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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로빈 쿡] 바이러스

by Casey,Riley 2023.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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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
로빈 쿡

차례

  프롤로그
  자이레, 아프리카, 1976년 9월 7일  
  1976년  9월 16일  
  1976년  9월 23일  
  1976년  9월 24일  
  1976년  9월 30일  
  1976년 10월 13일  
  1976년 11월 16일  
  1976년 12월  3일  
  로스엔젤레스, 캘리포니아 현재 1월 14일                                 
            
  1.  1월 20일  
  2.  1월 21일  
  3.  1월 22일  
  4.  2월 27일  
  5.  3월  3일  
  6.  4월 10일  
  7.  4월 17일  
  8.  5월 16일  
  9.  5월 17일  
  10. 5월 20일  
  11. 5월 20일 저녁  
  12. 5월 21일  
  13. 5월 22일  
  14. 5월 23일  
  15. 5월 23일 계속  
  16. 5월 24일  
  17. 5월 24일 
  에필로그  
  옮기고나서  

 의학 스릴러의 거장 로빈 쿡과  바이러스 에 대하여
로빈 쿡은 항상 다른 소재와 최신의 의학 정보를 사용한다.  그는 이번작품 
 바이러스 에서 바이러스의 모든 실체를 파헤친다.  단지 초현미경적인 미립지에

불과한 바이러스.  한 개의 바이러스로 수천 명을 살상시킬 수 잇고, 수백억
개의 
바이러스로도 자각증세조차 느끼지 못할수 있다.  생물의 체내 체표에 도사리고 
있을 바이러스의 모유숙주(바이러스가 기생하는 대상으로 삼는 생물)는 어떤 
것인가?
그 모유숙주를 추적하는 과정이 숨가쁘게 전개된다.
로빈 쿡은 콜롬비아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하버드에서 대학원 과정을 마쳤다.  
현재는 아내와 함께 플로리다에 살고 있다.  

    프롤로그

    자이레, 아프리카, 1976년 9월 7일

  새벽, 존 노다이크라는 이름의 스물한 살 난 예일대학 생물학과 학생은 자이레

공화국 붐바 북쪽 조그만 마을 어귀에서 잠에서 깨어났다.  땀에 푹 젖은 슬리핑

백 안에서 돌아누운 그는 잠에서 깨어나는 마을의 소음이 어우러진, 열대 우림의

소리를 들으며 산악용 나일론 텐트의 망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새벽의 산들바람에 밥을 짓는 모닥불의 매캐한 향기와 후텁지근한 쇠똥 내음이

실려왔다.  머리 위로는 하늘을 가린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날아가듯 스쳐가는 
원숭이떼의 모습이 언뜻언뜻 눈에 비쳤다.
  밤새도록 뒤척였던 탓에 똑바로 일어나앉자 힘이 빠지며 온몸이 후들거렷다.  
그는 자신이 저녁 식사 한 시간쯤 뒤부터 열과 오한이 들기 시작했던 전날
밤보다 
상태가 더 나빠져 있다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미리 키니네(말라리아 
예방, 치료제)를 먹어두기는 했지만 어쩐지 말라리아에 걸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문제는 매일 저녁 질척질척한 정글 바닥의 구정물 웅덩이에서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모기떼들을 피할 도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마을에 들어간 그는 제일 가까운 병원이 어디쯤 되는지를

물었다.  순회 포교를 나왔던 신부 한 사람이 동쪽으로 몇 킬로 떨어진 얌부쿠란

작은 마을에 벨기에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병원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예기치 
않았던 발병에 두려워진 존은 재빨리 캠프를 거두어 텐트와 슬리핑 백을 배낭에 
쑤셔넣고 얌부쿠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존은 멸종 위기에 처한 고산 고릴라 등 아프리카 야생 동물들의 사진을 찍기 
위해 학교에 반 학기 동안 휴학계를 냈다.
  검은 대륙을 최초로 탐사했던 19세기 탐험가들처럼 아프리카의 오지를 누비며 
모험을 하는 것은 존이 어릴때부터 항상 마음속에 품어왔던 꿈이었다.
  얌부쿠는 그가 방금 떠나왔던 마을 정도의 크기로, 그곳의 미션병원 역시 그리

신통해 보이지는 않았다.  병원이라야 시커먼 흙벽돌로 지은 건물 몇 
동뿐이었는데, 그나마도 모두 조만간 손을 보지않으면 쓰러져버릴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건물들의 지붕은 녹이 슨 골함석이나 원주민의 오두막들처러
짚으로 
덮여 있었는데 전깃줄이나 전신주 등 전기가 들어온다는 것을 암시하는 물건은 
어디에도 눈에 띄지 않았다.
  프랑스어밖에 할 줄 모르는 전통 수도복 차림의 수녀에게 접수를 하자 존은 
각양각색의 원주민 환자들이 뒤섞인 긴 줄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명령을 받았다. 

다른 환자들을 훑어보니 이 사람들틈에 섞여 있다가는 지금 걸린 것보다 더한
병이 
옮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야 그는 그나마라도 몇 마디 영어를 하는, 지친 벨기에인 
의사의 진찰을 받을 수가 있었다.  수박 겉핥기 식 진찰 후에 내려진 진단은 존 
자신이 이미 예측했던 대로 말라리아 증후가 좀 있다는 것이었다.  그 의사는 
존에게 클로르콰인(항 말라리아 제)주사 한 대를 처방한 후 하루 이틀두고 보아 
증세가 호전되지 않으면 다시 병원을 찾아오라고 말했다.
  진찰이 끝나자 존은 치료실에서 주사를 맞기 위해 다시 줄을 서 기다려야
했다.  
그가 이곳에 소독기법(소독된 기구나 부위를 오염시키지 않고 시술하는
방법)이란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바로 이때였다.
  치료실 간호원은 1회용 주사바늘 대신 주사기 세 개를 번갈아가며 사용하고 
있었다.  존은 주사기들을 그렇게 잠깐 소독액에 담가두어서는 제대로 소독이 될

리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간호원은 맨 손가락으로 
소독액을 휘저으며 주사기들을 건져내고 있었다.  자기 차례가 오자 그는 무슨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의 프랑스어는 그만큼 유창하지 
못했고, 그 자신이 주사가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순순히 주사를 
맞았다.
  그후 며칠 동안 증세가 호전되자 존은 자기가 잠자코 있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부드자원주민들의 사진을 찍으며 얌부쿠 근처에 머물렀다.  그들은 용맹한 
사냥꾼들로 금발의 외국인에게 자신들의 무용담을 과시할 수 있게 된 것을
몹시도 
자랑스럽게여겼다.
  사흘 뒤 헨리 스탠리의 발자취를 따라 자이레 강을 거슬러 올라가려던 존은 
갑작스러운 증세의 반전을 맞았다.  그가 처음 느꼈던 것은 격심한 두통으로 곧 
오한, 발열, 오심(구역질)과 설사가 그 뒤를 따랐다.  증세가 가라앉기를
바라며, 
존은 텐트에 두러누워 오한 속에서 밤을 지세웠다.
  아침이 되자 밤새 토한 그는 축 늘어져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힘이 없었다.  
그는 몹시도 힘겹게 짐을 챙겨 미션 병원을 향해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붉은 선혈을 토해내며 병원 바닥에 고꾸라졌다.
  한 시간 뒤, 그는 약으로도 소용없는 악성 말라리아 환자 두 명이 함께 수용된

병실에서 의식을 되찾고 깨어났다.
  담당 의사는 존이 지난번 병원을 찾았을 때 진찰을 맡았던 바로 그 사람으로 
존의 심각한 상태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존에게서 이상한 추가 증상들을 
발견했다.  가슴에 번진 괴상한 양태의 반점들과 안구 표면의 작은 점상 출혈반.
 
그는 아직도 말라리아라는 자신의 최초 진단을 고수하고 있었지만 점차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전형적인 케이스가 아니었다.  혹시 장티푸스가
합병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예방적인 조치로 클로람페티콜을 함께 
투여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1976년 9월 16일

  붐바 일원을 담당하는 지역 보건 국장 닥터 루가사는 활짝 열어 젖힌 창
밖으로 
아침 햇살 속에 반짝이는 광대한 자이레 강의 장관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이레라는 이름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신비하고 자극적인 느낌을 주는 콩고라는
옛 
이름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다시금 업무로 주의를 돌린 그는 방금 얌부쿠 미션 병원에서 받은 편지를 
다시한번 읽어보았다.  그 편지의 내용은 존 노다이크라는 젊은 미국인 남자와 
에볼라강근처의 농장에서 얌부쿠를 방문중이던 어떤 농부의 사망 소식을 담고 
있었다.
  미션 병원의 의사는 그들의 죽음이 전파 속도가 엄청나게 빠른 어떤
원인불명의 
전염성 질환에 원인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미국인과 같은 병실에
수용되었던 
환자 둘, 농부의 간호를 맡았던 농장 주인의 가족 넷, 그리고 병원의 외래 환자
열 
명이 같은 질환의 중증으로 현재 입원중이었다.
  닥터 루가사는 자신에게 두 가지 선택의 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먼저, 
아무 주치도 취하지 않는 방법이 있는데, 이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가장
현명한 
선택일 것이었다.  저 밖, 정글 구석에 어떤 무서운 풍토병이 있는지 관심을
보일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뻔한 일이었다.
  그에게 주어진 두 번째의 선택은 산더미 같은 보고서 용지들을 메꿔 자기보다 
조금 더 높은 자리에서, 역시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고 결절할 
자기와 똑같은 사람이 있는 킨샤샤로 이 사건을 보고하는 것이다.  물론, 닥터 
루가사는 만일 자신이 보고서 용지들을 메꾸기로 결정한다면 필히 얌부쿠를 
방문해야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는데, 그것은 이 무덥고 눅눅한 우기에는 
유난히도 정나미가 떨어지는 생각이었다.
  약간 양심의 가책을 느끼긴 했지만 닥터 루가사는 얇은 반투명지에 쓰인
편지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1976년 9월 23일

  일주일 뒤, 붐바 공항에 낡은 디씨-3기가 착륙하는 광경을 지켜보며 닥터 
루가사는 불안한 듯 서성거렸다.  처음 내린 사람은 킨샤샤에서 온 닥터
루가사의 
상관, 닥터 부샤드였다.  전날, 닥터 루가사는 닥터 부샤드에게 전화를 걸어
얌부쿠 
미션 병원 일원에 심각한 원인 불명의 질병이 창궐하고 있다는 소식을 방금 
접하게 되었노라고 보고했다.
  그 질병은 지역 주민들에게뿐 아니라 병원의 직원들에게까지도 번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일주일 전에 받았던 편지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타르가 깔린 활주로 위에서 인사를 나눈 다음 닥터 루가사의 도요다

콜로라에 올라탔다.  닥터 부샤드는 얌부쿠에서 무슨 소식이 더 왔는지 물었고 
닥터 루가사는 계속 잔기침을 해댔지만 아직도 그날 아침 무선 연락으로 전달된 
사실에 마음이 심하게 동요되어 있었다.  지금까지의 소식으로 미루어 17명의
병원 
직원 중 11명이 114명의 마을 주민과 더불어 사망한 것이 틀림없었다.  병원은
더 
이상 진료 업무를 담당할 만한 사람이 없어 폐쇄되었다.
  닥터 부샤드는 전 붐바 지역을 검역 격리시켜야만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는 
식속히 킨샤샤에 필요한 연락을 취한 다음, 내켜하지 않는 닥터 루가사에게 
얌부쿠를 방문해 상황을 파악할 수 있도록 내일 아침 교통 수단을 준비하라고 
명령했다.

    1976년 9월 24일

  다음날, 두 의사선생이 얌부쿠 미션 병원의 앞마당으로 차를 몰아 들어섰을 때

그들을 반긴 것은 으스스한 정적뿐이었다.  커다란 쥐 한 마리가 텅 빈 현관의 
난간을 따라 허둥지둥 사라졌다.
  썩는 듯한 악취가 그들의 코를 찔렀다.  면 손수건으로 코를 가린 그들은 
마지못해 랜드로버 밖으로 나와 조심스레 제일 가까이에 있는 건물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그곳에는 두 구의 시체가 누워 있었는데 둘 다 찌는 듯한 더위에

부패가 시작되어 있었다.
  그들이 아직도 숨이 붙어 있는 사람을 발견한 것은 세 번째 건물을 
들여보았을 때에서였다.  생존자는 고열로 의식이 혼미해진 간호사였다.  두 
의사선생들은 좀 늦은 감은 있지만 자신들을 보호하려고 텅 빈 수술실로 들어가 
장갑과 가운과 마스크로 온몸을 휘감았다.  자신들의 안전에 대해 더 두려워하며

그들은 병든 간호사에게 응급 조치를 취한 뒤 병원 직원들을 더 찾아보았다.  
30명 남짓한 사망자들 틈에서 그들은 간신히 숨이 붙어 있는 환자 네 명을
추가로 
찾아낼 수 있었다.
  닥터 부샤드는 킨샤샤에 무선 연락을 해 미션 병원으로부터 수도로 환자들을 
공수하기 위해 자이레 공군의 응급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수송시 이 환자들을

어떻게 격리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대학병원 감염병관에 자문 요청을 했을
때에는 
겨우 그 간호사 한 명만이 살아 있었을 뿐이었다.
  그들이 다루게 된 이 질병이 몹시 전염성이 강하며 동시에 엄청나게 
치명적이라는 사실이 분명했기에 부샤드는 격리 기법이 완벽해야만 한다는 것을 
거듭거듭 강조했다.

    1976년 9월 30일

  킨샤샤로 공수된 벨기에인 간호사는 6일간의 집중적인 치료에도 불구하고 새벽

3시에 사망했다.  확정적인 진단을 내리지는 못했지만, 부검 후 그녀의 혈액, 
간장, 비장과 대뇌 조직 표본은 벨기에 앤트워프의 열대병 연구소, 미국
아틀란타의 
질병 관리 센터, 그리고 영국 포튼 다운의 미생물 연구소로 보내졌다.  이제 
얌부쿠 지역에는 확인된 환자가 249명이었고, 그 치사율은 거의 90퍼센트에 
육박했다.

    1976년 10월 13일

  얌부쿠 바이러스는 거의 동시에 세 연구소로 분리되었다.  그것은 우간다산 
녹색 원숭이를 다루는 연구 요원들간의 치명적인 감염사태로 1967년 처음 세상에

알려졌던 마버그바이러스와 비슷한 구조를 가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마버그 
바이러스보다 훨씬 독성이 강한 이 새로운 바이러스는 붐바 북쪽을 흐르는 
에볼라 강의 이름을 따 에볼라라고 명명되었다.  이것은 선 페스트 이후 가장 
치명적인 미생물로 간주되었다.

    1976년 11월 16일

  처음 질병이 발생한 지 두 달 후, 얌부쿠 일대를 강타했던 원인 불명의 질병은

몇 주간 새로운 환자 발생의 보고가 없자 일단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1976년 12월 3일

  붐바 지역의 격리가 해제되고 항공 운항이 재개되었다.  에볼라 바이러스는 
원래의 잠복지로 돌아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곳이 어디인가는 완전한 
미스터리였다.  한때 라사열 바이러스의 추적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씨디씨의 
닥터 시릴 두브체크를 포함하여 국제적인 전문가들로 구성된 조사단은 에볼라 
바이러스의 포유동물, 조류, 곤충 내의 숙주(기생생물들이 기생하는 대상으로
삼는 
생물)를 찾아 그 일대를 샅샅이 훑었다.  하지만 바이러스 학자들은 어떠한 
조그마한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사실 그들은 도움이 될 만한 증거 하나조차도 
확보하지 못했던 것이다.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 현재 1월 14일

  서독 출신의 저명한 안과 의사이며 로스 앤젤레스 리히터 클리닉의 공동 
설립자인 닥터 루돌프 리히터는 안경을 고쳐쓰며 병원 회의실 원탁에 펼쳐져
있는 
광고문안의 교정지들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오른쪽에는 비즈니스  학교 졸업생,

파트너이자 형제인 윌리엄이 루돌프만큼이나 주의깊게 교정지들을 살피며 앉아 
있었다.
  그 자료들은 다음 분기, 병원의 건강관리 프로그램에 선금제 회원들을
모집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비교적 건강한 집단인 젊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  
회원제 건강관리 사업에서 진짜 돈 주머니는 거기에 있었고, 윌리엄은 재빨리 
그것을 간파한 것이다.
  루돌프는 교정지들이 마음에 들었다.  그날 있었던 일 중 그것이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일이었다.  그날은 새로 산 비엠더블을 샌디에고 고속도로 입구의 
난간에 부딪혀 흉직한 상처를 내는 것으로 시작된 재수없는 하루였다.  그 
다음에는 병원 전체를 뒤집어놓은 응급 수술이 있었다.  또 그 다음에는 괴상한 
합병증이 생긴 불쌍한 에이즈환자가 망망 검사를 하는 도중 그의 얼굴에 대고 
기침을 해버렸다.  게다가 그것만으로는 모자랐던지 설상가상으로 안구 허피스 
실험용으로 쓰이는 원숭이 중 한 마리에게 깨물리고 만 것이었다.  정말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루돌프는 엘에이 타임즈 일요일 자에 실릴 예정인 광고 하나를 집어들었다.  
그것은 완벽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여보이자 윌리엄은 광고회사 직원에게 다음 
사안으로 넘어가라는 시늉을 했다.  다음 소개된 것은 저녁 뉴스 시간에
끼워넣을 
30초짜리 티브이 스파트 광고였다.  그것은 핸섬한 젊은 청년들과 발리 
볼(해변배구)을 즐기는 말리부 해안의 발랄한 비키니 차림 아가씨들을 그리고 
있었다.  그것은 진료를 받은 다음 진료비를 내던 통상의 의료 시스템과 비교해,

리히터 클리닉과 같은 의료 기관이 제공해주는 선금제 건강관리의 이점을 
격찬하는 것이었지만 루돌프에게는 값비싼 펩시 광고를 연상시켰다.
  루돌프와 윌리엄은 진료 부장인 닥터 나바르를 포함, 몇 명의 스태프 닥터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  그들은 모두 병원의 임원들로서 나름대로 병원 주식을
소유하고 
있었다.
  윌리엄은 목청을 가다듬어 혹시 좌중에 어떤 질문 사항이 있는지를 물었다.  
아무 질문도 나오지 않았다.  광고 직원들이 나간 다음 그 그룹은 만장일치로 
그들 앞에 소개되었던 사안들을 승인했다.  뉴포트 비치 지역의 늘어난 회원 
가입자들을 처리하기 위한 새로운 자매 병원의 설립에 대한 짧은 토론이 있은
뒤, 
그 회합은 끝이 났다.
  닥터 리히터는 사무실로 돌아와 기분좋게 광고 교정지를 서류가방에
던져넣었다.  
사무실은 그룹 프랙티스(집단 개업)을 하는 의사의 비교적 낮은 봉급에 분이 
넘치는 호사스러운 방이었지만 그의 봉급은 그가 소유한 공모주식의 지분에서 
나오는 이익 배당에 비교하면 그저 푼돈에 불과했다.  리히터 클리닉과 닥터 
루돌프 리히터는 둘 다 탄탄한 재정 상태를 누리고 있었다.
  자리를 비운 사이 걸려왔던 전화 메시지들을 해결한 다음 닥처 리히터는
자기가 
수술했던 입원 환자들을 회진했다.  복잡한 병력을 가진 두 명의
망막박리(망막이 
안구의 뒷부분에서 떨어져나온 질병 상태)환자들을 모두 좋은 상태였다.  
사무실로 돌아오는 도중, 클리닉에 안과 의사가 자기 하나밖에 없는데도 수술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지만 사실 동네에 
넘치고 흐르는 안과 의사들의 수를 생각할 때 적으나마 있는 것도 다행이었다.  
그는 8년 전 동생의 말을 따라 클리닉을 연 것을 잘했다고 생각했다.
  흰 가운에서 푸른 블레이저(화려한 스포츠용 상의)로 갈아입고 서류가방을 
집어든 닥터 리히터는 병원을 나섰다.  저녁 아홉 시가 넘은 시각이어서 2층에 
주차를 하도록 고안된 차고는 거의 비어 있었다.  낮시간 동안 그곳은 항상 
만원이었고 윌리엄은 벌써부터 차고를 확장할 필요가 있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는 공간도 공간이지만 그것으로 인한 상대적 이득 때문에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루돌프는 그런 문제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별로 알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병원의 재정 문제를 생각하느라 정신이 팔린 닥터 리히터는 차고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기다리던 두 사내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는 그들이
자기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을 때조차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들은 짙은 색의 정장 차림이었다.  둘 중 키가 큰 사내는 한쪽 팔이 
구부러진 상태로 영구 고정된 것처럼 보였다.  그의 손에 들린 커다란 서류 
가방은 고정된 주관절(팔꿈치 관절) 때문에 부자연스럽게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차에 가까워지자, 그들의 빨라진 발걸음 때문에 닥터 리히터는 뒤를 따르는 
발자국 소리들을 알아차렸다.  불안감이 그의 목덜미를 움켜쥐는 것 같았다. 
그는 
마른침을 꿀꺽 삼킨 뒤 어깨 너머로 불안한 시선을 돌렸다.
  곧장 그를 향해 오는 것 같은 두 사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내들이 
천정에 달린 전등 밑을 지날 때 닥터 리히터는 그들이 깨끗이 다린 셔츠와 실크 
타이로 단정하게 차려입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사실에 그는 조금 마음이

놓였다.  그렇긴 하지만 그는 몸을 더욱 빨리 움직여 차 꽁무니를 돌았다.  
허둥지둥 열쇠를 꺼낸 그는 운전석 문을 열고 서류 가방을 던져넣은 다음 차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마악 문을 닫으려는 순간 손 하나가 불쑥 그를 
가로막았다.
  닥터 리히터가 마지못해 고개를 들자 그의 뒤를 따라왔던 사내중 하나의 
침착하고 무표정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닥터 리히터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그를 바라보자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닥터 리히터는 다시 문을 닫으려고 손잡이를 잡아당겼지만 그 사내는 밖에서 
문을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지금 몇 시쯤 되었는지 가르쳐주실 수 있겠습니까, 선생님! 
  그 사내가 공손하게 물었다.
   그럽시다. 
  그 사나이의 행동에 이유있는 설명이 따르자 마음이 놓인 리히터가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입을 열기도 전에 그는 난폭하게 차 밖으로 끌려나갔다. 

그는 반항을 해보았지만 순식간에 양쪽 뺨을 후러맞고 땅바닥에 쓰러졌다.  
손들이 지갑을 찾아 난폭하게 몸을 더듬었다.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내들 중 하나가 비꼬는 듯한 말투로  비지니스 맨 이란 말을 하자 다른 녀석이

말했다.
   가방이나 챙겨. 
  닥터 리히터는 손목에서 시계가 풀려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눈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멀어지는 발소리와 차문이 세게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음 순간 매그러운 콘크리트 바닥을 긁고 타이어의 
날카로운 파열음이 정적을 갈랐다.
  잠시 동안 그는 목숨을 부지한 것만도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꼼짝도 않고 
누워 있었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안경을 주워 코에 걸쳤다.  왼쪽 안경알이
깨져 
있었다.  외과의로서 그가 제일 걱정을 했던 것은 손이었다.  그는 땅바닥에서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우선 손부터 점검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그는
나머지 
부분들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그의 흰 셔츠와 넥타이는 기름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불레이저 앞쪽에서 
단추가 하나 떨어져 나갔고, 단추가 있던 자리는 조그마한 말굽 모양으로 찢겨져

있었다.  바지는 오른족 앞 주머니에서 무릎 위까지 길게 쭉 찢어져 있었다.
   제기랄, 정말 재수없는 날이군. 
  그는 이 강도 당한 것에 비하면 아침에 차가 찌그러진 것 정도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잠시 망설인 끝에 그는 열쇠를 집어들고 다시 자기 
사무실로 돌아갔다.  경비원을 호출한 그는 엘에이 경찰에 신고를 할 것인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 사람들에게 병원의 이미지가 
나빠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그를 잠시 망설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또 냉정히 
따져보면 경찰이 무슨 뾰족한 수를 낼 리도 없는 것이었다.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동안 그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예정보다

조금 더 늦어지게 될 것 같다는 말을 전했다.  전화를 내려놓은 그는 화장실로 
들어가 거울에 얼굴을 비추어보았다.  오른족 광대뼈 바로 위에 차고 바닥의 
흙먼지로 범벅이 된 찰과상이 하나 생겨 있었다.  소독약으로 조심스럽게 상처를

닦아내며 그는 강도들에게 얼마 정도나 보태주었는가를 가늠해보려고 기억을 
더듬었다.
  지갑 속에는 캘리포니아 주 의사 면허증을 비롯해 신분증과 크레디트 카드
일체, 
그리고 백 달러 정도의 현금이 들어 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제일 아쉬운
것은 
그의 시계였다.  그것은 아내로부터 받은 선물이었다.  제기랄, 하지만 그것오
다시 
사면 되긴 하지.  그런생각이 마악 머리를 스칠 때 사무실 바깥 쪽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경비원은 이런 문제가 전에는 한 번도 없었던 일이며 자기가 현장에 없어 정말

죄송하게 되었다고 비굴할 정도로 고개를 조아리며 사과를 했다.  그는 자신이 
불과 30분 전, 평상시와 같이 순찰을 하며 차고 안을 훑어보았다고 말했다.
  닥터 리히터는 이것이 절대 그의 탓이 아니라고 경비원을 달래며 자신의 
유일한 관심은 차후 또 이러한 불미스러운 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적절한
조치가 
강구되어야 한다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그런 다음 닥터 리히터는 경찰에게
연락을 
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다음날, 닥터 리히터는 몸의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았지만 그 이유를 전날의 
충격과 간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는 사실 탓으로 돌려버렸다.  하지만
오후 
다섯 시 반이 되자 그는 의무 기록실 비서로 있는 애인과의 밀회 약속을
취소할까 
고려할 정도로 몸이 불편해졌다.  결국, 그는 그녀의 아파트에 들르기는 했지만 
집에 가서 좀 쉬기 위해 일찍 그곳을 떠났고, 본인이 바라던 바와는 달리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척이기만 했다.
  다음날이 되자 닥터 리히터는 진짜로 병이 나버렸다.  
세극등(안과 검진용 기계)에서 몸을 일으키자 머리가 빙빙 돌며 현기증이 났다. 

그는 원숭이에게 물렸던 일이나 에이즈 환자가 얼굴에 대고 기침을 했던 일 
따위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는 에이즈가 그런 사소한 접촉으로

전염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걱정하는 것은 그 환자에게 
있을지도 모르는 미확인 중복감염(어떤 주된 감염증 이외에 병을 합병시키는 
감염.  예를 들어 에이즈 환자에게는 세균이나 진균 등이 중복 감염될 수 
있슴)이었다.
  오후 세 시 반이 되자 오한이 나며 편두통만큼이나 심한 두통이 시작되었다.  
열이 나는 것으로 생각한 리히터는 남아 있는 스케줄을 모두 취소하고 병원을 
나섰다.  그때가 되자 그는 자신이 감기에 걸린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가 집에 도착하자 그의 아내는 그의 충혈된 눈과 창백해진 얼굴을 한 번 힐끗 
쳐다본 다음 그를 침대에 눕혔다.
  여덟 시가 되자 두통이 너무 심해져 그는 페르코단을 한 알 먹었다. 아홉 시가

되자 격렬한 복통과 설사가 일어났다.  그의 아내는 닥터 나바르에게 전화를 
하려 했지는 닥터 리히터는 아내에게 너무 호들갑 떨지 말라고 핀잔을 주며 이내

괜찮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달마인(수면제) 몇 알을 먹은 뒤 잠이 들었다.
 
새벽 세 시, 일어나 욕실로 기어들어간 닥터 리허터는 붉은 선혈을 토해냈다.  
공포에 질린 그의 아내는 병원에 앰뷸런스를 요청한 다음 내내 그의 곁을
지켰다.  
그는 이제 불평을 늘어놓을 만한 힘도 없었다.  그는 자신이 여태까지
앓아보았던 
어떤 질병보다도 더 중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1

    1월 20일

  무엇인가가 마리사 블루멘탈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녀는 자극이 자신의 마음 
속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어떤 사소한 외부적인 변화에서 온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더 이상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펼쳐놓았던 책에서 눈을
든 
그녀는 창 밖의 빛이 창백한 겨울의 흰색에서 잉크 같은 칠흑빛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이미 시계는 일곱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소사! 
  마리사는 입에 밴 어린 시절 말투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잠시 현기증이 났다.  그녀는 애당초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오랫동안 
질병관리센터의 도서실 구석, 두 개의 비닐 커버를 씌운 의자 위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날 저녁에는 데이트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준비를
하기 
위해 여섯 시 반까지 집에 돌아갈 계획이었다.
  육중한 필드 바이러스학 교과서를 집어든 그녀는 욱신거리는 다리 근육들을 
쭉쭉 뻗으며 도서 반납용 서가로 걸음을 옮겼다.  그날 아침 마리사는 조깅을 
나서기는 했었지만 왠지 컨디션이 안좋아 6킬로를 뛰던 평소와는 달리 3킬로만을

달리고는 그만 두었던 것이다.
   그 괴물을 책꽂이에 넣으려면 도움이 좀 필요하지 않겠어요? 
  인자하게 생긴 도서관 사서 캠벨 부인이 항상 입고 있는 회색 가디건의 단추를

채우며 놀리듯 물었다.  도서실은 항상 썰렁한 기운이 맴도는 곳이었다.
  물론 그녀가 했던 말은 농담이기는 했지만 캠벨 부인의 말이 전혀
사실무근만은 
아니었다.  그 바이러스학 교과서의 무게는 5킬로그램 정도로 마리사의 
50킬로그램 체중의 십분의 일이나 되었다.  물어올 때면 마리사는 힐을 신었을 
때의 키인 160센티라고 대답하고는 했다.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책을 휘두른 
그녀는 힘껏 체중을 실어 던지듯 그것을 서가에 올려놓았다.
   이런 책에 필요한 도움은 말이에요. 
  마리사가 말했다.
   내용을 머릿속에 넣도록 해주는 그런 것뿐이랍니다. 
  캠벨 부인은 자신의 온화한 스타일로 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씨디씨의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친절하고 우호적이었다.
  이곳은 1973년 공식적으로 연방 산하 기관이 되기는 했지만 마리사의 눈에는 
이곳이 딱딱한 정부 기관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연구소와 같은 느낌을 주었다.  
이곳의 분위기는 공무원 사회에서는 보기 드문 헌신과 성실성으로 가득했다. 
비서나 관리 직원들은 네 시반 정각에 퇴근을 하지만 연구 직원들은 대개의 경우

늦게까지 사무실을 지켰으며 새벽 동이 틀 무렵까지 일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이곳 사람들은 자기들 일에 신념과 정열을 가지고 있었다.
  마리사는 공간적으로는 정말 한심할 정도로 비좁은 도서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센터의 책과 정기 간행물의 반 이상이 건물 각곳에 산재한 사무실들에
아무렇게나 
보관되어 있었다.  그런 면들에 있어서는 씨디씨 역시 예산 삭감의 분위기
속에서 
경비를 구걸해 얻어야만하는 연방 산하 보건 기관임에 틀림이 없었다.
  마리사는 이곳이 정부 기관이라는 처지에 걸맞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복도는 공공기관에 단골로 쓰이는 칙칙한 녹색이었고 바닥을 닳아빠져 거의
  어질 
것만 같은 회색 비닐로 덮여 있었다.  엘리베이터 앞에는 어디에고 붙어 있는
웃음 
띤 대통령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 사진 바로 아래에는  올해 예산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내년까지 한 번 기다려 보세요 라는 낙서가 적힌 카드가 한 장 붙어

있었다.
  마리사는 계단으로 한 층을 올라갔다.  그녀의 사무실 - 사실 그곳은 
사무실이라기보다는 조그마한 창고에 가까웠다 - 은 도서관 한 층 위에 있었다. 

그곳은 한때 청소 도구 보관함이었음직한 창문조차 없는 창고 구역이었다.  벽은

페인트칠을 한 재벽돌이었고 비좁은 공간은 철제 책상 하나, 서류 캐비닛,
전등과 
회전의자 하나만으로 꽉 찼다.  하지만 그나마라도 얻을 수가 있었던 것은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씨디씨에서는 자기 자신만의 사무실을 얻는다는 게 
하늘의 별따기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열악한 근무 조건에도 불구하고 마리사는 씨디씨가 훌륭히 맡은

바 소임을 다해내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씨디씨는

미국 내는 물론 수많은 다른 나라에서도 가히 경이적이라 할 수 있는 의학적 
공헌을 해왔다.
  그녀는 이 센터가 몇 년 전 어떻게 레지오넬라병의 미스터리를 풀었는지 
생생히 기억해낼 수 있었다.  이 기구가 미국 남부에서 말라리아를 몰아내기
위해 
1942년 말라리아 관리국이라는 이름으로 출범한 이래 기여한 공헌의 수백 가지가

넘었다.  1946년, 이 기구는 박테리아(세균), 진균(곰팡이), 기생충, 바이러스와

리케차(세균보다 작고 바이러스보다 큰 미생물)에 각각 별도의 전문 부서를 
갖추고 전염병 센터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이듬해, 흑사병, 광견병,

탄저병 등 원래 동물에 기생하는 병원체가 사람에게 전염되어 일어나는 
동물기생체증 전담부서가 신설되었다.  1970년, 이 기구는 다시 개명이 되었는데

그것이 오늘의 질병관리센터, 씨디씨였다.
  정부에서 지급된 서류가방에 짐을 챙겨넣으며 마리사는 씨디씨의 지난
영광들을 
생각해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이 센터에 오게 된 주된 이유 중의 하나가 이
기관의 
찬란한 역사와 전통 때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보스턴에서 소아과 
레지던트 과정을 마친 다음 이곳을 지원했던 마리사는 역학정보부에 2년 계약의 
역학 정보원으로 채용이 되었다.
  크리스마스 직전이었던 불과 3주 반 전, 그녀는 명목상 그녀의 새로운 역할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이라는 기본적인 코스들을 수료했다.  그 코스에는
공공 
보건 행전, 생명 통계학과 역학 - 즉 어떤 특정 인구 집단 안에서 질병과 건강에

대해 연구, 조사를 하는 학문 - 이 포함되어 있었다.
  짙은 감색의 코트를 걸치던 마리사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그녀가 
기본적인 코스를 수료했던 것만은 사실이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진짜 응급상황을

다루기에는 심히 역부족이라는 느낌을 수련 기간 동안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만일 업무가 부여되어 실제로 현장에 나가게 된다면 교실에서 배운 것만으로는 
어림도 없을 것이 분명했다.  어떤 특정질환의 증례에 대한 원인, 전파 수단, 
숙주요소 등을 남들이 알아 쉽게 조리있게 말로 설명할 줄 안다는 것은 진짜 
사람들에게 발생한 진짜 질병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결정하는 것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사실, 이것은 만약의 문제가 아니라 이제 곧 목전에 닥쳐올
문제였던 
것이다.
  서류가방을 집어든 마리사는 전등을 끄고 엘리베이터를 향해서 복도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녀와 함께 기본 역학 코스를 수강했던 48명은 대개가 그녀처럼
전공의 
교육을 마친 의사들이었다.  의사가 아닌 사람 중에는 미생물 학자가 몇 명, 
간호사가 몇 명, 심지어는 치과 의사도 한 명이 끼여 있었다.  그녀는 같이
수료했던 
사람들도 모두 자신과 같은 자신감의 상실 위기를 겪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의학계에 있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런 것에 대해서는 쉽게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 했다.  그것은 그런 행동이 그들이 머릿속에 품고 있는 일반적인
이미지와 
상반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기본 수련 과정이 끝나자 그녀는 자리가 났던 곳 중 자신의 제1지망이었던
특수 
병원체 부서의 바이러스과에 배속되었다.  그녀의 지원이 받아들여졌던 것은 
그녀가 자기 반에서 최고의 성적을 올렸기 때문이었다.  마리사는 바이러스학에 
대해 특별히 조예가 깊지 않았지만 이것이 그녀가 도서관에서 그렇게 많은
시간을 
보내야만 하는 이유였다.  근래의 에이즈란 질병의 유행으로 바이러스학이
연구의 
최첨단 분야로 떠올라 각광을 받게 되었던 터라 이 부서를 지원했던 것이었다.  
얼만 전가지만 해도 바이러스학은 항상 세균학의 그늘에 가려져 있는 찬밥 
신세였으나 이제 바이러스학은 인기있는 분야가 되었고 마리사는 그 일부가 되고

싶었다.
  엘리베이터에 도착한 마리사는 승강기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에게 
인사말을 건넸다.  그들 중에는 낯익은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 대부분은 그녀의 
사무실 바로 옆에 붙은 바이러스과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지만 모두들 친근하게 그녀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녀는 자신의 새로운 직책을 수행할 능력에 대해 자신감의 위기를 느끼고 
있었지만 적어도 자신이 남들에게 호감을 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가 있었다.
  1층에 도착한 마리사는 줄을 서서, 오후 5시 이후로는 꼭 기재해야 하는
출입자 
명부에 서명을 마친 다음 주차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겨울이라고는 하지만 이곳의 겨울은 지난 4년동안 견뎌내야 했던 보스턴의 
매서운 겨울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것이어서 그녀는 코드 단추를 잠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의 빨간색 흔다 프리루드 스포츠카는 그녀가 아침에 
아무렇게나 팽개쳐둔 먼지투성이에 더러운 상태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차에는 
아직도 매사추세츠 번호판이 달려 있었다.  번호판을 바꾸는 일은 마리사가 
아직도 시간이 없어 해결하지 못했던 수많은 과제 중의 하나였다.
  씨디씨에서 마리사가 세든 집가지는 차로 얼마 걸리지 않았다.  씨디씨 주변 
지역은 1940년대 초 씨디씨에게 부지를 기증했던 에모리대학의 소유로 되어
있었다.  
대학 주위로는 중하류에서 상류까지의 계층이 망라된 여러 개의 깔금하고 보기 
좋은 주택가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마리사가 빌릴 만한 집을 찾아낸 것은 
드루이드 힐스 구역의 오래된 주택가 중의 하나에서였다.  그 집은 광범위한 
산아 제한 정책의 연구를 위해 아프리카의 말리라는 나라로 전근을 가게 된 어떤

부부의 소유였다.
  마리사는 피치트리(복숭아 나무)플레이스로 차를 진입시켰다.  그녀에게는 
아틀란타의 모든 것에 복숭아 나무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왼편에 나타난 자기 집 앞을 지나 차를 몰았다.  그녀가 사는 집은
정원을 
제외하고는 그런 대로 쓸만하게 유지되어온 조그마한 2층 목조 건물이었다.  
현관을 떠받치고 있는 두 개의 이오니아식 기둥을 제외하고는 그 집이 어떤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모든 창문에는 가운데 하트모양의 
구멍이 뚫어진 덧문이 달려 있었다.  마리사는 부모님께 귀엽다는 단어로 그 
창문들을 묘사했었다.
  그녀는 다음 길목에서 좌회전을  한 다음 또 한번 좌회전을 했다.  그녀의
집이 
서 있는 대지는 한 블록 전체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차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집 
뒤쪽으로부터 진입을 해야만 했다.  집 앞쪽에도 원형의 진입로가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차고나 뒤쪽의 진입로와는 연결이 되지 않았다.
  저녁에 외출을 해야 하기 때문에 마리사는 차고로 들어가는 대신 바로 나갈 수

있도록 마당에 주차를 시켰다.  뒷문 쪽 계단을 뛰어오르자 소아과 수련 동기
중의 
하나가 선물로 준 코커 스파니엘종 개가 반갑다고 짖어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실 마리사는 단 한번도 개를 기를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지만 6개월 전, 
그녀가 결혼까지 무난히 이어지리라고 생각했던 오랜 로맨스가 갑자기 
무산되어버리는 바람에 심경의 변화가 생기게 된 것이었다.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의 신경외과 레지던트였던 로저 슐만은 자신이 유씨엘에이의 
펠로우쉽(특별 연구직)을 수락했다는 소식과 또 자신은 혼자 가기를 원한다는 
말을 전함으로써 마리사를 충격에 빠뜨렸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로저가 
수련을 마치고 싶어하는 곳 어디에건 마리사가 같이 간다는 것을 기정사실처러 
받아들이고 있었고, 실제로 마리사는 샌프란시스코와 휴스터의 소아과 자리에 
지원서를 내기가지 했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로저는 유씨엘에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말이 없었던 것이다.
  세 명의 오빠와 차갑고 가부장적인 신경외과 의사인 아버지 밑에서 응석받이로

자란 마리사는 사실 자신감이나 독립심 같은 것은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로저와의 결별로 심한 충격을 받아 매일 아침 병원에 출근하기 위해 일어나는 
것조차도 몹시 힘겨워했다.  그녀의 친구 낸시가 강아지 한 마리를 선물했던
것은 
이 우울했던 이별의 여파 한 중간에서였다.
  처음에는 짜증을 냈던 마리사였지만, 태피 - 강아지는 그 지독하게 귀여운 
이름이 적힌 커다란 나비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 는 금세 마리사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낸시가 생각했던 대로 마리사로 하여금 그녀의 아픈 상처 외에 다른

곳으로 주의를 돌릴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제 마리사는 그 강아지에 푹 빠져서

집에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어떤 생명체 가 있다는 사실을 몹시 즐겁게 
생각하고 있었다.  씨디씨로 오게 되었을 때 마리사의 유일한 걱정은 직장으로 
나가 있을 때 태피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뿐이었다.  그점은 집
오른편에 
사는 이웃 저드슨 부부가 강아지와 사랑에 빠져 마리사가 외출하는 경우 
언제라도 태피를 맡아 돌보겠노라고 제안 아닌 요구를 하는 바람에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제드슨 부부의 호의는 정말 신의 가호와도 같은 것이었다.
  문을 연 마리사는 경보장치를 끄기 위해, 흥분해 달려드는 태피를 요리조리 
피해야만 했다.  집 주인이 처음 마리사에게 이 경보장치에 대해 설명해주었을 
때, 그녀는 그저 한쪽 귀로 흘리면 건성으로 들었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그런 
경보장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다행으로만 생각되었다.  교외는 시내보다는
훨씬 
안전했지만 밤이 되면 어쩐지 북적거리던 보스톤에 있을 때보다 더 고립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심지어 귀가시 집안의 수상한 불빛이나 
움직임을 감지했을 경우 진입로에서 경보기를 작동시킬 수 있도록 위급버튼을 
항상 코트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것까지도 몹시 안심이 되었다.
  우편물을 훑어보는 동안 마리사는 태피가 앞마당, 푸른 가문비 나무 주위를 
뱅뱅 돌아 뛰어다니며 힘을 빼도록 내버려두었다.  저드슨씨 부부는 어김없이 
정오쯤 강아지에게 바람을 쐬어주었다.  하지만 그랬다고는 해도 마리사가 올 
때까지 그저 부엌에만 갇혀 있기에는 여덟 달 난 강아지에게 너무도 긴
시간이었다.
  그러나, 마리사는 태피에게 그 즐거운 운동시간을 오래 허락할 수가 없었다.  
시간은 벌써 일곱 시를 지나 있었고, 그녀는 여덟 시까지는 저녁 약속 장소에 
나가야만 했다.
  꽤 유명한 안과 의사인 램프 헴스턴은 이미 그녀와 몇 번 만난적이 있었다.  
그녀는 아직도 로저와의 관계를 완전히 극복한 것은 아니었지만 랠프의 세련된 
사교술과 침대로 가자는 강요없이 그저 저녁 식사나 극장, 또는 음악회에 가는 
것만으로도 만족해 하는 것 같은 태도에 호감을 느꼈다.  사실, 그가 마리사를 
집으로 초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그는 이번 모임이 그들 단 둘만의
자리가 
아닌 큰 파티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명명백백히 밝힌 바 있었다.
  그는 그들의 관계가 자연스러운 속도로 진행되어 나가는 것에 만족하고 있는
것 
같아 보였는데 마리사는 그 이유가 스물두 살이라는 나이 차 - 그녀는 31세,
그는 
53세였다 -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러나 어쨌든 그것이 
마리사에게는 꽤나 다행스럽게 생각되었다.
  아틀란타에서 마리사가 데이트를 하는 랠프 이외의 또다른 상대는 그녀보다 네

살 아래였다.  그 사람은 그녀가 배치된 부서에서 함께 근무하는 태드
쇼클리라는 
미생물학 박사였는데, 그녀가 센터에 온 첫 주, 식당에서 우연히 마주친
순간부터 
그녀에게 홀닥 반해버린 것이다.  그는 랠프 헴스턴과는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그는 고작 영화구경 한 번 가지고 청할 때에도 너무나도 수줍게 굴었다.  그들은

대여섯 번 데이트를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그 역시 랠프처럼 육체적인 면에서
그리 
치근덕거리지는 않았다.
  재빨리 샤워를 마친 마리사는 물기를 닦으며 거의 습관적으로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시간과 경주를 하며, 그녀는 어떻게 차려입는 것이 좋을까 재빨리 
옷장을 훑었다.  그녀는 패션광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능력껏 제일 예쁘게 차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녀는 마침내 실크 스커트와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스웨터를

입기로 마음을 먹었다.  스웨터는 허벅지 중간까지 내려왔는데 그녀는 그것이 
자신의 키를 그나마 좀 커보이게 한다고 생각했다.  발에 까만 펌프스(신발의 등

부분이 없고 끈으로 매지 않는 구두.  원래는 무도용으로 이브닝 드레스와 함게 
신었다)를 싣고 그녀는 전신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보았다.
  키를 제외하고는, 마리사는 자신의 용모에 대체적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그녀의 
이목구비는 작지만 매우 고왔으며 수년 전 그녀가 아버지에게 자기를 예쁘다고 
생각하는지를 물었을 때 아버지는  그림처럼 아름답다 는 말을 한 적도 있었다. 

그녀의 눈은 짙은 밤색에 눈썹이 고왔고 파도치는 곱슬머리는 값비싼 세리 주의 
색깔이었다.  그녀는 열여섯 살 때부터, 어깨 길이의 머리칼을 한 묶음으로 뒤로
 
제쳐 거북이 껍질 머리핀으로 붙들어맨 지금과 같은 헤어 스타일을 지키고
있었다.
  랠프의 집가지는 차로 불과 5분 거리였지만 그곳으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동네의 
모습이 현격히 바뀌기 시작했다.  집들이 점차 커지며 잘 다듬어진 마당
뒤켠으로 
물러나 앉아 있었다.  그 진입로는 봄에 보아야 그 아름다운 모습을 알 수
있다고 
랠프가 주장하던 진달래과 철쭉들로 단장되어 있었다.
  집 자체는 오른족 앞 모퉁이에 커다란 팔각형의 기둥이 솟아 있는 3층자리 
빅토리아풍 건물이었다.  그 기둥에서부터 시작되어 내려온 화려한 장식으로 
테두리를 두른 커다란 현광이 건물 앞쪽 전체에서 집 왼쪽 모퉁이까지 뻗어
있었다.  
쌍바라지 앞문 위쪽과 현관 지붕 위로는, 둥근 발코니가 걸려 있었다.
  그곳은 축제 분위기가 한껏 무르익은 것 같아 보였다.  집의 모든 창문들에
환히 
불이 켜져 있었다.  마리사는 랠프가 가르쳐주었던대로 왼쪽을 향해 차를
돌렸다.  
그녀는 자신이 약간 늦엇다고 생각했지만 그곳에는 다른 차들이 한 대도 눈에
띄지 
않았다.
  집 옆을 지나며 그녀는 3층에서부터 시작되어 내려는 화재시대피용 비상계단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어느 날 저녁 랠프가 깜박 잊고 나온 무선 호출기를
가지러 
다시 집에 들렀을 때 그것을 처음발견했다.  랠프는 건물의 전 소유주가 그곳에 
하인들 숙소를 만들었는데 시청 건축과가 강제로 그곳에다가 화재 대피용 비상 
계단을 첨가하도록 했다고 말해주었다.  그 검은 철계단은 집의 흰 칠과 너무도 
어울리지가 않아 괴상해 보이기까지 했다.
  마리사는 집만큼이나 요란한 장식이 달린 차고 앞에 차를 세우고 건물 
앞쪽에서는 보이지 않는 신축 이면에 달린 뒷문에 노크를 했다.  아무도 그녀의 
노크 소리를 듣지 못하는 모양이엇다.  창문을 통해 그녀는 부엌의 분주하게 
돌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마리사는 건물 앞쪽으로 돌아가 초인종을
울렸다.  
랠프가 즉각 문을 열어주며 커다란 포옹으로 그녀를 반겼다.
   일찍 와줘서 고마워요. 
  그가 마리사의 코트를 거들며 말했다.
   일찍이라구요? 전 제가 늦을 줄 알았는데요? 
   아니, 전혀 그렇지가 않아요.  손님들은 여덟 시 반이 되어야만 오기 
시작할거예요. 
  그는 그녀의 코트를 복도의 옷장에 걸었다.
  마리사는 랠프가 턱시도 차림이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가 몹시

핸섬해 보인다는 데는 전혀 이의가 없었지만 그녀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복장을 제대로 갖춰입고 올 걸 그랬나봐요.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이게 공식 파티란 얘기 하지도 않으셨잖아요. 
   당신은 언제 보아도 눈이 부시게 아름다워요.  이 턱시도는 그저 한 번 
입어본 것뿐이에요.  이리 와봐요, 집 구경을 시켜드리죠. 
  마리사는 다시 한번 랠프가 전형적인 의사같아 보인다는 생각을 하며 그의
뒤를 
따랐다.  그는 적당히 흰 머리칼이 나기 시작한, 강인하면서도 인자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랠프가 안내하며 둘은 응접실로 들어갔다.  실내장식은 
매혹적이었지만 어딘가 박력이 없이 김이 빠진 느낌을 주었다.  검은 유니폼을 
입은 하녀 하나가 오르되브르를 펼쳐놓고 있었다.
   여기서 시작을 할 거예요.  술은 거실에 있는 바에서 내놓도록 했어요. 
  랠프가 말했다.
  미닫이문을 열고 그들은 함께 거실로 들어섰다.  왼쪽에 바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붉은 조끼 차림의 절  ㄴ이 한 명이 분주히 술잔을 문질러 광을 내고 
있었다.  거실 너머 아치형 문을 지나서는 격식을 갖춘 식당이 있었는데
마리사는 
적어도 심여 명을 위한 식탁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랠프를 따라 신축 건물로 들어갔는데 그곳에는 커다란 현대식 주방과 가족들이
쉴수 
있는 휴게실이 딸려 있었다.  디너 파티를 출장연회 서비스에 부탁한 듯 서너
명의 
사람들이 분주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마을 놓은 랠르는 다시 마리사를 
응접실로 데리고 가 그녀가 안주인 역할을 맡아주기를 바라는 욕심에 남들보다 
일찍 와달라는 부탁을 하게 되었노라고 설명을 했다.  랠프와 불과 대여섯
번밖에 
데이트를 하지 않았던 까닭에 약간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마리사는 흔쾌히 그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초인종이 울렸다.  첫 손님들이 도착한 것이었다.
  불행히도 마리사는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데는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닥터 헤이워드와 그의 부인을 기억할 수가 있었는데 그것은 그의
머리칼이 
놀랄 만큼 흰 은발이었기 때문이었다.  닥터 잭슨 부부는 그 부인이 걸치고 있던

골프공만한 다이아몬드 때문에 기억에 남았다.  마리사가 기억할 수 있었던 
유일한 다른 이름은 닥터 샌드버그 부부였는데 그들은 내외가 모두 정신과 
의사였다.
  그저 가벼운 대화나 주고받으려고 생각했던 마리사는 손님들의 모피와 보석에 
입이 딱 벌어졌다.  이 손님들이 평범한 시골 동네 개업의들이 아니라는 것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손에 음료를 든 채 거실 한가운데를 배회하고 있을 때 다시

초인종 소리가 났다.  랠프가 보이지 않자 마리사는 대신 나가 문을 열었다.  
너무나 놀랍게도 그 손님은 그녀가 근무하는 특수 병원체 부서의 장인 닥터 시릴

두브체크였다.
   안녕하시오, 닥터 블루멘탈. 
  두브체크가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그녀의 앞을 지나며 부드럽게 인사를
건넸다.
  마리사는 어찌나 당황을 했는지 누구라도 그녀의 놀란 표정을 읽을 수가 있을 
정도였다.  그녀는 씨디씨에서 누가 올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던 것이다. 

두브체크가 하녀에게 코트를 벗어 건네주자 짙은 감색의 이태리제 양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석탄처럼 새까만 지적인 눈과 올리브색 피부를 가진 지독히도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날카롭고 단정한, 귀족적인 용모를 가지고 있었다. 

이마에서부터 뒤로 벗어넘긴 머리칼을 매만지며 그가 미소를 지어보였다.
   또 만나게 되었군요. 
  마리사는 희미한 미소로 응대하며 거실쪽을 향해 고개를 끄떡였다.
   바는 저쪽에 있어요. 
   랠프는 어디 있지요? 
  두브체크가 사람으로 북적대는 거실 안쪽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아마 부엌에 있을 거예요. 
  마리사가 말했다.
  두브체크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떡이며 발길을 옮기는 순간 또 한번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연 마리사는 이번에는 숨이 막혀 기절을 할 지경이었다.  그녀 
앞에는 태드 쇼클 리가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마리사! 
  태드가 놀란 듯이 입을 열었다.
  마리사는 이내 충격에서 벗어나 태드가 집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문간을 
비켜주었다.
  태드가 코트를 벗는 것을 거들며 그녀가 물었다.
   닥터 헴스턴이랑 어떻게 아시게 됐죠? 
   그저 오가다 회의석상에서 만났어요.  우편함에서 초대장을 발견하고는 정말 
놀랬었죠. 
  태드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제가 누굽니까?  공짜로 밥 한 끼를 때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사람 같아 보입니까? 
   닥터 두브체크도 온다는 걸 알고 있었나요? 
  마리사가 물었다.
  태드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큰 상관이에요? 
  그는 식당 안쪽을 들여다본 다음 시선을 중앙 계단으로 옮겨 올려다보았다.
   정말 아름다운 집이에요.  와! 
  마리사의 얼굴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짧은 모래빛 금발에 순진한 
얼굴의 태드는 박사학위를 딴 사람치고는 너무나도 어려보였다.  그는 골덴 
재킷과 니트 넥타이 그리고 회색 플란넬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바지는 얼마나 
닳고 닳았던지 청바지라고 해도 곧이들을 정도였다.
   참, 그런데...당신은 닥터 햄스턴을 어떻게 알죠? 
   그냥 아는 사람이에요. 
  마리사는 태드에게 거실로 들어가 음료를 한 잔 들라고 손짓을 하며
얼버무렸다.
  일단 손님들이 모두 도착하자 마리사는 조금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문간을
떠났다.  
바에서 백포도주를 한잔 집어든 그녀는 손님들 사이로 섞여들었다.  그녀는 닥터

샌드버그와 닥터 잭슨 부부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아틀란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아가씨. 
  닥터 샌드버그가 말했다.
   감사합니다. 
  마리사는 잭슨 부인의 커다란 다이아몬드 반지에 시선이 끌리는 것을 애써 
막으며 대답을 했다.
   어떻게 씨디씨까지 오시게 되었습니까? 
  닥터 잭슥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깊고 낭랑했다.  그는 그저 외모만 찰턴 
헤스턴과 닮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벤허의 역할을 대신 할 수 있을 정도로 
목소리마저 꼭 같았다.
  그의 푸른 눈을 들여다보며 마리사는 이 외견상 정중하고 진지한 질문에
어떻게 
대답을 해야할까 망설였다.  그녀는 전 애인이 엘에이로 도망쳐버리는 바람에 
기분전환을 위해 왔다는 등의 이야기는 결코 꺼낼 생각이 없었다.  그런 종류의 
이야기는 사람들이 흔히 기대하는 씨디씨에 오게 된 이유 아닐 것이었다.
   저는 항상 공중 보건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어요. 
  그 말은 악의 없는 거짓말이었다.
   게다가 저는 항상 의학 탐정 이야기에 큰 매력을 느끼고 있엇거든요.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적어도 방금 한 이야기만은 사실이었다.
   어쩌면 더 이상 콧물 감기나 아픈 아이들 귀나 들여다보는 게 지겨워졌는지도

몰라요. 
   소아과 수련을 받으셨다... 
  닥터 샌드버그가 혼자 중얼거렸다.
   보스턴 소아 병원에서 레지던트를 했습니다. 
  마리사가 말했다.  그녀는 정신과 의사들과  야기를 할게 될 때면 언제고 좀 
불안한 기분이 들고는 했다.  그들이 그녀 자신보다도 그녀의 동기를 더 잘 
분석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이 의업에 투신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가 아버지와의 관계에 있어 오빠들과 경쟁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였음을 알고 있었다.
   임상 의학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닥터 잭슨이 물었다.
   개업을 하실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나요? 
   그럼요, 물론이에요. 
  마리사가 대답했다.
   어떻게요? 
  마리사를 점점 더 불안하게 만들며 닥터 잭슨이 말을 이었다.
   어떤 형태의 개업을 생각하셨나요?  혼자?  그룹으로?  아니면 클리닉? 
   저녁 준비가 다 됐습니다. 
  웅성거리는 대화의 소음 위로 랠프가 큰 소리로 외쳐댔다.
  닥터 잭슨과 닥터 샌드버그가 각자 부인들을 찾기 위해 몸을 돌리자 마리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과 함께 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마치 
끌려가 취조를 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식당에 들어선 마리사는 랠프가 긴 테이블 한족 끝에 자신의 자리를 정하고, 
마주보는 건너편 끝에 그녀의 자리를 잡아주었다는 사실을 아게 되었다.  
마리사의 바로 오른족에는 그녀에게 던졌던 임상 의학에 관한 질문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린 닥터 잭슨이 자리를 잡았다.  그녀의 왼쪽은 은발이 찬란한 닥터 
헤이워드였다.
  식사가 진행될수록 마리사와 함께 저녁을 먹는 사람들이 아틀란타 의료계의 
거물급들이라는 사실이 점점 명백해지기 시작했다.  이 사람들은 그저 평범한 
의사들이 아니라 아틀란타 시에서 가장 성공한 개업의들이었다.  이곳의 유일한 
예외는 시릴 두브체크, 태드와 그녀뿐이었다.
  고급 포도주가 몇 잔 들어가자 마리사는 평소보다 말이 많아졌다.  그녀는 
식탁에 모인 사람들 모두가 그녀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순간 창피해져서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화제가 미국 의료계의 부조리한 실태와 개인 개업의 기반을 잠식하는 
선금제 건강관리 병원들로 옮겨가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걸치고 
들어왔던 모피와 값비싼 보석들을 기억한 마리사는 여기 참석한 사람들은 그 
개탄할 만한 의료 현실에 그다지 심한 타격을 받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씨디씨는 어때요? 
  닥터 헤이워드가 테이블 너머로 시릴을 바라보며 물었다.
   예산 감축 같은 건 없었나요? 
  시릴은 양볼에 깊숙한 주름을 만들며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매년 우리는 예산 책정자들은 물론 연구소내 경비 운영회와도 전투를 
벌여야만 합니다.  우리는 예산 삭감으로 500명이나 감원해야 했어요. 
  닥터 잭슨은 목청을 가다듬었다.
   만일 1917년과 1918년에 있었던 전 세계적으로 발생한 인플루엔자 감염이 또 
한번 터져나온다고 생각해봅시다.  당시 부서에 그일이 맡겨진다고 한다면, 그런

일을 해결할 정도의 인력을 가지고 계십니까? 
  시릴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였다.
   그건 여러 가지 변수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만일 그 특정
바이러스주가 
표면 항원을 변환시키지 않는 종류이고 조직 배양에서 쉽게 기를 수만 있다면, 
우리는 꽤 빠른 시일내에 백신을 만들수가 있습니다.  그게 정확히 어느 정도 
시일이 걸릴지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태드? 
  그는 몸을 돌려 태드에게 질문을 던졌다.
   한 달 가량이 걸릴 겁니다. 
  태드가 말했다.
   만일 운이 좋다면 말이에요.  하지만 질병의 확신이나 치료에 어떤 의미있고 
변화를 초래할 수 있을 정도의 양을 만들기 위해서는 시간이 그보다 조금 더 
필요할 겁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몇 년 전 있었던 돼지 인플루엔자 대소동이
기억나는군요. 
  닥터 헤이워드가 참견을 하며 끼어들었다.
   그건 씨디씨의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시릴리 변호하듯 입을 열었다.
   포트 딕스에 출현했던 균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때 왜 
전파되지 않았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때 마리사의 어깨에 손길이 느껴졌다.  몸을 돌리자 눈 앞에 검은 옷을 입은

웨이트리스 한명이 서 있었다.
   닥터 블루멘탈? 
  그 아가씨가 속삭이듯 물었다.
   그런데요. 
   선생님께 전환가 와 있습니다. 
  마리사는 식탁 건너편의 랠프에게 시선을 던졌지만 그는 잭슨 부인과 이야기를

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녀는 잠깐 실례하겠다는 말을 한 다음 
웨이트리스를 따라 부엌으로 들어갔다.  이 전화가 씨디씨에서 걸려온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자 그녀는 인턴이되어 첫 야간 호출을 받았던 때처럼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그녀는 오늘 저녁 당직 대기였기에 씨디씨에 랠프의 
전화번호를 남긴 것이다.  그녀가 여기 온 것을 아는 사람은 씨디씨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닥터 블루멘탈? 
  마리사가 전화기를 집어들자 씨디씨 교환수가 물었다.
  전화는 이내 당직 연구원에게로 연결되었다.
   축하드립니다. 
  그가 명랑하게 말했다.
   방금 전염병 역학 조사를 도와달라는 요청이 하나 접수되었습니다.  
캘리포니아주 역학(질병의 집단현상을 연구하는 의학의 한 분야) 담당관이 
엘에이에 발생한 문제에 씨디씨의 도움을 좀 받고 싶다는군요.  리히터 
클리닉이라는 이름의 병원에서 발생한, 미확인되었지만 매우 심각한 질병 
때문이에요.  선생님을 위해 우리가 벌써 엘에이행 새벽 1시 10분 발 델타 
항공편을 예약해 두었답니다.  트로픽 모텔이라는 데다가 방도 미리 
잡아두었어요.  멋진 이름이지요?  어쨌든, 선생님, 행운을 빕니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마리사는 잠시 전화통 위에 손을 올려놓은채 숨을 돌렸다. 

완전히 혀를 찔린 듯한 기분이었다.  저 불쌍하고 순진한 캘리포니아 사람들은 
역학 전문가가 오려니 하고 씨디씨에 연락을 한 것인데, 전문가는 고사하고,
그녀, 
마리사 블루멘탈이 가게 된 것이다!  오척 단구의 그녀가.
  그녀는 불가피한 일로 자리를 비워야겠다는 작별 인사를 하기위해 다시 식당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2
  
    1월 21일

  마리사가 수하물 창구에서 가방을 찾은 다음 렌트카 회사의 차를 빌려(게다가 
첫 번째 빌렸던 것은 시동이 걸리지 않아 애를 먹었다) 어찌어찌 트로픽
모텔까지 
찾아갔을 때에는 벌써 동녘이 훤히 밝아오고 있었다.
  프런트에 접수를 하려니 로저에 대한 생각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녀는 연락을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녀는 비행기 안에서 몇 번이나 자신에게 그것을
다짐한 
바 있었다.
  그 후줄근한 모텔은 마음에 드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그리 오래 머무를 것도 아니니까.  그녀는 손과 얼굴을 씻고
머리를 
빗은 뒤 다시 머리핀을 꽂았다.  더 이상 지체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자
그녀는 
렌트카에 올라 리히터 클리닉을 향해 차를 몰기 시작했다.  운전대를 쥔 그녀의 
손에 축축하게 땀이 배어나왔다.
  그 병원은 넓은 대로변, 교통이 편리한 곳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아침 이른 
시각이어서 차는 별로 없었다.  주차장으로 진입한 마리사는 주차 티켓을 한 장 
뽑은 뒤 입구 근처에 차를 세웠다.  차고며, 외래과 병동들로 보이는 7층짜리 
건물을 포함해서 리히터 클리닉 전체는 현대적으로 꾸며져 있었다.
  차에서 내린 그녀는 기지개를 켠 다음 서류가방을 집어들었다.  가방 안에는 
혹시 무슨 도움이라도 될까 생각해서 넣은 기본 과정의 역학 부분 강의록과 
메모장, 연필 및 자루, 바이러스병 진단에 관한 자그마한 지침서 한권, 여벌 
립스틱 한 개와 껌 한 통이 들어 있었다.  정말 농담 같은 이야기였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마리사는 익숙한 병원의 소독약 냄새에 마음의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입구 근처에는 안내 창구아 하나 있었지만 그곳은 텅 빈 채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바닥에 걸레질을 하는 관리 직원 하나에게 병실쪽으로 
어떻게 가는가를 묻자 그는 바닥에 그려진 빨간 선을 가리켰다.  마리사는 그 
선을 따라 응급실에 도착했다.  대기실에 환자 몇 명과, 간호사 두 명이 중앙 
데스크를 지키고 있었을 뿐 응급실은 한산한 편이었다.  마리사는 당직 의사를 
찾아 자신이 누구이며 또 무슨 일로 찾아오게 되었는가를 설명했다.
   오, 이제야 오셨군요! 
  응급실 당직 의사가 구세주라도 만난 듯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정말 반갑습니다!  닥터 나바르는 밤새 선생님이 오시기만을 학수고대하고 
계셨답니다.  어서 가서 만나보시죠. 
  마리사는 멍하니 종이 클립 몇 개를 들고 손장난을 쳤다.  이어 고개를 든 
그녀는 간호사 둘이 자기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가

미소를 짓자 그들도 미소로써 답례를 했다.
   커피를 드릴까요? 
  둘 중 키가 큰 간호사가 물었다.
   그래주시겠어요? 
  마리사가 말했다.  기왕에 느끼고 있던 불안감에다가 덧붙여 그녀는 
아틀란타로부터의 비행기 안에서 불과 두 시간 남짓 눈을 붙였을 뿐이어서 약간 
피로함을 느끼고 있었다.
  뜨거운 커피를 홀짝이며 마리사는  뉴 요커 에 게재되었던 버튼루쉬의 의학
탐정 
이야기를 돌이켜 생각해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근대 역학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존 스노우에 의해 해결되었던 것과 같은 사례를 맡을 수 있게 되기를 마음 
속으로 간절히 빌고 있었다.
  런던을 휩쓸었던 콜레라의 창궐은 스노우가 추리 끝에 런던의 어떤 배수장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진압될 수가 있었다.  스노우가 남긴 업적의 
핵심은 그것이 질병의 병원균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전의 일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명명백백한 경우를 맡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당직실의 문이 열리며 새까만 머리칼의 핸섬한 남자 한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밝은 응급실의 불빛에 눈을 깜박인 그는 곧장 마리사에게로 다가왔다.  그의 입 
언저리에 커다란 미소가 떠올라 얼굴전체로 퍼져나갔다.
   닥터 블루멘탈, 이렇게 만나뵙게 되어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당신이 오기를 얼마나 눈이 빠지게 기다렸는지 아마 당신은 상상도 못하실
겁니다. 
  악수를 나누며 닥터 나바르는 마리사의 작은 체구를 굽어내려다 보았다.  
그녀의 너무나도 작은 체구와 어려보이는 외모에 당황하긴 했지만 그는 정중한 
태도로 마리사에게 여행은 어땠는지, 또 혹시 배가 고프지는 않은지 등등을
천천히 
물었다.
   제 생각엔 곧바로 일을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마리사가 말했다.
  닥터 나바르는 흔쾌히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병원 회의실로 마리사를 
인도하며 그는 자신을 병원의 진료부장이라고 소개했다.  하지만 이 말은 도움이

되기는커녕 그녀의 흔들리는 자신감을 더 더욱 뒤흔들어 놓았다.  그녀는 이
닥터 
나바르가 전염병에 관한 한 그녀보다 백 배나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둥근 회의용 탁자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마리사에게 손짓을 한 닥터 나바르는 
전화기를 집어들고 다이얼을 돌렸다.  저쪽에 벨이 울리기 시작하자, 그는 주 
정부의 역학 담당관 닥터 스펜서 콕스가 마리사가 도착하는 대로 이야기를 하고 
싶어한다고 설명을 했다.
  갈수록 태산이군, 마리사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보였다.
  닥서 콕스는 마리사가 지원군으로 왔다는 데 대해 닥터 나바르만큼이나 기뻐
펄적 
뛰는 목소리로 그녀를 맞았다.  그는 마리사에게 불행히도 자신이 지금 에이즈와

연관성이 있을지도 모르는 비형 간염이 샌프란시스코 안에서 발생된 사태 때문에

옴짝달싹도 할 수가 없이 묶여 있다고 설명을 늘어놓았다.
  닥터 콕스가 말을 이었다.
   닥터 나바르가 벌써 선생님께 이번 리히터 클리닉에 발생한 문제의 질병의 
환자가 일곱 명이라는 사실을 말씀드렸으리라 믿습니다. 
   저는 아직 아무 얘기도 듣지를 못했습니다. 
  마리사가 말했다.
   그럼 이제 곧 듣게 되실 겁니다. 
  닥터 콕스가 말했다.
   여기는 말이죠, 비형 간염 환자가 거의 500명이나 된답니다.  그러니 왜 제가

당장 그리로 달려가지 못하는지 이해를 해주실 수 있겠죠? 
   물론입니다. 
   행운을 빕니다. 
  닥터 콕스가 말했다.
   참, 그런데 씨디씨에는 얼마나 계셨지요? 
   그리 오리 되지는 않았어요. 
  마리사의 솔직한 대답이었다.
  잠시 전화선에 침묵이 흘렀다.
   어  든, 제게 계속 연락을 해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닥터 콕스가 말했다.
  마리사가 수화기를 다시 닥터 나바르에게 건네자 그는 전화를 끊었다.
   제가 여태까지의 상황을 종합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그는 주머니에서 7.6x12.7센티짜리 독서카드를 꺼내들며 형식적인 목소리로
톤을 
바꾸었다.
   지금 우리에게는 심한 전신 무력감과 다발성 장기 손상을 특징으로 하는 진단

미상의, 하지만 분명 상당히 심각한 발열성 질환의 사례가 일곱 건
발생하였습니다.  
이 질환이 발병한 첫 번째 환자는 이 클리닉의 공동 설립자 중의 한분이신 닥터 
리히터였습니다.  그 다음 발생한 환자는 의무 기록실에 근무하는 한 
여직원이었습니다. 
  닥터 나바르는 독서 카드를 책상 위에 내려놓기 시작했다.  한 장이 환자 한 
명씩에 해당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카드들을 환자가 발생한 순서대로 차례로 
걸쳐놓았다.
  닥터 나바르가 가방 속을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신중을 기해 서류가방을 연 
마리사는 메모장과 연필을 끄집어냈다.  그녀의 마음은 어느 정도 이수했던 
기초과정 강의실로 달려가 제공된 정보들을 몇 개의 합리적이고 납득이 갈 만한 
범주로 분류를 해놓아야만 한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처음은 그 질병에 관한 정보들이었다.  이게 정말 전혀 새로운 질환인가?  
진짜로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일까?  이것은 간단한 2x2테이블 연산과 일련의
초보적인 통계 조작으로 알아볼 수 있는 문제였다.  마리사는 자신이 어떤
특정한 
진단을 내리지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그 질환의 성격은 규명해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다음 단계는 연령, 성별, 건강 상태, 식사 습관, 취미 등등 환자들이 가진 
숙주요소들에 대해 고찰이며, 또 그 다음으로는 각 환자가 처음 초기 증상들을 
나타냈던 시간, 장소와 환경 등을 고찰해 보아야 한다.  그래야 환자들간에 어떤

공통적인 요소가 있는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그 질환이 어떻게 전파되었는지 하는 문제가 제기 될 것인데, 
그것을 해결하는 동안 전염병원이 밝혀질 가능성도 있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숙주나 보균자에게서 병원체를 박멸해버리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말로 해버리면 너무도 쉬운 일처럼 들리지만 마리사는 이것이 
두브체크같이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련한 사람에게도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땀에 젖은 손을 스커트에 문질러 닦아낸 마리사는 다시 연필을 집어들었다.
   그래서요... 
  그녀가 빈 메모장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아직확진을 내리지 못하셨다니 말인데요, 어떤 병동이 고려 대상에 올라 
있지요? 
   전부 다요. 
  닥터 나바르가 말했다.
   인플루엔지? 
  질문이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기를 바라면서 마리사가 물었다.
   그런 것 같지는 않아요. 
  닥터 나바르가 말했다.
   환자들이 호흡기 증상을 보이기는 하지만 그게 주는 아니에요.  뿐만 아니라 
혈청 검사를 해보니 인플루엔자에 일곱 명 모두가 음성 반응을 보였어요.  그 
사람들 병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인플루엔자는 아니에요. 
   혹시 무슨 단서가 될 만한 건 없나요? 
  마리사가 물었다.
   거의 모든 게 음성이라는 것밖에는 없어요. 
  닥터 나바르가 말했다.
   우리가 해본 모든 검사가 다 꽝 이었어요.  혈액 검사, 소변 검사, 침 검사,
대변 
검사, 심지어는 뇌 척수액 검사까지도.  혹시 말라리아가 아닌가 해서 혈액
도발상 
병원충이 나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항말라리아제를 투여해보기도
했어요.  
배양검사에 음성이었어도 테트라사이클린이나 클로람페니콜로 장티푸스 치료도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전혀 효과가 없었어요.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환자들은

모두 급격히 악화일로를 걷고 있습니다. 
   그래도 감별진단을 하신 건 몇 개 있을 것 같은데요. 
  마리사가 말했다.
   물론입니다. 
  닥터 나바르의 대답이었다.
   우리는 그 사이 몇 군데 전염병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구해보았습니다.  
렙토스피라증의 가능성이 아직도 약간 있기는 하지만 아마도 바이러스성 질환일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닥터 나바르는 카드를 뒤적이더니 한 장을 치켜들었다.
   아, 여기 현재 감별진단에 올라 있는 것들의 목록이 있군요.  아까
말씀드렸던 
렙토스피라증, 황열증, 뎅구열, 전염성 단핵구증, 또 기본적인 것들로, 다른 
엔테로바이러스, 아보바이러스 및 아데노바이러스 감영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치료면에서처럼 진단에 별 뾰족한 진전이 없었다는 사실은 구태여 다시 
말씀드릴 필요가 없겠지요? 
   닥터 리히터가 입원한 지는 얼마나 되지요? 
   오늘이 닷새쨉니다.  우리가 다루어야 할 병이 어떤 건지 감을 잡으려면 
환자들을 한 번 살펴보시는 게 도움이 될 것 같군요. 
  닥터 나바르는 마리사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몸을 일으켰다.  성큼성큼
걷는 
그의 뒤를 따르기 위해서 마리사는 거의 달음질을 쳐야 했다.
  그들은 회전문을 통해 병원 본관 건물로 들어섰다.  그녀는 몹시 불안해하고 
있었지만 호화로운 카펫이 깔린 호텔 같은 내부 장식에 모든 것을 잊고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닥텨 나바르의 뒤를 쫓아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 그는 마리사가 어떤 
바취과 의사에게 인사시켜주었다.  마리사는 미소로 그의 인사에 답례를 했지만 
실상 생각은 다른 곳에 있었다.
  지금 이 순간, 환자들을 보는 것이 그녀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것 이외에는 어떠한 성과도 거두지 못하리라는 사실은 거의
분명했다.
  그들은 5층의 간호사실에 도착햇다.  닥터 나바라는 이제 마약 교대 준비를 
시작한 야간 당직 간호사들에게 마리사를 한참 동안 소개시켜주었다.
   환자 일곱 명이 다 이 5층에 있습니다. 
  닥터 나바르가 말했다.
   우리 병원에서 제일 노련한 직원들이 이곳에 있거든요.  상태가 위중한 두
명은 
복도 바로 건너편 내과계 중환자실의 격리실에 있습니다.  나머지 환자들은 일반

병실에 입원해 있습니다.  차트들은 여기 있습니다. 
  그는 손바닥으로 간호사실 카운터 위 한구석에 쌓여 있던 차트더미를 가볍게 
두드렸다.
   닥터 리히터를 제일 먼저 보시고 싶으시겠죠? 
  닥터 나바르는 리히터의 차를 마리사에게 건네주었다.
  그녀가 가장 먼저 펼쳐본 곳은 바이탈 사인(살아 있다는 징후. 체온, 혈압,
맥박, 
호흡 등 가장 기본적인 임상자료들의 총칭)기록지였다.  그녀는 입원 5일째에 
접어든 닥터 리히터의 혈압이 떨어지며 체온이 상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좋은 조짐은 아니로군.  그녀는 재빨리 차트를 훑어보았다.  그녀는 
나중에 다시 한 번 이 차트들을 세밀히 점검해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저 한 번 대충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여태까지 진료진이 해왔던 처치가 
마리사 자신이 했을 수 있는 것보다 나으면 나았지 전혀 뒤지지 않는 훌륭한 
작업이었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여태까지 알려진 임상 검사법은 거의 모두가 
망라되어 있었다.
  그녀는 도대체 어떻게 되어 자기가 마치 권위자인 양 이 일의 책임을 떠맡게 
되었는지 도무지 알수가 없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차트 앞부분으로 돌아간 마리사는 현병력이라고 쓰인 부분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갑자기 내용 중의 한 부분이 그녀의 관심을 끌었다.  증상이
나타나기 
6주 전, 닥터 리히터가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서 개최된 안과학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호기심이 일어 계속 읽어내려갔다.  발병 1주 전 닥터 리히터는 
샌디에고에서 열린 안검 수술 세미나에 참석했었다.  또 입원 이틀 전 그는 
서코피테세우스 에티옵스라는 것에 물린 적이 있었다.  그녀는 닥터 나바르에게 
그 괴상한 이름을 가리켜보였다.
   그건 원숭이의 한 종류입니다. 
  닥터 나바르가 말했다.
   닥터 리히터는 눈에 생기는 허피스 연구용으로 항상 몇 마리를 기르고
있지요. 
  마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검사 결과지들을 들여다보던 그녀는 환자가 
백혈구 수의 감소와 동시에 낮은 디에스알(혈침속도 : 대개의 경우 체내에 염증 
반응이 있으면 혈침 속도는 상승하게 된다)과 혈소판 수 감소의 혈액 소견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른 검사치들은 감장과 신장의 기능 이상을
시사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이케이지(심전도)마저 경로의 이상 소견을 보이고 있었다. 
이 
환자도 몹시 위중한 상태임이 분명했다.
  마리사는 차트를 카운터 위에 내려놓았다.
   됐습니까? 
  닥터 나바르가 물었다.
  마리사는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환자들과
대면하는 
것은 가급적 뒤로 미루고만 싶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자기가 여태까지 다른 
사람들이 놓쳐버린 중요한 신체 증상을 발견해 그것으로 이 미스터리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과대 망상은 결코 갖고 있지 않았다.  이 시점에서 그녀가

환자들을 본다는 것은 완전한  쇼 일 뿐 아니라, 불행히도 매우 큰 위험부담을 
안게 되는 일이었다.  그녀는 마지못해 닥터 나바르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복잡한 최첨단 전자 장비들이 갖추어진 중환자실로 들어섰다. 
환자들은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힌 전선과 플라스틱 주사줄에 꽁꽁 묶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소독용 알코올 냄새 가득한 중환자실은 심장 감시기, 인공 호흡기가 내는
기계음과 
분주히 움직이는 간호사들로 꽤나 소란스러웠다.
   우리는 닥터 리히터를 이쪽 옆방으로 격리시켰습니다.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며 닥터 나바르가 말했다.  문 왼쪽으로는 커다란
창문이 
달려 있었는데 마리사는 그 창문을 통해 병실 안의 환자를 볼 수 있었다.  
중환자실에 수용된 다른 환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느느 지붕처럼 침대를 뒤덮은 
정맥 주사용 수액병들 밑에 온몸을 축 늘어뜨린 채 맥없이 누워 있었다.  그의 
뒤쪽으로는 모니터에 지속적으로 디케이지의 궤적을 그리는 티브이화면이 버티고

있었다.  
   마스크와 가운을 착용하시는게 좋을 것 같군요. 
  닥터 나바르가 말했다.
   선생님도 물론 짐작을 하셨겠지만, 우리는 이 모든 환자들에게 철저한 격리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거야 당연한 일이지요. 
  자신이 그런 사전 예방조치를 너무 반긴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마리사가 말했다.  하지만, 만일 할 수만 있다면 그녀는 우주복이라도 입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는 가운을 걸친 다음 모자, 마스크, 덧신에 심지어는 수술용 
고무 장갑까지 끼어 몸을 감쌌다.  닥터 나바르 역시 그녀와 같은 복장을
취했다.
  좀 불결스러운 말로  가기 직전인 것처럼 보이는 환자를 내려다보자 마리사는 
자신도 모르게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닥터 리히터의 얼굴은 잿빛으로 변해 
있었고 푹 꺼진 눈에 피부는 탄력을 잃고 축 늘어져 있었다.  그의 오른쪽
광대뼈 
뒤에는 시퍼런 멍이 들어있었다.  그의 입술은 바싹 말라 갈라져 있었고
앞니에는 
말라붙은 피가 엉겨붙어 있었다.
  병마에 시달려 축 늘어진 환자를 내려다보던 마리사는 과연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지만 옆에서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는 닥터 
나바르 때문에 무엇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좀 어떠세요? 
  마리사가 물었다.  그녀는 말이 튀어나가는 순간부터 그것이 물어볼 필요도
없이 
바보 같은 질문이라는 사실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걱정에도 불구하고 닥터 리히터의 눈이 번쩍 떠졌다.  환자위에 생긴 출현반 몇 
개가 마리사의 눈에 들어왔다.
   별로 좋질 않아요. 
  닥터 리히터가 쉰 목소리로 힘없이 소근거렸다.
   한 달 전에 아프리카에 가셨던 게 사실인가요? 
  그녀가 물었다.  탈진한 닥터 리히터의 대답을 듣기 위해서 마리사는 그의
머리 
위로 몸을 구부려야 했다.
   6주 전이에요. 
  닥터 리히터가 말했다.
   혹시 그곳에서 어떤 동물을 접촉하신 적이 있나요? 
  마리사가 물었다.
   아뇨. 
  잠깐 침묵이 흐른 뒤 닥터 리히터가 간신히 말을 이었다.
   모기는 많이 봤어도 직접 손을 댄 적은 없었어요. 
   혹시 어떤 환자를 보시거나 한 적은 없었어요? 
  닥터 리히터는 고개를 저었다.  말을 하는 것조차 힘에 겨운 모양이었다. 
몸을 
일으킨 마리사는 환자의 오른편 눈 밑에 생긴 찰과상을 가리켰다.
   이게 어떻게 생긴 건지 혹시 알고 계세요? 
  그녀가 닥터 나바르에게 물었다.  닥터 나바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병이 나기 이틀 전에 노상 강도를 당한 적이 있습니다.  넘어지며 땅바닥에 
얼굴을 긁혔답니다. 
   불운이 겹쳤군요.  안됐습니다. 
  마리사가 설상가상으로 밀어닥친 닥터 리히터의 불운에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

잠깐 시간이 흐른 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어 덧붙였다.
   이번엔 이 정도면 된 것 같아요. 
  중환자실 중앙부로 향하는 문 바로 앞에는 비닐 백이 달린 커다란 프레임이 서

있었다.  마리사와 닥터 나바르는 자신들이 걸치고 있던 보호가운을 벗어 비닐 
백에 넣은 뒤 다시 5층 간호사실로 돌아왔다.  강박감을 느끼는 듯 마리사는 
세면대에서 거듭거듭 손을 씻어냈다.
   닥터 리히터를 물었다는 그 원숭이는 어떻습니까? 
  그녀가 물었다.
   우리가 그 녀석을 격리해 놓았습니다. 
  닥터 나바르가 말했다.
   우리는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그 녀석에게서 병원체 배양을
시도해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녀석은 아주 건강한 상태입니다. 
  그들은 이미 모든 것을 다 고려해본 것 같았다.  마리사는 혹시 그의 결막 
출혈이 간과되지나 않았나 확인을 해보기 위해 다시 닥터 리히터의 차트를 
집어들었다.  그것은 이미 기록되어 있었다.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 마리사는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눈빛으로 계속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닥터 나바르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글쎄요... 
  그녀가 모호하게 말꼬리를 흐리며 말했다.
   이 차트들을 차근차근 살펴보는 것도 영 만만치가 않은 것 같군요. 
  그때 갑자기 그녀의 머릿속에 전에 바이러스성 출혈열(바이러스에 의한 출혈을

동반한 열병.  유행성 출혈열도 이 범주에 포함된다)이란 종류의 질병들이
있다는 
것을 읽은 기억이 섬광처럼 스쳤다.  그것은 몹시 희귀했지만 대단히
치명적이었고, 
또 그중 몇몇은 아프리카에서 처음 발견된 것들이었다.  클리닉의 의사들이 이미

열거해놓은 진단의 목록에 무엇인가 첨가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 마리사는
그 
질병의 가능성을 언급했다.
   바이러스성 출혈열은 이미 의심을 했던 바입니다. 
  닥터 나바르가 말했다.
   그것이 우리가 이렇게 급하게 씨디씨에 연락을 취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얼룩말  진단치고는 성과가 꽤 있는 편이로군.  마리사는  말굽소리가 나면
말을 
생각해야지 엉뚱하게 얼룩말을 생각해서는 안된다 라는 의학계의 오랜 금언을 
떠올리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닥터 나바르에게 응급 호출이 날아오자 마리사는 그것이 그렇게
다행스럽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정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말했다.
   응급실에 좀 가봐야겠습니다.  제가 가기 전에 더 도와드릴 일이라도
있습니까? 
   글쎄요, 제 생각에는 환자들의 격리를 좀더 완벽하게 보완하는 편이 낫지 
않겠나 싶군요.  이 질병의 전염력이나 전염 경로 등 세세한 것들에 대해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을 때까지는 별개의 격리병동을 운영하고 철저한 격리 간호를 
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닥터 나바르는 마리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잠시 동안 마리사는 그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의아해졌다.
  다음 순간 그가 말을 이었다.
   선생 의견이 절대적으로 옳습니다. 
  마리사는 일곱 개의 차트를 들고 간호사실 뒤에 붙은 자그마한 방으로
들어갔다.  
각각의 차트를 펼쳐본 마리사는 닥터 리히터 후에 네 명의 여자와 두 명의 
남자가 같은 빌병에 걸린 것으로 간주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들은 어떤 
경로로든 직접적인 접촉이 있었든지 아니면 동일한 오염원에 노출되었던 것이 
분명했다.
  마리사는 이 난생 처음으로 맡게 된 현장 과제를 공략하는 최상의 방법이
가능한 
한 많은 정보를 수집해 아틀란타에 보고하는 것이라고 거듭해 자신을 타일렀다. 

