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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루-세계사 편력

by Casey,Riley 2023. 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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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사 편력 

 네루

      (저자 소개)

    * J. 네루
  1889 년 인도 알라하바드에서 귀족 출신으로 채어나
  1905 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 유학하여 법학을 전공하고 변호사가 되었다.
  1912 년 귀국하여 독립운동에 참가하여
  1921 년 시민 불복종 운동을 전개했다.
  1922 년 외제 직물 불매 운동을 벌이다가 투옥된 뒤로 총 9 회에 걸쳐 투옥
되었다.
  1936 년 인도 국민 회의의 의장이 되었고
  1946 년 인도 임시 정부의 부수상이 되었고
  1947 년 인도의 독립과 더불어 수상, 외상과 연방 관계상을 역임했다.
  1964 년 76세로 사망하였다.
  저서: '마하트마 간디' '인도의 발견' '자서전' 등. 

    1. 역사의 교훈

  언젠가 나는 너에게 역사에 관한 연구는 이 세상이 얼마나 유유히, 그러나 확실히
진보해 왔는지, 최초의 단순한 동물이 어떻게 더욱 복잡하고 진화된 동물로
변모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라는 동물이 나타나 지능의 힘으로
다른 동물들을 거꾸러뜨리고 승리하게 되었는지를 가르쳐줄 것이라고 쓴 적이 있다.
그리고 나는 협력 또는 협업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발달해 왔는지, 우리의 이상은
여러 사람의 행복을 위해 힘을 합쳐서 일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설명한 적이
있다.
  나는 인간이 야만 상태에서 문명 상태로 발전했다는 것이 역사의 주제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때때로 광범위한 역사를 바라다보면 이 이상이 크게 진보했다든지,
혹은 우리가 정말로 문명인이 되거나 발전했다고 믿기가 어렵다. 오늘날에도
곳곳에서 협동 정신이 결여된 경우를 볼 수 있고, 자기 이익만을 생각하여 다른
나라를 공격하거나 압박하는 나라와 민족이 있으며, 또 남을 착취하는 사람도 있다.
수백만 년 동안 진보하고서도 우리가 여전히 이렇게 뒤떨어지고 불완전하다면,
앞으로 우리가 지각 있고 분별 있는 인간으로서 행동하는 것을 배워 익히려면
얼마나 오랜 세월이 필요할까? 우리들은 때때로 역사 속에서 우리들의 시대보다
훨씬 뛰어나고 교양도 깊으며 문명이란 면에서도 뛰어났던 시대에 대하여 읽을 때가
있다. 그러나 그 때에도 우리는 역사란 도대체 발전하고 있는 것인지, 퇴보하고 있는
것인지를 의심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우리 나라는 확실히 모든 점에서 지금보다 뛰어났던 찬란한 과거를 갖고 있었다.
많은 나라들, 즉 인도, 이집트, 중국, 그리스, 그리고 그 밖의 여러 나라들에서도
역시 과거에 훌륭한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이 나라들은 거의 쇠퇴하여 몰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 사실도 우리의 용기를 꺾지는 못한다. 세계는 큰 무대란다.
그러므로 어떤 나라가 일시에 흥하고 망한 것도 크게 보자면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역사란 변화를 기록한 것일 뿐이다. 그리고 만약 과거에 변화가 조금밖에
없었다면 역사 또한 조금밖에 쓸 수 없을 테지. 우리는 대개 학교나 대학에서
역사를 그리 깊이 배우지는 않는다. 내가 제대로 역사를 읽게 된 것은 대학을 나온
후였지. 다행히 감옥에 갇힌 덕분에 나는 모자라는 지식을 보충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유럽과 아시아를 자세히 살펴보자. 지도를 펴고 커다란 아시아 대륙에 조그만
유럽이 붙어 있는 것을 보려무나. 그것은 마치 아시아에서 조금 튀어나온 것처럼
보이지 않니? 역사를 읽어보면 장구한 세월 동안 아시아가 훨씬 우세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시아 사람들은 커다란 파도가 밀어닥치듯 몇 번이나 유럽을
정복한 적이 있다. 그들은 유럽을 휩쓸고 다녔으며, 유럽에 문화의 빛을 전파했다.
아리아인, 스키타이인, 훈족, 아랍인, 몽고인, 투르크인그들은 저마다
아시아에서 출발하여 아시아와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아시아는 이 민족들을
마치 메뚜기떼를 낳듯이 잇달아 키워 냈다. 사실 유럽은 오랫동안 아시아의
식민지와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현대 유럽의 많은 민족은 아시아에서 침입한
자들의 후손이다.
  아시아는 지도 전체에 걸쳐 크고 육중한 거인처럼 네 활개를 펴고 드러누워
있지만, 유럽은 왜소하다. 그러나 아시아가 크기 때문에 위대하다거나 유럽이
보잘것없다는 말은 아니다. 크기란 사람이나 국가의 위대함을 재는 데 있어 가장
뒤떨어지는 기준이란다. 유럽이 대륙 가운데서는 제일 작아도 위대하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또 우리는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역사적으로 찬란한 시기를
지나왔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 나라들은 발명이나 발견을 통하여 인간의 문명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발전시켰으며, 수백만에 달하는 인간의 생활을 안락하게 해준
위대한 과학자들을 낳았다. 또한 이 나라들은 위대한 작가, 사상가, 미술가, 음악가,
그리고 활동적인 인물들을 배출했다. 그러므로 유럽의 위대성을 부인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아시아의 위대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도 이에 못지 않게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는 자칫 유럽이 발하는 광채에 눈이 멀어 과거를 잊기 쉽다. 그 어느
누구보다도,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크게 세계를 움직인 위대한 사상적 지도자, 즉
여러 주요 종교의 창시자들을 낳은 곳이 바로 아시아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현존하는 큰 종교 가운데 가장 오래된 힌두교는 인도에서 창시되었다. 힌두교의
자매 종교이자 지금 중국, 일본, 버마(현재의 미얀마), 티벳, 그리고 실론에서
성행하고 있는 불교 역시 마찬가지다. 유태교나 기독교도 그 기원을 따져 보면
아시아 서쪽에 위치한 팔레스타인에서 비롯되었으니 역시 아시아의 종교다.
조로아스터교, 즉 배화교는 페르시아(현재의 이란)에서 시작되었고, 너도 알다시피
이슬람교의 예언자 마호메트는 아리아의 메카에서 태어났다. 크리슈나, 석가모니,
마호메트, 그리고 중국의 대철학자인 공자, 노자 등 아시아에서 태어난 대사상가들의
이름을 들자면 책 몇 페이지가 금방 메워질 것이다. 아시아의 위대한 활동적인
인물들의 이름도 결코 이것보다 적지 않다. 또한 나는 다른 많은 방면에서 우리의
이 노쇠한 대륙이 지난날 얼마나 위대하고 활기에 넘치고 있었는지를 네게 보여줄
수 있다.
  어쩌면 이렇게 시대가 변했단 말이냐! 그러나 시대는 우리 눈앞에서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역사는 때때로 급박함과 폭발을 보이면서도 대체로 몇 세기에 걸쳐
서서히 변해 가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아시아에서는 그 변화가 어지러울 정도다.
이 노쇠한 대륙은 기나긴 잠에서 깨어나 소생하고 있다. 세계의 눈길은 아시아로
쏠리고 있다. 아시아가 위대한 역할을 떠맡을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 이제
누구의 눈에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1931 년 1월 9일
    2. 고대 문명의 발생

  3천년 전의 고대 세계로 눈길을 돌려 보자. 고대 문명은 이집트, 크레타 섬의
코노소스, 지금은 이라크 또는 메소포타미아라고 부르는 지방, 중국, 인도, 그리고
그리스에서 비롯되었다. 그리스는 아마 이 중에서는 조금 늦게 발달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인도의 문명을 연대로 보자면, 자매 관계에 있는 이집트, 중국, 그리고
이라크의 문명과 어깨를 겨루고 있다. 고대 그리스조차 이 문명들에 비하면
동생뻘에 해당된다. 이 고대 문명들은 지금 어떻게 되었는가? 코노소스는 지금은
찾아볼 길이 없다. 벌써 3천년 전에 이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리스 문명을
건설한 사람들이 나중에 그것을 파괴했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오랜 문명은 수천년
동안이나 찬란한 꽃을 피웠지만 지금은 거대한 피라미드나 스핑크스, 신전 같은
유적밖에 남지 않았다. 물론 이집트라는 나라는 지금도 있고, 옛날과 마찬가지로
나일강은 유유히 흐르며, 다른 나라들처럼 남녀 노소가 살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주민과 옛문명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라크와 페르시아얼마나 많은 제국들이 번성했다가 잇달아 연기처럼
사라졌는가! 그 중 가장 연대가 오랜 것만 꼽아도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그리고
칼데아가 있다. 그 밖에도 바빌론과 니네베 등의 커다란 도시들이 있었다. 구약
성서는 이곳 주민들에 대한 기록으로 가득 차 있다. 훗날 역시 이 고대 문명을
꽃피운 땅에 다른 제국들이 흥하고 망했다. '아리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마법의 도시
바그다드도 여기에 있었다. 제국의 흥망은 무상하여 아무리 권세 있는 제왕도
세계의 무대에서 아주 잠시만 자신들의 모습을 뽐낼 수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문명만은 계속 남아 있다. 그런데 오늘날 이라크와 페르시아의 고대 문명은 고대
이집트 문명과 마찬가지로 완전히 사라졌다.
  고대 그리스는 분명히 위대했다. 사람들은 지금도 놀라운 눈길로 영광에 가득찬
역사를 읽는다. 우리는 그 대리석 조각을 우러러보고 감동을 받으며, 지금도 전해져
내려오는 고대 문학의 단편들을 읽어보면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현대 유럽이 어떤
의미에서 고대 그리스의 자손이라 일컬어지는 것도 충분히 근거가 있는 말이다.
유럽이 그리스 사상과 문화에서 받은 영향은 그토록 깊은 것이다. 그러나 일찍이
그렇게 빛나던 그리스의 영광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 고대 문명은 자취를 감춘
지 이미 오래 되었으며, 다른 문명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리하여 지금 그리스는
유럽의 동남부에 자리잡은 작은 나라에 불과하다.
  이집트, 코노소스, 이라크, 그리스이 나라들은 모두 멸망하고 말았다. 그
오랜 문명, 그리고 바빌론과 니네베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면 이들 고대
문명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다른 두 문명, 즉 중국과 인도 문명은 어떻게 되었는가?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역시 많은 제국들이 잇달아 흥하고 망했다.
대규모적인 침략과 파괴, 약탈이 계속되어 왔다. 수백년 동안 왕조들이 이 지역을
지배하고는 다시 새로운 왕조로 바뀌었다. 다른 곳에서처럼 중국과 인도에서도
이러한 흥망 성쇠가 되풀이되었다.
  하지만 중국과 인도를 빼고는 어디서도 문명이 진정으로 지속된 곳은 없었다.
많은 변란과 전쟁과 침략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두 나라에서는 고대 문명이
후대에까지 면면히 계속 전해져 내려왔다. 두 나라 모두 고대에 비하면 한결같이
전락하여, 고대의 문명이 오랜 세월을 두고 쌓인 두터운 먼지나 오물 속에 묻혀
버린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들은 어쨌든 지금도 존속되고 있으며, 고대 인도
문명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인도인들의 삶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이제 세계에는
새로운 상황들이 조성되었다. 기선과 철도와 큰 공장이 세계의 모습을 바꾸어
놓았다. 이제껏 변모해 왔듯이 앞으로 인도의 모습도 바뀔 수 있을 것이며, 그리고
분명히 바뀔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여명기와 함께 시작되어 오늘 우리에게
이어지는 장구한 인도의 문화와 문명을 생각하면 흥미로우며 아주 경이롭다. 
  1931 년 1월 10일, 11일
    3.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

  이번 편지에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옛 유럽을 간단히 살펴보자. 오랫동안
유럽은 지중해를 둘러싼 여러 나라들을 가리켜 왔다. 당시의 유럽 북방 나라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독일, 영국, 프랑스는 지중해 연안의 여러
민족들이 볼 때 야만스러운 미개 부족의 소굴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 유럽 문명의
시초는 동부 지중해 연안에 국한되어 있었던 것 같다. 너도 알다시피
이집트^6,36^물론 유럽이 아니라 아프리카에 있는 나라지만^3,63^와 코노소스가
발전을 시작한 최초의 국가였다. 그 후 아리안족이 아시아에서 서족으로 확산되어
그리스와 그 근방의 나라들을 침입하였다. 우리가 고대 그리스인으로 알고 찬양하는
사람들도 이 아리안계의 그리스인이다.
  이들은 그리스에 도착하였을 때 이미 그 곳에서 번영하고 있던 크노소스 문명에서
깊은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크노소스 문명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동시에 크노소스 문명과 그 주위의 문명들을 파괴하고, 그 폐허 위에
자신들의 문명을 세웠다. 먼 옛날에는 인도 아리아인이나 그리스 아리아인은 모두
거칠고 촌스러웠지만 용감한 전사였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용감한 그들은
자신들보다 온순하고 개화된 여러 민족을 파괴하여 흡수해 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코노소스는 기원전 약 1천년에 멸망하고, 새로운 그리스인이 그리스와
주변 일대의 여러 섬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들은 배로 소아시아 서해안과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섬, 그리고 남부 프랑스까지 진출하였다. 프랑스의 마르세유는
그들이 세운 도시다. 하지만 거기에는 이들보다 훨씬 이전에 페니키아인이 정착해
살고 있었다. 페니키아인은 무역을 위해 멀리까지 항해했던 소아시아의 위대한 항해
민족이었다는 사실은 너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들은 야만족이 살고 있던
영국에까지 진출하였는데, 그 무렵 지브롤터 해협을 통과하는 뱃길은 상당히
위험했을 것이다.
  그리스 본토에서는 유명한 여러 도시들이 발달했다. 아테네, 스파르타, 테베,
코린트 등이 그것이다. 옛날의 그리스인^6,36^또는 헬레네인이라고 불렀다.^3,63^은
두 편의 유명한 서사시 '일리아드'와 '오디세이' 속에서 예찬되고 있다. 이 두
서사시에 대해서는 너도 조금은 알고 있을 테지. 그것들은 장님이었던 호메로스가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리아드'에는 파리스가 아름다운 헬렌을 자기 나라인
트로이로 데리고 도망가고, 그리스의 왕과 장수들이 그녀를 빼앗아 오기 위해
트로이 성을 포위한 이야기들이 적혀 있다. '오디세이'는, 오디세우스의 다른 이름인
율리시즈가 트로이 성 포위 전쟁에서 돌아와 방랑하던 이야기다. 이 트로이라는
작은 도시는 소아시아의 해변에서 그다지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 도시는
이제 존재하지 않고, 오랜 세월 속에 지금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천재
시인 호메로스는 그것을 불멸의 도시로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그리스에 대한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리스인들은 커다란 왕국이나 제국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은 작은 도시 국가를 좋아하였다. 말하자면 각 도시가 하나의
독립된 국가였다. 그 도시는 작은 공화국이며, 중심에 도시가 있고 그 주변에 농지가
있어서 식량을 공급하였다. 너도 잘 알겠지만 공화국에는 왕이 없단다. 이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은 왕이 없이 부유한 시민들이 다스렸다. 보통 사람들은 정치에 대하여
발언권이 전혀 혹은 거의 없었다. 참정권이 없는 노^36^예가 많이 있었고,
여자들에게도 역시 아무런 권리가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극히 일부만이 시민
자격을 갖고 공적인 문제에 대해서 투표할 수 있었다. 그들은 전부 한 곳에 모일 수
있었기 때문에 시민들이 투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것은 하나의 정부
아래 있는 큰 국가가 아니라 작은 도시 국가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이 작은 도시 국가들을 통합하여 왕국이든 공화국이든 커다란
국가를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저마다 독립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거의 쉴
새 없이 서로 싸웠다. 그들 사이에는 격렬한 경쟁이 있었고, 때로는 그 때문에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한편 이 도시 국가들을 서로 결합시키는 공통점도 많았다. 그들은 공통된 언어와
문화, 그리고 같은 종교를 갖고 있었다. 그들의 종교는 여러 신과 여신을 믿는
것이며, 그들에게는 풍부하고 아름다운 신화가 있었다. 그들은 미를 숭배하였다.
지금도 그들이 대리석이나 돌에 새긴 조각이 더러 남아 있는데, 그것들은 아름답고
훌륭한 작품들이다. 그들은 건강하고 아름다운 육체를 중요시했으며, 이를 위해
놀이나 경기를 벌이기도 했다. 그리스에서는 이 경기들이 올림피아에서 수시로 열려,
그리스의 온 민족은 이 때만 되면 거기에 모여들었다. 너는 지금도 올림픽 경기가
열린다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 명칭은 고대 그리스의 올림피아 경기에서
따온 것으로서, 여러 나라끼리 경쟁하는 선수권 대회의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은 흩어져 살다가 운동 경기를 할 때는 함께
모이는가 하면 서로 자주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일단 외부에서 위험이 닥쳐올
때에는 곧 하나로 단결하여 막아냈다. 페르시아가 침입했을 때가 그랬다. 
  1931 년 1월 14일, 15일
    4. 고대 인도의 촌락 공동체

  아리아인이 인도에 들어왔을 때 인도에는 이미 문명이 자리잡고 있었다. 북서
지방의 모헨조다로의 유적으로 미루어 볼 때 아리아인이 오기 훨씬 전부터 위대한
문명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드라비다인이 그 무렵 남부 인도에(그리고 아마도 북부 인도에도) 훌륭한 문명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아리아인의 산스크리트어와는 계보가 다른
그들의 언어는 매우 오래된 것이며, 세련된 문학을 낳았다.
  점차 아리아인들 사이에서는 촌락 제도가 발달하였다. 이 제도는 드라비다인의
오래된 촌락과 아리아인의 새로운 창의성이 혼합된 것이었다. 이들 촌락은 거의
독립해 있었으며, 선출된 판차야트(장로 회의)가 다스리고 있었다. 많은 촌락이나
작은 도읍들은 선거로 뽑히거나 세습된 라자, 즉 족장 아래 통합되기도 했다. 종종
몇 개의 촌락 집단들이 서로 이익이 되는 도로, 숙박 시설, 관개를 위한 운하, 그
밖의 공동 시설을 만들기 위해 협력하기도 했다. 라자는 국가의 우두머리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무엇이든 자기 마음대로 할 수는 없었다. 그 역시 아리아인의
법률과 풍습을 따라야 했으며, 백성들에 의해 폐위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처벌받을
수도 있었다. "짐은 곧 국가다" 하는 따위는 있을 수 없었다. 이렇게 아리아인의
촌락에는 일종의 민주주의가 있었다. 말하자면 아리아인 주민들은 어느 정도 정부를
통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이 민주주의적인 제도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오직 아리아인 자신들에게만
제한되어 있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노^36^예나 하층 계급에 속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민주주의도 자유도 없었다. 당시 인도의 아리아인 사이에는 네
가지 사회적 구분, 즉 네 개의 카스트가 있었다. 학자와 승려와 성직자로 구성되는
브라만, 정치에 종사하는 크샤트리아, 상점 주인이나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로
구성되는 바이샤, 그리고 노동자와 직공으로 구성되는 수드라가 그것이다. 이처럼 이
구별은 직업에 따른 것이었다. 어쩌면 카스트 제도가 자리잡은 것은 피정복 민족과
차별을 두고 싶어하는 아리아인의 욕망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매우
오만하고 자만심이 강하여 다른 종족들을 천시하고 어울리기를 싫어했다.
카스트라는 말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는 바르나, 즉 색깔을 뜻하는 말이다. 이
사실은 또한 새로 정착한 아리아인이 인도 원주민에 비하여 피부색이 상당히
희었다는 것을 짐작케 해준다.
  따라서 우리는 아리아인들이 일하는 계급을 천시하여 민주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지만, 자신들간에는 서로 상당한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왕이나 통치자의 부정을 용납하지 않았다. 부정이 있을
때는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왕은 주로 크샤트리아 계급에서 나왔지만, 전쟁이
나거나 어려운 상황에서는 능력만 있으면 심지어 수드라나 그 밖의 하층 계급에서
왕위에 오르는 일도 있었다. 뒷날 아리아인은 퇴보하여 카스트 제도가 엄격해졌다.
너무나 많은 신분 차별이 나라를 약하게 만들고, 마침내 나라를 망치고 말았다. 또한
그들은 예전의 이유에 대해 이해하는 것을 잊어버렸다. 옛날에 아리아인은
노^36^예가 되는 일이 절대로 없었으며, 아리아인의 이름을 더럽히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했던 것이다. 
    1931 년 1월 16일
    5. 중국의 천년, 그리고 코리아와 일본

  5천년 전, 혹은 그보다 훨씬 전에 중국은 서쪽에 사는 부족의 침략을 받았다.
침입한 자들은 역시 중앙 아시아에서 온 부족인데 문화 수준도 상당히 높았다.
그들은 농사를 지을 줄도 알고, 많은 가축도 기르고 있었다. 훌륭한 집들도 갖고
있었고, 사회 조직도 꽤 발달되어 있었다. 그들은 '누런 강'이라고 부르던 황하
근처에 정착하여 나라를 세웠다. 수백년에 걸쳐 온 중국으로 퍼져 나가면서 기술과
예술을 발달시켰다. 중국인은 대부분 농민이며, 이들의 우두머리는 족장이었다.
그로부터 6--7백년 후, 그러니까 지금부터 4천년 전에 요라는 인물이 나타나
황제가 되었다. 하지만 명색은 황제였지만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를 다스린 그런
위엄 있는 황제라기보다는 족장에 가까웠다. 중국인들은 여전히 농민이었고, 중앙
정부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다.
  족장은 보통 선거로 뽑히지만 나중에는 세습되었다. 요는 자식에게 자리를
물려주지 않고 제일 유능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지명하였다. 하지만 제위는 곧
세습되었고, 하왕조는 4백년 이상 중국을 지배하였다고 한다. 하의 마지막 임금은
대단히 잔인한 사람이어서, 그를 쫓아내는 혁명이 일어났다. 그 뒤 은, 또는
상이라고도 하는 또다른 왕조가 패권을 잡고 약 650 년 동안 지배했다.
  은 왕조는 640 년 후에 혁명으로 쓰러지고 주 왕조가 권력을 잡았다. 주나라는
은나라보다도 더 오랫동안 정권을 잡아 867 년 동안 존속했다. 체제를 갖춘 국가가
중국에 출현한 것은 이 주나라가 처음이다. 또한 중국의 위대한 철학자인 공자와
노자가 살았던 것도 이 시대였다.
  은 왕조가 쫓겨날 때, 그 고관 가운데 한 사람인 기자라는 사람은 주나라를
섬기기보다는 망명을 택했다. 그는 부하 5천 명을 거느리고 중국을 떠나 코리아로
갔다. 그는 이 나라를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뜻의 조선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고
한다. 조선은 중국의 동쪽에 있는 나라이므로, 기자는 해가 뜨는 방향을 향해
부하들을 거느리고 이동한 셈이다. 아마도 그는 동쪽 끝에 도착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붙였던 듯하다. 기자는 코리아에 중국의 예술과 기술, 집짓기, 농사, 그리고
비단짜기를 퍼뜨렸다. 더 많은 중국인 이주자들이 기자를 따라왔다.
  우리는 기자가 조선으로 이동했을 당시 일본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전혀
아는 바가 없다. 일본의 역사는 중국이나 코리아의 역사처럼 오래지 않다. 일본인의
말에 따르면 그들의 첫 황제는 진무천황이라고 하며, 기원전 6백년이나 7백년쯤에
즉위했다고 한다. 그들은 그가 태양의 여신 자손이라고 생각한단다. 왜냐하면
일본에서는 태양을 일종의 여신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일본 왕도
진무천황의 직계 자손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많은 일본인들은 그를 태양의
후손이라고 믿고 있다.
  1931 년 1월 18일
    6. 농경의 시작과 계급의 발생

  원시인들은 살기가 매우 어려워 음식물을 찾아다니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들은
날마다 사냥을 나가고 나무 열매를 따고, 먹을 것을 찾아 여기저기 헤매고 다녔다.
점차 부족들이 생기게 되었는데, 이들은 함께 생활하고 함께 사냥하는 거대한
가족들이었다. 혼자 살기보다는 여럿이 함께 모여 사는 것이 안전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커다란 변화, 즉 농경이 시작되어 엄청난 변화를 일으켰다. 사람들은 하루
종일 사냥하기보다는 농사짓는 것, 즉 땅에다 음식물을 키우는 것이 훨씬 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땅을 갈아 씨를 뿌리고 추수하는 것은 곧 땅 위에
정착한다는 것을 뜻했다. 그들은 이제 예전처럼 떠돌아다니는 대신에 농지 가까이에
머물러야 했다. 이리하여 마을과 도시가 생겨났다.
  농경은 또 다른 변화도 가져왔다. 땅에서는 당장 필요한 양 이상의 식량이
생산되었다. 이 초과량 또는 잉여분은 저장되었다. 생활은 예전의 수렵 생활 시대에
비해 복잡해지고, 계급이 서로 다른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농지나 그 밖의
곳에서 노동을 했으며, 몇몇 사람들은 관리와 조직을 맡았다. 관리나 조직을 맡은
사람들의 힘이 점점 커져서 족장이나 지배자나 왕이 되고 귀족이 되었다. 또한
그들은 그 힘을 이용하여 많이 생산된 잉여 식량을 차지하였다. 따라서 들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겨우 먹고 살아가는 동안, 그들은 부자가 되었다. 나중에는 관리나
조직을 맡은 사람들은 너무 게으르고 무능해져서 심지어 조직하는 일까지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는 일없이 놀면서 오직 노동하는 사람들이 생산한 식량을 챙기는
데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는 자신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이런 식으로
남의 노동으로 먹고 살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고 생각하였다.
  이제 농경이 인간의 생활을 크게 바꾸었다는 것을 너도 잘 이해하리라 본다.
농경은 식량을 마련하는 방법을 개량하고 더욱 쉽게 만들어 사회의 기초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버렸다. 농경은 사람들에게 여가를 주었고, 여러 가지 계급을
낳았다. 식량을 얻기 위하여 누구나 꼭 일할 필요는 없어졌고, 일부 사람들은 다른
일에 조사할 수 있게 되었다. 여러 가지 직업이 발전하고, 새로운 전문 분야가
생겨났다. 하지만 권력은 주로 조직을 맡은 계급의 손에 있었다.
  생산 방법의 어떤 커다란 변화는 동시에 커다란 사회적 변화를 가져오게
마련이다. 그 좋은 보기를 하나 들어볼까? 증기가 공장이나 철도나 배의 동력으로
사용되었을 때, 생산이나 분배 방식이 크게 변화하였다. 증기 기관을 쓰는 공장은
수공업자나 직인이 손이나 간단한 도구로 만드는 것보다 훨씬 더 빨리 물건을 만들
수 있었다. 큰 기계는 정말 엄청난 도구였다. 또 철도와 기선은 식량이나 공장의
생산물을 먼 곳으로 신속히 운반해 주었다. 이것이 세계에 어떤 변화를 주었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식량과 물자를 생산하는 더 새롭고 빠른 방법이 역사 속에서 수시로 발견되었다.
물론 너는 생산에 더 좋은 방법이 이용되면 더 많은 양이 생산될 테고, 세계는
그만큼 풍요로워지고, 누구나 예전보다 풍족해질 거라고 생각하겠지? 그러한 생각은
어떤 면에서는 맞고, 또 어떤 면에서는 틀렸다. 진보된 생산 방법은 분명 세계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주었다. 그런데 세계의 어떤 부분을 풍요롭게 해주었을까?
우리 나라에는 아직도 극심한 가난과 빈곤이 남아 있다. 하지만 영국처럼 부유한
나라에도 극빈층이 있다. 이것은 대체 어찌된 영문일까? 부는 어디로 가는가? 점점
더 많은 물자가 생산되는데도 불구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여전히 가난하게 남아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몇몇 나라에서는 그들의 생활도 어느 정도 나아지기는
했지만, 새로 생산되는 부에 비하면 그것은 참으로 보잘것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부의 대부분을 누가 차지하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그것은
대부분, 관리자나 조직자로 있으면서 좋은 것은 죄다 차지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로
간다. 그리고 이상한 것은 거의 아무 일도 하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남들이 일한
몫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계급들이 인간 사회에 출현했다는 사실이다!
더구나^6,36^믿기지 않는 이야기지만^3,63^이러한 계급은 존경을 받으며, 그리하여
일부 어리석은 자들은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기까지 한다! 
  1931 년 1월 20일
    7. 세계적인 종교의 발생

  기원전 6세기 인도에는 불타와 마하비라가 있었고, 중국에는 공자와 노자,
페르시아에는 조로아스터, 그리고 그리스의 사모스 섬에는 피타고라스가 있었다.
혹시 종교와는 상관없더라도 너도 이들의 이름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평범한
학생들은 피타고라스 하면 기하학의 정리를 증명해서 그것을 공부하는 자신들을
고생시키는 중뿔난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 피타고라스의 정리란 유클리드나 그
밖의 어떤 기하학에든 나오는 직각 삼각형의 각 변의 제곱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기하학에서의 발견과는 별도로 피타고라스는 위대한 사상가였다.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는 조로아스터교의 시조라고 한다. 그러나 과연 그를
창시자로 보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서는 단언할 수 없구나. 아마도 그는 페르시아의
오래된 사상과 종교에 새로운 방향과 형식을 주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이
종교는 이미 오래 전에 페르시아에서는 거의 완전히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옛날
페르시아에서 인도로 온 파르시인들이 들여와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이 무렵 중국에서는 두 사람의 위인, 즉 공자와 노자가 있었다. 공자는 정확하게는
'공부자'라고 한다. 이 두 사람은 흔히 말하는 의미의 종교 창시자는 아니었다.
그들은 인간이란 무엇을 해야 하며, 또 무엇을 해서는 안되는가 하는 윤리와 사회적
행위의 체계를 세운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세상을 떠난 뒤 그들을 기념하기 위해
많은 사당이 세워지고, 또 그들의 저작은 마치 힌두교의 '베다'나 기독교의 '성경'과
마찬가지로 중국인에게 존중받았다. 그리고 공자의 가르침 때문에 중국인은
세계에서 제일 예의가 바르고 점잖으며 세련된 민족이 되었다.
  인도에는 마하비라와 불타가 있었다. 마하비라는 지금도 존속되고 있는
자이나교를 창시하였다. 그의 본명은 바르다르마나이며, 마하비라(위대한 영웅이라는
뜻)는 그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칭호다. 자이나 교도는 주로 서부 인도와
카티아와드에 살고 있으며, 오늘날 종종 힌두교에 포함되는 경우도 있다.
카티아와드와 라지푸타나의 아부 산에는 그들의 아름다운 사원이 있다. 그들은
아힘사(비폭력)의 열렬한 신봉자여서 모든 생물에 대한 살생을 엄격하게 배격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재미있는 것은 피타고라스 역시 엄격한 채식주의자였으며, 모든
제자들에게도 이를 지키도록 하였단다.
  이제는 고타마, 즉 불타에 대하여 이야기할 차례로구나. 새삼 말할 것도 없이 그는
크샤트리아로 왕실 가문의 왕자였으며, 이름은 싯다르타였다. 그의 어머니는 마야
왕비였는데, 옛 기록에는 마야가 "보름달처럼 뭇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았고, 대지와
같이 의지가 굳고 냉철하며, 연꽃처럼 마음이 순결한 위대한 여성이었다"고 적혀
있다. 그의 부모는 아들을 안락하고 풍족하게 키우면서 세상의 고뇌나 비참한
모습을 결코 보지 못하게 하려 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가난과 병고와 죽음을 목격하고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이후 그는 자기를 에워싼 궁전의 호화스러운 생활 속에서 편안히 살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가 사랑하는 젊고 아름다운 아내마저도 그의 마음을 인간의
고뇌에서 빼앗을 수는 없었다. 마침내 그의 마음속에는 사상이 싹텄고, 마침내
중생을 이러한 고통에서 구원할 수단을 찾고자 하는 충동이 더 이상 억제할 수 없을
만큼 뜨겁게 타올랐다.
  그리하여 어느 날 그는 야음을 틈타 궁전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 자신을
괴롭히는 의문을 풀기 위하여 홀로 넓은 세상을 방랑하기 시작했다. 이 해답을 찾는
것은 길고도 고된 길이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끝에, 마침내 그는 피팔 나무 밑에
앉아서 도를 깨달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불타, 즉 '도를 깨달은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그가 그늘에 앉아 있던 나무는 그때부터 보리수, 즉 '깨달음의
나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는 옛 카시 부근, 당시에는 이시파나나(신선이 내려오는
곳이라는 뜻)라고 부르던 사르나트의 녹야원에서 포교를 시작하였다. 그는 '올바른
삶의 길'을 제시하였다. 그는 신 앞에 온갖 제물을 바치는 것을 배격하고, 그 대신
우리 마음속의 분노와 미움과 질투와 망상을 버려야 한다고 가르쳤다.
  불타가 태어났을 무렵 인도에서는 주로 옛 베다의 종교를 신봉하였는데, 그
종교는 이미 본래의 면모를 거의 잃을 만큼 타락해 있었다. 브라만의 승려들은 모든
의식과 공양, 미신에 사로잡혀 있었다. 공양이 많을수록 승려들은 더 부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카스트 제도는 더욱 엄격해지고, 대중은 점, 굿, 마술, 사이비 치료
따위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승려들은 이러한 수단을 통하여 사람들을 휘어잡고
지배자인 크샤트리아 세력에 도전하였다. 이리하여 크샤트리아와 브라만은 서로
다투게 되었다. 이 때 불타가 나타나 대중의 사랑을 받는 위대한 개혁자로서 이들
승려의 압제와 낡은 베다의 종교에 파고든 온갖 죄악을 공격하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공양 같은 것을 권장하지 않고, 바른 생활과 선의 실천을 강조하였다.
그는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남녀 수도인을 불교 사중(불교 승려의 공동체 집단, 즉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를 말한다)으로 조직하였다.
  종교로서의 불교는 얼마 동안은 그다지 확산되지 못했다. 불교는 실론에서 중국에
걸쳐 먼 나라들에서는 크게 융성하였지만, 탄생지인 인도는 다시 브라만교, 즉
힌두교에 흡수되고 말았다. 그러나 불교가 브라만교에 끼친 영향은 크며, 적어도
일부 미신과 예식을 몰아냈다.
  오늘날 불교는 세계에서도 가장 신도가 많은 종교이다. 이처럼 신도가 많은
종교로서는 이 외에도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가 있다. 그 밖에 유태교, 시크교,
파르시교 등이 있다. 종교와 그 창시자들은 세계 역사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역사를 살펴볼 때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이에 대하여 쓰면서
당혹감을 느끼고 있다. 대종교의 창시자들이 세계가 낳은 가장 위대하고 숭고한
인물들 가운데 속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들의 제자나 신도들은
종종 위대하다거나 선하다는 말과는 너무도 인연이 먼 사람들이 많았다. 때때로
우리는 역사에서 우리를 고양시켜 더 낫고 고결해지도록 인도해야 할 종교가
사람들을 마치 짐승처럼 행동하게 만든 것을 볼 수 있다. 종교는 그들에게 깨달음을
주는 대신 암흑 속에 가둬 놓으려 하였다.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기는커녕 오히려
편협하게 만들고 타인에게 관대하지 못한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종교의 이름으로
수많은 위대하고 훌륭한 일들이 이루어졌지만, 같은 종교의 이름으로 수백 수천만의
사람들이 살해되고,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죄악이 저질러졌던 경우도 많다.
  너도 어른이 되면 종교적인 사람들, 종교에 적대적인 사람들, 또는 그 어느 쪽에도
무관심한 사람 등, 모든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큰 재력이나 권력을
쥐고 있는 커다란 교회나 종교 단체가 있다. 그것들은 좋은 목적에 쓰일 때도 있고,
때로는 나쁜 목적에 쓰일 때도 있다. 너는 대단히 훌륭하고 고결한 종교인을
만나기도 하겠지만, 반면에 종교라는 허울을 두르고 남을 착취하고 기만하는
불량배나 사기꾼을 만나기도 할 것이다. 그럴 때 너는 상황을 잘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을 내려야 한다. 누구든 남에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은 자신이 직접 찾아내고 경험하는 것이란다. 누구에게든 스스로가 답해야만
할 문제가 있게 마련이니까. 
  1931 년 1월 13일, 21일
    8. 페르시아와 그리스

  그럼 이제 아시아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보자꾸나. 너도 알다시피
아시아에는 고대 문명의 3대 중심지메소포타미아, 인도, 중국이 있었다.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소아시아에서는 아득한 옛날부터 수많은 제국이 잇달아
흥하고 망했다. 아시리아 제국, 메디아 제국, 바빌로니아 제국, 그리고 나중에
페르시아 제국 등. 이 제국들이 서로 싸우고, 때로는 잠시 평화롭게 지내기도 하고,
서로 멸망시키는 과정에 대하여 상세히 파고들 필요는 없겠지. 너는 곧 이 제국들과
그리스의 도시 국가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이 나라들에는 대국 또는 제국을 이룩하려는 열정이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그 이전 문명의 영향에 따른 것으로 생각되지만, 이 밖에 다른 원인들이 더
있었을지도 모른다.
  네 흥미를 끌 만한 어떤 사람이 있단다. '코로이소스'라는 이름을 너도
들어보았겠지? '굉장히 돈이 많은(as rich as Croesus)'이라는 말은 잘 알려진 영어
표현이다. 크로이소스가 얼마나 부귀 영화를 마음껏 누리고, 또 얼마나 욕을
당했는지 읽어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크로이소스는 현재 소아시아가 있는,
아시아의 서쪽 해안의 리디아라는 나라의 왕이었다. 바다를 끼고 있었기 때문에
아마 무역이 꽤 성했을 것이다. 크로이소스와 같은 시대에 키로스가 다스리는
페르시아 제국이 일어나 강대해졌다.
  키로스는 동쪽으로는 거의 인도까지 닿는 커다란 제국을 세웠다. 그러나 후계자의
한 사람인 다리우스가 통치할 때는 영토가 훨씬 더 넓었다. 이 제국의 면적은
소아시아에서 인더스 강에 미치고, 이집트나 소아시아에 건설된 그리스의 여러
도시도 이에 속해 있었다. 이 광대한 제국을 관통하는 훌륭한 도로가 건설되고,
제국의 우편이 규칙적으로 왕래하였다. 다리우스는 몇 가지 이유에서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을 정복하려고 했다. 그리고 이 전쟁 동안에 역사에 널리 알려진 몇 번의
격전이 벌어졌다.
  그리스에 대한 페르시아의 첫 공격은 진군하는 동안 질병과 식량 부족으로 고생이
막심하여 실패로 돌아갔다. 페르시아 군은 그리스에 도착하지도 못하고 그만
후퇴하고 말았다. 그 뒤 기원전 490 년에 두번째 공격이 시작되었다. 페르시아 군은
이번에는 육로를 피하고 뱃길로 아테네 근처의 마라톤이라는 곳에 상륙하였다. 그
무렵 페르시아 제국은 천하에 명성을 떨치고 있었기 때문에 아테네 시민들은 크게
경악했다. 낭패한 아테네인은 옛날부터 다퉈 온 스파르타와 화해하고, 이 공통의
적을 격퇴하는 데 원조를 청하려고 했다. 그러나 스파르타인이 전선에 닿기도 전에,
아테네인은 페르시아 군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이 기원전 490 년에 일어난 그
유명한 마라톤 전투였다.
  이 조그마한 그리스의 도시 국가가 거대한 제국의 군대를 물리쳤다니 놀랍게
생각되겠지. 하지만 이는 겉보기처럼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리스인은
자신들의 집 근처에서 집을 지키기 위하여 싸웠지만, 페르시아 군은 고향을 멀리
떠나 싸운 것이다. 게다가 페르시아의 군대는 제국 전체에서 긁어모은
오합지졸이었다. 그들은 금전적인 대가를 받기 위해 싸웠지, 그리스 정복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이와 반대로 아테네는 자유를 위해 싸웠다. 그들은 자유를
빼앗기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죽기를 각오한 사람들이
패배하는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이다.
  이리하여 다리우스는 마라톤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뒤에 그가 죽고,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가 뒤를 이었다. 크세르크세스 역시 그리스 정복에 뜻을 품고 원정을
준비하였다. 여기서 헤로도투스가 전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마.
크세르크세스의 숙부 아르타바누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페르시아 군이
그리스에 쳐들어가는 것을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조카인 크세르크세스가 그리스와
싸우는 것을 막으려 했다. 헤로도투스는 크세르크세스가 숙부의 말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대의 말에도 일리는 있소. 그러나 그렇게 무슨 일에나 위험을 느끼고, 덮어놓고
겁을 집어먹어서는 안되오. 그대처럼 무슨 일이든 일일이 저울질을 하다가는
아무것도 못하게 되오. 하루 종일 불길한 예감에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불행을
피하기보다는, 운명을 하늘에 맡기고 불행의 절반을 떠메고 나서는 편이 훨씬 나을
거요. 승산이 확실치 않다는 이유로 모든 계획을 거부한다면, 결국 그대 역시 그대가
거부한 사람들 못지 않게 비참해질 것이오. 저울은 이미 균형을 잡고 있소. 그것이
어느 쪽으로 기울지를 누가 정확히 예언할 수 있겠소? 사람은 그럴 능력이 없소.
하지만 성공은 결단을 내리는 자의 것이지, 무슨 일이든지 망설이고 저울질해 보는
자에게는 돌아가지 않는 법이오. 보다시피 페르시아가 쟁취한 힘은 강대하오. 만일
역대의 황제들이 그대와 같이 생각했다고 해보시오. 또는 그대와 같은 신하들만
있었다고 해보시오. 이 왕국은 결코 오늘의 번영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오. 그들이
오늘의 우리를 만든 것은 무엇보다도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오. 큰 공은
큰 위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법이오.

  이 말은 다른 어떤 설명보다도 이 페르시아 왕의 사람됨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 길게 인용해 보았다. 그러나 페르시아 군은 그리스에게 패하고 말았다.
크세르크세스는 실패했지만, 이 말은 여전히 하나의 진리로서 우리 모두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다. 오늘날 우리들은 위대한 과업을 이루려고 하지만, 목적을
달성하려면 커다란 위험을 무릅써야만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왕 중의 왕 크세르크세스는 대군을 거느리고 소아시아를 가로질러 당시
헬레스콘트라고 부르던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 유럽으로 들어갔다. 도중에
크세르크세스는 옛날 그리스의 영웅들이 헬렌을 되찾기 위해 싸웠던 트로이의
폐허에도 잠시 들렀다고 한다. 헬레스폰트에는 군대를 건너게 하기 위하여 커다란
다리가 놓여졌다. 크세르크세스는 언덕 위에 마련된 대리석 옥좌에 앉아 다리를
건너는 페르시아 군대를 사열하였다.
  대군은 육지로 진군하고 수많은 해군이 바다에서 호응하였다. 그러나 바다는
그리스의 편을 들어 많은 배가 폭풍우를 만나 침몰해 버렸다. 그리스인은 이 대군의
침입에 놀라 동족간의 갈등을 청산하고 일치 단결하여 침략자에 항거하였다. 그들은
페르시아 군에 밀리면서도 테르모필레라는 곳에서 적의 진격을 저지하려고 하였다.
그 곳은 한편은 산이고 한편은 바다로 에워싸여 매우 좁은 통로를 이루고 있어서
적은 병력으로도 능히 대군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3백 명의 스파르타 군을
거느린 레오니다스는 이 통로를 사수하였다. 이 용감한 사람들은 마라톤 전쟁 뒤 10
년 만에 다시 찾아온 이 운명의 날에 조국을 위하여 참으로 훌륭하게 싸웠다.
그리스 군이 철수하는 동안 이들은 페르시아 군을 철저히 가로막았다. 비좁은
통로에서 용사들은 잇달아 죽어 갔지만, 뒤에서 기다리던 다른 용사가 나서서
페르시아 군은 한 걸음도 진군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레오니다스와 3백 명의
용사들이 드디어 페르시아 군의 통과를 허용했을 때에는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모조리 전사한 뒤였다.
  이것은 기원전 480 년, 그러니까 지금부터 2천 4백년 전 일이지만 아직도 우리는
이 불굴의 용기를 상기하면 온몸이 긴장되지 않을 수 없다. 지금도 테르모필레를
찾는 사람들은 비석에 아로새겨진 레오니다스와 그 병사들의 격문에 저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힐 것이다.

