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뉴우스의 마술사
앵커맨 전4권 중 제3권
저자: 로버트 골드버그. 제럴드 제이 골드버그
= 차례 =
13. 모조와 재창조 1
14. 대한항공 추락과 NBC 20
15. 그 뉴스는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39
16. 앵커먼 래더 62
17. 래더의 스튜디오 117
18. 베를린 장벽 136
19. 앵커 제닝스 179
13. 모조와 재창조
그날 저녁, ABC의 테이프 룸에서 벌어진 토론은 전국 어디서나 있을 법한 그런
것 중의 하나였다. 그것은 한가지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7월 하순, ABC의 발국 뉴스팀과 존 맥워시 기자는 FBI와 미국무성이 전 비엔나
주재 대사관의 고위 외교관이었던 펠릭스 블로흐에 대해 소련에 비밀을 누설했다는
혐의로 조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기막힌 특종기사였고, 아마도
주요 국내뉴스가 될 것임이 틀림없었다. 사실 너무나 중요한 사건이어서, 피터
제닝스와 폴 프리드만뿐만 아니라 ABC 뉴스의 룬 알럿지 사장도 나서서 제작에
참여했다.
"국무성과 통화하느라고 나도 거의 하루종일 보냈습니다'라고 사장이 말했다.
몇 가지 특정 사실에 대해 알럿지 사장은 국무성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다.
"우리는 그 모임이 어디서 열리는지에 대해서는 보도하지 않기로 합의했습니다.
"파리"라는 지명 대신 "유럽의 한 도시에서"라고 표현했습니다'
FBI의 우려 때문에 블로흐가 자살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도 삭제했다. 그러나
요직에 있는 미국 외교관이 소련에 대한 스파이 혐의를 갖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건의 내용은 아주 강력했다. 그래서 피터 제닝스가 7월 21일 금요일, 이
프로그램을 머리기사로 보도했을 때만 해도 블로흐에 관한 독점보도가 ABC가
두고두고 자부심을 갖을 만큼 대승리를 거둔 것이라고 기대했었다. 그러나
결과는 이게 웬 날벼락이란 말인가!
제닝스는 그날 밤,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오늘밤, 비밀은 드러나고 만다는 냉엄한 가르침을 생각하게 합니다'
시청자들은 처음엔(나이트라인에 쓰이는) 일반적인 흑백의 거리 모습을 보았다.
그러더니 망원경 초점의 십자선과 시간 코드로 완성된 화면이 나오더니, 입자가
거칠고 희미한 이미지의 펠릭스 블릭스 블로흐가 소련 요원에게 손가방을 전해
주는 모습이 화면에 나왔다. 그런데 사실은 그 사람은 블로흐가 아니었다.
소련요원도 아니었다. 그것은 "모조(simulation)"였고, 배우들의 연기였다. 그러나
그장면이 10초 동안 나가는 가운데 "모조"라는 표시는 어느 곳에도 없었다. 국무성
앞에서 리포터를 하려고 모니터를 하려고 모니터를 보고 서 있던 존 맥워시는
실수를 발견하고 황급히 워싱턴의 주조정실을 불렀다. 그러나 때는 너무 늦었다.
결국 두 번째 뉴스 공급 때인 7시 ABC 뉴스를 본 시청들만 정정된 표시를 볼 수
있었다.
룬 알럿지 사장은 하루종일 전화에 매달려 있다가 주말을 즐기러 일찍 떠나버렸기
때문에 실제 방송이 나가는 것은 그만 보지 못했다. 녹화장치를 해놓았지만,
공교롭게도 기계에 이상이 생겼는지, 그날 분은 녹화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월요일, 사무실에 도착해서야 비로서 장안을 떠들썩하게 한 소동을 알게 되었다.
ABC는 혐의 사실을 인위적인 화면으로 내보냈으니 이중으로 죄를 범한 셈이 되었고,
신문, 잡지와 전국의 학자들은 일제히 으르렁거렸다. 전 CBS 뉴스 사장 프레드
프렌들리 씨는 "ABC 뉴스에 의해 자행된 사기사건"이라고 비난했다.
"뉴욕타임스"지는 사설에서 "이런 속임수는 시청자와 언론의 윤리를 우롱했다...
"블로흐는" 고소된 것도 아닌데 ABC는 마치 그가 유죄선고를 받은 것처럼 보도했다.
그 화면면 보면 경솔한 시청자는 ABC가 블로흐를 현장에서 잡은 것처럼 생각했을
것이다. 뉴스를 조작한 것은 ABC의 신뢰성에 큰 위협이 되었고 언론에 대한 대중의
신의를 저버린 결과를 가져왔다!'라고 신랄하게 썼다. ABC 뉴스의 전 책임자인 루벤
프랭크는 말했다. "그들은 시청자들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한다는 신조에 확실한
동의를 보여 주었다. 드라마로서는 훌륭했으나 뉴스에서는 완전한 거짓말이었다'
사실 그 화면은 엄격히 말은 거짓말은 아니었다. 좀더 분명히 말하면, 엄청난
실수였고 어리석은 실수였을 뿐이다. 원래 블로흐와 소련 첩보요원의 모습은 법정
스케치처럼 그림으로 그리거나 만화로 그려 "스파이 대 스파이" 형태로 처리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7월 21일, ABC의 미술요원은 다른 일로 무척 바빴었고, 그래서
시간은 촉박하고, 그동안 정부 보도물에 그림없는 부분을 잘 처리해내야 했던
워싱턴 제작진들이 대안을 제시했던 것이다. 즉, ABC 직원이 손가방을 건네 주는
모습을 즉석 폴라로이드 사진으로 찍어 전자적 화면 변환 장치인 "페인트
박스(Paint Box)"라는 기계에 넣어 처리했던 것이다. 이 경우, 사진을 미술가의
그림으로 전환해 보자는 생각이었다.
즉석 사진의 이미지는 페인트 박스로 처리되었다. 몇몇 날카로운 부분은 애매하게
지워졌다. 그리고 블로흐 역을 한 직원은 머리가 덥수룩해 코작처럼 나왔다. 그러나
6시 31분 마감시간 압력에 쫓겨 더 이상의 손질을 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그 화면은
충분히 변환되지 못했다는 얘기가 된다. 그리고 워싱턴의 일을 담당하고 있는 대리
프로듀서는 그 작업에 익숙하지 못했고, 뉴욕 스텝은 잠재해 있는 문제점을 확실히
인식하지 못해서 블로흐의 화면이 실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다. 그래서 아주
실제처럼 보이는 사진이 그만 전파를 타고 나가 버린 것이다.
그것은 코미디였다. 아니면 알럿지 사장이 말한 것처럼 "실수로 뒤범벅된
비극"이었든가, 고의적인 속임수는 전혀 아니었지만 ABC 보도국장이 나중에 말한
것처럼 "우리 모두의 표준을 깨뜨린 것"이었다. 그 후유증으로 ABC 직원들은 징계를
받았고 그러한 중요한 결정에 사인하는 것은 프로듀서가 아니라 ABC 뉴스 사장이
직접 해야 한다는 새로운 지침이 만들어졌다.
만일 ABC 사건이 비난의 불길에 불을 붙인 격이었다면, 그래서 그것이 효과가
있었다면, 룬 알럿지의 말에서처럼 "전 방송사 사장들로서는 일반적으로 말해
속수무책"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만일 이 짧은 10초 동안의 예기치 않은 돌발사고가
만든 사람을 긴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면 그 사건은 당시의 경향을 집약한 한
단면이었을 수도 있다. 뉴스 프로그램은 이전부터 있는 그대로의 그림을 내도록
되어 있다. 실제 촬영을 하든가 아니면 아무 그림 없이 읽어 가든가.
그러나 1989년에는 새로운 움직임이 생겼다. 사실을 좀더 빠르게도, 혹은 늦추기도
하는 움직임이 바로 그것이다. 블로흐 사건은 실수로 끝났지만 더 많은 뉴스, 혹은
사실에 근거한 프로그램(예를들면, "America's Most Wanted"라든가,
"a Current Affair"같은 프로그램)들은 물론 재창조라는 방법을 사용해 의도적으로
드라마와 사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했다.
그렇다면 "재창조"란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가? 여기에 대한 논쟁은 분분했고,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사실은 놀랍도록 간단하다. 텔레비전은 그림을 통해
말하는 매체다. 문제는 그림이 없을 땐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이다. 마화고 싶은
얘깃거리가 있는데 현장에 카메라가 없었다면? "재현(reenactment)"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재창조, 재구성, 재현, 모조, 이들은 모두 같은 것을 일컫는 여러가지 표현들이다(
즉, 조작하는 것)이다. 만일 실젤 촬영한 것이 없었다면(모든 기술, 혹은 배우를
동원해) 자체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방송사가 사건을 쥐고 있고, 모든 취재를
마치고 단지 그림만 없을 때, 화면을 재창조하는 것이 뭐 잘못된 일인가? 하는 것이
옹호하는 쪽의 얘기다. 다 알려진 사실을 그림으로 표현했다고 해서 뭐가 잘못될 것이
있겠느냐의 의견이다.
그러나 반대하는 사람의 의견은 이렇다. TV 뉴스는 시청자들과 독특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실제로 촬영한 화면을 보여줌으로 해서 TV 뉴스는 시청자들로 하여금
사건의 증인이 되도록 해주는 것이다. 그것은 쌍방간의 계약이다. 저녁뉴스에
보았다면 그 사건을 실제 본 것과 다름없다고 해도 좋은 것이다. 그러나 재창조라면?
누가 알겠는가? 설사 그 얘기가 발생 가능한 것이라 해도 프로듀서가 전체 얘기를
꾸며낸 것인지. 사건 외에 드라마를 요구하는 상황에서는 여러가지 미약하나마 변조된
부분은, 전체 이야기 속으로 기어들어와 내용을 왜곡시키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렇게 하고나면 어느 누가 그것이 사실인지 허구인지 말할 수 있겠는가? 이 문제는
1989년 한 해동안 폭 넓게 논의되었다. 어떤 프로듀서들은 이 재창조들을 가리켜
"방송뉴스의 자연스러운 발전 단계"라고 말한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그러한 개념을
"졸렬한 모조품"이라고 치부해 버린다.
그러나 놀라게도 재창조 작업은 아주 새로운 작업이 아니다. 1950년대 중반 월터
크론카이트가 "You Are There"라는프로를 진행했을 때였다. 이 프로는 뉴스 프로그램
형태의 역사 수업시간이었다. 수세기 동안을 거슬러 올라가면 "You Are There"는
모스톤 파티(Tea Party)부터 "잔다르크"의 임종 전 몇 시간까지 모두 재구성했다.
배우들이 제시 제임스며 존 딜링커, 아멜리아 얼하트의 역을 맡아 연기했고, 기자와
인터뷰까지 했다. 재창조 개념에서 만들어지는 개념은 부자연스러웠지만, 그 당시엔
시비거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1989년 NBC의 시드 페더스같은 프로듀서들은 재현 작업이 "때만난 발상"이라고
느꼈다. 그들은 "America's Most Wanted"에서처럼 배우를 써서 전체 범죄를 재구성한
프로의 시청률에 주목했다. 프라임 타임 오락프로에 비해, 돈 조금 들이고 제작한
뉴스가 두 배는 싸게 먹히는 것에 주목했다. 그들은 또한 "60 Minutes" 같은 큰 돈을
벌어들인 프라임 타임 뉴스쇼의 성공비결을 조사했다. 마침내 1989년 가을, 제작의
상당부분을 재창조에 의지한 매거진 프로 두 개가 생겨났으니, 바로 NBC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Yeserday, Today and Yomorrow)"과 CBS의 "카니 정과 함께 토요일
밤을"이 바로 그것이었다.
"Y, T and T"는 스스로 "전자타임머신"이라고 부르며 지문만 남긴 살인사건을 거슬러
올라가 재창조하고 정신병원에 착오로 감금된 한 여성의 이야기도 재구성했다.
"Saturday Night"는 나름대로 민권운동가의 생애와 14살짜리 마약 밀매꾼의 얘기를
재구성했다. 배우들이 애비 호프만에서부터 인질 테리 앤더슨의 역할까지 모두 맡아
했다.
여기서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중요한 사실은 그런 프로그램이 결코 정규뉴스는
아니라는 점이다. 이 프로들은 황금시간대에 나가는 한 시간짜리 뉴스쇼일 뿐이다.
그러나 "Ytt"나, "Saturday Night"는 적어도 부분적이나마 보도 부서에서 제작한
것이다. 따라서 여러 비평가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프로는 전체 뉴스 제작 과정에
부패된 영향을 끼쳤다는 비난을 가하게 되는 것이다. ABC의 돌발사고에도
불구하고(아니, 아마도 그 사고가 원인 되어) 룬 알럿지는, "재창조는 뉴스
부서에서는 위험한 존재"라고 말하며 그런 프로그램에 대해 심한 질타를 퍼부었다.
"Saturday Night"는 배역 담당 책임자와 오디션만으로 구성해, CBS 뉴스쇼를 흉내내
만든 것에 불과하다는 말을 듣는다. 그리거 겉만 번드르르한 ABC의 "YTT"는
과거로부터 현재 미래까지 정처없이 떠도는 진행자가 현실과 허구 사이에 어느
곳에도 붙지 않는 영역을 헤매도록 운명지워졌다고 매도당했다.
"YTT"에서는 실제 촬영 그림과 재구성 그림 사이의 구분이 너무 모호해져서, 때론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진다. 어떤 화면을 보고 NBC의 한 프로듀서는 이렇게 소리친다.
"야, 그 "모조" 한번 훌륭한데! 어떻게 저렇게 잘 만들었지'하고 감탄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면 한쪽에서 이런 대답이 나온다. "저건 만들어진 것이 아니야. 실제
화면이라구' NBC요원들은 이제는 "이것이 실제 화면입니다!'라는 자막을 사용해야
할 판이라고 자조 섞인 말을 한다.
NBC 주변에서 "YTT"쇼의 이름을 그냥 "Yeserday and Today(어제와 오늘)"라고
부른다. 이 프로는 미래가 없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비평가들의 강력한 비난과
시청자들의 무관심에 직면해 "YTT" 프로는 도중 하차하고 말았다. 연말에 가서는
내부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치가 있은 후 "Saturday Night"도 고전을
면치 못했다. "재창조"라는 방법은 결정적인 패배로 낙인찍혀 버렸다.
오늘날, 무엇이 실제화면이고 무엇이 모조인지의 문제는 또다른 뜻밖의 전개로
골칫거리가 되어가고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기술은 비디오 이미지를 전자적으로
전환시키는 데까지 발달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과정은 어마어마하게 많은 비용이
들지만, 오늘날 컴퓨터의 위력은 완전히 새로운 화면을 생성해내거나 기존의 것을
획기적으로 재배열해낼 수 있는 단계까지 미치고 있다.
한번 가정을 해보자. 부시 대통령의 파란 양복이 초록색으로 바뀔 수 있을 뿐
아니라, 권총을 차고 달라스의 초원 위에 서 있게 할 수도 있다. 가능성은 끝이
없고 그 위력은 가공할 만하다. 의학분야에서 시험관 아기문제처럼 비디오 기술은
그에 수반되어야 할 윤리를 앞질러 가버리고 말았다.
모든 논쟁은 "계약"이라는 용어에서 시작된다. 즉, TV 시청자들이 저녁뉴스에서
시청한 것은 실제로 일어난 그대로의 사건이어야 한다는 것이 묵계로 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는 "뉴욕 포스트"지가 1989녀 9월 CBS를 비난했을 때, 또다른 주요
논쟁이 발생했던 이유에 대해 충분한 설명이 된다.
당시 "뉴욕 포스트"는 CBS가 "Operation: Black out"이라는 제목의 프로에서
1984년 아프간 사태에 관해 조작된 화면을 방송했다고 비난한 적이 있다.
"뉴욕 포스트"지는 프리랜서 카메라맨이 마이크 후버가 찍은 화면, 즉 무자헤딘이
고압 전기선을 끊어버리고 살던 마을을 떠나는 모습이 모두 카메라 촬영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비난했다. 실제상황은 이미 며칠전에 지나간 사건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뉴욕 포스트"지는 특히 댄 래더를 찍어서 썼다. "댄 래더가 가짜 아프간전을
방송했다"란 것이 헤드라인이었다. 래더는 사실 "60Minutes"를 맡은 이후
소련과 아프간 분쟁의 취재를 위해 저돌적으로 노력했는데, 그 당시 그는 반군들과
대화를 시도하려고 산행 복장을 하고 아프간 언덕을 헤매며 수마일씩 걸었다.
그는 "Gunga Dan"이라고 조롱하듯 불리워졌지만 어떤 비난은 야비했고, 오도된
인상이 짙게 풍겨졌다. 아프가니스탄은 베트남처럼 큰 뉴스였지만 취재가 빈약했던
뉴스였다는 것이 래더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는 소련이 결코 승리할 수 없는
전쟁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좀더 많은 취재를 하기 위해 밀고 나갔다. 그러나
사실을 보여 줄 증거는 전혀 포착되지 않았고, 그래서 그는 너그럽게 인정을
해주고 가짜를 조장했다는 것이다. "뉴욕 포스트"지의 비난은 간단히 말해서
비열한 플레이였다.
래더의 역할에 대해 시청자들이 유일하게 합법적으로 공격할 수 있었던 근거는
그의 편집국장 역할, 다시 말해 문지기 역할에 대한 것뿐이다. 그가 편집국장
감투를 쓰고 있다면 그는 자신의 뉴스에 나가는 모든 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피터 제닝스도 이렇게 말했다. "매일 나가는 저녁 뉴스는 모두 내 도장을
찍어야 나갑니다. 그렇게 함으로 해서, 전파를 타는 모든 늇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청자는 아무리 잘못된 것이 있어도 백아관의 맥워시
기자를 나무라지 않습니다. 바로 "저"를 비난합니다'
궁극에 가서는 피터 제닝스처럼 댄 래더도 모든 게 깨끗이 면죄되었다. CBS가
내부 조사를 한 결과, 가짜소동은 단지 "사실이 아님"으로 결론지워졌다. 그러나
잠자코 있던 CBS 뉴스의 데이빗 벌크 사장이 결코 시시콜콜한 얘기를 발표하자
않았기 때문에 시청자들은 벌크의 말을 믿어야 했다. 카메라맨 마이크 후버는
나중에 이렇게 언급했다. "뉴욕 포스트"지의 두 군데 취재원조차도, 그가 취재할
당시 아프가니스탄에 있지도 않았으며 자신은 라이벌인 아프간사건의 파벌들
사이의 "악의적인 매부 싸움"의 피해자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후버를 아는 몇몇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미심쩍어 했다.
1989년 7월과 9, 10월에 발생한 가가의 뜻하지 않은 사고에서 두 앵커, 피터
제닝스와 댄 래더가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은 어떤 스캔들에서든 앵커가 가장 큰
공격 대상이라는 사실뿐만 아니라 시청자들은 계약에 대해 진실로 우려를 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ff
14. 대한항공 추락과 NBC
대한항공 DC_10기가 200명 이상의 승개을 태운 채 추락한 사건은 7월의 CBS
아침 6시 뉴스의 머리기사였다. 사고는 리비아의 트리폴리 공항에서 약 3마일 떨어진
곳에서 발생했다. 원인을 밝히기는 아직 이르지만, 사고 당시 짙은 안개가 끼어
있었고 비행기에는 엔진 고장의 조짐이 몇 가지 있었다. 초기 보도로는 조종사를 포함,
생존자가 여럿 있다는 소식이었다.
미국에 처음 도착한 화면은 리비아의 JANA 통신으로부터였다. 뉴욕으로 쇄도하는
유로비전의 위성화면은 NBC의 "Sunrise"와 "Today"프로부터
방송되기 시작했다. 사고는 처참했다.
아침 일찍 "NBC Nightly News"의 욋ㄴ 데스크는 이 사건 소식을 듣자마자 로마
주재 젊은 특파원 스티븐 프랫지어를 현장으로 급파했다.뉴요과 로마 사이의 6시간
시차 때문에 프랫지어는 매일 아침 10시 20분에 트리폴리 향해 떠나는 알리탈리라항공
정기노선을 놓치고 말았다. 그는 재빨리 전세기를 내서 2시간 만에 지중해를
건넜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혹은 리비아 당국이 추락 현장 부근에 접근 하도록
허락할 것인지, 아무것도 예측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기자라면 우선 경쟁자들보다
먼저 사건 현장에 도착하고 볼 일이었다.
뉴욕으로 시간으로 오후 4시 35분, NBC 본부에는 프랭크 쉔벡커가 방안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쉔 벡커, 독일어로 "아름다운 빵굽는 사람"이라는 뜻이지만
전혀 빵굽는 사람같아 보이진 않았다. 가지런히 손질한 하얀 턱수염, 깨끗이
빗어넘긴 금발에 예민하게 생긴 마른 얼굴의 쉔벡커는 밀가루 반죽을 반죽을 만지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영어 교수처럼 보였다(영어는 뉴욕대학에서 그의
전공과목이었다) 그는 제과공이나 교수보다도 훨씬 옷을 잘 입고 있었다. 그는 1970년
NBC 견학 코스의 안내자로 방송국 일을 시작했다. 그가 테이프 제작자로서 존
챈샐러가 앵커였던 "Nightly News"의 스텝이 된 것은 1979년 당시 폴 그린버그,
그가 수석 프로듀서였을 때였다. 그는 지금 뉴욕에서 프로듀서로 뿐만 아니라 뉴욕
"Nightly News"의 테이프 코디네이터로 일하고 있다.
그날 오후 내내 그는 유럽으로부터 NBC 본부로 들어오는 위성화면을 검토하고
있었다. 화면은 추락현장과 근처병원에 수요된 생종자들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NBC의 도쿄 지국으로부터는 사고 속보를 기다리고 있는 국인 승객의 가족과
친구들의 모습을 받았다. 오후 늦게 그는 다섯개의 테이프를 모아 각 비디오
프레임에 새겨진 코드를 사용해(1초에 30프레임) 노란 종이에 각 화면의 주요사항을
참고로 적어 넣었다. 쉔벡커는 스티븐 프랫지어가 방송시간에 맞춰 로마로 다시
돌아오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확신했다. 비록 되온다 하더라도 리비아 관리들과의
문제로 해서 빈 손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방송 시작이 두 시간도 채 안
남았을 때, 쉔벡커와 "Nightly News"의 수석 프로듀서인 빌 휘틀리는 그날의 주요
뉴스에 보조자료가 필요하다는 데 동의했다. 4시 55분 라인업이 나왔을 때 추락사고
소식은 로마의 프랫지어와 뉴욕의 스탠 버나드 두 사람이 맡기로 결정됐다.
5시 30분, 뉴욕 "Nightly News"의 9면 편집자중 한 사람인 빌 카탈라노는 록펠러
센터 4츠의 작은 방, EJ_3에 앉아 신문의 스포츠란을 읽고 있었다. 비록 여러 대의
편집기들로 목잡하게 둘러싸여 있었지만 카탈라노의 창없는 작은 방은 수도사의
방처럼 고요하고 평안했다. 때때로 그는 소리를 죽여 놓은 화면에서 뉴욕 매츠와
피츠버그팀이 우중에도 싸우고 있는 장면을 흘끗 쳐다본다. 다른 모니터에서는
화면조정이 나가고 있다. 카탈라노는 16년째 NBC에서 일하고 있었고, 필름에서
테이프로 전환해 오는 과정을 모두 지켜본 사람이었다.
"1976년 경이었습니다. 그 변화는 약 5년간에 걸쳐 서서히 일어났습니다. 테이프를
사용함으로 해서 모든 일의 속도가 빨라졌어요'
그러나 테이프만 가지고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다. 방송시간까지는 58분 밖에 남지
않았다. 전화벵이 울린다. 카탈라노가 수화기를 들고 대답한다.
"네, 준비 다 됐습니다. 한 시간 내에 방송에 보내도록 만들겠습니다만, 아직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입니다'
카탈라노는 이렇게 긴박한 마감시간에 이미 익숙해져 있지만, 이렇게 그날의 주요
뉴스가 늦어지는 것은 매일 있는 일이 아닌 것이 그래도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다른 편집실로 들어가는 문 위에도 EJ_3와 같은 표시가 걸려 있다. "정신병동"이라고
쓰여있다.
갑자기 프랭크 쉔벡커가 카탈라노의 편집실 문 앞에 나타났다.
"전화가 왔는데. 프랫지어가 로마로 가고 있다는군. 5시 35분에 도착한대요.
6시까진 낼 수 있겠지'
"5시 35분까지 꼭 도착한다는 걸 어떻게 알지요?'
"그건 모르지'
하며 쉔벡커는 나가 버렸다.
수년동안 카탈라노는 압박속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왔다. 그나,
팀 깁니나모드, 쉔벡커가 다급할 때 의지할 수 있다고 느끼는 편집자들이지만 카탈라노는
특히 조이는 걸 싫어했다. 그는 날카로운 컷 화면보다는 부드러운 디졸브를 사용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래야 오디오와도 맞출수 있고, 나레이션과 비디오 갭도 잘
처리해서 전체 이야기의 진행이 무리가 없게 되는 것이다. 불론 이 작업이 전국 지리
탐사가 아니라 뉴스라는 걸 잘 아고 있지만, 카탈라노는 유리처럼 매끈하게 일을
처리하고 싶어했다.
"일이 폭주할 때마다 시간만 있으면 좀더 고치려고 하지만 빈번이 그대로 내보내야
하게 됩니다'
편집실 밖에서는 쉔벡커가 그의 카시오 디지탈 시계를 체크하면서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고 있다. "제발, 빨리 좀' 하며 중얼거린다. 그때 전화벨이 울리고, 그는
달려가 수화기를 집어든다. "고맙습니다'하고 말한 쉔벡커는 전화를 끊고 달려와
전해 준다.
"프랫지어가 비행기에서 내렸대요. 약 20분쯤 있으면 지국에 도착 한답니다'
20분 후, 정확히 6시 프랫지어로부터 다시 전화가 왔다. 특파원은 정확히 로마
사무실에 도차했지만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고 했다. 쓸 화면이 없다는 것이었다.
화가 난 쉔벡커가 소리쳤다.
"리비아까지 날아가서 고작 해온 게 기자 얼굴 비치고 찍은 것뿐이라니...
10초, 20초짜리 브릿지만 카메라에 담아 왔다는군. 그것밖에 할 수 없었다니까'
쉔벡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마도 겨우 공항에만 내리게 했을 거야. 그리고 아무데도 못 가게 했겠지.
우리가 하루종일 걱정했던 게 바로 그거 아니었어? 겨우 착륙하는 것만 허락했겠지.
그게 전부였대요'
6시 1분이었다. 방송시간까지는 29분 남았다. 하지만 아무도 당황하지 않은 것은
그래도 스탠 버니드가 뒷받침할 리포터를 준비했다는 것 덕분이었다. 카탈로니
말대로, "스탠은 빨랐다' 그도 물론 하루종일 유로비전을 통해 들어오는 화면을
사용해 제작을 계속했고, 지금은 외신 데스크 편집자들이 자신이 몫을 승인해
주길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의 것이 OK만 나면, 녹음 부스로 가서 테이프에
나레이션을 넣으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남은 일은 단지 화면만 맞춰 잘라
넣으면 되는 것이다. 방송국에 있는 사람들은 TV 뉴스 일 모든면에 대해 존경할 만큼
태평하게 대한다. 그들의 말처럼 이것은 "뇌수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쉔벡커는 드디어 결심했다. 버나드가 6시 30분 "Nightly News"의리드를 맡고,
버나드의 작업은 카타라노가 같이 하도록 하고, 7시 방송분을 위해서는 만일
프랫지어와 깁니가 제시간에만 대준다면 되는 것이다. 그는 프랫지어의 보도를 꼭
사용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학구적인 외모에 둥근얼굴을 한 중년의 남자 한 사람이 손에 스크립을 들고
흥분해서 나타났다. 쉔벡커가 반갑게 인사했다.
"어디, 스탠. 준비 되었나?'
"네, 준비됐습니다'
버나드가 대답했다. 자신의 스크립에 대한 마지막 승인을 받아다고 한다.
프랫지어가 로마 지국에 도착했다고 쉔벡커가 전해준다.
"알아요, 알아'
버나드는 더 이상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오디오 룸으로 가버렸다.
그때까지 그냥 시간만 기다리던 카탈라노는 갑자기 행동에 들어갔다. 음향기를
집중적으로 정보를 입력했다. 스탠 모소리가 마이크로 들리는 순간 그는 잡아채듯
소리쳤다.
"보이스 레벨 좀 빨리 줘!'
"숨 좀 돌립시다. 이제 겨우 몇 개 문단은 다시 손을 봤는 걸요'
하고 버나드가 설명한다.
또다른 목소리, 팀 깁니의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튀어 나왔다. 프랫지어의
보도물이 로마로부터 위성으로 도착했다고 쉔벡커에게 알리는 말이었다.
