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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골드버그-앵커맨 (4)

by Casey,Riley 2023.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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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도 뉴우스의 마술사
  앵커맨 전4권 중 제4권

          = 차례 =

  20. 제닝스의 일과 1
  21. 앵커 브로커 25
  22. 앵커라는 괴물 102
  23. 네트워크 뉴스의 장래 123
  24. 몰타정상회담 146
  25. 종결-승자와 패자 201


        20. 제닝스의 일과

  목요일 오후 5시 5분 제닝스는 앞에 놓인 컴퓨터의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오저런!'이라고 외치면서 화면에 나타난 녹색 글씨들 그리고 깜박이는 커서를
응시한다. 그리고나서 두 개의 집게 손가락으로 천천히 자판을 두드려대기 시작한다.
그의 어깨 너머로는 벽에 붙인 두 개의 구호가 보인다. 하나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정말로 잘못 배운 사람이다'라고 되어 있고, 다른 하나는
'TV가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오늘의 나는 TV 덕분이다'라고 적혀 있다.
  이곳이 "World News Tonight"의 기사가 모아지는 중요한 사무실인
"RIM"이다. 림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크고 짙은 청색의 반원형 탁자
주위에 ABC 저녁뉴스를 준비하는 프로듀서들이 모여 있다. 제닝스의 왼편에는 머리가
벗겨지고 턱수염이 나 있고 안경을 낀 제닝스의 주요 작가인 밀트 와이스가 앉아
있고, 오른쪽에는 수석 프로듀서인 폴 프리드만이 앉아 있는데 그의 구레나룻와 안경
낀 두 눈이 어떤 이들에겐 그로쵸 막스의 연상시킬 수도 있겠다. 탁자를 가로질러
뉴스 쇼의 다른 주요 프로듀서들인 밥 로이와 데니스 던라비가 앉아 있다.
  최첨단의 그러나 이상하게 배열된 ABC 건물 안에서 림은 통제실(조종실) 두 층
위에, 녹음실 3층 위에, 그리고 "풍선"으로 알려져 있는 뉴스방송
스튜디오 한 층 아래에 있는 뉴스방송 스튜디오 한 층 아래에 있다. 그
"World News" 제국이 넓게 퍼져 있긴 하지만 전화가 울려대고 질문과
대답이 오가는 중추가 있는 곳은 바로 이곳 림이다.
  림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제닝스의 사부실이 있다. 그의 사무실은 딱딱한 책상,
큰 창문, 가족사진, 소파, 지구본, 에스키모 인쇄물, 책과 잡지를 넣어두는 책장,
문 옆에는 "뉴욕 데일리 뉴스"에서부터 "월스트리트
저널"까지... 일간신문들을 걸어 두는 벽걸이 등 안락하게 일을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렇지만 하루의 대부분을 제닝스는 림에 있는 의자에 앉아 소매를
걷어붙이고 타이를 느슨하게 풀어 놓고, 코끝에다 할아버지의 안경을 불안정하게
걸쳐놓고 보내고 있다.
  '로리야!'
  밥 로이가 책상 건너편의 제닝스를 소리쳐 부른다.
  '소련 정부가 공화국(발트 3국)의 독립을 허용할지도 모를 법안을 입안했다고
제라시모브가 말했다네'
  제닝스는 리투아니아에서 일어난 최초의 봉기 움직임에 관한 로리의 기자회견
내용을 담은 전화를 들으려고 수화기를 든다.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확히 말해 주게나'
  그가 말한다. 제닝스는 등을 기대고 림 위에 솟아 있는 TV 모니터를 올려다 본다.
윤이 나는 ABC, CBS, CNN용 크롬 모니터, 그리고 NBC용의 작은 흑백 TV.
  '관련된 몇 가지 내용을 피터의 주도하에 반영 시켜야 할 것 같군'
  밥로이가 맞장구친다.
  제닝스는 5,000마일 떨어진 곳에서 보내 오는 로리의 말을 듣고는 일일이 코멘트
해준다. '아마 말할 수 있는 일은 그 일의 결과가 어떤것이 될지를 우리가 모른다는
점일거야... 하지만 고르비의 역사에는 아무것도 없지... 만약 법안이 통과 되면
정책의 대변화라고 봐야지...'
  대부분의 아침, 제닝스는 매 방송에서 앵커의 뒷 배경으로 쓰이는 커다란 지도의
뒷편에 있는 회의실에서 열리는 오전 10시의 정례회의에 참석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아침,  제닝스는 폴 프리드만과 TV 뉴스 취재담당 부사장인 밥 머피가 국내와
해외지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그날의 기사거리를 할당하는 일에 합류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세계의 기자들로부터 뉴욕으로 보내져 기사의 틀을 잡아가는 과정이 오면
그는 아마 어느 앵커보다 가장 바쁜 사람이 될 것이다. 오후 대부분 그는 특파원들과
통화를 위해 전화를 붙들고 있다.
  '그건 덜 중요할 것 같군...'
  로리에게 그가 말한다. '잘 지켜봐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 그래, 
"리투아니아 사람들도 특파원들도 소련이 무엇에 관해 말하고 있는지 전혀
모른다" 정도로 말하는게 어떤가?'
   제닝스는 특파원들과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는 자신이 훌륭한 기사 편집자임을
자랑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동료들이 보내 준 기사를 편집하는 데 쓴다.
  '난 프로듀서가 없던 시대에 성장했지요'
  그의 말이다.
  '과거 내가 사건 현장에 있었을 때는 특파원들이 슷로의 힘으로 기사를
만들어냈어요... 그런데 지금은 기사의 틀을 잡고, 기사에 충격을 주고, 기사가
숨쉬게 하고, 사람들에게 아주 잠깐 동안만 감흥을 주는 것이 아니라고 확신시키려고
애쓰는 일 등 나는 내내 그런 것에 대해 특파원들과 작업을 하지요'
  '어제 내가 가장 오래 쓴 시간은 니카라과에 있는 우리 특파원인 피터 콜린스라고
하는 오랜 친구이자 아주 명석한 인물과 보낸 것이었어요. 그는 기사를 쓰고 있는데
기발한 생각이 전혀 나질 않는다는 거예요. 그에게 그 이야기를 하도록 하면서 근 한
시간을 전화하며 보냈어요. 이런 일을 하면서 우리들이 거둬들이는 몫은 쓰는
것보다도 말하면서 얻는 게 더 많다는 것이지요. 그런 과정을 거친 후 나는 '자, 이제
그것을 대본으로 옮겨 볼 수 있겠나, 피터?'라고 말했답니다. 그것은 그가 정말
느끼고 생갓하는 니카라과에 관한 것이 테이프로 옮겨지도록 하는 일종의 몸 푸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난 그런 일을 많이 하고 그것을 정말 좋아합니다. 더
좋은 것은 없어요. 앵커 일을 하는 사람은 이 직업이 주는 고도로 뚜렷한 특성 때문에
거의 자동적으로 많은 신임을 받지만 나는 특히나 방송이 서너 편의 좋은 작품으로
이뤄질 때 가장 고마움을 느낀답니다'
  제닝스와 일하는 특파원들은 종종 그가 부다페스트나 암만에 있는 특파원들과
여러가지 견해와 충고, 좋은 교제를 기꺼이 함께 하려 하는 것에 관해 이야기한다.
제닝스는 종종 레벡카 체이스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려고 애쓰며, 송화기 앞에서 타드
캐롤이나 베스 니슨과 여러시간을 앉아 보내며, 그들이 보내는 기사의 어투를
지도하면서 기자들과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ABC 방송국에는 제닝스가 때로 자발성이 조금은 지나쳐서 그의 생각과 함께
하기 힘들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제닝스의 계속적인 제안과 명령으로
인해 괴롭힘을 당하고 있고, 심하면 자신들이 집중공격을 당하고 있다는 느낌도
다소간 갖게 된다. 수석 프로듀서인 프리드만을 만족시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그 사람에 제닝스까지 가세했다면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리고 제닝스는 너무
까다로워서 그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고 그중 몇 사람은 말한다.
심지어는 앵커인 제닝스 자신도 기자들을 미치게하고 있음을 인정할 정도다.
  '잘 지켜봐야 할 것 같아...'
  로리에게 제닝스가 계속 말하고 있다.
  '음, 고르비가 말하는 것을 들을 때까지... 그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군중들의
외침을 사용해 보자구... 그래, 그런데 지미? 두 가지 일을 고려해 보는 게 어떻겠나?
한 가지는 자네가 '제라시모브 말한다'라고 말한 것을 '제라시모브가 말한다'라고
하면 어떤가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강경파"라는 구절보다 더 나은 것을
찾아볼 수 없는가 하는 점이야' 그러면서 제닝스는 이야기를 마친다. 그러자 밥로이가
'런던 특파원은 계속 취재하세요'라고 말한다.
  ABC 방송국 주변에서 제닝스는 사정없이 비판을 가한다. 그는 화면에 나타나는
세련미에 비해서 외교관다운 자질을 많이 갖고 있지 않다. 그도 "주변과 약간은
대립되는 조건 하에서" 자신이 더 잘 일한다고 시인할 정도다. 위든 아래든
그가 자신의 비판을 표현하는 데는 거리낄 것이 없다. 전투적인 측면이 많은 댄
래더가 외교관적 자질을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래더는 자신이 예의
바르고 친절하다고 자랑한다.
  ABC에서는 제닝스와 어떤 프로듀서가 에이즈에 걸린 아기들이 100p 죽을 것인지를
갖고 뜨겁게 논쟁하는 것 같은 충돌을 보는 것이 전혀 낯설지 않다. 반면 CBS에서는
그런 류의 폭발은 훨씬 드문일이다. 그러나 CBS에는 급이 낮은 긴장이 맴돌고 있다.
'피터는 비판을 할 때는 용감해요'
  동료인 스퓨 슈츠맨의 말이다.
  '하지만 뒷공론은 CBS보다 여기 ABC가 훨씬 덜하지요'
  '사람들은 예산 초과가 무얼 뜻하는지 모르는 것 같아요'
  제닝스가 이번에는 워싱턴에 있는 브릿 훔과 통화하고 있다. '그 말은 더 많은 돈이
사회보장기금에 들어 있다는 것을 뜻합니까? ... 그렇다면 그 돈은 어디 있지요?'
그는 쾅 소리를 내며 전화를 끊고는 폴 프리드만을 돌아보며 말한다.
  '그와는 싸움 할 생각이 없지만 그 친구는 초과 예산이라는 말을 두 번이나 쓰고
있고... 특히 그램 러드만 법안의 해석에 그런 말을 쓰고 있어요'
  림에서는 여러 명의 프로듀서들이 보장법의 초과분이 정확하게 무엇을 뜻하는지를
정의내리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것이 상원의원 다니엘 피트릭 모이니핸부터 대통령에
이르는 모든 사람을 당황하게 했는지는 의문이다. 그리고 ABC에는 그 일에 더 가까이
접근하고 있는 사람이 없다. 토론은 몹시 거칠고 학부의 학기에 볼 수 있는 정도의
수준으로 진행된다.
  '보라구, 사회보장기금에 대한 분담금은 연방예산에 세입으로 계상되어 있어.
그것은 전체 연방 예산 부족분을 줄여 주는 효과를 갖고 있다구'
  한 프로듀서가 주장한다. 제닝스는 컴퓨터 위에 나타나 있는 흄의 글을 응시한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이 그것을 예산에 올리려고 한다가 됩니까?'라고 제닝스가
말하며 몇 자를 타이프하고는 웅얼거리며 그것을 읽는다.
  '사회보장법은 그 법을 시행하는 데 현재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돈이 기금에 들어
있다고 하면 어떨까?'
  전화벨이 울린다. 아내 케이티로부터 온 전화다.
  '당신이 좋다면 연극 헨리 5세를 보러 가지. 당신이 계획을 세워보라구'
  제닝스는 그렇게 말한다. 림 주위에 있는 모든 동료들이 제안을 한다. '"나의
왼발(영화)은 어때?'라든지 '"섹스, 거짓말, 비디오 테이프"는 어때?'
하는 시각이다. 그들은 모두 제닝스의 작업 후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를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섹스, 거짓말, 비디오 테이프"를 보러 가지 말게나'
프리드만의 말이다.
  '자네는 1년에 영화를 한 편밖에 보지 않으므로 이번에 볼 영화는 "섹스,
거짓말, 비디오 테이프"가 되어서는 안 되겠지...'
  제닝스는 전화로 돌아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래, 7시30분에 날 태우러 와'
  전화를 끊었을 때 그의 오랜 침착하고 유능한 보조자인 그래쳔 밥로빅이 바람을
일으키며 그의 옆을 지나간다. 그는 황급히 그녀를 제지시키고 이렇게 말한다.
'그들에게 하블의 형제들을 다음 주 우리하고 차 한잔 하자고 초대하라고 말해 줘'
  컴퓨터로 돌아가 그는 다음 기사로 옮겨 간다.
  '미식축구에서 누가 최고의 팔을 가졌다고 생각되나?'
  제닝스가 체코의 정치인들과 함께 있는 것보다 미식축구장의 영웅들과 함께 있는
것이 덜 편안해 보이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글쎄, 정확성으로 말하면 죠 몬타나라고 할 수 있지만 다른 친구들이 더 강한 팔을
가지고 있겠지...'
  밀트 와이스의 말이다. 제닝스는 첫 부분을 타이프하기 시작하다가 멈추고는 그것을
지워 버린다. 그리고 다시 타이프한다.
  '마침내 오늘 저녁 축구에서 최고의 팔을 가진 선수. 아니야 그게 우리 의도는
아닌데...'
  ABC 주위에서 간부들은 제닝스의 독특한 글쓰기 방법에 관해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의 글은 분명히 래더나 브로커보다 냉정하다. 그러나 더한 복선을 깔고 있다.
제닝스는 농담하기에 앞서 효과있는 기사를 배치한다든가, 누가, 무엇을, 언제,
어디서의 앞에 왜를 놓는다든가, 사실들을 말하기 앞서 노골적인 짓궃은 말들을 하는
식으로 전통적인 뉴스 진행 순서를 뒤바꾼다 ('우리는 비밀이 팔린다는 데 대해
엄격하게 주의하면서 시작합니다')라는 식으로. 그가 하는 대다수의 일은
쓴다기보다는 다시 쓴다고 해야 적당하다.
  제닝스가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것은 생방송하는, 즉흥적으로 말하는 능력이다.
그것은 바이센테니얼(Bicentennial: 프랑스혁명 200주년 기념제)을 취재하기 위해
파리에 있었던(55초 정도 방송시간이 남았던) 최근에 영향을 받은 믿음이다. 조종실에
있던 기사들이 손톱을 씹어대기 시작했을 때 프로듀서가 '프랑스 TV에 연결괼 수
있을까?' 하고 물었다. 그래서 그들은 프랑스 TV의 시그널과 필름을 집어넣기
시작했는데 그건 제닝스가 전에 한 버도 본 적이 없던 것이었다. 그래서 제닝스는
공백을 메우기 위해 프랑스혁명에 관해 즉석 논평을 시작했던 것이다.
  제닝스는 이 능력을 오늘날 앵커들이 지녀야 할 핵심이 되는 기능중 하나로 보고
있다.
  '나는 기술이 어떻게 우리들을 변화시켰나를 이해시키려고.... 사람들을
확신시키려고 애쓴다. 난 매일 이곳에서 멋진 12시간 을 보내고 있으며, 어느 면에서
그 12시간 가운데 나는 방송 출연 요청을 받을 수도 있고, 무언가를 이야기하거나
토론을 끌어가 달라는 요청을 받을 수도 있다. 난 그렇게 하는 내 능력을 과장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것 모두는 역할을 재규정하고 방송시장에서 우세함을 유지하고
기술을 멀리 하려고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기술 때문에 많은 다양한 방법속에 행동할
수밖에 없는 방송뉴스 분야들과 함께 보호받고 있다. 나는 그것을"비디오
흐름"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의 모든 지방 방송국들은 비디오 흐름, 즉 계속 이어지는 화면을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노스 다코다 주 한가운데 TV 방송국으로 이용되는 작은 오두막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공중으로 흘러나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갖지
못하는 배경과 역사를 제공하는 경험입니다. 그래서 낮과 밤 어느 때나 비행기 추락,
주식시장의 폭락, 대통령의 도착, 살인, 또는 경영진이 생방송하기로 결정한 것이
무엇이든 간에 나는 가서 그것을 말해야만 합니다'
  제닝스는 화면을 바라보다가 머리를 가로젓는다. '치과의사가 될 수 있었으면'
그의 말이다. 오후 6시다. 그런데 그 수정작업은 아직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제닝스는 소련발 AP통신을 담은 두루마리를 보고 있는 중이다.
   '고르비는 리투아니아인들에게 "나는 연방 탈퇴를 포함해 그들의 모든
결정을 찬성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제닝스는 프리드만을 바라보며 말한다.
  '로리에게 이 문제를 조금은 조심스럽게 다루라고 말했지요'
  프리드만이 로리가 보낸 기사를 자세히 본다. 그는 만족한다. 제닝스에게 돌아선
그는 낄낄거리며 말한다.
  '자네와 나 사이에는 리투아니아인들이 벌써 독립을 얻었지'
  다른 기사를 타이프하던 제닝스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이건 속임수야, 속임수라구'
  프리드만이 미소지으며,
  '자네가 독립적이길 원하나? 자네는 벌써 자유로운데 말이야'
  프리드만과 제닝스는 편안한 사이이다. 그래서 즐거이 장난을 친다.
  '그건 뉴햄프셔 출신 상원의원과 비슷하군, 그 친구 이름이 뭐더라?'
  베닝스의 말이다.
  '베트남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라고 말했던 친구말일세(이겼다고 선언한 후 고향으로
가는 것)'
  한 군데 모니터에 리투아니아에서 보낸 짐 로리의 뉴스 필름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거리의 군중들, 플래카드를 들고 광장에 모인 사람들.
  '오, 이런 일을 봤나!'
  제닝스가 자판을 두들기며 소리지른다. 뉴스 필름이 끝났을 때 프리드만은
"금주의 인물"이 누가 될지 알고 싶어한다. 제닝스가 말한다. '두 사람의
훌륭한 후보자가 있지. 아트 버크워드와 더글라스 와일더 말일세'
  '자네는 버크워드가 되기를 원치 않지'
  밥 로이의 말이다. 림에 있던 사람들의 감정은 그 칼럼니스트가 에디 머피와 벌인
표절 시비 사건에서 이겼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기만 내세우는 사람이다.
  '우린 카다피를 뽑았었지'
  프리드만의 말이다.
  제닝스가 슬픈 미소를 띠면서 그를 돌아본다.
  '자네는 어젯밤에 PBS 스페셜을 보았나?'
  그가 묻는다.
  '래더가 진행한 프로그램에 이어진 것 말이야. 우린 자네를 위해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고 행각했네. 그래서 우린 대신 그에게 진실을 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지'
  '자네가 뭐라고 말하든간에'
  프리드만이 아이러니컬하게 맞장구친다.
  6시10분 마감시간을 두고 의견 충돌이 일어나 모든 사람이 조금ㅆ기 예민해져 간다.
밤 로이가 전화를 붙들고서 짐 우텐에게서 대체연료에 대한 기사를 얻어내려고 애쓰고
있다.
  '우텐 씨, 당신은 끝나기까지 20분쯤 더 기다리고 싶지 않습니까?'
  그가 비꼬는 투로 말한다.
  폴 프리드만이 그 전화를 잡고,
  '허튼소리를 우리에게 읽어 주시겠소?'라고 말한다. 그는 웃으면서 우텐이 말하는
것을 듣는다.
  '그건 아주 지독한 이야기로군. 그렇게 중요한 주제를 다룬 것이지'
  그들은 웃으며 전화를 끊는다.
건너편에 있던 편집자 마이크 스타인이 제닝스에게 물어보고 있다.
  '사회보장법에 대한 제안을 해도 되겠나? 자네가 말한 조심스런 조치 대신에 한판
승부라고 하면 어떤가...'
  제닝스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사려깊게 듣고 있다가 말한다.
  '그래, 좋았어. 훨씬 더 좋은데'
  제닝스는 그 단어들을 타이프해 넣는다. 그리고 자료들을 모아 스튜디오로 향한다.
  '누가 사회보장법에 대한 기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그가 한숨을 내쉰다.
  7시30분 방송이 끝나고 제닝스는 67번가를 아내 케이티와 친구, 그리고 ABC 동료인
톰 옐린과 같이 활보하고 있다. 피터와 케이티는 영화관으로 향하고 있지만 그전에
제닝스는 끝내야 할 마지막 일거리인, 송신기로 다튜멘터리 프로그램의 결론 부분을
보내는 일이 남아 있다. 그들은 콜롬버스가에 있는 다른 ABC 건물 2층으로 올라가
버려진 장비들로 가득 차 있는 작은 곰팡내 나는 방으로 간다. 구석에는 자그마한
방음시설이 된 방이 있는데 그곳은 공중전화 박스보다 조금 큰 규모의 방이다.
  제닝스는 안으로 들어가 이어폰을 끼고, 음향기사인 알렉스는 커다란 녹음기계를
만져 보고 음 높이를 조절한다. 이윽고 됐다는 표시로 제닝스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제닝스는 읽기 시작한다.
  '아마 미국인들은 기꺼이 폭력이 현상태로 유지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그는 다시 시도한다.
  제닝스는 다섯 번이나 같은 내요의 녹음을 옐린의 지시에 따라 했는데 다섯번째,
사람들이 좋다고 동의한다.
  '바로 그거야!'
  그들 모두 웃으며 말한다. 제닝스는 헤드폰을 벗고 박스 밖으로 나와 녹음된 것을
들어 본다.
  '아니야, 너무 단조로워'
  머리를 흔들며 그가 말한다. 그는 녹음실로 다시 들어간다. '화면에다 녹음하는
것이 훨씬 더 쉽구만'
  제닝스는 두 번을 더 녹음해 본다. 그는 아까보다 몇 단어를 줄여서 녹음한다.
마침내 그는 만족한 듯이 일어나 밖으로 나온다. 그의 이마가 녹음이 재생될 때
신경을 쓰느라고 주름이 잡혀진다.
  '바로 그거야!'
  그가 이제야 말한다. 레인코트를 입고 케이티에게 미소를 지은 그는 아내와 함께 문
쪽으로 나가다가 갑자기 주저하며 멈춘다.
  그는 아내에게 양해를 구하고 몸을 돌려 마지막으로 녹음실로 들어간다. 베이지색
옷과 스카프를 입은 케이티는 마음 좋게 웃는다. 그녀는 전에도 이런 일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영화관에 가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 아니데'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조금은 생각에 잠겨 있는 목소리로 그녀가 말한다.
  마침내 일을 마친 제닝스와 케이티는 어둠 속으로 나간다. 그들이가는 것을
지켜보며 톰 옐린은 머리를 흔들며 애정과 섭섭함을 섞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피터는 항상 그런 식이빈다. 한번, 다시 한번 그는 시도해 봅니다'
  그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그는 결코 만족하는 법이 없지요'@ff
      21. 앵커 브로커