다시 닥터 리히터의 차트를 펼친 마리사는 간호 일지를 포함해 구석구석 하나도 
빼놓지 않고 샅샅이 훑었다.  그녀는 가지고 온 노트에 환자가 피를 토해내는 
토혈증상을 포함해서 어떤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되는 모든 정보들을
적어 
내려갔다.
  토혈은 인플루엔자와는 좀 맞지가 않는군.  차트들을 점검하는 동안 그녀의 
마음은 계속 닥터 리히터가 발병 6주 전 아프리카를 방문한 적이 있다는 사실로 
되돌아갔다.  증상으로 보아 한 달이 넘는 잠복기는 이미 가능성이 배제된 
말라리아가 아닌 한 좀 맞지 않는 것 같았지만 그 사실은 어쩐지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에이즈처럼 훨씬 더 긴 잠복기를 가진 바이러스성

질환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에이즈는 급성 바이러스성 질환은 아니었다.  그런 
급성 바이러스성 질환의 잠복기는 하루 이틀 정도의 편차가 있기는 했지만
대개의 
경우 일주일 내외였다.
  마리사는 열심히 차트들을 분석하여 환자 한 명당 노트 한 페이지씩을
할애하여 
연령, 성별, 생활 습관, 직업, 생활 환경 등의 다양한 정보를 수집, 기록해
두었다.  
곧 그녀는 자신이 매우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을 다루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닥터 리히터 외에, 리히터 클리닉의 의무 기록실에 근무하는 여자 비서가 
한 명, 가정주부가 둘, 배관공이 하나, 보험 외판원과 부동산 직원이 각각 한
명씩 
이환된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된 뒤죽박죽의 집단에 어떤 분명한

공통점이 있을 가능성은 실로 드물었지만, 그래도 이들 모두가 같은 감염원에 
노출되었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차트를 읽어보니 마리사는 자신이 싸워야 할 질병이 어떤 임상 경과를
보이는지 
더 더욱 명확히 알 수가 있었다.  그것은 심한 두통과 근육통, 고열, 그리고 
갑작스럽게 발병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환자들은 그 다음 복통, 설사,
구토, 
인후통, 기침과 흉부 통증 등의 증상 중 몇몇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었다. 
차트를 
읽고 있으려니 마치 마리사 자신이 그 병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등골이 
서늘해졌다.
  마리사는 눈을 비볐다.  수면 부족으로 눈은 마치 모래가 들어간것처럼 
뻑뻑하게만 느껴졌다.  이제는 그녀가 좋건 싫건간에 나머지 환자들을
둘러보아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녀가 얻어낸 정보, 그중에서도 특히 발병 직전 각 
환자들의 형태에 관한 것들에는 채워 넣어야만 할 공란들이 너무도 많았다.
  그녀는 닥터 리히터의 병실 바로 옆방에 수용된 의무기록실 비서를 필두로
제일 
마지막에 입원 조치를 받았던 환자까지를 모두 조사해보았다.  각 환자를
방문하기 
전, 그녀는 주의깊게 철저한 모든 복장을 갖추었다.  환자들은 모두 중태로,
아무도 
기꺼이 이야기를 해줄 만큼 기운을 차리고 있지를 못했다.  그래도 마리사는
혹시 
환자들이 발병한 다른 환자들과 모종의 접촉이 있었는지에 대해 집중적으로 
캐물었으며 준비했던 질문들을 던졌다.  언제나 대답은 노였지만 유일한 예외는 
모든 환자들이 닥터 리히터를 알고 있었으며 또 모두가 리히터 클리닉의
건강관리 
계획에 가입된 회원이라는 것이었다.
  그 대답은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어서 마리사는 다른 사람들이 이전에 그것을 
간파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였다.  의무 기록실 비서와도 접촉했을 
가능성이 있으니 어쩌면 닥터 리히터 자신이 이 질병을 퍼트리고 있었는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그녀는 병실 사무원에게 발병 환자 모두의 외래 진료기록을 
가져다달라고 부탁했다.
  그녀가 기다리는 동안 닥터 나바르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불행하게도 환자가 한 명 더 발생한 것 같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 사람은 우리 병원 검사실 기사 중의 한 명입니다.  지금 응급실에
있습니다.  
내려와보시겠습니까? 
   환자를 격리시키셨습니까? 
  마리사가 물었다.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닥터 나바르가 말했다.
   지금 우리는 5층에 격리 병동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준비가 끝나는 즉시
모든 
환자들을 그리로 옮길 작정입니다. 
   그건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어요. 
  마리사가 말했다.
   저는 당분간 꼭 필요하지 않은 임상검사들은 연기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닥터 나바르가 말했다.
   여기 있는 이 친구는 어떻게 할까요?  내려와서 보시겠습니까? 
   지금 내려가겠습니다. 
  마리사가 말했다.
  응급실을 향하는 마리사는 자신들이 중대 전염병 창궐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는

위기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검사실 기사에 관해서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었다.  
첫째는 그 친구가 다른 환자들과 같은 경로로, 즉 리히터 클리닉 내에 존재하는 
치명적인 바이러스의 활동성 감염원으로부터 병을 얻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 
검사실 기사가 기존의 환자들로부터 나온 검체들을 다루는 과정에서 병원체에 
노출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마리사는 두 번째 경우가 더욱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응급실 근무자들은 그 새로운 환자를 정신과 진찰실 중 하나에 격리시켜둔 
모양이었다.
  문에는  출입금지 라고 쓴 표지가 붙어 있었다.  마리사는 기사의 차트를 
읽어내려갔다.  그는 앨런 모이어스라는 24세된 남자였다.  그의 체온은
103.4도.  
보호용 가운에 마스크, 모자, 장갑과 덧신을 착용한 마리사는 그가 격리되어
있는 
작은 진찰실로 들어섰다.  환자는 흐리멍텅한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편찮으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마리사가 말했다.
   트럭에 깔린 것 같은 기분이에요. 
  앨런이 말했다.  
   전, 작년에 심한 독감에 걸려본 적도 있지만 이렇게 아파보기는 처음이에요. 
   처음 느낀 증상은 어떤 것이었죠? 
   두통이었어요. 
  앨련이 말했다.  그는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두드렸다.
   바로 여기가 아픈 데예요.  정말 끔직해요.  제발 무슨 약 좀 주실 수
없나요.? 
   오한이 있었나요? 
   그럼요.  두통이 시작된 다음부터 몸이 계속 덜덜 떨려와요. 
   지난 주나 그 무렵에 검사실에서 무슨 특별한 일 같은 건 없었나요? 
   어떤 걸 물으시는 거죠? 
  앨런이 눈을 지그시 감으며 물었다.
   사실 지난번 레이커스 게임에 내기를 걸어 돈을 따기는 했어요. 
   저는 그런 것들보다는 당신 업무에 관련된 일에 더 관심이 있답니다.  혹시 
동물에게 물리신 적이 있나요? 
   아뇨.  전 동물 같은 건 다루지를 않아요.  제게 무슨 큰 이상이라도 있나요?

   닥터 리히터는 어때요?  그분을 아세요? 
   그럼요.  이 병원에 닥터 리히터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며칠 전
진공 
채혈 튜브에 달린 바늘에 찔린 적이 있어요.  전엔 이런 일이 한 번도 없었는데.

   혹시 그 채혈 튜브에 적혔던 환자 이름을 기억하실 수 있으세요? 
   아뇨.  제가 기억하는 건 그 친구가 에이즈 환자가 아니었다는게 전부예요.  
걱정이 돼서 그 친구 차트를 찾아보았거든요. 
   진단이 뭐였지요? 
   적혀 있지 않았어요.  하지만 에이즈면 항상 에이즈라고 적혀 있거든요.  전 
에이즈는 아니죠, 그렇죠? 
   걱정 마세요, 앨런.  당신은 에이즈는 아니에요. 
  마리사가 말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앨런이 말했다.
   잠시 동안 전 정말 혼이 쑥 빠지게 무서웠어요. 
  마리사는 닥터 나바르를 찾아 방을 나섰지만 그는 방금 앰뷸런스에 실려들어온

심장마비 환자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마리사는 자기가 5층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를 전해달라고 간호사에게 부탁을 했다.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한
마리사는 
닥터 두브체크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머릿 속의 생각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실례합니다. 
  팔에 손길을 느낀 마리사가 몸을 돌리자 텁수룩한 수염에 금속테 안경을 쓴 
땅딸막한 남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씨디씨에서 오신 닥터 불루멘탈이시지요? 
  그 남자가 물었다.
  누가 자기를 알아본다는 사실에 난처해진 마리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
사나이가 
엘리베이터로 통하는 길목을 가로막으며 버티고 섰다.
   저는 엘에이 타임즈의 클레런스 헌즈입니다.  제 집사람이 내과계 중환자실에

밤 당직 간호사로 근무하지요.  그 사람 말로는 당신이 닥터 리히터를 만나러 
오셨다고 하더군요.  그 사람이 걸린 병이 도대체 뭐지요? 
   지금 이 시점에선 아무도 모릅니다. 
  마리사가 말했다.
   심각한 질병으로 보십니까? 
   제가 보기엔 당신 부인이 더 잘 아실 것 같은데요. 
   그 사람 말로는 닥터 리히터가 다 죽어가고, 또 의무 기록실의 여비서를 
위시해 환자가 여섯 명이나 더 있다고 하더군요.  제게는 이게 큰 돌림병의 
시초처럼 보입니다. 
   글세 저는 그 돌림병이란 단어가 꼭 옳은 것일지 확실치가 않습니다.  오늘도

새 환자가 하나 발생한 것 같기는 하지만 지난 이틀간 한 명뿐이었습니다.  저는

그 환자가 마지막이 되기를 바라마지않지만, 그거야 누가 알겠어요? 
   으스스한 이야기로군요. 
  기자가 말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마리사가 말했다.
   하지만 더 이상 말씀을 나눌 수가 없겠군요.  저는 지금 몹시 바쁘거든요. 
  차근거리며 따라붙는 헌즈를 따돌리고 엘리베이터에 오른 마리사는 다시 5층 
간호사실 뒤편의 작은 방으로 돌아가 닥터 두브체크에게 수신자 부담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 시간 아틀란타는 2시 45분이었다.  그녀는 즉시 두브체크와 통화를
할 
수 있었다.
   그래, 첫 번째 현장 작업이 어떻소? 
  그가 물었다.
   조금 벅찬 것 같아요.   
  마리사가 말했다.  이미 마리사는 리히터 클리닉에 근무하는 의사들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 이외에 자신이 다른 특별한 것은 단 하나도 발결하지 못했다는 것을 
솔직히 고백하며 가능한 한 간단 명료하게 자기가 살펴보았던 일곱 증례에 대해 
설명을 했다.
   그런 걸로 기가 죽을 필요는 없어요. 
  두브체크가 말했다.
   당신은 역학을 하는 사람들이 임상의들과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데이터들을
보기 
때문에 같은 데이터로도 다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만
해요.  
임상의사들은 각 케이스에 대해 신경을 쓰지만 우리들은 전체적인 윤곽을 보는 
거예요.  자, 그럼 그 병에 대해 이야기를 좀 들어봅시다. 
  마리사는 가끔씩 자기가 적어둔 메모들을 참조해가며 문제의 임상 증후군에 
대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두브체크가 두 명의 환자가 토혈을, 또
하나가 
혈변을, 그리고 세 명이 눈에 결막하 출혈을 보였다는 사실에 특히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마리사가 닥터 리히터가 아프리카에서 개최된
안과학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는 말을 하자 두브체크는 탄성을 내질렀다.
   맙소사, 닥터 불루멘탈!  당신은 지금 자신이 어떤 병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는지 알겠소!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마리사가 말했다.  괜히 나서서 망신이나 당하지 말고 조용히 있다가 중간이나

가라는 것, 예로부터 의과대학 전래의 황금 차세술이었기 때문이었다.
   바이러스성 출혈열이오. 
  두브체크가 말했다.
   ...그리고 만일 그게 아프리카에서 온 것이라면, 라사열임에 틀림이 없어요. 

마버그나 에볼라가 아니라면 말이오.  맙소사! 
   하지만 리히터가 거기 갔던 건 6주도 더 전의 일인데요. 
   젠장! 
  두브체크가 거의 성이 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종류의 맹렬한 질병들의 잠복기는 길어야 2주일 정도요.  심지어는 
검역을 위해서라도 20일이면 충분하다고들 생각해요. 
   그 의사는 발병 이틀 전에 원숭이한테 물린 적이 있답니다. 
  마리사가 말했다.
   그건 잠복기치고는 너무 짧아요.  적어도 5-6일은 되어야 해요.  그 원숭이는

지금 어디 있지요? 
   검역을 위해 격리 관찰중이에요. 
  마리사가 말했다.
   좋아요.  그 동물에게 아무도 함부로 손을 대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주시오.  특히 그 놈이 죽으면 말이오.  그 짐승한테서 바이러스 검사를 
해보아야 하니까요.  만일 그 짐승에게서 이환되었다면 우린 마버그 바이러스를 
고려해야 할 거요.  어쨌든, 그 병이 바이러스성 출혈열이란 사실이 분명한 것 
같으니 다른 것으로 입증되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하고 대처해나가는 게 좋을
것 
같소.  우리는 한동안 혹시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을 했던적이 
있소.  문제는 이런 질병에는 백신도 치료제도 없다는 것이오. 
   이런 병들의 시차율은 어느 정도지요? 
  마리사가 물었다.
   매우 높아요.  잠깐, 혹시 닥터 리히터의 피부에 반점이 있지는 않던가요? 
  마리사는 기억을 해낼 수가 없어  .
   한 번 점검해보겠습니다. 
   내가 선생에게 우선적으로 부탁하고 싶은 건 일곱 환자 모두에게서 바이러스 
배양을 위한 혈액, 소변 및 인후부 스왑(면봉으로 문질러 얻어낸 검체)을 채취해

지급으로 씨디씨로 보내달라는 거요.  델타 항공권의 소화물 서비스편으로 
보내주시오.  그게 아마 제일 빠를 겁니다.  그리고 혈액은 선생이 직접 
채취하도록 하시오.  그리고 부탁인데 최대한으로 조심하시오.  만일 가능하다면

원숭이 검체도 좀 보내주시오.  검체들은 부치기 전에 드라이 아이스에
채워두시오. 
   전 방금 제8의 증례일 가능성이 있는 환자를 보고 왔습니다. 
  마리사가 말했다.
   그 사람은 병원 검사실 기사입니다. 
   그럼 그 사람 것도 검체에 포함시켜주시오.  듣자하니 점점 더 심각해지는 것

같군요.  반드시 모든 환자를 격리하고 철저한 차단 간호(환자가 전염성이 강한 
질병을 앓을 경우 간호진이 보호용 가운은 물론, 마스크, 수술모, 고무 장갑에 
덧신까지 착용하여 환자를 외부 환경에 완전히 차단하는 간호 방식)를 하도록 
해주시오.  그리고 누구건 그쪽 책임자에게 내가 거기 도착할 때까지 일체 
어떠한 검사도 하지 말라고 말해주시오. 
   벌써 그렇게 해놓았습니다. 
  마리사가 말했다.
   직접 오실 건가요? 
   물론 그렇소. 
  두브체크가 말했다.
   이건 국가적인 위기가 될 수도 있어요.  하지만 비커스이동 검사실을 
준비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소.  그동안 환자들과 접촉을 했던 사람들을 
검역 격리시키고, 아프리카에서 그 안과학회를 스폰서했던 사람들을 수소문해서 
혹시 참석했던 의사들 중 또 병에 걸린 사람이 있는지 확인해 봐주시오.  그리고

또 한가지 절대 신문에는 아무 말도 하지 마시오.  에이즈에 대해 저렇게 
떠들어대는데 거기다가 또 치명적인 바이러스성 지로한의 위협 어쩌고 하면 
사람들이 도저히 평정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요.  그리고 마리사,
환자를 
볼 때는 보안경을 착용하고 완전한 보호 복장을 갖추도록 하세요.  만일
보안경을 
찾기가 힘들다면 병리과에 가면 구할 수 있을 거요.  내 가능한 한 빨리 가도록 
하겠소. 
  전화를 끊자 마리사는 노드와 같이 밀려오는 불안과 초조함에 몸서리를 쳤다. 

혹시 자신이 벌써 그 바이러스에 노출되어버리지나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다음 그녀는  엘에이타임즈 의 클레런스 헌즈에게 벌써 
이야기를 해버린 것이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어쨌든 그건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녀는 두브체크가 온다는 것이 너무도 
다행스럽게만 느껴졌다.  사실 엘에이에 도착한 순간부터 그녀자신이 능력에 
걸맞지 않는 과중한 임무를 맡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너무나도 부담스럽게

느끼고 있엇던 것이다.
  닥터 나바르에게 전화를 건 다음 마리사는 간호사 한명의 도움을 받아 
환자들에게 채혈을 할 때 필요한 도구들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우선 항응고제가

들어있는 진공 채혈관과 비닐 봉지, 그리고 비닐 봉지 바깥쪽을 소독하기 위해 
소리움 하이포클로라이트가 필요했다.  또 소변 용기와 인후부 스왑을 하기 위한

면봉도 필요했다.  다음 그녀는 미생물 검사실에 전화를 해서 바이러스 운반용 
배지(미생물을 배양하는데 쓰는 영양물)를 넣을 용기와 드라이 아이스, 또 화물 
운송용 상자를 올려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닥터 나바르가 전화를 하자 그녀는 완전히 차단 간호와, 그 자신이 특수
기구를 
가지고 도착하기 전에는 어떠한 검사도 하지 말아달라는 두브체크의 말을
전했다.  
그녀는 또한 환자들이 접촉한 모든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검역 격리할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같이 의논을 해보는 것이 좋겠다는 말도 아울러 전했다.  그들이 
다루게된 병이 그 악명 높은 바이러스성 출혈열일지도 모른다는 두브체크의 
생각을 전해듣고 혼비백산한 닥터 나바르는 순순히 마리사의 말에 도의를 했다.
  두브체크의 충고대로 마리사는 병리과로 내려가 보안경을 하나 얻어 끼었다.  
그녀는 전에는 눈을 통해 감염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지만
눈의 
표면이 점막이며 코의 점막만큼이나 바이러스 감염에 취약할 것이 분명하다는 
사실에 동감하고 있었다.  수술모자, 보안경, 마스크, 가운, 장갑과 덧신으로
완전 
무장을 갖춘 그녀는 검체 채취를 시작하기 위해 닥터 리히터의 입원실로
들어갔다.
  채혈 준비를 시작하기 전, 그녀는 피부 반점의 발현 유무를 알기 위해 닥터 
리히터를 진찰했다.  그의 팔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었지만, 실제로 오른쪽
허벅지 
부분에 25센트 동전만한 크기의 이상한 발적(붉게 된 부분)이 나타나 있었다.  
그의 환자복을 들춰본 마리사는 몸통 전체에 미세한, 하지만 의심의 여지가 
없는 반점상구진이 돋아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두브체크가 그런 
것까지 예견했다는데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먼저 혈액을 채취한 뒤, 도뇨관에 연결된 주머니에서 소변을 채취해 
소변 검사 용기에 옮겨담았다.  각 용기를 밀폐한 다음 그 외부를 소리움 
하이포클로라이트로 소독하고 비닐봉지에 넣었다.  비닐봉지의 바깥쪽을
소독액으로 
세척한 다음, 그녀는 검체들을 들고 방을 나섰다.
 리히터의 방에 입고 들어갔던 수술모, 마스크, 가운, 장갑과 덧신을 벗어 
폐기하고 새로운 보호 복장을 착용한 마리사는 다음 환자인 의무기록실 비서,
헬렌 
타운센드에게로 옮겨갔다.  마리사는 피부의 발진을 살피는 것을 시작으로 닥터 
리히터에게 했던 전 과정을 똑같이 반복했다.  헬렌 역시 몸통에 희미한
반점들이 
있기는 했지만 넓적다리고 어디고 둥근 발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려나 다른 
환자들은 닥터 리히터보다는 좀 나아보였지만 마리사가 검체를 채취하며 돌아 
다니는 동안 무엇을 물어볼 만한 기력을 가진 환자들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무슨 하소연이라도 할 기운을 낼 수 있었던 사람은 가장 최근에 발병했던 앨런 
모이어스뿐이었다.
  처음에 그는 마리사에게 병명을 가르쳐주기 전에 절대 채혈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는 공포에 질려 있었던 것이다.  마리사가 자기도 
진짜 그의 질병이 어떤 것인지 모르며 그것이 바로 검체를 채취해야 되는 
이유라고 사실을 털어놓자 마침내 그도 고집을 꺾었다.
  원숭이에 대해서는, 솔직히 마리사는 혈액 검체를 얻으려는 시도조차 하지를 
않았다.  동물 사육사는 마침 비번으로 자리를 비웠는데, 마리사 혼자서 그
짐승을 
어떻게 해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 원숭이 녀석은 꽤 건강해보이기는
했지만 
결코 녹녹치 않았다.  그 녀석은 마리사에게 철창 사이로 오물을 집어던지며
전혀 
피를 뽑힐 의사가 없음을 명백히 밝히고 있었다.
  일단 드라이 아이스에서 증발한 이산화탄소가 검체에 들어가지 않도록 모든 
뚜껑들이 단단히 밀봉되어 있는지를 확인한 마리사는 포장을 마치고 직접
공항으로
차를 몰아 아틀란타로 상자들을 부쳤다.  운좋게도 그녀는 아틀란타로 가는 
직행편에 상자들을 실을 수 있었다.
  리히터 클리닉으로 돌아온 마리사는 건물을 빙 돌아 자그마한 병원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바이러스성 질환이 수록된 몇권의 표준 텍스트가 소장되어 
있었다.  그녀는 재빨리 라사열, 마버그와 에볼라 바이러스에 대한 부분들을 
훑어보았다.  그제서야 그녀는 전화를 받았을 때 두브체크가 그렇게 흥분하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알려진 바로는 그것들이 인간에게 가장 치명적인 
바이러스들이었던 것이다.
  다시 5층으로 올라온 마리사는 환자 여덟 명 모두가 특설된 격리병동으로
옮겨져 
수용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또 자기가 부탁했던 환자들의 외래 
기록들이 도착했다는 것도 아울러 알게 되었다.  닥터 나바르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이 돌아왔음을 알린 마리사는 자리를 잡고 앉아 차트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첫 번째 차트는 부동산 브로커 해롤드 스티븐스의 것이었다.  차트 뒤쪽을
펼친 
마리사는 즉각 그의 최근 외래 방문이 닥터 리히터를 찾아왔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해롤드 스티븐스는 만성 개방각성 녹내장(안구 전방의 안방수가 외부로

나가는 통로가 열려 있음에도 안압이 만성적으로 높아져 있는 녹내장의 일종) 
때문에 정기적으로 닥터 리히터의 검진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마지막 
검진은 1월 15일로 병원에 입원하기 나흘 전의 일이었다.
  점점 뚜렷해지는 확신을 가지고 마리사는 각 차트의 마지막 외래방문 일자들을

훑어내려갔다.  바로 그것이었다.  각 환자는 1월 15일이나 16일 양일 중 하루에

닥터 리히터를 만난 적이 있었다.  예외는 의무기록실 비서 헬렌 타운센드와 
검사실 기사 앨런뿐이었다.  타운센드의 마지막 외래 진료 기록은 방광염으로 
산부인과를 찾아간 것이었다.  앨런의 경우는 1년 전 병원 농구 리그전에서 
발목을 삐어 정형외과를 방문했던 것이 최근의 기록이었다.
  의무기록실 비서와 검사실 기사를 제외하고는, 닥터 리히터가 그괴질의 
감염원이었다는 암시가 짙게 풍겨나오고 있었다.  그가 증상이 나타나기 직전 
다섯 명의 환자를 검진했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마리사는 그 검사실 기사가 우연히 오염된 주사바늘에 찔리는 바람에 병에 
걸리게 되었다고 설명할 수 있었지만 헬렌 타운센드의 경우는 얼른 어떤
그럴듯한 
설명을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  마리사는 헬렌이 그 주 어느 때인가 닥터
리히터를 
만난 적이 있다고 밖에는 달리 가정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닥터 리히터가 
발병한 지불과 48시간만에 같은 질병에 이환된 것이었다.  어쩌면 닥터 리히터가

그 주 초, 의무기록실에 자주 들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리사는 닥터 나바르가 병원 회의실로 내려와달라고 했다는 말을 전하는 병실

사무원에 의해 골똘히 사로잡혀 있던 생각에서 깨어났다.
  하루 일과를 시작했던 방으로 다시 돌아와보니 문득 꽤나 오랫동안 정신없이 
뛰어다녔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문을 닫은 닥터 나바르가 또 다른 
사람을 소개하는데 피곤이 뼛속까지 파고는 것 같았다.  그는 닥터 리히터의
동생, 
윌리엄 리히터였다.  
   이렇게 와주셔서 어떻게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윌리엄이 말했다.  그는 가는 줄무늬의 정장을 말쑥하게 차려입고 있었지만 
초췌한 얼굴이 간밤의 수면부족을 대변하고 있었다.
   닥터 나바르가 선생님이 붙이신 잠정적인 진단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우리가 힘이 닿는 한 이 질병의 전염을 봉쇄하려는 선생님의 노력에 최대한의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을 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상황이 우리 병우너에 끼칠 수 있는 좋지 않은 영향에 대해서도 몹시 우려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선생님께서도 이 사실이 언록매체에 실리지 않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는 데 동의를 하고 계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마리사는 가벼운 분노를 느꼈다.  이렇게 귀중한 생명들이 경각에 달려 있는데

고작 생각하는 것이라니...하지만 두브체크 역시 결국은 똑같은 요점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가...
   병원측의 걱정은 저도 잘 알겠습니다. 
  그녀는 자기가 별써 신문기자와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데 약간의 찜찜함을
느끼며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저는 검역 격리 조치들을 추가로 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리사는 질병에 접촉했을 가능성이 있는 환자들을 일차 접촉과 이차 접촉으로

구분해 두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일차 접촉은 현재 환자로
판명된 
여덟 사람과 직접 신체적인 접촉이 있었거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차 접촉은 일차 접촉자와 접촉한 적이 있는 모든 사람이
포함된다.
   맙소사! 
  닥터 나바르가 말했다.
   그렇게 따지면 수천 명이나 될 거예요. 
   유감스럽지만 그렇게 될 것 같군요. 
  마리사가 말했다.
   우린 병원측에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인력이 다 필요해요.  또, 주 보건 
당국에도 추가 인력 지원을 요청해야 할 거예요. 
   병우너측에서 필요한 인력을 모두 제공하도록 하겠습니다. 
  윌리엄이 말했다. 
   저는 이번 일을 되도록 외부에 떠들지 않고  집안 일 로 해결했으면 합니다. 

그러니 실제로 어떤 확실한 진단이 나올 때까지 조금 기다리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기다린다면 너무 늦어 기회를 놓쳐버릴지도 몰라요. 
  마리사가 말했다.
   게다가 나중에 만일 필요하다면 검역 격리야 취소시켜버리면 그만이거든요. 
   하지만 그렇게 하면 기자들에게 감출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리히터씨가 신음을 내  었다.
   솔직히 말하면요. 
  마리사가 말했다.
   저는 언론 매체가 모든 접촉자들을 다 찾아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가 있으리라고 생각해요.  일차 접촉자들은 반드시 하루에 두 번씩 
체온을 측정하며 한 일주일 가량 가능한한 일체의 외부 접촉을 피하고 격리된 
상태에 있도록 해야 합니다.  만일 화씨 101도 이상의 열이 발생하면 반드시 
병원에 와야 합니다.  이차 접촉자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생업에 종사해도 되지만

그래도 계속 하루 한 번 체온만은 측정을 해보아야 합니다. 
  마리사는 몸을 일으키며 크게 기지개를 켰다.
   닥터 두브체크가 오시면 여러 가지 다른 방도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방금 말씀드린 것이 표준적인 씨디씨의 작업 과정입니다.  저는 그 실행을 
전적으로 리히터 클리닉측에 맡기겠습니다.  사실 제게 부여된 임무는 도대체 
어디에서 그 바이러스가 나왔나를 찾는 것이랍니다. 
  놀라 얼이 빠진 두 명의 남자들을 뒤에 남기고 마리사는 회의실을 나섰다.  
병원에서 외래쪽 건물로 건너가는 도중 그녀는 안내 창구로 다가가 닥터
리히터의 
사무실이 어디쯤 인지를 물었다.  2층에 있다는 대답에 마리사는 곧장 그리로
향했다.
  문은 닫혀 있었지만 잠겨 있지는 않았다.  노크를 한 마리사는 문을 열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닥터 리히터의 비서는 충직하게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그녀가 물었다.  그녀는 바글바글하게 파마를 한 은회색 머리칼의 50대
여인이었다.  
그녀의 명찰에는 카바나양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녀의 코끝에는 떨어질 듯 말
듯 
달랑달랑하게 독서용 안경이 걸려 있었는데, 안경은 목에 걸린 금색 체인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마리사는 자신이 누구인가를 설명한 뒤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닥터 리히터가 어떻게 이 질병에 걸리게 되었는지 밝히는 것은 이만저만 
중요한 일이 아니에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 저는 리히터 선생님이 발병하기
직전 
1-2주 동안의 스케줄을 재구성해보고 싶습니다.  그렇게 해주실 수 있을까요?  
저는 선생님의 부인께도 똑같은 부탁을 드릴 작정입니다. 
   잘은 모르긴 해도 아마 할 수 있을 거예요. 
  카바나양이 말했다.
   혹시 좀 특이하다거나 평소와 달랐다거나 하는 기억나는 일은 없었나요?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을 말씀하시는 거지요? 
  카바나양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예를 들자면, 원숭이에게 물렸다거나 주차장에서 노상 강도를 당했다거나
하는 
것과 비슷한 일들 말이에요. 
   그런 일들이 뭐 이상한 일인가요?  늘상 일어나는 것들인데. 
  카바나양이 말했다.
   그렇습니까?  그럼 이상하다거나 평소와 달랐다거나 했던 일은 없었나요? 
   지금 당장은 생각나는게 없군요.  잠깐, 언젠가 차를 찌그러뜨린 일이
있었군요. 
   좋아요, 바로 그런 것들이에요. 
  마리사가 그녀를 부추기며 말했다.
   계속 생각을 해보세요.  참, 그런데 당신이 그 아프리카 학회 참석 준비를 
해주셨나요? 
   네. 
   샌디에고 학회는요? 
   그것도 제가 했어요. 
   그것들을 개최했던 단체들의 전화번호를 알고 싶어요.  한 번 찾아봐주신다면

정말 고맙겠군요.  또, 저는 닥터 리히터가 발병하기 2주일 전 동안 진료했던 
모든 환자들의 명단을 얻고 싶습니다.  그리고 혹시 헬렌 타운센드라는 사람을 
아시나요? 
  카바나양은 코끝에서 안경을 벗어 목에 걸었다.  그녀는 언짢은 듯 한숨을 
내쉬었다.
   헬렌이 닥터 리히터랑 같은 병에 걸렸나요? 
   그런 것 같아요. 
 조심스럽게 카바나양의 얼굴을 살피며 마리사가 말했다.  비서는 헬렌
타운센드에 
대해 무엇인가를 알고 있음이 분명했지만 타이프 라이터의 키만 만지작거릴 뿐, 
주저하며 선뜻 말을 꺼내려 하지 않았다.
   헬렌 타운센드도 닥터 리히터의 환자였나요? 
  마리사는 집요하게 질문을 던졌다.
  카바나양이 고개를 쳐들었다.
   아뇨.  그 여자는 그의 정부였어요.  난 그 여자를 가까이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주의를 주었었죠.  그런데, 결국 이 꼴이 됐어요.  그 여자한테서 병이 
옮았어요.  그저 내 말을 들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병이 나기 직전 그녀를 만난 적이 있었는지 혹시 아세요? 
   네, 발병하기 바로 전날 만났을 거예요. 
  마리사는 그 여자를 쳐다보았다.  헬렌 타운센드가 닥터 리히터한테 병을
옮긴게 
아닌데...실상은 그 반대인데.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착착 맞아들어가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모든 환자들을 닥터 리히터에게로 연결시킬 수가 있었다.  
역학적으로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성과였다.  이것은 닥터 리히터가 유일한 지표

증례로 그만이 정체 불명의 바이러스 감염보유 숙주에 노출되었다는 뜻이었다.
이제 
그의 스케줄을 세세한 부분까지 재구성하는 것은 더 더욱 중요한 과제가 된
것이다.
  마리사는 카바나양에게 닥터 리히터의 지난 두 주일 동안의 스케줄을
대강이라도 
재구성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녀는 비서에게 자신이 다시 와서 그것을
받아갈 
생각이지만 필요한 경우 언제라도 병원 교환을 통해 무선 호출을 해달라고
말했다.
   제가 뭐 하나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카바나양이 겁 먹은 듯 주저하며 물었다.
   물론이에요. 
  한 손을 문에 올려 놓은 마리사가 말했다.
   저한테까지도 병이 옮을 수가 있나요? 
  마리사는 여인에게 공연히 겁을 주지 않기 위해 그 생각을 애써 억누르고 
있었지만 이렇게 말이 나오자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 비서는 일차

접촉자로 간주되어야 할 사람이 아닌가.
   가능한 일이에요. 
  마리사가 말했다.
   곧 우리는 당신에게 다음 한두 주 정도 활동을 좀 제한하고 매일 두 번씩
체온을 
측정하라는 부탁을 드리게 될 거예요.  하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여태까지 
아무런 증상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별일이 없으실 것 같아요. 
  다시 병원으로 돌아온 마리사는 안간심을 써 자기 자신의 두려움과 뼛속까지 
파고드는 피로를 떨쳐버렸다.  그녀에게는 할 일이 너무도 많았다.  그녀는 이제

병원 차트들의 구석구석까지 세밀히 조사해야만 한다.  그녀는 왜 닥터 리히터의

환자 중 일부는 병에 감염되고 나머지는 그렇지 않았는지 이유를 찾을 수 있게 
되기를 빌었다.  마리사는 아울러 닥터 리히터의 부인에게 전화를 할
생각이었다.  
그녀는 부인과 비서 양쪽의 도움을 받아 발병하기 전 2주 동안의 닥터 리히터의 
상세한 활동 목록을 재구성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5층으로 돌아온 마리사는 우연히 닥터 나바르와 마주쳤다.  언뜻 보기에도
그는 
마리사만큼이나 지쳐 있는 것 같았다.
   닥터 리히터의 상태가 악화되고 있어요. 
  그가 입을 열었다.
   온갖 데서 다 피를 흘리고 있어요.  주사 자리, 잇몸, 위장관계, 지금 혈압이

너무 떨어져 신부전이 오기 직전이에요.  우리가 투여했던 인터페론(항 바이러스

제제의 일종)도 전혀 아무런 효과가 없어요.  이젠 또 무엇을 해봐야 할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군요. 
   헬렌 타운센드는 어때요? 
  마리사가 말했다.
   그 환자도 상태가 더 나빠졌어요.  그녀 역시 출혈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는 털썩 의자에 몸을 던졌다.
  마리사는 거의 일분 동안이나 망설인 뒤에 전화를 집어들었다.  그녀는 
두브체크가 벌써 엘에이를 향해 출발했기를 기도하며 아틀란타로 또 한 번의 
수신자 부담 전화를 걸었다.  불행하게도 그녀의 기도는 응답이 되지 않았다.  
두브체크가 전화를 받아든 것이다.
   이쪽 상황이 상당히 심각해졌습니다. 
  마리사감 말했다.
   환자 둘에게서 심각한 출혈 증상이 나타났습니다.  임상적으로는 양태가 점점

더 바이러스성 출혈열의 특징적인 모습과 비슷해지는 것 같지만 아무도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사실, 해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요. 
  두브체크가 말했다.
   헤파린(항 응고제의 일종.  출혈이 있는데 항 응고제를 쓴다는 것이 좀
이상해 
보일지는 모르지만 이것은 혈관 내의 혈소판 응집으로 혈소판이 감소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쓰인다)을 투여해볼 수도 있어요.  그 외에는 대증적(그때 그때 
중상에 따라 치료를 하는 것.  열이 날 때 아스피린을 주는 것 같은 경우)인 
치료가 전부예요.  우리가 어떤 확신을 내리게 되는 경우 만일 가능만 하다면 
초면역 혈청(인공적으로 면역접종을 실시하여 특이항체의 역가를 강화한 사람의 
혈청)을 투여할 수도 있어요.  말이 나왔으니 얘긴데 당신이 보낸 검체들은 벌써

모두 무사히 도착해 태드가 가공 처리를 시작했어요. 
   언제쯤 오실 건가요? 
  마리사가 물었다.
   곧 가게 될 거요. 
  두브체크가 말했다.
   비커스 이동 격리 검사실 준비가 다 끝났으니까요. 
  
  마리사는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다행히도 간호사실 뒤쪽 작은 방에는 
그녀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저녁 10시 15분.  
겨우 5분이나 10분 정도 깜빡 졸았던 모양이다.
  몸을 일으키자 가벼운 현기증이 났다.  두통이 나며 목 감기가 시작하는
것처럼 
목이 칼칼했다.  그녀는 자신의 증상이 단순히 피로 때문이지 바이러스성
출혈열의 
시초가 아니기를 두 손 모아 간절히 빌었다.
  저녁 때는 눈코뜰새 없이 바빴다.  심한 두통과 구토를 호소하는 환자가 
네 명이나 더 응급실을 찾아왔던 것이다.  한 명은 벌써 출혈 증상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 환자들은 모두가 이미 증상을 발현했던 환자들의 가족으로, 엄격한 
검역 격리의 필요성이 새삼 강조되고 있었다.  벌써 바이러사는 제 3차
접촉자들을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마리사는 바이러스 검체들을 채취해 야간 항공편으로 
아틀란타로 급송했다.
  자신의 체력이 한계까지 왔다는 사실을 느낀 마리사는 모텔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마악 떠나려는데 5층에 근무하는 간호사 한 명이 닥터 리히터의

부인이 그녀를 만나러 왔다는 말을 전해왔다.  그녀와의 약속을 미루는 것은 
그렇지 않아도 상심한 그녀에게 너무 잔인하겠다는 생각에 마리사는 면회실로 
들어갔다.
  30대 후반에도 매력을 잃지 않고 옷을 잘 차려입은 안나 리히터는 지난 
두 주일 동안 남편의 행적을 모두 알려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는 있었지만 
그녀는 비단 남편 일뿐만 아니라 자신의 어린 두 아이에 대해 두려움을 감추지 
못하며 몹시도 불안해하고 있었다.  마리사는 가엾은 마음에 그녀에게 꼬치꼬치 
캐묻지는 않았다.  리히터 부인은 기억을 더듬어 다음날까지 더욱 완벽한 
행적표를 말들어주겠노라고 약속을 했다.  그녀는 리히터 부인을 닥터 리히터의 
비엠더블까지 배웅한 다음 자신의 렌트카에 타고는 곧장 트로픽 모텔로 달려가 
침대로 뛰어들었다.


    1월 22일

  다음날 아침, 병원에 도착한 마리사는 하늘 높이 전송 안테나들을 뽑아올린 
여러 대의 티브이중계차들이 병원 입구에 장사진을 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입이 
딱 벌어졌다.  주차장으로 들어가려던 그녀는 정복 경관 한 명에게 제지를
당했고 
하는 수 없이 씨디씨신분증을 꺼내 보여주어야만 했다.
   검역 격리가 시행되었습니다. 
  경찰은 통제의 이유를 설명하며 그녀에게 티브이 중계차들이 버티고 서 있는
병원 
건물 정물을 통해 들어가라는 말을 해주었다.
  마리사는 자기가 자리를 비웠던 여섯 시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궁금해하며 순순히 경찰의 지시를 따랐다.  회의실로 통하는 통로의 바닥에는 
굵은 티브이용 전선이 뱀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중앙 복도의 
부산스러움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침 닥터 나바르가 눈에 띄자 그녀는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가를 물었다.
   당신 동료들이 기자회견을 자청했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의 얼굴은 초췌하고, 면도조차 하지 않았는데 간밤을 꼬박 
새웠음이 분명했다.  그는 겨드랑이에 끼고 잇던 신문 한 장을 꺼내 마리사에게 
보여주었다.   에이즈 또다시 창궐 주먹만한 활자의 표제가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그 기사 옆에는 클레런스 헌즈와 대담하는 마리사의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닥터 두브체크는 이런 오해가 계속되도록 방치해서는 안된다고 단안을 
내렸습니다. 
  닥터 나바르가 말했다.
  마리사는 신음을 내뱉었다.
   제가 도착하자마자 그 기자란 사람이 접근해왔었어요.  전 정말 그 사람한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건 문제될 게 없어요. 
  닥터 나바르가 부드럽게 그녀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말을 이었다.  
   닥터 리히터가 간밤에 운명했어요.  게다가 새로운 환자가 네 명이나 더 
발생했기 때문에 더 이상 이 사실을 언론에 숨기기는 어차피 불가능했을 겁니다.
   닥터 두브체크는 언제 도착하셨지요? 
  회의실을 향하는 카메라 맨들에게 길을 비켜주며 마리사가 물었다.
   자정 조금 지난 시각이었습니다. 
  닥터 나바르가 말했다.
   저 경찰들은 다 뭐지요? 
  병원으로 통하는 문가에 서 있는 또 한 명의 정복 경관을 본 마리사가 물었다.
   닥터 리히터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환자들이 앞을 다투어 퇴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주 보건국장이 이 병원 건물 전체를 검역 격리시킨다는 
명령을 내렸답니다. 
  마리사는 닥터 나바르의 양해를 구한 다음 회의실 밖에 장사진을 친 신문, 
티브이기자들 틈을 뚫고 안으로 들어갔다.  마리사는 두브체크가 도착해 
총지휘를 맡아준 것을 몹시 기쁘게 생각했지만 동시에 왜 그가 그녀에게 곧바로 
연락을 취하지 않았는지가 궁금해졌다.  그녀가 방으로 들어가자 두브체크는 
마악 말을   가하려는 참이었다.
  그는 아주 능숙하고 세련된 태도로 좌중을 이끌어가고 있었다.  그의 차분하고

근엄한 태도는 즉각 방안의 술렁거림을 잠재웠다.  그는 자신의 씨디씨에서 
파견나온 의사들을 소개함으로써 기자회견을 시작했다.  의학역학과장 닥터 
마크 브리란드, 바이러스학과장 닥터 피어스 아보트, 병원인성감염병 연구 팀장 
닥터 클라크 레인, 전염병센터 소장 닥터 폴 에켄스타인이 차례로 소개되었다.
  다음 두브체크는 이 문제가 에이즈와는 전혀 하 등의 관계가 없다고 말하며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던 기사에 대해 해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캘리포니아 주

역학 담당관이 바이러스에 의한 것으로 생각되는 몇 건의 원인불명 질환의
조사를 
위해 씨디씨에 도움을 요청했다고 말했다.
  열심히 두브체크의 말을 적어내려가는 기자들의 상기된 얼굴을 본 마리사는 
그들이 두브체크의 차분한 해명을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새로운 무서운 원인불명의 바이러스성 질환은 분명 보통의 
기사거리는 아니었다.
  두브체크는 이환된 증례가 총 열여섯 건에 불과하며, 자신은 이 문제가 현재 
통제되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말로써 회견을 이어나갔다.  그는 닥터 레인을 
가리키며 그가 검역 격리를 책임 통괄할 것이라고 말한 뒤, 여태까지의 경험상 
이런 종류의 질병은 엄격한 병원 격리 수용만으로도 통제가 가능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는 말을 덧붙였다.
  이 말에 클레런스 헌스가 펄쩍 일어나며 질문을 던졌다.
   아프티카 학회에 참석했던 닥터 리히터가 이 바이러스를 묻혀왔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아직 확실치가 않습니다. 
  두브체크가 말했다.
   그럴 가능성도 있기는 하지만 좀 희박한 편입니다.  닥터 리히터가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것이 벌써 한 달도 전의 일이니 그렇게 생각한다면 
잠복기가 너무 깁니다.  이런 질환들의 잠복기는 대개의 경우 일주일 
내외입니다. 
  또 한 명의 기자가 몸을 일으켰다.
   에이즈의 경우 잠복기는 5년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어떻게 한 달도 
되지 않는 기간으로 판단할 수가 있습니까? 
   바로 그게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점입니다. 
  두브체크가 조금 침착함을 잃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 저희가 당면한 이 문제는 에이즈 바이러스와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그러니 언론들은 반드시 이 점을 충분히 이해하시고, 그 사실을 착오없이 
대중들에게 전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럼 이 새로운 바이러스는 분리를 해내셨습니까? 
  또 한명의 기자가 물었다.
   아직은 못했습니다. 
  두브체크가 솔직히 털어놓았다.
   하지만 그렇게 어려울 것이라고는 생각치 않습니다.  이것은, 역시 이 
바이러스가 에이즈 바이러스와는 완전히 다른 성질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배양하는 데에는 1-2주면 충분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만일 그 바이러스가 아직 분리되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방금 전의 그 기자가 말을 이었다.
   어떻게 그것이 에이즈 바이러스와 다르다고 단언하실 수가 있습니까? 
  두브체크는 그 기자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마리사는 그의 분노를 감지할 수 
있었다.  두브체크는 다시 차분한 목소리로 질문에 대답을 했다.
   수 년에 걸친 경험으로 우리는 완전히 양상이 다른 임상 증후군들은 거의 
대부분 완전히 다른 종류의 미생물에 의해 야기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 오늘 드릴 말씀은 이것이 마지막이지만, 우리는 계속 여러분께 상황의
진전에 
관해 신속한 정보를 제공할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이른 시각에도 
불구하고 많이들 찾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모든 기자가 한 가지라도 더 질문을 해대려는 통에 회의실은 북새통이 되었다.
 
두브체크는 그 소란에는 아랑곳도 않고 다른 의사들과 함께 회의실을 나섰다.  
마리사는 운집한 사람들을 뚫고 들어가려 했지만 힘이 달려 도저히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회의실 밖에서는 정복 경관 한 명이 병원 본관 건물로 들어오려는

기자들을 저지하고 있었다.  씨디씨 신분증을 보여준 후에야 마리사는 간신히 
병원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그녀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두브체크 일행을 
따라잡았다.
   여기 있었군! 
  두브체크는 새까만 눈을 반짝이며 반갑게 그녀를 맞았다.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마리사를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시켜주었다.
   이렇게 여러 분이 함께 오실 줄은 몰랐어요.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마리사가 말했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닥터 레인이 말했다.
  닥터 아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자회견 때 시릴이 침착하게 이야기를 하기는 했지만 사실 이번 사태는 보통

심각한 게 아닙니다.  아프리카의 바이러스성 출혈열이 문명사회로 퍼질 수도 
있다는 것은 이런 질병들이 처음 발견되었을 때부터 우리들이 제일 두려워했던 
악몽이었습니다. 
   만일 이게 정말 아프리카 산 바이러스성 출혈열이라면 말입니다. 
  닥터 에켄스타인이 덧붙였다.
   난 더 두고 볼 것도 없이 확실하다고 생각하네. 
  닥터 브리란드가 말했다.
   그리고 난 그 원숭이 녀석이 범인이라는 생각이야. 
   전 원숭이한테서는 미처 검체를 채취하지 못했습니다. 
  마리사가 재빨리 고백했다.
   괜찮아요. 
  두브체크가 말했다.
   어젯밤 그 녀석을 희생시켜 씨디씨로 검체들을 의뢰했어요.  간이나 비장의 
절편 조직들이 혈액보다 훨씬 나을 겁니다. 
  그들은 씨디씨에서 나온 기사 두 명이 비커스 이동 격리 검사실에서 분주히 
검체들을 처리하고 있는 5층에 도착했다.
   그 엘에이타임즈 기사는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두브체크와 단 둘이만 남게 되자 마리사가 입을 열었다.
   제가 처음 병원에 들어서자마자 그 기자란 사람이 말을 걸었거든요. 
   괜찮아요. 
  두브체크가 말했다.
   또 다시 같은 실수를 범하지만 마세요. 
  그는 미소를 지으며 윙크를 해보였다.
  마리사는 그 윙크나 미소가 무엇을 뜻하는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왜 도착하셨을 때 바로 연락을 하지 않으셨어요? 
  그녀 물었다.
   당신이 파김치가 되어 있으리란 걸 알고 있었거든요. 
  두브체크가 말했다.
   그리고 또 진짜 꼭 알릴 필요는 없었어요.  우리는 그저 실험실 가동 준비랑,

원숭이 부검, 그리고 사태가 어떤지 감을 잡느라고 밤시간의 대부분을 
보냈으니까요.  우리는 또 환풍기를 설치해 격리 상황을 좀더 낫게 개선했어요. 

어쨌건 당신은 칭찬을 받을 만해요. 당신이 이 일이 제대로 돌아가도록 하는데 
정말 큰 공헌을 했다고 생각해요.  지금 당장은 행정적인 후속 조치들 때문에
눈코 
뜰 수가 없게 바빠요. 
  두브체크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선생이 알아낸 사실들에 대해 더 상세히 들어보고 싶군요.  어쩌면
오늘 
저녁 때 함께 식사를 하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군요.  참, 내가 우리 호텔에 선생

방도 하나 잡아두었어요.  트로픽 모텔보다는 훨씬 나을 겁니다. 
   트로픽이 어때서요? 
  마리사가 말했다.  그녀에게 무슨 경고라도 해주려하는 듯 설명하기 힘든 
야릇한 불안감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마리사는 간호사실 뒤 조그만 방으로 들어가 미흡했던 서류 작업을 만회하기 
시작했다.  먼저 그녀는 닥터 리히터가 참석했던 두학회의 스폰서를 했던
단체들에 
전화를 했다.  그녀는 다른 참석자중에도 바이러스성 질환에 이환된 사람이 
있는지를 알고 싶다고 그들에게 참석자들의 점검을 부탁했다.  다음, 꼭 이런 
전화를 해야하는지 그 운명의 잔인함에 이를 악물며 그녀는 닥터 리히터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 리히터 부인이 건네주기로 약속한 리히터의 행적을 받으러 
가도 되는지 물었다.
  전화를 받은 리히터의 이웃집 사람은 그녀의 요청에 대단히 놀란 듯햇지만 
리히터의 미망인에게 확인을 해본 다음 마리사에게 한 30분쯤 있다가 와달라고 
말해주었다.
  아름답게 조경된 리히터의 집 안에 차를 세운 마리사는 초조한 마음으로 
초인종을 울렸다.  아까 전화를 받았던 바로 그 이웃 사람이 문을 열어주며 약간

화가 난 듯이 마리사를 거실로 안내했다.  안나 리히터는 몇 분이 지나서야 
모습을 나타냈다.  그녀는 밤 사이에 10년은 늙어버린 것 같았다.  그녀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했고 그 전날 저녁 그렇게 정성스럽게 말아올렸던 
아름다운 머리칼은 뺏뺏한 지푸라기처럼 아무렇게나 얼굴 위로 흐트러져 있었다.
  그녀는 이웃 사람의 부축을 받아 힘없이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마리사가 부탁했던 죽은 남편의 지난 두어 주 동안의 행적이 적혀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종잇장을 불안한 듯 계속 접었다폈다 했다.  안나가 얼마나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는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던 마리사는 도대체 어떤 말로 
위안을 해야 할까 망설였지만 안나는 바로 그 종이를 마리사에게 건네주었다.
   굳이 이것 때문이 아니었더라도 어차피 어젯밤에는 잠을 자지 못했을 
거예요.  어쩌면 이게 다른 어떤 불쌍한 가족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그렇게 좋은 사람이었는데...좋은 아버지였어요...우리애들이 너무 불쌍해요.

  헬렌 타운센드와의 관계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리사는 닥터 리히터가 꽤

괜찮은 남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안나의 비탄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 같아 보였다.  마리사는 정중하게 하지만 가능한 빨리 리히터 
상가를 빠져나왔다.
  차를 시동을 걸기 직전 읽어본 메모는 놀랄 만큼 상세히 기술되어 있었다.  
카바나양과의 추후 면담이 닥터 리히터의 진료 예약 장부와 함께 대조를 하면 
닥터 리히터의 마지막 몇 주일을 추적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병원으로 돌아온 마리사는 1월의 하루에 한 장씩의 종이를 배분하여 리히터의 
행적을 적어내려갔다.  그녀가 새로이 발견한 특이한 사실 하나는 그가 
카바나양에게 원인불명의 망막 질환에 걸린 메테르코라는 환자에 대해 불명을 
토로했다는 것이다.  마리사는 그것에 대해 좀서 자세히 조사를 해보아야겟다고 
생각했다.
  오후에 접어들자 마리사 앞에 놓여 있던 전화기의 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집어든 마리사는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태드 쇼클리의 목수리에 깜짝 놀랐다.  
어찌나 또렷하게 들리는지 잠시 그녀는 그가 엘에이에 있는 것으로 착각을 했을 
정도였다.
   아뇨. 
  그녀의 질문에 태드가 대답을 했다.  
   난 아직 여기 아틀란타에 있어요.  하지만 두브체크와 이야기를 좀
해야겠어요.  
병원 교환수는 그 양반이 어디 있을지 당신이 알거라고 하던데요. 
   만일 씨디씨에서 배정된 방에 없다면 아마 호텔로 돌아간 모양이에요.  
어젯밤엔 꼬박 밤을 새운 것 같아 보이더군요. 
   그렇다면 호텔로 전화를 해볼게요.  하지만 연결이 안될지도 모르니, 그런 
사태를 대비해 메시지 하나 전해주실 수 있겠어요? 
   물론이에요. 
  마리사가 말했다.
   좋은 소식은 아니에요. 
  몸을 일으킨 마리사는 혹시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수화기를 바짝 귀에다 
갖다붙였다.
   개인적인 건가요? 
   아뇨. 
  태드가 기가 막히다는 듯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건 거기서 다루고 있는 바이러스에 대한 얘기예요.  당신이 보내준 검체,
그 
중에서도 특히 닥터 리히터의 것은 정말 대단했어요.  그 사람 혈액은 말 
그대로 바이러스가 우글우글했어요.  밀리리터당 적어도 10억 마리 이상이었을 
거예요.  난 그저 원심분리를 한 다음 고정(현미경으로 보기 위해 화학 약품으로

검체를 처리하는 과정)시켜 전자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됐으니까요. 
   어떤 바이러스인지 알겠던가요? 
  마리사가 물었다.
   두말하면 잔소리죠. 
  태드가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모양으로 생긴 바이러스는 단 두 종류밖에 없는데, 에볼라 간접 형광 
항체검사에 양성으로 나오더군요.  닥터 리히터는 에볼라 출혈열에 걸린 거예요.

   그 시제는 벌써  걸렸었던 이 되어버렸어요. 
  태드의 거의 비인간적인 무감정에 약간 기분이 상한 마리사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 사람이 죽었나요? 
  태드가 물었다.
   어젯밤에요. 
   그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에요.  그 질병은 치사율이 90퍼센트가
넘으니까요. 
   맙소사! 
  마리사의 입이 딱 벌어졌다.
   그럼 이건 알려진 것 중 가장 치명적인 바이러스겠군요. 
   어떤 사람들은 공수병 바이러스가 가장 치명적이라고 말하기도 하죠. 
  태드가 말했다.
   하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에볼라가 제일 무섭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이 질병에 대해 알려진 것이 거의 전무하다는 거예요.  워낙 경험해본 
적이 없으니까요.  아프리카에서 두어 번 발생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말고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는 미지의 질병이에요.  어떻게 이 질병이 난데없이 
로스엔젤레스에서 터져나왔는지를 설명하려면 소설도 보통 소설이 아닌 걸 하나 
써야 할걸요. 
   어쩌면 그럴 필요가 없을지도 몰라요. 
  마리사가 말했다.
   닥터 리히터는 발병 직전 아프리카산 원숭이한테 물린 적이 있거든요.  닥터 
브리란드는 그 원숭이가 감염원일 것이 거의 확실하다고 생각하던데요. 
   그 말이 아마 맞을 거예요. 
  태드가 동의의 뜻을 표했다.
   1967년 발생했던 출혈열은 원숭이들이 그 원인이었으니까요.  그 바이러스는 
그 병이 처음 발생했던 독일의 도시 이름을 따 마버그 바이러스라고
명명되었지요.  
그 바이러스는 에볼라랑 거의 비슷한 형태를 가지고 있답니다. 
   이제 곧 알게 되겠지요. 
  마리사가 말했다.
   이제 그건 당신에게 달렸어요.  그 원숭이에게서 채취한 간과 비장 조각들을 
그리로 보냈어요.  곧바로 점검을 해서 제게 알려주면 정말 고맙겠어요. 
   기꺼이 그렇게 해드리지요. 
  태드가 말했다.
   그 검체들이 이리로 오는 동안 저는 에볼라 바이러스로 얼마나 쉽게 배양을 
할 수 있나 볼 작정이에요.  그게 어떤 바이러스주인지 알아내고 싶어요.  
두브체크랑 다른 사람들에게 그 병이 에볼라라는 사실을 알려주세요.  그 말만 
전하면 전부 엄청나게 조심들을 할 거예요.  곧 다시 소식을 전해드릴게요.  
당신도 조심하세요. 
  작은 방에서 나온 마리사는 복도를 건너 씨디씨방을 들여다보았다.  그곳은 
아무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옆방으로 고개를 들이민 마리사는 검사
기사들에게 
모두 어디로 갔는지를 물었다.  그들은 환자 두 명이 더 죽었기 때문에 일부는 
병리과로 내려갔고 또 일부는 응급실에서 새로운 환자들을 입원시키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닥터 두브체크는 호텔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마리사는 기사들에게

그들이 싸워야 하는 질병이 에볼라라는 사실을 알리고 그 끔찍한 소식의 전파는 
기사들에게 맡긴 채 다시 서류작업으로 돌아갔다.

  비버리 힐튼은 두브체크가 말했던 그대로였다.  그곳은 허름한 트로픽 
모텔보다는 분명 한수 위였고 게다가 리히터 클리닉에도 더 가까웠다.  하지만 
벨맨 뒤를 따라 8층 복도를 터덜터덜 걸어가는 마리사의 눈에는 이런 사치스러운

호텔이 불필요한 낭비로만 보였다.  그녀가 문간에서 기다리는 동안 먼저 들어간

벨맨은 방안의 불을 모두 켜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건넨 1달러짜리 지폐를 챙긴

벨맨은 뒤로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그녀는 트로픽 모텔에서 여장을 풀지조차 않았었기에 숙소를 옮기는 데
번거로울 
것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두브체크가 계속 권유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그렇게

숙소를 옮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태드와 이야기를 나눈 지 몇 시간이 지난 오후, 두브체크가 전화를
해왔다.  
혹시 잠을 깨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감히 그에게 전화를 하지 못하다가 전화를 
받자마자 마리사는 이 정체불명의 질병이 에볼라 출혈열이라는 태드의 그 
소식을 받아들였다.  다음 그는 그녀에게 호텔로 오는 길을 알려준 뒤 이미
수속을 
다 해두었으니 그저 805호실 열쇠만 받아 올라오면 된다고 말해주었다.  아울러 
그는 7시 반에 저녁식사를 할 예정인데 마리사만 괜찮다면 그녀 방에서 불과 몇
방 
건너인 자기 방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그는 식사를 하며 마리사의 노트를
검토해볼 
생각으로 식사를 방으로 배달해달라고 했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침대가 눈에 들어오자 갑자기 피로가 쏟아져왔다.  벌써 시간은 일곱 시가
넘어 
있었다.  트렁크에서 화장 가방을 꺼낸 그녀는 욕실로 들어가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은 다음 화장을 약간 고쳤다.  그녀는 서류가방에서 닥터 리히터의 발병 전 
행적을 적은 종이쪽지들을 끄집어냈다.  그 종이들을 움켜쥔 마리사는
두브체크의 
방문 앞으로 걸어가 노크를 했다.
  그녀의 노크 소리에 문을 열어준 두브체크는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는 전화를 하는 중이었는데 마리사는 오가는 대화로 미루어보아

상대가 태드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마리사는 의자에 걸터앉아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이곳에서 보낸 원숭이의 검체가 도착해 검사가 다 끝난 모양이었다.
   그럼, 전자현미경으로도 바이러스가 전혀 안 보였다는 얘긴가? 
  두브체크가 말했다.
  태드가 각종 검사 결과를 상세히 설명하는 듯 긴 침묵이 뒤를 이었다.  시계를

내려다보니 아틀란타는 벌써 열한 시가 넘어 있을 시간이었다.  태드는 상식을 
훨씬 벗어난 정도로 시간외 근무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그녀는 두브체크를 
바라보았다.  그에게는 어딘지 모르게 그녀를 불안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 가슴에 와닿았다.
  그녀는 그가 랠프의 파티에 나타났을 때 자기가 얼마나 당황해 했었는지를 
기억하며 자신이 지금 그에게 왠지 모르게 매력을 느깨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가끔 그가 눈을 들어 쳐다볼 때마다 그녀는 그의 새까만 
눈동자에서 번득이는 그의 목아랫 부분에는 그을은 피부가 만들어놓은 브이자가 
선명했다.
  마침내 전화를 끊은 그는 마리사 쪽으로 걸어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당신은 내가 오늘 본 것 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군요.  당신 친구 태드도 아마

내 말에 동의할 것 같군요.  그 친구는 당신이 혹시 위험에 처하지나 않을까 
걱정이 대단하던데요. 
   저는 이 일에 관련된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히 더 위험한 상황에 있지는
않아요. 
  대화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자 막연히 짜증이 난 마리사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두브체크는 빙긋이 웃음을 지었다.
   태드는 당신만큼 귀여운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에요. 
  이야기를 다시 일 쪽으로 돌리려고 마리사는 그 원숭이의 간 및 비장조직
절편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아직까지는 아무 이상이 없다는군요. 
  두브체크가 공중에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이건 단지 전자현미경 검사 결과에 불과해요.  태드가 바이러스
배양을 
시작했으니 일주일쯤 지나면 결과를 알 수 있을 거예요. 
   그럼 그 동안은 말이죠. 
  마리사가 말했다.
   다른 곳들도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나도 동감이오. 
  두브체크가 말했다.  그는 어딘지 다른 곳에 정신을 팔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눈을 비비며 마리사 건너편에 걸터앉았다.
  마리사는 자신이 작성한 메모들을 건네주었다.
   혹시 이것들을 보고 싶어하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리사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 두브체크는 받아든 종이들을 찬찬히
읽어내려갔다.
  마리사는 엘에이에 도착했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낱낱이 이야기했다.  그녀는 닥터 리히터가 모든 것의 열쇠를 쥔
지표증례인 
동시에 그의 환자들 몇 명에게 질병을 전염시킨 에볼라 바이러스의 감염원이라는

상당히 신빙성이 있어 보이는 주장을 펼쳤다.  그녀는 닥터 리히터와 헬렌 
타운센드간의 관계에 대해 설명을 한 다음 그가 참석했던 두 건의 학회에
대해서도 
언급을 했다.  그녀는 아울러 학회를 주최했던 단체들이 참석자들의 이름은 물론

주소와 전화번호까지 기재된 명단을 보내주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그녀가 혼자서 이야기를 하는 동안 두브체크는 듣고 있다는 신호로 줄곧
고개를 
끄덕였지만 어쩐지 건성으로만 그러는 듯했다.  오히려 마리사가 하는 말보다 
차라리 그녀의 얼굴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었다.  그의 반응이 영 신통치
않자 
마리사는 혹시라도 자기가 무슨 큰 잘못이라도 범한 것이 아닌가 의아해 하며 
말꼬리를 흐리다가 입을 닫아버렸다.  한숨을 내쉰 두브체크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주 잘했어요. 
  그가 간단하게 말했다.
   이게 당신의 첫 현장업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예요. 
  그는 문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어이쿠, 이제야 저녁이 온 모양이로군.  나는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에요. 
  배달된 식사는 평범하지 짝이 없었다.  두브체크가 주문했던 고기와 야채들은 
모두 미지근하게 식어 있었다.  마리사는 도대체 왜 애당초 식당으로 내려가지 
않았는지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가 업무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그러는 줄로 생각했지만, 식사를 하며 나온 이야기들은 랠프의 디너파티며,

또 어떻게 그녀가 그를 알게 되었는지, 씨디씨며, 그녀가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좋아하는지 등등 하찮은 것들에 불과했다.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갑자기 
두브체크가 불쑥 말을 꺼냈다.
   당신한테 내가 홀아비라는 사실을 가르쳐드리고 싶군요. 
   저런, 정말 힘드시겠어요. 
  마리사는 이 남자가 왜 굳이 자기 사생활을 밝히려는 것인지 영문을 몰라하며 
진심으로 위로의 뜻을 전했다.
   그저 당신이 알고 있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한 말씀입니다. 
  마치 그녀의 마음이라도 읽으려는 듯 그가 덧붙였다.
   제 처는 2년전 교통사고로 죽었답니다. 
  또 한 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마리사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당신은 어때요? 
  두브체크가 물었다.
   만나는 사람이라도 있소? 
  마리사는 커피잔의 손잡이만 만지작거리며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그녀는 
로저와의 결별 이야기를 입에 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아뇨, 지금 당장은 없어요. 
  그녀는 간신히 대답을 했다.  그녀는 두브체크가 정말로 그녀가 태드와 사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그것은 비밀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만인이 다 알도록 공개된 것 역시 아니었다.  둘 다 연구소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의 관계를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갑자기 마리사는 더 더욱 불편한 기분을 느꼈다.  일과 사생활은 완전 별개를 
유지한다는 자신의 철칙이 도전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두브체크를 
쳐다보자, 그녀는 자신이 그에게 끌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것이 그녀가 이렇게 불편한 느낌을 받게 된 이유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일 여기 이 방에서 저녁 식사를 한 것이 어떤 다른 목적에서였다면, 마리사는
더 
이상 그와 개인적으로 가까운 관계를 맺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갑자기 
방을 박차고 뛰어나가 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자를 뒤로 뺀 두브체크는 몸을 일으켰다.
   병원으로 돌아갈 생각이라면 빨리 움직이는 게 좋겠소. 
  그것은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그녀는 자기가 들고왔던 종이들을 챙기기 
우해 탁자 쪽으로 발을 옮겼다.  종이를 집어 몸을 일으킨 그녀는 두브체크가 몸

뒤로 바짝 다가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가 무슨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그는 그녀의 어깨를 붙들어 얼굴이 자신을 향하도록 몸을 돌렸다.  그의 행동에 
너무 놀란 마리사는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못박혀버렸다.  아주 짧은 순간 동안

그들의 입술이 포개졌다.  다음 순간 그녀가 몸을 빼자 들고 있던 종잇장들이 
우수수 바닥으로 떨어졌다.
   미안해요. 
  그가 말했다.
   애당초 이럴 계획을 했던 건 아니었어요.  하지만 당신이 씨디씨에 왔을 
때부터 이러고 싶은 유혹을 느꼈어요.  내가 직장에 함께 근무하는 동료들과 
사귀려 하지 않는다는 건 하나님도 알 겁니다.  하지만 집사람이 죽은 다음 
여자에 대해 정말 관심을 갖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당신은 그 사람이랑은

너무나도 다르게 생겼어요.  그녀는 키가 크고 금발이었죠.  하지만 일에 아주 
열정적이란 건 비슷해요.  그녀는 음악가였는데 연주가 잘될 때면 당신 얼굴에 
떠오르는 것과 똑같은 흥분된 표정을 짓고는 했답니다. 
  마리사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두브체크가 진정 추근거리려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창피하고 어색해 어떻게 이 일을 무마하고 
넘어갈지 아득하기만 했다.
   마리사.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다시 아틀란타로 돌아가면 정식으로 데이트를 신청하고 싶어요.  하지만 만일

당신이 랠프랑 사귄다거나 아니면 그저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거나 하면... 
  그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마리사는 몸을 굽혀 흩어진 종이들을 주워모았다.
   병원으로 돌아갈 생각이라면 지금 나서는 게 좋겠어요. 
  그녀가 딱 잘라 말했다.
  그는 뻣뻣하게 그녀의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까지 전송을 해주었다.  나중, 
렌트카에 홀로 앉은 마리사는 자신을 질책했다.  시릴은 로저 이후로 그녀가
만난 
가장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도대체 왜 그렇게 터무니없이 굴었단 말인가?


    4

    2월 27일

  5주 뒤, 공항에서 그녀를 태운 택시가 피치트리 플레이스로 접어들자 마리사는

이제 둘 다 아틀란타로 돌아온 지금, 직장에서 두브체크와 예전과 같은 좋은 
관계를 재정립할 수 있을지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는 비버리 힐튼에서의 
일이 있은 지 불과 며칠 뒤에 엘에이를 떠났고, 그 사이 리히터 클리닉에서 몇
번 
우연히 마주쳤을 때에도 그들의 대면은 쌀쌀하고 어색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지나는 길거리의 불켜진 창문들을 통해 식구들끼리 모여앉은 단란한 정경이 
눈에 들어오자 마리사는 파도처럼 밀려드는 외로움에 사로잡혀버렸다.
  운전사에게 요금을 지불하고 경보 장치를 끈 마리사는 허겁지겁 저드슨네 
집으로 달려가 태피와 지난 5주 동안의 편지들을 되찾아왔다.  그녀를 본 
강아지는 기뻐 날뛰었고 저드슨 부부는 너무도 따뜻하게 긴 여행에 지친 그녀를 
맞아주었다.  너무 오랫동안 폐를 끼친 것에 대해 마리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게 
하기는커녕 그들은 진정 태피와 헤어지는 것을 섭섭해하는 것 같았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방안이 훈훈해지도록 히터의 온도를 올렸다. 
강아지 
한 마리로 집안이 다 달라보였다.  강아지는 계속 그녀의 주위를 맴돌며
자기에게 
신경을 써달라고 아양을 떨어댔다.
  저녁 생각이 난 그녀는 냉장고 문을 열어보았지만 저장된 음식이 상했다는 
것만 알게 되었을 뿐이다.  그녀는 냉장고 청소를 다음날로 미루고는 문을 
닫아버렸다.  그녀는 피그 뉴튼(무화가 열매가 든 쿠키)과 코카 콜라로 저녁을 
때우며 편지들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부모님으로부터의 편지 한 장과 오빠가
보낸 
카드 한 장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제약 회사가 보낸 잡동사니 약 광고였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마리사는 깜짝 놀랐지만, 아틀란타로의 귀환을
환영하는 
태드의 목소리를 듣고 기분이 좋아졌다.
   한 잔 하러 나갈까요? 
  그가 물었다.
   내가 그리로 데리러 갈게요. 
  마리사는 여행 때문에 완전 파김치가 되었다고 말하려다가 그 순간 지난번 
엘에이에 있을 대 했던 최근의 전화 통화에서 그가 자신이 매달려 있던 에이즈 
프로젝트 하나를 마악 끝냈으며 그가  마리사의 에볼라 바이러스 라고 부르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는 말을 했던 것을 기억했다.  갑자기 힘이 솟아난 그녀는 그 
검사들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를 물었다.
   아주 잘 돼가고 있어요. 
  태드가 말했다.
   그 놈들은 베로 98조직 배양액에서 산불처럼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나고
있어요.  
형태학(균이나 바이러스의 형태를 연구하는 것)부분의 연구가 벌써 마무리가 
되어서 구성 단백질의 분석을 시작했답니다. 
   당신이 하는 일을 한 번 봤으면 좋겠어요. 
  마리사가 말했다.
   보여드릴 수 있는 것들은 저도 기꺼이 보여드리고 싶지만 불행하게도 일의 
대부분은 초밀폐 특수 실험실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답니다. 
   저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마리사는 그렇게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다루는 방법은 이름 그대로 그런 
미생물을 오나전 밀폐시킬 수 있는 초밀폐 시설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마리사가 아는 한, 그런 시설은 전 세계에 네 군데밖에 없었다.
  씨디씨에 하나, 영국에 하나, 벨기에에 하나, 그리고 소련에 하나, 그리고
파리의 
파스퇴르 연구소가 그런 시설을 갖추고 있는지는 확실치가 않았다.  안전상의 
이유로 그런 시설에의 출입은 소수의 관계자들만으로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었다.
 
현재의 시점에서 마리사에게는 출입의 허가가 나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볼라의 엄청난 파괴력을 실제로 목격했던 그녀는, 정말로 그의 연구를 보고
싶어 
안달이 났다.
   하지만 당신은 거기 들어갈 수 없도록 되어 있어요. 
  그는 그녀의 세상 물정 모르는 듯한 태도에 어이가 없는지 달래는 말투로
말했다.
   저도 알아요. 
  마리사가 말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이라면 저를 데리고 가서 실험실에서 당신이 에볼라
바이러스로 
무엇을 하는지를 보여준 다음에 한 잔 하러 나가는데 무슨 큰 잘못될 게 있어요?
 
어차피, 벌써 늦었잖아요.  당신이 지금 절 데리고 들어가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거예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거기는 아무나 들어가는 데가 아니에요. 
  태드가 애원하듯 말했다.
  마리사는 자신이 미인계로 태드를 꼬드기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녀가 태드와 함께 들어간다면 누구에게도 위험을 끼치지 않게 되리라는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누가 감히 상상ㅓ이나 하겠어요? 
  그녀가 달콤한 목소리로 얼르며 말했다.
   게다가 저는 그 에볼라 바이러스 연구팀의 일원이잖아요. 
   그렇긴 하군요. 
  태드는 마지못해 그녀의 말에 동의를 했다.
  그는 망설이고 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실험실을 구경시켜주지 않고서는 
마리사와 데이트를 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 그에게 결심을 하도록 만드는 것 
같았다.  그는 30분 뒤에 데리러 올 테니 절대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하면 
안된다고 거듭거듭 다짐을 했다. 
  마리사는 기다렸다는 듯 약속을 해주었다.
  
   진짜 이래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씨디씨를 향해 차를 달리며 태드가 말했다.
   제발 그렇게 호들갑 좀 떨지 마세요.  난 특별 병원체 부서에 배속된 
역학정보원이란 말이에요. 
  일부러 마리사는 약간 화가 난 것처럼 굴었다.
   하지만 내일쯤 정식으로 허가 요청을 내보는게 어떻겠어요? 
  태드의 제안이었다.
  마리사는 태드 쪽으로 몸을 돌리며 다그쳤다.
   왜, 이제와서 겁이 나요? 
  부장인 두브체크가 다음날 워싱턴으로부터 돌아올 예정이었기에 공식적인 
허가를 요청할 수 있다는 태드의 말에는 틀림이 없었다.  하지만 마리사는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확실히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물론 자신의 멍청함이 그 원인이었다고는 하더라도 그가 지난 몇
주일간 
지나치리만큼 차가운 태도로 그녀를 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감하고 있었다.  왜

그에게 사과를 하거나 아니면 한 번 만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할 용기가 생기지 
않는지는 그녀 자신도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 특히 두브체크 쪽의 냉담함은 점점 더 심해져만 갔다.
  태드가 주차장에 차를 세우자 그들은 아무말도 없이 현관을 향했다.  그 사이 
마리사는 남자라는 동물들의 자만과 그 자만이 성가신 일들을 얼마나 많이 
만들어내게 되는지에 대해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눈을 번뜩이는 경비원의 코 앞에서 출입자 명부에 이름을 기입한 다음,

공손히 씨디씨신분증을 꺼내 보여주었다.   목적지 라고 쓰인 칸에 마리사는 
 사무실 이라고 써넣었다.  한참을 기다려 엘리베이터에 오른 그들은 3층으로 
올라갔다.  긴 복도를 지난 그들은 바깥쪽 문을 통해 본관 건물과 실험실들이 
있는 바이러스동을 연결하는 좁다락 구름다리에 올랐다.  씨디씨의 모든 
건물들은 이런 비슷한 구름다리들로 거미줄처럼 서로 연결이 되어 있었다.
   초밀폐 실험실은 경비가 아주 삼엄해요. 
  바이러스동 건물의 문을 열며 태드가 말햇다.
   그곳에는 인간에게 알려진 모든 종류의 병원성(병을 일으킬수 있는)
바이러스들이 보관되어 있거든요. 
   정말 모든 종류가 다 있단 말이에요? 
  마리사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거의 그런 셈이죠. 
  태드가 자식 자랑을 하는 아버지처럼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에볼라 바이러스는요? 
  그녀가 물었다.
   에볼라도 있지요.  우리는 에볼라 사태가 났을 때마다의 바이러스 샘플을 
보관하고 있어요.  마버그 바이러스도 있고, 지금은 세상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어버린 천연두 바이러스도 가지고 있어요.  황열, 뎅구, 에이즈, 당신이
아는 건 
다 있을 거예요. 
   맙소사! 
  마리사가 탄성을 내질렀다.
   공포의 동물원이로군요. 
   그렇게 생각해도 그리 크게 잘못된 건 아니지요. 
   그것들을 어떻게 보관하고 있지요? 
  그녀가 물었다.
   액체 질소로 냉동이 되어 있어요. 
   그럼 그 바이러스들은 전염성을 유지하고 있나요? 
   그냥 해동만 시키면 전염력을 회복한답니다. 
  그들은 수많은 자그마한, 불꺼진 사무실들을 지나 평범해 보이는 복도를 
걸어내려갔다.  마리사는 두브체크의 사무실에 인사를 하러 왔을 때 이곳에 와본

적이 있었다.
  태드는 정육점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비슷한 커다란 냉장실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혹시 여기 흥미를 좀 느낄지 모르겠군요. 
  태드가 무거운 문짝을 당겨 열며 말했다.  안에는 자그마한 전등이 하나 켜져 
있었다.
  마리사는 조심스럽게 문지방을 넘어 차갑고 습한 공기 안으로 발을 디뎠다.  
태드는 바짝 그녀 뒤를 따랐다.  육중한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며 걸쇠 소리가 
방안에 메아리치자 그녀는 엄습하는 공포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냉장시르이 안쪽은 수십만 개의 조그마한 유리 바이알(주사약들을 담는
조그마한 
유리병)이 놓인 선반들로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이게 도대체 뭐예요? 
  마리사가 물었다.
   냉동 혈청이에요. 
  번호와 날짜가 적힌 바이알 하나를 집어들며 태드가 말했다.
   전 세계 방방곡곡에서 밝혀진 모든, 그리고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바이러스 
질환 환자들에서 채취한 혈청 샘플입니다.  면역 검사를 위해 이리로 의뢰한 
것인데 전염성은 없으니 안심하세요. 
  하지만 다시 복도로 나오자 마리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냉장실에서 15미터쯤 나아가자 복도가 오른쪽으로 급하게 꺾이더니 몸퉁이를 
돌자 거대한 철문이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문의 손잡이 바로 위에는 마리사가 
세든 집 경보 장치에 붙어 있는 것과 비슷한 전화 다이얼식의 버튼이 붙어
있었다.  
그 아래에는 자동 현금 지급기의 크레디트 카드를 넣는 구멍 같은 것이 하나 나 
있었다.  태드는 가죽 끈으로 자신의 목에 걸린 카드를 마리사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카드를 구멍에 밀어넣었다.
   컴퓨터가 조회를 하고 있어요. 
  그가 말했다.  다음 그는 버튼을 눌러 개인번호를 입력했다.  43-23-39.
   대다한 몸매예요. 
  그가 기발하게 둘러댔다.
   고마워요. 
  마리사가 웃음을 터뜨리고 태드 역시 뒤따라 웃음을 터뜨렸다.  바이러스동 
건물이 텅 비어 있어서인지 그는 이제 조금 긴장을 푼 것 같아 보였다.  잠시 
시간이 흐른 뒤 빗장이 열리는 기계음이 들려왔다.  태드는 문을 당겼다.
  마리사는 마치 별천지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건물 바깥쪽의 
단조롭고 지저분한 복도들 대신 그녀는 색깔로 분류된 파이프들, 새로 구입한 
신형 기구들과 말로만 듣던 초현대식 장비들로 둘러싸이게 되었다.  어두운 불빛

속에서 태드가 자그마한 캐비닛 문을 열자 한 줄로 배열된 회로차단기들이 
나타났다.  그는 순서대로 차단기들을 올렸다.
  첫 차단기는 그들이 서 있는 방의 불을 켰다.  그 방의 천정은 거의 2층 
높이로 온갖 종류의 기구들로 가득차 있었다.  방 안에는 마리사에게 대학
시절의 
부검실을 상기시켜주는 페놀(석탄산) 소독약의 엷은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다음 차단기는 방 한가운데로 튀어나와 있는 3미터 높이의 커다란 원통 옆에 
달린 총안처럼 생긴 창문들에 불이 들어오게 했다.  그 원통의 한쪽 끝에는 
잠수함의 방수문과 비슷하게 생긴 타원형 철문이 달려 있었다.
  마지막 차단기를 올리자 어떤 커다란 기계를 작동시킨 듯 나지막한 진동음이
들려왔다.
   콤프레서(압축기)예요. 
  그가 마리사의 호기심 가득한 시선에 대답했다.  그는 자세한 설명 대신 손을 
펼쳐보이며 말했다.
   여기가 초밀폐 실험의 제어와 감시가 이루어지는 곳이에요.  여기서 모든 
송풍기와 필터(공기 여과기)를 모니터하지요.  심지어는 감마선 발생기까지도요.
 
