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인
길리언 헬프갓, 알리사 탄스카야
제 1부 도마지
제 1장 첫만남
"지금 만나는 사람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크리스 레이놀즈 박사는 내 가방을 들고
집안으로 들어가면서 말했다.
나는 방금 퍼스에 업무차 도착한 참이었다. 장시간에 걸친 비행기 여행과 타는 듯한 11월 더
위 때문에 약간 얼이 빠진 상태였다. 거실에 들어서서 어둠에 적응을 하려니까, 아주 유별난 사
람이 눈앞에서 있었다. 그는 방금 수영장에서 나와 물을 뚝뚝 흘리면서 내 손을 잡고는 놓을 생
각을 하지 않았다. 미소 띤 얼굴로 펄쩍펄쩍 뛰고 이따금씩 젖은 얼굴을 내 얼굴에 대기도 하면
서 말을 쏟아 내 놓았다. "안녕, 길리언 달링, 만나서 반가워요, 길리언 달링. 당신이 온다고 크
리스가 그랬어요. 정말 당신이 왔군요, 길리언 달링? 와서 내가 연주하는 걸 들어 보세요. 리
카도에. 오늘밤에 올거죠, 올거죠? 리카도에 말예요, 길리언 달링?"
이런 낱말과 표현이 정신없이 되풀이되는 가운데, 꼭 안긴 채로 또 얼굴에 온통 입맞춤 세례를
받으면서 나는 라운지 안 야마하 그랜드 피아노가 있는 곳으로 휩쓸려 갔다. 왁자지껄한 와중에
어렴풋이 크리스가 하는 말이 들렸다. "길리언, 데이빗 헬프갓입니다."
나는 완전히 얼이 빠졌다. 나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이 사람은 머리를 앞으로 수그린 채 정신
없이 뛰고 수다를 떨면서, 팔이 아래로 하릴없이 축 늘어져 있다가도 내 팔을 가볍게 건드리는가
하면 야마하 피아노를 토닥거렸다. 반쯤 감은 눈으로 이따금씩은 나를 흘끔흘끔 바라보는데, 안
경이 마치 콜라병 밑부분같이 두꺼웠다. 데이빗은 검게 그을려 있었지만 얼굴은 그리 건강한
이 아니었다. 이 사이에 끼여 있는 담배는 입맞춤을 할 때에만 잠시 빼내곤 했다.
그는 다시 한 번 나를 꼭 껴안았다. 좀 우스꽝스러웠다. 입을 벌린채 내 이마에, 볼에, 귀에
가볍게 입맞추며 말했다. "길리언 달링, 오직나를 위해 와 주었다니. 그것도 시드니에서, 오직나
를 위해. 상상해 보세요! 그렇게나 먼데서! 오로지 내가 연주하는 걸 듣자고. 오늘. 와서, 어쨌
든, 어쨌거나. 얼마나 놀라운지! 놀라운 은총, 은총, 감사, 감사, 감사할 수밖에. 좋아요. 아주 좋
아요, 달링. 그래서 오늘 저녁에 리카도에 올 거죠, 길리언 달링? 오는 거죠?" 일방통행식 대화
는 계속되었다. 잠시 숨을 몰아쉴 때에만 중단될 뿐이었다.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말에서 의미를 풀이하려 애쓰는 동안에도 나는 쉴 틈을 주지 않는 괴
짜이면서 한편으로 그지없이 다정스런 이 사람에게 내가 이끌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피터 팬이 나타나 마법의 세계로 나를 이끌고 가는 것 같았다.
잠시 뒤 크리스는 수술 때문에 병원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는 가는 길에 데이빗을 하숙집으로
데려다 주었다. 크리스 집에 홀로 남게 되자 나는 한숨을 돌리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길리언
달링, 리카도로 와요" 하는 말이 그 때까지도 내 머리속에서 맴돌았다. 거절할 수 없는 초대였
다.
그 날 저녁 외출 준비를 하면서 나는 기대감에 몹시 흥분하고 있음을 느꼈다. 데이빗이 여성
적인 것을 매우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꽤나 신경을 써서 금색과 흰색 레이스로
차려 입었다. 그렇지만 내가 데이빗의 반응을 바라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 낯선 사람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끼친 것일까?
그 때까지도 약간 얼이 빠진 생태에서 나는 크리스와 함께 차를 몰고 데이빗을 태우러 갔다.
가는 길에 크리스는 데이빗이 리카도의 연주자가 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데이빗은 60년대에
유명한 음악 신동이었고 그래서 퍼스에 있는 음악인들이 그에게 기대를 많이 걸었다. 하지만 데
이빗이 신경쇠약에 걸리는 바람에 전문 연주무대에서 본 지는 십 연도 더 되었다고 했다. 사실
상 잊혀진 상태였다. 60년대의 데이빗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렇듯이, 얼마 전까지
만 해도 크리스 역시 데이빗이 런던에 유학을 간 이후로 계속 해외에 머무르고 있는 줄로만 알았
다. 그러다가 어느 날 데이빗의 동생이 전화를 걸어, 리카도에 일자리가 있는지를 물은 것이다.
리카도는 포도주를 파는 술집이었다.
몇 주 뒤, 우연히도 리카도에서 연주를 하던 고전음악 피아니스트가 일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
다. 몇몇 피아니스트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으나 모두 술집 연주를 거절했다. 결국 크리스는 데
이빗의 전화번호를 돌렸다. 데이빗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이렇게 대답했다. "좋아요, 크리스. 연
주하고 말고요. 기꺼이 연주하죠." 크리스가 수고료 이야기를 꺼내자 데이빗이 말을 가로막았다.
"공짜로 하죠. 공짜로요." 크리스가 한동안 설득한 끝에 데이빗은 수고료를 받기로 동의했다.
그 날 저녁, 크리스는 줄담배를 피우는 허깨비 같은 사람이 술집 손님들을 헤치며 피아노를 향
해 초조한 걸음을 옮기는 것을 보고 낭패감을 느꼈다. 그 사람은 얼룩 투성이 누더기 같은 크리
스마스 캐롤집과 따라부르기용 악보를 꺼내고는 양손 가운뎃손가락으로 건반 몇 개를 눌러보았
다. 기이하게 생각한 손님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하고, 기가 막힌 크리스가 어떻게 해 볼 생각으로
피아노로 다가가는 순간, 기술적으로 완벽한 음정이 술집 안을 가득 메웠다. 데이빗이(왕벌의 비
행)으로 건반 위를 내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입이 딱 벌어진 손님들은 이내 소리를 죽였다. 그
때부터 데이빗은 리카도의 정규 연주자가 되었다.
우리가 데이빗의 하숙집에 도착하자 데이빗은 서류가방을 겨드랑이에 끼고 나타났다. 여전히
너덜너덜한 악보뭉치가 빠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았다. 약간 짧은 바지는 아쉽게도
손질이 안된 상태였지만, 깨끗한 흰 셔츠에다 검은 나비넥타이 차림이었다. 정수리 부분이 벗겨
져 가는 곱슬 금발머리를 물을 발라 뒤로 빗어 넘겼고, 그리고 저 빼놓을 수 없는 담배가 이 사
이에 끼여 있었다. 그는 얼른 가고 싶어 안달이었다.
리카도가 자리잡은 동네는 어느 모로 보아도 유행과는 거리가 멀었다. 술집 위층에는 배낭족
들 호스텔이 있었고, 술집 내부는 50년대 스타일이었다. 어두운 벽 색깔에다 철제 의자가 있었
고, 창은 없지만 화분이 아주 많았다. 안으로 들어서자 청중들의 기대감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
다. '안녕', '어서 와요', '잘 있었어요?' 등등 인사를 들을 때마다 데이빗은 씩 웃곤 했다. 여
러
계층, 여러 연령대 남자들이 바에, 벽에 늘어섰고, 의자는 빈 곳이 없었다. 모두가 '천재' 를 기
다
리고 있었다. 상당수는 매주 두세 번씩 찾아오는 손님이었다. 거의 팬클럽이라 할 수 있었다.
광채 띤 데이빗의 얼굴은 마치, "이게 꿈일까 생시일까!"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홀 안 한가운데 작은 무대 위에 피아노가 놓여 있었는데, 어린아이가 어머니에게 달려가듯이
데이빗은 곧장 피아노로 다가갔다. 연주를 시작하지도 않았지만 피아노에 얼마만한 애정을 지니
고 있는지를 금방 알 수 있었다. 그가 자리잡고 앉자마자 - 입에는 담배가 매달린 채였다 - 커
피 한 잔이 나오고, 데이빗은 그 커피를 단숨에 꿀꺽 삼켰다. 손님들은 이제 대부분 주의를 기울
이고 있었다. 단골들은 차분히 기다렸고 처음 온 사람들은 호기심이 가득했다.
청중이 데이빗에게 이끌리기 시작한다는 것을 그의 손가락이 건반을 가볍게 건드려 나오는 첫
소리에 바로 알 수 있었다. 데이빗은 달라져 있었다. 평소에는 어색하고 정신없이 시끄러운데다
가 불안해 보이는 사람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자기 재능에 자신감을 갖고 완전히 몰입하는
것이다. 그의 얼굴에는 뭐든지 다 아는 체하는 것 같은 장난기마저 어려 있었고, 그의 엄청난 클
래식 레퍼토리 중 몇 곡인 쇼팽의 (G 단조 발라드)와 리스트의 (헝가리광시곡 2번), 베토벤의 (열
정)을 연주하는 동안 기쁨이 퍼져나오는 듯했다.
연주하는 내내 무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는 여자가 새 담배에 불을 붙여 데이빗의 입에 물려주
었다. 커피가 계속 나오고 잔이 금방 비워졌지만 음악은 멈춤 없이 계속되었다. 팬들, 술잔을
꼭 쥔 남자들, 음악 애호가들, 그리고 클래식 라이브를 처음 듣는 사람까지 모두가 그가 펼치는
마법에 매료되었다.
데이빗은 무궁무진한 에너지를 지니고 있었다. 잠시 쉬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말이 들리자 데
이빗은 "에이, 그냥 계속 치면 안 되나요?" 하면서 연주를 계속했다.
마침내 데이빗이 정말로 잠깐 쉬는 사이에 나는 제일 좋아하는 작품이 무엇인지 물어 보았다.
그는 "라흐 3번. 세르지 라흐 3번." 이라 대답했다. 그런 다음 곧장 피아노로 돌아가더니, 세르
게이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 전체를 연주했다. 관현악 합주 부분까지 피아노로 채워
넣으면서 연주했다. 공연활동을 하는 피아니스트들이 피아노 협주곡 가운데서도 가장 어려운 곡
으로 치는 이 불후의 작품이 데이빗의 영혼을 타도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그는 음악에 자신
을 내맡기고 있었다. 건반은 그의 연장선처럼 보였고, 사람과 음악과 피아노가 하나가 되는 듯했
다.
나는 넋을 잃었다.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다. 나는 거장들의 연주회에 가 본 적이 많
았지만, 이번 연주는 유달리 장엄하고 열정적이었다.
연주 마지막에 크리스가 다가와서, 데이빗이 리카도에서 일한 지 3개월 됐지만 그렇게 연주하
는 것을 들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했다. 데이빗은 기분 좋은 얼굴로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
다. 그리고는 열띤 어조로 단호하게 대꾸했다. "길리언 때문이지요."
데이빗을 다시 하숙집에 데려다 준 뒤, 크리스는 데이빗이 내게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날 크리스는 데이빗에 관해 여러 가지 얘기를 해주었다. 리키도에서 연주
하기 시작하던 무렵 데이빗은 교회에서 운영하는 길더클리프라는 기숙사에서 지내고 있었다. 반
쯤은 병원이고 반쯤은 하숙집이었던 그곳은 편안한 가정과는 거리가 멀었고, 기숙사 안의 다른
거주자들과의 대화는 거의 불가능했다.
데이빗에게 일자리를 주고 나자 크리스는 그가 '정상적인' 사회생활로 나아가는 한걸음을 더
내
디딜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데이빗이 하숙집에서 지낼 수 있게 주선해 주었다.
그 곳에서는 낮이건 밤이건 원하는 때에 얼마든지 피아노를 칠 수 있었다. 이런 모든 것을 통해
크리스는 데이빗이 지난 12년간 악몽 같은 결과만 남긴 정신병원 생활방식에서 마침내는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다음날 아침 데이빗은 크리스의 집에 수영하러 왔다. 여느 때나 다름없이 그는 지나치게 말과
동작이 많으면서도 뿌리칠 수 없는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나는 수영장 가에서 중얼거리며
서 있는 그를 관찰했다. 그는 어깨를 잔뜩 움츠려 구부정하게 서 있었고, 팔은 축 늘어져 덜렁거
렸으며, 턱이 거의 가슴에 닿아 있었다. 마치 머리를 감추려는 것 같았다. 가슴 깊은 불안감과
초조함이 배어 있었고, 자신감이라고는 전혀 없는 자세였다. 나는 그가 몸을 펴 어깨를 뒤로 당
기고 똑바로 서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데이빗은 담배를 내던지고 물에 뛰어들었다. 헤엄치는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그가 물을 얼마
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었다. 수영장을 따라 이리저리 헤엄치며 다니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부드러운 리듬이 그를 감싸면서 조바심이 녹아 없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꽤 오랫동안, 같은
박자를 유지하면서 수영했다. 보기 좋은 광경이었다. 그러나 다시 물에서 나온 순간 그는 곧장
움츠러들어 고개를 떨구고 팔을 늘어뜨렸다. 다시 불안감에 휩싸인 것이다.
우리는 수영장 가에 서서 음악과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전히 토막토막이었지만,
이제는 나도 익숙해져 있었다. 데이빗은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손짓을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몸
가짐이 변하면서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가 내게 팔을 두르고, 조용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
다. "길리언, 나랑 결혼해 주겠소?"
나는 놀랐다. 그리고 이내 "예." 하고 대답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상식에 비추어 그
런 대답을 할 수는 없었다.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친구가 되자고 대답했다.
그 순간부터 우리 사이에는 절대로 깨어지지 않을 특별한 연결고리가 생겨났다.
꿈 같은 나날이 지나갔다. 데이빗 덕분에 내 집중력과 능률은 간곳 없이 사라졌다. 나는 완전
히 평형을 잃어버렸다. 그런 느낌은 처음이었으며 그다지 달가운 것이 아니었다. 나는 퍼스에
온 목적에 집중하기 위해 애써야 했다. 나는 점성가 연맹 지부 창립모임을 주최하러 온 것이고,
지부는 성공적으로 출발했다. 그렇지만 그 나머지 시간은 '헬프갓'이라는 안개에 뒤덮여 있었다.
이윽고 시드니로 돌아갈 시간이, 데이빗과 작별할 시간이 되었다. 나는 크리스에게 계속 데이
빗과 연락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크리스는 이렇게 말했다. "좋죠. 데이빗은 될 수 있는 대로
친구가 많이 있어야 하거든요." 그리하여 정기적인 편지 교환이 시작됐다. 이따금 나는 전화도
걸었다. 그럴 때면 그가 얼마나 기뻐하는지, 나도 흥분되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데이빗은 말하고 연주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편지를 썼다. 열정적으로, 황홀감에 빠진 듯이
썼다. 편지는 언제나 비슷한 내용으로 시작했다. "자기 편지 잘 받았어요, 너무너무 고마워요,
당신은 천사예요, 달링!!"
그런 다음에는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뜻을 적었다. "전화해 줘서 고마워요. 뛸 듯이
기뻤어요... 날 보살펴 줘서 고마워요... 차익 테이프 고마워요, 달링 길리언. 어제 들었어요. 영
감이 살아났죠, 달링 길리언. 당신도 나한테 영감을 불어넣어 주죠!... 또 길리언 달링, 세익스피
어 소네트도 고마워요. 오늘 아침에 읽었어요. 영감에 차 있더군요. 당신을 사랑해요, 달링."
데이빗은 편지마다 거의 빠짐없이 우리가 만난 일에 대해 언급했다. "수영장 옆에서 당신을
안고 입맞추던 걸 떠올리고 있어요, 길리언 달링! 당신도 기억해요 달링? 당신은 나를 아주 행
복하고 느긋하게 해 주었죠. 당신이 없었더라면 그렇게 잘 연주할 수 없었을 거예요, 길리언 달
링! 그래서 지금은 연주할 때 당신 생각을 해요. 그러면 연주를 더 잘 하죠."
데이빗은 또 종종 이런 말도 덧붙였다. "크리스도 천사예요, 달링. 그분 만난 건 정말 운이
좋았어요. 그리고 당신을 만난 건 더 운이 좋은 겨죠!... 길리언 달링... 곧 또 만날 수 있기를 빌
어요, 길리언 달링 - 그 때에는 안고 입맞추고 등등을 많이 해야죠!! 야호!!"
데이빗에게 보내는 내 편지는 따뜻하고 사랑이 깃들어 있었지만 조심스러웠다. 데이빗은 꾸밈
없고 끝도 없는 사랑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런 식의 애정은 나로서는 이제까지 겪어보지 못한 것
이었다. 그렇지만 크리스가 '심한 정신병 환자'라고 표현했고 또 나보다 열 다섯이나 아래인데다
가 재산도 없고 장차 직업에 대해서는 커다란 물음표가 드리워진 사람과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
할 길이 없었다. 게다가 그는 유대인이었고 나는 이교도였다. 천생연분과는 아예 거리가 멀었
다. 그럼에도 그는 계속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제 2장 발견
1983년까지, 그러니까 데이빗을 만난해까지 나는그런 대로 풍요롭고 다사다난하게 살아왔다.
열 여섯에 결혼해서 그 뒤 22년 동안 어머니와 아내로, 또 직업인으로 활동했다. 아이들이 학교
를 마치고 나니 나는 긴 휴가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홀로 세상을 다니면서 인도나 프랑스, 포
르투갈 등 여러 나라도 가보고, 또 오랫동안 꿈으로 간직해 온 러시아 여행도 해 보고 싶었다.
나는 새로이 발견한 이같은 자신감에 기뻤고, 그 이듬해 남편과 이혼했다.
서른여덟이 되자 나는 문득 십대 시절에 거르고 지나친 온갖 것들을 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나이 많은 한 남자를 사귀게 되자 우습게도 이런 마음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고, 그 때부터 10년
간 퀸즈랜드해안에 있는 누사 헤즈의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편안하게 지냈다.
상담 점성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였다. 이 고대 학문의 과학적 측면, 특히 레이
놀드 에버틴이 발전시킨 분야에 빠져들어 학위를 얻기로 결심했다. 학위는 3년간 도리스 그리브
즈의 애정 어린 지도를 받은 끝에 얻어냈는데, 도리스 그리브즈는 많은 사람들이 오스트레일리아
'점성학의 어머니'로 꼽는 사람이다. 그런 다음에는 나도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내
가 아는 것을 학생들과 나누는 일이 즐거웠고 학생들을 점성학에 도전시키는 일이 흥미로웠다.
누사에서 맺은 인연이 다하자 나는 난생 처음으로 내가 완전히 자립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돈도 궁하지 않았고, 집세나 그 밖의 문제로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아이들은 이제 어른이 되
어 제각기 다른 주에서 살면서 경력을 쌓아가고 있었다. 가족생활을 시작한 지 33년이 지나자
더 이상 집청소나 음식준비를 할 필요가 없어졌고, 다른 사람을 뒷바라지 할 일도 없었다. 이제
자유를 만끽할 수 있게된 것이다.
나는 시드니로 이사를 갔고, 점성학은 내 직업이 되었다. 협의회나 강습회를 하기 위해 해외나
오스트레일리아 근처로 여행을 다니는 등 사는 것이 바쁘고 재미있었다.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여객선 안에서 강연을 하기도 했고, 섬에서 섬으로 떠돌아다니며 흥미로운 사람들도 만나고 아무
런 걱정 없이 재미있는 나날을 보냈다.
크리스 레이놀즈와 알게 된 것도 이런 여행길 배 안에서였다. 그 때 그는 친구와 여행을 다니
고 있었다. 크리스는 퍼스에서 개업한 의사로서 심리학에 관심이 많았다. 우리는 저녁식사 후
그의 생활에 대해, 두 아들과 일에 대해 자주 이야기를 나누었다. 쌍둥이자리 사람들이 대개는
관심분야가 넓고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진행시킬 능력이 있는데, 그 역시 쌍둥이자리답게 리카
도에 지분을 갖고 있다는 얘기를 했다. 항해가 끝날 무렵 그는 이렇게 말했다. "혹시 퍼스에 오
실 일이 있으면 우리 집에서 지내시죠.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그때에는 그와의 만남이 어떤 촉
매가 될지 조금도 알지 못했다. 그렇지만 무엇에 대한 촉매일까? 데이빗이 내게 결혼하자고 했
고, 나는 그에 대한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도대체 내가 어디에 빠져들고 있는 것일까?
시드니로 돌아왔을 때 심령능력이 강한 친구인 일이아노가 전화를 걸어, 자기 집에 와서 점성
학 자문을 해달라고 청했다. 자문이 끝난 뒤 일이아노는 점을 쳐 주겠다고 했다. 그녀는 내가
데이빗과 만난 일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었는데도 이렇게 말했다. "어린애 같은 성
격의 독특한 남자야. 그리고 손이 아주 특별하군."
"있잖아, 그 사람은 정이 많게 느껴져. 그렇지만 그것 말고도 또 있어. 필요한 게 아주 많은
데... 손이야, 그 사람 손!" 일리아노가 소리쳤다. "손으로 일하는데 능력이 특별해." 마침내 그녀
는 내가 그와 결혼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전에도 점을 쳐 본 적이 많았고 언제나 열린 마음으로 점괘를 받아들였지만, 최근 벌어진
일이 있고 보니 그녀의 말에 벼락이라도 맞은 듯 벌떡 일어나 앉았다.
몇 주 뒤 나는 거실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텔레비전을 켜 두었지만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
았다. 그런데 갑자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 화면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네이션 와이드)라
는 프로그램에서 데이빗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다. 퍼스에 다녀온 뒤로 내 생각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된 바로 그 사람을 화면으로 보고 있자니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따스함과 매
력, 또 저 특이한 몸가짐이 그대로 텔레비전에서 뛰쳐나와 나를 감싸 안을 것 같았다. 그제야 나
는 그를 깊이 사랑하고 있음을 알았다. 나는 멍하니 앉아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까 생각했다.
다른 사람과의 이처럼 놀라운 연대감과 자아보다도 더 큰 것 같은 사랑은 찬란하면서도 낯설었
다.
나는 딸 수에게 전화를 걸어 내 감정을 털어놓았다. 수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요, 엄마가 12
월에 퍼스에서 돌아왔을 때 그분과 사랑에 빠졌다는 걸 알았어요. 이제 그걸 깨달았다니 기뻐
요." 그를 사랑하는 까닭을 물었을 때나는 데이빗의 솔직함과 조건 없는 믿음, 따스함, 친절과 유
머에 대해 말했다. 음악은 덤이었다.
아들 스콧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아들의 반응은 간단했다. "사랑한다면 결혼하셔야죠!" 전화
를 끊었을 때 나는 일부 사람들이 '정신 이상자'로 여기는데다가 성가시기가 이만저만하지 않
은
사람에 대한 내 감정을 아이들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준 데에 대해 고마움을 금치 못했다.
그 즈음 퍼스의 상황이 바뀌고 있었다. 매번 전화를 걸 때마다 데이빗은 점점 더 슬퍼하고 외
로워했다. 자신의 음악에 대해서조차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계속 내게 부탁했다.
"만나러 올 수 없어요, 길리언 달링? 내가 그리 가면 안될까요? 언제 볼 수 있나요? 언제 만
날 수 있나요?"
점점 더해 가는 데이빗의 불안감은 들쭉날쭉한 그의 글씨에서도 나타났다. 그는 이렇게 썼다.
"항해는 어땠나요, 자기? 배타고 강의하러 다니니 정말 좋겠어요! 정말 즐거운 인생이잖아요!
나도 곧 당신과 함께 항해에 나설 수 있으면 좋겠군요. 그거, 정말 좋을 거예요!!... 다시 당신을
안고 입맞추고 싶어요, 달링. 아주 가까운 장래에 말이죠!!"
그보다 한 달 전에 크리스는 데이빗이 지내는 곳이 마음에 들지 않아 자기 집에서 함께 지내도
록 했다. 그렇지만 데이빗은 전 기숙사에서 편안히 지내고 있었고, 다른 기숙사 사람들과도 어울
릴 수 있었다. 나는 데이빗이 얼마나 성가실 수 있는지를 보았기 때문에, 거처를 옮긴 점이 염려
되었다. 매일 그는 열다섯에서 스무 잔 정도 커피를 타 마셨는데, 설탕은 다섯 스푼씩 넣었다.
타면서 설탕과 커피를 온통 바닥에 쏟아 놓곤 했다. 샤워를 수도 없이 하면서 젖은 수건을 집안
여기저기에 족히 열 장 정도는 흩어 놓았다. 하루에 담배 125개피를 피웠고, 옷이나 책, 악보 등
은 조금도 가지런하게 해놓지 못했다. 거기에다 쉴 새 없이 말을 하기 때문에 평화롭고 조용한
분위기는 불가능했다.
데이빗의 큰 약점 가운데 하나가 어느 누구의 의견도 쉽게 받아들인다는 점이었는데, 크리스가
이사하자고 했을 때에도 데이빗은 다른 사람이 자신을 견디기 힘들어 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
도 반대하지 않았다. 1월 말에 데이빗은 나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이번 주말에 크리스네 집
으로 이사를 가요. 정말 잘됐잖아요!! 어떻게든 크리스가 나를 배겨낼 수 있다면 말이죠. 난
좀 골치 아픈 사람이거든요!!"
데이빗이 처한 상황이 특히 슬픈 것은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참기 힘들 거라는 사
실을 알면서도 자신을 통제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그는 크리스에게 깊이 감사를 느꼈고,
최선을 다해 보기로 결심했다. "당신과 크리스를 실망시키지 않을 거예요, 달링 길리언! 음식도
아주 좋고, 방도 아주 좋고 피아노도 아주 좋은게 있어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그러나 크리스가 데이빗과 함께 생활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실상을 이내 실감하면서 '걱정'
할
것이 아주 많아졌다. 데이빗은 냉장고를 덮치다시피 했고, 커피를 모조리 마셨으며, 더운 물을
죄다 써버렸고, 악보나 그밖의 소지품을 집안 여기저기에 흩어놓았으며, 피아노 의자에다 담배구
명을 내놓기까지 했다. 크리스가 받는 스트레스는 엄청났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게 되는 일도
종종 있었다. 의사 일도 해야 하고 리카도 쪽 일도 보아야 했으니 데이빗을 돌보는 것은 사실상
무리였다.
데이빗은 이런 모든 상황을 예민하게 인식하면서, 그 나름대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오랫동
안 요양원에서 공동생활을 했는데, 크리스가 병원에 나가고 없는 낮동안 집에 혼자 있게 된 것은
커다란 변화였다. 다른 기숙사 사람들을 그리워했고, 나를 그리워했다.
어느 날 밤 11시에 전화벨이 올렸다. 텔레파시 친구 일리아노였다. 무슨 급한 일로 밤늦게 전
화를 걸었을까 궁금했다. 일리아노는 방금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데이빗이 깊은 고통을 겪
고
있다는 것이다. "아, 길리언, 그 사람이 아주 깊이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 같아. 어떻게 표현
해야 될지 모르겠어. 퇴행하고 있다는 것 느껴." 일리아노는 또 데이빗이 태아 자세로 웅크리고
누워 있는 영상도 보았다고 했다. "내가 이런 말 할 위치는 아니지만, 내 생각에 당장 그 사람한
테 가 보는 게 좋을 거 같아." 지난 몇 주 동안 전화에서 데이빗이 점점 힘들어하는 것처럼 들렸
으므로 일리아노가 염려하는 것을 쉽사리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수에게 전화를 걸어 데이빗이 겪고 있는 어려움에 대해 말한 다음 퍼스로 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수는 무슨 일이든지 돕겠다고 했다. 그렇지만 데이빗의 반응이 어떨지 몰라 나는 타롯
카드로 점을 쳐 보았다. 아프도록 슬픈 (열 개의 검)이었다. 남자가 땅바닥에 엎드려 있고 등에
는 검 열 자루가 꽂혀 있는 모양의 카드이다. 남자는 한쪽 손가락을 십자가 모양으로 꼬고 있다.
나는 이 카드 점괘를 크리스가 내 제안을 곧장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단둘이 있게 된 것이 처음이고 보니 데이빗의 흥분이 내게도 점염되는 것 같았다. 그는 나와
있게 된 것이 한없이 기쁜 모양이었다. 건강도 순식간에 좋아져 보였다. 그러나 잠자리에 들 시
간이 되었을 때 데이빗이 약을 찾기 시작했는데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 "허겁, 지겁, 크리스는
허겁지겁 떠났어. 달아나듯이. 성급하게 말이야."
그는 집안을 뒤지고 다니면서 계속 이렇게 뇌까렸다. "내 약을 잊고 갔어. 내 약을. 큰일이야, 큰
일. 길리언 달링, 어디 두었을까요? 어디? 왜?... 약이 없으면 잠도 못 자니까요."
데이빗은 지난 몇 년간 항정신병약인 세레네이스를 먹었지만, 지금은 하루에 세레팍스 네 알만
먹었다. 그는 약을 찾지 못해 점점더 초조해 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약을 먹고 살아온 만큼 그
런 조바심은 당연한 것이었다. 나는 그와 함께 침대 가에 앉아 그를 안아 주었다. 우리는 사랑
을 나누었고 마침내 그는 잠들었다.
아침이 되어 잠에서 깨어나자 데이빗은 나를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세레팍스보다
낫군요!" 그것은 나에 대한 최대의 찬사였다. 데이빗은 그 때부터 수면제를 한 알도 먹지 않았
다.
퍼스에서 데이빗과 내가 함께 지냄 그 열흘간은 우리 두 사람 모두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우
리는 함께 산책하고 수영하면서 재회를 즐겼다. 그러나 나는 이내 닥쳐올 현실을 맞닥뜨릴 준비
가 되어 있지 않았다. 데이빗이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을 본 것은 리카도에서 뿐이었다. 그 곳
에서는 데이빗이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또 그의 재능을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겼다.
어느 날 나는 데이빗에게 스완 강을 따라 프리맨틀로 여객선을 타고 나들이를 갔다가 버스로
돌아오자고 했다. 그는 왠지 망설이는 듯하다가 그러자고 했다. 태양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날이
었고 경치도 아주 좋았다. 나는 두 사람이 먹을 오후 간식거리를 쌌다.
배에 올라 제일 뒤로 가니 자리가 있었다. 데이빗은 내게 바짝 붙어 앉았다. 배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사람들이 뒷자리로 오자 데이빗이 불편해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낮선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데다가 마음을 가라앉혀주는 피아노도 없고 보니, 평소 그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표현
하곤 하는 친근감은 간 데 없이 사라지고 데이빗은 자신 속으로 움츠러들기 시작했다. 이 곳에
서는 사람들이 그를 사랑해 주지도 않고, 그래서 그의 몸가짐에서는 거부당할까 두려워하는 마음
이 그대로 드러났다. 데이빗은 두 팔로 스스로를 감싸 안고 나에게 더욱 더 바짝 붙어 웅크러들
었다. 이가 맞부딪히고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렸다. 나는 사람들이 데이빗으로부터 멀찍이
물러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저 건 도대체 뭐야?
어디가 잘못된 거야? 전염병은 아닐까? 위험한 사람은 아닐까?"
나는 데이빗을 꼭 끌어안았다. 가슴이 아팠다. 그는 세상에 이바지할 재능이 너무도 많았지만
신경증의 제약을 받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장벽을 넘어야 했다. 거부와
소외에 대한 어마어마한 두려움 때문에 움츠러든 그를 보자 나는 그가 얼마나 고통을 겪고 있는
지 알 수 있었다. 리카도가 그의 치료에 도움이 되기는 했다. 그러나 그의 특별한 재능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 가득찬 양보 없는 이 세상이라는 곳은 여전히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나들이를 다녀온 뒤로 나는 데이빗의 어려움에 대해 - 사랑 받고 싶어하는 거의 강박적인 욕구
와 그를 가로막고 있는 장벽에 대해 - 더욱 잘 알 수 있었다. 그에 대한 내 감정은 이제 또다른
차원에서 더욱 강해졌다. 그는 24시간 보살핌을 받아야 했고 끊임없는 사랑이 필요했다.
우리는 크리스의 집 뒤쪽 베란다에 앉아 우리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데이빗은 정
말로 결혼을 하고 싶어했다. 그는 다시 나를 졸랐다. 아직 결혼에 대해 확신은 없었지만, 그래4
도 나는 내가 뭔가 다짐을 했다는 사실을 가슴 깊이에서부터 알 수 있었다.
며칠간의 휴가에서 돌아온 크리스는 우리가 팔짱을 끼고 거리를 걷고 있는 것을 보자 반농담조
로 말했다. "두 분이 결혼하지 그래요?" 우리도 그럴까 생각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크리스는 약
간 당황했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한 가지 해결책이 될 것임은 분명했다.
그 날 오후 크리스와 나는 나와 데이빗의 관계에 대해, 또 둘이 함께 하기로 했다는 결정에 대
해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데이빗의 상태에 대해 아주 솔직하게 말하면서, 거부당할거
라는 두려움과 그밖의 불안감 때문에 데이빗은 만나는 사람에게마다 상대가 최고라고 말한다고
했다. 크리스는 나에 대한 데이빗의 호감이 진실한 것인지, 그리고 결혼을 통해 내가 얻을 것은
무엇인지 궁금해했다. 크리스는 사려가 깊으면서도 조심스러웠다. 우리 둘 모두가 잘못된 선택
을 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가 그렇게 솔직하게 말해 주는 것이 고마웠지만, 데이빗이 정말로 나와 함께 있고 싶어
한다고 느꼈고, 또 이미 우리 두 사람의 운명이 서로 얽혀서 내가 그의 삶에서 한 부분을 차지하
고 있다고 느꼈다. 그 한 부분이 얼마나 가까운 한 부분인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었다. 그 시
점에서는 내가 보호자든, 애인이든, 아내든, 친구든, 아니면 이런 것들을 섞은 어떤 것이든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일단 데이빗에게 다짐을 한 이상 돌이킬 수는 없었고 또 이 관계에
서는 시험 가동이라는 것도 있을 수 없었다. 나중에 알게된 일이지만 데이빗의 인생에 드나든
사람들은 많았다. 애정은 있으면서도 전적으로 매달릴 준비가 되지 않았거나 그럴 수 없었던 사
람들이었다. 크리스는 우리가 성급하게 결혼하지 말고, 내가 데이빗과 함께 자기 집에서 머무르
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의했다. 나는 동의했다.
그 때 이후로, 내가 데이빗과 함께 지낸 시간이 두 주밖에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런 약속을
할 수 있었는지 묻는 사람들이 많았다. 당시 상황을 분석하자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옳다는 확신과 믿음이 있었다. 나는 데이빗에게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돌아오겠다고 하
고 시드니로 돌아가 그곳 생활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제 3장 소유 아닌 사랑
충동? 어리석음? 그럴 수도 있겠다. 사수자리 사람들은 점성학에서 '낙천가'로 꼽는다. 이
들
은 대체로 자신의 본능에 의지하고 충동적으로 행동한다. 결과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고
상황에 뛰어드는 성격이다. 사수자리 사람들의 공통점은 낙천주의다. 잔이 항상 반쯤 차 있다고
생각하지 반쯤 비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이들은 또 말보다는 행동을 먼저 시작하는 편이
다.
3중으로 사수자리에 속한 사람이다 보니 나는 열흘만에 시드니의 생활을 정리했다. 점성학 강
좌를 취소하고, 내가 살던 그 아름다운 집에서 이사를 나오고, 또 친구들에게 모두 작별인사를 했
다.
퍼스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잠시 의구심이 일었다.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 걸까? 데
이빗이 어려움을 이겨내도록 내가 충실히 도와줄 수 있을까? 크리스뿐 아니라 보살펴 주려는 사
람들의 인내심을 극도로 건드리는 사람과 정말 함께 지낼 수 있을까? 그러다가 일전에 그레이스
라는 여자에게서 들은 지혜로운 말이 생각났다.
유니티파 교회 목사인 그레이스는 거의 죽을 뻔한 일도 겪었고,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난 뒤 다
른 중독자들이 정상을 되찾도록 돕고 있었다. 그레이스는 사람이 어떤 일에 도전하면서 할 수
있는 가장 헛된 말이 '해 본다'거나 '하지 않으면 안된다'거나 '불가능하다'는 말이라 했다. '해
본
다'고 말한다면 시작도 하기 전에 도전이 성공하지 못할 거라고 의심한다는 뜻이다. '하지 않으
면 안된다'고 말한다면 어떤 죄의식이나 책임감 때문에 시작하는 것이지 진실로 마음이 내켜서
시작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레이스의 말에 따르면 '불가능하다'는 말은 거
룩한 존재의 능력에 한계를 긋고 기적을 믿기를 거부하는 것과 같다. 나는 오랫동안 이런 생각
을 염두에 두고 삶을 대해 왔는데, 비행기가 퍼스에 착륙하려는 이 시점에 와서 태도를 바꿀 수
는 없다고 판단했다.
데이빗은 나를 보고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는 그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쁜 나
머지 앞으로 내가 지내게 될 곳이 어떤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크리스의 집
뒤쪽에 붙어 있는 작은 베란다방에는 1인용 침대 하나, 옷장, 의자 하나가 있었다. 벽에는 아무
것도 없었고 데이빗에게는 소지품이 없었다. 낡은 카세트라디오 하나가 전부였다. 그리고 크리
스와 데이빗을 빼면 퍼스에는 정말 친한 친구가 거의 없다는 점도 마음에 걸리지 않았다. 이런
모든 점에 비추어 볼 때 이번 일이 중대한 적응력 시험이될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한 가지 확
실한 보너스가 있었다. 바로 데이빗이었다! 그 결과 나는 그 다음날 그 보너스가 다른 여자와
함께 주말을 지낼 것이라고 선언했을 때 완전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도티-스코티에게 가는 길이에요. 도티-스코티에게, 달링. 다 예정에 있던 거예요, 다 예정에
있던 거. 주말 내내, 주말 내내." 데이빗은 미안한 기색이라곤 조금도 없이 말했다. 나는 공허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도티-스코티'는 도로시라는 이름에 데이빗이 붙인 별명이었다. 도로시는
데
이빗보다 몇 살 위였고, 남편과 별거 중이었으며, 아이가 몇 있었다. 데이빗은 우리가 만난 지
얼마 되자 않아 도로시에 대해 내게 들려주었다. "어떻게 보면 내가 정말 어려울 때, 세상이 나
를 외면할 때 나한테는 도티-스코티 이었죠. 그녀가 나를 어느 정도 살려준 셈이에요. 도티-스
코티는 나한테 음식을 주고 또 주고 또 내가 피아노를 아주 잘 친대요."
도로시는 데이빗이 가장 어렵고 힘든 시기에 그를 만났다. 1976년 데이빗이 한 요양원에서 다
른 요양원으로 옮기는 사이 석 달 동안 프레드와 에블린 프라이스라는 기독교인 부부가 자선 차
원에서 데이빗을 그들의 집네 머무르게 했다. 어느 날 프라이스 부부와 함께 교회 행사에 참석
했을 때, 데이빗은 머뭇머뭇 피아노로 다가가 피아노 연주자를 위해 악보를 넘겨주기 시작했다.
연주자의 이름은 도로시 였다. 단정치 못하고 비틀거리는 이 사람이 악보를 볼 줄 안다는 점이
놀라웠다. 도로시는 그의 도움을 고맙게 생각했고 음악은 얼마나 아는지, 이름은 뭔지 물어보았
다. 데이빗이 이름을 말했을 때 도로시는 충격을 받았다. 퍼스에 있는 음악가 대부분이 그렇듯
이 도로시는 데이빗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정신질환으로 고통을 겪는 시기에 대해서는 알지 못
했다.
도로시는 음악교사였는데, 충실한 기독교인이었던 만큼 이내 데이빗을 도우려고 했다. 그녀는
자기 집으로 데이빗을 초대해서 피아노를 치게 했다. 그러나 데이빗은 다시 건강이 나빠져 프라
이스부부 집에서 나와 그레이랜드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도로시는 병원이 데이빗에게 나쁜 영향
을 준다고 생각했지만 가족이 있었기 때문에 데이빗을 보살피는 책임을 떠맡을 수는 없었다. 그
래서 도로시는 데이빗이 병원 역할이 약간만 가미된 길더클리프 기숙사에 들어갈 수 있도록 주선
해 주었다.
데이빗은 그 뒤에도 계속 주말을 도로시 집에서 지냈다. 둘은 음악에 대한 사랑을 나누었고,
연주회나 그 밖의 나들이도 자주 나갔다. 그 몇 년 동안 데이빗에게는 친한 친구가 도로시뿐이
었다. 그 무렵 데이빗의 연주는 마음속의 혼란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당시 녹음된 테이프를 들
어 보면 그 절망의 깊이가 드러나 있다. 그러나 그 뒤 5년 동안 도로시의 도움으로 데이빗의 연
주는 차츰 나아졌다.
그러나 내가 데이빗을 만나기 몇 달 전 도로시와 데이빗은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데이빗
은 퍼스의 케리녑 오케스트라와 함께 작은 연주회에 참가했는데, 도로시는 이런 활동에 별로 관
심을 보이지 않았다. "난 정말 내 나름대로 일을 하고 있었던 거예요, 안 그래요? 어떻게 보면
난 스스로 헤쳐 나가고 있었던 거예요." 둘 사이의 시들어 가는 우정에 대한 데이빗의 설명이었
다.
짐을 꾸리러 시드니로 돌아가기 전 나는 크리스의 충고에 따라 도로시에게 전화를 걸어 나를
소개했다. 나는 데이빗을 깊이 사랑하고 있고 또 퍼스로 돌아와 데이빗과 함께 지내기로 했다고
말했다. 도로시는 자신이 데이빗을 '애인'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내색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
보
다는 오히려, 가족이 처한 상황 때문에 데이빗을 맡은 수 없었다면서 내가 돌아와 그 역할을 하
게 되어 기쁘다고 했다. 그럼에도 도로시는 크리스가 데이빗을 길더클리프 기숙사에서 데리고
나오지 알았어야 했고 또 데이빗이 리카도에서 너무 일을 많이 하고 있다고 불평을 했다. 도로
시는 크리스가 데이빗과 그녀 사이를 갈라놓으려 하고 있고 그래서 이제는 둘이 별로 만나지 않
게 됐다고 덧붙였다.
다가오는 주말은 그녀의 말처럼 되지 않을게 분명했다. 크리스는 얼마 전 데이빗이 도로시한
테 가기로 했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뒤죽박죽된 심정과 외로움을 홀로 달래야
했다.
내가 데이빗과 함께 지내기 위해 퍼스로 아주 옮겨왔다는 사실, 또 내가 친구들과 일자리를 모
두 뒤에 남겨 두고 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사실을 데이빗이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
을 나는 알았다. 나는 데이빗이 고통이 가득한 흐릿한 세계 속에 갇혀 있는 데다가 그에게 보이
는 어떠한 친절에도 감사해 마지않는 성향이 있어서, 조금이라도 친절하게 대하는 사람과 진심으
로 그를 사랑하는 사람을 따로 구별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만나는 사람이면 누구
든 즐겁게 해주고 싶어했고, 따라서 무슨 부탁을 받든 거절하지를 못했다. 데이빗과 함께 살면
현실적으로 이런 일에도 부딪히게 될 것이라는 점은 이것에 오기 점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나 빨리 이런 일을 당한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었다.
데이빗에게 계획을 바꾸어 가지 말라고 부탁할 수도 있을 테고 또 그러면 데이빗은 금방 그러
마고 했겠지만, 그렇게 하면 이미 압박에 시달리고 있는 연약한 그의 정신에 또다른 압박을 주는
셈이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런 상황에서 내가 이래라 저래라 하는 일은 옳지 않다고 느꼈다.
그가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인 것이다.
그 뒤 24시간 내내 나는 내 감정과 싸웠다. 그리고 밤동안 친구 그레이스가 했던 지혜로운 말
몇 가지를 더 생각해 냈다. 그레이스는 사랑은 자유로워야 하며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 아님'을
말해 주었다. 다른 사람에게 느끼는 사랑은 사실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감
싸고 있는 저 끝간데 없는 사랑, 그 위대하고 온전하고 거룩한 사랑에 속하는 것이라 했다. 그
사랑은 누구나 한없이 주고받을 능력이 있지만, 이 위대한 사랑의 아주 작은 일부분이라도 오직
우리 자신의 것으로만 따로 떼어놓고 싶어한다면 우리는 사실상 사랑이 완전한 경지에 이르지 못
하도록 한계를 긋게 되는 것이라 했다.
나는 이 말을 내가 처한 상황에 적용했고, 아침 무렵에는 실망과 아픔을 씻을 수 있었다. 데이
빗이 즐거운 주말을 보낼 수 있도록 진심으로 바라는 상태에까지 도달했다.
아침을 먹고 있을 때 전화가 울렸다. 도로시의 딸이었다. 그녀는 이제는 데이빗이 자기 집에
오지 않게 해 달라고 말했다. 조금 뜻밖의 전화였다. 그리고 몇 주 뒤 데이빗이 다시 일전의 약
속대로 주말을 보내러 가게 될 즈음 다시 데이빗을 찾는 전화가 왔다. 내용을 같았다. 딸은 도
로시가 몸이 좋지 않다고 했다. 나는 약간 실망을 느꼈다. 나 때문에 데이빗이 특별한 친구를
잃게 되지나 않을까 두려웠다. 그것은 절대로 바라지 않는 일이었다. 데이빗에게는 그가 얻을
수 있는 친구가 모두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뜻밖의 사건은 더 있었다. 애가 도착한 지 나흘째 되던 날 데이빗은 음악 연주회에 대
해 무라고 중얼거렸다. 크리스에게 확인해 본 결과 정말로 데이빗은 연주회를 열 계획이 있었다.
그것도 그냥 일상적인 연주회가 아니라, 음악계로 되돌아가는 '복귀'연주회였다. 1984년 6월 8
일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아 대학교의 옥타곤 극장에서 (마이클 패리의 클래식 음악회)가운데 한 행사
로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음악업계 사업가인 마이클이 데이빗과 접촉한 것은 몇 주 전 일이었
고, 그 때 크리스도 연주회에 동의했다. 행사일까지 꼭 7주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자 나는
극도로 염려되었다. 현실적으로 데이빗은 그런 연주를 성공적으로 해 낼 수 있는 생태가 전혀
아니었다.
처음 데이빗을 리카도에서 보았을 때 나는 너무나도 압도된 나머지 그의 연주를 구석구석까지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다. 이제 나는 나 자신에게 솔직해져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데이빗은 정
말로 상처를 입고 연주회 피아니스트로서의 경력을 다시 쌓아 올릴 기회를 망쳐 버리게 될 것이
다.
리카도는 이제껏 매주 세 번 비교적 편안한 분위기에서 아주 반응이 좋은 청중들을 두고 연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덕분에 데이빗은 자신감을 키울 수 있었다. 크리스는
이따금씩 대중 음악을 연주해 달라는 신청이 들어와도 연주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고전음악 연주
자로서의 데이빗의 명성을 보호했다.
어느 날 밤 어떤 단골손님이 차이코프스키의 (1812년 서곡)을 신청했을 때 나는 그 곡이 커다
란 관현악단과 대포를 위해 쓰여진 곡이라, 주방에 있는 오븐 문을 쾅쾅 여닫는 소리로 대포소리
를 대신한다 해도 전혀 분위기가 안날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실천강령은 이랬다. 피아노만을
위해 쓰인 곡만을 연주한다는 것이다. 이따금 데이빗은 슬쩍 베토벤의 5번 교향곡을 연주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리스트가 피아노곡으로 편곡한 것이었다.
아무튼 전체적으로 리카도에서 데이빗이 연주하는 데에는 별다른 격조가 없었다. 데이빗은 몇
시간이고 계속 연주를 했다. 저녁 8시에 시작해서 자정이 넘도록 연주했다. 시간을 정해 놓고
쉬었다가 또 연주하고 하는 식이 아니라 그저 계속해서 연주만 하는 것이다.
또하나, 나는 줄담배를 피워 대는 좀 별난 피아니스트의 모습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피아노
양쪽에 놓인 재떨이는 꽁초로 넘쳐 났고, 건반 위 보면대에도 꽁초가 즐비했다. 그리고 데이빗의
상반신은 짙은 담배연기에 둘러싸여 있었다. "방패예요, 연기방패. 장막, 연기장막." 최근 그가
한 설명이었다. 줄담배를 피우다 보니 입술이 데지 않도록 이따금씩 한손으로 꽁초를 입에서 빼
내야 했기 때문에 완전치 못한 연주라는 결과를 빚어냈다. 또 저 끝없이 가져오는 커피도 한손
으로 단숨에 마셔야 했다.
데이빗은 껌도 씹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필요한 '버팀대'였다. 거기에다 또 그는 근처에
있
는 청중에게 현재 연주하고 있는 부분의 기술적인 면을 내내 설명해 주거나 아니면 연주하고 있
는 부분보다 한두 마디 뒤에 나오는 가락을 노래로 불렀다.
니코틴과 카페인, 엄청난 양의 설탕이 합쳐진 결과 그는 지나치게 활동적이었으며 매사에 민감
한 반응을 보였다. 연주하다가 음악이 토막토막 끊어져, 어떤 곡은 중간에 끝내고 다른 곡을 시
작하기도 했다. 데이빗의 팬들은 이처럼 과도하게 충전된 '천재'모습에 즐거워했고 기벽을 싫어
하지 않았지만, 그 곳은 어디까지나 변두리 포도주집이었다. 이름 있는 연주 홀에서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연주자를 누가 좋게 봐 줄까.
내가 걱정하고 있는 내용을 데이빗에게 말했더니 그도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점에 동의했
다. 그는 피아노 앞에서 품위 없이 비치는 것을 전혀 바라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7주라는 기한
덕분에 이런 협조를 얻어내기가 쉬웠다.
일차 목표는 피아노 앞에 있는 동안은 담배를 줄이는 것이었다. 제일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데이빗이 손이나 입에 담배를 물고 있지 않는 유일한 때는 수영할 때였다. 물에서 밖으로 나오
는 바로 그 순간 그는 담배를 피워야 했다. 크리스가 한가지 일화를 들려준 적이 있다. 수영장
에서 나왔을 때 데이빗은 담배가 떨어진 것을 알았다. 그는 곧장 전화로 택시를 불렀다. 택시가
오자마자 차 안으로 뛰어들었다. 여전히 수영복 차림이었지만 가방만은 챙겼다. 그는 운전기사
에게 쇼핑센터로 가자고 했는데, 쇼핑센터는 1킬로미터 거리밖에 되지 않았다. 거기 갔을 때 그
는 택시 기사에게 기다리라고 하고 담배가게로 갔다. 다시 택시에 올랐을 때 그는 '연기장막'으
로 세상에 대해 보호막을 쳐 좀더 안전한 마음이 된 다음, 기사에게 집으로 가자고 했다.
쉬지 않고 수영을 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될 것 같지만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나는 데이빗에게 크리스의 수영장에서 될 수 있는 대로 오랫동안 수영하라고 부탁했
다. 수영하는 시간을 여러 가지 음악 길이에 맞추도록 부탁했다. "달링, (열정 소나타)로 수영해
봐요." 하는 식이었다. 그런 다음에는 쇼팽의 전주곡 몇 곡을 권했다. 데이빗은 수영을 하는 동
안 마음속으로 작품을 '연주'했다.
그러나 리카도에서 담배를 줄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첫 단계는 데이빗이 시간을 정해 놓
고 연주했다 쉬었다 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분명하게 쉬는 시간을 두고, 그 동안만 담배를
피우고 커피도 그 때에만 마시게 했다. 그런 다음 나는 이런 식으로 말했다. "달링, 짤막한 곡
하나를 담배 없이 연주해 봐요. (왕벌의 비행)같은 걸로요." 그러면 데이빗은 이렇게 대답했다.
"알았어요, 달링." 연주를 잘 끝내고 나면 나는 아주아주 많이 칭찬해 주었다. 흥미진진한 여행처
럼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데이빗을 흠모하는 팬들은 내가 끼여드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피아노 근처에 앉아 담배
를 붙여 주던 여자들은 그것이 데이빗을 도는 일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내가 그러지 말라고
부탁하자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아, 그냥 내버려둬요! 즐겁게 해 주려는데 왜 못하게 말리는
거예요?" 나는 그들이 나를 일종의 악마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리카도에서 나는 신참이었
고, 단골들은 '자기네들의 친구' 데이빗에게 내가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데이빗에게는 자신에게 유익한 일이라면 뭐든지 항상 최선을 다해 노력하려는 자세가
있었다. 그래서 한 번도 내가 자신의 '버팀대'를 없애려고 하는 일로 내게 불평하거나 기분 상해
하는 일이 없었다.
아는 차근차근 그가 습관을 고치도록 했다. 첫 주 동안은 짤막한 곡 하나만을 연주하는 동안
담배를 피우지 않도록 부탁했다. 둘째 주에는 짧은 곡 둘, 셋째 주에는 담배 없이 연주하는 곡
수를 셋으로 늘렸다. 길고도 느린 전쟁이 될 것이 확실했다. 모든 일은 데이빗의 기분이 어때
보느냐에 따라 판단해야 했다. 그리고 모든 일은 천천히 이루어 나가야 했다. 그의 '버팀대'
를
를 단번에 모조리 없애 버린다면 너무도 비인간적인 처사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결국에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거라는 점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중독이 어떤 것
인지에 대해 나는 완전히 무지했고 데이빗이 기꺼이 노력해 주었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좀더
잘 알았더라면 아마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맞아요, 달링. 바로 그거예요. 할 수 있어요.
할 수 있다구요." 이렇게 말하기가 나로서는 쉬웠다.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하는 말이었으니까.
3주가 지나자 데이빗은 담배 없이 15분 동안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넷째 주에는 25분짜리
소나타 전곡을 담배 없이 연주했다. 다섯 주가 지나자 45분을 계속할 수 있었다.
커피도 차차 줄였다. 처음에는 짧은 곡 셋을 연주한 뒤에 커피 한잔, 소나타를 연주한 다음에
한 잔 하는 식으로, 반드시 쉬는 시간에만 마시게 했다. 물론 껌에다 이야기, 노래까지 있고 보
니 아직도 모범적인 연주회 피아니스트와는 거리가 매우 멀었지만, 아무리 작더라도 나아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모두 소중했다.
제 4장 황소자리
크리스가 베란다 방에서 데이빗과 내가 지낼 수 있도록 해 준 배려는 고맙기 그지없는 일이지
만, 우리 둘이 지낼 곳이 따로 있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렇게 하면 데이빗이 더 강한 소
속감을 느끼고 자신감도 더 커질 것으로 생각되었다.
크리스 집에서는 주말이면 그의 사내아이 둘과 크리스의 애인, 애인의 어린 아들이 모두 모이
기 때문에 그 누구도 조용하고 평화롭게 지낼 수가 없었다. 모두가 친절하고 또 아이들이 데이
빗을 금방 받아들이는 것을 보면 가슴이 뭉클해지지만, 주말은 대개 난장판으로 변하기가 일쑤였
다. 어쩌면 부산스런 어린아이 셋만 있었다면 어른 세 사람이 그렇게 산만하게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끊임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계속 라디오를 틀고, 또 기회가 있을 때마다 텔
레비전은 틀어 놓고 피아노로 달려가는 데이빗까지 있고 보니, 왁자지껄하기가 정신이 없을 정도
였다.
나는 데이빗이 내는 소리를 이겨내지 못하면 내가 신경쇠약에 걸리고 말 거라는 사실을 빨리
깨달았다. 이런 소동은 대개 내가 점성학 자문을 구하러 오는 고객을 위해 메모를 하고 있는 동
안 벌어지기 때문에, 시드니 공항 탑승장에 사무실을 낸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림 형편도 이사를 가야 할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나는 점성학을 다시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당의 때문에 크리스의 집 공간을 더 차지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도 5월 첫째 주 무렵 볼품은 없
어도 비교적 깨끗한 집을 라틀래인에서 찾아냈다. 크리스가 사는 동네와 가까운 변두리였다. 중
고품 가게 몇 군데를 둘러보고 새 커튼과 또 화분을 잔뜩 갖다 놓으니, 셋집이기는 했지만 그럭
저럭 살 만한 곳이 되었다. 데이빗에게는 13년만에 처음으로 집이 생긴 것이다.
다음 문제는 우리 피아노를 장만하는 일이었다. 이 문제는 크리스가 고맙게도 연습용 피아노
를 한 대 맡겨 주어서 해결되었다.
자기만의 집을 갖게 된 효과는 금방 나타났다. 데이빗은 집 주위를 알몸으로 어슬렁거리고 다
닐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좋아하는 옷차림은 알몸이었다. 데이빗은 늘 이런 식으로 말했다.
"덜, 덜, 덜 입어요. 자유를 느끼거든요!" 마음이 내키면 언제든지 피아노를 칠 수 있었다. 마음
내키는 시간이란 아침 일찍부터 시작해서 거의 온종일이었다.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동물인 고
양이도 한 마리 키웠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는 고양이를 라흐마니노프라고 이름 붙였다.
원하는 때에 언제든지 피아노를 칠 수 있게 해 주는 일이 데이빗에게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일
이었다. 그래서 끊임없이 피아노 소리가 들리면 이웃이 어떻게 나올지 몰라 나는 창문을 모두
꼭꼭 닫아 두었다. 어느 날 이웃 한 사람이 현관으로 다가오자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 여자는
데이빗이 피아노를 치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나는 가슴이 더욱 내려않았다. 그랬는데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좀 더 잘 들리게 혹시 창문을 열어 두실 수 있겠어요?"
데이빗과 한집에 살고부터 나는 황소자리 사람인 데이빗의 성격을 더욱 잘 느낄 수 있었다.
그와 함께 살기 전에 나는 그의 별자리를 미리 연구해 두었는데 그것이 그의 행동 동기나 창의
성, 감정의 밑바탕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그와 함께 지내기 시작한 첫 두
달 동안 내가 알게 된 것은 황소자리 사람들의 근원적인 특징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겉으로 드러
나는가 하는 것이었다.
황소자리 사람들은 대부분 결단력이 강하다. 그런 성격은 외고집과 사촌간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성격이 없었다면 데이빗은 피아노연주 기술을 완벽하게 끌어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
만 일상생활에서는 이런 성격이 약간 다른 방향으로 나타난다. 요구사항이 대단히 많은 데이빗
의 성격이 곧 드러나기 시작했다. 일찍이 크리스는 내게 주의를 주면서, 데이빗에게는 원하는 것
을 얻을 때까지 두고두고 계속 조를 수 있는 기가 막힌 재주가 있다고 했는데, 이내 나는 그가
이런 방법에는 도사급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무엇을 달라거나 무슨 일을 해 달라고 할 때, 그것
이 곧바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떼를 쓰기 시작했다. 서른여섯 몸 안에 있는 세살박이였다. 데이
빗은 일과의 작은 부분이라도 달라지는 것을 견디지 못했고, 상황을 스스로 고쳐 나갈 생각도 하
지 않았다. 요구사항은 반드시, 빨리 관철되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믿기 힘들 정도로 다른
사람의 주의를 산만하게 하고 성가시게 했다. 나중에는 상대방이 견딜 수가 없어 항복하고 뭐든
그가 원하는 대로 해 주게 된다. 이런 지경에 이르면 다들 더 이상 그의 곁에 머무를 수가 없게
된다. 그가 또 한편으로는 상냥하고 매력적이고 정이 많은 성격이라는 점을 마음에 새겨 두지
않으면 더 버틸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데이빗은 또 황소자리 사람들 특징대로 식욕이 왕성했는데, 그의 경우 이런 특징은 냉장고와
찬장을 규칙적으로 깡그리 비우고, 빵을 몇 덩이씩 먹고, 과일과 생 야채를 몇 킬로그램씩 먹어
치우는 형태로 나타났다. 저녁 식사 때가 되면 양고기를 적어도 여섯 조각은 먹어야 했는데, 고
기가 파삭해질 때까지 태운 다음 매운 소스를 쳐야 했다. 그리고 감자칩을 한 바가지씩 먹었다.
그렇지 않으면 언어의 몽둥이가 다시 나타났다. 나는 그가 냉장고와 찬장을 비우는 일을 막을
수 없었다. 자신감을 붙이는 일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 자물쇠도 채울 수 없었다. 사다
놓은 식품이나 저녁 식사로 만들어둔 음식이 정작 식사 때가 되었을 때 냉장고 안에 있으리라고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에 손님을 한 번도 초대할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장을
봐서 음식을 다시 채워 놓는 일뿐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얼마나 많이 먹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먹느냐 하는 것이었다. 처음 3월에
열흘 동안 데이빗과 지내는 동안 그는 언제나 식사를 혼자 하게 해 달라고 했다. 어느 날 점심
을 준비해서 그에게 주었더니 그는 점심을 박아 들고 고맙다고 한 다음, 내가 방을 나서자 베란
다 방문을 닫았다. 그러다가 나는 잊은 것이 있어서 베란다 방으로 돌아갔다. 데이빗은 침대에
앉아 있었다. 접시는 무릎에 놓여 있었고, 소스로 뒤덮인 양고기 조각이 소스로 뒤덮인 손에 쥐
여 있었으며, 깜짝 놀란 그의 얼굴에도 소스가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잠시 동안 그는 몹시 당황
하고 어색해 했다. 그는 양고기를 도로 접시에 내려놓고, 깊이 한숨을 쉬더니 이렇게 말했다.
"난 식탁에서 예의바르지 못해요." 그제야 나는 그가 혼자 식사를 하는 이유가 부끄러움 때문이라
는 것을 알았다.
나는 침대 가에 앉아 그를 안아주면서 내게는 그런 것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고 다짐해
주면서, 제대로 먹는 법을 배우고 싶으면 함께 노력해 보자고 했다. 그 때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
다. "그다지 품위가 있지 못해요. 별로 품위 있지 못해요. 헬프갓네 사람들은 원래 원시적이라.
루버 아줌마가 고마워요. 런던에 갈 수 있도록 나를 가르쳐 주어서." 그 당시는 처음이라 그가
그다지 많이 설명해주지 않았으므로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몇 달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나
는 그저 그가 병원에서 생활하면서 식탁예절을 잊어버렸겠거니 생각했다. 하여간 데이빗은 기꺼
이 노력하겠노라 했다. 그러나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지금도 다른 사람들이 다들 식탁에서 나이
프와 포크로 식사를 하고 있어도 그는 종종 숟가락을 달라고 한다.
황소자리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으로 또 하나 꼽을 수 있는 것이 그들이 신체접촉
을 아주 좋아한다는 점인데, 데이빗의 경우 이런 성격 역시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그는 사
람을 안고 만지고 팔 속으로 파고들기를 아주 좋아하는데 나는 그런 점에 걷잡을 수 없이 끌렸
다. 나와 함께 지내기 시작한 지 한 달 남짓 되었을 때 그는 몇 군데 사람이 많은 곳에서도 어
느 정도 안전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움츠러들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전혀 낯모르는 사람에게 다
가가 악수하고 안고 입맞추고 하는 습관을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한 고양이가 다른 고양이에게
겁주려는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코를 비비는 것과 비슷했다. 그러나 고양이의 언어로
교육을 받지 않은 인간사회에서는 이런 행동이 종종 바라지 않는 반응으로 나타났다. 여전히 구
부정하고, 흥분한 수다장이처럼 종알거리고, 또 침도 약간 흘리는 - 세레네이스의 부작용을 중화
하기 위해 먹는 약인 코젠틴의 부작용인데 - 데이빗의 모습에 대단한 위협을 느끼는 사람도 있는
데, 이런 사람들은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나도 처음에 그런 식이었는데, 그러면 데이빗은 거기
에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거절당하는 경우를 오랫동안 겪었기 때문에 대체로 거기
에 대처할 줄 알았다.
어느 날 밤 리카도에서, 약간 취한 여자 한 사람이 나에게 다가와, 침을 흘리며 중얼거리고 있
는 피아니스트를 가리키며 울었다. "당신 같은 여자가 왜 하필이면 '저런 사람'과 사귀고 싶어하
죠?" 데이빗은 그 때 겨우 1미터 남짓한 거리에서 한 손으로 피아노를 치고 다른 손으로는 껌을
입에서 꺼내 의자 밑에 붙이고 있었다. "사랑하니까요." 나는 조용히 그렇게 대답한 다음 데이빗
에게 다가가 팔로 감싸 안았다.
그 때부터 몇 년 동안 나는 사람들이 물러서거나 데이빗에게 욕하는 것을 많이 보게 되었다.
나는 이런 일에 될 수 있는 대로 눈을 감았다. 그러지 않았으면 그 고통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
다.
이런 일은 종종 구가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에 벌어졌다. 시드니에 있는 내 자동차를 가져오기
전 일이었다. 데이빗과 내가 버스에 오르면 바로 그 순간 사람들은 우리 둘을 경계했고 자기네
들 곁에 앉지 않았으면 하는 것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이 데이빗을 경계해서 거리를 두
는 것을 보고 나는 중고 자동차를 서둘러 구입했다. 그렇게 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어떤 면으로 보면 문제가 해결되기는 했지만, 이내 나는 데이빗이 자동차를 어떻게 생각
하는지 알게 되었다. 리카도까지는 10분밖에 걸리지 않았으므로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그
보다 시간이 더 오래 걸리면 칭얼거림과 잔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언제 도착하죠, 달링? 왜 아
직 거기 도착하지 않은 거죠, 달링?" 그는 조바심 나는 목소리로 이 말을 하고 또 했다. 그는 자
동차를 몰아 본 적이 없었다. 작은 자동차안에 갇혀 있다는 느낌을 못견뎌했다. 그래서 불안감
이 일었다가 나중에는 안절부절못했다. 그는 비행기에 대해서도 비슷한 두려움이 있었다. 신경
쇠약에 걸린 뒤에 생겨난 증세였다.
데이빗은 또 나와 함께 장에 가는 곳을 싫어했다. 슈퍼마켓에 모여 있는 사람들 때문에 안절
부절못해지기 때문이다. 나는 이 부분이 우리 두 사람이 함께 하지 못하는 여러 가지 일과 가운
데 하나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모든 것들 속에서 제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나는 이따금 혼자 조용하게 쉴 시간이 필요했
고, 데이빗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도 만날 필요를 느꼈다. 처음 퍼스에 도착했을 때는 크리스를
빼면 동료 점성가인 바바라 브래클 리가 그 곳에서 내가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 이전까지
는 점성학 모임에서 마주치는 정도로만 아는 사이였지만, 지금은 친한 사이가 되었다.
데이빗과 함께 지낼 거라고 바바라에게 말했을 때 바바라는 아주 많이 염려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는 거죠, 안 그래요?" 그러나 비록 한숨을 쉬면서 마음에 꺼리는
듯이 고개를 내젓기는 했지만 바바라는 무조건 나를 돕겠다고 했다.
라틀래인 집에서 지내는 생활이 자리가 잡히자 바바라와 나는 퍼스 점성학 학원을 열기로 했다.
초보자와 상급자들을 위한 강의를 열 생각이었다. 우리는 열의를 보이는 학생 여남은 명이 토요
일 오후에 우리 집 뒤뜰에 모여 앉자 강의를 시작했다.
강의는 한 강좌가 10주 간에 걸쳐 이루어졌고 준비도 많이 해야 했지만, 데이빗과의 생활에서
녹초가 되어도 여기서 기분전환을 하고 활력을 많이 얻을 수 있었다.
바바라의 남편 피터 역시 좋은 친구였다. 그는 우리 집에 찾아와서 남자들 손이 필요한 일을
해 주었다. 데이빗은 이제껏 한 번도 몽키 스패너나 망치를 손에 잡아 본 적이 없었으므로 그런
부분에서는 전혀 손을 쓰지 못했다. "손가락을 보호해야 돼요, 달링. 손가락!" 그는 그런 식으로
말했고, 또 거기에 반대하는 것도 바보 같은 일이 될 것이다.
데이빗의 특이한 행동에 비춰 볼 때 우리 생활은 나름대로 최대한 짜임새 있게 일과가 자리잡
혔다. 라틀래인 집에는 수영장이 없었지만 데이빗은 수영을 해야 했기 때문에 나는 그를 아침과
오후에 근처 수영장으로 데리고 갔다. 매일 네 시간이 걸렸는데, 나는 데이빗이 수영을 하는 동
안 메모를 다시 훑어보곤 했다. 비록 시간을 많이 뺏기기는 했지만, 조깅과 더불어 수영이 조금
씩 효과를 보이기 시작했고, 데이빗이 피우는 담배 양이 줄어들었다.
데이빗에게는 물 자체가 일종의 치료약이었다. 데이빗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안정시키는 효능
이 있었던 것이다. 매일 네 번, 어떤 날 에는 열 번까지 강박적이다 싶을 정도로 샤워를 하는데
이는 그의 정신을 씻어 내는 효과를 주는 것 같았다. 두려움이 녹아 내리고 조화가 자리잡는 것
이다. 다행히도 시간이 가면서 데이빗은 샤워를 덜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마음의 위로를 얻어야
할 필요가 그만큼 줄어들었다는 뜻이다.
잠자는 문제도 차츰 나아졌다. 피아노로 달려가 잠시 야상곡을 연주하지 않아도 밤 내내 꽤
깊이 잠잘 수 있게 되었다. 나에 대한 믿음이 자라나면서 말을 할 때에도 초조해 보이던 것이
덜해졌고, 일관성도 차츰 나타났다. 매주 전문 요가 스승과 함께 심호흡과 긴장이완 훈련을 하는
것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
건강이 나아지니 연습시간도 길어졌고, 나중에는 하루 평균 여섯 시간씩 연습했다. 대개는 연
습하는 동안 텔레비전과 라디오도 함께 있는 대로 틀어 두었다. 그렇게 시끄러운데 어떻게 집중
할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데이빗은 이렇게 대답했다. "글세, 그건 기적이에요, 달링. 난 이 소리
저 소리를 다들을 수 있어요. 이 소리, 저 소리 모두... 내 머리는 기가 막힌다니까요, 정말!"
피아노 앞에 앉아 있다고 해서 내내 연습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데이빗은 음악 자체를 즐기
는 데에도 시간을 많이 할애했다. 그가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하는 것을 듣는 동안 나는 음악
작품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얼마 안 가 나는 그가 음정을 빼먹고 지나가는지, 이상한
옥타브 음정을 더 넣었는지, 필요 없이 한 부분을 되풀이하고 지나가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음악을 무척 좋아했지만 직접 악기를 연주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데이빗과 함께 지내다
보니 내 생활은 음악이해에 대한 일종의 속성과정처럼 되어 버렸다. 피아노곡에 대한, 특히 낭만
주의 시대 음악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
라디오는 언제나 오스트레일리아 방송사(ABC)의 클래식 FM 주파수에 맞춰져 있었고 나는 늘
흥미롭고 새로운 음악을 접하게 되었다. 작품에 대해 라디오 아나운서가 설명을 하고 나면 대개
는 데이빗이 직접 평을 덧붙여 주었다.
데이빗은 라디오를 24시간 켜 두어야 했기 때문에 이같은 음악이해 강좌는 밤에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밤이면 나는 주의력이 떨어지는 학생이었다. 너무나도 지치기 때문에, 어떤 것도 나를 깨
어 있게 할 수 없었다.
집안에 있는 라디오뿐 아니라 데이빗의 낡은 카세트 라디오도 언제나 켜져 있었다. 데이빗과
그 카세트 라디오는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사이였다. 리카도에 갈 때 말고는 그것 없이 집 밖
으로 나간 적이 없었다. 담배와 껌과 함께 카세트 라디오도 마음의 안정을 위해 꼭 필요한 물건
이었고, 어디를 가든 항상 들고 다녔다. 나는 농담으로 이렇게 말하곤 했다. "데이빗, 그걸 손에
들고 있지 않으면 다리가 움직이지 않아요?" 데이빗의 곁을 좀체 떠나는 일이 없는 나도 내내 카
세트 라디오를 듣는 셈이었다. 어떤 때에는 카세트 라디오 역시 ABC클래식 FM에 맞춰져 있었
지만, 저 셀 수 없이 많은 카세트 테이프 가운데 하나를 듣는 일도 종종 있었다. 데이빗이 가지
고 있는 테이프는 그야말로 잡동사니였다. 어떤 것은 딱지가 찢겨 나갔고, 어떤 것은 집에서 녹
음한 것이고, 어떤 것에는 껍질에 잉크가 흘러 얼룩져 있고, 어떤 것은 물에 빠졌던 것처럼 보이
기까지 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대부분이 소리가 났다.
내게 소개한 테이프 가운데 하나가 데이빗의 레퍼토리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곡이 될 작품이었
다. 리스트의 (B단조 소나타)였다. 테렌스 저드 연주로 처음 이 소나타를 들었을 때, 나는 어떤
초월과 같은 드문 경험을 했다. 마치 이 작품을 연주하는 사람의 영혼이 이 세상에서 더 머물러
있을 수 없어 박차고 뛰쳐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저드에 대해 알아보았다. 1978년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경연대회에서 수상했지만, 21세가
되기 전에 자살했다는 것을 알았다. 저드의 연주에는 그같은 취약성이 나타나 있었다. 제정신과
광기,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오가는 것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또 한가지 확실한 것은, 우
리 집 거실에 있는 사람의 연주 역시 경계선상에 있는 때가 많다는 사실이었다.
제 5장 마법의 시간
"모두 아버지 탓이야. 모두 아버지 탓이야." 잘못했을 때나 자신이 뭔가 제대로 행동하지 못했
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나타나는 데이빗의 중얼거림에 새로운 후렴이 등장했다.
"뭐가 아버지 탓이라는 거죠?"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다친 거, 다친 거 말이에요." 그는 마치 정말로 눈꺼풀에 무슨 이상이 있는 것처럼 왼쪽 눈 바
깥부분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라틀래인 집에서 지내는 동안 신뢰와 일관성이 자라나면서 데이빗의 어두운 지난날로 통하는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과거에 대한 회상이 토막토막인데다가 베일에 싸여 있었다. 데
이빗은 불쑥 "자자가 바이올린을 부셔 버렸거든요" 하는 말을 해 놓고는 그게 정확하게 무엇을
가리키는 말인지를 내가 알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자자가 누군데요?" 내가 설명해 달라고
물으면 그는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뻔한 것을 모르다니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할아버지
말이죠! 아버지의 아버지 말이죠. 바이올린을 부셔 버렸죠. 그냥! 불쌍한 아버지는 갖은 궂은
일을 다 하면서 그 바이올린을 샀는데, 자자는 '넌 랍비야' 하면서 바이올린을 산산조각 내버렸어
요. 산산조각으로."
말을 하면서 데이빗은 성난 '자자'의 행동을 연기했다. 그러나 이야기 전체가 다 드러나는 데
에는 몇 달이 걸렸고, 헬프갓 가족의 역사가 내 머리 속에서 이해되는 데에는 몇 년이 더 걸렸다.
데이빗의 아버지 엘리아스 피터 헬프갓은 폴란드의 체스토코바 근처에 있는 유대인 정착지 카
미크의 샤시드 랍비 아들이었다. 1903년에 태어난 그는 당시 러시아의 지배 하에 있던 지역에서
자라났다.
피터가 자라나던 때 사회주의-공산주의 이념이 동유럽을 산불처럼 휩쓸면서 많은 젊은 유대인
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피터의 경우, 가족이 무조건 받아들이고 엄격하게 따르던 토라의 거
룩한 말씀 대신 차츰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말이 가슴속에 자리잡았다. 랍비와 아들 사이에서는
격한 논쟁이 오고 갔다. 데이빗은 아버지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들은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
버지는 할아버지의 턱수염을 잘라 버리려고 했죠. 아버지는 가위를 들고 탁자를 빙빙 돌며 도망
가는 할아버지를 쫓아다녔어요.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무서워하지 않았거든요. 아버지는 스스로
홀로서기를 한 거예요." 샤시드 랍비의 수염을 자르고자 한 짓은 정말로 당돌하고 반항적인 행동
이었다. 그 때 피터의 나이는 겨우 열두어 살이었다.