  1976년, NBC의 허브 슈로서 사장과 딕 월드 뉴스국장은 쩔쩔매고 있는 앵커 존
챈셀러의 후임을 누구로 할까를 가지고 고심하고 있었다. 1971년 데뷔해서 줄곧 존
챈셀러는 크론카이트에게 뒤져 2위의 시청률을 기록해 왔다. 전당대회보도에서는 가끔
크론카이트를 앞선 적이 있기는 했지만 NBC는 그 정도에 결코 만족할 수가 없었다.
  후속 인물로 콤 브로커가 거론되었지만 슈로서는 이 백악관 출입기자가 적임자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반은 은퇴했지만, 날카롭다는 슈로서는 여전히 철저했다. 그는
기억하고 있다.
  '우리는 톰 브로커가 "Today"쇼로 데뷔했다는 것을 생각해냈습니다
그때 NBC "Today"를 이끌어갈 친절하고 상냥한 교통순경을 찾고 있었다.
  '톰을 적임자라고 여긴 것은 그가 매력적이고 분명하며, 야심이 있어서 그 일을 잘
해낼 수 있으리라고 봤기 때문입니다'
  36세의 브로커가 겨우 거론될 후보라면 더욱 유력한 후보로는 L.A의 KNBC 시절부터
그와 절친한 친구인 톰 스나이더였다. '그를 68년인가 69년에 L.A에서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주눅이 들었습니다. 이것이 장차의 일이라면 그것이 내가 이 분야에 뛰어든
이유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브로커는 말했다.
  브로커는 스나이더 같은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는 "완벽한
방송인"이었다. 그는 오직 카메라 앞만 신경썼다. 브로커에게는 카메라 위에
달린 작은 빨간 등이 켜질 때면 스나이더의 삶이 진행되는 것 같았다.
  '나는 11시 뉴스를 진행하는 것 이외에 그가 진행하는 6시 쇼에서 정계 소식을
보도했었습니다. 나는 '톰, 당신도 알듯이...' 하면서 끼어들곤 했는데 그 말이 그를
맥빠지게 했었죠. 그런데도 그는 그런 사소한 것에는 저혀 신경을 안 썼습니다. 그는
방송하는 것을, 즉, 촉매자의 역할을 사랑했으며 그 일에 대단히 능숙했습니다'
  우연히도 그당시 그들의 대리인은 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L.A에서 활동하던 에드
훅스트래튼이란 사람으로서 자신의 두 고객을 공동 앵커로"Nightly
News"에 출연시키려고 브로커에게 물었다.
  '당신은 워싱턴에서, 톰은 뉴욕에서 일하면 어떻겠소?'
  브로커는 탐탁치 않게 여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대답했었다.
  몸을 앞으로 하며 슈로서가 말한다. '견해들이 다르니까 내 말대로 합시다. 1주에
한 번 뉴스국 사람들을 만나보겠소. 그러면 많은 의견이 나올 것이오. 톰 브로커도
제인 폴리도 내 임기중에 "Today"쇼를 맡은 사람들이오. 그리고 우린
챈셀러 후인이 될 후보자들에 대해 고심중이었소. 스나이더도 그중 하나이고 그가
적임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뉴스국 내에 많이 있소?'
  슈로서는 자신이 스나이더만을 생각한다고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1984년 NBC 뉴스국장이 된 로렌스 그로스만에 따르면, 그는 스나이더가 후임 앵커가
되길 간절히 바랐던 것이 분명하다.
  L.A 이후 스나이더는 "뉴욕 뉴스 4"의 앵커로 동부에 왔고, 잘 해냈다.
또 "내일"이라는 심야 토크쇼의 진행자가 되었다. "워싱턴
포스트"의 TV 평론가인 톰 쉘스는 어느 글에선가 '만약 세상을 지루한 세상과
그렇지 않은 세상으로 나눈다면 스나이더는 후자일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 그는 예측
불가능의 스나이더를 TV의 세계를 가로지르는 불꽃, 경외와 두려움으로 쳐다보아야
하는 혜성으로 평가했던 것이다.
  비록 예측 불가능하다는 것이 생생하고 극적이긴 하지만, 그리고 경영의 입장에서
시청자를 붙잡아두는 가장 큰 매력이긴 하지만 그것이 "앵커"로서의
자격들 중에서 상위는 아니다. 오히려 슈로서는 앵커가 가져야 할 주요한 자질을
"무게"로 본다.
  '앵커는 책임감이 있어야 하고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시청자는 안정감을 원하는
것입니다. 지혜와 깊이를 느끼고 싶어하는 것이죠. 그러나 한번 봅시다. 우리가 또한
앵커에게 요구하는 것은 진행 솜씨입니다'
  챈셀러는 "무게"가 아니라 "시청률"이 그에게 약점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오랜 경혐으로 다져진 전직 앵터 챈셀러는 미소를 머금고 먼
산을 바라보듯 천장을 응시하면서 이런 말을 한다. '사장이 원하는 것은 숫자입니다.
어느 경영자가 내게 "톰 스나이더는 시청자를 늘려놓지 않은 프로그램이
없지"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숫자를 사랑합니다'
  슈로서로서는 스나이더의 시청률이 인상적이긴 했다. 그렇지만 시청률 전쟁의
압력으로 NBC는 결국 톰 스나이더가 아닌 좀 더 노련한 데이비드  브링클리를
챈셀러와 공동 앵커로 선택했다. 새로운 팀은 1976년 6월 7일에 등장했다. 1년 반이
지나도록 시청률에 인상적인 변화가 없자 브링클리는 물러나고 챈셀러만 남았다.
외로운 왕으로.
  브로커와 챈셀러는 서로 좋아했다. '나는 종종 그의 충고를 들으로 갔고 그는
자신있게 내게 와서는 여러가지를 말해 주었습니다'라고 브로커는 회고한다. 챈셀러가
스나이더의 앵커로서의 자질에 회의를 가졌다면 브로커에 대해서는 그런 불안이 전혀
없었다. 톰은 최소한 그러기를 바랐다. 그는 게임하는 방법을 알았고, 높은 위치에
있는 친구를 필요로 했다. 오마하의 KMTV, 그리고 나중엔 버뱅크의 KNBC에 있었던 봅
무홀랜드, L.A에서 처음 만난 딕 월드, 그리고 뉴욕 지사의 책임자였던 존 챈셀러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그의 경력에 있어, 매 단계마다 도움을 주었다. 회사 내에 다른
경쟁자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브로커는 이제 최선의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CBS의 로저 머드를 못 보았던 것이다.
  1980년 2월 18일, 댄 래더가 CBS와 2,200만 달러에 향후 10년간의 계약에 서명했을
때 로저 머드는 월터 크론카이트의 후임자 도전에 실패했다는 것을 알았다.
"못생긴 난쟁이"라는 별명의 CBS신임사장 빌 레오나드와 만난 후 머드는
CBS를 떠나기로 작심했다.
  그러는 동안 NBC 뉴스국장 자리는 계속 주인이 바뀌고 있었다. 딕 월드와 레스
크리스탈은 합쳐서 채 5년도 재직하지 못했다. 그 당시 사장은(어느 NBC 직원이
명명했듯)"장인 공작"이라는 빌 스몰이었다. 머드가 희망을 나타내자
스몰이 그를 날쌔게 낚아챘다. 그들의 계약조건 속에는 챈셀러가 앵커를 그만두면
머드가 그 자리를 맡는다는 다짐이 들어 있었다.
  래더가 CBS와 서명한 후 브로커는 이후 상황을 추측해 보았다.
  '나는 머드가 왔을 때 놀라지 않았습니다. 빌 스몰과 CBS와의 관계를 알았죠'
대학 시절 이래 쭉 NBC에서 일해 왔기에 브로커는 NBC가 그의 미래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1981년 봄과 여름에 그는 다른 곳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5년 계약이 만료가
되어 가고 있었으며, "Today"에서의 성공으로 그는 분명 주가가 올라
있었다.
  처음 접근해 온 것은 CBS였다. 빌 레오나드와 존 래인이었다. 빌이 말했다. '함께
일해 봅시다. "60분"이라는 프로가 있소'
  브로커는 매우 흥미를 느꼈으며, 그는 레오나드와 그의 대리인 버드 벤자미니과
동부인해서 저녁을 함께 했다. 그 저녁 후에그들이 그런 내용을"60분"의
수석 프로듀서인 던 휴위트에게 전하지 않았던 것은틀림없다. 
  크게 실망이 됐지만, 브로커는 CBS에서 맡을 수 있는 다른 프로그램에 대해 그들과
계속 이야기했다. 그때 ABC에 있는 딕 월드가 그런 사정을 전해 듣고 함께 이야기해
볼 것을 제안했다. 그때 마침 높은 위치에 있는 브로커의 친구인 ABC 뉴스 룬 알러지
사장이 찾아왔다. 그는 1977년 임명된 이후(충분환 전망과 모험과 자금을
가지고) NBC, CBS의 불가침적인 주도권에 처음으로 감히 도전하고 있는 ABC 뉴스국을
발전시켜오고 있었다. 그는 브로커를 탐냈다. 지루하고 초조한 교섭 끝에 래더를
CBS에 빼앗겼기에 더 그랬다.
  '그래서 우리는 꽤나 열렬히 이야기를 나누었고 아마 2개월 정도 계속했을 것이다.
우리는 함께 점심을 하고 그의 집까지 가서 좀더 얘기하고 그리고서야 내 일에 대한
심각한 토의를 시작했다. ABC는 많은 자리를 제안하고 있었다. 하지만 돈 문제는 결코
거론 되지 않았다. 나는 훅스트래튼을 캘리포니아에 머물게 했다. 많은 대화를
했으며, 나는 훅스트래튼을 캘리포니아에 머물게 했다. 많은 대화를 했으며, 나는
업무 영역에 관심이 있었다. 그것이 내가 해결하기 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나서 돈
이야기를 할 것이다'
  NBC의 챈셀러와 많은 사람드러이 재앙의 조짐을 두려워하여 브로커를 머무르게
하려고 애썼다. 좀더 정상에 있었더라면 그를 잃어버릴 위험이 덜했을 텐테. 심지어는
머드에 대한 스몰의 선호 때문에 브로커가 떠나는 것을 아쉬워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바로 이때(우연히) 브로커의 친구인 손톤 브레드쇼가 NBC의
모 회사인 RCA 사장으로 왔다.
  '브로커는 L.A에서 브레드쇼가 알코의 사장으로 있을 때 이미 우정을 돈독히
했었다. 그는 그러한 류의 처신에 능하다'라고 루벤 프랭크는 전한다. 브레드쇼는
스몰에게 지시를 했고, 스몰은 어떻게든 브로커를 머물게 해야 했다.
  룬 알럿지를 존경했다는 브로커는 말한다. '그가 다짐하는 모든 믿어지지 않는
약속들이 이행될 것을 믿었죠. 나는 그 사람들에게 정당한 요구를 받았고 그 제안들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금요일 오후 어느 순간인가 나는 그러리라 결심했는데
나는 스스로에게 그것이 이치에 맞는 일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신선한 출발이고 꽤
흥미로운 조직이며, 그 사람들이 좋고 내 친구 중 몇도 이미 가 있다, 딕 월드, 폴
프리드만 등등. 그날 밤 만찬이 끝나 집에 왔고, 홀로 앉아서 내 삶이 어디에 있어
왔는가, 내가 하려고 했던 일, 내가 어디서 끝내길 원하는지를 곰곰이 반추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NBC를 떠날 수 없다고 결심했습니다. 이곳이 내가 몸담을
곳이다, 이들이 내 친구 들이다, 그래서 나는 가서 내 결심한 바를 전했습니다.
이야기가 잘 되면 머물겠다고 말입니다'
  그가 래더의 엄청난 액수의 계약을 들었을 때, 브로커는 플로리다주의 예비선거에
관한 정치권 보도에 관한 일을 하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이미 봄 훈련이 시작되어
있었다. 야구광인 그는 양키 훈련장에 갔다. 레지 잭슨이 달려오더니,'아니! 래더와
같은 계약을 할 예정 입니까?' 그것이 그가 처음 생각한 일이었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모든 사람이 그런 계약을 원하지만, 레지, 우리 주변엔 그런 사람이 별로
없죠' 우린 둘 다 크게 웃었다. 그것이 그가 TV 뉴스에 대해 이해한 전부였다. 당신은
그가 받은 돈을 단번에 만들 수 있다. 그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솔직히
말하건대, 내 삶의 어느 순간에 그러한 액수의 돈이 내게 가능할 것이라고 결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 문제에 관한 스몰의 해결책은 머드가 브로커와 공동 앵커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말은 행동보다 쉬운 법이다. 스몰은 머드가 이미전에 그런 제의를
거절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번에도 간단히 거절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놀라웁게도 머드는 순응할 줄 안다는 것이 입증이 되었다. 전혀 못 차지하는 것보다
반 쪽의 자리라도 차지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는지(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식의 그의
태도가 함께 살아야 하는 세상 속의 성인보다는 모래 상자 속의 어린애들에게 더
어울린다고 느끼면서) 혹은 단순히 브로커가 래더보다는 더 마음에 들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는 반대하지 않았다. 사실 많은 이들에게 안 알려졌지만, 그는 그 결정을
적극적으로 구체화시켰다. 그 교섭을 하는 중에 브로커에게 워싱턴의 머드에게서
전화가 온 것이다. 그는 그가 뉴욕에 있겠다고 하고는 함께 식사를 하자고 청했다.
  '우리는 사계절에서 식사를 했죠. 그는 말했습니다. '남아 계시오. 걱정하는 것이
"Nightly News"라면 함께 합시다. 나는 워싱턴에 있겠소. 당신은 뉴욕에
있으시오. 떠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오' 그 말은 내게 많은 의미가
있었습니다'
  머드는 그가 가족과 함께 정착한 워싱턴에 남게 되었다.
  스몰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챈셀러는 1982년 4월에 앵커 자리를 물러나기로
동의하면서 마침내 떠날 날짜를 잡았다. 이제 후속의 본질적인 부분들을 짜맞춘
스몰은 대리인 훅스트래튼과 브로커의 계약을 교섭하면서 운영의 실제적인 국면에
들어갔다.
  냉철한 계약자 훅스트래튼은 그가 힘으로 거래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브로커의
지지를 얻으려는 한 친구의 바람과, 그가 떠나는 것을 막으려는 또 다른 친구의
열정으로 부풀려진 계약은 브로커의 기대 이상으로 이루어졌다. 7년간 1,800만
달러에다가 "Nightly News"의 연출자, 감독 그리고 세트 디자인까지
승인하고, 머드가 그만두면 후임자 임명권도 갖게 되었다. 또한 그에게는 뉴스국의
경영에 관한 문제에도 자문하는 권리가 주어졌다. 스몰은 온전히 한 시간 길이의
방송을 하게 해주겠다고 했다. 줄 수 있는 전부를 준 것이다.
  앵커가 되기 위해서는 조직적 정치활동에 능숙해야 한다고 말한 사람은 월터
크론카이트였다. 브로커가 그러했다. 그가 ABC가 알았기에 그를 잡으려고 전력을
다하려 한다며, 브로커는 그러한 인상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았다.
  루벤 프랭크는 말했다.
  '우리는 그것이 앵커가 되는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러나 아니었다. 그것은 많은
돈이었다. 그러나 당신이 ABC를 믿는다면 그것이 스타 기자가 되는 것이었다'
  브로커는 최근에 이렇게 뒷받침했다. '아니, 그것은 앵커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프랭크 레이놀즈를 대체하려 하지 않았다. 그것은 앵커 자리로 가는 것이었다.
내 추측으로는(추측일 뿐이다) 그들은 피터와 나를 일종의 공동 진행시키려고 염두에
두었던 것이라 생각된다'
  그 계약은 1981년 7월1일 이루어졌다.
  '정말 놀라운 돈이었다. 교섭 마지막 날 에드가 내게 와서 '당신 믿을 수가 없을
거야'라고 했을 때,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소식이 막판에 새나가기 시작했고,
아버지께서 나를 부르시더니 그것이 사실인지를 물으셨다. 나는 '왜요? 전에는 안
물어 보셨잖아요'라고 대답하고, 계속 그러다가 아버지께서 "타임"지에서
기사를 읽으시고는 또 불러 물으시기에 또 그런 식으로 대댭했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엄마와 내가 알기로는 너는 언제나 연말에 잠깐 화제에 올라왔다.
우리가 예산집행을 하고 있는데 네가 너를 감당할 만큼 됐다는 것을 확인 시키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이 작은 집을 떠나고 싶다"고 하쎳다'
  브로커와 머드의 새 앵커팀은 1982년 4월15일 처음으로 방송을 했다. 브로커는
백악관 출입할 때인 6년 전에 머드를 알았는데, 그리고서는 그저 그렇게 지내왔었다.
'그가 크론카이트를 대신해서 왔을때, 로저는 우리 방에 와서(한 번인가 두 번) 함께
저녁을 먹었었죠'
  브로커는 머드와 일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예전과 같은 정치적 감각으로 그는 TV
가이드를 통해 머드에 대한 열정을 공개적으로 내보임으로써 새로운 짝과의 관계를
부드럽게 닦아 놓았다. 그는 새 짝을 1급 방송인으로 표현했다. 만약 머드가 CBS와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그의 조가 아니라 CBS의 죄로 생각되었다.
  새 프로그램의 수석 프로듀서는 폴 그린버그였다. 그는 짧은 턱수염에 안경을
꼈으며 밝고 야윈 얼굴의 신중한 사람이었고, 그는 전임 앵커 존 챈셀러의 수석
프로듀서이기도 했다. 그린버그는 서슴지 않고 '챈셀러는 본질적으로 브로커가
쫓아냈다'는 견해를 밝힌다.
  그린버그는 챈셀러의 지지자이긴 하지만 브로커에 대해 '매우 영리하고 정력적이며
대단한 호기심의 소유자'라고 평가한다. 그는 사람들과 함께 잘 지냈고, 머드는
워싱턴 구석에 처박혔다. 그린버그는 '우리는 영향력에 관한 한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근본적으로 그린버그가 그 프로를 이끌면서 거기에 브로커와 머드가
투입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현명하게 행동하고 있다고 인식하면서 그
스타들과 부드럽게 지냈다. 앵커를 교체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프로듀서의
역할은, 아주 쓸모없는 사람이 아닐 경우 5분 2정도의 비중을 차지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브로커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는 '함께 일했을 때, 우리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기사 선택 등에 애해 의견교환을 했다. 정말로 불과 한 달에 한 번 뿐'이라고
말했다.
  CBS에서 그와 함께 일했던 크론카이트와 챈셀러가 둘 다 편집운영국장이었지만,
그린버그는 브로커를 그와 함께 일했던 앵커 중에서 가장 실전 경험이 많고 의욕적인
사람으로 보고 있다.
  톰 브로커는 매우 능동적인 매니징 에디터이다. 월터보다 더하다. 우리는 그날의
사건에 대해 토론하고, 그 기사의 접근방식에 대해 토론한다. 그는 모든 것에 대해
의견을 가지고 있다. 그 프로가 제작되는 방식이나 그래픽, 스튜디오 세트, 그리고
컴퓨터가 작동되는 데에까지 그 모든 것에 대해 의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알아내고야 만다. 누가 프로를 진행하는지, 누가 같이 하는지, 누가 기사를
쓰고, 누가 감독하며, 누가 조감독인지, 그리고 누가 보조 프로듀서이고, 누가 시청자
전화에 대답하는 사람들인지를 "Nightly"의 연출자인 잭 체스넛도
챈셀러나 브로커와 함께일한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서 그린버그의 견해에 동의하고
있다. 톰에게는 더 많은 실전운영 능력이 있지만, 챈셀러는 그렇지 않다. 톰은 어느
부서의 장을 뽑든 깊이 관여한다. 그는 결재를 하는 위치는 아니지만 깊숙이 관여하는
것이다.
  새 계약을 따낸 42세의 앵커는 그의 영향력을 사용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방송의
모든 부분에 하나하나 그의 의견을 제시했다.
  브로커는 자신을 초년시절에서 뛰놀던 평온한 때에 그 순진하고 따뜻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이제 그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주는 현실적인
결정들을 내리고 있다. 모두가 다 그 결정을, 그리고 그를 따르고 싶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투데이"쇼에 나왔을 때 방송국에서 그를 비난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 당시 함께 일했던 베스티 아론은 '어느 누구도 그에게 불쾌한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고 술회한다.
  그러나 경력 앵커로서 그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으려 한 것 같지는 않다. 만약
그가 농담으로 '나는 언제나 방송하기를 원한다. 그것이 내 꿈이다'라고 말한다면
분명히 그에게 "방송 돼지"라는 딱지를 붙이려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앵커로서 그는 놓치기에는 너무 커다란 목표였다. 그에게 불만이 있는 한 스텝은 '그
친구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방송인이라 생각합니다'라고 말하고, 또 한 사람은
그를 '혀 짧은 보통하람'이라고 이죽거리기도 한다.
  호스트에서 앵커로 브로커가 역할을 바꾸게 되면서 가장 재미있는 것은 그 자신의
반응이었다. 비록 그가 그의 영향력을 유연하게 즐기고 있다 하더라도(사실 그것을
일에 있어서 자신의 지도책임의 역할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는 여전히 아이들
중의 하나인 정도로 받아들여지길 원하고 주위 사람들이 그를 좋아해 주길 원한다.
  '나는 앵커 신드롬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그는 솔직히 인정한다.
'당신은 갑자기 전혀 다른 분야로 밀려난다. 친구들은 더이상 당신을 뛰어다니는
기자로 보지 않는다. 그들은 당신이 그 이상이라고 느낀다'
  그의 앵커 경력이 시작되자 곧 거의 갑작스럽게 끝날 뻔했다. 브로커 머드 팀이
처음 방송하기 1주일 반 전에 루벤 프랭크가 뉴스국장으로 스몰과 교체되었다.
프랭크는 금방 그가 새로운 앵커팀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결정했지만 그들에게
구체화할 시간을 더 주려고 기다렸다. '1년이 지난 83년 여름이 되어서야 나는 그
프로가 죽은 쇼라고 말했다' 그는 문제는 앵커 둘이 하는 방식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화면 뒤에서 그 둘은 누가 머릿기사를 방송하는지, 누가 더 많은 방송시간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쓸데없는 언쟁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 주장하듯이 그들은 실제로
초시계로 재지는 않았지만 어느 뉴스가 더 중요한지, 어떻게 시간을 할당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견이 기본적으로 달랐다.
  브로커는 그것을 중요도에 대한 워싱턴과 뉴욕의 주도권 싸움이라고 표현한다
'로저는 나 이상으로 워싱턴 프리즘을 통해 세상을 보았다. 이를테면 그는 대중문화와
그 영향력에대한 이야기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또한 그는 보도해야 할 외국
뉴스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워싱턴 주재 기자로서의 역할에 온 시간을 보냈다.
그것이 그의 관심이었고, 열정이었다. 그는 이것이 그의 시야를 제한했다고 생각했다'
  브로커 머드 쇼는 헌틀리 브링클리의 불가사의했던 힘을 되찾고자 하는 NBC
광고국의 열정적이고 민감한 사람들에게 일찍부터 축복을 받았었다. 그러나 루벤
프랭크가 이미 언급했듯이, 그 힘은 제대로 작용하지 않았다. 브로커도 역시
알아차렸다. 거의 1년 지나 그 쇼가 많은 광고를 잃고 각 계열 방송사들이 불평할
때쯤 브로커는 머드에게 말했다. '우리의 시청률이 좋지 않습니다. 뭔가 생각을
해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급하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엇다.
  브로커는 솔직히 걱정이 되었다. 그들 중의 하나가 떠나야 하는 것은 명백했다.
'그리고 나는 떠나야 할 사람이 로저인지 나인지 몰랐다' 그는 그의 파트너가 게약상
더 유리한 위치에 있지나 않을까 두려워했다.
  루벤 프랭크에게 중요한 문제는 '누가 가야 하는가?'였다.
  '나는 그것에 대해 오랫동안 곰곰이 생각했다'
  그는 당연히 머드가 뛰어난 낭독자라는 것을 인정한다. 게다가 프랭크는 그를 매우
훌륭한 기자라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방송에 어울리는 멋진 외모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한편, 브로커는 놀라운 "애드 리버(ad libber)"였다. 그는 TV에
어울린다. 더 나은 사람도 있겠지만 흔한 것은 아니다. 초창기에는 없었던 그런
사람이었다. 내 생각으로는 브링클리가 첫째가 이니었나 싶다. 그는 정말로 TV가
무엇인지를 아는 친구였다. 크론카이트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이었지만
어떻게 맺어야 하는지를 몰랐다. 반면에 브로커는 아주 능숙했다. 브로커는 뉴스
캐스터로서보다 이런 점에서 더 훌륭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또 프랭크는 기사를 취재하기 위해 머드가 워싱턴 밖으로 나오는 문제를 예상해
보았다. 머드는 대단히 싫어할 것이다. 그러나 브로커는 어디든 간다. 사람들은
트랜치 코트를 입은 조엘 맥크레이 같은 사람들을 알고 있다. 브로커는 이런 일을
대단히 좋아한다.
  그러나 그가 결국 머드를 내쫓은 이유는 뉴스와는 관계가 없었다.
  '선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머드는 애드 립을 못합니다. 전당대회가,
특히 별일 없을 것이라고 알고 있었던 그 두 전당대회가 벌어지는 동안에
스튜디오에만 있을 그를 생각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머드에게 통첩을 한 83년의 여름을 기억하면서 프랭크는 투덜댄다.
  '참 더러운 날이었습니다'
  머드가 대리인에게 이미 전달받은 것을 알았지만 프랭크는 개인적으로 만나 그의
사임을 알려 줘야 한다고 느꼈다. 그날 아침 그는 국회 쇠위 때문에 워싱턴에 있었다.
선거가 1년밖에 안 남은 상태에서 소위는 서부가 아직도 투표하고 있는 동안 뉴스가
조기 방영된 동기에 대해 조사하고 있었다. '아침 내내 팀 위드 의원, 알 스위프트
의원에게 심하게 얻어맞았습니다' 그것이 프랭크의 식욕을 없애기에 충분치 않았다면
그의 다음 행동은 점심을 확실히 먹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식사를 하는 대신에
머드에게 전화해서 K가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골치 아픈 일이 생기지나 않을까
해서 미리 NBC 로비스트 중 한 사람에게 사무실을 빌려 놓았었다. 그곳이 무대가 될
거라면 그는 그 일이 가능한 한 NBC 워싱턴 사무실에서 멀리 떨어져서 일어나기를
원했다. 그들은 대결을 벌였다. 크고 억세게 보이는 머드와 두꺼운 안경을 낀 야윈
백발의 근엄한 프랭크가. '그는 매우 화가 났었씁니다' 프랭크는 회고한다. '설명을
요구했고, 나는 해줬습니다. 그는 불충분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건 마치 어떤
농담이라고 말해씁니다. 나는 그 수식어들을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듣기 좋은
말은 아니었습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상황이 좋지가 않았습니다. 그는
실망할 만했고, 나 개인 의견이 아니라고는 했지만 어쩔 수 있겠습니까?'
  그날 오후 늦게 뉴욕에 온 프랭크는 브로커를 불러서는 방금 머드에게 통보했다고
전했다.
  브로커가 1983년 8월 솔로로 등장했을 때, 모든 사람이 브로커에게 프랭크가 그랬던
것처럼 몰두한 것 같지는 않았다. 비평가들은 마치 그가 통구이인 것처럼 그려내었다.
브로커는 생생하게 회상한다. '나는 매우 험한 길을 통과했습니다. 로저가 아닌 내가
그 프로를 맡은 것에 대한 언론의 반응은 매우 부정적이었습니다. 훌륭한 경관이
직업을 잃고 어린 친구가 잡았다는 등 많은 험담조의 기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브로커는 매일 저녁 그 쇼의 진행에 애쓰느라고 스스로 연민에 빠질 시간이
거의 없었다. 장애물을 극복한다는 것은 자신의 신비한 매력을 유지하면서 암벽
등반과 감동적인 기사에 대한 그의 취향을 증언하는 어떤 것이어야 했다. '엉뚱한
녀석이 그 일을 맡았다고 수군대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진실로
겸손해지려고, 내 일만 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평하고 있었고,
로저에게는 많은 후원자들이 있었습니다'
  NBC 뉴스국은 이 전환기 내내 혼란에 빠져 있었다. 담당 부서간에 혼란이 있었고
기사는 불가피하게 빠지기도 했다. 브로커의 "Nightly"는 시청률 3위로
미끄러졌다. NBC 뉴스맨과 매니저로서의 긍지를 가지고 있던 루벤 프랭크는 이러한
새로운 시기에 임시변통으로 국장을 맡기 위해 돌아와서 혼란의 흐름을 막으려고
도왔다. 그러나 1984년까지 NBC 뉴스국은 7,500만 달러의 적자를 봤다. 전 NBC 뉴스
경리부장 나탈리 헌터는 '그것은 우리에겐 낮은 수치였습니다. 84년은 선거의 해였고
당연히 영향을 받았던 것이죠'라고 말한다.
  NBC의 이 혼란의 시기에 대해 언급하면서 딕 월드는 '톰 브로커는 당시에 막대한
영향력을 가졌지만 그것은 힘의 공백상태 때문이었다'라고 밝힌다. 브로커는 더 나은
장비, 더 적극적인 뉴스 보도, 새로운 세트를 바랐다. '나는 우리의 제작이 아주 안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비록 그가 그의 수석 프로듀서인 폴 그린버그를 믿기는 했지만
그는 그들이 "Nightly"에서 해야 할 것, 어떤 통신기자가 그것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강력하게 의견을 제시했고, 그들이 확실하게 알아듣도록 했다. '나는
이런 것들이 우리가 해내야만 하는 것이고 우리가 가야만 할 방향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애썼습니다' 톰 브로커의 말이다.
  그린버그는 장비에 대해서 그와 같은 생각이다. '장비는 NBC에서 커다란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루벤의 재직 말기로 가면서 크게 개선되었습니다. 80년대
중반까지 우리는 경쟁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앵커에게 "Nightly"의 저조한 시청률에 대한 책임이 있고, 혹은
최소한도 앵커에 대한 시청자들의 인식에 원인이 있다는 것을 심지어 브로커 자신도
알고 있었다. 여러 방송사에서 일하고 있는 이미지 상담가인 알마 바바로는 브로커가
포괄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포괄적인 매력 때문에(결코
깎아내리려는 뜻은 아니다) 만약 월크 디즈니가 방송뉴스에 대한 영화를 만든다면
당신들이 언제나 좋아하고 싶어하는 사람, 바로 브로커 같은 사람과 함께할 것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녀는 그가 비록 보수적인 의상을 하고 있지만 다른 두 앵커보다 "약간
젊은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느낀다. 어떤 시청자들이 그를 지적인 플라이급
선수로 느끼는 것은 이 매력적이고 청년다운 특징 때문일 것이다. 혹은, 가끔 그가
"투데이"쇼에서 했었던 딱딱한 저널리즘에도 불구하고 기상통보원 윌라드
스콧트와 벌이는 농담과 가수 에디고르메 같은 사람과 희롱하는 등의 5년간 매력적인
호스트 역할을 한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유야 어쨌든 브로커는 "단지 깔끔한
얼굴"이었던 그의 이미지를 변화시킬 뭔가를 가져야만 한다고 확신했었다.
  그가 샌프란시스코의 좌익성 잡지인 "마더 존스"와 인터뷰에 응하기로
한 것은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도 있다. 브로커는 정치적 이슈에 관해 많은 견해를
발표해 왔다. 그는 그것들에 대해 박식해  고, 독립적이고 편견없는 확신을 굳혀
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 인터뷰가 불행한 사건임이 입증되었다. 결국 앵커는
강한 정치적 견해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투데이"쇼의 왕년의
동료였던 제인 폴리는 '앵커보다 더 하얀 빵은 없다'고 말한다.
  그 인터뷰에서 브로커는 레이건을 '지나치게 단순하고 구식'이라고 했고,
엘살바도르를 '대부분의 부를 나라 밖으로 유출시키는 우익 소두 독재자들, 그 한줌의
사람들이 통제하는 나라'로 묘사했으며, 자기 자신을 여권신장 옹호자, 사형제도 폐지
옹호론자, 프로 초이스(pro_choice)라고 성격 지웠다. 그리고서는 흥분해서
시청자들에게 일격을 가했다. '봉급쟁이들은 TV 네트워크 근처를 어슬렁거리죠.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한 진정한 관심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둘 때를 제외하고서 말입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 NBC 경영진은 놀라지 않았고, 언론 또한 그랬다. "워싱턴
포스트"의 콜맨 맥카시는 이렇게 썼다. '앵커가 할 일은 보도하는 것이다.
완벽한 객관성은 어떤 뉴스 취급자에게도 불가능하지만, 브로커의 폭발은 미디어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갉아먹지 않을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드러낸 단면이다. 이제
브로커가 레이건 행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보도를 할 때 사사로운 견해가 들어
있었다는 의심이 제기될 수 있다. 개인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말이다'
  어느 정도는 훨씬 우익 쪽에 있는 칼럼니스트들은 그가 "부유한
자유주의자"인지 "손수운전의 인민당원"인지 결정할 수가 없었다.
그 문제가 해결되기도 전에 항시 자신을 저널리즘의 객관적 존재(개인적이 아닌)라고
자부해 온 브로커는 그 인터뷰가 실수라고 생각했다.
  뉴스국에 새로운 에너지, 아이디어, 안정감을 불어넣으려고 계획하던 중에 NBC는
루벤 프랭크를 대신해서 뉴스국장으로 PBS(Public Broadcasting System)의 로렌스
그로스만을 선발하려고 3대 방송 바깥으로 눈을 돌리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했다.
그로스만은 퍼블릭 TV에서는 뛰어난 점을 보여 주었지만 "Nightly"의
직원이 평하듯이 "뉴스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직업에 있어서 방향을
벗어난 게 아닌가 하고 느껴지는 무었인가가 있었다.
  그로스만은 단정한 반백의 수염을 가진 느긋한 매너의 키 큰 사내였다. 그는 2층
발코니처럼 반백의 눈썹이 이마에서 툭 튀어나온 그 밑으로 세상을 주의깊게
바라보았다.
  "Nightly"의 연출자 잭 체스넛은 그가 아주 타리스마적인 사람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선라이즈"와 "선데이 투데이"를 출발시켰고,
특별하게 잘해냈습니다. 나는 책임자란 그가 힘을 가졌을 동안에는 언제나 나쁜
놈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당시 뒤에서 지켜본 바로는 그리 나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책임자로서의 주요 업적으로 손꼽는 것을 요약하면서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거의 빈사상태의 뉴스부를 인수받아서 최고의 장소로 만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수염을 어루만지며 말을 잇는다. '그리고 게랄도 리베라를 뉴스부에서
교양부로 쫓아 버린 것입니다'
  그로스만이 1984년 3월 NBC 뉴스의 운영을 넘겨받았을 때 그곳은 악평을 받고
있었다. 취재기자들은 언제나 현장에 제일 늦게 도착하는 것 같았다. 한 NBC 연출자는
'그들은 제일 늦게 와서는 늦게까지 머물렀습니다'라고 80년대 초반기에 만연했던
유감스러운 상황에 대해 묘사했다. 새 책임자는 부서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기로
결심했고, 재임 2년 내에 그렇게 해냈다.
  그가 처음 그 직을 수락했을 때 들은 한 친구의 충고를 기억하며 그로스만은
말한다. 
  '나는 NBC 뉴스가 모두 제멋대로이고 충성심이 없는, 힘든 조직체라는 식으로
악명이 놓은 데 대해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7년간 5명의 책임자가 바뀌었기 때문에,
그래서 방향성이나 안정감이 없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는 있었습니다. 우리가 약간의
성공을 하면 그것은 대단했습니다. 정규전을 치뤘지만 상하관계는 확실했습니다. 나를
데려온 그랜트 팅커 사장의 지원은 확실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해야하는
대로 제 일을 해내게 되었습니다'
  1985년 말까지 닐슨 시청률조사에 의하면 브로커의 "나이틀리 뉴스"가
바닥에서 1등까지 바닥에서 1등까지 치솟았다.
  브로커는 처음에 그로스만과 잘 지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그의 전
상관을 고상하고 명예로운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아예 처음(84년 선거의
해)부터 많은 문제가 있었다. '래리가 한 첫번째 결정 중의 하나는 처음의 표
작성결과가 나올 때까지 선거 결과를 보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브로커는
놀라움에 머리를 흔들며 아직도 그 말을 믿지 않으려 한다.
  '그 결정이 우리를 끔직한 경쟁적 위치에 밀어넣었습니다. 우리는 밤새 뛰었고,
방송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려는 일종의 외부 로비가 있었다고 느끼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이해를 할 수는 없었습니다'
  브로커는 그로스만이 택한 이 역할에 대해 회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뉴스국장으로서 대중의 옹호론자가 되려고 결심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에게
그것이 우리가 하는 일과 마찰을 일으킬 때가 여러 번 있다고 말했습니다' 브로커는
바로 이것이 그 마찰 중의 하나라고 느꼈다.
  그 두 사람 사이에는 또한 다른 여러가지 불일치하는 점과 퉁명스러운 사적 만남이
있었다. 비록 이런 토론이 여러 문제를 자유롭게 토의하는 데 도움이 되었지만,
그들은 확실히 상처를 입어  다. 그로스만은 브로커가 많은 면에서 매우 고집스럽고
 독재적인 경향이 있다고 본다. 외견상 그들 관계는 비교적 부드럽게 보였지만 한
꺼풀 벗기면 심각한 결함이 있덨다. 그 두 사람과 가까운 사람들은 어느 통신기자
혹은 부서장이 어느 기사를 맡는지, 그리고 앵커가 프롬프터 화면이 없는 것처럼
진행하려면 원고 낭독에 얼마만큼의 리허설이 필요한지가 주요한 의견 차이라고
알려 준다.
  또한 NBC 뉴스국장은 브로커의 이름이 사회란에 자주 증장하는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결국 뉴스국의 주요한 대표격이었고, 그의 이미지는 그만큼 중요한 것이었다.
만약 그가 친구의 아내를 위해(예를 들면 전 보건교육 및 복지성 장관 조셉 칼리파노
2세) 맨하탄의 어퍼 이스트 사이드에 있는 고급식당인 모티어에서 벌어진 개인파티에
참석해서, 그것은 물론 개인적인 일이지만, NBC의 살아 있는 상표가 손을 치켜올린 채
뉴욕의 사전 시장과 사진에 찍히고, '톰 브로커가 휴즈 캐리에게 시청률이 처질 때 그
자신을 어떻게 벌하는가를 보여 주고 있다'라는 표제가 붙어 나온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브로커는 결코 비이성적이지는 않았다. 그는 이미지를 신중하게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만약 그로스만이 그가 누구인지를 알리는 기사를
신문에 보다 더 싣기를 원했다면 찬성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브로커는 자신에 대한
인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과 자신이 그 직업에 대한 신임장을 가지고 있는지의 여부에
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이해가 안 된 것은 그와 함께 NBC 뉴스를
지켜내는 것보다 남들을 달래려는 데에 보다 열성적인 그로스만의 태도였다.
  '래리가 재직하고 있던 중 내가 그와 크게 일치하지 않은 것 하나는 우리를 위해
입장을 지키면서 날카로운 칼 끝에서 서 있으려 하지를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너무 변명하는 입장에서 사물을 보는 경향이 있으며, 너무 급해서 타협을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건 이런 분야에서는 괴로운 일입니다. 일반적인진 않지만
멈춰서서 잠깐 기다리라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옳은 일을 해왔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경우에는 '내가 티벳어 관해 보도하면서 중국 정부에 대해 농담을
했는데 그는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NBC 뉴스가 '20년과 6일: 꿈이 사라지고
있다(가나안 서안과 기자지구를20년간 이스라엘이 점령한 것에 대한 비판적인
다큐멘터리)'를 방영하여 폭풍처럼 이스라엘 정부를 강타했었고, 이스라엘 정부는
그 프로를 '편파적인 TV 저널리즘의 충격'이라고 저주했다. 그후 한동안 NBC뉴스는
이스라엘 관리를 만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 점에서 래리와 나는 약간의 토론을 했습니다. 그는 양보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거기에 사절을 보냈습니다'
  그들의 긴장상태에다가, 뉴스국의 기능방식에 변화를 주어야 한다는 주위의
압력이 더해지고 있었다. 그로스만의 휘하의 NBC 뉴스는 비디오 테이프,
인공위성, 컴퓨터가 투입되면서 그 운영에 커다란 기술적 변화를 이루게 되었다.
새 기술은 스튜디오 밖의 생방송 능력을 신장시켰다. 그로스만은 '그래서 우리는
정말로 운영방식을 활짝 열어 젖혔습니다. "투데이"쇼를 길 위에서,
"나이틀리 뉴스"를 스튜디오 밖으로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부서의 효율성을 높이려는 시도 하에서 그로스만은 예산 절약을 위한 방안을 짜낼
맥킨시 자문회사를 불러들였다. 어떤 이들은 그 팀 때문에 직장을 잃게 될까봐
걱정하기도 했다.
  어뗜 이들은 뉴스를 자로 재려는 회사의 시도를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한
프로듀서는, '그들은 진행되는 상황을 전혀 알아낼 수가 없다'고 말했다. 언제라도
인간 본성의 일부를 측정하려고 그의 주머니에다 언제나 자와 저울, 구구단을 가지고
다니는 토마스 그래드그리처럼 그들은, 본질은 제외한 채 뉴스의 모든 것을 요약해
버렸다. 그 조사내용 중 하나는 비용 계상을 돕는 인덱스 시스템이었다. 그러나 NBC는
최근에 그것을 내던져 버렸다.
  그런 후, 그로스만이 세트 디자이너인 프랭크 로페즈를 불러 "나이틀리
뉴스"를 위한 방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그는 그 방이 무대 세트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실제로 일하는 장솔로 보이길 원했다. 시청자는 직원들이 전화받고,
TV를 모니터하고, 컴퓨터를 다루는 바쁜 책상들을 배경으로 한 브로커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로페즈에 의하면 대개 뉴스국의 책임자들은 그들이 애정을 가지고 추구하는 한 가지
기획 안에 이  는데 이것이 바로 그렇나 기획이라는 거싱다. 그는 계속한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 당시 CBS와ABC는 뉴스 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NBC만 유일하게
없었습니다. 나는 그들이 밴드왜건에 올라타기를 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로스만의 웅대한 계획을 실현시키는 데에 재주꾼 로페즈가 부딪힌 근본적인
문제는 24시간 동안 돌아가는 뉴스 룸 안에서 어떻게 하면 그동안 앵커를 멋있게
보이게 하느냐 하는 것이었다(CBS와 ABC에서 제각기 뉴스 룸을 만들었던 휴즈
레스키와 로져 그로드만도 부딪혔던 문제였다)
  로페즈는 인정한다. '나는 그들에게 뭔가 진실로 우아한 것을 제공하는 균형잡힌
행동을 하려고 애썼으며 아직도 사람들이 매일 와서 일하는 사무실이라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 그가 작업을 끝내자 NBC경영진들은 처음부터 그 방을 좋아했다.
    그러나 그로스만과는 달리 브로커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원래는 "따뜻한
회색"이 중심 색조로 결정되었어  다. 그것은'나이틀리 뉴스'를 경쟁 프로와
다른 색으로 구별시키자는 것이었다. 색깔은 시청자들ㅇ이 저녁뉴스를 찾아서 채널을
돌려나갈 때 금세 구별을 느끼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다른 두 방송사는 일반적으로
몇 안 되는 안정된 색깔인 푸른색을 사용했기 대문에 푸른색은 제외되었던 것이다.
  로페즈는 '푸른색 외에 흐릿한 회색이 많은 사람들이 편견을 가지지 않는 유일한
색입니다. 빨강은 너무 강렬하고 연보라색은 공격적이죠. 초록은 좋게 보이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톰은 "따뜻한 회색" 속에서의 방송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그는 바꾸길 원했다. 그는 자신이 청색을 배경으로 해야 더 잘 보인다고 생각했다.
브로커는 약간의 힘을 썼고 색은 파랑으로 변했다.
  키가 작고 부드러운 말씨에 친절한 매너를 가진 로페즈는 한숨을 쉬면서 어떻게
된 건지를 밝힌다. '우리가 그 일을 맡았을 때 나는 분명히 톰 브로커의 의견을 듣자고
했습니다. 사실 나는 그가 우리가 앉으라는 데에 앉을 거이라는 말을 들었고, 또한
그들은  우리가 세트를 책임지는 것이고, 그는 탤런트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압력이 밀려왔을 때는 전혀 그렇게 되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로페즈가
느꼈듯이 어떤 것이 당신에게 득이 될지를 안다면 어디에 앉을까를 고릴라에게
말하지 않거나, 맞아서 멍투성이가 되고 싶지 않다면 따뜻한 회색을 그의 턱
밑으로 밀어붙이려고 해야 한다. '내 생각에 경영진들은 많은 사람들이 계속
골칫거리에 휘말리기를 원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로페즈는 깊이 생각했었고
바로 그것이 그에게 자문을 구하지 않은 이유이다. 톰 브로커는 좋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로스만과 그의 수석 앵커와의 관계가 그 당시 체제 하에서 전혀 매끄럽지 않은
것이었다면, 1989년 방송사를 GE가 전부 인수하는 긴장상태에서 결정적으로 금이
가게 되었다. '그날부터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들을 수 있었던 것, 그리고 들은 것에
의하면 래리는 GE의 새 주인인 로버트 C. 라이트와 잭 웰치 등으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나의 매우 강한 인상이었습니다. 첫날부터 그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신뢰를 잃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브로커는 당시 "투데이"쑈의 수석 프로듀서였던
스티브 프리드만을 그로스만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사람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CBS와 ABC에서 이미 일어났던 식의 대규모 해고에 대해 일찌감치 두려워했던 것과는
달리 NBC의 새 주인은 처음부터 변화를 서두르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새 장난감을
분해해 버리기 전에 한 번 살펴보기로 한 것 같았다. 그러나 해고가 임박했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GE의 사장인 잭 웰치는 "중성자"라고
불리지는 않았다. 그는 그 체제를 존속시키면서 많은 사람을 쓸어 버렸다. 아무 이유도
없이.
  그리고 1987년 6월에 불확실함을 더하기 위해 NABET(NBC의 뉴스작가, 촬영기자,
편집자,음향기술자, 그래픽 전문가, 그리고 연구원들의 노조)는 파업에 들어갔다.
파업은 17주나 계속되었다. NBC에서는 특히나 어려운 시간을 보냈고, 한 파업
기록자에 따르면 그로 스만이 거의 도움이 안 된다고 즈끼는 많은 사람들의 피켓
행렬이 록펠러 센터 밖으로 줄을 지어 있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브로커를 칭찬했다. '나는 브로커가 내부에서 그 상황을
도우려고 정말 애쓰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는 작가진들의 모임에 여러 번 왔었습니다'
  NABET의 지역 11 책임자인 존 클라크는 파업 기간중 브로커가 한 막후에서의 역할을
확인한다. '나는 그가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건설적인 일을 한다고 느꼈습니다.
그가 그 파업중 많은 사람들과 개인적으로 만났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NABET에서 코디네이터로 일하고 있는 대변인 톰 케네디까지도 만나서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그가 사장 밥 라이트와도 의논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는 그가 할 수 있는 한 많은 일을 하려고 애썼다고 생각합니다'
  브로커는 자신이 NBC의 수석 집행위원이며, 웰치가 직접 데려온 라이트에게 양쪽이
함께 하도록 애쓴 적이 몇 번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 사실을
방송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하는 것이'나이틀리 뉴스'의 리더 앵커가 되는 데에
어울린다고 믿었던 것이다.
  브로커는 "최후의 내조자"로 불리웠다. 예를 들면 그 파업 도중 카니 정은 센트럴
파크에서 가진 야유회에 참가하는 등 공개적으로 노조원들을 편들었다. 브로커는 다른
역할을 선택하면서 불참했다. '나는 그 파업에 대해 강하게 느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정직한 매개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공개적으로 그 일을 하지
 않으려 애를 썼습니다. 나는 은밀하게 양쪽에 가기를 택했습니다. 나는 해결사인
척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서로를 놓친 적이 있었으며, 나는 언제나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고 있다고 확신하도록 노력했습니다'
  실제로 그가 별개의 두 태양계를 다루고 있는 것처럼 느꼈던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최근에 카니 정이 NBC를 떠나 CBS로 갔을 때, 그녀를 붙잡는 데 더이상의 역할을 하지
않은 것 때문에 브로커를 욕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그 분명한 무관심이 자기의
지위에 대한 도전자를 경계하는 증상으로, 혹은 여성기자에 대한 애정 부족으로
여겨졌다. 이 경우에 그 두 가지가 다 이유가 될 수 있다고 본다. 대표적으로 그녀를
NBC에 두려고 안 보이는 곳에서 조용히 그리고 부지런히 일하고 있었다. 정 자신의
말에 의하면 그는 그녀의 협상에 매일 최대한의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그는 나를
설득해 머물게 하려고 집으로 사무길로 계속 전화를 걸었고, 심지어는 사무실에서
컴퓨터 편지를 보내기까지 했습니다'
  파업이 시작한 그 달에 브로커는 편집운영국장 겸 수석 기자로 임명되었다.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고 나는 그때 이야기했습니다. 사실 나는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맥킨시 고문은 사람을 구하지 못한 경영진을 돕기 위해서라도 기자가 마땅히 가야 할
자리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때 래리 그로스만이 돌아왔고, 많은 사람들이 그건
좋은 생각이라고 보고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브로커가 자기는 거절했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그는 그때 다른 말도 했다. 그는
그의 새 지위에 대해 "전환점의 이동", "방송뉴스의 제도적 미래"를 향한 원대한
조치라고 말했다. 브로커를 임명한다는 발표는 방송기자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사기가
뚝 떨어졌다. 더 많은 방송시간을 주지 않는다고 그에게 불평할 수 있겠는가? 바로
그가 주지 않았기 때문인데. 그로스만까지도 그 생각에 반대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되돌아보건대 그 사건은 모든 사람들에게 천 파운드나 나가는 고릴라가
이제 날개까지 달았구나 하는 인식을 굳게 만들었다고 생각됩니다' 오늘날 브로커는
그의 수석 기자라는 직함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브로커가 뉴스 보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한 것은 87년 가을이었다. 1주 동안에 그는
크렘린에서 고르바초프와 그리고 선두를 달리고 있는 대통령 후보들의 토론에 사회를
보는 모습을 골든아워의 시청자들에게 보여 주었다. 그로스만에 의해서 비교적
안정되었던 2년 반 동안NBC는 상승세에 있는 것 같았다. 시청률에 있어서도
"나이틀리"는 댄 래더의 "CBS이브닝 뉴스"를 간발의 차이로
밀어내고 1등을 했다. 카페트 깔린 NBC의 3층 복도에서 미소가 빛났다.
  브로커는 철학적으로 설명한다. '놓은 시청률을 올리기 위해 정해진 공식이란 없는
것입니다. 난 바닥이기도 했었고 1등이기도 했습니다'그러나 1등이 훨씬 좋은 것이다.
요즘 그로스만은 예전의 행복한 시절에 대한 향수가 있다. 그에게는 그때가 춘삼월
호시절이었다. 'NBC 뉴스가 정상으로 올라가고 그 손상된 이미지를 회복시키면서
조직은 점점 더 성공적이며 훌륭한 모듯ㅂ을 갖추어 나갈 때, 모든 사람은 함께
일하고 있었고, 진정한 성취감과 팀워크,그리고 공동 이익에 대한 희생정신이 넘쳐
있었습니다'
  그러나 브로커와 그로스만 사이의 마찰이 커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1987년 9월에
닐슨사는 시청률조사 시스템을 개선하고자 "일지기입" 방식에서
"Pushbutton PeoPle Meter" 방식으로 바꾸었고, 그 결과는 NBC 에게 충격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죽은 오리새끼처럼 공중으로 쏘아올려진 "나이틀리 뉴스"의 시청률은 3위로 떨어졌다.
그로스만의 말로는 그 일이 일어났을 때 분위기가 엉망으로 바뀌고 상부에 명백한
문제가 있었으며 모두들 "제멋대로 또로 노는" 혼란의 상태로 돌아가 버렸다고 한다.
  브로커의 견해로는, 새 사주가 온 이후 그로스만의 지도력이 점점약해져 간 듯하며
뉴스국과 그 자신의 경력에까지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로스만의
재주를 다져보면서 브로커는 GE 사람들, 즉 라이트와 웰치에게 척후병을 보냈다.
자기가 잭 웰치의 친구라고 하는 글에 대해서 웃어넘기지만(밥 라이트가 그로스만의
후계자를 위해 파티를 열었던 1년 전 그 일요일까지 웰치를 보지 못했다) 브로커는
웰치의 신임을 받았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브로커는 자기가 잭 웰치에게 간
때가 파업이 끝난 1987년 말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때 GE는 우리가 해고에 대해
결단내리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연공서열에 따라 해고를 시킬 예정이었죠.
이만한 수의 사람을 자르시오. 래리는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별영향력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밀사로 보내졌고, 나는 잭에게 말했습니다. "들어보시오.
비용에 관한 당신의 입장을 잘 압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조절할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이럭저럭 하는 동안에 일이 일어나도록 놔두시면 안 됩니다" 나는
그것이 매우 치명적이라는 것을 알기에 말해 주었습니다. "당신은 사람들의
능력에 근거한 판단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언제 고용되었는가를
기준으로 판단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자 그가 오케이를 했습니다. 내 주장이
갖고 있는 힘을 알아차린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브로커는 해고 파동을 커누트보다 잘 막을 수는 없었지만 충격을보다 완화시키는
데에는 성공했다. 전 NBC 감사관인 나탈리 헌터는 '나는 우리가 어떤 소동이라도
제1면 기사로 실리지 않도록 열심히 노력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CBS가 하룻밤 사이에 사람들을 몽땅 해고하고서 모두에게 받았던 비난 같은 것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7년 말 비교적 짧은 기간에 NBC의 활동력은 래리 그로스만이
84년 처음 인계받았을 때의 70p까지 감소되었다. 대량해고, 조기 은퇴 프로그램,
부당한 계약, 두 차례의 해고사태등으로 NBC는 40명을 추려냈고, 약간은 당황하면서
의기소침해진 천 명의 직원만이 남게 되었다.
  데스크 지원진들과 뉴스와 특집 지원진들은 쉽게 해고되었다. 필요하다면 그 자리는
경험 부족의 프리랜서와 파트타임으로 채워지곤 했다. 어떤 경우에는 카메라맨과
음향담당자로 구성된 2인조 작업을 혼자서 해야 되었다. 휴스턴 지국은 폐쇄되었다.
비록 호아금시절에 낭비가 심했던 것은 분명하지만 이러한 "새로운
현실"은 NBC의 기사 취재능력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나이틀리"가 계속 3위를 하고 있던 이 쓸쓸하게 기울어 가는 초라한
시기에 브로커와 그로스만의 관게는 어쩔 수 없이 팽팽해져만 갔다. '톰은 경영진에게
끌려갔다' 그로스만의 말이다. 회사 내의 다른 사람들은 진행되어가는 상황을
어렴풋이 느낄 뿐이었다. 그리고 지진이 일어났다. 리히터의 지진계로는 미세한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일을 부드럽게 처리하는 자제력과 열정을 가진 브로커의
자질에도 불구하고 잭 체스넛과 같은 직원들의 주의를 끌기에는 충분한 사건이었다.
  '그로스만과 톰과의 긴장, 그것은 매우 미묘했습니다. 그가 떠나기 4개월 전까지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밤 그로스만은 그날 나간 어떤 기사가 싫어서
톰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톰은 연락을 받더니 전화기를 내팽개쳐 버리고 래리가 그
기사를 싫어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은 래리가 그 기사를 싫어하며, 자기가 뭘
이야기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후 그로스만의 운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웰치와 라이트와도 관계가 신속히
악화되고 있었지만, 나중에서야 겨우 자기의 축출에 브로커도 한몫 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잭 웰치와 나는 매사에 전혀 상반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큰 싸움이
있었고 톰이 나에 대해 어떤 역할을 했다' 그로스만은 미쉘 가트너의 고용에 톰이
일정부분 책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브로커의 말에 의하면 어느날 라이트가 지나치듯이 그에게 사람을 구하는 중이라고
이야기했다. 한다. 그러나 그로스만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없었다는 것이 브로커의
주장이다. '그는 엉클어진 뉴스국에 어떤 새로운 인물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브로커는 그가 라이트의 상관이 웰치의 기호를 안다고 확신했기에 그들이 찾는
사람이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를 확신했다. 하나에서 열까지 웰치가 꼽는 우선 순위는
뉴스국을 통제하는 것, 그가 출혈이라고 생각하는 재정 지출을 막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딱 맞는 겅우였다. 브로커는 그들이 찾는 사람은 재정적인 문제에 대해서
뿐만이 아니라 편집분야에 대해서도 그들에게 조언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시켜 주고 싶었다.
  브로커는 덧붙여 말한다. '그 당시 어느날 나는 NBC 뉴스에서 특별기획을 담당하는
고든 매닝 부국장에게 이런 일들을 이야기하고 생각해 보라고 요청한 일이 있었다.
그런 후 매닝이 내게 와서 '미쉘 가트너!'라고 했다. 나는 좋은 생각이라고
이야기했다'
  가트너가 친구는 아니었지만 브로커는 그를 적어도 네 차례는 만났다. 맨 처음은
1980년 아이오와에서였다. '챈셀러와 내가 스테이션 대표로 데스 모인에서의 오찬에
초대받았을 때 잠깐 만났습니다. 미쉘은 데스 모인 사무실의 주창자이자 퀘이커
교도였습니다'
  신문업계에 친구가 많은 브로커는 데스 모인 레지스터의 전임 사장이자 가네트의
이사가 된 그에 대해 이미 들은 적이 있었다. 결국 메레디스 브로커는 가네트에서
일하게 된다. 브로커는 '어떤 사람들은 내가 중서부에 있는 내 친구에게 손을 뻗쳐
그를 이 자리에 데려와 앉힌 것으로 알고 있지만 결코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어쨌든 그는 중개자로서의 역할을 한 것이다.
  브로커는 다음과 같은 편지와 함께 가트너를 라이트에게 소개했다. '중서부에서
발행인이자 편집인이었고 모든 이에게 평가가 아주 좋은 친구를 소개합니다. 누굴
찾고 있다면 이 사람에게 이야기 해보십시오' 그리고나서 라이트는 브로커를 불러서
말했다. '그는 저 중서부에서 벗어난 사람이오. 별로 좋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브로커는 '좋습니다. 그러나 나는 단지 그가 성실한 사람이라는 것이라는 걸 말하는
것뿐입니다'
  '1988년 민주당 전당대회 직전까지 나는 그 친구 이야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그랬다가 그때 라이트가 내게 거의 스쳐가듯이 말했습니다. '이봐, 우린 당신 친구인
가트너를 좋아하게 됐소'라고 말입니다. 나는 미쉘과 그 대회가 열리는 아틀란타에서
만났죠. 연락이 있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있었지만 별 의미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나는 말해 주었습니다. '자네가 느끼는 것보다 훨씬 좋던데' 그리고는
24시간이 채 되지 않아서 그는 일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로스만의 추방 소식은 1988년 7월 27일 뉴욕에서 발표되었다. 그때 브로커는
3,000마일이나 떨어진 곳에서 회의를 하느라고 바빴었다. 50대의 전 신문인이며 밝은
눈의 소유자 가트너는 록펠러 광장 30번가에 "데일리 트리뷴, 중부 아이오와
매일신문"이라고 쓰여진 채 매달려 이는 작은 초록색 유체통처럼, NBC 사장실에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만 별난 멋을 풍기는 나비 넥타이와 멜빵비지를 즐기는
사람이다. 그의 사교적 성격과 반백의 머리, 그리고 친절해 보이는 외모에도 불구하고
그를 완고하고, 차갑고, 거만하다고 보는 수많은 NBC의 경력직원들을 떼어 버리려고,
비범할 정도로 빠르게 애썼던 것 같다.
  다른 이들은 매주 금요일에 나오는 신물이 나올 정도의 낙천적인 메모를 보고
웃어댈 뿐이다. 그리고 GE의 새 사람에게 해고될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그에게
"칼날"이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고의인지 우연인지는 몰라도 그는
신속하게 크리스 왈라스, 카니 정, 그리고 켄 보드와 같은 주요 통신기자들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왈라스의 경유는 특히 지저분했고 결국 격렬한 험담 속에서
끝이 났다.
  "나이틀리"의 한 직원은 '누구나 가트너를 긴장상태에서 바라보았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그가 멍청했기 때문에 크리스가 가려고 하는 것을 느끼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우리 중의 누구도 떠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한 것인지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5울에 주말 "나이틀리 뉴스"의 수석 프로듀서인 빌
체슬리를 해고하자 100명 이상의 NBC 직원들이 항의서명을 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
분규에 앞장을 섰던 한 사람은 '이제 이곳은 듀렵고 괴로운 곳이 되어 버리고
말았소'라고 했다.
  가트너는 "나이트라린"에 출연하면서 가끔씩 TV를 멸시하는 말을
떠벌려서 여러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를 알게 된 사람의 평가를
들어보자. '그는 근본적으로 인쇄매체의 우월성을 믿고 있는 사람입니다. TV는 쇼킹할
뿐이라고 생각해요'
  가트너는 그가 고용되었을 때 TV를 싫어했을 뿐 아니라 매체에 대한 지식에 관한 한
거의 무식쟁이었다는 것이 지적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런 사실이 브로커에겐 중요치
않았다. 가트너는 편집과 경영에 재주가 있었고, TV로 말하자면 가트너 외에도
NBC에는 아는 사람이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NBC의 다른 사람들은 불편했다. 한 고참 통신기자는 밝힌다. 'NBC의 고위
경영진 네 명(팀 러서트,톰 롯, 죠 앤거티, 그리고 미쉘 가트너) 가운데 오직 한
사람, 앤거티만이 TV를 이해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미쉘 가트너는 TV를 확실히 모르는
사람이다'
  최근의 일을 생각해 보면 이점은 분명해진다. 베를린장벽에서 브로커가 얻은 행운에
흥분해서 가트너는 그 방송이 나간 후 즉시 고참 뉴스 간부들을 모아 놓은 뒤 그
장벽의 모든 역사에 대한 한 시간짜리 특집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그것도 그날 밤
10시까지, 사람들은 놀라서 자기의 상관을 쳐다보았고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가트너는 자신이 3주의 영상작업이 필요한 일을 세 시간 안에 하라고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한 직원이 가트너에게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고 점잖게 설명을 해주었다.
  아마 재직 바로 초기부터 그는 당호아한 모습을 보이게 될까봐 두려워했던 것 같다.
가트너는 전문가에게 배우기보다는 스스로 TV 뉴스에 대해 뒤진 것을 만회하려고
애쓰면서 쌀쌀맞게 굴었다. 어떤 고참 연출자가 그의 상관을 위해서 하루를 내서 그를
의자에 앉혀 놓고 방송국의 롤 콜에 대해서 가르쳤다. 그러나 그는 대댭해 주길
기다리고만 있었다. 가트너는 진척도가 잘 보이지 않고 또한 느렷다. 그리고
아이오와에서의 규칙적인 주말 휴가도 별 도움이 된 것 같지 않았다.
  한 노조 대표는 이렇게 말한다. '그와의 대화를 통해서 볼 때 나는 그가 NBC
뉴스에서 진행되는 상황을 알고 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수가 없습니다. 나는 올해
일찍이 그를 만났습니다. 그는 그의 부하들에 대해 뭘 모르고 있었고, 방송에도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임시 변통의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그토록 오래 그
자리에 있으리라고는 정말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단지 해고시키는 역할을
맡으로 온 사람이라고 생각됩니다'
  가트너를 지명한 이래로 NBC 뉴스는 실수로 빠뜨린 기사나 통신기자들이 떠나고
사기가 가라앉은 것 등 내부 언쟁을 다룬 신문기사들에 의해 공격을 받고 있었다.
유럽 지국에서는 1년이 지나도 새 국장의 방문이 없었던 것에 대해 솔직히 놀라고
있었다. 오래 된 외국주재 기자에 따르면 이런 일은 매우 이상한 일이며 해외
직원들에게 답답한 느낌을 줄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리고나서 30년 이상이나
유지하고 있던 NBC의 파리 지국을 경제적인 이유로 폐쇄한다는 사실이 신문에
발표되었을 때 방송계는 놀라움을 긐치 못했다.
  신문에는 마치 매일 가트너의 불쌍한 직원들에 대해 지겨운 제목들로 꽉 채워진
끔찍한 기사가 실리는 것 같았다. 성난 가트너! 난처한 브로커! 발끈한 검블! 89년 말
곤경에 빠진 브로커는 NBC가 신문잡지업자들이라는 상어들을 위해 물 속에 빠진
미끼의 신세라고 느끼면서 "나이틀리"의 특별 프로듀서 10명을 불러
특별회의를 가졌다.
  뉴스쇼가 끝나자마자인 저녁 7시 반에 회의를 시작했다. 브로커는 언론에 새나가는
것이 중지되어야 한다고 그들에게 말했다. 불평이 있다면 브로커나 빌 휘틀리에게
말해야 한다. 브로커에게 해결 방법은 훤히 보였지만 그 자리는 바윗돌에 짓눌리듯
저주스러웠다. 가트너는 사면초가엿다. 브로커는 내부로부터 작업을 해야 한다고 그의
독특한 방식으로 그들에게 충고를 했다. 만약 이야기가 언론에 계속 새나간다면
그들은 계속 가트너를 고립시켜 사태가 더욱 악화되어 갈 것이다.
  브로커는 자신에 대한 비평에 대해서는 별 말이 없었고 그런대로 지나갔다. 그러나
최근엔 놀라울 정도로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나이틀리"가 1989년 거의 내내 바닥의 시청률을 기록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3등이라는 것은 브로커 같은 경쟁적인 사람에게는
생각할수록 유쾌하지 않은 일이었다.
  지난 1년간 닐슨의 시청률이 발표되는 매주 화요일마다 그는 스트레스를 받아
왔을까? '우리가 앞서 있을 때는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가 뒤처져 있을 때만 나는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는 귀찮다는 듯이 내뱉는다.
  그의 헝클어진 머리, 비뚤어진 넥타이를 보면서 그가 스트레스를 받아 왔다는 것을
쉽게 알 수가 있다. 순위에 대해 신경쓰지 않는다면 그때는 천국 같은 심정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나이틀리"의 앵커가 된 이래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스스로 인정한다.
  좋지 못한 시청률과 평판에 짓눌리던 중 브로커는 그의 고향에서 발행되는
"양톤 데일리 프레스"와 "다코다인"지(발행부수 3,610)로
부터 한 방의 화살을 맞았다. 이는 "타임"지나 "뉴스
위크"지가 그에게 "꼬마"라는 딱지를 붙여 주었을 째만큼이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1989년 7월 26일, "양톤 데일리"는 사설 반대편에
"인디언 나라에서 온 소식"이라는 칼럼을 통해 남부 다카톤의 알
네하르트(은퇴한 가네트 신문 그룹의 회장)와 TV스포츠 캐스터인 팻 리얀에게 일격을
가한 후에 브로커도 공격해 댔다. 그들은 러쉬모아 산 보존을 위한 모금을 도와
주려고 한 것인데 브로커가 "뻔뻔스럽게 톰(톰프로덕)션이라고 하는 회사를
세우려 하고 있다"고 했다. 남부 다카톤의 래피드 시에 서부 라디오 방송국을
세우려고 소수민족 우선 융자를 얻었다는  것이다.
  브로커가 자신의 땅을 사고 방송국을 세우고 싶어한다는 것은 생각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이를 위해 소수민족 우선 융자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더구나 그 비난에 대해 장황하고 솔직하지 못한 답변을 하기 위해 시간을 낸다는
것은 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아우스에 대한 질무을 받았을 때 내가 마치
집안에 비밀이 있는 것 처럼 해동한다고 결론지은 근거는 무엇입니까? 하나만이라도
대답해 보십시오'
  그러나 그는 내막을 이해하고나서는 마이너리티 론을 받았다는 사실을 부인하면서
단호하게 말한다. '당신들이 기사화 했듯이 내 라디오 회사에 톰(톰 브로커)라는
이름을 붙인 "뻔뻔함"이라는 것이, 사장이 톰 브로커와 톰 크렌스에서
나왔다는 것을 아는 것이 당신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오. 틈에 대해 내가 알지
못하는 무슨 저작권이라도 걸려 있습니까?'
  지아고의 공격은 꽤나 어리석은 것이었지만 한번으로 끝나진 않았고, 포위 공격을
받고 있다고 느끼는 브로커는 1989년을 조롱하며 넘길 수는 없었다.
  가트너의 재임 첫해에는 의심스러울 정도로 열심히 노력한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이듬해는 비참했다. 많은 도전 속에 무럭무럭 커가는 브로커는 사건 묘사에 알맞는
엄격한 이미지를 찾기 위해 밖으로 눈을 돌려야 했다. '카약을 타다보면 여러가지의
물살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1단계,2단계... 미쉘은 아주 거칠고 고약한 4단계의
물살 속에서 오래고 오랜 향해를 해왔습니다. 두세 번 정도 거꾸로 선 적도 있었고,
에스키모 역할을 해야 한 적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배 밖으로 튕겨나간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배로 되돌아왔고 물살이 잔잔한 이 시기에 몸을
나타냈습니다'
  이것이 브로커의 입장에서 본 희망사항이었을지는 모르지만, 90년대는 가트너와
NBC 뉴스에 보다 좋은 일이 생길 수 있을 것이다. 1990년 톰 브로커의
"나이틀리 뉴스"는 바닥에서 조금 올라섰다. 때로는 근소한 차로 2등을
하기도 했다. GE 사장으로부터 좀더 오래 머물라고 새로운 위임을 받은 가트너는
"착한 마이크"라는 새로운 이미지를 세우기로 결심했다. 언론에서
'그는 사람을 지치게 한다'고 평가한 것을 인정하고 사람들에게 다가가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지난해의 '못된 마이크'에게 정떨어진 NBC의 직원들은 의심하면서
자신들의 급소를 보호하려고 뒤로 움츠러들었다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새로운 90년대는 NBC에 다른 변화를 가져왔다. 한 예로 2월 6일은
"나이틀리"의 앵커가 50살이 되는 날이다. 30대나 40대에서는 특별한
느낌이 없었던 그가 50이 되면서 퍼뜩 느낀 것이 있었다. '난 40대에 별로 큰 고생을
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남들의 두 배는 했지. 그땐 시간이 많기도 했지. 그러나 갑자기
50이라니, 시간이 초를 다투는 때야.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 심사숙고하기 시작할
때야' 그리고서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베케트의 연극에 나오는 배우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전진하겠노라'
  부인과 세 딸이 6개월 전부터 생일계획을 짰다. 시내의 멋진 식당인 사운도프
브라질로 데리고 갈 것이다. 그곳은 시강 안내인의 말대로 가장 맛없는 음식이
나온다.
 그러나 누가 거기에 먹으러 가는가? 마시고 춤추고 북부 리오의 어서나 들을 수
있는 와일드한 브라질 음악을 들으러 가는 곳. 친구와 가족이 전국에서 모여 50세
생일잔치를 하기에는 아주 이상적인 곳이다.
  '난 약속을 지키는 사람으로서의 명예를 회복할 때라고 결심했다. 나는 그동안
수없이 가족과의 휴가나 모임들의 약속을 어겨 왔다. 난 모두에게 이번 약속을 꼭
지키겠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나 바로 그때 모스크바에서 열리고 있는 역사적인 중앙위원회 총회를 어쩐다는
말인가. 래더는 이미 현지에 가 있고 제닝스는 막 날아가고 있었다. 앵커끼리의
순위경쟁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브로커는 성급하게 결론을 내렸다. '이런 일은 늘 있었던 일이다. 우리를 불시에
습격하는 미칠 것 같은 상황. 우리 중의 어느 누가 거리를 가로질러 간다면 언제나
다른 두 사람도 따라 건너야 한다니 정말 미친 짓이다'
  그래서 그날 밤 "나이틀리 뉴스"를 보는 수백만의 미국인들은
모스크바의 성바실 성당 앞에 에릭 어틀리가 서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 했다. '톰
브로커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음악에 따라 춤을 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경우에 당신은 가족들을 뒤로 버려둔 채 어느 때건 어느 장소에나 갈 수 있다고 난
말합니다' 큰 저항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있어서 앵커맨인 동시에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은 매우 가치있는 일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브로커에게는 기꺼이 치루려는 대갸 이상인 듯하다. 그는 힘주어 말한다.
  '누가 이 일을 싫어한단 말인가?' 지친 그의 눈이 어떤 광고판의 눈처럼 빛나기
시작한다. '나는 금요일에 보고타에 갔다. 시장과 여러 기자들과 더불어 저녁을
먹었는데 그들은 나에게 마약전쟁에 관한 그들의 견해를 완전히 설득시켰다. 다음날
아침 나는 일찍 일어나 콜롬비아의 FBI책임자와 보고타 거리로 나갔다. 그 다음에
나는 콜롬비아의 대통령을 만나러 갔다. 대통령궁을 거닐면서 우리는 마약전쟁의
진행상황에 대해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나서 나는 비행기로 돌아왔다.
이제 내일 밤에는 이틀에서 1주일쯤 걸릴지 모르는 남아프리카로 가야 한다'
  숨을 돌리려고 말을 멈추면서 그는 머리를 흔들면서 이를 드러내어 웃는다.
팔다리가 어뵷는 누군가 러쉬모아 산을 끝내 정복했다는, 그의 프로그램 끝무렵에
그랬듯이 말이다. 그는 말한다. '당신도 알듯이 앵커란 활력이 넘치는 삶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 일을 잘 치러왔습니다' 그는 몸을 앟으로 숙이면서 덧붙인다.
'나는 전화를 들어서 일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를 묻고 싶은 사람에게 연락을 취할 수
있습니다'
  브로커는 다시 의자에 깊이 파묻히며 부드러우면서 피로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드레날린이오? 당연하죠'@ff
        22. 앵커라는 괴물