"프랭크 기자, 얼굴 나오는 부분은 여기 있습니다'
"가봐야 되겠어' 카탈라노에게 이렇게 말하고, 쉔벡커는 문을 열어 놓은 채,
EJ_10으로 달려갔다. 크고 유리가 없는 그 방에는 마감시간에 대기 위해 팀
깁니가 편집 오디오 기기 앞에 앉아 있었다. 그가 NBC에서 일한 것이 벌써 27째지만,
줄무늬 포로 셔츠를 입고 리복 운동화를 신은 깁니는 그의 오랜 경험에 비한다면
훨씬 젊어 보였다. 단지 코 끝에 걸친 반쪽짜리 원시용 안경이 중년임을 암시해
줄 뿐이었다.
1961년부터 그는 필름 편집자로 일했다. "우리는 모두 원래부터 필름 편집자였습니다.
대부분이 다 그랬지요'
그리고 11년 전, NBC는 테이프 체제로 전환했고 모든 것이 박차를 가해 진행되었다.
"그것이 삶이지요'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러나 그가 "마감시간까지의 도전"을
은근히 즐기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맞아요, 난 이 일을 사랑합니다'
쉔벡커는 탁자위에 있는 카세트 테이프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트리폴리로부터 온
사고 소식에 관련된 모든 그림과 그 뉴스에 대한 한국에서의 반응 등이 담겨 있었다.
"팀, 1번에는 우리가 쓸 그림이 다 들어 있어요. 그래도 1, 2, 3, 4, 5까진 다 갖고
있어야 해요'
그는 하나하나 모고 체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하군'
전화벨이 울리자 쉔벡커는 수화기를 잡아채듯 집어 들었다.
"네, 좋아요.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스티븐 프랫지어가 얼굴을 잡고 현장에서 리포터한 장면은 겨우 19초에 불과했다.
관제탑처럼 생긴 물체 앞에 서서 보돌르 하긴 했지만, 화면으로 봐서는 그곳이
트리폴리인지 아닌지 아무 표시가 없다. 달나라의 관제탑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
갑자기 프랫지어의 목소리가 들렸다.
"꼭대기로 올라가요. 셋, 둘, 하나. 트리폴리는 짙은 안개에 싸여 구조반이
작업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비행기는 활주로에서 조금 못 미쳐
추락했고, 그 왼쪽으로 두 채의 가옥과 세워둔 승용차를 들이받고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비행기 잔해는 대부분 불에 탔습니다. 수백명의 구조대원이 달려와 기장을
포함한 수십명의 생존자를 실어 날랐습니다. 기장의 말에 따르면 추락하기 15분
전에 관제탑과의 교신이 끊어졌다고 합니다'
기장의 현장 보도를 포함해서 프랫지어가 설명한 전체 보도물은 고작 1분 30초에
불과했다.
"좋아요'
쉔벡커가 말했다.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되는 주요 비디오의 시간코드를 적어놓은
목록을 들여다보면서 그는 깁니에게 1번 카세트 테이프의 프레임 06_05_11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편집자는 지시된 06_05__11 부분을 찾아 틀었다. 안개
속에서 태극 마크가 찍힌 사고기의 꼬리가 드러났다.
"바로 저 그림이야'
쉔벡커는 바로 그가 원했던 그 장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계속 돌려봐요. 더
좋은 게 있을지도 모르니까. 좀더 넓게 보이는 화면으로. 여기 있군. 그래요,
거기...'
프랫지어의 멘트가 다시 반복되었다.
"구조대원이 달려와 수십명의 생존자를 실어 날랐습니다...'
쉔벡커는 계속해서 말했다.
"이제 시체쪽으로 가 봅시다'
그는 테이프를 뒤로 돌렸다. 사람들이 나타나 기체 잔해 속에서 시체를 꺼내
옮긴다.
"바로 저거. 저 부분이 기본 화면이에요'
프랫지어의 멘트가 또다시 반복해서 나온다. "기장의 말에 따르면 추락하기 15분
전에 관제탑과의 교신이 끊어졌다고 합니다...'
벽에 걸린 큰 시계가 6시 17분을 가리키고 있다. 흰머리를 짧게 깎고 안경을 쓴
직원 한 사람이 근심어린 표정으로 다가왔다. 그는 깁니와 쉔벡커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조용히 물었다.
"잘 돼 갑니까?'
쉔벡커가 대답했다.
"샌디 노력해 보는 중이에요. 아직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리고는 다시 깁니쪽으로 몸을 기울여 말했다.
"이제 기자 얼굴 나오는 부분으로...'
프랫지어의 목소리가 다시 나온다.
"그러나 추락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트리폴리에서 NBC 뉴스 스티븐
프랫지어였습니다'
그들은 계속 테이프를 돌리며 한국인 피해자 가족의 그림, 엔진의 클로즈업
화면 등을 끼워 넣었다. 비행기 동체의 머리부분의 그림을 찾던 편집자가 벌컥
화를 내며 소리친다.
"5번 테이프 어디 갔어? 제기랄'
비디오 편집을 다 마치자 쉔벡커는 시계르 올려다 보았다. 아직 6시 28분인
것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빛을 나타냈다.
그는 전화를 들고 보고했다.
"다 됐어요. 1분 33초. 하지만 두 번째 방송에서는 좀더 다른 것을 참가해야겠어요.
내 생각엔 사람들이 소리치고 우는 장면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아니면
다른 걸로 좀더...'
그때 라인을 통해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이 또 한 팀, 즉 버나드와 카탈라노
팀을 물리친 것이었다. 쉔벡커가 소리쳤다.
"농담이겠지, 우리가 정말 그랬어?'
그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구 사람들이 A 플랜이었는데. 이건 환상적이군. 환상적이야'
그느 기뻐했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부터 좀더 낫게 만들어 봐야지'
7시 방송분을 위해 그와 깁니는,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기장의 모습과 호스를 들고
서 있는 소방수, 목숨을 잃은 70여 명 승객의 한국인 가족들의 모습을 담은 서울서
온 단편들을 도입부에 첨가했다. 두 번째 방송분 시작 부분을 보고 있는 동안
쉔벡커는 NBC 외신부에 차장으로 임명된 데이브 밀러로부터 축하의 말을 들었다.
"현장에 특파원을 보낸 방송은 우리밖에 없다더군'
깁니에게 말하며 두 사람은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마감시간에 대느라
정신없이 뛰어도 결과가 좋으면 피곤을 느끼지 않는 법이다.
NBC의 베터랑 쉔벡커와 깁니는 분명 죽을 힘을 다해서, 톰 브로커의 NBC
"Nightly News"와 수백만 시청자들을 위해 다른 경쟁사보다 좀더 나은 화면을
제공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과연 현장에 섰던 스티브 프랫지어의 모습은 대한
항공기 추락사고 보도에 어떤 실제적인 정보가 되었을까?
안됐지만, 대답은 "거의 없었다"이다. 프랫지어의 추락현장에도 가까이 가지
못했던 것이다. 관제탑을 배경으로 한 19초짜리 화면 외에는, 리비아의 사고의 모든
그림은 이미 유로비전을 통해 뉴욕으로 들어온 것으로 제작됐기 때문이다. 차라리
추락현장에서의 새로운 화면에 대한 큰 기대만 없었더라도 스탠 버나드는 좀더
시간을 넉넉히 잡아 저녁뉴스용 보도물을 완성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버나드의
제작물은 비록 완벽하게 훌륭히 완성됐지만 불방되고 말았다.
방송뉴스는 언제나 낭비적인 사업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GE나 캡시티즈나 티쉬
같은 감시가 엄중한 경영주들의 새로운 긴축정책 하에 처해 온 것도 불가피한
일이었다. 대한항공 DC_10기의 트리폴리 추락사고와 같은 경우에, 중요한 것은
NBC가 정말 주요 언론으로서 그 사건을 심각하게 다룰 의사가 있었다면 특파원과
카메라 요원을 리비아에 파견했을까 하는 점이다. 불행하게도 그렇게 하는 데는
엄청난 비용이 든다는 계산이 나온다.시티즈, 티쉬 같은 경영주들의 새로운
긴축정책의 엄중한 감시 속에 처해 온 것도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한항공
DC_10기의 트리폴리 추락사고와 같은 경우에, 본질적인 문제는 NBC가 정말 주요
언론으로서 그 사건을 심가한 것으로 받아들였다면 하는 점이다.
@ff
15. 그 뉴스는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스티븐 프랫지어의 특파원의 트리폴리 사고현장 보도물은 NBC에게 큰 만족을 주었던
엄밀히 말해 취재는 아니었다. 그것은 취재일 것이라는 착각이었을 뿐 즉,
현장에서 사건을 취재하는 부지런한 기자를 갖고 있다는 착각일 뿐이었다. 그때 그
기자는 아주 인상적인 짧은 연출하는 역할을 했다. 지난 2__3년 동안 뉴스와 뉴스의
환영 사이의 구분은 더욱 모호해졌다. 그리고 이러한 혼란은 방송뉴스의 많은 오점중의
하나일 뿐이다.
하기는 전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22분에 모두 담으려는 생각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결국 TV 뉴스는 한페이지짜리 1면 한 페이지로 된 신문에 불과한 것이라는
말이 된다. 물론 길이가 두 배로 늘어나면 TV 뉴스가 훨씬 나아질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방송 관계자들에 따르면, 또다른 30분을 더 할애할 기회란 적어도 가까운
장래에는 거의 없을 거라는 얘기다. 관계자들은 이스라엘의 리쿠드당이 웨스트 뱅크에서
손을 떼겠다느니 하는 얘기 때문에 돈더미 시간인 30분을 절대 포기하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물론 방송사 자체에서도 귀중한 황금시간대의 전형적인 예를 희생할 의향이
없을 것이다.
시간이 별로 없다는 사실 때문에 3대 방송사는 상당히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일
주일에 닷새, "CBS Evening News"와 "NBC Nightly News",
ABC의 "World News Tonight"은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성공적으로 취재하고 있다. 정보를 취재하는 능력,
대중에게 신속하게 보도하는 그들의 능력은 참으로 인상적이다. 그리고 매일 밤 지구의
저편 끝을 생방송으로 연결하는 아슬아슬한 기술적 묘기도 가히 놀랄만한 일이다.
각 방송사는 발굴 보도(investigative reporting: 범죄, 부정 등에 관한 매스컴의
독자적 조사에 의한 보도)에 대해 스스로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고, 그럴 마한 권리도
있다. 지난 해에는 적어도 한 번 이상 주요 조간 신문들이 대서특필한 뉴스의 취재원이
지난밤 저녁뉴스라고 밝히고 있다. 최근 방송사가 밝혀낸 큰 뉴스로는 펠릭스 블로흐
스파이 사건과 콜롬비아의 마약전쟁에서 외국인 용병을 이용한다는 보도, 그리고
이라크가 핵 발사장치를 보유하려 한다는 뉴스들이 있다.
큰 사건이 곳곳에서 터질때마다 TV만큼 신속하게 감정적 충격을 주며 화면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매체도 없다. 그러한 사건의 집중취재는 즉, 정치, 문화, 경제 분야에서
일어나는 사건 뉴스와(그들이 "활력소(bounce piece)"라고 부르는) 짧은 해설
뉴스(ssidebar)의 혼합이다. 이런 뉴스는 그 자체의 가치도 있는 것이지만 깜짝 놀란만한
사건의 폭로가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최근의 로퍼(Roper)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64p가 TV에서 "대부분의"
정보를 얻는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의 TV 뉴스는 충분히 훌륭하다고는 할 수 없다.
편향되고 제한 돼 있는 TV 뉴스는 그 자체의 중요한 책임의 일부만을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이 점은 앵커들 자신도 인정하는 것으로서, 그들의 뉴스가 대중들에게 철저한
정보 전달면에서는 불충분하다고 말하고 있다. 화면을 세심하게 들여다 보면서 미국의
게으른 군상들은 어두운 유리를 통해 세계를 보고 있는 것이다.
영구 BBC의 로드 마마듀크 사장은 미국 TV 뉴스를 보고 비웃은 적이 있었다. 나쁜
소식에 대한 목마름, 특히 구경거리가 될 마한 나쁜 소식, 그리고 내용보다는
속보성에 치우치는 경향에 대해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시체
운반용 부대(body bag) 저널리즘", 곧 미국 TV 뉴스를 평판 나쁜 사내(bimbo)로 만드는
요인이라고 매도했다. 그의 신랄한 비판은 주로 지역뉴스에 해당하는 것이었지만 전국
뉴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시청률 경쟁은 각 방송사에 압력을 가해 그들의 상품을 더욱 다채롭게 하고, 시청자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선정적인 프로를 만들게 했다. 시청자가 많다는 것은 결국 광고비를
많이 벌어들이게 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뉴스 시청자들은 요즘 점점 그 수가 줄어들기
시작해서 최근에 실시된 닐슨 조사에 따르면 시청률이 60p를 밑돌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돌연변이 잡종인 이른바 TV 타블로이드 언론이 상승세를 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CBS의 뉴욕지역 방송국인 WCBS의 기자 바바라 네빈스는 말한다.
"오늘날은 혼란스런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정통적인 뉴스의 시청률은 떨어지고,
"사실에 근거한 만들어진 프로그램" 즉, "Current
Affair"나 "Hard Copy", "Inside Edition" 같은
프로들이 상대적으로 붐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시청자들에게 문제는 "어떤
것이 뉴스이고, 어떤 게 오락인가?" 하는 것이지요'
TV 시청이 점점 축소되고 있고, 흥미 위주의 폭로성 타블로이드 스타일의 저널리즘이
증가하는 추세에 직면한 뉴스 간부들은 충분히 이런 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어떻게
하면 저 정도의 시청률을 올릴 수 있을 것인가? 타블로이드의 한두 가지 요소를 빌려
오면 가능할 것인가?"
CBS뉴스의 사장을 지냈던 벤 고든 수더씨는 아이러니켈하게도, 시대를 좀 앞서 간
사람이었던가 보다. 그는 자기가 "순간"이라고 부르는 눈물짜내는 화면에 주력함으로써
뉴스와 오락사이의 구분을 없애는 데 한 몫을 했다. "순간"이란 작지만 감동적인
직관의 현시를 말한다. 예를들면 죽은 딸아이를 안고 얼르는 기아에 허덕이는 어머니나,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황폐해진 논을 바라보고 있는 농부의 모습이 바로 그런
것이다. 순간이란 결국 사실 보도도 좋지만 진실한 감동을 경험하는 "작은" 사람들을
보여 주자는 것이다. 그래서 TV라는 매체에서 아주 적절히 표현되는 몇 가지 충격적인
화면을 보자(좀더 간단히 말하면 뉴스에 오락성을 부여하자는 것이다.) 수염이
덥수룩한 한 남자가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는 모습이 50개의 실업률 도표의 효과와
맞먹는다는 것이 수더의 견해였다.
"사람들에게 다가가 감동을 주는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사장은 늘 말했습니다'
댄 래더는 1980년대 중반, 론 로젠바움 기자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여기
포클랜드전쟁과 베이루트 난민수용소의 떼죽은, 그리고 새아기를 갖은 웨일즈 공주의
얘기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중 그날의 톱뉴스로는 어떤 것이 적절할까 한번 생각해
보자.
"당연히 왕실의 아기 이야기여야 한다고 결정했습니다. 이는 "담너머
이론"에 따라서 그렇습니다'
담 너머 이론이라? 래더는 이렇게 설명해 주고 있다.
"그것은 글쎄요, 우선 이웃집에 사는 두 여인이 하루 해가 저물 무렵 울타리에 기대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겁니다. 한 여인이 상대에게 묻습니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러면 그들이 가장 알고 싶어하는 이야기는 바로 웨일즈 공주에게 일어난
일일 것이다... 라는 이론이지요'
그 이론은 "He Martha"이론(한독자가 친구에게 이것 봐, 마르타. 이 얘기 읽었어?
한다는 이론)과 과히 다르지 않다. 이 이론은 내셔널 인콰이어러지의 지침이되는 회사
신조였다. 이러한 쇼 비지니스적인 규칙에 짜증난 찰스 쿠랄트는 최근 "사실보도
자체를 대신하는 요즘의 추세, 영상과 속보성과 전기조작에 대한 꼴사나운 강조"에
대해 반론을 제기했다.
그러나 사건보도에 있어서도 방송사가 얼마나 "취재를 하지 않는가" 하는 것을 알면
정말 깜짝 놀랄 정도다. 전세계에서 벌어진, 많은 일들, 모든 인간의 삶의 현장은
네트워크 뉴스가 서성이기 두려워하는 빈민굴같은 곳이다. 콜롬비아대학 신문방송학과의
조안 코너 학장은 "방송뉴스는 아주 편협한 예정표만을 갖고 있다"라고 불평한다.
그녀의 말은 분명 옳다.
이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녁뉴스의 토론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최근
스칸디나비아 오스트레일리아 혹은 인디아, 남아프리카의 백인구역을 제외한 전체
아프리카 대륙, 그런 곳에서 발생한 뉴스가 나왔다면 하나라도 거론해 보라. 한때
NBC와 ABC가 케냐의 나이로비에 지국을 설치한 적이 있었지만, 두 방송사 모두
정치적으로나 지리적으로 대접이 나쁜 대륙 주변에 어른거리는 것에 대한 불안함
때문에, 또한 시청자들의 관심이 희박하다는 이유때문에 지국이 철수해 버린 사실을
기억해 보라. 환태평양 지역은 어떠한가? 무역분쟁등의 문제를 제외하고는 그 중요한
일본에 대해서도 우리는 놀랄 정도로 아는 바가 없다. TV 뉴스에서는 지구의 대부분이
블랙 홀로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다뤄지지 않는 주제도 너무나 많다. 사람들은 영화나 출판, 연극,
음악(록음악이나 클래식을 막론하고) 등 문화계 소식은 거의 듣지 못했다. 어떤
그림이 8250만 달러에 경매되었다거나, 도난을 당했다거나 하지 않은 이상, 시각
예술을 다루는 데도 소홀하다. 사진의 경우는 외설이라는 설명이 붙지 않는이상
뉴스거리가 되지 않는다. 우리의 미래, 후손들의 미래를 결정하는 데 너무나 중요한
과학분야는 빈약하게나마 취재대상이 되지만, 누가 왁찐을 개발했다든가 세계적인
전염병이 발생했다든가 수십억짜리 망원경을 실은 우주선이 발사되었거나 할 때만
보도가 될 뿐이다. 경제는 어떤가? 모든 시청자들의 주머니돈에 영향을 미치는
경제 뉴스는? 물론 이 달의 인플레율에 대한 짧은 언급이 있긴 하지만, 큰 문제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국가 재정 적자는 어떠한지. 왜 저축 여신 산업이 실패했는지,
사회보장제도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TV만 봐서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이러한 상황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방송사가 아이디어를 다룰 능력이 없다는 데
있다. 뉴스 방송은 전쟁이나 선거같은 사건은 성공적으로 취재한다. 그러나 신념이나
가치, 종교, 생활방식, 사고방식은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또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광범위한 문제, 즉 범죄가 날이 갈수록 흉폭해져 간다든가, 교통이 날로
혼잡해진다든가, 공립학교제도의 실패, 가진자와 못 가진 자간의 불평등의 증가 등
광범위한 흐름은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가? CBS의 경제담당 로버트 크룰위치 기자의
말처럼 TV는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는 생각이나 단어를 다루는 일에는 아주 서툴기
짝이 없다.
아마도 이러한 이유로 해서 각 방송사는 TV 뉴스를 사고가 아닌 사건과 사실의
연속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사건들은 어떤 형태를 취하고
있는가? 아무도 우리에게 넓은 시각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때
좀더 많은 해설이 뉴스에도 필요하다. 현재로서는 NBC이 존 챈셀러만이 저녁뉴스에서
그 역할을 이행하고 있고, 그나마도 많아야 1주일에 세번 정도 가능할 뿐이다.
방송 뉴스는 사실 자체 이상으로 가는 데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리고 방송되는
사실조차도 놀라울 정도로 문맥이 통하지 않는다.역사적, 지리적, 논리적 말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뉴스란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하는 요건을 갖춰야
한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왜?"는? 왜 이란과 이라크가 여러해동안 싸움을
벌여왔는지? 미국중동평화안은 무엇인지? 왜 우리의 형사재판제도는 제 역할을 하고
있지 않은지?
이는 앵커들 자신이 문제의식을 갖지 못해서가 아니다. 댄 래더는 말하기를
"정말 훌륭한 보도도 있습니다. 그러나 TV는 항상, 그 "깊이"에 문제를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뉴스프로그램에서는 문맥과 전망에 있어, 문제점이 있지요'라고 한다.
방송사들은 그들의 관심 분야를 확대시키려고 시도해 보기도 했다. ABC의
"American Agenda"나, NBC의 "Assignment America",
혹은 "Assignment Earth" 같은
프로에서 방송들은 구체적인 사건내용보다는 좀더 보편적인 문제를 보여 주려고
노력했다. 예를들어 성교육이 전세계적으로 어떻게 시행되고 있는지, 소도시에 마약이
미치는 영향, 산업의 발달이 공해를 일으키는 과정같은 것을 다뤄 보려고 애썼던
것이다. 이런 종류의 취재는 더 나아지기 위한 중요한 변화이지만 아직도 갈 길은
멀다.
일단 취재된 내용도 계속적인 뒷받침이 전혀 없다. 한 사건이 보도되고 나면 곧
망각속으로 잊혀지는 일이 허다 하다. 예를들어 핵의 냉융합이 어떻게 되었는지,
천안문 사태 이후 북경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등 뒷얘기 말이다.
다시 한번 방문하기를 외쳐 바라는 사건 중 하나가, 미국의 파나마 침공이다.
우리의 정부는 이 뉴스가 처음, 승인된 특파원들로 구성된 소규모 풀(pool)팀이
이 뉴스를 취재했을 때만큼, 더이상 사건에 대한 조정을 하지 않는다. 활자 매체들은
실제로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정확히 밝히는 데 실패한 TV 뉴스를 대신해 속죄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만일 "L.A Times"의 부장과 같이 군대의 서툰 전략 때문에 침공 당시 목숨을 잃은
군인의 4배나 되는 양민이 죽었는 보도는, 사건의 진지한 재평가작업이 시급히 나와야
마땅하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렇게 하기에는 수백만 시청자들이 지켜보는
저녁뉴스보다 더 적절한 매체는 없을 것이다.
보도되지 않는 많은 뉴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날 6시 30분을 봐도 세 방송사는
거의 같은 순서로 같은 내용의 뉴스를 보도한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다. 그러니 시청자
눈에는 세 뉴스가 거의 비슷해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각 방송사의 편집 순서는 비교적
비슷한 전문직 배경을 갖고 있고 TV 뉴스에 대해 비슷비슷한 정의를 내리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결정된다. 워싱턴의 정치는 뉴스가 되지만, 전국적인 개방 경향은 뉴스로
소개되지 않는다. 그런 것까지 취재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시간이 늘 원흉이다. 어떻게 22분안에, 그많은 이야기를 다 구겨 넣을 수 있는가?
그러니 한가지 얘기가 1__2분짜리 작은 단위로 압축될 수 밖에. 평균 7개 정도의 주요
소식이 보도되는 게 보통이고, 아주 큰 뉴스래야 3분을 넘길 수 있을까 말까 한
형편이다. 그러나 AIDS의 확산이나, 미국이 일본에 뒤지고 있는 상황, 아니면 이런
것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문제들을 어떻게 3분 안에 다 보도한단 말인가? 그리고
방송사가 계속 10초 이하의 sound bites를 사용하려는데 어떻게 사람들이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1988년 선거운동 때는 sound bites가 정확히 9.8초였다. 1968년에
40초 이상이었던 것에 비하면 너무나 큰 차이가 난다) 따라서 모든 뉴스는 속사포처럼
쏘아대어 시청자들을 얼떨떨하게 하고 어리둥절하게 만들어, 결국 불만스럽게만 해주고
만다. 그들은 정보를 전달받았다는 환영(illusion)을 지니게 되었지만, 그들이 얻은
것은 모두 "사실 비슷한 것들을 아무거나 대충 모아 놓은 것"뿐이다.
최근에 로버트 맥닐이 1960년대 중반 "헌틀리 브링클리" 방송 테이프를 볼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그때 방송은 속도가 얼마나 느리고 사려 깊은지, 정말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한다. 맥닐에 따르면 "거기엔 속임수도 없고 그래픽도 자막도 없었을 뿐
아니라, 광고라고는 살렘 담배 선전이 약 1분간이나 계속되었다"고 한다. "계속, 계속,
또 계속. 1분 내내 한 광고가 계속되더군요. 오늘날 그걸 봤으면 마치 한 사람의 일생을
그린 완전한 영화 한 편 같은 느낌을 주었을 겁니다" 가가의 보도물은 숫자는 적었고,
하나당 길이는 길었다.
맥닐은 재미있는 가정을 해보았다. 좀더 많은 시청자와 광고주를 끌어모으기 위해
방송사가 4번의 광고 방송으로 뉴스를 토막내는 것을 포함해서 짧게짧게 보여 주는
것은 시청자들의 짧아진 평균 집중력을 만족시키기 위해 애쓰는 결과가 아닌가 하는
해석이다. 그는 말한다.
"분명한 것은 전체적인 미학이, 광고의 길이에 의해 발달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광고시간이 점점 더 값어치가 나가는 만큼, 1분짜리 광고를 30초로, 다시
20초로, 다시 15초로 짜내는 것입니다. 모든 곳이 점점 빨라지니까, 광고에 비해 느린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뉴스도 자연히 속도를 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속도를 내는 데도 더욱 심각해지기만 하는 시간의 한계는 아직도 TV뉴스맨들의
큰 적이다. 모든 것을 어떻게 잘 싸넣느야 하는 것이 영구과제이다. 시간은 없고 할
얘기는 많은데, 사건을 설명하려면 적어도 1__2분은 더 있어야 하는데... 결코
취재되지 않은 얘기가 가득한데도 방송사가 그 중 몇 가지를 추려낸다는 것 자체가
그저 놀라움일 뿐이다.
예를 들어 보자. 1989년 4월 20일 목요일, "CBS Evening News"는 그들이나 그들의
경쟁사도 끊임없이 관심을 가졌던 야구선수 피트로즈의 도박에 대해 보도했다. 이것은
단지 대중들의 의견을 물어 본 CBS와 "뉴욕 타임스" 공동의 여론 조사만을 덧붙인 재탕
리포터였다. 절정이었던 것은 야구위원회 총감독 바트 쟈메티의 말이었다.
"No Comment "할 말이 없습니다"'였다. 또 무슨 말을 하라는 것이냐는 뜻이었을
것이다.
CBS는 여론 조사에 정신이 팔려 그 주변에 뭘 좀 더 덧붙여 보려고 애쓰며 그
보도물을 내보냈다. 사실 아무리 야구팬이라 할지라도 이제 그 이야기는 지겨웠다.
"우리 스스로 놓은 덫에 빠진 격이었지요. 전체를 다 죽이는 것을 생각해 봤습니다'
CBS의 수석 프로듀서 톰 베타크는 이렇게 솔직히 인정했다. "그 피트로즈 보도는
아주 더러운 경우였지요' 같은 날 밤, 이 말 같지도 않은 보도가 시간을 잡아먹는
바람에 다른 것들, 요르단의 후세인 대통령이 자기 나라에서는 폭동이 난무하는
가운데 백악관에서 레이건 대통령과 만찬을 즐긴 것 같은 보도는 미처 방송되지
못하는 촌극을 빚었다.
더욱 알 수 없는 것은 3대 방송사가 아주 정규적으로 저녁뉴스의 15p를 스퀘어
댄스나 북화술사 얘기, 귀신들린 마을이나 귀염둥이 고릴라 얘기에 할애하고 있다는
것이다. 3개 방송사 뉴스의 마지막 토막은 항상 시청자들에게 기분좋은밤을
선사하고 앵커들의 미소로 끝을 장식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것들은 흔히
"끝인사 물"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요리하고 부풀린 이런 얘기들이 전체 방송의
7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
지난해 NBC 뉴스는 22분짜리 저녁뉴스의 상당 부분을 할애해 엘카피탄산의 정상을
향해 조금씩 기어 올라가고 있는 하반신 불수 등산가의 얘기를 몇 번인가 다룬 적이
있다. 이렇게 여러 개의 도막으로 하는 것은 등산에 대한 그의 개인적인 애착과
고무적인 이야기에 대한 감상적인 접근이라는 명분이 서로 얽혀 아주 매혹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매일 밤 "Nightly News"의 시청자는 특수 장구를 착용하고 정상을
향해 조금씩 천천히 애쓰며 올라가는 장애인 등산가의 모습을 보아야만 했던 것이다.
이것이 뉴스일까?