  길가는 사람은 스파르타에 가서 말하라.
  우리는 조국의 명을 받들고 여기서 잠드노라.

  죽음마저도 정복한 위대한 용기는 얼마나 훌륭한가! 레오니다스와 테르모필레의
생명은 언제까지고 살아남아, 멀리 인도에서도 우리는 그들을 상기하며 긴장을
느낀다. 그렇다면 우리 나라의 유구한 역사를 통하여 선조들, 힌두스탄의 용감한
사람들이 나라를 위하여 두려움 없이 침착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또 압제에
굴복하느니 차라리 깨끗하게 죽음을 택한 수많은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말하며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
  테르모필레는 잠시 동안 페르시아 군을 저지하였다. 그러나 오래 버틸 수는
없었다. 그리스인은 적에게 압도되어 후퇴하고, 몇몇 그리스의 도시들은 이에
항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존심 강한 아테네인들은 항복하기보다는 그들이
사랑하는 도시를 파괴하는 길을 택했다. 그리고 모든 시민은 대개 배를 타고
탈출하였다. 페르시아인은 텅 빈 도시에 입성하여 모든 것을 불태워 버렸다. 그러나
아테네는 완전히 패배한 것이 아니었다. 살라미스 부근에서 큰 격전이 벌어졌다.
페르시아의 배는 격파되었고, 이 패배에 기가 꺾인 크세르크세스는 덧없이
페르시아로 물러갔다.
  그 뒤 페르시아는 한동안 여전히 대제국이었지만, 마라톤과 살라미스 전투를
고비로 몰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에 살았던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이
거대한 제국의 토대가 흔들렸다는 것은 분명 놀라운 일이었으리라. 헤로도투스는 이
점을 고찰하고 한 가지 교훈을 끌어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민족의
역사에는 세 단계가 있다. 처음에 성공하고, 그러면 곧 거드름을 피우고 다른 민족을
압제하게 되며, 그리고는 마침내 몰락한다." 
  1931 년 1월 25일
    9. 그리스의 영광

  헬레네인, 즉 그리스인이 페르시아를 무찌른 것은 두 가지 결과를 낳았다. 즉
페르시아 제국은 점차 쇠퇴하여 약해지고, 그리스인은 역사의 황금 시대에 접어들게
되었다. 그리스의 전성기는 페르시아 전쟁에서 알렉산더의 전쟁에 이르기까지, 즉
테르모필레와 살라미스 전투 이후 약 150 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페르시아의
위협은 그리스를 단결시켰다. 그러나 그 위협이 사라지자 그리스인들은 다시 갈라져
서로 싸웠다. 그 중에서도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두 도시 국가는 불구 대천의 원수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싸움은 아무래도 좋다.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다. 우리가 그들을 생각하는 이유는 다른 의미에서 당시의 그리스가 위대했기
때문이다.
  이 당시 그리스의 책, 조각, 유적은 얼마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는
이 유품들은 그리스인들의 다방면에 걸친 위대성을 나타내어 우리를 놀라게 하고
감탄으로 가슴을 가득 차게 하는 데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 그들의 감정이 얼마나
풍부했으며, 또 조각이나 건축물을 만들어낸 손은 얼마나 섬세하고 날래었을까!
페이디아스는 당시의 유명한 조각가였지만 그만큼 명성이 있는 다른 예술가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의 희곡비극과 희극 작품들은 오늘날까지도 그 방면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들에 속한다.
스포클레스.아이스킬로스.에우리페데스.아리스토파네스.핀다로스.메난데로스.사포 등
지금 이렇게 너에게 이름만 열거하지만, 네가 커서 그들의 작품을 읽으면 그 무렵
그리스 황금 시대의 영광을 일부나마 실감하게 될 것이다.
  이 시대의 그리스 역사는 우리가 어느 나라의 역사든 역사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일종의 경고가 된다. 당시 그리스에서 일어난 사소한 전쟁 같은
데에만 주의를 기울여서는 그들을 참으로 알았다고 할 수 없다. 그들을 이해하려면
그들의 사상 속으로 들어가, 그들이 느끼고 행동한 것을 맛보아야만 한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이러한 내면의 역사이며, 바로 이것이 현대 유럽을 여러 가지 점에서
고대 그리스 문화의 자손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특히 이 시대에는 아테네가 유명했다. 아테네의 지도자 가운데 대 정치가가 한 명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페리클레스라고 한다. 그는 30 년 동안 아테네에서 정치
권력을 장악하였다. 아테네가 고귀한 도시가 되고, 아름다운 건축물과 위대한
예술가와 사상으로 충만된 것은 이 시대의 일이었다. 지금도 그 시대를
'페리클레스의 아테네'라고 부르며, 또 우리는 '페리클레스 시대'에 대하여 자주
이야기한다.
  그 무렵 아테네에 살고 있던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아테네의 성장을 고찰하고,
무엇이든지 도덕적인 입장에서 관찰하는 그의 성향대로 한 가지 교훈을 이끌어
냈다. 그는 '역사'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아테네의 세력은 강대해졌다. 여기에 자유를 존중해야 할 이유에 대한^6,36^그
증거는 다른 데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지만^3,63^분명한 증거가 있다. 그들은
전제 정치가 아테네를 지배하고 있을 때에는 어느 이웃 나라와의 전쟁에서도 우세를
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압제자가 추방되자마자 그들은 곧 이웃 나라를 능가하게
되었다. 이 사실은 예속 당한 상태에서는 자기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오직
상전을 위해 일한 것에 불과하지만, 일단 그들이 자유롭게 되자 개개인은 바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는 증거이다.

  나는 이 시대의 위대한 사람들 이름을 몇 명 언급하였다. 하지만 아직 그 시대나
모든 시대를 통하여 가장 위대한 사람들 중의 하나로 간주되고 있는 사람을 말하지
않았다. 그 이름은 바로 소크라테스다. 그는 오직 진리만을 탐구한 철학자였다. 그가
지향한 가장 가치 있는 유일한 것은 참된 지식이었다. 그는 이런 어려운 문제를
놓고 친구나 친지들과 가끔 토론을 하였다. 토론 속에서 진리가 드러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많은 제자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은
플라톤이다. 그는 지금까지 남아 있는 많은 책을 썼다. 우리가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에 대하여 여러 가지를 알 수 있는 것도 이 책들 덕분이란다. 그러나
대개 정부라는 것은 사물의 본질을 분명히 밝히려고 하는 사람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기 마련이다. 정부는 진리를 탐구하는 것을 싫어한다. 아테네의
정부^6,36^이것은 페리클레스 시대보다 더 나중의 일이지만^3,63^는 소크라테스의
방법을 달가워하지 않아 그를 재판에 회부하여 사형을 선고하였다. 그들은
소크라테스에게, 만일 사람들과 토론하기를 중지하고 전향할 것을 약속한다면
석방하겠다는 제의를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를 거절하고, 스스로 의무로 여기는
것을 저버리느니보다는 차라리 독배를 선택하여 죽는 것을 택했다. 그는 죽음에
임하여 '아테네 사람들', 즉 자기를 고발한 자들과 재판관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만일 진리를 탐구하는 것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나를 석방하겠다고 제의한다면
나는 말하겠소. 아테네 사람들이여, 당신들의 친절에 감사하오. 그러나 나는
당신들보다 나에게 이 일을 부여한 신을 따를 것이오. 그리하여 나에게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철학이라는 천직을 버리지 않을 것이오.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당신은
예지와 진리와 영혼에 대한 수업을 게을리 하고 오직 명예만을 추구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가?"라고 묻기를 그치지 않을 것이오. 나는 죽음이 무엇인지
모르오. 어쩌면 죽음이란 좋은 것일지도 모르겠소. 나는 사람들이 그 임무를
포기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소. 그러므로 나는 내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어쩌면 좋을지도 모르는 편을 택하겠소.

  소크라테스는 항상 진리와 지식의 대의에 봉사하였지만, 죽음을 통하여 가장
훌륭한 봉사를 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많은 문제, 예컨대 사회주의니 자본주의니 그 밖의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하여 쓴 책을 읽기도 하고 듣기도 한다. 세계에는 많은 불행과 부정이
있으며, 많은 사람들은 여기에 깊이 분노하면서 변화를 원하고 있다. 플라톤도 정치
문제에 대하여 생각하고 이에 관한 저서(국가론)를 내놓기도 했다. 이처럼 사람들은
그 당시부터 모든 사람의 행복을 위하여 국가나 사회를 어떻게 꾸려 나가야 할
것인가를 생각했던 것이다.
  플라톤이 늙었을 무렵, 또 한 사람의 유명한 그리스인이 나타났다. 그의 이름은
아리스토텔레스다. 그는 알렉산더 대왕의 가정 교사였으며, 알렉산더 대왕은 그가
학문을 쌓는 데 크게 도움을 주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처럼
인간의 문제에는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았고, 자연계를 관찰하거나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는 데 흥미를 갖고 있었다. 이것은 자연 철학오늘날 흔히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그는 초기 과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931 년 1월 24일
    10. 유명한 정복자, 그러나 교만했던 청년(알렉산더)

  알렉산더는 마케도니아, 즉 그리스 바로 북쪽에 있는 나라에서 태어났다.
마케도니아인은 여러 가지 면에서 그리스인과 비슷해서 서로 사촌 사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알렉산더의 아버지 필립포스는 마케도니아의 왕이었다. 그는 유능한
왕이어서 그의 작은 왕국을 강대하게 만들고 아주 효율적인 군대를 양성하였다.
알렉산더는 이른바 '대왕'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널리 이름을 전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업적은 대부분 부왕 필립포스가 일찍이 치밀하게 국사를 운영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므로 알렉산더가 정말로 위대한 인물이었는지는 의심스럽다. 그는
내가 영웅으로 간주하는 사람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다만 그는 짧은 생애 동안
자기 이름을 두 대륙에서 잊을 수 없게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역사상 최초의
세계 정복자라고 한다. 그리고 그가 실제로 무슨 일을 했든 그의 이름은 역사에서
불가사의한 마력을 갖게 되었다. 수십 개의 도시가 그의 이름을 본떠서 명명되고, 그
가운데 여러 도시는 지금도 남아 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도시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다.
  알렉산더는 나이 서른 세 살에 죽고 말았다. 이 '위대한' 인물은 그 짧은 생애에
무엇을 이룩하였을까? 그는 몇몇 싸움에서 눈부신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의심할
여지없이 위대한 장군이기는 했지만 허영과 자만심이 많은 인간이었고, 가끔 아주
잔인하고 난폭하였다. 그는 자신을 거의 신이라고 간주하였다. 일시적인 격분과
변덕의 순간에 가장 훌륭한 친구들을 죽였으며, 또 몇 개의 큰 도시를 그 주민들과
함께 파괴해 버렸다.
  알렉산더는 자신의 제국에 이렇다 할 만한 업적심지어 제대로 된 도로조차
전혀 남기지 않았다. 그는 그저 허공을 흐르는 유성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졌으며,
한줌의 기억 말고는 아무것도 남긴 것이 없었다. 그가 죽은 뒤 왕위 계승 다툼으로
그 크나큰 나라는 사분 오열되고 말았다. 그를 흔히 '세계의 정복자'라고 한다. 그는
한때 정복할 땅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고 한탄하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 흐느껴
울었다고 한다. 그러나 인도는 서북부의 작은 지역을 제외하고는 그에게 정복되지
않았으며, 그 당시 이미 대국이었던 중국은 말할 것도 없다. 알렉산더는 중국을
구경도 해보지 못했다.
  알렉산더가 죽자 제국은 그의 장군들에 의하여 분할되었다. 이집트는 강력한
정부와 왕조를 세운 프톨레마이오스가 차지했다. 알렉산드리아를 수도로 삼은 이
정부 아래서 이집트는 강대한 국가가 되었고, 알렉산드리아는 과학, 철학, 예술로
유명한 대도시가 되었다.
  페르시아,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소아시아의 일부는 또 셀레우코스 장군이
다스리게 되었으며, 알렉산더가 정복한 인도의 서북 지방 일부도 그의 손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인도를 계속 거느릴 수 없었다. 알렉산더가 죽은 뒤
그리스의 수비대가 쫓겨났기 때문이다.
  알렉산더가 인도에 나타난 것은 기원전 327 년의 일이었다. 그의 침략은 일종의
기습과 같은 것이어서 인도는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알렉산더의
침략이 인도와 그리스 사이에 왕래하는 길을 터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알렉산더 시대 이전부터 동서를 연결하는 도로가 있었으며, 인도는 페르시아는
물론이고 그리스와도 계속 왕래하고 있었다. 물론 알렉산더의 침략으로 접촉이 크게
촉진되어 인도와 그리스의 양대 문화는 더욱 긴밀하게 융합되었던 것이 틀림없다.

  1931 년 1월 25일, 1932 년 3월 30일
    11. 마우리아 제국과 아소카 왕

  알렉산더가 인도의 서북 지방을 침입해 왔을 때 마가다 왕국에는 찬드라굽타라는
청년이 있었다. 그는 알렉산더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행동을 개시할 때가
왔다고 생각하고 결단을 내렸다.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원조를 얻어내어 알렉산더가
남겨 두고 간 그리스 수비대를 공격하여 쫓아 버렸다. 이렇게 탁실라를 점령한 그와
그의 일파는 남쪽으로 진격하여 왕이 있는 파탈리푸트라로 쳐들어가 난다 왕을
거꾸러뜨렸다. 이 때가 기원전 321 년으로, 알렉산더가 죽은 지 2 년 후의
일이었다. 이 날로 마우리아 왕조의 치세가 시작되었다.
  찬드라굽타의 마우리아 제국은 북부 인도 일대에서 아프가니스탄의 일부를
병합하고, 카불에서 벵골, 아라비아 해에서 멩골 만까지 커졌다. 파탈리푸트라가
대제국의 수도가 되었고, 오직 남부 인도만이 그의 지배에서 제외되었다.
  이 시절 카우틸랴라는 사람이 찬드라굽타 정부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한
'아르타샤스트라'가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지금부터 2천 2백년 전 마우리아 제국의
모습을 대체로 짐작할 수 있다. 마우리아 제국의 수도는 파탈리푸트라였다. 그곳은
인더스 강을 9 마일에 걸쳐 바라보고 있던 화려한 도시였다. 64개의 큰 성문과 수백
개의 작은 문이 있었다. 집은 주로 목조이며, 화재의 염려가 있었기 때문에 세심한
방화 시설이 마련되어 있었다. 즉 주요한 거리마다 물을 가득 채운 수많은 물통을
마련해 두고, 집집마다 화재가 일어날 때 즉시 사용할 수 있는 물통, 사다리,
갈쿠리, 그 밖에 필요한 도구를 마련해 두어야 했다.
  카우틸랴가 서술하고 있는 도시의 규칙 가운데에는 너의 흥미를 끌 만한 것이
하나 있다. 거리에 쓰레기를 버린 자는 누구나 벌금을 물도록 되어 있단다. 그리고
거리에 흙탕물이 고이도록 내버려 두어도 벌금을 물어야 했다. 이런 규칙이 제대로
지켜졌다면 파탈리푸트라나 그 밖의 도시는 매우 깨끗하고 청결하고 위생적이었을
것이 틀림없다. 나는 이러한 규칙이 우리들의 도시 행정에도 채택되기를 바란다.
  파탈리푸트라에는 시정을 처리하기 위한 자치 행정 의회가 있었는데, 이것은
시민이 선출하는 30 명의 평의원으로 구성되며, 이 30 명의 평의원은 5 명의
임원으로 구성되는 6개의 위원회로 나누어 있었다. 이 위원회는 시의 공업, 공예,
여행자나 순례자의 취급, 과세를 위한 사망 및 출생 신고의 접수, 물산 따위를
취급하였다. 의회는 위생, 재정, 급수, 공원 및 공공 건축물 등을 관할하였다.
  재판과 항소 법정을 관리하는 장로 회의가 있었다. 재해 구제를 위하여 특별한
조치가 취해지고, 국가가 보유하는 식량의 절반은 반드시 이 재해에 대비하여
비축하였다.
  융성했던 마우리아 왕조에 기억할 만한 왕이 태어났다. 바로 아소카 왕이다.
아소카는 기원전 268 년에 빈두사라에서 북부 및 중부 인도의 전부와 중앙
아시아에 이르는 대제국을 계승하였다. 그는 제위에 오른 지 9 년이 되는 해에
나머지 동남부 및 남부까지 차지하려고 칼링가 정복에 나섰다. 칼링가는 인도
동해안의 마하나디 강, 고다바리 강, 키스타나 강으로 둘러싸인 곳에 있었다.
칼링가의 백성들은 아소카의 군대에 맞서 용감하게 싸웠지만,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
끝에 굴복하였다. 이 전쟁과 학살은 아소카의 마음을 움직여 그는 전쟁과 이에
따르는 모든 행위를 혐오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그에게 전쟁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남부의 한 모서리를 제외한 전 인도가 그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에
이곳을 공략하여 정복을 완성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단념했다.
그는 승리를 거둔 뒤에 전쟁을 포기한 역사상 유일한 군주였다.
  다행히 아소카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하였는가를 우리에게 전해 주는 그의
말, 즉 칙서들이 오늘날까지 많이 남아 있다. 우리는 돌이나 금속에 새긴 수많은
글에서 그가 백성과 자손들에게 준 가르침을 알 수 있다. 너도 알다시피
알라하바드에는 아소카의 기념비가 있는데, 이와 비슷한 기념비가 인도의 어느
주에나 많이 남아 있다. 그것을 보면 아소카는 전쟁과 정복에 따르는 학살에 대한
두려움과 뉘우침을 말하고 있다. 그는 "참되고 유일한 정복이란 자아의 극복이며,
다르마(의무, 진리, 법, 덕을 뜻함)로 인간의 마음을 정복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여기서 다시 그에 관한 이야기 가운데 몇 가지를 더 소개하겠다. 그
이야기들은 우리의 마음을 끌 뿐만 아니라 아소카를 한층 친밀하게 느끼게 해줄
것이다.

  폐하께서 대관식을 올리신 지 8 년이 지나서 칼링가는 폐하 앞에 정복되었다.
포로로 납치된 자가 15 만, 살해된 자가 10 만, 그리고 전사한 자는 이보다 몇 배에
이르렀다.
  칼링가가 병합되자 폐하께서는 곧 법의 열렬한 보호, 법에 대한 사랑,
법(다르마)의 포교를 시작하게 하셨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칼링가 정복에 대하여
회한을 느끼시게 되었다. 이는 한 나라의 정복이 학살과 죽음과 포로와 납치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인도적인 행위는 폐하가 깊이 애통해 하시고, 통탄을
금치 못하시는 일이었다.

  이 글은 계속하여, 아소카는 이제 설령 칼링가에서 살해되고 납치된 자의 백분의
1, 천분의 1에 해당하는 살해나 납치도 용납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한다. 아소카는
참된 정복은 의무나 신앙의 법으로 사람의 마음을 정복하는 것이라고 역설하고,
그가 이미 자기 제국뿐만 아니라 다른 먼 나라에서도 이러한 참된 승리를 얻었음을
역설하였다.
  이러한 칙서에 거듭 언급된 법이란 결국 불타의 법이었다. 아소카는 열렬한
불교도가 되어 세상에 널리 다르마를 전하는 데 온 힘을 다하였다. 그러나 이를
위해 어떤 권력이나 강제 수단도 동원하지는 않았다. 그가 원하는 개종이란 인간의
마음을 얻는 것이었다. 종교인 치고 아소카 만큼 참으로 관대한 인물도 드물
것이다. 종교가들이 전도를 위하여 강권, 공포 수단, 사기 행위까지도 마다 않던
예는 드물지 않다. 역사를 보면 종교적 박해와 종교 전쟁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으며, 아마 그 어떤 명분보다도 종교나 신의라는 명분 아래 가장 많은 피를
흘렸을 것이다. 인도의 위대한 아들이자 강대한 제국의 원수가 열렬한 신앙을 갖고
사람들을 개종시키는 데 오로지 정신적인 수단에만 의지했다는 것을 기억해 두자.
이상하게도 누구나 종교나 신앙에 관한 일이라면 목에 총칼을 꽂아도 좋다는 미련한
생각에 빠진다.
  아소카가 본보기를 보여주고 불교가 널리 퍼지자 채식주의가 성행하였다. 그
때까지만 해도 인도에서는 브라만이나 크샤트리아도 보통 육식을 하고 술도
마셨지만, 이 때부터 음주와 육식을 하는 자가 크게 줄었다.
  이와 같이 아소카는 평화로운 방법으로 공익을 위해 힘쓰면서 38 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그는 한시도 정치를 게을리 한 적이 없다. "짐이 언제 어느 곳에
있더라도, 식사중이거나 후궁에 있거나 침실에 있거나 사적인 방에 있거나 수레
위에 있거나, 또는 정원을 거닐 때라도 대신들은 가리지 말고 언제나 백성에 대한
정무를 보고하라"고 했다. 만약 어떤 긴급한 사태가 발생했을 때에는 '어떤
곳에서도' 즉시 보고해야 했다. 아소카 왕의 말을 빌리면 그것은 '사회의 안녕을
위해 소임을 수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소카는 기원전 226 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기 얼마 전에 출가했다. 
  1932 년 4월 3일
    12. 고대 중국의 발전(진나라와 한나라)

  그 동안 중국에서는 국가가 발생하여 오랜 세월을 두고 중앙 정부가 형성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명목상으로는 주나라의 지배하에 있었지만, 점차로 통일 과정이
멈추고 해체가 이루어지던 오랜 시기가 계속되었다. 지방의 작은 영주들은 사실상
독립하여 서로 세력 다툼을 벌였다. 이처럼 불행한 사태가 몇백년 동안
계속된^6,36^중국에서는 무슨 일이든 몇백년에서 천년은 걸리나 보다^3,63^결과 이
지방 군주의 한 사람인 진공이 노쇠한 주나라를 추방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의
후손들은 진 왕조라고 하는데, '지나(China)'라는 이름이 이 진에서 나왔다는 것은
기억해 두어도 좋을 것이다.
  이렇게 진 일족은 기원전 225 년부터 중국에서 치세를 시작했다. 아소카의 치세가
시작된 것은 이보다 36 년 전이므로, 우리는 이제 중국에서 아소카의 동시대인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진의 황제 가운데 초기의 세 사람은 매우 짧은 시기 동안
군림했을 뿐이다. 그리고 기원전 246 년에 네 번째 황제가 나타났는데 이 사람은
주목할 만한 인물이었다. 그의 이름은 정이었지만 나중에 스스로 시황제라 칭했다.
그는 흔히 시황제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첫 번째 황제'라는 뜻이다. 그는 자신과
자기의 시대에 대해 자부심이 강했으며, 과거 역사를 숭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백성에게 지난날을 망각하도록 강요하고, 역사는 최초의 위대한 황제인
자기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믿으라고 강요할 정도였다. 이미 2천년 전부터
중국에는 훌륭한 황제들이 얼마든지 있었다는 사실도 무시한 채 백성들의
기억까지도 씻어내려 하였다. 옛 황제들뿐만 아니라 과거의 모든 저명한
사람들까지도 모조리 잊어버리라고 했다. 그리하여 과거를 전해 주는 책, 특히
역사나 유교의 고전을 모조리 불태워 버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여기서 제외된 것을
겨우 의학과 그 밖의 과학 서적들뿐이었다.
  그는 포고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과거에 비추어 오늘을 경시하는 자는 마땅히 9족을 멸하겠다.

  그는 이 포고를 그대로 실행하였다. 가장 아끼는 책을 감추었던 수백 명의 학자가
생매장을 당하였다. 이 '첫 번째 황제'는 이토록 마음이 따뜻하고 성격이 부드러운
인물이었던가 보다! 나는 인도에서 과거가 찬양되는 말을 들을 때마다 시황제를
생각하고 잠시 동정을 금하지 못하곤 한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과거를 되돌아보고
찬사를 아끼지 않으며, 거기서 어떤 영감을 얻으려고 애쓴다. 과거가 우리를
격려하고 위대한 행위를 하도록 이끌어 준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 도움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개인이건 민족이건 그저 과거만을 돌아본다는 것은 그다지
건전한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누군가 말한 것처럼 만일 인간이 뒤로 걷거나
뒤만 보도록 되어 있다면 인간의 눈은 머리 뒤쪽에 붙어 있어야 마땅할 것이다.
우리는 열심히 과거를 연구하여 거기에 찬양할 만한 점이 있으면 물론
찬양해야겠지만, 우리 눈은 어디까지나 앞을 바라보아야 하며 우리의 걸음은 언제나
앞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진시황제는 지배자로서는 중국의 역사 이래 가장 강력한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수많은 지방 영주들이 저마다 내미는 요구를 제압하고, 봉건적인 체제를
무너뜨려서 강력한 중앙 정부를 세웠다. 그는 중국 전체와 안남까지 통일했다. '만리
장성'을 쌓은 사람도 그였다. 이것은 경비가 막대하게 드는 사업이었지만,
중국인들은 국가의 방위를 위해 방대한 군대를 유지하느니 이 대규모 성벽에 자금을
투입하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만리 장성은 대대적인 침략을
감당할 수 없었으며, 그저 소소한 외적의 습격을 막는 데 효과적이었을 따름이다.
어쨌든 이 만리 장성은 중국인이 평화의 애호자이며, 그토록 국력이 강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군사적으로 나라의 위엄을 떨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다음에 등장한 것은 한 왕조였다. 이 왕조는 4백년 이상이나 번성하였다.
초기에는 여황제가 즉위하기도 하였는데, 여섯 번째 황제는 무제라 하여 중국에서도
가장 유명하고 실력 있는 황제로 손꼽히며, 50 년 이상이나 제위에 앉아 있었다.
그는 줄곧 북부 지방을 위협하고 있던 흉노를 무찔렀다. 동쪽으로는 코리아에서
서쪽으로는 카스피 해에 이르기까지 그는 무적이었고, 중앙 아시아의 여러 부족은
모두 무제를 섬기게 되었다. 지도를 보면 기원전 1, 2세기에 그의 영향이 얼마나
컸으며, 또 중국의 세력이 얼마나 강대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는 이 시대에
로마가 무척 크고 강했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기 때문에 자칫 로마가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당시 로마는 '세계의 여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큰 나라였으며 국력도 날로 커 가고 있었지만, 중국은 이보다 훨씬 더
방대하고 강력한 제국이었다.
  아마도 무제의 시대에는 중국과 로마 사이에 교류가 확립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양국간의 무역은 페르시아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살던 파르티아인이 중개하였다.
나중에 로마와 파르티아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 이 중개 무역이 중단되자 로마는
해로를 통해 무역을 찾아 나섰고, 실제로 로마의 배들이 중국에 드나들었다. 다만
이것은 기원 후 2세기의 일이며,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시대는 기원전이란다.
  불교는 한나라 시대에 중국에 전해졌다. 중국인은 기원전부터 불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었지만, 포교가 시작된 것은 한나라의 어느 황제가 머리 뒤에
후광이 빛나는 남자를 꿈에서 본 뒤부터라고 한다. 그 황제는 이 꿈이 서쪽에서
나타났다면서 그 방향으로 사신을 파견하였고, 이 사신이 불상과 불경을 갖고
돌아왔다는 것이다. 불교와 함께 인도의 예술이 중국에 전달되고, 나아가 코리아를
거쳐 일본에도 전해졌다.
  한 왕조 시대에는 기억할 만한 두 가지 중대한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종이가
발명된 것이다. 이 종이는 천년 이상이나 이용되었는데 유럽보다 수백년을 앞선
것이다.
  또 하나 기억할 만한 것은 과거 시험 제도였다. 어린 소년, 소녀는 시험이라면
질색하고 나도 그들을 동정한다. 그러나 중국의 이 관리 시험 제도는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최근까지도 관리를 주로 정실에 의해 임명하거나
특별한 계급에 속하는 자만을 임명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시험에만
급제하면 누구나 관리가 될 수 있었다. 물론 유교 경전 시험에 급제한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유능한 관리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상적인 제도라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실이나 계급에 따라 관리를 임용하는 것에 비하면 대단히 진보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이 제도가 2천년 동안이나 존속되었으며, 이것이 폐지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었다. 
  1932 년 4월 5일
    13. 로마와 카르타고

  로마 자체는 대단히 특수한 통치 제도를 갖고 있었다. 로마에는 황제도 국왕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공화국도 아니었다. 그래도 굳이 말한다면
로마는 방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소수의 귀족에 의하여 지배되었기 때문에 역시
일종의 공화국이었다. 정치는 원로원에서 맡고 있었는데, 이 원로원은 선거로 뽑힌
두 사람의 집정관이 지명하는 것이다. 원로원 의원이 될 수 있는 자는 오랫동안
귀족으로만 제한되어 있었다.
  로마는 두 계급으로 나뉘어 있었다. 한 계급은 토지를 많이 갖고 있는 파트리키,
즉 부유한 귀족이고, 또 한 계급은 플레브스, 즉 일반 시민이었다. 로마국 또는 로마
공화국의 역사는 수백년 동안 이 두 계급간의 투쟁사였다. 귀족들은 모든 권력을
거머쥐고 있었고, 권력이 있는 곳에는 재물이 따르기 마련이었다. 평민들은
패배자로서 권력도 재물도 없었다. 그들은 권력을 얻기 위하여 투쟁을 계속한 결과,
서서히 작은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 오랜 투쟁 속에서 평민들이 정부에 대한
일종의 비협력 운동을 벌여 성공을 거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들은 떼지어
로마를 떠나 새로운 도시를 만들어 정착하였다. 이것은 평민들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계급에게 큰 타격이었다. 그러자 귀족들은 조금 양보하여 평민들에게 작은
권리를 주었다. 그리하여 평민들도 고위 관료나 원로원 의원이 될 수 있게 되었다.
  귀족과 평민의 투쟁만 이야기하고 있으면 우리는 자칫 다른 계급을 잊기
십상이다. 로마에는 이 두 계급 외에도 방대한 숫자에 달하는 노^36^예가 있었다.
그들에게는 아무런 권리도 없었다. 그들은 시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선거권도 없었으며, 소나 개처럼 주인의 사유재산이었다. 그들은 이리 팔리고 저리
팔려 다녔으며, 함부로 처벌당하기도 하였다. 어떤 특수한 조건에서는 해방될 때도
있었다. 그들은 해방되면 자유민이라고 불리는 특별한 계급에 속하게 된다.
  서양 고대 세계에는 언제나 많은 노^36^예가 필요했다. 이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큰 노^36^예 시장이 설치되고, 성인은 물론이고 아이들까지도 포로로
잡아오려고 원정대가 파견되었고, 포로들을 노^36^예로 팔아 치웠다. 이집트도
마찬가지지만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영화는 바로 이 광범위한 노^36^예 제도를
토대로 하여 이루어졌던 것이다.
  한편 로마가 성장하는 동안 정치는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었을까? 앞에서 나는
원로원이 정치를 맡고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원로원은 선거로 뽑힌 두 명의
집정관이 지명하였다. 그럼 집정관은 누가 선출하였을까? 그것은 유권자인
시민이었다. 처음에 로마가 일개 도시국가에 불과할 때에는 시민들은 모두 로마
시내나 그 부근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한 장소에 모여 투표하는 것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로마가 점점 커지면서 로마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시민들이
많아지자 투표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러니 선거나 그 밖의 중요한 결정에 실제로 참여하는 것은 로마 시내에 살고
있는 유권자들뿐이었다. 그들은 야외 울타리를 쳐놓은 곳에서 투표하였다. 이
유권자 중에는 평민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높은 지위나 권력을 원하는 부유한
귀족들은 가난한 평민의 표를 얻기 위하여 뇌물을 썼다. 그리하여 로마의 선거는
오늘날의 선거에서도 가끔 볼 수 있는 매수 공작이나 속임수에 의해 좌우되게
되었다.
  로마가 이탈리아에서 성장하고 있는 동안 카르타고는 북아프리카에서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카르타고인은 페니키아인의 전통을 이어받아 전통적으로 상업과
항해에 능했다. 이 나라 역시 공화국이기는 했지만, 부유한 계급만의 공화국이라는
색채가 로마보다도 더 강하고, 거대한 노^36^예 인구를 거느린 도시 공화국이었다.
  전에는 로마와 카르타고의 중간 지점인 남이탈리아와 메시나에 그리스의
식민지들이 있었지만, 이 두 나라가 힘을 합하여 그리스인을 쫓아낸 후 카르타고는
시칠리아 섬을 차지하고, 로마는 장화처럼 생긴 이탈리아의 맨 끝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로마와 카르타고의 우호 관계는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이윽고 두 나라
사이에서는 충돌이 일어나 정세는 날로 험악해질 뿐이었다. 비좁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맞선 두 강대국을 다 포용할 만큼 지중해는 넓지 못하였다. 게다가 두 나라는
모두 큰 야심을 품고 있었다. 로마는 바야흐로 한창 발전하는 도중이어서 청년의
객기가 흘러 넘쳤다. 한편 카르타고는 자수 성가한 로마를 얕보며 줄곧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 두 나라는 가끔 휴전 기간도 있었지만 백년 이상이나 싸움을
계속하였다. 위정자들은 대중을 피폐시키면서 야수처럼 싸웠다.
  세 번의 큰 전쟁이 벌어졌는데 이를 포에니 전쟁(이 명칭은 로마인들이
카르타고인을 포에니, 즉 페니키아인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다)이라고 한다. 제1차
포에니 전쟁은 기원전 264 년부터 241 년까지 계속되어 로마가 승리했다. 그 후 22
년 뒤에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되었는데, 카르타고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한
장군을 내보냈다. 그의 이름은 '한니발'이었다. 그는 15 년 동안이나 로마를
괴롭혔으며, 로마 백성들을 벌벌 떨게 하였다. 그는 기원전 216 년 칸나에에서 큰
전투를 벌인 끝에 로마 군을 크게 무찌르고 대학살을 저질렀다. 로마인이 뱃길을
장악한 탓에 한니발은 본국과 연락이 되지 않아, 거의 원조도 받지 못하고 혼자
힘으로 싸워 나갔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패전과 이에 따른 재난에도 불구하고
굴하지 않았으며, 언제나 한니발의 위협을 받아도 굴하지 않고 그들의 불구 대천의
적에 맞서 항쟁을 계속하였다. 한니발을 상대로 큰 싸움을 벌이는 것을 두려워한
그들은 큰 전투를 피하되, 오로지 적의 연락망을 끊어서 적을 괴롭히는 작전으로
나아갔다. 로마의 장군이며, 특히 이러한 소극적인 작전에 능했던 사람이
파비우스(Fabius)였다. 그는 10 년 이상이나 큰 싸움을 피해 왔다. 여기에서 그를
소개하는 것은 그가 기억할 만큼 큰 인물이어서가 아니라 영어의
'페이비언(Fabian)'이란 말의 기원이기 때문이다. 만사를 무리하게 급히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 '페이비언 전술'이라는 말이 있다. 그는 전투나 위험한 국면을 피하면서
완만한 충돌을 통하여 목적을 달성하려고 했다. 영국에는 사회주의를 신봉하되
돌발적인 변화를 배격하는 페이비언 협회가 있다.
  한니발은 이탈리아를 대부분 불모의 황야로 만들었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완강한
저항 끝에 최후의 승리를 거두었다. 기원전 202 년 한니발은 자마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말았다. 그는 로마인의 무서운 증오에 쫓겨 도망 다니다가 결국 독을 마시고
자살했다.
  그로부터 반 세기 동안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는 평화가 계속되었다. 카르타고는
이미 쇠퇴해 버려서 로마에 도전할 기력을 잃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카르타고를 용서하지 않고 제3차 포에니 전쟁을 강행했다. 이 전쟁은 카르타고에
대한 철저한 파괴와 대학살로 끝났다. 이리하여 일찍이 '지중해의 여왕'으로 이름을
떨친 카르타고는 가련하게도 쟁기가 땅을 가는 벌판으로 변하고 말았다. 
  1932 년 4월 9일
    14. 로마 공화국이 제국이 되다.

  로마의 승리와 정복은 나라의 부와 사치를 불러왔다. 정복된 나라에서 돈과
노^36^예가 쏟아져 들어왔다. 그러나 그것은 누구의 소유가 되었겠니? 앞서 말한
것처럼 로마의 최고 통치 기관은 원로원이며, 이는 귀족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부유한 집단이 로마 공화국을 좌우하여, 로마의 세력과 영토가 확대됨에 따라
이들의 부도 늘어갔다. 그 결과 부자는 더욱 부유해지고, 가난한 자는 여전히
가난했다. 아니, 실제로는 더 가난해졌다. 노^36^예의 수가 증가하고 사치와 빈곤이
함께 진행되었다. 이러니 분쟁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인간의 인내는
놀랄 만큼 강하지만 그 인내에도 한계가 있으며, 일단 한계에 달하면 폭발하기
마련이다.
  부유층은 각종 놀이와 전차 경주 등의 흥행물로 빈민의 눈을 속이려고 하였다.
원형 경기장에서는 검투사들이 열광하는 관객 앞에서 서로 칼질을 하여 목숨을
주고받았다. 이렇게 죽어간 노^36^예나 전쟁 포로가 상당히 많았지만, 이것은 한낱
스포츠쯤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로마의 혼란은 날로 심해지기만 했다. 폭동, 학살, 투표권의 매수, 부정
행위가 잇달았다. 가난하고 짓밟힌 노^36^예까지도 스파르타쿠스라는 검투사의 지휘
아래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들은 무참하게 진압되어, 로마의 아피안 거리에서는
6천 명이나 되는 반도들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 갔다고 한다.
  한편 장사치나 군인들이 점점 득세하여 원로원을 능가하게 되었다. 군인들이 서로
권력 다툼을 벌인 결과 내란이 일어나고 황폐화가 뒤따랐다.
  로마의 많은 장군들 가운데 두 사람이 특히 뛰어났다. 폼페이우스와 율리우스
카이사르인데, 카이사르는 너도 알다시피 프랑스^6,36^당시에는 골이라고
불렀다^3,63^와 영국을 평정했고, 폼페이우스는 동방을 원정하여 큰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크게 대립하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야심가이며 적을
용서하지 않았다. 둘은 모두 원로원에 대하여 입으로는 호의를 보였지만, 사실상
원로원은 있으나마나한 존재였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거꾸러뜨리고 로마
세계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러나 로마는 공화국이었기 때문에 카이사르도
노골적으로 독재를 할 수는 없었다. 그러자 그를 왕, 혹은 황제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는 내심 구미가 당겼지만 옛날부터 내려오는 공화국의 전통을
생각하여 주저했다. 실제로 이 전통은 그에게도 벅찰 정도로 큰 힘을 갖고 있었다.
그는 포룸(공공 광장) 입구에서 브루투스 일파에게 피살되었다. 이 장면을 묘사한
셰익스피어의 희곡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아마 너도 읽어보았겠지.
  그는 기원전 44 년에 피살되었다. 그러나 그를 피살해도 공화국을 구할 수는
없었다. 그의 양자이자 조카인 옥타비아누스와 그의 친구인 안토니우스가 그의
처참한 죽음에 대하여 복수를 하였다. 그러자 왕정을 세우려는 운동이 되살아나
옥타비아누스가 국가의 원수인 프린캡스(제1의 시민, 로마 원로원의 대표자), 즉
제1인자 자리에 오름으로써 공화국은 종말을 고하였다. 원로원은 존속하고 있었지만
이미 아무런 실권도 없었다.
  옥타비아누스가 국가의 원수 자리에 올랐을 때 그는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그 후 후계자들은 모두 '카이사르'라고 일컬어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카이사르'라는 말은 황제를 의미하게 되었다. 독일의 카이저나 러시아의
차르라는 말도 카이사르에서 나온 것이란다.
  로마가 변모하고 있을 동안, 즉 공화국이 왕국으로 될 때 그 미모로 역사에 길이
이름을 떨친 한 여성이 이집트에 살고 있었다. 그녀가 바로 클레오파트라다. 그녀는
그다지 평판이 좋지 않았지만 미모로 역사를 바꾸었다는 극소수의 여성 가운데
하나다. 카이사르가 이집트에 원정하였을 때 그녀는 아직 어린 소녀에 지나지
않았다. 나중에 그녀는 안토니우스와 사이가 좋아졌지만 그에게 그다지
헌신적이지는 않았다. 그녀는 한창 대해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그를 배반하고 배를
타고 도망쳐 버렸다.
  옛날 유명한 프랑스의 문인 파스칼은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도
세계의 모습은 훨씬 달라졌을 것이다"라고 쓴 일이 있다. 물론 이 말은 약간 과장된
말이기는 하다. 세계는 클레오파트라의 코 때문에 그렇게 크게 변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카이사르가 이집트를 원정한 이래 스스로 왕 혹은 황제, 즉 일종의 신권
군주라는 생각을 품게 되었으리라는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이집트는
공화제가 아니라 군주제였기에, 군주는 최고 지위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거의 신과
같은 존재로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먼 옛날부터 이집트에 전해 내려온
관념이며, 알렉산더가 죽은 후 이집트를 지배한 그리스인 프톨레마이오스도
이집트의 풍습이나 사고 방식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핏줄에 속하며, 따라서 그리스인이라기보다 마케도니아계의
여왕이었다.
  클레오파트라가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신권 군주라는 이집트적인
관념은 로마에 전해졌다. 공화국이 번영을 누리고 있던 카이사르의 생전에도 그의
동상이 세워져 뭇사람들의 참배를 받고 있었다.
  그 무렵 로마는 위대하였다. 그러나 다른 나라의 역사에 어두운 많은 유럽
사람들이 마치 로마가 전세계를 지배한 것처럼 생각했지만, 이는 사실과 거리가
매우 멀다. 이 시대에 중국의 한나라는 아시아를 가로질러 카스피 해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통치하였거나 적어도 지배자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로마가
참패를 맛본 메소포타미아의 카레 전투만 보더라도 파르티아인은 아마도 중앙
아시아 유목민의 원조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로마의 역사, 특히 로마
공화국의 역사는 유럽인에게 대단히 친숙하다. 그들이 고대 로마를 현대 유럽의
여러 나라의 선조로 생각하기 때문인데, 이는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이야기다.
카이사르는 군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유창한 문필가였으며, 그의 '갈리아
원정기'는 지금도 유럽의 수천여 학교에서 학습되고 있다. 
  1932 년 4월 11일
    15. 쿠샨 제국 시대의 불교

