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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명 - 가즈오의 나라

by Casey,Riley 2023. 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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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명 장편소설
가즈오의 나라 2

김진명


"나는 한반도의 역사와 문화를 독자들과 같이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싶었다. 맹목적으로 일본을 매도하는 공허한 감정풀이 대신 성실한 자기성찰과 노력이 있을 때만이 우리에게 발전이 올 것이다. 비단 한국의 독자들뿐만 아니라 선량하고 성실한 대다수의 일본 국민들과도 역사를 같이 생각해 보고 싶다. 군국주의자들의 불순한 음모가 게재된 허구의 역사를 벗어날 때라야만 이웃한 두 나라는 진정한 우호적 관계를 이룰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0세기에 일어났던 일은 20세기에 정리해야 하지 않겠는가!"

가즈오의 나라

김진명 장편소설
가즈오의 나라 2



가즈오의 나라2,차례
작가의 말,5
34. 야호이의 동료들,11
35. 가즈오의 비애,23
36. 육군참모본부,28
37. 역사의 고백,41
38. 역사의 덫,51
39. 국내성의 날들,62
40. 연구소의 비밀,71
41. 북방공작원,80
42. 주임의 실종,90
43. 상훈의 추리,99
44. 가즈오의 삼촌,116
45. 평양의 모반,125
46. 추악한 한국인,133
47. 주민등록부,142
48. 만찬사,152
49. 돌아가지 못할 자,160
50. 이마무라의 단서,167
51. 주석의 결단,178
52. 평양의 쿠데타,196
53. 비밀문서,207
54. 조작된 전설,219
55. 정죄,235
56. 야마모도 슈우꼬오,247
57. 잃어버린 글자,256
58. 어떤 노인,267
59. 와따나베의 몰락,281
60. 칠지도의 복수,294
61. 나비야 청산 가자,310

34. 야호이의 동료들
 하바로프스크에서 나리따까지는 두 시간의 비행거리였다. 아파트에 돌아와 짐을 풀어놓자마자 목욕탕에 들어간 상훈은 더운물에 들어앉았다. 뜨거운 김 속에서 느긋해진 기분으로 상훈은 야호이의 전설을 흉내냈다는 일본인들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가또오의 메모로 보아 가또오와 에이지가 그 일원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듯했다. 
 야호이의 일본인 일곱 명은 같이 갔던 한 사람을 죽이고는 피를 나누며 맹세를 했다. 그들이 그 멀고도 먼 시베리아의 울란 야호이까지 가서 했던 맹세는 무엇일까? 도대체 어떤 일본인들이 무슨 이유로 거기까지 갔을까?
 우선은 그들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들은 무엇을 하던 사람들이었을까? 온갖 추측을 다 해보던 상훈의 뇌리에 지난번 사할린 교포협회의 김창린 씨 얘기가 떠올랐다. 
 "공사 감독의 따귀를 후려갈기던 군인이 있었어요. 에이지 대위였죠."
 이어서 가또오를 추적한 이마무라 주임이 알아온 정보도 생각났다. 
"가또오는 게이오 대학을 졸업하고 육군의 장교가 되어 있었다고 노파가 증언했어요."
 동지니 배신이니 하는 구절이 가또오의 메모에 있던 것과 연결되어 이들의 신분에 대한 얘기들이 범상치 않게 여겨졌다. 에이지와 가또오는 무슨 이유로 시베리아에 갔을까? 에이지가 대위의 계급을 갖고 있었다면 같이 학교를 졸업한 가또오 또한 비슷한 계급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육군의 위관장교인 이들이 같이 바이칼에 간 이유가 무엇일까.
 일단 이들이 군인의 신분으로 울란 야호이에 갔다는 생각이 들자 상훈은 육군의 기록을 뒤져보는 것이 나을 것으로 생각했다. 시베리아까지 갔다왔다는 생각이 상훈으로 하여금 더욱 악착같이 이들의 과거를 추적하게 만들었다. 
 다음날부터 상훈은 접촉할 수 있는 한의 육군자료를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상훈이 육군의 기록을 아무리 뒤져도 육군의 전투부대가 바이칼에 출병했던 기록은 없었다. 다만 블라디보스톡 부근에 진주했던 것은 뚜렷한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 
 다음날 의회 도서관에 간 상훈은 다시 한 번 시베리아에 출병한 사단들의 기록을 살폈다. 1918년 체코사단 사건으로 일본이 시베리아에 73,000명이라는 대병력을 출병시킨 이래 1922년까지 약 5년간 주둔했던 기록을 샅샅이 뒤지던 상훈은 주둔군 사령부의 기록에서 흥미있는 기록을 발견했다.

"1918년 10월 30일 흑해함대 사령관 코르작 제독을 환영하여 사단의 전 장병이 분열 및 열병식을 하다."
"1918년 10월 31일 블라디보스톡의 러시아 수비대 대장이 부대에 와서 코르작 제독을 호위해 가다."

 이렇게 시작된 사령부의 기록은 1920년 3월 초까지 간헐적이지만 끊이지 않았다.
"코르작 부대 전멸."
"코르작 부대 생존자 3명 신문."
"금괴수송에 관한 정보 획득. 총량 500톤"
 
 일련의 연결성이 있는 이 기록 중에서 상훈의 주의를 확 잡아당긴 것은 맨 마지막의 기록이었다. 500톤이나 되는 금괴수송에 관한 정보획득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기록에 의하면 일본육군은 코르작 부대의 동향을 면밀히 주시하고 있었다는 얘기였다. 왠지 모르게 이 코르작 제독의 부대에 관한 기록이 야호이의 동지와 무슨 관계가 있을 것 같은 본능적 예감이 떠올랐다. 자료를 덮은 상훈은 바삐 학교로 돌아와 러시아 관계사를 전공하는 같은 과의 이시다를 찾았다. 
 "우등생이 웬일이야, 나한테 커피를 사주면서 물을 게 있단."
 "자네 전공이야, 싸게 가르쳐줘."
 이시다는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같은 과의 가벼운 친구들에 비해 상훈은 조용하면서도 정이 가는 친구였다. 상훈은 복사해온 자료를 이시다 앞에 내놓았다. 이시다는 역사를 전공하는 외에도 역사의 뒤안길에 있었던 야사나 기담을 많이 아는 친구라 이런 유의 정보를 얻는 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적당한 친구였다. 
"이게 뭐야?"
"블라디보스톡에 머무르고 있던 일본 육군사단의 정보장교가 본국의 육군본부에 보내는 보고서야."
"음, 코르작부대에 관한 정보군."
"이때의 상황을 좀 설명해줘."
 이시다는 잠시 보고서를 살피더니 매우 불행한 역사상의 사건이라며 눈살을 찌푸렸다.
"1919년 11월에 시작되었던 일이었지."
"러시아 혁명 직후군."
"볼셰비티가 짜르를 축출한 후 짜르를 추종하는 귀족과 군대들이 모스크바를 탈환하고 짜르를 구출하려 했지만 전투에 패배하고는 도주했지."
"그래서?"
"코르작은 유명한 짜르의 장군이었지. 미국에 갔다가 일본을 경유하여 옴스크로 가서 독립정부를 세운 거야."
"그 다음은?"
"도처에서 붉은 군대에 쫓긴 이들은 결국 영국 첩보대의 권유를 받아들여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블라디보스톡으로 목적지를 정했어."
"블라디보스톡, 그 먼 데까지?"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을 경계하던 영국은 동맹관계에 있던 우리나라에 연락을 해 군대를 블라디보스톡에 주둔시켜 이들을 맞아들이도록 했지. 당시의 군국주의 정권에게는 매우 반가운 제안이었어. 그래서 정권은 사단병력을 블라디보스톡에 주둔시키고 스파이를 서시베리아 지역에 보냈어."
 상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감이 맞아들어가는 순간이었다. 이시다는 상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시베리아를 횡단하던 짜르의 추종자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지. 그들이 출발한 때는 한겨울이었는데 그해는 마침 수십년래의 혹한이 닥쳤어. 인가도 한 채 없는 시베리아 벌판 한복판에서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자고 나면 쓰러지곤 했지. 말은 추위에 쓰러지고 자동차는 연료가 다하여 가지를 못하고. 군인과 귀족들, 부녀자와 아이들을 포함하여 백이십오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바이칼호의 서안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상당수의 사람들이 죽거나 낙오됐어. 그런데 정작 더 무서운 일은 바이칼호에 도착하고 생겼던 거야."
"낙오된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지?"
"낙오란 죽음을 의미하는 거지."
"차라리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돌아가기에는 이미 너무 먼 길을 와버린 거야. 그전에는 돌아가면 잡혀 죽는다는 공포감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바이칼호에서는 무슨 일이 생겼나?"
"호수는 꽝꽝 얼어붙어 있었지. 추위에 지치고 피로한 사람들이 얼음 위를 걷는 것은 엄청난 비극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어. 무려 삼십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얼음판 위에서 낙오하게 되었지. 그래서 우리의 주둔군이 기다리는 블라디보스톡까지 살아간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어."
"그런 일이 있었나?"
"그럼."
"......"
 비참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자네는 왜 이 보고서를 들고 왔어? 설마 행방불명된 금괴를 찾으려는 것은 아니겠지?"
"금괴가 행방불명되었나?"
 상훈의 귀가 꿈틀했다.
"여기에도 있다시피 주둔군은 이들이 싣고 오던 군자금에 주목하고 있었지."
"군자금?"
"이들은 귀족이기 때문에 많은 금은보화를 갖고 있었어. 또 군대를 양성하여 볼셰비키 혁명을 깨뜨려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엄청난 액수의 군자금을 마련하여 출발했던 거야."
"그러면 그 많은 군자금이 모두 일본군의 손에 들어갔겠군?"
"그렇지 않아."
"그러면 그것들을 누가 가졌어?"
"바이칼이지."
"바이칼이라구?"
"그래. 모두 바이칼의 밑바닥에 가라앉아 버렸어. 삼십만이 넘는 사람들의 시체와 함께."
"얼음이 녹으면서 모두 가라앉았다는 얘기인가?"
"그렇지."
"살아간 사람들이 가져가지 못했을까?"
"내가 알기로는 그 군자금을 차지했다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아."
 엄청난 비극의 뒤에는 흥미 있는 역사의 수수께끼가 있었다.
"일본군에서는 당연히 이 군자금에 촉각을 곤두세웠겠군."
"그렇지. 이에 대하여 일본육군에서는 군자금을 획득하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이미 그해에는 불가능해지고 말았어. 볼셰비키의 정부가 의외로 급속히 강화되었기 때문에 그들과 대립하는 것을 피하려 했지. 아마 더 큰 이유는 그들의 관심을 유발하는 것을 경계해서였을 거야."
"포기하고 말았나?"
"아니지. 기다렸어."
"언제까지?"
"결과적으로 영원히라고 말하는 것이 낫겠군."
"고마워."
 그러니까 일본군은 소비에트 정부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공식적으로는 모르는 체하고 있었다는 얘기였다. 그렇다면 상훈의 예감은 정확히 들어맞은 것이었다. 공식적으로 모른 체하고 있으면서 비공식적으로는 금괴의 행방을 수소문해야 했다면 그 방법이란 스파이를 계속 파견하는 것이었다. 에이지와 가또오는 그 금괴의 행방을 탐지하기 위해 그 지역에 파견되었을 가능성이 짙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시베리아에 출병한 부대에 근무했을 것이었다. 야호이의 동지들이란 두 사람과 함께 바이칼 부근에 갔던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상훈은 며칠간에 걸쳐 시베리아의 출병한 부대의 기록들과 장교의 근무상황을 샅샅이 뒤져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가또오나 에이지의 이름을 찾을 수는 없었다. 뿐만 아니라 부대의 작전일지나 근무일지에도 바이칼에 장교를 파견했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 
 빠짐없이 부대의 기록을 찾아왔어도 아무런 성과를 보지 못한 상훈은 일단 닛꼬의 이마무라 주임의 집으로 전화를 했다. 돌아온 것도 알릴 겸 무슨 성과라도 있었는지 알아보아야 할 것이었다. 전화를 받는 주임의 목소리는 반가움에 겨워 감격스럽기조차 하였다. 한걸음에 동경으로 내려온 주임은 이제는 동경대학교의 지하 학생식당이 경찰서의 간부식당이라도 되는 양 너무나 익숙하게 줄을 서서 배식을 받았다.
"하하, 이제 여기에서 공부나 하시지요."
"원, 박 선생님도. 제가 동경대 갈 머리가 됐으면 지금쯤은 경시총감으로 앉아 있지 시골경찰서에서 형사주임을 하겠어요?"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이마무라는 기분이 나는 모양이었다.
"그래 시베리아 여행은 잘 다녀 오셨어요? 몸은 여전히 건강하시구요?"
"네, 염려 덕분에 잘 다녀왔습니다."
"전화를 받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사건을 떠나 이제 정이 들었나 봅니다."
"어려운 사건으로 인연이 맺어져서 그런가 봐요."
"지나고 보니 우리 일본인과 한국인은 그 뭐라나 그 마음이 맞는다는 그런 표현이 있는데......, 아, 그 정서적으로 같은 데가 있어요. 이제껏 몰랐지만 이번 기회에 그런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박 선생님과 같이 수사를 하던 기억이 어찌나 자꾸 떠오르던지, 사실 그래서 박 선생님 가시고 나서는 하나도 성과가 없었어요."
 이마무라는 좋아하는 계란덮밥을 연신 떠가며 칭찬인지 변명인지 모를 말을 정겨운 목소리로 집어댔다. 
"사실 선대의 역사는 한국과 일본이 같이 가지고 있는 것이 많아요. 두 나라는 정서뿐만이 아니라 나라의 운명도 비슷하기 때문에 앞으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협력이 필수적입니다."
 식사를 마치고 두 사람은 학생 상대의 찻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상훈이 차를 뽑아가지고 오자 이마무라는 일어나 받았다.
"시베리아에서는 무슨 성과가 있었습니까?"
"울란 야호이라는 말에 담긴 전설을 알아냈습니다. 바이칼호 옆 어느 마을에 있었던 전설이더군요. 그런데 에이지와 가또오를 포함한 여러 사람이 바이칼에 가서 전설과 비슷하게 어떤 맹세를 하고 돌아왔습니다."
"무슨 이유로 거기에 갔을까요?"
"확실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군인의 신분으로 어떤 사명을 띠고 갔던 것 같습니다."
"네? 군인이라구요?"
"그렇습니다."
 차를 마시며 상훈이 코르작부대의 참사에 대해 설명을 하자 이마무라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세상에, 그런 일이 역사에 있었어요?"
"인류 역사상 가장 처참했던 죽음의 현장이죠."
"여자와 어린애도 있었을 것 아닙니까?"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귀족부인과 어린이들이 그 부대를 따랐죠. 모두 볼셰비키의 타도대상이었으니까."
"어마어마한 재물을 지니고 있었겠군요?"
"바로 그겁니다. 일본 육군은 특히 그들이 운반하는 금괴 500톤에 신경이 집중되어 있었죠."
"그런데 그 금괴의 행방은 어떻게 된 겁니까?"
"지금에 이르기까지 밝혀지지 않았어요. 다만 일본육군이 매우 오랫동안 집요한 관심을 갖고 그 금괴의 행방을 탐문했어요."
"그래서 무슨 결과가 있었나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에이지를 살해한 자를 찾아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네? 어떻게요?"
"제 가정입니다만, 에이지와 가또오를 포함한 여러 사람이 울란 야호이에 갔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모종의 맹세를 했습니다. 에이지가 그 맹세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려고 했기 때문에 가또오는 <울란 야호이의 맹세를 잊었단 말이냐>라는 메모를 남겼고 결국 에이지는 살해됐습니다. 그렇다면 범인은 당시 에이지, 가또오와 함께 올란 야호이에 갔던 사람 중 하나일 것입니다."
"아, 굉장한 것을 알아내셨군요."
"그러나 아무리 당시의 기록을 살펴봐도 누가 에이지와 같은 시기에 야호이, 즉 바이칼 부근에 갔는지는 나오지 않습니다."
 이마무라는 너무나 뜻밖의 얘기에 입을 벌리고 상훈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그로서는 이렇듯 역사를 더듬는 것이 사건 수사의 길이 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에이지와 가또오는 군인입니다. 그들이 바이칼로 가야 했다면 그 이유는 오로지 금괴 때문입니다. 블라디보스톡의 부대에서는 코르작 부대의 생존자 세 명을 취조했으므로 그 당시 상황을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아무리 그 부대의 기록을 더듬어도 바이칼에 부대원을 보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런 것이 기록에 남겨지기나 할까요?"
"기록에 안 나온다 하더라도 최소한 에이지와 가또오의 근무기록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것이 하나도 없어요."
"아, 잠깐만요."
 오랜만에 이마무라의 표정이 자신있게 펴졌다. 상훈은 반장의 입에서 무슨 얘기가 나오나 싶어 그의 입술을 주시했다.
"저의 부친은 관동군에 근무했습니다. 부친의 군 시절 얘기를 늘 들었습니다만 그런 일이라면 전투사단에서 관여할 일이 아닐 것 같습니다."
 이마무라의 자신있는 표정에 비례하여 상훈의 얼굴도 밝아졌다.
"그런 일을 담당하는 부서가 따로 있습니까?"
"있지요."
"어디입니까?"
"육군참모본부."
"육군참모본부라구요?"
"네, 그 시절 같으면 육군참모본부에서 그 일을 했을 것 같군요."
"육군참모본부에 그런 일을 전담하는 부서가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참모본부의 정보국 소관일 것 같습니다."
 상훈의 얼굴이 희망으로 활짝 펴졌다.
"기록을 찾아봐야 하겠군요."
 그러나 상훈의 활기찬 표정에 비해 이마무라의 표정은 과히 밝지 못했다.
"정보국의 활동은 비밀을 요하는 것이 많았으니만치 기록으로 자세히 남겨져 있을 것 같지 않군요."
"그렇긴 하겠지만 두 사람의 이름 정도는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이마무라 주임에 비해 상훈의 표정이 여유가 있는 것은 상훈이 묵은 서책을 뒤지는 것을 전공으로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었다. 이마무라는 전혀 예상치 않은 순간에 큰 도움이 되어주었다.
"참모본부의 기록에서 무엇인가 나오면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처음 들을 때는 옛날 이야기 한 토막 같았습니다만 이제 곰곰 생각하니 무슨 연관이 있을 것 같은 추리군요. 어쩐지 일이 풀릴 것 같은 희망이 생깁니다."
 이마무라는 한층 밝아진 얼굴로 상훈과 악수를 나누고 닛꼬로 내려갔다. 아무리 이번 사건이 역사라는 특수분야에 관계된 것이기는 하지만, 자신이 맡은 사건인데도 계속 상훈에게만 의존하고 있어 이마무라는 미안하기도 하고 영 체면도 서지 않는 터였다. 이마무라는 수사에 진전이 있게 되어 기쁘기도 했지만, 자신이 참모본부의 존재를 지적했다는 사실에 더 큰 기쁨을 느꼈다.


35. 가즈오의 비애

"어머, 언제 오셨어요?"
"엊그제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야 전화를 하세요?"
"먼저 급한 일을 처리하고 하야꼬 씨를 푸근하게 만나고 싶어서요."
"그래도 그런 법은 없어요."
"미안합니다. 저녁을 살 테니까 화를 푸세요."
"저녁은 제가 사드려야죠. 고생하고 오셨을 텐데. 가이세끼 한 번 들어 보실래요? 공부하시느라 늘 간단한 것만 드셨을 테니까 오늘은 제가 한번 톡톡히 살게요."

 상훈과 하야꼬는 미쓰꼬시 백화점 뒤의 골목길로 들어서서 얼마 가지 않아 있는 전통음식점으로 들어섰다. 주인이 현관에 나와 손님을 받는 이 집의 친절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일본에 온 지 제법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일본정식을 먹어본적이 없었던 상훈이 살뜰하게 젓가락을 움직이고 있을 때에 하야꼬의 약간은 들뜬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 안녕하세요?"
"아, 하야꼬구나. 그래 식사하고 있었니?"
 상훈도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였다.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해내려고 하는데 하야꼬의 목소리가 들렸다.
"상훈 씨, 인사드려요. 야마자끼 선생님이세요."
 아, 그랬구나 하는 생각과 더불어 상훈은 일어나 인사를 했다.
"박상훈입니다."
"아, 그때 만났던. 식사하시는 데 죄송합니다. 어서 앉으십시오."
 나타내지는 않으려 했지만 야마자끼의 얼굴에는 놀란 기색이 비쳤다. 가벼운 젊은 남녀 사이로는 오기가 힘든 전통식당에서 하야꼬가 젊은 남자와 같이 있는 것을 발견한 놀라움이라고 판단한 상훈은 어쩐지 목덜미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자, 식사 많이 하십시오."
 야마자끼는 부드러운 목소리를 남기고 자리를 비켰다. 상훈은 일어나 인사를 하다가 야마자끼와 같이 있는 사람이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맨처음 하꼬네의 미술관에 갔을 때 손님과 같이 들어오던 사람이었다.
"대동아연구소의 기획실장이에요. 그림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에요."
 하야꼬는 자리에 앉으며 상훈의 기억을 확인해 주었다. 식사를 하는 동안 하야꼬의 표정에 별다른 변화가 나타난 것은 아니었지만 상훈은 하야꼬가 곤란할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산책을 하면서 상훈이 물었다.
"가즈오의 부친이 많이 놀라는 것 같았죠?"
"네."
"하야꼬 씨가 저와 같이 있는 것이 놀랍게 생각되었겠죠?"
"......"
 다음날 상훈은 혼자서 하꼬네행 특급열차를 탔다. 하야꼬를 동반하지 않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혼자서 가는 하꼬네는 어쩐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역시 그랬군요. 나의 추측이 틀리지 않았군요."
 상훈의 이야기를 듣고 난 가즈오는 일그러진 표정을 감추려하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 또한 침울하기 짝이 없었다. 상훈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가즈오 씨, 조부께서는 정말 훌륭한 분이셨단 말입니다. 어느 독립투사에 못지 않은 일을 하셨어요."
 상훈이 이렇게 의미부여까지 하였음에도 가즈오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관자놀이를 씰룩이는 것이 무언가 깊은 생각에 빠져있는 것 같았다. 상훈은 이런 가즈오를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윤호...역시 그랬군요. ......하하하......"
 가즈오는 침통한 표정을 지은 채 웃고 있었다. 상훈은 가즈오의 정신병이 재발하는가 싶어 겁이 났다. 가즈오는 공허한 웃음을 그치자 말없이 바닥을 뚫어지게 내려다보았다. 상훈은 불안했지만 그저 조용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 가즈오가 독백처럼 되뇌이는 소리를 듣고서야 상훈은 가즈오의 침울한 표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동지들을 배신하고 일본에 밀고를 했던 바로 그 이름 하윤호는 가즈오가 잠겨 있던 책상 서랍에서 발견한 양조부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가즈오는 얼굴도 보지 못한 친할아버지보다는 어렸을 때부터 같이 살아온 양조부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묘한 운명이죠?"
 가즈오는 괴상한 웃음을 입가에 흘렸다. 일그러진 표정에서 억지로 피워내는 미소였다. 수고해준 상훈을 생각하고 짓는 웃음이었다. 상훈은 말없이 일어났다. 언젠가 하야꼬가 하던 얘기가 떠올랐다.
 "가즈오 씨는 외아들이라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극진한 보살핌 속에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병환으로 입원을 하던 그날 아침까지도 할아버지는 가즈오 씨를 학교까지 바래다 주셨다더군요."
 하야꼬의 말이 아니더라도 가즈오는 이미 그들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정이 들어있는 것이 한눈에 느껴졌다. 하윤호는 아마도 가즈오에게 애정을 쏟음으로써 가즈오의 친할아버지와 동포에 대한 죄책감에서 헤어나려 했을 것이었다.
"내 손으로 끝내야죠."
 가즈오의 마지막 한 마디가 낯설게 들린다고 생각한 순간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이상한 눈빛이 가즈오의 눈에 스쳤다. 여자의 것같이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뻗어 상훈의 손을 잡고 억지로 표정을 바꿔보이려 하는 가즈오의 얼굴에 경련이 일어나고 있었다.
"가즈오 씨, 괜찮아요?"
"돌아가시죠."
 상훈은 가즈오가 자신의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느끼고는 간단한 인사를 남기고 바로 돌아서 나왔다. 자신이 연해주에 가서 알게 된 최화영 선생의 존경스런 면모보다 하윤호의 정체에 더 민감했던 가즈오의 처지가 이해되는 만치 안타까움도 더했다. 바깥은 아직 햇살이 따사로운 밝은 오후였다.
 동경으로 돌아오는 열차 안에서 가즈오의 삶을 곰곰 생각하던 상훈은 그의 마지막 한 마디를 떠올리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는 무엇을 자기 손으로 끝내겠다고 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가즈오가 무엇을 끝내겠다는 것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기차가 동경역에 도착할 즈음이 되어서 상훈은 불길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가즈오는 혹시 자살을 하려는 것이 아닐까.'
 막상 이렇게 생각하자 겁이 덜컥 난 상훈은 기차가 플랫폼에 들어가자마자 뛰어내려 하꼬네로 전화를 했다. 간호사는 가즈오가 방문을 걸어 잠그고 혼자 있기는 하지만 평소와 별 다름없다고 말했다. 상훈은 그가 흥분한 상태이니 특별히 유의해달라고 신신당부하며 전화를 끊었다.


36. 육군참모본부

 며칠간 상훈은 참모본부의 자료를 추적했다. 그 자료를 읽으며 상훈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1878년에 설치된 이 조직은 이미 1880년에 만주와 중국에 비밀리에 장교들을 보내 군사전략적 견지에서 병제, 군비, 지리를 비롯한 각종 정보들을 입수함은 물론 당시 정쟁에 여념이 없던 조선에도 군인들을 보내 『조선지지"를 편찬하여 전쟁준비를 치밀하게 진행시키고 있었다. 이것은 과거 임진왜란 때 일본이 승려로 가장한 간첩을 조선에 보내 침략을 준비한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수법이었다. 뿐만 아니라 어학연수를 가장하여 월남, 시베리아, 페르시아 방면까지 정보원들을 내보내고 있는 데에는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광범위한 분야에서 정보의 공개가 이루어지고 있는 일본임에도 불구하고, 참모본부의 다른 부서에 비해 정보국에 대한 자료는 극히 드물었다. 이마무라 주임의 말대로 특수한 분야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진 일들에 대해 일일이 기록이 남겨져 있을 것이라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생각일지 몰랐다. 그러나 상훈은 포기하지 않고 정보국에 대한 모든 기록과 증언을 살피고 또 살폈다. 특수분야의 일이라 공식적인 기록보다는 그 분야에서 일했던 사람들의 증언이 더 도움이 되었다. 
 일본에서는 태평양전쟁을 전후한 군의 활동이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편이었다. 그것은 전범재판에서 군의 모든 기록이 공개되어야 했던 이유도 있었지만, 일본군 자체가 매우 일사불란한 조직이라 엄정한 군령에 의해 움직였기 때문에 일상적이지 않은 것은 무엇이라도 기록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이칼 지역에 파견된 군인들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었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벌써 포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길은 더 이상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상훈은 정보국과 관련된 기록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끝까지 추적했다. 그러나 정보과의 상세한 직원명단에도 가또오나 에이지의 이름은 없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한 달 가까이나 참모본부의 온갖 서류와 씨름을 하던 상훈에게 드디어 단서가 잡혔다. 전범재판에서 참모본부의 정보과장이 조직의 구성에 대해 진술한 것을 유심히 살피던 상훈은 다음과 같은 진술에 착안했다.

 "정보국에서는 각국으로 정보원을 내보냈습니다. 정보원들은 유학생, 언어연수생, 혹은 종교인이나 장사치로 가장하고 현지에 나가 여러 가지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다른 부서로부터 직원을 지원받기도 했습니다. 정보국의 직원들은 사회에서 통용되는 정도의 언어능력과 지식은 있었지만 역사나 문화에 대한 깊은 지식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의 경우 그 지역 문화를 전공한 제2국의 문관이나 장교들이 외려 훌륭하게 임무를 수행하고 오는 것을 보고는 필요시마다 지원받는 빈도가 늘어났습니다."

 눈길이 확 쏠리는 구절이었다. 진술을 보는 상훈의 기억에 가또오의 수첩에 러시아의 정서와 문화에 대해 적어둔 몇 구절이 떠오르고 있었다. 짜르의 군대가 운반하던 엄청난 금괴에 대한 일본군의 집착을 감안할 때 러시아의 정서에 대한 이해가 있는 가또오가 정보원들과 동행했을 가능성은 농후한 것이었다.
 상훈은 참모본부 정보과의 직원명단에서 러시아팀에 속한 사람들을 추렸다. 모두 여섯 명이었다. 일단은 이들이 가또오, 에이지와 함께 바이칼에 갔을 것으로 추측되었다. 그러나 확실한 결론은 참모본부에 가또오와 에이지가 근무했었다는 기록을 찾은 후에 내려야 할 것이었다. 이들의 이름을 수첩에 기록한 수 다시 제2국의 관원록을 면밀히 훑어가던 상훈의 눈길이 어느 한 페이지에 미치자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아니, 이 이름은."
 아소가와 겐지.
 이마무라 주임이 상훈에게 맨처음 가지고 왔던 책. 범인이 떼어간 종이가 붙어 있던 바로 그 책의 저자였다. 놀라움을 가라앉히고 그의 신원을 훑어보던 상훈은 다시 한 번 소스라치게 놀랐다. 
 <육군참모본부 촉탁>
 여느 때 같으면 예사롭게 넘어갔을 이 사람의 신분이 상훈의 눈길을 확 잡아끌었다. 예전 쥰이찌의 책에서 전화번호를 발견하고 찾아갔을 때 나까가와 교수는 에이지로부터 가께아끼의 정체를 주목하라는 말을 듣고 그가 참모본부의 간첩임을 알아냈다고 했다. 그렇다면 에이지는 이미 가께아끼가 간첩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리고 종이가 붙어 있던 책은 참모본부에서 일했던 적이 있는 사람이 쓴 것이다.
 이 세 사람 간에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지 않을까. 일본역사에 빛나는 자료를 갖고 왔으면서도 철저히 은폐되어야 했던 인물 가께아끼. 마찬가지로 그 허구성을 알고도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하지 못했던 에이지. 그리고 참모본부의 촉탁으로 호태왕비를 쓴 겐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 상훈에게 참모본부라는 단어가 범상치 않은 의미로 부각되어 왔다. 에이지 살인사건은 어쩐지 육군참모본부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알게 된 사실을 연결해 볼 때 에이지나 가또오가 참모본부에 근무했었음은 틀림없다는 확신이 생긴 상훈은 더욱 흥분되는 가슴을 가라앉히고 자료를 살폈다.
 꽤 두꺼운 자료를 꼼꼼히 읽어가던 상훈의 눈길이 드디어 참모본부의 직제표에 멎었다. 참모본부 육군부 제2국이라고 쓰여진 항에 편찬과라고 쓰여진 것이 유난히 눈에 띄어다. 특히 과장이 육군보병소좌이고 과원으로 대위, 중위가 있고 그 밑에 육군교수가 있는 것이 이채로웠다. 아무리 당시의 일본이 군국주의의 거센 물결에 휩쓸려 있었다고는 하나 육군교수가 위관들과 같은 정7위의 직급을 갖고 있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아마 젊은 교관을 교수로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페이지를 넘기고 편찬과에서 발행한 책들의 목록이 있었다. 다시 목록을 훑어내려가던 상훈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럴 수가."
 자신도 모르게 놀라움에 가득찬 탄식이 튀어나왔다. 상훈의손길이 바쁘게 다시 앞 페이지를 펼쳤다. 무언가를 확인한 상훈은 다시 페이지를 넘기고는 한자 한자 대조했다. 글자를 대조하는 상훈의 손가락 끝이 가늘게 떨고 있었다.
 '아, 도대체 이럴 수가 있는 건가? 『임나고"를 지은 자가 육군참모본부의 군인이라니.'
 상훈은 책을 덮었다. 창 밖으로 돌려버린 그의 시선에는 뭔지 모를 공허함이 짙게 배어 있었다. 힘없는 눈길을 바깥으로 던지고 있는 상훈의 얼굴은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보이고 있었다. 어찌 보면 분노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허탈함 같기도 한 표정은 한동안 상훈의 얼굴에서 거두어지지 않고 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상훈은 무엇인지 아쉬운 듯이 다시 한 번 먼저의 페이지를 펼쳤다. 
임나고 : 출판년원일 : 1884년 7월
저자 : 요꼬이 다다나오(횡정충직)

상훈은 다시 한 번 직제표에서 이름을 확인했다. 

과장 육군 보병 소좌, 종6위 오오하라 리겡(대원리현)
과원 육군 공병 대위, 정7위 고지마 고강(소도호간)
과원 육군 공병 중위, 종7위 다우찌 산기찌(전내삼길)
과원 육군 교수, 정7위 요꼬이 다다나오(횡정충직)

 틀림없이 같은 이름이었다. 상훈은 갑자기 자신이 일본이라는 나라를 너무도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나고가 보통의 책인가. 이 책에서 일본은 최초로 신라, 백제, 임나(가야)는 일본 야마도 정권의 지배하에 있었고 야마도 정권은 이들을 다스리기 위해 암나에 일본의 관청, 즉 근대의 총독부를 두고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 주장은 그대로 일본 사학계 전체의 주장이 되어있지 않은가. 이른바 말하는 임나일본부를 일본서기로부터 빼내어 구체화시킨 맨 처음의 책. 이런 엄청난 책을 육군참모본부의 일개 젊은 과원이 내놓고 지금에 이르도록 모든 학자들이 그것을 그대로 따른다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랐다. 
 세계경제를 주름잡고 아시아의 영도자를 자처하며 대동아 공영을 외치는 일본의 역사학계가 이렇듯이 참모본부의 날조에 의해 아직까지도 꼭두각시의 춤을 추고 있다는 것이 한심하다 못해 슬프기조차 했다. 물론 참모본부의 편찬과의 직원이 썼다고 해서 무조건 틀렸다고 할 것은 아니지만 당시의 참모본부란 한반도 침략과 대륙진출의 사령탑이었다. 참모본부는 일본의 국민을 전쟁으로 이끌어내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당시 참모본부는 한반도 침탈의 논리를 이끌어내기 위해 고심하다가 일본서기의 전설 한 구절을 끌어대어 과거 한반도는 우리의 땅이었으니 이제 우리가 가서 찾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각종 논문과 책을 만들어냈으니 그 실무 조직이 바로 편찬과였다. 그런 상황에서 편찬과의 직원 요꼬이가 참모본부의 자료와 경비를 써가며 쓴 책이라면 그 성격은 뻔할 것이었다.
 상훈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억누르고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1930년대의 편찬과 기록이었다. 가또오와 에이지가 바이칼에 갔다면 이 무렵일 가능성이 높아 관원록을 펼치는 상훈의 손이 가볍게 떨려왔다. 
"아!"
 상훈은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과장 육군 보병 중좌, 정6위 이노우에 다이스케(정상대조)
과원 육군 보병 소좌, 종6위 후지사와 가게하루(등택경춘)
과원 육군 공병 대위, 정7위 가또오 마사쓰라(가등정행)
과원 육군 보병 대위, 종7위 우에노 에이지(상야영치)
과원 대학교관 촉탁, 종7위 아소가와 겐지(아소천현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에이지와 가또오의 두 이름이 도서관의 묵은 서류 속에 나란히 붙어 있어다. 
 역시 그들은 참모본부의 장교였다.
 상훈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기록을 복사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살인사건 후 지금까지 계속되어온 궁금증에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친 뒤끝이라 기분은 날아갈 것만 같았다. 상훈은 도서관 앞의 벤치에 앉아 복사한 기록을 다시 꺼냈다. 하얀 복사지 위에 에이지라는 검은 글자가 분명히 살아 꿈틀거리고 있었다.
 
"역시 그들은 참모본부의 군인들이었습니다."
 상훈의 연락을 받고 올라온 이마무라 주임은 연신 싱글거리며 좋아했다.
"이제 에이지 살해사건은 뭔가 숨통이 트여오는군요."
"기나긴 추적이었어요."
"그러니까 에이지는 참모본부의 편찬과 직원으로 당연히 호태왕비에 관심을 기울여 왔겠군요."
"그렇지요. 가또오 역시 편찬과 직원이라는 특수한 지위를 이용하여 일반인으로서는 접근하기 어려운 희귀한 책과 자료를 손에 넣을 수 있었지요."
"그런데 왜 두 사람은 갈라섰을까요?"
"에이지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 고민해왔던 것 같아요."
"무엇을 고민했을까요?"
 주임은 역사를 잘 알지 못하는 편이라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호태왕비의 해독이 참모본부에 의해 침략논리에 이용되는 것을 봐왔기 때문이죠."
"그게 어떻게 관계가 있습니까?"
"한반도는 과거 우리가 지배했던 땅이니 다시 가서 찾자라고 부추기니 일본의 선량한 국민들이 아무런 죄의식 없이 한반도를 침탈하게 된 것입니다."
"아, 그렇군요. 저런 못된 놈들 같으니."
"정작 문제는 지금도 일본학계가 과거 참모본부 농간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국민들을 교육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마무라 주임은 이런 일들을 마치 자신의 잘못이라도 되는 양 송구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에이지는 나까가와 교수에게 가께아끼의 정체에 대해 제보했군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누군가로부터 죽음의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던 것이군요."
"그렇지요. 그때부터 이름을 바꾸고 정체를 숨기며 살아왔다고 봐야지요."
"그러나 결국은 노출되어 철저한 감시를 받으며 살아왔단 얘기군요."
"그러다 최근 무슨 문제로 다투고 그 감시자로부터 죽음을 당했다고 추리할 수 있습니다."
"안정된 추리군요. 정말 놀랍습니다. 머리카락 하나 남겨지지 않은 살인현장을 책과 역사를 더듬어 거기까지 추리했다는 것은."
"반장님의 도움이 컸습니다."
"제가 무슨."
 그러면서도 주임은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오늘은 제가 맥주를 한잔 사겠습니다."
 들뜬 기분으로 한 잔을 쭉 들이킨 주임이 상훈에게 잔을 권하며 자신있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야호이의 동지들이 누구인가만 밝히면 사건은 쉽사리 해결되는 셈이군요."
"그렇습니다."
"편찬과에서는 가또오와 에이지가 동행했고 여섯 사람은 정보과의 직원들입니다. 당시 사망한 것으로 기록된 지휘관은 나머지 일곱 사람에 의해 바이칼에서 죽음을 당한 사람 같군요."
"그들은 왜 지휘관을 살해했을까요?"
"맹세의 내용만 안다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텐데......"
"수수께끼의 맹세군요."
"하여간 당시의 정보과 직원들 명단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정보과 직원들의 명단을 넘겨받던 주임은 의외로 상훈의 표정이 침울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박 선생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닙니다."
 상훈은 건성으로 대답하며 맥주를 들이켰으나 주임은 상훈의 얼굴이 갑자기 침울해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표정이 너무 어두워요."
"......"

 야호이의 동지들 명단을 넘겨주는 상훈의 뇌리에 이정호 교수의 모습이 떠올라 오는 것이었다. 일본군인들의 추악한 음모로 만들어진 일본의 한반도 지배설에 대항하다 결국은 생을 마감한 그의 인생이 허망하게 느껴졌다. 이마무라 주임의 걱정스런 표정위로 상훈의 비감한 목소리가 떨어져 내렸다.
"내게는 아직도 사건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아, 미안합니다. 제가 잠시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군요. 그 명단의 인물들을 파악하여 조사를 하면 에이지 살해사건의 범인들이 나올 것 같습니다. 결과 나오는 대로 연락을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주임과 헤어진 상훈은 다음날 아침 발길을 대동아연구소로 향했다. 그러나 기무라 박사를 만날 수는 없었다.
"미안합니다. 박사님께서는 해외출장중이십니다. 메모를 남겨 놓으시면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상훈은 메모를 남기지 않고 그냥 나왔다.

"모두 일곱 사람 가운데 다섯 사람이 이미 사망했습니다. 생존자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캐나다로 이민을 갔습니다. 또 한 사람은 동경에 살고 있습니다."
 이마무라 주임은 매우 신속하게 용의자들의 신원을 확인해 왔다.
"그렇다면 동경에 있는 사람을 추적하면 되겠군요."
 주임은 낭패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얼버무렸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 생존자의 이름이 와따나베입니다."
"와따나베?"
"그렇습니다. 와따나베 의원의 부친입니다."
"와따나베 의원이라면 대동아연구소 이사장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이사장의 부친입니다. 지금은 은퇴하였습니다만."
"은퇴하기 전에는 무엇을 하였습니까?"
"연구소를 설립한 사람입니다."
"일이 약간 복잡하게 되었군요."
 그랬다. 간단하게 여겨졌던 일이 방향을 틀고 있었다. 상대방은 심문은커녕 시골경찰서의 형사주임으로서는 한 번 만나보기도 힘든 사람이었다. 상대방의 신분에 놀란 이마무라 주임의 표정이 충분히 이해가 되는 상황이라 상훈 역시 곤혹스런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함부로 취조할 수도 없으니 섣불리 얘기를 꺼내는 것은 오히려 불리하겠군요."
"그렇습니다."
 이제는 완전히 실망스런 이마무라 주임의 표정을 보면서 상훈은 오히려 어떤 종류의 확신과 더불어 자신도 모를 큰 힘이 가슴깊이에서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주임은 용의자의 아들이 현역의원인 것을 염려하는 것이지만 상훈에게는 이미 이것은 한 노인의 문제는 아니었다. 가또오의 기록이 모두 대동아연구소로 들어가 있는 것은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고 에이지의 기록이 하나도 없는 것 역시 이 연구소와 관련이 있을 것임을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노인이 아닌 그의 아들 와따나베 이사장이 직접 범죄와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짙은 것이었다.
 '차라리 잘된 일이다. 모든 것이 대동아연구소로부터 나오고 있다. 어차피 내게는 이 사건이 단순한 살인사건은 아니지 않은가. 일본 군국주의의 핵심이 웅크리고 있는 대동아연구소를 깨부숴야 한다.'
"너무 상심 마십시오."
 이마무라 주임은 상훈의 위로에 크게 안도하는 눈치였다. 그로서는 상훈이 러시아까지 가서 찾아낸 용의자를 심문 한 번 못해본다는 사실이 외국인인 상훈에게 더없이 부끄럽던 참이었다.
"어쩌면 제게 길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다음 말에 주임은 기대 섞인 눈길을 상훈의 입가로 보냈다. 상훈의 생각으로는 이 사건은 자료와 정황에 의거하여 범인을 유추할 수밖에 없는 다소 미묘한 사건이었다. 무척 어려운 듯이 보이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지극히 쉬운일이었다. 문제는 자료나 기억에 얼마나 다가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상훈은 동경대학의 선배인 도서관장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에게 부탁하여 연구소에 있는 기록들을 면밀히 살피면 반드시 결정적인 증거가 나올 것이었다. 가또오의 기록만 살피더라도 에이지에 대한 범의를 품은 기록이 반드시 나올 것이었다. 주임이 상훈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만나기조차 힘들 텐데요."
"그것이 아니고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얘기입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와따나베 의원의 아버지가 아니고 와따나베 의원 본인이 의심스럽습니다. 전부터 느끼던 것입니다만 대동아연구소는 어딘지 이상한 데가 있는 연구소입니다."
"이상한 데가 있다니요?"
"전문적인 분야라 설명하기가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만 어떤 목적을 가지고 뚜렷이 나아간다는 점이 보통의 연구소와는 매우 다릅니다."
 역시 이마무라 주임은 상훈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돌아가서 기다리십시오. 뭔가 유력한 증거가 포착되면 제가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주임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돌아갔다. 그로서는 이제 상훈에게 기대는 것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는지 어깨가 늘어진채 힘없는 발걸음을 옮겼다.

37. 역사의 고백

 에이지가 편찬과의 직원으로 드러난 이상 편찬과의 기록과 자료를 충실히 검토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었다. 자료중에는 에이지가 작성한 것도 상당히 있어 상훈은 에이지가 어떤 업무에 종사했으며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에이지는 주로 조선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고서를 수집하여 읽고 분석하는 일을 하였으며 자신이 알게된 모든 정보와 지식을 참모본부의 침략논리를 만들어내는 데에 제공하는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한반도에 빈번하게 출장을 다닌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과학적 연구방법도 확립되어 있지 않은 채 일본에 합방당한 당시의 조선에 참모본부의 직원들이 수시로 나가 서책을 수집하였다면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해 체계적으로 방어하기가 쉽지는 않겠구나.'
 편찬과에는 직원들이 직접 나가 수집한 것 말고도 조선총독부에서 수집, 분류하여 보내온 자료도 많았다. 1930년대에 편찬과에서 근무하던 에이지와 가또오는 이런 연유로 일반학자들이 구할 수 없는 수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 자료들은 이제 거의가 대동아연구소에 넘겨져 있는 것으로 보였다. 상훈은 새삼스럽게 대동아연구소의 존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동아연구소는 일본 문화계 전반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 연구소는 주로 부수 우익의 정치가와 학자들을 회원으로 하고 있었고, 역사의 해석에 있어서도 항상 일본의 이익을 우선으로 하고 있어 학문적 진리를 추구하는 학자들과 여러 분야에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특히 이론의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의 편찬에 있어 압도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에이지 사건의 성격을 알아내는 데도 필요할 것으로 생각되어 상훈은 대동아연구소에서 발행한 잡지와 대동아연구소가 선두에 선 논쟁의 기록들을 찾아 샅샅이 읽어나갔다. 이 연구소는 교과서의 편찬에 있어서, 미심쩍은 부분이나 불명확한 역사적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일본의 전설이나 이야기 등에라도 잠깐 비치기만 하면 마치 고증된 사실인 것처럼 일본우위의 논리를 펼쳐나가는 데 급급했다. 
 상훈은 특히 한일간의 고대사 분야에 있어서는 무조건 일본이 한국을 지배했었다는 논리를 개진하고 있는 것에 주목했다. 이것은 육군참모본부가 한반도 침략을 위해 구성한 군국적 논리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었다. 이들이 이에 대한 유력한 증거로 내세우는 것은 일본서기에 있는 믿지 못할 이야기 한 토막과 광개토왕비, 그리고 칠지도였다. 
 전설과 이야기로 꾸며져 일본학계에서도 별로 신빙성을 얻지못하는 일본서기에는 일본의 전설적 천황인 신공무후가 일엽편주를 타고 바다를 건너 삼한을 무찔렀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은 한국의 몇몇 고역사서가 한국이 아시아 전체를 지배했다고 주장하는 것과 똑같은 것으로, 어느 정도라도 역사의 방법론을 아는 사람이라면 피식 웃어버리고 말 수준의 것이었지만 이 연구소는 달랐다.
 '참모본부의 현대판을 보는 것 같군.'
 일본이 근대역사에 한창 눈을 뜰 때 참모본부가 일부 역사의 해석을 틀어쥐고 있었던 것은 일본학계 전체의 불행이라면 불행이었다. 초기단계의 역사학계에 뿌려진 침략사관의 폐해는 오늘날까지 일본의 학계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며칠간에 걸쳐 대동아연구소가 개진하는 논리를 살피던 상훈은 이 연구소가 광개토왕비와 칠지도의 해석에 특히 몰두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에이지의 서재에 광개토왕비의 자료가 많았다면 가또오의 서재에는 칠지도에 대한 많은 자료가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순간 상훈의 머리를 퍼뜩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일본의 검인정교과서 검증제도였다.
 '가또오의 모든 자료는 그것이 연구소에 기증된 것이건 서재에 있는 것이건 이미 대동아연구소에서 검토를 다 마친 것이다. 이 연구소에는 교과서의 집필자가 많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들이 교과서를 집필하는 데 있어 가또오의 자료를 이용했을 가능성은 아주 높다. 참고로 한 자료는 제출하게 되어 있으므로 교과서 검증위원회를 통하면 가또오나 에이지의 자료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상훈의 추측은 적중했다. 마침 미나미 교수가 대동아연구소에서 나온 역사교과서의 검증위원으로 있었기에 연구소에서 제출한 자료를 입수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칠지도에 대한 연구소측 주장의 참고자료에는 가또오의 이름 석자가 분명히 들어있었다. 아니 이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참모본부의 군인신분인 가또오가 구성한 논리가 그대로 교과서에 전개되어 있었다. 교과서 편찬용으로 제출한 연구소의 칠지도 관련 자료에서 가또오의 이름을 찾아낼 수 있었다. 연구소의 논지는 4, 5세기 무렵의 한반도를 일본이 지배했었다는 것이었는데 그 증거로 과거 백제에서 일본으로 보내진 칠지도를 들고 있는 것이었다. 색인에서 가또오의 이름을 찾아낸 상훈은 해당 페이지를 폈다.
 
 "......이와 관련하여 나의 동료는 호태왕비 및 칠지도와 관련한 기록들이 한반도에 있는가 조사했다. 
삼국사기 등 이미 알려진 사서 이외에도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새로운 자료를 찾았다. 그러나 이와 관련된 기록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는 한반도의 사람들이 이 사실을 욕되는 것으로 간주하여 사서의 기록에서 빼버린 것으로 간주했다."

 이 구절을 보던 상훈의 머리에 전광석화처럼 어떤 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가또오는 <나의 동료>라는 표현을 쓰고 있으며 그 동료는 한반도의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자료를 조사했다고 했다. 
"외지사서고"

 상훈은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두들겼다. 당시 일본이 조선을 외지라고 불렀다는 생각이 그제서야 난 것이다. 지난번 닛꼬의 에이지 집 서재에서 얼핏 보았던 수백 권의 책 사이에 끼여 있던 책이랄 수도 없을 정도로 얇은 문집. 그것의 제목이 외지사서고가 아니었던가. 그때는 이마무라 주임과 책을 반씩 갈라 여백이나 행간에 에이지의 메모 같은 것이 있는가를 살피기만 했을 때라 제목만 얼핏 보고 바삐 책장을 넘기며 지나쳐 어떤 내용인지 생각조차 하지 않았지만 지금 가또오의 메모를 보니 어쩌면 그것은 에이지가 기록한 것일지 모른다는 예감이 떠올랐던 것이다. 당시 참모본부에서 호태왕비와 관련한 연구의 책임을 지고 있던 사람이 바로 에이지였기 때문이다.
 다음날 아침 상훈은 닛꼬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가또오가 얘기하는 외지에 나가 역사서를 찾았다는 동료가 에이지이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미리 연락을 주시지 않구요. 그랬으면 기다리고 있었을 텐데."
 상훈이 경찰서에서 제법 기다렸을 때 나타난 이마무라 주임은 몹시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상훈을 반겼다. 곧바로 에이지의 집으로 간 상훈은 서재에서 다른 책 사이에 끼어 있는 "외지사서고"를 찾아냈다. 거친 종이에 조잡하게 등사가 된 것이었는데  내용은 외지의 역사에 관한 서책을 조사하여 분류한 것으로 학자의 저술이라기보다는 조사한 사람의 보고서 같은 형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불과 구십여 페이지의 얄팍한 문집은 상훈의 두 눈을 확잡아끌었다. 등사물을 엮은 문집들이 흔히 그렇듯 뒷부분의 여러장들이 백지였고 거기에는 무엇인가가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필체가 나까가와 교수의 전화번호를 기록했던 것과 같은 것으로 보아 에이지가 쓴 것임이 분명했다.
 첫머리를 읽으며 이 기록이 에이지의 것임을 확인하는 순간 상훈은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앞부분의 보고서와는 달리 문장이 술회조이고 자신의 느낌을 많이 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왠지 모르게 이 책 속에는 자신에게 보내는 에이지의 목소리가 들어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왜 지난번에는 이 책에 주목하지 못했을까요?"
"재미있군요. 백지가 있어서 그랬습니다."
"백지라니요?"
"문집이 인쇄된 것이 아니고 필사본이기 때문에 책의 뒷장에 백지들을 남겨 두었어요. 에이지는 후에 이 백지에 자신의 생각을 써넣었기 때문에 책 귀퉁이만 열심히 살피던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첫 줄을 짚는 상훈의 손가락이 기대와 흥분에 부풀어 가늘게 떨렸다. 그토록 오랫동안 찾아 헤매었던 에이지의 기록을 대하는 심정이 예사로울 수는 없는 것이었다.

"나는 육군참모본부의 군인으로서 외지를 세 차례에 걸쳐 방문했다. 목적은 호태왕비와 칠지도에 관한 외지의 관련 사서를 찾아 그 내용을 파악하고 본국으로 가져오는 것이었다. 다양한 종류의 책을 살폈지만 정작 내가 찾으려하는 사서들은 없었다. 이미 총독부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역사서, 혹은 조선의 민족정신을 고취할 수 있는 책에 대하여는 수거하여 파손하거나 소각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동양 삼국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필요불가결한 귀중한 책들이 총독부의 무지와 무단통치로 말미암아 절멸된 사실 앞에서 나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현대판 분서갱유를 저지르고 만 것이었다. 
나는 우리 일본인들에 의하여 이러한 행위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침략을 위하여 귀중한 인류의 문화유산을 절멸시키는 사람들, 그들이 나의 동포라는 사실은 조국에 바치고 있는 나의 애국심이 어떤 것인가 깊이 숙고살 수밖에 없게 만든다. 불쌍한 조선인들, 수천 년의 문화유산이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하는 것을 떨리는 가슴으로 보고 있었을 그들에게 나는 한없이 용서를 빌었다. 총독부는 조선인들로 하여금 패배의식과 열등감을 느끼게 하는 식민사관의 주입에 여념이 없었다. 오랜 탐문 끝에 나는 본국으로 보내진 책들이 있음을 알아냈다. 조선의 사서들을 일본에서 찾아야 한다는 사실 앞에 망연할 수밖에 없었다."

 상훈은 일단 책장을 덮었다. 중요한 내용이라 집에 가서 차분히 보는 것이 나을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반장님, 대동아연구소에서 나온 교과서와 이 자료를 비교해 보는 것이 의미가 있을 것 같군요. 이 책은 제가 가져가서 보고싶습니다."
"알겠습니다."

이마무라 주임과 헤어져 동경으로 올라온 상훈은 바로 집으로 향했다. 에이지의 이 기록을 읽고 싶은 생각에 가슴이 마구 뛰었다.

 "나는 참모본부가 칠지도의 해독에 관여하는 것이 두려웠다. 또 한 번 역사를 왜곡할 것이 너무도 명백했기 때문이었다. 칠지도에는 분명히 백제왕이 일본왕 지를 후왕으로 표기하고 있지만 이것이 또 어떻게 바뀔지 모르겠다. 과거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했으니 이를 회복하기 위해 한반도에 진출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 그 허구의 논리를 위하여 모든 사료를 과장, 왜곡하는 이 무서운 음모의 끝갈 데를 나는 알 수 없다. 역사를 하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군인으로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칠지도에 대한 에이지의 이 고백은 진실한 한 인간으로서의 양심의 소리여다. 같이 역사를 하는 사람으로서 상훈은 숙연한 마음이 느껴졌다.
 에이지의 메모는 주로 참모본부의 한일 고대사 왜곡을 보는 양심 있는 학자로서의 자기 고백이었다. 고백은 계속되었다.

 "백제왕이 신하의 예를 갖춰 일본왕에게 칠지도를 바쳤다는 주장을 성립시키기 위해 참모본부에서는 두 가지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칠지도를 준 사람을 백제왕으로 해석하지말고 중국의 천자로 바꾸고 백제는 단지 이것을 전달하기만했다고 하자는 방안에 나는 웃음이 나왔다. 그래 분명히 명문에 백제의 태자가 만들었다는 조자가 있는데 이런 방법이 가능할까. 그러나 아무도 웃지 않았다. 오히려 진지하기 짝이 없는 그들의 얼굴에서 나는 이 사람들이 뭔가 큰 일을 저지르고 말 것이라는 예감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칠지도의 일부 구절을 삭제하자는 또 하나의 주장은 차라리 공포감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이미 삭제된 부분만으로도 칠지도는 사료로서의 가치를 잃고 있는데, 침략논리를 만들기 위하여 사료를 훼손하겠다는 발상. 나는 전율할 수밖에 없다."

"요꼬이가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에 새롭게 발견된 호태왕비의 한 구절을 극도로 과장하여 뜯어 맞추라는 국장의 명령. 나는 이것을 겐지에게 밀어버렸다. 그러나 마음은 편치 못하다. 나는 왜 그것은 범죄라고 주장하지 못했던가."

 메모는 여기까지였다. 그러나 상훈은 책장을 덮을 수 없었다. 상훈에게는 사건의 해결과는 별개로 칠지도에 대한 일본 학계의 주장에 참모본부의 음모가 깊숙이 개입되어 있음을 확인한 의미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일본 학계의 가장 중요한 칠지도 논리가 바로 백제가 일본의 왕에게 복종의 표시로 칠지도를 헌상했다는 것이었다. 칠지도의 어디에도 그런 구절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학계는 칠지도가 일본이 한반도의 남부를 지배했다는 유력한 증거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으니 이것은 명백한 억지였다. 이 억지의 뒤에도 역시 호태왕비의 왜곡해석과 같은 군부의 음모가 숨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상훈은 어떻게 해서든 일본의 학계에 짙게 드리워져 있는 침략사관의 잔재를 말끔히 걷어야만 한일간의 진정한 이해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갑자기 피로가 엄습하는 기분이었다. 상훈은 두 눈을 감은 채 뒤로 기대 앉았다. 일본의 역사왜곡은 너무나도 조직적이고 치밀했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자신은 아직 국내 학계에도 깊이 정착하지 못한 일개 역사학도가 아닌가? 혼자 일본의 역사왜곡 행위에 대적하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상훈의 뇌리에 이정호 교수의 모습이 스쳐갔다. 그리고 살해된 에이지, 갈등하는 가즈오, 일본인이면서 한국인의 분노를 이해하려 애쓰는 하야꼬, 천리대에 안치된 몽유도원도, 야마자끼 박물관의 월중도하도 등등...... 상훈은 눈을 떴다. 어둠이 짙게 깔린 창밖으로 불빛이 명멸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38. 역사의 덫

 상훈은 고대사 왜곡과 관련된 광개토대왕비 해석의 음모가 이제 물 위로 드러났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이 음모를 일본의 선량한 국민들에게 알리는 것이었다. 그전에 먼저 기무라 박사를 만나 이 교수와 어떤 대화를 했는지 확인해야 했다. 그것은 육군참모본부의 광개토대왕비 왜곡해석에 대한 갈래를 잡는 데 중요한 일이었다. 기무라 박사는 상훈을 기억하고 있었다. 
"전엔 정말 미안합니다. 예기치 않게 늦어져 그냥 가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니, 오히려 제가 미안했습니다."
"그래 전에 오셨을 때는 요미우리 신문 주최의 학술대회와 관련해서물으실 것이 있다고 하셨죠?"
"그렇습니다. 90년 요미우리 신문사 주최의 국제학술회의에서 이정호 교수라는 분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이정호 교수라, 아, 그 한국인 교수 말이군요.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분과 무슨 대화를 나누셨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혹시 한국분이십니까?"
"네. 박상훈이라 합니다."
"아, 그렇군요. 그런데 그분과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물어보시니 질문이 좀 당혹스럽군요."
"사정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하하, 이건 어딘지 모르게 수사관들이 하는 질문 같습니다."
 이정호 교수의 정황을 얘기하면 간단한 일이겠지만 상훈은 곧이 곧대로 얘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고대사의 몇 가지 논점에 대하여 의견교환이 있으셨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지금 이 교수님이 중병으로 입원해 계셔서 기무라 박사님께 여쭙는 것이 나올 것 같아서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럼 제가 대답을 해드리지요."
"고맙습니다."
"당시 이 교수는 광개토대왕비를 일본인들이 변조했다는 내용의 발표를 했습니다. 한두 해 하던 것이 아니고 지난 72년 이진희 씨가 주장한 이래 한국사학계의 단골메뉴가 되어버린 주장이었지요."
 기무라 박사는 조용하되 자신있는 목소리로 얘기를 시작했다.
"우리가 아무리 그렇지 않다고 학술적으로 반박해도 한국학자들이 목소리를 돋우는 데는 당할 재주가 없었어요. 그들은 우리에게 중고등학교 교과서의 내용을 바꾸라고 요구해 왔어요. 변조된 광개토대왕비가 임나일본부설의 유일한 증거인데 그 비의 비문은 조작된 것이니 임나일본부설을 폐기처분하는 게 당연하지 않느냔 얘기였죠. 특히 일본에서는 이진희 선생이 한국에서는 이정호 교수가 앞장서서 주장했지요."
 상훈은 역시 일이 짐작대로 되어간다고 생각했다.
"참 딱한 노릇이더군요. 저는 여기서 한국의 신문을 받아보는데 광개토대왕비가 일본인에 의해 변조되었다는 내용이 파다하더군요. 한국의 지식인들은 모두 우리가 비를 조작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나 봐요. 그래서 한국 사학계에서는 변조되기 전의 탁본을 찾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모양입니다만 참으로 우스꽝스런 일이라는 생각을 나는 하고 있었지요."
 기무라 박사는 별로 대단치도 않은 얘기를 지나가는 말로 하는 듯이 천연덕스럽게 얘기를 풀어놓고 있었다. 상훈 역시 무표정한 얼굴로 듣는 듯하고 있었으나 내심 온 신경을 기울여 기무라 박사의 말 한 마디도 놓치지 않도록 집중했다.
"그해의 학술회의에서도 이정호 박사가 예의 그 주장을 늘어놓기에 내가 발표가 끝난 후 그를 찾아가 저녁이나 하면서 얘기를 좀 하자고 했어요. 같이 저녁을 먹고난 후 내가 이 교수에게 물었어요."
 상훈은 더욱 정신을 차려 기무라 박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 대목이 바로 이 박사의 급격한 변화에 대한 해답이 될 것이었다. 
"광개토대왕비를 가서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어요. 그는 얼굴색이 변하며 난처해 하더군요. 약간 시간이 지나고 나서 없다고 대답하더군요. 맨처음 비를 변조했다고 주장한 일본에 있는 이진희 씨도 비에 가서 실측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아느냐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고개를 끄덕여요. 그래서 내가 다시 그런데 어째서 일본인들이 비를 변조했다고 주장할 수 있느냐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그는 탁본을 비교하면 알 수 있는 일이라고 하더군요.
 그 태도가 얼마나 완강한지 다른 방법으로는 도저히 그에게 우리 일본인들이 비를 변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설득하지 못하겠더군요. 광개토대왕비는 표면이 매우 거칠고 오랜 세월 동안 비바람에 깎여 탁본이 곱게 나오지 않스니다. 수십 장의 탁본이 다 다릅니다. 그런데 탁본이 약간씩 다른 걸 가지고 비가 변조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견강부회가 아닙니까.
 또 그 비에 석회가 칠해져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랜 세월 동안 이끼에 덮여 있던 비를 깨끗이 하기 위해 비를 탁본하여 팔던 중국인이 비에 불을 지르고 나서 균열이 생긴 부분을 보수하려고 석회를 칠했던 것입니다. 일본인들이 비에 석회를 칠해 있는 글자를 메워버리거나 없는 글자를 만들어냈다고 하는 주장은 사실 관계를 알아보지도 않고 미리 결론을 내버린 너무나 비학문적인 태도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하도 완고하게 나오기에 나는 아주 극단적인 방법을 썼지요."
"어떤 방법을 썼습니까?"
"같이 비에 가보자고 했습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이지요. 그런데도 그는 역시 엉뚱한 주장을 하더군요."
"뭐라고 했는데요?"
"가서 봐도 모른다는 겁니다. 육안으로는 확인이 안된다는 거죠. 갑갑하더군요. 아니, 그래 석회를 씌워 글자를 조작한 것을 가서 들여다봐도 모른다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비의 원재질과 비교해 보면 삼척동자도 알 텐데 그것을 가서 봐도 모른다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그런 억지가 한국학자들이 학문을 하는 태도란 말입니까?"
 상훔의 심장은 격렬하게 요동질치고 있었다. 당장 일어나 비의 왜곡에 대한 진실을 소리치고 싶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훈의 심사를 알 리가 없는 기무라 박사는 더욱 자신있는 얼굴로 얘기를 계속했다.
"그의 무턱댄 억지에 나는 질릴 수밖에 없었어요. 극도로 화가난 나는 내기를 걸었지요."
"내기를 걸어요?"
"목숨을 걸겠다고 했지요. 그가 주장하는 대로 비가 석회로 덮여 없는 글자가 생기고 있는 글자가 없어졌다면 자결하겠다고 했지요. 정밀하게 검증하여 한국의 학자들이 조작되었다고 주장하는 글자, 즉 원비면에는 없다고 주장하는 글자인 내도해가 석회로 조작된 글자라면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고 했어요."
"이 교수는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있더군요. 나는 그의 얼굴에 땀방울이 배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 그는 내기를 할 필요가 없다고 하더군요. 왜냐하면 지금에 와서 그것을 알아낼 방법이 없기 때문이라는 거죠. 그래서 나는 만약 당신도 납득할 수 있는 검증방법을 내가 제시하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지요. 그는 더 이상 억지를 쓰면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었던 겁니다."
 상훈은 기무라 박사가 워낙 자신만만해 하자 과연 그가 어떤 방법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였다.
"나는 목숨을 거는 대신 그에게는 만약 비를 일본인들이 조작하지 않았다는 것이 증명이 되면, 임나일본부 즉 일본이 신라 백제 가야를 이백 년간 통치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겠느냐고 물었지요."
 상훈은 숨이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 이 교수가 어떤 대답을 했을까? 상훈은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순간 그는 몹시 당황하더군요. 대답을 하지 못해요. 충혈된 눈으로 나의 입술만을 바라보고 있는 겁니다. 분명한 그의 패배였어요. 학자란 자신의 주장에 목숨을 걸 수 있어야 합니다. 변조설의 주창자인 그가 결정적 순간에 가서는 자신의 학설에 등을 돌렸어요. 그는 기대를 포기하지 않은 채 내게 어떤 방법이 있느냐고 묻더군요."
"기대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혹시 내가 제안하는 방법이 우길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기대감이죠. 인문지리적 혹은 학술적 논리적 귀결에 의한 증명이 아닌가 희망을 걸었겠지요. 그런 것은 역시 우기면 그만이니까요."
 상훈은 기무라가 필요 이상으로 이 교수를 몰아붙인다는 느낌이 들어 다시금 울분이 치솟았다. 그러나 지금은 잠자코 듣기만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를 쉽게 풀어주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더군요. 그냥 얘기를 해주면 또 교묘하게 우기고 나올 것 같았어요. 그래서 재차 다그쳤지요."
"다그쳤다는 것은?"
"물론 임나일본부를 인정하겠느냐는 것이었지요."
"그랬더니요?"
"그는 눈을 감고 한동안 무엇인가를 생각하더니 이렇게 얘기하더군요."
"......."
"그렇다 하더라도 임나일본부를 인정할 수는 없다. 그것은 역시 허구이기 때문이다라구요. 나는 그가 학문적으로는 빈약해도 용기는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상훈은 기무라 박사의 이 말이 은근히 비꼬는 것임을 느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왜냐하면 그가 제시한 내기의 대가도 작은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
"그는 임나일본부는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대신 자신도 내놓을 것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게 무엇인데요?"
"목숨."
 상훈은 이 말을 하는 기무라의 얼굴에 흡사 귀기와 같은 음산한 기색이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가 말로는 극도로 화가 나서 그랬다고 했지만 어쩌면 처음부터 이 교수를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고 가거나 최소한 폐인으로 만들어버릴 음모를 가졌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것이 학자들의 방법이 될 수 있는 겁니까?"
 상훈은 떨리는 가슴을 억지로 누르고 낮고 무거운 목소리로 질책하듯 물었다.
"학문의 길이란 그런 것입니다. 자신의 진리에 목숨을 바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엄정함 없이 분위기에 편승하여 억지주장을 해댄다면 그는 이미 학자가 아닙니다. 따라서 존재 이유도 없어지는 것이죠."
"잘못 알게 되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학자란 비록 하늘같은 스승의 가르침이라 하더라도 냉정하고 엄밀하게 다시 검증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진정으로 같은 진리에 도달했을 때에만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따라서 잘못 안다는 경우는 학자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 호태왕비를 검증할 수 있는 어떤 방법을 제시했습니까?"
 기무라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거만하게 대답했다. 이런 태도는 이제까지의 친절하던 모습과는 너무도 다른 것이었기에 상훈은 약간 어리둥절했다.
"레이저 판독입니다."
"레이저 판독이라구요?"
"그렇지요. 만약에 누군가가 석회를 발라 없는 글자를 조작하거나 있는 글자를 없애버렸다면 레이저로 찍어보면 확실하게 나옵니다. 나는 젊은 과학자들과 그 방법에 대한 검토를 마쳤던 참이라 이 교수에게 그 방법을 제시했지요."
 상훈은 당황했다. 자신도 기무라 박사가 쓸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해봤지만 이런 방법은 놀라운 것이었다. 기무라 박사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부연설명을 했다.
"중국이나 한국의 과학자들을 동원해도 결과는 변하지 않습니다. 사학자들끼리 다툴 필요가 없는 일이죠. 누구라도 쉽게 납득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아무런 억지도 흥분도 통하지 않는 지극히 조용한 벙법이면서 만인이 납득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입니다."
"이 교수는 뭐라고 대답을 했습니까?"
 상훈은 억지로 냉정을 회복하고 물었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더군요. 타들어가는 담배를 잡은 손길만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습니다. 입술은 타들어가고 얼굴은 창백해지는데 옆에서 보고 있기가 민망하더군요."
"그래서요?"
 기무라 박사는 상훈이 비상한 관심을 보이자 약간 의아하다는 느낌이 드는 모양인지 상훈을 흘낏 보고는 눈길을 밖으로 던졌다. 상훈도 역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답답한 기분이 들어다. 비라도 오려는지 하늘은 짙은 잿빛이었다. 기무라 박사는 담배를 꺼내 느릿한 동작으로 불을 붙이며 마지막 말을 이었다.
"이 교수의 참혹하기 짝이 없는 표정을 보자 안됐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나는 그에게 석회도말론에 대한 양심선언을 한다면 우리의 약속은 공개하지 않겠다고 했지요. 즉 목숨이나 학문적 명성 중 하나를 택할 수 있도록 선택권을 준 셈이지요."
 기무라의 설명을 듣고 난 상훈의 뇌리에 이 교수의 참담한 얼굴이 조그맣게 생겨나더니 차츰 부풀어올랐다. 저승에서도 편히 눈을 감고 있지 못할 것 같은 그의 고통이 자신에게도 그대로 전해져 오는 것을 느끼며 상훈은 천천히 일어섰다. 많은 국내의 학자들이 호태왕비의 변조설을 지지해오고 있었고 상훈 자신도 그 학설의 맹점을 의식하면서도 전적으로 물리칠 수만은 없었다. 그동안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한 한국의 대응이 극도로 감정적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황으로 보아 이 교수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음은 당연했다. 목숨을 걸겠다는 기무라 박사의 호언이 학자로서는 과격하고 경망된 것이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확고한 자신감의 표현인 것도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기무라 박사의 검증방법을 듣고 난 이 교수의 번민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이 가는 일이었다. 일본이 한반도를 이백 년간이나 지배했다는 것이 도대체 말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막상 구석에 몰리자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목숨을 건 약속에 대한 부담감에서 이 교수는 결국 우울증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반도의 지도를 그들의 나라와 같은 빨간색으로 칠해 두고 일 년에도 몇백만이나 되는 학생들을 그릇되게 가르치는 데 대한 울분과 사학자로서 그 엄청난 왜곡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중압감이 그로 하여금 정신병원에서 아까이라고 되뇌이며 죽음을 맞이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 사람 이제는 그런 주장을 하지 않더군요. 한국에서 나오는 논문을 봐도 그 사람 발표는 없어졌더군요. 목숨은 역시 아까웠던 모양이죠."
 돌아서서 나오는 상훈의 등뒤에서 들리는 기무라 박사의 마지막 한 마디에 상훈은 끝간데 없는 울분과 비애를 느꼈다. 그러나 상훈은 감정을 애써 누르고 잠자코 걸어나왔다. 머지않아 반드시 다시 찾아올 것을 마음속으로 다짐하면서.

 기무라 박사의 연구실을 나온 상훈의 심사는 격렬하게 요동질치고 있었다. 변조설은 일본의 터무니없는 역사왜곡에 대한 한국사학자들의 필사의 저항이었다. 이 교수가 일본이 한국의 남반부를 이백 년간이나 일본과 같은 색깔인 붉은색으로 그려놓은 것에 대해 <아까이>라고 토해내며 생을 마친 것도 이런 역사의 왜곡에 대한 애타는 몸부림이었다. 레이저를 쏘아보자는 말 한 마디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자신감을 잃고 회의에 빠져 급기야는 미쳐가는 이 교수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다가오자 상훈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역사가 너무 가혹하게 돌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진왜란과 일제 삼십육 년의 수탈을 당한 것도 모자라 지금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역사왜곡에 시달려야 한다는 현실이 견딜 수 없는 답답함으로 터져 올랐다.
 그러나 상훈은 조급하게 분노하지 않았다. 서두른다고 될 일도 아니었다. 이제껏 올바른 대응을 못해오고 아직도 수백만이나 되는 일본의 학생들로 하여금 왜곡된 역사를 배우게 하고 있는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한 분노를 삭일 수 없었지만, 자신은 냉정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훈은 분노를 누르고 앞을 향하여 묵묵히 걸었다. 이 교수의 고통스러워하는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지만 그럴수록 냉철해져야만 했다. 감정적 대응은 학문의 세계에서는 패배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상훈은 이 교수가 역사의 덫에 걸려 죽는다는 말을 한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상훈은 다시 한 번 자신이 일본에서 역사를 공부한다는 중요하고도 미묘한 의미를 깨닫고 있었다. 이 교수가 걸릴 수밖에 없었던 그 덫을 상훈 자신이 치워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광개토대왕비에 직접 가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교수를 죽음으로까지 몰아넣어던 기무라와의 대화는 칼날처럼 예리하고 정확해야만 할 것이다.

39. 국내성의 날들

 상훈은 며칠간의 결강을 각오하고 나리따에서 심양행 비행기를 탔다. 심양의 공항에 내리자마자 팔을 끌며 호객하느라 아우성인 택시 운전사들을 피해 비교적 양순한 인상의 운전사를 골라 호텔로 향했다. 이제 막 기지개를 펴기 시작하는 요녕성의 성도이자 전통적인 만주의 중심도시 심양은 건설공사가 한창이었다. 바로 역에 도착해 시간표를 보니 마침 통화로 가는 야간열차가 있어 표를 사려했지만 희한하게도 역에서는 기차표를 팔지 않았다. 상훈이 조금 아는 중국어가 거의 통하지 않는데다가 영어를 하는 사람도 만날 수 없어 역구내에서 쩔쩔맸지만 누구 하나 거들떠보는 사람도 없었다. 많은 혼란을 겪고 이제 막 근대화에 눈을 뜨고있는 심양의 사람들도 칠십년대의 한국과 마찬가지로 남의 일에 관심을 가지려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돈으로 수렴되는 근대화의 비정함으로 가득 찬 역에서 상훈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역에서 기차표를 못 사면 어디서 살 수 있단 말인가.
"한국에서 왔어요?" 
 기차가 막 도착할 때까지도 표를 구하지 못해 <한국인-통화> 라는 한자 쪽지를 써 들고 만나는 사람마다 내밀어보던 상훈에게는 눈물이 나도록 반가운 목소리였다. 앞에는 안경을 낀 조그만 체격의 삼십대 사나이가 서 있었다. 상훈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사나이는 쓴웃음을 지었다.
"기차표는 역에서 사는 게 아니에요. 열 시간이나 서서 가는 입석권이라면 몰라도."
"그럼 어디서 삽니까?"
"국영여행사나 관리들에게 가서 구해야죠. 사는 게 아니라 구하는 겁니다."
 알아듣기 힘든 소리였다.
"십삼억이나 되는 인간들이 있으니 층이 얼마나 지겠어요. 하류층이 상류층과 같이 아무 때나 기차를 탈 수는 없는 일이죠. 마찬가지로 상류층이 하류층과 섞여 줄을 서서 기차표를 사고 그들과 같은 객실을 이용할 수도 없는 일이구요."
 한 마디로 중국에서 평등을 바랄 수는 없다는 얘기였다.
"통화까지 간다고 그랬죠?"
"네."
"따라와요."
 사나이는 상훈의 앞장을 서서 이층의 귀빈실로 올라갔다.
"아래층에서는 기차를 타기 위해 열 시간이나 전부터 줄을 서요. 그래도 막상 기차가 도착하면 새치기에 싸움질로 온통 북새통이 돼요."
 사나이는 귀빈실의 여자경비원에게 신분증을 제시하고 상훈과 같이 들어갔다. 장터 같은 일층과는 달리 넓고 호화로운 귀빈실에는 단 한 사람의 귀빈도 없었다.
"아, 난 표를 구하지 못했는데요."
"알아요. 그래서 내가 같이 가잖아요."
"고맙군요. 그런데 무슨 일을 하는 분입니까?"
"그것까지는 알 필요없어요."
"그런데 왜 나를 도와줍니까?"
"조선족이니까요."
 사나이는 조선족이었다. 신혼중이라 집에 일찍 들어가야 하는데 말도 못하는 상훈이 역구내에서 쩔쩔 매는 것을 보고는 가다가 돌아왔다는 것이다. 상훈은 이 사람이 도와주지 않았으면 다음날도 기차표를 살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차가 도착하자 사나이는 상훈을 데리고 기차의 차장을 찾아갔다. 플랫폼에 들어서자 상훈은 모든 기차가 항상 만원인 것을 보고 아닌게 아니라 기차표 구하는 것이 보통 일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통화까지 가는 외국인인데 표가 없이 탔습니다. 가급적 침대칸을 구해주십시오."
 상훈은 김이라는 조선족 사나이가 차장에게 대략 이런 뜻으로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신 정신나갔어. 표가 없는 사람을 태워주라고 하다니. 그것도 침대칸을 주라고?"
 그러자 사나이는 신분증을 내밀었다. 마치 황제와도 같이 부하들이 가지고 오는 잡다한 부탁사항을 때로는 들어주고 때로는 욕을 하며 거부하던 차장은 잔뜩 거만한 표정으로 사나이의 신분증을 들여다봤다. 그러더니 뭐라고 투덜거리며 큰 소리로 사나이에게 욕지거리를 하며 상훈에게는 거지에게 밥주듯 귀찮다는 표정으로 타라는 턱짓을 했다. 사나이는 차장에게 비굴한 웃음을 띠며 몇 번이나 상훈을 잘 부탁한다고 하고는 돌아서 갔다. 자신과는 인사를 나눌 마음의 여유도 없이 몇 번이나 차장에게 고개를 숙이고 돌아가는 사나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상훈은 가슴이 찡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상훈이 생각했던 만큼의 힘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차장의 태도로 보아 그는 아마 역의 하급직 직원 정도일 것이다. 아무런 대가도 없는 일을 거만한 차장에게 고개를 몇 번이나 굽실거리며 부탁하고 돌아가는 그를 바라보는 상훈의 마음에 조선족이라는 세 글자가 아프게 다가왔다.
 
 기차 안은 엉망이었다. 차장을 만나 자리를 얻기 위해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중국은 제도적으로 관리가 부패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삼층 침대에서 밤새 바닥에 가래침을 뱉어대도 누구 한 사람 신경 쓰지 않는 찻간에서 잠을 청했지만 불결하고 신경이 쓰여 잠이 올 리가 없었다. 상훈은 차창을 통하여 간간이 보이는 전등불을 세었다. 띄엄띄엄 보이는 사람 사는 신호를 세어보는 것은 아마도 한반도로부터 이 부근까지 나와서 살지 않을 수 없었던 기구한 운명의 조상 생각 때문일 것이었다. 고려조의 심양왕으로부터 조선조의 삼학사, 그리고 근세의 숱한 만주 이주민에 이르기까지 부근의 어디엔가 토해놓은 한숨과 눈물을 느낄 듯하였다.
 희끄무레 동이 트일 무렵 만주벌판을 달려온 철마는 어둠을 찢는 기적소리와 더불어 그 힘찬 걸음을 멈추었다.
 새벽에 도착한 통화역에는 칠팔 명의 형사가 나와 사냥개처럼 눈을 부라리고 있다가는 가끔 승객들의 짐을 열어보곤 하였다. 아마 밀수품을 검사하는 모양이었다. 역 앞에 잔뜩 대기한 택시운전사 중 인상이 괜찮은 한 사람을 찾아 종이에 집안이라고 써 보여주자 운전사는 기쁜 표정으로 얼른 상훈을 뒷자리에 안내했다. 택시 요금이 비싼 중국에서는 새벽열차라 해도 기껏해야 단거리 손님 몇밖에 없는 터에 세 시간이나 걸리는 집안까지 간다는 손님은 운전사에게는 굴러들어온 호박이었다.
 십 년도 더 된 일제 도요다 자동차를 끌고 포장 안된 길을 덜컹거리며 달리는 운전사의 얼굴이 더없이 밝아보였다. 집안까지 가는 동안 자동차는 짙은 안개에 휩싸여 야트막한 산을 몇 번이나 넘고 때로는 작은 시내를 가로건넜다. 상훈은 바로 이 길이 만주를 호령하고 중국을 아우르던 고구려의 늠름한 장수들이 말을 타고 다니던 길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감회에 사로잡혔다. 맞은편 길에서 안개를 뚫고 이제라도 젊고 잘생긴 광개토대왕이 검정 말을 타고 나타나 사방을 뒤덮는 호쾌한 목소리로 자신의 후예를 반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통화를 떠난 지 근 세 시간이 다 되어서야 자동차는 집안이라고 쓰인 조그마한 나무 팻말을 지나쳤다. 나무 팻말 바로 옆에는 냉면이라고 한글로 쓰인 음식점이 있었는데 이런 작은 한국음식점은 집안 시내로 들어가기까지 제법 눈에 띄었다. 이들은 일본의 침략과 더불어 만주로 이주한 사람들일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어쩌면 과거 광개토대왕의 능을 지키면서 고구려 때부터 대대로 살아오던 뿌리 깊은 사람들도 있을지 모른다는 은근한 기대로 품어보았다. 
 집안 시내에는 가라오케 혹은 음악반주라고 써 붙인 음식점이 많았고 상훈은 그 중 한글을 써 붙인 어느 한 집에 운전사와 같이 앉아 식사를 하였다. 아침이라 한 가지의 음식을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대여섯 접시의 음식이 나오고 값은 형편없이 쌌다. 홀에는 대여섯 명의 처녀가 앉아 아침부터 음악을 틀어놓고 흥얼거리고 있었다. 처녀들은 상훈이 같은 말을 쓰는 것을 보고는 매우 놀라는 표정이었다. 조선족이 아닌 한국인이 이 마을에 왔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보통의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시내에서 오 분 거리에 광개토대왕비가 있었다. 관광지로 개발이 되지는 않았지만 가끔 집안에 사는 친지를 찾아온 사람들이 와보는 모양인지 비의 주위에는 담장을 치고 사람이 앉아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호태왕릉비라고 쓰여진 담장의 안내문에는 이 비가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비로서 그 아들 장수왕이 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라고 쓰여 있었다.
 담장을 들어서자 누각으로 씌운 웅장하고 거대한 광개토대왕비가 육 미터가 넘는 위용을 자랑하며 당당하게 서 있었다. 비를 보는 순간 상훈의 가슴이 떨려왔다. 비의 한가운데서 말발굽소리도 요란하게 만주벌판을 달리며 기상을 떨치던 고구려인들이 달려나올 듯했다. 다시 광개토대왕비의 탁본을 놓고 머리를 맞대고 한반도 지배를 짜맞추는 참모본부의 군인들이 보일 듯하다가 정신병원에서 아까이라는 말을 중얼거리던 이정호 교수가 걸어나올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상훈은 주변의 풍물을 하나하나 살피면서 발걸음을 바로 옮겨 놓아다. 비의 뒤편으로는 관리인이 사는 듯싶은 집이 두 채 있었고 담장을 들어오자마자 오른쪽에 있는 한 채의 집에는 안내인과 기념품을 파는 가게가 있었다. 비는 층계와 누각으로 보호가 되어 있었으며 비의 주변은 쇠사슬로 막아놓아 손으로 만지거나 지나치게 가까이 접근할 수 없도록 했다. 상훈은 주의력을 집중하여 비면을 살폈다. 무엇보다도 그 유명한 신묘년 기사를 살폈으나 눈으로 보기에는 어떤 석회자국도 지금껏 남아 있지는 않았다. 비에 누각이 덮인 것이 1982년이고 석회가 칠해졌다고 하는 것은 1899년 이전이니 물에 잘 녹는 석회가 백 년 가까운 세월을 비를 맞고 이제껏 남아있을 리는 없었다. 설사 남아 있다 하더라도 원석의 재질과는 눈에 띄게 다를 테니 석회도말론은 굳이 레이저 검사를 하지 않더라도 현재 비면에 내도해의 세 글자가 있는지만 실피면 되는 일이었다. 논리적으로 똑 떨어지는 일이니 기무라가 기세등등할 만했다. 그 석 자의 위치는 비의 제 일면에 있는 것이었다.
 상훈은 온 힘을 눈에 모았다. 내도해의 석 자는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보이지 않는 것 같기도 하여 함부로 단정할 수는 없었다. 단순한 관광객이 아니라 학술적 목적으로 왔다고 누누이 설명하여 사진을 찍는 것까지는 허용받았으나 쇠사슬 안으로 들어가 글자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아마도 중국인들은 누군가가 비면을 훼손하지 않을까 하는 히스테리에 눌려 이는 모양이었다.
 조상의 비가 중국인들에 의해 관리된다는 현실에 비애가 느껴지면서 순간적으로 광개토대왕비까지 걸어왔다가 탁본 한 장 살 돈이 없어 비를 잡고 목놓아 울었다는 신채호 선생의 모습이 떠올라 상훈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광개토대왕이 나타나 어째서 너희는 나의 비를 중국인에게 맡겨놓고 한 번 만져보지도 못하는가라고 호통을 쳐올 것만 같은 생각에 가슴조차 아려왔다. 그러나 상훈은 냉정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마음속으로 대왕에게 기도했다.
 '이제 우리 민족은 시련을 이겨내고 일어서고 있습니다. 가난을 떨쳐내고 민주주의를 쟁취했습니다. 이제 곧 통일을 이루면 한 사람의 겨레도 빠짐없이 대왕의 비를 보고 그 옛날 만주벌판을 내달리던 웅혼한 민족의 기상을 이어받을 것입니다.'
 기도를 마치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이 편해졌다. 상훈은 집안에 와서 비를 실측한 모든 학자들의 석문에 내도해라고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자신의 실측을 대치하기로 했다. 그 수많은 학자들이 모두 양심을 속이고 없는 내도해를 있다고 조작할 리는 없기 때문이었다. 특히 1963년에 현장에서 실측한 북한의 연구팀과 1981년에 완성한 중국학자 주운대의 선명한 탁본을 믿지 않을 도리는 없었다. 아쉬움을 남기고 비에서 약 팔백 미터쯤 떨어진 광개토대왕릉으로 발걸음을 옮긴 상훈은 능을 지키는 조선족 노인을 만날 수 있었다. 노인은 상훈이 남한에서 왔다는 말을 듣고는 무척 반가워했다.
"언제부터 여기 사셨습니까?"
"일제시대에 할아버지가 고향을 떠나오셨어요."
"혹시 고구려 때부터 여기 살던 사람은 없을까요?"
 상훈은 광개토대왕의 비에 삼백삼십 호를 지정해 묘를 지키게 한 것을 떠올리고 물었다.
"없어요. 다들 일제시대에 이주한 사람들이죠."
 대왕릉은 관리가 전혀 안되고 있었다. 이미 오래 전에 도굴꾼들에 의해 파헤쳐졌겠지만 벌겋게 녹이 슨 출입문이나 열쇠를 넣어도 잘 움직이지 않는 석실의 자물통을 보는 상훈의 마음이 좋을 리가 없었다. 안내인이 어설프게 해설하는 석실의 내부에는 습기가 차 수도 없이 많은 벌레가 기어다녔다.
"바닥과 천장의 돌들에는 표식이 되어 있습니다. 습기가 가득찬 채로 천오백 년 이상을 지내왔지만 석실은 완전한 원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고구려인들은 석재를 고르는 데 남다른 안목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안내인의 설명을 들으며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를 기분이었다. 왕릉 주변에는 많은 고구려의 무덤들이 널려 있었지만 한결같이 원형이 보존된 것은 없었다. 무덤 위에 집을 짓고 온갖 오물을 쏟아내놓고 있는 중국인들이 혐오스럽게 생각되었지만, 따지고 보면 그들이 남의 나라 무덤에 관심을 가져줄 리가 만무했다. 이제 약간의 세월이 더 흐르면 고구려의 무덤들은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었다. 그렇게 없어지고 마는 것이 역사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가능하면 보존했으면 하는 생각에 아쉬움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마도 옛 고구려의 유적, 그것도 이제는 잊어버리고 있는 마주에 있는 것이라 더욱 미련이 남는지 모를 일이었다. 대왕릉에 고개를 숙이고 돌아오면서 상훈은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역사왜곡을 기필코 바로 잡으리라는 다짐을 했다. 불어오는 바람에 발목 높이까지 자란 무성한 풀들이 스러지며 상훈의 다짐에 맞장구를 치는 듯했다. 어쩌면 대왕 자신이 보내오는 역사의 소리인지도 몰랐다. 

40. 연구소의 비밀

 일본으로 돌아온 상훈은 우선 대동아연구소의 도서관장을 찾아 가또오의 자료를 열람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식사라도 같이 하면서 얘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점심시간을 택해 연구소의 도서관에 들르자 관장자리에는 다른 사람이 앉아 있었다. 상훈은 여직원의 자리에 가서 물었다.
"관장님이 바뀌셨습니까?"
"네."
"아, 그래요?"
 낭패였다. 그냥 나올 수도 없는 일이라 신임관장에게 자신을 소개하고 자료를 열람하도록 부탁했지만 신임관장은 바짝 긴장하며 상훈의 얘기를 듣고는 잘라 거절했다. 다툰다고 될 일도 아니고 당장은 자신의 존재를 눈에 띄게 만드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아 그냥 돌아서 나와 한참을 걸어왔을 때였다.
"저, 잠깐만요."
 누군가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상훈이 뒤를 돌아보니 어디선가 본 듯한 사람이었다.
"저 모르시겠습니까?"
"아, 그때 도서관에 계시던."
"그렇습니다. 마쓰모도라고 합니다."
 지난번 연구소의 도서관에서 공개자료실은 볼 수 없다고 하다 관장의 지시로 할 수 없이 문을 열어주던 젊은 직원이었다.
 상훈은 이 사람이 웬일로 자신을 아는 체 하나 싶어 슬며시 경계심이 생기기도 하였으나 인상이 과히 악해 보이지 않아 자신도 반갑게 아는 체를 했다.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차를 한잔 하시겠습니까?"
"일이 있으십니까?"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상훈은 마쓰모도의 진실한 얼굴 뒤에는 뭔가 중요한 얘기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하시지요."
 마쓰모도는 지나가는 택시를 세우더니 자신이 먼저 타고 상훈을 기다렸다. 택시를 타고 어디론가 가서 차를 마신다는 것이 썩 내키지는 않았으나 설마 무슨 일이 있을까 싶어 상훈은 곧 따라탔다. 마쓰모도는 상훈의 목적지를 묻더니 운전사에게 그쪽 방향으로 가도록 요청했다. 학교 부근의 커피숍 앞에서 내린 마쓰모도는 먼저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잠시의 불안에서 해방된 상훈은 어쩌면 마쓰모도가 연구소 부근의 눈에 띄는 장소를 피하기 위해 택시를 잡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택시를 잡고 보니 어디로 가도 무방할 것이므로 어차피 상훈이 가는 방향을 운전사에게 얘기했을 것이었다.
"오랫동안 고민을 해왔습니다만 아까 박 선생님을 보는 순간 얘기를 해야 한다는 충동을 느꼈습니다."
 커피가 오자 종업원이 가기를 기다려 맨 먼저 꺼낸 말은 상훈으로서는 도무지 그 의도를 짐작할 수 없는 엉뚱한 말이었다.
"연구소에 삼 년 팔 개월간 있으면서 어딘지 모르게 이상하다는 느낌을 갖고 있었습니다만, 일전에 박 선생님께서 오셨다가신 후로 어느 정도 감을 잡게 되었습니다."
 상훈은 마쓰모도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몰라 커피잔 너머로 그의 두 눈을 쳐다봤다.
"관장님은 그날 박 선생님에게 자료를 열람하도록 하시고 다음날 그만두셔야 했습니다. 기획실장이 비공개 자료인데 보였다고 얼마나 을러대는지 옆에서도 도저히 못 볼 정도였습니다. 성격이 꼬장꼬장한 관장님은 다음날 바로 사표를 써버리시더군요."
"아니, 관장님이 사표를 쓰셨다구요?"
"그렇습니다."
"아, 그렇다면 내 잘못이 크군요."
"박 선생님이 잘못하신 것은 전혀 없습니다. 연구소 자체에 문제가 있는 거죠."
"저도 그런 면이 있다는 느낌은 가졌습니다만......."
 상훈은 이 사람의 의도가 무엇인지 경계를 늦추지 않으면서도 무슨 말이 나오는가 신경을 집중했다.
"전에 와서 보시던 자료는 무슨 이유 때문이었습니까?"
 상훈은 망설였다. 대답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자칫 잘못하면 자신의 의도를 고스란히 노출당하고 말것이었다. 어려운 순간 상훈은 마쓰모도의 얼굴을 믿었다. 진실이 배어 있는 힘있는 얼굴이라 믿은 상훈은 거침없이 대답했다.
"연구소에서는 뭔가 역사의 진실을 은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쓰모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저와 마찬가지 생각이시군요. 저는 평소에 도대체 무슨 이유로 연구소에서는 별것도 아닌 자료들을 공개하지 않는 것인가 하는 의심이 들어 자료실에 들어가 비공개 자료들을 유심히 살펴봤지요. 역사에 대해 별로 식견이 없는 저로서는 봐도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는 어려운 것들이라 그냥 나오고 말았지만 그때 박 선생님이 찾아오시고 관장님이 사표를 내시는 것을 보니 뭔가 떠오르는 게 있었습니다."
"뭐가 떠올랐습니까?"
"연구소에서 보관하고 있는 자료들이 어떤 것인지 외부의 검증을 받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야만 저도 무슨 일에 종사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매우 올바른 생각이시군요."
"그래서 자료들을 박 선생님께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도서관에는 다른 사람들의 눈이 있지 않습니까?"
"남들이 모르게 가지고 나오겠습니다."
"그 자료들은 매우 유용합니다. 은폐된 진실을 밝힐 수 있을 것입니다."
 마쓰모도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자신으로서는 커다란 모험을 하는 셈일 것이다.
"그리고 어제 기획실에 올라가 자료정리를 도와주다 이상한 카드를 보았습니다."
"이상한 카드라구요?"
"그렇습니다. 겉에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두꺼운 봉투에 들어있는 노란색 카드였는데 기획실장이 아무도 손을 못 대게 하는 석제금고에 봉투를 꺼내들고 일어나려다가 의자에 발이 걸려 봉투를 놓쳤습니다. 책상 밑에 떨어진 봉투로부터 카드가 비쭉 나왔는데 제가 집어드리려는 순간 기획실장이 얼른 잡아챘어요. 어찌나 날카롭게 반응하는지 순간적으로 분위기가 이상했어요. 실장은 곧 냉정을 회복하고 저에게 고맙다고 했고 저도 웃고 말았지만 어쩐지 그 일이 잊혀지지 않는군요. 연구소에는 같은 직원에게도 숨기려는 비밀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런 분위기가 저로 하여금 연구실에 정을 붙이지 못하게 한다고 생각했어요."
"무슨 카드인지 내용은 보지 못했나요?"
"매우 낡은 카드였는데 맨 밑의 연호가 기억나는군요."
"언제로 되어있던가요?"
"쇼오와 17년이었습니다."
"쇼오와 17년이면 1942년이군요."
"그렇습니다."
"연호가 맨 밑에 기록되어 있었다면 그 카드는 누군가가 남에게 무엇인가를 작성하여 건네준 것으로 볼 수 있습니까?"
"글세, 저는......."
"채무증서나 확인증 같은 것의 밑에 날짜를 적지 않습니까? 한 장의 두꺼운 카드인 것으로 보면 일기일 리도 없구요."
"저는 잘 모르겠군요. 어쨌든 자료는 월요일 밤에 이리로 가지고 오겠습니다."
 직원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며 상훈은 일본인이란 어떤 사람들인가 생각했다. 한없이 친절하고 예의바르며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 집단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희생할 줄 아는 사람들. 자신들을 천래적으로 우수하다고 생각하고 아시아의 리더가 되고싶어하는 사람들. 그래서 타민족의 역사조차도 쉽게 굴절시키는 사람들. 그러나 그 중에는 도서관장이나 마쓰모도와 같이 올바르지 않은 것을 보면 즉각 나서는 양식 있는 사람들도 많은 것이었다. 
 불현듯 상훈의 뇌리에 하야꼬가 떠올랐다.
"대다수의 일본인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어요."

 못다한 공부를 하느라 주말을 도서관에서 보낸 상훈은 월요일 저녁이 되자 마쓰모도와 약속한 학교 앞의 커피숍으로 나갔다. 마쓰모도가 가져올 자료에 대한 기대는 상훈의 마음을 부풀리기에 충분했다. 마쓰모도의 얘기로 미루어 볼 때 그 자료들은 육군참모본부의 과장되고 날조된 침략사관이 일본의 역사학계에 자리잡는 과정을 드러내 줄 것으로 생각되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각국이 서로 자신에게 유리한 주장을 들이대며 우기면 그만이겠지만 학설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의 음모를 포착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검은 음모가 만들어낸 학설과 이론에 의해 수많은 일본의 젊은이들이 전쟁터로 내몰렸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교과서에서까지 왜곡된 역사를 배우고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사실을 일본의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릴 수 있을 것이었다.
 시선은 창 밖에 둔 채 이런 생각에 빠져 있던 상훈은 문득 시간이 너무 지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시계를 보니 약속시간에서 이십 분이나 경과해 있었다. 여느 때 같으면 다소 늦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오늘 마쓰모도는 중요하기 짝이 없는 자료를 몰래 빼가지고 오기로 했기에 약간이라도 늦는 것이 예사스러운 일일 수 없었다. 일단 혹시나 하는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하자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다. 시간은 자꾸 흘러갔다. 한 시간이 지나자 상훈은 이제 더 기대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자료의 획득에 대한 기대보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마쓰모도의 신변이었다. 이제까지 오지도 않고 아무런 연락도 없으니 그의 신변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으로 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당장 무엇을 해볼 수도 없는 일이라 상훈은 일단 집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집에 돌아온 상훈은 냉장고를 열어 찬 맥주를 꺼내 급히 들이켰다. 단숨에 한 병을 다 마시고 거실의 테이블에 앉았다.
 '마쓰모도는 연구소의 자료를 가져나오려다 발각이 되었을 것이다.'

"연구소에서는 딱 잡아떼고 있습니다. 어제 점심시간 직전에 나가서 지금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다는 것입니다."
 간밤에 상훈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새벽길을 달려온 이마무라 주임은 관할 경찰서의 형사들과 대동아연구소에 들어갔다. 관할 경찰서는 마침 야마모도가 서장으로 있는 치요다 경찰서였다. 연구소에서는 마쓰모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은 전혀 모르고 있다는 얘기뿐이었다. 현재로서는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길이 없었다. 이마무라 주임은 당장 연구소를 압수수색하고 싶어했지만 법원으로부터 영장을 발부받을 방법이 없었다. 설사 영장을 발부받는다 하더라도 결정적인 증거를 잡지 못하면 그 여파는 엄청날 것이었다. 주임의 징계는 말할 것도 없겠지만 서장과 동경 경시청장도 온전할 수 없을 것이었다.
 새벽잠을 설쳐가며 닛꼬에서 달려온 시골경찰서의 강력주임은 마쓰모도의 행방을 찾지 못하자 무척 속이 상하는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전에 간 적이 있던 학교 부근의 간이주점에 마주앉았다. 정종 한 잔을 시키고 안주를 겸한 저녁을 바삐 먹는 주임은 상훈에게 자신의 말은 일에 지극히 성실한 일본인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상훈은 일본인의 이러한 모습이 좋았다. 상후는 이마무라 주임의 이런 성실한 모습에 호감을 느끼고 있었고 특히 오늘같이 자신의 요청에 의해 식사도 거르고 올라와 지금까지 뛰어다닌 주임에게 미안한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그동안 자주 만나면서 개인적인 얘기들은 한 번도 나누지 못했군요. 반장님은 자녀들을 어떻게 두셨어요?"
 주임은 여러 모로 상훈에게 미안하던 차에 상훈이 갑자기 개인적 얘기를 물어오자 대답하기가 쑥스러운 모양이었다.
"아, 네. 저는 일녀 일남을 두고 있습니다. 큰 애가 여자아인데 지금 고등학교에 다닙니다. 둘째 아이는 중학생인데 아직 어린애 같아요. 엄마보다 오히려 저를 좋아해서 일요일마다 운동상대가 되어주느라 쉬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일요일이면 잠만 자고 싶어 하는데 그놈 등쌀에 오히려 새벽부터 깨야 합니다. 몸은 피곤해도 아이와 같이 놀아준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가정적이시군요."
"아, 예. 뭐 좀 그런 편인 것 같기도 하구요."
 주임은 계면쩍은 듯이 웃었다.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는 순박한 모습은 전혀 강력반장 같은 태를 보이지 않았다.
"참, 이런 말을 해도 될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니, 반장님이 수줍어하실 때도 있나요?"
"사실 박 선생님을 보고 나서 한국인들에 대한 저의 생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간 못살고 어려운 한국인들만 보다 보니 은연중에 우리보다 좀 열등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더군요."
"......"
"생각해 보니 일본에 있는 한국인들 입장이 너무 나빠서 그랬던 것 같아요."
 그 정도 말을 하는 것도 어려웠는지 말을 마치자마자 주임은 잔에 가득찬 정종을 쭈욱 들이켜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스로 어색한 분위기를 느꼈는지 주임은 사무적인 인사를 남기고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마쓰모도가 살해된 것이 아니기를 바랄 수밖에요."

 집에 돌아온 상훈은 샤워를 하고 책상 앞에 앉아 서너 시간 책을 읽다가 잠을 청했다. 그러나 마쓰모도의 행방에 대한 의문이 머리를 떠나지 않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의연한 용기를 보였던 사람이 스스로 행방을 감출 리는 없지 않은가? 상훈의 뇌리에서 마쓰모도의 쓰러져 있는 모습이 떠나지 않았다. 그가 살해되었을까? 그렇다면 누구에게? 대동아연구소가 끔찍한 비밀조직과 연관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41. 북방공작원

"절 알아보시겠어요?"
 어디선가 들었던 기억이 있는 목소리였다.
"어?"
"오랜만이에요."
"놀라셨죠."
"절 찾아오셨어요?"
"네."
"아니, 무슨 일로?"
"차 한잔 하자는 얘기도 없으셔요?"
"아, 그렇군요. 너무 뜻밖이라."
 러시아에서 만났던 김정애였다. 어떻게 학교에까지 자신을 찾아왔는지 의아해하면서 상훈은 학교 앞의 찻집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공부를 열심히 하시는 모양이군요. 늘 도서관에 계신다면서요."
"헛소문만 난 모양입니다. 일본에는 무슨 일로?"
"호호, 상훈 씨는 제가 전혀 반갑지 않은 모양이에요. 자꾸 용건만 물으시니 말이에요."
"그게 아니고 너무 뜻밖이어서."
"그러시겠죠. 사실 일로 왔지만 오면서 저는 상훈 씨를 만난다는 기대에 즐거웠는데요."
 진심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었지만 김정애의 말에서 상투적인 어투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어떻게 여기까지 날 찾아올 수 있었죠? 단순한 연구원이라면 어림도 없을 텐데. 러시아에서는 신분을 감춘 게 아닙니까?"
"호호호. 미안해요."
 김정애는 무엇이 우스운지 한참이나 깔깔거렸다.
"네, 맞아요. 사실은 정부를 위해 일하고 있어요. 오늘은 상훈씨의 도움을 받고 싶어서 왔어요."
"저의 도움을요?"
"네."
 상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여자가 도대체 무슨 일로 자신을 찾아 이렇게 일본에까지 왔을까?
"아니 제가 도울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대학에서 공부나 하는 사람이."
"일전에 하바로프스크에서 최화영 씨에 대해 알아간 적이 있으시죠?"
"네. 그랬었죠."
 상훈은 이 여자가 자신으로부터 어떤 도움을 받기 위해 그때의 일을 떠올리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김정애의 입에서 나온 얘기는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그때 그분의 후손 대신에 알아보러 오셨다고 하셨죠?"
"네."
 상훈은 김정애의 입에서 무슨 얘기가 나올지 몰라 경계하면서 간략하게 대답했다.
"그 후손이란 최화영 선생의 손자이죠?"
"왜 그러시죠?"
"일단 대답을 해주세요."
"먼저 이유를 얘기하세요."
"그 손자를 좀 만나게 해주세요."
"안됩니다."
"왜요?"
"이유를 얘기하지 않으니 함부로 만나게 할 수가 없어요."
"나라를 위한 것이에요. 그러니 얘기할 수는 없는 일이구요."
 상훈은 완강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설사 김정애가 이유를 얘기한다 하더라도 가즈오를 만나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가즈오의 심리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김정애는 뜻밖에도 상훈이 완강하게 나오자 놀라는 모양이었다. 반가워하며 안내해 주리라고 쉽게 생각하고 왔다가 여러 차례나 부탁을 해도 상훈이 막무가내인 것을 알자 섭섭한 표정을 지으며 일어섰다. 상훈은 미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러시아에서 만났던 이 여자공작원을 그냥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이 여자는 다시 올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잘은 몰랐지만 공작원이란 그렇게 한 번 부탁했다가 안되면 그냥 포기해버리는 단순한 사람들은 아닐 것이었다.
 여자는 예상보다 빨리 다시 왔다. 집에 돌아와 책상에 앉자마자 벨이 울려서 문을 열어보니 여자가 서 있었다. 여자의 옆에는 사십대 후반의 한 점잖아 보이는 사나이가 서 있었다. 일단 집으로 들어오게 하자 여자가 사나이를 상훈에게 소개했다.
"국가안전기획부의 동경 책임자세요."
 사나이는 손을 내밀었다. 정보계통의 인물이 줄 걸로 믿었던 음침한 기색은 전혀 없이 온화한 인상이 풍기는 사나이는 신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조 전무라고 합니다. 우리가 최화영 선생의 손자를 만나려고 하는 것은 선생의 아들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최화영 선생의 아들이라면?"
"박 선생의 친구에게는 삼촌이 되지요."
 놀라운 얘기였다. 가즈오의 삼촌이라면 하바로프스크에서 노인이 얘기하던 최화영 선생의 어린 두 아들이었다.
"삼촌이 두 분 다 계십니까?"
"네, 그렇지만 한 사람은 최근에 죽었습니다."
"......"
"한 분만 살아있지요."
"어디에 살고 계십니까?"
"평양에 있습니다."
"그러면 가즈오에게는 삼촌이 살아 있다는 얘기를 전하려고 만나고자 하시는 겁니까?"
 상훈의 이 질문에 사나이는 잠시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박 선생. 나는 안기부의 동경지부장입니다. 업무상 모든 것을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 가즈오라는 친구분을 만나려는 것은 전적으로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입니다. 친구분에게는 아무런 해가 되지 않을 것을 보장합니다."
 뜻밖의 얘기였다. 가즈오와 국가이익이 무슨 관계가 있을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상대방이 자신의 신분을 걸고 부탁하니만치 가즈오를 만나게 해주어야 할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한편으로는 자칫 잘못하면 가즈오에게 더 큰 충격을 줄수도 있을 것이었다. 상훈은 가즈오의 상태를 솔직히 말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을했다.
"가즈오는 정신병을 앓고 있습니다. 가벼운 단계가 아니기 때문에 새로운 소식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알 수 없습니다. 게다가 제 삼자의 입장이 개입되는 것은 더욱 불안합니다."
"정신병을 앓고 있다구요?"
"네."
 상훈의 확고한 대답에 사나이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그는 망연한 표정으로 꼼꼼하게 가즈오의 상태에 대해 물어왔다. 상훈의 얘기를 듣는 그의 표정이 차츰 절망으로 물들었다. 상훈이 얘기를 마치자 그는 애써 얼굴을 바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 선생이 친구의 건강을 위해 애쓰는 것을 알겠습니다. 근간 다시 뵙겠습니다. 이것은 저의 전화번호인데 혹시 연락하실 일이 있으시면 전화를 주십시오."
"그렇게 하시죠."

