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다이고로야, 고마워
저자: 오타니 준코, 오타니 에이지
오타니 준코
1937 년 히로시마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2 학년 때 히로시마 시내에서
원폭을 경험했다. 1957 년 도쿄로 와 오타니 에이지와 결혼했고, 그 후
사진작가로서 공해와 직업병의 현장을 쫓는 남편의 활동을 후원하며
봉사활동에 참여해왔다. 지은 책에 "다이고로는 천사의 날개를 달았다"
"유후인의 바람"이 있다.
@[ 제1장 중증 장애를 지닌 원숭이가 새 가족이 되다 (p9)
오뚝이 인형처럼 생긴 체중 300그램의 원숭이.
강하게 살라고 다이고로라고 이름 지었다.
@[ 다이고로와 지낸 추억 (p11)
도쿄에서 36 년 동안 살다가, 유후인에서 남편과 여관을 하며 전혀 다른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도쿄에서 이래저래 이곳 생활을 그려보기는 했지만,
실제로 지내보니까 훨씬 더 힘든 일이 많았습니다. 예상 외로 많이 드는
건축비용, 현지에 적응하는 일 등에 정신을 쏟다 보니 그럭저럭 지낼 수
있었습니다.
손님 중에 여관 앞에 있는 다이고로의 석상을 보며 "이 원숭이 상은
뭐예요?"라고 묻는 분도 많이 계십니다. 우리에게는 소중한 한가족이었던
다이고로, 그와 지낸 추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날 아와지시마 섬으로 촬영을 나갔던 남편이 돌아왔습니다. 남편은
후지TV에 근무하면서 개인적인 사진작업도 병행했는데, 아름다운 풍경이나
인물 같은 일반적인 피사체보다는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여러 사회현상을
주제로 삼아 전국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습니다. 남편은 당시 관광용으로
먹이를 주며 길들이는 야생 원숭이들 중에 기형이 많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러한 원숭이들의 사진을 찍기 시작했습니다.
이날도 남편은 여전히 양팔에 묵직한 촬영 도구를 늘어뜨리고 오른손에
자그마한 꾸러미를 들고 왔습니다. 아이들 생각이 끔찍한 남편은 촬영을 갔다
오면 늘 선물을 사 왔기 때문에 그날도 딸아이들은 기대에 부풀어 아빠가
돌아오기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얘들아, 선물이다."
남편은 선물 꾸러미를 아이들에게 건네주었습니다. "오늘은 또 무슨
선물일까" 하고 한차례 떠들며 꾸러미를 펼쳐본 순간, 아이들과 나는 갑자기
조용해지며 꾸러미 속을 물끄러미 보았습니다. 이것이 다이고로와 만난
첫순간이었으며, 그날부터 다이고로는 우리와 한가족이 되었습니다.
1971 년에 부모님을 모시고 다카사키야마 국립공원에 놀러 간 적이 있다.
이때 먹이를 주며 길들이는 야생 원숭이 가운데 기형이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
집에 돌아가서도 이 사실이 뇌리를 떠나지 않아 이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았지만 명확한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공해와 수입식품, 강물의 오염 등
여러 가지 원인을 생각할 수 있었지만, 단순히 야생 원숭이의 문제로만 끝날
일은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작년부터 각지의 야생 원숭이들을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다가
아와지시마 섬의 원숭이 센터에서 다이고로를 만났다.
이곳에서는 가사 상태로 덤불 속을 뒹굴던 원숭이를 보호하고 있었는데, 이
원숭이의 뒷다리는 아예 흔적도 없었고 앞발은 팔꿈치에 약간 붙어 있을
뿐이었다. 나는 얼마 못 살 거라고 생각하고 그 원숭이를 집에 데리고 가도
괜찮겠느냐고 물어보았다. 곧 허가를 받아 수속을 마치고 도쿄로 돌아갔다.
너무 불쌍해서 그 원숭이를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고, 기록사진이라도
찍어둬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때부터 우리 가족, 특히 아내에게 힘든 나날이 시작되었다. (에이지)
처음 다이고로를 보던 순간, 건어물처럼 생겼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습니다.
동물의 새끼라고 보기에는 전혀 귀엽지 않아 말도 나오지 않았지만,
딸아이들은 이에 개의치 않고 관심을 보였습니다. 남편은 이 원숭이가 중증
장애를 앓고 있어 2--3일 정도밖에 살 수 없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막내 마호는 네 살, 가즈요는 일곱 살, 세이코는 대학 입시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우리 집은 오기쿠보 역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아파트였습니다. 동물을
키우는 것은 당연히 금지되었으며, 내 몸 상태도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가족 모두가 동물을 좋아한다 해도 도대체 야생 원숭이를 어떻게
키울지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죽은 것처럼 모로 누워만 있는 작달막한
원숭이, 더구나 팔다리기 온전치 못한 이 원숭이를 도대체 어떻게 키우라는
것인지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면봉에 우유를 적셔 이 안에 넣어주면 30분이 지나야 겨우 조금 먹을
뿐이었고, 밤중에는 병아리처럼 희미한 소리를 내며 울었습니다. 나는 거의
잠을 잘 수가 없었고 불안한 마음은 깊어갔습니다.
다음날 남편은 어미 원숭이가 없어도 튼튼하게 살아가라는 바람을 담아 이
원숭이에게 '다이고로'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가사 상태였던 다이고로가
아주 조금씩 살아가려는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속눈썹이 눈을 심하게
찌르는 바람에 1주일 만에 눈을 뜨게 된 다이고로. 마치 뭔가를 호소하는 듯한
순진하고 새까만 눈동자로 나를 쳐다봤을 때, 예전에 5개월 만에 유산했던
아들녀석이 떠올랐습니다. 어쩌면 그 아이가 장애를 갖고 다시 태어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날부터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한 내
아이가 되살아난 것처럼, 다이고로에게 애정을 쏟게 되었습니다.
* 사진설명
1. 다이고로는 가사 상태로 덤불 속에 버려져 있었다.
2. 1주일만에 눈을 뜬 다이고로. 뭔가를 호소하는 듯한 순진하고 새까만
눈동자였다.
3. 2--3일밖에 못 살 거라던 다이고로.
4. 우리 집에 왔을 때는 체중이 겨우 300그램, 신장은 17센티미터였다.
5. 잘 키울 자신은 없었지만, 생명의 불은 켜졌다.
6. 막내 마호는 동생이 생긴 것처럼 마냥 즐거워했다.
7. 처음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울어대기만 하더니 차츰 안정을 찾았다.
@[ 아이들과 다이고로 (p21)
다이고로가 우리 집에 오면서 거대한 폭풍이 점차 불어닥쳤습니다.
큰딸 세이코는 대학 입시를 준비했기 때문에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었습니다. 둘째딸 가즈요는 초등학교 3 학년이었지만 아직 손이
많이 가고 응석을 부릴 나이였습니다. 더 큰 일은 막내 마호였습니다. 네 살인
마호는 엄마의 사람을 독점하며 어리광 부리고 싶어하는 눈치였습니다. 나
또한 그렇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다이고로를 키우는 데 온 힘과 시간을
빼앗기게 되는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날이 이어졌습니다.
결국 이 문제는 나를 오랫동안 힘들게 했습니다.
다이고로는 언제나 엄마 곁에 붙어 있었다.
지금까지는 막내인 내가 늘 엄마 옆에 있었는데, 다이고로가 오고 나서는
내가 엄마 곁에 가면 다이고로는 아무리 멀리서도 쫓아와서 내게 이빨을
드러냈고, 그래도 내가 엄마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면 힘껏 물고 늘어져서 아주
아팠던 기억이 난다.
엄마는 잠자기 전에 언제나 책을 읽어주셨는데, 이럴 때면 다이고로는
심술을 부리며 나를 물려고 해서, 엄마는 다이고로 쪽을 바라보고 내게 등을
보이면서 책을 읽어주셨다. 나는 슬퍼서 엄마가 어떤 책을 읽어주셨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런 다이고로였지만 내가 엄마에게 혼나거나 친구들과 싸움을 하고 와서 울
때면 항상 나를 위로해주었다. 나는 이런 다이고로가 하도 재미있어서 '가짜로
우는 척'을 하며 약을 올렸고, 그러면 다이고로는 한참 동안 토라져서 풀어지지
않았다.(마호)
다이고로는 7월 중순에 우리 집에 왔는데, 더워서 그랬는지 하루 종일 여린
목소리로 울기만 했습니다. 몸이 약한 나는 삑삑거리며 우는 소리에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그날 밤,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다이고로가 내 젖가슴을 더듬었습니다. 눈을
붙이려던 나는 얼른 다이고로에게 젖을 물려주었습니다. 다이고로는 그제야
안심이 되는지 조용히 잠들었고, 매일 밤 이런 식으로 잠을 잘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이고로가 깨어 있을 때 조금도 한눈을 팔 수 없는 상황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물건 하나 사러 갈 때도 아이들이 돌아온 다음으로 미루어야
했습니다. 조금도 방심할 수 없는 날이 이어지다 보니, 내가 왜 이런 일을
해야만 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엄마 원숭이에게
매달리듯이 내 품속에서 잠든 다이고로를 보노라면 가엾기도 하고 가슴이
찡해서, 날이 갈수록 애정이 깊어졌습니다.
인간이 초래한 공해 때문에 장애를 안고 세상에 태어난 다이고로. 나도
원폭으로 인해 소중한 사람을 많이 잃었습니다. 그때의 슬픔과 괴로움이
지금도 아련히 떠오릅니다. 다이고로의 생명은 우리가 지켜야 한다고 강하게
다짐했습니다.
우리 집 식구는 모두 동물을 좋아한다. 금붕어, 병아리, 문조(참샛과에 딸린
새. 애완용으로 흔히 기른다 : 역자주)까지는 괜찮았는데, 어느 날 동생이
버려진 강아지를 데리고 들어온 일이 있다. 크게 자랄 것 같은 잡종이라서
키우게 돼도 엄마가 제일 고생할 것이 분명했다. 나는 어린 동물들을 꽤
좋아해서, 코를 킁킁거리며 대롱대롱 매달리는 강아지의 모습에 마음이 약해져
한 달 동안이나 키우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더 키울 수가 없어서, 동생들과 길거리에 나가 개를 데리고 갈
사람을 구하는 것으로 끝났다.
이 정도로 동물을 좋아하는 동생들에게 다이고로의 출현은 뛸 듯이 기뻐할
일이었다. 그리고 동생들은 아직 어려서 다이고로의 장애를 아무런 편견 없이
받아들였다. 눈앞에 있는 볼품없고 사랑스러운 모습만이 전부였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둘째 가즈요는 다이고로가 다른 원숭이와 다르다는 것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다이고로는 새끼 고양이나 강아지처럼 사람에게 치근대지
않았으며, 팔다리의 기형이 평범하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우리를 의지하듯이 쳐다보는 눈을 슬쩍 만지면 더욱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가족 가운데 네 살배기 마호가 아무런 선입견과 사심
없이 다이고로를 가족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마호는 장애라는 의미를
몰랐다. 팔다리가 없다는 게 뭔지도 몰랐으며, 눈앞에 보이는 모습 그대로를
전부라고 생각했다. 마호에게 다이고로는 별다르지 않고 그 모습 자체가
다이고로라는 존재였던 것이다.