브로커는 자신과 그의 방송프로에 대해 말할 때 늘 "절친한 마약 상용자"라는
단어를 쓴다. 이 말은 아무리 잘해도 끔찍한 말일 수밖에 없다. NBC에 공평하게 대해
주기 위해서인지 다른 두 방송사도 더 많은 시시한 얘기를 내보내고 있다. 그리고
브로커나 래더나 제닝스는 모두 이런 종류의 보도가 시청자들의 입맛에 맞을 거라는
잘못된 믿음에서, 또 오락적인 목적 때문에 이런 방향으로 더욱 멀리 떠밀려 갈 것이
분명하다. 방송사는 저녁뉴스를 보는 시청자들은 이런 종류의 인간 승리 이야기를
안 본다는 사실, 그리고 이런 것에 이끌리는 사람이라면 아예 처음부터 뉴스로 채널을
돌려 볼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오락성을 가미하라는 압력은 방송국의 새로운 기업형 주인이 오면서부터 더욱
심해졌다. 콩 계수기 같은 사람들이 권력을 휘두르는 자리에 앉아 있으니 이제 돈은
그 게임의 목적이 되고 말았다. 최근 듀퐁 언론상 세미나에 모인 현재 3대 네트워크
사장들은 한 가지 점에서 완전한 의견일치를 보고 있었다. 바로 돈을 벌기 위한
사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사회자 딘 코너는 조심스럽게 이런 결론을 내린다.
"회사의 이익과 상충하지만 않는다면 잘못된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대중의 이익에 부응하기 위해서 저녁뉴스는 시청자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 뉴스가 사려깊기도, 때론 불온하기도 하고 선동적이기도,
흥미진진할 수도 있는 것이다. 단 한가지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오락적"이 되는 것이다.
그래도 아직 ABC의 룬 알럿지 사장 같은 간부도 있어서 다행이다. 그의 인식은
이렇다. "공공의 전파를 사용하는 대가로 방송사는 특정한 수준에 오른 프로그램을
제공해야 합니다. 방송사가 뉴스와 공익 프로에서 수행해 왔던 전통적인 역할은
우리의 공공 책임의 한 실천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뉴스체제에서
모든 방송사의 사장이 똑같은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하다'고 NBC의
마이클 카트너는 말한다.@ff
16. 앵커맨 래더
댄 래더는 초조하고 불안했다.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은 바로 이 자리, 이 순간을
위한 것이었다. 1981년 3월 9일이면 그는 마침내 월터 크론카이트의 무대로 걸어
들어가 그의 자리에 앉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CBS 저녁뉴스"의 앵커맨이 되는
것이다. 월요일 이날, 꿈이 실현되었고 가슴은 터질 듯했지만 그 기쁨을 즐기기엔
걱정거리가 너무 많았다.
그때 래더 스스로에게 물어 보았던 질문이고, 또한 고참 프로듀서에서부터 데스크
보조까지 따라다니던 질문이 있었다. 어떻게 그가 미국에서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월터 크론카이트를 대신하겠는가? 어떻게 시청률 1위의 자리를 독점하여 온 그 신적
존재를 따라가겠는가? 어떻게 월터 아저씨의 자리에 그가 앉는가?
댄 래더는 도대체 마음이 나지 않았다. 1주일 내내 프로듀서들과 함께 연습을 하고
아무리 애를 써도 여전히 뻣뻣하게 어색했다. 래더 스스로도 인정하겠지만 당시 그는
너무 긴장되어서 웃은 한번도 자연스럽게 웃지 못했다. 30년이 넘는 아나운서 경력에다
적어도 10여 년동안 주말 앵커 또는 대리 앵커로서 활동해 온 노련한 프로였지만
그 날은 일어서든 앉든 거북할 뿐이었다.
그래서 그날 밤, 앵커로서 맞이한 첫날 밤, 래더는 크론카이트의 데스크에 앉지도
서지도 못한 채 한쪽 엉덩이만 걸치고 반쯤은 서고, 반쯤은 앉은 불편한 자세로
기대 있었다. 자기 자신을 찾고자 하는 어색한 노력이었다.
래더에게는 힘든 시간이었다. 젊고 팔팔한 저널리스트들이 TV 뉴스의 성산 올림푸스에
밀고 들어와 있었고, 이제 그도 자격이 있음을 보여 주려 애쓰고 있었다. 그는
비평가들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자기 자신까지 확신시켜야 했다. 항상 그는 그 상황을
싸움에 비교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 방송이 끝나서 기뻤다. 끔찍하게 두려웠고 정말 잘하고 싶었다. 그러나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스스로 해야했다. 알다시피 나는 고등학교,
대학교에서 권투를 하고, 몇몇 대회의 우승을 하기까지 권투선수로서 상당한 시간을
보냈는데 트레이너나 다른 사람들이 무어라 말하든 일단 공이 울리고 앉았던 의자가
내려가면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만 남는 것이다'
사실 래더가 이러한 한 판 결승에 이르게 된 것도 꽤 힘든 일이었다. 일찍부터 부통령
버드 벤자민에서 찰스 쿠랄트까지 모든 사람들은 크론카이트의 후계자는 로저 머드가 될
것으로 생각해 왔다. 머드는 워싱턴에서 일해 왔으며, 존 윌크스를 치료해서 "그의
이름은 머드"라는 말을 만든 할비 머드늬 후손으로 명문가 출신이었다. 민감한 워싱턴
정가의 소식통으로 머드는 래더와 달랐다. 머드가 신중하고 손으로 쓰는 사람이라면
래더는 성급하고 발로 뛰는 사람이었고, 머드는 동부 해안에서 교육받고 석사학위를
받은 지략가이지만 래더는 텍사스 출신의 쌈꾼 정도였다. 두 사람 다 CBS의 사다리를
올라가도록 단련받아 왔지만 많은 사람들은 머드가 승리하리라 생각했다. 그는 처지가
있으며 역사를 체계적으로 공부했고, CBS의 뉴스에 강직하고 굴하지 않는 헌신을
해왔었다. 당시의 CBS는 딱딱한 뉴스의 "교회"로 여겨졌었고, 머드는 교황이 되기에
알맞은 경건함을 가지고 있었다.
래더는 민권소요에서부터, 머드가 정가의 전문 지식과 자기 과시의 저널리즘에 대한
혐오감을 들어 가기를 거부한 베트남까지 가면서 기회가 나는 대로 자신의 헌신과
용기를 드러내 보였다. 그는 조금은 지나치게 요란하고 번지르르하면서 정도를 벗어난
듯했다. 늘 시선을 끌고 다녔고 신중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솔직히 너무 새로웠다.
어디를 가든 특히 워싱턴의 조심스러운 공간에서도 그는 일을 벌렸다.
TV 시대에는 일을 일으키는 능력이 곧 돈이라는 것을 CBS 사람들은 거의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래더는 돈을 끌어 들이고 있었다. 그가 "60Minutes"에 참여했을 때
시청률은 급격히 상승했으며, 36세에, 즉 시청자의 36p를 차지했는데, 이것은 TV
역사상 뉴스가 오락프로를 앞지른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결과로 CBS 뉴스는 처음
흑자를 냈다.
CBS의 경영진은 래더의 잠재력을 조금 늦게 인식하게 되지만 ABC는 달랐다.
빨간머리의 ABC 뉴스 국장인 룬 알럿지는 한번 보면 시청자를 끌어들이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는 야한 여자나 보석을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TV에 대해 민감했다.
ABC는 스포츠 국장일 땐 ABC를 상징하는 "승리의 떨림, 패배의 쓰라림"이라는 말
이외에도 느린 동작 또는 동작을 보여 주는 스포츠 보도와 관중석에 있는 귀여운
여자를 잡아 보여 주는 것 등을 실행했다. 1977년 그는 ABC 뉴스의 국장이 되었고
승리의 떨림을 원했다. 그래서 탤런트, 프로듀서, 통신원들을 끌어들이려 CBS를
적극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조오지 스타인브레너처럼 알럿지는 두 배, 세 배의
보수를 약속하며 가장 훌륭한 팀을 만들려 했다. 결국 너무나 많은 CBS의 프로듀서와
통신원들이 ABC로 떠나버려서, CBS 워싱턴 지국에는 "ABC로 마지막 떠나는 사람은
불 좀 꺼주세요"라는 표시가 붙을 정도였다.
알럿지는 무엇보다도 팀을 이끌 중심이 될 수 있는 선장을 필요로 했고, 댄 래더를
적임자로 생각했다. 그를 얻기 위해 알럿지는 놀라운 조건을 제시했다. "World News
Tonight"을 한 시간으로 늘려 래더에게 맡기며 큰 기사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현장에서
뉴스를 진행할 수 있도록 하고, 원한다면 "20/20"에서부터 생방송과
기록방송까지
맡도록 하겠다. 게다가 경영에도 참가시키며 어떤 기사를 보도하고 누구를 고용하고
해고할 것인가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도록 하겠다고도 했다. 그리고 보수는 거의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크론카이트도 65만불 받을 때 그에게 200만 불을 지불하겠다고
했다. 최고 영화배우의 수입이었다.
바바라 마튼소가 쓴 "The Evening Stars"에 자세히 쓰여 있는 대로 협상은 여러 달
끌었다. CBS의 뉴스국장 빌 레오날드는 래더와 머드 두 사람을 다 내세워 새로운
헌틀리 브링클리 팀으로 공동 앵커 체제를 만들려 했다. 래더는 기꺼이 하려 했으나
머드는 달가워하지 않았고, 둘 다 머드가 유리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ABC의 제안은 모든 것을 바꾸어 버렸다. 레오날드는 번들거리는 래더를
단독 앵커로 세우는 것을 분명히 하지 못했으나 다른 방송사가 시청률을 끌어올리는
그를 데려가도록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대단한 조건으로 응수해 나갔다.
10년에 걸쳐 2200만 불을 지급하며 5년마다 재교섭을 할 수 있도록 하고, ABC가
제시한 것과 비슷한 경영권을 제시했다. 이러한 모든 과정에서 머드는 손을 더럽히거나
하는 것처럼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래더는 리차드 리브너를 대리인으로 하여
ABC와 CBS의 앵커 자리를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 있는 위치에서 교섭을 했다.
결정을 하는 동안 래더는 괴로웠다. ABC의 마지막 제안은 우수한 프로듀서로 이루어진
스텝을 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연봉은 거의 300만 불에 달했다. 또한 그것은 새로이
시작할 수 있고, 크론카이트 그늘을 벗어나 새로운 탑을 세울 수 있는 자리였다.
그러나 CBS는 그이 고향이었다. 그는 CBS에서 성장했고 신의를 소중히 여겼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조차도 의견이 갈라졌다. 대리인 리브너는 ABC에서 출발하라 했고, 그의
아내 진은 처음에는 ABC를 선호하다가 신의와 CBS의 편에 섰다.
약 8개월에 걸쳐 래더는 빙 존스톤과 같은 오랜 친구와 CBS의 동료들에게 충고를
구하며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의 오랜 동료인 허포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물어보면서 그가 찾아다닌 사람들이 놀랄만큼 많았습니다.
나도 한 사람이었지요. ABC로 갈 시기가 있다면 지금이 그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알럿지가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하고 있다는 말이 있었지요. 래더는 마음을 적어도
열 차례 바꾸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을 원하는지도 확신하지
못했지요.결국 진은 CBS를 강력히 주장했고, 그는 결정을 하면서 그녀의 상식에 크게
의존했지요'
크론카이트를 계승한 첫번째 사람은 얼굴을 잃어 버리게 되니 ABC로 가라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신의는 CBS로 저울을 기울게 했다. 게다가 다른 이유가 있었다.
CBS는 래더가 늘 숭배해 온 교회였다. 그의 급한 마음은 활기차고 새로운 ABC 팀을
영광으로 이끌고 싶었다. 그러나 더욱 깊은 곳에서는 CBS 뉴스 최고 전달자가 되기를
더욱 바랐다. 그것은 전통이었다. 결국 ABC에서 새로 시작했다면 더욱 행복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크론카이트와 함께 나란히 서 있는 순간을 지나칠 수 없었을 것이다.
신의를 지켜 CBS에 남은 래더의 모습을 잡기 위해 카메라의 플래시가 터질 때 그의
표정은 삶의 소망이 이루어졌다고 느끼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 주었다. 웃을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래더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너무도 밝아 춤추는 듯했다. 스스로도
말하듯이 그는 솜방석에 앉았다.
그러나 머드는 달랐다. 래더의 발표가 있기 두 시간 전에 레오날드는 머드에게 그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CBS 워싱턴 사무실에 갔다. 쓴 만남이었다. 래더의 즉위식이
거행될 때 머드는 CBS의 경영진과 CBS 뉴스는 시류에 따라 크론카이트의 후계자를
결정했고, 자신은 처음부터 스스로를 뉴스 진행자나 유명인사가 아닌 뉴스 기자로
여겨왔다는 한이 배어 있는 말을 했고, 몇 달만에 문을 박차고 NBC로 떠나 버렸다.
그러나 더욱 쓴 열매는 뒤에 남는다. 래더가 앵커를 만났을 때 CBS에는 여전히
머드가 적임자이고, 그는 아니라는 사람들이 있었다. 래더는 CBS가 다른 경쟁사를
앞지르게 될 거라고 큰 소리 쳤으나 몇 달 안 가서 그는 버둥거렸다.시청률이
1.5포인트 떨어지고 CBS가 오래 지켜온 우위를 포기하면서 비평가들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내가 실패하는 것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외부에는 많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CBS 내의 모든 사람들은 나는 밀고 있다고 믿었지요. 그렇지
않다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날 때도 나는 믿으려 들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내가
이 자리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은 엄청난 충격이었고 심한 상처를 입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의도대로 된 것이지요.
모두들 그럴 만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러한 일에도 좋지 않은 면이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몸만 큰 어린아이고 세상은 거친 곳이지요. 그러나 나는 어느 누구도
적극적으로 내가 실패하는 것을 보려고 애쓰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래더가 "장검의 행렬"이라고 부르는 시기가 왔고, 그때 그는 포위되어
갇혀 있다고 느꼈다. "어느날 사무실의 문이 열려 있고 머드의 친구들과 지지자들인지,
사람들이 "래더는 엉망이야. 5주 안에 여기를 떠나게 될 거야"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고 그것은 들으라는 소리였습니다. 그것은 대단한 충격이었지만 어떤 면에서는
나를 구한 것입니다. 그때 나는 "이제 나에게 달려 있어"라고 생각하게 되었지요'라고
그는 말한다.
래더는 지금까지 겪어 온 모든 경우와 마찬가지로 스스로 터득한 철학, 즉 좀
속되기도 하면서 마음을 움직이는 철학, 맨주먹으로도 하면 된다라는 텍사스의
정신으로 이 싸움을 대처해 나갔다.
"머리를 들어라. 그리고 저 길을 알려 주는 북극성을 바라보자. 옆에서 일어나는
일에 신경쓸 필요는 없다. 뒤에서 일어나는 일이야 아무것도 아니지. 그것은 농사꾼의
힘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남보다 먼저 발을 내딛고 똑바로 걸어라. 피나는 훈련을 하고
굳은 결의를 해도 쓰러질 때가 있을 것이야. 하나님이 돕고 가족이 도와도 비틀거릴
때가 있을 것이다. 쓰러지지 않으면 다행인 것. 나는 여러 번 쓰러졌었습니다. 그러나
그때가 바로 일어나서 방향을 정하고 나아가려고 굳게 마음먹어야 할 때였습니다'
CBS에서의 어려움은 "네드 퍼스트(Net first)"라는 조직체게에 집중되어 있었다.
뉴스국에는 CBS의 경우 "Evening News" 이외에 "60minutes"와
"Sunday Morning" 등의
뉴스쇼가 있듯이, 여러 개의 뉴스쇼가 있는데 네트 퍼스트란 NBC가 최근에 마련한 뉴스
데스크의 조직과 비슷하게, 보도자료를 마련하기 위해 모두가 동료로서 일하고 어떤
쇼가 다음에 있는지에 따라 그 결과를 나눈다는 것이다. 이러한 운용방법은 대단히
합리적인 것처럼 들리지만 래더에게는 방송망의 중심이되는 "Evening News"가 임시로
꾸려진 스텝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과 곧 침몰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래더는 ""Evening News"는 매일매일 방여되는 CBS의 가장 중요한 방송인데 최고의
프로듀서와 카메라맨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싸우고 있다면 최고의 사람과
물자가 없는 한 나는 이길 수 없다. 나나 방송사가 버티어 갈 수 있는 힘은 이 점을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달려 있었다'라고 말한다.
그가 CBS의 팀으로부터 최고의 것을 얻지 못하고 있다고 느꼈다면 그것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네트 퍼스트 조직은 민첩하게 움직이지는 못했었다. 그러한 상태에서 새로운
일에 대한 긴장감과 떨어진 시청률등은 그의 걱정을 더욱 크게 했을 것이다. 그는
"Evening News"를 최고로 만들고자 하는 전사였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풍차를
공격하는 돈키호테처럼 그림자와 싸우고 있는지도 몰랐다.
당시 뉴스 편집자였던 피터 스튜테벤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래더는 조직이 뒤를
밀어주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는 화가 났지요. 일이 잘못되거나 해야 할 만큼
보도를 잘하지 못했을 땐 그것은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들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한번은 "저녁뉴스"는 적절한 자료를 못 받고
"아침뉴스"는 받은 적이 있었지요.그때 래더는 우리 사무실에 와서 소리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가 크론카이트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지요. 나는
그 말에 대단히 놀랐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다르게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갑자기
무엇이 그를 자극하는지 알게 되었지요. 무엇이 그를 불안하게 하는지 알게 된
것입니다'
크론카이트는 래더에게 분명 아버지와 같은 모습이었다. 래더는 크론카이트를
숭배한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 여러 차례 인정한 대로 앵커 경력이 꽤 될 때까지도
그를 기쁘게 하고 그를 따라 하고자 했으며, 동시에 그의 그늘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머드의 지지자들이 이미 화살을 날렸으니 래더가 자기 편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그의 편집증일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CBS의 스텝 중에서 그를 이해하려고 한 사람도 없지 않았습니다' 포위된 채
동시에 두 개의 전투, 즉 타 경쟁사와의 시청률 다툼과 회사 내의 분쟁을 치르면서
래더는 어떤 내용을 보도하고, 또 누가 보도할 것인가 하는 분명한 결정권을
스튜테벤트와 같은 네트 퍼스트의 집행자로부터 가져와 자신과 "저녁뉴스" 사무실을
강화함으로써 자신의 영향력을 공고히 했다.
물론 당시의 CBS 뉴스국장이 막았다면 이러한 일은 하나도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1982년 말 부임한 교수 타입의 벤 고든 수더는 파이프를 즐기고 수염과 보기
좋게 나온 배를 자랑하는 사람이었다. 피터 보이어가 "누가 CBS를 죽였는가?
(Who killed CBS?)"에 자세히 쓴 것처럼 수더는 자신이 해야할 가장 중요한 일은 알을
낳은 래더를 행복하게 하는 일이라 여겼다. 그래서 앵커에게 모든 권력의 고삐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래더는 긍정적인 면에서 그리고 부정적인 면에서 즉 자신의
뉴스쇼의 위세를 되찾기 위해서 그리고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한 모든 권력을 흡수해 나갔다. 계약상 편집국장인 래더에게 수더는 왕국의 열쇠를
건네주었다.
전 CBS의 프로듀서였던 리차드 코헨의 말에 의하면 래더의 승인이 없이는 비서 한
명도 채용하지 못했고 서류 클립조차도 움직이지 못했다고 한다. 크론카이트는
뉴스쇼에서 한 가지 역할만 했을 뿐이다. 그는 오후에 나타나서는 요트 항해에 대해
농담 좀 하다가 보도자료를 재정리하는 것으로 스텝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그는
월터가 원한다는 의미의 "WW"를 사용하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래더가 1982년 말 휘두르던 권력 같은 것을 본 적이 없었고, 크론카이트의 프로듀서였던
로스 벤슬리의 말대로 아무도 그러한 권력을 쥐어 본 적이 없었다.
수더와 래더는 함께 뉴스국을 흔들어 다시 편제했다. 스텝은 두 부류 즉,
크론카이트를 따랐던 옛 사람들과 래더에게 충실한 새로운 사람들로 나뉘어졌다. CBS는
대청소가 필요하다고 생각도 했고, 새롭게 시작하고 싶기도 해서 래더는 크론카이트의
프로듀서 샌디 소코로나 통신원 모튼 딘과 같은 사람을 내쫓았다. A급 통신원과 B급의
통신원 목록이 만들어졌다. 래더는 한 통신원에게 보고하듯 말한다. "보시오, 이곳은
연극과 같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연을 맡고 또 어떤 사람들은 조연을 맡지요.
당신은 바로 그 조연을 맡은 것입니다'
래더는 "저녁뉴스"를 잘해 보려는 욕심에 필요한 사람을 탐욕스럽게 챙겼고, 다른
뉴스쇼에도 못 참가하게 했다. 전 "일요일 아침"의 프로듀서였던 로버트 셰드 노스실드는
"그들이 우리 건물에 들어서는 것만 보여도 심하게 야단을 쳤습니다'라고 말한다.
수더와 래더는 함께 새로운 CBS 뉴스의 철학을 세웠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뉴스는
지나치게 워싱턴을 다루면서 사람 사는 현장을 다루지 못했고, 소수의 의회는 지나치게
다루면서 실제 사람에 대해서는 소홀했다는 것이다. "순간들"이라 알려진, 앞에서
언급했던 마음을 움직이는 원리가 그 핵심에 있었다. 그래서 CBS의 기자들과 래더 자신도
항상 순간을 포착하고, 그리고 시청률을 높이려 무릎까지 빠지는 외양간도 밟아야 했다.
이러한 시청자를 움직이는 뉴스는 대단한 인기였다. 1982년부터 1983년까지 래더와
그의 팀은 경쟁사를 크게 앞질렀다. CBS가 200주 이상 계속 정상을 차지하면서 모든
걱정과 긴장이 해소되었다. 그를 괴롭히던 시청률은 이제 그를 어루만지고 격려했다.
수더의 도움으로 래더의 길은 순탄했다. "때때로 하루이 일을 마치고 우리는 그의
책상에 다리를 올리고 맥주를 마시며 "이봐, 멋지지. 안 그래?" 하고 말했었지'
그러나 드러나지 않은 부분까지 모두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1980년대 중반 시청률이
다시 떨어지기 시작하자 보이지 않았던 균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순간이라는 개념은
딱딱한 뉴스에 익숙한 많은 CBS의 스텝의 마음에 맞지 않았다. 그들에게 그것은 교회의
이단과 같은 것이었다. 또한 그들 자신과 오랜 CBS의 스텝이었던 그들의 친구들이
수더와 래더의 지배 하에서 함부로 내몰리는 것에 몹시 마음이 상했다.
이러한 내부의 고통에 테드 터너부터 제스 헬름즈까지 CBS를 인수하려는 모든 사람들의
시도와 래더, 마이크, 월래스, 딘 휴위트에 의한 방송망을 매수하려는 내부 시도 등
외부의 고통이 더해지자 상황은 정말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1986년 중반 내부 권력
다툼이 이사 래리 티쉬에 의해 벌어졌을 때 "뉴스위크"지는 그 상황을
"CBS의 내란"이라는
말로 표현했고, 검은 표지에 찢어진 CBS의 눈을 그려 놓고 "전설적인 방송망의 영혼을
찾는 몸부림"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었다.
그리고 200명이 넘는 대규모 해고를 포함하여 분위기를 바꾸려는 해고가 잇따랐다. 셰드
노스실드는 2년 동안 프랑스혁명과 같았고, 마차는 몸체도 없이 이리저리 끌려다녔다고
회상한다.
어느날 래더는 "용기"라는 말을 씀으로 방송을 마쳐 뉴스 룸의 스텝을 놀라게 했다.
아무도 그 의미를 알지 못했지만 매일 밤, 1주일 동안 방송은 용기라는 말로 끝났다.
아마도 그것은 장군이 부대에게 고개를 돌라며 연설하는 것처럼 CBS에 사기를
높이려는 시도인 듯했다. 그것은 일종의 래더의 재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용기를
내라는 권고는 나타날 때처럼 갑자기 사라졌다.
한편으로는 그 일은 당시 CBS의 상황과 같았다. 아무도 무엇이 어떻게 되는지 몰랐고
소문만 무성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앵커로서 래더의 10년간의 신분보장을 상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아닌 것도 있지만 좋은 의도가 대부분이 여러가지의 해석이
가능한 이상한 일이었다.
래더의 초기 앵커 시절부터 그의 복잡한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쉽게 말해서 모든 사람들은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었고, 하나도 같은 것이 없었다.
감추어져 있고 단단히 싸맨 래더의 성격에는 CBS 내부의 사람들이나 외부의 사람들을
심리학자가 되게 하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래더에 대한 화제를 꺼내면 반드시 그의 관대함이나 우정에 대한 성실함에 대해
듣게 된다. "48시간"의 프로듀서 앤드류 헤이워드는 래더는 그와 단 몇 마일만 같이
간 적이 있어도 대단한 우의를 표한다고 말한다. 래더는 방송이 끝나면 현장의
기자들에게 격려의 전화를 했다. 파나마의 마룻바닥에서 자고 있는 리차드 스랠켈드와
같은 통신원이나 버나드 골드버그에게 그 전화의 의미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가 직접
할 것 같아서 대신 나가서 일을 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라고 골드버그는 말한다.
골드버그의 경우 래더의 신의에 대한 한 사건이 대단한 감동을 주고, 가슴에 깊이
박혀 있다. "나는 당시의 CBS 뉴스국장인 에드 조이스에게 가서 통신원이 되고 싶다고
말했고 그는 래더와 그의 프로듀서에게 가보라고 했지요. 그것은 그들의 결정에 달린
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래더와 프로듀서에게 말했고, 그는 다 듣고 좋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내가 한 편의 보도를 마치자 그는 "통신원 버나드
골드버그였습니다"라고 말했지요. 그런데 에드 조이스는 방송이 끝나자 당장 전화를
걸어 레인과 래더에게 소리쳤습니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다시는 그렇게 하지
마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조이스는 나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지요. 조이스는 내가
통신원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러나 다음에 내가 보도를 마치자 래더는 나를 "통신원 버나드 골드버그였습니다"라고
다시 소개했지요. 걱정스러웠지요. 그러자 조이스는 그를 불러들여 욕을 했고, 래더는
웃으며 대답만 했지요. 그러나 그 다음날 조이스는 CBS를 떠나고 래더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서 "버니, 통신원을 잊지 말게. 바로 자네거든'
래더는 앵커의 일을 하면서 텍사스 작은 도시의 매력, 즉 함께 하는 정신 그리고
스텝에 대한 염려 등을 살렸다. 그의 강한 이미지와 달리 그는 주머니가 바닥날
정도로 남에게 호의를 베풀고자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아주 사소한 일에도 많은 꽃과
화려한 화환을 보내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베시 이톤 기자는 1970년대 중반
조오지아 주에서 KKK단의 행진을 취재하다 다리가 심하게 부러졌던 일을 기억한다.
그녀는 래더를 잘 알지 못했으나 래더는 대단했다고 기억한다. 그는 편지를 쓰고
전화를 했는데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세 명의 CBS의 기술자가 57번가
주차장에서 총에 맞아 살해되었을 때 그는 미망인들을 열성으로 돕고 위로하였다.
래더는 감상적이엇으며 구닥다리였다. 분명 야망이 있었고 나아가려고 했으나
그는 사무실에서 어울리고 호감을 얻고 싶어하는 촌사람이었다. 그러나 서부 57번가
토끼장 같은 복잡한 사무실에서 삶에 익숙한 CBS의 직원들은 그의 매력을 의심했다.
그들은 래더가 너무 지나치게 열심히 애쓰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어느날 래더가 막 일을 마친 후, 프로듀서들이 뉴스 룸에 둘러서서 그날의 쇼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은 때 "커피를 어떻게 타 드릴까요?' 하고 묻는 소리가 들렸다.
래더였다. 그는 손에 메모지를 들고 방에 있는 사람들의 커피 주문을 받고 있었다.
아무도 어떻게 생각해야 할 지 몰랐다. 그들은 이상한 일이고 무언가 일을 꾸미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때 래더의 프로듀서였으나 지금은 소원한 관계에 있는 리차드 코헨은 래더의
초기 앵커 시절에 대한 한 이야기를 말한다. "래더는 불분명하고 확실치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월터는 어떻게 했지?" 하고 묻곤 했지요. 예를들면 신통하게도
그는 데스크보조까지 모든 사람들의 이름을 알고 있었습니다. 월터는 몰랐거든요.
어느날 누군가 그에게 그러한 이야기를 했는 모양입니다. 나에게 와서는 "실수는
아닌가? 조금 거리를 두어야 하나?"하고 물었지요'
자신의 역할에 자신이 없고 약한 래더는 솔직하지 못하다고 여겨지는 많은 모습을
보였다. 그는 정말 일을 열심히 바로 하려 했다. 그러나 촌 출신인 그는 사람들의
면전에다 심한 말을 할 수 없엇다. 그래서 그가 진실치 못하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몇 명의 CBS 프로듀서들은 경영진과 다툼이 있었을 때에 대해 말한다.
그때 래더는 그들에게 들려서 그들은 아무 문제도 없다고 말했지만 그들은 "댄이
음흉한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한다.
사실 친구들도 그의 완곡한 어법을 놀리곤 한다. 오랫동안 CBS의 프로듀서였으며,
댄 래더의 친구인 앤드류 헤이워드는 "댄체" 언어에 대한 재미있는 몇 가지
이야기를 한다. 그는 래더가 안달을 하면서 뉴스 룸에 들어서서 "쉬고 싶다.