이 녹색 불들이 보이세요?  이건 모든 게 다 순조롭게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적어도 바라는 바는 그렇다는 말이죠. 
    바라는 바 라니 그게 도대체 무슨 뜻이죠? 
  깜짝 놀란 마리사가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다음 순간 태드의 미소를 본 
그녀는 그것이 그저 그녀를 놀래주기 위해 한 농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렇기는 했지만, 갑자기 자신이 과연 정말 이 참관을 하고
싶어하는 
건지 100퍼센트 확신이 서지를 않는 것이었다.  아까 안전한 집 안에 있을 때는 
정말 그럴듯한 생각같이 보였지만 이제 이 낯선 기계들에 포위되어 그 안에 어떤

바이러스들이 들어 있는지를 알고 나니 그것이 꼭 그렇게 좋은 생각이었는지 알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하지만 태드는 마음을 바꿀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는 기밀문을 열고 
마리사에게 안쪽으로 들어가라는 손짓을 했다.  마리사는 15센티 높이의
문지방을 
밟고 넘어가는 동안 그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약간 숙여야 했다.  태드는

그녀를 따라 들어와 문을 닫은 다음 볼트를 채웠다.  기압의 변화에 먹먹해진 
귀를 적응시키기 위해 마른침을 삼키자 갑자기 심함 폐소공포가 그녀의 전신을 
휘감았다.
  그 원통형의 방에는 마리사가 바깥쪽에서 본 총알 같은 자그마한 창문들이 
줄지어 달려 있었다.  방의 양쪽 벽에는 긴 벤치와 길다란 사물함들이 놓여 
있었고, 마리사가 들어왔던 문의 반대편에는 선반들과 또 한 개의 타원형
기밀문이 
달려 있었다.
   이건 몰랐겠지요? 
  마리사에게 수술복 한 벌을 던져주며 태드가 말했다.
   여긴 일상복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어요. 
  잠깐 망설이며 어디 조금이라도 몸을 가릴 만한 것이 없을까 헛되어 방안을 
둘러본 마리사는 단념의 한숨을 내쉬며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태드

앞에서 속옷만 남기고는 다 벗어야 한다는 것이 마리사는 이만저만 난감한 게 
아니었지만 태드는 그녀보다도 더욱 몸둘 바를 모르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가 
옷을 갈아있는 동안 줄곳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옷을 갈아입은 그들은 두 번째 문을 통과했다.
   우리가 실험실로 들어가며 통과하는 각 방들은 압력면에 있어 그 바로 앞의 
방보다 음압을 유지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공기의 움직임의 바깥쪽이
아닌 
안쪽, 즉 실험실 쪽을 향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두 번째 방은 첫 번째 방과 거의 비슷한 크기였지만 창문이 달려있지 않았다. 

페놀 소독액의 냄새는 먼저 방보다 더 강렬했다.  옷걸이에는 몇 벌의 커다란 
푸른 비닐 의복들이 걸려 있었다.  한참을 뒤적인 태드는 마침내 마리사에게
맞을 
것 같은 옷을 한 벌 찾아냈다.  태드는 손을 뻗어 그것을 마리사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은 둥근 헬멧과 등에 지는 배낭만 없었지 우주복과 거의 마찬가지였다.  
우주복처럼 장갑과 신발이 달린 그 옷은 전신을 다 감싸도록 되어 있었다.  
머리를 덮은 부분의 앞면은 투명한 비닐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 옷은 치골 
부위에서 턱 바로 아래까지 긴 지퍼가 달려 있었고 등 쪽에는 공기 호스가 마치 
길다란 꼬리처럼 튀어나와 있었다.
  태드는 방의 벽면을 따라 지나가는 녹색 파이프를 가리키며 실험실 전체가
그런 
파이프로 둘러처져 있다고 말했다.  이따금씩 파이프에는 마리사가 입고 있는
것과 같은 보호의복에 달린 공기 호스들을 연결할 수 있도록 연한 녹색의 사각형

다기관들이 달려 있었다.  태드는 보호의가 깨끗한 양압의 공기로 채워져 있어 
검사실 내의 공기는 절대 들이마실 수 없도록 한다는 사실을 설명해주었다. 
그는 
마리사가 완전히 안심을 했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몇 번이고 공기 호스를 
연결했다 분리했다 하였다.
   자, 이제 옷을 입도록 합시다. 
  마리사에게 어떠한 방법으로 그 거추장스러운 보호의를 입는지 시범을 보이며 
태드가 말했다.  옷을 입는 과정은 대단히 복잡했는데 특히 앞 뒤가 막힌 두건에

머리를 집어넣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간신히 머리를 끼운 그녀가 투병 
비닐 페이스 마스크(얼굴덮개)를 통해 밖을 내다보자 그것은 금세 흐려졌다.
  태드의 말에 따라 공기 호스를 연결하자, 쏟아져 들어오는 맑은 공기가 그녀의

몸을 식히며 페이스 마스크를 다시 투명하게 만들어 주었다.  마리사의 보호의 
앞 지퍼를 올려준 태드는 숙련된 동작으로 자기 옷을 입었다.  보호의를 부풀린 
태드는 공기 호스를 분   손에 들고는 검사실 더 깊숙한 쪽을 향하는 문으로 
걸음을 옮기기가 여간 어렵지 않아 오리처럼 우스꽝스럽게 뒤뚱거리며 그의 뒤를

쫓았다.
  문 오른쪽에는 배전판이 하나 달려 있었다.
   검사실 내부등이에요. 
  태드가 스위치들을 올리며 설명을 했다.  그의 목소리는 온몸을 감싼 보호의 
때문에 똑똑히 들리지 않았다.  특히 보호의 안으로 밀려들어오는 공기 소리가 
뒤에 깔려 알아듣기가 무척 힘이 들었다.  그들은 또 한 개의 기밀문을 통과한 
다음 지나온 문을 닫았다.
  다음번 방은 처음 두 방의 꼭 반 정도 되는 크기로 벽과 파이프가 모두 하얀 
분필 가루 같은 물질로 덮여 있었다.  방의 바닥에는 플라스틱 매트가 깔려
있었다.
  그들은 잠시 공기 호스들을 연결시켰다.  다음 그들은 진자 실험실 본체로 
통하는 마지막 기밀문을 통과했다.  마리사는 태드가 하는 대로 공기호스를 
분리했다가 또 그가 연결시키는 곳에 꼭같이 연결시키며 바짝 그의 뒤를 쫓았다.
  마리사의 눈 앞에 나타난 것은 보호용 배기 후드들이 덮인 실험테이블이 방 
한가운데 옹기종기 모여 있는 커다란 장방형의 방이었다.  방의 벽 쪽은 빙 
둘러놓인 각종 기자재 - 원심분리기, 배양기, 다양한 종류의 현미경, 컴퓨터 
단말기 또 마리사는 무엇인지 알수조차 없는 이상한 기계들로 빽빽이 채워져 
있었다.  방의 왼쪽으로는 또 한 개의 볼트로 굳게 닫힌 기밀문이 달려 있었다.
  태드는 마리사를 곧장 배양기 하나로 데리고 가더니 배양기의 유리문을 
걷어올렸다.  그곳에는 조직배양 시험관들이 천천히 회전하는 트레이(시험관을 
담을 수 있도록 시험관 크기에 맞는 구멍이 뚫린쟁반)에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태드는 그 중 하나를 뽑아 마리사에게 건네주었다.
   자, 이게 당신이 그토록 그리워하는 에볼라예요. 
  그가 말했다.
  소량의 액체가 담겨 있는 시험관 한쪽 면에 바이러스에 감염된 살아 있는 
세포들로 형성된 엷은 막이 덮여 있었다.  그 세포들 안에서 바이러스는 자기 
복제를 강행하고 있는 것이었다.  시험관의 내용물은 일견 무해하게만 보였지만 
마리사는 그 안에 아틀란타는 물론이고 어쩌면 미국 전체의 인구까지도 
살상하기에 충분한 양의 맹독성 바이러스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마리사는 유리시험관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리사의 손에서 시험관을 받아든 태드는 현미경 중 하나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검체를 기밀용기에 든 채로 현미경에 올리고 초점을 맞춘 뒤 마리사가 볼 
수 있도록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저기 세포질 내에 들어 있는 시커면 덩어리들이 보이죠? 
  그가 물었다.
  마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투명 플라스틱 페이스 마스크를 통해서라지만  
태드가 기술한  봉입체(여과성 바이러스에 감염된 세포 안의 미립자)와 
비정상적인 모양의 세포핵을 관찰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저것이 감염이 되었다는 첫 번째 신호입니다. 
  태드가 말했다.
   이 배양은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이에요.  이 바이러스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번식력이 강하답니다. 
  마리사가 현미경에서 몸을 일으키자 태드는 다시 시험관을 배양기 안으로 
집어넣었다.  다음, 태드는 자신의 난해한 연구에 대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연구에 사용하는 복잡한 기자재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심지어는 
자신이 시행했던 수많은 실험들의 세부사항까지 자세히 열거했다.  그녀가 이 
야밤에 실험실을 찾은 것은 태드의 연구 따위나 의논하자는 것이 아니었지만
차마 
그런 밀을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긴 복도를 내려간 태드가 마리사를 마지막으로 데리고 간 곳은 동물 우리들이 
천정에 닿을 듯 높게 쌓인 복잡한 동물 사육실이었다.  그곳에는 원숭이, 토끼, 
모르모트, 쥐, 실험용 생쥐 등이 크고 작은 우리에 가득 들어 있었다.  마리사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수백, 수천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혹은 불안에 떨고, 또

혹은 분노와 증오에 가득한 눈길들이었다.
  사육실의 깊숙한 안쪽으로 들어간 태드는 스위스 얼음 생쥐라고 부르는 
생쥐들이 담긴 우리를 끄집어냈따.  마리사에게 그것들을 모여주려던 태드는 
갑자기 얼어붙은 듯 동작을 멈추었다.
   맙소사! 
  그가 비명을 내질렀다.
   오늘 오후에 접종을 했을 뿐인데 벌써 거의 다 죽어버렸군요. 
  그는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마리사를 쳐다보았다.
   당신 에볼라는 정말 치명적인 놈이로군요.  76년 자이레 것보다 전혀 덜하지 
않아요. 
  마리사는 내키지 않는 듯 죽은 생쥐를 내려다보았다.
   각 바이러스주를 비료하는 무슨 방법이라도 있나요? 
   물론이죠. 
  태드가 죽은 쥐들을 치우며 말했다.  태드는 마리사를 데리고 다시
중앙실험실로 
돌아가 그 생쥐들의 작은 사체에 맞는 자그마한 부검 트레이들을 찾아냈다. 
그는 
계속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며 마리사의 질문에 대답을 했다.  마리사는 그가
바로 
앞에 서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그의 말소리를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우주복

같은 보호의 때문에 그의 목소리는 다스 베이더(영화 스타워즈에 나오는 검은 
갑옷의 악당)의 목소리처럼 웅얼거리는 소리로만 들렸다.
   이제 제가 당신 에볼라의 성질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으니 말입니다. 
  그가 말했다.
   전에 발생했던 종류와 비교를 하는 건 그리 어려운 게 아닐 겁니다.  사실,
이 
생쥐 실험이 그 첫 번째 단계였는데, 확실한 걸 알기 위해서는 통계 처리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보아야 합니다. 
  부검판에 생쥐를 올린 태드는 볼트로 굳게 닫힌 기밀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여기는 들어오시지 않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그는 마리사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문을 연 다음 죽은 생쥐를 들고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그의 옷에 달린 공기 호스에 걸려 살짝 벌어진 육중한  
문틈으로 뿌연 김이 새나왔다.
  그 열린 문틈을 바라본 마리사는 독한 마음을 먹고 따라 들어가기로 결심을 
했지만 그녀가 미처 발을 옮기기도 전에 태드가 다시 나타나더니 황급히 문을 
닫아버렸다.
   아세요?  전 또 당신 바이러스의 구조 폴리펩타이드(둘 이상의 아미노산이 
펩티드 결합으로 생기는 화합물군)와 바이러스 알엔에이(리보핵산)를 이전의 
에볼라 바이러스주와 비교해볼 계획이랍니다. 
  그가 말했다.
   그만하면 됐어요. 
  마리사가 웃음을 지었다.
   당신이랑 있으면 내가 정말 멍청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당신이 한 말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다시 바이러스학 교과서를 읽어보아야할 것만 같아요.  
오늘은 이만 하시고 약속했던 대로 마실거나 한잔 사주시지 않겠어요? 
   좋아요, 그렇게 하도록 해요. 
  그가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나오는 길목에는 한 가지 깜짝 놀랄 만한 일이 마리사를 기라리고 있었다.  
분필 가루로 덮인 듯한 흰벽의 방으로 들어모는 순간, 갑자기 천정에서 
페놀소독액이 왈칵 쏟아져 그들을 독에 빠진 생쥐꼴로 흠뻑 적신 것이다.  
마리사의 깜짝 놀란 얼굴을 쳐다본 태드는 함빡 웃음을 지었다.
   이제 화장실 변기가 매번 어떤 기분인지 아실 수 있을 거예요. 
  평상복으로 갈아입으며 마리사는 그가 죽은 생쥐를 들고 들어갔던 방안에 
무엇이 들어 잇는지를 물었다.
   그저 커다란 냉장고가 하나 있을 뿐이에요. 
  더 이상 질문을 말아달라는 듯 손을 휘저으며 그가 말했다.

  그 뒤 나흘 동안, 마리사는 그녀의 강아지와 오랜만에 되찾은 안락한 가정 
생활을 즐기며 서서히 다시 아틀란타에서의 일상에 적응해갔다. 그녀는, 돌아온 
바로 다음날, 냉장고에서 썩은 야채들을 청소해 낸다든지, 밀린 고지서를 
정리한다든지 하는 제일 어려운 일들부터 우선적으로 해결해버렸다.  직장에서는

바이러스성 출혈열, 그중에서도 특히 에볼라 병의 연구에 온 정신을 다 쏟았다.
  씨디씨도서관을 이용해 마리사는 이전에 발생했던 에볼라 감염에 대한 상세한 
자료들을 입수할 수 있었다.  1976년  자이레, 1976년 수단, 1977년 자이레,
그리고 
1977년 수단.  매번 에볼라가 발생햇을 때마다 그 바이러스는 어디서 나왔는지도

모르게 갑작스레 튀어나왔다가 종적도 없이 홀연히 살져버리고는 했다.  도대체 
어떤 생물이 이 치명적인 바이러스의모유 숙주인가를 밝혀내기 위해 엄청난 
노력이 경주되었다.  숙주인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되어 집중적인 조사를 받았던 
동물과 곤충은 200여 종이 넘었다.  하지만 바이러스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 광범위한 연구가 얻어낸 유일한 긍정적인 발전은 가끔 집에서
기르는 
모르모토에서 약간의 항체가 발견되기도 한다는 것뿐이었다.
  마리사의 특별한 관심을 끈 것은 최초, 즉 1976년 자이레에서 발생했던 에볼라

열병에 대한 기종이었다.  질병의 전파는 얌부쿠 미션 병원이라는 의료시설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었다.  마리사는 얌부쿠 미션 병원과 리히터 클리닉,
혹은 
그런 면에 있어, 얌부쿠와 로스앤젤레스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을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공통점이 그리 많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는 이번 역시 필드의 바이러스학 교과서를 읽으며 도서관 구석의 후미진 
책상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앞으로의 주바이러스 실험실에서의 실험에 대비해 
조직 배양에 대해 공부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태드는 고맙게도 그녀가 최신의 
바이러스 연구 기재들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비교적 무해한 바이러스들로 훈련을

해볼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었다.
  마리사는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두 시가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그녀는 3시 
15분, 닥터 두브체크과 만날 약속을 해놓고 있었다.  전날, 그녀는 그녀가 
시행하고자 하는 에볼라 바이러스의 전염성에 대한 실험 계획서를 그의 비서에게

들이밀며 초밀폐 실험실을 사용할 수 있는 허락을 공식적으로 요청했었다.  
마리사는 두브체크가 어떻게 나올 것인가에 대해서는 특별히 낙관적이진 않았다.
 
그는 마리사가 로스앤젤레스에서 돌아온 다음에도 계속 모르는 체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인기척과 함께 그녀가 읽고 있던 책상에 그림자가 드리우자 마리사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이쿠, 어이쿠, 아직도 살아 있었군 그래.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랠프! 
  씨디씨도서관이라는 뜻밖의 장소에서 만난 것과 그의 목소리가 너무 크다는 
사실에 깜짝 놀란 마리사가 낮은 목소리로 그를 꾸짖듯 속삭였다.  몇 명이
고개를 
돌려 그들을 나무라듯 쳐다보았다.
   살아 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러 왔어요. 
  캠벨 부인의 따가운 시선도 아랑곳 않으며 랠프가 말을 이었다.
  랠프에게 제발 조용히 좀 해달라는 시늉을 한 마리사는 그의 손을 붙들어
복도로 
끌고 나갔다.  그곳이라면 다른 사람들을 방해하지 않고도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을 것이다.  너무나 반가워 하는 그의 미소를 올려다보자 가슴이 뭉클해지며 
호감이 솟아나왔다.
   정말 보고 싶었어요. 
  마리사는 단숨에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마리사는 아틀란타로 돌아온 
다음에도 그에게 기별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엘에이에 
있을 때는 적어도 한 주일에 한 번 정도는 전화를 하고는 했었는데...
  마치 그녀의 머릿속이라도 훤히 들여다보듯 랠프가 입을 열었다.  
   왜 연락도 없었죠?  두브체크 말로는 돌아온 지 벌써 나흘이나 됐다던데... 
   오늘 밤에 전화를 할 생각이었어요. 
  랠프가 다른 사람도 아닌 두브체크로부터 그녀에 관한 정보들을 얻어내고 
있다는 것에 적잖히 당황한 마리사가 얼버무리며 대답했다.
  그들은 커피를 마시러 씨디씨구내 식당으로 내려갔다.  점심 식사때가 지난 
시각이라 식당은 텅 비어 있었다.  그들은 앞마당이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랠프는 자신이 병원에서 사무실로 가는 도중인데 저녁 때가 되기 전에 
꼭 그녀를 만나보고 싶었노라고 말했다.
   저녁이나 같이 할까요? 
  몸을 앞으로 숙인 그가 슬그머니 마리사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엘에이의 에볼라를 정복한 당신의 활약상을 자세히 듣고 싶어 죽을
지경이에요. 
   사망자가 스물한 명이나 나왔는데 과연 그것을  정복 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지 
모르겠네요. 
  마리사가 말했다.
   게다가 역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무참하게 실패를 한 거예요.  
바이러스가 도대체 어디에서 나왔는지조차도 밝혀내지를 못했거든요.  어딘가에 
모종의 숙주가 꼭 있었을 텐데도 말이에요.  만일 씨디씨가 레지오넬라 
박테리아가 에어컨디셔닝 시스템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밝혀내지 
못했더라면 언론 매체가 얼마나 법석을 떨었을지 한 번 상상을 해보세요. 
   난 당신이 너무 자신에게 관대하지 못하다고 생각해요. 
  랠프가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 어디서 또 에볼라가 다시 터져나올지 감도 못 잡고
있어요. 
  마리사가 말했다.
   유감이지만, 어디에선가 반드시 또 터져나올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치명적인 그 병이 말이에요. 
  마리사는 에볼라의 참상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병의 원산지인 아프리카에서조차도 아무도 에볼라 바이러스가 
어디서 나왔는지를 밝혀내지 못하지 않았소? 
  계속 그녀의 기분을 달래려고 애를 쓰며 랠프가 말했다.
  랠프가 사실을 다 알고 있다는 데 놀란 마리사는 어떻게 그런 것까지 다 알고 
있는지 물어보았다.
   티브이덕분이에요. 
  그가 말했다.
   요새는 저녁 뉴스만 매일 보면 의과대학에 다닐 필요가 없을 정도니까요. 
  그는 마리사의 작은 손을 힘주어 꽉 쥐었다.
   당신이 엘에이에서 했던 일을 성공적이라고 해야 하는 이유는 하마터면 
엄청나게 번질 뻔했던 대역마를 그 정도로 수습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마리사는 미소를 지었다.  랠프가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일부러 애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마리사는 그의 행동이 모두 한없이 고맙게만 느껴졌다.
   고마워요. 
  그녀가 말했다.
   당신 말이 옳아요.  사실 이번 사태는 훨씬 더 나빴을 수도 있었고, 한동안 
우리들 자신도 그렇게 될 것으로 우려를 했었어요.  검역 격리가 효과가 있었던 
게 천만다행이에요.  병의 치사율이 98퍼센트나 되는걸 생각해보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몰라요.  발병 환자 중 살아남은 사람은 겨우 두 명에 
불과해요.  그 와중에 리히터 클리닉도 엄청난 타격을 입은 것 같더군요.  이제 
에볼라 때문에 그 병원의 명성에 깊은 상처를 입었어요.  샌프란시스코 대중 
목욕탕이 에이즈 때문에 악명이 드높아진 것과 마찬가지죠. 
  마리사는 증기 보온대(음식 식은 것을 막는 보온 용기) 위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았다.  세 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이제 곧 약속이 있어요. 
  그녀가 사과의 말을 했다.
   찾아와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그리고 오늘 저녁 식사에 초대해 주셔서
기뻐요. 
   그럼, 저녁 약속은 한 겁니다. 
  랠프가 빈 잔들이 놓인 쟁반을 집어들며 말했다.
  마리사는 허겁지겁 계단으로 세 층을 올라가 바이러스동 건물로 건너갔다. 
벌건 
대낮에 보니 그 건물은 밤에 보았을 때와는 달리 그리 무시무시해 보이지는 
않았다.  두브체크의 사무실 쪽으로 걸음을 돌리던 마리사는 바로 복도 저 
귀퉁이만 돌면 초밀폐 실험실로 통하는 육중한 철문이 있다는 것을 생각했다.  
그녀가 황망한 걸음으로 두브체크의 비서 앞에 서게 된 것은 3시 17분이었다.
  하지만 이내 마리사는 자신이 그렇게 허겁지겁 서두를 필요가 전혀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서 건너편 자리에 앉아,  이 달의 바이러스 란 센터 폴드가 끼워진 
바이러스학 
타임즈 를 뒤적거리던 마리사는 어차피 두브체크가 곧바로 만나주지 않고 
미적미적 기다리게 만들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다시 시계를 
쳐다보았다.  4시 20분 전.  굳게 닫힌 사무실 문 너머로 전화를 받은
두브체크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비서의 책상 위에 놓인 전화 교호나기에는 그가 전화를 
끊고 또 다른 통화를 시작함을 알려주는 작은 불빛들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두브체크가 마리사에게 들어오라는 손짓을 한 것은 4시 5분 전이 다 
되어서였다.
  그의 자그마한 사무실은 책상, 서류 캐비닛 그리고 바닥에까지 조그마한 산을 
이루며 쌓여 있는 복사된 논문들로 산만하게 어질러져 있었다.  두브체크는 
와이셔츠 차림으로, 넥타이가 방해가 되었던지 두 번째와 세 번째 셔츠 단추
사이로
 밀어넣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왜 그렇게 기다리게 했었는지 아무런 해명도, 사과도 하지
않았다.  
마리사가 특히 더 화가 난 것은 그의 얼굴에 번져 있던 희미한 미소의 그림자 
때문이었다.
   제 편지를 받아보셨을 줄 압니다. 
  마리사는 가급적이면 사무적인 목소리를 내려고 애를 쓰며 입을 열었다.
   네, 보았습니다. 
  두브체크가 말했다.
   그런데 대답은...? 
  잠시 망설이던 마리사가 물었다.
   실험실에서 며칠 일을 해본 것으로 초밀폐 실험실을 이용하기에는 충분치가 
않아요. 
  두브체크가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마리사가 물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계속하도록 하세요. 
  두브체크가 말했다.
   충분한 결험을 축적할 때까지 독성이 좀 덜한 바이러스들로 연구를 계속하는 
편이 좋을 것 같군요. 
   제게 충분한 경험이 생겼다면 그때는 그걸 어떻게 알게 되지요? 
  마리사는 시릴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는 것을 알지만 혹시 그들이 데이트를
하고 
있었더라면 그의 대답이 달라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맴돌았다.  
마리사는 전에 두브체크에게 비쳤던 그 노골적인 거부의 의사표시를 취소할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녀가 함께 기쁜 마음으로 
저녁을 먹기로 약속한 랠프와 그는 매력면에 있어서 비교할 수도 없었다.
   당신이 충분한 경험을 쌓았는지는 내가 자연히 알게 될 것입니다. 
  마리사의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들을 흐트러뜨리며 두브체크가 말했다.
   아니면 태드 쇼클리라도 알게 되겠지요. 
  그 말을 듣고 마리사는 마음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만일 그 결정이 
태드에게 달린 것이라면 조만간에 그 필요한 허가를 받아낼 수 있겠지.
   그런 그렇고... 
  책상을 빙 돌아 의자에 앉은 두브체크가 입을 열었다.
   당신한테 더 중요한 이야기가 좀 있어요.  방금 미주리주 역학 담당관을
위시해 
몇 명이랑 통화를 했는데 세인트루이스에 에볼라일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심한 바이러스성 질병 환자가 하나 발생했답니다.  당신이 지금 당장 
달려가서 그 환자 상태를 파악하고 태드한테 검체를 채취해 보낸 다음 보고를 좀

해주었으면 좋겠어요.  당신이 타고 갈 항공권은 미리 예약을 해두었습니다. 
여기. 
  그는 마리사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네주었다.  그곳에는  델타 항공, 1083편
5:34 
오후 출발, 6:06 오후 도착 이라고 적혀 있었다.
  마리사는 입이 딱 벌어졌다.  러시아워의 교  체증을 생각하면 지금 당장 
뛰어나가도 출발시간에 간신히 턱걸이를 할 판이었다.  역학 정보원은 항상 미리

여행 가방을 싸들고 언제든 출발할 준비를 갖추어 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지금 그녀는 전혀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데다가 태피에 대해서도
배려를 
해야만 한다.
   혹시 필요할지도 모르니 이동 검사실도 준비를 해두겠소. 
  시릴이 말했다.
   하지만 제발 그게 필요하게 되지 않기를 빌겠소. 
  그는 그녀에게 행운을 빌어주기 위해 악수를 청했지만 마리사는 불과 네 
시간도 지나기 전에 또 무서운 에볼라 바이러스와 맞닥뜨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그가 내민 손은 보지도 못한 채 그대로 사무실을 나와버렸다.
  그녀는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다.  행여 초밀폐 실험실을 사용해도 좋다는
승낙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과 기대에 부풀어 갔다가 당장 세인트루이스로 
날아가라는 명령을 받아가지고 나오다니!  시계를 내려다본 그녀는 허겁지겁 
달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서두리지 않으면 턱걸이 하기도 수비지가 않을
것이다.
































    5


    3월 3일

  마리사가 랠프와의 데이트 약속을 기억해낸 것은 비행기가 이륙지점을 향해 
서서히 활주로 위를 움직이기 시작한 뒤였다.  아뿔사!  하지만 예정대로라면 
비행기는 그가 집에 돌아오기 전에 기착할 것이니 곧바로 연락을 취하기만 하면 
큰 낭패는 없을 것이다.
  지금 그녀의 유일한 위안은 지난번 엘에이를 향할 때보다는 일에 조금 더 
자신이 붙었다는 것뿐이었다.  적어도 이제는 자신이 어떠한 일들을 해야 할 
것인지는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긴 하지만 이번 원인이 정말 에볼라라는 
생각을 하면 그 바이러스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잘 아는 마리사는 혹시라도 
자신이 그 바이러스에 노출되면 어쩌나하는 두려움을 쉽사리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여태까지는 아무에게도 털어놓은 적이 없었지만 사실 그녀는 지난번 사태 때 
혹시라도 그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았을까 아직도 걱정을 하고 있는 터였다.  
증상이 없이 하루하루가 지날 때마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렇다고

그 두려움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었다.
  마리사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또 다른 것 하나는 지난번 사태가 수습되기가 
무섭게 또 다른 에볼라 환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이었다.  만일 이것이 진짜 
에볼라라면 어떻게 세인트루이스까지 퍼지게 되었을까.  이번 증례가 엘에이의 
것과는 무관한 독립 발생례일까, 아니면 단순히 엘에이것의 연장에 불과할까.  
엘에이사태의 접촉자 중의 하나가 이제 발병을 한 것일까, 아니면 저 악명 높은 
 장티푸스 메리 (메리라는 이름의 아일랜드계 미국인 여자로 오랫동안 
장티푸스균을 보유하며 수많은 가정에 질병을 퍼뜨렸음.  본인은 70세까지 
장수하며 건강하게 살았음) 같은  에볼라 메리 보균자가 있는 것일까?  머릿속에

피어오르는 수많은 의문 사항 중 마리사의 기분을 즐겁게 해주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저녁 식사를 하시겠습니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마리사의 생각들을 깨뜨리며 기내 승무원이
물었다.
   물론이에요. 
  마리사는 좌석 앞에 달려 있는 식판 테이블을 내리며 대답했다.  배가 고프건 
말건 저녁을 먹어두는 것이 상책일 것 같았다.  일단 세인트루이스에 도착하면 
그럴 시간이 없다는 사실을 마리사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세인트루이스 공항에서 대세인트루이스 사회보건계획 병원까지 데려다준 
택시에서 내리던 마리사는 현관 앞 차도까지 뻗어나온 웅장한 콘크리트 빗물막이

지붕에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밖에는 장대 같은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머리 위를 가려 주는 빗물막이 지붕에도 불구하고 마리사는 현관의 
회전문을 향해 달음질을 치며 바람으로 날리는 물방울들을 막기 위해 코트의 
깃을 올려세웠다.  호텔에는 들르지도 않고 곧바로 병원으로 직행했기에 그녀는 
서류가방은 물론, 여행 가방까지 들고 있었다.
  배오는 어두컴컴한 밤이었음에도 병원의 모습은 찬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회백색 대리석으로 전면을 장식한 초현대식 건물로 앞쪽은 거의 3층 
높이나 되는 게이트웨이 아치의 복제품으로 장식이 되어 있었다.  건물의 내부는

금빛 나는 떡갈나무와 밝은 빨간색 카펫으로 꾸며져 있었다.  발랄한 접수계원 
하나가 마리사를 자동문 너머의 사무실로 안내해주었다.
   닥터 불루멘탈? 
  자그마한 동양계 남자 하나가 앉아 있던 책상에서 황급히 몸을 일으키며
반갑게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  그가 그녀의 여행 가방을 받아들며 악수하는 손을 
정열적으로 흔들어대자 깜짝 놀란 마리사는 뒷걸음질을 쳤다.
   저는 닥터 해롤 타보소입니다. 
  그가 말했다.
   제가 여기 원장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닥터 피터 오스틴, 미주리주 역학 
담당관이에요.  당신이 오기를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리사는 홀쭉한 큰 키와 불그스레한 얼굴을 한 닥터 오스틴과 악수를
나누었다.
   이렇게 빨리 와주시다니 정말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닥터 타보소가 말했다.
   뭐 드실 것 좀 드릴까요? 
  마리사는 사양하겠노라고 고개를 저었다.  
   비행기에서 벌써 먹었답니다.  곧바로 일에 착수를 하고 싶은데요. 
   물론...물론 그러시겠지요. 
  닥터 타보소가 말했다.  
  그는 잠시 갈피를 잡지 못하는 듯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잠깐 입을 
다물고 있는 사이에 닥터 오스틴이 말문을 열었다.
   우선 엘에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 벌써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우리가 똑같은 문제에 직면한 것 같아 걱정이 태산입니다.  
아시다시피 오늘 아침 의심스러운 증례 한 명을 입원시켰는데 선생이 비행기로 
오시는 도중 두 명이 더 들어왔습니다. 
  마리사는 질끈 입술을 물었다.  이번 일이 진짜 에볼라가 아닌 공연한 
헛소란이기만을 빌었지만 가능성 있는 환자가 둘이나 더 생긴터인지라 더 이상 
그런 낙관적인 희망은 가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닥터 타보소가 권한 
의자에 털썩 주저않으며 입을 열었다.
   여태까지 알아낸 사실에 대해 상세히 말씀을 해주세요. 
   유감스럽지만 알아낸 건 거의 없답니다. 
  닥터 오스틴이 말했다.
   시간이 별로 없었으니까요.  첫 번째 환자가 입원한 게 새벽 네시였습니다.  
이렇게 일찍 경종을 울릴 수 있게 된 건 순전히 닥터 타보소의 공입니다.  
병원에서의 접촉을 최소화시키기 위해 환자는 즉각 격리가 되었습니다. 
  마리사는 닥터 타보소에게 눈길을 던졌다.  그는 닥터 오스틴의 치하를 들아며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거 아주 다행이로군요. 
  마리사가 말했다.
   무슨 검사라도 해보셨나요? 
   물론입니다. 
  닥터 타보소가 대답했다.
   그게 문제가 될지도 모르겠군요. 
  마리사가 말했다.  
   그건 저희도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닥터 오스틴이 말했다.
   하지만 그건 어떠한 의심도 갖기 전인 입원 직후에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저는 사무실에서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말을 들은 즉시 씨디씨에 연락했습니다. 
   혹시 지난번 엘에이에서 일어났던 것과 연관이 되는 부분이 있던가요? 
환자들 
중에 엘에이에 다녀온 사람이 있나요? 
   아뇨. 
  닥터 오스틴이 말했다.
   우린 그럴 가능성을 생각하고 조사해 보았습니다만 그런 연관성 같은 것은 
찾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좋아요.  환자들을 좀 보여주세요.  참, 보호의들은 완전히 갖추어져 있지요?

   물론입니다. 
  줄을 지어 사무실을 나서며 닥터 타보소가 말했다.
  그들은 병원 로비를 가로질러 엘리베이터를 향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마리사가 물었다.
   환자들 중에 최근 아프리카에 다녀온 사람이 있나요? 
  타보소와 오스틴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닥터 타보소가
말했다.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요. 
  마리사는 사실 긍정적인 대답이 나오리라는 기대는 애당초 갖고 있지도
않았다.  
그러면 일이 너무 쉬워지지 않겠는가.  그녀는 문 위의 층수 표지판을
올려다보았다.  
엘리베이터는 8층에서 멈추어 섰다.
  복도를 따라 걸음을 옮기던 마리사는 그들이 지나는 방들이 모두 비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대부분의 입원실들에 기본적인
가구조차 
제대로 들어가 있지 않았다.  게다가 복도의 벽은 완전히 페이트칠이 다 되지
않은 
채 그저 밑칠만을 한 상태였다.
  닥터 타보소가 마리사의 어리둥절해 하는 표정을 읽은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그가 말했다.
   미리 설명을 드렸어야 하는데...이 병원은 지어질 당시 필요이상으로 너무
많은 
병상들이 들어오도록 설계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이 8층은 완성이 되지를 
않았지요.  하지만 우리는 이번 응급사태의 경우 여기를 쓰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답니다.  격리하기는 정말 최고지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들은 캐비닛만 빼고 나머지는 거의 완벽하게 갖추어진 것처럼 보이는 
간호사실에 도착했다.  마리사는 첫 번째 환자의 차트를 집어들었다.  그녀는 
책상에 앉아 금속제 차트 커버를 펼쳤다.  환자의 이름은 쟈브리스키.  바이탈 
사인이 적힌 페이지에는 낯익은 고열과 저혈압의 그래프가 평행선을 그리며 
달리고 있었다.  다음 페이지에는 환자의 병력이 기록되어 있었다.  페이지를 
읽어내려가던 마리사의 눈은 환자의 전체 이름이 적힌 난에서 멎었다.  닥터 
칼 엠.  쟈브리스키.  닥터 타보소를 올려다본 그녀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물었다.
   환자가 의사란 말이에요? 
   유감스럽지만 그렇습니다. 
  닥터 타보소가 대답했다.
   우리 병원에 근무하는 안과 의사입니다. 
  닥터 오스틴에게로 몸을 돌린 마리사가 물었다.
   엘에이에서의 지표증례 역시 의사였다는 사실을 알고 계세요?  게다가 그 
사람도 안과 의사였다구요! 
   저도 그 우연의 일치에 대해선 알고 있습니다. 
  닥터 오스틴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닥터 쟈브리스키도 원숭이로 실험을 하고 계신가요? 
  마리사가 물었다.
   제가 아는 한은 그렇지 않습니다. 
  닥터 타보소가 대답했다.
  적어도 이 병원에서는 그랬던 적이 없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바로는 엘에이때 그 사람 리히터 말고는 환자 중에 또 다른 
의사는 없는 것 같던데요. 
  닥터 오스틴이 말했다.
   선생님 말씀이 맞아요. 
  마리사가 말했다.
   지표증례 한 명만이 의사였어요.  검사실 기사 세 명이랑 간호사 한 명이 
있었지만 다른 의사들은 없었어요. 
  다른 차트로 주의를 돌린 마리사는 재빨ㄹ 그 내용을 훑어보았다.  환자의 
병력은 리히터 클리닉이 닥터 리히터에 대해 기록해 놓은 것에 비해서는 
터무니없이 허점투성이었다.  그곳에는 최근의 여행이라든지 동물 접촉에 대한 
사항은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시행했던 임상 검사 워크 업
(정확한 진단을 내리기 위한 각종 검사의 총칭)은 가히 놀랄 정도였다.  비록
모든 
검사 결과들이 다 나온 것은 아니었지만 나온 결과들은 간장과 신장에 심한 
장애가 발생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여태까지의 모든 것이 에볼라 출혈열의 
소견에 부합하고 있는 것이다.
  차트를 내려놓은 마리사는 바이러스 검체의 채취 및 포장에 필요한 물건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그녀는 간호사 한 명을 데리고 복도를 
따라 환자가 수용되어 있는 격리 구역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모자와 
마스크, 장갑, 보안경과 덧신등 보호 복장을 갖추었다.
  쟈브리스키의 병실에는 그녀와 비슷한 옷차림을 한 여자 두 명이 병상 옆을 
지키고 있었다.  한 명은 간호사였고 또 하나는 의사였다.
   환자 상태는 어때요? 
  마리사가 침대 옆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하나마나한 
질문이었다.  환자의 상태는 너무도 확실했다.  처음 마리사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환자의 몸통 전체에 퍼져 있는 붉은 반점이었다.  그 다음은 출혈의 
흔적이었다.  환자의 콧구멍에서 뱀처럼 길게 뻗어나온 비위관(코를 통해 위로 
집어넣은 튜브) 끝에 놓인 병은 붉은 선혈로 가득차 있었다.  닥터 쟈브리스키는

의식은 있었지만 그나마도 꺼져가는 촛불처럼 깜박거리고 있었다.  그는 묻는
말에 
전혀 대답을 하지 못했다.
  병상을 지키던 담당 의사와 나눈 짧은 대화로 마리사는 자신의 느낌이 
옳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환자의 상태는 계속 악화일로이며 갑자기 
혈압이 떨어지기 시작한 지난 마지막 몇 시간 동안 더욱 나빠졌다는 것이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임상적으로 이 환자는 닥터 리히터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너무도 똑같았다.  다른 확실한 진단이 붙기 전까지는 닥터 쟈브리스키와 다른
두 
병의 후발 환자들은 에볼라 출혈열인 것으로 가정해야만 할 것이었다.
  마리사는 간호사의 도움으로 혈액과 소변, 그리고 인후부 스왑을 채취했다.  
마리사는 엘에이에서 했던 것처럼 검체들을 이중으로 포장했다.  각 봉지의 
외측을 소디움 하이포클로라이트 액으로 소독하면서.
  보호 의복을 벗어던지고 깨끗이 손을 닦은 마리사는 간호사실로 돌아와 
두브체크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는 요점만을 이야기한 간결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마리사는 자기가 
보기에 이번 역시 에볼라 감염인 것 같다는 말을 전했다.
   격리는 어떻소? 
   그 점만은 제대로 하고 있는 것 같아요. 
  마리사가 대답했다.
   가능한 한 서둘러 가겠소. 
  두브체크가 말했다.
   아마 오늘 밤쯤 도착하게 될 겁니다.  그 동안 더 이상의 검사를 중지시키고 
근방을 철저히 소독하도록 지도해주세요.  또 우리가 엘에이에서 했던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환자와 접촉했던 사람들을 분류해 검역 격리를 시작하도록 
지시해주십시오. 
  마리사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는 딸깍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쳇, 같이 일하는 관계가 고작 이것밖에는 안되나?
   아무튼. 
  마리사가 타보소와 오스틴을 향해 말했다.
   빨리 일을 시작해야겠어요. 
  재빨리 검역 격리와 검사실의 소독 절차에 대해 논의한 다음 그들은 그녀가 
채취한 검채들을 가능한 한 빠른 시간 내에 씨디씨로 보내기로 했다.
  타보소와 오스틴이 각자 맡은 일을 하기 위해 떠나간 다음 마리사는 다른 두 
환자들의 차트를 가져다달라고 부탁을 했다.  패트라는 이름의 간호사가 차트를 
건네주며 말했다.
   닥터 타보소가 벌써 말씀드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쟈브리스키 부인께서 지금 
아래층에 계세요. 
   그분도 환자세요? 
  마리사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오, 아녜요. 
  패트가 말했다.
   집에 가지 않고 계속 병원에 남아 있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계세요.  사실은 
여기 올라와 간병을 하시겠다고 하는 걸 닥터 타보소께서 허락을 하지
않으셨어요.  
닥터 타보소는 그녀에게 1층 라운지에서 기다리라고 했답니다. 
  마리사는 이제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망설이며 새로 건네받은 차트 두 개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닥터 쟈브리스키의 최초 행적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는 상태이니 쟈브리스키 부인을 만나는 편이 차트를 읽는 것보다 훨씬 
유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어차피 소독 절차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검사실에도 들러보아야 한다.
  패트에게 방향을 물은 마리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으로 내려왔다.  
내려오는 도중 그녀는 옆에 선 사람들의 얼굴을 쳐다보며 만일 이 병원 내에 
에볼라 감염이 발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이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상상해 
보았다.  2층에서 문이 열렸을 때 내린 사람은 그녀 한 명뿐이었다.
  야간 근무자들만 남아 잇을 것으로 기대했던 마리사는 검사실에서 뜻밖에도
여덟 
시가 넘은 시각까지 사무실을 지키며 남아 있던 검사실장 겸 병리학자인 닥터 
아더 랜드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나이가 지긋한 신사로 금시계줄까지 완벽하게

갖춘 격자무늬 조끼 차림이었다.  그는 마리사가 씨디씨에서 파견을 나왔다는 
사실에 전혀 놀라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마리사가 자신의 임상적 견해로 보아 
병원에 에볼라 바이러스 감염이 발생했다고 말을 했을 때에도 표정하자 변하지 
않았다.
   감별 진단에 그 병이 들어 있더군요. 
   씨디씨에서는 에볼라 감염이 의심되는 환자들에게 더 이상의 검사를 하지 말 
것을 공식적으로 요청했습니다. 
  그는 매우 불편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우리가 오늘 밤에 격리 검사 시설을 가지고 올 것입니다. 
   그 말은 닥터 타보소에게 하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닥터 랜드가 말했다.
   벌써 말씀드렸습니다. 
  마리사가 말했다.
   저희측 견해 중의 또 하나는 이 검사실을 소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난번

엘에이에서는 세 명의 환자가 검사실에서 전염이 되었습니다.  원하신다면 제가
좀 
도와드리겠습니다. 
   우리 검사실의 소독은 우리 손으로도 충분합니다. 
   내가 갓난 아이인줄 알아? 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으로 닥터 랜드가 마리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필요하시다면 언제들지 말씀만 하세요. 
  마리사가 발길을 돌리며 말했다.  그녀도 할 수 있는 한은 다 한셈이었다.
  1층으로 내려온 마리사는 자그마한 예배당이 딸린 깜끔한 라운지로 발길을 
옮겼다.  그녀는 쟈브리스키 부인을 어떻게 찾아내야 할지 약간 걱정을 했지만
방 
안에는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쟈브리스키 부인. 
  마리사가 조용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여인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군데군데 백발이 비치는 사십대 후반이나 오십대 초반쯤 되어 보였다.  
그녀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울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저는 닥터 불루멘탈이에요. 
  마리사가 부드럽게 말했다.
   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하지만 몇 가지 여쭈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여인의 눈에는 두려움이 떠올랐다.
   칼이 죽었나요? 
   아뇨. 
  마리사가 말했다.
   가망이 없죠.  안 그래요? 
   쟈브리스키 부인. 
  그 불쌍한 여인의 직감이 맞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마리사는 민감한 부분을 
가급적이면 피해가기 위해 얼버무리며 입을 열엇다.  
   저는 부인의 남편을 직접 치료하고 있는 의료진이 아닙니다.  저는 부군께서 
어떠한 질병을 앓고 계시는지, 또 어떻게 그런 질병에 걸리게 되었는지를
알아내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파견된 사람입니다.  부군께서 최근 여행을 하신 적이 
있나요? 
  처음에는 최근 3주간이라고 물으려던 마리사는 닥터 리히터의 아프리카 여행을

기억해내고는 대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난 두 달간에 말이에요. 
   네, 있어요. 
  쟈브리스키 부인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난 달에 샌디에고의 학회에 갔었고 지난 주엔 보스턴에 갔었어요. 
   샌디에고 라는 말에 마리사는 몸을 곧추세웠다.
   샌디에고에서 있었던 안검수술 세미나에 가셨었단 말인가요? 
   그랬던 것 같아요. 
  쟈브리스키 부인이 말했다.
   하지만 확실한 걸 알려면 칼의 비서에게 물어보셔야 해요. 
  마리사의 머릿속에서는 생각이 소용돌이를 치기 시작했다.  쟈브리스키가 닥터

리히터와 동일한 모임에 참석을 했었다니!  또 하나의 우연일까?  문제는 그 
세미나가 닥터 리히터의 아프리카 여행과 증상 발현 사이의 기간이 똑같은 6주 
전이라는 사실이었다.
   혹시 부군께서 샌디에고에 계신 때 어떤 호텔에 묵으셨는지 알고 계세요? 
  마리사가 말했다.
   혹시 코로나도 호텔 아니었나요? 
   그랬던 것 같군요. 
  쟈브리스키 부인이 말했다.
  마음 속으로는 숨가쁘게 레지오넬라병 돌발 사태 때 필라델피아의 모 호텔이 
감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을 떠올리며 그녀는 닥터 쟈브리스키의 보스턴 
여행에 대해 물었다.  하지만 부인은 왜 남편이 보스턴에 갔었는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대신 그녀는 그런 일이라면 쥬디스가 잘 알 것이라고 거듭 말하며 남편

비서의 전화번호를 가르쳐주었다.
  전화번호를 건네받은 다음 마리사는 혹시 닥터 쟈브리스키가 최근 원숭이에게 
물린 적이 있거나 원숭이 근처에 간 적이 있는지를 물었다.
   아뇨.  그런 적은 없어요. 
  쟈브리스키 부인이 말했다.  적어도 자기가 아는 한은 그런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마리사는 그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 다음 곧장 달려가 쥬디스에게 전화를 
했다.  마리사는 자기가 누구이며 왜 이 늦은 시각에 전화를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두 번이나 누누히 설명을 한 다음에야 비서의 협조를 얻을 수가 있었다.
  쥬디스의 도움으로 마리사는 쟈브리스키 부인이 했던 말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즉, 쟈브리스키는 샌디에고에 갔을 때 코로나도 호텔에 
묵었으며, 최근 동물에게 물린 적도 없고, 그녀가 아는 한 원숭이에게는
근처에도 
간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혹시 닥터 쟈브리스키와 닥터 리히터가 아는 
사이인지를 묻자 쥬디스는 그런 이름은 그의 전호번호부에 올라 있지 않으며
그런 
이름의 편지도 받아본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쥬디스는 닥터 쟈브리스키가 
보스턴에 갔던 이유는 다가오는 메사추세츠 안 - 이과병원 동창회 준비를 돕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그녀는 마리사에게 보스턴에 있는 닥터 쟈브리스키의 
친구들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가르쳐주었다.  비서가 불러주는 이름들을 받아적는

동안 혹시 닥터 쟈브리스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보스턴 지역에 바이러스를 
퍼뜨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섬광처럼 그녀의 머리를 스쳤다.  그녀는 그 
가능성에 대해 두브체크와 의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전화기를 내려놓던 마리사는 갑자기 자기가 공항에서 랠프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졸린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 그에게 마리사는 잠을

깨운 것과 또 아틀란타를 출발하기 전에 미처 연락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
사과를 
했다.  그녀가 허둥지둥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랠프는 이틀에 한 번씩 전화를
걸어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지를 상세히 전해준다고 약속하지 않으면 절대 용서를 
해주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마리사는 그렇게 하겠노라고 맹세를 했다.
  격리 병동으로 돌아온 마리사는 다시 차트들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들어온 환자들의 이름은 캐롤 몽고메리와 닥터 브라이언 세스터였다.  두 명 
모두가 고열과 머리가 터지는 듯한 심한 두통, 그리고 심한 복통 때문에 입원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 두 차트에는 최근의 여행이나 동물 접촉에 대한 기록이 
전혀 들어 있지 않았다.
  바이러스 검체 채취에 필요한 물건들을 챙긴 마리사는 보호 복장을 갖추고
캐롤 
몽고메리를 찾았다. 환자는 마리사보다 한 살이 많은 여자였다.  그녀는 시내의 
커다란 법률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변호사였다.  비록 의식은 명료하고 말도 할
수 
있었지만 그녀가 중환자라는 것은 한눈에도 쉽게 알아볼 수가 있었다.
  마리사는 그녀에게 혹시 최근에 여행을 한 적이 있는가를 물었다.  대답은 
 아니오 였다.  캐롤은 그렇다고 대답을 했다. 그녀는 닥터 쟈브리스키의
환자였던 
것이다.
   최근에 만난 적이 있나요? 
  답은  예 였다.  불과 나흘 전에 진료를 받은 적이 있다는 것이다.  
  바이러스 검체를 채취한 마리사는 무거운 마음으로 병실을 나섰다.  그녀는 
치료도 못하는 병의 진단을 내려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도 싫었다.  
그녀가 지난번 감염 사태 때와 비슷한 전파 경로가 있었다는 것을 밝혀냈다는 
사실만이 자그마한 위안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그 사실은 엘에이에서 그녀를 
계속 괴롭혔던 한 가지 의문점을 상기시켜주었다.  왜 다른 리히터가 보았던 
환자들 중 어떤 사람은 감염이 되고 다른 사람들은 감염이 되지 않았을까?
  새로운 보호 복장으로 갈아입은 마리사는 닥터 브라이언 세스터를 방문했다.  
그녀는 아까와 똑같은 질문을 했지만 혹시 닥터 쟈브리스키의 환자였냐는 것만 
빼고는 모두 똑같은 대답을 받앗을 뿐이었다.
   아니오. 
  한 차례의 복통이 지나가자 닥터 세스터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나는 평생 안과 의사한테 진료를 받아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함께 일을 하신 적은 없나요? 
  마리사가 물었다.
   가끔 그 선생 수술에 마취를 해주고는 해요. 
  닥터 세스터가 말했다.  통증으로 그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통증이 
지나가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선생이랑은 일보다는 주로 테니스로 만나요.  사실 바로 나흘전에 같이 
테니스를 쳤어요. 
  검체를 채취한 마리사는 더 더욱 혼동된 머리로 방을 나섰다.  그녀는 에볼라 
바이러스의 전염에는 가까운 접촉, 특히 점막끼리의 접촉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테니스를 같이 쳤다고 전염이 된다는 것은 
그녀가 가지고 있던 생각의 틀에 도저히 들어맞지가 않았다.
  두 번째의 검체들을 보낸 마리사는 다시 닥터 쟈브리스키의 차트에
달려들었다.  
그녀는 다시금 그의 병력을 샅샅이 읽은 뒤 닥터 리히터 때와 마찬가지로 일지를

작성했다.  그녀는 쟈브리스키 부인과 비서에게서 알아낸 모든 사실들을 종합해 
보았지만 완전한 일지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들 둘을 다시 한 번 찾아가 보아야 
할 것이 분명했다.
  엘에이 감염 사태 때는 바이러스의 보균자를 밝혀내지 못했지만 닥터 
쟈브리스키에게 똑같은 작업을 되풀이해보면 두 사람이 샌디에고의 같은 안과 
세미나에 갔었다는 것 이외에 또 새로운 공통점을 밝혀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두브체크, 브리랜드와 레인이 도착한 것은 자정이 넘어서였다.  특히 닥터 
쟈브리스키의 상태가 계속 악화일로를 거듭하고 있엇던터라 마리사는 그들의 
도착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닥터 쟈브리스키의 주치의는 환자의 수분 공급

상태를 가늠하기 위해 일상의 혈액 검사를 하게 해달라고 집요하게 부탁을 
했으며 마리사는 환자의 치료와 병원의 보호라는 두 개의 상반된 요구 사이에 
치어 아주 난처한 지경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마침내 그 필요한
검사들을 
환자의 병실 내에서 할 수 있도록 허락을 내려주었다.
  병원측과 대충 인사를 나눈 씨디씨 파견 의사들은 이동 격리 검사실을 
가동시키고 환자들의 격리를 개선하는 데에만 몰두해 마리사의 존재 따위는 아예

망각해버린 것 같았다.  닥터 레인이 몇 개의 커다란 환풍기들을 설치하느라 
실랑이를 벌이는 동악 닥터 브리랜드는 검역 격리의 개선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곧바로 행정 부서들로 내려갔다.
  마리사는 다시 차트 검색에 들어갔지만 금세 그것들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들을 모두 뽑아낼 수가 있었다.  책상에서 일어난 그녀는 어슬렁어슬렁 격리

검사실을 향했다.  재킷을 벗어던지고 소매까지 걷어붙인 두브체크는 두 명의 
씨디씨 기사들과 분주히 작업을 하고 있었다.  자동 화학 성분 분석기 부분에
무슨 
하자가 발생한 모양이었다.
   제가 도울 일 없나요? 
  마리사가 물었다.
   그럴 만한 건 없는 것 같소. 
  두브체크가 시선을 돌리지도 않은 채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다음 순간 그는 
감지 전극을 바꾸어보자는 제안을 하며 즉시 기사 중의 하나와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제가 알아낸 사실들을 보고하게 잠깐 시간을 내주셨으면 좋겠어요. 
  닥터 쟈브리스키가 닥터 리히터가 참가했었던 바로 그 샌디에고 학회에 
참석했던 사실을 알리고 싶어 안달이 난 마리사가 안쪽을 향해 소리를 질러댔다.
   그건 좀 기다려야 할 것 같소. 
  두브체크가 맹정하게 쏘아붙였다.
   검사실을 가동시키는 게 역학적인 가설들을 점검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니 
말이오. 
  다시 간호사실로 발길을 돌린 마리사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아올랐다.
그녀는 
두브체크의 신랄한 빈정거림은 생각지도 않았을 분 아니라 그것을 감수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만일 그가 그녀의 협조를 최소화할 생각이었다면 그는 분명
뜻을 
이루고 만 것이었다.  마리사는 차분히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을 생각해 보았다. 

하나는 그가 자기가 편리한 시간에 십 분쯤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려니 하는 
희망에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고 또 하나는 어디 가서 눈을 좀 붙여두는
것이었다.  
결국 결론은 잠을 자두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었다.  그려는 서류 가방에
조이들을 
쑤셔넣고 여행 가방을 찾기 위해 일층으로 내려갔다.

  교환은 정확히 일곱 시에 마리사를 깨워주었다.  샤워를 마치고 옷을 입자 
마리사는 두브체크를 향한 그녀의 분노가 밤새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쨌든, 그 사람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지 않은가?  만일 에볼라가 걷자을

수 없이 번져나간다면 날아가는 것은 그녀의 목이 아니라 그의 목이 아닌가
말이다.
  다시 격리 병동에 돌아오자 씨디씨에서 온 검사실 기사 중의 하나가
마리사에게 
두브체크는 새벽 다섯 시쯤 호텔로 돌아갔다고 귀띔해주었다.  하지만
브리랜드나 
레인의 행방에 대해서는 그 역시 아는 바가 없었다.
  간호사실은 그 사이 꽤나 복잡하게 바뀌어져 있었다.  간밤에 에볼라 
출혈열이라는 추정 진단이 붙은 환자가 다섯 명이나 추가로 입원을 한 것이다.  
차트들을 모아 순서대로 쌓던 마리사는 쟈브리스키의 차트가 없어졌음을
알아챘다.  
그녀는 간호사에게 그 차트가 어디 있는지 물었다.
   닥터 쟈브리스키는 새벽 네 시 직후에 운명하셨습니다. 
  예측은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마리사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그녀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주저앉아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잠시 후 그녀는 자신을 채찍질해 새로운 차트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바삐
일을 
하는 편이 더 마음이 편할 것만 같았다.  무심코 목을 더듬던 그녀는 목이 조금 
부은 것을 알았다.  그 부위에는 약간의 압통도 있었다.  혹시 임파절이
부어오른 게 
아닐까?
  씨디씨의 병원인성감염병 연구 팀장인 닥터 레인의 출현으로 온갖 불길한
생각들에 
더 이상 몰두할 수 없게 된 것이 마리사에게는 오히려 다행스럽게만 느껴졌다. 
눈 
아래 검게 파인 둥근 주름과 초췌한 얼굴, 턱을 뒤덮은 텁수룩한 수염으로
미루어 
그는 밤을 꼬박 새운 것이 분명했다.  마리사는 그의 고단해 보이는 듬직한
모습에 
미소를 보냈다.  그는 은퇴한 미식 축구선수를 연상케 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관자놀이를 비비며 피곤한 듯 의자에 몸을 던졌다.
   엘에이 때만큼이나 일이 커질 것 같군요. 
  그가 말했다.
   환자들이 또 생겨서 하나는 이리로 올라오는 중이고 또 하나는 응급실에 누워

있어요. 
   전 이제서야 방금 새 차트들을 훑기 시작했어요. 
  마리사가 말했다.  갑자기 전날 밤 자기 혼자 편안히 발을 뻗고 잤다는 것이 
죄스럽게 느껴졌다.
   어쨌든 확실한 건 하나 있어요. 
  닥터 레인이 말했다.  
   새로 이환된 환자들은 모두가 병원에서 전염이 된 것 같아요.  그것 때문에 
신경이 이만저만 쓰이는 게 아니에요. 
   그 사람들이 모두 닥터 쟈브리스키의 환자였나요? 
  마리사가 물었다.  
   저 사람들은 그랬죠. 
  마리사 앞에 놓인 차트들을 가리키며 닥터 레인이 말했다.
   저 사람들은 모두 닥터 쟈브리스키에게 진료를 받은 적이 있어요.  닥터 
쟈브리스키가 검진 도중에 저 환자들에게 바이러스를 퍼트렸던 게 분명해요.  
하지만 새로 생긴 증례들은 둘 다 닥터 세스터의 환자였어요.  지난 열흘 사이 
수술을 받았을 때 닥터 세스터가 마취를 담당했더군요. 
   닥터 세스터는 어때요? 
  마리사가 물었다.
   그 사람이 닥터 쟈브리스키와 같은 경로로 감염이 되었다고 생각하세요? 
  닥터 레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장시간에 걸쳐 이야기를 해본 결과 저는 닥터 세스터와 쟈브리스키가 
테니스 파트너라는 사실을 알아냈어요. 
  마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런 정도의 접촉으로도 감염이 될 수 있나요? 
   닥터 쟈브리스키가 발병하기 사흘 전 쯤, 닥터 세스터가 경기도중
쟈브리스키의 
수건을 빌려 쓴 적이 있다더군요.  아마 그 일로 감염이 되었을 거예요.  이 
바이러스의 점염은 실제 체액과의 접촉에 의존하는 것 같아요.  저는
쟈브리스키가 
닥터 리히터의 경우와 똑같은 또 하나의 지표 증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리사는 바보가 되어버린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닥터 세스터와 이야기를 
나누었음에도 바로 한 발자국 앞에서 질문을 중단했기 때문에 중요한 사실을 
알아내지 못하고 만 것이다.  마리사는 앞으로 다시는 그런 실수를 범하지 
않겠노라고 마음 속으로 굳게 다짐을 했다.
   애시당초 어떻게 에볼라 바이러스가 이 병원에 들어오게 되었는지만 알 수 
있다면 정말... 
  닥터 레인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바로 그때 지쳐보이긴 하지만 평소와 다름없이 깨끗이 면도를 하고 깔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두브체크가 간호사실에 도착했다.  그의 출현에 마리사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까 그 검사실 기사의 말대로 새벽 다섯 시에 나갔다면
눈을 
붙이기는커녕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을 시간도 넉넉치가 않았을 텐데.
  마리사는 두브체크가 닥터 레인과 무슨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닥터 리히터와

닥터 쟈브리스키가 둘 다 샌디에고 학회에 참석했었음은 물론 같은 호텔에 
투숙하기까지 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그건 무슨 의미를 가지기에는 너무 오래 전이오. 
  두브체크가 고집스럽게 잘라말했다.
   그 세미나는 벌써 6주도 전의 일이지 않소?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게 쟈브리스키와 리히터에게서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연관성이에요. 
  마리사가 이의를 제기했다.
   제 셍각엔 제가 그걸 더 조사해보는게 좋을 것 같아요. 
   그건 당신 마음대로 하시오. 
  두브체크가 말했다.
   그건 그렇고 지금 병리학과로 내려가 오늘 아침 닥터 쟈브리스키를 부검할 때

최대한도로 조심을 해달라는 말을 전해주시오.  그리고 부검 팀에서 바이러스를 
분리해 내게 간, 심장, 뇌와 비장의 급속 동결 절편을 만들어달라고 하시오. 
   신장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레인이 끼어들며 물었다.
   참, 신장도 준비를 해달라고 하세요. 
  두브체크가 말했다.

  마리사는 심부름이나 하는 사환이 되어버린 기분으로 간호사실을 나섰다. 
다시 
두브체크에게 예우를 받게 될 수 있을까 우울한 마음으로 걸음을 옮기던 그녀는 
도대체 어떤 이유로 이런 상황이 되었는지를 기억하지 화가 치밀어올랐다.
  북적거리는 병리과로 내려간 마리사는 부검실로 안내되었다.  그녀는 닥터 
랜드와 맞닥뜨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제의 그 거들먹거리던 
고압적인 태도를 생각하니 그를 만나기도 전부터 기분이 언짢아졌다.
  부검실들은 흰 타일과 번쩍거리는 스테인리스 강철로 만들어진 구조물이었다. 

방안 가득히 포르말린의 냄새에 마리사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부검실 기사 
중의 한 명이 마리사에게 쟈브리스키의 부검이 3번 부검실에서 시행될
예정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들어가보실 생각이라면 제대로 복장을 갖추셔야 합니다.  지저분한 
케이스거든요. 
  그렇지 않아도 혹시 에볼라에 전염될까 가슴을 조이며 걱정을 하고 있던 
마리사는 기꺼이 그의 지시를 받아들였다.  그녀가 부검실로 들어가자 닥터 
랜드는 마악 부검을 시작하려는 참이었다.  그는 무시무시한 기구들이 줄지어 
놓인 부검대에서 눈을 들어 마리사를 바라보았다.  닥터 쟈브리스키의 시체는 
아직도 커다란 투명 비닐 봉지 안에 들어 있었다.  그의 시체는 윗부분은
백지장처럼 창백했지만 부검대에 닿은 밑부분은 시커먼 보라색이 되어 있었다.
   안녕하세요! 
  마리사가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왕이면 명랑하게 구는 편이 나으리라는 
생각을 했지 때문이다.  아무 대꾸가 없자 마리사는 닥터 랜드에게 씨디씨의 
공식적인 요청을 전달했다.  그는 순순히 검체를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리고 마리사는 보안경을 사용하는게 좋겠다는 제안을 했다.
   이곳과 엘에이 모두에서 상당수의 증례들이 결막을 통해 바이러스에 감염이
된 
것으로 생각되거든요. 
  닥터 랜드는 투덜거리며 잠시 사라졌다가 플라스틱 보안경을 걸치고 다시 
나타났다.  그는 아무 말도 없이 마리사에게 보안경 하나를 건넸다.
   또 한 가지요. 
  마리사가 덧붙였다.
   이런 종류의 부검을 할 때 씨디씨는 연무질(연기나 안개처럼 고체나 액체의 
미립자가 기체 속에 분산되어 있는 현상) 발생 위험이 있는 동력 톱의 사용을 
자제할 것을 강력히 권하고 있습니다. 
   난 동력 기구들 따위는 쓸 생각조차 없었소. 
  닥터 랜드가 말했다.
   나도 평생 이 짓을 하며 전염병을 한두 번은 다루어본 적이 있단 말입니다. 
   마리사가 말했다.
   부검을 담당했던 병리 의사 하나가 부검 도중 손을 다치는 바람에바이러스성 
출혈열로 목숨을 잃은 적이 이어요. 
   나도 기억하오. 
  닥터 랜드가 말했다.
   라사열이었죠.  자, 해주실 충고가 더 있으신가요? 
   아뇨.  이젠 없어요. 
  마리사가 말했다.  닥터 랜드는 비닐 덮개를 절개, 쟈브리스키의 시체를 
공기에 노출시켰다.  마리사는 나갈 것인지 아니면 계속 지켜보고 있을 것인지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망설이고만 있었다.  그결과, 그녀는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한 채 그냥 방안에 남아 있게 되었다.
  발판으로 작동되는 오버헤드 마이크를 켠 닥터 랜드는 사체의 뇌양에 대해 
구술을 하기 시작했다.  구술 테이프에 녹음을 하는 그의 판에 박힌 목소리에 
마리사는 잠깐 의과대학 시절로 돌아가 있는 듯했다.  그녀를 깜짝 놀라 현실로 
되돌아오게 한 것은 봉합이 된 두피 열상에 대한 랜드의 언급이었다.  그것은
물론 
오른쪽 주관절 부위의 찢어진 상처나 오른쪽 허벅다리 25센트 동전만한 둥근 
멍자국도 차트에는 전혀 언급이 되어 있지 않았었다.
   이 상처들이 죽기 전에 생긴 것들인가요.  아니면 죽은 다음 것들인가요? 
   죽기 전이오. 
  그가 마리사의 방해에 노골적으로 신경질을 내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저 상처들이 얼마나 됐다고 생각하세요? 
  마리사가 그의 짜증스럽다는 목소리를 일축하며 물었다.
   한 일주일 정도는 된 것 같소. 
  닥터 랜드가 대답했다.
   물론 하루 이틀의 오차는 있을 수가 있겠지만 말이오.  정 궁금하면 떼어 
현미경으로 조직 검사를 해보면 확실히 알 수 있을 거요.  하지만 환자의 상태를

돌이켜볼 때 그것들이 그리 중요하다고는 생각할 수가 없군요.  자, 이제,
당신이 
별 이의가 없으시다면 다시 일을 계속하고 싶소. 
  어쩔 수 없이 한걸음 뒤로 물러선 마리사는 이 외상의 흔적들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다.  어쩌면 이것들은 정말로 단순한 우연일 수도 있었다. - 닥터 
쟈브리스키가 테니스를 치다가 넘어졌을 수도 있고...
  마리사를 영 찜찜하게 만든 것은 환자의 차트에 이 상처들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었다는 불가해한 사실이었다.  마리사 자신은 수련을 받을 당시 아무리 하잘
것 
없어보이는 세세한 이학적 소견까지도 기록을 하도록 귀에 못이 박히게 듣지를 
않았던가!
  랜드의 부검이 끝나고 요청했던 검체의 채취가 바라던 대로 시행되었음을 
확인하자 마리사는 그 외상들의 원인을 추적해 보기로 결심했다.
  병리과에 있는 전화를 집어든 마리사는 쟈브리스키의 비서 쥬디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스무 번 울릴 때까지 수화기를 들고 기다렸지만 끝내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남편의 사망으로 비탄에 잠겨 있을 쟈브리스키 부인을 
괴롭히기는 영 내키지를 않아 마리사는 닥터 쟈브리스키의 사무실을 방문해 보는

편으로 생각을 바꾸었다.  쟈브리스키의 사무실을 찾아간 마리사는 주인 없는 
빈 사무실에 앉아 있는 쥬디스를 만나게 되었다.  
  쥬디스는 이십대 중반의 연약해 보이는 젊은 아가씨였다.  그녀의 볼에는 
마스카라가 시커멓게 번져 있었다.  마리사는 한눈에 그녀가 울고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비통해 하는 것 이상으로 공포에 질려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쟈브리스키 부인이 병에 걸리셨어요. 
  마리사가 자신을 소개하자마자 그녀는 왈칵 울음 섞인 하소연을 쏟아놓았다.
   방금 그녀량 얘기를 했어요.  지금 아래층 응급실에 있는데 병원에 입원을
해야 
한 대요.  의사들 말로는 쟈브리스키 박사님이 걸렸던 바로 그 병인 것 같대요. 
오, 
하나님, 저도 그 병에 걸리면 어떻게 해요?  선생님, 그 병 증상이 뭐예요.   
  마리사는 엘에이의 경우 의사의 비서가 끝내 감염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차근차근 설명한 다음에야 간신히 그녀를 달랠 수 있었다.
   그래도 더 이상 여기 있을 수가 없어요. 
  책상 서랍을 열어 스웨터를 끄집어내며 쥬디스가 말했다.  그녀는 옷을 상자 
속으로 던져넣어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어서 여길 떠나고 싶어요.  저뿐만이 아니에요. 
  그녀가 덧붙였다.
   직원들 몇 명이랑 얘기를 해보았는데 그 사람들 모두 떠난 생각이래요. 
  직원들의 우왕좌왕하는 반응으로 미루어 혹시 병원 전체를 검역 격리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마리사의 머리를 스쳤다.  검역 격리가 발표된 이후에 겁에 
질린 환자와 직원들로 아수라장이 되었던 리히터 클리닉의 기억이 악몽처럼 
되살아났다.
   제가 여기 온 건 당신한테 물어볼 것들이 좀 있어서예요. 
  마리사가 말했다.
   그럼 물어보세요. 
  계속 책상 서랍을 비우며 쥬디스가 말했다.
   닥터 쟈브리스키는 마치 어디 넘어졌던 것처럼 머리에 찰과상과 찢어진
상처가 
있더군요.  혹시 그 일에 대해 아시는 게 있으세요? 
   그건 별일 아니었어요. 
  쥬디스가 손을 흔들어 전혀 중요치 않다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한 일주일 전쯤에 부인한테 줄 생일 선문을 사러 나갔다가 동네 쇼핑 센터 
앞에서 노상 강도를 당했어요.  선생님은 지갑이랑 금딱지 로렐스 시계를 
빼앗겼었죠.  그때 머리를 맞으셨던 것 같더군요. 
  그렇게 궁금하게 생각했던 외상의 원인치고 참 싱겁기 그지없군, 마리사는
마음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혹시 더 물어볼 것이 없을까, 마리사는 쥬디스가 상자

안으로 자신의 소지품을 던져넣는 것을 지켜보며 몇 분 동안이나 그 옆에 서 
있었다.  아무리 해도 더 물어볼 것이 생각이 나지 않자 마리사는 작별을 고하고

격리 병동을 향해 방을 나섰다.  그녀는 여러 모로 쥬디스만큼이나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격리 병동은 전에 없이 소란스러웠다.  마리사는 이곳이 처음 왔던 날 정적에 
싸여 있던 병동이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새로운 환자들의 입원으로 
병동은 꽉 차 있고 간호사들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녀는 차트 몇 개에 분주히 새로운 발견 사항들을 기입하는 닥터 레인을
발견했다.
  그가 말했다.
   쟈브리스키 부인을 포함해 다섯 명이 더 입원했어요. 
   저도 그 소식을 들었어요. 
  닥터 레인 옆에 자리를 잡아 앉으며 마리사가 말했다.  제발 두브체크도 닥터 
레인처럼 그녀를 동료로 취급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태드 쇼클 리가 전화를 했더군요.  에볼라래요. 
  마리사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제 언제라도 주 보건 국장이 와서 검역 격리를 공포할 거예요. 
  닥터 레인이 말을 이었다.
   병원 직원들 주에 상당수가 일을 팽개치고 도망가는 것 같더군요.  간호사,
기사 
심지어는 의사들까지도 도망을 치고 있어요.  닥터 타보소는 이 병동을 가동시킬

인력을 대느라고 아주 죽을 고생을 하고 있답니다.  참, 신문 읽어보셨어요? 
  마리사는 고개를 저어 그렇지 않다는 대답을 했다.  마리사는 바이러스에
감염될 
가능성이 있다면 자신도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는 말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1면 톱 기사가 <페스트 돌아오다!>예요. 
  닥터 레인은 혐오스럽기 짝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중 언론 매체라는 게 이 따위로 무책임한 말을 남발하다니!  두브체크는 
누구도 보도진이랑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자신이 모든 질문에
공식적인 
답변을 할 생각인 모양이에요. 
  환자 수송용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는 소리에 마리사는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투명한 비닐로 만든 격리 텐트에 덮인 이동 침대가 하나 미끄러져 나왔다.  
마리사는 지나는 침대 위에 누운 쟈브리스키 부인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는 과연 신문의 그 머리 기사가 터무니 없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미심쩍게 생각하며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6


    4월 10일

  마리사는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먹기로 결심한 종류의 디저트를 또 한 숟가락 
떠먹었다.  아틀란타에 돌아온 지 이틀째 되는 날, 랠프는 그녀를 단골 프랑스 
음식점으로 데리고 왔다.
  5주 동안 잠도 제대로 못자고 병원 식당에서 허겁지겁 식사를 때운 
마리사에게는 감칠맛 나는 이 저녁 식사가 몹시도 즐거운 일이었다.  그녀는 
아틀란타를 떠난 뒤 단 한 번도 술을 입에 댄 적이 없었기에 포도주 한 잔에
홀딱 
취해버린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평소와는 달리 유난히도 떠들어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랠프는 느긋하게 기대앉아 귀를 기울이는 것이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너무 혼자만 떠들었다는 데 겸연쩍어진 마리사는 변명하듯 일에 대해서만 
떠들어대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사과할 필요는 전혀 없어요. 
  랠프가 힘을 주어 말했다.
   난 밤새라도 듣겠어요.  난 당신이 엘.에이.랑 세인트루이스에서 올린 성과에

홀딱 반해버렸답니다. 
   하지만 이건 제가 돌아오기 전에 벌써 다 말씀드린 것들이잖아요. 
  마리사가 그동안 계속된 전화 통화를 상기시키며 말했다.  마리사는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동안 계속 며칠에 한 번씩 랠프와 통화를 나누고는 했었다.
 
랠프와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녀의 가설들을 털어놓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음은 
물론 두브체크의 계속되고 냉담한 태도에 대한 분노와 절망을 해소할 수 있는 
방편도 되었다.  두 경우 모두에 있어 랠프는 따뜻한 이해와 공감으로 그녀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던 것이다.
   그 대중들의 반응이라는 것에 대해 좀 더 이야기를 해주었으면 좋겠어요. 
  그가 말했다.
   이번에는 서른 일곱 명이란 엄청난 수의 사망자가 발생했는데 행정부처 
사람들이랑 병원 직원들이 어떻게 그 놀라 날뛰는 사람들을 진정시킬 수 
있었는지가 궁금하군요.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마리사도 세인트루이스 병원에서 벌어졌던 대 소동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환자들과 직원들의 대부분은 주 정부 당국에 
의해 강제고 선포된 검역 격리에 격분을 했었고 닥터 타보소는 마리사에게 검역 
격리가 끝나더라도 병원은 폐업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슬프게 말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말이에요, 내 자신도 혹시 내가 병에 걸리면 어떻게 하나 아직도 
걱정이 되는 것 있죠. 
  마리사가 어줍은 미소를 지으며 심경을 털어놓았다.
   매번 머리가 좀 아플 때마다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우리가 아직은 그 바이러스가 어디서 나왔는지 감도 못 잡고 있기는 하지만 
두브체크는 바이러스 보균체가 의료인들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런 생각을 하면 더욱 으스스해지기만 해요. 
   그 말을 믿어요? 
  랠프가 물었다.
  마리사는 웃음을 지었다.
   그런 것 같아요.  그리고 만일 그게 정말 맞는 말이라면 당신은 자신이 
남들보다도 훨씬 큰 위험에 직면해 있다고 생각하셔야 해요.  두 번의 경우 지표

증례들이 모두 안과 의사들이었거든요. 
   그런 소리 마세요. 
  랠프가 웃음을 터뜨렸다.
   난 미신에 약해요. 
  웨이터가 두 번째 커피를 내오자 마리사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그
맛은 
기가 막혔지만 나중에 잠이 오지 않아 고생을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웨이터가 빈 디저트 접시들을 들고 사라지자 마리사가 다시 말을 이었다.
   만일 두브체크의 가정이 맞는다면 그 두 명의 안과 의사들은 어떤 경로를 
통해서건 그 미스터리의 보균체와 접촉을 가진 게 돼요.  전 몇 주 동안이나
계속 
이리저리 생각을 해보았지만 그럴듯한 대답은 단 한 가지도 떠오르지가
않더군요.  
닥터 리히터는 원숭이들과 접촉을 한 적이 있지요.  사실 그는 발병한 지 
일주일쯤 전에 원숭이한테 물린 일이 있는데 원숭이는 마버그 바이러스라는 
비슷한 바이러스의 숙주가 될 수도 있거든요.  하지만 닥터 쟈브리스키는 어떤 
짐승과도 전혀 접촉을 한 적이 없었어요. 
   전에 닥터 리히터가 아프리카에 갔던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 
  랠프가 말했다.
   내가 보기엔 그게 제일 중요한 사실인 것 같아요.  어쨌든, 아프리카에는 그 
바이러스가 풍토병이니까요. 
   그건 그래요. 
  마리사가 말했다.
   그런데 시기적으로 영 맞아떨어지지를 않아요.  그 아프리카 방문 사실이
의미가 
있으려면 잠복기가 6주나 된다는 얘긴데, 다른 증례들에서는 불과 평균 이틀에서

닷새 사이에 병이 나타났거든요.  그 다음, 두 번의 에볼라 감염 사태를
연관짓는 
문제에 대해 생각을 해보세요.  닥터 쟈브리스키는 아프리카에 간 적이 없고 그
두 
의사들 사이의 유일한 공통점은 같은 샌디에고 세미나에 참석했다는 것뿐이에요.
 
그런데 그것은 쟈브리스키가 발병하기 6주 전의 일이었어요.  도무지 말이
되지를 
않아요. 
  마리사는 이제는 도저히 어찌할 도리가 없어 포기해야겠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그럼 적어도 그 무서운 질병을 성공적으로 제압했다는 걸 위안으로 삼아요.  
그 바이러스가 처음 아프리카에 출현했을 때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맹위를 
떨쳤잖아요? 
   그런 그래요. 
  마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미국인 대학생 하나가 지표 증례였다고 생각되는 1976년 자이레 사태
때는 
318명의 환자가 발생해 그 중 280명이 목숨을 잃었어요. 
   그것 봐요. 
  그 엄청난 통계 자료로 마리사의 마음이 좀 편해질 것이라고 생각한 랠프가 
맞장구를 쳤다.  그는 냅킨을 접어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우리 집에 들러 입가심 한 잔 어때요? 
  마리사는 이 남자랑 있으면 얼마나 마음이 편해지는지 자신도 놀라며 랠프를 
쳐다보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런 관계가 전화를 하는 사이에 형성된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딱 한 잔이라면 그것도 좋은 생각이에요. 
  마리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음식점에서 걸어나오는 길에 마리사는 랠프의 팔짱을 끼었다.  차앞에
도착하자 
랠프는 그녀를 위해 문을 열어주었다.  그녀는 이런 남자랑 이렇게 사는 것도 
괜찮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마음 속으로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랠프는 자기 차를 몹시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운전대와 
계기들을 만지는 애정어린 손길만 봐도 한눈에 금방 알수가 있었다.  그의 차는 
새로 뽑은 300에스이엘 메르세데스였다.  부드러운 가죽 시트에 기대앉은
마리사는
 그 호사스러움에 찬탄을 금할 수가 없었지만 사실 그녀는 자동차에는 큰 매력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또 왜 사람들이 시동 때와 정지 상태에서 불편하게

덜덜거리는 디젤 차를 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게 훨씬 경제적이거든요. 
  랠프가 말했다.  마리사는 호사스러운 차 안의 집기들을 둘러보았다.  그녀는
이 
비싼 메르세데스가 경제적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한동안 침묵이 흐르자 마리사는 이 늦은 야밤에 랠프의 집으로 가는 것이 과연

좋은 생각일까 다시 한 번 곱씹어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랠프를 믿었고 사실 둘

사이의 관계에 조금 진전이 생겨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어스름 
불빛에 비친 그의 옆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는 그녀의 아버지를 닮은 큼직한
코를 
가진 사람이었다.
  브랜디 잔을 들고 소파에 기대앉자 마리사는 위압적인 태도에 눌려 두브체크 
앞에서는 감히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 두 명의 지표 증례에는 정말 이상한 공통점이 하나 있었어요.  두 명 모두

발병 며칠 전에 노상 강도를 당했던 적이 있거든요. 
  마리사는 말을 멈추고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몹시 의심스러운 단서로군요. 
  랠프가 윙크와 함께 말을 했다.
   그럼 사람들을 털면서 병을 퍼뜨리는  에볼라 메리 가 있단 말인가요? 
  마리사는 웃음을 터뜨렸다.
   저도 그게 바보 같은 생각이란 걸 잘 알아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한테는 
한 번도 이 이야기를 한 적이 없어요. 
   하지만 항상 모든 가능성을 생각하기는 해야 돼요. 
  랠프가 덧붙였다.
   의과 대학 다닐 때를 생각해봐요.  환자의 외고조 할아버지가 이민 오기 전에

무슨 일을 했었는지까지도 물어보라고 가르쳤잖아요. 
  마리사는 일부러 화제를 랠프가 제일 좋아하는 두 가지, 즉 그의 일과 그의 
집으로 돌렸다.  시간이 흐르면서 마리사는 랠프가 더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그것이 혹시 그녀가 에볼라에 감염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것 같은 그녀의 어떤 문제점 때문이 아닐까 생각을 해보았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그는 그녀에게 손님 방에서 자고 가라는 초대를 했다.
  마리사는 심한 모욕을 느꼈다.  그것은 현관 문으로 들어오자마자 치마를 
잡아벗기려는 것과 똑같이 모욕적이었다.  그녀는 고맙다는 인사를 했지만 그의 
집 손님 방에서 밤을 보낼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녀는 그냥 자기 집으로 돌아가 강아지랑 자고 싶다고 말했다.  그 말은 
랠프에게 창피를 주려고 한 것이었지만 그는 마리사의 의도를 깨닫지 못한 채 
그냥 흘려듣고 말았다.  그는 계속 집의 일층을 어떻게 개조할까에 대해서만 
떠들어대면서 이제 이 집에 오래 살다보니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완전히 
파악을 했다고 말했다.
  사실, 마리사는 랠프가 진짜로 육체적인 접근을 시도해온다면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지 마음의 준비를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그는 좋은 친구이기는 했지만 
성적인 매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 면에 있어서는 두브체크의 용모가 훨씬 더 
자극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시릴의 생각이 떠올랐다.
   당신이랑 두브체크는 어떻게 서로 알게 되었죠? 
   그 친구가 대학 병원에서 안과 레지던트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했을 때 처음 
만나게 되었죠. 
  랠프가 말했다.
   에볼라나 심지어는 에이즈 바이러스 같은 희귀한 바이러스들이 눈물이나 
전방수에서 검출이 되거든요.  그들 중 어떤 것들은 전방 포도막염을 일으키기도

하지요. 
   그래요? 
  마리사가 이해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지만 사실 그녀는 전방 
포도막염이 무엇인지 감도 잡지 못했고 그것이 랠프에게 집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기에 절호의 기회임을 잊지 않았다.
  