말로 표현하기에 좀 어색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아무 거리낌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멋진 시절이었다고 생각한다.(세이코)
* 사진설명
1. 다이고로에게 힘껏 젖을 물려주었다.
2. 아이들의 마음은 장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3. 자기도 술을 마시겠다고 졸라대서 술병을 가까이 대고 먹여주었다.
4. 작디작은 다이고로. 우리의 새로운 가족이 되었다.
@[ 처음 떠나는 여행 (p29)
우리는 해마다 아이들의 여름방학 때면 여행을 떠났습니다. 올해는
다이고로도 있고 하니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 그냥 떠나기로 했습니다.
다이고로를 맡기고 떠날 수 없어서 과감히 데려가기로 했지만, 처음 같이 가는
여행이라 꽤 걱정이 되었습니다.
오줌을 싸서 이불을 적시지는 않을까, 밤에 막 울어대는 것은 아닐까.
이것저것 생각하니 끝이 없었습니다.
다이고로에게는 처음 떠나는 여행이었지만, 별문제는 없었습니다. 다이고로는
기분이 꽤 좋아서 아이들과 함께 신나게 수영장 한쪽에서 놀았습니다. 남편은
그런 다이고로의 모습을 쫓아 셔터를 눌러댔습니다. 예전과 다름 없는
여름휴가 때의 광경...
그 모습을 보자니 다이고로가 새끼 원숭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고 마치 우리
아이들 같았으며, 딸아이들에게는 남동생처럼 보였습니다. 아이들은 손바닥에
쏙 안기는 작은 다이고로가 귀여워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내 기분은 좀 복잡했습니다. 너무 지쳐 있었고, 그 전에 큰 병을 앓은
일도 있는 데다 평소 몸이 튼튼한 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때는 쉽게 피로해져서 한번 병원에 가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너무나
바빠서 시간이 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그때는 몸이 너무 좋지 않아서 다이고로가 죽은 뒤, 두 달 동안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매일 신경을 많이 써서 피로했기 때문에 이번 가족
여행에는 느긋한 마음으로 몸을 쉬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다이고로가 우리 집에 처음 온 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아빠는 아홉 시쯤
돌아오셨는데, 나와 마호는 자고 있었다. 선물이 뭘까 궁금해서 일어나
나가보았다. 선물 꾸러미를 풀어보았더니 살아 있는 동물이라 깜짝 놀랐다.
그때는 이게 도대체 뭐야 하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다음날부터 다이고로는 우리에게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 그런데
다이고로는 샘이 너무 많았다. 엄마와 내가 함께 있어도 화를 내고 나랑
언니가 있으면 가운데로 들어와 화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모두가 시장을 가고 혼자 집을 볼 때면 더욱 큰일이었다. 평소보다 똥오줌을
세 배 이상 싸놓아서 뒤치다꺼리에 애를 먹었다.
동생 마호는 아직 어려서 엄마에게 어리광 부리고 싶어했지만 다이고로가
훼방을 놓는 바람에 울면서 잠든 적이 많았다.
가족끼리 여행을 갔을 때 있었던 일이 기억난다.
해변에서 다이고로와 노는데 우리 곁을 지나가던 한 여자가 자기 딸에게
"더러우니까 가까이 가면 안 돼요"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나는 너무나도 슬펐다. 세상에는 왜 이런 사람이 있는 걸까. 어린 마음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마냥 놀고 있는 다이고로가 가여워서
나도 모르게 껴안아주었다. (가즈요)
* 사진설명
1. 다이고로를 홀로 남겨놓을 수 없어서, 고향 히로시마로 데리고 갔다.
@[ 다이고로와 히로시마에 가다 (p33)
원폭 피해자인 나는 해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고향인 히로시마에 갔는데,
다이고로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했습니다. 아이들은 히로시마에 가는 것을
마냥 좋아했고, 히로시마에 계시는 어머니도 우리를 은근히 기다리셨습니다.
물론 나도 그랬습니다.
시험 준비 때문에 집에 있는 세이코에게 다이고로를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생각한 끝에 과감하게 다이고로를 데리고 가기로 했습니다.
다이고로도 간다는 말에 아이들은 매우 기뻐했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신칸센을 타보는 다이고로는 몸을 부르르 떨었습니다. 나는
다이고로를 주머니 속에 넣었습니다. 내 품에 꼭 달라붙어 의지하는
다이고로가 정말 사랑스럽게 느껴졌습니다. 몇 번이나 오줌을 쌌을 때는 그리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야생 원숭이는 스스로 먹이를 잡을 수 있을 때까지 엄마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며, 어미원숭이는 인간, 아니 때로는 인간 이상으로 자식에게 애정을
쏟으며 보호하고 키운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엄마의 존재를 모르는 다이고로.
그리고 다이고로와 똑같은 운명을 타고났을 많은 원숭이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밤늦게서야 히로시마에 도착했습니다. 어머니를 포함해 가족 모두
다이고로를 보고 놀라는 눈치더니 곧 유쾌하게 받아주었습니다.
나도 신경을 많이 써서 녹초가 되었지만 아이들과 다이고로는 더 피곤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금세 잠이 들었습니다. 가즈요와 마호, 다이고로가 나란히 자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함께 오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새록새록 들었습니다.
'원폭의 날'은 무척 더웠습니다. 고향에 돌아와 어머니의 얼굴을 보니 그때의
일이 자꾸만 떠올랐습니다. 잊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어서,
PTA(Parent-Teacher-Association, 교육의 민주화를 위해 1947 년 3월 5일
결성된 부모와 교사의 모임. 아이들을 건전하게 키우기 위해서는 가정, 학교,
사회가 교육의 책임을 지고 힘을 합쳐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 노력해야 함을
취지로 한다: 역자주)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하며 신체장애인회에도 참석하고,
스기나미구로 이주해 온 원폭피해자들의 모임(1945 년 8월 6일 히로시마, 9월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에 의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단체로 '광우회'라고
한다: 역자주) 운영에도 참여해왔습니다. 원폭으로 잃은 수많은 생명은
과학문명의 희생자며, 두 번 다시 이러한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날은 아이들을 데리고 평화공원의 기념식장에 갔습니다. 돔에는 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우연히 옛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원폭으로 먼저 떠나간 친구들의 고통과 슬픔을 잊고 있어서 나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흐르는 게 세월이라지만 그렇게 간단히 남의 슬픔과 분노를 흘려버릴
수 있을까요. 하지만 나도 만약 다이고로를 만나서 키우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충격을 받지는 않았으리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아빠와 엄마는 장애인운동에 참여하시고, 아빠는 장애에 관한 기록 사진을
찍고 계셨다. 나와 언니도 장애인운동에 참가했는데 나 자신도 반성할 일이
많았다.
장애를 갖고 있는 아이들도 씩씩하게 살아가며 열심히 현실에 맞서
도전한다. 내가 얼마나 제멋대로 응석만 부리는지 느끼는 바가 컸다.
장애인을 보면 처음에 '불쌍하다'는 생각을 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다이고로의 존재는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가즈요)
* 역자주: 오타니 부부는 태어날 때부터 팔다리에 기형이 있는 아이를 둔
부모들의 모임인 '선천성 사지장애 부모회'에 참여하고 있다. 기형의 원인
규명과 가족의 교류를 목적으로 한다.
* 사진설명
1. 아내는 초등학교 때 원폭 피해를 경험했다. 소중한 사람들을 잃은 슬픔이
지금도 아련하다.
@[ 다이고로가 굴러다녔다 (p38)
다이고로의 눈동자는 둥글고 새까맸는데, 눈 밑으로 몰린 검은자위는 마치
수평선에 잠긴 태양 같았습니다. 가끔 검은자위가 아주 안 보일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도 있는 힘껏 눈을 크게 뜨고 우리를 쳐다보았습니다. 나는 어떻게든
다이고로가 움직여 다닐 수 있도록 해주고 싶어서 특수훈련을 시작했습니다.
우선 선선한 오전 중에, 30센티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다이고로를
불렀습니다.
"다이고로, 다이고로" 하면 자기 이름을 부르는 걸 알고 몸을 조금씩
움직였습니다. 한 시간 동안 계속 이름을 부르자니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습니다. 역시 아직은 이르다고 생각하며 포기하려는 순간, 갑자기
다이고로가 구르기 시작했습니다. 두 번, 세 번을 굴렀지만 아직 내가 있는
곳까지 오기는 무리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다이고로가 인간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음을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다이고로의 자그마한 몸을 꼭 안아주었습니다. 다이고로도 필사적으로
애썼는지 짧은 팔 끝에 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나는 비록 다이고로가
다리는 없지만 자기가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도록 해주고 싶다고
기도했습니다.
인간들과 함께 자라며 다이고로의 지능도 놀랄 만큼 발달했다.
팔다리가 마음대로 안 되지만 다이고로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실제로 두 아이를 키워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기뻐한 적이
있지만, 이때 다이고로가 노력하는 태도는 보통이 아니었다. 육신이 완전한
인간의 아이조차 조금씩 노력하면서 몸을 뒤치락거리고, 똑바로 앉기도 하고,
기어다니며, 그리고 두 발로 서서 자유롭게 걷고 뛰어다니게 된다. 이것이
당연한 일 같지만 실제로는 매우 경이롭고 신비로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가족은 이런 당연한 일을 다이고로에게 기대하지 않았다. 우리 집에
왔을 때, 다이고로는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 꼼짝달싹 못 했으며, 짧은
생애를 마칠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나 사실은 달랐다. 아주 조금씩이었지만, 확실히 다이고로의 몸은
커갔으며 체력도 붙어갔다.
다이고로는 끊임없이 노력했다. 똑바로 누워 자다가 천장만 바라보는 생활에
질려, 자유롭지 못한 팔과 몸 전체를 옴지락거리면서 몸을 뒤척였다.
이러한 노력은 매일매일 포기하지 않고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다이고로는
등을 위로 향하며 자랑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제부터 다이고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불편한 몸이 아니었다. 손목이
없으면 팔꿈치로 기어다닐 수 있다. 누워만 있는 것이 피곤하면 뭔가를 붙잡고
앉으면 된다. 익숙해지면 단련된 몸의 탄력으로 이용해 일어나면 된다. 높은
곳도 팔꿈치와 온몸을 사용하면 올라갈 수 있다. 살아 있다는 현실만 있으면
하지 못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다이고로는 누구에게 배운 것도 아닌데, 온몸으로 그렇게 부르짖으며
살아가려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 누구에게 배우지 않아도 성장하고 살아가듯이,
다이고로는 어미원숭이에게서 버림받고, 자신의 몸에 장애가 있어도 포기하지
않고 살았다.
이것은 다이고로에게 자연스런 행위였다고 생각한다.(세이코)
이 무렵 다이고로에게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랐지만
병아리처럼 삑삑거리며 울어대기 시작했습니다.