 며칠 후 상훈은 아침 일직 다시 두 사람의 방문을 받았다. 이른 시간인데도 백화점 포장이 된 선물을 들고온 것으로 보아 미리 준비해 두었던 모양이었다. 마주앉자 지부장은 자신감 있는 표정에 어울리지 않게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가즈오의 삼촌 최독준은 현재 북한의 인민무력부 장성입니다. 대장인 그는 인민군 총정치국장을 겸하고 있습니다. 군부 내에서는 주석의 최측근이죠."
 잠시 말을 끊은 그는 상훈의 반응을 살폈다. 상훈은 자신과는 직접 관련이 없는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가즈오가 혼란에 휩싸이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에게는 최독보라는 형이 있었습니다. 형은 얼마 전 북한에 들어가 동생을 만났습니다. 그 동생으로부터 조카가 일본에 입양되어 살고 있다는 것을 듣게 되었죠."
"지난번에 오셨을 때에는 한 분은 죽었다고 말하지 않았나요?"
"네, 형은 죽었습니다. 북한에서 나오다가 러시아 국경선에서 경비병에게 쫓기게 되었죠. 두만강변에서 김정애 씨의 품에 안겨 죽었습니다."
 상훈의 눈길이 김정애의 얼굴로 옮겨졌다. 김정애는 상훈이 자신을 바라보자 어색한지 양 미간을 찌푸리며 변명조로 상황을 설명했다.
"사고가 생겼어요. 갑자기 중국 쪽 국경선이 봉쇄되는 바람에 그분은 2차 탈출루트인 제가 있는 쪽으로 왔는데 어둠 속에서 러시아 경비병을 우리로 착각하고 손을 들었다가 쫓기게 되었어요. 우리가 구했을 때는 총격을 받아 출혈이 너무 심했어요. 숨을 거두시면서 조카를 찾아달라고 했어요."
"가즈오 말이군요."
"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왜 이제껏 가즈오를 찾지 않았을까요?"
"전엔 모르고 있다가 북한에서 동생으로부터 들었어요."
"그 인민군 대장이라는 사람 말이군요."
"네."
"가즈오를 찾아서는 어떻게 하라구 했어요?"
"삼촌이 북한에 있다는 사실, 인민무력부의 최독준 대장이 삼촌이라는 사실을 전해달라고 했어요."
"단순히 그 얘기만 했어요?"
"네."
"그러면 가즈오가 국가이익과 관련이 있을 이유가 없잖아요?"
 이때 사나이가 김정애 대신 말을 받았다.
"우리로서는 최독준 대장에게 선을 대 둘 필요가 있습니다.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죠."
"그렇다면 가즈오를 이용한단 말입니까?"
"나쁜 의미의 이용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가즈오 씨와 협의를 할 생각이었습니다."
"지금은 생각이 바뀌셨나요?"
"가즈오 씨의 상태가 심하다면 그런 것을 협의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의당 그럴 것이었다. 그런 중차대한 일을 정신병을 앓고 있는 사람과 협의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박 선생께서 그에게 북한에 삼촌이 있다는 사실만을 알려주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가즈오 씨에게는 그것을 알 권리가 있지 않을까요?"
 맞는 말이었다. 가즈오는 당연히 알 권리가 있었다. 자신이 중간에 나서서 알리고 말고 결정을 할 일이 아니었다. 다만 가즈오가 정상인과 다르다는 이유로 자신은 이들이 가즈오와접근하는데 협조하지 않고 있지만 가즈오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히 알 권리가 있는 일이었다.
 사나이는 그 점을 지적하고 있었다. 사나이는 일단 가즈오에게 북한에 삼촌이 있다는 사실만을 알리고 그 다음은 가즈오에게 맡겨보겠다는 생각인 것 같았다. 상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가즈오의 삼촌이라는 최독준 대장은 어떤 사람일까. 그는 현재 북한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이며 가즈오의 또다른 삼촌이라는 최독보는 무슨 사명을 갖고 간첩이 되어 북한으로 올라갔을까. 가즈오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어떻게 반응할까. 자신이 확실한 반응을 짐작하지 못할 바에는 일단은 삼촌의 존재를 알리기는 해야할 것이라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알았습니다. 기회를 보아 제가 얘기하겠습니다."
"부탁합니다."

 본론이 끝나고 나자 두 사람의 화제는 잠시 가벼운 것으로 옮겨졌다. 자연히 이야기는 한일간 문화의 차이 같은 것이 되었는데 대화중에 대동아연구소가 나오자 조 전무는 뜻밖에도 격한 어조로 내뱉었다.
"정작 나쁜 놈들은 바로 이런 놈들입니다."
 상훈은 그가 흥분하는 것을 보자 슬며시 흥미가 끌렸다.
"연구소가 나쁘다면 그 이유가 뭡니까?"
"침략을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잘했다고 일본국민을 몰아가고 있으니 분통이 터질 지경입니다. 최근 일본전역에 불고 있는 신사참배도 이들이 일으킨 현상이 아닙니까."
 상훈은 얼마 전 연구소에 갔을 때 소장인 와따나베의 연설에 청중들이 열광했던 것이 생각났다. 일본이 동양을 해방하기 위해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는 그의 연설이야말로 역사도착의 압권이었다.
"한때 사죄니 반성이니 하던 내각도 이들의 영향으로 싹 바뀌었어요. 분위기는 또다시 일본우월주의로 가고 있단 말입니다."
"이들이 그럴 정도까지 영향력이 있다는 말입니까?"
"박 선생, 연전의 호소카와 수상 저격미수사건을 기억 못하시오?"
 상훈은 이 년 전 프린스호텔 로비에서 수상에게 공포를 쏘다 붙들린 한 사나이를 떠올렸다. 당시 그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다시 외국에 사과를 한다면 그때는 실탄이다."
 수사 결과 이 사십대의 무직자는 배후가 없는 단독범으로 발표되었지만 아무도 이 발표를 그대로 믿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런 자들의 뒤에 이 연구소가 있다는 말입니까?"
"꼭 이 연구소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침략의 역사를 부인하려는 많은 단체가 있는 것은 틀림없고 이 연구소는 그런 단체의 정신적 지주가 되고 있어요. 때로는 어떤 종류의 행동에 앞장을 서기도 하지요."
"그런데 어떻게 이 연구소를 그렇게 잘 아십니까?"
"중요한 업무 중의 하나요. 일본이란 나라는 정부보다 이런 연구소가 더 무섭소. 가끔 망언이라고 규탄받는 발언도 이런 연구소의 계산된 각본에서 나오지. 각료의 입은 빌리기만 하는거요."
"사실 이 연구소와 관련해서는 제게도 매우 큰 의문이 있습니다."
 상훈은 처음 이마무라 주임이 찾아오던 때로부터 이제까지의 경과를 조 전무에게 다 말했다. 의외로 연구소의 본질을 잘 파악하고 있는 데다가 특수한 분야에 종사하는 이 사람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대단한 일을 하셨군요."
 조 전무는 기대 이상으로 놀라워했다. 그러면서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무언가 생각나는 것이 있는 모양이죠?"
 조 전무의 입술이 달싹하다가 이내 한일자로 다물어지고 말았다. 상훈은 그가 순간적으로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억제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일어나자 상훈은 배웅을 하고 나서도 한참이나 조 전무가 순간적으로 하려던 말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했지만 오리무중이었다. 하나 분명한 것은 안기부의 일본 책임자가 하려고 했던 말은 결코 예사로운 정보일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42. 주임의 실종

"자네 동경의 대동아연구소에 난입한 적이 있나?"
"네? 난입이라뇨?"
"이것을 보아."
 서장이 던져놓는 문건은 동경 경시청에서 온 것이었다.

 "귀서의 이마무라 경위는 수색영장 없이 대동아연구소에 난입한 사실이 있으므로 엄중조사 후 철저히 문책하시압. 귀하에 대한 징계는 결정 후 추가통보할 계획임."

 주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연구소에서 그냥 나오기가 아쉬워 지하실을 좀 보자고 했던 것이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될 줄이야.
 부하의 잘못으로 자신까지 큰 화를 입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서장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주임의 입만을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그는 주임을 중징계해야만 자신은 어떻게라도 빠져나갈 길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할 거야?"
 주임은 서장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주임은 서장실을 나오며 비애를 느꼈다. 자신을 감싸줄 형편이 못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서장이 원망스러운 생각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야마모도 서장이라면 동경에까지 올라가서 경시청 관계자들에게 소명하고 어떻게든 자신을 감싸주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더 큰 회의는 대동아연구소에 휘둘리는 경찰조직에 대한 허무에서 오는 것이었다. 경시청으로부터 온 공문의 본질은 범인이 도리어 수사관을 축출하는 것이었다. 주임은 경찰서의 옥상에 올라가 큰 한숨을 내쉬었다. 시골경찰서의 형사반장에게 대동아연구소는 너무도 벅찬 상대였다. 주임은 이제야 비로소 눈이 뜨이는 것 같았다. 사회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범죄라는 것도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주임의 가치관을 흔들어 왔다. 자신은 이제까지 수사관으로서 정의를 집행한다고 생각해왔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자신은 기껏해야 힘없는 약자를 닦달해왔을 뿐이었다. 구름 위에 있는 대동아연구소의 범죄에 대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이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그것은 충격이었다. 주임은 서장실로 내려갔다. 
"사표를 받아 주십시오."
 후련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막상 내뱉고 나자 한없는 서글픔이 밀려들었다. 울음이 복받치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 고개를 돌려 서장실을 나와 자리를 정리하자 놀란 동료들이 모여들었다. 주임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굳은 악수를 했다. 이십여 년간을 지켜온 직장을 떠나는 마당이라 누구 한 사람 언짢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나 모두들 말이 없이 주임을 배웅했다. 고집이 센 주임의 평소 성격을 아는 때문이기도 했지만 마땅히 할 말이 없는 것이었다.
 한낮에 짐을 싸서 집으로 돌아온 주임을 보자 부인 미야꼬는 놀랐으나 이내 사태를 짐작하고는 위로하려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이 자의로 사직한 것으로는 생각지도 못했다. 동경에서 영장 없이 연구소에 들어간 일로 파면을 당한 것으로 알고 남편에게 용기를 주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는 애써 밝은 얼굴을 지었다.
 미야꼬는 들은 것이 있어 지금이 남자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라고 판단했다. 이 시기에 잘못되면 우울증이 생기거나 알콜중독이 되고 마는 것이었다. 남편이 목욕탕을 간 사이 그녀는 매우 바삐 움직였다. 빨간 카네이션을 사다가 거실과 식탁에 꽂았다. 먼 훗날 딸이 시집가면 주려고 장롱 깊이 넣어두었던 백자다기를 꺼내고 남편의 차를 운전하여 대도사의 약수를 떠와다. 가늘게 숯불을 피우고 몇 년 전에 일심사의 다도회에 참석했을 때 어렵게 얻은 이노우에가의 녹차잎을 꺼내 찻주전자 옆에 가지런히 놓았다. 그리고도 남편이 오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남자 그녀는 가볍게 샤워를 했다. 화사한 색깔의 꽃무늬 기모노를 꺼내입고 남편의 하얀 바탕에 청색 무늬가 있는 유까다와 검정색 하오리를 정성스럽게 개어 놓고는 무릎을 꿇고 남편이 돌어오기를 기다렸다. 목욕에서 돌아온 남편은 다소 기분이 나아져 보였다. 옷을 갈아입고 부부는 정성스레 차를 달였다.
"이젠 좀 쉬세요. 해외여행도 좀 하시고 충분히 휴식을 취한 다음 무엇을 할 것인가 생각해 보세요."
"그래야겠어."
 그러나 차를 마시고 나자 주임은 조금씩 안정을 잃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십여 년 간을 직장에 다니다가 어느날 갑자기 홀로 집에 우두커니 있는 자신을 발견한 기분이 좋을 리는 없는 것이었다. 
 미야꼬는 주임의 어릴 때부터 친구인 몇몇에게 전화를 했다. 식구들끼리만 식사를 하는 것이 어쩐지 을씨년스런 기분이 들 것 같아서였다. 주임은 생각지도 않았던 친구들이 찾아오자 기분이 한결 풀리는 모습이었다. 격의 없는 대화 속에 권커니 잣커니 하면서 돌린 잔에 다들 꽤 취했다. 
"이봐, 오이타."
"응."
"이게 세상이 이래서 되는 거야?"
"왜 그래?"
"내가 경찰생활 이십육 년인데 말이야."
"그렇지."
"이게 이래서 되느냐구?"
"얘길해 봐, 이 만년 주임아."
"내가, 나 이마무라가 범인을 잡기는커녕 범인에게 눌려 옷을 벗어야 했다니, 이게 참, 이래도 되는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살인사건이 있었는데 말이야, 그 범행을 사주한 자들이 누구냐 하면 말이야."
"그게 누구야, 뜸들이지 말고 좀 좍 털어놔 봐."
"그게......"
 이때였다.
"딩동."
 초인종 소리였다. 순간 주임은 섬뜩한 기분이 들어 막 튀어나오려는 얘기를 중단했다.
"누구야."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신경질적으로 올라갔다.
"여보, 경찰서의 동료들이 오셨어요."
 현관문을 열며 미야꼬가 기쁜 표정으로 대답했다. 경찰서의 동료들이 찾아와준 것은 미야꼬에게는 반갑기 짝이 없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럴 것이었다. 파면당했다고 생각되는 남편에게 직장의 동료들이 아무도 찾아와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슬픈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남편이 기뻐할 것으로 생각하며 미야꼬는 남편을 불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남편의 얼굴은 이상해지고 있었다. 반갑게 안내를 하는 미야꼬와는 달리 주임의 얼굴이 차츰 일그러지기 시작하더니 시선을 한 곳에 고정시킨 채 입을 꽉 다물고 있다가 급기야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친구들이나 동료들은 물론 부인 미야꼬마저도 주임의 이러한 모습에 깜짝 놀라 지켜만 보고 있었다. 한참이나 이러고 있는 주임의 모습에 걱정이 되어 미야꼬가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여보, 괜찮으셔요?"
 그러나 주임은 한 손을 내저어 부인의 말을 중단시키고 한참이나 무엇을 생각하다가 갑자기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려쳤다.
"그랬구나, 그랬어."
 술잔이 엎어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전화기로 달려간 주임은 흥분된 손길로 동경으로 전화를 걸었다. 상대편에서 받지 않는지 전화기를 한참이나 들고 있던 주임은 용건을 녹음했다.
"박 선생님, 닛꼬의 이마무라입니다. 중요한 사실을 떠올렸습니다. 이마무라가 이번에는 큰일을 해낼 겁니다. 기대해도 좋습니다. 내일 아침에 다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다음날 아침 상훈은 주임의 전화를 기다리다 강의시간 때문에 집을 나서야 했으므로 닛꼬 경찰서로 전화를 했다. 아직 출근하지 않았다는 얘기에 집으로 연락을 하자 부인이 받았다.
"아, 박 선생님. 바깥양반은 아침에 일찍 나갔습니다. 어디 가시는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급히 나갔습니다. 서두르는 중에도 박 선생님께 진 빚을 한꺼번에 갚을 수 있다면서 기뻐하는 표정이 역력했어요. 경찰서에도 다시 나갈 수 있다고 희망찬 얼굴이었는데."
"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모르셨군요. 바깥양반은 결창서를 그만두셨습니다."
 상훈은 부인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주임이 경찰을 사직했다면 그 책임은 자신에게 있는 셈이었다. 학교에 가 있는 중에도 자꾸 주임의 사직에 신경이 쓰여 상훈은 주임의 집으로 몇 번 전화를 했지만 주임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상훈이 닛꼬로부터 다시 연락을 받은 것은 그날 밤 늦은 시간이었다.
"박 선생님, 밤 늦게 미안합니다만 혹시 바깥분과 연락이 없었습니까?"
"아니, 없었는데요."
"오늘 하루종일 연락이 없으시군요. 평소엔 늘 전화를 주셨는데요."
 시계는 열두시를 넘고 있었다.
"아침에 누군가의 연락을 받고 나갔습니까?"
"아닙니다. 혼자 나갔습니다."
 퍼뜩 불안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지만 부인에게 내색할 수는 없는 일이라 상훈은 위안과 더불어 기다려 보자고 말했다.
"딸아아가 울고 있어요. 갑자기 직장을 그만두어 충격이 크셨을 거라고 하는군요."
 딸뿐만 아니라 부인도 울먹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상훈은 마음이 매우 무거워졌다. 밤새 혹시나 하는 기분으로 전화를 기다리느라 잠을 이루지 못하고 다음날 아침 일찍 주임의 집으로 전화를 했으나 역시 주임은 연락이 없다고 했다. 학교에서 돌아온 저녁에도 다시 전화를 해보았으나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부인의 울먹이던 소리만이 가느다란 울음으로 변해 있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닛꼬로 내려간 상훈은 황망중에도 상훈의 식사를 걱정하는 부인을 대하자 코끝이 찡 울려왔다. 주임의 딸은 밤새 울어 부어오른 눈을 손수건으로 가리며 상훈에게 아빠를 찾아달라고 울먹였다. 상훈의 뒤를 이어 경찰서 형사계의 동료들이 찾아 왔으나 그들은 사태를 별로 심각하게 보지 않는 모양이었다. 가족들 앞에서는 걱정하는 태를 보였지만 그들은 주임이 사직의 충격으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어디 여행이나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상훈은 틀림없이 주임에게 변고가 생겼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형식적인 질문을 마친 형사들이 돌아가자 상훈은 미야꼬에게 그날 밤의 정황을 상세히 물었다.
"초인종 소리 그 자체에 놀란 것은 아니란 말이죠?"
"네. 초인종이 울리고 나서 동료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더니 갑자기 놀란 얼굴이 되더군요."
 그러니까 동료들의 얼굴을 보고 놀랐다는 얘기였다.
"어떻게 놀랐습니까?"
"무슨 말씀인지......?"
"동료들이 찾아온 사실에 놀란 것 같았습니까? 아니면 동료들의 얼굴을 보고 어떤 일이 생각나 놀란 것 같았습니까?"
"나중 같군요."
 바로 그날까지도 같이 근무하던 동료들을 보고 놀란다는 것은 이치에 닿지 않는 일이므로 이마무라는 찾아온 동료들의 얼굴을 보고 어떤 일을 생각해낸 것이 틀림없었다.
 상훈이 경찰서로 가서 동료형사들을 만나 이것저것 물었으나 동료형사 중 아무도 시원한 답변을 해주지는 못했다. 다시 그날 집으로 찾아온 친구들을 만나 물어본 결과 주임은 쥰이찌 살해사건의 배후를 말하려던 순간 마침 울린 초인종 소리를 듣고 멈칫했으며 들어온 형사들을 보자 갑자기 무엇인가가 생각난 얼굴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친구들의 진술로 대략의 상황은 알게 되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주임이 동료들을 보고 무엇을 생각해냈을까하는 것이었다. 주임은 무엇을 생각해내었기에 자신에게 전화를 해서 중요한 사실을 떠올려다고 했을까.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는 어디에 갔기에 이제껏 소식도 없는 것일까. 상훈은 일단 동경에 올라가서 주임의 소식을 기다리기로 하고 버스를 탔다.

 나흘이 지나도 주임은 연락이 없었다. 그렇다면 주임의 신변에 이상이 생긴 것이 분명하였다. 답답해진 상훈은 야마모도 서장을 찾아갔다.
 야마모도 서장은 주임이 동료형사들을 보고 놀란 것은 대동아연구소에 대한 발설을 하기 직전이었기 때문이지 않겠는가고 생각했다. 주임은 연구소 사건으로 닛꼬의 서장에게 압력을 받고있었을 터이므로 동료들에게 그 장면을 발견당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겠느냐는 얘기였다. 
 과연 일리 있는 얘기였다. 같은 처지에 있는 야마모도 서장이 주임의 심리는 잘 알 것이었다. 그러나 상훈에게는 그 다음이 문제였다. 단순히 연구소에 대한 발설을 노출당하는 것이 싫었다면 입을 다물기만 하면 그만인데 주임은 이후 무엇인가를 떠올렸다. 야마모도 서장도 이 점에 대해서는 짐작하는 것이 없었다. 야마모도 서장은 닛꼬의 서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한참 통화를 했지만 주임의 실종에 대해 참고할 만한 내용은 얻지는 못했다.
 답답하고 괴로운 심정으로 지내던 상훈은 저녁에 야마모도 서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박 선생이오? 이마무라 주임의 행적이 나왔소. 실종되던 날 아침 주임은 시야쿠쇼(시역소)에 가서 쥰이찌의 주민등록부를 열람했소."
 역시 주임은 쥰이찌의 살해와 관련하여 중요한 사실을 떠올린 것이 분명하였다. 그래서 시야쿠쇼에 가서 쥰이찌의 주민등록부를 열람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미 쥰이찌의 인적 사항에 대해서는 훤히 알고 있는 주임이 새삼스럽게 주민등록부를 열람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주임이 새롭게 떠올렸을 사실과 주민등록부와의 관계가 좀처럼 머리에 잡히지 않았다. 

43. 상훈의 추리 

 마쓰모도에 이어 이마무라 주임까지 실종되자 연구소는 상훈에게 더욱 검은 세력으로 다가왔다. 사건의 배후에 연구소가 있는 것은 틀림없는데 어떻게 캐고 들어가야 할 지 실마리를 찾을 수 없었다. 현직 경찰도 아닌 유학생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야마모도 서장이 언제나 의논상대가 되어준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마무라 주임이 있을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주임은 이제는 친구처럼 상훈과 스스럼없이 얘기를 할 수 있는 상대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도서관을 나와 야마모도 서장을 찾아갔다가 닛꼬에서의 주임의 실종에 대한 수사가 아무런 진전이 없는 것을 전해 듣고는 답답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여느 때처럼 자동응답기를 틀자 원우회에서 모임에 참석할지 여부를 알려달라는 내용만이 녹음되어 있었다. 며칠 전에도 걸려왔던 전화였다. 상훈은 총무의 전화번호를 알기 위해 수첩을 찾으려다 지난번 걸려왔던 전화에 번호가 녹음되어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테이프를 역회전시켰다. 전화번호를 듣고는 무심코 응답기를 끄려던 상훈의 귀에 다음 전화의 녹음이 들렸다. 기억이 나지 않는 내용이었다. 음성이 들리지 않고 즉각 다음 녹음으로 넘어가는 것으로 보아 그때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넘겨버린 것 같았다. 다시 틀자 심한 잡음 사이에 낯설지 않은 음향이 들리는 것 같았다. 사람의 목소리였다. 번개같은 동작으로 상훈이 수화기를 귀에 바짝 대자 모기소리보다도 가느다란 음성이 들려왔다. 상대방은 혼신의 힘을 모아 겨우 한 마디씩 하는 것이 느껴져왔다. 목소리 사이사이에는 가냘픈 신음이 섞여 있었다. 그나마도 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호흡이 가빠지는 것이 상대방의 생명이 사그라지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전화는 이마무라로부터의 전화가 틀림없다고 생각되자 자연 긴장했다. 아물아물한 가운데도 혼신의 힘을 다한 마지막 목소리를 내는 모양인지 마지막 두 마디가 알아들을 만했다. 상훈은 온 정신을 귀에 모았다. 
"으,으, 바,바, 박, 범인, 범인, 으,으,음, --음, --음---윽."
 마지막 신음소리는 크고 분명했다. 상훈은 이것은 분명 이마무라 주임의 숨이 넘어가는 소리라는 판단을 했다.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한 말들이라 무슨 뜻인지 알아듣기가 무척 힘들었다. 다급한 마음에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았던 것이 느껴졌다. 상훈은 메모지에 이마무라의 소리들을 적었다. 메모지를 들여다보면서 몇 십 번이나 테이프를 반복하여 들었지만 무슨 의미인지 도저히 알아낼 수 없었다. 전화는 주임이 닛꼬를 떠난 날 온 것이었다.
 
"아아, 으으는 신음소리군요. 이런 소리는 저도 처음이라 알아듣기가 무척 힘들군요. 다만 이 사람이 하려고 했던 확실한 말은 박, 범인의 두 단어입니다. 워낙 고통 속에서 짜낸 말이라 신음과 섞여 분간이 되지 않는군요. 마지막은 숨이 넘어가는 소리 같군요."
 야마모도 서장이 부른 녹취전문가의 견해 역시 주임이 숨이 넘어가면서 전화를 한 것이라는 결론이었다.
"마쓰모도의 실종에 이은 이마무라 주임의 살해. 역시 연구소가 의심스럽군요."
 상훈의 말에 야마모도 서장은 한참 눈을 감고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수사과장을 불러 연구소에 가서 그 날짜에 이마무라가 방문한 적이 있는지 조사를 하고 오도록 지시했다. 수사과장을 직접 보낸 것은 서장이 연구소를 두려워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상훈은 서장도 역시 연구소를 의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두어 시간이 지난 후 돌아온 시바 과장의 보고는 지극히 간단한 것이었다.
"연구소에서는 모르는 일이라고 합니다."
"찾아온 적도 없다는가?"
"네, 연구소의 직원이 실종된 일로 찾아온 적은 있었으나 그후로는 온 적이 없다는 겁니다."
"음, 그때는 우리 서의 형사들과 같이 가지 않았던가."
"네, 사실 연구소에서는 서장님에 대해 매우 화를 내고 있습니다. 얼토당토않은 일로 자꾸 형사를 보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
 이렇게 말하는 과장의 표정에는 그도 서장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기색이 나타나 있었다.
"평소와 다른 전화가 온 적은 없다고 합니까? 혹시 주임이 연구소에 전화를 했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요?"
상훈이 물었다.
"확인해 보죠."
 시바 과장은 화가 난 표정으로 연구소에 전화를 했다. 교환원과 한참 동안이나 대화를 하던 시바 과장은 역시 딱딱한 얼굴로 상훈에게 대답했다.
"없다는군요. 서무과를 대달라고 했다가 직접 가겠다고 하면서 끊은 전화는 있지만. 하지만 그런 전화는 종종 있는 거랍니다. 서무과에는 하루에도 수십 명은 찾아온다는군요. 그날 서무과에 찾아온 모든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서무과를 대달라고 했다가 직접 간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은 적이 있나 물어볼까요?"
 시바 과장은 상훈과 서장을 비꼬았다.
"그렇다면 시체를 발견할 때까지는 어떻게 해볼 건덕지가 없다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과장은 확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얼굴에는 연구소가 그런 일과 관련이 있을 리도 없거니와 무엇보다도 연구소를 건드려서 좋은 일이 하나도 없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막상 연구소에 가서 분위기를 보고 온 시바 과장은 떨고 있었고 그 불안은 상훈과 서장에 대한 퉁명스러움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관록의 야마모도 서장은 역시 만만치 않았다. 무언가를 한참 생각하던 서장은 어떤 만족할 만한 결론을 얻었는지 찡그리던 표정을 펴고 자신 있게 말했다. 
"자네 어떤 경우에 사람이 죽기 전에 전화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무슨 말씀이신지......"
"시체가 아직 경찰에 신고되지 않았지?"
"네."
"그렇다면 이마무라 주임은 공중전화를 쓴 것은 아니겠지?"
"그렇군요."
"그렇다면 주임이 어떤 장소에서 전화를 할 수 있었을 것 같아?"
"당연히 개인 집이나 건물에서밖에는 못했을 것입니다."
"전화국에 형사들을 보내 그 시간에 박 선생의 집으로 온 전화를 추적해 봐."
 야마모도 서장은 중요한 순간에 결정적 도움이 되었다. 상훈은 이마무라 주임이 죽기 직전에 전화를 걸어온 것을 생각했다. 야마모도 서장의 추리대로 시체가 아직까지 경찰에 신고되지 않은 것을 보면 공중전화를 쓴 것은 아니었다. 집이나 건물의 내무에서 죽어갔다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면 아파트에 걸려온 전화의 발신지를 추적하면 이마무라가 죽어간 장소를 알게 될 것이고 그 장소와 관련이 있는 사람이 그대로 용의자가 되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 장소란 대동아연구소의 지하실 같은 곳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시바 과장은 급히 전화국에 가서 발신지를 추적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돌아온 과장은 기대감에 들뜬 서장과 상훈의 표정과는 대조적으로 풀이 죽어 있었다.
"발신지가 확인되지 않았나?"
 서장이 불안한 표정으로 먼저 물었다.
"이마무라 주임은 휴대폰을 사용했더군요."
 전연 뜻밖의 일이었다. 휴대폰을 사용했다면 추적이 불가능함은 물론 건물 내에서 죽었다고 가정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은근히 대동아연구소가 걸려들길 기다리던 것이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특히 서장은 실망이 큰 모양이었다. 그로서는 어차피 연구소를 건드려 놓은 이상 뭔가 단서를 잡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기는 모양이었다. 실망과 더불어 불안이 엿보였다. 은연중에 상훈은 그가 에이지의 죽음까지도 연구소의 소행으로 단정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평소에 그는 에이지에게 위협을 가하고 있는 자들은 엄청난 힘을 가진 자들이라고 느끼고 있었고 그러한 느낌은 마쓰모도와 이마무라 주임의 연속 실종을 당하자 신념으로 굳어진 모양이었다. 
"운이 좋은 놈들이군. 발신지 추적이 됐다면 일이 많이 풀렸을 텐데 하필 그게 휴대폰일 게 뭐야?"
"그나마 휴대폰이라도 있었으니 제게 전화를 할 수 있었겠죠."

 경찰서를 나와 집으로 돌아오면서 상훈은 죽기 직전에 휴대폰을 쓸 수 있는 상황이란 어떤 것일지 생각했다. 누군가에 의해 죽음을 당했고 아직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신고가 없는 것을 보면 살해자는 시체를 은폐했다는 얘기가 된다. 이것은 죽음의 순간까지 이마무라 주임은 가해자에 의해 관리되고 있었음을 말하는 것인데 어느 순간에 휴대폰을 쓸 수 있었을까. 상훈은 이 사실에 집착했다. 암매장을 했거나 수중에 시체를 버렸을 때나 폭행 혹은 흉기로 살해했을 때에도 전화를 하다가 죽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책상 앞에 앉아 서너시간 텍스트를 읽고 잠을 청했다. 그러나 머리가 썩 막지는 못했다. 가해자가 시체를 은폐하기까지 어느 순간 휴대폰을 쓸 수 있었겠는가 하는 의문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상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에서 찬 맥주를 꺼냈다. 냉장고의 문을 닫는 순간 상훈의 머리에 얼핏 스치는 게 있었다.
"아."
 그랬을 가능성이 있다. 아니 가능성이라기보다 그 경우만이 죽기 직전 휴대폰으로 연락을 할 수 있을 것이었다. 상훈은 시계를 봤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야마모도 서장의 집으로 전화를 했다. 너무 늦게 연락하는 것이 미안했지만 살인사건의 해결은 피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서장은 막 집에 도착해 있었다. 
"서장님, 이마무라 주임이 죽기 직전 휴대폰을 사용했을 경우가 떠올랐습니다."
 서장은 반가운 목소리로 물어왔다.
"어떤 경우입니까?"
"차안에서 전화를 했을 겁니다."
"네? 차안에서요?"
"그렇습니다."
"그러나 차안에서라면 살해자가 옆에 있었을 텐데 전화를 쓰도록 버려두었을까요?"
"트렁크 안에서요."
"트렁크?"
"그렇습니다. 상대는 주임을 살해한 후에 시체를 차의 트렁크에 싣고 어디론지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임은 이때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죽어가는 상황에서 휴대폰을 꺼내 저에게 필사적으로 연락을 했던 겁니다."
"아, 그렇군요. 그 경우 밖에는 살해자의 눈을 피해서 전화를 할 수는 없겠군요."
"그는 트렁크 안에서 죽은 것입니다."
 서장은 진정으로 놀라는 것 같았다. 그는 수십 년을 수사관으로 지내오고 있는 자신이지만 상훈의 추리에 대해서는 그저 입이 벌어질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자동차의 트렁크에서 죽었다는 사실만으로는 이마무라의 살해범이 누구인가를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고 덧붙였다.
"트렁크 안에서 죽었다는 사실에서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상훈의 자신있는 목소리에 서장은 다시 한 번 놀랐다. 도대체 이 젊은이는 무엇을 생각해낸 것일까.
"얘기를 해주시겠습니까?"
"정황으로 보아 주임은 무슨 단서인가를 가지고 닛꼬를 출발하여 동경으로 왔습니다. 주임은 연구소에 뭔가 확인할 일이 있어 연구소를 찾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연구소에서는 주임이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단순한 직원들도 있기 때문에 이런 것에 대해 연구소에서는 거짓말을 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연구소에서는 이마무라 주임이 연구소를 방문한 후에 살해할 수도 없습니다. 강한 의심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뿐입니다. 연구소에서는 주임을 감시하고 있다가 주임이 연구소에 가까이 오자 살해했을 것입니다."
"중요한 추리군요. 연구소에 오기 전에 살해를 해야만 의심을 받지 않게 되는군요. 그렇다면 주임을 닛꼬에서부터 감시했었다는 얘기가 되는데."
"그렇습니다. 주임은 닛꼬에서부터 감시를 당했던 것입니다. 에이지가 그랬듯이 말입니다. 감시자는 주임이 평소와는 달리 무언가 확실한 단서를 잡았다고 느끼고는 밀착해서 감시했을 겁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까?"
"단순히 감시만 한다고 해서 주임이 어디로 간다는 것을 알 수는 없습니다. 감시자는 주임이 연구소에 전화를 하는 것을 옆에서 들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연구소의 서무과에 전화를 했던 사람은 바로 주임입니다."
"천재적 추리군요. 만약에 연구소에서 주임을 죽였다면 어디서 죽였을까요?"
"큰길에는 사람들이 많아 누군가를 죽인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주임은 큰길에서 연구소로 가는 길의 어느 지점에서 공격을 받은 것이 됩니다. 가보셨겠지만 큰길에서 연구소로 가기까지는 좁은 길 하나 밖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길의 양쪽은 숲입니다. 아마도 그 길이 가장 적당했을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그자들은 어떤 방법을 썼을까요?"
"총은 사용할 수 없습니다. 소리가 나서 누군가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칼은 더욱 위험합니다. 한 칼에 죽을 리가 없고 칼에 찔린 주임은 짐승처럼 날뛸 게 뻔합니다. 시체까지 치워야 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위의 두 방법은 모두 적당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살해자는 무슨 방법을 썼을까요?"
 서장은 그제서야 추측할 수 있었다.
"자동차?"
"바로 그렇습니다. 들이받고는 트렁크에 실어버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목격자 탐문을 하면 뭔가 나올지 모르겠군요."
"그럴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연구소 소속 자동차 중 충돌의 흔적이 있거나 라이트 등을 새로 갈아끼운 자동차가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내일 아침에 알아봐야 하겠군."
 다음날 아침 서장은 형사들을 시켜 연구소 부근을 지나친 사람을 탐문하여 목격자를 찾아냈다.
"자동차 두 대가 서 있더군요. 앞 차의 트렁크가 열려 있었어요. 저는 지나가면서 흘낏 바라보았죠. 너댓 명이 트렁크 주위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것 같았어요."
"혹시 자동차 번호를 기억하지 못하겠습니까?"
"보지 못했어요. 차를 타고 지나치던 길인데다가 이미 땅거미가 졌을 때였으니까요."
 상훈의 추리는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서장은 더욱 신이 나서 좀더 자세히 현장을 본 목격자를 탐문하도록 지시했다. 며칠 후 특이한 목격자가 나타났다. 신문배달하는 소년이었다.
"자동차 번호는 니 37-76이었어요. 자전거를 끌고 올라오는데 보이지는 않았지만 무엇인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어요. 곧이어 다시 한 번 부딪치는 소리가 나더군요. 직감적으로 사고가 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길을 돌아 올라와보니 막 자동차 두 대가 출발하더군요."
"틀림없이 번호를 봤단 말이야?"
"네."
"번호는 왜 봤어?"
"자연히 눈길이 번호판으로 갔어요. 번호판을 보는 것은 취미거든요."
"번호는 정확해?"
"네, 그런 번호를 잊어버릴 수가 있나요? 후지산 높이가 3776미터 아닙니까. 일본사람치고 후지산 높이 모르는 사람 있나요?"
 서장은 쾌재를 불렀다.
"박 선생, 정말 훌륭합니다. 어떤 베테랑도 이런 귀신같은 추리를 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범인을 찾은 것은 전적으로 서장님의 도움 덕분입니다."
"그럴 리가. 어쨌든 박 선생, 고맙습니다. 이마무라의 살해범을 붙잡기만 하면 가네무라 선생의 살해범까지 잡을 수 있다는 얘기가 되는군요."
"그렇습니다. 마쓰모도의 살해범도 잡히겠죠."
"그렇겠군요. 하여간에 우선 범행차량부터 수배하고 봅시다."
 야마모도 서장은 수사과장을 불러 차량수배를 지시했다. 차량은 수배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바로 대동아연구소의 차량이었다.
"소장도 소장이지만 간부들도 보통 사람들은 아니니 내가 직접 나서야겠소. 자칫 잘못하면 크게 다치니 절대 경고망동은 하지 마시오. 일단 철통같은 보안을 유지하고 서내의 다른 형사들에게도 비밀로 해두시오. 확증을 잡기 전에 언론에라도 새나가면 모든 것은 끝이오. 놈들이 무슨 방법을 써서 대비할지 모르거든."
 야마모도는 역시 서장다웠다. 연구소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하기 위하여서는 보안유지가 가장 우선이었다. 서장은 수사과장과 강력계장에게 기초수사를 지시했다.
"보안유지를 위하여 직접 다녀주어야겠어. 범행차량은 증거를 인멸하기 위하여 범퍼를 갈았을 거야. 연구소의 지정 정비공장이든 집 부근의 서비스업소이든 동경시내를 샅샅이 뒤져 범퍼를 갈아낸 사살이 있는가를 확인하시오. 범퍼를 갈기만 했다면 물증은 확실하니 바로 들이닥칩시다."
 두 사람이 나가는 것을 보고 상훈도 학교로 돌아갔다. 서장은 무슨 소식이 있으면 바로 상훈에게 사람을 보내겠다고 했다.

 오후에 서장은 형사를 학교로 보내왔다. 상훈은 급한 마음에 형사에게 상황을 물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일이 잘 풀리고 있습니다. 연구소의 차 두 대가 범퍼를 갈았더군요."
"원래의 범퍼도 찾았습니까?"
"네, 정비공장에 그대로 있더군요. 일단 경찰서로 가시지요."
 경찰서에 도착하자 야마모도 서장은 만면에 희색을 띄고 상훈을 맞았다.
"박 선생, 이마무라 주임은 대동아연구소의 차에 치여 죽음을 당한 것이 틀림없소. 녀석들은 아무도 모를 줄 알았겠지만 이렇게 천재적인 추리에 의해 덜미가 잡힐 줄은 꿈에도 몰랐을 거요."
 서장은 다시 수사과장에게 지시했다.
"지금 연구소로 가서 두 대의 차량에 타고 있던 사람들을 연행해 와. 그리고 차량의 트렁크를 정밀 감정해."
"체포영장과 수색영장을 청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영장을 청구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을 것 같은데. 당신 생각은 어떻소?"
"어려움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만약의 경우......"
"정황증거는 확실하니 대항하지는 못할 거요."
"상대방들이 워낙 막강한 사람들이라......"
 시바 과장은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그는 확실히 떨고있었다. 그러나 야마모도 서장은 굵고 낮은 목소리로 힘있게 내뱉었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소."
"알았습니다."
 상훈은 야마모도 서장이 자신을 믿고 이토록 열성적으로 사건해결에 달려드는 것을 보자 고마운 마음이 생겼다. 이마무라에 대한 그의 의리가 상당하다는 것 또한 느낄 수 있었다.
"박 선생은 여기서 기다립시다."

 시바 과장이 나가고 나서 상훈과 마주앉게 되자 서장은 다시 한 번 상훈의 추리를 칭찬했다. 형사도 아닌 상훈이 그렇게까지 정확하게 사건을 추리한 것에 대하여 야마모도 서장은 진정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런데, 박 선생. 이마무라 주임으로부터 다른 연락은 없었습니까?"
"그것뿐이었습니다. 닛꼬에서 떠나기 전날 밤에는 중요한 사실을 떠올렸다는 전화가 녹음이 되어 있었구요."
"중요한 사실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글세, 저도 짐작을 할 수는 없더군요. 이마무라 주임만이 느낄 수 있었던 범인에 대한 단서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것만 알면 확실할 텐데."
"그 다음날 일직 시야쿠쇼에 가서 주민등록을 열람한 것과 무슨 관계가 있을 텐데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군요."
"주민등록이라, 주민등록."
 서장도 궁금한 모양인지 눈을 감고 가끔 고개를 흔들어가며 생각에 잠겼다. 두 사람의 대화가 중단되고 약간의 시간이 지났을 무렵 서장실의 문이 열리며 시바 과장과 강력계장이 신사복을 잘 차려입은 두 사람과 함께 들어왔다. 서장은 약간 의외라는 듯 수사과장의 얼굴과 낯선 사람들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범죄자를 서장실에까지 데려올 리가 만무했기 때문이었다. 시바 과장은 몹시 풀이 죽어있었다. 상훈과 서장은 직감적으로 사태의 진전을 눈치챘다. 서장은 약간 불안한 듯한 음성으로 물었다.
"시바 과장, 이분들은 누구시오?"
 수사과장의 대답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에 실려나왔다.
"연구소의 행정실장님과 와따나베 의원님의 비서이십니다."
"아, 그러십니까. 이리 앉으십시오."
 실장이라는 자는 서장의 앞에 앉아있는 상훈에게 힐끗 눈길을 던지고는 자리에는 앉지도 않은 채 거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서장이오?"
"그렇습니다만."
 서장의 목소리는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당신 도대체 정신이 있는 거요, 없는 거요? 이 사람들이 난데없이 연구소에 뛰어들어와서는 자동차가 어떠니 살인이 어떠니 하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오?"
 서장은 굳을 대로 굳어 있는 수사과장의 얼굴에 시선을 던졌다.
"범퍼를 갈긴 했는데, 그것은 연구소의 자동차끼리 사고가 났던 것이었습니다. 어제 저녁에 앞에 가던 차를 뒤의 차가 좀 심하게 들이받았더군요. 그래서 앞 뒤 차가 범퍼를 모두 갈았더군요. 트렁크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었습니다."
 서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의원님께서 공안위원장께 전화를 거시는 걸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 겨우 말렸습니다."
 의원의 비서라는 사나이가 다시 서장에게 호통을 쳤다.
"영장도 없이 십여 명의 형사를 연구소에 난입시킬 수 있는 거요? 당신 그러고도 서장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소? 그래 자동차끼리 부딪친 것이 그리도 큰 사건입니까? 누가 누구를 죽였단 말이오? 오늘 이 자리에서 분명히 설명하지 못하면 불법연행과 불법수색으로 당신을 그냥 두지 않겠소. 설명을 해보시오."
 야마모도 서장의 얼굴은 더욱 굳어지고 있었다. 상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왔다. 더 볼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어쩐지 사건이 너무 쉽게 풀려 일말의 불안감이 느껴지더니 결국은 이런 상황으로 이어졌다. 집에 돌아온 지 두 시간쯤 지났을 때 먼저 도서관으로 찾아왔던 그 형사가 찾아왔다. 그의 얼굴은 지쳐 있었다. 
"야마모도 서장님은 와따나베 의원에게 사과하러 갔습니다. 와따나베 의원이 어디에든 전화 한 통만 하면 서장님은 파면입니다. 심하면 형사책임까지 져야 할 것입니다. 가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도 어떻게 될지 모를 것 같습니다."
"......"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박 선생님의 추리가 확실하다고 생각했는데."
"저도 놀랐습니다. 곰곰 생각해보니 놈들은 매우 교묘한 수법을 썼습니다. 처음부터 두 대의 차를 이용하여 한 대가 주임을 치고 다시 그 앞에 대기하고 있던 또 한 대의 차를 들이받았습니다. 범퍼에 남아 있는 사람을 친 흔적은 더 큰 충돌에 의해 묻혀버립니다. 결과적으로 보기좋게 당하고 말았습니다."
"아, 그렇군요. 그런 지능적 수법을 썼군요. 그렇다면 자동차 살인은 밝혀질 수 없는 건가요?"
"그렇겠군요. 결정적 증인이 나오거나 시체가 발견되어야 하는데 둘 다 어려울 것 같습니다."
 상훈의 말을 들은 형사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그나저나 서장님이 큰일입니다. 저쪽에서 문제를 삼으면 타격이 클 텐데요."
"놈들은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서라도 서장님을 더 가혹하게 몰아붙일 가능성이 있겠군요."
 산훈은 망연자실했다. 연구소의 상대방들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는 생각했지만 이렇게나 완전하게 당해버릴 줄은 몰랐다. 상훈은 상대들이 생각했던 이상으로 치밀한 자들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도 서장님은 박 선생님을 원망하는 기색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연구소측의 자동차 사고를 믿으시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어차피 자신의 책임 아래 진행된 일이니 자신이 책임을 지겠다는 태도를 보이시더군요."

 참담한 기분이었다. 무엇보다도 야마모도 서장에게 미안했다. 형사가 돌아가고 나서 상훈도 곧 집을 나왔다. 그대로 집에 있을 수는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는 동안 야마모도 서장을 윽박지르던 행정실장이라는 자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서장이 대신 당하긴 했지만 사실은 자신이 책임져야 할 자신의 추리였다. 그러나 견딜 수 없는 미안함과 분함이 뒤섞여 가슴속에서 치밀어오르는 중에도 한 가닥 의문이 떠올랐다.
 '이마무라 주임은 무엇을 알기 위해 연구소로 갔던 것일까.'

44. 가즈오의 삼촌

 참담한 패배의 기분이 사라지지 않았지만 당장은 어떻게 해볼도리가 없어 상훈은 당분간 밀렸던 공부에 신경을 쓰기로 했다. 그러나 이마무라 주임까지 살해된 마당에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정신이 있을 리 없었다. 정리되지 않은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즈음에 어느날 밤 늦게까지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집으로 돌아온 상훈이 자동응답기를 틀자 이 기자의 음성이 녹음되어 있었다. 반가운 목소리였다.
《내일 동경으로 취재 가네. 주석의 일본 방문 때문이야. 자네하고 같이 자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술독에는 빠뜨려 줘.》
 이 기자의 전화는 오랜만에 신선한 기분을 갖게 했다.

"북한 주석의 일본 방문을 취재하러 왔다구?"
"그래, 북한부에 있으니 취재할 것이 많지."
"일본에 있는 동안 내 집에서 지내게."
"고맙지만 그건 안돼. 같이 온 사람들과 호텔에서 합숙을 해. 언제 뉴스거리가 터질지 모르고 취재 결과를 취합하기도 해야하니까 같이 지내야 한단 말이야. 오늘은 첫날이니까 예외지만."
"그럼 오늘은 실컷 마셔도 된단 말이지."
"그럼, 그러니까 초저녁부터 자넬 찾아온 게 아닌가."
 상훈은 이 기자를 데리고 동네의 로바다야끼 주점으로 갔다. 좁아터진 주점의 한 구석에서 술로 식사를 대신하여 어지간히 취하자 이 기자는 취재와 관련한 얘기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번에 주석이 일본을 방문하는 것은 의외야."
"수교도 했으니 이상할 것은 없잖아. 주석은 외교에서 자신의 역량을 보여 지도력을 강화하고 싶어할 테고. 무엇보다도 앞으로 지속적 경제개발을 하려면 일본의 협력이 필요하겠지."
"과거 박정희 대통령이 서둘러 일본을 방문했듯이 말이야?"
"비슷한 맥락이지."
"남한에서 다 해가면 오죽 좋겠어?"
"그렇게 보면 방문의 필요성이 충분하긴 한데, 의문이 좀 있단말이야."
"의문?"
"북한의 정정이 뒤숭숭하잖아. 그런데도 주석이 안심하고 일본을 올 수 있을까."
"정권의 안정을 과시하려 할 수 있겠지. 어차피 실권은 군부에서 쥐고 있으니 폭동에 대한 대처도 군에서 하겠지."
"그렇다 하더라도 주석 본인은 자리를 비우기 싫어하지 않을까?"
"모르지. 그 안에서 어떤 파워게임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는."
 이렇게 대답한 상훈의 기억에 조 전무의 얼굴이 얼핏 스쳤다. 조 전무는 혼란을 막기 위해 가즈오의 삼촌인 최독준 대장과 선을 연결해 두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던 것이다. 최독준 대장은 추석의 최측근이라고 했다.
"참, 그런데 이번에 주석을 수행하는 사람들 중에 군인도 있나?"
"물론이지."
"명단을 좀 볼 수 있어?"
"아직은 안 나왔어. 아마 내일 조건에는 나올지 모르지. 근데 왜 그래?"
"아냐, 별 일은."
 택시를 잡아 이 기자를 호텔에 태워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상훈은 가즈오의 삼촌인 최독준 대장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날 아침 상훈은 이 기자의 전화를 받고 잠을 깼다.
"몇 신데 아직 자고 있는거야?"
"자네야말로 꼭두새벽부터 무슨 일이야?"
"조간 봤어?"
"아니, 지금 눈떴는데 신문을 언제 봐?"
"아무거나 집어 보라구. 북한측 수행원 명단이 나와 있으니."
"고맙군."
 상훈은 어젯밤 이 기자에게 수행원 명단을 물었던 것이 생각났다. 상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편지통에 꽂혀 있는 신문을 집었다. 1면 머릿기사에 주석의 일본 방문이 대문짝만한 제목으로 실렸고 그 밑에 공식 수행원 명단이 실려 있었다.
〈인민무력부 총정치국장 최독준 대장〉
 가즈오의 삼촌 이름이 분명히 실려 있는 것을 본 상훈은 하고네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조 전무의 정치적 이유와는 상관없이 가즈오에게 세상의 유일한 혈육인 삼촌이 일본에 온다는 소식을 전해 주지 않을 도리는 없는 것이었다. 상훈은 하야꼬와 같이 가는 것도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유황냄새는 그리 싫지 않아요. 아마도 익숙해져서 그렇겠죠."
"옛날 생각이 나게 해주는 냄새죠."
"언젠가는 유황냄새를 맡으며 상훈 씨 생각을 하게 될 것 같아요."
"어쩐지 헤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얘기군요."
"......"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지만 상훈은 이내 후회를 했다. 늘 밝기만 하던 하야꼬의 눈매가 어딘지 서늘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천리시를 갔다 오고 나서 뭔가 해야 한다고 느꼈어요. 그날 고통스러워하던 상훈 씨의 모습이 가슴에 맺혀 오랫동안 우울했어요. 우리 일본인들의 진실은 따로 있는데, 우리 일본인들이 그렇게 나쁜 사람들은 분명 아닌데 역사는 왜 이렇게 흘러왔는지 안타까웠어요. 여기 이 편지 사본을 읽어 보세요."
 가방에서 편지봉투를 꺼내 상훈에게 건네주는 하야꼬의 눈망울이 더없이 맑아 보였다. 편지는 천리교주에게 보낸 것이었다. 편지를 읽는 상훈의 마음은 하야꼬의 배려에 대한 고마움으로 가득찼다. 상훈은 하야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살짝 미소만 지어보였다.

"교주님. 천리시를 방문했던 것은 아름다운 기억이었습니다. 그 고요하고 검소한 분위기의 도시에서 저는 정녕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마주치는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 그렇게나 깨끗해 보일 수 없었습니다. 기독교나 불교의 큰 종교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편안함이 금세 몸에 와 닿았습니다. 저는 천리교가 아무도 해치지 않고 아무의 것도 빼앗지 않았지만 이토록 교세를 확장해온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세속의 때를 벗고 어리석은 탐욕을 버리며 마음을 깨끗이 하자는 교리가 어느 종교의 거창한 교리보다 훌륭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종교가 순수하게 우리 일본에서 생겨난 것도 자랑스럽습니다. 저도 언젠가는 천리교의 제자가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교주님. 천리교에 옥의 티와 같은 일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한국의 몽유도원도가 천리대학교 도서관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그림은 한국으로서는 너무도 중요한 그림입니다. 중학교 교과서에도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그리고 사회의 모든 시험에도 어김없이 나오는 이 그림과  거기에 붙여진 글들은 미술사적인 가치는 말할 것도 없고 한국의 역사, 문화 전반에 걸쳐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그림입니다. 한국인들은 이 그림을 임진왜란 혹은 근대의 식민지 시대에 빼앗겼습니다. 그들은 이런 그림들을 우리나라에 빼앗김으로써 문화를 상실해가고 있다고 합니다. 문화의 상실은 그들에게 뿌리 잘린 사회를 살게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한국인들은 이런 그림들을 돌려받기를 너무나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교주님. 맑고 깨끗한 정신으로 살아가는 천리교에서 경위야 어떻게 되었든 한국에서 빼앗아 온 그림을 갖고 있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아니 어쩌면 천리교에서 그 그림을 갖고 있다는 것은 크나큰 다행일지도 모릅니다. 아마 일본에서 그 그림을 돌려줄 수 있을 정도의 윤리와 도덕을 확실히 갖고 있는 사람들은 천리교의 교인들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주님. 이 그림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한국인들의 눈동자를 생각해 주세요.
하야꼬 올림"

"오늘은 기분이 좋은 날이군. 두 분이 같이 이렇게 방문해주다니."
 가즈오는 지난번 상훈을 황급히 떠나게 한 것을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기분이 나아 보이는군요."
"네, 기분이 좋아요. 머리가 말끔해졌거든요."
"정말요?"
"네. 머리 속에 피어오르던 검은 안개들을 걷어냈어요."
 가즈오가 유쾌한 표정으로 얘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 지난번 얘기했던 끝내겠다는 말이 생각나 상훈은 불안했다. 어쩌면 유쾌한 표정은 깊은 마음을 감추기 위한 것일지도 몰랐다. 상훈은 가즈오의 삼촌 얘기를 꺼냈다.
"반가운 소식이 있습니다."
"반가운 소식? 내게도 반가운 소식이 올 때가 있나요?"
"가즈오 씨의 내력에 대한 얘기 거든요."
"......"
"가즈오 씨에게는 삼촌이 있습니다."
"네, 삼촌이라구요?"
 가즈오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렇습니다. 부친 최독립 씨의 동생 최독준 씨죠."
"정말인가요?"
"네."
"삼촌이 어디에 있습니까?"
"북한에 있습니다."
"북한에요?"
"그렇습니다. 그분은 오랫동안 가즈오 씨를 찾은 모양입니다."
"나를 찾았다고?"
 상훈은 이때 가즈오를 만난 이후 처음으로 그가 놀라는 것을 보았다. 언제나 우울하고 파리한 모습으로 목소리조차 높낮이가 없던 가즈오였지만 혈육이 살아 있고 자신을 찾기까지 했다는 말에는 보통 사람과 조금도 다름없이 반응하는 것이었다. 
"삼촌이 나를 찾았다는 말이죠?"
"그렇습니다."
"오랫동안이나요?"
"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었죠?"
 상훈은 아는 대로 설명을 했다.
"그랬군요. 내게도 그런 삼촌이 있었군요. 나를 찾아주는 삼촌이 있었다는 말이군요."
 가즈오는 이상할 정도로 흥분했다.
"어릴 때 나는 누구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곤 했었어요. 할아버지가 보낸 편지를 해독하고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고 나자 내게 손을 내밀었다가 무안을 당하고 오사카로 전학간 그 아이의 얼굴이 떠올라서는 사라지지 않더군요. 찾아가 사과를 해야한다는 생각 한편으로 내가 한국인으로 떨어져야 한다는 공포감에 시달렸습니다. 일본에서의 한국인이란 늘 신분을 숨기고 살아야 하는 그러한 존재이거든요. 학교에서 애들이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으로 매일매일을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지내던 때는 누군가 찾아와 〈가즈오야, 너는 한국인이란다〉 하고 외치며 나를 한국으로 데려가 주기를 바라며 살았어요."
"그런데 더욱 놀라운 소식이 있습니다."
"......"
"그 삼촌이 며칠 후면 일본에 옵니다."
"네? 삼촌이 오신다구요?"
"네."
"무슨 일로?"
"북한의 주석을 수행해서 옵니다."
"삼촌이 오면 만날 수 있겠죠?"
"물론이죠."
"삼촌도 나를 만나고 싶어할까요?"
"이르다 말입니까? 그 삼촌이 가즈오 씨를 얼마나 찾았는데."
"내가 동경으로 가야겠죠?"
"데리러 오겠습니다."
 가즈오가 흥분하는 것을 보자 아직 모든 것이 분명치 않은 상황에서 속으로 은근히 걱정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상훈은 일단 그렇게 약속을 했다.

45. 평양의 모반

"오극렬을 죽이지 않으면 안돼. 그놈은 살모사 새끼 같은 놈이야. 언젠가는 혁명과업을 뒤엎을 놈이야."
 이을설은 전화기를 내려놓으며 언젠가 오진우가 자신에게 하던 말을 생생하게 떠올리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유달리 오극렬을 미워했던 옹고집 오진우의 태도가 지금에 와서는 이유가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을설은 벽에 걸린 수령의 사진에 눈길을 보냈다. 수령은 죽기 전에 몇 번인가 자신을 불러 특별히 주석을 부탁했었다.
"총국장, 내레 죽고 나면 반드시 동요가 있을 거야. 그러면 갸레 총국장이 봐줘야 해. 약속할 수 있갔디?"
"의심가는 놈들을 미리 제거하면 되지 않갔습네까?"
"당장은 몰라. 지금 충신 아닌 놈이 어드메 있갔어. 내레 죽고나면 문제지. 어떤 놈들이 어드러케 변할지 어캐 알갔어. 총국장이 봐줘야 해. 알갔디?"
"여부가 있갔습네까?"
이을설은 아득한 옛날 민족통일전쟁 때 주석을 등에 업고 낭림산을 넘어 만주로 피난가던 기억을 떠올렸다. 미군기의 폭격을 뭔지도 모르고 재미있어 하던 그 일곱 살짜리 어린애가 이제는 조선인민공화국의 위대한 지도자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 짙은 패전의 기미 속에서도 수령은 자신의 장자를 끔찍이도 귀여워했다. 온갖 고생 끝에 만주에서 무사한 모습으로 만나자 울며 뛰어드는 주석을 품에 안고 그 덩치의 수령은 어깨를 들먹였었다. 그때 눈물이 채 마르지도 않은 얼굴로 자신을 보며 진정 감사해 하던 수령. 그도 결국은 한 사람의 평범한 아버지에 불과했다. 이십 년간이나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을 짜고 수도 없이 많은 혁명 동지들을 숙청하고는 때로는 달랠길 없는 후회로 밤을 지새던 수령의 모습이 이을설의 기억에 실루엣처럼 떠올라왔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시계를 봤다. 이미 여덟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저씨, 여덟시까지 이봉원이 집으로 오시라요. 갸레 오늘 생일이래요. 어른도 모셔야지 않겠냐니까 다들 한 입으로 아저씨를 모셔야한다지 않갔시오. 뉘가 뭐래도 갸네들은 아저씨레 제일 따른다니까요."
 주석을 생각하고 수령을 생각하면 가서는 안되는 자리였다. 그러나 이을설은 자신이 점점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비록 십만에 이르는 실병을 직접 지휘하는 자리였지만 이을설은 자신이 허수아비라고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호위총국 예하의 실질적 힘을 가진 참모부와 평양경비사령부, 평양방위사령부의 지휘관들이 모두 오극렬의 추종세력인 이상, 자신은 무사태평인 듯 이들이 하자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공화국의 희망은 원로군간부들이 모두 은퇴한 뒤에나 찾을 수 있습네다. 그때까지는 지옥이야요."
 오진우의 사망 직후 오극렬은 이런 말을 했었다. 묘한 시기에 아무도 함부로 할 수 없었던 강력한 발언을 토해낸 그의 진정한 의도는 무엇이었던가. 이제서야 그의 뜻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으면 진작 제거해야 했었는데 이제는 왠지 시기가 늦은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어지러운 생각이 교차하는 가운데 잔칫집에 도착한 이을설은 자신을 환영하는 젊은 군인들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은 것을 느꼈다. 오극렬이 기다렸다는 듯한 표정으로 현관까지 나와서 영접을 했지만 이을설은 어쩐지 분위기가 낯설고 냉랭하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와주셨구만요, 아저씨. 들어가시라요."
"하하, 이 늙은이가 올 자리가 아닌 것 같구만."
"원, 아저씨도.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십니까. 다들 아저씨를 환영하는데요."
 이을설은 오극렬이 자신을 끈덕지게 아저씨라 부르는 것에 대해 내심으로는 달갑지 않았지만 달리 싫은 기색을 표시할 수도 없는 일이라 그냥 버려두고 있었다. 거기에는 오극렬이 자신과 같은 세대의 혁명동지인 오진우의 조카라는 관계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언젠가는 오극렬이 큰일을 터뜨릴 사람이라는 판단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을설이 이제 소장이나 중장급인 젊은 군인들이 대거 섞인 잔치에서 그런 대로 어울려 술잔을 몇 번 입에 갖다 댔을 무렵 어디선가 들었던 기억이 나는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호위총국장 이을설 차수를 모신 이 자리에서 인민무력부를 대표하는 우리 스물다섯 명의 장성은 혼란에 처한 나라를 보위하고자 하는 일념으로 영명하신 지도자 동지께 우리의 결의를 연명으로 표하고자 합니다. 반대가 있는 분은 손을 들어주십시오."
 바로 자신의 직속인 평양방위사령관이었다. 좌중의 눈길이 모두 자신에게로 쏠린 것이 느껴지는 순간 이을설의 가슴이 크게 출렁였다. 이것은 완전한 기습이었다. 어떻게 대항할 수 없는 묘한 기습이었다. 만약 자신이 이 자리에서 반대를 한다면 그 다음 자신의 운명은 뻔한 것이었다. 찬성은 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반대를 하지 않는 자체가 바로 찬성이었다. 지금 자신은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는 입장에 처했다는 것을 이을설은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이럴 경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노회한 그의 머리는 번개처럼 돌고 있었지만 이 급박한 순간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수십 개 성상을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목숨과 자리를 보전해온 그의 후각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그는 여기에 모인 면면이 모두 실병을 가진 지휘관이라는 것을 생각했다. 이들이 단합하면 마땅히 맞설 부대가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들은 시류에 편승하고 있었다. 일단 머리가 이렇게 돌아가자 이을설은 노인답지 않은 적극성을 보였다.
 그 적극성은 오랜 동안의 숙청을 경험하면서 스스로 체득한 보신술이었다.
"나 호위총국장이 한 마디 하갔시다."
 좌중의 시선이 이을설의 얼굴에 집중됐다.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모르는지라 좌중은 아연 긴장의 분위기로 휩싸였다. 평양방위사령관은 경호병들에게 눈짓을 했다. 자신이 명령하면 즉각 이을설을 체포하라는 의미였다. 이을설은 이 광경을 보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평소에 우리 공화국에 새로운 흐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온 만큼 여러 젊은 지휘관이 동의한다면 기꺼이 앞장을 서갔시다."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졌다. 얼굴에 웃음을 흘리며 이 광경을 바라보던 오극렬이 술잔을 들며 건배를 제창했다. 사실 그가 주석 배후에서 92년의 군인사를 주무르던 순간부터 오늘과 같은 상황은 배태되어 왔던 것이다. 건배의 환호가 가라앉자 평방사령관이 나섰다.
"우선 우리는 다음의 세 가지를 결의하고자 합니다. 첫째 이을설 차수를 제외한 모든 원로군간부들의 용퇴. 둘째 군개혁위원회 설치, 셋째 유일사상의 철폐."
 다시 이을설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몇몇 다른 지휘관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는지 안색이 변했다. 결의사항 중 첫째 둘째는 그렇다 치더라도 셋째는 감히 생각조차 하기 어려운 무서운 말이었다. 이제까지 이 말은 바로 숙청, 나아가서는 반드시 죽음과 연결되었었다. 그러나 평방사령관은 태연히 아니 당당하게 외치고 있었다.
"옳소."
 이을설은 그제서야 확연히 깨달을 수 있었다. 이들이 최종적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모반.
 이들은 모반을 꾸미고 있는 것이었다. 언젠가 이런 일이 올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사태는 너무 일찍 벌어지고 있었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이들을 진압하는 임무를 가진 자신이 모반의 맨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을설은 이것이 어쩔 수 없는 흐름이란 것, 또한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주석은 이들 젊은 지휘관들의 마음을 붙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결국 이들은 더 이상 주석만 쳐다보고 있다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주석은 이래저래 조금씩 개방의 물꼬를 트고 있었다. 때때로 자신들의 눈치를 보면서 속도를 조정하고 있긴 했지만 큰 흐름은 역시 개방으로 가고 있었다. 개방은 군의 입지를 끊임없이 좁혀갔다. 인민군에 지급되던 보급품들이 자신들의 동의도 얻지 않고 싹둑싹둑 잘려져 나갔다. 과거에는 함부로 쳐다보지도 못하던 경제관료란 것들이 군의 훈련비용을 주무르고 앉아 있는 꼴을 더 이상 참아줄 수 없었다. 주석은 그만의 살길을 찾아가고 있었고 주석의 살길이란 자신들에게는 죽을 길이었다. 이 모든 불길한 조짐들을 뒤집어버리는 것. 그것은 바로 반란이었다. 그리고 이 반란은 모두가 예감하고 있는 터였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역사의 한 과정이었다.
 반란은 주석의 측근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반란을 진압할 위치에 있는 지휘관들이 일으키는 반란을 제압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인민의 힘을 빌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미 모든 자유를 박탈당하고 노예처럼 살아온 인민들에게 반란의 부당함을 호소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을설은 시대가 바뀌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고 바뀌는 시대에는 몸을 아껴야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다행히 이들이 자신은 숙청대상에서 제외시켜 주었다. 그렇다면 이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분명해진 셈이었다.
"조만간 행동을 개시할 예정이니 여러 동지들은 지금부터 각자의 부대를 관장하고 연락을 기다리기 바랍네다."
 이을설은 돌아가는 지휘관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었다. 젊은 지휘관들이 돌아가자 집주인 이봉원은 이을설을 밀실로 안내했다. 밀실에는 이미 오극렬이 앉아 있었다.
"아저씨, 고맙시다. 아저씨가 우리와 뜻을 같이해 주니 마음이 든든합네다."
 공치사와도 같은 말이었다. 그러나 이을설은 아부섞인 웃음을 흘리며 역시 공치사로 맞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 늙은이에게 조국을 위해 다시 한 번 봉사할 기회를 주어 고맙시다."
 이을설은 자신도 모르게 말투조차 바꾸었다.
"이거 우리 기냥 있으면 다 말라죽고 말아요. 주석동지레 자꾸 개방이다 경제개발이다 하면서 우리 군부를 푸대접하는데 이거 이러다간 남한 아이들한테 통째로 다 멕히고 말아요. 거사를 일으켜야 돼요. 미국도 확고한 지지를 약속했습네다. 거사 후 중국과 거리를 유지하기만 하면 지지하겠다는 겁네다."
 이을설은 이들이 이미 미국과도접촉을 해두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것은 또 한편으로는 안도감으로 다가왔다. 미국이 뒤에 있다면 더더군다나 무서울 것이 없었다.
"최소한의 유혈사태라도 피하기 위해서는 지도자 동지의 일본방문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좋습네다."
 주석이 일본에 가 있는 동안 쿠데타를 일으킨다면 저항을 최소화 할 수 있을 것이었다.
 이을설은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로 되뇌었다.
 '돌아올 수 없겠구만.'

46. 추악한 한국인

"박 선생, 대동아연구소에 대해 얘기해 줄 것이 있소. 시내로 좀 나오시오."
 조 전무였다. 목소리를 듣는 순간 상훈은 그가 일전에 집에 왔을 때 뭔가를 얘기하려다 말고 그냥 가버렸던 기억이 났다. 프린스호텔의 라운지 한 구석에 먼저 와 있던 조 전무는 상훈이 나타나자 반갑게 손을 들어보였다. 간단한 인사를 하고 차를 시키고 나자 조 전무는 고민이라도 털어놓는 표정으로 상훈의 눈을 보며 말했다.
"박 선생, 최근에 일본각지에서 태평양전쟁 찬양대회가 열리는 것을 알고 있소?"
"네, 근래에 맹렬한 기세로 불타오르고 있지요."
"많은 시민단체의 자발적 운동으로 알려져 있긴 한데......"
 조 전무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 구호가 너무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소?"
"그런 것 같기도 하군요."
"그들은 한결같이 일본이 희생하여 아시아의 해방을 가져왔다고 한단 말이오."
"그렇더군요."
"자발적 운동이라면 그렇게나 구호와 논리가 비슷할 수 없는 것 아니오."
 상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 전무의 말을 듣고 보니 언젠가 자신이 대동아연구소에 갔을 때 소장인 와따나베가 강의하던 내용이 그대로 일본국민의 논리로 흡입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추한 한국인"이란 책을 혹시 알고 있소?"
"물론이죠. 한국인은 일본이 한반도를 병합한 것에 대해 고마움을 느낀다는 등의 허황된 내용으로 점철된 책이죠."
"정작 더 큰 문제는 그 책이 일본독자들로 하여금 제국주의 시절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한다는 데에 있단 말이오."
"그런 책이 팔리기나 합니까?"
"수십만 부가 팔려나갔소. 일본인들은 그런 책을 보고 한국인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가질 수밖에 없지 않겠소."
"답답한 일이군요."
"그런데 그 책의 저자가 누군지 아시오?"
"저자의 이름이 박태혁으로 되어 있더군요."
"책에는 그렇게 나와 있자. 그 박태혁이란 자가 자신의 생각을 술회한 형식으로 위장했지."
"그렇다면 실제의 저자는 따로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소. 박태혁이란 이름은 가공이고 그 책의 평론을 쓴 가세히데아키가 실제의 저자요."
"세상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겁니까?"
"사기의 일종이지. 한국인으로 하여금 한국인을 욕하도록 만들어 결국은 선량한 일본인들이 한국에 대해 나쁜 인상을 갖게 하는 범죄행위지. 세계에서 유일하고 오직 일본의 일부 그릇된 지식인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오."
"우리의 역사를 조작한 것과 똑같은 수법이군요."
"지금도 이런 식의 발상을 할 정도니 그 시절은 어땠겠소."
 상훈의 기억에 일본의 식민정책을 좇다가 발견했던 사이또 총독의 발언이 떠올랐다.
"조선 사람들에게 그들의 역사를 알지 못하게 하라. 그들 조상의 무위, 무능, 악행을 들추어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의 후손들에게 가르쳐라. 그리하여 청소년들로 하여금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하라."
 삼십육 년간이나 이런 교육을 해댔으니 지금에 이르러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를 비하하도록 길들여져 있었다.
〈한국인은 역시 안돼〉
〈한국인은 맞아야 말을 들어〉
〈우리는 민족성이 나빠〉라는 말들은 모두 어디에서 나온 말들인가. 배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런 말들을 거리낌없이 쓰고 있는 것은 통탄할 수밖에 없는 식민지배의 폐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왜 학교에서는 이런 현상의 이면을 파악하여 가르치지 못하고 있는지 답답한 생각도 드는 것이었다. 오랜 세월에 걸친 일본의 역사왜곡, 지금도 자행되고 있는 그들의 왜곡된 역사해석에 대응하는 우리의 노력이 너무나 보잘 것이 없다는 생각이 동경시내 한복판의 호텔에서 서글픔을 느끼게 했다. 의식이 있는 사람들조차 무의식적으로 쓰는 이조실록, 이조백자, 민비라는 말도 역시 일본이 조선의 정통성을 부인하고 조선은 이씨의 한 정권이니 일본이 지배해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아니란 의식을 암암리에 심기 위해 지어낸 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도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는 것은 처참한 일이었다.
"사실 이것은 책 한 권의 문제만은 아니오."
"......"
"박 선생은 부전결의를 반대하는 〈종전50주년 국민위원회〉라는 단체를 아시오?"
"알지요."
 범국민적으로 부전결의 반대를 주도하는 이 단체는 이미 대단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으며 위원장인 가세 도시카즈는 진작부터 평화헌법 개정을 주장해온 우익의 대부였다.
"위원장인 가세 도시카즈는 그 추한 책의 숨은 저자 가세 히데아키의 부친이오."
 상훈은 왜 조 전무가 책 한 권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모두가 연결된 의식의 조작행위요. 이런 일련의 행위들 뒤에는 문제의 그 연구소가 있소. 와따나베의 영향이 지대하지."
 상훈은 의외로 조 전무가 연구소에 대해 깊이 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보를 다루는 사람이라 상관하지 않는 분야가 없겠지만 자신보다도 연구소를 더 잘 아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근본적으로 이런 연구소의 뒤에는 뿌리 깊은 일본인들의 우월의식이 있소. 천황제를 수호하고 신이 일본을 보호한다고 생각하는 민족적 우월주의자들이지. 대동아연구소는 특이하게도 자금을 자체조달하지만 다른 우익의 연구소들은 모금과 더불어 천황제를 받치는 사람들, 나아가서는 천황 주변, 어쩌면 천황의 돈으로 운영되는지도 모르오."
"안기부에서는 모든 분야에 그렇게 관심이 많습니까?"
 조 전무는 잠시 상훈을 쳐다보더니 품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냈다.
"박 선생, 이것을 보시오."
 잔뜩 구겨져 있던 것을 펴서 다렸는지 접혀진 종이는 온통 주름투성이였다.
"거기 줄친 부분을 읽어보시오."
 조 전무가 가리키는 부분에는 행동강령이라는 소제목 밑에 이런 내용의 컴퓨터 인쇄가 되어 있었다.

 "일본혼을 자극하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테러 활용."

 그리고 그 밑에는 다시 펜으로 쓰여진 글씨가 있었다.

 "일조수교 결사반대"

"이것이 무엇입니까?"
"그 연구소에서 나온 거요."
"대동아연구소 말입니까?"
"그렇소."
"이것을 어떻게 손에 넣었습니까?"
"그런 건 묻지 마시오."
 상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에게 대답을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었다.
"이 행동강령이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나라고 알 수 있겠소. 다만 그 연구소의 음모 중 하나일 것으로 볼 수밖에. 그러나 내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 밑의 글씨요."
 상훈의 눈길이 다시 펜글씨를 짚었다.
"살벌한 느낌이 드는군요."
"행동강령에 인쇄된 유의 테러는 늘상 있어온 거요. 가장 일본적인 테러지. 이런 연구소의 앞에는 언제나 전위적 우익돌격대들이 있소. 이들의 테러는 사람을 죽이거나 무고한 시민을 다치게 하거나 하지는 않소. 주로 정치인과 학자를 대상으로 그 주장에 대한 반대를 분명히 하는 경우가 많소. 이전의 호소카와 수상에 대한 테러도 사람을 향하여 발포하지는 않지 않았소. 천장을 향하여 쏘면서 우익의 목소리를 터뜨리는 거요. 일종의 애교 있는 테러라고나 할까."
 상훈은 일본을 보는 조 전무의 안목이 탁월한 데가 있는 것을 알았다.
"박 선생, 그런데 내가 고민하는 것은 바로 그 밑의 메모 때문이오."
"메모 때문이라구요?"
"그렇소. 메모의 내용도 아니고 그 메모를 쓴 글씨 때문이지."
"잘 이해가 안되는군요."
"행동강령은 인쇄가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준 것인데 그 밑의 그런 내용의 메모를 한 사람이 누군가를 알아내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단 말이오."
"있을 수 있는 메모가 아닌가요?"
 결사반대라는 말은 그리 어렵지 않게 쓰는 말이라 상훈은 가볍게 반문했다. 그러나 조 전무는 미간을 좁혔다.
"그 사람은 결사라는 단어를 여러 번 반복해서 썼소."
 상훈이 보니 과연 결사라는 단어가 진하게 덧칠이 되어 있었다.
"무심코 쓴 것이 아니라 기가 들어가 있는 글씨요. 펜자국이 깊이 나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소.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글씨체요."
"글씨체를 보면 성격을 알 수 있단 말이군요."
"바로 그러소. 이 사람은 연구소의 고정 멤버가 아니오. 늘상 보던 글씨들도 아니지만 얌전히 연구소에서 무엇을 할 성격이 아니란 말이오. 무인에 가까운 사람이 어떤 특별한 일로 연구소의 회의에 참석했든지 한 것 같소. 나는 그 종이를 전문가에게 가지고 갔소."
 상훈은 정보를 다루는 사람들이란 상상 못할 정도로 치미란 데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글씨를 쓴 사람은 편집증이 있는 사람이라는 감정이 나왔소."
"편집증이라구요?"
"그렇소. 자신의 엉뚱한 신념에 의거하여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오."
"그런 사람이 일조수교 결사반대라고 썼다면?"
"일조수교와 관련하여 엉뚱한 짓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지. 전부터 북한과 일본의 수교를 반대하는 데모는 많았지만 이렇게 힘이 들어가 있는 메모는 처음이란 말이오."
"그러나 이미 북한과 일본의 수교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까?"
"수교가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여전히 문제가 있을 수 있소. 나는 일본경찰에 이런 메모를 알려주어야 할 것으로 생각되오. 이전의 아사히신문 난입소동이나 문예춘추 사장집 발포 같은 것과 연결시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오."
"일본경찰에서 이 메모를 어떻게 입수했느냐고 묻는다면요?"
 상훈은 그가 메모를 어떻게 입수했는지 궁금하여 슬쩍 물었다.
"하하, 우리는 라인이 있소. 그런 것을 얘기할 필요는 없어요."
"그렇다 하더라도 짐작은 가는군요."
"정말이오?"
"쓰레기 수거원을 매수했겠죠."
"하하하, 그런 정도로 해둡시다. 그건 그렇고 나의 얘기가 박선생에게 도움이 되었을지 모르겠소."
"물론입니다. 연구소는 과거에 하던 추악한 행위를 지금도 계속하고 있군요."
"그 에이지 살해사건의 수사는 진전이 있소?"
"박 선생, 철옹성도 녹부스러기 하나로 말미암아 쓰러지는 법이오. 차분하게 생각하면 뭔가 허점이 나올 거요. 그건 세상의 법칙이거든."
 조 전무는 상훈의 눈을 들여다보며 용기를 주려는 듯이 한 마디 한 마디를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참, 그리고 최독준 대장이 이번에 일본에 오게 되어 있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즈오에게 가서 얘기를 했습니다. 삼촌이 오면 만나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래요? 그것 참 잘되었군요."
 조 전무의 활짝 펴지는 얼굴을 보며 상훈은 정보계통에 있는 사람들의 속성을 느낄 수 있었다. 조 전무가 그 바쁜 중에도 자신을 만나 연구소에 대한 정보를 일러주는 것에도 따지고 보면 조 전무의 계산이 깔려 있을 것이었다. 그 계산은 아마도 최독준 대장과 가즈오, 그리고 가즈오와 자신과의 관계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었다. 조 전무에게 있어서 자신은 가즈오와의 연결고리라는 의미 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역시 조 전무는 헤어지면서 상훈에게 가즈오의 얘기를 꺼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박 선생, 친구의 상태가 좀 나아지면 나를 한 번 만나게 해주시오."

47. 주민등록부

 조 전무를 만나고 학교로 가는 길에 상훈은 야마모도 서장에게 전화를 했다.
"죄송합니다, 서장님. 고초를 겪으셨죠."
"박 선생, 정말 훌륭했소."
 상훈은 서장이 자신의 추리는 믿지 않았지만 책임은 진다고 했다던 형사의 말이 떠올라 어리둥절했다.
"큰 봉변은 안 당하셨는지요?"
"가서 백배사죄하고 오긴 했지만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니오. 박 선생의 추리가 맞다는 것이 어제 증명이 됐단 말이오."
"네? 어떻게요?"
"주임의 시체가 발견되었소. 경찰병원에 가보시오."
"아, 저런."
 죽었다고 단정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얘기는 크나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복받치는 감정을 누르고 택시를 잡아타자 가슴 깊숙이에서 뭔가 생겨나서는 심장을 꽉 죄는 것 같았다. 목이 메어 가까스로 운전사에게 목적지를 말하고는 무거운 머리를 창가에 대자 이마무라의 모습이 머리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나왔다. 동경대학 구내식당에서 학생들과 줄을 서서 식사를 타며 겸연쩍게 웃던 모습이 상훈의 가슴을 저며왔다.
"제가 동경대 들어갈 머리가 됐으면 지금쯤은 경시총감이 되어있게요."
 영안실 밖에서도 들리는 부인 미야꼬의 흐느낌은 다시 한 번 상훈을 망연자실하게 만들었다.
"큰 충격을 받고 쓰러지면서 뇌진탕을 일으켰던 것 같습니다. 후두부가 심하게 함몰됐어요. 교통사고로 볼 수 있습니다."
 시체는 동경교외의 한 야적장에서 발견되었다고 했다. 처참한 죽음이었다. 상훈은 무섭게 뻗쳐오르는 분노를 누르며 냉정하려고 애를 썼다.
 집에 돌아와 책상 앞에서 두 손으로 턱을 괴고 주임을 처음 만나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과 주임이 했던 말을 하나하나 떠올리면서 그 의미를 곱씹었다. 이마무라 주임은 연구소를 찾아가다 죽음을 당했을 것이라는 자신의 추리는 이제 교통사고로 추정되는 주임의 시체가 발견됨으로써 옳았던 것으로 증명이 되었다. 그러나 이 추리의 증명만으로는 아무것도 해낼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너무도 강력한 상대방의 범죄를 밝혀내려면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다.
 이렇게 생각하자 상훈에게는 새삼 주임이 실종되기 전 떠올렸다는 그 중요한 사실이 부각되어왔다. 주임이 동경에 올라온 이후에 자신에게 연락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서는 올라오자마자 변을 당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렇다면 주임은 닛꼬에서 출발하면서 이미 강력한 단서를 가지고 출발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그 강력한 단서는 아마도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 알리려 했던 예의 그 중요한 사실일 것이다. 상훈은 다시 친구들의 증언을 떠올렸다.
"초인종이 울리고 나서 동료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더니 갑자기 놀란 얼굴이 되더군요."
 그 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동료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놀란 얼굴이 되었다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주임이 동료들의 얼굴을 보고 깨달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상훈은 그 다음날 주임이 시야쿠쇼에 갔던 사실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었다. 주임은 무엇을 확인하기 위해서 시야쿠쇼에 갔던 것일까. 뭔가가 아물아물 떠오를 것 같으면서도 딱히 머리에 와서 집히지는 않았다. 상훈은 시야쿠쇼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했다. 주민등록부를 보고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현재 동거하고 있는 가족상황과 전입일자 같은 것이었다. 주임은 에이지가 혼자 사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동거가족을 확인하기 위해서 쥰이찌의 주민등록부를 확인하러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주임이 시야쿠쇼에 간 것은 쥰이찌의 전입일자를 확인하러 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전입일자〉
 이 단어를 떠올리는 순간 무엇이 생각날 것 같았다. 주임은 왜 쥰이찌의 전입일자를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까. 상훈의 머리에 뭔가 아물아물 떠오르려고 하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조 전무였다.
"박 선생, 내일 최독준 대장을 만나러 가는 것이 좋겠소. 오늘 그들이 일본에 들어오니까. 선발대 중의 누군가와 외무성 인민국과 접촉하여 가즈오를 추적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대장이 지시한 것 같소. 아마 이민국에서는 찾아주지 못했을 거요. 가즈오의 입양기록은 부모의 요청에 따라 소멸되었거든. 그리고 내가 가즈오를 만나는 것은 일단 연기합시다. 자칫 잘못하면 쓸데없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으니까."

 조 전무의 전화를 끊고 나자 막 떠오르려 했던 생각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까와 같은 생각의 경로를 되찾을 수 없었다. 아까웠지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치 영감과도 같이 다시 생각이 떠오를 때를 기다리면서 상훈은 일단 가즈오의 일을 먼저 처리하기로 했다. 그러고는 전력을 다해 주임의 죽음을 추적할 셈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연구소의 겉에서 돌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위험이 닥치더라도 주임이 생각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알아내어 주임과 같은 방법으로 상대방과 마주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건 그렇고 우선은 가즈오를 데려와 최독준 대장과 상면시키는 것도 보통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독준 대장을 만나는 방법도 생각을 해보아야 할 것이었다.

 저녁에 상훈은 이 기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일 주석 일행의 일정이 어떻게 돼?"
"오전에 수상과 정상회담을 하고 저녁에는 아끼히도 왕이 베푸는 만찬에 참석하게 되어 있어."
"그 사이에는 뭘 하지?"
"증권거래소를 비롯해 한두 군데 더 둘러보도록 되어 있어. 그리고는 호텔에서 쉬다가 만찬에 가지."
"알았어. 고마워."
"그런데 갑자기 주석의 일정은 왜 물어? 그 만찬사에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지? 역시 역사를 하는 사람이라 다르군."
"만찬사라니?"
"아, 이 사람. 지금 그 만찬사를 두고 한일 양국이 온통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데 자네가 모른다면 말이나 돼?"
 상훈은 그제서야 자신이 주임의 사건 때문에 다른 일에 전혀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찬사 때문에 신경들이 곤두서 있다면 이유는 오직 하나 일왕의 과거에 대한 사죄문제일 것이었다. 전쟁배상을 하지 않았던 일본은 이 문제에 있어서 역시 한 번도 시원하게 과거에 대해 사과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늘상 유감으로 생각한다 정도로 끝냈던 일왕이 최근에 한국에 대한 통석의 념을 가진다는 표현을 했던 것이 최고 수준의 사죄였던 것이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후 그 어느 때보다도 보수우익의 목소리가 높은 때라 이 정도의 사과조차 나올지 어떨지에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수십 년간을 식민지배하고 한국민의 뜻과는 상관없이 합병까지 해놓고도 사과 한 마디하지 않는 일본이라는 나라도 한심하지만 제대로 된 사과 한 번 못 받고도 따끔하게 응징 한 번 못해 온 한국민도 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만찬사 작성을 놓고 외무성 내에서도 의견이 분분해. 이렇게 가다간 내일 만찬 직전에야 작성이 될 거야. 내일 일왕의 만찬사를 들어 보자구."
 이 기자의 관심은 온통 만찬사에 가 있는 모양이었다.

 이 시간 만찬사를 작성하는 외무성 청사 앞에 검은 세단이 한 대 멎었다. 키가 작고 대머리가 약간 벗어진 오십 대 후반의 사나이가 거만한 태도로 차에서 내려서는 미리 내려와 있던 외무대신비서의 안내를 받으며 외무대신의 집무실에 들어섰다. 한참 무엇인가 작은 소리로 수군수군하다가 소리가 차츰 커졌고 급기야는 고함이 터져나왔다.
"외무대신, 지금 북조선이 어떤 지경에 빠져 있는지 아시오?"
"알고 있소."
"북조선은 어떤 형태로든 개방할 수밖에 없소. 지금 주석이 국내의 급박한 사정을 돌아보지 않고 일본에 오는 것도 결국은 돈 때문이 아니오?"
"그렇소."
"앞으로의 동북아를 끌어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깊고도 강한 면모를 보여야 하는 것 아니오?"
"그런데요?"
"뭐가 그런뎁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잘못했느니 어쩌니 하고 자빠져 있으면 되겠어요? 폐하가 과거를 사죄하시면 주석은 우쭐해져선 우리나라와 대등하게 나오려고 할 게 아니오. 돈이 급하고 정치적 입지가 흔들려서 이것저것 가릴 것 없이 온 친구에게 잘못했다고 청승을 떨고 있는 것이 될 말이오?"
"그러나 이제 북한과 지구상에서 마지막으로 과거를 청산하고 국교를 트는 마당인데 과거에 대한 정의를 해야 할 것 아니오. 청산이란 게 그런 것 아니오."
"누가 청산을 하지 말랬나요. 청산을 제대로 하란 말이지."
"어떻게 하는 것이 제대로 청산을 하는 것입니까?"
"외무대신은 지난번 부전결의 때의 범국민적 반대를 보지 못했나요? 그 수많은 연판장들이 기억나지 않소? 왜 국민의 뜻을 꺾어놓으려 하는 거요?"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이오?"
"다신 지난번처럼 통석의 념이니 뭐니 하는 실없는 소리를 집어넣지 말란 말이오."
"그럼 아예 글귀까지 와따나베 의원이 집어넣으시오."
"내가 넣는다면 〈일본의 도움으로 근대화에 눈을 뜬 인연을 미래에 다시 살려나가자〉고 하겠소. 어차피 북조선에는 언론도 의식 있는 지식인들도 없으니 그랬다고 시끄러울 것도 없잖소. 급해서 찾아온 주석이야 말할 것도 없고."
"......"
"외무대신이란 사람이 때를 알아야지......"

 다음날 상훈은 하야꼬와 같이 하야꼬네 내려갔다. 반가워할 것으로 생각되었던 가즈오는 뜻밖에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가지 않겠어요."
 며칠 전에 그렇게나 반가워하며 삼촌이 오면 만나게 해달라던 가즈오였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다가오자 가즈오는 불안해 하는 것이었다.
"일이 잘못될 수도 있거든요. 삼촌이 아닐 거예요."
가즈오의 병이 확실히 나타나는 순간이었다.
"틀림없이 확인이 됐어요. 삼촌이 가즈오 씨를 찾고 있다니까요."
"삼촌한테 부끄러워요. 이 가즈오가 어떤 돈으로 살아오고 있었는지 삼촌한테 얘기할 수가 없어요."
"그건 무슨 얘기예요?"
"처음 여기 왔던 상훈 씨가 뛰어나가는 것을 보고 내가 기뻤다고 얘기한 적이 있었지요."
"네, 기억납니다."
"그때 나는 상훈 씨의 마음에 살아 있는 조국에 대한 긍지를 느꼈거든요. 나의 아버지가 일본인의 하수인 노릇을 하면서 팔아먹었던 그것 말이에요."
"야마자끼 씨가 무엇을 했던 그것은 가즈오 씨의 잘못이 아니잖아요."
"우리는 모두 공범이라니까요."
 가즈오의 표정이 거칠게 변하고 있었다. 하야꼬는 가즈오의 얘기를 듣고 있다가 종내는 '흑'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이때 등 뒤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냥 가시오."
 상훈이 돌아보니 언제 다가왔는지 가즈오의 양부 야마자끼가 무거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하야꼬를 보는 그의 눈길은 분노로 활활 타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하야꼬의 인사에도 한 마디 대답이 없이 서 있던 그는 다시 한번 굵고 탁한 목소리로 내뱉았다.
"너, 이제 다시는 여기 오지 마라."
 야마자끼의 목소리가 사라지기 전에 가즈오의 악에 받친 목소리가 날카롭게 상훈의 귀를 파고들었다.
"공범, 공범, 우리는 공범이라니까."
 가즈오의 흥분된 목소리가 이내 악에 받친 비명으로 변해가자 야마자끼는 근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가즈오를 바라보며 두 사람에게 손을 내저었다. 숨이 넘어갈 듯 비명섞인 고함을 질러대는 가즈오의 모습을 뒤로 남기고 두 사람은 박물관을 나와 전차를 탔다. 
"가즈오의 이중적 심리를 이제야 알 수 있을 것 같군요. 양부에 대한 사랑과 미움이 깊이 교차하는 것 같더군요."
"야마자끼 씨의 가즈오 씨에 대한 애정도 극진해요."
"그것이 더욱더 가즈오 씨로 하여금 자신의 병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하는 요소일지 몰라요.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늘 원인을 제공하는 법이니까요."
 무심코 한 상훈의 말을 들은 하야꼬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한동안 차창 밖의 풍경을 말없이 바라보던 그녀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돌아가야겠어요."
"네?"
"가즈오 씨에게 가봐야겠어요."
"지금 상태가 안 좋을 텐데."
"절 필요로 하고 있어요."
 하야꼬의 얼굴이 울음을 머금었다.
"발작을 하고 있을지 몰라요."
"그래요, 바로 그 발작. 저 때문이에요. 그전에는 발작을 한 적이 없었단 말이에요."
 하야꼬는 전차가 멎자 뛰어내려서는 급히 반대쪽으로 달려갔다. 상훈은 어떻게 해볼 도리도 없이 하야꼬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야꼬가 그전에는 발작을 한 적이 없다고 하  것은 어쩌면 상훈 자신에 대한 얘기일지 몰랐다. 즉 상훈이 나타나기 전에는 발작을 한 적이 없다는 얘기로 들렸다. 상훈은 자신의 마음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을 느끼며 텅빈 가슴을 안고 혼자 동경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 공허한 마음으로 어둠이 깔리는 밖을 내다보고 서있는데 전화벨이 울려다. 뜻밖에도 가즈오였다.
"상훈 씨, 아까는 미안했습니다. 삼촌에게 이 가즈오가 있다는 사실은 알리고 싶어요. 미안하지만 상훈 씨가 가 줄 수 있습니까?"
"네, 가겠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찾아가겠다고도 전해주세요."
 상훈은 가즈오의 심리상태를 알 수 있었다. 삼촌을 만나고는 싶지만 그의 예민한 성격에 선뜻 나서지는 못하는 것이었다. 전화를 끊고나자 상훈은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전화번호는 하야꼬가 알려줬을 것이었고 그렇다면 하야꼬가 돌아간 것은 결국 가즈오를 위해서는 아주 잘한 일이었다.

48. 만찬사

 가즈오의 전화를 끊고 나서 상훈은 서둘러 최독준 대장을 찾아갔다. 북한대표단의 숙소인 프린스 호텔은 경계가 삼엄했다. 상훈은 로비의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지켜보는 형사들에게 용건을 말하고 그들의 안내에 따라 대표단이 머무르는 15층에서 엘리베이터를 내렸다.
"아, 그렇습네까. 그런데 안됐구만요. 대표단은 이미 만찬장으로 떠났습니다."
 상훈이 낭패한 표정으로 돌아서려 하자 일본인 안내자의 뒤에서 듣고 있던 북한측 연락원이 내용을 물어왔다. 안내자가 설명을 하자 연락원은 놀란 표정이 되더니 능숙한 일어로 물었다.
"최독준 총정치국장 동지를 찾아오셨다구요?"
"그렇습니다."
"어떻게 되는 사이십네까?"
"그분 조카의 친구입니다."
"그렇다면 잠시 기다려 보십시오."
 연락원은 전화기를 들고 번호를 돌렸다. 만찬장으로 하는 모양이었다. 연락원이 상황을 설명하니 저쪽에서는 한동안 기다리게 하더니 뭐라고 지시하는지 연락원은 긴장된 태도로 전화를 받았다.
"총정치국장 동지께서 만찬장으로 모시고 오라고 하신다는구만요."
"만찬장으로요?"
"네, 저희가 모시겠습네다."
 자신이 참석하기에 적절한지 판단이 서지는 않았지만 일단 상훈으로서는 갈 수밖에 없었다. 연락원은 대기하고 있는 차의 뒷좌석에 상훈을 안내했다.
 차가 만찬장에 도착하자 다른 안내원이 입구에 나와 있다가 상훈을 안으로 안내했다. 일본경찰의 삼엄한 경호는 상훈으로 하여금 몇 번이나 탐지기를 통과하게 하였다.
"총정치국장 동지께서는 앞자리에 계십네다. 있다가 이리로 오실 테니 우선 여기 앉으시죠."
 상훈이 일단의 북한관리들 사이에 앉자 누군가가 샴페인을 부어주었다. 상훈이 샴페인을 입에 대는 순간 박수소리가 들리며 모든 사람의 시선이 앞으로 집중됐다. 아끼히도 일본왕과 주석의 건배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두 사람은 샴페인 잔을 공중에서 부딪치며 축하의 말을 주고 받았다. 소박하고 침착한 모습의 일본왕 부처와 어딘지 모르게 약간 들떠 있는 듯한 주석 부처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주석 측근의 인사들도 어딘지 모르게 미숙하고 딱딱해 보이는 것이 일본측의 세련된 모습과 극명하게 대비되어 보였다. 상견례를 마친 북한 대표단과 일본측 환영인사들은 모두 잔을 높이 들었다. 이제 잔을 부딪치기만 하면 역사적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분위기는 극도로 고조되었다. 종전후 반 세기가 지난 후에야 비로소 국교를 틀 수 있었을 정도로 이웃의 거리는 멀고 멀었다. 만찬장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중계를 하는 아나운서의 상기된 얼굴과 들뜬 목소리가 주석의 일본방문의 역사적 의미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드디어 주석과 일왕의 건배를 필두로 만찬장은 잔 부딪치는 소리로 요란하였다. 건배를 마치자 일본왕은 주석 부처를 자리로 안내하고 만찬사를 시작했다.
"오늘 북조선인민공화국 주석의 역사적인 일본방문을 내외빈 여러분과 더불어 진심으로 환영하는 바입니다. 생각하면 가장 가까워야 할 두 나라가 지난 반 세기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과거에 대한 인식의 차이로 그리고 이념의 상이함으로 말미암아 가장 가까운 이웃이 되지 못하고 지내온 것은 유감스런 일입니다. 지난날 일본이 조선반도에 진출함으로써 조선국민들에게 불행을 초래한 것에 대해 본인은 전일본국민과 더불어 통석의 념을 금치 못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이제 불행했던 과거는 역사 속에 흘려 보내고 미래를 공동개척하는 동반자로서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만찬사를 마친 아키히도는 주석이 있는 쪽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이고 좌중의 박수를 받으며 자리에 가서 앉았다. 수상의 안내를 받으며 왕으로서의 위엄을 은연중에 보이는 아키히도를 조명이 집중적으로 비치고 아나운서는 열심히 아키히도의 만찬사를 시청자에게 옮겼다.
"외무성은 그간의 이견을 물리치고 한국에 표명했던 수준의 마찬사를 준비했습니다. 뒷얘기입니다만 이렇게까지 하는 데는 외무대신의 고집이 결정적이었다고 합니다. 자리를 내놓는 한이 있더라도 한국에 했던 정도의 과거인식을 북조선과도 나누어야 형평의 원칙에 맞다는 것이 그의 신념입니다. 이에 대하여 많은 의원들은 역사를 재조명하는 마당에 잘못된 과거의 역사 속에 일본을 묻어두는 행위라고 외무대신에 대한 강한 비난을 제기했다고 합니다. 막후접촉에서 상당한 부담을 가졌다는 보도가 끊임없이 이어졌던 북한대표단은 정부로부터 과거 한국에 했던 수준의 과거정리를 받아냈으니 매우 만족스러울 것입니다."
 아나운서의 멘트가 끝나자 조명은 이제 주석의 자리로 옮겨졌다. 답사가 시작될 것이었다. 그러나 제법 시간이 흘렀음에도 주석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늘의 일정 중 가장 고조된 분위기를 연출할 만찬의 답사가 즉각 이어지지 않자 좌중의 시선과 관심은 모두 주석에게로 모아졌다.
 상훈은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주석의 건강에 대해 말도 많고 추측도 많았던지라 혹시 그가 이 중요한 자리에서 답사를 하지 못할 정도로 쇠약하다면 그것은 정녕 작은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났지만 주석은 여전히 일어나지 않았다. 북한과 일본측 관리들이 분주히 오가는 것으로 보아 무슨 일이 생긴 것 같기는 하였지만 의사가 들어오거나 주석의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건강상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좌중의 관리, 초청인사, 동경주재 외교관, 기자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의 신경은 극도로 곤두서 도대체 주석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려고 소란이 일었다. 상훈도 눈길을 주석의 자리로 보내며 무슨 이상이 있는지 신경을 집중했다. 옆자리의 북한관리들도 말을 꺼내진 않았지만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매우 불안한 모양이었다. 초조해진 상훈은 좌중의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살피기 위해 눈길을 돌렸다. 이제 좌중의 모든 사람들, 특히 내외신 기자들의 눈과 귀는 모두 주석의 일거수 일투족에 쏠려 있었다. 
"역시 듣던 대로 괴팍한 자로군. 이봐, 윌리 저 친구 도대체 왜저래. 뭘 잘못 먹은 것 아냐."
 걍박한 미국기자의 비난조의 농담이 귀에 들리자 상훈은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비록 남북한으로 갈라져 있다고 하더라도 북한도 그리고 주석도 엄연한 겨레임에 틀림이 없기 때문이었다. 세계외교사에 유례가 없을 이 사태에 대해서는 특히 의전을 맡고 있는 일본의 외교담당 관리들이 크게 당황했다.
"우리도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몸이 편찮은 것은 아니라 하시는데 아무 말씀도 없이 일어나질 않으시니."
 그러나 북한의 관리들로부터도 시원한 대답을 들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본인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그 원인이나 앞으로의 사태진전을 예측할 수 없었다. 지나치게 시간이 흐르자 좌석 여기저기서 소란이 일었다.
 번연히 이 소란을 목도하고 있으면서 미동도 하지 않고 앞만 쳐다본 채 앉아 있던 주석에게 변화가 생긴 것은 일본의 외무대신과 한참이나 얘기를 나누던 외교부장이 주석에게로 다가와 무엇인가를 귀뜸하고 나서였다. 주석은 그때까지도 묵묵히 자리에 앉아있기만 하다가 귀뜸을 듣고서야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좌중의 곤두선 신경이 가라앉는 듯 한숨소리가 곳곳에서 들렸다. 한숨은 특히 북한의 수행원들과 조총련계 교포 사이에서 많이 들렸다. 그들은 가뜩이나 구설수에 올라 있는 자신들의 주석이 이렇게 중요한 자리에서 즉각 답사를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이유를 불문하고 답답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었다.
 이윽고 주석은 일본왕이 있는 쪽으로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단상에 섰다. 도발적인 눈매로 좌중을 훑은 그는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답사를 시작했다. 사람들은 왜 그가 그렇게 오랫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는지 의문이 가득 담긴 눈길을 그의 얼굴로부터 떼지 않았다.
"북조선인민공화국의 국가주석인 본인은 이번 일본 방문의 의미가 지대하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역사의 고통을 묻어버리고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기 위한 초석을 마련하기 위해 본인의 일본방문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본인은 이 자리에서 그러한 본인의 희망이 현실에 근거를 두지 못한 환상으로 끝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지금 느끼고 있습니다."
 일단 안심했던 좌중은 주석의 만찬사가 매우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을 느끼자 더욱 긴장하고 단상에 주목하고 있었다.
"본인은 일본의 사과에 의하여 과거의 역사가 달라진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일본의 진정하고 솔직한 사죄만이 양국의 미래를 밝힐 수 있는 최소한의 필요조건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본인은 귀국으로부터 죽음을 당하고 자유와 재산을 빼앗긴 수없이 많은 조선인을 대표하여 이 자리에서 귀국의 사과를 받아야만 하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과의 의지가 보이지 않는 애매모호한 표현으로 얼룩진 역사를 슬쩍 넘겨버리는 귀국 아키히도 전하의 사과 아닌 사과를 본인은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과거 희생된 수많은 조선인의 원혼이 반대할 뿐만 아니라 지금도 조선을 무시하고 있다는 부정할 수 없는 증좌가 되기 때문입니다."
 좌중에서 크게 소용돌이가 일었다. 이런 일은 외교관례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취재가 허용된 텔레비전의 카메라가 정신없이 돌고 기자들은 한 마디도 빼놓지 않으려고 땀난 손으로 펜을 부지런히 놀렸다.
"물론 본인은 이 자리에서 그러한 것을 논한다는 것이 외교관례에 벗어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만, 과거 귀국과 남조선의 예로 볼 때에 수십 년간 남조선이 귀국으로부터 진정한 사과를 받지 못하고 지금까지도 국민여론이 들끓고 이는 것은 첫 단추를 잘못 끼웠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때 남조선은 귀국의 경협자금, 아니 제대로 표현하자면 전쟁배상금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귀국의 과거에 대한 사죄를 받지 못했습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제 이 자리에는 북조선을 대표하여 본인이 섰습니다. 본인은 진솔한 사과, 혼이 담기고 성의가 담긴 사과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불과 일 년 남짓 프랑스를 점령한 독일도 그토록 정중하고도 깊은 사과를 했는데 삼십육 년간이나 한반도를 지배하고 병합한 귀국이 이렇듯 기만적 사과로 일관한다면 세계의 인민들은 우리 조선인이 못나서 그런 것으로 밖에는 생각치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조선의 젊은이들에게는 국가정기를 흐리고 귀국의 젊은이들에게는 역사를 왜곡하는 무서운 행위가 된다는 것을 인식하시기 바랍니다. 본인은 지금 이 자리에서 귀국 아키히도 전하의 진실한 사과가 추가적으로 이루어지길 정중히 요구합니다."
 좌중은 얼어붙은 듯했다. 한국어나 일본어를 못 알아듣는 외국인들조차 숨소리도 내지 않고 온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다. 일본의 관리들도 처음 접하는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할지 몰라 당황해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외국의 원수가 답사에서 자국 왕의 추가적 언급을 요구하였으므로 다음 순서로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왕에게 당장 어떤 발언을 하도록 한다는 것은 일본의 관리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경우 왕의 즉흥적 기지나 단어만이 사태를 해결할 유일한 방법이었지만 왕은 묵묵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일본의 왕이란 이런 경우 그저 묵묵히 앉아 있는 존재였다. 그냥 있을 수도 어떤 행동을 취할 수도 없는 상황이 좌중의 침묵 속에 마냥 이어지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리던 주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일왕 앞을 지나면서 고개도 숙이지 않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수행원들도 주석의 뒤를 따라 퇴장하자 좌중의 조총련계 인사들도 잇따라 일어나 퇴장했다. 묘한 것은 한국에서 온 기자들도 따라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상훈 자신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의 뒤를 따르고 있는 것을 느꼈다.

49. 돌아가지 못할 자

"뭘 해, 이 친구야."
 흥분이 극에 달한 이 기자의 목소리가 새벽잠을 깨웠다.
"꼭두새벽부터 웬일이야?"
"어서 일어나 조간을 봐."
"뭔데 그래?"
 반문은 했지만 무슨 일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세상이 발칵 뒤집혔어."
 그 자리에 자신이 있었다는 것을 꿈에도 모르는 이 기자는 불문곡직하고 신문을 보라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한국과 일본의 신문만이 아니었다. 세계의 모든 신문은 제1면에 동경에서 송고된 기사를 대서특필했다.

 "일본을 방문중인 북한의 주석은 아끼히도 왕이 초청한 만찬의 답사에서 아끼히도 왕이 과거 일본의 조선진출에 대해 통석의 념을 표한다고 말한 것에 대해 진정한 사과가 아니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주석은 일본의 침략행위에 의해 목숨을 빼앗기고 생명과 재산을 잃은 조선인의 수가 헤아릴 수 없고 그 결과로 한반도가 분단되는 등 피해가 이루 말할 수 없는 터에 통석의 념을 표한다는 장난과 같은 표현은 아직도 조선인을 얕잡아보는 발상에서 나온 것이므로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일본 외무성은 곧 외교관례에 벗어나는 일이라고 엄중한 항의를 전달했으며 북조선 외교부장은 관례 때문에 진실을 얘기하지 않을 수는 없다고 반박했다."

 이날 새벽 야쓰꾸니의 신사에는 머리에 수건을 두른 한 사나이가 신상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사무라이풍의 유까다를 걸친 사나이의 눈에서는 혁혁한 안광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으며 솟구친 관자놀이 밑으로 꽉 다문 어금니는 사나이의 무서운 결의를 보여주고 있었다.
 '국조가 나라를 연 이래 오늘과 같은 모욕은 처음이다. 폐하의 신민으로서 어떻게 이런 일을 견디고 있을 것인가. 죽음으로 폐하의 욕을 씻으리라.'
 어젯밤의 일을 되새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가 다시 꿈틀 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사나이는 입구의 공중전화 박스에서 전화기를 들었다.
"와따나베 이사장을 바꿔주시오."
 잠시 기다렸던 사내는 저쪽이 나왔는지 비장함이 담긴 묵직한 목소리를 뱉어내다.
"와따나베 군, 이대로 있을 수는 없네."
 와따나베의 당황한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사나이의 귀에 와 닿았다.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어."
"그렇다면?"
"그렇게만 알아두어."
"......"
"자네가 한다면 완벽하겠지. 그러나 자네 또한......"
"미시마 선배의 뒤를 따르려네."
 묵직하고 단호한 음성이 귀를 파고들자 와따나베는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오고 있는 친구와의 젊은 시절을 떠올렸다.
 그의 백부는 쇼오와 11년의 반란사건 때 내무대신 사이토를 직접 찔러 살해하고는 젊은 장교들의 앞장을 서 수상관저로 난입하여 수상 오까다 게이스케로 착각하고 비서관을 살해했던 인물이었다. 어려서부터 그는 백부를 자신의 영웅으로 삼아 언젠가 자신은 일본혼을 백방에 알리고 장렬하게 죽으리라고 말해왔었다. 그의 부친과 자신의 부친은 육군참모본부의 장교였던 터라 두 사람은 어려서부터 자주 만났다. 백부의 행위에 영웅적 향수를 품고 성장한 그는 젊었을 때부터 따르던 작가 미시마 유끼오가 일본우익의 부활을 부르짖으며 대중 앞에서 할복자결하자 삼일 밤낮을 단식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나흘째 되던 날 자신을 찾아와서는 미시마의 뒤를 따르겠다고 우기는 통에 진땀을 흘리며 말리던 기억이 있었다.
"훗날 반드시 값지게 목숨을 바칠 일이 있을 것이네."
 그때 자신이 했던 말이었다. 그런데 수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친구는 다시 한 번 미시마의 뒤를 따르겠다는 것이었다. 
 '말려야 할 것인가?'
 그러나 와따나베는 말리려 하지 않았다. 말려서 들을 친구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지금 이 순간 그는 와따나베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었다. 
 주석은 자신에게도 그냥 돌려보내고 싶지 않은 인물이었다.
"잘 가게."