  인도의 남방에 강대한 안드라 왕국이 일어나 벵골 만에서 아라비아해까지
진출했는데, 얼마 후에 쿠샨인이 무대의 전면에 나섰다. 기원전 1세기에 이들은
인도의 국경 지방에 나라를 세웠는데, 곧 커다란 제국으로 발전하였다.
  이 쿠샨 제국은 여러 가지 면에서 흥미를 끈다. 이 나라는 불교국으로서 그
군주들 가운데 특히 유명한 카니슈카가 있었는데, 그는 열렬한 다르마 신자였다.
수도 페샤와르 근처에는 오랫동안 불교 문화 중심지였던 타크샤실라가 있었다.
쿠샨인은 중앙 아시아의 유목민이거나 혹은 그 동맹자였다. 쿠샨의 수도와 중앙
아시아의 유목민 사이에는 왕래가 잦아서 불교와 불교 문화가 자연히 중국이나
몽고에 전파되었다. 마찬가지로 서아시아도 불교와 긴말한 관계를 맺은 것이
분명하다. 서아시아는 알렉산더 시대 이래로 그리스인의 지배하에 있었으며, 많은
그리스인이 이들의 문화를 배워 갔다. 그리하여 이 '그리스아시아' 문화가
'인도 불교' 문화와 융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국과 서아시아는 인도의 영향을 받았다. 인도 또한 그들의 영향을
받았다. 쿠샨 제국은 서방의 그리스로마 세계와 동방의 중국 세계와 남방의
인도 세계의 중간 지점, 말하자면 아시아의 등판에 해당되는 곳에 거인처럼 걸쳐
있었다. 쉽게 추측할 수 있겠지만, 이 중간이라는 위치는 인도와 로마가 긴밀하게
접촉하게 했다. 쿠샨 시대는 카이사르가 살고 있던 로마 공화국의 말기와 로마
제국의 초기 2백년에 이르는 기간에 해당한다. 쿠샨 황제는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에게 대규모 사절단을 보냈다고 한다. 무역은 바다와 육지에서 모두
성하였다. 인도에서 로마로 보낸 상품 가운데는 향수, 향료, 명주, 비단, 모슬린,
금사, 보석 등이 있었다. 당시 로마의 문필가였던 플리니우스는 로마에서 인도로
돈이 흘러들어 가는 것을 한탄하여 "로마는 이 사치로 말미암아 해마다 1억
세스타스(로마의 화폐 단위)의 손실을 본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대략 1백만
파운드에 해당될 것이다.
  이 무렵 불교의 사원과 승단 집회에서는 승려들간에 큰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새로운 사상, 또는 새로운 옷을 걸친 낡은 사상이 남방이나 서방에서 빈번히
밀려들어와 불교 사상의 단일성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불교는 결국 두
파, 즉 대승 불교와 소승 불교로 갈라지게 되었다. 새로운 해석이나 관념에 따라
인생관과 종교관이 달라지자 예술과 건축에서도 그 사상의 표현 방식이 달라졌다.
이러한 변화가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는 설명하기 어렵지만, 아마도 불교를 이렇게
일탈하게 한 경향이 있던 두 가지 영향, 즉 브라만과 그리스 문명의 영향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전에도 말한 것처럼 불교는 카스트 제도와 승려의 타락, 그리고 형식주의에 대한
반역이었다. 석가모니는 우상 숭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신으로서 배례를
받는 것도 원치 않았다. 그는 '깨달은 자', 즉 불타였다. 이러한 사상에 따라 불타는
상으로 표현되지 않았으며, 당시의 건축물은 우상을 일절 배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브라만들은 힌두교와 불교 사이에 가로놓인 골을 메우려고 언제나 힌두교적인
관념이나 상징들을 불교 사상에 주입하려 하였다. 그리고 그리스와 로마에게 온
장인들도 신들의 상을 만드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 이리하여 어느 틈엔가 불교
사원에도 우상이 등장하게 되었다. 불교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처음에 그것들은
불타가 아니고 불타의 전신인 보살들의 상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결국은 불타
자신이 하나의 상으로 만들어져 예배를 받게 되었다.
  대승 불교는 이러한 변화를 환영하였다. 이들의 사고는 비교적 브라만들의 생각과
흡사하였다. 한편 쿠샨의 황제들은 대승 불교를 받아들여 이를 장려하였지만, 소승
불교나 그 밖의 종교는 용납하지 않았다.
  대승 불교와 소승 불교 간의 상대적 장점들을 놓고 학자들간에 벌어진 논쟁을
읽어보면 매우 재미있다. 이를 위해 승단의 대집회가 자주 열렸다. 카슈미르에서
승단 총회를 개최하였다. 이 문제에 대한 논쟁은 수백년을 두고 계속되었다.
인도에서는 결국 양편이 모두 힌두교에 흡수되었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대승
불교는 북부 인도에서, 소승 불교는 남부 인도에서 각각 우세하였다. 오늘날 전자는
중국, 코리아, 일본, 티벳에, 후자는 실론, 버마에 존속되고 있다.
  민중의 예술은 그들의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울이다. 그러므로 원시 불교의
소박한 사상이 섬세한 상징주의에 그 자리를 양보하게 되자, 인도의 예술도
섬세하고 화려하게 변해 갔다. 특히 서북부의 '간다라'에서 대승 불교의 조각은 온갖
기교를 부린 장식이나 조각상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소승 불교의 건축까지도 이
새로운 형식에 무심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초기의 단순하고 간결한 양식은 점차
사라지고, 풍부한 조각 양식과 상징주의가 채택되게 되었다. 이 시대의 기념물은
아직도 더러 남아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은 아잔타 동굴의 아름다운
벽화다. 
  1932 년 4월 12일
    16. 예수와 기독교

  이제부터는 기원후의 시대A.D. 또는 A.C.의 시대로 접어든다. 이 시대는
그 기호가 의미하는 것처럼 '그리스도로부터', 즉 그리스도가 태어났다는 해부터
시작된다. 사실 예수는 이보다 4 년 전에 태어났지만 이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연호를 A.DAnno Domini(주님의 해)로 셈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습으로
이것을 따라도 별반 나쁠 것은 없겠지만, 우리는 여태까지 B.C.Before
Christ라는 기호를 사용해 왔으니 A.C.After Christ라고 하는 것이 보다 더
과학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할 것을 제안한다.
  예수는 나사렛에서 태어나 갈릴리에서 설교를 하고, 나이 서른이 지나서
예루살렘에 왔다. 이윽고 그는 로마의 총독 빌라도의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가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는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알 도리가 없다.
  예수는 유태인이었다. 그리고 유태인은 옛부터 유달리 끈기 있는 민족이다.
다윗과 솔로몬이 영화를 누린 짧은 한때가 지난 뒤 그들은 불행한 시대에
접어들었다. 사실 그들이 누린 영화도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유태인들은
과거를 공상 속에서 미화하며 황금 시대로 채색하였고, 유태인이 다시 강대해질
약속된 날이 오리라고 믿고 있었다. 그들은 로마 제국을 비롯하여 여러 지방에
흩어져 살았지만 언제나 단결하였으며, 머지않아 한 사람의 구세주가 나타나
영광스러운 시대로 이끌어 주리라는 굳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의지할
조국도 피난처도 없이 모진 박해와 학대를 참아 가며, 때로는 목숨까지 잃어 가면서
2천년이 넘도록 계속 단결해 왔다는 것은 역사상 불가사의한 일 가운데 하나다.
  구세주를 손꼽아 기다리던 유태인들은 예수에게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실망하고 말았다. 예수는 당신의 환경이나 사회 질서에 어긋나는 귀에 거슬리는
말을 쏟아 냈다. 특히 그는 종교를 일정한 의식이나 행사의 문제로 왜곡하는 부자나
위선자들을 반대하였다. 그리하여 부귀와 영화를 약속하기보다는 어떤 희미하고
신비스러운 천국을 위해서는 그들이 현재 지니고 있는 재물까지도 버려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그는 우화나 설화의 형식을 빌려 이야기하였지만 타고난 반역자였으며,
현실 상황에 만족하지 않고 이를 뜯어고치기 위해 나타난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는 유태인들이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대부분 그에게 반대하여
그를 당시 그 곳을 지배하고 있던 로마 당국에 넘겼던 것이다.
  예수는 정치적인 반역자로 간주되었으며, 또한 유태인이 볼 때는 사회적인
반역자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예수는 재판을 받고 죄인이 되어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 이렇게 고통스러울 때 그가 가장 아끼던 제자들조차 그를
버리고 떠나 버렸다.
  예수가 사랑하던 제자들도 위협을 느끼자 스승을 외면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예수를 만나 본 적도 없는 바울이 스스로 기독교의 교의라고 생각하는 바를 널리
전도하기 시작하였다. 바울이 전도한 기독교가 예수의 가르침과는 매우 다르다는
것이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다. 바울은 박식하고 유능한 사람이었지만 예수와 같은
반항아는 아니었다. 어쨌든 바울은 성공을 거두어 기독교는 점점 널리 퍼져 나갔다.
당초에 로마 사람들은 기독교를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다. 그들은 기독교도들을
유태인의 일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도들은 사뭇 전투적이었다.
그들은 다른 모든 종교를 적대시하고, 황제의 초상에 대하여 절하기를 한사코
거부하였다.
  종교적으로는 그들을 관대하게 대할 수도 있었지만, 황제의 초상에 절하기를
거부한다면 정치적인 범죄자이며 사형에 처해야 마땅하였다. 기독교도들은 또한
검투사 노^36^예들의 혈투를 즐기는 것을 몹시 비난하였다. 이리하여 기독교도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어떤 인간이 커다란 목적을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나면 아무도 그의 뜻, 혹은
그가 대표하는 목적을 꺾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기독교도에 대한 로마
제국의 탄압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무려 4세기에 이르는 항쟁 끝에 승리는
결국 기독교도에게 돌아갔다. 한 로마 황제는 스스로 기독교도가 되어 기독교는
제국의 국교가 되었다. 이 사람이 바로 콘스탄티노플을 건설한 콘스탄티누스다. 
  1932 년 4월 23일.24일
    17. 로마 제국의 발전과 쇠퇴

  로마 제국은 기원 전야인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로부터 시작된다. 한동안
황제들은 원로원에 경의를 표하였지만 그것도 잠깐이었고, 이윽고 공화국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황제만이 전능하게 되었다. 그는 완전한 전제 군주가 되었으며, 거의
신에 가까운 존재가 되었다. 황제가 살고 있는 동안에는 거의 신으로 숭배를
받았으며, 죽은 뒤에는 글자 그대로 신이 되었다. 당신의 문필가들은 초기의 황제,
특히 아우구스투스에 대하여 온갖 미덕을 지닌 황제로 찬양하였다. 그들은
아우구스투스의 시대를 온누리에 덕이 가득 차, 선인은 보답 받고 악인은 처벌받던
황금 시대, 즉 '아우구스투스 시대'라고 불렀다. 이는 물론 통치자를 찬양함으로써
이득을 보게 마련인 전제 국가의 관습이다. 우리가 학교에서 공부한 유명한 라틴
문학가들빌지리우스, 오비디우스, 호라티우스는 거의 이 시대 사람들이었다.
공화국의 말기에 끊임없이 내란과 분규가 일어난 뒤, 상업과 어느 정도의 문화가
번영할 수 있는 평화로운 시기가 잠시 유지되었던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문화란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부자들의 문화이며, 정취 있고 강건했던 고대 그리스의 부유층과는 달리 향락만
일삼는 구린내 나고 칠칠치 못한 작자들의 문화였다. 전 세계에서 식량과
사치품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엄청난 흥행이 과시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족속들은
오늘날에도 있다! 어마어마한 행사와 굉장한 흥행이 벌어지고 호화로운 행렬이
뒤따르며, 원형 경기장에서는 승부를 다투고 검투사들은 잇달아 죽어 갔다. 그러나
이러한 호화판의 그늘에는 대중의 궁핍이 있었다. 주로 서민들에게는 무거운 세금이
떨어지고, 힘든 노동은 수많은 노^36^예들에게 맡겨졌다. 로마의 권세가들은 그들의
의료, 사색, 철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그리스인 노^36^예에게 맡겼던 것이다!
그들 스스로 주인 행세를 하고 있던 세계를 탐구하고자 하는 노력이나 교육 같은
것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황제는 대를 이어 옥좌에 올랐지만, 어떤 자는 사납고 어떤 자는 포악하였다. 점차
군부가 득세하여 황제의 폐립까지 좌우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군부에 앞다투어
아첨하는 것이 유행하게 되고, 군부에 뇌물을 쓰기 위하여 일반 서민이나 정복된
여러 나라에서 재물을 쥐어 짜냈다. 나아가 노^36^예 무역은 국고의 중요한 재원이
되었으며, 동방에서는 로마 군대에 의한 정규적이고 조직적인 노^36^예 사냥이
벌어졌다. 노^36^예 상인들은 군부와 결탁하여 현지에서 즉시 노^36^예를 사들였다.
옛날 그리스인의 성지였던 델로스 섬은 큰 노^36^예 시장이 되었고, 거래되는
숫자는 하루에 1 만 명이 넘을 때도 있었다! 로마의 콜로세움에서는 매 회마다
1천2백 명이나 되는 노^36^예들을 검투사로 내보내어 뭇사람들에게 구경거리로
제공했다. 그들은 황제와 신하들의 심심풀이 대상이 되어 헛되이 목숨을 버려야만
했다.
  내가 로마를 너무 신랄하게 깎아 내린 것 같다. 로마에 어느 정도 평화가 유지된
것은 반가운 일임에 틀림없다. 변두리 지방에서는 가끔 전쟁이 있었지만, 적어도
초기에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로마의 평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안정된 곳에서는 통상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로마의 시민권은 로마 세계 전체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점은 가련한 노^36^예들은 이와 아무 관계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황제만이 나라 일을 좌우할 뿐 시민들은 소소한 권리밖에
없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된다. 정치에 관하여 이러니 저러니 말하는 것은 내용
여하를 불문하고 황제에 대한 죄로 간주되었다! 상층 계급에게는 어쨌거나 어느
정도 안정된 정부와 단일한 법이 있었다. 이것은 예전에 훨씬 더 고약한 전제 정치
아래서 고통을 받았던 많은 사람들에게는 매우 커다란 소득이었음이 틀림없다.
  4세기초(326 년) 콘스탄티누스는 옛날 비잔티움의 교외에 콘스탄티노플을
건설하고 제국의 수도를 낡은 로마에서 보스포러스 연안의 새 도시로 그대로 옮겨
놓았다.
  두 사람의 황제가 공동으로 통치하되 한 사람은 로마에, 또 한 사람은
콘스탄티노플에 군림했다. 이 때문에 얼마 후 제국은 공식적으로 동서로
분할되었다. 그러나 로마를 수도로 한 서로마 제국은 격변하는 정세에 타격을 받아
오래 존속하지 못했다. 서로마인들은 그들이 '야만인'이라 부르던 사람들을 막아내지
못하였다. 그 후 게르만족의 한 부족인 고트족이 침입하여 로마를 포위했다. 그리고
잇달아 반달족, 훈족의 침입을 받아 서로마 제국은 붕괴하였다.
  고트족과 반달족과 훈족은 로마를 식은 죽 먹듯이 쉽게 짓밟아 버렸다. 그들이
그렇게 쉽사리 목적을 달성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로마 제국의 농민들이 너무
가난에 허덕인 데다가 과중한 세금과 빚에 쪼달려 어떤 변화라도 환영하는 상태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제국을 잃은 후에 로마는 새로운 제국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은 조금
다른 종류의 제국이었다. 옛날 예수의 제자인 베드로가 로마에 와서 최초의 주교가
되었다는 말이 있다. 이 덕분에 많은 기독교도들의 눈에는 로마가 성지로 보였고,
로마의 주교직에는 특별한 권위가 곁들여지게 되었다. 로마의 주교는 처음에는 다른
주교와 별로 다른 점이 없었지만, 황제가 콘스탄티노플로 옮겨간 후부터 차츰
권위를 갖기 시작했다. 아무도 위에 군림할 사람이 없어진 당시에 로마의 주교는
베드로의 자리를 계승한 자로서 주교 중의 우두머리로 여겨졌고, 후에는 교황이라
불리게 되었다. 다 알다시피 오늘날에도 교황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우두머리로
존재하고 있다. 묘한 것은 로마 가톨릭 교회와 그리스 정교회가 분열한 원인 가운데
하나는 우상 채택에 관한 문제였다. 로마 교회는 성자상, 특히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 숭배를 장려했으나 정교회는 이를 강력히 반대했다.
  교황은 북방 게르만의 한 부족이었던 프랑크인의 강력한 지도자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이 프랑크인의 지도자 카롤루스는 후에 로마로부터 제관을 수여 받은
사람이다. 이 제국은 새롭게 일어선 나라였지만, 그래도 '로마 제국', 그리고 후에
'신성 로마 제국'이라 일컬어졌다. 그들은 제국이라면 로마밖에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카롤루스 대제는 로마와 아무 관계도 없으면서 임페라토르가 되고,
카이사르가 되고, 아우구스투스가 되었다. 새 제국은 낡은 제국의 후계자로
간주되었다. 나중에 그 명칭에는 한 가지 수식어가 붙었다. '신성(Holly)'이라는
말이 곁들여진 것이다. 교황을 대부로 하는 기독교 제국이었기 때문에 '신성'이라는
말이었다.
  또다시 관념의 기이한 힘을 볼 수 있다. 중부 유럽에 사는 프랑크인 또는
게르만인이 로마 황제가 된 것이다! 그 후 '신성 로마 제국'의 역사는 더더욱
우스운 것이었다. 이 나라는 제국치고는 매우 막연한 것이었다. 동로마 제국이
국가로서 존속한 데 비하여, 이 서방 제국은 끊임없이 변화하여 때로는 없어지기도
하고 나타나기도 했다. 그것은 그야말로 로마라는 이름과 기독교회의 위세 덕분에
명목으로만 존재한 그림자거나 환상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실체가 없는 상상의
제국에 지나지 않았다. 누군가가, 아마 볼테르라고 생각되는데, 이 '신성 로마
제국'을 정의하기를 '신성'도, '로마'도, '제국'도 아닌 어떤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아무튼 이 환상 같은 신성 로마 제국은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1천년이나
존속하였고, 완전히 멸망한 것은 나폴레옹 시대(1806 년)였다.
  서유럽이 정치적으로 흥망 성쇠를 하는 가운데 동유럽에서도 한때 크게 부흥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527 년부터 565 년에 걸쳐 콘스탄티노플에서 동로마 제국의
황제로 군림했다. 그는 고트족을 이탈리아에서 몰아내 한때는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동로마 제국에 편입시키기도 했다. 그 후 고트족은 이탈리아를 다시
회복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지금도 비잔티움 교회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가운데 하나인
성 소피아 사원을 콘스탄티노플에 세웠다. 또 현행 법률을 모두 모아 유능한
법률가의 손을 빌려 정리하기도 했다. 나는 동로마 제국과 그 황제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를 때에도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이라는 법률서를 통해
유스티니아누스라는 이름만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법전을 읽어보았다. 그러나
한편 유스티니아누스는 콘스탄티노플에 대학을 개설하면서 플라톤에 의해 창립되어
1천여 년을 지속해 온 아카데미를 폐쇄하기도 하였다. 철학이란 독선적인 종교를
위해서는 위험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사고하는 능력을
길러 주기 때문이다.
  한편 동로마 제국은 훈족을 비롯한 여러 종족의 공격에 만신창이가 되면서도 끈기
있게 존속했다. 그 공격을 견디었을 뿐만 아니라, 이 제국은 아랍인, 그리고
나중에는 투르크인과 끊임없이 전투를 벌이면서도 몇 세기를 더 버티었다. 그
기간은, 기원 1453 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투르크인에게 점령되어 마침내
멸망하기까지의 11세기에 걸친 오랜 세월이었다. 
  1932 년 4월 29일
    18. 굽타 왕조와 힌두 제국주의

  찬드라굽타는 야심과 수완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북쪽의 다른 아리아인
족장들을 토벌하여 그들과 함께 일종의 연방국을 수립하려고 하였다. 그는 또
유력한 가문의 쿠마라 데비와 결혼함으로써 그 일족의 원조를 확보했다. 이렇게
찬드라굽타는 기반을 빈틈없이 다진 다음 인도에 존재하는 모든 외국인 지배자에
대한 '성전'을 선포했다. 자신들의 세력과 지위를 외국인에게 빼앗긴 크샤트리아와
아리아인 귀족이 이 싸움을 뒤에서 밀어 주었다. 찬드라굽타는 10 년 이상이나
싸움에 싸움을 거듭하여 지금의 연합주를 포함한 북인도의 한 모퉁이를 지배하게
되었고, 스스로 '왕 중의 왕'이라 일컬었다.
  굽타 왕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 왕조는 약 2백년 후에 훈족이 와서 괴롭힐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다소 침략적인 힌두주의와 민족주의의 시대였다. 외국인
지배자투르크인, 파르티아인, 그 밖의 비아리아인은 뿌리가 뽑혀 강제로
쫓겨났다. 그리하여 인종주의가 나타났다. 인도 아리아인 귀족은 자기들의 인종적인
혈통을 자랑하고 야만인이나 '오랑캐'를 경멸했다. 굽타족에게 정복된 다른 인도
아리안 국가와 군주는 관대한 대우를 받았지만, 비아리아인들은 조금도 용서받지
못했다.
  찬드라굽타의 아들 사무드라굽타는 아버지보다 더욱 호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뛰어난 전투 지휘자로서, 황제가 되자 인도 전역에 걸쳐 정복 전쟁을 일으켜
남방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굽타 제국을 확대하여 인도의 대부분을 지배했다.
그러나 남쪽에서 그의 주권은 허울에 지나지 않았지만, 북쪽에서는 쿠샨인이 인더스
강 너머로 쫓겨나기까지 했다.
  사무드라굽타의 아들인 찬드라굽타 2세 역시 군인 황제였는데, 오랫동안 사카인
또는 투르크인 왕조의 지배하에 있던 카티아와드와 구자라트를 정복했다. 그는
스스로 비크라마디트야(무용의 태양, 즉 무공이 혁혁하다는 뜻)라고 일컬었는데,
대개 이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이름은 마치 카이사르라는 이름처럼 많은
군주의 칭호가 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혼동하기 쉽다.
  굽타 시대는 인도에서 힌두 제국주의의 시대였다. 고대 아리안 문화와 산스크리트
학문이 대대적으로 부활하였다. 그리스인과 쿠샨인에 의해 전해진 헬레니즘과
그리스 및 몽고의 요소들은 장려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인도 아리안 전통을
존중함으로써 오히려 엄중하게 억압되었다. 공식적인 궁정 언어는
산스크리트어였다. 그런데 이미 당시부터 산스크리트어는 민중의 언어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산스크리트어에 가까운 프라크리트어의 한 형식을 사용하였다. 비록
당시의 일상 용어는 아니었지만 산스크리트어는 아직 충분한 생명력을 갖고 있었다.
산스크리트어 시, 희곡 및 아리안 예술은 눈부시게 꽃피었다. 산스크리트어 문학의
역사에서 아마 이 시대는 '베다'와 서사시를 낳은 위대한 시대에 버금가는
번성기라고 할 수 있다. 저명한 문호 칼리다사도 이 시대 사람이다.
  비크라마디티아는 현란한 궁정에 당시 최대의 문인과 예술가들을 불러 모았다고
한다. 너는 그 궁정의 '아홉 개의 보석', 즉 '나바라트나'에 대해 들은 적은 없느냐?
칼리다사도 그 아홉 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사무드라굽타는 제국의 수도를 파탈리푸트라에서 아요디아로 옮겼다. 발미키가 쓴
서사시 라마찬드라의 이야기 ('라먀야나')에는 사무드라굽타의 호전적이며 인도
아리안적인 의도가 잘 나타나는데, 그는 자기 목적을 달성하는 데 아요디아가 더
적절한 근거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굽타 왕조의 아리안주의, 힌두주의의 부활은 불교에게는 당연히 반갑지 않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힌두주의 부활 운동이 크샤트리아의 우두머리들이 추진하는
귀족적인 것인 데 반해, 불교는 보다 민주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불교의 대승 형식이 북인도의 쿠샨인과 그 밖의 외국인 지배자와 밀접한 협력
관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불교가 심한 박해를 받는
일은 없었던 것 같다. 불교 사원은 존속되었고, 여전히 큰 교육 시설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굽타 왕조는 불교가 번성한 실론의 지배자와 우호 관계를 맺었고, 실론 왕
메가바르나는 사무드라굽타에게 값진 선물을 보냈으며, 가야에 신할라의 학생을
위한 수도원을 세웠다.
  하지만 인도에서는 불교가 쇠퇴하고 있었다. 이 쇠퇴는 전에 말한 것처럼
브라만이나 정부측의 압박 때문이라기보다는 불교를 점차 흡수하기에 이른 힌두교의
힘 때문이었다.
  이 무렵 한 저명한 중국인 여행자가 인도를 찾아왔다. 법현(335--420 년)이라는
사람이다. 그는 불교 성전을 구하러 온 승려였다. 그는 마가다 사람들이 행복하고
여유롭게 생활하고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재판은 관대하였으며 사형은 없었다.
가야는 황폐해지고, 카필라바스투는 밀림 속에 파묻혀 있었다. 그러나
파탈리푸트라의 사람들은 '부유하고 풍요로우며 예절이 있었다.' 풍요롭고 웅장한
수도원이 많았으며, 대로변에는 나랏돈으로 여행자를 묵게 하고 식량을 주는
다르마샬라가 있었다. 대도시에는 무료 진료소가 세워져 있었다.
  법현은 인도를 돌아본 다음 실론으로 건너가 2 년 동안 머물렀다. 그의 동반자인
도정은 인도가 아주 마음에 들고 또 승려들이 독실한 데 감동하여 이 나라에 계속
머물기로 작정했다. 법현은 실론에서 바다를 통하여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오랫동안 소식이 끊긴 채 온갖 모험을 겪었으나 결국 모국 땅을 다시 밟은 것이다.
  찬드라굽타 2세는 약 23 년 동안 재위했다. 그 뒤를 이은 아들 쿠마라굽타는 40
년에 걸쳐 왕위에 있었다. 그 다음에 왕위에 오른 사람은 453 년에 즉위한
스칸다굽타였다. 그의 대에 이르러 마침내 굽타 제국의 척추가 부러지는 새로운
공포에 직면했다.
  아잔타의 교묘하기 이를 데 없는 벽화나 넓은 방이나 예배당은 굽타 예술을
대표하는 것이다. 언젠가 한번 그것을 볼 기회가 있으면 얼마나 훌륭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벽화는 오랫동안 비와 바람에 노출되어 점점 벗겨지고
있다.
  굽타 왕조가 인도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던 시대에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을까? 찬드라굽타 1세는 콘스탄티노플을 세운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동시대의 사람이다. 굽타 왕조 후기에 로마는 동서로 분열하고
서로마는 북방의 '야만족'에 의해 쓰러졌다. 이처럼 마침 로마의 세력이 쇠퇴하고
있을 때 인도에는 대장군과 굳건한 군대를 거느린 대제국이 있었다. 사무드라굽타는
흔히 '인도의 나폴레옹'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그는 분명 야심가이기는 했지만, 인도
국경 밖에까지 정복의 손을 뻗치려고 하지는 않았다. 
  1932 년 5월 7일
    19. 당나라, 중국의 번영

  3세기에 한(은하수 한) 왕조가 붕괴되고 중국은 세 나라로 분열되었다. 이른바
'삼국 시대'가 1백년 동안 계속된 뒤에 다시 통일되어 수나라에 이어 당이라는 왕조
밑에 다시 강대한 단일 국가가 되었다. 이것은 대체로 7세기초의 일이었다 (618
년).
  그러나 이 분열의 시대에, 더구나 북방의 타타르족(Tartar)으로부터 종종 습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문화와 학문의 흐름은 끊기지 않았다. 예를 들면 큰
도서관이 몇 개나 세워지고, 뛰어난 회화가 그려졌다. 인도에서 여전히 정교한 직물,
그 밖의 물품뿐만 아니라 사상, 종교, 예술까지 유입되었다. 숱한 불교 전도자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들어가 인도 예술의 전통을 전했다. 뿐만 아니라 인도의
예술가와 직인도 갔던 것 같다. 불교와 인도의 새로운 사상의 전래는 중국에 커다란
결과를 남겼다. 물론 중국은 전부터 매우 발달한 문명국이었기 때문에 이 경우
인도의 사상, 종교 및 예술이 후진국으로 건너가 그 지역을 예하에 두는 것과는
의미가 달랐다. 인도 문명은 중국에 전파될 때 중국 자체의 전통적인 예술, 그리고
사상과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양자의 충돌은 그 어느 쪽과도 다른 어떤
것인도의 요소를 다분히 포함하고는 있지만, 본질적으로 중국적이며 중국의
형식에 따라 형상화된 것을 낳았다. 이렇게 전해진 인도의 사조는 중국의 예술과
정신 생활에 어떤 자극과 기동력을 주었다.
  마찬가지로 불교와 인도 예술의 복음은 더 동쪽에 있는 코리아와 일본에까지
전해졌다. 이 나라들이 불교에 대해서 각기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보면 재미있다. 두
나라 모두 그것을 각각의 성격에 맞게 개조했다. 때문에 불교는 중국, 코리아,
일본에서 융성하고 있지만 그 모습은 나라에 따라 다르다. 그리고 아마 인도에서
전파될 당시의 불교와는 많은 점에서 달라져 있을 것이다. 예술도 역시 풍토와
사람에 따라 그 질과 취향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불교가 널리 흥하는 것에 고무되어 인도 불교의 어떤 장로가 남인도에서
중국의 광동을 향해 항해한 일도 있었다. 그의 이름, 혹은 칭호는 보리달마(흔히
'달마'라 한다)라 한다. 그는 아마도 인도에서 불교 세력이 점차 쇠퇴해 가자
중국으로 건너갈 결심을 했을 것이다. 526 년에 중국에 건너간 달마는 벌써
노인이었다. 달마 외에도 다른 많은 승려들이 중국으로 건너갔다. 중국의 어떤
성낙양만 보더라도 당시 3천 명 이상의 인도 승려와 1 만 명에 달하는
인도인 거주자가 있었다고 한다. 이제 중국이 지도적인 불교국이 된 것이다.
  당 왕조는 618 년 고조 황제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전 중국을 통일했을 뿐만
아니라 매우 광대한 지역, 즉 남으로는 안남과 캄보디아를 넘고 서로는 페르시아와
카스피 해에 이르는 지역에 그의 권위를 떨쳤다. 코리아의 일부도 그의 대제국에
포함되어 있었다. 제국의 수도는 장안이며, 그 장려함과 문화로 동아시아 전역에
유명했다. 일본이나 독립을 유지하고 있던 코리아에서도 당의 예술이나 철학, 문명을
배우려고 대사나 특사를 파견하였다.
  당의 역대 황제는 외국 무역을 장려하고 외국의 사절을 후하게 대접했다. 외국인
거류자나 여행자를 재판할 때는 가능한 한 외국인 자신의 풍속과 습관에 따라 재판
받을 수 있도록 특별법을 마련하였다. 특히 남중국의 광동 부근에는 이미 300 년
전후에 아랍인이 거류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이슬람교가 일어나기 이전, 즉
예언자 마호메트가 태어나기 이전의 일이다. 해상 무역은 아랍인들이 참가하면서
더욱 발달하였고, 아랍과 중국의 배가 이러한 무역에 종사했다.
  나라의 인구를 밝히기 위해 주민의 수를 계산하는 조사가 중국에서는 벌써 오랜
옛날부터 제도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면 너도 깜짝 놀라겠지. 아마도 156 년에는
국세 조사가 실시되고 있었다. 이는 곧 한나라 시대에 해당한다. 조사는 개인이
아니라 가족을 단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관례였다. 각 가족은 대략 5인으로
구성되었다. 이 계산에 따르면 중국의 인구는 156 년에 대략 5천만이었다. 물론
그리 정확한 방법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서양에서는 국세 조사 자체가 매우
새로운 것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150 년 쯤 전에 미국에서
실시된 것이 최초였다고 한다.
  당나라 초기에 두 가지 새로운 종교가 중국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기독교와 이슬람교다. 기독교는 서양에서 이단시되어 추방된 일파에 의해
전달되었는데, 그들을 네스토리우스 교도, 즉 경교도라고 한다.
  이슬람교는 네스토리우스 교파가 전래된 지 몇 해 전 중국에 전해졌는데, 그들의
대^36^예언자 마호메트가 아직 살아 있을 때의 일이었다. 중국 황제는 네스토리우스
교파와 이슬람교의 사절을 정중하게 맞이했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그들의 식견에 감탄하였으며, 관대한 태도로 호의를 베풀었다. 아랍인은 광동에 회교
사원을 건립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놀랍게도 이 회당은 1천3백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그것은 세계에서도 가장 오랜 회교 사원 가운데 하나다.
  또한 당의 황제는 기독교 교회와 수도원 건립도 허락했다. 이 너그러운 아량은, 이
시대에 매우 편협했던 유럽과의 대조라는 면에서 매우 상징적이다.
  아랍인이 종이 만드는 법을 중국에서 배워 유럽에 전했다고 한다. 751 년에 중앙
아시아의 투르키스탄에서 중국인과 아랍인 이슬람 교도 사이에 전쟁(탈라스 전투)이
있었는데, 이 때 아랍인이 중국인 몇 사람을 포로로 잡았다. 이 포로들이 그들에게
종이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당나라는 907 년까지 3백년간 매우 발달한 문화를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민중의
복지도 높은 수준에 이르러서 중국의 가장 융성했던 시기였다고 한다. 서양이 훨씬
뒤에 와서야 비로소 알게 된 것을 중국인은 그 무렵부터 많이 알고 있었다. 종이에
대해서는 이미 말했거니와 화약도 그 한 가지 예다. 그들은 뛰어난 기술자였다.
일반적으로, 아니 각 분야를 하나 하나 뜯어보더라도 거의 모든 분야에서 유럽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그들이 그렇게 발전해 있었다면 어째서 과학이나 발명에서 그
선도적 역할을 계속 유지하지 못했을까? 유럽은 청년이 노인을 앞지르듯, 어느
사이엔가 중국을 따라잡더니 마침내 여러 방면에서 중국을 앞지르게 되었다. 여러
민족의 역사에서 어찌하여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철학자나 사학자들로서도 가장
다루기 힘든 문제다. 그러나 너는 아직 이러한 문제를 탐구하는 전문적인 학자가
아니므로 나도 그다지 머리를 썩힐 필요는 없겠다.
  이 시대에 중국의 융성은 중국을 예술과 문화의 스승으로 받들고 있던 아시아의
다른 나라에도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흔히 있는 일이지만, 중국의 발전된
문화는 너무나 사치하고 안이한 생활 방식을 초래했다. 그 때문에 국가가 부패하기
시작하고, 따라서 자연히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이 강요되었다. 이리하여 민중들은
당 왕조에 반발을 느끼고 이 왕조에 종지부를 찍었다. 
  1932 년 5월 8일
    20. 코리아와 일본

  오늘은 중국의 이웃 나라이며, 또 많은 측면에서 중국 문명의 후손이라고 볼 수도
있는 코리아와 일본에 대하여 살펴봐야겠다. 이 두 나라는 아시아의 동쪽 맨 끝, 즉
극동에 있기 때문에 여기를 지나가면 넓은 태평양이다. 물론 이 두 나라는 매우
최근까지도 아메리카 대륙과 왕래가 없었다. 이 두 나라는 중국에서, 혹은 중국을
통하여 외국의 종교와 예술과 문화를 접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코리아와 일본 두
나라는 중국에 큰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그 중에서 어떤 것은 인도에서 온
것이었지만, 인도에서 온 것은 모두 중국의 손을 거쳐 전달되고 중국의 정신에 물든
것이었다.
  두 나라는 지리적 위치 덕분에 아시아나 그 밖의 여러 곳에서 일어나는 큰
사건들과는 무관하게 지내 왔다. 이들은 사건의 중심에서 매우 멀리 떨어져 있었다.
특히 일본은 이런 점에서 행운아였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들의 역사에서 그러한
사건들을 무시해도 별 지장이 없다. 이들의 역사는 아시아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이해하는 데 그다지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말레이시아나 그 밖의
동방의 여러 섬들이 걸어온 지난날의 역사를 무시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역사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가엾은 작은 나라 코리아는 오늘날 거의 잊혀지고
있다. 일본에 합병되어 그 제국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코리아는 지금도
자유를 꿈꾸며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다. 일본은 지금 활약이 뚜렷하여 신문들은
일본이 중국을 공격한 것에 대한 기사로 가득 차 있다. 이렇게 내가 편지를 쓰고
있는 동안에도 만주에서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네가 잊어서는 안될 것은 그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고립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사실 일본은 침략으로부터의 자유와 고립에 관한 한 놀라운 기록을 갖고 있다.
그들은 유사 이래 외부의 침략을 받은 일이 거의 없었으며, 간혹 있었다 하더라도
외적은 침략에 성공하지 못하였다. 일본을 괴롭힌 분쟁은 최근까지 모두 국내
문제였다. 어느 시대에는 외부 세계와 완전히 교섭을 끊었던 때도 있다. 때문에
일본인이 외국에 나가거나 외국인, 심지어 중국인까지 일본에 들어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였다. 그것은 유럽에서 오는 외국인이나 기독교 선교사들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이것은 못난 짓이기도 했고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그것은 민족 전체를 고스란히 감옥에 가두어 외부의 좋은 영향, 나쁜 영향으로부터
차단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본은 그 뒤 문호를 개방하여 유럽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무턱대고 다
배웠다. 더구나 그들의 유럽 문화에 대한 흡수욕은 대단히 왕성하여, 한두 세대를
지나는 동안 적어도 겉보기로는 어느 유럽 국가에 못지 않게 되었으며, 유럽의 나쁜
풍속까지도 모조리 본받을 지경이었다.
  진시황 시절에 많은 중국인이 무리를 지어 코리아로 들어왔다. 시황제의 혹독한
탄압으로 많은 중국인들이 쫓겨났고, 그들은 안주할 땅을 찾아서 코리아에 들어와
힘없는 기자의 자손들을 몰아냈다. 그 후 코리아는 8백년 이상이나 몇 개의 국가로
분열되어 있었다. 이 나라들은 서로 싸웠다.
  어느 나라는 중국에 원조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위험한 요청이었다.
구원병은 왔지만 나중에 철수를 거부했으니까! 이것이 강대국의 상투적인 수법이다.
중국의 군대는 그대로 머물며 코리아의 일부를 지배했다. 그 후 수백년 동안
코리아의 나머지 지역에서도 당나라 황제의 종주권이 인정되었다.
  코리아가 고려 왕국으로 통일된 것은 936 년이었다. 이 위업을 이룬 사람은
왕건으로, 그로부터 450 년 동안 그의 후손들이 이 나라를 통치하게 되었다.
  나는 불과 두세 문단으로 2천년 이상에 이르는 코리아의 역사를 처리해 버렸구나!
그 중에서도 특히 기억해야 할 것은 코리아가 중국에 여러 가지를 빚졌다는 점이다.
문자도 중국에서 들어왔다. 그들은 1천년 동안이나 표의 문자인 중국의 한자를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그들은 마침내 자신들의 말을 적는 데 한결 적합한 독자적인
한글을 발명한 것이다.
  불교도 중국을 거쳐 전해졌으며, 유학도 중국에서 들어온 것이다. 인도에서 비롯된
예술의 영향은 중국을 거쳐 코리아와 일본에까지 긴 여행을 한 셈이다. 코리아는
예술에서 아름다운 작품, 특히 뛰어난 조각을 남겼다. 건축은 중국과 비슷하였다.
조선술도 큰 진보를 보였다. 그들은 한때 일본을 공략했을 정도로 강력한 해군을
갖기도 하였다.
  일본은 200 년쯤에 징고라는 황후가 야마토라는 나라의 수장 지위에 올랐다.
'야마토'란 일본 고유의 이름이며, 또한 그들이 외부에서 건너와 처음 정착했던
지방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부인의 이름을 잘 보거라. 이것이 일본 최초의 지배자
가운데 한 사람의 이름이라니, 참으로 묘한 우연이로구나. '징고(Jingo)'라는 말은
영어에서는 일정한 의미로 쓰이고 있다. 즉 '난폭하고 염치없는 제국주의자'라는
뜻이다. 혹은 간단히 제국주의자를 가리킨다고 해도 좋다. 제국주의자란 어김없이
난폭하고 염치없게 마련이니까. 일본도 역시 이 제국주의 또는 징고이즘(Jingoism)
병에 걸려서 최근 코리아나 중국에 걸핏하면 난폭한 행위를 저지르고 있다. '징고'가
일본 최초의 지배자 이름이라는 사실이 묘한 우연이라고 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야마토는 코리아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중국의 문화는 코리아를 통해
야마토에 전해졌다. 중국 문자도 400 년쯤에 코리아를 거쳐 전해졌다. 불교도
마찬가지였다. 즉 552 년에 백제의 군주는 전도자를 시켜 불경과 황금으로 된
불상을 야마토 군주에게 보내 주었다.
  일본 고유의 종교는 신도(귀신 신, 길 도)였다. 이것은 '신들의 길'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한자로서 자연 숭배와 조상 숭배의 혼합물이다. 그것은 내세나 기적이나
인생 문제 따위는 별로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것은 무력을 존중하는 인종의
종교였다. 일본인은 중국인과 생김새도 비슷하고, 또 중국 문명에서 많은 것을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인과는 전혀 성질이 다르다. 중국인은 본래 평화를
애호하는 민족이며, 그들의 문화나 인생 철학도 모두 평화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인은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투적인 민족이다. 군인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상관과 동료에 대한 충절인데, 이것이 또한 일본인의 미덕이며, 그들의
강력한 힘은 다분히 여기에서 유래한다. 신도는 다음과 같은 덕을 가르친다. '신을
받들고 그 자자손손에 대하여 충절을 다해야 한다'. 이리하여 신도는 오늘날까지
일본에 전해 내려와 여전히 불교와 함께 존속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이를 덕이라고 할 수 있을까? 동지나 대의에 대한 충성심은 분명
덕일 것이다. 그러나 '신도'나 다른 종교는 대개 우리의 충성심을 이용하여 우리를
지배자들의 도구로 봉사하게끔 시도한다. 일본이나 로마, 그 밖의 여러 나라에서
종교가들이 역설한 가르침, 즉 권위에 대한 숭배가 우리에게 얼마나 커다란 해독을
끼쳤는지 곧 알게 될 것이다.
  불교가 일본에 전해졌을 때에는 고유의 '신도'와 불교 사이에 약간 마찰이 있었다.
그러나 곧 사이좋게 병존하게 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일본의 예술사는 불교와 더불어 시작된다. 일본 혹은 야마토는 당시의 중국과
직접 교섭을 시작하였다. 특히 중국의 수도 장안이 전 아시아에 널리 알려져 있던
당나라 때에는 일본 사절들의 관저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인 혹은
야마토 민족은 '나라'라는 새로운 수도를 세웠는데, 이는 당나라의 장안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었다. 그들은 옛날부터 남을 모방하는 데서는 가히 천재적인 재질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 세도 있는 문벌들끼리 서로 대립하며 권력 다툼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옛날에 어느 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이 문벌은 옛 씨족의 관념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의 역사는
주로 씨족이나 문벌의 투쟁사라고 볼 수 있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정치를 좌우한 문벌은 소가 씨였다. 불교가 궁정의 종교가
되고 국교가 된 것도 이들이 허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 무렵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쇼토쿠 태자는 일본 역사에서도 최대의 위인으로 손꼽히는 사람이다.
그는 열렬한 불교도이며, 뛰어난 재능을 가진 예술가였다. 그는 중국 유교의
고전에서 자신의 사상을 세우고, 권력이 아닌 도의에 입각하여 정치를 하려고 했다.
그 당시 일본 곳곳에는 거의 독립한 족장이 지배하는 씨족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권력을 다투고, 어떠한 권위에도 머리를 숙이려 하지 않았다. 쇼토쿠 태자는 이러한
상태를 개조하여 중앙 정부를 강화하려고 하였다. 그는 여러 족장이나 귀족을
천황의 '신하', 즉 종속된 자로 삼았다. 이것은 대략 600 년 전후의 일이었다.
  쇼토쿠 태자가 죽은 뒤 소가 씨는 타도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일본 역사에서
널리 알려진 또 한 인물이 등장하였다. 그의 이름은 나카토미노 가마타리라 했다.
그는 정치 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하여 중국식으로 많이 뜯어고쳤다. 그러나 그는
중국에서 실시되는 독특한 과거 제도는 모방하지 않았다. 이 때부터 천황은 한
씨족의 우두머리를 초월하는 존재가 되고, 중앙 정부의 기초가 다져졌다.
  '나라'가 정식으로 수도가 된 것은 이 때였다. 그러나 나라는 단명으로 끝나고
794 년에 교토를 수도로 정했다. 그 후 약 1천년 동안 내려오다가 최근 도쿄로
수도를 옮겼다. 도쿄는 커다란 근대 도시다. 하지만 일본의 정신을 말해 주고,
일본의 역사 가운데 1천년의 세월을 간직하고 있는 곳은 역시 교토다.
  나카토미노 가마타리는 일본 역사에서 큰 역할을 하게 되는 후지와라 씨족의
시조가 되었다. 그들은 2백년 동안이나 줄곧 일본을 지배하며 천황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종종 특정 가문의 여자와 강제로 결혼을 시켰으며, 다른 씨족에 유능한
인물이 나타나면 수도원에 유폐시켜 놓고 경계하기도 했다!
  '나라'가 수도였을 때, 중국 황제는 일본의 지배자에게 국서를 보낼 때 '대일본국
황제'라고 불렀다. 이것은 '해가 떠오르는 위대한 왕국'이라는 뜻이었다. 일본인들은
이 이름을 좋아했다. 야마토보다 위엄 있게 들렸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기
나라를 '대일본', 즉 '아침해가 떠오르는 나라'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지금도 일본은
스스로 그렇게 부르고 있다. 재팬(Japan)이라는 이름 자체는 '닛폰(Nippon)'에서
유래되어 생긴 말이다. 이탈리아의 한 여행자가 중국을 방문했는데, 바로 마르코
폴로라는 사람이다. 그는 일본에 간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여행기에는 일본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그는 '닛폰고쿠(일본국)'라는 이름을 듣고 있었다. 그래서 책에
'지팡고(Chipango)'라고 기록했다. 여기에서 재팬(Japan)이라는 말이 유래하게
되었다. 
  1932 년 5월 17일
    21. 빛나는 앙코르와 스리비자야