전날 밤에는 우유도 먹지 않았고, 왼쪽 팔 있는 데가 부어 있었습니다. 열이
나고 빨갛게 부어올라 쓰다듬어주려고 하자, 싫어하면서 만지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온몸에 불덩이처럼 열이 나고 매우 아파했습니다. 밤새
다이고로를 안고 방 안을 왔다갔다했습니다.
아침 나절에야 깜박깜박 졸기 시작하기에 팔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빨갛게
부은 곳에 작은 구멍이 생겼습니다. 여기구나 하고, 있는 힘껏 그 구멍을
눌렀습니다.
꺄 하고 다이고로가 비명을 질렀습니다. 난폭하지만 과감한 치료가
필요했습니다. 술잔 가득 고름을 짜내니까 저녁에는 말짱하게 나았습니다.
걱정했던 배꼽의 탯줄도 마호에게 사용했던 약으로 깔끔하게 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이때 처음으로 다이고로를 데리고 물건을 사러 갔습니다. 다이고로의
몸집이 워낙 작아 너무 세게 껴안으면 부서질 것 같고, 느슨하게 안으면
떨어질 것 같아서 꽤 난감했습니다.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다이고로는 한번 나갔다 돌아오면 피곤했는지
금방 낮잠을 잤습니다.
욕조에도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세면대에서 씻겼는데 물이
뜨끈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욕조에 들어갈 때 함께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이고로에게는 진드기가 있어서 특별히 비싼 약용 비누를
사용했습니다.
식구들 모두 온몸이 근질거리고 빨간 습진이 났는데, 설마 다이고로에게
원인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의사에게 동물을 키우느냐는 말을
듣고서야 알아챘습니다.
이런 이유로 약용 비누를 쓰게 되었는데, 다이고로를 씻기는 일은 꽤
힘들었습니다.
사실 이때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마호였습니다. 다이고로를 돌보는 데
많은 시간이 들었고, 실제 내가 조금만 한눈을 팔아도 다이고로는 살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마호도 한창 응석을 부리고 싶어했습니다. 마호와 다이고로는 서로
나를 독점하려고 싸우기도 했습니다. 눈물 자국을 보이며 자는 마호를 보니
가슴이 메었습니다.
내가 히로시마에서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어머니께서 "다이고로와 헤어지는
날이 오면, 너 도대체 어쩔 셈이니"하며 걱정하셨습니다. 실제로 키워보니
다이고로도 내 자식과 똑같았습니다. 다이고로가 없어진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마호와 가즈요, 세이코가 다이고로와 지내면서 분명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 사진설명
1. 처음에는 세면대가 욕조 대신이었다.
2. 처음에는 누워만 지내던 다이고로가
3. 자신의 힘으로 구르는 것을 깨달았다.
4. 식사와 목욕도 언제나 함께. 다이고로는 집안의 막내이자 장남이었다.
@[ 제2장 딸 셋 더하기 아들 원숭이 하나 (p47)
인간과 똑같은 마음을 지닌 원숭이.
다이고로의 행동은 가족에게 사는 것의 소중함을 가르쳐주었다.
@[ 자신의 힘으로 기어다니는 것을 터득했다 (p49)
다이고로가 집에 온 지 한 달 정도 지났을 무렵, 특수훈련의 효과로 이제는
온몸을 이용해 구르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한 시간 훈련을 하고 30분 휴식하는 동안 우유 600cc를 먹으면 세 시간은
끄떡없이 견딜 수 있었습니다. 다이고로는 이런 식으로 매일 훈련을 했습니다.
하루는 이런 훈련을 반복하던 중 다이고로가 이리저리 구르며 술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면서도 필사적으로 내가 있는 쪽으로 오는 것입니다!
잘됐다, 이제는 다이고로가 혼자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다. 이 한 단계를
내디뎠을 때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맛보았습니다.
다이고로가 구르게 되면서 행동범위도 꽤 넓어졌습니다. 그저 누워만 있던
때보다 다이고로의 세계가 훨씬 넓어졌고, 대신 다이고로의 장난에 우리가
애를 먹었습니다.
이 무렵 다이고로를 자기 키의 반만한 상자에 집어넣으면 들락날락거리며
놀았습니다. 그 모습이 아주 귀엽고 재미있어 보여, 지켜보는 사람이 다 즐거울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곤란한 일이 생겼습니다.
원숭이 중에서도 특히 일본원숭이는 대소변을 가리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그 동안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이것저것 궁리해보았지만, 모두 다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
문제는 끝내 해결되지 않았으며, 나는 날마다 걸레를 들고 이곳저곳을 닦고
다녀야 했습니다.
어쨌든 똥오줌을 가리는 장소를 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집에는 손님이
많이 오셨는데 동물 특유의 냄새가 나는 것이 큰 고민거리였습니다. 아이들은
똥을 짓밟고 비명을 지르기도 했습니다.
더 그냥 두면 안 되겠기에 바지를 만들어주기로 했습니다. 손바느질로
바지를 만들었는데 다이고로는 싫은지 금방 벗어던졌습니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해보았지만 어느 것 하나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남편과 아이들이 하얀 비둘기를 데리고 돌아온 적이 있습니다. 어디
상처 난 곳도 없는데 갑자기 땅바닥으로 내려왔다고 했습니다.
다이고로는 이 비둘기가 맘에 쏙 들었는지 사이 좋게 지냈습니다. 우리는 이
비둘기를 즈코라고 불렀는데, 집 안에서 즈코가 구우구우 소리를 내며
비칠비칠 거닐고, 다이고로가 뒹굴면서 뒤를 따라갑니다. 두 사람(?)의 모습이
너무 예뻐서 그날의 피곤이 말끔히 가실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좁은 집 안에 처박혀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어느 날
즈코를 따뜻한 햇살이 드는 아파트 옥상에 데리고 갔습니다.
그때까지는 날려고 하지 않던 즈코가 새의 본능을 되찾은 듯했습니다.
하늘로 날려주니 하얀 날개를 파닥거리며 날아올라 순식간에
사라져버렸습니다.
다이고로는 눈을 크게 뜨고 날아가는 즈코의 뒷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즈코가 자유롭게 날아가는 모습을 보며 무엇을 느꼈을까요? 지금도 그때
다이고로의 모습이 가슴속에 남아 있습니다.
다이고로는 표정이 아주 풍부했다. 그의 표정을 보고 있으면 원숭이는
인간과 참 많이 닮았다는 말이 실감 났다.
엄마가 화장을 하고 외출 준비를 하면,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슬픈 얼굴로
바라본다. 또 물건을 사러 나가려 하면 벌써 준치를 채고 옷을 물며
잡아당겼다. 기쁠 때는 킥킥 소리를 내며 즐거워했다.
다이고로는 늘 마루를 딛고 의자에 올라서서, 테이블 위에 올라 텔레비전을
켰다. 처음에 테이블 위에 올라갔을 때, 다이고로의 얼굴은 홍조가 되어
새빨개져 있었다. 나는 이러한 다이고로를 보며 감동했다. 가사 상태로 우리
집에 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활발한 동작이었다.
지금도 그때 일을 떠올리며, 다이고로가 우리에게 노력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쳐줬다는 생각을 한다.(가즈요)
다이고로는 내 행동을 곧잘 따라했다. 내가 책을 보면 다이고로도 자신의
짧은 팔로 책을 고정하고 입으로 한 장씩 책장을 넘겼다. 다이고로는 그림
그리는 것도 좋아해서 색연필을 입에 물고 도화지에 여러 선을 끼적거렸다.
그리고 내가 갖고 있는 것은 죄다 갖고 싶어했다. 과자와 장난감을 가리지
않고 자기도 갖고 싶어해서 때로는 진짜로 싸운 적도 있었다.
다이고로가 죽었을 때, 봉제 고양이 인형을 관에 넣어주었다. 엄마가 여러
가지 천조각으로 이어준 자국이 이곳저곳 있는 인형이었다.
이 인형을 내가 세뱃돈을 모아 산 것인데, 그날로 다이고로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나는 인형을 빼앗으려고 필사적으로 애썼다. 그러나 다이고로도 이에
질세라 덤벼들었고, 둘이 티격태격하다 보니 너덜너덜해졌다. 그래서 엄마가
수선해주었지만, 결국 나중에는 다이고로 차지가 되었다.(마호)
다이고로의 울음도 여러 가지로 달라지면서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무서울 때는 키키키, 화났을 때는 킷킷킷, 기쁠 때는 크크크하며 감정을
표현했습니다.
7월에 집에 온 다이고로가 처음으로 겨울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추위를 많이
타서 난로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무턱대고 난로를 만지려 드는
바람에 아슬아슬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루는 끝내 다이고로가 난로에 입을 대고 비명을 질렀습니다. 나는 놀라서
다이고로를 번쩍 들고 입 안을 들여다보았는데, 무심결에 소리를 지르고
말았습니다. 새하얀 이빨 두 개가 자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루하루 성장하는 증거를 보여주는 다이고로의 모습에 가족 모두가
기뻐하며, 키우는 재미를 맛보는 날이 이어졌습니다.
어느 날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는데 다이고로가 다가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왠지 평소와 거동이 달랐습니다.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닌가 하는
마음에 뒤돌아보니, 다이고로가 기어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물개처럼 짧은 팔을 질질 끌면서 힘겹게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다이고로는 스스로 기는 법을 익히고, 내가 있는
곳으로 오려 했던 것입니다.
"다이고로..."
나도 모르게 박수를 치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장애를 갖고 태어나
자기 힘으로 살아가려는 몸짓.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준 다이고로를 향해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 사진설명
1. 다이고로는 친자식처럼 소중했지만 힘든 일도 많았다.
2. 오줌을 싸는 고충 때문에 손바느질로 바지를 만들었다.
3. 계속 누워만 있더니 혼자 굴러다니고, 상자에 들어가 놀기도 했다.
4. 지상으로 내려온 비둘기 즈코와 금방 친해졌다.
5. 사람 흉내를 내고 싶어한 원숭이. 다이고로는 책장을 곧잘 넘겼다.
@[ 인간과 똑같이 행동하는 원숭이 (p60)
만약 다이고로가 무리 안에서 생활하는 원숭이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다이고로의 감정 속에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다이고로는 자신을
원숭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 집의 막내로서 자신의 존재를 자부하고 있었다. 당연히 자존심도
있었다.
자신은 아빠와 엄마에게 다른 딸 세 명과 똑같은 존재여야 한다. 뿐만
아니라 막내가 부모의 애정을 독점하고 싶어하듯이 다이고로도 부모에게
특별한 애정을 받고 싶어했다. 이러한 마음에서 질투를 하기도 하고, 형제들과
싸움도 했다. 특히 마호와 서로 다투는 일은 장난이 아니었다.
기쁨, 슬픔, 서운함, 질투... 인간과 똑같은 행동을 하는 원숭이는 이미
원숭이가 아니다. 뚜렷한 감정을 지닌 한 인간이다.