  산을 관상하는 수도승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는 산에 대해 명상을 한 후에 그는
이제 절대로 산이 아니라고 깨닫는다. 어느날 득도한 그는 다시 그 산을 응시하면서
또 하나의 산을 보게 된다.
  요즘 TV에 등장하는 앵커들, 브로커, 베닝스 그리고 래더는 많은 면에서 차이가
없다.  모두 잘생긴 백인 남자이며, 50대의 앵글로 색슨계 프로테스탄트이다. 그러나
좀더 알아보면 그들이 실제로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래더: 두 주먹을 불끈 쥔 열정적인 텍사스 출신 투사
  브로커: 부드러운 매력의 사나이, 개츠비, 솜씨 좋은 막후 교섭자.
  제닝스: 세련되었으며, 돌아다니며 배운 독학의 열정가.
  그러나 사실 바탕에 있어서는 놀랄 정도로 비슷하다. 몇 명 되지 않는 시청자를
상대로 한 라디오 디스크 자키로부터 출발한 이 세 사람은 모두 전국을 대상으로 삼게
되었다. 야망은 그들 자신을 수년 동안 갈아온 숫돌이다. 세 사람은 모두 힘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들이 누구이고 무엇을 원하는지, 또한 어떻게 그것을
잡아채느냐에 대한 뛰어난 감각을 가지고 있다. 매력에 의해서건 또는 열정에
의해서건, 미가공의 힘이든 또는 짐승 같은 힘이든간에 말이다.
  한 프로듀서는 말한다. '그들은 뭐가 다른 인종입니다. 무대 위에서 출세한
사람들이죠. 그들이 사람들 모인 곳에 가서 농담을 하면 그게 재미있거나 말거나
모든 사람이 웃게 됩니다' 어떤 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세 사람이 교육의 한계,
계층의 한계, 지리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싸우면서 스스로 자신들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타고난 기자인 댄 래더는 자신을 앵커로 만들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고, 천부적인
앵커인 피터 제닝스는 그 자신을 기자로 변신시키려고 무진 애를 썼다. 타고난 매력의
소유자 톰 브로커는 그 둘 다가 되려고 애를 썼다. 타고난 매력의 소유자 톰 브로커는
그 둘 다가 되려고 애를 썼다. 이들 셋은 모두 다 오늘날 그들의 모습을 주조해낸
것이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각자는 놀랄 만큼의 불안감을 보인다.
  한 수석 프로듀서가 말한다.
  '내가 이 계통이 있는 한 그들의 자아가 얼마나 연약한 것인지에 대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을 것이다. 큰 것을 얻으면 얻을수록 그들의 자아는 더 연약해진다. 이
계통에 있으면 있을수록 더 자신이 생기리라고 생각하겠지만 앵커들은 엄청난 양의
적극적인 보강을 필요로 합니다'
  TV방송의 정상 위치에 탄탄하게 자리잡은 그들은 그럼에도 매주 자기 자신을
증명하려고 애쓰고 있다. CBS 특파원인 딕 스렐켈드는 마해 준다.
  '그들 모두 그들이 훌륭한 기자라는 것이 입증되길 원합니다. 그들은 테드 백스터
(TV코미디물에 나오는 앵커)로 받아들여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뉴스
편집자로, 기자로, 그리고 연출가로 보이길 원합니다'
  수년 동안 앵커의 위치가 뉴스를 읽는 사람에서 저명인사로 발전했기에, 마케팅에
대한 관심이 앵커를 더욱더 중요한 사람으로 만들어 왔기에, 그 일을 잡은 사람들은
보다 여러 역할을 맡게 되었고, 방송뉴스 조직의 거의 모든 면에서 더욱더 실무적인
힘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살아 있는 이성으로서의 영향력과 연약한 자기
자아로부터의 요구가 혼합되어 이성과 자아가 만날 때 약간은 무시무시한 어떤 것이
태어나기도 한다. 그것은 고릴라처럼 거대해지기도 한다. 수년간 뉴스 계통에서는
앵버들이 '800파운드의 고릴라'로 불리워 왔다. 월터 크론카이트는 여지없는
800파운드 고릴라였다. 그러나 래더, 제닝스, 브로커가 브라운관에 등장하면서 그들은
중요도에 대한 서로 다른 질서를 갖게 되었다.
  CBS "저녁뉴스"의 전임 연출자인 리차드 코헨은 전한다.
  '1980년 오하이오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그의 영향력이 급격히
솟아오르는 데에 관해 댄과 이야기를 나눴던 것이 기억납니다. "월터가
800파운드의 고릴라라는 데 너무 개의치 마시오"라고 했더니 그는 웃으며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단언했습니다. 지금은 그가 1,800파운드의 고릴라입니다. 그리고
그가 숲을 엄청난 기세로 흔들어댈 때...'
  가장 충성스러운 직원들마저도 그들이 '앵커 괴물'이라 부르는, 이 먹성좋은 새
품종이 그렇게 많은 힘과 방송시간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것에 약간은 투덜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로 힘든 때, 즉 일들이 점점 통제를 벗어나는 상황이 되면,
그들은 '거대한 발'에 대해 이야기를 할 것이다. '나는 거대한 발에 밟혀 버렸다'고.
  PBS의 '1주일을 보내며' 사회자 폴 듀크는 말하길, '슈퍼 앵커맨의 시대입니다.
NBC에 있을 때 나는 언제나 그들이 강력하게 뭉쳐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큰 기사
거리가 터지면, 스튜디오와 앵커 프로그램으로 옮겨가 특별프로를 할 수 있는 일단의
방송인들이 있습니다. 헌틀리와 브링클리 외에도 뉴먼, 메기, 챈셀러가 바로
그들입니다. 오늘날은 슈퍼 앵커맨이 모든 일을 합니다. 그것은 마치 한 기자가 매일
신문의 머릿기사를 쓰는 것과 같습니다. 이치에 맞지를 않아요. 그들은 모든 금전상의
대리석을 한 사람에게 주고 있으며, 나머지 직원은 그를 위해 일하는 숫벌 같은
부류일 뿐입니다'라고 한다.
  피터 제닝스는 이런 말은 과장된 것이고, TV뉴스는 본질적으로 복합적인 것이며
특별 수직적인 계층 구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구겐하임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나는 앵커맨이라는
이유로 해서 주변에 많은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내가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오랜 기간 이 계통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내가 하는 일에
능숙하기에 어느 정도의 힘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도 그럴 수 있죠. 그래서
내가 A라는 기자가 기사를 특히 잘 쓴다고 하면 회사는 경청할 것입니다. 이는 내가
꽤 정확한 안목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닝스의 말은 오직 기사와 관련된 부분에서만 진실이다. 왜냐하면 그와 다른
앵커들이 전임자들보다 얼마나 많은 힘을 갖고 있는지를 빠뜨렸기 때문이다. 그 힘은
누가 방송에 출연하고 누가 못하게 되는가, 어떤 기사가 취재되어야 하는가, 심지어
누가 그들과 함께 방송 해야 하는가를 선택하는 힘이다. 그 앵커는 이전 사람들과
전혀 달랐다. 오히려 지금 그의 일은 경영이라는 측면이 강하다. 정치적 수완이 있어
심지어는 자기가 일하는 부서의 책임자를 쫓아내고 그 후임을 선발하기까지 한 톰
브로커를 예로 들어보자. 누가 도대체 그 밑에서 일할 수 있을까? 어느 전임 NBC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톰은 거대한 삼나무 같다. 그는 오직 발육 정지된
묘목만이 자랄 수 있는 거대한 그늘을 제공한다'
  벤 고든 수더 밑에서 특히 초기시절을 보낸 댄 래더는 분명히 많은 경영 책임을
맡았다. 그래서 오래된 기자들을 다른 곳으로 보냈고, 자신의 핵심들을 키워 나갔다.
'댄은 미쳐 날뛰는 망나니 어린애였다'라고 해고 당한 어느 불행한 연출자는 말한다.
  래더는 분명히 새 앵커로서의 그의 역할은 기사 편집을 포함하여 뉴스 작업의 모든
면에서 우두머리여야 한다고 느꼈던 것 같다. 한 CBS 직원에 의하면 이런 열정으로
몇 가지 재미있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맨처음 그가 운영편집국장으로서 일을 시작했을 때 그는 모든 프로의 모든 화면을
검토해 보곤 했습니다. 그때 한번은 한 작픔을 끝냈는데 방안에는 침묵이 흘렀고,
모든 사람이 복종하는 눈빛으로 댄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는 뭔가를 지어냈습니다.
"45초를 잘라내야겠어요" 오랜 침묵이 흐른 뒤에 그는 말했습니다.
"물론 그것에 대해 내게 이야기해도 됩니다"'
  셋 중에서 제닝스는 경영에 대해 가장 적은 힘을 행사하고 있었다. 비록 그가
아직도 고용인에 대해 심지어 최하위의 조사원에 대해서도 거부권을 행사하기
원하지만 그러나 사실 그는 다른 앵커와 달리 매일 매일의 기사 재편집과 재작성에
더욱 가까이 관여하고 있다. 물론 이런 행동이 이미 다른 편집자들의 손을 거쳤던
기자들을 귀찮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건 분명하다. 존 맥워시 같은 친구들까지도
때로는 당혹해 한다. '그는 내 원고를 샅샅이 뜯어본다'며 한숨을 쉰다.
  몇몇 통신원들은 제닝스가 과거에 보도기자들의 흥미있는 기사나 아이디어를 받아서
앵커의 것으로 수월하게 강탈하여 자기 것인 양 사용했었다고 불평했다. ABC 기자들은
이제 그런 일이 없어졌다고 밝힌다. '피터가 전에는 기사를 훔쳤었는데 그것이
얼마나 비도덕적인가를 깨닫고는 그만두었죠'
  물론 당신이 앵커들에 대해 자주 듣는 험담은 그들이 '방송 돼지'라는 것이다.
물론 지나간 이야기이다. 그러나 앵커들은 요즈음 대략 TV방송의 4분 1인, 한밤의 5분
30초__6분을 각자가 확보하고 있다. 가끔 기자들이 더 많은 방송시간을 요구하며,
미친 둣이 앵커맨에게 들이닥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대부분의 불평은 기사거리가
생겨서 앵커가 취재차 거리로 나갈 때 터져 나온다.
  '그 분야에 있는 사람의 관심은 아주 충분히 사건을 취재하는 것이고, 그러고 나면
꽝하고 달아나 버린다'라고 존 맥워시는 말하다.
  괴물 앵커에 대한 화제는 한 구절로 요약될 수 있다. 그 구절은 모든 뉴스 방송에
똑같이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전임 CBS 직원이 말했다.
  '뉴스쇼는 끝났다. 이제는 댄 래더 혼자 북치고 장구치는 쇼다'
  내가 제닝스, 래더, 브로커에 대한 많은 부정적인 이야기들을 하면서 출처를 밝히지
않은 것은 앵커의 힘을 보여 주는 작은 지표이다. 다른 한 기자는 '만약에 당신이
아직도 출세를 하기를 원한다면 이 세 앵커의 기록을 보고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너무도 강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힘에도 불구하고 앵커의 몫에는 슬픈 아이러니가 있다. 그것은
지금도 통용되는 뉴스맨들의 피터 원칙이다. 그들을 정상까지 오르게 한 그 능력은 새
역할이 주어졌을 때에도 반드시 결정적인 것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훌륭한,
일류라는 기자들은 바깥에 나가 있는데 그들은 이제 앵커 데스크에 매여 있다.
  제닝스와 래더 그리고 브로커는 뉴스거리를 찾아 참호 밖으로 나가는 일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 조금은 후회스럽다고 언제나 이야기했다.
  '방송의 노예'가 되는 것에 대해 말한 사람은 피터 제닝스이다. 그리고 댄 래더에
대해서 전 동료, 마디 쿠건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댄에게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는 대단한 기자이며, 이제 서방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그는
많은 것을 이루어냈지만, 거기에 만족치는 않지요. 화면에 나와서는 텔레프롬프터를
읽고 범퍼 속에서는 심각하게 보입니다. 그는 그가 갖고 있는 왕관의 죄수입니다.
총기사건이 나면 댄 같은 친구들은 취재를 하기 위해 다리를 혹사하게 되는데 이건
좋지 않은 일입니다'
  물론 그 앵커들이 커다란 사건으로 해회에(중국, 동독, 몰타) 가는 것을 그토록
좋아하는 이유는 자유는 자유에의 음미, 예전 보도기자 시절에 대한 추억 때문이다.
즉각 옛날 기자의 숱한 자료와 전화번호가 있는 비밀수첩을 끄집어내고, 비록 다리가
힘겨워 할지라도 잠시 동안 그들은 기사 사냥개가 된다.
  비평가들은 앵커 파견의 이면에는 모든 나머지 취재할 부분에 대한 소홀함이
뒤따르게 된다고 불평한다. 전임 앵커 존 챈셀러 못지 않은 권위자는 외국 취재는
앵커가 현장에 갈 수 있는가를 보기 위한 걸음 경쟁이 되어 버렸다고 불평했다.
그러나 그 앵커가 단지 걸음 경쟁에서 이겼기 때문에 그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모든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전 NBC 통신원 켄 보드는 묻는다.
  '톰 브로커가 목요일 아침에 30록(록펠러 플라자)에 있다가 그날 밤에 중국에 가
있더라도 무엇이 진행되고 있는지 안다고 기대할 수 있습니까?'
  그 문제는 현실적이다. 감운시대에서 더욱더 주요한 사건들이 세계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일어나면서, 뉴수 취재는 실로 점점 더 얄팍해지고 있다. 지구촌을 취재하기
위해 기자와 앵커를 데리고 그들의 담당구역으로 가서 진을 친다. 그러나 사건들이
중국, 로마, 이디오피이처럼 구석진 곳에서 일어나면(외국 카메라를 완전히 쫓아
버린 시리아와 알바니아는 말고라도) 지역 담당은 항상 혼쭐이 나게 된다.
  '중국에서, 우리는 정부가 무너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민주화운동이 너무
강했다고 생각했죠. 우리는 기사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중국 정부에 아는
취재원이 없었습니다. 아무도 천안문광장에 서 있는 사람이 보는 것 이상을 알지
못했습니다' 켄 보드는 이것이 전 세계에 앵커와 기자를 보내는 이동취재의
결함이라고 주장한다.
  '방송은 포템킨 마을을 포함하여 전세계를 취재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들을 지원할 기자와 사무소가 없는 것입니다'
  TV방송은 이미 언급한 애로 길거리로 앵커를 내보낼 이유가 많이 있고,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는 그것이 큰 사건 취재에 대중의 관심을 끌어낸다는 것이다.
로버트 맥닐은 그것이 미국의 시청자들에게 그 기사의 중요성을 극화시킨다고 본다.
'어이쿠 저런! 뭔가 중요한 것이 여기서 일어나고 있구나. 정상적인 일상사보다 다른
종류의 이야기구나'
  '여러분이 앵커를 보내기 때문에 그것은 어딘가에 사장을 보낸 것과 같습니다.
당신은 다른 많은 것들을 보내고 시간과 자원과 정력을 바치게 됩니다'
  그러나 전세계를 좀더 잘 취재하려고 할 때는 그 지역을 알고 있고, 주요 인물을
알고 있고, 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왜 그러는지를 이해하는 기자가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최고다. 요컨대 정말 필요한 것은 상세한 지식을 가진 사람,
그리고 전반적인 경험을 쌓은 앵커와 함께 취재차를 타고 일할 수 있는 기자이다.
중요한 취재를 위해서는 사무소가 그 방송에 유일하고 가장 중요한 취재원이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렇게 쓰여진 돈은 잘 쓰여진 것이다. 그것은 또한 앵커의
가치를 끌어올린다.
  아주 최근에 앵커의 역할은 또다시 바뀌었다. 아마도 '앵커 괴물'이라고 알고
있는 대중의 인식에 대한 반발로 세 앵커 자신이 그들의 '큰 발' 역할을 축소하기
시작했다.
  브로커는 '피터 제닝스, 댄 래더, 톰 브로커 어느 누구도 사람들이 생각하는
만큼의 힘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순진하게 기다리고 있는 사람도 아니며,
또한 나는 앵커가 걸으면서도 원고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믿지도
않습니다. 결국 나는 이 계통에서 상당한 기간을 재직하고 경험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 위치를 압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당신에게 내가 800파운드의
고릴라 역할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 줄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방송뉴스 본부가 앵커에게 고삐를 당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메디치가의 재판 이래로 공격적 가십이 가장 고급 예술형태인 그 얽히고 설킨
속에서, 1988년 말 CBS 뉴스국장으로 에이빗 벌크가 온 것은 뉴스국을 장악하고 있는
댄 래더의 왕국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었다.
  '벌크는 래더를 길들이기 위해 영입되었다'는 것이 새 국장을 영입한 배경으로
받아들여졌다. 벌크의 급작스러운 도착을 발표하려고 경영진이 뉴스 룸으로 왔을 때,
그리고 래더가 그래왔던 것처럼 경영진 쪽에서 서 있지 않고 놀란 직원들 사이에 서
있었을 때 확실히 그 배경 이야기가 사실인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벌크가 처음에
래더의 친구인 부국장 조운 리치만을 해고하더니, 다음에는 아마 CBS에서 래더와
가장 친한 친구일 특집물 감독 데이비드 벅스범을 해고했을 때, 그것은 정말로
사실인 것 같았다. 아마도 그것은 마찰을 잘 일으키는 벅스범과 '얼음왕자'라는 예비
간부인 벌크와의 충돌일 뿐이었을지 모르지만, 벌크가 뭐라고 주장하든지 그것은
분명히 쌍권총 공격이었고 래더가 그 전만큼의 힘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확연히
보여 주었다.
  NBC에서는 단순히 NBC의 취재 능력을 개선시키는 것 외에, 던브라운 주재 하에
1989년에 새롭고 강력한 뉴스데스크 체제가 들어섬으로써 콤 브로커의 힘을 또한
좀먹어 갔다. 이제 "나이틀리 뉴스"는 직접적인 그 앵커의 통치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NBC뉴스 부서들과 함께 기자와 카메라맨들의 공동출자 형태로
진행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 세 앵커의 영향력이 약간은 감소되었다 하더라도
그들 각자는 여전히 자신이 원할 때 많은 통제를 행사할 수 있다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어느 방송 수석 프로듀서는 숨김없이 인정한다.
  '들어보십시오. 강력한 앵커와 함께 일하는 수석 프로듀서로서 여러분은 그의 생존
능력이 나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기 위해 뇌수술 전문의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더
많은 사람이 그의 역할보다 내 역할을 합니다. 그는 힘을 행사합니다만 매일매일이
타협입니다. 당신이 논쟁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당신은 이길 수 없는 것을
가지고 노쟁하려 하지는 않습니다. 당신은 매일 밤 어떤 기사가 머리에 올 것인가를
가지고 논쟁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당신은 짜증나는 친구와 매일 싸울 수는
없습니다. 압력이 밀려오면 바로 당신이 희생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앵커들은 낯선 역할을 하고 있다. 고릴라, 괴물, 큰 발. 가증스러운
스노우맨 등  당신이 뭐라고 그들을 부르든지간에 그들이 투덜거리면 사람들이 듣는
것은 분명하다. 그들은 TV가 배출한 가장 훌륭한 생방송 기자들 사이에 단순히
있음으로써 그들의 영역을 확보했다. 아마도 그들은 작가만큼 위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그들은 아마 변덕스러운 기사 편집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세
사람 모두는 대단한 애드 리버이고, 눈에 띄제 정열적이며 실제로 신뢰할수 있다.
그리고 모두 전세계에 수년간 보도한 경험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문점은
남는다. 이 세 앵커가 행사하고 있는 권위를 어느 앵커가 또 가질 수 있겠는가?
  결국 그들이 그처럼 돋보인 것은 자본가의 영리 제일주의가 가져다준 행운일
뿐이다. 아니면 사라 제닝스가 48세 미만 나이 대에서 앵커의 신성시된 역할에 대해
그녀의 건전한 의구심을 또렷한 캐나다 말투로 또박또박 말한 대로 일 것이다.
  '이 사람들이 대문자 T로 쓰여지는 그런 진리를 위한 도구라는 생각은 완전하고
철저한 넌센스다. 시청자들 스스로 사실을 평가하도록 하고 있는 BBC나 CBC의
냉정하고 편견없는 방송과 비교해 보라. 앵커들이 가진 매력이란 단지 상업주의가
상품 판매를 위해 스타들에게 쏟아부은 적극적인 노력의 결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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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네트워크 뉴스의 장래