 뜻밖의 사태로 인해 최독준 대장을 만날 수 없게 된 상훈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하고 있는 터에 조 전무로부터 전화가 왔다.
"마침 전화를 잘해주셨군요. 북한대표단은 그냥 돌아갑니까?"
"아니오. 예정대로 남은 일정을 계속 할 것이라 합니다."
"그럼 오늘 최독준 대장을 만나러 가야겠군요."
"그래야 할 것 같소. 그런데 친구는 괜찮소?"
"마음의 안정을 못 찾고 있어요. 일단 저에게 가서 대장을 대신 만나라고 하는군요."
"음, 그래요?"
 조 전무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눈치였다.
"박 선생, 내가 지금 그리 갈 테니까 조금 기다려 주시오."
 상훈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은 조 전무는 곧 도착했다. 그는 아무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누군가가 듣기라도 하는 듯이 작은 목소리로 용건을 끄집어냈다.
"박 선생, 지금 평양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소."
"......"
"미군 정보대의 감청에 따르면 인민군의 주요지휘관들이 평양으로 속속 모이고 있다 하오."
"......"
"우리의 분석으로도 주석은 군부의 강경파들과 심한 대립을 보이던 중 일본을 방문하고 있단 말이오. 통상의 경우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오."
 얼마 전 이 기자와 대화했던 내용이었다.
"어쩌면 주석에게는 북한에 돌아가지 못할 사정이 발생할지도 모르오."
"어떤 사정이지요?"
"평양에서 쿠데타가 일어날 경우이지."
"쿠데타가 성공할까요?"
"지금 상황으로 보아서는 일단 쿠데타가 일어나면 성공할 가능성이 높소. 강경파가 주도하는 군부에 대항하기란 쉽지 않을거요."
"쿠데타의 성격은 어떤 것입니까?"
"거두절미하고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주석의 폭압적 독재를 깨뜨리고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사람들의 쿠데타는 아닐 것 같소."
"그렇다면 또다시 북한의 주민들이 고통을 당해야 한다는 얘긴가요?"
"그럴 공산이 커요. 주민들과는 상관없는, 아니 오히려 주민들이 희생되어야만 하는 권력다툼일 것이오."
"못 견디겠군요. 주석이니 군부강경파니 하는 되지 못한 자들 때문에 북한동포들이 끝없이 고통을 겪어야만 한다는 사실이."
 상훈의 가슴은 찢어질 것 같았다. 이 비참한 역사가 언제까지나 반복되어야 하는지 치가 떨렸다.
"시간이 필요할 거요. 정부로서도 답답하지만 나설 수 없는 것은 박 선생도 잘 알지 않소."
"그렇겠지요. 그러니 더욱 답답하군요."
"박 선생, 지금 우리로서는 일본에 와 있는 북한 대표단의 분위기를 포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오. 그들과의 유일한 연결고리는 바로 박 선생이오. 최독준 대장과 접촉해 주시오."

 그러나 최독준 대장은 하루종일 만나지지 않았다.
"총정치국장 동지는 전화를 받으실 수 없습니다."
 주석의 일정에 수행을 하고 있지 않은 것을 확인한 조 전무의 말에 따라 상훈이 호텔로 몇 번 전화를 했어도 대답은 똑같았다.
"아마 대사관에 가 있는 모양이오."
 조 전무는 최독준 대장이 본국과의 연락을 위해 대사관에 가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평양의 사정이 쉽지 않은 것으로 보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만날 것을 거의 포기하고 있던 저녁 무렵 상훈은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박상훈 씨입니까? 잠시 기다리십시오."
 이어서 나온 목소리는 카랑카랑한 이북사투리였다.
"내레 최독준입네다. 의송이레 어데 있습네까?"
 상훈이 간단하게 상황을 얘기하자 최독준 대장은 걱정이 많이 되는 모양인지 만나서 얘기를 들어야겠다고 했다. 
"갸레 어디가 그렇게 많이 아픕네까? 이거이 내가 시간이 워낙 없어놔서 미안하지만 있다가 만찬장으로 한 번 와주시갔습네까? 대사관으로 오시면 차를 대기시켜 놓갔습네다."
 만찬장은 초청받은 사람들말고도 어제 일왕이 베푼 만찬에서의 해프닝 때문인지 기자들로 초만원이었다. 출입이 허락되지 않은 기자들이 입구를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로 상훈이 북한의 요원으로부터 안내를 받고 들어가자 셔터를 누르는 사진기자도 있었다.
"아니, 이거 박 선생 아니오? 어떻게 여길."
 깜짝 놀란 목소리의 주인공은 야마모도 서장이었다.
"초청을 받고 왔습니다."
 상훈이 간단히 설명하자 서장은 재미있다는 웃음을 지으며 농을 던졌다.
"경호감독관으로 나와 있는 중이지만 박 선생을 만나게 될 줄이야 꿈에도 몰랐소. 박 선생 경호는 내가 책임지겠소."
 수상 초청의 만찬은 어제의 해프닝 때문인지 조심스러운 분위기에서 시작되었다. 수상은 으레 왕보다는 한층 깊은 유감을 표시하곤 했던 데다가 어제의 일도 있었으므로 모든 사람의 신경은 수상의 입술에 머물러 있었다. 주석 부처와 잔을 부딪친 수상이 단상에 서자 어제보다도 훨씬 더한 보도의 열기가 밀어닥쳤다. 곳곳에서 카메라의 플래시가 터지고 텔레비전의 조명은 수상의 가벼운 입술 동작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얼굴을 집중적으로 비치고 있었다.

50. 이마무라의 단서

 앞에서 두 번째의 테이블에 북한의 관리들과 같이 앉은 상훈 역시 수상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청각을 곤두세웠다.
"존경하는 북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의 주석과 방일대표단을 맞게 된 것을 본인은 더없는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지난날의 역사를 생각하면 유감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만 지금에 이르러 그 표현상의 문제가 아직도 해결이 안되고 있는 것은 더더욱 가슴이 아픕니다. 어제 귀 대표단의 돌발적 행동에 대하여는 우리도 책임이 지대하다는 것을 느끼며 이에 본인은 빠른시일 내에 국내외 중지를 모아 표현상의 문제를 매듭짓고자 합니다. 이에 대하여 귀 대표단의 깊은 양찰 있기를 바랍니다."
 수상은 매끄럽게 빠져나가는 와중에도 은연중에 북한대표단의 어제 행동에 대하여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기자들은 과연 일본의 수상이라는 생각을 하며 기대가 무산되자 실망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수상의 만찬사가 끝나고 주석의 답사가 시작되자 다시 눈동자를 빛내며 주석의 목소리와 표정에 신경을 집중했다. 그들은 수상의 연설에서 놓친 대어를 반항아 기질이 농후한 이 지도자 동지의 입으로부터 잡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노골적으로 나타냈다.
"이봐 윌리, 저 사이코의 백만불짜리 입을 놓치지 마."
"괜찮아. 녹음기를 다섯 개나 가지고 왔으니까."
 좌중의 이런 기대를 아는지 모르는지 주석은 예의 그 도발적인 자세로 단상에 섰다.
"존경하는 총리대신 각하, 본인은 귀 정부와 국민의 환영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특히 어제의 유감스런 사태에 대한 각하의 깊은 관심과 약속에 대하여 본인은 한반도의 칠천만 조선민족과 더불어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주석의 답사 역시 수상의 송사에 화답하는 형식이었다. 아마 사전에 실무자들간에 깊이 조율된 만찬사일 것이었다.
"다만 하나 본인이 우려하는 것은......"
 이 대목에서 주석의 고개가 들리며 눈은 좌중을 훑었다. 순간 양국 관리들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읽어야 할 종이로부터 눈이 떠났다는 것은 바로 주석 자신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경제적 신용으로는 세계 제일이라 할 수 있는 귀국이 유독 과거의 사과나 배상에 대해서는 유난히 인색하고 누차에 걸쳐 약속을 어기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대목에 이르자 모든 사람의 호흡이 정지된 듯했다. 특히 기자들의 신경은 곤두설 대로 곤두섰다. 드디어 기다리던 장면이 연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상훈 역시 숨을 죽였다. 자신도 모르게 주석을 염려하는 기분이 드는 것을 느꼈다. 어제의 퇴장만으로 족한 것 같은데 오늘 다시 극단적 행동을 보인다면 주석은 정말 세계의 비웃음거리가 될지도 몰랐다.
 그러나 다음 순간 제발 그냥 넘어갔으면 하고 바라던 상훈의 가슴속에서 세찬 의문이 치고 올라왔다. 어쩌면 주석이 옳은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짧은 순간이지만 상훈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 생각했다. 적당히 넘어갔으면 하고 바라는 자신이 옳은지 외교관례를 따르며 편하게 넘어가는 것을 한사코 거부하고 엉뚱하나마 하고 싶은 말을 토해내는 주석이 옳은지 판단이 잘 서지 않는 것이었다.
 상훈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궁금한 마음이 생겨 고개를 돌려 좌중을 살폈다. 그러나 사람들은 거의 표정을 나타내지 않은 채 주석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리던 상훈의 눈에 낯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야마모토 서장이었다. 경호관리의 목적으로 온 그조차도 주석의 만찬사에 온 신경을 뺏기고 있다고 생각하며 다시 눈길을 단상의 주석에게 돌리면서 멈칫했다. 어딘지 모르게 낯선 느낌이 왔던 것이다. 야마모도 서장의 얼굴이 늘상 봐오던 평범하고 친숙한 것이 아니었다. 그도 주석의 다음 말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서 그러려니 했지만 단지 그렇게 여기기에는 표정이 너무 굳어있었다. 오른쪽 복도에 서서 벽에 등을 붙이고 테이블에 눈길을 주고 있는 다른 경호원들과는 달리 주석에게 온 신경을 모으고 있는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 보였다. 상훈은 이런 느낌이 왜 오는가 싶어 서장에게로 재차 눈길을 보내다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토했다. 갑자기 머리를 흉기로 세차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왔던 것이다. 머리가 텅빈 것 같은 상태에서 이마무라 주임의 얼굴이 야마모도 서장의 그림자 위로 스쳤다.
"박 선생님, 중요한 사실을 떠올렸습니다."
 갑자기 왜 이 말이 생각나는지 몰랐다. 자신이 이제껏 추측하려던 그 중요한 사실이 야마모도의 긴장된 얼굴을 보는 순간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었다. 언젠가 주임은 형사들이 매일 순찰을 하는데도 쥰이찌가 감시당하고 있었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에 대해 매우 의아하게 생각했었고 그 점은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주임은 그 점을 파고들지 않았을까. 상훈의 뇌리에 주임의 친구들이 하던 말이 생생히 떠올랐다.
"깜짝 놀랐던 주임이 초인종을 누른 사람이 동료형사들인 것을 알고는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었어요. 그러더니 가서 박 선생께 전화를 했거든요."
 왜 그랬을까? 왜 방문객이 동료형사들임을 알고 중요한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았을까. 혹시 주임은 그때 형사들도 감시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닐까.
 '아, 그랬구나. 서장이 형사를 시켜 쥰이찌를 감시했다면?'
 형사들은 내용도 모르고 쥰이찌의 감시자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을 것이다. 쥰이찌만이 느끼는 공포, 그만이 느낄 수 있는 감시의 분위기. 그런 것은 본인 외에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겠지만, 어느날 이마무라 주임은 자신의 집에 찾아온 동료형사들의 초인종 소리에 놀랐고 형사들도 감시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주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쥰이찌의 감시자가 되어 있었던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형사를 감시자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경우. 그것은 바로 서장이 쥰이찌를 위협하는 경우뿐일 것이다. 그 경우 쥰이찌에게 형사들이란 다만 야마모도의 부하일 뿐이었다. 
 현장에서 책 뒷장의 종이 한 장만 떼어갈 수 있을 정도로 쥰이찌를 샅샅이 감시하던 사람. 그럴 수 이는 사람은 바로 야마모도 서장밖에 없었다. 이렇게 생각하자 모든 추리가 정확히 들어맞았다. 어느 장면이든 야마모도를 넣으면 해결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야마모도가 앞장서서 연구소를 의심하던 것이나 연구소의 수색에 그렇게나 열을 띠던 것도 지금 생각하니 모두 교묘한 연극이었다. 야마모도는 이미 연구소와 밀접한 연관을 갖고 와따나베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는 하수인임에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그런 야마모도가 이 자리에 나타난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하던 상훈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테러〉
 야마모도가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은 테러를 위한 것이란 말인가. 상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설마 자국을 방문한 외국의 국가원수를 경찰서장의 신분으로서 살해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설마 하는 생각 사이로 세 사람의 죽음이 떠올랐다. 에이지, 마쓰모도, 이마무라. 이 사람들도 모두 죽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설마 하고만 있을 것인가. 상훈의 뇌리에 며칠 전에 조 전무가 보여 주던 쪽지가 떠올랐다.
 〈일조수교 결사반대〉
 조 전무는 편집증이 있는 자의 글씨라 하지 않아던가. 상훈은 야마모도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다시 한 번 쥰이찌의 죽음 이래로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더듬었다. 조 전무가 준 쪽지와 관련해서도 야마모도는 가장 유력한 용의자였다. 본래 연구소의 멤버가 아닌 야마모도만이 부주의로 메모를 유출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그 쪽지를 쓴 임자가 야마모도라면 그가 여기에 와 있는 이유는 주석의 암살일 가능성이 많았다. 골수 우익인 그에게 어제 일왕이 당한 모욕은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일이 아닐것이었다.
 상훈의 생각이 이어지는 동안 야마모도는 서서히 움직였다. 상훈은 몸이 달아올랐지만 상황은 미묘하여 자신이 어떤 행동을 보일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추리가 맞다는 보장이 없었다. 검증을 해야 할 것이지만 방법이 없었다. 보통사람과는 달리 야마모도는 경찰서장이기 때문에 총을 소지하고 있을 수 있는 신분이고 따라서 몸을 수색하여 범의의 유무를 판단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몸이 달아오르고 머리가 후끈거렸지만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만약 지금이라도 야마모도가 앞으로 나가 주석을 쏘면 그걸로 끝이었다. 아무도 야마모도를 저지할 수 없을 것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땀이 흘렀다. 입술이 타오르고 비지땀이 났지만 자신의 추리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이 자리에서 만약 자신이 실수라도 한다면 주석까지도 아니 모든 한국인이 따라서 우스운 사람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냥 있을 수 만도 없는 일이었다.
 '아, 그렇지.'
 속수무책의 이 순간에 상훈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이마무라 주임은 시야쿠쇼에 가지 않았던가?'
 야마모도가 사건의 배후에 있다고 생각한 주임은 다음날 아침 바로 시야쿠쇼에 갔다. 이유는 확인을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었다.
 〈쥰이찌의 전입일자.〉
 상훈은 주임을 처음 봤던 때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급히 더듬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수도 없이 많은 생각이 상훈의 뇌리를 전광석화처럼 스쳐지나갔다. 그러나 그 중 상훈의 뇌리에 걸리는 말이 하나 있었다.
 "야마모도 서장님은 닛꼬에 부임해 있을 당시 쥰이찌 씨로부터 전화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제 은퇴도 하고 했으니 어디 좋은 곳이 없느냐고 해서 닛꼬로 내려오라고 했다 합니다."
 상훈은 왠지 모르게 숨이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 말이 쥰이찌의 전입일자와 연결되었다.
 주임은 전입일자를 알아보기 위해 시야쿠쇼에 갔다. 쥰이찌가 전입해온 날짜와 서장이 부임해온 날짜를 비교하여 서장의 말과는 달리 쥰이찌가 이사한 후에 서장이 부임했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쥰이찌를 감시하고 위협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속수무책의 이 순간에 상훈의 머리에 떠오르는 방법이 있었다. 상훈은 여전히 야마모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한국기자들이 있는 자리로 걸어갔다.
"미안하지만 휴대폰을 가진 분이 있습니까?"
 주재기자로 보이는 사람이 역시 눈을 주석의 좌석으로부터 떼지 않은 채 품속에서 휴대폰을 꺼내주었다. 상훈은 닛꼬에 있는 이마무라 주임의 집 다이얼을 돌렸다. 부인 미야꼬가 받았다.
"박상훈입니다. 지금 대단히 급한 상황이니 최대한 빨리 확인해 주십시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쥰이찌의 전입일자를 확인해주십시오. 확인되시면 휴대폰으로 전화를 해주십시오."
 상훈은 기자에게 물어 휴대폰의 번호를 일러줬다. 그리고는 닛꼬 경찰서 경무과에 전화를 해서 야마모도 서장의 부임일자를 확인했다. 1994년 7월 17일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부인의 전화였다. 상훈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야마모도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야마모도 역시 홀 안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주석의 거동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모습이었다.
 모두가 온 신경을 단상의 주석에게 쏟고 있을 때에 야마모도의 오른손이 스르르 움직였다. 손은 마치 흐느적거리는 뱀처럼 서서히 미끄러져 가슴을 타고 겨드랑이 밑으로 들어갔다. 상훈은 당황했다. 지금 이 극적인 순간에 자신이 야마모도를 덮쳐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만약 야마모도의 동작이 별 뜻이 없는 것이라면, 아니 별 뜻이 있어도 경호요원인 그의 범의를 입증하지 못할 것이므로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이지만 자신은 일대소동을 일으키고 체포되어 나갈 것이었다. 자신은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주석이 남북을 막론하고 한민족을 대표하여 일본에 중요한 질문을 던져놓고 있는 마당에 모든 상황은 우스꽝스런 것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상훈의 입술이 타들어갔다. 번연히 알면서도 앉아서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확인이 되지 않는다면 설사 당하더라도 경거망동해서는 안되는 순간이었다. 홀 안의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야마모도의 동작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사람들은 끝없는 침묵을 유지하면서 주석에게만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경호원들은 자신들의 관리자인 야마모도에게 신경을 쓸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하고 좌중의 인물들에게만 감시의 눈길을 번득이고 있었다. 상훈의 눈에 야마모도의 오른손이 양복 주머니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모양으로 보아 주머니 안의 어떤 물건을 움켜쥐는 것으로 여겨졌다. 권총일 것이었다. 그와 주석과의 거리는 불과 이십 미터.
 '오, 하느님.'
 상훈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며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이제 총만 꺼내면 모든 것은 끝이었다. 심장이 조이고 피가 역류하는 것 같았지만 자신으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확인이 안되면 아무것도 해서는 안된다.'
 상훈은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눈꺼풀로 닫힌 망막에는 끝없는 암흑만이 있었다.
"당연한 책임배상을 마치 동냥주듯 해온 귀국의 행태는 결국 남조선의 대통령으로 하여금 정신대를 돈으로 배상하라고 요구하지 않겠다는 결단을 내리게 만들었습니다. 나는 그분의 정신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주석의 연설은 거의 끝이 나고 있었다. 이제 일 분도 안되어 연설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상훈은 머리꼭대기까지 피가 솟구치는 기분이었다. 이제 불과 몇십 초 혹은 몇 초 후면 좌중의 깊은 침묵은 끝이 날 것이었다. 아수라장이 벌어지고 피가 튈 것이었다. 주석은 역사의 목소리를 남겨놓고 만찬장의 차디찬 제물로 변할 것이었다. 불현듯 수없이 많은 한국인의 얼굴이 주석의 얼굴에 실루엣처럼 피어오르고 그들이 입을 모아 외쳐대는 고함이 상훈의 귀에 들리는 듯하였다.
 소리.
 그것은 억울하게 숨져간 한국인들의 소리였다. 헐벗고 순박한 모습으로 차디찬 총칼 앞에 모든 것을 빼앗긴 반도인들의 소리였다. 그리고 이제 그 희생자들을 대표한 주석이 다시 일본인의 손에 쓰러질 것이었다. 상훈의 뇌리에 자신이 이들을 지켜야 한다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울려왔다. 그것은 자신이 한평생 몸을 바쳐 연구할 역사의 소리였다. 이 소리에 상훈은 감았던 눈을 부릅떴다.
 망막을 열자 맨 처음 들어온 야마모도의 모습은 한 걸음 앞으로 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상훈은 마음으로부터 울부짖었다. 파도와 같은 끝없는 긴장을 견딜 수 없어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었다.
 이때였다.
"삐리리리―"
 전화벨이었다. 상훈은 진땀이 고인 손으로 스위치를 올렸다.
"박 선생님, 94년 6월 30일이에요."
 기나긴 침묵에 질려 있던 모든 사람들의 눈과 귀가 전화벨 소리에 집중되었다가 다시 용수철처럼 튀어오르는 한 청년의 고함소리에 집중되었다.
"엎드려!"
 고함이라기보다는 비명이었다. 국가원수에 대한 존칭도 경칭도 없는 그저 한 인간의 단말마와도 같은 비명이 홀에 울려퍼지는 순간, 사람들은 품에서 권총을 빼드는 건장한 오십대의 메마른 몸짓을 보았다. 한 청년이 오십대를 덮쳤다. 오십대의 격렬한 몸짓이 달려든 청년을 팽개치고 아직 어안이 벙벙한 사람들 사이를 뚫고 앞으로 내달았다. 청년은 벌떡 일어나 오십대의 다리를 붙잡고 쓰러졌다. 오십대의 권총이 청년의 머리를 겨누고 격발되기 직전 경호원이 달려와 권총을 발로 찼다. 권총이 땅에 떨어지자 순간적으로 모든 것이 글러버렸다는 것을 깨달은 오십대의 전력을 실은 주먹이 모로 누운 청년의 허리를 강타했다. 청년은 숨이 끊어지는 듯한 신음을 내뱉으면서 정신을 잃고, 오십대는 재빨리 양복 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어 자신의 가슴을 찔렀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아무도 손을 쓰지 못했다. 피가 흥건한 가운데 쓰러져 있는 야마모도와 상훈에게 경호원들이 몰려들었다.

51. 주석의 결단

 다음날 아침 상훈은 뜻밖의 방문객을 맞았다.
"계십네까?"
"누구시죠?"
"지도자 동지레 박 선생님을 만나고 싶어하시기에 모시러 왔습네다. 시간이 있갔습네까?"
북한의 외교부 부부장이 직접 온 것으로 보아 주석은 상훈에게 깊이 감사하는 모양이었다. 상훈이 막 나가려고 하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조 전무였다.
"박 선생, 푹 쉬었소?"
"네. 덕분에요."
 상훈은 조 전무의 목소리를 듣자 단순한 안부인사 이상의 무엇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박 선생, 지금 평양의 사태가 급박해진 것 같소. 혹시 최독준 대장을 만나러 가면 가급적 신경을 곤두세우고 그들을 살펴주었으면 해서 전화드렸소."
"그렇잖아도 지금 북한대표단의 숙소로 가려고 하는데 급박한 사태라면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확실친 않아요. 평양시내에서 부대의 이동이 포착되고 있소."
"알았습니다."
 상훈은 조용히 전화를 끊었다.
 
 주석을 만난다는 의미를 곱씹으며 숙소인 프린스호텔에 도착한 상훈은 외교부장의 영접을 받았다. 노련한 외교부장은 여유 있는 모습으로 상훈을 맞이했으나 표정의 한 구석에는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기색이 엿보였다.
"지도자 동지께서는 박 선생의 헌신적인 행위에 대해 깊은 감사를 표했습니다. 우리 공화국의 훈장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기다리는 동안 역시 외교관의 면모가 풍기는 사십대 후반의 한 사나이가 얼굴에 웃음을 띠고 말했다. 그러나 이 사나이는 상훈이 제법 오래 기다리게 되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외교부장이 들어간 문에 연신 눈길을 보냈다.
"바쁘신 모양이죠?"
"네, 하지만 박 선생님을 꼭 만나겠다고 어서 모셔오라고 지시하셨는데......"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닙니까?"
 상훈이 떠봤지만 사나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약간의 시간이 더 지나서야 외교부장이 밖으로 나왔다.
"기다리시게 해서 미안합네다. 들어가시죠."
 커다란 사무실과 응접실이 붙어 있는 로얄 스위트룸의 화려한 분위기 한가운데 회색 인민복을 간소하게 차려입은 주석이 소파에 앉아 있다가 상훈이 들어오자 활짝 웃으며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상훈은 그가 격식을 싫어하는 성품의 소유자라고 생각했다.
"여어, 박 선생. 어서 오시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오."
"반갑습니다."
"어디 다친 데는 없소?"
"없습니다."
"이거 내가 생명의 은인에게 결례가 심합네다. 자, 이리 앉으시오."
 중키 혹은 약간 작은 키에 퉁퉁한 모습의 주석은 사진에서 볼때의 날카로운 모습에 더하여 상당히 들떠 있는 인상을 주었다. 상훈은 외교부장의 얼굴에 보이던 일말의 불안감이 주석의 얼굴에도 배어 있는 것을 보았다. 여비서가 차를 날라오자 주석은 상훈에게 권하며 짐짓 유쾌한 표정으로 이것저것 물었다. 그는 상훈이 동경대학에 유학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모양으로 상훈을 수재라 일컬으며 칭찬했다.
"어제 만찬장에서 나를 암살하려던 그자의 배후에는 어떤 놈들이 있을까?"
"경찰이 밝혀낼 겁니다."
"보나 안 보나 극우단체인지 뭔지 하는 놈들이 있을 거야. 그놈들 내가 만찬장에서 할말 한 것 가지고 자기네 천황이 모욕을 당했네 어쩌네 하는 모양인데 전쟁에 대해 사과 한 마디 않고 조선 인민들을 모욕한 것은 눈에 안 보이는 모양이야."
"일본인들은 아시아의 다른 나라에 대해 우월의식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갖고 있지. 그러나 재미있는 건 말이지, 세계의 인민들이 모두 일본에 대하여 두려워하고 우러러보지만 우리 조선 인민들만은 일본을 우습게 본다는 점이오."
"그건 왜 그렇습니까?"
"아마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정신적 전통인 모양이오."
"고대에 문화를 전승해 주었던 사실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인지도 모르겠군요. 서구의 학자들 중에는 앞으로의 세계는 일본인보다 오히려 우리 한국인들에게 맞다는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
"몰개성적 산업사회에서는 일본인들과 같은 집단주의적 사고가 효율적이지만 앞으로 다가올 철저한 개성적 사회에서는 한국인들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이 우수한 것이 더 낫다는 얘기입니다."
"일리 있는 얘기구만."
 주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노크소리가 들리더니 다급한 표정의 보좌관이 뛰어들어왔다. 그는 급히 무언가를 말하려다 상훈이 있는 것이 그제서야 보였는지 주석의 옆에 서서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주석님, 급히 말씀드릴 것이 있습네다."
"박 선생, 미안하지만 좀 기다리시라요."
 주석은 상훈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옆방으로 들어갔다. 잇따라 들어온 외교부장의 허둥대는 목소리를 들으며 상훈은 예삿일로는 외교부장이 저리도 당황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외교부장의 보고에 곧이어 주석의 격앙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을설이는 뭘하고 있나."
 다시 외교부장이 낮은 목소리로 뭐라고 한참 설명했다.
"측근이라는 놈들이 모두 나를 배신했다는 말인가."
 주석의 목소리가 처음과는 달리 힘을 잃고 떨려나왔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비관적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총정치국장에게 계속 군부와 접촉해 보라고 하시오."
 외교부장이 급한 발걸음으로 나가는 것과 동시에 대기하고 있던 여비서가 방에서 나오는 주석에게 무언가를 보고하고 나갔다. 상훈은 급한 시기에 자신이 응접실에 앉아 있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했지만 주석이 기다려 달라고 부탁한 상황에서 말없이 나가기도 뭣하여 그냥 앉아 있었다. 안에서 주석이 전화를 받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조용히 얘기했지만 뭔가가 잘 풀리지 않는지 대화가 거듭될수록 말소리가 커졌다.
"글세, 위험하다는 것을 누가 모르갔소? 다만 사태의 진전을 좀더 지켜봐야 한단 말이오."
 다시 저쪽의 얘기를 기다렸다가 주석의 말은 계속되었다.
"비행기는 공항에 이십사시간 대기상태로 두면 되지 않소?"
 주석은 단정적으로 전화를 끊고는 밖으로 나왔다. 상훈에게는 애써 웃는 얼굴을 지어보였으나 조금 전과는 달리 초조하고 불안한 기색이 얼굴에 역력했다. 상훈이 가겠다고 말을 하려 했으나 주석은 몇 번 심호흡을 하고 안정을 되찾으려는 듯 눈을 감았다. 그의 뇌리에는 주석궁에서 만났던 매콤스키 의원의 모습이 떠올랐다. 
"주석각하, 얼마 전의 폭동은 이제 곧 전국으로 퍼질 것입니다. 개방의 맛을 안 주민들이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또한 군부의 반란도 필연적입니다. 우리의 정보에 의하면 주석각하의 일본 방문시 거사를 결의했다고 합니다. 둘 중 어느 것도 막을 수 없습니다."
 매콤스키는 미국정부의 신뢰를 보이기 위해 일부러 자신을 찾아왔었다.
"방법은 일본 방문 후 망명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합중국으로 망명을 하십시오. 가지고 오실 수 있을 만큼의 돈을 갖고 오십시오. 우리가 도와드릴 것입니다. 기회는 그때밖에 없습니다. 루마니아의 차우세스쿠를 기억하십시오."
 매콤스키의 마지막 말은 주석의 머리에 대포를 쏜 것 같았다. 가장 민감한 부분을 건드려왔던 것이었다. 어제까지도 대통령이었던 차우세스쿠는 불과 하루 만에 성난 군중에 의해 권좌에서 끌어내려져 생을 마치고 말았다. 늘 생각해 왔던 것이지만 자신도 잘못되면 그의 경우와 흡사할 가능성이 많았다. 믿는 것은 군부였지만 끊임없이 들려오는 쿠데타설에 하루도 편안하게 있을 수 없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곤 하는 일이 잦아지더니 급기야는 불면증이 생겼다. 오랫동안 번민하던 주석이 결정을 내린 것은 흑룡강성에 주둔하고 있는 중국동부군 사령관이 평양에 왔다가 자신을 찾아오지 않고 돌아가버린 일이 있고서였다. 오극렬은 그가 주석궁을 방문하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꽉 짜인 일정 때문이었다고 변명을 했지만 도대체 그것이 이유일 수는 없었다. 머리가 비상한 주석은 그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 알 수 있었다. 흉조였다. 그후 주석은 미국인 클라크와 만나는 일이 잦아졌다. 미국은 평생이 보장되는 안전한 방법을 제시했다. 
"일본 방문이 끝나면 부인과 측근만을 데리고 우리 비행기를 타시면 됩니다."
 주석은 눈을 떴다. 최종 결정은 일본 방문을 끝낸 후 내려 했지만 이제는 그럴 시간이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결론을 내려야만 하는 것이었다. 쿠데타가 성공한다면 물론 돌아갈 수 없는 일이지만 실패한다면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일본에서 사태의 진전을 주시하다가 실패의 조짐이 보이면 그때 돌아가야 할 것인가. 그러나 자신에게는 돌아가서의 상황도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 자신의 측근들이 거의 가담하여 쿠데타를 일으킨 마당에 쿠데타가 제압된다 하더라도 거센 군부의 입김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은 꼭두각시로 전락해 있다가 머지않아 비참한 최후를 맞을 공산이 컸다.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으로서는 쿠데타의 결말이 어떻게 날 것인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급박한 순간이었지만 주석은 어쩐지 자신을 테러로부터 지켜준 남조선의 청년을 보내고 싶지않았다.
"박 선생, 어젯밤 공화국에서는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소. 지금 정확한 정보가 들어왔는데 나의 측근들이 대거 가담한 쿠데타가 진행중이오."
 상훈은 주석이 왜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하는지 몰랐다. 그의 괴팍하다는 성격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었던가.
 주석은 잠시 상훈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이을 열었다.
"박 선생은 내가 몰락할 것 같소?"
"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갔디."
 주석의 비관적 목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노크도 없이 군복을 입은 한 사람이 황급히 들어왔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주석에게 경례를 붙이고는 무슨 말인가 하려다가 상훈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괜찮소, 그냥 말하시오."
"주석 동지, 중국대사관에서 오는 길입네다. 상황에 큰 변수가 생겼습네다."
"변수라니?"
"대규모 민란이 터졌습네다."
"민란?"
"쿠데타군이 평양시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시민에게 발포를 했습네다. 이에 대한 저항이 대규모 폭동으로 번졌다고 합니다. 학생과 시민들은 자유를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쿠데타군은 무자비한 진압을 하고 있습네다."
"......"
 주석은 아무런 말이 없이 눈을 감았다.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머리를 소파에 기대고 한참이나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상훈은 그의 얼굴에 형언키 어려운 온갖 표정이 어려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역사적 순간이었다. 해방 후 반 세기가 넘도록 한반도의 북쪽을 지배해오던 독재정권의 말로가 다가온 것 같았다. 착 가라앉은 주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최 동지는 나가 있으시오."
 뜻밖이었다. 주석은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과 조금 더 있고 싶소."
 주석은 일어나 홈 바에서 술을 골랐다.
"박 선생은 무엇을 마시겠소? 스카치, 꼬냑, 보드카. 얘기를 하시오."
 상훈은 주석의 날카롭고 예민한 성격이 측근들에게 배신을 당하자 허무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 이 순간 술을 마실 만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이 역사적 순간에 그와 같이 있다는 것이 커다란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같은 걸로 하고 싶습니다."
"고맙소."
"주석님, 지금부터 하실 일이 많으실 텐데요."
"모두 헛된 일이오. 본국과 연락도 되지 않는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갔소. 러시아 대사관이나 중국 대사관에 가서 반란을 중지하라고 본국에 전화를 해야 하갔소? 어차피 소용없는 일들이오."
 주석은 역시 듣던 대로 괴팍했다. 불타는 로마시를 보면서 시를 읋었다는 네로와 견줄 바는 아니겠지만 자신을 축출하는 쿠데타를 당하고 있는 이 순간에 생명의 은인과 같이 있고 싶다고 하는 것이나 분위기에 맞는 술을 고른다는 것은 보통 사람이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그는 발렌타인 삼십 년생에 말리부초코를 타고 얼음을 집어넣은 칵테일을 만들어왔다.
"생명의 은인을 위한 축배를 듭시다."
 상훈은 잔을 부딪치며 얼굴이 거의 맞닿는 위치에서 주석의 표정을 관찰했다. 일인자의 장남으로, 그리고 그 자신이 일인자로만 커온 오만함과 태어나서부터의 정해진 운명을 따를 수밖에 없었던 고독함이 이 급박한 순간 그의 얼굴에서 교차하고 있었다. 상훈은 주석이 이 순간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것이 어느 만큼은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박 선생."
"네."
"남조선 사람들은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소?"
 역시 뜻밖의 질문이었다.
"솔직하게 얘기해도 됩니까?"
"그렇소. 목숨의 은인으로부터 무슨 소리를 못 듣겠소?"
"우리의 역사를 무겁게 짓누르는 반민족적 도배의 수괴라고 생각합니다. 주석님이 집권하는 한 북한의 동포들은 행복할 수가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렇갔디."
 주석은 씁쓸하게 웃었다.
"박 선생도 마찬가지 생각이오?"
"크게 어긋나지는 않겠지요. 다만 언젠가 매우 인상적인 사진을 봤던 것이 잊히지 않는군요."
"인상적인 사진이라구?"
"네. 어느 지방 기업소를 현장지도하고 있는 사진이었는데 가난하고 초라해 보이는 노동자들에 둘러싸여 다같이 웃고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그들과 같이 무언가를 이루어 보고자 애쓰는 모습이 담겼던 사진이었지요. 무엇보다도 그 순진무구한 표정의 노동자들과 팔짱을 끼고 경의 없이 웃는 모습이 좋았습니다."
"그랬소?"
 주석은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비록 쿠데타를 당하여 백척간두에 선 운명이 되었지만 새로운 느낌의 이 남한청년에게는 어쩐지 좋은 인상을 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인간에게는 그런 측면이 있는 법이었다.
"박 선생, 역사란 무엇이오?"
 또다른 뜻밖의 질문이었다.
 상훈은 술잔을 놓고 주석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았다. 거기에는 번민과 고뇌를 안고 길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한 사람의 자포자기적인 눈빛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떻게 보면 가장 급박한 순간에 하찮은 것으로부터도 무엇인가를 얻고 싶어하는 처절한 기대가 배어 있는 눈빛이기도 했다. 상훈은 이미 주석이 권력을 놓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권력자는 자신의 종말이 가까웠다고 생각할 때에야 비로소 역사를 생각하는 법이었다. 주석은 지금 자신이 데리고 있는 어떤 부하도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깨닫고 있었다.
"역사는 일기장이나 거울과 같은 것입니다."
"재미있군, 역사가 일기장이나 거울과 같은 것이라구. 그도 그럴 법하구만."
 주석은 웃었다. 싱거운 웃음 같기도 했으나 무섭도록 깊이 공감하는 처절한 웃음 같기도 했다. 상훈은 주석이 내면적으로 깊이 흔들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인생을 한 번 왔다가면 그만인 것으로 보지만 역사의 눈은 그렇지 않습니다."
"역사에서는 어떻게 본단 말이오?"
"인간은 영원히 살아 있습니다. 육신은 가지만 그가 살았던 인생, 그의 이름, 그 존재의 의미는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상훈은 자신이 일반적인 얘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석이 이말에 크게 흔들리는 듯한 인상을 느꼈다.
"그러나 인간은 현실의 필요와 욕심에 따라 살 수밖에 없지 않소?"
"그렇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나약합니다. 그러나 그 나약한 인간이 역사의식을 가지면 죽음도 두려워 않는 강철같은 인간이 됩니다. 자신의 가치관에 반하는 일에 대하여는 목숨을 던지며 반대합니다. 비겁하게 사느니 기쁘게 죽음의 대열에서는 것입니다."
 주석은 눈에 띄게 동요하고 있었다. 상훈은 주석이 왜 이렇게나 동요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어차피 외국을 방문중에 쿠데타는 발생한 것이고 일본에서 사태를 주시하다가 상황에 따라 처신을 결정하면 될 것이었다. 권력의 속성을 잘 아는 것으로 보이는 주석은 그래서 여유롭게 자신을 상대로 술을 마시며 마음을 달래고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상하게도 주석은 역사의 일반론에 지나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이유를 곰곰 생각하던 상훈은 아까 주석이 받던 전화가 예사롭지 않던 것을 떠올렸다.
 '주석은 아까 누구와 통화를 했을까. 그리고 공항에 비행기를 이십사시간 대기상태로 두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한 것은 무슨 얘기일까.'
 분명 이상한 점이 있었다. 어느 것이나 자신의 수행원이나 부하에게 할 얘기가 아니었다. 게다가 주석은 모든 상황을 부하를 통해서 보고를 받고 지시를 내리곤 하였다. 그런데 그 전화는 직접 주석에게로 온 것이었다. 도대체 누군데 밖에서 전화로 주석을 찾을 수 있으며 주석은 순순히 전화를 받았을까. 갑자기 상훈의 뇌리에 떠오르는 단어가 하나 있었다.
 〈망명〉
 그렇다. 그것은 바로 망명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런 내용의 대화를 외부인과 할 리가 없는 것이고 지금 이렇게 흔들릴 수 없는 것이었다. 망명을 생각하고 있다면 주석은 이미 평양을 떠나기 전에 쿠데타의 조짐을 잀었을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신속하게 망명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는 없는 것이었다.
 상훈은 주석에 대한 실망감이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생명을 구해서, 아니면 최고권력을 잃고 떨어지는 모습이 안되어서, 혹은 가까이서 본 모습이 인간적이어서 그런지 잠시 느꼈던 애정이 봄볕에 눈 녹듯 사라지고 마는 것이었다. 한 나라의 최고지도자가 망명을 준비해서 외국을 방문한다. 주석의 미묘한 입장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만은 아니었으나 왠지 비감한 기분과 더불어 북한의 주민, 나아가서는 한반도에 사는 모든 사람이 비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자 가슴에 울컥 치미는 것이 있었다.
"주석님, 한반도의 역사란 왜 이래야만 합니까."
 상훈의 비감한 목소리에 주석은 흠칫 놀라는 표정이었다.
"무슨 얘기요?"
"지도자가 없지 않습니까. 역사의식을 가진 지도자라곤 그림자도 찾을 수 없지 않습니까?"
"나를 두고 하는 얘기요?"
"그렇습니다. 비단 주석님뿐만이 아니라 남북한의 모든 지도자가 다 그래왔단 말입니다."
"......"
"북한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는 어릴 때 계백장군의 최후를 학교에서 배웠습니다. 황산벌 싸움에 나서기 전 장군은 부인과 자식들을 먼저 베었습니다."
 주석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지도자란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의 일거수 일투족에 온 국민의 운명이 좌우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제껏 불법적 쿠데타를 당하여 우리의 지도자들이 보여온 행태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
"장면 수상은 쿠데타가 나자 수녀원으로 들어가 삼 일을 숨었습니다. 최규하 대통령은 군사반란자에게 항변 한 번 하지 못하고 대통령 자리를 넘겨주었습니다. 그것이 이 땅의 지도자들이 보여온 행태입니다. 그들의 이렇듯 비겁한 행동의 대가로 수도 없는 선량한 국민들이 죽고 고통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
"그리고 이제 북한에 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역시 죄 없는 양민이 죽고 있습니다. 지난 오십 년간 주석님의 아버지와 주석님만을 하늘로 믿고 살아오던 사람들이 죽고 있습니다. 사진에서 보았던 그 순진무구한 노동자들이 죽고 있단 말입니다. 그들은 오로지 주석님만을 믿고 굶주림을 참고 살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렸던 배부른 세상이 오기는커녕 권력을 탐하는 군인들에 의해 학살당하고 있습니다."
 주석의 달아올랐던 얼굴이 점차 창백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글라스에 반이나 차 있던 위스키를 한숨에 들이키고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이 한 마리 사슴처럼 고독해 보였다.
"그런데 지금 주석님은 무엇을 하고 계신 겁니까?"
 가슴에 맺혔던 말을 남김없이 토해낸 상훈 역시 술잔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비웠다. 독한 액체가 목젖을 타고 흐르며 텅빈 가슴에 새로운 혈기를 북돋웠다. 무언가를 토해내고 싶은 욕망이 불쑥 솟아올랐지만 다음 순간 상훈은 입을 꽉 다물고 말았다. 창백하던 주석의 얼굴에 질릴 정도로 엄숙한 결의가 서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후후, 박 선생. 조선의 인민들이 이제껏 버림만 받고 살아왔다고 그랬소? 그래서 조선의 역사가 비참하다고 그랬소?"
 주석의 표정이 묘하게 변하고 있었다.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입에서는 이상스런 느낌을 주는 차가운 웃음이 배어 나왔다. 그러나 그 웃음은 이내 사라지고 허탈한 표정과 비장한 기색이 교차했다. 상훈은 주석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그렇게도 비겁하게 목숨을 이어가는 꼴을 지금 보이고 있소?"
"......"
"내가 지금 인민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다고 말했소?"
 상훈의 복받치는 감정이 목소리에 담겨져 나왔다.
"바로 그렇습니다. 주석님은 지난 반 세기를 이어온 주석님 부자의 추악한 허위를 온 세상에 드러내고 이제 하찮은 목숨을 도모하기 위해 한민족을 영원히 부끄럽게 만들 그 더러운 망명을 하려 합니다."
 주석의 얼굴은 경련을 일으키며 추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여러 번이나 잔을 채워 입에 털어넣고는 눈을 감아다. 현실의 모든 것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술기운이 퍼지는 중에도 너무나 선명하게 살아나는 한 얼굴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네 동생을 버리면 안돼."
 팔십이라는 고령에 낳은 아이를 품에 안은 아버지의 애절한 당부와 함께 이제 겨우 다섯 살이 된 어린 아이의 천진한 얼굴이 뇌리에 살아나고 있었다. 그 아이를 데리고 오지 못한 것은 천추의 한이 될 것이었다. 이제껏 모든 것을 이해해준 아버지였지만 그 아이를 두고 왔다면 저승에서도 아버지는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것 같았다. 주석은 순간 사방이 꽉 막힌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어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이 마치 장난과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돌연 주체할 수 없는 허무감에 휩싸였다. 권력은 무엇이고 쿠데타는 무엇이며 망명이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아버지가 신신당부한 동생을 버리고 인민을 버리고 자신은 무엇을 위해 어디로 가려는 것인가.
 자신이 이리도 못난 인간이었던가 하는 비관이 공허한 의식을 가득 채우고 들었다. 최정상에서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는 고통은 감당하기 힘들었다. 모든 것이 허무하다는 생각에 주석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자신이 일본에 온 것도 부질없는 짓이었다. 일본에 와서 무엇을 했단 말인가. 일본의 지도자들을 만나 우호협력을 약속하고 파티에 참석하고 만찬사를 하고 테러를 당할 뻔했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하지만 이미 허무의 심연에 빠진 주석은 이런 것들에게 아무 의미도 찾을 수 없었다. 상황이 바뀌면 의미도 바뀌어 버리는 덧없는 것들이었다.
 이런 생각에 빠진 주석의 뇌리에 돌연 매우 낯설고 특이한 무슨 말인가가 떠올랐다. 무엇인가 변치 않는 것에 대한 무슨 말인가를 듣지 않았던가. 술기운이 퍼져 몽롱해져 가는 의식을 추스리고 기억을 더듬자 떨쳐버릴 수 없는 허무감의 한 끝을 타고 폐부를 찔러오는 한 마디가 있었다.
"인간은 영원히 살아 있습니다. 육신은 가지만 그가 살았던 인생, 그의 이름, 그 존재의 의미는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육중한 둔기로 머리를 세차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주석은 눈을 번쩍 떴다. 엄숙하면서도 비감함을 머금은 상훈의 얼굴이 망막에 들어와 맺혔다. 터질 듯한 심장을 억누르며 주석은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순간 상훈에게도 무엇인지 짚여오는 것이 있었다. 두 손을 모아 주석의 내밀어진 손을 맞잡으며 두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인민의 앞에서 떳떳이 죽겠소."
 단호한 결의가 배어 있는 목소리였다. 이 목소리에 상훈은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조그만 떨림이 생겨나 곧 온몸을 휘감아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지금 이 순간 주석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상훈은 주석의 손을 놓고 조용히 일어섰다. 이제 자신이 이 외로운 지도자 옆에 있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주석과 상훈은 잠시 이별의 눈길을 나누었다. 이때 군복을 입은 한 사람이 황급히 뛰어 들어왔다. 온 얼굴에 땀이 맺혀 있는 것으로 봐서 대단히 중요한 소식을 갖고 왔음에 틀림없었다.
"지도자 동지. 중요한 보고입니다."
 그러나 주석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다. 술잔을 테이블에 내려놓는 그의 잔잔한 표정이 군인의 다급한 표정과 대조가 되어보였다. 주석은 조용히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댔다.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지시였다. 방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시간이 정지해버린 것 같은 깊고 깊은 침묵이 계속되었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군인은 비록 주석의 심중을 헤아리지는 못했지만 기분만은 알아차린 것 같았다. 짧지 않은 인간의 연륜으로 그는 이 순간 어떠한 말도 침묵보다 못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린 것 같았다. 하긴 그의 입에서 나올 얘기란 무엇이든 상황을 주석의 편에서 조금이라도 더 멀리 옮겨 놓는 내용일 수밖에 없었다. 끝없이 계속될 것 같던 침묵은 날카로운 전화벨 소리에 의해 깨어졌다. 다급한 손길로 전화를 받으려던 군인을 느릿한 주석의 손짓이 만류했다. 주석은 천천히 손을 뻗어 자신이 전화기를 들었다. 한동안 전화기를 귀에 대고만 있던 주석이 가라앉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위원장에게 전하시오. 주석은 공화국으로 돌아갔다고."

52. 평양의 쿠데타

 상훈은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을 느꼈다. 말못할 감격이 전신을 휩싸고 들었지만 상훈은 주석에게 아무런 말도 건넬 수가 없었다. 
"대장 동지, 지금 즉시 공화국으로 돌아갈 것이오. 준비를 하시오. 그리고 중국에 있는 정남이와 설송이도 평양으로 돌아오도록 연락하시오."
 군인은 그제서야 주석의 결심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주석에게 불리한 상황을 가지고 돌아온 그에게는 감격의 깊이도 더한 모양인지 한동안 대답 없이 섰다가 비장한 어조로 되물었다.
"아이들도 들어오라고 하셨습네까?"
 주석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주석 동지, 아이들을 희생시킬 수는 없습네다."
 그러나 주석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돌이킬 수 없는 결론이 배인 확고한 고갯짓이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며 말없이 돌아서는 상훈의 등 뒤에서 마지막이 될 주서그이 목소리가 떨어져 내렸다.
"박 선생, 고마웠소."

 상훈이 호텔 밖으로 나오자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인지 조 전무가 현관 앞에 바로 차를 갖다댔다.
"어떤 상황인지 파악이 되던가요?"
 상훈은 있었던 일을 그대로 얘기했다.
"저런!"
 조 전무도 뜻밖의 얘기에 깜짝 놀랐다.
"주석이 그런 결심을 했단 말입니까?"
"네. 지금 돌아간다고 합니다."
"박 선생, 미안하지만 나와 같이 갑시다."
"어디를요?"
"일단 대사님을 만납시다."
 조 전무는 기사에게 대사관으로 가도록 지시했다.

 대사관에 도착한 조 전무는 바로 전화기를 들고 본국과 연락을 취했다. 통화를 마친 조 전무는 상훈과 함께 대사 집무실로 뛰어들다시피 들어갔다. 놀라는 표정의 대사에게 간단하게 상황설명을 마치자마자 본국에서 조 전무를 찾는 전화가 연결됐다.
"네, 부장님. 접니다."
 전화는 안기부장으로부터였다. 두 사람의 통화는 오래 계속됐고 전화를 받는 조 전무의 목소리가 간간이 떨려나오는 것으로 보아 전화의 내용은 보통 중요한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네, 알았습니다. 해보겠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는 조 전무의 눈길이 상훈의 얼굴에 와서 박혔다. 상훈은 그의 눈이 마치 짐승의 것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박 선생. 중차대한 일을 해주어야겠소."
 상훈은 직감적으로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무슨 일입니까?"
"가서 주석을 다시 만나 주시오."
"네? 주석을요?"
"그렇소. 가서 우리 정부의 의지를 전해주시오."
"정부의 의지라구요?"
"그가 죽음을 무릅쓰고 북한으로 돌아가기로 했다는 말을 듣고 대통령께서는 그를 도와야 한다고 판단하셨소. 아마 주민을 무차별로 학살하고 있는 쿠데타 세력에 대해 깊이 분노하신 모양이오."
"어떻게 그를 도울 수 있죠?"
"그에 대한 지지를 표방하고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로 하여금 우리와 같은 노선을 택하도록 노력할 것이오."
"주석에게는 큰 힘이 되겠군요."
"그렇소. 아마 주석은 모르고 있겠지만 개성에 있는 전투부대들이 평양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소. 우리의 분석에 의하면 이 부대들은 반쿠데타군이오. 쿠데타군이 평양을 장악하고 있는 이때에 같은 편이라면 굳이 올라갈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겠소."
 상훈은 조 전무의 말을 듣자 힘이 솟는 것을 느꼈다. 망명을 하려다가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보여준 주석의 역사의식이 자신으로 하여금 그에 대해 애정을 느끼게 했던 것이다.
"제가 가는 것은 문제가 아니겠지만 주석이 저의 말을 믿어줄까요?"
"그가 박 선생에게 평양으로 돌아가겠다고 얘기했다면 아마 박 선생의 말을 믿어줄 거요. 그쪽에서 필요하다면 대통령 각하와의 전화통화도 가능할 것이오."
"알았습니다. 지금 가겠습니다."

 주석은 상훈이 다시 찾아온 것을 보고 황망중에도 반가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대통령께서는 주석님이 무고한 주민을 보호하는 한 끝까지 지지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일,중,러의 정상들과도 긴밀한 접촉을 가지고 주석님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낼 것입니다."
 주석은 상훈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말에 숙연해졌다.
"그리고 개성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가 평양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정부에서는 그 부대를 반쿠데타군으로 보는 모양입니다."
"뭐라고, 위성갑이가?"
 주석의 표정이 환해지며 생기가 돌았다. 그는 급한 손길로 전화기를 들어 최독준 대장을 불렀다.
"정치국장 동지, 개성의 위성갑이가 평양으로 올라간다고 하는구만."
"역시 위 동무레 움직여 주는구만요. 가레 가장 강직한 군인이디요."
 최독준 대장 역시 큰 희망이 생기는 모양이었다.
"가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디. 위성갑이한테 용기를 주어야 하지 않갔습네까?"
"어떻게?"
"가레 지금 속으로는 무척 불안할 거이구만요. 이런 때 주석님이 쿠데타 진압의 전권을 맡기고 모든 군으로 하여금 그를 돕게 하는 명령을 내리면 용기백배할 것이 아닙네까?"
"맞아. 그런데 어찌 됐건 그럴려면 북조선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순안비행장은 그놈들이 장악하고 있을 테니 착륙하자마자 체포될 테고."
"위성갑이가 먼저 비행장부터 장악하면 좋갔구만요."
 이제 주석은 생각이 조금 달라지는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죽음을 각오하고 평양으로 돌아가려 했던 것이 이제 측근이 부대를 이끌고 쿠데타를 진압하러 평양을 향하고 있다는 말에 가슴이 부풀어 있었다.
"정남이와 설송이를 중국에 머무르라고 하라."
 주석은 반쿠데타군에게 용기를 북돋어주는 것이 절실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통신은 완전히 두절됐고 평양은 반동놈들이 장악하고 있으니 답답하구만요."
 외교부장의 무기력한 대답이 끝나기 전에 힘찬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방법이 있습니다."
 주석과 대장의 눈길이 동시에 상훈에게로 쏠렸다.
"판문점으로 넘어가십시오."
"판문점?"
"그렇습니다. 개성에 있는 부대라면 판문점도 장악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그러면 반쿠데타군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격려가 되지 않겠습니까? 주석님이 앞장을 서서 쿠데타군을 토벌하러 간다면요."
"기발한 생각이야. 그러나 남조선에서 협력할까?"
"대통령께서는 주석님을 지지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통화를 한 번 해보시지요."
 주석은 한참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옆의 외교부장에게 물었다.
"부장, 어떻게 하면 좋을까?"
"괜찮을 것 같습네다."
 외교부장은 시원하게 대답했다. 북한에서는 누구보다도 국제정치의 흐름을 잘 읽고 있는 그로서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남조선의 대통령께 전화를 연결시키라."
 전화는 신속히 연결됐다.

"대통령 각하, 접네다."
"아, 주석님. 심려가 크시겠습니다."
"이럴 때 도움을 주시다니 너무나 고맙습네다."
"주석님께서 올바른 결단을 내리셨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국민들과 같이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철학입니다. 주석님이 진정으로 국민을 생각하고 운명을 같이하겠다고 생각하는 한 저는 최선을 다해 주석님을 도울 것입니다."
"판문점을 통하여 개성으로 올라가고 싶은데 허락하시갔습네까?"
"여부가 있습니까? 모든 편의를 제공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주석은 몇 사람의 측근만을 대동하고 바로 서울로 떠났다. 대통령은 일본 수상에게 대한항공기의 특별이륙과 자위대의 공중경호를 부탁했고 특별기가 영공에 들어오자 대기하고 있던 한국공군의 전투기들이 특별기를 호위했다. 특별기는 북한의 사태로 비상이 걸린 남반부의 하늘을 날아 극비리에 전방의 어느 공군기지에 내렸다. 주석은 거기서 바로 판문점을 통해 개성으로 들어갈 작정이었다.

"부장, 내가 가서 주석을 만나고 싶소."
"각하, 안됩니다.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데 주석을 만나는 것은 곤란을 자초할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있겠지. 나도 그래서 심사숙고를 했소. 이미 도움은 준 것이니, 지금 주석을 만나서 좋을 일은 하나도 없겠지."
 안기부장은 대통령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프로 정치인인 대통령의 판단력은 칼날처럼 예리한 것이었다. 지금 주석을 만나서는 안된다는 것을 대통령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대통령의 어조는 어딘지 모르게 촉촉했다. 판단력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부장도 보고했듯이 지금 주석은 자신을 위해서 평양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것이 아니잖소."
"그렇긴 합니다."
"그가 북한의 선량한 시민들을 위해 북한으로 들어가는 한 나는 그를 만나 용기를 주고 싶소."
"그러나 그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는 아직......"
"망명을 마다하고 죽음이 기다리는 땅으로 들어가는 데에 다른 무슨 의도가 있겠소?......"
"......"
"진정한 정치는 어떠한 이념이나 조건에 구애됨이 없이 언제나 시민들을 위하는 것이오. 지금 그가 모든 것을 잃고 무언가를 느껴 북으로 들어가고 있다면 나는 그를 만나 용기를 줘야하오. 최소한 내가 북한의 동포들 때문에 그를 만났다는 것은 역사적 의미가 있는 것이오. 어떤 세력이 집권을 하든 우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우쳐주는 효과도 있을 것이오. 준비하시오."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아까부터 이상한 무전이 들어오고 있습네다."
"꺼버리라, 개새끼들."
 잔뜩 긴장하고 있던 위성갑 상장은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그로서는 일단 쿠데타를 진압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리고 부대를 출동시키기는 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이 더해왔다. 평양의 쿠데타군으로부터는 쉴 새 없이 부대를 원위치시키고 자신들에게 합류하라는 무전이 들어왔다. 그럴 때마다 끊어버리곤 했지만 차츰 자신이 약해지고 있는 걸 느꼈다. 북조선 제일의 강병을 거느리고 있는 그로서는 평양에 올라가 쿠데타군과 한 판 벌이는 것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전투를 앞뒤로 한 정치문제에는 전혀 아는 것이 없었다. 일본에 있는 주석과 연락만 된다면 무서울 것이 없겠지만 만약 주석이 망명이라도 하게 되면 전투와 상관없이 자신의 운명은 끝이었다. 바라는 주석과의 연락은 불통인 상황에서 평양으로부터 오 분이 멀다 하고 무전이 들어오고 있으니 신경질을 부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미 선봉군은 황주를 떠나 중화로 올라가고 있는 중이었고 자신은 사리원에 주둔한 부대의 지휘관들을 만나 지원을 다짐받고 급히 황주의 본대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군용지프는 선도차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나는 듯이 달리고 있었다. 
"사령관님, 평양이 아니고 총정치국장 동지라고 합네다."
"무슨 소리야. 총정치국장 동지라니."
"사령관님을 바꾸라고 성화입네다."
"이보라, 일본에서 여기까지 무전이 들어올 수 있니?"
"안됩네다."
 지프의 무전기는 근거리 야전용이었다.
"근데 무슨 총정치국장 동지라 하니. 평양의 간나들이 내가 안받으니까 그런 게 아니갔니?"
"이상하긴 한데 저쪽에서 워낙 딱딱거리는 게 평양 같지는 않습네다."
 그러면서도 무전병은 스위치를 끄려 했다.
"이리 줘봐."
 위성갑은 욕이나 한 바탕 해줄 생각으로 전화기를 받아들었다.
"어떤 간나가 자꾸 전통질이야?"
 그러나 다음 순간 그 탁하던 목소리는 순식간에 희열에 들떠 어쩔 줄 모르는 소리로 바뀌었다. 
"총정치국장 동지. 어디 계십네까? 뭐, 판문점에 계신다구요? 이제 막 넘는다구요? 뭐라구요, 주석 동지께서도 같이 오셨다구요? 그게 정말입네까? 내레 즉각 그리 가겠습네다."
 무전기를 내던지며 환호를 지른 위성갑이 뭐라고 지시를 하기도 전에 운전병은 지프를 돌리고 있었다.

"주석님, 이제 출발하시면 됩니다."
 최독준 대장이 전방부대의 무전실에서 위성갑과 통화를 마치고 들뜬 표정으로 주석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막 떠나려는 순간이었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행비서 중 한 사람이 황급히 문을 두드렸다.
"뭐야?"
"남조선의 대통령 각하께서 오셨습니다."
 최 대장의 날카로운 물음에 움찔한 비서가 다급한 보고를 토해냈다.
"뭐라고?"
 최 대장이 자기도 모르게 주석의 얼굴에 고개를 돌리는 순간 주석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모시라."
"네."
 비서가 나가자 바로 일단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어깨에 별을 단 몇 사람의 군인을 대동하고 들어온 대통령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주석에게로 성큼 다가와 어깨를 덥석 껴안았다.
"주석님, 반갑습니다."
"아, 대통령 각하."
"얼마나 심려가 많으십니까?"
 주석의 놀라움은 대단한 것이었다. 사진으로만 봐오던 남조선의 대통령이 추락하고 있는 자신을 전방 부대까지 일부로 찾아와 주었다는 사실이 남다른 감회를 불러 일으켰다.
"앞으로 사태가 어떻게 전개되든 오늘 이 순간은 잊지 않갔습네다."
"저는 물론 주변의 모든 나라와 힘을 합쳐 주석님을 돕겠습니다. 그러나 주석님, 하나 약속을 해주십시오.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무고한 국민들은 보호해 주셔야 합니다."
"명심하갔습네다."
 두 사람은 뜨거운 포옹을 나누었다. 그리고 주석은 대통령의 배웅을 받으며 황망히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53. 비밀문서

 그로부터 며칠 후 상훈은 조 전무의 전화를 받았다.
"박 선생, 기뻐하시오."
 조 전무의 목소리에는 활기가 넘쳤다. 상훈은 직감적으로 무언가 좋은 소식이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어떻게 됐습니까?"
"쿠데타는 완전히 진압되었소. 주석은 다시 주석궁으로 들어갔소."
"다행이군요."
 상훈은 진정 안심이 되었다.
"오늘 저녁 어떻소?"
"좋습니다."
 상훈은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혼자서는 도저히 캐낼 수 없는 연구소의 비밀이지만 조 전무가 도와주면 가능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그는 연구소에서 유출된 메모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가. 그가 최선을 다해주기만 하면 기획실의 금고 안도 볼 수 있을지 몰랐다. 
 저녁에 만난 조 전무는 상훈을 요정으로 데리고 갔다.
"너무나 거창한 저녁이군요."
"박 선생의 공로는 저녁 한 끼로는 갚을 수 있는 일이 아니오."
"이제 남북관계가 급속히 가까워질까요?"
"가까워지다 뿐이겠소? 그동안의 가장 큰 과제였던 남북간의 신뢰가 확고히 구축되었는데 민족의 앞날을 위해 얼마나 다행한 일이오."
 상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야마모도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소. 상처가 깊어 의식불명 상태라는군. 아직 배후를 조사할 수는 없을 것 같소."
"꼭 밝혀 내야 합니다. 쥰이찌 노인, 마쓰모도, 이마무라 반장 모두 그에게 살해되었습니다. 그의 배후에는 엄청난 조직이 숨어 있습니다."
"......"
 상훈의 열띤 주장에도 불구하고 조 전무는 별로 응답을 하지 않았다. 아마도 정보를 다루는 입장에서 일본의 국내문제에 대해 별로 관여하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어쩌면 와따나베라는 거물은 조 전무에게도 큰 부담일지 몰랐다. 이런 생각이 들자 상훈은 서운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조 전무와 앉아서 장시간 술을 마신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뒤를 아무렇게나 끝내고 일어나는 상훈의 표정을 보자 조 전무는 영문을 몰라 당황했다.
"아니, 박 선생. 뭐 섭섭한 일이라도 있소?"
"없습니다. 이제 일이 끝났으니 각자 할 일을 해야지요."
 상훈은 건성으로 악수를 나누고 먼저 음식점을 나섰다. 조 전무는 떨떠름한 기분으로 상훈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차에 올랐다.
"별 이상한 놈들도 다 있군요."
"왜?"
"차를 주차장에 대면 그만일 텐데 입구에 대고 있다가 다른 차들이 드나들 때마다 비켜주는군요. 운전연습을 하는 놈들인지, 심심해서 할 일이 없는 놈들인지."
"그런 놈들도 있겠지. 세상은 넓고 넓으니까."
 거나한 목소리로 되는 대로 한 마디 뱉고는 뒷좌석에 몸을 눕히던 조 전무는 갑자기 무엇인가 생각난 듯 기사에게 물었다.
"그놈들 어디 있어?"
"방금 떠났어요."
"어디로?"
"저쪽으로요."
 기사는 상훈이 걸어간 방향을 가리켰다.
"뭐야? 쫓아가. 밟아!"
 조 전무가 탄 차는 상훈이 간 쪽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길은 언덕 쪽으로 이어지면서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빨리 빨리!"
 저 멀리 언덕 위로 명상에 잠긴 듯이 천천히 걷고 있는 상훈의 모습이 보이고, 그 뒤로 은색 승용차 한 대가 바짝 뒤따르는 것이 보였다. 불안에 휩싸인 조 전무는 기사에게 다급하게 소리쳤다. 
"경적을 울려. 빨리! 계속 울려!"
 경적 소리에 놀란 상훈이 뒤돌아보며 몸을 피하는 것이 보이는 순간 은색 승용차가 상훈을 덮쳤다. 조 전무는 앞이 캄캄해졌다. 상훈이 길 옆으로 쓰러지며 구르는 것이 보였고 승용차는 전속력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잡아, 저 새끼들 잡아."
 조 전무는 차에서 뛰어내리며 기사에게 소리쳤다.
"박 선생! 정신차려요! 정신차리라니까."
 당황한 조 전무는 울상이 되어 상훈을 붙들어 안았다. 다행히도 상훈은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잠시 정신을 잃은 것 같았고 왼쪽팔이 부러졌는지 팔을 축 늘어뜨린 채 신음소리를 내다. 조 전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상훈은 조 전무가 흔들자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짐작하는 듯했다.
"아, 다행이오. 도대체 저 자들이 누구요?"
"아실 것 없어요."
"무슨 소리요? 박 선생을 해치려는 자들을 내가 알 것이 없다니?"
"알아 봐야 조 전무님은 발이나 빼려고 할 것 아닙니까? 비겁하게 말입니다."
"음, 그러면 저 놈들이 바로 박 선생이 말하던......"
"바로 그렇습니다."
 조 전무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이거 놓으세요."
"무슨 소리요, 병원에 가야지."
"병원에 가면 뭐 합니까? 어차피 곧 살해될 운명인 걸. 가서 일이나 보시지요. 국가의 안전을 도모하고 국민을 보호하는 거창한 과업을 수행하세요."
"내게 대단한 불만이 있는 모양이군."
"그렇지 않겠습니까. 일개 유학생은 조국의 역사를 왜곡하는 것도 참지 못해 책도 놓아버리고 위험을 무릅쓰고 돌아다니는데, 안기부의 책임자란 분은 조직이 누설될까 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말로만 국가안보니 국민보호니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번의 김 주석 테러 건도 사실은 연구소를 추적하다 알아낸 것입니다. 연구소에는 우리 민족의 안위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무서운 문서가 있습니다. 나는 그것들을 찾아야하고 그 과정에서 죽음을 당하고 말겠지요. 뒤에서 오는 자동차에 의해서도 죽을 판인데 그 연구소에 문서를 찾으러 가다가 죽을 것은 자명하지 않습니까. 이 팔 놓으십시오. 으윽."
 상훈은 팔을 뿌리치다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이때 조 전무의 차가 옆에 와 멈추더니 기사가 얼굴에 땀이 맺힌 채 내렸다.
"보통 놈들이 아니더군요. 제가 못 잡을 정도였습니다."
"번호판은 봤나?"
"네. 그러나 소용 있겠어요?"
"그렇겠지. 무슨 야꾸자 차나 그런 거겠지. 이미 도난신고를 해뒀겠지. 그건 그렇고 어서 병원으로 가자."
 그러나 상훈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박 선생, 병원으로 가면서 얘기합시다."
"혼자서도 갈 수 있습니다."
"박 선생은 국가유공자요. 어느 유공자보다 중요한 일을 해냈소. 나는 박 선생을 병원으로 인도할 책임이 있소."
"그런 빈말은 제게 와닿지 않습니다."
 상훈의 이 말에 심각한 표정으로 무엇인가를 한참 생각하던 조 전무는 이윽고 무겁게 입을 뗐다. 
"좋소, 박 선생. 한 가지 부탁만은 들어주겠소. 그러나 어떤 일이 있더라도 보안을 유지하겠다고 맹세할 수 있소?"
"물론입니다."
"그럼 차를 타시오. 병원으로 가면서 얘기합시다."
 병원으로 가는 차 안에서 조 전무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상훈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곤혹스럽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긴장한 얼굴이었다.
"대동아연구소의 기획실에는 석제금고가 있습니다. 그 안의 내용물들을 보게 해주십시오."
 올 것이 왔구나 하는 표정이 조 전무의 얼굴에 무겁게 깔렸다. 조 전무는 상훈을 병원에 입원시키고 돌아갈 때까지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열흘쯤 후 팔의 기브스를 떼고 퇴원하기 전날의 깊은 밤 조 전무는 소리없이 찾아왔다.
"한 시간 안에 보시오."
 조 전무는 옆에 끼고 온 작은 가방을 상훈에게 넘겨주었다.

 연구소의 금고 깊숙이 보관되어 있던 이 귀중한 서류들에 대한 호기심을 지그시 눌러가면서 상훈은 참을성 있게 서류를 하나하나 살폈다. 서류들은 주로 역사관계의 학설이나 이론을 발표한 사람들의 경력이나 개인적 기록들이었다.
 '이상한 일이군, 연구소에서 이런 것들을 그토록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는 이유를 도대체 알 수가 없어.'
 이런 것들은 도서관의 서고에도 얼마든지 있는 것이었다. 특히 태평양전쟁 전의 역사학자들 이름은 거의 망라되어 있다시피 했다. 별것도 아닌 것을 잘못 가져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으로 실망스럽게 서류철의 마지막에서 두 번째 장을 넘긴 상훈의 두 눈에 날카로운 빛이 쏟아졌다. 낡은 두 장의 원고지가 찢겨진 채 비닐로 씌워져 있었다. 상훈이 조심스럽게 들추어보니 후꾸야마라는 이름이 보였다. 후꾸야마라면 일본에서는 칠지도의 수수께끼를 해결했다는 평판을 듣는 사람으로 기무라 박사의 스승이었다.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될 것 같은 예감에 상훈은 원고지를 조심스레 뜯었다. 그러나 정작 놀라운 것이 그 뒤에 있었다. 마지막 장을 넘긴 상훈은 어딘지 모르게 눈에 익은 듯한 한 구절을 보는 순간 마치 전류에 감전된 사람마냥 몸을 부르르 떨었다.
 누렇게 바랜 종이에 쓰여진 한 구절은 한 번 본 적도 없는 자신에게 마치 오랜 세월 동안 머리 속에서 맴돌아왔던 것 같은 아늑한 기분을 주는 것이었다.

 "동(東)의 옆에 있는 글자로서 적합한 것은 침(侵), 정(征) 혹은 벌(伐)이다. 셋 중의 어느 것이든 뜻은 같다. 초 씨는 영원한 비밀을 남기고 가버린 것인가."

 다시 한 번 이 구절을 되뇌이던 상훈의 뇌리에 직감적으로 짚여오는 것이 있었다.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숨을 고르던 상훈은 불현듯 종이를 뒤집었다. 무엇인가에 붙어 있다가 뜯긴 자국이 있었다. 이 자국이 눈에 들어오자 상훈은 갑자기 신들린 사람처럼 벌떡 일어나다. 다행히 조 전무는 등을 돌리고 누군가와 휴대폰으로 통화하는 중이라 상훈의 행동을 눈치채지 못했다. 상훈은 두 장의 원고지와 함께 종이를 슬쩍 시트 밑에 감추었다. 엄청난 성취감과 희열이 온몸을 휘감아왔다. 그러나 다음 순간 상훈은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가방에 남아 있던 한 뭉텅이의 노란 카드를 꺼냈을 때였다.
 '아, 이것들은 모두 무엇이란 말인가.'
 수십 장의 카드는 모두 같은 것이었다. 같은 서식에 같은 문구가 인쇄되어 있는 노란색의 카드는 이름만으로도 학계의 존경을 한몸에 받을 만한 학자와 교수들이 기명하고 날인한 서약서였다.
 〈대일본제국 천황폐하〉라는 서두의 밑에 이 이름이 있는 학자들은 모두 한결같은 목소리를 토해 내고 있었다.

 "저는 자랑스런 황국민으로서 폐하의 신성과 존엄을 위하여 진력할 것입니다. 쓰다 사유기찌의 사건과 관련하여서는 그의 저작물을 발행금지케 하고 엄중한 신벌을 내려야 한다고 연명으로 결의합니다. 학문의 연구가 황실의 존엄을 해쳐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서약합니다."

 밑에는 쇼오와 17년 5월이라고 연월이 박혀 있었다. 언젠가 마쓰모도가 기획실장이 떨어뜨려 자신이 주워 주려 하자 벌컥 화를 냈다고 하던 서류는 바로 이것을 말했던 모양이었다. 서약서에 쓰다 사우기찌라는 이름이 들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서약서는 그의 사건과 관련하여 작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쇼오와 17년이라면 태평양전쟁 중으로 군국주의가 극성을 부리고 모든 학문의 연구는 정부에 의하여 엄격히 심사받고 탄압이 가해지던 시기였다. 
 상훈은 쓰다 사유기지의 사건이라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호기심이 일었다. 이 카드는 이미 아득한 옛날의 한 서약서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카드의 명단을 다 실피지도 못했지만 일 분도 어김없는 한 시간이 되자 조 전무는 상훈이 보던 서류들을 가방에 집어넣고는 인사도 나누지 않고 바로 병실을 나갔다. 상훈은 그의 긴장된 표정으로 보아 서류를 도로 갖다놓으러 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음날 퇴원하여 집에 도착하자마자 상훈은 바로 책꽂이에서 한 권의 책을 뽑았다.
 "역사의 연구"
 바로 처음 이마무라 주임이 가지고 왔던 살인현장의 바로 그 책이었다. 밤새 잠 못 이루고 설레던 가슴을 억지로 누르고 상훈은 조심스럽게 책의 뒷장을 열었다. 가방에서 빼낸 그 종이를 조심스럽게 맞추는 상훈의 손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종이는 책 뒷장의 뜯겨나간 자국과 꼭 들어맞았다.
 '아, 이제야 찾았구나.'
 닛꼬의 살인현장에서 뜯겨나간 그 종이였다. 상훈은 온몸의 긴장이 다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토록 찾아헤매던 바로 그 종이를 찾아낸 순간 어쩔 수 없는 허탈감이 밀려왔다. 살해된 이마무라 주임이 떠올랐다. 그는 바로 이것을 찾다가 죽음을 당한게 아니었던가. 이 종이는 쥰이찌의 죽음과 연구소의 비밀을 파헤칠 수 있는 확고부동한 증거물이었다. 그러나 상훈은 그 내용을 쉽사리 해석할 수가 없었다. 그것만으로는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루종일 종이에 매달려 애써도 아무 소득이 없자 상훈은 종이를 책 속에 끼워두고 일어났다. 도서관에 가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종이의 내용은 시간을 두고 생각해 봐야 할 것이었으나 쓰다 사유기찌의 사건이라는 것은 한시 바삐 확인하고 싶은 것이었다. 서약서의 내용으로 보아서는 쓰다 사유기찌는 학자, 그것도 역사학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상훈은 역사학자의 인명록을 뒤져 어렵잖게 그 이름을 찾아내었다. 그는 와세다 대학의 교수였었다.
 다음날 도서관으로 간 상훈은 그와 관련된 자료는 모두 찾아 구석자리에 앉았다. 그의 연구는 주로 "일본서기"에 관한 것이었는데 당시 대부분의 학자들과는 달리 그는 천황가의 계보가 꾸며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신화전설은 불행히도 민간에 전해져 온 기록이 아니다. 물론 민간에서 전승되어온 것도 다소 들어 있지만 이것은 어느 시기에 어떤 조정의 지식인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만들어 넣은 것이다.〉
 그의 연구는 이 주장을 세세히 논증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이런 연구는 즉각 탄압을 받았다. 그는 와세다 대학의 교수직을 사임해야 했으며 쇼오와 15년 황실의 존엄을 모독한 이유로 기소당했다. 그리고 1942년 5월 유죄판결을 받았다. 재판장 나까니시 요이찌의 판결문은 다음과 같았다.

 "숭신, 수인의 존재를 가정한다고 말하고 중애천황 이전의 역대에 대하여는 그 계보에 관한 재료가 존재한 흔적이 없고 그에 관한 역사적 사실도 거의 전하지 않는다는 등 황공하게도 신무천황으로부터 중애천황에 이르는 역대 천황의 존재에 대하여 의혹을 품게 할 우려가 있는 강설을 감히 함으로써 황실의 존엄을 모독하는 문서를 저작하고 이를 이와나미로 하여금 발행케 한 것은 출판법 제26조 1항을 위반한 것이므로 금고 3개월, 집행유예 2년의 유죄판결을 선고한다."

 쓰다 사유기찌에 대한 이 판결은 천황의 존재에 대해서는 설사 학자라 하더라도 함부로 접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천황의 족보와 궁정에 전해져 온 이야기를 편찬한 "고사기"와 "일본서기" 역시 학자가 비판하고 연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모든 사람은 거기에 쓰여 있는 그대로 믿기만을 강요당하였다. 그 내용에 대해 회의를 푸믄다거나 진정한 학문적 접근태도를 보이면 위의 판결에서 보는 것처럼 단죄당하였다. 
 상훈은 에이지의 죽음을 생각하였다. 쓰다 사유기찌가 처음부터 굴절된 일본역사에 의문을 제기했다면 에이지는 군인의 신분으로 천황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지만 차츰 시간이 지날수록 회의를 품고 종내는 역사의 진실을 밝히려다가 희생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쓰다 사유기찌나 에이지나 아직도 왜곡된 역사를 배우는 일본인이나 역사왜곡의 대상이 되고 있는 한국이나 모두가 군국주의의 피해자인 셈이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큰 희생자는 바로 일본의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은 마땅히 청산했어야 할 군국시대의 왜곡된 역사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그대로 젊은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었다. 주변국에 대한 역사 교과서 왜곡에 대한 항의에 대하여도 관리들이 외교적으로 해결하려 들 뿐 정작 책임이 있는 지식인들은 마이동풍 격이었다.
 상훈이 보기에는 일본의 역사학계가 황국사관의 잔재를 과감하게 떨치고 역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다. 제국주의 시대의 침략적 지도자들 밑에서 일본이라는 나라의 맹목적 자존심만을 고양시키는 데 앞장서 온 그들에게, 왜곡된 역사를 시정하고, 있었던 그대로의 진실세계로 나아가자고 얘기해봐야 먹혀들 것 같지가 않았다. 유일한 방법은 일본의 선량한 국민들에게 무엇이 올바른 역사고 어떻게 하는 것이 역사의 올바른 방법론인가를 알려 제국주의적 역사의 잔재를 스스로 청산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기회는 뜻밖에도 빨리 왔다.

54. 조작된 전설

"박 군, 대동아연구소에서 고대사 세미나가 있는데 특히 광개토대왕비를 집중 조망한다는군. 토론자로 참석할 생각이 없어?"
 상훈을 지도하고 있는 미나미 교수가 불러서 올라가 보니 뜻밖의 제안을 했다.
"나에게 참석해 달라는 요청이 왔는데 내가 응락은 해놓은 상태에서 갑자기 다른 중요한 일이 생겼어.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달라고 하니까 시간이 없어 안된다는군. 요시다 교수에게 부탁을 하니까 그 양반도 안된다고 하고. 그래서 생각해 보니 박 군이 괜찮을 것 같아."
"제가 실력이 돼야지요."
"발표하는 사람들이 잘할 거야. 박 군은 가만 앉아 있다가 광개토왕비에 대해서 몇 마디 하면 될 거야. 사실 그 비에 대해서는 박 선생이 나보다도 잘 알잖아."
"격에 어긋나지 않을까요?"
"토론자로 참석하는 것이니까 괜찮아요. 박 군은 강의 경력도 있고 토론에도 늘 앞서가던데 충분할 거야. 그럼 내가 저쪽에 통보하지."
"알겠습니다."
 상훈은 어쩌면 잘된 일이라 생각했다. 어차피 일본학계의 오류를 지적하려던 참이 아니었던가. 더군다나 대동아연구소 주최라면 연구소의 정체를 밝혀내는 기회가 되어 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든 상훈은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세미나에 참석한다는 긴장감 탓으로 생각했지만 그것만은 아닌 기억 깊숙한 곳에서 누군가의 울부짖는 모습이 보이는 듯하여 계속 뒤척였다. 억지로 잠을 이루었지만 역시 꿈자리가 곱지 않았다. 누군지 알 듯 모를 듯한 얼굴이 끊임없이 눈앞에서 아른거리더니 종내는 상훈의 팔을 잡고 어디론가 끌고 가는 것이었다. 소스라치게 놀라 잠을 깬 상훈이 아무리 그 얼굴을 기억해 내려 해도 좀체로 떠오르지 않았다.
 〈이정호 교수〉
 그 얼굴이 종내는 이정호 교수로 연결되었다. 상훈은 자신이 긴장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세미나가 열리는 날 상훈은 예정된 시간보다 일찍 대동아연구소에 갔다. 세미나가 열리는 3층의 강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강당에는 제법 많은 수의 청중이 앉아 있었고 연단 위에는 다섯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테이블 위에 놓여진 명패에는 토론참석자들의 이름이 쓰여져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에 자신의 이름이 쓰여져 있는 것을 본 상훈의 어깨에 중압감이 실려왔다. 쟁쟁한 일본학자들 사이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결코 가볍지 않다고 생각하자 한숨조차 나오는 것이었다. 세미나는 대동아연구소장 와따나베의 인사말로부터 시작되었다. 인사말이 끝나고 주제발표가 시작되었다. 주제는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광개토대왕비에 대하여 한국의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남북한 일관하여 백제와 신라가 일본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진희, 이정호 교수 등 한국의 대표적 사학자들은 일본이 광개토대왕비에 석회를칠해 비문을 조작했다고 한다.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광개토대왕비에 명백히 일본이 바다를 건너 백제와 신라를 깨뜨리고 신민으로 삼았다는 주장이 나오자 매우 당황했다. 그래서 광개토대왕비의 해석을 비틀어 보고자 온갖 노력을 다했다. 심지어 위당 정인보 같은 사람은 자신 외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해독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한국학자들의 주장은 견강부회이다."

"그들은 우리의 중고교 교과서를 고치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그들 민족의 비문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이제 와서 치욕이 된다고 고치라는 것이 어찌 온당하다고 하겠는가. 역사는 엄숙한 것이다. 과거의 역사가 지금의 입장과 배치된다고 해서 고치거나 왜곡하는 것은 역사에 대해 그리고 인류에 대해 죄를 짓는 것이다."

"일본 중국 한국의 역사는 같은 사실을 제각기 다르게 기술하고 있다. 중국은 모든 역사적 사실 위에 군림하려 하고 있다. 즉 모든 역사적 사실의 한가운데에는 언제나 중국이 있다는 식으로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이처럼 자국의 역사 외에는 모두 변방의 해프닝 정도로 여기는 태도는 결과적으로 중국중심주의라는 그릇된 역사관을 낳고 이것은 소위 말하는 황화론(黃禍論)등으로 확산되고 있다. 즉 중국이 결국은 아시아를 장악하고 나아가서는 세계를 장악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우려되는 현상으로 국가간의 올바른 관계에 커다란 장애가 되고 있다."

"한국도 역시 역사를 왜곡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민족과의 관계에서 항상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해온 한국은 치욕이 된다고 생각되는 역사를 은폐하는 데 급급하고 이다. 한국의 어떠한 사서도 임나일본부를 기술하고 있지는 않다. 분명한 역사적 사실을 회피하는 그들의 태도도 중국의 억지와 마찬가지로 올바른 역사인식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들 민족의 기록에도 나오는 엄연한 사실을 그들은 부정하고 있지 않은가. 올바른 역사의 정립을 위하여 삼국 학계의 분발을 호소하는 바이다."

 말은 삼국 학계라고 하고 있었지만 결론은 일본을 제외한 중국과 한국의 역사기술은 옳지 못하다고 나무라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몇 사람의 토론자들도 발표자의 견해에 적극 동조하는 듯한 발언을 하고 있었고 따라서 분위기는 올바른 토론이라기보다는 한국과 중국의 역사학계에 대한 성토장이 되고 있었다. 누군가 상훈의 의견을 물어오자 상훈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어쨌거나 그들은 일본 학계의 대표들이기 때문이었다.
"본인은 동양 삼국의 역사를 올바로 기술하기 위하여 삼국의 사서를 대조하고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사실을 위주로 하여 이제까지처럼 자국 중심의 역사기술 태도를 버리고 철저히 사료에 입각하여 역사를 재구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고대사 중에서 한일간에 쟁점이 되어 있는 임나일본부에 대한 일본의 역사기술은 여전히 황국사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므로 이 점에 있어서 학계의 양심을 촉구하는 바입니다."
 상훈의 발언에 토론자들은 발끈했다. 상훈이 발언을 마치자마자 거의 동시에 반론들이 튀어나왔다.
"임나일본부는 "일본서기"의 기록과 광개토대왕비의 기록이 정확히 맞아떨어지고 있습니다. 한일간의 역사기술에서 이처럼 확실하게 맞아떨어지는 예는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일본측의 역사기술이 황국사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까?"
"우선 "일본서기"의 사료로서의 가치를 보아야 합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연대기록이 모두 틀려 있어 240년 이상이나 산 사람이 나오고 신공황후가 물고기가 받치는 배를 타고 신라를 무찔렀다는 등 믿을 수 없는 사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한 예를 들자면 667년 천황의 자식이 죽자 고구려 신라 백제의 사신들이 큰길에서 곡을 했다고 하는 기술이 있습니다. 이 해는 백제가 멸망한 지 칠 년 후입니다. 이것은 연대가 틀려 있는 외에도 "일본서기"라는 책이 누구에 의해 어떤 의도로 만들어진 책인지를 알 수 있게 합니다. 따라서 양심 있는 일본의 학자들은 이 책의 사료로서의 가치를 인정하는 데 매우 인색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 일본이 한반도의 남부를 정복하고 2세기에 걸쳐 한반도에 일본의 관청을 두어 지배했다고 쓰여 있는 것에 대해서는 일본의 학자들이 앞을 다투어 사실로 받아들이려 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과거의 사실을 미화하여 기술한 사서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느 사서에는 연개소문이 장안에 입성하여 당태종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고 쓰여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 관한 다른 기록들이 없기 때문에 이것은 과장되었을 것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아마 일본의 학자들도 평상시의 경우라면 "일본서기"에 있는 임나일본부를 받아들이는 입장이 위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일본서기"말고는 어디에도 임나일본부에 대한 기술이 없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순수한 학문탐구의 영역에 이론군국주의의 불순한 의도가 개입되었습니다. 그들은 한반도를 침략할 구실을 만들기 위해 광분하고 있던 중 참모본부의 간첩 사꼬오 가께아끼 대위가 만주에서 가지고 온 탁본에 주목했습니다. 이것을 본 순간 참모본부는 열광했습니다. 곧 학자들을 끌어모아 이 탁본의 해석에 착수했습니다. 그리고는 기어코 임나일본부라는 허상을 실체로 조립해냈습니다. 한반도는 본시 우리의 지배하에 있던 땅이니 이제 가서 찾자는 주장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그대로 일본학계의 정설이 되어버렸습니다."
"광개토왕비에는 분명히 일본이 백제와 신라를 깨뜨리고 그들을 신민으로 삼았다고 나와 있지 않소. 그럼 박 선생은 그 비문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한단 말이오?"
 와세다 대학의 원로교수 히라다의 무거운 목소리에 이어 게이오 대학의 다나까 교수의 가시 돋친 질문이 뒤따랐다.
"이제까지 한국학자들은 그 비문의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온갖 해괴한 해석들을 다 갖다붙여 왔습니다. 게다가 대다수의 한국학자들은 재일사학자 이진희 교수가 발표한 석회도말론, 즉 우리 일본인들이 석회를 발라 비문을 조작했다는 주장에 동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진실을 알리려는 태도라는 말입니까?"
"그 문제 역시 일본의 군국주의와 일본의 학계에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올바른 역사를 버려두고 침략의 목적으로 사소한 사실을 과장하여 임나일본부라는 괴물을 만들어 한국을 마치 속국인 양 여기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한국의 학자들은 없는 사실에 대해 대항하는 벙법에 능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정통적인 방법, 즉 다른 사서에는 그런 기록이 전연 없다고 이의를 제기해도 일본은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차에 육군참모본부에서 은밀히 해독작업을 추진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상이한 탁본들간에 일치하지 않는 글자가 많은 점에 주목해 참모본부의 석회도말론이 나오게 된것입니다. 석회도말론이 사실로는 어떨는지 몰라도 최소한 참모본부의 음모를 간파했다는 점에서는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박 선생은 호태왕비를 어떻게 해석한다는 말이오?"
"호태왕비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는 두 가지 관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쓰여진 그대로를 믿는 것입니다. 이 경우는 다른 객관적 사료와의 균형은 무시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문자의 해석에 집중해야 합니다. 호태왕비에서 한일간에 가장 큰 쟁점이 되어 있는 구절의 마지막 세 글자가 밝혀지기 전에는 함부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대다수의 일본학자들은 참모본부의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여 일본중심적 해석을 하는데 학문의 세계에서는 올바른 방법이 아닙니다. 학문의 진리를 발견하기 위한 가장 솔직한 노력이고 그런 의미에서 학문의 세계에는 국가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 구절을 한번 볼까요. 우선 군국주의자들의 주장대로 띄어 읽습니다.
 〈백잔신라 구시속민 유래조공. 이왜이신묘년 래도해, 파백잔□□□라. 이위신민, 이육년병신, 왕궁솔수군, 토래잔국〉입니다.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은 이 구절을 〈백제와 신라는 본래 고구려의 속민이라 조공을 바쳐왔다. 일본이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 백제와 가야와 신라를 쳐부수고 신민으로 삼았다. 그래서 호태왕은 즉위 후 육년째인 병신년에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토벌했다〉라고 해석합니다. 이 해석은 빈칸에는 당연히 〈가야〉혹은 〈임나〉 그리고 마지막에는 〈신〉자가 들어간다고 하는 성급하고도 확인되지 않은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석했을 때에는 두 가지 해석상의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나는 어째서 같은 의미의 동사를 두 번 썼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왜이신묘년 래도해〉라는 구절을 일본을 주어로 보면 〈일본이 신묘년에 왔다. 그리고 다시 바다를 건넜다〉라고 해석해야 합니다. 왔다는 뭐고 다시 바다를 건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군국주의자들 식으로 해석을 하자면 〈래〉나 〈도해〉중의 하나를 빼야만 합니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일본이 백제, 가야, 신라를 깨뜨리고 신민으로 삼았는데 어째서 호태왕이 백제를 토벌했는가 하는 모순입니다. 호태왕의 공적을 치하하는 비문에서 호태왕은 백제를 깨뜨린 일본을 토벌해야 당당하고 문맥도 맞을 터인데 어째서 일본에 깨진 백제를 토벌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서들은 그 당시의 백제와 일보의 관계를 매우 우호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런 모순점들은 해석을 일본 위주로 하기 때문에 당연히 생기는 것들입니다."
"중국학자들의 주장도 우리와 유사하지 않소?"
"중국학자 중 대표격인 왕건군의 해석을 보기로 합시다. 그는 일본과 한국의 학자들에 비해 월등히 유리한 위치에 있습니다. 십여 년간이나 비에 붙어 비면을 샅샅이 조사하고 비에 관련된 사람들을 추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껏 많은 일본의 학자들이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던 사실들을 가려내는 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육년병신조의 구절에 있어서도 모두들 토리잔국이라고 해석하여 그 뜻을 파악하지 못허던 것을 비면의 글자는 〈리〉가 아닌 〈벌〉이라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따라서 해석도 〈토벌잔국〉즉 백제를 토벌했다는 것으로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그도 역시 무리한 해석을 시도했습니다. 그는 이 구절 중 〈이왜이신묘년래〉를 〈왜가 신묘년 이래〉라고 해석합니다. 〈래〉를 동사 〈오다〉로 보지 않고 그 전의 〈이〉와 연관된 〈이래〉라는 뜻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의 해석은 〈백제, 신라는 본시 고구려의 속민이라 조공을 바쳐왔는데 신묘년 이래로 왜가 바다를 건너 백제와 신라를 깨뜨리고 신민을 삼았다. 그래서 대왕은 즉위 6년째인 병신년에 수군을 인솔하여 백제를 토벌했다〉입니다.
 그러나 그의 해석은 자가당착을 범하고 있습니다. 우선 〈이〉와 〈래〉를 연결하여 쉽게 〈이래〉라는 의미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호태왕비에는 〈이〉가 독립적으로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 뜻은 모두 '-는' 혹은 '-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런 예들을 무시하고 자의적으로 〈이래〉라는 해석을 했습니다. 만약 그의 말대로 라면 〈신묘년이래〉라고 해야 자연스러울 것이고 이런 표현은 비에도 나오고 있습니다. 〈자차이래〉라는 표현이 바로 따라나오는 것입니다. 만약 그의 주장이 옳다면 이것은 〈이자차래〉라고 나와야 할 것입니다.
 또한 그 역시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를 정벌한 일본을 깨뜨리지 않고 백제를 토벌하였다고 하는 모순된 설명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 까닭을 그간 백제는 조공을 바치다가 일본의 신민이 된 이후로 조공을 끊었기 때문에 고구려가 백제를 친 것이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설명은 역사적 사실과 모순되고 있습니다. 그 무렵 백제는 고구려에 조공을 바치기는커녕 고구려를 공격하여 호태왕이 즉위하기 이십 년 전에는 호태왕의 조부인 고국원왕을 죽이기가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신묘년, 즉 호태왕이 즉위하던 해까지 조공을 바쳐왔다고 자의적 해석을 하는 겁니까. 또한 일본이 백제를 신민으로 삼고 있었다면 호태왕이 백제를 벙벌할 때 어째서 왜인은 백제와 같이 고구려에 대항하지 않았단 말입니까? 그는 이에 대하여 당시 백제와 신라를 정벌하여 신민으로 삼은 왜는 일개 왜구에 불과하여 잠시 내습했다가 곧 물러갔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시의 백제와 신라가 일단의 왜구로부터 내습을 받자 곧 신민이 되었다는 말입니까? 그토록 강성한 고구려에게도 수백 년간 한 번도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았는데 왜구의 간단한 내습에 백제와 가야 신라가 한꺼번에 신민이 되어버렸다는 주장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구절에 대한 박 선생의 해석은 어떤 것이오?"
"이렇게 띄어 읽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백잔신라, 구시속민, 유래조공. 이왜이신묘년래, 도해파. 백잔□□□라, 이위신민. 이육년병신, 왕궁솔수군, 토벌잔국〉, 즉 〈백제와 신라는 본시 우리 고구려의 속민이라 조공을 바쳐왔다. 왜가 신묘년에 내침하니 우리 고구려는 바다 건너 그들을 격파했다. 백제가 신라를 침략하여 신민을 삼았으므로 대왕은 병신년에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토벌했다〉입니다."
"그 빈칸에는 어떤 글자를 넣는단 말이오?"
"나는 빈칸에 어떤 글자를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지 않습니다. 해석을 자의적으로 만들 소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전에 왜에 대해 언급한 것과 역사적 사실을 고려한다면 그 빈칸에는 백제가 신라를 공격했다는 뜻의 어떤 글자가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온당할 것입니다."
"그것 역시 자의적인 것이 아니오?"
"지금에 있어서 광개토대왕비의 연구는 누구라도 나만이 옳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모두가 겸허한 마음으로 쇼비니즘적 태도를 버리고 진실을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박 선생은 아까 두 가지 관점이 있다고 했는데 문자를 있는 그대로 해석하는 외에 또 어떤 방법론이 있다는 말이오?"
"사료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는 다른 사료들과의 균형이 가장 중요합니다. 어느 한 사료에 쓰여 있는 사실을 여과나 검증 없이 진실로 받아들이면 과거는 언제나 심하게 굴절된 모습으로남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광개토대왕비의 비문을 매우 귀중한 자료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쓰여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비에는 추모왕은 천제의 아들이고 그의 모친은 알에서 태어났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사실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그 유명한 신묘년 기사에 대한 해석도 문자에 치우쳐서만은 안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호태왕비는 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대왕의 공덕을 칭송하는 공덕비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을 대왕의 관점에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비에는 백제와 신라가 본래 고구려의 속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어느 사서에도 신라와 백제가 고구려의 속민이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고구려의 과장이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백제 신라 가야는 일본의 시민이 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육군참모본부는 이 비를 보고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빈칸이 있어 왜곡해석할 여지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임나일본부라는 허구의 전설을 실체화하는 데 착수한 것입니다. 그 전설 자체가 조작되었다는 것은 여러분 일본학자들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 고여? 전설이 조작되었다니?"
"들고 싶은 예가 너무나 많지만 한 가지 중요한 사실만 지적하겠습니다. "일본서기"는 그보다 십 년 전에 나온 "고사기"를 참고로 하여 만들어진 책인데 그토록 중요한 임나일본부에 대한 기록이 "고사기"에는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사소한 기록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일본이 한반도를 이백 년간이나 지배하면서 설치한 관청에 대한 기록이 똑같은 시대에 나온 역사서에는 하나도 없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임나일본부는 우스꽝스런 쇼비니즘적 창조물입니다. 일본이라는 국명이 7세기에나 생겼음에도 이미 4,5세기에 임나일본부라는 이름의 관청이 있었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 아닙니까?"
 상훈의 대답은 거침이 없었다. 일본인 발제자들은 침착을 잃은 표정이 역력했고, 청중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거 커졌다.
"그렇다면 백제왕이 칠지도를 헌상한 것은 어떻게 설명할 거요?"
"칠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참모본부에서는 칠지도 역시 백제왕이 왜왕에게 헌상한 것이라고 얘기합니다만, 한국의 어느 학자는 정반대로 일본에 분국을 두고 있던 백제왕이 분국의 왕에게 하사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두 주장이 다 문제가 있습니다. 다른 사료에 같은 기록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일본서기"에는 칠지도에 대한 기로깅 있습니다. 그러나 칠지도에 새겨진 명문과 "일본서기"의 기록과는 연대가 맞지 않습니다. 게다가 칠지도에서는 백제왕이 왜왕을 후왕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후왕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신하라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오히려 후자의 주장이 더 신빙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한결같이 칠지도는 백제에서 일본에 헌상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의 나라에서 진행되어온 역사라는 것입니다. 
 참모본부는 일본의 국민을 전쟁터로 불러내기 위해 한반도는 본시 일본의 땅이었다고 조작했습니다. 그 무지몽매한 군인들이나 관방학자들은 그렇다 하더라도 문제는 지금의 일본학계입니다. 학문적 진리를 구하려는 겸허한 태도보다 민족의 우수성을 선전하려는 얕은 발상이 일본의 학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과거 남의 나라를 지배한 것을 자랑으로 알고 역사를 조작했던 군국주의자들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일본의 학계를 위해 참으로 슬픈 일이며 일본의 국민들에게는 불행한 일입니다.
 어릴 때부터 교과서에서 이렇게 왜곡된 역사를 배우고 있는 일본인들은 가장 신뢰하는 학자와 선생님들에 의해 역사적 진실에서 유리되어 있다는 이유 한 가지만으로도 불행한 것입니다. 본인은 이제라도 일본의 학계에서 각성하여 국민들에게 진실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박 선생은 지금 당치도 않은 주장을 하고 있소. 그래 야마모토 조정의 임나일본부가 결국은 한낱 허구란 말이오?"
"바로 그렇습니다. 일본의 학계에서는 광계토대왕비의 한 구절을 가지고 일본고대사의 연대를 몇백 년이나 소급하고 있습니다만, 그럼으로 해서 다른 사료와의 균형이 모두 틀어져 있습니다. 4,5세기 경에는 야마토 조정이 일본을 통일하고 한반도에 군사를 보낼 정도가 되지 못한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일본의 학자인 여러분이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왜 국내 사료와의 균형을 취하여 과거를 바른 모습으로 보려 하지 않고 불거져 나온 외국의 사료를 왜곡하여 진실을 외면한단 말입니까?
 중국이나 한국의 어느 사료에도 일본이 한반도를 2세기나 지배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래 2세기에 걸쳐 한반도를 지배한 사실이 수천 수만 종의 사서에는 한 구절도 언급이 안되어 있고 오직 "일본서기"에만 한 줄 적혀 있단 말입니까? 같은 시기의 "고사기"에도 없는데 말입니다. 더군다나 여러분들은 식민지배 시절 그 사실을 증명할 자료를 찾으려고 혈안이 되지 않았습니까? 
 결국 한 점의 자료도 찾지 못하자 한반도의 사람들이 치욕적인 사실이라 기록을 모두 없애버렸다고 주장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한반도측에서 보면 일본을 쫓아낸 것이 자랑스러운 역사적 사실인데 그것도 모두 없애버렸을까요. 그것도 신라 가야 고구려 백제 중국이 모두 협의해서 말입니까? 세계 역사상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4,5세기경이면 양국간에 사신 한 번 왔다간 것도 모두 사료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2세기에 걸쳐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한 것이 겨우 "일본서기"의 기록 한 줄로 압축될 수 있습니까? 터무니없는 주장입니다. 하루빨리 황국사관의 어두운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민족에게는 현재의 번영도 중요하지만 과거의 역사도 중요합니다. 일본이 그 어두운 역사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면 결코 진정한 의미에서 앞선 나라라고 볼 수 없습니다."
"집어치우시오!"
 흥분한 한 학자의 고함으로 토론은 중단되었지만 상훈은 참으로 통쾌함을 느꼈다. 일본인 학자들 정면에서 당당하고도 논리적으로 그들의 역사왜곡을 하나하나 지적해 주었다는 생각에 너무나 도 가슴이 시원하여 한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그동안 그를 괴롭혀온 에이지 사건의 추적으로 일본 역사학계의 허상을 꿰뚫어 보게 되지 않았던가. 일본 참모본부의 추악한 비밀을 많은 사람이 모인 세미나에서 밝히게 된 것이 더욱 후련했다. 세미나는 웅성거리는 가운데 끝났다.

55. 정죄

"뜻밖이군.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어."
 단상을 내려오자 눈에 익은 얼굴이 악수를 건넸다. 언젠가 학회에서 인사를 나누었던 학교의 선배였다.
"아니, 선배님이 어떻게 여길."
"일본에 온 길에 심포지엄이 있는 것을 알고 우연히 들렀어. 그런데 정말 놀랐어. 언제 그렇게 실력을 키웠지?"
"과찬입니다."
"얼마 후에 서울에서 고대사 관계 심포지엄이 있는데 시간 있으면 한 번 오게. 내가 초청장을 보내지. 식사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다른 일정이 잡혀 있어."

 다음날 학교에서는 같은 과의 우찌다 교수가 상훈을 찾고 있었다. 지도교수인 미나미 교수의 얼굴이 밝지 않은 것으로 보아 좋은 일은 아닐 것으로 생각됐다. 상훈은 일본인이지만 미나미 교수와 같은 훌륭한 학자 밑에서 공부를 할 수 있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유명한 하타다 교수의 수제자인 그는 상훈의 명석함과 성실함을 깊이 사랑하였다. 하타다 교수는 일본 사학계의 주류와 정면으로 대립하고 있는 양심 있는 학자였다. 그는 한말의 정한론이 "일본서기"의 그릇된 기술에서 나왔다고 주장함으로써 많은 주류학자들의 비판을 들었다. 하지만 굴하지 않고 자신의 주장이 정당함을 수많은 연구와 논문으로 밝혀낸 양심 있는 학자였다. 상훈이 우찌다 교수의 연구실로 들어가자 우찌다 교수는 대뜸 버럭 고함을 질렀다.
"자네가 역사에 대해 무엇을 안다고 세미나에 가서 그렇게 좌충우돌했단 말인가?"
"......"
"역사학에 있어 하나의 이론이 성립되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줄 아는가. 조금 줏어들은 것을 가지고 그렇게 휘젓고 다니는 게 아니야."
"......"
"자네 나라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일본에서는 오랜 학문의 전통이 없이는 결코 그렇게 함부로 발표를 하거나 멋대로 토론을 하지는 않아."
 스승을 존경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상훈이었지만 이 말에는 잠자코 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저의 발표가 한국의 학문적 전통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한국의 근대학문이란 것은 모두 일본의 틀을 따르고 있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학문의 체계는 그럴지 몰라도 한국의 학자들에게는 일본이 감히 따라올 수 없는 학자로서의 유구한 전통이 있습니다. 그들은 결코 정치적 목적을 위해 학문적 진실을 왜곡하진 않았습니다. 비록 군사독재를 겪었지만 당대의 유수한 학자들이 군부에 충성을 서약하는 일들은 한 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그렇다면 일본의 학자들은 그랬단 말인가."
"그랬지요. 분명히 그랬습니다."
"당치도 않은 소리는 하지 말아!"
"증거가 있습니다."
"뭐라고? 증거가."
"그렇습니다. 일본의 대표적 학자들이 천황가의 허위를 들추지 않겠다는 맹세를 한 서약서가 있단 말입니다."
 이때 우찌다 교수의 눈빛이 이상하게 변하는 것을 상훈은 눈치채지 못했다. 교수는 잠시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다가 이제까지의 들뜬 목소리와는 다른 나지막한 목소리로 상훈에게 물었다.
"자네가 어떻게 그런 것을 알지?"
 상훈은 그제서야 아차했다.
"그 서약서란 것은 어디에 있는 거야?"
"......"
"왜 얼버무리는 거야? 말해 봐."
"달리 말씀이 없으시면 돌아가겠습니다."
 상훈이 돌아서 나오는데도 우찌다 교수는 아무 말이 없었다. 다만 어떤 생각에 깊이 빠진 듯한 모습으로 상훈의 뒷모습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상훈은 어딘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크게 눈에 띄는 것은 아니었지만 누군가가 방을 뒤진 듯한 흔적이 있었다.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일까?'
 반신반의하는 중에도 조 전무가 그날 즉각 서류를 가져간 것은 매우 사려깊은 행동이었다는 생각과 함께 새삼스레 조 전무가 자신을 위해 큰일을 해주었다는 것을 느꼈다. 정보조직에 속해 있는 사람으로서 웬만해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조 전무는 자신을 위해 해준 것이었다. 곤두섰던 신경을 가라앉히고 책상에 앉자마자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상훈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이 생각나지 않았다.
 문밖에는 두 사람이 서 있었다.
"누구시죠?"
"늦은 밤에 미안합니다. 경시청 형삽니다."
"무슨 일입니까?"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일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좀 들어가서 얘기를 나눠도 되겠습니까?"
"들어오세요."
 형사들은 들어와 자리에 앉으면서 무의식적으로 방안을 둘러봤다.
"야마모도 서장이 죽었습니다."
"뭐라구요? 언제요?"
"오늘 저녁. 그런데 그것이 타살입니다. 병실 감시가 잠시 소홀한 틈을 타고 누군가가 침입했습니다."
"범인은 못 잡았습니까?"
 형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면서 상훈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이 상훈은 무엇인가를 알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를 찾아온 것은 무어라도 알아낼 것이 있다는 판단을 하기 때문인 것이겠죠?"
"그렇습니다."
 상훈은 잠시 생각을 했다. 분명 배후에는 연구소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함부로 단정지어 얘기할 수는 없었다. 노련한 와따나베는 틀림없이 수사망을 벗어날 것이었기 때문에 확실한 증거를 잡기 전에는 섣불리 얘기할 것이 아니었다.
"미안하지만 별로 짐작 가는 것이 없군요."
 그러나 형사는 상훈의 표정에서 무엇인가를 읽어낸 듯 쉽사리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박 선생께서는 야마모도 서장의 테러를 추리해냈습니다. 그에 대해 깊이 알지 못하고는 불가능한 일이죠."
"그에 대해 조사된 바는 있습니까?"
"현재로서는 아무것도 캐낸 것이 없습니다. 현직 경찰서장으로 능력을 인정받아 왔고 매우 모범적인 인물로 평가되어 와서 조직과 연결되어 있다고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성장과정에서도 별다른 의문을 찾을 수 없었어요. 형제는 없고 부친은 이미 오래 전에 캐나다로 이민을 가 연락을 끊고 사는 듯합니다. 뭔가 생각나시면 협조를 부탁합니다."
"알겠습니다."

"때르르릉."
 서장의 죽음을 생각하다 늦게야 잠이 든 상훈은 한밤중에 걸려온 전화에 자신도 모르게 화가 났다. 경시청의 형사일 것이었다. 머리맡의 시계를 보니 이제 막 한시를 지나고 있었다.
"저예요."
 형사들일 것으로 판단한 상훈이 아직 잠에서 덜 깬 늘어지는 동작으로 수화기를 귀에 갖다대자 뜻밖에도 하야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니, 하야꼬 씨. 무슨 일입니까?"
 직감적으로 무슨 일이 났구나 싶어 반문하는 상훈의 목소리에 이어 하야꼬의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꼬네에 가야겠어요."
"지금요? 무슨 일이 있습니까?"
"가즈오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느낌이 이상해요."
"뭐라고 했습니까?"
"청산으로 간다는 거예요."
"청산으로 간다구요?"
 상훈 역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기분이 아주 이상했어요.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아요."
"같이 가봐야겠군요."
"네. 제가 차를 가지고 나갈게요."

