘째 단서는, 자장가의 일곱번째 구절에 있다. 암스트롱의 죽음은 훈제
<청어>와 관계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훈제 <청어>라는 말에는 그가 어
떤 자에게 속아서 죽었다는 게 암시되어 있다. 거기서 실마리를 찾는다
면, 그때 남은 네 사람 가운데에서 그가 믿을 수 있었던 것은 나 말고 없
는 것이다.
셋째 실마리는 상징적인 것이다. 내 이마에 남겨진 붉은 반점이다. 말
할 것도 없이 카인의 낙인이다.
이젠 더 쓸 게 없다. 나는 이 고백서를 바다에 맡기고 내 방으로 가서
침대에 눕는다. 내 안경에는 가느다란 검은 줄이 달려 있다. 고무처럼 늘
어나는 줄이다. 나는 안경을 몸으로 눌러 둔다. 줄을 문 손잡이에 매고
그 끝에 권총을 느슨하게 묶어 놓는다.
내 생각은 이렇다. 베러 크레이슨의 지문이 지워지지 않도록 손수건으
로 권총을 감싸 쥐고 방아쇠를 당긴다. 내 손은 몸 옆에 늘어진다. 권총
은 줄에 끌려가 문 손잡이에 부딪쳐 줄에서 빠져 나와 바닥으로 떨어진
다. 줄은 문 손잡이에서 풀려 내 몸밑의 안경으로 끌려와 늘어진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손수건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으리라. 나는 희생자
가운데 몇 사람이 기록해 놓은 대로, 앞 이마를 꿰뚫려 침대에 누워 있는
상태로 발견될 것이다. 우리들의 시체가 조사될 때에는 아마도 언제 죽었
는지 정확히 아는 일이 불가능하리라.
이제 바다가 잠잠해지면 육지에서 배와 사람들이 오겠지. 그리고 열 구
의 시체와 인디언 섬의 수수께끼를 발견할 것이다.
로런스 워그레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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