그러나...' 하고 말하는 것을 놀린다. 물론 요점은 "그러나"에 있었다.
헤이워드는 "나는 그것에 대해 놀랐습니다. 가장 좋은 예를 들자면 슐츠와
셰바르드나제의 회담이 끝난 후 제네바에 있을 때입니다. 앵커들은 모두 그 곳에
있었고 우리는 모두 레이건이 중요한 연설을 할 워싱턴으로 뉴스 시간에 맞게
도착하지 못하면 어쩌지? 제네바에 남아서 뉴스를 진행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그를 확신시켰고 비행기를 전세내어 런던으로 가서 콩코드를 탔지요'
"그 비행기에는 브로커, 제닝스, 래더 모두가 있었습니다. 대서양을 건너 45분
지났을 때 기장이 와서 "신사 숙녀 여러분, 여기 빨간 불이 켜져 있습니다. 우리는
연료를 버리고 영국으로 돌아갈 것입니다"라고 말했지요. 걱정되지요. 방송시간에
맞게 돌아가지 못할는지도 모르고, 못 가게 될지도 몰랐습니다. 비행기 뒤쪽에
가보니 래더는 자기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서 있었지요.
그가 한 말은 "내 탓이야"란 말이 전부였습니다'
이것이 래더의 본성이었다. 그것은 그의 경쟁심에다 다른 무엇가에 대해 말해
준다. 헤이워드는 말한다. "그것은 대단히 많은 차원에서 이해됩니다.
"내 탓이오"란 말은 사실 그가 우리를 탓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는 자신을 탓해야 합니다. 그는 늘 "일이 나면 그것은 나의
책임이야"라고 말해 왔기 때문입니다'
대단히 야심이 많고 부담이 크며 자기 의심이 많고 상반된 감정에 시달리는 이
복잡한 인물은 항상 경쟁자인 제닝스나 브로커보다 더욱 열정적인 것 같았다.
래더는 늘 실제의 삶보다 조금 크게 비쳤다. 그에 대한 작은 일도 뉴스였다. 그가
스웨터를 입었는지, 그가 서 있든 앉아 있든 모든 것이 보도되었다. 이러한 그의
개성은 보이는 것보다 더 큰 것 같았다. 그것이 그의 힘이고 매력이었다. 그것은
또한 그의 파멸의 원이었다. 그는 TV에 나왔다 사라지는 고전압의 인간이었다.
이것은 공장에 있는 사람들이 그를 "피뢰침"이라고 말할 때의 의미이다. 그는
태풍에도 맞서는 사람이고 정치 집회에도 호되게 당하기도 하는 사람, 즉 주위에
일으키는 사람이었다. 그는 종종 보디가드인 전 비밀정보원인 토비 챈들레와 함께
다니고 집에 총을 준비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시카고에서 일어났던 잘 알려지지 않은 자동차 납치 이야기를 들어보자.
"60Minutes"의 방송을 위해 작가 스터드 털겔을 만나기 위해 가는 길에 래더는
오하라 국제공항에서 택시를 탔다. 그 택시 운전사가 시카고 주위를 꾸불꾸불
돌아다녔고 래더는 그가 길을 모르거나 아니면 속임수를 쓰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운전사에게 멈추라고 했다. 그러나 운전사는 요금 12불 50센트를
못 받을까 걱정되어 속도를 높였다. 택시가 도시의 거리를 질주할 때 래더는
고개를 창밖으로 내밀고 도와달라고 소리쳤다. 그것은, 래더는 고소하겠다고
하고 운전수는 명예 훼손에 대해 불만을 토한 사소한 사건이었고 모든 신문은
요란하게 보도되었다. 그러나 오랜 친구인 빌 존스톤에게는 더 큰 것을 말해
주고 있다.
"한번은 뉴욕에 있는 래더를 만나러 갔습니다. 그래서 라쿠아디어에서 보스톤까지
셔틀버스를 타야 했습니다. 그는 나에게 "동부 터미널이 아닌 동부 셔틀 빌딩에
내려주도록 분명히 해야 해. 요금에다 4달러를 더하려는 그들이 잘 쓰는 수법이지.
순진하게 취급되는 것은 정말 성질나는 일이지"라고 말했습니다. 아시겠지만 그것은
4달러의 문제가 아니라 원칙의 문제였지요. 그는 누구도 그를 이용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것이 그를 움직이는 것이었습니다'
분명히 가장 알려진 "피뢰침" 사건은 1986년 10월 토요일 밤늦게 일어났다. 아주
기분좋은 10월의 밤, 애브뉴 공원 아래로 어슬렁거리며 집으로 돌아던중 30대의 한
남자가 길을 막고 물어보았다. "케네스, 주파수는?" 래더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그리고 사람을 잘못 보았다고 주장했다. 바로 이때 2백 파운드가 넘는
이 옷을 잘 입은 백인은 래더에게 번개처럼 달려들어 턱과 몸을 쳤다.
래더는 한 블럭을 달려내려가 파크 애브뉴 1075에 있는 한 건물의 로비로
들어갔고, 래더를 때린 사람과 또 한 사람이 쫓아와서는 차고 때리며 내내 "케네스,
주파수는?" 하고 물었다. 건물의 관리원이 뛰어 나오자 그 두 사람은 온몸이 심하게
다친 래더를 남겨두고 도망갔다.
때린 사람은 아무도 잡히지 않았고 그 이상한 일은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그러나 재미있게도 CBS의 어느 누구도 래더가 말한대로 그 이야기를 믿는 것 같지
않다. 그의 절친한 친구 데이비드 벅스범은 그가 자신의 아파트에서 기분좋게
스파게티 시가를 하고 좋아하는 영화 패튼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고
주장하지만, CBS의 많은 사람들은 여자가 관련되어 있고 화가 난 남편이나 남자
친구로부터 경고로써 매를 맞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는 단지 소문이다.
그러나 많은 CBS의 스텝들은 사실이라고 확신한다. 지금도 래더가 비행기 추락을
보도하기 위해 늦게까지 남아 있는 것에 대해 화를 내면 스텝들은 래더가 데이트
약속을 깨야 하는 것을 농담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별난 일이지만 별로 알려지지 않은 사건들이 있었다. 복잡한
케네디공항의 터미널을 빠져나가다 래더는 뒤따라와서 한마디 말도 없이 그를 때려
눕힌 어떤 사람에게 공격을 당했다. 그리고 피터 보이어가 말한 대로 래더가
전당대회가 열리고 잇는 샌프란시스코의 노브 힐을 천천히 걷고 있을 때 무엇을
할 것인지를 소리치면서 한 미친 사람이 달려 들었다. 이 사람은 나중에 뉴욕으로
와서 힐튼 호텔에 투숙하여 전화로 래더를 죽이겠다는 말을 전했다. 그 남자는
잡혔지만 래더를 섬뜩하게 했다.
이러한 모든 사건들이 돌풍을 일으키는, 즉 극도의 감정을 자아내는 래더의
능력에 대한 것을 말하지만 어느 것도 앵커로서의 일과는 관련이 없없다. 이러한
것들은 래더의 주위에서 일어난 일이고 그가 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마침내
마이애미에서 6분간의 방송 중단 사건이 발생한다.
2987년 9월 11일, 래더와 "CBS Evening News" 팀은 마이애미에서 교황 요한
바울 2세의 방문을 보도하고 있었다. 먼저 방송되고 있던 미국 오픈테니스경기
프로그램이 배정된 시간을 조금 지났었다. 6시 35분 50초에 그 프로그램은
끝나고 네트워크는 "저녁뉴스"로 연결되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전
미국의 CBS로 돌려놓은 TV 화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6분 6초 동안.
전 CBS 뉴스 마티 코겐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것은 정말 엄청난
순간이었습니다. 저널리즘 학교에서 공부할 때 TV에는 유일한 죄가 있다고 배우지요.
그것은 아무것도 안 나오는 것이지요. 그 이외의 어떠한 것도 그보다는 괜찮지요.
색상이 있는 줄만 보여 주는 것까지도 좋지요. 그런데 세계에서 가장 전문적인 뉴스
방송이 화면을 안 보여 주는 일이 생긴 겁니다'
다음날 CBS에서 나온 공삭적인 설명은 다음과 같다. 래더, 톰 베타크, 그리고
그들의 팀은 테니스 경기가 그들의 시간을 넘어서고 잇는 것을 걱정했다. 래더는
전화를 찾아 CBS 뉴스국장 하워드 스트링거에게 불만을 말하러 나갔다. 그가 나가
있는 동안 시합이 끝나고 방송은 마이애미로 연결되었다. 래더를 찾을 수 없었다.
몇 분이 지났다. 그를 찾았고 그는 뛰어들어와 앵커 자리에 앉았고 방송은
시작되었다. 엄청난 실수이다. 그러나 실수일 뿐이다. 회사의 입장은 그랬다.
그러나 CBS의 설명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이었다.
모든 이야기에서 유일한 진실은 래더의 분노였다. 그는 미칠 정도로 화가 났다.
그에게 단지 프로그램이 아니라 신성한 것인 "저녁뉴스"가 하찮은 테니스
시합때문에 수난을 당하고 있었다. 래더는 아직까지도 그 일을 빈정대며 말했다.
"테니스 준결승이라니. 뉴스는 중요한 것이다. 믿을 만해야지. CBS 뉴스는 다른
방송사의 것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책임이 있습니다. 누구도 이것을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내가 매일 그 일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면 사람들은 내가 이 일을 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 테니스 시합이 자신의 방송시간을 넘어서고 있는 것을 알고 래더는 놀랐다.
모든 일이 사전에 결정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하워드 스트링거에서
전화해서 한마디 하려 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화면이 꺼져 버린 그동안 사실
래더를 못 찾은 것이 아니었다.
당시 뉴욕 조정실에 있었던 CBS의 프로듀서인 한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들은 래더를 찾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찾을 수 없다니. 온통 기자들과 방송
관계자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앵커를 찾을 수 없다고 할 수 있습니까?'
사실 여러가지의 경로로 확인된 것은 그가 화가 나서 발코니에 나가 마이애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원래 스포츠국에서 지나간 필름으로 시간을
잡아먹고 있다고 생각했었지요. 그러나 곧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지요. 그는
상황이 어떠한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대단히 화가 나 있었고
그래서 앵커 자리에 앉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고의적으로 그런 일을 벌인
것이지요
"여러분이 테레사 수녀처럼 그를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오해가 있었다고
생각해도, 어떤 점에서는 래더는 자신이 대단히 좋지 않은 일을 저질렀음을 알았고,
또 당연히 알아야만 했지요'라고 마이애미에 있었던 한 스텝은 말했다.
그러나 그 스텝은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하고 있다. "래더는 바그던, 틀리던
상관없이 뉴스는 테니스 시합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재미있는 일은 그곳에는 많은
삶들이 있었는데 아부도 그것을 막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무도"이보게 자네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그래서는 안 돼. 다시 자리에 앉아"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들은 이런 일이 생기도록 놓아 두었을까요? 간단히 말해서 모두
겁장이들이었습니다'
전 CBS 프로듀서 마티 코겐은 그것은 조직상의 틈이었다고 말한다. "앵커의 상사는
프로듀서의 상사는 편집국장 바로 래더였습니다. 톰 베타그가 래더를 쫓아나갔을 때
그 또한 윗사람을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래더를 데려올 힘도 없었고 감히
그렇게 하지도 못했습니다.'
일이 벌어졌을 때 두 명의 노련한 기자 리차드 로스와 버나드 골드버그가 마이애미
지국으로 쓰이는 건물에서 150피트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지만 아무도 래더를 대신할
수 없었다. 골드버그는 자기에게 요청한 사람도 없었다고 말한다.
CBS에서 돌아다니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날 밤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모였을 때
골드버그는 대신할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앵커 래더에게 대단한 존경과 호의를
표하면서 "아니요, 래더에게 심장마비가 왔다면 모를까 안 됩니다'라고 말했다 한다.
리차드 로스에게 같은 질문을 했을 때 그는 "골드버그에게 심장마비가 왔다면
모를까 안 됩니다'라고 말했다 한다.
그날 마이애미에게는 그외의 혼란이 또 있었다. 그 프로그램의 모든 도입 부분은
이미 녹음되어 있었다. "CBS 뉴스입니다. 댄 래더가 마이애미로부터.....'하는
소개와 첫 내용이 이미 돌아갈 준비가 되어 테이프에 들어 있었다. 테이프의 내용은
3분 가량 되었고 약 2분가량의 상업방송을 더하면 필요한 시간을 거의 채울 수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아무도"테이프는?'하고 묻지 않았을까?
그날 마이애미에 있었던 한 스텝은 누군가가 결정을 내려야 했는데 아무도 영웅이
되고 싶어하지 않았다고 한다.
마침내 5분 30초, 당황한 상황에서는 정말 짧은 시간이지만 화면이꺼진 상태에서는
영원과 같은 시간이 지나서야 래더는 어슬렁거리며 돌아와 옷을 입고 방송을
시작했다. 6분6초가 흐른 뒤였다.
나중에 어떤 사람들은 그 사건을 도덕성의 문제로 보고, 사람에게 눈멀어 일과 팀과
조직에 충실치 못할 정도로 베타그는 래더와 지나치게 가까웠다고 말하면서 베타그를
비난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어떻게 앵커가 괴물처럼 되어 그러한 일을 저질렀을
때에도 아무도 감히 막지 못하느냐며 조직 자체를 비난하며 그 일을 들먹거렸다.
그러한 생각들은 사실이다. 그러나 마이애미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금요일 밤의
서두름과 혼란함 속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정작 일은 3일 후 휴일을 보내고 난
월요일에 일어났다.
월요일 오전 10시, 전화 회의를 위해 전국 모든 지국이 연결되었을 때 CBS의
스텝들은 지난 금요일의 일에 대해 무슨 말이 나올까 죽을 지경이었다. 회의에
참석했던 마티 코겐은 이와같이 말했다. "베타그가 설명을 했습니다. 자신이 회사의
방침을 전했다는 것, 래더가 전화하러 나갔다는 것, 그리고 그를 찾을 수 없었다는
것, 그런데 나는 그 금요일에 앉아 있었습니다. 나는 래더가 화가 난 얼굴로
당황스럽게 우리를 바라보면서 천천히 걸어들어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베타그는 그가 서둘러 돌아왔다니 믿어지겠습니까?'
전화로 듣고 있던 프로듀서들이 낄낄거리기 시작했고 어떤 사람들은 크게 웃기까지
했습니다. 불쾌하게 전화를 내려놓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한 프로듀서는 너무도
정직하지 못해서 기분 나쁘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외부의 사람들은 속일 수 있어도
우리에게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며 전화를 끊어 버렸다고 말했다.
회의가 끝난 후 여러 명의 기자들은 왜 그들은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는지, 왜
래더를 와야 한다고 말해야 하는지, 질문을 쏟아냈다.
결국 래더와, 아마 베타그도 함께 원칙을 세운 셈이 되었다. 의도는 불순했지만
그것은 뉴스의 중요성을 높이려는 상징직인 행동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바른 응수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좋은 뜻으로 만들어진 것이었고, 돈키호테와 같은 매력도
있었다. 한 기자는 왜 부끄러워한느내고, 또 왜 옳은 일이라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잘못이었다고 왜 말하지 못하는지 묻고 있었다.
사실 당황해서 사실을 감추려는 시도 이외에는 그 진술에 치욕이되는 일이 없었다.
아직까지 놀라운 것은 거짓말을 폭로하면서 워싱턴에서 수년을 보낸 래더나 베타그
같은 사람들이 그들의 적이었던 트릭키 딕처럼 꼼짝없이 잡혔다는 것이다.
아직까지도 래더는 더러운 날이었고 정말 끔찍하다고 말하곤 한다.
비밀을 은폐하려 하고 사건을 얕본 래더, 베타그와 CBS의 결정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래더를 뉴스의 승리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해 점차 이상한 인상을 받기
시작했다. 그의 주위에 떠도는 모든 불가사의한 것들과 함께 그를 흥분이 가신
흉포한 사냥꾼 톰슨 같은 사람으로 그를 보기 시작했다. 런던의"타임"지
같은 신문은 뉴스계의 주교, 댄 래더는 그 빛을 잃어 비리는가라고 묻고 있었다.
소설가 스테판 킹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래더에 대해 추악한 인상을 가지고
있다. 그가 언제 미쳐 버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는 갑자기 멈추어 서서 미친
소리를 늘어 놓을 것만 같다.'
랜스 크레인이 "크레인의 뉴욕사업"이라는 책에 써놓은 다음과 같은
가상의 이야기는 분명히 가장 창의적인 설명이 될 것이다. 래더는 외계인에게
사로잡혀 있었다. 래더의 외계인에 대한 변절은 두 차례 발생하는데 한번은 그가
시카고에서 요금 지불을 거절하여 택시가사에게 납치당했다라고 주장할 때이다. 물론
그 외계인의 비밀 이름은 케네스이다. 그것은 그후 그가"케네스,
주파수"회수"는? 하며 묻는 두 사람에게 매를 맞았기 때문이다.'
"그 두 명의 외계인은 자기의 별과 어떤 주파수로 통신해야 하는지 알고자 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래더(사실은 케네스)의 잠시 사용했던
종료신호"용기"는 분명히 그의 동료 외계인에게 보내는 신호였다.'
"래더가 자리를 비워서 생긴 6분간의 방송 중단은 사실은 그의 동료 외계인들이
CBS의 강력한 전파망을 이용하여 중대한 지시를 받고자 치밀하게 계획하여 만들어낸
기회였다.'
그때 또 다른 "피뢰침"사건이 생겼다. 9분간의 생방송 시간이었다.
1988년 1월 월요일 저녁이었다. 래더는 대통령 후보 조지 부시와 "CBS
저녁뉴스" 시간에 생방송으로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뉴욕과 워싱턴을 연결한
인터뷰는 보통의 질문과 대답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다 갑자기 판이한 일로 들어가게
되었다.
래더가 먼저 말했다. "이것이 인질을 위한 무기의 교환이라고 알았다면 그것에
반대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또한...'
부시는 펄쩍 뛰며 "사실, 질문에 답해도 되겠지요?'라고 말했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대답을 하겠습니다' 부시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질문 먼저 할 수 있겠습니까?'
부시는 단호하게 손을 흔들며 말해 나갔다. "대통령께서 그 계획을 만드셨고
공식적으로 밝힌 대로 그도 그것이 인질을 위한 무기...'
"그것은 대통령의 문제이고, 부통령께서는...'
몇 차례 그런 대확가 오가고나서 래더는 "저는 논쟁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부시는 "아니오. 당신은 하고 싶어합니다'라고 대답했고, 그 말에 래더는 웃었다.
그때 부시는 불에 기름을 부었다. "나의 모든 경력을 이란에 대한 지어낸 이야기로
판단하려는 것은 옳다고 할 수 없습니다. 내가 당신의 경력을 뉴욕에서 당신이
자리를 비웠을 때 생긴 그 7분으로 판단한다면 좊겠습니까? 좋겠어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래더의 턱은 그 조용한 한방에 믿을 수 없이 꼭 닫혀
움직이지 않았다. 갑자기 벙어리가 된 듯했고 부시는 계속 말해나갔다. "나는
당신을 존경합니다. 그러나 오늘밤 이 자리에서 당신이 한 것에 대하여는 존경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놀란 시선으로 지켜보았고, 역사적 장면, 포장된 상자가 벗겨지고 감정이
그대로 넘쳐나는 강력한 TV의 생방송 순간이 방영되었다.
부시가 말했다. "나는 나의 모든 영역을 바로 하고자 할 뿐입니다'
"부통령께서는 조지 슐츠와 회의에 참석하였고, 그는 그것을 발견하고는
흥분하여...'
"그는 흥분하지 않았소!'
시간이 흘러 래더의 귀에 마지막 초를 세는 소리가 들려올 때ㅔ 그는 마지막
질문을 했다.
"아이오와 주에서의 당대회 이전에 기자회견을 열고 모든 질문에 답해 주실
의사를...' 부시가 끼어들며, "나는 이미 3월부터 86차례 기자회견을 치러
왔습니다'라고 말하자, 래더가 그의 말을 끊고, "아니라는 대답으로 듣겠습니다.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말해 버렸다.
긴장된 대화는 시작과 마찬가지로 급하게 끝이 났다. 부시는 마이크를 떼고
집무실에서 고함을 쳤다. "방송국에 말해. 할 말이 있으면 기자회견에서 손을
들라고!'
이야기는 분명하다. 자유분방한 뉴스맨이 공화당 부통령을 매번 공격하려다가 벌을
받은 것이었다. CBS 팀은 솔직한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이란 콘트라 사건에 초점을
맞추어 공격을 하려 한 것이다. 부시가 물리쳐 이겼다.
사실 기습 준비를 한 것은 부시 측이었다. 베타그와 정치담당 프로듀서 리차드
코헨은 부시 측에 인터뷰가 상당히 거칠 것이라는 표시를 분명히 했다. 공화당
방송담당 보좌고나 로저 에일스는 이인터뷰를 부시가 그의 무기력한 모습의 이미지를
벗을 수 있는 기회로 보았다. 부시는 활기차게 나타날 것이고, 부자이고, 동부
출신의 연약한 부통령은 강한 남성으로 변하여 레이건의 유일한 후계자가 될 것이다.
부시의 프로필을 썼던 전 CBS 프로듀서인 마티 코겐은 "그것은 내가 본 에일스의 가장
놀라운 마술이었다'라고 말했다.
부시는 자신은 간단한 인터뷰인 줄 알고 나갔다가 생명을 걸고 싸우게 됐다며 CBS의
속임수에 당했다고 계속 주장하지만, 사실은 CBS와 래더가 당한 꼴이 되었다.
베타그는 부시가 철저하게 거짓말하고 있다고 말했다.
단서를 들자면 첫째, 전날 CBS는 "60Mlnutes"시간에도 이란 콘트라
사건에 대해 질문했으나 그러한 공격이 없었다. 둘째, 백악관에서 기자들에게 당일
오후에 기사거리가 있을 것임을 알려 주었고, 셋째, CBS의 프로듀서 코겐이 부시 측의
어떤 사람으로부터 전화로 부시가 기회가 나는 대로 처음 7분(사실은 6분간의
방송 중단)에 대한 말을 할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다는 것이다.
백악관의 사전 준비는 인터뷰를 통하여 분명히 드러났다. 에일스는 카메라
뒤에서 복싱 코치처럼 종이판에 글을 써서 보여 주면서 부시를 격려했다. 부시는
싸움을 찾는 사람이었고 챔피언이 되고 싶어 했다. 그 상대로 래더만큼 강한 선수가
어디 있겠는가? 이런 면에서 보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래더는 진정한 대답을
얻으려고 무진 애를 쓰면 모든 것이 달랄진다. 래더는 진정한 대답을 얻으려고 무진
애를 쓰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래더는 진정한 대답을 얻으려고 무진 애를 쓰는
것으로 보인다. 조금 공격적이긴 하지만 지나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부시는
이란 콘트라 사건을 물고 늘어지면서 괜한 소동을 일으키려고 하는 사람인 것이다.
대체로 부시는 래더를 희생으로 정치적인 소득을 얻었다. 그는 계속 유세 때마다
그 일을 끄집어냈다. 겁장이가 대통령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래더는?
"나는 뉴스 전달자로서 나의 일을 하려고 했다. 그 일은 질문을 하는 것이고,
계속해서 질문하는 것이다'라고 후에 래더는 말하곤 했다.
래더는 오랜 친구인 빌 존스톤에게 "부시가 대답하지 않았으면 나도 물러서지
않았다'라고 말하곤 했다.
존스톤은 "이렇게 해서 그는 대결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댄 래더는 자신의 계약이 끝나는 1994년 앵커에서 물러나겠다고 말해 왔다. CBS의
어떤 사람들은 더 빨리 그가 물러날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벌써 10년이 흘러 그도
일을 지겨워한다고 말한다. 여러 면에서 그는 개인적으로나 직업적으로도 인생의
절정에 이르러 있다. 연봉은 400만 달러에 이르러 가장 많은 돈을 받는 뉴스맨이며,
사랑하는 아내 진과 두 아들 로빈과 댄 주니어가 있다. 그러나 래더를 따르는
사람들과 자신까지도 당황하게 하는 의문이 하나 있다.
래더의 친구인 CBS의 한 프로듀서는 이렇게 말한다. "그가 아직도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정말 수수께끼이다. 많은 봉급, 명예와 힘을 가지고 있으며 직업의 정상에 있다.
이 모든 것이 그를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하겠는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를 일종의 "비극적"
인간이라고 말하는 이유일 것이다. 전 CBS의 간부에 따르면, "통신원으로 그는 대단히
정력적이고 정상에 이르려는 야심이 만만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이루었을 땐,
앵커가 되었을 땐, 말하자면 ... 영화 후보자의 마지막 장면을 아시지요? 레드포드는
선거에서 이기고, 사람들은 축배를 들지만 그는 멍청한 얼굴로 방에 들어가서 묻지요.
"이제 무엇을 하나?"'
적절한 설명인 듯하다. 래더는 정상가지 싸우며 올라왔으나, 그 정상은 생각했던
것만큼 달콤한 곳이 아니었다. 너무 많은 책임과 일, 그리고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위험만 가득했다. 모든 권력에도 불구하고 데스크에 박혀 있을 때, 전형적인
언론인인 그는 아마 더 행복하고 통신원으로서의 그의 본래 모습에 더욱 어울릴
것이다. 이것이 CBS의 스텝들이 래더에게 성공이라는 벌을 받았다고 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인물평은 투사, 댄 래더에 대한 중요한 것을 빠뜨리고 있다.
긴장된 분위가가 늘 CBS 뉴스에 흐르는 것 같고, 래더는 대단히 불안정한 사람이라
결국 친구가 될 사람조차도 멀리하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에 이르기 위해
그리고 머물기 위해 애쓰며, "변화하는 공산주의의 얼굴'에 관한 장기 주제의
시리즈를 위해 싸우던 것과, 1989년 말과, 19ㅓ90년대 초반 시청률이 천천히 떨어지기
시작할 때 그는 더욱 그의 쑈를 모스크바로 이끌려고 했던 그의 강인함을 존경해야
한다.
그의 폭탄 같은 힘과 더 좋은 보도를 하고, CBS를 "교회"로 만들려는
그 열의있는 준비는 존경할 만하다. 그리고 비평가들이 그가 쓰러질 것이 분명하다고
한 그는, 아직도 몇 라운드를 더 뛸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ff
17. 래더의 스튜디오
"대장이 옵니다!' 댄 래더가 CBS의 뉴스실의 복도에 들어서면 이러한 외침이 들리고
그는 가벼운 미소를 짓는다. 9월 오후 5시 40분, 그가 청색 줄무늬 양복을 입고
천천히 뉴스실 복도를 걸어갈 때 그의 모습은 은행가나 최고 정치인의 무게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풍모를 지니고 있다.
가볍게 한숨을 쉬며 그는 양복 상의를 벗어 의자에 걸친다. 자리에 앉아 안경을
벗고 책상 위에 있는 거울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콘택트렌즈를 낀다. 래더의 머리 위
벽에는 부드럽게 내려다보고 있는 크론카이트의 사진이 걸려 있다. 갈색 옷을 입은
중년의 여성이 그에게 다가온다. 거리에 나온 가정주부 같지만 사실은 최고의 미용사
프란시스알볼드이다. 세 명의 앵커는 모두 화장을 한다. 래더는 제닝스보다는 7살,
브로커보다는 9살이 많으니 그들보다 화장에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브러쉬를 들고 프란시스는 래더의 눈밑을 살살 칠해 나간다. 그리고 작은 솔로
그의 눈썹을 가지런히 한다. 그는 뒤로 개대어 편집자인 리 타운샌드와 이야기를
한다. 화제는 전국야구대회에서 커브스와 엑스포와 맷츠의 경주. 리는 "마지막 회의
구원투수가..' 하며 말을 하지만 래더의 마음은 다른 스포츠 시합, CBS가 생중계하고
있고 뉴스로 이어질 그라프와 사바티니의 테니스 시합에 가 있다.
"테니스 시합은 어떻게 됐지?'
"거의 끝나갑니다'
프란시스가 마무리를 하는 동안 긴장을 풀고 쉰다. 그리고는 이어폰을 낀다.
"볼륨을 좀 내려'
이제 그가 읽을 내용을 살펴보기 위해 바로 앉는다.
담당이 외친다.
"조용히 하세요'
"시청자를 위한 댄 래더의 머릿기사입니다. 5초, 4초, 조용히!'
큐와 함께 래더는 읽어 나간다.
"... 곧 방송됩니다. 함께 해주십시오' 그리고나서 3초간의 ID가 나간다.
"마약. 그것은 내일, 오늘 밤, 항상 나라를 위태롭게 합니다'
그는 모든 것을 이 첫번 녹음에 맞추어 놓는다.