  TV 뉴스업계에 있는 사람들이 TV뉴스의 장래에 관해 말할 때 그들은 늘 버스와
관련된 질문이 퍼져 있음을 알게 된다. 일반적으로 그것은 다음과 같다. 만약에 룬
알럿지가 내일 버스에 치이면 ABC 뉴스는 누가 운영하게 될까? 만약 댄 래더가 버스에
치이면 톰 베타그가 여전히 수석 프로듀서 자리를 지킬 수 있을 것인가? 가장 흔한
것으로 만약 피터 제닝스가 또는 브로커나 래더가 다음 주에 테러범의 박격포 공격에
많은 사람이 죽은 버스에 앉아 있었다면 누가 그 자리를 대신 맡을 것인가?
  세 방송국에서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은 분명한 것이 없다. 오늘날 특파원들은
정상으로 올라서는 데 후원받는 일이 그리 흔하지 않다. 세 명의 대 앵커들 중 한
사람에게 후계자라는 개념은 방송계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일이다. 세 방송국의 최고
경영진은 래더나 제닝스나 브로커를 지금의 그들로 만들어내는 데 너무나 많은 시간을
보낸 나머지 막대한 금전적, 정신적인 투자를 했다는 느낌을 갖고 있으며, 누가
그들을 대체할 수 있다거나, 심지어는 시청률이 떨어질 때도 그들을 바꾼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경영진은 그들을 바꾼다는 생각은 꿈에서도 하지
않는다' CBS 뉴스 특파원 리차드 스랠켈드의 말이다. '그들은 세 앵커가 영원히 그
자리에 있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그래서 그들이 그 자리에 없게 되면 놀라고
실망하는 것이다'
  오늘날 그 상황은 크론카이트가 물러날 준비를 하던 때와는 다르다. 그리고 래더와
머드가 양편에서 물러날 때를 기다리던 시기와도 심지어 프랭크 레이놀즈가 갑자기
죽고, 피터 제닝스와 테드 카펠이 그를 대샌할 합리적인 사람으로 선택되었을 때와도
다르다. 오늘날 각 방송사에서 두 사람의 훌륭한 대체 인물을 찾아내긴 어려운
일이다. 어느 경우에나 한 사람을 찾아내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이렇게 된 부분적인 이유는 누군가가 지금 앵커 자리를 물려받았을 때, 그 또는
그녀가 구색을 갖춘 언론인이어야 할 뿐 아니라 기성의 스타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톰 브로커의 유사시 대체인물로 왜 브라이언트 검블이 거론되는가에 대한
대답이 될 수도 있다. 비록 검블이 뉴스를 맡아 본 경험이 전무하다 해도, 그가 맡고
있는 유일한 일이 "TODAY"쇼라고 해도, 그리고 브로커와 검블이 미스터
투테이가 "NIGHTLY NEWS"앵커 자리에 관심이 없는지를 장황하게 말한다
해도 소문은 지속적으로 퍼져 나간다. 유일한 이유는 검블이 보조자로 토론하게 되면,
그리고 검블의 친구인 딕 에버솔이 NBC 스포츠 담당에서 NBC 뉴스의 2인자로 영입되어
들어오고, 아주 진지하게 마이클 가트너를 대신할 사람으로 고려되면 그런 사태
전개는 그 소문에 불을 붙일 뿐이다.
  가장 가능성 있는 브로커의 후계자(공동진행자)는 제인 폴리인데 그녀는 전
"TODAY"의 스타였고, 종종 브로커가 휴가중일 때 그 역을 맡기도 하며,
브로커가 현장에 나가 있을 때는 대리 앵커 역을 하기도 한다. 검블처럼 폴리도 뉴스
경험이 많지 않다. 그녀는 10년 이상 지방 TV에서 근무한 이래 순수한 뉴스를 담당해
본 경험이 없다. 다시 말해 그녀가 후계자로 지목되는 이유는 그녀의 스타로서의 매력
때문이다. 커메라가 그녀를 잡을 때 그녀는 놀랄 정도의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NBC
시청자들은 최근에 왜 그녀가 브로커의 공동진행자로 취임하지 않는지를 알려 달라고
계속해서 요구해 오고 있다. 그녀는 매력과 지성을 갖추고 있다. 그녀는 대중의
지지에 바창을 둔 권위도 갖고 있다. 그녀는 20년간 뉴스를 취재한 것을 제외한다면
모든 것을 갖고 있는 셈이다.
  NBC의 후계자가 모자란다는 것은 NBC의 상대적으로 약한'벤치'의 힘과 인상적인
기자들의 배치가 부족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NBC 뉴스에 대한 기존의 혹평은 NBC
뉴스가 '얼빙이라는 이름을 가진 친구들이 꾸려 가는 방송망'이라는 것이었다. 사실
NBC는 백약관 담당 안드레아 미첼부터 유럽 담당 마이크 베처에 이르기까지 많은 믿을
만한 기자들을 갖고 있다. 다만 스타가 없을 뿐이다.
  NBC 뉴스에 사실인 것은 어떤 면에서 다른 방송사 뉴스에도 역시 사실이다. 어떤
이들은 날 때부터 천부적인 스타 기질이 있지만, 대부분은 만들어진다. 대중에게
많이 노출되는 것이 스타를 만들고 시장(뉴스)이 스타를 만든다. 그리고 현재 뉴스
방송의 틀 속에서 앵커들에게 정말 바람직한 기반은 주말 앵커 자리가 갖는 지위임이
분명하다.
  어떤 이들은 현재의 경쟁자가 빠르게 부상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앵커들이 주말
프로를 선택하거나 대체 앵커들은 선택하는 데 있어 그들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가진 힘을 휘두르고 있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이런 주말 프로를 선택하거나
대체 앵커들을 선택하는 데 있어 그들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가진 힘을
휘두르고 있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이런 줌랄 프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오늘날 CBS의 봅 쉐이퍼와 ABC의 캐롤 심슨과 같은 분명히 숙련된 언론인이지만 현
앵커들의 지위를 위협할 만한 스타의 자질을 갖추지 못한 충성스런(부관급)으로
채워져 있는 것은 우연의 일치치고는 이상한 일이다.
  ABC에서 제닝스를 대체할 가능성이 있는 앵커는 테드 카펠과 다이안 소이어이다.
두 사람은 각각"Nightline"과 "Primetime Live"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고는 있지만 둘 중 한 사람은 피터 제닝스가 떠나면 도약을 할
수도 있다. 테드 카펠은 TV 뉴스업계에선 가장 존경받는 뉴스맨임이 분명하다. 그의
성공적인 인터뷰 쇼는 10년을 맞이 했다. 비록 "Nightline"에서 기억할
만한 인물을 다룰 때, 조지 부시가 테드를 '댄'이라고 부르는 실수를 범했지만,
대통령은 그의 앵커로서의 자질을 분명히 알고 있다(이 책이 출판되었을 때 퍼진
하나의 소문은 카펠이 CBS의 래더 자리를 제의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CBS 안에서 카니 정은 앵커 후보자로 거론된다. 그녀는 방송계에서 알아 주는 뉴스
낭독자의 한 사람이며, CBS와 NBC에서 모두 그녀의 기술을 연마했다. 그러나 그녀는
평범한 애드 리버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뉴스를 다룬 경험도 체중을 줄이는
것과 같은 주제를 다룬 기록물에 한정되어 있다. CBS의 앵커 경쟁에서 외부 인사로
각광을 받는 사람이 에드 브레들리이다. 비록 근면한 사람은 아니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강력한 뉴스 배경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의 턱수염, 안경, 호감을
주는 부드러운 태도와 뉴스를 읽어 나가는 기술, 이 모든 것이 CBS에 월터 아저씨가
있던 시절을 연상시켜 줄 수도 있는 아저씨 같은 모습을 만들어내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래더, 제닝스, 브로커가 길을 건너기 전에 양쪽을 둘러보고 무서운 뉴욕의
택시와 악명높은 오토바이족들을 살짝 비켜갈 수 있다면 다음 몇 년 동안, 버스와
관련된 중대한 질문은 다음과 같이 되는 것이 당연하리라. 만약 TV뉴스가 버스에
치이게 되면 어찌될까? 아니 어쩌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핵심을 찌를 것일지 모른다.
TV뉴스가 이미 버스에 치였는가? 벌써 버스에 치여 아스팔트 위에 찌그러져 있는가?
  전 CBS뉴스 사장 프레드 프랜들리와 NBC의 루벤 프랭크 같은 직업적인 뉴스
회의론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국가적인 뉴스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프랜들리는
단호하게 말한다. '밤마다 뉴스를 보내는 일은 이제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NBC의
국내 뉴스 담당 프로듀쇼인 잭 체스넛과, 같은 방송사 내부에 있는 어떤 이들은
역시 의심을 품고 있다. '우리가 공료의 등 위에 마지막으로 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로버트 맥닐은 '여러분이 연구하는 동물이 그 책(연구 결과로)이 나올 때쯤
멸종되지 않으리라고 확신하는가?'라고 묻는다.
  심지어는 방송망을 가진 TV를 운영하는 사장, 부사장들도 계속 시청자가 줄어들고
재원이 부족한 걱정을 해야 한다. 3개 방송을 보는 시청자들의 비율은 점점 떨어져
TV를 가진 가정의 60%이하가 해당될 뿐이다.
  CBS의 연구담당 부사장인 데이비드 폴트랙은 뉴스를 보는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노년층이고 베이비 붐을 통해 태어난 많은 아이들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미국의
노령화와 함께) 뉴스물이 다시 각광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장래에 대한 장미빛 전망과 견해들이 있지만 바로 지금 경영진은 공동보조를 취하고
 필사적으로 닐슨 차이를 가려내고 있으며 숨겨진 메시지를 찾다가 아무것도
발견해 내지 못하고 있다. 그 숫자가 너무 좋지 않아서 방송사들은 닐슨 회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상실한 시청자들이 발견되어져야 한다고 요구했고,
고마움을 표시하는 데 열심이었던 닐슨 회사는 자신들이 조사한 조사표를 처리했고,
편리하게도 직장에서 대학 기숙사에서 호텔과 술집에서, 그들이 은밀히 즐기는 쇼를
보던 수십만 명의 "숨겨진" 시청자들을 찾아냈다. 그렇지만 방송사 사장
중 어느 누구도 1990년의 첫 3개월간 전체 시청자의 8p 가까이 시청률이 갑작스레
급하락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자신이 없었다.
  협력에 기초한 새로운 환경적응 방침에 따라 이들 방송사의 경영진들은 공동
결정으로, 더많은 마케팅으로, 뉴스 분베구조의 변화로, 균형예산을 이루려는 비용
절감 등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CBS 방송국 주위를 떠돌던 좋지 않은
소문 때문에 런던 지국을 액톤으로 옮기려던 계획을 재빨리 단념했던 일이 있었는데,
이것은 CBS의 뉴욕 본부를 세카커스로 옮기는 일과 비교할 만한 일이었다. CBS와
CNN을 최소한도로 합병해 보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심지어는 해외 취재 비용을
나누자는 제안을 했던 적도 있었는데, 현재도 논의중이다. 기껏해야 그들의 여러
해결책들은 비용을 깎는 것이고 최악의 경유에도 그들은 단지 표면적으로 그렇게 할
뿐이다. 어느 길을 택하든 그들은 줄어드는 TV 시청자를 다시 돌려오진 못할 것이다.
  현재 세 방송국에 소문으로 떠도는 가장 놀라운 전망은 뉴스 방송계를 분할하고
있던 것 중 하나가 어쩔 수 없이 문을 닫게 되리라는 것이다. 몇몇 프로듀서,
기자들은 그 종료 기사를 이미 읽었다고 한다. 세 개 방송국에서 동시에 같은 일을
하고 있을 때 적어도 하나는 사라질 수밖에 없는,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댄 래더 자신이 인정하듯이 '그 변화는 아주 강력한 것 같다'
  1989년의 대부분을 NBC가 세방송국 중 세번째를 차지해 고달픈 시절을 보냈을 때,
가장 가능성 있는 희생자는 공작 네트워크(공작은 NBC 네트워크의 상징)로 나타났다.
기록적인 적자 경영에 사로잡혀, 단지 콜롬비아대학교 미식축구팀에 의해서만 다른
방송국을 앞서는 NBC는 신문기자에서 TV기자로 변신한 미쉘 가트너의 미덥지 못한 손
아래서 회사의 공동주인 GE사 사람들과 외부적인 문제를 동시에 갖고 있었다. 그
전기회사에서 자주 거론되는 공동의 목표는 1인자가 되지 못한다면 사업에 절대로
뛰어들지 말라는 것이다. 2인자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꼴찌를
달린다면? 모든 종류의 이야기들이 "NBC Nightly News" 주변을 떠돌기
시작했다.
  끈질기게 나돌고 있는 한 가지 이야기는, 가트너와 GE의 사장 잭 휄치에게서 모두
확인된 이야기는 NBC가 뉴스를 전달하는 새로운 방법을 실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변화해야 합니다'라고 NBC의 재정담당 책임자인 나탈리 헌터는 말했다. '만약 내가
여러분을 이해시키려고 마음 먹는다면 나는 여러분이 5년 후에는 이 조직체(NBC)를
알지 못하게 되리라고 말해야 할겁니다. 우리 방송국은 대중들이 원하는 것과
합치하지 못하는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을 가지고 있는 셈이지요. 그게 나쁜
제품이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반드시 쓸모있는 제품이라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그것은 값이 너무 비싸게 듭니다. 아침 일찍 뉴스를 내보내고 저녁에도,
그리고 지방뉴스가 있기 때문에 밤늦게는 내보내지 않는 것은 도대체가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루를 전부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요. 방송망을 가진 뉴스와
지방뉴스 또는 그들 두 개가 섞여서 방송되는 하루를 전체라는 시각을 갖고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요. 그래서 그것이 빈번하게 있어야 하고 일상적인 일이 되어야 하며,
우리가 만들든, 우리 동료들이 지부에서 만들든,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만들든 간에
관계없이 방송망 뉴스와 지방뉴스가 혼합되어야 한다다는 점은 아주 중요합니다' 가장
자주 토론 대상이 되는 대안은 NBC가 "Nightly News" 사업을 하지 않고
대신에 NBC의 모든 지방 방송국을 통해 뉴스를 모으거나, 지방에 있는 지국이 보내
주는 일종의 영상 화면으로 채워진 뉴스를 내보낼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계획하에 지방 방송국은 원하는 보도는 무엇이나 할 수 있을 것이고, 그것들을
지방 소식과 결합시킬 수 있을 것이며 자신의 방송 틀을 잡아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즉, 스스로 만드는 뉴스 프로그램을 그 틀 속에 집어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소문에 의하면 NBC는 거의 모든 기사가 2__3분씩 걸리는 전형적인 뉴스 방송
시간보다 더 짧은 1분에서 1분 30초의 시간 안에 방송되는, 여러 주일 동안 매일 밤
템포 빠른 프로그맴을 종합 편집하는 뉴스 방송을 실험해 왔다.
  NBC의 속도감 있는 뉴스가 방송되진 못했지만, 영상을 지방 방송국이 보내 주는
방식은 그의 동료 기자, 프로듀서들이 대단히 유감스러워 함에도 아직도 NBC와 GE
수뇌부의 마음을 이끌고 있으며, 톰 브로커와 지방 방송국은 오늘날의 방송시장에서
계속해서 한쪽으로 기울어진 큰 힘을 갖고 있다. NBC의 샌프란시스코 지진 취재
"대실패"에 대한 많은 불평이 있은 후에 지방 방송국들을 달래줄 필요가
있게 되었다. 그래서 베를린장벽에서 톰 브로커와 다른 기자들이, 그들이 겪는 다른
힘든 일에 덧붙여 24시간 내내 지방 방송국과 특별한 관계를 갖고서'하이 척(Hi
chuck', 나는 베르러린장벽에 있네' 하는 식으로 방송했던 것이다. 댄 래더도
천안문 광장으로부터 CBS 지국들을 위해 같은 일을 해야 했다. 그리고 제닝스도
동유럽에서 비슷하게 행동했다. 만약 셋 중 하나의 방송 뉴스라도 문을 닫게 되면
가장 가능성 있는 시나리오는 그것이 지방을 위한 비디오 뉴스 체제로 바뀌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것은 중요한 상실이 될 것이다. 비록 경영진이 줄어드는 시청자를 확보하는
해답을 찾고는 있지만 최상의 해결책은 공동협력이 아니라 편집자에 관한 것이다.
방송국이 직면한 기본적인 딜레마는 TV에 중독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시청자들이
기본적으로 세 개의 뉴스 프로그램을 따로 구별해서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세 명의
앵커들만이 미국의 대부분 시청자들의 눈에서 구별이 지어진다. 그들의 사장들은
이것을 잘 알고 있으며, 바로 그것이 세 앵커가 많은 돈을 받는 이유가 된다. 세
앵커를 1주일간 휴가 보내면 시청자 10명 중 9명은 한 프로를 다른 프로와 구별할 수
없었다. 말리 세이퍼와 같은 노련한 사람도 그가 세 프로그램을 구별하기 어렵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그중 한 사람이 약간의 상상력을 나타내면 결과는 어찌될까? 그리고
그것이 뉴스의 형태를 변화시키는 것이라면 결과는 어떨 것인가?
  오늘날 뉴스는 빠르고 단편적이어서 사람들이 그것을 흡수하기 어렵다. 그날의 주요
기사를 단 몇 분에 전달하는 것으로 방송사들은 모든 것을 주입시키려 한다.
  '개인적으롤 나는 모든 저녁 뉴스가 조금은 빨리 진행되었으면 합니다' 찰스
쿠랄트의 말이다. '필요한 것은 20분 안에 모든 내용을 짜넣는 것입니다. 적어도
스톱워치를 갖고 어항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있고, 우리가 2초를 넘어서는지 3초가 안
되는지를 컴퓨터로 계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만약 내가 저녁뉴스의 프로듀서라면
그들은 조금은 더 느리게 될 것이고 좀더 생각을 하게 될 겁니다'
  최근 방송망 뉴스의 방송이 CNN과 MTV라는 두 개의 유선방송사의 영향 때문에
전보다 빨라지게 되었다. 유선방송을 듣는 TV를 가진 가정의 비율이 1980년대에
21p에서 56p로 상승했다. MTV와 CNN의 예술적인 민첩함이 우리의 시간 감각을 바꾸어
놓았다. 아주 적극적인 MTV는 중단없이 이어지는 5초라는 시간을 영원한 것으로
느끼게끔 만들어 놓았다. 24시간 취재로 CNN은 어떤 것이라도 순간적으로 뉴스가
끊어지는 경우 그것이 어쩔 수 없이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보이게 한다.
  톰 브로커는 최근에 '우리가 하루의 막바지에 등장하면 많은 뉴스거리가 이미 낡은
것이 된다'라고 말했다. 오늘날 "생방송"이라는 말은 독특한 말이며,
CNN의 24시간 취재는 TV가 나와 신문을 쫓아냈던 때와 같은 지위를 방송국 뉴스에
주어 왔다. 방송망 뉴스는 방법을 수정하든지 폐물이 되는 위험에 직면해야 한다.
  미래 방송 뉴스에 가장 바람직한 길은 주제별 취재가 늘어나야 한다는 점이다.
뉴스쇼의 처음 3분의 1은 지금 하는 것과 같은 방식의 보도를 하는 것이다. 즉 그날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기사들을 광범위하게 취재하고 그것들을 머릿기사나 짧은
장면으로 시청자에게 제공한다. 그러나 바뀐 저녁뉴스의 나머지 시간은 머릿기사
중에서 1개 이상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일본에서 했듯이 다양한 시각에서 폭넓은
취재보도를 제공하는 데 쓴다. 이때 앵커를 중추적인 인물로 사용하는 방식은
대중들의 관심을 중요한 문제, 경향, 지리적인 지역에 집중시키는 효과를 가져다줄
것이다.
  여기 제안된 종류의 방송은 중요 기사의 사실들을 전달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실
뒤에 숨어 있는 사실, 즉 문제의 배경, 관련된 주요 인물, 문제가 되는 주요 쟁점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이런 취재 방식은 직접 뉴스를 전달하는 데서부터 배경이 되는
뉴스, 그리고 뉴스 분석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을 강조하는 가운데서 알 필요가 있는
많은 변화를 우리에게 제공해 줄 것이다.
  예를 들면, 현재의 방송구조 속에서 저녁뉴스는 미국인들에게 금융스캔들 뉴스를
전달하는 데 비참할 정도로 실패를 했다. 분명히 일련의 사건들은 수십억 달러를
횡령한, 그래서 그 결과가 납세자 한 사람에게 적어도 2,500달러를 더 지불해야 하는
"역사상 그 어느 것과도 다른 지식인 범죄의 물결"로서 묘사된 일련의
사건들을 시청자들의 관심을 거의 끌지 못했음에 틀림없다. 주제와 일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일단의 기사들에 의해 시청자들은 마침내 그 뜻이 와닿은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기본적인 개념 일단의 관련 사건들을 취재하는 것이다. 5__10분까지 늘어난
방송시간은 "맥닐 리어"보다 "60분"에 더 가까운 정지된
느낌보다는 움직이는 느낌을 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금융스캔들 기사에서 여러 단편적 보도들은, 1930년대 미국의 파산한
은행 앞에서 시위하는 성난 군중들의 모습을 담은 화면을, 그리고 1985년 신시내티에
있는 몰리터 저축융자회사가 쓰러졌을 때 연방저축보험공사 기금을 얻기 위해 참을성
있게 줄을 서 기다리는 만만한 고객들의 화면을 배경으로 포함시킬 수도 있다. 이것이
그 추문에 연루된 주요 인물들을 설명하고, 의회에 있는 그들과 연관된 세력을
설명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다. 끝으로 S and L 조사자들의 역할을 다룬 기사와
현재 조사가 진행된 상태를, 많은 연방저축보험공사 경매의 한 장면을 담은 화면과
함께 제시할 수도 있다.
  이 전후관계에 의한 사건 전달방식은 세계에서 일어나는 소식을 시청자들에게 더욱
의미있는 것으로 만들어 줄 뿐 아니라 그 소식을 더욱 받아들이게 만들고, 그 소식에
몰두하게 할 것이다. 이와 같이 깊이 있는 접근방식으로 방송국들은 1989년에 아주
다양하게 동유럽을 휩쓴 혁명적인 변화를 다룰 수도 있었다. 다수의 시위대가 외치는
소리를 반복해서 강조하는 대신에, 마치 동독 군중이 체코나 루마니아의 군중과는
기본적으로 다른 것처럼 그들은 오늘날 폴란드의 생활이 어떠한지, 왜 추악한
민족주의자와 혐오집단이 소련과 체코에 갑자기 나타나고 있으려, 루마니아는
민주주의가 무엇인가를 찾아내기 위해 어떻게 싸우고 있는지를 보여 주어야 했다.
  그런 짤막한 긴급보도를 보는 대신에 시청자는 한 가족이 어떻게 사태를 극복하고
있으며, 한 노둥자가 어떻게 자신의 길을 찾아가고, 한 어머니가 아이들에게 줄
음식과 옷을 구하려고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를 보고 이해햐게 될 것이다. 로버트 맥닐
요인에 더해(즉 쟁점을 토론하는) 저녁뉴스 시간은 이 개인적인 영역을 포함시킬 수
있었다. 그것을 차스 쿠랄트 요소, 즉 인간적 요소라고 부른다. 중요한 뉴스기사와
적절하게 연결된, 이른바 다시 거론되는 기사들을 모아놓은 것은 강력한 연합이나
이길 수 있는 결정적인 결합에 기여할 수 있다.
  방송사들이 채택하기로 결정한 계획이 무엇이냐에 관계없이 그들은 필사적으로
새로운 창조적인 접근을 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접근이 없다면 그들은 뉴스를 보지
않는 많은 시청자들에 의해 쓰러지는 모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ff
      24. 몰타정상회담