  다음 며칠 동안, 매번 전화벨 소리가 울릴 때마다 또 어디 에볼라 감염이 
터져나와 출장을 가라는 게 아닐까 가슴이 철렁 내려앉기는 했지만 마리사는
점차 
일상적인 생활로 적응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지난번 급작스럽게 떠나야 했던
출장 
때의 경험으로 마리사는 언제라도 화장 가방만 던져 넣으면 출발을 할 수 있도록

여행가방을 꾸려두었다.  이제는 만일 필요만 하다면 불과 몇 분 사이에 집을
나설 
수 있었다.
  직장에서는, 모든 일이 잘되어 가고 있었다.  태드는 그녀가 바이러스를
다루는 
실험 기술들을 연마할 수 있도록 열성적으로 도움을 주었고 에볼라 바이러스에 
대한 연구 계획서를 작성하는 데에도 일조를 해주었다.
  에볼라 보균숙주에 대해 그럴듯한 가설을 세울 수가 없던 마리사는 대신 
바이러스의 전파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엘에이와 세인트루이스에서 수집했던

방대한 자료를 토대로 그녀는 한 환자로부터 다른 환자에게 바이러스가 전염된 
경로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정교한 증례 지도를 만들었다.  동시에 그녀는 
일차 접촉자임에도 불구하고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았던 사람들에 대해 세세한 
프로필을 작성했다.
  병의 전파에는 닥터 레인이 말했던 바와 같이 긴밀한 신체적 접촉이 필요한 
것처럼 보였는데, 이 경우는 에이즈와는 달리 성 접촉에 의한 전염이 닥터 
리히터와 그의 비서, 또 쟈브리스키 부부의 두 경우로 국한되었고 주로 점막의 
접촉을 통해 전파가 되는 것 같았다.  이 무서운 에볼라 출혈열이 그저 우연히 
수건을 같이 쓰는 것이나 하찮은 접촉만으로 전파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에이즈 따위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니었다.
  마리사가 하고 싶었던 것은 모르모트를 써서 자신의 가설을 입증하는
연구였다.  
그런 연구에는 초밀폐 실험실의 사용이 꼭 필요했지만 아직 그녀는 그 허락을 
받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굉장하군요! 
  어느 날 오후, 마리사가 고안해낸 세균 오염 바이러스 배양액 구제법(세균으로

오염된 바이러스 배양액은 폐기가 불가피한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것을 폐기하지 
않고도 쓸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본 태드가 탄성을 내질렀다.
   이젠 두브체크가 더 이상 당신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수가 없겠는데요. 
   글세 그건 자신이 없네요. 
  마리사가 말했다.  그녀는 엘에이의 호텔에서 있었던 일을 태드에게
말해버릴까 
망설였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그런
말을 
해보았자 아무 득이 없을 텐데 공연히 시릴과 태드의 관계만 나빠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태드를 따라 그의 사무실로 갔다.  커피를 마시며 느긋하게 마음을 푼 
마리사가 입을 열었다.
   태드, 지난번 같이 초밀폐 실험실에 들어갔을 때 거기 에볼라를 위시해 
우리에게 알려진 모든 바이러스가 다 보관되어 있다고 했지요? 
   거긴 모든 게 다 있어요.  당신이 해결해낸 지난 두 번의 감염 사태에서
나왔던 
검체들도 냉동 상태로 보관되어 있답니다. 
  마리사는 사람들이 최근의 에볼라 사태들을  그녀가 해결해낸 것이라고 지칭할

때 과연 어떻게 생각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생각은 일단 마음 속에 접어두고 다시 말했다.
   여기 씨디씨말고 또 에볼라 바이러스가 보관되어 있는 곳은 없나요? 
  태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는 모르겠는데요.  미국 내에 말인가요? 
  마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육군이 데트릭 기지에 있는 생물학전센터에 약간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지금 그곳 책임자로 있는 친구가 여기 씨디씨에 있을 때
바이러스성 
출혈열에 꽤 관심이 있었거든요.   
   군대에도 초밀폐 실험실이 있나요? 
  태드는 어이가 없다는 듯 휘파람을 불었다.
   거긴 뭐든지 다 있어요. 
   게다가 데트릭 기지의 생물학전 담당자가 바이러스성 출혈열에 관심이 있단 
말이죠? 
   그 사람은 처음 자일에서 에볼라 병이 출현했었을 때 두브체크와 함께 
파견되었던 사람들 중의 하나예요. 
  마리사는 참 재미있는 우연의 일치라는 생각을 하며 커피를 홀짝거렸다. 
동시에 
그녀의 머릿속에는 어떤 생각 하나가 머리를 들기 시작했는데 그 생각이 너무도 
사악하고 끔찍해서 도저히 가능성 있다고 가정하기조차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지하십시오. 
  정복을 입은 보초가 투박한 남부 억양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보초의 제지를 받은 마리사는 데트릭 기지의 정물 앞에 차를 세웠다.  지난 
며칠동안 계속 무방비 상태의 대중들에게 에볼라 바이러스가 퍼져나온 데 대해 
군이 어떠한 형태로든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덜쳐버리려고 자신을 
설득하던 마리사는 마침내 비번인 날을 이용해 직접 확인을 해보기로 마음을 
굳히게 된 것이다.
  데트릭 기지가 있는 메릴랜드까지는 비행기로 불과 한 시간 반이 걸렸을 
뿐이었다.  공항에서 렌트카로 마리사는 금방 기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리사는 
에볼라를 직접 다루어보았다는 현장경험을 이유로 내세워 이 희귀한 바이러스를 
취급한 경험이 있는 사람과 의견 교환을 해보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었는데 
울버트 대령은 말을 꺼낸 마리사 자신도 놀랄 만큼 적극적으로 그녀의 제안을 
수락한 것이었다.
  잠시 초소 안으로 들어갔던 보초가 다시 마리사의 차 옆으로 다가왔다.
   18번 건물로 가십시오. 
  블레이저 깃에 패용하도록 출입증을 건네준 그 보초는 빳빳한 거수 경례로 
그녀를 깜짝 놀라게 했다.  차 앞을 가로막던 검은 줄무늬의 차단기가 번쩍 
들어올라가자 그녀는 기지 안으로 차을 몰았다.
  18번 건물은 평평한 지붕에 창문 하나 없는 칙칙한 콘크리트 구조물이었다.  
마리사가 차에서 내리자 민간인 복장을 한 중년의 남자 한 명이 손을 흔들며 
반갑게 그녀를 맞았다.  케네스 울버트 대령이었다.
  마리사가 보기에 그는 육군 대령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대학 교수에 가까웠다.  
그는 친절하고 익살스러웠으며 마리사가 찾아와준 것에 대해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는 마리사를 보자마자 그녀가 자신이 여태까지 보아온 중 제일 예쁘고 또 제일

조그마한 역학정보원이란 말을 했다.  마리사는 동시에 쏟아져나온 칭찬과
폄하에 
쓴 웃음을 지었다.
  그 건물은 마치 벙커 같았다.  위쪽에 자그마한 감시 카메라들이 달린 몇 개의

육중한 강철 미닫이 문을 지나서야 마리사는 실험실로 발을 들여놓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엄중한 감시망을 해치고 들어간 실험실은 번센 버너 위에 놓인 
커피 포트까지 다른 병원에 있는 실험실과 똑같은 평범한 곳이었다.  유일한 
차이라고는 창문이 없다는 것뿐이었다.
  초밀폐 실험실의 유무에 대해서는 한 마디 언급도 없이 재빨리 실험실들을 
구경시켜준 울버트 대령은 마리사를 간이 식당으로 데리고 갔는데, 그곳은 말만 
식당이지 자동 판매기 몇 대가 줄지어 있는 것에 불과했다.  자판기에서 펩시와 
도우넛을 하나씩 봅아든 울버트와 마리사는 자그마한 탁자에 자리를 잡았다.
  묻지도 않았는데 울버트는 자진해서 자신이 50년대 말 씨디씨에서 
역학정보원으로 이 바닥에 처음 발을 들여놓게 되었으며 점차 미생물학, 그리고 
마침내는 바이러스학에까지 깊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정부의 학비 보조를 받은 1970년대에 그는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고 했다.
   이렇게 사는 게 목감기나 귀에서 진물 나는 환자들이나 쳐다보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낫답니다. 
  대령이 말했다.
   그럼 소아과를 전공하셨었단 말이에요? 
  마리사가 탄성을 내질렀다.
  그들은 자신들이 둘 다 보스턴 아동 병원에서 수련을 받은 동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웃음을 터뜨렸다.  울버트 대령은 또 자기가 어떻게 이 데트릭
기지까지 
굴러오게 되었는지 자신의 인생유전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는 군이
도저히 
거절을 할 수 없는 제안을 가지고 그를 찾아왔었다고 말했다.  실험실과
장비들도 
모두 최상급이었음은 물론 그에 덧붙여 연구 자금을 구걸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장점이 그를 이곳으로 오게 만든 것이었다.
   생물학전을 담당하신다면, 대령님이 하시는 연구의 궁극적인 목표가 전쟁의 
수행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리지 않으세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울버트 대령이 말했다.
   여기서 우리가 하는 일의 4분의 3이상은 생물학적 무기에 대응해 미국을
지키는 
데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저 같은 경우도 에볼라 같은 독성 
바이러스의 중화(무력화)에 대부분의 연구 시간을 할애하고 있답니다. 
  마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울버트 대령이 말을 이었다.
   여기 있으면 오나전한 자유를 보장받지요.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연구를 할

수가 있답니다. 
   그럼 지금 무슨 연구를 하고 계세요? 
  마리사는 순진하게 질문을 던졌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대령은 밝은 푸른색
눈을 
반짝였다.
   사실 내가 연구 결과에 대해 일련의 논문들을 발표하고 있으니 당신에게 말을
한다 
해도 군기밀 유지법을 어기는 건 아니겠군요.  3년 전부터 전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대해 집중적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에볼라 바이러스가 아니구요? 
  울버트 대령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에볼라에 대해 마지막으로 연구를 했던 건 벌써 몇 년 전이랍니다. 
   여기 혹시 누구 에볼라에 대해 연구를 하시는 분은 안 계신가요? 
  마리사가 물었다.
  울버트 대령은 잠시 망설인 끝에 입을 열었다.
   작년  전략 연구 라는 국방성 정책 보고서에 언급이 있었으니 말씀을
대르려도 
될 것 같군요.  대답은  아니오 예요.  소련 친구들까지 친다 해도 지금은
아무도 
에볼라에 대해 연구를 하는 사람이 없어요.  그것에 대해서는 백신도 치료법도 
전혀 없기 때문이지요.  일단 퍼져나가기만 하면 이 에볼라 출혈열이 누구에게건

들불처럼 번져갈 것이라는 생각들을 하고 있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를 않잖아요? 
  마리사가 말했다.
   저도 압니다. 
  울버트 대령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도 지난 두 번의 에볼라 발생 사건들에 대해 대단한 흥미를 가지고 주시를 
했었습니다.  어쩌면 나중에라도 그 바이러스에 대한 연구를 재개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제발, 저 때문에라면 그러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마리사는 굳이 다시 에볼라 연구를 시작하도록 부추기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동시에 그녀는 군대에서 에볼라 바이러스를 가지고 장난을 치지는 않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전 대령님께서 1976년 얌부쿠로 파견되었던 국제적인 조사팀의 일원이셨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녀가 말했다.
   난 그래서 당신이 하는 일이 정말 대단한 것이라는 사실을 잘알고 있지요. 
  울버트가 말했다.
   정말이지, 아프리카에 갔었을 땐 넘 무서워서 생똥을 다 쌀뻔했답니다. 
  마리사는 함박 웃음을 지었다.  그의 솔직한 말에 그녀는 깊은 호감과 신뢰를 
느꼈다.
   대령님이 무서웠다고 솔직하게 마해주신 첫 번째 분이랍니다. 
  그녀가 말했다.
   저는 처음 엘에이로 가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무서워 죽을 뻔했었거든요. 
   충분히 그럴 수 있지요. 
  울버트 대령이 말했다.
   에볼라는 정말 이상한 바이러스예요.  꽤 쉽게 파괴해버릴 수는 있어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한 전염력을 가지고 있거든요.  그건 불과 바이러스 몇 
개만으로도 병을 일으킬 수가 있다는 뜻이에요.  이건 수백억 개의 바이러스가 
들어간 다음에도 발병의 확률이 상당히 낮은 에이즈 같은 것들과는 
아주대조적이지요. 
   보균숙주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마리사가 물었다.
   저도 아프리카에서는 물론 어디서도 보균숙주를 찾아내지 못했다는 게
공식적인 
발표라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혹시 다른 의견이라도 있으신가 해서요.

   저도 그게 동물병의 일종이라는 생각이에요. 
  울버트 대령이 말했다.
   나중에 가면 결국 어떤 아프리카 열대 원숭이에게서 바이러스가 발견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병은 동물기생체 중, 즉 우연한 기회에 사람에게까지 전파되는 척추
 동물들의 병이라는 말이지요. 
   그럼 최근의 에볼라 감염 사태에 대해서는 씨디씨의 공식 발표와 완전히
동의를 
하신단 말인가요? 
  마리사가 물었다.
   물론입니다. 
  울버트 대령이 말했다.
   그럼 무슨 다른 이야기라도 있단 말입니까? 
  마리사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여기에도 에볼라 바이러스를 가지고 계신가요? 
  마리사가 물었다.
   아니오.  하지만 정 필요하다면 어디서 얻을 수 있는지는 알아요. 
   저도 그렇답니다. 
  마리사는 말했다.  글세, 꼭 그런 건 아닌데, 마리사가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태드가 그것이 초밀페 실험실 안 어딘가에 있다는 이야기를 하기는 했지만
그녀는 
정확히 어디인지를 모르고 있었다.  지난번 몰래 들어갔을 때 미처 거기까지는 
물어보지를 못했던 것이다.



















    7


    4월 17일

  마침내 돌아누운 마리사가 수화기를 집어들기까지 전화벨은 한 동안 계속 
울려댔던 모양이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씨디씨의 교환수는 단잠을 깨워 정말 
죄송하다는 사과의 말을 전했다.  비틀거리며 일어나 앉던 마리사는
피닉스로부터 
전화가 한 통 걸려왔는데 그 전화를 연결할 것인지를 물어보기 위해 교환수가
먼저 
전화를 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리사는 즉시 전화를 연격해달라고 
말했다. 다시 벨이 울리기를 기다리던 마리사는 가운을 걸치며 시계를
쳐다보았다.  
새벽 네시.  그럼 피닉스는 새벽 두시라는 말이었다.  또 누군가가 에볼라가 
의심되는 증례를 발견했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다시 전화가 따르릉거렸다.
   닥터 불루멘탈입니다. 
  마리사가 말했다.
  반대쪽에 나온 목소리는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은 듯 덜덜 떨리고 있었다.  
전화를 건 사람은 자기가 아리조나주 역학 담당관 닥터 가이 위버라고 신분을 
밝혔다.
   이런 시간에 전화를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그가 말했다.
   하지만 메디카 병원에 발생한 심각한 문제로 호출을 받았거든요.  피닉스에 
있는 메미카 병원에 대해서는 알고 계시겠지요? 
   꼭 그렇진 않군요. 
   그 병원은 아리조나 이 부근에서 선금제 종합 진료를 제공하도록 메디카 의료

재단과 계약을 체결한 가업형 병원 체인 중의 하나입니다.  끔찍하게도 그 
병원에 에볼라가 터져나왔습니다. 
   환자는 잘 격리를 시켜두셨으리라 믿습니다. 
  마리사가 말했다.
   우리가 아는 바로는... 
   닥터 불루멘달, 
  닥터 위버가 말 허리를 자르며 끼어들었다.
   한 명이 아닙니다.  여든네 명이나 됩니다. 
   여든넷이라구요! 
  그녀는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는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의사 마흔두 명, 간호사 열세 명, 간호 보조원 열하나, 검사실 기사 넷,
사무직원 
여섯, 식당 직원 여섯에 관리직원 두 명입니다. 
   전부 다 한꺼번에요? 
  마리사가 물었다.
   전부 오늘 저녁, 한꺼번에 발병해 버렸답니다. 
  역학 담당관이 말했다.
  밤 늦은 이 시각에는 비록 델타 항공이 최대한 직항로에 가까운 항공편을 
안내해 주겠노라고 철석같이 약속을 했지만 사실 뾰족하게 편리한 교통편이 
없었다.  옷을 차려입자마자 마리사는 씨디씨의 당직 의사에게로 전화를 걸어 
자신이 즉시 피닉스로 떠나니 두브체크가 출근을 하는 대로 상황을 전해달라는 
부탁의 말을 남겼다.
  저드슨 부부의 집 문 앞에 태피와 자신에게 배달되는 우편물을 부탁한다는 
메모를 남기고 마리사는 공항으로 차를 몰았다.  새로터진 에볼라 사태가 여든네

명이라는  가공할 숫자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에 그녀는 정신이 다 멍해졌다.  
그녀는 두브체크와 나머지 팀이 늦어도 오후까지는 도착을 할 수 있기를 두손
모아 
빌었다.
  두 번이나 중간에서 착륙을 해야 했지만 비행은 순조로웠다.  비행기가 텅
비어 
쾌적했음은 물론이었다.  기착을 하자마자 마리사는 초조한 듯 자신을 메디카 
병원의 관리 부원장 저스틴 가디너라고 소개한 자그맣고 통통한 사람의 영접을 
받았다.
   가방 이리 주세요. 
  그가 말했다.  하지만 그가 어찌나 손을 떨고 있었던지 가방은 바닥에 
동댕이쳐졌다.  허리를 구부려 가방을 집어들던 그는 자신이 좀 당황을 해서 
그러니 양해해 달라고 사과를 했다.
   충분히 이해해요. 
  마리사가 말했다.
   환자가 더 늘었나요? 
   몇 명이요, 지금 병원은 아수라장이에요. 
  차에 시동을 걸며 가디너가 말했다.
   환자들이랑 직원들이 저마다 먼저 나가려고 북새통을 떠는 바람에 보건국장이

강제로 병원을 검역 격리 시켜버렸습니다.  제가 이렇게 마중을 나올 수 있었던
건 
다행히도 제가 어제 비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끔찍한 아수라장 속에서 뛰어들어간다고 생각하니 마리사는 공포에 입이 
바짝 말라왔다.  이제는 소아과를 하는 편이 이 짓보다는 훨씬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도 병우너은 멋진 초현대식 건물이었다.  에볼라는 이상하게도 이런 
현대식 병원만 좋아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 묻어 있을 것 같지 
않은 깨끗한 병원의 모습은 그런 치명적인 감염의 발생과는 도무지 어울려 
보이지를 않았다.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병원 앞의 큰 길은 티브이중계차와 보도진으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북적거리는 기자들 앞에는 외과용 수술 마스크를 뒤집어쓴 
경관들이 한 줄로 도열해 그들의 접근을 차단하고 있었다.  엷은 새벽빛에 그 
광경은 도무지 현실 같아 보이지 않았다.
  가디너는 어떤 티브이 중계차 뒤에 차를 세웠다.
   들어가셔서 원장님을 찾아가세요. 
  그가 말했다.
   저는 밖에서 소란을 진정시키라는 명령을 받았거든요.  행운을 빕니다. 
  정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마리사는 품에서 신분증을 꺼내들었다.  그녀는 
도열한 경관 중 한 명에게 그것을 보여주었지만 그 경관은 바로 들여보내주는 
대신 상관에게 연락을 해 그녀를 들여보내도 되는가를 물었다.  마리사가 
씨디씨에서 왔다는 사실을 들은 기자들은 그녀를 에워사고 논평을 부탁했다.
   저는 이 상황에 대해서는 직접 알게 된 바가 전혀 없습니다. 
  벌떼처럼 달려드는 기자들에게 유린당하는 느낌이 마리사는 항의조로 대답을 
했다.  고맙게도 경찰관 한 명이 보도진들을 한쪽으로 밀어붙이며 바리케이드를 
치워 그녀를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불행하게도 병원 안쪽은 더더욱 엉망이었다.  마리사는 발을 들이밀자마자 또 
한 번 몰려드는 인파에 시달려야 했다.  그녀는 지난 수시간 내에 병원 앞으로 
출입이 허용되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녀에게 달려드는 사람들 중의 상당수는 잠옷 같은 환자복과 가운 차림의
입원 
환자들이었다.  그들은 한꺼번에 질문을 퍼부으며, 당장 대답을 해내라고
아우성을 
쳤다.
  마리사의 오른편에서 어떤 사람이 소리를 질러댔다.
   제발 절 좀 지나가게 해주세요! 
  두툼한 눈썹을 가진 육중한 사내 하나가 사람들을 밀치며 마리사의 옆으로 
다가왔다.
   닥터 불루멘탈? 
   네. 
  마리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커다란 남자는 그녀가 양손에 서류가방과 여행가방을 든 채 절절매고
있다는 
사실을 아랑곳도 않고, 그녀의 팔을 붙들고 아우성치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로비를 건넌 다음 문을 잠갔다.  그들은 길다란 좁은 복도에 서 있게 되었다.
   봉변을 당하시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남자가 말했다.
   저는 이 병원 원장 로이드 데이비드입니다.  지금 병원은 조금
소란스럽답니다. 
  마리사는 데이비스를 따라 그의 사무실을 향했다.  옆쪽에 난 조그마한 
비상문으로 사무실에 들어간 마리사는 커다란 의자들을 쌓아 사무실을 출입구를 
봉쇄해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직원들이 선생님을 만나뵈려고 모두들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리사의 손에서 가방들을 받아 자기 책상 옆에 내려놓으며 데이비드가
말했다.  
그는 허리를 구부려 가방을 놓는 것이 몹시 힘에 겨운 듯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에볼라 감염이 의심되는 환자들은 어떻게들 하고 있지요? 
  마리사가 물었다.
   그 사람들은 잠깐 기다려도 될 겁니다. 
  다시 복도로 나가자는 시늉을 하며 원장이 말했다.
   하지만 우리에게 지금 제일 우선적인 과제는 환자들을 제대로 격리시키는 
거예요. 
   환자들은 모두 제대로 격리가 되어 있습니다. 
  데이비스는 마리사에게 장담을 했다.
   닥터 위버가 다 알아서 해놓았답니다. 
  그는 두툼한 손으로 마리사의 등을 문 쪽으로 지그시 밀었다.
   물론, 앞으로 선생께서 추가적으로 지시하는 것들은 모두 다
들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제발 직원들을 좀 만나주셨으면 합니다.  안 그러면 폭동이 
일어날 것 같아요. 
   상황이 말처럼 그렇게 나쁘지 않기를 빌어요. 
  마리사가 말했다.  입원 환자들이 동요하는 것도 문제이기는 했지만, 직접
업무를 
수행해야 하는 병원의 직원들까지 히스테리 상태에 빠져 있다면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사무실 문을 닫은 데이비스는 앞장서 다른 복도를 걸어내려갔다.
   강제로 병원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사람들이 다 공포에 질려 있어요. 
   씨디씨로 연락을 하신 다음에 추정환자가 몇 명이나 더 발생했나요? 
   열여섯 명입니다.  이번 환자 중에는 병원 직원은 더 이상 없더군요.  모두가

메디카 계획 가입자들이에요. 
  그것은 최초에 감염되었던 의사들로부터 전파된 바이러스가 별써 제 2세대로 
진입했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었다.
  이것은 지난번 두 번의 경우에도 관찰된 일이었다.  이런 무서운 전염병과
함께 
같은 건물에 갇혀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그녀 자신도 몸이 덜덜 떨려오는 판에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공포에 질린 직원들을 달래야 할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를 
않았다.  이렇게 많은 환자가 발생한 것으로 미루어 과연 지난번 엘에이와 
세인트루이스 때처럼 효과적으로 병을 진압할 수 있을지도 자못 의심스러워졌다.
 
에볼라가 무방비 상태의 대중들에게로 퍼져나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감히 
상사하기조차 두려운 것이었다.
   최초에 발생했던 환자들 중에 혹시 최근 노상 강도를 당했던 사람이 있나요? 
  꼭 무슨 대답을 듣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주의를 환기시키려는 마음에 마리사가 
물었다.  데이비스는 그 말을 듣고 마치 그녀가 돌기라도 했다는 것처럼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는 그것이면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본전도 
못 건졌군, 그 말을 처음했었을 때 랠프가 보이던 반응을 기억하며 마리사가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들은 굳게 잠긴 문 앞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낸 
데이비스는 문을 열고 마리사를 병원 강당의 무대 위로 데리고 올라갔다.  
그것은 그리 크지는 않았다.  자리는 150여 석 남짓.  마리사는 자리가 모두 
찼음에도 상당수가 뒤쪽에 서 있다는 사실을 이내 알아볼 수 있었다.
  좌중들은 십여 군데에서 각기 이야기들을 하느라 웅성거리고 있었다. 
마리사가 
한가운데 서 있는 연단으로 불안한 걸음을 옮겨 나아가자 시선들이 그녀에게 
집중되며 장내의 소란이 잦아들었다.  키가 크고 유난히도 마른 남자 하나가
연단 
뒤에 놓인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악수로 그녀를 맞았다.  데이비스는 그가 
한밤중에 그녀에게 전화했던 닥터 가이 위버라고 소래를 했다.
   닥터 불루멘탈! 
  닥터 위버가 체격과는 아주 대조적인 중후한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당신을 만나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당신은 아마 상상도 못하실 겁니다. 
  분에 넘치는 기대에 마리사는 마치 남의 명성을 도용하는 듯한 불안한 기분이 
있었다.  일은 점입가경이 되었다.  제대로 작동이 되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가볍게 마이크를 두드려본 닥터 위버는 좌중에게 마리사를 소개했다.
  그가 어찌나 현란한 찬사들을 동원하는지 소개가 진행되면 될 수록 마리사는 
점점 더 불안해졌다.  그의 말만 들어보면 그녀는 씨디씨 그 자체요, 그간 
씨디씨가 기록한 업적은 모두 그녀의 것이었다.  그 다음, 그는 마치 대
스타라도 
소개를 하듯 긴팔을 펼쳐보이며 마리사에게로 마이크를 넘겼다.
  일이 이 지경이 되어버리자 그러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는 제대로 입이 
떨어지지 않는 마리사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남들이 자신에게 
어떤 기대를 걸고 있는지 또 지금 당장 어떠한 말을 해야 할지도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키에 맞도록 마이크 높이를 조정하며 그 잠깐의 틈을 
이용해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청중들은 반 정도가 수술용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는데 피부 빛깔이
다른 
사람들이 상당수 섞여 있었다.  청중들이 다양한 인종과 연령층으로 미루어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들 모두가 이곳에 모인 듯했다.  기대에 부푼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마리사는 진짜 자신에게 이 병원에서 벌어지는 일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최우선적으로 할 일은 확실한 진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평소보다 몇 옥타브나 높은 목소리로 마리사는 말을 시작했다.  과연 어떤 
방향으로 이야기를 끌어나가야 할지 망설이다가 그녀의 목소리는 점차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보다 현실적인 단어들을 동원해 자기 소개를 하고 자신이 씨디씨에서 
맡고 있는 역할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그녀 자신도 사실 확신을 하지 못하고

있기는 했지만 마리사는 청중들에게 이번의 감염 사태가 엄격한 호나자 격리, 
완전한 차단 간호 및 적절한 검역 격리로 제어될 수 있다는 것을 설득시켜
주려고 
애를 썼다.
   우리들은 도대체 어떻게 됩니까?  모두 병에 걸리게 되나요? 
  한 여인이 강당의 뒤편에서 소리쳐 물었다.  그 말에 청중들 사이로
웅성거림이 
물결처럼 번져나갔다.  그것이 그들의 주된 관심사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저는 지난 두 번의 에볼라 사태 현장에서 작업을 수행한 바 있습니다. 
  마리사가 말했다.
   하지만 감염되었던 환자들과 수없이 접촉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염이 되지를 
않았습니다.  우리는 에볼라 바이러스의 전파에는 긴밀한 신체적 접촉이 필수 
불가결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로 보아서는
공기를 
매개로 전염될 확률은 없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말에 몇 명이 마스크를 벗어던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몸을 돌려 닥터 위버를 쳐다보자 그는 정말 잘했다는 듯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우리가 이 병원에 꼭 남아 있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겁니까? 
  세 번째 줄에 앉은 남자 하나가 볼멘 소리로 다그쳐 물었다.  그는 긴 의사 
가운을 입고 있었다.
   다소 불편하시더라도 당분간만 참아주시면 됩니다. 
  마리사는 교묘히 그의 질문을 받아넘기며 말했다.
   지난 두 번의 감염 사태 때 적용했던 검역 격리는 대상들을 일차 접촉자와 
이차 접촉차로 구분하여 각각 다른 방법으로 시행되었습니다. 
  마리사는 계속해 엘에이와 세인트루이스의 경우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녀는 직접 기존의 환자들 중 어떤 사람과 긴밀한 피부 접촉을 하지 않은 한
검역 
격리 중 발병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는 이야기로 말을 맺었다.
  다음 마리사는 에볼라 출혈열의 경과 및 초기 증상들을 묻는 몇 몇 질문들에 
차례차례 답변을 해나갔다.  호기심이 충족되어서인지 아니면 공포에 말문이 
막혀서인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이내 더 이상의 질문은 나오지 않았다.
  데이비스가 직원들에게 이야기를 하기 위해 몸을 일으키자 닥터 위버는 
마리사를 데리고 강당을 나섰다.  좁은 복도로 나서자마자 그녀는 씨디씨로
연락을 
하기 전에 우선 처음 발생한 환자를 보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닥터 위버는 
그러실 줄 알았다는 대답을 하며 손수 안내를 하겠노라고 자청했다.
  병실로 가면서 그는 병원측이 다른 환자들을 모두 옮겨내고 호나기 시스템을 
분리시킨 다음 두 개의 층으로 환자들을 모두 모아 수용했다는 설명을 해주었다.
 
그는 그 병동들이 이제 바깥 세상과는 완전히 차단이 되었다고 자신있게
장담했다.  
그는 덧붙여 그 두 개층을 담당하는 의료진의 구성원들 모두가 그의 동료들에 
의해 특수교육을 받았고, 임상 검사는 격리된 층 중 하나에 급조된 간이 검사 
시설에서 소화해낼 수 있는 것들만으로 축소되었으며 환자들이 사용하던 소지품 
일체는 직접 소각로에 들어가기 전 소리움 하이돈 클로라이트 용액으로 세척이 
되었다고 설명을 했다.
  검역 격리의 상황에 대해서 묻자 그는 일차와 이차 접촉자를 구분, 외부에서 
반입된 매트리스로 외래 진료부에 각각의 숙소를 마련해 주었다고 대답했다. 
모든 
음식과 식수는 외부로부터 공급이 되는 것으로만 충당을 하고 있었다.  마리사가

닥터 위버 그 자신도 6년전 씨디씨에서 역학 정보원으로 일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바로 그 시점이었다.
   잘 아시면서 왜 제가 마치 전문가인 것처럼 소개를 하셨어요? 
  그의 한껏 과장된 찬사들을 기억하며 마리사가 물었다.  그 자신이 검역
격리니 
뭐니 하는 것들에 대해 마리사보다 더 많이 알 텐데 말이다.
   효과 때문이죠. 
  닥터 위버가 털어놓았다.
   병원 직원들은 지금 믿고 매달릴 정신적인 지주가 필요해요. 
  얼토당토 않게 전문가로 소개되어 기분이 상한 마리사는 볼멘 소리로 
투덜거렸지만 닥터 위버의 노력함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덧가운을

걸치고 환자들이 격리 수용된 층으로 들어갔다.  다음, 또 한 겹의 가운과
수술모, 
마스크, 보안경에 장갑과 덧신으로 중무장을 하고나서 그들은 환자의 병실로 
들어갔다.
  닥터 위버가 안내한 환자는 병원의 일반 외과 의사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봄베이 출신의 인도인이었다.  환자를 내려다보자 혹시 병에 걸리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과 걱정이 다시 파도처럼 밀려와 마리사를 사로잡았다.  발병한지 
불과 스물네 시간이 되었을 뿐인데도 그는 뻘써 사경을 헤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임상적인 경과는 엘에이와 세인트루이스의 말기 환자들이 보이던 것과 
똑같았다.  고열과 아울러 혈압 강화와 점막의 출혈 소견을 동반한 특징적인 
반점들이 관찰되고 있었다.  마리사는 이 사람이 스물네 시간 이상은 더 지탱할 
수가 없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마리사는 그 즉시로 바이러스 검체를 채취했고 닥터 
위버는 그것들이 제대로 포장이 되어 가능한 한 빠른 시간 내에 태드 
쇼클리에게로 발송되도록 조치를 취해주었다.
  환자의 차트에 적힌 병력은 너무도 모호하고 간략했지만 불과 여섯 시간 
동안에 여든네 명의 환자가 쏟아져들어온 것을 생각하면 그 이상을 바라는 것도 
무리일 것 같았다.  그의 병력에는 외국 여행이나 원숭이, 도는 엘에이나 
세인트루이스의 감염 접촉자들과의 접촉 여부 등 그녀가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들은 단 한가지도 적혀 있지 않았다.
  환자들이 수용된 층을 나서며 마리사는 우선 전화를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고 호나자들을 문진하기 위해 의사들 중에서 가능한 한 많은 지원자들을 
모집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만일 환자들 대부분이 그 인도인 의사와 비슷한 
상태라면 무슨 정보라도 얻어내기 위해서는 서두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마리사는 데이비스의 방에 있는 전화를 제공받았다.  아틀란타는 벌서 열한 
시가 넘은 시각이었기에 마리사는 곧바로 두브체크와 통화를 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는 머리 끝까지 화가 나 있었다.
   도대체 왜 도움 요청이 오자마자 연락을 하지   은 거요?  난 오늘 출근을 
해서야 당신이 간 것을 알게 되었단 말이오. 
  마리사는 아무 대꾸도 없었다.  사실은 그녀가 씨디씨 교호나수들에게 
어디서라도 에볼라 감염을 시사하는 연락이 오면 곧바로 연락을 해달라고 부탁을

해두었던 것이다.  만일 두브체크가 진짜 즉각적으로 연락을 받고 싶은 마음이 
있었더라면 그 역시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지적해 그렇지
않아도 
불편한 관계를 더 더욱 악화시킬 생각은 없었다.
   정말 에볼라인 것 같소? 
   그런 것 같아요. 
  다음 그녀는 정말 혼이 빠지게 놀랄 것이라고 예상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주된 차이는 감염된 환자 수에 있어요.  이 시간까지 환자가 벌써 백 명이나 
생겼어요. 
   그 사람들을 제대로 격리해 두었기를 바래요. 
  그것이 두브체크의 유일한 대답이었다.  마리사는 속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환자가 그렇게 많이 발생했다는데 놀라지도 않으세요? 
  그녀가 물었다.
   에볼라는 사실 거의 알려진 바가 없는 질병이오. 
  두브체크가 말했다.
   그러니 어떤 일이 발생한다 해도 그리 놀랄 건 없지 않소?  난 어떻게 병의 
확산을 막을 수 있을지가 더 걱정이오.  격리 상태는 어떻소? 
   격리 상태는 믿을 만해요. 
   그럼 됐소. 
  두브체크가 말했다.
   비커스 검사실이 준비되었으니 한 시간 내에 출발을 할 수 있을거요.  가능한

한 빨리 태드에게 바이러스 검체를 보내주도록 하시오. 
  마리사는 기껏 대답을 하고 나서야 이미 전화가 끊겼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 망할 자식이 전화를 끊어버렸어!  병원 전체가 검역 격리 하에 있어 일단 
들어오면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는 이야기를 해줄 기회조차 주지 않고 말이야.
   흥, 될대로 되라지. 
  책상에서 몸을 일으키며 마리사가 큰 소리로 말했다.
  전화를 거는 사이 닥터 위버는 벌써 병력 조사를 도울 지원자를 열한 명이나 
모아놓고 있었다.  남자 여섯에 여자 다섯 명 그들 모두의 지원동기는 어차피 
병원에 갇혀 있으니 아무일 않고 있는 것 보다는 차라리 일을 하는 편이
낫겠다는 
것이었다.
  마리사는 의자에 앉은 뒤 처음 발병한 여든네 명 중 가능한한 많은
환자들로부터 
제대로 된 병력을 얻어내야 한다는 당명과제를 설명했다.  그녀는 엘에이와 
세인트루이스의 두 경우 모두에게 다른 모든 환자들의 감염원이 되었던 지표 
증례가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하지만 이번 피닉스 건은 그런 경로가
아닌 
것이 거의 확실해 보였다.  이렇게 많은 환자가 동시에 발생했다는 사실은 
음식이나 물을 매개로 전파가 되었을지 모른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만일 물을 매개로 전파되었다면 환자가 더 많이 발생하지 않았을까요? 
  여자 의사 중의 하나가 물었다.
   만인 병원 급수원 전체가 오염이 되었더라면 그랬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만일 
급수대 하나가... 
  그녀는 말꼬리를 흐렸다.
   에볼라는 여태까지 음식이나 물에 의해 전염된 적이 없어요. 
  마리사는 심경을 털어놓았다.
   모든 게 오리무중이에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환자들간의 어떤 공통점을 
찾아내기 위해선 완벽한 병력이 더더욱 필요한 거예요.  환자들이 모두 같은 
시간대에 근무를 했다든지, 모두 병원내 같은 지점에 있었다든지, 같은 기계에서

커피를 마셨다든지, 같은 음식을 먹었는지, 동일한 짐승을 접촉한 적이 있는지, 
그런 게 모두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어요. 
  의자를 뒤로 밀어낸 마리사는 흑판으로 걸어가 각 환자들에게 물어보아야 할 
일련의 질문들을 간략하게 적어내려갔다.  좌중에서 쏟아져나오는 여러 가지 
제안들에 대해 토론을 끝내고 나서 마리사는 혹시 3개월 전쯤 샌디에고에서 
개최되었던 안검 수술 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는지 물어보라는 말을 덧붙였다.
  해산하기 전 모두에게 철저한 격리 수기의 준수를 신신당부한 다음 마리사는 
지금까지 확보된 자료들을 검토하기 위해 발길을 옮겼다.

  엘에이에서 했던 것처럼 마리사는 간호사실 뒤의 차트실을 사령실로 차렸다.  
병력 조사를 마친 의사들이 속속 자료와 함께 돌아오자 마리사는 그 자료들을 
분석해 대조하는 지루하고 힘든 작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 자료들에는 환자 
모두가 메디카 병원 직원이라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 외에는 특기할 만한 것이 
없었다.
  정오가 되자 새로이 입원을 한 환자가 무려 열네 명이나 되었다.  마리사는 
에볼라가 벌써 손도 쓸 길 없이 창궐하게 돼버린 것이 아닐까 몹시 두려워졌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메디카 건강 관리 프로그램의 회원들로서 최초의
의사 
환자 마흔 두 명 중 어떤이에게 진료를 받은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 예외의
한 
명은 그 질병이 에볼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품기 전 처음 몇 증례의 임상 
검사를 담당했던 검사실 기사였다.
  야간 근무자들이 하나 둘 임무 교대를 하러 들어올 즈음 마리사는 다른 씨디씨

요원들이 도착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마리사는 단숨에 
그들에게로 달려갔다.  두브체크는 마침 비커스 검사실의 설치를 돕고 있는 
중이었다.
   도대체 왜 이 망할 놈의 병원이 검역 격리 하에 있단 말을 하지 않았소? 
  그녀의 모습을 보자마자 그가 매섭게 호통을 쳤다.
   그럴 기회를 안 주셨잖아요. 
  전화를 먼저 끊어버린 것이 그였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그녀가 말했다.  
마리사는 그들의 불편해진 관계를 호전시킬 수 있는 것이라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녀의 뜻과는 정반대로 일은 악화일로를 달리고만 있었다.
   어쨌든, 폴라 마크는 기분이 몹시 나빴던 모양이오. 
  두브체크가 말했다.
   모두 이번 사태가 끝날 때까지 병원 안에 갇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냥 아틀란타로 돌아가 버렸으니까요. 
   닥터 레인은요? 
  꺼림칙한 기분으로 마리사가 물었다.
   그는 벌써 닥터 위버랑 병원 간부들을 만나고 있는 중이오.  그 다음엔 주 
보건국장을 만나 우리 씨디씨가 일을 할 수 있도록 병원의 검역 격리 체제를 
수정하는 것에 대해 상의할 예정이오. 
   그럼 이 검사실이 가동되기 전에는 당신과 상의를 할 수가 없겠군요. 
  마리사가 말했다.
   당신 기억력은 그대도 쓸만한 편이군요. 
  몸을 구부려 나무 상자에서 원심 분리기를 들어내며 두브체크가 말했다.
   우선 여기 일을 끝내고 레인과 격리 절차에 대해 상의를 한 다음에 당신이 
알아낸 것을 검토할 생각이오. 
  다시 자기 방으로 발길을 옮기며 마리사는 어떤 대답을 해야 저 건방진 
두브체크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줄 수 있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그런 
것들은 하나같이 지금의 상황을 더 악화시킬 뿐이었을 것이다.  마리사가 아무 
대꾸도 없이 묵묵히 그의 모욕적인 대접을 받아넘긴 것도 모두 그 이유
때문이었다.

  에볼라로 추정되는 환자들과 직접 접촉을 하는 직원들에게 배정된 외래 
진료실의 한구석에서 외부로부터 차입된 기내식으로 식사를 한 마리사는 차트 
작업을 재개하기 위해 발길을 옮겼다.  이제 처음발병했던 여든네 명 중
대부분이 
병력은 이미 입수되어 있었다.
  차트실에 도착하니 뜻밖에도 두브체크가 그녀의 노트를 훑어보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에 두브체크가 윗몸을 곧추세웠다.
   이 병원의 직원들을 시켜 병력을 청취한 게 과연 합당한 것이었는지 좀
의문이 
가는군요.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마리사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환자 수가 너무 많았어요. 
  마리사가 변명을 했다.
   단시간 내에 저 혼자서 그 환자들 모두의 병력을 조사한다는 것은 도저히 
가능성이 없는 일이었어요.  잘 아시겠지만 일곱 명은 너무 상태가 나빠 말조차 
할 수가 없었고, 세 명은 병력 청취도 못한 채 사망을 해버렸어요.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건 제대로 역학 수련을 받은 일이 없는 의사들을
질병에 
노출시킬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지를 않소.  정 급했다면 차라리 아리조나 주 
보건국에 있는 훈련된 직원들을 동원했어야 마땅하오.  혹시 만에 하나라도
당신이 
차출했던 의사들 중에 환자가 생기게 되면 씨디씨를 탓하게 될 수가 있단
말이오. 
   하지만 그들은... 
  마리사가 항의를 했다.
   됐소! 
  두브체크가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난 여기 시시콜콜 말싸움이나 하러온 게 아니오.  자, 이제 당신이
알아냈다는 
것들을 좀 들어보기나 합시다. 
  치밀어오른 감정을 애써 억제하며 마리사는 머릿 속의 생각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법적인   에 대해 전혀 고려해본 적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그것이 진짜 문제가 될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검역 격리로 병원에 갇히게 된 의사들은 벌써 접촉자들로 간주되고
있는 
상태가 아닌가.  책상 앞에 걸터앉은 그녀는 종이 뭉치를 뒤적여 중요 발견 
사항들을 축약해 적어둔 요약지를 찾기 시작했다.  그 페이지를 찾아내자 그녀는

두브체크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지도 않은 채 단조로운 목소리로 적힌 내용들을 
읽어내려갔다.
   최초에 발병했던 환자 중 한 명은 닥터 리히터나 쟈브리스키와 같은 샌디에고

세미나에 참석했던 안과 의사입니다.  최초 발생환자 중의 또 한명은 정형외과 
의사로 2개월 전 동아프리카에서 사파리 여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또 최초 
환자들 중 두 증례에서는 두 사람 모두 최근 물리거나 한 일은 없다고 합니다.
  처음 발병했던 여든네 명의 환자는 모두가 여섯 시간이라는 짧은 기간 내에 
집단적으로 증상을 발현했는데 이것은 그들 모두가 동시에 감염원에
노출되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처음 발현한 증상들이 매우 심했던 것으로 미루어 환자들 
모두가 다량의 병원체의 침입을 받은 것으로 추측됩니다.
  최초 발생한 환자들은 모두 메디카 병원에서 근무하기는 했지만 근무 장소는 
동일 구역이 아닌 것으로 보아 에어컨 시스템이 전파의 원인일 가능성은 
희박해지는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번 감염은 음식이나 식수를 매개로 
전파된 것 같은데, 그런 면에 초점을 맞추어보면, 지금까지 얻어낸 자료상의 
유일한 공통점은 발병한 여든네 명 모두가 병원 식당을 이용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확인 가능한 정보에 의하면 여든네 명 모두가 사흘 전 그곳에서 점심 
식사를 한 사실이 있습니다. 
  말을 마친 마리사는 마침내 고개를 들어 물끄러미 천장을 쳐다보고 있는 
두브체크를 올려다보았다.  마리사가 보고를 끝냇다는 사실을 깨닫자 그가 입을 
열었다.
   엘에이나 세인트루이스 환자와의 접촉 여부는 어떻소? 
   그런 건 전혀 없었습니다. 
  마리사가 말했다.
   적어도 여태까지 알아낸 바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태드에게 혈액 검체들은 보냈겠지요? 
   네. 
  마리사가 말했다.
  시릴은 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난 당신이 이번 사태와 지난 엘에이나 세인트루이스 건과의 관계를
찾아내는데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오.  반드시 무슨 관계가 있을 테니
말이오. 
   식당은 어떻게 할까요? 
  마리사가 물었다.
   그건 당신 마음대로 하시오. 
  두브체크가 말했다.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음식을 매개로 전파된 적이 없고 에볼라가 그 식당과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을지 난 잘 모르겠소만... 
  두브체크가 문을 당겨열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우연의 일치치고는 좀 미심쩍은 구석이 없지는 않군요. 
당신 
직감을 따르는 것에 더 이상의 잔소리는 하지 않겠소.  하지만 먼저 엘에이와 
세인트루이스 건과의 연관 가능성에 대해서 철저히 조사를 해주었으면 좋겠소. 
  한참 동안이나 두부체크가 나가버린 문을 쳐다보던 마리사는 다시 요약지와 
산더미처럼 쌓인 병력지 뭉치들을 내려다보았다.  정말 우울하기 짝이 없었다.
  시릴이 던진 마지막 한 마디가 마치 무슨 도발이기라도 하듯, 마리사는 당장 
식당부터 점검을 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식당은 병원 정원을 굽어보게 지어진 독립 건물이었다.  굳게 닫힌 식당의 
상바라지문 오른편에는  주 보건국장의 명에 의해 폐쇄함 이라고 적힌 공고문이 
걸려 있었다.  마리사가 살며시 문짝을 밀어보자 놀랍게도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보니 스테인리스 스틸과 형성 플라스틱 집기들로 꾸며진 식당의 
홀은 티 한 점 없이 깨끗하기만 했다.  마리사 바로 정면으로는 한 끝에 금전 
등록기기, 또 한 끝에는 쟁반들이 가지련히 쌓인 스팀 테이블(식기째 보온을 할
수 
있도록 된 증기 보온기)이 위치하고 있었다.
  스팀 테이블 뒤쪽으로는 부엌으로 통하는 작은 원형 유리창의 쌍바라지 문이 
하나 더 달려 있었다.  마악 들어갈까말까 망설이던 차에 문이 열리면 작달막한 
중년 여인 한 명이 모습을 나타내며 식당은 당분간 하지 않는다고 큰 소리로 
마리사에게 외쳐댔다.  서둘러 자신을 소개하고 마리사는 혹시 몇 가지 
물어보아도 되는지를 물었다.
   그럼요.  물론이에요. 
  그녀가 대답했다.  그녀는 희미한 스칸디나비아 억양이 섞인 말투로 식당
지배인
야나 베론슨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마리사는 그녀를 따라 스케줄과 메뉴로 
벽면이 가득 메워진 그녀의 사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잠시 이런저런 이야기들로 예의를 차린 마리사는 사흘 전의 점심 메뉴를 
보여달라고 부탁했다.  베론슨이 서류철에서 식단표를 뽑아 건네주자 마리사는 
재빨리 종이를 훑어내려갔다.  그것은 주식 세 가지, 수프 두 가지, 그리고 후식

몇 가지가 나열된 평범하기 짝이 없는 보통의 직원 식당 메뉴였다.
   이게 그날 점심에 나온 음식 전분가요? 
   거긴 스페셜(특선)만 적혀 있어요. 
  베론슨이 대답했다.
   거기 적힌 것들 말고도 우린 항상 각종 샌드위치랑 샐러드, 그리고 물론, 
음료들을 팔고 있답니다. 
  마리사가 그 메뉴를 한 부 얻을 수 있을까 묻자 베론슨은 식단이 적힌 종이를 
들고 복사를 하기 위해 사무실을 나갔다.  마리사는 다시금 최근 발생 
환자들에게로 돌아가 사흘 전 점심 때 어떤 음식들을 먹었는지를 물어보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녀는 그날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발병을 
하지 않은 대조군을 찾아 그들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해볼 작정이었다.
  베론슨은 곧 복사한 메뉴를 들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녀가 건네준 종이를 
접으며 마리사가 물었다.
   여기 종업원 중 한 명은 병에 걸리지 않았죠? 
   네.  마리아 곤잘레스예요. 
   여기서 무슨 일을 담당했지요? 
   대개 저기 스팀 테이블이나 샐러드 바를 맡고는 했어요. 
  베론슨이 대답했다.
   문제가 된 날 그녀가 어디에 있었는지 혹시 기억하실 수 있으세요? 
  마리사가 묻자 베론슨은 몸을 일으켜 벽에 걸린 커다란 스케줄판으로 걸음을 
옮겼다.
   후식이랑 샐러드를 맡았었군요. 
  식당 직원 모두에게 에볼라 항체 검사를 시행해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섬광처럼 마리사의 머리를 스쳤다.   에볼라 메리 라는 게 있을 수도
있다는 
랠프의 말은 그저 하찮은 농담에 불과했고, 원산지인 아프리카에서조차 그런 
전례가 없었지만 어쩌면 진짜 그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우리 식당 시설을 한 번 보시겠어요?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은 듯 베론슨이 친절하게 물었다.
  다음 삼십 분 동안 마리사는 두 개의 주방과 실제 손님들이 식사를 하는 홀을 
포함한 식당 구석구석을 구경했다.  주방에서 그녀는 사람이 드나들 정도로 큰 
냉장실과 대형 가스 레인지 그리고 청결하기 그지 없는 조리 구역 등을 
둘러보았다.  홀로 자리를 옮긴 마리사는 스팀 테이블 가를 따라걸으며 샐러드 
드레싱 용기들의 뚜껑을 들추어보고 식기통들도 들여다보았다.
   창고도 보여드릴까요? 
  식당 구경을 마치자 베론슨이 물었다.
  마리사는 정중하게 그녀의 제의를 사양했다.  마리사는 지금 최초 발생했던 
환자들이 점심 메뉴 중 어떤 것들을 골라 먹었는지를 알아내고 싶어 마음이 
조급해졌다.

  회전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기대앉은 마리사는 자꾸만 감겨오는 눈을
비벼떴다.  
오전 열한 시, 피닉스에 도착한지가 벌써 이틀이나 되었건만 그녀는 고작 네 
시간밖에 눈을 붙이지 못했다.  산부인과 외래에 있는 작은 진찰실 하나를 
배당받은 그녀는 누가 복도를 지날 때마다 그나마의 토끼잠에서 소스라쳐 
깨어나고는 했던 것이다.  
  바로 그때, 뒤편에서 문이 열리고 기척이 들려왔다.  몸을 돌리자 신문의
1면을 
펼쳐 높이 쳐든 두브체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신문에는 주먹만한 활자로 
 씨디씨, 미국 내에 미상의 에볼라 숙주가 있는 것으로 생각 이라는 머리 기사가

실려 있었다.  두브체크의 표정을 본 마리사는 그가 평소와 다름없이 화가 나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내가 분명 당신에게 보도진들한테 허튼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소? 
   전 그런 적 없어요. 
  두브체크는 신경질을 내며 신문을 내리쳤다.
   기사에 씨디씨의 닥터 불루멘탈에 의하면 미국 내에 에볼라의 숙주가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이번 피닉스 감염은 오염 전 음식물이나 식수를 매개로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고 전혀 있단 말이오. 
  마리사는 신문을 들고 재빨리 기사를 읽어내려갔다.  그녀의 이름이 거론된 건

사실이었지만 그것은 단지 간접적인 인용이었을 뿐이었다.  그 기사 거리를 
신문에 직접 제공한 사람은 빌 프리팬이라는 이름의, 환자들 병력 청취를 
도와주었던 의사 중의 한 명이었다.  마리사는 두브체크에게 이 사실을
지적했다.
   당신이 직접 신문쟁이들한테 떠벌였건, 신문쟁이들에게 떠벌이는 정신 나간 
녀석들에게 떠들어댔건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오.  결과는 똑같으니까.  사실 
전혀 그렇지도 않은데 이 기사에는 마치 씨디씨가 당신의 사견에 동조하는 
것처럼 씌어 있소.  음식이나 식수가 문제를 일으켰다는 증거는 눈을 씻고
찾아도 
하나도 없는데 이제 얼토당토않게 집단 광란을 일으키게 되어버렸단 말이오. 
  마리사는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이 두브체크라는 사내는 마치 입을 열
때마다 
그녀를 야단치려고 벼르고 있는 것 같았다.
  만인 지난 번 엘에이호텔 방에서 더 사근사근하게 대해주었다면 이렇게 
매몰차게 닦달을 했을까?  도대체 어쩌란 말이야?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랑도

망을 하지 말라는 건가?  공동으로 작업을 한다는 건 응당 의견을 교환해야
한다는 
뜻이 아닌가!
  간신히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른 마리사는 두브체크에게 종이를 한 장
건넸다.
   이걸 한 번 봐주셨으면 합니다. 
   이건 또 뭐요? 
  그가 신경질을 내며 물었다.
   최초에 발병했던 환자들을 다시 점검해본 결과입니다.  물론 적어도 대답을
할 
힘이 있는 환자들에게 국한된 것이기는 하지만요.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사실을 
알게 되실 겁니다.  잘 기억을 하지 못하는 두 명을 제외하고는 환자 모두가
나흘 
전 병원 식당에서 커스터드 푸딩을 먹어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제가 처음
했던 
조사 결과를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날 점심을 병원 식당에서 먹었다는 
것이 환자들간의 유일한 공통점이었습니다.  게다가 같은 날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커스터드를 먹지 않았던 스물한 명의 대조군은 아무도 병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두브체크는 들고 있던 종이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초보치고는 대단히 훌륭하지만 당신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소.  
에볼라는 음식을 매개로 전파되는 질병이 아니오. 
   저도 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마리사가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당신이라 해도 이번 사태가 무더기 환자 발생으로 시작해
격리를 
하자마자 발생률이 격감해버렸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는 없어요. 
  두브체크는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 말 좀 들어보시오. 
  그가 어조를 바꾸어 달래듯 말했다.
   닥터 레인이 당신이 처음 알아냈던 대로 최초 발생 환자 중 하나가 닥터 
리히터와 쟈브리스키가 참석했던 그 샌디에고 세미나에 갔었다는 사실을 
확인했소.  그 사실이 우리 공식 입장, 즉 리히터가 아프리카의 에볼라 풍토병 
지역에서 바이러스를 묻혀와 이 메디카 병원에 근무하던 그 불운한 안과 의사를 
포함, 다른 의사들에게 전파했다는 가설의 토대가 되었지 않소? 
   하지만 그 주장은 기왕에 알려진 바이러스성 출혈열의 잠복기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잖아요. 
   나도 문제가 좀 있다는 건 알고 있소. 
  두브체크가 지친 듯한 목소리로 시인했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현재는 그것이 우리의 공식적인 입장이오.  
당신이 음식물 매개의 전파 가능성에 대해 조사를 하고 다니는 데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소만 제발 그걸 떠들고 다니지만은 말아주시오.  여기서 당신은 
공인으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라오.  난 당신이 다른 사람들,
특히 
보도진들에게는 사건을 피력하지 않아주었으면 하오.  알겠소? 
  마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에게 부탁이 하나 있소? 
  두브체크가 말을 이었다.
   보건국장 사무실로 연락을 해서 희생자들 유해 중 몇 구를 압류해달라고 
부탁해주시오.  장기 표본들을 냉동시켜 아틀란타로 보낼 생각이니 말이오. 
  마리사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던 두브체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발을 멈추었다.  뒤를

돌아 마리사를 쳐다보며 그가 한층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참, 태드가 엘에이 세인트루이스와 피닉스 감염 사태에서 채취된 에볼라 
바이러스들을 비교하기 시작했다는데 관심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아직 최종 
결과는 나오지 않았지만 초기 검사 결과상 모두 같은 종류일 것으로 생각된다고 
하더군요.  그 결과는 이 모든 것들이 실제로는 서로 연관이 있는 감염이라는 
우리 가설을 지지하고 있어요. 
  마리사는 잠깐 부드러운 표정을 지어보인 두브체크는 이내 방을 나섰다.
  마리사는 눈을 감고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불행하게도 
그  죽음의 점심 식사 에서 남은 커스터드는 단 한 개도 없었다.  하지만 만일 
그렇게 된다면 일이 너무 쉬워져버릴 테지.
  대신, 그녀는 모든 식당 직원들의 혈액을 채취해 에볼라 항체를 검사해보기로 
했다.  그녀는 또 커스터드 푸딩의 재료들을 검체로 채취해 태드에게 바이러스 
오염여부를 판정해달라고 부탁하기로 작정을 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 속 
한구석에서 설령 그 커스터드 푸딩이 진짜 범인일지라도 그 재료들을 분석해서는

아무 것도 알아낼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메아리쳤다.  에볼라 바이러스는 열에 
지극히 민감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니 바이러스는 커스터드가 식은 뒤에

투입되었어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었을까?
  마리사는 앞에 쌓인 종이 뭉치를 내려다보았다.  분명 그 안에 그녀가 놓친 
단서가 들어 있을 것이었다.  만일 경험만 조금 더 있었더라면 볼 수가 있었을 
텐데...


    8

    5월 16일

  마침내 마리사가 아틀란타, 씨디씨의 작은 사무실로 돌아온 것은 거의 한
달이나 
지난 뒤였다.  피닉스를 강타했던 역마는 결국 진압되었고, 무엇이 그 감염
사태를 
야기했었는지, 또 그것이 추후로 예방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은 
찾아내지 못했다.
  에볼라의 위세가 꺾이기 시작하면서부터 마리사는 빨리 집으로 돌아가 다시 
센터에서 일을 하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하지만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렸건만, 막상 돌아와보니 전혀 기쁘지 않았다.
  눈물이 글썽이는 눈으로 마리사는  이런 통보를 드리게 되어 유감이지만...
으로 
시작되는 메모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이러스 취급과 조직 배양의 실험 기술 
습득을 위해 쏟아부었던 그녀의 정열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두브체크가 또 
초밀폐 실험실을 사용하게 해달라는 그녀의 요청을 기각해버린 것이다.  그녀는 
정말로 실의에 빠져버렸다.
  그녀는 아직도 지난번 피닉스 감염이 후식으로 나온 커스터드와 관계가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는데, 동물 실험으로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입증해 보이고 
싶었다.  만일 바이러스의 전파 경로만 확실히 밝혀낼 수가 있다면 애시당초 그 
바이러스의 출처가 어디인지를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리사는 지난 세 변의 미국 내 감염에서 에볼라 바이러스가 전파된 경로를 
표시한 커다란 도면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에볼라가 처음 세상에 알려지게 된 
1976년의 두 감염 때에 대해서도 미비하나마 비슷한 도면을 작성했다.  1976년의

두 건은 자이레의 얌부쿠와 수단의 나자라에서 거의 동시에 발생했던 것으로 
씨디씨자료 보관실에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아무렇게나 처박혀 있던 자료들을 
그녀가 발굴해 손수 정리한 것이었다.
  아프리카 사례들에서 특히 그녀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끝끝내 숙주를 찾아내지

못하고 말았다는 사실이었다.  라사 출혈열을 일으키는 바이러스가 특정한
종류의 
집 쥐를 숙주로 한다는 발견조차도 에볼라의 숙주를 밝혀내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모기, 빈대, 원숭이, 생쥐, 집쥐 - 수없이 많은 짐승들이 
의심선상에 올랐지만 결국 아무런 단서도 얻어내지 못했다.  아프리카에서도
역시 
미국과 마찬가지로 연구는 미궁에 빠져버렸던 것이다.
  마리사는 실망한 나머지 연필을 책상 위로 내동댕이쳤다.  사실, 두브체크의 
편지 내용을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도 아니었다.  피닉에서 날이 가면 갈수록 
그녀를 따돌리기만 하던 두브체크가 검역 격리가 풀리자마자 그녀를 아틀란타로 
돌려보내 버렸던 것이다.  그는 아직도 에볼라 바이러스가 닥터 리히터에 의해 
아프리카로부터 수입되었고 샌디에고의 안검 수술 세미나에서 안과 의사들에게로

전파되었다는 종래의 주장을 고수하고 있는 것 같았다.  두브체크는 그것이 
여태까지의 경험과 일치하지 않지만 긴 잠복기간을 그저 한 변형의 형태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충동적으로 몸을 일으킨 마리사는 태드를 찾아나섰다.  초밀폐 실험실을 
사용하게 해달라는 탄원서를 쓰는 것을 도와준 그였으니 그 요청이 무참히 
짓밟히고 만 지금 위로라도 해줄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마리사는 태드를 바이러스 실험실에서 끌어내 이른 점심 식사를 하도록
만들었다.
  "그럼 다시 한 번 노력을 해보는 수밖에 없겠군요. 
  그녀가 털어놓은 그 우울한 소식에 대한 태드의 반응은 담담하기만 했다.  
마리사는 미소를 지었다.  태드의 순진무구한 반응이 너무도 귀여워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좁다란 구름다리를 걸어 본관으로 건너갔다.  일찍 점심을 먹는 것의 
장점 중 하나는 식당에서 지루하게 줄을 서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그날 준비된 후식 중의 하나는 캐러멜 커스터드였다.  식탁에 그릇을
내려놓으며 
마리사는 태드에게 혹시 그녀가 아리조나에서 보냈던 커스터드 재료들을 검사해 
보았는가를 물었다.
   에볼라는 없었어요. 
  태드가 짤막하게 말했다.
  의자에 자릴 잡으며 마리사는 혹시 어떤 병원 음식 공급업체가 범인이라면 
얼마나 일이 쉽게 풀려나갈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만 되면 왜 그 
바이러스가 반복적으로 의료 기관들에 출몰하는 가를 설명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일 텐데...
   식당 종업원들 피 검사 결과는 어땠어요? 
   에볼라 항체는 없었어요. 
  태드가 말했다.
   하지만 당신에게 경고를 해주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두브체크가 내가 일하는

걸 보더니 아주 화를 내더군요.  둘 사이가 왜 그렇게 됐지요?  피닉스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태드에게 자초지종을 다 털어놓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 
봐야 상황이 악화되기만 할 것 같은 마음에 마리사는 또다시 유혹을 물리쳤다.  
그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마리사는 자신이 의도와는 달리 씨디씨의 공식
입장과 
다른 뉴스 기사의 제공자가 되어버린 적이 있다고 설명해주었다.
   혹시 그게 여기 미국에 미상의 에볼라 숙주가 있다고 난 그 기사였나요? 
  마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 분명 그 커스터드에 에볼라 바이러스가 들어 있었다고 생각해요.  뿐만 
아니라, 앞으로 계속 에볼라가 출현할 것이라고 확신을 하고 있어요. 
  태드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하지만 내 연구결과는 두브체크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난 
지난 세 번의 감염에서 얻어진 바이러스 알엔에이와 캡시드(바이러스의 외벽) 
단백질을 분리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모두가 동일하답니다.  그건 완전히 동일한

주의 바이러스가 병을 일으키고 있다는 뜻인데, 그것은 다시 바꾸어 말하면 지난

세 번의 감염건들이 실제로는 동일한 감염원에서 시작된 한 건의 감염이라는 
뜻이에요.  보통 에보라 바이러스는 약간이라도 변전을 하는 것이 보통이죠.  
불과 850킬로미터 사이를 두고 발생했던 얌부쿠와 나자라 두 건의 아프리카 
사례들에서도 원인이 되었던 바이러스간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답니다. 
   그렇지만 잠복기는 어땠어요? 
  마리사의 항변이었다.
   모든 사례에서 신환자들의 잠복기는 항상 이틀에서 나흘 사이였어요.  
샌디에고 세미나와 피닉스 감염과는 석 달이란 기가이 있단 마리에요. 
   그렇긴 해요. 
  태드가 말했다.
   하지만 대량의 바이러스가 어떠한 경위로 커스터드 푸딩 속으로 들어갔다고 
주장하는 것보다는 더 신빙성 있는 얘기예요. 
   그래서 재료들을 보낸 것 아니에요. 
   하지만 마릿, 
  태드가 그녀의 말을 막으며 나섰다.
   에볼라는 겨우 섭씨 60도에도 파괴되어버려요.  설령 재료 안에 있었다 
하더라로 조리과정에서 감염력을 잃게 되었을 거예요. 
   후식을 담당하던 여직원 자신이 병에 걸렸던 것 기억하시죠?  어쩌면 그녀가 
커스터드를 오염시켰을지도 몰라요. 
   좋아요.  그렇다고 해둡시다. 
  태드가 엷은 푸른색 눈동자를 굴리며 체념한 듯 말했다.
   하지만 그 여자는 어떻게 아프리카, 그것도 깊숙한 오지에만 있는 바이러스에

감염이 된 거지요? 
   그건 정말 모르겠어요. 
  마리사의 고백이었다.
   하지만 그 여자가 샌디에고 세미나에 참석하지 않았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에요. 
  그들은 잠시 살벌한 침묵 속에서 식사를 계속했다.
   그 후식 담당 직원이 바이러스를 얻었을 만한 데다 딱 한 군데 있기는 해요. 
  마침내 마리사가 말문을 열었다.
   그게 어딘데요? 
   여기 씨디씨예요. 
  태드는 먹던 샌드위치를 내려놓고 휘둥그래진 눈으로 마리사를 쳐다보았다.
   맙소사, 그게 지금 무슨 뜻인지 알고나 하는 얘기예요? 
   난 무슨 뜻으로 얘기한 게 아니에요.  난 그저 사실을 얘기한 것 뿐이에요.  
여태까지 알려진 에볼라의 유일한 감염원은 우리 초밀폐 실험실 안에 있는 
거라구요. 
  태드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태드. 
  마리사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부탁이 하나 있어요.  안전 관리실에 가서 작년 한 해 동안 초밀폐 실험실에 
출입했던 사람들 명단을 뽑아주세요. 
   난 영 내키지를 않아요. 
  태드가 자리에서 뒤로 기대앉으며 말했다.
   제발 그러지 마세요. 
  마리사가 말했다.
   명단 한 장 얻어낸다고 해서 피해를 볼 사람은 없어요.  전 당신이 분명 그 
명단을 요청할 적당한 구실을 생각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명단을 얻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태드가 말했다.
   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거든요.  하지만 내가 영 싫은 건 당신의 피해망상적인

가설을 부추기는 것이고, 특히 두브체크를 위시해 행정이 담당하는 사람들이랑 
당신 사이에 끼어 새우처럼 등이 터지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거예요. 
   말도 안되는 소리 마세요.  명단을 얻어주는 것으로 나랑 두브체크 사이에 
끼게 될 가능성은 전혀 없어요.  게다가 그 사람이 어떻게 이런 걸 알겠어요?  
아무도 알 수가 없을 거예요. 
   그건 그래요. 
 태드가 마지못해 대답을 했다.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삼아 보여주지만 않는다면요. 
   좋아요. 
  마리사는 마치 그렇게 하기로 결정이라도 난 듯 딱 잘라 말했다.
   오늘 저녁 당신 집으로 명단을 가지러 갈게요.  어때요? 
   글세, 그러면 되겠죠. 
  마리사는 태드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는 정말 믿음직한 친구다.  게다가 
마리사는 그녀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가 간이라도 빼줄 것이라는 푸근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또 하나의 중대한 부탁을 해야만 하는 것이 그렇게 다행스럽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다시금 초밀폐 실험실에 들어가보려는 생각을 하고

있있던 것이다.
  
  힘주어 핸드 브레이크를 당겨올린 마리사는 사뿐히 빨간 혼다 자동차에서 
내렸다.  길의 경사가 심해 그녀는 바퀴를 돌려 보도 블록에 닿게 하는 미끄럼 
방지 예방책까지 동원을 했다.
  태드와는 수 차례 데이트를 했지만 그의 집에까지 와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현관 계단을 올라간 그녀는 한참이나 초인종을 찾아 헤매야 했다.  거의 아홉 
시가 다 되어서인지 거리를 칠흑처럼 어두었다.
  태드의 모습을 보는 순간 마리사는 그가 원하던 것을 손에 넣었음을 알 수 
있었다.  문을 열어줄 때 그의 얼굴에 번져 있던 미소 때문이었다.
   푹신한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마리사는 태드가 기르는 커다란 얼룩 고양이의 
털을 쓰다듬으며 설레는 마음으로 태드의 명단을 기다렸다.
   커다란 함박 웃음을 지으며 태드가 컴퓨터 용지로 출력된 명단을 내밀었다.
   실험실 출입 빈도에 대해 내부 감사를 한다고 말했어요. 
  태드가 말했다.
   그 사람들은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는 것 같더군요. 
  첫 페이지를 펼친 마리사는 초밀폐 실험실 출입 기록에 이름, 들어간 시각과 
나온 시각이 정확히 기입되어 있음을 보았다.
  그녀는 검지 손가락으로 명단을 더듬어 내려갔지만 아는 이름은 겨우 몇 개에 
불과했다.  가장 빈번히 나타나는 이름은 태드의 것이었다.
   씨디씨에서 진짜로 일을 하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건 다들 아는
사실이에요. 
  태드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명단이 이렇게 길 줄은 몰랐어요. 
  페이지들을 넘기며 마리사가 투덜거렸다.
   이 명단에 오른 사람들 모두가 아직도 출입허가를 가지고 있나요? 
  태드는 마리사의 어깨에 몸을 기대며 페이지를 훑어내려갔다.
   다시 첫 장으로 가보세요. 
   이 친구. 
  태드가 이름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개스통 드부와는 더 이상 아니에요.  국제 보건 기구에서 나온 사람이었는데 
잠깐 들렀던 것 뿐이에요.  그리고 이 친구는, 
  태드는 해리 롱포드라는 이름을 가리켰다.
   하바드 대학원생인데 특정 연구에 대해서만 실험실을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지요. 
  마리사는 울버트 대령의 이름이 몇 번이나 적혀 있다는 것과 9월까지는 
해버링이란 사람이 꽤 정기적인 방문을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이름은 9월 이후 갑자기 사라져 있었다.  마리사는 그에 대해 물었다.
   해버링은 여기서 근무하던 친구예요. 
  태드의 설명이었다.
   6개월 전에 직장을 옮겼죠.  최근에 에이즈연구 기금이 엄청나게 
늘어나면서부터 바이러스학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 자리 이동이 꽤 있었답니다. 
   그 사람은 어디로 갔어요? 
  페이지를 넘기며 마리사가 물었다.
  태드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알 길이 없지요.  내가 보기엔 데트릭 기지연구실로 가고 싶어했던 것 같은데

울버트랑 얘기가 잘 안된 모양이에요.  헤버링은 똑똑하기는 해도 같이 지내기는

영 힘든 사람이죠.  지금 두브체크의 자리를 원했다는 소문도 있더군요.  그
사람 
소원대로 안된 게 정말 다행이에요.  그 사람 밑에 있었으면 인생이 우울해졌을 
거예요. 
  마리사는 1월까지 페이지들을 넘기며 두 주일 동안 몇 번이나 출입을 했던 
글로리아 프렌치라는 이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여자는 누구예요? 
  마리사가 물었다.
   글로리아는 기생충 질환 담당 부서에 있어요.  그녀는 중개물(환자의
병원체를 
다른 곳에 매개 전파하는 동물로 특히 곤충류가 중요하다) 매개 바이러스성 질환

연구로 실험실을 사용했엇지요. 
  마리사는 명단을 돌돌 말아쥐었다.
   이제 만족했어요? 
  태드가 물었다.
   기대했던 것 이상은 아니에요. 
  마리사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하지만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요.  그런데 음... 부탁이 하나 더 있거든요. 
   또요! 
  태드가 신음소리르 냈다.
   긴장할 건 없어요. 
  마리사가 말했다.
   당신이 지난번 엘에이 세인트루이스와 피닉스의 에볼라 바이러스가 동일 
주라고 말했잖아요?  어떤 방법으로 그 사실을 알게 되었는지 정말 궁금해요.  
보고 싶어요. 
   하지만 자료들이 전부 초밀폐 실험실 안에 있는걸요. 
  테드가 가냘픈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세요? 
  마리사가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허가를 못 받았잖아요. 
  태드가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는 다음 부탁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내가 연구 허가를 받지 못한 건 사실이에요.  그건 내가 혼자서는 들어갈 수 
없다는 뜻이에요.  하지만 내가 당신을 따라 들어간다면, 특히 다른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라면 다르지 않겠어요?  지난번 당신을 따라 들어갔을 때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잖아요?  그렇죠? 
  태드는 수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난번에도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또 
못할 것은 없었다.  특별히 다른 직원을 데리고 실험실 출입을 하지 말라는 
명백한 지시가 없었으니 발각이 나도 몰랐다고 둘러대면 그만이다.
  태는 자신이 꼬임에 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마리사의 매력에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업적에 대해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깊은 감명을 받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좋아요. 
  그가 말했다.
   가고 싶은 게 언제예요? 
   지금 당장 어때요? 
  마리사가 말했다.
  태드는 시계를 내려다 보았다.
   지금도 괜찮은 시간이기는 한 것 같군요. 
   끝난 다음에 한 잔 하러 가요. 
  마리사가 말했다.
   제가 살께요. 
  지갑을 집어든 마리사는 태드가 열쇠와 실험실 출입카드를 문 앞 선반 위에
함께 
노상 두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실험실로 향하는 도중 태드는 자신의 최근 연구에 대해 난해하기 그지없는 
설명들을 늘어 놓기 시작했다.  마리사는 귀를 기울이기는 했지만 건성으로 들어

넘겼다.  그녀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전과 마찬가지로 CDC정문 출입 장부에 이름을 적은 그들은 마리사의 사무실로 
올라가는 것처럼 중앙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마리사의 사무실이 위치한 층에서 
내린 그들은 계단으로 한 층을 내려와 구름다리를 건너 바이러스 동 건물로 
들어갔다.  태드가 육중한 철문 앞에 서자 마리사가 비밀 번호를 깨우쳐주듯
말했다.
   43-23-39 
  태드는   눈이 되어 마리사를 쳐다 보았다.
   와, 굉장한 기억력인데요! 
   잊으셨군요. 
  마리사가 말했다.
   그건 내 몸 사이즈예요. 
  그 말에 태드는 킥킥거렸다.
  외부 조정 구역에 들어선 태드가 전등과 콤프레서의 스위치를 올리자 마리사는

다시금 처음 방문 때에 느꼈던 불안감을 느끼게 되었다.  실험실은 어딘지 
무시무시한 데가 있었다.  꼭 공상과학 영화에 나오는 장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갱의실로 들어간 그들은 조용히 옷을 갈아입었다.  면으로 만든 수술복 위로 
큼지막한 비닐 보호의를 걸친 마리사는 태드를 쫓아 공기 호스를 다기관에 
접속시켰다.
   이제 프로가 다 되셨군요. 
  실험실 내부 전등의 스위치를 올리며 태드가 말했다.  다음 그는 마리사에게 
호스를 떼고 다음 방으로 들어가라는 시늉을 했다.
  나올 때 석탄산 소독액 샤워를 뒤집어쓰게 될 그 자그마한 방에서 태드를 
기다리던 마리사는 밀려오는 폐소 공포의 두려움을 애써 억눌렀다.  널찍한 두 
실험실로 들어서자 마음이 약간 편해졌다.  예전에는 그저 낯설기만 했던 실험 
기재들이 이제는 조금 더 친숙해  보였다.  그간의 바이러스 실험이 좀 도움이 
되었던 것 같았다.  이제 그녀는 조직 배양 인큐베이터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크로마토그라피 기계들까지도 알아볼 수가 있었다.
   이쪽이에요. 
  적당한 다기관에 호스를 연결시킨 태드가 마리사를 불렀다.  그는 그녀를
이상한 
실험도구들이 복잡하게 설치된 어떤 실험 테이블 앞으로 데리고 가더니 자기가 
어떤 방법으로 에볼라 바이러스의 디엔에이와 캡시드 단백질을 분리해내고 
있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리사의 마음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그녀의 진짜 목적은
에볼라가 
저장된 장소를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굳게 닫힌 기밀문에 시선을 
던졌다.  만일 누군가 에볼라 바이러스가 어디 있을지 맞추어보라고 한다면 
그녀는 저 문 뒤에 있을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었다.  태드가 잠시 말을 멈추자 
마리사는 기다렸다는 듯 바이러스를 보관하는 장소가 어딘지 보여줄 수 있는지를

물었다.
  태드는 잠시 머뭇거린 끝에 입을 열었다.
   저쪽이에요. 
  그는 굳게 닫힌 기밀문 쪽을 가리켰다.
   보여줄 수 있어요?   
  마리사가 물었다.
  태드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한 다음 마리사에게 따라오라는 시늉을 했다.  그는 
비척비척 방 한구석으로 걸음을 옮기더니 조직 배양 인큐베이터 앞에 놓인 기구 
하나를 가리켰다.  그가 아까 가리켰던 것은 기밀문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 안에 있다구요? 
  놀라움과 실망으로 범벅이 된 마리사의 질문이었다.  그녀는 사실 더욱 
견고하고 함부로 손을 댈 수가 없는 육중한 금고형의 보관 용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건 우리 부모님 집에 있는 냉동고랑 비슷해 보이는데요. 
   맞아요.  이건 그냥 보통 냉동고예요. 
  태드가 말했다.
   냉각용매로 액화 질소를 쓰도록 조금 개조를 한 것 뿐이에요. 
  그는 액화 질소가 주입되는 호스를 가리켰다.
   항상 영하 70도를 유지하도록 되어 있지요. 
  냉동고의 손잡이 밑으로 몸체를 둘러친 체인이 다이얼 자물쇠로 채워져
있었다.  
태드는 자물쇠를 들어 다이얼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걸 달아놓은 사람이 누군지 모르지만 유머 감각이 대단해요.  번호가 
6-6-6이거든요. 
   그다지 튼튼해 보이지는 않는군요. 
  마리사가 말하자 태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누가 들어오겠어요.  청소 아줌마가요? 
   난 심각하게 얘기하는 거예요. 
   출입 카드 없이는 아무도 이 실험실에 들어올 수가 없어요. 
  자물쇠를 돌려 체인을 풀며 태드가 말했다.  그래, 잘났다.  마리사는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태드가 냉동고의 뚜껑을 들어올리자 마리사는 무엇이라도 튀어 나올 것 같은 
기분에 조심스럽게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피어오르는 차가운 김 사이로 금속 
트레이들 위에 가지런히 놓인 수천, 수만의 플라스틱 뚜껑으로 덮은 자그마한
유리 
바이얼들이 보였다.
  비닐 보호의로 덮인 손으로 태드는 냉동고 뚜껑에 낀 성에를 걷어 각
바이러스의 
위치가 표시된 도표를 노출시켰다.  에볼라의 위치 번호를 확인한 그는 마치 
슈퍼마켓에서 냉동 생선을 고르는 손님처럼 냉동고 안을 뒤적였다.
   자, 이게 당신이 찾는 에볼라예요. 
  바이얼 하나를 들어 마리사에게 던지는 시늉을 하며 태드가 말했다.
  당황한 마리사는 병을 받으려 양 손을 힘껏 앞으로 뻗었다.  태드의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보호의에 뒤덮여 그 웃음 소리는 아주 먼 데서 나는 것처럼
메아리쳤다.  
마리사는 화가 났다.  여긴 그따위 장난질을 칠 만한 장소가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코 앞으로 바이러스가 든 바이얼을 들이댄 태드는 그녀에게 받으라고 했지만 
그녀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왠지 모르게 겁이났다.
   별거 아닌 것 같아 보이지요? 
  그가 병 속의 얼어붙은 내용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이 안에는 바이러스가 10억 개나 들어 있어요. 
  그녀는 태드가 다시 유리병을 금속 트레이 위에 올려놓고 냉동고 문을 닫은
다음, 
자전거 자물쇠를 다 채울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태드가 자물쇠를 채우자 마리사는 그제서야 다시 실험실 안을 한 번 죽 
훑어보았다.  실험실 전체로 보아서는 낯선 곳이기는 했지만 각각의 기구들은
눈에 
익은 것들이었다.
   여기 보통 실험실에 없는 기구 같은 것들은 없나요? 
   보통 실험실에는 음압 시스템이나 공기 차단기 같은 것 없잖아요? 
  그가 말했다.
   아뇨.  그게 아니라, 전 지금 실험 기재 얘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태드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은 방 한 가운데 있는 실험 테이블들
위로 
설치된 보통용 배기 후드에 멈추었다.
   저것들은 좀 특별하지요. 
  그가 손을 들어 가리키며 말했다.
   저건 제3형 에이취디피에이 필터 시스템이라고 부르는 것이에요.  저런것들 
얘긴가요? 
   저건 초밀폐 실험실에만 있는 건가요? 
  마리사가 물었다.
   물론이지요.  저런 것들은 특별히 주문 제작을 해야 하거든요. 
  마리사는 실험 기재들 위를 덮고 있는 배기후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것은 
조리용 연기 배출 송풍기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엄청나게 크다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이런 건 누가 만들죠? 
  마리사가 물었다.
   여기를 보면 되지요. 
  태드가 후드 옆에 붙은 금속 라벨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랩 엔지니어링 
주식회사, 사우스 벤드, 인디아나 라고 적혀 있었다.  혹시 이런 배기 후드를 
주문한 사람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섬광처럼 마리사의 머리를 스쳤다.
  그녀는 자신이 품고 있는 생각이 정말 미치광이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피닉스 사건이 커스터드와 관계가 있다고 단정을 이은 이후로 에볼라 
감염들이 어쩌면 고의적으로 유발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어쩌면 누군가가 실험을 하다가 실수로 바이러스를

유출시켰을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헤이, 당신이 내 연구에 관심이 있는 줄 알았는데요. 
  태드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물론이에요. 
  마리사가 힘을 주어 말했다.
   단지 이 실험실의 위용에 좀 위축이 되어서 그런 거예요. 
  어디까지 이야기를 했는지 잠시 머뭇거린 태드는 다시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마리사는 건성으로 들으면서 랩 엔지니어링 주식회사로 편지를 보내 
물어보아야겠다고 마음 속에 메모를 남겼다.
   그래 다 들은 소감이 어떻습니까? 
  마침내 말을 마친 태드가 물었다.
   정말 굉장해요...그리고 목도 몹시 마르구요.  이제 나가서 한잔 해요. 
  나가는 길에 마리사를 자신의 사무실로 데리고 간 태드는 감염 사건에서 
검출되었던 바이러스들에 대한 최종 실험 결과를 보여주었다.  서로서로 너무도 
비슷한 분석 결과를 보이는 것이 모든 감염 사건들이 실제로는 동일한
사건이라는 
사실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나온 바이러스랑 아프리카 바이러스들을 비교해보셨나요? 
   그건 아직 안해봤어요. 
  태드가 솔직히 말했다.
   그 바이러스들에 대해서도 같은 종류의 분석 실험 결과를 가지고 계신가요? 
   그거야 물론이죠. 
  태드가 말했다.  그는 서류 캐비닛으로 걸음을 옮겨 아래쪽 서랍을 당겨냈다. 