피터와 할아버지 사이의 갈등은 또 그가 음악가가 되고 싶어했기 때문에 더울 심해졌다. 샤시
드파에서는 노래와 춤 같은 순수한 감정발산이 종교적 충동의 적절한 표현이라서 '순수한 감정을
통한 믿음'으로 여겼지만, 어린 피터가 갈망하던 예술적 표현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마을 가게 진열대에는 바이올린이 하나 있었다. 그 바이올린을 사기 위해 피터는 몰래 일을
해서 충분히 돈을 모았다. 바이올린을 사서 집으로 기지고 갔지만, 피터의 아버지는 그것을 보는
순간 그 소중한 악기를 아들 손에서 나꿔채서 '산산조각으로' 부수고 말았다. 랍비 데이빗 헬프
갓은 아들이 전통을 거스르는 것을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전통에 따르면 랍비의 아들은 아버지
의 뒤를 이어 랍비가 되어야 했다. 아들은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어야 했고, 동족의
종교적 유산을 지키는 데에 힘써야 마땅했다.
그러나 데이빗은 종종 이런 말을 했다. "아버지는 히브리 학교에 한 번도 나가지 않았고 또
학교 교육도 받지 않았죠." 가족 사이에 흘러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어린 피터가 계속 가출
했다가 붙들려 가족에게 되돌려지는 일을 몇 번 되풀이한 끝에 마침내 1917년에 가출에 성공했
다. 그 무렵 동유럽은 열네 살 소년이 혼자 떠돌아다니기에는 상당히 힘들고 위험한 격동기였다.
그 뒤 21년간 피터의 생활에 대해서는 구구한 추측과 전설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그렇
지만 그 가운데 확실한 것은 오직 세 가지 뿐이다. 첫째는 떠돌아다니던 어느 시점에 서커스단
에서 일했다는 사실이다. 사자에게 물려 생긴 팔의 흉터와 갖가지 곡예 기술이 그 증거다. 둘째
는 피터 헬프갓이 1926년에 팔레스타인에 있었다는 것이다. 셋째는 상선에서 일했다는 사실인데,
덕분에 1934년에 오스트레일리아 멜번에 올 수 있었다.
당시 이민 온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말하자면 '게토'에서 벗어나
는
일이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믿기로 '게토(유대인들을 강제 격리시켰던 일정한 거주지역)'에
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에는 선호도에 따라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 사업에 성공하여 부자가 되거
나, 둘째, 의사나 변호사 같은 전문가가 되거나, 셋째, 음악적 재능이 있거나 아니면 자식이 재능
이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피터도 '게토'에서 벗어나기로 작정했다.
오스트레일리아에 도착한 뒤 피터는 열심히 영어를 공부했다. 그 결과 읽고 쓰기만 배운 것이
아니라 과학에 대한 여러 가지 지식도 얼마간 익혔고, 그래서 노동력과 비용을 줄여 줄 수 있는
공업용 다리미를 발명해서 특허를 얻어 오스트레일리아 내의 여러 의류공장에 공급했다. 그는
공산주의에 대한 관심을 내내 유지했다. 무엇보다도 주목할 만한 사실은 그가 독학으로 악보 읽
는 법과 피아노와 바이올린 연주법을 익혔다는 점이다.
멜번에서 피터는 사업과 인간관계 모두에서 유대인 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처음에는
비슷한 시기에 이민온 사람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수익'을 올린 모양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난
뒤부터는 뒤쳐지기 시작했다. 사교 모임에서 친구들은 성공한 친구들에 대해 피터가 질투와 원
망 섞인 태도를 보이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1944년 그는 체스토코바 출신인 스물네 살 난 레이첼 그라넥이라는 유대인 아가씨와 결혼했다.
사업관계로 레이첼의 아버지인 모르드캐, 오빠인 모리와 알게 되면서 만난 아가씨였다.
1947년 데이빗은 피터와 레이첼의 다섯 자녀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얼룩졌던 어린시절과
또 아버지와의 관계가 그의 일평생을 괴롭혀 왔다.
라틀래인에서 지내는 동안 데이빗의 기억이라는 봇물이 일단 내게로 터지자 다시는 닫히지 않
았다. 함께 지내기 시작한 처음 두 해동안 데이빗의 아버지와 또 데이빗의 일생 동안 일어난 수
많은 불행한 일에 대한 - 데이빗은 그런 불행 모두가 어떤 식으로든 아버지와 연관된 것으로 굳
게 믿고 있었다 - 이야기는 거의 집착에 가까웠다. 음악에서 이루어 낸 여러 가지 경력을 빼면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데이빗이 유일하게 진정한 열정과 관심을 갖고 말한 부분이었다. 또 이
부분에서는 다른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조리 있게 대화할 수 있었다.
데이빗이 기억하고 있는 사건이 긍정적이거나 아니면 아직도 어린이 상태로 머물러 있는 부분
에서는 데이빗에게 피터 헬프갓은 '아빠'였다. 그러나 그 기억이 실제 나이인 데이빗의 의식 속
에 있거나 고통스럽게 생각하는 기억과 관련되어 있을 때에는 '아빠'가 '아버지'로 변했다. 이
런
기억을 되살리는 일은 이상하고도 형언하기 어려운 의식으로 발전했다. 그러는 사이에 나는 데
이빗의 지나온 삶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됐다.
리카도에서 집으로 차를 몰고 돌아온 밤이면 대부분 우리는 진입로에 차를 세우고 시동을 끈
다음 차 안에 몇 시간 동안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거실이나 침실에서 편안하게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은 우리 두 사람 모두가 왠지 하지 못했다. 거기에 대해 내가 설명
할 수 있는 말은 "그냥 일이 그렇게 됐을 뿐이지 어떻게 그렇게 됐는지는 나도 모른다."는 말뿐인
데, 사실은 데이빗이 자신의 일생을 그렇게 말한다면 꼭 어울릴 것이다.
데이빗의 어린시절은 그렇게 부유하지는 않았어도 비교적 행복하고 평화로웠다. 주로 유대인
들이 많이 모여 사는 멜번 변두리 엘우드에서 셋집에 살았는데, 그 시기 데이빗은 여느 아이들과
다른 점이 없었던 것 같다. 피터가 모르드캐와 모리의 의류업체로 일하러 나간 동안 레이첼은 -
데이빗은 어머니를 '마메나'라 불렀는데 - 집에 있으면서 데이빗과 누나 마거릿, 남동생 레스를
보살폈다.
"우린 곧잘 요술 같은 시간을 보냈죠. 아빠 일이 잘 풀릴 때에는 모든 게 마술 같았어요." 데
이빗은 초기 어린시절에 대해 종종 이렇게 말했다. 집에는 피아노가 있었는데, 데이빗은 네 살
무렵 마거릿을 따라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피아노를 일찍
접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늙은 개에게 새로운 재주를 가르칠 수는 없으니까요. 나이가 들면
어렵죠. 나름대로의 방식에 굳어 버리거든요." 아버지의 철학에 대한 데이빗의 설명이었다. 그
는 이렇게 그 당시 일을 떠올렸다.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 첫날밤부터, 아버지는 모든 음이 여행
같은 거라고 했어요. 기적적인 발견 같은 거 말이죠."
시작은 쉬웠고 보상도 있었다. 데이빗은 (존 톰슨의 1학년 교과서)에서 배운 짧은 곡을 처음으
로 쳤을 때 일을 이렇게 되새겼다. "난 온 이웃 사람들이 모은 데에서 피아노를 쳤어요. 아주
신났죠! 이웃 사람들은 내가 피아노 치는 걸 언제나 좋아했고 또 가게로 데이고 가서 초콜릿이
랑 여러 가지를 사 줬죠. 다들 잘 해줬어요."
보상은 이웃들의 선물이라는 형태로만 받은 것이 아니라, 피터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것도 거
기 포함되었다. 피터는 데이빗의 음악적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그가 처음 건반을 건드린 순간에
알아차렸다. 전문 음악인이 되겠다던 자신의 꿈이 운명의 힘에 부딪혀 좌절된데다가 다른 방법
으로는 도저히 '게토'를 벗어날 길이 없어 보인 이 사람에게는 세상에서 이보다 더 기분 좋은
일
이 없었을 것이다. 음악적 재능뿐 아니라 또 데이빗이 유대인 가정에서 맏아들이었기 때문에 피
터는 데이빗을 전적으로 편애했다. 피터는 데이빗을 '내 어린 왕자'라 부르면서, 다른 아이들보
다
특별히 더 관심을 기울이고, 여윳돈은 데이빗에게 필요한 것을 구하는 데에 모조리 쓰고 하면서
아들의 성장에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대한도로 투자했다.
그러나 피터에게는 돈도 시간도 그렇게 쉽지 않았다. 레이첼의 친정 쪽에서 떨어져 나오면서
헬프갓 가족의 살림은 어려운 형편에서 더 어렵게 변했기 때문이다. 피터는 혼자 힘으로 성공해
보려고 커피 휴게실을 열었지만 실패했다. 그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게다가 아기가 또 하
나 태어날 참이어서 상황은 더욱 어려워져 갔다. 만삭인 레이첼은 집안일이 힘에 부쳐 낮시간에
도 종종 피터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전통적으로 친정 어머니가 아이 키우는 일을 도와주었지만,
레이첼은 그런 혜택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피터에게 도움을 청했다. 처가 쪽과 의견이 벌어
진 뒤로 피터는 그라넥 집안 사람들이 헬프갓 집안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데이빗이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고 또 여동생 수지가 태어나던 1953년, 헬프갓 가족의 살림은
가장 어려운 지경에 빠져 그 뒤 여러 해 동안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다. 데이빗은 미약한 신경과
민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제때에 화장실에 가지 못하는 것이다. 당황하고 부끄럽고
또 들킬까 봐 두려운 마음에 데이빗은 학교 뒤 풀숲을 쏘다녔고, 그런 그를 착하게도 누나 마거
릿이 찾아내 집으로 데려와 목욕시켜 주곤 했다.
그러나 학교교육도 이내 중단되었다. 멜번에서 어떻게 해 보겠다는 희망을 모두 잃어버린 피
터가 퍼스로 이사를 가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아주 힘들었어요. 아주 힘들고 우린 모두 멀미를 했죠. 가족 전부가 멀미를 했어요." 데이빗
은 퍼스로 가는 배 안의 일을 이렇게 되살렸다. "그리고 나는 세상에서 제일 겁먹은 고양이 같
았어요. 수프를 먹지 않았어요. 고양이는 세상에서 제일 까다롭게 먹는 동물이니까요. 그래서
아버지는 날이 새도록 나를 때렸죠. 아버지는 걱정이 돼 죽을 지경이었어요. 돈도, 일자리고, 희
망도 없었고 그래서 잘 사는 유대인들의 인정에 매달려야 했거든요."
험한 파도를 헤치고 퍼스로 가는 배 안에서 피터는 사실 초조했다. 멜번을 떠나기 전 그는 어
린 자식들을 퍼스에서 보살필 확실한 대책도 세워 두지 못했고, 가족이 지낼 곳도 마련해 두지
못한 상태 였다. 그러다 보니 헬프갓 가족은 퍼스에 도착한 뒤 어느 창고에 자리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잠자리로 쓸 매트리스는 한 장뿐이었고, 라디에이터 하나로 난방과 취사를 겸했으며, 줄
지어 서 있는 새 냉장고가 방 벽이었다. 피터는 달리 방법이 없어 퍼스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특
히 브렉클러 가족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신발 점포망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우린 돈도,
먹을 것도 없었죠. 아버지가 정말로 부자 유대인들을 찾아간 것 같아요. 정말로 알렉 브렉클러
를 찾아가서 도와 달라고 한 것 같아요. 도와 달라고 말이죠." 데이빗은 이렇게 말하면서 또 자
기 마메나가 전기 난로 앞부분에다 빵 한 조각을 구우려 애쓰던 일도 들려주었다.
잘 사는 유대인들은 피터를 돕기로 했다. 그러나 이들은 가난한 헬프갓 가족이 사는 곳으로
찾아왔을 때 무엇을 보게 될 지에 대해서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피터는 그나마 얼
마 되지 않는 남은 돈을 어처구니없게도 피아노를 사는 데에 써 버렸다. 데이빗이 연습을 시작
할 수 있도록 피아노는 즉시 배달되었다. "우린 너무나도 가난했어요. 난 아무 것도 없는 집안
에서 자랐죠. 그리고 아버지는 돈도 전혀 없었는데, 그런데도 나한테 피아노를 사줬어요! 아버
지가 피아노를 사 준거죠!" 데이빗은 아버지의 어리석음이 놀랍기도 하고 또 고맙게도 생각하는
마음이 뒤섞인 어조로 그 때 일을 떠올렸다. 그렇지만 그 '잘 사는 유대인들'은 피터 헬프갓 나
름대로의 희생정신에 대해 조금도 감동을 받지 못했다.
데이빗은 유대인들이 돕고자 찾아온 일을 생생하게 기억했고 그 장면을 몸짓으로 열심히 흉내
내 가면서 말했다. "아, 우린 피아노가 있었고 그리고 그 유대인들은, 그 부자 유대인들은 맙소
사, 아버지한테 몹시 화가 났어요! 부자 유대인들이 아버지에게 말했죠. '그런데 도대체 뭘 도
와
달라는 겁니까? 돈도 없고, 일자리도 없으면서 이렇게 퍼스에 와서 우리더러 보살펴 달라니!' 그
리고 알렉 브렉클러는 어린 우리가 불쌍해서 이렇게 말했어요. '너희들 아버지는 아주 위험한
사
람이거든."
데이빗은 단호하게 말했다. "아무튼 아버지는 정말로 소리도 많이 지르고 고함도 많이 쳤어요.
중요한 건 야무진 알렉 브렉클러 씨가 우리한테 아버지는 양식 살 돈도 없는데다가 너무 가난하
기 때문에 우리가 떠나야 한다고 했다는 거예요. 불쌍한 아버지는 울고, 흐느끼고, 그러면서 말
했죠. '아, 다시는 날 울리지 못할 겁니다. 다시는 내 눈에 눈물이 흐르게 하지 못할 거라구
요!'
그렇게 된 거죠. 그리고 다들 아는 얘기지만 브렉클러 씨는 정말로 우릴 도와줬어요. 아버지는
아주 자존심이 셌죠. 가난하게 살기에는 너무 자존심이 셌어요. 그래서 아버지는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그런 다음에는 그 사람들을 뒤에서 헐뜯었어요. 별로 좋은 행동이 아니죠. 좀 지저분하
잖아요, 안 그래요?"
곰곰 생각해 보면 대학살에서 누이 한 사람만 남기고 나머지 가족 모두가 희생되는 끔찍한 일
을 당한 피터 헬프갓이고 보니, 낯선 사람들이 와서 가족이 흩어져야 된다는 충고를 하면 그것이
아무리 선의에서 나왔다 해도 그리 달갑게 들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감정에
다 자존심과 무력감까지 더해지면 어떤 사람이라도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때 내가 알지 못한 사실은 데이빗이 아주 어린 시절에 벌어진 이 사건 하나가 비
통하고 비극적인 일련의 사건의 시작이었고, 자기 인생에 대한 데이빗 자신의 판단에 따르면 오
랜 시간에 걸쳐 결국 신경쇠약으로까지 이어지게 된 여러 가지 일 가운데 최초의 사건이라는 점
이었다.
그러나 1953년, '부자 유대인들'에 대한 피터 헬프갓의 혐오와 불만은 적어도 그 때까지는 그들
의 도움을 분별없이 거절할 정도는 아니었다. 덕분에 가족은 '집'이란 곳으로 이사를 갈 수 있었
고 거기서 피터를 다시금 커피점을 차렸지만 이번에도 실패했다.
그 뒤 5년 동안 헬프갓 가족은 여러 번 이사를 다녔다. 매번 퍼스안에서도 근로자 계층이 모
여 사는 가난한 변두리 동네였다. 마침내 이들은 1958년에 포근하긴 해도 별 볼품은 없는 집에
자리를 잡았다. 그 곳은 하이게이트의 불워 거리였는데, 편리하게도 길 건너에 초등학교가 있었
다.
이 시기에 헬프갓 가족은 기본적인 안락조차 누리지 못하고 살았지만 데이빗은 "아버지는 언제
나 피아노가 나한테서 떨어지지 않게 해 줬어요" 하고 말했다. 피터는 무슨 자질구레한 일자리
로 돈을 벌든, 데이빗에게 피아노 교사와 일반교사 노릇을 하는 일만은 양보하지 않았다. 그는
아들에게 체스를 가르쳤고, '어린 왕자'가 글을 읽을 줄 알게 되자 그 때부터 특별한 야간일과가
생겨났다. 데이빗은 그 때 일을 자랑스럽게 떠올렸다. "아빠한테 밤마다 책을 읽어 드렸죠. 달
콤 씁쓸한 윌리엄, 바이런, 셸리. 아, 그리고 세익스피어도 많이 읽었죠. 소네트, 시, 희곡, (헴
릿), (맥베드), (리어왕)까지요."
피터는 아이들 모두에게, 특히 데이빗에게 사회주의의 근본이념을 가르쳤다. 또한 그가 구역
공산당 집회에 나갈 때는 데이빗을 데리고 다녔다. 데이빗은 그같은 짧은 나들이를 아주 큰 모
험으로 기억했다. "아버지는 당원증이 있는 당원이 아니었고 또 공산당 집회에 매번 나간 건 아
니었어요. 위험했으니까요. 항상 감시를 받았죠. 대단한 영기가 필요했어요. 퍼스 한가운데에
서 그런 집회가 열리면 집회에 들어갈 때마다 감시를 받았죠. 멘지스에서 나온 보안경찰이 쫙깔
려서 들어가는 사람들을 모두 감시했어요. 아주 위험했죠."
데이빗은 또 가족 가운데 피터가 회당으로 데리고 간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데이빗은 생각에 잠겼다. "아버지는 나를 늘 회당에 데리고 갔죠. 금요일 저녁과 토요일 아침이
면 언제나. 카디시와 사바스가 있을 때마다 우린 늘 회당에 나갔어요. 즐거운 시간이었거든요.
난 자랑스러웠어요. 아버지와 함께 고개를 꼿꼿하게 세우고 회당까지 걸어갔어요. 그리고 그 놀
랍고 찬란한 음악을 듣곤 했죠."
그러나 아들과 나누는 대화에서 화제는 주로 정치얘기였던 반면, 유대인들의 종교나 역사, 문화
에 대해서는 한 번도 말이 없었던 것 같다. 이런 것들에 대한 피터의 정확한 태도를 데이빗은
종종 이런 식으로 말했다. "성장환경이 나빴어요. 환경이 나빴어요. 집안에 유대인 분위기가
없었어요. 양초를 켠 적이 한 번도 없었죠. 난 도무지 아무것도 몰랐어요. 우린 회당에 나갔지
만 나는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몰랐죠. 아버지는 유대인들이나 그런 데 대해서는
별로 가르쳐 주지 않았어요. 아버지는 그냥 위선자였어요. 야누스. 두 얼굴의 사나이. 아버지
는 회당에 나가는 걸 조금도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런 의식을 믿지 않았으니까요. 아버지는 동
산주의자였기 때문에 그런 게 모두 속임수에다 미신이라 생각했죠. 아버지가 회당에 나간 건 잘
사는 유대인들한테, 야무진 알렉과 메이어 브렉클러한테 잘 보이기 위해서였어요."
유대인 단체에서는 헬프갓 가족이 잘 지내고 있는지를 보려고 자주 찾아왔다. 데이빗은 그런
관계를 이런 식으로 설명했다. "아빠는 그 사람들을 찾아가지 않았어요. 우리가 처음 퍼스에 도
착했을 때에는 아버지가 그 사람들을 찾아갔지만, 그 뒤부터는 언제나 그 사람들이 우릴 찾아왔
죠. 그 사람들은 멀고 먼 곳에서, 특히 아주 고급 자동차를 타고 왔는데, 올 때마다 우리한테 선
물이나 돈 같은 걸 줬어요, 그러니 아버지는 회당에 나가 그 사람들 비위를 맞춘 거죠."
"유대인이 뭔지에 대해서는 한 번도 말해 주지 않던가요?"
"절대, 절대, 절대로. 우린 공산주의에 대해 이야기를 했어요. 러시아와 중국 공산주의. 유대
민족에 대해서는 한 번도 날이 없었어요. 한 번도."
그러나 피터가 아이들 모두에게 운동을 권했기 때문에 데이빗이 아버지와 함께 있었던 시간 전
부가 피아노와 정치 이야기에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팔굽혀펴기, 턱걸이. 아버지가 시켰죠.
아버지는 세상에 있는 운동은 모두 시켰어요! '건강해야 돼, 건강해야 한단 말이야' 하면서. 그
러면 생각이 좀더 긍정적으로 변하고, 좀더 완전해지고, 좀더 관대해지고, 좀더 집중력이 늘거든
요. 생각이 질이 좋아지죠."
데이빗은 종종 일터에서 돌아오는 아버지를 마중 나갈 때 멀리까지 물구나무로 갈 수 있었다고
자랑했다. "늘상 아버지한테로 달려갔어요. 좋은 운동이었죠. 여러 가지 운동 가운데서도. 다
른 사람은 아무도 그렇게 하지 못했죠. 특별하잖아요! 별나잖아요!... 어쨌거나 그렇게들 생각하
잖아요."
그런 시기도 있었지만, 어린시절에 대해 데이빗이 이야기하면 할수록 아버지의 모습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1950년대 말무렵, 피터 헬프갓이 그 때까지 겪은 고생의 흔적이 건강과 신경계에 나
타나기 시작했다. 심장발작을 자주 일으켰고 또 아주 사소한 일에도 신경질을 부리기 일쑤였다.
자기의 '어린 왕자'와 함께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특별한 시간도 힘이 들었다.
어느 날 그같은 피아노 수업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데이빗은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가 나를
가르쳐 준 건 정말 고맙지만, 가르칠 때에 좀 엄격했어요." 나는 더 자세히 설명해 달라고 했는
데, 설명을 들고 깜짝 놀랐다.
"에, 내가 기억하는 건 나한테는 선택의 여지가 젼혀 없었다는 것뿐이에요. 아버지는 너무나
엄격해서 툭하면 '빌어먹을,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라니까!' 라고 말했죠." 데이빗은 슬픈 표정으
로 고개를 가로 저으면서 말을 이었다. "아버지는 아주 엄격한 교사인데다가 기대하는 수준이
아주 높았어요. 나는 이해해 보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아버지는 별로 좋은 스승이 아니었죠. 독
학했으니까요. 그러니 어떻게 됐겠어요? 아버지는 아주 무뚝뚝한 방식으로 날 가르쳤어요. 퉁
명스럽고 무뚝뚝하게. 피아노 앞에 앉혔는데, 연주를 잘 못하면 고함을 지르면서 왈칵 밀쳐 버리
는 거예요."
두 손과 상체를 이용해서 밀쳐 버리는 장면을 연출했다. "이런 식으로. 아주 세게 밀치는 거
예요. 아주 왈칵. 피아노 앞에서. 언제나 거칠게 말이죠. 그러면 나는 울면서 마메나에게 달려
갔어요. 마메나에게. 언제나 울면서. 언제나 울었죠. 결국에는. 우리 고양이가 발톱을 세울
때와 마찬가지로. 그러면 아빠는 고양이를 방 저편으로 내던졌어요. 아주 거칠고도 아주 세게.
그런 식으로 아버지는 날 가르쳤어요. 알아요? 아버지는 혼자 배웠는데 나는 매맞는 학교에서
배운 셈이죠." 데이빗은 자기가 한 말장난에 슬프게 웃다가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그게 아버지
가 아는 전부였어요. 할 줄 아는 게 그것뿐이었던 거죠." 잠시 뒤 그는 덧 붙였다. "그렇지만 한
편으로는 상냥하기도 했어요."
"그래서 아버지가 그렇게 하면 마메나는 어떻게 했어요?"
"불쌍한 마메나 집안에서 발언권이 전혀 없었어요. 그냥 완전히... 그냥 철저하게 뭉개진 거죠.
완전히 뭉개졌죠." 데이빗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대답했다. 그러다가 다시 미소지으면서
입을 오므리고 말했다. "포치나굴라, 포치나굴라." 재촉하는 그에게 내가 입맞추자 눈물이 사라졌
다.
그렇지만 적어도 데이빗의 피아노 실력만을 놓고 볼 때에는 피터의 '퉁명스럽고' '거친' 방법
이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열 살 때 데이빗은 시골 음악경연대회에서 쇼팽의 (Ab장조 폴로네즈)
를 연주했다. 그 대회는 데이빗이 대중 앞에서 연주한 최초의 큰 행사였고, 연주하는 동안 피아
노 바퀴가 구르면서 피아노가 밀려나기 시작했는데도 데이빗은 멈추지 않고 계속 연주했다. 타
고난 연주자인데다가 놀랄 정도로 집중력이 강하고 천부적인 장인정신이 있어서, 데이빗은 일어
나서 한 박자도 놓치지 않고 피아노를 따라 무대 저편으로 가면서 계속 연주했다.
피터는 이만저만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데이빗이 아무런 실수도 하지 않았음에도 우승할 희
망이 없다고 생각하여, 모임 때문에 급히 가 봐야 된다고 둘러대면서 데이빗을 집으로 데리고 가
버렸다. 다행히도 경연대회 주최측에서 데이빗이 사는 곳을 찾아냈다. "그 사람들이 찾아와서는
이렇게 말했죠. '헬프갓 군은 신동입니다.' '나는 특별상을 받았죠. 타고 난 재능이 강한 인상
을
주었다는 게 이유였어요." 데이빗은 쓴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그 때 그 용감한 묘기를 보인 지 10년 후 런던 음악학교에 지원서를 보내면서 데이빗은 그 때
의 (폴로네즈) 연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별다른 지도를 받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렇
게 덧붙였다. "정해진 상을 받지는 못했지만 '특별'상을 받았습니다(아마 용기가 가상해서 준
상
이겠지요!)." 피아노가 움직인 일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피터 역시 아들이 연주지도를 받을 필요가 있다고 느꼈던 모양이다. 그는 적당한 교사를 찾아
나섰다. 결국 만남 사람이 프랭크 안트였는데, 그는 데이빗뿐 아니라 누나 마거릿까지 가르쳐 주
겠다고 했다. 그것도 무료로. 잘된 일이었다. 레이첼이 다시 아기를 가졌으므로 피터로서는 수
업료를 낼 길이 없었다.
1958년, 데이빗은 프랭크 안트의 면밀한 지도를 받으면서 기술을 연마하고 연주 곡목도 늘렸다.
이듬해 무렵에는 전국규모 대회에 나갈 실력이 충분히 되어 오스트레일리아 방송사(ABC)의 신임
선발대회에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아 주 대표로 출전했다. 데이빗은 르쿠오나의 (말라게나)를 연주
하여 준결승에서 이겼고, 리스트의 (라 캄파넬라)로 결승에 나갔다.
당시 아직 열두 살밖에 되지 않은 데이빗은 이어 바흐의 (D단조 협주곡)으로 ABC의 협주곡과
성악 부문 경연대회에도 참가했다. 가장 권위 있는 전국규모 음악 경연대회에 처음 나간 그는
결국 주결승에는 진출하지 못했다. 그러나 신인 선발대회 덕분에 그의 이름과 사진이 신문에 실
렸고, 음악계에서 곱슬머리에 안경을 낀 이 어린 소년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유명인을 향한 데이
빗 헬프갓의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제 6장 생일
"데이빗!" 나는 데이빗을 부르면서 수영장에서 나오라고 손짓했다. 햇볕에 그을린 벗겨진 머리
에다 두꺼운 안경을 쓴 인물이 물 위아래로 움직이더니 속력을 내며 다가왔다.
나는 공중 수영장 옆 잔디밭에 서서 데이빗을 기다렸다. 데이빗은 수영으로 무소르그스키와
스크랴빈을 끝내고 밖으로 올라와 환한 얼굴로 팔을 펼친 채 달려오고 있었다. 내게 다가오는
그는 크게 나를 안아 주었다. "연습곡은 어땠어요?" 내가 물었다.
"좀더 잘 연주할 수도 있었는데요." 그는 한껏 진지한 얼굴로 대답하고 잠시 얼굴을 찡그렸다.
수건과 옷을 건네주자 그는 탈의실로 달려갔다. 가면서 한손으로 아이들 머리를 가볍게 건드렸
다.
나와 함께 지낸다는 사실에 데이빗은 날이 갈수록 더 즐거워했다. 하루 40번쯤 나를 사랑한다
고 말했고, 그를 혼자 두고 내가 어디든 다녀오면 나를 보고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한 주씩
지날 때마다 그는 나에 대해 느끼는 사랑이 일방적인 사랑이 아니라는 확신을 점점 강하게 갖게
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거의 매일같이 내게 청혼을 해 왔다. 그 때마다 나는 묵묵부답으로 애매
하게 대응했다. 그럼에도 그는 전보다 상당히 많이 자신감을 얻었다.
아이들이 즐거워 깔깔거리고 웃는 소리와 데이빗이 커다랗게 "아아아! 우우우!" 하면서 웃는
소리가 남자 탈의실에서 들려 왔다. 종종 있는 일이지만, 거기 들어간 까닭을 데이빗이 이번에도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나는 깨달았다. 지금쯤 필시 아이들과 물튀기기 장난에 빠져 있을 것이다.
남자 탈의실에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입구 바깥에 서서 소리는 지를 수 있었다. "데이
빗! 빨리, 달링! 가야죠!"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젊은 수영장 안전요원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미소지으면서 말했다. "제가 모시고 나오죠." 이제 수영장 안전원들도 다들 데이빗을 알았고, 언
제나 친절하고 상냥하게 대했다.
청년은 몇 초 뒤 데이빗과 함께 나왔다. 내 추측과는 달리 데이빗은 옷을 갈아입는 일을 잊지
는 않았지만, 겉과 속이 뒤집혔고 앞과 뒤가 바뀌어 있었으며, 젖어 물이 뚝뚝 흐르고 있었다.
그 날은 그가 서른일곱이 되는 생일이었다.
나는 그 날 밤 자그마한 생일잔치를 마련했다. 손님들은 대부분 우리 둘이 리카도에서 사귄
친구들이었고, 일부는 나와 만나기 전 데이빗이 사귄 친구들이었다. 이 부분은 사실 좀더 중요하
다. 처음 데이빗을 만났을 때 크리스도 도로시도 데이빗에게는 자기들 두 사람 말고는 보살펴
주는 사람도 친구도 전혀 없다는 인상을 풍겼었다. 아직도 대부분이 퍼스에서 살고 있는 데이빗
가족들까지도 데이빗 일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으려 한다고 들었다. 이런 잘못된 생각에 대해 데
이빗이 별달리 부인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매번 '새' 친구가 나타날 때마다 놀랍고도 반가웠다.
그런 특별한 친구 가운데 한 사람이 프란시스 헤브였다. 다른 퍼스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프란
시스 역시 데이빗이 런던에 가기 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그 다음에는 언론에서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잊고 지냈다. 그러다가 데이빗이 리카도에서 연주를 시작하여 신문에 다시 얼굴이 나타
나자마자 프란시스는 데이빗에게 연락해서 무슨 일이든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 했다. 정식
훈련을 받은 간호사인 그녀는 데이빗이 오랫동안 유폐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슬퍼, 틈만 나
면 데이빗을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프란시스는 데이빗과 함께 영화관에도 갔고, 연주회에도 갔
고, 공원을 산책하기도 했고, 데번셔 홍차를 마시기도 했다. 데이빗은 늘 이런 나들이를 기다렸
다.
프란시스를 만남 것은 크리스의 집에서 지낼 때였는데, 그녀는 그 때 데이빗을 데리고 (라 트
라비아타)영화를 보러 가기로 되어 있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나에게 함께 가자고 했고, 내가
쉬고 싶은 날이 있으면 언제라고 대신해서 데이빗을 보살펴 주겠다고 했다.
프란시스는 피아노가 있고 퍼스와 스완 강의 전경이 잘 보이는 멋진 아파트에서 살았다. 그
집에 가면 데이빗은 아주 편안해 했다. 우리는 늘 소식을 주고받았다.
또 한 무리 친구들은 케리녑 교향악단에서 알게 된 사람들이었다. 이 교향악단은 아마추어였
는데, 지휘자가 우연히도 프랭크 안트였다. 그는 어린 시절에 본 뒤로 데이빗을 본 적이 없다가,
80년대 초에 수소문 끝에 데이빗을 찾아내 함께 연주할 것을 제안했다.
나는 데이빗의 이 연주에 대해 크리스로부터 처음 들었다. 크리스는 교향악단에서 데이빗에게
협연에 대한 연주료를 지불하지 않는데 대해 언짢아했다. 거기에 대해 데이빗에게 물었더니 그
는 언제든 어떤 교향악단으든, 연주할 기화가 있다는 사실이 기쁘기 그지없었고 그래서 프랭크에
게 아주 고마워하고 있다고 했다. "프랭크는 나를 믿었어요. 아무렴, 나를 믿었고 말고. 나는
악보를 잘 보았죠. 어떤 때에는 아주 기발하게. 암. 아주 기발하게. 다시 연주할 수 있게 되어
뛸 듯이 기뻤죠. 프랭크는 친절했어요. 늘 나를 믿었어요."
프랭크가 제안했을 당시 데이빗이 자신의 음악을 다른 삶과 나눌 수 있었던 기회라고는 도로시
가 주선한 교회 예배실 독주회뿐이었다. 케리녑 오케스트라와 연주하는 데에서 얻는 보답은 연
주료를 받는 것보다도 훨씬 컸다. 리허설과 연주회 덕분에 데이빗은 동료 음악가들에 둘러싸일
기회를 얻었다. 대부분 데이빗의 어린시절부터 기억하고 있었으므로 그를 대단히 존경하고 애써
보살펴 주었다.
리허설이 열리는 곳은 길더클리프 기숙사에서 멀지 않았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데이빗을 데
리러 오곤 했으며, 종종 저녁 식사에 초대하기도 했다. 데이빗은 10년만에 처음으로 한 무리의
사람들 전체가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느낌을 가졌다.
나는 오케스트라 바이올리니스트인 코완 여사가 데이빗과 나를 저녁식사에 초대했을 때 이런
것들을 깨닫게 되었다. 코완 여사는 데이빗이 길더클리프 기숙사에서 지낼 때에 지낼 곳을 마련
해 줄 수 없어서 항상 안타까웠다는 말을 했다. 신장이 좋지 못한 데다가 아이가 열한 명이나
있기 때문에!
이처럼 친절하고 다정한 분들을 데이빗과 내가 모두 한자리에 초대한 것은 이번 생일잔치가 처
음이었다. 데이빗의 가족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 나는 가족 모두를 잠깐씩 만나 보았지만, 아마
도 아직 나를 경계하고 있거니 생각했고 또 일을 억지로 진척시킬 마음이 없었다. 게다가 당시
에는 가족들과 데이빗 사이에도 그다지 연락이 오가지 않았다.
4월 유월절 동안 데이빗은 나에게 함께 마메나를 만나 보러 가자고 했다. 레이첼을 만났을 때,
그래서 데이빗에 대한 나의 감정을 말했을 때, 그녀는 데이빗과 함께 지내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
다고 쳐도 도대체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지만
아들의 건강상태가 레이첼로서는 충격일 뿐이었다. 조용하고 단순한 성격인 레이첼은 일생을 살
면서 아들의 특출난 재능에 대해서도, 정신적인 고통에 대해서도 그저 지켜 볼 수밖에 없었다.
한 때에는 그토록 총명하고 건강했지만 이제는 구부정하고 침흘리고 중얼거리는 아들을 보았을
때, 도울 길이 없어 안타까운 마음 때문에 나의 동기에 대해 불신을 품었던 것 같고, 또 약간 어
리둥절했던 것 같다. "난 저 애를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몰랐어요." 몇 달 뒤 레이첼은 슬픈 목
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나는 그런 마음을 느끼는 사람이 레이첼 혼자만이 아니라며 안심시켜 주
었지만, 마침내 그녀가 나를 받아들이고 또 내가 데이빗의 가장 소중한 사람임을 인정받기까지는
좀더 시간이 걸렸다.
우리가 라틀래인 집으로 이사를 간 직후에 레이첼이 나와 가까워지기 힘들어지도록 만든 사건
이 있었다. 도로시로부터 부탁 받은 일 때문에 레이첼이 난처한 처지에 놓인 셈이었는데, 그 부
탁이라는 것이 데이빗과 내가 성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지 데이빗에게 전화를 걸어 알아봐 달라
는 곳이었다. 그보다 며칠 전에 데이빗과 내가 도로시에게 건강하기를 빌면서 보낸 카드에 대한
대답치고는 좀 이상한 부탁이었다. 그 때 데이빗은 용기를 그러모아 사랑하는 마메나에게 상관
할 일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그런 모든 일을 무시하고 도로시에게 데이빗의 생일잔치에와 달라고 초대장을 보냈다.
초청에 대해 답장이 따로 두 장이 왔다. 하나는 데이빗 앞으로 되어 있었고 다른 하나는 애 것
이었다. 둘 모두에서 도로시는 오지 못하겠노라 썼고, 데이빗 앞으로 된 편지에는 그의 살이 그
토록 많이 달라졌기 때문에 자신은 거기에서 차지할 자리가 없는 것으로 느낀다고 썼다. 그렇지
만 데이빗의 앞날을 눈여겨보면서 연주회가 있을 때마다 참석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데이빗이나 내가 채 거기에 답하기도 전에 도로시에게서 새로 편지가 한 장 왔다. 데
이빗은 편지를 뜯고 몇 초 동안 읽더니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데이빗은 한동안 완전히 말을
잃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내 쪽으로 내저었다. 나는 받아서 읽어보았다. "데이빗, 근
래에 달라진 당신 생활에 비추어, 우리의 우정이 이제는 끝났다는 것을 단신이 알아주었으면 해
요. 그리고 앞으로는 내게 편지도 전화도 하지 말아 주세요. 빌린 돈은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보낼게요. 도로시."
이런 냉정한 거부는 어쩌다 버스에서 만난 낯선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아주 아씨는 특별한 친구
에게서 온 것이었다. 나는 그 때까지 데이빗이 그렇게 깊이 충격 받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나
는 도로시가 필시 마음이 혼란스럽고 고통이 커서 그럴 거라며 데이빗을 전정 시키려고 했다.
그게 어느 정도 효과가 있기는 했지만, 이번 사건의 여파가 어느 정도였나 하면 그로부터 일 년
이 지난 후에도 데이빗은 편지를 뜯을 수가 없어 늘 나에게 부탁했다. "그런 추격은 다시는 받
고 싶지 않아요, 달링. 다시는."
나도 그런 충격은 더 이상 바라지 않았지만, 운명은 우리 뜻대로 되지 않았다. 다음 날 나는
다가올 데이빗의 연주회 입장권을 전하러 레이첼 집으로 갔다. 그런데 이제까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여자가 거기서 나에게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 여자의 이름이 도로시였다.
불미스런 비난이 부엌을 가로질러 나에게로 몰려오자 레이첼은 더할 나위 없이 당황해 했다.
일평생 그렇게 욕을 많이 먹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가장 아프게 느꼈던 것은 데이빗을 건드린
일로 도로시는 스스로를 불결하게 느끼면서 자기를 비하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도로시는 완전히
혼란에 빠져 있었고 또 데이빗에 대해 강한 소유욕을 보였다. 세월이 지나면서 나는 사람들이
데이빗에 대해 취하는 모순적인 태도가 남녀를 막론하고 데이빗과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흔히 나
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러나 그 당시 레이첼의 부엌에 서 있던 나는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25분이 지나자
이성적인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섰다. 나는 도로시에게 신실한 기독교인인 만큼 나중에
후회하게 될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데이빗을 보러 온다면 언제든지 환영한다고, 또 그동안 데이
빗을 보살펴 주어 우리는 늘 고맙게 여길 것이라고 덧붙였다. 거기에 대한 대답은 "선심 쓰지
말아요!"였다. 레이첼이 점점 더 불편해 했으므로 나는 그 자리를 떠났다.
며칠 뒤 나는 도로시에게서 사과하는 내용의 쪽지를 받았다. 그러면서 답장은 보내지 말아 달
라는 부탁이었다. 나는 도로시의 행동에 깊은 감사를 느끼고 데이빗과 내 이름으로 도로시네 현
관에 하얀 국화 화분을 하나 놓아두었다. 나는 도로시가 데이빗을 빼앗겼다고 느낀다는 것을 알
고 있었다. 내가 데이빗에게 나타났기 때문만이 아니라, 크리스와 리키도 등 데이빗이 새로 사귄
친구 모두 때문이었다.
나는 데이빗에게 털어놓아야 한다는 마음이 들어 레이첼의 집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데이빗은 주의깊게 듣더니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를 안고 말했다. "아, 불쌍한 달링... , 에 그리고
불쌍한 도티-스코티." 그 며칠 뒤 데이빗은 어느 순간 갑자기, 내가 도착한 바로 다음 날 도로시
네에 가서 주말을 보낼 거라고 했을 때 내 기분이 어땠을 지를 알아차렸다. 데이빗으로서는 처
음으로 나에게 염려하는 빛을 띠면서 말했다. "미안해요, 달링. 난 몰랐어요. 알았어야 하는 건
데. 어떻게 내가 그럴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마음 아프게 할 생각은 없었어요. 난 몰랐고
마음 아프게 할 생각은 없었어요. 이젠 알아야 되겠군요, 더 잘.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요."
데이빗은 다른 사람의 기분이 어떤지, 무엇을 필요고 하는지를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나아가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더 분명하게 구별하고 또 나와 나머지 사람들 사이의 차이점을 분간하고
있었다. 데이빗에게는 이것이 '안개'밖으로 걸어나오는 작은 한 걸음이었다.
'안개'는 그가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는 여러 가지 용어 가운데 하나였다. '다친 자리', '도마지
',
'눈의 상처', '낚시바늘' 말고도 여러 가지 용어를 썼다. "안개에 싸인, 어렴풋한 상태예요, 달
링."
그는 정신과 의사들이 갖가지 의학 용어로 정의를 내리고자 하는 증세를 그런 식으로 말하곤 했
다. '안개' 속에서는 모든 것이, 그러니까 안개에 싸인 듯이 보이지만, 무엇보다도 어려운 점은
종종 그의 피아노 연주도 안개에 싸인 듯이 '들린다는' 것이었다.
마음은 갖가지 생각으로 뒤얽힌 와중에서 소용돌이치고, 영혼은 고통에 잠겨 있는 한편으로, 외
적인 현실과 거기 있는 모든 사람, 모든 사물은 두터운 솜 같은 안개에 휩싸여 있었다. 데이빗의
저 특별한 두뇌가 만들어 낸 기발한 자기보호 수단이었다.
제 7장 보기 드문 신동
데이빗이 '안개 없이' 지낸 마지막 해는 1960년이었다.
3월에 중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가장 친한 친구 보리수와는 학교가 달라 떨어져 지낼 수밖
에 없었다. 데이빗은 새로운 환경 때문에 조금 외로움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래도 불행하지는 않
았다. 다른 부분에서 신나는 일이 너무나 많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데이빗은 열세 살이 되지 직전이었다. 성인식을 치러야 했다. 피터는 데이빗의 바르 비츠바
(유대교의 성인식)에 종교에 대한 자신의 편견을 개입시키고픈 생각이 없었다. 데이빗은 그 성인
식이 아주 좋았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거기 참석한 목적을 왜곡시켜 말하지는 않았다.
"바르 비츠바에 참석한 것은 아빠가 그 부자 유대인들의 비위를 맞추려 했기 때문이죠. 돈이 필
요했으니까요." 이런 목적에 비춰볼 때 피터는 성공했다.
"나는 그렇게 멋진 파티에다 온갖 케익, 과자 등등, 지금도 브렉클러 씨네 분들한테 고맙게 생
각하고 있어요. 브렉클러 가족은 나한테 선물이랑, 돈이랑 많이 줬죠. 그리고 돈도 많이 들었
죠." 데이빗은 더할 수 없이 진지하게 말하곤 했다.
브렉클러와 또 유대인들 가운데 형편이 괜찮은 사람들은 데이빗의 아버지를 그리 높이 평가하
지는 않았지만 아이들을 위해 언제나 헬프갓 가족을, 특히 데이빗을 많이 도와주었다. 이 어린
피아노 신동은 유대인 사회 전체의 큰 재산이었다. 피터가 데이빗을 회당으로 데리고 갈 때에도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데이빗은 그 행사 전체에서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을 얻었다. 행사를 준비하면서 데이빗
은 몇 주 동안 핑클스타인 부인이라는 친절한 이웃과 함께 공부하면서 고대 음률을 만끽했다.
"그 음악은 2000년 동안 전해 내려온 거예요! 로마제국과 대영제국 시대를 거쳐 내려왔는데도
변하지 않은 거예요!" 데이빗은 자랑스럽게 소리쳤다. "아주 음률이 뛰어나고 아주 놀랍고 광활
해요! 그건 전부를 기억해야 돼요. 요술이에요, 요술! 그건 노래로 불러야 돼요. 나는 기억력
이 기가 막혔어요. 나는 토라와 그 나머지를 모두 배웠는데, 그걸 모두 기억할 수 있었어요!"
데이빗은 자신의 성인식 뒤로는 한 번도 바르 미츠바 행사에 나가지 않았는데, 놀랍게도 그 음
률을 아직도 기억하면서 이따금씩 일부분을 나에게 들려준다. 그렇지만 행사 당일에는 가사는
다 기억했지만 곡조를 일부 잊어버렸다고 한다. 그는 그같은 아이러니에 지금도 어리둥절해 한
다. 이따금 데이빗은 그 때 랍비가 이런 말을 한 것을 기억하면서 웃곤 했다. "자, 데이빗. 네
가 연설에는 별로 소질이 없다는 걸 이제 다들 알게 됐군."
그렇지만 이런 기억에는 항상 약간의 회한 같은 것이 섞여 있다. 데이빗에게는 그다지 효과가
없는 방법으로 연습을 했던 것이다. "난 그냥 기계적으로 외었어요. 노래를 부르면서도 사실은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를 몰랐던 거죠. 그냥, 말하자면 앵무새같이 배운 거죠. 히브리어는 한 마
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어요. 아버지가 히브리어는 한마디도 가르쳐 주지 않았으니까요." 물론 문
제는 히브리어를 배우는 것이 아니었다.
열세 번째 생일이 지난 몇 주 뒤 데이빗은 다시 ABC의 협주곡과 성악 부문 경연대회에 참가
해 주 결선에 나갔다. 이번에는 라벨의 (G장조 협주곡) 가운데 두 악장을 연주했다. 2 등에 그
쳤지만 언론으로부터 호의적이 평가를 받았다. (웨스트 오스트에일리언)지에서는 그가 "어려운
라벨의 협주곡을 능숙하게 다루어, 청중으로부터 가장 공감하는 갈채를 받았다"고 썼다.
더 중요한 사실은 주 결승에서 데이빗의 연주가 제임스 펜버티의 관심을 사로잡았다는 점이었
다. 한 해 뒤 그는 데이빗의 일생에 숙명적으로 관여하게 된다. (선데이 타임즈) 비평가인 그는
이렇게 썼다. "13살 난 데이빗 헬프갓이라는 피아니스트의 출현으로 퍼스는 처음으로 보기 드문
신동을 갖게 되었다. 라벨 협주곡의 1, 3악장은 그토록 작고 어린 피아니스트로서는 놀라운 연주
였다."
데이빗은 성공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신문 기사는 늘어났고 가족들은 데이빗의 개인 스크랩북
에 하나 하나 정성 들여 기사를 붙여 나갔다. 몇십 년이 지난 뒤 나는 그 모드를 찾아볼 수 있
었다.
1960년도 기사 모음에서는 그밖에도 여러 연주회에 참가했고 또 데이빗의 레퍼토리가 계속 늘어
나고 있다는 애용을 찾을 수 있다. 학교에서 보낸 연말 성적표도 있었다. 프랑스어는 94점, 목
공은 47점, 그리고 학부모님께 전하는 통신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데이빗은 한 해 동안 꽤
공부를 잘했습니다. 조용하고 기분 좋은 성격을 지니고 있어서 수업 시간에도 좋은 학생입니다."
보기 드문 신동은 관두고라도, 데이빗은 그냥 '조용한' 정도가 아니라 상대방이 불편할 정도로
수줍음을 많이 탔다. 자신의 음악을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올 때마다 들뜬 기분이
되고 청중이 많이 모인 앞에서 연주하는 것을 아주 좋아하기는 했지만, 그리고 조금만 칭찬해 주
어도 그 어린 가슴이 기뻐 어쩔 줄 몰랐지만, 수줍은 성격 때문에 늘 감정을 드러낼 수 없었다.
그러나 이같은 수줍은 성격에도 나름대로 특별한 장점이 있었다. 퍽이나 겸손했던 데이빗은 연
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그것이 너무나도 고마운 나머지 긴장하기는커녕 오로지 기뻐 어쩔
줄 모르게 된다는 점이다.
열네 살 무렵, 데이빗은 변두리에 사는 어머니들 모두가 꿈꾸는 이상형의 아들로 자라났다. 남
자아이들이 무뚝뚝하고 다루기 힘들게 바뀌는 경향이 있는 나이에, 신문에서 데이빗은 완벽한 매
력을 지닌 청소년으로 그려졌다. 사진에서는 언제나 정장에다 나비넥타이를 맨 모습이었다. 안
경과 단정하게 깎은 곱슬 금발에서, 상냥하고도 마음 넓어 보이는 얼굴에서 진지한 일면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물론 건반에서 보여 주는 마술 같은 재능도 있었다. 어느 여성지 기사
에서는 이렇게 그렸다. "데이빗은 너무나도 얌전하여, 텔레비전에 출연한 뒤 퍼스에 사는 많은
주부들이 방송국으로 전화를 걸어 이제까지 데이빗만큼 손이 아름다운 사람을 본 적이 없다는 말
을 했다는 사실을 알면 어쩔 줄 모를 것이다."
퍼스는 세계에서 지역적으로 무척 외떨어진 곳 가운데 하나이고 또 당시에는 비교적 좁은 환경
이어서, 밀접하게 조직된 사회집단이 지역의 문화적 사회적 측면을 보살폈다. 이런 면은 특히 퍼
스의 음악계에서 두드러져, 고전음악이 각별한 지위를 누리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
다. 데이빗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은 퍼스로서는 커다란 사건이었다. 그런 만큼 막후 세력
들이 그의 경력에 영향력을 행사하고파 한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언론 역시 데이빗의 이
야기에서 '인간적인 관심'의 가능성이 대단히 큰 것을 알아차렸고 그래서 최대한 전면에 내세
웠
다.
1961년 5월 말 데이빗은 자시 ABC 경연대회에 참가하여 주 결승에 진출했다. 이번에는 모차
르트의 (C단조 협주곡) 가운데 두 악장이었다. 우연히도 유명한 미국 음악가 두 사람이 그 당시
몇 주 동안 그 곳에 와 있었다. 피아니스트 애비 사이먼과 바이올리니스트 아이작 스턴이었다.
외국에서 유명인사가 오면 이들이 나라 안의 젊은 인재들의 음악을 들을 수 있도록 주선해 주는
것이 당시 ABC의 관행이었다. 데이빗은 그 같은 젊은 인재 가운데 하나였으므로 사이먼과 스턴
이 각자 일정대로 퍼스에 왔을 때 데이빗은 ABC에서 연주하도록 초대를 받았다. 그 곳에 모인
사람들로는 기자들과 또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아 대학교 음악 교수 프랭크 캘러웨이가 있었다.
그러나 피터는 두 번 모두 가지 않았다. 데이빗은 이전에도 외국 유명인들을 위한 연주 행사에
많이 나갔지만, 피터는 그런 연주회를 위해 일손을 놓고 나가는 일이 별로 없었다.
사이먼은 기자들에게 "이 아이에게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 장래가 촉망된다는 것을 믿어 의심
치 않는다"고 말했다. 그런데 스턴을 위한 비공개 음악회에서는 더욱 좋은 결과를 얻었다. 데이
빗은 그 때 연주를 자신의 경력 가운데 두 가지 최고 사건 가운데 하나로 꼽는다.
"그 때는 대단했죠!" 그는 스턴과 함께 보낸 그 때 오후에 대해 매번 그렇게 말한다. "ABC에
서 자리를 만들어 주어서 난 아주 고마웠어요. 상상해 봐요! 어린 나를. 아버지도 없이! 난
그냥 피아노만 쳤어요. 볼프강의 (C 단조 협주곡). 아이작은 내내 미소짓고 있었죠. 그분은 내
가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자의식이 조금도 없이 데이빗은 이런 식으로 덧붙인다. "난 조금도
초조하지 않았어요! 천만 다행으로 난 초조하지 않았어요. 그저 편안하고 침착하고 느긋했고 연
주도 아주 잘했어요."
비록 데이빗은 이 시기까지 중요한 음악가로부터 재능을 인정받은 일이 많았지만, 어려운 환경
출신에 자신을 그리 내세우지 않는 이 어린 피아니스트에 대한 스턴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당시
일을 데이빗은 자랑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이 이렇게 떠올렸다. "그분은 천재 같은 조짐을 본 모
양이어서 나를 최대한 도와 주어야 마땅하다고 했죠. '내가 미국에서 네 스승이 되어 주겠다' 하
는 식으로 말했어요. 나를 보살펴 주겠다는 말 같았어요. 아무 걱정 말라면서. 그리고는 나더
러 '미국에 가고 싶니? 별에서 음악이 튕겨 나오는 곳에?' 했고, 그래서 나는 '전 테니스를 좋
아
해요!' 했어요." 데이빗은 자신의 치기 어린 농담을 떠올리며 쿡쿡 웃었고, 그런 농담 때문에 기회
가 사라지는 일은 전혀 없었다고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아이작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어요.
그리고 내가 테니스를 좋아한다고 했을 때 아주 재미있는 말이라고 생각했죠. 내 농담을 내가
'예스'라고 대답한 것으로 받아들였어요. 완벽한 대답이었죠. 아주 매력적이고 즐거운 대답으
로
생각한 겨예요!"
'벽에서 음악이 튕겨 나오는 곳'은 펜실베니아에 있는 커티스 음악원이었다. 스턴을 위한 그
때의 비공개 음악회에 나온 사람들 가운데 피터 헬프갓 데이빗을 그 곳으로 보낼 형편이 될 거라
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같은 기회가 데이빗의 재능에 아무리 합당한 것이라 해도.
데이빗이 집으로 돌아가서 스턴과의 대화를 자랑스럽게 말했을 때 피터는 일단 긍정적으로 받
아들였다. 그리고 그 뒤 며칠 동안 퍼스의 음악업자들과 유대인들이 데이빗을 위한 기금에 대해
말을 꺼내기 시작해했을 때 그것 역시 피터에세는 반가웠다.
물론 데이빗이 당장 어디로 간다는 것은 아니었다. 너무 어리기 때문이었다. "한동안은 괜찮
았죠. 모두 좋았어요. 합리적인 결정이었거든요." 데이빗은 피터와 처음 의논한 것에 대해 설명
했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어요. '우린 기금을 모을 거고, 네가 갈 만한 때가 되면 가거라.
그렇지만 우선은 기금을 모아야 돼. 기금에 대해 싫다고는 안 할거야. 돈이거든.' 그러니까 모두
합리적으로 계획이된 거였어요."
피터는 유학을 가려면 중학교 졸업장을 받을 때까지 적어도 18개월은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데이빗은 그 전까지만 해도 해외 유학을 꿈꿀 염치가 조금도 없었겠지만, 그 때부터는 그 생각에
온 마음이 사로잡히게 되었다. 낙관적으로 생각하기 쉬운 어린 나이답게 그는 그 꿈이 이루어지
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 뒤로도 데이빗은 많은 상을 받았다. 6월 7일 데이빗은 ABC의 주 대결승에 출전해서 우승
했다. 이어 월말에 맬번에서 열리는 전국 결승에서 연주하도록 선발됐다. 언론의 반응이 정말로
절정에 이른 것이 이 때였다. 데이빗도 기분이 아주 좋았다. 데이빗이 말했다. "애비와 또 아
이작 앞에서 연주회를 할 때, 또 다들 내 사진을 찍을 때 나는 스타가 된 기분이었죠. 정말로 살
아 있는 스타 말예요. 다들 날 가지고 법석을 떨었어요. 유명해진 거죠!"
그러나 데이빗의 '유명세'가 데이빗 혼자에게만 의미 있는 것은 아니었다. 유대인 사회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들은 동족 가운데 젊은 스타가 나타나자 큰 자부심을 느꼈다. 유대인
어머니들에 대한 일이 생각날 때마다 데이빗은 한껏 웃곤 했다. "퍼스의 경연대회에서 우승했을
때 들은 얘긴데, 나 때문에 유대인 마메니들이 다들 자기 아기를 피아노에 앉혀 데이빗을 따라잡
으려 하고 있다는 거예요. 나같이 되게 하려고요. 나같이 되게 하려고요. 또다른 '데이빗'을 만
들고 싶어서! 그랬대요! 다들 나를 따라잡으려고!"
모범 사례. 그것이었다. 그러나 세상일에는 항상 음과 양이 있는 모양이다. 데이빗에 대한
제임스 펜버티의 끊임없는 관심은 완전히 엉뚱한 결과를 낳게 되었다.
제 8장 아빠는 피아노를 팔지 않아요
1961년 ABC의 협주곡 경연대회 주 대결승이 있은지 한두 주일뒤, 데이빗이 항상 친근하게 '짐
경'이라고 부르는 제임스 펜버티가 데이빗의 경력을 위해 능력이 되는대로 최대한 돕겠다는 선의
를 가지고 헬프갓네 집을 찾아왔다.
유명한 작곡가이기도 한 펜버티는 진심으로 데이빗의 재능을 믿었다. 이제 그는 데이빗의
ABC 경연대회 우승으로 생겨난 홍보효과와 유명 미국인 음악가들이 추천을 바탕으로 유대인 사
회를 몰아 데이빗의 교육을 위한 기금을 모을 계획이었다. 6월 11일, 그가 쓴 기사 '아빠는 피아
노를 팔지 않아요'가 (선데이 타임즈) 머리기사로 나왔다.
데이빗이 피아노 앞에 앉은 사진이 신문 4분의 1면 크기로 났고, 그 밑에 지난 해 데이빗이
ABC 경연대회에 나온 이야기로 기사가 시작되었다. 펜버티는 데이빗을 "너무 작은 저고리에 너
무 짧은 바지 차림으로 나타난 핼쑥한 어린 소년"으로 묘사했다. "캐피톨 극장 무대 위를 머뭇머
뭇 걸어가" 피아노에 앉았는데, "너무나 작아서 연주회용 그랜드 피아노 페달에 발이 거의 닿지
않을 정도였다"고 썼다. 그리고 "몇 초 뒤 청중은 열세 살 난 피아니스트가 그 어려운 라벨의 피
아노 협주곡을 놀랄 정도로 힘차게 연주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이런 묘사에 대해 데이빗에게 물었더니 그는 머리를 가로 저으면서 말했다. "아주 화려해요,
아주 화려해. 그렇지만 사실이 아녜요. 짐 경은 그냥 사람들 눈물을 짜낼 생각이었어요."
기사는 계속해서 데이빗의 음악 수준과 해외에서 공부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설명했다. 한껏
정성을 쏟은 펜버티의 글을 이렇게 계속되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상당한 액수의 장학금을 받
지 못한다면, 혹은 특별한 기금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아무 곳에도 가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필
자는 이번 주에 알게 되었다." 이어 그는 가난에 대해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설명을 시작했다.
"헬프갓은 아내와 다섯 아이들을 부양해야 한다... . 폴란드 태생인 피터와 레이(원문대로) 헬프
갓이 퍼스의 불워 거리에 있는 집에서 그들의 매력적인 가족을 어떻게 행복하게 하고 잘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는지 필자로서는 이해할 길이 전혀 없다. 얼마 전 피터 헬프갓은 병을 얻었는데
그 때 그들의 작은 집에는 가구가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피터는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집안에서 어느 정도 생계를 유지하고 싶었죠. 그래서 피아노 할부금만큼은 어떻게 어
떻
게 냈습니다.' 헬프갓 가족은 참으로 자존심이 강한 가족이다. 아무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
그러나 데이빗 같은 소년에게 적절한 교육 기회를 제공해 줄 수 있는 가족은 오로지 부유한 사람
들뿐이다. 필자는 그가 언젠가는 이 도시에 명예를 안겨 줄 것으로 믿는다. 그러기에 우리 지역
사회는 그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 주어야 마땅한 것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이 소년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은 있다... . 그가 쓰는 피아노는 철저하게 수리를 받아야 한다. 거기서 연습할 때마
다 아마도 악몽 같을 것이다. 그리고 앉아서 연습하는 피아노 의자는? 집에서 만든 것이다."
이 가사는 몇 가지 강력하고도 서로 다른 반응을 불러 일으켰는데, 그 대부분은 펜버티가 의도
하지도 내다보지도 못한 것이었다. 그의 입장에서 볼 때 반응은 온전히 긍정적이었다. 그 날 오
후 그의 사무실 전화기는 가난에 시달리는 이 어린 신동에게 돈과 피아노 의자, 피아노 무료 조
율을 해 주겠다는 내용의 전화로 불이 날 지경이었으니까.
그러나 헬프갓 가족에게 6월 11일 일요일은 '눈물의 날'이었다. 펜버티에게 자기도 모르는 사
이에 기사에 실린 내용 대부분을 일러준 셈인 피터로서는 그 가사가 가족들, 특히 재능이 뛰어난
아들을 그가 적절히 뒷받침하지 못했다는 구체적인 설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오로지 부
유
한 가족들'만 할 수 있는 일이었는데 피터의 가족은 어느 모로 보나 부유하지 않았으니까 기사
는 피터에게 수치였다. 그 기사 때문에 그는 자신이 가치 없고 쓸모 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창
고에 살면서도 사들이는 단계에서부터 시작해서 많은 것을 희생하고 마련한 그 피아노가 데이빗
에게 '악몽'이라는 것이다. '어린 왕자'에게 피아노 의자를 만들어 주고자 애쓴 것까지 동정의
대
상에 되어 사람들의 기부금을 부추겼다. 이런 것들은 피터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주었다.
데이빗에게 그 기사는 방향은 달라도 역시 아픈 결과를 낳았다. "아버지는 아주 또렷하게 말
했어요. '데이빗, 읽지마. 울게 될 테니까.' 그렇지만 난 아빠 말을 듣지 않았죠. 그래서 결국
읽었고 그래서 며칠 동안, 며칠 동안 내내 울었죠. 많이 울었죠. 애가 가난하다고 했거든요. 내
또래들이, 무슨 말이냐 하면 학교에 있는 내 또래들이 우리가 얼마나 가난한지를 알고 나면 나한
테 성가시게 굴지 않을까 싶어 겁났거든요."
데이빗에게 유일한 위안거리는 그의 음악에 대한 펜버티의 칭찬이었다. "그러면서도 기분이
아주 좋기도 했죠. 내 연주에 대해 쓴 말이 맘에 들었거든요. 나에 대해 쓴 부분은 정말 좋았어
요. 나에 대해 쓴 부분은 정말 좋았어요. 황홀했어요." 데이빗이 말했다.
그러나 그 기사 때문에 -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 기사에 있는 문장 하나 때문에 - 화가
난 사람들이 또 한 무리 있었다. "헬프갓 가족은 참으로 자존심이 강한 가족이다. 아무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 하는 부분 때문에 유대인 사회가 들끓었다 그동안 그토록 도와준 건 어
디 가고? 데이빗의 바르 비츠바는 어떡하고? 언론에서 '그들의' 데이빗을 언급하면서 어떻게
그
들은 언급하지 않을 수가 있나? 기사는 헬프갓 가족의 민족을 '폴란드 태생'이라고만 표시함으
로
써 원래 목적에서 벗어나 데이빗과 유대민족을 따로 놓아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그 다음 안식일에 피터가 회당에 나타났을 때 회중 가운데 일부 사람들은 자신들이 정확히 어
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피테에게 알렸다. 데이빗은 근처에 서서 피터의 이중성격이 결국 어떻
게 그에게 피해를 끼치는지를 보았다.
그 날의 기억은 언제나 데이빗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브렉클러 가족은 오랫동안 우리를 도왔
고, 그래서 다들 아버지가 짐 경과 만났을 때 그 이야기를 했어야 옳다고 생각했어요. 다들 도움
을 받은 사실을 인정하고 고마움을 표시했어야 마땅하다고 했죠. 그 부자 유대인들은 무척 화가
났어요. 그래서 아빠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우린 당신에게서 손을 떼겠소. 우리가 그토록 도와
줬는데도 자존심 강한 당신 가족은 아무에게서도 도움을 받지 않겠다고 하니까."
피터 입장에서는 이런 식으로 욕을 먹는 일이, 특히 도움과 관계된 부분이라 상처에 소금을 뿌
리는 것과 같았다. 기사에서 헬프갓 가족의 자존심을 언급한 것이 대중 앞에서 피터가 어느 정
도 체면이 서는 유일한 부분인데, 앞으로는 어떤 기자와 만나도 그 부분은 이용할 수 없다고 이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걸까? 다름 아닌 데이빗 때문이다. 그
가 애초에 스스로 이런 수모를 감내한 것도 데이빗 때문이지 않았던가.
한편 브렉클러 가족은 아버지 일에는 '손을 떼겠다'고 하긴 했지만 아들에 대해서는 전혀 그
럴
생각이 없었다. 그 안식일 전 주에 알렉 브렉클러는 아이작 스턴과 만나 데이빗의 장래에 대해
의논했다. 그 모임은 퍼스의 음악계 사람들이 데이빗을 도울 방법을 찾기 위해 모여 의논한 뒤
에 있었다. 이들은 데이빗의 미국 유학생활 5년동안 학비와 생활비로 5천 파운드는 들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들은 이어 퍼스 시장 해리 하워드 경을 찾아가 데이빗을 유학 보내기 위한 기
금의 후견인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피터 헬프갓은 이런 모임에서 한 번도 초대받거나 의논상
대가 된 적이 없었다.
데이빗은 6월 18일 일요일, 그러니까 '부자 유대인들'로부터 욕을 먹은 바로 다음 날, 피터
가
(선데이 타임즈)지를 펼쳐 들고 이런 모임에 대한 내용과 또 한 주 동안 데이빗에게 제공된 갖가
지 도움에 대해 3면에 실린 기사를 읽고나서 어떤 기분이 되었는지를 전혀 알지 못했다. 이 기
사는 펜버티가 쓰지는 않았지만, 피터가 읽은 바로 그 순간 데이빗의 나머지 인생에 영향을 끼친
한 문장, 정확하게 말해 한 낱말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문장은 이렇다. "시드니의 저명한 사업
가 모임에 피아니스트 (원문데로) 아이작 스턴과 퍼스 사업가 알렉 브렉클러 씨가 배석했다."
오늘날까지도 데이빗은 이 이야기를 들려줄 때마다 아버지가 그 기사를 읽던 순간의 기억이 거
울처럼 또렷하게 되살아나 혼란과 고통에 시달린다.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도 이런 감
정을 아프게 느꼈다.
"우린 기금을 모을 거고 또 내가 준비가 되면 유학을 갈 거라고 얘기했었어요. 그렇게 의논이
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아버지는 갑자기 방향을 바꿔 전혀 반대되는 말을 했어요. 돌아
가는 기계에다 막대기를 쑤셔 박은 셈이죠." 데이빗은 놀랄 정도로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신문
에 난 기사에서는 야무진 알렉이 아이작 스턴과 만났다고 되어 있었죠. 아버지는 그 이름을 본
그 산간, '야무진 알렉'이라는 이름을 본 순간 곧장 으으, 으으... "데이빗은 으르렁거리는 소리
를
내어 아버지의 기분이 사나워진 것을 흉내냈다. "그러더니 몽땅 취소해 버린 거예요! 부모 권위
로 단번에! 아버지가 말했죠. '기금은 이제 없어. 돈은 모으지 않아. 미국도 끝이야. 아무 것
도 안돼. 그리고 돈은 다 돌려보내!' 아버지는 온통 신경이 곤두서서 앙심뿐이었어요. 낱말 하
나
때문에! 그 분 이름 때문에! 그 이름 때문에 그런 피해가 돌아온 거예요! 그 낱말 하나를 본
것 때문에! 끝장이었어요. 다 끝장 난 거예요."
"그러니까, 오로지 브렉클러 씨가 아이작과 만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기금을 취소했다는 말이
에요?" 나는 믿을 수가 없어 물었다.
"그래요, 브렉클러 가족은 나를 미국으로 보내는 일에서 한몫을 하고 싶었죠. 우리를 아주 아
주 오래 오래 도와주고 있었잖아요. 그건 이해할 수 있는 일이죠. 다들 나를 미국으로 보내고
싶어했으니까. 그리고 나도 미국으로 가려면 그 사람들 도움이 필요했어요. 돈이 드니까요. 그
렇지만 아빠는 자존심이 너무 강했어요. 아빠는 아주 가난하고 아주 자존심이 셌어요. 너무나
가난하고 너무나 자존심이 셌어요. 브렉클러 가족들에 대해서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어야 하
는데 말이죠. 어쨌거나 그냥 도움을 받아들여야 되는 건데 말이죠. 도움을 그냥 받아들이는 거
예요."
"그런데 왜 신문에 난 이름이... ?"
"아버지한테 그렇게 지독한 영향을 끼쳤나 하는 거요?" 같은 의문을 수십 년 동안 품어 온 데
이빗이 말을 가로막았다. 그는 흥분하기 시작했다. 필시 천 번도 더 이 문제를 풀어 보려고 했
을 것이다. "에, 그러니까... 아버지의 문제가 뭐였을까요? 아버지는 필시 독재자 기질이 있었겠
죠... 어쩌면... 어쩌면 독재자였겠죠. 한 번도 거기에 대해 나랑 이야기를 나눈 족이 없었어요.
우린 그 문제에 대해 한 번도 가슴을 털어놓고 대화한 적이 없어요. 하여간 그게 진물러가고 있
었어요. 곪아터지는 식으로 말이죠. 아버지는 브렉클러 가족한테 아주 화가 나 있었고 아주 깊
은 원한을 품었어요."
"그러니까 당신을 미국으로 보내고 싶어하지 않은 이유가 오로지... "
"야무진 알렉이죠." 데이빗은 다시 말을 가로막았다. 그 때의 일이 그에게 이해되는 한도까지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조금도 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마침내 의문을
풀어 버리고 깊어하는 것도 같았다. "아빠는 원한을 품고 있었어요! 그렇게 오랫동안 내내 원한
을 품고 있었던 거죠! 야무진 알렉 브렉클러 씨는 애가 아버지와 따로 살아야 된다고 생각했으
니까요. 아버지가 파괴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는 식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아이들을 기를 자격이
없다고 본 거죠. 그리고 브렉클러 가족은 우리가 창고에서 살던 시절에 아버지를 울렸어요. 그
래서 그 날부터 아버지는 원한을 품었죠. 그 날부터 아버지는 원한을 잊은 적이 없어요. 애 생
각엔 유대인들은 원한을 품어서는 안 돼요. 그러니까, 결국 독일 총통 히틀러도 비엔나에서 가난
한 화가로 살던 시절에 유대인들이 약간 비열하게 대했기 때문에 유대인들한테 그런 원한을 품었
잖아요. 어리석은 일이잖아요! 어리석어요! 원한을 품어서는 안 돼요. 그렇게 살면 안 돼요.
인생은 너무 짧으니까."
마침내 데이빗은 슬퍼졌다. 그리고 슬픈 기분 덕분에 마음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그는 어
깨를 으쓱하면서 한동안 지난날을 돌이켜 보았다. "그래서 내 생각엔 아버지가 약간 어리석었던
거 같아요, 정말. 그런 이름 하나로 모든 게 바뀌고 역사의 방향이 바뀌고 온 세상이 바뀌게 하
다니. 62년도에 줄리어스 캐천 앞에서 (차임즈)와 (라 캄파넬라)를 연주했을 때 그 분은 아버지
한테 이렇게 말했어요. '아이작 스턴 장학생으로 미국에 가면 누구나 아주 훌륭하게 보살핌을
받
습니다. 왜 보내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했죠. '나한테 상처를 줬으니까
요.'
그리고 그런 위대한 미국 콘서트 피아니스트들은 아버지와 대화하는 게 시간 낭비고 내가 그냥
유학을 갔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게다가 이런 잘못을 바로잡아 보겠다고 쓴 그 많은 돈하며.
아까운 일이죠, 정말. 생각 없고 멍청하고, 하여간 그런 거예요."
그러나 데이빗은 처음 나에게 이 이야기를 해 주었을 때 아버지의 극단적인 반응 뒤에 숨어 있
는 의문을 풀지 못한 상태였다. 열 번째, 열다섯 번째 들려주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역사
의 방향이 바뀌고 온 세상이 바뀌었다"고 했다고 했을 때 데이빗이 과장한 것은 아니었다. 적어
도 그에게는 그렇게 바뀌었다. 그런 사정의 앞뒤를 모두 끼워 맞추는 데에는 수많은 세월이 걸
릴 것이다.
제 9장 돈과 질투
신문에서 알렉 브렉클러라는 이름을 본 순간이 데이빗의 아버지 피터에게는 그 뒤 오랫동안 겪
을 복잡하고 절망적인 여러 생각과 감정의 출발점이었다. 그가 사람들에 대해 품은 생각은 정확
하게 말해 아들의 일생을 남들이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거기에 이제는 질렸다
고 생각한 것도 그 순간이었다. 어쨌거나 천재 데이빗은 그의 아들이었으니까. 그 천재는 언론
것도 아니고 유대인 사회 것도 아니었으며, 브렉클러 가족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천재의 아버지는 아이작 스턴을 만나지도 못했고, 아버지도 아닌 브렉클러는 스턴과
만났다. 여러 모임에 나가 자기 아들의 장래를 위해 한 마디 말할 기회도 없었는데, 그것은 돈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브렉클러는 그 천재의 아버지가 아니었음에도 돈이 있었고, 그에 따른
힘이 있던 까닭에 발언권도 있었다. 그는 그 천재의 삶을 어떤 개인적인 이유로든 주무를 수 있
었다. 신문에 이름이 난 것도 그 한 예다.
피터의 가난은 머리기사가 됐다. 그의 이름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피아노를 사 준 것
과 피아노 의자를 직접 만들어 준 것 말고는 희망도 없고 가망도 없고 병들어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는 아버지라는 식으로만 언급됐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브렉클러는 신문에서 성공한 사업
가들과 외국에서 온 이름난 음악가와 연관지어져 있었다.
계속해서 사업에 실패하고 건강도 나빠져 피터의 권위와 자부심은 무척 저조했을 것이다. 그
래서 이제 그는 온 세상 사람들 눈에 아들을 제대로 보살펴 주지도 못하는 쓸모 없는 인간이 댔
을 뿐 아니라, 브렉클러가 - 자기 자식조차 보살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
바로 그 사람이 - 구원병으로 뛰어들어야 한다는 식으로 비치고 말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한
걸음 나아가 저 '부자 유대인들'은 그가 기자와 만났을 때 그런 인상을 강조했어야 한다고 말
했
다.
천재 아들을 두는 것이 권력과 영광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는 점을, 오로지 돈만이 그럴 수 있
다는 점을 피터가 알아차린 것은 어쩌면 이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나이도 있고 해서
이제 그런 돈은 평생 만져 보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니 천재 아들이 무슨
소용인가?