 늘 열차를 타고 가던 하꼬네에 하야꼬가 운전하는 자동차를 타고 가는 느낌은 새로운 것이었다. 더군다나 깊은 밤에 불길한 예감을 안고 어둠 속을 질주하자 처음 가즈오를 만나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가 사라지곤 했다.
"목소리는 어떻던가요?"
"아무런 감정이 없는 목소리였어요. 여느 때처럼요."
"다른 말은 없었습니까?"
"네. 제가 전화를 받으니까 다른 말은 없이 〈하야꼬, 잘 있어. 이제 나는 청산으로 가겠어〉라고 하더니 전화를 끊었어요."
 하야꼬의 목소리가 떨려 나오더니 액셀러레이터를 세게 밟았다. 그녀도 역시 격렬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는 듯했다. 두 사람은 하꼬네로 가는 긴 시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간간이 스쳐 지나가는 자동차의 불빛에 비치는 하야꼬의 얼굴에는 눈물이 배어 나왔다. 하야꼬는 액셀러레이터를 늦추지 않았으나 하꼬네로 가는 길은 여느 때보다 훨씬 멀어보였다.
 이윽고 자동차가 하꼬네에 도착하여 산간도로를 따라 올라가는 동안 상훈은 왠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새벽 네시가 되어가는 시간이라면 산은 고요히 잠들어 있어야 했는데 어딘지 모르게 산만하고 소란한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불길한 예감 탓이려니 하고 무심코 차창을 열던 상훈은 바람을 타고 흘러온 매캐한 냄새에 코를 막았다.
"무슨 냄새죠?"
 하야꼬가 물었다.
"뭔가 타는 냄새 같은데요."
 자동차가 미술관 바로 밑의 언덕에 다다르자 냄새는 더욱 심해졌다.
"혹시?"
 두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마주봤다. 짙은 불안감을 느끼는 모양인지 하야꼬의 눈이 더욱 커졌다.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자동차가 산모퉁이를 돌아서자 시뻘건 화염이 혀를 낼름거리며 어둠을 사르고 있었다.
"불이다."
"미술관이에요."
 자동차가 정문 앞에 다다르자 상훈은 번개처럼 뛰어내렸다. 많은 사람들이 불길을 잡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불타는 미술관을 바라보며 발을 구르고 있었다. 불길은 강한 바람을 타고 너무나 기세좋게 타올랐다. 소방차 몇 대가 와 있었지만 강한 바람을 타고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길을 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불길에 비치는 사람들의 얼굴이 안타까움으로 일그러져 있는 것을 보고 상훈은 불길한 마음을 가까스로 누르며 절규하듯이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가즈오는 어디 있어요?"
 평소 안면이 있던 경비원은 상훈을 보자 억지로 참고 있던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요즘 도련님 상태가 안 좋았습니다. 한밤중에 괴성을 지르기도 하고 갑자기 밖으로 뛰쳐나오시곤 했어요. 그래도 이렇게까지 하실 줄이야."
 바람에 춤추는 불길이 나이든 경비원의 가늘게 떨고 있는 얼굴에 어른거렸다.
"가즈오!"
 하야꼬의 다급하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어둠을 뚫고 허공중에 울려퍼졌다. 처절한 절규는 이내 불길에 묻혀버리고 불타는 미술관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주저앉는 하야꼬를 보면서 상훈 역시 망연자실했다. 미술관을 둘러싼 사람들에게 여봐란 듯이 혀를 낼름거리며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길 앞에서 상훈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불쌍한 가즈오'
 무엇보다도 상훈의 기억을 아프게 때려오는 것은 최독준 대장이 온다고 기뻐하던 가즈오가 다음에는 태도를 바꾸어 가지 않겠다고 하던 모습이었다. 그때 그의 얼굴은 고뇌와 갈등에 가득차 자신의 존재를 힘겨워하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얼룩져 있었던 것이었다. 상훈은 자신도 모르게 나직이 가즈오의 이름을 되뇌었다.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고 영혼만이라도 편안한 휴식을 누릴 수 있기를 빌었다.
"우지끈 퉁탕, 탁탁"
 미술관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였다. 앙상한 골조를 드러낸 미술관 건물은 마치 가즈오의 소실될 육신을 상징하듯 어둠 속에서 조금씩 무너져 내렸다.
"가즈오야!"
 이제 도착했는지 야마자끼의 미친 듯이 울부짖는 목소리에 이어 소동이 일어났다. 불타는 건물 안으로 미친 듯이 뛰어들어 가려는 야마자끼를 사람들이 붙잡았다. 야마자끼는 사람들을 벗어나려 팔을 휘두르며 악을 쓰고 있었다. 불길이 가라앉고 미술관이 검정 잔해를 드러낼 무렵까지 야마자끼의 소동은 계속되다가 새벽녘이 되어 탈진해서야 가라앉았다.

"이것 좀 보십시오. 뒤뜰에 그림들 하고 같이 있었습니다. 도련님이 미리 그림들을 몇 점 꺼내놓으셨나 봅니다."
 경비원이 지친 야마자끼에게 하얀 봉투를 내밀었다. 그때까지도 넋을 놓고 있던 야마자끼는 경비원이 내미는 봉투를 빼앗듯이 낚아챘다. 편지였다. 야마자끼는 마치 편지 안에 가즈오가 살아있기라도 한 것처럼 다급한 손길로 접혀진 편지지를 펴고는 읽어내려갔다. 불빛에 비친 야마자끼의 눈동자가 좌우로 몇 번 구르더니 고개가 푹 꺾이면서 입에서는 신음인지 비명인지 분간 못할 괴성이 흘러나왔다.
"으흐흐흐."
 상훈과 하야꼬는 야마자끼의 옆에 한동안 서 있었다. 두 사람에게도 위로의 말을 건넬 여유가 없었다. 야마자끼는 고개를 들다가 두 사람이 눈에 들어오자 천천히 일어섰다.
"아저씨."
 하야꼬가 울먹이며 부르자 야마자끼는 하야꼬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미안하구나. 하야꼬야."
 상훈은 한바탕 울고나서인지 야마자끼의 얼굴이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것을 보았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서 있는 하야꼬에게 야마자끼는 손에 쥐었던 편지를 내밀고는 불길이 사그라진 가즈오의 방으로 눈길을 돌렸다. 옆에 있던 상훈과 눈이 마주쳤으나 뜻밖에도 지난번에 보였던 적대감이 없는 눈빛이었다. 편지를 펴보던 하야꼬의 얼굴에서는 눈물이 주루룩 흘러다. 상훈의 눈이 하야꼬의 어깨 위로 편지를 찬찬히 훑었다.

 "아버지. 병이 나아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안되더군요. 머리 속의 혼돈을 결국은 극복하지 못하겠습니다. 제가 가장 사랑하고 또 저를 가장 사랑하는 아버지가 집안의 원수라니요. 자신의 동포를 팔아버리고 조국을 배반한 죄인이라니요. 그 현실 앞에 가즈오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병이 나아야 한다고 수천 번이나 다짐을 하며 흐려지는 정신을 다잡다가도, 현실 속으로 깨어나기가 두려워 슬그머니 아버지가 정성껏 지어오신 약을 버리곤 했습니다. 아버지가 지은 죄를 제가 대신해 씻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저 역시 죄인이라는 자격지심에 늘 허물어지곤 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조국에 생채기를 낼수록 저는 가슴속에 조국을 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도 몰래 모국어를 배우기 시작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인가 시조집에서 〈나비야, 청산가자〉라는 구절을 보고 얼마나 울었던지 모릅니다. 이 가즈오는 정말이지 한 마리 나비이고 싶었습니다. 청산을 향해 너훌 너훌 춤을 추며 날아만 가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 고통스런 현실로 결코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면서요. 저는 그렇게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아버지, 어떻게 하면 아버지도 저도 용서받게 될까요? 훌륭했던 저의 친조부와 저의 조국이 아버지와 저를 용서해줄까요? 며칠째 머리 속에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납니다. 지금도 그 소리가 사라지지 않고 저를 괴롭힙니다. 고통이 너무 큽니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요. 아버지, 이 다음에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게 되면 아버지도 저도 순수하고 깨끗한 인간으로 태어나길 빕니다. 아버지, 아버지를 정말 사랑했었습니다."

"박 선생, 가즈오는 내가 죽였소."
 야마자끼의 감정을 잃은 목소리가 바람에 날리는 재에 섞여 전해져 왔다.
"내 부친은 동지를 배신하고 나는 내 나라의 미술품을 암거래했소. 가즈오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대한 극진한 애정을 갖고 있었는데, 우리는 가즈오를 배신했던 거요. 가즈오는 우리가 모두 한국인이라는 사실과 우리가 자신의 집안의 원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거요. 그것도 모르고 나는 가즈오의 애비 노릇을 하고 계속 조국을 파는 행위를 계속하고 있었소. 한국에서 몰래 미술품을 들여와 일본에 팔아넘기고 있었던 거요. 가즈오의 정신병은 나 때문에 생겼던 건데, 이제 결국 그 아이를 죽이기까지 한 거요. 가즈오! 나를 데리고 가라. 나 혼자 이 고통을 어떻게 견디란 말이냐!"
 상훈과 하야꼬는 아직도 잔불길이 널름거리는 미술관과 그 앞에서 통곡하는 야마자끼를 뒤로 하고 말없이 동경으로 돌아왔다.
 상훈은 가슴이 텅 빈 듯했다. 혈육을 잃은 듯한 기분이었다. 하야꼬 역시 넋이 나간 듯했다. 상훈은 하야꼬가 걱정되었지만 그녀의 집앞에서 말없이 헤어지는 수밖에 없었다.

56. 야마모도 슈우꼬오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열려고 하던 상훈은 누군가가 집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기척을 느꼈다. 어젯밤 나갈 적에 분명히 문을 잠그고 나갔는데 누군가 들어와 있다면 보통 일은 아니었다. 형사들일까? 도어를 잡은 손을 살며시 놓으려던 상훈은 갑자기 문이 확 열리는 바람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디 갔었어요?"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김정애였다.
"아니 어떻게 여길?"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괜찮아요?"
"가즈오가 죽었습니다."
"네?"
 김정애도 충격인 모양이었다.
"자살입니다."
"아니, 어떻게 그런 일이......"
 김정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손을 휘휘 젓더니 가슴을 손으로 몇 번이고 두드렸다. 겨우 충격이 가셨는지 김정애가 용건을 말했다.
"조 전무님이 우리를 보냈어요. 다른 요원들은 밖에서 감시하고 있어요."
"아니 왜 들어오지 않고."
"정체를 노출시키라구요?"
"그럼 누가 또 있습니까?"
"언론, 경찰, 야마모도의 살해세력 할 것 없이 모두 박 선생님을 노리고 있어요. 조 전무님이 야마모도의 피살 소식을 어젯밤 늦게 아시고 전화를 했는데 받지 않으니까 바로 우리를 보냈어요. 조 전무님은 야마모도를 살해한 배후세력이 박 선생님을 해칠까 봐 상당히 신경을 쓰고 있어요."
 김정애는 이제 그만 가겠다고 일어섰다. 김정애가 돌아서자 곧 몇 사람의 기자와 형사들이 찾아왔다. 현직 경찰서장의 테러와 의문의 피살에 대한 여론이 들끓었지만 경시청에서는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라 오직 상훈에게 매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상훈으로서도 배후에 연구소가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으나 자신에게 야마모도와 연구소의 관계를 밝힐 뚜렷한 증거가 없는 한 함부로 발설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조 전무가 연구소에서 야마모도의 메모를 발견한 사실도 극비로 붙여야 했다. 따라서 에이지의 살해현장에서 사라졌던 책 뒷장의 종이가 연구소에서 발견되었다는 것도 얘기할 수 없었다. 조 전무도 역시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와따나베의 역량으로 보아 경시청에서 잡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소. 수사의 초점을 흐리기 위해 와따나베는 도난당한 서류들을 거론하고 나올 것이오. 잘못하면 나와 박 선생이 크게 당할 염려가 있소."
 방법은 야마모도와 연구소와의 관계를 밝혀줄 증거를 찾는 것 뿐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 둘을 연결시켜 생각해볼 건덕지는 없었다. 연구소는 철저히 뒤에 숨어 있었고 야마모도 역시 한번도 연구소에 대하여는 입에 올리지 않았다. 오히려 철저히 위장하여 이마무라 주임이 살해당했을 때도 전혀 연구소의 내막에 대하여는 모르는 듯이 행동했다. 연구소의 행정실장이 서장실에 나타나 거세게 항의를 할 때도 모르는 사람들처럼 행동했으니 상훈이 양자의 관계를 밝힌다는 것은 난망한 일이었다. 이럴 때 이마무라 주임이라도 있었으면 낫지 않았을까 하고 아쉬워하던 상훈의 뇌리에 문득 떠오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바로 그 이마무라 주임은 연구소로 가는 도중에 피살되었던 것이다.
 '주임은 어째서 연구소의 서무과를 찾아가려 한 것일까.'
 야마모도를 의심하던 주임이 연구소를 찾아갔다면 그 이유는 야마모도와 연구소간의 어떤 관계를 눈치챘기 때문이 아닐까. 주임은 무척 자신만만하게 이번에는 직접 큰일을 해내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상훈은 이제야 비로소 이마무라 주임이 결코 보통의 형사가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에이지의 주민등록을 추적했던 것이나 야마모도에 의혹을 갖자 연구소를 찾아가려 한 일이나 베테랑 수사관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연구소의 서무과에서 하는 일을 곰곰 생각하던 상훈은 한 가지 사실에 착안했다. 
 '혹시 주임은 연구소의 명단에서 야마모도의 이름을 확인하려하지 않았을까.'
 그것 밖에는 연구소의 서무과에 찾아가서 확인할 일이 없었다.
 상훈은 전화기를 들어 연구소의 서무과를 연결했다.
"혹시 직원 중에 야마모도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추리는 빗나갔다. 그냥 끊으려던 상훈은 내친 김에 한 번 더 물었다.
"아, 꼭 직원이 아니더라도 연구소와 관련이 있는 가까운 사람 중에 야마모도라는 사람이 없는가 말입니다. 가령 이사장님의 친구라든지 말입니다."
"그런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간단하게 대답을 하고 끊으려던 여직원은 갑자기 무엇인가 생각난 모양이었다.
"아, 잠깐만요.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이름이군요."
 상훈은 긴장으로 온몸이 팽창되는 것을 느꼈다.
"그분은 발기인이십니다."
"네? 발기인이라구요?"
"그렇습니다."
"야마모도 슈유꼬오. 연구소의 창립 발기인이 틀림없습니다."
"미안하지만 연구소의 창립발기인 명단을 불러주실 수 있습니까?"
"잠시 기다려 주세요."
 잠시 뒤에 나온 여직원은 또렷한 목소리로 정관에 있는 창립발기인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와따나베, 에이지, 가또오, 야마모도의 네 분이십니다."
"예? 그 바로 네 사람이 발기인이라고요?"
 상훈은 현기증을 느꼈다. 놀라운 일이었다. 대동아연구소는 바로 야호이의 동지들이 만든 것이었다. 상훈은 목이 메었다. 이마무라의 웃는 얼굴이 눈앞을 스쳐갔다. 그 생각을 못했었다니. 야마모도 슈우꼬오는 야마모도 서장의 부친일 것이었다.
"야마모도 선생도 계신단 말이지요?"
 상훈은 한 번 더 물었고 영문을 모르는 여직원은 친절히 대답했다.
"네. 틀림없이 계십니다."
"고맙습니다."

 전화를 끊는 상훈의 귓가에 언젠가 주임이 바이칼에 갔다온 사람들을 추적해 와서 하던 말이 들려오는 것이었다.
"생존자는 두 사람입니다. 와따나베 외에 또 한 사람은 캐나다로 이민을 갔습니다."
 그랬었다. 참모본부의 첩보원으로 시베리아에 갔다온 두 사람의 생존자 중에 한 사람은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고 했다. 
 이마무라 주임은 연구소의 정관을 입수하러 간 것이었다. 
 야마모도는 연구소 창립발기인의 아들이라는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관계를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비슷한 나이의 와따나베가 이사장을 맡고 있고 같은 창립발기인의 아들인 야마모도는 바로 관할 경찰서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모르는 관계라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상훈은 이 정도면 야마모도와 연구소의 관계를 보여주는 충분한 정황증거가 된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연구소의 직원인 마쓰모도의 실종과 이마무라 주임이 연구소 부근에서 차에 치여 죽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연구소는 빠져나가지 못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상훈은 즉각 경시청에 연락을 하려다가 생각 끝에 다시 전화기를 놓았다. 일단 조 전무와 의논을 해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대단히 미묘하게 되었군요."
"무슨 의미인가요?"
"그것은 뚜렷한 증거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는 얘기요."
"잡아떼지는 못할 것 아닙니까?"
"그렇겠지요. 그러나 결정적으로 혐의를 둘 수도 없는 심증 정도에 불과할 수도 있지요."
"결국 연구소의 범행을 입증할 수는 없단 말인가요?"
"그렇다고 봐야 될 것 같소."
"갑갑하군요."
"박 선생, 굳이 연구소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소?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데. 이마무라 주임도 야마모도의 테러를 드러낸 것으로 만족할 거요. 일본에는 이런 연구소나 우익단체가 수천 개나 있소."
"저는 꼭 밝혀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요?"
 조 전무는 강한 호기심을 머금은 얼굴로 물었다. 상훈은 약간 망설이다 설명을 시작했다. 조 전무가 쉽게 알아들을 수 있을 것으로는 생각지 않았지만 자칫하면 조 전무로부터 자신을 무시한다는 오해를 사게 될 것 같아서였다.
"닛꼬의 살인현장에서 사라졌다가 연구소에서 발견된 종이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동의 옆에 있는 글자로서 적합한 것은 침, 정 혹은 벌이다. 셋 중의 어는 것이든 뜻은 같다. 초 씨는 영원한 비밀을 남기고 가버린 것인가.〉"
"그건 무슨 뜻이오?"
"저도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쩌면 호태왕비의 비밀을 푸는 결정적 열쇠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연구소에서는 그것을 알고 있단 얘기요?"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아마 와따나베만은 어째서 에이지가 이런 메모를 남겼는지 알고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조 전무는 상훈의 눈빛으로 보아 에이지의 이 메모에 대한 집착이 대단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젊은 청년의 집념으로 보아 잘못하면 자신이 연구소를 침입하도록 사주한 사실이 드러난 위험성이 매우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청년은 자신이 주었던 서류를 모두 돌려주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박 선생, 그 종이를 갖고 계시지요? 일단 그걸 돌려주시오."
"안됩니다."
"왜? 돌려주기로 하잖았소?"
"내가 순수하게 박 선생에게 도움이 되라고 위험을 무릅쓰고 얻어낸 것 아니오. 그런데 박 선생이 그것을 가지고 문제를 삼는다면 배은망덕한 일이 아니오?"
"미안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 개인의 일이 아닙니다. 어쩌면 그 종이에는 이제껏 호태왕비에 대해 알려진 것과는 전혀 다른 진실이 숨겨져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저는 경시청에 그 종이를 제출하겠습니다. 에이지의 살해현장에서 사라졌던 종이가 연구소의 비밀금고에서 발견되었다면 연구소는 결정적 살인용의자가 됩니다. 조 전무님께는 미안하지만 할 수 없습니다. 나는 그 종이의 비밀을 밝혀내야만 합니다."
 조 전무는 갑작스런 상훈의 변화에 몹시 당황했다. 눈을 감고 한참을 무언가를 생각하던 조 전무는 이윽고 눈을 뜨며 무거운 목소리로 내뱉았다.
"내가 그 종이를 공개하지 않고도 진실을 알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 보겠소. 그러나 일이 잘못되면 나의 미래는 말할 것도 없고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할 것이오."

 며칠 후 상훈은 조 전무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박 선생. 내일 정오에 벳부의 스기노이호텔로 가보시오."
"왜요?"
"프론트에서 야마모도 슈우꼬오 씨를 찾으시오."
"야마모도 서장의 부친이오. 그라면 박 선생의 질문에 답을 해 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소. 피살된 에이지와는 같은 연구소의 창립발기인이거든."
 상훈은 깜짝 놀랐다. 자신이 그토록 어렵게 추리를 해서 찾아낸 것을 이 사람은 너무도 빨리 알아내고 말았다. 상훈은 도대체 이 사람이 그런 것을 어떻게 알아냈는지 궁금증이 강하게 일었다.
"그런데 어떻게 찾았습니까? 캐나다에 있다고 알고 있었는데요."
"박 선생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시오? 캐나다에 있는 직원에게 부탁하고 입국자 명단 다 뒤지고 워낙 특별한 노인이라 정말 힘들게 찾았소."
"아, 야마모도의 장례 때문에 들어온 모양이군요. 그런데 살아있는 것은 어떻게 알았습니까?"
"혹시나 해서 야마모도의 국제통화 기록을 뒤졌소. 야마모도의 사망이 알려진 날 밤에 부인이 캐나다로 전화를 한 것이 있더군. 장례에 간단하게 참석하고는 바로 벳부로 내려가버린 것으로 보아 부자간이 거의 의절하다시피 살아온 것 같았소. 만날때에 참고로 하시오."
"정말 고맙습니다. 급할 때마다 이렇게 묘안을 내주니 어떻게 신세를 갚아야 할지 모르겠군요."
"그 노인에게서 무엇인가 알아내지 못하면 다른 방법은 없소. 나의 생각으로는 아마 가능성이 있을 것 같소. 노인은 자신의 아들과 연구소의 하는 짓들에 염증을 느끼고 캐나다로 갔다는 얘기가 있더군. 연구소에서 야마모도를 살해했다고 넌지시 비치면 성과가 있을지 모르지. 그리고 그 종이는 내게 돌려주시오."
 조 전무는 은근히 방법까지 일러주었다.
"알았습니다."
 다음날 상훈은 바로 오이타행 비행기를 탔다.

57. 잃어버린 글자

 하루종일 유황천의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벳부의 전망 좋은 산 중턱에 자리잡은 스기노이호텔은 깨끗한 현대식 건물이었다. 로비의 시원한 대형 유리창을 통하여 벳부만이 정면으로 보이는 호텔에는 다야안 목욕시설이 있어 일본의 수많은 온천 중에서도 단연 으뜸으로 꼽히고 있었다. 당일로 올라갈 수는 없는 일정이라 프론트를 찾아 야마모도의 방을 확인하고 상훈도 방을 하나 잡았다.
"1536호. 오우션 뷰입니다."
 상훈이 15층에 올라가자 대기실의 여자가 나와 깊이 고개를 숙이고는 열쇠로 방을 열고 유까다를 꺼내놓았다. 상훈은 차를 한잔 마시며 생각을 정리한 후에 야마모도의 방으로 전화를 했다. 벨이 한참 울려도 전화를 받지 않자 프론트에 확인하니 목욕중이라고 했다.
 좀 있다 다시 전화하기로 하고 상훈도 목욕탕으로 내려갔다. 비행기를 타 피곤하기도 했지만 깨끗한 인상으로 노인을 만나는 것이 나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러나 욕탕에 들어선 순간 상훈은 아차 했다. 평일이라 그런지 목욕탕에는 단 한사람의 노인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팔십 세 정도로 보이는 것으로 보아 그 노인은 아마도 야마모도의 부친임에 틀림없을 것으로 생각됐다. 
 상훈은 몸을 돌려 나오려다가 노인이 보고 있는 것을 느끼고는 자연스럽게 걸어 욕조에 들어갔다.
 머리를 욕조에 기대자 커다란 대형유리를 통해 벳부만이 한눈에 들어왔다. 파란 인조잔디로 정원처럼 꾸며놓은 테라스에는 금붕어들이 자유로이 헤엄을 치고 있어 한가로운 분위기였다. 상훈이 온천물이 넘쳐나는 큰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잠시 눈을 감았다 뜨자 바로 앞에 야마모도 노인이 수건을 머리에 동여맨 채 기분좋은 표정으로 상훈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훈은 일순 당황했다. 야마모도 노인이야 아무것도 모르고 있겠지만 자신은 노인을 찾아 동경에서 내려온 입장이었다. 상훈은 아예 여기서 말을 꺼내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야마모도 선생님이시죠?"
"그렇소만......"
 뜻밖에도 야마모도는 크게 놀라는 기색은 아니었다. 나이 탓일 것이었다.
"박상훈이라고 합니다."
 상훈은 야마모도에게 에이지의 피살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샅샅이 얘기했다. 야마모도는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상훈의 얘기를 들었다.
 상훈이 얘기를 끝내자 노인은 한편으로는 혀를 차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상훈의 집념과 추리에 감탄한 표정이었다. 노인은 나이보다 훨씬 젊고 이해가 정확하였다. 한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온천물이 솟아 나오는 석대에 양손을 뻗쳐 더운물을 얼굴에 몇 번 뿌렸다. 
 상훈은 노인이 야마모도 서장의 죽음에 연구소가 개입되어 있다고 얘기했는데도 별로 반응을 보이지 않은 점이 이상하게 생각됐다. 서장의 죽음에 연구소가 개입되어 있다고 말하면 격분할 것으로 생각했던 상훈은 저으기 불안해졌다.
"와따나베 그놈이 결국은 이런 일들을 저지르고 말았군. 어리석은 내 아들놈이야 어차피 그렇게 죽을 놈이었지만 에이지는 비참하게 죽음을 당하고 말았어."
 알고 보니 노인은 원래 별로 감정의 동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아드님의 일은 정말 안됐습니다."
 역시 노인은 별반 표정을 나타내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놈은 뜻도 모르는 애국심에 미친 놈이야. 나는 이런 결과를 예상하고 있었어. 이놈들의 정신나간 짓들은 더 얘기할 필요도 없으니 자네가 가장 알고 싶어하는 에이지의 얘기를 해주겠네."
"고맙습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모두 정신나간 짓이었어."
 노인은 과거가 후회스런 표정이었다.
"우리는 바이칼에서 금괴의 일부를 찾았지. 그런데 엄청난 양의 금괴를 찾자 대원들간에 무서운 피바람이 몰아쳤어. 모두 생각이 달라진 거지. 어차피 전쟁도 막바진데 국고에 넣을 필요가 어디 있느냔 거였어. 딴 생각을 하면 군법에 회부하겠다는 지휘관을 죽이고, 패전 후에도 일본의 정신을 지키면서 끝까지 투쟁해 나가자고 결심을 했지. 그래서 금괴를 감추어두고 있다가 패전 직후 연구소를 차렸어. 그런데 일곱 명 중 셋이 자신들의 몫을 나누어 달라고 했지. 와따나베는 무서운 자였어. 그들을 하나씩 모두 죽여버렸지. 이런 것을 보며 나와 에이지는 회의를 느꼈어. 이런 식으로 일본의 정신을 지킨다는 것이 우스꽝스런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거지. 나는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어. 바보 같은 내 아들은 한창 연구소의 논리에 빠져들어 나를 비난했고 우리 부자는 의절했어. 에이지 역시 연구소가 일방적인 길로 치닫는 것을 보고는 회의를 품었지만 그는 한창 연구하던 것이 있었어. 연구소의 자금이 필요했지."
"그분이 연구하던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자네가 관심을 갖는 호태왕비의 비문이었어."
 상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엄청난 비밀을 듣게 될 것 같은 예감을 느끼자 몸이 떨려왔다.
"그분이 살해된 현장에서 발견된 종이가 호태왕비와 관련이 있을까요?"
"그렇지. 연구소에서 끝까지 숨기려 했을 정도로 무서운 비밀을 갖고 있는 것이지. 에이지를 죽여서라도 말이야. 자리를 옮겨 얘기할까?"
 두 사람은 야마모도의 방으로 올라갔다. 의외에도 목욕탕에서 얘기를 시작한 것이 솔직함을 더하게 했는지 야마모도 노인은 상훈에게 우호적이었다. 벳부만이 바라보이는 창가의 자리에 앉자 야마모도 노인은 감회 어린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의 변화라는 것은 참으로 무상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 시절에는 그렇게나 한국인에게 숨기려고 하던 것을 이제 내 입으로 털어놓게 될 줄이야."
"진실만이 영원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노인은 한동안 창밖을 내다보다가 이윽고 얘기를 시작했다.
"에이지는 호태왕비가 있는 집안을 수십 차례 찾아갔었어. 그는 호태왕비의 부근에 사는 사람들에게서 비의 해석과 관련한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지."
"이제껏 학자들이 비면에만 집착하던 것과는 확실히 다르군요."
"그렇지. 모든 학자들이 탁본에만 의거하여 왈가왈부할 때 그는 좀더 폭넓게 비에 접근했었지. 신발이 닳도록 비와 관련된 사람들을 찾아다니다가 그는 결국 엄청난 발견을 해냈네."
 상훈은 자신도 모르게 숨결이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 야마모도 노인의 다음 얘기에 온 신경이 쏠렸다.
"그는 호태왕비의 옆에 움막을 짓고 2대에 걸쳐 비를 탁본하여 팔던 사람을 상투라는 곳에 있는 그의 조카의 집에서 찾았네. 그의 이름은 초균덕. 그의 아비의 이름은 초천부였어."
"이미 나이가 많이 들었겠군요."
"그렇지. 패전하던 해에 만났는데 이미 그의 나이 팔십에 가까웠지."
"2대에 걸쳐 탁본을 했다면 이미 1880년대부터 그 작업을 해왔겠군요?"
"그렇지. 1883년부터 탁본을 했다고 했어. 그들이 처음에는 이끼에 덮여 있던 비에 말똥을 붙여 태워서는 탁본을 시작했다고 했어."
"그러면 거의 모든 탁본이 그들에 의해 만들어졌겠군요?"
"그렇지. 호태왕비의 탁본 자체가 워낙 어려운 데다가 이들은 탁본을 하여 파는 사람들이었으므로 탁본 그 자체에는 속임수가 많아."
"동일인에 의해 만들어졌어도 탁본들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게다가 이들은 작업을 쉽게 하기 위해 글자 사이의 틈새에 석회를 바르거나 석회로 글자를 보수하기도 하였어."
"그것은 저도 비에 가서 확인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에이지는 그 초균덕이란 자가 가지고 있던 저본을 볼 기회가 있었단 말이야."
"저본이라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 비의 초록이지. 즉 그들이 탁본을 하기 전 비에 원래 쓰여 있던 글자들을 종이에 옮겨 적은 것이야."
"아, 대단한 자료군요."
"그렇지. 그들 초 씨 부자가 무식한 사람들이었으니만치 어떤 의도를 가지고 글자를 조작했을 리는 없지."
"그렇겠군요. 그러나 그 당시라 해도 1880년대이니 비가 지금보다 월등히 잘 보인다고 생각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긴 해. 그러나 그 저본에 그 비에서 가장 중요한 세 글자 중의 한 자, 어쩌면 두 글자 중의 한자가 적혀 있다면 보통 일인가?"
"그것이 무슨 자입니까?"
"아까 자네가 말하지 않았나? 〈이왜이신묘년래 도해파백잔□□□라〉의 구절 중 마지막은 오른쪽에 근자가 보이므로 결국 신자일 것으로 대부분 의견들이 일치하고 있으나 앞의 두자만이 미궁이지. 그런데 에이지는 그 초록에서 두 자 중의 앞의 글자를 보았던 것이네."
 상훈은 가슴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세상에 그런 저본이 있을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상훈의 목소리 역시 떨려나왔다. 
"그 글자는 무엇이었습니까?"
 야마모도 노인은 잠시 감았던 눈을 뜨며 단호한 목소리로 내뱉았다.
"초록의 글자는 동자였던 것일세."
 '아, 그랬구나. 그래서 에이지의 메모에는 동의 옆에 들어갈 수 있는 글자가 쓰여 있었구나.'
 그제서야 상훈은 에이지의 메모를 이해할 수 있었다. 에이지는 초균덕의 저본에서 빈칸의 맨 앞에 동자가 쓰여 있는 것을 보고 그 다음에 들어갈 구절에 대해 연구를 한 것이었다.
"아까 한국인에게 그토록 숨기려고 했다고 하셨는데 무엇 때문에 그랬습니까?"
"거기에 있던 글자가 동이라면 참모본부에서 몰아가던 해석과는 전혀 달라지지. 참모본부에서는 〈이왜이도해파백잔임나신라 이위신민〉이라고 해서 왜가 바다를 건너 백제와 가야, 신라를 깨뜨리고 신민을 삼았다고 해석했는데 거기에 '동'이 들어간다면 그런 해석은 설 자리를 잃게 되지."
"그렇군요."
"그 자리에 〈동〉이 들어가면 다음에는 정, 벌, 침 등의 동사가 오게 되고 주어는 자연히 백제가 되어버린단 말이야. 즉〈백제가 동으로 신라를 쳐서 신민을 삼았다〉가 되어 왜가 들어갈 자리를 잃어버리게 되지. 이것은 따라서 그 뒤에 나오는 구절 〈그래서 병신 육년에 대왕은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토벌했다〉와 꼭 맞아떨어지지."
"거기에 다른 해석은 없을까요?"
"그 구절의 주어를 왜로 보아 왜가 백제를 깨뜨리고 동쪽으로 신라를 침략했다고 억지 해석을 할 수 있긴 한데 아무래도 부자연스러워. 무엇보다도 참모본부와 학자들이 이제까지 주장해온 〈백잔임나신라〉라는 해석과도 배치될 뿐만 아니라, 상식적으로도 백제를 완전히 점령하여 식민지화하지 않은 이상 백제를 깨뜨리고 백제 쪽에서 동진하여 다시 가야와 신라를 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일본에서 바로 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니까."
 상훈은 너무나 뜻밖의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에이지는 너무나 대단한 발견을 한 것이다.
"에이지 선생은 그런 연구결과를 발표하지 않았습니까?"
 상훈은 자기도 모르게 에이지의 이름에 선생을 붙이고 있었다.
"발표? 그렇지 발표를 한 셈이지. 죽음으로써. 나는 자네가 아까 나에게 에이지의 죽음을 얘기할 때부터 자네는 에이지가 보내서 온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어. 내가 모든 것을 말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단 말이야. 결국 이것은 역사의 섭리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러니까 에이지 선생은 최근 이런 사실을 발표하려 했고 와따나베는 만류하다 소용없다고 판단하고 결국은 살해하고 말았단 얘기군요."
"바로 그렇지."
"그후로 초균덕의 초록은 왜 알려지지 않았을까요?"
"초균덕은 패전 바로 다음해인 46년에 죽고 말았어. 에이지가 그해 5월에 다시 찾아갔을 때에는 생긴 지 두 달 된 무덤만을 볼 수 있었지."
"초씨가 그 초록을 누군가에게 맡기고 죽지는 않았을까요?"
"그랬을 가능성이 있지만 전쟁 후에는 일본인이 그 지역에 들어갈 수 없었어. 에이지로서도 그 초록을 가져오는 것은 엄두를 못 냈겠지. 그럴 필요도 없었을 거야. 어차피 그로서는 틀림없이 확인했으니까."
 상훈이 야마모도 노인에게 증언해 줄 것을 부탁하자 노인은 목숨을 걸고라도 증언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상훈은 목이 메이는 것을 느끼며 노인에게 깊이 고개를 숙이고 호텔을 나왔다.
 
 상훈은 일 박을 하려고 했던 예정을 바꿔 마지막 비행기를 타고 동경으로 급히 돌아왔다. 무언가 짚이는 것이 있었다. 공항에서 서둘러 시내로 돌아온 상훈은 역 앞의 동양문고를 서둘러 찾았다. 언젠가 중국의 학자가 쓴 호태왕비에 관한 책에서 초록에 대한 설명을 보았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서가에서 책을 뽑아본 상훈은 소스라치게 놀라다. 그것은 중국의 학자로 호태왕비를 깊이 연구해온 길림성 고고연구소장인 왕건군의 책이었고 거기에는 분명히 초균덕의 초록이 실려 있었다. 초록에는 야마모도 노인의 설명과 틀림없는 동자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상훈은 자신도 모르게 쥐었던 책을 떨어뜨렸다. 
 허탈감이 파도처럼 밀려와 온몸을 휘감았다. 자신이 이제껏 역사를 한다고 생각해온 것이 견딜 수 없도록 부끄러웠다. 일본과 중국의 학자들이 모두 이토록 철저히 호태왕비를연구해 온 데 비해 비의 주인인 자신을 비롯한 한국인들은 근거도 없는 석회도말론은 내세우며 눈뜬 장님으로 머물러 왔다는 사실에 몸둘 바를 몰랐다. 
 이런 상태로 교역액이 세계 몇 위라느니 선진국에 진입한다느니 하는 것은 엄청난 모순이었다. 자신의 역사와 문화를 내팽개치고 무엇을 내세울 것이 있어서 세계화를 외친단 말인가. 상훈의 기억에 과거 신채호 선생이 호태왕 비문을 얻어보려고 만주까지 걸어갔다가 엽전 몇 푼으로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되돌아왔던 일이 다시 한 번 고통스럽게 떠올랐다.
 민족의 자존심을 일깨우는 수십만 권의 책을 불살리우고 수십만 종의 문화재를 빼앗기고도 아무렇지 않게 잘 사는 사람들, 하룻저녁에 몇십 몇백만 원의 술값은 아낌없이 쓰면서도 제나라 역사와 문화를 살리는 일에는 돈 한 푼 안 쓰는 사람들, 전쟁이 나도 나가지 않겠다고, 통일에도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
 상훈은 무언가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이었다. 상훈이 생각하는 잘못의 출발점은 문화의 상실이었다. 고유문화의 맥을 잘리운 겨레에게는 타락한 물질문화에 대한 노예적 종속뿐이었다. 올바른 한국의 정신은 돈에 대한 무조건적 아부에, 힘에 대한 이유 없는 복종이 있지 않았다. 통일을 완수할 건강하고 힘찬 정신은 문화를 회복하고 역사를 바로잡는데서 얻어질 것이었다. 상훈은 이를 악물었다. 누구를 원망하고 탓할 일이 아니었다. 필사의 노력을 기울여 일본의 역사왜곡을 반드시 고치고 말리라는 결의를 새롭게 했다. 상훈은 책을 사들고 서점을 나왔다.

58. 어떤 노인

 다음날 상훈은 경시청을 찾아갔다.
"훌륭한 추리였습니다. 충분히 심증이 갑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와따나베 이사장의 범행을 입증할 증거는 아무것도 없군요. 잘 아시겠지만 그는 워낙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라 함부로 다룰 수 없습니다. 확실한 증거가 없이는 방문조사조차 할 수 없습니다.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내사를 하겠습니다."
 당연한 얘기였다. 상훈으로서는 살인현장에서 없어진 에이지 노인의 메모가 그의 연구소에 있었다는 얘기를 할 수 없는 것이 답답한 노릇이었다.
"그의 정체를 노출시킬 수는 없소. 그렇게 되면 우리는 앞으로 일본에서 어떤 활동도 할 수 없소. 그 일과 관련하여서는 나는 박 선생을 도울 수 없소. 이해하시오."
 조 전무도 역시 마찬가지 얘기였다. 다양하고도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는 안기부의 책임자가 한 사람의 범죄를 입증하기 위해 조직의 활동을 드러내 놓을 리가 없는 일이었다. 상훈은 결국 와따나베를 사법처리하는 것은 요원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찰이 내사를 하는 과정에서 정보는 샐 것이고 와따나베는 자신의 막강한 힘을 행사하여 빠져나가 버릴 것이었다. 답답했지만 상훈이 혼자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라 일단 한국에 다녀온 다음에 방법을 강구하기로 했다. 세미나에서 만났던 선배가 고대사 심포지엄의 초청장을 보내왔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서울의 심포지엄에 참석한 상훈의 마음은 가벼웠다. 분위기가 예전과는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몇 년 전만 해도 몇몇 교조적 학자들의 권위에 억눌려 고루하고 답답하던 분위기는 자유로운 발표와 토론으로 활기를 띠었다. 민족사학자들과 실증사학자들간의 논쟁은 여전했지만 계급투쟁에 몰두했던 경제사학은 자취를 감추었다. 민족사학에 눈을 뜬 젊은 사학자들이 관찬사학자들에게 날카로운 비난을 퍼붓는 것도 새로운 모습이었다. 과거에는 민족사학자란 거의 나이가 지긋한 한학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일본에서는 "일본서기"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는 줄 아십니까?"
"......"
"역사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분통이 터질 노릇입니다."
"왜?"
"그놈들은 그 엉터리 사서의 말도 안되는 몇 개의 전설을 동원하여 한국을 지배했느니 뭐니 하는데 우리는 정사에 있는 것도 믿지 못하겠다고 빼버리지 않았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요?"
"왜 단군신화를 역사로 보지 않는 겁니까? 왜 이야기 정도로 치부해 버리는 겁니까? 일본인들은 자기네 역사를 올리지 못해 안달인데 왜 우리는 깎아내리지 못해 안달입니까?"
 상훈에게는 참으로 가슴에 와닿는 얘기였다. 에이지의 사건을 추적하면서 뼈저리게 느끼던 부분이었다.
"실증이 안되고 있잖아요."
"밤낮 그놈의 실증 실증 하지 마십시오. 정말 싫증납니다. 박혁거세, 온조, 고주몽은 "삼국사기"를 못 믿어 교과서에서 빼버리고 단군은 "규원사화"나 "제왕운기"를 못 믿어 빼버리고 이 나라 학생들은 제 나라 시조를 유치원에서 이야기 정도로나 배우라는 겁니까?"
"학문이란 그런 게 아니오. 교과서에는 고증된 것만을 실어야지."
"일본이 수천 권의 역사서를 불태우고 말살해 버린 한국의 고대사는 시시한 사서에 한 줄만 있는 사실도 애지중지하며 키워내야 합니다. 그런데 "삼국사기"같은 정사에 있는 기록도 못믿겠다고 교과서에서 빼버리면 우리나라 역사를 어디로 끌고 가겠다는 겁니까? 왜 과거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하던 주장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겁니까?"
 학자들은 눈에 띄게 조선사편수회 시절부터 내려오던 뿌리 깊은 식민사관을 극복해 가고 있었다. 상훈은 선배의 소개와 더불어 발표대에 섰다. 에이지의 사건을 좇으면서 알아낸 일본 군부의 음모와 광개토대왕비와 관련한 사실, 특히 초균덕의 초록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결코 무시되어서는 안될 발견입니다. 그들 초씨 부자가 무지한 자들이기에 오히려 그 초록은 더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그들에게는 비의 글자를 조작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에이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그 초록을 발견한 또 다른 학자 왕건군은 왜 그 동자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는 것입니까?"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의 방대한 저서에는 어느 한 군데에서도 동자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동을 인정하면 그의 이론은 설 땅을 잃게 됩니다. 야마토조정이란 존재하지도 않았고 백제, 가야, 신라를 침공하여 신민으로 삼았던 왜의 실체가 왜구라는 그의 주장에 모순이 생기게 되죠. 일개 왜구가 백제를 치고 내쳐 동진하여 가야와 신라를 정복하고 모두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것이 말이 될 리가 없을 테니까요."
"이제부터 광개토왕비에 대해서는 진정한 우리의 연구가 필요합니다. 그동안 조작되었다고 밀어붙이고 팽개쳐 두기만 했던 것을 이제는 철두철미하게 제대로 연구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박 선생이 그 동자를 발견한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입니다."
"왕건군의 저서에 이미 실렸던 초록을 그가 무시한다고 가볍게 지나쳐버린 것이 잘못입니다."
"그렇다면 이번에 일본에서 열리는 한일 고대사 세미나에서 당장 문제를 삼는 것이 어떨까요?"
"좀더 깊이 연구해 봅시다."
"참, 박 선생은 일본에 있으니까 그날 나올 수 있겠군요."
"네, 나가겠습니다."
 세미나가 끝나자 상훈은 모교의 은사를 찾았다. 인사도 드릴겸 일본에서 보았던 몽유도원도의 반환이라는 문제에 대해 조언을 구하고 싶었던 것이다.
"반드시 돌려받아야 해. 온 겨레가 나서서 되찾아와야만 해. 해방 후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빼앗긴 문화재 한 점 돌려달라는 말도 하지 않고 살아왔으니 어떻게 나라를 이루고 사는 국민들이라고 할 수 있겠나?"
 은사는 그러면서도 문화에 대한 자각을 강조했다.
"우리도 냉정히 반성하고 자각해야 해. 문화재를 보존하고 관리하는 데 기울여야 하는 정성과 비용, 문화재를 아끼고 자신의 문화를 알려고 하는 의식, 이런 것들이 병행되어야만 해. 박물관에 가 보게. 하루에 몇 사람이나 오는가. 천년고도 경주에 지하철을 놓고 경마장을 만들면서 문화민족이라고 생각한다면 착각도 이만저만이 아니겠지.
 세계화라 그러지만 사실 선진국들과 어깨를 겨눌 수 있는 우리의 재산이라는 게 무엇이 있겠나. 내세울 것이라곤 그래도 수천 년간 이루어온 유구한 역사와 문화가 아닌가. 그런데 이런 문화에 대한 의식이 없이 머리와 가슴이 텅 빈 채로 세계에 나가서 무엇을 하자는 말인가. 우리 한국인은 돈이 많으니 알아달라고 할 건가, 영어를 잘하니 봐달라고 할 건가. 몽유도원도와 같은 조상의 유산을 되돌려받지 못하는 한 우리는 언제나 영원한 후진국으로 머물 수밖에 없는 것이네. 수치상의 선진국 진입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오히려 부끄러울 뿐이야."
 은사와의 대화는 상훈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자신의 문화에 대한 관심이나 보존 노력에 있어 조국은 슬프게도 그 수 많은 문화재를 강탈해간 일본에 견줄 바가 아니었다. 울적한 기분이 들었지만 상훈은 결코 실망하지는 않았다.
 해방 반 세기가 지났다고 하지만 한국인에게 시간이 그리 많았던 것은 아니었다. 식민지배를 청산하고 전쟁을 겪으면서도 수천년 간 고통을 겪어왔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 만으로도 한국인들은 위대하다고 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다른 어느 선진국과도 달리 한 번도 다른 나라를 침탈한 적이 없이 기적을 이루어냈다는 점에서는 세계사적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수십 년간의 군사독재를 결국은 무너뜨리고 스스로 민주정부를 이룩한 것도 모든 한국인들의 자랑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상훈은 이런 민족의 저력으로 틀림없이 문화의식도 회복하고 문화재도 돌려받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한국인은 진정 뿌리깊은 문화인이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일본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새로운 희망이 용솟음쳤다.

《이번 금요일에 힐튼호텔로 나오세요. 중요한 일이에요.》
 집으로 돌아오자 하야꼬의 전화메모가 되어 있었다. 상훈은 하야꼬가 무슨 일을 가리켜 중요하다고 하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가즈오의 일로 충격을 받고는 무슨 중요한 선택을 했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러나 금요일 힐튼호텔에 나간 상훈은 전연 뜻밖의 인물을 대하고는 놀랐다.
"아, 안녕하십니까?"
"어서 오시오."
 하야꼬와 같이 나와있는 사람은 야마자끼였다. 야마자끼는 몹시 초췌한 얼굴이었다. 
"오늘 만나자고 한 것은 박 선생에게 할 얘기가 있어서요."
 야마자끼는 무겁게 내리깔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야꼬 역시 눈을 내리깔고 있는 걸로 보아 그의 입에서 무슨 얘기가 나올지 대략 짐작하는 모양이었다.
"가즈오는 내가 죽였소. 그토록 심성이 곱고 착한 아이를 결국은 내가 죽이고 말았소."
"......"
"나는 그애가 그렇게나 예민한 줄 몰랐소. 그애를 위해 못해 줄것이 없었는데. 그애의 생각이 나와는 전혀 다르다는 걸 미처 깨닫지 못했던 거요. 돈을 벌고 권력을 탐하는 데 정신이 쏠려있었던 탓이었소. 자신의 애비가 무슨 짓을 해서 돈을 벌고 있는지를 알게 된 후부터 그애는 애비의 죄를 혼자 가슴에 품고 괴로워하고 있었던 거요. 그리고 결국은 나의 죄를 씻기 위해 미술관을 태워버린 거요. 이 애비에게 벌을 주면서 한편으로는 용서를 빌었던 거요. 나는 그애의 유서를 읽으며 깊이 느낄 수 있었소."
"그렇습니다. 가즈오는 정말 심성이 깊고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친조부를 해한 얘기를 들으면서도 오히려 양조부를 걱정하더군요. 차라리 자신의 내력을 몰랐더라면 더 나았을 것을."
 상훈의 이 얘기에 야마자끼는 잠시 말을 끊고 울먹이다 이윽고 단호한 표정으로 무엇인가를 결심한 듯 말을 꺼냈다.
"그애는 내가 양부라서, 나의 아버지가 친조부를 밀고해서 그렇듯 고통스러워 했던 것만은 아니오."
"네? 그렇다면 다른 무슨 이유가?"
"그렇소. 그애를 죽게 만든 이유는 따로 있었소."
"도대체 어떤 것입니까? 그 이유란."
"가즈오는 어떻게 알았는지 자신의 내력에 대한 얘기를 듣고 양조부의 비밀서랍을 열었소."
"알고 있습니다. 거기서 양조부가 집안의 원수라는 것을 알게 되었죠."
"그렇지. 그런데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소."
"......"
"그애는 정말 봐서는 안될 것을 보고 말았소."
"그게 무엇입니까?"
"음."
 야마자끼는 차마 말을 하기 곤란한지 신음을 토해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마음을 다잡은 듯 독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하윤호는 최화영을 일본헌병에게 밀고하고 거액의 상금을 받자 귀화하여 일본으로 들어왔다. 머리는 좋았지만 민족정신이 없었던 그에게 조선의 예술품 밀매는 복마전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어느 정도 복구가 될 무렵부터 장사는 나날이 성황이었다. 식민지 시대에 조선미술품에 맛을 들인 사람, 그 시절 강탈했던 문화재를 생활고로 팔려는 사람들이 늘 북적거렸다. 특히 대동아연구소는 그에게 고객을 끊임없이 소개하였다. 연구소는 방대한 한국미술품 소장가의 목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연구소와 손을 잡고 하는 그의 사업은 탄탄대로를 걷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연구소는 그에게 준비해야 할 미술품 목록을 주고는 그가 미술품을 확보하면 원매자를 소개하였고 그는 이익금의 반을 연구소에 주었다. 그는 연구소가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한국의 문화재를 파악하고 소개시키는 것에는 불순한 목적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자신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연구소는 그에게 엄청난 부를 가져다 줄 수 있는 소중한 연줄이었다.
 아들 야마자끼가 크자 그는 아들에게 일을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야마자끼도 아버지의 재주를 이어받았는지 그들은 하꼬네에 미술관을 지을 수 있을 정도로 급성장했다. 그러나 워낙 막대한 공사비를 감당치 못해 쩔쩔 매던 어느날 이들 부자는 육순도 넘어보이는 한 재일한국인의 방문을 받았다. 첫눈에도 병색이 완연한 이 노인은 숨쉬는 것조차 힘들어 했다. 야마자끼 부자는 이 사람이 얼마 살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림을 하나 구해 줄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무슨 그림입니까?"
"몽유도원도라는 그림입니다."
"아, 그 그림은 구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소장가가 내놓으려 하지 않을 겁니다. 만약 내놓는다 하더라도 값이 엄청날 거구요."
"얼마쯤 할까요?"
"아마 이천만 엔을 호가할 겁니다."
 노인은 깜짝 놀라는 표정이었다. 한참이나 괴로운 듯한 표정으로 부자의 얼굴을 쳐다보던 노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물어왔다. 
"천팔백만 엔 정도면 안될까요? 그 이상은 정말 불가능합니다. 내 육신까지 다 팔아도 그 정도밖에 안됩니다."
 이 말을 듣자 야마자끼는 의문이 생겼다. 곧 숨이 넘어갈 사람이 전 재산을 다 바쳐 왜 그그림을 사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도대체 왜 그 그림을 시시려 합니까?"
 노인은 잠시 무엇을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더니 이제까지와는 다른 아주 결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는 조선에서 징용에 끌려와 온갖 설움을 다 겪었습니다. 징용기간이 끝나자 사십여 년을 죽도록 일했지요. 일본에서 밑바닥 생활을 하다 보니 조국이란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돈은 좀 벌었지만 조국이 없이는 떳떳하게 살 수가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배운 것은 없지만 우리의 정신이랄 수 있는 문화재들이 일본에 넘어와 있다는 사실이 늘 가슴에 걸렸습니다. 그 중에서도 몽유도원도라는 귀중한 그림이 일본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나는 죽기 전에 꼭 이 그림을 사서 한국으로 보내고 싶습니다. 나는 조국을 빼앗기고 노예가 되어 남의 나라에 잡혀와 살고 있지만 우리의 후손들에게는 다시는 이런 일을 겪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의 얼을 사서 나의 나라로 보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 곧 죽을 사람, 처도 자식도 없습니다. 그동안 노동판을 따라다니며 국수를 팔고 긴자의 뒷골목에서 술을 팔아 사십 년간 모은 돈입니다. 부디 그림을 사주십시오."
 야마자끼 부자는 의미 있는 표정으로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좋습니다. 해보지요. 사실은 우리도 한국인입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우리의 이익금은 한 푼도 붙이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돈은 당장 가져올 수 있습니까?"
"아, 조상이 도우셨군요.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당신들 부자를 만나다니. 돈은 일주일 정도면 될 겁니다."
 부자는 만감이 교차하는 듯한 표정의 노인을 현관에서 배웅했다. 이때 학교 수업을 마치고 가게로 들어서던 가즈오가 유심히 노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예요?"
"그림을 사려는 노인이다."
"무슨 그림이요?"
"한국의 이조시대 그림이란다."
"그럼 비쌀 텐데. 저 할아버지는 돈이 별로 많을 것 같지도 않은데 왜 그런 그림을 사려고 할까요?"
"우리가 그 이유까지 알 필요가 있겠지?"
 가즈오의 시선이 야마자끼 부자의 얼굴을 스쳐갔다.
 일 주일 후에 노인은 정말 어떻게 구했는지 천팔백만 엔을 가지고 왔고, 입원비까지 털어넣은 노인이 심한 기침을 하며 찾아온 어느날 야마자끼 부자는 분간이 불가능할 정도로 후륭하게 복사한 모조품을 내놓았다. 노인은 감동하여 눈물까지 흘리면서 그림을 품에 안고 고맙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림을 어떻게 한국에 보내지요?"
"한국에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있습니다. 거기에 저와 절친한 안인식이란 학예관이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그림을 보내면 너무나 고마워할 겁니다. 아마 한국정부에서 훈장까지 수여할지 모릅니다."
 노인은 흥분하였다.
"훈장은 무슨, 그런 건 나라를 위해 정말 공을 세운 사람들이 받는 것이지 나 같은 무식꾼이 어찌 감히 나라에서 주는 훈장을 받을 수 이단 말이오. 그럼 야마자끼 선생, 아니 하 선생. 하 선생께서 그 학예관에게 이 그림을 좀 보내주실 수 있겠소?"
"그렇게 하지요. 그러나 절대로 사람들에게 비밀을 지켜야 합니다. 이 그림이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알려지면 모두 수포로 돌아갑니다. 일본인들이 가만 있지 않을 것입니다."
"아, 그럼. 여부가 있겠소. 나는 염려말고 하 선생이나 조심하시오."
"참, 몸이 무척 안 좋으시던데 병원에 입원하셔야죠."
"입원은 무슨, 이제 그림을 보내면 나는 저 세상으로 가야지."
 야마자끼 부자는 노인을 병원에 입원시켰다. 노인은 급성폐렴이었다. 쇠약할 대로 쇠약해진 노인에게 병원의 약이 들을 리가 없었다. 하루 하루 상태가 악화돼가던 노인은 막상 죽음의 날이 다가온다고 느끼자 한국정부로부터 무슨 연락이라도 오기를 바라는 눈치가 역력했다. 훈장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감사하다는 말 한 마디 정도는 듣고 싶어 했다. 그림을 잘 보냈다던 야마자끼 부자는 처음 한두 번 오고는 연락조차 없었다. 노인은 혹시라도 일본인들이 알게 될까봐 병원에서는 한 마디도 않고 야마자끼 부자가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다가 어느날 새벽 끝내 눈을 감고 말았다. 그토록 기다리던 한국정부의 감사장은 받아보지 못한 채.
"돌아가시기 전 편지를 한 통 보내왔었소. 정부에서 하는 일이 개인의 일처럼 신속하게 되겠느냐고 오히려 우리를 위로하는 편지였소. 조국에 그림을 바치고 죽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기쁘다고 하시면서 병원비 부담을 주는 게 미안하여 어서 죽기를 바라고 있다고 했소. 그 돈의 백분지 일만이라도 병원비로 썼으면 돌아가시지 않았을 텐데......"
 야마자끼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데 그 편지를 가즈오가 보고 말았던 모양이군요?"
"그렇소. 그 애는 편지에 몽유도원도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고는 모든 것을 알아차렸소. 일본의 국보로까지 지정된 그림이 그런 노인에게 팔릴 수 없다는 것을 가즈오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
"가즈오의 타격이 컸겠군요."
"백지장처럼 하얘진 얼굴로 온몸을 부르르 떨며 내 앞에 다가와서는 아무런 말도 없이 내 눈만을 쳐다보더니 그 자리에 푹 쓰러지고 말았소. 의사를 불러 신경안정 주사를 놓았는데 그 다음날 깨어나서부터는 그전까지의 가즈오가 아니었소."
"그후로는 한 번도 회복이 안됐습니까?"
 야마자기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가즈오는 우리 집안의 꿈이었소. 비록 친자식은 아니었지만 양심의 가책 때문에, 또 죽어가는 애를 우리가 살렸다는 인연 때문에, 무엇보다도 머리가 뛰어나고 성품도 착해서 애를 못낳는 나에게는 하늘이 준 인연으로 믿었소. 그림에도 뛰어나 은근히 세계적인 화가로 키우겠다는 기대도 했었지."
"......"
"그 노인이 화근이었소. 그깟 천팔백만 엔이 무슨 소용이라고. 그 노인이 가게에 들어선 그날이 저주스럽소."
 야마자끼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한국에 미술관이라도 차려주어야겠소. 가즈오의 이름으로 말이오. 그 노인은 아무래도 혼령이었나 보오. 예전에 내가 못된짓을 한 한국인들의 혼령이 사자를 보내 내 소중한 자식을 빼앗아간 것 같소. 이제 그들을 위로도 해야겠고, 무엇보다 가즈오를 위해 무슨 사당이라도 차려 주고 싶은 심정이오. 돌아가신 아버님도 이해하실 거요."
"정말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 미술관에는 일본에 밀매된 한국의 골동품들을 하나 하나 되찾아 보낼 작정이오. 임진왜란 때 뺏기고 식민지배 때 뺏긴 수십만 점의 예술품들을 하나하나 되찾아야겠소. 그것만이 가즈오에게 용서를 비는 길이 될 것 같소."
 상훈은 자신도 모르게 야마자끼의 두 손을 잡았다.
"고맙습니다."

59. 와따나베의 몰락

 고개를 숙이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상훈은 무엇인가 생각나는 듯하여 멈칫했다. 언젠가 하야꼬와 식사를 하다가 야마자끼를 만났을 때 그가 연구소의 기획실장과 같이 있던 것이 기억나고 아까 야마자끼가 연구소와 같이 미술품 밀매를 했다는 얘기가 연관이 지어져오는 것이었다. 야마자끼가 연구소와 가까웠다면 뭐라도 캐낼 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참, 아까 대동아연구소와 손을 잡고 일을 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소."
 야마자끼는 무심코 대답했다가 이내 한 마디 보탰다.
"이제 거기와도 손을 끊어야 할 것 같소."
"그들은 왜 한국의 문화재를 그렇게 철저히 관리했을까요?"
"음, 아마 그것은 문화지배를 위해서일 거요. 일본에는 한국의 문화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소. 그들은 한국이 문화를 제대로 유지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오. 자신들이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하지."
 답답한 얘기였지만 지금 상훈은 그 얘기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어쩌면 큰 고기를 잡을 수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연구소와는 굳은 믿음이 있었겠군요."
"그렇소. 와따나베 이사장과는 친해졌지. 최근에는 전화 한 통화에 일억 엔을 보내주기도 했소."
 아무것도 아닌 얘기로 넘길 수도 있었지만 워낙 연구소에 관한 일이라면 꼬투리를 잡고 싶어하던 상훈은 한 마디 더 물었다.
"와따나베 이사장이 돈이 그렇게 없습니까?"
"그건 아니오. 그는 막대한 재산가요."
"그런데 왜 돈을 빌려달라고 했을까요?"
"아마 무슨 사정이 있었던 것 같소."
"무슨 사정이 있었을까요?"
"누구를 만나 전해달라고 했으니 급히 줄 돈이어던 것 같소."
"누구였습니까? 만났던 사람은."
"나는 모르는 사람이었소."
"알 수 없을까요?"
 야마자끼는 별것 아닌 얘기를 상훈이 집요하게 물어오자 이상한 모양이었다.
"영수증이 있으니 이름은 알겠지만 그 이상은 모르오."
"그 영수증을 제게 보여줄 수 있습니까?"
"와따나베 이사장이 간곡하게 부탁하던데. 돈은 곧 줄테니 아무에게도 그런 내용을 얘기하지 말랬는데."
 상훈은 목이 타는 듯했다.
"그 말씀을 경찰에서 증언해주실 수 있습니까?"
"곤란하오. 사업 비밀이오. 내가 지나친 얘기를 한 것 같군."
"가즈오를 위한 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조국을 위한 길입니다. 그 연구소는 악의 세력이 규합된 집단입니다. 조국의 역사가 그 연구소에 의해 왜곡되고 있고 최근에는 살인사건까지 발생했습니다. 조만간 그 비밀이 공개될 겁니다. 무엇보다 가즈오를 생각하십시오. 연구소의 음모를 덮어두시면 가즈오가 두 번 죽는 것입니다."
 야마자끼는 동요하는 듯했다.
"증언해 주겠소."

 상훈이라면 십 년이 걸려도 못할 일은 조 전무는 하루 만에 알아주었다. 
"안기부가 놀고 먹는 사람들이 모인 데는 아닌 모양이군요."
 처음인 듯한 상훈의 농담을 대하자 조 전무는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는지 호쾌하게 웃었다. 
"박 선생이 오늘은 무슨 신나는 일이 있는 모양이야. 농담을 다하고."
"그래 그 사람은 뭐하는 사람입니까?"
"보통 사람은 아니오. 죽음을 흥정하는 상인이지."
 귀가 확 트이는 얘기였다.
"무슨 얘기죠?"
"후지모리라면 무덤 속까지 비밀을 안고 가는 살인 브로커로 암흑가에서는 알려져 있소."
"역시 그랬군요."
"그런데 그런 자의 이름은 어떻게 알게 됐소?"
 상훈은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음, 그러나 야마자끼의 증언만으론 부족하오. 보통의 경우라면 모르겠지만 와따나베와 후지모리라면 충분히 뚫고 나갈 거요. 와따나베는 야마자끼에게 그런 부탁한 적이 없다 할 테고 후지모리는 야마자끼에게 받을 것이 있었다고 하면 그만이겠지."
"그렇겠군요."
 역시 마찬가지였다. 야마자끼의 영수증은 결정적 증거가 될 수는 없었다.
"그들에게는 어떤 증거를 갖다대도 소용이 없을 거요. 둘 다 거물이라 각기 다른 방법으로 빠져나갈 테지."
 상훈은 한참 무엇을 생각하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조 전무를 불렀다.
"하나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뭐요?"
"이것이 안기부의 일이라면 어떻게 처리합니까?"
"무슨 소리요?"
"어떻게 해서든지 와따나베를 사법처리해야 한다면 안기부에서는 이런 경우 어떻게 하느냔 말입니다."
 조 전무는 테이블 너머로 넌지시 상훈을 건너다 보았다. 맹랑하달까 의표를 찔렸달까, 여하간 난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다른 경우와는 다릴 거짓말로 넘기고 싶지는 않았다.
"증거를 확보해야 하기 위한 노력을 하겠지."
"부탁입니다. 도와주십시오."
"지난번에 한 번만 도와주기로 했잖았소."
"뜻이 있는 일에 약속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입니까? 그는 여러 사람을 살해한 배후자일 뿐 아니라 그냥 두면 더욱 큰 비극을 초래할 사람입니다."
"얌전한 대학원생으로 알았던 박 선생이 날이 갈수록 자꾸 어려운 부탁만 해오니 못 견디겠소. 본국으로 들어가버리든지 해야지."
 말을 이렇게 하면서도 조 전무는 미간을 찌푸리며 무슨 생각인가에 깊이 빠졌다가 낮은 목소리로 상훈에게 주문했다.
"박 선생, 야마모도 슈우꼬오 노인을 만나게 해주시오."

 와따나베 이사장은 평소와 같이 열한시에 연구소로 출근했다. 의회와 관련된 일도 연구소에서 처리하기 때문에 그의 방 앞에는 항상 면담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국민에 대한 영향력이 웬만한 의원 삼사십 명보다 크다는 그였다. 책상에서 몇 가지 결재서류에 서명하고 맨 처음 방문객을 내보냈을 때였다.
"실례합니다. 와따나베 이사장이시죠?"
 듣지 못하던 어조였다. 감히 자신의 사무실에 이런 식으로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생각에 느릿한 동작으로 고개를 들던 와따나베는 다시 한 번 놀랐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제 사십도 안돼 보이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의 옆으로는 비슷한 나이의 사람들 둘이 섰고 뒤로는 그보다 약간 나이가 들어보이는 몇 사람이 서 있었다. 
 이들을 보는 순간 와따나베의 불쾌감은 극에 달했다. 도대체 어떤 놈들이기에 한꺼번에 이렇게 우르르 들어올 수 있단 말인가. 비서란 놈은 밖에서 내방객들을 통제하지 않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화가 치밀었다. 와따나베는 방문객의 물음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밖에 있을 비서를 불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항상 대기하고 있던 비서의 대답도 없었다. 짜증이 겹친 와따나베는 귀찮다는 어조로 내뱉았다.
"뭐요, 당신들은?"
"같이 좀 가셔야겠습니다."
"무슨 소리야? 뭐하는 자들이야?"
"동경지검의 검사들입니다."
"그런데?"
"조사할 것이 있습니다."
"건방진 놈 같으니. 일개 검사가 감히 나를 조사하겠다고?"
"말조심 하시오."
"그래, 무슨 일로 나를 조사하겠다는 건가?"
"여러 가지 혐의가 있지만 우선은 야마모도 서장의 살해를 교사한 혐의요."
"뭐라고, 그놈은 도대체 어떤 놈이야? 생판 모르는 놈을 내가 살해하라고 했단 말인가?"
"일단 검찰청으로 가서 얘기합시다."
"겁이 없는 놈이군."
 와따나베는 전화기를 들었다.
"법무대신 연결해."
 분노한 표정으로 검사를 노려보고 있던 와따나베는 상대방이 나오자 대뜸 고함을 질렀다.
"법무대신, 당신 이럴 수 있소?"
"아, 와따나베 의원이시군요. 본인도 지금에야 검찰총장으로부터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아, 새카만 검사들 몇 놈이 와서 나를 살인교사 혐의로 연행하겠다는데 당신은 이제야 보고를 받았다는 게 말이나 되는 얘기요? 즉각 총장에게 지시해서 이 철없는 놈들을 불러서 혼쭐을 내라고 하시오."
"총장 얘기로는 어쩔 수 없이 체포영장을 발부했다고 하더군요. 와따나베 의원이 결백하다면 가서 조사를 받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만약 검찰 측에 잘못이 있다면 본인이 엄중히 문책하겠습니다."
"죽일 놈들, 어디 두고 보자."
 와따나베는 전화기를 내던졌다. 그러나 그의 머리는 무서운 속도로 돌아가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지금 이 순간은 아무도 자신을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직 자신이 해내야 하는 일이었다. 짦은 순간이지만 머리 속으로 모든 것을 다 생각한 그는 자신감을 회복했다.
"너희들 이름을 대."
"모리, 이께다, 겐스께 검사와 수사관들입니다."
 와따나베는 침착하게 그들의 이름을 노트에 적어넣었다.
"개업준비나 해둬, 이 멍청이들아. 가자."
 와따나베는 자신의 승용차를 이용했다. 그것 역시 자신감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모든 것은 완벽했다. 어떠한 상황도 자신의 천재적 두뇌를 벗어난 범위에 존재하는 것은 없었다. 특히 야마모도 건은 잘못 될 이유가 하나도 없는 일이었다. 후지모리가 입을 연다는 것은 지구가 망한다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다시 한 번 머리를 돌리던 그는 그러나 전혀 이상한 방향에서 약간의 차질을 발견해냈다. 얼마 전 동경대의 우찌다 교수가 건네주던 이름 하나가 떠오르는 것이었다.
 〈박상훈〉
 군부에 충성을 맹세한 학자들의 명단이 있다고 했다던 이상한놈이었다. 명단은 금고 속에 그대로 있었고 그놈의 방도 뒤졌지만 이상한 점은 없었다. 그러나 뭔지 기분이 이상했다.우찌다의 말이 맞다면 그놈이야말로 몇 십 년간 단 한 번 자신의 완벽한 계산을 벗어난 이상한 놈이었다.

 엘리베이터가 멎는 순간 와따나베는 기분이 몹시 상했다. 이유야 어떻든 자신이 검찰청에 온 이상 총장이 나와야 하는 것이었다. 아니면 차장, 최소한 수석부장이라도 나와야 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러나 엘리베이터는 심문실이 있는 층에 멎었고 자신은 바로 심문실로 안내되었다.
"총장 어디 있어?"
"일단 조사를 받으시지요."
 대답은 평검사도 아닌 수사관의 입에서 나왔다. 엄청난 불쾌감, 그것은 즉각 엄청난 불안감으로 이어졌다.
 '이자들이 이렇게 자신있을 이유가 없는데.'
 심문실에서 와따나베는 독하게 버텼다. 치밀한 두뇌와 달변 앞에서 검사와 수사관들은 제자리 걸음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와따나베는 자신감이 넘쳐나는 것을 느꼈다. 점심 때가 되자 그는 정식에 메밀국수를 하나 더 시켜 맛있게 먹었다. 오후 수사가 시작되면 이제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검찰청의 전 직원에게 알릴 셈이었다. 아니 전 일본국민에게 명명백백히 보여줄 셈이었다. 그러나 수사가 시작되고 참고인이 나오는 순간 와따나베는 이상하게도 가슴이 방망이질 치는 것을 느꼈다. 왠지 모르게 불길하고 불안한 마음이 심장 한복판으로부터 자꾸 넓게 퍼져나왔다.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오느라 좀 늦었습니다."
 더욱 혼란을 주는 말이었다. 세상에 자신을 심문실에 불러놓고 조사를 하면서 중요 참고인을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게 놔둔단 말인가. 와따나베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총장, 차장, 대검의 각부장들, 담당부장, 담당검사, 수사관까지 모조리 처단해도 속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와따나베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귀하의 성명은 무엇입니까?"
"박상훈입니다."
 그 이름. 바로 그 이름이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연구소에 감히 대적하려고 든 자. 당장 처치해 버리라고 한 것을 무슨 이유에선지 야마모도가 좀더 두고 보자고 반대했었지.
 이 이름을 대하자 와따나베는 긴장이 스르르 풀리며 의자에 등을 기대는 자신을 느꼈다. 이런 이상한 기분은 처음이었다. 맥이 풀리고 분노가 사라지며 누군에겐가 공손해지고 웃음조차 실실흘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자신감이 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와따나베는 이 한국청년이 자신도 잘 알지 못하는 바이칼이며 금괴를 얘기하고는 종내는 에이지와 마쓰모도, 이마무라와 야마모도의 살해에 대한 진술을 하는 것을 들었다. 모두가 사실과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아마 자신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정확하고 조리있게 약 육십 년 간에 걸친 거대한 스토리를 얘기해낼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 청년은 마치 사관과도 같이 엄숙하게 역사를 조립해내고 있었다. 와따나베는 이미 더 이상의 혐의를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시간 전 점심을 먹을 때와는 정반대의 절망감이 온몸을 휩싸고 들어다. 그러나 와따나베는 마지막 힘을 모아 고함을 질렀다.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발악이었다.
"집어치워! 아무런 증거도 없어. 그 따위 소설로 나를 얽어넣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나 청년은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진술을 계속했다.
"증거, 증거를 내놔. 그렇지 못하면 너는 끝장이야."
 상훈이 진술을 마치자 와따나베는 바닥에 가래침을 타악 뱉고는 독기 서린 목소리로 상훈에게 고함을 질렀다.
"이 테이프를 들어보겠습니까? 의원님의 목소리인지만 확인해주십시오."
 옆에 있던 검사가 가로막고 나섰다. 와따나베는 무슨 소리인가 싶어 검사의 얼굴을 쳐다봤다.
"이미 수사연구소에서 검증을 마친 거니 간단하게 확인만 해주시면 됩니다."
 검사는 수사관에게 턱짓을 했다.
―안녕하십니까. 야마자끼입니다.
―아, 야마자끼 선생. 잘 계십니까?
―다름이 아니라 제 사무실에서 세무보고를 해야 하는데 전에 그 돈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의논을 하려고 전화드렸습니다.
―대여금으로 해두면 안됩니까?
―그럴 경우 장부상에 이사장님 이름을 올려야 하는데요.
―아니, 그러진 마세요. 곧 갚을 돈이니까 야마자끼 선생의 지급금으로 처리할 수 없습니까?
―저도 가지급금 이월액이 많아 곤란하군요. 후지모리라는 사람 앞으로 대여금 처리를 하면 안되겠습니까? 그때 이 사장님이 대신 결제하라 할 때 영수증을 받아둔 것도 있어 문제가 없을 텐데요.
―그것도 안됩니다.
―그 사람 뭐하는 사람입니까? 그 사람 명의의 사업체만 있으면 어떻게든 해결될 텐데요.
―사업체 같은 것은 없는 사람입니다.
 녹음기를 끄면서 검사가 물었다.
"의원님, 이 후지모리에게는 어떤 이유로 일억 엔이나 주셨습니까?"
"나는 준 적 없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야마자끼란 놈하고의 둘 사이에 일어난 일이잖아."
"단순히 빌려준 것이 아니잖습니까. 대체결제하라고 야마자끼 씨에게 부탁한 것이 테이프에 담겨 있지 않습니까?"
"야마자끼의 함정이야. 당신들하고 짠 것이지. 나는 후지모리라는 자를 잘 몰라. 돈이 필요하다기에 야마자끼에게 소개한 것 뿐이야."
"그렇다면 이 테이프를 들어 보시겠어요?"
 수사관이 테이프를 바꿨다.
―이사장님, 저 후지모리입니다.
―전화하지 말랬잖아.
―너무나 중요한 일입니다.
―뭐야?
―이사장님을 살해해 달라고 청부해온 노털이 있습니다.
―뭐라고, 누구야?
―슈우꼬오라는 노인입니다.
―뭐하는 놈이래?
―그건 모르겠습니다.
―자네가 한다고 해. 괜히 딴놈한테 가면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까. 그리고 무슨 일로 그러는지 알아보고 연락해.
 대화는 잠시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졌다.
―이사장님, 그 노털의 이름은 야마모도 슈우꼬오입니다.
―야마모도 슈우꼬오? 들어본 이름인데. 아니 야마모도의 애비잖아.
―얼마 전에 보내버린 그 야마모도 말입니까?
―그래, 캐나다에 있는데. 자식의 복수를 하러 왔나. 그런데 그 영감이 어떻게 눈치를 챘을까. 어!
 놀란 목소리와 함께 급히 전화를 끊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한 번 들으시겠어요?"
 검사의 차가운 목소리가 와따나베의 귓전을 후리고 들었다.
"아니, 됐어."
 오히려 평정을 찾은 목소리가 와따나베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박 선생, 이것도 당신 작품이오?"
"그렇습니다."
"그렇겠지. 바보 같은 검사놈들이 이렇게까지 할 수는 없었겠지. 역시 인생이란 어렵고 어려운 것이야."
 와따나베는 무슨 뜻인지 모를 말을 혼자 중얼거리며 느릿한 동작으로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상훈은 비로소 어깨에 짊어진 굴레를 내려놓는 기분이었다. 와따나베를 이렇듯 굴복시키다니 이제 이마무라 주임도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옆에서 호탕하게 웃고 있는 주임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주임이 살아 있었으면 얼마나 기뻐했을까. 흔적 없이 살해되어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헤매고 다니던 쥰이찌 노인의 혼령도 이제 편안히 제 갈길을 찾으리라. 상훈은 감개가 무량했다. 쥰이찌 노인의 살해 사건으로 이마무라 주임의 방문을 처음 받았던 무렵부터 이제껏 자신의 머리에 꽉 차 있던 대동아연구소의 문제가 드디어 결말이 난 것이다. 일본의 학계뿐 아니라 정계에까지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던 와따나베가 구속되고 나면 일본 내에 크나큰 파문이 일게 될 것이고 올바른 정신을 가진 일본이들의 대각성이 뒤따르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훈은 무엇인가 아직 머리 속에 남아있는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베란다에서 스미다가와 강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 묵직한 기분의 실체가 서서히 드러났다. 와따나베 한 사람의 구속으로 그치고 대동아연구소 같은 은밀한 단체들은 지하에서 여전히 그 뿌리를 뻗어나가지 않을까 하는 우려였다. 그러한 생각과 함께 이정호 교수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정호 교수가 당한 것 같은 보이지 않는 테러가 계속되지 않을까? 걱정스런 마음은 기무라 박사의 얼굴로 모아졌다. 상훈은 달력을 더듬었다. 기무라 박사가 참가하는 세미나의 날짜가 며칠 후로 다가와 있었다. 

60. 칠지도의 복수

 세미나가 시작되는 날, 기무라는 당당한 모습으로 회의장에 모습을 나타냈다. 연례행사처럼 한일 양국의 학자들이 고대사의 밝혀지지 않은 부분에 대해 상반된 주장을 하고 나자 기무라는 마치 심판관과 같은 태도로 등장했다. 고대사에 관한 한 일본 사학계의 태두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그는 마지막 날에 발표를 하도록 순서가 잡혀 있었다. 그러나 첫날 간단한 주제설명을 하는 자리에서 그는 한 청중의 질문을 받았다.
"칠지도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고대사가 전공이 아닌 대학원생이거나 일반인일 것이었다. 기무라는 웃으며 답변을 시작했다.
"칠지도는 길이 약 75센티미터의 단철로 만든 것인데 도신의 좌우로는 각각 세 개씩의 가지가 서로 엇갈리게 붙어 있습니다. 이 칼은 녹이 잔뜩 슨 채로 이소노카미의 신궁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1870년대에 신궁의 대궁사로 있던 스가마사도모(   ) 선생에 의해 녹이 제거되고 명문이 해석되었습니다."
"그 명문은 어떤 내용입니까?"
"앞면에는 〈태화사년 월십 일병오정양 조백련철칠지도 생벽백병 선공공후왕 〉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태화사년 월십 일 병오정양에 백련철로 칠지도를 만들었으니 백병을 피할 수 있는 칼로 후왕들에게 공급할 만하다〉라는 뜻입니다.
 후면에는 〈선세이래 미유차도 백자왕세자가 기생성음 고위왜왕지조 전시후세〉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 뜻은 〈선세 이래로 아직 이러한 칼이 없었으므로 백제의 왕과 세자가 성음에게 기생하고 살아서 왜왕 지에게 바쳤으니 후세에 전하게 하시오〉라는 뜻입니다."
 질문을 한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었다. 그러나 기무라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한 사람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상훈이었다.
"그런 해석에는 웃음이 나오는군요."
"무슨 말씀이오?"
"백제의 왕과 세자가 기생충입니까? 성음에게 기생하여 그 고마움으로 왜왕을 위해 칼을 만들다니요?"
"기생은 신세를 지고 살았다는 뜻입니다."
"그런 해석은 너무나 부자연스럽습니다. 고대사가 아무리 해석하기 나름이라지만 그 해석은 이미 그 문장 자체의 다른 구절과 어긋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그 뒤의 〈전시후세〉라는 구절은 〈후세에 전하게 하라〉고 해석됩니다. 이 말은 위에 있는 자가 아래에 있는 자에게 물건을 하사할 때 쓰는 말이 아닙니까? 그런데 기생하고 산 사람이 그런 표현을 칼에 새긴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얼마든지 그럴 수 있지요. 고마움을 후세에도 기억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는 얘기가 아닙니까?"
"결정적인 판단의 근거는 그 앞의 후왕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후왕이란 제후와 같은 의미가 아닙니까? 아래에 있는 사람이 위의 사람에게 후왕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 칼이 하사가 아니라 헌납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까?"
"칠지도에 경어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명문은 아직 온전히 해석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아까 백제의 왕과 세자가 성음이란 일본인에게 기생해서 살았다고 설명을 한 것입니까?"
"단지 그런 해석도 있다는 것일 뿐입니다."
 기무라는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정식 발표도 아니고 미숙한 대학원생 정도 되어 보이는 청중의 질문에 가볍게 대답하려 한 것이 상훈의 개입으로 궁색한 모습을 보이게 되어서였다. 짐짓 태연한 표정으로 자신을 몰아붙이는 목소리의 얼굴에 눈초리를 보내던 그는 흠칫 놀랐다. 언젠가 대동아연구소의 발표장에서 비분강개하던 그 젊은이였다. 그리고 그전에 자신을 찾아와 이정호 교수에 대해 묻던 기억도 떠올랐다. 분노에 찬 기무라의 눈빛이 번득였다.

"박 선생, 저녁에 시간이 있습니까?"
 뒤를 돌아보는 순간 상훈은 깜짝 놀랐다. 기무라 박사였다. 그가 바로 뒤에 서 있는 것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지만, 상훈은 언젠가 이정호 교수의 상황도 이랬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묘한 일치였다. 자신이 이정호 교수를 대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네, 있습니다."
"저녁이나 같이 하실까요?"
"그렇게 하시지요."
 그렇잖아도 만나려던 기무라 박사였기에 상훈은 선선히 대답했다.
  
 그날 저녁 상훈은 시내의 어느 음식점에서 기무라 박사와 마주 앉았다. 기무라 박사가 미리 조용한 음식점을 예약해 두었던 것으로 보아 상훈과의 대화를 깊숙이 준비해둔 것 같았다. 테이블이 두 개밖에 안되는 음식점은 워낙 작기도 했지만 박사와 상훈이 들어오자 아예 문을 닫아버렸다. 동경 시내에는 종업원은 두지 않고 주인이 단골만 받는 이런 작은 음식점들이 제법 있는 편이었다.
 식사가 나오고 술이 따라나와 몇 잔 마셨을 때 기무라 박사가 여담을 끝내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박 선생은 이정호 교수와는 어떤 사이입니까?"
"한두 번 뵌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번에는 이정호 교수와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으셨던가요?"
"그랬습니다."
"왜 물으셨지요?"
 상훈은 기무라의 눈빛이 강렬하게 얼굴에 와닿는 것을 느꼈다.
"그의 죽음과 관련하여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지요."
"그가 죽었습니까?"
"네."
 상훈의 대답을 듣는 그의 얼굴에 묘한 기색이 잠시 흘렀다.
 그는 당당한 얼굴로 상훈에게 물었다.
"박 선생은 이제까지의 한국학자와는 달리 비가 변조되었다고 말하지는 않더군요.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한국학자들이 모두 비가 변조되어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닙니다. 또 비가 변조되었다고 주장한 학자들에게도 무슨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주장에 대한 원인을 군국주의자들이 제공했으니까요. 오히려 군국주의자들의 간계를 꿰뚫어봤다는 측면에서는 훌륭한 면도 있습니다."
"그건 무슨 말입니까?"
"군국주의자들은 사료를 훼손시키는 일을 거침없이 자행했습니다. 학자와 지식인들을 앞세워 가지고요."
"우리 일본의 학자들은 사료를 훼손시키는 일 따위는 하지 않습니다. 문화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조선인들은 때때로 모든 잘못을 일본인에게로 밀어버리는 측면이 있지요. 모든 것을 일제 삼십육 년의 탓으로 돌린다는 말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제 한국인들은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답답한 노릇이군요. 그 엄중한 역사의 책임이 이런 식으로 또 다시 왜곡이 되고 있으니 말입니다."
 갑자기 기무라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박 선생, 아까 일본의 학자들이 사료를 훼손하고 역사를 왜곡한다 했는데 근거 없이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은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가 있소. 이정호 교수의 경우를 생각해 보시오."
"근거를 제시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런 근거는 있을 수 없소."
 상훈은 기무라가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냈다.
"읽어 보십시오."
"이게 뭡니까?"
 상훈이 내민 서류를 읽어내려가던 기무라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먼저 조선 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하라. 그럼으로써 민족혼, 민족 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 무능, 악행을 들추어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의 후손들에게 가르쳐라. 조선의 청소년들이 그들의 부모와 조상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라. 그러면 조선의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에 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게 될 것이며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때 일본의 사적, 일본의 문화, 일본의 위대한 인물들을 소개하면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사이또 총독의 교육지침입니다. 바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정책이고 일본의 학자와 지식인들은 이런 일에 앞장섰습니다. 이들은 조선에서 수십만 권의 책을 찾아내어 불태웠습니다. 그런데도 사료를 훼손하고 역사를 왜곡하지 않았다고 강변할 수 있습니까?"
"식민지에 파견되었던 사이비 학자들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오. 식민지에 가면 지식인이라도 식민지 사람들 수준에 맞춰 행동하 수밖에 없는 것이오. 본토의 학자들에게는 그런 일은 없소."
"장담할 수 있습니까?"
"물론이오."
"그렇다면 내기를 하실까요?"
"뭐요? 내기를 하자구?"
"그렇습니다."
 기무라는 묘한 표정으로 상훈을 바라보았다. 젊은 유학생인 상훈이 의외에도 만만치 않다고 생각되는 데다가 내기를 걸자고 하는 부분에서 언뜻 불안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내기라면 몇 년 전 자신이 이정호 교수를 꼼짝도 못하게 얽어맸던 방법이었는데 이제 이 젊은 한국인 유학생이 자신에게 똑같은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었다. 기무라는 생각에 잠겼다. 이론 사학계를 대표하는 자신으로서 방금 장담할 수 있다고 말했다가 내기에 응하지 않는다면 부끄러운 일이었다. 학문을 하는 사람은 내기와 같은 천박한 짓을 하지 않는다고 거절할까 생각했지만 이 유학생에게는 그렇게 거절할 수도 없었다. 자신이 이정호 교수를 죽음으로 유도한 사실을 이 청년은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기무라는 짦은 시간임에도 많은 생각을 했다.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이 청년은 내기를 하자고 하는 것인가. 국내의 학자들이 도대체 어떤 사료를 훼손한 적이 있단 말인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절대로 국내에서 학자들이 사료를  훼손할 리가 없는 것이었다. 이 젊은 친구는 무엇인가 헛다리를 짚고 있는 것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었다. 기무라는 이윽고 결심을 했다.
"무슨 내기를 하잔 말입니까?"
"내가 잘못 생각한 것으로 밝혀지면 나의 목숨을 내놓겠습니다."
"뭐요, 목숨을?"
"그렇습니다."
 기무라는 그제서야 이 청년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이 청년은 자신에게 복수를 하려는 것이다. 그것도 자신이 이정호 교수에게 했던 그 방법을 그대로 쓰는 것이었다. 기무라는 차갑게 웃었다. 그제서야 마음에 평정이 왔다. 청년은 아마도 이정호 교수의 제자이거나 그의 죽음에 분격한 젊은 사학도일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이정호 교수에게 썼던 그 방법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뻔한 것이다. 일개 대학원생이 일본 사학계를 대표하는 자신에게 도전한다는 것부터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청년은 스승의 죽음에 분격하여 마치 부나방처럼 죽음을 좇는 것이다.
"만약에 사료를 훼손하여 역사를 짜맞추려 했다는 것이 증명이 되면 기무라 박사께서는 무엇을 걸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의 이 한 마디는 기무라의 가슴에 날카로운 비수와도 같이 꽂혀 들었다.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이 친구는 이렇게 당돌하게 내게 덤벼드는 것인가?'
 나도 목숨을 걸겠다는 말이 목구멍에까지 튀어오르는 것을 가까스로 참아내고 기무라는 다시 한번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일본의 학자들이 사료를 훼손하여 역사를 짜맞추려 한 것은 없었다. 설사 만에 하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학자들이 한 것일 터이므로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이었다. 그런 정도를 할 수 있는 학자들이라면 그 분야에서는 단연 으뜸일 것이었다. 그렇다면 얼마든지 빠져나갈 방법이 있었다. 사료라는 것이 그것의 객관적 존재가치를 증명해줄 수 있는 다른 사료에 의해서만 인정을 받는 것일진대 문제가 있어도 주장을 밀고나가면 되는 것이었다. 이정호 교수의 경우와는 달랐다. 기무라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 사료의 훼손을 통하여 달성하고자 했던 학문적 성과에 대한 포기를 선언하겠소."
"그것은 안됩니다."
"일본 사학계에서의 나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단 말이오?"
"그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 문제는 달리 논증이 되고 있기 때문에 굳이 그런 종류의 선언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내기를 할 필요는 없지 않소?"
"반드시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토록 무책임하게 양심을 저버리고 진실을 호도하는 일본학계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입니다."
 '건방진 녀석 같으니'
 기무라는 속이 끓어오르는 것을 억지로 참아내며 탁한 목소리로 내뱉았다.
"그렇다면 무슨 내기를 원한단 말이오?"
"사료를 훼손하여 역사를 왜곡시키려 한 것은 학자에게는 죽음과도 같은 행위입니다."
 기무라는 그제서야 이 청년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좋소. 그렇다면 나 역시 목숨을 걸겠소."
"좋습니다."
 상훈의 대답이 너무 쉽게 나오는 것을 보는 기무라의 속이 다시 한 번 요동쳤다.
"사료를 훼손하였는지 어떻게 검증을 하자는 얘기요?"
"귀하가 좋아하는 방법으로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벙법이라니?"
"바로 레이저 검증법입니다."
 기무라는 뒤통수를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불안했다. 이 젊은이가 철저히도 자신이 이정호 교수를 파멸시킨 방법을 그대로 자신에게 옮겨오는 것이 까닭 모르게 불안해졌다. 벙법은 완벽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틀림없는 자신의 벙법이었다. 그러나 기무라는 왠지 자신의 목소리가 떨려나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상대가 자신을 이렇게도 철저히 연구했다면 그가 주장하는 훼손된 사료라는 것도 턱없는 것은 아닐 것 같았다.
"그래, 우리 일본의 학계에서 훼손했다고 당신이 주장하는 사료는 도대체 무어란 말이오?"
 기무라의 질문에 상훈은 바로 대답을 하지 않고 가방에서 봉투 하나를 꺼냈다.
"아마 내일 마지막 발표를 하게 되어있으시지요?"
"그렇소."
"그날 어떤 발표를 하는가 지켜보겠습니다."
 상훈은 봉투를 내밀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뭐요?"
"보시면 알 것입니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을 느끼며 기무라는 짐짓 태연하게 봉투를 열었다. 뜯겨진 두 장의 원고지가 있었다.
"헉."
 메모의 내용을 살피며 글씨가 너무나 눈에 익은 것 같은 기분을 느끼던 기무라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신음이 터졌다.
"이걸 어떻게 당신이 가지고 있소?"
"진실은 감추어지지 않는 법입니다."
 원고지를 잡은 기무라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단 한줄에 그치고 있는 원고지에 고정되어 움직일 줄 몰랐다.

 "칠지도의 명문 중〈태화〉의 〈화〉자는 작은 칼과 같은 것으로 몇 번이나 깎아보려고 한 듯하다."

"그 밑의 서명을 보십시오."
"이것이 정녕 후꾸야마 선생님의 글씨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칠지도 연구의 대가 후꾸야마 선생, 바로 귀하의 은사가 했던 양심의 고백입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겨우 다음 원고지에 눈을 돌린 기무라는 마치 넋이 나간 사람처럼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칠지도의 정밀조사로 유명한 가야모토 모리토(비본두인)의 이름 밑에 역시 마찬가지의 고백이 기록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칠지도의 글자에 가해진 자국들은 글자를 확실히 하기 위해 입혀진 상처인 듯이 말해져 왔으나 〈태화〉의 〈화〉처럼 글자를 지우려고 한 칼자국도 있다."

"왜 〈화〉자를 지우려고 했는지는 누구보다도 귀하가 잘 알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양심 어린 고백이나 진실된 조사의 결과를 파묻어 두어야 하는 이유도 역시 잘 아실 겁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내일 귀하의 발표가 끝나면 나는 이소노카미의 신궁에 있는 칠지도에 귀하의 방식대로 레이저를 투시하자고 공식 제안하겠습니다. 그것은 귀하와 나와의 약속입니다. 그리고 이런 메모들이 어떻게 금고에 있는지 수사를 의뢰하겠습니다."
 상훈의 목소리는 매몰차게 기무라 박사의 귓전을 파고 들었다. 그러나 기무라 박사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다만 넋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한없이 원고지만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다음날 계속된 세미나에서 마지막 발표를 듣는 한일 양국의 학자들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정해진 주제의 발표를 간략하게 마친 기무라 박사가 생각지도 못했던 몇 가지 소견을 얘기했기 때문이었다. 이 소견들은 평소에 기무라 박사가 주장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들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는 조선에 대한 심한 역사의 콤플렉스를 겪어오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일본인의 시조를 고고학적 자료에 의해 실증되는 기마민족, 혹은 외래인으로 보지 않고 신화에서만 찾으려고 했던 것이나, 고대 일본문화의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도래인〉을 부정하고 그 도래인들의 나라 조선의 역사를 축소하려고 애썼던 것은 결국 이런 콤플렉스의 결과가 아닌가 합니다. 서양의 문물을 한 발 앞서 받아들이면서 우리는 자신을 미개한 조선이나 중국과는 다른 좀더 우월하고 특수한 사람들로 만들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당장 무력으로 경제력으로 앞서고 있는데 굳이 문화를 받아들였다든가 뿌리가 같다는 식으로 조선을 이해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러한 각종 비학문적 욕구들을 우리 학계에서 받아들인 결과 지금의 우리 역사학계는 온갖 비학문적 주장이 난무하는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특히 임나일본부에 대하여 본인은 이 자리에서 분명한 양심적 고백을 하고자 합니다. 지난 식민시대에 약 이십 년간 정부와 학계가 전력을 기울여 조선반도를 샅샅이 훑었으나 임나일본부와 관련한 어떠한 자료도 찾지 못했습니다. 임나일본부를 조립해 내기 위해 우리는 광개토대왕비의 해석을 비틀었고, 칠지도가 백제가 아닌 중국에서 전해진 것으로 바꾸어버려야 했기 때문에 칠지도의 〈화〉를 지우려 했습니다. 이제 나는 임나일본부가 이백 년간 조선에 설치되었다는 가설은 철회되어야 하고 우리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과서에서도 삭제되어야 한다고 양심에 의거하여 고백합니다."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내용의 소견을 피력하고 단상을 내려가는 기무라 박사를 보는 한일 양국의 학자들은 어안이 벙벙한 채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지만 상훈은 묘한 감동에 빠져들고 있었다.
 '기무라 박사님, 당신이야말로 진정한 학자입니다. 진실을 발견했을 때 그토록 솔직히 양심의 고백을 하는 모습은 우러러보지 않을 수 없군요. 따지고 보면 기무라 박사님도 우리 한반도의 사람들처럼 왜곡된 역사의 피해자입니다. 흐르는 강물만큼이나 순수하고 깨끗해야 할 학문의 연구가 하찮은 민족의 자존심과 국가의 이익을 위해 휘둘려 왔다는 사실이 박사님의 고백을 보는 저의 가슴에 아프게 걸려오는군요.
 한반도의 사람들, 이제껏 한 번도 남을 침략해 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역사조작의 희생자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그들에게 죄가 있다면 오직 서양문물에 늦게 눈을 뜬 죄밖에는 없습니다. 그 죄로 귀국의 식민지배를 당하고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고 지금껏 분단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좌절하지 않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독재도 극복했고 이제 분단도 극복할 것입니다. 세계로 나아가 국제평화와 전 인류의 행복에 기여할 것입니다.
 귀국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우리는 귀국의 문화를 수입하느냐 여부를 건강하게 토의하고 있습니다. 지난날의 가슴아팠던 역사를 포용하고 있다는 얘기가 되겠지요. 우리 한국인들은 귀국의 선량한 시민들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습니다. 성실하고 친절하며 많은 점에서 우리와 비슷한 귀국의 시민들을 좋아하지 않을 리가 없는 것이죠. 다만 일본에는 침략의 역사를 미화하면서 민족의 우월성을 과시하려는 일부 그릇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역시 우리나라에도 귀국을 무조건적으로 혐오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같은 태도는 양국의 진정한 우호에 장애가 되는 것들입니다.
 박사님, 이제 박사님은 역사왜곡에 대한 진실의 고백을 해주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커다란 힘이 될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일본은 고대뿐만 아니라 근대에 이르기까지 문화를 서로 주고받은 형제와 같은 나라입니다. 두 나라의 진정한 우호를 위한 박사님의 애정어린 노력을 바랍니다.'
 상훈은 기무라 박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진심으로 존경과 염원을 보냈다. 진실을 발견하자 수십 년 간의 주장을 스스로 철회하는 용기를 보여준 그야말로 진정한 학자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신문을 본 상훈은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어제 학회에서 평소 자신의 주장을 완전히 뒤엎는 소견을 표명한 기무라 박사는 학계에서의 은퇴를 결심하였다. 고대사 학계를 대표하는 그의 은퇴는 이유는 분명치 않으나 측근에서 전하는 바로는 한 한국인 역사교수에 대한 양심의 가책때문이라고 한다. 남은 여생을 한일간의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 데 바칠 것을 맹세한 박사는 우선 식민지 시대에 조선으로부터 반입한 역사관게 자료들을 추적해 반환하는 작업을 시작하겠다고 했다."

 상훈의 마음이 착잡하게 내려앉고 있었다. 정신병원에서 무거운 걸음을 옮겨놓는 이정호 교수의 모습과, 고통스런 표정으로 은퇴를 선언하는 일본 사학계의 대가 기무라 박사의 모습이 머리 한켠에서 엉키고 있었다. 허전한 마음과 더불어 비애가 가슴속으로부터 솟구쳐 올라왔다. 비애는 양국간의 역사만큼이나 고통스럽게 감기어 들었다. 
 생각하면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다. 서로 이해하고 진심으로부터 도움이 되고자 노력하며 살아야 할 가장 이웃인 두 나라. 따지고 보면 형제나 다름없는 두 나라가 그리도 오랫동안 질시와 반목으로 살아오고 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다. 한편 쥰이찌 노인, 이마무라 주임이 저쪽에서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이며 바라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상훈은 다시 한 번 죽은 이들의 명복을 빌었다. 역사의 희생이 된 분들이여, 저승에서는 편히 쉬소서.

61. 나비야 청산 가자

 에이지의 피살로부터 기무라의 고백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역사가 의미있는 날개를 한 겹 접었지만 상훈은 가슴 깊숙이로부터 밀려오는 허탈감을 억누를 수 없었다. 가즈오 때문이었다. 한동안 무거운 기분으로 지내던 상훈은 어느날 저녁 스미다가와강을 바라보며 문득 하야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하야꼬는 집에 없었다. 단지 북산에 요양을 떠난다는 메모만이 남겨져 있었다. 며칠 후 상훈은 하야꼬로부터 편지 한 장을 받았다.

 "하꼬네는 한국인들이 만든 마을이라고 얘기했던 걸 기억하세요? 아마 그래선지 하꼬네 행 열차에서 상훈 씨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무척 친근감을 느꼈나 봅니다.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해져서 늘 상훈 씨 곁에 있고 싶다는 터무니없는 생각도 했었지요. 
 저는 한국과 인연이 깊어졌어요. 천리교에 편지를 보내며, 가즈오 씨를 떠나보내며 한국사람들을 깊이 생각했습니다. 나름대로 한국을 위해 무어라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상훈 씨와 함께 보고 함께 느꼈던 한국의 그림들을 떠올려 봅니다. 몽유도원도를 돌려보내고 싶어요. 하야꼬가 일본의 한 미술연구가로서 열심히 노력하는 것을 보고 일본에 대한 서운한 감정을 푸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월중도하도가 손상되지 않아 너무나 다행입니다. 가즈오 씨는 혼돈에 휩싸여 격정에 빠질 때조차 일반인보다 더 침착할 수 있었습니다.
 놀라운 정신력입니다.
 가즈오 씨는 제게 현실적인 존재로 다가온 적이 없었습니다. 다가가면 멀어지는 불가해한 존재라고 할까, 혼탁한 세상을 비춰주는 미약한 등불이라고 할까, 어쨌든 속세를 등진 은자 같은 모습으로 비쳐졌지요. 그런 가즈오 씨의 모습을 보며 저 역시 세속에 물들지 않고 고고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무의식중에 심어왔는가 봅니다.
 그런데 상훈 씨를 만난 이후 가즈오 씨와 저의 삶이 다소 잘못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가즈오 씨는 저의 이러한 미세한 변화를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그 예민한 감성이 얼마나 고통받았을까요? 그 고통이 너무나 크다 해도 물론 절대 내색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속으로 삭여버렸겠지요. 가즈오 씨의 고통을 제가 더하게 한 것 같아 괴롭습니다. 가즈오 씨는 죽음으로써 오히려 제게 더 커다란 의미가 되어버렸습니다. 가즈오 씨는......가즈오 씨는 청산으로 갔을 거예요. 혼자 한글을 배우고 발음도 분명치 않게 그 시조를 읊으며 눈물은 얼마나 흘렸을까요. 언젠가 〈나는 청산에 갈 거야. 하야꼬도 함께 가지〉하면서 외로운 미소를 짓곤 하던 것이 그가 가고 나서야 이해가 되는군요. 그에게는 청산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가 아련히 그리워하던 갈등이라고는 전혀 없는 낙원이었을까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자신의 뿌리였을까요? 어쨌든 이제는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청산에서 푹 쉬고 있겠지요? 우리는 여기 남아 있는데...... 여기 북산에는 오래 있게 될 것 같아요. 언젠가 다시 뵐 수 있겠지요. 그동안 정말 고마웠습니다. 

하야꼬 드림"

 편지를 다 읽고 난 상훈은 오랜만에 차분히 책상에 앉았다. 북산의 깊은 골짜기에서 시퍼렇게 흐르는 계곡물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듯한 하야꼬의 투명한 얼굴이 떠올랐다. 청순하고 이지적인 여인. 하야꼬는 일본의 깨끗한 전통 문화의 진수를 응집시킨 듯하면서 또한 일본의 양심을 대변하는 여인이었다. 
 한편 하꼬네에서 처음 만난 순간의 가즈오의 강렬했던 그 눈빛이 떠올랐다. 가즈오. 혼자 해결하기에는 너무나 큰 짐을 지고 태어난 인물이었다. 그 고통을 자제하려고 애쓰다가 예민한 감수성이 파괴되어버린 안타까운 인물. 아무리 어른들의 장난이라 하더라도 가즈오와 하야꼬 두 사람의 의식은 어릴 때부터 서로 엮어졌던 것이다. 가즈오는 정말 청산에 가 있을까? 한 마리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 그를 괴롭히던 갈등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상향을 날아가고 있을까? 
 상훈은 가즈오와 하야꼬가 너무나 보고 싶었다. 두 사람에게 달려가 꽉 끌어안고 싶었다. 상훈은 텅빈 두 팔 안에 마치 두 사람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허공중에 팔을 뻗은 채 한참동안 몸을 떨며 앉아 있었다. 눈물 때문인지 시야가 흐릿해져 왔다. 

〈끝〉 

가즈오의 나라 1

저자 : 김진명
1판 1쇄 발행 : 1995년 7월 7일
1판 36쇄 발행 : 2001년 9월 15일 
펴낸이 : 주기형
펴낸곳 : (주)프리미엄 북스
봉사자 이름 : 이승은

김진명 (金辰明)
1957년 부산 출생으로 보성고등학교, 한국외국어대학교를 졸업했다. 작품으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가 있다. 
“나는 한반도의 역사와 문화를 독자들과 같이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싶었다. 맹목적으로 일본을 매도하는 공허한 감정풀이 대신 성실한 자기성찰과 노력이 있을 때만이 우리에게 발전이 올 것이다. 비단 한국의 독자들뿐만 아니라 선량하고 성실한 대다수의 일본 국민들과도 역사를 같이 생각해 보고 싶다. 군국주의자들의 불순한 음모가 게재된 허구의 역사를 벗어날 때라야만 이웃한 두 나라는 진정한 우호적 관계를 이룰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0세기에 일어났던 일은 20세기에 정리해야 하지 않겠는가!”
작가의 말
일전에 나는 일본의 역사부도를 보고 한동안 격심한 충격에 빠졌다. 4,5세기에 일본이 백제, 신라, 가야를 약 이백 년간 지배했다는 주장이 지도에 버젓이 나와 있었던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부도의 발행일이었다. 1994년,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도 일본에서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는 얘기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아직까지도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단초는 과거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에 있는 광개토대왕비로부터 찾아진다. 우리나라를 침략 합병할 즈음에, 일본 정부는 과거 한반도는 일본의 땅이었으니 이제 가서 찾아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일본은 국민의 죄의식을 마비시키고 국민을 침략의 현장으로 이끌어내기 위한 음모를 꾸미는 데 광개토대왕비를 이용했던 것이다. 임나일본부론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전후에는 마땅히 폐기했어야 할 위와 같은 이론이 지금도 버젓이 일본에서 가르쳐진다는 데 있다. 이상하게도 일본의 학자들은 군부에서 조작한 허위의 이론을 떠나지 못하고 국민을 오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이 허위 이론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던가! 그들의 영혼은 역사의 저 심층에 가라앉은 채 떠돌고 있다. 이제는 그들의 들리지 않는 함성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다. 그들의 한을 풀어줘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역사를 바로 알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대다수 선량한 국민들에게고 조각나고 숨겨져버린 역사의 진실을 알려야 한다. 우리는 임나일본부라는 허상을 없애고 한일간의 역사를 올바로 정립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우리나라 지식인들의 입장이다. 많은 우리의 지식인들은 일본이 그들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광개토대왕비를 왕비에 석회를 발라 글자를 조작했다는 정도로 광개토대왕비를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이 근거가 희박한 주장으로 일본의 역사왜곡에 항의하는 것은 벽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도대체 왜 우리는 일본이 석회를 발라 비를 조작했다고 믿고 있을까. 일본의 터무니없는 주장의 실체를 드러내야 하는데 방법이 없다는 질곡에 빠진 학자들의 마지막 탈출구가 그같은 주장으로 결과되지 않았나 싶다. 우리는 모두 역사의 덫에 걸려버린 것은 아닐까. 우리는 이제 힘을 합쳐 이 덫에서 빠져나와야 할 때가 되었다. 
또한 나는 빼앗긴 문화재의 반환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독자 여러분과 생각을 나누고 싶다. 우리는 지난해 안견을 기리는 행사를 치르면서 그 유명한 몽유도원도의 진품 대신 수천 장이나 널려 있는 복사본을 국립박물관에 걸어 두었던 괴로운 기억을 안고 있다. 해방 이후 오십 년이 지나는 동안 우리들은 총칼 앞에 빼앗겼던 문화재를 돌려달라는 요구조차 하지 않고 살아온 것이다. 자랑스러운 문화민족이라는 우리가 이같이 문화의 맥을 잘리운 채, 조상은 어떻게 대하며 후손에게는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
나는 한반도의 역사와 문화를 독자들와 같이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싶었다. 맹목적으로 일본을 매도하는 공허한 감정풀이 대신 성실한 자기성찰과 노력이 있을 때만이 우리에게 발전이 올 것이다. 비단 우리나라 독자들뿐만 아니라 선량하고 성실한 대다수의 일본 국민들과도 역사를 같이 생각해 보고 싶다. 군국주의자들의 불순한 음모가 게재된 허구의 역사를 벗어날 때라야만 이웃한 두 나라는 진정한 우호적 관계를 이룰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십세기에 일어났던 일은 이십세기에 정리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 작품이 나오기까지 일 년 남직 걸렸다. 서울대학교 박물관장 안휘준 교수의 정심한 저서와 문화재 전문위원 서희건 선생의 집념어린 저서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기에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한다. 그리고 정리가 채 되지도 않은 원고를 읽어주신 최민호, 서덕순, 한상훈, 박웅현, 송태효 등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마음으로부터의 친구 대식 군에게도 감사한다. 마지막으로 프리미엄북스 주기형 사장의 진지한 수고에 고마움을 전한다. 
1995년 6월
서초동에서 김진명



1. 닛꼬의 살인


닛꼬 경찰서의 강력반장 이마무라 경위는 집에 돌아와 밥상을 받자마자 울어대는 전화벨 소리에 이맛살을 짙게 찌푸렸다. 시간을 보니 이미 자정이 지나 있었다. 새로 부임한 서장과의 상견례를 겸한 술자리를 너무 오래 끌었다고 생각하며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반장님,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당직형사 스즈끼였다. 혹여 상사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지는 않았을까 조심성 있는, 그러면서도 긴장감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괜찮아, 무슨 일인가?”
“살인사건입니다.”
경위의 이맛살이 다시 찌푸려졌다. 
“어디에?”
“이즈미산장 옆의 좁은 길로 들어가 있는 기꾸 마을입니다. 피살자는 가네무라 쥰이찌라는 노인입니다.”
“뭐, 가네무라 상이?”
“아, 아시는 분입니까?”
“알아,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저도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이것 저것 알아보고 있지만 아직 진상은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알았어, 지금 가지. 현장보존하고 기자들 출입은 막아.”
수화기를 내려놓은 이마무라는 잠시 동안 멍하니 있었다. 옆에서 지키고 있던 부인 미야꼬가 걱정스런 얼굴로 뭔가를 물을 듯 하다가 깊은 생각에 잠겨 들어가는 남편의 얼굴을 보고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음, 가네무라 상이 살해당할 만한 무슨 이유라도 있었단 말인가?’
마흔다섯 살의 반장에게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그토록 곱상한 얼굴과 잔잔한 분위기를 가진 가네무라 상이 이제 팔십을 넘긴 나이에 갑자기 살해당하고 말았다. 이것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반장은 본능적으로 이 사건은 간단히 해결될 것 같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밥상을 물리고 벗어놓았던 점퍼를 든 채 운전석에 앉았지만 여느 사건을 대했을 때처럼 무심하게 현장으로 출발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느껴졌다. 반장은 시동을 거는 대신 느린 동작으로 담배 한 개비를 빼어 물었다. 뿜어져 나오는 담배연기 사이로 노인을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이마무라 주임, 여기는 가네무라 상이오, 닛꼬에서 여생을 마치고 싶다고 오신 분이니 아무쪼록 편하게 지내실 수 있도록 각별히 배려해 주기 바라오.”
당시 외근주임으로 부임한 자신에게 바로 어제까지 닛꼬 경찰서의 서장이었던 야마모도는 쥰이찌를 조심스럽게 소개하지 않았던가. 그때 이후 자신이 다른 부서로 옮길 때까지 야마모도 서장은 여러 번에 걸쳐 자신에게 순찰시마다 쥰이찌의 집을 들러줄 것을 부탁했었다. 지금까지 별로 이상하다는 기분을 느끼지는 못했으나 오늘 갑작스런 쥰이찌의 죽음을 대하고 보니 그것은 범상하지 않은 일로 다가오고 있었다. 평소 그런 일이 전혀 없던 야마모도 서장은 왜 쥰이찌를 각별히 배려하라고 했을까? 이 조용한 소도시 닛꼬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 염려되어서.......
반장은 생각에 잠긴 채로 서서히 차를 출발시켰다. 밤이었지만 마을로 가는 길은 낯설지 않았다. 오래된 여관들이 숲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고 좁고 굽은 길을 따라 마을에 도착하기까지 내내 시냇물 소리가 귀를 떠나지 않았다. 간간이 들려오는 부엉이 소리를 담은 시원한 밤공기가 적당히 취기 오른 주임의 얼굴에 상쾌하게 와닿았다. 여느 때 같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드라이브 코스였지만 살인사건의 보고를 받은 주임에게는 밤의 서정을 감상할 기분 같은 것은 없었다.