래더에게는 저녁뉴스 직전인 6시 7분, 이 시간이 긴 하루의 결정이다. 매일 아침
그는 6시 이전에 일어난다. 사실 그는 잠이 적은 사람이다. 새벽 2시건 3시건 어느
시간이든 속보를 듣기 위해 CBS의 뉴스 데스크로 전화를 한다. 래더의 말로는 그는
아침에는 해가 뜰 때쯤 조깅을 하러 나가고, 거의 매일 아침 "타임"지,
"포스트"지, "저널"지를 받아보고, 면도하고 샤워하면서
CBS의 아침뉴스를 듣는다. 피터 제닝스가 BBS의 아침뉴스를 듣는다. 피터 제닝스가
BBS 라디오와 NBR을 듣는 것과 비교된다.
대개 래더는 9시 30분경, 서부 57번가에 있는 CBS뉴스국의 현관을 들어선다.
로비에 있는 에드워드 R. 머로우의 액자를 지나서 복도로 들어선다. 이 커다란
흰색 건물은 종종 "낙농장"이라고 부르곤 하는데, 한때 쉐필드농장
우유공장의 터였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납작하고 창문도 없는 이러한 건물은
전원의 풍광은 상상할 수도 없다. 좁은 복도가 꼬불꼬불 이어지고 있고 좁아서 양팔이
닿을 정도이다.
도착하면 바로 래더는 복사한 서류를 받는다. "안녕하세요" 가볍게
인사하고는 그날의 주요기사와 같은 것들을 검토하기 시작한다. 래더와 톰 베타그는
공식적으로 여러 번 회합을 갖고 어느 것을 녹음하고 어느 것을 맡기고 무엇을
처리해야 하는가를 논의한다.
대개 래더는 10시나 10시 30분에 국내외 지국에서 그날의 기사목록을 보내오므로
회합에 참석하지 않는다. 편집부장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지만, 기사 배정의 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는 세부적인 일까지 하지는 않는다. 중역처럼 그는 회의에 참석하여
전체 상황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일을 하지만, 간혹 중대한 기사나 외국여행 계획을
세울 때에는 세부 사항까지 관여한다.
"약 11시경 우리는 게임을 시작합니다. 베타그가 그렇게 부르지요. 그 게임은
"우리가 뉴스를 지금 당장 편집해야 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하겠는가?"라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4시간이 넘게 그는 베타그와 게임을 하기 위해 뉴스 룸을 돌아다닐
것이고, 그의 자리로 돌아오기 전에 빌 크로포드나 수잔 지린슼와 간은 고참
프로듀서와 얘기를 할 것이다.
그의 사무실은 경영자를 위한 스위트 룸이다. 뉴스 룸 위층에 있는데, 시이저가
검투사를 바라보둣 프로듀서들을 내려다볼 수 있다. 안쪽과 바깥쪽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들어가려면 두 명의 비서를 거쳐야 한다. 이 스위트 룸은 사장이
사용하던 것인데 지금은 래더가 쓰고 있다. 이 사무실은 우아한 무대장치만큼 잘
장식되 정리되어 있고, 커다란 어항과 화려하며 고풍스러운 책상이 있다. 책상 위
한편에는 오래 된 수동식 타자기가 한 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컴퓨터가 놓여 있으며,
가운데는 성경책이 스탠드 위에 펼쳐져 있다.
그가 하는 일을 보자. 그는 많은 일을 하도록 되어 있다. 그는 CBS자체의 살아
있는 로고이며, CBS 뉴스의 대표자로 가장 많이 TV에 등장한다. 오후마다 하고
있듯이 방송망의 대표이면서 판매원이어야 하는 복합된 역할을 해야 한다. 그는
회사에 들르는 관계 단체장이나 지방국의 국장들과 악수를 해야 하고, TV 광고선전을
녹음해야 하고, 광고 전단용 사진을 찍어야 하며, 은퇴식의 사회를 보아야 하고,
TV 비평가를 위한 새로운 쇼의 발표를 주최해야 한다. 게다가 해야 할 전화가 있고,
교제를 해야 하고, 뉴스의 출처와 연락해야 하며, 프로듀서들을 감독해야 한다.
래더의 말을 들어보자. "저는 하루를 뉴스를 보도하고 전화를 하며 어느 정도
보내고, 편집부장으로서 또 얼마간 보내고자 합니다. 방송에는 관계되는 식구가
많고 나는 그들을 보고싶고, 말하고, 격려하고, 때때로 야단도 치고, 훈련도 시키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녁뉴스"는 래더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지만, 그가
맡은 다른 른 쇼가 또 있다. 주말 황금시간의 '48시간'과 매일 하는 라디오 쇼인
"댄 래더 리포팅"이 그것이다. 그 쇼를 위해 래더는 구상을 하고 작가가
내용을 작성하면, 그는 보도를 한다. 간단히 말해서 그는 다른 모든 앵커들처럼 그의
말대로 "많은 모자를 쓰는 사람"이다.
그의 사무실에 들어서면 곧 그말이 사실임을 알게 된다. 벽장 속에 는 많은
모자들이 걸려 있다. 뉴욕 맷츠의 야구모자부터 택시 운전사의 모자까지 모든 것이
있다. 어떤 것들은 얼굴을 가린 것들이다. 그것은 슈퍼스타인 그가 뉴욕 거리를
걸을 때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순수한 래더의 모자도 있다. 부드러운 트위디 낚시모자가 그것이다. 그의
친구 빌 존스톤에 따르면, 그는 낚시를 하고 있을 때보다 더 행복할 수 없는 낚시
중독자이다. 래더는 주말이나 휴가 때는 캐스킬에 있는 그의 오두막이나 고향 텍사스
오스틴에 있는 하일랜드호에 낚시하러 가곤 한다.
그리고 그곳에는 카우보이 모자가 있다. 그것은 래더, 즉 여전히 텍사스 기질,
텍사스의 예절과 구식이며 남부식의 남성 위주의 태도 등을 가지고 있는 남자에
대하여 많은 것을 말해 준다. 사무실 벽 액자에 들어 있는 포스터에는 진 오트리의
카우보이 법전 십계명이 쓰여 있다. 그것은 첫번째 조항인 "카우보이는
적일지라도 이용하지 않는다"에서 열번째 조항 "카우보이는
애국자다"로 이어진다. 그것은 촌스럽고 20세기 말 뉴욕 같은 도시에서는 믿기
어려운 시대착오적이지만 래더는 여전히 그 카우보이 법전을 신봉한다.
수석 프로듀서 톰 베타그의 사무실은 아래층에 있다. 좁고 창문도없는 파이 모양의
그 공간은 일본의 포스터와 TV모니터로 장식되어 있다. 하지만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사무실 내에 유리로 만들어 밖이 내다보이고, CBS 뉴스 룸의 사령부로 쓰이는 이
"어항"에서 보낸다. 그 어항은 늘 컴퓨터를 만지고 전화를 걸고
촬영하고 있는 각본을 보는 고참 푸로듀서들로 차 있는 것 같다. 하지만 2시
45분이면 완전히 꽉 찬다. 래더가 그의 사무실에서 내려오고, 베타그가 걸어나오면
그날 밤의 기사의 공식적인 요약이 이루어진다.
래더와 그의 수석 프로듀서는 쉽고 재미있게 말을 한다. 변덕스러운 TV세계에서
그들의 관계는 특별나고 대단히 가깝다. 어떤 사람들은 아주 어린시절에 아버지를
잃은 베타그는 래더를 한번도 가져보지 못한 아버지로 보고 있다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나이 차가 많이 나는 형제 관계로 묘사한다. 분명히 그들 두 사람은 서로
존경심을 가지고 말한다. 베타그는 열성적으로 케네디의 암살부터 천안문광장까지
뉴스계의 앵커의 역사와 뉴스 감각을 위한 자신의 "황금 같은
기사장면"을 상세히 말해 나간다.
그러나 CBS의 안과 밖에는 그 관계가 조금 지나치게 가깝다고 말하는 기자들과
프로듀서들이 있다. 베타그가 조금 지나치게 공손하고 방어적인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 같다.
어떤 CBS 기자는 말한다. "아첨하는 거지요. 베타그는 래더가 막아 달라고 한
것처럼 그를 방어하느라 애쓰며 다닙니다. 래더는 그렇게 약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래더가 당신과 말하려 다가오면베타그는 마치 당신에게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듯이 그의 뒤에 가서서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그런 사람이나 되는 듯이 말입니다.
베타그는 사람들을 다가오지 못하게 하며 스스로 중개인이 되려고 합니다. 결국은
래더를 돕는 것이 아니라 그를 해치게 되지요'
래더와 베타그가 함께 서서 그날 기사의 내용을 분류하고 있을 때 어떻게 이 두
사람이 서로 알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는 것도 재미있다. 창백해 보이면서도 끈기있는
중서부 출신의 베타그는 두 명의 대학생 아들을 둔 사람치고는 대단히 천진스러워
보인다. 그는 매일 어퍼 웨스트 사이드에서 자전거를 타고 출근한다. 하지만 그러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비평은 그가 조직 내의 정치인이고, 서로 다투게 하여
어부지리를 얻어내는 권모술수에 능한 사람이라고 한다. "두 갈래 길에서 세
갈래로 걷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60분"의 프로듀서 데이비드 저버의 말처럼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는
것이 한 가지 있다. "나는 베타그처럼 뉴스에 대하여 그렇게 생각이 깊은 사람을
못 보았습니다' 그의 안경 뒤에, 그리고 그의 느리고 산만하고, 지루한 말에는
뉴스의 형태에 날카로운 생각이 있다. 그는 총명함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TV 속에 회전돌기 묘기를 넣는 것"에 대해 말한다.
베타그의 어깨 위로 넘어보며 서 있는 래더는 단단히 싸매져 있는 외로운
카우보이의 모습이다. 그의 동료라는 사람들도, 그는 친구가 거의 없다고,
실제보다도 더 없는 것으로 믿고 있으며, 종종 동료들에 대하뎌 "충성
테스트"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친구로 여기는 사람들은 끔찍히
아낀다. 래더가 자기가 앵커로 있는 한 베타그 이외의 수석 프로 듀서를 갖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사실, 중서부 출신의 카톨릭교도와 텍사스 출신의 침례교도는 동질의 정신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뉴스에 대한 열정과, 베타그의 말대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직업'에
대한 정열과 그 위센는 사라지기 시작했지만, 뉴스국의 "보배"로서 CBS의
전통을 지키려는 열의를 함께 나누고 있다. 래더는 "나는 나만큼 열심히 일하고
마음을 쓰는 사람을 만나리라고 생각도 못해 보았습니다. 톰 베타그는
"저녁뉴스"의 심장입니다'라고 말한다.
오후 6시 11분, 래더는 저녁뉴스 원고를 살펴보며 앵커 데스크에 앉아 있다. 한
손에 펜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커피를 마시며 단어를 지우고 문장을 고치고 있다.
베타그는 말한다. "래더는 땜장이입니다. 그는 구속받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는
답답함을 느끼지 않으려고 말을 바꾸지요. 그는 "내 삶의 어느 면도 통제할 수
없다"고 말하는 듯 예측할 수 없는 행동을 잘합니다'
데스크 보조와 편집자들이 마지막 수정원고를 가지고 분주한 동안 조용히 원고를
살피며 앵커 데스크에 앉아 있는 래더는 CBS뉴스의 중심에 있는 듯핟. 사실 그것은
설계된 것이다. 연못의 파문과 같은 앵커 데스크로부터 뻗어나가는 일련의 나이테
같은 원을 생각해 보자. 원의 밖에는 조정실과 위성중계실인 34호실이 있다.
그곳에는 "어머니는 늘 TV 보는 것은 아무 소용도 없다고 말씀하신다'는 글 아래
기술자들이 전세계에서 들어오는 소식을 분주하게 받고 있다.
가장 밖의 원에는 "저녁뉴스"의 사무실과 해외담당 편집자와 국내 담당
편집자, 그리고 베타그의 사무실이 있고 모든 사무실은 유리로 되어 안을 볼 수 있다.
다음 원에는 국내외 담당 데스크와 작가들의 데스크가 있다. 그곳에서는 사람들이
열심히 컴퓨터를 두들기고 있다. 끝으로 가운데에는 앵커의 데스크가 있다. 온통
유리로 둘러싸인 사무실에는 가운데에 있는 앵커의 의자로부터 형광등이 뻗어 나간다.
설계상 그는 분명히 모든 것의 핵심에 있다. 이러한 앵커 중심의 자리에서 일련의
사실이 흘러 들어가고, 뉴스가 흘러 나온다. 그것이 바로 무대 디자이너 휴즈
레스키가 구상한 것이다.
휴즈 레스키는 말한다. "나는 "저녁뉴스"의 무대가 세계의 뉴스
본부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모든 것이 그곳으로 흘러 들어갑니다. 원 밖의 사무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앵커맨에게 소식을 전하고 그가 과정의 마지막, 즉 중심이 되기를
의도했습니다. 앵커를 중심에 두는 것은 기술상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상징적인 가치가 있었지요'
오후 6시 13분, 안쪽 원에는 방송중 래더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안경쓴 중견
편집자인 타운샌드가 베타그와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니 콜롬비아에서 온 것은
죽일까?' "좋아'
래더는 일어나서 원을 돌아 베타그에게 가서 "오늘은 어렵지 않겠지'라고 묻는다.
스튜디오의 구석에는 4피트 놓이의 청색 연단이 있다. 그것은 크론카이트 이후
그를 따라 다니는 문제의 해결책이었다. 그 연단 위에서 그는 뉴스를 서서 전달할 수
있다. 그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쿠랄트가 "나는 손끝으로 생각하고 래더는 발로
생각한다'고 말하듯이 쓰는 아나운서인 찰스 쿠랄트와 달리 그는 행동하는
아나운서이다.
래더는 앵커 데스크에 앉아 있지만 자신은 서 있는 것을 좋아한다고 인정해야만
한다. 버크는 말한다. "연단은 중국 여행을 하면서 생각했습니다. "서서
하는 것이 더 좋다" 그것은 모두에게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서서 말을 더
잘합니다. 소리가 더 잘 울리지요, 그것이 목사나 랍비가 서서 말하는 이유지요'
긴 이론에도 불구하고 래더는 1989년에 6개월 동안 그것을 사용했고, 1990년 초에 한
번 더 사용했었다. 그러한 변화는 CBS뉴스의 불안과 지푸라기라도 잡으려하는 최근의
경향을 보여 준다.
연단 뒤에는 래더가 화면과 도표를 위해 사용하는 10피트 놓이의 거대한 영사기 화
면이 있다.
"5분입니다. 5분' 래더와 베타그와 타운샌드가 모인다. 작가의 책상 옆에 있는
프린터는 마지막 수정된 원고 3부를 찍어내고 있다. "아틀란타에 있는 연방 판사가
마티네즈에게 중지 명령을 내렸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3분 전입니다' 래더는
앵커 데스크로 돌아가 머리를 만지고 옷을 입는다. 보조원들은 마지막 원고를 들고
뉴스 룸을 거쳐 조정실로 달려간다. "2분 전입니다' 한 뭉치의 원고가 래더에게
도착한다. "아직 못 본 것입니다'
"1분 전입니다' 베타그는 래더와 마지막 상의를 한다. 30초 전, 래더는 커피를
마저 마시고 안경을 벗고 타이를 매만지고 원고를 가지런히 하고...
"CBS 저녁뉴스입니다. 댄 래더가 전합니다. 전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은 오늘밤
수술을 받습니다..'
베타그는 소식이 더 있을 거라고 말하고, 레이건에 대한 기사는 계속 녹화
방영된다. 몇 초 후 전화를 받고, "수술 후 안정을 취함. 성공이라 여겨짐'이라고
외친다.
레이건의 녹화 기사는 몇 초 남아 있다. 래더는 원고없이 하겠다고 외친다.
카메라 불이 들어오고 그는 렌즈를 바라보며 미소짓는다. "오늘밤 CBS뉴스는 전
대통령이 정상적인 수술 후 안정을 취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게 되어 기쁩니다.
수술은 성공이라고 합니다'
녹화 방영으로 돌아가자 뉴스 룸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워싱턴에 있는 지린스키가 백악관에서 발표가 있을 거라는 정보를
얻었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그렇게 빨리 처리할수 없었을 겁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 기사를 받았느냐고 래더는 묻는다. 경쟁심 있는 앵커의 당연한
첫 질문이다. 다른 곳도 받았지만 그렇게 빠르지는 못했다.
7시 9분, 모든 흥분이 가시고 돌풍은 사라졌다. 나머지 방송은 자동 녹화방영이다.
그러나 래뎌는 아직 할 일이 하나 있다. 서부지역을 위한 속보 방송이다. "전 미국
대통령 레이건은 지금 편안하게..'
속보가 끝나면 불을 끄고 하루가 끝마칠 시간이다.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래더는
여전히 주위에서 일하고 있는 편집자와 프로듀서들을 바라보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인사를 한다. "태양이 질 때까지 이대로 나아갑시다'
시청률: 9월
1위: 래더
2위: 브로커
3위: 제닝스@ff
18. 베를린장벽
NBC 방송국 뉴스편집실 뒤에 있는 대학도서관의 개인열람석을 닮은 칸막이
방에서 "Nig_gtly News"의 국제문제 담당 프로듀서인 마크 커스네츠는
통신문을 있는 디지탈 VT320 모니터 스크린에 다음과 같은 단어들로 나타났다. "나는
그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비중있는 역사적 내용을 더 많이 알고 싶습니다'
그날은 11월 17일 화요일 대형 뉴스가 있었던 날이었고, 커스네츠는 조금 힘들어
하는 듯했다. 동베를린에서 정치적 소요가 있었는데 수십만의 시위군중들이
라이프찌히 거리를 행진하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그날이 선거일이었다. 게다가
커스네츠는 그날 두 아이를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 잠시 맡아 주는 일도 해야만
했다.
막내아이 닉키가 그의 무릎 위에서 꼼지락거리고 있을 때 유선을 통해 기사가
모니터에 나타났다. "이봐, 군중들이야! 군중들이라구!' 그가 외쳐댔다.
톰 브로커는 조금 전에 우연히 뉴스편집실에 들렀다가 그 소리를 듣고 서둘러서
커스네츠의 책상으로 갔다. 그는 커스네츠의 어깨 너머로 그 기사를 읽었다. 동독의
전 내각이 막 사퇴를 했다. 잠시 후 브로커는 철의 장막 뒤에서 일어나고 있는
최근의 사태 진전을 방송하고 있었다. 그 소식이 조금이라도 지체되는 일이 없도록
신경을 쓴 그는 그 특별보도가 정규 프로그램을 방해하기 전에 방송하기 위한 기사를
작성했다. 3주일 전에만 해도 그는 샌프란시스코 지진을 NBC가 뒤늦게 보도했다는
중대한 전력을 갖고 있었고, 그래서 그가 다시 출발점에 남아 있는 것 같은 짓을 할
리가 없었다.
브로커가 보도를 마치고 자리를 뜨자 계획담당 선임 프로듀서인 제리 램프래트가
그곳에 서 있었고 그는 브로커에게 "오늘밤 그곳으로 가야 되겠군'이라고 말했다.
사실 베를린으로 가는 계획은 몇 주 동안 준비 작업중에 있었으며 그 전 달
(10월 18일)에 에곤 크렌츠가 에릭 호네커를 대신해서 동독공산당의 서기장직을
맡았을 때 수석 프로듀서 빌 휘틀리는 곧 그와 인터뷰를 주선하려고 했을 정도였다.
"우리는 동독인들과 현지에서 생방송할 가능성이 있는가를 탐색하고 있었습니다'
커스네츠의 회상이다. 곧 취재할 기사거리가 배당되었고, 특파원들이 현장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10월 23일과 30일에 30만 명 이상의 동독인들이 지금 민주주의를
요구하면서 라이프찌히 거리에서 시위를 했다. 원래 계획은 12월 2일과 3일로
예정되어 있던 부시와 고르비의 몰타 정상회담, 1건들은 브로커가 그때까지 그곳에
가지 못한다는 것을 걱정하기 시작할 정도로 너무나 급박하게 전개되고 있었고,
이제는 램프래트도 같은 심정이었다.
두 사람은 곧 뉴스 총감독인 던 브라운, 외신뉴스 감독인 데이브 밀러와 합류했다.
그들이 갖고 있는 의문은 갈 것인가 말 것인가였다. 브로커가 그들보다 앞서서
생각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들어봐요'그가 말했다. "우리가 이미 워싱턴에
가동시켜 놓은 두 가지 일이 있지요'
코라손 아키노가 미국을 방문중이었고, 브로커는 워싱턴에서 그 다음 날 밤 그녀와
인터뷰를 주선해 놓고 있었다. 공교롭게 안 일이지만 그것은 그런 인텁ㅍ에는 좋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 다움 며ㄸ 주 이내에 아키노는 대통령직에 대한 6번째이며
가장심각한 쿠데타을 겪게 된다. 그들 네 사람은 곧 떠날 것인가에 대해 찬반 논쟁을
벌이면서 거기에 서 있었다. 그러나 아키노와의 만남 때문에 브로커는 여전히 점심을
먹으러 자리를 뜰 때도 무엇을 해야 할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는
길에 그는 수석 프로듀서인 빌 휘틀리의 방에 들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밤
서독으로 가야 할 것 같아요' 휘틀리는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도 똑같은 일을 생각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우연히도 그날 브로커의 점심식사는 정치계 주변에 몸담았던 일단의 정력적인
인물들과 하게 되었다. 그 식사에는 제네바에서 있었던 소련과의 무기 제한 협상에서
한때 미국 대표였던 폴 니츠와 전에는 랜드 코퍼레이션에 있었고 국방분야 연구에
적극적인 리차드 홀부루크가 포한되어 있었다. 브로커는 그들에게 동독에서 온
뉴스를 말했다. 그 이야기에 그들은 깜짝 놀랐다. 그을은 철의 장막 뒤에서
진행되는 놀랄 만한 변화를 토의하면서 점심을 먹었다. 브로커가 NBC로 돌아왔을
때는 오후 2시가 넘어 있었다. 휘틀리의 방으로 들어갔을 때 브로커는 빌과 제리 두
사람이 모두 우울해 보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우린 자네가 가야 한다고
생각하네' 휘틀리가 말했다.
"이해합니다' 브로커가 대답했다. 그러나 그는 늘 이런 상황에서 하는 방식으로
만약 그가 간다면 전체 뉴스 진용을 바꾸게 될 것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그리고
내가 그곳에 도착하면 도대체 뭘 해야 하지요. 그리고 그보다도 체코로 가게
되면?' 그가 말했다.
"모두 잘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램프래트가 말했다. 보모가 아이들을 데리러
도착했을 때 커스네츠는 복도로 나가 승강기로 걸어갔다. 갑자기 그는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부른 사람은 세릴 굴드였는데 선임 프로듀서인 그녀는 어떤
일로 아주 흥분해 있음이 분명했다. "곧 돌아오겠소. 아이들을 승강기까지 데리고
가는 중이거든요' 그가 그녀에게 말했다. "아주 중요한 일이라 지금 와야 해요'
그녀가 소리쳤다.
커스네츠는 아이들에게 작별 키스를 해주고 서둘러 빌 휘틀리 방으로 갔는데 세릴,
제리 램, 그리고 던 브라운이 휘틀리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커스네츠를 돌아다보면서
빌 휘틀리는 다음과 같이 물었다. "당신이 오늘밤 떠나지 못할 이유가 있습니까?'
새로운 계획은 저녁뉴스 방송이 끝난 후에 독일로 떠나는 것이었다. 커스네츠는
오후 시간 대부분을 취재진의 배치도를 그리면서, 그리고 그들이 적재적소에 배치된
사람들이라고 확신하면서 보냈다. 뉴스 앵커가 현장으로 움직이면 아주 새로운 팀이
소집되어야 했다. 외신부에 있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커스네츠는 특파원 짐 비틀맨을
국경지방을 취재하도록 파리에서 프랑크푸르트로 이동시켰고, 마틴 프래처를
이스라엘에서 이동시켰다. 프랑크푸르트 지사의 책임자인 수재트니틀은 베를린으로
보내졌다. 요르단 지사장인 마이크 실버는 암만에서 프랑크푸르트로 이동했으며, 릭
데이비스도 프랑크푸르트로 자리를 옮겼다. 마이크 베처는 베를린으로 갔으며,
나중에는 아더 켄트도 베를린에 합류했다. 특파원들의 이와 같은 이동은 마치
농구에서 지역방어를 펴는 것 같았다. 농구에서 수비수들은 공을 막아내기 위해
하나의 단위가 되어 그들의 위치를 이동시킨다. 그러나 지역방어의 경우처럼
특파원들의 배치도 사람을 잘못 짝지움으로써 실패로 끝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요르단에 있는 지사장이 반드시 동구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최상의 정보원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날 오후 브로커는 전화통에 매달려 있었다. 그는 이미 동독의 정치 상황에
이숙해 있었지만, 이번과 같은 중요한 여행에는 더 많은 정보가 필요했다. "난
콜롬비아에 있는 해리만연구소의 옛 친구인 봅 레그볼드에게 전화했지요.
외교관계위원회에 있는 빌 하이랜드에게도, 워싱턴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전화했어요'
그리고나서 그는 여행가방을 가지러 파크 애브뉴에 있는 그의 아파트로 서둘러
갔다. 개축중이었던 그 아파트는 문이 잠겨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그는 열쇠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했지요. 그 일 중 하나는 비행기 안에
휴대할 수 있는 소지품을 챙기는 것이지요. 난 늘 가볍고 빨리 여행하기를
좋아하거든요'라고 브로커는 말하는데, 이 방법은 그가 하이킹을 하거나 등산할 때
취하는 것과 같은 방법이었다.
그는 또하나의 가방을 얻어 짐을 싸고 여권이 있는지를 확인한 다음, 편성 관리자인
메랄린 제레프스키에게서 비행기 표와 호텔 예약권을 가지러 갔는데, 그 여자도
마지막 순간에 그것들을 예약하는 데 성공했었다. 화요일 오후 남는 시간에 그는
수백만의 시청자들을 "나이틀리 뉴스" 앞으로 끌어모으기 위해 오후 6시
30분에는 방송에 출연할 준비도 했다.
그날 밤 9시경, 브로커는 JFK 공항에서 오후 9시 35분 프랑크푸르트행 루프트한자
비행기에 탑승하려 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NBC 방송 제작보도.컴퓨터 기술자 그리고
커스네츠가 있었는데, 커스네츠는 독일에서 진행되고 있었던 일에 끈덕지게
매달렸다고 브로커가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브로커와 커스네츠는 커다란 서류철을
갖고 갔는데 비행기에 타기 전에도 그들은 그 서류철을 샅샅이 조사했었다. 비행기
안에서 그들은 기사에 대한 서로의 생각들을 논의했다. 그들은 새로운 돋독의 야당
동맹에게 어떤 일이라도 시도하고 싶었다. 그들은 거기에 도착하면 그 구성원들과
대화를 나눌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정작 하려고 한 것은 잠을 자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일단 베를린에 도착하면 쉴 시간이 거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바로 옆자리에 앉은 두 사람은 거의 비슷한 나이였지만 어딘가 색다른 한쌍처럼
보였다. 테 없는 안경을 끼고 턱수염이 나 있고 직업적으로 보이고 그레이
하운드처럼 날씬하며, 겉모습 아래 도시인의 예민한 힘을 간직하고 있음을 암시해
주는 모습을 커스네츠는 지니고 있었고, 브로커는 침착하고 매끈한 피부를 지녔고,
마음이 편해지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가까운 친구였다. 커스네츠의 아내가
암으로 죽어가고 있을 때 브로커는 그녀를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그는
미네소타대학교에서 알았던 한 전문의를 연결시켜 주었으며, 그 부부에게 코네티컷에
있는 그의 집을 빌려 주었다. 그는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커스네츠에게는 "톰은 단순한 동료 관계를 훨씬 뛰어넘는 사람이었다. 그는 형제와
같았다'라고 느껴졌다.
이제 홀아비 커스네츠는 아이들을 꼭 안아 주고는 떠났다. 그리고 그와 브로커가
유럽에서 무엇을 찾아내고 언제 돌아올지에 대한 분명한 생각도 없이 유럽으로 가고
있었다.
비행기는 빠르게 느껴졌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연락한 후에 수요일인 11월 8일 오후
일찍 서베를린에 도착했다. 그들은 베를린 5번가에 있는 크훼르스텐담에서 조금
떨어진 쉐이제호프호텔로 직접 갔는데 그곳에는 임시 취재본부가 이미 가동중에
있었다. 커스네츠는 "내 옷 가방은 온종일 그곳에 놓여 있었고, 그날 나는 내 방을
둘러보는 일도 할 수 없었지요'라고 말한다.
브로커는 크렌츠가 정치국을 재조직하려 한다는 것을 재빨리 알아 차렸다.
크렌츠는 한스 모드로우에게 새 낵을 구성하라고 명령했었다. 많은 이부민들과
시위대에도 아랑곳없이 공산당은 분명히 서두르고 있었다. 브로커는 이 일이 뉴욕을
떠날 때 기사거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것을 취재하기 위해 그는 카메라를
동베를린으로 가져 가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오후 1시 15분경 (동반구 시간으로 오전 7시15분경), 그는 뉴욕에 있는 수석
프로듀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기사가 모양을 갖춰 가고 있습니다' 휘틀리에게 그가
말했다.