데이빗은 모든 것이 '돈과 질투'였다고 종종 말했다. 갖고 있지 못한 돈과 또 돈을 가진 사람
들이 누릴 수 있는 권력에 대한 피터의 질투였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피터는 한 가지는 할 수
있었다. 속담처럼 잘 돌아가는 기계에 막대기를 쑤셔 넣는 방법 말이다. 설혹 그것이 그가 오랫
동안 품어 온 꿈과 또 어린아이가 꾸기 시작한 꿈을 무너뜨리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냥 안 된다
고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 뒤로도 피터는 데이빗을 격려하고 뒷받침해 주기는 했지만, 이 순간이 이후에 아버지와 아
들 사이의 애정이 식어 가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리라는 점은 확실하다.
그러나 일단은 피터의 분노를 아는 사람은 아들뿐이었고, 데이빗은 그것을 그저 아버지가 늘상
내는 짜증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다. 데이빗으로서는 그런 기막힌 꿈이 그렇게 갑자기 무
지막지하게 산산조각이 나리라고는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집에서 벌어지는 이런 극적인 상황과는 상관없이 데이빗에게는 여전히 중요한 연주회가 계획되
어 있었다. 6월 25일 그는 아버지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멜번으로 날아가 ABC의 협주곡과 성악
부문 경연대회에 참가했다. 브렉클러 가족이 데이빗에게 잘하라고 격려하는 전보를 보냈을 때
피터는 악몽이 되살아나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데이빗은 그 점보를 받고 좋아
했다. "멜번에서 그 전보를 읽는 순간 나는 아주 커다란 감동을 받았어요. 나는 듯이 기분이 좋
았죠. 정말 영광이라 생각했어요." 데이빗이 말했다. 그리고 잠시 말없이 있다가 이렇게 덧붙
였다. "물론 우리는 그 때에도 여전히 그 사람들과 사이가 좋았죠."
6월 27일, 전국 총결승이 있던 밤 데이빗은 다시 모차르트의 (C단조 협주곡)을 연주했다. 그러
나 이번에는 우승하지 못했다.
"미국에 가지 못하게 돼 슬퍼서 실력껏 연주를 못했나요?" 내가 물었다.
"아뇨. 난 그 때에도 연주를 꽤 잘했어요. 다들 완벽한 연주라고 했거든요!" 데이빗은 최종
결승에서 우승하지 못한 것이 혹시 연주 때문인가 하는 말에 발끈해서 대답했다. 그리고는 이렇
게 설명했다. "보세요, 난 그냥 현실을 받아들였고 또 그게 그리 나쁘지도 않았어요. 시간이 오
래 걸렸죠. 차츰, 시간이 좀 걸릴 뿐이지." 그러나 자기는 어디에도 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데이
빗이 마침내 깨닫게 된 것은 그리 오래 뒤의 일이 아니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알렉 브렉클러는 그 뒤 안식일에 회당에서 데이빗에게 다가와, 기금이 쏟아
져 들어오고 있고 또 '미국에서 데이빗을 돌봐 줄 좋은 유대인 가족'을 주선해 두었다는 반가
운
소식을 들려주었다.
"아버지가 제일로 듣기 싫어한 말이 바로 그거였어요!" 데이빗은 공감한다는 듯이 말했다.
우선 이 미국 가족은 '좋았'다. 그런데 피터가 당시 처해 있는 형편에서 볼 때 브렉클러가 또
다시 피터의 가족이 '좋은'가족이 아니라는 말을 넌지시 하고 있는 것으로 들렸다. 둘째로 그들
은 '유대인'가족이었는데, 피터는 우리도 알다시피 '정통파 유대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피터는
데
이빗이 미국에서 지내는 5년 동안 '유대인'들이 '공산주의자'들보다 낫다는 사실을 알게 될 기회
를
주고 싶지 않았다. 혹시라도 그런 일이 벌어지면 그토록 오랜 시간과 세월을 들여 이야기한 정
치이념이 물거품이 되고, 결국에는 아들이 랍비 할아버지처럼 환상에 빠지게 될 판이었다.
"아버지는 유대적인 것에 대해 온통 뒤죽박죽이었죠." 데이빗은 '좋은 유대인 가족'에 대한 피
터
의 반응을 설명하려고 했지만 그 스스로가 뒤죽박죽이 되고 말았다. "아버지는 폴란드인이 되기
에는 자존심이 너무 강했고, 러시아인이 되고 싶었지만 실제로는 폴란드계 유대인이었어요. 아버
지는 자존심 강한 유대인이었고 가난한 유대인 공산주의자였어요. 그러니 아주 복잡한 데다가
또 아버지는 미국인들은 어쨌거나 다들 악당들이라고 했어요. 아버지는 아주 극단적이었어요.
한꺼번에 그 모든 게 되어야 했으니까." 갑자기 데이빗은 자기 자신의 말을 가로막고 유령에게
탄원했다. "그런 광신자는 되지 말아요, 아버지! 아까운 일이잖아요." 이어 그는 나에게 가까이
기대며 귓속말로 말했다. "아마 아버지는 좀 혼란에 빠진 거 같아요. 일관성이 없었어요."
혼란에 빠졌든 아니든, 데이빗이 미국에 가지 못한다고 완전히 결정을 보고 난 뒤 피터는 '공식
적인' 이유로 두 가지를 내세웠다. 첫째로, 그는 기금을 맡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데이빗이 18개
월이라는 시간이 지나도 혼자 해외에 나가기에는 너무 어리기 때문에 기금 자체를 무기한 연기하
고 돈은 낸 사람들에게 모두 돌려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는 기금이 잘 모이지
않아서 모금을 중단하게 됐다고 말했다.
두 번째 이유는 기자의 방문으로 세상에 발표되었다. 헬프갓 가족의 생활과 데이빗의 음악 요
정에 대한 언론의 관심이 갑자기 커졌기 때문에, (선데이 타임즈)의 프레드 던힐이라는 기자가 데
이빗이 해외에 나가지 않는 정확한 이유를 찾아내기 위해 그 다음 토요일에 헬프갓 가족을 찾아
왔다. 그가 도착하기 전 피터는 데이빗에게 미리 대답할 말을 일러주었다. 데이빗이 나에게 말
했다. "난 늘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했어요." 이번에도 그는 정확하게 시키는 대로 했다.
"대답할 말을 아버지가 미리 가르쳐 주었어요. 아버지가 미리 가르쳐 줬어요." 내가 데이빗을
만난 뒤로 데이빗의 중얼거림 속에서는 이 말이 늘 되풀이 되었다. 아버지에게 배운 대로 데이
빗이 기자에게 대답하던 그 순간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음악으로 유학은 분명히 갈 거예요. 그
렇지만 가족을 두고 떠날 수는 없어요. 사실 유학을 가고 싶은 지도 모르겠어요. 지금으로서는
떠나고 싶지 않아요."
다음 날 (선데이 타임즈)지에 난 던힐의 기사 '피아니스트,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아에 머물기로
'
에 이 말이 그대로 실렸다. 기사에는 데이빗이 "세상에 알려지는 일에 신기해서 어쩔 줄 몰라
한다"고 되어 있고, "처음 기금에 대한 의견이 나왔을 때 그는 필시 몇 년 안에 유학을 떠날 준비
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고 씌어 있었다. 그렇지만 또 "성악과 협주곡 총결승 때문에 멜번에 갔던
뒤로 그는 가족이 자신에게 너무나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따라서 아직은 가족을 떠날 생
각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누구라도 약간 아까운 생각이들 법했다. 기사가 "여러 군데에서 거
액의 기부금을 약속했고 기탁했다"는 내용으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거 알아요?" 데이빗은 이 기사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면서 한 번은 이렇게 아픈 농담
을 했다. "난 가족이 나한테 그렇게 소중한지 깨닫지도 못하고 있었어요."
그러나 당시 데이빗은 그 사건이 전혀 재미있지가 않았다. 사실 그 사건은 점점 더 심해지는
일련의 '불행'의 시작이었다. 아버지의 생각이 다음 날 기사에서 데이빗 자신의 의견인 것처럼
실린 것을 보았을 때, 데이빗은 그 때에야 현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난 스스로 무덤을 판 거고,
아버지도 등 뒤에서 나는 찌르고 배신했으니까 둘이 같이 내 무덤을 판 거고, 아버지도 등 뒤에
서 나를 찌르고 배신했으니까 둘이 같이 내 무덤을 판 거예요." 데이빗은 그 사건을 그렇게 말했
다. 데이빗에게는 아버지가 그를 사랑한다는 믿음이 배신을 당한 것이고, 아버지와 그가 함께 꾸
던 온갖 꿈에 대한 배신이었고, 오랜 세월에 걸쳐 아버지가 키워 주던 야심한 계획에 대한 배신
이었다.
분노? 절망? 슬픔? 아니었다. 그저 얼얼한 상태에 빠졌다. "그냥 받아들이는 식이었어요."
데이빗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사실 나한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받아들이는 길밖에
는, 선택하고 말고 할 게 뭐가 있어야죠. 슬픔은 며칠이고 며칠이고 지난 뒤에야 닥쳤죠."
그러나 그런 절박한 사실을 깨달은 바로 그 다음날 데이빗이 학교에 갔을 때 그는 이제껏 일상
적이던 환경에 대단히 이상한 일이 벌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마치 세상에서 불이 꺼져
버린 것 같았어요." 데이빗은 커튼을 내리 듯이 손을 들어 얼굴 앞에 드리워 보이면서 말했다.
"모든 게 달라죠 보였어요. 먼지투성이고, 학교가 아주 지저분했어요. 학교에 나무가 한 그루도
없고 풀잎도 하나 없는 거예요. 마치 창고 같은 학교였는데, 그리 기분이 좋지 않았어요. 교실
에 나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는데 선생님이 소리를 질렀기 때문이에요. 그렇지만 난 겁나지 않
았죠. 그 누구도 아버지보다 큰 소리를 지를 수는 없었으니까요 사실 난 쫓겨난 기분이었어요.
친구도 없는 기분이었고, 버림받고 희망도 없고, 완전히 격리된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한 마디로
비참했어요."
"어떻게 된 겨죠, 데이빗? 학교에 나무가 없는 거랑 미국에 가지 않는 거랑 어떤 관련이 있
죠?" 나는 데이빗의 논리를 따라잡을 수가 없어 물었다.
"그러니까, 만일 내가 미국에 갔더라면, 그러면 다른 학교에 갔을 거고 그러면 전혀 다른 환경
에서 앉아 있었을 테니까요!" 그는 그토록 뻔한 것도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데에 대해 지친 듯,
고통에 가득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도 달랐을 거고 세상도 달랐을 거예요! 거기 갔더라면 내
가 달라졌을 거 아녜요? 당연히 달랐을 거예요!" 데이빗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조용하게 덧붙
였다. "어쩐 일인지 그 때 상처를 입은 거 같아요."
열네 살, 그 때까지 데이빗이 알고 지내던 세상이 갑자기 앞뒤가 맞지 않게 되어 버린 것이다.
현실을 너무나도 이해할 수 없어 말 그대로 참을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그 모든 것이 너무나
도 견딜 수 없었고, 그 때가 세상이 '안대에 싸여 버린'때였다.
미국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아버지가 거부해 버린 일이 그 뒤로도 오랫동안 데이빗의 인
생에 영향을 끼쳤다. 그의 마음 저 뒤쪽 어디선가에서 자그마한 목소리가 늘 이렇게 소근대고
있었다. "왜 미국에 가지 않았어?" 그는 만일 미국에 갔더라면 정신적 황무지는 전혀 없었을 것
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그레이랜드 병원에 있는 동안 방을 둘러보면 "음악이 벽에서 튕겨 나온
다"는 아이작 스턴의 말이 유령처럼 다가와 그를 괴롭힌 때가 많았다고 했다.
아버지의 결정으로 인한 데이빗의 고뇌에 대해 우리는 몇 시간, 며칠, 몇 년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언제나 결론은 똑같았다. 나는 만일 미국에 갔더라도 어떻게 되었을 지는 알기 힘들
다는 점을 데이빗에게 상기시켜 주곤 했다. 그것은 해답을 알 길이 없는 의문이었다. 그러나 데
이빗은 거기에서 위로를 얻지 못했다. 그저 이야기를 다음 기회로 미루었고, 다음 기회가 되면
대화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었다.
제 10장 독특한 사람
'안개에 싸인' 내 친구는 대기실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있었다. 데이빗은 속옷 차림으로 자
기 식의 힘들이지 않는 팔굽혀펴기를 하면서 주변에 늘어놓은 악보집을 들여다보며 자신과의 대
화에 몰두해 있었다.
그는 대단히 흥분한 상태다. 문 밖 옥타곤 극장 강당은 호기심 많고 열성적인 음악 애호가들
로 빼곡이 들어차 있었다. 데이빗의 복귀 연주회가 이제 곧 시작될 참이었다. 나는 데이빗이 담
배도 커피도 없이 어떻게 연주회를 무사히 마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어 대기실 안을 오락가락했
다.
현재까지는 그의 '재활'이 성공적이었다. 리카도에서 이제 그는 연주를 하는 동안 커피를 마시
지 않았고 담배도 피우지 않았으며, 전반적으로 설탕을 섭취하는 양도 상당히 줄어들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가 아침에 일어나는 일을 점차 힘들어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별도로 에너
지를 키워 주는 약물이 필요할 판이었다. 그래서 원래 먹던 약 처방이 필요 이상으로 강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크리스와 의논한 결과 장기간에 걸친 투약량 조절이 시작되었다.
투약량을 늘이면 데이빗은 더 차분하고 논리정연하게 말했지만 연주는 그리 좋지 않았다.
데이빗과 함께 지내기로 결심한 그 날부터, 약 처방의 미묘한 균형과 또 그밖의 '재활' 노력이
내 생각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그는 특별한 인간이었고, 그래서 그가 지닌 특별한 개성과 음
악가로서의 독특한 측면을 따로 떼어놓기란 무척 힘들었다. 사실은 거의 불가능했다. 인생은 좀
더 더 쉽게 살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 나가는 측면에서 보는 개성도 있지만, 음악가라는 독특한
면을 망가뜨릴 만한 일은 결코 해서는 안된다고 나는 굳게 믿고 있었다. 투약량은 그가 생각을
어느 정도 또렷하게 하게 하면서도 인생 전반에 새해 특히 음악에 대해 그가 지닌 열정을 무디게
하지는 않을 정도가 되어야 했다.
데이빗은 놀라우리 만치, 거의 초인적으로 민감하다. 흔히 그는 상대방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예측할 수 있거나 상대방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그는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있는 대로 틀어 놓
고 피아노를 치면서도 옆방에서 조용하게 오가는 대화를 들을 수 있다. 또 어떤 피아노든 건반
하나하나를 저마다 정확하게 어떤 식으로 건드려야 원하는 소리를 낼 수 있는지를 본능적으로 아
는 것 같다. 데이빗은 아주 근시인 데다가 눈을 완전히 뜨는 일도 거의 없지만 미세한 것들을
알아보는 희한한 능력이 있었다. 이런 초인적인 능력이 방해받지 않으려면 주위에서 많이 신경
을 써 줘야 했다.
데이빗의 개성을 일상생활에 맞게 조절할 때에도 세심해야 한다. 한 번은 네 살난 아이가 자
기 엄마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우연히 들은 적이 있다. "엄마, 데이빗은 아이야, 어른이야?" 부
당한 질문이 아니다. 데이빗의 이같은 면 때문에 의아해 하는 것은 어린아이뿐 아니라 어른들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데이빗에게는 정말로 어린아이 같은 표정과 믿음이 있다. 악의, 질투,
잔인함, 속임수는 처음부터 그에게는 없는 성격이다. 그는 주변 모두에 대해 너그럽고 호감을 갖
고 있으며 단순하고 넉넉하다.
데이빗은 자기 것을 누가 달라고 하면 뭐든지 기꺼이 내줄 것이다. 나는 그가 사람들에게 우
리 자동차를 주겠다고 할 때마다 말려야 했다. 지난날에는 악보와 돈을 많이 내주었다. 그는 돈
가치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돈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나가면 자그마한 사건이 벌어지는 일이 많
았다. 어느 날 데이빗은 주머니에 든 50달러로 친구와 만나 애 생일선물을 사러 갔다. 애가 진
주목걸이를 좋아한다는 말을 했던 게 생각나 그는 5,900달러짜리 목걸이를 보고 친구에게 말했다.
"이걸 길리언에게 사주고 싶어. 돈좀 줄래? 집에 가면 길리언이 갚아줄거야." 혼자 신용카드를
들고 선물을 사러 나간 게 아니라 천만다행이었다!
데이빗의 어린아이 같은 성격은 또 단정치 못하고 정리도 잘 못하고 실질적인 손재주가 없는
쪽에서도 나타났다. 언젠가는 그가 부엌에서 콩 통조림을 마구 흔드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병따
개로 구멍을 두 군데나 뚫었는데도 왜 콩이 안 나오는지 도무지 알 수 없어 하는 것이었다.
또 한 번은 그가 피아노 곁에서 한손에는 카세트 녹음기를, 다른 손에는 녹음기 전원 플러그를
든 채,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있는 콘센트를 보고 망연히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난감해 하
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애원조로 말했다. "달링, 도와줄 수 있나요? 나 좀 도와줄래요, 달
링?" 피아노를 연습하는 동안 라디오를 들으면서 녹음하고 싶은 특별한 프로그램이 하나 있는데,
전기선이 짧았던 것이다. 나는 연장선을 가져다 연결한 다음 벽에 꽂았다. 그는 경이에 찬 눈으
로 내 행동을 보고 있다가, 내가 다 마치자 이렇게 말했다. "달링, 당신은 정말 너무 영리해요!"
그렇게 작은 일로 그렇게 크게 찬찬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단순한'행동이 단순한 머리에서 나온 것은 전혀 아니었다. 데이빗은 대단히 지능
이 뛰어나도 전반적인 상식도 어마어마한 데다가, 아음만 먹으면 사진과 같은 기억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 그의 두뇌는 음악과 지식을 쌓아 둔 거대한 도서관과 같았고, 그 안의 자료는 언제든
지 꺼낼 수 있었다. 몇 년 동안 보지도 연주하지도 않은 곡을 연주해 달라고 부탁하면 그는 언
제나 즉각 연주를 시작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데이빗이 근처에 있으면 역사, 정치, 혹은
과학 자료를 책에서 찾을 필요가 없었다. 묻기만 하면 대답이 금방 나오기 때문이다. 데이빗은
퀴즈왕 대회에서 우승하고도 남을 실력을 갖고 있었지만 승부욕이 없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기꺼
이 답을 가르쳐 줄 성격이다. 어린아이 같은 성향과 성숙한 지능 사이의 함수관계를 조리 있게
설명할 수 있는 길은 없다. 데이빗이 잘 쓰는 말을 빌리자면 "그건 수수께끼에요!"
음악에 대한 그의 열정 역시 절대적인 경지에 도달해 있기 때문에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저
성향이 그런 것이 아니라 강박이다. 직업이라서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피아노 앞에 앉으면 황홀
하기 때문에 연주한다. 특히 다른 사람들을 위해 연주할 때 더욱 만족을 느낀다. 기회만 있으면
피아노에 붙어 앉으려고 한다. 허락만 하면 피아노 위에서 먹고 잘 것이다. 다른 어떤 일보다
피아노 연주하기를 좋아하는데, 어릴 때에 건반을 처음 건드린 그 순간부터 그랬다. 음악을 향한
열정을 신이 내린 은총이다. "나는 피아노 연주를 위해 세상에 태어났어요, 달링. 연주를 위해."
그는 늘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 부분에서는 나나 또 어느 누구도 데이빗의 열정을 두고 참견
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물론, 데이빗에게 돈의 가치를 가르치고 조심성 있게 쓰는 법도 가르쳐 줄 수 있다. 잡다한 일
상적인 일을 시키면 그는 분명히 시키는 대로 할 것이다. 그의 말대로 '모두에게 상냥하고 친
절
하게' 대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약을 충분히 많이 먹이면 시장이나 식당이나 붐비는 길거리
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낯선 사람들일지라도 우선 사귀는 데에만 몇 달
을 보낼 필요도 없이 처음부터 확실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그가 사회의 '평범한' 구성원이 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그는
평범한 사회 구성원들이 처리하는 온갖 자질구레한 일을 처리하느라 시간을 다 보내게 될 것이
고, 연주하고픈 열정도 빼앗길 것이다. 살아가는 하루하루마다 정상이라는 인위적인 기준에 맞게
'적응'시키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데이빗은 더 이상 데이빗이 아니게 될 것
이고, 그러면 그의 개성을 무너뜨림으로써 그의 마술을 무너뜨릴 수 있는 위험을 안게 되는 것이
다.
어느 날 리카도에서, 데이빗이 베토벤 소나타 한 곡을 매우 격정적으로 연주한 뒤, 어떤 여자가
내가 앉아 잇는 테이블로 다가와 비교적 생색내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이 데이빗을 정상
인처럼 대해 주면 좋겠군요."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절대로 데이빗을 그런 수준으로는 끌어내
리지 않을 거예요." 나는 데이빗이 특별한 채로 머물러 있을 권리를 위해 언제나 싸울 것이고,
평범한 틀에 끼워 맞추려고 하는 세상의 압력으로부터 그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것이다.
복귀 연주회가 있던 저녁, 옥타곤 극장 대기실에 있던 나는 이런 임무에 관한 한 초보자에 지
나지 않았다. 또 그 뒤 오랜 세월에 걸쳐 얼마나 많은 부분을 새로 재우게 될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데이빗과 사는 데에는 참고할 만한 어떤 '지침'이 없었다. 내가 아는 것이라고
는
나의 의도가 데이빗에 대한 사랑에서 우러나왔다는 사실뿐이었으며, 내가 바랄 수 있던 것이라고
는 나의 행동이 긍정적인 결과를 낳는 것뿐이었다.
나는 종종 그의 본격적인 연주회가 처음 열리던 그 직전에 애가 초조하거나 불안하지는 않았는
지 질문을 많이 받는데, 그 때 - 그리고 지금도 큰 연주회가 있을 때마다 - 느낀 긴장과 흥분이
묘하게 범벅된 그 기분을 함 번도 제대로 묘사할 수 없었다. 나는 데이빗이 리카도에서 연주하
는 것을 지켜본 후 피아노 앞에서 보여 주는 그의 힘과 솜씨에 아주 확고한 믿음을 지니게 됐다.
또 리카도에서 그의 음악과 개성에 대한 천중들의 반응도 보고 느꼈고, 그래서 옥타곤 극장 강당
에서도 그와 같기를 바랬다.
데이빗은 그 날 밤 연주를 시작하기 전에 자신의 기분을 단 한 마디로 요약했다. "신나요!"
나는 12년이라는 공백이 지난 뒤 데이빗이 전문 연주 무대로 돌아올 수 있도록 기회를 준 마이
클 패리에게 아주 고맙게 생각했고, 데이빗이 마이클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기를 바랬다.
마이클에게 고맙게 생각하는 일이 또한가지 있었지만 나는 몇 년이 지나도록 그 내용을 모르고
있었다. 연주회가 시작되기 겨우 몇 시간 전, 크리스 레이놀즈는 데이빗에게 정당한 연주료를 주
지 않으면 데이빗을 내보내지 않겠다고 마이클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결국 마이클은 거절했고,
그래도 연주회는 예정대로 열렸다. 당시 마이클은 데이빗이나 나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
기로 마음먹었고, 적분에 데이빗과 나는 모두 최악이 될 뻔한 상황을 피할 수 있었다. 마이클이
데이빗을 보호하려는 마음은 언제나 이와 같았다. 기자들을 대하는 문제에서나 홍보 문제에 있
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연주회 프로그램 자체는 데이빗의 말대로 하자면 '콤프리', 즉 마이클과 크리스, 그리고 데이
빗
이 타협한 결과였다. 마이클과 크리스는 프로그램에서 쇼팽의 (폴로네즈 Ab장조)를 시작으로
(즉흥환상곡 C#단조), (발라드 G 단조) 등 좀더 널리 알려져 있는 곡을 주로 골랐다. 이어 라흐
마니노프의 전주곡 세 곡, G 장조, G 단조, C# 단조를 넣었다. 그리고 데이빗이 고른 발라키레프
의 (이슬라미)로 연주회 전반부를 끝내기로 했다. 후반부에서는 다시 데이빗이 고른 무소르그스
키의 (전람회의 그림)을 연주하기로 했다.
연주회 입장권은 금방 매진되었고 강당 안은 희망과 지지를 보내는 분위기가 가득했다. 리카
도에서 본 낯익은 얼굴, 데이빗의 가족, 예전에 피아노를 가르쳐 준 분들, 그리고 그밖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데이빗이 성공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마치 축구 경기장에서 관중들이 자기 팀이
이기기를 바라는 열망을 느끼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었다.
데이빗이 무대 위를 걸어 베흐스타인 그랜드 피아노 앞에 자리잡고 앉을 때 우리는 모두 떨고
있었다. 쇼팽의 (폴로네즈)가 건반에서 질주하는 듯한 속도로 흘러나왔고 그 결과 연주가 고르지
않게 됐다. (즉흥환상곡)에서는 서정적인 감정이 군데군데 나타났다. 연주가 시작되기 얼마 전
에 데이빗은 이 작품에 대해 설명해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은 섬세한 비단처럼 기적
을 짜 넣어야 한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광풍이라고도 해요. 내가 보기엔 콤프리에요, 콤프리.
너무 빠르지도 않고 너무 느리지도 않게. 균형을 잘 맞춰야 되는 거죠." 지금 나는 650명을 앞에
앉혀 놓고 그가 그 균형을 찾아 나서는 것을 듣고 있는 셈이었다.
(발라드)에서는 절제된 감정이 분명히 느껴졌다. 데이빗이 연주를 더 잘 할 수 있도록 청중들
이 영감을 불어넣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가 사랑하는 라흐마니노프에 이르자 전주곡들이
더욱 자신감 있고 아름답게 흘러나왔다. 이어 그는 발라키레프의 (이슬라미)를 시작했다.
처음 데이빗이 (이슬라미)를 연주하는 것을 들었을 때 나는 피아노곡으로는 세계에서 제일 소
화하기 힘든 곡이 아닌가 생각했다. 데이빗도 나의 그런 생각을 사실로 확인시켜 주었다. "이건
세계에서 제일 힘든 곡이에요! 사실상 피아니스트는 누구나 그렇게 말하죠. 연주하기 너무 힘들
어요. 데일 빠른 곡이에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힘들어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기술적으로
도 아주 힘들고 감정상으로도 아주 힘들어요. 피아니스트들은 대체로 연주하지 않으려 하죠. 너
무 어려우니까요."
기술적인 면에서 볼 때 (이슬라미)는 피아니스트에게 지뢰밭이었다. 더 빨리 연주하면 그만큼
지뢰를 밟을 확률이 높아지는 곡이었다. 데이빗은 이 작품을 어찌나 믿기 힘든 속도로 시작하는
지, 크리스와 나는 서로 마주보면서 데이빗이 복귀하도록 북돋아 준 것이 과연 잘한 일인지 생각
했다. 너무 일찍 무대로 되돌아간 것은 아닐까? 무시하게 연주를 마칠 수 있을까? 우린 도대
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러나 이번 일은 커다란 연주회에서 데이빗이 보여주는 진정한 힘과 용기와 기량에 대한 첫
경험이었다. 한 순간 그가 재난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이내 회복하여 그 아슬아
슬한 작품을 이윽고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웨스트 오스트레일리아)지의 음악 평론가는 평하기를
"별다른 어려운 없이 연주했다"고 하면서, 데이빗의 "아주 독특한 개성에서 위대한 기교가 드러났
고, 자력처럼 강렬한 동시에 서정적으로 평온했다"고 했다.
전반부가 끝난 뒤 데이빗은 비교적 동요된 상태로 돌아왔다. "라흐를 시작할 때쯤 난 모든 게
다 진정됐거니 생각했는데." 그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가 동요한 것은 초조감 때문이
아니었다. 지나친 흥분 때문이었다. 크리스는 대기실에서 데이빗과 조용하게 이야기를 나누면
서, 무대로 돌아가 그가 '정말로'해낼 수 있다는 것을 청중들에게 보여주라고 했다. 데이빗은
숨
을 깊이 들이쉰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크리스. 알았어요, 크리스."
휴식이 끝난 뒤 데이빗은 무대로 돌아가 약속을 실행에 옮겼다. 멋지게 (전람회의 그림)을 해
냄으로써 음악가로서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는 완벽하게 연주하게 연주했고 자신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연주회 끝에 이르자 청중으로부터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대부분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뒤
이어 기립박수와 환호가 터졌다. 답례를 한 뒤 데이빗은 청중의 사랑과 존경심에 흠뻑 젖은 채
무대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나는 기쁨과 자부심과 사랑으로 범벅이 되었고, 말할 수 없는 안도
감에 사로잡혔다. 나는 무대 뒤에 서 있었기 때문에 데이빗이 눈물을 흘렸는지 안 흘렸는지를
볼 수 없었지만 내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천천히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마치 '도마지', 즉 상처가 여전히 거기 있다는 것
을
자신에게 또 청중에게 상기시켜 주는 것 같았다. 어쩌면 크나큰 기쁨이 순간적으로 '안개'를 뚫
고 들어와, 갑자기 세상이 너무나도 예리하고 아름다워 보여서 눈을 가렸는지도 모른다. 잠시 뒤
그는 손을 내리더니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승리감을 나타내는 듯이 조금 들어올린 채 가만히 있
었다. 원래 겸손한 성격인데다 그같은 성공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으므로 주먹을 좀더 높이 들
어 승리를 내세울 수 없었던 것이다.
제 11장 생쥐와 사자
"아버지와 말을 하지 않고부터 난 사방을 막아 버리고 스스로를 낚시바늘에 건 꼴이 되었죠.
말만 했더라도 좀더 나았을 거예요." 자신이 처한 상황의 인과관계에 대해 데이빗은 이렇게 설명
했고 지금도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이런 설명이 처음에는 감이 잡히지 않고 상당히 추상적으로
들렸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데이빗으로부터 자세한 내용을 듣고 나니 이런 설명이 놀이적이고 단
순하고 분명하게 이해되기 시작했다. 사실 데이빗의 미국 유학을 피터가 거부한 뒤 몇 해동안
일어난 일을 그 이상 잘 표현하기란 힘들 것이다.
유학을 취소한 뒤 최초로 반응을 보인 쪽은 놀랍게도 데이빗이 아니었다. 다만 거기에 영향은
받았다. 데이빗의 장래를 위해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투자한 유대인들은 피터가 취한 태도를 이
해할 수 없었다. 더욱 고약했던 일은 피터가 데이빗을 시켜 신문을 통해 공식적으로 기금을 거
절하도록 한 것이었다. 자신의 비이성적인 행동에 대한 책임을 데이빗에게 고스란히 떠넘긴 것
에 대해 유대인들은 더욱 화가 났다. "물론 그 부자 유대인들은 속지 않았죠." 데이빗은 설명한
다. "그 말을 한 게 내가 아니라 아버지라는 걸 알고 있었고, 그래서 아주 화가 났어요. 그리고
트로이 씨, 기금 회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거 같은데, 그 분은 그 때문에 단단히 화가 났죠."
피터와 '부자 유대인들' 사이에 결국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겠지만, 데이빗은
1961년 어느 안식일에 아버지가 처음으로 그를 회당에 데리고 가지 않은 일을 기억하고 있다.
나중에 피터는 집으로 돌아와서 데이빗에게 이상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트로이 씨가 아빠를
노려보았어요. 무서운 눈으로, '우우우' 하는 눈길 말예요." 이야기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데이빗
은 무섭게 노려보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비로 이런 식으로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어요!
그냥 그런 눈빛으로 말을 한 거예요. '데이빗을 보냈어야 하는 거요.' 아마 그것 때문에 화가
나
있었을 거예요."
그리고 피터는 회당에 다시는 나가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래서 아빠는 다시는 회당에 나가
지 않았어요." 데이빗은 설명을 계속했다. "그렇게 간단하게 말예요! 그렇게 오랫동안 회당에
다녔으면서! 그건 어리석은 일 같아요. 한번 쏘아봤다고 그러다니. 하긴, 쏘아보는 것도 무섭긴
하겠죠." 데이빗은 쿡쿡 웃더니 한숨을 쉬었다. "어쨌거나 회당에 다닌 건 좋았어요. 편안하고
부드럽고 찬란한 음악도 많이 들을 수 있고. 아름다운 시간이었어요, 정말. 그렇게 끝나다니 아
까운 일이죠. 그렇지만 어쩌겠어요." 그래서 데이빗은 자기 민족의 지지와 보살핌을 더 이상 받
지 못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안개는 점점 짙어졌고 데이빗은 차츰 자신의 작은 사회 전체로부터 스스로 떨어져 나
왔다. "나는 겨울잠을 자곤 했어요." 데이빗이 털어놓았다. "주로 혼자서만 시간을 보냈고 어떤
면으로는 외롭기도 했어요. 무슨 일에도 나는 반응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나는 학교에서 아무하
고도 말하지 않았고 아버지하고도 말을 하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다들 날 좋아했어요. 모두와
알고 지냈지만 아무도 진짜 친구는 아니었어요."
그런 다음 그는 자신의 과거와 관계된 모든 것에서 그러듯 자신의 행동과 모든 것이 잘못되어
버린 이유를 서로 연관지었다. "피해가 생긴 건 그 때였어요. 난 아이들과 잘 지낼 수 없었어
요. 나는 거부당했고 그게 끝이었어요. 거기에 대해 나로서는 아무 곳도 어쩔 수가 없었죠. 아
무도 내 옆자리에 앉지 않겠다는데 내가 무슨 해결책이 있겠어요? 그리고 선생님은 소리를 고래
고래 질렀어요. 피해가 컸어요. 아주. 그러니까, 또래들한테 받아들여지는 건 아주 중요한 일이
거든요. 가족이나 또래한테서. 그 여부에 따라 정신건강이 확달라지는 거죠. 그래서 내가 상처
를 입은 것도 그 때문이었어요."
그렇지만 그는 잠시 이야기를 멈추고 스스로를 꾸짖음으로써 상황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인정
하는 일면도 보였다. "그러니까, 내 생각에 아마 나도 좀 달랐어야 했겠죠. 좀 더 뻔뻔스러워져
야 됐겠죠." 잠시 동안 그는 대단히 진지한 얼굴이 되어, 나에게 바짝 몸을 기울이면서 마치 대단
한 비밀을 들려주듯이 말했다. "아마 내가 은둔하는 성격이 돼 버린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 거
기서 빠져 나오자니 보통 일이 아니죠."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처럼 자신 속에 갖혀 버린 데이빗은 무심하고 멍한 생태였으므로 누구도 쉽게 대할 수 없었
다. 가족들은 그것을 오만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 무렵 형제자매 모두가(두 살 난 루이스만
빼고)악기를 다루었지만, 연주회가 있을 때마다 새 옷이 생기는 사람은 데이빗뿐이었다. "난 늘
새 양복을 받았어요. 마치 내가 새것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죠." 그는 나에게 이렇게 들려주고
웃은 일이 있다. 연주가 있을 때마다 피터의 주장에 따라 더운 물 목욕으로 긴장을 풀 수 있었
던 사람도 데이빗이었다. 온수 시설이 없던 집에서는 누리기 힘든 사치였다. 집안에서 다른 일
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 역시 데이빗뿐이었다. 그저 '아버지를 위해 피아노만 치면' 됐기 때문
이다. 데이빗은 자기 신발 끈을 맬 필요가 없었고, 화로에 불을 붙이는 일도 빵을 써는 일도 할
필요가 없었다는 식의 가족 얘깃거리는 무수히 많다. 모두가 손가락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이
제 이 '어린 왕자'가 바깥 세계에 대해 문을 닫기 시작하고 보니, 그것이 오만한 태도로 비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데이빗의 성격이 달라지자 피터도 신경이 쓰였다. 기금이라든가 언론, 유대인들로부터 그런 수
모를 겪은 뒤인지라, 데이빗의 이상한 행동은 피터에게 조금도 달갑지 않았다. 데이빗은 그 즈음
아버지와 완전히 말을 끊고 지내지는 않았지만, 오랫동안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행해지던 몇
가지 자그마한 일과를 그냥 지나치기 시작했다. 당시 생기기 시작한 변화에 대해 레이첼이 이렇
게 말한 적이 있다. "얘야, 이젠 아빠에게 책을 읽어 드리지 않는구나."
피터와 데이빗이 원래 모든 대화에서 서로 의견이 일치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사건 이후부터
는 둘이 대화를 나눌 때에도 서로의 말에 어떤 다른 저의가 있지 않을까 의심하는 새로운 버릇이
생겼다. 기금에 대한 피터의 행동이 결국에는 아버지에 대한 데이빗의 존중심을 근본부터 조금
씩 갉아먹기 시작했고, 아버지가 하는 말을 고스란히 믿거나 존중하는 일도 더 이상은 불가능해
져 버렸다. 그로써 피터는 더욱 충격을 받고 실망하고 화가 났고, 마침내는 대화를 나눌 때마다
언쟁으로 발전했다. 데이빗에 따르면 이런 언쟁은 '화제가 뭐든지 간에' 벌어졌다. 피터는 정
치
이야기를 가장 좋아했으므로 이런 싸움은 화풀이를 하는 도구가 되었다. "주로 러시와 중국 공
산주의 얘기였어요" 데이빗은 설명을 계속했다. "그 때 꽤 큰 분파가 있었는데 아버지는 니키타
를 싫어했어요. 니키타가 권력을 잡았을 때요. 아버지는 까탈스럽고 또 까탈스러웠어요. 그리
고 날 울리고 또 울렸죠. 내가 러시아 공산주의를 편들 때마다 아버지는 중국 편을 들었어요.
그렇지만 나는 언제나 러시아 편을 들지는 않았죠. 이따금은 편을 바꿨어요. 그런데 내가 편을
바꿀 때마다 아버지는 늘 반대쪽 편을 들었어요. 심술! 일부러 말이에요."
물론 이런 일은 데이빗이 아버지에 대해 품은 감정이 나아지도록 하는 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편애하여 귀여워해 보아도, 소리를 질러 보아도 데이빗의 사랑을 되찾지 못하자 피터는
다른 작전을 썼다. 시샘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나는 제일 사랑 받는 자식이었는데 아버지는 우
릴 조종했어요. 서로 맞서게요. 로마제국과 대영 제국이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는 나를 조종해
서 마거릿과 맞서게 했어요. 날 조종했어요. 아버지가 그러는 건 너무 잔인했죠." 그렇지만 이
런 작전은 전혀 효과가 없었다. 데이빗은 샘낼 줄을 몰랐으니까. 적지 않게 실망하고 놀라면서
그가 알아차린 것이라고는 이것이 전부였다. "아버지가 적개심을 품은 거예요. 그냥, 뚱단지같
이!"
그 무렵 헬프갓 집안에서는 새로운 일과가 생겨났다. 그것을 데이빗은 '미움의 밤'이라고 이름
붙였다. 오랫동안 그 뒷사정을 분석한 끝에 그는 비교적 그럴 듯한 설명을 찾아냈다. "아빠는
필시 절망에 빠져 있었을 거예요. 불쌍한 아빠. 레이첼이라든가 일이라든가 하여간 온갖 것들
때문에요. 마치 기름처럼 끊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은 폭발할 수밖에 없었던 거 같아요." 아마도
미움에 대한 이런 가르침은, 이런 끔찍한 시간은, 이런 미움의 밤은 석 달에 한 번씩 있었던 것
같다. 피터는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올 때 "엄청난 압박에 짓눌려 있었어요. 그 압박, 그 압력.
믿을 수 없을 정도였어요! 내내 그 지경이었어요. 매번 이유는 달랐어요. 그리고 에, 아버지는
또 소리를 잘 질렀죠. 피아노를 잘 치지 못하면 아버지는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유대인 집안에
서 실력이 미치지 못하는 일이 있을 법이나 한 일이냐면서. 우리 가족은 다들 질렸고 또 우린
모두가 야단을 맞았어요. 물론 나도 필요 이상으로 야단을 많이 맞은 거 같아요."
가장 좋아하는 아들은 날이 갈수록 가장 좋아하는 공격목표가 되었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기
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데이빗은 말을 계속했다. "만일 마거릿이
연주를 잘 못하면, 오, 맙소사! 심하게 벌을 받았어요. 아버지는 말도 심하게 하고 심하게 다그
쳤어요. 때리기도 했어요! 레이첼에게도 아버지는 무지하게 심했어요. 아버지는 늘 성난 사자
처럼 빙빙 돌았고, 레이첼은 늘 울었죠."
한 번은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 설명하면서 데이빗은 또다른 사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는 완전히 분개해서 말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레이첼이 앞마당으로 내쳐 달려나가는 걸 상상해
보세요! 오가는 그 많은 자동차 앞으로! 불쌍한 레이첼, 소리, 소리 지르면서 와! 게다가 아버
지 행동은 또 어떻고요! 별로 좋은 일이 아닌 곳 같아요.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잠자리에서 일
어나다니!"
"왜? 무슨 일이 있었죠?" 내가 물었다.
데이빗은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흥분한 마음을 추스리며 대답했다. "글쎄요. 난 침대
에 누워 신문을 읽고 있었어요. 아무 것도 듣지 못했어요. 내가 침대에서 일어나기 전에 아버지
가 신문을 갖다 주니까요. 늘 나한테 (웨스트 오스트레일리아)와 (데일리 뉴스)지를 갖다 줬어요.
그렇지만 내 생각에 아버지는 레이첼에게 그렇게 심하게 하지 말아야 했어요. 잘 해줘야 되지
않아요? 불쌍한 레이첼은 천당 가는 길에 지옥을 지나간 셈이에요."
내가 놀란 것이 고스란히 겉으로 드러난 모양이었다. 그래서 데이빗은 설명을 덧붙였다. "아
버지는 잘해 주기도 했어요. 아주 상냥하고 아주 정도 많았죠. 아버지는 나를 끔찍이 사랑했지
만 동시에 엄하기도 했어요. 아마 아버지 안에 악마가 있었고, 또 천사도 있었던 것 같아요. 내
평생 동안 그랬어요. 평생토록 아버지는 악마와 천사를 데리고 살았어요. 일종의 흑백이었어요.
분파가 생긴 거죠. 나는 맞섰어야 하는 건데. '안돼요, 아빠. 이젠 이런 거 그만둘 때도 됐어요.
이젠 그만 둘 때가 됐어요, 아빠.' 이렇게 말이죠. 안 그래요? '이런 말도 안되는 행동은 이제
그만두세요.' 그런데 그러지 않았어요. 난 그냥 말을 안 하고 살았어요. 난 작은 생쥐였어요.
생쥐."
그렇지만 데이빗은 적어도 그 때까지는 완전히 말문을 닫고 지내지는 않았다. 학교에서는 친
구도 없고 집에서는 가족 불화로 점차 혼란이 더해가고 있었기 때문에, 데이빗은 세상을 대하는
기준점을 빠른 속도로 잃어 갔다. 그러나 기댈 수 있던 것이, 앞으로도 기댈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음악이었다. 어느 날 동도 친구도 없는 날이 올지라도 음악이 있으면 그는 언제나 부유
할 것이라는 말을 둘려준 사람은 묘하게도 다름 아닌 피터 자신이었다. 피아노 치는 법을 가르
치기 시작할 깨 들려준 말이었다. 그래서 데이빗은 계속 연습했다. 그리고 레퍼토리도 그에 따
라 늘어났다.
그는 계속 독주회와 연주회에 출연했고, 신문에서도 계속 그의 발전을 주시했다. 1961년 9월
그는 '바비 립 쇼'에 출연하기 위해 비행기에 올라 시드니로 갔다. 당시에는 전국에서 가장 인기
잇던 텔레비전 프로그램이었다. 소년이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사진도 더욱 많아졌고 인정도 찬
사도 더 많이 받았다.
10월, 데이빗은 학년제도를 완전히 건너뛰어, 열네 살이라는 나이에 음악협회 학위과정에 연주
프로그램을 제출하여 처음으로 공식 음악시험을 치렀다. 공식적으로 전문 음악가로 인정받는 마
지막 두단계 가운데 첫 번째로 꼽는 과정이었다. 그는 바흐와 모차르트, 쇼팽, 드뷔시를 수월하
게 연주하여 최고점이라는 기록을 세웠고, '협회 학위과정 수석합격자'가 되어 상을 받았다.
갖가지 독주회와 상 덕분에 벌이도 괜찮아서, 몇 년 동안 데이빗은 1백 파운드를 모았다. 자신
의 돈이라고는 한 푼도 없던 그 나이 소년으로서는 아주 큰 돈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매일같이 피터와 벌이던 언쟁이 정점에 이르렀다.
그 해가 다갈 무렵 헬프갓 가족은 아늑하진 않지만 좀더 큰 집으로 이사를 갔다. 아이들이 자
라나고 있었으므로 가족에게 동간이 좀 더 필요했던 깃이다. 마거릿이 그 무렵에는 학교를 마쳤
고, 피아노 연주도 그만두고 일을 해서 가족 살림에 보탬을 주고 있었지만 가외 수입은 언제든지
환영이었다. 그렇지만 데이빗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난 그 1백 파운드로 학비를 할 생각
이었어요. 다음 해 공부를 위해서요. 그런데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는 거였어요. '그 돈을 집과
가족을 위해 써야겠다.' 그렇지만 나는 그게 별로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데이빗의 이기적인 태도에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이는 어쩌면 그 무렵 아버지와 가족으로
부터 얼마나 많이 문을 닫고 지냈는지를 보여주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문을
닫았든 아니든, 피터가 그렇게 말한 까닭을 데이빗이 얼마나 이해하고 잇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나는 물었다. "달링, 아버지가 그 돈을 내놓으라 한 게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죠?"
"에, 우선순위는 바로 세워 둬야 하잖아요, 안 그래요? 어쩌면 아버지는 그 돈을 집에다 쓰는
것이 공부보다 중요하고 또 내가 그 돈 없이도 어떻게든 대처해 나갈 걸로 생각했겠죠. 어쨌든
아버지는 돈을 가져갔어요, 나를 깡그리 무시하고 돈을 가져간 거죠. 나는 아버지가 좀 이기적이
라고 생각했어요. 하긴, 세상에 이기적이지 않은 사람이 어딨겠어요. 그 누구도."
데이빗은 말을 멈추고 숨을 깊이 들이쉰 다음 털어놓았다. "나는 그게 내가 보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어요. 난... 난 어리석었죠. 어리석었어요. 멍청했죠. 알아요. 말을
계속 하고 지냈어야 하는 건데. 그런데 나는 아버지와 말을 하지 않고 지내기 시작한 그 때에
내 스스로를 낚시바늘에 걸었다는 것 깨닫지 못했어요. 그러니 결국 보세요."
그러니까 데이빗이 문을 닫은 것은 결국 서서히 진행된 과정이 아니었지만, 처음 해 준 설명이
나로서는 아직도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그렇지만 달링, 그건 어떻게 설명을... ?" 나는 말을 꺼
냈지만, 늘 그렇듯이 그것은 데이빗이 수도 없이 자문해 보았던 것 가운데 하나였다. "아버지에
게 말을 하지 않으면 어째서 낚시에 걸리는 거냐고요? 글쎄요. 그건 알 수 없죠. 어쩌면 그 벌
때문에 낚시에 걸렸는지도 몰라요. 벌이 너무나 가혹했거든요. 너무나 가혹했어요."
나는 목이 바짝 탔다. "벌이라뇨, 달링?"
제 12장 비극의 밤, 그리고 도마지
1962년 초에 들어서자 데이빗은 진짜로 피터와는 대화를 하지 않다. 가장 일상적인 부분만 제
외하고 데이빗은 스스로 완전히 문을 닫아 버린 것이다. 그나마 나누는 말은 주로 데이빗을 가
르칠 새 선생님에 대한 것이었다. 데이빗의 인생이 다른 부분에서도 달라져 버린 것처럼, 프랭크
안트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교습을 계속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데이빗은 스티븐 도난에게서 피
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리스트의 협주곡 1번 같은 큰 작품을 새로 배웠지만 수업에 대한 데
이빗의 기억은 희미하다. 그 무렵 '안대'가 대단히 짙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데이빗으로서는 인생에서 열여섯 번째로 맞이한 그 한 해를 통털어 딱 한가지 사건만을 기억한
다. 아버지의 '벌'이었다. 데이빗의 판단으로는 그 벌 때문에 마음의 상처가 더욱 심해졌는데,
'내가 이미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을 아버지가 몰랐기 때문'이었다.
정신상태가 '변화'하는 궤도상에서 데이빗은 그 한 가지 사건을 '전환점'혹은 '비극의 밤'으로
뚜
렷하게 표시해 두었다. 그 날 밤에 있었던 일을 자세히 설명해 주기 전에 그는 그 사건이 그 자
신에게만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다고 못박았다. "가족 전부가 발칵 뒤집혔어요. 모두가 고통을
겪었죠. 그 날 밤 우리 집안은 온통 혼돈뿐이었어요. 자, 나는 목욕을 하고 있었고 아빠는 일하
러 나가고 없었어요... " 여느 때나 다름없이 이야기는 갑작스레 시작되었지만, 잠시 뒤, 아니면
한 해 뒤에는 이런 이야기가 모두 앞뒤가 맞아떨어지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아빠는 부글부글 오래 오래 며칠이고 며칠이고 끓고 있었어요. 어린 왕자가 말을 하지 않으
니까요. 집에 돌아와서 문을 쾅 닫았을 때 나는 아, 오늘 또 무슨 일이 있겠구나 하는 걸 알았
죠. 그리고 아빠의 고함은 끊이지를 않았어요."
데이빗은 대개 눈을 반쯤 감고 있지만 이제 크게 뜨고 있었다. 그는 그 날 밤 일을 영화로 보
는 듯 눈앞의 허공을 지켜보았다. 그 때의 기억이 아직도 너무 또렷하여 그는 부르르 떨었다.
"아는 겁이 나서 죽을 지경이었고... 아, 그 날 밤 일은 거의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아요! 너무
겁이 나서 기억나지가 않아요!"
데이빗은 침을 꿀꺽 삼킨 다음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마 아버지가 욕실 안으로 들어왔던 것
같아요. 고함을 질렀던 것 같아요. 소리, 소리, 소릴 질렀어요! 물건을 사방으로 집어던지고 악
을 쓰고 또 썼어요. 완전히 엉망이었어요! 무슨 일로 악을 썼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어요. '그래, 네가 시궁창에 빠지는걸 보고야 말겠다. 응, 응, 응, 응!' 우리 둘은 의
자를 가지고 씨름했어요." 데이빗은 두 손을 들어, 마치 얼굴 바로 위에서 내리누르는 의자를 버
티는 시늉을 했다.
"그렇지만 난 한 번도 대들지 않았어요. 아빠가 날 두들겨 패는걸 피하기만 했어요. 나 자신
을 보호하기만 했죠. 우스운 건 그 사건이 있고 나서 내가 아빠에게 말을 걸었다는 거예요. 협
주곡 경연 대회에서."
데이빗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것을 설명하려는 듯이 나를 돌아보았다. 잠시 그는 목소리가 가
라앉은 상태로 말했다. "그 날 밤에 협주곡을 연주하기로 되어 있었어요. 리스트 말이에요. 협
주곡 경연대회가 있던 날 밤이었는데, 마거릿은 아빠가 문을 걸어 잠그면... "
갑자기 데이빗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는 이야기를 계속할수록 말을 잇기가 힘들어지
는 것처럼 보였다. "경찰서로 달려가겠다고 했어요. 현관 문 말이에요. 아빠는 이렇게 말했어
요. '문을 잠가 버릴거야. 경연대회에 못 나가게 할거야.' 아빠는 화가 나 있었거든요. 아빤
화
가 나 있었어요... 아빠는... 왕자가... 아, 상관없어요... 사이가 아무리 좋은 가족이라 해고 가끔씩
은 벌어지는 일이니까." 눈물이 뺨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리자 데이빗은 말을 꿀꺽 삼켜 버렸다.
매사에 늘 긍정적인 부분을 찾는 나인지라 나는 방금 들은 내용에 매달렸다. "아, 달링. 마거
릿이 고맙지 않아요? 당신을 위해 나섰으니까!" 나는 최대한 명랑한 어조로 말을 걸었고, 실제로
한동안 효과가 있어 보였다.
"마거릿은 대단했어요! 마거릿은 대단했어요! 마거릿은 최고였어요! 마거릿은 내 두 눈을 똑
바로 쳐다보고 말했어요. '아빠가 저 현관문을 잠가 버리면 경찰을 부를 거야."
"아, 마거릿이 정말 잘했네요!"
"잘했어요. 맞아요." 데이빗은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그래요, 맞아요. 난 고마워하고 있어
요. 고마워하고 있어요!" 그는 나직이 말하더니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난 기쁘고 즐거워요, 마
거릿이 그날 밤 그렇게 대단하게 나를 위해 나서 줘서 기뻐요. 그나저나 그건 안타까운 일이죠.
그래서 누가 상처를 입는 것도 그런 식이고 아버지는 완전히 신경이 곤두섰고 난 끝장이었어요.
끝장이었죠."
그 즈음 나는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데이빗은 나를 안심시켜 주려 했
다. "그렇지만 사건은 다 가라앉았죠. 우린 둘 다 옷을 차려 입고 택시를 타고 캐피톨 극장으로
갔어요."
"그랬거나 말거나 우승했죠. 그런 일이 있은 다음인데도! 상상해 보세요!"
"그러고도 우승했어요?!" 전후 상황을 생각해 보면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데이빗은 그
씁쓸한 아이러니 때문에 웃음을 터뜨렸다. "대단해요! 당신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해요!"
나는 데이빗을 끌어안았다. 그러나 데이빗의 웃음이 가라앉자 그와 동시에 걷잡을 수 없이 흐느
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알아요." 데이빗은 나직이 말하고 흐느꼈다.
데이빗은 쉽게 눈물을 흘리지만 또 그만큼 쉽게 눈물이 그친다. 잠시 뒤 그는 훌쩍이면서 즐
겁게 미소지었다. "괜찮아요. 난 우는 게 좋아요... 이게 흐르는 걸 좋아해요!" 그는 눈물을 가리
키면서 소리쳤다. "그리고 나면 더 잘 웃는 것 같거든요! 이게 흐르면 웃음이 더 잘 나와요!"
그러나 그 '비극의 밤'이 지난 뒤 데이빗의 기분은 눈물도 웃음도 아니었다. 고통이었다.
주
결승에서 우승했지만 전국 결승에 뽑히지는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이미 연약해져 있
던 그의 정신은 그 날 밤에 받은 압박 때문에 더욱 망가졌고, 새로운 증세가 나타났다. '낚시바
늘'이었다.
"나는 사춘기도 없었어요. 놓치고 말았죠. 난 지금 늦게나마 따라 잡고 있어요. 난 따라잡을
게 많아요!" 데이빗은 이따금씩 자신의 사춘기적 성향을 그렇게 재치 있게 설명하면서 웃었다.
그렇지만 어떤 때에는 감정 수준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가 아주 진지하다. "나는 낚시바늘에 걸
린 채 열다섯 살 수준에서 머무르고 말았어요. 그게 내가 받은 상처의 핵심이에요. 그 때 낚시
에 걸린 거예요."
"'낚시'라는 건 뭐죠, 데이빗?"
"글세, 그건 아픈 거죠. 눈에서 느끼는 일종의 아픔이에요. 나 스스로도 느끼거든요. 왠지 그
상처가 그 때 내 눈에 들어간 것 같아요." 데이빗은 왼손으로 왼쪽 눈꺼풀 바깥자리를 건드리면
서 말했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그의 이런 동작은 일종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그가 '
도
마지'를 건드리는 장면을 찍은 사진은 신문에도 많이 실렸다.
"그래도 나는 그리 우울하지는 않았어요!" 그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우스운 건 바로 그 점이
에요. 그렇게 되고 난 뒤에도 나는 정말로 아주 느긋했어요. 단지 피아노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그렇지만."
"피아노 소리는 왜 안 들린 거예요?"
"아팠기 때문이죠. 그 때문이에요. 모든 게 여기 집중돼 있었거든요." 그는 눈을 건드리면서
말했다. "일종의 '도마지'였어요. 여기 작은 곳이 있었어요. 사실 눈 안에 있는 것도 아니에
요.
여기 이 가장자리에, 여기 귀퉁이에 있었어요. 그냥 그렇게 된 거예요."
데이빗은 곰곰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되는 데에 오래 걸렸는데, 그러니 낫는 데에도 오래 걸
리죠."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더 심해졌어요. 아주 여러 가지었어요.
잡동사니처럼. 가지각색이 모인 것 같았어요. 온갖 게 말이에요. 꼭 통증이 있었던 것도 아니
예요. 감정적인 면에서 아팠던 거죠."
자신의 증세가 경이롭다는 듯 데이빗은 계속 설명했다. "약간은 신비해요! 보기 드물고 희한
한 일이죠! 물론 난 평생토록 그게 아니라고 하면서 살았어요. 절대로 인정하지 않았죠. 아마
늘 아프지 않은 척 한 것 같아요. 쉬운 일이었죠. 조금 아픈 데가 있으면 사실은 덜 흥분하니까
요. 덜 불안하고요."
실로 대단히 드물고 희한한 일이었다. 열다섯 무렵 데이빗의 가슴은 더 이상 아픔을 느끼지
못했고 그래서 그의 마음에 들어오는 모든 고민을 눈꺼풀 귀퉁이에 있는 작은 '통점'으로 전달
한
것이다. 세상을 향한 문을 닫아걸고 주위에 '안대'를 두르고 오로지 눈에 있는 '도마지'의 아픔
에
만 집중함으로써 그는 더 이상 감정적인 고통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나아가 정서도 더 이상 발
달하지 않았다. 그는 '낚시바늘'에 걸린 물고기처럼 열다섯이라는 나이에 갇혀 버린 것이다.
이 작은 통점은 나타났다 없어졌다 했다. 그러나 열여덟 살 반쯤 되던 때에 통점은 영영 거기
자리를 잡았고, 깨어 있는 내내 데이빗은 그것을 또렷하게 느꼈다. 그것을 '도마지(dommage)'라
고 - 프랑스어로 '유감'또는 '애석함'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이를 영어의 '대미지(dammage)', 즉
'피
해'또는 '상처'와 같은 말로 사용하여 - 이름 붙임으로써 데이빗은 자신의 병을 정의하는 동시
에
설명까지 한 것이다.
그렇지만 아직 열다섯이던 시절에 데이빗은 아무 이상도 없는 듯 애써 감추면서 계속 피아노를
쳤다. 피아노를 계속 작 치기만 하면 아무도 상관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계산은 맞아떨어졌다. ABC의 경연대회에 나간 뒤로 그의 연주실력은 질적으로 뚝 떨어졌지만 -
든든한 후원자 제임스 펜버티까지도 1962년 데이빗이 연주한 라벨 협주곡에 대한 평에서 실력이
떨어졌음을 짚고 넘어갔을 정도였다 - 사람들은 대부분 음악교사로부터 지도를 더 잘 받을 필요
가 있다고만 느끼고 있었다.
ABC 스튜디오로 해외 유명 음악가를 초청한 자리에서 데이빗은 앨리스 캐러드 여사를 소개받
았다. 그리고 앨리스 여사는 데이빗을 집으로 초청했다. "메이 웨스트처럼 이렇게 말했어요.
'언제 한 번 우리 집에 놀러 와.'" 당시 앨리스 여사는 데이빗보다 50살 위였으므로, 데이빗은
앨
리스 여사의 연주감각을 높이 평가하여 기꺼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피터는 반대하지 않았다. 대
단한 영광으로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헝가리 태생으로 부타페스트의 리스트 음악원에서 벨라 바르톡의 제자로 있었던 앨리스 여사는
오래 점부터 퍼스가 자랑하는 음악가중 한 사람이었다. 데이빗에게는 라흐마니노프 3번 협주곡
의 비밀을 배우겠다는 오랜 꿈을 현실로 이루어 줄 사람이었다. 그뿐 아니라 앨리스 여사의 도
움으로 데이빗은 베토벤의 (발트스타인 소나타)와 리스트의 (B단조 소나타), 무소르그스키의 (전
람회의 그림)을 레퍼토리에 추가했고, 공식 시험의 최종단계인 음악학위 인증 프로그램을 준비했
다. 이처럼 레퍼토리를 대폭 늘이고 또 새로운 기술과 개념을 배우기 위해서는 연주회와 경연대
회를 참가를 한 해 동안 중단해야 했다. 1964년 6월에 이르러서야 데이빗은 대중 앞에서 큰 작
품을 다시 연주하기 시작했다.
데이빗에게는 사는 것이 아주 즐거웠다. 스스로 만들어 낸 복잡한 방호막에 에워싸인 그는 세
상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 다만 한가지가 문제거리였다. 그는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무론 난 귀가 먹었어요. 귀머거리. 귀머거리. 진흙더미 같은 게 귀를 막고 있었어요." 그러면
서 귀를 막아 보였다.
데이빗은 사랑해 마지않는 (라흐 3번) 1악장을 ABC 경연대회에서 명쾌하게 연주하면서 대중
앞에 다시 등장했다. 이 대작이, 열일곱 소년에게는 너무나도 힘든 이 작품이 그냥 물 흐르듯 흘
러나왔다. 그는 신들린 듯 연주했고, 비록 스스로는 '귀먹었다'고 생각했을지라도 음정 하나 하
나
를 빠짐 없이 모두 들었으며,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성취감을 느꼈다. 우승은 확실한 것이었고
이번에는 총결승에서 연주하도록 선발됐다. 퍼스의 음악평론가 샐리 트레토완은 이렇게 평했다.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그의 손을 타고 이 작품이 화려하게 펼쳐졌다. 운집한 청중은 오랫동
안 열성적으로 박수를 보냈다." 심사위원 가운데 한 사람인 프랭크 허친스는 "마술과 흥분, 빛깔
과 연속성을 보여준 연주"라 했다. 데이빗 자신의 평가는 완전한 '승리!'였다.
그 밤에는 그러나 그보다 더 특별하고 비상한 것이 있었다. "아빠가 나한테 '포치나굴라'를 해
줬어요." 데이빗의 설명이다. "그 날밤, 라흐마니노프 협주곡을 너무나 잘 연주하고 화려한 솜씨
를 보여줘서 아빠가 나한테 입맞춤을 해 줬어요. 그러니 완전히 비극적인 것만은 아니었던 거죠.
내 생각에 아빠가 '포치나굴라'를 해 준 건 그 때뿐이었던 것 같아요. 아주, 아주 드물었어요.
그러니 그런 드문 순간은 소중히 간직해야죠." 행복한 순간이 적어도 얼마간은 저 '안개'를 뚫고
스며든 것 같다.
3주 뒤 7월 4일, 데이빗은 멜번에서 빅토리아 교향악단과 리허설을 했다. 리허설이 끝나자 지
휘자 헨리 크립스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밤에도 그런 식으로 연주해, 데이빗. 그럼 쉽게 우승
할 수 있을 거야." 그러나 일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았다. "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어요." 데이
빗을 계속 설명했다. "그건 엉망이었어요. 승리가 비극으로 바뀐 거예요. '할 수만 있다면'이
우승했을 때 나는 이렇게 말했어요. '경쟁이 치열하군.'... 물론 최고에게 지는 데에 부끄러울 게
없죠."
대외적으로 그것을 '엉망'과는 거리라 멀었다. 데이빗은 연주를 썩 잘했고, 데이빗이 늘 '할
수
만 있다면'이라는 얄밉고도 친근한 별명으로 부르는 우승자 로저 우드워드와의 점수 차이는 0.5
점
밖에 나지 않았다. 멜번의 비평가 아드리안 롤린스는 (에이지)지에 실린 그의 기사 (의문의 시
상)에서 심사위원장 앙드레 클뤼탕의 평결에 '의문'이 있다고 하면서, "프로코피에프의 협주곡 3
번
을 지독하게 기술적으로 연주한" 우드워드에게 1등상을 준 것은 "그 작품이 눈부시고 듣기 좋기
는 하지만 성숙한 음악 수준을 시험할 만한 작품이 전혀 아니기 때문에 분별없는 판단이다"라고
했다.
한편으로 롤린스는 데이빗이 "훨씬 더 복잡하고 높은 수준을 요구하는 라흐마니노프 D 단조
협주곡을 대단히 높은 감수성과 통찰력으로" 연주했으며, 라흐마니노프의 이 작품은 "과시적인 면
은 그보다 덜하지만 더 어려운 작품이어서 고도의 기술뿐 아니라 그만한 이해 역시 요구되는 작
품이기 때문에 헬프갓에게 그 상을 주었으면 더욱 합당할 것으로 생각된다"고 했다. 그렇지만
0.5점이라는 차이를 보면 클뤼탕이 쉽게 판단을 내린 것은 아니었고, 우드워드는 당연히 일류 음
악가로 발을 내디뎠다.
데이빗은 자신의 연주솜씨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문제가 자신의 연주에 영향을 미쳤고, 그 결
과 우승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이번 경연대회에서는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와 함께 멜번에 갔
는데, 어머니는 데이빗을 길거리에 세워 둔 채 친정 어머니와 함께 쇼핑을 갔고, 데이빗은 마치
남극에서 곧장 불어오는 듯이 몰아치는 매서운 7월 바람에 떨고 서 있었다. "생각해 보세요. 연
주회가 있기 전인데!" 데이빗은 지금도 어머니의 '소흘'을 놀라워하며 말하곤 한다. 그리고는
이
렇게 덧붙이는 것이다. "아버지는 절대로 그러지 않았을 거예요. 아버지였다면 식사를 챙겨 주
었을 거예요. 양 허리살을 챙겨 먹이고 보살펴 주었을 거예요." 일이 꼭 그렇게 돌아간 것은 아
닐 수도 있다는 점을 애가 데이빗에게 상기시켜 죽 수 잇게 되기까지는 여러 해가 걸렸다.
데이빗은 그 때 외삼촌 자니 그라넥 집에서 머무르고 있었는데, 이 외삼촌은 조카를 무척이나
사랑했다. 경연대회에서 지고 난 뒤 일을 데이빗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삼촌은 나한테 잘해
줬어요. 나를 음식점에 데리고 가서 위로하면서 이렇게 말했어요. '멜번에와. 그럼 우리가 보살
펴 줄게. 애가 돌봐 줄게. 아무 걱정하지 말고." 자니가 데이빗에게 제안한 것은 외삼촌 집에
와서 외삼촌 부부와 함께 지내는 한편 멜번 음악원에서 유명한 스승 야샤 스피바코프스키에게 배
우라는 것이었다.
데이빗이 퍼스로 돌아가 자니의 제안을 전했을 때 피터의 반응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
었다. "아버지는 노발대발했어요." 데이빗은 그 때 일을 이렇게 되살렸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
했죠. '뻔뻔스럽기는! 철면피 같으니!' 아버지는 멜번에 사는 친척들에 대해 갖은 상소리를
다
했어요. 그네들에게는 돈이 있고 아버지에게는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샘이 났으니까요." '부자
유대인'들이 또 아들을 훔쳐 가려 하고 있었다. 언제나 되어야 그들이 포기할까? 그리고 자신
은
데이빗에게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운명은 피터 편이 아니었다. 얼마 안 가 데이빗은 마침내 피터로부터 벗어났다.
제 13장 스승
멜번에서 '비극'을 겪은 다음 데이빗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졸업장을 받기도 전에 학교를 그만
둔
것이었다. 겉으로는 음악에 전념하기 위해 그런 것으로 보였다. 사실 그는 음악에 전념했다.
날이 밝기도 전에 시작해서 깨어 있는 시간 대부분을 연습하는 데에 보냈다. 또 이따금씩 웨스
턴 오스트레일리아 대학교에 나가 음악강의를 들었다. 데이빗의 재능을 믿는 프랭크 캘러웨이와
그밖의 교수들이 특별히 허가한 덕분이었다.
"물론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 머문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죠." 오로지 음악을 위해서였다는 번
지르한 설명 말고 데이빗은 마침내 진짜 이유를 털어놓았다. "내가 좀 앓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피아노에서 조금만 멀어져도 데이빗은 주위 세계에 대처하기가 점점 더 힘들어졌지만, 겉보기
는 그러지 않은 척하면서 연주활동을 계속했다. 그는 또 음악 학위 인증에도 통과했지만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낮은 점수였다. "창피한 일이에요!" 한 해 뒤 그는 캘러웨이 교수에게 자
신이 받은 점수에 대해 그렇게 말했다. 그는 그 해 그가 받은 점수가 이번에도 최고점이었고, 또
상도 받았다는 사실은 잊고 말하지 않았다.
데이빗이 더 나은 상급 기관에서 음악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직도 오가고 있었기 때
문에 그는 졸업장을 받을 때까지 다니라는 충고를 받았다. 그는 충고를 받아들여 1965년 2월에
리더빌 전문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그리고 어디에서 용기가 났는지는 알 수 없어도 5월에 다시
ABC의 협주곡 경연대회에 나갔다. 내가 그간의 사정에 비춰 볼 때 그가 다시 경연대회에 나간
것은 상당히 용기 있는 일이었다고 말하자 그는 애가 한 말 밑바닥에 깔려 있는 논리를 알아보지
못하고 전혀 뜻밖으로 받아들였다. "왜요? 계속 시도할 수밖에 없었잖아요. 그럴 수박에 없었
어요. 문제는, 일단 우승한 사람은 다시 대회에 나갈 수 없었어요. 총결승까지 올라간 사람은
계속 나갈 수 있었어요. 그러면 계속 시도해 볼 수 있잖아요! 정말 좋잖아요?! 그러면 관현악
단과 함께 연주할 수 잇는 기회가 또 생기는 거예요! 그런데 그 불쌍한 '할 수만 있다면'은 우승
했으니 폴란드로 갈 수밖에 없었죠. 순식간에 과정을 끝내고 카네기 홀에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지만. 문제는 어쨌거나 나는 총결승까지 올라갔다는 거예요. 우승하지 못한다 해도 상관할 게
없었어요. 올림픽과 마찬가지죠. 노력하고 애쓰는 게 중요한 거죠."
그 때 캘러웨이 교수에게 보낸 편지에서 데이빗은 또 이렇게 썼다. "저의 음악적 성숙은 협주
곡 경연대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놓쳤을 기회를 얻었던 거
죠."
'라흐 3번'은 그 전 해에 '승리가 비극으로 변한'것이었는지 몰라도, 데이빗은 삶에 대한 열정
을
- 상처를 입었든 안 입었든, '귀먹었든' 아니든 - 타고났으므로 비극을 승리로 되돌리려는 노력
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 때에는 알지 못하고 있었지만, 비극과 승리가 되풀이되고 또 노력하고 애
쓰는 일이 이후 20년간 그의 일생을 지배했다.
그러나 당장은 차이코프스키의 찬란한 협주곡 1번아 문제였다. 데이빗은 주 결승에서 수월하
게 이겨 이 때에도 전국결승에 진출하도록 선발됐다. 주 결승이 있은 이틀 뒤인 1965년 5월 30
일, 데이빗을 진심으로 염려하던 제임스 팬버티는 (선데이 타임즈)지에 실린 기사에서 데이빗 헬
프갓 장래에 관심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의 솔직한 심정을 그대로 썼다.
팬버티는 기사를 군대 지휘관 같은 어투로 시작해서 끝까지 그대로 밀고 나갔다. "퍼스의 음
악계가 젊은 피아니스트 데이빗 헬프갓의 재능에 대해 추측만 계속하는 행동은 이제 그만둘 때가
되었다. 그가 1960년 라벨을 연주하기 위해 어색한 걸음으로 처음 무대에 올라온 때부터 1965년
협주곡과 성악부문 경연대회 결승에서 차이코프스키를 연주한 금요일 밤까지 나는 그의 보기 드
문 재능을 믿어왔다. 젊은 헬프갓은 지금, 그리고 언제나, 피아니스트이다."
펜버티는 나아가 이렇게 평했다. "데이빗이 연주한 차이코프스키 협주곡 - 1악장 - 연주회 피
아니스트 수준이었다. 보통 때보다 실수를 많이 했지만 그의 해석과 영감과 기술은 해외의 어느
유명 음악인이 와서 들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펜버티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헬프갓의 장래는 어떠한가? 현재 훌륭한 스승에게
배우고 있는 것 같다. 지금 맡고 있는 스승들이 결정하도록 하자. 한 가지는 분명하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도울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온 세계사 이 피아니스트를 사랑하는 것 같
다. 이 피아니스트는 천부적으로 대중에게 호소력이 있다."
펜버티의 기사는 먹혀들었다. 캘러웨이를 비롯한 '지금 맡고 있는 스승들'은 만일 데이빗이 해
외로 유학을 가지 않는다면 과연 '헬프갓의 장래'는 무엇인가를 스승 스스로 물어 볼 때가 되었
다
는 점에 의견이 일치했다. 이제 데이빗은 열여덟 살이었으므로 '스승들'은 데이빗이 자신의 장래
에 대해 판단할 능력이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밖에도 데이빗은 한 가지를 더 언급했다. "뭔
가 이루어져야 했어요." 그는 혼자 대화를 주고받는 형식으로 말을 바꾸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정말 훌륭한 피아니스트이기 때문에 최고의 가르침을 받고, 훌륭한 교수님에게서 배우고 실력을
키울 자격이 충분히, 넘치도록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어요."
이리하여 데이빗이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아 주 음악협의회에 해외에서 유학하는 데에 필요한 장
학금 청구서를 내야 한다는 결론이 났다. 데이빗은 청구서를 냈고 거의 순식간에 "협의회가 승
인하는 해외 기관에서 한 해 동안 공부하는 생활비와 수업료로 쓸" 장학금 5백 파운드를 받았다.
장학금 조건에는 또 첫 해 동안 데이빗의 성적에 대해 "해당 기관 당국에서 만족할 만한 수준의
보고서를 협의회에 보낼" 경우 "한 해 또는 그 이상 장학금을 연장할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었
다.
우연히도 음악협의회의 초대의장은 캘러웨이 교수였고, 당시에는 가까운 동료 교수인 프레드
알렉산더가 후임자로 회장직을 맡고 있었다. 데이빗과 의논한 뒤 - "그건 부분적인 타협안이었
어요, 이것 조금 또 저것 조금. 우린 그냥 얘기만 나누었어요" - 교수들은 데이빗을 보낼 제일
좋은 '기관'은 런던의 왕립 음악대회이라고 결론 지었다.
"그건 내 의견이었어요. 아버지는 반대했죠." 데이빗은 당시 일을 그렇게 들려주었다. "프랭키
아저씨가 도와줬죠. 프랭키 아저씨의 신청서나 마찬가지였겠지만 물론 난 좋다고 했죠. 난 그냥
받아들이는 식이었어요." 데이빗의 관점에서는 그같은 계획이 전적으로 옳은 것이었고, 그는 앞
으로도 평생동안 그가 언제나 최고로 존중하고 사랑하는 이 '프랭키 아저씨', 즉 캘러웨이 교수에
게 한없는 고마움을 느낄 것이다.
이런 거창한 계획은 모두 ABC의 협주곡 경연대회 전국결승이 있던 때와 같은 무렵에 진행되
었다. 데이빗이 아직 출전하기 전이었다. 그는 애들레이드로 가서 사우스 오스트레일리아 교향
악단과 함께 '차익'협주곡으로 리허설을 했다. 지휘자 존 홉킨스는 그 결승의 심사위원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데이빗의 재능과 기술을 높이 평가하기는 했지만 데이빗은 우승하지 못했다.