현장은 잘 보존되어 있었다. 
신참인 스즈끼 형사는 반장을 보자 지시대로 현장을 보존한 것이 자랑스러운 양 정복 몇 사람을 어떻게 배치했다는 등 약간의 수다를 떨었다. 살인의 현장치고는 이상할 정도로 깨끗하고 어질러진 것이 없는 것을 보고 반장은 피살자의 나이를 생각했다. 동기는 어떨는지 몰라도 살인의 행위 자체는 무척 간단했을 것이다. 서재에 침입한 살인자는 정면에서 주먹으로 쥰이찌의 얼굴을 강하게 치고는 쓰러진 팔순 노인의 목을 뒤에서 졸랐다. 목덜미에 색흔이 십자로 갈라져 있고 그 사이로 손가락 자국이 뚜렷한 것으로 보아 범인은 파리 한 마리 죽이듯 힘 안 들이고 노인을 처리한 것이었다. 반항 한 번 못해 보고 그 긴 세월의 인생여정에 종지부를 찍을 수밖에 없었을 노인의 얼굴이 떠올라 주임은 몸서리쳤다. 
“피해품 조사는 됐나?”
“외형상으로는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신고한 사람은 누구인가?”
“파출부입니다. 원래 내일 오기로 되어 있었는데 쥰이찌 씨로부터 며칠간 오지 말라는 연락이 와 있었다고 합니다. 언제 올까하고 묻기 위해 전화를 했는데 저녁 내내 깊은 밤까지 전화를 받지 않아 덜컥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파출소의 요시무라 군에게 한 번 가주도록 부탁을 했다는 겁니다.”
“그 파출부를 불러주게.”
“이미 와 있습니다.”
겁먹은 표정이 역력한 파출부는 반장이 약간 달래자 비로소 평정을 회복한 듯 얘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스즈끼 형사가 보고한 것보다 조금도 자세할 것이 없는 지극히 간단한 것이었다. 
“아까 덜컥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고 했는데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해서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이유가 있습니까?”
“최근 며칠간 선생님 태도가 이상했어요.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 보이고 전에 없던 신경질을 부리시고 무엇엔가 초조해하는 듯했어요.”
“구체적으로 행동에 변화를 보인 게 있습니까?”
“전화를 받으실 때 제가 있는 것을 꺼리는 눈치였어요. 이상하게 느껴졌어요. 무엇을 숨기거나 소곤대던 분이 아니거든요.”
“평소에 찾아오거나 자주 연락을 하던 사람은 누구였나요?”
“자주 연락을 하던 분은 없어요. 찾아오던 분도 없고 심지어는 전화조차도 한 통화 오는 것을 보지 못했어요.”
“음, 그랬군요. 협조해줘서 고맙습니다. 혹시 무어라고 말해줄 것이 기억나시면 경찰서로 연락해 주십시오.”
파출부를 보내고 나서 반장은 현장을 처음 목격한 요시무라 순경을 불러 몇 마디 더 물어보곤 현장감식을 지시했다. 요시무라 순경은 밤 열한시경에 파출부의 전화를 받고 바로 순찰차를 타고 쥰이찌의 집으로 와서 시체를 발견했다고 했다. 불이 꺼져 있고 문이 잠겨져 있지 않은 것 말고는 모든 것이 잘 정리되어 있어 주인이 시체로 누워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경찰공의가 사망시간을 대략 여덟 시간 전쯤으로 추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쥰이찌는 오후 네시쯤 사망한 것이 된다. 반장은 감식요원들이 현장을 뜨고 있는 것을 보면서 서재를 나섰다. 옆방과 뒤뜰을 대략 살펴보았지만 모든 것이 꼼꼼하게 잘 정돈되어 있을 뿐 단서가 될 만한 것은 전혀 눈에 띄지않았다. 
‘짐작대로군. 이것은 역시 원한에 의한 살인이야. 쥰이찌는 어느 야꾸자 조직의 일원이었겠지. 어느날 조직을 배신하고 돈을 가지고 잠적해버린 거야. 숨어 살고 있었지만 결국은 노출되어 프로에게 당하고 만 거야.’
아무와도 연락이 없이 혼자 살았다는 파출부의 얘기나 살인현장이 조금도 더럽혀져 있지 않은 점 등이 반장의 추리를 뒷받침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추리가 맞다면 야마모도 서장이 쥰이찌를 자신에게 소개한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야마모도 서장은 쥰이찌의 과거 행적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까? 아니면 그저 그렇게 아는 사이이거나 누구의 소개를 받은 정도에 불과한 것일까? 이런저런 경우를 곰곰이 생각해 보던 반장은 결국 야마모도 서장에게 연락을 취해 보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다른 관할지로 떠나간 그에게 실례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관할을 불문하고 살인사건의 해결만큼 중요한 일도 없을 것이었다. 

“반장님, 이리로 와 보시죠.”
돋보기를 들고 머리카락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이방 저방 유심히 살피던 감식요원은 반장이 대충 훑어보았던 서재의 책장 앞에 서 있었다. 
“뭐라도 있어?”
“희미합니다만 책을 뒤진 흔적이 있군요. 다른 칸이 모두 정연하고 먼지가 곱게 깔려있는데 반해 이 칸의 책들엔 손자욱이 나 있어요. 정돈상태도 거칠구요. 누가 급히 뒤졌던 것으로 봐야 할 것 같군요.”
“책?”
과연 감식요원이 가리키는 책장 한 칸엔 누군가의 황급한 손길이 스치고 지나간 흔적이 있었다. 반장은 손을 뻗쳐 두세 권의 책을 뽑아 이리저리 살폈다. 
<회여록>, <비문의 세계사>, <역사의 연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경찰에 들어간 반장으로서는 무슨 내용인지 쉽게 짐작할 수 없는 책들이었지만 제목들로 보아서는 어떤 일관성이 있는 책들 같았다. 
“다른 칸들의 책은 전혀 손을 댄 흔적이 없나?”
“네, 없습니다.”
“이것들은 어떤 분야의 책 같은가?”
뒤적이던 책장을 덮으면 이마무라가 물었다. 손에 들려 있는 것은 <비문의 연구>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역사와 관련된 책과 논문들인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
“이 칸의 책들을 모두 서로 옮겨.”
꼼꼼한 성격의 이마무라 반장은 마지막으로 현장을 다시 한 번 훑어보고 자신의 차로 걸어갔다. 



2. 월중도하도(月中渡河圖)


“하꼬네는 처음이세요?”
“아, 네.”
약간 물기를 머금은 듯한 여자의 목소리가 상훈을 당황케 했다.
“야마자끼 미술관에 가신다 그러셨죠?”
“네.”
“예약을 하셨나요?”
“아니, 예약은 안했는데요.”
“거기는 예약을 해야만 관람이 허용돼요. 개인미술관이라 관람하는 절차가 무척 까다롭답니다.”
“아, 그럼 어떻게 하나.”
“거기서 가까운 곳에 헨리 무어 조각박물관이 있으니 그거라도 보고 가시는 게 어떠세요?”
“사실 저는 조각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야마자끼 미술관에는 꼭 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가던 중이거든요.”
“보고 싶은 것이 무엇인데요?”
상훈은 초면의 젊은 아가씨치고는 꽤 꼬치꼬치 묻는다고 생각했지만 상냥한 말씨 사이에 언뜻 내비치는 고고함이 사람을 끌었다. 처음 대하는 젊은 남자에게도 이렇게 친절할 수 있다는 것과 자연스럽게 내비치는 이 고고함이 오히려 어떤 종류의 오만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그것이 오만함이라면 자신은 무시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에 상훈은 피식 웃었다.
“월중도하도라는 그림입니다.”
“어머, 그 그림이 거기에 있는 것은 어떻게 아셨어요?”
진한 화장을 한 얼굴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들게 하는 이 젊은 여자는 진정 놀라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교수님이 얘기해 주셨어요.”
“학생이세요?”
“네. 대학원에 있습니다.”
“전공은 무슨......?”
“역사학입니다.”
“미술사에도 관심이 있으신가 봐요?”
“약간은요. 역사라는 것이 사실 모든 걸 다루는 학문이라서.”
여자는 다시 상훈의 말을 이해하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걱정스런 표정이 되어 말했다. 
“야마자끼 미술관은 어떻게 하죠? 먼길 오셨는데.”
“가서 사정이라도 해볼 작정입니다.”
“안되시면 제가 미안할 것 같아요.”
일본에 와서 처음으로 대해보는 미인이었다. 빨갛게 칠한 작은 입술이 어딘지 모르게 사람으로 하여금 헛된 기대를 해보게 만들었다. 
“어.”
상훈은 그제서야 이 여자가 야마자끼 미술관과 무관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혹시?”
“하야꼬라고 해요. 동경여대 미술사를 강의하고 있어요.”
“박상훈이라 합니다. 동경대 역사학과 박사과정에 있습니다.”
“재일한국인이세요?”
“아니, 한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유학중입니다.”
“이따가 아무 말씀도 하지 말고 계세요. 제가 얘기할 테니까요. 혹시 누가 묻거든 신분증도 안 가져왔다고 하세요.”
“폐가 안될지 모르겠습니다.”
“사설박물관이나 미술관들은 까다로워요.”
“경비 때문에 그런 모양이죠?”
“그런 것도 있겠지만 사실은 다른 이유도 있어요.”
하야꼬는 매우 솔직한 여자라고 생각됐다. 상훈은 이 여자가 무엇을 얘기하려 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외국서 들어온 작품들이 말썽이 일어나는 것을 싫어하거든요.”
“정상적으로 들여왔다면 무슨 말썽이 있겠어요?”
“비꼬시는 건 아니겠죠?”
상훈은 순간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몰랐다. 가벼웠지만 약간 앙칼진 느낌이 드는 여자의 말에 반사적으로 대꾸하면 무엇인지 깨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국에서는 친구들이 약탈당한 문화재를 하루빨리 찾아와야 한다고 열을 내며 일본인들을 혹독하게 비난했지만 막상 이 자리에서 그것도 미술사를 강의한다는 강사 앞에서 자신은 어떤 확연한 태도도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
“미안해요, 기분을 건드렸다면. 저는 그냥 가볍게 말한 것이었어요.”
“오히려 제가.”
생각지도 않았던 말이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갔다. 이 여자는 다툴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자기변명을 하려 했지만 마음속에서는 수도 없이 자신을 꾸짖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느꼈다. 
“이제 다음 역에서 내리면 돼요.”
차창 밖으로는 벚꽃이 온통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종소리를 딸랑거리며 조용한 산길을 한겹 한겹 넘어가는 등산전차 안은 산 속에서 사는 주민들 몇몇을 빼고는 거의가 주말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이었다. 젊은이들의 환한 표정이 활짝 핀 벚꽃과 잘 어우러졌고 전차가 지나가는 선로 뒤로는 상큼한 토요일의 향기가 피어올랐다.
“미술관에는 그림을 보러 가세요?”
“부탁을 받고 그림을 설명하러 가는 길이에요. 손님이 오시거든요.”
“귀한 손님인 모양이죠?”
“지방의 소장가인 모양이에요.”
“그냥 보는 것과 큰 차이가 있나요?”
“손님들은 설명을 듣기를 좋아해요. 주관적인 감상을 안하는건 아니지만 누군가의 객관적인 설명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말하자면 그림의 상품적 가치까지 확인하고 싶어하거든요.”
등산전차는 조각공원이라는 이름의 역에 멎었고 두 사람은 같이 내렸다.
미술관은 조용한 산속에 마칭 별장처럼 들어앉아 있었다. 파란 잔디가 눈부시게 펼쳐져 있는 정원을 한참 가로질러 서 있는 대리석의 정문에는 작은 글씨로 야마자끼 미술관이라고 쓰여 있었다. 글씨에 별로 조예가 있달 수 없는 상훈이 보기에도 유려한 초서체의 작은 현관은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정문을 지키는 수위는 하야꼬를 잘 아는지 반갑게 인사를 던졌왔다.
“오랜만에 오셨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셨어요?”
하야꼬의 약간 높은 목소리가 무료함에 절은 수위의 표정에 생기를 불어넣으며 눈부신 잔디 위에 떨어져 내렸다.
“같이 오신 분이 계시군요?”
“학교에 계신 분이에요.”
“아, 그러시군요. 어서 들어가시지요. 도련님께서 기다리고 계시거든요.”
하야꼬는 익숙한 동작으로 잔디밭에 징검다리처럼 드문드문 박혀 있는 돌을 팔짝팔짝 뛰었다. 그 모습이 마치 어린 소녀와도 같이 경쾌하고 순수해 보여 상훈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하야꼬의 뒷모습에 눈길을 던지며 성큼성큼 걷던 상훈은 누군가 자신을 뚫어지게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고개를 들다가 깜짝 놀랐다. 
“앗.”
보기에도 섬뜩한 눈길이었다. 방안에서 자신을 향해서 무섭게 내쏘고 있는 그 눈길 밑으로는 파리하고 무표정한 한 청년의 얼굴이 있었다. 나이는 스물예닐곱으로 상훈과 비슷할 것 같았다. 
“안녕, 가즈오 씨.”
하야꼬는 청년의 날카로운 눈길에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 듯 가까운 사람에게 하는 식으로 인사를 했다. 그러나 청년은 하야꼬의 인사에는 대꾸도 없이 상훈에게 던진 눈길을 거두어들이지 않고 있었다. 상훈은 얼른 고개를 돌려 눈길이 부딪치는 것을 피했다. 
하야꼬는 현관문을 잡고 있다가 상훈과 같이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홀은 크지는 않았지만 매우 정갈했다. 그림을 전시하고 있는 듯한 방에는 자물쇠가 걸려 있었고 가즈오라 불린 청년은 정원 쪽으로 창이 나 있는 해가 잘 비치는 방에 서 있었다. 청년은 두 사람을 보고도 걸어나와 마중하지 않고 고개만 돌린 채 바라보고 있었다. 상훈은 어딘지 모르게 음산한 청년의 모습은 병색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가즈오 씨 얼굴이 나아졌어요. 봄이라 그런가 봐요.”
하야꼬는 청년에게로 다가가 손을 잡으며 반갑게 인사를 했다.
“인사를 나누세요. 이분은 역사를 공부하는 박상훈 씨에요. 이분은 가즈오 씨.”
“안녕하십니까?”
상훈이 손을 내밀며 정중하게 인사를 했음에도 청년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상훈은 약간 무안해하며 내민 손을 어떻게 할지 몰라하자 하야꼬가 얼른 나섰다.
“가즈오 씨는 몸이 약간 불편하답니다.”
상훈은 손을 거두어들이며 찬찬히 청년의 얼굴을 살폈다. 파리한 얼굴은 병색 때문이기도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세상을 곱게만 살아온 사람의 나약함이 배어 있는 듯했다. 태어나서부터 줄곧 볕도 들지 않는 감옥에서만 살아왔다든지 아니면 고립된 성에서 세상과는 무관하게 살아가는 동화 속의 인물처럼 어딘지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는 얼굴이었다. 이상스러울 만치 강렬한 눈의 광채를 빼면 전체적으로는 부드럽고 약한 것이 소년과도 같은 인상이었다. 
“하야꼬가 왔구나.”
어디서 나타났는지 온화한 인상을 가진 오십대 중반의 신사가 밝게 웃으며 하야꼬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셨어요?”
하야꼬는 고개를 깊이 숙여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같이 오신 분이 있는 모양이구나.”
상훈을 훑는 신사의 눈매가 부드러우면서도 예리했다.
“네, 동경대학교에서 공부하는 분이에요. 월중도하도를 보고 싶다기에 제가 모셔왔어요.”
하야꼬는 상훈이 역사를 전공하는 한국인이라는 말은 빼고 있었다.
“잘 오셨습니다. 야마자끼입니다.”
야마자끼의 거침 없는 목소리에 상훈은 순간 당황했다. 하야꼬는 아무 얘기도 하지 말라고 했지만 통성명을 하는 자리에서 상대가 이름을 얘기했는데 그냥 지나친다는 것은 실례일 수밖에 없었다. 상훈의 망설임이 채 드러나기 전에 하야꼬의 약간 높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아, 저기 손님들이 오시는군요. 선생님, 미안하지만 선생님 얘기는 나중으로 돌려주시겠어요?”
상훈은 하야꼬가 매우 영리한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순간적으로 선택한 선생이라는 단어가 모든 것을 부드럽게 해소해주고 있었다. 야마자끼는 창 너머로 손님들의 모습이 보이자 바로 마중하러 나갔다. 야마자끼가 자리를 뜨자 하야꼬가 장난스레 양손을 들었다 놓으며 웃음 담긴 눈길을 던졌다. 상훈은 때마침 손님들이 보이지 않았으면 하야꼬가 어떻게 자신을 가로막았을까 생각하며 멋쩍은 웃음을 입가에 머금었다.

“자, 이리 들어오시지요.”
야마자끼는 오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두 남자와 같이 들어왔다. 뒤로는 비서쯤 되어보이는 삼십대 초반의 남자가 따라 들어왔다. 야마자끼가 이들을 데리고 다른 방으로 들어가서 차를 마시고 있는 동안 직원이 들어와 하야꼬에게 인사를 하고는 잠겨 있는 방의 자물쇠를 열었다. 하야꼬는 가즈오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상훈의 앞장을 서서 방안으로 들어갔다. 
상훈이 하야꼬의 뒤를 따르며 힐끗 바라보니 가즈오는 상훈에게 향한 예의 그 눈길을 조금도 바꾸지 않은 채 꼿꼿이 앉아 있었다. 상훈은 아까 하야꼬가 경비원이나 야마자끼에게는 자신의 이름을 숨기면서도 가즈오에게는 스스럼없이 자신의 이름을 밝히던 것이 떠올랐다. 그녀에게도 가즈오는 현실의 인물이 아닌 것으로 여겨지는 모양이었다. 
방안에는 여러 점의 그림이 걸려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상훈의 눈길을 확 잡아당기는 것이 있었다.
“아, 이것이 월중도하도군요.”
“그래요, 이조후기의 그림 중 남화를 대표하는 걸작이에요.”
그림은 사람을 빨아들이는 듯했다. 달빛이 은은히 비치는 밤에 한껏 취기가 오른 늙은이가 다리를 걷고 시내를 건너고 있는 그림이었는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편안함과 더불어 그림 속의 인물에 대해 한없는 친근감을 갖게 하는 마력이 있었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미술사적으로는 그리 알려지지 않은 분이죠. 이 작품 외에는 다른 그림이 보이진 않는 것으로 보아 전문적인 화가가 아니지 않은가 하는 분석도 있습니다만, 조선조의 어느 이름 난 화가의 그림에 못지 않은 세련미가 있습니다.”
상훈은 얼굴이 달아올랐다. 자신이 한국에서는 보도듣도 못한 그림에 대해 아무리 미술사를 전공했다고는 하나 외국의 아가씨에게 설명을 듣고 있어야 하는 일도 그렇거니와 다른 작품이 더 없다고 단정하고 있는 하야꼬의 설명은 한국문화재의 실상을 회화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이런 화가는 어느 문헌에도 아예 이름조차 올라 있지 않았다.
하야꼬의 마지막 목소리가 흩어지기 전에 야마자끼가 손님들과 같이 나타났다. 이들이 하야꼬와 인사를 나누고 하야꼬의 설명이 시작되자 상훈은 슬며시 방을 빠져나왔다. 견딜 수 없는 부끄러움과 모멸감이 가슴 깊숙이에서부터 치밀어 올라왔다. 자신이 모르는 것은 그래도 좀 나을니 몰랐다. 며칠 전 동양화를 전공하는 매형에게 전화를 해서 최웅칠이라는 화가에 대해 물었을 때 매형은 세상에 그런 화가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했던 것이다. 상훈은 총총히 현관을 나왔다. 하야꼬가 설명을 마치고 나오기 전에 어서 그 박물관을 나서야 한다는 생각에 상훈의 걸음은 바빠지고 있었다. 
“아무 말씀도 없이 그렇게 불쑥 가시면 어떻게 해요? 기차시간 때문에 어차피 만나기 마련인데요.”
옆좌석 표를 가진 하야꼬가 자리에 앉으며 창가에 자리잡고 앉아 있던 상훈에게 가볍게 눈을 흘겼다. 상훈은 짐짓 쾌활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설명이 끝나고 야마자끼 씨가 이름을 물어오면 곤란할 것으로 생각했어요. 그래서 설명 도중에 나와버렸죠. 그림은 봤으니까요.”
“그런 줄도 모르고 괜히 걱정했잖아요. 혹시 가즈오 씨의 태도가 마음에 걸렸나 하구요.”
“전연.”
짤막하게 대답하면서 상훈은 그 파리하던 모습의 청년을 떠올렸다. 처음엔 과히 기분이 좋지 않은 눈초리였지만 조금 있는 동안에 오히려 뭔가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던 터라 하야꼬로부터 그에 대해 얘기를 듣고 싶어졌다. 
“그 사람은 어디가 아픈가요?”
하야꼬는 한참 동안이나 잠자코 있었다. 고개를 돌려 창 밖을 스치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가 마치 차창 밖으로 보이는 나무에게 얘기하듯이 무심한 목소리를 툭 내어 보냈다.
“머리가 썩 깨끗하지 않은가 봐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소년기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해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럼 하야꼬 씨는 한번도 그가 정상일 때를 보지 못했나요?”
“.......”
대답없이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 하던 하야꼬는 다시 약간의 시간이 지나서야 말문을 열었다. 
“가즈오 씨는 저의 약혼자예요.”
“네?”
상훈은 저도 모르게 반문하며 그녀를 다시 한번 바라보았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별다른 감정의 기색이 없었다. 상훈은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왠지 깊은 실망이 생겨나고 있는 것을 의식했다. 자신은 은근히 기차시간에 맞춰 그녀가 옆자리에 나타나주길 기다리고 있지 않았던가?
“제 아버지와 가즈오 씨의 부친은 친구였어요. 우리의 나이가 어울리자 두 분은 우리가 어릴 적에 혼약을 해두었었죠. 장난처럼요. 물론 당사자들이 나이가 되었을 때 반대가 없다면이라는 조건은 걸었지만요.”
“지금은 어떤데요?”
상훈은 자신이 너무 주제넘은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생각해볼 틈도 없이 말이 앞서가고 있었다. 
“우리는 아직 의사표시를 하지 않았어요.”
하야꼬의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약간 쓸쓸해지는 것 같았다. 
“어릴 때의 가즈오 씨는 어땠나요?”
“예민하고 잘생겼었어요. 외아들인데다 신동이라는 소문도 자자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애정을 독차지했었죠.”
상훈은 창백하고 파리한 가즈오의 얼굴을 떠올렸다.
“한동안 서로 보지 못했던 모양이죠?”
하야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둠 속을 달리는 기차는 유난히 빠르게 느껴졌다. 가즈오에 대한 얘기가 끝나자 두 사람은 별로 말을 하지 않고 각자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상훈은 괜히 하야꼬로 하여금 가즈오의 얘기를 하게 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처음 만난 사이라 그런지 한번 침묵이 시작되자 다시 다른 가벼운 이야기들로 이어지지 않았다. 기차가 종착역에 들어설 즈음에야 상훈이 입을 열었다.
“혹시 다음에 동경대학으로 오시는 길이 있으시면 들러 주세요. 오늘 신세진 것은 너무 미안합니다.”
마음과는 달리 신세진 것 갚게 저녁을 사겠다는 등의 얘기가 나오지 않았다. 은연중에 가즈오를 의식한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이 역사학과 대학원생이라는 것만 힘주어 말했다.
“안녕히 가세요.”
하야꼬도 낮과는 달리 간결한 인사를 던지고는 기차가 플랫폼에 멎자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훈은 하야꼬의 뒷모습을 눈으로만 좇았다.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잠시 버스를 기다리던 상훈은 이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여느 때라면 걸을 엄두가 안 나는 먼 길이었지만 왠지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히비야 공원길을 걷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스물일곱 해를 살아오는 동안 공부에만 매달리느라고 느끼지 못했던 여자라는 존재가 갑자기 가슴 앞에 쑥 다가온 기분이었다. 상훈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턱을 만졌다. 별로 얼굴에 신경을 쓰지 않고 지냈지만 오늘은 면도라도 하고 갔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어 쓴웃음을 지었다. 



3. 비문의 연구


“상훈 군, 이쪽은 닛꼬 경찰서의 이마무라 경위야. 인사 나누지.”
두 사람이 간단한 인사를 마치자 미나미 교수는 설명을 시작했다. 
“여기 이 책들을 보게.”
상훈이 대략 보자 책들은 거의 비문에 관한 것들이었다.
“이 책들이 닛꼬의 어느 살인 현장에 있었다는 거야. 다른 것들은 전혀 건드리지 않았는데 이 책들만 손을 댄 흔적이 있더라는 거지. 경찰에서 살펴보니 바로 이 책에 무슨 종이가 붙어 있다 뜯겨져 나간 흔적이 있더라는 거야. 책이 한결같이 비문에 관한 것들이라 전문가로부터 무슨 참고되는 얘기라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왔다는군.”
미나미 교수가 넘겨주는 책은 <비문의 연구>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얇은 책이었다.
“책이 얇은데도 현장에서 종이만 뜯어갔군요.”
상훈이 책을 건네받으며 옆에서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이마무라 주임에게 물었다. 이마무라 주임은 인사를 나눌 때 상훈이 한국인인 것을 알고는 약간 김이 빠진 기색이었다. 아무리 전공이라 해도 상훈이 일본인이 아니란 것이 탐탁치 않았던 것이다.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범인은 평소 책과는 인연이 먼 사람으로 볼 수 있습니까?”
“글쎄, 나는 잘 모르겠군요. 그런 것으로 범인의 성향을 짐작할 수 있습니까?”
“제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평소 책과 가까운 사람이라면 현장에서 이 얇은 책을 들고 나오는 것이 간편하다고 생각했을 것 같군요. 그러나 평소 책과 별로 가깝게 지내지 않던 사람이라면 목표물인 뒤표지에 붙은 종이만 머리 속에 떠올랐을 것 같습니다.”
“그럴까요?”
“게다가 상대방은 아주 대담한 사람인 모양입니다. 전문적인 살인자이든지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살인현장에서 이토록 조심스럽게 표지 안쪽에 붙은 종이를 떼어간다는 것은 초범이나 우발적 범행을 저지른 사람으로서는 어려운 일일 겁니다.”
상훈은 표지가 뜯긴 자국을 보이며 설명을 계속했다.
“종이를 뜯은 자국이 곱게 나 있지 않습니까. 맨 아랫부분에 가서만 안표지가 조금 뜯겨 있습니다. 풀이 두텁게 먹여진 자리죠. 범인은 경황 중에도 종이를 매우 조심스럽게 뜯어냈습니다. 별다른 피해품이 없다면 이 대담한 범인의 목표는 뒷장의 종이였겠군요. 피살자는 무엇을 하던 사람이었습니까?”
“팔십을 넘겼으니 일에서는 은퇴를 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과거에 살던 곳의 경찰에 의뢰를 했는데 별로 뚜렷한 직업이 없이 살았다고 합니다.”
“이상하군요.”
상훈이 고개를 갸우뚱하자 이마무라 주임이 다시 물었다.
“무엇이 이상한가요?”
“피살자아 직업이 없이 살았다는 것이 이해가 안 갑니다. 여기 가져온 책들은 보통 사람이 볼 수 있는 책이 아닙니다. 이쪽 방면의 전문가가 아니면 아무런 재미가 없고 보기도 까다로운 책들이죠. 그렇게 보면 피살자는 이쪽 방면의 연구를 하는 학자이든지 비문과 관련된 직업을 가진 사람이기 쉽습니다. 둘 다 특수한 분야라 금방 표시가 나죠. 그런데도 직업이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면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거죠.”
“취미로 볼 수는 없습니까?”
“금석학 같은 분야의 전문가라 하더라도 이런 서적들을 가지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 책들 중 일부는 이미 오래 전에 절판된 희귀한 것들입니다. 아마추어의 수준에서 갖출 수 있는 책이 아니죠.”
이마무라 주임은 놀라고 있었다. 미나미 교수로부터 매우 명석한 두뇌를 가진 사람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예리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상훈이 한국인이라 해도 제법 도움이 될 것 같아 이마무라 주임은 은근히 기대감이 생겨났다. 
“이 책들을 제가 가지고 가도 됩니까?”
“네, 괜찮습니다. 어차피 우리가 가지고 있어 봐야 별반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데요.”
“뭔가 발견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상훈은 이마무라 주임의 명함을 받아들고 미나미 교수에게 고개를 숙인 다음 교수의 연구실을 나왔다.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오는 동안 이 사건이 뭔가 재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책이 범행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하더라도, 이런 희귀한 책들을 가지고 있던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문제의 종이가 뜯겨나간 책의 제목은 <비문의 연구>였다. 저자는 아소가와 겐지라는 사람으로 육십년대에 사망한 사람이었다. 상훈은 뒤표지 부근을 찬찬히 살폈다. 처음에 생각했듯이 범인은 오랫동안 풀로 잘 붙여져 있던 종이를 아주 조심스럽게 뜯어낸 듯했다. 사람을 죽인 현장에서 원장을 그토록 조심스럽게 뜯어낼 정도라면 범인은 보통 사람이 아닐 테고 그 종이 역시 보통 중요한 것이 아닐 것이었다.
뒤표지의 발행일을 보니 1939년 6월, 발행사는 대륙연구회였다. 근대동양사에 정통한 상훈의 눈에 낯선 것으로 보아 별로 많이 알려졌던 단체는 아닌 모양이었다. 지금은 없어진 단체이겠지만 이름은 당시 유행하던 대륙에 대한 일본인들이 동경을 한껏 담고 있는 것이었다. 비록 색은 바랬고 불과 구십여 페이지이 얇은 책이었으나 아직도 반듯하게 책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출판 당시에는 상당히 정성을 들인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책의 첫 장을 넘기자 저자의 말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나라 역사의 흔적이 이미 오래 전에 산동반도와 만주에서 발견되고 있었음에도 이제껏 제대로 살필 기회가 없었던 것은 불행하고도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던 중 천우신조를 얻어 통구에 있는 비의 탁본을 얻게 되어 각계의 자문을 받아 그 내용을 이제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나의 이 책이 만주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촉발하고 나아가서는 대동아 공영에 이바지하기를 기대한다.“

서문에서 통구에 있는 비라고 한 것은 아마도 광개토대왕비를 얘기하는 것이리라 생각되었다. 다음 페이지를 넘기자 그간의 광개토대왕비에 대한 연구성과 주장을 집대성하고 있었다. 1889년 처음 광개토대왕비에 대한 연구결과를 출판하였을 때와 조금도 다른 점이 없는 논지였다. 연구와 주장은 거의 한 구절에 집중되고 있었다. 

“왜이신묘년래, 도해파백잔, □□□라, 이위신민.
倭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 ,□□□라, 以爲臣民.
신묘년에 일본은 바다를 건너 백제와 가야와 신라를 깨뜨리고 이들을 신민으로 삼았다.“

이 구절은 그대로 이 책의 결론이 되고 있었다.
“음.”
상훈은 책을 덮었다. 바로 광개토대왕비에 대한 논문을 쓰려고 하는 자신으로서는 수도 없이 봐 오던 구절이었지만 살인사건와 관련하여 다시 이 구절을 보게 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책의 뒷장에 붙어 있던 종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 책의 내용과 관련이 있는 것이었을까? 전문적인 학자나 볼 법한 책과 살인사건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참으로 그 관계를 추측하기 어려웠다. 
상훈은 다시 나머지 책들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 책들도 모두 광개토대왕비에 대한 연구서였는데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있는 상훈으로서도 구하기 어려운 희귀서들이었다. 책들은 일본에서 출판되거나 발표된 연구의 거의 모두를 체계적으로 담고 있어 상훈으로서도 탐이 날 만한 것이었다. 학계에서 다소 이름이 있다고 할지라도 이런 희귀한 자료를 갖춘 사람은 상훈이 아는 한 한 사람도 없었다. 새삼스럽게 피살자의 신분에 대한 궁금증이 물밀 듯 밀려왔다. 일본 사학계를 꽤 안다고 자처하는 상훈으로서도 가네무라 쥰이찌라는 이름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상훈은 이마무라 주임의 번호를 돌렸다. 주임은 부재중이었다. 동경에 온 길에 다른 일을 보고 내려가는 모양이라 생각한 상훈은 연락을 부탁하고 전화를 끊었다. 



4. 야마모도 서장
닛꼬 경찰서로부터 동경의 치요다 경차서장으로 옮겨온 야마모도는 나이가 육십에 가까웠지만 여느 젊은이 못지 않은 완력과 유연한 체격을 가진 사람이렀다. 그의 날려하고도 정확한 사격 솜씨는 젊은 형사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게다가 닛꼬에서 근무하던 때에는 불편부당하고 부하직원들을 잘 감싸주는 휼륭한 서장으로 인기가 있었다. 경찰간부답지 않게 검소하고 소탈한 그의 모습은 이마무라 주임에게도 깊이 인상지워져 있었다. 
고급 화과자 한 상자를 사 들고 서장실 앞에 선 시골결찰의 주임은 오랜만에 반가운 형이라도 찾아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야마모도 서장 역시 전임지의 부하직원이 일부러 찾아와준 것을 무척 반가워했다.
“뭐라고, 쥰이찌 상이 살해됐다고?”
그러나 인사를 나눈 후 이마무라 주임의 입에서 나온 소식에 야마모도 서장은 기겁했다.
“너무나 간단한 살인입니다. 저도 강력담당을 맡은 후 이렇게 깨끗하게, 흔적 없이 사람을 죽인 것을 보는 것은 처음입니다. 이것은 프로가 마치 나보란 듯이 자신의 재주를 뽐내는 것 같아서 화가 치밀 정도입니다.”
“사인이 질식사라고, 살해된 것은 틀림 없나?”
야마모도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몇 번이나 고개를 흔들다 이마무라 주임이 현장이 너무 깨끗했다는 얘기를 하자 아예 사인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물론입니다. 목을 조이기 전에 관자놀이를 강타당했습니다. 팔십이 넘은 노인에게는 이것만으로도 치명적입니다. 검시 결과 울혈이 심했고 내출혈도 있었습니다.”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군. 쥰이찌 상과 같이 조용한 사람이 팔십을 넘은 나이에 살해당하다니. 내가 옮기자마자 그런 일이 발생했구먼.”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통화는 점검했나?”
“평소에 외부와의 통화는 전무했습니다만 사건 직전 동경에서 공중전화로 걸려온 전화가 삼 회 있었습니다.”
“동경에서?”
“그렇습니다.”
“공중전화로?”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우발사건은 아니군. 상대는 동경에서 쥰이찌 상을 노리고 내려간 거야. 피해품은?”
“그게 말입니다. 정말 이상하기 짝이 없는 것이 아무런 피해품도 없다는 것입니다. 도장과 통장도 그대로 있고 신용카드와 지갑이 들어있는 서랍은 아예 열지도 않았습니다. 침입자의 목적은 단 하나, 바로 쥰이찌 상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일반인으로서는 흉내도 낼 수 없이 깨끗하게 처리한 것을 보면, 누군가 살해의 목적을 가진 사람이 프로를 보내 그를 살해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쥰이찌 상이 누군가에게 원한을 사고 있었다는 얘긴가?”
“지금으로서는 그렇게 밖에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서장님께 하나 여쭤 보고 싶은 것은......”
야마모도는 이 대목에서 이마무라가 자신을 방문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마무라는 옛 부하로서 안부 인사를 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쥰이찌의 살해사건과 관련하여 자신에게 무언가를 물으러 온 것이었다.
“과거 제가 외근주임으로 부임했을 때 서장님께서 쥰이찌 상을 소개하셨습니다.”
“그랬지. 내가 자네에게 쥰이찌 상을 잘 보살펴주라고 특별히 당부했잖아.”
이마무라는 야마모도 서장의 표정에 은근한 원망의 기색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는 가뜩이나 작고 땅딸막한 몸집을 더욱 움츠렸다. 그도 그럴 것이 야마모도 서장이 이임한지 하루 만에 사건이 발생했으니 자신으로서는 면목이 없었다. 물론 지금은 자신의 직책이 외근주임은 아니니 직접적 관계는 없지만 그래도 앉아 있는 자리가 편치는 않았다. 
“이제 이렇게 됐으니 범인을 잡아 쥰이찌 상의 영혼이라도 달래주는 것이 저의 도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말씀인데...... 혹시 서장님께서는 쥰이찌 상이 전에 무엇을 하던 사람인지 아실지 모른다는 생각에.”
야마모도 서장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는 슬픔을 참아내고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려고 애쓰는 듯했다.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던 야마모도 서장은 이윽고 약간 노기 서린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는 주임이 당연히 해야 할 기초적 조사들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과거 거주지 조사를 하지 않았나?”
냉랭해진 목소리가 이마무라를 더욱 주눅들게 했다.
“동경에서 전입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전에 살던 데가 어딘지는 나오니 않습니다. 주민등록상 동거인은 없고 혼자 살아왔다고 얘기했다는군요. 나이가 매우 많은 사람인데도 마치 하늘에서 떨어졌는지 과거의 기록이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쥰이찌 상에 대해 아는 유일한 분이 바로 서장님이십니다.”
이마무라가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서장에게는 이마무라의 이 말이 매우 서운하게 들리는 모양이었다. 서장은 몹시 침체된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쥰이찌 상과 나는 동경에서 알게 된 사이였네. 그는 매우 박학하고도 선량한 사람이었지. 늘 만나던 사이이거나 집엘 가보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정이 들었었네. 나이가 적은 내가 항시 무어라도 배우는 편이었지. 우리는 가원에서 만났어. 늘 책을 가까이 하던 그분의 유일한 취미가 바둑이야. 가끔 바둑을 두러 나가곤 하던 나는 급수도 비슷하고 인격도 고매한 쥰이찌 상과 자주 대국을 하곤 했지. 그분하고의 대국은 이길 때나 질 때나 똑같이 즐거웠어. 내가 닛꼬 경찰서로 부임한 지 얼마 안됐을 때 하루는 쥰이찌 상이 전화를 걸어오셨더군. 이제 은퇴도 했으니 동경을 떠나 조용한 곳에 가서 살고 싶다고 하시더군. 나는 잘됐다 싶어 닛꼬로 오시라 했고 그분은 곧 내려오셨어. 자식도 친척도 없고 연세가 높은 분이라 내가 당시 외근주임이던 자네에게 순찰할 때마다 들러 잘 좀 보살펴드리라 했지.”
“동경에 계실 때는 쥰이찌 상이 무엇을 하던 분인지 알지 못하셨습니까?”
“내 생각에 그는 은퇴한 점잖은 학자 같았어. 그때도 이미 연세가 높으셨으니까.”
하긴 그랬다. 그는 이미 나이가 팔십을 넘은 사람이나 무엇을 뚜렷이 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지 몰랐다. 
“닛꼬에 오셔서는 가끔 만나셨습니까?”
“나는 쥰이찌 상이 닛꼬에 오시면 같이 바둑도 두고 재미있게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닛꼬에 오셔서는 바둑도 안 두시고 별로 연락도 안하시더군. 내가 전화를 드리면 다음에 전화를 주시겠다고 하시고선 그 다음엔 연락을 안하시곤 하셨어. 나만 자꾸 연락하기도 뭣해서 자연히 뜸해졌네.”
“혹시 쥰이찌 상이 누군가로부터 위협을 당하고 있다거나 하는 느낌을 받은 적은 없으셨나요?”
“위협? 그런 것은 전혀 느끼지 못했어.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내게 먼저 연락했을 텐데 아무런 연락도 없지 않았나. 자네들도 순찰을 나가서는 하루 한 번씩 꼭 들러보지 않았나?”
“아, 네. 그러긴 했습니다만.......”
주임은 가슴이 찔렸다. 순찰이라는 것이 무슨 일이나 있어야 자주 들러보는 것이지 항상 가봐야 별일 없는 집에 매일 들른다는 것도 못할 짓이었다. 그래서 주임은 서장의 명령이긴 했어도 자신은 가끔 한번 들러볼 뿐 왠만하면 부하직원들로 하여금 가보도록 했던 것이다. 주임인 자신이 그럴 정도면 직원들이 어떠했으리란 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었다. 
“내가 경시청에 얘기해서 민완형사를 지원할까?”
서장은 이마무라 주임이 우물쭈물하는 것을 보고는 마음이 놓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아니, 괜찮습니다. 저희가 해결하겠습니다.”
주임은 당황했다. 만약에 야마모도 서장이 닛꼬의 서장에게 전화라도 걸어 형사를 지원하겠다 하면 자신의 위신은 땅에 떨어지고 말 것이었다. 어쩌면 신임서장에게 완전한 불신임을 사고 말지도 몰랐다. 주임은 야마모도 서장이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서장님, 걱정 마십시오. 저희가 최선을 다해 빠른 시일 안에 좋은 소식 올리겠습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라도 연락해.”
서장실을 나서며 이마무라 주임은 어깨가 축 처졌다. 혹시 뭔가 단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야마모도 서장에게서 은근한 질책만 받고 나온 기분이었다. 닛꼬로 돌아오니 경찰서에는 상훈의 전화가 와 있었다.

“박 선생님입니까? 닛꼬이 이마무라입니다.”
“네, 가네무라 쥰이찌의 집에 가보고 싶어 전화드렸습니다.”
“아, 무슨 단서라도 찾은 모양이죠?”
“아닙니다. 그런 것은 아니고 쥰이찌라는 사람을 알기 위해서는 그의 집에 가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시면 우리 경찰서로 오십시오. 같이 가보시죠.”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5. 없어진 기록


동경에서 출발하여 닛꼬로 가는 동안 차창 밖으로 스치는 주변의 경관은 끊임없이 상훈을 매혹시켰다. 일본에서도 첫손가락에 꼽히는 관광지인 닛꼬는 도꾸가와 이에야스의 화려하기 짝이 없는 묘와 함께 그 시원하고 장쾌한 화엄폭포가 장관이다. 더욱이 신문명이 들어와 자유연애가 젊은이들의 가슴을 공연히 설레게 했던 시절,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을 가슴 아파하던 미남자 누군가가 닛꼬의 폭포에 몸을 던지고 난 다음부터는 전국에서 실연하거나 남녀문제로 가슴앓이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드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자살을 본떠 몸을 던지는 젊은이들도 많고 보면 역시 청춘은 예민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상훈의 머리 속에 하얀 연기처럼 하야꼬의 모습이 피어올랐다. 친절하고 상냥한 미소 뒤에는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고고함이 깃들어 있는 듯한 여인이었다. 여는 여자와 달라 보이는 하야꼬의 특별함이 무엇인가를 곰곰 생각하던 상훈은 아마도 그것은 가즈오와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토록 밝고 투명하던 햐야꼬의 얼굴이 가즈오라는 매우 특이한 인상을 주던 청년의 얘기가 나오자 어딘지 모르게 어두운 기색을 띠던 것이 떠올랐다. 어린 나이에 부모끼리 정혼을 한 사이라는 것이 요즘 세상에 어떤 의미를 지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린 아직 의사표시를 하지는 않았어요.”
그 말은 하며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지던 하야꼬의 모습은 아름다우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처연하고 외로워보였다. 하야꼬는 가즈오가 정신병을 가졌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정신병을 가진 사람의 눈길이 그리도 매서울 수 있는 것인가? 그날 가즈오가 자신에게 보였던 그 눈초리는 웬만큼 정신을 집중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보여줄 수 없는 날카롭고도 활활 타오르는 것이었다. 자신에게 보내온 그의 눈길 속에 담겨 있던 의미는 무엇일까, 증오, 질투, 아니면 무조건적인 적대의식? 그건 아니었다. 그날 가즈오의 행동은 비록 비정상적이긴 했지만 결코 적대적이진 않았다. 창백하고 파리하면서도 준수한 그 얼굴의 뒤편에 감추어진 가즈오의 성격은 어떤 것일까?
가즈오와 겹쳐지는 하야꼬의 특별한 인상은 혹시 비극적으로 짜여진 자신의 운명에 대해 수긍하면서도 결코 허물어지지 않으려는 한 가냘픈 여자의 절제된 비애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목적지 닛꼬에 도착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운전사의 말에 퍼뜩 정신이 든 상훈은 버스를 내려 바로 경찰서를 찾았다. 이마무라 주임은 상훈이 닛꼬까지 와준 것이 고마운지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책임감이 강한 데다가 닛꼬에서 태어나 이제까지 계속 고향에서만 살아온 이 사나이는 자신이 강력반장으로 있을 때 살인사건이 발생했다는 자체가 고향에 대해 큰 죄를 짓는 것과도 같은 모양이었다. 
쥰이찌의 집 열쇠는 이마무라 주임이 갖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본 현장은 사건이 발생했을 때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정말이지 현장은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깨끗했다. 
“과연!”
피살자의 서재를 보는 순간 상훈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소리였다.
“뭐 생각해두신 거라도 있는 모양이죠?”
이마무라 주임은 상훈의 표정을 보면서 희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아닙니다. 나는 단지 이 사람이 예사로운 사람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예사로운 사람이 아니라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 말입니까?”
“매우 전문적인 분야를 연구하는 사람이라는 거죠.”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까?”
“단순한 역사가 아니고 비문연구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지갑이나 수첩에서는 뭐 좀 도움될 만한 것이 나온 게 없습니까?”
“지갑에는 운전면허증과 의료보험증 밖에 없었습니다. 수첩은 없었어요.”
“범인이 수첩을 가져갔을 수도 있는 것이죠?”
“그렇게 봐야 할 것 같군요.”
아마도 수첩에는 범인의 정체와 관계있는 전화번호나 이름들이 있을 것이었다. 지갑은 그냥 두고 수첩은 가져갔다면 이것은 분명히 면식범 혹은 평소 쥰이찌와 관계있는 사람의 사주에 의한 범행이라는 얘기가 된다.
“이 책들의 어느 한 귀퉁이에 메모나 낙서 따위가 있는지 살펴보아 주십시오.”   
상훈은 책꽂이의 책들 중 반을 이마무라 주임에게 맡기고 나머지 반의 책을 한권 뽑아서 넘겼다. 페이지를 연속적으로 넘기며 빈 여백만을 살피는 데도 워낙 책이 많아 시간을 많이 잡아먹고 있었다. 
“아, 여기 뭔가 적혀 있군요.”
기계적으로 책장을 넘기던 주임이 얼마 남기지 않은 책들 중에서 무언가 발견하고는 오랫동안 지루한 작업 끝에 보물을 발견한 사람의 표정으로 상훈에게 책을 한 권 건넸다. 
“역시 반장님이 다르시군요.”
상훈은 웃으며 책을 넘겨받았다. 다른 책들이 모두 한 점의 낙서도 없이 깨끗한 것이었는데 반해 <역사연구>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이 책의 중간쯤에는 과연 뭔가가 적혀 있었다. 

‘나라여자대학 나까가와 교수 0014-76-8547’

이름과 전화번호였다.
책은 1970년 10월에 발간된 역사학술잡지로 특별히 주의를 끌만한 내용은 없었다. 그러나 역사의 방법론에 대한 세미나를 요약한 기사가 있는 기사가 있는 페이지에 나까가와 교수의 이름이 메모되어 있었다. 쥰이찌는 이 기사를 읽고 나까가와 교수를 기억해 두려 했었던 모양이었다. 
“뭐 보실 게 있으면 얼마든지 가져가서 천천히 보십시오.”
상훈이 짧지 않은 기사를 선 채 다 읽으려는 것을 알아차린 주임이 서둘러 권했다. 그러나 상훈은 이내 기사에 빠져들며 고개는 돌리지도 않은 채로 엉뚱한 대답을 했다. 
“피살자는 성경이 매우 깨끗한 사람이었던 것 같군요. 그 많은 책 중에 약간의 메모라도 되어 있는 것은 이것뿐이군요.”
“그마저도 그가 적어놓은 것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요? 가령 다른 사람의 책을 얻어왔다든가.”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이런 책들은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한번 손에 넣으면 남에게 빌려준다든가 하는 것을 전문가들은 죽기보다 싫어하거든요.”
“하긴 학자들의 책에 대한 욕심이란 지긋지긋한 걸러 소문이 나 있죠. 그래야만 학자가 되기도 하겠지만요.”
주임은 무슨 말인가를 한두 마디 더 하려 하다 상훈이 책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자 입을 다물고 말았다. 
‘내가 보기엔 당신도 어김없는 훈장타입이야. 지난번 내가 동경에 책을 갖고 갔을 때 그 욕심내는 눈초리 하며 당장 지금도 죽치고 책에 파묻히는 것 하고 영락없어.’
“아, 미안합니다. 너무 오래 기다리셨군요. 이제 다 끝난 것 같습니다.”
상훈이 기사를 꼼꼼히 읽는 동안 자신의 몫은 물론 상훈의 몫으로 남겨진 책들의 여백까지 다 확인한 이마무라 주임은 상훈이 기사를 다 읽고 나서 집을 나서게 되자 반가운 표정으로 너스레를 떨었다. 
“형사생활 이십 년에 이렇게나 단서가 없는 사건은 처음입니다. 살인현장에서 찾은 유일한 변화라는 것이 책 뒷장 하나 찢어간 것이라는 게 도대체 말이나 됩니까?”
이마무라 주임은 아까 상훈에게 자신의 지루함을 드러내지 않았을까 염려하는 듯했다. 상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터미널에 도착하자 주임은 자신이 표를 사는 등 최대한의 친절을 베풀려고 하는 것이 역력했다. 그는 큰 기대를 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상훈이 닛꼬까지 내려와서 열심히 책을 조사하는 것이 고맙기 짝이 없는 모양이었다. 

닛꼬에서 올라온 다음날 상훈은 도서관의 색인표에서 나까가와 교수의 저서와 논문 등을 찾았다. 여러 논문 중에서도 광개토대왕비와 관련한 그의 논문에 주목하게 되는 것은 없어진 종이가 붙어 있던 책 역시 광개토대왕비에 관한 책이기 때문이었다. 논문을 읽어나가던 상훈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것은 매우 특이한 논문이군. 이 사람은 그때까지의 일본학자들 중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것을 지적하고 있지 않은가.“
발간일이 1971년 3월인 <사상>이라는 잡지에 실린 그의 주장은 특이할 만한 것이었다.

“일본 학계가 광개토대왕비의 탁본을 처음으로 입수한 것은 1884년이다. 그간 우리는 이 탁본에 의거하여 많은 연구를 했고 이 연구에 의거하여 4.5세기의 한일관계사를 확정지었다. 그러므로 이 탁본은 고대사 연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자료임이 명약관화하다. 그러나 매우 이상스러운 일이 있다. 이 탁본을 일본에 가지고 옴으로써 그야말로 혁혁한 공로를 세운 사람이 누구인가를 우리는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1918년까지의 모든 연구논문이나 출판된 책에는 왜 모두 <일본인 모씨> 혹은 <황국인 모씨>로만 표기되어 있는가? 그가 육군포병대위 사꼬오 가께아께임이 밝혀진 것은 순전히 1918년 육군준장 오누우에의 실수에 의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것조차도 퇴역육군소장 다께우찌에 의한 것이었다. 나는 여기서 중요한 의문을 하나 제기하고자 한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토록 혁혁한 공로를 세운 가께아끼란 이름이 숨겨져야 했던가? 나는 추츠한다. 혹시 그는 만주에 파견된 간첩의 한 사람이 아니었던가 하고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비정상적인 일이 일어날 수는 없지 않을까.”

쥰이찌는 왜 이사람의 이름을 책에 적어 놓았을까? 쥰이찌는 이미 보유하고 있는 자료의 양만으로도 전문가 혹은 학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가 나까가와 교수의 대담을 읽고 그 이름을 책 뒤에 적어 두었다면 그 이유는 나까가와 교수의 발언 중에 참고할 것이 있거나, 그 교수의 견해가 심히 못마땅하여 항의나 반박을 해야겠다고 느꼈거나, 자신도 공감하기에 교수의 이름을 기억하기 위한 경우일 것이었다. 어느 경우이든 일단은 나까기와 교수에게 전화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한 상훈은 교수의 전화번호를 찾아 다이얼을 돌렸다. 수화기를 통해 부드럽고 친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상훈이 동경대학 대학원생이라고 자신을 밝히자, 반가워하며 아는 것은 무엇이든 대답해주겠다고 말했다.
“혹시 가네무라 쥰이찌라는 사람을 아십니까?”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군요.”
“1970년 10월에 발간된 ‘역사연구’라는 잡지에 고대사 관계 대담을 하시고 나서 혹시 누구로부터 전화나 편지를 받으신 적은 없습니까?”
“오래 전의 일이라.... 중요한 전화는 적어놓기도 합니다만, 워낙 오래 전 것이라 한참 찾아봐야 할 것 같군요. 찾아보고 혹시 그런 기록이 있으면 연락을 해드릴 테니 전화번호를 주세요.”
상훈은 번호를 불러주고 전화를 끊었다. 일본 사학계의 대가중 하나로 꼽히는 교수의 너무도 친절한 대답에 상훈은 송구한 마음마저 들 정도였다. 이십여 년 전에 전화 한 통화 받은 것을 기억해 달라고 하는 주문이 무리하기 짝이 없는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상훈은 은근히 나까가와 교수로부터의 전화를 기다리는 심정이 되었다. 확률없는 기대를 빼고 나면 모든 것은 다시 원점이었다. 도대체 이 사건은 어떻게 풀어야 할까?



6. 쥰이찌의 본명


벌써 열흘도 넘게 상훈은 늦은 저녁까지 동경대학 구내의 산시로 연못가에 않아 깊은 생각에 잠기곤 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궁금증만 더해가는 사건에 매달리느라 강의시간 중에 토론에서는 새로운 내용에 대해 벙어리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다들 늘 충분히 텍스트를 읽어와 토론을 주도하던 상훈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의아해하고 있었지만 정작 본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사건에,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지만 정작 본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사건에, 정확히 말하면 가네무라 쥰이찌라는 인물에 몰두하고 있었다. 동경대학 사학과 교수보다 결코 빈약하지 않은 자료를 가진 인물, 자신이 논문을 쓰고자 하는 비문의 연구에 필요한 자료는 거의 하나도 빠짐없이 가지고 있던 인물, 그러나 한평생을 연구나 하면서 살아왔을 이 인물이 팔십이 넘은 나이에 살인 전문가에게 피살당했다. 피해품은 고작 종이 한 장.
늦게까지 연못가에 않아 생각을 가다듬어 봤어도 사건의 핵심에 접근할 수 있는 건덕지라곤 아무것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실날 같은 기대를 했던 나까가와 교수로부터도 전화가 없었다. 제법 차가운 사월의 밤기운을 느끼며 일어난 상훈이 학교 앞에서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자취하는 있는 독신자아파트에 돌아왔을 때는 밤이 깊어 있었다.
<늦어도 좋으니 연락해주시기 바랍니다.>
녹음장치가 되어 있는 전화기에는 이마무라 주임의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웬일일까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기대에 들뜬 상훈이 전화를 걸자 이마무라 주임은 기다리고 있기나 했던 것처럼 바로 전화를 받았다.
“동경에 있는 미쓰이 보험회사의 본사에서 연락이 왔었는데 가네무라 씨는 상당액의 생명보험을 들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상훈의 뇌리에는 퍼뜩 보험살인이란 어휘가 떠올랐다. 무언가 복잡하게 꼬여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사건이 의외에도 신문에 늘상 보아오던 보험살인으로 귀결지어 지는 것이 어딘지 모르게 허전한 느낌마저 드는 것이었다.
“수혜자는 누구로 되어 있습니까?”
상훈의 이 질문 속에는 이제껏 시간과 정열을 바쳐 사건에 몰두해온 것에 대한 불만이랄까 억울한 심정이 깃들어 있는 듯 했다.
“우에노 아사꼬, 여자입니다.”
“쥰이찌와는 어떤 관계입니까?”
“아직은 전혀 드러나는 게 없습니다.”
“부인은 아니유?”
“아마 내일 보험회사에 가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겠군요.”
“내일 새벽 동경으로 올라가겠습니다. 혹시 시간이 괜찮으시면 보험회사에 같이 가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하시죠.”
다음날 아침에 만난 주임의 표정은 상기되어 있었다. 그의 경험으로는 생명보험을 든 사람이 살해되었을 경우 범인은 십중팔구 수혜자나 가족 부근에서 찾아졌다. 이제까지 형사반장으로서 변변하게 의견 하나 내세우지 못하다가 처음으로 단서 같은 단서를 하나 잡았다는 생각이 그를 의기양양하게 했다. 그는 보험사의 창구에서 모처럼 강력반장다운 당당한 태도를 되찾았다. 반장의 표정과 신분증에 약간 주눅이 든 직원은 금세 쥰이찌의 계좌를 찾아왔다.
“지불될 금액은 약 삼억 팔천 오백만 엔입니다.”
“이것은 얼마 동안 적립된 금액이오?”
“이십오 년이 좀 넘었군요.”
“매우 큰 금액이군, 그런데 쥰이찌 씨의 원장을 좀 보여주시오.”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쥰이찌 씨의 가족관계를 알고 싶어서 그렇소. 원장에는 그런것들을 기록하도록 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잠시 후 직원이 꺼내온 쥰이찌의 보험원장을 들여다보던 이마무라 주임의 표정이 점차 어두워지더니 급기야는 완연한 실망의 기색을 드러내고 말았다. 아무것도 없군요. 가족란이 텅 비어 있어요. 우에노 아사꼬라는 여자와의 관계도 기록되어 있지 않아요.“
옆에서 궁금해하는 상훈에게 원장을 넘겨주는 이마무라의 손길에는 힘이 빠져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무언가 도움이 될 것으로 믿어마지 않았던 원장을 보러 새벽길을 재촉하여 닛꼬로부터 동경가지 큰 기대를 갖고 왔던 반장이었다. 그러나 정작 힘이 빠진 이유는 처음으로 상훈에게 형사반장으로서의 당당한 모습을 보이고자 했던 것이 수포로 돌아간 데서 오는 허망함이 더 컸던 것이었다.
“여기 70년 6월의 전입금은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원장을 넘겨받은 상훈이 한참 살피다가 손가락으로 서류를 짚으며 묻는 소리에 주임은 옆에서 슬쩍 곁눈질을 했다.
“아, 그것은 이 보험 전에 들었던 다른 상품의 구좌를 옮긴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동일인의 것입니까?”
“그럴수도 있고 다른 사람의 것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 확인이 안됩니까?”
“잠시 기다려 보십시오.”
이 대목에서 이마무라의 귀가 번쩍 뜨였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형사인 자신이 볼 가치가 없다고 던져준 서류를 이 한국인 유학생은 꼼꼼히 살펴 결국은 무언가를 찾아내었다. 자신은 얼마나 경솔했으며 이 한국청년은 얼마나 자신을 우습게 볼 것인가, 주임은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상훈과 눈길이 부딪친 이마무라는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을 보는 상훈의 눈길에는 조금도 교만하거나 뽐내는 태가 없었다. 그저 같이 사건을 좇는 동료의 진정한 기대만이 전해져 오고 있었다. 이 성실하고 우직한 시골형사는 침착한 한국인 동경대 대학원생이 어딘지 모르게 듬직하고 마치 오랜 친구와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직원은 오래되어 색이 바랜 서류 한 장을 갖고 나왔다.
“힘들게 찾았어요, 마이크로 필름이 있긴 하지만 원장을 보시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요.”
직원은 이마무라의 신분증을 보고 자신도 뭔가 도움이 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이제 이마무라는 손을 뻗치지 않고 상훈이 먼저 보도록 양보했다.
“아예 저기 않아서 같이 보시죠.”
먼젓번 구좌의 명의인은 우에노 에이지라는 이름으로 되어 있엇따. 주소는 동경, 수혜자는 쥰이찌의 보험과 같은 우에노 아사꼬였다. 이마무라는 즉시 수첩을 꺼내 필요한 사항을 적고는 다시 직원에게 두 장을 복사해 달라고 부탁했다. 복사된 서류를 받아 나오는 두 사람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학교에 가 계시죠, 제가 이 주소로 찾아가 필요한 것들을 모두 확인하고 학교로 들르겠습니다.”
이제 상훈은 수사관보다도 더 사건에 몰두하고 있었다. 궁금하기 짝이 없었던 인물의 윤곽이 이제는 떠오를 것이었다. 쥰이찌에게 자신의 보험금을 넘겨준 우에노 에이지라를 사람과 에이지와 쥰이찌의 두 남자로부터 보험금의 수혜자로 지정되어 있는 아사꼬의 신원이 떠오르면 쥰이찌도 자연히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될 겄이었다.  상훈의 짐작에 쥰이찌는 아마도 은퇴한 대학교수 정도 일 것 같았다.

이마무라 주임은 석양이 넘어갈 즈음에야 학교로 왔다. 상훈은 이 우직한 형사반장이 점심도 먹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되어 학생식당으로 데리고 가서 탕수육덮밥을 사줬다. 학생들 사이에 서서 식기를 들고 배식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이마무라 주임은 뭔가를 말하고 싶어 못 견디는 듯했다.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주임은 자신이 알아낸 것을 쏟아냈다.
“에이지라는 사람은 나이가 쥰이찌와 같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주민등록을 옮기지 않고 어느날 갑자기 없어졌습니다. 시야쿠쇼에서는 직권으로 주민등록을 말소시켰더군요”
“그렇다면 그 사람도 역시 알 수 없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러나 이마무라 주임의 얼굴은 밝았다. 그는 시원하다는 듯이 된장국을 쭈욱 마시고는 손등으로 입가를 쓰윽 닦았다. 상훈은 주임의 이런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한국의 시골사람과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주임은 자신 있는 목소리로, 그러나 확실한 것을 잡았을 때 오히려 더욱 신중하게 처신함으로써 아까의 실수를 만회하려는 듯이 다소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상훈은 그의 이런 태도조차 한국의 시골사람들과 너무나 흡사하다는 생각에 뭔지 모를 애정이 생기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매끄러운 도시인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약간의 어리석음은 언제나 상훈을 편하게 했다.
“우에노 에이지와 가네무라 쥰이찌는 같은 사람입니다.”
“네?”
“우에노 에이지가 바로 쥰이찌라는 뜻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죠?”
“여기를 보십시오”
이마무라는 수첩을 꺼냈다.

우에노 에이지
생년월일 : 1912년 6월 9일
본적 : 북해도 삿뽀르


가네무라 쥰이찌
생년월일 : 1912년 6월 9일
본적 : 시즈오카현

“본적은 다르지만 분명히 생년월일은 같지 않습니까?”
“그렇군요”
“본인이 아닌 남에게 보험금을 전입시킬 리도 없지 않습니까?”
“그렇겠군요.”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떻게요?”
“우에노 에이지는 아사꼬를 수혜자로 하는 생명보험을 들었는데 이름을 가네무라 쥰이찌로 바꾸고 자신이 이제껏 적립했던 보험금을 쥰이찌의 계좌에 옮긴다.”
“그렇군요”
“.........”
여기까지 신나게 얘기한 주임은 상훈이 너무 쉽게 동조하자 김이 빠졌는지 아니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는지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잠시 눈길이 마주친 두 사람은 빙그레 웃고 말았다. 그 다음을 꿰어맞출 추리가 갑자기 동나버린 것이 직전의 거침없던 추리와 너무나 대조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까지만 해도 대단한 것이었다. 오랫동안의 갑갑함을 뚫고 무언가 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다는 유쾌함이 두 사람을 격의 없이 가깝게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자리를 옮겼다. 학교의 정문 아까몽 부근의 한 선술집에 자리를 잡고 맥주를 시켰다. 한국의 술집과 비교하면 좁아터지긴 했지만 마치 주인처럼 정성스럽게 대하는 종업원들의 친절과 작은 공간도 재치있게 이용하는 일본인들의 공간감각이 아늑한 분위기를 주고있었다. 
“이 시점에서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군요.”
“무엇입니까?”
“쥰이찌는, 아니 에이지는 무슨 이유로 이름을 바꾸고 본적을 숨겼을까 하는 것이죠.”
“그가 이름을 바꾸고 본적을 숨겼다면.......”
“이십여년 전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꼈을 수도 있죠.”
이말을 들은 이마무라의 뇌리에 야마모도 서장의 모습이 꿈틀거렸다.
“그렇다면 쥰이찌는 닛꼬에 숨어 살고 있었단 말이 되는 것입니까?”
“아마 그랬을 거라고 생각되긴 하지만 아직은 사정을 확실히 모르니 단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수혜자와의 관계는 어떻게 알아 볼수 있을까요?”
“흔한 성이긴 하지만 성이 같은 것으로 보아서는 누이일 가능성이 있겠지요.”
“저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
“수혜자로 되어있는 아사꼬의 주소를 추적하여 신원을 밝히다 보면 쥰이찌와의 관계가 드러날지 모르겠습니다. 반장님께서 수고를 하셔야 겠습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최대한 빨리 알아내야지요.”
“자 그럼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좋습니다.”
두사람은 잔을 높이 들고 건배를 했다. 늦은 시간에 닛꼬로 돌아가는 주임의 팔에 상훈은 과일 한 바구니를 안겨주었다. 상훈은 남편을 하늘같이 알고 아무리 늦은 시간에 귀가해도 단정한 차림으로 문을 연다는 이마무라의 부인얘기에 무언가 선물을 하고 싶었다. 바구니를 든 두손을 앞에 모으고 수도 없이 고개를 숙이고 돌아가는 이마무라 주임의 발걸음이 무척이나 가벼워 보였다.


7. 미국의 음모


집에 돌아온 상훈은 전화기에 메시지가 남겨져 있는 것을 보고 스위치를 켰다. 외무부에 근무하는 친구 대식이었다.
“공부 안하고 어딜 그렇게 쏘다녀, 지금 심바시 다이이찌호텔 808호에 있어, 이틀전에 왔다가 내일 돌아가는데 연락해줘. 동경까지 와서 널 못보고 간대서야 말이 되나.”
반가운 전화였다. 이 년 전 서울을 떠난 이래 한번도 들어간 적이 없었으니 친구를 만날 기회가 있을리 없었다. 상훈은 전화를 하고 한달음에 달려갔다.
“이 친구 변한게 없구만”
“그럼 삼년 사이에 사람이 어떻게 되는 줄 알았어?”
인사를 나눌 사이도 없이 바로 근처의 주점으로 들어간 두사람은 술잔을 나누면서 서울의 친구들 이야기로 시작해서 정치 사회 문제까지 섭렵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역시 북한과 일본의 수교 문제로 화제가 종착됬다. 이제 조인만 남겨두고 있는 북일 수교는 일본에 살고있는 상훈과 외무부에 있는 대식에게는 당연한 화제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가네마루의 스캔들이 수교를 몇 년이나 미룬 꼴이 되었군."
"그런 셈인가. 미국의 압력을 극복하기에 시간이 걸렸다고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
"그럴 수도 있지. 어쨌거나 일본은 대단한 나라라는 것이 또한번 증명되는 셈이군."
"무슨 말이야?"
"한 번도 전쟁배상을 않으니 말이야,"
"교활한 자들이지. 우리와 수교할 때는 배상은커녕 오히려 한국에 남기고 간 일본인들의 재산을 내놓으라 하지 않았나."
"그뿐인가, 식민지 지배가 가져온 이익에 대한 보상을 청구하겠다고도 했으니 도대체 말이나 되는 얘긴가?"
"결국은 돈이 없다는 우리의 약점을 이용하여 청구권을 포기하도록 하고 수교를 하지 않았나. 그 막대한 침략 피해를 그래 겨우 오억 달러, 그것도 이억 달러는 빌려주는 걸로 마감할 수 있는 일이야."
외교관계를 잘 아는 대식은 분이 치미는지 술잔을 거푸 들이켰다. 그리고는 자조 섞인 목소리로 내뱉었다.
"결국은 북한도 약점을 잡히고 수교를 하게 되는군."
"약점니라니?"
"독재가 코너에 몰리니 서둘러 수교를 하는 것이 아닌가. 돈이 있어야 막을 지경이니 말이야."
"주석이 그렇게나 위태하나?"
"견디지 못할 것 같아. 군부의 동향도 심상치 않고 말이야."

술에 취한 두 사람이 이런 얘기를 나누고 있는 바로 그 시간 북경에서는 미군 공군의 특별군용기 한 대가 이륙하여 기수를 평양으로 잡고 있었다. 비행기 안에는 평양에 주재하는 미국의 정보 책임자 클라크와 군복을 입고 있는 한 사람의 장군과 또 한 사람의 대령이 긴장된 표정으로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논의하고 있었다. 그들과 좀 떨어진 자리에는 공화당의 중진이자 의회의 아시아 태평양 위원장을 맡은 바 있는 매콤스키 의원이 미동도 하지 않고 정면을 응시하며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어둠 속을 비행하는 군용기는 붉은 신호등을 점멸하며 가끔 난기류에 휩쓸려 흔들렸지만 정확하게 방향을 잡고 정동의 평양을 향해 조금 씩 다가서고 있었다. 
"이제 막 산동반도를 지나 황해로 접어들었습니다. 이십 분 후 면 순안비행장에 착륙합니다."
보좌관이 이 비행의 의미를 의식하고 있는 듯 약간 들뜬 목소리로 매콤스키 의원에게 말을 건넸다. 의원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눈을 감고 깍지를 낀 손에 머리를 대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자신의 상사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에 나타내는 특유의 동작인 것을 아는 보좌관은 얼른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매콤스키는 다시 어깨를 비스듬히 눕혀 창가에 머리를 기댔다. 그의 뇌리에 미국을 떠나오기 전 참석했던 회의의 광경이 떠올랐다. 그 자리에서 대통령안보담당 특별보좌관과 중앙정보국장은 자신에게 중요한 주문을 해왔던 것이다. 국가안전보장회의 멤버 외에 참석한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닷새 전의 폭동에 대한 CIA의 분석은 어떻습니까?"
"이제까지의 소규모 항의나 전단살포와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은 규모가 크다는 말입니까?"
"물론 규모 면에서도 차이가 납니다만 비록 소수지만 군인들이 가세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군인들이 가세했습니까?"
"국경수비대의 일부입니다."
"폭동은 국경도시에서 일어났습니까?"
"네, 신의주라는 압록강변의 국경도시입니다."
"진압은 당일로 완료되었습니까?"
"밤늦게 완료되었습니다."
"주동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노동자들과 학생입니다. 그리고 아까 말씀드렸듯이 약간의 군인과 일반인들이 가세했습니다."
"그들의 요구조건은 무엇이었습니까?"
"처음에는 배급을 요구하다 나중에는 지도자 숙청으로 이어졌다고 합니다."
"사태는 완전히 평정되었습니까?"
"네. 하지만 진압을 두고 평양에서는 묘한 기류가 형성되었습니다."
"묘한 기류라면?"
"주석이 즉각 진압을 지시했음에도 군부의 장성들이 시간을 끌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안보담당 보좌관이 중앙정보국장에게 묻는 것을 듣고만 있던 대통령이 끼어들었다.
"군부가 지도자 동지로부터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는 얘긴가?"
"사태는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폭동을 군부에서 사주했다고 합니다.
"지도력에 손상을 입은 주석이 그냥 있으려 하지 않겠지."
"숙군을 시도하다가 그만둔 흔적이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
"이미 역부족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사태는?"
"주석이 숙청될 공산이 큽니다."
"반세기가 넘게 지속되어온 정권이 무너진다면 엄청난 사태가 벌어지겠군.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오?"
"주석은 그대로 무너지지 않습니다. 중국의 도움을 요청할 것입니다."
"중국이라......."
"중국은 북한의 변화를 매우 싫어합니다. 북한의 변화가 도미노 현상을 일으켜 중국에 그대로 전파될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중국이 주석을 도울까?"
"틀림없이 돕습니다."
"어떻게?"
"최악의 경우 군대를 파견할 것입니다."
"그럴 수 있겠군. 중국으로서야 반갑기 짝이 없는 일일 테지. 우리가 철병을 요구하면?"
"중국은 듣지 않습니다. 그들이 이제껏 보여온 외교노선은 지극히 독립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강력히 경고하면?"
"남한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은 우리에게도 명분이 없습니다. 중국이 거절하면 심각한 대치상황이 초래됩니다."
"중국군의 북한주둔은 동북아 정세에 큰 변화를 일으키게 될 것이 아니오?"
"물론입니다. 남한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을 크게 자극하게 됩니다. 러시아 역시 어떤 구실이라도 붙여올 것입니다."
"문제로군."
"그렇습니다."
"우리로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이지?"
CIA국장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 단호한 어조로 내뱉었다.
"주석은 한반도와 중국을 잇는 사슬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그 사슬을 끊어야 합니다."
"사슬을 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거지?"
"중국의 도움을 요청하기 전에 주석을 제거해버리는 것이 최선책입니다."
"안돼, 그것은."
대통령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맙소사, 온 세계의 비난이 내게 쏟아질 텐데 어떻게 감당하란 말이야."
"각하, 왜 극단적으로 생각하십니까?"
"극단적이라니, 그를 제거하는 것 자체가 이미 극단적이지 않은가?"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무슨 방법?"
"망명을 시키면 됩니다."
"망명이라고?"
"그렇습니다.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망명이라......."
"주석이 없어지면 중국은 보호할 상대가 없어지게 됩니다. 출병할 명분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새로이 집권하는 세력은 누구의 견제나 간섭을 받기 좋아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중국을 부를 이유가 없습니다."
"그럴 듯해. 그런 좋은 방법이 있었군. 그런데 어디로 망명을 시키지?"
"합중국입니다."
"주성을 합중국으로 망명을 시킨다? 그 다음은?"
"군부에서 집권을 하겠지만 우리가 조종할 수 있습니다."
"주석을 추종하는 자들의 저항은?"
"저항은 미미합니다. 주석이 죽는 경우와는 다릅니다. 주석이 망명하면 그들도 모두 몰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겠군. 그런데 주석을 망명시키는 것이 가능할까?"
"물론 가능합니다. 이미 평양의 우리 요원들이 그의 최측근과 깊이 선을 대두고 있습니다. 주석은 날이 갈수록 군부로부터 불시에 거세당할까 봐 불안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좋소, 차질없이 하시오."
회의가 끝나자 정보국장은 자신을 따로 은밀히 불렀다. 이미 예정된 수순이었다.
"의원님을 믿고 다 말씀드렸습니다. 보셨다시피 대통령께서도 인가하셨습니다."
"어쨌거나 불러주어서 고맙소."
"유의하실 일이 있습니다."
"들어봅시다."
"이번에 가시면 주석은 될 수록 많은 것을 의원님께 보장받고 싶어할 것입니다. 모두 오케이 하십시오. 그는 심리적으로 매우 흔들리고 있기 때문에 초조할 것입니다. 숙군에 실패했다는 것이 자신의 몰락을 의미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선은 안심을 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뿐이오?"
"가급적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은연중에 유사시 미국이 뒤를 봐주겠다는 뉘앙스를 전해주었으면 합니다."
"그건 그렇게 하지. 그런데 혹시라도 내가 정치공작에 연루되는 것이 아니오?"
"결코 아닙니다. 의원님은 의당 하실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확신시켜 드리기 위하여 안전보장회의에 초청한 것입니다."
"알았소."
"참, 그리고 오실 때는 서울 청와대를 들르셔야 됩니다."
"무슨 얘기를 해야지?"
"적당히 둘러대십시오. 그 친구들 평양 가서 겁주고 왔다면 술대접하느라 정신 없을 겁니다."
국장은 주석에게 미국정부의 의지를 확인시켜주고 안심시키는 역할을 의회의 중진인 자신에게 맡긴 셈이었다.
비행기는 어둠 속에 순안비행장에 착륙했다.



8. 동토의 잠행


그로부터 열흘쯤 후.
프랑크푸르트를 출발하여 모스크바를 경유한 보잉 747기가 굉음도 요란하게 김포의 활주로에 내려앉자 트랩을 실은 리프트카 뒤를 검은 승용차 한 대가 천천히 뒤따르고 있었다. 비행기의 문이 열리자 맨 먼저 내려온 검은 싱글의 사나이는 자신을 마중나온 사람을 보자 놀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환영나온 사람이 자신보다 훨씬 키가 큰 검은 싱글을 잠시 포옹한 후 어깨를 끌어안고 뒷좌석에 같이 자리를 잡자 승용차는 일 초도 아까운 듯이 바로 미끄러져 갔다.
"몸은 괜찮아?"
"덕분에 무사히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국장님께서 여기까지 저를 마중나오시다니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시간이 없어, 자네의 보고가 분초를 다툴 정도로 급해. 기대했던 만큼의 성과가 있었나?"
"네, 마침 주재원이 그 방면의 증언들을 많이 모아둔 게 있었습니다. 운이 좋았던 것은 특별히 그들을 기억하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사나이로부터 누런 봉투를 건네받은 국장이라 불리운 사람의 눈초리가 봉투에서 꺼낸 몇 장의 서류를 훑었다. 사나이의 곁눈질이 국장의 표정을 좇다가 서류에 집중하는 눈길을 확인하고는 이내 원점으로 되돌아왔다. 눈을 감으면 더듬는 기억에 하마로프스크에서 만났던 공작원의 깊숙한 눈매가 떠올랐다.
"김정애, 여기에서는 알렉세예브나 김이라고 불리죠."
"한국에 돌아가고 싶지 않으세요?"
"고국에 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겠어요? 하지만 어쩐지 여기 시베리아가 좋아요."
"이 매서운 추위가 좋다는 말입니까?"
"깨끗하잖아요."
국장은 계속 넘겨지는 서류에서 눈은 떼지도 않은 채 전화기를 들었다.
"부장님 시간을 좀 잡아줘."

자동차가 남산의 안기부로 들어간 후 곧 국장은 안기부장과 마주앉았다.
"부장님, 여기 서류가 있습니다."
굵은 안경테 속에서 부장의 눈길이 서류를 꼼꼼히 살피는 것이 예사롭지 않은 서류인 것 같았다.
"음, 철저히도 확인했군."
"상주하던 요원이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잘되었군, 그런데 본인의 의지는 어때요?"
"마지막 인생을 바치겠다는 의지가 확고합니다. 부인과도 사별하고 외동딸마저 미국에서 결혼해 정착했으니, 이제 하나 남은 혈육을 만나게 되고 자신의 여생을 조국에 바칠 수 있게 됐다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만약의 사태에 대해서 충분히 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러면 언제 출발시킬 겁니까?"
"바로 출발할 예정입니다."
"수고하시오."
부장실을 나와 자신의 책상 앞에 앉은 국장은 다시 한번 전체의 계획을 머리 속으로 검토했다. 성공 여부는 오로지 두 장의 그림에 달려 있었다.

이날 밤 서울발 동경행 마지막 비행기의 일등석에는 오십대 중반 혹은 후반으로 보이는 한 신사가 앉아 있었다. 주변의 혈색 좋은 승객들과는 쉽게 대비되는 다소 마르고 주름이 잡힌 얼굴이었지만 어딘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강인한 기색이 배어 있었다. 다음날 아침 일본의 나리따 공항에서 이륙하는 북경행 비행기에 역시 모습을 드러낸 이 신사는 북경에 도착해서는 공항의 대기실에서 한 시간 정도 기다리다가 심양으로 떠나는 국내선을 옮겨탔다. 신사는 심양의 봉황호텔에서 하루를 묵고 역에서 세 시간을 기다려서는 단동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기차를 타는 사나이의 복장은 어느새 평범한 중국인민의 것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단동에서 내려 역부근의 인삼가게들을 얼쩡거리던 이 초로의 사나이는 다음날 아침 몇 사람의 중국인들과 압록강 부근의 사람이 다니지 않은 산으로 산삼을 캐러 출발했다.
<소년은 집으로 무사히 들어갔음.>
며칠 후 북경에서 서울로 들어온 전통문을 받아보는 국장의 얼굴에 만족스런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러나 이내 미소는 사라지고 무거운 한숨이 꽉다문 입술 사이로 새어나왔다. 산전수전을 겪은 국장에게도 이 일만은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어깨를 내리눌러 왔다. 착잡한 눈길로 훑는 책상 위의 신원서류에서는 최독보라는 이름 석 자가 선명하게 묻어나왔다. 국장은 입속으로 나직이 그 이름 석자를 되뇌었다.
"동무, 여권 좀 보여주갔시오."
"여기 있시다."
"목단강시에 살고 있음메?"
"그렇시다."
"평양으로 갑네까?"
"그렇시다."
"무스기 일로 가오?"
"산삼."
"산삼이라면 내가 어떻게 알아듣소. 산삼을 어떻게 한단 말이오?"
사나이의 설명 없는 대답이 묘하게도 초병장교의 기를 눌러놓고 있었다. 훈련받은 솜씨였다. 
"산삼을 팔러 가오."
"산삼을 팔러 간다? 누군지 팔자 좋은 동무레 피양에 있구만. 우리는 여기서 세 끼 밥도 먹기 어려운데."
"......."
초병장교의 의도 있는 불평이 혹시 평양 권력자의 귀에 들어갈까 움찔대며 한바퀴 돌아 사나이의 귓전에 불안하게 내려앉았다. 사나이는 이해가 간다는 듯이 약간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자신감을 가진 초병장교의 목소리에 본론이 실려왔다.
"동무, 뭐 좀 주고 갈 것 없습네까?"
"육포가 좀 있시다."
"육포라구요?"
초병장교뿐만 아니라 서너 걸음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몇 사람의 검문병들의 시선이 번개처럼 사나이의 보따리를 꿰뚫었다.
"충분히 집어놓으시오."
"고맙수다레."
초병장교의 손이 부지런히 육포를 옮기는 동안 사나이는 고개를 들어 멀리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잠시 공허한 듯 보이던 눈길이 이내 현실로 돌아와 장교의 얼굴에 머물렀다.
"너무 많이 가지지 않았는지 모르겠수다레."
겸연쩍어하며 꼬리를 감추는 장교의 목소리를 사나이의 굵직한 목소리가 덮었다.
"앞으로 산삼이 잘되면 내 왔다갔다 하면서 실한 먹거리 낙낙하게 조달하갔시다."
"말만으로도 고맙수다레. 안녕히 가시라요."
검문소를 뒤로 하고 평양을 향하는 사나이의 걸음이 나직하면서도 힘이 실려 있었다. 사나이는 비슷한 과정을 두세 번 더 거친 후에 평양행 버스에 몸을 싣고 눈을 감았다. 떠나기 전 수없이 반복했던 과정이었지만 실전은 역시 연습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긴장감을 불러 일으켰다. 사나이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창에 기대고는 창밖으로 지나치는 풍경을 몽롱한 채 바라보았다. 사십여 년 만에 혈육을 만나러 가는 것이 전혀 실감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존재의 무기력함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이제까지 흘러온 자신의 인생이 그러했듯이 산다는 일은 언제나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그저 주변의 상황이 명하는 대로 따라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시대의 요구였고 역사였다. 사나이의 기억에 이제는 반 세기가 다 되어가는 먼 옛날의 기억이 아물거리며 피어올랐다.

"형, 이제 다 왔어?"
"응,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돼."
"너무 추워서 쓰러질 것 같아."
"조금만 참아."
"속이 너무 쓰려. 배가 고파 한 걸음도 못 옮길 것 같아."
"참으라니까, 이 바보야."
"씨, 욕은 왜 해."
"미안해, 조금만 더 가면 되니까 참고 가자."
며칠 굶은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갓난 아이 시절부터 제대로 먹지 못한데다 매만 맞고 자란 자신과 동생의 체력으로 벌써 사흘 째 굶으면서 눈보라를 헤치고 시베리아의 혹한을 걷는다는 것은 무모함을 넘어 죽음을 맞아들이는 행위였다. 그러나 어린 두 형제는 이를 악물고 필사적으로 걸었다.
"형, 아버지가 쫓아오지 않을까?"
"너 또 아버지라 부르갔니?"
"아 참, 내가 또 아버지라 그랬구나. 그런데 습관이 돼서 다른 이름으로 안 불러진다."
"우리 오마니를 쥑인 그 간나가 어째 아바이가 될 수 있니."
그랬다.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인간이었다. 그 인간은 오직 자신과 동생을 먹여 살리기 위해 첩살이 들어간 어머니를 짐승처럼 부렸다.
"이년아, 보릿고개에 일도 못하는 애새끼들은 왜 처먹여!"
자식들을 버려둔 채 바깥일, 집안일을 혼자 도맡아하면서도 온갖 고통을 참아내던 어머니는 결국 중풍에 걸린 본부인의 학대과 인색하고 잔인한 그 인간의 매질을 못 견뎌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발길질에 가슴을 맞은 어머니는 갓 열 살이 되었던 자신과 동생의 손을 잡고 디 세상에서의 마지막 음성을 숨가쁘게 토해내었다.
"독..독보야..독준아..형을 찾아라거라... 우수라이스끄로 가라. 형..독립이...독립이를 찾아라."

그의 눈앞에 길을 물으려다가 거지로 오인받고 물벼락을 맞으며 쫓겨나던 일, 엄동설한의 눈보라 속에서 쓰러져 뻣뻣해져 가는 동생의 몸을 붙들어 안고 미친 듯이 비비고 주무르던 일, 차라리 이대로 죽어버리자고 울부짖던 일 등등이 스쳐갔다. 천신만고 끝에 찾아간 형 독립은 자신들의 몰골을 보고 말문을 열지 못한 채 주루룩 눈물을 흘렸다. 형의 눈물은 너무도 따뜻하게 자신의 손등에 떨어졌었다. 그 눈물의 온기에 비로소 마음을 놓고 스르르 잠이 들던 것이 바로 엊그제 같은 생각이 들어 사나이는 손등에 시선을 내리 깔았다. 어쩌면 눈물이 떨어진 자국이 보이는 듯도 하여 사나이의 눈길은 이제는 검은 색으로 변해가는 핏줄 사이사이를 샅샅이 살폈다. 사나이의 기억과 상념이 낙수처럼 뿌려지는 한적한 시외도로를 버스는 검은 매연을 내뿜으며 달려 석양 무렵 한 검문소에 멎었다.
평양이었다.

평양.
해방 이후 오십 년 간 북반부의 수도로서 숱한 격변을 겪어온 파란의 도시. 이제는 동북아시아 정세의 핵으로 등장하며 생존을 위한 비장한 변신을 시도하는 도시 평양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모순과 혼돈에 심하게 앓고 있는 중이었다. 사나이는 자신의 평양잠입이 가지는 중차대한 의미를 다시 한 번 상기하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검문을 마친 버스는 한동안 시내를 달려 이윽고 평양시내의 종점에서 멈추었다. 사나이는 선반에 올려둔 산삼보따리를 들고는 버스를 내려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9. 반 세기 만의 해후


그날 저녁 요란한 호위를 받으며 인민무력부 청사를 떠나 집으로 돌아온 인민군 총정치국장 최독준은 대문의 안쪽 바닥에 하얀 종이가 한 장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편지함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누군가 대문의 밑으로 밀어넣은 것 같은 종이를 무심코 집어든 대장은 반으로 접힌 종이를 펴보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림이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마치 만화와도 같이 간단하게 그려져 있는 그림을 본 대장은 아이들이 장난으로 그린 것으로 여겨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휴지통에 버렸지만 식탁에 앉아 인삼주를 한 잔 기울이면서부터는 이상하게도 이 그림에 신경이 쓰이고 있었다.
"무얼 그리 골똘히 생각하세요?"
옆에서 시중을 들던 부인이 물어왔을 때만 해도 대장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대답을 했으나 책상 앞에서 서류를 훑을 때 그림은 다시 대장의 신경을 건드려 왔다.
대장은 생각을 떨치고 자리에 누워 불을 껐지만 이상하게도 그 장난과 같은 한 장의 그림이 마치 아득한 전설인양 살아나 대장의 뇌리에서 꿈틀대왔다. 단순한 그림이었지만 어쩐지 그 그림을 보는 순간부터 대장은 마치 뒤숭숭한 꿈을 꾼 사람처럼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자신을 느끼고 있었다. 가슴 한 구석에 깊숙이 묻어 두었던 그 옛날의 기억이 이 한 장의 그림으로 살아나고 있는 것이었다. 자리에 누워 눈을 감은 채 대장은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 없어.'
마치 유령의 그림자처럼 그림이 뇌리에서 꿈틀거릴 때마다 대장은 더욱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리는 없는 것이었다. 도저히 그런 일이 일어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장의 의식한 구석에서는 고갯짓의 세기에 비례하여 더욱 강한 의심이 솟아나는 것이었다. 대장은 고갯짓을 멈추었다. 견딜 수 없는 뜨거운 기류가 가슴에서 밀려왔다. 대장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가 현관 옆의 휴지통을 살폈다. 예의 그 그림이 구겨진 채 천장을 보고 누워 있었다. 대장은 종이를 집어들고 서재로 들어가 불을 켰다. 책상 위에 펼쳐진 그림은 두 사람의 소년이 큰 돌을 들어 땅바닥에 누워 있는 한 소년의 얼굴에 떨어뜨리고 있는 그림이었다. 
오랫동안 이 그림을 들여다보던 대장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격렬한 감정의 흔들림이 있는 것이 분명한 표정이었다. 새벽이 되도록 서재에서 불을 밝히고 있던 대장은 아침이 되자 뜰에 나가 서성거렸다. 체조를 하는 듯하면서도 신경은 대문에 쏠려 있었다. 그날 저녁 장군들의 모임을 취소하고 퇴근한 대장은 집에 들어서면서 바로 대문을 살폈다. 대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무엇인가 기대하는 듯한 대장의 대문살피기가 일 주일째 계속 되었으나 역시 대문 밑에는 아무것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여드레째 되는 날 노동당 정치국원들과 밤늦게 술을 마시고 어느 정도 취하여 귀가하던 대장은 습관적으로 고개를 대문 밑으로 돌렸다.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이제 집에 들어오면서 대문 밑바닥을 살피는 것은 대자의 습관이 되어 있었다. 어슴푸레한 불빛에 무언가 하얀 것이 흘낏 보이는 순간 대장은 술이 확 깨는 것을 느꼈다. 그토록 기다려왔던 하얀 종이였다. 대장은 종이를 집어서는 펴보지도 않은 채 바로 서재로 올라갔다. 문을 걸어 잠그고 책상 앞에 앉아 반으로 접힌 종이를 펴는 대장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종이를 펼쳐 그림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대장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있는 것인가."
대장은 황급히 창가로 달려가 대문이 있는 쪽을 살폈다. 골목 어귀에 있는 초소의 경비병만이 보안등에 노출되어 있을 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장은 한 시간 가까이나 창가에 서서 바깥의 동정을 살피고 나서 비로소 책상 앞에 앉았다. 대장은 크게 요동질치는 가슴을 부여잡고 다시 한 번 그림을 살폈다. 이것 역시 간단한 한 장의 그림이었지만 먼저의 그림과 연결지어 생각하면 틀림없는 확신을 주고 있었다. 석가여래상 뒤에 숨어 있는 두 소년을 그린 그림은 대장에게 너무도 절실한 기억으로 다가왔다.
대장의 얼굴은 반가움과 당혹스러움, 그리고 불안으로 뒤범벅이 되어 동요되고 있었으나 한참의 시간의 지나자 본래의 냉정한 모습을 되찾았다. 대장은 바깥의 초소를 한 번 살피고는 불을 껐다. 이틀이나 밤을 새는 모습을 남에게 보이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라 생각되었다. 어둠 속에서 대장의 두 눈이 나이답지 않게 파랗게 살아 움직였다. 틀림 없이 내용이 연결되어 있는 두 그림 속에서 메시지를 찾아내려는 절실한 노력의 표시였다.
'그렇구나.'
대장은 나지막이 내뱉었다. 또다시 대장의 고뇌가 시작되었다.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는 현상은 일 주일 전과 같았으나 그 내용은 달랐다. 만날 것인가 말 것인가. 위험은 너무나 많았다. 한반도의 북반부에서는 살인, 혹은 그보다 더한 것도 자신의 능력으로 덮어버릴 수가 있었지만 이 일만은 유일한 예외였다. 자신뿐만 아니라 아내와 아이들의 운명에까지 깊은 상처를 주게 될 일이었다. 밤을 하얗게 새며 고뇌한 대장의 얼굴은 아침이 되자 하룻밤 새에 일 년은 늙어버린 것으로 보였다.
점심 무렵 대장의 승용차는 평양에서 남쪽으로 뻗어 있는 도로를 급히 달리고 있었다. 평상시와는 달리 운전병 없이 대장이 직접 운전하는 자동차는 한 시간여를 달려 황주시로 들어갔고 얼마 후 자동차는 황주시내를 벗어나 정방산 기슭의 어는 농가에 멈추었다. 자동차에서 내린 대장은 등산복 차림이었다. 대장의 고급 승용차는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았지만 대장은 개의치 않고 산의 등산로를 살폈다.
"실례하겠습네다. 평양에서 내려오셨습네까?"
황주시에 들어올 때부터 보고를 받았는지 시내를 벗어날 무렵에 뒤를 따르던 내무서의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의 정복이 대장의 옆에 와 섰다. 대장은 이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표정이 굳어졌으나 이내 냉정을 회복했다. 대장의 두뇌가 번개처럼 돌고 있었다. 자신을 체포하려면 지금은 결정적 순간이 아니었다. 평양이 아닌 황주라는 지방임을 감안할 때 이들이 따라붙은 것은 단순한 통상의 순찰활동일 것이다. 설혹 모든 것이 발각되었다 해도 감히 내무서원 정도가 자신을 연행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대장의 날카로운 두뇌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서열을 생각했다. 아니 서열보다도 자신의 실질적인 힘을 생각했다. 정변이 아니라면 누구라도 자신을 연행은커녕 소환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장은 단호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나 인민무력부 최독준 대장이야."
정복들은 아연 긴장했다. 평양의 대장이라면 그들이 최고로 하는 황주의 내무서장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거물이 아닌가. 내무서장이 아니라 노동당 위원장보다도 무게 있는 사람이었다. 정복들은 평생 처음 대해보는 거물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자칫 말이라도 한 마디 잘못했다가는 즉각 모가지였다. 비단 목이 위험할 뿐만 아니라 십중 팔구는 수용소행이었다. 평소에 못보던 고급승용차라 무조건 따라온 것이었는데, 이렇게 되자 후회막급이었다.
"죄송합네다. 몰라뵈었습네다."
그러나 대장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고 있는 두 정복의 어깨를 정감 있는 동작으로 툭 쳐주었다.
"그럴 테지. 나 성불사에 치성드리러 왔는데 어떤 길로 올라가면 되나?"
"저희가 법당까지 모시겠습니다. 대장님."
정복들은 살 길을 찾은 양 다급한 기쁨을 토해내며 충성을 보이려 들었다.
"괜찮아, 번거로운 것이 싫어 호위병을 두고 혼자 내려왔어. 어릴 적엔 가끔 치성을 드리러 올라가곤 했었는데 오랜만에 내려왔더니 입구를 잘 모르겠구만."
정복들은 그들이 표현할 수 있는 온갖 방법으로 친절을 보였다. 그들의 감동 어린 경례를 뒤로 하고 등산길을 오르며, 대장은 정방산의 성불사를 핑계삼는 방법이 아니라면 이렇듯 자연스럽게 이곳에 올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삼십 분이 채 안 걸려 천왕문을 통과한 대장은 법당이 눈에 들어오자 남다른 감회를 느끼는 듯 고개를 가로 저었다. 파란만장하게 살아온 삶의 일단이 짙게 배어 있는 불당을 대하는 심사가 예사로울 수는 없는 것이었지만 오늘 여기에 온 것은 단순히 과거의 한 기억을 되살리려는 사치스런 이유가 아니었다. 대장은 긴장된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평일 한 낮의 절은 그림처럼 조용할 뿐이었다. 대장은 법당의 여래상 앞에 서서 마음을 가라앉혔다. 소년시절의 그 어느날처럼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여 여러 번 염불을 외었다. 대장은 잠시 눈을 감고 그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눈을 감고 절을 하노라면 어디 숨어 있었는지 형이 나타나 부처님 대신 자신의 앞에 서서 절을 받아먹다가 도망치곤 하던 것이 바로 엊그제 일처럼 생각되었다. 남의 집 닭 서리를 하고서는 그림에서처럼 석가여래상 뒤에 숨어 눈치를 살피던 기억이 한 줄기 미소와 함께 아련히 떠올랐다. 기억이 잦아들자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힌 대장은 눈을 뜨면서 무거운 신음을 토해냈다. 다음 순간 신음은 이제 육십을 바라보는 대장의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소년의 높은 목소리가 되어 법당을 울렸다. 
"형!"
"독준아!"
끝이 갈라지는 새된 목소리는 공허한 법당 안에서 앉을 자리를 찾지 못하고 이내 정적 속으로 묻혀버렸지만 사십여 년 만에 만나는 형제의 감회가 법당이라 해서 다를 것은 없었다. 두 사람은 그대로 끌어안은 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닥에 쓰러져 붙들고 뒹굴었다. 오랫동안 출입하는 사람이 없어 법당 바닥에 깔렸던 먼지가 풀풀 일어났다. 오로지 이 먼지만이 잃어버린 사십여년 세월을 증언해주고 있었다.



10. 교수의 죽음


아침 여덟시를 넘기는 경찰서 형사계의 분위기는 왁자지껄했다. 몇 안되는 당직형사들이 밤새 관할구역 곳곳에서 연행되어온 각종 사범의 피의자들을 분류해 처리하는 외에도 사안에 따라 따로이 보고서를 작성하는 등 경찰서 내부는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제 곧 교대가 이루어질 시간이라 보고서에 매달린 형사들의 두 손은 타자기 위에서 정신없이 춤추고 있었다.
"때르릉, 때르릉"
벌써 몇 번째 울리는 전화벨이지만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일의 맥이 끊기는 것도 그렇지만 대개 이 시간에 울리는 벨은 밤새 돌아오지 않는 가족을 이리저리 찾다가 마지막으로 경찰서로 걸어보는 전화이기 일쑤인 때문이다. 아침부터 이런 전화를 받으면 걱정하는 가족의 목소리에 용건만 확인해주고 매정하게 끊어버릴 수 없다. 시간도 지체되지만 그대로 옮겨져 오는 가족의 걱정이 한동안 마음에 남아 형사들은 기분이 무거워진다. 이런저런 이유로 아침에 울리는 전화는 한동안 형사계 사무실에서 주인없는 호출음을 토해내는 것이다.
'자식들, 전화가 오면 빨리 빨리 받아야지.'
연행자들의 사연을 살피던 영북신문사의 이 기자는 아직 형사계의 이런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은 듯 목소리를 돋우고 형사들에게 소리쳤다.
"사람 없어요, 전화받아 드릴까?"
오십이 넘어보이는 형사가 그제서야 팔을 뻗쳐 수화기를 집으며 이 기자에게 눈길을 던졌다. 밤사이 별다른 일이 없는 것을 확인한 기자가 걸어나가는 등 뒤로 나이 많은 형사의 밤샘에 절어 피곤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요, 국립정신병원이라구?"

오후에 다시 경찰서에 들른 이 기자는 마침 마주친 신임 형사과장에게 팔을 붙들여 과장실로 올라갔다. 차를 한 잔 하며 인사를 나누다가 아침에 들었던 정신병원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참, 과장님. 정신병원에서 꼭두새벽에 전화가 오던데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정신병원? 아니 별 사건 없는데."
"전화가 오던데."
"그래요? 어디 보자."
과장은 보고철을 이리저리 뒤지더니 서류 한 장을 뽑아서는 살폈다.
"응, 여기 있네. 별것 아니구먼."
"뭔데요?"
"사람 하나 죽었구먼. 쇼크사야."
"무슨 쇼크에요?"
"어디 보자, 장기투약에 따른 심근경색, 응, 심장마비라는 얘기구먼."
"환자예요?"
"그래요, 장기 입원 환자구먼."
"이런 건 병원측 과실이 없어요?"
"장기 환자면 별일 있겠어요? 갓 들어온 환자한테 단기간에 쏟아부었다면 문제가 될 수도 있겠지만."
"사망진단은 어디서 한 거예요?"
"자체에서 했겠지. 자기들도 의사니까."
"그냥 둬도 문제없어요?"
과장은 이 기자의 의외로 깐깐하게 물어오자 전화기를 들었다. 오랜 경험으로 별일이 아닌 것은 분명하였지만 처음 인사를 나누는 유력지의 기자에게 굳어 있는 사람이란 인상을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과장이 보는 바로는 기자들이란 마치 잘 삐치는 여자와 같은 존재들이라 겉으로는 오냐오냐 해주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했다.
"아, 나 과장인데 정신병원 쇼크사 말이지, 가서 검안 한 번 해봐. 결재서류에 지정의 사체검안서 첨부해서 올려."
나이든 과장이 이렇게까지 하자 이 기자는 그냥 있기가 미안해 한 마디 보탰다.
"정신병 환자들은 지나치게 복잡하거나 지나치게 단순해서 말을 잘못 알아 들어요. 다루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답답하기 짝이 없죠, 그래서 때때로 폭행이 있어요."
"경찰 지정의가 검안할 테니까 별일 없을 거요. 하여튼 앞으로 잘해 봅시다."
다음날 형사에게 들른 이 기자는 과장이 찾는다는 말을 듣고 과장실로 올라갔다.
"어서 오시오. 이 기자."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그 정신병원 일 말이요, 심장마비가 맞아요, 검안을 했어요."
"원, 과장님도 그 말 하려고 부르셨어요?"
이 기자는 과장이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타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지나가는 말로 한 마디 한 것을 확인이 끝났으면 그만일 텐데 일부러 불러 결과 설명까지 하니 말이다.
"신체의 수용성 여부도 검사하고 투약을 해왔으니 형사적으로 문제될 것은 전혀 없어요."
과장은 이 기자에게 자신의 일처리에 대한 완벽성을 인상지우려 했다.
"그런데 사망자가 보통 사람이 아니더군,"
"어떤 사람인데요?"
"교수야."
"교수?"
"그래요."
과장은 나이 차이가 많은 이 기자에게 말을 놓았다가는 이 기자가 따라서 반말투로 나오면 곧 말을 올리곤 하였다. 자칫 아예 이 기자가 말을 놓고 나올까봐 신경을 쓰는 눈치였다. 이 기자는 나름대로 나이대접을 하다가도 한 번씩 반말투로 치고 나가곤 했다. 기자라는 직업의 생리상 해야 하는 일이었다.
"현직 교수라는 말입니까?"
"아니, 물론 전직이지. 역사 교순데, 그것도 서울대 교수였는데."
"어디 서류 한번 줘봐요."
서울대 교수라는 말에 회가 동한 이 가자가 서류를 받아들고는 잠시 살피는 듯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어, 교수님이."
이 기자의 놀라는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는 과장에게 다시 한번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정호 교수님이 맞아요? 사망한 분이?"
"그래, 그분이야."
과장이 은근히 위로하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세상에, 교수님이 정신병원에 계셨다니."
"이 기자 아는 분이오?"
"알다 뿐입니까? 우리 학교 교수님인데요."
"아, 그래요?"
"정신병원이 몇 번입니까?"
"거기 있어요."
이 기자는 전화기를 들고 과장이 짚어주는 번호를 돌렸다. 담당의가 나오자 이 기자는 교수의 병력과 병세에 대해 차근차근히 물어서 노트에 적었다. 전화를 끊는 이 기자에게 과장이 물었다. 
"입원한지 오래 되셨나?"
"네, 병이 깊으셨군요."
고개를 들고 천정을 바라보는 이 기자의 뇌리에 오래 전 교양 국사 시간에 열강을 하던 교수의 모습이 떠올라왔다.
"학생 여러분, 몽고를 봐, 그리고 중국의 여러 나라들, 그 옆의 이민족 국가들을 봐. 한때는 천하를 호령했지만 지금 그들의 모습은 어떤가. 다시 한반도를 봐. 그 큰 중국 옆에 달랑 붙어 있지만 줄기차게 나라를 지켜왔잖아. 못난 놈들은 우리 조상이 당파싸움만 하고 무능했다고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야. 무능한 조상들이 공룡 같은 나라 옆에서 몇천 년이나 나라를 지켜올 수 있어? 나는 여러분들에게서 왜 우리나라의 역사는 그렇게 비참하냐, 왜 우리 역사에는 신나는 일이 하나도 없고 고통스럽고 화나는 일만 있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아. 역사를 배우기 싫다는 거야. 역사를 안 배우면 안되느냐고 물어와.
그러나 여러분, 이런 질문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어. 지금 여러분 앞에 있는 역사를 봐. 멀리 볼 것도 없어. 바로 여러분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버지 어머니가 만든 역사를 봐. 식민지배에 전쟁에 군사독재에 최악의 여건이었지만 결코 좌절하지 않고 결국은 이 풍요로운 사회를 여러분에게 물려주지 않았어. 이게 위대하지 않으면 뭐가 위대하단 말야? 우리말고 세상의 어느 나라가, 어느 민족이 이보다 더 위대한 역사를 만들었단 말이야? 이보다 더한 인간승리가 어디에 있냔 말이야? 그런데도 우리는 걸핏하면 엽전은 안돼. 조선사람은 국민성이 나빠하고 자조한단 말이야. 그게 다 왜 그런 줄 알아. 일본놈들이 우리를 지배하면서 치밀하게 심어놓은 고등술책이야. 우리가 왜 안돼? 이 작은 나라가 오십 배나 큰 중국과 때로는 맞서고 때로는 눈치봐 가면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나라를 지켜온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야.
이제부터 역사는 여러분들 몫이야. 조상이. 여러분들의 부모가 물려준 이 신성한 역사를 이제는 여러분이 계승해야 해, 그래서 남북통일도 하고 환경보호도 해서 여러분의 후대에게 더운 나은 사회를 물려줘야 해."
교수의 힘있는 강의와 마지막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다. 무슨 이유로 교수는 깊은 병이 들어 약이 쌓여 죽을 때까지 병원신세를 져야 했던 것일까. 이 기자에게는 어쩔 수 없는 의문이 떠오르고 있었다. 이 기자는 차를 중곡동의 정신병원으로 몰았다.