  수요일 밤, 몰타의 소도 발레타에 있는 낡은 젤라모 캐서르 상업학교의
공중보건실험실 미생물분과라는 닳아빠진 간판 바로 위 3층에는 대여섯 명이 긴장된
모습으로 전화와 워키토키에 대고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미즈다만 나오세요. 미즈다만'
  '백악관에서 중요한 사실이 입수되었어'
  '그 크레인에 접수번호를 받아냈어'
  '그가 금요일에 온단 말야?'
  이곳이 ABC뉴스 룸이다. 그들은 마치 공격 준비라도 하는 것 같다. 어떤 면에서는
그렇다고도 할 수 있겠다.
  조지 부시와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정상회담을 위해 몰타에서 만날 것이라고
발표하여 최근세사에 있어 가히 뉴스의 해라고 할 만한 이 해를 마감하려 하자
방송계도 참여를 서둘렀다. 오늘 수요일, 그들은 대거 그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몰타라는 이 작은 섬은 나폴레옹과 술레이만 대제의 침공을 용케도 버텨냈지만
세계의 언론사의 도착은 이에 못지 않은 괄목할 만한 사건이었다. 2,500명의 야심찬
남녀들이 로드 아일랜드의 10분의 1에 불과한 이 조그만 바윗덩어리에 상륙하는
것이다. 12월 초의 이 긴 주말에 몰타의 고풍스럽고 잘 정돈된 수도 인구의 4분의 1은
언론인들이었다.
  수백년 동안, 이 지중해의 섬은 듬성듬성한 올리브나무와 3층짜리 석회석
건물들이나 서 있는 나른하달 만큼 낙후된 곳이었다. 발코니와 둥근 아치가 있는
서서히 퇴색되어 가는 이 건물들은 북아프리카나 이탈리아 남부의 모습에 딱
맞아떨어지는 것들이다. 하지만 메이저 리그가 시작되려는 이 특별한 주말에 건물들은
온통 미국 국기와 소련 국기, 그리고 "1989년 12월 부시와 고르바초프 방문
환영"이라는 표지로 장식되었다.
  TV 방송사들도 물론 취재를 위하여 왔다. CBS와 CNN이 중국사태를 건졌고, ABC가
샌프란시스코의 지진을 NBC가 베를린장벽 붕괴에서 히트를 쳤지만 아무도 이
정상회담을 놓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CBS의 한 프로듀서는 '모두들 들떠 있어요.
취재계획이 점점 더 대형화하고 있지요. 모두들 점점 대담해지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취재에 얽힌 모든 기행들을 모으기란 보통 난감한 일이 아니다. 방송사들은 저마다
최소 백만 달러는 쏟아붓고 있다. ABC, NBC, CNN은 60내지 70명을, CBS는 약 25개
부서에 해당하는 120여 명을 파견했다. 섬 주변에는 러시아 순양함 스라바호와 미국
벌크냅호로부터 항구의 중계소 및 교회탑, 그리고 섬을 가로지러 발레타에 있는 뉴스
룸까지 수신하기 위한 아횹 개나 되는 이동식 위성용 파라볼라 안테나와 40회선이
넘는 단파홉스, 즉 중계소가 설치되어 있다.
  ABC방송단의 한 사람은 '저 마사로크만의 모든 것이 잘못되어 있어요. 이곳은
섬에서 가장 볼품없는 곳이죠. 바로 밑에 유정 굴착장치까지 있고요. 왜 그 사람들이
배를 거기다 댔는지 모르겠어요. 밤이 되면 조명등도 안 비치고, 또 해변에서
비추기에는 너무 멀고요'라고 투덜거렸다.
  방송사들이 만으로부터 영상을 보낼 수 있도록 가쟈크교회의 한 신부가
다행스럽게도 멋진 교회의 종루 사용허가를 내주었다. 후에 그분은 의당
청구서(28인치 컬러 모니터와 사진복사기)를 포함하여 교회에 기증을 바라는 모델
넘버까지 적힌 전자장비 목록을 내놓으실 것이다. 방송사들은 '뭐 다른 것은
없습니까? 지상방송국은 어때요?'라고 심드렁해져서 물었다.
  '정상회담이 발표된 날, 저는 한 시간도 안 돼 100개의 방을 예약했구요. 운전사
딸린 26대의 차와 함께요'라고 ABC의 로케이션 프로듀서 폴 틸스리가 말했다.
  평상시면 건물 임대나 내주던 이 거대한 낡은 시의 건물은 막대한 양의 ABC의 가장
복잡한 전자장비들로 가득 차 있다. 선술집 같지만 한 조정실에는 휘번쩍이는
모니터들이 4X4화일에 포개어져 있다. 테이프로 부착된 꼬리표에는 '버드',
'미즈다만', '타이트1', '타이트2'라고 되어 있다. 조정실에는 전화선, 전력선들이
흡사 뱀처럼 들락날락 엉켜 있어 거대한 전자 스파게티 요리라고나 할 형상을 하고
있다.
  ABC의 틸스리는 자신들이 눈 깜짝할 새에 완성해 놓은 시설에 눈을 휘둥그래
둘러보면서 '이 건물은 1주일 만에 지어진 방송국이라고나 해야 할 겁니다'라고
말했다. 메인 뉴스룸에는 팩시와 상호 통신장치 및 전화 등의 기계음이 울려 퍼졌다.
벽에는 '현지' 및 '본사'라는 표찰이 붙은 두 개의 시계가 각각 몰타 시간인 오전
11시 25분과 뉴욕 시간인 5시 25분을 가리키고 있다. 벽에는 온통 커다란 하얀 표지에
현지, 뉴욕, 워싱턴, CBS, CNN, 백악관, 힐튼, 페니키아, 벌크냅, 프레스센터,
비즈다만 카메라 등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다.
  제작책임자가 '프레스센터에 있는 국장과 통화되는 회선은 어떤 거야? 뭐라고?
저런 맙소사? 기술은 다 뭐하는 데 써먹고 통화가 안 되잖아. 좋아. 전령을 보내도록
해'라고 외쳤다.
  통신(즉석 통신) 이것이야말로 이 사업의 생명선이나 다름없다. CNN의 워싱턴 특파원
찰스 비어바우어는 '이 사업은 90p는 병참술이요, 5p는 저널리즘, 5p는
기발함이라니까요'라고 한 바도 있다.
  부시도 고르바초프도 도착하지 않았고 래더도 제닝스도 브로커도 그렇다. 이 세
앵커들은 로마에서 고르바초프와 교황광의 종교 정상회담을 취재하고 있다. ABC뉴스
디렉터 찰리 하인즈가 뉴스룸으로 들어와 '마닐라에서 모종의 그룹이 쿠데타를
수행하고 있대. 공항과 방송시설도 일부 접수했다는데'라고 발표했다. 필리핀의 코리
아키노 대통령을 전복시키기 위한 여섯번째 시도이다. 이제 또하나의 빅뉴스가
만들어질 참이다. 뉴스룸에 세번째 시계가 부착된다. '현지', '본사', 그리고
'마닐라'.