그 서랍은 너무도 잔뜩 들어차 한참이나 실랑이를 한끝에야 마닐라 종이로 된 
서류철 몇 개를 끄집어낼 수가 있었다.
   이게 수단 거고, 이게 자이레 거예요. 
  책상 위에 서류철들을 쌓은 태드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마리사는 첫 번째 서류철을 펼쳤다.  그 도표는 마리사의 눈에는 그저 다른 
것들과 비슷해 보였지만 태드는 에볼라의 여섯 단백질 거의 모두에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지적했다.  다음 마리사는 두 번째 서류철을 펼쳤다.  태드는 앞쪽으로 
몸을 구부려 자이레 도표 중 한 장을 집어들고 그것을 최근 완성의 미국
바이러스 
도표 옆에다 내려놓았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요! 
  그는 황급히 다른 도표들을 움켜쥐고는 책상 위에 가지런히 배열을 했다.
   왜 그래요? 
  마리사가 물었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분광분석기(스펙트럼의 가시부, 자외부, 또는
적외부에서 
정량분석을 할 수 있도록 북광기와 광도계를 결합한 기계)를 돌려 확인을 
해보아야겠어요. 
   확인이라뇨? 무엇을요? 
   이 바이러스들은 거의 완전하게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요. 
  태드가 말했다.
   제발.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해주세요. 도대체 무슨
말이죠? 
   1976년 자이레 바이러스가 당신이 보냈던 지난 세 번 감염 사태의 바이러스와

완전히 똑같아요. 
  마리사와 태드는 한참동안이나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침내 마리사가
입을 
열었다.
   그럼 이건 1976 자이레부터 1987년 피닉스까지 전부 한 번의 발생에서 파생된

것이라는 뜻이잖아요? 
   그건 불가능해요. 
  다시 바이러스 구조 분석 도표들을 바라보며 태드가 말했다.
   하지만 방금 당신이 한 말이 바로 그런 뜻이잖아요? 
  마리사가 말했다.
   나도 알아요.  하지만 이건 컴퓨터 계산상의 착오일 게 분명해요. 
  그는 다시 푸른 눈을 마리사에게로 돌리며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정말 놀라워요.  그 말밖에는 할 수가 없군요. 
  좁다란 육교를 건너 본관으로 들어간 다음, 마리사는 자신의 사무실로 올라가 
짧은 편지를 타이프하는 동안 태드를 잠깐 기다리게 했다.
   누군지는 몰라도 꼭 이 야밤에 그렇게 편지를 해야 되나요? 
  태드가 물었다.
   생각난 김에 잊어버리기 전에 써두려는 것 뿐이에요. 
  마리사가 말했다.  그녀는 타이프라이터에서 편지를 꺼내 봉투에 집어 넣었다.
   자, 다 됐어요.  오래 걸리진 않았죠, 그렇죠? 
  그녀는 지갑을 뒤져 우표를 한 장 꺼냈다.  봉투의 받는 이 주소에는 랩 
엔지니어링 주식회사, 사우스 벤드, 인디아나 라고 적혀 있었다.
   대관절 왜 그 회사로 편지를 하는 거지요? 
  태드가 물었다.
   제3형 에이치이피에이 필터 시스템에 대해 문의를 좀 해보려는 거예요. 
  태드는 걸음을 멈추었다.
   왜요? 
  그가 걱정스러운 태도로 물었다.  그는 마리사가 몹시도 충동적인 성격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혹시 그녀를 다시금 초밀폐 실험실로 데리고 들어간 게
큰 
실수가 아닌가 하는 걱정이 먹구름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놀라세요? 
  마리사는 웃음을 터뜨렸다.
   만일 두브체크가 계속 초밀폐 실험실 사용허가를 내주지 않으면 내가 손수 
하나 차리려고 그러는 거예요. 
  태드는 무슨 말인가를 하기 시작했지만 마리사는 그의 팔을 붙들어 엘리베이터

쪽으로 잡아끌었다.































    9


    5월 17일

  이른 아침, 마리사는 굳은 결의와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너무도 해맑은 봄날

아침이었기에 마리사는 상큼한 봄 기운을 만끽하기 위해 태피를 데리고 조깅을 
나섰다.  동네를 뛰어 다니는 마리사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강아지란 녀석까지도

봄을 즐기는 것 같았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마리사는 샤워를 한 다음, 티브이에서 방영되는 투데이
쇼를 
보면서 옷을 갈아입고 여덟시 반이 되어서는 출근길에 오를 수가 있었다.  
사무실에 들어선 그녀는 서류 캐비닛 위에 핸드백을 내려놓고 책상 앞에 앉았다.
  그녀는 1976년 자이레 바이러스와 미국에서 검출된 바이러스가 동일 종으로
나올 
수 있는 통계학적 학률을 계산할 만큼 에볼라 바이러스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을지가 궁금했다.  만일 그녀의 추측이 맞다면 그녀의 점증하는 
의심은 과학적으로 사실 무근한 것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마리사의 책상 녹생 메모판 위에  지급 을 알리는 봉투가 하나 있는
것이 
눈에 띄였다.  봉투를 여니 즉각 두브체크의 사무실로 출두하라는 퉁명스러운 
전갈이 들어 있었다.
  그녀는 바이러스동 건물로 건너갔다.  밤에는 그저 믿음직스럽기만 했던 
구름다리의 보호용 철책이 환한 대낮에는 마치 감옥에 갇힌 기분을 느끼게 했다.
 
두브체크의 비서가 아직 출근을 하지 않았기에 그녀는 열려 있던 문에 노크를 
하고 들어갔다.
  책상에 앉은 두브체크는 몸을 구부린 채 우편물들을 훑어보고 있다가
마리사에게 
문을 닫고 앉으라고 말했다.  마리사는 지속적으로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을 
살피는 두브체크의 검은 눈을 느끼며 순순히 그의 지시를 따랐다.
  공간이란 공간마다 논문 사본들을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그의 사무실은
여느때와 
다름없이 무질서하기만 했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항상 말쑥하게 차려입으면서 
다른 것은 신경도 안 쓰는 모양이다.
   닥터 불루멘탈. 
  그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어젯밤 초밀폐 실험실에 들어갔다고 들었소. 
  마리사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두브체크는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었다.
   정식 허가를 얻기 전에는 그곳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 내가 분명 망을 하지 
않았던가요?  난 당신이 계속 내 명령을 무시해버리는 것이 불쾌해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오.  특히 당신이 태드를 시켜 메디카 병원 음식 검체들에 대해 
허락도 없이 작업을 시킨 다음부터는 더 더욱 그렇소. 
   저는 제가 맡은 임무에 최선을 다하려는 것 뿐입니다. 
  마리사가 말했다.  그녀의 불안은 분노로 급선회하고 있었다.
   어쨌든 당신의 그 최선이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두브체크가 쏘아붙였다.
   게다가 난 당신이 우리 씨디씨가 일반 대중들에게 얼마나 막중한 책임감을 
느껴야 하는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소.  
지금 세간에 퍼진 에이즈 히스테리를 보시오. 
   그래요?  오히려 전 당신이 틀렸다고 생각하는데요. 
  마리사가 두브체크의 시선을 맞받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저 역시 우리들이 대중들에게 느껴야 하는 책임감이 실로 막중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이 에볼라의 위협을 과소 평가는 것이 직무유기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앞으로 에볼라 감염이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과학적인 또 논리적인 이유가 없기 
때문에 또 다른 감염 사태가 터져나오기 전에 감염원을 찾아내기 위해 전력을 
경주하는 것 뿐이에요. 
   닥터 불루멘탈, 당신이 여기 장이아니란 사실을 잊지 않아주었으면 좋겠소. 
   저도 그 사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닥터 두브체크.  만일 제가 당신 
자리에 있었더라면 분명 닥터 리히터가 아프리카로부터 바이러스를 묻혀와
들어본 
적도 없는 6주간의 잠복기 후에 발병을 했다는 씨도 안 먹히는 공식입장 따위를 
주장하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그리고, 만일 닥터 리히터가 실제로 그
바이러스를 
묻혀오지 않았다면, 바이러스의 유일한 근원은 바로 이 씨디씨란 말입니다! 
   난 그런 얼토당토 않은 억측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소! 
   억측이건 뭐건 당신 마음대로 부르셔도 상관 없어요.   
  책상을 박차고 일어나며 마리사가 말했다.
   그건 사실임에 틀림이 없으니까요.  심지어는 데트릭 기지에도 에볼라는 
없었어요.  바이러스가 있는 곳은 오직 씨디씨분인데 그건 그저 평범하기 짝이 
없는 자전거용 체인 자물쇠로 잠근 냉동고 안에 보관되어 있어요.  세상에서
가장 
치명적인 바이러스 치고는 참 대단한 경비더군요!  그리고 혹시 아직도 초밀폐 
실험실이 안전하다는 망상을 하신다면 저 같은 미미한 사람조차도 들락거릴 수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한참 뒤, 대학 병원에 도착해 식당이 어디 있는지를 물으면서도 마리사의 몸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복도를 걸어내려가던 그녀는 그런 용기가 도대체 
자신의 자그마한 몸 어느 구석에서 나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했던 것처럼 상급자에게 대들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또한 자기를 
사무실에서 내몰 듯 했던 두브체크의 얼굴을 생각하니 기분이 몹시 우울해졌다.
  이제 역학 정보원으로서의 생활은 끝장이라는 생각이 당장 어찌할 바를 
몰라하던 마리사는 정처없이 차를 몰고 싸돌아다닌 끝에 랠프를 기억해내고는 
그에게 조언을 구하기로 했다.
  마침 랠프는 수술 사이의 잠깐 쉬는 시간이어서 통화를 할 수가 있었다.  그는

점심을 같이 하자는 마리사의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대학 병원의 식당은 노란색 식타들이 줄지어 늘어선 흰 타일 바닥의 깨끗하고 
기분 좋은 곳이었다.  구석에 놓인 식탁 앞에 자리를 잡은 랠프가 손을 흔들어 
그녀를 반기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랠프는 마리사가 다가가자 재빨리 몸을 일으켜 그녀를 위해 의자를
당겨주었다.  
눈물이 쏟아져나올 지경이었지만 마리사는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그의 
우아한 매너가 허름한 수술복과는 너무도 어울려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부러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그녀가 말했다.
   전 당신이 얼마나 바쁜지 잘 알거든요. 
   말도 안되는 소리. 
  랠프가 말했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시간이 있어요.  자, 문제가 무너재 얘기를
해봐요.  
전화 목소리가 몹시 당황한 것 같던데. 
   먼저 식사나 해요. 
  마리사가 말했다.
  점심식사로 뜸을 들인 것이 좀 도움이 되었는지 식사를 마치고 나자 마리사는 
자신의 감정을 조금 더 제어할 수가 있게 되었다.
   씨디씨에서 문제가 좀 생겼어요. 
  그녀가 고백을 했다.  그녀는 랠프에게 엘에이에서의 두브체크의 행동과 호텔 
방에서 있었던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그 다음부터는 일이 영 어럽게만 꼬이고 있어요.  어쩌면 제가 그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는지는 몰라도 그건 제 책임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어쨌든,
그건 
일종의 희롱이었어요. 
   영 두브체크답지 않군요. 
  랠프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제 말을 믿으시는거죠?  그렇죠? 
  마리사가 물었다.
   물론이오. 
  랠프가 마리사를 달래듯 말했다.
   하지만 난 아직 모든 문제를 다 그 사건 탓으로 돌릴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를 
않아요.  당신은 씨디씨가 정부 기관이란 사실을 기억해야 해요. 
  랠프는 잠시 말을 멈추고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물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내 하나 물어보겠소. 
   그러세요. 
  마리사가 말했다.
   당신은 내가 당신의 친구이며 진심으로 당신이 잘되기를 바란다는 걸 믿나요?

  마리사는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거창한 서두를 꺼내는지 궁금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솔직히 이야기를 할 수 있겠군요.  난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씨디씨에 
있는 사람 중 일부가 당신이 너무 마음대로 일을 해버린다는 불만을 품고 있다는

걸 들었답니다.  내게 충고를 들어러 찾아온 건 아니라는 걸 잘 알지만 말이 
나온 김에 어쨌든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관료적인 체제 
하에서 살아나가려면 꼭 적당한 시기가 되기 전에는 자기 생각을 함부로 말하면 
안되는 법이에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당신은 입을 다물고 잇는 걸 좀 배워야 
해요. 
   에볼라에 관한 제 주장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 같군요. 
  마리사는 랠프가 바른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가 방금 한 
말에는 속이 상했다.  그녀는 그래도 나름대로 자신이 일을 잘해나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에볼라에 대한 당신 주장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해요.  당신은 전혀 팀 
플레이를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마리사가 도전적으로 캐물었다.
   굳이 그걸 알아낸다 해도 문제 해결에는 전혀 도움이 안돼요. 
   하지만 제가 묵묵히 입닥치고 앉아 있다고 해서 문제해결이 되는 것도 절대 
아닐 거예요.  제가 에볼라에 대한 씨디씨의 공식 입장이란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그것은 모순투성이인데다 미심쩍은 데가 너무도 많아요.
 
제가 어젯밤 허락도 없이 초밀폐 실험실에 들어가본 뒤에야 알아낸 것을
포함해서 
말이에요. 
   그게 뭔데요? 
   에볼라 바이러스는 지속적으로 변전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난 세 번의 미국내 감염에서 검출된 바이러스가 완전히 
동일하고, 더 더욱 놀랍게도, 1976년 자이레 감염을 일으켰던 바이러스와
똑같다는 
사실에 직면하고 있어요.  제게는 이 질병이 자연적으로 전파되는 것 같아 
보이지를 않아요. 
   당신이 맞을지도 모르죠. 
  랠프가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지금 정치적으로 아주 미묘한 상황에 잇으니 그에 걸맞도록 
처신을 해야 해요.  혹시라도 또 다시 에볼라 감염이 발생한다 해도, 물론
그렇게 
되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라지만, 난 씨디씨가 그 질병을 초기에 진압할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어요. 
   글쎄요, 하지만 거기엔 커다란 의문 부호를 찍어두셔야 할걸요. 
  마리사가 말했다.
   피닉스에서 나온 통계 자료들을 그리 고무적이지를 못해요.  삼백 아흔 일곱 
명이 목숨을 잃은데 반해 생존자는 불과 열세 명이라는 사실을 알기나 하세요? 
   나도 그 수치는 들어 알고 있어요. 
  랠프가 말했다.
   하지만 최초에 여든네 명이나 무더기로 발생했던 것을 감안하면 당신들은
정말 
훌륭하게 처리를 해낸 셈이에요. 
   글세, 만일 당신이 근무하는 이 병원이 그 지경이 되었다면  훌륭한 이란
말이 
나올 수 있을지 의문이군요. 
  마리사가 말했다.
   당신 말이 맞기는 해요. 
  랠프가 말했다.
   사실 또 어디선가 에볼라가 터져나올지 모른다는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요.  
어쩌면 그것이 스스로 씨디씨 공식 입장을 그렇게 믿고 싶어하는 이유인지
몰라요.  
만일 그 사람들 이야기가 맞는다면 위험은 물 건너간 것이니까요. 
   맙소사. 
  마리사는 갑자기 격앙된 소리를 질렀다.
   내 일에만 정신이 팔려 태드에 대해선 까맣게 잊어먹고 있었어요. 
두브체크는 
초밀폐 실험실로 날 데리고 들어간 사람이 태드라는 걸 알아 있음이 분명해요.  
빨리 돌아가서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아보아야겠어요. 
   보내주기는 하겠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랠프가 말했다.
   내일은 토요일이에요. 나랑 저녁이나 같이 합시다. 
   당신은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내일  저녁 초대 정말 고마워요. 
  마리사는 앞으로 몸을 기울여 랠프의 이마에 키스를 했다.  그는 너무도 
친절했다.  마리사는 그에게 조금만 더 매력을 느낄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이 했다.
  차를 몰고 씨디씨로 돌아가던 마리사는 두브체크에 대한 분노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자책과 직장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위축되어 버렸다.  랠프의

지적은 정곡을 찌른 것이었다.  사실 그녀는 팀 플레이와는 거리가 먼 행동들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가 바이러스 실험실에서 찾아낸 태드는 다시 새로운 에이즈 연구에 매달려

있었다.  에이즈는 아직도 씨디씨의 주 공략 대상이었다.  마리사의 모습을 보자

그는 짐짓 겁이 나는 듯이 양 팔로 얼굴을 가렸다.
   그렇게 심했어요? 
  마리사가 물었다.
   어찌 말로 형용할 수가 있겠어요?  아주 작살이 났어요. 
  태드가 말했다.
   정말 미안하게 됐어요. 
  마리사가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아냈대요? 
   나한테 묻더군요. 
   그래서 순순히 다 털어놓았단 말이예요? 
   그럼요.  난 거짓말을 할 생각이 없었어요.  나에게 당신이랑 데이트를 하고 
있는지도 묻더군요. 
   그래서 그렇다는 대답도 했어요? 
  마리사가 파랗게 질려 물었다.
   왜요, 그러면 안되나요? 
  태드가 말했다.
   그건 적어도 내가 길가는 사람 아무한테나 초밀폐 실험실 구경을 시켜주는 게

아니라는 사실은 알려주었을 거예요. 
  마리사는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어쩌면 모든 걸 다 떳떳하게 드러내는 편이 
최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태드의 어깨에 한 손을 올려
놓았다.
   나 때문에 그런 고초를 겪게 되어 정말 미안해요.  오늘 저녁 식사를 요리해 
드리면 좀 보상이 되겠어요? 
  태드의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그것 참 멋진 생각이군요. 

  저녁 여섯 시, 마리사와 태드는 슈퍼마켓을 향했다.  저녁 식단을 더블 램 
촙(양고기 구이)으로 정한 태드가 정육점 주인이 고기를 자르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마리사는 감자와 샐러드용 야채를 골랐다.
  식료품 꾸러미들이 마리사의 차 트렁크에 실리자 태드는 주류상에 들러 
포도주를 좀 사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는 바로 그녀의 집으로 갈 테니 미리

준비를 좀 해두고 있으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져버렸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지만 차창을 문지르는 리드미컬한 와이퍼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자니 그녀의 마음은 훨씬 더 밝아졌다.  모든 것을 드러내 놓으니 
한결 홀가분해진 기분이었다. 그녀는 월요일이 되면 무엇보다도 먼저 두브체크를

찾아가 정식으로 사과를 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둘 다 아이들도 아닌 터이니 
제대로 화해를 할 수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네 빵집에 들른 마리사는 나폴레옹(크림이나 젤리를 층층히 끼워넣은 
케이크)을 두 개 샀다.
  집 뒤쪽으로 차를 진입시킨 그녀는 식료품들을 들고 걸어야 하는 거기를 
최소로 줄이기 위해 부엌문을 향해 차를 후진시키기 시작했다.  해는 아직
지지도 
않았지만 짙은 구름에 벌써 날이 어두워진 것만 같았다.  어찌나 어두웠던지 
마리사는 맞는 열쇠를 찾아 한참이나 이것저것을 넣어보아야 했다.  그녀는 
팔꿈치로 전등을 켠 다음 커다란 갈색 봉투 두 개를 부엌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경보 장치를 끈 그녀는 왜 태피가 반기러 달려오지를 않았는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녀는 혹시 저드슨 부부가 강아지를 데려간 게 아닐까 의아해하며

강아지를 불러보았다.  그러나 집안은 부자연스러운 정적에 휩싸인 채 아무 
반응이 없었다.
  거실로 통하는 짧은 복도를 지난 그녀는 소파 옆에 놓인 전등의 스위치를
올렸다. 
   태-애-애-피.   
  그녀는 길게 강아지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혹시나 강아지들이 가끔 그렇듯

우연히 위층 침실 중 하나에 갇혀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계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바로 그때 창가 마룻바닥에 괴상한 각도로 목을 구부린 채
쓰러져 
있는 태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태피! 
  마리사는 비명을 지르며 강아지 옆으로 달려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녀가 
강아지에게 손을 대려는 순간 누군가가 뒤쪽에서 우악스럽게 그녀의 목을 
움켜쥐었다.  어찌나 센 힘으로 잡아채는지 방이 빙빙 도는 것만 같았다.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침입자의 팔을 붙든 그녀는 그것이 나무 토막처럼 억세고 
단단하다는 것을 느꼈다.  옷자락이 찢어지는 소리가 부엌을 진동시켰다. 
그녀는 
침입자의 얼굴을 보려고 몸을 뒤틀었지만 옴짝달싹을 할 수가 없었다.
  경보장치를 작동시키는  위급 버튼은 그녀의 재킷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쑤셔넣은 마리사는 스위치를 누르기 위해 필사적으로 버튼을 
더듬었다.  마침내 버튼을 누르는 순간 그녀는 머리에 일격을 맞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귀가 찢어지는 듯한 경보기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그때
침입자에게 
소리를 지르는 태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혼미한 상태로 몸을 틀자 
태드가 우람한 사내 하나와 뒤엉켜 싸우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지치지 않고 빽빽대는 경보기 소리에 양쪽 귀를 틀어막은 마리사는 현관으로 
달려가 벌컥 문을 열고 저드슨 부부에게 도와달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  
그녀는 마당을 지나 양쪽 집 마당 경계를 표시한 나지막한 관목들을 헤치고 
미친 듯 달음질을 쳤다.
  저드슨네 집에 가까워지자 저드슨이 현관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그에게 경찰을 불러달라고 고함을 친 다음 아무런 설명도 없이 황급히 몸을 돌려

자기 집으로 달려갔다.  경보기 소리는 가로수들을 타고 거리 전체에 메아리를 
치고 있었다.  한꺼번에 계단을 두 개씩 뛰어오른 그녀는 거실로 뛰어들었지만 
그곳은 텅 비어 있었다.  공포에 사로잡힌 마리사는 황급히 복도를 지나
부엌으로 
들어갔다.  뒷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그녀는 계기판으로 손을 뻗어 경보
장치를 
껐다.
   태드! 
  일층 손님방들을 들여다보며 마리사가 소리를 질러댔지만 태드는 어디에도 
보이지를 않았다.
  그때 저드슨이 벽난로용 쇠 작대기를 휘두르며 현관을 통해 달려 들어왔다.  
그들은 함께 부엌을 지나 뒷문을 나섰다.
   집사람이 경찰을 부르고 있어요. 
  저드슨이 말했다.
   친구가 하나 함께 있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어디 갔는지 알수가 없어요. 
  마리사가 불안감에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저기 누가 오는데요. 
  저드슨이 손을 들어 무엇인가를 가리켰다.
  소나무들을 헤치고 나오는 남자의 모습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태드였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마리사는 달려가 양팔로 목을 껴안고는 어떻게 된 일인지를 
물었다.  
   불행히도 내가 케이오를 당했어요. 
  그가 머리 옆 부분을 문지르며 말했다.
   일어나보니 그 녀석은 벌써 밖으로 나갔더군요.  미리 차를 대기시켜 
두었더라구요. 
  마리사는 태드를 부엌으로 데리고 가 젖은 수건으로 옆머리를 훔쳐냈다.  
다행히도 상처는 가벼운 찰과상에 불과했다.
   팔이 나무 몽둥이 갔더군요. 
  태드가 말했다.
   그만한 것이 다행이에요.  왜 따라갔어요?  혹시 총이라도 들고 있었더라면 
어쩔 뻔했어요? 
   나도 영웅이 되고픈 생각은 없었어요. 
  태드가 말했다.
   하지만 그 녀석은 그저 서류가방 하나만 들랑 들고 있었거든요. 
   옷을 아주 잘 차려 입었던데요. 
  태드가 말했다.
   그건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요. 
   그 사람을 식별해낼 수 있게소? 
  저드슨이 물었다.
  태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글세, 그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아요.  워낙 갑작스레 당한 일이라서... 
  멀리서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저드슨은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꽤 괜찮은 편이로구요. 
   태피 
  갑자기 강아지를 기억해낸 마리사가 소리를 지르며 다시 거실로 뛰어들었다.
  마리사는 몸을 숙여 미동도 않는 강아지를 조심스레 안아올렸다.  태피의 목이

힘없이 축 늘어졌다.  목이 부러졌던 것이다.
  그 순간까지 냉정을 유지하고 있었던 마리사는 미친 듯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한참 뒤에야 저드슨이 간신히 그녀를 달래 강아지를 내려놓도록 할 
수가 있었다.  태드는 그녀를 달래기 위해 그녀의 오열하는 작은 몸을 껴안았다.
  순찰차는 경광 등을 번쩍이며 집 앞에 멈추어섰다.  차 안에는 두명의 정복 
경관들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다행스럽게도 매우 친절하면서도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해주언T다.  침입 경로로 사용된 부서진 침실 창문을 발견해낸 그들은 
마리사에게 처음 경보 장치가 작동을 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그것은 
침입자가 유리를 깨고 들어와 경보 장치의 작동 스위치가 달린 샤시를 들어올릴 
필요가 없었기 때분이었다.
  다음 경찰은 그 사건에 대해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되는 정보들을 
꼼꼼하게 기록하기 시작했다.
  불행하게도 태드와 마리사는 그 사나이의 팔이 몹시도 딱딱했다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특별한 이야기를 할 만한 것이 없었다.  혹시 없어진 것은 없냐는 질문에

마리사는 아직은 모른다고 대답을했다.  그들에게 태피에 대해 이야기를 하던 
마리사는 다시 울음을 터뜨려버렸다.
  경찰은 혹시 병원에 가야 할지를 무었지만 그녀는 사양했다.  그러자 곧
연락을 
주겠다는 말을 남기고 그들은 떠나갔다.  저드슨 역시 마리사에게 혹시 필요한게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을 해줄 것과 태피의 시체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친절하게도 다음날 그녀의 부서진 창문을 
고쳐주겠다고 덧붙었다.
  갑자기 마리사와 태드는 식료품이 가득 들어 있는 두 개의 봉투와 함께 
덩그러니 부엌 식탁에 남게 되었다.
   정말 미안하게 됐어요. 
  마리사가 지끝거리는 머리를 문지르며 말했다.  
   바보 같은 소리 말아요 
  태드가 그녀를 나무라며 말했다.
   자, 나가서 저녁이나 먹을까요? 
   사실 전 외식을 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 있고 싶지도
않고... 
당신 집에 가서 저녁을 해먹으면 어떨까요? 
   대찬성이에요.  자, 갑시다. 
   잠깐 옷 좀 갈아입고 올게요. 
  마리사가 말했다.











    10


    5월 20일

  월요일 아침, 마리사는 마음이 몹시도 불편했다.  지난 주말은 정말 
기억하기조차 괴로웠다.  두브체크와의 충돌로 시작해 영문도 모르는 공격과 
태피의 죽음으로 이어진 지난 금요일 그녀 생애 최악의 날이었다.  공격을 받은 
직후 그녀는 정신적 충격을 최소화시키려고 노력했지만 그것은 결국 주말 내내 
그녀를 괴롭혔다.  그녀는 태드를 위해 저녁을 만들고 그의 집에 묵기는 했지만 
저녁 내낸 강아지를 죽였던 그 침입자에 대한 분노와 눈물로 시간을 보냈다.  
  태드와 저드슨 부부가 그녀를 달래주려고 무던 애를 썼건만 토요일도 마음이 
산란하기는 마찬가지 였다.  토요일 저녁, 마리사는 예정대로 랠프를 만났고
그는 
그녀에게 잠깐 휴가를 받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이 
직접 며칠간 그녀를 카리브해에 데려가겠다는 제안을 해오기까지 했다.  그는 
잠깐 휴가를 떠나는 것이 CDC 일을 진전시키는 데 도움이 될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리사가 한사코 계속 일을 하겠노라고 고집을 부리자 그에 에볼라 
말고 다른 연구에 전념해볼 것을 제안했지만 마리사는 거기에 대해서도 고개를 
저었다.
   좋아요, 그럼 적어도 더 이상 다른 파문은 일으키지 말아요. 
  랠프의 충고였다.  그의 생각으로 두브체크는 원래가 좋은 사람으로 아직도 
사랑하던 아내와의 사별이라는 심한 충격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는 마리사에게 그에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어보라고 부탁을 했다.  마리사는 
이번 한 번만 더 그렇게 하기로 수긍을 했다.
  두브체크와 또 다시 대면한다는 것이 두려웠지만 화해를 해보기로 굳게 결심을

한 마리사가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 그녀의 책상 위에는 벌서 또 한 통의 전갈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브체크가 보낸 것으로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그것은 
역학 정보원 계획의 담당자, 즉 그녀의 직속 상관인 닥터 카보나라로부터 온 
것이었다.  쿵쾅거리는 가슴으로 그녀는 봉투를 열어 즉시 사무실로
올라와달라는 
내용의 메모를 읽어내려갔다.  어쩐지 좋은 일은 아닐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
  닥터 카보나라의 사무실은 2층에 있었다.  혹시 파면되는 것은 아닌가 내심 
두려워하며 마리사는 그의 사무실로 향했다.  그의 널찍하고 안락해 보이는 
사무실 벽면에는 역학 정보원들이 현재 파견되어 업무를 보고 있는 장소들을 
표시한 커다란 세계 지도가 걸려 있었다.
  닥터 카보나라는 헝클어진 회색 머리칼로 유명한 조용하고 자상한 사람이었다.
 
그는 전화 통화를 하는 동안 우선 앉으라고 마리사에게 손짓을 해보였다.  
전화를 끊은 그는 따뜻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미소에 마리사는 약간 긴장을 
풀었다.  그는 놀랍게도 그녀가 당했던 불의의 습격과 애견의 죽음에 대한
동정심 
가득한 위로로써 말문을 열었다.  태드와 랠프, 저드슨 이외에는 아무도 그 일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난 당신에게 휴가를 좀 드릴 생각을 하고 있어요. 
  닥터 카보나라가 말을 이었다.
   그런 끔찍한 일을 당한 다음엔 기분 전환을 하는 것이 좀 도움이 되고는 
한답니다. 
   친절하게 배려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마리사가 말했다.
   하지만 저는 일을 계속하고 싶습니다.  바쁜 것이 충격을 잊는데 더 도움이 
될 것 같거든요.  게다가 저는 에볼라 감염이 아직은 끝나지 않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닥터 카보나라는 파이프를 물고 마치 무슨 신성한 종교의식이라도 되는 듯 
정성스레 불을 붙였다.  마음에 들 정도로 파이프에 불이 붙자 그가 입을
열었다.
   불행하게도 지금 그 에볼라 건에 대해선 여러 가지 어려운 점들이 많아요.  
오늘 부로 우리는 당신을 바이러스과에서 박테리아과로 전보시킬 생각이에요.  
사무실은 그대로 써도 돼요.  사실 이번에 가는 부서가 전 부서보다 사무실에서 
더 가까울 거예요.  난 이번 새로운 부서가 전번 부서만큼이나 흥미롭고 도전의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해요. 
  그는 열심히 파이프를 뻐끔거려 회색 연기 구름을 만들어냈다.
  마리사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녀가 보기에 이 전보는 해고와 다름이 없는 
것이었다.
   당신에게 온갖 구실을 다 댈 수도 있소만. 
  닥터 카보나가 말을 이었다.
   사실 이 문제는 씨디씨의 장이신 닥터 모리슨이 직접 지시하신 거예요. 
그분이 
손수 나서서 당신을 바이러스과에서 다른 곳으로 전보시켜 에볼라 문제에서 손을

떼게 하라고 부탁을 하셨어요. 
   전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어요. 
  마리사가 쏘아붙였다.
   그렇게 한 사람은 바로 닥터 두크체크예요. 
   아닙니다.  닥터 두브체크가 아니에요. 
  닥터 카보나라가 힘을 주어 말했다.  다음 그가 덧붙였다.
   물론 반대는 하지 않았지만 말입니다. 
  마리사는 코방귀를 뀌었다.
   마리사, 난 당신이나 닥터 두브체크 사이에 불행하게도 충돌이 있었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성적 희롱이란 말이 더 정확할 거예요. 
  마리사가 대들며 말 허리를 잘랐다.
   그 사람은 내가 자기를 거부해 자존심을 상한 다음부터 계속 나를 못살게만
굴고 
있어요. 
   당신이 그런 오해를 하다니 정말 안타깝군요. 
  닥터 카보나라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면 당신에게 일의 전모를 다 밝히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내 말 좀 잘 들어보세요.  닥터 모리슨은 연방 보건사회부 예산 심의

소위원회의 수석 멤버 중 하나인 캘빈 마크햄이란 하원의원에게서 전화를 
받았어요.  당신도 알다시피 그 소위원회는 우리 씨디씨에 예산을 좌지우지하는 
곳이에요.  당신을 에볼라 연구팀에서 쫓아내라고 고집을 부린 건 닥터
두브체크가 
아니라 바로 그 하원의원 양반이에요. 
  마리사는 다시금 말문이 막혔다.  미합중국 연방 하원의원이 씨디씨의 장에게 
직접 전화를 해 그녀를 에볼라 연구팀에서 빼버리라고 지시를 했다니,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마크햄 의원이 제 이름을 꼬집어 거명했단 말이에요? 
   그래요.  사실 나도 처음에는 귀를 의심했답니다. 
   하지만 왜요? 
  마리사가 물었다.
   거기에 대해서 아무런 설명도 없었어요. 
  닥터 카보나라가 말했다.
   게다가 그건 어떤 제안이라기보다는 명령에 가까웠어요.  우리한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난 당신이 이해해주리라고 생각해요. 
  마리사는 고개를 저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라도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그 말을 
들으니 휴가를 주신다던 것에 대해 생각이 바뀌는군요.  제가 보기에 결국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잘 생각했소. 
  닥터 카보나라가 말했다.
   내가 조치를 하리다.  지금 당장 말이오.  잠깐 쉬면 활력을 충전해 다시 
힘차게 매진할 수가 있을 겁니다.  우리가 당신의 일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강조해두고 싶군요.  사실, 우린 모두 당신의 눈부신 업적에 깊은 
감명을 받았답니다.  그 에볼라 감염 사건들은 장내 세균에 대해 연구하는 우리 
박테리아팀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아울러 난 당신이 닥터 해리에트 샘도르 
과장과 잘 지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요. 

  마리사는 흔들리는 마음으로 집을 향했다.  그녀는 사실 일에 몰두함으로써 
태피의 끔찍한 죽음을 잊으려 했었다.  하지만 해고를 당할 확률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던 반면, 휴가를 주리라고는 꿈에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는 
랠프에게 카리브해 여행이 진심이었는지를 물어볼까 하다가 자신이 과연 진전된 
관계를 맺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 확실치가 않았기 때문에 그만두었다.
   태피의 호들갑스러운 반김이 없는 집은 너무도 조용하기만 했다.  마리사는 
곧장 침대로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면 우울한 기분에 
두손을 들고 항복해버리는 것밖에는 안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사실 자신이 에볼라 연구팀에서 떨려나게 된 경위에 대해 닥터 
카보나라가 늘어놓았던 이야기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다.  아무리 
하원의원이란 사람이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했다고 해도 이렇게 빨리 조치가
되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다.  조사만 해보면 이 마크햄이란 사람이
두브체크와 
아주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쉽게 알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푹신한 베개들이 유혹의 손짓을 하는 침대를 바라보던 마리사는 툭하면 베개를

싸매고 드러눕던 평소의 자신에게서 팔티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로저가 떠난
다음 
겪었던 그 우울증의 기억이 아직도 너무나 기억에 생생했다.  그때처럼 만사를 
포기하는 대신 그녀는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해야 된다고 강력히 다그치기 
시작했다.  문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였다.
  기분 전환으로 빨래나 좀 해볼까 싶어 더러운 옷가지들을 치우던 마리사의
눈에 
언제라도 떠날 수 있도록 챙겨둔 여행가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마치
무슨 
계시라도 되는 것 같았다.
  충동적으로 전화기를 집어든 그녀는 델타 항공사로 전화를 걸어 워싱턴 디씨로

향하는 다음 비행기에 자리를 예약했다.
   문 바로 바깥쪽에 안내 창구가 하나 있을 겁니다. 
  하원의원들의 사무실로 쓰이는 캐넌 빌딩을 가리키며 자리에 밝은 택시
운전사가 
말했다.
  일단 건물 내로 들어가자 마리사는 정복의 보초병이 핸드백의 내용물을 
검사하는 동안 금속탐지기를 지나야 했다.  마크햄 의원의 사무실 위치를 물은 
그녀는 5층에 위치하고 있다는 대답을 들을 수가 있었다.  조금 복잡해
알아듣기가 
어려운 위치 안내-엘리베이터는 4층까지밖에 운행하지 않는 것 같았다-를 따르던

마리사는 건물 내부가 전체적으로 몹시 누추하다는 데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엘리베이터의 벽면들은 거의 낙서들로 뒤덮여 있다시피했다.
  마리사는 어렵지 않게 마크햄의 사무실을 찾아낼 수가 있었다.  사무실 문이 
살짝 열려 있어서 혹시 이렇게 갑자기 들어가 당황하게 만들면 효과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는 그대로 사무실로 들어가버렸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의원은 출타중이었다.
   지금 휴스턴에 계셔서 적어도 사흘은 돌아오시지 않을 텐데요.  시간 약속을 
정해 드릴까요? 
   글쎄요. 
  만날 수 있는지 여부는 둘째로 치더라도 그가 워싱턴에 있는지 조차도 확인을 
해보지 않고 아틀란타에서부터 비행기를 타고 날아왔다는 것이 조금 바보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럼 의원님의 행정 비서관 에이브럼스씨하고 이야기를 해보시겠어요? 
   그게 좋을 것 같군요. 
  마리사가 말했다.  사실 그녀는 어떻게 마크햄과 대면할 것인지 조차 확실히 
생각을 해둔 바가 없었다.  만일 그녀가 단도직입적으로 두브체크의 부탁을 받아

그녀를 에볼라 연구 계획에서 쫓아냈는지를 묻는다면 그는 분명 한사코 부인할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녀가 아직도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궁리를 하는 동안 
성실해보이는 젊은 남자 한 명이 다가와 마이클 에이브럼스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네, 무슨 일을 도와드릴까요? 
  그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며 물었다.  그는 스물 다섯쯤 되는 나이에 검은

색에 가까운 짙은 머리칼, 그리고 저렇게 순진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의심이 갈

정도로 천진무구한 함박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어서 둘이서 조용히 이야기할 만한 데가 있을까요? 
  마리사가 그에게 물었다.  그들은 비서 책상 바로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물론입니다. 
  그는 그녀를 인도해 한쪽 귀퉁이에는 성조기가, 그리고 또 한쪽 귀퉁이에는 
텍사스주의 기가 놓인 거대한 마호가니 책상이 자리를 잡고 있는 널찍한
하원의원 
사무실로 들어갔다.  사무실의 벽면은 대통령들을 포함한 각계의 유명인사들과 
악수를 나누는 마크햄 의원의 액자에 든 사진들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제 이름은 닥터 불루멘탈입니다. 
  의자에 앉자마자 마리사가 말을 시작했다.
   제 이름 들으니 기억나는 것 없으세요? 
  마이클은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그럴 만한 이유가 있나요? 
  그가 친근한 태도로 물었다.
   어쩌면요. 
  말을 어떻게 이어나갈지 난감해진 마리사의 대답이었다.
   휴스턴에서 오셨나요? 
  마이클이 물었다.
   저는 아틀란타에서 왔어요.  씨디씨에서 말이에요. 
  마리사는 혹시라도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나 주의깊게 그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눈에 띄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씨디씨란 말이죠. 
  마이클이 말했다.
   여기 공무로 오신 건가요? 
   아니에요. 
  마리사는 솔직하게 말을 했다.
   저는 그저 마크햄 의원과 센터가 무슨 관계인지 궁금해서 들른 것 뿐이에요. 

의원님께서 씨디씨에 각별한 관심이 있으신가보죠? 
   글세 그  각별한 이란 게 적당한 단어일지는 잘 모르겠군요. 
  마이클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의원님께서는 의료나 보건 분야 모두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답니다.  실제로 
마크햄 의원께서는 다른 어떠한 하원의원들보다도 더 많은 의료 관계법안을 
제창하셨어요.  최근에는 외국 의과대학 졸업자들의 이민을 제한하는 의안이며, 
의료 과실에 대한 강제 조정안, 의료 과실 보상액의 상한 제정안, 에이치엠오
(보건 유지 기구)에 대한 연방 보조금 제한에 관한 안, 또... 
  마이클은 숨을 돌리기 위해 잠시 말을 멈추었다.
   정말 대단하시군요. 
  마리사가 말했다.
   정말 미국 의료계에 관심이 지대하신 모양이로군요. 
   그렇습니다. 
  마이클이 동의를 표했다.
   그분의 아버님께서는 아주 뛰어난 개업의셨답니다.
   하지만 아시는 한은...씨디씨의 어떤 특정 계획과는 특별한 관계가 없으시다 
이거죠? 
   제가 아는 한은 그렇습니다. 
  마이클이 말하며 순진무구한 함박 웃음을 지어보였다.
   시간을 내주셔서 정말 고마웠어요. 
  몸을 일으키며 마리사가 말했다.  직감적으로 그녀는 마이클 에이브럼스에게는

더 이상 알아낼 것이 없으리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다시 길거리로 나온 마리사는 다시금 실망감에 빠졌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무엇인가 적극적인 대처를 하고 있다는 만족감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마크햄이 돌아올 때까지 사흘 동안 워싱턴에 죽치고 있을지 
아니면 그냥 아틀란타로 돌아가야 할지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정처없이 그저 국회 의사당 쪽을 향해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벌써 
조지타운에 호텔방을 잡아놓은 터였으니 그냥 눌러 앉지 못할 이유도 없었지만 
국회 의사당의 당당한 위용을 바라보자 아무리 두브체크의 친구라 해도 왜
마크햄 
같은 고위직 사람이 자신과 같은 미미한 존재에게까지 신경을 쓰는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따.
  갑자기 어떤 생각 하나가 섬광처럼 그녀의 머리를 스쳤다.  손을 흔들어
택시를 
잡은 그녀는 재빨리 올라타 운전사에게 말했다.
   연방 선거 관리 위원회로 데려다 주세요.  그게 어딘지는 아시죠? 
  잘생긴 흑인 운전사는 몸을 돌려 대답을 했다. 
   아가씨, 만일 이 도시에서 내가 모르는 데가 있다면 공짜로 데려다
드리겠어요. 
  그 대답에 마음을 놓고 마리사는 뒤로 기대앉았다.  15분 뒤 그들은 워싱턴 
다운타운 중에서도 좀 초라한 곳에 위치한 단조로운 사무실 건물 앞에 차를
멈추었다.
  제복을 입은 수위 하나가 마리사에게 들어가기 전 방명록에 이름을 기재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을 뿐 특별한 제재는 없었다.  어떤 부서를 찾아가야 할지
끝내 
결정을 내리지 못했던 마리사는 결국 1층 아무 사무실로나 들어가버렸다. 
그곳에는 
회색 철제 책상뒤에 네 명의 여자 직원들의 바쁘게 타이프를 쳐대고 있었다.
  마리사가 다가가자 그 중 하나가 고개를 들고 혹시 도울 일이 있는지를
물었다.
   어쩌면요. 
  마리사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전 지금 어떤 하워의원님의 선거 비용에 관심을 가지고 있답니다.  선거
비용은 
공공 기록으로 보전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럼요, 물론입니다. 
  그녀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관심이 있으신 쪽이 헌금 내역인가요 아니면 지출 명세 쪽인가요? 
   헌금 쪽인 것 같군요. 
  마리사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대답했다.
   하원의원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데요? 
   마크햄이에요. 
  마리사가 말했다.
   캘빈 마크햄. 
  그 여직원은 검은 루스 리프 책자로 뒤덮인 둥근 책상 위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책자를 찾아낸 그녀는 엠자 페이지를 펼치더니 각 의원들 이름 뒤에 붙어

있는 번호가 해당 마이크로필름카세트 번호라고 설명을 해주었다.  다음 그녀는 
마리사를 엄청난 크기의 카세트 장으로 데리고 가 해당 카세트를 꺼낸 다음
그것을 
마이크로필름 판독기에 걸었다.
   어떤 선거에 관심이 있으시죠? 
  그녀가 자료 번호를 입력시킬 준비를 하며 물었다.
   최근 게 좋을 것 같군요. 
  마리사가 말했다.  그녀는 아직도 자신이 무엇을 찾아내고 싶은지 알지를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어떤 방법으로든 그저 마크햄과 두브체크, 또는 씨디씨가
관계를 
갖고 있다는 사실만을 알아내고 싶었다.
  갑자기 판독기에 불이 들어오며 자료들의 영상이 비치기 시작하는데 어찌나 
지나가는 속도가 빨랐던지 그저 지속되는 희미한 그림자로밖에는 인식되지를 
않았다.  그러자 그 여직원이 버튼을 하나 누르며 마리사에게 그 자료 영상들의 
속도를 어떻게 조절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었다.
   만일 원하신다면 복사 한 장에 5센트예요.  여기다 넣으시면 돼요. 
  그녀는 동전 투입구를 가르켰다.
   만일 문제가 생기면 소리만 지르세요. 
  새로이 보는 그 마이크로필름 판독기라는 기계와 그것을 통해 접하게 된 정보 
모두가 마리사의 흥미를 자극했다.  마이큼의 적지 않은 재선 비용에 일조를 한 
사람들의 이름과 주소를 살펴보면 마리사는 그가 자신의 지역구인
텍사스주뿐만이 
아니라 전국적인 독지가들의 재정후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당 
대변인이나 당 자금 위원회 의장도 아닌 그에게 이런 전국 규모의 후원이 
있다는 게 어쩐지 좀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또 헌금을 낸 사람 
중의 상당수가 의사들이라는 사실도 아울러 알 수 있었는데 그것은 마크햄의 
보건입법 활동에 비추어 충분히 짐작이 되는 일이었다.
  헌금자들의 이름은 알파벳 순으로 정리되어 있었는데 주의깊게 디자란을 
살펴보아도 두브체크의 이름은 없었다.  처음부터 미친 생각이었어.  그녀가 
자신을 타일렀다.  시릴이 무슨 돈이 있어 권력 있는 국회의원을 주무르겠어?  
마크햄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지도 모르지만 재정 관계는 아닐 것이 분명해
보였다.  
마리사는 웃음을 터뜨렸다.  내 주제에 태드보고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비웃었다니!
  그렇지만, 그녀는 나중에 시간이 날 때 읽어나 볼 생각으로 모든 헌금자들의 
명단을 복사해 두었다.  그녀는 아이를 여섯 둔 어떤 의사 하나가 자신이 한 
사람에게 허용되는 최대 금액의 헌금을 했음은 물론, 각 가족원들의 이름으로도 
상한액의 헌금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말 대단한 지지자였다.
  개인 헌금자들 명단 뒤로는 지지 단체들의 명단이 적혀 있었다.  그중  의료인

하원 정치 행동 위원회 라는 이름의 의사 단체는 어떠한 텍사스주 석유 
회사보다도 많은 헌금을 한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었다.  이전의 선거 
기록들에서도 마리사는 같은 이름을 발견해낼 수가 있었다.  그것은 상당한 재정

능력을 갖추고 있는 단체가 분명했는데 마크햄을 열성적으로 지지하고 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여직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마리사는 밖으로 나가 택시를 잡아탔다.  
택시가 러시아워의 교통 체증을바져나가는 동안 마리사는 다시 각 헌금자의 
이름이 나열된 명단을 훑어내려갔다.  갑자기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 종이들을 
놓칠 뻔했다.  페이지 한 중간에서 난데없이 닥터 랠프 헴스턴의 이름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연의 일치일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는 세상이 얼마나 좁은 것인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시 
곱씹어보자 그리 놀랄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랠프에 대해 그녀가 항상 
골칫거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그의 너무도 뚜렷한 보수성향이었다.  어쩌면
마크햄 
같은 하원의원을 지지하는 게 그의 본색에 가까운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그녀가 기분좋게 호텔 로비에 들어선 것은 다섯 시 반이나 되어서였다.  
자그마한 신문 판매대를 지나던 그녀의 시선은 워싱턴 포스트지의 머리 기사에 
얼어붙은 듯 고정이 되어버렸다.
   에볼라 또 다시 미국을 강타! 
  자석에 끌린 쇠붙이처럼 그녀는 로비를 달음질쳐 건너갔다.  그녀는 재빨리 
신문을 들고 헤드라인 밑을 읽어내려갔다.
   새로운 천형, 동성애의 도시를 불안에 떨게 하다. 
  신문 값을 낸 그녀는 엘리베이터로 걸음을 옮기며 계속 기사를 읽어내려갔다. 

필라델피아 바로 외곽에 있는 펜실베니아주 애빙턴의 버슨 병원에 에볼라 
출혈열로 추정되는 환자 세 명이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기사는 그 자그마한 
외곽 도시에 번진 광범위한 공황상태를 상세히 기술하고 있었다.
  자신이 묵은 층의 버튼을 누르던 마리사는 두브체크가 이번 감염이 단시간
내에 
진압이 될 것이므로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 것이 인용되어 있음을 
보았다.  씨디씨가 지난 세 번의 감염 사태를 통해 그 바이러스를 제어하는
방법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필라델피아의 게이(남자 동성 연애자) 권리 운동지도자 중 하나인 피터 카보는

제리 팔웰이 단 한 명의 동성 연애자도 에이즈 바이러스와 아프리카 같은
동네에서 
건너온 이 새롭고 훨씬 위험한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특기해주기 바란다고 말했던 것으로 인용되어 있었다.
  방으로 돌아온 마리사는 안쪽의 화보면을 펼쳤다.  버슨 병원 정문을 가로막은

경찰 바리케이드의 모습이 그녀가 겪었던 피닉스 사태를 상기시켜주었다.  
그녀는 기사를 다 읽은 다음 신문을 옷장 위에 내려놓고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보았다.  비록 휴가중이고, 또 공식적으로는 에볼라 연구팀에서 쫓겨난 
몸이긴 했지만 그녀는 자신이 직접 현장으로 달려가 정보를 얻어내야만 직성이 
풀릴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에볼라에 대한 강한 집착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녀는 
필라델피아의 워싱톤에서 기차로도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라는 것으로 자신의 
결정을 합리화시켜 버렸다.  마리사는 방안에 늘어놓았던 소지품들을 챙이기 
시작했다.

  필라델피아 역에서 기차를 내린 마리사는 애빙턴까지 택시를 탔는데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비용이 많이 나왔다.  다행히도 그녀는 지갑에 약간의 여행자 
수표를 가지고 있었는데 운전사가 아무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버슨에 
도착하자 그녀는 아까 신문에서 보았던 바리케이드와 맞닥뜨리게 되었다.  
바리케이드를 지나기 전 그녀는 기차 하나에서 혹시 검역 격리가 선포되었는지를

물었다.
   아직은 아니에요. 
  경찰은 겸역 격리가 선포될 때를 대비해 대기하고 있는 것이었다.  마리사는 
경비원 중 한 명에서 자신의 씨디씨신분증을 펼쳐보였다.  그는 아무말 없이 
그녀를 들여보내주었다.
  그 병원은 엘에이나 피닉스에서 에볼라가 발생했던 장소들과 비슷한 멋진 
신축 건물이었다.  안내 창구를 향해 걸음을 옮기던 마리사는 도대체 왜 그 
바이러스가 뉴욕이나 보스턴 시내의 우중충한 낡은 병원이 아닌 이런 우아하고 
보기 좋은 신축 병원들만 골라서 터져나오는 것처럼 보이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로비에는 사람들이 잔뜩 서성거리고 있었지만 그녀가 피닉스에서 보았던 그런 
아수라장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람들은 불안해 보이기는 했지만 공포에 질린
것은 
아니었다.
  안내창구를 담당하던 사람은 마리사에게 환자들 모두가 6층에 있는 격리
병동에 
수용되어 있다고 말해주었다.  마리사가 종종걸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향하자 등 
뒤에서 그가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죄송하지만 거긴 방문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마리사는 다시 자신의 씨디씨 신분증을 꺼내 펼쳐보였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제일 끝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십시오.  6층까지 가는

건 그것뿐입니다. 
  마리사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간호사 한 명이 즉시 보호의를 걸칠 것을 
요청하며 다가왔다.  그녀는 마리사에게 무슨 용건으로 왔는지 묻지조차 않았다.
 
마리사는 반가운 마음으로 마스크를 걸쳤다.  그것은 바이러스에 대한 보호는 
물론이고 아울러 익명성도 보장해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죄송하지만 혹시 씨디씨에서 나온 의사 선생님들 좀 뵐 수 있을까요? 
  그녀의 질문에 간호사실 안에서 잡담을 나누던 두 사람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 오신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었거든요. 
  둘 중 나이가 더 들어보이는 간호사가 입을 열였다.
   씨디씨에서 오신 분들은 한 시간쯤 전에 떠나셨습니다. 
  다른 간호사의 말이었다.
   원장님 사무실로 가신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던데요.  거길 한 번 가보시면 
어떻겠어요? 
   괜찮아요. 
  마리사가 말했다.
   환자들은 어때요? 
   이젠 일곱 명이랍니다. 
  첫 번째 여자가 말했다.  다음 그녀는 마리사의 신분을 캐물었다.
   저는 씨디시에서 왔어요. 
  그녀는 교묘하게 이름을 얼버무리며 대답을 했다.
   그쪽은 어떻게 되시지요? 
   저희들은 원래부터 이 병동에 배정되어 있던 간호사들입니다.  저희들은 병에

대한 저항력이 떨어져 있는 환자들을 격리하는 데만 익숙했지 이런 치명적인 
전염병 환자들 간호는 처음이에요.  당신들이 와주어서 얼마나 마음이 놓이는지 
몰라요. 
   처음에는 다 그렇게 겁이 나기 마련이죠. 
  마리사는 대담하게 간호사실로 들어서며 위안의 말을 건넸다.
   하지만 제 말을 들어보시면 혹시라도 마음이 좀 편해지실지 모르겠군요. 
사실 
전 지난 세 번의 감염 사건 모두에 관여를 했었지만 전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답니다.  차트들은요?  여기 있나요, 아니면 병실에? 
   여기 있습니다. 
  연장자인 듯한 간호사가 한구석에 놓인 선반을 가리키며 말했다.
   환자들 상태는 어때요? 
   최악이에요.  그게 적절한 의학 용어가 아니라는 걸 잘 알지만 전 이이상 
심하게 아픈 사람들을 본 적이 없답니다.  저희들이 옆에 붙어앉아 특별 간호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무리 온갖 노력을 다   아부어도 계속 상태가 나빠지기만 
하는 거예요. 
  간호사는 마리사가 앉아 있는 곳으로 건너와 차트들 중 하나를 마리사에게 
건네주었다.
   닥터 알렉시가 첫 환자였어요.  상태가 워낙 나빠 오늘을 넘긴게 거의 기적일

정도예요. 
  마리사는 차트를 펼쳤다.  차트에 기술된 증상들은 이제는 너무도 익숙해진 
것들이었지만 그곳에는 최근의 외국 여행이라든지 동물과의 접촉여부, 그리고 
지난 세 번 감염 사건들의 환자들과의 접촉 여부 등 그녀가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들은 하나도 적혀 잇지 않았다.  하지만 알렉시는 병원의 안과 과장이었다.  
마리사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럼 결국 두브체크가 맞는단 말인가?
  병동에 얼마동안이나 머무를 수 있을지 자신을 할 수가 없으므로 마리사는
즉각 
환자들을 살펴보기로 했다.  1회용 보안경과 보호의를 한 겹 더 걸쳐입은 
마리사는 병실로 들어섰다.
   닥터 알렉시는 의식이 있으신가요? 
  그녀가 침대 곁을 지키고 있던 마리라는 이름의 특별 간호 담당에게 물었다.  
환자는 똑바로 누워 입을 벌린 채 물끄러미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피부는 마리사가 죽기 직전의 환자들에게서 자주 보았던 누런 색조를 띠고
있었다.
   왔다갔다 하세요. 
  간호사의 대답이었다.
   잠깐 말씀을 하시는가 하면 곧 반응이 없어지고는 해요.  또 혈압이 떨어지기

시작했어요.  전 구태여 응급 소생술을 할 것까지는 없다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마리사는 불안한 듯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는 항상환자를 포기 해버리라는 
명령에는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이다.
   닥터 알렉시. 
  마리사가 부드럽게 팔을 건드리며 환자의 이름을 불렀다.  천천히 그는 마리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리사는 그의 오른족 눈 밑에 커다란 멍 자국이 있는 
것을 보았다.
   제 말이 들리세요, 닥터 알렉시?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지난 몇 달전 샌디에고에서 열렸던 안검 수술 세미나에 참석하셨던 적이

있으신가요? 
  그는 간신히  네 라는 대답을 했다.
  어쩌면 두브체크가 정말로 맞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엔 너무도 판에 박은 듯 같은 일이 거듭되고 있었다.  매번 감염이

터져나올 때마다 최초의 환자는 샌디에고 세미나를 다녀온 안과 의사가 아닌가.
   닥터 알렉시. 
  마리사는 신중하게 단어들을 선택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엘에이나 세인트루이스, 피닉스에 친구가 있으세요?  최근 그 사람들을 
만나신 적이 있으세요.? 
  하지만 마리사가 질문을 마치기도 전에 그는 다시 혼수상태에 빠져버렸다.
   계속 저런 상태에서 왔다갔다 하셨다니까요. 
  혈압을 재기 위해 침대 반대편으로 돌아가며 간호사가 말했다.
  마리사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잠시 망설였다.  어쩌면 몇 분 기다려 다시

질문을 해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환자의 눈 
밑에 난 타박상으로 관심을 돌린 마리사는 간호사에게 혹시 그것이 어떻게
생기게 
되었는지를 아는지 물어보았다.
   강도를 당했다고 사모님이 말씀하시더군요.  혈압이 더 떨어졌어요. 
  그녀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발병 직전에 강도를 당했다구요? 
  마리사가 물었다.  그녀는 자신이 제대로 들었는가를 재삼 확인해 보고
싶었다.
   네.  제가 듣기로는 저항도 하지 않았는데 강도가 다짜고짜 얼굴을 두들겨 
팼다던 것 같아요. 
  바로 그때 인터폰이 켜지며 소리가 흘러나왔다.
   마리, 당신 병실에 씨디씨에서 오신 선생님이 계신가요? 
  간호사는 스피커에서 눈을 들어 마리사를 한 번 쳐다보더니 다시 스피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네, 계신데요. 
  인터폰이 아직 켜져 있음을 암시하는 나지막한 칙-칙- 소리위로 어떤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닥터 알렉시의 병실에 계시답니다. 
  또 하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내가 내려가 그녀를 직접 만나볼 테니 말이오. 
  마리사의 가슴은 방망이질을 치기 시작했다.
  두브체크!  그녀는 마치 몸을 숨길 곳이라도 찾듯 황망히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녀는 간호사에게 혹시 다른 출입구가 있는지를 물어볼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그렇게 한다면 정말 이상해보일 것이 분명했고 게다가 벌써 너무 늦어버리고 
말았다.
  시릴이 보안경을 조정하며 방안으로 들어섰다.
   마리? 
  그가 물었다.
   접니다. 
  간호사가 말했다.
  마리사는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지만 두브체크의 억센 손이 그녀의

팔을 움켜쥐는 바람에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얼마나 많은 규칙들을 
위반했는지 잘 아는 마리사는 두브체크의 반응이 무서워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는 그렇게밖에는 할 수가 없었던 것에 대해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도대체 당신 여기까지 와서 무슨 짓거리를 하고 있는 거야? 
  그가 으르렁거렸다.
   다른 건 몰라도 환자 앞에서는 제발 이러지 마세요. 
  몸을 뒤튼 끝에 팔을 빼낸 마리사가 병실 밖으로 나서며 날카롭게 말했다.  
두브체크는 곧바로 그녀의 뒤를 쫓았다.  그녀는 보안경과 보호의 장갑을 벗어 
수거함에 던져넣었다.  두브체크도 똑같이 벗어던졌다.
   당신, 명령 위반을 취미로 삼았소? 
  그가 간신히 분노를 억누르며 다그쳐 물었다.
   이게 무슨 장난인 것 같아 보이냔 말이오! 
   거기 대해선 이야기를 하지 않는 편이 좋겠어요. 
  마리사가 말했다.  그녀는 지금 당장은 두브체크와 도저히 이성적인 대화를 
진행할 수가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엘리베이터를 향해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하지 않는 편이 좋다니 도대체 무슨 뜻이야? 
  두브체크가 소리를 질렀다.
   당신, 도대체 당신이 뭔 줄 알고 이러는 거야? 
  마리사의 팔을 움켜쥔 그는 마리사를 당겨 돌려세웠다.
   제 생각엔 당신이 조금 진정하신 다음에 이야기를 하는 편이 나을 것 같군요.

  마리사는 가능한 한 침착하게 응수를 했다.
   진정? 
  두브체크는 마침내 폭발을 해버리고 말았다.
   이것 봐, 아가씨.  난 내일 아침 당장 닥터 모리슨에게 전화를 해서 휴가
대신 
정직이나 파면시켜버리라고 요구를 하겠어.  만일 거절한다면 공청회를 
소집해달라고 요구할 거야. 
   마음대로 하세요. 
  간신히 감정을 억누르며 마리사가 말했다.
   이 에볼라 감염 사건에는 어딘지 수상한 구석이 있어요.  그리고 난 당신이 
자꾸만 그것을 외면하려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쩌면 공식적인 청문회가
우리가 
바로 필요로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내던져버리기 전에 어서 썩 꺼져버리란 말이야. 
   그렇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에요. 
  마리사가 말했다.
  병원을 나서던 마리사의 온몸이 사시나무 떨 듯 덜덜 떨리고 있었다.  싸움을 
천성적으로 싫어하는 그녀였건만 또다시 정당한 분노와 모욕 사이에서 갈가리 
찍기게 된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에볼라 감염의 진짜 원인에 한층 더 가까이 다가와 있다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가 있었지만 아직 다른 사람은커녕 자신도 만족하게 생각할 만한 
가설을 확립해놓지 못하고 있었다.
  마리사는 공항을 향하는 도중 계속 적당한 가설을 세워보려고 안간힘을 
써보았지만 그녀의 머릿속을 맴도는 것은 두브체크와의 그 생각하기조차 싫은 
끔찍한 조우뿐이었다.  그녀는 쉽사리 그 일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시릴이
화를 
내는 것도 나무랄 수만은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매번 지표 증례들이 발병 직전 강도를 만나 폭행을 당한적이 있다는 
이상한 사실을 말해줄 수 없었던 것만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아틀란타로 돌아가는 항공편을 기다리는 동안 마리사는 랠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전화를 해도 안 받길래 걱정이 되어 그녀의 집에까지 가보았다는 말을
했다.  
그간 어디 있었는지를 물은 랠프는 자신에게 말도 없이 아틀란타를 떠났다는 
것에 짐짓 화를 내는 척했다.
   워싱턴에 갔다가 지금은 필라델피아에 있어요. 
  마리사가 말했다.
   지금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에요. 
   그 새로운 에볼라 감염 때문에 필라델피아까지 간 거요? 
   맞아요. 
  마리사가 말했다.
   지난번 만났던 뒤로 새로 생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 와서는 안될 데를 왔다가 두브체크한테 붙들렸는데 그 사람이 화가

나서 펄펄 뛰고 있다는 거예요.  어쩌면 직장에서 쫓겨날지도 모르겠어요.  혹시

경험이 좀 부족한 소아과 의사를 써줄 만한 데를 알고 계세요? 
   그건 문제 없어요. 
  랠프가 킬킬거리며 말했다.
   내가 여기 대학병원에 자리를 하나 얻어줄 수도 있으니까요.  당신 항공편 
번호가 어떻게 되죠?  내가 공항에 나가서 데려와줄게요.  나한테까지도 숨기고 
비행기를 타야 했던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고 싶군요. 
   고맙기는 하지만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어요.  공항에 차를 세워두었거든요. 
   그럼 갈 때 우리집에 들르도록 해요. 
   늦을지도 모르는데요? 
  텅 빈 자기 집에 혼자 쓸쓸히 있으니 어쩌면 랠프와 함께 있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마리사가 말했다.
   씨디씨에 잠깐 들러볼 생각이거든요.  두브체크가 없는 동안 할 일이 있어요.

   그건 별로 좋은 얘기처럼 들리지가 않는군요. 
  랠프가 말했다.
   도대체 또 무슨 일을 벌일 생각이오? 
   절 믿어주세요.  별 건 아니에요.  초밀폐 실험실에 잠깐 들러보고 싶을 
뿐이에요. 
   당신은 허가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래도 어떻게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내가 보기엔 씨디씨에 가지 않는 게 나을 것 같군요. 
  랠프가 말했다.
   그 실험실에 들어갔던 게 애당초 당신이 겪고 있는 골치아픈 문제들의 
원인이었잖아요. 
   저도 알아요.  하지만 어쨌든 그렇게 할 거예요.  이 에볼라 일 때문에
정신이 
돌아버리겠거든요. 
   그럼 마음대로 해요.  하지만 꼭 우리집에 들르도록 해요.  늦더라도
기다리고 
있겠어요. 
   랠프? 
  용기를 짜내며 마리사가 물었다.
   혹시 마크햄이란 하워의원을 아세요? 
  잠시 침묵 끝에 그가 대답했다.
   그 사람을 알아요. 
   그 사람 선거 비용에 헌금을 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그건, 이게 장거리 전화라는 사실치고는 정말 이해하기가 힘든 질문이로군요.

   그러신 적이 있나요? 
  마리사가 고집스럽게 물었다.
   그랬지요. 
  랠프가 말했다.
   몇 번 그런 적이 있어요.  난 보건 의료분야에 대한 그 사람 주장의 상당 
부분을 지지하는 입장이지요. 
  저녁 때 만나기로 다짐을 한 마리사는 편안한 마음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마크햄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도 기분이 좋았지만 랠프가 숨김없이
자신의 
지원에 대해 털어놓은 것에는 더 더욱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일단 비행기가 이륙을 하자 그녀는 다시금 불안한 마음에 사로잡혔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서서히 윤곽을 잡아가던 가설이 너무도 무서운 것이었기에 
그녀는 그것을 구체화하기가 두려웠던 것이다.
  더 더욱 끔찍했던 것은 그녀가 겪어야 했던 가택침입 사건과 사랑하는 강아지 
태피의 죽음이 처음 그녀가 생각했던 것처럼 우발적인 범행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11


    5월 20일, 저녁

  공항을 출발한 마리사는 곧장 태드의 집을 향했다.  거의 아홉 시가 다
되었지만 
그냥 들르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그녀는 일부러 전화를 하지 않았다.
  그의 집 앞쪽에 차를 댄 마리사는 이층 거실에 불이 훤히 켜져 있는 것을
보았다.
   마리사! 
  한 손에 의학 저널을 든 채 문을 연 태드의 입이 딱 벌어졌다.
   도대체 어쩐 일이에요? 
   주인 양반을 뵙고 싶어서요. 
  마리사가 말했다.
   전 어떤 땅콩 버터를 즐겨드시는지 조사를 하러 나왔답니다. 
   농담이시겠지요. 
   물론 농담이에요.  날 들어가게 해줄 건가요, 아니면 밤새 이렇게 문간에 
세워두기만 할 건가요? 
   미안해요. 
  태드가 옆으로 비켜서며 말했다.
   어서 들어오세요. 
  그의 집 안으로 들어가면서 마리사는 그의 출입 카드가 평소와 다름없이 현관 
선반 위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하루 종일 전화를 했었어요. 
  태드가 말했다.
   도대체 어딜갔었어요? 
   외출을 좀 했었어요. 
  마리사가 얼버무리며 말했다.
   오늘 역시 대단히 재미있는 하루였어요. 
   특수 병원체 부서에서 전보를 당했다면서요.  그 다음에는 휴가를 갔다는 
소문이 들리더군요.  도대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거예요? 
   나도 알았으면 좋겠어요. 
  마리사가 태드의 나지막한 소파에 몸을 던지며 말했다.  어디선가 태드의 얼룩

고양이가 튀어나오더니 그녀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필라델피아 건은 어때요?  정말 에볼라인가요? 
   유감스럽지만 그런 것 같아요. 
  태드가 그녀 옆에 앉으며 말했다.
   일요일에 연락이 왔어요.  오늘 아침에 검체들을 받았는데 바이러스가 
우글우글해요. 
   같은 바이러스주던가요? 
   그건 좀 지나봐야 알 것 같아요. 
   아직도 그 바이러스가 샌디에고 안과 세미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마리사가 물었다.
   난 몰라요. 
  태드가 목소리에 약간 언짢은 기색을 비치며 말했다.
   난 바이러스학자지 역학을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화내지 마세요. 
  마리사가 말했다.
   하지만 굳이 역학자다 되어야만 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제가 왜 전보되었는지 아세요? 
   두브체크가 요청을 했겠죠, 뭐. 
   아니에요. 
  마리사가 말했다.
   마크햄이란 텍사스주 출신 연방 하원의원 때문이었어요.  그 사람이 직접
닥터 
모리슨에게 전화를 했대요.  씨디씨의 예산을 결정하는 예산 심의 위원회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닥터 모리슨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하지만 정말 
이상하지 않아요?  내 말은, 난 일개 역학 정보원에 불과한데 말이에요. 
   그런 것 같군요. 
  태드는 점점 더 불안해 하는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마리사가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왜 그래요? 
   걱정이 돼서 그래요. 
  태드가 말했다.
   전 당신을 좋아해요.  당신도 그걸 잘 알 거예요.  하지만 당신은 계속 
골치아픈 일들을 몰고 다니거든요.  전 도무지 그런데 끌려들어가고 싶지가
않아요.  
전 지금 제가 하는 일을 좋아하거든요. 
   저도 당신에게 누를 끼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어요.  하지만 마지막으로 
꼭 한 번 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그것 때문에 이 늦은 시각에 당신을
찾아온 
거예요. 
  태드는 그녀의 손을 떨쳐버렸다.
   제발, 더 이상 내게 규정을 위반하도록 만들지 말아주세요. 
   전, 꼭, 그 초밀페 실험실을 다시 한 번 들어가봐야 해요. 
  마리사가 말했다.
   단지 몇 분이면 돼요. 
   안돼요! 
  태드가 단호하게 말했다.
   도저히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가 없어요.  정말 미안해요. 
   두브체크는 지금 아틀란타에 없어요. 
  마리사가 말했다.
   지금 이 시간엔 거기 아무도 없을 거예요. 
   안돼요.  난 안하겠어요. 
  마리사는 그의 결심이 확고하다는 것을 알았다.
   당신을 이해해요. 
   정말이에요? 
  그녀가 그렇게 쉽사리 포기했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는 듯 태드가 물었다.
   진짜라니까요.  하지만 실험실에는 안 데리고 간다 해도 마실 것 한 잔 
정도는 줄 수 있겠죠? 
   물론이죠. 
  그녀의 기분을 달래는 일이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듯 태드가 흔쾌히 대답을
했다.
   맥주?  포도주?  뭘 드릴까요? 
   맥주가 좋겠어요. 
  마리사가 말했다.
  태드가 부엌으로 사라졌다.  냉장고를 여는 소리가 들리자 마리사는 재빨리 
일어나 뒷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현관으로 다가갔다.  선반을 들여다본 마리사는 
출입 카드가 두 개나 있다는 것에 뛸 듯이 기뻤다.  하나를 슬쩍 빌려간다 해도 
눈치채지 못할지 모른다.  마리사는 하나를 몰래 재킷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태드가 맥주를 들고 돌아왔을 때 그녀는 다시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앉아
있었다.
  자신도 한 병을 집어든 태드는 마리사에게  롤링 록 맥주 한 병을 건넸다. 
그는 
안주로 포테이토 칩 한 통을 따서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마리사는 그의 최근 
연구 성과가 어떤지를 물었지만 그의 대답에 관심이 없다는 것에 역려했다.
   롤링 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로군요. 
  그녀가 맥주에는 거의 손도 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태드가 말했다.
   아녜요, 좋은데요. 
  마리사가 하품을 하며 말했다.
   목이 마른게 아니라 피곤한 건가 봐요.  가보는 게 좋겠어요. 
   여기서 자고 가도 괜찮아요. 
  마리사는 몸을 일으켰다.
   고마워요, 하지만 정말 집에 가야겠어요. 
   실험실 건은 미안해요. 
  태드가 몸을 구부려 키스를 하며 말했다.
   괜찮아요. 
  그녀는 태드가 포옹을 하려는 순간 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태드는 바깥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묵묵히 
서 있기만 했다.  한편으로는 그녀의 꼬드김에 넘어가지 않고 이성적으로 행동을

했다는 게 기뻤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녀를 실망시켰다는 것이 영 마음이
불편했다.
  태드가 서 있는 곳에서는 출입 카드와 열쇠들을 놓아둔 선반이 곧 바로 마주 
보였는데 아직도 머릿속에서 마리사 생각을 하던 출입 카드 중 한 장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는 다시 한 번 주머니 속에서 꺼낸
잡동사니들과 
위 아래 선반들을 살펴보았다.  그의 여벌 출입 카드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제기랄! 
  태드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가 그렇게 일찍 일어났을 때 그런

속임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야 했는데.
  그녀를 붙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밖으로 달려나가보았지만 그녀는 
벌써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거리는 텅 비어 있었고 무덥기만 한 밤 공기에는

바람 한 점 없었다.  가로수의 잎새들은 축늘어진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태드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지 궁리를 하며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가 
마리사를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번에는 좀 너무한다 싶었다.  그는 
수화기를 집어들고 다이얼을 돌리기 시작했다.

  센터로 차를 몰려 마리사는 두브체크가 경비원에게 그녀가 더 이상 
바이러스과에서 일하는 않는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기만 바랬다.  하지만 
그녀가 신분증을 펼쳐보이자 근무중이던 경비원은 그저 미소를 지으며 말을 
했을 뿐이었다.
   또 늦게까지 일을 하시나 보지요? 
  아직까지는 괜찮군.  하지만 조심을 해두자는 뜻에서 마리사는 우선 자신의 
사무실로 올라가 혹시라도 경비원이 따라오는 것에 대해 대비를 했다.  그녀는 
불을 켠 다음 책상 앞에 앉아 마음을 졸이며 기다렸지만 복도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녀의 메모판 위에는 편지가 몇 통 놓여 있었다.  두 개는 제약 회사에서 온 
광고물이었고 또 하나는 사우스 벤드의 랩 엔지니어링 주식회사에서 온
것이었다.  
마리사는 그 봉투를 열어보았다.
  편지는 그 회사의 영업 담당 직원이 쓴 것으로 그들의 생산품이 제3형 
에이치디피에이 필터 시스템은 그 장비가 오직 주문 생산에 의해서만 판매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관심이 있으면 우선 병원 설게 전문 설게회사와 미리 
이야기를 해보아야 한다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랩 엔지니어링 주식회사는 
작년에 단 한 개의 시스템을 건설했는데 그것은 조지아주 그레이슨의 프로페셔널

랩이라는 연구소에서였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사무실의 먼저 주인에 의해 걸린 채 그간 방치되어 왔던 벽면의 미국 
지도를 쳐다보았다.  조지아주의 그레이슨이란 곳을 세밀하게 찾아보았지만
그곳은 
표시가 되어 있지 않았다.  어딘가에 조지아 자동차 지도가 있음을 기억하고 
마리사는 책상 서랍들을 뒤져보았다.
  그녀는 마침내 서류 캐비닛 안에서 지도를 찾아냈다.  그레이슨은 아틀란타 
동쪽으로 몇 시간 거리 떨어진 조그마한 소도시였다.  도대체 그런데서 제3형 
에이치이피에이 필페 후드가 무슨 기능을 하고 있는 거지?
  도로 지도를 다시 서류 캐비닛에 집어넣은 다음 편지를 주머니에 쑤셔넣고 
마리사는 복도를 살폈다.  밖은 조용했고 엘리베이터는 아까 내렸던 대로 그녀의

층에 머물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 이후로는 아무도 엘리베이터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이제 행동을 개시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계단으로 한 층을 내려온 마리사는 구름다리를 타고 바이러스동 건물로 
건너갔다.  불이 켜진 사무실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그녀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두브체크의 사무실 앞을 지나면서 그녀는 낼름 혀를 내밀어보엿다.  그것은 정말

어린애 같은 유치한 행동이었지만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모퉁이를 돌자 커다란 기밀문이 나타났다.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인 그녀는 
태드의 카드를 밀어넣고 그의 비밀 번호 43-23-39를 차례로 눌렀다.  커다란
철컥 
소리가 메아리치며 육중한 문이 열렸다.  익숙한 페놀 소독액 냄새가 그녀의
코를 
스쳤다.
  마리사는 맥박이 마구 빨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문지방을 넘자 유령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불편한 느낌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어두컴컴한
불빛으로 
보이는 수많은 파이프와 그들 그림자의 얽힌 모습이 마치 거대한 거미집으로 
들어가고 있는 느낌을 주었다.
  지난 두 번의 방문 때 태드가 하는 것을 보았던 대로 마리사는 입구 옆의 
자그마한 캐비닛을 열고 차단기들을 올려 전 등을 켜고 콤프레서와 환기 
장치들을 작동시켰다.  바닥가지 진동시키는 계기들의 작동음은 그녀가 기억하고

있었던 것 보다 훨씬 더 요란하게만 느껴졌다.
  혼자 들어와보니 그 초현대적인 실험실은 마리사가 기억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무시무시했다.  자신이 근신 처분을 받고 있는 중임에도 또 다시 규정을 
위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아는 마리사는 결의에 결의를 다진 끝에야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었다.
  땀에 젖은 손으로 갱의실로 통하는 기밀문의 둥근 바퀴 손잡이를 붙든
마리사는 
젖먹던 힘까지 다 짜낸 뒤에야 그것을 돌릴 수가 있었다.  쉭, 바람 새는 소리와

함께 문틈이 벌어지며 무거운 문이 바깥쪽으로 활짝 열렸다.  그녀가 방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뒤쪽에서 문은 불길한 쿵 소리와 함께 닫혀버렸다.
  수술복으로 갈아입으려니 밖과의 기압차로 귀가 먹먹해지기 시작했다.  
두 번째의 문은 더 쉽게 열려주기는 했지만 일이 쉽게 풀려나가면 나갈수록
그녀가 
감수해야하는 진짜 위험에 대한 두려움은 점점 더 깊어지기만 했다.
  방안에 걸려 있는 20여벌의 옷 중에서 몸에 맞는 플라스틱 격리 보호의를
찾아낸 
마리사는 태드의 도움없이 혼자 옷을 입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마침내 지퍼를 올려 착용을 마쳤을 때, 그녀는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스위치 판에서 그녀는 주 실험실 전등만을 켰다.  나머지는 필요가 없었다.  
동물 실험실에는 들어가볼 생각이 없었으니까.  다음, 보호의의 공기 호스를
집어든 
그녀는 소독실을 지나 마지막 기밀문을 열어 젖히고 실험실 중앙부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우선 해야 할 일은 적절한 위치의 다기관에 호스를 연결해 신선한
공기로 
보호의를 채우고 흐려진 마스크를 말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녀는 공기가
주입되는 
쉭 소리에 기쁜 마음을 귀를 기울였다.  그나마 그 소리라도 없었더라면 쥐죽은 
듯한 침묵에 숨이 막혔을지도 모른다.
  방안에 산재한 최첨단 실험 기자재들로 자신의 위치를 어림짐작한 마리사는 
마침내 그 문제의 냉동고를 찾아낼 수가 있었다.  그녀는 전 등을 다 켜두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실험실 저쪽 구석에 드리워진 검은 그림자는 마치 그 치명적인 
바이러스의 혼령이라도 되는 듯 마리사의 공포를 부채질하고 있었다.
  부풀어오른 큼지막한 보호의에 적응하기 위해 어기적어기적 냉동고를 향해
발을 
옮기기 시작한 마리사는 다른 수많은 최첨단 기기를 구비한 사람들이 정말
중요한 
바이러스의 보관에는 그저 평범하기 그지없는 가전용품으로 만족했다는 사실에 
다시금 혀를 내둘렀다.  그런 것이 초밀폐 실험실에 놓여 있다는 것 자체가 
컴퓨터 박람회에 구식 덧셈 기계를 내놓은 것처럼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냉동고에 도착하기 직전 마리사는 왼쪽의 굳게 잠긴 기밀문에 시선을 던지며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바이러스가 그 안에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안 다음부터

그녀는 도대체 저 엄중한 시설이 무엇을 보호하기 위한 것인지 궁금해졌다.
  불안한 마음으로 그녀는 손을 뻗어 가로지른 빗장을 풀었다.  문을 열고 
안쪽으로 들어서자 차가운 수증기가 구름처럼 밖으로 뿜어져나왔다.  마치 
얼어붙은 구름 안으로 들어선 기분이었다.  다음 순간 육중한 문이 닫히며 
그녀를 암흑 속으로 몰아넣었다.
  눈이 어둠에 적응하자 한쪽 벽면에서 전등 스위치처럼 생긴 것을 돌려보았다. 