"<아까이>라는 말을 습관처럼 하고 있었어요. 이유는 한 번도 얘기하지 않더군요."
담당의사는 여자였다. 자신이 맡고 있던 환자가 병원에서 사망하고 곧이어 기자가 찾아오자 불안해하는 기색이 얼굴에 역력했다.
"아까이라구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일본어예요. 같은 병실의 환자들이 그를 아까이 상이라고 불렀죠."
"처음 입원한 것이 언젭니까?"
"90년 10월이에요."
"여러 번 퇴원했다가 입원하셨군요."
"네, 다섯 번이나 퇴원했다가 다시 들어왔어요."
"병명은 무엇입니까?"
"강박신경증이죠, 강박관념에 짓눌려 불안을 느끼는 거예요."
"어떤 강박관념을 가지셨던가요?"
"말을 안했어요. 그 아까이라는 말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본인은 한번도 말을 하지 않았어요, 많이 배운 사람들일수록 의사에게는 까다롭죠,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하죠, 의사를 믿지 않지 때문에 거짓말을 해요. 묻는 말에 정반대로 대답하기 일쑤구요."
"그럼 치료가 되지 않았습니까?"
"너무 초조해하고 잠을 자지 않았기 때문에 약을 써서 잠을 재우는 것만 해고 큰 치료였다고 생각해야 할 거예요. 이런 유의환자들은 그냥 두면 자살을 하려 하고 못하게 하면 자신의 몸을 파괴하죠. 중증이었어요."
"아까이라는 일본말이 뜻하는 바는 뭘까요?"
"빨갛다는 뜻이예요."
"빨갛다?"
"네."
"왜 그런 말을 했을까요?"
"정신병리학적으로 보면 사람이 빨간 것에 대해 강한 인상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보통 피와 관계가 있어요. 강간 혹은 원치 않는 임신의 충격을 받은 여성환자들이 일반적으로 빨간 것에 대한 공포를 느끼고 있거든요. 남자의 경우는 자신의 배우자나 자식이 희생되었을 때 혹은 지독한 고문이나 폭행을 당했을 때 빨간 것에 대한 공포나 증오를 느껴요. 그래서 이 환자의 주변을 조사했지만 특별히 그런 일은 없었어요."
"설혹 그런 일이 있었다 하더라고 굳이 일본어로 할 이유는 뭐였을까요? 단 한마디도 아까이와 관련하여 설명한 적이 없었습니까?"
"없었어요, 이 환자는 의사를 무슨 학생처럼 취급했어요."
여의사는 은근히 교수에 대해 화가 나있는 듯했다.
"고맙습니다. 일이 있으면 다시 들르죠."
돌아서는 이 기자를 의사가 불렀다.
"아 참, 그 환자는 종종 지도를 거꾸로 보곤 했어요."
"지도를 거꾸로 보다니요?"
"벽에 붙어 있는 지도를 떼어서는 남북을 거꾸로 보고 했어요. 옛날 지도에는 북한이 빨갛게 표시가 되어 있었잖아요. 그걸 거꾸로 돌려서 빨간 것이 밑으로 오게 하곤 했어요."

밤에 장례를 치르는 교수의 집으로 차를 몰면서 이 기자는 생각에 잠겼다. 90년 10월에 입원했다면 그 전에 발병했다는 얘기였다. 그때라면 교수가 아무도 모르게 정보기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할 수 있는 시기였다. 당시 군부독재에 대해 거침없이 비난하던 교수가 참혹한 고문을 당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혹은 교수는 사상적으로 문제가 있을 수도 있었다. 빨간 것이라면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교수가 지도를 돌려 봤다는 것은 남한의 적화를 열망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아닐까?
한때 자신을 가르쳤던 대학의 은사라는 생각이 이 기자로 하여금 교수의 발병동기를 캐고들게 만들었다. 장례식에는 예전의 동료교수들과 후배 제자들이 제법 와 있는 편이었다. 가족으로는 시집도 안 간 외동딸만 있어 장례절차는 몇 안 되는 친척들과 제자들이 치르고 있었다. 
예를 마친 이 기자는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들을 귀에 담았으나 자신의 의문을 해소할 시원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주로 역사학계에 몸을 담고 있는 학자들과 교수들이 와 있었으나 전공이나 직장이 같았음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고인에 대한 얘기가 별로 나오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술도 있고 안주도 있었으나 분위기는 확실히 보통의 장례 밤샘과는 달리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나이든 교수들의 자리 뒤로 눈에 익은 얼굴이 있는 것을 본 이 기자가 그 자리로 다가가자 상대도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일단 악수를 나누고 확인해 본 결과 상대는 이 기자와 같은 시기 국사학과에 다니던 학생이었다. 지금은 박사과정에 있으며 시간강사를 한다고 했다. 주변의 동료들과도 인사를 나눈후 소주잔을 기울이게 되자 기회를 엿보던 이 기자가 슬며시 얘기를 꺼냈다.
"교수님은 왜 학교를 그만두셨어요?"
"......."
얼굴이 익은 동창은 뭔가 말을 할 듯하다가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이 기자의 질문이 무시된 듯한 분위기가 되어버리자 그 옆에 있던 나이가 두세 살쯤은 위로 보이는 안경 낀 사람이 대답했다.
"몸이 별로 안 좋으셨지요."
이 기자는 이때다 싶어 바로 말을 이었다.
"어디가 안 좋으셨나요?"
"아, 뭐 확실히는 모르지만 하여튼 몸이 안 좋으셨어요."
"누군가 중곡동 병원에 계셨다는 얘기를 하던데 그렇습니까?'
"......."
긍정의 표시였다.
"왜 병원에 가시게 됐는지 아십니까?"
"그건 모르겠어요."
"제자들이니 아실 것 같은데......."
안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기자의 눈이 재빨리 나머지 사람들의 얼굴을 훑었으나 역시 모른다는 표정들뿐이었다.      
"혹시 실례했다면 용서하십시오."
이 기자는 일어났다. 아무래도 이 자리에서는 얘기를 할 것 같은 표정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내일 따로이 그 동창을 찾으려는 생각에서였다. 

"이정호 교수님이 학교를 그만두신 것은 90년 2월입니다. 이유는 건강상의 문제로 되어 있군요."
다음날 대학원으로 동창을 찾아가기 전에 교무처에 들러 확인한 교수의 사직시기는 병원에 입원하기 8개월 전이었다. 동창은 이 기자가 일부러 찾아왔다고 하자 놀라는 표정이었다. 이 기자는 먼저 자신이 국립정신병원에서 들었던 것을 얘기했다. 
"아까이라는 말을 하셨다구요? 그것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동창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토록 정열적이던 교수님이 강박신경증이라니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아요. 무슨 이유가  있으셨길래."
"정확한 것은 아무도 몰라요. 다만 어느날 갑자기 우울증에 빠지시더니 연구실을 온통 흐트러뜨려 놓으시더군요. 다음날부터 학교에 나오지 않았어요."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이 없을까요?"
"친했던 교수님들이나 우리 제자들이 댁으로 찾아가도 일절 만나려 들지 않으셨어요."
"그 무렵을 전후해서 교수님 주변에 무슨 급격한 변화 같은 것은 없었나요?"
"별다른 일은 없었어요."
"이상한 일이군요. 어느날 갑자기 그렇게 변하셨다는 것은."
제자에게서는 신통한 대답을 얻을 수 없었다. 기왕 학교에 온 김에 이 기자는 동료교수의 방에 들렀다. 그러나 동료교수 역시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이 기자는 처음의 생각과는 달리 이들이 실제로 교수의 급작스런 질환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교수의 변화는 객관적으로 그 원인을 규명할 이유가 없는 개인적인 것일 수 있었다. 그렇다면 교수의 가족에게서 해답을 얻어야 할지 몰랐다.

다음날 마침 교수의 집 부근을 지나는 길이 있어 벨을 눌렀다. 대학을 갓 졸업한 교수의 외동딸은 아버지의 힘든 뒤치다꺼리에 지쳤을 텐데도 이 기자의 질문에 열심히 대답해 주었다.
"평소에 그런 증세가 있었습니까?"
"아니예요. 아주 쾌활하고 정열적이셨어요. 저밖에 없어 더욱 그러셨어요."
"그런데 어째서 갑자기 그런 질환이 생겼을까요?"
"무엇인가에 충격을 받으셨던 것 같아요."
"그런 걸 느낄 수 있었습니까?"
"네."
"언제 그랬죠?"
"평소와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일본에 갔다 오신 후부터였어요. 말이 없어지시더니 늘 우울한 모습을 하고 계셨어요. 어느날인가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학교에서 돌아오시더니 며칠간을 서재에서 나오시지 않았어요. 그때 이미 학교를 그만두셨더군요. 그후 혼자 중국을 갔다오셨는데 돌아와서는 더욱 우울해졌어요."
"중국에는 무슨 일로 가셨습니까?"
"제게는 아무런 말씀도 없으셨어요."
"그 후에 병원에 가시게 되었습니까?"
"네. 병원에 가시던 날은 문을 안으로 잠가 놓아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어요. 제가 걱정이 되어 밖에서 몇 시간을 애원하니 그 때야 문을 열어주셨는데 이미 눈동자에 초점이 하나도 없어지셨더군요. 서재에 있던 책과 논문들을 갈기갈기 찢어 놓으셨더군요,"
외동딸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고였다.
"그 다음부터는 한 번도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하셨어요."
"어떤 특징 같은 것은 없었어요?"
"역사의 덫이라는 말을 하시던 것이 기억이 나는군요."
"역사의 덫?"
"네, 병원에 가시기 직전에 어디서 구하셨는지. 제게 덫을 보이며 <이게 바로 덫이다. 쥐는 쥐덫에 걸려 죽고 나는 역사의 덫에 걸려 죽는다>라고 하셨어요."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 지는 짐작하지 못했나요?"
"네."
이 기자는 미간을 좁게 찌푸리며 병원에서 들었던 아까이라는 말과 역사의 덫이라는 말 사이의 상관관계를 연상해내려 했지만 전연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아까이라는 말로 미루어 보건대 교수의 변화에는 어떤 형태로든 일본과 관계가 있을 것이었다.
"일본에는 언제 갔다오셨나요?"
"자주 가시던 편이었는데 마지막으로 갔다오신 것이 90년 1월이었어요."
"그때 일본에 갔다오셔서 바로 질환을 앓으셨다는 말이지요?"
"네. 그래요."
"일본에 가시기 전에는 건강하셨나요?"
"네. 평소와 전혀 다름이 없었어요."
"그때 일본에는 왜 가셨어요?"
"아마 학회에 참석하셨을 거예요. 하지만 서재에 어쩌면 관련 자료들이 있을지 몰라요."
"한 번 찾아보고 싶군요."
"그렇게 하세요."
건강하던 교수가 일본을 다녀오자마자 중질환이 생겼다면 교수의 질환은 일본에서 생긴 일로 말미암은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도대체 일본에서 무슨 일이 생겼기에 교수는 그만 미쳐버리고 말았을까. 이 기자의 호기심이 불같이 일었다.
교수의 딸은 이 기자를 서재로 안내했다. 오랫동안 주인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서재는 말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아버지가 병원에 계시는 동안 가끔 제가 서재를 정리하곤 했어요."
말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는 많은 책과 자료 사이사이에 아버지와 딸의 사진이 호젓하게 놓여 있어 보는 이 기자로 하여금 한숨이 나오게 했다.
"이 서랍에 학회관계 자료가 들어 있어요."
자료를 몽땅 꺼내 반쯤 살피자 바로 90년 1월이라는 숫자가 찍힌 학회 안내문을 찾을 수 있었다. 일본어로 쓰여 있어 완전히는 알 수 없었지만 90년 1월 25일부터 27일 까지 요미우리 신문사 주최로 동경에서 열리는 고대사 관계 삼국학술회의 안내문이었다. 교수는 한국측 주제발표자였다. 이 기자는 교수 이외의 다른 한국측 참석자 명단을 옮겨 적었다.
"이 당시 발표하셨던 자료가 있을 텐데 혹시 모르세요?"
"아마 찢어버리셨을 거예요."
"찢어버려요?"
그제서야 이 기자의 뇌리에 교수가 처한 정황이 어슴푸레 떠올라왔다. 자신이 발표한 자료를 찢어버렸다면 문제는 바로 그 학술회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랬구나, 교수는 국제학술회의에서 커다란 오류를 범했던 것이구나. 거기게 충격을 받아 이제까지의 자신의 학문적 업적에 커다란 회의를 품게 되었구나. 결국은 이것이 우울증으로 더 나아가서는 강박신경증으로 발전된 것이었겠지."
그렇다면 교수가 범했던 오류란 것이 무엇일까. 어떤 오류였기에 정신병이 생길 정도였을까? 국제학술대회라는 것이 그 주장에 대해 잘잘못을 판정하는 종교재판 같은 것은 아니지 않은가. 더군다나 역사에 관한 것이라면 각국이 서로 다른 주장을 펼쳐온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만큼 오류라고 확실하게 이름 붙일만한 것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없었다.
"고맙습니다. 다음에 또 들르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이 기자는 인사를 하고 교수의 집을 나왔다.



11. 세기의 수수께끼


교수의 집을 다녀온 지 얼마 후에 이 기자는 그 당시 학술회의에 참석했던 다른 학자들을 찾아갔다. 그러나 학자들 중에는 그 당시 교수에게 별다른 일이 있었다고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다. 다행히 교수와 가장 친했던 세명대의 박 교수가 비교적 상세히 기억하고 있는 편이었다.
"이정호 교수님의 주제발표는 어땠습니까?"
"좋았어요, 여느 때와 다름없는 내용이었지요."
"그 발표로 무슨 논란이 있거나 하지는 않았습니까?"
"없었어요, 그런 종류의 학술회의라는 것이 발표내용에 대해 즉각 뭐라 하는 사람은 없고 그냥 주제발표만 하는 거지요, 나중에 자료들을 받아갖고 반박논문을 내기는 하지만 그 자리에서는 심도 있는 논쟁이 벌어지진 않아요. 그것도 일종의 축제니까. 또 논쟁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이 교수가 보통사람이요? 백전백승할 사람이지."
"이 교수님이 발표하신 주제는 어떤 내용이었습니까?"
"일본인들의 광개토대왕비 변조에 관한 내용이었어요. 우리 학계의 목소리를 대표하여 고대사관계 국제학술회의 때마다 주장해왔던 거지."
"일본인들의 광개토대왕비 변조 사건 말이군요?"
"그렇지, 그 유명한 석회도론 말일세. 일본인들이 만주에 가서 광개토대왕비에 석회를 발라서는 글자들을 조작해내기 않았나? 그래서 임나일본부를 뒷받침하는 것이고."
"죄송합니다. 좀 자세히 알고 싶은데요."
"임나일본부란 뭔가? 일본인들은 가야를 임나라고 하지. 일본이 가야에 일본의 관청을 두고 한반도의 남부를 통치했다는 뜻 아닌가."
"한반도의 남부라면?"
"고구려를 뺀 신라와 백제, 그리고 가야를 말하는 거지."
"4세기에서 6세기에 걸치는 약 이백 년간이라는 얘기였죠, 아마,"
"억지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지. 그런 주장의 허구성을 이 교수가 짚어냈던 거지."
"그 주장을 펼친 것이 이 교수님이 처음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지, 원래는 제일사학자인 이진희 선생이 수십 장의 광개토대왕비 탁본을 비교 검토하는 등 각고의 노력 끝에 밝혀내 우리 학계에서 대폭 수용했지."
"처음 그 사실을 밝혀낸 것은 언제였습니까?"
"1972년이지, 당시 학계와 언론이 온통 떠들썩했어."
"일본학계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처음에는 당황했지. 그러나 곧 대항논리를 세우고 나왔어."
이 기자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물었다. 
"전 사실 지금까지 명확히 이해를 못하고 있는데, 일본인들이 광개토대왕비의 어떤 글자를 조작했습니까?"
"많은 글자를 조작한 혐의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내도해(來渡海)의 세 글자요."
"내도해?"
"그렇소"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 뜻을 알려면 먼저 그 문장 전체를 알아야 하지."
"설명을 좀 부탁드립니다."
"광개토대왕비에 <백잔신라구시속민, 유래조공. 이왜이신묘년래, 도해파. 백잔□□□라, 이위신민. 이육년병신, 왕궁솔수군. 토리잔국. 白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 百殘□□□羅, 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利殘國>이라는 중요한 구절이 있소. 원래는 이 구절의 해석을 놓고 한국과 일본간의 심각한 대립을 해왔소."
"각각 달리 해석을 해왔다는 말이군요,"
"그렇소."
"그것이 그렇게 여러 갈래의 해석이 나올 정도로 복잡한 것입니까?"
"복잡하다면 복잡하고 간단하다면 간단하지. 문제는 마지막 부분의 비어 있는 몇 글자가 무엇이냐에 따라 각 주장의 옳고 그름이 밝혀진단 말이요."
"마치 수수께끼와 같은 일이군요."
"수수께끼? 그렇지. 수수께끼라면 수수께끼지. 세기의 수수께끼지."
"그 석 자가 비에서는 지워져 있습니까?"
"그렇소, 보이지 않지."
"누군가 의도적으로 지우지는 않았을까요?"
"그렇지는 않소, 그 세 글자 말고도 안 보이는 글자가 많소, 워낙 오랫동안 비바람을 맞다보니 풍화되어 그렇소."
"비는 언제 세워진 것입니까?"
"서기 414년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아들 장수와이 즉위한 지 2년 되던 해에 세운 것이요."
"그러면 1,500년도 더 되었군요."
"그렇지. 발견될 때까지는 1,460년간 벌판에 서 있었던 거지. 그런데 우리는 모두 이 비가 금나라의 것인 줄로만 알았었소. 조선 초기의 용비어천가나 1830년대에 나온 강계지에도 모두 금나라 황제의 무덤과 비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단 말이오."
"왜 그랬을까요?"
"장수왕 때 고구려가 도읍을 국내성으로부터 평양으로 옮기고 나서는 압록강 이북이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지게 되었지. 압록강의 만포에서 보아도 보이지만, 이미 의식 속에서 만주를 지워버렸으니 보일 리가 없었지."
"비가 있는 곳이 압록강에서 그렇게나 가까운 곳입니까?"
"그렇소, 집안(集安)이라는 곳인데 바로 압록강 너머요, 과거 고구려 시절 국내성으로 불리었지."
"그런데 언제 그것이 고구려의 비인 것으로 확인되었습니까?"
"1875년 무렵이오."
"누가 확인했습니까?"
"중국의 금석학자와 관리들이지."
"많은 사람들이 비를 보러 가겠군요."
"그렇지는 않았소, 비가 발견된 통구까지 가는 길이 워낙 멀어 북경의 관심 있는 사람들은 탁본을 보고 그 글의 내용을 더듬었소."
"탁본이 그렇게 정확할까요?"
"비가 워낙 크고 표면이 거칠어 많은 탁본이 일치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오. 이 탁본 중 어느 것이 가장 정확한가도 비의 내용과 관련하여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소."
"아까 얘기하셨던 그 구절의 해석이 한국과 일본 사이에 어떻게 다릅니까?"
"애석하게도 우리나라에서는 그 해석을 두고 깊이 연구한 사람이 없었소. 담원 정인보 선생이 1995년에 유일하게 해냈지. 담원은 그 구절을 이렇게 띄어 읽지.
<백잔신라구시속민, 유래조공. 이왜이신묘년래, 도해파. 백잔□□□라, 이위신민. 이육년병신, 왕궁솔수군. 토리잔국. 白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 百殘□□□羅, 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利殘國>인데 담원은 이 구절을 이렇게 풀이했소.
<백제와 신라는 원래 고구려의 속민이라 조공을 바쳐왔다. 왜가 신묘년에 고구려를 공격해오자 고구려는 바다를 건너 왜를 깨뜨렸다. 백제는 일본과 손을 잡고 신라를 침공하였다. 신라는 대왕의 신민이었기에 병신년에 대왕은 친히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토벌하고 신라를 이롭게 했다.>"
"그렇다면 일본의 해석은 어떤 것입니까?"
"띄어쓰기부터 달라지지. 달라니는 부분은 <이왜이신묘년래도해, 파백잔□□□라, 이위신민>이야. <백제와 신라는 원래 고구려의 속민이라 조공을 바쳐왔다. 왜가 신묘년 이래로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가야와 신라를 깨뜨리고 신민을 삼았기에 병신년에 왕은 친히 수군을 거느리고 가서 백제를 쳤다.>"
"전혀 다른 해석이 되는군요."
"그렇지."
"그렇다면 그 세 개의 빈칸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글자도 각각 다르겠군요?"
"그렇소, 세 글자 중 마지막의 것은 그 뒤에 라가 있으므로 담원의 해석과 일본의 해석이 공히 신(新)자일 것으로 보지만 그 앞의 두 자는 판이하게 다르지."
"어떤 글자들을 넣고 있습니까?"
"담원은 연(連), 침(侵)이라고 주장하지. 즉 백제가 왜와 연합하여 신라를 침략했다고 하는 거야. 일본은 임나라고 주장하지. 따라서 왜가 백제 가야 신라를 깨뜨렸다는 거요."
"한자라면 문법이 있지 않습니까? 문법에 맞게 해석하면 그렇게 크게 어긋날 리가 있습니까?"
"양쪽이 다 우겨대는 판에 문법이 무슨 의미가 있겠소? 이미 이것은 양국간의 자존심의 문에인데."
"그렇겠군요."
"한국의 학자들이 담원의 설을 전적으로 밀어붙이지 않은 것은 사실 해석이 부자연스러웠기 때문이오."
"문법적으로 말이지요?"
"그렇소, 아마 1880년대부터의 일본의 주장에 대해 한 마디 말도 못하고 있던 우리의 처지가 너무나 안타까워 담원의 그러한 해석이 나왔을 것으로 생각했소. 심정적으로는 동정이 갔지만 진실발견이라는 측면에서는 학자들이 아무래도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을 거요."
"담원의 해석이 지나치게 자의적인가요?"
"그렇소, 자신만이 가능한 해석이라고 볼 수 있소."
"학자들의 입장이 어려웠겠군요?"
"모두 다 전전긍긍하고 있었지. 해방 후 일본의 식민사관을 극복해야 할 의무가 역사학자들에게 주어졌지만 일본측 사료도 아닌 우리의 광개토대왕비에 쓰여진 구절이었기 때문에 통박도 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억지해석을 무조건 지지할 수도 없는 터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소."
"학계에서는 매우 고통스러워하고 있었겠군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지. 억지 주장이 뻔한데도 그 억지를 증명할 수 없는 것이 너무 갑갑했소. 그런데 그때 우리 한민족에게는 천우신조와도 같은 연구발표가 나왔소."
"그것이 무었입니까?"
"바로 석회도말론이지. 제일사학자 이진희 씨가 각고의 노력 끝에 일본인들이 광개토대왕비를 변조한 사실을 밝혀냈던 거요."
"아, 참으로 엄청난 일을 해냈군요."
이제까지의 이야기에 답답함을 금치 못하던 이 기자의 입에서 지신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나왔다. 실로 중차대한 일을 이 학자는 해낸 것이었다.
"김월령, 천광호, 이강벽 등 한국 역사학계의 권위자들이 모두 대환영을 하고 나섰소. 많은 학자들이 이진희 씨의 연구를 진정 높이 평가했소. 특히 이정호 교수가 가장 흥분했었소."
"왜 그랬을까요?"
"원래는 이 교수도 그런 주장을 했었거든."
"네? 그렇다면 이 교수님은 왜 발표를 하지 않았습니까?"
"한국에서 연구를 하기에는 자료 등이 충분치 않아 확신을 가지지 못했었소. 우리나라에는 비교분석할 만한 탁본들도 제대로 없었거든. 연구발표라는 것은 확실한 자료에 의한 논문이 나와야 하는 것인데 이 점에서 이교수는 이진희 씨에 뒤처질 수밖에 없었던 거지."
"그렇다 하더라도 보통 기뻐하지 않았겠군요."
"이를 말이오? 그는 이진희 씨의 논문을 샅샅이 검토하고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만세를 외쳤소."
"논문이 좋았던 모양이죠?"
"그 철저한 고증, 수십 장의 탁본을 비교분석한 열의, 치밀한 논리전개 등은 역사관계 논문의 압권이었소."
"그랬군요, 그런데 늘 하던 발표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이 교수님은 무슨 일로 강박신경증에 빠졌을까요? 교수직도 내놓을 정도로 말입니다."
"글세, 그 부분을 나도 모르겠소. 어쨌든 그해 일본에 갔다온 것이 이유이긴 한 것 같은데 도저히 짐작을 할 수 없단 말이오."
"주제발표가 끝난 후 누구를 만났는지 모르십니까?"
"모르겠어요. 호태왕비 변조는 최대의 관심사이기 때문에 최종일에 있었던 이 박사의 발표가 끝나자 서너 명 정도의 참석자가 단상에서 내려오던 이 교수의 곁으로 가 인사를 했소. 그 중 누군가가 저녁약속을 하는 것 같았어. 밑에서 보니 이교수가 시계를 보며 대화를 하던 것이 생각나거든."
"어떻게 그것이 저녁약속이었다고 단정할 수 있습니까?"
"내가 같이 저녁을 하자고 하니까 일본인과 선약이 있다고 했어요."
"아, 그랬군요. 그 일본인이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으시던가요?"
"그것은 말하지 않더군, 그러나 누구인지는 알 수가 있을 거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아마 초청받은 학자들 중 한 사람일 거요, 그들이 발표자 뒤의 참석자 토론대에서 일어났으니 발표자가 아니라면 초청받은 학자일 거요."
"토론대의 어느 쪽입니까?"
박 교수는 이 기자가 별걸 다 묻는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기억나는 대로 대답해 주었다. 박 교수의 기억에는 그들이 자신이 앉아 있던 쪽, 즉 단상의 뒤의 오른쪽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이 기자는 이제야 뭔가 단서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동경에서의 학술대회 당시 오른쪽 뒤에 앉아 있던 사람들을 추적하면 이 교수의 급성 질환에 대한 의문이 풀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 교수의 연구실을 나오는 이 기자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는 신문사에 도착하자 바로 동경으로 편지를 썼다.

'그리운 벗 상훈, 오랜만에 소식을 전하네. 한국을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공부에 전념하고 있겠지. 우리 대학 사학과 이정호 교수님 생각나나? 그분이 정신병원에서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네. -(중략)-
결국 교수님은 아까이라는 말로 나타내지는 어떤 관념에 몹시 짓눌려 있었다고 보여지네. 그리고 그 학회 당시 앞줄 오른쪽에 앉아 있다가 교수님과 저녁식사를 약속한 사람을 찾으면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네.'



12. 기무라 박사


집에 돌아온 상훈은 우편함에서 반가운 편지 한 통을 꺼냈다. 한국에서는 가족, 친척, 친지, 동료들에 둘려싸여 웬만큼 대범하고 관대한 성격이 아니면 늘상 사소한 갈등에 마음이 쓰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국 생활은 그런 인간관계가 전혀 없어 오히려 외롭다. 애증의 감정이 전혀 없어 오히려 외로운 천국보다는 애증의 갈등이 그치지 않는 지옥이 훨씬 낫다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이국 생활 중에 고국에서 날아온 편지는 자신을 과거로, 고향으로 이어주는 탯줄처럼 반갑다.
편지는 한 고향에서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이 기자의 편지였다. 이 기자가 편지를 보낸 것은 의외였다. 상훈은 그가 웬일로 편지를 보냈는지 궁금해졌다.

'교수님은 일본에서 호태왕비 변조에 대한 주제발표를 하고는 돌아오자마자 미쳐버리셨다네.'

생각지도 못했던 내용이었다. 편지를 읽어내려가는 중에 기이하게도 쥰이찌의 살인사건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이 기자의 편지는 쥰이찌의 것과는 분명 다른 별개의 사건이었지만 상훈에게는 묘한 일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어쩌면 운명처럼 호태왕비의 비밀과 얽혀들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상훈도 한두 번 사석에서 만난 적인 있어 그 꼬장꼬장한 성품을 잘 알고는 있지만. 이정호 교수가 학술회의에서 주제발표를 하고 미쳐버렸다는 친구의 편지는 아무래도 비약이 심한 것 같았다. 세상에 학술회의에서 주제발표를 한 것이 사람이 미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아마도 다른 이유가 우연히 겹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의 편지는 마치 귀신에 씌인 것처럼 상훈의 뇌리에 깊이 파고 들었다.
편지에서 이 기자는 이정호 교수가 일본에서 열린 학술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와서는 갑자기 미쳐버렸다고 했다. 믿을 수 없는 얘기였지만 교수가 아까이라고 한 말로 미루어 보면 일본과 어떤 형태로든 관계가 있을지도 몰랐다.
다음날 아침 상훈은 학교에 가기 전에 요미우리 신문사에 먼저 들렀다. 당시의 학술회의 관계자료를 찾아보니 이정호 교수가 마지막 발표자로서 일본의 광개토대왕비 변조에 관한 주제발표를 하게 되어 있었다. 상훈은 수소문하여 당시의 행사담당 요다 기자를 만날 수 있었다. 
"사진을 보면 알 수 있겠군요."
마침 주제발표자와 초청학자 모두가 앉은 것을 찍어둔 사진이 있었다. 요다 기자는 책장에서 사진을 찾아 상훈에게 가지고 왔다.
"이정호 교수는 여기 왼쪽에 앉아 있군요. 오른쪽으로는 모두 다섯 분이 앉았는데 이분들의 이름은 명단과 대조해 봐야겠습니다."
요다 기자는 다시 책장에서 명단을 찾아서는 사진과 대조하여 다섯 사람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동경대학의 미나미 교수, 와세다 대학의 가네무라 교수, 상지대학의 이노우에 교수, 게이오 대학의 하야시 교수, 그리고 대동아연구소의 기무라 박사입니다."
'기무라 박사구나.'
일본의 사학계를 대략 아는 상훈은 직감적으로 이정호 교수를 만난 사람은 기무라 박사일 것으로 판단했다. 그의 전공이 바로 이정호 교수와 같은 고대사였기 때문이다.
상훈은 신문사를 나와 바로 기무라 박사를 만나러 갔다.
"동경대학교 역사학과 대학원생입니다. 지난90년 요미우리 신문 주최의 국제학술대회와 관련하여 몇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어 찾아 뵈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미안합니다만 마침 잠시 나갔다 와야 할 일이 있어서요, 한 이십 분 정도 걸릴 것 같은데 괜찮으시다면 잠시 앉아서 기다리시겠습니까?"
친절한 표정의 기무라 박사는 상훈이 기다리겠다고 하자 차까지 한 잔 타주며 미안한 표정이 역력한 채 밖으로 나갔다. 기무라 박사를 대하자 상훈은 더더욱 이 기자의 편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저렇게 친절한 성격의 학자와 저녁식사를 같이 한 것이 사람이 미치는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가.'

시간이 흐를수록 상훈은 잘못 찾아왔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기무라 박사에게 어떤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나라의 한 교수가 학술대회에서 발표를 한 후 귀하와 같이 식사를 하고는 우울증이 생겼고 나아가서는 완전히 정신을 잃고 결국은 죽고 말았다. 그러니 당시 그 교수와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얘기해 달라.
어떻게 생각하면 창피하기조차 한 일로 생각되자 상훈은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신경을 <아까이>라는 말에 집중했다. 이 교수는 왜 아까이라는 단어에 중압감을 느꼈을까. 역사를 전공하는 교수의 미친 이유를 학술회의에서 찾는다면 아까이라는 단어도 역사와 관련시켜 해석할 도리 밖에 없었다. 역사 중에서도 이 교수의 전공인 고대사 부분일 것이었다. 그러나 고대사의 어떤 부분을 이 단어와 연관지을 수 있을 것인가. 바다 한가운데 빠진 바늘을 찾아내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상훈은 단념하지 않고 생각을 가다듬었다. 자신의 판단을 배제하고 이 기자가 조사한 경로를 따라가보기로 했다. 이 교수는 일본의 광개토대왕비 변조라는 주제로 발표를 했고 발표 후에 기무라 박사를 만났고 다음날 한국에 돌아와서는 깊은 우울증이 생겼고 급기야는 미쳐버렸다. 정신병원에서는 내내 아까이라는 일본말을 내뱉었다. 의사의 말에 따르면 이 교수는 아까이라는 말에 중압감을 느꼈다고 한다.
도대체 이교수는 빨간 색깔의 수많은 상징 중 무엇에 의해 그리 심한 중압감을 느꼈던 것일까. 고대사에 있어서 빨갛다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기무라 박사의 인상으로 보건데 이 교수가 그와 식사를 했다고 하더라도 무슨 치명적인 도발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교수는 기무라 박사를 만나고 난 다음날은 바로 귀국을 했기 때문에 이유는 오로지 기무라 박사와의 만남에서 찾아야 했다. 기무라 박사가 주제발표와 관련하여 이 교수를 질타한다. 그래서 이 교수는 자신의 이론에 회의를 갖고 우울증에 빠진다.
그러나 상훈에게는 이 대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학술적 주장이라는 것이 한쪽이 틀렸다 하더라도 그렇게 모가 나도록 틀릴 수도 없는 것이거니와 설사 심각한 오류를 범했다 하더라도 대학 교수 정도 되는 사람이 바로 우울증에 빠질 리는 없는 것이었다. 어쩌면 이 교수와 기무라 박사와의 관계는 <아까이>라는 밑도 끝도 없는 단어에서 얻어질 수 있을지 몰랐다. <아까이>는 이 교수가 내내 중압감을 느꼈던 단어이고 그것은 일본말이었다. 상훈은 문득 자신이 좀더 확실히 이 교수의 발병 원인을 알아내기 전에는 기무라 박사에게 함부로 이 교수에 대해서 물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이런 결론을 내리자 상훈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매우 불편해졌다. 기무라 박사가 들어오면 할 얘기가 없어진 것이었다. 마침 기무라 박사가 말한 이십 분보다 시간이 늦어지고 있어 상훈은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메모지에 바쁘신 것 같으니 다음에 다시 찾아뵙겠다고 써두고는 황급히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나와도 실례가 안될 정도로 기무라 박사가 늦어지고 있는 것이 차라리 다행이었다. 이 기자에게는 한국에 나가는 기회가 있으면 그때 만나서 이 교수의 정황을 좀더 알아본 후에 기무라 박사를 만나는 것이 낫겠다는 내용으로 편지를 할 생각이었다. 부탁을 들어주지 못해 미안하기는 했지만 고대사를 놓고 민감하게 대립하는 한일 양국의 관계를 잘 알고 있는 역사학도인 자신으로서는 기자와 같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일이었다.



13. 안견의 그림


"상훈 씨. 언제 그런 여성을 숨겨놓았어요?"
"무슨 얘기에요?"
"동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학생이 상훈 씨를 찾아왔었어요."
"여학생?"
"하야꼬 씨라고 하던데요."
상훈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세상에, 하야꼬가 날 찾아오다니.'
전혀 기대하지 않고 얘기했었는데 하야꼬가 왔다는 것이다.
"언제 왔었어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아, 급하시긴. 그런게 맨입으로 됩니까?"
"그래요, 내 다음 저녁 살게요. 어디 있습니까?"
"늘 여유 있던 상훈 씨도 여자에게는 꼼짝 못하는군요. 하여튼 남자들이란,"
"얼른 얘기해요. 괜히 사람 기다리게 하지 말고."
"안심해요, 금방 갈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동경여대에서 누군가 특강을 하러 왔는데 같이 왔대요. 문학부의 미술사학 강의실로 가봐요."
"고마워요."
자신의 어디에 이런 성급함이 있는지 몰랐다. 강의실을 향해서 걷는 마음이 자꾸 급해지는 것을 느끼며 상훈은 걸음을 늦추려고 애를 썼다. 동경대학의 문학부 건물은 고색창연하고 약간은 퀴퀴한 냄새라도 나는 것 같은 담쟁이 덩굴이 둘러쳐져 있는 건물이었다. 그런 숨막히는 건물에 하야꼬가 앉아 있다는 것이 도시 어울릴 것 같지 않았다. 그녀는 미끄러지는 듯이 달리는 하꼬네행 특급열차나 연두색 나뭇잎 사이사이로 꽃망울이 터져 있는 그런 산을 잔잔하게 올라가는 등산열차나, 산속 한가운데 새파란 잔디가 깔린 성과 같은 미술관에나 어울릴 여자였다.
하야꼬는 뒷문 옆에 앉아 있다가 상훈이 오는 것을 보고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하꼬네에서 봤을 때는 머리를 약간 묶어올린 것이 은연중에 지성적 분위기를 띠고 있었는데 오늘은 길게 풀어 헤치고 화장도 전연 하지 않은 것이 아까 조교 학생이 찾아왔다고 한 것이 그로서는 농담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녕하셨어요?"
"찾아주셔셔 고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그냥 나와도 됩니까?"
"이해하실 꺼예요. 늘 듣던 얘기니까요. 어쩌면 내가 나가주는 것이 더 편하실지 몰라요."
"같은 말 또 하는 걸 아는 사람이 보면 쑥스러울 테죠."
"호호, 경험이 있으신가 봐요."
"한국에서는 강의를 좀 했었죠. 같은 소재로 지루한 대목마다 웃기곤 했는데 어느날 보니 다른 과에서 듣던 학생이 또 듣고 있는 거였어요."
"호호호."
"그 학생도 웃긴 웃더군요. 그런데."
하야꼬의 경쾌한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웃음의 종류가 다르더라는 거죠."
"맞습니다. 경험이 있는 모양이죠?"
"다른 대학에 출강나갈 때 강의마다 쫓아와서 듣던 나이든 남학생이 있었어요. 저는 전혀 모르고 두 달이나 했지 뭐예요, 그 남학생 나중엔 저만 보면 웃더군요, 묘한 웃음을요. 아마도 아무리 글을 잘 쓰는 사람도 그 학생의 묘한 웃음을 묘사하진 못할 거예요."
상훈은 하야꼬를 안내하여 대학 구내의 몇 곳을 돌아다니다가 도서관의 뒤의 호수로 갔다. 오월의 바람에 날리는 라일락 꽃향기가 코를 강하게 자극해 오는 것을 느끼며 두 사람은 호수가의 벤치에 앉았다. 평일의 오후치고는 드물게 사람이 없는 날이었다. 간간이 첨벙거리는 물고기 소리마니 오후의 정적을 깰 뿐 봄날의 호수는 조용하기만 했다.
"이 호수에는 실연한 여학생의 귀신이 있다는 얘기가 있다면서요?"
눈부시게 하얀 이를 드러내며 하야꼬는 웃었다. 상훈은 하야꼬의 얼굴과 질문이 너무 안 맞는다고 생각했지만 하야꼬의 질문은 어쩐지 마냥 가볍게 느껴지지만은 않았다.
"날씨와는 너무 어울리지 않는 질문이군요."
"가엾어요,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어요?"
하야꼬의 목소리를 타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가즈오.>
하꼬네에서 만난 뒤로부터 상훈은 늘 하야꼬의 모습을 그리곤 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가즈오의 얼굴이 하야꼬와 함께 떠오르곤 했다.
"하야꼬 씨는 실연당한 경험이 없나요?"
"상훈 씨는요?"
"글쎄요,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고 하고."
"어머, 그런 대답이 어디 있어요?"
"어쨌거나 저는 대답을 했지만 하야꼬 씨는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대답하지 않을래요."
"불공평하지 않은가요?"
"그럼 그냥 뭐 그런 걸로 해두죠."
"있는 걸루요, 없는 걸루요?"
"없는 걸루요."
두 사람은 어린아이들 마냥 깔깔 웃었다.
"오늘 온 교수는 무슨 특강을 하러 왔나요?"
"말하지 않겠어요."
"네? 아니 무슨 이유라도 있나요?"
"싫어하시는 것 같아서요."
"......."
"한국회화론이에요."
"한국회화론? 그런데 내가 왜 싫어하죠?"
"한국에 없는 그림 얘기가 많이 나오거든요, 일전에 보니까 싫어하시는 것 같던데요."
"하야꼬 씨."
"네?"
"저는 결코 자신을 속이 좁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부정한 방법으로 밖으로 유출된 문화재를 보고도 가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휴머니스트로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실 줄 알았어요."
"어쩌면 일본인이 쓰는 한국미술사가 더 정확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국인은 볼 수 없는 예술품들이 일본에는 무척 많기 때문입니다."
하야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상훈의 말이 아니더라도 하야꼬는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일부 소장가들은 한국인은 물론 설사 일본인이라 하더라도 정체가 확실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한국미술품을 보여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는 인류가 진정으로 역사를 발전시켜 나가려면 과거 제국주의 시대에 약탈한 문화재 같은 것은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사실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하야꼬는 상훈의 말에 진정 공감하고 있었다.
"예전에 일본의 호소카와 수상이 한국을 방문하여 과거 침략 행위를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한국정부와 문화계에서 그토록 원하는 몇 점의 문화재라도 가지고 왔으면 하고 바랐었죠. 그런데 그 역시 공허한 말의 잔치만으로 끝내고 말더군요."
"미안합니다."
하야꼬는 진정 미안한 얼굴이 되어 상훈에게 사과했다.
"제가 다소 흥분했군요. 오히려 미안합니다."
상훈은 하야꼬가 몸둘 바를 모르며 자신에게 사과하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못난 놈처럼 나를 찾아온 하야꼬에게나 이런 말을 하고 있다니.'
"언젠가는 한국의 문화재들도 고향으로 되돌아갈 거예요."
"이제 그 얘기는 그만하기로 하죠. 하야꼬 씨의 전공이 미술사라서 이런 얘기가 나오는가 봅니다. 앞으로 다시는 이런 얘기를 꺼내지 않겠습니다."
"맥주 한 잔 하지 않으실래요?"
"사드릴께요."
두 사람은 학교를 나와 신쥬꾸의 한 원샷 바에 자리잡았다. 상훈은 신쥬꾸로 오는 동안 내내 하야꼬가 미안하다고 할 때 자신의 기분이 매우 이상해지던 이유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제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야릇한 기분이었다.
여러 잔의 맥주를 마시는 동안 창 밖을 내다보며 무슨 생각엔가 잠겨 있던 하야꼬는 술집을 나설 때에야 원래의 밝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아까 생각했던 것인데......."
지하철로 걸어가면서 하야꼬가 말했다.
"대단한 그림이 하나 있거든요."
"뭔데요?"
"안견의 그림이에요."
"안견?"
"네, 조선 초기 산수화의 대가죠. 한국 회화사상 최고의 화가로 꼽히는 분이죠."
"맞습니다."
"그분의 그림을 한 번 보여드리고 싶어서요."
"네? 아니 뭐라구요? 그 그림이 일본에 있습니까?"
"네, 그림뿐만이 아니라 그림의 뒤에는 당대의 저명한 학자들이 쓴 찬시가 수십 편이나 붙어 있어요."
"저런."
"한국에 있었다면 국보 중에서도 최상급일 거예요."
"언제 볼 수 있습니까?"
"일반인에게는 공개를 하지 않아요. 관계 전문가들에게만 보여 주는데 대학의 미술강사는 특별관람이 가능해요."
"그게 어디에 있습니까?"
"천리대에 있어요."
"대학에 있다면 왜 일반인에게 공개를 하지 않습니까?"
"워낙 대단한 그림이라 그럴 거예요."
"대단하다면 더욱 공개를 해서 다같이 봐야 하지 않을까요? 더군다나 한국의 것인데......."
"약간의 소문이 생기면 주인들은 공개를 안해요. 예전에도 관서지방의 어느 절에서 한국의 불화가 발견되자 주변의 절들이 모두 갖고 있던 불화를 감추어 버렸어요."
"......."
하야꼬는 상훈이 자제하느라 아무 말도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상훈이 자제하는 이유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치는 것을 상훈은 예민하게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 조심스러워졌다. 기회만 생긴다면 상훈에게 일본인들이 모두 문화재 약탈범이 아니란 걸 보여주고 싶었다. 



14. 탁본을 가지고 온 간첩


'어째서 진작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상훈은 <역사의 연구>를 꺼내어 뒷장을 넘겼다. 발행일은 1970년 10월. 다시 나까가와 교수가 주장을 제기한 <사상>을 펼쳐들고 발행일을 확인하니 71년 3월이었다. 쥰이찌가 이름을 바꾼 것은 70년 6월, 그렇다면 쥰이찌는 혹시 우에노 에이지라는 이름으로 나까가와 교수에게 전화를 했을지 모른다. 이 시기라면 쥰이찌가 본명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상훈은 급한 손길로 전화기를 들고 나까가와 교수의 번호를 눌렀다.
"일전에 전화했던 동경대학의 박상훈입니다. 혹시 70년 10월 혹은 그 이후의 어느 기간 중에 우에노 에이지라는 사람의 전화를 받은 적이 있는지 확인해 주실 수 있습니까?"
저쪽의 대답은 생각과는 달리 너무나 쉽게 나왔다.
"있습니다."
상훈은 전화기를 내던지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엄청난 희열이 온몸을 휩싸는 가운데 목소리는 들뜨고 숨이 가빠왔다.
"교수님, 제가 좀 찾아 뵈어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세요."
전화를 끊자마자 상훈은 바로 역으로 나가 히까리를 탔다.

그토록 자신을 궁금하게 했던 사람 가네무라 쥰이찌, 아니 우에노 에이지의 베일이 벗겨질 수 있다는 기대감에 상훈은 마치 열병환자처럼 들뜨고 있었다. 들뜬 중에도 상훈은 이 사람의 정체를 알아낸다는 것은 어쩌면 생각지도 못했던 거대한 역사의 비밀을 한겹 벗겨내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멀리서 오시느라 수고가 많았습니다."
짐작했던 대로 교수는 점잖으면서도 편안함을 주는 좋은 사람인 것이 한눈에 느껴졌다. 상훈은 황망중에도 챙겨온 울릉도 오징어 한 축을 내놓았다. 오징어를 좋아하는 상훈에게 아버지가 부쳐온 것이었는데 마침 선물로 적당하다고 생각되어 가지고 온 것이었다.
"울릉도 오징어는 일본에서도 제일로 알아주고 있지요. 받아야할지 잘 모르겠지만 가져오신 것이니 잘 먹겠습니다."
서재로 안내되어 자리에 앉자 마자 상훈은 달리 인사를 차릴 겨를도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얘기를 꺼냈다.
"우에노 에이지 씨가 교수님께 전화를 걸어온 것은 언제였습니까?"
"나는 그분으로부터 두 번 전화를 받았는데 한 번은 70년 10월 <역사의 연구>라는 잡지에서 제국주의적 사관의 잔재를 청산해야 한다는 요지의 대담을 했을 때였지요. 그때 그분이 전화를 해와서는 나와 여러 가지 학술적인 얘기를 나눴지요. 상당히 식견이 있는 분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내 주장에서 잘됐던 부분에 대해 칭찬을 하고 미흡했던 부분에 대해서는 내게 매우 참고가 되는 얘기를 해주더군요. 나는 전화를 받다가 이것은 중요한 얘기구나 싶어서 한 번 만나고 싶다고 얘기했었지요. 그랬더니 그분은 다음에 다시 연락을 하겠다고 하면서 전화를 끊었어요."
나까가와 교수의 얘기를 들으면서 상훈은 역시 에이지는 연구가 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일본 사학계의 대가에게 전화를 걸어 미흡한 점을 지적할 정도라면 보통의 실력을 기지고서는 어림도 없는 일일 것이었다.
"그 다음 내가 전화를 받은 것은 다음해 정초였어요. 아이들에게 세배를 받고 있는데 전화가 와서 받아보니 그분이었어요. 나는 전에 받았던 전화의 인상이 깊어 반가운 마음이 들었어요. 그런데 그분은 새해 인사를 나누려고 전화한 것이 아니었어요. 전화로도 뭔지 비장함을 머금은 목소리인 것이 느껴졌어요. 그는 나에게 호태왕비의 비밀을 아느냐고 묻더군요. 나는 순간적으로 긴장했어요. 아는 것이 없다고 대답했더니 호태왕비의 탁본을 맨처음 일본에 가져온 사람이 누군가 생각해보라고 얘기하고는 바로 전화를 끊더군요. 그 말을 듣자 온몸에 소름이 끼치더군요. 매우 불길한 예감이 들었어요. 어쩌면 그동안 우리 일본 사학계가 누군가의 장난질에 놀아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무서운 느낌이 순간적으로 들었어요. 왜냐하면 그토록 중요하게 인용하고 임나일본부의 근거로 내세우곤 하던 호태왕비의 탁본을 가지고 온 사람은 가께아끼 중위였고, 그의 정체가 밝혀지는 과정이 너무나 비정상적이었거든요."
나까가와 교수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눈을 감았다. 아마도 이십여 년이나 된 옛날의 일을 한 번에 다 털어놓기는 숨이 가쁜 모양이었다. 더군다나 보통의 일도 아니었다.
"나는 즉시 가께아끼 중위의 행적을 알아보기 시작했어요. 다른 군인들과는 달리 이 사람은 행적이 들쭉날쭉하더군요."
"행적이 들쭉날쭉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보직이 천차만별로 바뀌었어요. 그리고 주로 외국에 다녔어요, 광개토대왕비의 탁본과 관련해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 해독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구요, 그래서 나는 좀더 확실한 조사를 위해 북해도 대학의 스미자와 교수에게 부탁을 했죠. 그는 그런 걸 알아보는 데는 특출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어요."
상훈은 나까가와 교수의 말을 들으면서 학문을 하는 사람의 올바른 자세를 배우고 있다고 생각했다.
"우선 내가 확인한 만큼은 <사상>에 발표하고 스미자와의 조사를 기다렸지요. 과연 스미자와는 치밀했어요. 그는 1891년에 출판된 야마다의 책에서 <탁본은 우리 육군의 이원이 순유 중에 얻은 것이다.>라는 구절을 찾아냈어요. 이것을 단서로하여 그는 정부의 관원록과 육군의 직원록을 샅샅이 뒤졌어요."
다시 한 번 교수는 말을 끊었다. 상훈은 그의 얼굴이 약간은 흥분되어 있는 듯한 기색을 엿볼 수 있었다.
"72년 4월 그는 <일본역사>에 '광개토대왕비 재검토를 위한 서문-참모본부와 조선연구'라는 논문을 발표했어요. 여기서 그는 가께아끼가 만주일대를 맡은 육군본부의 간첩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밝혀냈지요. 그는 죽기 하루 전 천황의 특지로 한 계급 승진했더군요."
교수는 잠시 일어나 서재 한켠의 책꽂이에서 색이 누렇게 바랜 한 권의 책을 가지고 왔다. 앞장 겉표지를 넘기자 <나까가와 선생혜존, 저자 스미자와 증정>이란 구절이 보였다.
"우리는 그 중요한 호태왕비의 탁본을 일본에 맨처음 가지고 온 사람이 육군본부의 간첩이라는 사실에 경악했습니다. 4,5세기에 일본이 신라, 백제, 임나를 지배했었다는 것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유일한 결정적 자료를 육군참모본부의 간첩이 가지고 오고 그 해석도 육군참모본부에서 하고 학자들은 그 후 아무런 비판 없이 이것을 정설로 받아들여 온 국민을 교육시키고 있다는 사실이 두려워졌습니다. 그후 우리는 신중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연구자에 따라서는 4,5세기의 한국지배설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논문을 써내는 사람도 생기더군요,"
"그후로는 우에노 에이지 씨로부터 연락을 받은 적이 없었습니까?"
"그것이 마직막이었어요."
상훈은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교수의 집을 나섰다. 비록 짧은 동안이었지만 교수의 설명은 상훈에게 많은 것을 알게 또 느끼게 해주었다. 그런데 나까가와 교수가 가께아끼의 정체를 밝히도록 결정적 정보를 준 에이지는 도대체 누구일까? 한 나라의 역사를 완전히 뒤집어놓을 엄청난 정보를 주고도 자신은 나서지 않은 채 결국에는 살해당하고 만 이 사람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15. 남과 북


"이젠 떠나야 할 때가 되었어."
"......."
"독준아. 사실 나는 네게 알려줄 것이 있어서 올라왔다."
"......."
대장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미안하다. 나를 만나러 오기까지는 갈등이 심했겠지."
"사실입네다. 하지만 결국은 와야만 한다는 결론을 내렸지요."
"고맙다."
최독보는 사실 동생이 자신을 체포하거나 고발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없지 않았었다. 그러나 동생은 자신을 따뜻하게 형으로 맞아주었다. 자칫 잘못되면 그 대가는 동생의 완전한 파멸이었다. 최독보는 동생의 인생을 산산조각 내느니 차라리 입 속에 숨긴 독약을 먹고 죽는 것이 낫다고 결심했다.
최독보가 몸에 지니고 온 임무는 너무도 중대했다. 단순한 동생의 포섭이 아니었다. 자신이 떠나올 때 국장은 천번 만번도 넘게 동생을 확실히 파악하고 나서야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고 얘기했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안심이 되지 않으면 지니고 갔던 얘기는 그대로 가슴에 품고 돌아와야만 한다고 신신당부했던 것이다.
"매우 미묘한 국제관계가 발생할 수 있으니 절대로 발설하지 말고 조심해야 한다."
"........"
최독보는 다시 뜸을 들이다가 이윽고 무엇인가 결심한 듯이 불쑥 첫 마디를 내뱉었다.
"미국에서는 주석을 망명시킬 계획을 갖고 있는 듯하다."
"네? 주석을 망명시켜요?"
"그렇다."
대장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한동안 말을 잊지 못했다. 잇따른 형의 설명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멍하니 형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미국은 남북관계보다도 중국을 두려워하고 있어."
"......."
형은 잠시 호흡을 끊었다.
"지금 중국은 군을 움직이는 자들의 입장이 제가가이야. 겉으로 보는 것과는 달리 심각한 권력투쟁의 조짐이 엿보이고 있어, 중국의 지도체제는 매우 불안하고 앞으로는 더할 거라고 보고 있지."
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점은 누구보다도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는 바였다. 자신이 최근에 만나고 있는 중국군 고위 장성들이 상당히 들떠 있는 것을 보면 이들이 중앙권력의 향배에 무척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문제는 극대화된 중국의 정정불안이 미국과의 대결구도로 치달을 위험성이 있다는 거야."
"......." 
"중국과 미국은 이미 구조적으로 대결의 양상을 띠고 있어. 중국이 핵확산 금지조약에 조인을 하고 나서 불과 삼 일 만에  거대한 핵실험을 한 것은 세계경영에 있어 결코 미국의 품안에 머무르지 않겠다는 의지로 볼 수 있지. 최소한 지역패권은 차지하겠다는 의사표시를 하면서 주변국들에 중국을 따라야 한다는 압력을 은연중에 넣고 있는 거지."
"그래서 미국이 대만을 슬쩍 부추긴 거구만요. 십오 년 만에 대만총통의 미국방문을 허용한다든지."
"미국은 중국과의 본격 대결을 촉발할 몇 가지 위험요소 중의 하나로 북한을 꼽고 있어. 주석이 상황에 쫓기면 중국에 의지하여 정권을 유지하려 할 공산이 있다고 보는 거지."
"......."
"그랬을 경우 중국의 권력자들이 권력투쟁의 방향을 돌리기 위해 한반도에 강력하게 개입할 위험성이 있다고 보고 미국은 아예 북한을 먼저 관리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지."
"일 리가 있는 얘기구만요."
"게다가 미국의 세계경영과 관련하여서도 주석은 커다란 장애가 되고 있어."
"미국의 세계경영?"
"핵관리 체제 같은 것을 말하는 거지."
"핵개발은 이미 결론이 나지 않았습네까?"
"그 방법이 시원찮았던 것이 이제와서는 불만인 거야. 이란과 이집트가 핵개발을 외치는 것이 북한을 잘못 다루었기 때문이라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어. 이런 계제에 북한이 다시 핵개발을 들고 나오면 미국의 지도력은 급격히 손상된다고 생각해. 정권에도 큰 타격이지."
대장은 미국 공화당의 강경론자들의 주장에 대하여 익히 알고 있었다. 민주당 정부의 대북 핵협상이 너무도 미진하다는 그들의 주장은 많은 미국인들의 공감을 얻고 있는 바였다.
"그런데 북한에 폭동이 나고 주석은 군부를 장악하지 못한다. 미국은 이 기회를 놓치려하지 않아."
"지도자 동지가 그리 홀홀하게 망명을 할 분인가요?"
"물론 그러려고 하지는 않겠지. 그러나 상황이 만들어지면 어쩔 수 없어."
형의 짧은 대답에 대장은 달리 더 반박할 수 없었다. 사실은 자신이 더욱 잘 아는 부분이었다.
"미국이 그 상황을 만들고 있다는 뜻입네까?"
"상황은 자연발생적이야, 미국은 다만 조종할 뿐이지. 그러나 미국의 조종은 무서워."
대장은 한동안 말없이 깊은 생각에 잠겼다. 오진우의 사망 후 군부의 실세로 군림한 오극렬의 번득이는 눈자위가 기분 나쁠 정도로 또렷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형님."
대장은 자신도 모르게 담담한 목소리로 형을 불렀다.
"그래."
"남한 정부는 내가 어떻게 행동하기를 바라는 거지요?"
"주석의 망명을 두고 남한정부의 입장과 미국의 입장이 서로 달라."
"어떤점에서 그렇습네까?"
"미국은 주석을 망명시킴으로써 아까 얘기했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지. 그러나 남한은 달라."
"......."
"북한에 일어날 혼란을 무서워하는 거지. 주석이 망명을 하고 나면 북한은 엄청난 혼란에 휩싸이게 돼. 누가 정권을 잡더라도 활화산처럼 분출하는 주민들의 욕구를 수용할 방법이 없어."
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반 세기가 넘게 지속되어온 독재정권이 쓰러졌을 때 용출하는 주민들이 욕구는 아무도 막을 수 없을 것이었다. 더군다나 외부세계에 대하여는 철두철미하게 속아 살아 왔다는 것을 알게 될 주민들의 분노는 엄청날 것이었다. 대규모 유혈사태는 불을 보듯 뻔한 노릇이었다.
"망명은 바로 북한을 붕괴시킬 수 있어. 우리는 북한의 혼란을 원치 않아. 북한의 사정이 풍전등화 같은 때에 남의 일처럼 수수방관하고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남한 지도부의 생각이야."
"남한정부는 우리가 인민을 통제할 힘을 유지하길 바란다는 거군요."
"시간을 갖고 통일을 준비하자는 얘기지."
설득력 있는 얘기였다. 남이든 북이든 간에 지금은 시간이 필요한 시기였다. 상대와 같이 미래를 준비할 시간이 극도로 필요한 시기였다.
"주석의 망명은 막아야만 해. 그렇다고 중국의 개입을 요청하게 두어서도 안돼. 최악의 사태가 발생하면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야."
차가운 목소리를 던진 형은 의미심장한 눈길로 동생의 안색을 훑었고 동생은 그 눈동자를 응시했다. 형의 눈동자로부터는 엄청난 무게가 옮겨져왔다. 그 차가운 목소리가 무엇을 얘기하는지 깨닫는 순간 동생의 입에서는 나직한 신음이 새어나왔다. 끝간데 없는 두려움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이제 나는 내려가마."
동생의 고뇌를 읽었는지 형은 서둘러 작별을 고했다. 반세기만에 만난 동생에게 고통을 주어야 하는 장면으로부터 어서 피하고 싶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섰던 동생이 돌아서는 형에게 말했다.
"조카가 살아 있어요."
"조카라니?"
"큰 형님의 아들이 살아있단 말예요."
"뭐라고? 형에게 아들이 있었어?"
"예."
"걔가 어디에 살아 있단 말이냐?"
"일본으로 입양되어 갔더구만요."
"일본으로?"
"그래요, 저의 출신문제도 있고 해서 더 이상은 추적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일본으로 입양되어간 것은 틀림 없어요."
최독준 대장은 메모지에 적은 주소를 건넸다. 최독보는 메모지를 보고 주소와 이름을 머리에 집어넣고는 다시 동생에게 되돌려 주었다.
"가자마자 찾아야겠다."
최독보는 자신들의 어릴 적 모습을 떠올리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형 독립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하바로프스키의 헌병대 유치장에서였다. 음침한 기운이 감도는 유치장의 창살을 붙잡고 서서 형은 자신에게 독준을 데리고 본토로 들어가라고 했다. 적어도 이십 년 정도는 유형을 받을 것이라고 하면서 독준을 잘 보살피라던 형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최독준과 최독보에게 있어서 형의 존재는 매우 특별한 것이었다. 나이 차가 많이 나던 형은 어린 두 동생에게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아니 형은 어떤 아버지보다도 더 헌신적으로 어린 두동생을 키웠다. 늘 며칠씩 어디론가 다니다가 집에 돌아오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자신과 동생에게 공부를 가르쳤다.
어느 날인가 형이 돌아와서 책상에 앉자마자 조선인 밀정을 앞세운 일본헌병 두 사람이 신발을 신은 채로 방에 들어오자 어린나이에도 목이 메인 울음부터 터저나오던 것이 기억났다. 포승에 묶여 앞을 보지 않는다고 그렇게 매를 맞으면서도 끝까지 뒤를 돌아다보던 형이었다. 죄목이 항일운동이었던 형은 어쩐일인지 러시아 헌병대로 압송되어 유형을 떠났다. 동생들은 형이 시킨대로 황해도에 산다는 어느 친척을 찾아 내려왔다. 그후 바로 해방이 되고 전쟁이 터지자 독보는 공산당원이었던 친척이 입대를 강요하는 게 싫어 남한으로 내려왔다. 동생을 데리고 오고 싶었지만 잠시 징집만 피하고 돌아오려했기에 동생을 고생길에 동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미운 친척이었지만 동생을 맡긴 입장이라 길거리에 죽어있는 소년의 얼굴을 돌로 짓뭉개고 자신이 죽은 것으로 위장하고 떠났던 것이 결과적으로 동생의 출세에 장애가 안되어 다행이었다.
"형과 형수의 묘는 제가 하바로프스키 근처의 인민묘지에 모셨지만 조카의 행방은 추적하기가 무척 어렵더군요. 일본인이 입양을 시켜 데려갔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었어요. 제가 일본에 건너갈 수도 없는 일이고 남에게 시킬 수는 더더욱 없는 일이라 많이 괴로워 했지요. 조카의 일은 내게는 언제나 커다란 짐이 되어 왔어요."
"조카는 유형장에서 태어났니?"
"네, 형이 있던 시베리아의 유형장엔 가족을 이루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어요. 형이 거기서 비로비잔의 고향사람을 만났어요. 그 고향 사람에게는 따라온 조선 처녀가 있어 형은 뒤늦게 유형장에서 가정을 이루었지요. 형수가 해산을 하기 위해 친정으로 갔을 때에 형은 벌목작업을 하다가 나무에 깔려 크게 다쳤어요. 마침 제가 왔을 때라 저는 형의 임종을 지킬 수가 있었지요. 그후 몸이 쇠약한 형수도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가 잘못되어 돌아가셨어요. 뒤늦게 형수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아이를 거두려 내가 갔는데 이상하게도 아이가 없어졌어요. 몇 해를 두고 추적한 결과 일본인이 형님의 아이를 입양해 갔다는 겁데다."
"이상한 사람이군,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 시베리아에까지 와서 형의 아이를 입양해 갔을까?"
"아이의 이름은 의송이에요. 최의송이죠. 스타노보이의 유형장에 있던 아버지가 미리 지어준 이름이래요."
"아버지가 그때까지 살아계셨단 말이야?"
"저도 그때 처음 알았어요. 솔직히 혼자 남반부로 내려간 형을 원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요."
"우리 집안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아버지와 형이 모두 시베리아의 유형장에서 삶을 마치고, 너나 나나 무슨 죄인인 것처럼 평생을 마음 졸이며 살아야 했단 말이냐?"
사십 년 만에 만난 인민무력무의 대장인 동생과 그 동생을 포섭하러온 밀사인 형. 긴 세월 끝의 짧은 만남은 절규로 이어졌다.
"형, 만약에 체포되면 거리낌없이 날 대요." 
최독보는 말없이 동생을 끌어안았다. 동생의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는 알 수 있었다. 밀사의 임무수행을 완료했다는 기쁨보다는 기대했던 동생의 모습을 발견한 의미가 형으로 하여금 한참 동안이나 감격스럽게 동생을 끌어안게 하고 있었다. 거대한 감동의 물결이 자신도 모를 곳에서 생겨나 온몸을 뒤덮어오는 것을 느끼며 형은 다시 한번 동생을 힘주어 안았다. 사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형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역시 피는 물보다 진했다.



16. 이상한 메모


"단서를 찾아냈습니다."
모처럼 깊은 잠에 빠진 상훈은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깼다. 새벽 한시였다.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흥분된 목소리는 이마무라 주임의 것이었다. 보험수혜자로 되어 있는 아사꼬의 주민등록지를 추적하다보니 그녀를 기억하는 한 노파를 찾아냈다는 것이다. 그 노파의 기억을 되살리는 데 고생했다며 이마무라는 너스레를 떨었다.
아사꼬는 군인인 오빠가 있을 뿐 혼자 살고 있었고, 그녀를 찾아오던 애인이 있었는데 그 사람 이름은 가또오였다는 것이다. 아사꼬의 옆 집에 살던 그 노파는 은근히 가또오라는 사람을 사모하여 그녀를 질투한 적도 있었노라고 서슴없이 털어놓았다. 성 뿐만 아니라 이름까지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노파의 증언이 틀렸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아사꼬는 어느날 가또오와 큰 소리로 다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노파가 기억하는 가또오는 당시 게이오 대학을 졸업하고 육군의 장교가 되었다고 했다. 주임은 대학의 학적부로부터 추적하여 가또오의 주소까지도 알아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과연 강력주임이시군요."
수십 년 전의 주소 하나를 가지고 여기까지 추적한 것이 대단하게 생각되어 상훈은 칭찬을 해주었다. 막상 상훈의 인사를 받자 과장스레 너스레를 떨던 주임은 말을 더듬으며 어색해했다.
"제가 맡은 사건인데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는 쥐구멍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침 가또오의 집은 동경에 있었다.
"시조부의 서재에요. 부모님이 미국에 살고 계시기 때문에 치우지 않고 있었어요, 이제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시면 시간을 갖고 정리하실 계획이라고 손을 대지 말고 그냥 두라고 하셨어요."
손자 며느리라는 삼십대 중반의 여자는 상훈이 동경대학교의 역사학과 대학원생임을 밝히자 의외로 친절하게 서재를 보여주었다. 가또오의 서재에 들어서는 순간 상훈은 전율을 느꼈다.
'이 무슨 괴이한 일이란 말인가.'
에이지의 서재에 있는 책들도 일반인으로서는 도저히 갖출 수 없는 진귀한 것들이었지만 가또오의 서재 역시 역사 및 비문의 연구에 대한 희귀한 책들로 가득 차 있었다. 처음에 상훈은 에이지의 서재에 들어온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할 정도였다. 에이지와 가또오가 갖추고 있는 책이나 자료의 종류와 분야는 너무도 비슷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또오라는 이름 역시 무슨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시간이 좀 많이 걸릴지도 모르니 제게 신경 쓰지 마시고 하실 일이 있으면 하십시오,"
키가 크고 눈매가 선량해 보이는 이 주부는 상훈을 의심한다든지 하는 눈치는 전혀 보이지 않고 오히려 음료를 가져다 주면서 차분히 보고 싶은 것을 보라고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런 것으로 보아 가또오는 에이지와는 달리 신변의 위협을 느끼거나 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생각되었다.
상훈은 비문에 관련한 서적을 하나도 빼지 않고 꼼꼼히 살폈다. 성격이 깔끔한 에이지와는 달리 가또오는 책의 여기저기에 많은 메모와 단상을 남겨두고 있었다. 단상들은 그때 그때의 소감을 적은 것으로 비록 의미상 연결은 되지 않는 것이었지만 패전을 앞둔 한 젊은이의 소감을 담백하게 표현한 것으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인간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군인이었지만 가또오는 문학에도 상당히 취미가 있었던 모양인지 문장들이 어딘지 모르게 사람의 마음을 끌고 있었다. 상훈은 수첩을 꺼내 마음을 울리는 몇 개의 단상과 당장 이해하기 힘든 단어와 지명 등을 옮겨적었다. 꼭 사건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역사를 연구하는 자신에게 언젠가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몇 개의 구절을 적어내려가던 상훈은 갑자기 너무도 낯선 느낌을 주는 한 구절을 대하고는 깜짝놀랐다.

'에이지, 울란 야호이의 동지들을 잊었단 말인가.'

다른 구절들이 모두 부드럽고 때로는 서정적인 것에 비해 이 구절은 섬뜩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상훈은 이와 관련된 구절이 또 있는지 나머지 책장들을 열심히 살폈지만 관련이 있어 보이는 구절은 한 군데도 없었다. 수첩이나 노트가 있으면 좋았겠지만 서가에 꽂혀 있는 것은 모두 책 뿐이었다. 더 이상 참고될 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 상훈이 마지막으로 책꽂이의 오른쪽 맨 끝에 있는 책을 펼치는 순간 책 속에서 무엇인가가 밑으로 떨어졌다. 집어들어 보니 빛바랜 사진이었다. 사진은 두 사람의 남자가 한 사람의 여자를 사이에 두고 찍은 것이었다. 상훈이 찬찬히 들여다보니 한 남자와 여자는 매우 닮은 것이 첫눈에도 남매라는 것이 느껴졌다. 두 남자는 학생복을 입고 있었는데 짐작으로 둘 중의 한 사람은 가또오일 것이다. 나이로 미루어 보건데 가또오가 자신의 친구와 그 여동생과 같이 찍은 사진임이 분명했다. 
사진의 뒷장에는 가또오의 필체로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소식없는 아사꼬, 그 춥고 어두운 섬에서 얼마나 두려울 것인가. 가또오는 그대를 그리며 오늘도 북쪽 하늘만 쳐다본다.'

상훈은 얼른 사진을 노트 갈피에 끼우고 밖으로 나왔다. 여자가 상훈의 기척을 듣고는 따라나와 인사를 했다.
"충분히 보셨어요?"
"네, 감사합니다."
"원고 같은 것도 보셨으면 좋았을 텐데."
"네? 그런 것도 있었나요?"
"아니예요, 여기는 없어요. 돌아가시기 전 평소 관계하시던 연구소에 기증하셨어요, 중요한 서적이랑 자료. 그리고 기록이나 단상이 담겨져 있는 노트와 수첩 등을 기증하셨지요."
"어디에 기증하셨습니까?"
"대동아연구소에요, 왜 그 와따나베 선생님이 소장으로 계시는......."
여자는 와따나베라는 이름에 약간의 억양을 넣었다.
상훈은 현역 중의원이자 당대의 이론가인 와따나베에 대해 익히 듣고 있던 바였다. 이 연구소는 풍부한 재정으로 우수한 학자를 모아 일본의 역사해석과 국가의 통치이념에 대해 꾸준히 자료를 내놓고 있는 고급두뇌의 집합소였다. 소장인 와따나베의 영향력은 워낙 지대하여 일본국민에게 미치는 힘은 수십 명의 정치인과 비길 바가 아니었다. 상훈이 얼마 전 만났던 기무라 박사와 같은 일본 고대사 학계의 권위자로 대학으로부터 연구소로 유치해 왔을 정도로 연구소의 지명도는 높았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훈이 집에 돌아와 가또오의 메모와 사진을 꺼내놓자 이내 초인종이 울렸다. 이마무라 주임이었다.

"어, 이 사람은?"
주임은 상훈이 꺼내놓은 사진을 보자 깜짝 놀랐다.
"이 사진을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가또오의 서재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놀라시죠?"
"이 사람은 쥰이찌입니다."
"네?"
"여기 학생복을 입은 사람은 바로 살해된 쥰이찌입니다."
주임은 학생복을 입은 남자의 사진을 보자마자 바로 알아봤다. 그리고는 사진의 뒤편에 쓰여 있는 가또오의 메모를 눈길로 좇았다. 
"이 여자는 쥰이찌의 여동생임에 틀림없군요."
"쥰이찌와 닮은 걸 보니 그렇겠군요."
"아사꼬, 호적등본을 보니 그녀는 사할린으로 이주하였더군요."
"네? 사할린으로요?"
"그렇습니다."
"언제 이주하였습니까?"
"1944년입니다."
"왜 이주하였을까요?"
"이승우라는 한국인 남자와 혼인신고가 되어 있더군요."
상훈은 주임의 말을 들으며 사진을 차분히 뜯어봤다. 선량하고 귀엽게 생긴 여자의 웃는 모습이 부드러운 느낌을 주고 있었다.
<우에노 아사꼬>
여자는 옆의 학생복을 입은 남자와 너무도 닮았다. 역시 사진의 남매는 에이지와 그의 여동생이었던 것이다.
"사진의 뒤에 있는 메모로 보아 가또오는 아사꼬를 무척 사랑했던 모양이죠?"
"그렇지만 아사꼬는 가또오의 바람을 저버리고 사할린으로 가 버린 것 같군요."
"그런데 이해할 수 없습니다."
"무엇을요?"
"어째서 에이지는 보험의 수혜자를 사할린으로 가버린 아사꼬로 했을까요?"
"유일한 혈육일 가능성이 있겠군요."
"단 두 남매뿐이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에이지의 신원을 알아내는 것은 난관에 봉착했군요. 유일한 혈육이 사할린에 있다면,"
"그렇군요,"
"아, 그런데 아사꼬가 아직 사할린에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 당시 사할린으로 갔던 사람들은 모두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보험금은 아직 아무도 찾으러 오지 않았잖아요."
"이상하군요, 일본에 있다면 당연히 보험회사에서 연락이 닿도록 해두었을 텐데."
"사할린에서 돌아오지 않았거나 보험금을 상속할 혈육이 없이 사망했을 수가 있겠군요."
"내일 제가 알아보죠."
상훈은 아사꼬가 한국인인 이승우라는 사람과 혼인신고가 되어 있는 것이 특이하게 생각되어 그 사정을 알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17. 미귀 한국인


주임을 배웅하고 돌아오자 서울의 이 기자로부터 전화가 와 있었다. 
<돌아오는 대로 전화를 해주게.>
상훈은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무라 박사를 만나러 갔다가 그냥 나오면서 이 기자에게 편지를 한다는 것을 이제껏 깜빡 잊고 지내온 것이었다. 늘 쾌활하게 전화를 하던 이 기자의 음성이 가라앉아 있는 것으로 보아 기분이 좋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 미안해. 내가 연락을 한다는 것이 그만 깜빡했네."
"무슨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는 모양이야."
"아니, 그 반대야."
상훈은 기무라 박사를 찾아간 이야기를 했다.
"그렇잖아도 그것 때문에 전화를 걸었어. 자네에게 편지를 보내고 나서부터 나도 광개토대왕비에 대해 상당히 조사를 했어."
"그래? 사회부 기자가 별걸 다 조사했네."
"참, 얘기를 안했군, 그후 난 북한부로 옮겼어."
"그래?"
"각종 정보를 수집하다 보니 북한의 광개토대왕비에 대한 이론에 접하게 되더군,"
"광개토대왕비에 대하여 북한도 많은 관심을 갖고 연구를 해왔지. 비가 만주에 있어 우리보다 더 활발하게 연구를 할 수 있었어. 조중연합고고팀을 구성하여 이미 60년대 초반부터 비를 직접 조사했지."
"그런데 북한 학자들은 일본이 비를 조작했다고는 하지 않더군."
"북한학자들 중 광개토대왕비의 연구로는 박시형이 유명하지."
"박시형? 그 사람의 이론은 어떤 것인가?"
"그는 <백잔신라, 구시속민, 유래조공. 이왜이신묘년래, 도해파. 백잔□□□라, 이위신민. 이육년병신, 왕궁솔수군. 토리잔국. (白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 百殘□□□羅, 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利殘國)>이라고 떼어 읽지. 해석은 백제와 신라는 오랫동안 고구려의 속민으로 조공을 바쳐왔는데 왜가 신묘년에 내침하므로 바다 건너 이를 격파했다. 백제는 왜를 끌어들여 신라를 공격하고 신민으로 삼으매 왕은 병신년에 친히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토벌하여 승리를 거두었다고 보는 거지."
"그렇다면 그 수수께끼의 빈칸에는 무슨 글자가 있었다는 거지?"
"초왜침(梢倭侵)의 세 글자야."
"초왜침? 초왜침라가 되는군,"
"그렇지, 왜를 불러 신라를 쳤다는 얘기지."
"정인보 선생의 해석과 비슷하군, 다만 이위신민의 주어가 다르군, 일본의 해석과 크게 달라지는 이유가 뭐지?"
"도해파의 주어를 다르게 보기 때문이야, 일본의 학자들은 왜라고 보지. 박시형은 고구려, 혹은 왕이라고 보는 거야."
"슬픈 현실이군."
"왜?"
"남북분단의 원흉인 일본의 역사왜곡을 놓고 그 피해 당사자인 남북이 한 번도 공조체계를 취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야."
"이제 북일 수교가 되면 일본과는 서로 친구가 되고 남북간에는 적으로 남게 될 판이지."
"살맛 안 나는군,"
"살맛 안 나긴? 그럴수록 더 우리가 시대를 살아가는 의미가 크고 우리의 일이 기쁜 것 아닌가?"
"무슨 말이야?"
"용기를 가지자고. 나는 우리 세대가 통일을 이룩하는 과업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 오히려 기뻐. 태어나서 밥이나 먹고 육체적 쾌락만을 탐하다 죽는 것에 비하면 얼마나 크나큰 의미와 기쁨이 있는 일인가. 빼앗겼던 문화재도 찾고 역사왜곡도 시정 시키고 나아가서는 통일을 이루어 민족의 역사를 지키는 가슴 떨리는 일이 우리 앞에 있잖아. 나는 죽을 때까지 이 일에 매달리고 싶어. 역사 앞에 자신 있게 외치는 인간으로 살다 죽고 싶다는 말이지."
"그만해, 이정호 교수님이 생각나는군,"
상훈 역시 이 교수의 모습이 떠오르자 핏줄이 부풀어오르는 느낌이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한번 끓어올랐던 혈기는 쉽사리 가라앉지 않아 상훈은 스미다가와강이 바라다보이는 베란다에 나가섰다. 찬 밤공기를 들이마시며 상훈은 역사와 현실을 생각했다. 비록 제국주의의 야욕에 희생되고 이데올로기의 다툼에 의해 분단되었지만 이제는 우리 민족의 역량이 스스로 일어설 때가 되었다는 자신감이 가슴에 차올랐다. 숱한 고통을 겪고도 지금의 풍족한 사회를 물려준 앞세대를 생각하자 앞으로 자신이 해야할 일이 뚜렷이 눈앞에 떠올랐다. 그것이야말로 자신이 외국에 나와서 공부를 하는 의미라고 생각되어 상훈은 주먹을 굳게 쥐었다.

다음날 아침 상훈은 외무성을 찾아갔다. 사할린에 간 아사꼬에 대해 가족관계 등을 문의하니 담당자는 오랫동안 서류를 찾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반장이 조사한 대로 이승우라는 한국인 남자와 혼인신고를 하고 바로 사할린으로 갔다는 정도의 빈약한 사실 밖에는 기재되어 있는 것이 없었다. 꼬치꼬치 묻는 상훈에게 달리 더 해줄 것이 없는 모양인지 담당자는 사할린 한국동포협회를 일러주었다.
"사할린에 있는 한국인들에 관한 각종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식 조사된 것은 아니지만 우리보다 많은 정보를 갖고 있을 겁니다."
상훈은 매우 어렵게 사할린 한국동포협회를 찾을 수 있었다. 말이 협회지 생활보호대상자가 주로 사는 언덕 위 개인집의 방 한 칸에 그럴 듯한 간판 없이 차리고 있는 협회는 상훈 스스로도 찾아올 수 있었던 것이 대견할 정도였다. 여사무원 하나 없이 텅 비어 있는 것으로 보아 협회라는 것은 순전히 한 개인 혹은 겨우 살아갈 정도의 가난한 사람 몇이서 뜻을 모아 만든 것임에 틀림없었다. 오전에 찾아간 상훈은 저녁 때에나 아버지가 돌아오신다고 말하는 약간 말을 더듬는 열서너 살쯤 되어보이는 아이의 말을 듣고는 실소를 금치 못할 지경이었다. 무엇을 물어도 잘 대답도 못하는 아이를 대하며 이런 협회는 도대체 왜 만들어 사람을 애먹이는가 싶은 생각에 화도 났지만 어린 아이에게 화를 낼 수도 없는 일이라 나중에 오마고는 나와버렸다.
학교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고 저녁무렵에 다시 협회를 찾은 상훈은 아직 아무도 오지 않은 것을 보고는 방에서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영훈아, 아버지 왔다."
낡은 베니어판 하나로 만들어진 문 바깥에서 오랜만에 들어보는 한국어가 들렸다. 옆방에 있던 예의 그 아이가 뛰어나가 말을 더듬으며 뭐라뭐라 열심히 설명하는 모양이 상훈이 두 번이나 와서 기다리는 것이 제딴에도 안돼 보였던 모양이다. 상훈은 그냥 앉아 있기가 민망하여 일어나려 하는데 문이 열리며 시커먼 사람이 불쑥 들어왔다.
"두 번이나 오셨다면서요, 불편하게 해서 미안합니다."
"무슨 말씀을요, 반갑습니다."
상훈이 자세히 보니 동경에도 이렇게 사는 사람이 있나 싶을 정도로 육십년대 한국의 못살던 사람의 전형을 보는 것 같았다. 옆구리에는 누런 봉지에 무슨 저녁 반찬이라도 사온 양 감자며 파 같은 것이 비죽비죽 나와 있었다. 사십대로 보이는 사나이는 상훈의 눈길이 봉지를 스치자 겸연쩍은지 얼른 한 구석으로 봉지를 밀어놓으며 상훈의 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이상하게도 상훈은 처음의 불쾌한 감정과는 다른 연민의 정이 우러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얼마나 힘이 없고 돈이 없으면 이렇게 해놓고 협회라 칭하고 있을까 하는 마음에 이어 이렇게 해놓고 모이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일까 하는 궁금증마저 일었다. 문이 열리더니 아까의 그 아이가 밖에 선 채로 허리를 구부리고 낡은 찻잔을 들이밀더니 씨익 웃고는 문을 닫았다. 사나이가 무릎걸음으로 찻잔을 당겨 상훈의 앞에 밀어놓고는 다시 한 번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집사람이 아직 올 때가 안돼서 대접이 시원찮습니다."
"괜찮습니다. 제가 공연한 수고를 끼치게 하는군요."
사나이는 상훈이 인사로 차를 한모금 마시는 것을 기다렸다가 자신을 소개했다.
"김봉주라고 합니다."
"박상훈입니다. 동경대학교 역사학과 박사과정에 유학중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런데 무슨 일로 이 누추한 곳을 찾아주셨습니까?"
"혹시 무엇을 하나 확인할 수 있을까 해서 들렀습니다."
"무언데요?"
사나이는 금세 궁금한 기색을 띠며 물었다.
"혹시 사할린에 살았거나 현재 살고있는 한국사람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모두 다는 아니지만 어느정도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분의 이름은 무었입니까?"
"우에노 아사꼬입니다. 일본여자인데 나이는 약 팔십 정도입니다."
"네? 우에노 아사꼬라구요?"
상훈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깜짝 놀랐다. 
"아시는 모양이죠?"
"네, 알지요. 알아도 잘 알지요."
"만나본 적이 있습니까?"
"아니, 저는 만난 적이 없습니다만 그분은 사할린의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분이지요." 
"지금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분에 대한 이야기라면 저보다 김창린 씨께 직접 듣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 분 부부와 같이 사할린으로 가셨다가 돌아오신 분이니 너무도 잘 아시지요. 마침 이동네에 사시니 잠시 기다리십시오. 제가 가서 모시고 오겠습니다."
잠시 후 사나이는 도통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노인을 한 사람 부축해 들어왔다. 검은 얼굴에 온통 주름살과 반점 투성이의 노인은 겉보기 보다는 정신이 또렸한 듯 목소리도 카랑카랑했다. 오면서 사나이에게 설명을 들은 듯 앉자마자 아련한 기색을 떠올리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전쟁은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패전의 기색이 짙은 동경시내의 분위기는 무겁고 어두웠다. 와세다대학 문리대 영문과 유학중인 승우는 더 이상 학교를 다니기 어렵다고 느끼고 있었다. 몇 차례에 걸친 학도병 모집을 여태까지는 용케 잘 피해왔지만 이제는 더 이상 피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단계가 되었다. 하루에도 두차례나 형사들이 하숙집을 찾아와서 학병을 지원하지 않으면 불령선인으로 잡아넣겠다고 노골적으로 협박을 해왔다. 그토록 버티던 학교당국도 이번 주일부터는 휴교에 들어가고 있었고 학도병지원을 만류하던 교수들은 연행되어 갔다. 승우는 죽음의 그림자가 점점 더 짙게 드리워지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형사가 세 번이나 다녀간 그날밤 승우는 아사꼬를 만났다. 
"이제는 하루도 더 버틸 수가 없어. 지원하느냐, 붙들려가느냐 하는 형식만 남았어. 아사꼬, 그동안 너무나 행복했어. 오늘밤이 지나면 다시는 못 만날 것 같아. 잘 있어."
"같이 달아나요. 시골에 가서 숨어요."
"안돼, 나는 어차피 벗어나지 못할 운명인데 아사꼬까지 파멸시킬 수는 없어."
"우리 내일 결혼식 올려요. 일본인 부인이 있으면 학병을 면할 수 있잖아요."
"학병을 면하기 위해 아사꼬와 결혼할 수는 없어. 어차피 나는 끌려갈 운명이야. 잘 있어."
"승우 씨"
승우는 아사꼬를 두고 도망치다 시피 밖으로 나왔다. 아사꼬가 따라오지 못하게 골목길을 이리저리 돌아 선술집에 들어갔다. 그날 밤 마직막이라는 기분에 너무 많이 마신 승우는 한 취객과의 사소한 시비 끝에 주먹다짐을 했다. 순사에 붙들려 경찰서로 넘어간 승우는 학병을 지원하지 않는 조선인 유학생이라는 이유로 한 달간의 노역장 봉사라는 보안처분을 받고 땅굴 파는 공사에 끌려갔다. 지원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악랄한 처분이었다. 땅굴공사에는 조선에서 징용된 노동자들이 우글우글했다. 승우는 피골이 상접한 채 앙상하고 병든 몸으로 하루종일 오직 굴만 파는 그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조금이라도 처지거나 작업량을 채우지 못하면 혹독한 매를 맞았기 때문에 지하의 땅굴에는 신음과 비명, 울부짖는 소리가 가득찼다. 일하다 쓰러져 자력으로 일어나지 못하면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으므로 그냥 구덩이에 묻었다. 문자 그대로 생지옥이었던 것이다. 
 공사를 시작하기 전에 감독의 훈시가 있었다. 작업이 생각보다 더디게 진행되고 있으니 멸사봉공의 정식으로 가일층 분발하라는 것과 식량사정이 나빠서 배급을 줄인다는 내용이었다. 
"개새끼들"
승우의 바로 옆에서 욕지거리가 터졌다.
"누구야"
감독은 그냥 넘어가려 하지 않았다.
한 놈울 잡아서 본보기를 보이려는 생각에 그는 악착같이 추궁했다. 자수할 때까지 이런저런 트집을 잡아 감시병을 시켜 몇 명을 개패듯 했다. 그래도 나오지 않자 감독은 삽을 들었다.
"정말 안 나올 텐가"
일순간 긴장이 감돌았다. 감독이 소리났던 쪽으로 다가오자 다들 떨기 시작했다. 포악하기 짝이없는 감독이 삽으로 무슨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감독은 승우쪽으로 다가 왔다.
승우는 자신의 몸이 떨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두려움만큼이나 강한 증오심은 감독을 향한 것이 아니라 옆에서 욕을 한 자에 대한 것이었다. 왜 빨리 자수를 안해서 엉뚱한 사람이 당하도록 하는지 원망스런 생각뿐이었다. 본래 무자비하게 생긴데다가 악까지 받친 감독의 잔학한 몰골은 승우를 공포에 질리게 했다. 승우는 혹시 감독이 자신을 지명할지 모른다고 생각이 들었다. 아니 감독이 가까워질수록 자신도 모르게 온몸이 떨려오는 것이었다. 역시 감독은 승우의 앞에 섰다. 처음 보는 얼굴의 승우에게 혐의를 두는 것은 당연했다.
"너, 이리 나와."
승우는 옆 자리에 있는 소리의 주인공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자발적으로 나가지 않으면 감독에게 얘기를 할 참이었다. 그러나 승우의 증오스런 눈길에 이제 불과 열 다섯 정도로 보이는 소년의 하얗게 질린 얼굴이 들어오는 순간 승우는 말없이 감독의 앞으로 나섰다. 보통의 피징용자들과는 달리 조금도 굴하지 않는 자세로 나오는 승우의 복부에 감독의 구둣발이 사정없이 날아들었다.
"윽."
외마디 비명과 함께 쓰러진 승우의 목덜미께로 감독의 독기어린 삽날이 날아들었다. 바로 이때였다.
"잠깐."
삽날이 허공에서 춤을추며 멈추었다.
벌겋게 핏기가 올라 광기를 띤 감독의 눈이 사람들을 거칠게 훓고 소리난 쪽에 멈추었다. 징용자들의 시선도 모두 소리난 쪽으로 쏠렸다.
"내가 그랬소."
나직한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승우의 옆에 서 있던 노인이었다, 경상도 어디에서 자식대신 자원했다는 오십대 후반의 김 농인이었다. 한학에 조예가 있고 사람이 점잖아 징용자들이 정신적 지주로 믿고 따르는 인자한 사람이었다.
"네가 그랬다고?"
감독이 핏발선 눈으로 노려봤다.
"그렇소"
"분명히 네가 그랬단 말이지."
"그렇소, 내가 그랬소."
가슴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의연한 목소리였다. 굶주림과 혹독한 노동에 지친 노인의 어디에서 저런 목소리가 나올까 의심이 가는 당당하고도 힘찬 목소리였다. 굶주림과 혹독한 노동에 지친 노인이 어디에서 저런 목소리가 나올까 의심이 가는 당당하고도 힘찬 목소리엿다. 감독은 느릿느릿 노인의 앞으로 걸어왔다. 무시당했다고 느끼는 무지한 자의 전형적 복수심이 불타오르는 양 잔인한 웃음이 흐르는 얼굴은 괴상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지탱하고 서서 억지로 가슴을 펼쳐보이고 있는 노인의 앞에 서서 감독은 다시 한 번 물었다. 이미 그 물음에는 진실을 확인하는 이미는 없었다. 광기를 불어넣고 피를 부르기위한 준비일 뿐이다. 이미 마음을 굳힌 노인의 목소리는 여전했다. 노인의 대답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삽을 잡은 손등의 힘줄이 굼틀 하는가 싶더니 땅바닥에서는 세찬 피가 튀었다. 조금 전까지도 힘차던 노인의 목소리는 이내 단말마의 비명으로 잦아들었고 당당한 태도는 모래더미처럼 무너져 버렸다.
흥분한 감독의 삽날이 황혼녘에 붉게물든 태양을 가리고 허공 중에 지켜져 올랐다. 일거러진 얼굴에 게걸스런 웃음을 흘리며 벌레처럼 사지를 떨고 있는 노인의 가련한 몸둥아리에 핏발선 눈길을 보내던 감독의 관자놀이가 꿈틀거렸다. 이미 피 맛을 본 팔뚝에 다시 한번 힘이 들어가자 석양을 가렸던 삽날이 노인의 앞면을 향해 크게 원을 그렸다. 못 먹고 노역에 시달려 주먹만해진 노인의 얼굴에 예리한 삽날이 떨어지는 순간 승우의 발길질이 감독의 사타구니에 꽂혔다. 쓰러진 감독의 안면에 다시 승우의 발길이 날자 감독의 얼굴은 피로 물들었다.
"어르신 정신 차리십시오"
으으 젊은이 죽는 데도...... 순서가 있어. ...... 먼저 내가 죽고  다음은 젊은이가 죽고 마지막까지 저 아이를 지켜 주어야 해. 으으, ..... 그게 이 땅에 끌려온 우리가..... 우리가 할 수 있는 도리야..... ."
마지막말은 잇지도 못하고 고개를 꺽고마는 노인의 머리를 놓고 악에 바친 승우가 쓰러진 감독을 덥치는 순간 감시병들의 곤봉이 뒤에서 떨어져 내렸다. 비명과 함께 쓰러진 승우를 일으킨 병사들이 뒤에서 양팔을 꺽자 감독은 번개처럼 일어나 닥치는 데로 손발로 차고 때렸다. 그러나 맨손으로 직성이 풀리지 않았던지 감시병들이 들고 있던 곤봉을 뺏아 쥐었다.
피 맛을 본 팔뚝에 잡힌 곤봉이 다시 허공에 춤을 추었다. 눈 코 얼굴을 가리지 않고  떨어지는 곤봉에는 삽시간에 피가 버얼겋게 피가 배었다.
"멈춰"
미친 듯이 감독의 곤봉이 승우의 머리를 찍으려는 순간이었다. 날카로운 목소리와 더불어 젊은 군인 한 사람이 달려와 감독의 손에 들려있는 곤봉을 나꿔챘다.
"어떤 놈이야"
작업장내에서 두려울 것이 하나 없는 감독은 호통과 함께 돌아섰다. 돌아서는 감독의 빰에서 철썩 소리가 났다. 이어서 차가운 쇳덩어리가 턱에 박혔다. 권총이었다.
"개새끼 죽여 버릴테다."
번쩍 정신이 든 감독의 눈에 군인의 견장이 들어왔다. 육군대위. 견장 옆에 빨간줄이 쳐저 있었다.
에이지 대위.
승우는 에이지 대위가 자기 때문에 온 것을 알았다. 자기가 돌아오지 않자 아사꼬는 오빠를 찾아가서 부탁했을 것이다. 에이지는 경찰서를 수배해서 자신이 노역장에 끌려간 것을 알고 이제 데려가려고 왔을 갓이다. 그러나 승우는 가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노인의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이 생 지옥에서 동포들이 겪는 고통을 피해가서는 안된다는 결심을 했다. 
"아사꼬에게 잊으라고 얘기해주세요. 어짜피 우리 운명은 다른 길로 갈라섰습니다. 내가 아사꼬를 위해 아사꼬가 나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지금 서로가 해어지지 못하면 두 사람이 다 불행해질 것입니다."
묵묵히 듣고 있던 에이지는 그냥 돌아가고 다음날 승우는 조선인 징용대에 지원했습니다.
징용대에서 하루하루는 죽음과의 외로운 싸움이었습니다. 열다섯 살의 소년으로부터 육십의 노인에 이르기까지 악에 받쳐 할당량에 허덕여 댔다. 오빠로부터  승우의 소식을 들은 아사꼬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승우를 찾아왔다. 승우가 속한 징용대가 사할린으로 징용되어 간다는 것을 알게 되자 승우의 도장을 위조 혼인시고를 하고 같이 가겠다고 따라 나섰다. 결국 승우는 어느 외박날 아사꼬를 가지고 말았다. 사할린으로 떠나는 날 소식을 듣고 달려온 에이지에게 아사꼬는 처여란 웃음을 머금고 이렇게 말했다.
"아무 죄도 없이 고향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든 한국인을 우리는 총칼로 끌어다가 짐승처럼 부리고 함부로 죽이고 있어요. 나는 이 무서운 범죄를 한국인에게 용서받아야 해요. 남들은 사할린이 춥고 어두운 섬이라고 하지만 나는 동경이야말로 검은 죄악의 도시라고 생각해요."

김창린 씨의 얘기는 여기서 끝났지만 상훈의 귓전에는 아사꼬의 목소리가 사라지지 않았다. 아사꼬는 비록 여자였지만 그 가파르던 시절에 왜곡된 민족의 우월성을 거부하고 진정한 인간의 길을 걷기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는 생각이 상훈으로 하여금 숙연한 느낌을 갖게 했다.
"이분들은 후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직도 사할린에 있을 거요. 이들 부부는 일본으로도 한국으로도 갈 수 있었겠지만 지난 오십 년을 그 춥고 어두운 섬에서 살아왔소. 그들은 다른 징용근로자들과 운명을 같이 하는 것이 자신들의 도리라고 생각했소."
"징용근로자들은 전쟁이 끝나고도 한국에 돌아올 수 없었단 말입니까?"
"그렇소 아무도 돌아올 수 없었소. 90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죽음을 눈앞에 둔 노인들이 조국을 방문할 수 있었을 뿐이요."
"따지고 보면 다 우리 민족의 역량이지, 남양에 징병으로 끌려갔다가 전후에 일본인들은 대다수 빠져나가고 바보같은 우리 한국인들만 전범으로 처형된 것과 같은 것 아니겠소."
노인은 패배주의에 젖어 있는 듯했다. 무리도 아닌 것이 그가 살아온 인생의 한때라도 한국인들이 국제관계에서 설움을 맛보지 않았던 적이 없었을 것이었다.
"그래도 구체적인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우선 일본이 그들을 내버렸지. 오랫동안 광부로 노동자로 써먹다가 전쟁이 끝나자 일본인들만 송환협상의 대상으로 했단 말이오. 데리고갈 때는 내선일체다 머다 해서 한국인들도 일본국민이라던 놈들이 전후에는 완전히 외면하고 말았지. 일본인들만 실은 배가 떠나는 콜샤코프의 부두는 온통 울음바다였소. 고향에 가지 못하는 한국인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어쩔 줄을 몰라 했소. 어제까지도 같은 처지에 있든 일본인들과 판이하게 멀어저가는 운명에 모두들 절규하고 있었소. 그래 원흉은 모두 고향으로 돌아 가는데 그들의 희생양 우리는 그 척박한 동토의 땅에 그냥 남겨진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이오. 진정 하느님에게 버림받은 민족이라는 조국을 원망하는 것 밖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소. 일본인들을 싣고가는 배에 숨어 들어갔다가 매를 맞으며 개처럼 끌려나오는 동포들을 보며 우리는 눈물을 삼켰소.
"우리정부는 협상을 하지않았던가요."
"당시에 우리정부라는 것이 없었소. 한국에는 미군이 군정을 하고 있었고 쏘련을 상대로 한 송환협상은 연합군 사령부가 했소. 연합군 사령부는 한국인들이 사할린에 있다는 사실에 무지했소. 그들은 일본정부가 올리는 명단에 따라 쏘련과 협상을 했는데 일본정부는 혈통적으로 일본인인 사람들의 명단만을 제시했던 것이오."
"이승우와 아사꼬는 돌아 올 수 있었을 것 같은데요. 1959년 송환 때에는 일본인을 아내로 가진 사람들은 돌아 올 수 있지 않았습니까?"
"두 사람은 사할린에서 귀환운동을 전개하고 있었소. 동포들을 그냥 두고 자신들만 단지 일본인 아내를 갖는다는 이유로 돌아오게 되는 것을 단호히 거부 했소. 그들을 두고 자신들만 돌아오는 것은  또 하나의 범죄행위라고 생각했소. 아사꼬의 오빠가 두 번이나 사할린에 들어가 두 사람을 설득 했지만 막무가내였소. 아사꼬는 오빠에게 자신들은 사할린에 버려진  한국인들과 운명을 같이 하겠다고 말했소."
협회를 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상훈의 귀전에 노인의 마지막 한마디가 쟁쟁하게 울렸다.
"우리가 일본사회에서 최하민층 생활을 면치 못하면서도 이렇게 협회라고 만들어 계속 일본정부에 진정 호소 탄원하는 것은 아직도 우리가 떠나올 때 부두에 메달리던 동포들을 잊지 못해서요. 사할린에서 일본으로 돌아 왔을 때 동경으로 오는 기차에서 한국인인 나는 빼고 처와 아들에게만 일본정부의 도시락이 지급되더군. 멋모른 아이들에게 내가 한국인인 것이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소. 일본정부는 도시락 하나로 우리가정에 아버지의 위신이라는 것을 빼앗아 갔소. 그래 같은 가족인데 나 한 사람 도시락을 지급 할 이유가 없단 말이오. 처가 울음을 터뜨리며 도시락을 네게 주고 자신은 객실 밖으로 나가버렸소. 그 말랑말랑한 도시락과 함께 한일 양국정부의 알량한 관심도 같이 철로갱목 사이에 던져버렸소. 일본정부나 한국정부에 사할린동포를 맡겨 두었다간 사 만명의 한국인 중 주기 전에 고향을 밝을 수 있는 사람이 단 열 명도 안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소. 나는 동경에 오자마자 첫술을 뜨기도 전에 동포귀환을 위한 탄원소부터 냈소. 지금도 울고 메달리던 그들을 잊을 수 없소."
 상훈은 가슴이 저려왔다. 사할린동포들의 고통스러운 절규가 생생히 들리는 듯했다. 어째든 아사꼬가 사할린에 살고 있다는 사실은 밝혀졌다. 에이지는 한국인에 대해 남다른 견해를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상훈은 아사꼬를 만나러 사할린에 가야 할까하고 생각했지만 이미 오십 여 년 전에 떠나 그 곳에서만 생애를 보낸 아사꼬에게 얻어낼 수 있는 것은 없을 꺼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김창린 씨의 얘기가 전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에이지가 그 시절 육군대위로 있었다는 사실은 어쩌면 큰 수확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18.  비밀결사


1972년 12월
새로이 밝혀진 에이지라는 인물에 대한 정보를 곰곰 따져보던 상훈은 쾌재를 불렀다. 상훈은 에이지가 나까가와 교수에게 가께아끼에 대한 정보를 주던 시기와, 이름을 바꾸고 행적을 은폐한 채 어디론가 사라진 시기가 비슷한 것은  같은 기억을 떠올렸던 것이다. 이마무라 형사가 건네준 에이지의 기록을 꺼내 확인한 상훈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렇다면 에이지는 나까가와 교수께 정보를 주면서 자신의 안전이 위협받을 것으로 생각했다는 얘기가 될 수도 있다. 몇 차례나 곰곰 생각하던 상훈은 에이지의 살해현장에 이상한 점이 있던 것을 떠올렸다. 
'본인의 기록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지 않는가.' 
보통사람도 한 평생을 살고 나면 잡다한 기록들이 있게 마련인데 그토록 많은 자료를 가지고 연구하던 에이지에게 수첩 하나 편지 하나 없었던 것은 이상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지난번 니꼬에 갔을 때에는 벼로 생각지 못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 하니 이것은 확실히 이상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 때는 왜 이 생각을 하지 못 했을까 생각하던 상훈은 서재를 어지럽힌 흔적이 전혀 없기 때문에 미처 주목하지 못 했던 것을 깨달았다. 
 범인은 에이지를 살해하고 나사 책 뒤에 붙은 종이만 떼어갔고 따라서 현장은 너무도 깨끗했다. 그런데도 에이지의 기록이 아무 것도 없었다면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범인이 현장에서 가져갔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기록의 분량이야 어떨지 몰라도 메모지 한 장 남기지 않고 샅샅이 훑어간 것을 보면 에이지를 살해한 직후 현장을 뒤져 가져간 것이 아님은 분명했다. 그렇게 보기에는 너무도 깨끗했다.
여기까지 생각했던 상훈의 뇌리에 퍼득 가오또의 기록들이 떠올랐다. 가오또도 역시 아무런 기록이 없었다. 에이지와는 경우가 다르지만 본인의 기록이 없었다는 현상은 같았다. 두 사람의 경우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개인의 기록이란 것이 아무리 타인이 샅샅이 뒤진다 하드라도 이처럼 완전하게 훑어갈 수는 없을 것이고 보면 본인 이외에는 의미 있는 기록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에이지는 기록을 스스로 없앴 을까. 도대체 어떤 경우에 그럴 필요가 있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가또오의 경우 자신이 기증을 했기 때문에 그렇다 하드라도 에이지는 이름조차 바꾸면서 숨어 살든 사람이고 보면 어디에 무었을 기증한다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개인적인 기록이 없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면 두 사람은 모두 비슷한 환경에 처해 잇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그 같은 환경이란 무었이란 말인가.
현재로서 확인되고 있는 두 사람은 모두 같은 시기에 학생이었다는 점이다. 이마무라 반장이 학적부를 조사했으나 졸업 후의 행적은 아무 것도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잡다한 본인의 기록이 없다는 이유가 단순히 같은 대학에 다녔다는 것만으로는 설명될 수는 없다. 도대체 두 사람은 어떤 환경을 공유했을까. 상훈이 이런 생각에 빠져 도서관에서 멍하니 밖을 바라보고 있을 때 이마무라 주임의 투박한 목소리가 들렸다.
"왠지 이해가 안되는 일이 있어 찾아 왔습니다." 
주임은 상훈이 안내한 음식점 다다미에 엉덩이를 붙이기가 무섭게 말문을 열었다. 몇 번 만나는 사이 상훈은 그의 솔직하고 성실한 모습에 정이 들어있던 참이라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뭘 좀 드셔야지요. 시장하실 텐데."
"네, 저는 계란덮밥을 먹겠습니다. 박 선생님은 뭘로...."
"같은 걸로 하지요."
상훈이 종업원을 불러 음식주문을 마치기가 바쁘게 이마무라 주임은 말을 이었다.
"사건을 처음부터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박 선생님이 알려준 사실들을 종합해보니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나더군요. 그래서 수사관으로서의 저의 직감이 비로소 자리를 잡게 되고 저는 이상한 사실에 착안하게 되었습니다."
상훈은 어쩐지 이마무라 주임의 착상이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는 이 사건에 관계하고 있는 사람들 중 유일한 전문수사관인데다가 평소 에이지를 알고 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바로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더라도 상훈이 밝혀낸 사실들을 바탕에 놓고 보면 베테랑 수사관으로서의 감각이 잡히기 마련일 것이었다. 
"에이지는 파출부를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집을 비울 계획이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범인은 에이지의 이러한 계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가 집을 떠나기 직전에 에이지를 살해했습니다. 또한 범인은 에이지가 매우 중요한 종이의 책의 뒷장에 붙여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즉 범인은 에이지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저는 이 점이 매우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불규칙하게 순찰을 했다 하더라고 닛꼬 경찰서의 형사들이 하루에 한 번쯤은 빠지지 않고 에이지의 집을 들렀기 때문입니다. 형사들의 눈에 띄지 않고 에이지를 감시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게다가 에이지도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파출부의 말에 의하면 에이지는 살해되기 전에 전화로 누군가와 심하게 싸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에이지는 형사들이 자신을 보호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무슨 문제가 있더라도 형사들에게 얘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에이지는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물론 에이지는 형사들에게 얘기해서 문제를 야기시키는 것보다 조용히 사라지는 것을 편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집을 떠나야 할 정도로 급한 상황에 있었던 에이지가 형사들에게 아무런 말이 없었던 것은 아무래도 이상한 일입니다.
곰곰 생각해 보니 그가 경찰을 믿지 않았다는 것밖에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경찰은 그를 보호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한 거죠. 이것을 달리 생각해 보면 그를 협박하고 있는 자가 한 개인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합니다. 이니 오히려 매우 거대한 조직을 같고 있거나 무서운 힘을 가진 자들일 것입니다."
이마무라 주임은 거침없이 여기까지 얘기하고는 상훈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상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마무라 주임도 같은 추리를 하고 있었다. 문제의 열쇠는 역시 가또오였다. 그가 자신의 사적 기록 등을 모조리 연구소에 기증한 것이나 서재에서 보았던 그 메모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분위기 등이 모두 이마무라 주임이 거대한 조직의 냄새가 난다고 하는 말고 일차하고 있는 것이었다.
"정확하게 사건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것 같군요. 저도 비슷한 생각입니다. 다만 그 조직이 거대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흔적이 없다는 것이 매우 이상합니다. 에이지의 기록을 찾기만 한다면 모든 일이 쉽게 풀릴 것 같은데 어디서 찾아야 할지 모르겠군요."
"범인이 에이지의 기록을 모두 가져갔을까요?"
"아닌 것 같아요. 그렇게 보기에는 현장이 너무도 깨끗했어요, 평소에 누군가가 에이지의 기록을 가져갔다고 보아야 하는데 그런 일이 본인의 의사에 반해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죠. 그렇다면 에이지도 가또오같이 과거 자신의 경험과 관련한 자료를 누구에겐가 넘겼다고 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누구에게 넘겼을까요?"
"글쎄요. 현재로서는 알 수가 없는 일입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가또오와 에이지의 경우가 너무 비슷하다는 겁니다. 따라서 아무것도 드러나 있지 않은 에이지를 찾는 것보다 그나마 약간이라도 드러나 있는 가또오를 추적하는 것이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두 사람의 경우가 비슷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에이지나 가또오나 자신들의 경험이나 생각을 기록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거죠. 경우는 다르지만 결과는 똑같아요."
"어째서 이런 결과가 생기는 걸까요?"
"글쎄요, 저로서도 이 기이한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알 수가 없군요."
이렇게 말하는 순간 상훈의 머리에는 퍼뜩 무슨 단어인지가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막상 무슨 단어인지는 떠오르지 않아 상훈은 얼굴을 찌푸리며 그 단어를 생각해내려 애썼다. 뿌연 안개 속의 막연한 분위기는 느꼈지만 그것을 정확히 한 단어로 끄집어내는 것이 의외로 어려웠다. 언젠가 어린 시절 읽었던 책에, 아니면 영화에 이와 비슷한 경우가 있곤 했고 그때에 이런 사람들은 늘 어떤 조직을 이루고 있지 않았던가. 그들은 모두 조건을 공유하고 때로는 목숨까지도 같이 나누고 자신들만의 어떤 목적을 위해 일을 하다가 그중에 어떤 배신자가 생기면 모든 것에 우선해서 그 사람을 죽이고 만다. 왜냐하면 배신자를 살려두는 것은 조직의 와해를 부르게 되고 결국은 구성원 모두의 목숨을 빼앗아 가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동네 아이들과 전쟁놀이를 할 때에도 늘 네편 내편 나누고는 무엇보다도 배신하지 않을 것부터 맹세하고 하지 않았던가. 이렇게 생각하던 상훈은 뇌리에 아물아물하던 그 단어가 푸드득 날개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비밀결사>
그렇구나.
바로 그것이다.
이 단어가 뇌리에 들어오자 모든 의문이 한꺼번에 풀려나가는 듯했다. 무엇보다도 에이지와 가또오의 기록이 같이 없다는 희귀한 현상에 대한 설명이 되었다.
'에이지와 가또오는 같이 학교를 졸업한 후 무엇인지 모르지만 비밀결사에 가입하여 매우 중요한 일에 종사했었다. 보안을 유지한다는 차원에서 비밀결사의 회원들은 자신들의 기록을 모두 한군데 모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름을 바꾸던 무렵부터 에이지는 비밀결사의 다른 조직원들과 의견이 크게 대립되었다. 에이지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에 비밀결사는 늘 에이지에게 위협이 되었고 에이지는 오랜 세월을 협박을 받으며 살아왔다.
그런데 어느날 조용히 살아오던 에이지에게 무슨 변화가 생겼음을 비밀결사에서는 파악한다. 이것은 에이지의 주변에서 늘 에이지를 감시하던 자가 알아내 비밀결사의 누구에겐가 보고했을 것이다. 비밀결사는 에이지에게 전화를 걸어 무언가를 종용한다. 그러나 에이지가 거부함으로써 비밀결사에서는 킬러를 보낸다. 킬러는 에이지를 살해하고 책의 뒷장에 붙어 있는 종이를 떼어갔다. 그 종이에는 무엇이 기록되어 있을까?
비밀결사에서 에이지를 살해했다는 생각은 상훈의 뇌리에 전율을 일게 했다. 이마무라 주임의 분석은 정확했다. 이들이 에이지 살인의 배후에 있는 한 에이지는 경찰을 믿을 수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결국 에이지는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못하고 혼자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있다가 비명에 갔을 것이다. 측은한 생각과 더불어 기필코 에이지를 살해한 배후세력을 규명해야 한다는 생각이 상훈을 더욱 무겁게 짓눌러왔다. 우선은 가또오가 자료를 기증한 대동아연구소에 가보아야 할 것이었다.