  대략 3백년 동안, 즉 8세기까지 인도지나에는 세 개의 서로 다른 힌두교 국가들이
있었다. 9세기에 이르러 한 사람의 대군주자야 바르만이 나타나 이 세
나라를 통일하여 하나의 대제국을 만들었다. 그는 아마 불교도인 듯하다. 그는 수도
앙코르의 건설에 착수하였고, 그 후계자인 야소 바르만이 이를 완성했다. 이
캄보디아 제국은 4백년 가까이 존속하였다. 여러 제국 가운데서도 캄보디아는 특히
장려하고 강대했다고 한다. 왕국의 수도 앙코르 톰은 '빛나는 앙코르'로서 동방에
널리 이름을 떨쳤다. 그 근처에 웅장하고도 아름다운 건축물인 유명한 앙코르 와트
사원이 있었다.
  그러나 13세기에 캄보디아는 여러 방면에서 공격을 받았다. 동쪽에서는 안남인,
남쪽에서는 그 지방의 여러 부족들이 쳐들어왔다. 북쪽에서는 몽고인에게 쫓겨
남하한 샨인이 피할 길이 막히자 캄보디아로 침입했다. 왕국은 이렇게 끊임없는
전투와 방위에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다. 그러나 앙코르 시는 여전히 동방에서
가장 훌륭한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1297 년 캄보디아 국왕을 찾아온 중국의 한
사절은 유려한 필치로 그 장려하고 놀라운 건축물을 묘사하기도 했다.
  그런데 앙코르는 전혀 뜻하지 않게 끔찍스러운 최후를 맞아야 했다. 1300 년쯤
메콩 강의 퇴적된 진흙이 강어귀를 막자, 강물이 흘러 나가지 못하고 도시 주변에
범람하여 비옥한 논밭을 불모의 습지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여기에 살던 많은
사람들은 굶주리기 시작했으며, 끝내 도시를 버리고 거주지를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빛나는 앙코르'는 멸망하고 그 자리에는 밀림만이 무성해졌다.
장려한 건물은 한동안 야수의 소굴이 되었고, 끝내는 정글의 진흙에 묻혀서 들어갈
수조차 없게 되었다.
  이렇게 큰 재해를 겪고 난 뒤 캄보디아 국가도 오래 지탱하지 못했다. 점점
쇠퇴한 끝에 때로는 샴에 속하기도 하고, 때로는 안남의 영토가 되기도 했다.
  수마트라 섬은 1,2세기쯤 남인도에서 건너온 팔라바인들이 처음으로 식민지를
개척한 곳이다. 그것이 점점 커져서 말레이 반도는 수마트라 국가의 일부가 되었다.
그 후 오랫동안 수마트라와 말레이 반도의 역사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수마트라 제국의 수도는 수마트라의 산간 벽지에 위치하고 있던
스리비자야라는 대도시였다. 팔렘방 강 하구가 이 도시의 문이었다. 5, 6세기
전후에는 불교가 수마트라의 지배적인 종교가 되었다. 불교를 포교하는 데 선두에
서서, 힌두교의 영향 아래 있던 말레이 민중을 대부분 불교도로 개종시킨 것은 바로
이 수마트라였다. 그래서 이 수마트라 제국은 일명 스리비자야의 불교 제국으로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스리비자야는 날이 갈수록 더욱 광대해져서, 마침내 수마트라와 말레이뿐만
아니라 필리핀.셀레베스.보르네오.자바.대만의 절반, 실론에서 남부 중국 광동 부근의
한 항구까지를 포괄하기에 이르렀다. 아마 실론에 접해 있는 인도의 남단에도 이
나라의 항구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나라는 말레이시아 전역을 차지한
대제국이었을 것이다. 상업, 무역 및 조선이 이 인도인 식민지의 주요한 산업이었다.
중국과 아라비아의 서적에는 수마트라 제국에 속해 있던 항구들의 기다란 목록도
나와 있다. 이 항구 목록은 계속 더해져 갈 뿐이었다.
  스리비자야 제국 역시 무역에 기초를 둔 해양국이었다. 아무리 조그만 곳이라도
발붙일 곳만 있으면 어디에나 항구를 만든 것도 그러한 까닭이었다. 실제로
수마트라 제국의 식민지들은 그 전략적 가치가 주목할 만했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
식민지들은 주변 해역을 지배할 수 있는 장소에 정확하게 배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해 서로 협조하기도 했다.
  따라서 지금은 대도시가 된 싱가포르도 애초에는 수마트라의 식민지였다. 너도
금방 느꼈겠지만 그 이름은 전형적인 인도 이름인 싱가푸르이다. 싱가포르와 해협을
사이에 두고 수마트라의 식민지가 또 하나 있었는데, 이곳의 주민들은 종종 이
해협에 쇠사슬을 쳐놓고 이곳을 통과하는 모든 배를 세워 과중한 통과세를 물리곤
했다.
  스리비자야 제국이 가장 번영했던 시기는 11세기 전후로, 이는 남인도에서 촐라
제국이 번영하던 시대에 해당한다. 그러나 스리비자야 제국은 촐라 제국보다 훨씬
오래 번영을 누렸다. 촐라와 스리비자야는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나 둘 다
호전적인 해양 국가였고, 강력한 해군력과 식민지들을 널리 거느리고 있었다.
11세기초 이 두 제국은 충돌하였고 전쟁이 일어났다. 촐라 제국의 황제인 라젠드라
1세는 원정군을 보내 스리비자야를 굴복시켰다. 그러나 곧 스리비자야는 이 수난을
극복하고 예전의 세력을 회복하였다.
  11세기초 중국 황제는 수마트라 국왕에게 많은 청동제 종을 선물로 보냈다.
수마트라 국왕은 그 보답으로 진주와 상아, 산스크리트 고서 등을 보냈다. 이 중에는
황금판에 인도 문자로 새긴 편지도 곁들여져 있었다고 한다.
  스리비자야의 번영은 참으로 오래 계속되었다. 2세기쯤에 시작되어, 5, 6세기 무렵
불교로 개종하는 시기를 거쳐 영토를 계속 확대하면서 11세기에 이르렀다. 제국은
그로부터 다시 3백년 동안이나 더 말레이시아의 상업과 무역을 지배하는 대제국의
위치를 고수했다. 그러다가 1377 년 옛 팔라바의 식민지들에 의해 마침내 타도되고
말았다. 
  1932 년 5월 21일
    22. 이슬람 세계

  아라비아는 사막의 나라이며, 사막과 산악은 자유를 사랑하고 쉽게 굴복할 줄
모르는 억센 백성을 길러 낸다. 그 곳은 풍요로운 지역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른
나라의 정복자나 침략자의 욕망을 부추길 만한 것이 별로 없었다. 도시라고 해봐야
메카와 바닷가의 예드리브 둘 뿐이고, 그 밖에는 사막에 주거지가 조금 있을 뿐이며,
주민은 대개 베두인 혹은 밧두인'사막의 유목민'이었다. 그들은 걸음이 빠른
낙타와 날쌘 말을 일상 생활의 반려로 삼았으며, 나귀도 그 특유의 지구력을 높이
사 충실한 친구로 삼았다. 그래서 나귀에 비유하는 것은 칭찬은 될지언정 다른
나라에서처럼 경멸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이 지역에서는 힘겨운 사막 생활
때문에 다른 어느 나라보다 강인함과 인내를 귀중한 미덕으로 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존심이 강하고 예민하며, 다투기를 잘했다. 또한 그들은 씨족이나 가족
단위로 생활하면서 다른 씨족이나 가족들과 곧잘 분쟁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들은 1
년에 한 번씩 화해를 하고, 그들이 섬기는 신들의 우상 중에서도 거대한 검은
돌'카바'(예배의 방향을 정하는 직사각형의 검은 돌을 모신 이슬람 교도의
신전)를 숭배하고 있었다.
  이처럼 아랍인을 일깨우고 그들에게 자신감과 활력을 불어넣은 새로운 힘과
이념은 바로 이슬람교였다. 이 종교는 570 년에 메카에서 태어난 예언자 마호메트에
의해 창시되었다. 그는 이 종교의 창립을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평온한 생활을
하면서 이웃의 사랑과 신임을 얻어 '알 아민'성실한 사람이라 일컬어졌다.
그러나 그가 일단 새 종교를 포교하기 시작하며 메카의 우상 배척을 주장하자,
도처에서 비난의 소리가 빗발쳤다. 그러다가 마침내 겨우 목숨만 부지한 채
메카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는 특히 신은 오직 하나만 존재하며, 자신이 바로 그
신의 예언자라고 강조했다.
  메카에서 자기 마을 사람들에게 쫓겨난 그는 두세 명의 친구, 그리고 동지들과
함께 예드리브에 은신했다. 이 메카에서 도망한 것을 아랍어로 '헤지라'라고 하며,
모슬렘력은 이 해(622 년)을 원년으로 하여 시작된다. 이 헤지라력은 태음력, 즉
달을 기준으로 계산하는 달력으로서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태양력보다 11일쯤 짧다.
그래서 일정한 달은 매년 같은 계절에 꼭 돌아오지는 않는다. 따라서 같은 날이라도
어떤 해에는 겨울이던 것이 몇 해 뒤에는 한여름일 수도 있다.
  이슬람교는 어떤 의미에서는 헤지라보다 조금 전부터 시작되고 있었지만, 일단
622 년의 도주헤지라를 기점으로 이슬람교가 시작되었다고 해도 좋다.
예드리브 시는 마호메트를 환영했고, 그의 도래를 기리어 그 이름도 '마디나트 운
나비'예언자의 도읍으로 고쳤다. 혹은 이 이름을 줄여서 오늘날 부르는
것처럼 메디나라고 불렀다. 마호메트를 도와준 메디나 사람들은
'안사르'구원자라고 일컬어졌다. 이들 구원자의 자손들은 이 칭호를
자랑스러워하며, 지금도 그 말을 즐겨 사용하고 있다.
  7 년에 걸쳐 도망했다가 드디어 마호메트는 메카에 복귀하여 지도자가 되었다. 그
전에도 그는 메디나에서 세계 각국의 국왕과 군주에게 그가 주장하는 유일신,
그리고 자신이 그 예언자라는 것을 승인하라고 요구했다. 콘스탄티노플의 황제
헤라클리우스는 시리아와 페르시아에서 겨루고 있다가 이 권고를 받았으며,
페르시아 국왕 역시 이러한 요구를 받았다. 또한 중국의 당 태종도 권고를 받았다고
한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그러한 대담한 명령을 전달한 이 이름 없는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 했을 것이다. 이것을 보더라도 우리는 마호메트가 자신과 자신의
사명에 대해 얼마나 철저한 확신을 갖고 있었는지 엿볼 수 있다. 바로 이 신념과
신앙을 국민에게 전파함으로써 그들을 위안하고 격려하여 마침내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던 무지한 사막의 백성들로 하여금 당시 세계의 절반을 정복하게 한 것이다.
  자신감과 신념은 그 자체가 이미 위대한 것이었다. 게다가 이슬람교는 그들에게
동포^36^애, 즉 이슬람 교도 사이의 일체 평등의 복음을 전했다. 그리하여 일종의
민주주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당시의 기독교가 심하게 부패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동포^36^애의 복음은 아랍인들뿐만 아니라 그들이 가는 여러 나라의 주민들에게도
강한 호소력이 있었다.
  마호메트는 헤지라 후 10 년 만인 632 년에 죽었다. 그는 서로 다투는 수많은
부족을 하나로 통합하여 민족을 만들고, 또 그들로 하여금 한가지 목표를 향하여
정열적으로 활약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의 뒤를 이은 것은 마호메트의 가족인
아부 바크르인데, 그는 할리파 혹은 칼리프, 또는 수장이 되었다. 이러한 계승은
공회에서 비공식적인 선거로 이루어지는 것이 관례였다. 아부 바크르는 2 년 뒤에
죽고, 10 년간 칼리프 자리에 있던 오마르가 뒤를 이었다. 
  1932 년 5월 23일
    23. 스페인에서 중앙 아시아까지 아랍인들이 점령하다.

  다른 종교의 창시자가 대개 그렇듯이 마호메트도 기존의 많은 사회 관습에 대한
반역아였다. 그가 설파한 종교는 그 단순성과 솔직함, 민주주의와 평등의 향기로,
오랫동안 압제적인 국왕과 압제적이고 안하무인인 성직자들에게 짓눌려 온 이웃
나라의 국민들까지 휘어잡았다. 그들은 낡은 질서에 진저리를 치면서 변화를
갈구하였다. 이슬람교는 그들에게 그 변화를 주었고, 그 변화는 환영받았다. 그
변화는 많은 점을 개선했고, 수많은 낡은 악습들을 폐지했기 때문이다. 이슬람교는
대중에 대한 착취에 종지부를 찍는 대규모적인 사회 혁명을 성취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슬람 교도에 관한 한 착취를 경감시켰고, 이들이 하나의 커다란 동포
정신으로 묶여 있음을 자각시켰다.
  이리하여 아랍인은 원정에 원정을 거듭하였고,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일도 많았다.
그들의 예언자가 죽은 지 25 년도 채 되기 전에 아랍인은 한쪽에서는 페르시아,
시리아, 아르메니아 전부와 중앙 아시아 일부, 또 서쪽에서는 이집트와 북아프리카의
일부를 정복해 버렸다. 그 중에서도 이집트는 아주 손쉽게 그들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집트는 로마 제국의 착취와 기독교 교파간의 다툼으로 고통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때는 이들 아랍인이 알렉산드리아의 유명한 도서관을 불살랐다는
주장도 있었으나 지금은 이 주장이 그릇되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아랍인은 서책의
애호자여서 그런 야만스러운 짓을 했을 리가 없다. 오히려 이러한 파괴 행위는 아마
콘스탄티노플의 황제 테오도시우스의 소행인 듯하다.
  아랍인은 동서 양쪽 방향으로 진출했다. 동방으로는 헤라트, 카불, 발흐를
차지하고, 인더스 강과 신드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진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수백년 동안 인도 군주들과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반면
그들은 서쪽으로는 끝없이 전진했다. 그들의 장군 오크바는 대서양을 향해
북아프리카를 횡단하여 현재 모로코라 일컬어지는 서해안까지 도달했다고 한다.
그래도 여전히 오크바는 이 장애물(대서양)에 실망하며 들어갈 수 있는 곳까지 말을
타고 바다로 걸어 들어가 신을 향해, 더 이상 정복할 땅이 없어 유감이라는 뜻을
표명했다!
  아랍인은 모로코, 아프리카에서 해협을 건너 스페인을 거쳐 유럽으로 침입해
들어갔다. 고대 그리스인은 이 해협을 '헤라클레스의 기둥'이라 부르고 있었다.
유럽으로 건너간 아랍 장군은 지브롤터에 상륙했다. 바로 이 이름 자체가 그를
기리는 것이다. 그의 이름은 타리크인데, 지브롤터란 정확하게 말해서 자발 우트
타리크, 즉 '타리크의 바위'라는 뜻이다.
  스페인은 즉시 정복되고, 그 뒤 아랍인은 남프랑스까지 밀고 들어갔다. 이리하여
마호메트가 죽은 뒤 1백년쯤 후, 아랍인의 제국은 남프랑스 및 스페인에서
북아프리카를 거쳐 수에즈에 이르렀고, 다시 아라비아, 페르시아, 중아 아시아를
거쳐 몽고 국경까지 확장되었다. 인도는 신드를 제외하면 그 경계 밖에 있었다.
  이 아랍인들은 서유럽 사람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아랍인과 싸우기 위해 대대적인 연합을 결성했다. 카롤루스 마르텔이 연합군의
총수가 되어 723 년 프랑스의 투르 전투에서 그들을 무찔렀다. 이 승리야말로
유럽을 아랍인의 손아귀에서 구해 냈다. 이 사건을 가리켜 어떤 역사가는 "투르
평원에서 아랍인은 바야흐로 손아귀에 들어오려고 하던 세계 제국을 잃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만일 아랍인이 투르에서 승리를 거두었다면 유럽의 역사는 예측할
수 없을 만큼 큰 변화를 겪었을 것이다. 투르 전투 말고는 유럽에서 아랍인의
전진을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만약 그들이 투르 전투에서 패배하지 않고
계속 전진했다면 콘스탄티노플, 그리고 동로마 제국과 또 그 도중에 위치한 많은
나라들에게 종말을 고했을지도 모른다. 또 기독교 대신 이슬람교가 유럽의 종교가
되고, 이에 수반되는 온갖 변화가 나타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이고 아랍인은 프랑스에서 멈추었다. 하지만 그 후 수백년 동안 거기에
머물며 스페인을 지배했다.
  아랍인은 스페인과 중앙 아시아에 이르기까지 세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사막에서 온 이 유목 민족은 대제국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들은 흔히 사라센인으로
일컬어졌다. 이는 아마 '사라 나신', 즉 '사막의 국민'이라는 말에서 나왔으리라
짐작된다. 그 후 그렇게도 검소하던 사막의 국민은 바로 사치와 도시 생활의 맛을
알게 되고, 그들의 도시들에는 속속 궁전이 세워졌다. 멀리 원정하여 승리를 거둔
그들도 서로 다투는 옛날의 악습을 버리지는 못하였다. 칼리프의 지위를 둘러싼
권력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사소한 다툼이나 집안 싸움이 내란으로 발전하였다. 이
싸움은 더욱 불거져서 급기야 이슬람교를 두 개의 커다란 분파로 갈라놓아 수니파와
시아파가 형성되었다. 이 양파의 다툼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칼리프는 절대 전제 군주가 되었고, 이 군주에 관한 한 민주주의도 선거도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는 예전과 달리 당시의 다른 절대 군주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이
되었다. 이론상으로 칼리프는 여전히 종교상의 수장, 즉 신자의 총수를 겸하고
있었다.
  이 시대에 아랍인은 특수한 건축 양식을 창안해 냈는데, 이것은 사라센 건축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것은 내부에 별로 장식이 없고, 단순하고 당당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이 건축은 아라비아와 시리아의 우아한 종려나무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라고 한다. 아치나 돔 양식의 탑에는 아치처럼 서로 겹치고 돔처럼 솟아오른
종려나무 잎새 모습이 배어 있다. 이 건축 양식은 인도에도 전파되어 인도적인
의장이 가미된 혼합 양식으로 발달되었다. 전형적인 사라센 건축이 지금도 스페인에
몇 군데 남아 있다.
  부와 제국은 사치와 도박과 사치스러운 예술을 낳는다. 아랍인들은 경마를 즐겼고,
폴로(4명이 1조가 되어 말을 타고 하는 공치기)와 사냥과 장기 따위도 성행하였다.
또한 음악, 특히 성악은 열광적으로 인기를 끌었고, 도회지에서는 단원을 인솔한
가수가 떼지어 몰려다녔다.
  또 하나의 커다란, 그러나 매우 불행스러운 변화가 서서히 일고 있었다. 다름 아닌
여성 지위의 변화였다. 원래 아랍 여성들에게는 파르다가 없었다. 그들은 격리되지
않았고, 집안에 틀어박혀 지내지도 않았다. 그들은 공공연히 돌아다니며 예배당에
나가 설교를 듣고, 직접 강단에 서기도 했다(이슬람 제국의 궁정이나 가정에서는
부인은 하렘이라는 전용 거실에 틀어박혀 남성과의 자유로운 교섭이 금지되고,
외출할 때에는 베일로 얼굴을 가리는 풍습, 즉 파르다 풍습이 있었다. 이슬람교 군주
중에는 수천 명의 처첩을 하렘에 모아 두었던 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랍인은 그 승리 덕분에 점점 예전의 두 제국동로마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의 풍습에 물들게 되었다. 비록 그들이 두 제국을 무찔렀으나 오히려 이 두
제국의 수많은 악습에 굴복했다.
  아랍인 사이에서 여성 격리 현상이 시작된 것은 콘스탄티노플과 페르시아의 영향
때문이라고 한다. 점차 하렘 제도가 시작되어 남자와 여자가 사회적으로 어울리는
일이 없어졌다. 불행하게도 여성 격리는 이슬람교 사회의 특징이 되었고, 인도도
이슬람 교도가 들어오자 그들에게 이 악습을 배우고 말았다. 지금도 이런 야만적인
풍습을 따르는 자들이 있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나는 여성들이 파르다 때문에
바깥 세상과 단절되어 있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감옥이나 동물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어떤 민족의 절반이 어떤 종류의 감옥에 갇혀 있다면 어떻게 그
민족이 발전할 수 있겠느냐! 파르다를 타파하라! 그리하여 우리 모두에게 한낮의
햇빛을 누리게 하라! 
  1932 년 5월 27일. 6월 16일
    24. 바그다드와 코르도바

  바그다드! 하룬 알 라쉬드와 샤헤라자드, 그리고 '아라비안 나이트'의 갖가지
불가사의한 이야기들을 너는 기억하고 있느냐? 아바스 가문 칼리크들의 통치 아래
번영하던 도시가 바로 '아라비안 나이트'의 도시였다. 그것은 궁전, 관청, 학교,
대학, 대점포, 공원, 정원, 그밖에 모든 것을 갖춘 거대한 도시였다. 상인들은 동으로
서로 광대한 거래를 하고 있었다. 수많은 정부 관리는 제국의 변두리 지방과
끊임없이 연락을 취하고, 정부는 세월이 흐를수록 복잡해져서 많은 부서를 두고
있었다. 신속 정확한 우편 제도가 제국의 구석구석을 수도와 연결하였고, 도처에
병원이 세워졌다. 칼리프가 학식과 예술이 뛰어난 사람들을 후대한다고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학자, 학생, 예술가들이 바그다드로 모여들었다.
  칼리프 자신은 노^36^예에 둘러싸여 호사스럽기 그지없는 생활을 하고, 그들의
처첩들은 하렘에서 앞다투어 시중을 들었다. 아바스 제국은 786 년부터 809 년에
이르는 하룬 알 라쉬드의 치세 시절에 그 번영이 외면적으로는 절정에 달했다.
중국이나 유럽의 카롤루스 대제도 하룬 알 라쉬드에게 사절을 파견하였다.
바그다드와 아바스의 영토는 아랍스페인 지역을 제외하면, 당시 유럽에 비해
정치, 상업, 학문 등 모든 면에서 앞서 있었다.
  아바스 시대가 특히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이 무렵 과학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너도 알다시피 과학은 현대에 극히 중요하며, 우리는 그 혜택을
이 보고 있다. 과학이란 잠자코 앉아서 사물이 생기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 생기는 원인을 밝히려는 것이다. 의문이 생기면 여러 차례 되풀이해서
실험하고 검증한다. 그리고 때로는 실패하기도 하고 성공하기도 하면서 조금씩
인류의 지식을 쌓아 나간다. 현대 세계는 고대 세계나 중세와 그 양상이 매우
다른데, 이는 주로 과학 덕분이다. 현대 세계는 과학이 만든 것이다.
  아랍인들은 과학적 탐구심이 강했다. 덕분에 그들은 근대 과학의 선구로 여겨지고
있다. 어떤 분야, 이를테면 의학이나 수학에 관해서 그들은 인도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래서 인도의 많은 학자나 수학자들이 바그다드로 찾아갔다. 또 많은 아랍
학생들은 당시 큰 대학이 있던 북인도의 탁실라에 가서 의학을 전공했다. 의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에 관한 산스크리트어 책이 아랍어로 번역되기도 했다. 아랍인은
또 많은 기술예컨대 종이 만드는 법을 중국인한테서 배웠다. 그들은 다른
나라에서 배운 지식을 기초로 하여 연구를 거듭한 끝에 몇 가지 중요한 발명을
했다. 망원경과 항해용 나침반을 처음 발명한 것도 그들이었다. 의학 분야에서
아랍의 내과 의사와 외과 의사는 온 유럽에 소문이 자자했다.
  바그다드는 이러한 모든 학문 활동의 대중심지였다. 이에 반하여 서방에서는
아랍스페인의 수도 코르도바가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아랍 세계에는 이
밖에도 많은 대학 도시가 있었다. 카이로 혹은 알 콰히라(승리의 도시)가 있었고,
바스라 및 쿠파도 있었다. 특히 바그다드는, 어느 아랍인 역사가의 말을 빌리면
'이슬람교의 수도, 이라크의 눈, 제국의 자리, 미와 문화의 예술의 중심'으로서, 이
많은 유명한 도시들 위에 우뚝 솟아 있었다. 바그다드의 인구가 2백만을 넘었으니,
현재의 캘커타나 봄베이에 비해 훨씬 큰 규모였던 셈이다.
  아랍인이 7백년 동안이나 스페인의 일부를 계속 지배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더욱 흥미로운 것은 무어인이라 불리는 스페인계 아랍인의 문화가
꽤 수준 높은 것이었다는 점이다. 어느 역사가는 이에 대해 약간 들뜬 어조로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무어인은 코르도바라는 놀라운 왕국을 세웠다. 이것은 중세의 기적으로서, 유럽
전체가 야만적인 무지와 항쟁 속에 빠져 있을 때 유독 혼자서만 찬란한 학술과
문명의 횃불을 높이 쳐들고 서방 세계를 비추고 있었다.

  여기서 말한 코르도바는 꼭 5백년간 이 왕국의 수도였는데, 인구 1백만을
헤아리는 대도시로, 24 마일이나 되는 외곽을 성벽으로 둘러싸고 있으며, 길이 10
마일에 달하는 공원 도시였다. 그 안에는 6 만을 헤아리는 궁전과 저택, 그리고 20
만 호의 중소 주택, 8 만 채의 점포, 3천 8백 개의 모스코(예배당), 7백 개의 공중
목욕탕이 있었다고 한다. 이 숫자가 과장된 것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그 규모를
대략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도서관도 많았는데, 규모가 가장 큰 것은 40 만
권의 장서를 갖고 있던 에미르(사라센인의 왕에 대한 칭호)의 왕실 도서관이었다.
코르도바 대학은 유럽 전체는 물론이고 서아시아에까지 알려져 있었다.
  이 곳 대학에는 먼 나라에서 온 학생도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아랍 철학은 유럽의
다른 큰 대학, 즉 파리와 옥스퍼드, 북이탈리아 등 여러 대학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서기 1천년, 즉 밀레니엄이 끝나려 할 즈음에 에미르 왕국은 스페인의 거의
전부를 장악하고 있었다. 심지어 남프랑스 일부까지 이에 예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붕괴는 삽시간에 닥쳐왔다. 그 원인은 내부적인 약점 때문이었다. 예술과 사치와
기사도로 명성을 떨쳤던 아랍 문화의 소산인 탁월한 건축물은 결국 특권층의
문화였다. 그리하여 굶주린 빈민들이 봉기하고 노동자의 반란이 일어났다. 내란은
점차 확대되어 여러 주가 에미르 왕국에서 이탈했으며, 아랍인의 스페인 제국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코르도바가 끝내 카스티야의 가독교 국왕에게 무릎을 꿇고
만 것은 1236 년의 일이었다.
  아랍인은 이때 남쪽으로 쫓겨갔으나 그래도 저항을 계속했다. 그들은 스페인
남부에서 아주 작은 왕국, 즉 그라나다를 세우고 그 곳을 새로운 터전으로 삼았다.
이 왕국은 비록 규모는 작았으나 아랍 문화의 축소판이었다. 유명한 알함브라
궁전은 지금도 그라나다에 우뚝 솟아 있으며, 아름다운 문과 둥근 기둥, 그리고
아라베스크 등은 지난날의 영화를 말해 준다. 그것은 원래 아랍어로 알 하무라, 즉
'붉은 궁전'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아라베스크는 아랍 건축물과 그 밖의 이슬람교의
영향을 받은 건축물에서도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무늬를 말한다. 당시 인물화는
이슬람교가 금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건축가들은 장식적인 무늬와 복잡한 무늬를
애용했다. 흔히 그들은 코란 속의 문구를 아치나 그 밖의 다른 곳에 배치하여
아름다운 장식으로 활용하였다. 아랍 문자는 유선형 문자이기 때문에 그대로 이런
장식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1469 년에 이르러 주요 기독교 국가들의 군주인 페르디난트와 이사벨라가
결혼함으로써 카스티야, 아라곤, 레온 등 스페인의 북방 3개국이 통합되었다. 그 후
페르디난트와 이사벨라는 아랍 왕국인 그라나다마저 끝내 멸망시키고 말았다.
아랍인은 그라나다가 적에게 포위될 때까지 수 년 동안 용감히 싸웠다. 하지만 결국
기아에 못 이겨 1492 년 항복하고 말았다.
  이 아랍인들에 대한 정복자의 대우는 스페인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장이었다.
그들을 관대하게 대우하겠다던 약속은 잊혀지고 잔인 무도한 살육이 자행되었다. 이
무렵 이단 심문소, 즉 로마 교회가 자기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를 색출하여 모조리
처치하기 위해 만든 무시무시한 올가미가 스페인에 만들어져 있었다. 사라센인의
통치하에 줄곧 번영을 누려온 유태인도 개종을 강요당했고, 화형에 처해진 사람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여자나 어린이도 관대한 처분을 바랄 수 없었다. 
  1932 년 6월 3일
    25. 프랑크 왕국과 노르만의 이동

  그럼 이번에는 둘이서 유럽을 돌아보기로 할까? 우리가 마지막으로 유럽을 떠날
때 그 곳은 부진한 상태였지만, 로마의 함락에 따른 격동이 지나고 새로운 질서
아래 안정되는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향방이 분명해지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고, 새로운 형태가 분명히 드러나려면 상황이 더욱 발전해야만 했다. 기독교는
성자와 평화의 사도들에 의해서, 혹은 칼과 호전적인 왕의 지원을 받으며 널리
보급되어 나갔다. 수많은 새 왕국이 출현했다. 프랑스, 벨기에, 독일의 일부에서는
프랑크인(지금의 프랑스인과 혼동해서는 안된다)이 클로비스라는 군주 아래 하나의
왕국, 프랑크 왕국을 형성했는데, 클로비스가 481 년에서 511 년까지 지배했다.
이를 클로비스 조부의 이름을 따서 메로빙거 왕조(481--751)라 불렀다. 그런데 이
국왕들은 궁정 관리, 즉 궁정 재상 세력의 그늘 아래 기운을 펴지 못하기 일쑤였다.
이 장관들은 정권을 휘둘러 마침내 그 직위를 세습적으로 만들었다. 그들이 실제
통치자였으며, 이른바 왕은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732 년 프랑스의 투르 전투에서 사라센인을 무찌른 카롤루스 마르텔도 이러한
궁정 재상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투르 전투의 승리로 그는 사라센 정복의 파도를
가로막아, 기독교도가 볼 때는 유럽을 구한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그의 명성은 크게
올라갔다. 그는 적들에 대항하여 기독교를 지켜낸 자로 숭상 받았다. 그 무렵 로마
교황은 대대로 콘스탄티노플 측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카롤루스
마르텔 측의 원조를 기대했다. 그 때 마르텔의 아들 피핀은 스스로 왕이 되기로
작정하고 꼭두각시 왕을 제거했는데, 물론 교황은 기꺼이 이에 동의했다.
  피핀의 아들이 바로 카롤루스 대제(프랑스어로 샤를마뉴)였다. 교황은 또다시
분쟁을 일으키고 있었는데, 카롤루스 대제에게 원조를 호소했다. 그는 이 호소에
응하여 교황의 적들을 쫓아냈다. 그리고 800 년 크리스마스 날에 대단한 의식이
거행되어 교황 레오 3세는 카롤루스 대제에게 서로마 황제의 제관을 주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새 제국을, 그 옛날 '세계의 여왕'이라 불렸던 위대한 고대 로마
제국의 부활로 여겼다는 사실이다. 다만 여기에 새로운 이념기독교가
덧붙여졌을 뿐이다. 황제는 지상에서 신을 대신하는 대리자로 여겨졌고, 교황도 이와
거의 비슷한 위치에 있었다. 전자는 정치 영역을 담당하고, 후자는 정신 영역을
담당했다. 그 이념이란 대략 이런 것이었다. 생각컨대 왕의 신권이라는 관념이
유럽에서 시작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황제는 '신앙의 옹호자'였다. 영국
국왕이 지금도 신앙의 옹호자로 불리는 것을 생각해 보면 참 재미있다. 이런 의미의
황제를 '신도의 총수'라 보았던 아랍 세계의 칼리프와 비교해 보면 좋을 것이다.
칼리프는 사실상 황제와 교황을 하나로 합친 듯한 존재였다. 칼리프가 훗날
허울만의 수장이 되었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알아본 바와 같다.
  그리하여 카롤루스 대제는 서방 기독교의 수령이 되고, 지상에서 신의 대리자가
되었으며, 동시에 새로운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이 얼마나 장엄한 명칭이냐!
그러나 그는 민중을 기만하고 잠재움으로써 자기 목적을 달성하려고 했다. 권위는
항상 종교를 뒷배경으로 하여 민중을 무지에 빠뜨리고 자기 힘을 강화하려고 한다.
국왕이나 황제, 직위가 높은 성직자 무리들은 보통 사람에게는 거의 신과 같은 존재,
또한 일상 생활에서 아득히 동떨어져 실로 손닿기 어려운 존재가 되었다. 이러한
신비성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에 대하여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궁정의 어마어마한
관습, 예절, 의례 따위를 역시 거창하기만 한 사원이나 교회의 예배 의식과 비교해
보아라. 양자에게서 공통된 경례, 배궤(절하고 꿇어앉음).부복중국인의 말을
빌리면 고두를 볼 수 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여러 가지 형태로 이러한 권위를
숭배하도록 주입 받는다. 그것은 사랑에서 비롯된 의무가 아니라 두려움에서 나오는
의무이다.
  카롤루스 대제는 814 년에 죽었다. 그 후 오래지 않아 제국의 유산상속을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났다. 카롤루스 대제의 제국이 동프랑크, 서프랑크, 중프랑크
등 3국으로 분할됨으로써 마침내 우리는 독일과 프랑스, 이탈리아가 국가 형태를
정립해 가는 것을 보게 된다. 독일은 843 년에 국가를 이루었다고 하며, 독일인을
단일 국민으로 이끈 사람은 962 년부터 973 년까지 재위했던 오토 1세였다고 한다.
오토 1세는 로마 교황을 원조한 공으로 교황 요하네스 12세로부터 신성 로마제국
황제의 제관을 받았다.
  한편 프랑스는 이미 이 당시부터 오토 제국의 일부는 아니었지만, 987 년에 위그
카페가 미약한 카롤링거계 국왕을 내쫓고 프랑스의 지배권을 획득했다. 사실
프랑스에서는 독립적인 귀족들이 나라를 몇 개의 영역으로 나누어 갖고서 서로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지배권의 획득은 별 실효가 없었다. 하지만 그 귀족들은
상대방보다는 황제나 교황이 더 무서운 존재였기 때문에 그들에 대항하기 위해 위그
카페를 중심으로 일치 단결 했다. 위그 카페로 인하여 마침내 프랑스도 하나의
국가를 이루어 나갔다.
  먼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1천년 동안 계속되어 온 독일과 프랑스의 대립은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프랑스인과 독일인처럼 교양이 높고 재능이 뛰어난 국민들이
먼 옛날의 원한을 지금까지 계속 품어 왔다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그
원인은 아마 그들에게 있다기보다는 그들을 지배한 그 당신의 체제(구조)에 있었다.
  그 동안 북유럽 사람들은 배를 타고 서유럽이나 남유럽에 나타나 방화, 학살, 약탈
등을 자행했다. 너는 이미 영국으로 노략질을 하러 나간 덴마크인과 그 밖의
노스맨(Northmen)에 대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겠지만, 훗날 노스맨, 즉
노르만이라고 일컬어지게 된 이들은 배를 타고 지중해를 돌아 큰 강을 거슬러
올라가 도처에서 온갖 강도질, 살일, 폭행, 약탈을 자행했다. 그 무렵 이탈리아는
혼란에 빠져 있었고, 로마는 비참한 상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노르만인들은 로마를
포위하고 콘스탄티노플까지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이 강도, 약탈자들은 노르망디가
있는 프랑스의 서북부, 남이탈리아, 시칠리아 등을 탈취하고, 거기에 정착하여
영주와 대지주가 되었다. 이것은 떼돈을 만지게 된 도적들이 흔히 하는 수법이다.
1066 년에 정복자로 알려진 윌리엄의 지휘 아래 바다를 건너 영국을 평정한 것은
이 노르망디에서 온 노르만인이었다. 이리하여 영국 역시 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1932 년 6월 4일
    26. 봉건 제도

  로마가 몰락한 이후 서방 세계의 낡은 질서는 무너지고 말았다. 도처에 무질서,
무정부 상태, 폭력과 무력이 난무했다. 강자는 힘이 닿는 한 모든 것을 차지하며, 더
큰 강자가 나타나 그를 때려 누일 때까지는 결코 손에 쥔 것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견고한 성곽이 축조되고, 이 성의 영주는 습격대를 이끌고 주위 일대를 약탈하고
돌아다녔으며, 때로는 똑같은 짓을 하고 다니는 다른 무리와 싸움을 벌이기도
하였다. 여기에서 가장 피해가 컸던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농촌의 농민이나
노동자들이었다. 바로 이러한 무질서 상태에서 봉건 제도가 생겨난 것이다.
  농민들은 조직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강도나 다를 게 없는 영주에 대하여 속수
무책이었다. 그들은 보호해줄 만한 강력한 중앙 정부도 없었다. 그래서 민중들은
그나마 나은 길을 택하여 그들을 약탈하는 영주와 계약을 맺게 되었다. 즉 그들은
영주가 약탈하거나 박해하지 않으며, 다른 영주들로부터 보호해 준다는 조건으로
그들의 밭에서 생산한 농산물의 일부를 영주에게 바치고, 또 영주에게 노동력을
제공하는 데 동의하였다. 한편 조그마한 성의 영주는 보다 더 큰 성의 영주와 이와
비슷한 계약을 맺었다. 다만 이 작은 영주는 농민도 아니고 생산자도 아니었기
때문에, 밭에서 나는 농산물을 대영주에게 바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작은 영주는
필요에 따라 언제나 대영주에게 군사적인 봉사를 하기로 약속했다. 그 대신 대
영주는 소영주들을 보호해 주기로 하고 가신으로 삼았다. 이리하여 그들은 한
단계씩 더 큰 영주나 귀족에 종속되어, 드디어는 이러한 봉건적 기구의 정점을
이루는 국왕에까지 연결되었다. 그러나 거기가 종착점인 것은 아니었다.
  어느 한 성의 토지를 소유한 자가 위정자이며, 그 토지와 그 토지 위에 사는 모든
주민들에 대하여 영주로 군림하였다. 그는 일종의 작은 국왕이었으며, 주민의 부역과
생산물을 징수하는 대가로 그들을 보호해 주게 되어 있었다. 이리하여 그는 농민
혹은 농노라 부르던 이들 민중의 주군이었다. 이론상으로는 이 영주를 가신으로
삼고 그에게 군사적인 봉사를 요구하는 더 큰 영주로부터 토지를 물려받는
형식이었다.
  교회의 성직자들까지 봉건 제도의 구성 분자가 되었다. 그들은 성직자인 동시에
봉건 영주였다. 그리하여 독일에서는 토지와 부의 거의 절반이 주교와 수도원장과
같은 성직자들 차지가 되었다. 교황부터가 하나의 봉건 영주였다.
  이것이 봉건 제도의 배후에 가로놓여 있는 이념이었다. 이념상으로 영주에게는
가신과 농노를 보호할 의무가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 스스로 일체를 다스리는
법률과 같은 존재였다. 이들의 상전이나 국왕은 좀처럼 이들을 제재하지 않았으며,
한편 농민은 이들에게 반항하기에는 너무나 힘이 미약하였다. 거의 절대적인 권력을
쥐고 있던 이들은 농노를 최대한 쥐어 짜내어 최소한의 생활을 할 수 있는 여유조차
남겨 주지 않았다. 토지 소유자의 수법이란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꼭
이런 것이었다. 토지의 소유권이 높은 가문을 만들었다. 땅을 횡령하여 성곽을
쌓아올린 날강도 같은 기사가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는 귀족이 되었다. 이 토지
소유권이 또 권력을 낳았다. 그리고 소유자는 그 권력을 이용하여 농민과 생산자나
직공들을 다그쳐 철저하게 쥐어 짜내었다. 법률도 영주 편이었다. 법률은 영주와
그의 친구들이 제정하였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민중들이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그 고역에서 벗어나는 길을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그저 희망도 없는 고역을 감당하여 살아갈
따름이었다. 이렇게 되니 사람들은 무슨 일에나 게을러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한편에는 봉건 영주와 그 가신, 다른 한편에는 극단적인 빈민으로 구성된 하나의
사회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석조로 된 영주의 성곽 주위에는 반드시 흙이나 판자로
지은 농노의 움막이 즐비하였다. 이리하여 아득히 동떨어진 두 개의
세계영주의 세계와 농노의 세계가 병존하고 있었다. 아마도 영주는 농노들을
마치 약간 색다른 털이 없는 가축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때로는 하급 성직자들 가운데 농노를 영주로부터 보호하려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대체로 성직자나 수도원장들은 영주의 편이었다. 주교나 수도원장 자신이 봉건
영주였던 것이다.
  영주와 농노 외에 또다른 계급으로 상인과 수공업자가 있다. 혼란한 시대에는
상업이나 수공업이 번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점차 거래가 늘어 직공의 우두머리나
상인의 지위는 날로 높아졌다. 그들이 부유하게 되자 영주는 그들의 돈을 빌려 쓰게
되었다. 그들은 돈을 꾸어 주는 대신 영주에게 여러 가지 특권을 보장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 특권은 그들의 세력을 더욱 키워 주었다. 그리하여 영주의 성곽
주변에 즐비했던 농노의 움막 대신, 예배당이나 교회나 길드 홀을 중심으로
민가들이 들어선 작은 도시가 발달하게 되었다. 상인이나 수공업자들은 길드나
협회를 결성하여 이 단체의 본부가 길드 홀이 되고, 이 길드 홀이 나중에 시
의회당이 되었다. 너도 아마 런던의 '길드 홀'에 대하여 잘 알고 있겠지.
  날로 커지기 시작한 이 도시들쾰른, 프랑크푸르트, 함부르크 등은 드디어
봉건 영주들과 대립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하나의 신흥 계급, 즉 상인 계급이
발흥하여 그들의 재력은 귀족을 능가하기에 이르렀다. 오랫동안 상인 계급과 귀족의
투쟁이 계속되었는데, 국왕은 휘하의 귀족이나 영주들의 세력을 은근히 두려워한
나머지 때때로 상인들 편을 들기도 했다. 
  1932 년 6월 5일
    27. 유목민과 중국