"그들은 이제 야당을 인정한다고도 하고 선거에 관해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밤
동베를린에서 촬영 허가도 얻어 놓았구요. 우린 그곳에서 녹음을 하게 될 겁니다'
찰리 검문소를 지나가면서 브로커는 늘 그렇듯이 엄격한, 표정없는 무장 경비원들이
주는 차가움을 느꼈다. 화가 날 정도로 시간을 낭비하는 것 같은 질문과 조사를
겪어내는 일은 참기 어려웠다. 그의 기사거리는 다른 편에 있었는데, 긴 차량행렬
가운데서 그들의 차량은 한번에 아주 조금씩 앞으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차 안에
앉아 있으면서 커스네츠는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놀랄 만한 사태
발전이 동구를 휩쓸고 있었지만 이곳에선 어떤 것도 변화하지 않은 것 같았다.
브로커와 커스네츠가 검문소를 통과하는 데 족히 한 시간 이상이 걸렸다. 베를린
장벽과 동베를린 사이 사람이 살지 않는 100미터의 땅은 자동무기로 무장하고 군견을
데리고 있는 군인들에 의해 엄중하게 순찰이 되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한때 분할되지
않은 베를린과 통일되 독일의 심장부였던 브란덴부르그 문으로 차를 몰았는데
그곳에서 그들은 그날 밤 방송할 뉴스의 도입부를 미리 녹음 촬영했다.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동베를린 브란덴부르그 문 앞입니다'브로커가 말문을
열었다. "동독은 오늘밤도 여전히 소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언제
어떻게 안정이 회복될지는 확실하게 알지 못합니다' 앵커 브로커는 "지난 하루
여전히 더 많은 공산당 강경론자들이 공산당이 침몰되는 것을 막으려는 당의 노력
속에서 방치되어 왔습니다'라고 보도했다.
그 프로 후반부에 본에서 온 짐 비덜만은 서독의 콜 수상이 "베를린장벽은 유지될
수 없다'고 선언했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휘틀리는브로커가 서방으로 탈출한 세 명의
젊은 동독인과 그날 낮에 인터뷰한 내용을 방송하면서 끝을 맺었다.
그것은 특별히 브로커가 기발하게 생각해냈던 일은 아니었다. 아마도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예상 가능한 지루한 질문을 던졌던 것을 보면 그는 비행 자체로 고통을
겪고 있었던 것 같다. "1년 전이라면 오늘 당신이 여기에 서 있으리라고
생각했겠습니까?' 결단을 늦게 내리지 않은 데 대해 자부심을 지닌 사람에게 대답을
얻어내려는 질문이 이 정도라니!
그러나 그가 물어본 마지막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일상적인 관심 이상의 것이었다.
"당신은 장벽이 무너질 것이라고 보십니까?' 브로커는 베를린 장벽 옆에서 8년간
살았던 젊은이에게 물었다. 그 젊은이는 아주 분명하게 다음과 같이 말을 하고
나서야 멈추었다. "그래요,장벽은 무너집니다'그에게는 이미 장벽이 무너지는 일은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브로커는 방송이 나간 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뉴욕에는 우리 경쟁자들의
역할을 재고하라는 상당한 압력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들은 "그가 거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지?"라고 말하고 있었지요. 미국에서 이날은 선거 다음
날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선거가 주된 놀라움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미국에선 노예의 후손인 D. 와일더가 버지니아 주지사로 선출되었는데, 그는 미국
역사상 첫번째 흑인 주지사였다. 뉴욕에선 또 한 명의 흑인인 D. 디틴스가 예상하지
못할 정도의 치열한 경쟁에서 최초의 흑인 시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렇지만 브로코와
NBC 방송사가 생각했던 대로 그 뉴스들은 아주 빠르게 관심의 대상에서 벗어나
버렸음이 분명했다.
"그것은 멋진 기사였지요' 앵커 브로커가 인정했다. "하지만 모든 이가 그들이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전날 밤 11시부터 그들은 방송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했던 일에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지요. 모든 일이 잘 되어
나가는 것같이 보였습니다'
특히 잘 되어 가는 듯이 보인 한 가지 일은 브로커가 이미 야당인 뉴 포럼 그룹의
몇몇 인사들과의 인터뷰를 준비하기 시작했다는 기사였다. 이 보도와 관련해서 그는
동베를린 공산당 지도자이며 대변인인 훈터 쉬보우스키와의 만남을 주선하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브로커는 그를 만난 적은 없었지만, 오늘날 미국 앵커들은
해외에서 놀라울 정도로 잘 알려져 있다. 이는 많은 유럽인들이 미국을 방문한
결과일 것이며, 또는 미군방송에 나타난 앵커의 모습이 가져다준 결과일 것이다.
브로커가 고르비와 했던 인터뷰와 같은 주도적인 유럽 정치가들과의 면담이 유럽 TV에
재방영된 결과일 것이며, 유럽 호텔 TV에 나타난 CNN 방송의 존재 때문일 것이다.
그런 변화를 알고 있던 브로커는 "세계 거의 모든 곳에서 사람들은 우리가 누군지
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곧 면담을 뜻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독일에 있는
NBC의 미쉘 뉴버트와 함께 브로커는 일찍이 쉬보우스키에 대한 기자회견에
참석했었다. 그에게 접근하면서 브로커는 인터뷰를 하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영어를
하는 쉬보우스키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그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내일 밤쯤이 어떻겠느냐고 덧붙였다.
다음날 아침인 11월 9일 목요일. 브로커는 5시간 정도 잠을 잔 후 7시30분쯤
깨어났다. 그가 맨처음 한 일은 뉴 포럼 그룹의 사람들이 지닌 목표들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그들과 대화를 할 국경지방으로 되돌아가는 일이었다. 그날 아침 그와
그의 프로듀서는 동독 정치국이 회의를 가졌다는 것과 그들이 국민들의 감정을 계속
격앙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우리는 비중이 큰 기사거리가 그날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계속해서 조잡하게나마 그것과 다른 요소들을
모아 나갔지요' 브로커가 말했다.
브란덴부르그 문의 서베를린 지역에서 정오경에 브로커와 커스네츠는 그들을 따라
독일로 온 제리 램프래트를 만났다. 제리는 NBC 방송사가 브란덴부르그 문의 서쪽
지역에 갖고 있는 인공위성 연결장치를 그들이 필요로 할 것인지를 알고 싶어했다.
그 유명한 경계지점은 생방송 시설을 해놓기에는 분명히 좋은 자리이다. 베르린
장벽과 브란덴부르그 문은 볼 만한 배경으로 작용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브로커가 대답했다. 그러나 사태가 너무나
유동적으로 진행되고 있어서 그 장치가 필요할지는 모르겠소,. 만일 우리가 계속
동베를린에서 녹음편집을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것을 그렇게 많이는 보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두 사람이 알고 있듯이
생방송으로 하는 것보다는 녹화하는 것이 더 쉬웠다.
다시 브로커는 그날 저녁, 뉴 포럼이 주선한 기자회견에 참석하러 동베를린으로
돌아갔다. 후에 그는 그 그룹을 구성하고 있는 몇몇 예술가, 지식인들과의 인터뷰를
녹화했다. 나중에 뉴욕 필하모니의 지휘자로 임명된 컬트 마스어도 지도급 인사들
중에 들어 있었다.
그날 저녁 기자회견장에 쉬바우스키는 정부의 새로운 정치적 양보를 분명하게
설명하고 12월에 당대회가 있음을 발표하러 약 300명의기자 앞에 나타났다. 그는
자유로운 출판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당국에 더 많은 여성들이 들어올 필요성을
언급했으며, 경제가 성과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모든 면에서 그의 말은
구체적인 면이 부족한 것이었다.
커스네츠에 따르면 그 기자회견은 지루한 것이었다.
"기자회견은 답답했지요. 질질 끌고 나가는 것이었어요. 난 이 모든 진행과정이
흥미롭다고 느끼고 있었어요. 내가 어떻게 그것을 그날의 조리졍연한 기사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들떠 있던 커스네츠는 통역용 이어폰을 빼내고 밖으로 나와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리고나서 예정된 기자회견 시간이 5분쯤 남아 기자와 카메라맨들이 짐을 꾸릴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쉬바우스키는 그날 정치국이 마련한 새 여행정책을 설명하기
시작했지요. 영어 통역관으로부터 그의 말은 또박또박하게 터져 나왔습니다.
"항구적인 국외 이주를 법령으로 정하는 것..... 이것은 이런 움직임이 이웃
우방국인 체코를 통해 실행되는 성질의 것이라면 자유로운 이주는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우리는 모든 시민이 동독 국경을
넘어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규정을...결정했습니다"'
브로커는 당시 그 장면을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즉시 말입니까?'
어떤 기자가 외쳐댔다.
안경을 쓰고 안주머니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든 그 동독 공산당 지도자는 그것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사적인 여행... 사전 여행허가증 없이도 이루어질 수 있고... 그 허가 조치는 곧
효력을 발생합니다'
이제 방에 있던 기자들이 그들이 같은 뜻의 말을 들었는지를 확인 하려고 서로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곳에 서베를린도 포함됩니까?'
기자 중 한 사람이 물었다. 쉬바우스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항구적인 국외 이주는 동독의 모든 국경에서 일어날수 있습니다.
서독이나 서베를린으로 가는 국경에서도 말입니다'
조금 전 커스네츠는 기자회견실로 돌아왔는데 브로커의 얼굴에 한대 얻어 맞은 듯한
표정이 나타나 있음을 알았다.
"그가 말하는 것을 들었나?'
브로커가 물었다.
"뭐라고 했는데?'
"국경이 개방된다고 말한 것 같아'
"뭐라고?'
커스네츠는 그가 농담하는 것이 아니가 하고 그를 쳐다보았다.
"언제쯤?'
"즉시라고 말한 것 같아'
깜짝 놀란 영국인 기자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가 뭐라 말했는지 들었소?'
모든 사람이 떼를 지어 서서 아직도 그들이 들은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어수선한 장면이었다.
"쉬바우스키를 놓치지 마!'
커스네츠는 그들이 쉬바우스키를 뒤쫓아 나갈 때 카메라맨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
공산당 대변인은 그들과 인터뷰하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래서 커스네츠는
쉬바우스키가 그들을 만나지 않게끔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쉬바우스키와의 인터뷰는 기자회견장의 위에 있는 정사각형 방에서 있었는데, 그
방은 의자 몇 개와 소파가 있는 검소해 보이는 사무실이었다. 그 방에는 앵커
브로커와 푸로듀서 커스네츠, 카메라맨, 쉬바우스키, 그리고 두 명의 보조관이
있었다. 모든 기자가 그렇듯이, 브로커가 하고자 했던 것은 정확히 쉬바우스키의
말을 이해했는지를 확실히 하기 위해 쉬운 말로 그 새로운 정책이 분명한가의 확답을
쉬바우스키로부터 받아두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 질문부터 시작했다.
"이곳에서 내가 이해할 수 있게 해주시오'
그러면서 그는 기자회견장에서 작성한 쪽지를 꺼내 천천히 읽었다.
"동독 시민들이 개인적 이유로 선택한 것을 갖고 어떤 검문소도 통과할 수 있다는
것... 내가 정확히 알고 있는 것입니까? 동독인들이 더이상 제3국을 통해 국외로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까?'
쉬바우스키는 손을 턱에 대고 주의깊게 듣고 있었다. 회색머리를 뒤로 잘 빗질해
넘긴 육중한 몸체를 지닌 쉬바우스키는 저고리 옷깃에 달린 당원 표시 핀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래요'
그가 끄덕였다.
"그들은 더이상 3국을 경유해 동독을 떠나지 않아도 됩니다'
"그들이 베를린장벽을 넘어가는 것도 가능합니까?'
브로커가 그를 다그치면서 물어보았다.
"가능합니다'
쉬바우스키가 반복해 말했다.
"여행할 수 있는 자유도 말입니까?'
"당연하지요'
지켜보던 커스네츠는 쉬바우스키의 반응이 즉흥적인 성격을 갖고 있음을 알고는
깜짝 놀랐다.
"난 그 결정이 그 자리에서 이루어졌다는 인상을 분명하게 받았습니다'
커스네츠가 회상했다.
"그 모두는 임기응변식이었지요.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보좌관들이 그에게
서류들을 넘겨 주고 있었어요. 브로커는 이때 질문을 했고, 쉬바우스키는 대답거리를
찾으려고 서류를 뒤적여야 했지요. 그는 그렇게 임시변통식이었고 따라서 상황은
도저히 현실적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브로커는 방을 뛰쳐나가 아래층으로 달려 내려갔다. 가는
길에 그는 새로운 이주정책을 읽고 있던 서방 기자들을 만났다. 엄격하게 강화된,
사람들을 억압하던 낡은 규정이 28년이나 시행되어 왔기 때문에 기자들이 그 정책의
허점을 찾아내려 한 것도 이해할 만했다.
"그건 사실이야!'
브로커가 말했다.
"그들은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낼 생각이라구!'
"그가 말했단 말인가?'
"그 부분을 그에게 특별히 물엇지. 그건 사실이야! 녹화도 해놓았거든. 내일
아침 즉시 여권업무가 시작될 걸세'
문답을 주고받으며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브로커는 굽히 건물을 빠져나갔다. 그
순간을 회상하며 커스네츠는 겅이로운 미소를 짓는다.
"순리대로 일이 잘 되려면 정말 현실로 나타나는가 봐요'
세낸 메르세데스 승용차가 기자회견장 밖에 세워져 있었고, 운이 따라 주었는지 그
차에는 "정말 믿음직하게' 전화가 설치되어 있었다. 몇 분 후 브로커는 뉴욕에
있는 NBC 본사와 통화하고 있었다. 오후 7시40분(뉴욕시간 오후 1시40분) 게릭
어트리와 특별보도 시간에 끼어들어간 브로커는 메르세데스 앞 좌석에 앉아 극적인
동독의 새 정책을 미국에 보도했다.
래더와 제닝스도 이미 취재하려는 목표에 가까워져 있었겠지만 브로커는 최초로 그
소식을 알려 주었다. 그는 그 경쟁에서 우뚝 솟아있음을 느꼈고 저녁방송 시간까지는
아직도 5시간 가량 남아 있었다. 쉬바우스키의 기자회견은 생방송되었다. 말은
빠르게 퍼지는 법이다. 그들이 찰리 검문소를 통해 서베를린으로 돌아왔을 때
브로코는 경비군인에게 "새로운 여행정책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물어보았다.
"아무런 의견도 없소' 그 경비군인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러나 이제 차량수색은
건성건성 이루어졌다. 그들을 통과시키기 직전 그는 미소를 보내며 말했다. "내
의견은 직무상의 의견입니다'
호텔로 돌아온 브로커는 NBC의 컴퓨터에다 그날 저녁뉴스 진행을 위해 기자회견문을
적어 넣기 시작했다. 그는 쉬바우스키 인터뷰 녹화테이프를 점검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제 호텔 로비에서 조금 떨어진 방 옆에 설치된 임시 지사 사무실에는 약
80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곧 특파원들이 여러 검문소로 나갔는데 그곳들은
동독인들이 건너오게 될 장소였다.
수재트 니틀이 브로커가 기사를 완성해 가고 있던 방으로 달려온 것은(뉴욕에서
뉴스가 있기 한 시간 전인) 그날 밤 11시에서 11시30분 사이였다. 그녀는 두 눈을
크게 뜨고는 NBC 생방송 중계팀 바로 옆에 있는 브란덴부르그 문의 서쪽 지역에
수많은 군중들이 모여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당신이 오늘 밤 뉴스 프로그램을 진행시킬 수 있도로 안전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니틀이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요'
브로커가 그녀를 제지시켰다. 일련의 사건들은 너무나 상식을 넘어서는 것이어서
그 프랑크푸르트 지국장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군중들은 TV 뉴스팀에 이끌려
모여든 사람이 아니라고 그는 설명해 주었다. 그들은 역사적 사건, 그야말로
획기적인, TV보다 영향력이 더 큰 사건들에 이끌려 모여든 사람들이었다. 그녀는
진행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고는 그와 함께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브로커는 즉시 브란덴부르그 문으로 떠나 다. 커스네츠는 진행을 감독하려고 남아
있었다. 호텔에는 기사들이 프랑크푸르트에서, 모스크바에서, 런던에서 날아들기
시작했고, 피터 켄트는 독일 통일을 보도하고 있었다. 호텔 복도를 오르내리면서
호텔은 시장바닥 같았다.
송화기와 택시 호출상자를 합쳐 놓은 것 같은 기계장치인"코드 박스"로
뉴욕에 있는 휘틀리와 통화하면서 커스네츠는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가
계속해서 기사들을 받고 있으며, 여전히 필요로 하는 것은 "cold open(nbc의
특수한 뉴스 도입부분)"이라고.
약 두 달 동안 NBC의 "nightly"는 프로그램의 시작 부분을 NBC의
로고나 브로커의 얼굴로 채우지 않고 드라마에선 항상 성공한 것은 아니지만 길이와
해설하는 소리가 들어간 화면으로 바로 시작하는 콜드 오픈을 사용해 오고 있었다.
휘틀리에게 커스네츠는 그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베를린에서 진행되고 있는 놀라운
사건들을 포괄한 화면이 도저히 생각나지 않았다.
"정말 죽을 지경이었지요'
그가 말했다.
"나는 나타나는 모든 화면들을 보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것들을 잘 처리하지
못했어요. 기자회견장의 화면들이 있었지만 그곳에는 한 친구만 나타나 있거든요.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방송시간이 25분밖에 남지 25분밖에 남지 않았을 때 커스네츠는 돌아와서 휘틀리와
통화했다. 그는 여전히 좋은 생각을 해내지 못했다.
"우리가 이 작업을 할 수 있을까요?' 커스네츠가 물어보았는데 그의 목소리는 그가
제안한 선택에 대한 자신감 부족을 나타내고 있었다.
바로 그때, NBC 카메라맨의 한 사람인 피터 샘슨이 카세트를 잡고 흔들면서 달려
들어왔다. 샘슨은 냉정해지려고 애쓰고 있었지만 두 눈은 어떤 열정으로 불타고
있었다.
"수천 명이나 돼요... 수천 명의 동독인들이 검문소를 지나 넘어오고 있어요'라고
소리쳤다.
샘슨은 그것을 증명할 필름(footage)을 갖고 있었다. 그림을 살펴볼 시간이 전혀
없었다. 그것을 보지도 않은 채 커스네츠는 그를 브란덴 부르그 문에 자리잡은
생방송 송출지점으로 급히 보내, 위성을 통해 휘틀리에게 그 화면을 보내게 했다. 몇
분 후에 필름이 뉴욕에 도달했을 때 커스네츠는 이어폰으로 듣고 있었다. 그는
휘틀리가 말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 화면들을 보십시오!'
방송까지 15분 정도 남았을 때 브로커는 사진 찍을 준비를 하며 브란덴부르그 문
가까이에 있는 작은 플랫폼에 서 있었다. 그 지역은 서독인들로 꽉 차 있었다. 추운
밤이었다. 그는 자신의 녹색 파카가 추운 날씨를 견디기 어려웠으므로 특파원 마이크
베처의 두꺼운 코트를 빌렸다. 예고없이 나타난 서독 경찰이 사람들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촉구했다. "맙소사!' 그는 생각했다. "우리가 방송할 때쯤이면 저들이
모두 가버리고 없겠는데'
브란덴부르그 문 앞에 있던 군중이 앞으로 쇄도한 것은 그때쯤이었다. 그들은 벽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다른 쪽에선 동독 군경이 물대포를 쏘아대고 있었는데
그들은 담에 올라가는 사람들을 맞추어 떨어뜨리려 애쓰고 있었다. 조금 전 브로커는
방송이 시작된다는 신호인 카운트다운 소리를 희미하게 이어폰으로 듣고 있었다.
"보십시오. 나는 이 일이 어디로 진행되어 갈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와 함께
지켜보도록 합시다'
그가 뉴욕에다 대고 말했다. 브로커의 주변은 큰 외침으로 가득 차서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모니터 위의 콜드 오픈엔 냉정하게 좁다란 다리로 행진하고 있는 소규모의 동독
남녀가 나타났다. 화면과 함께, 브로커의 떨리는 목소리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오늘밤은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베를린 장벽이 더이상 동독인들을 가로막을 수
없습니다. 수천 인파가 다리를 건너오고 있습니다'
그리고나서 브로커는 자신보다 한 자는 더 커보이는 짙은 색 코트를 입고 화면에
나타났다. 그는 뉴욕과 더 잘 통화하려고 이어폰을 손으로 꼭 잡고 있었다.
배경으로 몇몇 젊은이들이 장벽 꼭대기에서 뛰어다니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동독군이
물대포를 쏘아댔을 때 그것을 막아낸 갈색 우산을 들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앵커가 말했다. "장벽이 세워진 이래 가장 역사적인 것으로 기록될 밤에
베를린장벽으로부터 생방송으로 보내드립니다. 여러분이 내 뒤에서 보고 있는 것은
오늘, 1961년 장벽이 세워진 이래 처음으로 동독정부에 의해 발표된 새로운
정책(여행에 관한)에 대한 기쁨의 표현입니다. 사람들은 이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자회견장의 단편들이 잇따랐고, 그리고나서 쉬바우스키의 인터뷰가 이어졌다.
그리고 다시 브로커의 생방송 현당으로 화면이 바뀌었다.
"축제는 계속됩니다'
앵커 브로커는 카메라가 물을 흠뻑 뒤집어 쓴 축제분위기에 들뜬 두 사람이 있는
장벽 꼭대기로 올라갔을 때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경찰은 물대포로도 두 사람의 기분을 떨어뜨릴 수는 없습니다'
바로 그때 동독에서 온 뉴스에 대한 서독 의회의 반응이 담긴 기사가 본에 있는 짐
비더만에게서 욌다. 그 내용은 의회 전체가 자발적으로 일어나 그들의 국가를
부르면서 놀랄 만큼 애국적인 행복한 순간을 가졌다는 것이었다. 전송되는 화면을
지켜보는 미국인들에게 그 장면은 마치 헐리우드에서 연출된 것처럼 보였다. 방송이
반쯤 나가 광고가 진행되는 동안 뉴욕에 있는 수석 푸로듀서 세릴 굴드가 브로커에게
말했다.
"믿지 못하겠지만 오늘밤 이틀란타에서 비행기 추락사고가 있었어요'
"상태가 얼마나 안 좋지요?'
그가 물었다.
"우리도 아직은 잘 몰라요. 불길이 심하답니다. 그러나 그 문제는 곧
풀리겠지요'
아틀란타 북쪽 아파트 단지에 추락한 비행기는 해군 A7 제트기로 판명되었다.
"다음은 뭘 해야 하지!' 브로커는 생각했다. 장벽에 있는 군중들은 계속 늘고
있었으며 기사거리는 계속 쌓여 가고 있었다. 앵커 브로커에 따르면 "그 첫번째
쇼(축제)의 막바지에 나는 그들의 소리를 뉴욕에 있는 조종실에서 들을 수 있었지요.
그들은 우리도 원을 만들어 삥 돌아야 한다고, 그리고 다시 이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지요. 난 이곳이 정말 미쳐간다고 느껴서 돌아갈 준비를 하라고
말했습니다'
브로커를 둘러싸고 있던 들뜬 독일인들에게서 노도와 같은 외침이 터져 나온 것은
베르르린 시간으로 아침 10시(그 소식을 뉴욕으로 두번째 송출하기 시작한 동반구
시간으로는 오후 7시부터)가 막 넘어서고 있을 때였다.
브란덴부르그 문에는 검문소가 없기도 했지만, 동독 진영 출입금지 구역을 가로질러
장벽 쪽으로 일단의 동독 군중들이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장벽에 처음 도착한 사람은 갈색 재킷을 입은 젊은이였지요. 그는 한숨에 장벽
위에 올라온 것 같았으며, 그가 의기양양하게 두 팔을 올리고 몇 시간 전만 해도 그를
가둬두고 있었던 콘크리트 판을 따라가며 춤을 추었을 때 군중들은 환호했습니다'
그리고 후에 그 장면을 자세히 이야기했다. 브로커는 카메라가 생생하게 그를
잡아낼 수 있게 하라고 미친 듯이 지시했다.
아틀란타 근교의 비행기 추락 설명을 방금 들어온 소식으로 에릭어틀리가 짧게
보도한 후, 브로커가 다시 시작했다.
"여러분이 TV를 생방송으로 보고 있는 것은 역사적 순간입니다. 영원히 살아남을
순간입니다. 여러분은 동서독을 나누고 있던 베를린장벽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장벽의 다른 편에서는 동독 경찰이 퍼부어댄 물대포를 뚫고 브란덴부르그
문을 통해 달려오는 젊은 동독인들이 있습니다. 드들은 동소독을 오가는 데 더이상
검문이 필요없다는 보도가 나간 오늘, 서독땅에서 장벽으로 온 다른 서독 청년들에
의해 장벽 위로 끌어올려졌습니다... 동독 당국은 검문소를 통과하도록 허용될 것이라
말했지만, 이제 그것은 사실로 확인되었습니다. 그들은 효과적으로 장벽을 허물었던
것입니다'
서독 수상을 헬무트 콜 대신에 헬쿠트 슈미트라고 부르는 것 같은, 브로커가 아니라
주식시장의 지표를 내놓은 양 지역(뉴욕과 베를린)을 서투르게 연결시킨 것 같은 몇
가지 실수에도 부구하고 사건의 성격과 기술적인 문제들을 제시하면서 전체 방송은 잘
진행되었다.
"아시다시피 그 사건은 그물없이 수천 피트 상공에서 방송하는 것같았어요. 심장이
마구 뛰고, 놀이와 같은 것도 아니고요. 이것들은 정말 중요한 사건이에요.
여러분은 이 역사적 순간에 현장에 있을 필요가 없었지요. 계산 착오를 할 필요도
없었고, 판단키 어려운 혼란스러운 것을 말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사건은 어느
정도는 스스로 말하는 법이니까요. 그래서 여러분이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은 어떤
내용과 전망을 줄 수 있는 몇 가지 관찰에 따른 의견들을 갖고 여러분이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을 메우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내가 하려고 애쓴거이었어요'라고 브러커는
후에 말했다.
그날 밤 베를린에선 커스네츠가 뉴욕에 있는 방송사 사람들에게 그가 방송을 들을
수 있도록 TV 모니터 가까이에 전화를 갖다 놓으라고 말했다. 그는 뉴스를 들으면서
그 기사거리에 이렇게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느끼면서 그리고 그 기사를
베를린이 아니라 뉴욕을 통해 듣는다는 사실에 낯선 느낌을 받으면서 작은 호텔방에
앉아 있었다. 마지막 부분에 케네디 대통령의"Ich bin ein Berliner(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라는 연설문 중 인용한 것이 나왔고, 방송은 군중들의 환호로 막을
내렸다.
마지막 방송음이 사라질 때 쯤 커스네츠는 뉴욕에 있는 방송실 전체에 터져나가는
것 같은 박수가 울려 퍼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나를 전율하게 했어요'
커스네츠가 말했다. 이것은 NBC 뉴스가 우울했던 한 해를 거의 마감하는 순간에
터져나온 승리자로 올라서는 멋진 순간이었던 것이다. 그날 저녁 늦게 커스네츠는
NBC가 독일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태진전에 관해 하려고 계획한 특별뉴스에 추가될 수
있는 자료를 얻으려고 카메라맨 한 사람과 밖으로 나갔다. 608피트 두께의 장벽
위에는 군중들이 있었다.
"영어 할 줄 아는 사람 있습니까?'
커스네츠가 외쳤다. 머리 바로 위에서 망치와 끌을 든 빨간 머리으 여자가 장벽을
두드려대고 있었다. 하던 일을 계속하면서 그녀는 말했다. "내가 할 줄 알아요'
그녀가 원기왕성하게 시멘트에 대고 망치질을 해댈 때 돌가루가 아세틸렌 불꽃처럼
사방으로 날리고 있었는데, 커스네츠는 인터뷰를 수행했다.
다음 날 아침 호텔에 있는 자기 방으로 돌아온 커스네츠는 기분좋게 몄 시간 잠을
자고는 일찍 샤워를 했다. 머리를 감을 때 그는 머릿속에서 자그마한 돌조각들을
발견했다. 그는 욕조에 그것들을 내려놓고 살펴보았다. 그는 그것들이 하수와 함께
어지러이 쓸려 내려가는것을 보다가 갑자기 그것들이 무언가를 알아차리고는 미소를
지었다. "이게 베를린장벽이구나!'라고 그제서야 생각해냈던 것이다.
@ff
19. 앵커 제닝스
1983년 7월 피터 제닝스는 몸이 불편한 프랭크 레이놀즈를 대신해 ABC 방송국
워싱턴 지국으로 돌아왔다. 레이놀즈는 3월 이후 병원을 들락거리고 있었으며,
제닝스는 레이놀즈가 회복될 때까지 두 달 동안 앵커 자리를 맡아 달라는 요청을 받고
있었다. 레이놀즈의 어디가 잘못되어 있는지는 아무도 자신있게 알지 못했고, 강한
개성을 지닌 레이놀즈는 그런 식으로 앵커 자리가 지속되기를 원했다.