천장에 달린 전등들이 켜지기는 했지만 불빛이 약해 스위치 옆에 달린 온도계가 
겨우 눈에 보일 정도였다.  몸을 구부린 그녀는 온도계가 영하51도를 가리키고 
있음을 알았다.
   맙소사! 
  증기 구름의 원인을 알아낸 마리사는 탄성을 내질렀다.  실온의 공기가 그 
차가운 온도에 노출되자 함유하고 있던 수분이 얼음으로 승화되어버린 것이다.
  다시 방향을 돌려 짙은 안개를 맞은 마리사는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점점 더 
깊숙한 쪽으로 걸어들어가다.  순간 끔찍하기 짝이 없는 형상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내지른 비명은 천둥처럼 보호의 안을 메아리쳤다.
  처음에 그녀는 유령이 나타난 것으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더 더욱 
끔찍하게도, 자신이 소용돌이치는 안개에 휩싸인 일열의 냉동 나신 시체들을 
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그들이 한 줄로 서 있는 것이려니 
하고 생각을 했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그들은 해부학 실습용 사체들처럼 양쪽 
외이도를 통해 삽입된 캘리퍼(원통의 외경이나 내경을 재는 콤파스 모양의 
공구)같은 기구에 의해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가까이 다가간 마리사는 첫 번째 사체를 알아볼 수가 있었다.  잠시동안
그녀는 
꼭 기절한 것만 같았다.  얼어붙은 얼굴이 고통에 신음하는 데도 마스크로 변한 
것은 마리사가 피닉스에서 만난 적이 있었던 그 인도인 의사였다.
  그곳에는 적어도 대여섯 구의 시체가 보관되어 있었다.  시체들 오른쪽으로는 
괴상망측한 모양으로 얼어붙은 원숭이와 쥐들의 사체가 놓여 있었다.  마리사는 
장기 표본의 바이러스 검사를 위해 그런 냉동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를 하지만 이런 끔찍한 지옥경을 직접 맞닥뜨릴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태드가 그녀를 드여보내지 않으려 했던 것이 이해가 갔다.
  뒷걸음질쳐 방을 나선 마리사는 불을 끄고 다시 문에 빗장을 질렀다.  그녀는 
추위와 혐오감에 진저리를 쳤다.
  호되게 호기심의 대가를 치른 마리사는 다시 냉동고 쪽으로 주의를 돌렸다.  
떨리는 손과 비닐 보호의에 의한 둔열에도 그녀는 비교적 쉽게 자전거용
자물쇠를 
열 수 있었다.  하지만 냉동고를 감아놓은 체인은 단단하게 매듭져 있었기
때문에 
체인을 손잡이에서 빼내기 위해 그녀는 한참동안이나 실랑이를 벌여야 했다.  
그녀가 바라던 것보다 훨씬 시간을 많이 잡아먹기는 했지만 결국 체인은
풀어지고 
그녀는 뚜껑을 열어젖혔다.
  뚜껑 안쪽의 성에를 문질러낸 마리사는 색인 부호들을 훑어보았다. 
바이러스의 
이름들은 알파벳 순으로 나열되어 있었다.   에볼라, 자이레 76 이라는 이름
뒤에는 
 97, 디11-이48, 에프1-에프12 라는 기호가 적혀 있었다.  마리사는 첫 번째
나오는 
숫자가 트레이(시약병들을 담아놓기 위해 사용되는 대)를, 그 뒤에 나오는
숫자들이 
트레이 내에서의 바이러스 위치를 표시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각 
트레이에는 적어도 천 개 가량의 표본이 담겨 있었는데 그것은 자이레76년형 
바이러스가 들은 바이얼이 50개는 있다는 뜻이었다.
  가능한 한 최대의 신중을 기하며 마리사는 97번 트레이를 들여내 근처의 실험 
이블 위에 올려놓고 시약병들이 꽂힌 홈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각 홈에는 까만 
마개가 달린 시약병들의 꽂혀 있었다.  자이레 76바이러스들의 위치를 찾아낸 
마리사는 이-11번 표번을 집어들었다.  시약병 안의 자그마한 얼음 구슬은 
무해해보이지만, 해동만 되면 불과 한 두 개라도 사람 하나를 충분히 죽일 수
있는 
미세한 바이러스가 그 안에 수백만 개나 들어 있다는 사실을 마리사는 잘 알고 
있었다.
  시약병을 다시 홈에 끼운 마리사는 얼음 구슬이 완전히 있는가를 확인해보기 
위해 다음 것을 집어들었다.  그녀는 계속 이 과정을 반복해 보았지만 아무런 
이상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디39번 표본을 집어 들었을 때, 그녀는 마침내 
바라던 것을 찾아낼 수가 있었다.  그 시약병이 비어 있었던 것이다.
  재빨리 마리사는 나머지 표본들을 훑어보았다.  다른 것들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  이39시약병을 들어 불빛에 비추고 마리사는 자신이 착각하지 않았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하기 위해 실눈을 뜨고 병 안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시약병 
안에는 분명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연구를 하던 과학자들 중 어떤 사람이 표본 하나를 잘못된 위치에 꽂아둘 수도

있었지만 시약병이 완전히 텅 비어 있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최근의 에볼라 감염 사건들이 이 아프리카산 바이러스가 보관된 씨디씨 
시약병들의 사고, 또는 고의적인 악용으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그녀의 
모호하기만 했던 가설은 이제 가설이 아닌 듯했다.
  바로 그때, 갑작스러운 움직임 하나가 그녀의 주의를 사로잡았다.  소독실로 
통하는 기밀문의 바퀴처럼 생긴 손잡이가 회전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실험실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마리사는 공포에 사로잡혀 무기력하게 그쪽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몸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정신이 돌어오자 그녀는 빈 시약병을 트레이에 올려놓은 뒤, 
트레이를 냉동고 안으로 집어넣고 뚜껑을 닫았다.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도무지 갈 데가 없었다.  어쩌면 숨는 게 나을지도 몰라.  그녀는 동물

우리들 뒤쪽의 어둡게 그림자진 곳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없었다.
  바로 그 순간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게 비닐 보호의를 걸친 사람들이 
실험실로 들어왔다.  키가 큰 동료에게 어디서 공기 호스를 연결하는지를 
가르쳐주는 것으로 보아 키가 작은 사람은 이 실험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공포에 질린 마리사는 선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들이 진행중인 실험 상황을 
점검하러 들어온 씨디씨 연구원들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곧장 마리사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그녀의 한가닥 희망은 이내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그녀가 작은 체구의 사람이 주사기 하나를 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바로 이때였다.  그녀의 시선은 이상한 각도로 팔꿈치 관절을 구부린 채 
앞으로 다가오는 그의 동료로 옮겨졌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끔찍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마리사는 그들의 얼굴을 쳐다보려 했지만 플라스틱 페이스 마스크에 반사가 
되어 도저히 안을 볼 수가 없었다.
   불루멘탈? 
  작은 사람이 투박한 남자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손을 뻗어 거칠게 마리사의 마스크를 향해 불빛을 비추어 보았다. 
그녀의 
보호의 지퍼로 손을 뻗는 동료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보아 그는 
마리사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안돼! 
  이들이 경비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마리사는 비명을 내질렀다.  그들은 
지난번 집에서처럼 그녀를 공격하려 하는 것이다.  필사적으로, 그녀는 냉동고에

걸려 있던 자전거용 자물쇠를 나꿔채 그들에게 집어던졌다.  그 혼란을 틈타 
간신히 공기 호스를 분리시킨 마리사는 동물 실험실 쪽으로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체구가 큰 사람이 불과 1초도 안돼 그녀의 뒤를 쫓기 시작했지만 마악 그녀를 
붙들려는 순간 보호의에 달린 공기 호스 때문에 줄에 묶인 강아지꼴이 되고
말았다.
  마리사는 원숭이, 쥐, 닭, 그리고 오만 가지 실험 동물들의 놀란 울음소리를 
헤치며 높게 쌓인 동물 우리들 사이로 난 어두컴컴한 통로를 달음질쳤다.  이제 
꼼짝없이 실험실 내에 갇히게 된 그녀는 추적자들의 주의를 혼동시키려고 원숭이

우리들을 열어젖히기 시작햇다.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중병인 놈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즉각 우리 밖으로 튀어나왔다.  곧, 그녀는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한참을 헤맨 끝에 어둠 속에서 간신히 다기관을 찾아낸 마리사는 호스를 
연결시키고 밀려들어오는 차갑고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체구가 큰 사람이 
이 실험실 출입에 익숙치가 않다는 사실은 자명했지만 그것이 정말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우리들을 따라 실험실 중앙부를 
볼 수 있는 데까지 걸음을 옮겼다.
  전등의 후광을 받은 덩치 큰 사내는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자기를 볼 수 있는지 없는지 알지 못한 상태로 그가 다른 통로를 택하기만을 
간절히 기도했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향해 곧장 다가오고 있었다.  마리사늬 
머리털이 쭈뼛 곤두섰다.
  손을 뻗어 공기 호스를 분리시킨 마리사는 줄지어 놓인 동물 우리 반대편으로 
돌아가려고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뜻을 이루기도 전에 그 사나이는 
그녀의 왼팔을 움켜잡았다.
  마리사는 자신을 공격한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보이는 것이라고는
페이스 
마스크에 반사된 희미한 불빛뿐이었다.  팔을 움켜쥔 그의 힘으로 이루어 저항은

정말 아무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바로 그 순간 그의 어깨 너머로  비상시에만

사용 이라는 글씨가 적힌 빨간 손잡이가 눈에 들어왔다.
  절망 상태가 된 마리사는 손을 뻗어 손잡이를 끌어내렸다.  순간, 요란한 
경보음과 함께 갑자기 실험실 전체에 페놀 소독액이 비오듯 쏟아져내리기
시작했다.  
피어오르는 소독액의 짙은 안개 때문에 한치 앞도 분간할 수가 없다.  깜짝 놀란

그 사내가 엉겁결에 마리사의 팔을 놓아버렸고 그녀는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그

바람에 동물 우리들 밑으로 기어나갈 수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마리사는 
자신이 제발 제대로 방향을 잡았기만을 빌며 꿈틀꿈틀 사내로부터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동물 우리들 밑을 벗어난 그녀는 몸을 일으켜 더듬더듬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소독액 샤워는 그 손잡이를 다시 원위치로 올려놓기 전까지는 계속 
쏟아지도록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몹시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신선한 공기가 필요했다.  
  갑자기 코 앞에서 어떤 물체가 튀어오르자 그녀는 하마터면 비명을 내지를 
뻔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 치명적인 실내 공기에 몸부림치는 원숭이 중의 한 
마리였을 분이었다.  그것은 잠시 그녀에게 매달려 있더니 비닐 보호의에서 
미끄러져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숨을 헐떡이며 마리사는 손을 벋어 파이프를 따라 손을 더듬어갔다.  마침내 
다기관이 만져지자 그녀는 공기 호스를 연결했다.
  경적음 사이로 마리사는 열 통로의 다급한 소란과 보호의를 뚫고 흘러나오는 
명확치 않은 외침을 들을 수가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추적하던 사내가
다기관을 
찾아내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두 번째 사내가 동료를 구원하러 갈 것이라는데 도박을 건 마리사는 공기 
호스를 분리한 다음 장님처럼 양 손을 앞으로 내뻗은 채 불빛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곧 조명이 균일해지자 그녀는 자신이 주실험실에 도착했음을 알 수 
있었다.  벽을 향해 움직이다가, 그만 냉동고에 부닥쳐버린 마리사는 그 바로
위에 
다기관이 하나 달려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그녀는 호스를 연결시켜 재빨리 공기를 몇 모금 들이쉬었다.  다음 그녀는
벽을 더듬어 문 쪽으로 이동을 하기 시작했다.  문을 발견한 순간, 그녀는
재빨리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어젖혔다.  일 분 뒤, 그녀는 소독실에 서 있었다.
  이미 페놀 소독액 세례를 받았던지라 그녀는 평소처럼 소독액 샤워가 끝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다음 방으로 건너가 비닐 보호의를 벗어던진
마리사는 황급히 그 다음 방으로 건너가 수술복이 들어 있는 사물함을 넘어뜨려
기밀문을 막아버렸다.  그것으로 문이 열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추적자들을 지연시켜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마리사는 회로 차단기를 모두 내려 갱의실 까지 깜깜하게
만들어버린 다음 환기 장치마저도 모두 꺼버렸다.
  초밀폐 실험실 밖으로 나온 순간 마리사는 단숨에 바이러스동 건물을 달려
구름다리를 건넌 다음 한 번에 두 개씩 계단을 뛰어올라 본관 건물로
뛰어들었다.  깊은 숨을 들이쉬고, 그녀는 태연한 체 정문 로비를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경비원은 로비 왼쪽의 책상에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그는 전화를 하는
중이었는데 상대가 누궁니지는 모르겠지만 경비용 출입구 경보가 아닌 생물학적
경보 장치가 작동되었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었다.
  추적자들이 그녀를 죽이려고 했던 마당에 경비원에게까지 도움을 청해두었을
리는 없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출입자 명부에 서명을 하는 그녀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통화를 하는 상대편에게 교환수들이 현재 바이러스 과장을
지급으로 수소문중이라는 설명을 한 경비원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여보세요. 
  마리사가 마악 문을 향해 걸음을 옮긴 순간 경비원이 뒤에서 소리를 질럿다. 
그냥 도망을 쳐버릴까 하는 생각이 잠깐 그녀의 머리를 스쳤다.  정문은 불과
2미터 앞에 있었다.  그 순간 경비원이 말을 이었다.
   나가시는 시간을 안 적으셨어요. 
  마리사는 순순히 다시 걸음을 돌려 성실하게 공란을 메웠다.  그리고는 건물
밖에서 차를 향해 달음질쳤다.
  그녀가 떨기를 멈추고 자신의 무서운 발견에 대해 생각을 해볼 수 있게 된
것은 랠프의 집에 반이나 더 가서였다.  사라진 에볼라 얼음구슬은 우연의
일치일 리가 없었다.  그것은 최근 전국적으로 발생하는 감염 사건들과 같은
주의 바이러스였다.  누군가가, 사고든 고의든, 그 바이러스를 사용하고 있었고,
그 치명적인 바이러스는 각기 다른 시간 각기 다른 장소에서, 의사와 병원들을
감염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39 시약병에서 사라져버린 표본이 그간 미궁에 싸여 있던 에볼라의 미국 내
감염원이다.  이러한 설명만이 모든 감염에서 동일한 주가 발결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유일한 답변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그 누군가는 이 사실을 은폐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려들고 있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그녀는 에볼라 연구팀에서 쫓겨나야 했고, 또 방금 전에는
죽을 뻔까지도 했던 것이다.  마리사를 가장 두렵게 만든 것은 그녀를 덮친
괴한이 씨디씨에 근무하는, 그것도 초밀폐 실험실의 출입 허가를 가진 누군가일
수밖에 없다는 분명한 사실이었다.  아까 서명을 하고 나올 때 정신이 없어 누가
들어왔는지 출입자 명부를 확인하지 못한 것이 후회막급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자기가 알게 된 사실을 털어놓고 싶어 안달을 하던 마리사의
머리에 랠프를 이 일에 끼어들게 만드는 것이 부당하다는 생각이 스친 것은 벌써
그의 집 앞으로 난 도로로 접어든 다음이었다.  그녀는 벌써 태드의 우정을
배신했고, 내일 그가 출입 장부에 적힌 그녀의 이름을 보게 되면 그녀는 완전히
낙인이 찍혀 버림을 받게 될 것이다.
  지금 그녀의 유일한 희망은 그 두 명의 습격자들이 자기들이 그녀의 목숨을
빼앗으려 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그녀가 초밀폐 실험실에 들어 갔었다는
것을 상부에 보고하지 않으리라는 것뿐이었다.  그렇기는 했지만, 그들이 적당한
거짓말을 꾸며댈 가능성도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은 누구 말을
믿는가의 문제였지만 내일 씨디씨에서 그녀의 말이 먹혀들어갈 확률은 전혀
없었다.  아침이 되면 아틀란타 경찰들이 그녀를 찾아다니게 될 것이다.
  자신의 여행 가방이 아직도 차 트렁크 안에 들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
마리사는 제일 가까운 모텔로 차 방향을 돌렸다.  자신에게 배정된 방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랠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벨이 다섯 번이나 울린
뒤에야 졸음 가득한 목소리로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잠이 와서 견딜 수 없어질 때까지 계속 기다리고 있었소. 
  그가 말했다.
   왜 안 들렀지요? 
   말을 하자면 아주 길어요. 
  마리사가 말했다.
   지금은 자세히 설명드릴 수가 없지만, 전 아주 심각한 곤경에 빠져버렸어요. 
어쩌면 형사사건 담당 변호사가 필요할지도 몰라요.  혹시 아는 사람 있으세요? 
   맙소사! 
  랠프는 갑자기 정신이 바짝 든 모양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내게 말을 해주는 게 좋겠소. 
   당신까지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아요.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상황이
몹시 심각해졌다는 것, 그리고 당분간은 관리들에게 가지 않을 생각이라는
것뿐이에요.  졸지에 도망자가 되어버렸네요. 
  마리사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왜 이리로 오질 않죠? 
  랠프가 말했다.
   여기라면 안전해요. 
   랠프, 전 진심으로 당신을 이 일에 끌어들이고 싶지가 않아요.  하지만
변호사는 꼭 필요해요.  한 명 구해줄 수 있나요? 
   물론이오. 
  랠프가 말했다.
   내 힘 닫는 데까지 당신을 돕겠소.  지금 어디 있소? 
   제가 연락을 드릴게요. 
  마리사가 대답을 회피하며 말했다.
   친구가 되어줘서 고마워요. 
  전화를 끊은 마리사는 태드의 출입 카드를 도용했다는 사실을 그가 다른
사람을 통해 알게 되기 전에 미리 사과를 하려고 용기를 끌어모았다.  길게 숨을
들이쉰 그녀는 다이얼을 돌렸다.  전화벨이 몇 번이나 울렸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자 용기가 사그라진 그녀는 그의 잠을 깨우지 않기로 결정을 내려버렸다.
  마리사는 주머니에서 랩 엔지니어링 주식회사로부터 받은 편지를 꺼내 접힌
부분을 반듯하게 매만졌다.  그녀의 다음 행선지는 그레이슨이 될 것이었다.


   12


    5월 21일

  몹시 지쳐 있었음에도 밤새 추적자들에게 쫓겨 헤매는 악몽에 시달린 마리사는

제대로 창문을 통해 스며들어온 새벽빛이 잠을 깨우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밖을 내다보니 어떤 사람이 신문 자동판매기에 신문을 채우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사람이 떠나자마자 마리사는 거리로 뛰어나가  아틀란타 저널 앤 
컨스티튜션 지를 한부 샀다.
  신문에는 씨디씨에 대해 아무런 기사도 실려 있지 않았지만 티브이 아침 뉴스 
중간쯤부터 아나운서가 센터에 문제가 발생했었다는 뉴스를 보도하기 시작했다. 

초밀폐 실험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말이 없었지만 그는 실험실 기사 한 명이 
페놀 소독액을 흡입해 에모리 대학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뒤 퇴원했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 보도 뒤로 시릴 두브체크의 전화 인터뷰가 이어졌다.  마리사는 
앞으로 몸을 기울여 볼륨을 올렸다.
   다친 사람은 그 기사 한 명뿐입니다. 
  시릴이 딱딱한 금속성의 목소리로 말했다.
   사고로 비상 안전 시스템이 작동되었던 것이었습니다.  현재 모든 것이
수습이 
된 상태로 우리는 그 사고와 관련하여 닥터 마리사 불루멘탈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앵커는 이어 혹시 닥터 불루멘탈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즉시 아틀란타
경찰에게 
연락을 해달라는 당부로 보도를 마무리지었다.  그들은 약 10초간 그녀가
씨디씨에 
이력서와 함께 제출했던 사진을 비추어 주었다.
  마리사는 티브이를 껐다.  그녀를 해치려 하긴 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행동이 
그들에게 심한 상처를 입힐 수도 있따는 사실을 고려하지 못했던 것이 마음에 
걸렸다.  말썽이 계속 그녀를 따라다닌다고 했던 태드의 말이 정말로 맞는 것 
같았다.
  도망자가 되어버렸다고 농담을 했던 마리사였지만 그것이 이렇게 구체적으로 
현실화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제, 그녀의 행방에 대해 제보를 해달라는 
티브이 아나운서의 말을 듣고나니 마리사는 그 농담이 정말 심각한 것이 
되어버렸다는 냉엄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녀는, 이제 적어도 아틀란타 
경찰들에게는 지명 수배자가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소지품들을 챙긴 마리사는 모텔에서 체크 아웃을 하기 위해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사무실에 있는 동안 그녀는 내내 자신의 이름이 너무도 뚜렷이 적혀 
있다는 것이 초조하기만 했다.  접수 계원이 금방이라도 경찰에 전화를 걸어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사내는  안녕히 가십시오 라고 한 마디 말을 했을
뿐이었다.
  하워드 존슨(패스트 푸드 체인점의 일종)에 들러 황급히 커피 한 잔과
도우넛을 
챙긴 그녀는 은행으로 차를 몰았다.  다행스럽게도 은행은 마침 조기 개점을
하고 
있었다.  드라이브 인 창구로 들어간 그녀는 혹시 은행 출납 직원이 아침 뉴스를

보았을까 무서워 가급적이면 얼굴을 내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그 직원은 
여느 때와 같이 고객의 얼굴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마리사는 잔고의

대부분을 인출해 4,650달러를 손에 쥐었다.
  찾은 현금을 백에 넣으니 긴장이 조금 누그러들었다.  78번 주간고속도로의 
진입로를 오르며 그녀는 라디오를 켰다.  그녀는 바야흐로 조지아주 그레이슨을 
향한 장도에 오른 것이었다.
  그레이슨까지는 생각했던 것보다 오래 걸리기는 했지만 그저 단조롭기만 한 
쉬운 길이었다.  도중에 특기할 만한 것이라고는 스톤 마운틴이란 이름이 붙은 
돌산이 고작이었다.  그것 역시 아이 엉덩이에 돋아난 사마귀처럼 울창한 수풀이

덮인 조지아의 구릉들 사이로 툭 불거져나온 커다란 화강암 덩어리에 불과했다.
  스넬빌 시가를 지나 84번 고속도로에서 북동쪽으로 차 머리를 돌리자 차창을 
스치는 정경은 점점 더 시골스럽게 바뀌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녀는 
그레이슨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라고 쓰인 표지판앞을 통과하게 되었다.  그 표지판은 
누군가가 사격 연습용 표적으로 썼는지 구멍이 숭숭 뚫려 환영을 한다는 말이 
무색해질 정도였다.
  그레이슨이란 동네는 마리사가 상상했던 것과 똑같았다.  동네 한 가운데를 
통과하는 주 도로임에도 불구하고 노변에는 나무 문짝이 달린 벽돌 건물들 몇 
채가 늘어서 있을 뿐이었다.  파산을 했는지 문을 막아놓은 영화관이
을씨년스럽게 
서 있었고 가장 큰 가게라야 사료와 농기구를 파는 상점이 고작이었다.  길 한쪽

모퉁이 화강암으로 지은 자그마한 은행 건물에는 로마 숫자가 써진 커다란 
시계가 달려있었다.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제3형 에이치이피에이 밀폐 
후드 같은 것이 필요할 것처럼 생겨먹은 구석은 아무 데도 없었다.
  마리사는 텅 빈 거리를 따라 천천히 차를 몰았다.  거리에 최근 새로 건축된 
상업 구조물이 전혀 없다는 사실에 그녀는 프로페셔널 랩이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길을 물어야 할 것 같기는 했지만 
도대체 누구한테 말을 붙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사람이 없다 해도 
경찰에게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거리 끝에서 유턴을 한 그녀는 다시 거리를 따라 차를 몰기 시작했다.  그때 
우체국 표지판이 달린 잡화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프로페셔널 랩이라구요?  네, 저기 브리지가에 있어요. 
  점원이 말했다.  그는 직물류가 진열된 곳에서 손님 한 명에게 무명천 한 필을

펼쳐 보여주고 있었다.
   차를 돌려서 소방서 앞에서 우회전을 하세요.  그 다음에 파슨스 크리크를 
지나 좌회전을 하면 됩니다.  금방 찾으실 수 있을 거예요.  거긴 그 건물
말고는
 송아지들밖에 없거든요. 
   거기서 뭘 한 대요? 
  마리사가 물었다.
   전혀 아는 바 없어요. 
  점포의 직원이 말했다.
   게다가 관심도 없어요.  하지만 돈을 꼬박꼬박 잘 내는 좋은 고객들이기는 
하더군요. 
  점원이 가르쳐준 대로 마리사는 동네 외곽으로 차를 몰았다.  근처에 
송아지밖에 없다는 그의 말은 정말 과장이 아니었다.  파슨스 크리크를 지난 
뒤부터는 도로도 포장되어 있지 않아서 공연히 헛수고나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고개를 들 정도였다.  하지만 바로 그때 길이 소나무 숲으로 접어들기 
시작했고, 저 앞 전방에 건물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길이 넓어지며 주차장이 나타나는 순간 마리사의 혼다 승용차는  쿵 소리와
함께 
아스팔트 위로 올라섰다.  그곳에는 차가 두 대 더서 있었다.  한 대는 몸체에 
프로페셔널 랩 유한회사라는 글자가 씌어 있는 밴이었고 또 하나는 흰 크림색의 
메르세데스였다.
  마리사는 밴 옆에 차를 세웠다.  뽀족 지붕에 거울 같은 유리판으로 지어진 
연구소 건물에는 수목들이 줄지어 늘어선 아름다운 주위 경관이 반사되어 비치고

있었다.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기자니 향긋한 솔 냄새가 그녀를 에워샀다.
  그녀는 물을 한 번 당겨보았고 또 반대로 문을 밀어보기도 했지만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걸음 뒤로 물러선 그녀는 초인종을 찾아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그런 것은 도무지 눈에 띄지를 않았다.  아무리 문을 두들겨 보아도 전혀
인기척이 
없었다.
  현관을 포기한 그녀는 건물 주위를 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첫 번째 
창문이 나타나자 그녀는 반사 유리판 안쪽을 들여다보려고 손을 동그랗게 오무린

채 창문에 붙어섰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안쪽은 보이지 않았다.
   당신은 지금 무단 침입을 하시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놀란 마리사는 겸연쩍게 양 손을 내렸다.
   이건 사유 재산입니다. 
  푸른 작업복을 걸친 중년의 땅딸막한 남자가 말을 이었다.
   음... 
  들어오게 된 것에 대해 그럴듯한 구실을 생각해내려 안간힘을 쓰던 마리사가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짧게 깎은 회색 머리칼과 불그스레한 얼굴의 그 사내는 
전형적인 50년대의 공장 노동자 같은 모습이었다.
   표지판을 보셨나요? 
  그가 주차장에서 세워진 푯말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네, 보긴 했어요.  하지만 말이에요, 전 의산데... 
  그녀는 갑자기 말을 멈추어버렸다.  의사라고 해서 마음대로 남의 사유
재산권을 
침해할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재빨리 그녀는 말을 이었다.
   여기, 바이러스 실험실에서 바이러스 진단 검사를 하시는지 궁금해서 들르게 
되었어요. 
   도대체 무엇을 보고 이게 바이러스 실험실이라고 생각을 하는 거지요? 
  그 사내가 물었다.
   전 그냥 그렇게 들었거든요. 
   그럼 당신이 잘못 들으신 겁니다.  우린 여기서 분자 생물학 연구를
한답니다.  
산업 스파이들이 무서워 몹시 주의를 하지요.  그러니 어서 돌아가시지 않으면 
경찰을 부르겠습니다.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어요. 
  마리사는 경찰을 끌어들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귀찮게 굴려는 뜻은 아니었어요.  그래도 여기 
실험실 구경만이라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그건 가당치도 않아요. 
  그 사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는 돌을 깐 길위에 발소리를 울리며
마리사를 
다시 차까지 데려다주었다.
   혹시 구경을 좀 하려면 어떤 분에게 연락을 드려야 할지 가르쳐 주실 수 
있나요? 
  마리사가 운전대 앞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며 물었다.
   내가 여기 사장이오. 
  그가 짤막하게 말했다.
   그냥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소. 
  그는 차에서 한걸음 뒤로 물러나 마리사가 떠나기를 기다렸다.
  더 이상 뽀족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자 마리사는 단념을 하고 서둘러 시동을 
걸었다.  그녀는 작별 인사로 미소를 지어보였지만 그녀가 떠날 때까지도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기만 했다.
  그는 마리사의 차가 나무들 사이로 사라져버릴 때까지 서서 차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그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흔든 
뒤 몸을 돌려 연구소 건물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다가가자 앞 문이 스르르
열렸다.
  건물의 내부는 외양만큼 초현대적이었다.  그는 타일로 장식된 짧은 복도를 
내려가 조그마한 실험실로 들어갔다.  실험실의 한쪽 끝에는 책상이 하나 놓여 
있었고 그 반대쪽에는 제3형 에이치이피에이 필터 시스템, 장착 실험대가 설치된

실험실로 통하는 씨디씨의 초밀페 실험실문과 똑같은 기밀문이 하나 달려
있었다.
  책상 앞에는 또 다른 남자 한 명이 앉아 종이 클립을 괴상한 모양으로 비틀며 
손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도대체 나한테 그 여자를 처리해버리게 해주지 않은 이유가 뭐지? 
  불평을 늘어놓던 그는 격렬하게 기침을 해대기 시작했다.  그는 손수건을 들어

입을 가렸다.
   그건 다른 사람이 그녀가 여기 왔다는 사실을 알지도 몰라서 그래. 
  푸른 작업복의 사내가 말을 이었다.
   폴, 머리를 좀 써봐.  난 어떤 땐 자네가 너무 저돌적이라 겁이 난다니까. 
  그는 전화기를 집어들고 필요 이상으로 꽉꽉 힘을 주며 다이얼 버튼을 눌렀다.
   닥터 잭슨 사무실입니다. 
  비서 아가씨가 명랑하고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선생을 좀 바꿔주시오. 
   죄송하지만 지금 환자를 보고 계시는데요. 
   이것 보시오, 아가씨.  지금 하나님을 봐주는 중이라 해도 상관없소.  빨리 
전화를 바꾸기나 하시오. 
   죄송하지만 어디라고 전해드릴까요? 
  비서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의사 윤리위원회 위원장이라고 말해요.  그건 아무래도 상관 없으니 빨리 
전화를 바꾸기나 하란 말이오!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책상 쪽으로 몸을 돌리며 그가 말했다.
   폴, 저기 실험대 위에서 커피나 가져다줘. 
  폴은 쓰레기통에 클립을 던져넣고 몸을 비틀어 의자에서 일어났다.  커다란 
체구에 왼쪽 팔의 주관절이 고정되어 있어 의자에서 일어나는 것조차도 약간 
힘이 들어보였다.  그는 어린 시절 경관이 쏜 총탄에 맞아 불구가 된 것이었다.
   도대체, 누구시오? 
  수화기를 집어든 닥터 죠슈아 잭슨이 불쾌한 목소리로 다그쳐물었다.
   헤버링. 
  푸른 작업복 차림의 사내가 말했다.
   닥터 아놀드 헤버링이오.  날 기억하시오? 
  아놀드에게 커피를 가져다준 폴은 다시 책상에 앉아 가운데 사람에게 또 다른 
클립을 꺼내들었다.  그는 불편한 듯 가슴을 두드리며 헛기침을 해댔다.
   헤버링! 
  닥터 잭슨이 말했다.   
   절대 내 사무실로 전화하지 말라고 했잖소! 
   그 불루멘탈이란 여자가 여기 왔었소. 
  헤버링은 잭슨의 대꾸에도 아랑곳도 않고 말을 이었다.
   예쁘장한 모습으로 빨간 자동차를 몰고 왔더군요.  창문을 들여다보는 걸 
잡았소. 
   도대체 그 여자가 어떻게 그 실험실에 대해 알아낸 거요? 
   알지도 못하지만, 그런 건 상관도 없소. 
  헤버링이 말했다.
   문제는 그 여자가 여기를 찾아왔었다는 사실이오.  당신을 만나러 가겠소. 
더 
이상 이렇게 수수방관하고 있을 수만은 없소.  그녀에게 무슨 조치를
취해야겠소. 
   안돼요.  이리로 오지 마시오.  내가 그리로 가겠소. 
   좋소. 
  헤버링이 말했다.
   하지만 오늘 내로 와야 하오. 
   다섯 시쯤 도착하겠소. 
  잭슨은 말을 마친 다음 수화기를 거칠게 내려놓았다.

  마리사는 그레이슨에 들러 점심 식사를 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배도 고팠지만

누군가 그 연구소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잡화상 앞에 차를 대고 그녀는 가게로 들어가 구식 소다수 판매대앞에 
걸터앉았다.  그녀가 주문한 햄버거는 갓 구운 빵에 큼지막한 버뮤다 양파 
슬라이스가 곁들어져 나왔다.  코카 콜라는 시럽에 물을 부어 만든 듯 김이 빠져

있었다.
  식사를 하는 동안 마리사는 이제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들을
고려해보았다.  
하지만 거기에는 몇 가지가 없었다.  씨디씨나 버슨 병우너으로 돌아갈 수도
업속, 
프로페셔널 랩 유한회사라는 연구소가 제3형 에이치이피에이 필터 시스템 같은 
최첨단 정밀 기기로 무엇을 하는지 알아내는 게 최선의 방법이었지만 요새처럼 
엄중한 감시를 하는 터이니 들어가볼 수 있을 확률은 희박했다.  어쩌면 이제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랠프에게 전화를 걸어 변호사를 구해놓았는지 물어볼 때가 
된 게 아닐까?  하지만...
  마리사는 피클을 한입 베어물었다.  그녀의 머리에 연구소 주차장에 세워져
있던 
두 차량의 모습이 떠올랐다.  흰 밴의 몸체에는 프로페셔널 랩 유한회사라고
씌어 
있었다.  그녀의 관심을 끈 것은 그  유한회사 라는 명칭이었다.
  식사를 마친 마리사는 거리로 나가 아까 차를 몰고 지나칠 때 얼핏 보아두었던

사무실 건물로 걸어갔다.  뿌연 간유리가 끼워진 출입구는  로널드 에이비스, 
변호사 겸 부동산 중개인 이라는 금자가 박혀 있었다.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문에 달려 있던 종이 딸랑거렸다.  방안에는 지저분한 책상이 하나
놓여 
있었을 뿐, 비서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흰 셔츠에 나비 넥타이와 붉은 멜빵을 한 남자 하나가 안쪽 사무실로부터 
걸어나왔다.  그는 불과 서른 살 정도밖에는 되어보이지 않았지만 
할아버지들에게나 어울린 듯한 철사로 테를 두른 안경을 걸치고 있었다.
   도와드릴까죠? 
  그가 투박한 남부 억양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데이비스씬가요? 
  마리사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그는 대답을 하며 엄지 손가락을 멜빵끈에 걸쳤다.
   간단한 질문이 몇 개 있는데요. 
  마리사가 말했다.
   법인 조직법에 관한 거예요.  제게 대답을 해주실 수 있으세요? 
   어쩌면요. 
  데이비스가 말했다.  그는 마리사에게,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종잇장들을 펄럭이며 천천히 좌우로 왔다갔다 돌아가는 탁상용 선풍기까지
그의 
사무실은 마치 1930년대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켰다.  책상에 앉은 데이비스는

뒤로 몸을 기대며 양손으로 머리 위로 깎지를 끼었다.  다음 그가 입을 열었다.
   아시고 싶은 게 뭡니까? 
   어떤 회사에 대해 알고 싶은게 좀 있어요. 
  마리사가 말문을 열어  .
   만일 어떤 사업체가 유한회사라면, 저 같은 사람이 그 소유주들의 이름을 
알아낼 수가 있나요? 
  데이비스는 앞으로 몸을 숙여 책상 위에 팔꿈치를 버텼다.
   그럴 수도, 그렇지 못할 수도 있지요. 
  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리사는 신음 소리를 내뱉었다.  이 사람과의 대화는 아주 힘들어질 것 같다.
 
하지만 다시 말을 바꾸어 질문을 던지려는 순간 그가 말을 이었다.
   만일 그 문제의 회사가 공사화 되었다면 모든 주주들을 다 찾아 내기는 
어렵습니다.  특히 주식의 상당수가 제3자에게서 위임을 받은 변호사에게 
신탁되어 있을 경우는 더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만일 그 회사가 단순히 
합명회사일 경우에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든 만일 
어떤 소송을 제기하실 생각이시라면 법정 대리인 이름정도는 언제들 알아낼 수가

있습니다.  지금 그것을 고려중이신가요? 
   아니에요. 
  마리사가 말했다.
   그저 좀 알고 싶은 게 있어서 그렇답니다.  어떤 회사가 합명회사인지 아니면

공사인지를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그건 쉽지요. 
  데이비드가 다시금 뒤로 몸을 기대앉으며 말했다.
   그저 아틀란타에 있는 주 의회의사당 내무부 사무실에 들러 법인과의 어디 
있는지만 물어보시면 되거든요.  거기 있는 직원에게 회사 이름만 가르쳐주면 그

사람이 알아봐줄 거예요.  그런 건 공공 기록이니 만일 조지아주에만 등록되어 
있다면 알아낼 수가 있을 겁니다. 
   고맙습니다. 
  마치 깜깜한 굴속 한쪽 끝에서 한줄기 서광이 비쳐드는 것 같은 기분이 된 
마리사가 말했다.
  데이비스는 찬찬히 마리사의 얼굴을 살피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십 달러이면 되겠습니다만, 혹시... 
   그럼요, 드리고 말고요. 
  마리사가 20달러 지폐를 꺼내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
  다시 차로 돌아온 마리사는 아틀란타를 향해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그녀는 
제한 속도 아래로 신중하게 차를 몰았다.  속도 위반으로라도 경찰과 대면 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순조로운 여정 끝에 그녀는 네 시쯤 아틀란타에 
도착을 할 수가 있었다.  인근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그녀는 주의회
의사당으로 
걸어갔다.
  의회경찰들이 포진하고 있다는 사실에 마리사는 신분이 탄로날 것만 같은
생각에 
식은 땀을 흘리며 현관 계단을 올랐다.
   닥터 불루멘탈. 
  어떤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도망을 쳐버릴까 하는 생각이 그녀의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대신 몸을 돌려 
돌아보니 씨디씨비서 중의 하나인 발랄한 20대 초반의 여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전 닥터 카보나라 사무실에 근무하는 앨리스 맥카비예요.  기억을
하시겠어요? 
  마리사는 다음 애간장타는 몇 분 동안 하잘 것 없는 잡담에 할애를 해야만
했다.  
다행히도, 맥카비양은 마리사가  지명수배 중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적당한 기회를 틈타 그녀에게 작별을 고한 마리사는 황망히 의사당 건물로 
들어갔다.  빨리 필요한 정보를 얻어가지고 떠나고 싶은 마음만 굴뚝 같았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법안과 문의창구에는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혹시라도
다른 
사람들이 얼굴을 알아보지나 않을까 걱정하며 한손으로 얼굴을 가린채 마리사는 
초조하게 그녀의 차례를 기다렸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마침내 그녀의차례가 오자 백발이 성성한 창구 직원이 물었다.
   프로페셔널 랩이라는 회사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어디 있는 회사죠? 
  창구직원이 근시, 원시겸용인 초점 안경을 걸치더니 컴퓨터 단말기에 회사
이름을 
입력시켰다. 
   조지아주 그레이슨에 있습니다. 
  마리사가 말했다.
   됐어요. 
  그가 말했다.
   여기 나왔군요.  바로 작년에 등록을 했어요.  아시고 싶은 게 뭐죠? 
   그 회사가 공사인가요 아니면 합명 회사인가요? 
  데이비스가 했던 말을 기억하려 앴며 마리사가 말했다.
   유한 합병 회사, 에스형으로 분류되어 있군요. 
   그게 무슨 뜻이죠? 
  마리사가 물었다.
   이건 세제랑 관계가 있는 거죠.  만일 회사가 적자를 볼 경우 합명 사주들이 
개인의 소득에서 그 적자를 공제할 수 있다는 뜻이에요. 
   혹시 출자자들의 이름이 나와 있나요? 
  흥분한 마리사가 물었다.
   물론이죠. 
  직원이 말했다.
   죠슈아 잭슨, 로드 베커.... 
   잠깐만요. 
  마리사가 말했다.
   잠깐만요. 
  마리사가 말했다.
   받아적게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그녀는 펜을 꺼내 이름들을 적기 시작했다.
   자, 어디 봅시다. 
  직원은 컴퓨터 스크린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잭슨, 베커, 그 이름들을 적으셨지요? 
   네. 
   싱클레어 티만, 잭 크라우스, 구스타프 스웬슨, 두에인 무디, 트랜트 굿리지,

그리고 의료인 하원 정치 위원회라는 이름이 있군요. 
   제일 나중 게 뭐라고 하셨지요? 
  마리사가 황망히 손을 놀려 끄적거리며 물었다.
  창구 직원은 그 이름을 반복해 말해주었다.
   단체가 유한 책임 회사의 합명 사주가 될 수 있나요? 
  그녀는 마크햄의 헌금자 명단에서 그 의료인 하원 정치 행동 위원회라는
이름을 
보았던 것을 기억했다.
   난 변호사가 아니네요, 아가씨.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런 것 같더군요.  
그리고 또 하나 있어요.  쿠퍼, 호지스, 맥퀸린 그리고 행크스라는 명의로
설립된 
법률 회사로군요. 
   그 사람들도 합명 사주에요? 
  그 이름들을 추가로 적어내려가기 시작하며 마리사가 물었다.
   아니에요.  이 사람들은 법정 대리인이에요. 
   그럼 이건 필요가 없겠군요. 
  마리사가 말했다.
   그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려는 건 아니니까 말이에요. 
  그녀는 쿠퍼와 호지스의 이름은 지워버렸다.
  창구 직원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마리사는 서둘러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일단 차 안에 앉자 그녀는 서류 가방을 열어 마크햄의 헌금자 명단을
끄집어냈다.  
그곳에는 그녀의 기억대로 의료인 하원정치 행동 위원회라는 이름이 명기되어 
있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벤쳐 기업의 유한 책임 사주인 동시에 한편으로는 
보수파 정차인 개선 운동의 지원자이기도 한 것이었다.
  호기심이 난 마리사는 혹시 프로페셔널 랩 회사의 사주들 중 또 다른 사람이 
마크햄의 헌금 명단에 올라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명단을 훑어보았다.  
놀랍게도, 사주들 모두가 명단에 올라 있었다.  더 더욱 놀라운 것은 사주들이, 
다른 마크햄의 후원자들과 마찬가지로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마크햄의 후원자 명단에서 그녀는 그들 전부의 주소를 알아냈다.
  차에 시동을 걸려다가 마리사는 문득 손을 멈추었다.  다시 마크햄의 후원자 
명단을 내려다본 마리사는 의료인 하원 정치 행동 위원회가  법원 후원자 라는 
란에 적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시 의회 경찰들 앞을 지나가야 한다는

것이 너무도 싫었지만 마리사는 자신을 다그쳐 다시 의사당으로 걸어들어갔다.  
또다시 한참을 기다린 끝에야 마리사는 의료인 하원 정치 행동 위원회라는 
단체에 대해 질문을 할 수 있었다.
  창구 직원은 단말기에 그 이름을 입력한 뒤 잠깐을 기다려보더니 마리사에게로

몸을 돌렸다.
   미안하지만 도와드릴 수가 없군요.  여기는 나와 있지 않아요. 
   그럼 법인 등록이 안 되어 있단 말이가요? 
   꼭 그런 뜻은 아니에요.  여기 조지아에 등록된 법인이 아니라는 거예요. 
  다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또 한 번 달음질쳐서 차에 돌아오니 마치 성역(옛 
교회법에 의해 그곳으로 도망쳐 들아가면 체포할 수가 없다)에 들어온 듯 
마음이 놓였다.  이제 다음엔 무슨 행동을 해야할지 궁리를 하며 그녀는 몇 분간

차 안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사실 그녀가 얻어낸 정보라야 얼마되지 않았고 그나마도 에볼라 감염 
사건들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어 보이는 것들뿐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직감은 
그녀가 알아낸 것들 모두가 상상을 초월하는 방법으로 서로 연관이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만일 정말로 그렇다면 이 의료인 하원 정치 행동 위원회라는
것이 
바로 그 문제의 열쇠가 될 것이다.  하지만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단체를 도대체

어떻게 조사한단 말이가?
  처음에 에모리 대학병원 도서실에 가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어쩌면 사서들 중에서 어디로 가면 찾을 수 있을지 알려줄지도 모르니 말이다.  
하지만 앨리스 맥카비와 맞닥뜨렸던 것이 떠오르자 발각될 확률이 너무 높다는데

단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며칠 동안이라도 아틀란타를 떠나 있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하지?
  시동을 거는 순간 마리사의 머리에 영감이 하나 떠올랐다.  미국 의학 협회!  
만일 미국 의학 협회에도 등록되어 있지 않은 의사 단체라면 어디에서도 찾아낼 
수가 없는 것이리라.  게다가 시카고는 안전할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공항을 
향해 남쪽으로 차를 몰기 시작했다.

  파슨스 크리크의 나무 다리를 건너 조슈아 잭슨의 무거운 세단 승용차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급작스럽게 좌회전을 했다.  비포장 도로로 접어들어 육중한

세단은 가로수가 늘어진 진입로의 조그마한 돌멩이들을 분수처럼 튀기며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차 안에 앉은 잭슨은 연구소가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연구소를 방문하고 싶은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시내에서
헤버링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사람은 가면 갈수록 점점 더 믿을 수가 없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도저히 
예측할 수가 없게 되어가고 있다.  조그맣게 소동을 일으키라고 했더니 핵전쟁을

일으켜버린 꼴이 되어버리다니.  애초에 그 사람을 고용한 것 자체가 실수였지만

지금에 와서 그 사실에 대해 어떻게 해볼 방도는 거의 없는 것이다.
  연구소에 들어선 잭슨은 헤버링의 메르세데스 옆에 차를 세웠다.  그는
헤버링이 
그가 실험 기구를 사라도 건네준 돈에서 그 차를 샀음을 알고 있었다.
  잭슨은 걸음을 옮겨 건물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그 멋진 건물을 짓는데 
얼마나 들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의료인 하원 정치 행동 위원회는 
닥터 아놀드 헤버링에게 개인적인 기념비를 건립해준 셈이었다.  하지만 그 
대가는 제정신이 아닌 그 헤버링이 야기한 엄청난 골칫거리뿐이었다.
   딸깍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잭슨은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난 여기 회의실에 있소. 
  헤버링이 소리를 질렀다.
  잭슨은 헤버링이 어떤 방을 말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그곳은 회의실이라고
하기엔 
맞지 않았다.  잭슨은 문간에 걸음을 멈추고 높은 천정에 유리로 벽면을 장식한 
넓은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그곳에는 커다란 중국산 카펫 위에 치펜데인 소파
두 
개가 마주보게 놓여 있을 뿐 다른 기구란 하나도 없었다.  헤버링은 소파 하나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중요한 것이기를 바라오. 
  잭슨이 먼저 입을 열며 말했다.  둘은 서로를 마주한 채 소파에 걸터앉았다.
  외모로 보아 그들은 정반대였다.  헤버링은 비대한 얼굴에 선이 거친 땅딸막한

사람인 반면 잭슨은 훤칠하고 여윈데다가 금욕주의자처럼 기름기가 없는
얼굴이었다.  
게다가 그들이 거친 복장 때문에 대비가 더 더욱 확연해보였다.  헤버링이
작업복 
차림이었던 반면 잭슨은 은행가들이 즐겨입는 가는 세로줄 무늬의 양복을 입고 
있었다.
   그 불루멘탈이란 여자가 바로 이 앞마당까지 들어왔었소. 
  그는 어깨 너머로 손짓까지 해가며 말을 이었다.
   그 여자가 아무 것도 못 보고 돌아갔다는 건 분명하지만, 여기까지
찾아왔다는 
사실은 무엇인가 감을 잡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거요.  그 여자를 제거해야만
하오. 
   당신에겐 충분한 기회가 있었지 않소? 
  잭슨이 쏘아붙였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그런데 당신이랑 그 멍청한 자식은 매번 일을 엉망으로

망쳐버렸단 말이오.  집에서도, 또 어젯밤 씨디씨에서도 말이오. 
   그래서 또 해보겠다는 것 아니오?  하지만 이번엔 당신이 말리고 있는 거요. 
   그것 맞소.  하지만 그건 당신네들이 그녀에게 에볼라 바이러스를
감염시키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오. 
   안될 이유가 뭐가 있소? 
  헤버링이 말했다.
   그 여자는 호나자들이랑 접촉을 했지 않소?  아무도 의심을 하지는 않을
거요. 
   난 아틀란타에 에볼라가 발생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단 말이오. 
  잭슨이 소리를 질렀다.
   난 그 병이 무서워 소름이 끼쳐요.  나에게도 가족이 있딴 말이오.  그
여자는 
우리에게 맡기시오.  우리가 알아서 하겠소. 
   오, 물론 그렇겠지요. 
  헤버링이 코웃음을 쳤다.  
   당신네들은 그녀를 특수 병원체부에서 쫓아냈을 때도 그런 말을 했어요.  
하지만 그녀는 아직도 계획 전체에 큰 위협이 되고 있소.  나는 그녀를
제거해버릴 
작정이오. 
   결정은 당신이 내리는 게 아니오. 
  잭슨이 험악하게 말했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원래 계획대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사용했더라면 이런

황당한 상황에 봉착하지는 않았을거오.  당신이 아무런 상의도 없이 임의로 
에볼라 바이러스를 사용해버렸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 우리들은 모두 공황
상태에 
빠져버렸소! 
   또 그 타령이로군. 
  헤버링이 혐오스럽다는 듯 말했다.
   리히터 클리닉이 문을 닫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다들 좋아만하더니 말이오.
 
만일 피에이씨가 선불제 건강 관리 시스템에 대한 대중들의 점증하는 신뢰를 
붕괴시키려 들었다면 이보다 나은 방법이 어디 있었을 것 같소?  원래 계획과의 
유일한 차이는 내가 수년간의 실험실 연구를 단축시켜줄 수 있는 현장 실험
연구를 
좀 해보았다는 것뿐이오. 
  잭슨은 물끄러미 헤버링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가 완전히 미쳐버렸다는 
결론에 도달한 잭슨은 진저리를 쳤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미 늦어버렸다. 
일단 
계획이 실행에 옮겨지기 시작한 이상 그것을 쉽사리 중단시킬 방도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피에이씨 집행 위원회에서는 그런 제안을 그렇게 쉽사리
생각해버릴 
수가 있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화가 끓어올랐지만 참으며 잭슨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나는 열 번이 넘게 당신에게 위원회가 기분이 좋아하기는커녕 반대로 그 인명

손상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는 말을 전해주었소.  우린 그럴 뜻이 전혀
아니었다는 
걸 당신도 알지 않소.  닥터 헤버링. 
   엿같은 소리 마시오! 
  헤버링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우리가 사용하려고 했던 종류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썼어도 분명히 죽는 
사람이 생겼을 것이오.  그럼 몇 명 정도면 마음에 들겠소?  백 명쯤?  그리고 
인명 손실이니 뭐니, 당신들 돈 많은 의사들이 불필요한 수술을 하거나 무능한 
의사들이 병원의 자리를 차지해서 생기는 인명 손실은 어떻소?
   우리는 절대 불필요한 수술이나 무능을 옹호하지는 않소. 
  잭슨은 이제 이 미치광이 정신 병자랑은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당신네들은 그것을 중단시킬 생각도 없이 수수방관만 하고 있는 거요. 
  헤버링이 혐오감에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난 처음부터 당신이나 피에이씨가 미국 의학계의 전통적인 가치 기준이 
표류하고 있는 게 걱정이라는 둥 말도 안되는 헛소리를 하는 걸 믿지도 않았소.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릴랑 집어치워요!  이건 모두 당신네들의 경제적 이익을 
정당화하기 위한 계략에 불과해요.  갑자기 의사들 수가 폭증해 환자가 충분치 
않게 되어버렸다, 이거 아닙니까.  내가 당신네들에게 협조를 한 이유는 
당신네들이 이 연구소를 지어준다는 이유 한 가지뿐이었소. 
   하지만 우리는 당신에게 당장 중단하라고 명령했었소.  리히터 클리닉 사건 
직후에 말이오. 
   하지만 그건 영 마지못해하며였소. 
  헤버링이 말했다.
   당신네들은 그 결과를 아주 달갑게 생각했소.  리히터 클리닉이 문을 닫게 
되었을 뿐 아니라 5년 내 처음으로 캘리포니아 보건 계획의 새로운 신청자들의 
수가 감소했으니까.  의료인 하원 정치 행동 위원회는 가끔 일말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는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모두 즐거워하고 있었소.  그리고, 나는 그
덕택에 
백신이나 치료법이 없긴 하지만 에볼라가 최상급의 생물학적 무기가 될 수 
있다는 나의 확신을 사실로 입증해보일 수가 있었소.  나는 그것이 쉽게
전염시킬 
수 있고, 비교적 쉽게 진압할 수 있고 동시에 소집단에게 엄청난 전염력을 
수 가진다는 것을 입증했소.  닥터 잭슨, 우리 서로 원하던 것을 얻고 있소. 
이제 
남은 문제는 그 여자가 진짜 말썽을 일으키기 전에 어떻게 손을 써야 한다는 
것뿐이오. 
   내가 당신에게 마지막으로 경고하겠소. 
  잭슨이 말했다.
   우리는 더 이상의 에볼라 사태를 원치 않소.  이건 명령이오. 
  헤버링은 웃음을 터뜨렸다.
   닥터 잭슨. 
  그가 몸을 앞으로 숙이며 말했다.
   내가 보기에 당신은 사실을 잘 파악하지 못하는 듯하군.  피에이씨는 더 이상

내게 이래라저래라 명령할 입장이 아니오.  당신들은 만일 이 사실이 만천하에 
밝혀지면 당신들 꼴이 어떻게 될 것인지 상상이나 해보셨소?  그리고, 나는 
당신네들이 그 불루멘탈이란 여자를 내 방식대로 처리하게 해주지 않으면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될 거라는 얘기를 해주고 싶소. 
  잠시 잭슨은 자신의 양심과 실랑이를 벌였다.
  마음 같아서는 헤버링의 목을 죽을 때까지 마구 졸라대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헤버링의 말이 옳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피에이씨의 손은 꼼짝도 할 수
없이 
묶여버리고 만 것이다.
   알겠소. 
  그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닥터 불루멘탈은 당신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대로 처리하시오. 
하지만 
그저 내게 더 이상 그 얘기가 들리지 않도록 해주시오.  그리고, 아틀란타에서는

에볼라를 사용하지 마시오. 
   좋소. 
  헤버링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야 마음이 편하다면 내가 그 두 개는 확실히 약속을 드리지.  어쨌든,
나는 
매우 이성적인 사람이니까. 
  잭슨은 몸을 일으켰다.
   또 한가지가 있소.  내 사무실로 전화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소.  만일 연락할

일이 있으면 집에 있는 나 혼자 쓰는 전화로 해주시오. 
   알겠소. 
  헤버링이 말했다.
  
  아틀란타-시카고 노선은 다행히도 운항 회수가 많아서 마리사는 불과 삼십 분 
뒤에 출발하는 비행기에 좌석을 얻을 수가 있었다.  그녀는 딕 프란시스의
소설을 
한 권 샀지만 책에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그녀는 태드에게
전화를 
걸어 사과라도 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자신의 점증하는 의심에 대해 어떻게
또 
어디까지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확신이 서지를 않자 그녀는 그저 묻는 말에나 
대답을 하는 정도로 대화를 이끌어나가기로 작정했다.  그녀는 연구실로
다이얼을 
돌렸다.  생각했던 대로 그는 또 늦게까지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마리사예요. 
  그가 수화기를 집어들자 마리사가 말했다.
   저한테 화나셨죠? 
   그걸 말이라고 해요? 
   태드, 정말 미안해요. 
   내 출입 카드 하나를 가져갔더군요. 
   태드, 정말 미안해요.  만나서 모든 걸 설명드릴게요. 
   초밀폐 실험실 내로 들어갔었죠? 
  태드는 평소답지 않게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그래요. 
   마리사, 당신 때문에 실험실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는 걸 알아요?  실험 
동물들은 모두 죽어버렸고 또 어떤 사람 하나는 에모리 병원 응급실까지 
실려갔었단 말이에요. 
   괴한 둘이 실험실에 들어와 날 공격했어요. 
   당신을 공격했다구요? 
   그래요. 
  마리사가 말했다.
   내 말을 믿어주셔야 해요. 
   도대체 어떤 말을 믿어야할지 모르겠소.  왜 이런 일들이 계속 당신한테 
일어나는 거죠? 
   에볼라 감염 사건들 때문이에요.  태드, 다친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다른 부서에 있는 기사 중 하난데 잘은 모르겠소. 
   그 사람이 누구인지 좀 알아봐주세요.  그리고 어젯밤 실험실에 들어갔던 
사람들이 누구였는지도요. 
   그건 힘들 것 같군요.  우리 사이를 다 알아서 지금 당장은 아무도 내게 말을

해주지 않을 거예요.  지금 어디 있어요? 
   공항에 있어요. 
   만일 공격을 당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리로 돌아와 납득할 만큼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게 좋을 거예요.  그렇게 도망치는 것보다는. 
   나는 도망치는 게 아니에요. 
  마리사가 고집스럽게 말했다.
   나는 의료인 하원 정치 행동 위원회라는 단체를 조사해보기 위해 시카고의
미국 
의학 협회를 찾아가는 중이에요.  혹시 그런 이름 들어본 적 있어요?  그
사람들이 
어떻게든 관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마리사, 내가 보기엔 당신은 곧장 센터로 돌아오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혹시

모르고 있을까봐 하는 말인데, 당신은 정말 심한 곤경에 처해 있단 말이에요. 
   나도 알아요.  하지만 당분간은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할 
거예요.  저 말고 또 누가 어젯밤 초밀폐 실험실에 들어갔었는지 생물학전 안전 
관리실에 제발 한 번 물어봐주실 수 없어요? 
   마리사, 난 지금 당신의 부탁을 들어줄 만한 기분이 아니에요. 
   태드, 난... 
  마리사는 말을 멈추었다.  태드가 전화를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천천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사실 그를 탓할 수만은 없었다.
  그녀는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았다.  탑승 시간까지는 아직도 5분이 남아 
있었다.  마음을 가다듬은 그녀는 랠프의 집으로 다이얼을 돌렸다.
  그는 벨이 세 번 울린 뒤에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태드와는 달리 그는 화를 
내기는커녕 몹시도 걱정스러워 했다.
   맙소사.  마리사!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요?  저녁 신문에 당신

이름이 대문짝만하게 났더군요.  당신은 지금 심각한 곤경에 처해 있어요.  
아틀란타 경찰들이 당신을 찾아다니고 있는 중이라구요. 
   저도 대충은 알고 있어요. 
  마리사가 말했다.  돌이켜보니 비행기 표를 끊을 때 가명을 사용하고 또
요금도 
현금으로 지불했었다는 게 정말 현명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랠프, 쓸 만한 변호사는 하나 구해 놓으셨겠지요? 
   정말 미안하지만 아직...하지만 당신이 부탁을 했을 때에는 이렇게 급박하게 
필요하게 되리라고는 미처 생각을 못했어요. 
   이젠 정말 급하게 됐어요. 
  마리사가 말했다.
   하지만 전 하루나 이틀 정도 아틀란타를 떠나 있을 예정이에요.  그러니 
내일이라도 한 명 구해주신다면 정말 고맙겠어요. 
   도대체 무슨 일이오? 
  랠프가 물었다.
   신문에는 자세한 이야기가 나와 있지 않아요. 
   어젯밤 말씀드렸던 것처럼 저는 당신까지 끌어들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어요. 
   나는 상관 없소.  당장 이리로 건너와요.  자세히 이야기를 들어보고 내일
아침 
당장 변호사를 하나 구하도록 합니다. 
   혹시 의료인 하원 정치 행동 위원회라는 단체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세요? 
  랠프의 제안을 한쪽 귀로 흘려버리며 마리사가 물었다.
   그런 이름은 금시초문이오. 
  랠프가 말했다.
   마리사, 제발 이리로 좀 와요.  내가 보기엔 그 문제가 무엇이건 당당히
직면을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요.  도망을 쳐버리면 마치 무엇을 잘못하고 그러는 
것처럼 불필요한 오해를 살 수가 있어요. 
  바로 그때, 그녀가 탈 비행기의 수속이 시작된다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방금 말씀드렸던 그 단체를 조사해보기 위해 에이엠에이(미국 의학 협회)로
가는 
중이에요. 
  마리사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내일 전화 드릴게요.  지금은 빨리 가봐야 해요. 
  전화를 내려놓은 그녀는 서류 가방과 소설책을 집어들고 탑승구로 달음질을
쳤다.
    13


    5월 22일

  시카고에 도착한 마리사는 오랜만에 좋은 호텔에 투숙해 지친 심신을 쉬게 
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파머 하우스 호텔에 
크레디트 카드를 제시한 그녀는 곧장 방으로 올라가 침대로 뛰어들었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룸 서비스로 과일과 커피를 주문했다.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투데이 쇼를 켜놓고 샤워를 하러 욕실로 들어갔다.  마악 샤워를 마치고 
머리를 말리려는 순간 앵커맨이 에볼라를 언급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필라델피아의 최근 소식이 나오지 않을까 해서 달려나가 보았더니 뜻밖에도 
새로 터져나온 감염 사태에 대해 보도하고 있었다.  그것은 뉴욕 시5번가 위쪽에

위치한 로센버그 클리닉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기리쉬 메타라는 의사가
에볼라에 
감염된 것으로 진단을 받았다는 보도 내용이었다.  미처 손을 쓸 사이도 없이
언론 
매체에 이 사실이 누출되어 뉴욕 시 전체는 공포로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마리사는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필라델피아 상황이 아직도 진행중인데 또 
하나의 감염 사태가 터져나오다니.  서둘러 준비를 끝내고는 그녀는
에이엠에이의 
주소가 적힌 종이를 들고 러쉬가를 향해 방을 나섰다.
  안내 창구에 앉아 있던 여자는 마리사에게 홍보과로 가보라고 일러주었다.  
마리사는 비서들 중 하나를 붙들고 용건을 설명하고 있는데 마침 과장인 제임스 
프랭크가 그 옆을 지나게 되었다.  그는 그녀를 사무실 안으로 불러들였다.
  프랭크는 쉽게 가늠할 수 없는 나이에 약간 통통하고 대머리가 되기 시작한 
사람이었지만 성실함과 자상함이 흘러나오는 가식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리사는 한눈에 그에게 호감을 느꼈다.
   의료인 하원 정치 행동 위원회라... 
  그는 마리사가 말해준 이름을 다시 한 번 반복하며 중얼거렸다.
   난 금시초문인데요.  그런 이름은 어디서 듣게 되셨죠? 
   어떤 하원의원 후원자 명단에서요. 
  마리사가 말했다.
   그것 참 이상하군요. 
  프랭크가 말했다.
   나는 내가 그런 정치 압력 단체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컴퓨터로 한 번 조회해봅시다. 
  프랭크씨는 키보드를 두들겨 그 이름을 입력시켰다.
   정발 별일도 아 있군요.  당신 말이 정말 맞군요.  여기 나와 있네요. 
  그는 손가락으로 컴퓨터 스크린을 가리켰다.
   의료인 하원 정치 행동 위원회.  별도 격리 기금 단체로 등록이 되어 있군요.

   도대체 그게 무슨 뜻이죠? 
  마리사가 물었다.
   이름만큼 거창한 건 아니에요.  그건 단지 이 단체가 법인화된 멤버쉽 단체로

법적으로 선거 운동 등에 기금을 운용할 수 있는 별도의 소 위원회를 설립해두고

있다는 뜻이지요.  자, 그 사람들이 누구를 후원하는지 한 번 살펴봅시다. 
   한 명은 알고 있어요. 
  마리사가 말했다.
   켈빈 마크햄이란 의원이에요. 
  프랭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여기 몇 명 다른 보수파 후보자들 옆에 그 사람 이름이 나와 
있네요.  적어도 이 단체의 정치 성향은 알 수가 있군요. 
   우익이죠. 
  마리사가 말했다.
   어쩌면 극우파라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네요. 
  프랭크가 말했다.
   내가 보기엔 이 사람들이 디알지(어떤 진단이 붙으면 치료 방법이나 치료
기간에 
관계없이 동일한 의료 수가를 받도록 하는 시스템)의 보조금을 삭감하는 등,
비슷한 
정책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지원을 하는 것 같군요.  연방 선거 관리 위원회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한 번 걸어볼게요. 
  잠깐 잡담을 나눈 뒤에 그는 친구에게 의료인 하원 정치 행동 위원회에 대해
몇 
마디 질문을 던졌다.  몇 번 고개를 끄덕이며 귀를 기울이던 그는 전화를
내려놓고 
마리사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 친구도 피에이씨에 대해서는 잘 모르더군요.  하지만 조직 취지문을 
찾아보고 그 단체가 델라웨어에 법인 등록이 되어 있다고 했어요. 
   델라웨어요?  왜 하필이면 그곳에 등록이 되어 있을까요? 
  마리사가 물었다.
   그곳이 법인세가 제일 싸거든요. 
   그 단체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볼 수는 없을까요? 
  마리사가 물었다.
   어떤 것들을요?  직원이 누군지, 본부가 어딘지 하는 것들 말이가요? 
   네. 
  다시 전화기를 집어들며 프랭크가 말했다.
   델라웨어에서 어디까지 알아낼 수 있나 한 번 해봅시다. 
  그는 꽤 성공적인 성과를 올릴 수가 있었다.  처음에는 델라웨어 주 의사당의 
담당 직원이 그런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직접 찾아와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프랭크가 상급자를 구슬러 융통성을 좀 부리게 만들었다.
  프랭크는 듣는 것들을 메모지에 받아적으며 근 15분이나 전화통화를 했다.  
전화가 끝나자 그는 마리사에게 이사진들의 이름이 적힌 명단을 건네주었다.
  회장 조슈아 잭슨, 엠디; 부회장 로드 베커, 엠디; 회계 담당 싱클레어 티만, 
엠디; 사무국장 잭 크라우스, 엠디; 이사 구스타프 스웬스, 엠디; 두에인 무디, 
엠디; 트렌트 굿리지, 엠디. 서류 가방을 연 마리사는 프로페셔널 랩의 사주들 
명단을 꺼내 들었다.  모두 똑같은 이름들이었다.
  마리사는 어지러운 머리로 에이엠에이를 나섰다.  그녀의 머릿속에 또아리를
튼 
의혹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기괴하기만 했다.  초보수적인 의사 단체가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취급할 때나 사용되는 첨단기기를 구비한 실험실로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걸까.  일부러 마리사는 자신의 질문에 대답을 회피했다.
  호텔로 향하면서 마리사는 다시 한 번 비판적인 눈길로 자신의 가설을 
생각해보았다.  그녀는 여태까지 알게 된 중요 사실들을 하나하나 점검하기 
시작했다.
  각 에볼라 사태는 선불제 건강 관리 프로그램을 운용하는 개인 그룹 병원에서 
발생했다; 지표 증례들의 대부분은 외국계인 것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지표 증례가 된 환자들 모두가 발병 직전 노상에서 폭행 강도를 당했던 
사실이 있었다.다.  유일한 예외는 음식을 매개로 전염이 된 것으로 생각되는 
피닉스 건뿐이었다.
  그때, 지나던 상점의 진열장에 챨스 쥬르당 구두들이 얼핏 곁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구두라면 사족을 못쓰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진열장 안을 
들여다보려고 갑자기 걸음을 멈추는 바람에 그녀는 뒤에 따라오던 남자와 부딪쳐

하마터면 길바닥에 쓰러질뻔했다.  그는 험상궂게 그녀를 노려보았지만 그녀는 
그를 그냥 무시해버렸다.  어떤 계획 하나가 섬광처럼 그녀의 머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만일 그녀의 의심이 틀린 것이 아니고 또 전번의 감염 사태들이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면 이번 뉴욕 사건의 지표 증례는 선불제 건강 관리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발병하기 며칠 전 노상 강도를 당한 일이 있을 것이다.  마리사는 
뉴욕으로 가보아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이 호텔로 돌아가려면 어떤 방향을 택해야 할지 주변을
둘러보았다.  
앞쪽에 있는 고가 철도를 본 그녀는 파머 하우스근처에서 지하철이 회선한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갑자기 두려움이 밀려와 그녀는 서둘러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녀가
집에서 
공격을 받았던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초밀폐 실험실에서 그녀를 
붙들었던 사나이들이 그녀를 죽이려 들었던 일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더더군다나 마크햄이 그녀를 전보시킨 일은 이제와 생각하니 당연한 것이었다.  
만일 그녀의 우려가 사실이라면 거대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으며, 지금 그녀는 
엄청난 위험에 직면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 순간가지 시카고가 안전하다고 생각했었지만 이제, 그녀는 눈에 보이는
모든 
사람들이 다 수상한 것 같았다.  상점의 진열장 앞에는 마치 아이쇼핑을 하는 
척하면서 그녀를 감시하고 있음이 틀림없어보이는 사나이 한 명이 서 있었다.  
그녀는 그 사람이 미행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길을 건넜다.  하지만 그는 
진열장에만 정신을 팔고 있었다.
  길거리의 커피숍으로 뛰어든 마리사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차를 한 잔 
주문했다.  그녀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밖을 내다보았다.  그녀를 두렵게 
만들었던 사내가 커다란 쇼핑백을 들고 상점 문을 나와 택시를 잡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괜히 지레 겁을 먹었군!
  그녀가 어딘지 눈에 익은 비즈니스맨을 보게 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녀의 주의를 끈 것은 마치 주관절이 고정되어 굽힐 수가 없는 듯 괴상한 
각도로 팔을 뻗어든 남자가 서류 가방을 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순간, 섬광처럼 지난번 집에서 팔이 관절부에서 고정되어 있는 듯했던 형체 
모를 사람과 필사적으로 사투를 벌인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리고 또
실험실에서의 
악몽이...
  마리사가 바라보는 동안 그 사나이는 한 손으로 계속 서류 가방을 움켜쥔 채
한 
손만을 사용해 담배 한 대를 꺼내 불을 붙였다.  마리사는 침입을 했던 괴한이 
서류 가방을 들고 있었다는 태드의 말을 기억해냈다.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마리사는 이 모든 것이 꿈이기만을 기도했다.  
한참동안이나 앉아 눈을 비빈 그녀가 다시 시선을 그리로 돌렸을 때, 그
사나이는 
벌써 사라지고 없었다.
  차를 다 마신 마리사는 파머 하우스로 가는 방향을 물었다.  그녀는 초조하게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서류 가방을 옮겨들며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첫 번째 
모퉁이에서 어깨 너머로 뒤를 돌아다보았을 때 아까 보았던 비즈니스맨이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즉시 방향을 바꾼 그녀는 황망히 길을 건넜다.  그쪽을 보니 그 사내는 거리
한 
중간쯤까지 걸어오다가 그녀를 쫓아 길을 건너는 것이었다.  갑자기 솟아오르는 
공포에 그녀는 택시를 잡으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그녀는 급하게 몸을 돌려 고가 철도로 달음질을 쳤다.  그녀는 황급히 계단을 
뛰어올라 한 떼의 승객들 틈으로 파고들었다.  가급적이면 사람들 틈에 있는
것이 
나을 듯했다.
  플랫폼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기차를 기다리며 서성거리고 있었는데 마리사는 
일부러 출입구에서 멀리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가슴은 아직도 방망이질치고 
있었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생각해 보았다.  정말 동일 인물일까?  정말 
나를 미행해온 걸까?
  마치 그녀의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그가 시야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거친
피부와 커다란 체구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이빨들은 흉측하게 틈새가 벌어져

있었다.  그는 주먹을 쥔 손으로 입을 가린채 잔기침을 했다.
  그녀가 도망을 치려는 순간 우뢰 같은 소리를 내며 기차가 플랫폼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차량을 향해 달려드는 승객들 틈바구니에서 다른 사람들처럼
떠밀려져 
안으로 들어간 마리사는 그 사나이의 모습을 놓쳐버렸다.
  마리사는 스파이 영화들에서 보았떤 것처럼 마지막 순간에 기차에서 내리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밀어닥치는 사람들에 막혀 문은 그녀가 내리기도 전에 
닫혀버리고 말았다.  몸을 돌린 그녀는 주변의 얼굴들을 둘러보았다.
  기차가 갑작스레 출발을 하며 몸이 앞으로 쏠리자 그녀는 기둥을 붙들기 위해 
손을 내뻗었는데 바로 그 순간 그의 모습이 다시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그녀 바로 옆에서 성한 팔로 같은 기둥을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어찌나 
가까웠던지 마리사는 그의 향수 냄새까지 맡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가 몸을 
돌리자 그들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기둥을
잡았던 
손을 풀었다.  그리고 기침을 하며 재킷 주머니로 손을 집어넣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마리사는 비명을 내질렀다.  그녀는 그에게서 
멀어지려고 미친 듯 몸부림을 쳤지만 꽉꽉 들어찬 승객들 대문에 그녀의 노력은 
또다시 수포가 되어버렸다.  말을 하거나 움직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모두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때 요란한 바퀴 소리와 함께 기차가 
급회전을 하자 마리사와 그 사나이는 다시 기둥을 움켜쥐었다.  그들의 손이
서로 
스쳤다.
  마리사는 마치 그 기둥이 벌겋게 달은 쇳덩이인 양 소스라치며 손을 놓았다. 
그 
순간, 철도 경관 한 명이 사이를 헤치며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괜찮으세요? 
  시끄러운 기차 소리 위로 경관이 소리를 질러 물었다.
  이 사람이 아까부터 계속 저를 쫓아다니고 있어요. 
  마리사가 손가락질을 하며 말했다.
  경관은 비즈니스맨에게로 몸을 돌렸다.
   사실입니까? 
  그 남자를 고개를 저었다.
   난 저 여자를 생전 본 적도 없습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군요. 
  기차가 속력을 줄이자 경관은 마리사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정식으로 고발을 하고 싶으세요? 
   아뇨. 
  마리사가 소리를 쳤다.
   나를 더 이상 따라다니지만 않는다면 그럴 생각은 없어요. 
  바퀴의 시끄러운 제동음과 공기 브레이크의 쉭쉭거리는 소리 때문에 기차가 
완전히 정지하기 전까지는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가 없었다.  기차의 정지와
함께 
즉시 출입구가 열렸다.
   만일 제가 내려서 이 여자분께서 기분이 나아지실 것 같다면 기꺼이 여기서 
하차를 하겠습니다. 
  비즈니스맨이 말했다.
  닫히지 않도록 몸을 출입구를 가로막은 경관이 어떻게 하겠냐는 듯 마리사를 
쳐다보았다.
   그랬으면 좋겠어요. 
  갑자기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잃은 마리사가 대답했다.
  그 사내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이더니 이내 문 밖으로 발을 옮겼다.  그
즉시, 
문이 닫히면서 기차는 다시 한 번 왈칵 출발을 했다.
   이제 괜찮으세요? 
  경관이 물었다.
   훨씬 나아졌어요. 
  마리사가 말했다.  그녀는 그 사업가 차림의 사내가 떨어져나갔다는 데는
위안을 
느꼈지만 혹시라도 경관이 자신의 신분을 캐물을까봐 걱정이 되었다.  그녀는 
고맙다는 인사를 한 뒤 고개를 돌려 먼산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심중을 뚫어본
듯 
경관은 잠자코 발길을 옮겼다.
  모든 눈길들이 아직도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마리사는 다음

역에서 황망히 내려버렸다.  그 사나이가 이 먼 곳까지도 자신을 추적해 왔다는 
사실에 더럭 겁이 난 마리사는 길거리로 내려서자마자 눈에 띈 첫 번째 택시를 
잡아타고 파머 하우스를 향했다.
  택시에 올라 일단은 위험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이 들자 그녀는 약간의 평정을 
되찾을 수가 있었다.  그녀는 이제 혼자만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도대체 어디에 도움을 청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어떤 음모의 존재를 가정하고 있었지만 도대체 그것이 
어떤 규모의 것인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고 더구나 그녀는 아무런 증거도 
확보하고 잇지 못한 것이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것들은 불과 몇 개의 암시적인

사항들뿐이었다.
  그녀는 어차피 이렇게 된 바에야 뉴욕에까지 가보는 것이 좋겠다고 결단을 
내렸다.  만일 그 감염 사건에 대해 그녀의 의심이 사실로 판명된다면 누구에게 
연락을 취하는 것이 좋을지의 결정은 그 곳에서 하면 되니까 말이다.  그녀는 
랠프가 그동안 유능한 변호사를 하나 구해놓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어쩌면
그가
모든 일을 잘 해결해줄지도 모르는 것이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마리사는 곧장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가능한 한 빨리

호텔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그녀는 크레디트 카드를 사용했다는데 자신을 
나무랐다.  비행기를 이용했을 때 가명과 현금을 사용했었던 것처럼, 호텔에서도

똑같은 방식을 취했어야만 했는데.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마리사는 간단한 소지품들만 챙겨 곧장 공항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문을 연 그녀는 핸드백과 서류 가방을 던지듯 책상 위에 
내려놓은 다음 곧장 욕실을 향했다.
  바로 그 순간, 눈가에 어른거리는 어떤 움직임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그랬음에도 세찬 일격을 맞는 그녀는 앞으로 퉁겨져나가 침대 사이의 
바닥에 나뒹굴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아까 기차에서 보았던 사내가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광란 상태가 된 마리사는 침대 밑으로 뛰어들었지만 그 사나이는 성한 손으로 
그녀의 치맛자락을 잡아채 힘껏 잡아당겼다.
  마리사는 바닥에 두이굴려 격렬하게 발버둥을 쳤다.  사나이의 손에서 
무엇인가가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총이다!  마리사는 생각했다. 
이제 
그녀는 공포에 질려 기절을 할 것만 같았다.
  사나이가 총을 잡으려고 몸을 구부릴 때 마리사는 미친 듯이 문쪽에 가까운 
침대 밑으로 들어갔다.  총을 집어든 침입자는 마리사가 웅크리고 있는 침대
밑을
들여다보고는 그녀를 향해 커다란 손을 뻗어왔다.  그녀가 잡히지 않자 그는 
무릎을 꿇고 침대 밑으로 깊숙이 손을 뻗어 마리사의 한쪽 발목을 붙들고 세차게

잡아당겼다.
  마리사는 엄청난 힘으로 두 번째 비명을 내질렀다.  그녀는 다시 발길질을 해 
사나이의 손을 풀어냈다.  눈깜짝할 사이에 그녀는 다시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침입자는 마침내 총을 침대 위에 던져놓고 그녀를 쫓아 침대 밑으로
기어들었다.  
하지만 마리사는 재빨리 반대편으로 침대를 빠져나온 다음 달음질을 쳤다. 
그녀가
마악 손잡이를 비틀어 문을 여는 순간, 침입자는 침대 너머로 몸을 날려 그녀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세차게 그녀를 옷장 쪽으로 동댕이쳤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거울이 무너져내렸다.
  사내는 재빨리 복도를 확인한 뒤 문을 걸어잠갔다.  마리사는 건너편 침대
위에 
놓인 총을 집어들고 욕실로 뛰어들었다.  침입자가 허겁지겁 도착했을 때
마리사는
벌써 욕실 문을 거의 다 닫은 상태였다.
  마리사는 세면기에 등을 붙이고 안간힘을 쓰며 문짝을 밀어붙였다.  하지만 
조금씩조금씩 문틈이 벌어지면서 침입자의 팔이 그 사이로 쑥 들어왔다.
  마리사는 애처롭게 벽면에 달린 전화기에 시선을 던졌지만 문짝에서 발을 떼지

않고서는 도저히 그곳까지 닿을 수가 없었다.  혹시 벽에다 대고 총을 한 방
쏘면 
침입자가 겁을 집어먹고 물러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마리사는 손에 든 무기를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평범한 권총이 아니라 옛날
소아과 
병동에서 대량 예방 접종을 할 때 사용하고는 했던 것과 같은 종류의 공기 
주사총이었다.
  문틈이 조금 더 벌어지자 그는 이제 팔을 거의 자유롭게 놀릴 수 있게 되었다.
 
여기저기를 더듬던 손이 마침내 마리사의 발목을 움켜쥐었다.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생각이 들자 마리사는 사내의 팔에 공기 주사를

밀착시켜 방아쇠를 당겼다.  그는 소스라치며 비명을 질렀다.  팔이 물러남과 
동시에 밀어붙이던 문짝도 요란한 소리를 내며 쾅 닫혀버렸다.
  침입자가 허둥지둥 문을 열고 복도로 뛰쳐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침실로 나온 마리사는 방안을 가득채운 강한 페놀 소독액 냄새에 
고개를 갸우뚱햇다.  떨리는 손으로 공기 주사기를 든 그녀는 원판형의 주입구 
쪽을 살펴보았다.  직감적으로 그녀는 그 공기 주사총에 에보라가 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녀가 냄새를 맡은 소독액은 시술자의 노출을 막기 위한 
방어수단 중의 하나일 것이었다.
  이제 그녀는 정말로 공포에 사로잡혀버렸다.  그녀는 한 사람을 결국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어버렸을 뿐 아니라 어쩌면 또 ㅎ나번의 감염 사태를 
야기시켰는지도 모르게 되었다.  평정을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쓰며, 그녀는 
쓰레기통에서 꺼낸 비닐 봉지에 조심스럽게 공기 주사총을 집어넣은 뒤 다른 
비닐로 첫 번째 봉지를 단단히 매듭지었다.
  잠시 그녀는 혹시 경찰에 연락을 하는 게 좋지 않을까 망설였지만 이내 그녀는

경찰이 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침입자는 벌써 멀리
도망을
친 상태이고, 만일 저 공기 주사에 정말 에볼라 바이러스가 들어 있다면, 경찰의

개입은 소란을 자초하는 일이 되어버린다.  그렇게 되면 잠적한 사나이를 쫓는 
것은 불가능해지고 말 것이다.
  마리사는 복도를 내다보았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엇다.  문 손잡이에 
방해하지 
마시오. 표지를 건 마리사는 공기 주사총이 들어 있는 비닐 봉지와 소지품들을 
챙겨들고 세탁실로 내려갔다.  세탁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락스 한 병을 찾아낸

그녀는 비닐 봉지의 겉면을 소독한 다음 자신의 손도 아울러 세척해냈다.  지금 
취할 수 있는 감염 예방 조치는 그것밖에 없었다.
  로비로 올라가보니 평상시와 같이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그런대로 
마음이 놓인 마리사는 일리노이주 역학 담당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신의
신분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은 채 그녀는 파머 하우스 호텔 2410호가 에볼라 
바이러스에 의해 오염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설명을 했다.  놀란 그가
질문을 
던지려는 순간 그녀는 재빨리 전화를 내려놓았다.
  다음, 그녀는 태드에게 전화를 걸었다.  바삐 행동을 취하다보니 그녀는
어느덧 
조금 전 일어났던 일에 대해 생각을 접어두고 있었다.  마리사가 몹시도 흥분한 
상태라는 사실을 깨닫자 태드의 냉정한 목소리가 사그러들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마리사, 당신 정말 괜찮아요? 
   부탁을 두 가지 드려야겠어요.  지난번 당신을 난처하게 만든 뒤로 다시는 
당신을 귀찮게 굴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었지만 이제는 다른 길이 없어요.  먼저,

지난번 엘에이 감염 때의 회복기 혈청이 한 바이알(주사약병) 필요해요.  그걸 
뉴욕 플라자 호텔에 캐롤 브래드포드 앞으로 지급 탁송해주실 수 있겠어요? 
   캐롤 브래드포드가 도대체 누구죠? 
   제발 질문을 하지 마세요. 
  마리사는 쏟아져나오는 눈물을 참으려 안간힘을 쓰며 말했다.
   이 시점에서는 당신 모르면 모를수록 더 좋아요. 
  캐롤 브래드포드는 그녀의 대학시절 룸 메이트 중의 하나로 마리사는 그
이름을 
사용해 아틀란타-시카고 간 항공편을 탑승했었다.
   다음 부탁은 제가 속달편으로 당신에게 보내려는 소포에 관한 것이에요.  
절대로 그걸 열어보시면 안돼요.  그걸 초밀폐 실험실 안에다 감추어 두세요. 
  마리사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게 전부예요? 
  태드가 물었다.
   네, 그것뿐이에요. 
  마리사가 말했다.
   절 도와주시겠어요.  태드? 
   그러죠.  그 정도라면 별 해가 될 것 같지는 않군요. 
   고마워요.  며칠 내에 모든 걸 설명할 수 있을 거예요. 
  전화를 끊은 그녀는 웨스턴 호텔의 수신자 부담 번호로 전화를 걸어 캐롤 
브래드포드라는 이름으로 그날 밤 프라자 호텔에 방을 한 개 예약했다.  일을 
마친 그녀는 파머 하우스의 로비를 죽 훑어보았다.  아무도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굳이 체크 아웃을 하지 않아도 호텔측이
크레디트
카드 회사에 지불요청을 하리라는 생각에 마리사는 곧장 거리로 내달았다.
  그녀가 처음 들른 곳은 연방 우체국이었다.
  마리사가 소포의 내용물이 다음 날까지 아틀란타에 꼭 도착을 해야 하는 특수 
백신이라고 말하자 직원들은 각별한 친절로 대해주었다.  그들은 그녀가 파손 
방지용 금속 상자에 비닐 봉지를 넣는 것을 거들어주었음은 물론 그녀의 손이 
심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자 주소가지 대신 써주었다.
  다시 거리로 나온 마리사는 택시를 잡아타고 오해어 공항을 향했다.  택시에 
올라타자마자 그녀는 혹시 전신의 임파절과 목이 붓지를 않았는지를
점검해보았다.  
전에도 에볼라와 맞닥뜨렸던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가깝게 스쳐보기는
처음이었다.
그 사나이가 의도적으로 그녀에게 에볼라 바이러스를 감염시키려 했었다는
생각에 
그녀는 온몸을 부르르 떨어  .
  그 위기를 벗어난 유일한 방법이 반대로 그를 감염시키는 것이었다는 사실은 
정말 잔인한 운명의 장난이었다.  그녀는 그 침입자가 증상 발현 전에는 
환자로부터 얻어진 회복기 혈청이 예방적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를 
바랬다.  어쩌면 그가 그렇게 호들갑 떨며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것은 그것을
알기 
때문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공항까지 가는 도중 그녀는 차차 침착해지며 논리적인 사고를 전개해나갈 수가

있었다.  자신이 다시금 공격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녀의 의혹에 신빙성을 더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 공기 주사총에 에볼라 바이러스가 들어 있다면 그녀가 
최초의 물증을 확보하게 된 셈이었다.
  택시 운전사는 매 시간마다 뉴욕행 항공편이 있다는 설명을 해주고 그녀를 
아메리카 항공사 터미널 앞에 내려주었다.  표를 구입하고 경비원들을 지나 
탑승구까지의 긴거리를 걸어내려간 그녀는 비행기를 타려면 아직도 거의 반 
시간이나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랠프에게 전화를 배호기로 마음을 먹었다.  부탁했던 번호사에 대해서 
물어보려는 것도있었지만 지금 그녀는 힘이 되어줄 따뜻한 목소리가 간절히 
그리웠다.
  마리사는 몇 분 동아닝라 랠프의 비서에게 제발 자기가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만이라도 전해달라고 애걸을 하며 실랑이를 벌였다.  한참을 고집스럽게
우긴 
끝에야 마침내 랠프가 전화를 받아들었다.
   아틀란타에 돌아왔기를 바라오. 
  그녀가 인사말을 건네기도 전에 그가 다짜고짜 입을 열었다.
   곧 갈 거예요. 
  마리사는 거듭 약속을 했다.  그녀는 자신이 현재 시카고의 아메리카 항공사 
터미널에서 뉴욕행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으며 만일 그가 적당한 변호사만 한 명 
선임해준다면 다음 날이라도 아틀란타에 돌아갈 생각이라고 설명을 했다.
   내가 여기저기 신중하게 문의를 해보았어요. 
  랠프가 말했다.
   내 생각엔 꼭 적당한 사람을 하나 찾아낸 것 같소.  그 사람 이름은 
맥퀸린이에요.  아틀란타에 있는 커다란 법률회사에 소속돼 있어요. 
   똑똑한 사람이었으면 좋겠군요. 
  마리사가 말했다.
   해결을 해주어야 할 일이 산더미 같거든요. 
   그 사람은 최고인 것 같더군요. 
   미리 거액을 지불해야 할까요? 
   글세, 잘은 모르겠지만 일종의 예약금 같은 것은 필요할 거예요.  그게
문제가 
되나요? 
   그럴 수도 있지요.  미리 얼마를 내라는지에 따라서요. 
   걱정 말아요. 
  랠프가 말했다.
   내가 기꺼이 돕겠어요. 
   그런 부탁까지 드릴 수는 없어요. 
  마리사가 말했다.
   이건 내가 자청해서 하는 거예요. 
  랠프가 말했다.
   하지만 그 대신 그 말도 안되는 여행 스케줄을 좀 취소해주었으면 좋겟소.  
도대체 뉴욕에는 또 무슨 볼일이오?  제발 그 새로운 에볼라 감염 사건 때문은 
아니었으면 좋겠군요.  또 필라델피아와 같으 꼴을 당하고 싶은 건 아니겠죠?  
곧장 아틀란타로 돌아와줘요.  난 정말 걱정이 돼요. 
   곧 갈게요. 
  마리사가 말했다.
   약속드리겠어요. 
  전화를 끊은 다음에도 마리사는 한참 동안이나 수화기를 붙들고 있었다.  
랠프와 이야기를 나누면 언제든 기분이 좋아졌다.  적어도 그만은 진심으로 
그녀를 걱정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비행기 안에서 마리사는 음료를 한 잔 주문했다.  그녀는 아직도 온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을 맴도는 커다란 의문전 중의 하나는 그 주관절이 고정된
사내가 
도대체 어떻게 그녀가 시카고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만일 동일인이라고 가정을 한다면, 그녀가 초밀폐 실험실에 있다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알 수가 있었을까?
  두 의문에 대한 대답을 찾던 마리사는 주저하는 마음으로 태드의 모습을 
떠올렸다.  출입 카드가 없어진 것을 발견했을 때 태드는 그녀가 그날 밤 그것을
사용하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저면 그는 자신이 괜스레 
말썽에 연루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두브체크에게 말을 했는지도 모른다.  태드는

그녀가 비행기를 타고 시카고로 갔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가 
의도적으로 자신의 뒤에 살이자를 따라붙였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두브체크를 원망하고 있긴 하지만 그가 헌신적이고 성실한 
과학자라는 존경심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를 경제적인 이권에 눈이
어두운
우익 의료인 하원 정치 행동 위원회와 연관을 짓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말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어디까지나 이성적인 추리이고 또 어디가지가 피해망상적인 환상인지 완전히 
혼동이 되어버린 마리사는 예방 접종용 공기 주사총을 그냥 그렇게 보내버렸다는

것이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만일 태드가 어떤 방식으로라도 연루되어 있다면 
그녀는, 그 주사기가 에볼라 바이러스에 대해 양성 반응을 보인다는 가정 하에, 
유일한 확고한 물적 증거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었다.
  비행기가 라구아디아 공항에 기착하자, 마리사는 만일 뉴욕 감염 사건이
에볼라
감염 사태에 대한 그녀의 가설과 맞아떨어진다면 곧장 랠프가 구해놓은 
변호사에게로 달려가 그와 경찰에게 전모를 털어놓고 수사에 착수하도록 
만들겠노라고 마음을 굳혔다.  그녀는 더 이상 대항해서 싸우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비행기가 멈추고 안전 벨트를 매라는 불빛이 꺼져 탑승구에 도착했음을 알리자

마리사는 몸을 일으켜 머리 위 화물 칸에서 여행 가방을 힘겹게 거내들었다.  
그녀는 캐롤 브래드포드라는 이름으로 플라자 호텔에 투숙하려던 원래 계획을 
변경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 대신 그 근처 어섹스 하우스에서 옛날 고등학교 
때의 친구, 리사 켄드릭의 이름으로 투숙을 할 것이었다.