  중앙 아시아나 몽고의 유목 종족들과 중국은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키고 있었다.
어쩌면 이 유목 종족이 중국을 끊임없이 위협하여 중국으로 하여금 부득이 방위에
나서지 않을 수 없게 했다는 편이 올바른 표현일지 모른다. '만리 장성'이 축조된
것도 이들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것이 조금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침입을 막기에는
너무나 빈약한 시설이었다. 중국의 역대 황제는 여러 차례 유목 종족을 몰아냈으며,
중국 제국이 멀리 서쪽의 카스피 해까지 확대해 나간 것도 바로 이같은 격퇴
과정이었을 뿐이다.
  중국 민족은 그다지 제국주의적 소질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중국 황제 가운데
어떤 사람은 분명히 제국주의자였고 정복의 야심을 불태우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수많은 민족에 비하면 그들은 평화를 사랑했고, 전쟁과 정복을 좋아하지 않았다.
중국에서는 어느 시대에나 학식 있는 사람이 전쟁을 좋아하는 사람보다 명예롭고
높은 지위를 차지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몇 번이나 어마어마하게
광대해지곤 했다. 이것은 서북쪽에서 끊임없이 공격해 오는 유목 종족으로부터 자극
받은 결과였다. 강력한 황제는 그들을 일거에 소탕하려고 멀리 서방까지 추적해
나갔다. 이 원정으로 그 위협을 근본적으로 해결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상당한
여유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중국이 얻은 이 여유는 다른 여러 민족이나 국가의 희생 위에서 이룩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중국인에게 쫓긴 유목 종족이 다른 나라에게 창끝을 겨누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도로 몰려오기도 했고, 수없이 유럽을 공격하기도 했다.
  지금까지는 중국인이 북방의 유목 종족에 대한 방위에 크게 성과를 거둔 예를
들었지만 이제는 중국인이 여기에 별로 성공하지 못한 시대로 들어가 보자.
  한때 번성하던 왕조가 어김없이 겪게 되는 운명처럼, 당나라도 차츰 쇠퇴하면서
선대의 미덕을 전혀 이어받지 못하고 그저 쾌락만 일삼는 어리석은 군주가
속출했다. 따라서 부패가 만연하고 국민들에게 무거운 세금이 부과되었다. 이
부담은 말할 것도 없이 빈민층의 나약한 두 어깨 위에 부과되었다. 그러자 백성들의
불평 불만이 폭발하여 907 년에 마침내 당 왕조는 무너지고 말았다.
  그 후 약 반세기 동안 몇몇 미약하고 하찮은 군주들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960
년에 다시 큰 왕조가 시작되었다. 그것은 바로 태조 조광윤에 의해 세워진 송
왕조였다. 하지만 국경과 국내의 분쟁은 여전히 그치지 않았다. 고액의 농지세가
농민에게 엄청난 압박을 주어 백성들의 원성이 드높았으며, 송 왕조는 바로 이
문제로 끊임없이 시달렸다. 송나라에서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한 인물이
나타났다. 그는 재상인 왕안석이었다. 중국은 유교 관념이 지배하는 나라였다.
관리는 누구나 유교 경전 시험에 급제해야만 했고, 아무도 공자의 말에 거스를 만한
용기를 갖지 못했다. 왕안석도 공자에 반대한 것은 아니며 공자의 주장을 그럴
듯하게 해석했을 뿐이다. 이는 현명한 사람이 장벽을 타개하기 위하여 곧잘
사용하는 방법이다.
  왕안석의 사상 중에는 때로는 놀랄 만큼 근대적인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의
개혁안은 모두 빈민에 대한 과세의 경감과 부담 능력이 있는 부자에게 더 많은
세금을 물리는 데 집중되어 있었다. 그는 지조를 경감하였고, 농민이 현금이 없어
납세하지 못할 경우에 현물, 즉 곡물로 대신하는 것을 인정했다. 또한 부유한
사람에게 소득세를 부과했다. 이것은 다름 아닌 근대적인 조세 제도인데, 그것이
9백년 전에 중국에서 제안되었던 것이다. 왕안석은 농민 구제책으로 정부가 양곡을
대출하고 풍년이 들었을 때 갚도록 하는 제도를 제안했다. 또 한 가지 극복해야 할
문제는 곡물 가격의 불안정이었다. 너는 곡물 및 기타 농산물 가격이 현저하게
하락하면 농민들이 얼마나 고통을 겪게 되는지 알고 있느냐? 시장 가격이 떨어지면
농민은 경작지에서 나오는 생산물로는 거의 수익을 올릴 수가 없다. 농민들은
생산물을 제값에 팔지 못하여 납세하거나 물건을 구입할 돈을 얻을 수가 없다.
왕안석은 이 문제를 극복하려먼 정부가 가격의 등락을 막기 위해 곡물을 적절한
시기에 매입하고 매출해야 한다는 안을 제출했던 것이다.
  왕안석은 또 공공 사업에 강제 노동을 시키지 말 것과 일하는 자는 누구나 일한
만큼 임금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보갑이라는 지방 농민군을 창설했다.
그러나 왕안석은 불행하게도 너무 시대를 앞서갔기 때문에 그의 개혁은 좌절하였다.
다만 농민군 제도만은 8백년 이상이나 존속했다.
  당면 문제의 해결에 용단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송 왕조는 차츰 흔들리기
시작했다. 북방 민족인 거란족(4세기 이래 내몽고 시라무렌 강 유역에 살았던
몽고계 유목 민족)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강해졌고, 이들을 물리치기 위해
동북부에서 온 다른 부족금, 즉 여진족에게 원군을 청했다. 금은 송의 요청에
따라 거란족을 물리쳤으나 송나라에 그대로 눌러앉아 철수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것은 강자의 원조에 의지하려는 약자나 약소국이 곧잘 겪는 운명이다.
  여진족은 스스로 북부 중국의 주인이 되어 북경에 수도를 두었다. 송은 남쪽으로
후퇴하여 여진족의 진출 앞에 위축되어 가기만 했다. 이리하여 북부 중국에는 금,
남부 중국에는 송이 자리잡고 대립하게 되었다. 남부 중국이 세워진 송을 남송이라
한다. 북부 중국에서 송 왕조, 즉 북송은 960 년부터 1127 년까지 지속되었다.
남송은 훗날 몽고인에 의해 1260 년에 쓰러질 때까지 150 년 동안 지배를
계속했다. 그런데 중국은 몽고인을 문화적으로 흡수, 동화시켜서 그들을 전형적인
중국인과 거의 다를 바 없이 만들어 버렸다. 이렇게 중국은 끝내 북방 민족에게
굴복했으나 그 과정에서 침입자들을 교화하여, 아시아나 유럽의 다른 지역들만큼
시달림을 받지는 않았다.
  북송이나 남송이 정치적으로는 당 왕조만큼 세력을 떨치지 못했다. 그러나
송나라는 당이 융성하던 시기에 꽃피운 예술적 전통을 보존하고 개량하기도 했다.
남송이 지배하는 남부 중국은 예술문학에 뛰어났으며, 아름다운 그림을 많이
남겼다. 특히 송나라의 예술가들은 자연을 사랑하여 뛰어난 풍경화들을 많이
남겼다. 그리고 예술가의 손길에 의해 정교한 도자기도 제작되었다. 이 도자기
기술은 더욱 발달하여 2백년 후 명나라에서는 뛰어나게 아름다운 도자기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명나라 때의 중국제 꽃병은 오늘날에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1932 년 6월 13일
    28. 아메리카 고대 문명의 붕괴

  나는 너에게 말했듯이 편지를 통하여 세계 역사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 있다.
그러나 아시아, 유럽, 그리고 북아프리카에 국한하고 말았구나. 이제 아메리카를
살펴보기로 하자.
  아메리카 세계에는 문명의 중심지가 세 군데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바로 멕시코,
중앙 아메리카, 페루다. 그 문명이 언제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지만,
페루의 역법은 기원전 613 년쯤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서기 원년에서 그리 멀리
않은 2세기 무렵에 이미 많은 도시가 발달했다. 석기, 도기, 직물, 그리고 매우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염색 옷감도 있었다. 동과 금은 풍부했으나 철은 없었다.
그리고 건축술이 발달하여 도시들은 서로 건축물을 경쟁했다. 또한 복잡하고 독특한
문자가 있었으며, 예술에서는 특히 조각 부문에서 매우 아름답고 볼 만한 것이
많았다.
  960 년쯤에는 욱스말이라는 도시가 세워졌는데, 곧 대도시로 변모하여 같은
시대의 아시아의 대도시에도 견줄 만했다고 한다. 이 밖에도 라부아, 마야판,
차오물툰 등의 대도시가 있었다.
  중앙 아메리카에 있던 세 개의 주요 국가 사이에는 마야판 연맹이라는 동맹
관계가 체결되어 있었다. 이러한 동맹 관계는 마치 우리가 서기 1천년을 전후하여
아시아와 유럽에서 볼 수 있었던 것과 흡사하다. 이렇듯 서기 1천년쯤, 중앙
아메리카에는 문명국들 사이에 이미 강력한 연맹이 형성되어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 여러 나라가 모두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 대체적으로 신관들이 권세를 쥐고
있었다. 당시에는 천문학이 가장 존중받은 학문이었는데, 신관들은 이 천문학 지식을
무기로 민중을 무지로 몰아넣고 있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인도에서도 있었다.
무수한 대중이 일식과 월식 때 목욕과 단식을 하도록 부추겨졌다.
  마야판 연맹은 약 1백년 이상 지속되었다. 그 후 일종의 사회 혁명이 발발한
듯하며, 외국 세력이 국경에서 간섭하기 시작했다. 1190 년쯤 마야판 연맹은
무너졌다. 하지만 다른 대도시들은 더 오랫동안 존속했다. 그 후 1백년이 경과하는
동안 다른 민족이 무대에 등장했다. 그들은 멕시코에서 찾아온 아즈텍인으로,
14세기초에 마야국을 정복하고, 1325 년 경에 테노치티틀란이라는 도시를 건설했다.
이 도시는 곧 광활한 멕시코의 수도가 되었고, 아즈텍 제국의 수도가 되었으며,
방대한 인구를 갖게 되었다.
  아즈텍인은 매우 호전적인 민족이었다. 그들은 군사 식민지와 군영지, 그리고 군사
도로망을 갖고 있었다. 또한 종속 국가들로 하여금 서로 다투도록 술책을 부릴
정도로 영리하고 빈틈이 없었다고 한다. 종속 국가들이 서로 분쟁을 벌이면 그만큼
다스리기가 쉬었기 때문이다. 이는 예로부터 모든 제국이 취해 온 상투적인
정책이다. 옛날에 로마인 역시 '분할한 다음에 통치하라'라고 말하지 않았더냐.
  아즈텍인은 이렇듯 영리한 일면도 있었지만 역시 신관 정치 아래 있었으며, 더욱
좋지 못한 점은 인간을 산 채로 제물로 삼았다는 것이다. 매년 수천 명의 사람들이
차마 볼 수 없는 참혹한 방법으로 살해되었다. 아즈텍인은 2백년 가까이 제국을
철퇴로 무자비하게 다스렸다. 대외적으로는 안전과 평화가 유지되었으나 민중은
가차없이 철저하게 착취당했다. 그러나 이렇게 건설되고 운영되는 국가가 오래
보전될 수는 없는 법이다. 사실이 이를 증명해 주었다. 16세기초(1519 년)에
아즈텍인의 권세가 정점에 달했을 때, 이 제국 전체는 외지에서 굴러 온 한 무리의
건달과 모험가 패거리에 의해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이는 제국의 멸망을
보여주는 예 가운데서도 매우 놀랍고도 어처구니없는 경우다.
  아즈텍 제국은 스페인의 헤르난 코르테스와 그가 인솔한 작은 부대에 의해
무너졌다. 코르테스는 매우 용감하고 과단성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아즈텍 왕국을
정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된 두 가지, 즉 화포와 말을 갖고 있었다. 멕시코 제국에는
말이 없었고, 아마 화포도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제 아무리 코르테스가 용맹하고
화포와 말을 갖고 있었다 해도, 만약 아즈텍 왕국이 내부 깊숙이 부패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허무하게 그의 손아귀에 넘어가진 않았을 것이다. 내부는 속속들이 썩어
버리고 겨우 외형만을 갖추고 있었으니, 발길질 한 번에도 무너지게 되어 있었다.
아즈텍 제국은 착취를 바탕으로 세워졌으며, 민중의 원성을 사고 있었다. 때문에
외적이 공격해 오자 민중들은 제국주의자의 패망에 환호를 보냈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는 으레 사회 혁명도 함께 일어나기 마련이다.
  남아메리카의 페루에는 또 다른 문명의 소재지가 있었으며, '잉카'가 지배하고
있었다. 잉카란 일종의 신권 군주를 말한다. 페루 문명은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른 후
멕시코 문명과 완전히 단절되고 말았는데, 이는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그들은
그다지 멀리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서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바로 이런 점이,
어느 면에서 볼 때 굉장히 뒤져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코르테스가
멕시코에서 성공한 뒤, 페루 역시 한 스페인 사람에 의해 몰락하게 되었다. 그의
이름은 피사로였다. 그는 1530 년 이 곳에 건너와 음모를 꾸며 잉카를 체포했다.
신권 군주 잉카를 포박했다는 것 자체가 민중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충분했다. 그는 당분간 잉카의 이름으로 통치하며 거액의 제물을 쓸어 모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스페인은 이러한 위장 정치를 폐지하고 페루를 자국의 영토에
병합시켰다. 
  1932 년 6월 19일
    29. 십자군 전쟁

  1095 년 십자군 전쟁이 시작된 후 장장 1백50 년간에 걸쳐 십자가와 초생달, 즉
기독교와 이슬람교 사이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막을 올리게 되었다. 그 사이에
오랜 휴전 기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전쟁 상태는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기독교
십자군은 잇달아 예루살렘으로 달려가 대부분 '성지'에서 죽었다. 이 엄청난
장기전도 십자군에게 이렇다 할 만한 보람을 주지는 못했다. 한때 예루살렘을
차지하기도 했으나 곧 투르크인에게 빼앗겼다. 수백만의 기독교도와 이슬람 교도를
죽음과 빈곤으로 몰아넣고, 아시아와 팔레스타인을 선혈로 물들인 것이 십자군
전쟁의 주요한 성과였다.
  이 무렵 바그다드 제국은 어떤 상태에 있었을까? 바그다드 내부에서의 진짜
주인공은 투르크인이었다. 그리고 또다른 투르크인 일파인 셀주크인이 들어와
순식간에 세력을 구축했고, 그 승리의 여세를 몰아 콘스탄티노플 성문까지 육박해
갔다. 당시 칼리프는 비록 정치적 실권은 없었지만, 칼리프라는 지위는 그대로
변함이 없었다. 칼리프는 부득이 셀주크 대장에게 술탄이라는 칭호를 주었고, 이
술탄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십자군은 이 셀주크 술탄과 그의 군대와
싸워야 했다.
  십자군 전쟁 당시 유럽에서는 이교도로부터 '성지' 회복이라는 공동 목표를
가지고 십자군 원정에 참가했다. 그렇지만 십자군에는 또 다른 목적이 하나 있었다.
로마 교황은 이 원정을 콘스탄티노플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천재 일우의 기회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이미 알다시피 콘스탄티노플 교회는 로마 교회와는 계통이
달랐다. 콘스탄티노플은 스스로 '정통 교회(정교회)'라 자칭하며 로마 교회를 매우
증오했고, 로마 교황을 벼락 출세한 자로 간주했다. 한편 로마 교황은 교황대로 이
우쭐대는 콘스탄티노플을 발 아래 두려고 했다. 이교도인 투르크에 대한 응징이라는
명분 뒤에는 이 오랜 야망을 성취하려는 사심이 짙게 깔려 있었다. 이것이
정치가들이나 스스로 경세가라고 자처하는 자들이 하는 짓이다! 너는 항상 십자군의
원정 기간 내내 존재했던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사이의 대립을 유념해 두어야 할
것이다.
  십자군을 동원한 또 하나의 이유는 상업적인 것이었다. 사업가들, 그 중에도
베네치아나 제노바 등 신흥 무역항의 상인들은 통상로가 막히자 십자군의 원정을
바랐다. 그들이 동방으로 가는 통상로는 오래 전부터 셀주크인에 의해 거의 막혀
있었기 때문이다.
  일반 사람들은 이런 이유가 숨어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아무도 이런 사정을
말해 주지 않았다. 정치가들이란 언제나 진짜 이유는 숨겨 두고 신앙이니 정의니
진실이니 하며 떠들 뿐이다. 십자군 때도 그랬고, 오늘날에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
때도 민중은 속기만 했고, 지금도 민중의 대다수는 정상배들의 달콤한 언변에
말려들기 일쑤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십자군 원정에 모여들었다. 그 중에는 선량하고 성실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선량하기는커녕 오직 약탈만을 노리고 따라나선 패들도
적지 않았다. 그리하여 십자군은 신앙심 깊은 인간들과, 온갖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불한당들의 기묘한 혼합체였다. 거룩한 뜻을 지니고 떠난 십자군 장병 대다수는
죄악 중에서도 가장 비열하고 가장 수치스러운 짓을 저질렀다. 원정 도중에 약탈과
추악한 짓을 자행하기에 여념이 없어 팔레스타인 근처에는 가지도 못한 자가
부지기수였다. 이교도와 유태인을 학살하기도 하고, 때로는 같은 기독교도 형제를
죽이는 자도 없지 않았다. 그들이 통과하는 여러 기독교 국가들 중에는, 그들의
악행에 격분한 나머지 종종 농민들이 봉기하여 십자군을 습격하여 많은 형제들을
죽이고 영토 밖으로 몰아내는 곳들도 있었다.
  십자군에 관한 일화 중에서 가장 끔찍한 것은 '소년 십자군' 이야기이다. 주로
프랑스와 독일 출신의 나이 어린 소년들은 신앙에 열광하여 고향을 떠나
팔레스타인으로 원정할 결심을 했다. 많은 소년이 도중에 죽거나 행방 불명되었다.
마르세유에 도착한 대부분의 소년들은 그 곳에서 속임수에 넘어가 그들의 순수한
열정은 고스란히 악당들에게 이용되었다. 노^36^예 상인들은 소년들에게 '성지'로
보내 주겠다고 약속하고 배에 태워서 이집트로 데려다가 노^36^예로 팔아 넘겼다.
  십자군 원정은 별 소득도 없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끊임없이 계속된
전쟁은 셀주크의 세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그런데 셀주크 제국을 뿌리에서 뒤흔든
것은 사실 봉건 제도였다. 대봉건 영주는 스스로 사실상 독립적인 존재로 행동했다.
그들은 서로 싸웠으며, 동족간의 싸움을 위해 기독교도에게 원조를 요청할 때도
있었다. 이러한 투르크인 내부의 분열은 때때로 십자군을 이롭게 했다. 그러나
살라딘과 같은 실력 있는 국왕이 통치할 때는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았다. 
  1932 년 6월 21일
    30. 유럽 도시들의 성장

  십자군 원정 시대에 유럽은 신앙과 공통된 열망, 신념 등의 위대한 시대였다.
민중들은 종종 이 신앙과 희망 속에서 일상 생활의 비참함을 잊고자 했다. 그리하여
유럽의 중세 시대에는 신앙이 고양되었고, 로마 교회는 신자들 위에 군림하며
착취하기에 바빴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신자들이 십자군이라는 이름으로
팔레스타인에 원정 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교황은 누구든 자기에게 불복하는
사람이나 집단에 대해서도 십자군 원정을 선포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교황과 교회는 신자들의 신앙심을 미끼로 때때로 '특사증'과 '면죄부'를
발행하여 판매했다. '특사증'이라는 것은 교회의 법규나 관습을 어겨도 좋다는
허가증이었다. 교회 자체가 만든 법규를 특별한 경우에는 무시해도 좋다고 허용한
셈이다. 이런 법규가 계속 존중될 리 없다. '면죄부'는 더 가당찮은 것이었다. 로마
교회측의 말을 빌리면, 인간이 죽으면 영혼을 천국과 지옥의 중간께에 있는
연옥으로 가서 이승에서 저지른 죄에 따라 벌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영혼은 그
다음 비로소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교황은 만약 돈만 내면 연옥행을
면제받고 곧장 천국으로 가게 된다는 약속을 포고했다. 이렇듯 교회는 소박한
사람들의 신앙을 이용해 착취했다. 그리고 죄, 혹은 죄로 간주된 것에 대해서도 돈을
우려먹었다. 이 면죄부 판매 사업은 십자군 출정 이후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곧 추문을 뿌리게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로마 교회에 등을 돌리게 된 한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신앙은 눈에 보이는 창조적인 모습을 띠었다. 11,12세기는 위대한
건축의 시대였으며, 서유럽 도처에 대성당이 출현했다. 종전에 유럽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건축 양식이 나타났다. 커다란 지붕의 무게와 압력이 건축물
바깥쪽의 웅대한 받침대로 배분되도록 교묘하게 고안되었다. 내부로 들어가 보면,
상부의 압도적인 중량을 떠받치고 있는 정교한 둥그런 기둥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아랍식 건축물을 모방한 뾰족한 아치도 있다. 건물 전체의 위쪽에는 하늘을 찌를
듯한 첨탑이 솟아 있다. 이것이 바로 유럽에서 발달한 고딕 양식이다. 이 고딕
건축은 신비할 만큼 아름다우며, 흡사 비상하는 신앙과 동경을 상징하는 것 같다.
참으로 그것은 신앙의 시대를 상징한다. 이 건축물들은 이 일을 사랑하는 건축가와
기술자들이 대공사를 분담하여 협력하지 않고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서유럽에서 고딕 양식이 발전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무질서와 혼란과 무지와 편협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마치 천국으로 올라가는
기도하는 사람과 같은 이 아름다운 양식이 자라난 것이다. 고대 양식에 대성당은
프랑스, 북부 이탈리아, 독일, 영국에서 거의 동시에 발전했다. 그 양식이 어떻게
비롯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그 건축가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그
건축물들은 특정 건축가보다는 대중의 의지와 노고의 결합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대성당의 착색 유리 창문도 새로 등장한 것이었다. 이 창문에는 아름다운
색채로 멋진 그림이 장식되었고, 그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은 건축물이 자아내는
엄숙하고 장엄한 효과를 더해 주었다.
  너도 고딕 양식의 대성당을 몇 개 보았을 것이다. 네가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구나. 너도 독일 쾰른에 있는 장려한 대성당을 구경한 적이 있단다.
이탈리아의 밀라노에는 매우 훌륭한 고딕 양식의 건축물이 있고, 프랑스의
샤르트르에도 있다. 낱낱이 이름을 들 수는 없지만, 이러한 성당은 독일, 프랑스,
영국, 그리고 북부 이탈리아에 널리 세워졌다.
  고딕 건축의 융성기인 11,12세기에도 파리의 노트르담처럼 고딕 양식이 아닌
교회도 많이 세워졌다. 베네치아의 성 마르코 사원도 그 중 하나이다. 너도 본 적이
있는 그 사원은 대표적인 비잔틴 양식으로서 아름다운 모자이크가 장식되어 있다.
  11,12세기에 세워진 이 고딕 양식의 대성당들은 거의 도시 안에 세워졌다. 로마의
문화와 질서가 붕괴한 이후 유럽은 오랫동안 그만한 도시를 갖지 못했지만, 오래된
도시는 다소 소생했으며, 새로운 도시는 더욱 흥성하게 되었다. 특히 이탈리아에서
이러한 대도시들이 성장하고 있었다. 신성 로마 제국은 이런 현상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왜냐하면 도시인들은 자유가 제한되는 것을 승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탈리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도시가 흥성 한다는 것은 곧 상인 계급과
부르주아, 즉 중간 계급의 성장을 뜻하는 것이었다.
  아드리아 해를 지배하던 베네치아는 독립 공화국이 되었다. 지금은 이리저리 휘어
도는 운하로 바닷물이 드나드는 아름다운 도시지만, 이 도시가 건설되기 전에는
늪지대였다고 한다. 훈족 아틸라가 몽둥이와 칼을 들고 아퀼레이아로 침입해 왔을
때, 일부 망명객들이 이 늪지로 피신했다. 그들은 이 곳에 베네치아 도시를 세우고,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의 중간이라는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독립을 유지했다.
인도나 동방으로 통하는 무역로가 트이자 베네치아는 부강해졌고, 해군을 창설하여
해상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베네치아는 부유한 사람들의 공화국이
되었고, '도지(Doge)'라는 대통령직도 있었다. 이 공화국은 나폴레옹이 1797 년
정복자로서 입성할 때까지 명맥을 유지했다. 나폴레옹이 갑자기 들이닥치자 나이가
매우 많았던 '도지'는 충격을 받아 사망했다고 하는데, 그를 마지막으로 하여
베네치아의 '도지'는 종말을 고했다.
  이탈리아의 다른 쪽에는 제네바가 있는데, 이 곳 역시 항해자들의 무역 도시로서
베네치아의 경쟁자였다. 그 중간 지역에 대학 도시인 볼로냐, 피사, 베로나,
피렌체가 있었다. 피렌체는 당시 많은 예술가를 배출한 도시로서, 저 유명한 메디치
가문의 지배 아래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웠다. 북부 이탈리아의 밀라노는 그 때
이미 제조 공업의 중심지가 되었고, 남부에서는 나폴리가 성장하고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위그 카페가 수도로 정한 파리가 성장하고 있었다. 파리는 언제나
프랑스의 중추 신경이요 심장이었다. 다른 나라에도 수도가 있었지만, 1천년 동안
프랑스를 지배해 온 파리만큼 그 나라에서 우세를 과시한 도시는 없었다. 그 밖에
중요한 도시로 성장한 곳은 리용, 마르세유^6,36^이 곳은 매우 오래된
항구다^3,63^오를레앙, 보르도, 볼로뉴 등이 있다.
  독일에서 자유 도시의 발달은 이탈리아 못지 않게 눈부셨다. 특히 13,14세기
중엽에 두드러졌다. 이 도시들은 인구와 재력이 증가함에 따라 점차 대담해져서
귀족들과 투쟁했다. 당시 황제는 대귀족 세력을 꺾기 위해 종종 그들을 지원해
주었다. 그리고 이 도시들은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통상 연맹과 연합을
형성하였다. 그들의 연합^6,36^그 당시 명칭은 '연방'^3,63^은 종종 귀족 측의 반대
연합과 싸우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함부르크, 브레멘, 쾰른, 프랑크프르트, 뮌헨,
단치히, 뉘른베르크, 브레슬라우가 발흥하는 도시의 대열에 끼게 되었다.
  네덜란드(지금의 네덜란드와 벨기에)에는 무역 도시인 앤트워프, 브뤼주, 겐트가
있었는데, 끝없이 증대되는 거래로 날로 번창했다. 영국에는 물론 런던이 있었지만,
그 규모나 재력, 거래 등에 있어서 대륙의 여러 도시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의 두 대학은 학문의 중심지로서 중요성을 더해 갔다.
동유럽에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가운데 하나인 빈, 러시아에는 모스크바,
키에프, 노브고로드가 있었다.
  유럽 신흥 도시의 중요성은 결코 황제나 국왕에게 의존한 것이 아니며, 오로지
도시들을 장악하고 있던 상업의 힘에 따른 것이었다. 도시의 권력은 귀족 계급이
아니라 상인 계급이 쥐고 있었다. 도시는 상인의 도시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시의
발흥은 곧 부르주아의 발흥을 뜻했다. 이 부르주아는 점차 세력을 키워서 마침내
국왕과 귀족에게 도전하여 권력을 빼앗게 되었다.
  도시에서는 많은 시민들이 함께 생활하였다. 그들은 문화 생활의 수준을 더욱
높이고, 지식을 쌓고, 토론하고, 비판하고, 사고할 기회를 점점 늘려 나갔다.
그리하여 자유로운 정신은 봉건 귀족으로 대표되는 정치적 권위와 교회로 대표되는
정신적 권위에 저항하면서 발전했다. 신앙의 시대는 기울고, 종교에 대한 회의와
부정이 고개를 쳐들었다. 교황과 교회의 권위가 언제까지나 맹목적으로 떠받들여질
수는 없었다. 우리는 곧 이 반역 정신이 더욱 성장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12세기 이후로 문예 부흥이 계속되었다. 라틴어가 유럽 지식인의 공통어로
사용되었고, 지식을 탐구하는 사람들은 이 대학 저 대학으로 순례하였다. 이탈리아의
위대한 시인 단테가 1265 년에 태어났고, 또 한 사람의 위대한 시인 페트라르카가
1304 년에 탄생했다. 그리고 얼마 후 영국의 가장 위대한 시인인 초서가 활약했다.
  그러나 문예 부흥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훗날 유럽에서 크게 성장한 과학 정신이
태동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중세 유럽에서는 개방적인 탐구 자세와 실험 정신이
존재하기 어려웠다. 교회가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과학 정신은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당시 유럽에서
이러한 과학적 정신을 갖고 있던 선구자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영국의 로저
베이컨이다. 
  1932 년 6월 1일.23일.24일
    31. 이슬람의 인도 침입과 델리의 노^36^예왕들

  이슬람교가 손에 칼을 들고 인도에 쳐들어오자 인도인이 격렬하게 반발하여
예전의 관용이 증오와 항쟁으로 변한 것은 11세기의 일이었다.
  인도에 들어와 방화와 학살을 자행한 자는 가즈니의 마흐무드였다. 그는 무용이
출중한 장군이며 용감한 지휘관이었고, 그의 아버지 세뷔크 테긴의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매년 인도에 침입하여 약탈과 학살을 자행하고 엄청난 재보와 숱한 포로를
잡아서 데려 갔다. 그는 모두 17번이나 인도에 침입하여 그 가운데 오직한 한
번카슈미르에 침입했을 때 패했을 뿐 싸울 때마다 승리를 거두었다.
  이리하여 마흐무드는 북부 일대에서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멀리 남쪽의
파탈리푸트라, 마투라, 솜나트까지 공략했다. 타네사와라에서는 20 만 명의 포로와
거액의 부를 약탈해 갔다고 한다. 그러나 마흐무드가 더 많은 재보를 약탈해간 것은
솜나트에서였다. 이 곳에는 카다란 사원이 있고, 몇 세기 동안 받은 봉납품이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마흐무드가 솜나트에 다가오자 수만 명이 사원으로 숨어
들어갔다고 한다. 저희들이 섬기는 신이 기적을 일으켜 보호해 주리라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적이란 신자의 공상 속에서라면 몰라도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는다. 사원은 허무하게 파괴되고 약탈당했으며, 5 만 명이 근거 없는 기적의
출현을 기다리다가 몰살당하고 말았다.
  마흐무드는 1030 년에 죽었다. 이 무렵 펀자브와 신드는 전부 그의 지배 아래
있었다. 그는 인도에 들어와 이슬람교를 전파한 이슬람교의 지도자로 숭앙 받고
있다. 이슬람 교도들은 대개 그를 숭배하지만 대부분의 힌두 교도들은 그를
증오한다. 사실 그는 전혀 종교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물론 이슬람 교도이기는
했지만 그것은 부수적인 면일 뿐이다. 누가 뭐래도 그는 무공이 혁혁한 군인이었다.
그는 인도로 쳐들어와 군인이라면 대개 그렇듯이 정복과 약탈을 자행했다. 설령
어떤 종교를 믿고 있었다 해도 결국 그는 마찬가지 일을 저질렀을 것이다. 그가
이슬람 교도인 신드의 영주를 협박하여 항복할 것과 공물을 바칠 것을 조건으로
영주를 풀어 준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그는 바그다드의 칼리프를 죽였다고
위협하면서 사마르칸트를 넘길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따라서 우리는 마흐무드를
무공을 날린 군인 이상으로 보는 과오를 범해서는 안된다.
  마흐무드는 인도의 수많은 건축사와 목수를 가즈니로 데려가 아름다운 모스크를
짓고 '천후원'이라 칭했다. 그는 정원을 매우 좋아했다.
  마흐무드 이후 새로운 정복의 파도가 서북쪽에서 밀려온 것은 12세기 말엽(1186
년 전후)의 일이었다. 아프간인의 한 족장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부흥하여 가즈니를
점령하고 가즈니 제국을 멸망시켰다. 그의 이름은 샤하부딘 구르(구르란
아프가니스탄의 한 작은 마을 이름이다)라 했다. 그는 라호르로 치고 내려와 그
곳을 병합하고, 다시 델리로 진격했다. 당시 델리의 왕은 프리트위 라즈
차우한이었는데, 북인도의 많은 족장들은 그의 지도 아래 침략군에 대항하여 마침내
이를 격퇴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뿐이었다. 다음해에 샤하부딘은 대군을 이끌고
다시 쳐들어와 승리를 거두고 프리트위 라즈를 처형했다.
  이렇게 1192 년 샤하부딘이 최초의 대승을 거둔 결과 인도에 이슬람교도들의
세력 기반이 확립되었다. 침략자는 서서히 동쪽과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그로부터 1백 50 년 동안(1340 년까지) 이슬람 세력은 남부 지역까지 광범위하게
미쳤다.
  한편 아프간인 샤하부딘이 프리트위 라지를 쓰러뜨린 후 델리에서는 노^36^예
왕조라 일컬어지는 술탄의 한 계열이 뒤를 이었다. 초대 술탄은 쿠트부딘
아이바크였다. 그는 원래 샤하부딘의 노^36^예였지만, 노^36^예라도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었기 때문에 델리의 초대 술탄으로 추대될 수 있었다.
그의 후계자 가운데 몇 명도 노^36^예 출신이었으며, 이로써 노^36^예 왕조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노^36^예 왕조의 술탄들은 모두 난폭하여 건축물이나 도서관의 파괴, 살상을
자행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건축을 좋아했고 특히 웅장한 건축물을 좋아했다.
쿠트부딘은 너도 알고 있는 델리 부근의 큰 탑, 쿠트브 미나르의 건립에 착수했다.
그의 후계자 일투트미슈가 이를 완성하고, 그 근처에 지금도 남아 있는 몇 개의
아름다운 아치를 세웠다. 이들 건축물에 쓰인 재료는 거의 모두가 낡은 인도의 건물,
주로 사원에서 뜯어낸 것이었다. 건축가는 물론 인도인이었지만, 이슬람 교도가
전파한 건축 양식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이슬람 교도의 인도 침공은 많은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이 침략자가 아랍인,
페르시아인 또는 서아시아의 높은 교양과 문화를 지닌 이슬람 교도가 아니라
아프간인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문명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들
아프간인은 인도인보다 뒤떨어져 있었지만, 그들은 정력에 넘쳐 있었으며 그 무렵의
인도에 비해 훨씬 발랄하였다. 인도는 지나치게 틀에 박혀 있었다. 그리하여 변화와
진보를 잊어 가고 있었다. 낡은 옛 관습에 사로잡혀 발전을 향한 의욕이 없었던
것이다. 전쟁 역량에서도 인도는 낙후되어 있었으며, 아프간인 쪽이 훨씬 잘
조직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용맹과 커다란 희생에도 불구하고 노쇠한 인도는 결국
이슬람 침략자 앞에 굴복하고 말았다.
  이 이슬람 교도들은 초기에 매우 흉악하고 잔인했다. 그들은 유화의 덕이란
찾아볼 수조차 없는 거친 나라에서 온 자들이었다. 게다가 이제 막 정복한 곳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 반란을 일으킬지 알 수 없는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상황이었다. 항상 반란의 조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불안은 흔히 잔학과
공포심을 낳는다. 그래서 인도 민중을 위협하기 위해 끊임없이 학살을 자행했던
것이다.
  이슬람 교도가 힌두 교도를 학살한 것은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외래의
정복자가 피정복민의 의기를 꺾기 위해서였다. 이런 경우에는 어김없이 종교를
들먹이게 마련이지만 그것은 옳지 않다. 때때로 종교 문제가 전면에 내세워진다.
그러나 참된 원인인 정치적, 사회적인 것이다. 중앙 아시아에서 인도로 침입해온 이
민족은 모국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하기 훨씬 전부터 흉포하고 인정 사정이 없었다.
그런 그들이 다른 나라들을 정복하였으니, 피정복민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오로지
공포 수단 하나밖에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이슬람교는 인도를 뒤흔들었다. 그것은 진보를 잊은 사회에 진보를 향한 자극과
충동을 불어넣었다. 퇴폐적이고 병적이며 반복과 자질구레한 재주에 빠져 있던
힌두교 예술은 북부에서 커다란 변화를 맞이했다. 말하자면 '인도이슬람'이라
해도 좋은, 발랄하고 활기 넘치는 새로운 양식의 예술이 발달했다. 인도의 늙은
건축가들은 이슬람 교도들이 가져온 새로운 이념에서 영감을 얻었다. 이슬람 교도의
신조와 태도의 어떤 단순성이 당시의 건축에 영향을 미치고, 간소하고 격조 높은
디자인을 회복시켜 주었다. 
  1932 년 6월 25일
    32. 몽고 제국이 아시아와 유럽을 뒤흔들다.

  테무진은 어려서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 끝내 성공했다.
그는 점차 기반을 다져 나가, 마침내 쿠릴타이라는 몽고인의 대집회가 열렸을 때
대칸 혹은 카간, 즉 황제로 선출되었다. 그는 대칸으로 뽑히기 몇 년 전에
칭기즈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었다. 14세기에 발행된 '원조 비사'에는 이 선출에
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이리하여 모전의 천막에 사는 온 국민을 평정하고, 호랑이 해에 간난강 근원에서
집회하여 아홉 개의 다리가 있는 하얀 기를 세우고, 칭기즈 칸의 칭호를 받았다.

  칭기즈가 대칸 또는 카간이 되었을 때는 이미 51세를 헤아리고 있었다. 그는 이미
그다지 젊은 나이는 아니었고, 다른 사람이라면 이 나이쯤 되면 안락한 평온 무사를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 나이가 정복의 생애에 출발점에 불과했다. 많은
정복자들이 젊었을 때 정복을 성취한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참으로 특이한 경우다.
또한 칭기즈 칸이 그저 젊은 혈기만으로 아시아를 가로질러 돌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신중하고 조심성 있는 중년이었고, 그가 성취한 모든
대사업에는 항상 사전에 충분한 검토와 준비가 있었다.
  칭기즈 칸이 나타나 아시아와 유럽을 휩쓸 때 그 곳의 지도는 어떻게 되어
있었을까? 몽고의 동남쪽에 위치한 중국은 분열되어 있었다. 중국 남부에는 남송이
세력을 펴고 있었고, 북부에는 송을 몰아낸 금, 즉 여진족이 북경을 수도로 하여
버티고 있었다. 서쪽으로는 고비 사막과 그 너머에 역시 유목민인 하, 즉 탕구트
제국이 있었다. 인도에는 앞서 본 것처럼 노^36^예 왕조가 델리에 군림하고 있었다.
페르시아와 메소포타미아에는 인도와 접한 지대에 호라즘(Khorazm) 혹은 키바라는
이슬람 교도 왕국이 있었고, 그 수도는 사마르칸트였다. 그 서쪽에는 셀주크인이
있었고,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에는 살라딘의 후^36^예가 있었다. 바그다드 주변은
셀주크인의 보호 아래 칼리프가 지배하고 있었다.
  또한 이 시기는 십자군 전쟁의 말기에 해당된다. '세계의 불가사의'라는 별명을
얻은 프리드리히 2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다. 영국에서는 '마그나 카르타'
이후로 이어지는 시대가 이 연대에 해당한다. 프랑스는 루이 9세가 다스리고
있었는데, 그는 십자군 전쟁에 참가했다가 투르크인의 포로가 되어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 나왔다. 동유럽에는 러시아가 있었는데, 이 곳은 북방에는 노브고르드,
남방에는 키에프의 두 국가로 뚜렷이 구분되어 있었다. 러시아와 신성 로마 제국
사이에는 헝가리와 폴란드가 있었다. 그리고 비잔틴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의
주변에서 계속 번영하고 있었다.
  칭기즈 칸은 정복에 나서기에 앞서 면밀한 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군대를 훈련하고 특히 말과 예비마를 잘 조련했다. 유목 민족인 만큼 말처럼 소중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칭기즈 칸은 드디어 동쪽으로 진격하여 중국 북부와 만주의
금나라를 재기 불능 상태로 만들고 북경을 점령했다. 고려도 굴복시켰다. 그는
남송과는 친교가 있었던 것 같다. 남송은 다음이 자기 차례라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금의 공략에 원조를 보내기도 했다. 그 후 칭기즈 칸은 탕구트족까지
정복했다.
  이만한 승리를 거두고 난 후 칭기즈 칸은 일단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던 듯하다.
원래 그는 서방을 침략할 뜻은 없었던 것 같다. 그는 중앙 아시아 호라즘 제국의 샤,
즉 왕과 우호 관계를 바랐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되질 않았다. "신은
멸망시키고자 하는 자로 하여금 먼저 스스로 미치광이 노릇을 하게 한다"는 뜻의
라틴어 속담이 있다. 호라즘의 샤는 온갖 난폭한 짓을 자행했다. 몽고의 상인들이
샤의 부하인 한 총독에게 살해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래도 칭기즈 칸은 사태가
확대되지 않도록 사절단을 파견하여 샤에게 그 총독을 처벌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어리석은 샤는 자기 세력을 과신하고 이 사절들에게 모욕을 가하고 끝내 사형에
처해 버렸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칭기즈 칸도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서두르지 않고 차분하게 준비를 갖춘 다음 대군을 몰고 서쪽으로 진군했다.
  이렇게 1219 년에 시작된 진군은 서아시아와 유럽의 일부를 공포에 떨게 했다. 이
강력한 지배자는 냉혹하게 쳐들어가 수많은 마을과 수백만 명의 인간을 궤멸시켜
버렸다. 호라즘 제국은 거의 사라져 버렸다. 수많은 궁전과 인구 1백만을 헤아리던
대도시 부하라는 잿더미가 되었다. 수도 사마르칸트는 불에 타버렸으며, 1백만의
주민 가운데 살아남은 자는 겨우 5만에 불과했다. 헤라트, 발흐, 그 밖에 번창하던
많은 도시들도 모두 파괴되었다. 수백만 명이 죽었다. 수백년 동안 중앙 아시아에서
번영을 지속해온 기술과 공예는 그림자를 감추고, 페르시아와 중앙 아시아의 문명
생활은 사라져 버렸다. 칭기즈 칸이 지나간 자리는 사막으로 화했다.
  셀주크 투르크인과 바그다드는 운이 좋아서, 칭기즈 칸은 그들을 그냥 내버려둔
채 러시아를 행해 북진했다. 가는 키에프 대공을 무찌르고 포로로 잡았다. 그러나
탕구트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동쪽으로 돌아갔다.
  칭기즈 칸이 여러 도시를 파괴하게 된 이면에는 또 하나의 다른 동기가 숨어
있었다. 그는 유목민 정신의 소유자였고 도시를 증오했다. 그는 대초원과 평원에서
살기를 좋아했다. 언젠가 그는 중국의 도시를 모조리 파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 생각을 실천에 옮기지는 않았다. 그가
바란 것은 문명과 유목 생활을 조화시키는 것이었다.
  칭기즈 칸은 문자를 읽고 쓸 줄을 몰랐으며, 그의 부하들 역시 그랬다. 아마 그는
오랫동안 문자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모든 소식은 말로
전달되었고, 대개 비유나 속담 같은 형식으로 교환되었다. 광막한 제국에서 모든
일이 입을 통한 전문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칭기트 칸은
문자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이를 매우 편하고 귀중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자식들과 관리들에게 이를 배우게 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몽고인의
전통적인 관습과 자기의 말을 문자로 기록하도록 명했다. 몽고의 관습법이 영구
'불변의 법'으로서 누구도 위배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황제라 해도 이
관습법에 따라야만 했다. 그러나 이 '불변의 법'은 오늘날 찾아볼 수 없다. 현대
몽고인도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며 또 전승되지도 않았다. 
  1932 년 6월 26일
    33. 몽고인들이 세계를 지배하다.