따라서 나는 다이고로가 2 년 4개월이라는 짧은 인생에서 느꼈을 수많은
감정을 상상해보면서, 실제 이렇게 글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심정이 반드시
다이고로에게 있었다고 생각한다. 단지 장애를 갖고 태어나 어미원숭이에게
버림받고 깊은 숲속에서 자연스레 죽어가는 새끼원숭이들, 이들과 다른 멋진
인생을 보낸 다이고로.
마음속에 늘 무언가를 지니고 살았을 다이고로...(세이코)
다이고로는 반년이 지났을 무렵 젖을 떼기 시작했습니다. 이빨도 나기
시작해서 다른 것을 먹여볼까 생각했습니다. 원숭이는 나무 순을 좋아한다지만,
도쿄 생활에서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자고
마음 먹었습니다.
다이고로도 우리 가족과 살면서, 자신이 원숭이라기보다는 완전히
'인간'이라는 자각을 하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마호가 거울을 보며
엄마놀이를 하는 것을 따라 하며, 자신도 실쭉 거울을 들여다본 적이 있습니다.
그 순간, 다이고로는 꺄악 하며 새된 소리를 질렀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우리와 함께 자란 다이고로는 자신도 인간인 줄로 생각한 것은
아닐까요. 따라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는 눈치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집은 해마다 크리스마스 때면 서로 선물을 주고받았는데
그해는 다이고로 것만 챙기지 못했습니다.
다이고로는 물끄러미 선물을 주고받는 광경을 지켜보다가 갑자기 마호의
선물을 입에 물고 테이블 밑으로 숨어버렸습니다.
그제야 우리들은 다이고로의 선물을 잊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웃음을 참으며
"다이고로야 미안해"하고 사과했습니다. 이때뿐이 아니라 다이고로는 자신이
우리 집 막내라는 사실을 인식시키기 위한 행동을 여러 번 했습니다.
생후 반년 만에 세 배나 체중이 불고, 장난 치는 정도도 점점 심해지고,
무엇에나 덤빌 기세여서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가끔 잠잠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무슨 일이든 벌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양복을 꿰매느라 다이고로에게 신경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기특하게도 조용하다고 생각했는데 뭔가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려 뒤돌아보니,
방금 바느질한 소매를 갉아먹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얼른 옷을 빼앗아 다이고로에게 큰소리를 내자, 다이고로는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다이고로는 장난을 치면서 사람의 주의를 자신에게 끌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기 때문에 심하게 화낼 마음도 없었습니다. 또한 풀이
죽은 모습을 보고 있으니 오히려 화를 내는 내가 나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외출이라도 해서 어쩔 수 없이 다이고로가 혼자 집을 보게 될 때면
정말 큰일이었습니다. 나갔다 돌아오면 이 방 저 방에 똥오줌을 싸놓았습니다.
그것도 내가 있을 때면 딱딱한 똥을 싸는데, 혼자 있으면 소화되지 않은 묽은
똥을 쌌습니다. 이때는 냉큼 창문을 열고, 공기를 정화한 다음 방 안 청소...
정말로 힘겨운 날의 연속이었습니다.
* 사진설명
1. 응석꾸러기로 집에서 가장 으스댔던 다이고로.
2. 다이고로는 인형처럼 아이들의 마스코트가 되었다.
3. 다이고로는 아이들에게 남동생이며 함께 놀 친구였다.
4. 마호의 간식을 자꾸 먹고 싶어해서 사이좋게 나눠 먹었다.
5. 자신을 원숭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울을 보고 깜짝 놀랐다.
@[ 단오를 기념하다 (p67)
우리 집은 아이들이라 봐야 딸아이 세 명이고 남자는 남편뿐. 이제는
다이고로까지 남자가 둘입니다.
5월 5일 아침, 출근하는 남편이 "지마키(단오에 먹는 찹쌀떡: 역자주) 좀
사고 창포물도 달여놔줘"라고 말했습니다. 세이코와 나는 무심결에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날 저녁 일찍 돌아온 남편은 다이고로를 안고 욕조로 들어갔습니다.
지금까지 아이들과 욕조에 들어간 적이 없었던 남편은 기분 좋은 얼굴로
목욕을 했습니다. 걱정이 될 정도로 오랫동안 나오지 않다가, 다이고로와 함께
얼굴이 불그레해져서 나왔습니다.
처음에는 다이고로를 세면대에서 씻겼는데, 몸집이 커지면서 가족과 함께
욕조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무서워하더니 차츰 익숙해져 이제는
욕조에 들어갔다 오면 푹 자기까지 했습니다.
남편과 욕조에 들어갔다 나온 다이고로는 남편의 무릎 위에 올라가서
우쭐댔습니다. 남편에게 한 남자로서 대접받는다는 것을 깨달은 걸까요. 이런
모습도 귀여웠습니다.
꽤 오랫동안 욕조에 있어서 피곤했는지 다이고로는 일찌감치 잠이
들었습니다. 남편의 넓은 품안에서 안심하며 자는 모습을 보자니, 지금까지 잘
커줬다는 생각에 감개무량하기까지 했습니다.
언니의 히나마쓰리(3월 3일에 여자이이들의 성장과 행복을 바라는 행사.
에도 시대부터 이어져온 풍습: 역자주) 때 친구가 와서 노는데, 다이고로도
같이 끼고 싶어서 갖은 아양을 부렸다. 하지만 모두들 수다 떠는 때 정신이
없어서 다이고로를 상대해주지 않았다.
심통이 난 다이고로는 친구가 애지중지하는 손수건을 빼앗아 이빨로 찍찍
찢었다. 내 친구는 울고불고 야단이 나고, 나는 어쩔 줄 몰라 내가 제일 아끼는
손수건을 주며 용서를 빌었다.
나도 너무 슬퍼서 다이고로를 방 밖으로 내보내고 아무리 칭얼대도 들이지
않았다. 그때 다이고로의 목소리가 가끔 생각난다.(마호)
다이고로가 오고 1 년 남짓 된 여름, 이웃의 잘 아는 가족과 에노시마 섬에
놀러 간 적이 있습니다. 다이고로는 물론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다이고로의
고향은 파랗게 맑은 바다가 펼쳐진 섬 아와지시마였습니다.
원숭이는 수영할 수 있다고 들었지만 다이고로는 팔과 다리가 없기 때문에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모처럼 바다에 왔으므로 함께 수영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다이고로를 등에 업고 바다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다이고로의 짧은
팔로 내 목을 감싸게 해서 몸을 안정시킨 다음 수영을 했습니다. 다이고로는
전혀 놀라지 않았습니다. 능숙하게 얼굴만 물 밖으로 쏙 내밀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나는 다이고로를 업고 바다 멀리 헤엄쳐 나갔습니다. 다이고로는
안심하며 물놀이를 즐겼습니다.
@[ 냉대를 받다 (p70)
가와구치코 호수로 2박 3일간 여행을 간 적도 있습니다. 다이고로와 같이
여행할 때는 항상 신경이 쓰였지만 이때는 작은 숙소에 머물렀기 때문에 특히
주의를 했습니다. 저녁 무렵 식당에는 우리 외에 아이들을 동반한 부부가 한
쌍 있었습니다.
다이고로를 마루에 내려놓으려고 하자, 엄마인 듯한 사람이 "어머 뭐야, 이
더러운 원숭이는!"하며 신경질적으로 큰소리를 질렀습니다. 이때 가슴에
날카로운 칼이 꽂히는 듯한 통증을 느꼈습니다.
물론 동물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같은 방에서 식사하기가 꺼림칙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점잖게 자신들은 동물과 함께 식사하는 것이 싫다고
한마디만 표현했어도 우리가 나중에 식사를 했을 것입니다. '더럽다'니. 더
적절한, 다른 표현이 있지 않았을까요.
기형이니까 더럽다고 하는 말을 너무나도 지나친 표현입니다. 우리는 기형
원숭이를 키우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이해 받으려는 생각은 없었지만, 그쪽
가족에도 아이가 둘 있었습니다. 그들이 한 말을 두 아이는 과연 어떤
기분으로 받아들였을까요.
그 아이들도 다이고로처럼 장애를 가진 사람이나 동물을 만났을 때,
더럽다는 감상밖에 할 수 없는 인간으로 성장하지는 않을까요?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고 화가 나 몸서리까지 쳐졌습니다.
그러고 나서 1 년 만에 다이고로와 함께 히로시마에 갔습니다. 지난 해에는
대학 입시 때문에 함께 가지 못한 세이코도 무사히 지망한 학교에 합격하고,
온 가족이 모여 어머니를 보러 갔습니다. 다이고로와 함께 한 그 어려운
시기에 대학에 붙어준 세이코에게 감사하는 마음까지 느끼며 집으로
향했습니다.
다이고로는 과일을 무척 좋아해서 우리와 사이 좋게 나눠 먹었다. 또 누워서
책을 보고 있으면 자기도 책장을 넘기면서 들여다보았다. 기어다니게 되면서
다이고로의 팔꿈치가 많이 갈라져서 안쓰러워 보였다.
다이고로는 단순히 우리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늘 무엇에 도전했다.
우리가 다이고로와 함께 살지 못했다면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대하는 방법을
몰랐을지도 모른다. 다이고로는 자신의 장애에서 결코 도망치지 않았다.
나는 견디기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다이고로를 생각한다. 그리고 강해져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꿋꿋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새삼 다짐한다.(가즈요)
다이고로는 언제나 복종하는 애완동물과 행동이 달랐다.
다이고로에게는 마음이 있었다. 생각하는 능력도 있었다. 따라서 재미없는
일은 확실하게 싫다고 부정했다. 마호와 다이고로는 진짜로 싸움도 하고
화해도 했다.
마호가 친구들과 다투거나 엄마에게 혼났을 때, 다이고로는 마호를
위로해주었다. 다이고로는 분명히 우리의 동생으로 존재했으며, 가족의
일원이었다.(세이코)
* 사진설명 (p73)
1. 히나마쓰리 인형 앞에서. 이 사진을 찍고 나서 다이고로는 짓궂은 장난을
쳤다.
2. 처음에는 싫어하는 눈치더니, 나중에는 목욕을 아주 좋아하게 되었다.
3. 자는 것도 함께. 다이고로는 잠이 안 오면 귀를 깨물며 깨웠다.
4. 다이고로에게 편견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지만, 될 수 있는 한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5. 고양이가 다가오면 화를 냈지만, 밤에는 두 사람(?)이 베개를 나란히 했다.
6. 다이고로는 과일을 제일 좋아했다.
7. 아이들이 하는 일은 모두 따라 해서 그림도 그렸다.
8. 인간과 똑같은 행동을 하며, 똑같은 마음을 지녔다고 생각한다.
9. 마호가 가짜로 우는 척을 하면 다이고로는 진심으로 걱정하며 위로했다.
10. 거짓말로 운 것이 탄로나자, 다이고로는 오랫동안 토라져 풀리지 않았다.
@[ 다이고로가 섰다 (p82)
다이고로가 태어난 지 1 년이 지난 가을, 남편과 마호와 함께 다이고로의
고향인 아와지시마 섬에 갔습니다.