19. 대동아연구소


다음날 상훈이 찾아갔을 때 대동아연구소 앞에는 커다란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소장인 와따나베의 정기 강연이 있는 날이었다. 상훈은 강연을 한번 들어보기로 했다. 이날 강연의 주제는 <동서문화의 충돌과 아시아의 안정>이라는 것이었다. 강연회장은 인산인해랄 정도는 아니었지만 제법 많은 사람들이 서서 들어야 할 정도였다.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상훈은 이 강연에 나온 사람들의 다양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늘 신문에서 보아오던 일본 정계의 실력자는 물론이고 전임 수상까지 나와 와따나베와 반갑게 악수를 나누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누가 보아도 어두운 세계의 대부쯤으로 보이는 사람들과 야꾸자의 행동대원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거침없이 와따나베와 악수를 나누고 실제로 와따나베는 이들을 어느 비중 있는 정객 못지 않게 정중히 또 반갑게 맞았다. 
일단 와따나베의 연설이 시작되자 인사를 나누느라 소란하던 사람들이 정숙하기 그지없는 자세로 경청했다. 와따나베의 연설은 청중들을 깊숙이 끌어당겼고 청중들은 연설의 중간중간마다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나는 세계사를 다시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랜 인류의 역사 속에 우리 동양인들은 매우 유연하고 깊이 있는 정신세계를 구축해 왔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인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확하게 짚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또한 동양의 인류는 고유하고 의미있는 문화를 오랫동안 유지해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서양은 동양문화에 대해 어떤 평가를 하고 있습니까? 물질문화가 한 발 앞섰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은 동양의 문화를 업신여기고 짓밟았습니다. 그들은 아시아를 오직 착취의 대상으로만 생각했고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할 것 없이 선진국이라는 선진국은 모두 아시아로 날카로운 착취의 발톱을 곤두세우고 몰려왔습니다. 인도, 중국, 동남아시아, 서아시아의 어느 나라도 그들의 착취의 손길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오직 우리나라만이 그들의 음험한 미수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동양문화의 고유한 가치를 지키고 동양인의 정신을 지키기 위하여 분연히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한 발 앞서 세계의 변화를 따라잡은 우리의 당연한 의무요. 책임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는 태평양 전쟁을 새로운 각도에서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때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에 맞섰기 때문에 아시아는 해방되었습니다. 우리의 희생은 아시아의 국가를 해방시키고 새로운 발전을 가지고 오게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라는 국가는 모두 무엇이었습니까? 우리가 모든 것을 전수해준 나라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역사적 통찰력이 없는 천박한 정치가들은 지금에 와서 태평양 전쟁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범죄행위라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앞세대가 그 고귀한 목숨을 바쳐가면서 지켜온 아시아의 정신이 지금에 와서 이런 자들에 의해 짓밟히고 있습니다.
일본은 다시 나서야 합니다.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일본만이 서구문화의 오류를 지적하고 아시아의 가치를 주창할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아시아의 국가들을 대표하여 아시아에도 문화가 있고 역사가 있음을 보여야 합니다. 우리가 미국이나 유럽에 갔을 때 그들이 우리에게 보이는 멸시에 찬 눈초리가 잘못된 것임을 분명히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선대들의 희생을 값지게 계승해야만 합니다."
이 같은 와따나베의 연설에 사람들은 진심으로 공감하는 듯했다. 상훈은 안내자에게 물어 가또오의 자료가 기증된 연구소의 도서관을 찾았다.
"네, 자료들을 공개하지 않는다구요?'
"그렇습니다. 우리 연구소의 자료들 중 현재 검토중에 있는 것들은 공개하지 않습니다."
상훈은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직원을 바라봤다.
"연락처를 주시면 공개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직원은 공손했으나 쌀쌀맞게 대답했다.
"그것은 온당치 않은 것 같습니다. 저는 바로 가또오 선생의 분야를 전공하는 학생입니다. 어떤 도서관이나 연구소의 자료도 보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상훈의 언성이 높아지자 지긋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상훈이 힐끗 돌아보니 관장이라는 명패가 보였다.
"동경대학 동양사학 박사과정의 학생입니다. 논문을 쓰는데 참고로 할 자료가 있을 것 같아서 왔습니다만 자료의 공개하지 않는다는 것은 뜻밖이군요."
"아, 그렇소? 그럼 내 후배가 되는군, 미나미 교수는 잘 계신가요? 우린 동기였소. 이봐, 마쓰모도. 무슨 자료인데 그러나?"  
"가또오 씨의 자료인데 아직 검토가 끝나지 않아 기획실에서 비공개 분류를 한 것입니다."
"무식한 자들 같으니, 도서관의 자료를 자기들이 뭔데 비공개 분류를 하고 그래."
오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관장은 무척 자존심이 상하는 모양이었다. 그냥 두었으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것을 그는 상훈이 동경대학의 박사과정에 있다고 말한 것에 신경이 쓰여 관여를 했다가 까다로운 문제에 봉착한 것이었다. 대학이든 연구소든 도서관장의 권위는 대단한 것이어서 자신의 이대로 주저앉을 경우 소문이 날 것이 두려웠다.
"보려고 하는 자료는 어떤 것이오?'
"가또오 선생의 역사에 대한 이해, 자신의 경험에 의거한 사관 같은 것입니다. 정식 출판된 책에서는 찾기 어려운 것을이라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데 비공개라니 유감입니다. 선생께서도 자신의 자료가 비공개로 사장되는 것을 원치 않으실텐데 왜 공개를 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군요."
"이봐, 마쓰모도, 자료를 보시게 해드려,"
"관장님, 그렇지만......."
"기획실장에게는 나중에 내가 얘기하겠어."
직원은 마지못해 상훈을 안내해 직원외 출입금지라고 쓰여진 방으로 들어갔다.
"이 칸에 있는 것들이 가또오 선생의 자료들입니다. 위치를 바꾸어 놓지 마십시오."
직원이 나가자 상훈은 급히 자료를 살폈다. 언제 직원이 다시 들어와서 그만 보라고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가또오가 쓴 연구논문이나 학술적 단상보다도 주로 수첩 등을 살피던 상훈은 가장 최근의 것으로 보이는 수첩을 넘기다 한 귀퉁이에서 이상한 구절을 발견했다. 

'단순한 역사 해석의 차이로만 보기에는 우리는 이미 너무 멀리 갈라서고 말았다. 일본의 역사는 그렇듯 쉽게 묻혀버리진 않을 것이다. 울란 야호이의 동지들을 잊지 마라,'

지난번 가또오의 책 한 귀퉁이에 적혀 있던 것과 맥이 닿는 구절이었다. 이때 급히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상훈은 얼른 노트를 꽂아 두고 옆자리에 있는 적당한 논문을 꺼내 들었다. 아까의 직원이 황급히 들어와서는 상훈을 제지했다.
"약간의 착오가 생겼습니다. 이 자료들은 고증이 안되고 있어서 학계에 논란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기 때문에 아직은 비공개로 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관장님의 착오였습니다. 이해해주십시오."
상훈은 매우 불만스러운 태도로 논문을 덮었다. 직원에게 논문을 넘기고 투덜거리며 밖으로 나온 상훈에게 직원은 연신 고개를 숙이며 미안해했다. 상훈은 관장에게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시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이제 곧 정리하여 공개를 하겠소, 미안하오."
관장은 유감스러운 표정으로 상훈을 배웅했다.
상훈이 발견한 가또오의 메모 내용은 살벌한 느낌을 주었다. 뭔가 에이지과 가또오의 관계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듯했다. 가또오가 토로하는 불만과 배신의 감정은 에이지에 대한 경고였다. 그럼 에이지는 이에 불응하다가 종내는 죽음을 당하고 만 것인가?
어쨌든 문제는 <울란 야호이의 동지들>임이 분명했다. 도대체 그 뜻을 종잡을 수가 없는 이국적 단어는 상훈의 호기심을 강하게 불러 일으켰다.
<울란 야호이>



20. 울란 야호이


"울란이란 것은 <붉은>이라는 뜻을 가진 몽고어입니다. 그러나 야호이라는 말은 몽고어 계통이 아니에요. 음성학적으로는 시베리아 토족의 말 같은 느낌을 주는군요. 몽고가 시베리아에 진출하던 시기에 두 지역의 언어가 합성되어 만들어진 단어일 가능성이 많을 것 같군요."
"만약 그 단어의 뒤에 동지들이란 말이 붙는 다면 그 단어의 성격을 알아내는 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까?"
"동지들이요?"
"네, 울란 야호이의 동지들이라면요."
"음, 그렇다면 그것은 어느 지역의 이름이기가 쉽겠군요."
교수는 지도를 꺼냈다.
"울란 바토르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바토르는 몽고어로 용사라는 뜻이죠. 붉은 용사라는 이름의 이 도시는 몽고의 수도입니다. 그 위를 보십시오."
교수는 손가락으로 울란 바토르의 위를 직선으로 그었다.
"울란 우데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시베리아의 한 도시입니다. 다시 그 옆을 보십시오. 울란 부르가시라는 이름의 산맥이 있습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울란 야호이라는 것은 이 울란 부르가시 산맥 부근의 어느 지역을 나타내는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만 문헌 같은데 나타난 것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까?"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 밖에는 모를 겁니다. 넓은 지역이 아니라 의외로 작은 마을이나 낮은 산 혹은 언덕을 표시하는 말일 수도 있거든요. 러시아인이라 해도 알 수 없을 겁니다."
친절한 교수는 전화를 걸아 러시아인 교수 몇 사람에게 한참 동안이나 물어보더니 결국은 성과없이 전화를 내려놓았다.
"직접 가보는 수밖에 없을까요?"
"간다고 해도 알 수 있다는 보장은 희박합니다. 이제까지는 저의 짐작에 불과하니까요. 그러나 지구상에세 그런 합성단어가 있을 수 있는 지역은 거기뿐일 것 같군요."
"고맙습니다."

상훈은 며칠째 울란 야호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찾아내려고 애썼지만 어느 나라 사전을 찾아봐도 울란 야호이라는 말은 없었다. 게다가 같은 대학 내긔 언어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도 울란 야호이라는 말의 어원이나 쓰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자신있게 얘기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이런 종류의 말이 중앙아시아와 시베리가 부근의 언어일 것이라는 데에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같이하고 있었다. 그래서 상훈은 시베리아 토족의 연구로 이름있는 동경여대의 아이와 교수를 찾아왔던 것이다. 
아이와 교수와 헤어진 후 상훈의 발길은 저절로 하야꼬가 있을 미대 건물로 향했다. 교무처에서 하야꼬의 시간표를 확인한 상훈은 강의실로 찾아갔으나 강의실은 텅 비어 있었다.
'휴강이라도 한 모양인가.'
상훈은 뚜벅뚜벅 걸아 들어가 교단 위에 섰다. 하야꼬는 어떤 모습으로 학생들에게 강의를 할까. 거울 앞에 서서 모습을 추스르고 강의실을 나와 교문으로 걸어가던 상훈의 앞에 뜻밖에도 라일락 꽃보다도 화사한 인사말이 꽃망울을 터뜨렸다.
"상훈 씨 아니세요? 어떻게 여길 오셨어요?'
"언어학부의 아이와 교수님을 만나 뵙고 오는 길입니다. 무엇인가 물어볼 것이 있어서요."
"공부를 열심히 하시는 모양이죠?"
"공부요, 하하 정반대입니다. 사실은 하야꼬 씨를 만나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습니다."
"기다리시겠어요? 야외수업중인데, 강의를 마치고 올게요."
"네, 저기 나무 밑의 벤치에 있겠습니다."
하야꼬가 돌아가자 학생들 사이에 가볍게 '와'하는 소란이 있었다. 아름답고 쾌활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얼굴에 우수가 깃든 하야꼬의 모습이 상훈을 깊이 사로잡았다. 상훈은 잠시 하야꼬와 자신의 관계가 무엇일까 생각해보았다.
"무엇을 그리 깊게 생각하세요?"
하야꼬가 옆에 와 있는 줄도 모르로 이런 생각에 잠겨 있던 상훈이 약간 당황한 기색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네. 강의를 다 끝내셨군요."
"마침 끝나던 참이었어요. 뭘 좋아하시죠? 오늘 저녁을 사 드릴게요."
"저는 아무거나 다 좋습니다. 좋아하시는 걸로 하시죠."
"태국요리 어때요. 매운 것이 한국음식과 비슷할 것 같은데."
"먹어본 적은 없습니다만 한 번 시도해보죠."
"호호, 아마 매워서 항복하시지는 않을 거예요. 매운 음식 잘 먹기로는 한국인이 세계적으로 정평이 나 있잖아요, 고추, 마늘을 고추장에 찍어먹으니 말예요."
"하하, 그렇게 되나요."
음식을 훌륭했다. 상훈은 태국 음식이 세계 각지에 진출해 매운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기호를 충족시켜주고 있지만 한국에는 한 군데도 없는 것을 보면 매운 것으로 얘기하자면 단연코 한국인이 세상에서 제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하야꼬는 매워서 쩔쩔 매면서도 맛이 있는 모양이었다.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약간 걸어서 긴자의 미쓰꼬시 백화점 뒤의 어느 분위기 있는 카페에 마주앉았다.
"한국에 가본 적은 없으시죠?"
"한 번 갔었어요."
"그랬어요? 물론 서울에도 가보셨겠군요."
"네."
"인상이 어땠어요?"
"일본과 아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좀 덜 친절한 것을 빼고요."
"우리 한국인들이 과거에는 친절하고 인심도 좋았는데 요즘와서는 그런 말을 할 수가 없게 됐어요."
"안타깝네요. 왜 그럴까요?"
"그동안 너무 혼란이 많았고 급속한 근대화 과정에서 인간성이 상실되어서 그래요. 우리 고유문화의 맥이 잘려버린 것도 한 큰 이유죠."
"일본의 식민지배를 말하시는군요."
"하하, 하야꼬 씨의 잘못은 하나도 없으니 미안해하실 것은 없어요."
"전에 문화재에 대해 말하신 것 전적으로 공감했어요. 다만 일본에도 양심이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꼭 말씀드리고 싶어요."
상훈은 다시 무엇인가를 말하려다가 말고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가즈오 씨의 병세는 어떻습니까?"
"조울증이 깊어요. 다른 사람 같으면 벌써 발작을 했을 거라고 하더군요, 다만 워낙 선량하고 깊은 심성으로 꾸욱 눌러 참고 있는 것 같아요."
"어떤 이유로 발병을 했는지 모르세요?"
"제가 동경에 있는 주치의를 만나 물어본 적이 있었어요. 그때 의사는 가즈오 씨가 어린 시절 큰 충격을 받았을 거라고 얘기하더군요, 그런데 그 내용에 대해서는 의사들도 알아내지 못했어요. 지나치게 예민한 신경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들 있어요. 가즈오 씨는 워낙 어릴 때부터 천재라는 소문이 자자 했었어요. 음악이나 미술 같은 예능 분야에서도 두드러지고, 모른는 것이 없을 정도로 해박하기도 했지요. 야마자끼 집안의 자랑거리였어요. 모든 사람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었지요. 그런데 병이 난 후 문학작품을 많이 읽더군요. 감성이 대단히 예민했어요. 시를 짓기도 한 것 같아요, 때로는 '나비야 청산가자, 범나바 너도 가자'라는 시구를 읊조리면서 먼산을 바라보고 눈물을 주르르 흘리기도 했어요. 나도 모르게 그 기분이 전염되곤 했었지요."
어쩐지 상훈의 눈에 가즈오의 모습이 다가오는 것 같았다. 몸은 야위었고 눈이 커질 대로 커져 무엇인가 두려워하며 자꾸 어디론가 숨으려는 가즈오의 모습이 상훈의 눈앞에 크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 상훈은 자신도 이럴진대 아무리 어릴 때 부모끼리 오가 이야기라고 해도 혼인 약속까지 있었던 사람이나 하야꼬의 마음은 얼마나 괴로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하야꼬의 표정은 담담했다. 그녀는 극도로 감정을 절제하고 있는 듯했다.
"일어나실까요?"
무거운 분위기를 걷어보려는 듯 하야꼬가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시죠."
상훈이 카운터로 걸어가는 동안 음악은 <빈센트>로 바뀌고 있었다. 상훈은 앞으로 이 음악을 들을 때마다 가즈오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긴자의 거리를 잠시 걸었다.
"참 지난번에 얘기했던 그 그림을 보실 기회가 곧 있을지 모르겠어요."
"안견의 그림 말인가요?"
"네, 강사협의회에서 곧 관람희망자를 모집할 거예요. 상훈씨도 회원으로 가장해서 가야 할 거예요."
상훈은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남의 나라 그림을 가져다 놓고 자기네끼리 관람을 허용하고 말고 하는 것에 대해 자신이 보여야 할 반응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 다분히 회화적이었다. 이런 상훈의 기색을 눈치챘는지 하야꼬는 얼른 한 마디 덧붙였다.
"그림을 소장하고 있는 사람들이 재산상의 가치가 높은 보물로만 생각하는 것이 문화를 이해하는데 있어 장애가 되고 있어요. 문화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나라의 문화도 자신의 것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 텐데.... 그러면 한국의 그림도 한국인들이 자유롭게 볼 수 있게 되겠죠."
"모든 일본인이 하야꼬 씨만 같으면 좋겠군요."
"......."

긴자의 밤거리는 휘황찬란했다. 거리의 모양이며 거리를 지나는 인파가 서울의 명동이나 종로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은 어느새 기부끼 좌 앞에 이르렀다. 마치 여자처럼 예쁘게 분장을 한 남자배우들이 사진이 극장 앞에 걸린 것을 보면서 상훈은 겉은 같아도 만만치 않은 문화의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상훈과 하야꼬는 극장 앞에서 헤어졌다. 하야꼬와 마냥 가까워지고 싶은 자신의 마음을 가즈오의 우울한 눈동자가 힘없이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상훈은 차마 바래다주겠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하야꼬도 비슷한 심정이었는지 별말없이 두 사람은 헤어졌다.



21. 하꼬네의 연정

하야꼬와 헤어져 돌아온 후에도 그녀의 모습과 목소리는 상훈 곁에 여전히 남았다. 상훈은 냉장고에서 스카치와 얼음을 꺼내 온더 락스를 만들어서는 베란다에 섰다. 눈앞에 내다보이는 스미다와강에는 무엇인가를 가득 실은 화물선이 부지런히 상류로 올라 가고 있었다. 동경만으로부터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한동안 쏘이자 상훈의 마음은 안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가즈오와 하야꼬의 관계에 대해 차분하게 돌아볼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두 사람의 관계는 자신이 함부로 끼어들 여지가 없는 깊고도 특별한 관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즈오"
한 번 봤을 뿐이지만 그의 인상은 너무나 강열 해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각인되어 있었다. 그는 나약하고 세상살이와는 동떨어진 듯한 은자와도 같은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인상에는 어딘지 모르게 불타는 듯한 강열함이 있었다. 그는 무엇인가를 향해 외치고 싶어하는 듯이 보이기도 하고, 이제는 그런 모든 것들에 대한 정열도 동경도 사라진 듯한 무기력함을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상훈은 잔을 들이켰다. 매끄럽고 따뜻한 액체가 목젖을 타고 몸 안으로 흘러들었다. 상훈은 거푸 마셨다. 잔에 남은 술을 단번에 다 들이켰다. 차가운 얼음을 혀로 밀어내며 얼음 사이의 따뜻한 액체를 마지막 한방울도 남기지 않고 찾았다. 술이 하야꼬는 떠오르게 하고 가즈오는 잊어버리게 해주기를 바랐다.
상훈은 이제껏 한번도 제대로 여자를 만난 경험이 없었다. 여자에 대한 호기심은 항상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여자 그 실체와는 별로 접할 기회가 없었다. 상훈은 연약하고 부드럽고 언제봐도 구름이나 솜사탕 같은 그런 비정형이 여자의 본질이라 생각했다. 아니 자신이 좋아할수 있는 여자의 필수조건인지도 몰랐다.
고전적 덕성을 가진 여자란 언제나 부드러웠고 한국의 여자는 특히 은근하고 숨기는 법이었다. 요즈음의 총명함과 용감함을 내세우지 못해 안달인 여자들은 상훈의 생리에 맞지 않았다. 여자들은 상훈을 지배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상훈이라는 남자의 껍질을 뚫고 들어갈 수 없는 이유를 몰랐다. 합리적익 대등한 대화와 몸짓만을 내세웠지만 서구식의 미래를 걱정하는 역사학도의 굳은 의식에 쉽게 동조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하야꼬는 이들과 달랐다. 무엇보다 부드러움이 있었다. 상훈에게 있어 여자의 부드러움이란 잃었던 무화에 대한 그리움이고 향수였다. 수그릴 줄 아는 동양문화의 맥이 하야꼬의 어딘가에 살아 있었다. 늘 쾌활하고 명랑한 모습에 밝은 미소를 띤채, 자신의 주관이 분명하면서도 그것을 내세우려 들지 않았다. 게다가 가즈오의 존재가 하야꼬의 운명에 무엇인가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는 느낌이 상훈으로 하여금 더욱 하여꼬의 서늘한 이미지를 가슴에 아로세기게 하였다.
 며칠을 별렸지만 막상 전화를 한 것은 하야꼬였다.
"토요일에 하야꼬네 가게 되어있어요. 상훈씨도 같이 가시겠어요?"
"야마쟈끼 미술관에 가시는 겁니까."
"네"
 마음 한켠에 밀어두었던 가즈오의 모습이 상훈의 머리에 떠올랐다. 
상훈은 자신도 모르게 조바심이 나는 것을 느꼈다.
"가즈오씨를 만나려 가시는 모양이죠?"
"네"
그러면서 하야꼬는 왜 내게 같이 가자고 하는 것일까. 가즈오에게 나의 존재를 강하게 각인시키고 싶어서 까?
"가즈오 씨가 상훈 씨를 보고 싶데요 전화가 왔거든요."
"저를요?"
"네 아마 상훈 씨의 어딘가가 마음에 든 모양이지요."
말을 하면서 하야꼬는 크게 웃었다. 하야꼬의 상쾌한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상훈의 귀에 전해졌다.
'가즈오는 왜 나를 만나자고 하는 것일까'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하야꼬는 가즈오가 보고싶은 모양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상훈으로서는 이해 할 수 없었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저를 만나자고 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요."
 상훈이 다소 조심스런 목소리로 말하자 하야꼬는 더욱 우습다는 듯이 깔깔거렸다.
"정적으로 생각하고 결투라도 신청 할까 봐서요. 걱정마세요 그런 일은 틀림없이 아닐테니까."

 다음날 하야꼬네로 떠나는 열차 역에서 만난 하야꼬는 지난번 뚜렷한 화장을 했던 모습과는 달리 수수한 옷차림에 화장도 전혀 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상훈은 여자의 인상이 옷과 화장에 의해 달라진다는 것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나 하야꼬의 모습은 지난번과는 극명하게 대비 되고 있었다. 스물 대여섯 정도일 하야꼬의 나이가 이제 갓 스물을 넘겼을 정도로 보였고 티 하나 없는 하얀 얼굴은 앳되어 보이기만 했다. 
"오늘은 학생같아 보이는군."
"상훈 씨처럼 말이죠."
두사람은 웃었다.
"참 그림을 그리기도 하나요."
 상훈의 갑작스런 질문에 하야꼬는 약간 망설이는 듯하다가 마치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바닥을 보고 대답했다. 
"네. 처음에는 전업화가로 나가려 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그린다는 행위가 두려워졌어요.젊은 시절 닥치는 대로 그리다가 어느날 갑자기 그릴 것이 하나도 없게 되지 안을까 하는 
걱정이 생겼어요. 그러면 못견딜 것 같아요."
"하하, 나중에 그릴 것이 없을까봐 그림을 포기 했단 말인가요?"
"네"
"우선 뭐라도 그려보고 나중에 어떻게되는가를 보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사실은 그동안 몇 번 출품도 하고 인정도 받고 했지만 과연 그림을 그리는 것이 나의 진실인가하고 스스로에게 물어 보면 대답은 언제나 부정적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데에서 저의 진실을 찾은 것도 아니었지만요."
 상훈은 자신이 하야꼬에게 자꾸만 무엇인가를 묻게 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저는 잘 몰라요. 다만 무엇인가를 거창하게 출발한다는 것이 싫었어요. 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니 다른 무엇보다도 그림을 그리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는 의식이 저를 지배하는 것이 싫었던 거죠. 어떻게 보면 비겁한 생각이었지만 저로서는 한동안의 고민에서 벗어나니 얼마나 즐거웠던지. 그날은 온종일 긴자를 쏘다니며 물건도 사고 이것 저것 많이 먹기도 했어요."
"그럼 지금은 아예 그림을 그리지 않나요?"
"그런 것은 아니지만 ...... 그림은 전념해서 그리지 않으면 주제가 이어지지 않아요. 단순히 그때 그때 떠오른 기분이나 감상을 캔버스에 옮겨 놓다보면 갈등이 더 생기게 되죠. 저는 좀더 있다 멀리서 마음 편하게 그림을 볼 수 있게 될 때 다시 한번 그려볼 생각이에요. 치열하게 부딪치는 것보다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의미는 있을 것으로 생각되거든요."
"어쩌면 그런 그림이 더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림이 낫다는 것과 자신이 어떤 과정을 거쳤다는 것은 다른 문제일 수 있을거예요. 사실은 그림 그 자체보다도 그림을 그린 사람의 생애가 더 중요한지도 모르겠어요."
"평범한 사람의 생애도 충분한 의미가 있잖아요?"
"그림에 열중하지 못한 사람의 생애는 그림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별로 의미가 없을거예요. 타고난 천재라면 그 생애와 작품이 반드시 일치하지만은 않겠지만요."
"조만간 기회가 있으면 하야꼬 씨의 그림을 보고 싶습니다."
"옛날것이나 훗날의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당분간의 그림은 어려울 것이예요."
상훈은 이 말을 하는 하야꼬의 얼굴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하야꼬의 명랑한 성격으로 봐서 이것은 의외라는 생각도 들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제가 공연히 그림 얘기를 했나보군요."
"아니예요."
하야꼬는 상훈이 미안하다고 말하자 오히려 당황하며 자신이 미안하다고 했다.
"사실 핑계 같지만  요즘 같아서는 그림을 그리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 붓을 잡으면 미술품을 대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릴 것 같아요. 외국에서 빼앗아온 그림을 숨기며 끝까지 소유하려는 탐욕과 무지에 대한 혐오감이 앞설 것 같아요. 그림이 재산의 한 품목으로 전락해 버린 현실이 싫어요."
 하야꼬는 약간 우울한 표정을 보였지만 열차가 하네꼬 역에 도착하자 생기가 되살아나는 모양이었다.
"저는 하네꼬가 좋아요. 관광을 오는 사람은 하네꼬를 보고 동경으로 떠나지만 저는 하네꼬에 있다가 오랫동안 동경으로 볼 일을 보러 갔다오는 느낌을 갖게 되거든요. 그렇다고 하네꼬에 집이 있다거나 하네꼬가 고향이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요. 언젠가 먼 훗날 하네꼬에 와서 살게 될지 모르겠어요.  눈에 익은 이 아름다운 산, 호수, 빛갈도 선명한 나뭇잎들, 흙냄새, 산등성이를 돌아 가는 등산전차의 종소리. 이런 것들을 캔버스에 담아 가며 하네꼬에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두 사람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등산전차를 탔다. 예전에는 미처 보지 못한 유황천의 김이 하늘로 솟아오르는 것이 보이며 유황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창밖으로 "노천탕 있음" 이라는 여관의 문구가 보이고 그 옆에는 목욕을 하는 여인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상훈은 자신도 하네꼬처럼 여기서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푸른 하늘과 깊은 살림, 골짜기를 흐르는 차고 맑은 물, 그리고 하네꼬가 그림을 그리고 잇는 정원, 목욕을 유난히 좋아하는 자신에게도 하네고는 살고싶은 고장 이 것같았다.
"하네꼬는 한국인과 인연이 깊어요"
"어떻게요"
"부근에 고려산이 있어요. 고려신사도 있어요.Dptskf 한국인이 개척한 마을이라는 얘기가 있어요."
"몰랐는데요."
"하네꼬라는 자체가 한국어라고 하던데요. 하네는 신선 꼬는 마루래요."
그러면 신선이 와서 사는 산마루라는 듯인가요."
하야꼬는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네,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정말 여기사람들은 달라요."
"어떤데요?"
"복잡하지 않아요. 얼굴도 맑아요."
"우리나라 시골 사람들도 그래요."
두 사람은 마주보고 깔깔 웃었다. 하야꼬는 늘 웃음을 만들어내는 상훈의 여유 있는 마음이 좋았다. 상훈을 볼 때마다 동경의 남자들은 너무 가볍고 빠르다는 느낌이 왔다. 다소 늦은 듯 하면서도 언제나 편안한 느낌을 주는 상훈의 여유는 동경의 남자들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여성을 존중하고 예의를 깍듯이 갖추지만 늘 정확하고 사소한 일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동경이라는 도시의 생활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지만, 그림을 한창 그리든 시절 하야꼬는 사람들의 이런 생활이 기계의 동작처럼 느껴졌고  하야꼬의 예술세계는 결정지워졌다. 하야꼬는 자연을 동경하고 자연을 그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속세를 등지고 천재적인 자신의 세계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잇는 순수한 은자같은 가즈오에게 경원과 연민의 정을 쌓아 왔던 것이다.
 그런데 상훈에게는 자신이 실망했던 동경의 기계적이고 일상적으로 바쁘게 돌아가는 분위기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느린 말투와 민첩하지 못한 동작은 오히려 여유로워 보였고. 대학원에서 금전으로 별로 환산될 법하지 않는 역사를 공부한다는 사실도 어딘지 모르게 따스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의 미술품에 대한 각별한 관심, 모나지 않으면서 강렬한 역사에 대한 정열이 은은하게 느껴져왔다. 가즈오와 전혀 다른 면에서의 끌림으었다.
"벌써 다 왔어요."
두 사람은 전차를 내려 박물관을 향해 걸었다.
"가즈오 씨의 아버지는 무엇을 하시는 분입니까?"
"미술품 거래를 하세요. 주로 동경의 사무실에 계시죠."
"그럼 가즈오 씨는 대개 혼자 지내겠군요."
"네, 미술관에서 혼자 살고 있어요."
"갑갑하겠군요, 외출은 하지 않습니까?"
"아마 거의 미술관에만 있을 거예요."
"병이 심한 모양이죠?"
"종잡을 수 없어요. 기분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 것 같아요. 평소에는 정상인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지요."
"가즈오 씨가 발작하는 것을 본 적이 있나요?"
"자제력이 대단해서 가슴에 치미는 것을 꾸욱 눌러 참죠, 그래서인지 발작을 하는 대신 더욱 깊은 우울증에 빠지는 것 같아요. 어쩌면 그것은 가즈오 씨가 세상에 대해 취하는 가장 절실한 예의인지도 몰라요. 혼신의 힘을 다해 자신의 세계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인지도 모르고요. 자신이 발작하는 모습을 세상에 보이지 않으려는 한 인간의 안타까운 노력이 너무 슬프게 느껴졌던 적이 있었어요. 그때 그에게 결혼하자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겨우 참았어요. 어쩌면 그것은 저의 이기적인 생각이고, 오히려 그를 더욱 괴롭힐지 모른다는 생가까지 들었어요."
"듣고 보니 가즈오 씨가 나를 만나자고 하는 이유가 더 궁금해 지는군요."
"저도 전혀 짐작을 할 수가 없어요."
"혹시 제게 무슨 오해라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아닐 거예요. 정신이 아주 맑아 보였어요. 정상적일 때의 가즈오 씨는 천사처럼 해맑은 사람이지요."
"지금은 상태가 나은 때인가요?"
"네. 그는 상태가 나쁠 때는 아무와도 말을 하지 않아요. 잠도 자지 않고 허한 모습으로 늘 허공만 바라보고 있어요."
두 사람은 박물관에 들어섰다. 정문을 지키던 수위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하야꼬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다.
"잘 오셨어요. 오늘은 도련님이 매우 기분이 좋으셔요. 앞으로도 계속 이러시면 얼마나 좋겠어요."
"좋아질 거예요."
하야꼬는 가볍게 웃어보이고 상훈을 앞서 먼저처럼 잔디 위의 돌을 징검다리마냥 팔짝 뛰어갔다.
"하야꼬 아가씨 오셨군요. 도련님은 뒤에 계세요."
관리인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현관문을 열고 나오며 하야꼬에게 인사를 했다. 사람들의 표정이 지난번과는 달리 밝아보이는 것이 가즈오의 상태가 많이 나은 모양이었다. 하야꼬는 상훈을 기다려 같이 건물의 뒤로 돌아갔다. 파란 잔디 위에 햐얀색의 정원 테이블 위에는 과일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가즈오는 웃는 얼굴로 의자에 앉아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지난번과는 전혀 다른 부드러운 모습으로 가즈오가 상훈에게 손을 내밀었다. 상훈은 지난번 자신이 손을 내밀었을 때 가즈오가 나무처럼 그냥 서 있던 기억이 났다.
"반갑습니다."
"하야꼬도 잘 있었어?"
"네."
"같이 먹으려고 과일을 사 왔어."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가즈오가 과일을 가리키며 웃었다. 약간 겸연쩍어하는 표정으로 보아 이런 일이 늘 있는 것은 아닌 것으로 생각되었다.
"어머, 과일들이 참 먹음직해 보여요. 종류도 많고, 무엇을 먼저 깎을까요?"
하야꼬가 깎은 배는 달고 시원했다. 하야꼬는 철없는 소녀처럼 우스운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듣고 있는 가즈오의 표정이 마치 소년의 그것처럼 순진하게 다가오고 하야꼬의 스스럼 없는 행동이 유난히 시원해 보였다. 상훈은 어쩐지 가즈오와 함께 있는 것이 전혀 부담이 되거나 불쾌하지 않았다. 짧은 동안이었지만 가즈오의 선량한 성품이 매우 자연스럽게 전해져 왔다. 세 사람은 마치 오랜 친구였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야꼬, 상훈 씨와 방에 들어갔다 올테니 잠시만 기다려줘."
"무슨 비밀 얘기라도 있는 모양이죠?"
"글세."
가즈오는 가벼운 농담을 던지고 상훈에게 같이 가자는 몸짓을 했다.



22. 가즈오의 내력

가즈오의 방에는 의외로 많은 책이 꽂혀 있었다. 책상 위에 있는 컴퓨터가 눈에 들어오자 상훈은 의아스러운 마음이 생기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어릴 때부터 정신병을 앓았다는 가즈오가 언제 저 많은 책을 읽고 컴퓨터까지 익혔을까.
"앉으시죠."
상훈이 의자에 앉자 가즈오는 방 한쪽에 있는 냉장고에서 음료를 꺼내 상훈의 앞에 놓고 자신은 맞은 편 의자에 앉아 상훈의 얼굴을 살폈다. 상훈은 가즈오가 뭔가 심상치 않은 이야기를 꺼내려 한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하야꼬는 여기에 들어올 때마다 잔디밭에 놓여 있는 돌을 징검다리처럼 팔짝팔짝 뜁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뜻밖의 질문이었다. 상훈도 하야꼬가 돌을 건너 뛰는 것을 봤지만 거기에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글쎄요, 저는 모르겠는데요."
"그녀는 여기에 올 때마다 자신을 추스르는 겁니다. 징검다리를 건너듯 하는 것은 자신에게 다짐을 주기 위해서죠."
"어떤 다짐입니까?'
"자, 이제 나는 다른 세상에 왔다. 불쌍한 가즈오가 있는 곳이다 화를 내서는 안된다. 가즈오를 버려서는 안된다. 이런 다짐을 스스로에게 두고 있는 것입니다."
"가즈오 씨의 지나친 생각이 아닙니까?"
"아닙니다."
가즈오의 표정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것을 어떻게 아셨어요?"
"관찰입니다. 저는 하야꼬가 여기에 들어올 때마다 뛰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즐거워서 그런 것으로 생각했어요. 그런데 하야꼬는 왜 여기에 올 때마다 저렇게 즐거울까 생각해보니 불현 듯 그런 의심이 들더군요."
가즈오는 생각보다 예민하고 관찰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망원경을 준비했어요. 멀리서부터 걸어오는 하야꼬의 표정을 관찰했어요. 우울한 표정이더군요. 그러나 징검다리를 뛰면서 부터는 얼굴이 밝아져요, 따라서 그것은 햐야꼬의 자신에 대한 다짐인 것이 확실해진 겁니다."
"치밀하군요."
"대단한 여자죠, 아직껏 내게 한 번도 싫은 표정이나 실망하는 표정을 지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마음이 착한 것 같더군요."
"아니죠. 그것은 착하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의무감에서죠, 두 가지 의무감을 그 여자는 가지고 있습니다."
"두 가지요?"
"그렇습니다. 하나는 간호원과 같은 의무감입니다. 환자는 어린애와 같으니 결코 화를 내거나 하면 안된다. 또 하나는 저 사람은 나와 어린 시절 정혼했는데 지금 몸이 아프다. 그렇다고 내가 버려서는 안된다. 이런 유의 것이죠."
"의무감에서라도 마음씨가 착한 사람만 가질 수 있는 것이군요."
"그런데 지난번, 그리고 오늘 눈에 띄는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하야꼬가 진정 즐거워하더군요."
".......?"
"바로 상훈 씨와 같이 왔다는 사실 때문어었습니다."
"지나친 생각 같군요."
"어떻게 받아 들여도 좋습니다."
"하야꼬 씨와 저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우연히 여기 미술관에 오다가 만난 것뿐이고 오늘은 가즈오 씨가 만나자고 해서 왔을 뿐입니다."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저도 상훈 씨를 만날 수 있어 다행이라는 사실입니다."
"네?"
"지난번 미술관에서 뛰어나갈 때는 내 마음의 상처도 어느 만큼 치유되는 것 같기도 했구요."
"무슨 말이죠?"
"다음에 알 기회가 있을 겁니다."
가즈오는 흐릿한 표정으로 말을 끊었다.
"언제부터인가 사람을 보면 혼자서 관상을 보는 습관이 들었습니다. 어떤 운명을 가진 사람이며 나와는 어떤 관계를 가질 사람인가 하고 생각하는 습관이 붙었습니다. 상훈 씨를 보자 커다란 기대감이 생겨나더군요."
가즈오의 얘기는 갑자기 크게 방향을 틀어 쉬 짐작하지 못할 의미로 상훈의 귀에 전해져 왔다. 상훈은 그저 묵묵히 가즈오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가즈오를 위해 할 수 있는 일도 가즈오가 자신을 위해 할 수 있는 것도 도저히 있을 것 같지가 않아서였다. 이런 상훈의 얼굴을 역시 물끄러미 바라보던 가즈오는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릴 적 얘기를 하나 해드리고 싶군요."
상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중학교 때 같은 반에 한 아이가 전학을 왔어요. 한국아이였죠. 아이들은 늘 그애를 놀려먹었죠. 반 년쯤 지난 어느날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 아이가 나를 따라오더군요. 그러더니 하는 말이 다시 오사카로 전학을 간다고 하더군요. 나와 사귀고 싶었다고 말하면서 평소에 몰래 내 뒤를 따라와 내가 집으로 가는 걸 보고 나서 자기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는 겁니다. 이사를 가는 것이 싫었지만 아버지가 일자리를 오사카에서 구했기 때문에 할수 없다고 하면서 손을 내밀더군요. 그때 나는 왠지 불결한 느낌과 더불어 모욕당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어요. 나는 그애에게 경멸하는 시선을 한번 주고는 그냥 돌아서 버렸지요. 그때는 귀찮은 벌레를 털어버린 기분이었어요."
가즈오는 잠시 얘기를 멈췄다. 상훈은 그가 왜 이런 얘기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의 얼굴을 살폈다. 뜻밖에도 별로 표정이 없을 것으로만 보이던 가즈오의 얼굴이 달아올라 있었다.
"그러부터 얼마 되지 않아서였어요. 나도 한국인이란 것을 알게 된 것은."
"네?"
너무나 뜻밖이었다. 가즈오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보았지만 그가 한국인이라는 것은 짐작도 못했던 일이었다. 가즈오는 회한에 찬 얼굴로 상훈이 놀라는 것을 쳐다보고 있다다 서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상훈에게 내밀었다.
"이것을 한번 보세요."
가즈오가 내민 것은 낡은 종이였다. 바단 종이가 낡았을 뿐만 아니라 원래부터 지질이 형편없는 데다가 연필로 쓴 것이어서 잘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상훈은 가즈오에게서 종이를 건네받았다. 그것은 한글로 쓰여진 편지였다.

"의송아, 보아라, 너의 이름은 최의송, 경주 최씨의 후손이다. 너의 아버지는 최독립, 어머니는 이연희, 할애비는 최화영이다. 너의 부모가 세상을 떠났다는 편지를 받고 이 할애비는 철창 속에서 하루종일 울었다. 삼십사 년 간의 수형생활중 처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울었단다. 너의 애비가 어렸을 때 시베리가에 끌려와 유형생활을 시작하여 미안한 마음을 어쩔 수 없었는데 결국은 그 애가 나보다 먼저 죽고 말았구나. 유형을 온 후 너의 애비와는 한 번 얼굴을 보았다. 이 할애비가 여기 있다는 말을 듣고 너의 애비는 얼어붙은 아무르강을 건너고 그 험한 스타노보이산맥을 넘어서 면회를 왔었단다. 너의 애비는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다. 헤어질 때 너의 애비는 앞으로 결혼을 하고 애기를 낳게 되면 이름을 무엇으로 할까 묻더구나. 할애비는 너의 이름을 무엇으로 지을까 생각하며 몇 백 번이나 심장이 꽉 차오르는 환희를 느꼈는지 모른단다. 그것은 희망, 바로 희망이었단다. 삼십년도 넘는 수형생활, 아마 죽고 나서야 석방이 될 것 같은 절망 속에 영원히 잊어버리고 말았던 단어인 희망이 내게도 생겨났단다. 그러나 얼마 전 나는 네 아비과 에미의 사망을 통고 하는 편지를 받고 말았다.
나는 철장에 머리를 짓찧으며 통곡했다. 하늘은 우리 가족에게 어쩌면 이리도 무심한가 하고. 그러나 의송아. 이 할애비는 슬퍼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나의 혈육이 천애의 고아로 살아남아 있는데 비록 감옥에서이지만 이 할애비가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너의 앞날을 생각하며 조금 있으면 석방된다는 고마운 소식이 들리더구나. 할애비가 친구에게 너를 수소문하여 꼭 찾아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느냐. 할애비 친구를 따라 일본으로 가도록 하여라. 비록 감옥에서 사귀었지만 이 사람과 나는 삼십 년 친구이다. 그는 일본인이지만 전쟁을 반대하고 동양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애쓴 지식인이란다. 그가 이 할애비를 대신하여 너의 앞날을 보살펴줄 것이다. 의송아. 어떤 어려운 환경에서도 조선인으로서의 자부심을 잃지 말고 굳세게 살아가기를 희망한다. 
  
                                                            할애비 최화영"

편지는 애절한 사연이었다. 편지를 읽고 나자 상훈의 머리에는 수많은 궁금증이 떠올랐다. 가즈오의 복잡한 집안 내력이 그를 정신병으로 몰고 갔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즈오가 한국인이라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고. 야마자끼가 가즈오의 친부가 아니라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었다. 가즈오의 할아버지는 어떤 연유로 시베리아에 유형당해 그렇게난 오랜 세월을 갇혀 지냈던 것이지 상상이 잘 가지 않는 일이었다. 상훈은 가즈오의 운명에 자신이 어떤 끊을 수 없는 관계로 얽혀들리라는 예감에 사로 잡혔다. 
"부탁이 있습니다."
가즈오는 상훈의 두 눈을 들여다보며 차분하고 정중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왔다. 역시 가즈오는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하야꼬의 얘기를 꺼내더니 갑자기 자신을 한국인이라 하고 놀라운 내용을 담고 있는 편지를 꺼내놓더니 이제는 정중한 부탁이 있다고 한다. 직감적으로 만만한 부탁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의 할아버지가 어떤 분이었는지 알아봐 주십시오."
"네?"
"저의 할아버지는 무엇을 하시던 분이었는지 왜 시베리아에 유형을 당하셨는지 알아봐 주십시오."
"그것은...."
"부탁입니다. 하야꼬의 얘기를 듣고 아니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저는 상훈 씨라면 저를 도와주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기 일본에서 알 수 있는 일이 아닐 것 같은데요."
"그렇습니다. 할아버지가 사시던 연해주, 어쩌면 시베리아의 유형장까지 가야 할 일인자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갈 수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신경이 극도로 예민합니다. 환경에 변화가 생기면 더합니다. 러시아는커녕 동경에도 가지 못합니다."
상훈은 가즈오의 처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로부터 그런 편지를 받고 가즈오는 매우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자신의 뿌리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수맣은 세월을 뒤덮어 왔을 것이다. 그러나 가지 못하는 자신이 정녕 답답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을 기다려오다 결국 가즈오는 자신을 택해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이 아닌가. 뭔지 모를 격한 마음이 상훈에게 전해져왔다.
"이 편지는 어떻게 전달이 되었습니까?"
"편지에도 있듯이 유형을 마치고 일본으로 들어온 분이 가지고 왔습니다. 편지를 쓰실 당시에도 별로 건강하지 못하던 할아버지는 이분이 출소하기 직전에 돌아가셨다더군요. 그분은 할아버지의 유언을 좇아 연해주에서 무척 많은 시간을 들여 저를 찾았다고 하시더군요."
"아, 그럼 그분이 가즈오 씨를 일본으로 데리고 온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저는 이미 그 이전에 일본으로 와 있었습니다."
"그럼 지금의 부친과 가즈오 씨는 어떤관계가 있었습니까?"
"모릅니다."
"네?"
"그것을 모르셨어요. 그분은 편지만 전하고 아무런 얘기도 해 주지는 않더군요. 처음 그분은 저를 보고 무슨 얘기인가를 할듯 말듯  하였습니다. 아마 그분은 잘살고 있는 저에게 편지를 전하면 혼란이 올 것을 염려한 것 같아요. 한참 무엇을 생각하다가 결국은 편지를 주고 아무 얘기도 하지 않고 돌아갔어요. 뒤는 하늘에 맡기자는 생각이었죠. 저는 할아버지로부터 온 편지라는 말을 듣고 너무 놀랐습니다. 할아버지는 나와 같이 살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편지를 받고 당황했어요.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얘기를 하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적어도 편지의 내용을 확인할 때까지는요.
 편지를 읽기 위해 혼자 한글을 배웠습니다. 남에게 읽어달랄 수가 없었어요. 어린 나이였지만 겁이 났어요. 몰래 한글을 익히면서 편지의 내용을 파악하는 데 거의 반 년이 걸렸습니다. 한글을 한 자 한자 깨칠 때마다 편지를 읽고 또 읽었지요. 마지막 한 자까지 깨우쳐 편지의 내용을 알게 되고 나서는 도대체 내가 누구인가 하는 생각이 끈질기게 따라다니더군요. 여태 할아버지와 아버지로 믿고 살던 그분들을 대하기가 겁이 나더군요.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봐야 한다는 생각과 더불어 내가 그 편지를 받았다는 사실을 두 분이 알면 안된다는 생각이 한동안 나를 괴롭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할아버지의 책상을 뒤졌습니다. 늘 자물쇠를 채워두던 서랍 안에 나의 내력에 대한 어떤 단서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죠. 있더군요. 할아버지는 저의 친부모가 돌아가신 것을 알고 연해주에서 저를 데리고 오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더군요. 해외입양이라는 러시아에서는 드문 방식으로 저를 일본으로 데리고 왔어요. 그런데 그중의 어느 서류 뒷면에 할아버지는 이런 구절을 써놓았더군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 애를 데려와야만 한다. 그것만이 내가 그들의 집안에 저지른 죄악을 용서받는 길이다.〉 그것을 보고 난 후부터 저는 두 분을 피하게 되었습니다. 늘 조마조마한 상태로 지내야 했어요. 상훈은 그때부터 가즈오의 정신병이 싹트기 시작했으리라 짐작했다. 예민한 성격의 가즈오는 자신을 애지중지 키우고 있는 양부와 얼굴도 모르는  친부모의 사이에서 정신적으로 방황을 했을 것이다. 그가 양부를 생각하고 대하던 이중적 심리상태가 결국은 병으로 깊어지게 되는 과정이 상훈의 머리를 그려졌다.
 편지의 내용으로 봐서 친조부는 보통 사람은 아닐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랬다. 짧은 편지였지만 손자에 대한 진한 사랑과 아울러 조선인으로 꿋꿋하게 살아갈 것을 부탁하는 내용이 인상적이었다. 그런 편지를 쓸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잡범은 아닐 것이었다. 그렇다면 무슨 죄목으로 시베리아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유형생활을 해야 했을까. 더군다나 러시아인도 아닌 조선인으로서. 가즈오의 할아버지가 아니라 하더라도 역사학도로서의 궁금증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며 상훈은 다시 한번 편지를 훑어보았다. 
 하야꼬로보터 동경대학교에서 역사를 전공하신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만약에 저의 조부가 보통의 범죄자가 아니라면 역사적으로도 그분의 생애를 연구해볼 가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부탁을 드리게 됐습니다. 필요하신 경비는 얼마라도 쓰십시오. 
 상훈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자신의 공부를 하는 외에도 에이지의 사건도 있는데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에 갑자기 어떻게 간단 말인가. 연해주, 혹은 시베리아까지 가야 할지도 모를 일인데. 게다가 만약에 시베리아까지 가서도 어떤 단서를 구하지 못하면 가즈오를 볼 면목도 없을 것이다. 이런 것을 고려하면 간다고 말을 할 수 없을 것이었지만 상훈의 깊은 곳 어디에선가는 가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고 있었다.
 부탁드립니다.
 가즈오는 깨끗하게 뒤를 끝냈다.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왔다. 기다리고 있던 하야꼬가 반가운 표정으로 물었다.  
 두 분이 무슨 비밀얘기라도 하신 모양이죠.
 상훈이 하야꼬를 보자 가즈오가 자신의 내력을 하야꼬에게 얘기했을까 하는 의문의 생겼다. 
 하야꼬, 이제 그만 올라가지.
 가즈오의 얼굴이 지쳐 보였다. 상훈에게 설명을 하느라고 기력을 소진한 것이 역력했다. 그의 모습이 다시 처음 봤을 때와 같이 파리하게 변해 있는 것을 보는 상훈의 마음속으로 연해주로 가즈오의 할아버지 내력을 알아봐 주고 싶은 생각이 강하게 일어났다. 
 "가즈오 씨, 얼굴이 너무 피곤해 보여요. 들어가서 쉬세요."
 하야꼬의 말을 들은 가즈오는 상훈에게 간단하게 고개만 끄덕이고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가즈오 씨, 얼굴이 너무 피곤해 보여요. 들어가서 쉬세요."
 하야꼬의 말을 들은 가즈오는 상훈에게 간단하게 고개만 끄덕이고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가즈오 씨는 오늘 상훈 씨와 만나기 위해 대단한 준비를 한 것 같아요."
 동경행 열차를 타자 한동안 아무말없이 밖을 내다보고 있던 하야꼬가 상훈을 돌아보여 말했다.
 "준비라면…?"
 "상훈 씨와의 대화를 위해 정신과 육체의 모든 힘을 집중했던 것으로 느껴졌어요.
 하요꼬의 말에 가즈오의 지치고 연약해 보이던 뒷모습이 마음에 걸려왔다. 상훈은 가즈오의 얘기를 하야꼬에게 할까 말까 망설였다. 그러나 가즈오에게 자신의 과거를 알아 달라는 부탁을 받자마자 이것을 바로 하야꼬에게 얘기해 버린다는 것이 온당치 않기도 하였다. 더군더나 가즈오가 밝히지 않고 있는 일을 자신이 얘기한다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야꼬는 기차가 동경에 도착 할 때까지 가즈오와의 대화내용에 대하여서는 한 마디도 묻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은연중에 두 사람의 대화는 가라앉고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어둠이 내 깔리기 시작 할 무렵 기차는 플랫폼에 들어섰다. 
"식사를 같이 하실까요."
상훈은 가즈오를 만나고 와서 구 사람이 토요일 저녁을 같이 보낸다는 것이 모양이 좋은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먼저 식사제의를 했다. 역시 하야꼬는 거절했다.
"오늘은 일찍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차를 한잔 사시는 것 은 어떨까요?"
"그렇게 하시죠" 
 기차는 무거운 분위기를 의식했음인지 두 사람은 큰 유리를 통해 안이 훤히 비치는 밝은 분위기의 커피숍으로 발길을 옮겼다. 하야꼬는 차를 주문하자마자 가즈오에 관한 대화로 옮겨가는 것을 피하기라도 할 양으로 얘기를 꺼냈다.
"참, 일전에 제가 그림을 보여드리겠다고 했죠?""
"네."
"기회가 있을 것 같아요. 빠르면 다음 주중에 그림을 보러 가게 될 것 같아요."
"천리대까지 가야 하나요?"
"네, 게다가 상훈 씨라면 약간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군요."
"다른 사람의 이름을 한 번쯤 쓰셔야 할 것 같군요."
"다른 사람의 이름을 쓴다구요?"
"네." 
상훈은 무슨 소린가 싶어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하야꼬의 얼굴을 살폈다.
"제법 오래 생각했어요. 상훈 씨가 한국에서 유학온 학생이라고 하면 보여주지 않을 것이 뻔하기 때문에 방법을 써야 해요."
"그러나 대학교는 야마자끼 미술관과 같은 사설 미술관과는 다르지 않습니까?"
"천리대는 더 심해요. 거기는 그림을 전시해두는 것이 아니라 금고 속에 넣어두고 있어요. 그리고는 미리 약속된 손님에게만 관람을 허락하는 거죠."
"그림을 금고에 넣어두고 있다구요?"
상훈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학에서 그림을 금고 속에 보관하고 있다가 사람을 가려가며 보여준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할까요?"
"귀중한 그림이라 소중히 다루는 것일 거예요."
하야꼬는 상훈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려는 듯 가볍게 지나쳤다.
"이름은 제 사촌의 것을 쓰는 것이 괜찮을 것 같아요. 마침 미술을 전공하고 있으니까요."
"하야꼬 시에게 너무 폐를 끼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군요."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두 사람은 차를 마시고 이내 일어섰다. 오래 앉아 있으면 아무래도 가즈오가 떠오를 것 같았고 오늘은 두 사람 모두 가즈오의 얘기를 피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집으로 오는 길은 내내 가즈오의 이야기가 상훈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가즈오"
그는 상훈더러 자신을 위해 연해주, 혹은 시베리아에 갔다 와주기를 부탁했다. 묘한 일이었다. 에이지 살인사건의 가닥이 시베리아 어디에 있는 지명일 울란 야호이와 연결이 되는 시접에 가즈오가 시베리아에 가게 될 것만 같은 예감을 느꼈다. 아니 단순한 예감이 아니고 반드시 시베리아를 다녀와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용솟음쳤다.
 


23.몽유도원도
 

상훈은 다음날 학교에 나가자 바로 미나미 교수를 찾아갔다.
"교수님, 이번에 자료를 구하기 위해 러시아에 좀 갔다오고 싶습니다.
"박 선생은 광개토대왕비와 관련된 논문을 쓰는 줄 알고 있는데."
"그때 닛꼬에서 살해된 사람이 뜻밖에도 광개토대왕비와 깊은 관련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어쩌면 러시아에서 자료가 구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자네 생각이 그렇다면 갔다와야겠지. 그러나 살인사건 같은 것은 잊어버리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런 것과 논문이 관련이 있을 리는 없으니까 말이야. 가기 전에 미리 논문의 골격을 생각해두고 가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군."
미나미 교수는 탐탁치않은 모양인지 한 마디 충고를 넌지시 던져왔다. 상훈은 그럴 법도 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교수에게 깊이 고개 숙이고 나왔다. 도서관에 앉아 러시아로의 여행계획을 짜고나서 이마무라 주임에게 전화를 했다.
 "반장님, 저는 시베리아에 가서 울란 야호이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소득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지금 여기서 할 일은 별로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저어, 그것은 너무나 미안한 일입니다. 공부를 하셔야 할 분이 저의 일로 시베리아에까지 다녀오시겠다니요?"
 "다른 일도 있고 해서 가는 길입니다. 다녀와서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집에 돌아온 상훈은 베란다의 의자에 앉았다. 시베리아로 간다는 기분이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스미다가와 강을 오르내리는 배를 바라보며 상훈은 일본에 와서 일어났던 일에 대하여 하나하나 정리를 해나갔다. 사건과 더불어 그때 그때의 얼굴들이 떠올랐다. 오버랩되어 넘어가는 얼굴 중에 조용히 떠올라서는 가슴 한켠에 자리를 잡는 얼굴이 있었다.
 "하야코"
 하야코의 얼굴이 떠오름과 동시에 상훈의 눈길이 달력을 더듬었다. 무엇을 했는지도 모르게 한 주일이 지나가고 내일이 바로 하야꼬와 약속했던 천리대의 그림을 보러 가는 날이었다.

 "가다 가쯔지, 어때요? 당분간의 이름이예요."
 하야꼬는 상훈을 보자 일본이름을 하나 주면서 뭐가 재미있는지 깔깔 웃었다. 상훈은 한국의 그림을 보러가기 위하여 일본인으로 가장해야 한다는 사실에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
지만 하야꼬의 밝은 얼굴을 대하자 같이 웃음이 나왔다.
 "사촌의 이름인 모양이죠?"
 "네, 신분증을 빌려달라 했더니 면허증을 주면서 주차위반이나 하지 말아달라고 하더군요." 
  두 사람은 같이 웃었다. 동경에서 천리대로 가기 위해서는 우선 신간선을 타고 오사카로 가야 했다. 거기서 천리대가 있는 천리시까지는 전철을 이용하기로 되어 있었다. 동경역에서 오사카까지 가는 쾌적한 분위기의 신간선 좌석은 어릴 적 소풍 가던 기억이 되살아나는 정겨운 분위기로 가득 채워졌다.
 하야꼬는 모처럼 자신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다. 하야꼬가 학교를 졸업하기까지 이성교제가 없었던 것을 알게 된 상훈은 가즈오가 얼마나 큰 비중으로 하야꼬의 가슴에 자리잡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이미 어린 시절에 정혼을 해두었다는 어른끼리의 장난기 섞인 약속이 정작 당사자의 가슴에는 잊혀질 수 없는 큰 의미로 자리잡혀온 것이었다. 상훈은 자신이 두 사람의 사이에 끼여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스스로에게 반문했다.
 '내가 두 사람의 관계에 영향을 주고 있다면 그것은 옳은 것인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하야꼬가 가즈오를 좋아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할 것이지만 하야꼬는 아직 한 번도 가즈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나타낸 적이 없다.
 '하야꼬는 가즈오의 몸이 낫기를 기다리는 것일까, 아니면 자마 진심을 표시하지 못하고 시간만 보내고 있는 것인가.'
 가즈오와 하야꼬의 관계에 대한 이러한 상훈의 복잡한 생각은 아랑곳하지 않는 듯 신간선 열차는 장애물 한 점 없이 쭉 뻗은 철도를 경쾌하게 미끄러졌다. 하야꼬의 자난날에 대한 얘기는 한 꼭지 한 꼭지가 상훈의 싱그런 어린 시절과 상상으로 맺어져 철로변에 새로운 몸짓으로 떨어져 내렸고 열차는 앞날의 알지 못할 미래를 향하여 시원하게 내달으며 힘찬 기적을 내뿜었다. 
 '여자를 일본에 와서 만나게 될 줄이야.'
 상훈은 여자를 만났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여자. 늘 상상으로 그려보고만 말 것으로 여겼던 그러한 여자가 지금 여기 눈앞에서 자신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도 어렸던 시절의 느낌과 바람을 마치 마음을 터놓은 친구에게나 아니면 먼 미래를 같이 걸어야 하는 동료에게 존재의 비밀이나 털어놓듯이 솔직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얘기하고 있었다.
 빨갛게 칠한 조그만 입술에서 급기야는 상훈의 인상에 대한 느낌이 흘러나오고 하야꼬의 마음 어느 한편에 희미하나마 자신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고 느낀 순간 상훈은 자신도 모르게 살며시 하야꼬의 손을 쥐었다. 하야꼬의 가느다란 손은 해면처럼 촉촉하고 부드러웠고 무엇보다도 작았다. 아주 짧은 동안 이제껏 잡혀 보지않아 솜털의 갈기가 그대로 느껴지는 희고 기다란, 그러나 작고 아담한 손은 그냥 그대로 상훈의 손 안에 머물러 있었다. 상훈은 하야꼬의 체온이 손을 통해 넘어오는 것을 느꼈다. 차지도 뜨겁지도 않고 그저 아늑하게만 느껴지는 손은 머물러 있다고 생각한 순간 완만히 그러나 차분하게 빠져나가고 있었다.
 "때로는 이유도 모르고 무엇인가를 할 때도 많았어요. 한때는 철학자처럼 정확하고 합리적 삶을 동경하기도 했지만 저에게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어떤 것이 자신에게 맞는 삶이라 생각하세요.?"
 "글쎄요, 잘 모르겠지만 가즈오 씨에 대한 마음이 늘 편치 않아요."
 하야꼬의 답변을 듣는 순간 상훈은 가슴이 뜨끔해지는 것을 느꼈다. 상훈의 뇌리에서 잠시 지워졌던 가즈오의 기억이 다시 꿈틀거리며 살아나왔다.
 "그의 몸이 나아질 수 있을까요?"
 "며칠 전 상훈 씨와 갔을 때의 모습은 정상인과 조금도 다름이 없지 않았어요?
그는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머리가 좋고 마음이 선량해요. 저의 짐작으로 그는  정서적으로 매우 민감하던 어린 시절에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매우 큰 충격을 받았어요. 그 후로 자기혐오와 조울증 증세를 보였지만 발작을 하거나 한 적은 없어요. 잘만 치료하면 나을 수 있다는 생각이에요."
 상훈은 가즈오가 충격을 받은 이유를 하야꼬에게 설명해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야꼬의 반응이 어떨지는 몰랐지만 지금 이 순간 자신은 그 원인을 알려주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가 무슨 일로 충격을 받았는지 아세요?"
 "잘 알지는 못하겠지만 저의 아버지가 야마자끼 씨에게 들은 얘기로는 어릴 때 무슨 일인가 있었대요. 언젠가 술이 취했을 때 야마자끼 씨는 괴롭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자신이 큰 잘못을 저질러서 가즈오 씨가 그렇게 되고 말았다는 얘기를 했었대요."
 "사실은 전번에 가즈오 씨로부터 과거 얘기를 들었습니다."
 하야꼬의 총명한 눈동자가 낯선 눈빛으로 엇갈리는 것을 보면서 상훈은 가즈오의 이야기를 담담히 들려주었다.
 "그랬었군요."
 상훈의 얘기를 다 듣고 난 하야꼬는 의외로 별로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하야꼬의 어디에 이런 면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간단하고 별로 감정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한마디 툭 던졌을 뿐이었다.
 "놀랍지 않으세요?"
 '우리 이제 가즈오 씨 얘기는 그만 하기로 해요. 저는 상훈씨와의 대화에 늘 가즈오 씨가 나오는 게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
 '누구나 자신의 길이 있잖아요."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자신이 느끼기로는 하야꼬는 가즈오에게 강한 연민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이 어떻게 변할지는 모를 일이지만 적어도 이제까지는  가즈오에 대한 하야꼬의 관심과 연민의 정이 뚜렷이 느껴졌다. 그러나 방금 하야꼬가 한 말은 가즈오는 자신과는 다른 길을 갈 사람이라는 뜻으로 들리지 않는가.
 '하야꼬가 변하고 있는 것일까?"  
 가즈오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가 상훈을 통해 알게 된 것에 화가 났을까? 아니면 가즈오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을까? 상훈은 하야꼬가 한국인에 대한 편견을 가졌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녀가 이제까지 한국인인 자신을 대해온 태도는 진지하고도 자연스러운 것으로, 도저히 차별의식을 갖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상훈은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하야꼬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았다. 시선을 창 밖으로 돌리고 있는 그녀의 옆얼굴이 약간 달아올라 있는 듯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차분했다. 상훈은 하야꼬의 침묵 속으로 함께 깊이 빠져들었다.
 
 

24. 빼앗긴 그림     
 

"몽유도원도가 언제 일본에 건너오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상훈이 긴 침묵을 깨뜨리면서 물었다.
 "글쎄요"
 하야꼬는 상훈의 자존심이 상할까 염려되었는지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 궤적을 추적해봤지요. 가고시마에 있는 시마즈가에서 1893년 이전에 소유한 것만은 분명합니다. 한일합방 이전에 이미 일본에 있었다는 얘기지요. 시마즈가는 천 칠백년대 후반 무렵 각종 진귀한 예술품을 끌어모으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 그림도 그 시기에 시마즈가로 들어갔다고 추측됩니다. 그렇다면 이 그림은 아무래도 임진왜란 때 풍신수길이  특별히 한국의 문화재를 샅샅이 훑어오도록 명령했던 특수부대가 일본으로 가져왔다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것 같네요."
 하야꼬는 더 이상의 말이 없었다. 그녀로서도 상훈이 자기네 조상이 그린 민족의 얼이 담긴 그림을 보러 가면서, 오히려 일본인으로 위장하고 가야 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하야꼬는 일본과 한국의 관계가 문화재를 약탈하고 또 약탈당했던 관계라는 것이 마음 아팠다. 야만적 문화재 약탈을 마음껏 성토할 수 있는 한국인의 입장이라면 차라리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열차는 오사카의 덴노지 역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역 구내의 긴데쓰 백화점을 거쳐 전철을 타고 천리시로 향했다. 천리시는 천리교를 믿는 일본인들의 마음의 고향인 도시였다. 일본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천리교도들은 매년 한 번씩 천리시에 와서 경건한 마음을 되살리고 교조의 정신을 이어받는 수련회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쓰메쇼는 전국에서 수련을 하러온 신도로 가득 차 있었고 거리에도 천리교도들이 수련복을 입고 활보하는 모습이 눈에 자주 들어왔다.
 "천리교의 교리는 어떤 것입니까?"
 "저도 잘 알지는 못해요. 오염된 마음을 씻어내고 청정한 생활을 해나가자는 정도로 알고 있어요."
 "창시자는 일본인입니까?" 
 "그래요. 여자예요."
 "이 많은 쓰메쇼라는 건물은 무엇입니까?"
 "아마도 잘못된 생활을 털어놓고 새로운 마음을 얻어나가는 도장 같은 것일 거예요."
 상훈은 하야꼬의 설명을 들으며 실소를 금치 못했다.
 '청정한 생활을 해나가자는 사람들이 남 나라에서 약탈한 문화재를 깊숙이 감추어 두고 보여주지도 않다니.'
 하야꼬는 상훈의 표정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린 것 같았다.
 "반환 가능성을 생각한다면 그림이 일반 소장가에게 있는 것보다는 천리대에 있는 것이 훨씬 나을지 몰라요. 천리대는 종교의 이념으로 설립되어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천리료의 교사들을 양성해낸 학교지요. 그러니 올바른 주장에 의외로 귀를 기울여 줄 수 있을 거예요."
 "글쎄요, 내게는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군요. 철저히 숨겨놓고 공개하지 않는 것은 반환요구를 두려워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하야꼬는 무엇인지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말았다. 표정이 약간 상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상훈의 말에 무엇인가 항의를 하려다가 그만 두는 것 같았다. 그 표정은 '그런게 역사가 아니겠어요? 문화재 약탈이 어디 일본만의 문제인가요? 로마도 그랬고 영국도 그랬죠. 또 한국의 역사에는 그런 야만적 과거가 전혀 없나요?' 라고 따지고 싶지만 상훈의 입장도 이해한다는 표정 같았다. 두 사람은 역앞에 대기하고 있는 택시를 잡아타고 대학도서관으로 향했다.
 대학의 건물은 천리교 본부의 건물과 형태가 비슷했다. 자유롭고 분방한 분위기임에도 불구하고 천리교의 교리학습을 하는 학생들의 절제된 행동이 가끔 보이곤 하였다. 두 사람은 바로 도서관으로 찾아갔다. 도서관 사무처의 직원들은 친절하였으나 두 사람이 몽유도원도를 보러온 것을 알고는 이미 특별관람 허가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두 사람을 대하였다.
 "미안하지만 신분증을 좀 보여주시겠습니다?"
 "여기 있습니다."
 상훈은 신분증을 내밀면서 속이 뜨끔하였다. 설마 얼굴대조까지는 안하겠지 하면서도 불안감이 생겨 하야꼬를 바라보자 하야꼬는 살짝 웃었다.
 "강사증은 없습니까?"
 "예 이번 학기는 작품제작 때문에 쉬고 있습니다. 이번 국전에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품을 선택했거든요."
 "네, 그러시군요."
 상훈의 능청스런 거짓말에 하야꼬는 다시 한 번 입을 가리며 웃었다.
 "따라 오십시오."
 직원은 인터폰을 걸고 나서 두 사람을 안내하여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의 어느 방 앞에 서서 벨을 누르자 감시광을 통하여 밖을 내다본 직원이 신원을 확인하고 문을 열었다. 세 사람이 방 안에 들어서자 문이 닫히면서 자동으로 잠겼다.
 "어서 오십시오"
 삼엄한 분위기와 대조적으로 직원의 친절을 돋보였다.
 "그림을 깊이 보관하시는군요."
 "네, 이 그림은 우리 대학에서도 가장 진귀한 보물이기 때문에 보관에 극도의 조심을 하고 있습니다. 잠시 앉아 기다리십시오."
 "아, 그림이 여기 있지 않은 모양이죠?"
 "네, 금고에 보관하지 있습니다."
 두 사람이 직원이 귄하는 소파에 앉아 잠시 기다리자 하얀 장갑을 끼고 마스크를 착용한 직원 두 사람이 그림을 맞들고 들어왔다. 두 사람의 걸음걸이는 매우 조심스러웠으며 표정조차 진지했다. 직원들은 그림을 펼쳐 보였다.
 '보십시오."
 상훈은 그림 앞에 섰다. 한국회화사상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꼽히는 바로 그 그림 앞에 일본인으로 가장하여 선 상훈의 마음은 흥분과 비애가 엇갈렸다.
 한국이라는 나라. 자신이 살고 있고 자신의 아버지가 살고 있고 아버지의 아버지가 살았던 나라. 그 아버지와 아버지들이 살아왔고 자신의 아들과 아들의 아들들이 대대손손 살아갈 나라. 그 나라의 가장 중요한 그림이 외국에 빼앗긴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국민들. 그리고 외국에 빼앗겨 있는데도 되찾아오려는 아무런 노력도 없는 나라. 그러고도 세계화를 부르짖고 선진국이 되기를 바라는 나라. 상훈의 마음 언저리에 문득 한 가닥 강한 부끄러움이 솟아올랐다. 항시 문화민족이라 일컬어지기를 좋아하는 한국인들이 비단 한국회화사상 가장 중요한 작품일 뿐만 아니라 수천년 문화의 결정체라 해도 좋을 몽유도원도를 일본에 빼앗기고도 반환노력조차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진정 한심하고 부끄러웠다. 당장 그림을 집어들고 한국에 가져가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누르며 착잡한 기분으로 그림에 시선을 던졌다.
 "아!"
 그림의 오른쪽에는 현란하고 유려하다 못해 귀기조차 감도는 필치로 몽유도원도라는 다섯 자가 살아 꿈틀거리고 있었다. 옅은 황색 바탕에 검은 글씨로 씌어진 이 다섯 자의 글씨야말로 조선조 서예의 대가로 일컬어지는 안평대군이 그림을 보고 필생의 기를 모아 써냈다는 그 글씨였다. 한 자 한 자에 변화가 가득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균형을 잡고 그림을 보호하는 듯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이 힘이 넘쳐 보였으며 이미 인간의 경지를 떠나 있는 듯 했다.
 제목의 옆에는 안평대군의 찬시가 붙어 있는데 이 시는 몽유도원도를 꺼내볼 적마다 감회를 억누르지 못하던 안평대군이 그림이 그려진 후로부터 삼 년이 지난 1450년 정월 어느날 밤 홀연히 꿈과 그림이 떠올라 써낸 것으로 담청색 바탕에 쓰여진 주홍빛 글씨의 현란함은 상훈의 입을 벌어지게 하였다.
 〈이 세상 어느 곳을 도원으로 꿈꾸었나〉로 시작되는 서시는 상훈으로 하여금 상훈의 눈길을 자연스럽게 그림으로 이끌었다. 전체적으로 담황색의 색조를 띠고 있는 그림은 입체감이 뚜렷하게 느껴지는 봉우리와 계곡, 시냇물, 복숭아밭이 어우러져 상상의 세계에서만 접할 수 있는 도화경을 현란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었다.
 그림의 왼쪽은 현실세계를 나타내는 야트막한 야산이고 그 오른쪽에는 도원의 바깥쪽 입구를 나타내는 바위산들이 그려져 있었다. 바위산 밑으로 한 가닥 길이 풀어져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도원으로 들어가는 길로 안평대군이 꿈 속에서 박팽년과 함께 가다가 사람을 만나 도원이 어디인지 물었다는 길이었다. 길은 복숭아밭을 끼고 돌아 바위산을 휘돌아서는 한동안 보이지 않다가 폭포 왼쪽의 산허리에 다시 그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데 완만한 곡선으로 휘어진 것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편안함과 유유함을  느끼게 하였다.
 그림의 오른쪽에도 역시 바위산들이 그려져 있었고 이 바위산들은 도원의 안쪽 입구를 나타내는 것으로 도원에는 복사꽃이 활짝 핀 나무들이 매우 입체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무엇으로 찍었는지 보이지 않을 정도의 하얀 점들을 찍어 복사꽃을 그려낸 것에 대하여는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꽃송이들이 한 개도 빠짐없이 분명히 드러나 있는 그림은 현대의 기법이라 해도 쉽게 흉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복숭아밭은 도원의 세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도연명이 도화원기에서 무릉도원을 설정한 이후로 모든 유학자들이 꿈에 그려온 유토피아였다.
 어디에서 솟아났는지 모를 청간수들이 흘러 그림 한가운데에 폭포를 이루었다가는 다시 왼쪽의 현실세계를 향해 흐르고 있었고 이 물줄기들이 만든 개울의 한편에 한가롭기 이를 데 없는 집이 한 채 그려져 있었다. 또 그 밑으로 나룻배가 한 척 매여져 물결따라 춤추는 듯하였다.
 이상세계인 돌산과 현실세계인 야산을 대비시키며 그 야산에서 돌산으로 복숭아 나무를 따라 나 있는 한 갈래의 길이 다다르는 곳에 절로 눈길이 모아지고 계곡을 흐르는 시원한 물줄기의 기세가 가슴에 그대로 전해져 흐르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상훈의 눈길은 다시 그림 왼쪽의 안평대군 발문으로 옮겨갔다. 발문은 자신이 꿈을 꾸고 안견이 그림을 그리게 된 과정을 설염하고 있는 것으로 이제까지와는 다른 정연한 글씨로 자신이 본 도화원을 그려내고 있었다.
    
 정묘년 4월 20일 밤. 내가 마악 잠이 들려 할 즈음, 정신이 갑자기 아련해지면서 깊은 잠에 빠지고, 이내 꿈을 꾸게 되었다.
 홀연히 인수와 더불어 어느 산 아래에 이르렀는데, 봉우리가 우뚝 솟고 골짜기는 깊어 산세가 험준하고 그윽하였다. 수십 그루의 복숭아 꽃나무가 있고, 그 사이로 오솔길이 나 있는 데 숲 가장자리에 이르러 갈림길이 되어 있었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를 몰라 잠시 머뭇거리고 있던 터에 마침 산관 야복 차림의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정중히 고개숙여 인사를 하면서 나에게 말하기를… 
 "이 길을 따라 북쪽 골짜기에 들어가면 도원에 이르게 됩니다." 라고 하였다.
 내가 인수와 함께 말을 채찍질하여 찾아 들어가는데 절벽은 깎아지른 듯 우뚝하고, 수풀은 빽빽하고 울창하였으며, 시냇물은 굽이쳐 흐르고, 길은 구불구불 백 번이나 꺾이어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골짜기에 들어가니 동천이 탁 트여 넓이가 2,3리 정도 되어 보였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구름과 안개가 자욱이 서려 있고 멀고 가까운 곳 복숭아나무숲에는 햇빛이 비쳐 연기 같은 놀이 일고 있었다.
 그리고 대나무 숲 속에는 짚풀 집이 있는데, 사립문이 반쯤 열려 있고, 흙으로 만든 섬돌은 거의 다 부스러져 있으며, 닭이나 개, 소, 말 따위는 없었다. 마을 앞을 흐르는 시내에는 오직 조각배 한 척이 물결따라 흔들리고 있을 뿐이어서 그 쓸쓸한 정경이 마치 신선 사는 곳인 듯 싶었다.
 이에 한참 동안을 머뭇거리면서 바라보다가 인수에게 말하길 "암벽에 기둥 엮고 골짜기 뚫어 집 짓는다" 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경우가 아니겠는가? 정녕 이곳이 도원동이로다" 라고 하였다.
 마침 옆에 몇 사람이 뒤따르고 이었는데 정부, 범옹 등이 운에 맞춰 함께 시를 짓기도 하였다.
 이윽고 신발을 가다듬고 더불어 함께 걸어 내려오면서 좌우를 돌아보며 즐기다가 홀연히 꿈에서 깨어났다.
 오호라, 큰 도회지는 실로 번화하여 이름난 벼슬아치들이 노니는 곳이요, 절벽 깎아지른 깊숙한 골짜기는 조용히 숨어사는 자가 거처하는 곳이다. 이런 까닭에 오색찬란한 의복을 몸에 걸치는 자는 발걸음이 산속 숲에 이르지 못하고, 바위 위로 흐르는 물 보며 마음 닦아 나가는 자는 또 꿈에도 솟을대문 고대광실을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고요함과 시끄러움이 길을 달리하는 까닭이니 필연적인 이치이기도 한 것이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낮에 행한 바를 밤에 꿈꾼다〉하였다.
 나는 궁궐에 몸을 기탁하여 밤낮으로 일에 몰두하고 있는 터에 어찌하여 산림에 이르는 꿈을 꾸었단 말인가? 내가 서로 좋아하는 사람이 많거늘 도원에 노닒에 있어 나를 따른 자가 하필이면 이 몇 사람이었는가? 생각건대 본디 그윽하고 궁벽한 곳을 좋아하며 마음에 전부터 산수자연을 즐기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아울러 이들 몇 사람과의 교분이 특별히 두터웠던 까닭에 함께 이르게 되었을 것이다.
 이에 가도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
 옛날부터 일컬어지는 도원이 진정 이와 같았을 것인지 여부는 알 수가 없었거니와 뒷날 이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옛날 그림을 구하여 나의 꿈과 비교하게 되면 무슨 말이 있게 될 것이다.
 
 꿈을 꾼 지 사흘째에 그림이 다 되었는지라 비해당 매죽헌에서 이 글을 쓰노라.

 그림도 그림이지만 중국의 사신들도 조선에 오면 글씨 한 토막을 얻어 가 자랑하였다고 하는 안평대군의 글 또한 희대의 보물이라 일컫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었다. 한국으로 돌아보면 국보중의 국보로 지정될 것임이 틀림 없는 이 그림을 보며 심함 자괴감을 느끼던 상훈은 하얀 장갑이 들추어내는 두루마리들을 무심하게 보고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아!"
 글, 글들이었다.
 들추어진 첫 번째 두루마리의 맨끝에는 고양 신숙주라는 이름 석 자가 단아하면서도 날아갈 듯한 필치로 분명히 씌여 있었다. 유려한 필치는 결코 안평대군의 그것에 못지 않았고 한 자 한 자에 살아 움직이는 정통파 유학자의 혁혁한 정신은 왕족이었던 안평대군의 글씨와는 달리 정격 속에 엄격함이 배어 있었고 이 엄정함은 사백 년이 훨씬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도 상훈의 정신을 압도하는 듯했다.
 신숙주라는 인물은 역시 상훈이 생각했던 대로 재주가 너무나 빼어난 수재였다. 안평대군에게 사약을 내렸던 수양조차도 신숙주를 아끼는 마음이 각별하여 명나라에 사은사로 갈 때에 그를 서장관으로 데리고 가 그가 안평의 무리에 끼이지 못하도록 미리 배려했고 정란에 가담하지 않을 수 없도록 온갖 계락을 다 구사했다는 야담이 과연 그럴싸하게 느껴졌다.
 수재는 정절을 지키기 어렵다는 말을 떠올리면서 상훈은 엄격하면서도 화려한 신숙주의 글씨에 빠져들가기 시작했다.
 그가 사육신의 단종 복위계획이 탄로난 후 단종과 금성대군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하던 이율배반적 모습이 그의 글씨에 그대로 나타나는 듯하였다. 사람을 흘리는 듯한 빼어난 글씨와 뛰어난 문장은 안평이 꿈꾸었던 도원을 읊고 있었으나 역시 속세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이는 듯했다.
  
 소멸하고 생장하여 자고 기우는 것 한결 같은 이치인데,
 형체와 정신의 변화는 기묘하여 헤아리기 어렵네.
 깊은 곳에 담긴 뜻 제멋대로 이야기할 일 아니러니,
 참과 거짓 모름지기 꿈과 현실이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하네.

 안평의 꿈에 대한 철학적 의미를 조망하며 시작된 글은 이후 주옥같은 서정적 문장과 형이상학적 가치탐구가 어우러져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재주와 역사를 생각하며 연신 한숨을 짓게끔 만들었다.
 
 들판 나룻터에는 외로운 배 절로 호젓하고,
 산 푸르고 물 파란 가운데 차가운 구슬 흔드는 듯,
 갈대와 부들 줄기 물가에 어지러이 돋아 있는데.
 해질녘 동풍이 부드러운 잎새를 스치네.

 저 마른 나무처럼 또렷이 깨어 있는 이는 누구이며,
 이 질펀한 물같이 꿈속에서 훨훨 나는 이는 누구인가.
 누가 이것이 반드시 그러하다고 주장하고,
 누가 이를 가려 저 높은 하늘나라로 돌아갈 수 있는가.
 
 상훈은 신숙주에 대한, 아니 옛사람에 대한 자신의 판단이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상훈은 옛사람들이 이제까지 쓸모없는 유학에 빠져 몇 자리 안되는 권좌를 놓고 싸우기만 해온 것으로 여겨왔었다. 그들의 세계가 이토록이나 보편성을 통찰하고 세상의 근본구조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적 시각을 갖고 있을 줄은 몰랐다. 게다가 문체 또한 예술적인 향기가 드높았다. 그 훌륭한 예술적 구도는 글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정돈된 편안함과 더불어 절제된 지적 세계에 자연스럽게 공감하도록 하고 있었다.
 상훈은 수많은 역사서와 시가집 등을 들추어온 자신이, 오늘 이렇게 외국에서 자기 민족의 문장 중의 문장을 보고 감탄하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해보지 않았었다. 그러기에 감동은 더욱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글씨와 문장의 현란함에 놀라 몇 번이나 고양 신숙주라는 이름을 되뇌어보고 있던 상훈은 두 번째 두루마리의 끝이 삐죽이 나와 있는 것을 보고 다시 불같은 호기심이 일었다.
 역시 담황색 바탕에 검은 글씨로 씌어진 두루마리가 펼쳐지자 이번에는 방금 신숙주의 글에서 보였던 현란하고 화려한 글씨와는 전연 다른 두텁고 무심한 글씨가 그 수수한 모습을 드러냈다.
 문장도 짧아 글을 쓴 사람의 텁텁한 성격이 느껴지는 두루마리의 끝에는 한산 이개라는 본관과 이름이 씌어 있었다.
 안평이라는 권력자의 꿈이야기를 듣고 마치 청룡이 날고 백호가 포효하는 듯한 현란함을 글의 전편에 드러내신 신숙주의 글과는 전혀 다른 소탈함과 더불어 묵직함이 담겨있는 글을 보며 상훈은 다시 한번 사륙신의 삶과 가치관이 차이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토록 화려한 도원몽 찬기를 지으며 안평을 따르던 시숙주가 반대편의 수양에게 저주없이 붙어버린 모습이나 대군이 이토록 무심하고 짧은 글을 툭 던져놓던 이개가 단종복위 충직한 꿈을 실행에 옮기다 고역을 격은 모습이 대비되어 오는 것 같아 상훈은 역사의 아이러니 아니 인생의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글의 첫 머리는 대군에 대한 칭송을 머금고 있었으나 글의 길이만으로도 그가 아첨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글은 도저히 안평대군을 따라가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내용이었지만 그러기 때문에 은근히 풍자하는 내용으로도 해석 할 수 있는 것이다. 

 지체가 높고 생각이 고상하신 분, 도가 절로 트여,
 초연히 세상 밖에 신선사는 곳을 꿈꾸네.
 자욱이 놀낀 그윽한 동굴에 꽃이 피고 지고,
 대나무숲 깊은 곳엔 길조차 있는 듯 없는 듯.
 단사로 기골 바꿀 수 있다는 것은 쓸데 없는 소리,
 허구한 날 어찌 억지로 호리병 건다는 말인가?
 그림을 펴 놓고 신선 세상에 마음껏 노닐고 싶으나,
 내 마음에 티끌 먼지 끼고 지나온 발자취 더욱 거칠어
 부끄럽기만 하구나.

 다음의 두루마리도 당대 제일가는 거유 문사들의 재기 넘치는 글로 이어졌다. 하연, 송처관, 김당, 고득존, 강현덕 정인지등의 대학자와 삼대 악성의 하나로 꼽히는 박연, 김종서 다시 이적, 최항, 박팽년, 윤자윤, 이예, 이현로와 당대의 문장가로 꼽히는 서거장, 사육신의 대표 성삼문, 김수온 등의 대학자와 승려 만우에 이르기까지 조선조 초기를 대표하는 거목들의 글이 망라 되어있었다. 
더군다나 이 글들은 아평대군의 도원몽이라는 한 가지 주제에 대해 이들 거유 학자들이 심혈을 기우려 문장을 지은 것이기 때문에 각자의 성향과 사상, 문장력 등이 매우 잘 드러나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경우가 흔치않아 몽유도원도와 이에 첨부 된 찬시들을 선조의 근관이 되는 유학, 선비문화를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였다. 비단 그림과 글씨라는 유형문화재로서의 가치뿐만이 아니라 한국의 지식사와 정신사 연구의 출발점이 된다는 점에서 역사적 자료로서 가치가 여느 다른 자료에 겨줄 바가 아니었다. 
 집현전을 중심으로 당대의 정신을 장하고 있던 신숙주, 정인지, 서거정 등의 거유 대학들이 계유정란이라는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을 위하여 이제까지의 자신의 학문과 사상을 송두리째 집어던지고 강한 권력자 수양에게 빌붙어 평생 권세를 누리며 살아가게 되는 운명이 이글에서 생생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조맹부의 송설체를 본떠 독자적 글씨체를 완성한 안평대군의 서도에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 집현전 학사들의 글씨 또한 볼 만한 것이다.
 특히 상훈에게 가장 인상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김종서의 글씨였다. 글의 내용과는 별개로 김종서의 글씨는 한 자 한 자가 살아움직이고 있었고 그 깨끗한 성품과 굽히지 않는 기개가 글씨체에 그대로 옮겨져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하였다. 글씨에 대해 조예가 없는 상훈이 보기에는 김종서의 글씨와 신숙주의 글씨는 안평대군과 거의 같은 경지에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글씨가 서로 방식은 다르되 학문적으로 그리고 체험적으로 완성의 경지에 다다라 있는 것이 보면 볼수록 감탄과 더불어 마음의 평화까지도 느껴지는 것들이었다.   그런 경지에 있으면서도 수양의 권력찬탈이라는 사건을 대하자 상반된 길을 걷고야마는 역사의 비정을 느끼게 하는 글들은 상훈으로 하여금 인간의 실체에 대하여 한결 깊은 사유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도서관 직원들의 기다림에 지친 얼굴은 아랑곳하지 않고 언제까지나 김종서의 글을 들여다보거 있던 상훈은 이윽고 약간의 양해의 말과 더불어 자신의 눈앞에서 두루마리가 말려지고 그림이 치워지자 지그시 눈을 감았다. 시서에 능통한 당대의 문장가 안평대군이 꿍을 꾸고 나서 놀라워하는 모습에서부터, 물감을 가다듬고 종이를 펼친 채 안평의 꿈이야기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그림에 담아내려는 안견의 옹골찬 모습, 그리고 당대의 거유들이 자신의 사상과 학문의 성취를 한 장의 두루마리에 펼치기 위해 꼿꼿이 허리를 펴고 먹을 가는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머리에 접혀 들었다. 안견이 기백어린 손끝으로 찍어내는 물감의 영롱한 색채는 어느새 충절어린 집현전 학자들의 단아한 검정 글씨로, 거유 대학들의 자신만만한 손끝에서 피어나 코에 스미는 은은한 묵향은 조카를 사지로 보내고 대권을 쥐는 정난의 피비린내로 상훈의 오감에 엇갈려 들었다.
 "잘 보셨습니까?"
 옆에서 한동안 지켜보던 도서관 직원이 상훈이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고 마냥 눈을 감고 생각에 몰두하는 것을 보자 말을 걸어 왔다. 하야꼬는 상훈을 그냥 내버려두고 싶어 가벼운 손짓으로 직원을 제지했으나 상훈은 이윽고 눈을 뜨고 일어났다. 여전히 무엇을 생각하는, 정돈되지 않은 몸짓으로 입구를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을 보며 직원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앞서 두 사람을 안내했다.
 하야꼬는 도서관의 책임자에게 표시하고 얼른 상훈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왔다. 비감한 표정의 상훈이 그들에게 주고 있는 낯선 기분이 뒷덜미에 느껴졌지만 하야꼬는 상훈을 너무나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미술사를 전공하는 자신에게도 몽유도원도라는 그림의 역사적 의미와 중요성이 큰 비중으로 다가왔다. 하야꼬는 한국인, 그것도 역사를 전공하는 젊은 학도인 상훈에게 느껴질 거대한 문화적 충격이 오히려 걱정이 될 정도였다.
 하야꼬는 상훈의 기분을 바꾸어주기 위해 서둘러 캠퍼스를 빠져나왔다. 외진 곳에 위치한 천리대학 앞에는 택시도 버스도 없었지만 택시를 부르기 위해 전화를 한다든지 할 기분도 아니었고 역까지의 거리도 얼마 되지 않아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걸었다.
 자전거를 탄 많은 학생들이 두 사람을 스쳐 지나가는 길에는 어딘지 모르게 종교적 도시의 절제된 분위기가 배어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지 학생들의 옷차림도 난삽하거나 요란해 보이지 않았고 표정에는 젊은이 특유의 쾌활함이 있으면서도 진지하고 엄숙한 분위기가 깃들어 있었다.
 이 조용하고 깨끗한 도시의 거리를 상훈과 더불어 걸으니 하야꼬는 신쥬꾸나 긴자를 걷던 때와 다른 경건함과 진지함이 온몸에 배여드는 느낌이었다. 하야꼬는 어쩌면 이 도시의 분위기와 상훈의 진지함이 맥을 같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훈의 부담 없으면서 신뢰감을 주는 분위기는 늘상 대하는 신세대의 다소 책임없는 자세와 대비되어 하야꼬의 뇌리에 (남자)라는 강력한 의미로 아로새겨져 왔다. 상훈의 진지함 속에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맞닥뜨리려는 인간적 애정과 사회에 대한 정열이 있었다. 신세대의 현란한 가벼움과는 다른 독특한 역사적 자세에는 상훈만의 무게가 담겨 있었고 이 무게는 하야꼬로 하여금 상훈과의 만남에 의미를 더하게 하고 있었다.
 상훈은 자신이 마술사를 가르치면서 늘 마주쳐왔던 문화의 원형복귀라는 문제에 의외로 간단하여 시원한 해답을 주었다. 자신의 문화를 찾기 위해서 이렇게 애쓰고 고심하는 한 청년을 보았다는 것만으로도 자신에게는 문화재를 원래의 문화테두리로 복귀시켜야 한다는 의미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것은 문화와 역사를 대하는 기본적 의식의 문제였고 상훈을 만나 이제까지 외면해왔던 이 의식을 일깨움으로써 자신에게 늘 앙금처럼 남아 있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도덕과 윤리의 문제가 말끔히 해결되었다.
 "그림은 충분히 보셨어요?"
 하야꼬는 경쾌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 덕분에요."
 상훈도 어느 정도 감정을 정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림뿐만이 아니라 그 글씨들도 보통 조예가 있는 사람들의 솜씨가 아니던데요."
 "네, 모두 조선조를 대표하는 쟁쟁한 문장가요, 학자들입니다."
 "모두 그림에 대한 느낌을 적은 것들이죠?"
 "그렇습니다. 안평대군의 꿈으로부터 시작하여 그림에 이르기까지 최고의 문장력을 발휘하여 써낸 것들입니다. 비단 문화재로서 가치가 있을뿐 아니라 한국문화의 전반을 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재료입니다."
다시 상훈의 표정이 무거워 지는 것을 보며 하야꼬는 말을 끊었다. 한동안 말없이 걷는 두 사람 앞에 다시 쓰메쇼라고 쓰여진 천리교의 몸과 마음을 정화하는 수련도장이 거대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순간 무엇인가가 하야꼬의 마음을 강하게 때렸다.
"모순, 이것은 모순이다. 공해와 탐욕에 찌든 몸과 마음을 정화시켜 깨끗한 인간이 되어 살자는 천리교에서 남의 나라에서 약탈한 문화재를 지하실 금고 속에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은 교리의 왜곡이 아닌가."
하야꾜의 얼굴에 뭔가 결연한 기색이 어렸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츰 풀어졌다. 두 사람은 어느새 역에 도착했다. 동경으로 올라가는 신간선은 교토에서도 탈 수가 있었으므로 두 사람은 교토행 전철을 탔다. 자리에 앉아 "천리"라고 쓰여진 역의 시그날이 멀어지는 것을 잠자코 지켜보는 상훈의 시선위로 쓰메쇼를 바라보는 하야꼬의 시선이 엇갈리고 있었다.



25. 하야꼬


막상 시베리아로 간다고 결심을 하니 준비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몇 가지 일을 처리하고 상훈은 하야꼬에게 다이알을 돌렸다. 하야꼬의 목소리에는 반가움이 넘치고 있었다. 함께 천리시를 다녀온 후로 두 사람은 더욱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토요일에 함RP 하꼬네에 다녀오는 것이 어떨까?"
"어머 하꼬네를요? 왜요?"
"가즈오 씨를 만나려고요."
"상훈 씨 혼자 다녀오는 것이 나을 것 같군요. "
"이번에 하꼬네를 다녀와서는 연해주로 가려고합니다. 시간이 걸릴 수도 있고 해서 가능하면 함께 다녀오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간이 드는군요."
"연해주를요?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 봐요?"
가즈오 씨와도 약간 관계가 있기도 하구요"
"......."
"......."
"혼자 가시는 게 좋겠어요."
"네, 그럼 그렇게 하죠"
"언제 오시게 되요?"
"확실치는 않습니다. 일이 끝나는 대로 돌아 올 겁니다."
상훈은 전화를 끊고 나서 이상하게도 하야꼬가 가즈오를 피하는 것 같은 느낌을 가졌다.
"혹시?"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기대 할 수 없었던 여자.
유리같이 투명하고 어디 한 군데라도 거슬림이 없는 여자.
'하야꼬가 가까이 오고 있다.'
상훈은 처음으로 사랑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아니 벌써 사랑에 흠뻑 취한 기분이었다. 하야꼬를 향한 감정에 가슴이 터질 것 같은 흥분이 느껴지고 주체 할 수 없는 기쁨에 몸이 
 떨릴 정도였다.

 다음날 상훈은 혼자 하꼬네행 열차를 탔다. 기차에서는 내내 처음 하야꼬를 볼 때부터 지금까지의 하야꼬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야꼬는 상큼한 봄날 같기도 하고 고고한 백합 같기도 하고 지성적이고 원숙한 여인으로 보이기도 했다. 스쳐 가는 미풍처럼, 흐르는 시내물처럼 잔잔하고 감미로운 그녀의 목소리가 상훈의 귓전에 계속 머물러 있는 듯했다. 하꼬네에가는 길에 처음 그녀를 만나서일까. 상훈은 자신의 들뜬 마음을 주체하려고 애썼다.
 상훈은 기차를 내려 다시 등산 열차를 갈아 타고 드디어 가즈오의 별장에 다다랐다. 아름다운 실록에 자리한 고급미술관이 오늘은 어느 때보다 초라했다. 이 미술관을 더욱 신비롭게 만들었던 하야꼬가 이제는 시선을 자신에게로 돌리고 있지 않는가. 상훈은 쓸쓸해 보이는 미술관의 정문을 향해 힘이 들어간 걸음걸이로 다가갔다.
가즈오는 불과 얼마사이에 병색이 더욱 깊어 진 듯 파리하다 못해 투명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약간 비틀어진 듯한 걸음걸이는 알지 못할 서글픔을 상훈의 가슴속에 일게 했다. 
'내가 이런 병자의 불행을 이용하고 있는 건 아닌가?'
가즈오에 대한 연민의 정은 상훈이 은밀히 즐기고 있던 자신과 하야꼬와의 관계를 여지없이 깨뜨려버렸다.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가즈오의 두 눈이 순간적으로 광채를 띠는 것 같았다.
"고맙습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이 한마디의 대답이 다시 한 번 상훈의 가슴에 출렁 파문을 던졌다. 너무도 절실하고 순수한 대답이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자 하는 그러나 도저히 그럴 능력이 없는 사람의 진심으로부터의 고마움과 기대가 섞인 목소리를 듣는 상훈의 마음이 오히려 미어질 듯했다.
"양부를 만나 가즈오 씨의 내력을 물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것은 안될 일입니다."
가즈오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아마도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키워준 정을 생각해서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야마자끼가 진실을 그대로 얘기해줄 리가 없다는 생각에 상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방법은 최화영이라는 이름 석 자만을 가지고 연해주로, 그리고 그가 뼈를 묻은 시베리아의 형무소로 다녀 보는 것뿐이었다. 가즈오는 할아버지로부터 온 편지와 함께 현금을 꺼내왔다. 상훈이 현금을 받는 것을 꺼리자 가즈오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나에게는 의미가 없는 것들입니다."
가즈오는 성격을 가늠하기 어려운 희미한 미소를 얼굴에 떠올리며 상훈에게 담담하게 손을 뻗었다. 마치 여자의 것처럼 가느다랗고 긴 손가락에 눈길을 보내며 상훈은 자신의 마음이 둘로 나뉘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가즈오에게는 이상한 매력이 있었다. 단순한 연민에서 우러나오는 것만은 아닌 묘한 정이 느껴졌다. 날카로워 보이면서도 나약하고 섬세하며 준수한 외모에 수도승 같은 초연함마저 감돌았다.
"일단은 받겠습니다. 나중에 정산을 하기로 하구요."
온 정신을 모아 상훈과 대화를 나눈 모양인지 결론이 나자 가즈오의 안색이 급격히 나빠졌다. 상훈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가즈오에게 손을 내밀었다. 무엇인가를 간절하게 소망하는 가즈오의 눈빛니 상훈의 눈동자에 고정되고, 늘 차게만 느껴졌던 가즈오의 파리한 손을 통해 의외로 따스한 체온이 전해져 온다고 느껴지자 상훈은 얼른 손을 놓고 몸을 돌려 방을 나왔다. 어째서 자신이 이처럼 반사적인 행동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가즈오를 더 보고 있을 수 없도록 가슴 저리게 하는 무엇인가가 확실히 느껴졌다.

동경에 도착한 상훈은 바로 하야꼬에게 전화를 걸었다. 가즈오를 만나고 난 지금부터 자신은 언제든 연해주로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자 하야꼬에게 전화를 하는 마음이 언제나처럼 여유롭지는 않은 기분이었다. 신호음이 울리자 바로 전화를 받는 하야꼬에게 어딘지 모르게 상훈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과 같은 기색이 전해져 왔다.
"별일 없으시다면 만났으면 합니다."
"네."
하야꼬의 목소리는 여느 때의 쾌활함을 잃은 채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긴자의 약속장소에서 기다리는 동안 자신은 어째서 연해주로 가는 것인가를 곰곰 생각했다. 물론 가즈오와 관련하여 그리고 에이지 사건과 관련하여 또 자신의 논문에 도움이 되리라는 것이 그가 연해주로 가야 할 이유였지만, 심층에 자리한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쉽게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생각을 해들어갈수록 간단치 않은 내면의 강한 충동이 차츰 형상화되어 왔다. 그것은 결국은 자신의 자아실현에 대한 욕구와 감각이었다. 역시 공부하는 학도로서뿐만 아니라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젊은이로서 자신의 사회와 문화에 대한 냉철한 반성과 통찰이 상훈에게는 연해주 여행이라는 형태로 다가와 있었다.
근현대를 살아온 조상과 선배들이 과학기술의 발전에 무지했던 대가로 세상을 온몸으로 힘들게 살아왔다면 이제 어느만큼 살게된 자신의 세대가 할 일은 그 역사를 가다듬고 문화를 정리해야 하는 것이었다. 광개토대왕비로부터 비롯된 군국주의 사관을 바로 잡고 약탈당한 우리 문화재에 시각을 돌리고 조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해외동포를 보살피는 일들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온몸으로 역경을 이겨내어 먹고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준 선배들에 이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었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하야꼬의 목소리가 생각에 잠긴 상훈의 뒤에 와닿았다.
"아니, 아닙니다."
전화를 받을 때와는 달리 하야꼬의 목소리는 가벼웠다.
"가즈오 씨는 잘 있어요?'
"네."
상훈은 대답을 하면서 자신의 감정이 매우 미묘하게 엇갈리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자신이 너무 민감한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상훈은 문득 언젠가 하야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왜 우리 대화에는 언제나 가즈오 씨가 등장해야 하죠?'
상후은 맞은편에 앉은 하야꼬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애써 밝은 얼굴을 내보이고 있었지만 흔들리고 있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가실까요?"
"네."
바깥은 어둠이 이미 짙어져 있었다.
"학교로 가실까요?"
상훈은 학교의 호수를 떠올렸다.
"네."
하야꼬의 목소리가 다시 전화를 받을 때의 촉촉한 목소리로 바뀌고 있었다. 아까몽을 통해 들어간 학교의 외진 것에는 데이트를 즐기는 학생이 드문드문 있었다. 손을 잡고 있거나 팔을 두르고 있는 이들의 곁을 두 사람은 마치 낯선 곳에서 온 사람처럼 거리를 두고 걸었다. 땅만 바라보고 걷는 하야꼬나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은 채 하야꼬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걷는 상훈이나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태도가 엿보였다. 호수에는 의외로 사람이 없었다. 남학생 몇몇이 술을 먹었는지 노래들을 부르고 있다가 상훈과 하야꼬가 벤치에 앉자 일어나 낮은 언덕을 넘어 가버렸다.
"한 잔 더하러 가는 모양이죠?'
남학생들이 피해주는 것이 오히려 어색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것을 의식한 상훈이 웃으며 하야꼬에게 말을 건넸다.
"상훈 씨도 학부 때 가끔 저러셨죠?'
이상하게도 다시 쾌활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는 하야꼬도 따라 웃으며 상훈에게 물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해요?"
"그랬을 것 같아요. 술을 마시고 친구들과 토론도 하고 노래도 부리고 했을 것 같은 모습이 아직 남아 있는 걸요. 특히 잃어버린 문화재에 대해서는 반드시 반환시켜야 한다고 열정적으로 토로하던 모습도요."
하야꼬의 말을 들으며 상훈은 한국에 두고 온 친구들을 떠올렸다. 성적은 나빠도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며 희한한 자료를 구하는 데는 천부적 재질이 있던 노황, 토론의 막바지에는 늘 답답하다며 술을 찾곤 하던 태효의 모습들이 차례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이들이 여기서 일본여자에 빠져 있는 것을 알면 뭐라고 할까.
"친한 친구들이 있었죠. 하야꼬 씨 말대로 토론이 끝나면 늘 술을 마시곤 했었죠. 우리나라의 역사란 별로 신나는 일이 없어요. 자연히 역사토론은 무엇을 극복해야 한다거나 무엇을 달리 해석해야 한다거나 하는 답답한 방향으로 결론이 나기 일쑤죠. 처음 역사학과를 들어가서는 얼마나 후회했던지 몰라요. 차차 그럴수록 역사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논리를 발전시켜 나가긴 했지만......."
말꼬리를 사리는 상훈의 뇌리에 며칠 전에 본 몽유도원도가 조용히 떠올라왔다. 기암괴석의 준봉들, 청간수의 시내에 유유히 떠있는 나룻배에 이어 부첨된 집현전 학사들의 서릿밭 같은 기개를 담은 찬시들이 파노라마처럼 상훈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토록 중요한 몽유도원도 같은 그림도 찾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역사 구성이 만족스러울 리는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묘하게도 저의 주변에는 한국인들이 두 사람이나 있네요."
"하야꼬."
상훈은 처음으로 하야꼬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아무런 존칭도 없이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지만 막상 불러보니 생각과는 달리 그리 어색하지 않았다.
"네."
입가에 맴돌고 마는 듯한 작은 목소리의 대답이 새어나왔다. 상훈의 부르는 소리도 하야꼬의 대답하는 소리도 어둠에 묻혀 떨려나왔다. 호수의 물결소리만이 간간이 들리는 공간의 낯선 진동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상훈의 손이 어둠을 짚고 이동해서 하야꼬의 가늘고 긴 손가락에 가볍게 닿았다. 차고 촉촉한 손의 느낌이 매우 신선했다.
식지와 검지의 끝에 살며시 닿은 상훈의 엄지가 하야꼬의 손톱 끝을 부드럽게 감아돌자 약간의 미세한 경련이 전해져왔다. 흠칫 놀라던 가느다란 손가락이 이내 전해져 오는 체온에 익숙해진 듯 움직임을 멈추고 촉촉한 손가락의 곤두섰던 신경도 가라앉는 듯했다. 매니큐어의 매끄러운 면을 한참이나 비벼대던 상훈의 엄지가 다시 하야꼬의 손가락 마디를 타고 움직였다. 손가락 마디의 굴곡과 반대편의 주름을 더듬은 손가락이 다시 곧추 펴지며 하야꼬의 손가락을 모두 거머쥐었다. 
약간의 힘이 전해지자 이제껏 잠자코 있던 하야꼬의 손가락에서 어떤 느낌이 전해져 왔다. 그것은 상훈의 다소 거세고 공격적인 손으로부터의 탈출로도 저항으로도 생각되지지 않는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상훈으로부터 전해져 오는 체온을 맞아들이는 것도 아니었다. 어떤 의미를 붙일 수 없는 미세한 경련으로 느껴질 정도의 것이었지만 처음의 소극적이기만 하던 것은 아닌 분명 어떤 느낌이었다. 이 작은 느낌은 마치 연체동물이 가늘고 고른 진흙의 표면을 기어가는 것 같은 미세하지만 분명한 흔적을 내며 상훈의 신경계통을 모두 거쳐서는 가슴에 닿았다. 무시될 정도의 가냘픈 진동이었지만 상훈은 이 작은 힘의 역반응에 의해 고무되었다.
'하야꼬도 나를 사랑하고 있다.'
신체의 접촉과 그 접촉으로부터 오는 반응은 역시 가슴으로 전해지는 사랑과는 확실히 다른 무엇이 있었다. 이제까지 그럴 것이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막상 느끼지는 못하던 그 무엇이 신체의 접촉에 의해 한걸음에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상훈은 팔을 돌려 하야꼬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목을 스치는 손등에 부드러운 감촉과 함께 가느다란 목의 탄력이 전해져 오자 상훈은 몸이 떨려 오는 것을 느꼈다. 하얀 살결 내음이 코로 스며들고 하야꼬의 기다란 머리카락일 바람에 날려 상훈의 입술과 콧등을 스치자 상훈의 입에서는 가느다란 한숨이 새어나왔다.
하야꼬의 손을 스르르 떠난 상훈의 오른손이 어깨를 두른 외손과 스칠 듯이 허리를 감아들더니 살며시 뻗어 등을 끌어안자 하야꼬의 작은 몸이 그대로 품안에 들어왔다. 상훈의 가슴에 가볍게 와닿은 하야꼬의 탄력 있는 가슴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하야꼬의 가냘픈 떨림이 어둠에 덮인 호수의 밤공기를 타고 사방으로 미세하게 퍼져나갔다. 상훈은 가슴에 전해져오는 하야꼬의 떨림을 느끼자 온몸의 피가 거세게 역류하는 것을 느꼈다. 도저히 참아내기 못할 것 같은 기운이 온몸에 퍼지며 현기증이 날 정도로 의식이 몽롱해져왔다.
목마름을 참지 못하던 입술은 하야꼬의 얼굴에서 맴돌다 깨물면 물이 똑똑 듣을 것만 같은 갸름한 귓불에 머물렀다. 은은한 화장내가 배어 있는 하야꼬의 귓불은 해면과도 같은 부드러움이로 끊임없이 상훈의 입술과 혀를 자극하고 가느다란 떨림이 솜털을 일으켜 세우며 상훈의 아래윗니 사이에 애처롭게 몸부림을 일으키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하얗게 빛나는 듯한 귓불 사이에서 맴돌던 상훈의 혀가 약간 미끄러지는 듯싶더니 사슴과도 같이 가느다란 하야꼬의 목덜미를 타고 다시 오똑한 콧날을 아래위로 훑고서는 마지막으로 약간 벌어진 하야꼬의 입술 사이로 밀고 들어갔다. 약간은 닫혀 있는 가지런한 이의 배열 사이로 틈을 만든 상훈의 혀가 하야꼬의 혀를 찾아내어서는 어르는 듯이 감아들었다. 상훈의 급작스런 침입에 약간 당화하던 햐야꼬긔 혀가 잠시 피하다 차츰 풀어지더니 부드럽게 얽혀들었다. 상훈의 혀는 하야꼬의 입에 고인 한 방울의 침까지도 다 빨아들일 듯 거센 숨결과 함께 강한 흡인력으로 하야꼬의 입안을 훑었다.
"아!"
진한 키스였다. 맥을 놓는 듯 자신도 모르게 터져나오는 하야꼬의 신음이 더욱 상훈을 자극하자 상훈은 눈을 감고 하야꼬의 허리를 으스러지게 끌어안았다. 부드러움이 먼저 가슴을 압박하고 다음은 두터운 물결이 끝없이 밀려왔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 한가운데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이 오직 두 사람만이 있는 파란 바다에서 자신과 하야꼬는 물먹은 스펀지마냥 서로 끌어안고 바다 밑으로 가라앉고 있을 뿐이었다.
상훈의 머리에 하야꼬와 함께 가는 미래가 처음에는 흐릿하게 그러나 차츰 뚜렷한 윤곽을 그리며 나타나고 있었다. 행복. 세상에 행복이라는 단어가 있다면 하야꼬를 끌어안고 있는 지금 이순간, 그리고 하야꼬와 같이 가는 미래를 말하는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었다. 망막의 어두운 커튼에서 일어난 한 줄기 가느다란 빛이 점차 확대되며 하얗고 밝은 길을 그려내고 있었다. 하야꼬와 자신은 팔을 걸고 다정한 얘기를 나누며 끝이 없는 이 길을 걸어갈 것이었다. 밝은 길은 끝없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훈의 상상은 순조롭게 이어지지만은 않았다. 하야꼬와 같이 걷는 하얀 길의 저편에서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었다. 헬쑥하고 파리한 얼굴이었지만 예리한 눈초리를 지닌 젊은 사람의 모습이 가까이 다가옴에 따라 차츰 뚜렷해지는 윤곽을 더듬던 상훈은 나지막이 소리를 질렀다.
'가즈오.'
역시 그 얼굴이었다. 그의 파리한 얼굴을 대하는 순간 상훈의 가슴이 크게 물결침과 동시에 하야꼬를 끌어안고 있던 손이 자신도 모르게 스르르 풀렸다. 눈을 뜨면서 하야꼬의 입술에서도 얼굴을 떼어냈다. 갑작스런 행동이었지만 하야꼬는 강열한 키스의 거센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듯 상훈의 변화를 눈치채지는 못했다.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잡으며 주변을 살피는 하야꼬의 얼굴 위로 이제 가즈오의 모습은 아주 또렷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아무 말없이 다만 핼쑥하기만 한 그 얼굴이 출렁이는 물결소리가 간간이 들리는 공간을 압도하며 상훈의 가슴을 날카롭게 파고 들었다. 상훈은 무엇에 쫓기기라도 하듯 급히 벤치에서 일어났다. 하야꼬는 약간은 뜻밖이라는 듯이 상훈을 바라보았지만 상훈은 아무 말 없이 걸어가 호수가의 돌멩이를 하나 집어 들었다. 한참의 시간을 돌멩이에 시선을 두고 있던 상훈은 느린 동작으로 팔을 들어 돌멩이를 어둠의 저 편으로 던졌다. 돌멩이는 포물선을 그리며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원래의 공간으로부터 멀어져갔고, 그 돌멩이의 궤적을 쫓던 상훈의 눈으로부터도 사라졌다. 첨벙하는 소리와 함께 돌멩이가 호수 가운데 떨어졌다.
"무슨 생각을 하셨어요?"
등뒤에서 하야꼬의 목소리가 다가왔다.
"그냥....."
얼버무리는 상훈의 목소리에 뒤이어 바로 하야꼬의 목소리가 따랐다. 하야꼬의 어디에 이런 다부진 구석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단호한 목소리였다.
"가즈오씨를 생각 하셨군요."
상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가즈오의 모습이 떠올랐다. 돌맹이를 집어 들었을 때는 자신이 바로 그 돌맹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호수에 던져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곧 가즈오가 호수에 집어던져야 할 돌맹이라는 생각이 이어졌다. 
'그렇다. 가즈오를 던져버려야 한다. 하야꼬에 대한 나의 감정은 순수하지 않는가. 그리고 무었보다도 하야꼬는 나를 좋아하고 있다.'
상훈은 가즈오에 대한 명상을 떨처 버리려는 듯이 호수를 향해 돌맹이를 힘을 다해 던졌던 것이다. 그러나 상훈의 깊숙한 어디에선가 자신도 모르게 가즈오의 영상이 조용히 떠오르면서 그의 마음에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내려 앉았다. 