  조지 발할라는 에이비스 렌트카 창구 앞에 기대서 수하물 출구에 북적이는 
사람들에게 무심한 눈길을 던졌다.  그의 고용주들이 그에게 붙여준 별명 
 두꺼비 는 어떤 외모상의 특징 때문이라기보다는 곤충을 기다리는 두꺼비처럼
수 
시간씩 꼼짝도 않고 잠복하는 그의 남다를 인내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 임무는 그의 장기를 살릴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었다.  그는 얼마 
전에야 공항에 도착을 했는데 그가 들은 정보로는 그 여자가 다섯 시나 여섯 시 
항공편으로 도착을 한다는 것이었다.  방금 기착을 한 다섯 시 비행기로부터
벌써
승객들이 한 둘씩 수하물 출구에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조지가 예견했던 유일한 작은 문제점 하나는 그에게 제공된 그녀의 외양에 
고나한 정보가 너무 모호하다는 것이었다.  귀엽게 생긴 작은 키에 갈색
머리칼을 
가진 서른 살짜리 백인 여자!  대개의 경우 그는 사지을 가지고 임무에 임했지만

이번 경우에는 그럴 만한 시간 여유가 없었다.
  바로 그때, 그녀의 모습이 눈에 뛰었다.  수하물 출구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서류
가방을 든 사람들 사이에 선 그녀는 다른 사람들 보다 머리 하나는 작아 도저히 
착각할래야 할 수도 없었다.  그녀의 모습을 본 조지는 그녀가 여행 가방을 든 
채로 비행기를 내렸다는 사실을 알아보았다.
  에이비스 창구를 튀어나온 조지는 그녀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해 두려고 
마리사를 향해 어슬렁어슬렁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녀를 따라 공항 청사 
밖으로 나가니 그녀는 택시를 잡기 위해 줄을 서고 있었다.  그녀는 들었던 대로

과연 귀엽고 앙증맞을 정도로 자그마했다.
  조지는 그녀가 도대체 어떻게 시카고에서 폴을 물리쳤다는 것인지 도저히 상상
 안됐다.  혹시 무슨 무술의 고수가 아닐까.  어쨌든, 조지는 그 작은
아가씨에게 
약간의 존경심을 느꼈다.  그는 알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알이 이런 수고를 하려들 리가 없었을 것이었다.
  가까이서 그녀의 모습을 세심히 지켜본 조지는 터미널 앞의 길을 건너 택시 
정류장 건너편에서 기다리고 있던 택시에 올라탔다.
  운전사는 조지를 쳐다보며 몸을 틀었다.
   그 여자를 찾아냈어요! 
  그는 서양 배처럼 통통한 조지와는 대조적으로 깡마른 체구에 새처럼 생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제이크, 내가 쪼다같아 보여?  빨리 시동을 걸어.  그 여자는 지금 택시 
정류장에 줄을 서 있단 말이야. 
  제이크는 즉시 조지의 말에 따랐다.  그와 조지는 벌서 4년째 알밑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조지가 마치 두목인 양 명령을 내린 때를 제외하고는 꽤 마음이 맞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이 그리 자주 있는 편은 아니었다.
   저기 있어. 
  조지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마리사는 마침 택시에 올라타고 있었다.
   차를 조금 앞으로 대서 저 여자가 탄 택시를 먼저 지나가게 해. 
   이것 보세요, 운전사는 나예요. 
  제이크가 말했다.
   당신은 구경이나 하세요.  운전은 내가 할 테니. 
  그렇게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이크는 기어를 넣고 천천히 차를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뒷창문을 내다보던 조지는 마리사가 탄 택시가 지붕이 찌그러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즐거운 듯 입을 열었다.
   따라가기는 쉽겠어. 
  마리사를 태운 택시가 오른쪽을 스치며 앞으로 나아가자 제이크는 바짝 뒤를 
따라 차를 몰기 시작했다.  그는 롱 아일랜드 고속도로에 진입하기 직전 차 한 
대를 앞에 끼워주었다.
  마리사를 태운 운전사는 러시아워의 체증으로 거북이 걸음을 하는 퀴즈보로 
다리로 들어갔지만 그들은 어렵지 않게 그녀의 택시를 계속 시야 안에 둘 수가 
있었다.  제이크는 호텔을 15미터쯤 지나쳐 차를 세웠다.
   어쨌든 이젠 그 여자가 어디 묵는지는 알게 되었군요. 
  제이크가 말했다.
   돌다리도 두드려 가라고, 그녀가 진짜 숙박부에 등록을 하는지 보고 오겠어. 
  조지가 말했다.
   금방 돌아올게. 



    
14


    5월 23일

  마리사는 밤새 제대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파머 하우스 방에서의 사건 
이후로 어쩌면 이제 다시는 편안한 마음으로 호텔 방을 이용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복도에서 들려오는 자그마한 소음에도 그녀는 두려워 몸을 떨었다.  
그런데, 간밤에는 늦게 돌아오는 사람들이며 룸 서비스에 밤참을 시켜먹는 
사람들이 많았는지 내내 조용할 틈이 없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계속 에볼라가 담긴 예방 접종용 공기 주사총의 느낌을 
좀처럼 잊을 수가 없었고, 매번 잠이 깰 때마다 분명히 열이나 다른 증상들이 
나타난 것처럼 느꼈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오나전히 녹초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룸 서비스를
통해 
커피와 과일을 주문했는데 서비스로 뉴욕 타임즈지 한부가 함께 배달되었다.  
신문의 1명에는 에볼라 감염 사건들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었다.  뉴욕에서는
열한
명의 환자 중 한 명이 사망했고 필라델피아에서는 발생 36례에 사망 17례로 정체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뉴욕의 사망자는 처음 발병을 했던 닥터 기리쉬
메타였다.
  열 시부터 마리사는 캐롤 브래드포드 앞으로 소포가 도착했는지를 묻기 위해 
계속 플라자 호텔로 전화를 걸어보았다.  그녀는 정오까지는 수시로 전화를 
걸어볼 작정이었다.  야간 지급 탁송은 대개 그 시간까지 도착을 보장하고
있었다.
만일 소포가 도착한다면 그녀는 더 이상 태드가 배신을 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따위에는 시달릴 필요없이 로젠버그 클리닉을 직행할 수 있을 것이다.  열한
시가 
지난 직후, 그녀는 소포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가 있었다.
  호텔을 나설 준비를 하며 마리사는 태드가 혈청을 보냈다는 데 놀라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가늠을 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 소포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고, 혹시 다른 그녀의 행방을 노출시키기 위한 덫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마리사에게는 그의 진심을 확인해볼 수 있는 방도가

없었고, 그녀는 자신의 의심을 단지 가공의 것이라고 믿지 않으면 안될 만큼 
간절히 그 혈청을 원하고 있었다.  아무리 위험할지라도 그녀는 모험을 해야만 
한다고 결심했다.
  핸드백만을 집어든 마리사는 최소한의 위험 부담으로 그 소포를 획득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녀는 택시를 대기시키고 주위에
사람들이 
많이 있을 대 소포를 찾는다는 것 이외의 다른 뾰족한 방법을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

  조지 발할라는 그날 이른 아침부터 어섹스 하우스의 로비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이것은 그가 제일 좋아하는 상황이었다.  그는 커피도 마시고 신문도
훑어보았으며
지나는 멋진 아가씨들로 눈요기를 하며 추파를 던지기도 했다.  한마디로 말해, 
그는 멋진 시간을 즐겼으며 아르마니 수트와 진짜 악어 가죽 구두로 깔금하게 
차려입은 덕에 호텔 청원 경찰들의 시선 따위는 전혀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빈둥거리던 그가 화장실로 잠시 피해 있을까 생각하던 참에 마침 
엘리베이터를 나서는 마리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들고 있던 뉴욕 포스트지를 내려놓고 그녀를 앞질러 회전문을
빠져나왔다.
정체된 차량들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 셔번가를 달음질로 건넌 그는 제이크가 
기다리고 있는 택시로 달려가 앞자리로 뛰어들었다.  제이크도 마리사를
보았는지
이미 차에는 시동이 걸려 있었다.
   대낮에 보니 더 귀여운데요. 
  그가 유턴을 하기 위해 핸들을 꺾으며 말했다.
   저 여자가 불루멘탈인 게 확실한가? 
  뒷자리에 앉아 기다리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의 이름은 알풀스 
힉트만이었지만 대개가 그의 부탁대로 알이라고만 부를 뿐 그의 이름을 가지고 
장난치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동독 출신으로 베를린 장벽을 넘어 서방으로 
탈출해온 사람이었다.  그의 얼굴은 나이와는 걸맞지 않게 너무도 젊어보였다.  
그의 금발은 줄리어스 시저스타일로 짧게 깎여 있었고 그의 엷은 파란 눈동자는 
겨울 하늘처럼 차가워보였다.
   리자 켄드릭이란 이름으로 투숙을 했지만 들었던 것과 똑같아요. 
  조지가 말했다.
   그녀가 확실해요. 
   저 여잔 엄청나게 고수이거나 아니면 엄청나게 운이 좋은 사람인 모양이야. 
  알이 말했다.
   우린 실수없이 저 여자를 격리시켜버려야 해.  헤버링 말로는 저 여자가 이번

일 전체를 다 망쳐버릴 수 있다더군. 
  그들은 마리사가 택시에 올라 동쪽을 향하는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혼잡한 교통에도 불구하고 용케 유턴을 한 제이크는 이쪽저쪽으로 추월을 하며

마리사가 탄 택시 뒤로 차 두 개의 간격을 두고 바짝 따라붙었다.

   이것 보세요, 아가씨.  어디로 가시려는지 목적지를 말씀해 주셔야지요. 
  택시 운전사가 백미러로 마리사의 모습을 살피며 말했다.
  마리사는 뒤로 돌아앉아 에섹스 하우스의 출입구를 살피고 있었다.  그녀를 
따라나오는 듯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앞으로 몸을 돌린 그녀는 블록을
한바퀴 
빙 돌아달라고 말했다.  그녀는 아직도 안전하게 혈청을 손에 넣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 고심하는 중이었다.
  운전사는 나지막한 소리로 툴툴거리며 길 모퉁이에서 오른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마리사는 플라자 호텔의 5번가쪽 입구를 쳐다보았다.
  입구에는 차들이 잔뜩 세워져 있었고 호텔 앞의 자그마한 소공원에는 사람들이

바글거리고 있었다.  길가에는 고풍스러운 멋진 마차들이 늘어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는 번쩍이는 짙은 감색 헬멧을 뒤집어쓴 기마 경찰들의 모습도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마리사는 마음이 놓였다.  이런 상황이라면 불시에
습격을
당할 위험은 거의 없을 것 같아 보였다.
  차가 다시 5번가로 접어들자 마리사는 운전사에게 자신을 플라자 호텔 입구에 
내려주고 잠깐 들어갔다올 동안 차를 대기시켜 달라고 부탁을 했다.
   아가씨, 제 생각엔 말이죠... 
   정말 잠깐이면 돼요. 
  마리사가 말했다.
   다른 택시도 많잖아요? 
  운전사는 손을 들어 창 밖을 가리켰다.
   다른 차를 타시면 안될까요? 
   미터 요금에 5달러를 더 드릴게요. 
  마리사가 말했다.
   정말 잠깐이면 돼요. 
  마리사는 그에게 상황이 허락하는 최대한의 예쁜 미소를 지어보였다.
  운전사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추가 요금5달러와 마리사의 애교스러운
미소가
대기의 충분한 보상이 된다고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그는 플라자 호텔 앞에
차를 
댔다.  친절한 호텔 수위가 문을 열어주었다.
  언제 최악의 사태와 맞닥뜨릴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는 몹시 불안한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타고 왔던 택시가 입구에서 9미터쯤 되는 곳에 자리를 잡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음이 좀 놓인 그녀는 곧장 입구로 들어섰다.
  그녀가 바라던 대로, 화려하게 치장된 로비는 몹시 분주한 상태였다.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곧바로 보석상의 진열장 앞으로 걸음을 옮긴 마리사는 마치 
정신이 팔린 것처럼 쇼 윈도우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유리창에 반사된 모습으로 그녀는 혹시 누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지 로비를 훑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신경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보였다.
  다시금 로비슬 가로지른 마리사는 콩콩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수위장의 책상으로 다가가 차례를 기다렸다.
   신분증 좀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소포를 찾아달라고 부탁한 마리사에게 수위장이 말했다.
  뜻밖의 요구에 허를 찔린 마리사는 잠시 당황한 끝에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럼, 방 열쇠만 보여주셔도 돼요. 
  그가 편의를 보아주려는 듯 친절하게 말했다.
   하지만 아직 체크 인을 안했거든요. 
  수위장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럼 먼저 체크 인을 하신 다음에 소포를 찾아가시면 어떻겠어요?  이해해 
주시겠죠?  저희도 책임이 있어서 말이에요. 
   물론이에요. 
  마리사는 그렇게 대답을 하기는 했지만 이런 일에 대비해 충분히 사려깊은 
배려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후회되엇다.  하지만 다른 뾰족한 방도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그녀는 수속 창구로 발길을 옮겼다.
  심지어는 아무것도 아니겠지 생각했던 투숙 수속 과정마저도 그녀가 크레디트 
카드를 쓰지 않겠다고 말하자 짜증이 날 정도로 복잡해졌다.  창구 직원은
그녀를 
수납계로 보내 상당량의 현금을 보증금으로 걸게 한 뒤에야 방 열쇠를
건네주었다. 
마침내, 열쇠를 가지고서야 그녀는 연방우체국의 소포를 받아들 수가 있었다.
  소포의 포장을 찢어낸 그녀는 세밀히 내용물을 살폈다.  그것은 진짜 혈청인
것 
같았다.  그녀는 포장을 쓰레기통에 던져넣고 약병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아직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롭게만 진행되고 있었다.
  회전문을 나선 마리사는 눈이 정오의 세찬 햇볕에 적응을 하는 동안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가 타고 왔던 택시는 아직도 마지막 보았던 자리에
위치를 
지키고 있었다.  수위가 혹시 교통수단이 필요하지 않은가 묻자 마리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59번가를 위 아래로 훑어보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거리는 더
번잡해져 
있었다.  보도 위에는 수백 명의 인파가 바비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마음이 
놓인 마리사는 거리로 이어진 낮은 계단을 걸어 내려와 택시를 향해 달음질을
쳤다.
  차에 도착해 뒷문의 손잡이를 잡은 그녀는 어깨 너머로 플라자 호텔의 입구를 
재빨리 한 번 훑어보았다.  그녀를 따라나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태드에 
대한 의심은 공연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악 차에 올라타려는 순간, 그녀는 뒷자리에 누워 있던 사내의 치켜든 총구를

곧장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사내가 무슨 말을 하기 시작했지만 
마리사는 재빨리 몸을 옆으로 던지며 세차게 문을 닫아버렸다.
   쉭 소리와 함께 무기가 불을 뿜었다.  그것은 최신식 공기총의 일종인 것
같았다.
택시의 창문은 그 일격에 박살이 났지만 마리사는 지체없이 사력을 다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곁눈으로 보니 운전사가 날쌔게 튀어나와 그녀의 반대쪽으로 꽁지가 
빠지게 도망을 치고 있었다.  그리고 뒤쪽에서 보니 금발의 사내가 행인들을 
밀치며 그녀를 향해 내딛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보도는 사람, 가방, 손수레, 유모차와 강아지들로 범벅이 된 장애물 코스였다.
 
금발의 사내는 어느새 총을 주머니에 감추었지만 마리사는 더 이상 인파가
자신이 
바라던 만큼의 보호막이 되어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가 공기총의 
들릴락말락한 발사음 따위를 알아차릴 수 있을까?  그녀는 그냥 바닥에
쓰러져버릴
것이고, 그녀를 습격한 괴한은 다른 사람들이 그녀가 총에 맞았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전에 유유히 사라져버릴 것이다.
  부닥칠 때마다 사람들은 성난 고함을 질러댔지만 그녀는 그저 계속 앞으로만 
달려나갔다.  그녀가 야기한 혼란한 금발의 사내를 조금 지체시키기는 했지만
그리
만족할 정도로 떼어놓지는 못했다.  그는 차차 거리를 좁혀들고 있었다.
  플라자 호텔 동쪽의 진입로를 달음질로 건넌 그녀는 택시와 리무진들 사이를 
숨바꼭질하며 가운데에 분수대가 있는 소공원 언저리에 도착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경관을 찾았다.  그녀는 금발의 사내가 보도에 도착해 머뭇거리는 
발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그는 벌써 호텔과 공원을 가로질러 진입로에
도착했던
것이다.
  말에 도착한 마리사는 고삐를 움켜쥐고 불안한 듯 고개를 흔드는 말의 몸 
밑으로 기어들었다.  뒤를 돌아다보니 그 금발의 사내는 벌써 길을 건너 리무진 
사이를 돌고 있었다.
  광란 상태가 되어버린 마리사는 초조하게 작은 공원을 훑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 쪽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경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자포자기한 그녀는

공원을 가로질러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숨을 기회도 없었다.  추적자가
너무도
바짝 뒤에 붙어 있다.
  분수 옆에는 한 떼의 구경꾼들이 앉아 있었지만 관심있게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뉴욕에 사는 그들은 공포에 질린 도망자를 포함해서 어떠한 것에도 
면역이 되어 있는 듯했다.
  분수 주위를 돌자 이제 마리사는 그 사내의 숨소리까지도 들을 수가 있었다.  
다시 방향을 틀자 마리사는 공원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사람들과
부닥쳐버렸다.
밀치고 떠밀리며 마리사는 행인들 사이를 헤집고 나갔다.
   이것봐! 
   망할 놈의! 
  행인들의 욕설이 귓전에 메아리쳤다.
  빈 공간으로 빠져나온 그녀가 마악 한숨을 돌리려는 순간, 그녀는 자신이 
수백명이 운집한 둥근 사람들의 울타리 안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세명의 우람한 흑인 청년들이 랩 송에 맞추어 브레이크 댄스 공연을 하고
있었다.
마리사의 정말 가득한 시선이 그들의 눈과 마주쳤다.  그들의 눈에는 공연을 
난장판으로 만든 것에 대한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그들이 마악 다시 몸을 움직이려던 순간, 금발의 사내가 원 안으로 뛰어들며
한 
발로 급히 몸을 멈추었다.
  황급히 손에 든 총을 올리는 순간 화가 난 춤꾼 중의 하나가 숙련된 발
동작으로
그 총을 걷어차 이내 발길질로 응수를 하자 관중들은 웅성거리며 뒤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일격을 맞은 춤꾼은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그 순간 관중들 사이에 섞여 있던 춤꾼들의 친구 세 명이 뒤쪽에서 금발에게 
달려들었다.
  마리사는 어물거리지 않았다.  그녀는 갑작스런 소동에 뒤로 물러섰던 관중들 
사이로 몸을 숨겼다.  대부분의 관중들은 제5 애비뉴를 건너고 있었다. 
마리사는 
재빨리 그 틈으로 섞여들어갔다.  59번가 북단에 도착하자마자 마리사는 다른
택시
한 대를 잡아타고 로젠버그 클리닉으로 데려다달라고 말했다.  택시가 59번가로 
접어들자 마리사는 분수대 근처에 상당한 인파가 모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말에 높게 올라 앉은 기마경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리사는 그가 저
금발의
사내를 몇 초간이라도 꼼짝 못하게 만들어주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마리사는 좌석에 기대앉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두려움 대신 갑작스런
분노가 
그녀의 온몸을 휘감았다.  그녀는 태드에게 강렬한 분노를 느꼈다.  이제는 그가

그녀를 쫓는 사람들에게 위치를 알려주고 있다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녀가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며 손에 넣은 혈청도 이제는 소용이 없어졌다.  
이렇게 모든게 의심스러운 상황에서 자신에게 그것을 주사할 수는 도저히 없는 
일이었다.  대신 그녀는 그 예방 주사용 공기 주사총이 사용자를 충분히 보호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을 것이라는 데 희망을 걸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로젠버그 클리닉 방문을 취소해버릴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적어도 에볼라가 고의적으로 퍼뜨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는 생각이
결국 이겼다.  그것은 반드시 확인을 해보아야만 한다.  게다가, 지난번 그런
일도 
있고 해서 아무도 그녀가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병원은 시가의 한 블록 거의 전체를 다 차지한 멋지게 재단장한 구조물이었다.
 
병원 정문 앞에는 티브이 이동 중계차 한 대와 순찰차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병원으로 이어지는 화강암 계단 위에는 경관들 몇 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마리사는 씨디씨 신분증을 내보이고 안으로 들어갔다.
  병원의 로비는 에볼라 감염 사건들이 터져나왔던 다른 병원들과 똑같이 혼란과

소동의 도가니였다.  공포에 질린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려니 그녀의 굳은

결심이 갑자기 흔들리기 시작했다.  에볼라 바이러스에 자신을 노출시키게
된다는
묵은 공포가 다시금 온몸을 떨리게 했다.  게다가, 음모와 간계가 엮어진 
위험천만의 거미줄에 잡히게 될지도 모른다는 냉엄하기 그지없는 현실에 대한 
공포가 밀려들었다.
  그녀는 비상구에 시선을 던지며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잠시 그냥 나가버릴까

망설이기도 했지만 결국 이 일을 확실하게 밝혀내는 것만이 자신의 유일한 
희망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며 새롭게 마음을 다잡았다.  다른 사람들을
설득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의 의심부터 말끔히 해결을 해야 한다.
  그녀는 우선 접근하기 쉬운 것으로부터 하나하나 점검을 해나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경리부 사무실로 들어가자  신규 가입자 라는 표지가 붙은 책상이 하나

눈에 띄었다.  책상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그 위에는 프린트된 팜플렛이 잔뜩
쌓여 
있었다.  그녀는 이내 로젠버그 클리닉이 예상했던 대로 에이치엠오(보건 위생 
기구)의 하나라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녀가 다음 과제로 삼은 의문점은 최초 발생 증례가 이미 사망을 한 뒤라 더 
어려울 것 같았다.  중앙 로비로 돌아온 마리사는 한참 동안이나 오가는
사람들을 
살핀 끝에 의사들이 가운을 벗어두는 가운실을 찾아낼 수가 있었다.
  그녀는 안내 창구의 직원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신호를 하는 수련 의사의 뒤에 
붙어 가운실 문 앞에 도착했다.  가운실의 문이 징소리를 내며 열리자 마리사는 
그 의사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서 긴 의사 가운 한 벌을 걸친 그녀는 소매를 접어올렸다.  가운의 깃에는

닥터 앤 엘리옷이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마리사는 명찰을 떼서 가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다시 로비로 돌아온 마리사는 갑자기 나타난 닥터 레인의 모습에 까무러칠 듯 
놀랐다.  재빨리 몸을 튼 그녀는 그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튀어나올 것이라는 
생각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는지 
그는 벌써 병원 문을 나사고 있었다.
  그를 만난 것은 마리사를 더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필라델피아에서처럼 또 두브체크와 맞닥뜨리게 될까봐 너무도 무서웠지만 그래도

그 죽은 지표 증례에 대해서 더 조사를 해보아야만 한다는 것은 너무도
확실했다.
  안내판으로 걸음을 옮긴 그녀는 병리과가 4층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로젠버그 클리닉은 정말 대단한 곳이었다.  병리과 
의사들의 연구실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임상 화학 검사실을 통과해야 
했는데 그 병원이 최신식, 최고가의 자동화 검사 기기들을 모두 구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앞에 나타난 쌍바라지 문 하나를 밀고 들어가자 구술 녹음 기록들을 타자하는 
비서들이 검사기록들의 작성을 담당하는 병리 부서의 핵심적인 부분이었다.
  마리사가 다가가자 비서 하나가 귀에 꽂고 있던 헤드폰을 벗어 내려놓았다.
   도와드릴까요? 
   전 씨디씨에서 파견된 의사 중 하나예요. 
  마리사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혹시 제 동료들이 여기 있나 해서 와본 거예요. 
   글쎄요, 그런 것 같지는 않군요. 
  비서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제가 닥터 스튜어트한테 물어봐 드릴게요.  지금 아마 사무실에 계실 거예요.

   난 여기 있소. 
  그때 얼굴 전체에 수염을 기른 커다란 사나이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씨디씨 사람들은 3층 격리 병동에 계시오. 
   그렇다면, 어쩌면 선생님께 물어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군요. 
  마리사는 일부러 자신의 소개를 건너뛰며 말을 시작했다.
   저는 처음부터 에볼라 감염 사건들을 조사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불행히도 
뉴욕에서 좀 지체가 되어버렸답니다.  첫 번재 증례였던 닥터 메타가 이미
사망을 
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혹시 부검을 하셨는지요? 
   바로 오늘 아침에 했소. 
  그럼 제가 몇가지 여쭤보아도 될까요? 
   하지만 부검은 내가 직접하지 않았습니다. 
  닥터 스튜어트가 이어 비서에게로 몸을 돌려 부탁을 했다.
   헬렌, 커트를 좀 불러줄 수 있겠소? 
  그는 현대식 책상 한 개와 번쩍번쩍 빛나는 최신형 자이즈쌍안 현미경이
부착된
흰 호마이카 실험대가 놓인 자그마한 사무실로 마리사를 데리고 들어갔다.
   생전의 닥터 메타를 아셨나요? 
  마리사가 물었다.
   꽤 친분이 있었죠. 
  닥터 스튜어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 양반은 우리 진료부장이었어요.  참 아까운 사람입니다. 
  닥터 스튜어트는 계속해 로젠버그 클리닉의 발전에 기여했던 고인의 지대한 
공헌이며 환자들이나 직원 모두에게 고인이 누렸던 엄청난 인기 등등을 
이야기해주었다.
   고인께서 어디서 수련을 받으셨는지 혹시 알고 계세요? 
  마리사가 물었다.
   의과 대학은 어디서 다녔는지 확실히 모르겠어요. 
  스튜어트가 말했다.
   내 생각엔 아마 봄베이 어디였을 거예요.  하지만 레지던트는 런던에서 
했다고 알고 있어요.  그런 건 왜 물으시죠? 
   혹시 그분께서 외국 의과 대학 출신인지가 궁금해서요. 
  마리사가 말했다.
   그게 무슨 상관이 있나요? 
  스튜어트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럴 수도 있지요. 
  마리사는 모호하게 대답을 했다.
   혹시 직원 중에 외국 의과 대학 출신들이 많이 있나요? 
   물론이죠. 
  스튜어트가 말했다.
   에이치엠오들은 모두가 처음에 외국 의과 대학 출신 인력을 바탕으로 
시작했어요.  미국 의과 대학 졸업자들은 이런 데까지 오려들지를 않거든요.  
하지만 요새는 달라졌어요.  요즈음은 좋은 데서 수련을 한 사람들도 쉽게 구할 
수가 있답니다. 
  그때 문이 열리며 젊은 남자 한 명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이 친구가 커트 반더메이랍니다. 
  스튜어트가 말했다.
  마리사는 마지못해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닥터 불루멘탈께서 오늘 아침 부검건에 대해 물어보실 게 좀 있으시다는군요.

  닥터 스튜어트는 설명을 하며 현미경의 밑에서 의자를 하나 꺼내 닥터 
반더메이에게 권했다.  그는 의자에 걸터앉아 우아하게 다리를 꼬았다.
   아직 현미경 표본들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닥터 반더메이가 말했다.
   그러니 육안 소견들밖에는 말씀드릴 수가 없겠는데요.  그것으로도
되겠습니까? 
   사실 저는 외부 진찰 소견에 더 관심이 있답니다. 
  마리사가 말했다.
   이상 소견들이 있었나요? 
   물론입니다. 
  닥터 반더메이가 말했다.
   환자는 피부에 광범위한 출혈성 병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외상 소견도 있었나요? 
   네, 코뼈가 부러져 있더군요.  하마터면 깜박 잊어버릴 뻔했어요. 
   얼마나 된 것 같아 보이던가요? 
  마리사가 물었다.
   일주일?  열흘?  그 정도인 것 같더군요. 
   차트에 그 원인이 기록되어 있던가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전 미처 그것까지는 읽어보지 않았습니다. 
  닥터 반더메이가 말했다.
   그분이 에볼라 출혈열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선입견이 
들었었나봐요.  전 그 부러진 코뼈에 대해서는 별 생각을 못하고
간과해버렸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요. 
  마리사가 말했다.
   차트는요?  여기 병리과에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한 번 보여주실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반더메이가 말했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
   같이 부검실로 내려가보시겠습니까?  원하신다면 비골절을 찍어 놓은 
폴라로이드 사진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마리사가 말했다.
  스튜어트가 꼭 참석을 해야 할 회의가 있다는 말과 함께 자리를 드자 마리사는

반더메이의 뒤를 따라 부검실을 향했다.  가는 도중, 반더메이는 바이러스의
누출을
막기 위해 부검을 마친 사체가 소독과정을 거친 다음 이중 포장이 되어 특수 
용기에 밀봉되었다는 설명을 해주었다.  그는 덧붙여 고인의 가족들이 사체를
고향
인도로 보내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으나 허락이 나지 않는다는 말을
해주었다.
마리사는 충분히 그 이유를 이해할 수가 있었다.
  차트는 마리사의 마음에 흡족할 정도로 완벽한 것은 아니었지만 부러진 코에 
대한 언급은 되어 있었다.  그 기록은 닥터 메타의 동료인 어떤 이비인후과
의사가
작성한 것이었다.  차트를 훑어본 마리사는 지난 감염 사건들과 같은 감염 
경로였다는 사실과 사망한 닥터 메타 자신이 이비인후과 의사였다는 사실을
아울러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실망스럽게도 비골절의 원인에 대해서는 아무런 
단서도 찾아낼 수가 없었다.
  반더메이는 그 기록을 작성한 의사에게 직접 전화를 해보자는 제안을 했다.  
그가 전화를 거는 동안 마리사는 차트의 나머지 부분을 훑어보았다.  닥터
메타는
최근 여행을 한 적도, 동물을 접촉한 적도 없었고 다른 에볼라 감염 사건들과도 
전혀 관련이 없었다.
   그 불쌍한 양반이 강도를 당했었다는군요. 
  닥터 반더메이가 전화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자기 집 진입로에서 노상 강도를 당했대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원. 
   만일 당신이 정말 사실을 알면 기절할 거예요. 
  이제 에볼라 감염 사건들 모두가 고의적으로 유발되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확실했다.
   혹시 닥터 메타의 허벅지에 동전 모양의 병변이 있지는 않던가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요. 
  닥터 반더메이가 말했다.
   하지만 여기 폴라로이드 사진들이 있으니 한 번 살펴보시지요. 
  그는 사진 한 다발을 죽 펼쳐놓았다.
  마리사는 제일 위에 놓인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스테인리스 강철 
부검대 위에 누운 벌거벗겨진 사체의 처참한 모습을 담고 있었다.  전신에 퍼진 
다발성 출혈성 병변 가운데서도 마리사는 닥터 리히터의 허벅다리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둥근 병변을 집어낼수가 있었다.  그것은 예방 접종용 공기 주사총의 머리 
부분과 대략 비슷한 크기였다.
   이 사진을 한 장 가져도 될까요? 
  마리사가 물었다.
  반더메이는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하세요.  우린 여러 장 있으니까요. 
  마리사는 주머니에 사진을 집어넣었다.  이것은 주사총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꽤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닥터 반더메이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 다음 병원을 나서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혹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알려주실 수 있으세요? 
  반더메이가 물었다.
  바로 그때, 인터폰이 켜지며 6번 선에 닥터 반더메이에게 전화가 와 있다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전화기를 집어든 그의 목소리가 마리사의 귓전으로
흘러들었다.
   마침 전화를 잘 해주셨군요.  닥터 두브체크, 그러지 않아도 저는 닥터 
불루멘탈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 
  마리사는 더 이상의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황급히 몸을
일으켜
엘리베이터로 달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반더메이가 등 뒤에서 소리쳐 그녀를 
불렀지만 그녀는 발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비서들 앞을 지난

쏜살같이 쌍바라지 문을 통과했다.
  엘리베이터와 비상 계단 사이에서 마리사는 위험을 무릅쓰고 엘리베이터를 
선택했다.  만일 두브체크가 3층에 있었다면 그는 시간을 벌기 위해 계단을 택할

확률이 더 높았다.  그녀는  내려감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 앞에는 진공 
시험관들이 갇그한 트레이를 든 기사가 한 명 서 있었다.  그는 마리사가 이미 
불이 켜진 버튼을 몇 번씩이나 다급하게 눌러대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응급 환자가 생겼나요? 
  둘의 시선이 마주치자 기사가 물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마리사는 허겁지겁 승객들 틈을 비집고 올라탔다. 
문이 
닫히기만을 기다리는 짧은 시간 동안에도 마리사는 금방이라도 두브체크가
뛰어와 
그녀를 끌어내리면 어쩌나 긴장되었다.  하지만 마침내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녀는 백발이 성성한 기사 한 사람에게 식당이 어디 있는지를 물었다.
 
그는 엘리베이터를 내리자마자 오른쪽으로 돌아 복도를 쭉 따라가라고
일러주었다.
  엘리베이터를 내린 마리사는 기사가 말해준 대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녀는 병원 정문을 사용하는 것은 너무 위험부담이 크다고 생각했다. 
두브체크가
벌써 경찰들에게 그녀를 제지하라는 명령을 내려놓았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녀는 마침 점심 식사를 하러 내려온 사람들로 붐비는 식당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그리고는 곧장 주방을 향했다.
  식당 직원들이 이상하다는 눈길로 쳐다보기는 했지만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가 생각했던 대로 주방에는 화물 하역장으로 통하는 문이 달려 있었다.  
그녀는 배달중이던 유제품 수송 차량을 스치며 곧장 하역장으로 달려나갔다.
  하역장으로 내려온 그녀는 재빨리 걸음을 옮겨 메디슨가로 접어들었다.  길을 
따라 반 블록쯤 북쪽으로 올라간 마리사는 동쪽으로 난 조그마한 가로수길로 
방향을 틀었다.  그곳은 행인도 거의 없는 한적한 길이었다.  마리사는 그제서야

누가 자신을 쫓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가 
있었다.
  뒤를 따라오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마리사는 
블루밍데일 백화점 앞에서 차를 내려 백화점을 통과한 다음 3번가에서 또 다른 
택시에 올랐다.  차가 에섹스 하우스 앞에 정지하자 그녀는 자신이 적어도 
당분간은 안전할 수 잇으리라는 확신을 할 수가 있었다.
  아직도  방해하지 마시오 라는 표지가 붙어 있는 자신의 방문 앞에서 마리사는

잠시 발을 멈추고 머뭇거렸다.  그녀가 가명으로 투숙을 했다는 사실은 아무도
알 
수가 없을 것 같았음에도 불구하고 시카고의 악몽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조심스럽게 문을 연 그녀는 들어가기 전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의자로 문을
버텨
열어놓은 채 조심스레 방안을 살폈다.  그녀는 침대 밑, 옷장 속과 욕실을 
훑어보았다.
  모든 것이 나갈 때와 조금도 차이가 없었다. 마음이 놓인 마리사는 문을 닫은 
뒤 달려 있는 빗장과 체인들을 모두 동원해 단단히 문을 걸어잠갔다.


   










 15


    5월 23일-계속

  마리사는 아침에 주문했던 과일의 나머지를 먹으려 함께 배달되었던 날카로운 
과도로 사과의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이제 품고 있던 의심이 모두 사실로 
판명나자 그녀는 다음으로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 것이가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생각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랠프가 구해놓았다는 변호사를 만나 
에이치엠오에 대한 대중들의 신뢰를 붕괴시키기 위해 소수의 극우파 의료인들이 
고의로 개인 클리닉들에 에볼라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확보한 증거물들을 넘겨주고 나머지 증거 수집에 대해서는 그에게로 
떠넘길 생각이었다.  어쩌면 그는 문제가 해결되는 동안 잠시 몸을 숨기고 있을 
피신처까지도 해결해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사과를 내려놓은 그녀는 전화를 집어들었다.  이제 결정을 내리고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지는 것 같았다.  랠프에게 다이얼을 돌린 그녀는 즉시 전화가
연결되자 
기분이 좋아졌다.
   내가 비서에게 특별 지시를 해두었소. 
  랠프의 설명이었다.
   혹시라도 내가 당신을 진정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걸 모르게 될까 해서
말이오. 
   당신은 정말 자상하세요. 
  그의 배려에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진 마리사가 입을 열었다.  랠프의 따뜻한 
목소리에 그동안 단단히 묶어놓았던 감정의 끈이 풀리기 시작했다.  잠시 동안 
그녀는 마치 엄마 모습이 보일 때까지 울음을 참는 넘어진 어린 아이가 된 듯한
기분이 되었다.
   오늘 집으로 돌아오는 거요? 
   글쎄요.  상황에 따라서요. 
  입술을 깨문 마리사가 깊은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오늘 가면 그 변호사를 만나볼 수 있을까요? 
  마리사가 불안한 듯 흔들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소. 
  랠프가 말했다.
   내가 아침에 사무실로 전화를 해보았더니 지금 출장중이라 내일쯤 돌아온다고

하더군요. 
   유감이로군요. 
  마리사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제 완연히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마리사, 괜찮아요? 
  랠프가 물었다.
   사실 별로 괜찮치가 않아요. 
  마리사는 솔직히 심경을 털어놓았다.
   전 아주 끔찍한 일들을 겪었거든요. 
   무슨 일이 있었소? 
   지금은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긴 말을 하기 시작하면 울음이 터져나올 것 같아 마리사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내 말 좀 들어봐요. 
  랠프가 말했다.
   난 당신이 지금 당장 돌아와주기를 바래요.  난 애초부터 당신이 뉴욕에
간다는
사실 자체가 영 마음에 들지를 않았소.  또 두브체크와 맞닥뜨렸소? 
   그것보다 훨씬 더 끔찍했어요. 
  마리사가 말했다.
   그럼 더 말할 필요도 없소.  다음 비행기를 잡아타고 당장 집으로 돌아와요. 

내가 공항으로 나갈게요. 
  그의 제안에 감동한 마리사가 마악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순간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마리사는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다시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마리사, 듣고 있소? 
   잠깐만요. 
  마리사가 전화기에 대고 말했다.
   누가 온 것 같아요.  끊지 말고 기다려주세요. 
  그녀는 나이트 테이블에 수화기를 내려놓고 조심스레 문간으로 다가갔다.
   누구세요? 
   켄트릭양 앞으로 소포가 하나 왔습니다. 
  마리사는 체인을 건 채 문을 조금 열었다.  문 앞에는 흰 종이 포장의 커다란 
꾸러미를 든 정복 벨맨 한 명이 서 있었다.
  아연해진 그녀는 벨맨에게 기다려달라고 전한 다음 다시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그녀는 문간에 어떤 사람이 찾아왔으니 그날 저녁 비행기 편으로 아틀란타로 
돌아갈 수 있을지 알아보고 다시 전화하겠노라고 말했다.
   약속하는 거죠? 
  랠프가 물었다.
   그럼요! 
  문간으로 되돌아온 마리사는 다시 빠꼼히 문을 열고 복도를 내다보았다.  
벨맨은 아직도 소포를 든 채 반대편 벽에 서 있었다.  서부에서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친구  켄드릭 양 에게 소포를 보내온 사람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전화기로 돌아온 그녀는 프런트 데스크를 불러 혹시 그녀 앞으로 꽃 선물이 
들어온 게 있는가를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한 수위장은 지금 올라가고 있는
중일 
거라고 덧붙여 설명을 늘어놓았다.  
  마리사는 마음이 놓였지만 그렇다고 체인을 풀 정도는 아니었다.  대신 그녀는

문틈으로 소리를 질렀다.
   정말 죄송해요, 하지만 꽃은 그냥 문 앞에 두실 수 없을까요?  제가 이따가 
들여놓을게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가씨. 
  벨맨이 소포를 내려놓고 인사를 한 후 복도 저편으로 사라져버렸다.
  체인을 푼 마리사는 재빨리 바구니를 집어들고 다시 문을 잠갔다.  겉의
종이를 
찢어내자 아름답게 배열된 화려한 봄꽃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스티로폴 판에
꽂힌
녹색 막대에는 리사 켄드릭 앞으로 된 봉투가 하나 붙어 있었다.  봉투를 떼어낸

마리사는 안쪽의 카드를 펼쳤다.  놀랍게도 카드는 마리사 불루멘탈 앞으로 되어

있었다.  카드를 읽어내려가면서 마리사의 가슴은 철렁 내려 앉았다.

  친애하는 닥터 불루멘탈 귀하,
  오늘 아침의 훌륭한 공연에 찬사를 보냅니다.  저희들은 모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물론 저희들은  선생님께서 이성적으로 행동하실 의향이 
없으실 경우에 다시금 방문을 드려야만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항상 선생님께서 어디 계신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만 만일 빌려가신 의료 기구만 
온전히 반남을 해주신다면 차후에는 선생님을 괴롭히지 않을 것입니다.

  마리사는 완전히 공포에 사로잡혀 버렸다.  잠시 동안 그녀는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는다는 듯 꽃 바구니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얼이 빠져 멍하니 서 있었다.  다음

순간, 갑작스럽게 정신이 돌아온 마리사는 옷장 서랍들 안에 넣어둔 소지품들을 
꺼내며 정신없이 짐을 싸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손을 멈추고 말았다.
 
그녀가 놓아두었던대로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녀가 방을 비운 사이에 들어와 소지품들을 뒤진 것이었다!  오,
맙소사! 
빨리 도망을 쳐야만 한다.
  욕실로 달려들어간 마리사는 화장품들을 집어 아무렇게나 가방안으로 
던져넣었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금 손을 멈추었다.  그녀에게 전해진 쪽지의 
의미가 새로이 그녀의 머리를 스쳤다.  만일 그들이 주사총을 찾고 있다면
그것은
태드가 전혀 무관하다는 뜻이었다.  그녀가 두 번째의 가병으로 에섹스 하우스에
투숙했다는 것은 태드는 물론이고,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이 알아낼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은 시카고 공항에서부터 그녀를 미행해오는 것뿐이었다.
  빨리 에섹스 하우스를 빠져나가는 것이 상책일 것만 같았다.  어찌나 엉망으로

짐을 쌌는지 가방이 닫히지를 않았다.  가방 위에 올라앉아 걸쇠와 실랑이를 
벌이던 마리사는 문득 꽃 바구니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순간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의도는 그녀를 겁에 질리게 해 자신들을 주사총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녀는 까딱했으면 그들의 술책에 넘어가 버릴 뻔한

것이었다.
  그녀는 침대에 걸터앉아 차분히 생각을 가다듬었다.  그녀의 적들이 그녀가 
주사총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그녀가 자신들을 그리로 인도하기를 
바라고 있다면 그녀에게서 어느 정도 운신의 폭이 생긴 것이었다.  그런데도
괜히
힘들게 여행 가방을 들고 다닐 필요까지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필수적인 것들 몇가지를 핸드백에 넣은 뒤 서류 가방까지도 놓아두고 갈 수 
있도록 필요한 서류 몇 가지를 거내 핸드백에 쑤셔넣었다.
  마리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자신이 미행당하게 되리라는 사실이었다.  
추적자들은 분명히 그녀가 일이 쉬워지도록 허겁지겁 공무니를 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잇을 것이다.
  좋아, 마리사는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한 번 깜짝 놀라게 해주지.
  다시 화려한 꽃 바구니에 시선을 던지자 적들이 쓴 똑같은 전략을 써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마리사의 머리를 스쳤다.  그 방향으로 생각을 돌린 마리사는 
사건 전체를 풀 실마리를 제공할 해답을 도출해낼 계호기을 짜기 시작했다.
  의료인 하원 정치 행동 위원회의 간부 명단을 펼친 마리사는 사무총장이
뉴욕에
거처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의 이름은 잭 크라우스로, 이스트 
84번가 426번지에 살고 있었다.  마리사는 그의 집을 불시에 방문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쩌면 의사들 전부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다 알지 못할 수도 있었다. 

의사 그룹 전체가 이구동성으로 전염병을 퍼뜨리는데 찬성을 하고 있을 리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그의 집 문간에 마리사가 나타난다는 것은
어떠한 
위협의 메시지가 담긴 꽃바구니보다도 훨씬 그들을 당황하게 만든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한편으로는 자신이 안전하게 호텔을 나설 수 있도록 조치를 해두기로 
작정을 했다.  그녀는 화가 난 목소리로 호텔 지배인에게 전화를 걸어 프린트가 
그녀의 헤어진 애인에게 방 번호를 가르쳐주는 바람에 계속 시달리게 
되어버렸다는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요. 
  지배인이 말했다.
   저희들은 절대 방 번호 같은 것은 가르쳐주지를 않는답니다. 
   전 당신과 이러쿵저러쿵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아요. 
  마리사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잖아요.  내가 그 사람이랑 헤어진 건 그 
사람의 난폭한 성미 때문이었는데 덕분에 난 지금 겁에 질려 벌벌 떨게
됐다구요! 
   그럼 어  게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마리사가 어떤 조치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 지배인이 상냥하게
물었다.
   적어도 절 다른 방으로 옮겨주셨으면 좋겠어요. 
   즉시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 
  지배인이 말했다.
   또 한 가지 있어요. 
  마리사가 말했다.
   제 애인은 금발이고 운동 선수처럼 단단하 체구에 날카롭게 생긴 사람이에요.
 
당신 부하 직원들에게 못 들어오게 막으라고 해주실 수 있겠지요? 
   물론입니다. 
  지배인이 말했다.

  알폰스 힉트만은 길게 마지막 한 모금을 빤 다음 물고 있던 담배를 보도와 
센트럴 파크를 가르는 화강암 벽 너머로 던져버렸다.   휴무중  등을 켠 택시를 
돌아다본 그는 조지의 모습을 간신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느긋하게 앉아 있었다.  그는 기다린다는 것이 아무런 
부담도 되지않는 모양이었다.  길 건너 에섹스 하우스의 입구를 쳐다본 알은 
마리사가 몰래 뒷문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제이크가 로비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알은 그 꽃 바구니로 마리사가 기절초풍을 해 호텔을 뛰쳐나올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여자가 너무 똑  한 것인지 아니면 너무 멍청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택시로 걸음을 옮긴 그는 손바닥으로 차의 지붕을 세차게 내리쳤다.  북소리와

같은 소음과 함께 조지가 순간적으로 반대편으로 뛰쳐나왔다.
  알은 조지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무서운가, 조지? 
  그의 인내는 알의 초조한 마음을 더 더욱 견디기 힘든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맙소사! 
  조지는 기가 차다는 듯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둘은 함께 택시 안으로 들어갔다.
   몇 시야? 
  알이 담배 한 대를 피워물며 물었다.  그는 오후 내내 벌써 한 갑을 다 피우고

있었다.
   일곱 시 반. 
  알은 불에 탄 성냥개비를 창 밖으로 내던졌다.  알은 제대로 되어 가지 않고 
있었다.  예방 접종용 주사총이 그녀에게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다음, 그에게 
내려진 명령은 그녀가 그것을 다시 손에 넣을 때까지 계속 미행을 하라는 
것이었지만 닥터 불루멘탈이 적어도 당분간은 그럴 시간이 없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해 보였다.
  그 순간, 한 떼의 취객들이 팔짱을 끼고 몸을 흔들어대며 비틀 비틀 에섹스 
하우스의 입구를 나섰다.  낄낄대고 멍청이 짓들을 하는 그들은 명찰이 달린
짙은 
색 정장에  산요 라는 글씨가 들어간 챙 달린 모자를 쓴 것으로 보아 무슨
대회의 
참석자들인 것 같았다.
  수위가 길 바로 위쪽에 대기하고 있던 리무진을 향해 손짓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차들은 차례차례 문 앞으로 다가와 손님들을 태우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알이 다급하게 조지의 어깨를 두드리며 회전문을 통과하는 한
떼의 
사람들을 가리켰다.  그 무리에는 너무 취해 걸음을 옮길 수 없는 듯 두 명의 
남자에게 부축을 받는 산요 챙 모자차림의 자그마한 여자가 한 명 섞여 있었다.
   혹시 저게 그 여자 아냐? 
  그가 물었다.
  조지는 자세히 쳐다보려고 실눈을 떴지만 무슨 대답을 하기도 전의 문제의 
여인은 리무진 안으로 모습을 감추어버렸다.  그는 알에게로 몸을 돌렸다.
   아닌 것 같은데요.  머리가 좀 다른 것 같아요.  하지만 확실히는
모르겠어요. 
   제기랄! 
  알이 말했다.
   나도 그래. 
  잠깐 망설인 끝에 알은 택시를 뛰쳐나갔다.
   만일 그 여자가 나오면 내가 없더라도 그냥 따라가. 
  알은 다음 순간 지나는 차들 사이를 뚫고 길을 건너 다른 택시안으로 
뛰어들었다.

  리무진의 뒷자리에 앉은 마리사는 호텔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누군가가
세워둔
택시를 내려 허겁지겁 길을 건너는 모습이 비쳤다.  그녀가 탄  리무진이 버스 
앞으로 차선을 바꾸어 시야가 가로막히는 순간 마리사는 사내가 
빈티지(1910-30년대에 만들어진 구식차형 체커 택시에 올라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리사는 몸을 틀어 앞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미행을 당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그녀에게는 몇 가지 선택이 있었지만 거의 한 
블록이나 앞서 있는 상황임을 감안할 때 차에서 내려 몸을 숨기는 것이 최선의 
방도일 것 같았다.
  리무진이 5번가로 돌아드는 순간 마리사는 차를 세워달라고 소리를 질러
동승한 
사람들 모두를 깜짝 놀래켰다.
  운전사는 그녀가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다고 생각했는지 순순히 차를 세웠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미처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깨닫기도 전에 그녀는 자기를 
그냥 두고 가달라는 말과 함께 차에서 뛰어내렸다.
  천만다행스럽게도 늦은 시간까지 영업을 하고 있는 더블데이 서점을 발견한 
마리사는 가게 안으로 들어가 밖을 내다보았다.   질주하는 체커 택시 뒷자리에 
올라탄 금발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곧장 앞쪽만을 쳐다보며 앞으로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그 집은 뉴욕의 호하 주택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중세의 성채에 가가워보였다.  
납틀에 끼워진 길다란 창문들에는 정교한 세공의 나선형 철창이 붙어 있었고, 
현관은 중세의 성문에나 어울릴 듯한 육중한 내리받이 창살 문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뒤로 물러나게 지어진 5층으로 인해 생겨난 테라스는 성탑처럼 
톱니모양을 이루어내고 있었다.
  마리사는 길 건너편에 서 조심스레 건물을 살펴보았다.  그 살벌하기만 한 
겉모양에 그녀는 잠시 닥터 크라우스를 방문하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숙고를 
해보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어섹스 하우스의 새로 배정받은 방에서 몇 번의 
전화를 해본 결과 그녀는 그가 파크애비뉴의 유명한 내과 의사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런 사람이 직접 자신을 해치려들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해치려 한다면 피에이씨 같은 조직의 손을 빌려 하려고 할 것이지 자신이 직접 
나서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길을 건너 현관 계단을 올라갔다.  마지막으로 조용한 길거리를 위 
아래로 훑어본 그녀는 깊은 숨을 들이쉰 다음 용기를 내 초인종을 눌렀다.  철문

뒤에는 한가운데에 문장이 양각된 육중한 나무 문이 버티고 있었다.
  일 분쯤 기다린 마리사는 다시 벨을 울렸다.  갑자기 현관에 밝은 불이 켜지며
문이 열렸다.  너무 눈이 부셔 사람의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누구시죠? 
  어떤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닥터 크라우스를 만나 뵙고 싶습니다. 
  마리사가 애써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약속을 하셨나요? 
   아닙니다.  하지만 선생님께 제가 의료인 하원 정치 행동 위원회 일로 급하게

왔다는 말씀을 전해주세요.  그러면 아마 만나시겠다고 할 거예요. 
  문이 닫히는 둔중한 소리가 마리사의 귓전을 울렸다.  현관의 강렬한 불빛은 
거리 전체를 환하게 만들고 있었다.  몇 분이 지난 뒤, 다시 나무 문이 열렸다.
   선생님께서 만나시겠답니다. 
  그녀의 말에 이어 육중한 철문이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서서히 들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마리사는 눈부신 전등불 밑을 벗어나게 된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검은 복장의 여인이 그녀를 향해 다가오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우아한 샹들리에가 달린 대리석 출입구를 통과한 마리사는 짧은 복도를 지나 
서재로 인도되었다.
   여기서 기다려 주십시오. 
  여인이 말했다.
   선생님께선 금방 내려오실 겁니다. 
  마리사는 골동 기구들로 우아하게 단장된 서재 안을 휘-둘러보았다.  서재의
세 
면은 책이 가득한 책장들로 꾸며져 있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상냥한 목소리 하나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마리사는 몸을 돌려 닥터 크라우스를 쳐다보았다.  그는 주름살이 깊은 통통한

얼굴로, 이민온 노동자처럼 커다랗고 넓적한 손을 가지고 있었다.  자리에 앉은 
그녀는 그를 더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그의 인자하고 총기 가득한 눈은 
그녀에게 학창 시절의 내과 교수님을 생각나게 했다.  마리사는 이런 사람이 
의료인 정치 행동 위원회 같은 곳에 말려들었다는 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이런 시간에 불숙 찾아와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닥터 크라우스가 말했다.
   난 그저 책을 좀 보고 있었을 뿐이에요.  자, 어쩐 일로 오셨지요? 
  마리사는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보기 위해 앞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제 이름은 닥터 마리사 불루멘탈입니다. 
  마리사가 잠시 뜸을 들이자 닥터 크라우스는 궁금하다는 듯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의 얼굴로 미루어 그는
그녀의
이름을 아예 들어보지도 못했거나, 아니면 아주 훌륭한 연기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저는 씨디씨에 근무하는 역학 정보원입니다. 
  마리사가 말했다.  그의 눈이 약간 가늘어졌다.
   내 하녀가 전하기로는 당신이 피에이씨 일로 찾아왔다고 들었소. 
  닥터 크라우스가 말했다.  어느새 그의 목소리에서는 여태까지의 친절함이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그건 사실입니다. 
  마리사가 말했다.
   어쩌면 먼저 선생님께 혹시 피에이씨가 하는 일 중에 씨디씨에 압력을 넣을 
만한 것이 있는지를 아시는가 한 번 여쭈어보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그 말에 닥터 크라우스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버렸다.  깊은 숨을 한 번 들이킨

그는 말을 시작하려다가 갑자기 생각이 바뀌었는지 입을 닫아버렸다.  마리사는 
느긋하게 앉아 그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마침내 헛기침으로 목청을 가다듬은 닥터 크라우스가 입을 열었다.
   피에이씨는 파괴적인 경제 세력들로부터 미국 의학계를 구조해내려고 부단히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애당초 단체가 설립된 궁극적인 목표이기도
합니다. 
   훌륭한 목표로군요. 
  마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피에이씨가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그 과제를 해결해나가고 있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성적이오 합리적인 입법 활동을 지원하는 것이 우리가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닥터 크라우스가 말했다.  그는 마리사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 몸을 일으켰다.
   피에이씨는 더욱 보수적인 즉, 미국적인 요소들이 영향을 강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데 일조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런 조치들을 취해야 할 
대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의료계의 현실을 한 번 생각해보세요.  고삐풀린 
망아지꼴이 아닌가요? 
  그가 벽난로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그의 얼굴은 그림자 속에 묻혀 사라졌다.
   불행하게도, 피에이씨는 입법 활동을 지원하는 것 외에도 또 다른 활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더군요.  그것이 바로 우리 씨디씨가 우려하는 바입니다. 
   내 생각엔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것 같소. 
  닥터 크라우스가 말했다.
   그럼 이만 실례. 
   저는 피에이씨가 최근의 에볼라 감염 사건들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몸을 일으키며 불쑥 마리사가 내뱉었다.
   당신네들은 에이치엠오들에 그 질병을 퍼뜨리는 것이 목표 추구에 일조를 할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건 말도 안되는 소리요! 
   저도 바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마리사가 말했다.
   하지만 저는 당신과 피에이씨의 간부들이 최근 그 바이러스를 취급하기 위해 
실험 기기들을 구입한 조지아 주 그레이슨의 프로페셔널 랩 연구소와 관계가 
있다는 서류들을 가지고 있어요.  저는 심지어는 지표 증례들을 감염시킬 때 
사용했던 예방 접종용 주사총까지 확보해두고 있단 말입니다. 
   빨리 여기서 나가주시오. 
  닥터 크라우스가 격앙된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기꺼이 나가드리죠. 
  마리사가 말했다.
   하지만 그러기 전에 먼저, 당신네들 피에이씨 간부 모두를 제가 일일이
방문할 
계획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저는 간부진 모두가 이 어리석기 짝이 없는 
계획에 동의를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사실, 저는 당신 같은 의사, 아니
어떤
의사라도, 이 따위 계획을 승인했다는 게 도저히 믿어지지를 않습니다. 
  마음과는 달리 마리사는 침착하게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닥터 크라우스는

꼼짝도 않고 벽난로 옆에 못박힌 듯 서 있었다.
   시간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마리사가 말했다.
   혹시 당혹스럽게 해드렸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만나볼 피에이씨

간부 중 누군가가 분명 이 끔찍한 일을 중지시키는 데 힘을 주실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글쎄, 공범 증언을 하는 것도 한 방법이겠지요.  선생님께도 
기회는 있습니다.  전 그렇게 되기만을 바라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닥터 
크라우스. 
  마리사는 간신히 자신을 달래며 현관으로 이어지는 복도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혹시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그가 따라와 덮치지나 않을까
조마조마하는데
어디선가 하녀가 나타나 문을 열어주었다.  마리사는 전등불 밑을 벗어나는 순간

꽁지가 빠지게 달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잠시 동안 닥터 크라우스는 손끝 하나 꼼짝할 수가 없었다.  마치 끔찍한
악몽에
시달리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갑자기 위층에 감추어두고 있는 권총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어쩌면 그냥 자살을 해버리는 게 현명할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어 공범 증언을 하는 대가로 면죄를 청원해보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는 그게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도무지 가늠을 할 수가 없었다.
  마비에 이어 공포가 엄습했다.  책상으로 달음질을 친 그는 허둥지둥 주소록을

펼쳐 전화번호를 찾아낸 다음 아틀란타로 다이얼을 돌렸다.
  벨이 거의 열 번이나 울린 다음에야 저쪽에서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전화선을

타고 조슈아 잭슨의 매끄러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여보세요?  어디시죠? 
   잭 크라우스요. 
  반 미치광이가 된 크라우스가 말했다.
   이것 봐요!  도대체 이게 어찌된 일이요?  당신이 분명 엘에이 것말고는 
피에이씨가 에볼라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맹세를 하지 않았소?  당신이 분명

당신 입으로 그 후의 감염 사건들은 처음 환자들로부터 뜻하지 않게 파생된 
거라고 말하지 않았냐 말이오!  조슈아, 당신 그렇게 약속해 놓고. 
   진정해요. 
  잭슨이 말했다.
   정신을 좀 차리란 말입니다. 
   도대체 마리사 불루멘탈이 누구요? 
  닥터 크라우스가 다소 침착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건 왜 물으십니까? 
   그 여자가 방금 우리집가지 찾아와 나와 피에이씨가 에볼라 감염 사건들 
전체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며 한바탕 소란을 피웠단 말이오. 
   그 여자가 아직도 거기 있습니까? 
   아니오.  
벌써 갔어요. 
  크라우스가 말했다.
   그 여잔 도대체 누구요? 
   기가 차게 재수가 좋은 씨디씨 역학관입니다.  하지만 걱정하실 것 까지는 
없습니다.  헤버링이 잘 처리를 할 겁니다. 
   일이 이제 걷잡을 수 없이 되어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오. 
  크라우스가 말했다.
   그러길래 내가 애당초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쓴다고 했을 때부터도 이
계획에
반대를 하지 않았소!  이건 나랑은 거의 상관이 없는 일이라는 걸 다시 한 번 
상기시켜드리고 싶소. 
  크라우스가 말했다.
   그녀는 정말 훌륭할 정도로 자기 목적을 달성했소.  그녀의 말에 의하면
자신이
피에이씨간부들 모두의 이름과 주소를 확보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게다가 그 
여자는 그들 모두를 일일이 방문할 작정이라는 것이었소. 
   다음엔 누구를 찾아갈 것이란 말은 안하던가요? 
   그런 말을 할 리가 있소?  그 여자는 바보가 아니란 말이오. 
  크라우스가 말했다.
   그 여자는, 실제로 혀를 내두를 정도로 똑똑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오.  그 
여자는 나를 무슨 악기라도 되는 양 마음대로 주물렀소.  만일 그 여자가 우리 
모두를 다 찾아다닌다면 누군가는 분명 손에 놀아나게 되고 말 거요.  
샌프란시스코의 티만을 기억하시오?  그 사람은 나보다도 고집스럽게 이 계획에 
극구 반대를 했었소. 
   긴장을 푸세요. 
  잭슨이 크라우스를 달래며 말했다.
   난 당신이 왜 그렇게 불안해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당신에게
상기시켜주고 싶은 것은 어떤 누구를 명확히 범인으로 단정할 만한 진짜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헤버링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박테리아 연구에 관련된 것들을 제외하고는 실험실을 깨끗이 정리해 버렸습니다.

내가 그에게 그 여자가 다른 간부들을 찾아갈 계획이란 말을 전해주겠습니다.  
그게 분명 도움이 좀 될 겁니다.  그리고 그 동안은 그 여자가 티만을 만나지 
못하도록 추가로 예방 조처들을 취해두겠습니다. 
  크라우스는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불안은 약간 누그러 들었지만 몸을 일으켜 
책상의 전등불을 그던 그는 아침에 자신의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어두기로 마음을

굳혔다.  공범 증언을 하는 절차에 대해 미리 파악해두는 것이 해가 될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택시가 바람을 가르며 트리보로교를 건너자 마리사는 휘황찬란한 맨하탄의 
야경에   을 잃었다.  멀리 바라보는 맨하탄의 밤 풍경은 아름답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차가 동아일랜드 고속도로의 함몰부로 접어들기 시작하자 맨하탄의
모습은 
점차 멀어지더니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마리사는 다시금 핸드백에서 
거낸 피에이씨 간부들의 성명과 주소가 적힌 명단으로 시선을 떨구엇다.  하지만

주마등처럼 스치는 가로등 불빛으로 명단을 읽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크라우스 다음으로 찾아갈 사람을 정하는 일도 쉽지가 않았다.  가장 가까이에

위치한 사람을 찾아가는 것이 기술적으로는 가장 시운 방법이겠지만 그것은 분명

추적자들도 가장 예측하기가 쉬운 것인 동시에 가장 위험한 선택이기도 했다.  
안전이라는 사항을 제일로 고려한 그녀는 가장 멀리에 위치한 사람, 즉 
샌프란시스코의 닥터 싱클레어 티만을 찾아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앞으로 몸을 기울이며, 마리사는 운전사에게 라구아디아 대신 케네디 공항으로
데려다달라고 말했다.  어던 항공사 터미널로 갈지 운전사가 묻자 그녀는
생가나는
대로 유나이티드 항공사 이름을 댔다.  만일 그 회사 항공편에 자리를 얻을 수 
없다면 다른 터미널로 가면 그만이었다.
  늦은 저녁 시간이었던 관계로 터미널은 한산했고, 덕분에 마리사는 신속히
일을 
볼 수가 있었다.  그녀는 중간에 시카고에 한 번 기착할 뿐 샌프란시스코까지
거의
직행하는 항공편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녀는 또다른 가명 하에 현금으로 표를 구입한 다음, 신문 판매대에서 읽을 
거리를 좀 사서 탑승구를 향했다.  그녀는 출발 전의 남는 시간을 이용해
랠프에게
전화를 걸기로 했다.  예상했던 대로 그는 그녀가 더 일찍 전화를 걸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지만 그녀가 공항에 와 있다는 사실을 말하자 반색을
했다.
   이번만은 용서를 해주겠소. 
  그가 말했다.
   하지만 이건 지금 당신이 집에 돌아오려는 참이기 때문이에요. 
  마리사는 신중하게 단어를 선택하며 입을 열었다.
   오늘 저녁 뵐 수 있었으면 정말 좋겟어요.  하지만... 
   오늘 또 못 온단 말이오? 
 랠프가 짐짓 화를 내며 말했다.
   내일 정오에 맥퀸린씨를 만날 약속을 해두었단 말이오.  당신이 가능한 한
빨리
만나게 해달라고 그러지 않았소? 
   약속을 연기해야 할 것 같아요. 
  마리사가 말했다.
   중요한 일이 생겼어요.  전 하루 이틀동안 샌프란시스코에 꼭 가봐야 해요.  
하지만 왜 그런지는 지금 당장 어떻게 설명을 드릴 수가 없어요. 
   마리스, 도대체 무슨 일이오? 
  랠프가 분노와 절망이 뒤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여태까지 당신이 해준 얼마 안되는 이야기로도 당신이 집으로 돌아와 
맥퀸린씨를 만나는 게 최상책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정 캘리포니아에 가고
싶다면
그 사람을 만나본 다음에 가도 늦지 않아요.  만일 그가 동의한다면 말이오. 
   랠프, 절 걱정해주신다는 건 잘 알아요.  당신이 그렇게 신경을 써주신다는 
사실에 마음이 든든해요.  하지만 모든 게 계획대로 착착 되어가고 있으니 너무 
걱정은 마세요.  지금 제가 하려는 것은 맥퀸리씨와의 일을 더 수월하게 해줄 
거예요.  저를 믿어 주세요. 
   난 도저히 못 그러겠소. 
  랠프는 애원을 했다.
   당신은 지금 이성적으로 굴고 있지를 않아요. 
   비행기 수속이 시작됐어요. 
  마리사가 말했다.
   시간 나는 대로 전화드릴게요. 
  마리사는 한숨과 함께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는 로맨틱한 면은 그리
뛰어나지
않았지만 자상하고 감상적인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알은 제이크에게 입을 닥치라고 말해  .  그는 그의 끊임없이 주절거리는
수다를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그것들은 야구 얘기 아니면 경마에 대한 것이었다. 

그의 수다는 조지의 끝없는 침묵보다도 더 지긋지긋했다.
  알은 조지가 계속 에섹스 하우스의 로비를 감시하는 동안 제이크와 함께
택시에
앉아 있었다.  알은 무엇인지 일이 틀어져버렸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는

소호의 어떤 음식점 앞까지 내내 그 리무진을 따라가 보았지만 그가 보았던 
여자는 끝내 차에서 내리지를 않았다.
  다시 호텔로 돌아온 그는 제이크를 시켜 켄드릭양이 아직도 투숙중인지를 
확인시켜보았다.  그녀는 아직도 숙박부에 기재되어 있었지만 알이 올라가 방 
앞을 지나가보니 방은 이미 정리중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그를 그 여인의 
옛날 애인으로 생각하는 호텔의 청원 경찰들에게 발각되어 그 여자를 괴롭히지 
말라고 경고까지 받게 되어버렸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제 아무리 바보 천치라 
해도 무엇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의 직업적인 육감은 
그 여인이 벌써 손아귀를 벗어나버렸고 에섹스 하우스를 감시하는 것은 시간의 
낭비일 분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정말 벨몬트데이 경마 때 4번에 아무 것도 걸지 않을 생각이세요? 
  제이크가 물었다.
  알이 주먹으로 제이크의 머리통을 두어 번 갈겨주려던 순간 갑자기 호출기에서

신호음이 들려왔다.  재킷 주머니로 손을 넣은 그는 나지막한 욕설과 함께 
호출기를 꺼버렸다.  그는 그것이 누구인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여기서 기다려. 
  그가 볼멘 소리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는 달음질로 길을 건너 플라자 호텔 
지하층의 공중전화로 헤버링에게 전화를 걸었다.
  헤버링은 모욕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았다.
   제기랄, 그 여자는 45킬로나 될가말까해.  내가 부탁한 게 람보처럼 하라는 
것도 아니잖아.  도대체 그 따위로 하고 하루에 천 달러씩이나 넙죽넙죽
받아먹는 
게 용하군. 
   그 여자는 운이 좋았어요. 
  알이 말했다.  그는 웬만한 것까지는 모두 꾹꾹 참아줄 작정이었다.
   그 따위 말은 하지도 말아. 
  헤버링이 말했다.
   말해봐, 그 여자가 지금 어디 있는지 알기나 하나? 
   확정적으로는 말씀을 드릴 수가 없겠는데요. 
  알이 얼버무리며 말했다.
   그럼 내가 그 여자가 어디를 갔었는지 말해주지.  그 여자는 닥터 크라우스를

찾아가 생똥을 싸도록 겁을 주었어.  이제 유감스럽게도 그 여자는 다른
피에이씨 
간부들을 일일이 찾아다닐 계획이라는 거야.  가장 약한 사람은 닥터 티만이야. 

다른 사람들은 내게 맡겨둬.  당신은 당신 오랑우탕 같은 부하를 데리고 빨리 
샌프란시스코로 가.  그녀가 그리로 왔는지 확인해보고 무슨 짓을 해도 상관 
없으니 그 여자가 티만을 만나지만 못하게 해. 











    16


    5월 24일

  알이 제이크와 조지의 뒤를 따라 샌프란시스코 중앙 터미널의 승강장을
걸어나올 
무렵, 하늘에는 벌서 서서히 먼동이 트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들이 잡아탔던 
아메리카 사의 항공편은 댈러스에 한 시간 반을 머문 다음 잠깐 기착만 하기로 
했던 라스베가스 공항에서 한참이나 연착을 해버렸다.
  제이크는 메타에게 사용했던 접종용 주사용이 든 서류 가방을 들고 있었다.  
알은 자신도 부하들만큼이나 초췌한 모습인지 궁금해  다.  그들은 면도와
샤워가 
필요했고 빳빳하게 주름을 잡았던 양복은 심하게 구겨져 있었다.
  알은 자신들이 지금 처한 상황을 생각할수록 점점 더 난감해졌다.  그 여자는 
물망에 오른 적어도 네 개의 도시 중 어디로든지 갔었을 수가 있었다.  게다가 
이건 그냥 처리해버리는 간단한 일만도 아니었다.  만일 그녀를 찾아낸다 해도 
그들은 먼저 그녀가 그 증거품인 주사총을 어디에 감추어 놓았는지를 알아내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었다.
  제이크나 조지에게 짐을 찾는 일을 맡긴 그는 항상 들고 다니는 몇 개의 
위조신분증을 이용해 차를 한 대 빌렸다.  지금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티만의 
집을 감시하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해야만 그녀를 찾아내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녀가 티만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을 수가 있었다.
  무선 전화기가 정착된 차를 빌릴 수 있도록 다시 한 번 확인을 한 그는 안내 
창구의 여직원에게서 얻은 지도를 펼쳐보았다.  티만은 소살리토라고 부르는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다.  아직 일곱 시도 되지 않은 이른 시각이니
적어도 
길이 막혀 고생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페어몬트 호텔의 교환수는 부탁해 두었던 대로 오전 7시 30분, 모닝 콜로 
마리사를 깨워주었다.  전날 밤, 마리사는 운이 좋았는지 조그만 대회
참석자들이 
마지막 순간에 예약을 취소하는 바람에 별고생없이 방을 하나 얻을 수가 있었다.
  침대에 누워 아침 식사가 오기를 기다리며 마리사는 닥터 티만이 어떤
사람일까 
상상을 해보았다.  아마도 크라우스와 비슷한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돈 주머니를 지키려는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속물 중의 하나겠지.
  몸을 일으킨 마리사는 창문을 가리고 있던 커튼을 걷었다.  그러자 베이
브리지,
마린 카운티 언덕과 중세의 요새 같은 모습을 한 알카트라츠 섬이 어우러진
장관이
눈 앞에 펼쳐졌다.  이런 일이 아닌 더 즐거운 일로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이 
장관을 즐길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그녀의 머리를 스쳤다.
  샤워를 마치고 마악 호텔에 비치된 목욕 가운으로 몸을 감싸자 주문했던 아침 
식사-다양한 종류의 과일과 커피-가 도착을 했다.
  복숭아 한 개를 집어 껍질을 벗겨내면서 그녀는 과도가 나무 손잡이로 된 
몹시도 날카로운 구식칼이로구나 생각했다.  복숭아를 먹으며 티만의 주소를 
내려다보던 그녀는 혹시 집보다는 사무실로 찾아가는 편이 낫지 않을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녀가 닥터 크라우스를 방문한 뒤로 누군가가 분명 티만에게 연락을 해주었을

것이니 이제 예기치 못한 상태에서 허를 찌른다는 것은 무리였다.  이런 상황 
하에서는 차라리 그의 사무실 쪽이 더 안전할 것 같았다.
  엘로우 페이지(상호 및 공공 기관이 수록된 전화 번호부)는 책상 서랍 중
하나에
들어 있었다.  의료 기관란을 펼쳐 티만의 이름을 찾은 마리사는 그가 
산부인과만을 전문으로 하고 있음을 알아낼 수 있었다.
  단지 그가 업무중인지 아닌지만을 파악할 목적으로 마리사는 그의 사무실로 
다이얼을 돌렸다.  교환은 친절하게도 사무실이 여덟시 반이 되어야 연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 시간까지는 아직도 약 10분 가량이 남아 있었다.
  외출 복장을 갖춘 다음, 마리사는 다시 다이얼을 돌렸다.  전화를 받아든 
사무실의 수첩 담당 직원은 오후 세 시나 돼야 선생이 돌아올 예정이라는 말을 
해주었다.  마침 오늘이 그가 샌프란시스코 종합 병원에서 수술을 하는 날이라는

것이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마리사는 창 밖의 베이 브리지를 바라보며 이 새로운
정보에
대해 곰곰이 음미해보았다.  어쩌면 병원에서 티만을 대면하는 편이 사무실에서 
만나는 것보다 훨씬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그 티만이란
사람이 
손수 나서 그녀를 저지할 생각을 품고 있다면 그 편이 훨씬 안전할 것이다.
  그녀는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보았다.  속옷을 제외하고는 그녀는 벌써 
이틀 동안이나 똑같은 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녀는 어디 가서 새 옷들을 
장만해야만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문 손잡이에  방해하지 마시오 표지를 걸며 방을 나섰다. 
추적자들보다 
몇 수나 앞서가고 있다는 생각에 그녀의 불안은 뉴욕 때보다는 훨씬 누그러져 
있었다.
  샌프란시스코 종합 병원은 아주 멋진 장소에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일단 
들어가보니 다른 대도시의 병원들과 비슷하게 구식과 신식의 것들이 아무렇게나 
뒤섞여 있었다.  또한 그런 병원들의 특색인 혼잡과 무질서가 판을 치고 있었다.
 
덕분에 마리사는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쉽게 의사들 갱의실로 잠입할 수
있었다.
  마악 수술복을 고르고 있는데 안내원 한 명이 그녀에게로 다가오며 물었다.
   도와드릴까요? 
   저는 닥터 불루멘탈입니다. 
  마리사가 말했다.
   닥터 티만의 수술을 참관하러 왔습니다. 
   사물함을 하나 배정해 드릴게요. 
  안내원은 주저없이 열쇠 하나를 건네주었다.
  옷을 갈아입은 마리사는 수술복 앞 섶에 사물함 열쇠를 매달고 수술장
휴게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스무 명 남짓되는 사람들이 커피와 수다와 신문으로 
휴식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휴게실을 통과한 마리사는 곧장 수술장으로 걸어들어갔다.  접속실에서
수술모와
덧신을 챙겨신은 그녀는 벽에 붙은 커다란 수술 예정표 게시판 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닥터 티만의 이름은 11번 수술방 란에 적혀 있었다.  그는 벌써 두 
번째 자궁 절제술을 시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저는 닥터 티만의 수술을 참관하러 왔습니다. 
  마리사가 수술장 리셉션 데스크 뒤에 앉은 간호사에게 말했다.
   그럼 들어가보세요.  수술은 11번 방이에요. 
  간호사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다른 일로 주의를 들리는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마리사는 널찍한 중앙 복도로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수술실들은 양쪽으로 
스크럽(수술 전 손을 소독하는 행위)과 마취 공간을 공유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수술실 문에 달린 타원형의 유리창을 통해 마리사는 각기 자신들이 맡은 환자들 
위로 몸을 구부린 수술가운 차림의 수술진들을 볼 수가 있었다.
  마리사는 마스크를 걸치고 티만의 수술방으로 걸어들어갔다.
  환자에게는 모두 다섯 사람이 달라붙어 있었다.  환자의 머리쪽에는 마취과 
의사가 앉아 있었고 수술대의 양 편에는 외과의(비단 일반 외과 의사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칼을 잡고 수술을 하는 모든 의사는 외과의라고 불림) 둘이, 환자의

발 쪽에는 스크럽 간호사(손을 소독하고 수술에 직접 참여하는 간호사)가,
그리고 
한 명은 서큘레이팅(순환간호사.  수술에 직접 참가하지는 않으나 수술방 내를 
돌아다니며 소독을 한 수술진을 돕는 역할을 한다)을 하고 있었다.
  마리사가 방에 들어서자 서큘레이팅은 마악 수술장 구석에 마련된 자리에 
앉으려는 참이었다.  다시 몸을 일으킨 간호사가 마리사에게 왜 왔는지를
물었다.
   얼마나 더 걸릴 것 같아요? 
  마리사가 물었다.
   15분쯤 있으면 끝날 거예요. 
  간호사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닥터 티만은 빨리 하시는 편이니까요. 
   어떤 분이 닥터 티만이죠? 
  마리사가 물었다.  간호사가 이사하다는 듯 마리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오른쪽에 있는 분이세요.  당신은 누구시죠? 
   아틀란타에서 찾아온 동료 의사예요. 
  그녀는 일부러 긴 설명을 늘어놓지 않았다.  수술대 머리 쪽으로 걸음을 옮겨 
닥터 티만을 바라본 마리사는 그제서야 왜 간호사가 그녀의 질문을 그렇게 
이상하게 생각했는지를 알 수가 있었다.  닥터 티만은 흑인이었던 것이다.
  정말 뜻밖이로군.  마리사가 생각했다.  그녀는 피메이씨 간부진 모두가
초강경
보수파, 인종 차별주의적인 백인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만 생각했던 것이다. 

잠시 동안 그녀는 에테르 스크린(마취의와 수술진 사이에 치는 스크린) 너머에 
서서 수술 광경을 지켜보았다.
  자궁은 이미 떨어져나온 상태로 그들은 봉합을 시작하고 있었다.  티만의
솜씨는 
훌륭했다.  그의 기민하고 재주있는 손놀림은 천부적으로 타고난 것 같았다.

   이 망할 놈의 차에 빨리 시동 걸어. 
  알은 차에 달린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들이 탄 차는 소살리토교회 산기슭에

자리잡은 나지막한 삼나무 집 앞에 세워져 있었다.  유칼립터스 나무를 사이로 
멀리 샌프란시스코 만의 푸른 물결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제이크는 시동 장치에 꽂혀 있던 열쇠를 돌렸다.
   어리로요? 
  그는 알이 신경질이 잔뜩 나 있는 상태일 때는 가급적이면 말을 적게 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시 시내로 들어가. 
   티만의 사무실에선 뭐래요? 
  뒷자리에 앉은 조지가 물었다.
  제이크는 조지에게 입을 닥치란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는 입을 열기조차도 
무서웠다.
   그 의사 양반이 샌프란시스코 종합병원에서 수술을 하는 중이라는 거야. 
  알이 분노로 새하얘지며 입을 열었다.
   첫 수술이 일곱 시 반에 시작할 예정이었고 세 시나 돼야 사무실로
돌아온다고 
하더군. 
   어차피 놓칠 수밖에 없었겠군요. 
  조지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그 친구는 우리가 여기 도착하기 한 시간 전에는 나갔을 거예요.  괜히 
시간만 낭비했군요.  아까 내 말대로 곧장 호텔을 잡았어야 했어요. 
  알이 번개같이 앞자리에서 몸을 돌려 조지의 분홍색 디오르 넥타이를 
움켜쥐었다.  조지의 눈이 부풀어오르며 얼굴 전체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만일 네 총고가 필요했다면 내가 먼저 묻겠어, 알겠어? 
  알은 넥타이를 놓으며 거칠게 조지를 뒷자리로 밀어붙였다.  제이크는 
거북이처럼 입고 있던 스포츠 재킷 속으로 목을 움츠렸다.  그는 용기를 내 알을

한 번 힐끗 쳐다보았다.
   넌 또 뭘 보는 거야? 
  알이 다그쳐 물었다.
  제이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번 일로 조지가 침묵의
현명함을 
배웠기만을 마음 속으로 간절히 기원했다.
  차 안의 무거운 침묵이 깨진 것은 그들이 베이 브리지에 거의 다와서였다.
   차를 한 대 더 빌려야겠어. 
  알이 침착하게 말문을 열었다.
   혹시 문제가 생겨 둘로 갈라져야 할지도 모르니 말이야.  차를 빌린 다음에 
샌프란시스코 병원으로 가기로 하자.  티만을 빨리 찾아낼수록 좋아. 