다이고로가 태어나 처음 보는 아와지시마는 예상보다 크고 넓었으며, 새파란
바다와 초록빛 산림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섬이었습니다. 다이고로는 이러한
아름다운 섬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다이고로와 같은 장애를 지닌 원숭이들을 대해야만
했습니다. 다이고로보다 기형의 정도가 약한 모코스와 바네, 눈이 보이지 않는
고타로. 모두들 장애를 견디며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또 이러한 원숭이들에게
애정을 쏟으며 키워주시는 원숭이 센터의 소장님을 비롯한 모든 분의 따뜻한
마음에 감사드렸습니다.
다이고로에게는 인간 이외의 친구들과 처음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좀 망설이는 듯하더니 역시 같은 동료인지라 금방 마음을 터놓고 놀기
시작했습니다.
고타로는 자라면서 눈이 멀게 되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오히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잔혹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고타로는 자신의 손발을 악 물고서라도 필사적으로 살려 한다고 합니다.
소장 나카하시 씨도 "차라리 죽는 게 더 행복할지도 모르지만, 힘껏
살아가려 애쓰는 모양을 보면 어떻게 해서든 살리고 싶은 마음에 의사를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하지만..."하며 눈가를 흐렸습니다.
다이고로를 키우는 동안 괴로운 일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나카하시 소장이
고생하는 것에 비하면 아무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새삼 들었습니다. 친구들과
놀면서도 항상 내 모습을 찾는 다이고로. 이 아이의 생명은 내가 지켜줘야
한다는 생각이 간절히 들었습니다.
다이고로는 이제 여러 동작을 하게 되었다. 그 모습을 보며 감탄하는 일이
많았다. 의자에 오르락내리락할 때는 텔레비전 밑에 있는 책장에 팔을 걸치고
엉덩이를 번쩍 들며 올라간다. 내려올 때는 쿵 하고 몇 번이나 바닥에 머리를
부딪혀 보기에도 꽤 아플 것 같았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으며 몇 번이나
오르내리기를 반복한다.
테이블 위에 올라갔을 때는 놀랐다. 테이블보를 입에 물고 가까이
끌어당기더니 하반신을 들며 올라간다. 하루 종일 테이블에 올라가려고 애쓴
결과, 드디어 이러한 방법을 터득하고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나는 팔과 다리가 없는 장애를 극복하고 새로운 것에 하나둘 도전해가며
노력하는 다이고로의 모습에 감동했다.(가즈요)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다이고로가 걷는 것입니다!
"엄마, 다이고로가"하며 마호가 소리 치자, 다이고로가 또 무슨 장난을 쳤나
하고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요, 다이고로가 서 있는 것이
아닙니까.
다이고로는 마호의 고양이 인형이 마음에 들었는지, 인형을 빼앗으려 하고
있었습니다. 자신과 키가 비슷한 인형을 짧은 팔과 가슴으로 꼭 껴안고 서
있었습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은 터벅터벅 걷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마치 태엽
감는 인형 같았는데, 설마 다이고로가 걷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이런
순간이 온 것이 마치 꿈만 같았습니다.
* 사진설명
1. 아파트 엘리베이터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다이고로.
2. 다이고로는 자기가 태어난 고향인 아와지시마 섬에 돌아왔다.
3. 인형을 붙잡고 다이고로가 갑자기 일어섰다.
4. 인간과 똑같이 희로애락의 감정이 풍부했다.
5. 대학 입시을 준비중이었던 세이코. 다이고로의 가장 큰 누나다.
6. 텔레비전 스위치를 켜고 볼륨 조절도 했다
7. 다이고로의 두 살배기 생일 때. 제일 좋아하는 수박으로 축하를 해주었다.
8. 동네 사람들과 젠후쿠지가와 공원으로 꽃구경을 갔다.
@[ 짓궂은 장난에 애를 먹다 (p94)
다이고로는 탈것을 매우 좋아해서 마호의 자전거를 즐겨 탔습니다. 물건을
사러 나갈 때는 나와 딸아이들의 스웨터 주머니에 넣거나 목욕 수건으로 싸서
데리고 갔습니다.
낯을 많이 가리는 다이고로는 사람들이 말을 시키면 주머니 속으로 쏙
들어갔습니다. 귀엽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심한 말을 던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 가족에게 없어서는 안 될 다이고로.
다이고로가 걸을 수 있게 된 사실은 매우 기쁘지만, 행동 범위가 넓어져서
장난 치는 정도도 심해졌습니다.
장지문에 종이를 바를 때의 일입니다. 전화벨이 울려서 종이 바르는 것도
잊은 채 수다를 떨다가,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막
종이를 바른 문짝 위를 다이고로가 타박타박 걸어다니고 있었습니다.
또한 깔끔을 떠는 마호가 정성스럽게 손수건을 챙길 때 다이고로가 나타나면
손수건도 엉망이 되기 일쑤입니다.
다이고로의 장난은 날로 심해져, 동물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힘든 일이 많았지만 아이들의 도움으로 다이고로를 키울 수가
있었습니다. 다이고로를 키우는 일이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언젠가 딸아이들도 엄마가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때 지금 겪었던 일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일까요.
내가 일하는 곳이 방송사인 관계로 '날아라 다이고로'라는 제목을 달고
다이고로의 모습이 TV에 방영되었다. 이 프로그램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또
다이고로가 죽은 뒤, 아내는 "다이고로는 천사의 날개를 달았다"는 제목으로
다이고로에 대한 추억을 책으로 엮었다.
정성 어린 편지를 많이 받았는데, 특히 기뻤던 것은 아이들에게서 온
편지였다. 장애에 대해 편견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다이고로에게 보내온
편지였다. 공해의 심각함, 장애를 지닌 사람에 대한 위로와 이해,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많이 배웠다는 내용들이었다.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는 편지 몇 통을 소개해보겠다.
"다이고로는 정말 잘 살고 있군요. 그런데 집안 이곳저곳에 똥오줌을
싸놓으면 안 돼요. 엄마가 많이 힘드셨겠지만, 모두들 다이고로를 아주 많이
좋아해서 다행이에요."
"만약 다이고로가 기형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마음껏 뛰어다닐 수 있었을
텐데. 그래도 고양이 인형과 비둘기 친구 즈코가 생겨서 다행이에요."
"몸이 불편하지만 많은 것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기형이면 아무것도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생각이 틀렸네요. 뭐든지 열심히 노력하면 되는
거군요. 다이고로는 이것저것에 도전하기를 좋아하나 봐요. 만약 다이고로가
병이 들지 않았다면 많은 것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까워요."
"저는 천식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습니다. 몸이 이래서 동물을 키울 수는
없지만, 다이고로처럼 귀여운 원숭이를 한번 키우고 싶습니다."
"다이고로 군, 너무 씩씩해서 장난이 심한가 봐요. 다이고로는 엄마한테
사랑을 많이 받아서 좋겠어요. 나도 다이고로가 더 힘내서 씩씩하게 살기를
마음속으로 응원할게요. 팔과 다리가 없어도 열심히 잘살고 있어서 기뻐요."
"장난은 그만 치는 게 어때요. 마호짱도 있으니까, 다이고로 혼자 엄마를
독차지하려고 하면 안 돼요."
다이고로는 짧은 생애를 마쳤지만, 그가 우리 가족에게 남긴 추억은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우리 가족의 일원이었던 다이고로의 모습이 많은
아이들에게 뭔가를 전해줬다는 증거로서, 이 편지들를 언제까지나 소중히
간직할 것이다.(에이지)
* 사진설명
1. 마호가 유치원에 가기 전에는 어디라도 함께였다.
2. 자전거에 타는 것을 참 좋아했다.
3. 동네로 드라이브. 다이고로는 인기를 한몸에 받았다.
4. 사람들이 얼굴을 들여다보면 낯을 많이 가렸다.
5. 탈 것을 매우 좋아했으며 호기심도 왕성했다.
6. 선천성 사지장애를 가지고 있는 아이들과 다이고로는 금방 친해졌다.
7. 스스로 가족의 일원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8. 공해로 인한 기형 원숭이 사진집을 엮는 데 온 가족이 협력했다.
9. 각자의 소원을 빌며 칠석을 보냈다.
10. 다이고로의 무심한 표정은 우리에게 뭔가를 깨닫게 해준다.
11. 아이들과 노는 것을 좋아했다. 마호와 낙엽 속에서 즐거운 한때.
12. 자연 공원에서 나무에 오르게 하자, 야생의 재능을 발휘하여 멋지게
올라갔다.
13. 다이고로는 어디에 있어도 아내의 모습을 찾았다.
14. 여러 곳에 데리고 가서 많은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 제3장 갑자기 찾아온 이별 (p111)
2 년 4개월 동안 열심히 살았던 다이고로.
그 추억을 가슴에 새기고 새로운 길을 가다.
@[ 잊을 수 없는 그날 (p113)
나는 가끔 그때의 일을 떠올린다. 나이를 먹고, 여러 가지 경험을 하고,
처지를 바꾸어 생각할 때마다 생각이 달라진다. 어쨌든 그때 나는 엄마와
아빠의 생활방식을 모두 부정했다. 다이고로를 잃고 당신뿐만이 아니라 가족
모두를 한순간 버렸던 엄마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리고 엄마를 이 지경으로
만든 원인을 제공한 아빠가 미웠다.
엄마는 다이고로가 죽던 날 아침, 제정신이 아니셨다. 동생들을 돌보지 않고,
동생과 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동생들은 벌벌 떨었다. 엄마가 이상하다.
예전처럼 상냥하고 씩씩한 엄마가 아니다. 다이고로의 시신 앞에서 정신을
놓은 듯이 우두커니 서 있다. 자식을 잃은 엄마의 모습은 이런 걸까.
아빠는 물론 멀쩡하셨다. 하지만 가족을 소중히 여긴다고 해도 처신이
그다지 능숙하지 못한 아빠는 엄마의 이런 모습을 보며 동요하셨고, 엄마 대신
동생들 마음을 다독거려주시지 못했다.
이런 사태를 만들어놓고는, 사회파 사진작가라며 사람들 앞에 나서는 아빠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때 나에게 중요한 것은 동생들이고, 아빠이며 엄마, 가족뿐이었다. 아빠의
생활방식, 엄마의 생활방식보다도 눈앞에 있는 우리가 무엇보다 애처롭게
느껴졌다. 혼자서 슬픔의 세계로 빠져들어 간 엄마가 불쌍하면서도 그런
엄마에게 실망했다.
사실 그때 엄마의 몸은 많이 망가져 있었다.(세이코)
다이고로가 죽었을 때, 너무나 슬퍼서 아침까지 울었다. 이젠 다이고로가
없다고 생각하니 서운해서 견딜 수가 없었고, 가슴이 메어오면서 아팠다.
지금까지 만났던 '죽음'이라는 것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뿐이었다.
할아버지하고는 떨어져 지냈고, 또한 그때는 어렸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이고로를 통해서 나는 처음으로 '가족을 잃은' 슬픔을
경험했다.(가즈요)
아직 어렸던 나는 그때의 기억이 희미하다.
죽는다는 것을 이해 못하고, 다만 다이고로가 차가워지는 것이 무서웠다.