데이빗은 이번에는 패배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자기 자신 탓으로 돌렸다. "난 너무 빨랐어
요. 박자를 맞추지 않았으니 내 스스로 무덤을 판 셈이죠." 그는 말을 계속했다. "애들레이드에
서는 목이 부러져라 빠르게 쳤어요. 그러면 안 되거든요. 관현악단과 어울려야 되거든요. 먼저
달아나 버리면 안 되죠. 관현악단과 어울려야 되거든요. 먼저 달아나 버리면 안 되죠. 관현악
단과 함께 가야 돼요." 그러나 런던으로 간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으므로 데이빗은 우승하지 못
한 것을 그리 마음에 두지 않았다. "런던에 갈 기회가 생겼을 때 나는 명예롭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아주 기분이 좋았어요. 아버지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나에게 압력을 넣고 있었거든요!"
데이빗이 설명했다.
그 무렵 집안 사정이 계속 나빠지고 있었기 때문에 데이빗의 관심사는 상당히 많이 바뀌어 있
었다. 피터는 데이빗이 어느 곳으로 가건 상관없이 무조건 드러내놓고 반대했고 - 아들의 인생
에 계속해서 쐐기를 박았다 - 그래서 점점 더 '적대적'이 되어갔다. 나아가 마거릿마저도 편을
바꾸어 데이빗 편을 들어주지 않았는데, 왜 태도가 바뀌었는지 데이빗은 지금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누나의 사랑과 보호를 잃은 것은 이미 거리가 벌어진 데이빗과 가족 간에 쐐기를 또하
나 박은 꼴이었다.
데이빗으로서는 '스승들'들에게 의지하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들은 세계에서 가
장 훌륭한 학교 가운데 한 곳에 데이빗을 보내기 위해 입학허가와 비용을 마련하고 있었을 뿐 아
니라, 그곳에서 대단히 평판이 훌륭한 시릴 스미스에게서 배우도록 주선하고 있었다. "선생님들
을 스미스가 나한테 가장 알맞은 스승이라고 생각했어요. 아주 훌륭한 피아니스트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그것 때문에 프랭키 아저씨가 특별히 런던으로 갔어요!" 데이빗은 그 때 일을 생각하면서
진심으로 기쁜 마음으로 말했다.
1965년 9월 캘러웨이 교수는 런던을 방문하여 왕립 음악대학 학장인 키스 포크너를 만나, 데이
빗이 시릴 스미스 밑에서 공부할 수 있는지와 그밖에 입학에 필요한 내용을 의논했다. 그 무렵
데이빗은 자신의 장래 공부와 관련하여 거의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은 것 같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피터는 아들에게 자립심을 키워 준 적이 없었고 - 사실은 늘 그 반대가 되도록 애썼
고 - 그 결과 이런 문제나 그밖의 문제에 대해 어디서부터 책임을 져야 할지를 알지 못하는 청년
으로 커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데이빗이 세상에서 기댈 수 있는 사람들이 대학교에 있는 '스승들'뿐만은 아니었다. 데
이빗은 당시 아주 특별한 여자와 특이한 우정을 키우고 있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캐서
린 수산나 프리처드는 여든한 살이었고 데이빗은 열여덟이 된 직후였지만,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줄 수 없는 것을 찾아냈다.
데이빗이 늘 KSP라 부른 이 사람을 처음 만난 것은 공산주의자 모임에서였다. "영국계-소련계
모임에서였어요 KSP는 주름장식이 잔뜩 달린 드레스 차림이었어요. 가엾게도 몹시 앓고 난 뒤
였죠." '공산주의자'세계에서 자라났으므로 데이빗은 이따금씩 이런 모임에 나가 연주하기도 했
다.
데이빗은 이렇게 설명했다. "그 사람들은 나를 소련으로 보내고 싶어했어요. 다들 내가 유학을
가야 된다고 확실하게 믿고 있었거든요." 피터가 믿었던 사람들마저 이런 '시도'를 자주 한 것 같
다.
당시 KSP는 심각한 발작에서 회복하던 중이어서 퍼스 뒤쪽 산등성이에 잇는 그린마운트 집을
떠나 시내에 내려와 있었다. 유명한 - 그 시절 사람들 중 어떤 사람의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악명 높기도 한 - 작가이자 사회사업가인 KSP는 음악을 사랑했고, 데이빗은 신들린 듯한 연주로
그 자리에서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때까지 KSP는 고난과 비극으로 점철된 격동적인 삶을 살았다. 운명의 묘한 장난으로, 아버
지와 또 제1차세계대전에서 용감히 싸워 빅토리아 훈장을 받았던 남편 휴고 트로슬을 포함해서
그녀에게 중요한 남자 몇 사람이 자살했다.
많은 작품을 썼던 KSP는 사회적인 문제에 깊이 관심을 가지고 사회주의자들의 이념을 열정적
으로 믿었다. 원주민들의 비참한 생활과 또 평범한 사람이 겪는 가난과 수많은 고난에 번민했던
그녀는 파시즘에 결사적으로 반대했고, 1943년에는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널리 알려
진 정치관 때문에 작품이 비난을 받아도 견디고, 또 '빨갱이의 위협'을 두려워하는 당국자들의 갖
가지 탄압도 이겨내면서 계속 불의와 싸우고 작품을 썼다. 그녀는 또 세계 평화협의회회원이 된
일곱 번째 사람이었다. 작품활동으로 수입이 생길 때마다 극단적으로 많이 내놓은 덕분에 그녀
는 자연에 파묻힌 작고 초라한 오두막집에서 황량하리 만치 단순하게 살았다. 데이빗이 그녀를
만나고 사랑하게 된 것도 이 집에서였다.
데이빗은 두 사람 사이의 우정 가운데 적어도 산 가지 측면은 KSP와 처음 만난 바로 그 때에
피터가 취한 행동에서 지대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우린 KSP 댁으로 갔는데 아
버지는 이렇게 말했어요. '내가 데이빗만큼 기회가 있었으면 세계 최고가 되었을 겁니다. 난 이
런 일을 했을 것이고 또 저런 일도 했을 겁니다.' 그리고 KSP는 가만히 듣고 있었죠. 아마 감명
을 받은 모양이에요. 다 듣고 나서 나한테 이렇게 말했거든요. '넌 불쌍한 네 아버지에게 고맙
게 생각해야 돼. 널 위해 자신을 희생했잖아. 널 계속 뒷바라지 해 줬으니 고맙게 생각해야돼."
그 순간부터 데이빗은 아버지에 대한 KSP의 의견에 반대할 용기를 한번도 그러모으지 못했다.
그녀가 보기에 피터 헬프갓은 자식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평범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 부분만 제하면 KSP와의 우정은 데이빗에게 가장 소중하고 즐거운 일이었다. 금요일 저녁
마다 데이빗은 기차를 타고 그린마운트로 가서 저녁시간을 KSP와 보냈다. 그것은 중요한 행사
가 되었고, 데이빗은 그 행사를 'KSP 카디시'라고 이름 붙였다.
"다들 날 보내 줬어요." 데이빗은 당시 상황에 약간 어이없어 하면서 말했다. "우스운 건, 루비
아줌마도 못 만나게 했지만 그래도 다들 내가 KSP를 만나러 가는 건 내버려두었어요."
데이빗은 잠시 설명을 멈추고, KSP를 만나러 가는 것을 어째서 아무도 막지 않았을까 생각했
다. 당시 그는 퍼스의 유대인 여성 협의회 회장이던 루버 스미스 여사를 만나지 못하도록 금지
되어 있었다. 잠시 뒤 야릇한 미소가 입 언저리에 나타나더니 데이빗이 말했다. "알아요? 힘센
사람들이 다들 애가 KSP를 만나러 가는 걸 막지 않았어요. 위협받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거
죠. 다들 내가 KSP네 집에 가는 걸 내버려두었어요."
잘된 일이었다. 데이빗은 종종 이렇게 말했다. "KSP는 아주 잘해 줬어요! 그냥 모든 걸 받
아들이고, 상냥하고 또 상냥하고, 친절하고, 그리고 내가 담배를 피워도 아무 말 하지 않았어요.
우린 자주 함께 책을 읽었어요. 해질 무렵에 지드 같은 프랑스 작가에 대해 즐겁게 대화를 나누
었고, 이글이글 소리를 내면서 타오르는 모닥불도 있었고, 또 '카루소'라는 애완용 까치도 있었죠.
좋지 않아요?" 데이빗은 그같은 평화로운 금요일 저녁을 떠올리면서 즐거운 듯 한숨지었다. "우
린 희비극인 (신곡)을 한 장씩 읽곤 했는데, 어떻게 보면 약간 비극이었죠. 내가 이 곳이 약간
아팠으니까요." 데이빗은 '도마지'를 가리키면서 자신의 말장난에 쿡쿡 웃었다.
데이빗은 KSP를 위해 주로 피아노를 연주했다. 몇 시간이고. "KSP는 쇼팽을 좋아했어요."
데이빗은 종종 이렇게 말했다. "나는 쇼팽을 많이 연주했죠. KSP는 내 쇼팽 연주가 아주 좋다
고 했어요. 나는 (열정)도 연주했죠. 그 곡을 들으면 휴고 생각이 지저귀는 새 같았죠... 그러다
가 KSP가 소련에 가 있는 동안 자살했어요. KSP는 그 일로 가슴에 못이 박혔다고 했어요. 도
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면서. 그렇지만 어쨌거나 작품은 계속 썼죠. 살아남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면서요."
그렇지만 KSP도 슬픈 순간이 있었고 그럴 때면 데이빗의 음악뿐 아니라 사람을 잘 달래는 그
의 천성이 KSP에겐 크나큰 위로가 되었다. "KSP는 늘 이런 식으로 말했죠. '아, 난 이제 거
울
을 들여다보지 않아. 누구나 그런 때가 오지.' 그럼 나는 이렇게 말하죠. '아 그런 말씀 마세
요,
KSP. 그런 말씀 말아요."
"KSP는 내가 아주 어리다고 했어요." 데이빗은 당시 기억을 떠올리면서 즐겁기도 하고 어색해
하기도 했다. "나의 상냥하고 친절하고 점잖은 면을 좋아했어요. 그 때 나는 점잖았죠. 한 번
은 나한테 다가오더니 입술에 '포치나굴라'를 해 주고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어요. 꼭
한 면 그랬죠. 그리고는 애가 자기의 모든 것이라고 말했어요. 내가 KSP의 모든 것이라고요.
아마 KSP가 날 맘에 들어한 것 같아요. 사랑하는 기분 말예요. 사랑하는, 사랑스런. 난 그게
아주 자랑스러워요." 데이빗은 한숨을 쉬더니, 우정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과 그 덧없는 시간에 슬
픔을 느껴 혼잣말을 했다. "그게 내 일생에서 최고로 좋았던 시절 가운데 하나였을까요? 어떤
면에서 보면? 대단한 특권이죠. 커다란 특권이에요."
그런 금요일 저녁이면 데이빗은 KSP와의 대화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두 사람 모두가 시간 가
는 줄 몰랐고, 때문에 데이빗은 집으로 돌아가는 막차를 놓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러면 그는
그린마운트의 집을 한밤중에 나서서 20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내내 달려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
다. "어쨌든 좋은 운동이 됐죠." 데이빗이 나름대로 그런 일에서 위안거리를 찾아내는 방법이었
다.
그렇지만 KSP도 슬픈 순간이 있었고 그럴 때면 데이빗의 음악뿐 아니라 사람을 잘 달래는 그
의 천성이 KSP 에겐 크나큰 위로가 되었다. "KSP는 늘 이런 식으로 말했죠. '아, 난 이제 거
울
을 들여다보지 않아. 누구나 그런 때가 오지.' 그럼 나는 이렇게 말하죠. '아 그럼 말씀 마세
요,
KSP. 그런 말씀 말아요."
"KSP는 내가 아주 어리다고 했어요." 데이빗은 당시 기억을 떠올리면서 즐겁기도 하고 어색해
하기도 했다. "나의 상냥하고 친절하고 점잖은 면을 좋아했어요. 그 때 나는 점잖았죠. 한 번
은 나한테 다가오더니 입술에 '포치나굴라'를 해 주고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어요. 꼭
한 번 그랬죠. 그리고는 애가 자기이 모든 것이라고 말했어요. 내가 KSP의 모든 것이라고요.
아마 KSP가 날 맘에 들어한 것 같아요. 사랑하는 기분 말예요. 사랑하는, 사랑스런. 난 그게
아주 자랑스러워요." 데이빗은 한숨을 쉬더니, 우정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과 그 덧없는 시간에 슬
픔을 느껴 혼잣말을 했다. "그게 내 일생에서 최고로 좋았던 시절 가운데 하나였을까요? 어떤
면에서 보면? 대단한 특권이죠. 커다란 특권이에요."
그런 금요일 저녁이면 데이빗은 KSP와의 대화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두 사람 모두가 시간 가
는 줄 몰랐고, 때문에 데이빗은 집으로 돌아가는 막차를 놓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러면 그는
그린마운트의 집을 한밤중에 나서서 20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내내 달려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
다. "어쨌든 좋은 운동이 됐죠." 데이빗이 나름대로 그런 일에서 위안거리를 찾아내는 방법이었
다.
그러나 또다른 일에 대해 설명하면서 데이빗은 그런 사정의 불편을 알아차리기도 했다. "거기
서 자고 오는 게 나았겠죠, 안 그래요? 그렇지만 KSP는 내가 아버지에게 돌아가야 된다고 했어
요." 그러더니 어쩌면 KSP가 이런 논리를 내놓은 것이 그리 적절한 것으로 들리지 않겠다는 생
각을 해서인지 이렇게 덧붙였다. "물론 KSP는 우리 집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잇는지 전혀 몰
랐죠. 내가 아픈 것도 몰랐고 아빠가 아주아주 고약한 줄도 몰랐어요. 난 한 번도 말하지 않았
어요. 안 그런 척 했는데, 사실은 KSP에게 털어놓는 게 나았을 거예요. KSP는 이렇게 말했어
요. '아버지에게 고맙게 생각하라'고. 그래서 나는 그냥 그 말을 받아들인 거예요. 그 시절에는
그 일에 애해 그리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어요. KSP에게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았던 거죠. KSP에
게 뭐하러 걱정거리를 안겨 그리겠어요? 그러니 KSP는 아무 것도 몰랐죠." 그러나 이 말을 하
고 나자 또다른 일이 기억났고, 데이빗은 믿을 수가 없어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데 아버지가
KSP에 대해 어떤 욕을 했는지 알아요! 이렇게 말했어요. '그 여잔 돼지우리에서 산다.' 그
뿐
아니라 다른 말도 했어요... 아버진 웃기는 사람이죠. 난 그 집이 썩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식의 "KSP 카디시'행사는 비록 1년 정도밖에 지속되지 않았지만 그린마운트는 데이빗에
게는 아주 요긴한 도피처가 되었다. 이 역시 데이빗이 자신의 문제를 KSP네 집으로 끌고가려
하지 않은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그보다는 늘 새로 힘과 용기를 얻어 그녀 집을 나섰던 것이다.
데이빗은 그가 가장 특별하게 생각하는 말 가운데 하나인 '포치나굴라'를 KSP에 대한 기억
을
떠올릴 때 쓴다. '입맞춤'혹은 '입맞춰 달라'는 뜻인 이 말은 캐서린 수산나 프리처드의 단편
집
세 권의 제목을 섞은 것이다. 그 단편집은 (입술에 한 키스와 그밖의 단편), (포치와 색깔), 그리
고 (나굴라)이다. "말을 합성시켜 일종의 교향곡을 만든 거죠." 데이빗이 말했다.
제 14장 떠남
"나는 음악대학으로부터 입학허가를 받았어요! 다른 사람들은 모두 녹음테이프 같은 걸 제출
했는데 나는 그럴 필요가 없었죠. 특별 대우를 받은 거예요. 프랭키 아저씨가 그렇게 만들어 주
었어요!" 데이빗은 왕립 음악대학에 입학하게 된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잠시 말을 멈추었
다가, 그는 '안개'에 대해 말장난을 할 수 잇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보
면
운이 좋았죠. 어쨌든 난 들리지 않았으니까요."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1965년 12월 21일, 캘러웨이 교수는 신학기 입학안내서와 지원서 양식을 받았는데, 학적부의 스
타이너 씨는 이런 내용의 편지를 거기에 첨부했다. "물론 우리는 당신의 추천에 따라 데이빗 헬
프갓을 받아들일 것이고, 지원서가 도착하면 직접 그와 편지를 주고받도록 하겠습니다. 테이프는
보낼 필요가 없습니다. 시릴 스미스 교수에게서 사사받는 데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같은 계획은 두 군데에서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음악협회에서 주는 장학금은 데
이빗의 여비와 생활비를 대기에는 부족했다. 그리고 아직 21세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원서에
부모나 보호자의 서명이 필요했던 것이다. 캘러웨이 교수는 조금도 뜸을 들이지 않고 그 다음날
바로 피터와 만나기로 약속을 정했다.
"교수님은 아버지와 나를 학교로 불렀어요." 데이빗이 설명했다. "그래서 프랭키 아저씨는 아
버지에게 압력을 넣었어요. 다른 교수님들도 아버지에게 압력을 넣었죠. 다들 아버지에게 이렇
게 말했어요. '받아들여야 합니다. 데이빗을 보내 주세요. 데이빗이 가고 싶어하잖아요. 여기
서명을 하세요. 데이빗이 갈 수 있게 말입니다.' 그런 다음 아버지에게 서명을 부탁했어요. 다들
그렇게 말했어요. 서명을 하라고 말이에요. 불쌍한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냥
받아들인 거예요. 아버지는 아주 마지못해 받아들였어요."
"거기 모인 사람들이 다들 압력을 넣으면서 아들을 이래라 저래라 하는 데 대해 아버지는 어떻
게 생각했죠?" 내가 물었다.
그러나 데이빗은 내 질문을 무시하고 이렇게 말했다. "에, 아마 어쨌든 아버지는 틀렸고 그래
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 같아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데이빗은 피터가 지원서에 서명은 했지만 결국에는 런던으로 보내 주지
않을 것이 걱정됐다. 그래서 데이빗은 끝없이 아버지에게 고맙다고 하면서 보내 달라고 애원했
다.
"나는 아버지와 얘길 해 보려고 애를 썼어요. 아버지에게 계속 말을 걸었지만 아버지는 기분
이 아주 언짢아서 말을 하려고 하지 않았어요. 물론 나는 아버지가 서명을 해줘서 기뻤죠. 아버
지가 날 완전히 받아들인 거예요." 데이빗은 아버지가 보내 주리라고는 믿지 않았지만, 피터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너무도 간절한 나머지 종이 위에 서명한 것을 진정한 사랑의 표현으로 생
각한 것이다.
데이빗은 계속해서 애원했고 피터는 계속해서 안 된다고 했다. 1965년 성탄절 무렵은 헬프갓
가족들에게는 내내 긴장의 연속이었다. 말 그대로 '아들을 빼앗기는 문서에 강제로 서명한' 뒤
피터는 깊은 우울에 빠져 더욱 완고해졌다.
새해가 되자 감정적인 긴장과 압박은 한층 고조되었다. 레이첼의 아버지 모르드캐가 이제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에 퍼스에 사는 딸을 방문하기로 하고 자니와 함께 찾아온 것이다.
피터와 모르드캐 사이의 불화는 해묵은 만큼이나 뒤얽혀 있었는데, 결국 그것이 표면으로 떠올랐
다. 기억하는 여러 가지 이야기 가운데 데이빗은 특히 한 가지를 재미있어 했다. "아버지는 외
할아버지가 아버지한테서 1백 파운드를 가져갔다고 했어요. 아버지가 나한테서 가져간 것과 같
은 액수죠. 우연 치고는 재미있죠. 그런데 그 뒤 그걸 한푼 두 푼씩 갚은 거예요. 아버지는 그
걸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 했고, 1백 파운드를 빌려준 것이 얼마나 큰 인심인지를 늘 들먹이면서,
그걸 그런 식으로 되갚았다며 늘 앙심을 품고 있었어요."
피터는 장인을 맞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 썩 즐겁지 않았지만 모르드캐 역시 나름대로 어려움
이 있었다. "외할아버지와 자니는 불쌍한 레이첼 때문에 아주 언짢아했어요. 아버지가 좀 심하
게 대하는 걸 봤거든요." 데이빗이 말했다. 사실 모르드캐는 딸과 외손자들이 겪고 있는 가난을
거의 믿을 수가 없었는데, 그러면서도 해 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언제나 그래
왔던 것처럼 피터가 도움을 받으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르드캐는 기회만 생기면 데이빗을
도와주겠다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돌아갔다.
피터는 가족 일에 '간섭'당하는 경우를 또다시 겪었다. 1월 말에 루버 스미스 여사를 비롯한
유대인 여성들이 집으로 찾아와, 협의회 장학금 위에 학비를 좀더 마련할 목적으로 데이빗이 자
선연주회를 열 것을 제안한 것이다. 이들이 찾아온 사건은 일찍이 1961년에 '좋은 유대인 가정'
에 대한 소식을 알렉 브렉클러에게서 들었을 때와 같은 식으로 피터의 사고방식에 작용했다. 루
버 스미스 여사에 대한 피터의 대답은 그냥 단순한 '안된다'가 아니었다. 다시는 피터에게 말을
붙일 엄두가 나지 않도록 심하게 거절한 것이다.
데이빗은 여사가 찾아온 뒤 며칠 동안의 일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루버 아줌마는 아버지
가 외출할 때까지 집 밖에 차를 세워 놓고 기다렸어요. 아버지를 끔찍이도 무서워했죠 그러다
가 아주 잽싸게 집안으로 들어와서는 나의 런던 유학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물론 아주 아슬아슬
한 상황이었죠. 쫓겨나면 끝장이고 나는 살아 있는 것만도 감지덕지해야 했으니까요."
"쫓겨나다뇨? 누가 쫓겨나는데요?" 나는 어리둥절해 물었다.
"물론 나죠! 당연히! 아빠가 날 쫓아냈어요. 끔찍한 밤이었어요. 미움에 밤에. 아버지는 있
는 대로 사나워지고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고... 소리 소리를 지르고,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죠.
'런던에 가지마. 까먹는 게 많아질 거야.' 아버지는 세계 곳곳에 거래처가 있어서 아버지 혼자
힘
으로도 주선해 줄 수 있다고 했어요. 그렇지만 그건 거짓말이었죠. 아버지는 퍼스에서도 거래하
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거든요."
데이빗은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계속했다. "아버지는 '가지 마라'했고 나는 한 번도 따지고
들지 않았어요. 나는 일평생 누구하고도 입씨름을 벌이지 않았어요. 너무 겁이 많아서 누구하고
도 언쟁을 벌일 수가 없는 거예요. 난 생쥐예요. 난 그냥 미소만 지었어요. 그냥 받아들였죠.
보세요, 문제는 아버지가 너무나도 적개심을 많이 품고 있었다는 점이고,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
각했죠. '어쨌거나 손해볼 건 아무 것도 없잖아.' 어쨌든 난 기회가 오자마자 런던으로 갔어요.
손해볼 게 뭐가 있겠어요?"
데이빗은 작은 옷가방을 꾸려 아버지의 집을 나섰다.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을 곳이었다. 동생
레스와 - 데이빗은 레스에게 '바미온 디아미'라는 별명을 붙였고 또 늘 그의 사랑과 뒷받침을
소
중하게 생각하고 있다 - 함께 공중전화로 가서 당시 유일하게 그를 받아줄 것으로 생각한 사람에
게 전화를 걸었다. 루버 스미스 여사였다.
루버 스미스 여사는 기뻐 어쩔 줄을 모르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친절하게 받아들여 함께 지내도
록 해 주었다. 데이빗은 이렇게 말했다. "아줌마는 계속 나한테 물었어요. '아버지가 마음을 바
꾸지 않을 게 확실해? 다시 데리고 가지 않을 게 분명해?' 그렇지만 난 사실별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루버 스미스 여사는 데이빗이 자기 집에서 함께 지내고 있으면 데이빗의 장래를 위해 훨씬 많
은 것을 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음이 분명하다. 여사는 런던으로 가기 위한 현실적인 부
분을 준비해주기 시작했다. 유대인 여성 협의회의 도움으로 데이빗을 위한 고별 연주회를 준비
할 수 있었다.
데이빗은 또 모르드캐 외할아버지와 자니 삼촌에게도 도움을 청했다. "나는 멜번에 사는 친척
들에게 그런 편지를 썼어요. 아빠가 날 내쫓은 다음에요." 데이빗이 말했다. "아버지와 마거릿에
대해 썼죠. 이 비참한, 비참한 내용의 편지를 썼는데 다들 하여간 날 도와주었죠. 멜번에 사는
친척들은 나한테 돈과 그밖의 것들을 아주 많이 보내 줬어요."
기금을 모으는 일뿐 아니라 루버 스미스 여사는 또 데이빗에게 예절과 교양을 가르치는 일도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데이빗이 나이프와 포크 쓰는 방법을 전혀 모른다는 것을 알고는
너무나도 놀랐다. "나는 나이프와 포크를 쓰기 시작하게 어요. 루버 아줌마가 꼭 그래야 된다
고 했거든요." 데이빗이 말했다. "아무튼 그게 더 품위가 있는 것 같아요. 런던에 갈 수 있도록
나를 가르쳐 주어야 했거든요." 그제야 나는 크리스의 베란다 방에서 데이빗이 한 말, 런던에 갈
수 있도록 루버 스미스 여사가 준비시켜 주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뒤 세 달 동안 데이빗은 계속 연습했다. 피아노뿐 아니라 식탁예절까지. 그리고 KSP의 집
에도 여전히 놀러 가곤 했는데, 루버 스미스 여사는 KSP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루버 아줌마
는 KSP가 지독한 공산주의자라고 생각했어요." 데이빗이 말했다. "그 시절에는 공산주의가 채식
주의와는 아주 거리가 먼 것으로 생각했거든요."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데이빗은 열광적이고 영리하고 약간은 괴짜기미가 있는 청년이었고, 유
달리 엄한 아버지 때문에 약간의 문제를 겪고 있는 것으로만 보였다. 실제로는 건강이 아주 좋
지 않았고, 자신의 연주도 전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고별연주회 준비는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었고, 연주회와 데이빗을 홍보하기 위한 기
사가 유대인 신문인 (마카비언)지에 실렸다. 5월 17일 주 의회 연회장에서 주지사 더글라스 켄드
류 경 부부가 참석한 가운데 데이빗은 거대한 프로그램을 연주했다. 베토벤의 (열정 소나타), 쇼
팽의 연습곡 다섯 곡, 리스트의 (단테 소나타), 그리고 무고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이었다.
비록 데이빗은 자신의 연주 수준에 만족해하지 않았지만, 제임스 펜버티를 비롯한 평론가들은 그
의 연주에 경탄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연회장의 피아노가 '욕실'같은 음색을 냈다는 점을 두고
불평했다.
연주회에서는 4백 파운드가 걷혔고, 루버 스미스 여사는 피니어스 실릭슨 재단에서 기금을 더
얻어냈는데, 므르드캐가 피터 몰래 외손자를 돕고 싶어서 익명으로 데이빗 앞으로 얼마간 기증한
돈이었다.
데이빗의 가족은 아무도 독주회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KSP는 좀처럼 하지 않는 나들이에 나섰
다. 그린마운트의 집에서 내려와 연주회에 참석한 것이다. KSP는 또한 '멋진 장갑'을 데이빗에
게 선물했고, 그는 지금도 소중하게 그 장갑을 간직하고 있다. "런던은 아주 추울 거라며 이런
값비싼 털장갑이 있어야 된다고 했거든요."
데이빗은 이제 완전히 준비가 끝났고, 실릭슨 재단에서 받은 돈 덕분에 루버 스미스 여사는 왕
립 음악대학 학생에 걸맞도록 옷을 완전히 새로 맞춰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예정된 데이빗의 항
해는 선원들의 파업 때문에 지연되었다. 한동안은 비행기로 런던에 가야만 크리스마스 학기 학
사일정에 맞출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파업은 너무 늦기 전에 때마침 끝났고, 8월 14일 데이빗은 P&O의 히말라야 호에 오르기 위해
부두에 나갔다. 그는 설명했다. "앨리스 여사가 배웅 나와서 메트로놈을 선물했고, 루버 아줌마
가 나와서 나는 루버 아줌마에게 많이 입맞추고 포옹하면서 작별인사를 했어요."
데이빗이 떠난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부두에 나와 즐거운 항해를 빌어 주는 가족은
아무도 없었다.
제 15장 깨달음
복귀 연주회를 마치자 사람들은 옥타곤 극장 대기실로 몰려들었다. 데이빗은 사람들의 축하와
포옹을 받으면서 뛸 듯이 기뻐했다. 청중 가운데 앉아 있던 앨리스 캐러드 여사의 연약한 몸집
이 사람들 사이로 나타나자 데이빗은 두 팔로 얼른 얼싸안았다. 여사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
었다. 음악계의 거성인 여사가 제자의 용감한 복귀를 축복하는 장면은 감정이 복받치는 장면이
었다.
그렇지만 잠시 뒤 앨리스 여사는 스승답게 데이빗에게 (전람회)는 훌륭했지만 쇼팽은 충분치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더니 나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나한테로 데이고 오세요. 내가 도와주
죠." 여사는 당시 여든일곱이었지만 여전히 힘이 넘쳤고, 가장 사랑하는 제자가 최상의 재능을
세상에 보이도록 하겠다는 결의가 있었다.
연주회가 있기 한 달 전쯤 데이빗은 '여사'를 만나야겠다는 말을 하면서 전화를 걸겠다고 했다.
나는 그 때 처음으로 앨리스 여사에 대해 들었는데, 여사가 누구인지를 설명한 뒤 데이빗은 이렇
게 말했다. "그분은 늘 나를 도와줬어요. 늘. 늘." 그런 다음 그가 편안하고 즐거운 태도로 여
사와 통화하는 것을 보고는 둘이 얼마나 가까우며 데이빗이 여사를 얼마나 믿는지를 깨달았다.
그는 여사에게 우리가 찾아가도 되겠느냐고 물었고, 두 주 뒤 우리는 여사 집으로 찾아갔다. 그
곳에는 자그마한 파티가 준비되어 있었다.
앨리스 여사의 집에 도착하자 마치 유럽식 집안에 들어서는 것 같았다. 수놓은 커튼, 탁자에
놓은 헝가리산 깔개, 마룻바닥에는 페르시아 양탄자가 깔려 있었고, 사방에 음악과 책이 넘쳐 났
다. 집 전체에 음악이 스며 있었다. 벨라 바르톡의 초상화가 무지카 피아노 위에 걸려 있었고,
그 곁에는 스타인웨이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바르톡에 대해 물었더니 여사는 슬픈 눈을 한 엄격한 사람으로 기억한다면서, 작곡에 심취한
나머지 학생들은 거의 피상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고 했다. 여사는 그의 음악이 늘 자신의
가슴 속 깊은 곳에 머물러 있다고 말했다.
앨리스 여사는 내가 데이빗과 지내기 시작한 힘들었던 초기에 나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인 몇
안 되는 사람 가운데 하나다. 자신은 데이빗을 특별한 인간이라고 믿고 또 대단히 아낀다고 하
면서, 이제 '내 데이빗'을 도맡아 보살펴 주는 사람이 생겼으니 앞으로는 상황이 좋아지기만 할
것이라고 말했다.
데이빗이 복귀 연주회가 있던 날 옥타곤 극장의 대기실에서 해 준 앨리스 여사의 말은 나에게
든든한 뒷받침이 되었고, 나는 그 친절한 제안에 감사를 표했다.
옥타곤에서 나온 뒤 데이빗의 친구와 후원자들은 그의 복귀를 축하하는 뜻에서 파티를 열었다.
샴페인이 터지고 모두가 어느 정도 기분이 고조된 가운데, 크리스는 마이클 패리에게 데이빗의
매니저 역을 맡아 주겠느냐고 물었다. 자신은 데이빗의 장래에 어울릴 만큼 경험도 없는데다가
시간도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데이빗은 며칠 동안 생각한 끝에 크리스의 의견을 받아들였고,
마이클도 기꺼이 받아들였다.
마이클은 시작부터 데이빗을 전적으로 연주회음악가로 내세우기로 결심했다. "데이빗의 경력
으로 볼 때 그는 존중받아 마땅하고 따라서 다른 음악가나 마찬가지로 그만한 경의를 표해야 한
다" 고 내에게 말했다. 마이클은 데이빗이 기벽이 있기 때문에 '구경거리'로 내보이기가 아주 쉽
다는 점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가 주선하는 독주회는 모두가 공식적인 행사였고, '일반
적인 연주회 관례'의 기준으로 믿는 것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그 뒤 몇 년 동안 그는
이
런 조건을 다른 매니저들에게도 적용시켜 나갔다.
파티가 끝난 다음 우리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아주 늦은 시각이었지만, 데이빗은 곧장 피아
노로 다가갔다. 연주회 동안 마음에 들자 않았던 부분이 있으면 무엇이든 곧바로 연습을 시작하
는 것은 그의 원칙 가운데 하나였다. 나에게는 이번이 데이빗이 한 연주회 가운데 제대로 격식
을 갖춘 최초의 행사였으므로 이런 태도가 놀라웠다. 그렇지만 나는 데이빗이 월계관을 쓰고 앉
아 쉬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점을 이해했다. 실제로 ABC와 녹음하기로 한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1번을 다듬을 시간이 4주 반, 네들랜즈 교향악단과 함께 연주할 라흐라니노프 협주곡 2번을 다듬
을 시간은 6주뿐이었다.
ABC와의 녹음은 웨스트 오스트레일리언 오페라 예술 교향악단 음악감독인 제럴드 크록이 주
선한 것이었다. 리카도를 자주 찾는 단골인 제럴드는 오랫동안 데이빗을 존경하는 눈으로 지켜
보았고, 종종 그의 연주 스타일을 스브야토슬라브 리히터와 비교했다. 그보다 몇 달 전에 그는
(웨스트 오스트레일리언)지에 이런 내용의 기사를 썼다. "데이빗 헬프갓은 음악의 천재이다. 기
교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같은 기사에서 그는 "세계적인 수준의 재능을 지닌 데이빗 같은 사람
이 연주회를 열 수 없다는 것은 비극이다"고 지적하면서, 어떤 관현악단이라도 데이빗과 함께 연
주한다면 시간을 내어 맡아 지휘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제럴드는 라흐마니노프 1번 협주곡 녹음
을 위한 독주자로는 데이빗이 적격이라고 ABC에 말했고, 약속대로 녹음을 위해 웨스트 오스트레
일리언 교향악단의 지휘를 맡았다.
데이빗 입장에서는 이 제안이 비교적 촉박하게 들어왔다. 몇 년만에 처음으로 협주곡 전곡을
녹음하는 것이고, 또 1번 협주곡을 잘 알고는 있었지만 연주회에서 연주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마이클패리가 주선해 준 2번 협주곡도 마찬가지였다.
그 뒤 몇 주 동안 데이빗은 리카도의 연주와 수영을 빼면 거의 한 번도 피아노를 떠나지 않았
다. 어느 날 그가 같은 부분을 한 시간이 훨씬 넘도록 되풀이하는 것을 듣고 나는 질리지 않느
냐고 물었다. 그는 내가 한 질문이 무지한 데에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지만 달링, 연주는
제대로 해야 되지 않겠어요?" 깨닫는 속도가 느렸던 나는 그의 심지 깊은 말에 저으기 놀랐다.
그리고 또한 그가 "낚시 바늘에 걸려 열다섯 살 수준에 머무르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성숙하
고 혼신을 다하는 전문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앨리스 여사가 데이빗을 지도해 주겠다고 한 것은 마침 잘된 일이었다. 나는 라흐마니노프 2
번 협주곡을 지도 받을 수 있도록 데이빗을 여사에게 데려다 주었다. 두 사람은 '라흐'의 작품에
익숙해 있었다. 데이빗에게 2번 협주곡을 처음 소개한 사람도 바로 앨리스 여사였다. 그는 옛
악보를 그 때까지도 가지고 있었는데, 다른 악보와 마찬가지로 낡을 대로 낡은 상태인 것으로 보
아 연습을 많이 한 것이 분명했다. 앨리스 여사는 힘과 통찰력이 대단한 스승이어서, 데이빗이
부주의한 음정이나 해석을 남겨 둔 채 다음 부분으로 넘어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제럴드 크
록은 리카도에서 나에게 데이빗은 해석에 좀더 신경을 써야 하고 또 '선을 더 잘 유지할'필요
가
있다는 말을 들려준 적이 있었다. 앨리스 여사는 데이빗의 이런 점을 고쳐 주었다.
지도가 이루어지는 동안 나는 두 사람을 넋을 잃고 바라보며 앉아있었다. 내 아이들이 어렸을
적에 나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우도록 아이들을 데려다 주곤 했다. 그 때에는 아이들이 음악
을 어느 정도 이해하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세계적 수준의 스승과 제자가
세세한 부분에까지 신경을 기울이는 것을 이렇게 가까이 앉아서 지켜보니 깨닫는 바가 많았다.
앨리스 여사는 이 협주곡에 대한 데이빗의 해석을 마음에 들어 했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 부분
은 '마무리'였다. 나는 데이빗에게 지도해 주는 스승이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었
다.
데이빗이 앨리스 여사로부터 정규 교습을 받은 것은 이미 오랜 세월 전 일이었으므로 나는 그
가 교습 과정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궁금했다. 두 사람을 보고 있노라니 그 대답을 알 수 있었다.
스승과 제자가 음악으로 똘똘 뭉쳐 라흐마니노프에 완전히 몰두해 있었으므로, 그밖의 것에는 조
금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피아노에 대한 데이빗의 타고난 열정과는 별도로, 전문 연주회 피
아니스트가 작품을 일정한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연습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데이빗의 완전한 집중과 전문가로서의 어려움에 대해 새로운 이해를 얻었다. 그
뒤 7년간 데이빗은 앨리스 여사의 가르침을 많이 받았다.
'라흐 1번'은 7월 11일 크록과 웨스트 오스트레일리아 교향악단과 함께 ABC의 바실 커크 스튜
디오에서 녹음했다. 연주자들 중 대부분은 데이빗을 알고 있었지만, 녹음이 끝난 뒤 해외에서 온
더블베이스 주자 한 사람이 저런 연주는 정말 오랜만에 들었는데 어째서 한 번도 데이빗이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을까 물었다. 단원들 가운데에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많았다.
녹음에 관여한 사람들은 모두 녹음이 잘됐다고 생각했고 언론에서도 보도했지만, 이어 실망이
뒤따랐다. 대중의 관심이 높았음에도 ABC에서 영문도 없이 방송을 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데
이빗은 이 때문에 슬퍼졌지만 곱씹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월말에 연주회에서 또한번 연주하기
로 했고 텔레비전 프로그램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윌리시 쇼'에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다루기로 되어 있었다.
'윌리시 쇼'덕분에 크리스티 코크번과 사귀게 되었다. 그녀는 의욕적인 텔레비전 기자로, 사
전
조사에 철저하고 끈기도 대단했다. 우리는 오랫동안 크리스티와 함께 우리 삶과 또 그간에 있었
던 변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데이빗의 수영과 물에 대한 집착에 흥미를 느꼈고
그의 재능을 진심으로 존경했다. 크리스티와 또 그녀의 동료이자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손꼽히는
정치부 기자인 조지니거스는 우리와 아주 가까운 친구가 되었고, 몇 년이 지난 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을 소개해 주었다.
텔레비전 쇼를 위한 촬영은 며칠 동안에 걸쳐 진행되었다. 카메라에 대해 보여주는 데이빗의
애정을 지켜보노라니 신기하기만 했다. 그는 진정한 연기자였고, 카메라가 비추는 모든 순간을
고스란히 음미했다. 수줍어하지도 위축되는 일도 없이 전적으로 협조했다. 이런 면은 이제껏 데
이빗에게서 경험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나는 언론이 데이빗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 다는 사실에
크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게다가 그의 소박한 허영심에는 웃음이 나왔다. 겨우 두 달 전에
만 해도 고개를 잔뜩 수그려 얼굴을 감추고 짙은 담배연기로 장막을 치던 사람이 이제는 카메라
앞에서 한껏 모양을 내고 재롱을 피우는 것이다.
텔레비전 쇼의 마지막 부분은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아 대학교의 윈트롭 홀에서 있었던 라흐마느
노프 2번 협주곡 연주회 동안 찍었다. 이번 행사, 즉 10년도 더 지난 뒤 처음으로 열리는 데이빗
의 협주곡 연주회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아주 많이 모여들었다. 그 중에는 퍼스의 연주회 단골
뿐 아니라, 리카도에서 고전음악과 데이빗의 마력에 대해 알게 되어 이제 연주회장에서는 어떤
모습일지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손톱을 깨물 정도로 초조하기만 했던 복귀 연주회를 무사히 마치기는 했지만, 나는 이제 새로
운 두려움에 싸여 있었다. 관현악단과 함께 연주하는 것은 독주자가 홀로 연주하는 것보다 늘
어려운 법이다. 무대 위에 혼자 있을 때에는 데이빗이 속도나 분위기, 강약에서 어느 정도 자유
를 부릴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변덕을 조금도 부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는 관현악단과
함께 다시 연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에 너무나도 들뜬 나머지 연주회 직전에 느끼는 그 어
떤 초조함도 그의 행복감을 뚫고 들어가지 못했다. 내 얼굴 표정에서 불안감이 드러났던 모양이
다. 연주회가 시작하기 직전에 데이빗이 나를 안아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걱정 말아요! 저
무대 위에 올라가서 청중을 보면 나는 정말로 생명을 느끼니까요. 마음 푹 놔요. 마음 푹 놔
요." 말이야 쉽지!
나는 이번에는 연주 동안 관람석에 자리를 잡았다. 크리스는 무대위 데이빗 곁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데이빗이 거의 보지도 않는 닳아빠진 악보를 넘겨주었다. 크리스에게는 연주 동안 데이
빗 곁에 그렇게 가까이 앉아 있는 것이 극도로 강렬한 경험이어서, 평생토록 기억하게 될 것이라
고 말했다. 열정이 데이빗으로부터 강렬하게 퍼져나와 가까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든 에워싸 버
리는 것이다. 그 뒤로 나도 연주 동안 데이빗 곁에 앉아 있는 경험을 종종 하게 됐는데, 감전 그
자체였다.
라흐마니노프의 협주곡 2번은 더할 나위 없이 낭만적이어서 그의 협주곡 가운데 가장 사랑 받
는 곡이고 청중의 반응도 대단했다. 연주가 끝난 뒤 일어서서 박수를 틴 다음 모두들 일제히 자
리에 앉았고, 잡시 동안 윈트롭 홀 안에는 완전한 정적이 감돌았다. 음악 평론가 잰 셰퍼드는 그
다음달 호 (뮤직 메이커)지에서 그 이상한 침묵은 천중이 '존경을 표하는 새로운 방법'이었을 것
이라고 썼다. 무대 뒤에서 데이빗은 이번에도 기분이 "신나요!"였다. 그는 나를 안으면서 말했
다. "봤죠, 달링? 청중을 보았을 때 나는 날아오르는 사자 같은 기분이었어요. 날아오르는 사
자!" 자신을 비유하는 동물이 이렇게 달라진 것을 듣고 나는 가슴이 뭉클했다.
연주회가 끝난 뒤 이번에도 파티가 있었다. 데이빗은 물론 곧장 피아노로 갔고, 거기서 그는
리카도에서 사귄 미국인 친구 빌과 함께 이중주를 했다. 파티에는 리카도에서 사귄 친구들을 비
롯해서 사람들이 많았다. 식사가 끝난 뒤 데이빗은 기분이 아주 좋아 방 안을 여기저기 다니면
서 모든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누군가가 브람스의 Bb 피아노 협주곡을 틀었다. 사람들이 모여 듣고 있을 때 데이빗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모든 사람과 포옹하면서 '당신이 최고'라고 말을 들려주고 다녔다. 친구들 사이에
있으면 데이빗은 아무도 자신의 호의 영역 바깥에 내버려 둘 수 없었다. 한 사람을 안고 입맞추
기를 끝없이 계속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런 다음 방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그렇
게 해 주어야 했다. "당신이 최고예요. 당신이 최고예요." 데이빗은 이 사람 저 사람 포옹하고
다니면서 말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멈추었다. 마치 문득 커다란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자기가
포옹하고 있는 사람을 쳐다보다가 이어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뒤 이렇게 말했다. "당신
이 최고예요. 그렇지만 길리언은 특별히 최고예요." 그런 다음 나를 보고 씩 웃어보이더니 다시
"당신이 최고예요" 작업을 계속했다.
나는 거의 믿기지가 않았다. 데이빗은 처음으로 나에 대한 감정과 방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
에 대한 감정에 차이를 두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엄청난 발전이었다.
그 전 두 달 동안 그는 나에게 내내 결혼하자고 했다. 비록 우리 두 사람이 일생을 함께 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라는 것은 느끼고 있었지만 결혼에 대한 계획은 일단은 보류하는 것이 더 낫다
고 생각됐다. 그런데 이번 일은 데이빗의 청혼이 진심이며 나에 대한 감정을 온전히 의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그 날 밤 이후로 나는 결혼 가능성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나는 자신의 생각에
놀랐다. 내 나이에 그런 형식을 갖추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왜 갑자기 그
게 그렇게 좋은 의견으로 보이는지 의아했다. 데이빗에 대한 나의 사랑이 지속적이라는 점과 또
우리가 이미 지니고 있는 사랑과 관심을 더하기 위해 꼭 결혼을 할 필요는 없다는 점에는 조금의
의심도 없었다. 이보다 더한 사랑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왜 그의 청혼을 진지
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다가 나는 내가 진심으로 그의 아내가 되고 싶어하며, 자랑스레 '데이빗 헬프갓 부인'이 되
고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 '여권론자다운'일은 아니지만 내가 데이빗을 위해 성을 바꾸었
다는 사실을 온 세상에 알리면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이 많이 달라질 것이다. 나는 성인이었고
생각 없이 전통만을 따르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나 자신의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세상 사람 전부가 데이빗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는 못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여 주는 것은 언제나 좋은 일이다. 데이빗과 결혼함으로써 지
구상에서 적어도 한 사람은 그를 고스란히 받아들여 사랑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행
동이 될 뿐아니라, 나아가 내가 데이빗을 너무나도 특별하고 중요하게 본 나머지 내 성을 기꺼이
버리고 그의 성을 얻었다는 것을 선언하는 행동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내 육감이 옳은 것으로 판가름났을 때 우리 사회의 어떤 모습이 드러날 지에 대해서
는 아직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가 결혼한 뒤 사람들이 데이빗을 바라보는 눈이 상당히 많이 긍정적으로 변했다.
제 16장 지옥에서 주선한 것
내가 결혼을 결심하자 데이빗은 더할 수 없이 기뻐했다. 몇 달 동안 거의 매일 결혼 이야기를
꺼냈는데 이제 소원이 풀리는 것이다. 나는 촬영이 끝난 뒤 크리스티와 통화하면서 아마 나도
모르게 그 얘기를 들먹였던 모양이다. '윌리시 쇼'에서 데이빗에 대한 내용을 7월 말쯤에 방영했
을 때 프로그램 진행자인 마이크 월리시가 전국방송에서 방금 들어온 소식이라며 우리의 결혼계
획을 방송하고 리카도 단골들을 모두 초대하기로 했다는 말을 덧붙인 것이다.
그보다 일찍 나는 우리가 내린 결정에 애해 크리스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크리스 역
시 데이빗이 자신의 사랑과 나에 대한 전적인 감정에 대해 확신하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을 하면서
신랑 들러리가 되어 주겠다고 했다. 내 친구 바바라 브랙클리에게 얘기를 했더니 바바라는 그
자리에서 "우리집에 와서 해" 하고 제안했고, 데이빗과 나는 바바라의 친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식을 올릴 완벽한 날을 잡을 필요가 있었다. 점성학 표를 뒤져 조짐이 제일 좋은 때를
찾았다. 결혼식을 올릴 날짜뿐 아니라 정확한 시간까지도 찾았다. 내가 찾은 시각은 8월 26일
11시 57분이었다.
초대할 사람들을 정하면서 데이빗은 이제까지 한 번도 들려준 적이 없는 사람들을 언급하기 시
작했다. 그는 늘 이런 식으로 말을 꺼냈다. "아, 달링. 그리고... " 이렇게 운을 뗀 다음 전적으로
혼자만 아는 사건을 들먹이며 자신이 만들어 낸 별명이나 아니면 이상한 호칭을 들먹이는 것이
다. 그러면 나는 질문을 했고, 마침내는 새로운 사람과 그에 연결된 이야기가 나오고, 그와 관련
된 갖가지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는 것이다. 나는 어떤 이야기에서는 충격을 받았고 또 어떤 이
야기에서는 슬픔을 느꼈지만, 데이빗이 가장 암울하게 보낸 지난 10년 동안 그를 보살펴 준 친구
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등장인물은 주로 웨스트 오스트레일리아 오페라단에서 나타났다. 70년대 초에 데이빗이 전속
으로 음악지도를 맡아 일했던 오페라단이었다. 그 가운데는 소프라노 일레인 플린트와 '조지'가
있었다. '조지'는 알고 보니 오페라단의 전임 감독이었던 조르그 틴트너였다.
나는 그 무렵에는 조르그를 만날 수 없었지만 - 퀸즈랜드로 이사가 퀸즈랜드 극장 관현악단 음
악감독이 되었으므로 - 그와 데이빗이 주고받는 수많은 편지에 내 편지도 끼여들었고 차차 친해
지게 되었다. 데이빗은 '조지'를 따뜻하고 고마운 사람이라고 했다. 데이빗에 대한 그의 지속
적
인 보살핌과 호의는 데이빗에 대해 나에게 써서 보내는 편지에서뿐 아니라 데이빗이 병원에 드나
들기를 되풀이하던 시기 내내 퀸즈랜드에서 데이빗에게 보낸 수많은 편지에서 잘 알 수 있었다.
조르그는 퀸즈랜드로 이사가기로 하여 퍼스에서 데이빗을 보살펴 줄 수 없게 된 것을 늘 마음에
걸려 했다.
편지는 모두 '내 소중한 친구 데이빗에게'로 시작하여, 더 일찍 홀은 더 자주 편지를 쓰지 못해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내용이 그 뒤를 이었다. 이 부분이 특히 감동적이었다. 데이빗과 편지를 주
고받은 사람이 그 말고도 두엇 더 있었지만 충실히 정기적으로 편지를 보낸 사람은 조르그뿐이었
기 때문이다. 일 때문에 조르그는 매년 며칠 정도만 데이빗과 함께 지낼 수 있을 뿐이었지만, 그
는 데이빗이 정신적으로 계속 그와 함께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해 주었다. 편지에서 그는 데이빗
이 연습을 잘 하고 있는지에 대해 물었는데, 마치 병원이 아니라 그랜드 피아노가 있는 편안한
집에 자리잡고 사는 사람에게 묻는 듯한 투였다. 그런 한편으로 이런 구절도 있었다. "저네가
거기 (병원에)있는 동안 세상은 많은 걸 맛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네. 낫도록 애를 많이 써야 될
걸세. 자넨 세상에 보태 줄 게 많잖나!" 그리고 "물론 자네가 병원에 있을 필요가 없다면 더 좋
겠지. 금방 거길 떠날 수 있기를 바라자구."
어느 날 조르그에게서 편지가 왔을 때 데이빗은 편지를 읽은 뒤 한 시간쯤 지나 편지를 손에
들고 나를 찾아 부엌으로 왔다.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 여잔 그 사람의 배짱이 미웠던 거
예요."
"무슨 얘기예요, 달링?"
"그녀는 조지를 샘냈어요. 알아요? 클라라는 술수를 썼어요. 내게 턱수염을 기르게 했거든
요. 알아요? 내가 스무 살 정도 나이가 더 들어 보이면 조지가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을 걸
로 생각한 거예요. 비열한 술수였죠. 클라라는 독한 여자였거든요. 세상에서 제일 가는 독종이
에요. 제일 지독한 여자였어요."
나는 클라라가 데이빗의 첫 번째 부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우리가 만난 다음 날 나
에게 청혼한 지 몇 분이 지난 뒤 데이빗은 결혼 경력에 대해 나에게 '고백'할 필요가 있다고 생
각
했다. 그러면서 나를 안심시키기 위한 마음에서인지 자신은 '책임이 없다'는 뜻으로 이렇게 말했
다. "내가 청혼한 건 아니었어요. 날 나꿔채서 결혼해 버렸으니까요."
그 당시에는 겨우 몇 시간 전에 만난 남자에게서 청혼을 받은 상황이었으므로 나는 그런 모든
이야기가 이해하기 힘들었다. 나중에 우리가 함께 생활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데이빗이 마음이
내키는 부분만 입에 올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의 일생에서 특히 힘들었던 70년대 시절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데이빗이 정말로 기분 나빠 할 것으로 생각되
는 부분에 대해서는 묻지 않으려고 신경을 많이 썼다. 언젠가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였다. 내 추측이 맞았다. 지금이 바로 클라라와 또 당시 데이빗의 주변에 대한 이야기
가 나올 때였다. 물론 전후상황이 완전히 이해되기까지는 몇 달이라는 시간과 여러 사람들의 이
야기가 더 필요했다.
모든 일은 1971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처음으로 입원했던 퍼스의 찰스 가디너 병원에서 넉
달만에 퇴원한 데이빗은 상당히 건강했고 자립심도 강해져 있었다. 루버 스미스 여사는 다시 호
의를 베풀어 그를 받아 주었지만, 몇 주가 지난 뒤 데이빗은 그 집에서 나와 앨리스 여사의 친한
친구인 해리스 부부 집으로 들어갔다.
클리프 해리스는 그 때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아 주 음악협의회 의장이었고, 부인 레이가 데이빗
에게 특히 관심이 많았다. 두 사람은 데이빗이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있을 만큼 자신감이 붙을
때까지 데이고 있기로 하고는 자기 집과 가까운 곳에 셋집을 얻어 주었다. 데이빗이 날마다 자
기네 집으로 찾아와 거기 있는 그랜드 피아노로 연습하고 함께 식사도 할 수 있는 거리여서 잘
보살펴 줄 수 있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클리프는 데이빗이 다시 한 번 음악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기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변함없
이 데이빗을 밀어 주는 제임스 펜버티는 (선데이 타임즈)에 데이빗과 모금에 대해 기사를 썼고
그 결과 기금이 무이기 시작했다. 해리스 부부는 또 데이빗이 연주할 수 있도록 자그마한 음악
행사도 주선했다. 데이빗이 클라라를 만난 것은 이런 행사에서였다.
나이 든 이혼녀로서 아이가 - 그 가운데에는 데이빗과 나이가 비슷한 아이도 있었는데 - 넷
딸린 클라라는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꽤 잘 알려진 사람이었고 앨리스 여사와도 가깝게 지내는 사
이였다. 아름다웠던 그녀는 부유했으나 제2차세계대전 동안 모든 것을 잃어버린 헝가리인 가족
에서 태어났다. 십대 시절에 수용소에 갇혔지만 결국 러시아 군대가 구해 주었고, 곡절 끝에 오
스트레일리아에 와서 정착했다.
클라라는 데이빗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나이가 좀더 들어가면서 데이빗은 점점 더 '생쥐'
쪽에 가까워졌으므로 클라라는 데이빗이 더할 나위 없이 다루기 쉬운 성격임을 알아차렸다. 데
이빗은 클라라의 관심이 기분 좋았고 얼마 안 가 클라라가 이끄는 대로 내버려두게 되었다. 해
리스 부부와 루버 스미스 부부는 두 사람의 친분관계를 깊이 염려했지만 그들로서는 어찌 할 도
리가 없었다.
몇 달 뒤 데이빗은 다시 ABC경연대회에 참가하여 Bb장조 협주곡을 연주했고, 다시금 주 결승
에서 우승했다. 클라라가 데이빗에게 청혼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강요당한 셈이었어요." 데이빗이 털어놓았다. "어르고 달래고 꼬드긴 셈이었죠. 사실 나한테
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어요. 앨리스 여사가 결혼하라고 했거든요. 물론 앨리스 여사도 속
아 넘어갔던 거죠. 클라라는 두 얼굴이었어요. 클라라는 앨리스 여사를 속였고, 나는 앨리스 여
사가 시키는 대로 한 거죠."
그 당시 앨리스 여사는 데이빗에게 정식 동반자가 있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머
지 사람들은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다. "루버 아줌마와 남편은 나를 설득하면서 그만두라고 했
어요." 데이빗이 말했다. "루버 아줌마를 계속 이렇게 말했어요. '난 클라라를 알아.' 해리스 부
부도 같은 말을 했어요. 후회하게 될 거라고요. 다들 세상에서 제일 큰 실수를 하는 거라 했
죠." 그 때 데이빗은 가족과는 가깝게 지내지 않았기 때문에 결혼 계획을 알리지도 않았다.
71년 7월에 클라라와 결혼하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데이빗은 실수라는 것을 깨달았다. "크나
큰 실수를 했죠. 그렇지만 무슨 수가 있겠어요? 물은 이미 엎질러져 버렸는데."
해리스 부부가 친절하게 대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그분들에게 연락해서 만날 것을 청했다.
만난 자리에서 그들은 클라라와 데이빗의 결혼에 대해 더욱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들
은 클라라와 데이빗의 결혼으로 마음이 많이 상했었다고 했다. 결혼하자마자 데이빗은 두 사람
이 마련해 준 셋집에서 곧바로 떠나가 버렸고, 그 날 이후로 거의 연락을 끊고 지냈던 것이다.
나중에 정작 그들을 찾아왔을 때 데이빗은 혼자가 아니었다. 곁에는 클라라가 서 있었는데, 클
라라는 해리스 부부에게 데이빗을 위해 모은 기금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몇 년 동안 편안히
지내면서 연습할 수 있을 만큼 꽤 많은 액수였다. 해리스 부부는 그 돈은 데이빗 혼자 쓰도록
모은 것이라면서 거절했다.
그 날 데이빗도 평소와는 달리 용기를 그러모아 클라라에게 잘라 말했다. "그건 당신 돈이 아
녜요. 꿈도 꾸지 말아요."
데이빗이 아내의 본색을 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해리스 씨네 집에서 그런 일이 있
기 몇 주 전 클라라는 데이빗이 ABC경연대회의 전국 결승에 선발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는 크
게 화를 냈다. 당시 자신감이 넘쳐 나는 상태가 아니었던 데이빗은 아내와 아이들에게 상금을
벌어다 주지 못한 일에 대해 심하게 당혹감을 느꼈다.
해리스 부부와 거리를 둔 때문에 데이빗에게는 또다른 문제가 생겼다. 연습할 피아노가 없는
것이다. 의회 의원이자 노인들을 위해 스완 오두막촌을 설립한 리처드 클리버가 데이빗의 사정
을 전해 듣고는 스완 오두막촌 사람들이 돈을 모아 데이빗에게 직립형 피아노를 사 줄 수 있도록
일을 주선했다. 피아노가 배달되자 데이빗은 다시 연습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겨우 며칠
동안 만이었다. 어느 날 데이빗이 집에 돌아와 보니 피아노가 없었다.
"팔아 버린 거예요! 나한테는 한 마디 말도 없이! 생각해 보세요! 애초에 누구 피아노였는
데!" 데이빗은 지금도 그같은 클라라의 행동에 놀라워하며 그 때 겪은 상실감과 그 때 받은 부당
한 대접에 아찔해 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나는 기가 막혔다. 1985년 리처드 클리버가 우리에게 편지를 보내 스완 오
두막촌에 와서 연주회를 열어 달라고 부탁했을 때 우리는 기꺼이 무료로 연주해 주었다. 데이빗
은 그 뒤로도 여러 번 스완 오두막촌에서 연주했다. 그 정도는 보답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우리 두 사람 모두의 생각이었다.
클라라와의 결혼생활에 곡절을 겪으면서 살림 형편도 어려워져 갔다. 몇 번 독주회를 하기는
했지만 일자리를 구해야만 할 상황이 되었다. 데이빗의 연주를 여러 번 들어 그의 재능을 깊이
존경하던 조르그가 오페라단에 와서 일해 달라고 청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일레인 플린트는 베르디의 (가면무도회)를 연출할 때 데이빗과 클라라를 만났는데, 내가 나중에
그녀에게 연락했을 때 일레인은 데이빗에 관한 그 무렵의 기억은 슬픈 것들뿐이라고 했다. 클라
라는 사람들 앞에서도 데이빗을 조롱하며 괴롭혔고, 오페라 단원들과 데이빗 사이의 친분을 혐오
하여 강한 소유욕을 드러냈다.
클라라는 특히 데이빗과 조르그 사이의 우정을 견딜 수 없어 했다. 급기야 데이빗에게 턱수염
까지 기르게 했다. 데이빗은 두 사람사이의 우정에다 '파괴공작'을 하기 위해서 클라라가 그랬다
면서 늘 이해할 수 없어했다.
데이빗의 친구들을 클라라가 싫어한 때문에 생긴 문제는 또 있었다. 데이빗이 오페라 공연을
보러 가고 싶을 때에는 늘 몰래 집을 빠져나왔다가 다시 몰래 들어가야 했다. 어떨 때에는 입장
권 조각을 주머니에 넣어 둔 채 깜박 잊고 그대로 집에 들어갔다가 낭패를 당하기도 했다. 클라
라가 데이빗의 주머니를 뒤지다가 입장권 조각을 발견하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데이빗은 이렇
게 말했다. "그러면 길길이 뛰었죠! 헝가리 사람들은 성격이 불 같아요! 세상에, 벌을 얼마나
심하게 받았는지! 맙소사! 얼마나 지독하게 벌을 받았는지! 그 욕설, 그 욕설하며! 그 부분은
상상에 맡기겠어요. 입에 담고 싶지도 않아요... " 데이빗은 그 때 일을 떠올리면서 부르르 떨었
다.
어느 날 몇몇 사람들이 리카도에서 나에게 말하기를 70년대 초의 데이빗을 기억하고 있다고 했
다. 그 때 데이빗과 클라라 집 근처에 살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데이빗이 종종 뒤뜰에서 네
발로 엉금엉금 기는 것을 본 적이 있다고 들려주었다. 1972년 무렵에 들어 데이빗의 연주활동은
거의 전무한 수준으로 떨어졌고 건강도 극도로 악화되었다. 1973년에는 침대에서 거의 일어날
수가 없었고 나락으로 치닫고 있었다.
1974년 초에 클라라는 수술을 받게 되었다. 데이빗을 집에 홀로 남겨 둘 수가 없어서 클라라
는 그레이랜드 정신병원에 그를 두 주 동안 입원시켰다. 집으로 데려가려고 클라라가 병원에 나
타났을 때 데이빗은 클라라를 퇴원하지 않고 병원에 계속 남아 있기로 작정했다.
피터는 그레이랜드 병원으로 가끔씩 아들을 찾아갔는데, 데이빗은 피터에게 클라라와 이혼하고
싶다고 하면서 클라라 집에 있는 자기 악보와 갖가지 경연대회에서 받은 메달을 찾아 달라고 부
탁했다. 피터는 클라라를 찾아가서 돌려 달라고 애원했지만 클라라는 없다면서 거절했다.
"그건 지옥에서 주선하고 악마가 축복하고 주례를 선 결혼이었어요." 두 사람의 결혼생활에 대
해 데이빗이 궁극적으로 내린 결론이었다.
그 무렵에는 데이빗이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배려해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는 점은 알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해리스 부부가 받은 마음의 상처를 아물게 해 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결혼 주례로도 활동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나는 클리프에게 우리 결혼식에서 주례를 서 달라고
부탁했다.
제17장 소박한 기적
겨울 햇살이 나뭇가지 사이를 뚫고 들어오고, 브래클리 부부의 집 정원에
있는 둥그런 분수에는 분홍빛 동백이 가득했다. 바바라와 피터는 혹시 비가
올 경우를 대비해서 집 건물 안을 꽃으로 꾸며 주었지만, 해가 났으므로 데이
빗의 소원대로 정원에서 식을 올릴 수 있게 되었다. 점성학으로 날짜를 잘
뽑은 것 같았다.
내 아이들 스콧과 수는 다른 주에서 먼 길을 왔고, 나에게 점성학을 가르친
도리스 그리브즈도 마찬가지였다. 앨리스 여사도 왔고 리카도에서 만난 친구
들도 많이 참석했다. 하객들은 결혼식 동안 데이빗이 어떻게 행동할지 궁금
했을 것이다. 사실은 나도 궁금했다. 행사가 특별한 만큼 이번만은 가만히
서 있을까? 예식 동안 조용히 있을까? 아니면 하객들 사이로 한 사람씩 안고
입 추면서 다닐까?
리카도에서 사귄 친구 한 사람이 자기 차로 태워다 준 덕분에 우리는 리본
장식이 된 고급 승용차로 식장까지 올 수 있었다. 새로 맞춘 우유빛 정장을
차려입은 데이빗은 꼿꼿하고 자랑스러운 자세로 정원으로 들어갔다. 아홉 달
전에 만난 구부정한 사람과는 사뭇 대조적이었다. 옷깃에는 빨간 카네이션을
꽂았고 얼굴에서는 미소가 떠날 줄 몰랐다. 공작빛 푸른 드레스 차림에다 같
은 빛깔의 모자를 쓴 나도 기뻤다.
클리프는 정확하게 오전 11시 47분에 식을 시작했고, 모든 것이 예정대로
완벽하게 진행되는 듯했다. 그렇지만 얼마 가지 않아 식이 전부 2성부 돌림
노래같이 변했다. 데이빗이 식 내내 클리프가 하는 말을 한 박자쯤 사이를
두고 모조리 따라 읊었기 때문이다. 나는 데이빗의 팔짱을 꽉 끼고 서 있었
다. 하객들을 안고 입맞추면서 돌아다니지 않고 신부에게 입맞춤을 해 줄 때
까지 최소한 가만히 서 있기라도 했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행진곡으로는 리스트의 B단조 소나타의 '코랄레' 부분을 골랐다. 리스트는
이 작품에 생명과 사랑의 장엄한 승리를 아로새겨 넣었다. 예식이 절정에 다
다른 순간에 이 격앙된 음악을 들으면서 정원을 걷는 것은 진실로 가슴 설레
이는 일이었다. 식이 모두 끝나자 데이빗은 마음대로 다니면서 하객들 모두
를 포옹하고 입맞추었다. 포옹과 입맞춤은 하객 모두가 피로연장으로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피로연장은 고맙게도 크리스의 배려로 리카도를 쓰게 되
었다.
크리스는 포도주도 제공해 주었고, 리카도에서 사귄 친구들은 음식을 장만
했다. 내 아이들과 점성학 학생들은 주방 일을 보면서 하객들 시중을 들었
다. 길다란 테이블을 마련하여 꽃장식을 했고, 프란시스 헤브가 결혼케익을
가져왔는데, 4분음표 모양으로 만들어 정말 잘 어울렸다.
리카도에 들어서자 마자 데이빗은 곧장 피아노로 다가갔다. 그로부터 몇
시간에 걸쳐 신랑은 연주를 하며 흥을 돋우었다. 케익을 자르고 포옹할 때에
만 이따금씩 연주를 중단했다. 이어 하객들과 작별 할 시간이 되었고, 퍼스
남쪽에 있는 호텔에서 이틀 동안 신혼여행을 보낼 예정이었다.
나는 이번 여행 동안 길에서 장시간을 보내게 된다는 점을 깨달았다. 오랫
동안 좁은 찻간에 갇혀 있으면 데이빗이 어떻에 견뎌 낼까 걱정되었다. 결혼
식의 흥분에 힘입어 너무 힘들어하지 않기만을 바랬다. 내 바램은 이루어졌
다. 데이빗은 너무 행복한 나머지 여행길이 긴 줄도 몰랐던 것이다. 그 때
부터 그는 자동차 여행에 차츰 익숙해졌다.
호텔에 도착하자 데이빗은 호화로운 분위기에 감격하여 끊임없이 중얼거렸
다. "나를 위해 이런 걸 다 준비해 두었다니! 오로지 나를 위해! 난 운이 좋
아! 운이 좋아! 특권이야!"
우리 방에서는 바다가 내다보였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해변을 따라 모래
밭을 거닐었다. 그렇지만 호텔에 실내 수영이 있었으므로 데이빗은 시간을
대부분 거기에서 보냈다. 그는 이내 주 의회 의원인 팸 벡스와 사귀었고, 어
린 두 딸과도 사귀어 수영장에서 데이빗과 물을 튕기며 함께 놀았다. 나는
수영장가에 앉아, 데이빗이 이런 사람들과 쉽사리 사귀는 것을 즐겁게 구경했
다. 그는 그다지 초조해 하는 기색 없이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
긴, 물 속에 있었으니까. 물은 그를 진정시켜 줄 뿐 아니라 편안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대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물 속에서 계속 지낼 수만 있다면 남
편이 세상을 살아가기가 훨씬 쉬웠을 것이다,
저녁 때가 되어 가자 나는 호텔 식당에서 식사를 하자고 하면 데이빗이 어
떻게 나올까 궁금했다. 그로서는 어려운 결정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한 번도 식당에서 식사를 한 적이 없었고, 테이블 한 곳에 매여 있어
야 한다는 것도 데이빗에게는 문제였다. 포크와 나이프를 쓰는 법을 집에서
연습하기는 했지만,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포크질을 하는 데에 따르는 심리적
인 압박감이 데이빗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놀랍게도 데이빗은 함께 식당에서 식사를 하겠다고 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면서 식당 안으로 머뭇머뭇 몇 걸음 들어갔다. 나는 데이빗이
얼른 돌아서서 나가 버릴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그는 초조한 기색이나마 자리에 앉았다. 웨이트리스가 왔을 때 데이빗이 벌
떡 일어나 그녀를 안고 입맞추지 않아 다시 한 번 나는 놀랐다. 웨이트리스
와 쉴 새 없이 잡담을 하기는 했지만 내내 자리에 앉아 있었고 이내 두려운
눈빛도 사라졌다.
스테이크가 나오자 데이빗은 허겁지겁 먹었다. 기술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포크과 나이프도 비교적 잘 다루었다. 데이빗과 함께 지내다 보니 나는 아주
작은 일에도 고마워할 줄 알게 되었다.
신혼여행이 끝나자 리카도와 또 바쁘고 정신없는 생활이 다시 시작되었다.
데이빗은 여전히 매일 수영을 두 번은 해야 했다. 좀처럼 지칠 줄 모르는 나
도 가끔씩은 완전히 녹초가 되곤 했다. 밤이 되면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일
어나서 침대까지 갈 기운이 없어 한동안 가만히 있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
런 점에 대해 전보다 훨씬 많이 예민해진 데이빗은 그럴 때면 나에게 다가와
안아 주면서 이렇게 말하곤 했다. "달링, 당신은 나한테 음악이에요." 다시
기운을 얻은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음 날을 맞이할 수 있었다.
다행히도 9월 말쯤이 되자 데이빗은 좀더 자신감을 얻게 되어, 하루 한 번
수영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덕분에 여가가 생길 참이었다. 데이빗을 만나기
전에는 한두 시간쯤의 여가가 얼마나 고마운지를 몰랐다.
그 주 어느 날 그는 부엌으로 어슬렁거리며 들어오더니, 싱크대에 더운물과
주방세제를 붓고는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놀랐다, 더욱 놀라운 것
은 그가 설거지를 즐기는 것처럼 보인 것이다. 접시를 비교적 아슬아슬하게
포개 놓고 세제를 너무 많이 써서 온통 거품이 넘쳐 나는 욕조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장면이었다. 일단 손을 비눗물에 적시
자 데이빗에게는 수영이나 샤워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날부터 데이빗은 설거지에 홀딱 빠졌다. 식사를 채 끝내기도 전에 아직
음식이 남아 있는 접시를 손님 코 밑에서 쥐면서 "괜찮죠? 괜찮죠? 괜찮죠?"
하고는, 눈깜짝할 사이에 부엌으로 가져가 버렸다.
처음으로 설거지를 한 이틀 뒤 데이빗은 우리 집에서 몇 구역 떨어져 있는
가게에 가서 신문을 사 오겠다고 했다. 내가 같이 갈 필요는 없다고 했다.
"괜찮아요, 달링." 그는 돈을 약간 가지고 문을 나섰다. 창가에 서서 그가
길을 건너가는 것을 지켜보던 나는 어딘가 약간 어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알아차였다. 그를 만난 뒤 처음으로 그가 휴대용 라디오를 집에다
둔 채 바깥으로 나선것이다!
데이빗이 신문을 사 들고 돌아왔을 때 - 물론 가지고 간 돈의 나머지는 모
두 과자와 음료수를 사는 데에 써 버렸지만 - 나는 축하 하고픈 충동이 일었
다! 그러나 부적을 집에 두고 나갔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고 싶지 않아서 나
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포치나굴라'를 해 주었다.
일상생활에서 자그마한 장벽을 하나하나 극복하는 한편으로 데이빗은 연주
경력을 쌓아 갔다. 마이클 패리 덕분이었다. 그 무렵 마이클의 전략은 옥타
곤 극장에서 해마다 두 번씩 커다란 연주회를 열어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아에
서 탄탄하게 자리를 굳히는 것이었다. 그 덕에 수입도 꽤 들어왔다. 작은
성과가 아니었다. 마이클이 매니저가 되겠다고 했을 당시 데이빗은 리카도에
서 일을 하고 있었음에도 여전히 사회보장제도에 의지해야 있다. 옥타곤의
연주회 말고도 데이빗은 퍼스의 관현악단과 연주활동을 했고 순회공연도 다녔
다. 그 덕에 수입은 더 늘어났고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대중 앞에 노출시키지
않으면서도 지지자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음악계에서 오랫동안 일해 왔기 때문에, 마이클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데이
빗이 지나치게 노출되지는 않게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공연 제의가 들어올
때마다 그는 퍼스에서는 광고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붙였다. 그는 언론에
서 데이빗의 이름이 매주 들먹여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 때문에 여나믄
번은 연주회가 '비밀스렵게' 열렸다. 자선공연도 많았고 매년 옥타곤에서 두
번 열기로 한 연주회는 때마다 꼬박꼬박 열렸다. 그 뒤로 몇 년 동안 데이빗
은 매진을 열세번 기록했다.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기반이 다져지자 마이클은 각 주 수도에서도 그
와 같은 방법으로 데이빗을 알리고 차츰 지방 중심지까지 기반을 넓혀 가기로
했다. 데이빗이 연주경험을 쌓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고, 연주일정을 엄
격하게 지킴으로써 그가 정규 연주회의 압박감을 이겨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철저하고 믿을 만한 연주자임을 전세계에, 특히 아직 악명 높은 기벽 이상으
로는 데이빗을 인식하지 못하는 흥행주들에게 보여주는 일이 중요했다. 그렇
게 되기까지는 데이빗의 재능과는 관계없이 피아니스트로서의 명성을 얻는 일
이 쉽지도 빨리 되지도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그가 퍼스에
서 3백 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제럴턴에서 공연해 달라는 제의를 받았을
때가 1984년 12월이었다.
한편 음악에 대한 내 지식이 늘어나면서 나는 데이빗에게 그랜드 피아노가
제격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나는 데이빗이 크리스의 그랜드에서 연습
할 때와 우리 집에 있는 U3 야마하 연습용에서 연습할 때에 나는 소리를 구별
할 수 있었다. 데이빗은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았지만 - 야마하는 직립형으로
는 최고급인 데다가 그가 평생 처음으로 갖게 된 새 피아노였으므로 - 거기에
서는 그가 제대로 연습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지만 살림이 너무나
빠듯해서 그랜드 피아노에 대한 꿈은 문자 그대로 꿈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이 문제를 두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데이빗에게 그랜드 피아
노가 반드시 꼭 있어야 마땅하다면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집에 나타날 것이라
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지만 나의 이 원대한 꿈에는 한 가지 장애물이 있었
다. 어느 날 피아노가 정말로 나타난다면 우리가 사는 집에는 놓을 곳이 없
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수자리 사람다운 낙관론으로 - 비가 오게 해 달라고
빌어 놓고 집에 우산을 두고 오면 무슨 소용이람 - 그랜드 피아노를 놓을 수
있는 집을 찾아보기로 했다. 물론 내가 이사하는 이유를 말했다면 누구라도
나를 미친 사람으로 취급했을 것이다.