  충분히 닥터 티만을 보았으니 그를 알아보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자신감으로 마리사는 수술실을 빠져나왔다.  그녀는 갱의실로 들어가 다시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녀는 티만을 만난 즉시 빠져나갈 수 있도록 준비를 
해두고 싶었다.  수술팀 휴게실로 들어선 그녀는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몇 
사람이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보이기는 했지만 실제로 말을 걸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삼십 분을 기다린 뒤에야 닥터 티만은 자연스럽고 우아한 걸음걸이로 휴게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마리사는 커피를 한 잔 따르고 티만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반팔 수술복
밑으로
덮인 보기좋은 팔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피부는 잘 길들인 포도처럼 짙은
갈색을 
띠고 있었다.
   저는 닥터 불루멘탈입니다. 
  마리사는 천천히 그의 반응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그는 잘 다듬어진 콧수염, 그리고 마치 인생의 모든 험난한 역경을 다 보아온

우수에 잡긴 눈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마리사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표정으로 미루어 그는 마리사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잠깐 둘이서만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마리사가 물었다.
  티만은 그르 향해 다가오던 조수를 한 번 힐끗 바라보았다.
   수술장에서 보세. 
  티만은 그 말과 함께 마리사를 데리고 휴게실을 나섰다.
  그는 그녀를 휴게실과는 두 개의 쌍바라지 문으로 차단된 구술 기록실로 
인도했다.  그곳에는 의자가 한 개 놓여 있었는데 닥터 티만은 마리사에게 
앉으라고 손짓을 하고는 그 자신은 오른손에 커피잔을 든 채 카운터에 몸을
기댔다.
  자신의 작은 체구와 그로 인한 심리적 불이익을 강하게 의식한 마리사는 이른 
아침부터 계속 수술을 하느라 피곤하실 테니 당연히 닥터 티만이 의자에 앉아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며 그에게로 의자를 밀었다.
   알았어요.  알았다니까요. 
  그가 짧은 웃음을 지으명 말했다.
   제가 앉을게요.  자, 어떤 이로 오셨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제 이름을 모르신다니 전 정말 놀랐습니다. 
  마리사가 티만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눈은 궁금한 듯 반짝거렸지만 
아직도 친절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닥터 티만이 말했다.  그는 다시 웃음을 지으며 마리사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워낙 사람들을 많이 만나다 보니... 
   닥터 잭 크라우스가 전화로 제 이야기를 하지 않던가요? 
  마리사가 말했다.
   난 닥터 크라우스란 사람을 알고 있는지조차도 잘 모르겠군요. 
  닥터 티만이 커피잔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첫 번째 거짓말이로군, 마리사가 생각했다.  길게 숨을 들이쉰 마리사는
단숨에 
닥터 크라우스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말을 그에게 쏟아부었다.  그녀의 입에서 
에.에이.에볼라 감염 사건에 대한 말이 나올때부터 그는 내내 눈을 내리깔고만 
있었다.  사실 마리사는 그가 몹시 불암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의 손에 들려있던 커피의 표면이 잔잔한 파문을 내며 흔들리는 거을 본 
마리사는 자신이 그의 다음번 수술 환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다행스럽기만 했다.
   난 당신이 왜 나한테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군요. 
  닥터 티만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리고, 유감이지만 난 수술이 더 남아서 이제 가보아야겠습니다. 
  평소의 자신답지 않은 대담함으로 마리사는 그의 가슴을 부드럽게 떠밀어 다시

의자에 눌러앉혔다.
   제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마리사가 말했다.
   당신이 알건 모르건간에 당신은 이제 빼도 박도 못하게 연루되어 있습니다.  
저는 에볼라가 의료인 하원 정치 행동 위원회에 의해 고의로 확산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들을 이미 확보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 단체의 재무담당입니다.  
당신 같은 명성을 가진 사람이 이런 끔찍하고 사악하기 짝이 없는 일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그저 놀라운 따름입니다. 
   당신은 제정신이 아니로군요. 
  마침내 몸을 일으킨 닥터 티만은 그녀의 자그마한 체구를 위압적으로 
내려다보며 반격의 포문을 열었다.
   오히려 당신이 그런 터무니없고 무책임한 주장을 떠들고 다닐만큼 강심장이란

게 놀라울 뿐이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 
  마리사가 말했다.
   당신이 피에이씨의 간부인 동시에 에볼라 같은 바이러스를 취급할 만한
장비를 
갖춘 연구소의 유한 책임 사주라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바예요. 
   당신이 온갖 보험에 다 들어놓았기를 바라겠소. 
  닥터 티만이 언성을 돋구며 위협적으로 고함을 쳤다.
   곧 내 변호사랑 대면을 하게 될 테니 말이오. 
   그것도 괜찮군요. 
  티만의 위협따위에는 아랑곳도 않는 듯 마리사가 말했다.
   어쩌면 그 사람이 당신에게 당국에 협조하는 것이 최선의 방편이라고 설득을 
해줄지도 모르니까 말이에요. 
  그녀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 그의 얼굴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당신을 만나보니 당신이 그런 무서운 질병을 퍼뜨리려는 계획을 순순히 
승인했다고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군요.  다른 사람들의 우매한 판단으로 인해 
당신이 여태까지 공들여 쌓아왔던 모든 것을 잃는다는 건 정말 이중의 비극일 
거예요.  다시 한 번 생각해보세요.  닥터 티만.  당신에겐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요. 
  허둥지둥 전화로 달려가는 실신 지경의 의사를 뒤로 한 채 마리사는 문을 
밀치고 기록실을 나섰다.  발을 옮기던 그녀는 티만에게 다른 피에이씨 간부들 
모두를 찾아갈 계획이란 말을 깜박 잊고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그것은
별로 중요할 것 같지 않았다.  그가 그 정도로 겁을 먹었으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저기 그 여자가 있어! 
  알이 제이크의 어깨를 내리치며 소리를 질렀다.  그들은 병원 정문 길
건너편에 
차를 세워두고 있었다.  조지는 그들이 탄 차 바로 뒤 새로 빌린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알이 몸을 틀어 뒤쪽을 쳐다보자 조지는 자신도 그녀를 
보았다고 엄지 손가락을 뻗어 신호를 보냈다.
   아가씨, 오늘은 절대 못 빠져나갈 거요. 
  알이 중얼거렸다.
  차에 시동을 건 제이크는 마리사가 택시에 오르는 순간 거리로 차를 빼 시내 
쪽을 향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떠나는 걸로 봐서 티만을 만난 게 분명해요. 
  제이크가 말했다.
   무슨 상관이야? 
  알이 말했다.
   이제 우리 손아귀에 있는데 말이야. 
  다음 그가 덧붙여 말했다.
   그 여자가 호텔로 돌아가준다면 일이 더 쉬워지겠는데. 
  그때 조지의 차를 뒤에 둔 마리사의 택시가 그들을 추월해 지나갔다. 
제이크는
다시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마리사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그녀의 차를 샌드위치할 작정이었다.
  십오 분쯤 뒤, 마리사가 탄 택시는 페이몬트 호텔 앞에 차를 대기 위해
기다리는
줄 뒤에서 속도를 줄였다.
   우리 소원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 같은데요. 
  호텔 건너편에 차를 대며 제이크가 말했다.
   내가 차를 맡을게. 
  알이 말했다.
   넌 빨리 따라들어가 저 여자가 몇 호실에 묵는지 알아내기나 해. 
  알이 운전대로 미끄러져 들어오자 제이크는 서둘러 차에서 내렸다.  아침의 
번잡한 교통량 사이를 이리저리 헤집으며, 길을 건넌 제이크는 마리사가
택시에서 
내리기도 전에 벌써 호텔 프런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로비에서 신문을 한 장 집어든 그는 전철 통근자들이 하는 식으로 신문을 
좁다랗게 접은 다음 호텔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한 명도 놓치지 않고 감시할 수 
있을 만한 자리를 잡았다.
  마리사는 곧장 프런트 데스크로 걸어왔다.  방 열쇠를 찾으려는 것이라고 
생각한 제이크는 재빨리 그녀의 등 뒤로 달라붙었다.  하지만 그녀는 귀중품 
보관함을 사용하고 싶다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접수계원이 문을 열어 마리사를 프런트 데스크 뒤편의 사무실로 데리고 
들어가자 제이크는 각종 모임들의 안내문이 붙은 게시판 앞으로 발길을 옮겼다.
곧, 마리사는 바쁜 듯 핸드백을 닫으며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다음 순간,
그녀는 
곧장 제이크를 향해 다가왔다.
  대경실색을 한 제이크는 그녀가 자신을 알아본 것이라고 잠시 착각을 했지만 
그녀는 곧장 그의 옆을 지나 선물점들이 줄줄이 늘어선 복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재빨리 그녀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제이크는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의

옛날 사진들의 걸려 있는 복도에서 그녀를 앞질렀다.  그녀가 엘리베이터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그는 그녀를 앞질러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 
틈에 섞여 들어갔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그는 기다리던 사람들이 모두 탈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여유가 있는지를 확인한 다음 마리사에 앞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일부러 
층수가 표시된 버튼 앞에 자리를 잡았다.  마리사의 가녀린 손이 11층 버튼을 
누르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승객들이 꾸역꾸역
올라타자
마리사는 엘리베이터 깊숙이 밀려들어갔다.
  엘리베이터가 이따금씩 정지해 승객들을 내려주며 올라가는 동안 제이크는
계속 
신문에만 코를 박고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11층에서 멈추자 그는 여전히 신문에

몰두한 채 마리사와 다른 손님 한명 뒤로 승강기를 내렸다.
  그녀가 1127호실 앞에서 발을 멈추었음에도 제이크는 계속 걸음을 옮겼다. 
그는
그녀가 문을 닫는 소리가 난 다음에야 다시 방향을 돌려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다시 거리로 나온 제이크는 길을 건너 알의 차로 다가갔다.
   어떻게 했어? 
  알이 또 탈주한 것이 아닌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1127호실이에요. 
  제이크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번엔 제대로 알아왔겠지? 
  알이 차에서 뛰쳐나오며 말했다.
   여기서 기다려.  전혀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그가 어찌나 커다란 미소를 지었는지 제이크는 처음으로 그의 앞이빨의 잇몸이

이 뿌리가 있는 곳까지 물러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알은 조지의 차로 걸어가 창문에 몸을 기댔다.
   넌 차를 돌려서 뒷문을 맡아.  혹시 모르니까 말이야. 
  지난 며칠간 느껴보지 못했던 흡족한 기분으로 그는 길을 건너 빨강과
검정으로 
조화된 우아한 로비로 들어섰다.
  그는 프런트 데스크로 걸어가 1127호실 우편함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여분의
열쇠가 들어 있었지만 다른 손님들이 별로 없어 그것을 달라고 부탁하면 
접수계원이 필경 질문을 퍼부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는 대신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11층으로 올라간 그는 객식 청소원이 끌고 다니는 카트를 찾아 복도를 
훑어보았다.  카트는 깨끗한 시트와 청소도구들을 실은 채 어떤 스위트룸
바깥편에
세워져 있었다.  수건 한 장을 집어든 그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대각선으로 접어 
든든한 로프를 만들었다.  양손에 각각 수건 로프의 한 쪽씩을 잡은 그는
청소원이
한창 일을 하고 잇을 스위트 룸으로 걸어들어갔다.
  스위트 룸의 거실은 텅 비어 있었다.  침실 한가운데는 진공 청소기가 놓여
있고
바닥에는 린넨이 한무더기 쌓여 있었지만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화장실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흐르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청소원이 욕조 앞에 무릎을 꿇고 안쪽을 닦고 있었다.  그녀의 무릎 바로 앞 
바닥에는 코멧 상표의 비누가 한 통 놓여 있었다.
  망설임도 없이 그녀의 뒤로 다가간 알은 접은 수건을 올가미로 그녀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나지막한 신음 소리를 냈지만 그 소리는 물소리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알이 수건 끝을 놓자 그녀는 헝겁 인형처럼 힘없이 바닥에 
고꾸라졌다.
  알은 그녀의 주머니를 뒤져 팔찌만한 크기의 놋쇠 열쇠 걸이에 걸린 마스터 
키를 찾아냈다.  다시 복도로 나온 그는 손잡이에  방해하지 마시오 표지를 건
뒤 
스위트 룸의 문을 닫았다.
  다음 그는 청소원의 카트를 밀어 비상 계단 옆으로 치워놓았다.  연주회
준비를 
하는 피아니스트처럼 손가락을 놀리며 그는 1127호실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17


    5월 24일

  나무 손잡이가 달린 과도로 아침에 먹다 남은 과일을 깎은 마리사는 과도와 
껍질을 나이트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그녀는 미네아폴리스로 가는 항공편을 예약하기 위해 노스웨스트 항공사에 
전화를 거는 중이었다.  피에이씨와 추적자들이 다음 목적지를 아마도 가까운 
엘에이로 생각하기가 십상이라는 생각을 한 마리사는 그래서 미네아폴리스를 
선택한 것이었다.
  마침내 예약 담당 직원은 그녀에게 오후 비행기편에 자리를 하나 잡아주었다. 

다시 침대에 드러누운 그녀는 남은 한두 시간을 어떻게 쓰는 게 좋을지 머리를 
짜내다가 너무 피곤해서 깜박 잠이 들고 말았다.
  그녀는 금속성의  찰칵 하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문에서 나는 소리 
같았지만 자신이 문에  방해하지 마시오 표지를 걸어두었음을 기억하고 마리사는

다시 베개에 머리를 묻었다.  바로 그 순간, 문에 달린 손잡이가 조용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시카고 호텔 방에서 접종용 주사총을 든 사내에게 붙들렸던 일이 
섬광처럼 그녀의 머리를 스쳤다.  공포의 전율이 전류처럼 그녀의 온몸을 타고 
흘렀다.  황급히 몸을 추스린 그녀는 전화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마리사가 전화를 집어들기도 전에 빗장과 체인이 부서지며 문이 활짝 
열렸다.  세차게 문을 닫아버린 사내는 몸을 날려 마리사를 덮쳤다.  양손으로 
마리사의 목을 움켜쥔 그는 발작하는 미친 개처럼 그녀를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의 잿빛이 된 얼굴을 자기 얼굴 가까이로 끌어당겼다.
   날 기억하겠지? 
  그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마리사는 그를 기억할 수 있었다.  그는 줄리어스 시저 스타일로 머리를 자른 
금발의 사나이였다.
   열 셀 동안에 주사총을 내놔. 
  그는 마리사의 목을 움쳐쥐었던 억센 손을 약간 느슨하게 풀어주며 을러댔다.
   그렇지 않으면 목을 부러뜨려 버릴 거야. 
  자신의 말을 강조라도 하듯 그는 그녀의 머리통을 한 번 세차게 비틀어보였다.
찌르는 듯한 통증이 척추를 타고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숨이 막힌 마리사는 사력을 다해 사내의 억센 팔뚝을 할퀴어보았지만 아주 
소용도 없었다.  그는 그녀의 머리를 벽에다 박으며 다시 그녀를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반사적으로, 마리사의 팔은 몸을 가누기 위해 뒤쪽을 향해
뻗어나갔다.
  사이드 테이블 전등이 요라한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져내렸다.  방이 
빙글빙글 돌며 그녀의 두뇌는 산소를 달라고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이게 마지막 기회야. 
  알이 소리를 질렀다.
   주사총 어쨌어? 
  바로 그 순간, 마리사의 손에 과도가 만져졌다.
  그녀는 자그마한 자루를 손가락으로 움켜쥐었다.  주먹으로 단단히 칼자루를 
움켜쥔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사내의 배를 찔렀다.  그녀가 진짜로 찔렀는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알은 말을 마치지 못한 채 마리사를 놓고 풀썩 바닥에 
주저않았다.  그의 얼굴은 놀람과 충격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오른손으로 칼을 움겨쥐고는 셔츠에 배나오는 핏물에 얼이 빠진 듯한 알을 향해 
계속 칼날을 겨누면서 뒷걸음질쳤다.
  그녀의 뒷걸음질로 문까지 나가 도망을 치려는 생각이었지만 문에 도착하기도 
전, 그가 성난 짐승처럼 달려드는 바람에 화장실로 도망을 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불과 몇 시간 전, 시카고에서 당했던 일을 재연하게 된 것이다.
  알은 문이 닫히기 직전 문틈으로 팔을 집어넣었다.  마리사는 엉겁결에 칼을 
휘둘렀다.  칼날이 벼에 닿는 느낌이 손  에 전해졌다.  알은 문짝에 핏자국을
남긴
채 비명을 지르며 손을 잡아뺐다.  문이 요란하게 닫히자 마리사는 황급히 문을 
잠갔다.
  마악 화장실에 달린 전화기의 다이얼을 돌리녀는 순간 광음과 함께 문짝
전체가 
안으로 무너져 들어왔다.  알이 손을 비트는 바람에 전화기는 떨어뜨렸지만
끝끝내
칼자루를 움켜쥔 마리사는 마구 그를 찔러댔다.  그녀는 그의 복부를 몇 번이나 
찔렀지만 그것은 아무 효과도 없는 것 같았다.
  칼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마리사의 머리채를 잡아챈 알은 세면대를 향해 
그녀를 집어던졌다.  마리사는 다시 그를 찌르려 했지만 그녀의 팔목을 움켜쥔 
그는 마리사의 손을 거듭거듭 세차게 벽에 부딪드렸다.  그녀의 손아귀가
풀어지며
칼이 바닥에 떨어졌다.
  칼을 집으려 구부렸던 그가 다시 몸을 일으키는 순간, 마리사가 전화선에 
대롱거리던 수화기로 사력을 다해 그를 내리쳤다.
  잠깐 동안 마리사는 누가 더 심한 손상을 입었는지 가능할 수가 없었다.  그 
일격을 내리친 그녀의 어깨도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알은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다음 순간 그의 푸른 눈이 위로 말려올라가더니

마치 슬로우모션에 걸린 영상처럼 천천히 욕조 안으로 무너져내리며 수도 꼭지에

머리를 부딪쳤다.
  알이 다시 일어나 덤벼들 것 같아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마리사는 갑작스런 
 삑삑 소리에 화들짝 정신이 돌아왔다.  그녀는 손을 뻗어 수화기를 제자리에 
올려놓았다.  다시 욕조 안을 들여다본 마리사는 두려움과 의료인으로서의
사명감 
사이에서 갈등을 했다.  그의 콧잔등에는 상당한 크기의 상처가 벌어져 있었고 
그의 셔츠 앞섶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하지만 두려움이 더 컸다.  핸드백을 움켜쥔 마리사는 재빨리 방을
빠져나갔다.  
뉴욕에서 보았을 때 그가 혼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기억한 마리사는 가능한 한 
빨리 호텔을 벗어나야만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일층으로 내려온 마리사는 정문을 피해 계단으로 한층을 내려간 다음 화살표를

따라 후문을 향했다.  후문에 도착한 마리사는 문 바로 뒤에 몸을 숨기고 전차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자신의 몸이 노출되는 시간을 최소화하려고 타이밍을
맞춘 
마리사는 호텔문을 나선 뒤 승객들 틈을 헤치며 뒤편으로 들어갔다.  전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녀는 호텔 입구를 돌아다보았다.  뒤쫓아나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지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눈을 깜박거렸다.  방금 눈앞을 스치고 
지나간 사람은 바로 그 여자였다.  그는 재빨리 제이크의 차로 다이얼을 돌렸다.
   방금 그 여자가 호텔에서 나왔어. 
  조지가 말했다.
   그리곤 전차에 올라탔어. 
   알은?  같이 있었어요? 
  제이크가 물었다.
   아니. 
  조지가 말했다.
   그 여잔 혼자였어.  조금 쩔뚝거리는 것 같았어. 
   뭔가 이상한데요. 
   네가 따라가봐. 
  조지가 말했다.
   전차는 이제 마악 움직이기 시작했어.  난 호텔로 들어가 알이 어떻게 됐나 
알아볼게. 
   그렇게 해요. 
  제이크가 말했다.  그는 조지가 먼저 알을 맡겠다고 나선 게 너무나도 
다행스러웠다.  알이 여자가 도망쳤다는 것을 알면 완전히 미쳐버릴 게
분명했으니 
말이다.

  마리사는 혹시 누가 따라오는 기색이 없나를 살피며 호텔 쪽을 되돌아보았다. 

문을 나서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지만 전차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 차를 내린

사내 한 사람이 호텔 후문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타이밍상 의심이 좀 가기는 했지만 그가 전화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자 
마리사는 그것이 그냥 우연의 일치려니 생각해버렸다.  그녀는 전화기 모퉁이를 
돌아 페어몬트 호텔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져버릴 때까지 계속 그 쪽을
감시하며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겨우 안도의 한숨과 함께 긴장을 풀었던 그녀는 요란한 쇳소리에 또다시 놀라
펄쩍 뛰었다.  허겁지겁 문을 향해 뛰쳐나가던 그녀는 그것이 차장이 차비를 
걷으며 울려대는 종소리라는 것을 깨닫고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남자 한 명이 차에서 내리자 마리사는 재빨리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부들부들 떨던 마리사는 자기 옷에 핏자국이 묻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세면대에 부딪쳤던 엉치가 점점 더 아파오기 시작했다.  게다가 목은 제대로 
가누기가 힘들 정도로 통증이 심했다.
   요금 주세요. 
  차장이 말했다.
  마리사는 눈을 내리깐 채 핸드백을 뒤져 잔돈을 찾기 시작했다.  바로 그 순간

자신의 오른편 손 등에 엉겨붙은 피딱지가 눈에 들어왔다.  재빨리, 그녀는 
핸드백을 고쳐들어 왼손으로 요그을 지불했다.
  차장이 지나가자 마리사는 그들이 어떻게 자신을 찾아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렇게 조심을 했는데...맞아, 그들은 티만을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만이 유일한 가능성이었다.
  자신감을 잃은 그녀는 호텔에서 그렇게 도망쳐나왔다는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냥 그곳에 있다가 경찰을 만나는 편이 훨씬 안전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 도망치는 것은 그녀의 본능이 되어버렸다.
  랠프의 말이 정말 맞는 것 같다.  샌프란시스코는 고사하고 그의 말대로
뉴욕에 
갔던 일부터가 잘못된 일인지도 몰랐다.  그는 그녀가 이 두 도시들을 방문하기 
전부터도 그녀가 심각한 곤경에 처해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어쨌든 이제 사태는 훨씬 더 악화되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두 번의 살인을

범하게 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이것은 정말 보통 일이 아니었다. 
미네아폴리스로 
가려던 생각이 씻은 듯 사라졌다.  대신 아틀란타로 돌아가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
모두와 그녀의 의심 모두를 변호사에게 털어놓고 싶었다.
  전차는 다시 속도를 늦추었다.  마리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는 
차이나타운 어디엔가 와 있었다.  정지했던 전차가 마악 다시 움직이려는 순간 
몸을 일으킨 그녀는 토끼처럼 차에서 뛰어내렸다.  보도 위를 달리던 그녀의
눈에
차장이 욕을 하며 마구 손을 흔들어대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그녀 뒤를 
따라내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깊은 숨을 들이킨 마리사는 아파오는 목덜미를 문질렀다.  주위를 둘러본
그녀는
길 양편 모두가 몹시 붐비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였다.  길은 손수레 행상을

하는 노점상들과 배달중인 트럭, 그리고 보도 위에 상품들을 늘어놓은 각종 
화판들로 혼잡하기 짝이 없었다.
  간판들은 모두 한문으로 되어 있었다.  그 짧은 전차 여행이 신비스럽게도 
순식간에 그녀를 동양으로 데려다준 것만 같았다.  심지어는 냄새까지도 낯설게 
이국적이었다.  생선 비린내와 매콤한 향료가 범벅이 된 냄새는 마치 동양의 
어떤 거리를 걷고 있는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중국 음식점 앞을 지나치던 그녀는 잠시 망설인 끝에 안으로 들어갔다. 
중국식 
칼라에 무릎까지 터진 긴 붉은 비단 치마 차림의 여자가 나오며 아직 점심
식사는 
안된다고 말을 해왔다.
   반 시간즘 있으면 돼요. 
  그녀가 말했다.
   화장실과 전화를 좀 빌리면 안될까요? 
  마리사가 물었다.
  그녀는 잠시 마리사를 훑어보더니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그녀를 
음식점 뒤쪽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마리사가 들어간 곳은 한쪽에 세면대가, 또 한쪽에는 공중전화가 달린
조그마한 
방이었다.  방의 뒤편으로는 각각 신사 숙녀라는 글씨가 새겨진 문이 두 개 달려

있었다.  그 자그마한 방의 벽면은 수년동안 한변도 닦아본 적이 없는지
지저분한 
낙서로 뒤덮여 있었다.
  마리사는 먼저 전화를 집어들었다.  페이몬트 호텔로 전화를 걸어 교환수에게 
1127호실에 앰뷸런스가 급히 필요한 남자 한 명이 있다는 말을 전했다. 
교환수가 
잠깐만 기다려달라고 했지만 마리사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다음 그녀는
잠시
경찰에게 전화를 걸어 모든 일을 설명하는 게 어떨까 고민을 해보았다.  아니야,

그러면 일이 너무 복잡해질 거야.  게다가 그녀는 벌서 현장에서 도망쳐버린 
상태이다.  빨리 아틀란타로 돌아가 변호사를 만나는 편이 훨씬 나을 것 같다.
  손을 씻으며 그녀는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추어보았다.  그녀의 꼴은 
엉망이었다.  빗을 꺼내서 머리를 빗고 머리칼이 얼굴을 가리지 않도록 몇
가닥을 
꼬아 땋아내려갔다.  머리 핀은 금발의 사내가 머리를 잡아챘을 때 떨어져나간 
모양이었다.  머리를 매만진 그녀는 블레이저와 블라우스의 칼라를 곧게 
바로잡았다.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제이크는 백번이 넣도록 조지의 차로 다이얼을 돌리고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아무런 응답도 없었지만 가끔씩은 지금 전화를 받을 수가 없다는 녹음된 내용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그는 일이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알과 조지는
벌써
옛날에 차로 돌아와 있어야 했다.
  마리사의 뒤를 쫓던 제이크는 그녀가 갑자기 전차에서 뛰어내렸을 때 하마터면

차로 칠 뻔했지만 그녀가  북경요리 라고 쓴 음식점으로 들어가는 것을 놓치지는

않았다.
  그는 운전석에서 몸을 곧추세웠다.  방금 음식점을 나선 마리사가 택시를 잡기

위해 손을 흔들어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한 시간 뒤, 제이크는 마리사가 표를 건네며 아틀라낱 행 논스톱 비행편에 
오르는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며 안절부절 발을 구르고 있었다.  그는
자기도
비행기 표를 사 뒤쫓을가 생각해 보았지만 알의 승낙이 우선이라는 생각으로 
그만두었다.  그녀는 출발전 30분간을 여자 화장실에 틀어박혀 있어 제이크에게

번이 넘도록 전화를 걸어볼 충분한 여유를 제공했지만 끝내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아 명령을 받으려던 그의 바램은 그냥 무산되어버렸다.
  비행기가 활주로로 진입하기 시작하자 제이크는 서둘러 차로 돌아왔다. 
와이퍼 
밑에 주차 위반 딱지가 끼여 있었지만 그것 따위에는 전혀 관심도 없었다. 
경찰이
차를 견인해가지 않았다는 것만 해도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차에 오른 그는 다시 페어몬트 호텔로 돌아가 동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확인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쩌면 일 전체가 취소되어 자기가 미친 개처럼 
시내를 싸다니는 동안 동료들은 바에 앉아 낄낄거리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고속도로에 진입한 그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전화를 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번에는 놀랍게도 조지가 전화를 받아들었다.
   도대체 어디 갔었어요? 
  제이크가 다그쳐 물었다.
   난 이 빌어먹을 아침 내내 당신한테 불이 나게 전화를 하고 있었단 말이에요.

   문제가 생겼어.
  조지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적당한 변명이 아니기만 해봐요! 
  제이크가 으르렁거렸다.
   그 여잔 아틀란타 행 비행기를 타버렸단 말입니다.  난 정말 미쳐버릴
뻔했어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대책이 있어야죠. 
   알이 칼에 찔렸어.  그 여자 짓인 것 같아.  지금 샌프란시스코 종합
병원에서 
응급 수술을 받고 있는 중이야.  도저히 만나볼 수가 없었어. 
   맙소사! 
  제이크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경악의 탄성을 내질렀다.  그 한 주먹도
안되는
여자가 알을 칼로 찌르고 도망을 쳤다는 사실이 도무지 상상이 되지를 않았다.
   그렇게 심각한 상태는 아니라는 것 같아. 
  조지가 말을 이었다.
   문제는 알이 청소원 아줌마 하나를 처치해버린 것 같다는 거야.  그 여자 
마스터 키가 알의 주머니에서 나왔어.  그는 지금 살인 혐의로 기소돼 버렸어. 
   제기랄! 
   지금 어디 있어? 
  조지가 물었다.
   고속도로에 있어요.  마악 공항에서 나왔거든요. 
  제이크가 대답했다.
   다시 돌아가. 
  조지가 말했다.
   아틀란타 행 다음 비행기 표를 끊어둬.  우리가 알의 복수를 해줄 거야. 


    




























18


    5월 24일

   읽을 것 좀 드릴까요? 
  승무원이 미소를 지으며 상냥하게 물었다.
  마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호텔에서의 그 끔찍한 광경을 잠시라도 잊으려면 
무엇에건 집중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잡지를 드릴까요, 아니면 신문을 보시겠어요? 
  승무원이 물었다.
   신문이 낫겠어요. 
  마리사가 말했다.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와 뉴욕 타임즈가 있는데요. 
  마리사는 지금 이러쿵저러쿵 따질 기분이 아니었다.
   뉴욕 타임즈를 주세요. 
  그녀가 말했다.
  커다란 제트기가 수평을 되찾자 안전벨트 지시등이 꺼졌다.  마리사는 창문을 
통해 메마른 사막으로 이어지는 거친 산악들을 내려다 보았다.  결국 무사히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고 생각을 하니 마음이 가라앉았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혹시라도 금발 사내의 친구들에게 습격을 당하거나 경찰에게 
체포되어버릴가 어찌나 겁이 났던지 그저 여자 화장실에 숨어 덜덜 떨고만
있어야 
했었다.
  신문을 펼친 그녀는 목차난을 훑어보았다.  뉴욕과 필라델피아의 에볼라 감염 
사건에 대한 속보가 4페이지에 실려 있었다.  그녀는 그 면을 펼쳤다.
  기사에는 필라델피아의 사망자 수가 벌써 58례로 뛰어올랐으며 뉴욕의 경우, 
사망자 수는 49례에 머무르고 있지만 계속해 환자가 발생중이라는 소식이 실려 
있었다.  뉴욕의 지표 증례가 이비인후과 전문의였음을 감안할 때 그것은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기사를 읽은 그녀는 로젠버그 클리닉이 벌써 파산선고를

했다는 소식도 아울러 알게 되었다.
  에볼라 기사와 같은 페이지에는 세게 보건 기구의 역학 부서 총책임자인 닥터 
아흐메드 파크리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사진 옆에 게재된 짤막한 기사에는
그가 
씨디씨를 방문중이라고 적혀 있엇다.  세계 보건 기구는 에볼라가 대서양을 
넘어서까지 전파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잔뜩 긴장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닥터 파크리가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  마리사는 생각했다.  
랠프가 구해놓은 변호사가 그와의 면담을 주선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 9시 30분, 초인종이 울렸을 때 랠프는 밀린 저널(의학 학술지)들을 
훑어보고 있었다.  시계를 내려다본 그는 누가 이 시간에 찾아온 것일까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현관문 옆 유리창을 내다본 그는 자신이 마리사의 얼굴을 곧장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마리사! 
  그는 문을 잡아채며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의
뒤로 
노란 택시 한 대가 진입로를 빠져나가는 모습이 눈에 비쳤다.
  마리사는 그의 품안으로 뛰어들며 울음을 터뜨렸다.
   난 당신이 캘리포니아에 있는 줄만 알았소. 
  랠프가 말했다.
   왜 온다고 미리 전화를 하지 않았소?  공항으로 데리러 나갔을 텐데. 
  마리사는 그저 그의 품에 매달려 울음만 터뜨리고 있었다.  안전하다는 것이 
이렇게 좋은지는 정말 예전엔 몰랐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 
  랠프가 물었지만 그가 대답으로 듣게 된 것은 더욱 커진 울음 소리뿐이었다.
   우선 앉기나 해요. 
  그가 그녀를 부축해 소파로 데려가며 말했다.  잠시 동안 그는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실컷 울도록 내버려두었다.
   이젠 괜찮아요. 
  달리 어떻게 달래야 할지 감을 못 잡은 그가 거듭 말했다.  그는 혹시라도
벨이 
울려주지나 않을까 하는 마음에 물끄러미 전화통을 바라보았다.  그는 지금 
전화를 해야 했지만 이런 식으로 가면 도저히 그녀가 놓아줄 것 같지 않았다.
   마실 걸 한 잔 줄까요? 
  그가 물었다.
   지난번 그 멋진 코냑 어대요?  어쩌면 기분이 좀 나아질지도 몰라요. 
  마리사가 고개를 저었다.
   와인?  냉장고에 새로 딴 멋진 샤도네이가 한 병 있어요. 
  랠프는 더 이상 다른 구실을 찾을 수가 없었다.
  마리사는 그저 그를 곽 붙들고만 있다가 저차 울음 소리가 잦아들며 숨이 
고라지기 시작했다.
  5분이 그렇게 흘렀다.  랠프는 한숨을 내쉬었다.
   짐은 어디 있소? 
  마리사는 대답 대신 주머니에서 휴지 한 장을 꺼내 눈물을 훔쳤다.
   부엌에 찬 닭고기가 있는데 생각 있소? 
  마침내 마리사가 몸을 일으켰다.
   잠깐만요.  저랑 조금만 더 있어주세요.  전 너무 무서워요. 
   그럼 왜 공항에서 전화하지 않았소?  그리고 당신 차는?  공항에 다 놔두지 
않았소? 
   얘기하자면 정말 길어요. 
  마리사가 말했다.
   하지만 혹시라도 누가 볼까봐 정말 무서웠어요.  전 누구에게도 아틀란타에 
돌아왔다는 걸 알리고 싶지가 않았어요. 
  랠프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럼 여기서 자고 가겠다는 말이오? 
   당신만 괜찮으시다면요. 
  마리사가 말했다.
   하지만 절대 폐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어쨌건 당신이 둘도 없는 
친구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어요. 
   집에 데려다줄 테니 필요한 것들이나 좀 챙겨오겠소? 
  랠프가 물었다.
   고마워요.  하지만 전 집에 모습을 드러내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그건 차에

가지 않았던 것과 꼭 같은 이유에서예요.  만일 오늘 밤 어디를 가고 싶다면
그건 
태드에게 숨겨달라고 부탁했던 소포를 되찾으러 씨디씨에 가는 거예요.  하지만 
솔직히 마해 전 그건 그리 급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내일 아침에 해도 될
거예요.
절 감옥소에 가지 않도록 도움을 줄 형사 사건 전문 변호사 양반도
마찬가지예요. 
   맙소사! 
  랠프가 말했다.
   당신이 한 말이 정말 진심이 아니었으면 좋겠소.  자, 이제 도대체 이게
어찌된 
일인지 말해주지 않겠소? 
  마리사는 랠프의 손을 집어들었다.
   그렇게 할게요.  정말 약속해요.  하지만 먼저 마음을 더 진정시켜야겠어요. 

어쩌면 뭘 좀 먹는게 좋겠어요. 
   닭고기 요기를 해줄게요. 
  그가 말했다.
   괜찮아요.  저도 부엌이 어딘지 잘 알아요.  그냥 달걀이나 몇 개 스크램블을

해먹을까봐요. 
   먼저 들어가 있어요.  내가 금방 따라갈게요.  잠깐 전화를 할 데가
있거든요. 
  마리사는 지친 몸을 끌고 집안을 가로질렀다.  부엌에 들어가 널찍한 주방과 
기구들을 둘러본 마리사는 고작 계란이나 해먹기에는 기구들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것이 가장 어울릴 것 같은 음식이었다.  
그녀는 냉장고에서 달걀 몇 개와 토스트용 식빵을 거냈다.  이제서야 그녀는 
자신이 랠프에게 같이 먹겠는지를 물어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리를 
질러 물어볼까도 생각을 했지만 랠프가 있는 곳까지는 들릴 것 같지가 않았다.
  계란들을 내려놓은 그녀는 인터폰으로 걸어가 혹시 작동 방법을 알아낼 수 
있을까 궁금해하며 계기판의 버튼들을 눌러보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그녀는 계속 다른 버튼들을 조합하며 말을 해보았다.  그러던 중 우연히 어떤 
조합에서 갑자기 랠프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샌프란시스코에 있질 않아. 
  랠프가 말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여기 내 집에 와 있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잭슨, 난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네.  그녀는 지금 
히스테리 상태야.  그녀가 한 말이라고는 씨디씨에 소포를 찾을 게 하나 있다고 
한 게 전부야.  이거봐, 난 지금은 더 이상 이야기를 할 수가 없어.  빨리 그녀 
곁으로 가봐야 해. 
  침묵.
   내가 그녀를 여기 잡아둘 테니 걱정일랑 말라구.  하지만 가능한 한 빨리 
와주게. 
  침묵.
   아냐, 그녀가 여기 있는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확실해.  그럼 안녕. 
  마리사는 기절을 할까 무서워 사력을 다해 조리대를 움켜쥐었다.  그녀가 믿고

있던 유일한 사람, 랠프는 내내 그들의 일원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잭슨이라구?
 
그 사람은 일전 랠프의 집 파티에서 만난 적이 있던 바로 그 잭슨임이 분명했다.
 
피에이씨의 회장이라는 그가 지금 이리로 오고 있는 중이라니.
  오, 하나님!
  랠프가 부엌을 향해 오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마리사는 계속 요리를 
해야 한다고 자신을 다그쳤다.  하지만 프라이팬 모서리에 껍질을 깨려다가 그만

통재로 계란을 팬 안에 떨어뜨려 박살을 내버렸다.  그녀가 다른 계란을 한 개 
집어든 순간 랠프가 술잔들을 손에 들고 모습을 드러냈다.
   냄새가 좋은데. 
  그가 명랑하게 말했다.  그는 술잔들을 내려놓고 가볍게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마리사는 깜짝 놀라 펄쩍 뛰어올랐다.
   와, 정말 대단히 긴장하고 있는 모양이로군요.  어떻게 하면 긴장이 좀 
풀어지겠소? 
  마리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젠 전혀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계속 손을 놀려 계란을 조리하고, 토스트에 버터를 바르며 잼 병을 꺼내놓았다. 

랠프의 비싼 실크 셔츠, 묵직한 금 커프스, 술 달린 구찌 구두가 눈에 들어오자
갑자기 
그에 대한 모든 것, 심지어는 우아하게 치장된 그의 집 전체까지도 정말
허무맹랑한 
겉치레로 느껴  다.  이 모든 것들은 새로운 경쟁자들과 시대의 변화, 그리고 
의학계가 더 이상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두려워하는 한 
부유한 의사의 자기 과시적 사치였을 따름이었다.
  분명, 랠프는 피에이씨의 일원이었다.  동시에 마크햄의 후원자이며, 그녀가
항상 
어디 있는지를 알고 있었던 사람도 태드가 아닌 랠프였다.  스크램블을 나누던 
마리사는 자신이 여기서 용케 빠져나간다 해도 찾아갈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앞이 막막해졌다.
  랠프가 추천한 변호사를 믿고 의자할 수 없다는 것은 이제 자명한 사실이었다.
 
이제 랠프가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녀는 왜 그가 추천했던

법률회사의 이름이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쿠퍼, 호지스, 맥퀸린과 행크스는 피에이시의 법정 대리인으로 명단에
기재되어 
있던 이름이었다.
  마리사의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아무도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전율하던 마리사는 그녀가 확보한 유일한 물증-접종용
주사총-이
자신의 뼈야픈 경험으로 알게 된 대로 추적자들도 마음대로 출입을 할 수 있는 
초밀폐 실험실 어디엔가 놓여 있다는 사실을 패거리들이 몰려오기 전에 빨리 
랠프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포크를 집어들자 갑자기 샌프란시스코에서 화장실 문을 부수고 쳐들어오던
금발 
사내의 모습이 눈 앞에 어른거렸다.  그녀는 도 다시 혼절해버릴 것만 같은
느낌에 
포크를 놓쳐버렸다.
  랠프는 그녀의 팔을 부축해 부엌 식탁으로 데려다 앉혔다.  그는 음식을 덜어 
그녀 앞에 놓은 뒤 먹으라고 재촉을 했다.
   방금 전가지는 괜찮은 것 같더니. 
  그가 말했다.
   뱃속에 뭐가 좀 들어가면 나아질 거요. 
  그는 그녀가 떨어뜨린 포크를 주워 싱크대 안으로 던져넣은 뒤 은기서랍에서

다른 포크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마리사는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자제력을 잃으면 안돼!
  귀중한 시간은 일초일초 무심히 흘러만 가고 있었다.
   배가 고프지 않아요? 
  랠프가 물었다.
   별로인 것 같아요. 
  마리삭 솔직히 대답을 했다.  풍겨오는 계란 냄새 때문에 오히려 속이 
메슥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몸서리를 쳤다.
   어쩌면 안정제라도 좀 먹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위층에 몇 알 있는데 당신 
생각은 어떻소? 
   좋아요. 
  마리사가 말했다.
   금방 올게요. 
  달래듯 그녀의 어깨를 다독거린 랠프가 말했다.
  이것은 그녀가 학수고대하던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그가 방을 나서자마자 
발딱 몸을 일으킨 마리사는 재빨리 벽에 걸린 전화기를 나꿔챘다.  하지만 
전화기는 신호음이 없는 먹통이었다.  랠프가 전화선을 차단해버렸어!  
이제 경찰은 안되겠어.  수화기를 내려놓은 그녀는 랠프의 차 열쇠를 찾아
분주히
부엌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아무 것도 없어!
  몸을 돌린 그녀는 부엌에 연결된 자그마한 휴게실로 뛰어들었다.  휴게실의 
나지막한 칸막이 위에는 열쇠 몇 개가 담긴 조그만 대리석 단지가 놓여 있었지만

그곳에는 자동차 열쇠 비슷한 건 들어 있지 않았다.  다시 방향을 돌려 부엌을 
통과한 그녀는 뒷문에 달린 현관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코르크 
메모판과 골동품이라고 할 만한 구식 학교 책상, 그리고 낡은 서랍장이 하나 
놓여 있었다.  현관 바로 옆으로는 화장실로 통하는 문이 하나 달려 있었다.
  먼저 마리사는, 책상을 뒤지기 시작했다.  책상 안에는 이상한 모양의 집 
열쇠들이 몇 개 들어 있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서랍장쪽으로 몸을 돌린
그녀는 
서랍들을 열어보기 시작했지만 찾아낸 것이라고는 아무렇게나 쑤셔넣은 장갑, 
스카프, 그리고 비올 때 쓰는 용구들이 고작이었다.
   뭘 찾소? 
  그때 돌연히 등 뒤로 나타난 랠프가 불쑥 물었다.  그녀는 변명거리를 찾으며 
계면쩍게 몸을 일으켰다.  랠프는 대답을 기다리는 듯 잠시 침묵을 지키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스웨터나 한 벌 찾아볼까 했어요. 
  마리사가 말했다.
  랠프는 이상하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집안은 너무 더우면 더웠지 절대
추울
리가 없었다.  벌써 유월이 다 되었는데 춥다니.
   그럼 부엌에 히터를 틀어놓겠소. 
  다시 마리사를 데려다 의자에 앉히며 랠프가 말했다.  그가 오른손을 
마리사에게로 내밀었다.
   여기, 이걸 먹어요. 
  그는 마리사의 손바닥에 알약 하나를 떨어뜨렸다.  그것은 반은 빨간색, 반은 
상아색인 탭슐이었다.
   이건 달마인(수면제의 일종)이잖아요? 
  마리사가 물었다.
   안정제를 가져다주신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요. 
   그거면 긴장도 풀어지고 편안히 푹 자게 될 거요. 
  랠프의 설명이었다.
  고개를 저으며 다시 랠프에게로 알약을 건네준 마리사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전 안정제가 더 나을 것 같아요. 
   그럼 발륨을 줄까요? 
   그게 낫겠어요. 
  마리사가 말했다.
  그가 다시 계단을 올라가는 소리가 들리자 마리사는 허겁지겁 앞문 현관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정교한 대리석 탁자 위에도, 거기 달린 서랍 속에도 열쇠는 
없었다.  옷장을 연 마리사는 재발리 재킷 주머니들을 더듬어보았다.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가 마악 부엌으로 들어선 순간 랠프가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 있소. 
  그가 푸른색이 감도는 알약 하나를 마리사의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
   얼마짜리예요? 
  마리사가 물었다.
   10밀리그램. 
   좀 센 것 같지 않아요? 
   당신은 지금 상당히 불안정한 상태예요.  그러니 그 정도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해요. 
  물잔을 건네주며 랠프가 말했다.  물잔을 받아든 마리사는 발륨을 섞는 시늉을

했지만, 대신 그 알약을 주머니 안에 감추어버렸다.
   자, 다시 한 번 식사를 해보도록 합시다. 
  랠프가 말했다.
  마리사는 머릿속으로 잭슨이 오기 전 달아날 방법만을 생각하면서 겉으로 
태연히 음식을 뜨는 채 해보였다.  하지만 음식은 도저히 넘길 수가 없었다.  
몇 입을 먹은 마리사는 포크를 내려놓았다.
   아직도 식욕이 없어요? 
  랠프가 물었다.
  마리사는 말없이 고개를 저어보였다.
   그럼 그만 두고 응접실에나 갑시다. 
  그녀는 음식 냄새를 피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랠프는 자리에 안자마자 계속 한 잔 마시라고 성화를 부려대기 시작했다.
   발륨도 먹었는데, 안 먹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조금 마시는 건 괜찮아요. 
   혹시 절 취하게 만들어 이상한 짓을 하시려는 건 아니겠죠? 
  마리사가 물으며 억지 웃음을 지어보였다.
   제가 만들어드리는 편이 나을 것 같군요. 
   그래도 좋죠. 
  랠프가 탁자 위로 발을 올리며 말했다.
   난 스카치로 줘요. 
  곧장 홈 바로 건너간 마리사는 잔 가득 스카치를 따랐다.  다음, 그가 다른 데

정신을 팔고 있음을 확인한 후 발륨을 꺼내 반으로 쪼갠 뒤 조각들을 술잔으로 
떨어뜨렸다.  불행하게도, 그 조각들은 쉽사리 녹지를 않았다.  손가락으로 약 
조각들을 건져낸 마리사는 위스키 병으로 약을 부수어 잔 안으로 가루를
쓸어넣었다.
   도와줄까요? 
  랠프가 소리쳐 물었다.
   아녜요. 
  자기 잔에 브랜디를 조금 따르며 마리사가 말했다.
   다 됐어요. 
  술잔을 받아든 랠프는 다시 소파에 걸터앉았다.  마리사는 그가 대관절 어디에

차 열쇠를 두었을까 머리를 굴리며 랠프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는 만일
자신이 
불쑥 차 열쇠를 달라고 한다면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도 위험한 행동이었다.  만일 그녀가 랠프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완력으로 붙들어두려고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때, 어쩌면 열쇠가 그의 바지 주머니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 듯 
그녀의 머리를 스쳤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기는 했지만, 그녀는 용기를
내 
그에게 자신의 몸을 비벼대시 시작했다.
  유혹적으로 그녀는 랠프 허벅지에 손을 올려 놓았다.  생각했던대로 그의
가벼운 
개버딘(헐거운 겉옷)밑으로 열쇠가 만져졌다.  이제 도대체 어떤 방법을 써야 
열쇠를 손에 넣을 수 있을지 그녀는 앞이 캄캄해졌다.
  굳은 결심으로 이를 악물고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랠프에게로 가져가며 키스를

해달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자 그녀는 슬그머니 
그이 주머니로 손을 밀어넣었다.  숨을 죽인 채 그녀는 둥근 열쇠 고리 가장 
자리를 더듬어 살살 위로 건져올리기 시작했다.
  열쇠들이 달가닥 소리를 내는 순간 마리사는 랠프에게 정열적인 키스 세례를 
퍼붓기 시작햇다.  그의 반응을 살핀 마리사는 위험스럽더라도 모든 것을 걸고 
모험하는 수밖에 없다고 굳게 마음을 먹었다.  하나님 제발, 하나님 제발.  
기도를 올린 그녀는 열쇠를 꺼내 살짝 자기 주머니에 감추어넣었다.
  랠프는 잭슨이 오기로 했다는 사실을 새까맣게 잊었는지, 아니면 마리사를 
조용히 붙들어두려면 섹스가 최선의 방편이라고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이제는 그만할 때이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이런 말을 하게 돼서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약기운이 돌기 시작하는 것 
같아요.  이제 가서 자야겠어요. 
   그녕 여기 있어요.  내가 안고 있을게요. 
   저도 그러고 싶어요.  하지만 그러면 당신이 위층가지 절 안아다 눕혀야
할걸요. 
  마리사가 그의 품을 빠져나오자 그는 안달이 난 표정으로 그녀를 부축해
손님용 
침실로 데려다주었다.
   같이 있어줄까요? 
  그가 물었다.
   랠프.  하지만 전 지금 당장이라도 뻗어버릴 것만 같아요.  그냥 자게
해주세요. 
  그녀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약기운이 떨어지면 언제건 불러줘요.  난 아래층에 있을 테니까. 
  그가 침실 문을 닫는 순간 몸을 일으킨 그녀는 살금살금 문간으로 다가가 그가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 다음 그녀는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창 밖의 발코니는 그녀가 기억하던 대로였다.  그녀는 살그머니 따뜻한 봄의 
밤공기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머리 위에는 누가 쏟아 붓기라도 한 듯 별들이 
총총 반짝이고 있었다.  나무들은 그저 검은 그림자처럼 희미하게 윤곽만을 
알아볼 수 있었다.  바람 한 점 없었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그때, 어디선가 자동차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재빨리 자신의 위치를 점검해보았다.  진입로까지는 4.5미터, 도저히 
뛰어내릴 수 없는 높이였다.  발코니는 나지막한 난간을 사이에 두고 현관의 
경사진 지붕으로 이어져 있었다.  현관 지붕 왼족으로는 망루에 연결되어
있었지만 
오른쪽으로는 모퉁이 너머까지 길게 뻗어 있었다.
  난간을 넘은 마리사는 조심스럽게 건물 모퉁이를 향해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현관 지붕이 끝나는 곳가지는 6미터쯤 떨어져 있었다.  모퉁이에 도착한
마리사는 
외벽에 걸린 화재용 비상 계단으로 손을 뻗어보았지만 손이 닿지를 않았다. 
몸을 
돌린 그녀가 다시 발코니를 향해 반쯤 돌아왔을까, 아까 들었던 자동차가 
진입로로 들어서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리사는 동작을 멈추고 경사진 지붕 위에 납작 배를 깔았다.  하지만
마리사는 
혹시라도 진입로를 올라오는 사람들이 눈을 들어 위를 쳐다보게 되면 대번
그녀를 
발견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차가 현관 계단 앞으로 다가오자
늘어선 
나무들 사이로 어른거리던 헤드라이트의 불빛이 그녀를 비추며 집의 전면을
스쳤다.
  문소리와 서너 명의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에 
흥분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  아무도 지붕 위에 엎드린 그녀의 모습을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초인종이 울리자 랠프가 그들을 맞았다.  대화가 조금 더
이어지더니 
목소리들은 이내 집안으로 사라져버렸다.
  허둥지둥 지붕 언저리를 따라 발을 옮긴 마리사는 난간을 넘어 발코니로
돌아왔다.
  손님 방으로 뛰어는 그녀는 살그머니 복도로 이어진 문을 열었다.  복도로 
나서자 랠프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거리 때문에 내용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숨소리를 죽이며 살금살금 뒤쪽의 계단을 향해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홀의 불빛은 복도 두 번째 모퉁이 이후로는 비쳐지지 않아서 마리사는 벽을 
더듬으며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그녀는 몇 개의 불거진 어두움 침실들을
지나서야 
마지막 모퉁이를 돌아 아래쪽에 비치는 부엌의 불빛을 볼 수가 있었다.
  계단 머리에 선 그녀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머뭇거렸다.  복잡하게 지어진 
랠프의 구식 가옥은 소리의 반향으로 마리사의 머리를 혼란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제는 말소리에 아울러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도저히 그 
소리들이 나는 방향을 가늠 할 수가 없었다.  바로 그 순간 아래쪽 계단의 엄지 
기둥에 올려놓은 손 한 개가 언뜻 눈에 들어왔다.
  방향을 튼 마리사는 3층을 향해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반쯤 올라갔을까,
발 
밑의 계단 하나가 삐걱 소리를 냈다.  발을 멈춘 그녀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아래쪽 
사람의 성큼성큼 다가오는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층에 도착한 사나이가 집

앞쪽을 향해 복도 모퉁이를 돌아내려가자 마리사는 참았던 숨을 길게 내뿜었다.
  마리사는 소리가 날 때마다 몸을 움찔거리며 계속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 끝,

하인들 숙소로 통하는 문을 다행히도 잠겨 있지는 않았다.
  가능한 한 소리를 죽이며, 그녀는 거실을 건너 화재용 비상계단이 걸려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침실로 들어갔다.
  힘들게 창문을 연 그녀는 얄팍한 금속제 계단 위로 기어올랐다.  높은 곳은 
질색이었지만 마리사는 모든 용기를 다 짜내어 몸을 똑바로 세웠다.  잠시 
머뭇거린 마리사는 오른발부터 한발 한발 내딛으며 조심스레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층 옆을 지나려는 순간, 갑자기 집 안에서 격앙된 목소리와 황급히

문짝들을 여닫는 소리가 들려오며 깜깜했던 창문들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이 벌서 그녀가 도망쳤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것이다.
  서둘러 이층 옆 플랫폼을 돈 마리사는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커다란 뒤엉킨 
금속 덩어리에 가로막혀 발을 멈추엇다.  손을 뻗어 장애문을 더듬은 그녀는 
계단의 마지막 한 층이 도둑을 막기 위해 위로 끌어올려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계단을 내리는 장치를 찾아 필사적으로 주위를 더듬었지만
그런 
것은 있지도 않은 듯, 도저히 찾아낼 수가 없었다.  바로 그 순간, 등 뒤쪽에
놓인 
커다란 평형추가 언뜻 보였다.
  그녀는 첫 번째 계단에 발을 올려놓았다.  삐꺽거리는 금속성 마찰음을 내며 
계단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깨달은
마리사는 
모진 마음으로 체중을 실어 힘껏 계단을 내리밀었다.  귀를 짖는 굉음과 함께 
계단이 지면을 치자 마리사는 재빨리 계단을 뛰어내렸다.
  잔디 위에 발이 닿자마자 그녀는 양팔을 흔들어대며 미친 사람처럼 차고를
향해 
달음질치기 시작했다.  집 안에 그녀를 찾으려고 눈에 불을 켠 사람들이 비상 
계단이 내려앉는 소리를 듣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그늘은 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를 찾아 뛰어나올 것이다.
  그녀는 제발 잠기지   았기만을 기도하며 차고 옆에 달린 문으로 달려갔다.  
다행스럽게도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그녀가 차고 안으로 마악 발을
내딛으려는 
순간 본채의 뒷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재빨리 어둠 속으로 몸을 
감추며 문을 끌어당겼다.  방향을 틀고 그녀가 앞으로 걸어나가자 이내 랠프의 
커다란 300에스디엘 세단이 나타났다.  차를 더듬어 앞문을 열고 운전대 앞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몇 번이나 헛손짓을 한 뒤에야 시동 장치에 열쇠를 꽂은
마리사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열쇠를 비틀었다.
  하지만 고작 지시등 몇 개가 깜박이기 시작했을 뿐, 시동은 걸리지 않았다. 
바로 
그 순간 엔진이 디젤이라 오렌지색 지시등이 꺼질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던 랠프의

말이 퍼득 그녀의 머리를 스쳤다.  시동 장치를 뒤로 돌리던 마리사는 열쇠를 
반정도만 앞으로 돌렸다.  오렌지색 등이 반짝이기 시작하자 마리사는 초조하게 
등이 꺼지기만을 기다렸다.  그때 누군가가 차고 문을 들어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광란 상태가 된 마리사는 허겁지겁 버튼을 눌러 네 몬을 걸어 잠갔다.
   빨리, 제발, 빨리! 
  악다문 이빨 사이로 다급한 애원이 흘러나왔다.  순간 점멸하던 오렌지색 등이

시야에서 사라  다.  그녀가 열쇠를 돌리자 푸득푸득 기름 올라오는 소리와 함께

침묵을 지키던 엔진이 개어나 돌아가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누군가가 창문을 
두드리는 요란한 소리가 찬안을 울렸다.  후진 기어를 넣은 그녀는 힘차게 
엑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잠깐 멈칫하던 그 커다란 자동차는 반동으로 그녀를 운전대에 밀어붙이며 
쏜살같이 뒤로 튀어나갔다.  대경실색한 두 추적자를 옆으로 튕겨내며 차가 
질풍같이 차고를 빠져나오자 마리사는 운전대를 부서져라 움켜쥐었다.
  차는 난폭하게  진입로를 미끄러져 내려갔다.  차가 요란한 타이어 소리와
함께 
본채 앞을 도는 순간 마리사는 브레이크를 내리밟았다.  그러나 속수무책으로
차는 
꽁무니로 잭슨의 차를 세차가 들이 받았다.  이젠 완전히 빠져나왔다고 생각한 
마리사가 숨을 내쉬며 전진 기어로 바꾸는 순간 추적자들 중 한 명이 그 틈을 
이용해 후드 위로 몸을 던졌다.
  마리사는 힘껏 엑셀러레이터를 밟았다.  하지만 차는 앞으로 튀어나가는 대신 
요란하게 헛 바퀴만 돌았다.  차가 잭슨의 차에 물려버린 것이다.  기어를
번갈아 
후진과 전진으로 바꾸며 그녀는 눈에 빠졌을 때처럼 앞 뒤로 흔들어댔다.
  금속의 요란한 마찰음이 울려퍼지며 올라탔던 추전자를 바닥에 동댕이친 
자동차는 쏜살같이 앞으로 튀어나가며 진입로를 헤집고 달리기 시작했다.

   단념하세요. 
  잭슨의 차 아래쪽에서 기어나온 제이크가 손에 묻은 기름을 닦아내며 말했다.
   그 여자가 라디에이터를 터뜨려버렸어요. 
  그가 잭슨에게 말했다.
   냉각수가 하나도 없어서 시동이 걸린다 해도 운전을 할 수가 없어요. 
   제기랄.  그 여잔 정말 억세게도 운이 좋군. 
  잭슨이 헤버링에게로 분노에 찬 시선을 던졌다.
   만일 내가 저 얼간이 같은 당신 부하들이 공항에서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곧장 왔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요. 
   그래요? 
  헤버링이 입을 열었다.
   그럼, 혼자 왔었으면 뭐가 됐을 것 같소?  어떻게 했을 참이오?  그녀한테 왜

이러느냐고 따질 셈이었소?  어차피 제이크와 조지가 필요하지 않았소? 
   내 450에스엘을 내주겠소. 
  랠프의 제안이었다.
   하지만 거긴 좌석이 둘밖에 없소. 
   그 여자랑 차이가 너무 커요. 
  조지가 말했다.
   절대 붙잡을 수가 없을 거예요. 
   그녀가 어떻게 도망을 쳤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군 그래. 
  랠프가 미안한 듯 입을 열었다.
   잠들도록 그냥 내버려 두었었거든.  게다가 발륨을 10밀리나 먹였는데
말이야. 
  말을 하던 랠프는 머리가 약간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어디로 갔을지 혹시 짚히는 데가 없소? 
  잭슨이 물었다.
   경찰한테 갈 것 같지는 않아. 
  랠프가 말했다.
   지금 그녀는 모든 사람을 다 두려워하고 있어.  어쩌면 씨디씨로 갈지도 
모르지.  거기 무슨 소포가 있다던가 그런 얘기를 했거든. 
  잭슨은 헤버링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사총!
   조지랑 제이크를 보내는 게 좋을 것 같군요. 
  헤버링이 말했다.
   그 여잔 절대 집으로 돌아갈 리가 없으니 이번에 이 친구들이 바라는 대로
알이 
당한 일의 복수를 하게 해주는 것도 괜찮을 겁니다. 

  랠프의 집을 벗어난지 15분이 지나자 마리사는 자기가 지금 어디 있는지를
걱정할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이 가라앉았다.  혹시 추적자들이 따라붙을까 아무데서나 
이러저리 방향을 돌렸던 그녀는 이제 완전히 방향 감각을 상실하고 있었다. 
어쩌면 
시내르 ㄹ한 바퀴 뺑 돌아 제자리에 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전방에 신호등과 주유소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리사는 주유소로 
들어갔다.  아틀란타 브레이스 팀 야구 모자를 눌러쓴 젊은이 한 명이 나와
그녀를 
맞았다.
   혹시 여기가 어딘지 가르쳐주실 수 있겠어요? 
  마리사가 물었다.
   여기야 셸에서 운영하는 주유소지요. 
  젊은이가 랠프의 차에 생긴 상처들을 살피며 말했다.
   조리등 양쪽이 다 깨져 있다는 걸 알고 계세요? 
   그럴 수도 있을 거예요. 
  마리사가 말했다.
   에모리 대학은 어디쯤 있어요?  여기서 어떻게 가는지 가르쳐주실래요? 
   아가씨, 무슨 자동차 때려부수기 시합에라도 나가셨던 모양이지요? 
  그는 아갑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엉뚱한 대답을 했다.
  마리사가 질문을 되풀이하자 그는 마지못해 애매하게 길을 가르쳐주었다.
  10분 뒤, 마리사가 탄 차는 씨디씨 앞을 지나게 되었다.  씨디씨 건물은
인적이 
끊어져 조용했지만 그녀는 아직도 무엇을 해야 할지, 또 누구를 믿어야 할지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녀는 사실 믿음직스러운 변호사에게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그것도 어떻게 해야 구할 수 있을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해보았지만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유일한 사람은 세계 보건 
기구에서 왔다는 닥터 파크리뿐이었다.  그는 분명 이 음모와는 전혀 관계가
없을 
뿐 아니라, 기사에서 읽은 바에 의하면 그리 멀지도 않은 피치트리 플라자
호텔에 
묵고 있었다.  문제는, 그가 그녀의 말을 믿어줄지 아니면 곧장 두브체크나
씨디씨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 그녀를 추적자들 손아귀 안으로 몰아 넣을지 확실치가 
않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두려움은 그녀가 유일한 선택으로 생각하는 행동을 결행하도록
부추기고 
있었다. 그녀는 꼭 그 주사총을 손에 넣어야만 한다.  그것은 그녀의 주장을 
뒷받침할 유일한 물증이었다.  그것이 없다면 아무도 그녀의 말을 귀담아주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아직 태드의 출입 카드를 가지고 있었고, 만일 그가 피에이씨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 그것은 아직 사용이 가능할 것이다.  물론 경비원이 그녀를 건물

안으로 들어가도록만 해준다면 말이다.
  마리사는 대담하게 씨디씨 정문 바로 지난 지점에 차를 세웠다.  혹시라도
누가 
그녀를 제지하고 나설 경우 재빨리 차에 올라 줄행랑을 칠 작정이었다.
  정문 유리창을 통해 들여다보니 경비원 한 명이 책상에 앉아 소설책에 머리를 
묻고 있었다.  다가오는 발소리를 들은 그는 고개를 쳐들어 무표정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래 입술을 말아 질끈 문 마리사는 두려움을 감추려 안간힘을 쓰며 신중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펜을 들어 출입자 명부에 이름을 끄적거렸다.  다음 
마리사는 경비원이 무슨 말을 건네겠거니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지만 그는 그저 
무심히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무슨 책을 일고 계세요? 
  용기를 낸 마리사가 입을 열었다.
   까뮤예요. 
  묘한군.  하지만 그녀는 그것이 혹시  페스트 가 아닌지 물어볼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등에 경비원의 시선을 느끼며 천천히 중앙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자기 방이 있는 층의 버튼을 누른 마리사는 몸을 돌려 경비원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때가지도 계속 그녀에게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는 순간 그는 재빨리 전화기를 들고 다이얼을 돌리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전화를 받자마자 그가 입을 열었다.
   닥터 불루멘탈이 방금 출입자 명단에 이름을 적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고 있습니다. 
   훌륭하군 제롬. 
  두브체크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몹시 지쳤거나 병에라도 걸린 듯 탁하게
쉬어 
있었다.
   우리가 그리고 곧 가겠네.  참,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해주게. 
   여부가 있겠습니까, 닥터 두브체크. 
  엘리베이터를 내린 마리사는 몇 분 동안이나 그 앞을 지키며 층수 표시 등을 
살펴보았다.  두 대의 엘리베이터는 모두 꼼짝도 않고 있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건물은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미행을 하는 사람이 없다는 확신이 서자 그녀는 
계단으로 가서 한 층을 달려내려간 다음 구름다리에 올랐다.  바이러스 동
건물로 
들어간 그녀느 서둘러 긴 지저분한 복도를 지나 모퉁이를 돈 다음 육중한 철제 
방호문 앞에 걸음을 멈추었다.  숨을 멈춘 그녀는 태드의 출입카드를 넣은 뒤 
그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녀는 혹시 경보기가 울리지 않을가 걱정을 했지만
잠시 
후 무거운 비장이 풀어지는 찰칵 소리가 났다.  육중한 문이 스르르 열리자
그녀는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차단기들을 올리고 기밀문의 원형 손잡이를 비튼 다음 그녀는 첫 번째 방으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곧장 다음 방으로 걸음을 옮겨 비닐 보호의를 걸치면서 
그녀는 태드가 어디쯤 그 주사총을 숨겼을지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보았다.

  두브체크는 급커브 길에서 브레이크를 두 번 밟았을 뿐, 신호등까지 무시하며 
미친 듯 차를 몰았다.  그는 두 명을 데리고 있었다.  앞자리에 앉은 존은
문짝을 
꽉 붙들고 있었고, 뒷자리에 앉은 마크는 요동치는 차 속에서 이리저리로 
흔들리며 고생하고 있었다.  세명의 얼굴에는 모두 어두운 표정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들은 혹시 너무 늦게 도착하게 될까봐 모두 두려워하고 있었다.

   저기 있어. 
  조지가 질병 관리 센터라고 쓴 표지판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저건 랠프의 차야! 
  그가 반원형의 진입로에 세워진 메르세데스를 손가락질하며 덧붙였다.
   마침내 행운의 여신이 우리 편을 들어주기로 했군 그래. 
  마음을 가다듬은 그는 길 건너편 셰라톤 모텔에 차를 세웠다.
  조지는 자신의 씨앤더블.356 매그넘을 꺼내 약실이 모두 채워져 있는지를
살폈다.  
그는 허리께에 총을 든 채 문을 열고 차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로등 불빛에 
하얀 총신이 빛을 발했다.
   정말 그 대포를 쓸거예요? 
  제이크가 물었다.
   소리가 엄청날 텐데요. 
   그 여자가 널 얹은 채 차를 몰 때 이걸 써버릴 걸 그랬어. 
  조지가 쏘아붙였다.
   빨리 오기나 해. 
  제이크는 어깨를 으쓱하며 차를 내렸다.  허리춤을 더듬어보니 자신의 베레타 
자동 권총의 손잡이가 만져졌다.  조지의 무지막지한 총보다는 훨씬 우아하고 
깨끗한 무기였다.

  공기 호스를 집어든 마리사는 서둘러 초밀폐 실험실로 통하는 마지막 기밀문을

통과했다. 중앙 다기관에 호스를 연결하고 숨을 돌리며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 
운명의 밤,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던 잔해는 말끔히 치워져 있었지만 그 사건의
기억은 
끔찍스러울 정도로 생생하게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녀는 빨리 그 소포를 찾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리고만 싶었지만 그것은 
말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느 실험실과 마찬가지로 그곳에는 그 정도
크기의 
물건을 숨길 마한 데가 얼마든지 있었다.
  오른쪽 끝에서 시작한 마리사는 캐비닛 문들을 열어보고 서랍속을 살피며 점차

뒤쪽으로 진행하기 시작했다.  방을 반쯤 돈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분명 더 
효율적인 방법이 있을 텐데...
  중앙의 섬처럼 배열된 실험대를 바라보던 마리사는 태드가 항상 자기만의 
것으로 여기던 밀폐 후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후드 아래 붙은 조그마한 장 
속에는 시약 병들과 종이 타월, 비닐 쓰레기 봉지, 새로 들어온 유리 도구들이 
담긴 상자며 다른 실험용품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보냈던
것처럼 
생긴 꾸러미는 나타나지 않았다.  마약 걸음을 옮기려던 그녀는 밀폐 후드
안쪽을 
들여다 보았다.  태드의 기구들 뒤로 비닐 쓰레기 봉지의 짙은 녹색빛이 간신히 
보일락말락 모습을 숨기고 있었다.
  후드 위에 달린 환풍기를 켠 마리사는 유리로 만들어진 앞면을 들어올렸다.  
다음 태드가 차려놓은 기구들을 건드리지 않도록 주의 하면서 봉지를
끄집어냈다.
  봉지 안에는 연방 우체국의 소인이 찍힌 소포가 들어 있었다.  확실히
해두자는 
생각에 그녀는 라벨을 살폈다.  그 위에는 그녀의 글씨로 쓴 태드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
  마리사는 소포를 다른 쓰레기 봉투에 넣은 다음 조심스럽게 입구를 봉했다.  
다음 그녀는 원래 소포를 싸고 있던 봉지는 다시 후드 안으로 집어넣고 열었던 
앞면 유리를 제자리로 내려놓았다.  중앙의 다기관으로 다가간 그녀는 서둘러 
공기 호스를 분리해낸 다음 출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제는
닥터 
파크리나 다른 믿을 만한 당국자를 찾악면 될 것이었다.
  페놀 소독액 샤워 밑에서 발을 멈춘 그녀는 침착해야 한다고 자신을 타일렀다.
 
소독액 샤워에는 자동 시간 장치가 붙어 있어 일정 소독 과정이 끝난 뒤에야 
문을 열 수가 있도록 되어 있었다.  다음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지퍼가 
걸릴 때마다 필사적으로 몸부림을 치며 비닐 보호의를 벗어내기 시작했다.  
마침내 보호의를 벗어던진 그녀의 옷은 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

  두브체크는 요란한 브레이크음을 내며 씨디씨 현관 바로 앞에 급격히 차를 
세웠다.
  황급히 차를 내린 세 명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허겁지겁 건물을 향해 달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어느 틈엔가 제롬은 벌써 유리문 하나를 열어 붙들고 있었다.
  두브체크는 만일 마리사가 나갔다면 묻지 않아도 제롬이 먼저 이야기를 할
것이 
분명했기에 구태여 발을 멈추고 질문을 하는 대신 서둘러 뒤따르는 두 명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뛰어올라 3층 버튼을 눌렀다.

  마리사가 마악 구름다리를 건너려 발을 내딛는 순간 본관으로 통하는 문이 
화들짝 열리며 세 명으 사나이가 튀어나왔다.  그녀는 빙그르르 몸을 돌려 다시 
바이러스동을 향해 내달았다.
   서요, 마리사!   누군가 소리쳐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것은 두브체크의 
목소리 같았다.  오, 하나님, 저 사람마저도 나를 쫓고 있었단 말인가요?
  그녀는 문에 빗장을 지른 뒤 숨을 곳을 찾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른쪽에는 
엘리베이터가 그리고 왼쪽으로는 계단으로 통하는 비상구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머뭇거릴 시간은 없었다.  두브체크가 힘으로 문을 부수고 들어왔을 때 그가 본 
것은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의 층수 표시등 불빛뿐이었다.  마리사는 
벌써 로비까지 내려가 있었다.  세 명은 허겁지겁 층계를 달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두브체크가 바짝 뒤를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마리사는 경비원의 의심을 사지 
않을 만큼 느긋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종종걸음으로 경비원 앞을 재빨리 
지나치는 순간 그가 읽던 책에서 머리를 치켜들었다.  닥터 두브체크가 
억지로라도 그녀를 잡아두기를 바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 듯 그의 머리를 
스쳤을 때, 그녀는 벌써 문밖으로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밖으로 뛰쳐나온 마리사는 왼손으로 소포를 옮기며 랠프의 차열쇠를 더듬기 
시작했다.  정적을 가르는 고함 소리에 이어 씨디씨 현관문이 다급히 열리는 
요란한 소리가 귓전을 울려왔다.  간신히 차문을 연 마리사는 운전대 앞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녀는 도망을 쳐야겠다는 일념에만 몰두해 있었기에 근 
일분이 지나서야 옆자리에 사람이 앉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뒷자리에도 
누군가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하지만 가장 끔찍했던 것은 자기를 
향해 겨누어진 커다란 권총의 모습이었다.
  마리사는 몸을 빼려고 안간힘을 써보았지만 마치 끈적끈적한 늪속에 빠진 
것처럼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다가오는 총구가 빤히 보였다.  침침한 불빛에 
얼굴이 하나 비치며  잘가슈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무서운 반동과 함께 
총성이 울려퍼지며 시간이 정지해버렸다.

  정신을 차렸을 때, 마리사는 무엇인가 부드러운 것 위에 누워 있어  . 
누군가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천천히 눈을 뜬 그녀는 자신이 씨디씨 로비에 
있는 소파 위로 옮겨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번쩍이는 빨강과 청색의 경광등 불빛이 현란한 펑크족 디스코테크처럼 방안을 
어지럽게 비추고 있었다.  그녀는 총을 든 사내들이 어찌 되었을까 의아하게 
생각하며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마리사, 괜찮아요? 
  움찔거리며 눈을 뜬 그녀는 두브체크의 짙은 눈동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마리사. 
  그가 다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괜찮아요?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몰라요.  당신 덕택에 마침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게 되는 순간부터 그들이 당신을 헤치려 할 것이라는 
생각에 정말 걱정을 많이 했어요.  하지만 당신이 한 군데 붙어 있질 않아서 
도저히 찾아낼 수가 없더군요. 
  마리사는 아직도 심한 충격에 말문이 막혀 있었다.
   제발 무슨 말 좀 해봐요. 
  두브체크가 애원했다.
   전 당신이 한 패인 줄만 알았어요.  음모에 가담했다고 생각을 했어요. 
  간신히 입을 열며 마리사가 중얼거렸다.
   나도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라고 짐작했어요. 
  두브체크가 불편한 신음 소리를 내며 말했다.
   하기야, 그건 당신을 탓할 수가 없어요.  난 씨디씨를 보호하려는 일념에만 
사로잡혀 당신의 말에 미처 귀를 기울이지 못했던 거예요.  하지만 날 믿어줘요.
 
난 음모와는 전혀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마리사는 손을 뻗어 두브체크의 손을 잡았다.
   저도 당신한테 입장을 설명할 기회를 드리지 않았어요.  저도 규칙들을 깨는 
데만 몰두하고 있었거든요. 
  그때 앰뷸런스를 몰고온 구조대원 한 명이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여자분을 병우너으로 모실까요? 
   당신 의견은 어떻소, 마리사? 
  두브체크가 말했다.
   괜찮은 것 같기는 하지만 한 번 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그녀를 들것으로 옮기기 위해 다른 구조대원 한 명이 더 다가왔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처음 총 소리를 들었을 때 전 제가 총에 맞은 줄만 알았어요. 
   아니, 그건 내가 데려온 에프비아이 요원이 당신을 죽이려던 녀석을
쏜소리였소. 
  마리사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두브체크는 앰뷸런스로 옮겨지는 마리사의 들
것 
옆에 따라 걸음을 옮겼다.  마리사는 손을 뻗어 그의 손을 꼭 붙들었다.



    에필로그

  초인종이 울렸을 때 마리사는 닥터 카보나라의 강요 가까운 권유로 다녀오게 
되었던 2주간 의휴가짐을 푸는 중이었다.  그녀는 태피 투(두번째 태피)라고
이름 
붙인 새 강아지를 포함하여 그녀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온 가족이 나서 온갖 
것들을 다해준 버지니아에서 돌아온 참이었다.
  아래층으로 걸음을 옮기던 마리사는 도대체 누구일지 짐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무에게도 정확히 언제 돌아올지 가르쳐준 적이 없었다.  문을 열자 
놀랍게도 두브체크와 낯선 사람 한 명이 문간에 서 있었다.
   이렇게 찾아와서 실례가 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닥터 
카보나라가 혹시 당신이 집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해서... 당신을 꼭 만나고
싶다고 
하신 세계 보건 기구의 닥터 파크리를 모시고 왔어요.  오늘이 미국에 머무시는 
마지막 날이거든요.  오늘 밤에 제네바로 돌아가실 예정입니다. 
  낯선 사람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했다.  그는 곧장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짙고 물기가 많은 눈은 그녀에게 두브체크의 
눈매를 연상시켜주었다.
   만나뵙게 되어 정말 큰 영광입니다. 
  닥터 파크리는 깔끔한 영국식 억양으로 마리사에게 인사를 건넸다.
   당신의 그 훌륭한 업적에 개인적으로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게다가 우리 도움도 전혀없이 홀홀단신 해낸 일이니 더 더욱 놀랍기만
합니다. 
  두  크가 솔직히 털어놓았다.
   과찬이세요. 
  잠시 할 말을 잊은 마리사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두브체크는 헛기침으로 목청을 가다듬었다.  마리사는 그의 자신없어 하는 
모습이 꽤나 매력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가 그녀를 화나게 만들 때를
제외하면 
그가 실제로 매우 핸섬하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당신이 그 뒤로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몹시 궁금해할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가 말했다.
   언론 기관들에게는 정말 최소한의 정보만을 제공했지만 당신은 숨김없이 모든

걸 알 권리가 있다는데 경찰들까지 동의를 하더군요. 
   정말 궁금해요. 
  마리사가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문간에만 서 계시지 마록 어서 들어오세요.  마실 것 좀 
드릴까요? 
  자리를 잡고 앉은 다음 닥터 파크리가 입을 열었다.
   선생 덕택에 에볼라 음모에 관계된 사람들 거의 모두를 체포할 수
있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당신에게 찔렸던 사람이 회복하자마자 닥터 헤버링의 이름을 
불어버렸어요. 
   경찰 얘기로는 그 친구가 당신이 다시 자기를 찾아내지 못하도록 차라리 
감옥에 보내달라고 애걸을 했다더군요. 
  두브체크가 예의 그 냉소적인 웃음을 머금으며 말을 받았다.
  마리사는 페어몬트 호텔 화장실에서 그 사내를 찔러야만 했던 끔찍하기 짝이 
없는 기억을 떠올리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다음 순간, 정신을 차려 몸을
추스린 
마리사는 헤버링이 어떻게 되었는가를 물었다.
   그 친구는 고의적인 대량 학살로 기소되어 대배심에 서게 될 거예요. 
  두브체크가 말했다.
   담당했던 판사는 그가 나찌 전범들만큼이나 사회에 위험한 사람이라며 아무리

많은 돈을 낸다 해도 절대 보석을 해줄 수 없다고 보석 신청을 기각해버렸어요. 
   제가 주사총으로 쏘았던 사람은요? 
  사실 이것은 마리사가 가장 꺼림칙하게 생각하던 질문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어떤 사람을 죽였다거나 또 다른 에볼라 사태를 야기시켰다는 얘기가 나올까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살아서 재판을 받게 될 거예요.  그 사람은 재빨리 혈청을 맞았는데 혈청이 
에볼라는 예방을 했지만 그만 심한 혈청병을 유발해버렸어요.  지금 입원 
치료중인데 회복하면 역시 바로 감옥에 갈 거예요. 
   의료인 하원 정치 행동 윈원회의 다른 간부들은 어떻게 되었어요? 
  마리사가 물었다.
   그들 중 상당수가 공범 증언을 하겠다고 나섰어요. 
  두브체크가 말했다.
   덕분에 수사가 이례적으로 아주 쉬워졌어요.  수사를 하다보니 대부분의 
회원들은 자신들이 그냥 보통 로비 캠페인을 지원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더군요. 
   티만이란 사람은요?  그 사람은 그런 일에 손을 댈 사람 같아 보이지를 
않던데요.  아니면 적어도 진정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 같아 보였어요. 
   그 사람 담당 변호사가 수사에 협력을 하는 대가로 좀 낮은 형량을 받을 수 
있도록 중재를 하는 중이에요.  피에이씨란 단체는 완전히 파산을 해버렸어요.  
희생자들 가족 거의 모두가 소송을 제기했거든요.  간부들 거의 대부분은 형사 
입건이 되었구요.  특히 잭슨이란 사람을 포함해서 대부분이 상당 기간 감옥에 
들어가 있게 될 거예요. 
   그 사람이랑 닥터 헤버링은 만일 거리에 나가면 사라  ㄹ한테 붙들려 런치를 
당하게 될 거예요. 
  닥터 파크리가 덧붙였다.
   그럼 랠프도 형을 살겠군요. 
  마리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녀는 아직도 보호자로 굳게 믿었던 그가 
갑자기 돌변해 그녀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 친구는 제일 먼저 검사측에 협력을 하기 시작한 사람 중 하나예요.  물론 
보답을 좀 받긴 하겠지만 그래도 상당기간 복역을 해야 할 걸요.  피에이씨와 
관련된 것 말고도 그는 당신에 대한 위해 기도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으니까요. 
   저도 알아요. 
  마리사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젠 정말 끝나버렸군요. 
   당신의 그 끈덕진 고집 덕분이에요. 
  두브체크가 말했다.
   그리고 뉴욕의 에볼라는 이제 완전히 우리 손에 잡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정말 다행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그럼 우리 씨디씨엔 언제나 다시 돌아올 생각이오? 
  두브체크가 물었다.
   우린 벌써 당신의 초밀폐 실험실 출입증을 만들어두었답니다. 
  이제 그의 얼굴에는 완연한 웃음이 번져 있었다.
   아무도 더 이상 당신이 몰래 밤에 들락거리는 걸 보고 싶어하지 않거든요. 
  마리사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어요.  사실 전 다시 소아과로 돌아갈까
생각중이에요. 
   다시 보스턴으로요? 
  두브체크의 얼굴이 갑자기 우울해졌다.
   그건 우리 분야의 엄청난 손실이에요. 
  닥터 파크리가 말했다.
   당신은 국제적인 역학계의 영웅이 되었는데요. 
   한번 더 곰곰이 생각을 해볼게요. 
  마리사가 약속을 했다.
   하지만 다시 소아과로 돌아간다 해도 전 아틀란타에 계속 머무를 생각이에요.

  그녀는 새로 얻은 강아지에 얼굴을 비벼댔다.  잠시 말을 멈추었던 그녀가
다시 
입을 열어 덧붙였다.
   하지만 부탁이 하나 있어요. 
   만일 우리가 어떤 도움이 되어드릴 수 있다면... 
  닥터 파크리가 그녀의 말을 받았다.
  마리사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이건 시릴만이 해줄 수 있는 거예요.  제가 소아과로 돌아가건 말건간에 다시

저녁 초대를 한 번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두브체크는 허를 찔린 표정이었다.  다음 순간, 파크리의 어리둥절한 표정에 
커다란 함박웃음을 지은 두브체크는 마리사를 당겨 품속에 얼싸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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