그렇지만 미국에 도착하고 며칠 후 제닝스는 레이놀즈로부터 점심식사를 하자는
초대를 받았다. 레이놀즈는 사업과 관련된 방문객을 몇달만에 처음으로 받아들였다.
제닝스가 생각하기에 그는 아주 허약해보였다. 하지만 식탁에 앉아 레이놀즈는
즐겁게 음식을 비웠고, 대화가 장래 문제로 바뀌자 그의 창백한 얼굴에는 홍조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레이놀즈는 가을에는 다시 앵커 자리를 맡겠다고 정열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그 후 일 주일도 채 되지 않은 7월 20일, 레이놀즈는 사망했다. 그는
암으로 고생하고 있었고 동료들에게도 그 사실은 숨기고 있었다. 60세 된 앵커의
갑작스런 죽음은 ABC 방송국을 충격에 빠지게 했다. 레이놀즈는 앵커 일을 하다 죽은
첫번째 인물이었다. ABC는 형언키 어려운 비극에 직명했을 뿐 아니라, 그 빈자리를
메워 줄 사람도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
룬 알럿지와 그의 관리팀이 내린 첫째 결정사항은 지금까지의 복잡한 앵커 체제를
피해 보자는 것이었다. 그 체제는 부분적으로만 성공해 많은 이들이 전세계로 앵커를
찾아다닌 것이 눈속임이며 서투른 일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맥스 로빈슨도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두번째 선택은 더 어려운
일이었다. 만약 적당한 한 명의 앵커가 있다면 그게 누가 되어야 하는가?
테드 카펠과 피터 제닝스가 생각해 볼 수 있는 두 명의 후보자였다. 카펠은 그가
알프레드 E.뉴만과 하우디 도디의 특성을 갖고 있었음에도 일반적으로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다. 그의 이전 동료인 리차드 스랠켈트는 카펠이 TV에 가장 알맞은
사람이라고 생각한 많은 사람 중하나였다. 그러나 카펠은 자신이 출연하는 밤 11시
30분의 "Nig_htline"으로 강력한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 프로그램을 포기한다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또한 그는 저녁
시간대의 앵커 세계가 갖고 있던 도박성과 높은 긴장감을 견디며 들어갈 필요가
있는가를 확신하지 못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그 일에 가장 적합한 인물인지도
자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알럿지와 카펠 사이의 대화는 몇 번의 전화통화로 끝이
났다.
이제 확실한 선택의 대상은 제닝스였다. 그는 앵커로서 미리 경험이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용모도 괜찮았고 매력도 있었다. 그는 신뢰감을 주었고 게다가
16년 이상 현장에서 얻은 교양도 도움이 되었다. 알럿지에겐 한 가지 문제만이 남아
있었다. 제닝스도 그 일을 맡으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여동생 사라 제닝스는 이렇게 회상한다. "해외 체류기간 동안에 오빠는 여러가지
점에서 미국으로 돌아오고 싶어했지만, 세번째 결혼 후에 그는 영국에서 만족한
생활을 하고 있었지요. 오빠는 대부분의 TV기자들이 갖고 있지 않은 익명을 쓰고
고사한 직업도 갖고 있었지요. 그는 헴스테드에 멋진 에드워드 왕조풍의 벽돌집이
있었는데 아이들에게 아주 훌륭한 곳이었지요. 오빠는 어린아이들 때문에 뉴욕에
끌리지 않았어요'
제닝스와 아내 케이티 마틴은 영국을 사랑했다. 그들은 정말 떠나고 싶지 않았다.
제닝스는 이 시기를 "나와 사장 사이에 큰 긴장감을 준 지긋지긋한 시간으로
기억합니다. 사장은 이렇게 생각했겠지요. "내가 이 젊은 친구에게 이른바 TV에서
얻고자 하는 최종적인 자리를 주려 하는 것을 보라구' 난 그 일을 원하지 않았어요.
나는 그 당시 TV 뉴스에서 최사의 일로 간주한 것을 지니고 있었거든요. 난
앵커맨이자 해외 특파원 책임자였지요. 때때로 내가 되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삼인집정의 임기가 여러 해 동안 나로 하여금 매일매일의 방송에 얽매이게 하지 않고
중요한 기사거리를 찾아 여행할 완전한 자유를 가능하게 했지요. 앵커라는 직업은
분명 일상적인 방송을 해야 하는 종들이지요. 아주 높은 값을 받는 종들이라도 종은
종일 뿐이지요. 그래서 나는 그 일을 정말 하기 싫어 한 겁니다'
제닝스 부부는 이스트 햄톤에 집을 세냈는데 그 집은 그 지방 학교장의 것이었다.
그들은 제안받은 그 일자리 앵커직을 수락하느냐 마느냐를 되풀이해서 논하면서 여러
시간을 보냈다. "그 일은 결코 잊지 못할 겁니다' 그는 말한다. "우린 그 일을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면서 며칠 밤을 지샜지요. 우린 정말 이 일을 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제닝스는 16년 이상의 해외특파원 생활을 생각해 보면서, 비행기를 잠깐씩 타고
내리며, 나이지라아에서 파키스탄까지 여러 나라를 들락거리며, 군용 지프를 마음대로
쓰면서 전속력으로 오지의 도로를 달리며, 심할 때는 자동소총을 지닌 겁없는 10대
소년병들의 감시를 받으면서 취재를 하며, 현장에서 보낸 지난 시절들을 아주 큰
즐거움으로 회상했다. 그가 취재한 가장 중요하면서도 무서운 기사거리는 불과 1년
전에 일어났던 일이었다. 그때 이스라엘군은 에리엘 샤론 장군 휘하에 있었는데,
PLO를 베이루트 밖으로 몰아내려고 레바논으로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었다.
1982년 여름 다마스커스로 비행기를 타고 갈 때, 제닝스는 ABC의 오랜 동료인 존
쿨리와 팀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함께 어둠을 뚫고 꼬불꼬불한 산길을 넘어
시리아에서부터 차를 몰았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최대의 폭격 중 하나가 시작되는
시간에 동베이루트에 도착했다. 알렉산더호텔에 몸을 숨기소 있으면서 그들은
서베이루트로 가는 그 알렉산더호텔에 몸을 숨기고 있으면서 그들은 서베이루트로
가는 그린 라인(Green Line)을 가로질러 가자고 결정했다. 무시무시한 공중폭격 하에
그들은 택시 하나를 빌렸는데, 충분한 돈을 주었음에도 기사는 가림길까지만 그들을
태워 주었다. 폭탄이 옆에서 터지고 파편이 공중으로 튀어올랐기 때문에 그들은 다시
택시 하나를 가까스로 잡아서는 기사에게 아주 많은 돈을 주면서 서베이루트의
카모돌호텔로 그들을 태워 줄 것을 제안했다.
제닝스가 후에 방송중에 말한 대로 모든 전쟁은 파괴하지 않는 호텔을 갖게 되는데
그곳은 모든 기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며, 레바논에서 그 호텔은 바로 카모돌이었다.
8월 초에 들어와 이스라엘군이 PLO 의장 야세르 아라파트를 쫓아낼 의도로 심하게
베이루트를 폭격하게 되어서 기자들은 카모돌호텔 지하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땅
속에서 코로 숨쉬는 두더지처럼 가끔씩 위험을 무릅쓰고 밖으로 나가 볼 뿐이었다.
그러나 ABC 방송국의 프로듀서 제프 그랄닉과 릭 캐프란은 동료 특파원들이
동베이루트로 돌아갔으면 했다. 동베이루트는 제닝스의 말에 따르면, 극장에서 보는
것처럼 전투를 볼 수 있는 곳이었다.
그들은 제닝스에게 출발 명령을 내렸다. "그린 라인을 가로질러 가는 일은 언제나
섬뜩한 일이었지요'라고 제닝스는 말한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절대로
알지 못해요' 제닝스가 알레산더호텔(동베이루트에 있음) 문으로 수속을 밟으러
로비에 들어 갔을 때 폭탄차량이 호텔 밖에서 갑자기 터졌다.
"그 폭발로 호텔 전면이 날라가 버렸어요' 제닝스가 회상한다. "차의 파편들이
호텔 지붕까지 올라갔지요. 난 뉴욕으로 전화를 걸어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야!
이 자식들아, 난 서베이루트로 갈 거야!'라고 말이에요.
서베이루트에서 제닝스는 이스라엘군 공격을 시간대로 기록했다. 전화통에 매달려
여러 곳을 순회하며 제닝스는 이탈리아 대사로부터 PLO 관리에 이르기까지 모든 옛
정보원을 불러냈는데, 이는 아라파트가 언제 이스라엘의 요구에 굴복해 레바논을 떠날
것인가를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8월 하순 아라파트가 조건부로 항복했을 때 제닝스는
그 기사를, 그리고 아라파트를 취재했다. 그러나 그런 경험이 그의 신념을 흔들리게
했다. "이스라엘군은 레바논으로 들어오는 음식. 야채. 과일 심지어는 물까지도
차단시켰어요. 이런 무서운 포위공격을 수행한 것이 우리로 하여금 존경심을 불러
일으키게 했던 이스라엘군이었지요' 사실 그 포위공격은 더 킅 비극을 준비하는
서곡에 불과했다. 그 비극이란 다름아닌 사브라와 샤틸라로 알려진 팔레스타인
피난민촌에 대한 공격이었다. 아라파트가 레바논에서 배를 타고 피해 달아난지 2주일
후인 9월 중순, 이스라엘군은 난민촌을 포위하고 레바논 군인들이 폭도 소탕작전을
수행하도록 허락을 해 수백, 아니 수천의 무고한, 이미 막바지에 몰린 난민들을
학살하게 했던 것이다. 제닝스와 ABC 방송사 팀은, 두 주일 전에 중동을 떠났는데,
다시 그곳으로 가는 비행기에 타고 있었다.
"오후 7시 우린 파리행 브리티쉬 에어(영국 항공기)를 잡아 탔지요' 후에 제닝스의
가까운 친구가 된 ABC의 프로듀서 톰 옐린이 회상한다' "11시에 파리발 텔아비브행
TWA기를 타고 취재진과 함께 앉아 잠을 청하려 애쓰고 있었어요. 그 이유는 그곳에
도착하면 며칠간은 잠을 자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어요. 모든 사람이 빛을 가려
주는 눈가리개를 쓰고 잠을 청했는데 피터 제닝스만은 예외였지요. 그는 시험공부를
하는 사람 같았어요. 그리고 하룻밤 안에 모든 것을 머릿속에 집어 넣으려는 그런
사람 같았지요. 그는 책, 잡지, 신문에서 오려낸 기사들도 갖고 있었는데 노란
전등으로 비춰가면서 그것들을 되풀이해 보고 있었지요. 나는 깨어나 "새벽 3시인데
물하고 있지? 자네는 베이루트에서 살았고 이스라엘은 2천 번은 갔다 왔을텐데
말이야'라고 말하는 거예요' 제닝스가 알럿지의 제안을 숙고하며 이스트 햄톤에 있는
세낸 집에 앉아 있을 때 그는 그런 과거를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결국 제닝스가 앵커직을 맡아야 한다는 확신을 준 것은 그의 아내이자
전 ABC 편집부원이었던 케이티 마틴이었다. 케이티는 남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들이 당신에게 앵커 직을 제안할 때 기본적으로 그 이유는 간단한거지요. 당신은
거절할 수가 없어요' ABC가 언굽하지 않은 비장의 위협수단은 제닝스가 앵커 직을
거절하면 런던에 있는 특파원 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자리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며, 적어도 자유분방한 형태로는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내 생애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버렸을
겁니다'라고 제닝스도 인정한다.
좀더 적끅적이 될 것을 강조하며 그의 아내는 다음과 같이 다짐을 했다. "만약 이
자리가 고위간부 그룹의 일원임을 나타내는 것이면 이 자리를 마룻바닥에 팽개치지
않는 것이 좋겠지요. 당신은 그 자리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알아보는 것이 좋을
거예요' 걱정은 많이 되었지만 제닝스는 1983년 9월 ABC뉴욕 본부의 앵커 자리를
맡겠다고 알렸다. "그는 신겨이 지나치게 날카로웠지요' 톰 옐린의 회상이다.
"전에도 그 일을 했었고 실패한 경험이 있었기에, 그에게 그 일은 피하지 못할 상처
같은 것이었겠지요'
만약 새로이 향상된 모습의 피터 제닝스에게 하나의 결점이 있다면, 그것은 미국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캐나다에서 성장하고 유럽과 중동에서 기자생활을 한
그는 미국 언론인 가운데선 드물게 국제적인 전망은 지니고 있었다. 그가 앵커를 맡은
첫 해에 광고는 다음과 같이 나갔다.
"우린 당신이 다른 곳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을 당신께 드립니다. 바로 피터
제닝스입니다. 중동에서 올림픽 경기가 열리는 곳까지 그는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는 정말 미국을 알지 못했다. "내가 해외에서 돌아왔을 때, 나는 20년간 국내정치를
취재하지 못했었지요' 제닝스의 회상이다. "난 조금은 걱정스러웠어요. 브링클리와
카펠과 바바라 월터스가 제닝스에 관한 몇 가지 질문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엇는데,
그건 일종의 방송되지 않은 선전용 캠페인이었지요. 누군가 브링킆리에게 물었답니다.
"제닝스가 이집트에 관해 무얼 알고 있지요?' 그는 "그곳에 있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말했답니다. "아프리카는요?' "그것 역시 다 알고 있지요'
"동유럽은 어때요?' "그는 다른 어떤 특파원보다도 동유럽을 많이 알고 있어요' 그럼
"국내 정치에 관해서는 무얼 알고 있지요?' "전혀 아는 바 없지요'
1984년 선거의 해에 취재과정을 통해 제닝스는 보도하는 가운데 한번 이상 실수를
했는데, 동료들에 따르면 그의 미국 정치 전망을 파악하는 능력이 불완전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그는 연구자들이 그에게 준비해 준 자료들을 연구하며 여러
시간을 보낸다. 그래서 선거일인 11월 6일 밤 컴퓨터가 만들어낸 ABC 로고
"84년 선거"가 화면에 나타났을 때, 제닝스는 그가 왼편에 앉아 있는
신랄하고 단정한 전 앵커를 "나의 뛰어난 동료 데이비드 브링클리'라고 소개할 때도
아주 편안해 보였다. 그리고 아주 짧은 순간에 제닝스는 유창하고 태연히, 로널드
레이건이 플로리다에서는 12명의 선거인, 앨라배머에선 9명의 선거인을 확보하는
압도적 승리의 가도를 달리고 있다는 투표결과 통계를 설명했다. 가장 좋았던 것은
제닝스와 브링클리 사이에 닥치는 대로 오고간 농담이었다. 그것이 신랄한 전 앵커와
새로 그 자리를 맡은 사람을 하나의 팀으로 섞어 주었다.
"제시 헬름즈는 라디오 해설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당신도 알고 있겠지요. 그리고
그가 그 일을 하면서 너무 인기를 얻어 상원에 나갔다는 것도 알고 있겠지요'
브랑클리가 제닝스에게 무표정하게 눈길을 보내면서 약한 곳에서 짓는 섬뜩한 미소를
던지면서 말했다. 그러자 제닝스는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 길이 우리 모두가
좋아하는 길은 아니겠지요'라고 그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내가 그렇게 말했어야
했는데' 만약 1984년 선거가 제닝스에게 앵커 자리를 그가 안정시키기 시작했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면, 26살로서 시작한 풋풋하고 때묻지 않은 기자 역할을 분명히
능가하는, 정말로 인정받는 앵커로 증명이 된 것은 그 다음 두 해 동안에 일어난
사건들을 다룬 일이었다.
첫번째 사건은, 1985년 6월에 그리스에서 TWA847편이 공중납치 되었을 때였다.
인질극이 공포, 피로, 긴장 속에 장장 17일간이나 지속됨에 따라 제닝스도 지속적으로
방송을 하거나 중단하거나 했다. "이와 같은 공중납치극이 일어나면 아말에 속한
사람들과 그들의 불만을 우리가 얼마나 모르고 있었는가를 깨닫게 되지요'라고
제닝스가 말했다. 그러나 제닝스와 ABC뉴스 취재반은 분명히 중동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었고, NBC의 톰 브로커가 휴가중이고, CBS의 댄 래더가 명예로운 일을 하고 있는
동안 베이루트 태생으로 제닝스가 살았던 여러 해는 그에게 날카로움을 주었음이
분명했다. 그는 시아파 회교도를 알고 있었고, 나비 베리가 협상자로 일을 이루어내려
애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제닝스는 시리아의 대통령 하사드와도 인터뷰했는데
그는 39명의 미국인 인질들을 꼬불꼬불한 산길을 넘어 다마스커스로 데리고 왔다.
제닝스는 앞으로 전개될 그 지역의 사태를 그려볼 수 있었던 것이다.
"레바논에 있는 모든 사람이 총을 갖고 있지는 않아요. 하지만 그곳에는 세계의
다른 어느 곳보다 1인당 보유 무기 수가 많을 겁니다'라고 제닝스가 말했다.
그렇게 TWA 847편의 모습은 총이 자신의 머리를 노리고 있는 상태에서 조종석 밖으로
말을 하던 기장의 모습이나 이상한 투명봉지를 머리에 뒤집어 쓰고 기자회견을 하는
납치범들의 모습과 같은 ABC와 제닝스의 특징을 우리에게 각인시켰다. 그 모든 과정을
통해 제닝스는 알려진 대로 냉정하고 힘찬, 공정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렇지만 그는
대부분의 서구인들이 느낀 것과 같은 감정상태로 표류하기도 했다.
ABC 뉴스 회장인 룬 알럿지가 황금시간대에 공중납치극을 다룬 특별 프로그램을
제닝스가 방송 종료하는 것을 들으러 스튜디오로 내려왔을 때, 제닝스는 즉흥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손가락을 열십자로
해놓으세요'
그 다움 해는 생생하고 마음 아픈, 앵커들을 단련시킨 일종의 호된 시련이라 볼 수
있는 비슷한 사건들이 잇따랐다. 레이건과 고르비간의 아이슬랜드 정상회담도 그러한
순간의 하나였다. 퍼붓는 진눈깨비 속에 서서 즉흥적으로 말을 할 때, 제닝스는 그의
경쟁자들조차 체력에 탄사를 보낼 정도의 일을 해냈던 것이다. 허리 밑으로 그는
완전히 흠뻑 젖어 있었고 한 시간 동안 비바람 속에 서 있어야 했다. CBS의 수석
프로듀서인 톰 베타그는 그것을 "인간의 한계를 극복한 뛰어난 업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제닝스에게 가장 가슴 아픈 대가를 치르게 하고 최상의 찬사를 안겨 준 것은
1986년 우주왕복선 챌린저호의 폭발사고 취재였다. ABC는 출발장면을 취재하지
못했다. 사실, 오전 11시 30분에 우주선이 폭발했을 때 CNN만이 그 기사를 생생하게
보도했을 뿐이었다. 제닝스는 다른 선임기자들과 함께, 그가 그날 아침 레이건
대통령의 연두교서 발표장면을 미리 예고해 주는 프로그램을 만들러 백악관에
갔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대통령이 거실로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쪽지 하나가 보좌관 리건에게
건네졌어요. 쪽지의 내용은 "왕복선 폭발. 상세한 것은 나중에
알리겠음"이었어요. 물론, 우리 모두는 그 방에서 쏜살같이 빠져나왔지요'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제닝스는 방송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이후 11시간 이상을
계속해서 그 사건을 방송했다. 그 일은 어떤 영감을 받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즉시
그 뜻이 전달되고 애수에 젖은 그런 일이었고, 그래서 한 시간짜리 특별보도로 사건의
실체가 드러났다.
"오늘밤, 우리나라의 수도 워싱턴과 전국에 조기가 게양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제닝스는 비극적 폭발기사를 자세히 말해 나갔다. "폭발장면은
이제 우릴 마음에 아로새겨져 잇습니다. 그렇지만 아지고 우리의 마음을 전율하게
합니다. 25번째 우주왕복선 발사의 비극적인 종말, 7명의 우주인들의 급작스런 죽음,
다시 한번 우주로 뻗어나가는 미국인들의 노려, 그것이 이번에 처음으로 실패로
끝났습니다' 제닝스는 시속 2천 마일의 속도로 이륙한 지 1분 만에 폭발했다는
사실들을 알고 있었다면, 더욱 중요한 것으로 그 사건이 가져다주는 여파도 알고
있었다. 그는 올바른 질문들을 했다. 1967년 아폴로 우주선이 불길에 휩싸인 후
NASA가 그 기능을 회복하는 데 22개월이 걸렸다는 사실에 그는 주목했다. 지금은
어떠할 것인가? 그는 유인 우주선과 무인 우주선의 역할에 대해 물었다.
마지막으로 제닝스는 말을 멈추고 카메라를 직시했다. 그가 피워댄 담배연기가
화면을 어지럽히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사건보도를 끝냈다.
"우주개발에 우리는 막대한 국가의 영혼을 투자했습니다. 이것은 대 재난입니다.
그리고 그 계획 자체는 후퇴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미국은 우주에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미국은 그곳에 속해 있으니까 말입니다. 지금까지 우리와 함께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만일 재난들이 방송인에게 전환점이 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면 케네디 암살을
다룬 CBS의 래더처럼 챌린저호 폭발사고 취재는 제닝스가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한
그런 순간으로 널리 인식되어졌다. 어떤 사람들은 동시에 내부갈등이 CBS를 표류하게
하고 있을 때, 위대한 다음 앵커가 ABC에서 태어나고 있다고 느끼기도 했다.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챌린저호 사건 후에 이 국가적인 비극을 취재하면서 보여 준
감수성과 지성에 대해 제닝스에게 감사를 표하는 편지가 수천통이나 시청자들로부터
ABC로 쇄도했다.
1986년 이래, ABC 내부와 미국민들에게 준 제닝스의 신뢰감은 계속 커갔다.
1987년에 시민들과 미국, 소련의 지도자굽 인사들을 연결시켜 전국에 생중계
방송한 "수도에서 수도로"를 주재하고, 1988년 대통령선거 후보 토론에서
기술자 출신의 관료인 듀카키스에게 "대통령이 필요로 하는 열정과 지도력을 갖고
계십니까?'라고 질문하고, 자신이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사로잡혀 있다'고 선언한
감상적인 부시에게는, "만약 당신이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앴다면 왜 8년 이상
레이건, 부시 행정부는 저소득층이 사는 지역을 없애버리는 것에 도움을 주는 계획을
그렇게 많이 짰단 말입니까?'라고 질문했다. 두 사람을 모두 싸잡아 난처하게 만드는
질문을 던지면서, 1989년에 동유럽을 취재하며, 1990년에는 "피터 제닝스
리포트"라는 새 연재물을 시작하는 등의 믿음을 주는 일을 계속해 나갔다. 이런
일의 결과로 제닝스는 느리지만 꾸준히 정상의 자리로 올라갔던 것이다.
이런 성공은 그에게 어떤 새로운 명성을 가져다 주었다. 양친의 집에서 성장한
이래로 제닝스는 늘 세계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 사이를 쉽사리 여행하고 다녔다. 어느
정도는 그것이 앵커가 할 일이며, 제닝스는 천부적인 앵커였다. 그러나 해외에서 보낸
그의 기자생활과는 달리 해외에서 그는 다소 알려져 있지 않은 사람이었다-뉴욕에서는
아주 눈에 띄게 알려진 인물이 되었다. 그의 얼굴은 버스정류장의 칸막이 위에 붙여져
있었고 아내 케이티의 사교적인 경향성에 고무된 그는 유명인다운 생활을 하고 있다.
뉴욕에서 유행하는 사교의 장으로 영화감독 알란 J. 피쿠라, 작가 피터 마스,
공보활동 담당 행정관리인 존 스캔론과 간은 사람들과 함께 들어가 보도록 하자.
상류사회인 햄톤에는 전원적인 모습이 있고, 그 저명인사들이 활동할 수 있는 넓은
땅이 있으며, 뷰유한 예술가들과 구색을 맞춘 중개상인들이 있게 마련이다.
매년 제야 때가 되면 브릿지 햄톤에 있는 새로 지은 집에서 케이티와 피터는
식자층과 부유층으로 만원을 이룬 파티를 열고 피터가 그것을 주재한다. 여름에는
보트를 타고, 테니스를 치고, 크로킷 경기를 하기도 한다. 때로 제닝스는 참가 자격이
까다로운 쌕 하버 소프크볼 경기에 합류하는데 아틀란틱 앤드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의 소유주인 몰트 주커만이 던지는 공을 치러 타석에 들어서기도 하며, 카알
번스틴 부류의 사람들이 치는 공을 받는 야수의 위채에 서기도 한다.
물론 유명인에게는 명성과 함께 사생활 침해라는 어두운 면도 있게 마련이다.
뉴욕이 다른 도시보다는 유명인에 지친 편이지만 아직도 유명인을 초청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거리를 걷다가 나는 늘 발걸음이 멈춰어집니다. 나에게 적대적인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야 옳겠지만, 대중들에게는 당신을 흥분시킬 만큼 절대적인 사람이 충분히
많다고 봐도 좋습니다. 아내는 그것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만' 제닝스의
말이다.
제닝스 자신은 주고받는 과정을 좋아한다. 그는 일부러 출근시 맨하탄의
웨스트사이드를 따라 걷거나 버스를 탄다. 사람들과 부대끼는 것도 그는 좋아한다.
그는 뉴욕 태생의 버스기사에게서 그리스에서 일어난 정치적 사건에 대한 커다란
정보를 얻기도 한다.
"날 때부터 나는 거리에서 이ㅓ야기하는 사람이었나 봐요. 만약 우리가 거리를 걷다
누가 나에게 질문을 하나 하게 되면, 나는 아마 그들에게 5개 정도는 되물었을
겁니다. 아내는 그것이 조금 견디기 어려웠던 모양이에요'
제닝스의 말이다.
물론 유명인, 특히 그의 가족에게 가장 힘든 일은 늘 조사당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사람들은 내내 행동에 주의하지요. 대중 앞에서 술을 많이 마셔도 안 되고요.
하물며 다른 일이야 말할 필요도 없지요. 여러 해 전에 아버지가 뉴욕에 있는 나를
방문하셨을 때 "내 여동생 부부가 잠시 내게 빌려 준 작고 오래된 포쉐 승용차를
갖고 있었어요. 난 뒷좌석에 앉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아버지와 월터
크론카이트를 태우고 콜럼버스 거리를 달리고 있었지요. 난 차라리 달나라로 날아가
버리고 싶었어요'
물론 유명인이 치르는 위험은 물건을 살 때도 누군가에게 주시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언젠가 아들녀석과 가게에 들어가 있었는데, 그녀석은 망나니처럼 굴었어요.
아들 녀석은 착한 아이였는데, 그날은 이상할 정도로 엉망이 더군요. 그래서 엉덩이를
한 대 때려 주었지요. 그랬더니만 그 다음날 "뉴욕 포스트"지 6면에
"앵커맨 제닝스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아이를 때리다'라는 기사가 실려 있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은 사생활에 관해 글을 쓰지요. 그건 무서운 일이에요'
브로커, 래더 그리고 제닝스는 모두 이 사생활 간섭으로 혼난 경험이 있다. 어떤
면에선 대중이 그들을 유명하게 만들기 때문에 그들은 대중의 재산이랄 수 있다. 이런
소유감은 의심할 바 없이 엉뚱한 측면이 있다. 한때 세 명의 노부인이 제닝스와 그의
가족을 슈와츠라는 뉴욕 장난감 가게의 회전문 안에 가둬놓고 웃으면서 손가락질을
해대었다. 그래도 그들 가족은 그 노부인들과 그 일을 털어놓지 않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20년 동안 그에게 편지를 보낸 샌프란시스코에사는 여자처럼 미친
사람들도 있다. 그 여자는 자신이 제닝스의 아내라고 믿고 있다. 그녀는 제닝스가
자신의 뇌를 제거하고 그곳에 앵무새의 뇌를 이식시켰다고 믿고 있기도 하다.
모든 사건이 재미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것들은 깜짝 놀랄 만한 사건들이다.
제닝스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종교집단 소속원에게서 "오늘밤에 당신은 죽어야 해'라는
협박을 받은 사건처럼 무서운 것도 있으머, 무장 침입자가 화가 나서 초을 휘두르며
제닝스를 찾으러 워싱턴에 있는 ABC 스튜디오로 들어왔을 때처럼 혼이 난 경우도
있다. 제닝스는 그날 워싱턴에 있었는데 그 침입자는 오랫동안 무기를 들고 ABC 지국
사무실을 활보하다가 안전요원에 쫓기던 중 경찰에 붙잡혔다.
1987년 제닝스가 앵커로서 정상의 자리에 오르기 시작할 바로 그때 다른 쪽에서
일들이 꼬였다. ABC의 몇몇 기자들은 제닝스가 그들의 기사 내용에 참견하고 변화를
요구하는 등 지위를 넘어서는 일을 하고 있다고 느꼈다.