그 시절에 퍼스에는 셋집이 아주 드물었지만, 어느 날 피아노가 나타날 것
이라면 집도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신문의 줄광고 난을 훑었다. 그 무
렵 '해 본다'거나 '하지 않으면 안된다'거나 '불가능하다'는 말은 내 사전에
서 사라진 지 이미 오래였다. 1985년 초에 나는 그 곳이 데이빗에게 낙원 같
은 곳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 집을 얻으면 공공 수영장이 아니라 스완 강
을 통째로 수영장으로 쓸 수 있게 될 테니까.
그 집은 이상적이었다. 거실이 아주 넓었고, 데이빗과 나는 그랜드 피아노
를 놓을 꼭 알맞은 자리까지 잡을 수 있었다. 아름다운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유리문 바로 곁이었다. 우리가 들어갔을 때 그 집을 보러 온 일곱 부부가 있
었는데 모두가 그 집을 얻기를 원했다. 부동산 중개인은 언론을 통해 데이빗
과 그가 한 고생을 알고 있었다. 그 중개인에게 나는 피아노를 놓을 만한 집
을 구하는 중이라고 일러두었었다. 한동안 생각하더니 중개인은 우리 모두를
테라스에 있는 포도넝쿨 아래로 불러모으고는, 데이빗이 피아노를 놓을 자리
가 필요하기 때문에 집을 데이빗에게 세놓겠다고 발표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실망했지만 모두들 데이빗을 만났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중개인의 결정에 불만
을 품지 않았다.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중개인에게 다가가 아직 우리에게는 그랜드 피아
노가 없다고 털어놓고, 가까운 장래에 생길 것으로 믿고 있다고 말했다. 중
개인은 문제없다고 했고, 1월 말에 우리는 그 집으로 이사갔다.
몇 주 뒤 나는 리카도에 나가 있었는데, 디저트와 소테른 포도주를 같이 먹
자며 종종 합석을 청하던 말콤과 디이 존스 부부가 나를 자기네 테이블로 불
렀다. 포도주를 마시다가 대화가 피아노 쪽으로 흘러갔고, 그러다가 말콤이
물었다. "당연히 데이빗한테는 그랜드가 있겠죠. 안 그래요?" 나는 없다고
애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말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그럼
하나 사 드려야지."
리카도에서는 이것저것 약속은 해도 금방 잊어버리는 손님들이 많았으므로
나는 이번에도 그렇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존스 부부의 약속은 진심이었음
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우선 말콤은 자기 회사 이사회에 이 문제를 안건으로 올렸다. 다음에는 리
카도의 주인인 마일즈와 만났고, 마일즈는 어떤 피아노 모델이 가장 좋을까를
생각했다. 3월 18일이 되자 야마하 C7 피아노는 완전히 값을 치르고 배달 준
비가 끝나 있었다.
일레인 플린트는 우리가 피아노를 들여놓을 수 있도록 데이빗을 데리고 외
출을 나갔다. 존스 부부는 아이들과 함께 샤토 디켐 한 병 둘레로 흰장미를
잔뜩 담은 들통을 들고 왔다. 데이빗이 집에 돌아 왔을 때 그는 말을 잃었을
뿐 아니라, 그처럼 훌륭한 피아노가 자기 집 거실에 놓여 있는 것을 보고 놀
랍고 기쁜 나머지 숨이 멎어 버린듯했다. 당연히 그는 그 즉시 피아노로 달
려가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 뒤 며칠 동안 데이빗은 이런 말을 계속 되풀이
랬다. "이건 기적이야! 나는 세상에서 제일 운이 좋은 사람이야! 너무 고마
워! 너무 고마워!" 중요한 것은 그가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데에는 기쁨이 베
어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그런 느낌을 너무나 좋아했다. 만일 누군가에게
고마워할 일이 있으면 그것은 그 사람이 그를 생각해 주었다는 뜻이고, 그에
게는 바로 그점이 가장 중요했다.
존스 부부는 시골에 부동산을 가지고 있었는데 거기에 저 유명한 브룩랜드
밸리 포도원을 차렸다. 그 곳에는 도로가에 역사 오랜 가축상인 오두막이 포
도넝쿨에 둘러싸여 있었다. 한 주쯤 뒤 존스는 우리를 포도원으로 초청하여
특별한 축하조찬을 하자고 앴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그 곳에는 퍼스에서 옮겨 온 그랜드 파아노가 작은 오
두막 현관 앞에 자리잡고 있었다. 울긋불긋한 커다란 파라솔에 에워싸인 낡
은 나무 베란다 위에 그랜드 파아노가 놓여 있는 광경은 너무나 어색했다.
데이빗이 리스트의 <그노멘라이겐>과 그밖의 작품을 연주하는 동안 손님들은
즐거이 아침을 들었다. 지나가던 자동차들고 모두 멈춰 서서 구경하고 듣고
했다. 나중에 말콤은 그 뒤 몇 년 동안 오두막 주위에 있는 샤르도네이 포도
나무가 가장 수확이 좋았다고 말했다.
시골에 다녀 온 며칠 뒤, 데이빗과 나는 테라스에 앉아 보기 드물게 평화로
운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햇살은 머리 위 포도넝쿨 사이로 스며들었고, 탐
스럽게 익은 포도송이가 햇살을 받아 무척 맛있어 보였다. 데이빗은 상념에
잠겼다. 그로서는 대단히 보기 드문 일이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이
렇게 앉아 있는 것도 마찬가지로 드문 일이었다. 우리는 그 날 저녁 리카도
에 나가는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나는 이제 출발할 때가 되어
간다고 알려주었다. 데이빗은 잠시 동안 아무 말이 없다가, 이윽고 깨달음을
얻은듯한 표정이 얼굴에 나나났다. 그리고는 말했다. "달링, 안개가 걷히고
있는 것 같아여. 맞아요! 맞아요! 안개가 걷히고 있어요. 걷히고 있어요."
제18장 'B' 등급
데이빗의 연주기회가 늘어나고 있었다. 1985년 초에 그는 류윈 동산의 야
외공연장에서 연주해 달라는 초대를 받았다.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아 서남쪽
마거릿 강가에 자리잡은 규윈 동산에서는 이미 최고급 포도주를 생산하고 있
었다. 동산 주인인 데이스와 트리시 호건 부부는 자신의 포도원을 세계적인
음악행사의 배경으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었다. 밤이면 조명에 어스름
반사광을 뿜에 매혹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거대한 고무나무 숲을 배경으로 조
개껍질 모양의 대형 반향판을 설치했다.
야외극장의 개시연주는 퍼스 축제에서 연주 중이던 런던 필하모니 오케스트
라가 맡았다. 데이빗은 먼저 45분 동안 연주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7천 명 정도가 돗자리와 소풍바구니를 들고 나타났다. 언론의 관심이 아주
높았다. 데이빗이 연주를 시작했을 때 헬리콥터 한 대가 데이빗의 머리 위쪽
에서 연주를 모두 촬영했다. 나는 소리와 소용돌이 바람 때문에 아주 어지럽
게 느껴졌지만 데이빗은 아랑곳없이 연주에 열중했다. 라디오와 텔레비전이
떠들어대는 한가운데에서 연습하는 습관과, 리카도에서 피아노 근처를 사람들
이 이리저리 오가는 가운데에서 연주하던 경험 덕분에 그는 주의가 흐트러지
는 일이 없었다.
해질 무렵, 런던 필하모니가 연주를 시작하려 하자 그 동네에 사는 쿠카부
라새들이 - '웃음물총새'라고도 알려져 있다 - 지고 싶지 않았는지 시끄럽게
꽥꽥 웃는 소리로 주위를 가득 메웠다. 물총새들은 자기네들이 더 잘한다고
판단한 것이 분명했다. 해마다 연주회에 나와 앵콜공연을 했으니까.
데이빗은 그 뒤 9년 동안 계속 류윈 동산에 나가, 디온 워윅, 톰 존스, 제
임스 갤웨이, 키리 테 카나와 등 유명한 음악가들과 함께 공연했다. 키리 케
카나와 여사는 비가 쏟아지는데도 공연을 계속하여 전문가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었다. 그렇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일은 다이아나 로그와의 협연이었
다.
데이빗이 한창 <랩소디 인 블루>를 연주하고 있는데 연주회 진행자가 나에
게 와서 말했다. "데이빗의 연주를 잠시 중단해 주세요. 로스 여사가 지금
발표할 것이 있는데, 중단하지 않으면 연주회를 취소하겠답니다."
나는 화가 나 대꾸했다. "그건 데이빗과 거쉰(랩소디 인 블루의 작곡자)과
청중들을 무시하는 일이에요." 진행자는 어쩌면 좋을지 몰라 안절부절못했는
데, 하루 종일 다이아나 로스의 요구사항을 들어 주느라 지친 것 같았다. 나
는 내 의지를 꺾고 데이빗에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데이빗은 연주를 중단했
고, 이윽고 확성기를 타고 천지를 울리는 듯한 방송이 나왔다. "로스 여사가
공연하는 동안 사진을 찍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이아나 로스와의 일은 접어 두고, 류윈 동산은 데이빗에게 큰 수확이 되
었다. 거기에서 처음 연주한 뒤로 마이클은 다른 주에서도 공연을 주선하기
시작했다. 도직 한 가지 문제는 데이빗이 비행기를 무서워한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자동차를 이용한다 해도 퍼스로부터 다른 주 수도까지 수천 킬로미터
를 오가는 일은 시간도 너무 많이 걸리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을 것이기 때문
에 불가능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신혼여행 때 자동차 여행에 대한 두려움
을 거뜬하게 이겨냈으므로, 어쩌면 비행기 여행에 대한 두려움도 같은 식으로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우리가 일에 밀려서 신혼
여행을 이틀만에 끝냈으니 한번 더 여유를 갖고 여행을 다녀오는 게 어떻겠느
냐고 데이빗에게 제안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은 발리에 가 보고
싶어요." 데이빗은 그런 매력적인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데이빗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여행은 예약
도 지불도 끝났고, 탑승 안내방송이 나오고 있었기 때문에 물러날 시간도 없
었다. 꼭 끌어안아 안심을 시키며 열대의 낙원이 기다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거듭한 끝에, 데이빗은 마침내 비행기에 오르기로 했다.
비행기가 활주로로 나서기 시작하자 데이빗은 더욱 긴장했다. 팔걸이를 얼
마나 세게 거머쥐는지 손마디가 하얗게 변할 지경이었다. 갇혀 있는 데에 대
한 불안이 눈빛에 나타나 나는 혹시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
다. 나는 그의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채널로 돌렸다. 다음에는 데이빗의
한쪽 손을 겨우겨우 끌어 내 손으로 감싸 쥐고 우리는 함께 이륙을 맞았다.
일단 공중에 오르자 데이빗의 두려움은 점차 사라졌다. 비행 내내 고전음
악이 그를 달래 주었다. 데이빗은 덴파사에 착륙하는 것도 거의 눈치채지 못
했다. 지난 20년 간의 인도네시아 정치에 대해 나에게 개요를 들려주는 일에
정신이 팔려 있었던 것이다.
닷새 동안 햇볕과 맛있는 음식을 즐기고 해변을 거닐면서 느긋하게 지낸 다
음 리카도로 돌아가자, 모두들 우리의 두 번째 신혼여행이 어땠는지 알고 싶
어했다. 누군가가 데이빗에게 여행 동안 무엇이 제일 재미있었는지 묻자 데
이빗은 이렇게 대답했다. "비행기요. 비행기!" 아, 이해할 수 없는 헬프갓
이라니! 그 뒤로 데이빗은 비행시 여행에 대해 조금도 두려움을 보이지 않았
다.
잘된 일이었다. 몇 달 뒤, 자리를 옮겨 레이 마틴의 '한낮의 쇼'에 참여하
게 된 크리스티 코크번이 그 프로그램에서 데이빗이 연주하도록 주선해 주었
는데, 시드니로 비행기를 타고 가야 했던 것이다.
데이빗은 이틀 동안 연이어 연주하기로 되어 있었고, 둘째 날에는 레이와
인터뷰도 갖기로 예정이었다. 우리는 둘 다 흥분했고 또 데이빗으로서는 십
대 시절 이후로는 처음으로 텔레비전 전국방송에 나설 기회였다.
레이 마틴은 성격이 쾌활했다. 인터뷰 동안 데이빗은 평소 기벽대로 마치
오랜 친구에게 하듯 레이와 잡담을 나누었다. 어느 순간 데이빗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문득 깨닫고는 물었다. "레이, 지금 방송 중인 거예요?"
레이가 "예." 하고 대답하자 데이빗은 이렇게 말했다. "에이, 그럼 좀 점잖
게 굴어야 되겠군요." 레이는 웃음을 터트렸고 방청석 사람들은 너무나 좋아
했다.
텔레비전 출연은 계속되었다. 그 해 중반 무렵 SBS가 퍼스에 와서 데이빗
에 대한 20분짜리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데이빗은 다시금 '쇼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 좋아 어쩔 줄 몰라 했지만, 이번 다큐멘터리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점은 생각이 비교적 명료해지고 말도 대체로 조리 있게 하여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제럴드 크룩이 데이빗에 대한 의리를 다시 한번 발휘하여, 데이빗이 퍼스
콘서트홀에서 웨스트 오스트레일리안 예술 교향악단과 함께 차이코프스키의
협주곡 1번을 협연하도록 주선한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공연이 성공적으
로 끝난 뒤 제럴드는 데이빗을 스트라우스의 <박쥐> 공연의 객원연주자로 초
청했다.
<박쥐> 오페레타는 13회에 걸쳐 공연했고, 객원연주자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데이빗은 리스트의 <헝가리 광시곡> 15번을 연주했다. 데이빗이 리카도에서
도 연주하기로 되어 있던 날에는 오페레타 출연과 겹쳐 재주를 피워야 했다.
크리스는 충분히 이해했다. 우리는 데이빗의 휴식시간을 조정하여, 리카도에
서 제1부 공연이 끝나면 내가 얼른 데이빗을 극장으로 태워 갔고, 거기서 맡
은 부분이 끝나면 다시 차를 몰아 리카도로 돌아가서 제2부 공연을 계속했다.
리카도의 청중들은 데이빗이 사라지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데이빗이 길더클리프 기숙사의 고물딱지 피아노에서 연주하던 시절보다 많
이 발전한 것은 분명하지만, 앞으로도 가야 할 길은 많이 남아 있었다. 우리
는 전문 음악인으로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지극히 작은 한 걸음도 고마
웠지만, 모든 것이 겉으로 보이는 만큼 완벽하지는 않았다.
두 가지 커다란 문제가 있었다. 첫째는 오스트레일리아, 특히 퍼스 음악계
의 보수적인 계층에서 데이빗을 진정한 전문가로 인정하여 들지 않는다는 점
이었다. 그가 사랑하는 ABC에서는 최근 녹음한 것을 방송하려 하지 않았고
데이빗에 대한 관심을 그다지 보이지 않는 것이 역력했다. 마찬가지로 점심
시간 독주회를 무료로 해 주겠다고 우리가 퍼스 음악원에 제의했을 때에도 냉
담하게 거절당했다. 주로 무리 지어 데이빗의 연주를 들으러 오는 일반 대중
과 호의적인 기사를 쓰는 일부 평론가들을 제외하면 아무도 데이빗을 '곁들이
프로그램에서 연주하는 구경거리' 이상으로는 취급하려 하지 않았다. 이 때
문에 그의 연주 기회는 심하게 제약을 받고 있었다. 데이빗에게 어욱 힘들었
던 부분은 그같은 상황 때문에 다른 동료 음악가들과 진정한 교류를 하지 못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것이 두 번째 문제였다. 데이빗은 새로운 생각과 영감을 동료들과 진지
하게 나눌 필요를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지만, 그의 성격을 사람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까닭에 이런 기회는 지극히 제약을 받았다. 매주 서너 차례
리카도레서 연주하는 것이 도움이 되고 또 그는 가까이에서 청중들을 접하는
것을 즐겼지만, 말하자면 카네기홀 같은 곳에서 연주하는 데에 필요한 영감을
불러일으키기에는 부족했다. 앨리스 여사의 사사도 귀중했지만 여사는 여든
여덟 살이었고 그런 만큼 데이빗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다.
여사는 데이빗이 배타적인 오스트레일리아 음악계 외곽에서 활동하는 것이 경
력에 좋은 도움이 되지 못하리라 확신했고, 동료 피아니스트들 사이에 있으면
서 그들이 연주하는 것을 듣고 자신의 연주를 그들에게 들려주면서 함께 토론
하는 일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믿었다. 데이빗은 또 자신의 연주에서 여러 측
면을 다듬어 나갈 필요가 있었는데, 이는 오스트레일리아 안에서는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리카도에서 크리스, 마일즈 등과 함께 의논한 끝에 우리는 데이빗이 런던으
로 돌아가 공부를 좀더 하는 것이 가장 좋겠다고 결론지었다. 마침 그 무렵
마이클 패리가 런던에 있었으므로 데이빗에게 알맞은 스승을 물색했다. 마이
클은 숙고한 끝에 피터 포이트뱅거와 접촉했다. 그는 사람마다 평판이 다른
좀 묘한 스승이었다. 어떤 사람은 그를 신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그를 협잡
꾼이라고 했다. 마이클은 데이빗에게 필요한 감수성과 기술을 포이트뱅거가
지니고 있다고 판단했다.
마이클은 포이트뱅거가 아주 말이 잘 통하고 상냥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데이빗의 연주 녹음 테이프를 전하자 테이프를 들은 포이티뱅거는 깊
이 감명을 받아 데이빗이 영국에 오면 얼마든지 환영한다고 하면서 매주 나흘
씩 지도해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유럽에서 상급 음악 세마나를 운영하
고 있는데, 런던에서 받는 사사와는 달리 다른 음악가들과 서로 교류할 수 있
기 때문에 데이빗에게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리하여 데이빗
은 학비가 마련 될 경우 1986년 북반구 여름에 런던에 가서 공부를 계속하기
로 결정되었다.
마이클은 퍼스로 돌아와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아 주 예술협의회에 장학금 6
천 달러를 신청했다. 12월 초에 나는 예술협의회로부터 장학금 신청에 관한
전화를 받았다. 협의회에서는 데이빗이 해외에서 일도 할 것인지 공부만 할
것인지를 물었다. 나는 공부만 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협의회측에서
는 데이빗이 이전에 장학금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에 - 처음 런던으로 유학갈
때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아 주 음악협회에서 장학금을 받았기 때문에 - 그만큼
불리하다고 했다. 나는 이전 장학금을 받은 것은 1965년이고 그 때에는 예술
협의회가 없었다고 반박했다. 어떻게 해서 20년 전에 있었던 일이 지금에 와
서 데이빗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예술협의회
에서는 생색내는 듯한 투로, 데이빗은 'B' 등급에 올라 있는데 그것도 거의
끝자리라고 했다. 나는 우리가 승산 없는 싸움을 벌이고 있음을 깨달았다.
성탄절이 되기 며칠 전에 부결통지서가 날아왔다. 거절당한 경험이 많다
보니 데이빗은 금방 털어 버렸지만 나는 화가 났다. 새해 초에 수혜자가 발
표되었을 때 보니 해외로 배당된 기금은 거의 대부분이 그 전 해에 비슷한 장
학금을 받았던 피아니스트에게 배정되어 있었다.
그 실망스런 부결통지를 받은 것은 데이빗이 퍼스의 큰 광산회사에서 크리
스마스 파티 연주회를 하기로 된 무렵이었다. 1980년대 중반에 퍼스는 정말
로 '볼만' 했다. 서부지역은 이 때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가장 화려한 것들
을 많이 배출하고 있었다. 돔 페리뇽은 점심시간에 마시는 최고의 음료였고
이 지역 사람들은 돈이 거리에 넘쳐 난다고 말하곤 했다. 흥청거리는 분위기
였고 호화로운 파티가 거의 매주 벌어졌다. 아메리카컵 요트 경기대회 챔피
언 자리를 외국에 빼앗기지 않는 것이 모두의 화제여서, 데이빗이 초청을 받
아 순항선 아킬 로로 호에서 응원연주를 하기까지 했다.
크리스마스 파티 연주는 스완 상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화려하게 새로 지은
멀린 호텔의 널따란 테라스에서 열렸다. 피아노를 수영장가에 놓아 둔 덕택
에 자신감이 넘치는 분위기였고, 황금빛 석양으로 분위기가 더욱 고조되었다.
리카도에서 소개받은 적이 있는 이사 앨런 러저스가 나에게 다가와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데이빗이 최근에 겪은 불운한 일에 대해 말했더니 그는
크게 충격을 받았다. 그러더니 그는 우리에게 돈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물었
다. 나는 6천 달러를 신청했었다고 말했다. 앨런은 느긋하면서도 아주 자신
감 있는 태도로 말했다. "나한테 맡겨 주세요." 그 말을 남기고 그는 데이빗
이 라흐마니노프의 전주곡 몇 곡을 연주하기 시작할 때 딴 곳으로 갔다.
몇 분 뒤 앨런은 돌아와서 차분하게 말했다. "캐먼 광산회사의 러셀 스미
스가 데이빗에게 1만 달러를 드릴 겁니다." 나는 놀랐다. 단 5분만에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우리가 작
성해야 했던 예술협의회의 온갖 지원서와 그 때문에 마이클이 들여야 했던 시
간을 되새겨 보았다. 앨런이 원한것이라고는 러셀에게 데이빗의 유학계획 개
요를 설명해 주는 일과, 러셀이 데이빗에게 수표를 주는 장면을 사진으로 촬
영해 두는 일뿐이었다.
마이클이 개요를 준비했고, 몇 주 뒤 러셀은 데이빗에게 수표를 주었다.
약속한 것보다 2천 5백 달러가 많은 액수였다. <웨스트 오스트레일리아>지
기자가 증정장면을 촬영했고, 그 다음 날 신문에 사연이 소상하게 실려 예술
관료들이 한 방 먹은 셈이 되었다. 게다가 더욱 잘 된 것은 데이빗이 경력을
되쌓는 과정에서 정부나 예술협의회로부터 한 푼도 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제19장 내 아들 스콧
오스틴 프리처드 리바이는 여러 가지 협의회에서 만나 계속 연락을 주고받
고 있는 점성연구학자였다. 류트와 기타를 능숙하게 다루기도 하는 그는 데
이빗을 만나자고 하면서 시드니에서 독주회를 주선해 주고 싶다고 했다. 시
드니 대학교의 음악학과에 아는 사람이 있었던 그는 1986년 2월에 올드 달링
턴 스쿨을 이용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올드 스쿨은 대단히 매력적이고 개성이 있는 역사 오랜 건물로, 150명 정도
를 수용할 수 있었다. 오스틴은 연주회 홍보를 시작했고, 연주가 있던 당일
에는 ABC의 저녁 일곱 시 뉴스에도 연주 소식이 나왔다. 일부 사람들은 뉴스
를 보다가 너무나도 호기심을 느껴 말 그대로 텔레비전을 끄고 디저트도 먹다
말고 자동차에 뛰어올라 곧장 연주회장으로 와서 데이빗의 연주를 들었다.
사람들이 모두들 길에서 차를 내려 올드 스쿨로 열심히 달려가는 광경은 참으
로 보기 좋았다.
데이빗은 청중이 가득찬 아름다운 곳에서 한 이번 연주를 아주 좋아했다.
연주회가 끝나자 우리는 의자를 접어 벽에 기대 놓고 청중에게 포도주와 치즈
를 대접했다. 시드니 사람들은 처음으로 데이빗을 만날 수 있었고, 당연히
데이빗은 모든 사람과 포옹하면서 청중들과 잡담을 나누었다.
우리는 내 딸 수의 집에서 머무르고 있었는데, 딸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꽤
나 밤이 늦은 시각이었다. 데이빗은 내가 잠자리에 들 무렵에야 껌이 다 떨
어진 것을 알았다. 담배와 커피, 설탕과 마찬가지로 껌도 중독된 지경이었고
그 때에도 우리는 줄여 보려고 애쓰던 중이었다. 담배는 하루 50개피로 줄였
고 커피는 연주하는 동안 전혀 마시지 않았지만, 껌은 늘 따라다녔다. 커피
와 담배를 줄인 데 따른 금단현상을 덜어 주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자신감을 키워 주는 이 자그마한 '버팀대'는 가장 성가신
것이었다. 단물이 속속들이 다 빠질 때까지 리글리 더블 민트나 PK, 주시 프
롯 껌을 씹고 나면 그는 껌을 바닥에 버렸고, 그러면 영락없이 신에 들러붙는
것이다. 의자 밑에 붙이면 가구를 옮길 때에나 발견할 수 었었고, 최악의 경
우는 바지 주머니 안에 들어 붙었다.
우리는 이처럼 좋지 못한 습관에 대해 여러 차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소영
이 없었다. 결국 우리는 한밤중에 옷을 챙겨 입고 껌을 사러 나갔다. 그렇
지만 수가 사는 곳은 상업지수 중심가에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에 그 시간에
영업을 하는 편의점이나 주유소가 한 군데도 없었다. 우리는 텅 빈 거리를
한 시간쯤 헤매 다녔다. 마침내 나는 지치고 말았다. 나는 데이빗에게 껌
때문에 우리 생활이 영향을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데이빗도 지쳤으므로 동
의했다. "맞아요, 맞아요." 그는 껌을 한입 가득히 문 것처럼 장난스럽게 말
했다. "게다가, 껌을 씹으면 제대로 웃지를 못하게 되잖아요." 그것이 껌의
최후였다.
며칠 뒤 내 아들 스콧이 출장길에 시느니로 왔다. 우리는 모두 인도 식당
에 가서 가족이 함께 식사를 하기로 했다. 나는 데이빗이 함께 가기로 해서
기뻤다. 아이들과 우린 제각기 다른 주 수도에서 살고 있었는데, 남편과 아
이들이 모두 한 방에 있게 되는 것은 결혼식 이후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
다. 기쁜 나머지 나는 스콧이 데이빗을 잘 받아넘기지 못하고 있는 것도 알
아차리지 못했다. 두 사람이 만남 것은 이번이 겨우 두 번째였다.
다음 날 우리는 팜비치 반도로 가족나들이를 가기로 했다. 점심을 먹으러
야외카페에 차를 세웠을 때, 스콧의 감정에 늘 민감하던 수가 데이빗을 데리
고 잠시 산책을 갔다. 그러자 스콧은 마침내 털어 놓고 말했다. 데이빗을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스콧은 결혼식 전날 밤에 리카도에서 데이빗을 처음 보았을 때 데이빗이 정
말 어떤 사람인지를 전혀 알 길이 없었다고 했다. 데이빗이 피아노 곁을 거
의 떠나는 일이 없는 데다가 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던 것이다. 데이빗
의 재기에 리카도가 중요한 역활을 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스콧은 몇몇
사람들이 데이빗을 '동물원의 물개' 이상으로 취급해 주지 않는 것 같아서 슬
펐다. 다음 날 결혼식 때에도 데이빗이 피아노 앞에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에워싸고 있었으므로 스콧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갈 기회를 얻지 못했다. 스
콧은 이렇게 말을 이었다. "마치 피아노를 치고 있지 않으면 사람들이 아무
관심도 보이지 않을 걸로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늘 피아노로 달려가는 게 아마도 피아노를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 정도로 안
전한 자리를 찾는 것 같거든요. 안전한 역할 말이죠." 이 역시 그를 슬프게
하는 점이었다.
스콧은 간밤에 식당에서 조바심이 나서 어쩔 줄 몰랐다고 했다. "데이빗이
눈에 띄는 사람마다 만지고 말을 걸고 할 때 정말 마음이 불안했어요. 사람
들이 따뜻하게 대해 줄 때에는 괜찮았지만, 혹시라도 누가 벌컥 화를 낼까 봐
겁났죠. 긴장돼서 어쩔 줄을 모르겠더라구요."
간밤에 식당에서 돌아온 뒤 데이빗은 불편해 보였다. 혼자 중얼거리면서
바닥에 엎드려 그 희한한 팔굽혀펴기를 하며 책을 읽고 있었다. 스콧은 데이
빗을 가까이 할 수 없었다. 내가 늘 들려준 대로 사랑과 따스함을 데이빗에
게서 느낄 수 있었지만 그같은 상황에서는 거기에 어떻게 반응하면 좋을지 알
수 없어 했다.
팜비치로 차를 몰고오는 동안 스콧은 데이빗이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태도가 참기 어려웠던 것 같다. 스콧이 운전을 맡고 있
었는데, 더욱 참기 힘들었던 것은 데이빗이 몇 분마다 한 번씩 뒷자리에서 그
를 붙잡는 습관이었다. 데이빗은 늘 그런 습관이 있었고 지금도 차 안에서
뒷자리에만 앉으면 운전자를 붙든다.
점심을 먹으려고 차를 세웠을 때, 데이빗이 다시금 웨이트리스를 비롯하여
모든 사람에게 말을 붙이기 시작하자 스콧의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웨이트
리스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스콧은 긴장되어 어쩔 줄 몰라 했다. 이런 감
정에 대한 죄책감까지 더해지자 그는 감정이 매우 복잡해졌다.
나는 스콧에게 조금도 죄책감을 느낄 것 없다고 했다. 물론 데이빗은 처음
만났을 때보다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지나치게 시끄럽고 개인적인 공간에
대한 개념도 없고, '정상'이라 할 만한 어떠한 방향으로도 다른 사람등과 관
련을 짓지 못했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내가 하는 것처럼 데이빗을 받아들이
지는 않고 또 어떤 사람들은 조금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는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내 아들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스콧이 데이빗을
아직 완전히 받아들이지는 못하고 있지만 항상 나를 응원해 주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는 스콧에게 그를 비롯하여 모두가, 진심에
서 우러나는 행동이라면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그대로 데이빗을 대해야 한
다고 했다.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난 뒤 스콧은 마음이 많이 가라앉았지만, 데이빗에
대한 자신의 반응이 남들처럼 긍정적이지 못한 까닭은 도대체 무엇일까 하는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갖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시드니를 방문한 일은 데
이빗의 경력에 큰 도움이 되었다. 퍼스로 돌아왔을 때 우리는 마이클과 의논
한 끝에, 데이빗이 유럽에 가기 전에 전국 순회공연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
론을 내렸다. 순회공연을 주선하는 일은 마이클에게 큰 문제였다. 오스트레
일리아에는 전국규모 순회공연을 맡길 만한 업체가 없었기 때문에 마이클이
직접 각 주를 찾아가서 장소를 결정해야 했다. 그같은 노력이 성과가 있어
데이빗은 네 곳에서 일정을 잡게 됐다. 애딜레이드, 메번, 시드니, 브리즈번
이 그 네 곳이었다.
앞으로 몇 달 동안 데이빗의 일정이 워낙 힘든 것이라서, 한 친구가 데이빗
에게 건강진단을 받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제의하면서 퍼스의 명망 있
는 심장 전문의를 만나게 해 주었다. 의사는 데이빗에 대해 들어서 알고 있
었는데, 따뜻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데이빗은 의사와 함께 자신의 흡연과
운동에 대해 재미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최근 들어 흉부 X레이를 찍어 본
적이 있는지를 의사가 묻자 데이빗은 이렇게 대답했다. "아뇨. 아뇨. 찍은
지 벌써 몇 년이 지났는걸요." 그러자 의사는 곧장 데이빗을 촬영실로 보냈
다.
다음 날 우리가 병원으로 갔을 때 의사는 달갑지 않은 소식을 전했다. 사
실 예상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허파 윗부분이 나빠졌는데, 만일 담배를
완전히 끊지 않으면 그리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데이빗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알아요. 알아요. 그렇겠죠. 그렇겠죠."
그리고는 진찰실을 나서자 마자 담배를 피워 무는 것이다.
나는 걱정이 되었다. 그렇지만 데이빗이 이처럼 많이 나아가는 것으로 보
아 시간이 지나면 담배도 끊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일생 동안 담배를 피
운 적도, 커피나 홍차를 마신 적도 없었는데 - 기호에 맞지 않기 때문이었지
만 - 만일 내가 그런 것 가운데 한 가지에라도 중독되어 있다면 데이빗의 문
제를 지금처럼 자신만만하게 대할 수 있을까 궁금했다. 나는 니코틴 중독이
그 가운데 제일 끊기 힘든 줄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전국 순회공연이 다가
오고 있었으므로 나는 데이빗에게 담배를 완전히 끊게 하는 것은 그다지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기회가 생기면 끊게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다가오는 데이빗의 순회공연에 대해 신문에 기사가 많이 실렸다. 첫 번째
공연지인 애들레이드의 에드먼드 라이트 홀은 만원이 됐다. 데이빗은 자신의
발전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어했고, 규모가 큰 순회공연도 할 수 있음을 모두
에게 알려 주고 싶어 극도로 흥분되어 있었다. 고향 밖에서 이렇게 큰 연주
회는 여는 것은 처음이었다. 낯설고 호기심 가득한 관중들 얼굴을 보면서 나
는 모든 일이 잘 되기만을 빌었다. 갉아먹는 듯한 이상한 기분이 아랫배에서
전해 왔다.
결과를 말하자면 데이빗은 연주를 잘했다. 음악 비평가인 엘리자베스 실스
버리는 <에드버타이저>지에 실린 논평에서, 데이빗이 "기술을 호복했을 뿐만
아니라, 초인이라는 말로만 설명이 가능한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고 썼다.
그리고는 데이빗이 "피아노를 오케스트라처럼 다루면서 원하는 일을 무제한
마음대로 해냈다"면서 "연주자 한 사람이 아니라 같은 마음 같은 능력의 연주
자 한 무리처럼 행동했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평도 했다. 데이빗의 "지극
히 개인적인 곡 해석"은 싫지 않았지만 " 때때로 곡조도 없이 흥얼거리는 소
리가 마치 자동차 경주대회가 철이르게 시작된 것처럼" 듣기 싫었다고 했다.
나는 그 "흥얼거리는 소리"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고 그 문제로 데
이빗과 자주 의논도 했지만, 무대에 실제로 올라가 연주할 때에는 전적으로
그의 기분에 달렸다. 어떤 때에는 노래를 부르고 말도 했고 어떤 때에는 그
러지 않았다. 지금도 그가 무대에 혼자 올라가면 어떻게 할지를 전혀 예측할
수 없다.
연주가 끝난 뒤 청중들에게 식사를 대접했는데, 내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
누고 있을 때에 말쑥한 신사 한 사람이 다가와 스콧 힉스라고 자신을 소개했
다. 그는 데이빗의 연주에 깊이 감명을 받았다면서, 구부정한 자세로 비틀거
리듯 무대로 올라가는 모습이 피아노 앞에서 열정적인 연주자로 변모하는 것
에서 흥미를 느꼈다고 했다. 스콧 힉스는 영화 제작자였는데, 데이빗의 일생
에 대한 영화를 만들면 아주 흥미 있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처음에는 뜻밖이었지만, 데이빗의 연주로 인해 감정의 변화를 일으킨
것에 감명을 받았고 또 그는 진지하고 신중한 사람 같아 보였다. 데이빗과
나는 라카도에서 밑도 끝도 없는 제안을 많이 받아 왔지만 이번 제안은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생각되었다. 하여튼 우리는 이튼 날 멜번으로 가야
했기 때문에 나는 스콧 힉스에게 제안을 편지로 보내 달라고 했다.
멜번에서는 국립 빅토리아 극장의 대강당에서 연주했다. 만원이였다. 데
이빗에게는 1964년 밤 경연대회에서 쓴잔을 마신 뒤 멜번에서 하는 큰 연주회
로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데이빗의 이번 연주는 말 그대로 경이로움이었다.
이번 연주회는 내 아들 스콧이 처음으로 참석한 정규 연주회였다. 휴식시
간이 지나 데이빗이 <전람회의 그림>을 연주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스콧이 완
전히 넋이 빠진 것을 볼 수 있었다. 두 번째 <프로메네이드>를 연주할 무렵
그는 흐느끼기 시작했고, 데이빗이 연주를 마친 한참 뒤까지도 그치지를 못했
다. 무대 뒤로 가자 데이빗은 달려나와 그를 껴안았다. 스콧은 그 때까지도
울고 있었다. 데이빗은 기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스코티를 울렸
어! 내가 울렸어!" 두 사람은 한동안 마주 안고 가만히 있었다. 스콧은 데이
빗의 어깨에 눈물을 흘렸고, 데이빗은 자신의 음악이 누군가를 이토록 감동시
켰다는 사실에 전율을 느꼈다. 적어도 그 때 스콧과 나의 생각은 그랬다.
그 뒤 오래도록 데이빗은 스콧을 만날 때마다 "내거 스코트를 울렸어!" 하
는 말을 되풀이했다. 공항에서 그를 만나거나 그가 우리 집으로 차를 몰고
들어오는 것을 볼 때마다 데이빗은 팔을 활짝 펼치고 스콧에게 달려가면서 웃
는 얼굴로 이 말을 자꾸 되풀이한다. "내가 스코티를 울렸어! 내가 스코티를
울렸어!" 스콧이 있는 자리에서 <전람회의 그림>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데이
빗은 이 말을 되풀이했고, 우리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만 받아들였다. 그 뒤
로 스콧은 데이빗의 연주회에 많이 참석했고 여전히 크게 감명을 받았지만,
데이빗이 그 연주회와 그 작품을 유독 따로 취급하는 점이 특이했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야, 데이빗과 보름 동안 함께 지내면서 이야기도 많이
나눈 뒤에야, 스콧은 "내가 스코티를 울렸어!"라는 말이 실제로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스콧은 이렇게 말했다. "데이빗은 제가 자기와 가까워지는 데에 대해 어려
움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내내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해요. 그런데 그 때 데이
빗이 <전람회의 그림>을 연주하고 나서, 그리고 제가 우는 것을 보고 나서야
제가 자기를 완전히 받아들였다는 것을 알았죠. 음악뿐 아니라 본질적으로
어린애 같은 순수함과 사랑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안 거죠. 저를 울렸다는 말
을 할 때 사실은 제가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말을 한 거예요."
스콧과 내가 이 대화를 나누고 있던 자리에 데이빗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텔
레파시가 통했는지 데이빗은 스콧이 자기 말뜻을 이해했다는 것을 알고 다시
는 "내가 스코티를 울렸어!" 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멜번의 독주회는 순회공연에서 가장 성공적이었으므로 특히 기억에 남았다.
시드니에서는 연주회를 주선한 앤드류 맥키넌이 정원 550석인 스코츠 대학 강
당에 6백명을 채웠다. 중간 중간에 기둥이 서 있는 강당에서 계단을 비롯하
여 사방에서 자리를 잡으려 했기 때문에 꽤나 웅성거렸다. 이번 연주에서 가
장 두드러진 부분은 데이빗이 저 악명 높은 '흥얼거림'을 비교적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으로 줄였다는 점이다. 그랑프리가 아니라 소형차 경주대회가 시작
된 정도에 그친 것이다.
연주회가 있는 날 아침에 나는 미끄러운 욕실 바닥에 넘어지면서 오른팔이
꼴사납게 부었다. 뚝 하는 불안한 소리가 났지만 나는 내 자신의 부주의를
탓하면서 괜찮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브리즈번에 도착했을 때 통증이 더욱
심해져 병원에 가 보아야만 했다. 손목이 부러져 있었다. 짐을 쳐다보니 한
숨이 나왔다.
그렇게 기다리던 해외여행이지만 팔에 기브스를 하고 시작한다는 것은 상당
한 부담이었다. 데이빗은 아직 브리즈번 독주회를 치러야 했고, 이번에도 청
중의 반응은 썩 좋았다. 그는 상승세를 타고 있었지만 나는 며칠 동안 침대
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쉬고 싶었다. 하지만 움직여야만 했다. 팔 부러진 것
은 사실 큰 문제가 아니었다. 런던으로 돌아가는 데에 대해 데이빗이 느끼는
감정에 비하면 말이다. 런던은 데이빗 자신이 파멸한 현장으로 인식하고 있
는 도시였다.
제20장 최고의 해
대양 여객선 히말라야 호에 올라 북반구로 항해하던 19세의 데이빗 헬프갓
은 전에 없던 기분을 경험했다. 자유였다. 그리고 이내 또 하나의 기분이
나타났다. 고독이었다. '아프고' 또 '안개'가 문제되지 않는 척 하는 것도
훨씬 쉬웠다. 그가 발견한 것은 술이었다.
"난 히말라야 호에서 자주 술에 취해 있었어요. 술에 취하고 기분도 거나
했죠." 데이빗이 당시 기억을 되살렸다. "선장이 벌이는 파티에 나가서 잔뜩
술에 위해서는 불을 다 껐어요. 모두들 그게 너무나 재미있어서 웃음을 터트
렸죠. 나는 장난기도 많았고 뻔뻔스럽고 재구쟁이었어요." 데이빗은 또 승객
을 위해서 피아노를 연주했다. 승객들은 아주 좋아했고 여행 동안 친구도 몇
몇 사귀었다.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이 볼 때 그는 천재에다 괴짜이고 술을 많
이 마시기는 하지만 놀랄 정도로 매력적이고 활기 넘치는 청년이었다. 그리
고 신나고 확실한 장래가 보장되어 있었다. 히말라야 호 여행은 그 뒤 3년
동안 데이빗의 생활의 본보기가 되었다.
데이빗은 처음 런던에 도착했을 당시를 이렇게 희고했다. "안개가 짙었지
만 이내 안개가 걷혀 맑아졌죠." 그렇지만 저 악명 높은 런던 안개는 걷혔을
지언정 그의 마음 속에 그리운 안개는 걷히지 않았다. 런던에서 지낸 이 시
기에 대한 그의 기억은 늘 아주 희미했고 또 앞으로도 필시 영영 그럴 것이
다.
빅토리아 역에 도착하자 유대인 단체인 브나이 브리스에서 사람이 나와 있
었다. 그는 데이빗을 단체 본부로 데려갔다. 거기서 그는 택시를 타고 윌스
던으로 갔는데, 그 곳에서 스트로스 부인이라는 유대인 집에서 하숙을 하게
되어 있었다.
스트로스 부인을 만난 데이빗은 초콜릿 한 상자와 반지를 하나 선물했다.
배를 타고 오는 길에 실론에서 특별히 사 둔 것이었다. 착하고 말 잘 듣게
교육받으며 자라났고, 또 그가 늘 말하는 것처럼 '모두에게 상냥하고 기분 좋
게' 대하는 천성대로, 데이빗은 스트로스 부인을 만났을 때 평소 행동에서 벗
어나지 않았고 왕립 음악대학에 등록하러 가던 그 다음 날에도 마찬가지였다.
데이빗은 크리스마스 학기가 시작되기 직전에 도착했으므로, 학교에서는 데
이빗에게 새로 그를 맡게 될 승 시릴 스미스를 곧장 찾아가라고 했다.
극도로 겁먹고 수줍은 마음에 데이빗은 스미스의 연구실 앞에 서서 영기를
그러모았다. 마침내 안으로 들어가자 스미스는 도착이 늦었다고 했다. 그렇
지만 이내 데이빗은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고 그 뒤 일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
명했다. "모든 게 금방 가라앉았죠. 스미스는 아주 관대하게 미소지으면서
몇 군데 악절처리가 아주 뛰어난 데가 있다고 했어요."
데이빗은 이내 스미스에게 교습 받고, 대학 합창단 연습에 참가하고, 작곡
수업을 듣는 등 바쁜 생활에 빠져들었다. 틀 잡힌 대학생활 덕분에 환경이
안정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데이빗은 더 넓고 낯선 세계인 런던과, 은밀하면
서 이제는 완전히 독립된 복잡하고 낯선 자아를 탐험할 수 있었다.
런던의 첫 6개월은 데이빗이 크게 성장한 시기였다. 대학 안에서는 이내
그의 재능이 남달리 뛰어나다는 소문이 퍼졌다. 동료들의 부러움을 사는 것
도 금방이었다. 학생들은 데이빗과 친해지면서 그의 어린아이 같고 장난을
좋아하고 멋진 파티를 즐기는 성격에 매력을 느꼈다.
퍼스의 외지고 시골스런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데이빗은 런던에서 벌어지
는 연주회 횟수와 수준에 압도됐다. 데이빗은 캘러웨이 교수에게 보낸 편지
에 이렇게 다. "교수님, 저는 형편이 닿는 대로 최대한 자주 연주회를 보러
가고 있어요. 그렇지만 몇 번밖에 갈 수 없어요. 이번 달에만도 연주회가
150번이라니!!! 그리고 몇 번은 더없이 훌륭했어요!!" 데이빗은 연주회 내내
경이로움에 가득차 듣고 있다가 연주회가 끝나면 달려 나가 방금 들은 곡의
축쇄판 악보를 구해다 자세히 공부하곤 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음악이 발전하고 있는 데에도 흥이 났다. 이름 난 피아
니스트이기도 한 대스승 시릴 스미스는 10년 전 심장발작 때문에 왼팔을 쓰지
못하게 되었는데, 데이빗은 스미스 덕택에 새로운 눈을 뜨고 있었고, 그의 지
혜에서 나오는 말을 한 마디도 남김 없이 빨아들였다.
처음의 수줍음이 사라지자 데이빗은 새로 만남 스승이 정말로 좋아졌다.
1966년 12월에 캘러웨이 교수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스미스 씨는 놀라운 스승
이에요 - 너무 엄격하긴 하지만 - 음 하나 하나가 모두 완벽해야 되거든요!!
유감스럽게도 제게는 없는 '절제'라는 것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강조하고 있
죠" 하고 썼지만, 두 달 뒤 다시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대단한 스승이에
요. 너무나 이해심이 깊어요. 더 이상 바랄 게 없어요!!"
스미스에 대한 데이빗의 기억은 대체로 참을성이 많고 든든한 후견인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분은 사실 너무나 관대해요. 처음에는 모든 음을
다 연주하도록 내버려두거든요. 첫째가 자신감, 그게 첫째 원칙이에요. 그
다음에는 모든 걸 다시 모조리 끼위 맞추는 거죠."
데이빗에게 자신감을 심어 준 다음 스미스는 데이빗의 연습방법을 바꾸는
일에 착수했다. 천천히 데이빗의 마음속에 자리를 굳혀 가던 혼란은 이 시기
에 와서 처음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스미스는 데이빗의 무절제하고 갈피
없는 행동에 대해 걱정했다. 그는 누구나 스스로를 절제할 수 있다고 확고히
믿었지만, 데이빗은 다른 학생들과는 많이 달랐던 것이다.
"지금 저는 제 피아노 연주를 완전히 뜯어고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요.
제 자신을 다스리고 올바로 연주하려고 말이죠!! 미리 생각해 보지 않은 음은
다시는 연주하고 싶지 않아요!!" 1966년 12월에 데이빗이 캘러웨이 교수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다. 몇 주 뒤에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털어놓았다.
"물론 피아노는 자기 비밀을 그렇게 쉽게 내보이지는 않죠. 길고 힘든 길인
것 같아요. 그렇지만 저는 취선을 다하고 있어요(바램이죠)." 2월 무렵 그는
이런 부분에 대한 스미스의 생각에 관해 꽤 전문가가 되어 이렇게 썼다. "피
아노 주변에서 빈둥거리면서 허송한 때를 생각하면 너무나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지만 지난 일은 지난 일이고, 저는 현재 연습하는 방식에 만족
해요. 주로 주의를 집중하고 열심히 듣는 거죠. 모든 게 머리에 달린 거 같
아요!! 생각을 또렷하게 하면 잘못될 게 아무 것도 없는 거죠."
데이빗은 런던 생활을 신나게 즐기고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생각을 또렷하게
하려는 노력은 갈수록 힘들어졌다. 안에서 자라나는 혼란은 밖에서 벌어지는
사건과는 거의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곤란하거나 기분 좋지
않은 상황에 남들보다 더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스트로스 부인의 하숙집
과 부인이 정해 놓은 규칙이 싫었다. 특히 저녁 식사시간이 문제였다.
스트로스 부인은 주로 데이빗이 가고 싶어하는 연주회가 시작하는 무렵에 저
녁을 차려 주었다. 데이빗은 연주회에 가고 싶었고 표도 대체로 미리 준비해
두었다. 그렇지만 데이빗은 연주회에 가지 못하고 하숙집에 있다가 저녁을
먹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굶게 될 테니까. 직접 음식을 만들 수도 없었
고, 그렇다고 다른 음식을 살 돈도 없었기 때문이다. 식비까지 포함된 하숙
비를 내느라 따로 식비로 쓸 돈이 남아 있지 않았다. 가고 싶은 연주회에 가
보지 못하는 이 같은 상황은 데이빗이 캘러웨이 교수에게 보내는 편지에 쓸
정도로 기분을 상하게 했다.
또 데이빗은 스트로스 부인이 그를 '심하게 두려워하여' 밤마다 문을 걸어
잠갔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데이빗은 이를 불친절 한 것으로 생각했
지만, 이밖에도 데이빗은 하숙집 주인과는 '성격 차이 문제'가 있었다. "스
트로스 부인은 '빅토리아인' 문제가 있었어요. 아버지처럼. 나는 문제가 있
는 사람이 아버지뿐이 아니라는 걸 이내 알게 됐어요. 이런 '빅토리아인들'
은 다들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에요. 다들 문제가 있어요. 다들 억압적이거
든요."
자유를 맛본 다음이라 데이빗으로서는 집에서 겪던 것과 같은 엄한 통제를
되새기게 하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자립심이 살아난 것이다. 데이빗은 설
명했다. "그래서 아일랜드인 집으로 간 거죠. 아일랜드인 집에서는 언제든
지 연습할 수 있었고 언제든지 연주회에도 갈 수 있었고 내 뒤치다꺼리를 내
가 하면 되고 그래서 한동안은 괜찮았어요."
'아일랜드인'은 데이빗이 1967년 부활절 동안에 이사 들어간 집주인인 클리
포드 부인에게 붙인 별명이다. 스트로스 부인의 하숙집과는 달리 여기서는
피아노도 없고 방에는 가구도 거의 없었지만 세는 전 하숙집의 4분의 1밖에
되지 않았다. '아일랜드인'은 친절하고 상냥해서, 점점 늘어나는 데이빗의
기벽을 관대하게 넘기고 그가 갈망하는 자유와 고독을 건드리지 않았다. "저
는 혼자 있을 때가 가장 좋아요. 방해받지 않고 공부할 수 있고 완전히 집중
할 수 있거든요. 어떤 경우는 그러지 않고서 누가 발전하기를 바랄 수 있겠
어요!!" 1967년 3월에 데이빗이 캘러웨이 교수에게 쓴 편지 내용이다.
데이빗이 편지에 쓴 발전이라는 것은 음악에 대한 말이고, 절대적인 독립이
라는 것은 마음대로 파티에 나가도 따라서 내키는 대로 술을 마실 수 있었다
는 말이다. "학교에서는 다들 그랬죠. 별로 해로운 것 같지도 않았어요."
데이빗이 설명했다. "다들 적포도주도 조금씩 했고 백포도주도 조금씩 했죠.
어떤 면으로는 이로우니까요. 그래서 나는 포도주를 늘 마셨어요. 포도주와
사이다를."
사실 한동안은 포도주가 그리 해를 끼치지 않았다. 데이빗의 연주 솜씨는
나아져 가고 있었고, 그로서는 보기 드물게 자족정신을 발휘하여 5파운드라는
돈을 겨우겨우 모다 피아노 한 대 구입했다. 피아노는 완전히 고물이었지만
- "페달이 다 망가지고 건반도 마찬가지였죠!" - 데이빗은 재간도 좋아 누군
가를 불러 수리했다. "진찰하고 꿰매고 조율하고 했어요."
술은 적어도 그 때까지는 연습에 크게 지장이 없는 정도였다. 데이빗은 몇
시간이고 건반 앞에서 연습했는데, 그 결과 스미스는 연말 성적통지서에 이렇
게 썼다. "연주가 아주 뛰어난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렇지만 집중하고 자
제하겠다는 온갖 다짐과 노력이 스미스의 기대수준에는 미치지 못한 것 같다.
스미스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데이빗은 연습을 좀더 꾸준히 해야 하며 기
본적인 리듬 문제에도 좀더 관심을 기울여야 함니다." 데이빗에게 작곡법을
가르친 브라이언 켈리는 그보다 좀더 심각하게 썼다. "비교적 성과가 떨어지
는 한 해였습니다. 열심히 하는 학생이지만 감정이 지성과 현실을 앞질러
결과가 미미합니다."
그럼에도 데이빗의 학비를 책임지고 있는 위원들은 첫 해 동안 데이빗의 성
적이 상당히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데이빗은 다음 해에도 장학금을 받았다.
데이빗은 여름방학을 연습에, 그리고 친구들을 찾아다니는 데에 보냈다.
데이빗에게는 친구도 많았고 여러 부류였다. 첫 해 말쯤 또래의 다른 학생들
과 마찬가지로 데이빗에게는 '끼리끼리' 모이는 친구들이 생겼다. 그 가운데
네 명을 그는 지금도 아주 친근하게 떠올린다. 물론 늘 별명으로 부른다.
피아노와 오르간을 공부하는 '사이먼 경'이 있었는데 물론 작위를 받은 적은
없었다. 데이빗이 한동안 '정신적인' 여자친구로 생각했던 '깔끔이'도 피아
노를 공부했다. '코니 프랑시스 박사'도 한동안 그랬는데, 사실은 박사가 아
니라 첼로를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그 가운데 데이빗이 실제 이름으로 부른
유일한 친구는 이언이라는 바이올리니스트였다. 이들은 함께 연주회와 음악
경연과 파티에 다녔고, 이들이 늘 데이빗보다 돈이 많았으므로 데이빗을 식당
과 영화에도 가끔씩 초대했다.
이런 또래 친구 말고도 데이빗은 몇몇 유대인 가족을 사귀었다. 오스트레
일리아의 유대인 사회를 통해 소개받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데이빗을 아끼
고 친절한 마음으로 대했지만, 좀더 자립하게 된 다음부터 데이빗이 이들을
찾아가는 횟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쪽 사람들 소개로 런던에서 사귀게 된 친구 가운데 가장 중
요한 사람은 추방당한 작가 잭 린제이와 부인 메타였다. 캐서린 수산나 프리
터드를 진심으로 지지하는 린제이를 데이빗은 늘 '재코 박사'락 부르는데, 그
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온 이 젊은 피아니스느를 반갑게 초대했다. 데이빗은
해외에서 맞이하는 첫 크리스마스를 린제이 가족과 함께 즐겁게 지냈다. 데
이빗은 종종 에식스주의 홀스테드로 재코 박사를 찾아가 피아노를 연주해 주
었고, 둘 사이의 대화에서 데이빗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KSP와 보낸 시간을
되새겼다.
데이빗은 KSP와 열심히 편지를 주고받았다. KSP는 데이빗을 재코 박사에게
소개해 준 것 말고도, 역시 추방당한 다른 친구에게 데이빗의 초상화를 주문
하여 오스트레일리아로 보내게 했다. 데이빗이 설명했다. "KSP는 내가 항상
곁에 있기를 바랬던 거죠."
1966년에서 1969년까지는 데이빗이 판단하기에 대체로 완벽에 가까웠다.
"좋은 시절이었어요. 최고의 해였죠."
이 '최고의 해'에서도 잘 드러나지는 암호지만 가장 중요한 순간은 와림 음
악대학의 학장인 키스 포크너 경의 (1976년 여름에 작위를 받았다) 연설이있
다. 그 때 들은 한 구절이 데이빗의 마음속에 영원히 새겨진 것이다. 그리
고 데이빗과 내가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키스 경의 마음 속에도 새겨져 있었
다.
그 구절은 단순했다. 키스 경이 학생들에게 물은 말이었다. "그건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그 때 데이빗은 키스 경이 무슨 말을 하다가 이 질문을 했는
지는 알고 있었지만 답은 몰랐던 것 같다. 20년 정도가 지난 뒤, 그러니까
데이빗이 그 질문이 나온 줄거리마저 까맣게 잊고 있을 때에 키스 경이 예기
치 않게 단순한 답을 들려주게 된다. 데이빗은 인생의 묘한 경로로 그 답을
듣게 되어 감탄해 마지 않았다.
제21장 야성적인 식민지 청년
1967년 봄, 데이빗은 자기 자신에게 굉장히 '사치스러운' 생일선물을 했다.
콘택트 렌즈였다. 그는 지금도 "그렇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었어요" 하면서
강변한다. 그 때까지 그는 서너 살 무렵부터 쓰던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보
기 싫고 성가신 데다가 항상 튀고 어색하게 보인 그 안경을 벗어버리려고 과
감하고도 무모하게 장학금의 일부를 쓴 것이다.
렌즈는 초기 모델이어서 조잡했고 끼고 있으면 아팠지만, 그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천지차이였죠." 데이빗이 설명했다. "자신감이 되살아나고 외모
와 자세도 나아졌죠. 기분도 더 좋았고 연주도 나아졌어요." 데이빗이 계산
에 넣지는 않았지만, 새로워진 자신감 덕분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더 매력적으
로 비치게 된 모양이다. 그는 더욱 잘된 일이라 생각했다.
제대로 챙겨 먹지를 않아 데이빗은 체중이 많이 줄어 버드나무처럼 가냘퍼
졌다. 여기에다 금발 곱슬과 어린아이 같은 장난기, 상냥하고 친절한 태도까
지 합세하니 여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다. 충분히 기대할 수 있는 일이
었다. 그러나 전혀 기대하지도 못한대다가 어쩌면 좋을지 당황스러웠던 것은
남학생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좋아졌다는 점이다.
"학교애서는 다들 나를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았어요." 데이빗은 적지 않은
자부심과 즐거움을 담아 말했다. "나는 학교에서 여자 친구, 남자 친구가 아
주 많았어요. 두 가지 다 있었어요. 거의 전부가!! 사실 난 비교적 야성적
인 피아니스트였어요. 어쨌든 다들 나랑 자고 싶어했어요!" 데이빗은 쿳쿳
웃으면서 털어놓았다. 그러나 잠시 뒤 이렇게 덧붙였다. "물론 나 그런 일
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죠. 나는 순진하고 순수했으니까요."
사실 이 '야성적인 식민지 청년'은 어떤 형태로든 관심과 호감을 사려고 애
쓰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건네는 온갖 수작과 유혹이 달콤했지만, 이 방면에
대해 경험이 없다 보니 수작의 기본을 잘 알지 못했다. 대부분의 경우 그는
전적으로 수동적으로 대처하는 쪽을 택하여, 누가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가든
자신이 그대로 끌려가게 내버려두었다. 그렇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데이빗은
뛰쳐 달아났다. 그를 원하는 대부분의 사람들 입장에서 볼 때 그는 '애만 태
우는'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놀랄 정도로 많았다. 학생들
뿐 아니라 일부 교사, 그밖에 예술 방면에서 만난 사람들도 많았다.
"난 늘 달아나기만 했어요." 데이빗이 털어놓았다. "그런 남자들에게서 달
아났죠. 나는 늘 겁이 나서 달아났어요. 나는 외로웠고 겁이 났어요. 일종
의 장벽이었던 게 분명해요. 방패 같은 거 말이죠." 여자들도 데이빗과 멀
리 가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무슨 수를 써도 안고 입맞추는 것이 고작이
었다. 데이빗의 태도를 그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눈앞에 있
는 스무 살 청년이 사실은 '열 다섯 살 수준에서 낚시바늘에 걸린 채로' 있다
는 것을 무슨 수로 알수 있을까.
그러나 '방패'가 된 것은 그가 미숙하다는 사실 뿐만은 아니었다. 대학 2
학년 무렵 더 이상 술은 데이빗의 감정적 고통을 충분히 무디게 해 주지 못했
다. 그는 마시는 양을 점점 늘여 갈 필요를 느꼈다. "난 멍청했어요." 데이
빗이 말했다. "나는 슬픔을 술로 삼켰어요. 포도주로. 마시다 마시다 결국
거기 빠져 죽는 거죠." 저녁 식사 데이트나 파티가 끝나 갈 무렵이면 그는 같
이 있는 사람들에게 있으나 마나 한 존재가 되었다. 데이빗이 볼 때에는 그
들이 애초부터 상당히 '안개에 싸인'것처럼 보였는데, 술까지 들어가고 보니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동료 학생들에게 갈수록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스미스에게
서 <이슬라미>를 지도 받는 동안 학생들은 스미스의 연구실 앞에 몰려들어,
이따금씩 안을 들여다보면서 데이빗이 연주하는 것을 훔쳐 듣곤 했다. 10월
17일 그는 대학 실내 연주회에서 <이슬라미>를 연주했다. 캘러웨이 교수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적었다. "<이슬라미>는 잘 끝났어요. 몇 군데
음정이 틀리기는 했지만 동료 학생들에게서 호평을 받았죠. 괜찮았어요. 무
대 위에서 조금도 떨지 않았거든요.!"
연주 동안 떨리지 않는 것이 데이빗에게는 놀랍지 않았을 것이다. 한 번도
그런 문제는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정신이 차차 갈피를 잃어 가고 돈도 떨지
고 점점 더 혼란스러워 가는 생활이 문제였다.
1968년 첫주 어느 날 데이빗은 돈이 바닥을 드러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크리스마스와 새해가 갓 지났고 게다가 우편물이 지연된 통에 오스트레일리아
에서 수표가 늦어진 때문이었다. 친구들은 대부분 방학 동안을 부모와 함께
지내느라 떠나고 없었다. 데이빗은 홀로 굶을 수밖에 없었다. 주머니 사정
으로 인한 당혹감 때문에 그는 더욱 불안해지고 눈어저리의 '상처'도 그 어느
때보다도 깊이 의식되었다. 생각은 걷잡을 수 없이 달아났다. 데이빗은 추
운 겨울 바람속에서 도대체 어쩌면 좋을지를 궁리하느라 런던을 쏘다녔다.
하이드 파크 코너를 배회하는데 친절해 보이는 한 청년이 다가왔다. 데이빗
은 그 때 일을 이렇게 되새겼다. "독일계 유대인이었어요. 상상해 보세요!
동족이었어요!"
청년은 데이빗에게 말을 걸었는데 데이빗이 앞뒤도 없는 말을 웅얼거리고
있음을 알아챈 모양이다. 데이빗이 이런 말을 들은 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
이다. "넌 말을 너무 많이 하는군." 청년은 이어 데이빗에게 식당에 함께 가
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돈도 없는데다가 배가 고팠어요. 그러니 도움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
었죠. 사실은 수프 한 접시도 거절할 수 없었어요." 데이빗은 설명하면서 한
숨을 쉬었다. "다음에는 일이 그렇게 돌아갔어요. 어디까지 가나 보고 싶기
도 했어요. 게다가 도와주어 고맙기도 했고요. 그게 처음이었어요." 이번에
는 데이빗은 그 자신도 알 수 없는 이유로 달아나지 않았다. 그 때 일에 충
격을 받은 그는 그 다음 날 아무렇지도 않은 것에 적지 않게 놀라워했다.
"다음 날 괜찮더라고요!"
그렇지만 친숙한 관계에는 겁을 먹었으므로 그는 잘 아는 사람들에게서는
어제나 달아났다. 그러나 전혀 낯선 사람들은 그다지 겁내지 않았던 모양이
다. "그냥 그런 식이었죠." 데이빗은 당시 자신의 행동에 대한 까닭을 곰곰
이 생각하면서 슬픈 듯이 쿡쿡 웃었다. "그냥 그렇게 균형을 잃고 기울어져
가고 있었어요." 그 무렵 이런 방종한 생활 때문에 그는 더욱 혼란에 뻐졌다.
약해져 있는 정신에 마지막 펀치 한 방을 가한 것과 같았다. 그렇지만 그는
20년 동안 생각하고 스스로를 분석한 끝에 자신의 행동을 이해하고 받아들이
면서, 그 이야기에 대해 아주 솔직하게 말했다. "물론 그 시절에 런던에서는
쾌락이 최고였죠. 뭐든 통했어요. 뭐든. 거의 뭐든 말이죠. 우린 시도해
보지 않은 게 없었고, 사실상 모두가 그랬어요. 최고의 시기에 있을 때에는
모험도 하고 즐겨야 될 거 같아요. 일단 부딪히면서 모험을 걸어야지. 인생
은 짧은데 재미도 보고 즐기기도 해야 되잖아요."
너무도 순지한 탓에 데이빗은 남들이야 모험을 걸고도 완전히 안전할 수 있
는 분야라 해도 그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혼
자 살기 시작한 지 2년째가 될 무렵 내면세계와 자아의 독립으로 이르는 탐험
은 알 수 없는 곳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는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럼
에도 그는 언제나 출발지점으로는 돌아갈 수 있었다. 음악이었다. 데이빗은
학교 독주회와 경연대회에서 연주를 계속했고, 스미스의 지도로 다시금 라흐
마니노프의 3번 협주곡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피아니스트로서 특별한 재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음악은 제대
로 조직되지 않고 불규칙합니다." 스미스는 2학년 말 데이빗에 대한 성적보고
서에 이렇게 썼다. 데이빗은 스미스가 그의 장래를 염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스승이 이런 의견을 지니고 있는 것을 그 시절에 알았다
해고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데이빗은 이렇게 설명했다. "나를 관찰한 것만 가지고도 스미스 선생님은
내가 피아노 연주는 잘 하지만 다른 일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고 생각했어요. 선생님은 나를 많이 생각해 주었고 또 국제적인 스타로 키우
고 있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일이 별로 없기 때문에 아주 훌륭한 피아
니스트가 되는 게 좋을 거라고 했어요. 선생님은 누구나 아킬레스건을 가지
고 있는데 나는 그게 무척 아슬아슬하다고 했죠. 콤프리가 있을 수 없다고
했어요. 나는 최고가 되거나 아니면 최하가 되거나, 둘뿐이었어요."
스미스의 지혜로운 말은 데이빗이 이미 알아낸 사실에 대한 확인 일 뿐이었
다. 돈에 몹시 쪼들린 끝에 데이빗은 런던의 어느 햄버거 식당에 취직했다.
주방에서 난 햄버거를 준비하는 일로 시작했지만, 취직한 첫날인데도 시간이
갈수록 사장은 그를 점점 더 보잘 것 없는 일을 하도록 좌천시켰고, 마침내
데이빗은 바닥을 쓰는 일을 맡았다. 사장은 가망 없는 청년을 불쌍하게 여겨
다음 날에 또 오면 일거리를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데이빗은 사장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피아노에서 제일
괜찮죠. 그게 내가 제일 잘 하는 거예요." 햄버거 업계에서 일찍 은퇴한 사
연에 대한 설명이었다. "게다가 그건 날고기였어요!" 그는 그 때의 기억에
몸을 움찔했다.
데이빗을 단지 어린아이 같다. 혹은 기벽이 있다 하는 식으로만 보아 넘기
지 않는 사람으로는 스미스 말고도 또 있었다. 데이빗이 갈수록 더 문란해지
고 건망증이 심해져 수업이나 리허설, 학교 행사에 늦거나 아예 나타나지 않
자, 다른 교수들도 데이빗이 문제를 겪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어느날 데이빗이 연주회를 위한 중요한 리허설을 놓쳤을 때 키스 경이 데이빗
대신 나서서 기회를 한 번 더 주십사고 간청했다. 나이가 더 많고 경험이 더
많은 몇 되지 않는 친구들도 데이빗에게 문제가 있음을 알아차리기 시작 했
다. 데이빗은 친구로 지내던 중년 유대인 부인 한 사람이 그가 안절부절못하
는 것을 보고 의사에게 데리고 간 일을 기억했다.
의사가 데이빗에게 왜 그렇게 안절부절못하는지를 물었을 때 데이빗은 울음
을 터트렸다. 거의 10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는 의사에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가 이 세상에서 하고 싶은 일은 오직 '아버지에게 피아노를 들
려주는'일 뿐이라고 했다. 데이빗은 너무나 슬펐다. 피터가 쫓아내기 전으
로, 1962년 의자를 붙들고 씨름하기 전으로, 그리고 미국 유학 이야기를 아무
도 꺼내지 않았던 시절로 되돌아가도 싶었다. 데이빗은 아빠가 그를 사랑하
고, 보호하고, 다시금 그의 '어린 왕자'라는 말을 해주고, 그의 피아노 연주
를 아주,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기를 바랬다.
의사는 주의 깊게 들은 다음 발륨을 처방했다. 데이빗은 집으로 돌아가 약
을 먹었지만, 몇 주 뒤 그것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의사를 찾아가겠다는 말을 했을 때 스승 스미스는 전적으로 반대 했다. 학
생 생활의 다른 부분과 마찬가지로, 스미스는 학생이 스스로를 다스리고 보살
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데이빗은 설명했다. "스스로 치료할 수 있다
고 생각한 거죠. 스미스가 좋은 선생님이기는 하지만 현명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난 도움을 청하고 있었잖아요. 그죠? 상처 때문에 치료를 받아야
했거든요."
스미스의 반대와는 전혀 상관없이, 정신과 의사를 찾는 일 자체도 쉽지 않
았다. 적당한 의사를 찾아내는 데에는 꽤 시간이 걸렸다. "나는 여러 의사
를 찾아가 봤어요. 비용이 엄청나더라고요! 나는 이 의사 저 의사를 찾아간
끝에 마침내 루핀 박사를 찾아냈어요."
한동안 모든 것이 비교적 가라앉았다. 데이빗은 공부와 연습을 계속했고
루핀 박사도 정기적으로 찾아갔다. 그는 박사를 정말 좋아했다. "효과가 좋
은 것 같았죠. 우린 이야기만 계속 했어요." 이 무렵 그의 피아노 연주는 급
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왕립 음악대학의 학생들은 음악 실력에 따라 모두 등급을 매겼는데, 처음
음악대학에 들어갔을 때 데이빗은 5B 등급이었다. 이 등급이 마음에 들지 않
은 그는 학교 첫날부터 5등습을 따겠다는 꿈을 꾸었다. 결국 3년차에 고내
경연대회에서 <전람회의 그림>을 연주한 그는 5등급으로 올라섰을 뿐 아니라
마마듀크 바턴 상과 홉킨슨 은 메달을 - 피아노 연주에서 세 번째로 높은 등
급의 메달이었다 - 받았다. 데이빗은 이같은 성과를 거둔 것을 루핀 박사의
치료 덕분으로 생각했다.
전반적인 건강과 체력을 증진시키기 위래 데이빗은 수영을 다니곤 했다.
돈이 있을 때에는 마샬 거리에 있는 수영장에 갔고, 궁할 때에는 하이드 파크
에 있는 서펜타인 연못의 시커먼 물에서 수영했다. 운동은 체중에 거의 효과
가 없었던 것 같다. 신진대사가 붕괴되어 가면서 나타나는 온갖 증세 말고도
어느 달에는 갈대처럼 말랐다가 다음 달에는 푸석푸석 붓는 등 기복이 극심했
던 것이다.
데이빗은 여전히 포도주를 많이 마셨고 먹는 것은 부실했다. 대부분의 경
우 그는 식사를 제대로 하는 것보다는 연주회에서 연주자의 손을 볼 수 있는
좋은 곳에 자리를 잡기 위해 비싼 표를 사는 편을 택했다. 힘을 내기 위해
커피를 마시고 식이섬유 음료인 루코제이드를 엄청나게 많이 마셨다. 실제로
그의 동료들과 친구들은 그와 루코제이드 병을 따로 떼어 생각하기가 어렵다
는 말을 종종 했다. 마찬가지로 데이빗이 발륨 약병과도 떨어지기 어려워지
고 있다는 것을 이들은 거의 알지 못했다. 먹으면 먹을수록 더 많이 먹어야
만 했던 것이다.
1969년 초여름 데이빗은 실수를 한 가지 저질렀다. 일생에서 가장 불행한
결과를 낳은 실수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두고두고 후회했다. 그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러한 행동을 한 까닭은 기억해 낼 수 없었지만, 어찌됐건 친
절하고 참을성 많은 주인 '아일랜드인'을 두고 무례한 말을 한 것이다. 그
말이란 주인의 외모에 대한 내용인 것 같은데, 다른 사람의 외모가 어떠한지
를 거의 보지 않는 데이빗이었으니 더욱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당연히 기분
이 상한 주인은 데이빗에게 자기 가족이 쓸 방이 하나 더 필요하다며 모여 사
는 집으로 들어갔다. 데이빗은 이 일을 두고 아쉬운 듯 이렇게 말했다. "나
는 아일랜드인 집에서 잘 지내고 있었어요. 그렇지만 재가 잔인했죠. 내 발
에다 총을 쏘아 버린 꼴이었어요. 그 뒤로는 모든게 잘못됐죠. 물론 라흐
연주만 빼고 말이에요."
그보다 더 곤란한 시기에 이사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데이빗은 22년 생
애 최고로 중요한 연주회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7월 17일 그는 교내 연
주회장에서 왕립 음악대학 교향악단과 함께 라흐마니노프 3번 협주곡 전곡을
연주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번 연주는 그가 런던에서 마지막으로 정열을 기울일 연주회였다. 연주회
가 끝나면 데이빗은 집에 가고 싶었다. 스스로 무너지고 있음을 느꼈던 것이
다. 그렇지만 지금은 정신적 힘을 모두 그러모아, 최선을 다해 집중하고 준
비해야 했다.
"학교에서는 나를 어떻게 하변 좋을지 난감해 했죠. 난관에 빠져 있었어
요." 데이빗이 설명했다. 학교에서 내린 결론은 데이빗 자신의 계획과는 상
당히 달랐던 것 같다. 그의 상태에 대한 가장 유력한 평가는 그가 가능성이
큰 피아니스트이기는 하지만 아직 제대로 '자라나지' 않았으므로 학교 안의
안정된 환경에서 좀더 지내고 나면 넓은 세상으로 나가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
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라흐마니노프 연주회가 있기 며칠 전이었다. 데이빗은 이렇게 말했다.
"루버 아줌마가 나를 챙겨 주러 특별히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온 거예요!" 루버
스미스 여사는 남편과 함께 찾아와서 친절하게도 데이빗의 문제를 살펴보았
고, 생활 형편과 정신상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여사는 학교 장
학위원회와 면담을 요청했고 시름 장학금을 주었다. 한 해 등록름과 얼마간
의 생활비가 될 만한 액수였다. 그렇지만 데이빗은 연주회가 끝난 뒤 나흘이
지나서야 알게되었다.
7월 17일 아침, 그는 비교적 '아픈' 상태로 잠에서 깨어났다. 그런 일에
대해서는 예측할 수 없었다. 어떤 날에는 다른 날보다 '안개가 짙었'고 '아
픔'도 더 심했다. 그 날 오후 두 시 반에 그는 오케스트라와의 리허설에 참
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생각을 집중하기 위해 그는 수영을 하기로 했다. 일
단 물에 들어가자 그는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게 되었고, 결국 리허설에 늦고
말았다. 오케스트라가 먼저 연주를 시작한 상황에서 데이빗은 강당으로 뛰쳐
들어가, 피아노 의자에 앉자마자 협주곡의 1악장 부분에서 현재 연주하고 있
는 자리를 찾아 연주를 시작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리허설을
계속했다.
리허설에서 보인 '독주자'의 행동에 화가 나 있었지만, 거기 있던 사람들은
다들 데이빗을 용서해 주었다. "내가 너무 연주를 잘 했거든요. 나는 아프
고 아프고 아팠지만 다들 리허설이 꽤 잘 진행된다고 생각했어요. 학교에서
평가를 그렇게 했다는 거죠." 그는 말을 이었지만 다음 순간에 다른 문제도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내가 그 날 저녁 대학 연주회에
나타날지를 알 수 없다고 했어요. 스미스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죠. '우린
자네가 어떻게 할지를 도무지 예측할 수 없어 , 데이빗.' 그렇지만 물론 실제
로는 연주회에 나타났잖아요."