  금요일 AM 11: 30
  상업학교의 뉴스룸에는 "World News Tonight" 방영 때문에 피터
제닝스가 런던의 잡지들을 훑어보며 가운데 데스크에 앉아 있다. 그는 자를 꺼내서
"더 타임스"와 "인디펜던트"지에서 기사를 잘라냈다. 모뎀의
접속장치의 흐느끼는 듯한 소리와 팩시밀리의 끽끽거리는 소리가 조용한 방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ABC의 옥외 방송을 다년간 이끌어 온 런던 주재 제작 책임자인 스치브 텔로는 방을
배회하며 일에 열중하고 있는 제닝스를 주시했다. 그는 ABC의 일중독증 환자인 그에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피터는 참 대단해요'라고 말했다. '우리는 오늘 새벽 3시에야
호텔에 도착했어요. 그런데 피터가 우리를 10시에 깨우더라구요'라고 말했다. 텔로는
한숨을 쉬며, '오는 길에 비행기 안에서 책을 읽고 조사된 노트북을 검토하더라구요.
내가 한숨 붙이려고 애를 쓰는데도 그는 책을 읽고 있었어요. 결국 '피터, 불 좀
끕시다'라고 말해야 했어요'하고 말했다.

  금요일 PM 1: 30
  ABC가 자리잡은 길 맞은 편에는 전에 몰타의 병원이었다가 지금은 프레스센터로
쓰이는, "지중해 컨퍼런스센터" 2층에는 NBC가 커다란 홀을 사용하고
있다. 대형의 천장이 높고, 조명이 잘 된 방에는 특파원들, 전문기사들, 그리고
"투데이"쇼를 위한 테이블이 놓여 있다. 디스패치 데스크와 수많은
전자장비 및 수많은 컴퓨터 단말기들이 놓여 있다. 현관 입구 근처에 커다란 임시
조정실이 있다.
  "투데이"쇼 담당자가 이 임시 스튜디오의 첫번째 줄에 있다. 그는
짜증을 내며 '경비들은 어디 있어? 저기 아무도 안 서 있잖아? 경비를 두기로 되어
있었다구'라고 물었다. 모니터에는 브라이언트 검블이 서 있다. 디렉터는
'브라이언트! 내 말 들려?'라고 물었다. 검블은 바지를 추스리는 것 같았다.
'브라이언트! 브라이언트!' 방안의 모든 이들이 "투데이"쇼의 진행자인
검블이 카메라에 등지고 있는 모습을 흘끗 보았다.
  이제 디렉터는 일어서서 '브라이언트 큐! 브라이언트 큐란 말야!' 그러나 큐 소리만
휑하니 스쳐가고 뉴욕의 제인 폴리가 화면에 나타났다. 뉴스 캐스터들이 이 분야에
뛰어들면 매사가 그리 순조로운 것만은 아니다.
  스포츠용 잠바 차림의 은발의 NBC 뉴스 부국장인 죠세프 앤거티는 이 돌발사고에
머뭇거리는 듯했다. 그러나 그가 뒤돌아서서 한 천장 밑에 모든 NBC 뉴스 프로그램이
커다란 홀에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 마냥 즐러워했다. 앤거티는 '3년 전만 해도 세
프로그램이 각각 놀았죠. 아주 낭비가 심했어요. 중복되는 것도 많았고'라고 말했다.
  보도 부문을 한데 모음으로써 NBC가 비용 면에서 효과를 본 점이야 두말할 나위조차
없다. 하지만 그 과정에 상실된 것은 없는지? 앤거티는 '글쎄요. 아마 질적인 면을
통제하기가 좀 힘들어졌다고 봐야죠. 왜냐하면 각 프로그램이 시종일관 보도를 맡지는
못하니까요. 전에는 각 프로그램마다 진흙덩어리를 나누어 반죽을 했죠. 지금은
처음부터 진흙덩어리의 형태를 만들어 나가죠'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하지만 이
방식이야말로 늘률적이고 효과적이됴'라고 말했다.
  이것이 앤거티의 '우리는 경쟁사들보다 비용을 덜 수 있다'라는 타이틀이 붙은
NBC의 절약 아리아의 서곡이다. 사실상 몰타에서 세 방송사 모두 같은 노래를 부르고
있다. 후렴이 똑같다고나 할까, 반은 사실이고, 반은 과장되었지만, 모두 기업주의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 기업화된 시대에 모든 방송 분야들은 경쟁사보다
돈을 덜 쓰면서도 더 잘하는 것으로 보여야 하니까 말이다.
  앤거티는 'CBS가 미쳐 가는 모양이라며, 온갖 잡동사니들을 다 데려왔다는구만.
엑셀시어호텔을 통째 전세냈다더라구. 조명회사들을 몽땅 사버리고 말야'라고 열심히
전한다. 그는 낄낄대며 웃어댔다.
  톰 브로커는 로마에서 오후 중간쯤 되어 오기로 되어 있다. 그동안 "NBC 뉴스
스페셜" 프로듀스인 필립 앨런지는 브로커가 방송을 하게 될 장소를 점검하러
로우러 바라카 공원으로 올라갔다. 그곳은 멋들어진 종려나무가 그득 메운, 만의 넓은
장관이 내려다보이는 세트이다. 하지만 앨런지와 앤거티는 물론 모든 NBC 방송팀에게
가장 멋들어진 점은 그곳이 경비가 싸게 먹힌다는 점이었다.
  프레스센터에서 뉴스룸 쪽으로 언덕을 가리키면서 앨런지는 '우리로서는 이곳은
그저 선만 연결한 것이죠. 우리는 단파도 절약했고 세트 설치 시간도 덜고, 또 이곳은
오전 오후 어느 프로에서도 먹을 수가 있지요. 우리가 쓰는 경비에서 더 많은 것을
얻은 셈입니다'

  금요일 PM 3: 00
  '아메리카 안녕!' 하면서 스티브 폭스 특파원이 막 옷을 입고 문밖으로 나섰다.
그는 '오케이, 2주일 후에 루마니아에서 만납시다'라고 말했다.
  스티브 텔로는 '저 말 들으셨죠'라고 말했다. '바로 저거예요. 기술이 하도
발전해서 두 대의 팩시와 전화회선, 편집장비만 있으면 되거든요. 아무데서고 열
명에서 열 두 명만 있으면 앵커를 내보낼 수 있어요'
  텔로는 제닝스가 한마디 하려고 다가오는 모습을 보았다. 제닝스는 '우리가
멕시코에 있었을 때죠, 아마. 저는 텅 빈 주차장 한가운데 서 있었죠. 전기줄을 쭈욱
펼치더니 2분 후엔 "나이트라인"의 테드 카펠과 대담을 할 수 있었죠'
  야윈 얼굴에 콧수염을 기른 "월드 뉴스 투나잇"의 책임 프로듀서 폴
프리드만은 자기는 야외촬영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방송이 한결 나아져요. 사건에
대한 시각을 유지하기가 쉽지는 않지만서두요. 어젯밤 같은 경우 필리핀사태의 비중을
낮게 다루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뉴욕의 제작 고문이 "틀렸어. 그건 중요
사안이야"라고 했어요.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다루었고 CBS는 놓치고
말았죠'라고 말했다.
  제닝스는 조그마한 노란 램프 밑에 작은 검정색 "캐논 타이프스타
6"이라는 전자 타자기에 가서 앉았다. 그는 자신과 스튜 슈츠맨이 함께 작성한
기사, 즉 고르바초프에게 원조가 얼마나 다급한가, 그리고 이번 정상회담에서 그가
얻을 수확은 어떤 종류인가에 대한 토론을 검토하였다. '몰타에 관한 45초짜리
집중기사도 써야 돼요. 몰타가 어디 있는지, 뭣인지도 모르는 시청자들이
태반이거든요'라고 말했다.

  금요일 PM 10: 00
  제닝스와 프리드만은 나란히 앉아서 스텝이 써준 대본들을 교정하고 있었다.
제닝스는 파란 캐시미어 스웨터를, 프리드만은 빨간색을입고 있었다. 제닝스의
오른쪽에는 여행에 찌든 그의 서류가방이 열려 있었다. 머리빗, 필기구, 헝클어진
서류 몇 장이 눈에 들어왔다. 제닝스는 전화에 대고 '아키노 대통령이 도움을
받으려고 결정하기까지는..'이라고 읽었다. '끊지 말고 기다려 봐. 젤닉스 기사를
다루기로 했었구. 코리답지 않기도 하고. 에이, 좋아'라고 전화를 끊고는 타자기에
종이를 끼우고 키보드에 두 손가락으로 정신없이 쳐대기 시작했다.
  그는 '부시 대통령이 코리에게 아무 언질도 없었나?'라고 물었다. 프리드만은
'퀘일이 약속한 모야이야'라고 재빨리 답했다. '아이구' 제닝스는 타자기에서 종이를
찢어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몰타 뉴스룸의 "월드 뉴스 투나잇" 코너에는 얼굴이 창백한 소련문제
전문가 밥 레그볼드가 샬롯트 테일러에게 화장을 받고 있었다. '그는 소위
"종속절" 인터뷰를 할 참이죠. 제가 할 말은 서너 문장뿐이 안 돼요.
자세히 말할 수가 없죠. 제대로 답하려면 4분 내지 5분은 소요되니까요. 그러나 이와
같은 상황에서 시청자들은 너무 많은 사실을 요구하지는 않아요. 나는 그저 단 하나의
생각만을 전할 뿐이죠. 그게 먹혀들어요'라고 말했다.
  제닝스도 화장 테이블로 걸어갔다. 그는 앉아서 콘택트를 착용했다. '참 하기 싫은
노릇입니다'라고 말했다. 편의상 ABC는 오늘 저녁뉴스를 1시간 전에 녹화하기로 했다.
제닝스는 전날 밤 일어난 일이 떠올랐다. 'CBS에서는 어제 미리 녹화해 두었다가 애를
먹었다더군요. 댄은 마을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기 좋아하는데 어젯밤 프로로 녹화된
첫 롤에서 놓친 필리핀 쿠데타 음모 기사를 나중에까지 다루질 못했더라구요'

  금요일 PM 10: 53
  제닝스와 프로듀서 두 명이 밴에 올라탔다. 미즈다만에 프로그램을 녹화하기 위해
설치한 앵커 스탠드가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이다. 그곳은 멋진 곳이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부시와 고르바초프의 배에서 뉴스룸보다 더 멀다. 밴이 어둠 속으로
꼬리를 감추었다.
  한 프로듀서가 '얼마나 걸려?'라고 목청을 돋우어 운전사 옆좌석에 앉아 있는
제닝스에게 물었다.
  제닝스도 '10분 걸린다는데, 7분 정도에 가보려고 하는 중이야'라고 소리 높여
뒤쪽으로 답했다.
  밴이 모퉁이길에서 끼익 소리를 냈다. 제닝스는 낮은 목소리로 '알라신이여,
굽어 살피소서'라고 아랍어로 신에게 기원했다. 밴은 몰타의 수백 년 된 요새의 성이
늘어선 해변길로 향했다. 제닝스가 운전사를 향해 '몰타의 전기는 어디서 받지?'라고
묻자 운전사는 커브를 지나 조그만 교회를 홱 지나면서 우물거리다, 그냥 어깨를
으쓱했다. '교회는 몇 개나 돼요? 삼백 개쯤 되나?'라고 다시 물었다. 그는 1년중
하루 하나꼴로 '삼백예순다섯 개'라고 답했다.
  그는 '프레고(고맙다)'라고 중얼거렸다. 십중팔구 자기 방송 대사에 외국어구를
써먹을 모양이다.