  칭기즈 칸이 죽자 아들인 오고타이가 대칸이 되었다. 대장군 사부타이의 인솔
아래 제2차 유럽 침략이 시작되었다. 그는 모스크바, 키에프, 폴란드, 헝가리 등지를
점령했다. 1241 년에는 중부 유럽의 라이프니츠에서 폴란드와 독일 연합군을
궤멸시켜 버렸다. 전 유럽은 이제 운을 다한 것처럼 보였다. 몽고족을 가로막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물론 '세계의 불가사의'라고 일컬어지던 프리드리히 2세도
몽고에서 온 진짜 불가사의를 보고 안색이 파랗게 질렸을 것이 틀림없다. 유럽의
왕과 준주들은 이미 거의 숨이 끊어져 있었다.
  1252 년 몽케 칸(헌종)이 대칸이 되고 쿠빌라이를 중국 총독에 임명했다.
카라코룸에 있던 몽케 칸의 궁전에는 아시아와 유럽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대칸은 여전히 유목 민족의 생활 양식을 지키며 천막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천막은 양대륙에서 가져온 전리품과 재물로 가득차 있었다. 특히 모슬렘
상인들이 많이 찾아와 관대한 몽고족 구매자와 거래했다. 한편 공예가, 천문학자,
수학자 및 당시의 과학에 정통한 사람들이 당시 세계의 중심지로 여겨진 이 천막의
도시로 모여들었다. 광막한 몽고 제국은 그런 대로 안정과 질서가 유지되었고
대륙을 횡단하는 대상의 통로는 오가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리하여 유럽과
아시아는 예전보다 한층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러나 몽케 칸의 통치 시대에 또다시 정복과 파괴의 물결이 일었다. 그의 동생
훌라구는 페르시아의 통독이었다. 어떤 일로 바그다드의 칼리프에게 화가 난
훌라구는, 칼리프에게 약속을 어긴 이유를 추궁하고 앞으로 태도를 고칠 것을
요구하며, 만약 말을 듣지 않으면 그의 제국을 빼앗아 버리겠다고 위협하였다.
칼리프는 그다지 영리하지 못하고 경험을 통하여 지혜를 얻는 능력도 없었다. 그는
오만한 회답을 보냈고 몽고의 사신은 바그다드의 폭도들에게 피살되었다. 이에
훌라구의 몽고인 피가 뜨겁게 불타올랐다. 격분한 훌라구는 바그다드를 40일간의
포위전 끝에 함락시켰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도시와 5백년에 걸친 제국 시대에
축적된 갖가지 재보는 이렇게 최후를 맞이했다. 칼리프와 그의 아들, 그리고
측근들은 사형 당했다. 그로부터 4주에 걸쳐 대학살이 자행되어 티그리스 강이 몇
마일에 걸쳐 피로 붉게 물들었다. 150 만 명이 비명에 횡사했다고 한다. 예술적,
문화적인 재보와 도서관은 모두 파괴되었다. 바그다드는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수천년의 역사를 지닌 서아시아의 관개 시설도 훌라구에 의해 파괴되어 버렸다.
말레포, 에데사, 그리고 기타 수많은 도시들도 같은 운명에 처하여 서아시아는
어둠의 장막에 뒤덮였다.
  1258 년 바그다드가 파괴됨으로써 남아 있던 아바스 제국은 종말을 고하였다.
이것은 서아시아에서 순수 아랍 문명의 종말을 뜻하는 것이었다. 멀리 떨어져 있던
남스페인의 그라나다에는 아직 아랍의 전통이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이곳 역시
2백년 이상 명맥을 유지하다가 멸망하였다. 그러나 아라비아 자체는 그 중요성을
급속히 상실하여 그 후로는 역사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훗날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편입되었다. 이로써 몽고 제국은 아시아, 서남 아시아, 그리고
유럽을 망라하는 대제국이 되었다.
  대칸 몽케는 1239 년에 죽었다. 그는 죽기 전에 티벳을 정복하였다. 이번에는
중국 총독인 쿠빌라이가 대칸이 되었다. 쿠빌라이는 꽤 오래 전부터 중국에
있으면서 이 나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수도를 카라코룸에서
북경으로 옮기고 그 이름을 칸발리크, 즉 '칸의 서울'이라고 고쳤다. 쿠빌라이는
중국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대제국에 소홀하게 되어 대몽고 각지의 총독들은 점차
독립하였다.
  쿠빌라이는 중국 정복을 완수했으나 그 전투는 옛날 몽고 전법과는 크게 달랐다.
잔학성이나 파괴성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중국은 벌써 쿠빌라이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문명화시켰다. 중국인은 그와 보조를 맞추고 그를 마치 같은 나라
사람처럼 대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현재 중국의 정통 왕조로 인정되는 원 왕조를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쿠빌라이는 고려, 안남, 버마를 자기 제국에 편입시켰다.
  광대한 몽고 제국의 행정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따라서 일찍이 분열하기
시작한 것도 별로 이상할 것이 없다. 쿠빌라이 칸은 1294 년에 죽었다. 그가 죽은
뒤 대칸이란 지위는 없어지면서 제국은 다음과 같이 다섯 개의 대지역으로
분할되었다.

  (1) 몽고, 만주, 티벳을 포함한 중화 대국. 이것이 제1의 국가이며, 원 왕조
쿠빌라이의 자손에 의하여 통지되었다.
  (2) 저 멀리 서방의 러시아, 폴란드 및 헝가리에는 '황금의 유목민'(그 일대에서는
몽고인을 이렇게 불렀다)의 킵차크 한국이 있었다.
  (3) 페르시아, 메소포타미아와 중앙 아시아의 일부에는 일 한국이 있었다. 이
제국은 훌라구가 세운 것으로 셀주크 투르크인에게 공물을 받고 있었다.
  (4) 중앙 아시아의 티벳 북방에는 대투르크, 이른바 차가타이 한국이 있었다.
  (5) 몽고와 '황금의 유목민'의 중간 지역에는 시베리아 몽고 제국, 즉 오고타이
한국이 있었다.

  대몽고 제국은 분열되기는 했지만 이 다섯 개의 분국 하나 하나가 각기 강대한
제국을 이루고 있었다. 
  1932 년 7월 1일
    34. 중세의 몰락

  13세기에서 14세기까지의 유럽으로 다시 한 번 눈을 돌려보자. 거기에는 수많은
혼란과 폭력과 분규가 있었다.
  몽고인들이 유럽에 화약을 전해 주었고, 이제 화포가 전쟁에 사용되고 있었다.
국왕들은 이것을 봉건 영주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이용하였다. 이 작업을 위하여
그들은 신흥 상인 계급으로 하여금 한 몫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귀족들은 서로
자기들간의 사사로운 소규모 전쟁에 골몰하고 있었다. 이로 인하여 그들의 힘은
자연히 약화되었다. 국왕은 세력을 회복하자 이러한 사적인 전쟁을 억압하였다.
곳에 따라서는 두 개의 파벌이 대립하여 왕위를 둘러싸고 내전을 일으킨 일도
있었다. 영국에서는 그 때문에 두 가문, 즉 요크 가와 랭커스터 가가 다툼을 벌였다.
랭커스터 가는 붉은 장미, 요코가는 흰 장미를 문장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이 내전을
장미 전쟁이라고 일컫는다. 많은 봉건 귀족이 이 내란 중에 살해 당했다. 십자군
전쟁으로 죽은 자들도 많았다. 이리하여 봉건 영주는 점차 국왕의 통제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권력이 귀족의 손에서 민중의 손으로 옮겨갔다는
것은 아니다. 세력을 확장한 것은 국왕이었다. 민중은 사사로운 전쟁이 줄었기
때문에 얼마간 부담은 가벼워졌으나, 다른 점에서는 원래 그대로였다. 그런데 국왕
쪽은 점점 위세를 떨치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전지 전능한 전제 군주가 되어 버렸다.
  한편 전쟁이나 살육과는 비교도 안되는 가공스러운 대역병이 1348 년 유럽을
엄습하였다. 이것은 러시아와 소아시아에서 영국까지 유럽 전체를 휩쓸었고, 이집트,
북아프리카, 중앙 아시아까지 덮쳤으며, 그 세력은 다시 계속해서 동쪽으로 향했다.
그것은 한번에 몇 백만이라는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흑사병'이라는 무서운
전염병이었다. 영국에서는 인구의 3분의 1이 죽었고, 중국이나 기타 나라에서도
사망자는 엄청난 숫자에 달했다.
  이 무서운 병은 놀랄 만큼 급격히 인구를 감소시켰고, 어떤 곳에서는 토지의
경작이 불가능할 만큼 사람이 부족하게 되었다. 이렇듯 사람의 일손이 부족한
탓으로 노동자의 임금은 지난날의 비참한 수준에서 상승하는 경향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러나 의회를 지배하고 있던 지주와 유산 계급은 노동자들이 예전과
다름없는 비참한 임금으로 일해야 하며, 그 이상을 요구할 수 없도록 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정도의 압박과 착취에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농민과 빈민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서유럽 전체에서 이와 비슷한 농민 반란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1358 년에는
프랑스에서 자크리라고 하는 사람이 봉기했고, 영국에서는 와트 타일러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으로 타일러는 1381 년, 국왕이 보는 앞에서 사형을 당했다.
이러한 반란 행위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끔찍하고도 잔학한 방법으로 진압되었다.
잔학한 행위가 거듭될수록 평등이라는 새로운 관념이 서서히 싹트기 시작했다. 무엇
때문에 어떤 무리들은 풍족하게 살고 무엇이든 마음대로 가질 수 있는 데 반해, 또
어떤 무리들은 가난하고 굶주려야만 하는가 하는 의문이 마음속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도대체 어찌하여 어떤 자는 영주이고 어떤 자는 농노인가? 어떤 자는 호화
찬란한 옷을 입고 있는데, 또 어떤 자는 몸을 가릴 넝마조차도 갖지 못하는가? 봉건
체제의 기초를 이루고 있던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의 오랜 관념은 허물어져
가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농민들의 봉기는 치열해져 갔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나
약세였고, 조직이 없었기 때문에 궐기했다가는 이내 진압되는 과정을 되풀이하곤
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거의 쉴 새 없이 전쟁을 하고 있었다. 14세기의 초반부터
15세기의 중반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백년 전쟁이 계속되었다. 프랑스의 동쪽에
해당하는 곳에 부르고뉴라는 강국이 있었는데, 명목상으로는 프랑스의 가신국이었다.
부르고뉴는 프랑스로 보아서는 어찌할 수 없는 귀찮은 가신이었는데, 영국은
부르고뉴나 기타 여러 나라들과 공모하여 프랑스에 대항했다. 프랑스는 사면 팔방이
꽉 막힌 상태가 되었다. 서부 프랑스의 대부분을 오랫동안 영국이 장악하고
있었기에, 영국 국왕은 스스로를 프랑스 국왕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프랑스가 이렇듯 비참한 수렁에서 헤매며 희망이라곤 조금도 없어 보였을 때, 한
농민의 딸의 모습을 한 희망이 찾아왔다. 오를레앙의 처녀, 즉 잔 다르크가 출현한
것이다. 너도 그 이야기는 잘 알고 있겠지. 그녀는 네가 가장 좋아하는 영웅이니까.
그녀는 사기가 땅에 떨어진 프랑스 국민들에게 전의를 복돋아 주었고, 그들을
격려하여 활기를 되찾게 하였으며, 그녀의 지휘하에 영국인을 프랑스에서 내쫓아
버렸다. 이러한 공로를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 대한 보답은 종교 재판이었다.
부르고뉴 군이 그녀를 사로잡아 영국군에 인도하고, 영국인은 1431 년 루앙의
광장에서 그녀를 마녀로 규정하여 화형 시켰던 것이다. 그로부터 훨씬 후에 로마
교회는 그녀를 단죄한 판결을 철회하고, 이미 저질러진 잘못을 속죄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 후 오랜 세월이 지난 뒤 그녀는 성녀로 추앙 받았다.
  잔 다르크는 프랑스의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들의 향토를 침략자로부터 수호하자고
호소했다. 이것은 그 때까지는 없었던 외침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사람들은 봉건적
관념에 사로잡혀서 민족주의에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잔
다르크의 외침은 그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으며, 처음에는 거의 이해될 수도
없었다. 여하튼 잔 다르크 시대에 프랑스에서 민족주의의 조그마한 징조가
나타났다고 할 수 있겠다.
  영국인을 프랑스에서 축출해 버리자 프랑스의 샤를 7세는 골칫덩어리였던
부르고뉴로 칼끝을 돌렸다. 이 강대한 가신국은 마침내 굴복하여 1493 년쯤
프랑스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이리하여 프랑스 왕은 강력한 대군주로 군림하게
되었다. 그는 이전의 봉건 군주들을 완전히 소탕해 버리거나 아니면 그의 지배하에
두었다. 부르고뉴의 병합으로 프랑스와 독일은 직접 국경을 접하여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강대한 중앙 집권 군주국이었음에 비하여, 독일은 여러
개의 군소 국가로 분열되어 있었다.
  13세기에는 작은 나라가 독립을 위한 자신의 권리를 주장했다. 이 나라는
스위스로서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해 있었으며, 오스트리아가 통치하고 있었다. 너는
빌헬름 텔과 그 아들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은 아니다. 그러나 스위스 농민이 대제국에 반기를 들고 예속을 완강히
거부한 것은 그 이야기 이상으로 놀라운 일이다. 우선 3개의 주가 일어나 1291 년
영구 동맹이라고 칭하는 것을 만들었다. 다른 여러 주도 이에 참가하여 1499 년
드디어 스위스는 독립 공화국이 되었다. 이것은 많은 주의 연합체로서 스위스
연방이라고 불렸다.
  유럽 동쪽의 콘스탄티노플에서는 어떤 사건이 일어났던 것일까? 라틴 십자군이
1204 년에 이 도시를 그리스인으로부터 탈취하여 점령했다. 1261 년에는 사정이
뒤바뀌어 이번에는 이들이 그리스인에게 쫓겨나서 다시 동로마 제국이 세워졌다.
그러나 또 다른, 좀더 커다란 위협이 다가오고 있었다.
  몽고인이 아시아를 횡단하여 진격해 오자 5 만의 오스만 투르크인은 그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도망쳐 버렸다. 이러한 행위는 셀주크 투르크인의 경우와는 매우
다른 모습이다. 그들은 오스만 또는 오트만이라고 하는 왕조의 창립자를 조상으로
모시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오트만 또는 오스만 투르크인이라고 불린다. 이들
오스만은 서아시아의 셀주크인들에게 의탁했다. 당시 셀주크인은 쇠퇴해 가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오스만인의 세력이 확대된 모양이었다. 그들은 과거의
여러 민족과 마찬가지로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지 않고, 그곳을 슬쩍 지나쳐서 1353
년 유럽으로 건너갔다. 그들의 세력은 순식간에 퍼져 나가 불가리아와 세르비아를
점령하고 아드리아노플을 수도로 삼았다.
  이와 같이 오스만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을 사이에 두고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
있었다. 그들은 콘스탄티노플을 둘러쌌으나 이 도시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1천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동로마 제국에는 이 도시만이 제국의 영토로 남겨졌을
뿐이었다. 투르크 인은 즉시 제국을 삼켜 버릴 듯한 형세로 보였으나 술탄과 황제
사이에는 우호 관계가 유지되고 있었던 듯 서로 인척 관계를 맺었다. 결국 1453
년에 콘스탄티노플은 투르크인의 수중에 떨어졌기 때문에 우리도 앞으로는 오스만
투르크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진척시키면 되겠다. 셀주크인은 이미 역사의 무대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비록 오래 전부터 예견되고 있었던 일이라고는 하지만
유럽을 깜짝 놀라게 한 대사건이었다. 그것은 1천년에 걸친 그리스인의 동로마
제국의 종말인 것이며 이슬람 제국의 유럽 재침략을 의미하는 것이다. 투르크인은
더욱 확대를 계속하여 거의 유럽 전역을 정복하는 듯이 보였으나 빈의 성문에서
저지 당했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날은 역사상으로도 매우 중요한 날이다. 그것은 한 시대의
종막인 동시에 다음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것이다. 중세는 지나갔다. 암흑의
1천년은 지나가고 유럽에 새로운 생명과 에너지가 태동했다. 이것이 바로 르네상스,
즉 문예 부흥의 시초라고 불리는 것이다. 사람들은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난 듯이
눈을 뜨고 몇 세기를 뛰어넘어 고대 그리스의 영광의 날을 살펴봄으로써 그로부터
영감을 받아들이는 듯했다. 교회에 의하여 창조된 어둡고 칙칙한 사고 방식, 다만
인간 정신을 억압해 오기만 한 쇠사슬에 대한 탐구심의 반역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 생겨났다. 고대 그리스의 미에 대한 사랑이 재현되고, 그리하여 유럽은 회화나
조각, 건축 등의 아름다운 작품에 의하여 일시에 꽃이 만발하듯 채색되었다.
  물론 이러한 일체의 현상이 콘스탄티노플 함락과 함께 돌연히 일어난 것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리석은 일이다. 투르크인에 의한 콘스탄티노플의
점령은 다만 어느 정도 변화의 속도를 촉진한 데 불과하다. 그리고 그것은 많은
학자와 지식인들이 그곳을 떠나 서방으로 이동해 간 원인이 되었다. 그들은 때마침
유럽에 고대 그리스 문예를 존중하는 기운이 한창일 때에 그 재보를 이탈리아로
가져왔다. 이런 뜻에서 이 도시의 함락은 르네상스의 전개를 얼마간 도왔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대변화에 비하면 극히 조그마한 동기에 불과하였다. 고대 그리스의
문학과 사상은 이탈리아나 그 밖의 중세 서유럽에서는 별로 새로운 것은 못되었다.
대학에서도 아직 그것을 연구하고 있었고, 학식이 있는 사람이면 이미 대개 알고
있었다. 다만 그것은 소수의 사람에게 국한된 것으로 당대의 주류를 이루는
인생관과 합치되지 않았기 때문에 광범하게 일반화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서서히
사람들의 정신 속에 싹튼 회의를 통하여 새로운 인생관의 소지가 마련되었다.
그들은 눈앞에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그들을 좀더 만족시켜 줄 만한 것을
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회의와 기대가 혼합된 듯한 상태에 있을 때, 그들의
지식을 요구하는 정신은 그리스의 고대 다신교 신앙을 발견하였고, 또한 그 문학을
가슴속 깊이 받아들이게 하였다. 이것은 바로 여태껏 그들이 찾고 있던 것처럼
생각되어 그들의 마음을 정렬로 가득 채웠다.
  르네상스는 처음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는 프랑스, 영국, 기타 여러
나라에서도 점차 꽃을 피워 갔다. 그것은 단순한 그리스의 사상, 문학의 재발견만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좀더 중요한 그 무엇이 있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유럽의
밑바탕에 면면히 흘러온 어떤 기운이 외부로 표출된 것이었다. 이 뭉게뭉게
일어나는 기운은 멀지 않아 여러 가지 모양으로 쏟아져 나와야 할 것이었고,
르네상스는 그것의 한 형태에 불과했다. 
  1932 년 7월 3일
    35. 새로운 항로의 발견

  우리는 이제 유럽에서 중세가 몰락하기 시작하고, 새로운 질서가 대신 등장하는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바로 이 때, 즉 유럽이 새로운 에너지로 충만 되어 있을 때
동양으로부터 황금의 유혹이 닥쳐왔다. 인도와 중국에 갔던 마르코 폴로나 그 밖의
여행가들의 이야기는 유럽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잘 알지도 못하는 동방의 부에
대한 유혹이 많은 사람들을 바다로 끌어냈다. 바로 그 때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었다. 당시 투르크인은 동방으로 가는 해로와 육로를 모두 지배하고
있었으면서도 그다지 무역을 장려하지는 않았다. 대상인이나 무역상들은 이에 화가
났고, 또 동방의 황금을 믿고 일확천금을 꿈꾸는 모험가들로 구성된 새로운 부류도
안절부절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황금의 동양에 이르는 새로운 길을 발견하려고
노력하였다.
  지금은 지구가 둥글고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옛날에 그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설사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이야기하게 되면 교회와의 사이에 곤란한 문제가
일어났다. 그러나 교회를 아무리 두려워해도 지구가 둥글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수는
늘어가기만 하였다. "지구가 둥근 것이라면 서쪽으로 길을 잡아도 중국이나 인도에
갈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였고, 또 다른 사람들은 아프리카를 우회하여 인도에
가려고 생각하였다.
  포르투갈인은 동쪽 항로로 나아가고, 스페인인은 서쪽으로 향하였다. 최초의 큰
성과는 1445 년 포르투갈인에 의한 베르데 곶의 발견이었다. 이 곳은 아프리카의
가장 서쪽에 있는 지점이다. 아프리카 지도를 보면 유럽에서 이 곳으로 내려오다가
남서로 향하여 항해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베르데 곶에서 그
모서리를 돌면 이번에는 키가 남동을 향한다. 이 곳의 발견은 가슴 부푼 희망을
약속하는 징후였다. 사람들은 아프리카를 우회하여 인도에 도착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프리카를 돌아서 가는 항로를 발견하는 데에는 아직도 40 년이 더
필요했다. 1486 년에 역시 포르투갈인 바르톨로뮤 디아즈가 아프리카의 남단인
'희망봉'을 돌았다. 그로부터 몇 년 안되어 또 한 사람의 포르투갈인 바스코 다
가마가 희망봉을 거쳐서 인도로 가는 데 성공했다. 그는 1498 년 말라바르 해안의
캘리컷에 도착했다.
  그래서 포르투갈인들은 인도에 도달하는 경주에서 승리하였다. 그런데 그 사이에
지구의 반대쪽에서도 커다란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쪽에서는 스페인이
이익을 취하게 되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1492 년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다.
  콜럼버스는 가난한 제노바 사람으로서, 지구가 둥글다고 믿고 서쪽을 향하여
바다를 건너서 일본과 인도에 가려고 하였다. 그는 그 여행이 그렇게 오래
걸리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왕들 중에서 그의 탐험 여행을 도와줄 사람을
찾기 위하여 이 나라 저 나라의 궁정을 기웃거렸다. 결국 스페인의 페르디난트와
이사벨라가 동의하였고, 콜럼버스는 세 척의 작은 배로 88 명의 대원을 이끌고
출발하였다. 그것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용감하고도 모험적인 항해였다. 아무도
앞길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콜럼버스에게는 신념이
있었고, 그 신념이 옳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69일간의 항해를 계속한 끝에 그들은
육지에 닿았다. 콜럼버스는 그것이 인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서인도
제도의 한 섬이었다.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본토에 도착한 일은 없고, 또 죽을 때까지
자기가 아시아에 도착했다고 믿고 있었다. 이 콜럼버스의 우스운 착각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어서 아직까지도 이들 여러 섬을 서인도 제도라고 부르고, 또 미국의
원주민은 인도인(인디언), 또는 레드 인디언(Red Indian)이라고 불리고 있다.
  콜럼버스는 일단 유럽으로 돌아왔다가 그 다음해에 더욱 많은 배를 거느리고 다시
대서양을 건너갔다. 당시 생각으로 인도로 가는 새항로의 발견은 유럽 전체에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바스코 다 가마가 동쪽으로 그의 항로를 서둘러
캘리컷에 도착한 것은 바로 이 직후의 일이었다. 이 새 항로를 발견했다는 소식은
유럽 전역에 전파되어 유럽은 더욱더 떠들썩해져 갔다.
  이들 신천지의 지배를 놓고 서로 다툰 경쟁자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이었다. 그러자
교황이 나서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대립을 막기 위하여 다른 여러 민족은 관여치
못하게 하고, 이 두 나라에 유리한 판결을 내렸다. 1493 년 교황은 '경계선 교서'를
발표했다. 그는 아조레스 제도에서 서방 1백 리그(1리그는 4.8km)의 위치에
남북으로 가상의 선을 긋고, 포르투갈은 이 선에서 동쪽의 비기독교도 지역의
전부를, 스페인은 그로부터 서쪽의 육지를 소유할 것을 선언하였다. 이것은 대략 전
세계에서 유럽을 빼고 난 그 나머지에 해당되는 엉터리없는 선물이었는데, 교황이
이것을 선물하는 데는 아무런 비용도 들지 않았다. 아조레스는 대서양 한가운데
있는 제도의 이름인데, 그로부터 서쪽으로 1백 리그(약 3백 마일) 떨어진 곳에
그어진 선에서 서쪽이라면 북아메리카 전부와 남아메리카의 대부분을 포함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 교황은 스페인에게는 아메리카를 몽땅 선물하고,
포르투갈에게는 인도, 중국, 일본, 기타 동방 여러 나라들과 그에 덧붙여서
아프리카까지도 증정한 셈이 되는 것이다!
  포르투갈인은 이 막대한 영토를 점령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것은 결코 손쉬운
작업이 아니었지만, 그들은 얼마간 작업을 진척시켰으며, 더욱더 동쪽으로
나아가려고 하였다. 그들은 1501 년 고아에 도착했다. 말레이 반도에는 1511 년에,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자바에, 또 1576 년에는 중국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그들이 이들 장소를 점령하였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몇 개의
장소에 근거지를 설치한 데 불과했을 뿐이다.
  동방에 거주하는 포르투갈인 중에 페르디난트 마젤란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포르투갈인 고용주와 마찰이 생기자 유럽으로 돌아와 스페인 국민이 되었다.
희망봉을 경유하는 동방 항로로 인도와 동방 제도를 건너간 경험이 있는 그는,
이번에는 서쪽 항로로 미국을 경유하여 그 곳에 가려고 생각하였다. 아마도 그는
콜럼버스가 발견한 육지가 아시아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이미 1513 년에 발보아라는 스페인인이 중앙 아메리카의 파나마에서 산과 들을
횡단하여 태평양에 도달한 바 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그는 이 바다를
'남해'라고 명명하고, 그 기슭에 서서 이 새로운 바다 및 이 바다 위에 나타나는
모든 육지가 그의 주군인 스페인 왕에게 속한 것임을 선언하였다.
  1519 년 마젤란은 서쪽으로 향하는 항해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은 항해 중의
최대의 대항해가 되었다. 그는 다섯 척의 배와 270 명의 선원을 거느리고 대서양을
횡단하여 남아메리카에 이르러 그 대륙의 남단에 이르기까지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는 자신의 선단 중의 한 척을 난파로 잃고 또 한 척은 폐기하였기 때문에, 세
척의 배로 남아메리카 대륙과 한 개의 섬 사이에 있는 해협을 통과하여 저 멀리
전개되는 대해로 나갔다. 이것이 태평양이었다. 마젤란은 이 바다가 대서양에
비하여 대단히 평온했기 때문에 이렇게 명명한 것이다.
  그리고 마젤란은 용감하게도 이 처음 보는 대양을 북쪽으로 올라가서 다시 북서로
돌았다. 이것이야말로 이 항해 중에서 가장 무서운 구간이었다. 아무도 이 구간이
그렇게나 오래 걸리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4개월 가까이, 정확히 말해서
108일간이나 그들은 제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채 바다 위를 떠다녔다. 무서운
고난과 궁핍을 견디어 내고, 마침내 그들은 필리핀에 도달하였다. 그들이 만난
원주민은 그들에게 너무도 친절하여 식량을 주기도 하고 서로 선물을 교환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스페인인은 우락부락하고 거만하였다. 마젤란은 두 추장 사이에
일어난 전투에 참가했다가 피살되었다. 또 그 밖에도 많은 스페인 사람들이 거만한
태도 때문에 이 섬에서 피살되었다.
  대탐험가나 대발견가의 뒤에는 전리품이나 약탈품을 노리는 무뢰한들이 때를 짓고
있었다. 스레인령 아메리카는 특히 극성스레 몰려드는 이런 무리들의 피해를 입어,
콜럼버스와 같은 사람도 그들 때문에 대단한 곤경을 치러야만 했다. 한편으로는
금과 은이 쉴새없이 페루나 멕시코로부터 스페인으로 흘러 들어왔다. 엄청나게 많은
이들 귀금속에 유럽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으며, 스페인은 유럽 제일의 대국으로
올라앉았다. 이 금과 은은 다시 유럽의 다른 나라로도 유출되었기 때문에 동방의
각종 물산을 사들일 돈은 얼마든지 공급되는 형편이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성공은 당연히 다른 나라, 특히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및
북부 독일의 여러 도시인들에게 새로운 파문을 던졌다. 그들은 처음에는 열심히
북쪽 그린란드를 거쳐 아시아나 아메리카에 이르는 통로를 찾아다녔으나 이에
실패하자 이미 알려진 항로로 눈을 돌렸다. 
  1932 년 7월 17일
    36. 말레이시아의 여러 나라

  9세기초부터 4백년 동안 이 동부 자바는 스리비자야의 팽창하는 세력에 위협을
받고 있었으나 운 좋게도 독립을 확보했으며, 그 동안 매우 많은 석조 사원을
건축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거대한 보로보두르라는 사원군은 지금도 볼 수 있으며,
많은 관광객을 모으고 있다. 스리비자야의 지배를 겨우 면한 동부 자바는 이제
오히려 사태를 역전시켜 스리비자야를 위협했다. 양쪽 모두 상업 국가로 시장을
찾아 대양을 누비고 다녔던 그들은 이따금 서로 분쟁을 일으켰다.
  나는 이 자바와 수마트라의 대립을 생각할 때마다 근대 국가의 대립, 이를테면
독일과 영국의 대립을 연상하게 된다. 스리비자야를 누르는 유일한 길은 제해력을
강화시키는 데 있다는 점을 알아차린 동부 자바는, 열심히 해군 병력을 증강시켜
대원정 함대를 출동시켰지만 몇 년 동안이나 적수를 만나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자바는 더욱 강대해지고 공격적으로 되어 갔다. 13세기말쯤에 마자파히트라는 한
도시가 건설되었으며, 그것이 신흥 자바 국가의 수도가 되었다.
  마자파히트 제국은 팽창을 계속했다. 그것은 결코 우연한 결과가 아닌, 국가가
계획적으로 조직한 제국주의적 팽창이었으며, 정예 육해군을 앞세워 수행한
것이었다. 이 팽창의 시대에 수히타라는 한 여성이 여왕으로 군림했던 일도 있었다.
정부는 고도의 통제력을 가진 잘 정비된 기구였던 모양이다. 조세, 관세, 통과세,
내국세 등과 관련된 제도 같은 것은 매우 뛰어났었다는 것이 서양의 역사가들에
의해 증명되고 있다. 정부의 행정 기구 속에는 식민성, 무역성, 후생 보건성, 내무성,
국방성 등이 있었으며, 두 사람의 관리를 주석으로 하고 7명의 재판관을 갖춘 최고
법원도 있었다. 브라만교의 승려가 큰 세력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국왕이 그들을
제어하고 있었다고 한다.
  마자파히트는 상업 국가였기 때문에 당연히 수출이나 수입, 즉 국외로 실어 내는
물품에 대한 무역과 외국으로부터 들여오는 물품에 대한 무역은 면밀한 계획 아래
행해졌다. 이들 무역은 주로 인도, 중국 및 자국의 식민지를 상대로 한 것이었다.
스리비자야와 전쟁 상태에 있는 이상 그 나라나 식민지 사이에 우호적인 무역이
지속되었을 리 는 없었다. 자바 국가는 수백년이나 존속했지만, 마자파히트 제국의
융성기는 1335 년부터 1380 년까지의 겨우 45 년간에 지나지 않았다.
  미얀마(버마)는 몽고인에게 정복당한 적이 있는데, 몽고인의 미얀마 침입 이전까지
이 나라의 수도는 북미얀마의 파간이었다. 2백년 동안 수도로 사용되어 왔던 이
도시는 대단히 아름다운 도시였으며, 이와 필적하는 것으로는 앙코르 말고는
없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볼만한 건축물은 세계 불교 건축물의 정화의
하나로 손꼽히는 아난드 사원이었다. 그 밖에도 장려한 건축물이 많이 있었다.
지금은 파간이 폐허로 되어 있지만, 그것조차도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파간의
융성기는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였다. 그 후 한참 동안 미얀마는 분쟁이 일어나
남북으로 분열되었으나 16세기에 대군주가 남쪽에서 일어나 다시 미얀마를
통일했다. 그의 수도는 남부의 페구였다.
  중국은 말레이시아의 여러 나라에 대해서 항상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명나라의
황제 영락제는 종래의 정책을 변경하기로 결심하고 제독 정화와 함께 방대한 함대를
파견했다. 정화는 도처에 손을 뻗쳐 필리핀, 자바, 수마트라, 말레이 반도 등 거의
모든 섬에 그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실론까지 정복하고 국왕을 사로잡아 중국으로
데리고 돌아간 적도 있다. 마지막 원정에서 그는 페르시아 만까지 이르렀다.
15세기초에 이루어진 정화의 항해는 그가 가는 곳마다 커다란 영향을 남겼다.
힌두교의 마자파히트와 불교의 샴을 억압하기 위해 그는 계획적으로 이슬람교를
후원했다. 말라카는 그의 대함대 보호 아래 확립되었다. 이러한 정화의 태도는 물론
완전히 정치적인 것으로서 종교와는 하등 관계가 없었다. 그 자신은 불교도였다.
  이리하여 말라카 제국은 반마자파히트 세력의 선두에 섰다. 국력은 커졌으며, 점차
자바의 여러 식민지를 침식해 들어가 1478 년에는 마자파히트의 수도가 함락되었다.
그 후 이슬람교는 궁정 및 도시의 종교가 되었다. 그러나 시골에서는 인도와
마찬가지로 옛날부터의 신앙과 신화와 습관이 유지되고 있었다.
  말라카 제국은 스리비자야나 마자파히트에 못지 않게 켜졌으며, 또 오래도록
국권을 유지했지만 좋지 않은 때를 만났다. 포르투갈인이 개입하기 시작한 지 몇
년이 되지 않아, 즉 1511 년에 말라카는 포르투갈인의 손안에 들어갔다. 이리하여
네 번째 제국은 다섯 번째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그러나 다섯 번째 제국의 생명도
길지는 못했다. 어쨌든 역사상 최초로 이 동방 해역에서 유럽이 공격하는 입장이
되고, 또 지배자의 입장에 서게 되었다. 
  1932 년 7월 19일
    37. 동아시아를 점령하기 시작한 유럽

  이미 알고 있겠지만 향료(후추 등)는 적도 부근에 있는 나라들의 더운 기후
아래서 생산되는 것이며, 유럽에서는 전혀 생산되지 않는다. 남인도나 실론에서도
조금 나기는 하지만, 이들 향료의 대부분은 몰루카즈 제도라는 섬에서 생산된다. 그
때문에 이 섬들은 '향료 제도'라고도 불린다. 먼 옛날부터 이 향료에 대해 육식을
즐기는 유럽인들에게 큰 수요가 있어 매년 규칙적으로 무역이 행해지곤 했다.
그런데 이 향료가 유럽에 도달할 즈음이면 이것들은 매우 비싼 값이 되었다. 로마
시대에는 향료의 값이 같은 무게의 금과 똑같았을 정도다.
  향료가 그토록 귀중한 것이고 서방에서 수요가 그렇게 컸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은
스스로 그것을 손에 넣을 수단을 강구하지 못했다. 오랫동안 향료 무역은 인도인의
수중에 있었으나, 그 후 아랍인이 이것을 지배하기도 했다. 포르투갈인과 스페인인을
세계의 서로 다른 방향에서 끌어당겨 마침내 말레이시아에서 만나게 한 것도 이
향료의 매력이었다. 스페인은 동방으로 오는 도중 아메리카에서 막대한 이익을
취하는 데 바빠 향료의 개발에서는 포르투갈이 앞섰다.
  바스코 다 가마가 희망봉을 돌아 인도에 도착하자 곧이어 많은 포르투갈 배들이
같은 항로를 따라 더욱 동쪽으로 뻗어 나갔다. 마침 그 무렵, 향료와 그 밖의 무역을
한 손에 쥐고 있던 것은 말라카 제국이었다. 그래서 포르투갈인은 당장 그 나라 및
아랍 상인과 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들의 총독 알부케르크는 1511 년 말라카를
점령하고 이슬람 무역상을 물리쳤다. 바야흐로 포르투갈인이 유럽 무역을 좌우하기
시작했으며, 그들의 수도 리스본은 향료와 그 밖의 동양 산물을 집산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그 동안 향료 제도에 대한 탐색은 계속되었으며, 후에 태평양을 횡단한 마젤란도
이전에 몰루카즈 제도를 발견한 탐험대의 한 대원이었다. 60 년 이상 유럽의 향료
무역에는 포르투갈의 경쟁 상대가 없었다. 이어서 1565 년 스페인이 필리핀 제도를
점령했으며, 이로써 제2의 유럽 강국이 동방 해상에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스페인인은 상업을 본령으로 하는 민족이 아니었기 때문에 포르투갈의 무역에
그다지 장애를 주지는 않았다.
  포르투갈은 군대나 선교사를 동방으로 보내어 한편으로는 위협하고 또 한편으로는
회유하며 향료 무역을 독점하였고, 마침내는 페르시아나 이집트까지도 포르투갈인의
손을 거치지 않으면 향료를 입수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들은 어떤 나라에 대해서도
향료 제도와의 직접무역을 묵인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포르투갈은 부유하게
되었지만, 식민지를 개발하려는 의도는 조금도 갖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조그만 나라가 16세기 전체에 걸쳐서 동방에서 얼마만한 업적을 올렸는가를
생각하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스페인은 필리핀을 손아귀에 꼭 틀어쥐고 가능한 한 많은 이익을 빼내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공물을 징수한 것 이외에는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그들은 전부터 포르투갈인과 동방 해상에서 싸움을 일으키지 않도록 협정을 맺고
있었다. 또한 스페인 정부는 스페인령 아메리카와의 무역을 필리핀을 지배하고 있는
스페인 사람들에게 허용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은 멕시코나 페루의 금, 은이
동방으로 유출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1 년에 단 1척의 배가
아메리카와 필리핀을 왕복할 뿐이었다. 그것은 '마닐라선'이라고 불렸는데, 필리핀의
스페인인들이 얼마나 이 정기선을 학수 고대했는지를 상상할 수 있다. 240 년 동안
이 '마닐라선'은 태평양을 가로질러 이 섬들과 아메리카 사이를 왕복했다.
  스페인과 포루투갈의 성공을 보고 유럽의 다른 여러 나라는 부러워한 나머지
얼굴빛이 달라졌다. 영국인과 네덜란드인은 모두 극동으로 진출하여 그 곳에 있는
스페인인과 포르투갈인을 습격했다. 스페인인들은 모두 필리핀에 모여 있었기
때문에 이 습격을 쉽게 막아낼 수 있었지만, 반면 포르투갈인은 큰 타격을 입었다.
그들의 동방 제국은 홍해에서 몰루카즈향료 제도까지 6천 마일 사이에 퍼져
있었다. 그들은 아덴 부근, 페르시아, 실론, 인도 연안 각지, 그리고 물론 동방의
여러 도서 지방 일대와 말레이에까지 근거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의 진출 이후 그들은 점차적으로 동방 식민지를 상실해 갔고, 도시나
거류지가 잇달아 영국이나 네덜란드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1641 년에는 말라카도
함락되었으며, 남은 것은 인도와 그 밖의 조그만 전진 기지뿐이었다. 서인도의
고아는 이 나라의 중요한 전진 기지로서 지금까지도 포르투갈인이 살고 있으며, 수
년 전에 세워진 포르투갈 공화국에 속해 있다. 당시 악바르 대왕은 고아를
포르투갈인의 손으로부터 되찾으려고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포르투갈은 동양 역사로부터 멀어져 갔다. 이 소국은 놀랄 만큼 크게
입을 벌리고 아시아를 물기는 했지만, 그것을 완전히 삼키지는 못하고 입 속에서
우물우물 씹고 있는 동안에 숨이 막혀 버린 것이다. 스페인의 역할도 축소되어
갔다. 엄청난 이익을 보장하는 동방 무역의 지배는 바야흐로 네덜란드와 영국의
손으로 넘어갔다. 이 두 나라는 전부터 상사를 만들어 그 목적을 위해 전력을 다해
왔다. 영국에서는 1600 년에 엘리자베스 여왕이 동인도 회사에 특허장을 주었고, 2
년 후에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창립되었다. 이들 회사는 모두 오로지 무역만을
목적으로 하는 사기업체에 지나지 않았지만 종종 국가로부터 원조도 받았다. 그들
회사는 주로 말레이시아의 향료 무역을 다루는 것이었다. 인도는 그 무렵 무굴 왕조
밑에서 강대한 국위를 떨치고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존재였다. 
  1932 년 7월 22일
    38. 중국의 태평 성대(명나라)

  동아시아에서 중국까지는 아주 가깝다. 이번에는 이 나라를 찾아가 보기로 하자.
쿠빌라이가 세운 원 왕조는 왕위 다툼과 정치 혼란, 그리고 민중 반란으로
쇠퇴하더니, 결국 몽고인들은 1368 년에 만리 장성 밖으로 쫓겨났다. 이 반란을
지도한 홍무제주원장은 본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서 거의 이렇다 할 학식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삶이라는 더 한층 큰 학교에서 우수한 학생으로
성공을 거두었으며, 나중에는 더욱 현명한 황제가 되었다. 그는 황제가 되고 나서도
평생 그가 민중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것을 잊지 않았기 때문에 절대로 잘난
체하거나 우쭐해져서 자기 실수를 잊는 일이 없었다. 그의 재위 기간 30 년 동안의
치세는 그가 줄곧 그 자신을 낳은 서민의 생활을 개선하는 데에 힘을 기울였다는
것으로 지금도 기억되고 있다. 죽을 때까지 그는 어릴 때의 소박한 취미를 계속
가지고 있었다.
  제독 정화가 이끄는 대원정 함대가 말레이시아에 파견된 것은 영락제 시대였음은
이미 얘기했다. 정화는 30 년 가까이나 동방 해상을 항해하면서 멀리 페르시아
만까지 이르렀다. 이것은 마치 변방의 여러 나라를 복속시키려는 제국주의적
기도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분명히 정복이라든가 그 밖의 전리품을 목표로 한 것은
아니었다. 십중팔구는 샴이나 마자파히트의 팽창이 영락제가 원정군을 파견하도록
자초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유야 어쨌든 이 원정군은 중대한 결과를 남겼다. 그것은
마자파히트와 샴을 제압한 도시에 새 이슬람 국가 말라카의 진출을 촉진시켰으며,
또한 중국 문화를 인도네시아와 동방 일대에 침투시켰다.
  15세기말 중국은 경제력, 산업, 문화에 있어서 유럽을 훨씬 능가하고 있었다.
명대를 통해서 유럽이나 그 밖의 어떤 나라도 민중의 복지와 그들의 예술 활동에서
중국과 비교될 수 있을 만한 것은 없었다. 더욱이 그 무렵 유럽은 위대한 르네상스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명나라 때의 예술이 오늘날 널리 칭찬 받는 이유의 하나는 볼만한 작품들이
무수히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커다란 기념비가 있는가 하면, 목조, 상아 세공,
경옥 세공 등이 있으며, 또 청동 화병이나 자기류도 있다. 명나라 말기에는 디자인이
지나치게 세련되어 그것이 오히려 조각이나 회화의 품위를 손상시켰을 정도다.
  포르투갈인들은 처음에는 포악한 행동으로 중국에 거점을 확보하려 했지만
실패하였고, 종래보다 평화적이고 겸손한 태도를 취한 결과, 1557 년에는 광동
부근에 거류지를 허가 받을 수 있었다. 마카오는 그 때 그들이 세운 것이다.
  포르투갈인과 함께 기독교 선교사가 건너왔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성
프란시스 사비에르였다. 그는 그의 생애의 상당히 긴 기간을 인도에서 지냈다.
인도에 그의 이름을 딴 선교 학교가 많이 있다는 것을 너는 깨닫게 될 것이다. 그는
일본에도 갔었지만 중국의 어떤 항구광동에서 상륙 허가를 기다리는 동안에
죽었다. 기독교의 포교는 중국에서는 장려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예수회 성직자로서
불교 학승을 위장하여 수년간 중국어를 배운 사람이 있다. 그는 훌륭한 유학자가
되었으며, 또한 과학자로서도 명성을 떨쳤다. 그는 마테오 리치라는 사람이다. 그는
매우 유능하고 훌륭한 학자였으며, 아첨을 잘하는 탓으로 황제의 마음에 들었다.
그는 나중에 위장을 벗어 던졌지만 그의 영향에 의해 기독교는 중국에서 훨씬 좋은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다.
  17세기 중엽 명나라가 몰락할 무렵 중국 북부 지방에 만주족이 세력을 확충하고
있었다. 중국이 서로 적대시하는 파벌로 사분 오열되어 있지 않았더라면 만주족도
쉽사리 중국을 정복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외국의 침략이라는 것은 중국이건
인도이건 다른 어느 나라일지라도 그 나라 자체가 약점을 갖고 있고 국민들 내부에
분쟁이 일어나고 있을 때 성공하는 법이다. 이 경우의 중국도 전국적으로 분쟁이
그치지 않았다. 아마도 명 왕조 말기의 황제들은 부패하고 무능해졌으며, 왕조는
경제적으로도 사회 혁명을 초래할 만큼 궁핍한 상태에 있었을 것이다. 또한
만주족과의 끊임없는 분쟁 해결에도 경비가 많이 들어 큰 부담이 되고 있었다.
  비적의 두목이 각지에서 머리를 들고 일어났으며,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세력을
가졌던 사람 이자성은 스스로 황제를 참칭하고 있을 정도였다. 반만주 항전 부대를
이끄는 장군은 오삼계였다. 그는 비적 황제와 만주족 틈에 끼여 애를 태우다가
어리석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명을 배반할 의도가 있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만주족에게 비적 토벌에 협조해 줄 것을 호소했다. 만주족은 기회는 왔다 싶어서
이것을 승인하였으며, 그리고 물론 북경에 자리를 잡았다. 이렇게 되자 오삼계는
명나라에 충성을 바치는 것은 이미 무익하다고 간파하였고, 따라서 명나라와의
관계를 끝장내기로 하고 외래 침략자인 만주족에 합류했다.
  이 오삼계라는 인물이 오늘날에도 중국에서 지탄의 대상이 되고, 중국 역사상
최대의 배반자의 표본처럼 취급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나라의 방위를 위임받고
있었으면서도 그는 적과 손을 잡았으며 더구나 적을 위해 남부 여러 성의 복속에도
개입했던 것이다. 그는 그 대가로 그가 적을 위해 획득해 주었던 여러 성의 태수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만주족이 그토록 쉽사리 중국을 정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것 말고도
중국인(한족)을 회유하는 일에 깊이 마음을 썼다. 옛날 타타르인의 침략에는 왕왕
잔학성과 살육이 뒤따랐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중국인 관리의 협력을 획득하는 데
온갖 노력을 다하여 같은 사람이 전의 명 왕조 시대에 있던 부서에 그대로 계속
있도록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인은 매우 높은 관리직을 차지했다. 종래 명의
통치 방식에 있어서도 추호도 변경된 것은 없었다. 제도도 얼핏 보기에 옛날과
다름없었으며, 다만 최고 권력에서 모든 것을 조종하는 손이 교체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중국인이 외국인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두 가지의 중요한
사실이 있었다. 만주족의 군대가 국내의 요충에 주둔했던 것과 변발 또는 돈미를
기르는 만주족의 풍속이 종속의 증거로서 중국인에게 강제되었던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중국인이라고 하면 항상 이 '변발'을 연상하곤 한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로 중국 고유의 풍속이 아니다. 그것은 예속의 의미를 나타내는 상징이었던
것이다. 중국인은 지금 이 '변발'의 풍속을 버렸다. 
  1932 년 7월 23일
    39. 일본의 쇄국 정책