자신의 엉뚱한 태도를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전혀 모르던 데이빗은
17년이 지난 뒤에야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됐다. 연주회가 있기 바로 직전에
지휘자 버논 핸들리가 키스 경을 바라보며, 숨을 깊이 들이쉰 다음 이렇게 말
한 것이다. "우연에 맡길 수밖에 없죠. 대단한 연주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제22장 런던에서의 마지막 한 해
1956년 심장발작을 겪은 뒤 시릴 스미스는 <세 손을 위한 이중주>를 썼는데,
데이빗에 따르면 "동기를 부여하고 영감을 불어넣어 주기 때문에 학생들이 꼭
읽어야 할 책이었다"고 한다.
그 책에서 스미스는 더없이 성취도가 높은 피아니스트라 해도 '완벽한 연주
를 10초간 연이어 해 내는 일'과, 악절 하나라도 '완전히 만족스럽게' 연주하
는 일은 대단히 어렵다고 썼다.
라흐마니노프의 협주곡 3번을 연주하기 위해 왕립 음악대학의 연주회장에
자리를 잡았을 때에는 데이빗 역시 그같은 스미스의 믿음에 대해 충분히 공감
하고 있었다. 또 데이빗은 완벽에 대한 스미스와 의견이 같아졌다는 말고 했
다. 즉, "손과 마음과 영혼 사이에 한결같은 균형이 있을 때, 그럴 때에 주
기가 완전해지고 만족을 느끼며", 이런 피아니스트라야 완벽에 다다를 수 있
다는 것이다.
데이빗이 피아노를 한 박자 늦게 연주하기 시작했지만 이내 그는 안정을 찾
았다. 그는 자랑스레 당시 일을 떠올렸다. "나는 최선을 다했어요. 문제는
그것뿐이었어요. 나는 집중하기로 마음먹었고 그래서 괜찮았죠."
데이빗은 한번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은 위험
한 일이지만, 인생은 짧기 때문에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죠." 따라서 결론
은 이러했다. "눈을 가리고 연주할 수 있을 정도로 모든 음을 다 알고 있어
야 해요. 그 날 밤 라흐를 연주했을 때 나는 눈을 감고도 모든 음을 알 수
있었고 실제로 나는 아주 안전하다는 기분이 들었어요. 그 때 그게 마술이라
는 것을 알았어요. 그 날 밤에 나는 영감을 너무나 많이 받았거든요. 나는
균형이 잘 잡혀 있었어요. 나는 정말 만족스럽게 느꼈어요. 완벽하다는 느
낌이었어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성공한 거예요."
시릴 스미스의 책을 읽고 나는 데이빗에게 그 날 밤 '완벽한 연주를 10초간
연이어 해 냈는지'물었다.
"그럼요! 그럼요!" 데이빗은 대답했다. "나는 연주하는 '내내' 완벽하다고
느꼈어요!" 데이빗이 대개 라흐 3번을 40분 정도에 연주한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여기서 '내내'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경지였음이 확실하다.
그러나 꿈이 아니였다. 그는 정말로 아주 뛰어나게 연주를 해서 열화와 같
은 기립박수를 받았다. 일반 청중뿐 아니라 왕립 음악원 교수들까지도 기립
박수를 쳤다. 왕립 음악대학원위 역사를 통틀어 보기 드문 일이었다. 그렇
지만 데이빗은 청중들이 환호를 보내면서 쳤던 박수소리를 기억하지 못한다.
"기립박수 이야기는 나중에 들었죠." 데이빗이 말했다. "나는 모두가 좋아하
고 있다는 것만 의식하고 있었어요."
"왜 보지 못했죠? 밖으로 나갔나요?" 내가 물었다.
"아뇨." 데이빗이 대답했다. "나는 무대를 계속 오르내렸어요. 앞 뒤로
왔다 갔다, 오르내렸다 하다가 그냥 올려다 봤어요. 어쩌면 내가 너무나 흥
분하면서 고조됐다가 긴장이 풀린 것도 같아요. 긴장이 풀린 것 같았어요.
성공했다는 것을 알았으니까요." 청중의 환호가 가라앉은 뒤 데이빗은 다음
일을 이렇게 기억한다. "스미스는 아주 기분이 좋아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
했어요! 나한테 악수를 청한 건 그 때뿐이었어요! 특별한 일이었죠!"
데이빗의 연주는 그 해 왕립 음악대학 학생이 한 협주곡 연주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으로 평가받았고, 그 상으로 13파운드라는 댄류더 상을 받았다. 그
다음 월요일에 그는 수표와 동봉된 편지를 받았는데, 편지에는 그가 그 상을
받았으며 리버헐름 장학금 5백 파운드가 수여됐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데
이빗은 문득 난국에 빠졌음을 알았다.
그는 그 장학금이 매우 드문 영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제 그는 위
대한 음악가가 되는 것이 그의 운명이라는 것도 증명했다. 또한 런던에서도
가장 명예로운 연주회장에서 연주할 기회도 생길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
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이 거의 아슬아슬 할 정도로 벼랑 끝까지 다가가 있
다는 것도 깊이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난 승리를 가슴에 안고 집으로 돌아왔어야 하는 건데." 데이빗은 기분이
좋지 않을 때면 이런 식으로 중얼거리곤 했다. "4년째 되는 해는 엉망이 될
줄 미리 알고 있었어요. 그렇지만 어쩌겠어요? 나는 학교가 시키는 대로 따
를 수밖에 없었어요. 나한테 그렇게나 돈을 많이 쓰면서 있으라고 했으니까
요. 나를 앨버트 홀과 아카데미에 세우고 싶어했어요. 그래서 난 어쩌면 좋
을지 난감했죠. 덫에 걸린 셈이었어요. 강철 덫에, 발을 딛지 말아야 했어
요. 나 자신의 본능에 맡기고 말이에요."
상황을 놓고 볼 때 자신의 본능에 따르는 것이 데이빗으로서는 너무나도 어
려웠을 것이다. 그는 왕립 음악대학에서 창 밖을 내다볼 때마다 앨버트 홀이
오라고 손짓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집에서 짜맞춘 피아노 의자에서 음악공
부를 시작한 퍼스 출신의 22세 청년으로서는 대단한 영광이었다. 스미스 선
생과 키스 경과 '프랭키 아저씨' 같은, 그가 지극히 존경하고 또 그를 뒷받침
해 준 사람들이 있었다. 이제 그는 이들이 그를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더욱이 큰 돈도 생겼거니와, 그간 겪은 일까지
생각해 보면 이같은 특전을 거절하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데이빗은 결국
한 해 더 머물기로 했다. '라흐 뒤로 온갖 것이 혼돈에 빠져버려 모든 것이
완전히 안개에 싸이고 안개 때문에 흐릿해졌기' 때문에 마침내는 자기 스스로
내림 판단에 따라 '지옥 같은 시간'을 맞이한 셈이었다.
데이빗의 정신은 감정적인 고통을 눈꺼풀 가장자리에 가두어 버리는 일을
이제는 잘 해내기 못했으므로 통점이 퍼지기 시작하여 슬금슬금 가슴 쪽으로
다가가, 급기야는 영혼 속에 둥지를 틀었다. 고통과 싸우기 위해 데이빗은
술을 마시고 발륨을 더 많이 먹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그것도 해결책은 아
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나는 그저 아픔을 줄일 생각으로 그랬는데, 그러면 찮을 걸로 생각했
죠." 데이빗이 설명했다. "그런데 당연한 일이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죠. 악
순환이었어요. 문제는 그런 약이 모두 부작용이 있었다는 점이에요! 사람을
몽롱하게 만들었어요. 아주 적은 양은 그리 나쁘지 않지만, 나는 너무 많이
먹으면서도 너무 많이 먹고 있는 줄을 전혀 몰랐던 거예요. 지나쳤어요. 나
는 항상 뭐든지 지나치게 해요. 한 줌씩 먹었어요! '주디 갈랜드'처럼 돼 버
린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그러다가 죽을 수도 있었다니까요! 술과 약을 섞
으면 독약이에요. 그러면 정말로 자기 무덤을 파는 거예요."
"자신을 소모시키면 안되는 거예요." 데이빗은 말을 이었다. "의지를 청중
한테까지 끌고 갈 수 있을 정도로 건강을 유지하고 있어야 되잖아요, 안 그래
요? 게다가 발륨 때문에 집중하기도 힘들어졌어요. 그런 약은 모두 몹쓸 약
이에요." 그는 쿡쿡 웃었다. "그러고 나니 연주를 그리 잘 할 수 없었어요.
상상해 보세요! 3년 동안 잘 연주했는데!"
런던에서 3년을 지낸 뒤에 보낸 몇 달은 모두 망각 속으로 사라져버리고,
데이빗은 오로지 한 가지만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루핀 박사에게 정신병
원에 입원시켜 달라고 부탁한 일이다. "나는 필사적으로 도움을 청하고 있었
어요. 그 때 나는 아주 오랫동안 아팠으니까요. 나는 이 '도마지'를 사실은
열네 살 때부터 지니고 다녔는데, 런던에 갔을 때 이미 어딘가 잘못돼 있었던
거예요." 데이빗이 설명했다. "나는 루핀 박사에게 빌고 빌고 또 빌었어요.
너무나 고통스러웠으니까요."
루핀 박사는 데이빗에게 아직 그런 극단적인 방벅을 쓸 정도로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니라며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마침내 동의했고, 1969년 10월 무렵 데이
빗은 핼리윅 병원에 입원했다. 다른 병원에 입워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데이
빗은 그 병원에서 지낸 시기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그럼에도 핼리윅 병
원에 입원한 사건 자체가 비극이었기 때문에 다른 병원에 입원한 것보다도 더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어느 날 간호사 한 사람이 데이빗에게 편지를 가져다주었을 때 오스트레일
리아에서 온 작은 소포가 끼여 있었다. 몇 분 뒤 간호사가 데이빗을 보러 왔
을 때 데이빗은 흐느끼며 울고 있었다. 소포에는 그가 KSP에게 보낸 편지와
몇 가지 물품이 들어 있었다. 런던에서 지내던 내내 데이빗은 KSP가 정기적
으로 보내는 편지가 데이빗이 가장 필요로 하는 확실하고도 한없는 애정의 유
일한 원천이었다. 데이빗의 말에 따르면 '온갖 사랑스러운 것들이, 기막히게
사랑스러운 것들이, 아름다운 시와 구절이' 편지에 적혀 있었다. 그런데 이
제는 편지도 오지 않을 것이고 또 그가 설령 오스트레일리아로 돌아 간다 해
도 KSP는 더 이상 그를 맞아 주지 않을 것이다. KSP가 죽은 것이다.
간호사는 데이빗을 두 팔로 꼭 감싸 안았다. "간호사는 내가 아름답다고,
괜찮을 거라고 했어뇨. 그녀는 나를 위로하면서 고통은 사라질 거라고, 곧
사라질 거라고 했어요." 데이빗이 말했다.
그러나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발륨보다 좀 덜 알려진 약물 덕분에 일시
적으로 둔감해진 것뿐이었다. 고통이 충분히 둔해진 듯해 보였을 때 데이빗
은 퇴원했는데, 매년 한 번 총장이 대학을 방문하는 행사에 가까스로 참석할
수 있었다. 당시 총장은 여왕의 어머니였고, 데이빗은 행사 때에 여왕의 어
머니호부터 홉킨슨 은메달을 받았다.
12월, 그는 어느 정도 생활에 안정을 찾아 - 필시 도움을 많이 받았을 테지
만 - 왕립 음악대학의 남자 기숙사인 로버트 메이어 홀에 입주했다.
데이빗의 증세는 거의 나아지지 않았다. 12월 31일 캘러웨이 교수에게 보
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지난 주에 브람스의 2번 협주곡을 연주했습
니다. 잘 쳤어야 하는데,,, 기분이 아주 좋지 않았습니다,,, 뭐라고 할까
요. '학기말 침체'?" 그러나 그 다음 학기에는 스스로 기분이 어떻다고 따로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 시절에 그가 적은 간단하고도 짤막한 글에서도 곳곳
에 밑줄이 쳐져 있고 구두점도 이상하게 찍혀 있는 것을 보면 정신건강이 아
주 나빠졌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데이빗은 연습과 연주를 계속했다. 학겨 4년차에서는 그전 3년보
다 교습도 리허설도 적게 계획되어 있었다. 학교 기구는 여전히 그를 지원해
주고 있었지만 그가 훨씬 더 자립하는 법을 배우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
나 가장 건강했을 때에도 스스로 생활에 기강을 잡는 일이 극도로 어려웠는데
이제는 아예 불가능해졌다. 이따금 그는 연주가 있는 것을 잊기도 하고 충분
히 준비하지 못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평론가들과 청중이 그의 연주를 높
이 평가하는데도 연주를 줄곧 거부했다.
1970년 3월 24일, 데이빗은 왕립 음악대학의 듀크 홀에서 라흐마니노프 협
주곡 3번을 연주했다. 어느 모로 보나 이번 연주는 '망신'스럽고 '경망'스러
웠다. 시릴 스미스는 모욕감을 느껴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렇게 연주
하라고 가르치지는 않았어." 데이빗은 자기 연주가 형편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거기에 대하여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완전히 '들리지
않게' 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들리지 않는' 증세는 한 달 뒤 그가 로얄 앨버트 홀에 운집한 청중에게 절
하고 이어 저 숙명의 리스트 협주곡 EB 장조를 연주했을 때 더욱 심해졌다.
피터와 함께 보낸 '미움의 밤 가운데 제일 지독한 미움의 밤'에 연주했던 바
로 그 곡이었다. 평론가들은 데이빗 자신의 평가에 따르면 '친절'했고 청중
도 호응이 좋았지만, 그는 자신의 연주를 거의 들을 수가 없어 극도로 실망했
다. "물론 나는 앨버트 홀에서 리스트의 EB을 연주해야 했을 때 아팠죠. 그
리고 아카데미에서 아르 3번을 연주할 때에도 아팠어요." 데이빗이 설명했다.
스미스는 4년차 끝무렵에 가서 데이빗의 마지막 성적보고서에 이렇게 썼다.
"그는 생활이 너무 무질서하고 홍란하여, 피아니스트로서의 발전은 드문드문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데이빗은 그 놀라운 손으로 이따금씩 거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게 악절처리를 했습니다."
데이빗을 아주 높이 평가하는 동시에 가장 아끼는 학생의 불운을 슬퍼한 키
스 경은 데이빗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여러 가지 기복을 겼었네. 어
떤 경우에는 좋았고 어떤 때에는 그렇지 못했지. 나중에 꼭 성공하고 또 생
활과 음악에서 안정을 찾기를 바라네. 계속 연락하세."
학사일정이 끝나 가자 돈도 바닥나고 데이빗이 고통을 견딜 능력도 끝나 갔
다. "내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말을 할 때에는 물론 '정신문제'를 나타내는
거였어요. 지독한 문제였죠. 사실은 내 잘못도 아니었어요." 데이빗은 6월5
일에 루버 스미스 여사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하여튼 지금으로서는 (큰
음악 경연대회에 나설) 가능성이 이 병에 달려 있어요. 얼마나 지독한지, 저
는 (부자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직업을 구해야 되겠죠.
적어도 노력은 해야 되겠죠. 그리고 음악은 취미로 계속하고요. 정말로 건
강해지면 언제든지 뉴욕이나 필라델피아 같은 데로 갈 수 있겠죠. 알고 계시
겠지만 저는 늘 최선을 다했어요. 그렇지만 사람이 건강하지 않을 때에는 아
무리 최선을 다한다 해도 오늘날 세상에서 요구하는 수준에 이르기에는 충분
하지 않죠,,, 곧 로버트 메이어 홀을 나가야 될텐데, 몸을 누일 지붕 밑도
없는데 런던에서 겨울을 보내는 건 정멀 달갑지가 않군요. 오스트레일리아로
돌아가야겠어요."
나흘 뒤 데이빗은 캘러웨이 교수에게 절박한 편지를 보냈다. "혹시 오스트
레일리아로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돌아갈 수 있을지 알고 싶어 편지를 드립니
다. 여기서는 더 이상 지낼 수가 없어요,,, 배도 고프고, 돈도 일자리도 없
고, 다음 주가 지나면 지낼 곳도 없어요." 데이빗은 캘러웨이 교수가 그 때
오스트레일리아에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의 절박한 사연은 교수의
비서에게만 전달됐을 뿐이었다. 비서는 고맙게도 캘러웨이 교수가 돌아와 일
을 제대로 처리 할 수 있게 될 때까지 당분간 지낼 수 있도록 얼마간 돈을 보
내 주었다. 루버 스미스 여사도 데이빗의 오랜 후원자인 실릭슨 재단과 알렉
브렉클러, 자니 그라넥에게 연락했다. 그래서 8월 둘째 주말에 데이빗은 예
약과 지불이 끝난 귀국 비행기표를 얻을 수 있었다.
로버트 메이어 홀의 좁은 방에서 바삐 움직이다가 끊임없이 넘어지고 혼잣
말을 중얼거리면서 데이빗은 옷가방에 양말 몇 가지를 던져 넣고, 다음에는
악보 몇 장, 책 한 권, 펜,,, 그러나 더 이상 챙길 시간이 없었다. 택시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데이빗은 길거리고 뛰쳐나와 택시에 올라탄 다음
기사에게 곧장 히드로 공항으로 가자고 말했다.
제2부 흐릿한 의식
제23장 유령의 춤
"제니 달링, 콜라 좀 주실래요? 코카콜라 아주 조금만 더 아니면 커피나.
커피도 좋아요, 제니. 콜라나 아니면 커피나,,,"
"콜라를 드릴게요."
"고마워요, 제니. 고마워요. 난 응석받이에요, 응석받이. 운이 좋아요."
내 옆에 앉은 승객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데이빗이었다. 여기는 어디,,,?
비행기. 아 맞아, 비행기지. 그런데 콜라 얘기는 뭐지? 아, 몇 개나 마셨을
까? 내가 얼마나 오래 졸고 있었지?
나는 잠이 깨었다. 콜라 얘기는 꿈이 아니었다. 고 친절한 여승부원이
콜라 캔을 하나 손에 들고 우리가 앉은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결정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시간이 몇 초밖에 남지 않았다. "달링, 몇 개나 마셨
죠?" 나는 데이빗의 주의를 끌기 의해 기브스를 한 손으로 데이빗으 무릎을
툭툭 두들기면서 물었다.
그는 씩 웃었다. 헤드폰을 벗기느라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몇 개밖에
안 돼요, 달링. 몇 개만, 아주 조금, 아주 드물게, 보기 드문 신동, 거의,겁
먹어요, 겁먹으면 안 돼요,,," 과민한 중얼거림이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머
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나는 승무원에게 미안한 미소를 지으면서 뒤찮게 해
서 죄송하지만 콜라는 더 없어도 된다고 했다.
데이빗과 나는 유럽으로 가는 길이었다. 함께 장거리 비행을 하기는 이번
이 처음이었다. 카페인과 설탕을 지나치게 많이 섭취한다는 점만 빼면 데이
빗은 잘 견디고 있었다. 그는 오스트레일리아 내려서 여행을 다니는 동안 비
행기에서 할 일을 특별히 마련해 두었는데, 그 뒤로 한 번도 빼먹지 않았다.
비행기에 오를 때 데이빗은 입구에서 있는 승무원들의 이름표를 보고는 그 자
리에서 외웠다. 여행이 끝날 때까지 그는 승무원들 이름을 부르면서, 마치
평생 알고 지내던 사람 마냥 이야기를 나누었다. 스는 승무원들의 호감을 사
서, 콜라와 커피, 레모네이드를 끝없이 가져오게 만들었다. 그에게는 천국이
었다. 특히 내가 깨어 말리지 않는 동안은 더 그랬다.
비행기가 목적지에 도착할 때가 되면 진심 어린 작별을 주고 받아따. 이따
금 성가신 승객이 되기도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승무원들이 데이빗을 유달리
상냥하게 대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나는 데이빗이 창가 자리에 앉았을 때
승무원들이 더욱 반항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통로 쪽에 앉으면 그는 승무원
이 곁을 지날 때마다 말을 걸고 포옹하고 하면서 전체적으로 불안한 사람이라
는 인상을 풍겼다. 멀찍이 창가 자리에 앉혀 이어폰을 고전음악 채널에 맞춰
주면 데이빗의 여행 예절이 나아졌다. 나아가 펜과 종이를 '작곡'용으로 -
데이빗의 생활에 아주 중요한 부분인데 - 맡겨 두면 훨씬 나아졌다.
처음에 가지런히 정던하려고 데이빗의 악보를 뒤지기 시작했을 때 나는 그
가 악보에 짤막한 악보를 써 놓은 것을 알게 됐다. 그게 무엇인지 물었더니
자기가 오래 전에 '작곡'한 것이라 했다. 그는 이어 작곡을 얼마나 좋아하는
지를 들려주면서, 런던에 가기 전에 작품도 몇 곡 썼다고 윌다. 그렇지만 학
교에서 이방면은 잘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뒤로는 아무 것도 쓰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안개'가 걷히기 시작하면서부터 데이빗은 머릿속에서 다시금 음악
을 들을 수 있게 됐다면서 악보를 쓰기 시작했다. 피아노를 치다가도 갑자기
벌떡 일어서서 연필을 거머쥐고는 뭐든지 손에 잡히는 종이에다 화음이나 멜
로디를 적어 넣었다. 어떤 때에는 한밤중에 자리에서 일어나 '작품'을 끄적
거린 다음 곧장 도로 잠들기도 했다. 그는 언제 어디서든 작곡했다. 때로는
수영장에서 뛰쳐나와, 종이에 온통 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작품'을 쓰
기도 했다. 물기에 젖은 손이고 보니 잉크에 얼룩이 번지기다 예사였다. 미
로 같은 생각 속으로 사라져 버리기 전에, 들리는 바로 그 순간에 '작품'을
적어 두는 일이 데이빗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처럼 보였다.
물론 오선지나 백지가 근처에 없을 때에는 문제였다. 데이빗은'토막난 걸
작'을 기록해 둘 곳을 손에 잡히는 대로 정하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악보와
책 재부분에다 특별한 흔적을 남겨 놓았다. 리스트의 <마제파>에는 이런 '작
품'이 빼곡이 들어타 있다. 리스트의 대작을 담은 음표가 조금이라도 눈에
띄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데이빗이 무척 좋아하
는 책 가운데 한 가지가 호로비트의 전기인데, 첫 장에 세 쪽에 걸쳐 '작품'
이 실려 있다. 사실 데이빗은 거의 모든 것에다 '작곡'한다. 냅킨, 봉투,
편지, 종이 상자, 신문, 잡지 등 모든 것에다 그의 츙동적 욕구를 담아 놓고
있다. 오선지 공책을 사 주었지만 금방 다 써 버리고, 또 종종 잊어 버리기
도 해서, 지니고 있는 책을 아무렇게나 골라 끄적이는 방식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데이빗은 악보를 비교적 잘 그리기 때문에 오선지 공책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는 필요한 길이만큼 오선을 긋고 거기에 음표를 그려 넣는다. 움
자리표를 그려 넣지 않는 일도 많다. 대개는 한 페이지에 여남은 '작품'이
기록되어 있지만 그 가운데 서로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것은 두세 대밖에
죄기 않는다. 그 나머지는 데이빗의 다른 생각과 마찬가지로 두서가 없다.
그는 이런 '작품'을 애써 간직하지 않기 때문에 가까운 장래에 완성된 작품이
하나 나올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우리가 들렀다 가도 나면 친구들은 오래지 않아 우리의 흔적을 집안 구석구
석에서 발견하곤 했다. "언제쯤이면 완성된 작품을 하나 볼 수 있을까요, 데
이빗?" 친구들은 이런 식으로 부추겼다. "때가 되면, 내가 집중할 수 있을
때에는 되겠죠. 그래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에요." 데이빗은 이렇게 대답하고
는 변명하는 투가 되어 버린다. "그래도 나한테는 중요한 일이에요. 뭔가를
쓰면 나는 계속 살아 있게 되거든요. 좀더 긍정적으로 되죠. 뭔가를 쓰면
안정이 돼요." 한번은 친구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주로 교향곡이
떠올라요." 그러자 그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슈베르트는 미완성 교향곡을
썼는데 데이빗은 미시작 교향곡을 쓰고 있었군요!"
곧 모스크바에 도착한다는 생각 때문에 데이빗은 영삼을 꽤 많이 받은 모양
이었다. 앞에 힌 비행기의 비상시 행동요령을 적은 카드에 '작품'을 빼곡
이 적어 놓았다. 그는 두어 것을 가리키면서 이해 할 수 없는 곡조를 불러
주더니 그 부분이 아주 자랑스럽다고 했다.
나는 데이빗이 그 모든 일이 벌어진 런던을 다시 보면 어떻게 나올지를 정
확히 몰랐고, 그래서 우리는 피터 포이트뱅거로부터 교습을 받기 전에 러시아
에 잠시 들렀다 가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해 두었었다. 나는 러시아 음악에
대한 데이빗의 사랑 덕분에 이번 여행이 특히 즐거운 것이 되기를 바랬고 실
제로 그런 바램은 현실로 나타났다.
모스트바는 장관이었다. 당당한 건물과 드넓은 가로수길, 특히 차이토프스
키 피아노 경연대회가 데이빗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우리는 극장 밖에서 한
암표상으로부터 경연대회 1회분 입장권을 어렵사리 구했다. 데이빗은 음악원
의 하얀 대상당에 앉아 음표 하나 하나까지 모두를 빨아들였다. 그 뒤 우리
는 경연대회의 나머지 몇 부분을 러시아 텔레비전으로 볼 수 있었다. 데이빗
은 너무나 좋아했다. 그는 이번 여행에서 이 이상 신나는 일은 없을 것이라
고 말했다.
데이빗은 페테르스부르트로 향하면서도 내내 '우와!'를 연발했다. 1986년
이었으므로 페테르스부르크는 아직 레닌그라드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발라키
레프와 무소르그스키가 걸었던 그 길을 걷고, 차이코프스키와 라흐마니노프가
보았던 그 광경을 보는 것은 데이빗에게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 우리는 레닌
그라드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연주홀에 가서 젊은 바이올린 연주자가 카파투리
안의 곡을 멋들어지게 연주하는 것을 들었다. 데이빗은 네바 강의 다리가 열
리는 장면을 보려고 새벽 두 시에 혼자 돌아다녔다. 아직 공산주의의 몰락이
영향을 끼치기 전이어서 데이빗은 혼자 이 역사적인 도시를 배회해도 그다지
위험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때가 6월이라 해가 지지 않는 '백야'였으므로 밤
서리는 어둡지 않았다. 물론 네바 강에서 수영도 한 차례 해야 했다. 러시
아 여행의 대미를 장식하기에 어울렸다.
이어 런던으로 향했다. 런던에 대해 데이빗이 어떻게 나올까 불안한 마음
이 다시 한 번 나를 엄습했다. 나는 데이빗에게 기분이 어떤지를 물었다.
그러나 런던에서 처음으로 신경쇠약을 겪고 수치를 안고 물러났던 기억에 대
해 데이빗은 내가 걱정하던 것만큼 고통스러워하지는 않았다. 그는 사실은
대학에 다시 가 본다는 생각에 흥분하고 나아가 얼른 가보고 싶어 조바심이
난다고 했다. 피터 포이트 뱅거를 만나 교습을 빨리 시작했으면 좋겠다는 말
도 했다.
오스트레일리아를 떠나기 전에 친구들은 우리가 해머스미스에 있는 스타이
너관에서 머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귀띔해 주엇는데, 가서 보니 그 곳은 실
제로 아주 이상적이었다. 조지아 시대에 지은 이 건물은 해머스미스에서 가
장 오래된 주거용 건물로 오디언 극장과 고가도로 사이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놀라우리 만치 평온한 분위기였다. 아름답고 화사한 장미원이 있었고, 화단
에는 여름 꽃이 그늘 나무를 배경으로 만발해 있었다. 우리가 도착하자 에블
린 케펄 박사와 남편 버트가 우리를 맞이했다. 데이빗은 금세 이 곳과 사람
들에게 친근감을 느꼈다. 다행이었다. 앞으로 5개월 동안 우리가 지낼 곳이
었으니까.
데이빗이 골라 쓸 수 있는 그랜드 피아노가 두 대 있었다. 한 대는 식당
에, 또 한 대는 부속 예배실에 있었다. 데이빗은 다른 손님들을 위해 저녁
식사 때에 피아노 연주를 종종 해 주었다. 지 곳의 생활은 대가족이 함께 모
여 사는 집에 친척이 번갈아 찾아오는 것과 비슷했다. 이 곳을 찾는 손님들
은 친절했고 데이빅을 이해했다. 덕분에 우리는 아주 보함있고 즐겁게 지낼
수 있었다. 스타이너 방식대로 가르치는 교사와 스타이너의 철학과 교육방법
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전세계에서 이 곳으로 몰려들었다. 우리는 거기에서
지내는 동안 새로 친규를 많이 사귀었다.
에불린은 유능하고 영리하고 강하고 심지가 곧은 여자로서, 개중에는 너무
도전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데이빗과는 아주 마음이 잘 통했
다. 그러나 데이빗을 따뜻하고 친절하게 대해주면서도 장난은 조금도 용납하
지 않았다. 데이빗은 물론 공용으로 내놓은 설탕과 홍차를 덮치는 데에 골몰
했지만 에블린은 상당히 강경하게 말았다. 한편으로는 데이빗에게 홍차도 타
주고 정원으로 데리고 나가 산책도 해 주었으므로 나는 데이빗의 장난기를 다
독거여 줄 수 있는 사람이 한 명 더 있다는 점이 고마웠다.
오스트레일리아를 떠나기 전에 우리는 피터 포이트뱅거와 편지를 주고받았
는데, 데이빗은 편지를 보고 그를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포이트뱅거는 키
가 크고 호리호리한 체구에다 손가락이 아름답고 몸가짐이 우아한 사람이었
다. 그는 처음부터 데이빗이 완전히 마음을 편하게 가질 수 있도록 해 주었
다. 데이빗은 새로이 음악여정을 떠나게 되어 아주 흥분해 있는 것처럼 보였
다.
포이트뱅거의 연습실은 나이츠브릿지의 골목에 있었는데 무척 비좁았다.
우리 세 사람과 피아노 한 대가 들어가기에도 빠듯한 공간이었다. 피아노는
악보들과 화가 친구의 스케치 더미에 거의 뒤덮이다시피 했다. 포이트뱅거는
데이빗에게 쇼팽을 연주해 보라고 했다. 데이빗은 <G 단조 발라드>를 쳤다.
포이트뱅거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으로 들었다. 연주가 끝나자 이렇
게 말했다. "나주 흥미롭군요, 데이빗. 그렇지만 헬프갓이 너무 많이 들어
가 있어요. 자, 이제 쇼팽을 연주해 보세요."
한 시간 반 동안 화음과 변화에 대해 샅샅이 분석한 뒤 포이트뱅거는 데이
빗에게 작품을 처음부터 새고 한 번 연주해 보라고 하면서, 쇼팽 자시은 어떻
게 연주하기를 바랬을까를 좀 다 생각하면서 쳐보라고 했다. 데이빗이 다시
연주를 시작하자 똑같은 작품이 저혀 다른 느낌으로 울려나왔다. 고백하건대
나는 이번 연주가 더 마음에 들었다.
교습은 한 주에 두어 번씩 같은 방식으로 계속되었고, 쇼팽의 작품 상당수
와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이 다루어졌다. 데이빗이 새로운 연주방
법을 기쁘게 받아들이면서 한동안 떠나 있기로 한 것이 잘한 결정이었음을 알
았다.
포이트뱅거의 연습실은 왕립 음악대학과 로얄 앨버트 홀, 켄싱턴 가든까지
금방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교습이 끝나면 종종 데이빗은 옛적 악
몽이 서려 있는 곳으로 나를 데리고 가곤 했다. 키스 포크너 경과 편지를 주
고받으면서 왕립 음악대학의 새 학장인 마이클 가우 매튜스를 만나기로 약속
이 되었다. 데이빗은 그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대단한 '특권'으로 생각
했다. 나는 키스 경의 배려가 고마웠다. 데이빗으로서는 학교 안으로 발을
들여놓기가 어려웠겠지만, 나는 데이빗이 위대한 사람의 소개를 통해 학교로
되돌아가면 아직 남아 있을 수도 있는 옛 악몽의 잔재가 사라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전화를 걸어 약속시간을 정했고 며칠 뒤 우리는 학교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앨버트 홀이 가까워지자 데이빗은 뛰기 시작하더니 홀을 지나 대학
건물 앞에서 갑자기 멈춰 섞다. 그는 아주 흥분한 상태로 웅장한 대학 건물
을 올려다보며 온갖 것에 대해 한꺼번에 중얼거리면서 마구 손짓했다. 나는
몇 분 동안 곁에 말없이 서서, 그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정리하기를 기
다렸다. 이윽고 우리는 안으로 들어갔다.
데이빗은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그다지 불안해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우리
는 학장실이 어디 있는지를 물어 보았고 이내 학장 사무실로 안내되었다. 우
리가 들어서자 가우 매튜스 씨는 키스 경이 미리 알려주었다면서 만나게 되어
반삽다고 했다. 우리는 함께 차를 들었고, 데이빗은 학교에서 지낸 시절에
대해 보통 때보다 조금 더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도 학장은 별로 싫어
하지 않았다.
학장실 안에는 그랜드 피아노가 한 대 있었는데, 학장은 잠시 뒤 데이빗에
게 연주를 부탁했다. 쇼팽의 <발라드>로 시간을 많이 보낸터였으므로 데이빗
은 그 곡을 연주하기로 했다. 안타깝게도 데이빗의 목청 역시 그 날은 상태
가 좋았기 때문에 연주가 약간 퇴색되었다. 그러나 가우 매튜스 씨는 연주에
대해 아주 너그러웠다. 그는 대학에서 곧 음악 경연대회가 있을 것이라고 귀
띔했고 데이빗은 구경할 수 있으면 아주 좋겠다고 했다. 작별인사를 하면서
데이빗은 경연대회 때 다시 오겠노라고 약속했다.
나중에 나는 혹시 경연대회를 보면 마음이 우울해지지 않겠냐고 물었는데,
데이빗은 그 이상 즐거운 일이 없을 거라며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내가 품
고 있던 모든 걱정은 결국 완전히 기울었다. 데이빗은 런던으로 돌아온 것을
뜻밖에도 - 데이빗 자신도 놀랄 정도로 - 기쁨과 열정과 모험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과거의 고통스런 사건이 그의 삶에 깊이 새겨져 있지만 현재
는 그리운 안개가 차츰 걷히면서, 안개에 쌓여가는 것은 오히려 과거의 고통
인 듯해 보였다.
그 다음 주 우리는 경연대회가 시작되는 시간보다도 약간 일찍 도착했다.
데이빗이 학교 구석구석을 나에게 구경시켜 주겠다고 해서였다. 웅장하고 고
색창연한 본관 건물 모퉁이를 돌아사면서 데이빗은 그가 라흐마니노프를 연주
할 때 포스터를 붙였던 게시판을 자랑스럽게 가리켰다. 다음에 멈춘 곳은 그
가 시리 스미스로부터 피아노를 교습 받던 저 전설적인 방 앞이었다. 스미스
가 옛적에 쓰던 교수실 문을 톡톡 치면서 데이빗이 말했다. "다들 여기에다
귀를 대고, 달링, 바로. 이 자리에 귀를 대고 내가 <이슬라미>를 연주하는
걸 들었어요. 다들 깊은 감명을 받았죠."
데이빗은 커다란 무대 위로 올라가 거기 놓인 그랜드 피아노를 살펴보았다.
피아노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경연대회가 시작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데이빗의 눈에 17년쯤 전에 이 자리에 앉아 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오를까? 아
득히 메아리 치는 박수소리가 들릴까? 그 날 밤에 겪었던 안도감과 흥분을 어
렴풋이 나마 느끼고 있을까? 아니면 그런 모든 것이 '안개'속으로 사라지고,
성공과 승리라는 밝고 따스한 불빛만을 남겨 두었을까?
데이빗이 피아노 앞에서 명상에 잠겨 있는데 강당 입구 쪽에서 밝고 열정적
인 목소리가 들려 왔다. 덞은 남녀 여럿이 들어오고 있었다. 지금은 '그들
의 해'이고 세상의 온갖 좋은 것들이 지금 그들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데이빗은 무대에서 재빨리 내려와, 청년들의 열기와 기대감을 함께 들이마
시는 듯 미소 띤 얼굴로 나에게 달려왔다. 강당 안의 좌석이 차차 메워지면
서 약간의 긴장도 느낄 수 있었다. 학생들은 한 사람씩 나와서 정해진 곡을
연주했다. 참가자 모두가 한결같이 높은 수준이었다.
연주 사이사이로 데이빗은 지금 연주하고 있는 곡에 대해 설명하면서 모두
들 얼마나 잘 연주하고 있는지를 들려주었다. 분위기 때문에 데이빗은 자신
의 청년시절이 떠오른 것이 분명했다. 데이빗은 이내 그가 학생으로 있던 때
에 있었던 경연대회와 동료들에 대해 들려주기 시작했다. 나는 주가 어떤
곡을 언제 어떻게 연주했는지를 그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의 목소리에는 고통이나 회한은 조금도 스며 있지 않았다.
우연히도 데이빗으 옛 친구이자 동료 학생이었던 존 릴이 그 다음 주에 베
토벤 협주곡을 연주하기로 되어 있었다. 우리는 특석 입장권을 사서 들어갔
으므로 데이빗은 탁 트인 곳에서 독주자를 잘 볼 수 있었다. 그는 이 강당이
너무나 익숙했고 이곳에서 훌료한 연주자들의 연주를 너무나도 많이 들었다.
표 한 장을 구하기 위해 여러 끼니를 거르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리고 비록
결과는 불만족스러웠지만 이 무대에서 직접 연주한 적도 있었다. 이제 그런
모든 일을 과거로 접어 두고 옛친구의 연주를 듣고 기뻐하는 것이다. 연주가
끝난 뒤 우리는 무대 뒤로 찾아갔다. 데이빗은 존을 와락 끌어안았다. 연주
회장을 나서자 데이빗은 껑충껑충 뛰면서 베토벤 협주곡을 흥겹게 불렀다.
그 날 그가 고른 노래는 그것이었다.
제24장 20년만에 얻은 해답
자신이 연주하는 음닥은 자신이 듣는 음악과 관이하게 다를 수 있다. 적어
도 데이빗에게는 그랬다. '라흐', '차익', '모드카'가 - 지구상의 다른 모든
사람은 무소르그스키가 부르지만 - 데이빗이 연주하기 제일 좋아하는 작고가
였다. 그렇지만 들을 때에는 '랄프 아저씨'와 '에드워드'가 그의 인기 작고
가 목곡에서 최상위에 올라 있었다. 본 윌리엄스의 <런건 교향곡>이나 엘가
의 <수수께끼 변주곡> 음반을 얹어 놓으면 데이빗은 황홀경에 빠지 넋을 잃고
듣는다. 따라서 그는 작품이 완전히 끝날 때가지 조용해진다. 그리고 여러
번 다시 들으면서 내내 조용하다.
이 정도였으므로 우스터 근처 말번 힐즈에 사는 어느 친구 부부가 자기 집
으로 초대했을 때 우리는 곧장 택시를 타고 서쪽으로 길을 재촉했다. 그 곳
은 엘가가 생애의 상당부분을 지낸 곳이기 때문이다. 산자락 끝 푸른 들판에
자리잡은 친구의 하얀 농장 건물이 가까워지자 데이빗은 들뜬 목소리로 소년
시절에 라디오에서 엘가의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 그의 음악을 사라하게 된
아야기를 들려주었다. 이 지역의 합창 전통에 대해, 또 엘가가 젊었을 때 참
여했던 유명한 3합창단 음악제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친구들과 이틀 동안 즐겁게 지내고 나니 키스 경과 재회하기로 되어 있는
서퍽으로 갈 시간이 되었다. 왕립 음악대학에서 장학생으로 있기도 했던 키
스 경의 목소리는 확실한 바리톤이었다. 데이빗은 종종 이런 식으로 말했다.
"영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성악가죠. 그 기막힌, 그 기막힌 목
소리." 왕립 음악대학에서는 키스 경 이전에는 성악가를 학장으로 맞이한 적
이 없었으므로 1960년에 그가 학장에 임명되었을 때 일부에서 눈썹을 티켜세
우기도 했다. 그러나 이내 그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키스 경은 현명하고 친절하고 상냥한 사람으로서, 허버트 하월은 그를 가리
켜 '보기 드물게 깊은 동정심과 마음의 평정을 지닌 사람'이라 했다. 키스
경은 대학 내에서의 자신의 위치가 '정신과 의사, 홀보담당관, 하인을 겸하는
것'이라는 것을 아주 잘 이해했다.
데이빗이 대학생활을 할 때 키스 경에게서 가장 감명을 많이 받은 부분은
한없는 인내심이었다. 키스 경은 데이빗이 입학할 때에도 든든하게 밀어 주
었고, 학교에서 지내는 내내 데이빗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데이빗이
오스트레일리아로 돌아온 뒤에도 변함이 없었다. 병원생활을 하던 때 데이빗
은 키스 경에게 종종 편지를 썼는데, 그럴 때마다 즉시 답장이 날아왔다.
1974년 은퇴한 뒤에도 키스 경은 계속 데이빗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데이빗이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때 나는 정망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같이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업무처리만으로도 시간이 빠
듯하고 재임시 3천 명 정도나 되는 많은 학생이 대학을 거쳐갔는데도 지구 반
대편에 있는 도시에서 병원 생활을 하고 있는 졸업생을 잊지 않고 편지를 쓸
시간을 꼬박꼬박 찾아낼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저는 아직도 병원에 있어요. 그렇지만 보내 주신 카드와 편지가 보약이
되는 것 같아요. 금방 퇴원할 수 있을 거예요." 데이빗은 1975년에 키스 경
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그가 키스 경에게 보낸 편지는 대부분 이런 내용
이었다. 데이빗은 또 피아노를 쓸 기회가 생기면 그 때 연습하는 음악에 대
한 내용도 편지에 썼다. 그러면 키스 경은 늘 데이빗의 재능을 칭찬해 주었
다.
데이빗은 키스 경에게 우리가 결혼한다는 사실을 편지로 알린 적이 있었고,
나는 편지로 우리가 영국으로 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렸다. 나는 이처럼 아
주 특별한 인물을 만나고 싶은 마음에, 또 데이빗에게 옛 친구이자 후견인인
키스 경을 다시 만나게 해 주고픈 생각에 편지에서 키스 경 부부를 만나 뵐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부인 포크너 여사는 피아니스트로서 두 사람이 왕립
음악대학에 학생으로 있을 때에 만난 사이었다.
"우린 이제 늙어 가고 있습니다만, 런던에 오시면 반드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데이빗의 연주도 듣고 싶군요." 여든여섯인 키스 경이 보
낸 답장 내용이었다. 런던에서 지내는 동안 나는 키스 경에게 전화를 걸었
고, 그는 점심을 함께 들자면서 그가 은퇴한 곳인 서퍽의 벙게이까지 찾아오
는 방법을 자세하게 알려주었다.
게이빗과 나는 비교적 이른 아침에 말번 힐즈를 출발하여, 잉글랜드 지방을
완전히 가로지르는 기나긴 자동차 여행을 시작했다. 도착하자 키스 경과 포
크너 여사가 우리를 마중 나왔다. 데이빗은 자동차에서 뛰어내려 두 사람을
포옹했다. 그는 흥분하지는 않았다. 기뻐할 뿐이었다.
노부부는 아름다운 이어지붕집 안으로 우리를 안내해 들어갔다. 포크너 여
사는 자신을 크리스타벨이라고 부르라고 했다. 나는 데이빗의 스크랩북에서
키스 경의 사진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 때에도 다감하고 잘 생긴 외모가 인상
적이었다. 그리고 그 사진을 찍은 지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 나는 그가 정이
많고 기품 있는 신사라는 것을 눈빛을 통해 알 수 있었다.
크리스타벨은 우아하기 그지없는 사람이었다. 여사는 우리에게 앉아서 점
심을 들자고 했고, 데이빗은 기꺼이 자리에 앉았다. 그 무렵에도 데이빗은
다른 사람들과 한 자리에서 식사하는 것을 불편해 했는데, 내가 제발 같이 식
사하자고 사정하지 않아도 되어 너무나 뜻밖이었다. 나는 데이빗이 키스 경
을 대단히 존경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두 사람은 함께 있었던 갖가지 옛
일과 친구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점심 식사 동안 킷 경은 우리가 런던에서 왔느냐고 물었는데, 우리가 사실
은 웨일스 지방 근처에서 왔다고 하자 저으기 놀라 이렇게 물었다. "우리와
점심을 들기 위해 잉글랜드 지방을 가로질러 왔다는 말씀입니까?" 영국 전체
를 가로지르는 일이 있다 해도 우리는 기꺼이 달려갔을 것이다.
키스 경은 데이빗의 연주가 생활이 어떻게 진전되고 있는지에 대해 관심이
대단했다. 다시금 연주무대에서 자리를 굳혀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매
우 기뻐했다. 그는 데이빗의 레퍼토리에 대해 묻더니 언주를 부탁했다.
설혹 말리고 싶다 해도 데이빗을 막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이내 그
랜드 피아노 앞에 앉았다. 리스트의 작품 두 곡이 올려나왔고 데이빗은 내내
곡을 따라 흥얼거렸다. 내가 데이빗에게 노래는 부르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했을 때 키스 경은 데이빗이 마음 내키는대로 노래를 불러도 된다고 했다.
데이빗은 너무나도 좋아했다. '영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의 성악가'가
한 말이니 더욱 좋았을 것이다.
이어 데이빗은 리스트의 <발라드 2번>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힘든 대작으
로서 특히 왼손 부분이 어려은 이 곡이 장엄하고 힘차게 울려 나왔다. 크리
스타벨과 키스 경은 벌떡 일어서서 팔을 활짝 벌리며 말했다. "아, 데이빗.
바로 그렇게 하는 거야!" 데이빗은 황하게 미소지으면서 키스 경에게 달려가
끌어안았다.
우리는 정원을 거닐고 차를 마셨다. 이윽고 런던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
다. 크리스타벨과 키스 경은 자동차 있는 곳까지 우리를 따라나왔고, 그 곳
에서 우리는 작별했다. 창을 내리면서 마지막으로 작별인사를 하려고 고개를
들었는데 키스 경의 얼굴에 눈물이 흘러 내리는 것이 보였다. "데이빗을 데
이고 와 줘서 고마워요." 키스 경이 나직하게 말했다.
데이빗은 키스 경이 마지막으로 한 말을 듣지 못했지만, 차를 몰고 돌아가
는 내내 그는 이렇게 소리쳤다. "이제서야! 이제서야!" 내가 무슨 말인지 묻
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물론 그 때 대학에서 선생님이 물었던 거 말예
요. '그건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그 대답을 들으려고 20년이나 기다렸어
요. 이렇게나 오래도록."
제25장 유럽, 친절한 이방인들
7월 말에 피터 포이트뱅거는 스위스 시옹에서 열리는 상급 음악 세미나에
데이빗을 초대했다. 우리는 이번 세미나가 데이빗이 동료 음악가들과 더 폭
넓게 접촉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나는 런던에서 프랑스로 출발하기 바로 며칠 전에 기브스를 풀었다. 때마
침 기브스를 풀게 되어 다행이었다. 공항에서 짐과 데이빗을 동시에 챙기는
일은 언제나 어려웠는데, 한쪽 팔을 쓰지 못하게 된 뒤부터는 거의 불가능했
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는 자동차를 세내어 스위스까지 가기로 되어 있었
다.
공항에서 붐비는 사람들 틈에 있으면 데이빗은 심리적인 압박감을 느껴 상
당히 불안해했다. 게다가 그는 아무도 우리 짐을 들고 사라져 버리지는 않으
리라는 고상한 생각도 지니고 있었다. 공항에서 탑승하기 전에 내가 처리해
야 할 일이 한 가지라도 있으면 거의 악몽같은 상황이 됐다. 데이빗의 마음
이 바로 눈앞의 상황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가듯, 그의 몸도 다른 곳으로 옮겨
가기 일쑤였고, 짐을 두고 다니지 말라는 안내방송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악수를 나누고 싶은 사람이 눈에 띄면 꼭 악수를 해야 했으므로 그 곳으로 가
버리곤 했다. 그런 다음에는 물론 그 사람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빠짐없이
데이빗의 호감을 경험하게 해 주어야 했기 때문에, 내가 데리러 갈 때까지 저
'우정의 의식'을 계속하는 것이다.
데이빗이 아무 상관없는 여행객들을 괴롭히지 않도록 하는 것도 중요한 일
이었지만, 사람들 가운데에는 다른 사람의 짐을 훔치거나 아니면 마약 같은
것을 밀수하려고 남의 짐에 숨기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최악의
경우에는 목숨까지 잃게 될지도 모르므로 사람들을 믿지 말라는 이야기를 알
아듣게 해 주는 것도 아주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데이빗은 어린아이 같은 순진한 마음에 그같은 말을 도무지 믿으려 들지 않
았다. "그렇지만 누가 우리한테 그런 일을 하겠어요. 달링? 사람들이 나한테
그럴 까닭이 뭐가 있겠어요?" 재가 사정해도 그는 이렇게 항변할 뿐이었다.
사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그의 말이 어느 정도 옳다는 것이 증명되기는
했다. 전세계를 다니면서 비행기 여행을 수백 번 했지만, 데이빗이 짐을 버
려두고 혼자 돌아 다닐때에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기적이었다.
팔에 아직 기브스를 하고 있던 동안, 내가 가방을 가지고 쩔쩔 매고 있는
시이에 데이빗은 언제나 '마구' 다녔고 그 때문에 세관원들의 의심을 샀다.
'저건 도대체 뭐야, 좀 수상하지 않아?' 하는 내용이 세관원들의 얼굴에 씌어
있었다. 히드로 공항에서는 세관원들이 우리를 따로 불러 데이빗의 흥분상태
에 대해 대단히 불쾌하게 캐물었다.
나는 데이빗의 상태에 대해 최대한 분명하게 설명해 주었지만 여전히 그들
은 의심하는 눈치였다. 데이빗이 약물에 취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
다. 사실 그는 약물을 복용하고 있었지만, 언제나 사용량을 엄격하게 지키면
서 조절했다.
기브스를 푼 후에도 상황이 썩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파리에서는 데이빗
을 자동차에 태운 다음에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적어도 자동차 안에 있
게는 할 수 있었고, 짐은 트렁크 안에 넣어 두어 안전했다. 스위스를 향하여
차를 몰고 출발한 것이 국경일 하루 전 금요일 오후였으므로 시내 도로는 꽉
꽉 막혔다. 나는 엉뚱한 방향 같아 보이는 차선에서 - 물론 '엉뚱'한 것이
아니라 차선이 '반대'로 되어 있을 뿐이지만 - 눈을 떼지 못하고 적응하려고
애쓰면서 시골 경치를 감상할 꿈에 부풀어 있었다. 개선문 5차선 가로수길을
따라 변두리를 향해 온 정신을 집중해서 가는데 데이빗이 전에 없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 어렴풋이 들렸다. "달링. 이 차에 불이 붙는게 정상
인 거예요?" 데이빗은 보닛 밑에서 피어나는 연기를 가리키면서 물었다.
다른 운전자들로부터 빵빵 소리를 많이 들은 끝에 차선 셋을 겨우겨우 넘어
가로수길 가장자리에 자동차를 세울 수 이었다. 다음에는 전화를 찾아 우리
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설명을 해야 했다, 나는 프랑스어를 조금도 할 줄
몰랐다. 곡절 끝에 시트 정비사가 도착했는데, 알고 보니 냉각기에 물을 넣
지 않은 것이었다.
몇 시간 뒤 오세르로 향하는 도로를 한참 달리고 있는데, 문득 나는 데이빗
이 아까 소동이 벌어지는 동안 참을성 있게 조용히 앉아있었다는 것을 깨달았
다. 빨리 그렁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며 떼를 쓰지도 않았고 조르지도
않았다. 내가 정비사와 자동차에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에 파리 시내로 사라
져 버리지도 않았다. 사실 너무나도 얌전히 있었는데, 그같은 난국을 완전히
의식하고 있었을 뿐아니라 거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불쾌한 현실 앞에서 그의 정신이 '안개'에 휩싸여 버린 것이 아니
라, 의식적으로 몸도 마음도 그 자리에서 머무르면서 현실을 마주 대하기로
결심했던 것 같았다.
데이빗은 좁은 길이나 터널 같은 곳에서는 약간 폐소공포증 증세를 보이기
는 했지만, 나머지 여행 동안 더할 나위 없이 협조적이었다. 시옹 못미쳐 크
랑-몽타나에는 오스트레일리아에 있는 친구가 쓰게 해 준 스키 별장이 있었
다. 산맥을 따라 도로를 타고 가는 동안 데이빗은 약간 불안해했다. 그러나
아늑한 별장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긴장을 풀었다.
스모그와 소음 위로 1500미터 올라온 곳에서 아름다운 스위스 알프스를 바
라보니 숨이 멎는 듯했다. 아침마다 데이빗은 다람쥐와 새들이 노니는 숲속
으로 산책을 나갔다가 호수에 가서 수영을 했다. 기온은 따뜻했지만 호수 물
은 영하에 가까웠다. 데이빗 말고는 수영하러 뛰어드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
다.
낮동안 우리는 상급 음악 세미나에 나갔다. 세미나에는 전세계에서 모여든
피아니스트 25명이 참가했다. 경쟁적인 분위기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 피아
노 세계에서는 아주 보기 드문 일이다 - 데이빗은 진정한 의미의 나눔을 체험
할 수 있었다. 1970년대에 대학을 떠난 뒤 처음으로 그는 동료들 사이에서
의견과 느낌을 교환하고 동료의식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마감연주회는 열흘 뒤에 있었다. 데이빗은 리스트와 스크랴빈을 연주했는
데, 이제까지의 연주와는 전혀 달랐다. 마치 음악이 혼자 숨을 쉬면서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들렸다. 연주회가 끝난 뒤 피터 포이트뱅거는 무대로 올라
와 연설하면서 데이빗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피아니스트로서뿐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데이빗에게 많이 배웠고, 세미나에 데이빗이 참여한 것
이 그에게는 영광이라고 했다. 포이트뱅거는 감정이 너무나 복받쳐 울면서
무대를 내려갔다.
우리는 시옹에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그들을 만난 덕분에 새로운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9월에는 비엔나의 베흐스타인 잘에서 데이빗이 비공
개로 리스트 독주회를 열기로 했고, 포이트뱅거는 10월에 독일 본에서 열리는
상급 음악 세미나에 데이빗을 초대했다. 그 사이에 우리는 유고슬라비아에
가기로 했다.
목적지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유럽으로 떠나오기 전 퍼
스의 친수 마리에타가 데이빗이 교습을 받는 사이사이로 휴가를 떠나고 싶으
면 이스트리아 반도 풀라 근처 마을인 메둘린에 있는 자기 집에서 지내도 좋
다고 했던 것이다, 우연히도 피터 포이트뱅거의 조수인 마리나 호랄레 역시
유고슬라비아 출신이었는데, 우리가 풀라로 갈 생각이라고 했더니 며칠 뒤에
폴라에서 합류하자고 했다.
우리는 메둘린에 도착한 다음 집을 찾느라 약간 탐정 노릇을 해야했다. 마
리에타는 이렇게 말했었다. "다들 우리 집이 어딘 지를 아니까 그냥 아무나
붙들고 묻기만 하면 돼요." 내가 유고슬라비아어를 할 줄 알거나 아니면 거기
사람들이 영어를 할 줄 알았더라면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서로 말
이 통하는 언어가 없다 보니 집을 찾는 일이 쉽지 않았다. 우리는 마을 안을
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마리에타'라는 이름을 물어 보았다. 결국 여자가
그 이름을 알아듣고 집을 가리켜 주었다.
다음에는 피아노를 찾기 시작했가. 말도 통하지 않았고 또 음악과 관련된
정보를 메둘린에서는 거의 얻을 수 없었으므로 우리는 45킬로미터 정도 떨어
진 풀라로 자동차를 몰아갔다. 자동차를 몰아가는 내내 <샐러드의 날>에 나
오는 노래 하나가 계속 귓전에서 맴돌았다. "우린 피아노를 찾고 있었요.
피아노 한 대,." 그 뒤로도 나는 여행하면서 피아노를 찾아다니는 탐험을 많
이 했다.
풀라 안을 다니는 것은 마치 고대 로마 제국을 되돌아가는 느낌이었다. 데
이빗은 로마 제국에 대해 특히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더없이 좋아했다. 로마
의 유적 가운데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원형극장이 있었는데 지금도 가끔씩
음악회가 여기서 열리기도 한다. 우리는 그 곳에 잠시 들렀다. 데이빗은 한
시간 동안 극장 안을 거닐면서 고대 로마사를 들려주었다.
나는 안내소를 찾아냈다. 영어를 약간 할 줄 아는 여자 안내원이 음악학교
로 가는 길을 알려주었다. 마침내 그 건물을 찾아내기는 했지만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8월이라 학교는 쉬고 있었다. 그렇지만 앞문이 열려 있어서 우
리는 안으로 들어가 여기저기 다녀 보았다. 몇 분 뒤 복도에서 청소원 아줌
마를 만났다. 청소원의 밝은 얼굴을 보니 반가웠다.
청소원은 영어를 전혀 할 줄 몰랐으므로, 손짓 발짓을 한 끝에 - 데이빗이
피아노를 치듯이 손을 옆으로 움직이면서 손가락으로 건반을 누르는 시늉을
했다 - 청소원은 우리가 찾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보았다. 마음씨가 아주
좋은 그 청소원은 우리를 연습실로 데리고 가서 문을 따 주었다.
데이빗은 한 시간 정도 연습했다. 우리가 연습실에서 나오니 청소원은 안
면에 미소를 띤 채 아직도 문 밖에 서 있었다. 데이빗의 음악을 몹시 즐겁게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다시 우리는 손짓 발짓을 통해 다음 날에도 또 거기서
연습하기로 했다.
다음 알 아침에 거기 가 보니 청소원은 계단에 앉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
다. 기대감에 가득찬 행복한 얼굴이었다. 청소원은 데이빗의 손을 붙들고
어제 그 연습실로 안내했다. 우리는 무척 고마웠다. 우리 둘을 믿고 그렇게
친절하게 대해 주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연습을 마치고 나올 때 우리는
초콜릿을 한 통 선물했다. 청소원은 고마워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받았다.
우리는 그 분을 만남 것에 마음 푸근해 하며 그 곳을 따났다.
마리나는 이틀 뒤에 도착했다. 우리는 이스트리아 반도를 함께 구경하며
다녔다. 마리나는 수영을 하고 싶다고 했다. 데이빗이 그거 정말 좋은 생각
이라며 환영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우리는 바닷가로 차를 몰고 나가
바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드리아해는 황금빛이 감도는 푸른 물결을 끝
없이 일렁이며 수평선 저편 아득히 옅은 물안개 속으로 펼쳐져 있었다. 마리
나는 바다 건너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쪽에 베니스가 있잖아요."
우리 셋은 모두 물에 들어갔다. 잠시 뒤 마리나와 나는 물 밖으로 나오고,
데이빗 혼자 물 속에 남아 수영을 계속했다. 우리 둘은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던 모양이다. 다시 바다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았을 때에는 데이빗
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잠시 당황해 하다가 우리는 얼굴을 마주 보며 동
시에 외쳤다. "베니스까지 헤엄쳐서 가고 있는 거예요!"
마리나는 벌떡 일어나 데이빗을 데려와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 바위 위를
이곳 저곳 뛰어다녔다. 마침내 모터보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찾아내어, 두
사람은 함께 배를 몰고 나가서 데이빗을 데리고 돌아왔다. 데이빗이 무사히
돌아왔을 때 나는 데이빗에게 확실하게 약속했다. 다음에 이탈리아에 들리면
자동차로 베니스에 데려다 주겠노라고.
유고슬라비아 여행을 마친 다음 우리는 런던으로 돌아갔다가, 비엔나로 가
서 데이빗의 연주회를 하고, 그 다음에는 본으로 가서 포이트뱅거의 상급 음
악 세미나에 다시 참석했다. 이번 세미나는 포이트뱅거의 친구인 에스더 프
리드만이 주선했는데, 포이트뱅거는 우리가 그녀와 함께 지낼 수 있도록 자리
를 마련해 주었다.
활동적이고 대단히 사교적인 에스더는 바드 고데스베르크에 있는 본 음악원
에서 음악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본 근교에 있는 널찍하고 안락한 집에서 살
고 있었다. 에스더는 만나자 마자 데이빗과 나를 가족처럼 맞아 주었고, 그
때부터 우리는 친한 친구가 되었다.
에스더는 1930년대 말에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났는데, 에스더가 이스라엘이
정착하기 이전에 보낸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자 데이빗은 넋을 놓고 들었다.
에스더와의 우정을 통해 데이빗은 자신의 민족성과 유대주의, 시온주의 전반
에 대해 난생 처음 진지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편견이 없었고 깨닫는 것
도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언젠가는 한 번 이스라엘에 꼭 가 보아야겠
다고 결심했다.
상습 음악 세미나는 바드 고데스베르크 음악대학에서 열렸다. 이번에도 포
이트뱅거와 그밖의 다른 참석자들로부터 음악을 배우려는 피아니스트들이 전
세계에서 몰려들었다. 훤칠한 키에 머리칼이 검고 콧수염에다 눈빛이 친근한
30대 초반 청년이 슈만의 <카르나발>을 연주하는 것을 듣고 감명을 받은 일이
특히 내 기억에 남는다. 그는 세미나 휴식시간에 담배를 피우러 밖으로 나갔
다가 애연가 동지 한 사람이 입맞추고, 포옹하고, 마구 말을 걸었던 일을 지
금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 피아니스트는 닐스 루벤스였는데, 데이빗을
만난 그 날 이후 그의 인생이 판이하게 바뀌었다고 나에게 말한 적이있다.
데이빗의 음악이 닐스의 영혼에 와 닿았던 것 같다. 닐스는 데이빗이 마지
막 날 마감연주회 때 리스트를 연주하는 것을 듣고 그 사건을 자신의 음악에
서 '제0일'로 삼았다. 더할 수 없이 인상이 좋고 상냥한 데다가 개구쟁이 같
은 익살을 지닌 닐스는 덴마크 태생으로 코펜하겐에서 살고 있었다. 우리는
세미나 기간 동안 닐스와 자주 만났다. 데이빗이 음악계에서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을 자주 마주쳤는데, 이런 인연이 계기가 되어 나중에는 데이빗의 일생
에서 가장 중요한 밤 가운데 하나로 이어진다.
유럽에서 지내는 시간은 10월 말에 끝났다. 지난 5개월간의 경험은 데이빗
에게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겼다. 우리가 바라던 것 - 훌륭한 음악가들과
교류를 주고받고, 아무 편견도 없는 사람들이 데이빗의 음악을 평가해 주고,
데이빗의 곡 해석능력을 키우는 등 - 모두를 이룰 수 있었다. 많은 친구를
사귀면서 우리는 바라는 이상으로 많은 것을 얻었다.
허파에 대해 또다른 진단을 내렸다. 데이빗을 지찰하고 X레이를 더 살펴보
고 한 끝에 박사는 만일 데이빗이 담배를 완전히 끊지 않으면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이 무렵 담배를 하루 한 갑 이하로 줄인 상태였지만.
멀러 박사의 말에 데이빗은 뜨끔했다. 시간이 얼마 없다는 생각이 든 것이
다.
히드로 공항에서 오스트레일리아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오르기 직전에, 여전
히 담배를 피워 대는 데이빗을 쳐다보다가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퍼스
공항에 우리를 마중 나와 있는 친구가 아주 많을 텐데, 비행기가 도착할 때까
지 담배를 끊는다면 친구들에게 놀라운 선물이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맞아요, 달링." 데이빗이 대답했다. 그러더니 그는 재떨이로 다가가 담배
를 비벼 꼈다. 그 뒤로 다시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제26장 수도꼭지
1986년 말에 오스트레일리아에 도착하여 보니 여러 가지가 달라져 있었다.
가장 두드러진 일은 5월에 데이빗이 마지막으로 연주한 다음 리카도는 문을
닫았고 크리스는 다른 사업을 벌이고 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살던 곳의 집세
가 많이 올라 차라리 집을 사는 것이 더 합리적인 것 같았다.
그리하여 1987년 1월에 나는 마이클 패리에게 전화를 걸어, 집 계약금을 낼
만한 돈이 데이빗 앞으로 남아 있는지를 물었다. 마이클은 그 전 해에 전국
순회공연이 순조로웠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나는 얼른 신문을 뒤져, 낡은 가건물이 들어서 있는 '개발구역'을 판다는
광고를 찾아냈다. 과거에 집을 많이 사고 판 경험이 있었으므로 나는 그 곳
이 대단히 가치가 있는 곳이라 판단했고, 이내 그 곳은 우리 소유가 되었다.
계약을 마무리지으면서 중개인에게 우리가 곧바로 이사를 들어갈 것이라고 했
더니, 그는 놀란 듯이 나를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설마 거기서 사시겠다
는 말씀은 아니겠죠?"
그러나 나는 쓰러지기 직전의 집을 아늑한 보금자리로 바꾸는 일에서 가장
창의적인 보람을 느꼈으므로, 낡은 카펫은 얼른 걷어치우고 바닥은 왁스로 닦
아 내고 집에는 페인트를 새로 칠하고 방 몇 개에는 벽지를 새로 입혔다. 부
지가 꽤 컸으므로 우리는 절반을 팔아서 투자자금을 마련했고, 나머지 땅에는
언제나 좋은 친구인 피터 브래클리의 도움으로 종료나무, 고사리, 장미와 진
달래를 심었다. 데이빗은 난생 처음으로 스스로를 자랑스런 집주인으로 부를
수 있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1994년에 와서야 나는 데이빗에게는 돈을
벌고 있다는 생각도 없고 부동산 소유주라는 생각은 더더구나 이해하지 못한
다는 것을 알았다.
스완 강은 이제 사실상 뒷문 바로 밖에 있는데 이 점이 데이빗에게는 너무
나도 유혹적이었다. 다행히도 저 드넓은 강에서도 - 어떤 곳에서는 폭이 1킬
로미터가 넘는 곳도 있었으니 - 특히 우리 집 부근이 교통량이 비교적 적었
다. 데이빗 말고는 그 강에서 수영하려는 사람이 없겠지만, 나는 그가 수영
을 한다 해도 안전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따금씩 노나 요트를 아슬
아슬하게 피한 일이 있었다. 그는 늘 안경을 낀 채로 수영하면서, 머리를 물
위로 높이 든 채 '교통'울 관찰했다. 유럽 여행길에서 얻은 취미였다.
'교통'은 거리를 따라 움직이는 차량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 멀찍이
안전한 거리만큼 떨어져서 관찰하는 데이빗의 입장에서는 오가는 사람들, 활
주로의 비행기, 여객선과 화물선, 날아가는 새 등이 모두 '교통'이었다. 유
럽의 고속도로를 달릴 때 데이빗은 자동차 안이라는 작은 공간 안에서 바깥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한동안 그러고 난 뒤 그는 그것이 정신집중에 도움이 된
다는 것을 알았다. 바깥에서 흘러가는 '교통'의 패턴과 속도에 나타나는 일
정한 규칙이 일종의 최면효과를 일으켜, 그의 머리 속에서 빠르게 두서없이
흘러가는 '생각의 교통'을 정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피아노 앞에 있지 않을 때에는 '교통'을 지켜보는 것이 일과가 되었
다. 이는 또한 그가 제일 좋아하는 화제가 되어, 들어주는 사람만 있으면
'파리의 교통'이나 '런던 트라팔가의 교통'에 대해 재잘거리는 것이었다. 저
혀 낯모르는 사람에게도 마치 다른 사람들이 날씨를 화제로 꺼내듯 혼잣말처
럼 '교통' 이야기를 시작하곤 했다. 물론 이같은 행동을 사람들은 대부분 전
혀 의미 없는 소리로 들었다. 그를 잘 아는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래서 사람들은 오랫동안 그의 이런 행동을 단지 데이빗의 수많은 기벽 가운대
하나인 것으로 접어 두고 지나갔다. 그러나 그는 전체적으로 조금씩 조리 있
게 변해 갔고, 어느 날 그것이 진짜 중요한 이유를 밝히게 된다.
하여튼 스완 강에서 수영을 즐기는 데이빗에게는 그 곳이 세상에서 제일 조
건이 좋은 곳이었다. 그는 물 속에 있을 수 있었고, 강과 바닷가에서 오가는
'교통'을 모두 관찰할 수 있어다. 단 한가지 더바랄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
은 물 위에 떠 있는 피아노였을 것이다. 불가능하고도 해괴해 보이는 이같은
생각이 어느 날 거의 현길로 다가왔다. 퍼스 근처에서 요트 정박장을 새로
만들었을 때 개장식 축하연주를 부탁 받은 것이다.
개장식은 저녁 텔레비전 방송에 나올 예정이었지만, 촬영은 이른 아침에 해
두어야 했다. 계획은 방파제 끝에 그랜드 피아노를 올려 놓고 핼리콥터에서
연주장면과 방파제 자체를 많이 촬영하는 것이었다. 데이빗은 라흐마니노프
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에서 낭만적인 18번째 변주를 연주하기로
동의했다. 녹화가 시작되기 전에 나는 데이빗에게 그만 하라는 신호를 보낼
때까지 18번째 변주곡을 계속 되풀이해서 치라고 했다. 텔레비전 촬영팀이
여러 각도에서 녹화를 많이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날은 몹시도 덥고 바람이 많이 불었지만, 모두들 아랑곳하지 않고 촬영
에 나섰다. 데이빗은 연주를 시작했고, 촬영팀은 녹화를 시작했다. 모든 것
이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 갑자기 한 줄기 광풍이 불
어 피아노 덮개가 떨어져 나갔다. 덮개는 공중으로 떠올라 잠시 머무는가 싶
더니 요란하게 물을 튀기면서 바다에 떨어졌다. 데이빗은 마치 아무 일도 없
는 것처럼 전혀 박자를 놓치지 않고 연주를 계속했다. 카메라 촬영팀은 데이
빗의 그같은 집중력이 도대체 가능하기나 한 일인지 감탄하면서 다들 놀라워
했다.
서핑을 즐기던 사람들이 피아노 덮개를 뭍으로 끌고 올라왔는데, 촬영팀은
덮개가 공중을 멋지게 날아가던 때에 애석하게도 헬리콥터가 회전하고 있었으
므로 그 장면을 찍지 못해 너무나도 안타까워했다. 나중에 데이빗에게 기분
이 어땠는지, 덮개가 날아갈 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물었더니 그는 약간 어리
둥절한 듯이 말했다. "왜들 그걸로 그렇게 법석을 떠는 거죠?" 데이빗이 말
했다. "난 겁나지 않았어요. 그냥 연주를 계속했죠. 그게 오늘 맡은 사명
이었으니까요. 그게 내가 맡은 임무고 그래서 그냥 연주만 했어요. 내쪽으
로 날아와서 나를 두동강이 내지 않은 게 천만 다행이에요." 데이빗은 쿡쿡
웃더니, 이번 사건이 사실은 "너무너무 재미있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피아노, 물, 게다가 헬리콥터까지 - 모두가 '교통'이었
으니까!
이 사건이 있는 며칠 뒤 우리는 에스더 프리드만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몹시 흥분해 있었다. 본 지역 음악계에서 영향력이 큰 폴 박사라는
사람과 만났다고 했다. 에스더는 그가 데이빗의 독주회를 주선하는 데에 크
게 도움을 줄 것으로 생각했는데, 과연 그는 자기 집에서 음악의 밤을 열어서
데이빗을 고전음악계 사람들에게 소개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의했다. 에스더는
우리가 다음 달에 독일의 쾰른에 와서 이번 음악의 밤에 참석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나는 마이클에게 전화를 걸어 이번 일로 지구 반대쪽으로 여행을 가는 것이
어떤 효과가 있을지를 물었고, 한동안 의논한 끝에 우리는 한번 참석해서 어
떻게 되는지를 보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마이클은 우리와 함께 가
겠다면서, 이번 기회에 유럽 사람들을 좀 사귀어 두어야겠다고 했다. 우리는
비행기편을 예약했고, 따뜻한 옷은 모조리 챙겨 - 퍼스는 한창 무더운 여름이
었으니 기분이 어색했다 - 두 번째 유럽 여행길에 올랐다.
에스더는 우리를 자기 집으로 반갑게 맞아들였고 이번 계획에 대해 자세하
게 설명해 주었다. 개인 저택에서 16명 정도가 참석한 가운데 비공개 연주회
를 여는데, 연주가 끝난 다음에는 공식적인 만찬이 있을 계정이었다. 이틀을
연이어 그같은 행사를 열기로 했다.
우리는 쾰른에 도착했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데이빗은 러시아풍 셔츠
차림이었고 - 데이빗이 러시아풍 셔츠를 공식 연주복처럼 입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 된 일이었다 - 손님들은 모두들 그의 연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넓
다란 응접실에는 연주회용 뵈젠도르퍼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었고, 식당에
는 멋진 도자기 접시와 꽃과 촛불이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그 광경을 보자
마자 데이빗이 그 처럼 격식을 갖춘 식사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주회가 있고 나면 특히 더 흥분해 있기 때문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다.
데이빗이 등장했고, 청중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리스트의 <발라드> 2번
B단조를 시작으로 <라 캄파넬라>, <헝가리안 광시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 날 저녁 노래를 흥얼거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나는 눈을 감고 데이
빗이 조용히 있기만을 빌었다. 제발 제발 제발 노래를 흥얼거리지 말라고 온
정신을 기울여 텔레파시를 보냈지만 그는 내 생각을 읽은 기색이 전혀 없었
다.
잠시 휴식시간이 되었다. 쉬는 시간에 나는 데이빗에게 노래를 부르는 일
이 절대로 있어서는 안된다며 상당히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쉬는 시간이 끝
난 다음 그는 <열정 소나타>를 연주했는데, 이번에는 흥얼거리는 소리가 훨씬
줄어들었다. 폴 박사는 감명을 받은 것 같았다. 행사가 끝난 다음 뒤 그는
마이클과 나에게 자기가 들어 본 베토벤 곡중에 최고였다고 말했다. 우리는
앞으로 있을 독주회 생각에 잔뜩 가슴이 부풀었다.
나중에 에스더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우리가 폴 박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
는 동안, 그 자리에 있던 리스트의 증손녀가 에스더에게 다가와서 말하기를
데이빗은 리스트의 작품에 너무나도 근접해 있어서 증조할아버지인 리스트의
화신이라고 해도 될 정도라 했다 한다.
그러나 독주회가 끝난 뒤 식탁에서 데이빗이 어떻게 나올까 하는 걱정은 현
실로 나타났다. 얼굴에는 피아노로 되돌아가고 싶은 표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게다가 데이빗의 포옹과 끊임없이 늘어 놓는 이야기를 그다지 편안
하게 생각하지 않는 손님들도 있었다. 저녁이 깊어 갈수록 앞으로 독주회를
계속 열게 될 가능성이 멀어져만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결국에는 그렇게
되고 말았다.
에스더는 독주회 결과가 그렇게 되자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데이빗
을 위해 이번 기회를 마련하느라 애를 많이 썼으므로 실망은 더욱 컸다. 그
렇지만 우리는 그 같은 실망을 앞으로도 많이 겼을 것이므로 받아들이는 법도
배워야 했다. 하여튼 일단 이번 일에서 데이빗이 연주 동안 노래를 부르지
않도록 하는 일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은 분명해졌다.