다이고로 눈 좀 떠봐, 하며 울었던 기억이 난다.
순식간에 죽어버린 다이고로. 나에게는 처음 맞는 '죽음'이었다.(마호)
@[ 다이고로의 시치고산 축하 잔치(p116)
마호가 일곱 살이 되어 시치고산(아이들의 성장 축하 행사, 남자아이는 세
살과 다섯 살, 여자아이는 세 살과 일곱 살이 되는 해 11월 15일에 일본식
정장을 입고 근처의 신사에 가서 참배한다: 역자주)을 축하하기 위해
메이지진구에 가게 되었습니다.
나도 오랜만에 좋아하는 기모노를 입을 수 있어서, 아침부터 기분이
들떴습니다. 다이고로와 살게 되면서 도저히 기모노를 입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언제 오줌을 지릴지 몰랐기 때문에 세탁이 가능한 옷을 입어야
했습니다.
우리 집 막내인 마호의 마지막 시치고산. 이날은 마호에게 기모노를 입히고
근사하게 축하해주고 싶었습니다.
세이코에게 다이고로를 맡기고 마호의 옷을 챙겨주었습니다. 다이고로는
언제나 내가 외출 준비를 하면 방해하며 심통을 부렸는데, 이날은 특히
더했습니다. 얼굴이 새빨개져서 기모노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보채기
시작했습니다.
"안 돼. 오늘은 같이 갈 수 없어요."라고 말해도 도통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평소 같으면 몇 번 듣고 포기하는 편인데, 이날은 막무가내였습니다. 그 모습이
워낙 진지하기에 끝내 못이기는 척하고 데려가기로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다이고로도 세 살이었습니다.
메이지진구에는 사람들로 북적댔으며, 날씨가 포근하고 따뜻해서 더할 나위
없이 좋았습니다. 신청서에는 '오타니 마호, 오타니 다이고로'라고 써서
접수했습니다. 기도를 올린 후, 시치고산 주머니를 받고 다이고로를 안았을 때
갑자기 다이고로의 얼굴색이 확 변했습니다. 눈을 번쩍 뜨고 여태까지 본 적이
없는 표정을 지으며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이때의 태도가 집에 돌아와서도 잊히지 않고 마음에 걸렸습니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반드시 흥분하여 오줌을 싸는데, 이날만은 얌전하게 말썽도
피우지 않았습니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습니다. 평소와 다른 모습에 왠지
불안했습니다.
이로부터 8일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아침부터 다이고로는 우유를 먹지
않았습니다. 평소처럼 활달하게 놀기는 했지만, 가끔 재채기를 해서 감기약을
먹였습니다. 세이코가 다이고로를 안고 "열이 좀 있는 거 같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평소 때면 난로 앞에서 떠나지 않을 정도로 추위를
탔는데, 이날은 그냥 마룻바닥에 있었습니다.
낮잠 잘 시간이 돼서 부르면 대개는 신이 나서 달려왔을 텐데, 누워서
기다리는 내 곁으로 천천히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베개 앞에 선 채 내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습니다. "왜 그래 다이고로, 낮잠 잘 시간이에요"라고
말해도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어느새 나는 잠이 들어버렸고, 한 시간 가량
자다가 깨어났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요. 다이고로는 아직도 내 얼굴을
보고 있었습니다.
다이고로의 얼굴을 보고 화들짝 놀랐습니다. 검은 눈동자가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늘 밑으로 가 있던 검은 눈동자가 한가운데로 모였습니다. 아이들에게
서둘러 가르쳐주니 "다이고로, 잘됐다" 하며 기뻐했습니다.
밤이 되어 남편이 집에 돌아왔습니다. 남편의 저녁을 차리기 위해
다이고로를 아이들에게 맡겼습니다. 그때 "꺄악" 하고 다이고로가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 소리가 이상해서 수의사에게 전화를 걸어보니, 폐렴인 것
같다고 대답했습니다.
@[ 다이고로는 다시 깨어나지 않았다 (p119)
새벽 한 시. 다이고로는 조용히 잠들었습니다.
의사가 처방해준 약을 사서 다이고로에게 억지로 먹였지만, 걱정이 돼서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겨우 다이고로가 잠들고 남편과 나도 마루에서 잠깐
잠이 들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얼마 뒤였습니다.
"으, 우, 우" 하고 나를 깨우는 다이고로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다이고로, 왜 그러니!"
나는 벌떡 일어나서 다이고로를 껴안았습니다. 그 순간, 나는 다이고로가
죽을 거라는 예감이 퍼뜩 들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습니다.
정신없이 가족 모두를 깨웠습니다. 내 품에서 다이고로의 검은 자위가
순식간에 위를 항해 올라갔습니다.
"다이고로야, 눈을 떠봐!"
마호가 흔들어 깨우면서 소리를 쳤습니다. 하지만 두 번 다시 다이고로는
눈을 뜨지 않았습니다. 새벽 두 시... 나는 점점 싸늘해져가는 다이고로를
끌어안은 채 울부짖었습니다. 내 살갗으로 따뜻하게 하면 다이고로가 다시
살아날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다이고로를 품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나는 기억을 잃었습니다.
* 사진설명
1. 가족과 많은 추억을 만들었던 다이고로.
2. 낮에 건강하게 놀던 다이고로가 한밤중에 갑자기 상태가 나빠졌다.
3. "눈을 떠봐, 다이고로!"
4. 아이들은 울고, 아내는 다이고로를 계속 껴안고 있었다.
5. 짧은 생애였다. 오래오래 함께 지내고 싶었다.
6. 우리를 언제나 지켜봐줘.
7. 다이고로. 우리 가족은 새로운 길을 걷기 시작했다.
@[ 각자의 삶을 찾아서 (p127)
이 무렵 내 몸은 이미 한계를 넘은 상태였습니다. 나는 곧바로 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받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몸으로 계속 다이고로를
키웠으면 나도 어떻게 됐을지 모릅니다. 다이고로가 내 대신 죽은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 뒤 아이들도 다 크고 남편이 정년을 맞았을 때, 우리는 유후인에서
'오모야'라는 작은 여관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올해 1월 1일, 난 유후인에서 성년의 날을 맞았다.
사춘기를 맞이하면서부터 나는 사사건건 엄마아빠에게 반항하며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비참한 나날을 보냈다. 내가 왜 이럴까 하고 자문해도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부모님께 슬픈 기억만 남겨드렸다고 생각한다.
그러는 가운데 작년부터 오모야의 일을 거들기 시작했다. 요 6 년 사이, 몸이
많이 허약해진 엄마는 더운 날이나 추운 날이나, 몸이 좋지 않은 날에도
손님을 기쁘게 맞이하는 데 최선을 다하셨다. 이런 엄마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당신들 이외의 모든 생명에게 사랑을 쏟는 부모님께 반항했던 날들이 한없이
후회됐다.
다이고로가 죽은지 15 년. 내게는 다이고로와 지냈던 추억이 또렷하지 않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니 다이고로는 내게 최고의 친구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엄마의 사랑을 독점하던 내게서 엄마를 빼앗으려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 허전한 감정이 늘 내 맘 깊은 곳에 남아 있었던 것일까...
다이고로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스무 살이 된 지금까지, 어느 정도 어른이
된 눈으로 부모님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이고로와 보낸 추억이
앞으로 내 인생에 커다란 플러스가 되기를 기원한다. (마호)
지금은 여관 일도 유후인에서 보내는 생활도 익숙해졌습니다. 특히 마호가
일을 거들어줘서 정말 기쁩니다.
돌아보면 정말 그랬어, 하게 되는 일이 참 많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모야가
아직 가건물인 상태에서 생활하기 시작했을 때, 한 달 동안 대중목욕탕을
이용한 적이 있습니다.
가건물 앞에 있었던 그 목욕탕은, 근처에 있는 노인들의 쉼터였습니다. 나는
매일 100엔짜리 동전을 쥐고 삐걱대는 문짝을 열고 물에 몸을 담그며, 용기를
내어 그들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한창 일할 나이의 주부가, 게다가 이 고장 사람도 아닌데 매일 한가롭게
목욕이나 하니까, 처음에는 그쪽 사람들도 황당했을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매일 장시간 온천에 들어가 있는 것도 고역이었습니다.
그래도 그 덕분에 어르신들께 옛날 이야기를 들으며,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하다 보니 유후인이라는 곳을 서서히 알게 되었습니다.
오모야는 무첨가, 자연 식품을 기본으로 한 음식을 음미할 수 있는 요리
여관입니다. 이것은 내가 벳푸의 이타마에 씨에게 배운 일본식 요리이고,
여관의 요리를 모두 내가 만듭니다.
요리에 익숙하지 않았을 때 너무나 바쁜 나머지 몽롱한 상태로 일하다가
계단에서 넘어져 머리를 크게 다친 적이 있습니다. 이때도 의사에게 '마취를
하면 혀의 감각이 없어질지 모른다'고, 마취를 하지 않게 하고 수술 부위를
꿰매고, 다음날 조리대에 섰습니다.
세 딸은 이러한 우리 부부를 마음 졸이면서 바라보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최대한 노력하며 살고 싶습니다.
다이고로가 장애를 지닌 몸으로 열심히 살아나간 것처럼.
우리는 유후인에 부는 바람처럼 따뜻하고 친절하게, 오모야를 방문하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 사진설명
1. 2 년 4개월간 희로애락을 나누었던 다이고로. 널 영원히 잊지 못할 거야.
2. 푸르디푸른 바다. 다이고로는 이미 저 먼곳으로 가버렸다.
@[ 제4장 정년 후, 유후인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다 (p133)
36 년간의 도쿄 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장애인들이 머물 수 있는 여관을
만들다.
@[ 부부가 세운 장애 설계 (p135)
오이타 현 벳푸 시 서쪽에 있는 유후인. 이곳은 자연 휴양지인 유휴의
산들로 둘러싸여 초록이 무성하고, 아침안개가 자욱하며 소담스럽고 한가로운
온천마을입니다.
우리 부부는 6 년 전에 남편, 에이지의 고향인 이곳 유후인으로 와서, 방이
여섯 개뿐인 여관 오모야를 시작했습니다. 여관 경영이 완전 초보인 우리
부부는 정년 후의 두 번째 인생을 이곳에서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원래 장남이었기 때문에 언젠가는 유후인에 돌아올 참이었습니다.
더구나 우리 부부는 대화를 많이 나누는 편이라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장래에
대한 설계를 했습니다. 여관을 하겠다는 꿈도 이런 대화 중에 자연스레 나오게
되었고, "민박 같은 여관을 해보자" 하는 쪽으로 마음을 조금씩 굳혀갔습니다.
많은 분들이 "잘 생각하셨네요" 하며 격려의 말을 해주었는데, 우리는
그렇게 큰맘을 먹고 여관을 시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한 그루 나무가
성장해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듯이, 우리 부부가 함께 살아오면서 자연스레
도달한 목적지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모님이 여관을 시작하신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엄마의 건강과 아빠의
성격을 봐서도, 오랫동안 도쿄에서 생활하신 두 분에게는 아무리 고향이라지만
새로운 생활에 맞을 만한 조건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두 분께
마이너스 조건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어디서든 당신들 생활방식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이라면 괜찮았다.