ABC에서 일어난 가장 큰 격론은 수석 프로듀서 빌 로드와 제닝스의 충돌이었다.
로드는 제닝스와 불과 몇 달간 일을 한 봅 프라이를 대신해 1984년에
"Nightline"으로부터 영입되었다. 비록 제닝스의 마음에 로드가 자신을
대체할 카펠이 들어올 길을 닦으려고 영입되었을지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은 있었지만,
처음에 두 사람은 호흡이 잘 맞았다. 그리고 1985, 1986년의 "World News
Tonight"의 성공으로 인해 제닝스와 로드는 편안한 직업적 관계를 유지했다.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한 것은 1987년이었다. 편집요원들은 두
사람이 밀실에서 방송할 기사, 그것들을 얼마나 오래 방송할 것인가. 어떤 순서로 그
기사들을 방송할 것인가, 머릿기사로는 어떤 것을 뽑아낼 것인가 등의 뉴스 방송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길고도 뜨거운 논쟁이 있었다고 회상한다. "피터는 빌이
창조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나 봐요. 빌은 피터를 나사풀린 대포 정도로 생각했고요'
한 ABC 프로듀서의 증언이다.
그들 논쟁의 대부분은 스타일에 대한 갈등이었다고 제닝스는 생각한다. "체질적인
것도 있었지요. 사람들이 때로는 그런 것을 일자리에서 가져 주었으면 해요. 그리고
권위를 가지기보다는 차라리 레슬링 경기에 더 많이 빠져들었으면 합니다. 누구라도
내가 끝없는 열정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리라고 확신합니다. 나는 빌이 상당한
정도까지 가져야 할 것 이상의 열정은 억제해 줄 필요가 있다고 봐요. 훌륭한
지도력을 발휘하는 비결은 열정을 일정한 방향으로 이끌어내는 것 같거든요'라고
재닝스는 말했다.
여러 예에서 나타나듯이 두 사람의 의견 불일치는 누가 마지막 결정을 내리는가에
맞추어져 있었다. 래더와 브로커의 "운영편집국장" 역할과는 달리
"수석편집위원"이라는 이름으로 제닝스는 기술적으로 로드의 아래 자리에
있었지만, 실체는 훨씬 더 까다로운 것이었다. 물론 서류상 권한이 진짜 권한과 같은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가 그 힘을 부려야 하고, 합의에 도달하는 대신에 지위를
이용하여 강제로 명령을 하는 식이 된다면 그런 관계는 제대로 유지되지 못하는
것이다.
전 ABC 특파원 한 사람이 기억하듯이 "피터는 그런 일을 참아낼수 없었고 마침내는
그 프로는 내가 주도해'라고 말했을 때 로드는 "빌어먹을 놈'이라고 화를 내었는데,
그 말을 들은 제닝스는 로드를 그만 벽으로 밀어버리고 말았던 일도 있었다.
제닝스는 ABC 회장 룬 알럿지와 탄탄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한번 이상 그는 로드를
건너뛰어 룬과 부회장 데이빗 벌크에게로 꼬인 문제를 푸는 일에 도움을 받으러 갔다.
두 사말 사이의 마찰은 커져갔다.
"뉴욕 매거진"의 기자 데이비드 브럼은 1987년 10월 어느날 두 사람의
관계가 최악이었을 때, 마침 자리를 같이 하고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이 뉴스쇼가
가까워 오는 동안 서로 다투는 것을 본 이야기를 했다. 로드는 찰스 황태자와
다이애너의 결혼 문제를 다룬 영국 왕실에 관한 런던발 기사를 방송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제닝스는 그것이 뉴스거리가 아니라 가십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로드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제닝스에게 그가 결정을 이미 내렸고, 그 결정은 최종적인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로드는 런던발 기사의 도입부를 쓰라고 제닝스를 내보냈다.
그날 밤 뉴스가 끝날 때쯤 제닝스가 카메라 앞에 나타나 그 기사의 도입부를
읽었다. 아래층 조종실에서는 빌 로드가 모니터를 통해 그것을 지텨보고 있었다.
"오늘 저녁 마지막으로 최고의 가십을 소개합니다. 우리는 영국 언론이 이번 주 내내
조용해서 그런지, 그 가십이 신문을 팔리게 할 것이라고 믿어서 그런지는 확실히
모릅니다' 아래층 조종실에서는 화난 목소리가 기계소리만이 들리던 곳을 흩뜨려
놓고 있었다.
소리의 주인공은 물론 로드였다. 그는 코까지 빨개져서 화면에다 냅다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다. "그건 진실이기 때문이야! 피터, 네놈은 진실을 생각해 본 적이
있나?' "그러나 다시 한번' 위층에서 제닝스가 로드의 분노를 망각하고 계속
진행했다.
"소위 대중언론과 때로는 시장언론이라는 것이 찰스 황태자와 웨일즈의 공주
다이애너에게 흘린 것입니다. 이상 런던에서 ABC뉴스 존로렌스입니다' 로렌스의
화면이 끝나자마자 로드는 위층으로 올라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것은 바로 네놈이
왜 운영편집국장이 되지 못하는가에 대한 완벽한 설명이 되지' 그는 강조할 목적으로
두 손을 공중으로 흔들어댔다. "그 기사는 오늘밤 모든 뉴스에서 다루고 있다구. 그
기사는 뉴스임에 틀림없어. 유리가 그걸 다룬 것은 옳은 일이었어' 며칠 후 제닝스는
그 일을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그가 늘 옳다고 생각하는 앵커는 누구나 바보지요.
늘 옳다고 생각하는 수석 프로듀서는 누구든지 바보예요. 더 짧은 시간 동안
말입니다' 몇 주 지나지 않아 빌 로드는 자신의 지위에서 해임되었다.
새로온 수석 프로듀서는 프레드 프랜들리 밑에서 배운 콜롬비아대학의 저널리즘을
공부했고, CBS의 톰 베타그, NBC의 마크 커스네츠와 같은 반에 다녔던 폴
프리드만이었다. 그는 ABC 런던 지사장으로 근무했고, 그곳에서 제닝스와 탄탄한
유대관계를 맺었었다. 제닝스는 프리드만을 뉴욕으로 데려오려고 열심히 로비를
했다. 분명히 프리드만 자신은 1987년 웨스트체스터에서 열린 ABC 고급 두뇌 모임의
세미나에 참석했는데 그때 경영진의 눈에 좋은 인상으로 비쳐지게끔 행동했었다.
다른 지사의 관리자들과 함께 유럽에서 비행기를 타고 오던중에, 프리드만은
부분적으로 뉴욕에서 지방 수석 프로듀서로 보낸 시절에서 끌어내온 착상으로 그
뉴스를 다시 짠다는 일련의 제안을 구상했었다. 그는 구체적인 제안을 함으로써 눈에
띄는 몇 안 되는 간부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룬 알럿지도 그의 착상에 감명을
받았으며, 프리드만은 유리한 위치에서 로드가 물러난 자리에 들어앉게 되는 것이다.
그때 이래로 그와 제닝스는 상당히 부드러운 관계를 가져왔다.
"폴은 아주 명석합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일이 잘되 나간다고 믿게하는 능력이
있어요. 그는 피터와 맞붙어 싸우지 않습니다. 그러나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많은
시간을 쓸 필요도 없지요'라고 전직 ABC의 간부 한 사람이 말했다.
사실 그들 사이의 교감은 대부분의 오후시간을 기사를 짜면서, 서로 집적대며,
주멱질을 주고받으며 나란히 의자에 앉아 있는 것에서 알 수 있었다.
그동안 아내 케이티는 멷 년만에 라울 월렌버그의 전기를 쓰고 소비에트 점령지에서
도망해 나온 헝가리 언론인의 딸로서 겪은 자신의 경험을 조금 섞어 쓴
"한 미국 여성"이라는 소설을 씀으로써 독자적인 영역을 만들어 내었다.
자신의 길을 찾는 데 있어 그녀는 남편만큼 야심만만했다. 그리고 뉴욕과 워싱턴의
사교생활에 빠져 있었다. 그들 가족과 가까운 친구들은 케이티가 남편의 그늘에서
살지 않기로 결심한 것 같다고 말했다. 후에 마틴이 말했듯이 그들의 결혼은
"습관적인 것"으로 되어 가고 있었다. 제닝스가"워싱턴
포스트"지 칼럼니스트인 리차드 코헨(CBS의 전 PD가 아님)과 염문을 뿌리고
있다는 것을 안 것은 6월 초순에 들어서서였다.
언론이 그 이야기를 앞다투어 다룰 때 느낀 비참함과 비교될 만한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제닝스는 느꼈다. "USA투데이"지는 제닝스의 결혼생활의 험난한
상태를 1면 머릿기사로 다룸으로써 독자들을 애태우게 했다. 그리고 7월 중순 리즈
스미스는 "데일리 뉴스"지에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좋지 않은 소식: ABC 방송국의 최고 뉴스진행자 피터 제닝스. 그의 아내이자 뛰어난
작가인 케이티 마틴. 두 사람이 8년간의 결혼 끝에 두 아이를 둔 채로 별거하고
있습니다. 나는 최근에 이 칼럼에서 두 사람을 완벽한 한 쌍으로 격찬한 바 있고,
지금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친구들도 모두 이 상황이 일시적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 가십은 정말로 팬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뉴욕과 워싱턴 주변에서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나갔다. 제닝스는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몇몇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두
번씩 결혼에 실패한 후 그 저명한 제닝스는 마침내 쓴맛을 보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개인적으로 받는 상처의 고총이 모든 지면을 총해 퍼뜨려진 다른 것은
어느 누구에게나 참을 수 없는 잔혹한 모욕이라고 느꼈다. 그래서 친구들은 그를
도우러 모여 들었고 상처를 아물게 하려고, 그리고 아픔을 치유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모욕과 배신을 당했다고 느낀 것이 분명한 제닝스는 이런 감정들이 일에 끼어들어
오지 않도록 했다. 오랜 친구이자 동료인 찰리 그라스가 중동에서 납치되었던 경우를
유일하게 제외해 놓는다면 제닝스는 매일밤 언제나처럼 자료를 수집하면서 보냈으며,
이런 불행한 일을 겪으면서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몇 가지 일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 시작했는데 그 중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그가 갖고 있는 최고의 자리가 아내를 돌아오게 하고 있으며 가족들을 함께
묶어 놓고 있다는 것이었다. 모든 경로를 통해 통화해 본 후에 두 사람은 시험삼아
다시 결합했다. 그들은 함께 있지만 제닝스는 얼마 전의 그 괴로움을 잊지 모하고
있었다.
"아내와 내가 몇 가지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은 더이상 비밀이 아니예요. 그런데
그것들이 빌어먹을 신문의 1면을 장식하고 있었단 말입니다' 제닝스의 말이다.
"너무나 지긋지긋했어요. "내 생애 일어난 최악의 사태, 바로 그것이었어요' 오늘날
부부관계가 얼마나 조심스러워야 하는가를 알게 된 제닝스는 잘 꾸며진 정원처럼
불필요한 것을 잘라 버리면서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반드시 그녀를 그렇게
대해야 한다고 여기는 것은 아닐지라도 제닝스는 아내에게 과도하게 신경을 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로 대화를 나누며 가끔씩 저녁뉴스 시간 후에 아내가 사무실에
모습을 나타내면 마치 그녀가 그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어깨나
등으로 가볍게 손을 가져간다.
사무실의 몇몇 여자들이 비록 제닝스가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계속해서 그 여자들이 불쾌해질 때까지 새롱거린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피터
제닝스에게는 이제 가정생활이 첫번째임은 누가 봐도 분명한 일이다. 여자들의 사랑을
받는 남자로서 제닝스를 언급할 때 그녀는, "그것은 지금 그의 배후에 숨어 있어요.
그는 마음을 바로잡은 알콜중독자 같지요'라고 말한다.
사라 제닝스가 설명하듯이, "아니(제닝스의 두번째 부인)는 그에게 따뜻하고
사교적인 환경을 제고해 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람들과 여러가지 생각을 놓고
이야기하는 방법이었지요. 하지만 케이티는 자신이 그 여러가지 생각에 관해
이야기하는 식이지요. 케이티는 제닝스를 화나게 합니다. 그녀는 남편과 여러
생각들을 갖고 논쟁하지요. 케이티가 책을 쓴다는 사실, 그것을 피터는 두려워해요.
어느 면에선 그일이 그가 직업으로 하는 앵커 일보다 더 현실적인 일이라고 보는 것
같아요' 제닝스가 아내에 관한 이야기를 하게 되면 그것은 자부심으로 눈을 빛내면서
끝도 없이 이어질 것이다. "아내는 막 아주 충격적인 책을 완성했답니다.
"사로니카만의 살인"이라는 책인데, 그리스 내전에서 CBS 특파원인
조오지 포크를 누가 죽였는지를 다룬 사실에 바탕을 둔 그이에요. 그 내막이 되는
이야기는 쓰여진 적이 없었는데 그녀가 그것을 드러낸 것이지요'
오늘날 피터와 케이티는 많은 사업들을 같이 하고 있다. 그는 아내의 책을 편집하고
있다. "나는 아주 훌륭한 편집자지요. 하지만, 아내의 책을 편집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에요. 내게는 배울 책이 세 권이나 필요하거든요'그리고 작년에 철의 장막이
동구에서 걷혀지는 신호의 하나였던 임마 나기의 재매장을 취재하러 헝가리로
여행했을 때도 그는 아내를 데리고 갔다. 헝가리 태생인 그녀는 모국어를 여전히
기억한다. 케이티는 고향 헝가리에서 일어나는 정치직인 변화를 알아보는 데
열심이었다.
"그녀가 나보다도 그 기사거리에 대해 훨씬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아내를 데리고
갔지요. 아침이 돼서 우리는 일어나 텔레비전을 켰어요. 멋진 일은 그 헝가리 TV가 이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방영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을 보고 아내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지요. 사실 그것은 나를 약간 혼란스럽게 하는 일이었어요. 아내는 감성적으로
메마른 사람이었거든요' 제닝스의 회상이다.
대부분의 아버지처럼 제닝스에게도 아내에 관해 말하는 것 이상 그를 신나게 하는
유일한 일은 그의 아이들이다. 제닝스는 그가 유능한 딸 엘리자베스와 부드러운
마음을 가진 아들 크리스토퍼를 말할 때면 기쁨으로 눈이 반짝거릴 정도다. 제닝스는
스키 타는 꼬마 악마 리즈가 무언지, 뛰어난 스키어인 제닝스가 슬로프로 뛰어들어갈
때 그녀가 어떻게 그의 꽁무니에 제대로 매달리는지 등을 자랑스럽게 끝없이
반복한다. 또 그는 터키 여행 때 아이들을 데려가 즐거운 시간을 보낸것을 장황하게
설명하며, 두 아이를 TV 시청시간을 제한하는 것 같은 일에서 알 수 있듯이 얼마나
주의깊게 보살피는지에 대해 말하기도 한다.
친구이자 동료인 톰 옐린은 "피터는 가족생활에 열심히 매달려요'라고 말한다. 그는
제닝스가 아이들에 관해 그에게 10분간이나 설교하던 장면을 묘사한다. "만약
아이들이 없으면 무언가가 부족한 거야. 아이들은 상상할 수 없는 여러 방법으로
보답을 하니까 말일세' 재치있고 신랄한 제닝스에게도 디틴즈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
중 하나처럼 따뜻하게 마음이 젖어드는 시간이 있다. 제닝스가 아이들은 잠이 든 후
집에 도착하는 날마다 그는 아이들을 깨우려 하거나 침대로 살금살금 기어가기도
한다. 마틴의 말을 빌리면 아이들은 그에게 "마지막 정신적인
안식처"라고 할 수 있다.
추운 1월의 어느날 밤 67번가를 걸어가면서 제닝스는 모퉁이를 돌아 의도적으로
주택지역으로 발길을 옮긴다. 그곳이 저녁뉴스 방송시간이 끝난 수엔 좋은 곳이며
그는 사실상 저녁식사 시간을 피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냥 거리를
배회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언제나 어떤 구상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활발한
걸음걸이로 걸어다닌다.
제닝스는 자신이 완벽하게 앞서가는 사람인 정열적인 사람으로 묘사되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새로운 생각으로 불붙기 쉬운 사람이지요. 새로운 생각으로 불붙기
쉽다는 것. 난 여기 있는 사람들을 미친 상태로 만들어요. 내가 찾아낸 최근의 착상을
갖고 문으로 들어와서는 사람들이 주의깊게 들어줄 때까지 못살게 굴지요' 제닝스가
숨가쁘게 하는 말이다.
때로 그 착상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엘리자베스 비숍의 시거나, 그가 사는 브릿지
햄톤의 이웃인 피터 마티쎄가 쓴 단편소설들이다.
또 젊은 언론인들이 역사젹 감각이나 해외소설에 대한 지식을 가져야 한다는
필요성도 그의 생각 중 하나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그는 그 일에 정열적으로
달려든다. 그날 그가 어떤 말을 탔든간에 그는 곧바로 정원으로 말을 몰고 나간다.
문장은 엉클어진 채로 나오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단어들은 그 다음 것을 능가하며
나타난다.
제닝스는 일할 때만 그런 것은 아니다. 여행할 때도 마찬가지다. 톰 옐린의 가족은
제닝스의 가족과 여러 번 여행을 같이 했었다.
"어떤 사람들은 감정에 치우친 행동을 하지요' 옐린의 말이다. "피터는 1분간
보트를 탔으면 그 다음에 수영을 하는 식이지요. 그리고 나서 불을 피우는 일을 하고
그날 끝 무렵엔 잠을 자려고 정말 애를 씁니다' 제닝스는 능숙한 스키어지만 그는
스키 강습을 받으며 휴가를 보낼 것이다.
"그의 휴식 방법은 무언가를 개선하려고 애쓰는 것이지요' 옐린이 계속해서 말한다.
"그는 기술적인 문제들을 점검합니다. 예를 들면 회전할 때 그의 몸무게에 의해
생긴 눈덩이를 처리하는 따위의 일입니다. 그건 그의 일과 같지요. 그를 재미있게
하는 것은 더 나아지고 있는 일에 집중한다는 점이에요'
제닝스에게 "90년대의 앵커"라는 칭호를 처음 주었을 때 그건 그냥
상업적으로 붙인 희망사항이었던 듯했다. 그러나 80년대가 지나가고 90년대가 왔을 때
제닝스는 이ㄹ름난 잡지인 "워싱턴 저널리즘 리뷰"에 의해 앞으로 4년간
가장 훌륭한 TV 앵커맨으로 지명되었다.
정상에 있든 아니든 제닝스는 스스로를 몰아 세운다. 그는 만족한적이 없다. "나는
얼마나 많은 밤을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가라는 관점에서 내가 출연한 프로그램을
봅니다' 최고 성적은 2주일 반도 채 가지 못한다. "4주가 될 때까지 끝을 내지
마라' 그가 자주 인용하는 말이다.
제닝스는 ABC 뉴스에서 이러한 비판적인 생활 기준들을 모든 이에게 돌려댄다. 그는
계속해서 다른 사람의 일을 갖고 소동을 일으키고 있다. 심하면 그가 칭찮해마지 않던
특파원의 글이 너무 무미건조하다고 불평하기도 하며, 그 기사가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지 못하다고 불평하는 경우도 있다.
제닝스의 직장에서의 이런 태도는 집에서도 똑같다. 그는 아들이 "예(Yes) 대신에
"예(Yeah)'라고 말하면 이를 정정해 준다. 그는 아내가 특별히 뛰어나 주기를 바란다.
"그는 내가 유럽인의 우아한 태도를 가져 주었으면 하지만 그것이 상처없이 노력도
하지 않고 되어야 해요' 케이티의 말이다. 제닝스가 원하는 것은 아내가 언제나
남보다 뛰어나고 명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높은 기준은 때로 분통 터지게 하는
일임이 분명하다. 그의 여동생 사라조차 그가 힘든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인정할
정도다.
그러나 제닝스에게 신뢰감을 심어 준 것은 그가 자신에게 더욱더 엄격했다는
점이다. 그가 방송이 아주 훌륭했다는 칭찬을 들으면 그는 "형식적인 인사치레의 말만
없다면'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광고가 방송 도중에 진행될 때 사람들은 그가
"서투르고' "좋지 않다'고 불평하는 소리를 들어 보았을 것이다.
제닝스의 수석 프로듀서인 폴 프리드만은 다음과 같이 그를 달래야만 했다. "자네는
너무 자신에게 엄격해'
"그는 해야 할 것 이상으로 자신의 일을 비판하는 경향이 있지요' 톰 옐린의
말이다.
"그는 정상의 자리에 있습니다. 그는 이 분야에서는 누구보다 성공했다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는 그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는 자신의 성공을 즐길 수도 없구요.
우리가 휴가중에 스키를 탈 때도 그렇습니다. "잘 돼 가는데'라고 말하는 대신에 일이
잘 안 돼 나가는 것을 걱정합니다. 그것이 피터를 가장 불만스럽게 하지요' 제닝스가
어느 누구보다 자기비판적이라면, 자기의 능력을 의심하며 괴로워한다면 그 근원은
아마 오랜 기간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것을 메우려고 생의 절반을 보낸 후에 TV 뉴스와 같은 경쟁이 심한 분야에서 촉망받는
인물이 될 것인지 아닌지를 끊임없이 의심하는 습관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그는 누구보다 책읽기를 좋아하며 독서광임이 분명하다. 그와 일해 본
사람들은 누구나 외국 잡지의 복사본을 들고 나오거나 미, 소 관계를 다룬 책을
간략하게 소개하거나, 한 뭉치의 지방신문을 소개하는 제닝스에 관해 말한다. 그러나
독학으로 출헤한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그도 자신의 교사를 의심하는 경향이
있다.
"그는 그런 경향을 극복하지 못했고, 아마 극복해내지 못할 겁니다' ABC 간부 여러
명의 말이다.
런던 주재 ABC 특파원 잭 로렌스는 다른 많은 동료들로부터 제닝스에 대해 들은
말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피터는 분석가로서, 지식인으로서의 자신의 능력을
불안해 합니다. 그는 생각하는 언론인임에 틀림없지만 사적인 시간에는 이런
불안정함이 얼마나 가는가를 시인합니다. 확신하건데 바로 그것이 그를 더 열심히
일하게 해주는 것이지요. 이 오래된 불안정이 그를 계속해서 몰아붙이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제닝스가 과잉 보상심리에 사로잡힌 고전적인 예만은 아니듯 하다. 그는
이상을, 다른 것과 조화를 이루기엔 너무 거친 이상을, 아버지를 회상하며 그 이상을
실천하려고 애쓰고 있다. 찰스 제닝스는 생애의 반은 캐나다의 대표적인 목소리로
보냈고, 나머지 반은 라디오와 TV의 모든 프로그램을 총괄하는 CBS의 조정자로
보냈다. 아들피터에 따르면, 그는 가족과 사업계에서 모두 인정받는 거목이었다.
찰스가 정상에 있던 여러 해 동안, 아들 피터는 게으르고 버릇없고 여러 면에서
실망감만 주는 존재였다. 그래서 찰스 제닝스가 죽은 지15년이 넘었지만 피터는
여전히 아버지에게 자신을 인정받으려고 애쓰는지도 모른다. "남편은 아버지를
숭배하는 일에 너무나 깊이 빠져 있어요'라고 제닝스의 아내 케이티가 말한다.
벽 위에 붙여 놓은 왜된 신문기사가 제닝스의 책상을 내려다 본다. 그 기사는 찰스
제닝스를 과거 케나다에서 최고의 찬사인 "제국주의자"로 묘사하고 있다.
"나는 아직도 상당할 정도로 아버지를 감동시키고 싶습니다'라고 피터가 말한다.
피터와 여동생 사라가 아버지에 대해 말할 때, 그들은 그를 성자의 전형과 같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아주 멋진 분' "흠잡을 데 없는 도덕성을 지닌 분' 아들에게
물려준 찰스의 부분이 이다면 그건 대중 봉사의 기준일 것이다. 아마 그것이 제닝스가
자주, 그가 믿고 있는 대의를 전달하려 연설을 하는 이유일 것이며, 다른 모든 앵커들
중에서 유독 혼자만 "Tge AIDS Quarterly Report"와 같은 특별보도
다큐멘터리를 방송하면서 대중 TV를 위해 일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그가 말하고
싶어하지는 않지만, 뮤료식당에서 집없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러 중심가로 가는 이유일
것이다.
"그건 그의 캐나다 프로테스탄트의 특성 중 하나지요' 친구들이 말한 적이 있었다.
"높은 신분에 걸밪는 도덕적 의무라고나 할까요. 만일 여러분이 많은 것을 갖고
있으면 그것을 돌려주어야만 한다는 그런 도덕적 의무 말이죠' 캐나다에서 성장한
피터에게는 가치관과 관심사가 이때에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여전히 캐나다 시민이다. 그가 "우리"라고 말할지라도 그는 다른
녹색카드 소지자와 마찬가지로 미국인이 아니며, 몰리 세이퍼, 베리 덴스모어, 로버트
맥닐과 마찬가지로 미국인이 아니다. 제닝스가 런던에서 미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리고
워싱턴에 있는 캐나다 대사관에서 열린 공식연회에 초청 받았을 때 그 이야기를 해준
것은 바로 맥닐이다. 캐나다 대사는 그들 캐나다인들이 얼마나 멋진 나날들을
가졌는가에 대한 연설을 했으며, 한 캐나다 소년이 이제 ABC 앵커 자리를 맡은 일도
이야기했다. 맥닐은 따뜻한 기운이 도는 양배추처럼 제닝스를 지그시 마라보며 술잔을
들고 서 있는 대사의 솔직한 아내인 샌드라 고트리브를 가리켰다. 갑자기 그녀가
큰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당신은 왜 캐나다 시민권을 포기하는 일을 생각하고
있지요?' 제닝스는 불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만약 로빈 맥닐이 벌을 받지 않고 이
일을 해낼 수 있다면 나 역시 그렇게 할 수 있지요'
사실 제닝스의 상사인 룬은 제닝스에게 미국 시민이 되라는 압력을 넣고 있었다.
"룬은 내가 앵커 자리를 맡아주도록 결정한 후에 갑자기 캐나다 시민이어서 좋은지
아닌지를 물어 보는 것이었어요. 그는 공개적으로 그 일을 말했고, 많은 이들이 그후
나에게 도전적으로 물어오기 시작했어요. "당신은 언제 미국인이 될
작정입니까?"라고 말이에요'
"나는 그 일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몰랐어요. 미국 시민이 된다는 생각이 그
시점에서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요. 60년대에 5년간 이곳에서 살았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 일은 사람들이 내가 룬과 다른 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정도가 될 때까지 나를
못살게 군 일 중 하나가 되었지요. "여러분은 이것이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라는
생각이 드신적이 있습니까?" 이것은 사업상 내리는 결정이 아닙니다. 적당한
시기에 이에 대한 의향을 밝히겠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문제를 전체 과정 속에서 생각해 보았지요. 내가 생애의 나머지를
미국에서 살 것이라 해도 내가 미국 시민이 될 필요가 있을까? 아이들도 아내도
미국인인데' "언젠가 내가 이 문제를 말했고, 어머니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는 아주
열정적인 편지를 보내주셨어요. "얘야, 너는 조상들을 갖고 있다. 진지하게 이
문제를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니? 너에게는 뿌리가 있단다"'
제닝스는 어머니가 살아계시는 한 아니 아마 그후에라도, 그가 캐나다인으로 남아
있으리라고 말한다.
외국인이라는 것이 제닝스의 강점이자 약점이다. "내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에는
차이가 있습니다'라고 그는 인정한다. 미국에서 오랬동안 살아왔음에도 그는 브로커,
래더보다 훨씬 국외자의 모습을 많이 갖고 있다. 그는 뉴스를 다룰 때 국외자로서
접근한다. 제닝스의 눈썹은 문자적이든 비유적이든 언제나 올라가 있다. 그는 피끓는
래더나 브러커와 달리, 옆집 사는 소년의 잘 다듬어진 거리감과 균형감, 차갑고
신랄한 초연함을 갖고 뉴스를 조사한다. 피터 제닝스는 바로 옆 나라에서 온 사람인
것이다.
제닝스의 아내는 그가 뿌리없는 "방랑자"라고 말한다. 이는 그가
지금까지 어디서 살았든지 투표를 한 적이 없다는 점에서 사실이다. 또 그가
방랑자적인 생활방식을 스스로의 힘으로 창조해낸 것도 사실이며, 현장에서 보낸 많은
세월이 그를 형성시켰고, 잘 생겼지만 능력없는 고등하교 낙제생을 박식한 해외
특파원으로 변모시킨 시기로 작용했음도 또한 사실인 것이다. 지난 7년간 뉴욕에서
편안하게 ABC 앵커직을 맡고는 있지만, 제닝스는 여전히 어떤 점에선 정신적으로 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고, 불만족해 하며, 계속해서 자신을,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기대에 부응하게끔 만들려고 애쓰는 사람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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