하루 이틀 뒤, 마이클은 샤워를 하러 욕실에 들어갔는데 - 데이빗이 나올
때까지 꽤 오랫동안 기다렸다 - 옷을 벗고 수도꼭지로 손을 뻗었다가 거기 꼭
지가 없는 것을 알았다. 샤워 꼭지도 마찬가지였다. 떨어져 나온 정도가 아
니라 부품 상태로 분해되어 오렌지 껍질과 함께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벽에
박힌 수도관에서 물이 마구 쏟아지고 있었다. 마이클은 에스더를 더 이상 걱
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샤워하러 들어갔던 마이클이 혼자서 조용히 상황을 수습하자니 거의 한 시
간이나 걸렸다. 그는 작은 가위와 빗을 이용해서 샤워기를 겨우겨우 도로 조
립했다. 에스더에세는 그 날 있었던 자그마한 홍수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필시 에스더는 데이빗의 메니저도 데이빗 만큼이나 결벽증이 있는
괴짜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다음 주에 잘츠부르크에 도착했을 때 마이클은 또다시 데이빗이 욕실에
다 벌여 놓은 사건을 수습해야 했다. 우리는 도시 한가운데에 있는 낡은 기
숙사식 여관에서 묵기로 되어 있었다. 우리 방은 2층에 있었고 길다란 복도
한쪽 끝에 공동으로 쓰는 욕실이 있었다.
폭설을 뚫고 달려왔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춥고 지치고 배가 고팠다. 그러
나 데이빗은 우리와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가려 하지 않고, 혼자 방에 남아 비
스킷과 치즈를 먹겠다고 했다. 마이클과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데이빗
은 혼자 남아 바닥에 엎드려 나름대로의 팔굽혀펴기를 하면서 읽을거리를 읽
었다.
비수기여서 손님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여관은 전체적으로 아주 조용했다.
포도주 몇 잔과 음식을 배불리 먹고 나니 마이클과 나는 피로가 나른하게 몰
려오는 것을 느꼈다. 우리는 방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계단으로 다가가는데
계단이 이상할 정도로 젖어 있는 게 눈에 띄었다. 나는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어 얼른 올라가 보았다. 세상에,. 복도 저쪽에서 물이 줄기차게 흘러오고
있었고, 욕실에서는 즐거운 노랫소리가 불안한 음정으로 퍼져나오고 있었다.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욕실에 달려들어가니 데이빗은 샤워실 하수구명을 마개와 비누로 막아 놓고
랄랄라 흥겹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물이 샤워실 턱을 넘쳐흐르고 있었다.
마이클과 나는 얼른 수도꼭지를 잠그고 수건을 집어든 다음 물을 닦아 내는
대장정에 올랐다. 여관 주인이 이 사건을 알면 정말로 곤란한 처지가 될 판
이었다. 방세를 특별히 싸게 흥정한 것이 바로 조금 전 일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복도를 오가면서 닦고 짜기를 반복했다. 데이빗은 주위를 맴돌면서
웃음띤 얼굴로 계속 말했다. "아, 미안해요, 달링. 미안해요."
몇 해 뒤 마이클은 이렇게 말했다. "장난꾸러기의 뒤치닥거리를 하느라 한
두 시간을 보내고 나면 그 사람이 아무리 거장이라 해도 존경의 눈길을 보내
기가 쉽지 않죠." 나도 그 말에 전적으로 동감이었다. 하여튼 잘츠부르크에
서 그 사건이 있은 뒤로 나는 앞으로는 데이빗이 욕실에 있을 때에는 더욱 신
경을 많이 써야겠다고 생각했고 - 욕실에 있는 남자를 여자가 신경 쓴다는 것
은 쉬운 일이 아니다 - 그처럼 커다란 물난리는 그 뒤로 또 한 번 더 있었
다. 우리가 머물던 어느 집 꼭대기층에서 데이빗이 '홍수'를 일으켰는데, 목
재 바닥으로 스며들어 아래층에까지 물이 넘쳐 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친구들 집에서 데이빗이 일으킨 그 나머지 '홍수'에서는 이에 비해 그다지
큰 피해가 없었지만, 데이빗은 새로운 말썽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손가락 힘
이 어느 정도인지를 잊어버리고 수도꼭지를 너무나 세게 잠근 나머지 손잡이
가 튕겨 달아나는 것이다. 집에서는 꼭지에 대한 감각이 익숙했기 때문에 수
난을 겪는 것은 주로 호텔이나 친구네 집 꼭지였다. 최근에 우리는 별장을
빌려 가족휴가를 보낸 적이 있는데, 거기서 내 아들 스콧이 꼭지를 고친 다음
에 데이빗에게 이렇게 권했다. 어디를 가든지 미용사나 트레이너를 데리고
다니는 연주자들처럼, 데이빗에게는 전속 수도 배관공이 따라 다니는게 어떻
겠냐는 것이었다.
제27장 '피아니스트'와 '괴물'
우리는 앨리스 여사의 90번째 생일에 맞춰 오스트레일리아로 돌아와, 특별
한 생일선물을 궁리했다. 의논한 끝에 데이빗과 나는 여사가 평생토록 제일
사랑한 것이 연주였으므로 그것을 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주자는 것으로
결정을 보았다. 연주회를 열어 주자는 것이었다. 연주회를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한다는 것은 힘에 부칠수도 있으므로 우리는 여사를 데이빗의 연주회에
특별손님으로 모시기로 했다.
여사를 만나 이 이야기를 꺼냈더니 여사는 정말로 좋은 생각이라고 하면서
곧바로 곡목을 고르기 시작했다. 마이클이 바쁘게 움직여 홍보한 덧분에 연
주회 입장권은 - 이번에도 옥타곤 극장에서 열었는데 - 금방 매진되었다.
이번 연주회는 거기 모인 사림들 모두에게 아주 감동적인 것이었고, 앨리스
여사는 스카를라티와 리스트의 곡을 연주한 뒤 학생들과 친구와 팬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았다. 여사는 훌륭하게 연주를 해냈고 데이빗은 여사의 기억력
에 놀랐다. 전체적으로 볼 때 여사에게해 드린 선물은 대성공이었다. 그러
나 단 한 가지 흠이 있었다.
연주회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 퍼스의 작곡가 매리 엔델이 특별히 곡을 썼
고 데이빗은 그 곡을 앙코르에서 초연하기로 했다. 그러나 연습할 시간이 거
의 없었으므로 곡을 외우지는 못했다. 나는 데이빗이 무대 위로 걸어 나가는
뒷모습과 매리를 번갈아 쳐다보며 그가 잘 기억하기만을 바랬다.
메리의 작품은 대단히 좋았고 데이빗은 이 작품을 아름답게 연주하기 시작
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문득 나는 이제껏 한 번도 들어 본 일이 없는 곡
을 데이빗이 연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메리의 얼굴에는 두려움과
난감한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 흐르더니 곡은 원래대
로 돌아와 제대로 끝을 맺았다.
청중들 가운데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것 같았
고, 사람들은 이 작품을 좋아했다. 메리는 그처럼 가망이 없어 보이는 상황
에서 데이빗이 어떻게 빠져 나올 수 있었는지를 무엇보다도 알고 싶어했다.
데이빗은 약간 겸연쩍은 얼굴로 이렇게 대답했다. "글쎄요, 내가 엉뚱하게
나가고 있다는 걸 알았죠. 그래서 올바른 곳으로 얼른 되돌아왔어요."
그 연주회가 있은 뒤 브라이언 리나커가 우리에게 지방 순회공연을 제의했
다. 처음에 데이빗은 주로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아의 남서부 지역에서만 연주
했지만 그 뒤에 멀리 북서부 지방까지 영역을 넓혀, 지구상에서 가장 외진 곳
에 속하는 것으로 치는 여러 마을 주민에게 쇼팽과, 드뷔시, 멘델스존, 슈베
르트, 그리그, 거쉰 등을 들려 주었다.
이런 작디작은 마을 청중들은 무척 고마워하면서 - 일단 그런 지역으로 순
회공연을 오는 피아니스트가 별로 없었으니까 - 데이빗에게 그같은 마음을 전
했다. 피아노를 구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지만 우리는 포트 헤들랜드에서 연
주하고, 브룸에서는 독주회를 두 차례 열었고 다음에는 더비로 갔다. 더비에
서는 고맙게도 그 곳 수녀들이 수녀회의 야마하 직립형을 쓰게 해 주었다.
킴벌리 고원지대에 있는 쿠누누라의 아가일 다이아먼드 광산촌에는 당시 인
구가 1천2백 명 정도 였는데, 그 곳에는 연주회장도 피아노도 없었다. 친절
한 그 곳 은행장 한 사람이 자기 피아노를 쓰게해 주었는데, 커다란 실내경기
장 안에 자그마한 직립형 피아노가 서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우리는 약간 실망
했다.
연주회에는 주민 1/4 이상이 참석했고 - 나는 쿠누누라에서 연주한 피아니
스트는 데이빗이 처음이라고 확신한다 - 데이빗은 그들을 실망시킬 수 없었
다. 언제나 도전에 응하는 자세가 되어 있는 데이빗인 만큼 그는 그 작은 악
기를 달래고 어루만져 미묘한 표현까지 이끌어 내는 작업을 시작했다. 청중
에게 자신의 음악을 전달하는 데에 성공한 데이빗은 기립박수를 받았다. 그
가 여지껏 받은 기립박수 중에서도 가장 따뜻한 것이었다.
순회공연에서 돌아온 뒤 우리는 그랜드 피아노를 구입하기 위해 특별히 구
성된 위원회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기금을 모으기 시작했다는 내용이었다.
이같은 열성과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맺었고, 한 해 뒤 데이빗은 다시 쿠누누
라로 가서 새 야마하 그랜드 피아노로 개시연주회를 열게 되었다.
이런 지방 순회공연과 또 크리스티 코크번이 많이 주선해 준 텔레비전 출연
덕분에 낯설고도 요술 같은 현상이 생겨났다. 전혀 뜻밖의 사람들이 데이빗
을 알아보고 말을 걸기 시작한 것이다. 하도 작아서 다니는 길이 하나뿐인
마을의 우체국 직원, 고속도로 주유소에 멈춘 트럭 운전기사, 외딴 어촌 잡화
상에 들어온 노인 등 많은 사람들이 데이빗을 보면 마치 가까운 친구인 것처
럼 금방 말을 걸기 시작했다. 이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그를 '피아니스
트'라 불렀는데 - '데이빗'으로 부르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 오스트레일리
아 사람들 특유의 편안하고도 간결한 투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아! 바로
그 피아니스트로군요! 잘 지냈어요? 피아노 계속 치세요!" 그러면 데이빗은
너무나 좋아했다.
데이빗이 연주를 할 때면 - 실황공연이든 방송이든 - 자신의 아주 많은 부
분을 청중들과 함께 나누기 때문에 벽이 없어 보이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
래서 사람들이 데이빗을 친슨하게 느끼는 것이 아닐까.
물론 이따금씩 사람들이 데이빗에게 욕을 하거나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불행한 경우도 있었다. 그 때까지는 그런 반응을 상쇄시킬만한 것을 데이빗
이 경험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사람들의 호감과 따스한 태도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예의 없는 몇 가지 말은 훨씬 더 받아넘기기가 쉬워졌다. 특히 내가 그
랬다.
오스트레일리아 북서부 지방 순회공연을 마치고 나니 다시 포이트뱅거를 만
나고 시옹의 상급 음악 세미나에 참가할 때가 되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짐
을 꾸려 유럽으로 출발했다. 세미나는 이번에도 성공이었다. 과정이 끝나
갈 무렵 시옹 음악원 관계자 한 사람이 포이트뱅거를 찾아와, 이브리 지틀리
가 맡고 있는 바이올린 학생들의 연주를 위해 반주를 맡아 줄 사람이 있겠느
냐고 물었다. 포이트뱅거는 데이빗이 초견 연주(악보를 보고 즉시 연주하는
것)에 뛰어나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데이빗에게 해 보겠느냐고 물
었다. 데이빗은 기꺼이 해 주겠다고 했다.
그 날 이브리 반에 나온 학생들은 열네 명쯤 되었다. 학생들은 한 사람씩
나와서 소나타를 연주했는데, 데이빗은 이들에게 피아노 반주만 해 준 것이
아니라 목소리 반주까지도 해 주었다. 세 번째 학생이 모차르트의 소나타 연
주를 마쳤을 때 이브리는 피아노 곁으로 다가가 데이빗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
으면서 말했다. "이 분은 음악의 화신이야."
그런 다음 이브리는 학생들에게 연주하는 동안 노래를 부르라고 했다. 그
들에게는 분명 특별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는 음악적 영혼의 진정한 표현
이기 때문이라며 데이빗이 연주를 하는 동안 노래를 부를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고 했다. 비록 나는 거기에 반대하지 않았지만, 그 뒤 청중들은 대체로
목소리보다는 피아노 소리를 더 듣고 싶어한다는 점을 데이빗에게 강조해 두
어야만 했다. 데이빗은 이번 일에서 너무나도 신나 했다. 나는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이 계속 문제로 남아 있겠구나 싶었다.
오스트레일리아로 돌아오기 전에 데이빗과 나는 파리에 가서 친척의 결혼식
에 참석해야 했다. 우리는 가까스로 값싼 비행기표를 구했지만, 개트웍으로
가서 비행기를 타야 했다. 이 공항에는 이제껏 한번도 가 본 일이 없었는데,
거기 도착하니 아주 기분이 좋지 않은 곳이었다.
사람들이 마치 가축 때처럼 이리저리 몰려다니고 있었다. 좁은 까닭에 서
로 몸을 바짝 비비면서 탑승구를 찾아 헤매는 것이었다. 의자는 앉을 곳이
없고 식당에도 사람들이 가득했다. 사방이 너무나 막혀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앞으로는 이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지 않아도 되도록 돈을 좀 더 들여서
좋은 표를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데이빗도 이 곳을 좋아하지 않는 눈치가 분명했는데, 사실 이 곳을 좋아할
만한 사람이 있을지 조차 의심스러웠다. 데이빗의 눈빛에 두려움이 나타나는
것이 보였고 마음의 동요가 커지는 것이 몸짓에 나타났다. 그가 손을 떨기
시작하자 나는 몹시 걱정이 되었다.
화장실로 가면서 우리는 청소원을 지나쳤는데, 청소원은 더러운 접시를 가
득 담은 수레를 밀며 인파 틈에서 애쓰고 있었다. 우리가 그 곁을 지나치는
바로 그 순간에 청소원은 몇 걸음도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 때문에 짜증을 내
면서 이렇게 말했다. "에이, 정말 신경질 나!" 그리고는 사건이 벌어졌다.
데이빗은 귀가 찢어질 듯한 소리를 지르고, 팔을 마구 휘저으면서 내 쪽으
로 바짝 붙어 섰다. 완전히 겁에 질린 표정으로 계속 비명을 지르면서 발버
둥쳤다. 나는 뜻밖의 상황에 너무나도 놀랐지만 당황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데이빗이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이제껏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군중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데이빗의 고통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팔로 그를 껴안으며 그가 팔을 마구 휘두르는 것을 제지하려 했다.
그리고는 말했다. 빠른 속도로. 아무 일도 없다, 말뿐인데 뭘그러느냐, 청
소원은 당신을 겁주자고 한 말이 아니다, 내가 곁에 있으니까 안전하다. 그러
나 데이빗은 계속해서 비명을 지르면서 울었다. 낯설고도 가슴아픈 소리였
다.
주위에서 우리를 이상하게 보기 시작하자 이내 경찰이 우리를 에워쌌다.
다행히도 데이빗은 그 때쯤 진정하기 시작했다. 경찰 한 사람이 데이빗이 마
약에 취해 있는지를 캐물었다.
내가 상황을 설명하자 경찰은 충분히 이해했지만, 데이빗과 나는 모두 그가
이처럼 심하게 반응한 데에 대해 큰 충격을 받았고 까닭도 알지 못해 더욱 답
답했다. '미친'이라든가 '정신병원', '얼간이', '정신병자' 같은 말을 들으
면 데이빗은 병원에 있던 기억이 되살아 겁을 먹곤 했지만 이렇게나 두렵고
고통스러운 정도는 아니었다.
경찰이 물러간 뒤 처음부터 상항을 지켜보았던 상냥해 보이는 중년 여자 한
사람이 혹시 도와줄 만한 일이 있겠는지 물었다. 나는 데이빗이 이제 가라앉
아서 괜찮다고 하면서 고맙다고 말했다. 낯선 사람 얼굴에서 친절을 보니 그
염려하는 마음과 돕고자 하는 태도에 적잖은 안심과 위로를 느꼈다.
그 다음 한 줄 동안은 모든 것이 괜찮아 보였다. 데이빗은 오스트레일리아
로 돌아갔을 무렵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렇지만 얼마
안 가 그는 낮동안 보통 때보다 조금 더 불안해 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고
밤에는 좀 더 뒤척거렸다. 하루하루 지나갈 때마다 나는 데이빗의 증세가 그
저 기분이 극단적으로 바뀌어서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기가 점점 더 힘들어졌
다.
어느날 우리는 저녁 식사 초대를 받고 브래클리 부부 집으로 갔는데, 데이
빗은 기분이 보통 때보다 약간 더 동요되어 있는 상태였다. 식사를 마친 뒤
모두가 거실로 자리를 옮겼는데, 데이빗은 이상하게 불편해 하면서 안절부절
못하는 것 같았다. 피터 브래클리는 소파에서 데이빗 곁자리에 앉아 그 집
고양이 밍커를 안아올렸다. 고양이를 쓰다듬고 토닥거리면서 피터는 장난스
럽게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밍커는 스컹크, 밍커는 스컹크."
그 순간 데이빗의 행동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는 펄쩍 일어서더니 극도로
흥분항 상태가 되어, 보통 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앞뒤 없는 말을 지껄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대로 뒤로 드러누웠는데, 너무나 세차게 누운 통에 소
파가 뒤로 넘어갔다. 데이빗은 팔을 마구 내젓고 고개를 뒤흔들었다. 얼굴
에는 겁에 질린 표정이 나타나있었다.
나는 재빨리 다가가 그를 단단히 붙들면서 발작을 멈추려 했다. 너무나도
겁나는 상황인 데다가 어쩌면 좋을지, 왜 이런 일이 생기는지를 아는 사람이
우리 가운데에는 아무도 없었다. 잠시 뒤 - 우리가 느끼기에는 영겁 같았지
만 - 데이빗은 다시 몸가짐을 가다듬었다.
바바라와 피터와 나는 속소무책 그 자체였고, 피터는 고양이를 두고 아무
뜻없이 한 말 때문에 데이빗이 발작한 것 같아 너무나도 미안해했다. 어떻게
보면 그 사건은 개트윅에서 있었던 일과 비슷했지만, 이번에 계기가 된 듯란
'스컹크'는 사실 아무 의미 없는 말 같아 보였다. 그런데 왜 그런 발작을 일
으켰을까?
집으로 돌아온 뒤 데이빗은 피터가 한 말에서 갑자기 '학교에서 아주 더러
웠던' 일이 생각났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고양이를 '스컹크라고 부른 것을
듣는 순간 데이빗은 다섯 살 어린아이로 되돌아 간 것이었다. 그 때 그 학교
에서 대변을 참지 못한 일이 있었는데, 창피하기도 하고 놀라기도 하여 달아
나 숨어 버렸다. 급우들을 보기도 부끄럽고 그들의 놀림감도 되기 싫었던 것
이다.
그렇지만 사건의 원인이 오로지 이것뿐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데이빗은
전에도 그 시절의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었는데, 당시의 기억에
대해 이런 식으로 반응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그 일이 이제 와서 왜 그토록
스트레스를 주는 걸까?
그 날 밤 데이빗은 너무나 슬퍼하면서 자신을 두려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에
사로잡혔다. 그는 계속 자신이 '괴물'로 변해 버렸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
신의 참 모습을 영영 되찾을 수 없게 되지 않으까 겁을 먹고 있었다. 사랑하
는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마구 뒤흔들면서 스스로를 고문하는 모습을 보니 나
는 견딜 수가 없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바바라의 어머니 릭스 위버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진정
으로 비범한 사람인 릭스는 스위스의 융 연구소에서 공부한 최초의 오스트레
일리아 사람이었고 실제로 융을 만나기도 했다. 오스트레일리아로 돌아온 뒤
릭스는 융 협회를 창설했고, 팔순이지만 아직도 융 방식의 정신분석으로 그
방면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릭스는 딸 집에서 살고 있었으며 데이빗을 잘 알
았다. 간밤에 릭스가 외출에서 돌아온 뒤 데이빗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곧
바로 도와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 뒤로 두 주 동안 릭스는 '괴물'에 대해
데이빗과 대화를 나누었다.
릭스는 데이빗에게 커다란 스케치북을 사 주라고 했고, 데이빗은 날마다 릭
스를 찾아가서 '괴물'을 그렸다. 처음에 데이빗이 그린 그림은 마구잡이인
데다가 발작적이었다. 나선, 톱니모양 등 불규칙하여, 그가 마음속에서 겪는
고통을 놀랄 정도로 뚜렷하게 나타내 보여주었다. 그러나 상담이 지속되면서
선이 다소 대칭 모양이 되어 불안감이 많이 가시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
다. 두 주가 지나 데이빗이 꽤 평이하고 분명한 동그라미를 그리기 시작했을
때 럭스는 동그라미 둘레로 울타리를 그려 넣으라고 했다. 울타리에 갇혀버
린 '괴물'은 그 뒤로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마지막 상담이 있은 뒤 럭스와 나는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릭스는
우리가 유럽에 있을 적에 데이빗이 혼자서 약을 끊어 버렸다는 사실을 알려주
었다. 개트윅에서 있었던 불행한 일은 약을 끊은 뒤 나타난 첫 증세라는 것
이다. 데이빗은 필시 사는 것이 즐겁다 또 너무나 만족스러웠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약'은 이제 필요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렇지만 나도 의사도
그의 자기판단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 두려워 - 당연히 동의하지 않았겠지만 -
약을 몰래 버린 것이다.
나는 놀랐다. 데이빗이 약을 그토록 절박하게 찾아 헤매던 그 밤 이후로
나는 데이빗이 약에 특히 의존하고 있고 늘 기꺼이 먹는 것으로 생각했다.
우리가 함께 지내기 시작한 것이 이제 3년째였지만, 실제로 약을 먹는지를 지
켜보는 일은커녕 약 먹을 시간이라고 알려주는 일도 필요치 않았다. 이제 나
는 앞으로는 이 문제에 관한 한 더 이상 데이빗을 믿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
을 알았다.
릭스는 데이빗이 어떤 일이 있어도 항상 약을 챙겨 먹을 것과 가끔 정신과
의사를 만나 보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데이빗을
정기 환자로 받아 장기간 진찰하면서 지켜보는 일은 릭스 자신의 나이 때문에
직접 할 수 없었고, 그래서 적당한 사람을 찾아 주겠다고 했다. 결국 릭스는
데이빗에게 가장 환벽한 의사를 찾아냈다.
제28장 과거를 딛고
활동적이고 따뜻한 인간미가 넘치며 놀랄 만큰 박식한 수산 윈 박사는 지독
한 유머감각과 여성적인 매력으로 이내 데이빗의 호감을 샀다. 데이빗은 다
른 사람들이 자신의 진짜 생각이 어떤 상태인지를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해 운
율을 꽉꽉 다져 넣은 저 묘한 말장난과 재치 있는 비유, 암시 등을 동원하는
데, 윈 박사가 나타남으로써 호적수를 만난 셈이었다.
데이빗은 윈 박사에게 갖은 말재간을 다 써 보았지만 한 번도 박사의 주의
를 딴 곳으로 돌리는 데에 성공한 적이 없었다. 박사는 언제나 데이빗을 웃
음으로 몰아넣은 다음 직선적인 태도로 대했고 그같은 솔직한 태도를 재치와
유머로 뒷받침했는데, 데이빗은 그런 태도를 대단히 고맞게 생각했다. 데이
빗은 박사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박사님을 만나러 오는 건 마치 축
제에 나오는 것 같아요!"
제대로 집중해서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려면 데이빗은 늘 상대방에게 바짝
다가앉아야 했다. 종종 포옹하기도 하고 상대방 머리에 자기 머리를 기대기도
했는데, 윈 박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상담이 진행되는 동안 데이빗은 박사가
허락하는 한도까지 최대한 바짝 붙어 앉으면서, 끊임없이 만지려고 했다. 상
담을 시작한 제일 첫날부터 윈 박사는 데이빗에게 개인적인 공간이라는 개념
을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데이빗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사람들을 편안하게
대하기 위해서는 이런 개념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에서 박사와 나는 의
견이 일치했다. 데이빗은 이 개념에 대해 지금도 배우고 있다.
상담이 있던 바로 첫날에 윈 박사는 자신의 다리 일정한 부분 위로 다른 사
람 손이 올라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데이빗에게 못박아 두었다. 박사
는 그 선을 '만수위'라 불렀는데, 이것 자체가 숨바꼭질이 되었다. 이따금씩
데이빗은 손을 슬금슬금 위쪽으로 움짓이며서, 순진한 척 뻔뻔한 얼굴로 이렇
게 묻는 것이었다. "여기가 만수위 위인가요?"
그러면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는 걸 잘 알며서 왜 물어요? 내가
그 예쁜 손가락을 구두 뒤축으로 사정없이 내리치면 당신 기분이 어떨까요?"
그러면 기가 죽은 데이빗은 손을 거두면서 이렇게 말했다. "어쨌거나 시도
는 해 볼만하죠."
정신과 의사로서는 보기 드문 행동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데이빗 역시 아
주 보기 드문 환자였다. 데이빗과 함께 생활하는 데에 지침이 전혀 없듯이,
그를 '치료'하는 데에도 정해진 방법이 없었다. 의학계에서 아직 데이빗과
같은 경우가 보고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 가지는 분명했다. 어떤 약은
그를 진정시켜 주고, 발작 같은 상황을 막아 준다는 사실이었다.
우선 무엇보다도 데이빗에게 다시 세레네이스를 처방했다. 그렇지만 그는
이제 청년이 아니었으므로 근육경련과 긴장이라는 부작용을 일으킬 염려가 없
었고, 따라서 부작용 방지를 위해 코젠틴을 함꼐 먹을 필요는 없었다. 투약
량을 면밀하게 조절하는 작업이 다시 시작 되었고, 새로운 약물도 시험하기
시작했다.
리튬은 효과가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리튬을 먹으면 데이빗이 훨씬
진정되고 조용해졌지만 그와 동시에 '생기'도 빠져나갔다. 한번은 연주회에
서 어떤 곡을 연주하다가 중단해 버린 일까지 있었다. 그 때까지는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고 그 뒤로도 그런 일이 다시는 없었다. 마침내 우리는 세레
네이스와 테그레톨을 함께 사용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상황과 데이빗의 기분에 따라 알맞게 처방했다. 예를 들어 여행 중일 때에는
데이빗이 비교적 불안해하기 때문에 투약량을 약간 늘였다.
데이빗은 거의 내내 들떠 있으면서 약간 조증 증세를 보인다. 간단하게 말
하면 거의 내내 언제나 즐겁고 신나 있는 병에 걸렸다는 말이다. 머릿속의
화확적 불균형 때문에 사고 과정이 가속되어 말이 빨라지고, 믿을 수 없으리
만치 민감해져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정도까지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으며,
피아노 앞에서 보이는 집중력은 초인적이지만 나머지 부분에서는 쉽사리 주위
가 산만해지는 것이다.
윈 박사는 데이빗이 어떤 약을 먹든 개성을 잃고 무뎌지지 않는 한도 이내
에서 어느 정도 진정시키는 한편 고통스런 생각으로부터 보호해 줄 수 있는
정도여야 한다는 점에 동의했다.
알맞은 투약량을 결정하는 과정은 쉬웠다. 그러나 아버지와 관련된 거의
손에 잡힐 듯한 고통을 풀어 주고 과거의 아픔과 화해하게 하는 일은 훨씬 더
복잡했다. 윈 박사는 주로 상담을 하는 동안 데이빗이 들려주는 내용을 바탕
으로 치료해 나갔는데, 진심으로 아버지와 화해하고 싶어하는 데이빗의 열성
덧분에 상황은 한결 유리했다. 한 번에 한 가지씩 풀어 나가면서 두 사람은
데이빗이 원할 때마다 아버지와 관련된 데이빗의 어린시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윈 박사는 언제난 좀더 긍정적인 부분을 강조했고, 궁극적으로는
모든 일이 과거의 일에 지나지 않으며 이제는 벌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늘 되
새겨 주었다.
어떻게 보면 과거의 일로 덮어두는 일은 쉬운 편이었다. 피터 헬프갓은
1975년에 세상을 따났고 따라서 그와 관련된 일은 더 이상 벌어지지 않기 때
문이었다. 그러나 유령과 '평화협상'을 벌이는 일은 훨씬 더 힘들었다. 데
이빗이 용서의 출발점으로 삼을 만한 어떠한 과거의 시점도 과거의 사건도 전
혀 없어 보였다. 피터를 용서하는 것이 과거라는 고문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아주 어린시절에는 비교적 밝은 순간도 있었지만 그 뒤에 벌어진 갖가지 사
건 때문에 그런 밝은 순간도 상당히 어둡게 비쳤다. 피터가 데이빗을 쫓아낸
사건도 긍정적인 기억은 아니었고, 데이빗이 런던에서 돌아온 시기부터 피터
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의 기간에서는 거의 아무 것도 찾아낼 수 없는 것 같
아 보였다.
런던에서 돌아온 것 자체가 고통스런 기억이었다. 데이빗은 피터의 반응이
어떨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어서, 오스트레일리아 땅에 발을 디딘 뒤에 집
으로 돌아가지도 않았다. 그는 택시를 잡아타고 오래도록 그가 곤경에 빠질
때마다 구해 준 루버-스미스 여사의 집으로 찾아갔다. 여사는 택시비를 냈고
- 데이빗이 또다시 무일푼이 되었기 때문에 - 데이빗에게 옷을 주고 하룻밤을
재워 주었다.
다음 날 그는 용기를 많이 되찾은 모양이었다. 그 때까지 데이빗을 후원해
주던 몇몇 유대인들이 그를 거듭거듭 안심시킨 끝에 랍비 한 사람이 집까지
태워 주었다.
아들은 용기를 보였지만 아버지는 그렇지 않았다. 데이빗이 곧 도착한다는
전화를 받은 피터는 집을 나서서 퍼스 거리를 홀로 배회했다. 산산이 부서진
꿈과 얼굴을 맞댈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데이빗은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는 겁이 났죠. 아주, 아주 겁이 나서 달아났어요. 달아났죠."
우리가 함께 지내기 시작한 지 몇 달 되지 않았을 때, 데이빗은 어느 날 밤
집 앞 진입로에서 차 안에 앉아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아버지는 몇 시간이
고 길거리를 헤매 다녔어요. 나는 오후 내내 루이스와 얘기했죠. 가엾은 루
이스. 루이스가 나를 살려줬어요." 데이빗은 그 날 오후의 슬픈 기억을 떠올
리며 쿡쿡 웃었다. 그 때 열한 살이던 여동생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면
회한과 함께 연민이 사무치는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들어왔어요!" 데이빗은 이 부분을 떠올리며서 어느 정도
기분이 밝아졌다. 아버지 집에서나 아버지의 가슴속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보다는 그냥 아버지를 만나는 편이 훨씬 더 나았던 것 같다.
"아버지는 들어와서 이렇게 말했죠. '안녕, 데이빗! 괜찮아. 걱정할 거 하
나도 없어.' 그러더니 나한테 파렉스를 조금 주면서 물과 우유를 줬어요."
위로와 음식을 건네 받은 희한한 기억이었다. 파렉스는 유아용 시리얼인데
피터가 가장 즐기는 음식이었다.
피터는 아들이 아주 심각한 상태임을 알았을 것이다. 앞뒤도 없고 주위가
산만한 데다가, 똑바로 설 수도 없고 걸을 때에는 계속 넘어질 정도였으니까.
4년만에 데이빗을 처음 보았을 때 피터가 얼마나 상심했는지, 데이빗으로서는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그 무렵 데이빗은 현실을 거의 감지할 수 없었던 것
이다.
데이빗은 열흘만에 찰스 가디너 병원의 정신병동에 입원했다. 입원을 도와
준 사람은 앨리스 여사가 소개한 정신과 의사로서 병원에서 데이빗의 치료를
맡았다. '바미온디아미' 동생 레스는 종종 데이빗을 찾아가 함께 탁구를 쳤
다. 데이빗이 깨어 있을 때에는 그랬다는 말이다. 대부분의 경우 레스가 면
회를 가도 데이빗은 잠들어 있었으며 앞으로도 오랫동안 잠을 잘 것이라는 말
만 듣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수면요법? 그럴지도 모그지만 1970년대에 입원해 있던 어느 병원에서도 데
이빗이 어떤 치료를 받았는지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윈
박사가 이런 부분에 대해 조회했을 때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아무 관계도 없는
메모가 전부였다. 병원이 이전하는 동안 일부 기록을 분실했거나, 간호사가
서류를 잘못 정리했기 때문이라는 설명과 함께, 사실이 어떻든 간에 데이빗이
입원해 있던 동안의 치료와 투약기록은 영영 불가사의로 남을 것이다.
피터 헬프갓도 데이빗이 입원해 있던 첫 주에 면회를 갔다. 그는 데이빗의
담당 의사와 오랫동안 면담하면서, 데이빗에게 신체적인 문제가 있는지, 만일
그렇다면 데이빗이 제대로 걷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인지를 물었다. 데이빗
에게 신체적인 문제는 아무 것도 없다는 답을 들은 뒤로 피터는 다시는 병원
으로 면회를 가지 않았다.
그러나 의사는 데이빗의 상태에 대해 피터에게 몇 가지를 더 설명해 주면
서, 아들의 문제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은 아버지와 아버지의 행동에 있다는
말을 들려준 것 같다. 어둡고도 지극히 사적인 가족 이야기를 데이빗이 전혀
낯선 사람에게 누설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피터는 몹시 화가 나 집으로
돌아갔다. 자신이 얼마나 화가 나 있는지를 아들에게 보여 줄 수 있는 방법
은 거의 없었다. 아들이 '손아귀에서 벗어나' 병원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
렇지만 아들의 개인 소지품이 든 옷가방은 집에 있었고 -데이빗이 집으로 돌
아온 직후 런던에 있던 친구가 부쳐 준 것이다 - 이 소지품에서 피터는 자그
마한 편지 묶음 하나를 찾아냈다. KSP와 주고받은 편지였다.
"아버지는 그걸 다 태웠어요. 불질러 버렸어요!" 데이빗은 그 일을 떠올릴
때마다 몹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 "아무도 몰래, 아주 주도면밀하게 해치웠
어요. 앙갚음이었어요. 아버지에 대해 내가 무슨 얘길 했고, 아빠는 그걸로
날 벌주고 싶었거든요. 편지를 태우는 걸로 말이죠. 아버진 그 편지가 내게
아주 귀중한 재산이란 걸 알았어요. 사랑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요. 아, 아
까워."
물론 데이빗은 이런 아까운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몇 달 뒤 병원에서 나올
때까지 모르고 있었다.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슬픔에 빠진 가운데에도 약간의
아이러니를 찾아낼 수 있었다. "웃기는 건 어쨌든 KSP는 자기 편지를 태워
버리기를 바랬다는 사실이에요." 데이빗이 설명했다. KSP는 실제로 친구와
친척들에게 부탁하기를 자기가 죽은 뒤 자신의 편지와 미완성 작품을 모두 없
애 버려 달라고 부탁했다. "그렇지만 나는 태워 버리지 않기로 마음먹었죠.
부탁대로 하지 않고 말예요." 데이빗은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 "아주 친밀한
내용이라서요. 나에 대한 사랑을 담은 편지거든요. 게다가 나는 자랑스러웠
어요. 그런 편지는 후손을 위해 간직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아주 좋은 편
지라서 없애면 안된다고 생각한 거죠. 그런데 우습게도 아빠가 KSP의 소원을
들어준 거예요. KSP는 늘 나한테 아빠에게 고맙게 생각해야 된다고 말하면서
아빠의 소원을 이루어 주려고 애썼어요. 그런데 꼭 그런 식으로 아빠가 KSP
의 소원을 이루어준 거예요!"
피터의 괴팍한 행동에 상심한 나머지 데이빗은 그 뒤 3년 동안 아버지도 다
른 가족도 거의 만나지 않았고, 그 사이에 그는 인생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
애썼으나, 결국 클라라와 결혼하여 더욱 어려운 지경에 빠졌다.
1975년 6월 그레이랜드 정신병원에서 16개월간 입원했다가 퇴원하고 보니
데이빗은 다시금 갈 곳이 없었고, 게다가 심하게 쇠약해진 상태였다. "입원
할 때에 나는 썩 좋지 않았는데, 퇴원할 무렵에는 정말로 앓고 있었죠." 데
이빗이 흔히 쓰는 우울한 말장난이었다. 갈 곳이 없었던 데이빗은 가족들에
게 집으로 돌아가도 되겠는지 물어 보았다. 아직 집에 남아 있는 가족들은
거절했다. 데이빗을 보살피기가 너무나도 힘들 것이 분명한 데다가 가족 내
에서도 다른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 피터가 심장이 약해져 건강이 약화
된 상태라는 점도 문제였다. 일흔두 살 노인이 되고 보니 데이빗을 보살필만
한 힘이 없었다.
그럼에도 피터는 아들을 곤경에서 구출해 내기로 결심했다. 데이빗은 이렇
게 기억을 떠올렸다. "우리 가족은 사실 별로 뭉치지를 못했어요. 엉망이었
죠. 우린 다들 천당과 지옥 사이를 오갔어요. 가족들은 용감하게 반대했지
만 아버지는 결국 나를 받아들였어요. 아빠는 나머지 가족들과 맞서 스탈린
그라드와 레닌그라드 전투를 벌인 끝에 나를 받아들인 거였죠. 아빠는 나를
돌봐 주었어요. 그래서 난 영원히 고맙게 생각할 거예요."
이 '전쟁'은 결국 별 소득이 없었던 것 같다. 데이빗이 얼마 안 있어 그레
이랜드 병원에서 만난 환자인 베라와 함께 모텔에서 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이
다. 그 생활이 실패로 끝난 뒤에야 데이빗은 완전히 집으로 돌아갔다.
아들의 소일거리를 위해 피터는 바이올린을 주고 저 유명한 차니코프스키의
바이놀린 협주곡을 연주하게 했다. 스물여덟이라는 나이에 데이빗은 새 악기
를 배우기 시작했다. 데이빗은 그 시기를 이렇게 떠올렸다. "재미있었어요.
나는 끈기 있게 배워서 결국에는 차익을 연주했죠. 나 스스로도 꽤 잘 연주
한다 싶었어요. 그렇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나는 연주를 하지 않았고 배
우지도 않았죠."
데이빗이 집에서 지낸 마지막 몇 달은 - 그는 1976년 3월에 다시 입원했고
그 뒤로 다시는 헬프갓 가족이 사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 시기가 아주
적절했다. 이 시기는 피터의 마지막 몇 달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는 1975
년 12월 29일에 세상을 떠났다.
피터의 죽음은 데이빗에게 거의 영향을 끼치지 않은 것 같다. 그는 너무나
심한 '안개에 싸여' 아무 것도 이해하지도 느끼지도 못했다. 그렇지만 아버
지와의 갈등은 이로써 전혀 풀리지 않은 채로 남게 되었다. 또한 데이빗에게
그토록 많은 고통을 안겨다 준 - 그래서 그가 믿기로 그의 병의 원인이 된 -
사람에 대한 지대한 분노 역시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았다.
피터 생전에 '미국 유학 사건', '벌', '미움의 밤', 추방, KSP의 편지를 태
운 사건 등에 대한 데이빗의 고민을 덜어 줄 만한 대화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
에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데이빗이 나와 윈 박사에게 이야기를 하면 할수
록 우리는 저마다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피터가 아들에게 분명히 품고 있었을
사랑에 대해 이야기해 주려고 애썼다. 우리는 호의나 친절로 해석할 수 있을
만한 것이면 아무리 작은 사건이라도 거기 매달리면서 데이빗이 아버지의 행
동 뒤에 숨어 있는 이유를 찾아보도록 도우면서 거기에 있는 긍정적인 부분에
집중하도록 했다.
데이빗의 정신구조는 어느 모로 보아도 병적인 것은 아니었다. 혼잣말을
할 때 들어보면 내용이 대부분 긍정적인 확신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내
가 그를 만난 뒤로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돼!" 하는 말이 데이빗의 독백 속에
서 점점 자주 나타났다. 다가오는 늪과 부정적인 생각, 두려움, 초조함 등을
없애기 위해 데이빗은 하루에도 수백 번 (과장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스스로
를 타일렀다.
그는 또 "정신 차려, 정신 차려야 돼, 정신을 잃으면 안돼!" 하면서 주위의
현실에 초점을 맞추려 애썼고, 그러면 생각이 '안개'속으로 휩싸여 들어가기
전에 현실을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데이빗에게 현실을 의식한다는 것은 그
것이 '현실'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즐거운 기분으로 연결되는 일이 많기 때문
에도 더욱 중요하다.
"감사해야 돼!" 하는 말을 그는 자꾸자꾸 되풀이하면서, 날이 맑아 고맙고
바다가 푸르러 고맙고 접시에 놓인 음식이 고맙고 정원에 있는 꽃이 고맙고
연주하고 있는 피아노가 고맙고 포옹해 주면서 사랑한다는 말을 들려주는 친
구들이 고맙고 그의 음악을 들으러 오는 청중들이 고맙고 - 우리들 대부분은
고마운 줄을 잊어버리고 살라가고 있는 이런 온갖 사소한 것들에 대해 기뻐
어쩔 줄 모를 정도로 고마워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고통 없이 살아 있는
매 순간이 너무나 고마워 기쁜 것이다. 데이빗의 논리는 이런 것 같다. 삶
에서 '감사드릴' 대상이 많음을 항상 '의식하며' 산다면 거기에 대해 긍정적
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타고난 낙천적인 기질은 치료과정에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현재에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되새기고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바탕으로 치료를 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도마지'는 과거로 밀려나고, 그래서 데이빗은 어느 날
이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상처는 입은 거예요. 과거는 과거
고, 지나간 건 지나간 거죠. 그렇지만 거기에 대해 뭔가를 할 수는 있죠! 즐
겁고 재미나게 살아갈 수 있잖아요. 안 그래요?"
일단 자신을 현재에 든든하게 뿌리박고 나니 데이빗은 과거를 돌이켜 보는
일이 꽤 안전하게 생각되었다. '미국 사건'까지도 안전하게 느껴져서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는 크나큰 실수를 했죠. 그렇지만 내 생각에는 사랑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이는 한동안 확신이 되었다. 스턴과 브렉클러, 또 피터의
최종 결정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데이빗은 결국에 가서는 이렇게 혼잣말을
한다. "아마 아버지는 널 정말로 사랑한 것 같아, 데이빗. 정말로 사랑했
어. 그래서 잘되기만을 바란 거야."
확신은 또 데이빗이 아버지와의 관계를 객관적으로 다시 생각하면서 하는
말에서도 얻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우리 모두가 잘 되기를 바랬어요. 아
버지는 정말 우릴 사랑한 거겠죠." 그리고 차차 강인해지면서 데이빗은 그런
말을 한 다음에는 이런 식으로 설명을 붙이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그냥
우릴 사랑하는 방법이 잘못됐거나 아니면 너무, 너무너무 사랑했어요. 아니
면 잘못된 사랑을 하고 있었거나. 너무 지나치게 사랑한 거죠. 그게 정말 사
실은 아까운 일이에요."
그러나 아깝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퍼지기도 전에 데이빗은 얼른 이렇게 덧
붙였다. "상관없어요. 상관없어요. 어쩌겠어요. 그래도 아버지는 죄선을
다했어요. 아버지가 다들 그렇듯이. 그리고 잔인하게 대하고 싶은 생각도
전혀 없었을 거예요. 아마 아버지도 어쩌지 못한 거겠죠. 아버지 자신도 어
쩔 수 없었던 거예요."
데이빗은 2년 정도를 계속 이런 방향으로 생각하는 훈련을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데이빗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근래에 아버지와의 관계 때문에 어려움
을 겪는 젊은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차분한 목소리로 친구에게 이렇게
충고를 했다. "아버지와 문제가 있으면 안돼. 그냥 빠져 나와 버려야 돼!
해결해 버려!"
오랫동안 데이빗이 아버지를 '폭군', '독재자', '두 얼굴의 야누스', 또 그
밖에 수많은 좋지 않은 호칭으로 부르는 것을 들었던지라 친구는 뜻밖이라 생
각했고, 데이빗은 설명해 줄 필요를 느꼈다. "그러니까, 세상은 흑백이 아니
란 거지. 세상에는 온갖 색깔이 다 있잖아, 온갖 다른 색깔 말이야. 안 그
래? 별의 별 유형과 별의 별 형태가 다 있거든. 세상을 훨씬 더 폭넓게 받아
들여야 돼. 자, 보라고. 똑 부러지게 흑백이 아닌 게 필시 나도 아버지에게
어느 정도 골치 아프게 굴었을 거라는 말이지. 그러니 이제는 모두가 용서를
받아야 돼. 모두용서해야 돼. 그런 원한을 가슴에 품고 있어 봐야 아무 쓸
모도 없거든."
데이빗이 피터에게 '어느 정도 골치 아프게' 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떤 식으로든 용서하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목표는 대단히
단순하고도 논리적인 생각을 통해 이루어졌다. 데이빗은 나나 윈 박사와 이
야기를 계속하다가 어느 시점에서 피터가 '부자 유대인들'에 대해 '원한'을
품었던 것이 아들의 인생이 잘못되기 시작한 전환점이었다면 원한을 품는다는
건 나쁜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데이빗은 피터가 '원한'을 품고
있는 것에 대해 늘 옳지 않다고 생각했으므로 그에게는 새로운 개념이 아니었
다. 새로웠던 것은 이 단순한 질문이었다. -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일을 본
받을 까닭이 어디 있나?
데이빗은 여전히 고통스런 기억에 대해 자주 말했지만 상당히 다른 색깔을
띠기 시작했다. 피터의 어린 시절과 할아버지 자자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
마저도 새로이 해석했다. 누가 데이빗에게 그와 피터 사이의 문제가 혹시 피
터와 자자 사이의 문제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으면 데이빗은 고
개를 가로 저었다. 이런 단순한 심리분석법에 대해 대답한다는 것 자체가 어
느 정도 그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라 생각하여 그는 대답 대신 이렇게 되묻는
것이었다. "그게 되풀이되나요? 스스로 되살아나는 식인가요?" 그는 잠시 뜸
을 들였다가 어느 정도 호탕하게 이렇게 말했다. "맞아요. 박차고 나올 수
있어요. 이런 악순환에 말려 들어가면 안돼요. 아버지보다 나아질 수 있어
요."
"아버지보다는 나아져야 돼!" 하는 말은 데이빗 즐겨 쓰는 주문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이렇게 덧붙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이제 나
한테 배워야 돼." 데이빗이 '원한'을 잊어버리기로 한뒤 피터에 대한 고통스
런 기억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그는 잊지 않고 이런 말을 한다. "그
렇지만 이제는 용서해야 돼요. 잊어버리고 용서해야 돼요." 용서하고 나니
그런 기억을 이겨내기가 너무나도 쉬었다.
10년이 넘게 걸리기는 했지만, 또 이런 고차원적인 생각을 그저 말로만 하
는 때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그는 아버지를 좋아하기 시작했고 나아가 사랑
하기 시작했다. 데이빗이 곧잘 "생각해 보세요!" 하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하
는 그같은 일이 많이 있었는데도. 그리고 피터에 대한 데이빗의 태도가 이해
와 용서와 사랑으로 바뀐 뒤에야 그는 이제껏 내내 기억 속에서 뒤적거리던
그 사건을 들춰낼 수 있었다.
우리 이야기가 대개 그렇듯이 그 사건도 그의 혼잣말로 시작했다. "아버지
는 숲은 보면서도 나무는 볼 수 없었어. 그래서 실수를 한거야. 나한테 실
수를 한 거야." 어느 날 시골길을 따라 자동차를 달리는 중에 데이빗이 말하
는 것을 들었다.
"무슨 말이에요, 달링?"
"커다란 실수였어요." 데이빗이 대답하면서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려주
었다. "아버지는 그 커다란 실수를 인정했는데, 평생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인정한 게 그 한 번뿐이었어요. 아버지는 자존심이 너무 셌거든요."
데이빗과 함께 지내기 시작한 뒤로 세월이 꽤나 흘렀는데도 가족 이야기에
이처럼 자그마한 내용이 추가된다는 그 사실 자체가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물론 이번 것은 작아도 비교적 중요한 것이었다. "언제 그걸 인정했죠?"
"그러니까, 런던에서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때였죠. 아빠는 이렇게
말했어요. '나는 너한테 일생 최대의 실수를 했다' 하는 것으로요. 정말 가
슴 벅차고 사무치는 얘기였어요. 나에 대한 온갖일 때문에 아버지가 깊이 죄
의식을 느끼고 있었다는 얘기잖아요. 사실은."
"그래서 당신에게 사과했나요?"
"그런 셈이죠. 그런 셈이에요."
"뭐라고 그랬는데요?"
"아주 미안하다고 했어요. 아버지는 병원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는데 너무
너무 슬퍼 보였어요. 아버지는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서 나에 대해 생각했
죠."
"병원에 면회를 와서요?"
"아뇨. 아빠가 병원에 있었죠. 늑막염 때문에. 아빠는 그걸 오래전부터
앓았거든요. 나는 아빠를 면회 갔는데 아빠는 그냥 날 생각하고 있었고 나는
내가 받은 온갖 상처를 아빠가 미안해 한 걸로 생각해요."
"그래서 뭐라고 그러던가요? '아, 데이빗. 미안하구나.'?"
"그런 식으로 분명하게 말하지는 않았어요. 아버지는 구체적으로 '미안하
다'는 말을 하는 법이 없었죠. 그냥 미안해하는 표정이었어요. 후회하고 슬
퍼하는 얼굴이었죠. 우린 전혀 상관없는 다른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
었어요."
"그런데 미안해하는 줄은 어떻게 알아요?"
"그냥 마음을 읽었는데, 미안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텔레파시 같은 게 정말로 있다 하는 말을 아버지가 한 적이
있어요. 아버지는 조용하게 아주 가만히 있었어요. 아주 가만히. 눈을 감
고 졸리는 얼굴이었지만 아버지는 바늘방석이었어요. 반 시간이 지날 때마다
의사가 와서 팔에다 바늘을 찔렀거든요. 아버지는 바늘방석이나 다름이 없었
는데 거기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어요. 게다가 아버지는 이가 모두 빠지고 머
리칼도 모두 빠졌어요. 나이가 들면 그렇게 되죠. 잎 떨어진 소나무. 잎
떨어진 소나무. 모든 걸 다 잃죠,."
"마음을 읽었는데 마안해하더라는 거예요?"
"예. 나에게 상처를 입혔다는 것을 알고는 아주 미안해했어요. 아버지는
아주 미안해하고 있었어요."
"미안해 한 것을 알고 나니 무슨 생각이 들던가요?"
"에, 아주 고마웠죠! 기분이 나아졌어요. 물론 아버지는 어쩔 수 없었어
요. 어쩔 수 없었죠. 아버지는 약간 어리석었어요. 가끔씩은 이상한 말도
했거든요,,, 나는 아버지를 친절하고 상냥하고 잘못을 뉘우치는 모습으로 기
억하고 싶어요. 좋은 방법이잖아요? 사랑으로 말예요."
데이빗은 한동안 고무나무의 '교통' 뒤로 자동차가 지나가는 것을 내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는 한숨을 쉬며 이렇게 말했다. "물론,
아버지는 아주 복잡했죠."
제29장 네버네버 랜드로
1989년 상급음악 세미나에 참가하기 위해 데이빗과 내가 유럽으로 가기 전
나는 오스트레일리아 경제에 대해 점성학적 연구를 많이 한 끝에 집을 파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천체의 변화에서 우리가 떠나 있는 동안
부동산 가격이 상당히 많이 떨어진 것을 점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데이빗의 경력을 위해 오스트레일리아 동부 주에 자리잡은 것을 생각
하던 중이었으므로 우리는 내놓아 아주 짧은 시간 안에 팔 수 있어다. 유럽
에서 돌아왔을 때 부동산 경기는 실제로 나빠져 있었고, 우리가 집을 맡겼던
중개인은 집값이 3만 달러 정도나 떨어졌기 때문에 운이 좋았다고 했다.
비록 이제는 동부 해안에서 부동산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돈이 충분했지
만, 어디에서 살면 좋을지를 꼭 집어낼 수는 없었다. 마음이 정해질 때까지
우리는 시내와 스완 강이 잘 내려다보이는 아파트를 세내어 살기로 했다. 강
은 이제 우리 집에서 길을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 있었다.
좀 더 신중하게 생각했더라면 나는 이 아파트를 절대로 선택하지 않았을 것
이다. 건물은 강이 굽어지는 반도 모양 부분에 자리잡고 있었으므로 우리 집
에서는 삼면이 강이었다. 이 지점을 로스테스트섬으로 가는 커다란 여객선들
이 주로 이용하는 수로와 그 수로를 가로지르는 커다란 다리가 있는 곳 바로
근처이기도 했다.
이런 점이 데이빗에게는 마냥 좋기만 했지만, 나에게는 결국 불안과 초조의
원인이 되었다. 당연히 데이빗은 여전히 수영하기를 좋아했는데, 건강이 좋
아지면서 자신감도 꾸준히 늘어나 혼자 다니기 시작하면서 몇 시간씩 '내키는
대로' 사라지기도 한 것이다. 우리 둘이 동네 경찰과 잘 알게 된 것도 이 무
렵이었다.
저번 집에 살던 동안 나는 데이빗이 강에서 수영하는 것에 상당히 익숙해져
있었고, 또 언제나 안전하게 돌아왔기 때문에 그가 스스로를 잘 돌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를 집 안에 가두어 두는 일은 생각조차 해 본 일이 없었
고 하루 종일 그에게만 신경을 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새로 이사온 집에서 데이빗은 창 밖으로 저 드넓은 물이 그를 부르는 것을
보면서, 그저 집 가까이 에서만 맴돌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예전보다 많
이 강해졌다는 생각이 든 그는 용감하게 조깅을 나서서 강가를 따라 몇 킬로
미터를 달린 다음 옷을 벗고 물 속으로 뛰어들곤 했다. 수영을 오랫동안 하
다 보니 어디에서 물에 뛰어들었는지를 잊어버리는 일도 자주 있었다. 옷을
찾아다니는 일은 생각해 보는 것조차 전혀 현실적이지 않다고 여겼는지 그는
수영복 차림으로 집까지 달려오곤 했다. 그러면 나는 옷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고 대개는 찾을 수 없었다.
이런 일이 한 달 정도 지속되고 나니 데이빗은 바지를 많이 잃었고, 신 다
섯 켤레, 스웨터 열 벌 정도, 수건과 티셔츠는 수 없이 많이 잃었다. 그렇지
만 이런 것은 그리큰 사건이 되지 못했다. 여객선 선장들은 데이빗의 안경
쓴 머리가 다리 밑 물 속 이곳 저곳에서 솟아오를 때마다 피하느라 진땀을 흘
려야 했다. 나는 데이빗이 그렇게 불편을 많이 끼치고 있는 줄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어느 날 경찰이 데이빗을 데리고 집으로 와서 데이빗이 여객선 항
로에서는 수영하지 않도록 설득해 달라며 애원하는 것이었다.
데이빗은 그러마고 했지만 이번에는 강폭이 넓은 곳으로 나가 강을 가로질
러 헤엄쳤다. 사우스 퍼스에서 네들랜즈 대학교까지 헤엄쳐 간 것이다. 데
이빗이 강 반대편에서 물 밖으로 나가 사람들에게 '트라팔가의교통'에 대해
횡설수설 늘어놓기 시작하자 몇몇 사람들이 경찰을 불렀다. 비록 데이빗은 그
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집이 어디 있는지도 잘 알고
있었지만, 경찰과 또 주위에 몰려든 사람들에게 그런 사실을 설명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 윈 박사에게 연락이 갔고, 그 위 몇 주 사이에 박사는 경
찰의 전화를 받는 일에 익숙해졌다. 수화기를 들면 상대방에서 이런 말을 하
는 것이다. "여기 데이빗 헬프갓이라는 사람이 있는데요."
내 가족과 친구들은 데이빗에게 "핑크 팬더"라고 별명을 붙였다. 허용된
분량 이상으로 커피나 설탕을 '슬쩍' 할 때마다 그가하도 소리 없이 기민하게
움직이기 때문이었고, 게다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바로 곁에 있던 사람이 다
음순간에는 사라지고 없기 때문이었다. 데이빗의 스완 강 모험은 어는 날 밤
절정에 다다랐다. 그 때에도 그는 그렇게 '사라졌다'.
그 날 밤에는 윈 박사와 박사의 남편, 피아니스트 친구인 카라 켈슨과 카라
의 남편이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우리 집에와 있었다. 중요한 점은 방안에는
데이빗의 잽싼 행동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나 말고도 넷이나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몰래 빠져나갔다는 사실이다. 데이빗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강으로 나가 수색을 시작했다. 그가 수영하러 나
갔을 것이라는 점은 더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지만 날이 어두웠기 때문
에 찾아 봐야 헛고생이었다. 우리는 지치고 맥이 풀려 돌아와서는 그가 재발
로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시간이 상당히 지난 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문을 열어 보니 거기
에는 내 남편이 물에 젖은 채 알몸으로 서서 떨고 있었다. 그리고 양옆에는
엉덩이에 권총을 찬 경찰이 한 사람씩 서 있었다. 데이빗이 또다시 여객선
항로에서 수영하기로 - 밤에는 대단이 위험한 일이다. - 마음먹었던 것 같은
데, 이번에는 수영복을 입지도 않았다. 윈 박사는 자신의 악명 높은 환자가
그렇게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을 보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말
했다. "세상에, 데이빗. 이번에는 된통 걸렸군요!" 박사의 말대로 경찰은
데이빗을 호되게 나무랐다.
이런 사건을 겪을 때마다 나는 데이빗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
면서도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곳을 찾아야 되겠다는 점을 절실하게 느꼈다.
우리가 어디에 자리를 잡든 간에, 그의 치료과정에서 새로이 나타난 이런 필
요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곳이어야 했다.
데이빗이 주변 세계를 점점 더 잘 의식할 수 있게 되어 '안개'가 더 이상
큰 문제가 아니게 되자, 데이빗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집중하는 노력을
시작했다. 어색해야 한다. 고마워해야 한다.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혼작말 말고도 이제는 생각을 집중해야 한다는 말이 추가됐다. 지금도 하루
수백 번씩 그는이렇게 말한다. "집중, 집중, 집중해야 되. 요점에 매달려야
돼."
'교통'을 지켜보는 취미가 그가 집중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운동을 많
이 하여 육체가 지치고 나면 그는 마음도 가라않았고, 그러면 그는 더욱 강해
지고 육체적으로도 건강하다고 느꼈다. 그러다가 어느날 그는 자신의 집중력
단련에 도움이 되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냈다. '이마고'였다.
'이마고'는 이미지로서, 데이빗은 그림이나 사진 같은 것을 늘 지니고 다녔
다. 생각이 마구 달아나기 시작한다는 느낌이 들 때마다 그는 '이마고'를 들
여다보면서, 정신이 저 혼자 달아날 위험이 사라졌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거
기 집중하는 것이다. 그가 처음으로 이용한 '이마고'는 서스테인이라는 시리
얼 통이었는데, 거기에는 운동선수들 사진이 인쇄되어 있었다. 그 뒤로 데이
빗이 이용한 '이마고'는 어떤 식으로든 힘과 건강에 관련된 것이었다. 그는
마일로 깡통을 가지고 다니기도 했다. 마일로? 데이빗이 나에게 일러준 내용
에 따르면 마일로는 기원전 6세기에 살았던 유명한 레슬링 선수로서 올림픽에
서 수없이 많이 승리한 사람이다. 초콜릿 음료를 보면서 고대사를 떠올리는
사람은 데이빗밖에 없을 것이다!
데이빗은 '이마고'를 하나 고른 다음에는 놀랄 정도로 오랫동안 이용했으므
로 나중에는 꽤죄죄한 누더기가 되었다. 어쩌다가 잃어버린 다음에야 새로운
'이마고'를 골랐다. 데이빗에게 그림을 이용해보라고 권한 사람은 아무도 없
었다. 정신을 훈련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혼자 판단한 것이다. 정신을
훈련하는 한편으로 그는 육체도 계속 단련했다. 이제 그에게 필요한 것은 평
화로운 주위환경과 완전한 행동의 자유였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주 우연한 일이었다. 그 무렵 기자 친구인 크리스트
코크번이 뉴 사우스 웨일스의 북쪽 해안에 있는 벨링언 근처에 사 둔 집으로
초대했다. 크리스티와 조지 니거스가 함께 사둔 집이었다. 데이빗은 뉴캐슬
에서 연주회가 두 차례 예정되어 있었는데 연주회 사이로 한 주라는 공백이
있었다. 우리는 해안을 따라 여행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다.
그 때 벨링언에는 홍수가 있었지만 우리가 갈 목적지는 그 곳에서 13킬로미
터 떨어진 지점이었다. 고무나무 향기가 풍기는 언덕을 올라간 다음 그 곳
사람들이 백 년 전부터 '약속의 땅'이라고 불러온 계곡으로 내려가면 거기가
목적지였다. 계곡에는 온통 아열대 식물이 하늘까지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고목 고무나무, 히말라야 삼나무, 참나무 등이 언덕 여기저기에 점점이 서 있
었고, 산으르 돌아 계곡을 타고 벨링어 강을 향해 구불구불 흘러 내려가는 맑
디맑은 네베네버 크릭 샛강 둑을 따라 잎이 무성한 오스트레일리아 소나무가
줄지어 서서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이 곳은 낙원이었다. 나를 마침내
이 곳까지 이끌고 온 사람은 다름 아닌 '피터 팬'이었다. 피터팬은 자라나기
를 거부한 사람이지만, 내 옆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 경우에는 자라날 수 없었
던 사람이라는 점만 다를 뿐이었다.
네버네버 크릭 둑에 지은 크리스티와 조지의 집은 주름무늬가 있는 철과 나
무로 지은 환상적인 건물이었다. 기둥을 세워 그 위에 지은 이 집은 나무 사
이에 자리잡아 환경과 어울렸다. 자연과 집이 고스란히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일부 벽은 완전히 개방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조지와 크리스티의 집에 갔던 일은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그 뒤로도
우리는 이 동화 같은 '숲속의 집'으로 여러 번 찾아가 그들과 함께 지냈다.
크리스티는 피아노까지 샀다. 비록 늘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하기도 했지만,
데이빗이 자주 찾아온다는 사실 때문에 얼른 샀다는 점은 확실하다.
1990년 우리가 거기로 찾아가 지내고 있던 어느 날, 데이빗은 조깅을 나갔
다가 크리스티와 조지의 집 바로 옆 공터에서 매물이라 적힌 간판을 보았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말했다. "달링, 이건 예정된 일이에요. '이 땅을 팝니
다.' 하는 간판이 있는데 그 땅을 사야 돼요. 그 땅을 사야 될 것 같은 예감
이 들어요."
데이빗이 그토록 진지하게 무엇을 요구하는 것이 나로서는 뜻밖이었다. 여
지껏 담배나 껌, 오선지 공책과 콜라 말고는 나에게 무엇을 사 달라고 한 적
이 없었기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알고 또 그토록 분명하가도 당
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을 보니 기뻤다.
닷새 뒤 경매가 있었고 그 땅은 우리 소유가 되었다. 집은 1991년 7월에
완공되었다.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우리에게 맞도록 특별하게 지은 집이었
다. 응접실에는 7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었고 작은 단을 만들어 거기에 데
이빗의 야마하 그랜드 피아노를 놓았다. 바닥에서 천장까지 창을 내어 사방
으로 산이 보였으며, 여름에는 찌는 듯한 햇살을 막을 수 있도록 빙 둘러 발
코니를 달았다. 마음대로 샤워를 하면서도 집안의 홍수를 일으킬 염려가 없
도록 데이빗을 위해 특별히 집 밖에 샤워실을 만들어 튼튼한 텅스턴 수도를
설치했다.
산 속 샘에서 흘러 내려오는 조그만 개울이 우리 집 앞 나무 사이로 구불구
불 흘러와 인공연못이로 이어졌다가, 연못을 지나 네버네버 크릭으로 흘러갔
다. 이 개울 덕분에 집안과 정원에 물을 얼마든지 끌어 쓸 수 있었다. 그러
나 마실 물은 깨끗한 빗물을 받아 물탱크에 모아 두었다.
이사를 들어가자 마자 나는 땅을 파 정원을 가꾸기 시작했다. 이내 토착식
물과 과일나무, 꽃이 무성하게 자라났다. 약속의 땅의 기후는 특히 따뜻하고
습하기 때문에 무엇이든 심기만 하면 울창하게 자랐다. 장미, 철쭉, 자스민,
치자, 라벤더가 집 바로 주위를 에워쌌다. 신선한 나물과 채소는 우리가 먹
고도 남을 정도로 풍족했다.
가끔씩 가뭄이 들기도 했지만 우리 땅이나 계곡의 풍성한 푸르름에는 영향
을 끼치지 못했다. 가뭄이 들 때면 동네 사람들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검은
코카투 앵무새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이 앵무새들은 산 위쪽 우림지대 계
곡으로 날아 내려왔는데, 이들의 시끄러운 울음소리가 곧 비가 온다는 징조였
다. 그러고 나면 며칠 동안 비가 계속 내렸다. 보통 때에는 고요하게 흐르
는 네베네버 크릭도 콸코라 급류로 바뀌어 다리 위로 넘치고 잔디밭도 물에
잠기는 것이다.
주변을 다니면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가축과 말 떼 말고도 계곡에는 야생동
물이 무척 많았다. 해뜰 무렵에는 수없이 많은 새들이 즐거운 소리로 지저귀
었다. 쿠카부라새를 비롯해서 커다란 휜 코카투떼, 커다란 꽃 안으로 날아들
어 즙을 빨아먹는 작은 꿀빨이새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다양했다. 늪에서는
야생 오리들이 다니면서 먹이를 잡았다. 금빛 꿩 한 마리를 우리는 엘비스라
불렀는데, 우리 땅 이쪽에서 저쪽 모퉁이로 달음질치는 광경도 자주 볼 수 있
었다. 커다란 고아나 뱀들은 덤불 속에서 도로로 나와 일광욕을 했다. 이
지역 뱀들은 도로에 나오는 일이 종종 있었다. 자동차를 몰 때에는 특히 조
심해서 이들을 피해야 했다. 동네 개들은 숲속 은신처에서 나와 돌아 다니는
산토끼와 주머니쥐 그리고 왈라비에게 밤새도록 짖어댔다.
데이빗과 나는 약 속의 땅에 있는 우리 집을 사랑했다. 우리 집으로 찾아
오리고 한 어떤 여자가 전화로 우리 집 주소를 물은 일이 있었다. 나는 나가
있었고 데이빗이 재빠르게 전화를 받았다. "사시는 곳이 어디에요?" 여자가
묻자 데이빗은 이렇게 대답했다. "천국이에요."
제30장 천국
데이빗은 우리 집을 일컬을 때 '천국'말고는 다른 말을 쓰지 않는다. 도시
에 사는 친구 하나가 데이빗에게 새로 이사간 집의 어떤점이 좋은지를 물었더
니 데이빗은 싱긋이 웃으며 장황하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거기 있으면 안심
이 돼요. 의식도 깨어 있고 자유롭다는 느낌이 들고 아주 아주 만족해요! 기
쁜 마음으로 잠에서 깨어나죠. 잠에서 깨어나면 침대를 뛰쳐나와 여기 저기
돌아다니고 '성당'에서 수영하고 가축과 오리 떼도 보고 피아노도 있고 하고
싶은 일을 하루 종일 할 수 있죠! 정말 좋아요. 모든 게 나를 위해 완벽하게
준비가 되어 있어요. 난 운이 좋아요! 특권이죠! 아주 감사해요!"
약속의 땅은 데이빗에게 안전하고 평화로운 환경이 되어 주었고 그 속에서
데이빗은 마침내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우리가 거기 살기 시작한
무렵 그는 종종 해뜰 무렵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초강력으로 진한 차를 여러
잔 타서 마신 다음 산 속으로 사라지곤했다.
데이빗은 옷을 차려 입고, 작곡을 위한 오선지 공책과 펜, 그리고 '이마고'
를 가지고 집을 나섰지만, 돌아올 때에는 완전히 알몸이기 일쑤였다. 오선지
와 펜은 숲속 어디에 두고 돌아오는 일이 많았지만 '이마고'는 보통 연전히
지니고 있었다. 산속으로 돌아오는 일이 많았지만 '이마고'는 보통 여전히
지니고 있었다. 산 속으로 다닐 때에는 다른 사람과 마주칠 가능성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옷을 꼭 입을 필요는 사실 없었고, 따라서 나도 반드시 입게
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는 언제나 맨발로 길을 따라 걷거나 늪을 가로질러 다니다가, 이윽고는
네버네버 크릭이나 우리 땅에 흐르는 작은 개울에서 수영했다. 그는 개울에
서도 특별히 얕은 곳 한 군데를 특히 좋아해서 몇 달 동안 오로지 거기에서만
헤엄쳤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올 때에는 진흙에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 뒤
데이빗이 '성당'을 찾아냄으로써 더 이상 진흙범벅이 되지 않게 되자 나는 무
척 반가웠다. '성당'은 늪에서도 비교적 깊은 한 부분에 데이빗이 붙인 이름
인데, 둑에 있는 나뭇가지가 물 위로 늘어져 돔 모양을 이루고 있는 곳이었
다. 데이빗은 그 밑에서 수영한다.
수풀 속에는 틈마다 구석마다 갖가지 독사와 독거미, 거머리, 각종 독충이
숨어 있었는데도, 사람들은 데이빗이 어디를 가든 아무일도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랐다. 물에서도 땅에서도 지독하게 물려 고생한 사람들이 몇몇 있
었는데도, 동네에서 사는 생물들이 데이빗과 특별한 우정이라도 키웠는지 그
를 건드리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계곡 속 깊은 곳을 다
녀 보고 싶어하는 손님들이 외지에서 오면 그들은 무조건 데이빗만 따라다닌
다. 사람들은 데이빗에게 바짝 붙어다니기만 하면 위험에 빠지지 않는다는
확신을 품고 있고, 데이빗 역시 그들의 믿음을 거듭 거듭 확인시켜 주는 것이
다.
데이빗과 나는 또 리지라는 사냥개에게 '입양'됐다. 한때 소설가 피터 캐
리가 이 계곡에 살던 시절에 데리고 있었다는 개인데, 너무 늙어서 따라다닐
수 없게 될 때까지 데이빗을 따라다니면서 지켜 주었다.
두어 해가 지나자 데이빗의 새로운 환경으느 내가 꿈도 꾸지 못한 정도로
기적적인 치료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데이빗의 정신과 영혼 속에 진정한
평화가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그를 만난 뒤 처음으로 그가 오랫동안 조용
하게 명상에 잠겨 있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해뜰 무렵과 해질 때에 -
하루 중 그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으로, '아침물결'과 '저녁물결'이라 불렀다
- 그는 우리 땅 경계선까지 걸어가서 꼼짝도 하지 않고 서서 자연과 대화를
주고받은 것이다.
"거기 서서 산을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세요?" 어느날 나는 이렇게 물
었다.
"에, - " 그는 한숨을 쉬면서 말을 이었다. "일종의 자유감이에요. 기쁨,
창의력 같은 거죠. 언젠가는 좋은 작품을 쓰겠다는 생각으르 해요, 안정이 되
면. 그래요. 또 피아노도 훌륭하게 치고, 그리고 훨씬더 사랑하고 아끼고
전체적으로 훨씬 더 달라져야겠다는 생각을 하죠. 또 훨씬 더 의식이 깨어
있을 거예요. 세상을 위식하면서 있게 될 거예요. 치료할 수 있는 길은 그
뿐이니까. 그리고 받아들이기도 해야죠. 도움을 받아들이고, 염치도 많이
생기고 용기도 많이 생기고,,, 완전히 달라질 거예요. 완전히. 알죠?"
나는 알고 있었다. 데이빗은 이미 그토록 놀랍게 나아졌고, 그럼에도 그는
'완전히 달라지고자' 하는 의도대로 날마다 내 눈앞에서 변모하고 있었다.
'나돌아다니고자'하는 마음은 점점 줄어들었고, 그만큼 피아노 앞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틈틈이 '성당'에서 짧막하게 수영하는 동안만 피아노를 떠
나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세월이 가면서 데이빗의 구부정한 자세도 점점 나
아졌는데, 약속의 땅에 와서는 완전히 꼿꼿하게 섰다. 어깨를 뒤로 잡아당긴
채 자랑스럽게 우뚝 서서 다니는 것이다.
데이빗은 자기가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말을 줄겨 하는데 나도 종종 그 말
에 공감한다. 세계를 돌아다니면서도 나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어느 피아니스
트도 자기 집에서 연주회를 한다는 말은 들어본적이 었다. 그러나 데이빗은
19991년 이후로 독주회를 서른 번이나 '천국'에서 열었다.
연주는 대개 오후 다섯 시에 시작한다. 데이빗이 70분 정도 연주하고 나면
손님들은 정원을 거닐면서 샴페인과 저녁식사를 든다. 이틈을 이용해서 데이
빗은 수영을 즐긴다. 연주회를 반쯤 마친 상태에서 수영을 즐길 수 있는 피
아니스트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수영을 마치면 데이빗은 물에서 나와 벗
진 검은 가운을 걸친다. 가운에는 음표가 여기저기 박혀 있고 '편안하게'라
는 말이 새겨져 있다. 크리스티가 선물한 이 가운은 대개 손님들의 관심을
많이 끈다.
휴식시간이 지나면 모두들 집안으로 돌아와 연주회의 '신청곡' 부분에 참여
하는데, 종종 손님들은 데이빗의 연주를 그의 집에서 들을 수 있다는 것에서
아주 특별대접을 받는 느낌이 든다면서, 연주회가 일방적이지 않고 청중과 연
주자간에 대화가 오가는 것이 정말 마음에 든다는 말을 하고 했다. 이런 연주
회는 대개 연주회가 있기 전에 자리가 동난다.
1994년에 우리는 정원에 따로 스튜디어를 지을 필요를 느꼈다. 베이빗의
경력이 계속 쌓여 가면서 사무실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샤워실 만한 집에서는
더 이상 그 일을 해낼 수 없었다. 어느 날 스튜디오가 - 데이빗은 이 건물을
'이탈리아'라 불렀다 - 거의 완공되었을 때 데이빗과 나는 정원에 나가서 건
물을 둘러보았다. 데이빗은 약간 의아하다는 표정이 되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 '이탈리아'"는 아주 비싸 보이네요." 나는 사실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데이빗은 더욱 의아한 표정이 되더니 돈이 다 어디서 났는지를 물었다. "당
신 연주에서 났죠." 내가 대답했다.
데이빗은 한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이윽고 이렇게 말했다. "집은요?" 나는
그렇게 여러 번 한 연주회와 또 내가 그의 매니저로 일한 것에서 생긴 돈으로
지었다고 했다. 그리고 은행도 한몫 거들었다고 했다.
"그럼, 내 집이에요?" 그가 물었다. 그제서야 나는 그가 퍼스에서도 집을
지니고 있었고 '천국'에서 거의 4년을 살았음에도 지금에 와서야 그가, 즉 데
이빗 헬프갓이 실제로 부동산을 소유할 능력이 된다는 사실으르 이해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집과 땅과 스튜디오가 확실하게 그의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데이빗은
어깨를 앞뒤로 젖히괴 가슴을 활짝 펴더니, 얼굴에 환하게 미소를 띠며 말했
다. "자, 그럼. 잠시 '내 땅을 둘러보고오죠." 그리고는 고개를 높이 들고
자신감에 가득한 발걸음으로 산책을 나서 우리 땅 2헥타르를 마치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처럼 구석구석 살펴보며 다녔다.