다이고로가 죽은 뒤, 엄마는 몇 번이나 입원을 하셨고, 그때마다 나는
부모님께서 조용하게 몸을 쉬면서 노후를 보내셨으면 하는 바램이었지만 이에
개의치 않으셨다. 부모님의 마음이 정 그러시니까 어쩔수 없었다.
부모님은 살아 있는 모든 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살라는 교훈을 다이고로의
삶을 통해 확신하신 듯했고, 나와 동생들도 다이고로가 살았던 태도와
부모님께서 살아가시는 자세를 따르고 싶었다.(세이코)
부모님께서 유후인에서 여관을 하시겠다는 말씀을 들은 것은 내가 고등학교
2 학년 때였고, 실제 시작한 것은 대학교 2 학년 무렵이었다. 이때 나는 진짜로
손님이 찾아올지, 얼마나 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예상 외로 오모야가
잘돼서 기뻤고, 한편으로 엄마의 몸이 걱정되었다. 요리도 엄마가 다 만드셔야
하고, 쉴 틈 없이 일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가즈요)
@[ 장애를 지닌 사람도 안심하고 머물 수 있는 여관 (p138)
우리가 여관을 경영하는 본래 뜻은 신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안심하고
머물 수 있는 여관을 만들자는 데 있었습니다.
남편은 후지TV에서 일하면서 전국 각지를 다니며 사진 촬영을 했습니다.
바쁜 일 가운데 짬을 내서 백납병(살가죽에 희게 어루러기가 새겨 차차
퍼져가는 병: 역자주)이나 한센병을 앓는 이들, 방문교사(일본에는 학교에 가지
않는 아이에게 교육위원회에서 선정한 특별교사가 가정으로 방문하여 공부를
가르치는 제도가 있다: 역자주) 등을 찍으며, 이 기록을 모아서 긴자의 니콘
살롱에서 사진전을 여는, 이른바 사회파 사진작가였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신체장애인들과 만나게 되어 장애인운동에 뛰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나 자신도 여덟 살 때 히로시마에서 원폭 피해를 당해,
소중한 사람들을 많이 잃었으며, 피폭수첩(원폭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정부에서 주는 의료수첩. 원폭 투하 당시 중심지에서 반경 2 킬로미터 안에
거주한 사람에 한해 제공한다: 역자주)을 갖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남편이 하는
일을 잘 이해할 수 있었고, 세이코, 가즈요, 마호도 어렸을 적부터 같이
활동해왔습니다.
이렇게 활동하는 가운데,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안심하고 머물 수 있는
시설과 여관이 너무 적다는 것을 알고, 자연스레 우리가 그런 숙박시설을
만들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 남편은 부모님과 함께 다카사키야마 야생 원숭이 공원에 갔을 때,
중증 장애를 지닌 원숭이들을 만났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기형원숭이들의
기록사진을 찍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 다이고로를 도쿄에 있는 우리
집에 데리고 왔던 것입니다.
오뚝이 인형 같은 그 원숭이를 '다이고로'라고 이름 짓고, 필사적으로
키웠지만 2 년 4개월 만에 생애를 마쳤습니다. 다이고로의 만남과 죽음은 우리
가족에게 커다란 흔적을 남겼는데, 이때의 경험도 장애인들을 위한 숙박시설을
만들겠다고 마음을 굳히게 된 큰 원인의 하나였습니다.
이 여관은 우리 부부 둘이서 상의하여 오모야(사전적으로는 종갓집, 본가,
본점의 의미. 여기서는 손님들도 자기 집에서 머무르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가족적이고 편한 여관이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 역자주)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자신의 집에 온 것 같은 기분으로 머물다 갔으면
하는 바람에서였습니다. 또 기본적으로는 여관의 규모도 우리 부부의 나이를
고려해서 둘이서도 잘 해나갈 수 있는 범위로 정했습니다. 괜히 크게
시작했다가 그만두어도 큰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여관을 짓기 위해 준비를 하면서 예상치도 못했던 일이 많이
생겼습니다. 이왕 지을 거면 제대로 된 거물을 만들고 싶어서, 당초에 예상했던
비용을 훨씬 초과했습니다. 또한 도쿄 생활에 익숙한 우리 가족이 유후인에서
잘 적응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유후인에 온 지 여러 날이 지났습니다. 이곳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되돌아왔다고 해도, 이곳 생활에 완전히 익숙해지는 데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특히 마호는 감수성이 풍부한 나이라서 걱정이 많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어쨌거나 우리가 선택한 길이었기에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관을 열 때까지 1 년 동안은 유후인에 익숙해지기 위해 많이 노력했으며,
가끔 민박, 팡숑(pension, 민박식인 작은 호텔: 역자주), 호텔, 여관에 묵으면서
장사하는 법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1988 년 4월 8일, 여관이 완성되어 드디어 유후인에 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때 큰딸 세이코는 벌써 결혼했고, 둘째딸 가즈요는 대학생, 막내 마호는
중학교 2 학년이었습니다. 가족끼리 충분히 얘기를 나누어, 가즈요는 그대로
도쿄에 남기로 하고, 남은 세 명이 제2의 인생을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된 계기 중의 하나를 다이고로가
만들어주었다고 생각하며, 늘 다이고로가 우리를 지켜봐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오모야의 현관 앞에는 다이고로의 석상을 만들어 세웠습니다.
* 사진설명
1. 오모야 앞에서. 장애인이 머물 수 있는 여관을 만드는 것이 꿈이었다.
@[ 후기 (p143)
렌즈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생명의 존엄함
나는 장애를 안고 태어난 다이고로를 만나기 전부터 공해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일본의 고도 경제성장기에는 자연과 인간을 무시하는 여러 가지 우행이
저질러졌다. 그것은 공업개발계획, 화력발전소, 원자력발전소 입지계획
따위였는데, 이런 일이 실행될 당시에 친구들과 술집에서 얘기를 나누면서,
사진작가인 내가 이에 대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다가, 이러한 현실을
기록해서 후세에 남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부족하나마 그러한 시대를 살았던 역사의 증언이 되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였다.
1971 년, 나는 처음으로 오이타 현의 다카사키야마에서 기형 원숭이를
만났다. 그로부터 6 년 동안, 전국의 야생 원숭이 공원에서 빈번히 발생하는
기형 원숭이를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기록하는 일에 몰두했다. 6 년째 되는 해,
중증 장애를 지니고 태어난, 생후 이틀째 되는 원숭이를 만났는데, 그것이 바로
다이고로였다.
지금도 그때의 일이 생생하게 기억 난다. 놀람, 긴장, 흥분으로 인해 떨리는
마음을 달래려고 멀리서 흑백과 컬러 두 대의 카메라 셔터를 번갈아 눌러댔던
것이 엊그제 일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정신상태에 빠지게 하는 장소를 만난
것은, 오랜 사진작가 생활에서도 드문 체험이었다.
지금까지 야생 원숭이를 찍으면서 여러 장면을 만났다.
혹독한 겨울로 알려진 홋카이도의 오쿠시가에서 원숭이들은 영하 20 도에도
나무 껍질을 먹으면서 살고 있었다. 또 기온이 36 도를 넘을 때는, 인간들처럼
나무 위에서 강가로 뛰어드는 모습도 보았다. 물 속에 잠겨 땅콩을 주워
먹기도 하고, 매미를 능숙하게 잡아먹기도 하고, 가슴앓이를 치료하기 위해서
특정 흙을 파내서 먹는 일도 있었다.
이 중에서 가장 감동적이고 흐뭇한 일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다. 하지만
동물들의 세계에서도 슬픈 드라마가 많이 있었다.
어떤 원숭이는 생후 7일 만에 죽었다. 그런데 죽은 원숭이의 어미는 그
다음날도 탱탱하게 불은 젖꼭지를 죽은 새끼의 입에 물리고 있었다. 더운
계절이어서, 며칠 만에 새끼원숭이의 몸은 부패하고 미라가 되어갔다. 그러나
어미원숭이는 자신의 새끼를 살아 있을 때와 똑같이 보듬고, 매일 아침 먹이
주는 곳으로 데려왔다. 그러는 사이 2주일이 지나 팔과 다리가 없어지고
나중에는 탁구공만한 두개골만 남았는데도, 어미원숭이는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내가 이 어미원숭이의 모습을 촬영하는 도중에 몇 번이나 파인더가 눈물로
흐려졌는지 모른다. 이 외에도 새끼원숭이 두 마리가 죽은 어미의 이를 잡거나
눈을 벌리는가 하면, 젖을 잡아당기며 깨우는 모습도 보았다.
그리고 2 년 4개월에 걸친 다이고로의 생활 기록... 나는 렌즈를 통해서
생명의 존엄함을 가르쳐주고 싶었다.
다이고로가 죽은 뒤, 준텐도 대학병원에서 해부를 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다이고로의 죽음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니었다.
다이고로는 우리 가족 모두의 가슴속에서 지금도 살고 있다. 나는 아직도
딸아이들을 부를 때, 다이고로의 이름을 부르는 경우가 있다.
다이고로의 생전 모습은 '날아라 다이고로'라는 제목으로 텔레비전에서
방영되었고, 죽은 뒤에는 아내 준코가 "다이고로는 천사의 날개를 달았다"는
제목으로 책을 냈다. 둘 다 큰 반향을 일으켜, 다이고로에게 온 편지가 1000
통이 넘으며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우리 부부는 유후인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고, 새로이 다이고로와 지낸 추억을 되새기며, 여러모로
성원해주신 분들게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 출판을 하게 되었다.
다이고로를 키우고 생활기록을 촬영하는 가운데, 아와지시마 섬에 있는
원숭이 센터의 나카하시 미노리 씨에게 아낌없는 협조와 조언을 받았다. 이
지면을 통해 다시 헌 번 감사드린다.
오타니 에이지
'평생토록 잊을 수 없는 다이고로의 추억'
나는 여덟 살 때 원폭을 경험해 친척과 친구를 많이 잃었습니다. 그 때의
슬픔, 또한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생명을 모독하는 행위에 대한 분노가 50
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원폭 체험은 내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습니다.
인생의 3분의 2를 보내고 지나간 과거를 돌이켜보면, 정말 아찔아찔한
나날이었습니다.
원폭, 결혼, 몇 차례 큰 병치레와 네 차례 수술, 세 딸아이를 낳은 일, 그리고
다이고로와 장애를 가진 아이들과 만난 일, 공해 문제에 뛰어들고,
자원봉사활동 등등...
하지만 어제와 오늘이 매일 다르듯이, 항상 새로운 나날이었습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일에 부닥치면서 당황하기도 하며 하나씩 체험해가는 과정에서 내
자신이 바뀌어가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허약한 몸으로 결혼하고 딸 셋을 출산하는 일은 예삿일이 아니었으며, 그
사이에 네 차례 수술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생활을 하면서 큰딸 세이코는 내
대신 주부 노릇을 잘해주었는데,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세이코에게는 대단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엄마는 걸핏하면 병에 걸리고, 동생들 뒤치다꺼리,
다이고로와 지내면서 큰딸 노릇을 톡톡히 해주었습니다.