  금요일 PM 11: 30
  제닝스가 급조된 새 스탠드에서 로케중이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피난처 같은 모습은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거의 완벽하다고나 할 샷, 즉 뒤의
멋들어진 모습에만 눈길이 갈 것이다. 그곳은 ABC가 비용을 대어 뒷배경을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테두리 한 교회로 하고, 앞에는 깔끔하게 칠한 배가 살랑살랑 움직이도록
하고 있다. 바로 그곳에 그들은 자리를 잡았다. 제닝스는 '텔로, 아주 엇있는 것
같은데'라고 ABC의 부지 선정 책임자인 텔로 추켜 주었다.
  텔로는 '이 샷이야말로 우리가 몰타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종교와 낚시, 그리고 사방이 물이라는 점들 말이죠'라고 말했다.
  제닝스가 조그만 움막에서 비추는 세 개의 조명이 밝혀진 두 대의 카메라 앞에
나서려 할 즈음, 그의 화장기사인 샬롯트 테일러가 잽싸게 헤어 스프레이 한 통을
꺼내어 그의 머리에 뿌리기 시작한다.
  제닝스는 '스프레이가 800파운드는 있어야 하죠'라고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아,
글쎄. 뉴스 분야에는 댄 래더가 플로리다에서 삭막한 폭풍 한가운데 서서 주위의
나무들은 다 넘어지는데 그의 머리카락만 온전하더라는 식의 농담까지 있을
지경이죠'라고 말했다.
  따사로운 미풍이 움막을 떠돌았다. 제닝스는 '레인코트를 입고 있는 건 좀 어색해
보일 것 같은데?'라고 물었다. 그는 멈추고서는 발레타의 조정실로 연결된 이어폰에
귀를 기울였다. '프리드만이 입고 있으라네. 할 수 없지' '우리는 시간의 압박 같은
걸 견뎌내야 하죠. 우리는 가능한 한 많이 녹화를 해두어야 해됴. 막판에 뭐
차질이라고 생기면 생방송으로 나가야 하구요'
  그들은 녹화를 시작했다. 제닝스는 부시와 고르바초프의 도착 기사를 훑어보았다.
'알았어요'라고 이어폰에 대고 이야기하고는 웃는다. '오케이, 기상대에 의하면
폭풍이 몰아치기로 한 하룻밤이 지나면, 아니, 이거 뭐 이래. 다 빼버려' 그는 손으로
대본을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카메라를 향한다. '백악관 특파원 브릿 흄입니다'
  그들은 나머지까지 모두 끝냈다. '고르바초프는 턱 밑까지 어려움에 처해 있습니다'
그리고 마무리를 한다. '끝으로 오늘 저녁 윌가 있는 이곳은 지중해의 이탈리아
남쪽으로 약 50마일 가량 떨어진 요새 섬나라로, 큰 전쟁에 두 번 휘말렸지만 결코
함락되지는 앉았던, 아마도 그래서 지구의 전쟁 위험 감소를 나하는 정상회담을
하기에는 가장 안성맞춤인 몰타입니다'
  제닝스는 마무리를 하고, 이어폰을 빼고 둘러보고는 '저알 멋있는 곳이야'라고
말했다. 그는 물 건너 석회석 건물 위에 들쓱날쓱 펼쳐져 있는 TV 안테나가 빽빽히
들어서 있는 낮은 건물들을 가리켰다. '한 마디로 대조적이라 할 수 있겠죠. 눈에
띄는 것도 그 때문이겠죠'라고 했다.
  '예루살렘을 아세요?'라고 물었다. '저곳은 마치 다마스커스의 문에서 되돌아본
예루살렘 같아요'
  제닝스가 떠나자 그의 사진을 찍던 사진사가 고개를 젓고는 '아시다시피 저
사람들은 여기서 찍는데 부시와 고르바는 섬 반대편에 있지 않습니까? 앵커들은
"나는 그 작전을 위하여 거기 있었노라"고 말할지 몰라도 사실은 그렇지
않은 거죠. 아마 "거기에 있었지만 거긴 없었고... 가까이 있었고"라고나
해야 어울리지 않겠어요?'라고 말했다.

  토요일 AM 12: 45
  몇 분 후면 톰 브로커가 로우어 바라카 공원에서 미국으로 생방송을 내보낼 것이다.
NBC의 조정실에서는 파란 코트를 입고 있는 브로커의 모습이 모니터마다 되풀이되고
있다. 모든 화면 위에서 그는 '백악관은 아키노가 도움을 청하기 전에 기꺼이 도움을
줄 것이라고 말하고 이씁니다'라고 말했다.
  제작책임자 빌 휘틀리와 부국장 죠 앤거티는 조정실의 두번째 열에 앉아 있다.
브로커의 이어폰은 그들과 연결되어 있지만 뉴욕 조정실의 체릴 고울드와도 연결이
되어 있다. 브로커는 지구 절반쯤 되는 마닐라의 프래드 프란시스와 생방송
인터뷰(이른바 이원방송이라는)를 하고 있다. '프래드, 이번이 여섯번째 쿠데타인데,
미국은 얼마나 더 그녀를 돕게 될까요?'
  바람이 차츰 거세져 광고가 시작될 무렵, 그의 머리를 홱 스치고 지나갔다.
브로커는 '프롬프터가 계속 들어왔다 나갔다 해. 보이질 않아'라고 말했다.
'10초'라고 콜이 왔다. 그는 나디아 코마네치 기사를 소개했다.
  녹화해 놓은 부분이 돌아가기 시작하자, 그는 카메라맨을 향해 '프롬프터가
엉망이라구'라며 남감하여 말했다. '돌 때마다 하얗게 되잖아. 정반대로 할 수 없어?'
뉴욕에서 체릴 고울드가 '이봐 톰, 광고로 들어가서 손보면 되잖아'라고 그의 귀에
전했다.
  나중에 광고가 시작되자 브로커는 기사들을 쳐다보았다. 그는 기사들이 미친 듯이
프롬프터에 달려들자 '굴절에 뭐 이상이 있는 거 아냐?'라고 물었다. '시간은 어때?'
'좋아, 내 뒤에 있는 게 뭐지? 그거 말해서 시간을 때워 볼 케니까' 이어폰에서 뭔가
불평소리가 새어 나왔지만 그는 무시를 해버렸다. '시청자들도 알고 싶어하겠지'라고
우겼다.
  '5초'라는 콜이 왔다. 브로커는 방송으로 되돌아와서 '제 뒤에 있는 것은
나폴레옹을 물이친 영국인들에게 공물로 바쳐진 것이랍니다'라고 했다.

  토요일 AM 1: 00
  브로커는 프로를 마쳤다. 하지만 그는 아직 할 일이 좀 남아 있다. 동부 시간으로
오수 7시 "Nightly"에 나갈 두번째 피드를 위해 약간의 교정을 보아야
한다. 비가 오기 시작했다. 브로커는 카메라를 들여다보았다. 그는 안에 앉아 있는
프로듀서들에게 '여기서 벗어나는 게 좋을 것 같은데'라고 말했다. 돌풍이 몰아쳐 와
그의 머리에 세차게 부딪쳐 그를 약간 기우뚱하게 했다. 그는 '내가 후닥닥 해버리란
말이아?'라고 물었다. '틀림없지?'
  그는 비바람에 맞은 어깨 주름을 잡았다. 그는 전자장비가 비에 젖는 것을
보면서 '여기서 벗어나는 게 좋을 것 같은데'라고 말했다. 안에서 프로듀서들은
뉴욕과 이야기를 했는데, 브로커의 귀에도 들렸다. 세찬 바람이 다시 그에게 덮쳐
왔다.
  '맙소사, 안 된대도 그러네'라고 말했다. 브로커가 코트는 비로 얼룩지고 머리는
봉두난발이 되어 안으로 들어왔을 때 보니터에는 여전히 30분 뉴스 마지막 부분이
틀어놓아져 있었다. 그는 혀를 꺼내 물고 눈썹을 치쳐 울리더니 '맙소사!'라고 했다.

  토요일 AM 1: 30 
  경쟁사의 본부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여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는 시들어 가는
귀부인 같은 엑셀시어호텔어세는 CBS팀이 속도를 내고 있다. NBC처럼 아침방송을
1시30분까지 끝내지는 못했지만 몰타의 사건이 현지 시간으로 9시면 시작되기
때문이다. 날씨 때문에 실내로 들어온 기술자들은 밤중의 갑작스런 소낙비에 아직도
머리를 설레설레 젓고 있다. 한 기술자는 웃으면서 '두번째 피드였어요. 비가 하도
와서 우리는 사람들을 모두 앵커가 있는 발코니에서 아래로 내려오도록 했죠.
방송까지 시간은 6분 밖에 남지 않았는데요. 그들은 실내에 있는 방송 위치로
돌아와서 재빨리 이동식 윈도우를 꺼내고 모든 준비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실수로
프롬프터를 거꾸로 달았지 뭡니까?'라고 말했다.
  전부라고는 할 수 없어도 CBS는 엑셀시어호텔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이 오랜
석회석 건물 현관 앞에 거대한 위성용 안테나를 보란 듯이 설치해 놓았다. 위쪽 4층의
하얀 복도에는 트렁크 크기로 크레이트를 포장한 거대한 은색 박스가 흩어져 있어서
복도를 마치 큰 창고처럼 만들어 놓았다.
  방은 침대를 치우고 전자장비를 프릴, 커텐, 카펫 사이 여기저기에 놓아 편집
스튜디오로 개조하였다. 아래층의 커다란 연회장은 화분의 종려나무며 샹들리에를
포함, 모든 것들을 거대한 뉴스 룸으로 개조하였다. 방을 가로질러 '48시간' '모닝
뉴스' '스페셜 이벤트'라는 표지가 붙은 여섯 세트의 테이블들이 있다. 대규모
작전이라고나 할까. 구석구석마다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가운데 긴 테이블에는
수잔 지린스키가 전화를 받으면서 디스패쳐를 조작하고 있다. 한 구석에서는
프린스턴대학 교수이자 CBS의 소련 문제 전문가인 스티븐 코헨이 컴퓨터 터미널에
타자를 치고 있는 레슬리 스탈 특파원과 담소하고 있다.
  코헨은 '고르바초프가 집권 당시만 해도 지지 국민이 거의 없었죠. 85p는
브레즈네프 수중에, 15p는 안드로포프 수중에 있었죠'라고 말했다. 한참 저 구석에는
기사들이 실내면서도 바깥처럼 보이는 앵커포지션을 만들기 위해 커텐을 달고
창문을 밖으로 내고 있다. 한편으로는 만의 그 멋진 풍경이 보이도록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석회석 진지가 보이도록 꾸미고 있다.
  댄 래더가 청바지 차림으로 앞 단추는 몇 개 풀어헤치고 운동화를 신은 스포티한
모습으로 들어섰다. 그는 와이엇 앤드류 특파원에게 '안녕!'하고 인사를 하고는
준비된 여러 잔의 커피 중 한 잔을 들이켰다. 그는 '바삐 서둘러야겠는걸'이라고
말했다.
  래더는 손에 커피를 들고 제작 책임자인 톰 베타그에게 다가가 자못 진지하게
말했다.
  '이건 정부 측에서 배포된 자료로 만든 기사 아닙니까?'라고 물었다. 베타그는
'어디 이런 걸 취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야지'라고 대답했다.
  '이건 정부 측에서 배포된 자료로 만든 기사 아닙니까?'라고 물었다. 베타그는
'어디 이런 걸 취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야지'라고 대답했다.
  '진짜 알맹이는 그들이 만나 서로 웃고 악수하는 데 그치는 것은 아니잖아.
그거야말로 소위 "중요한 것은 막 뒤에서 이루어진다"는 식 아닌가 말야.
그들이 알려주는 대로 하는 수밖에 없지'라고 말했다.
  래더는 '하기야'라며 동의했다. 이건 사진 시리즈네요. 24컷 사진이라..'
  래더는 커피를 한모금 마셨다. '사람들은 이를 정상회담 취재라기보다
"소문이야기 모음"이라고 하죠. 저는 특히 동유럽의 대격변 이후 이런 걸
한번도 믿지 않았어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묻자, 래더는 '나야 내가 사는 데 필요한 강력한 국방과
깨끗한 물을 지지하죠'라고 했다. 누군가 '텍사스 민주당원?'이라고 암시했다.
'텍사스 무소속이라고나 해야지'라고 편치 않은 미소를 띠었다.
  그는 화제를 바꾸려는 듯 '아마 제가 이전에 몰타에 와본 유일한 앵커일 겁니다.
이곳에서 "60Minutes" 기사를 했었죠'라고 했다. 화제는 자연히 각
방송사가 몰타를 어떻게 시청자에게 전달하고 있으며, 앵커들을 찍는 위치가 어딘가로
넘어갔다. 래더는 '음, ABC는 힛 앤드 런 전법이랄까, 한 샷으로 모든 걸 보여 주려고
하죠. 우리 CBS에서는 몰타의 전부를 보여 주고 싶어하죠. 그래서 우리는 바구니에
계란을 모두 담으려 하기보다는 섬 이곳저곳에서 두루 찍은 엽서식 샷을 쭈욱
내보내죠'라고 말했다.
  톰 베타그가 손에 스케줄을 들고 다가왔다. 그는 '자자, 이제 미국이 잠에서 깨기를
기다립시다. 아침 8시(몰타 현지 시간은 2시)에 15분짜리 특집방송을 내보내야
되니까'라고 말했다.
  래더는 '좋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만 일어나 옷을 좀 바꿔 입고 오겠습니다'
  간밤부터 바람이 불기 시작하던 좋지 않은 날씨가 마사로크만에 정박중인 미, 소
양국의 순양함을 뒤흔들며 정상회담 일정을 방해했다.
  베타그는 '나는 오히려 재미있구만. 해군력이나 뽐내려고 꾸며 놓은 쇼가 다른
이야기로 되어가지 않냐구. 이를테면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자연의 힘 앞에서의
무력감 같은 것 말야. 백악관이나 소련 측 언론 담당들은 사진 기회를 놓치고
아웅아웅하고 있지. 하지만 그들이 아웅아웅할수록 우리는 뭔가 뉴스를 건지는
법이지'라고 말했다.

  토요일 PM 1: 55
  여섯 개의 조명등이 유리창을 밖으로 내, 래더가 스페셜 리포트를 할 연회장 구석을
비추고 있다. 스페셜 이벤트 담당인 레인 베나도스가 4층 조정실에서 쇼를 진행시키는
한편, 베타그는 현장에서 작전을 지휘하고 있다.
  댄 래더가 깔끔한 해군 정장 차림의 말쑥하고 침착하며 눈부신 모습으로 와이엇
앤드류 특파원 옆에 있는 자기 자리로 갔다. 그곳의 열린 창문 옆 바닥에 작은 금속
테이프 조작으로 표시가 되어 있다. 젊은 PA인 비비안이 그에게 이어폰을 건네 주어
외투 속의 등 뒤로 선을 내렸다. 베타그는 파란색 헤드폰으로 들려 오는 소리를
경청하고 있었다. 그는 '방송 30초 전. 비비안 퇴장'이라고 소리쳤다.
  비비안은 IFB 이어폰 연결장치를 더듬어 찾아 래더의 혁대에 고정시키고는 부리나케
나왔다. 베타그는 방송시간까지 카운트다운을 하며 '스탠바이'라고 했다. 베타그가
댄에게 큐를 할 바로 그 순간 그이 IFB 연결장치가 혁대에서 떨어져 툭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베타그가 바닥에 떨어진 IFB 접속장치를 찾아 바닥을 기는 동안 댄은
'안녕하십니까, 몰타입니다'라고 태연히 말했다. 베타그는 카메라 시야 밖에서
래더의 발께를 더듬어 바닥의 선과 래더의 등 뒤로 귀에까지 연결된 선과
연결하느라고 정신이 없어 보였다. 래더가 '하지만 예정대로 진행이 되지는
않았습니다'라고 방송할 때 베타그는 래더가 옴짝달싹도 안하고 있음을 불현듯
깨달았다. 만일 그가 IFB 장치를 놓는 날이면 래더의 귀와는 접속이 안 되거나 뽑혀져
버릴 것이다. 그래서 그는 래더가 대본 짜투리인 '마르크스에게만큼이나 마르크스
형제에게 신세를 지게..' 부분을 읽을 때가지도 발 주위를 더듬고 있었다. 베타그는
두 소련 전문가에게 '빨리빨리 좀 해주세요. 스탠바이'라고 했다. '쓰리 샷 줌 준비'
스티븐 코헨이 래더에게 그늘을 드리우는 것을 보고 그는 손짓을 해 뒤로 좀
물러나도록 했다. 이제 삼자 인터뷰가 시작된다.
  소련 문제 전문가는 '그들은 서로 다른 입장에서 이번 정상회담에 임하고 있다고
봐야죠'라고 말했다. '조지 부시는 국제 외교사회의 오랜 룰에 좀더 익숙해
있습니다'
  래더는 코헨을 바라보았다. 코헨은 큐에 맞추어 '저는 사건이 사람들의 형태를
규정한다기보다는 사람들이 사건을 규정하고 있다는 견해입니다'  코헨은 구절을
바꾸어 말하기를 좋아한다.
  베타그는 아직도 래더의 발쪽에서 카드에 그날 방송될 다음 뉴스쇼의 스케줄을
써내려 갔다. 그는 래더가 읽을 수 있도록 들어 올렸다. 래더는 '우리는 오늘 수시로
방송을 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태연하게 말한 뒤 시청자들에게 그날 방송 스케줄을
전달했다.
  스페셜이 끝나자 베타그는 몸을 추스리고 일어서서 세 사람에게 수고했다는 인사를
했다. 그는 기쁨이 역력한 표정으로 '그런데 말이지, ABC도 우리와 같은 시간에
방송은 했겠지만 그들은 실내에서 촬영했어야 됐겠지'라고 말했다.
  TV에는 신참자인 코헨은 '그게 좋은 겁니까, 나쁜 겁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좋은 거죠. 제닝스는 실내와 실외 "미즈다만의 방송 장소"에서
하긴 하지요. 그런데 그게 어디 폭풍을 견뎌냅니까?'라며 껄껄 웃는다. '폭풍도
시청자들에게 보여 줄 수 있을 때만 기사거리가 되는 거지요'

  토요일 PM 3: 00
  '라이사가 움직이기 시작한다'라고 CBS 오퍼레이션 데스크를 담당하는 수잔
지린스키가 외쳤다. 그녀는 워키토키를 집어들고 내뱉듯이 말했다.
  '그녀를 추적하세요'
  톰 베타그는 폭풍의 전야 같은 이 시간에 CBS가 이번 주말에 몰타에서 얼마나
비용을 쓰는가를 따지고 있었다. '다른 방송사 사람들은 우리 이걸 보고 뻥튀기하고
있지. 백악관 기자단을 예를 들어 보자구. 그들은 대통령과 꼭 함께 다니지. 이
정상회담이 열리는 주말에 그들에게 들 경비를 생각이나 해봤어들? 각 부서는 어떻고
각 부서별로 예산이야 다 있지. "각 뉴스 프로 부서에서 뉴스를
만드니까" 하지만 래리 티쉬가 우리를 애를 먹이려면 모든 부서가
"이브닝 뉴스" 예산만 쓰라고 하면 되지'
  '이 말은 방송사의 누구에게든 할 수 있는 얘기라구. 한 주 유지에 백만 달러 가량
든다구. 하지만 만일 래리가 "이번 주말에만 백만 달러 쓴 거
이해하오"라고 얘기한다면 억울한 거지. 왜냐하면 우린 한 주일 분의 가치가
있는 프로를 했기 때문이지. 우리는 이번 주에 체코슬로바키아에도 가고 로마에도
갔잖아. 우리는 이 빚을 갚은 셈이지. 호텔 방값으로 우리는 1주일 분의 좋은 프로를
해낸 거야'
  이어 베타그는 '우리는 요즘, 우리가 얼마나 효율적이고 경비 절감을 의식하는가,
또 그것이 우리의 최고 우선순위라고 입증만 하면 된다고 생각들 하는 모양인데
어쨌든 다 거짓말이야'라고 했다.

  토요일 PM 3: 30
  내내 춥고 바람도 불고 축축하던 날씨가 험악하게 바뀌어 가고 있었다. 바람이 시속
60마일까지 몰아치고 있었다. 만에는 솟구치는 파도가 벌크냅호와 슬라바호에 세차게
부딪히고 있었다.
  엑셀시어에 있는 CBS 뉴스룸에는 소음측정기가 갑자기 나가버리기라도 한 둣했다.
기술자며 프로듀서며 심지어 베테랑급 기자들까지도 텔레비전 모니터 주변에 모여들어
화면이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슬라바호에서 벌크냅호로 돌아오는 길의 부시는
작은 런치선이 거대한 파도에 휩싸여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다. '배가 정박을 못해!
닻줄을 못 내리고 있어! 굉장한 샷이야' 뉴스룸에도 모두 일을 놓고 있었다. 그들은
그저 넋을 놓고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들은 어떤 게 좋은 텔레비전인지 다들 잘 알고
있는 터였다.
  폭풍우 몰아치는 토요일의 멋진 배의 트위스트 스토리가 정상회담에서 날씨로
옮아가는 데 내용 자체는 별 볼일 없다 하도라도 TV로서는 위대한 몸서리쳐질 만큼
중요한 뉴스거리로 되는 것이다. 바람은 더욱 세차고 파도는 부서지고, 이 용감한
작은 런치선은 하염없이 맴돌고 있었다.
  런치선이 다시 돌아와 네번째 정박 시도를 할 즈음, 책상에 앉아 있었던 레슬리
스탈은 '무슨 한이 있어도 이건 내 기사에 써먹어야겠어'라고 말했다.
  톰 베타그는 '아냐, 안 돼. 그건 댄이 해야 돼'라고 했다. 스탈이 인상을 썼다.
베타그는 '이봐 레슬리, 댄에게 양보한다고 모욕이 될 건 없잖아'라고 말했다.
  스탈은 '모욕이랄 것까지야 뭐 있겠어요. 그저 아프고 힘들 뿐이지'

  토요일 PM 3: 40
  댄 래더가 연회장 구석의 튀어나온 창문 곁에 마련된 앵커 위치에서 방송시간을
기다리며 다시 올라섰다. 레슬리 스탈도 같이 있었다. '그게 대통령 보트가 맞긴 맞는
건가?' 댄은 알고 싶었다. '부시가 거기 타고 있었냐구?' 스탈은 '부시를 보지는
못했지만, 그의 배였어요'라고 답했다.
  '그렇게 나가도 되겠어요?'라며 캐어가 물었다. 베타그는 '우리는 해군하고
친하니까 그거 확인해 달라고 할 수 있을 거야'라고 말했다. '우리가 아는 바는
대통령이 벌크냅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는 점, 그 배를 보았다는 점, 또 그 배 위에
대통령 비서관들을 보았다는 점 아닌가?'
  수잔 지린스키가 한쪽 귀를 여전히 수화기에 댄 채 '확인을 받아냈어요'라고
외쳤다. '백악관 언론 담당관이 그 배에 부시가 있었답니다' 베타그는 '자, 이제
시작하자구'라고 외쳤다. '댄, 우리에게 테이프가 두 종류가 있어. 빌 플레인트도
테이프로 불러낼 수 있구 말야. 좋아, 45초짜리로 하자구. 레슬리, 자네 역할은
옆에서 계속 와와 하며 분위기 잡는 거야, 알았지?'
  베타그가 래더에게 큐하고 그가 시작했다. '날씨로 정상회담 일정이 여지없이
구겨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프롬프터가 나가고 말았다. '일정이'라고
프름프터에 멈추어 있었다. 래더는 매끄럽게 대통령의 런치선이 동요하는 화면에
맞추어 애드 립을 이어 나갔다. '배에는 비서관들이 수행하고 있습니다'라고 애드
립을 해나갔다.
  '보트가 얼마나 물 속 깊이 잠기는가 살펴보십시오'
  마침내 베타그는 종료시간을 알리는 뜻으로 엑스자로 팔을 들어 보였고, 래더는
'몰타에서 댄 래더입니다'라고 마무리했다.

  토요일 PM 4: 30
  두 함정이 정박하고 마사로크만의 "시 브리즈"호텔 밖에는 바람이
드세지고 있었다. 사람을 넘겨 쓰러뜨릴 수 있을 정도였다. 만의 방파제 안쪽으로도
파도가 5피트나 솟구쳤고 벌크냅과 슬라바가 정박되어 있는 방파제 너머 바다 쪽은
파도가 무려 20피트 높이로 치고 있었다.
  CBS 사람들만 남아 있는 리조트호텔 안으로도 바람이 쌩쌩 불어와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214호 룸에는 CBS 스페셜 리푸트 제작자인 앤레인골드가 양쪽 어깨 위에
전화기를 한 대씩 걸어 놓고, CBS 모자를 푹 눌러 쓰고 담배는 입에 물고 앞에 놓인
컴퓨터 단말기에 메시지를 입력시키며 통화를 하고 있었다. 이따금 그녀는 벽에 쭈욱
걸려 있는 모니터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이봐오, 그가 나타나자마자 방송을 내보내는 게 당신들 임무예요'라고
말했다.
  시간이 좀 지나자 미 6함대의 한 관계자가 레인골드에게 들러 날씨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는 '폭풍 정도라고 할 수가 없어요'라고 말했다. '절망이라고나 해야
할까? 오늘밤 10시까지 계속될 겁니다. 배가 10도에서 12도까지 흔들리고 있어요'
그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 레인 골드는 계속 노트를 하다가 곧 뉴스타 컴퓨터 시스템에
입력을 하고 시스템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 전송하고 엑셀시어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
뉴욕의 방송진에게까지 전했다. 그녀는 '몇 년 전만 해도 우리는 회람판과 씨름을
했었죠. 컴퓨터 단말기가 없으면...'이라고 말했다. 요즘에야 게임의 이름을 즉석
통신이라 할만 하지 않은가.
  그녀 왼쪽 어깨에 걸린 전화기에서 벨이 울렸다. 그녀는 '엑셀시어에서 방송을
한답니다'라고 알렸다. '백악관에서는 다음 회담을 하러 벌크냅을 떠나기가 너무
위험하다고 발표했답니다'

  토요일 PM 6: 30
  발레타의 프레스센터 안에서는 NBC의 죠 앤거티가 톰 브로커를 아래층 브리핑실로
내려보냈다. 오후 회담이 취소된 데 이어 저녁 활동은 물론이고 예정에 있던 부시와
고르바초프의 만찬도 취소될 것처럼 보인다. 그는 '브로커가 그들이 확인을 해주면
바로 방송하게 하도록 하려구요'라고 말했다. '다른 누구보다도 빨리 정보를 내보내고
싶거든요'
  원형의 브리핑룸 출입구 가까운 데 서서 브로커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올 때까지
공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7시 15분 전. 이어 10분 전.
  조정실에서는 앤거티가 초조하게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아마 내일 뭔가 특별회합이
있겠지' '오전 8시부터 10시 반까지 "선데이 투데이"로 다시 돌아가야
할까봐. 지난 2주일 동안이나 회원들에게 말해왔는데. 이 두툼한 참고인 연명부를
꺼내어서... 자 이제, 그분들께 일일이 전화를 해서 정규방송으로 돌아가야
하겠노라고 말씀드려야지'
  7시 5분 전이다. 브로커는 앉아서 낮은 목소리로 아래에 있는 플로어 프로듀서와
담소를 했다. 그는 '우리 아버님도 앤토니라는 이름을 따라 붙이셨어. 그런데 난
딸들뿐이잖우. 하지만 아들이 있었으면 나도 그애 이름을 앤토니라고 했을 텐데'라고
말했다.
  별안간 워키토키로 조정실의 제작들에게 '취소, 만찬 없음'이라는 말이 전해졌다.
앤거티는 마이크를 잡고 '톰, 취소되었네. 시작하자구!'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좋아요. 1분 안에 창으로 가서. 시그널 뮤직 15초. 큐! 큐!'
  아래층에서 브로커는 '역사상 날씨 때문에 정상회담이 취소된 첫번째 일로 기록될
것이비니다'라고 시작했다.