그 날 이후 데이빗이 집안에 끼치는 영향이 확연하게 달라졌다. 여태까지
정리정돈을 모르던 사람이 침대를 정돈하고, 청소기로 집안을 밀고, 길을 쓸
고, 빨래를 널고 그밖에도 수없이 많은 집안 일을 돌보기 시작했다. 무엇보
다도 장관인 것은 그가 이런 일을 모두 그지없이 만족해하면서 해낸다는 사실
이었다.
집을 지니고 있다는 자부심을 새로 얻은 덕분에 데이빗은 전화를 받을 용기
도 생겼다. 그 때까지 그는 외부세계와의 의사소통을 전적으로 나와 응답기
에 맡겨 두고, 자신은 전화벨이 울려도 거의 받지 않았다. 직접 전화를 거는
일은 더더구나 드물었다. 마치 그에게 전화를 걸고 싶어하거나 그에게서 전
화를 받고 싶어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는 아무도 없을 것으로 믿는 것 같았다.
이제 그는 누가 '그의' 집으로 '그를' 찾아 전화를 걸면 좋아했고, 나름대
로 아주 특별한 전화예절을 개발했다. 전화가 울리면 그는 내가 바로 곁에
있어도 얼른 달려가 수화기를 집어들고는 언제나 "알로, 알로, 알로......"
하는 말로 상대방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런 다음에는 무엇이든 머리에 떠오
르는 것을 쉬지 않고 말하는 것이다. 전화를 건 사람은 무엇 때문에 전화를
걸었는지도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그가 좋아하는 사람과 통화를 끝낼 때에
그는 어김없이 이런 말로 대화를 맺었다. "속속들이 당신을 사랑합니다."
한두 해가 지난 뒤 내 가족은 모두 한 가지 방법을 알게 되었다. 전화에서
데이빗의 '의식의 흐름'이 빚어내는 독백을 끝내고 싶으면이 말만 하면 되었
다. "속속들이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러면 데이빗은 "당신을 속속들이 사랑
합니다."하면서 전화를 끊는 것이다.
모든 것이 '계획되어' 있고 '짜여져' 있고 '컴퓨터화되어' 있기 때문에 아
무 걱정도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은 데이빗이 아주 자주 하기 시작한 때오 또한
이 무렵이었다. 고속도로를 달려가다가 그는 지나가는 자동차 무리를 가리키
며 이렇게 말하고 했다. "봐요. 저기 교통에는 일정한 양식이 있어요. 모
든 게 계획되어 있고 거기에는 의미가 있어요." 새 떼가 날아가도 같은 말을
했다. 송아지가 어미소의 젖을 빠는 것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묻기도 했다.
"저들이 컴퓨터화된 거예요, 달링?" 그 말에 내가 웃으면서 "그건 말도 안 돼
요!" 하면 그는 고개를 가로 저으면서 아주 확고하게 말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엔 컴퓨터화된 거예요. 컴퓨터화 되는 조절되고 있죠. 우린 다들 그래
요. 모든 게 다 그렇죠."
자그마한 문제나 불상사에 대해서도, 커다란 사건이나 골칫거리에 대해서고
데이빗은 늘 해답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걱정말아요. 다 짜여져 있는 일
이니까 모두 괜찮아질 거예요."
그가말하는 '컴퓨터'에 대해 또 그것이 세상의 모든 것을 조절하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나는 데이빗의 믿음이 처음에 생각한 만큼 엉
뚱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수십 억이나 되는 사람들이 '하
느님'이라 부르는 존재 때문에 인생에는 모든 것에 이유와 의미가 있다고 믿
을 수 있다면, 데이빗이 '컴퓨터'라 부르는 것이 질서와 양식을 세상에 만들
어 넣었다고 믿는것도 이상할 까닭이 없다.
그리고 데이빗이 '교통'의 양식에 대해 해주는 이야기를 계속 들으면서 나
는 그것이 생각을 집중할 수 있게 해 주는 도구가 된다는 사실을 떠나, 우리
일생에 나타나는 의미도 이유도 없어 보이는 모든 것들에 대한 비유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길가에 서서 자동차가 오가는 것을 보면 우리는 대개 그들이 어디에서 가는
지를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각자 차 안에 있는 승객들은 대개 알고 있
다. 그들은 어떤 곳을 떠나오면서 갈 곳을 정해 두었고 또 그 곳으로 가는
이유가 있다. 지켜보는 사람에게는 그런 여행이 아무 의미가 없을 수 있겠지
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여행이 전혀 의미가 없다는 뜻은 아닌 것이다.
"맞아요! 맞아요!" 내가 데이빗에게 그런 이론을 들려주자 데이빗은 소리쳤
다. "인생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온갖 일이 벌어지는데 왜 그런 일이 일어나
는지는 모르죠. 그렇지만 거기에는 계획이 있어요. 컴퓨터는 모든 걸 보살
피고 있고 사람들은 모두가 계획에 따라 여기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 계획을
따르기만 하면 두려움도 사라지고 리듬을 타게 되죠. 그리고 이유와 목적도
알게 되고요. 그러니까, 그러지 않고서 어떻게 살아 나가겠어요? 그런데도
모두가 아주 부서지기 쉬운 상태인 것 같아 보이고 실제로 그렇죠. 우린 모
두가 피와 살로 되어 있잖아요? 바로 그것 때문에 아마 모두가 감사해야되는
거겠죠."
그제야 나는 데이빗이 나아가는 과정에서 자신감과 용기와 힘만얻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의식이 점점 많이 깨어나면서 순수하고 절대적인
믿음도 함께 생겨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약속의 땅에 밤이 되어 산 위
로 하얀 달이 둥그렇게 떠오르면 데이빗은 또다시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순
간을 맞이한다. 그는 집안으로 달려들어 오면서 나를 부른다. "달링, 달링.
와서 저것 좀 봐요! 빨리!" 그러면 우리는 정원으로 나가 무수히 많은 별과
남십자성을 지켜보는 것이다. 데이빗은 이렇게 말한다. "세상을 단순히 즐
기면서 살 수 있을까요? 아마 가능하겠죠. 우리가 이 세상을 한없이 멋진 곳
이며 반짝이는 보석과도 같다고 여긴다면 이런 장관을 단순히 즐기면서 살
수 있을 거예요!"
제31장 세계를다니며
약속의 땅에 있는 집을 데이빗이 좋아한다는 점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그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곳이라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으려는 까닭에 의
아해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데이빗은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예외
없이 단호하게 대답하는 말이 있었다. "어디든 현재 내가 있는 그 곳이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이죠. 그래서 그 순간을 최대한 즐겨야죠. 그 순간 그 곳
을 최대한 즐기는 거예요." 그것은 데이빗의 진심이기도 했다.
한 시간이 걸리든 하루가 걸리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만 하면 그는 곧장
그 곳의 멋진 점에 집중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데이빗의 경우 세상
의 멋진 면을 찾아내는 일은 쉬웠다. 그런 다음에는 무엇이든 그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을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했다. 어쨌든 그는
길이 막혀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을 때에도 즐거움을 찾아낸 사람이었으까.
그것은 정말 잘된 일이었다. 1986년 이후로 데이빗과 나는 오스트레일리아
와 전세계를 많이 다녔기 때문이다. 데이빗을 만나기 직전에 나는 숫자 점
을 보았는데, 2년 안에 내가 짐가방을 꾸리는데 그러고 나면 남은 평생도록
짐을 완전히 풀지는 못할 것이라는 점괘를 들었다. 3중으로 사수자리에 속한
사람답게 나는 그 점괘를 아주 반갑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10년간 짐을 꾸릴
일이 생기지 않은 채 8주 이상이 지나가는 일이 없었다.
그렇지만 우리의 여행이 모두가 음악과 연관된 것은 아니다. 1988년에는
이스라엘에 가 볼 기회가 생겼다. 여러 가지 이유로 나는 데이빗이 이수라엘
에 가 볼 기회가 생겼다. 여러 가지 이유로 나는 데이빗이 이스라엘에 적어
도 한 번은 가보는 것이 그에게는 아주 중요한 경험이 될 거라고 믿었다. 그
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유대인이 된다는 개념을 놓고 고민하고 있었다. 성
장배경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유대사에 대한 데이
빗의 지식은 백과사전 수준이지만 유대인들에 대한 감증은 대단히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다. 그 이유를 나에게 설명해 주었는데, '히므리인'이라는 말이
더 '음악적'으로 들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동족의 풍부한 역사를 직
접 경험해 보면 데이빗이 문제를 얼마간은 해결할 수 잇을것으로 생각했다.
게다가 데이빗의 누나 마거릿 역시 1970년대 중반부터 이스라엘에서 살고
있었다. 1986년 런던에 있을 때 우리는 잠시 찾아온 일이 있지만 데이빗은
지난 20년 동안 누나를 만날 일이 거의 없었고, 자형 앨런이나 이스라엘에서
살고 있는 나머지 가족은 만난 적이 전혀 없었다. 마거릿은 종종 편지에서
한 번 찾아오라고 했는데, 이제 데이빗과 나는 찾아갈 기회가 생긴 것이다.
데이빗에게 예루살렘은 역사를 들이마시는 축제장이었다. 그는 내내 큰소
리로 "훌륭해요! 를 연발했다. 어쩌면 그가 이 도시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마음속에 그려 두었기 때문에, 그가 상상하고 있던 것과는 너무나 달라 모든
것이 놀랍기만한 것도 같다.
베에르셰바에 있는 마거릿의 집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환대를 받았고, 옛정
을 되살리는 의미에서 두 남매는 드보르작의 <신세계 교향곡>을 피아노와 바
이올린 이중주로 편곡한 곡을 함께 연주했다. 어릴 때에 피터를 위해 연주하
던 것이었다.
다음 날 마거릿과 앨런은 우리를 마사다로 데리고 갔고, 야곱의 우물을 지
나 네게브 사막으로 갈 때에 데이빗과 나는 마치 성서시대로 시간여행을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데이빗은 마사다의 폐허를 보고 싶어 안달이었고, 거기
까지 가는 동안 유대인들의 영웅적인 항거와 결국 폐허가 된 사연을 들려주느
라 시간을 다 보냈다.
한때에는 집과 회당과 그밖의 건물이 있었으나 이제는 폐허가 된 곳을 돌아
보고 난 뒤 우리는 고원에서 사해를 내려다보았다. 소금이 과자처럼 떠 있었
다. 우리는 산을 엉금엉금기어 내려가 물에 뛰어 들었다. 데이빗은 따뜻하
고 짠 물 위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는 기분이 재미나면서도 묘하다고 했다.
"운동에는별로 좋지 않겠어요. 그죠?" 그리고는 얼른 샤워실로 달려가 소금
기를 씻어 냈다.
며칠 뒤 마거릿은 우리를 텔아비브로 안내했다. 그 곳에서 우리는 유대인
들의 전쟁기념과 야드 바셈에 들렀다. 사진과 녹음과 영화를 통해 대학살에
대한 이야기를 생상하게 전해 주고 있는 그 기념관을 다니며니서, 데이빗은
그 두려운 일을 그토록 단순하게 묘사해 둔 것에 매우 충격을 받았다. 전시
실에서 전시실로 다니는 사이에 이 두려움은 점점 더 커졌고, 아이들의 신이
한 무더기 쌓여 있는 탁자에 이르렀을 때 그 비극의 역사가 온통 우리를 압도
했다. 나는 눈물이 줄줄 흐르고 목이 메어 말도 할 수 없는 지경이어서 데이
빗의 손에 이끌려 - 데이빗은 나보다 덜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별로 차이가
없었는데 - 건물 밖으로 나갔다.
전쟁 전에 오스트레일리아에 도착한 데이빗의 친척과 또 수용소에서 기적적
으로 살아 나온 외삼촌 사지와 외할머니 브로니아를 제외하면 레이첼과 피터
쪽 친척은 모두 희생되었다. 그러니 그런 두려운 사건을 그렇게나 가까이에
서 듣고 자란 데이빗이고 보면, 우리가 방금 본 광경에 그가 나만큼은 충격
을 받지 않은 것도 어쩌면 그리 놀랄 일은 아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는 기념관 뜰에 앉아 매무새를 가다듬은 다음 마지막 전시실로 향했다.
그 곳에서는 바닥에 켜 놓은 촛불이 켜 놓은 촛불이 저마다 수용소 위치를 나
타내고 있었다. 나는 오스트레일리아에 태어난 것이 너무나도 고맙게 느껴졌
다. 전쟁을 통해 아무도 잃지 않은 것도 고마웠다.
이스라엘 방문 뒤에는 유럽 여행이 계획되어 있었는데, 비엔나에 있는 오스
트레일리아 대사관에서 오스트레일리아 2백주년 기념 특별 독주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데이빗의 독주회는 너무나 성공적이어서 그 다음 해에도 우리는 유
럽으로 갔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피터 포이트뱅거와 상급 음악 세미나에 참
석한다는 덤이 있었다. 뜻밖에도 덴마트인 친구 닐스 루벤도 세미나에 참가
한 것을 보고 반가웠다.
세미나가 끝난 뒤에 데이빗은 독일에서 독주회를 몇 번 열기로 되어 있었지
만 그 이상은 아무 것도 일정이 잡혀 있지 않았다. 닐스는 우리가 덴마크로
오면 데이빗으르 위한 비공개 독주회를 주선해 주겠다고 했다. 우리는 스칸
디나비아에는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으므로 닐슨의 제안을 더더욱 거절하기
힘들었다. 우리가 덴마크와 사랑에 빠지는 일이 시작될 참이었다.
코펜하겐에 우리가 도착했을 때 닐스는 우리를 그의 부모 집으로 안내했다.
두 분은 해협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 자리잡은 고색창연한 대저택에서 살
고 있었다. 우리는 정원 아래쪽에 있는 오두막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바로
바닥가였다. 그리고 물론 데이빗은 수영을 했다. 날씨에 상관없이.
닐슨의 아내 샬로테와 부모는 우리를 한 가족처럼 환영해 주었고, 데이빗은
날마다 닐슨집으로 가서 음악실에서 연습했다. 그와 함께 열흘간을 보내는
사이에 데이빗의 연주에 닐스의 영향이 반영되기 시작했다. 나는 닐스와 데
이빗이 특별한 관계를 이루었음을 알아볼 수 있었다. 거기에 대해 데이빗에
게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닐스는 너무나 상냥하고 너무나 훌륭한
음악가예요. 나를 실제로 가르치지는 않지만 지도는 하고 있어요. 영감을
불어넣고 주고 고양시켜 주거든요." 데이빗이 오스트레일리아에 있을 때에 그
렇게나 바라보면서도 오랫동안 좀처럼 얻을 수 없었던 음악 교류가 바로 이것
이었다.
약속대로 닐스는 자기집에 손님 40명 정도를 초청하여 독주회를 마련해 주
었다. 청중 가운데에는 유명한 비평가 테레사 바스코프레카도 있었다. 바스
코프스카 양은 데이빗의 연주에 감명을 받은 나머지 그 다음 날 데이빗과 인
터뷰를 할 수 있겠는지를 물었고 우리는 기꺼이 승낙했다.
인터뷰 동안 데이빗이 그리 협조적인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바스코프스
카 양은 가엾게도 그를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를 알지못했다. 그는 계속 셔프
단추를 끄르려 하면서 점점 불안해하다가, 마침내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바
닥에 엎드려 그 특유의 기괴한 '팔굽혀펴기'를 수백 번 했다. 인터뷰 마지막
에 바스코프스카 양은 닐스에게 데이빗이 앞으로 덴마크에서 어떤 공연을 할
계획인지를 물었다.
바스코프스카 양의 질문은 약간 뜻밖이었다. 닐스와 나는 한 번도 그 문제
로 의논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등 뒤로 손가락을 십자 모양으로 꼬면서
닐스는 미소띤 얼굴로 아주 자신 만만하게 바스코프스카 양에게 대답했다.
데이빗이 이듬해에 다시 덴마크에 와서 순회공연을 할 계획이라는 것이다.
나는 숨을 죽였다. 바스코프스카 양이 돌아간 뒤 나는 닐스에게 방금 데이
빗 헬프갓의 덴마크 담당 매니저가 된 것을 축하하며 키스를 해 주었다. 다
행히 데이빗의 그런 행동에도 불구하고 바스코프스카 양은 데이빗에 대한 아
주 심도 깊은 특집기사를 써서 뎅마크 사람들에게 소개했다.
닐스가 주선한 커다란 연주회 가운데 처음 것은 그 이듬해인 1990년에 코펜
하겐 북부에 자리잡고 있는 유명한 루이지아나 박물과에서 열린 독주회였다.
박물과 강당에는 청중들이 빼곡이 모여들었고, 바지만 차려입은 데이빗은 여
느 때나 다름없이 대기실 바닥에 엎드려 연주회가 시작되기 전 '팔굽혀펴기'
를 하고 있었다.
"자,오늘밤에 연주할 곡이 뭔지를 알고 있죠. 달링?" 내가 장난스럽게 물었
다.
"모르겠는데요. 달링. 전혀 모르겠어요." 음악회의 주인공이 안개에 싸인
것처럼 대답했다.
이런 대화는 데이빗과 나 사이에 오가는 농담이었지만, 우리 사이의 농담에
아직 익숙하지 않았던 닐스는 초조하게 대기실 안을 서성거렸다. 닐스가 걱
정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연주회가 있기 전 이틀 동안 닐스는 데이빗이
몇 시간인지도 모를 정도로 연습을 많이 하는 것을 들었지만, 독주회에서 연
주할 곡은 한 소절도 듣지 못했던 것이다.
"자, 이제 시작할 시간이에요." 닐스가 말했다. 데이빗은 바닥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눈 깜작할 사이에 무대로 나가는 문 뒤로 사리졌다. 아직도 반나
체 상태였다.
"데이빗!" 나는 데이빗을 세웠다. "돌아와요!. 빨리. 얼른 셔츠를 입고
곧장 피아노로 가는 거예요. 청중들과 악수하지 말고 아무한테도 입맞추면
안돼요!"
이 지경이 되자 닐스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머리칼을 쥐어뜯으려 했다.
나는 모든 것이 다 잘 될 거라고 안심시켜 주었다. 결국 모든 것은 잘 되었
다. 사실은 썩 볼만했다.
이번 독주회에서는 고차크의 <파스퀴나데>, <안달루지의 추억>, <그란데 스
케르조>, 파야의 <의식용 불의 춤>등 쉽사리 들을 수 없는 어려운 곡이 곡목
에 많이 들어가 있었다. 청중들은 아우성이었다. "브라보!"를 외치고 발을
구르면서 앙코르를 다섯 번이나 청했다. 그제야 닐스는 마음을 놓았다. 데
이빗이 홀스테브로와 오르후스에서 독주회를 열 때에도 그는 걱정하지 않았
다.
덴마크 다음에 우리는 처음으로 동독 여행에 나섰다. 라이프치히에 가서
유명한 블뤼트너 피아노 공장에 들렀는데, 그 곳에서 블뤼트너 씨를 직접 만
날 수 있었다. 데이빗은 그 무렵 1877년에 제작된 블뤼트너 피아노를 가지고
있었는데, 복원할 계획이었으므로 특히 관심이 많았다.
다음에는 켐니츠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곳에서 데이빗은 독주회도 열교
바우하우스 양식의 아름다운 수영장에서 수영도 했다. 데이빗은 '지구상 어
디를 가든 수영을 좋아했고, 가는 곳마다 수영장이 어디 있는지를 찾아내는
일을 탐정처첨 잘 해냈다. 이제 나는 유렵의 수영장에 대한 안내서도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함브르크에는 거대하고 웅장한 수영장이 있지
만 약간 압도적이라는 느낌이 들고, 본의 수영장은 비교적 작고 친근하며, 코
펜하겐에는 아름답고 대단히 친근하게 느껴지는 수영장이 있고, 런던 중심가
에 있는 수영장은 무척 붐빈다. 이런 수영장에서 빠지지 않는 공통점은 직원
들이 친절하고 도움이 많이 된다는 점이다. 왜 그런지 이유는 모르지만 우리
가 만난 수영장 안내원은 하나같이 데이빗에게 친절하고 상냥했다.
오스트레일리아로 돌아온 뒤 데이빗은 장애자 어린이들을 위한 자선공연을
제의했다. 연주회장은 손꼽히는 일본인 사업가인 한다 씨 소유였는데, 그는
제이잔 후카미라는 이름으로 작곡도 하는 사람이었다.
몇 달 뒤 한다 씨를 만났는데, 그는 데이빗을 위해 <피아노와 관현악단을
위한 고아시곡>을 쓰고 싶다고 했다. 1991년 9월에 토쿄 소니 음악당에서 연
주회를 열어 달라고 초청했다.
8월, 그러니까 출발 두 주 전에 한다 씨의 악보가 보착했다. 일본과 서양
주제가 한 데 어울린 아주 흥미로운 작품이었고, 낭만적인 부분이 많이 들어
있어서 데이빗이 아주 좋아했다. 시간이 촉박한 데다가 작품도 규모가 크고
상당히 복잡했기 때문에 데이빗은 여행을 떠나는 날까지 피아노를 거의 떠나
지 않았다.
우리가 탄 비행기가 토쿄에 도착한 것은 오전 6시 반이었지만 한다 씨의 직
원 열 명이 공항에 마중 나와 있었다. 이들은 대단히 정중하고 친절했다.
우리는 아름다운 임페리얼 호텔로 안내돼 갔다.
데이빗이 연슬할 수 있도록 음악실도 마련되었다. 음악실에서는 철도와 고
속도로가 내려다보여 데이빗이 아주 좋아했다 - '교통'이 많았으니까. 그리
고 데이빗은 호텍의 실내 수영장에서 언제든지 수영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한 주 동안 데이빗은 리허설로 바쁘게 시간을 보냈다. 일본 사람
들은 전반적으로 어느 정도 거리감이 있는 사람들이지만, 데이빗이 음악가들
과 함께 있을 때에는 아무런 장벽이 없었다. 데이빗의 성격 때문에 음악가들
이 어리둥절할 때도 있었지만 항상 그렇듯 음악이 모든 것을 감싸주었다.
정말 우연히도 러시아에서 다큐멘터리 촬영을 끝마친 조지 니거스가 데이빗
의 연주회를 보기 위해 토쿄에 들리겠다고 팩스를 보내왔다. 데이빗에게는
멀리서 자기 연주를 들으러 오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이상으로 기쁜 일은 거
의 없었지만, 조지는 그 때문에 시간을 얼마나 빽기게 될지를 조금도 모르고
있었다. 나리타 공항은 도쿄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었고 거기까지 오가는 도
로사정은 끔찍한 정도였다. 조지는 한다 씨의 자동차로 소니 음악당까지 왔
는데, 길이 막혀 몇 시간이 지난 뒤에 음악당에 도착했다. 연주가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연주회가 끝나자 그는 곧장 자동차에 올라, 공항까지 괴롭고 지
루한 여행을 시작했다. 그는 가까스로 비행기를 탈 수 있었지만, 나중에 우
리에게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었다고 말했다. 청중 2천5백 명도 데이빗의 연
주를 아주 좋아했다.
그 뒤 며칠 동안 도쿄에서 멋진 식당과 갖가지 풍물을 구경하는 한편, 데이
빗은 한다 씨의 작운 작품 몇 곡과 <광시곡>을 CD로 녹음했다. 요술의 나라
에 온 듯한 두 주가 지난 뒤 떠날 시간이 되었을 때 우리는 너무나도 아쉬웠
다. 한다 씨의 직원 열 명이 이번에도 공항까지 배웅을 나왔다.
세계여행은 계획되었다. 1993년 초에 사업가 기질이 뛰어난 친구 찰스 즐
레어가 데이빗의 페테르스부크 연주회를 주선했다. 데이빗은 이 소식을 듣자
마자 '라흐 3번'을 연주하는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불행히도 '라흐'를 연주
하기 위해서는 관현악단 규모가 90명 정도는 되어야 했는데 당시 연주회에 동
원할 수 있었던 연주자는 50명 정도뿐이었다. 데이빗의 꿈은 꿈으로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찰스는 데이빗이 무슨 협주곡이든 연주할 수 있지만 가능하면 슈만의 A단조
가 좋겠다고 했다. 그러나 데이빗은 슈만이라는 이름을들을 때마다 큰 슬픔
을 느꼈다. 데이빗은 어린 시절에 <환상곡집>과 그밖의 작품을 연주했지만
신경쇠약을 겪은 이후로 그는 수만의 비극적인 삶에 대단히 민감해졌고, 수만
이 결국 삶을 마감했던 정신병원에서 겪은 고통에 대해 깊이 연민을 느꼈다.
상당히 오랫동안 의논한 끝에 데이빗은 결국 슈만을 연주하기로 했다. 수만
이 비교적 덜 불행하던 시절에 쓴 곡이기 ㄸ문이었다.
일단 곡은 정했지만 데이빗이 작품을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은 한달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는 한편 찰스는 데이빗이 수만이나 라흐마니노프의 협주곡
2번을 연주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알바니아로 편지를 보냈다. 이는 어느 정
도 타협한 결과였다. 찰스는 이번 여행에서 설혹 장소가 러시아가 아니라도
데이빗이 라흐마니노프를 연주하고 싶어하는 소원을 이루어 주고 싶었고, 알
마니아쪽 관현악단에서 거대한 3번보다는 2번을 더 잘 소화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 결과 알바니아에서도 연주회를 열기로 확정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자기 데이빗에게 러시아와 알바니아 공연 직전에 덴마크
순회공연을 해 달라는 제의가 들어왔다. 일정은 이제 꽉 잡힌 데다가, 1984
년 이후로는 데이빗이 라흐마니노프의 협주곡 2번을 연주한 일이 없었으므로
슈만과 라흐마니노프를 모두 준비한다는 것이 그리 타당해 보이지 않았다.
알바니아쪽에서는 곡목을 정했다는 연락이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찰스는
데이빗이 슈만을 연주할 것이라고 통보했다.
방대한 덴마크 순회공연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이어 우리는 예전에 즐거운
추억이 남아 있는 러시아의 페테르스부르크로 향했다. 공항에는 러시아의 문
화단체에서 일하는 찰스의 친구 헬렌 이브첸코가 마중 나와 있었다.
우리는 페테르스부르크를 이곳 저곳 다니고 싶었으므로, 헬렌에게서 버스와
전차를 이용하는 요령 몇 가지를 들은 뒤 시내 탐험에 나섰다. 우리 앞에 드
러난 도시는 겨우 7년 전에 보았던 것과는 너무나도 다른 곳이었다. 도로와
건물이 심하게 퇴락해 있었고, 공산주의 시절일 때에는 잘 돌보고 있던 곳이
이제는 타손된 상태였다 전체적으로 전보다 훨씬 퇴색한 분위기였다.
데이빗은 그 곳 관현악단과 함께 슈만을 연습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정부
소속 기간이 이제는 많이 사라지고 음악가들도 일자리를 얻기가 힘들어진 상
태엿으므로 어떤 면에서 데이빗이 거기 가 있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게 느껴졌
다. 그러나 데이빗은 연주료를 받지 않았고 오스트레일리오의 벨링언 예술협
회에서 그 곳 관현악단을 미화 2백 달러로 고용했다. 러시아 기준으로는 상
당한 액수였다.
연주회는 유서 깊은 림스키-코르사코프 음악당에서 열렸다. 마린스키 극장
맞은 편에 있는 음악당이었다. 연주회가 끝나자 사람들은 앞으로 나아 와 무
대 위에 장미 한 송이, 튤립, 카네이션 같은 꽃을 놓았다. 이는 특히 감동적
인 광경이었다. 오로지 음악가와 음악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나타내기 위한
목적으로 꽃을 사 온 것인데, 그 꽃을 사기 위해 치러야 했을 대가를 생각해
보면 더욱 그랬다.
헬렌은 또 지금은 박물관이 된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생가에서 자그만한 독
주회도 주선했다. 집안에는 그가 가지고 있던 책과 사진, 심지어 종이와 펜
까지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어, 미치 그가 잠시 산책을 나가고 없는 듯한 착각
마저 들었다. 림스키-코르사코프의 피아노 앞에 안자 데이빗은 피아노 위쪽
에 있는 무소르그스키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그림 속의 무소르그스키는 강렬
한 눈빛으로 데이빗을 빨아들이는 듯했다. 데이빗은 곧장 <전람회의 그림>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데이빗은 기쁨에 북받쳐 있었고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
었다. 연주를 마친 다음 데이빗은 이렇게 말했다. "아, 달링! 내 평생에 이
렇게 특권을 누릴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삶은 너무나
도 오묘해요. 너무나도 놀라운 계획이에요. 이렇게나 특별하게 자여져 있다
니!"
그러나 그보다도 더한 감동이 데이빗을 기다리고 있었다 러시아 공연을 마
친 뒤 우리는 방마르로 갔다. 그 곳에서는 당시 데이빗의 독일 쪽 매니저인
롤란트 빈츠가 바이마르 음악위원회를 위해 리스트 하우스에서 데이빗이 연주
할 수 있도록 준비해둔 것이다.
리스트의 생가로 가는 동안 데이빗은 리스트가 직접 쓰던 피아노로 연주하
게 되었다는 생각에 흥분을 가누지 못했다. 음악위원회는 우리를 따뜻하게
맞이했지만, 영어를 하지 못했는데, 다행히 롤란트가 거기에서 통역을 맡아
주었다.
우리가 집안으로 들어가자 마자 데이빗은 피아노로 달려갔다. 오랜 역사를
지닌 베흐스타인 피아노로서, 리스트를 위해 베흐스타인이 직접 손으로 만든
것이었다. <B단조 발라드>의 힘찬 왼손 도입부가 집안을 가득 메웠고, 그 순
간부터 청중들은 모두 데이빗 차지가 되었다. <라 캄파넬라>, <운 조스피
로>, <광시곡>이 뒤를 이었다. 위원회의 몇 사람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
고, 또 몇명은 경이에 빠져 있었다. 데이빗은 열기를 내뿜었다.
연주회가 끝난 뒤 우리는 리스트의 집 이곳 저곳으로 안내되었다. 리스트
가 쓰던 물건 일부가 지금도 소장되어 있었고, 이 위대한 음악가의 본질을 느
낄 수 있었다. 어느 방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서있던 데이빗이 나에게 말했
다. "내 평생에 가장 영적이고 가장 감독받은 순간이었어요." 데이빗이 '영
적'이라는 말을 쓰는 것을 들은 것은 오직 그 때뿐이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난 후, 리스트가 그 곡을 작곡할 때 썼던 바로 그 건반을
두들기면서 바로 그 작품을 연주한 기분이 어땠는지 누군가 데이빗에게 물었
을 때, 데이빗은 영적인 부분과는 아주 거리가 먼 부분만 기억에 떠올릴 뿐이
었다. "정말 즐거웠어요. 아주 재미있었죠. 내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할 때
마다 길리안이 발가락으로 나를 툭툭 쳤어요. 나는 그게 재미있어서 더욱 신
이 났고 그래서 훨씬 더 연주를 잘 할 수 있었어요!"
사실이었다. 리스트의 생가에서 열린 독주회 역시 내가 '입막기'를 할 수
밖에 없었던 많은 연주회 가운데 하나였다.
바이마르 연주회가 끝난 뒤 데이빗은 드레스덴에서 독주회를 열었고, 그 다
음에는 로마로 차를 몰았다. 그 곳에서 오스트레일리아 대사관의 공보관인
클렐리아 마치가 알바니아 비자를 재빨리 처리해 주었고 티라너에서 지낼 곳
도 주선해 주었다.
그런데 이번엔 왠지 느낌이 이상해서 확인전화를 걸어보기로 했다. 클렐리
아에게 사흘 뒤어 티라너에게 데이빗이 슈만을 연주하기로 되어 있는데 그 곳
에 연락해서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는지를 좀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교향
악단 매니저에게 전화를 건 클렐리아는 데이빗이 라흐마니노프 2번을 연주할
것이라는 대답을 들었다.
세상에! 어디서 오해가 생겨났을까?
그렇지만 이는 사실 문제가 아니었다. 알바니아 사람들이 라흐마니노프 말
고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클렐리아가 알게 된 것이다. 데이빗
은 이 협주곡의 악보도 가지고 있지 않은 데다가 우리는 갈리폴리에서 독주회
를 열 예정이어서 남쪽으로 차를 몰아 출발하기 직전이었다. 독주회를 마치
면 곧바로 오트란토에서 배로 알바니아로 가기로 되어 있었다. 악보가 있었
다 해도 데이빗은 연주회가 있기 이틀 전까지는 연습할 시간도 없을 것이다.
다행히도 문제의 절반은 금방 해결되었다. 클렐리아가 로마의 음악서점에서
악보집을 찾아낸 것이다. 그래서 티라너에 도착했을 때 우리가 할 일은 피아
노를 찾아내는 것 뿐이었다.
첫 리허설은 우리가 도착한 다음 날 아침 텔레비젼 방송국에서 있었고, 연
주회는 그로부터 이틀 뒤 커다란 오페라 하우스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지휘자 페르디난드 데다는 명랑한 성격에다 영어도 약간 할 줄 알았으므로 저
으기 마음이 놓였다. 교향악단이 가지고있는 악기는 썩 좋은 것은 아니었지
만 악단의 열성은 대단했다. 리허설은 꽤 잘 진행되었고 지휘자는 곡 해석에
뛸 듯이 좋아했다. 호텔로 돌아온 데이빗은 저녁 내내 악보를 연구했다.
이튼날의 리허설도 완벽하게 진행되었지만, 연주 동안 데이빗의 악보를 넘
겨줄 사람이 필요하나는 말을 내가 꺼내자 약간의 문제가 생겼다. 지휘자는
내 요청에 대해 문제없다는 입장이었지만, 방송국장이 - 군대 지휘관 같은 사
람이었는데 - 즉각 달려오더니 연주회가 텔레비젼으로 방영될 것이기 때문에
데이빗이 악보를 사용하면 안된다고 했다.
나는 연주회 곡이 바뀐 데에 대해 설명했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국장은
또 데이빗의 라흐마니노프 연주가 너무 절제되어 있다고 했다. 나는 이번은
리허설일 뿐이기 때문에 데이빗이 최선을 다할 필요는 없으며, 다음날에 있을
본 연주회를 위해 힘을 아껴 두어야 한다는 설명을 해 줄 수밖에 없었다. 그
리고 오페라 하우스를 피아노 소리로 가득 메울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도
해 주었다.
호텔에 피아노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리허설이 끝난 뒤에도 데이빗이 남
아서 계속 연습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했다. 마침내 경비담당자들은 데이빗
이 혼자 집중적으로 연습할 수 있도록 두 시간 여유를 주겠다고 했다. 호텔
로 돌아온 뒤 데이빗은 악보를 자정까지 연구했다.
이튼날에는 실제 연주가 있기 전 저녁 여섯 시에 오페라 하우스에서 최종
리허설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데이빗과 바이올리니스트 한 사람만 빼고는 아
무도 나타나지 않았고 리허설은 결국 하지 못하고 말았다. 일곱 시 반, 청중
들이 가득 모여든 극장 안의 조명이 어두워지고 데이빗은 악보 없이 피아노
앞에 앉았다. 인정하지만 나는 불안하기 그지 없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사실 애초부터 없었다. 약간 불안하게 시작하기는
했지만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이내 어우러지면서 연주에 자신감과 열정이 붙
었고, 저 서정적인 곡이 섬세하고도 아름답게 울려퍼졌다. 극적인 3악장이
끝날 무렵 청중 가운데는 우는 사람이 많았다. 지휘자는 데이빗을 포옹했고,
데이빗은 관현악단 전부에게 입맞춤을 해 주고 싶었지만 다행히도 제일 앞줄
에 있는 단원들에게만 입맞춤을 해 주는 것으로 끝났다.
갖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알바니아 사람들은 깊은 감동을 받았다. 연주뿐
아니라 데이빗이 그들에게 연주를 들려주기 위해 오스트레일리아에서부터 먼
길을 왔다는 사실 자체도 고마워했다. 내가 데이빗과 함께 지내기 시작한 뒤
에 경험한 가장 자랑스러운 순간 가운데 하나였다. 그의 프로 정신과 따스한
매력이 모든 긴장을 몰아냈다.
피터 헬트갓은 아들이 언젠가는 '추락'할 것이라고 말했다. 데이빗은 또
그가 런던에서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해 준 말도 기억하고 있었다. "너는 네
가 똑똑하다고 생각하겠지. 연주회장에서 연주회장으로 다닐 것으로 생각했
겠지. 천만에. 결국 넌 그렇게 똑똑하지 않아. 병원에서 병원으로 옮겨 다
니기만 할 테니까." 피터 헬프갓은 아들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제32장 타리 가는 길에 생기는 일
1992년에 덴마크 순회공연을 다시 한번 멋드러지게 해 낸 뒤 데이빗은 집으로 돌아가 그간 쌓
인 피로를 풀기 전에 퍼스에 며칠간 머무르면서 윈 박사와 함께 성공의 기쁨을 나누고 싶어했다.
윈 박사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데이빗은 최근 얻은 자부심과 여행담을 들려 주었다. 이번 면담을
특히 즐거웠다.
이사를 한 뒤라 퍼스에는 우리 집이 없었으므로 바바라 브래클리의 딸 리키 부부 집에 머물렀
다. 리키의 남편 닉 케벌 역시 우리와는 아주 특별한 친구 사이였다. 두 사람은 2층집과 단층
별채가 있는 집을 샀는데, 놀라웠던 것은 별채가 붙은 집을 산 이유였다. 우리가 퍼스에 오면
언제든지 쓸 수 있도록 하려고 마련한 것이다. 나는 야마하 클라비노아 피아노를 이 작은 별채
에 사 두기까지 했고, 퍼스에 갈 때마다 데이빗과 나는 그 곳에 머물렀다. 그 곳에서는 완전히
우리 집처럼 편안했다.
윈 박사와의 면담이 있은 다음 날은 '타는 듯한' 날이 될 것이라는 예보가 있었으므로 닉과 리
키와 데이빗과 나는 아침 일찍 수영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제일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자동차에 수건과 선탠 크림을 챙겨 놓고 프리맨틀로 출발해서 오전 일곱 시반쯤에 바닷가에 도착
했다. 바다는 너무나 반가웠고 데이빗이 제일 먼저 물에 뛰어들었다. 나머지 세 사람은 천천히
물에 들어갔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사람들이 늘어났고 기온도 그만큼 기온도 높아지고 있었다. 한동안 첨범거
린 다은 우리는 물에서 나왔는데, 닉이 갑자기 바다 쪽을 뒤돌아보면서 말했다. "데이빗은 어디
있죠?"
우리는 수영객들을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데이빗의 특이한 수영자세는 눈에 띄지 않
았다. 다음에는 물가를 따라 뛰거나 거니는 사람들을 살펴보았지만 거기에서도 데이빗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바닥가를 다니면서 더 자세히 찾아보기로 했다. 그러나 그의 흔적은 없었다.
시간은 흘러 바야흐로 아홉 시간 되었고 나는 혹시 그가 우리가 있는 지점을 잊어버리고 지나
쳐 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리키는 데이빗이 너무 멀리까지 수영을 나갔다가 혹시
무슨 사고가 생긴 것은 아닐까 걱정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가 물에서는 항상 안전하다는 점을 알
고 있었다. 동부 해안에서 한번은 상어 섬까지 세 번을 연거푸 헤엄펴 오 지만 아무일도 없었
다.
지금으로서는 모퉁이를 돌아 옆 해변으로 걸어가서 살펴보는 길밖에 없었다. 어쩌면 그가 그
곳까지 조깅이나 수영으로 갔다가 원래있던 곳과는 다른 곳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지
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지금 그 곳에도 없었고 시간은 자꾸자꾸 흘러갔다. 우리는
처음 자리잡았던 해변으로 돌아와, 자동차를 타고 옆 해변으로 달려갔다.
그 때까지도 나는 그 곳에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는데, 거기는 뜻밖에도 나체족 해변이었다.
알몸인 남녀들을 하나하나자세히 살피면서 혹시 데이빗이 그 사이에 끼어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
는 않은지를 살쳐보는 일은 정말이지 마음 불편한 일이었다. 아마 그들은 나를 아주 이상한 사
람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몹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오후 세 시 반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데이빗을 찾을 수 없었다. 우리는 경찰서를 찾아갔다.
나는 데이빗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 나는 언제나 그가 불사신이라고 믿고 있었으므
로 - 어디있는지를 알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경찰은 자세하게 신고 내용을 받아 적은 다음 순찰
차에게 연락해서 데이빗을 보았는지를 물었다 순찰차 한 곳에서 아침에 프리맨틀 항구 근처에서
데이빗을 보았다고 대답했다.
다시 자동차에 오른 우리는 재차 수색을 나섰지만 이번에도 허탕이었다. 그 날 저녁에 다들
브래클리네 집으로 가기고 되어 있었으므로 혹시 하는 마음에 바바라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지
만,,, 바바라도 아는 게 없었다. 하긴 그 쪽으로 소식이 있을 리 없었다. 바바라의 집은 25킬
로미터 정도 되는 거리여씨으니까. 기온은 섭씨 42도를 오르내리고 있었고 데이빗은 돈도 없고
수영복 차람이었다. 새로 산 콘텍트 렌즈를 그가 물에서 잃어버리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었다.
저녁 여섯 시 반쯤, 우리는 스털링 고속도로에 올라 퍼스 쪽으로 차를 몰았다. 다시 한 번 바
바라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놀랍게도 뜻밖에도 그리고 다행하게도 데이빗이 발견되어 친구 한 사
람이 안전하게 집으로 데리고 오는 중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갖가지 감정이 뒤섞인 채로 바바라의 집에 도착했다. 데이빗을 보자 나는 진심으로 기
쁘고 안심이 되었지만 그 순간에는 그를 새로운 모델로 갈아키우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싼
값에 내다팔고, 닉과 리키는 조금도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오랫동안 캐물은 끝에 우리는 데이
빗이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겨우겨우 끼워 맞출수 있었다.
처음에는 물에서 나와 엉뚱한 방향으로 조깅을 시작한 것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그는 옆 해변
에 도착했고, 방향을 잃었다는 생각이 들자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방향은 해변 쪽이
아니라 프리맨틀 부두 쪽이었다. 거기서 길이 엇갈린 것이다.
데이빗은 스스로를 '집중해', '긍정적으로 생각해' 하는말로 타이르면서 한동안 방향도 없이
헤매 다니다가 수영을 좀 더 하고, 그리고는 우리가 이미 찾아보고 지나간 해변 몇 곳을 오르락
내리락 걸어다녔다.
오후 해도 어느 정도 기울었을 때 우리는 다시 찾아낼 방법은 한 가지뿐이라고 생각하고는 바
바라 집으로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거리가 얼마나 될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퍼스를
향해 길을 나섰을 때에 그는 탈수증과 피로에 지쳐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바로 그때 우리의 오랜 친구 프란시스 헤브가 고속도로가에 차를 세우고는 오라고 손직하는 것
을 마치 꿈속에서처럼 아른하게 보았다. 데이빗은 낯익은 손인 코카콜라 병을 건네는 것을 보고
놀랐다. 프란시스 역시 우리가 퍼스에 온 것을 모르고 있었으므로 어디인지도 모를 곳을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 데이빗이 수영복 차림으로 달리고 있는 것을 보고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뜻밖이었어요. 고맙고도 놀랍게도 이 멋진 자동차가 다가오더니 내 앞에 서는 거예요." 데이빗
은 그 광경이 아직도 눈에 선해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나는 반갑다고 했고, 이 콜라가 아주아
주 고마웠어요. 병째로 고스란히 오로지 나를 위해 따 주었거든요!"
데이빗이 목적지를 말하자 프란시스는 데이빗에게 곧장 자동차에 타라고 하고는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바바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는 사이에 데이빗은 프란시스의 냉장고에서 차고
물기 있는 것은 모조리 꺼내 마셔 버렸고, 웬만큼 성이 차자 이번에느느 피아로로 다가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데이빗을 끌어안았다. "달링. 오늘은 아주 힘들 하루였어요." 데이빗은 중얼거리듯 말했
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한 가지뿐이었다.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우리를 안삼시킬 필요를
느낀 데이빗은 미소를 지은면서 말했다." 걱정 말아요! 모든 게 계획에 있던 거예요. 누군가는
나를 보살펴 줄 거예요. 누군가는 그 일을 하게 되어 있거든요! 기적이에요! 내가 살아 있는 것
은 기적이에요. 그렇지만 누가 나를 보살펴 줄지는 컴퓨터가 늘 결정하는 것 같아요!" 아, 나에
게도 데이빗처럼 가없는 가없는 믿음이 있었다면.
며칠 뒤 우리는 시드니로 가서 우리 차를 찾아 벨링언까지 바닷가를 따라 6백 킬로미터 자동차
여행을 시작했다. 시드니를 빠져나올때에 데이빗은 약간 흥븐해 있었다.
네 시간 정도 차를 몰고 같 뒤 나는 잠시 쉬었다가 나머지 세 시간을 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
했다. 나는 주유소와 편의점이 있는 곳에 차를 세웠다. 데이빗은 내 옆자리에 앉아 즐겁게 '작
곡'을 하고 있었다. 나는 잠시 쉬겠다고 하고는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뭔가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에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떴더니 겁에 질린 데이빗이
우리 차 쪽으로 비명을 지르면서 달려오고 있었다. 그 뒤에서는 몸집이 커다란 남자를 그를 따
라 달려오고 있었다. 데이빗을 잠으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데이빗에게 얼른 차에 타라고
하고는 재빨리 시동을 걸었다. 출발하기 직전에 그 남자는 데이빗이 자기 아내를 폭행했기 때문
에 경찰에 연락하겠다고 소리를 질렀다.
데이빗은 완전히 넋이 나간 상태로 계속 이 말만 되풀이했다. "건드리지 않았아요! 콜라 하나
만 달라고 했을 뿐이에요! 건드리지 않았어요!" 나는 그를 달래 주고 싶었지만 지금으로서는 무
엇보다도 저 남자로부터 최대한 멀리 벗어나는 것이 데이빗에게 중요했다. 고함소리를 들어면
데이빗 늘 신경이 곤두서고 겁을 먹었다.
데이빗이 다른 사람은 물론 벌레 하나에게도 해를 입힐 사람이 아니라는 점에는 추호도 의심이
없었다. 데이빗이 비록 이제는 완전히 낯선 사람에게 다가가 포옹하지는 않지만, 사람들에게 악
수하자고 손을 내밀기는 여전히 좋아했다. 윈박사와 나는 사람들은 이런 행동을 개인적인 공간
을 침범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고 수없이 설명해 주었다. 데이빗이 약간 진정되기
시작하면서 중얼거리는 몇 마다 두서없는 말을 종합해 볼 때 가게 안에서 여자와 있었던 일이 바
로 이 경우인 것 같았다.
타리를 향해 차를 몰아가면서 나는 만일 진짜 문제가 있다면 경찰이 곧 나타나 우리를 세울 것
이라 생각했다. 타리에 거의 다 다다르자 정말로 경찰차가 다가오더니 길가에 차를 세우라고 지
시했다. 경찰은 신고가 있었기 때문에 몇 가지를 물어 보아야 되겠다고 했다.
우리는 경찰서로 따라갔고, 자동차 안에서 약간 가라앉았던 데이빗은 그 곳에 도착하자 위험한
수준으로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는 겁에 질린 얼굴에다 이성을 잃어 가고 있었다. 데이빗은 아
무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았다고 계속 소리쳤고, 경찰은 그를 끌고가서 유치장에 가두어 버렸다.
괴로워하고 겁에 질린 채 어쩔 줄 몰라 당황한 얼굴로 불안에 부들부들 떨면서 유치장 안에서
서성이는 데이빗을 보니 견디기가 너무나 힘들었다. 내가 그처럼 비참하고 무력하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데이빗은 자신이 왜 거기 갇혔는지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고 가슴속에서부터 공포
가 자라 나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두서없이 행동했다. 내가 유지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조차 허
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안고 달래 줄 수도 없었다. 고문이었다.
경찰 한 사람이 나를 사무실 안으로 불러들이더니 차를 한 잔 권했다. 그 경찰 역시 데이빗의
고통을 결코 즐기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데이빗에게 약을 좀 더 먹이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상급자가 나타나자 나는 데이빗의 약을 건네주었다. 그는 데이빗의 증세에
대해 물었고, 나는 대충 줄거리를 들려주엇다. 데이빗은 약을 매일 먹고 있으며 지난 4년 동안
같은 약을 내내 먹고 있어서 이제는 균형이 잘 잡혀 있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런 다음 윈 박사
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경찰은 유치장으로 가서 데이빗과 면담을 하고 돌아왔다. 그는 데이빗이 지난 며칠 동안 약을
몰래 버렸노라 털어놓았다고 했다.
그제야 나는 데이빗이 유럽 순회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 사는 것이 너무나 행복한 나머지
아무 '도움' 없이 살아 나갈 수 있는 것으로 느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매일 밤 손
에다 약을 쥐어 주면서 입에 털어 놓는 것을 지켜보기는 했지만, 실제로 삼키는 것까지는 보지
않은 적이 많았다. 지난 4년 동안 그가 전적으로 순순히 약을 먹었기 때문에 당연히 먹을 것으
로 믿고 있었다. 이제 데이빗의 조증 상태가 다시 나타난 것이 분명했고, 그가 보인 발작적인
몸짓 때문에 주유소의 여자가 겁을 먹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지만 데이빗은 여자를 건드리지
않았노라고 완강히 부인했다.
경찰은 두 다기 해결책이 있다고 말했다. 한 가지는 데이빗을을 뉴캐슬에 - 남쪽으로 두 시간
거리 - 있는 정신병원에 보내 며칠간 수요시켜 관찰하는 방법이었다. 나는 경찰에게 그것은 있
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데이빗이 얼마나 슬퍼하고 불안해할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일반 병원을 생각해도 겁을 먹는 그였으니, 정신병원이라는 사실을 알면 그 충격이 오죽 클까.
두 번째는 데이빗이 타리 안에 있는 병원에 입원해서 관찰을 받는 방법이었다. 나도 데이빗과
같은 병실에서 지낼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은 정신 의학계에서 새로 실험하고 있는 방법이었다.
어느 환자든 혼자 입원해 있는 것보다는 사랑하는 사람이 같은 병실에서 지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 데에서 나온 방법이었다. 나는 안심되고 또 경찰이 고마워서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그
는 데이빗이 건강하지 못한 것을 뻔히 보면서 유치장에 가두어 두는 것은 전혀 내키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는 병원으로 이송되어 가서 대기실에 자리잡고 앉았다. 윈 박사에게 연락이 갔고 이어 담
당 정신과 의사인 리치먼드 박사가 나와서 데이빗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가 아주 상냥하게 대
하자 데이빗은 진정되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데이빗은 창에 창살이 있는 감호병실에 수용되었다. 병원에서는 내가 쓸 수 있도록
안락의자를 들여놓아 주었다. 리치먼드 박사는 데이빗에게 진정제 주사를 놓았고, 나는 침대에
앉아 데이빗을 안았다. 그가 잠이 들 때 나는 온순한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고통이 컸지
만 조증 상태는 이제 가시고 평화가 되찾아 오고 있었다. 간호를 맡은 당직 수녀가 들어와서 우
리에게 더 필요한 것이 없는지를 확인한 다음 문을 잠갔다. 의자에 앉아 쉬면서 창을 바라보니
창살 윤곽이 살풍경 했다. 유치장에 있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니 아찔했다.
아침이 되어 리치먼드 박사가 들어왔을 때에도 데이빗은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박사는 데이
빗이 완전히 안정되었다고 판단될 때까지 며칠 동안 두 곳에서 지내야 한다고 했다. 산책을 나
가고 싶으면 나 혼자 나가는 것은 허용된다고 했지만 나는 데이빗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데
이빗은 거의 하루 종일 잤다. 오후에 잠에서 깨어나자 그는 예전처럼 익살맞고 사랑스런 모습으
로 되돌아와 있었다. 간호사는 데이빗을 대단히 따뜻하게 대했고, 데이빗은 다음 날 아침에 다
른 환자들을 위해 피아노를 연주해도 되겠느냐고 박사에게 물었다.
화창하게 날이 밝아 병실 안으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창살은 이제 그리 위협적으로 보이
지 않았다. 경찰이 병원으로 찾아와, 주유소의 부부에게 사정을 전부 설명해 주었더니 고소를
취하하겠노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리치먼드 박사가 다시 들어와 데이빗이 이제 안정을 되찾은
것을 보니 기쁘다면서 오후 아무 때고 퇴원해도 좋다고 했다. 그 사이에 데이빗은 비공식 독주
회를 준비했다.
피아노는 오락실에 있었고 환자 몇 사람과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찾아와 함께 데이빗의 음악을
나우었다. 그가 풍부한 감정에다 기쁨까지 실어 연주하자 황량한 오락실 안에 음악이 가득 흘렀
다. 나는 그가 예전의 모습을 되찾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환자와 의사와 간호사들은 이 뜻밖
의 선물에 반가워했고, 이들의 환호와 박수 역시 데이빗의 영혼이 미로에서 빠져나오는 데에 도
움이 되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데이빗을 내 곁에 앉혀 두고 집으로 차를 몰라 돌아오는 동안 나는 약에 관
한 한 다시는 데이빗을 믿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약을 혀 밑에 감춰 두지 않앗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그의 입 속에 손가락을 넣어 뒤지는 한이 있다 해도.
그리 낭만적인 모습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달리 어떻게 그를 더 깊이 사랑할 수 있을까,,,
제33장 샤인
1995년 4월 6일
데이빗과 길리언에게
추억을 나누고 싶고 또 한편으로는 영화를 만들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 이 편지를 씁니
다.
저는 우리가 힐게이트 로드 거리에 있는 포리스트 고등학교에 다니던 때의 데이빗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학교는 상업 고등학교였기 때문에 음악이나 미술은 아주 보기드문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학교에는 음악가가 두 사람 있었습니다. 데이빗과 저였습니다.
데이빗은 말라깽이면서 힘이 넘치고, 피아노를 놀라운 솜씨로 힘차고 기쁨에 차서 연주하던 아
이였습니다. 그 때 저는 시골 취주악단에서 트럼펫 연주를 배운 뒤 퍼스로 이사와 있었는데, 유
명한 악단에서 연주하는 한편으로 지휘자로부터 교습을 받았습니다. 지휘자는 웨스턴 오스트레
일리아 교향악단의 수석 연주자이기도 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여튼, 우리는 학교 조회에서 열리는 자그마한 연주회에서 연주를 하기로 했습니다. <캐러
밴> 같은 옛날 대중가요 두어 곡을 제가 연주하는 동안 데이빗이 '반주'를 맡아 주기로 했고, 그
다음에는 데이빗이 리스트나 아니면 자기가 원하는 다른 곡을 연주하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연습을 위해 윗길에 사시는 제 이모 댁으로 갔습니다. 그 때부터 제 어머니와 이모와
저는 데이빗의 '팬'이 됐는데, 그가 재기한다는 소식과 그간의 사정 이야기를 듣고 우리는 감동
을 받았습니다.
데이빗과 제가 함께 연주했던 그 이듬해에 저는 퍼스 모던 학교 2학년으로 진급했습니다. 그
렇지만 그 해에 제 아버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저는 사람이 변해 버려 엉뚱한 직업을 얻었
고, 성급하게 결혼했고, 경력 때문에 음악을 팽개대는 등등 여러 가지 분별없는 행동을 했습니
다. 그럼에도 꽤 '정상적'으로 보였고 또 대부분은 저를 성공한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그렇지
만 그건 진짜 제가 아니었습니다.
5년전 위기상황에 부딪힌 저는 모든 것을 다 '털어 버리고' 제 자신을 되찾았습니다. 의미 없
고 타성에 젖은 방식이기는 했지만 그동안 음악을 계속 연주하기는 했기 때문에 아직 감각은 지
니고 있었습니다. 제 음악은 밝게 살아났고, 이제는 커다란 스윙 악단에 트럼펫 1성부를 맡고
있습니다. 그밖에도 여러 가지 창의적인 일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재혼하고 다시
삶으로, 느낌으로, 현실로, 하느님에게로, 기쁨으로 - 모든 것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제 한 사람이 삶을 되찾은 이야기가 다른 사람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보았을 겁
니다. 두 분이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수많은 다른 사람들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두 분의 이야기를 내놓으십시오. 그런 사람들이 희망에 매달릴 수 있도록 말입니
다. 그리고 우리가 마침내는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말입니다.
진심으로 평안하기를 빌며
P ___
나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으로부터 전혀 뜻밖에 받은 이편지가 정말로 기뻤다. 사실
나는 울었다. 데이빗의 옛 급우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데이빗과 내가 희망을 지닐 수
있도록 도와주어 고마웠다.
이 편지가 도착했을 때는 영화 <샤인>이 이미 제작에 들어간 뒤였다. 영화가 결실을 맺기까
지
의 사연 자체도 끊임없는 희망과 철저한 믿음과 굳은 결심으로 점철된 기나긴 여행이었다. 감독
스콧 힉스가 애들레이드의 데이빗 연주회에서 처음으로 나를 만나 영화 이야기를 꺼낸 뒤로 9년
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다.
그 때 나에게 영화 이야기를 한 뒤 스콧은 우리가 유고슬라비아에 가 있는 동안 자신의 생각을
적은 제안서를 보냈다. 나는 스콧의 진심을 가슴 깊이 믿을 수 있었으므로 데이빗과 함께 영화
에 대해 의논했다. 데이빗은 스콧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주기를 바랬고, 자신
의 과거를 고스란히 되짚어 보는 자체가 커다란 치료효과가 - 그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도 -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또 영화음악을 주무를 수 있다는 생각에서도 흥이났다.
내 아이들 둘이 모두 영화계에서 일하고 있었으므로 나는 영화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해
서는 조금도 환상을 품고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스콧 힉스의 생각과 능력에 대해 깊은 믿
음을 느꼈고, 데이빗과 나는 승낙을 했다. 그콧과 작가 존 맥그리거는 곧 조사에 착수했다. 그
렇게 시작한 장정이 도대체 얼마나 걸릴지를 아는 사람은 우리 가운데 아무도 없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영국에서 3년간 조사하고 데이빗의 가족, 친구, 동료, 데이빗과 나와 수도
없이 많이 인터뷰를 한 끝에 대본에 모양이 잡히기 시작했다. 1990년에 작가 잰 사디가 작업에
참가했고, 현재 모양의 <샤인>이 생겨났다.
작품을 써 나가는 내내 스콧과 잰과 존은 우리와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았다. 어느 날 잰과
나는 통화하면서 '길리언'이라는 인물을 전적으로 객관적인 인물로 설정하자는 내용을 두고 의논
했다. 나는 그 대화가 비교적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객관성이라는 것에 이르면 나는 그다지
재주가 없기 때문이었다.
데이빗과 나는 1992년에 대본을 받았는데, 우리는 자리에 앉아 우리 일생에 대한 이야기를 읽
는 사이 우리가 '데이빗'과 '길리언'이라는 인물과 우리 자신을 얼마나 깊이 동일시하는지리를
깨닫는 가장 이상한 경험을 했다. 물론 데이빗에게는 아픈 기억이 되살아나는 고통스러운 순간
도 있었지만 "용기를 가져야 돼" 하는 말로 스스로를 격려하면서 계속 대본 원고를 넘겼다. 데
이빗은 울면서 나와 함께 고통을 나우었지만, 나는 그가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 이처럼 비교적
거리를 둔 채로 읽는 것 자체가 어느 정도 치료효과를 가져다주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스콧이 어른 '데이빗'역을 맡기고 싶어한 배우 제프리 러시가 약속의 땅으로 우리를 찾아왔을
때, 나는 그를 보자 마자 적격이라는 느낌이 늘었다. 제프리라면 데이빗이라는 인물을 잘 소화
해 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본질적으로 밝은 내 남편의 독특한 본성을 잘 표현해 주리라는
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스콧이 데이빗에 대한 영화를 만들기로 작정한 지 6년이 지났을 때였다. 그 사이에 어떤 다른
작품을 진행시키고 있든 아니든 간에 스콧은 데이빗의 영화를 완성시키겠다는 목표에서 한 번도
눈을 떼지 않았다. 그 뒤 몇 년 동안 그의 결심은 더 큰 시련을 맞게 된다. 제프리 러시를 주
연으로 정해 둔 것이 제작비 확보를 위한 전쟁으로 발전한 것이다.
스콧은 대본을 헐리웃으로 가지고 갔는데, 대본은 다들 좋아했지만 유명한 헐리웃 '스타'를 등
장시키지 않으면 미국 측에서 제작비를 대어줄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스콧은 자신의 이상과 꿈
에 - 제안을 거절했다. 이 실망스런 소식을 그에게서 전화로 전해 들었을 때 나는 울었지만 -
나도 이제는 지치기 시작했으므로 - 스콧의 일편단심에 대한 내 존경심은 더욱 깊어졌다.
스콧은 다시 다른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지만 제작비를 찾는 일은 계속했다. 우리가 품었던 희
망은 여러 번의 시도 끝에 마침내 1995년 초에 제인 스콧이라는 제작자를 통해 제작비가 마련되
었다. 촬영은 1995년 3월에 런던에서 시작되었다.
그런 한편 영화음악에 참여하겠다는 데이빗의 꿈은 현실로 다가와 작곡가 데이빗 허쉬펠더와
함께 리허설과 녹음을 하느라 분주했다.
영화가 완성되었을 때 나는 데이빗의 반응이 어떨지 몰라 조바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스콧 힉스도 나도 상처받기 쉬운 데이빗의 상태 대해 깊이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먼저
볼 수 있도록 비공개로 시사회를 하는 것이 제일 좋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혹시 영화를 보는 도
중에 그가 잠시 쉬거나 아니면 방 밖으로 나갈 필요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제인과 스콧과 나는 소파에 앉았고, 스콧의 아내 케리는 바닥에 앉아 데이빗을 팔로 감싸고 있
었다. 데이빗은 내 다리에 기대었다. 영화가 시작되었고, 열 살 난 '자신'이 무대 위에서 슬금
슬금 움직이는 피아노를 아가는 장면이 나오자 방 안에는 데이빗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가득 찼
다. 그제서야 스콧과 나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 때부터 데이빗은 웃고 울고 하면서 한
번도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영화가 4분의 3정도 진행되었을 때 데이빗은 갑자기 소리쳤
다. "멋진 영화예요!"
스콧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고, 나는 물론 울어서 엉망이었다. 나는 영화가 나에게 그렇
게나 깊이 영황을 끼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영화가 완성되기까지 걸린 9년 동안 데이빗과 스콧 사이에 특별한 유대관계가 생겨났다. 그
동안 스콧은 데이빗과 데이빗의 모든 아픔과 승리를 생각하면서 살았고, 데이빗은 그와 그의 삶
을 이런 식으로 예우해 주기로 결심한 스콧에 대해 한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작품이 대기상태에
들어간 듯이 보일 때에도 스콧은 줄곧 데이빗과 연락을 취했다.
1994년 데이빗에게 왕립 음악대학에서 연주할 기회가 생겼을 때, 그 무렵 런던에 대한 조사작
업을 상당부분 끝낸 스콧은 연주 당일에 데이빗 곁에 있어 줄 수 없어서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했
다. 그는 지구 반대쪽에서 영화를 촬영하는 중이었는데도 데이빗에게 커다란 꽃다발을 보냈다.
쪽지도 함께 배달되었는데, 거기에는 참석할 수 없게 된 데 대해 애석해 하면서 데이빗에게 최선
을 빌어 주는 내용이 씌어 있었다. 데이빗은 깊이 감동을 받았다.
왕립 음악대학의 찬란한 무대에서 데이빗이 '라흐'를 훌륭하게 연주해 낸 지 4반세기라는 시간
이 지났다. 어떻게 보면 그가 재기한 뒤 그 곳에서 하는 첫 연주가 자선목적이라는 점이 묘하면
서도 기분이 좋았다. 연주회는 테이트 기념재단을 위해 바네사 데니슨-팬더가 주선했는데, 테이
트 기념재단은 영국에 와서 일하고 공부하는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미술가와 음악가들을 후원하는
단체였다. 해외 유학을 갈 수 있는 기회는 오직 그런 자선단체를 통하는 방법뿐이던 소년이 이
제는 어른이 되어 약간이나마 은혜를 갚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멘델스존과 베토벤, 리스트를 연주한 이번 독주회에서 참석한 청중 가운데에는 오스트레일리아
고등판무관인 닐 블류어트도 있었고, 그 무렵 런던에 와 있던 오스트레일리아 친구도 여럿 있었
다. 데이빗은 왕리부 음악대학에서 다시 연주하게 된 것이 너무나도 기뻐 그 날 저녁 내내 흥겨
워했다.
다시 오스트레일리아로 돌아와 신년맞이 파티를 하는 동안 친구 하나가 데이빗에게 다가와, 그
렇게 오랜 세월이 지난 뒤 다시 그 무대에서 연주하니 기분이 어땠느냐고 물었다. 농담 겸 장난
겸 친구는 이렇게 물었다. "그러니까 데이빗, 연주할 때 이런 생각은 안 했나요? '아 하! 내가
돌아왔어, 내 실력이 어떤지를 이제 당신네들 모두한테 보여주지!' ?"
"당신네들 모두한테!?" 데이빗은 그 생각 자체가 믿기 힘들어 질문을 되뇌었다. 이어 그는 얼
굴을 찡그리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더니 설명을 시작했다. "아뇨. '보여주겠다'는 생각으로
연주하면 실채하기 십상이죠. 베풀고 보살피고 나누는 마음으로 연주해야 되요. '보여주겠다'
는 마음으로 연주하면 안 돼요. 물론 자랑해야 되고 내보여 줘야 되고 뻔뻔스럽기도 해야 하지
만, 그건 문제가 다르죠. 나는 청중 가운데서 사람을 골라 그 사람들을 위해 연주하는 거예요."
이번에는 내가 놀랄 차례였다. 이런 방법에 대해 내게는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연주할 때마다 사람을 고르는 거예요?" 내가 물었다. "그러니까, 대개는 몰래 청중을 둘러보죠.
그냥 둘러보면서 영상을 찾는 거예요. 기분 좋고 긍정적인 모습이라야 되요. 그런 다음 연주회
전체를 그 사람들을 위해 하는 거죠."
"그런 사람들은 대체로 남자인가요, 여자인가요?" 내가 물었다.
"늘 다르죠. 어느 쪽이든 돼요. 남자일 수도 여자일 수도 있어요. 나는 잡식성이거든요."
데이빗은 쿡쿡 웃고, 익살맞은 미소를 머금은 채 이렇게 덧붙였다. "사람이 좀 융통성이 있어야
죠. 안 그래요?"
"나이는 대체로 어떤 쪽이에요?"
"에, 스테이크로 치면 대충 좀 덜 익은 쪽이죠. 그냥 떠오르는 사람을 골라요. 어떤 사람이
될지는 나는 모르죠. 그 날 밤 런던에서는 닐과 랄프 아저씨였어요."
나는 데이빗의 생각이 돌아가는 기묘한 방식에 대해 웃음을 참을수 없었다. '닐'은 오스트레
일리아 고등판무관이었고, '랄프 아저씨'가 거기 참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연주회장 벽에
걸려 있는 저 유명한 초상화를 통하는 길뿐이었다. 데이빗이 청중 가운데에서 랄프 본 윌리엄스
의 유령을 보았다면 모를까.
약 속의 땅에서 시계가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를 울리자 우리는 찬을 들어 새해를 맞이했다.
데이빗과 나는 기대에 가득차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앞으로 크나큰 기쁨을 맛보게 되리라는 사
실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샤인>이 완성되었을 뿐 아니라, 독일과 런던에서 연주회를 몇 차례 더 한 뒤 덴마크로 떠
났
다. 닐스의 노력 덕분의 데이빗이 25년 이상 꿈꾸어 온 일이 실현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사
랑해 마지않는 '라흐 3번'을 교향악단과 함께 연주하며 실황을 녹음까지 하기로 했던 것이다.
데이빗은 연주회를 위해 기쁜 마음으로 연습에 몰두했고, 마무리 다듬기를 위해 멜번에서 러시
아의 라흐마니노프 전문가인 미카일 솔로베즈에게 연주를 들려주었다. 코펜하겐에 도착했을 무
렵 데이빗은 안달이었다.
밀란 호르바트가 지휘하는 코펜하겐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리허설을 두 차례 하기로 되
어 있었다. 첫 리허설 동안 데이빗이 좀 더 속도를 빠르게 잡자고 부탁하여 협주곡은 격정적이
고 숨가쁜 속도로 내달았다. 그 다음 날에 있을 두 번째 리허설을 위해서도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 리허설은 홀베크에서 있을 '시험부대'직전에 하기로 되어 있었다.
아침에는 날이 맑았지만 이내 날씨가 바뀌었고, 한 시간 반 거리인 홀베크까지 우리를 태워 주
려고 닐스가 나타났을 때 그는 방금 눈보라 예보를 들었다고 했다.
우리는 아주 기분이 좋은 상태로 길을 나섰지만, 20분쯤 지나자 눈보라가 치기 시작했다. 데이
빗도 나도 그런 것은 이제껏 본 적이 없었다. 데이빗은 어린아이 마냥 좋아했다. 나도 수평으
로 휘날리는 하얀 눈송이를 보며 흥분했지만 이내 우리가 시속 15킬로미터 속도로 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풀이 죽었다. 길은 빈틈없이 꽉꽉 막혔고 속도는 기어가는 듯했다. 물론 데이
빗은 그 이상 신이 날 수 없었다. 그는 창 밖을 계속 가리키며 소리쳤다. "봐요! 저 교통 좀
봐요!"
교통을 보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저녁 일곱 시가 되었는데도 우리는 연주회장
근처에도 못 미쳐 있었다. 우리는 두 번째 리허설은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닐스와 나
는 지휘자나 또 각자 모이기로 한 나머지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연주회가 실제로 시작될 때까지
연주회장에 나타날 수 있을지가 걱정되었다.
마침내 연주회장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짐을 풀고 있는 것을 보고 함숨을
돌렸다. 그렇지만 지휘자는 보이지 않았다. 강단 안의 조명이 어두워지기 몇 분 전에 밀란 호
르바트가 몹시 지치고 피곤한 기색으로 나타났다. 그는 나이가 지긋한 사람이었는데, 라흐마니
노프는 제대로 지휘할 수 있겠지만, 협주곡 지휘를 마치고 나면 후반부로 예정된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5번을 연주할 힘이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청중들 입장에서 보면 반쪽 짜리 움악회였다. 그러니까 우리와 마찬가지로 눈보라와 싸워 가
며 연주회장까지 찾아온 그들에게 반쪽 연주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데이빗에게 후반
부에 독주연주를 할 수 있겠는지를 물어 봐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이 때문에 나는 아주 곤란한
고민에 빠졌다.
'라흐 3번'은 연주하기 가장 힘든 곡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 악장
모두를 마치고 나면 마치 석탄 10톤을 삽으로 퍼 옮긴 것처럼 진이 빠진다는 작품이었다. 게다
가 이번 연주회는 '시험무대'였던 만큼, 그 다음 날 저녁에 코펜하겐의 티볼리 콘서트 홀에서 있
을 본무대를 위해 힘을 남겨 둘 필요가 있었다.
시간은 점점 흘러가고 결정을 내려야 했다. 나는 데이빗에게 가서, 후반부에 독주 연주를 해
줄 수 있겠는지를 물었다. 그는 주위에서 벌어지는 이런 온갖 소동에도 아랑곳없이 - 모든 것이
'계획되어'잇고 '컴퓨터화된' 세계에서 살고 있는 그였으니 사실 신경 쓸 까닭도 없었다. - 여
느 때나 다름없이 바닥에 엎드려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었다.
그는 미소를 지었다. "아, 달링, 그래도 돼요? 야, 정말 멋진 선물이군요! 난 운이 좋아요.
난 운이 좋아요. 난 특권을 누리고 있어요. <단테>를 연주해도 돼요? 아무렴, 단테도 연주하고
라흐도 좀 더 연주하고 또,,," 그를 말릴 길은 없었다. 어디서든 청중을 위해 연주하는 것이 크
나큰 '특권'이었으니, 피로하리라는 생각은 조금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연주회는 10분 늦게 시작했다. 리허설도 없었고 따라서 강당 안의 소리에 맞게 조절하는 작업
도 하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연주회는 괜찮았다. 데이빗은 만족하지 못했지만, 커다란 기회
는 아직 남아 있었다.
전반부 연주가 끝나고 관현악단과 지휘자는 짐을 꾸려 코펜하겐으로 돌아갔다. 피아노는 이제
완전히 데이빗 것이 되었고, 청중 또한 이내 그의 것이 되었다. 그는 쇼팽과 라흐마니노프를 연
주했고, 리스트의 <단테 소나타>로 그 날 밤 연주를 마무리했다. 그가 바란 그대로였다.
다음 날 아침 데이빗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간밤의 중노동도 연주회를 마치고 눈길을 뚫고 코
펜하겐까지 장시간 거북이 걸음으로 돌아온 흔적도 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모든 일을
통해 티볼리 연주회에 대한 열성만 높아진 것 같았다.
데이빗은 온수 수영장에서 수영하며 - 아무리 데이빗이라 해도 이런 날씨에 해협에 뛰어들 용
기는 없었으므로 - 지냈고, 저녁 무렵에는 완전히 정신이 집중되어 차분하게 연주를 기다렸다.
닐스와 나는 데이빗의 비밀을 알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시간이 갈수록 우리는 점
점 긴장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관현악단이 무대 위로 올라가고, 잠시 뒤 데이빗도 올라갔다. 닐스와 나는 무대가 똑바로 보이
는 발코니 특별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가슴이 어찌나 뛰는지 내 가슴 뛰는 소리가 닐스에
게도 들릴것만 같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자제하는 듯 웅장하게 울려퍼지는 첫 악장 도
입부가 강당 안을 메울 때까지 복도를 서성거렸다. 머릿속에서는 첫 마디에 대한 데이빗의 설명
이 메아리쳤다. "치 강 같아요. 강이나 마다 말이예요. 그냥 흐르는 거죠. 그 이상 단순할
수가 없어요. 세상에서 제일어려운 작품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단순한 거죠. 그게 비결이에
요. 달링 그게 비밀이에요."
정말로 그 '강'과 '바다'가 들렸고 진실로 단순했다. 데이빗의 연주가 그렇게 들렸다. 아무
힘도 들이지 않은 것처럼 들렸다. 나는 내 자리로 돌아와 그 때부터 45분동안 경이에 차 있었
다. 연주가 끝나자 닐스와 나는 나머지 2천 명 청중들과 함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환호했다.
나중에 조용하게 눈이 내리는 거리를 걷는 동안 데이빗은 보통 때에는 볼 수 없는 것처럼 평온
해 보였다. "달링" 그는 아주 조용하게 말했다. "아버지는 자랑스러워하고 있어요. 나는 청중
속에 아버지가 있다는 것을 느꼈어요. 아버지는 내 음악을 듣고 있다면서 기쁘고 자랑스럽다고
했어요. 그리고 나는 그게 너무나 좋았아어. 정말 즐거웠어요."
나는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내 눈썹에는 눈송이가 내려 있었고, 눈을 깜빡이자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데이빗은 나를 바짝 끌어당기면서 뺨을 가볍게 내 뺨에 대었다. 그리고
는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거의 속삭임이었다. "봐요. 아버지는 모든 걸 보고 있어요. 내가 어
떻게 해내고 있는지를 보며 기뻐하고 있어요. 아버지가 연주회장에 있었어요. 어떤 형태로.
미묘한 형태로. 일종의 신비한 형태로. 영혼으로. 흔적으로."
데이빗은 나를 꼭 껴안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낸 생각에는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 같아요, 사실은. 과거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그냥 현재를 받아들일 뿐이죠. 삶에는
이런 온갖 극단이 있지만, 내 생각에는 고마워해야 되고 걱정할 필요도 없는 것 같아요. 모든
게 완벽하게 계획되어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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