 

26. 아까이의 의미


'과연 울란 야호이의 비밀은 무엇일까?'
 울란 야오이의 의미를 밝혀내는 것은 곧 에이지라는 한 일본 역사가의 의문의 죽음을 통해 그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거대한 음모를 밝혀내는 것이 된다. 어찌면 역사의 거대한 소용돌이를 어떤 한 사사로운 집단이나 한 권력가의 이기심이 좌지우지하고 잇다는 엄청나면서 불합리라기 짝이 없는 현실이 드러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광개토대왕비와 관련된 일이라면 뭔가 우리의 역사까지도 울란 야호이의 그림자 속에 휘말려 들었던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의 역사가 이곳 일본의 한 구석에서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어둡게 변색되고 왜곡되고 있을지 모른다는 얘기인가? 
 상훈은 울란 야호이가 별것 아닌 일본의 폭력단체에 불과했다면 하고 바라면서도 어쩌면 일류의 어두운 역사적 현실을 드러낼 거대한 암흑의 세력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여어 상훈 자네 언제 왔어?"
"오래만이야 , 잘 있었나?"
"잘 있기야 했지. 그런데 방학도 아닌데 한국에 왜 들어왔니?"
"시베리아로 가는 길에 잠깐 들렸지."
"자료 구하러 가나? 나도 동행했으면 좋겠지만, 요즈음 같아서는 밥 먹을 틈도 없어. 그건 그렇고 이 교수와 만났다는 자는 왜 못 만난 거야?"
"약간 복잡한 관계가 발생 할 수 있어서 그랬다니까. 어쨌던 이교수의 집으로 가보자구."
"거기 왜 가자는 거야. 가도 볼 게 없을 텐데."
"아니야, 반드시 도움이 될 무슨 기록이 있을 거야."
"내가 대충 훑었는데."
"다시 한 번 꼼꼼히 살피자니까."

 이 기자의 안내를 받아 이 교수의 서재로 들어간 상훈은 이 교수가 남긴 자료들을 면밀히 살피기 시작했다. 전공이 같은 고대사라 상훈은 이 교수의 관심사를 쉽게 알 수 있었다. 이 교수의 달이 정리해두었지만 제본된 책이 아닌 형태로 자료들은 일일이 내용을 읽어 보아야 무슨 자료들인지 알 수 있었다. 오래만에 서울에 돌아와 하루종일 재미없는 자료들을 꼼꼼히 읽어나가는 상훈을 보는 이 기자가 미안한 기분이 들어 만류하는데도 불구하고 상훈은 부지런히 자료를 읽어 나갔다.
"안타까운 일이군"
한참동안 손에 잡힌 책을 보고 있던 상훈이 중얼거리며 책갈피 사이에 두꺼운 한 장의 종이를 빼내는 것을 보고 이 기자가 궁금해서 물었다.
"그게 뭐지"
"글세, 뭐라고 해야할까? 이 교수의 심정의 일단이랄까. 절망감이랄까."
"절망감"
"그래 이것을 봐." 상훈이 내미는 종이에는 뭔가가 빽빽이 적혀있고 한 글자도 빼지않고 다시 펜으로 까맣게 칠을해서 지워버리거나 진하게 엑스표를 쳐 보기에 징그러운 기분이 들 정도였다.
"이 교수가 이렇게 했을까?"
"그랬을 꺼야.
"왜 이런 짓을 했을까?"
"극도의 절망감의 표현이지."
"절망감의 표현?"
"그래. 이제껏 지녀왔던 자신의생각이나 희망을 스스로 지워 버린 거지."
"안타까운 일이군. 교수님이 자신의 이론을 스스로 지워 버렸다는 것은."
스승이라 그런지 이 기자의 표정이 연민으로 물들어 시무룩해졌다가 갑자기 뭔가가 생각난 듯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혹시 거기 아까이라는 말이 있어?"
"없어"
"교수님이 정신병원에서 아까이라는 단어를 내뱉으며 중압감에 시달렸다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지 통 알 수가 없어."
'지금 나도 그것을 생각하고 있던 참이야. 도대체 무엇이 빨갛다는 거지."
상훈은 유심히 종이를 들여다 보면서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담당의사가 지도를 거꾸로 돌려놓고 보시곤 했다던데.'
"응, 옛날지도. 북쪽이 빨갛게 그려져 있는 지도말이야. 그 지도를 빨간 쪽이 밑으로 내려오게 뒤집어놓고는 보셨다는 거야."
"그렇다면 남쪽을 빨갛게 그려 놓은 지도와 무슨 연관이 있다는 얘기가 아닐까. 그게 아까이라는 말과 무슨 관계가 있을법도 한데."
뭔가 얼핏 생각날 것 같았지만 머리에 뚜렸이 잡히는 게 없어 상훈은 이 교수의 낙서 자국을 몇 번이고 훑었다.
"그런데 그 종이에 적힌 것은 무슨 내용들이야?"
거의 지워져 있어 내용을 알아 볼 수는 없고 몇 글자를 겨우 알아볼 수 있을정도야. 야마토라는 말이나 정한론이라는 말은 알아볼 수가 있겠는데 무슨 생각을 기록했다가 이렇게 철저히 지워버렸는지는 짐작할 도리가 없어."
"야마토라는 말은 무슨 뜻이지?"
"과거 조정의 이름이지. 그 정권의 성립시기에 대해서는 일본의 학자들 사이에도 이론들이 많아."
"그 야마토 정권의 성립시기....."
"아니, 가만 있어봐. 자네 지금 야마토라고 했지."
"그래, 자네가 설명까지 하잖았나. 일본의 한 정권이라 하지 않았어?"
상훈이 갑자기 무엇인가 생각난 듯 급히 손을 뻗어 이 기자의 질문을 중단시켰다.
"이 교수가 지도를 거꾸로 뒤집어 놓고 봤다구?"
"그래"
"남한을 빨갛게 말이야?"
"그렇다니까."
상훈은 무거운 신음을 내뱉었다
"아, 그랬구나. 그래서 지도를 거꾸로 뒤집어놓고 봤구나."
상훈은 황급한 손길로 이 교수의 책꽂이를 살폈다.
"음, 여기에는 없어 .나가자구."
"나가, 어디로?"
"볼게 있어."
상훈은 지나가는 택시를 잡고 광화문 사거리에 내려달라고 했다.
"어딜 가는 거야?"
"서점에"
"서점"
"그래"
"갑자기 거기엔 왜?"
뭐 좀 볼 게 있어."
 궁금해하는 이 기자에게 시원한 답변을 하지도 않은 채 상훈은 일본 서작 코너에 들어가서는 책을 찾았다.
"무슨 책을 찾는 거야?"
"여기 있군"
 상훈이 집어든 책의 제목은 일본어가 서툰 이 기자로서는 읽을 수가 없지만 곁에서 보니 지도였다.
"지도책이 잖아"
"일본의 고등학 역사부도야."
"역사부도?"
"그래 역사를 지도로 나타낸 거지"
"그런데 거기에 무어가 있어?"
"가만 좀 있어봐."
 재촉하는 이 기자를 이르며 책갈피를 빠르게 넘기던 상훈의 손이 어느 지도가 그려진 페이지 앞에 딱 멈추었다.
"아까이"
 상훈의 입가에서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이 기자는 뭐라고 물으려다 상훈의 표정이 굳은 것을 보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상훈과 어린 시절부터 알아온 사이였지만 이런 딱딱한 표정을 보는 것은 처음이라 놀라움 더불어 약간 주눅이 들었다. 
"역시 그랬구나."
 상훈이가 혼자말처럼 내밷는 것을 보고 이 기자가 물었다.
"무엇이 그렇다는 거지?"
 상훈은 대답 없이 역사부도를 이 기자에게 내밀었다. 이 기자가 여전히 궁금한 표정으로 부도를 받아들고 눈길을 옮겼다. 이기자의 눈에 들어온 지도 위에 4-5세기 일본과 조선이라는 제목이 한자로 쓰여 있었고 한반도의 남부와 일본 온통 빨간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아니, 남쪽이 온통 빨갛게 칠해져 있네!"
그래, 일본 지도는 늘 빨간색으로 칠해져 있어. 이정호 교수는 한반도에 칠해져있는 이 빨간색을 견디지 못했던 거야."
아니, 이룰 수가!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는 얘기야? 이런 죽일 놈들."
 제목 밑의 지도가 눈에 들어오자마자 이 기자는 고함과 더불어 부도를 팽개치고 말았다.
"전쟁과 다름없는 범죄지."
 독백과 같은 상훈의 목소리와 이 기자의 고함이 잇달았다.
"그래, 이걸 그냥 두고 있단 말이야. 역사 한다는 자들은 이걸 그냥 버려두고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는 거야."
"너무 흥분하지 말게. 그게 그리 쉽게 되는 것이 아니야."
"아니, 이런 말도 안되는 망발을 뜯어고치는 것이 쉽게 되는 것이 아니라니? 자네들 역사 하는 자들이란 모두 썩은 동태 같은자들 아닌가?"
'이봐, 이 기자 이정호 교수의 죽음을 생각해 봐. 그분의 죽음이란 것이 결국은 이런 역사왜곡을 뜯어 고치기 위한 것이 아닌가?"
"이런 말도 안되는 것을 뜯어 고치는데  죽기는 왜 죽어. 역사 하는 자들이 그렇게들 나약하단 말인가?"
"이봐, 자꾸 역사하는자들, 역사 하는자들 그러지말게. 이것은 역사 하는 사람들의 잘못이 아니야."
"그럼 도대체 누구의 잘못이란 말인가?"
"아무의 잘못도 아니야. 일본의 망발일 뿐이지."
"아니, 일본이. 일본이 이런 식으로 역사를 유린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이 일본의 한계야. 과거의 침략과 수탈에 대해서 한 번도 시원하게 사과와 배상을 하지 않는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지."
"그것은 과거의 일이지만 지금까지도 일본이 이렇게 엉뚱한 짓을 학 있을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어. 한반도의 일본과 같은 색깔로 칠해 놓다니."
"단순한 역사왜곡으로 끝날 일이 아니야. 미래의 침략을 예비하는 거지."
"미래의 침략이라구?"
"그래. 이렇게 한반도를 일본과 같은 색깔로 칠한 지도를 보고 졸업한 학생들의 머리 속에 무엇이 남아 있겠나?"
"......."
"한반도는 본래 우리가 지배했던 땅이었다. 그러니 언젠가는 회복해야한다. 이런게 아니겠어. 이른바 정한론이야. 과거 우리를 침략하고 수탈한 일본인들의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 한 해에도 수백만의 학생들을 이런 식으로 가르쳐 학교를 졸업시키는 일본의 역사교육 때문이지."
"그놈들이야 그렇다치고 왜 우리는 그런 망발을 뜯어고치지 못한단 말이야?"
"국력과 국민의 의식 때문이지."
"국력이라고? 이런 일에 무슨 국력이 필요하단 말이야?"
"자네 신문기자니까 잘 알 거야. 일전에 교과서 왜곡과 관련하여 일본이 중국에 사과한 것을 기억하지?"
"그래, 일본의 진상사절이 갔었지,"
"그런데 한국에 대해서는 어땠는가?"
"아무것도 없었지."
"바로 그거야. 일본은 그런 나라야."
"그렇다면 우리가 일본보다 강성해지기 전에는 이런 역사왜곡도 시정시키지 못한단 말이야?"
"우리의 의식이 필요해. 우리가 모두 관심을 갖고 역사학자들이 앞장을 서서 끊임없이 시정을 시켜야해. 당장 돈이 안 된다고 해서 이런 역사왜곡을 그냥 지나치면 나중에 언젠가는 우리의 자손들이 큰 화를 입게 될 거야."
"그래, 그동안 먹고 살기에만 바빠서 역사와 문화에 대해 무관심하게 지내왔으니 저들의 저런 망발을 아직도 부리고 있는 거지. 아무리 그렇다 해도. 정말 나쁜 자들이군,"
"일부 소수야. 선량한 다수의 국만을 오도하는 자들은."
"그러니까 이 교수가 아까이라고 한 것은?"
"그렇지, 바로 일본이 자국과 한반도를 같이 빨간색으로 칠해두고 역사를 비뚤게 가르치는 것에 대한 학자로서의 부담감이었지."
"결국은 일본의 역사왜곡이 교수님을 죽음으로 이끌었단 말인가?"
"그렇다고 봐야지."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무엇이"
"이 교수는 일본이 광개토왕비를 석회로 칠해 변조했다고 학회에서 주장하지 않았나. 그토록 강경하게 일본의 역사왜곡을 질타하던 분이 어쩌면 그렇게 갑자기 강박신경증에 걸리셨을까?"
"그것은 기무라 박사를 만나봐야 알겠어. 러시아를 다녀와서 그를 만나면 뭔가가 나타나겠지."
이 기자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와 여행준비를 하는 상훈의 뇌리에 자꾸 정신병원에서 아까이라는 말을 내뱉으며 육중하게 닫힌 철문 사이의 음침한 복도에서 무거운 걸음을 옮겨놓는 이 교수의 모습이 떠올랐다. 도대체 기무라 박사와 이 교수 사이에는 무슨 대화가 오고 갔기에 이 교수는 돌아와서 강박신경증에 시달려야 했을까?



27. 시베리아


똑. 똑. 똑.
잠결에 어슴푸레 들려오는 소리였다. 노크소리라고 판단한 상훈은 잠시 떴던 눈을 감으며 돌아누웠다. 이 시간에 자신의 방을 두드릴 사람은 이 낯선 도시에는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른 아침 하바로프스크를 출발하여 이르쿠츠크까지 약 다섯 시간의 비행을 한 상훈은 하루종일 시내를 쏘다니며 이 도시의 모습을 새겨두고 늦은 저녁을 먹자마자 바로 잠자리에 들었으므로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었다. 아마도 옆방을 두드리는 소리일 것이었다. 첫 번째 노크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상훈은 이것이 분명히 자신의 방을 두드리는 소리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누굴까?'
"후즈 데어?"
"아임 소리 젠틀맨."
영어를 잘 하는 사람이 드문 러시아에서 들어보기 어려운 유창한 영어였다.
"무슨 일이오?"
"미안합니다만 여자를 원하시는 지요?"
"뭐라고요?"
"아주 예쁜 아가씨가 있는데요. 같이 자지 않겠습니까?"
쳇, 상훈은 어이가 없어 시계를 보았다. 두시 삼십분을 넘기고 있었다.
"아니오. 다시는 문을 두드리지 마시오."
침대에 돌아와 잠을 이루려하자, 하바로프스크 사람들의 생활에서 받은 인상의 편린들이 상훈의 머리 속에 가득 채웠다. 이런 심야의 소동을 겪고 보니 러시아라는 나라에 대한 동정과 연민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잠을 설친 상훈은 일어나 가방을 뒤져 소주를 꺼냈다. 러시아에 오기 전에 한국에 들러 가방 한 귀퉁이에 적잖이 쑤셔넣은 팩소주가 절실히 필요한 순간이었다. 어머니가 챙겨준 오징어포와 고추장을 꺼내 테이블에 놓고 테라스를 통해 보는 안가라 강가의 불빛에 눈길을 주면서 상훈은 글라스를 집어들었다. 소주와 맞는 술잔은 아니었지만 소주라는 술이 특별히 격식을 갖추고 마시는 전통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한밤에 잠을 깨어 마시는 이국에서의 술은 무엇보다도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그 알싸하고 짜릿한 맛이 진국일진데 소주는 그런 면에서 탁월한 술이었다.
거푸 두 잔을 마시고서야 오징어포를 집어드는 상훈의 머리에 하바로프스크에서 본 사람들의 표정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무르 강가에 행상을 펼쳐놓고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앉아 있던 두 동업자. 그들의 선반 위에는 한국에서 온 열 개들이 초코파이 다섯 곽과 새우깡 열 봉지 그리고 종이곽으로 포장된 주스 열 몇 통만이 있을 뿐이었지만 그들의 자랑스러운 표정은 자못 엄숙하기조차 했다. 사십대의 두 동업자가 벌려놓은 좌판은 한국에서라면 열 살짜리 소년의 용돈조차 벌 수 없을 빈약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좌판을 벌림으로써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중이었다. 사정은 여기 이르쿠츠르도 다를 바 없었다. 거대한 바이칼을 채우고 안가라강으로 빠져나가는 물줄기가 점점 짙은 색조를 띠기 시작하는 계절이면 시베리아의 빠리라고 불리는 이르쿠르츠의 젊은 여자들은 단 한 가지 일로 고민해야 하는 것이었다.
<몸을 팔 것이냐, 말 것이냐.>
러시아 사회주의의 말로가 깊은 밤 잠을 깨어 상념에 젖은 상훈의 가슴을 아프게 때려왔다. 팩소주의 마지막 한 방울을 따르며 바라보는 안가라강 건너의 기차역에서는 새로 출발하는 심야 열차의 구슬픈 기적소리가 러시아 대중의 고통스런 외침을 대변하며 어둠 속에 떨고 있었다. 애잔한 연민의 정이 소주잔에 섞여 상훈의 목젖을 타고 넘어가는 사이로 시베리아의 밤은 깊어만 갔다.

"울란 야호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아니오."
대학을 찾아갔다가 아무런 소득이 없이 돌아온 후 관광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수소문해봤지만 그들 가운데도 울란 야호이라는 말을 들어본 사람이 없었다. 일본에서 러시아 지방어 사전을 뒤졌을 때에도 없었던 것으로 봐서 크게 기대를 하지는 않았지만. 사람을 만날 때마다 상훈의 의지는 차츰 움츠러들었다.
일단은 부딪쳐보자는 심정으로 러시아, 그것도 시베리아 중심지 중의 하나인 이르쿠츠크에 오기는 하였지만 현실은 너무도 막막하였다. 더군다나 영어를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러시아어를 못하는 상훈으로서는 자신의 생각을 십분의 일도 제대로 전달하기 힘들었다. 상훈은 낭패한 기분으로 기분전환을 위해 안가라강을 왕래하는 유람선에 탔다.
비록 이르쿠츠크가 시베리아의 빠리라는 별명으로 불리고는 있었지만, 유람선이란 매우 보잘 것 없는 도하선에 불과했다. 냄새가 세어나오는 화장실 앞을 지나 앞 갑판엘 올라가니 대낮부터 보드카 병을 들고 실없는 소리를 늘어놓으며 웃고 떠드는 이십대 후반의 후즐근한 두 젊은이가 보였다. 선원이 줄을 매고 수신호를 하자 배가 움직이며 고동을 불었다. 낡은 배였지만 고동소리는 낮고 힘찬 것이 그럴 듯하여 상훈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정말 고동소리만큼은 어디 외항선 것이라도 옮겨단 것처럼 낮고 우렁찬 것이 뜻밖의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하라쑈."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맞은편에서 보드카를 마시던 한 젊은이가 상훈을 보며 뭔가 몸짓을 해보였다. 상훈은 러시아어를 전혀 하지 못했으므로 그냥 웃음짓고 있을 뿐이었다. 젊은이가 답답한 듯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다시 뭐라고 했을 때 옆에서 부드러운 음성이 들렸다.
"어디서 왔느냐고 묻고 있어요."
영어였다. 옆에 앉아 있던 삼십대 후반의 여자가 통역을 해주었다.
"한국에서 왔습니다."
여자는 러시아어로 맞은편의 젊은이에게 뭐라고 대답해 주었다. 상대방의 젊은이는 알았다는 시늉을 해보이고는 다시 옆의 친구와 뭔가 실없는 소리를 하며 키득거렸다.
"남한에서요, 아니면 북한에서요?"
이번에는 여자가 물었다.
"남한입니다."
"그럼 서울?"
"네."
여자의 영어는 능숙했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인 치고는 한국의 사정에 비교적 밝은 것 같았다. 상훈은 어딘지 모르게 품위가 있어 보이는 이 여자에게 호감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외국인을 위한 별다른 문화체계가 없는 러시아의 분위기가 갑판에 있는 다소 불량기 있는 젊은이들에게 받은 인상으로부터의 반작용일 것이었다.
"이르쿠츠크에 사시나요?"
"네."
"가끔 강에도 나오는 모양이죠?"
"네."
"무슨 일을 하십니까?"
"대학에서 외국어를 가르쳐요."
"저는 역사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름은 박상훈입니다."
"저는 옥시나예요. 여기는 관광으로 오신 모양이죠?"
"아니 무슨 연구관계로 왔습니다."
"호호, 아마 몰락한 공산주의라도 연구하시는 모양이죠?"
여자가 맞은편의 젊은이로부터 시선을 옮기지 않고 이렇게 물어봤기 때문에 상훈은 그녀의 어딘지 모르게 감정이 실린 것 같은 목소리가 젊은이들의 이런 형태를 외국인인 자신에게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느꼈다.
"그런 것은 아니고 역사와 관련 있는 무슨 단어의 뜻을 알기 위해 찾아 왔습니다."
"그럼 공산주의의 몰락에는 관심이 없다는 얘기인가요?"
"물론 관심이 있죠. 역사를 하는 사람으로서 공산주의의 몰락에 관심이 없을 수는 없죠."
"역사가들은 공산주의가 실패한 이유를 뭐라고 설명하죠?"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기심 때문이죠."
"이기심 때문이라구요?"
여자는 약간 의외인 듯이 반문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극도로 이기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득이 되는 일에만 최선을 다하죠. 공산주의는 이 점을 간과했습니다. 인간에게 신이 될 것을 요구했죠."
"신이 될 것을 요구했다구요?"
"그렇습니다. 인간이 동물인 것을 망각하고 고귀한 이상과 순결한 윤리만을 요구했죠. 능력 없고 못사는 사람들을 위하여 우리가 같이 일하고 그것을 같이 나누자는 것이 인간에게 통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 이기적인 것은 본능이니까요."
"호호, 재미있는 생각이군요."
"자연스런 느낌이죠."
"가증스러웠어요. 권위 있는 공산주의 이론가들이 다투어 서방 언론에 조국의 역사를 바난하는 글을 내는 것을 보고 구역질이 났어요. 그런데 당신은 간단하게 진실을 얘기하는 것 같군요. 당신의 설명에는 반감이 느껴지지 않아요."
"앗."
여자의 얘기를 들으며 강 한가운데서 낚시를 드리우고 있는 보트에 머물러 있던 상훈의 눈에 뱃머리 옆의 문자가 들어오는 순간 상훈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저게 무슨 글자입니까?"
"야보노이."
"야보노이라구요?"
"네, 그래요."
"아, 저것은 야호이와 너무도 비슷한 글자군요."
러시아로 떠나기 전 최소한 야호이의 알파벳은 익혀두었던 상훈을 깜짝 놀라게 만든 글자였다.
"지금 야호이라고 하셨어요?"
"네,"
"그것은 무슨 뜻인가요?"
"저도 그 뜻을 모릅니다. 다만 시베리아 어느 지방의 방언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놀라셨어요?"
"제가 여기에 온 목적이 바로 그 글자의 뜻을 알기 위한 것입니다."
"단지 그 글자의 뜻을 알기 위해서 오셨다구요?"
"그렇습니다."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도와주신다면 너무나 고맙겠군요. 그러나 쉽지는 않더군요. 대학을 찾아가 보았으나 소득이 없었어요."
"연락처를 주세요. 제가 알아보고 연락을 드릴게요."
28. 야호이의 전설


다음날 저녁 무렵 옥사나로부터 연락이 와서 두 사람은 호텔의 바에서 만났다.
"소개할게요. 여기는 올가 수슬로바. 졸업반 학생인데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 중에서 가장 총명한 학생이에요."
"반갑습니다. 박상훈입니다."
"저두요."
눈부신 금발에 발그레한 기색을 띠었으나 바탕은 백설같이 흰 피부를 가진 올가는 보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의 미인이었다. 빨간 루즈를 칠한 입술 사이로 가지런히 드러나는 새하얀 치아나 하얗게 드러나는 목덜미의 고운 선이 자석처럼 상훈의 시선을 당겼다.
"올가는 러시아어의 어원에 관심을 갖고 꾸준히 공부를 해왔어요. 야호이라는 단어에 대해 조사를 해달라고 부탁했더니 여기서는 알 수가 없다고 해요. 직접 올가의 얘기를 들어보세요."
올가의 설명이 이어졌다.
"저는 처음에 울란 야호이라는 말은 어느 것의 지명일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울란이라는 말은 몽고어로 <붉은>이란 뜻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야호이라는 말은 몽고어와는 계통이 달라요. 시베리아 계통의 말이거든요. 학문적으로 분류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단어의 구성이 시베리아의 토속어예요. 따라서 몽고인들이 과거 러시아를 정복했을 때 붙인 지명일 것이라 판단됩니다."
올가의 설명은 논리적이었다. 상훈은 올가의 특출난 외모 때문에 그녀의 지적 능력을 다소 과소평가했던 것을 반성했다.
"러시아의 지도를 펴놓고 몽고가 정복했던 곳을 훑어보았어요. 울란 바토르에서 북진하면 울란 우데라는 곳이 있어요. 지금의 브리아티아 공화국의 수도이죠. 이 도시를 정복한 몽고군은 울란 우데라는 지명을 붙이고 거기서 서북진해요. 모스크바로 진격하기 위해서죠. 저는 울란 야호이라는 말은 울란 우데에서 바이칼호의 동안에 이르기까지의 지명일 것이라고 생가했어요. 왜냐하면 바이칼호의 서안에서부터의 말이 달라져요. 야호이와 같은 야쿠트족의 냄새가 나는 말은 없어지죠. 그래서 브리아티아 공화국의 행정지도를 살폈어요. 그러나 어디에도 울란 야호이라는 말은 없더군요. 사전이라든지 행정지도 같은 공식적인 문서에서는 전혀 나와 있지 않았습니다."
"......."
상훈은 잔뜩 기대했다가 결론이 이렇게 나자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올가에게서 뭔가 실마리를 찾는 수밖에 없었다.
"울란 바토르라는 이름에는 무슨 뜻이 있습니까?"
"네. 바토르라는 것은 용사라는 뜻이에요. 즉 붉은 용사라는 뜻이죠."
"그렇다면 울란 우데에도 뜻이 있겠군요."
"네, 우데라는 것은 강이라는 뜻이에요."
"붉은 강."
"그래요."
"몽고군은 울란 바토르에서 울란 우데로 진격해서는 거기서 다시 모스크바로 진격했다는 얘기죠?"
"그래요."
"그렇다면 울란 야호이라는 말은 울란 우데에서 바이칼호의 동안에 이르기까지의 어느 지역에서 생긴 말이 틀림이 없겠군요."
"그래요."
"그러면 어떻게 알아볼 방법이 없을까요?"
"울란 우데에서 바이칼호의 동안을 끼고 북쪽으로 좀 올라가는 어느 지역의 알려지지 않은 지명일 가능성은 있어요. 야쿠르족이 있는 곳은 거기뿐이거든요."
갑갑하던 상훈의 귀가 트였다.
"저는 바이칼호의 동안을 가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상훈의 말을 들은 옥사나와 올가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바아칼호의 동안이라 해도 매우 넓은데요. 굳이 가시겠다면 우선 울란 우데로 가야 해요. 거기서 다시 고랴진스크까지 가야하는데 차를 빌려야 할 거예요. 버스가 있긴 하지만 하루에 두 번 뿐이고 버스를 타고서는 원하는 것을 찾아볼 수 없을 거예요."
"울란 우데."
상훈은 이 낯선 도시명을 입 속으로 되뇌었다.
"울란 우데는 브리아티아 공화국의 수도이죠. 이 나라는 인구가 약 백만에 면적은 한반도의 반이 약간 넘어요. 바이칼호의 동안을 끼고 길쭉하게 뻗은 나라인데 모피와 목재가 주생산품이죠. 그런데 당신은 러시아어를 조금도 못하잖아요? 그 지역에는 영어를 아는 사람이 없을 텐데요. 올가, 상훈과 동행하겠어?"
올가는 고개를 끄덕이며 밝게 웃었다.
"하루에 십 달러의 보수를 준다면요."
"고마워요. 옥사나."
"오히려 러시아 공산주의를 제대로 이해해 주니 내 쪽에서 고마웠어요. 여행이 성공하길 바래요."

다음날 아침, 두 사람은 울란 우데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저 밑을 보세요. 바이칼이에요."
"정말 대단하군요. 누가 이것을 호수라 하겠어요? 설명을 듣지  않으면 누구라도 바다인줄 알겠군요."
"네, 그럴 거예요. 이르쿠츠크는 바이칼의 서안에서 약 백 킬로미터 떨어진 시베리아 최대의 도시죠. 러시아 전체로도 다섯 번째 도시가 될 거예요. 바이칼로는 사십여 개의 강이 흘러드는데 오직 안가라강으로만 물이 빠져나가요. 그러니 자연 이 강 유역에는 이르쿠츠크가 최대의 공업도시가 되었죠."
"그렇군요. 바이칼이 세계에서 가장 깨끗한 담수호라고 했는데 아직도 물이 깨끗한가요?"
"네, 다만 남쪽은 약간씩 물이 그전보다 못해진다는 얘기도 있어요. 북쪽은 여전하지만요."
"바이칼은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한민족과도 관계가 깊어요."
"어떤 의미에서요?'
"우리 한민족의 고향이 바이칼이라는 연구결과가 나오고 있거든요."
"그럼 한민족이 바이칼에서 살았단 말인가요?"
"네, 인류의 이동에 대하여서는 여러 가지 다른 연구결과가 있지만 인류의 발상지를 메소포타미아 지방으로 본다면 중국인들은 따뜻한 경로로 이동한 사람들이고, 우리 민족은 추운 지방으로 이동하여 시베리아를 거쳐 한반도에 정착했다고 보거든요. 이동중에 바이칼호 부근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고 보는 거죠."
"그렇게 보는 근거가 있나요?"
"물론이죠. 바이칼호 부근은 우리와 토템이 같아요. 애니미즘도 같은 것이 많고 소도 등의 희귀한 풍습도 아주 유사하죠. 앞으로 우리나라의 고고학자들이 밝힐 문제이겠지만, 우리 민족의 이동경로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한 것 같아요."
비행기는 바이칼을 동서로 가로질러 이르쿠츠크를 떠난 지 한 시간 만에 울란 우데에 도착했다.
"얼마 전까지 이 나라의 외무장관을 지내던 사람도 까레이스키예요. 지금은 경제협력차관이지만요."
"아, 그래요?"
"하지만 외무장관이라 해도 러시아하고는 달라요. 워낙 작은 나라니까요. 봉급이 오십 달러에 불과해요. 이르쿠츠크의 인투어리스트 호텔에 있는 애들이 하룻밤에 버는 액수죠."
인투어리스트 호텔에 있는 애들이란 몸을 파는 여자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올가 역시 장관과 창녀의 봉급을 비교함으로써 러시아의 현실에 대한 불만을 냉소적으로 표현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이 나라는 외교 및 국방, 그리고 관세에 관한 것만 러시아에 맡기고 나머지는 철저하게 자치적으로 살아가죠,"
"독립국인데 왜 외교와 국방을 러시아에 맡깁니까?"
"벨로루시나 우크라이나 같은 힘있는 독립국들은 완전 자치가 가능하지만 대다수의 독립국들은 재정이 약해요. 러시아에서 도와주지 않으면 금방 파탄에 이르게 되죠. 새로 독립한 공화국들은 다시 러시아에 편입되기를 원하고 있어요."
"그렇군요."
두 사람은 공항을 빠져나와 자가용 택시를 타고 시내를 들어갔다.
"아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에게 차를 빌릴 수 있을 거예요."
"렌트 카 회사는 없는 모양이죠?"
"없어요. 여기뿐 아니라 이르쿠츠크에도 없어요. 러시아에서는 자동차가 보통 비싼 게 아니에요. 여기도 새차를 타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모두 일본에서 수출하는 중고차를 타죠."
올가의 이야기를 듣자 하바로프스크에서도 시커먼 매연을 뿜어대는 버스들밖에는 없던 생각이 났다. 어떤 버스도 최하 십 년은 넘어 보였던 것이다.
올가는 상훈의 앞장을 서서 어느 허름한 집으로 들어갔다. 앞마당에는 역시 허름한 자동차가 한 대 서 있었는데 그것이 올가가 빌리려고 하는 자동차인 것 같았다.
"백 달러에 빌리기로 했어요. 며칠 쓰기로 했지만 약간 지나도 괜찮다는군요."
밝은 얼굴로 나온 올가는 뒤에 따라온 삼십대의 사나이를 손으로 가리켰다.
'이 나라에서 불쌍한 사람은 장관밖에는 없는 모양이군."
이런 생각이 절로 들 수밖에 없었다. 하여간에 돈을 지불하고 차에 탄 상훈은 시동을 걸어 보았다. 뭔가 느낌이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걸리기는 했으므로 달리 불평할 도리가 없었다. 사나이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최고라는 시늉을 해보였다.
"4년밖에 안된 거래요."
올가는 사나이가 뭐라고 하는 말을 받아 통역을 했다.
"일본인들은 중고차를 아주 싸게 팔아요. 중고차를 싸게 팔아 놓고는 고장이 나면 부품은 굉장히 비싸게 팔아요. 아무리 비싸도 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사실 중고차를 사면 손해를 많이 보게 되죠.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여기서는 새차를 살 수가 없어요."
상훈은 차를 몰고 이제 막 자본주의가 태동하기 시작하는 옛 공산주의 도시를 한 바퀴 돌고서는 바로 시외로 나섰다.
"울란 우데에서 고랴진스크까지는 먼 거리인가요?"
"저도 가보진 않았지만 아마 약 다섯 시간 정도 걸릴 거예요."



29. 바이칼


도시를 벗어나자 금방 비포장도로였지만 시베리아의 평원을 질주한다는 기분은 보통이 아니었다. 지나치는 차량이 거의 없는 길을 일제 도요다 승용차는 흙먼지를 날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도중에 간간이 마주치는 강이나 개울은 거울처럼 투명했다. 야트막한 언덕 하나 없이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을 보는 상훈은 가슴 깊숙이 시원해졌다.
한국이나 일본에서 이렇게 펼쳐진 대지를 보지 못한 이유도 있지만 자신에게 시베리아라는 이름이 주는 시원함은 그냥 펼쳐진 대지를 보는 이상의 어떤 것이었다. 비록 한반도라는 좁은 곳에 오랜 동안 살아왔지만 어쩌면 한민족의 마음의 고향은 시베리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전인자 깊숙이 뿌리박고 있는 고향에 대한 본능적 그리움이 시베리아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터져나오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것은 아마도 유럽에서 이주한 미국인들이 유럽에 대해 본능적 향수를 느끼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었다. 다만 시간적으로 좀더 오랜 일이라 유전자 속에 깊이 들어가 있다는 것이 다를지 모르는 일이지만 중국이나 일본 러시아 등은 언제나 한민족을 반도에만 머물러 있도록 강요하고 조정해 왔지만, 한민족이라 해서 한반도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사람들이 아닐진대 어디에선가 왔을 것이고 그 고향에 대한 향수와 애착이 없을 리가 없는 것이다. 한민족이 바다가 아닌 육지에서 온 것이라면 중국이나 시베리아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상훈의 생각에는 중국보다는 시베리아였다. 그러므로 시베리아가 어느 정도 민족의 이동경로나 문화 등을 아는 상훈에게 주는 의미는 각별한지 몰랐다.
"기분이 좋은가 봐요?"
올가도 상훈의 상쾌한 표정이 느껴지는지 말을 던져왔다.
"네. 시원하군요. 어쩐지 이 지역이 낯설지가 않게 느껴지는 군요."
"호호, 아까 한민족이 바이칼 주변에 살았다는 이론에 너무 깊이 몰입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런가 봅니다."
어디 북극해에서라도 불어왔음직한 시원한 바람이 차창을 스치고 문틈으로 들어와 두 사람의 피부에 기분좋게 날아와 앉았다. 낮게 누운 시베리아 평원의 풀들이 타이어가 옆으로 스칠 적마다 마치 인사라도 하는 듯이 일어섰다. 한여름 내내 파릇했을 그 풀들이 이제 겨울을 맞아 누렇고 두텁게 변신하고는 지난날의 추억을 한껏 품고 늦가을의 마지막 바람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제 눈이 내리면 시베리아는 다시 얼어붙죠. 도시와 마을들은 차단되고 강도 얼어붙어요. 사람들은 집 밖으로 잘 나가려하지 않죠. 남자들은 보드카에 묻혀 지내지만 여자들은 할 일이 없어요. 시베리아 여자들에게 겨울은 터널과 같은 것이에요."
이렇게 말하는 올가의 표정 한가운데에 어쩔 수 없이 약간 우울한 기색이 생겨나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차창에 스쳐 지나가는 풍경에만 눈길을 주고 있었다. 비록 자신의 일은 아니지만 상훈은 왠지 자신도 우울해지는 것을 느꼈다. 크게 꺾인 길을 돌아가자 나타난 큰 강을 보고 올가가 소리를 질렀다.
"아, 깨끗해라, 우리 좀 쉬어 가요."
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물가로 내려갔다.
"시베리아의 강은 일년 낸 눈녹은 물이 흐르는 거예요. 여름에도 차고 깨끗하죠."
상훈이 손바닥을 모아 물을 떠마시자 올가가 웃었다. 하얗게 드러나는 올가의 치아가 시베리아의 물만큼이나 차고 깨끗한 느낌을 주었다.
"이 물은 어디로 흘러가죠?"
"북극해로 들어가겠죠. 세상에서 가장 추운 곳이에요."
올가도 상훈처럼 손을 모아 물을 떠마셨다. 기다랗고 하얀 올가의 손가락 사이로 떨어지는 물방울이 햇빛에 비쳐 무지개 빛깔로 보였다.
"아, 물이 너무 차요."
올가는 금방 푸른 빛이 배인 듯한 손바닥을 내보이며 얼굴을 좌우로 흔들고 몸을 떠는 시늉을 했다. 그 표정이 너무도 순박하고 자연스럽게 보여 상훈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치려다 흠칫 놀랐다. 자신의 손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멈칫하는 상훈의 손을 보며 올가가 웃었다. 상훈도 역시 겸연쩍은 표정으로 웃으며 손을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저 차고 맑은 물을 따라 흘러가고 싶은 기분이 들 때가 있어요. 끝이 어디라 하더라도요."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죠."
"어머, 상훈 씨도 그런 생각을 했어요?"
"네, 지금도 그런 기분이 드는 걸요."
올가는 상훈의 이 말에 무척 친근감이 느껴지는 듯 표정이 환해졌다.
"동양인하고는 별로 얘기해 본 적이 없어요. 지금 보니까 생각하는 것도 같고 느끼는 것도 같네요."
"하하, 우리 한국인은 감정이 더 섬세해요. 아마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한국인보다 더 주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없을 거예요."
"한국문화가 어떤 것인지 알고 싶어져요."
"반드시 기회가 있을 거예요."
올가는 상훈의 말에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다시 한참을 달렸다. 석양이 넘어갈 즈음에 굽어 있는 길을 돌아서자 상훈의 눈앞에 힘차게 물결치는 거대한 바다가 나타났다.
"오제로 바이칼."
올가가 갑자기 변한 풍경에 탄성을 발했다.
'아, 그렇구나, 이것이 바이칼이구나. 이 바다와도 같은 것이 바로 세계에서 가장 깨끗하다는 바이칼호구나. 그러나 도대체 누가 이것을 호수라 할 것인가.'
우렁차게 파도치는 바이칼이 석양을 받아 끝없는 사색의 바다와 같이 그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상훈은 차를 세우고 파도가 밀려오는 바이칼의 앞에 섰다. 어디에서 불어오는지 모를 바람이 끝없이 연속되는 파도를 이르켜 상훈의 앞에 와선 부서뜨리곤 했다. 하얗게 방울지는 호수의 파도는 소금물의 바다와는 달리 호수 밑바닥의 오랜 전설이라도 가지고 온 양 투명한 속살을 내보이며 한 걸음이라도 더 상훈에게 가까이 오려 했다.
파도가 밀려 나가는 호수 바닥에는 속속들이 들여다 보이는 투명한 물 속에서 오랜 세월을 바이칼에서 살아왔을 갖가지 모양의 크고 작은 돌들이 아무렇게나 뒤섞여 파도가 싣고 온 이야기에 귀를 열어주는 듯했다. 상훈은 왠지 모르게 끝없이 파도에 씻기는 돌들이 마치 이 세상의 사람들 같다는 생각이 들어 겸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우린 인간이란 이 대자연의 앞에 서면 마치 호수가의 돌멩이같이 보잘 것 없는 존재가 아니던가.'
멀리 내비치는 석양에 반사되어 잘게 물결치는 호수 한가운데에서 마치 무수한 생명이 살아 움직이는 듯이 꿈틀대고 있었다. 상훈은 그 수많은 생명 가운데에서 하나가 일어나 파도를 타고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것 같은 느낌을 가졌다. 얼마 전 동경대에서 호수에 돌을 던질 때 떠오르던 그 얼굴이었다.
<가즈오>
상훈은 이제야 비로소 이 청년이 자신의 마음을 끌어가는 이유가 하야꼬와의 관계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생명 가운데 상훈이 순수하게 관심을 가지게 된 존재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우수 깃든 얼굴, 아니 우수라기보다는 어떤 종류의 원초적 비극을 갖고 있는 듯한 얼굴에서 상훈은 그에게 연민을 느끼고 있었다. 상훈은 문득 가즈오가 보고 싶어졌다.
"사실은 나도 한국인입니다."
해쓱하고 파리한 얼굴로 웃음지으며 상훈에게 몸조심하고 다녀오라던 그 얼굴이 어쩐지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느껴지는 것이었다. 자신의 내력을 알고 싶어 애쓰는 그의 본질은 역시 피에 민감한 한국인이었다.
넋을 잃고 바이칼호를 바라보던 상훈의 귓가에 올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이칼은 지혜의 호수라는 이름으로 불려요. 야욕과 독선으로 얼룩진 인간들이 바이칼에 와서는 참된 인간의 모습을 깨닫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부근 사람들은 <바이칼에 귀를 기울이라>는 말들을 하곤 하죠. 진리의 소리를 들으란 얘기예요."
말과 함께 올가는 바닥에서 작은 돌멩이를 하나 집어 들었다.
"이렇게 하는 거예요."
올가는 돌멩이를 자신의 귀에 대었다 떼면서 맑게 웃었다.
"호호, 저는 머리가 나빠 진리의 소리를 잘 듣지 못하겠어요. 상훈 씨는 공부를 많이 한 분이니까 들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올가는 자신의 귀에서 떼낸 돌멩이를 상훈의 귀에 댔다.
"무슨 소리가 들려요?"
"아니오, 내게는 올가의 체온만이 느껴져요."
"엉터리."
상쾌하게 웃는 올가의 웃음소리가 바람에 흩어졌다.
"이 바이칼의 모습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아요."
"바이칼에는 힘이 있어요. 바이칼에서 생각한 것은 잊혀지지 않아요."
아무렇게나 한 말이겠지만 올가의 목소리를 듣는 상훈의 느낌은 결코 예사롭지 않았다.

이르쿠츠크를 떠난 지 약 다섯 시간 만에 도착한 고랴진스크는 바이칼 연안의 작은 마을이었다.
"고랴진스크는 휴양소가 유명해요."
"휴양소가 뭐죠?"
"원래는 공을 세운 사람들이나 직장에서 휴가를 얻은 사람들이 와서 쉬는 곳이죠. 하지만 이용할 수 있는 사람들은 거의 정부의 관리들이나 당의 간부들이죠."
"정부의 시설인가요?"
"원래는 그렇지만 최근에 와서는 영리사업을 하고 있어요. 즉 돈을 받고 방을 내주고 음식을 파는 거죠."
"요양소를 겸한다면 병원이 있다는 말인가요?"
"병원은 아니지만 의사는 있어요. 여기는 온천이 좋아요. 온천수에 미네랄 성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 물이 아주 무거워요. 물리치료를 겸한 안마도 유명하구요."
두 사람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저녁무렵이라 땅거미가 지고 있었으므로 올가는 요양소에서 방을 얻었다. 상훈은 자동차에서 짐을 내려 올가를 따라 방으로 갔다 깜짝 놀랐다. 올가는 방을 하나만 잡았던 것이다.
"식사를 먼저 해야겠어요. 늦으면 문을 닫거든요."
"네."
상훈은 놀라면서도 말을 제대로 못했지만 올가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두 사람은 어시아식의 식사를 마치고 휴양소를 한바퀴 돌아본 후 방으로 돌아왔다.
"시베리아에서 남자들은 이제부터 보드카를 마시죠. 할 일이 아무것도 없거든요."
"여자들은요?"
"사소한 집안일을 하거나 책을 보죠. 문화시설은 없어도 러시아가 세계에서 책을 많이 만들어내기로는 첫째예요."
"그건 몰랐는데."
"그런 면에서 러시아는 힘이 있는 나라예요."
"그럼요."
틀림없는 말이었다. 러시아가 힘이 있는 나라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다만 어떤 식으로 그 힘을 국민을 위해 쓰느냐하는 것이 숙제였다.
"아까 접수부에서 나이가 많은 여자가 있기에 울란 야호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지 물어봤어요."
"뭐라 그래요?"
"한참을 생각하더니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하더군요."
"전혀 못 들어본 말이래요?"
"바르군친 부근에 약간의 원주민이 사는데 거기 말 같기도 하다는 얘기를 하더군요."
"아, 그래요? 그것 참 반가운 얘기군요. 그런데 바르군친은 어디인가요?"
"여기는 저도 잘 몰라요. 물어봤더니 여기서 북쪽으로 약 일곱 시간 정도 걸리는 곳이래요."
"아침에 좀더 알아보고 거기 말이 틀림없다면 일찍 출발해야 하겠군요."
"네."
대화를 끝내고 보니 할 일이 없었다. 독채의 이층에 자리잡은 방 안에는 침대 두 개와 의자 두 개 테이블 하나만이 놓여 있었다. 침대는 일인용으로 미국식으로 나란히 놓여 있지 않고 떨어져서 양 옆의 벽에 붙어 있었다. 상훈은 어쩌면 방을 하나만 예약한 올가의 선택이 옳은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중으로 방세를 지불하면서 긴 밤을 떨어져서 심심하게 지내는 것이 오히려 더욱 부자연스러울 수도 있었다. 그래도 여자와 침대가 있는 방에 들어와 본 적이 없는 상훈은 언행이 자연스럽지 못했다.
어색한 기분을 떨치고자 상훈은 밖으로 나왔다. 차를 타고 오분쯤 가니 어둠에 잠긴 호수에서 흩어지는 물결소리만이 들려왔다. 밤의 바이칼은 조용하였다. 다만 담수호 특유의 약간 비린 듯한 냄새와 밀려온 파도가 깨어지는 소리만이 별이 빛나는 하늘 밑에 한가롭게 들려올 뿐이었다. 한참동안 거닐다가 호텔로 돌아오니 다행히 올가는 잠들어 있었다.



30. 밝혀진 전설


"바르군친을 간다구요? 사냥을 가는 모양이죠?"
"시베리아 원주민들이 사는 것을 보려구요."
"요즘은 원주민들이 없어요. 다 어디로들 가버린 모양이에요."
"어쨋거나 길만 가르쳐주세요."
"그 승용차로는 가기가 힘들지 모르겠어요."
"길이 험합니까?"
"길도 그렇지만 눈이 오기도 하거든요."
나이가 지긋한 요양소의 관리자는 울란 야호이라는 말이 시베리아 원주민의 말 같다는 얘기를 하며 바르군친으로 가는 길을 가르쳐주었다. 가는 동안 여러 차례 순록이 길가로 뛰쳐나와 상훈을 놀라게 했다. 이 지역에 오자 시베리아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얼굴을 보였다. 숲과 강, 호수만이 아닌 산악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툰드라의 시베리아와는 달리 곧게 뻗은 침엽수림이 있었고 숲과 친한 각종 짐승들이 살고 있었다. 끊어질 듯하면서도 끊어져 있지는 않은 길을 따라 운전을 한 지 예닐곱 시간이나 지나서야 자동차는 바르군친에 도착했다. 바르군친은 고랴진스크보다도 작은 마을이었고 여기에는 아무런 특징이 있는 것이 없었다.
"울란 야호이란 말을 들어보셨어요?"
올가는 만나는 사람마다 이렇게 묻고 다녔으나 별로 신통한 대답을 얻을 수 없었다. 더욱 낙담스런 것은 외부인들이 사냥하러 많이 오기 때문에 원주민들이 모두 떠나버렸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는 맥이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일단 숙소를 정해야 했으므로 촌장의 집을 찾아갔다. 촌장은 자신의 방을 기꺼이 내주며 저녁식사도 제공했다. 대대로 촌장을 하고 있다는 나이가 지긋한 촌장은 특히 상훈이 외국인인 것을 알고는 잘해주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이제 어떻게 하지요?'
"글쎄요, 돌아가는 수밖에는 없겠군요."
"그럼 여기 러시아까지 온 보람이 없잖아요?"
올가는 자신이 통역으로 나선 일이라 그런지 마음 아파했다.
"괜찮아요. 다른 일도 있으니까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상훈도 마음이 쓰렸다. 잔뜩 기다리고 있을 이마무라 주임의 얼굴이 떠오르고 쥰이찌가 저승에서 편안히 눈을 감지 못할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신이 맡은 사건을 여기까지 와서 해결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최선을 다했어도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울란 야호이라는 말의 뜻을 알아내지 못하자 이제 가즈오의 부탁은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박관념처럼 상훈을 내리 눌렀다.
"올가, 미안하지만 내 부탁 좀 들어줄 수 있어요?"
"무엇인데요?"
올가는 약간 고개를 끄덕이며 물어왔다.
"약간 먼 여행이 될지 모르지만 나의 다음 일에 동행해줄 수 있어요?"
"이번엔 어디까지 가는 건데요?"
상훈은 대략의 설명을 했다. 올가는 더한 부탁이라도 들어줄 수 있다는 듯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당신들은 무슨 일로 이 먼곳까지 왔소?"
올가가 자초지종을 얘기하자 촌장은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 저으며 안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잠시 후 그는 한 노인과 함께 다시 나타났다.
"울란 야호이, 그것은 붉은 전사의 전설이야."
"네?"
"붉은 전사라고."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소."
상훈의 가슴이 마구 뛰었다. 노인의 얼굴은 주름투성이었지만 행동거지는 활발하여 건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노인은 얘기를 시작했다.
"옛날에 이 근처 지역이 울란 야호이라고 불린 적이 있었지. 원래 울란 야호이란 이 지역에 살던 시베리아 원주민들의 전설이야. 이들은 야쿠트의 일족이지. 그 전설이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몰라도 아마 징기스칸이 러시아에 쳐들어온 직후일 것이야. 왜냐하면 그 울란이란 말은 몽고어이기 때문이지. 야호이란 말은 원주민들의 말로 전사란 뜻이지.
그런 말이 어째서 이 사람들의 전설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그들의 전설인 것은 틀림없어. 아마 몽고의 지배를 받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저항심에서 그런 전설이 나오게 됐는지도 모르겠어. 하여튼간에 그 내용은 이런 것이야. 몽고가 야쿠트족을 지배했을 당시 야쿠트족의 추장은 다섯 명의 전사를 데리고 조상들이 남겨두었다는 보물을 찾으러 갔지. 몽고는 보물을 가지고 오면 항복을 받아주겠다고 약속했던 거야. 칠일 밤 칠일 낮을 헤매어도 그들은 보물을 찾지 못하고 깊은 산속에서 길을 잃게 되었어. 모두 주리고 지쳐서 쓰러지기 직전에 보름달이 떠오르면서 늑대가 나타났어. 늑대는 이들에게 따라오라는 시늉을 했지. 이들이 늑대를 따라 어느 굴까지 가니까 그 굴 속에 이들이 찾던 바로 그 보물이 있었다는 거야. 그래서 추장이 맨 먼저 들어갔다는 거지. 붉은 추장이 보물을 가지고 나오는 것을 야쿠트의 다섯 전사가 기다리고 있다가 칼로 찔러 죽였어. 다섯 전사는 추장을 죽이고 몽고에 영원히 항쟁하겠다고 다짐했어.
이들은 추장의 시체를 감추고 사라졌는데 문제는 그 다음에 생긴 거야. 몽고의 병사들이 마을을 모두 잿더미로 만들어 버린 거지. 다섯 전사는 산에서 내려와 울부짖으며 몽고에 대한 영원한 복수를 맹세했어. 이들이 울부짖을 때 길을 안내했던 늑대가 나타나 같은 목소리로 울부짖었다는 거야. 그 다음부터는 이들 부족은 늑대를 자신들의 수호신이라고 믿게 되었지. 그들은 늑대가 우는 밤이면 축제를 열고 몽고의 지배를 벗어난 것을 기린다는 거야. 
족장의 얘기가 끝났어도 상훈은 도무지 단서를 잡을 수 없었다. 도대체 가또오가 울란 야호이의 맹세라고 써놓은 것이 이 이야기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혹시 이 전설과 일본인이 관련된 것은 없습니까?"
"일본인?"
"네."
"몰라."
"촌장으로 계실 당시 이 지역에 찾아온 동양인들은 없었습니까?"
"별로 없었어. 워낙 오지라 러시아인들도 잘 오지 않으니까."
이렇게 대답하면서도 옛날 일을 생각해내려 애쓰던 노인은 갑자기 무엇인가 생각난 듯 머리를 쳤다.
"참, 그 사람들이 있었지. 이상한 사람들이 있었다구."
"이상한 사람들이요?'
"그래, 묘한 자들이지. 전설을 흉내내곤 돌아간 사람들이 있었어."
귀가 번쩍 뜨이는 얘기였다.
"전설을 흉내낸 사람들이라구요?"
"그래, 무덤도 있어. 우리가 묻었지."
"처음부터 설명을 좀 해주시겠어요?"
노인은 미간을 찌푸리고 아련한 옛날의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나 막상 얘기를 시작하자 막힘이 없이 얘기를 풀어냈다.
"그게 벌써 오십 년이나 지난 얘기야. 매우 이상스런 느낌을 주는 여덟 명의 사나이가 이 마을에 나타났어. 우리 말을 할 줄 아는 사람도 있었어. 금을 내놓으면서 술과 음식을 준비해 달라고 했어. 달이 밝은 밤이었지. 나는 뭔가 이상한 예감을 느꼈어, 이상한 살기가 흐르더란 말이아. 그들 중의 두 사람이 칼을 꺼내들었지. 달빛에 하얗게 반사되는 칼날에 벌겋게 피가 묻어 나오는 것을 보는 순간 언젠가 꼭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더군. 얘기로만 듣던 야호이의 전설이 그날 밤 되살아나고 있었단 말이야.
그들은 갑자기 칼을 뽑아 지휘자를 죽였어. 죽은 자를 사이에 두고 핏발이 선 눈길로 이를 드러내며 웃는 그들의 모습, 우연인지 그때 마침 건너편 산에서 늑대가 울었어. 귀기마저 흐르는 살벌한 밤이었지. 달빛에 미쳐버렸는지 이상하게도 나는 그 죽은 사람이 야쿠트의 추장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나는 자신도 모르게 야호이 야호이 하고 외치며 돌아다녔지. 피묻은 손을 씻지고 않은 채 눈동자를 희번득거리는 그들에게 나는 전설 얘기를 해주었지.
그들은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손가락을 배어 피를 냈어. 둥글게 모여앉아 술에 피를 섞어놓고는 핏발선 눈으로 한참이나 서로를 응시하고 있더군. 동네의 처녀들이 춤을 추는 가운데 그들은 피를 나눈 술잔을 나누며 맹세를 했지. 내가 무슨 맹세냐고 물으니 피가 묻은 입술로 야호이의 맹세라고 하지 않겠나. 섬뜩한 기분이 들었지. 모두가 미친 밤이었어. 처녀들은 황금에 취해 밤새 그들에게 드나들었지."
"그들이 했던 맹세가 무슨 내용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까?"
"모르겠어. 무어라 맹세를 하고는 마지막에는 다 함께 고함을 지르더군."
하긴 노인이 맹세의 내용을 알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포기하다시피 한 일에 노인을 만나 이런 얘기를 듣게 된 것은 너무도 다행스런 일이었다. 상훈은 혼자 나가 촌장이 만들어 주었다는 무덤을 돌아보았다. 그것은 그저 버려진 쓸쓸한 무덤일 뿐이었다. 무엇을 알아낼 단서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상훈은 한동안 무덤 옆에 앉아 들풀과 날벌레들을 바라보았다.
'야호이. 이 전설을 흉내내고 돌아간 사람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이란 말인가?'

다음날 아침 두 사람은 일찍 출발하여 고랴진스크를 거쳐 울란 우데까지 돌아왔다. 울란 우데의 바이칼 호텔에서도 역시 올가와 같은 방에 들게 된 상훈은 또다시 어색한 기분을 어쩔 수 없어 저녁식사를 마치고 산책을 나갔다. 올가는 계속 읽던 책을 꺼내면서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농담을 던졌다.
"상훈 씨는 제가 밤에는 늑대로 변하는 줄 아시는 모양이에요."

울란 우데의 시내에는 아직도 레닌의 두상이 웅장하게 자리잠고 있었다. 러시아에서 가장 크다는 이 두상은 공산당 본부와 비밀경찰 본부, 그리고 브리아티아 공화국 정부청사 사이의 광장에 기묘한 느낌을 주며 버티고 있었다. 어떤 사회이든 급작스러운 혼란은 부담스러운 모양인지 이 나라도 처음에는 반공산당 세력이 정권을 잡았다가 국민투표에 의해 다시 공산당 계열에서 대통령이 나왔다고 했다.
영화관이나 술집 혹은 커피숍 같은 것이 보이지 않는 이도시에서는 오페라가 유일한 대중오락인지 정부청사 맞은편에 오페라 극장이 가장 화려한 건물에 들어 있었다. 박물관과 전쟁기념관 등의 전통적 건물들만이 있는 가운데 유일하게 햄버거 가게가 있었다. 개방 이후 러시아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햄버거라는 보도를 들은 적이 있는 상훈은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러시아에 있는 햄버거 가게도 한국이나 미국에 있는 것과 똑같은 시설이었다. 밖에서 구경하며 슬쩍 지나치는데 앞을 가로막는 사람이 있었다.
"한국분이시죠?"
"그렇습니다만,"
"저도 한국인입니다. 서울에서 왔죠?"
"아, 이 가게를 하고 계십니까?"
"그렇습니다."
상훈은 놀랐다. 언제 한국인인 이 외진 시베리아의 한 곳에 와서 햄버거 가게를 시작했단 말인가. 자리에 앉자 주인은 상훈을 만난 것이 무척 반가운 듯 쉴새없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상훈은 이 사람이 모진 고생을 무릅쓰고도 결국은 성공하여 울란 우데에서 인정을 받으며 여러 가지 사업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역시 한국인의 끈질긴 생명력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에서 사업을 한다는 것은 시한 폭탄을 안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언제 한 방에 날아갈지 모르는 거죠. 이 사람들이 처음에는 가만히 놔둡니다. 매우 협조적이죠. 그러나 비밀경찰이 모든 정보를 다 입수하여 기록해 둡니다. 그러다 어느날 갑자기 들이닥치는 겁니다. 외환이나 탈세 등에 관한 모든 자료를 다 내놓고 사업체를 내놓을래. 아니면 형무소로 갈래 하는 겁니다. 솔직히 러시아같이 법이 미비된 곳에서 외화이나 세무에 문제가 없을 수는 없지요. 빠져나갈 방법이 없어요."
"그럼 어떻게 사업을 하셨어요?"
"여기만은 괜찮습니다. 우리 동포가 장관으로 있어 정부와 친하게 되었고 또 브리아티아 공화국 자체가 좋은 정부입니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는 마파아를 끼지 않으면 아무 일도 못하죠."
"정부에서는 마피아를 단속하지 않습니까?"
"러시아의 마피아는 이태리나 미국의 마피아와는 다릅니다. 단순한 범죄조직이 아니에요. 또 하나의 정부라고 보면 됩니다."
주인과 헤어져 돌아오며 어쨌거나 한국인은 생명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이 미지의 곳에까지 와서 정부의 고위인사와 사귀고 첨단가게라는 햄버거숍을 차리고 살아가는 모습이 대견하기조차 했다.
시내 곳곳을 다니다 호텔에 돌아왔을 때에는 올가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상훈은 소리를 내지 않도록 조심하며 샤워를 하고는 침대에 들었다.



31. 유형장


"나고르니에 간다니까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라요. 스코보로디노에서 내려 자동차로 갈아타야 한다는 군요. 유형장은 스타노보이산맥 한가운데 있었다는데 가기만 하면 죽기 전에는 살아 나올 수 없었다는 곳이래요.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한국인이 그런 곳에서 유형생활을 했을 수가 있어요?"   
올가는 상훈이 가고자 하는 곳을 물어 확인하고는 적잖이 놀란 모양이었다. 상훈도 일본을 떠나기 전 대략 확인을 해 두었던 바라 올가가 놀라는 것이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은 하였으나 막상 러시아 현지에 와서 교통 상황을 보니 유형장이 있던 곳을 찾아가는 것만 해도 보통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올가, 고마워요. 올가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혼자서는 엄두도 내지 못했을 거요."  
"지금 바로 역에 가서 기차를 타면 내일 정오에는 스코보로디노에 내릴 수 있어요. 거기서 자동차를 알아보아야 할 거예요. 운이 좋으면 버스를 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아마 버스는 아침에 떠나는 것 한 편뿐일 거예요."
역에 도착한 상훈은 깜짝 놀랐다. 역에서 기차표가 이미 다 나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올가는 당황하지 않고 여기저기 다니며 알아보더니 침대가 있는 콤파트의 표를 구했다.
"지금 구한 표는 암표인 모양이죠?"
올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차가 출발하자 울란 우데 부근의 시베리아 정경이 새롭게 눈앞에 다가섰다. 툰트라의 침엽수림이 교대로 나타났다가는 사라지는 사이로 곧게 뻗은 적송들이 고고한 자태를 보이고 때때로 달리는 기차를 보며 숲으로 자취를 감추는 사슴의 뒷모습이 외로워 보였다. 드넓게 목초지에 소를 놓아 기르는 목장의 한가로워 보이는 풍경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것을 보며 상훈은 새삼스레 시베라아의 광활함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철로 옆으로 완만하게 흐르는 작은 강은 자연의 아늑함을 보듬고 있었지만 차창 밖의 풍과은 이제 북극의 찬바람이 휘몰아쳐 모든 풍경이 삽시간에 바뀌기 전에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이 늦가을의 마지막 잔광을 누리려는 듯 애잔한 분위기를 보이고 있었다.
기차가 보급품을 싣기 위해 제법 오랫동안 멈추어 있을 때에 상훈은 올가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맑은 공기를 들어마시며 시베리아 횡단 열차여행은 쾌적한 것이라고 생각하던 상훈의 눈에 삼등칸 승객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우등석의 승객들이 모두 밖에 나와 운동을 하는데도 삼등칸의 승객들은 별로 내리지도 않고 있었다.
"왜 그렇죠?"
"직접 보시는 게 나을 거예요."
비록 창밖에서였지만 삼등칸의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좌석을 가진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입석승객들도 겨우 몸을 추스릴 정도의 작은 공간이나마 빼앗길까봐 일어날 생각조차 않는 것이었다. 보통 며칠씩 가는 승객들이었으므로 자리를 빼앗기면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좌석표를 가져도 별로 의미가 없을 것으로 보였다.
"인생을 알려면 삼등칸을 타라는 말이 있을 정도예요. 이제 밤이 되면 더 심해져요. 코를 찌르는 냄새와 술취한 사람들의 주정, 코고는 소리, 자리싸움, 돈 달라는 거지와 깡패들, 젊은 여자에게 추근한 치한들, 앙칼진 여자들의 고함으로 얼룩지는 열차는 지옥과도 같아요."
"젊은 여자가 삼등칸에 타는 것은 정말 못 견딜 일이겠군요."
"네, 그러나 다들 삼등칸을 타요."
"왜요?"
"싸니까요."
그를 것이었다. 수입이 적을 수 밖에 없는 젊은 여자들이 삼등칸을 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할 것이었다.
"처음에는 저항하지만 결국은 더러운 손의 놀림감이 되고 말아요. 밤새 잠을 안 잘수는 없으니까요."
"옆사람들이 말려주지 않나요?"
"러시아에서는 남의 일에 상관하지 않아요."
올가의 대답은 간단했으나 명료했다.
"슬픈 일이군요."
두 번늬 식사를 마치자 밤이 찾아왔다. 차창 밖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두 사람의 모습만이 반사되어 비칠 뿐이었다. 시베리아의 밤을 달리는 기차의 숨소리는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다.
"유형장은 이제 없어졌어요. 집단농장으로 바뀌었어요. 그런데 거기는 왜 가려고 그래요?"
다음날 저녁 무렵에야 도착한 나고르니의 법무관은 상훈이 유형장을 찾아왔다는 말을 듣고는  매우 궁금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어떤 사람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사람인데요?"
"조선인입니다."
"조선인?"
"네, 지금은 고려인이라고 불리죠."
"언제 거기에 있던 사람인데요?"
"분명하지는 않지만 1930년대 무렵부터 상당히 오랫동안 거기에 있었던 것은 확실합니다."
"그래 도대체 무슨 일로 그 사람에 대해 알아보는 겁니까?"
"그 사람의 손자의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집안 내력을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에 나에게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왜 그는 자신이 직접 오지 않았습니까?"
"그는 몸이 많이 아픕니다."
"음."
관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의미는 무언가 도움이 되어야겠다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아마 상훈이 외국에서 이렇게 먼길을 그 일을 위해 왔다는 것이 지방의 관리에게는 관심과 더불어 자신의 무료함도 달랠 수 있는 작은 사건으로 생각되는 모양이었다.
"유형장의 모든 기록은 내가 보관하고 있소. 같이 찾아보도록 합시다."
"감사합니다."
스타노보이 산맥이라는 외지의 한가운데 있었던 유형장치고는 죄수의 수가 그리 많지 않았던 모양인지. 가즈오의 할아버지 최화영의 기록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여기 있군요."
서류를 집어든 관리는 먼저 자신이 꼼꼼하게 읽어본 다음에 상훈에게 내밀었다.
"이 서류 제가 가져가도 됩니까?"
"안돼요."
"이제는 아무런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정부의 공식 문서요."
"그럼 여기에 이렇게 썩어가는 것들은 왜 관리하지 않는 겁니까?"
"어쨌든 그렇게는 할 수 없소."
관리가 완고한 태도를 보이자 상훈의 말을 옮기기만 하던 올가가 빠른 러시아어로 뭐라 했다. 관리는 올가의 말을 듣자 대번에 태도가 누그러지더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상황이 달라지는 눈치였다.
"이십 달러를 주세요."
상훈이 이십 달러를 꺼내 올가에게 주자 올가는 돈을 관리에게 주는 것과 동시에 서류를 집어들었다. 상훈이 서류를 가방 안에 넣는 것을 지켜보던 관리는 빙그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두 사람은 작은 여관을 찾아 짐을 풀고는 식사를 했다. 따로 떨어진 작은 침대가 두 개 있고 역시 작고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책상이 하나 있는 여관은 비록 깨끗하지는 않았지만 주인은 친절했다. 찾아오는 손님이 거의 없는 모양인지 주인이 날라온 장작에는 먼지가 쌓여 있었다. 두 침대 사이에 놓여 있는 난로에 장작을 넣자 이내 방안은 훈훈해졌다. 난로에 놓여 있는 찻주전자에서 모락모락나는 김과 따르락거리는 물끊는 소리가 때이른 겨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하긴 시베리아에서도 높은 지역인 이곳은 이미 겨울로 접어들고 있었다.
"장작이 잘 말라 있군요."
"네, 시베리아 장작은 잘 타요."
"기후가 건조해서 그런 모양이죠?"
"그렇기도 하고 잘 타는 수종들이 있어요."
올가가 차를 따르는 동안 상훈은 가방 속에서 서류와 종이를 꺼냈다.
"좀 쉬세요. 제가 영어로 번역을 해두겠어요."
마침 이 유형지 마을의 밤거리를 보고 싶던 참이라 올가의 얘기를 듣자 상훈은 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여관 밖으로 나서자마자 매섭도록 찬바람이 얼굴을 후려쳐왔다. 아직 겨울의 문턱에 있는데도 바람이 이럴진대 막상 겨울로 들어서면 어떨는지 생각만 해도 몸이 떨려왔다. 더군다나 산 위에 있었다는 유형장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시베리아의 찬바람은 상훈에게 가즈오의 할아버지가 겪었을 고통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연약해 보이는 가즈오의 인상 탓인지 가즈오의 할아버지 또한 육체적으로 강인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이런 생각이 들자 상훈은 올가가 번역하고 있는 서류를 빨리 보고 싶어졌다.
가로등 하나 없는 마을은 캄캄했다. 길도 포장되었던 자국은 있었으나 다 파헤쳐져 있었다. 시베리아의 강추위에 얼어붙었다가 여름이 되면 녹기 시작하면서 길은 터져나가고 말 것이었다. 도로의 양쪽으로 늘어선 집들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을 따라 마을을 한바퀴 돌아보았으나 허름한 찻집이나 선술집조차 하나 발견하지 못한 상훈이 여관으로 돌아와 놀랍다는 표정으로 올가에게 설명하자 올가는 빙긋이 웃기만 했다.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살죠? 아무것도 없어요."
"집에만 있어요."
"젊은이들은 어떻게 살아요? 그냥 집에만 있을 수는 없잖아요?"
"도시에 나가 있거나 어느 집엔가 모여 있을 거예요."
"모여서 뭘 하죠? 오락이 있어야 하잖아요?"
"여자들은 군것질을 하거나 옷감을 짜면서 남자 이야기들을 하죠. 남자들은 보드카를 마시고 뭘 하는 지는 모르겠어요. 아마 여자 이야기를 하겠죠."
"혼전 성교 같은 것도 허용되나요?"
이 말은 들은 올가는 그 하얗고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러시아에서 섹스란 악수하는 것과 같은 정도예요."
상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이었다. 그 길고도 긴 밤을 이렇듯 아무런 오락이나 취미시설 같은 것이 없이 지내다 보면 자연히 섹스가 오락이 될 것이었다.
"이 사람의 기록은 비참하군요."
올가가 자신이 번역한 종이를 내밀었다.
상훈은 종이를 받아들고는 책상에 앉아 꼼꼼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수형부
성명 : 최화영
생년월일 : 1910년 7월 2일
주소 : 하바로프스크 비로비잔 구역 비라거리 16
직업 : 하바로프스크시 국립출판소 직원
입감일 : 1937년 12월 19일
출감일 : 1964년 12월 30일
죄명 : 국가반역, 당간부 암살미수
형량 : 종신징역
출감사유 : 사망 (신병으로 인한 신체쇠약)
특기사항 : 상기자는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수행하는 당간부를 암살하려 했고 고려인들의 집단적 저항을 유도하려 했던 자로 극히 불온한 자임.
유형지에서도 이런 움직임을 보일 시에는 별도 보고 없이 처형해도 무방하다는 극동헌병사령관의 지침 부기.

올가가 이 사람의 기록이 비참하다고 말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세상에 어떤 죄수가 별도 보고 없이 처형해도 좋다는 꼬리표를 달고 시베리아의 유형지로 보내질 수 있었을까. 그러나 이 꼬리표는 상훈에게 안도의 한숨을 쉬게 해 주는 것이었다.
'가즈오가 기뻐하겠군.'
극동헌병사령관이 그런 꼬리표를 붙여 유형지로 보냈다면 이 사람은 이미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상훈은 세 가지 사실로 이 사람의 내력을 추측하려 했다. 우선 직업란에 있는 하바로프스크 국립출판소 직원이라는 신분, 국립출판소 직원이었다면 당시로서는 지식인일 것이었다. 다음으로는 죄목이었다. 당간부를 암살하려 하고 고려인들의 집단적 저항을 유도하려 했다는 것은 그가 정치적 인물이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다음으로는 극동헌병사령관의 지침이었다. 이것은 위의 국가의 중요한 정책이라는 표현과도 관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 사람은 도대체 소련의 어떤 정책에 반발하여 고려인들의 집단적 저항을 유도하였을까. 단순히 저항을 유도했을 뿐만 아니라 주요 정책 수행자를 암살하려까지 했다면 그 정책이란 보통의 것이 아닐 것임은 명백했다. 가즈오의 할아버지가 아니라 하여도 이런 기록을 가진 사람이라면 역사를 연구하는 상훈에게는 깊은 흥미를 자아내지 않을 수 없었다. 상훈은 찻잔을 기울이며 생각을 가다듬었다. 입감일이 1937년 12월 19일이라면 이 사람은 그해 하반기에 잡혀온 사람임이 분명했다. 1937년에 하바로프스크 부근에서 일어난 큰 일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던 상훈이 갑자기 책상을 쳤다.
<강제이주>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연대와 죄목 등으로 보아 가즈오의 할아버지는 소련의 강제이주 정책에 항거하여 당간부를 암살하려 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1937년 스탈린은 극동에 있는 모든 고려인을 강제로 화차에 태워서는 한 달 간의 이동 끝에 중앙아시아의 황무지에 내려놓았다. 이 야만적 독재자에 의한 약 15만에 이르는 한인의 강제이동은 한 마디로 참극을 연출하여 이동중에나 그 후유증으로 죽은 아이만도 수천 명에 이르렀다.
다행히 한인동포들은 살인적인 환경을 잘 극복하여 지금에 이르러서는 러시아 내의 소수민족 가운데서도 가장 잘사는 민족으로 떠올랐지만, 이 야만적인 강제이동으로 인하여 입었던 피해는 이루 말로 다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상훈은 하바로프스크로 가야한다고 생각했다. 성과가 있을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이 기록으로 보면 하바로프스크에 가면 반드시 이 사람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32. 수난의 조선인


"우리 경찰서에서는 그 당시의 기록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럼 오래된 서류는 어떻게 합니까?"
"중요한 것은 정부문서보관소로 보내고 중요치 않은 것은 폐기 처분해 버리죠."
"경찰서에서 별도로 간략하게 기록하는 것은 없습니까?"
"네, 그런 것이 있기는 한데 대단히 중요한 일만 기록하거든요. 업무일지 같은 것이 아니고 경찰서사 같은 것이지요."
"그것이라도 한 번 보아 주었으면 합니다."
하바로프스크 경찰서는 기대 이상으로 친절했다. 서무과장은 오랜 기록철을 꺼내 한참이나 뒤지더니 책을 덮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것을 보는 상훈의 마음에 먹구름이 피어 올랐다. 먼저 간 출판소는 이미 없어져버려 경찰서에서 밖에는 최화영이라는 인물의 행적을 찾을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없어요. 그 해에는 중요한 범죄기록이 단 한 것 밖에 없어요."
"무슨 사건입니까?"
"류쉬꼬쁘 암살사건이에요."
"사건의 내용이 어떤 것입니까?"
서무과장은 썩 내켜하지 않았지만 올가가 거듭 부탁하자 다시 책을 같고 나와 1937년도 편을 폈다.
"인민내무서 극동지고 책임자 류쉬꼬쁘 씨를 까레이스키가 암살하려 했던 사건이에요."
"그 고려인의 이름은 쓰여 있지 않은가요?"
"잠깐 기다려요."
과장은 한참 읽고 나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사실 이름을 확인할 필요도 없어요. 그 고려인인 바로 내가 찾는 사람임에 틀림이 없어요. 어떻게 하면 류쉬꼬쁘와 관련된 기록을 볼 수 있을까요?"
"문서보관소에 가면 되겠지요."
맞는 말이었다. 인민내무서의 극동지구 책임자라면 하바로프스크 지역문서 보관소를 가 봐도 여러 가지 기록이 있을 것이었다. 두 사람은 문서보관소에 가서 열람신청을 했다. 류쉬꼬쁘에 관한 문서는 특별한 비밀로 분류되어 있지 않아 두 사람은 직접 문서를 찾을 수 있었다.
"여기 있군요. 비밀경찰의 극동책임자였어요."
올가가 한참 문서를 뒤지더니 급기야는 류쉬꼬쁘라는 이름을 찾아냈다.
"그 사람이 그 직에서 수행한 일 중에 중요한 것이 무엇이 있나요?"
"고려인 이동작업을 지휘하여 공산당 중앙위원회 명의의 표창장을 받았군요."
"음, 내가 짐작 했던 대로군."

역시 그랬다. 가즈오의 할아버지 최화영은 고려인의 강제이동을 진두지휘하는 류쉬꼬쁘로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쳐 나고르니 근처의 유형장으로 끌려갔던 것이다. 그는 온 대지가 울어대는 혹한의 시베리아에서 낮에는 일에 지치고 밤에는 추위에 시달리다 끝내는 유형장에서 생명을 마치고 말았던 것이다. 상훈은 아직도 그의 외로운 영혼이 버림받은 채 시베리아의 유형장 주변을 떠돌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가슴이 아팠다.
고려인을 학대하고 추방하려는 음모에 대항한 가즈오의 할아버지는 분명 민족의 영웅으로 역사에 기록되어야 마땅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민족으로부터 영원히 버림받은 시베리아의 떠도는 혼이 되었다. 게다가 그의 자손인 가즈오는 자신의 뿌리가 무엇인지도 모른채 괴로워하다가 결국 이국에서 정신병을 앓고 있었다. 가즈오는 자신이 엉뚱한 곳에 어설프게 뿌리내린 존재임을 막연히 눈치채고, 남모르는 고통을 속으로 삭이면서 자신의 뿌리를 찾고 있지 않은가.
상훈은 가즈오의 노력이 눈물겨웠다. 창백한 가즈오의 가냘픈 이미지가 우리 민족의 부대껴온 역사의 희생자의 모습으로 상훈에게 다가왔다. 상훈은 가즈오를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 하고 싶었다. 상훈은 일단 그의 할아버지의 고향인 비로비잔 구역에 가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혹시 고향에서 그의 행적을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게 될지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저녁이 다 되어서야 비로비잔에 도착한 상훈은 수형부상의 주소지를 찾았으나 이마 구역개편이 되어 그런 주소는 있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행정사무소를 찾아 확인한 주소지에는 유태인이 살고 있었다.
올가가 몇 마디 물었으나 그는 전혀 아는 것이 없다고 했다. 상훈은 다시 행정사무소에 확인하여 고려인이 살고 있는지 물었으나 정확히 확인할 수는 없었다.
"아마 비로비잔 구역에 고려인은 없을 겁니다. 기록을 보면 1930년까지는 고려인이 3,200명으로 당시의 유태인 2,700명보다 많았지만 유태인 자치지역으로 선포되고 나서는 다 이동하여 갔을 겁니다."
유태인 직원의 설명을 들으며 상훈은 궁금증이 생겼다. 어째서 비로비잔은 고려인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유태인 자치지역으로 선포되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달리 더 알아볼 도리가 없어 하바로프스크로 돌아온 상훈은 하바로프스크의 고려인들을 찾아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들 중에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면 이 암살미수 사건을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비로비잔 출신들도 이제는 드물어여. 다 죽고 흩어지고 여기 하바에도 몇 없어요."
힘들게 찾은 비로비잔 출신 한 노인은 옛날 일을 물어보려면 미하일로비치 최를 찾아가야 한다며 검버섯이 피어난 투박한 손으로 약도를 그려주었다. 낡고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오층 아파트의 어둡고 비좁은 터널 같은 복도를 지나 문을 두드리자 주름살 자국이 깊은 한 노인이 문을 열어주었다.
"미하일로비치 최 선생님이신가요?"
"그렇소. 당신들은 누구요?"
"한국에서 왔습니다. 류쉬꼬쁘 암살사건과 관련하여 여쭈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 찾아뵈었습니다."
"류쉬꼬쁘 암살사건?"
"네, 그 사건에 대하여 아시는 바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뵈었습니다."
"허, 이상한 일이로군, 일년내내 손님이 없는 집에서 하루에 두 번이나 방문을 받다니. 어떻든 들어오시오. 뭐 안다기보다 있었던 일을 그대로 얘기하면 되겠지."
상훈은 방안을 들어서면서 깜짝 놀랐다. 러시아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화사한 옷차림과 환한 혈색의 젊은 한국인 남녀가 앉아 있었던 것이다.
"자 이리 앉으시오."
노인은 젊은 남녀에게 무슨 얘기를 하던 중이었는지 상훈과 올가에게 그 옆의 자리를 권하고는 중단되었던 얘기를 계속했다. 두 젊은 남녀는 상훈과 올가가 옆자리에 앉자 부드러우면서도 예리한 눈길을 던지며 계속 노인 얘기를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노인은 함경도 사투리가 섞인 말씨로 얘기를 하고 있었으나 젊은이들은 러시아에 와서 오랜만에 보는 세련된 맵시로 보아 한국인 그것도 서울에서 온 사람들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상훈이 남한에서 왔다는 얘기를 들은 두 젊은 남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상훈과 올가에게 시선을 보내고 있었는데 아마도 올가의 미모를 두고 상훈과의 관계를 흥미롭게 저울질하는 것으로 보였다.
노인은 한참 과거에 일어났던 얘기를 하고있는 중이었다. 얘기중간에 찰깍 하는 소리가 나자 젊은 남자가 잠시 노인의 얘기를 중단시키고는 자신의 안주머니에 있는 소형 녹음기를 꺼내 테이프를 교환했다.
'녹음을 하고 있었구나.'
자세히 보니 노인의 옷깃에는 마이크 핀이 꽂혀 있었다. 노인은 과거 일제시대 연해주 부근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재산이고 뭐고 다 놔둔 채로 우리는 역 앞에 집결했어요. 노인들은 눈물을 흘리며 무덤에서 흙을 파다가 수건에 싸갖고 나왔지. 공민증을 다 빼앗더구먼, 그리고는 화물열차 한 칸에 우리를 사십 명씩 나누어서 태우는데 아, 이놈의 열차에 변소가 있어야지. 하루에 두 번씩 세우는데 그때마다 우르르 달려가서는 그때까지 참았던 변을 싸질러댔어. 서는 역마다 변소로 변할 수밖에."
노인은 감정이 복받치는지 잠시 말을 끊었다가는 다시 이었다.
"역직원들은 우리를 짐승으로 취급했어. 식사도 문제였지. 어떤 날은 하루에 한끼도 못 먹었어. 밤에는 돌투성이의 맨바닥에 등을 대고 잠을 잤어. 무엇보다도 어린애들이 문제였지. 굶어 힘도 없는 그 어린것들이 물갈아 먹고 배탈이 나서 금방 이질이 오르곤 하는데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더구먼,"
그래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이렇게 죽어갈 수는 없다 하고 기차에 오르지 못하겠다고 버텼지. 그런데 총칼 앞에 어떻게 할 도리가 있어야지. 결국은 다들 다시 기차를 타고 그 놈들이 부리는 데로 내렸는데 이놈들이 우리를 한 곳에 모아주는 것이 아니라 온 데 흩어놓더란 말이야. 우즈백, 까작, 키르키즈, 타지크, 투르크멘 할 것 없이 그 넓은 지역에 우리를 조금씩 떼어놓고는 공민증에 거주지 제한이라고 도장을 찍어 버리니 우리가 꼼짝을 할 수 있어야지. 그 얼어붙은 땅을 아무런 도구도 없이 맨손으로 파면서 벼를 심었지. 살림집이 없어 땅굴을 파고 살았어. 땅굴 속의 습기가 어린아이들에게 죽음을 가져다 주었지. 아이들은 살리려도 온갖 노력을 다했어도 의사가 있나 약이 있나 정말 짐승과 똑같았지. 죽어가는 아이들을 그냥 껴안고 있을 수밖에 없었어. 어느 집은 팔남매 중 하나만 살아남아 외아들이 되어버렸어.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면서도 우리는 왜 유독 우리 민족만 이런 수난을 겪어야 하나 하고 하늘을 보면서 눈물 짓곤 했지."
노인은 여기까지 말하고는 격한 감정을 어떻게 하지 못하고 울먹거렸다. 두 젊은이는 당황하여 노인을 위로하였다. 그러나 노인은 좀체로 감정을 가라앉히지 못하였으므로 두 사람은 의논하더니 노인의 옷깃에서 마이크 핀을 뺐다.
"남은 얘기는 내일 하시지요. 저희가 내일 오전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노인은 무척 피곤해 보였다. 상훈은 아쉬웠지만 내일 다시 오는 수밖에 없었다.
상훈은 두 남녀와 함께 삐거덕거리는 아파트 철제 계단을 내려왔다.
"한국에서 오셨죠? 백종원이라고 합니다."
"박상훈입니다. 이쪽은 제 안내를 맡고 있는 이르쿠츠크의 올가 양입니다."
"자료를 구하러 오셨다구요? 대학에 계십니까?"
"네, 서울에서 공부하다가 지금은 동경대학교에서 박사논문을 쓰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 있는 김정애 씨와 이 지역의 사정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서울에 있는 한국민족연구소에서 파견되었습니다."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저는 인투어리스트 호텔에 묵고 있습니다."
"잘 되었군요. 우리도 거기에 묵고 있으니 내일 같이 오지요. 아침에 전화를 주십시오. 저는 607호에 있고 김정애 씨는 608호에 있습니다. 연락주시죠."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두 사람이 나가고 난 후 상훈과 올가는 식사를 마치고 호텔로 갔다. 올가는 역시 하나의 방만을 빌렸다.
"산책을 좀 하는 것이 어때요?"
"좋아요."
방에 짐을 놓고 두 사람은 바로 나와 호텔에 붙어 있다시피한 아무르 강변을 걸었다. 이르쿠츠크나 하바로프스크나 강을 낀 가장 아름다운 곳에 외국인 전용인 인투어리스트 호텔이 자리잡고 있었다.
시베리아의 강들은 모두 크고 넓었다. 아무르강은 러시아와 중국의 국경을 따라 흐르는 큰 강으로 때때로 있는 러시아와 중국간의 국경분쟁에 대비하여 예전에는 많은 수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는 국경분쟁이 잠잠해진 탓인지 군대의 시설물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강 건너 중국에서는 반짝이는 불빛을 보며 강변의 망루에서 시원한 공기를 호흡하는 기분이 매우 좋았다.
"도시의 분위기가 이르쿠츠크와는 매우 다르군요."
올가는 극동지역으로 와본 것이 처음인 듯했다.
"나도 그렇게 느끼고 있어요. 이르쿠츠크가 유럽의 도시들에 가깝다면 이곳 하바로프스크는 어딘지 모르게 동양의 색조를 갖고 있군요."
두 사람은 망루에서 내려와 강변을 조금 걷다가 숲속의 벤치에 앉았다. 강변의 보도에서 약간 들어가 있는 벤치에서는 여전히 아무르강을 떠다니는 배의 불빛이 비치고 강 건너 국경의 불빛이 보였다.
이때였다. 벤치의 바로 앞 보도의 앞에 사람의 그림자가 비치는 듯 하더니 나지막하나마 맑고 선명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국어였다.
"적전도 끝났으니 돌아가고 싶어요."
"좀더 오래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던데."
"오래라면 얼마나?"
"육 개월 이상 대기하고 있어야 할지도 몰라요,"
"맙소사."
"노인네들 증언 열심히 녹음했다가 돌아가서 책이나 낼 궁리해요."

대화의 주인공은 아까 만났던 한국인 남녀였다. 그러나 이들의 대화는 도대체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짧은 대화였지만 상훈의 머리에는 간단찮은 생각거리를 남겨두고 두 사람은 가버렸다.
잠시 후 상훈과 올가도 일어나 호텔로 돌아왔다. 상훈은 올가의 기분을 가라앉혀 먼저 잠자리에 들게 했다. 그리고 테이블에 앉아 러시아에서 보고 겪은 것들을 정리해 두고 밤이 늦어서야 잠을 청했다.



33. 한인 독립공화국


다음날 오전 찾아가 노인의 아파트 앞에서 상훈이 기다리자 두 사람이 노인을 모시고 나왔다. 점심을 하기에는 약간 이른 시간이었지만 두 남녀는 노인과 상훈 일행을 평양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하바로프스크에는 북한에서 사람이 나와 경영하는 평양식당과 서울에서 이주한 사람이 경영하는 서울식당이 있었다. 주인을 빼고는 모두가 고려인 종업원들이라 분위기는 크게 다른 것은 없었다.
"먼저 여쭤보시죠."
백종원이라는 남자가 상훈에게 권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상훈은 노인에게 먼저 절을 했다. 단순한 인사라기보다는 어려운 시절을 온몸으로 버터온 선배에게 드리는 진심으로부터의 고마움이 깃들어 있는 절이었다. 노인도 뭔가 색다른 기분을 느꼈는지 예사롭지 않은 눈빛을 보내왔다.
"어르신은 원래 하바로프스크에서 사셨습니까?"
"나는 원래 뽀시예트 구역에 살았소."
"그럼 언제 하바로프스크에 오셨습니까?"
"뽀시예트에서 나는 비로비잔으로 이주를 했었소. 거기서 하바로프스크로 왔지."
상훈의 눈이 빛났다.
"비로비잔에 계실 때가 언제쯤이었습니까?"
"내가 열두 살 때 비로비잔으로 옮겨 스물두 살 때 하바로프스크로 왔으니 1922년에서 1931년까지였소."
"뽀시예트 구역은 왜 떠나셨습니까?"
"일제의 탄압이 거기까지 미쳤소. 나의 아버지는 조선어를 가르치다가 그들의 탄압을 피해 우리 조선인들이 많이 모여 살던 비로비잔으로 이주했소."
"비로비잔은 왜 떠나셨습니까?"
"유태인들에게 내몰렸지. 소련정부가 그들에게 자치구역을 선포해주었소,"
"조선인이 훨씬 많은 그 지역을 왜 유태인 자치구역으로 선포를 했습니까?"
"소련정부는 유럽 여러 나라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곳을 유태인 자치구역으로 선포해 주었소. 비록 숫자는 우리가 훨씬 많았지만 힘이 없어 희생되고 만거요."
"그러면 그때 비로비잔에 거주하던 동포들은 어디로 갔습니까?"
"다들 뿔뿔히 흩어졌어요."'
"어르신은 하바로프스크로 가셨군요."
"그렇소."
"거기서 다시 내쫓겨 중앙아시아로 가셨군요?"
"그렇소."
"그랬다가 스탈린이 죽자 다시 여기로 돌아오셨군요."
"그렇소."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었다. 한평생을 좁은 지역도 아니고 수만리가 넘는 광활한 대륙을 쫓겨다니다가 마치고야 마는 운명이었다.
"너무나 기구한 운명이시군요."
"그러나 나는 여기 살아있지만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았겠소? 그래도 우리 한민족은 살아남았소. 가는 곳마다 황무지를 옥토로 바꾸며 모질고 모진 목숨을 이어왔소. 소련의 벼농사는 모두 우리가 개척했소. 처음 피땀 흘려 개간한 논들을 유태인에게 빼앗기고 쫓겨날 때는 억울한 생각에 잠을 못 이루었는데 그 후부터는 차라리 체념하고 말게 되었소. 어차피 약소민족인데 하고 말이오."
그러나 말은 이렇게 해도 노인의 얼굴에는 원통한 기색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아무리 체념했다고 하나 한평생 일군 것을 빼앗기고 쫓겨나면서 체념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없을 수 없었다.
"혹시 최화영이라는 사람을 아십니까?"
상훈의 입에서 나온 이 이름에 노인은 수그렸던 고개를 한껏 치켜들며 이제껏 보이지 않았던 날카로운 안광을 내쏘았다.
"젊은이가 그 사람을 어떻게 아시오?"
"저는 그분 손자의 부탁으로 그분의 종적을 찾으러 왔습니다."
"손자? 그 사람에게 손자가 있소?"
"네, 있습니다."
노인은 한동안 얼굴을 찌푸리며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그래 그 손자는 어디에 살고 있소?"
"누군가가 일본으로 데려가 그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일본에?"
"그렇습니다. 몸이 불편하여 직접 오지는 못하고 저에게 대신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 젊은이는 어떻게 나에게까지 오게 되었소?"
상훈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최화영이라는 사람은 대단한 인물이었소."
이 말과 더불어 노인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최화영이라는 이름 석 자가 노인에게 힘을 주는 모양이었다.
"우리 민족이 서구 열강의 탐욕과 일제의 강압하에도 무너지지 않았던 것은 이런 큰 인물들이 있었던 까닭이요. 총칼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꿋꿋한 기상을 가진 거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란 말이요. 한국에서도 안중근 의사를 가르치고 있소?"
"물론입니다."
노인에게는 흥분한 기색이 엿보였다.
"러시아. 중국 할 것 없이 벌벌 떨던 히로부미란 놈을 일거에 쏘아죽이고 살기등등하던 일본법정에서 했던 말도 알고 있소?"
상훈은 당황했다. 고령의 노인이 갑자기 엉뚱한 방향으로 나가는 것도 그랬지만 노인의 물음에 선뜻 대답을 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노인은 상훈이 즉각 대답하지 않자 커다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피고는 어째서 조선을 돕고 개화를 이끈 조선인의 은인 이또오 백작을 살해하였는가라는 재판장의 핍박에 가슴을 쫙 펴고 재판장의 얼굴을 정면으로 노려보면서 호호탕탕한 목소리로 대답하지 않았겠소. <내게는 히로부미를 죽여야 할 열다섯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그는 낭인을 보내어 우리나라의 국모를 살해했다. 조선의 남아로 이것을 보고 어찌 가만히 있을소냐. 이것이 내가 히로부미를 쏘아죽인 광명정대한 이유이다. .......열다섯째........>"
한 번 입을 열자 거침없이 열다섯 가지의 이유를 대는 노인의 표정이 매우 자랑스러워 보였다.
"젊은이, 앞으로는 그 열다섯 가지 이유를 꼭 외고 다니시오."
"네,"
상훈은 대답하면서 서글픔을 느꼈다. 안 의사의 열 다섯 가지 이유를 암송하는 것이 조국을 떠나 러시아인으로 살아야만 하는 고통을 견뎌내는 노인 나름대로의 한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훈의 대답을 듣자 편안한 느낌이 드는지 노인은 아련한 기억을 되살리는 표정으로 차분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이상한 것은 이제까지의 원통해하던 표정과는 달리 어딘지 모르게 자랑스럽고 후련한 기색이 노인의 얼굴에 완연히 살아오고 있었다. 
"그 사람은 제이의 안 의사였어. 꿈도 큰 사람이었지. 다들 눈 앞의 일에만 급급할 때에 이미 먼 앞날을 내다보고 있었소. 그는 비로비잔의 고려인들이 쫓겨날 것을 예측했었소. 비록 우리가 수적으로는 월등히 많았지만 힘에 있어서는 유태인들과 견줄 수 없었거든, 게다가 소련 비밀경찰의 극동책임자가 유태인이었단 말이요. 그는 그 책임자와 모종의 협상을 했소. 어차피 유태인에게 마을과 농토를 물려주고 떠나야 한다면, 다른 지역에 우리 고려인만의 자치공화국을 마련해 달라고 했단 말이오. 그 책임자는 다른 분야의 간부들과 의논한 끝에 그렇게 해주겠다고 했소."
"고려인만의 자치국을 세운단 말입니까?"
"그렇소, 당시로서는 일제에 빼앗긴 우리 한반도를 찾을 수 있는 길은 없다고 보았소. 그래서 우리 민족의 나라를 연해주에 세우겠다고 생각한 거지."
"참으로 큰 꿈이군요."
"그게 꿈만으로 끝나지 않을수 있었소."
노인은 무엇인가 아쉽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창밖의 하늘을 응시했다. 가늘게 떨리는 눈꺼풀 사이로 수많은 회한이 교차하는 것이 느껴지는 듯했다.
"소련인들은 비록 정치적 이유로 유태인에게 비로비잔에 그들만의 자치구역을 선포해 주었지만, 우리 고려인들의 처지에 동정을 가지고 있었소. 게다가 그들은 우리 고려인들이 근면성과 탁월한 벼농사 능력을 크게 인정하고 있었거든, 협상도 잘 진행되어 우리는 나름대로 정부조직표도 짜곤 했소."
"지도자는 최화영 선생이 맡았겠군요."
"아니오, 그분은 끝까지 뒤에서 도우려고 했지. 앞에 나서려고 하지 않았어요. 모든 것이 잘 진행이 되어간다 싶었는데 도중에 사건이 발생했소."
"무슨 사건입니까?"
"최 선생을 비롯하여 십여 명이 건국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거사를 했소."
"그 거사가 잘못되었군요?"
"아니지. 거사 자체는 성공했소. 용의주도한 최 선생은 미리 치밀한 계획을 세워 회령의 조선은행에서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는 일본의 자금수송대를 습격했소, 대성공이었지, 피 한방울 안 흘리고 금괴를 송두리째 빼앗았거든."
"신나는 일이었군요."
"그랬지. 정말 신나는 일이었지."
"그런데요?"
상훈은 조바심이 나서 물었다.
"배신자가 생겼소. 금괴를 파는 과정에서 한 놈이 몽땅 가로채곤 추적을 막기 위해 밀고했소."
"네?"
"돈에 눈이 어두워 민족을 팔아버린 놈이 있었단 말이오. 하윤호라는 놈이지. 나와는 같은 동네에 살던 놈이었소. 세상에 그런 죽일 놈이 다 있었소. 그놈 때문에 금괴를 팔러간 사람들은 모두 체포되고 설상가상으로 하바로프스크에 와있던 최 선생은 소련 헌병대에 끌려갔소."
"왜요?"
"그 비밀경찰의 책임자가 고려인의 편에 서주는 대가로 엄청난 금액을 요구했기 때문에 금괴를 탈취했던 것이오. 한 푼없는 고려인의 처지로 모금을 할 수도 없었고 최 선생이 기지를 발휘하여 일본의 침략자금을 탈취한 것이었거든."
"그것이 소련과 무슨 관계가 있나요?"
"잡혀간 사람들이 고문에 못 이겨 이런 사실을 자백하자 일본은 거꾸로 이 비밀경찰의 책임자를 협박했지. 잘못하다간 이 소련인이 목이 달아날 형편이 되어버렸어. 그래서 모든 게 끝이 나버렸지."
"가슴 아픈 일이군요."
상훈을 비롯하여 백종원이라는 사나이와 김정애라는 여자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노인도 역시 고개를 들고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한동안의 침묵을 깨고 상훈이 입을 열었다.
"그 분의 가족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최 선생은 일찍 혼인해서 아들만 셋 있었어 최 선생이 끌려가면서 아내에게는 큰 아이를 내보내고 재가하라고 했다는군. 큰 아들에게는 타지방으로 가서 살라고 하고."
"왜 그랬을까요?"
"두 어린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서였지."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세요?"
"큰아들은 어디론가 떠나갔고, 부인은 어느 집에 첩실로 들어갔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학대가 심했다더군. 그 다음은 모르겠어. 애들 이름이 특색이 있었는데."
"특색이 있었어요?"
"그럼, 최선생은 아이들을 낳기도 전에 이름부터 생각해 두었어. 큰 애는 독립, 작은 애는 독보, 막내는 독준이었지."
"무슨 뜻입니까?"
"홀로 서자는 뜻이고 홀로 걷자는 뜻이고 홀로 뛰자는 뜻이지."
"그렇군요."
상훈의 마음속에서 가즈오의 파리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의 표정이 달라지겠지. 누구에게라도 떳떳이 밝힐 수 있는 자랑스런 할아버지가 아닌가? 상훈은 깊이 고개를 숙여 노인에게 인사했다. 가즈오의 집안 내력을 알려준 고마움 때문이 아니라 하더라도 노인이 살아온 길에 대한 상훈의 진심으로부터의 인사였다. 
"이제 어떻게 하시죠?"
"러시아에서는 운이 좋으셨어요. 미녀와 같이 다니면서 쉽게 목적도 이루고."
김정애가 꼬인 듯한 말투로 상훈의 말을 받자 상훈도 시침을 뚝 떼고 물었다.
"연구는 언제 끝나시죠?"
"몇 달 걸릴지 모르겠어요."
바로 돌아가는 상훈에 대한 부러움이 묻어 있는 듯한 푸념 섞인 대답이었다. 그러면서도 테이프 하나를 건네 주었다.
"강제 이주 당시의 상황을 증언한 테이프에요. 도움이 될 것 같아 드리는 거예요."
"고마워요."
상훈은 어쩐지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는 몰랐지만 이 춥고 삭막한 도시에서 육 개월 이상이나 있어야 한다는 것은 여자에게는 별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상훈은 그녀의 눈초리를 의식하면서 올가와 함께 호텔로 돌아왔다.

"상훈씨, 저는 오후에 먼저 가겠어요."
"내일 같이 공항으로 가는 것이 낫지 않아요?"
"아니에요. 먼저 가겠어요."
로비에 들어서자 올가는 먼저 가겠다고 우겼다.
"지금 기차를 타면 내일 비행기를 타는 것보다 하루 반 늦을 뿐이에요, 저는 비행기를 타는 것을 아주 싫어해요. 속이 메슥거려서 견딜 수가 없어요."
올가는 상훈이 거절할 수 없도록 얘기를 해왔다. 요금 때문에 그럴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런 것을 집어서 얘기할 수는 없는 일이라 상훈은 굳이 말리지는 않았다. 다행히 아직도 많은 돈이 남아 최소한의 경비만을 남겨두고 모두 집어넣은 상훈은 아무 말 없이 올가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돈을 많이 넣은 것이 올가에게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어쩌면 이 돈이 올가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올가 덕분에 일이 다 잘되었네. 고마워."
"상훈 씨를 만난 것은 제게 큰 기쁨이었어요."
아쉬운 이별의 인사를 나누는 올가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답고 순수해 보였다. 호텔에 돌아와 깜빡 잠이 들었던 상훈은 전화벨 소리에 눈을 떴다.
"올가예요. 너무 많은 돈을 넣어 주셨더군요. 흑, 어쩌면 이렇게....... 영원히 잊지 못할 거예요."
"울지 말아요, 올가, 정말 잘살기를 바래,"
".......언젠가는 저도 한국인을 도울  날이 있을 거예요, 꼭 도울거예요. 상훈 씨가 제게 베풀어준 은혜를 생각하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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