그 딸아이도 지금은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그때의 많은 경험이 그
아이를 지켜주며 아내와 엄마로서 너그러운 마음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둘째
가즈요, 막내 마호. 단 한 번뿐인 인생에서 다이고로나 장애를 가진 사람들과
만난 경험을 살려서 앞으로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안온과
편안함만을 바라지 말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살아가길 바랍니다.
우리 가족 모두가 경험했던 다이고로와 지낸 생활. 다이고로는 스스로
살아가는 일에 도전하며, 2 년 4개월의 짧은 생명을 힘껏 불태웠습니다.
다이고로와 맺은 추억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지구라는 커다란 배를 나눠 타며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것이 같이
누리는 환경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우며, 태고부터 이어진 생명의
영위를 인간의 편리대로 훼손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동물들이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감동하지 않을 사람을 없을 겁니다.
우리들 각자가 이러한 마음을 갖고 아름다운 자연과 생명의 존엄함과 위대함을
소중히 여긴다면, 아름다운 자연을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돌이켜보면 다이고로는 내 인생에 크나큰 것을 선사해주었습니다.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지, 친절함, 용기, 가족애.... 다이고로를
키우면서 정말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다이고로야, 정말 고맙구나.
오타니 준코
@[ 인간과 동물 간의 영혼의 교류를 담은 사진집 (p149)
내가 오타니 에이지 씨를 언제 처음 만났는지는 솔직히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일본원숭이를 대하기 시작한 것은 홋카이도대학 수의학부를 졸업하고
재단법인 일본원숭이 센터에 들어온 1962 년이었고, 일본원숭이의 기형 문제에
정면으로 대응하기 시작한 것이 1967 년이니까 아마도 그 후였을 것이다.
처음 만날 날이나 장소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지만, 오타니 씨의 첫인상은
기억한다. '말수가 적고 진실하며, 카메라를 통해서 때로는 엄격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대상을 주시하는 사회파 사진작가'라는 당시의 인상은 지금도
변함없다.
오타니 씨의 사진집에 해설을 쓰게 되어 대단한 영광으로 생각한다.
이 사진집은 아와지시마 섬에서 중증 사지(수족) 장애를 지니고 태어난 새끼
일본원숭이 '다이고로'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오타니 씨 가족의 일원이
되고, 2 년 4개월의 짧은 생애를 마칠 때까지의 기록이다.
이 사진집은 사진작가 오타니 에이지 씨의 사진과 부인 준코 씨를 포함해
가족 전원의 글로 구성되었으며, 단순히 일본원숭이의 일생을 기록한 책이
아니다. 다이고로와 가족 간의 영혼의 교류를 통해, 인간 활동이 자연에 끼치는
영향, 인간과 인간 이외의 동물이 함께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와 고귀함,
바람직한 가족상에 대해 조용히 묻고 있다.
다이고로가 오타니씨의 가족이 된 경위는 본문에 쓰여 있기 때문에, 우선
다이고로가 태어났을 무렵의 사회적 배경, 곧 다이고로처럼 사지에 장애를
지닌 일본원숭이가 다발적으로 발생하게 된 원인을 간략히 말하고자 한다.
선천적으로 사지에 이상이 있는 일본원숭이가 처음 발견된 것은 1955 년,
야생 원숭이에게 먹이를 주어 길들이기 시작한 지 3 년째 되던 해
다카사키야마에서였다
이후 일본 각지에서 야생 원숭이 공원이 증가함에 따라, 기형 원숭이가 눈에
띄게 늘어나고, 우리가 조사한 74 무리 가운데 29 무리에서 기형이 발견되었다.
특히 그 중에서도 먹이를 주어 길들이는 야생 원숭이 집단에서 발생률이
높았는데, 39 무리 중 20집단에서 기형이 발견됐으니까, 야생 원숭이를
길들이는 것에 어떤 요인이 있나 생각되었다.
전국적인 차원에서 기형 원숭이 발생 상황을 보면, 1970 년 전후로 10 년
동안 발생이 많았으며 그 후로는 감소했다. 다이고로는 전국적으로 발생률이
줄어들기 시작했을 때 태어난 셈이지만, 예외적으로 아와지시마 섬에서는
현재까지 발생하고 있다.
이들 기형 원숭이는 사지 맨 끝부터 이상한 것이 특징인데, 증상이 약한
경우는 손가락이 구부러지는 정도지만, 손가락 수가 적기도 하고, 손바닥에
배인 자국이 생기기도 한다. 결손형(손가락 끝, 손목, 손부터 없는 경우:
역자주)인 경우가 가장 많다. 손가락이 착 달라붙어 있기도 하고, 때로는
손가락 수가 정상보다 많기도 하다.
이러한 증상은 언뜻 봐서 서로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촬영한
X선 사진에 의하면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일련의 증후군인 사실을
알 수 있다. 사지의 끝부분이 이상하고, 전신의 다른 부분에는 이상이 보이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장애가 앞다리 상완부나 뒷다리 대퇴부로 이어진
경우에는 흉부, 척추, 골반 따위의 골격이나 내장에도 이상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팔꿈치 아랫부분과 뒷다리 전부가 없는 다이고로는, 아주 심한 중증 장애를
가진 원숭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지 기형의 원인은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원인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이러한 기형의 원인이 유전적일 거라고 생각되었다. 가계
집적성(특정한 가계에 집중해 있는 것)이 보이는 것이 근거였다.
그러나 우리가 연구한 결과 염색체 이상, 반성유전(어느 한 성에만 나타나는
것), 우성유전, 열성유전이라는 같은 유전자에 의한 단일유전양식은 모두
부정되고, 이 일련의 기형을 유전 요인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이러한 선천성 기형의 원인을 생각할 때, 유전 요인인 내인(안 내, 인할
인)과 외인(환경요인)으로 나누어 검토하는 것이 보통인데, 내인단독설이
부정되면 외인 아니면 내인과 외인의 복합에 의한 것인지도 검토해야 한다.
가능성이 있을 법한 몇 가지 원인, 가령 기생충, 세균, 바이러스 따위에
감염된 것이라는 설, 수입대두설, 원숭이가 먹는 토양 중에 금속 성분이 있다는
설 등은, 우리의 연구에 의해서 부정되었다. 가장 가능성이 있는 농약에
대해서는, '어쩌면...' 하는 정도 반응이 두세 가지 떠오르지만, 지금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는 상황이다.
다이고로는 이러한 기형 원숭이가 전국에 다발적으로 발생하는 이상한
환경에서 태어났다.
만약 당시 아와지시마 섬 원숭이 센터의 나카하시 미노루 씨가 발견하지
못했으면,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고 조용히 땅속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런
다이고로를 나카하시 씨가 보살피고 있었는데, 오타니 씨 가족의 간호로
목숨을 건졌다. 2 년 4개월이라는 짧은 생애였지만,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주었다고 생각한다.
우선 생명의 신비와 소중함을 느낄 수 있다. 수억 또는 수십억 가운데 단
하나의 정자와 난자가 만나 하나의 생명을 만드는 확률은 깨알보다 작다.
이것이 어떠한 기준으로 선택되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신비의 세계에 속한
일이며, 이리하여 태어난 생명이 생존한다는 것 자체가 존귀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태어난 생명이라 해서 대개들 생각하듯이 '우수한 자'로 선택되었다는
뜻은 아니지만, 존재 그 자체가 존중되어야 한다.
다이고로는 이러한 사실을 온몸으로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다. 아마
다이고로의 기형은, 수정된 후에 어떤 외부 요인 때문에 생겼겠지만,
다이고로는 스스로 장애가 있다는 것을 별로 의식하지 않았으며, 힘껏
살아가는 것으로 생명의 존귀함을 말했던 것 같다.
또한 다이고로의 사지 기형이 우리 인간들의 활동에 무언의 경고를 주고
있음은 결코 나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다이고로의 생애를 기록한 이 사진집은 위압적으로 인간 활동을 고발하거나,
환경 문제를 경고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이 사진집을 통해
인간 활동을 겸허하게 되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 어떨까.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어미에게 버림받은, 생후 며칠 안 되는 원숭이를
인공으로 젖을 먹여 키운 적이 있다. 이러한 경우 일정 기간 성장한 후 본래
무리의 생활에 복귀시키는 것을 전제로 했다. 이러한 전제가 세워지면,
원숭이가 인간과 지내는 생활에 너무 익숙해지는 것을 피해야 한다.
그러나 오타니 씨 가족은 처음부터 가족의 일원으로서 다이고로를
받아들였다.
중증 장애를 지닌 다이고로는 돌아갈 장소가 없기 때문에 이는 당연한
일이었지만, 이 때문에 다이고로는 원숭이답지 않게 인간과 가까운 감성을
키우며 성장해갔던 것이다.
동물은 인간과 함께 생활하면서 본래 종족의 생활과는 다른 행동이나 감정
따위를 보이는 일이 있다.
야생 일본원숭이의 생활을 전혀 모르고 오타니 씨 가족의 따뜻한 애정
속에서 자란 다이고로는, 이들이야말로 자신의 동료이며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이 인간과 다르다는 의식도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생활 속에서 다이고로가 인간과 가까운 감성으로 성장해갔음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사진집에서도 그것을 읽을 수가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기쁨, 노여움, 슬픔, 서운함, 질투, 심술 부리는 감정
들은 야생 원숭이에게서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보고 동정하기도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며 웃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과 함께 생활하는 원숭이의 감정은 자연 상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의 감정과 가깝다는 것을, 나 자신의 경험으로도 사실이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은 함께 생활하는 가정환경에 따라서 현저하게 달라진다.
사진집에서 보이는, 인간과 닮은 다이고로의 감정 표출이나 행동은, 아마도
오타니 씨 가족의 환경을 반영할 것이다.
이 사진집은 다양한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함으로써, 가족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조용히 묻고 있다.
많은 사람이 일본원숭이의 기형 문제에 관심을 갖다가 흐지부지해졌다.
언제부터인가 대중매체에서 다루지 않게 된 기형 원숭이 문제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잊혀간 느낌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그렇다 치고, 개인적으로 결코 잊지 못할 사람이 몇
있다. 오타니 씨 부부는 틀림없이 그러한 사람들일 것이다.
1996 년 10월, 기형 원숭이 문제 발상의 원산지라고 할 수 있는 아와지시마
섬 원숭이 센터에서, 나카하시 씨가 중심이 되어 이런 분들이 한데 모였다.
이날 오이타 현에서 허리 통증까지 참으며 와서 참석해주신 오타니 준코
부인과 에이지 씨를 만나게 되어 매우 기뻤다.
이 사진집은 기형 원숭이 문제, 가족 본연의 모습, 사회적인 문제를 결코
크게 외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에게 조근조근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 공감과
감동을 부르는 요소가 있다. 많은 사람이 이것을 함께 느꼈으면 하는 바람이다.
1997 년 2월
오사카대학 인간과학부 교수 니기히데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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