  토요일 PM 8: 35
  황색 우비를 입고 야구모 뒤로 묶은 머리를 늘어뜨린 ABC 프로듀서 폴 틸스리가
쌩쌩거리는 바람을 피해 안으로 들어와 비를 털었다. '두 명의 기사를 100피트 위에
있는 교회 탑에 올려보내 문자 그대로 ABC를 공중에 붙잡아두도록(방송중이라는 On
Air를 빗댄 농담)하고 있어요'
  스티브 텔로가 멈춰서서 말했다. '방송시간까지 3시간 55분 남았는데도 저녁뉴스가
어디서 올지를 모르고 있으니, 참'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미즈다로 가봐야겠어.
거기서 방송을 내보낼 수 있는지' 
  제작 책임자인 폴 프리드만이 걸어왔다. 그는 '오늘 방송은 날씨가 이렇게
되었으니'라며 말에 힘을 주며 말했다. '가능하면 밖에서 내보내야겟는데 '라며
텔로가 서둘러 나갔다. 프리드만은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내가 이 직업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인데, 신참들이나 하는 날씨 보도로 되돌아가게 생겼으니'라고 했다.
  피터 제닝스가 다가왔다. 그는 인상적으로 생긴 몰타인이 틀림없는 한 젊은 여인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걸이라고 하셨던가요?' 그녀는 그에게
'GRIEGAL'이라고 스펠링을 알려 주었다.
  그는 웃으면서 '그리걸'이라고 반복했다. '이 바람을 몰타 사람들이 부르는
말이랍니다' 그는 우비를 후닥닥 입고는 옷깃을 매만지고 고개를 들어 천장을
쳐다보았다. 천장 위로는 가랑비가 오고 바람이 따뜻하기는 하지만 몹시 거세게 불고
있었다.
  불빛 아래에 방송 기간 요원인 음향기사, 카메라맨, 디렉터인 틸스리가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제닝스가 뚜벅뚜벅 걸어가 지체없이 토요일 ABC 야구방송의 하프타임
특별방송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몰타는 하루가 금세 지나가고 있습니다.
짤말하고 바람 불고 축축한 날입니다'
  바람이 고개를 들어 울어대기 시작했다. 길 건너편 어느 집 지붕 위의 구부러진
쇠쿹이가 질푸에 그만 낡은 환기통이 벗겨지면서 끽끽 소리를 냈다.
  '몰타 사람들은 이 바람을 그리걸이라고 합니다...' 모진 돌풍으로 그만 대사가
끊겼다. 옷깃을 매만지고 제닝스는 대사가 끊긴 곳부터 다시 해나가려 했으나,
제작자들은 처음부터 시작하기를 원했다. 제닝스는 '이봐, 해설 도중인데 뭘
그래'라며 편안하고 따뜻한 아래 조정실에 있는 프로듀서들에게 환기를 시켰다.
'처음부터 할 필요 없어. 그냥 계속하라구' 그는 틸스리를 쳐다보았다. '이거 왜
이렇게 오래 걸리죠?' 제닝스가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모습이 역려했다. 지붕에
가로질러 설치해 놓은 단파 수신기가 육중한 콘크리트로 아래를 괴어 두었는데도
바람에 삐걱대기 시작했다. 비가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봐, 여기 지붕에 정말
비가 내리고 있어'라고 빈정거림을 넘어서 말했다. '여기 위에서 방송 못하겠어, 미친
짓이야'라고 말했다.
  틸스리가 그에게 진행신호를 주었다.
  제닝스가 '부시 대통령이 되돌아가려고 하는 모습을 한 번 보십시오...'라고
녹화테이프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별안간 강력한 돌풍이 제닝스 등 뒤를 때려
비틀거리다 카메라에 부딪히게 했다.
  제닝스는 몸을 일으키면서 웃었다. 날씨가 너무 나빠 이제는 재미있다고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는 '게속합시다'라고 했다
  그는 해설 나머지 부분을 재빨리 하고 잔뜩 찌푸린 얼굴로 '몰타 사람들 말로는
이곳은 대부분 날씨가 맑다고 합니다'라고 끝냈다.

  토요일 PM 9: 30
  한편, 마을 건너편 CBS의 엑셀시어호텔 안에서는 모두들 멀쩡하게 잘 있다. 톰
베타그가 '꼭 이번 정상회담은 위대한 교훈적 연극인 것 같아'라고 말하고 있다.
  '양 세계의 지도자들이 만나지도 못하니 말야. 날씨야말로 진정한 평등주의자인
셈이지'
  수잔 지린스키가 수화기를 손에 쥐고 '이건 긴급이에요. 바로 여기서 백악관
사람들한테 진짜 뉴스를 얻고 있어요' 그녀는 컴퓨터에 정신없이 원고를 치기
시작했다. '미국은 옵서버의 지위를 받아들여 소련 시장에 촉구...'
  지린스키가 저고 있는 것은 부시 행정부가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기 위해 몰타에
갖고 온 핵심 16개 제안이다. 부시는 카리스마적인 고르비보다 돋보이려 했었다.
하지만 그러한 기도는 나쁜 날씨 탓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백악관의 스텝들은
부시 베이커의 계획이 반드시 미국에서 저녁뉴스거리가 되도록 하려고 모든
방송사에게 필사적으로 요구하고 있었다.
  지린스키가 찍은 원고를 보고 스탈과 베리 피터슨이 컴퓨터로 향해 가서 타이핑을
쳐보냈다. 스크린에 매끈한 문자들이 번득였다.

  토요일 PM 11: 15
  CBS 디렉터가 1시간 전에 미리 녹화할 준비를 하면서 '창문 열어'라고 외쳤다.
기술자들이 창을 열자 바람과 비가 휘몰아쳐 들어왔다. 레슬리 스찰의 머리카락이
앞으로 휘날리자 열심히 손으로 누르고 있다.
  디렉터가 화면을 보면서 '레슬리, 좀더 오른쪽으로 우믹여 봐'라고 외쳤다. '댄에게
한참 더 가까이'
  스탈이 래더 바로 옆에 다가붙자 그는 넓은 스테이지에서 미소를 띠우며 내보란
듯 그녀를 포옹했다. 스탈은 그의 뺨에 뽀뽀를 했다.
  디렉터는 '아, 누가 그렇게 가까이 하라 그랬어!'라며 껄껄 웃었다. 스찰이
새롱거리며 '댄, 저 사람들이 우리가 이러는 게 맘에 안드는 모양이죠?' 라고 말했다.
디레터는 '레슬리 얼굴에 아직도 그림자가 지잖아'라고 나무라듯 말했다.
  래더가 '앵커맨 머리가 하도 커서'라며 빈정거렸다.
  위층의 조정실에는 스페셜 이벤트 제작책임자 레인 베나도스가 방뒤편에 앉아
있었다. '이제 몇 시간만 지나면 잠자리에 들 수 있겠구만'이라고 말했다. 디렉트가
'2번 카메라'라고 지시했다. '1번 준비' 스탈이 '제 머리 괜찮아요?'라고 물었다.

  토요일 PM 11: 45
  디레터가 '됐어. 이번 건 댄과 봅 투웨이야. 댄이 저기 창문에서 프레임하도록
일러두라고' 카메라맨이 화면을 맞추자 뉴욕의 봅 쉐이퍼가 이어폰을 통해 댄에게
말했다. '댄? 안녕하세요, 여기 봅입니다...'
  래더가 카메라를 들여다보면서 '안녕하세요. 봅이 감을 잡은 듯싶습니다. 그들은
그날 밤 보트에 갖혀 있었습니다. 저는 이름난 항해사 말린 피츠워터도 끔찍하게
느끼리라고 확신합니다'
  쉐이퍼는 녹화를 시작하자 '댄, 날씨 이야기로 이름을 유지하고 계신데 날씨가 이번
회담을 수렁에 처박게 될 가능성은 없다고 보시는지요'라고 물었다.
  래더는 예언이나 하듯 '그럴 가능성도 있죠. 못된 폭풍이라고 해야 할 겁니다.
신밧드나 넬슨 제독이 나서서 호령해야 할 그런 폭풍이죠...'
  피드가 끝나자, 아래츠에서 톰 베타그가 얼굴에 새 잡아먹은 고양이 표정을 하고
씨익 웃었다. 'ABC와 CNN은 위성중계를 못했어'라고 알렸다.

  일요일
  비가 잠잠해졌다.
 오늘, 모든 사람들이 정상으로 돌아와 예전처럼 일들을 했다. ABC, CBS, CNN과 NBC
모두 미, 소 양국 대통령의 첫 공동기자 회견을 취재하고 있었다. 두 지도자들은
다음의 기억할 만한 성명을 냈다. '세계는 이제 냉전의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중요한가? 당연하다. 역사적인가? 물론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미국 TV 시청자들은 그날 저녁 프로 풋볼경기가 시작되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마침내 몰타 정상회담이 끝나갈 무렵 이 역사적인 초강대국 정상의 만남을 취재함에
있어서 어느 방송사가 더 잘했는지 우열을 가릴 수 있는 시청자는 거의 없었다.
  방송사와 앵커들간의 숨막히는 고가의 경쟁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이번
취재를 무승부로 보게 될 것이다.
  지중해 컨퍼런스센터 안에서 CNN의 찰스 비어바우어가 이번 취재를 마무리 하는
2분짜리 대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카메라맨에게 '앉을까요, 설까요?'라고
물었다. '아, 정말 중요한 것은 50년이 지나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것, 아니 젠장,
50분만 지나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이지'라고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말했다.
  비어바우어는 브라이언트 검블이 몰타공화국 수상과 인터뷰했고, 또 일찍이 한 미국
기자가 한 프랑스 TV 직원과 미국인 TV 직원과 소련 언론인과의 인터뷰 장명을
녹화하는 것을 본 바로 그 장소에 자리잡았다.
  그는 '저는 금요일에 기자단과 함께 벌크냅호로 갔었습니다. 우리는 대통령이
배에서 내렸을 때 그의 얼굴도 못 보았습니다. 대통령은 다시 갑판 위로
올라갔습니다. 우리는 대통령에게 필리핀 사태에 대해 물었습니다. 대통령은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나서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비어바우어는 '바로 이것입니다. 시청자 여러분, 아무 말이 필요없습니다.
서커스단이 마을에 들어오면 천막을 쳐야겠죠. 거기 가서 곡예도 한 2분 해야 하구요.
그것이 끝나면 또 다음 마을 로 옮겨가는 거구요'라고 말했다.
@ff
      25. 종결: 승자와 패자

  1990년 1월 3일 수요일, ABC의 모든 기자와 간부들, 그리고 프로듀서와 기술진들은
림이라고 알려진 2층의 뉴스룸에 가득히 모여들었다. 샴페인이 들어오고 곧 와인이
넘쳐흘렀다. 창사 이래 처음으로 연간 시청률 순위에서 ABC가 1위를 차지한 것이다.
  알럿지는 방 저 끝에 혼자 서서 잔을 들었다. 그리고는 이름들을 쭈욱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봅 시게타이러, 어브 웨스틴, 제프 그랄닉, 봅 프라이, 빌 로드, 폴프리드만...'
  사람들은 처음엔 의아해 했으나 마지막 이름을 들어보자 곧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알럿지는 "World News Tonight"에서 지금까지 일했던 모든 수석
프로듀서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었던 것이다. 명단을 다 읽었을 때 연회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크게 웃으며, 박수를 치고 건배를 했다.
  '한말씀 드리겠습니다'
  알럿지는 말했다.
  '여러분 모두 자랑스러울 것입니다. "World News Tonight"이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일해 온 모든 사람이...'
  폴 프리드만은 재빨리 감사하다고 했다. 이어서 사람들의 눈길은 피터 제닝스에게
모아졌다.
  '나는 이런 파티를 많이 경험했고 룬의 연설을 여러 번 들어보았습니다만, 오늘은
매우 특별하군요'
  그는 약간 목이 메인 목소리로 이야기하고서 알럿지를 향해 몸을 돌리더니 '당신은
지금 뭔가에 의미를 두고 있지 않습니까? 정말 큼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라고 말했다.
  제닝스는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시더니 잔을 높이 들었다.
  '여러분도 기억하실 겁니다. 우리가 주간 시청률에서 처음 1위를 해보았을 때 룬은
샴페인을 보내왔습니다. 그렇지만 전 돌려보냈습니다. 포도주가 아니어서죠. 그런데
지금은 포도주 샴페인입니다'
  참석자들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박수로써 공감을 나타냈다. 마침내
ABC의 모회사인 캐피탈 시티즈의 토마스 머피 사장이 한마디 하기 위해 연단에 섰다.
그는 ABC가 스스로 일어서게 되어 행복하다고 했다.
  '나는 "다른 어떤 곳에서보다 ABC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뉴스를
듣는다"는 발표를 듣고는 여전히 등골이 오싹합니다. 다 아시듯이 방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뉴스국입니다. 지금까지 CBS가 그 분야의 명성을 누려 왔습니다.
이제는 바로 여러분의 것입니다'
  열 블록 떨어진 곳, 예전 낙농빌딩이었던 CBS 건물은 분위기가 완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정상의 위치에서 추락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수주 동안 실제로
3위로 떨어졌기에 CBS 직원들은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댄 래더, 톰 베타그와 많은
사람들이 시청률 순위 때문에 침울하다 못해 낙심천만하고 있다고 했다. 래더는 성탄
주간 동안 뉴스를 방송한 유일한 정규 앵커였으나, 결국 CBS는 여전히 3등이었다.
CBS는 온갖 소문이 떠돌면서 다시 일하기 빡빡한 직장이 되었다. 톰 베타그, 뉴스
부국장 던 디시사레와 조 페이로닌, CBS 뉴스 국장 데이빗 벌크 등은 고민에 빠졌다.
한 CBS 직원은 전한다.
  '모두들 사기가 떨어졌습니다. 댄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그는 1등이
아니었습니다. 누가 그 추락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래더는 기운을 차리고 모스크바로 떠났고, 거기서 새로운 소련의 다당제와
성장하는 민주화에 대한 특종을 기록했다. 그리고는 쉬지도 않고 넬슨 만델라의
석방을 취재하기 위해 아프리카로 갔다.
  '58세 된 사람에게는 세계를 일주한다는 것이 힘든 일이지만 댄은 계속 가고, 뛰고,
싸우고 있습니다'
  한 CBS 제작자의 말이다.
  CBS의 분위기는 낙천적이었지만 매우, 아주 매우 조심스러웠다. '그토록 오랫동안
뒤처져 있었는데 이제 우리도 올라가는 것 같다'는 느낌들을 가지고 있었다. 드디어
그들은 2위 자리를 놓고 경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연말 대회의가 뉴저지의
프린스턴에서 있었는데, "워크아웃(Workout)" 회합이라고 불리우듯이 그
모임에는 카메라맨과 기자에서부터 수석 프로듀서들까지, 75명의 NBC 뉴스 직원들이
다 모였다. 놀랍게도 새 경영진에 대해 4년간이나 미심쩍어 했고, 부정적이었지만 그
고집센 집단들은, 이사인 미쉘 가트너와 밥 라이트가 그들 자신의 죄를 잘 씻었다고
생각했고, 많은 사람들이 새롭게 낙관하면서 "회의를 마치고"떠났다.
  '나는 통일교 신자처럼 들리기를 원하진 않지만, 정말로 잘 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말은 그 당시 NBC에서 자주 들을 수 있던 말이다. 직원들은 비평가들이
NBC를 공격하는 데 지쳤고, 이제는 CBS 차례라고 느꼈다. 톰 브로커와 NBC는 이제
더이상 혼자 바닥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1990년 중간 무렵까지 NBC는 여전히
바닥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자 수석 프로듀서 빌 휘틀리가 갑자기 스티브
프리드만으로 교체되었다. 그는 "투데이"쇼에서부터 브로커의
프로듀서였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공동 앵커로 제인 폴리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나왔다.
  ABC에 관해서 말한다면, 그들이 축하한 승리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1989년 마지막
주에 ABC의 "World News Tonight"이 시청률 순위에서 "CBS Evening
News"를 조금씩 앞서 나갔다. 1989년의 결과는 이렇다.
  ABC 10.14p /20
  CBS 10.09p /20
  NBC 9.44p /19
  달리 말하면, ABC가 1p에 의해, 혹은 1/10p에 의해서가 아니라 5/100p에 의해서
순위경쟁을 이겼다. 이는 2억4천만 인구 중 5만도 안 되는 숫자이다.
  만약 근소한 승리라면 어느 누구도 왜 그런지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최근에는
중요하다는 많은 뉴스가 국제적인 것이었다'고 ABC의 조사 및 마케팅 부장 알란
월트젯은 완곡히 말했다. '그리고 피터 제닝스는 그 분야에서 독보적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인구통계와 관련이 있고 또한 인구가 늘어나고 있는 도시의 젊은
시청자들 사이에 인기가 좋다는 제닝스의 평판과도 어느 정도 관계가 있음을
암시한다고 말한다. 반면에 래더는 비유적으로나 글자 그대로거나 사라지는
계층이라고 할 수 있는 더 늙은 중서부 시청자들에게 인기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에게도 해답이 없다는 것만이 진실이다. 닐슨에서 시청률이 나올 때
어느 누구도 그 실마리를 찾은 사람이 없었다. 뭔가 신비스런 마술 같은 것이 있다.
오늘날 그전보다 훨씬 시기해진 것은 닐슨사가 90년대 초에 계산에 넣지 못했던
수백만의 시청자를 처음 찾아냈고, 그리고 나서 그후 몇 개월 동안 갑자기 TV
시청자의 80p가 떨어져 나갔다고 인식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비록 시청률이라는 것이 뭔가를 재는 척도일지라도 오늘날 그 척도는 아주
미세한 차이를 측정하기 위해서 사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CBS의 말리 세이퍼는
말한다.
  '요즘 뉴스로 말하면 우리는 100p분의 1초를 재는 올림픽 계측에 까지 도달해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것은 사실 동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수삼년간 그래 왔던
것입니다'
  TV 방송계는 아직 닐슨의 존재를 믿고 있으며, 그들이 어떤 중요한 것을 의미하고
있다는 듯이 반응한다(마치 이 책이 출판사에 대해 가지는 관계처럼 방송은 리슨과
함께 문제점들을 인식하기 시작했고, 광고주들을 불러 모으기 휘해 결국은 새로운
체제를 개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최근 닐슨 조사 결과 크게 승리한 피터 제닝스마저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왜 우리가 1위를 했는지 모릅니다. 전에는 우리가 왜 3위를 했었는지, 지금은 왜
1위인지를 알 수가 없어요. 사람들은 내게 계속 물어 오지만 나는 대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최근 순위에 대해 ABC가 기뻐하고 CBS가 고민하는 동안, 그리고 세 방송사가 주간
닐슨 조사에서의 미세한 변화에 극도로 예민해 하는 동안, 그들은 다른 숫자를 계속
무시하고 있다. 거대한 숫자, 즉 저녁방송 뉴스를 보는 전체 청중의 숫자가 가차없이
줄어들고 있음을 알리는 숫자 말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방송사에게서 강한 반응을
끌어내는 주간 순위의 미묘한 차이라는 것이 결국 타당성이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타이타호 갑판 위에서 춤추고 있는 사람들과 키를 조종하는 사람들과의 차이처럼.
1위이건 3위이건 배는 여전히 가라앉고 있는 것이다.
  CBS가 아직 정상에 읬을 때 돌아온 버나드 골드버그는 말한다.'모든 사람이 1,
2등에 연연해 하는데 이는 미친 짒입니다. 오늘의 1등은 10년 전에는 3등이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보다 중요한 것이 되도록 만들어 나가는 일일 것입니다'
  우리가 시청자를 놓치고 있는 이유는, 우리가 중요하다고 규정한 것 때문이다.
우리는 시청자를 놓치고 있기 때문에 늘 케이블과 VCR을 지켜보고 있지만, 우리가
원하는 만큼의 흥미를 끌고 있지는 못하는 것 같다.
  골드버기가 제안하듯이, 그리고 ABC의 아메리칸 어젠더(American Agenda) 사장인,
고참 연출자로서 샐리 홀름과 찰스 쿠랄트가 제안하듯이, 또한 우리가 이미 제안하고
있듯이 해답은 저녁뉴스 방송의 새로운 역할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즉, 유행과
아이디어와 성취에 대한 언급의 확대, 뉴스의 속도를 줄여서 깊이와 인간적 면모를
부여할 수 있는 새로운 리듬의 도입이 그것이다.
  요사이 안 좋은 뉴스에도 불구하고, ABC, CBS, NBC의 전통적인 6시 반과 7시의 전국
저녁뉴스를 보는 시청자가 줄어드는 동안, TV 뉴스는 사실 전체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다양하게 방영되고 있는 뉴스 프로의 스펙트럼은 넓어져 가고 있다.
  사람들은 낮 동안 특집보도를 지켜보고 있다. 그들은 지방 뉴스와 뉴스 골든아워,
테드 카펠의 "Nightline"을 지켜보고 있다. 그들은 24시간 내내 CNN을
쳐다보고 있다(낮 동안 이렇게 시청하면서도 저녁 뉴스에 친근함을 느끼는 것은 약간
놀라운 일이다) 시청 습관은 다를지 모르나 만약 모든 시간을 합산한다면 실제로
이전보다 더 많은 사람이 뉴스를 보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 라디오가 그랬듯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TV가 세상을 알리고 있다. 새로운
휴대용 첨단장비를 가지고 샌프란시스코에서 몰타에 이르기까지, 커다란 사건이
일어나기만 하면 TV는 작년에 그랬던 것처럼 대단한 속도와 순발력으로 우리의
거실까지 소식을 전달한다. TV 뉴스는 이제 지구의 이 구석에서 저 구석까지를 묶어
주는 전기끈이다.
 사실 거의 모든 방법으로 80년대 중에 작았던 화면이 점점 더 커졌다. 훨씬 커진
것이다. 1989년 말까지 미국 가정에서는 뉴스, 오락, 스포츠 등을 하루 평균 7시간
동안 시청했다. 그리고 TV는 우리에게 세상을 이해시키는 다른 어떤 매체보다 더
중요하게 되었다. '신문보다도, 책보다도, 영화보다도, 전축이나 라디오보다도, 이제
편안히 앉아서 보는 시대가 된 것을 환영합니다'
  브라운관에 달라붙은 그 대단한 수의 미국 사람들 때문에 최근 신기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천천히, 그리고 미묘하게 현실과 TV사이의 경계가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그 둘을 떼어서 구별하기란 이제 더이상 간단한 일이 아니다. 사건들이 더
좋은 TV 프로를 위해 재구성되었다. 예를 들면 민주당원도 공화당원도 그들이 어떻게
집회를 가져야 할지를 방송에 물어 왔다.
  어떤 사건은 그것들이 발생하자마자 재구성되었다. 조지 부시 대통령 자신은
전국으로 방송된 연설에서 오직 마약 문제에 대한 인식을 높일 목적으로 백악관 길
건너편 공원에 마약 거래자를 불러들인 것에 대해 책임이 있다.
  그리고 또한 첨단의 위성기술시대에 사건이 일어난 시간과 보도하는 시간과의
차이가 점점 짧아지고 있다. 과거에는 전쟁이 일어나면 역사가들이 언제가 그것에
대해 썼다. 오늘날, 놀라울 정도로 남의 이목을 꺼리는 시대에 TV는 우리에게 싸우고
있는 그대로의 전쟁이라든지, 폭락하고 있는 주식시장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 줄
뿐 아니라, 우리가 실제 이루어지는 역사의 현장에 참관하고 있다는 것을 날카롭게
인식하도록 해준다.
  요즈음 뉴스와 뉴스보도를 구별하는 것이 더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몰타
정상회담에서 CNN은 부시와 고르바초프가 회담하는 배로 투입되었다. 초강대국의 두
정상은 미래를 구상하면서, 실제로 그들 자신을 생생하게 지켜볼 수 있었따. 그리고
그들의 모습과 그들의 말이 어떻게 연출되는지, 또 어떻게 해서 적절하게
조정되는지를 지켜보았다.
  이제는 새로운 시대, 비디오 피드백의 시대이다. 오늘날 지구촌은 세계적인 거실이
되었다. 즉, 모든 일이 발생하고 있고, 또한 동시에 비춰지고 있는 하나의 작은 방이
된 것이다. 그리고 중앙에는 관찰자로서 또 참가자로서 앵커가 앉아 있다. 결정적인
시기, 위기와 불확실서의 시기에 사람들은 정보와 통찰력을 구하려고 앵커들에게 눈을
돌린다. 어떤 면에서는 선발된 관리들보다 그들이 더 신뢰감을 준다.
  파나마에서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자. 최근 파나마 침공중에 매리어트호텔에 숨은
미국의 사업가들은 톰 브로커와 브라이언트 검블과 전화 인터뷰를 했다. 매시각 그
사업가들은 그들의 상화에 대해 생생하게 최신 정보를 제공했다. 한 사람이 '이곳은
정말 위험합니다'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는 한숨을 돌리더니 그는 수천 마일
넘어 뉴욕에 있는 앵커에게 물었다. '로비로 내려가도 안전할까요?'
  브로커와 검블 옆에 앉아 있던 베테랑 기자인 존 챈셀러가 이 기괴한 거울집 현상에
대해 언급했다. '그들은 그 호텔에서 미국 TV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이 호텔에 갇혀 있다고 TV에 보도하는 NBC와 다른 방송을 위해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을 가둔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말입니다'
  작은 화면 위에 펼쳐지는 뉴스의 미래를 위해, 그리고 90년대를 위해 이 모든
것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또한 앵커의 미래를 위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TV뉴스가 점점 더 전세계로부터의 빈번한 생중계로 인해 발전해 왔기에, 앵커는  큰
사건이 일어나는 곳은 어디에서나 더욱 자주 그것들을 보도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순수한 출연에 의해 사건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TV 보도가 없는 중국의 5월 봉기를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동구의 연속적인 사건에
관해서도, 그것들이 발생한 속도는 전자기술이 뒤떨어진 시기였다면 생각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기술의 진보에 의해 더욱더 기동성이 빨라진 앵커들은 "가장 신선한"
뉴스를 경쟁적으로 보도하려고 서로들 전세계에 걸친 치열한 추격전을 계속할 것이
확실하다. 그들이 그 뉴스에 끼치는 영향은? 추측일 뿐이지만, 지난 10년이 마감되고
지금의 10년이 시작했을 때 TV방송의 미래에 대한 비유를 하나 얻을 수 있었다.
  루마니아 민중이 봉기했다. 그리고 독재자 차우세스크를 끌어내리고 새로운
임시정부를 세웠다. 그들의 새로운 지도자는 국가의 운영을 위해 선택 가능한
부쿠레슈티의 모든 건물 중에서 바로 TV방송국을 골라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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