  몽고인이 중국에서 쫓겨나자 곧 코리아에 혁명이 일어나서 몽고인에게 복종해
왔던 왕조고려는 무너졌다. 이 반란의 주모자는 코리아의 이성계였다. 그는
새로운 군주가 되었으며, 1392 년부터 1910 년 일본이 코리아를 합병할 때까지
5백여 년 동안 존속한 왕조의 창건자가 되었다. 그 때 서울한양이 수도로
정해져서 오늘에 이르렀다. 우리는 이 5백년 동안의 코리아 역사에 깊이 파고들
수는 없다.
 일본에서는 이미 너도 알고 있는 바와 같이 12세기말쯤에 쇼군이 통치의 실권자가
되었다. 천황은 거의 인형과 다를 바가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가마쿠라
막부라고 불리는 최초의 쇼군 정치는 1백50 년 가까이 계속되었으며, 유능한
정치력을 발휘하여 평화를 유지했다. 이에 뒤이어 언제나 그렇지만 막부의 쇠퇴가
시작되었고, 무능과 사치와 내란이 거듭되었다. 천황 고다이고가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하여 쇼군 호조 다카도키와 권력 다툼을 벌였다. 천황은 이 권력
투쟁에서 실패했으며, 종래의 쇼군 집안 호조도 쓰러지고, 1338 년에 새로운 계통의
쇼군 가문이 권력을 장악했다. 그것이 아시카가 막부로서 235 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 기간은 혼란과 압제의 시대였다. 그것은 거의 중국의 명 왕조와 시대를
같이한다. 쇼군 중의 한 사람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열심히 명의 환심을 사는 데
힘쓴 끝에 스스로 명 황제의 신하라고 일컬었다. 일본의 역사가들은 이것이 일본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하여 몹시 화를 내고 이 인물을 심하게 비난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세 명의 인물이 나타나서 1백년 동안의 내전 상태를 극복했다. 영주
즉 귀족 출신인 오다 노부나가, 농민 출신인 도요토미 히데요시, 대귀족의 한 사람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바로 그들이다. 16세기가 끝날 무렵에 일본은 다시
통일되었다. 농부인 히데요시는 일본의 탁월한 정치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주 못생겼으며, 키가 작고 원숭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일본이 통일되자 이 사람들이 그들의 대군대를 통솔하기가 어려워졌다. 특별한
배출구가 따로 없었던 그들은 코리아를 침략했다. 그러나 그들은 오래 가지 않아
후회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코리아의 해군 제독 이순신은 일본을 격파했으며,
두 나라 사이에 가로놓인 바다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코리아는 주로 거북 등과
비슷한 지붕이 있고, 철판을 깐 신식 배를 사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거북선'이라고 불린 그 배는 전진 후퇴가 모두 자유 자재여서 전투력이
비상하였으며, 일본 군함은 그 때문에 격파되었다.
  위에서 든 세 명 가운데 마지막 인물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내란에 의해 커다란
이익을 획득했다. 그런 까닭으로 그는 엄청나게 부유해졌으며, 일본의 7분의 1을
소유하게 되었다. 에도에 수도를 세운 것은 그였으며, 그 곳은 그의 소유지의 복판에
있었다. 그 곳이 지금의 도쿄이다. 이에야스는 1603 년에 쇼군이 되었으며, 그
해부터 250 년 이상 계속된 막부로서는 세 번째이자 마지막인 도쿠가와 막부가
시작되었다.
  1549 년 전해진 예수회는 포교를 허가 받았을 뿐 아니라 장려되기까지 했다.
그것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인데, 다시 말하면 불교 사원을 음모의 온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불교 승려는 탄압했으나 기독교 선교사에게는 호의를 보였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서 일본인은 그 선교사들이 위험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갑자기 정책을 변경하여 선교사를 추방하려 했다. 1587 년에는 반기독교
법령이 발표되어 기독교 선교사는 모두 20일 이내에 일본에서 퇴거하도록
명령받았으며, 법을 어기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선언했다. 법령은 상인을 목표로
한 것은 아니었다. 상인들은 잔류해서 거래를 계속해도 좋다고 했다. 다만 그들이
상선에 선교사를 싣고 왔을 경우에는 배와 물품을 모두 몰수한다는 조건이
덧붙여졌을 뿐이다. 이 법령은 오로지 정치적 이유에 의해서 제정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기독교의 위험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그는 선교사와 그 신자들이
정치적으로 위험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느꼈다. 그의 예감은 결코 빗나갔다고는 할
수 없다.
  일본은 1636 년에 마침내 모든 대외 창구를 봉인하였다. 모든 일본인은
기독교도와 비기독교도를 불문하고 어떤 이유에서든지 해외 도항이 금지되었다.
그리고 해외에 살고 있던 일본인은 고국으로 돌아오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이것을
범하는 자는 사형에 처해졌다. 소수의 네덜란드인만이 간신히 남았으나 그들도 항구
도시 나가사키로부터 단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었으며, 물론 내지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 1641 년에는 이들 네덜란드인조차도 나가사키 항 밖에 있는 조그만 섬
이즈시마로 옮겨 거기서 죄수와 같은 취급을 받았다. 그리하여 처음 포르투갈인이
발자취를 남긴 지 꼭 99 년 만에 일본은 모든 대외 교섭을 단절하고 국내에만
틀어박히게 되었다. 
  1932 년 7월 1일, 8월 5일
    40. 르네상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날은 역사상으로도 매우 중요한 날이다. 그것은 한 시대의
종막인 동시에 다음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것이다. 중세는 지나갔다. 암흑의
1천년은 지나가고 유럽에 새로운 생명과 에너지가 태동했다. 이것이 바로 르네상스,
즉 문예 부흥의 시초라고 불리는 것이다. 사람들은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난 듯이
눈을 뜨고 몇 세기를 뛰어넘어 고대 그리스의 영광의 날을 살펴봄으로써 그로부터
영감을 받아들이는 듯했다. 교회에 의하여 창도된 어둡고 칙칙한 사고 방식, 다만
인간 정신을 억압해오기만한 쇠사슬에 대한 탐구심의 반역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
생겨났다. 고대 그리스의 미에 대한 사랑이 재현되고, 그리하여 유럽은 회화나 조각,
건축 등의 아름다운 작품에 의하여 일시에 꽃이 만발하듯 채색되었다.
  피렌체는 이미 13, 14세기에 이탈리아어로 글을 쓴 위대한 시인 단테와
페트라르카를 낳았다. 중세기를 통하여 이 도시는 오랫동안 유럽 금융의 중심지로서
대금업자가 이 곳으로 모여들었다. 부유하기는 하지만 그다지 신통치 않은 사람들이
공화국을 이루어 때때로 그들 중에서 나온 위대한 사람들을 학대한 일도 있었기
때문에 '경박한 피렌체'라고 불리기도 했다.
  대금업자와 압제자와 엉터리 정치가들이 판을 쳤음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는
주목할 만한 세 인물을 배출했다. 이들은 바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그리고 라파엘로였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위대한 예술가였고, 또한 화가였으며,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는 다른 방면에서도 뛰어났다. 미켈란젤로는 훌륭한
조각가로서 단단한 대리석으로 힘이 넘치는 조각상을 만들어 냈다. 그는 또 위대한
건축가로서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은 거의 그의 손으로 지어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레오나르도가 항공 실험, 즉 공중 비행을 꾀한
일이다. 그는 그 일에 성공하지는 못했으나 성공에 이르는 과정의 상당한 수준까지
이르렀다. 다만 그의 이론과 실험을 이어받은 후계자가 없었다. 만약 그를 뒤따른
한두 사람의 레오나르도가 있었다면 현대의 항공기는 이미 2--3백년 전에
발명되었을 것이다. 이상하고도 경이적인 이 인물은 1452 년부터 1519 년까지
살았다. 후세의 사람들은 그의 생에는 '자연과의 대화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끊임없이 질문을 내놓고 실험에 의해 그 해답을 이끌어 내려 했고, 미래를
포착하려고 끝없는 전진을 계속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시대15세기와 16세기에는 과학도 차츰 진보하여 궤도에 올랐다. 과학은
교회와 격심하게 충돌했다. 교회가 민중에게 사고와 실험을 허용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회의 눈으로 본다면 우주의 중심은 지구였고, 태양이 그 둘레를 돌며
별은 하늘 속에 고정된 하나의 점이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이설을 들고 나오는
자는 그가 누구든 이단자였고 종교 재판을 받아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페르니쿠스라는 폴란드인은 용감히 이 신앙에 도전하여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돌고 있다는 것을 주장함으로써 우주에 관한 근대적 관념의 기초를 확립했다.
  코페르니쿠스는 그의 혁명적이고 이단적 견해에 대한 교회로부터의 분노와 수난을
그럭저럭 면할 수 있었으나, 그의 후계자들은 그것이 불가능했다. 이탈리아인
조르다노 브루노는 지구가 태양 둘레를 돌며, 별은 그 하나하나가 태양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다가 1600 년에 로마에서 교회에 의해 화형을 당했다. 똑같은 시대
사람으로서 망원경을 발명한 갈릴레오도 역시 교회의 주장처럼 대지는 우주의
중심이며, 태양이 그것을 둘러싸고 돈다는 것을 시인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속죄를 위해 얼마 동안 감옥에서 지내야 했다.
  16세기의 뛰어난 자연 과학자 가운데 하비가 있다. 그는 혈액의 순환 작용을
결정적으로 증명한 사람이다. 17세기가 되면 최대의 자연 과학자의 이름이 하나 더
늘어나게 된다. 대수학자 아이작 뉴턴이다. 그는 중력의 법칙만유 인력을
발견하여 자연 속에 감추어진 비밀을 또 한 꺼풀 벗겨 냈다. 
  1932 년 6월 28일, 8월 8일
    41. 종교 개혁과 농민 전쟁

  십자군 전쟁은 점점 쇠퇴해 가고 있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희망과 정열에 불타서
출발했으나 결국은 아무것도 이루어 놓을 수 없었으며, 또 이런 경우 반작용은 더욱
쉽게 생기는 것이다. 현실의 교회에 만족할 수 없게 되어 막연하게, 그리고
희미하게나마 사람들은 다른 장소에서 빛을 찾기 시작하였다. 교회는 폭력을 써서
사람들의 정신을 계속 지배하려 했으나, 이것은 폭력과 같은 방법이 결국 아무 힘도
없는 무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고 있었던 소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개인이나
집단의 양심적 각성을 마구 억압하고, 종교적 회의에 대해서도 논증과 설득이 아닌
몽둥이와 화형으로 대처해 나갔다.
  교회는 1233 년에 종교 재판을 개시함으로써 더욱더 대규모로 종교에서의 폭력
지배를 강화하고 나섰다. 이것은 신앙의 정통성 여부를 심문하는 일종의 법정으로서,
만일 그들이 책정한 기준에 맞지 않을 때는 화형에 처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들은 쉴새없이 '이단자 사냥'을 해서 수백 명이나 되는 사람을 형틀에 매달아
태워 죽였다. 이보다 더 심했던 것은 전향을 강요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가해진
고문이었다. 불쌍하고 불행한 수많은 여인들이 마녀로 고발되어 화형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때때로, 특히 영국이나 스코틀랜드에서는 종교 재판에 의해서가
아니라 폭도들에 의하여 행해진 적도 있었다.
  교회의 비판을 상당히 자유로이 시작한 사람 중의 하나가 영국인 존
위클리프였다. 그는 성직자로 있으면서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를 겸하고 있었다.
그는 처음으로 '성서'를 영어로 번역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살아 있는
동안에는 간신히 로마의 노여움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죽은 지 31 년째인 1415
년에 교회 공의회는 그의 뼈를 파내어 화형에 처하도록 명령하였으며, 그 명령은
그대로 시행되었다.
  위클리프의 뼈는 모독당하고 불태워졌으나, 그의 학설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갔다. 그 영향은 지금의 체코슬로바키아인 보헤미아에까지 미치고, 프라하 대학의
총장이 된 요하네스 후스에게 전달되었다. 그는 자신의 견해 때문에 교황에게 파문
당했으나, 그의 고향 거리에서는 그의 인기가 대단했기 때문에 어떻게 더 이상 손을
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함정을 만들어 놓고 그에게 황제의 보증서를 주어
마침 교회 공의회가 개최되고 있던 스위스의 콘스탄스로 초대하였다. 교회 공의회는
그가 출두하자 그 자리에서 그의 잘못을 고백하라고 강요했다. 그는 마음에도 없는
일을 고백할 수는 없다고 거부했다. 그러자 그들은 약속을 위반하고 황제의
보증서에도 불구하고 그를 산채로 화형 시켰다. 이것은 1415 년의 일이었다. 후스는
진실로 강직하고 굳센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사악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를
말하기보다는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이다. 그는 양심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를
위하여 죽었다. 그는 체코인들 사이에서 영웅이 되어 그에 관한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체코슬로바키아에 전해지고 있다.
  마침내 16세기초 독일에서, 로마 교회에 대한 반란의 대지도자가 된 마틴 루터가
나타났다. 그는 우연히 로마를 방문하여 교회의 타락과 호사스러움을 보고 교회에
정이 떨어진 한 젊은 성직자였다. 그가 지도한 종교적 항쟁은 확대 일로에 있었으며,
마침내 로마 교회를 양분하고, 다시 서구를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두 개의
진영으로 분열시키기에 이르렀다. 러시아의 그리스 정교회와 동유럽은 이 분쟁에
참가하지 않았다. 로마 교회에 관한 한 그 자체가 참된 신앙과는 거리가 매우
멀어졌음이 폭로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프로테스탄트들의 반란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로마 교회의 여러 가지
교조에 항의했기(protested) 때문에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고 불린다. 이 때를
기점으로 하여 서구의 기독교는 두 개의 종파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로
양분되었다. 그리고 프로테스탄트는 다시 많은 분파로 갈라졌다.
  이 반로마 교회 운동을 종교 개혁이라고 한다. 그것은 대체로 교회의 부패와
권위주의에 대한 민중 폭동이었다. 또한 많은 군주들은 그들을 지배하려 드는
교회의 의도를 분쇄하고 싶어했다. 그들은 정부에 대한 교황의 간섭에 심한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또 종교 개혁에는 제3의 측면이 있었다. 그것은 충실한
교회인이 교회의 부패를 내부로부터 수술하려고 한 것이었다.
  너는 아마도 로마 교회 내에 프란체스코파와 도미니크파라는 두 개의 교단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마틴 루터가 세력을 확립해 나가고 있을 무렵인
16세기에 스페인 사람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에 의해 로마 가톨릭에 속하는 또 하나의
새로운 교단이 세워졌다. 그는 그 교단에 '예수회'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단원을
'제주이트'라고 불렀다. 이 '예수회'는 아주 색다른 단체였다. 그것은 사람들을
교회나 교황을 위한 봉사에 전렴하도록 단련하는 것을 목표로 한 교단이었다.
엄격한 훈련의 결과로 상당한 성과를 올려 놀랄 만큼 유능하고 신앙심이 두터운
교회의 종복이 양성되었다. 그들은 교회를 진심으로 믿고 맹목적으로 복종하며,
조금도 의문을 품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렸다. 교회의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바친다고 한다. 그들은 교회에 대해 멸사 봉공함으로써 칭찬을
받고 있다. 교회의 선이 모든 것을 합리화하고 모든 것을 변호했다.
  영국에서는 몇 번이나 결혼한 헨리 8세가 교황에 반대하고
프로테스탄트에게보다는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호의를 보였다. 그는 교회 재산에
눈독을 들이고, 교황과 인연을 끊은 다음 사원, 수도원, 교회가 가지고 있던 막대한
소유지를 전부 몰수했다. 교황과 인연을 끊은 개인적인 이유는 그가 그의 아내와
이혼하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려고 한 데서부터 비롯되었다.
  프랑스는 특수한 정세에 처해 있었다. 당시(루이 13세의 재위 기간)의 재상은
추기경 리슐리외 였으며, 사실상 그가 왕국을 통치하고 있었다. 리슐리외는 프랑스를
교황에 동조하도록 하는 한편 신교를 일소했다. 반면에 리슐리외는 고도의 정치적인
권모 술수를 부렸다. 즉 독일에 내란을 일으켜서 세력을 약화시키고, 분열 상태로
두기 위해 독일의 신교를 뒤에서 밀어 주었던 것이다. 프랑스와 독일의 상호 적대
관계는 한 올의 실처럼 유럽 역사의 일면을 이어가고 있다.
  루터나 프로테스탄트들은 민중의 지지에 큰 힘을 얻었다. 그것은 당시 민중이
로마 교회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농민은 비참하기 짝이 없는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자주 폭동을 일으켰다. 독일에서
일어난 소규모 농민 폭동이 확대되어 본격적인 농민 전쟁으로까지 발전했다. 가난한
농민들은 그들을 짓누르고 있던 나쁜 제도에 대해 들고 일어났으며, '농노제의
철폐'와 '어획 수렵권의 부여'라는 지극히 평범하고 간단한 요구를 내걸었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여지없이 거절당했으며, 독일의 군주들은 온갖 야만성을 다 발휘하여
농민 탄압을 시도했다.
  그런데 대개혁가인 루터는 어떤 태도를 취했던 것일까? 그는 가난한 농민들의
입장에 서서 그들의 공정한 요구를 지지했던 것일까? 아니다! '농노제의 철폐'라는
농민의 요구를 보고 루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조항은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만들며,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정신적 왕국을 표면적인 현세의 왕국으로 개조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지상의 왕국은 인간의 불평등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지주이고 나머지 사람은 농노이며, 또 어떤 사람은
군주이고 나머지 사람은 신하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는 농민들을 저주하고 농민
반란군을 죽일 것을 호소했다. "그러므로 공공연하게 또는 은밀하게 그들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를 막론하고 그것을 하게 하라. 대체로 유해 유독하며 자신이
악마의 화신이라는 점에서 반도들보다 더한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라. 그대는 농민 반도들을 죽이기를 마치 미친개를 그렇게 하듯이 해야 한다.
만약 그대가 그들을 공격하지 않으면 그들이 그대를 공격할 것이며, 그리고 그대의
토지를 모두 빼앗아 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종교 지도자이며 특히 개혁가라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멋들어진 말이다! 그러므로 자유니 자율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상류 계급에게만 관계되는 것이지 일반 대중을 위한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신흥 부르주아의 힘이 강했던 곳에서는 신교가 득세했다. 캘빈파는 부르주아의
성장과 상응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에 세력이 강해졌다. 캘빈은 종교적인 일에
있어서는 지극히 편협하여 이단자들을 고문하거나 불에 태워 죽이기도 했으며,
신자에게는 엄격하기 이를 데 없는 규율을 강요했다. 그러나 세속의 업무에 관한
그의 설교는 로마의 그것과는 반대로, 당시 발달해 가고 있던 상공업에 아주 적합한
것이었다. 업무상의 이윤은 축복되고 신용은 장려되었다. 이리하여 신흥 부르주아는
이 낡은 신앙의 새로운 해석을 채택했으며, 엉터리 같은 양심으로써 돈벌이에
분주했다. 그들은 봉건 귀족에 대한 자기들의 투쟁에 대중을 이용했다. 귀족과의
싸움에서 개가를 올린 지금, 그들은 대중을 무시하고 그들 위에 군림하게 되었다.

  1932 년 8월 26일, 27일
    42. 16, 17세기 유럽의 절대 왕정

  16세기의 유럽에서는 왕들이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양파로 갈려 있었다. 그
무렵에는 민중은 문제시되지도 않았고, 주요한 것은 군주였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프랑스, 스페인은 가톨릭이었으며, 독일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반반이었고, 영국은 다만 왕이 그것을 선택했다는 이유 때문에 프로테스탄트가
되었다. 또한 영국이 프로테스탄트였다는 점은 영국이 때때로 정복과 압박을 꾀해
온 피정복국인 아일랜드가 가톨릭으로 머물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민중의 신앙이 문제가 안됐다는 것도 완전히 옳았다고 할 수는 없다. 마지막에는
그것이 문제가 되어 전쟁이나 혁명이 수없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종교적 측면과
정치, 경제적 측면을 확연히 구분하기는 매우 어렵다.
  로마에 대한 프로테스탄트의 반란은 특히 신흥 상인 계급이 그 세력을 확장한
데서 일어났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들은 종교와 경제간에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많은 군주들은 시민 혁명에 의해 그들의 권위가 타도 당할 위험을
두려워하여 종교 개혁에 양다리를 걸쳤다. 만약 어떤 사람이 교황의 종교적 권위에
도전할 뜻이 있다면, 그는 또 국왕이나 영주의 정치적 권위에 도전할 수도 있을
것이 아닌가? 이것은 국왕들에게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들은 그때까지
옛날 그대로 통치의 신권을 고수하고 있었다. 프로테스탄트 군주라도 이 신권을
내놓고 싶은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종교 개혁이 일어난 뒤에도 유럽의
국왕은 여전히 만능이었다.
  베르사유 궁전은 무책임한 절대 군주제의 상징이었다. 그러므로 동시에
베르사유가 군주제를 근본에서부터 뒤집어 놓은 프랑스 혁명의 전조가 된 것도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러나 이 시대에 혁명이란 아직 창창하게 먼 얘기였다. 국왕
루이 14세는 대왕으로 불렸는데, 태양왕으로 궁정에서 그를 받드는 혹성들에
둘러싸인 태양이었다. 그가 군림한 호화롭고 성대했던 72 년 동안, 즉 1643 년부터
1715 년에 걸쳐 또 하나의 출중한 추기경 마자랭이 수상으로서 그를 보좌했다.
상류층은 모두 영화를 누렸고, 왕실은 문학, 과학, 예술을 비호해 주었으나 영화의
껍질을 한 겹 벗겨 내고 나면 거기에는 빈곤과 궁핍만 있었다. 이것은 한번도 씻은
적이 없는 먼지와 때로 범벅이 된 몸에 걸친 가발과 레이스의 장식과 아름다운
의상의 거짓 세계일 뿐이었다.
  자, 이제 유럽의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 독일로 눈을 돌리자. 1618 년부터
1648 년에 걸쳐 이 나라에는 30 년 전쟁이라는 무서운 내란이 계속되었다. 이것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싸움으로서, 독일의 소제후들과 선제후가 서로에 대항하여,
그리고 황제와 싸웠다. 그래서 당시 가톨릭파였던 프랑스 왕은 분쟁을 확대하기
위해 개입하여 프로테스탄트 측에 붙었고, 또한 이른바 '북방의 사자'인 스웨덴 왕
구스타프 아돌프스가 남하하여 황제를 격파하고 프로테스탄트를 구원했다.
  그러나 독일은 전쟁으로 황폐한 나라가 되어 버렸다. 용병들은 비적과 다름없이
폭행을 일삼고 약탈을 예사로 했다. 군사령부까지도 병졸에게 지불할 돈이나 식량이
없을 때는 약탈의 손을 뻗쳤다. 이런 일이 무려 30 년간이나 계속되었다. 학살과
파괴와 약탈이 매년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상업은 있는 둥 마는 둥이었고, 농토의
경작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식량은 날이 갈수록 줄어들었고, 이에 따라 굶주림은
더욱 심각해졌다. 그리고 그것이 비적과 약탈을 더 한층 부채질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독일은 마치 직업 군인과 용병의 양성소 같은 꼴이었다.
  드디어 이처럼 지긋지긋한 전쟁도 결국 끝났다. 아마도 그것은 더 이상 약탈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상태에서 독일이 전쟁의 상처를
회복하고 다시 일어서기까지는 실로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1648 년의 베스트팔렌
강화 조약에 의해 독일의 내전은 막을 내렸다.
  이에 의해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사실상 실권이 없는 그림자 없은 환영 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 프랑스는 커다란 노획물알자스를 한 조각 잘라 가졌다.
2백년간 프랑스는 이것을 영유한 뒤에 새로운 독일에게 어쩔 수 없이 반환했다.
그런 뒤에 1914 년부터 1918 년까지의 전쟁에서 다시 그것을 빼앗았다. 프랑스는
이 베스트팔렌 강화 조약에 의해 이득을 본 것이다. 그러나 다시 새로운 강국이
독일에서 일어나 프랑스에게는 실로 눈 위의 혹 같은 존재가 되려 하고 있었다. 이
강력한 존재는 호엔촐레른 가가 군림한 프로이센이었다. 
  1932 년 8월 29일
    43. 영국이 왕의 목을 자르다.

  영국의 월터 롤리는 대서양을 횡단하여 지금은 미합중국으로 불리는 아메리카의
동해안에 식민지를 마련했다. 이 지방은 처녀 여왕 엘리자베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버지니아(처녀의 땅)라고 불려졌다. 곧이어 스페인 함대가 아메리카에
달려왔지만, 그들의 속셈은 완전히 실패로 끝남으로써 영국은 의기 충천했다.
   엘리자베스 시대는 영국 역사상 가장 융성한 시대로 손꼽힌다. 엘리자베스는
위대한 여왕이었으며, 영국은 이 시대에 과감한 실천가들을 낳았다. 하지만 이렇게
위대한 여왕이나 또 모험을 좋아하는 그녀의 기사들보다도 더욱 위대했던 인물들은
이 시대의 시인과 극작가들이며, 이들 가운데 셰익스피어는 커다란 봉우리로 우뚝
솟아 있다.
  이렇듯 화려한 엘리자베스의 치세가 막을 내리고 제임스 1세가 즉위했다. 그는
왕권 신수설의 신봉자로서 의회를 싫어했고, 또한 엘리자베스만큼 현명치 못한
관계로 얼마 안 가서 그와 의회 사이에는 분쟁이 일어났다. 끝끝내 완강하기만 했던
프로테스탄트가 1620 년 메이 플라워호를 타고 영원히 조국을 버린 채 아메리카로
건너간 것도 이 때의 일이었다. 그들은 제임스 1세의 전제 정치에 반대하였고, 또
일찍부터 영국 교회에 불만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영국 교회가 아직 충분히
프로테스탄트적이라고 생각지 않았기 때문에 집을 버리고 사랑하는 조국을 뒤로
하고서 미지의 신천지를 목표로 대서양에 배를 띄운 것이었다. 그들은 아메리카
북부 해안의 어떤 곳에 상륙하여 그 곳을 뉴 플리머스라고 이름지었다. 그 후에도
많은 개척자들이 줄지어 건너감으로써 식민지의 수효는 점차 늘어나 13개를
헤아리게 되었으며, 이것들은 모두 동해안을 따라 퍼져 있었다. 이들 식민지가
발달하여 마침내는 합중국이 되었는데,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시대보다 훨씬 뒤의
이야기이다.
  제임스 1세의 아들은 찰스 1세였는데, 1625 년에 그가 국왕이 되면서 곧
기억해야 할 사건이 발생했다. 1628 년 의회가 영국 사상 유명한 문서가 된 '권리
청원서'를 왕에게 제출한 것이다. 이 '청원'에는 국왕은 절대 군주가 아니라는 것과
그가 해서는 안될 많은 사항이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즉 그는 불법으로
가유민에게 과세하거나 자유민을 투옥해서는 안되며, 체포해서도 안된다는 사항
등이 포함되어 있다. 해도 괜찮은 일과 해서는 안되는 일에 제한을 받게 된 국왕은
격노하여 의회를 해산하고 얼마 동안 의회 없는 통치를 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자 그는 자금이 궁해져 할 수 없이 특별 의회를 소집했다.
그러자 그 때까지 찰스가 의회 없이 통치한 행위에 대해 국민들은 계속 분노와
불만을 품고 있던 참이었으므로, 의회는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그와의 일전을
기다렸다. 그로부터 2 년도 지나지 않은 1642 년에 드디어 내전이 일어나 한편에는
많은 귀족과 대군대에 호위된 국왕이 서고, 다른 한편에는 부유한 상인과 런던 시의
지지를 받고 있는 의회가 맞섰다. 전쟁이 오래 계속되어 몇 년이 지났을 때 의회
측에 한 위대한 지도자올리버 크롬웰이 나타났다. 그는 훌륭한 조직가였으며,
엄격한 규율가였고, 정의를 목숨보다 중시하는 종교적 정열에 불타는 사람이었다.
"전황이 위급해서 그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희망의 등불이 꺼져 버렸을
때에도 전장의 진두에 선 그에게는 불기둥 같은 희망이 빛나고 있었다"고 토마스
칼라일은 말했다. 크롬웰은 '철기대(Ironsides)'라 불리는 새로운 군대를 조직하여
그들의 가슴속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규율 있는 정열을 불어넣었다. 의회군인
'청교도파'와 찰스의 '왕당파'는 계속 접전하여 마침내 크롬웰은 승리를 얻었고,
찰스는 의회에 의해 사로잡히게 되었다.
  많은 수의 의원들은 아직도 국왕과의 화해를 원했던 반면, 크롬웰의 새 군대는
완강히 그것을 거부하였으며, 드디어 군의 한 장교인 프라이드 대령은 의사당에
난입하여 화해파 의원들을 모조리 내쫓았다. 이것을 '프라이드 추방'이라고 한다. 이
일은 전격적인 사건이었으나 아무래도 폭력적이었던 만큼 의회에 예의를 갖춘
것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의회는 국왕의 전제 정치에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하나의 권력그들의 군대가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군대가
의회의 법적인 말장난 같은 것에 개의치 않았다는 것이다. 혁명이란 이런 것이다.
  '잔당 의회'라 불리던 하원의 잔류 의원들은 상원의 반대를 물리치고 찰스를
심문키로 결의한 뒤, 찰스에게 '폭군, 매국노, 살인범, 조국의 원수'으로서 사형을
선고했다. 그리하여 1649 년 지난날 그들의 국왕으로서 자신의 통치권에 신성을
내세운 이 인물을 드디어는 런던의 화이트 홀에서 목을 베었다.
  크롬웰은 사실상 독재자였고, 그는 '호국경(Lord Protector)'이라 불렸다. 그의
엄격하고 유능한 통치 아래 영국의 국력은 계속 자라나, 그 함대는 넬덜란드,
프랑스, 스페인의 함대를 쳐부수었고, 이로써 영국은 비로소 유럽 제일의 해군국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의회는 최고의 지위에 올랐다. 그러나 이 의회란 도대체 어떤 모임이었을까?
그것이 영국 시민을 대표하고 있었다고 속단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극히 적은
일부를 대표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귀족원(상원)은 그 이름이 말해 주듯 영토
소유자, 즉 대지주와 성직자를 대표하는 것이었고, 하원조차도 부유층지주나
상인의 집합체였다. 투표권을 가진 사람이 소수로 한정되어 있었던 1백년 전까지의
영국에는 이른바 '주머니 선거구'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는 사실상 누군가의 주머니
속에 있는 선거구라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한 사람의 의원을 선출하는 선거구
전체가 단 한 사람, 혹은 두 사람의 유권자로 이루어질 수도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1793 년에는 하원의 306 명의 의원이 전 유권자(투표권이 있는
모든 사람) 160 명에 의해 선출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볼 때 시민의 대다수가
투표권을 갖지 못했고 의회에 의해 대표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하원은 도저히 시민 대표의 집회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며, 도시마다 대두되기
시작한 신흥 중간 계급을 대표하는 것조차도 못되었다. 그것은 다만 대지주 계급과
얼마 안되는 부유한 상인을 대표하는 데 불과했다. 의회의 의석은 매매되었으며,
뇌물 거래가 성행했다. 더구나 이것은 1백년 전 시끄러운 여론이 들끓어 개혁
법안이 통과된 뒤,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 선거권을 갖게 된 1832 년 무렵까지
일어났던 일들이었다.
  16--17세기에는 영국과 아일랜드 사이에 커다란 마찰이 있었다. 아일랜드 정복이
기도되어 엘리자베스와 제임스 1세의 치세를 통하여 많은 반란과 학살이
거듭되었다. 제임스는 북부 아일랜드 얼스터의 영지를 많이 몰수한 후
스코틀랜드에서 프로테스탄트를 데려다가 이 곳에 정주케 했다. 그때부터 이
프로테스탄트 식민지가 계속 남아 아일랜드는 아일랜드 원주민과 스코틀랜드
이주민, 그리고 종교적으로는 로마 가톨릭 교도와 프로테스탄트의 둘로 갈라지게
되었다. 이 양자는 격심한 증오로 맞서 그 중간에서 어부지리를 얻은 것은 물론
영국이었다. 지금까지도 얼스터 문제는 아일랜드 최대의 난제다.
  영국의 내란 중에 아일랜드에서 영국인 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대하여
크롬웰은 잔혹하게 아일랜드인을 학살함으로써 보복했는데, 오늘날까지도 이것은
아일랜드의 쓰라린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항쟁은 다시 계속되어 마침내 협정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영국은 이 협정들을 지키지 않았다. 아일랜드의 고민에 찬 역사,
그것은 오랜 고통으로 가득 얼룩진 역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32 년 9월 15일
    44. 중국을 지배한 만주족의 위대한 통치자

  새롭게 나타난 왕조는 처음에는 걸출한 군주를 배출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대개는
용두 사미로 끝나는 법이다. 만주족도 그 예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며, 처음에는
능하고 뛰어난 군주나 정치가를 낳았으나 나중에는 그렇지 못했다. 건국 후 2대째가
강희였는데 그는 8세에 즉위했다. 그 후 61 년 동안 전 세계의 어떤 나라보다도
광대하며 인구도 제일 많은 한 제국의 군주로 군림했다.
  그러나 강희제는 그의 무용 때문에 역사상 이름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정치가로서의 재능과 눈부신 문화적 활동에 의해 후대에까지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이다. 그는 1661 년부터 1722 년에 걸쳐 황제의 자리에 있었으므로, 54 년
동안은 프랑스의 대왕 루이 14세와 시대를 같이하고 있었던 셈이다. 두 사람 모두
오랫동안 통치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기록적이지만, 재위 경쟁에서는 72 년이라는
기록을 세운 루이 14세 쪽이 앞서고 있다. 이 두 황제를 비교하는 것은 흥미가
있는데, 비교 결과는 모든 점에서 루이 14세 쪽이 열세이다. 그는 자기 나라를
황폐화시키고 당치도 않은 빚더미 위에 올려놓았다. 종교에 있어서도 관대하지
못했다. 강희는 열성적인 유교도였지만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관용적인 태도를
취했다. 명 왕조 시대의 문화도 그대로 보존되고 계승되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점에서는 더 진보하기도 했다. 산업, 문예, 교육에서도 명 왕조 시대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 많았다. 여전히 훌륭한 도기가 제작되었으며, 원색 인쇄가 발명되고,
동판화가 예수회 수도사로부터 전해지기도 했다.
  만주족 위정자의 정치적 기량과 성공의 비결은 그들이 완전히 중국 문화에 동화된
점에 있었다. 중국의 사상과 문화를 전면적으로 흡수하면서도 그들은 그들 자신의
생동감과 활동성을 잃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강희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진기한
합성물, 즉 부지런한 철학도와 문학도, 문화 활동 심취가, 정복을 좋아하는 유능한
군사 지도자였다. 그는 문학과 예술의 단순한 애호자 내지는 맹목적인 심취자는
아니었다. 문예 방면에서 그가 보여준 활동 중에서도 다음에 말하는 세 가지 사업은
모두 그의 창안에 의해 이룩되었으며, 때로는 자신이 직접 감독한 것도 있어 그의
열성과 학식의 풍부함을 엿볼 수 있고도 남는다.
  알고 있겠지만 중국어는 표음 문자로 적은 것이 아니라 의미를 가지는 문자, 즉
표의 문자로 씌어지는 것이다. 강희는 이 말의 사서, 즉
대사전'강희대자전'을 만들게 했다. 이것은 4 만 어 이상을 수록하고, 더욱이
많은 예문에 의한 설명을 붙인 방대한 것으로서 오늘날에도 이에 필적할 만한 것은
없다고 한다.
  또 한 가지 강희의 호학심 덕분에 생긴 것으로 서책의 해설이 가장 많이 들어
있는 백과 사전'흠정 고금 도서 집성'이 있다. 이것은 수백 권이나 되는
훌륭한 대역작이다. 그것 자체가 대도서관이며, 온갖 것이 다루어지고 또 논술되어
있다. 이 책은 강희가 죽은 후 동판으로 인쇄되었다.
  세 번째 대사업은 중국의 모든 문헌의 총색인이다. 다시 말해서 말이나 문장을
수집하고 정리한 일종의 사전이다. 이것은 문학 전체에 대한 상세한 연구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서 역시 엄청난 규모의 대사업이었다. 시인, 역사가 그리고
평론가의 글에서 인용한 무척 많은 문장과 글귀가 수록되어 있다.
  강희의 학예상의 업적은 그 밖에도 허다하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사업만 보고도
놀라지 않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현대의 업적 가운데서도 50 년
이상의 시일을 소비하고, 다수의 학자를 동원해서 몇 해 전에 겨우 완성했다고 하는
'옥스퍼드 영어 사전' 이외에 여기에 필적할 만한 것은 쉽게 생각이 나질 않는다.
  강희는 기독교와 선교사들에게 호의적이었다. 그는 외국 무역을 장려했으며,
그것을 위해 중국의 모든 항구를 개방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유럽인의 행동에
바람직하지 못한 점이 발견되어 무역에 제한을 가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는
선교사들이 본국 정부와 결탁해서 정부 전복을 획책하고 있다는 점에 의심을 품었던
것인데, 이것은 결코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 때문에 그는 기독교도에 대한
관대한 태도를 버리게 되었다. 그의 의심은 그 후 광동에 있는 중국 무관으로부터
받은 보고서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이 보고서는 필리핀이나 인도에서 유럽 여러
나라의 정부와 선교사가 서로 매우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었다. 그 관리의 의견은 제국을 침략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외국 무역을 단속하고
기독교의 포교를 저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32 년 9월 16일
    45. 중국 황제가 영국 왕에게 보낸 편지

  강희제의 손자인 제4 대 황제 건륭이 가장 관심을 가졌던 것은 문화적 활동과
제국의 팽창이었다. 그는 보존할 가치가 있는 모든 문헌을 대규모적으로 조사했다.
이들 문헌은 모두 수집되었고, 그 분류는 상세하기 이를 데 없으며, 황실 도서관의
방대한 분류 사전, 즉 사고 전서는 네 가지 항목고전, 즉 유교, 역사, 철학 및
일반 문학으로 정리되어 있다. 이런 종류의 것으로 이것과 비할 수 있는 것은 전
세계 어느 곳에도 없다고 한다.
  대체로 이 무렵에 중국의 장, 단편 소설과 희곡도 고도의 수준에 달해 있었다.
영국에서도 때를 같이하여 소설이 발달하고 있었다는 것은 우리들의 흥미를 끈다.
중국의 도자기와 그 밖의 미술품은 유럽에서도 진귀하고 소중한 상품으로 수출이
끊어진 일이 없었다. 더욱 흥미가 있는 것은 차 무역으로, 이것은 제1대 만주족
황제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차는 찰스 2세 시대에 처음으로 영국에 수출된 것 같다.
영국의 저명한 일기 작가인 사무엘 페피스는 1660 년에 그의 일기에 '차'(일종의
중국 음료)를 마셨다는 것을 적고 있다. 이러한 차 무역은 놀랄 만큼 발달되었으며,
2백년 뒤인 1860 년에는 중국의 복주라는 한 항구에서만 3개월 동안에 수출 규모가
1억 파운드에 달했다. 나중에 차는 다른 나라에서도 심게 되었으며, 지금은 인도나
실론에서 널리 재배되고 있다.
  건륭의 치세 말기인 1796 년 그의 직접 통치하에 두었던 제국은 만주, 몽고, 티벳,
투르키스탄 등이었다. 그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속국에는 안남, 샴(타이), 미얀마가
있었다. 그런데 정복과 군사적 공적의 추구를 좋아하면 거액의 지출을 수반하며
국민들의 조세 부담은 증대하게 마련이다. 이러한 부담은 어느 때나 마찬가지로 그
때도 최하층의 빈민이 짊어졌다. 극도의 경제적 궁핍이 불평 불만을 자아냈고, 이로
인해 비밀 결사가 전국에 조직되었다. 중국은 이탈리아와 함께 비밀 결사의
본고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결사의 이름들이 재미있는데, 흰 백합의 모임인 백련회,
하늘의 도 모임인 천리회, 흰 날개의 모임인 백우회, 하늘과 땅의 모임인 천지회
등이 그것이다.
  한편 온갖 억제 수단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외국 무역은 증대 일로에 있었다.
제국주의 영국은 중국과 무역을 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영국 정부는 1792 년
매카트니 경을 단장으로 하는 사절단을 북경에 파견했다. 조지 3세가 당시의 영국
왕이었다. 건륭은 그들을 접견했으며 증답품이 교환되었다. 그러나 황제는 종래의
외국 무역에 대한 방침을 변경하기를 거부했다. 건륭이 조지 3세에게 보낸 편지는
매우 흥미 있는 기록이므로 여기에 길게 인용해 보기로 하자.

  오호! 그대 국왕이여. 그대는 멀리 7 대양을 사이에 둔 먼 나라에 살면서 우리
문명의 은혜를 받으려고 하는 기특한 마음으로 공손하게 사자를 파견해서 그대의
외교 문서를 지참케 했다. 그대는 짐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그대 나라에서
생산하는 공물을 바쳤다. 짐은 그대의 문서를 열람컨대, 그대의 가상할 만한 공순의
성의가 문사 속에도 자연히 스며 나오고 있다.
  짐이 광대 무변한 세계를 통어하는 것은, 첫째로 치안을 완전히 하고 국무를
틀림없이 수행하기 위해서이다. 이국의 진보 따위에 이르러서는 조금도 짐이 바라는
바가 아니다. 짐은 그대 나라의 토산품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짐은 그대를
타이르려고 한다. 국왕이여, 그대는 짐의 뜻을 마음에 잘 새겨 장래 더욱 더 충성에
힘 쓸 것이며, 오래도록 우리 제위에 대해 공경을 다하고, 그럼으로써 그대 나라의
평화와 번영을 지켜 나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두려워하면서 복종하고, 경거 망동하지 말지어다!

  조지 3세와 그 대신들은 이 회답을 보고 아연 질색했을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회답이 나타내고 있는 중국 문화의 우월성과 권력의 장엄함은 사실
튼튼한 기반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 건륭 치하에서만 만주 정부는 강력하게
보였으며, 사실 강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뿌리는 이미 경제적인 여러 가지 조건의
변화로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조금 전에 이야기한 비밀 결사는 국민 대중들의 불평
불만이 표현된 것이었다. 이에 반해 서양은 새 질서를 선창하면서 급속하게
전진하며 날이 갈수록 강력해져 갔다. 건륭이 조지 3세에 대해서 매우 오만한
회답을 보낸 지 70 년도 되지 않아서 중국은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말할 수 없는
모욕을 당했으며, 그 자만은 하루 아침에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잠깐 러시아의 동진에 대해서 언급해 주고자 한다. 러시아와 중국 사이에 맺어진
1689 년의 네르친스크 조약 이후 1세기 반에 걸쳐서 러시아의 동방에 대한
영향력은 계속 증대하였다. 1728 년 러시아의 관리였던 덴마크 태생의 비투스
베링이라는 사람이 아시아와 아메리카 사이의 해협을 탐험했다. 이 해협은 너도
알고 있겠지만, 오늘날까지도 그의 이름을 따서 베링 해협이라고 한다. 베링은
해협을 건너 알래스카로 가서 여기를 러시아 영토로 선언했다. 알래스카는 모피의
대량 산출지인데다, 중국에서는 모피의 수요가 급증하여 러시아와 중국 사이에는
특히 모피 무역이 발달했다.
  18세기말쯤 모피의 수요가 매우 컸다는 것은 러시아가 그것을 멀리 캐나다 허드슨
만으로부터 영국을 거쳐 수입하고, 다시 그것을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 부근에 있는
캬크타의 대모피 시장에 보낸 사실로도 알 수 있다. 이 모피들은 얼마나 먼 여행을
했단 말인가! 
  1932 년 9월 26일.27일
    46. 산업 혁명이 영국에서 시작되다.

  산업 혁명은 거대한 기계를 세상에 가지고 왔으며, 기계화의 시대를 열었다.
새로운 발명품들 가운데 최초의 것은 1733 년에 이루어졌다. 존 케이라는 사람이
옷감을 짜는 데 사용되는 북(베틀에서 날실 사이에 씨실을 넣는 데 쓰이는 배
모양의 도구)을 아주 빠르게 동작하도록 만들었다. 이것을 플라잉 셔틀(flying
shuttle)이라고 한다. 이 발명이 있기 전까지는 직공이 북에 넣은 실을 손으로 들고,
세로로 걸려 있는 날실이라는 다른 실 사이로 천천히 통과시켜야 했다. 플라잉
셔틀은 이 과정을 단축시켜 생산량을 두 배로 증가시켰다. 이것은 베 짜는 사람이
실을 더 많이 소비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자 실을 생산하는 쪽에서는
추가되는 실을 공급하기에 진땀을 뺐다. 이들은 생산량을 늘리기 위한 방법들을
찾으려고 애썼다. 이 문제는 1764 년 하그리브스가 발명한 제니 방적기에 의해 일부
해소되었다. 뒤이어 아크라이트의 수력 방적기가 발명되고, 뒤따라 여러 가지
발명품이 나왔다. 동력으로 수력이 이용되다가 나중에는 증기력이 동원되었다.
이러한 모든 발명품들은 처음에는 면직 공업에 응용되었다. 그 결과 공장들이
증가했는데, 이같은 새로운 방법들은 모직 공업에도 응용되었다.
  한편 1765 년에 제임스 와트가 증기 기관을 발명했는데, 이것은 거대한
사건이었다. 이제 공장에서는 동력으로 증기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되자
공장의 석탄 수요가 급격히 늘어나고, 따라서 석탄 산업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석탄의 사용은 철 제련에 새로운 방법들을 제공해 주었다. 즉 철광석을 녹여서
순수한 금속을 분리해 내는 방법이 생긴 것이다. 그 후 제철 공업이 급속히
발달했으며, 새로운 공장들이 석탄 값이 싼 석탄 산지 가까이에 잇달아 세워졌다.
  이러한 도구와 기계의 도움으로 인간은 보다 쉽게 물건을 생산하고 보다 많은
여가를 갖게 되었다. 그 결과 예술과 문명, 그리고 사상과 과학의 진보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거대한 기계와 그에 따른 일체의 부속들 모두가 고마운 것은 아니었다.
기계는 문명의발달을 촉진했지만, 동시에 전쟁과 파괴의 끔찍한 무기를
생산함으로써 야만성의 발달도 촉진시켰다. 기계는 무척이나 많은 물자를
생산했지만, 이 많은 물자는 대중의 손에 골고루 돌아가지 못하고, 주로 소수의
한정된 사람들만이 차지하게 되었다. 물자는 부유한 자의 사치와 빈민의 궁핍간의
차이를 옛날보다 더욱 두드러지게 만들었다. 기계가 인간의 도구이자 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주인 노릇을 자처하게 된 것이다. 기계는 한편으로는
협동, 조직, 정확성 등과 같은 미덕을 가르친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수백만 명의
인간들에게 따분한 반복적인 삶을 가져다 주었고, 기쁨이나 자유가 거의 없는
기계적 부담만을 안겨 주었다.
  산업 혁명은 상층부의 왕과 지배자들을 갈아치우는 단순한 정치 혁명이 아니라
모든 사회 계급들, 그리고 모든 개개인의 생활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혁명이었다.
기계와 산업화의 승리는 기계를 지배하는 계급들의 승리를 의미했다. 전에 너에게
얘기했듯이 생산 수단을 관리하는 계급은 동시에 지배하는 계급이기도 하다.
옛날에는 토지가 유일한 주요 생산 수단이었다. 따라서 토지를 소유한 계급, 즉
영주가 지배자였다. 봉건 시대는 이와 같은 상태였다. 그러나 토지 이외의 다른
부가 나타나자, 토지 소유 계급은 새로운 생산 수단을 소유하는 계급에게 권력을
나눠주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거대한 기계가 등장하자 자연히 이것을 장악하는
계급이 앞에 나서서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1932 년 10월 2일
    47.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미국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남부의 대규모 농장에서 일하기를 거부한 결과 노동력이
극심하게 부족해짐에 따라, 아프리카의 불행한 흑인들은 인간 사냥에 의해 사로잡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잔인한 취급을 받으면서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로 끌려왔다.
이들 아프리카 흑인들은 버지니아, 캐롤라이나, 조지아 등 남부의 여러 주로
끌려왔고, 주로 목화와 담배를 재배하는 대농장에서 집단 노동을 강요당했다.
  북부의 여러 주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온 필그림
파더즈들의 오랜 청교도 전통은 이 때까지도 빛을 내고 있었다. 농장은 작고
치밀했으며, 남부에서와 같은 대농장은 없었다. 이런 농장에서는 노^36^예나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새로운 땅이 모자라지도 않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각자 스스로 농장을 경영하여 주인이 되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개척민들
사이에서는 평등 사상이 발전하였다.
  영국의 왕과 대지주들은 특히 남부 식민지에 커다란 이해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가능한 한 식민지들을 많이 착취하려고 애썼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7 년
전쟁(1756--63)이 끝난 뒤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돈을 빼가려는 의도가 노골적으로
나타났다. 대지주들에 의해 장악된 영국 의회는 식민지의 착취에 혈안이 되었으며,
왕의 식민지 정책을 지지하였다. 세금이 부과되고, 무역은 규제되었다.
  미국 식민지들은 이러한 규제와 과세 신설에 반대했으나, 7 년 전쟁에 승리한 뒤
자신감에 넘친 영국 정부는 이들의 반대를 안중에 두지 않았다. 그러나 7 년 전쟁은
식민지 사람들에게도 많은 교훈을 주었다. 여러 식민지와 각 주에서 온 사람들은
상대를 서로 사귀어 알게 되었다. 이들은 영국 정규군과 함께 프랑스 군에 대항하여
싸운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전쟁이라는 죽음의 경기에 아주 익숙했다. 그리하여
식민지 주민들은 불공정하다고 생각하거나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처사에 대해
굴복할 뜻이 전혀 없었다.
  1773 년 영국 정부가 그들에게 동인도 회사의 차를 구매할 것을 강요함에 이르러
사태는 표면화되었다. 영국 본토의 많은 부자들은 동인도 회사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어서 이런 류의 일에도 관심이 컸다. 그들에게 더 많은 돈을 가져다 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정부는 그들의 영향력 아래 있었고, 정부의 관리들 자신이 동인도
무역에 관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영국 정부는 동인도 회사의 사업을
진흥시키기 위하여 그 차를 아메리카로 가져다가 거기서 판로를 개척해 주었다.
그런데 이렇게 되자 본 고장의 개척 산업인 차 거래에 상당한 장애가 되어 크게
격분한 식민지 주민들은 1773 년 12월 동인도 회사의 차를 보스턴 항에 상륙시키려
할 때 이것에 저항하였다. 어떤 식민지 주민들은 아메리카 인디언으로 가장하고
차를 실은 배에 올라가 차를 모두 바다에 던져 버렸다. 이 행위는 동조하는 많은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공연히 진행되었다. 이 도전 행위는 반란을 일으킨 여러
주와 영국과의 전쟁을 일으키는 도화선이 되었다.
  그 뒤 1 년 반이 지난 1775 년 영국과 아메리카 식민지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식민지는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었겠니? 독립도 아니었고, 영국과의
분리도 아니었다. 싸움이 시작되고 피가 땅을 적실 때도 식민지 지도부는 영국 왕
조지 3세를 '폐하'라고 부르면서 자신들을 그의 충직한 신민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식민지와 영국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기 직전인 1774 년 식민지의 지도자였던
조지 워싱턴은 북부 아메리카에서 생각이 있는 어느 누구도 독립을 원하고 있지
않다는 뜻을 발표했다. 그런데도 바로 그 워싱턴이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1774 년 전쟁이 시작된 뒤 식민지 의회의 주요한 46명의 의원들은 조지 3세에 대해
그의 충성스러운 신민의 이름으로 평화와 '인명 낭비'의 중지를 간청하였다. 이들은
영국과 그 분가에 해당하는 아메리카 사이의 조화와 친선을 회복하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이들이 오직 원하는 바는 자치 정부이며, 워싱턴의 말을 통해 식자들은
어느 누구도 독립을 원치 않는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올리브 브랜치의
청원'이었다.
  그러나 이로부터 2 년도 채 되지 않아 청원서에 서명한 사람들 가운데 25명은
다른 문서, 즉 독립 선언서에 서명하였다.
  이와 같이 식민지는 독립을 목표로 전쟁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불만
사항은 세금 부과와 무역에 대한 규제였다. 그들은 영국 의회가 그들의 의지에
반하여 세금을 부과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해 이를 거부하였다. "대표권 없는 과세
없다"가 그들의 유명한 구호였다. 그들은 영국 의회에 대표를 보내지 않고 있었다.
  식민지에는 군대가 없었으나 필요할 때마다 후퇴할 수 있는 광대한 지역을 가지고
있었고, 언제든 반격을 감행할 수 있었다. 그들은 군대를 창설하고 워싱턴이
총사령관이 되었다. 이들은 몇몇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는데, 프랑스는 오랜 원수인
영국에 일격을 가할 수 있는 호기라고 생각하여 식민지 편에 서서 싸웠다. 스페인
역시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제 영국은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고 전쟁은
여러 해를 끌게 된다. 1776 년에는 식민지 측의 유명한 '독립 선언서'가
발표되었다. 1782 년 전쟁은 끝났고, 이듬해인 1783 년 교전국 사이에 파리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리하여 아메리카의 13개 식민지는 미국이라 불리는 독립
공화국이 되었다.
  1776 년의 독립 선언은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평등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엄밀히 분석해 보면 정확한 말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몸이 약하고, 어떤
사람은 몸이 튼튼하며,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똑똑하고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선언서의 배경이 되는 생각은 명료하며 칭찬할 만한 가치가
있다. 식민지 주민들은 유럽의 중세적 불평등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이것만도
대단한 진보가 아니겠니. 아마 독립 선언서를 기초한 많은 사람들은 볼테르와
루소로 이어지는 18세기 프랑스 사상가들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평등하다." 그러나 이렇다 할 권리를 갖지 못한
불쌍한 흑인 노^36^예들이 있었다. 그들은 도대체 어떠했던가? 그들은 어떻게 해서
헌법의 적용을 받는다는 것인가? 그들은 적용 받지 못했으며 계속 그런 상태였다.
수 년이 지난 뒤 남부와 북부 사이에 치열한 내전이 벌어지고, 그 결과 노^36^예
제도는 폐지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흑인과 백인간의 인종 차별 문제는 미국의
중요한 문제로 남아 있다. 
  1932 년 9월 19일. 10월 7일, 10일, 13일
    48. 프랑스 혁명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사상들이 좀더 명확해지고 일반화함에 따라 인간의
이성 문제를 다루는 책들이 등장하였다. 합리주의를 비롯한 당시의 주제들에 대한
글을 쓴 가장 유명한 사람은 볼테르였다. 그는 프랑스 사람으로 감옥에 들어갔다가
나온 뒤 국외로 추방당했고, 이 결과 제네바 근처의 페르네이에 정착했다. 감옥에
있을 때 그에게는 종이와 잉크가 허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납 조각으로 책의 행간에
시를 적어 내려갔다. 그는 불공평과 편협함을 증오했다, 이것들에 대해서
투쟁하였다. 그의 유명한 구호는 '수치를 모르는 자를 쓸어버려라'였다. 그는 아주
오래 살았고(1694--1778) 무척 많은 책들을 써냈다. 기독교를 비판했기 때문에
그는 정통 기독교인들로부터 맹렬한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저작 가운데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무비판적으로 종교를 받아들이는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속박해 두려는 황소와 같다." 그의 저작들은 사람들이 합리주의와 새로운 사상으로
이끌리도록 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페르네이에 있는 그의 오래된 집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볼테르와 동시대인이지만 더 젊은 또 한 명의 위대한 저술가는 장자크 루소였다.
그는 제네바 출신이었는데, 이 도시는 그를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그의
소설, 꽤 대담한 사회 이론과 정치 이론에 대한 저술들은 많은 사람들을 새로운
사상과 결의로 열광시켰다. 이제 그의 정치 이론들은 구식이 되었지만 프랑스인들이
대혁명을 준비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그는 혁명을 부르짖지도 않았고 어쩌면
그것을 예상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의 저작과 사상들은 확실히 사람들의 마음속에
씨앗을 뿌려 혁명으로 개화하도록 하였다. 가장 잘 알려진 그의 책은 '사회
계약론'이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인간은 자유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러나 모든 곳에서 그는 사슬에 묶여 있다." 루소는 또한 위대한
교육자였다. 그가 창안한 새로운 교육 방법의 많은 부분들은 지금 학교에서
이용되고 있다.
  볼테르와 루소 외에도 18세기 프랑스에는 주목할 만한 사상가와 저술가들이
많았다. 한 사람만 더 소개하기로 하자. '법의 정신'을 쓴 몽테스키외가 있다. 이
때에는 또한 파리에서 백과 사전이 출간되었는데, 정치와 사회 문제에 관련된
주제들에 대해 디드로와 그 밖의 유능한 집필가들에 의한 논문들이 가득하다.
프랑스는 이 때 철학자와 사상가로 가득했던 것 같다. 더욱이 그들의 글들은 널리
읽혔고, 수많은 보통 사람들이 그들의 사상을 생각하고 그들의 이론들을 토론하도록
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프랑스에서는 종교적 독선과 정치적, 사회적 특권들에
대항하는 강한 여론이 형성되었다. 자유에 대한 막연한 생각이 민중들을
사로잡았다.
  그 무렵 프랑스는 루이 16세의 지배 아래 있었다. 그의 치세가 시작되자 돌연
굶주린 대중이 봉기하였다. 그 봉기는 몇 년 동안 잇달아 일어났고, 잠시 뜸을
두었다가는 다시 새로운 농민 봉기가 시작되었다. 디종(프랑스 중부 지방에 있는
도시)에서 이런 종류의 식량 폭동이 일어났을 때, 그 곳 관리는 굶주린 민중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들판에 풀이 자라고 있으니 들판에 가서 뜯어 먹어라!" 당시는
구걸을 업으로 삼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1777 년 공식 보고에 따르면, 프랑스에는
1백 10만 명의 거지가 있었다.
  농민들은 식량에 굶주려 있었을 뿐만 아니라 토지에도 주려 있었다. 봉건 제도
밑에서는 귀족이 토지의 소유자이며, 토지에서 나오는 수익은 거의 모두가 귀족에게
들어갔다. 농민들은 어떤 뚜렷한 생각도 없었고 목표도 희미했지만 아무튼 토지를
갈망했고, 그들을 짓밟는 봉건 제도와 귀족과 성직자를 증오했으며, 그리고 가벨, 즉
가난한 자들에겐 특히 큰 부담이던 소금세를 증오했다.
  궁핍은 농민을 혁명적인 행동으로 내몰았으나 그들은 대개 자신들의 행동이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명확한 관념을 갖지 못했다. 이 사상의 모호함,
이데올로기의 결핍이 흔히 그들의 노력을 수포로 만들었다. 그런데 우리는 프랑스
혁명에서 예전에 보지 못했던 큰 규모의 새로운 현상, 즉 사상과 경제적 동인이
혁명적 행동과 결합한 것을 보게 된다. 이같은 결합이 있는 곳에 참된 혁명이 있다.
그리고 참된 혁명은 정치, 경제, 사회, 종교는 물론 생활과 사회의 모든 구조에
영향을 미친다. 18세기의 마지막 몇 해 동안 우리는 프랑스에서 바로 이와 같은
사건을 볼 수 있다.
  1789 년 5월 4일, 국왕이 참석한 삼부회가 베르사유에서 개최되었다. 하지만 루이
16세는 이내 세 계급을 한 자리에 소집한 것을 후회했다. 왜냐하면, 제3신분, 즉
평민 또는 중간 계급의 입김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거칠어지기 시작하더니, 자기들
동의 없이 조세를 부과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이와 같은
권리를 확립한 영국 하원이라는 전례가 있었고, 또한 당시의 미국 역시 좋은
본보기였다. 그들은 영국을 자유로운 나라로 크게 착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이는 환상일 뿐이었다. 왜냐하면 영국은 여전히 귀족과 지주 계급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투표권이 매우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의회는 귀족 계급의
독무대였다.
  아무튼 제3신분, 즉 평민들이 하는 일은 모두 국왕 루이 16세의 눈에 거슬렸다.
루이 16세는 그들을 의사당 밖으로 몰아냈다. 그러나 의원들은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즉시 근처의 테니스 코트에 모여 헌법을 획득하는 날까지 절대
해산하지 않기로 선서했다. 이것이 유명한 '테니스 코트의 선서'이다. 그러자 국왕은
무력을 사용하려 했다. 그러나 군대가 국왕의 명령을 거부하자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위기가 닥쳐왔다. 혁명에서 위기는 으레 정부의 버팀목인 군대가 동포인 군중에게
발포하라는 명령을 거부할 때 닥쳐오기 마련이다. 이에 당황한 루이 16세는 자기
군대를 포기하고, 특유의 졸렬함을 발휘하여 자기 국민을 죽이려고 외국 군대를
불러들이려 했다. 이것은 민중에게 너무 심한 짓이었다. 역사적인 1789 년 7월
14일, 민중들은 파리에서 봉기하여 유구한 바스티유 감옥을 점령하고 죄수들을
석방했다.
  바스티유 감옥의 함락은 역사상 중대한 사건이다. 이는 혁명의 발단이 되어
전국적인 민중 봉기의 신호탄이 되었으며, 또한 그것은 프랑스의 낡은 질서, 즉 봉건
제도.군주제, 특권의 종말을 의미했다. 그것은 온 유럽의 모든 국왕과 황제 일족에
대한 공포와 위협의 조짐이었다. 지난날 당당히 군주제의 모범이었던 프랑스가
이번에는 다시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 유럽을 놀라게 했다.
  바스티유 점령 20일 뒤인 1789 년 8월 4일 의회에서는 극적인 장면이 벌어졌다.
의회에 상정된 그날의 의제는 봉건적 권리와 특권의 폐지였다.
  결국 프랑스의 국민 의회는 적어도 결의상으로는 농노 제도와 여러 특권, 봉건
법정, 그리고 귀족, 성직자의 조세 부담 면제, 그들의 칭호까지 잇달아 폐지해
나갔다. 국왕이 아직 재위하고 있는데 귀족의 칭호가 없어진 것은 이상한 일이기는
했다.
  국민 의회는 이어서 '인권 선언'을 통과시켰다. 이 유명한 선언의 사상은 아마도
미국 독립 선언에서 유래된 것이리라. 그러나 미국의 선언은 짧고 간단한 반면
프랑스의 것은 길고 복잡하다. 인권이란 인간의 평등, 자유, 행복을 보장한다고
생각한 데서 나온 것이었다. 당시 이 선언은 과감하고 파격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져
그 뒤 1백년 가까이나 유럽의 자유주의자와 민주주의자의 헌장이 되었다.
  1791 년 6월 21일 혁명의 운명을 결정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국왕 루이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변장하고 탈출한 것이다. 그들은 거의 국경에 닿기 직전 베르덩
근처에 있는 바렌에서 몇몇 농부에게 붙들려 파리로 송환되었다.
  국왕과 왕비의 이러한 행동은 파리 시민과 관계되는 일인 만큼 이들의 운명을
결정해 버렸다. 공화국의 이념이 급속히 발전했다. 하지만 이 무렵 매우 온건해져서
민중의 감정과는 전혀 동떨어져 있던 국민 의회와 정부는 루이의 폐위를 요구하는
사람들을 계속해서 총살하고 있었다. 혁명 과정에서 위대한 지도자로 등장한 마라는
도망치려던 국왕을 반역자로 탄핵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의해 쫓겨다니고 있었다.
그는 당국의 눈을 피해 파리의 하수도 안에 숨어 있다가 지독한 피부병에 걸리기도
했다.
  1792 년 9월 21일에 '국민 공회'가 소집되었다. 이것은 입법 의회를 대신한
새로운 회의체였다. 이것은 선행한 두 의회에 비교하면 상당히 발전된 것이기는
했으나, 코뮨에 비하면 아직 뒤에서 꾸물거리고 있었다. 공회가 처음으로 한 일은
공화국 선언이었다. 바로 뒤이어 루이 16세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그는 사형
선고를 받아 1793 년 1월 21일 왕정이 저지른 갖가지 죄를 그의 목으로
보상했다그는 길로틴으로 목이 잘린 것이다. 이로써 프랑스 민중은 이 때
스스로 퇴로를 끊어 버렸다. 그들은 마지막 한 발자국마저 내디뎌 유럽의 국왕과
황제에 도전했다. 이미 한 걸음도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 국왕의 피비린내가
가시지 않은 채 선혈로 젖어 있는 길로틴 위에서 혁명의 대지도자 당통은 몰려든
군중을 향해 주변 국가들의 국왕들에게 도전하는 연설을 소리 높여 외쳤다. "유럽의
국왕들은 우리에게 도전해 올 것이다. 저들에게 국왕 루이의 목을 던져 주자!"
  이 격렬한 열광의 시간 속에서 하나의 찬란한 노래가 나타났다. 그들의
불타오르는 정감을 나타내는 이 곡조는 그들로 하여금 목이 터지도록 노래하면서
전장으로 몰려 나가게 하고, 온갖 장애를 극복하여 강적 앞에서도 아무 두려움 없이
약진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루제 드릴이 라인의 군대(라인 방면의 공화국 군대)를
위해 작곡한 군가로서, 그 뒤 '라 메르세^36^예즈'로 알려진 노래이며, 현재의
프랑스 국가가 되었다.
  그 동안 파리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을까? 누가 파리를 지배하고
있었을까? 새로운 선거로 이루어진 코뮨(혁명 자치 정부)과 각지구 자치단이 여전히
시의 생명을 장악하고 있었다. 국민 공회 내부에는 여러 당파간에 싸움이
벌어졌는데, 그 중에서도 두드러진 것은 온건 공화주의자인 지롱드 당과 급진
공화주의자와 자코뱅 당의 싸움이었다. 결국 자코뱅 당이 이겨 1793 년 6월
대부분의 지롱드 당 의원은 공회에서 축출되었다. 공회는 봉건적 권리를 박탈하는
마지막 조치를 취하여, 봉건 영주에 소속되었던 토지는 각 지방 코뮨, 즉 지방 자치
정부에 회수되었다. 말하자면 이 토지들은 공유 재산이 된 셈이다.
  이제 자코뱅 당이 지배하게 된 공회는 두 위원회공익 위원회와 공안
위원회를 선임하고 여기에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했다. 두 위원회, 특히 공안
위원회는 어느덧 대단한 권세를 차지하여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마침내
혁명이 공포 정치의 밑바닥으로 굴러 떨어질 때까지 사사건건 국민 공회를
몰아세웠다. 모든 사람들에게 공포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들을 포위하고 있던
외국 군대의 위협, 간첩과 내통자의 위협, 그리고 그 밖에도 많은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다. 공포는 사람을 맹목적으로 만들고, 자포 자기 상태로 만든다 공회는 이처럼
끊임없이 밀어닥치는 위협에 몰려 1793 년 9월에 무서운 법률혐의법을
통과시켰다. 혐의를 받은 자는 아무도 안전할 수 없었다. 혐의를 받지 않으리라고
그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1개월 뒤 22 명이나 되는 공회의 지롱드 당 의원들이
혁명 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고 바로 사형에 처해졌다.
  공포 정치가 이렇게 시작되었다. 날마다 죄인으로 몰린 사람들이 줄지어
길로틴으로 향했다. 이 희생자들을 태운 죄수 수송차^6,36^텀브릴(쓰레기 운반차)
이라고 불렸다 ^3,63^가 날마다 파리의 자갈길을 덜거덕거리며 지나가고 시민들은
이 불행한 삶들을 야유했다. 공회에서 조차 권세를 떨치는 우두머리들과 맞서는
것은 위험했다. 그랬다가는 혐의를 초래하고, 혐의는 곧 재판과 길로틴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공회는 공익 위원회와 공안 위원회에 의해 좌우되었다. 두 위원회는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일체의 권한을 손아귀에 쥐고 타인의 개입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은 파리의 코뮨과도 대립했으며, 자기들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모든
자와 대립했다.
  그러나 마침내 케르미도르(더위의 달) 9일 (1794 년 7월 27일)에 풍향이
바뀌었다. 공회는 갑자기 로베스피에르와 그 일파에게 칼을 들이대고 "압제자를
타도하라"라는 고함 소리와 함께 그를 잡아 묶었다. 로베스피에르에게는 변명의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이튿날 그를 죄수 수송차에 싣고 길로틴으로 끌고 갔다.
일찍이 그가 수많은 사람의 목을 잘랐던 길로틴으로 말이다. 이렇게 해서 프랑스
혁명은 끝났다.
  로베스피에르의 실각에 이어 곧 반혁명이 닥쳐왔다. 온건파가 힘을 회복하여
자코뱅을 습격하고, 그들에게 공포 정치의 마수를 휘둘렀다. 적색 공포 정치에 이어
백색 공포 정치가 닥쳐온 것이다. 15개월 뒤인 1795 년 10월에 공회는 해산되고,
5인으로 구성된 '총재 정부'가 정권을 잡았다. 이것은 완전히 부르주아 정부로서,
민중의 억압에 힘썼다. 4 년 이상 총재 정부가 프랑스를 통치했다. 그들은 온갖
내분에도 불구하고 공화국의 위신과 힘이 유지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며, 대외
전쟁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여기저기서 반란이 일어났으나 곧 진압되었는데, 이
반란을 진압하던 공화국의 청년 지휘관이 바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였다. 그는
파리의 군중을 향해 감히 총을 쏘아^6,36^이것은 '포도탄의 총격'으로 알려져
있다^3,63^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구 혁명군이 파리의 시민들을 사살하는 데
투입되게 되었으니 이제 분명 혁명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1932 년 11월 4일, 19일
    49. 나폴레옹과 빈 체제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이 한창 진행되는 가운데 등장했다. 온 유럽의 국왕들에게
감히 도전했던 공화국 프랑스는 이 작은 코르시카 섬 사람의 발밑에 굴복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769 년 프랑스 영토였던 크르시카 섬에서 태어났다. 그는
프랑스계 코르시카인에 이탈리아인의 피가 섞인 혼혈아였다. 프랑스의 사관
학교에서 훈련을 받았으며, 혁명 기간 중에는 자코뱅 당원이었다. 그러나 그는 다만
자기 이익을 위해 자코뱅 당에 가입한 것이지 당의 이상을 신봉한 것은 아니었다.
1793 년에 그는 툴롱에서 첫 승리를 거두었다. 이곳 부유 계급은 혁명 정권
아래에서 재산을 빼앗길 것을 우려하여 한심스럽게도 영국을 끌어들여 프랑스
해군의 잔존 세력을 그들에게 넘겨주었다. 이 손실은 동시에 다른 곳에도 막대한
영향을 주어 신생 공화국에 심대한 타격을 주고, 불구자가 아닌 모든 남성은 물론
여성까지 군대에 소집되었다. 나폴레옹은 이 반정을 진압하고 교묘한 습격으로
툴롱에서 영국군을 격파했다. 나폴레옹이라는 별은 이 때부터 빛나기 시작하여
24세의 새파란 나이에 장군이 되었다. 그런데 몇 개월 뒤 로베스피에르가
길로틴으로 처형 당했을 때, 그는 사건에 휘말려 들어 로베스피에르와의 관계를
의심 받았다. 그러나 그가 정말 소속된 당에는 실로 단 한 사람의 당원밖에 없었다.
나폴레옹이 바로 그 당의 이름이다! 그 뒤 '총재 정부'가 서자, 나폴레옹은 자코뱅
당원이기는커녕 눈 하나 까딱 않고 민중을 사살할 수 있는 반혁명의 지도자임을
입증했다. 이것이 지난번 편지에서 얘기한 1795 년의 유명한 '포도탄의
총격'이었다. 바로 이날 나폴레옹은 공화국에 상처를 입혔다. 그리고 나서 10 년도
지나기 전에 그는 공화국을 끝장내고 프랑스의 황제가 되었다.
  나폴레옹이 이집트에서 돌아왔을 때 프랑스는 궁지에 빠져 있었다. 총재 정부는
신용을 잃어 인기가 없었으며, 사방에서 공격을 받고 있었다. 귀국한 지 한 달째인
1799 년 11월, 나폴레옹은 동생 루시앙의 도움을 받아 공회를 강제
해산하고^6,36^당시는 총재 정부가 통치하고 있었다^3,63^헌법을 사실상 폐기했다.
이같은 강제력을 사용하는 정치 행동을 쿠데타라고 하는데, 이 쿠데타는 나폴레옹을
정치 무대 위에 화려한 인물로 등장시켰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도 그에게
인기가 있었고, 민중이 그를 신뢰했기 때문이다. 혁명은 이미 오래 전에 파산했고,
민주주의마저 자취를 감추려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한 장군이 대중의 인기를 업고
들판에 뛰놀던 사슴을 쏘아 쓰러뜨렸다. 그리고 세 명의 집정관(이 명칭은 고대
로마에서 딴 것이다)을 두는 신헌법이 기초되었다. 세 명의 집정관 가운데
우두머리는 강대한 권력을 갖는 수석 집정관이었다. 그 자리는 10 년 임기였는데
바로 그 자리에 나폴레옹이 임명되었다.
  1804 년에는 다시 국민 투표를 하여 마침내 스스로 황제라 칭했다(제1제정). 그는
프랑스의 전능자가 됐지만 구식 전제 군주와는 크게 달랐다. 그는 전통이나 신권의
기초 위에서 자기 권위를 유지할 수는 없었다 그는 자신의 출중한 능력과 민중,
특히 농민들에게 얻은 인기에 권력의 기초를 두어야 했다. 농민들은 나폴레옹
덕분에 토지를 얻을 수 있었다고 믿었기 때문에 나폴레옹이 죽을 때까지 농민들은
줄곧 가장 충실한 지지자였다. "내가 무엇 때문에 응접실의 호사꾼이나 잔소리꾼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겠는가? 내가 받아들이려는 의견은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농민의 견해다." 언젠가 나폴레옹은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농민들도 끊임없이
계속되는 전쟁으로 자신의 아들을 빼앗겼고 곧 피폐해졌다. 이 지지 세력이
퇴조하기 시작하자 나폴레옹이 쌓아올린 누각도 이에 따라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10 년간 황제 자리에 있었는데, 그 동안 유럽 대륙의 모든 방면에 타격을
주고 눈부신 원정을 거듭했으며, 괄목할 만한 승리를 거두었다. 전 유럽은 그의
이름에 떨었으며, 아무에게도 지배당한 적이 없던 이들도 그에게 엎드렸다. 그의
시대에 지상전에서 승리를 거둔 지역을 몇 개만 들어봐도, 마렝고(이것은 1800 년
엄동에 눈으로 막힌 스위스의 생 베르나르령을 군대를 이끌고 넘었을 때의
일이다).울름, 아우스터리트, 예나, 아일라우, 프리드란트, 바그람 등이다.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도 그의 앞에서는 힘없이 허물어졌다. 스페인,
이탈리아, 네덜란드, 라인 연방으로 불리던 독일의 대부분, 그리고 지금은 바르샤바
공국으로 불리는 폴란드도 잇달아 종속국이 되었다. 옛날부터 명목만 이어져 온
신성 로마 제국도 마침내 이 때 최후를 고했다.
  유럽의 여러 열강 가운데서는 영국만이 재앙을 면했다. 나폴레옹이 평생 낯설어
하던 바다가 영국을 구한 것이다. 그리고 바다 덕분에 안전이 보장된 영국은
나폴레옹의 가장 크고 오만한 적국이 되었다. 1805 년 10월 21일, 영국의 넬슨은
스페인의 남안 트라팔가르 해안에서 프랑스와 스페인의 연합 함대와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넬슨이 그의 함대를 향해 "영국은 제군 각자가 의무를 다할 것을
기대한다"는 유명한 말을 내건 것은 이 해전 직전의 일이었다. 넬슨은 승리하는
순간에 전사했다. 그러나 영국 국민에 의해 길이 찬양 받고, 런던의 넬슨 기념비와
트라팔가르 광장에 의해 기념되고 있는 그의 승리는 나폴레옹의 영국 침략 야욕을
분쇄했다.
  나폴레옹은 영국으로 통하는 전 유럽의 항만을 폐쇄함으로써 이에 보복했다.
나폴레옹은 모든 해상 교통을 엄금하면 '장사꾼의 나라'인 영국은 이에 굴복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에 대해 영국 측에서는 반대로 유럽의 이 항만들을 봉쇄하여
나폴레옹 제국이 아메리카를 비롯한 그 밖의 다른 나라와 무역을 못하도록
차단했다.
  산업 구조가 취약한 러시아가 영국과 몰래 교역을 하자 나폴레옹은 1812 년
러시아 침입을 기도했다. 그렇지만 러시아는 저항을 하지 않고 계속 후퇴만 하면서
초토화 작전을 수행하여 전쟁은 장기화하였고, 나폴레옹은 혹독한 추위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 러시아 원정은 무서운 타격이었다. 그 때문에 프랑스는 인력을 크게 소모했다.
그렇지 않아도 쇠약했던 나폴레옹은 한층 노화하여 주의력은 산만해지고 긴장을
견뎌 낼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느긋하게 휴양이나 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적은
사방에서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전투에서는 승리에 빛나는
지휘관이었지만, 포위망은 시일이 지남에 따라 점점 압축되었다. 탈레랑의 책동은
활발해지고 나폴레옹의 직계 장군 가운데서도 배반자가 나왔다. 지칠 대로 지쳐
버린 나폴레옹은 자포 자기에 빠져 1814 년 4월 황제 자리에서 물러났다.
  유럽의 지도를 다시 만들기 위해 유럽 열국은 1814 년에 대회의를 빈에서
개최하였다. 여기에서 나폴레옹을 제외하기 위해 그를 지중해에 있는 작은 섬
엘바로 유배시켰다. 부르봉 왕가의 다른 루이^6,36^길로틴에 처형된 루이의
동생이다^3,63^가 어딘가 숨은 곳에서 나와 프랑스의 왕좌에 올려져 루이 18세로
행세하게 되었다. 부르봉 왕가는 이렇게 다시 복귀했고, 동시에 여러 압제가
부활했다. 이것이 바스티유 점령 후 20 년간에 걸친 온갖 눈부신 업적의 성과였다!
빈에서는 국왕들과 대신들이 서로 논의와 싸움을 거듭하는가 하면 자주 휴회하며
시간을 낭비했다. 그들은 마음껏 활개치고 있었다. 태풍이 지나간 뒤 겨우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는 때가 온 것이다. 나폴레옹을 배반한 내통자 탈레랑은 국왕들과
대신들 중에서 특히 인기를 모아 회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1 년도 채 못되어 나폴레옹은 엘바 섬에 넌더리를 냈고, 프랑스는 부르봉 왕가에
넌더리를 냈다. 나폴레옹은 조각배에 몸을 싣고 섬을 탈출하여, 1814 년 2월 26일
거의 단신으로 리비에라의 칸에 상륙했다. 그는 농민들에게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를 체포하려고 파견된 군대는 옛 지휘관 '꼬마 하사'를 보자마자 "황제
만세!"를 외치며 그의 휘하로 들어갔다. 승리를 거둔 그는 자랑스럽게 파리에
입성했고, 부르봉 왕가의 국왕은 도망쳤다. 유럽의 다른 나라는 공포와 놀라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여전히 지리하게 회의가 진행되던 빈에서는 춤과 주연이 일시에
멈추었다. 공통된 공포심이 국왕과 대신들로 하여금 모든 갈등을 잊게 하고,
나폴레옹 타도를 위해 다시 단결하게 만들었다.
  전 유럽은 그를 향해 진군을 개시했다. 그런데 프랑스는 전쟁에 지쳐 있었다.
게다가 나폴레옹은 46세밖에 안되었지만 그의 아내 마리 루이즈에게 버림받고
인생에 지친 노인이었다. 그는 두세 번은 승리했으나 브뤼셀 근처의 워털루에서
영국의 사령관 웰링턴과 프로이센의 사령관 블뤼헤르에게 대패했다. 그가 상륙한 지
불과 1백일 뒤의 일이었다. 그래서 그가 복귀한 이 기간을 '백일 천하'라 한다.
워털루 전투에서는 매우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으며, 전황은 막상 막하였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매우 운이 나빴다. 이기자면 이길 수도 있는 전투였다. 하지만 그 때
이겼다 하더라도 어차피 일치 단결한 유럽 앞에 굴복하는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가
참패하자 그를 지지하던 많은 사람들은 제 목숨을 위해 그를 외면하였다. 전황은
절망적이었다. 그는 두 번째 퇴위를 하고는 프랑스의 한 항구에 정박 중인 영국
배를 찾아가 영국에서 조용히 숨어 살고 싶다고 선장에게 호소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영국이나 유럽에서 너그럽고 정중한 대우를 기대했다면 그것은
큰 착오였다. 그들은 나폴레옹을 너무나 두려워했으며, 그의 엘바 섬 탈출로 그를
멀리 격리시켜 엄중히 감시해야 할 필요성을 통감하게 했다. 그래서 그의 호소도
아무런 보람없이 그는 죄수 취급을 받으며 몇몇 동행자와 함께 대서양의 고독한 섬
세인트 헬레나에 유배당했다.
  나폴레옹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유럽에서는 옛날의 국왕과 대신들이 빈
회의에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연회와 댄스를 즐기는 틈틈이 나폴레옹이 크게 바꾸어
놓은 유럽 지도를 고치고 있었다.
  부르봉 왕가의 루이 18세가 프랑스에 복귀했다. 스페인에서는 종교 재판까지
부활했다. 빈 회의의 군주들은 공화국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홀란드의
구 공화국만은 부활시키지 않았다. 그 대신 홀란드와 벨기에를 한데 합쳐 네덜란드
광화국을 만들었다. 독립국 폴란드는 모습을 감추고,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특히
주로 러시아에 병합되었다. 베네치아와 북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 차지가 되었다.
스위스와 라비에라 사이에는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한 조각씩 뜯어 맞춘
사르디니아 왕국이 생겼다. 중앙 유럽에는 묘하고 막연한 독일 연방이 생겼는데, 그
중심은 여전히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였다. 그 밖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처럼
빈 회의의 참석자들은 자신들의 뜻에 따라 민중들과 영토를 강제로 이리저리
갈라놓고 다른 나라 언어를 지껄이게 함으로써 곳곳에 장래의 분규와 전쟁의 씨를
뿌려 놓았다.
  1814 년부터 1815 년 걸쳐 열린 빈 회의가 특히 관심을 기울인 것은 국왕들을
절대로 안전하게 하는 일이었다. 프랑스 혁명은 그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했으나, 그들은 어리석게도 새로운 혁명 사상을 막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파르(알렉산드르 1세)와 오스트리아의 황제(프란츠 요제프 1세)는
한술 더 떠서 자신들과 다른 군주들을 방위하기 위하여 '신성 동맹'이라는 것을
체결했다. 이렇게 되고 보니 꼭 루이 14세나 루이 16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 것
같은 꼴이다. 영국을 포함한 유럽 전체에서 모든 자유 사상이 탄압 받았다. 유럽의
진보적인 사람들은 프랑스 혁명에서 흘린 피가 헛된 꽃이 되어 버린 것에 얼마나
실망했던가!
  나폴레옹 몰락 당시 남아메리카는 스페인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독립 투쟁이
전개되고 있었다. 나폴레옹의 폐위는 이 투쟁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아, 스페인에
대한 항쟁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유럽의 국왕 가운데에는 그들의 친척이라 할
스페인 왕을 도와 식민지의 혁명 운동을 진압하려고 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미국이 이같은 간섭을 최종적으로 배제했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은 먼로였는데, 그는
유럽 열강이 남북 아메리카 어느 지역에든 간섭하면 미국과 즉시 교전을 해야 할
것이라고 강력하게 경고하고 나섰다. 이 엄포가 유럽 열강에 두려움을 주어, 그 뒤로
유럽 열강은 남아메리카에 적극적으로 간섭하지 못했다. 먼로 대통령의 유럽에 대한
경고는 '먼로주의'로 잘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남아메리카의 새로운 공화국은
오래도록 유럽의 야망에서 벗어나 성장해 갈 수 있었다. 그들은 유럽의 위협에서는
충분히 보호받을 수 있었지만, 보호자인 미국의 손에서 지켜 줄 자는 아무도 없었다.
오늘날 그들은 미국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며, 수많은 공화국들이 완전히 미국의
영향 아래 놓여 있다. 
  1932 년 11월 22일, 24일
    50. 제1차 세계 대전까지의 1백년

  1814 년부터 1914 년까지의 1백년간은 물론 네가 잘 알고 있듯이 대체로
19세기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완전히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이 시기를 말하는
것은 곧 19세기를 설명하는 것이 된다.
  19세기에는 기계가 발전한 시대였다. 산업 혁명은 뒤이어 기계 혁명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기계는 인간 생활에서 점점 중요해지게 되었다. 그것들은
종래에 인간이 하던 갖가지 일을 대신하고, 인간의 노동을 편하게 했으며, 자연에
대한 의존도를 덜어 주고, 인간을 위한 부를 생산하였다. 과학은 현실에 여러 모로
응용되어, 여행과 운송은 점점 속도가 빨라 가기만 했다. 철도가 등장하여 역마차를
대신했고, 증기선은 범선을 대신했으며, 이윽고 대륙과 대륙 사이에 정기적으로 쾌속
운항되는 안전하고 기동력이 좋은 거대한 기선이 출현했다. 세기말에는 자동차가
발명되어 전세계에 보급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비행기가 나타났다. 동시에
인간은 또 하나 놀라운 것, 즉 전기를 지배하고 이용하기 시작하여 전신, 전화가
등장했다. 실로 이런 것들은 세계의 모습을 바꿔 놓았다. 교통 기관이 발달하여
점점 빠른 속도로 여행할 수 있게 되면서 세계는 축소되어 무척 작아진 것처럼
느껴졌다. 오늘날 우리는 이 모든 것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새삼 그것을 다시
돌아보는 일은 별로 없다. 그러나 이런 개량과 변화는 바로 얼마 전에 나타난
것으로서 모두 최근 1백년간의 산물인 것이다.
  또한 19세기는 유럽, 그 가운데서도 서유럽, 특히 영국의 세기였다. 산업 혁명과
기계 혁명은 여기서 시작되고 진행되었으며, 그로 말미암아 서유럽은 다른 세계를
크게 앞섰다. 영국이 제해력과 공업에서 우월한 기반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서유럽의
다른 나라들도 곧 이를 뒤쫓아갔다. 미국도 이 새로운 기계 문명으로 두각을
나타내어, 철도는 그들을 서부로 운반해 준 끝에 저 광대한 땅을 한 나라가 되게
해주었다. 그들은 내부 문제와 팽창에 너무 바빠 유럽이나 다른 세계에 손댈 여유가
없었다.
  그 밖의 다른 세계는 공업이나 기계력에서 뒤떨어져 서유럽의 새로운 기계 문명과
경쟁할 수 없었다. 유럽의 기계 공업은 종래의 농가 수공업에 비해 훨씬 빠르고
대량으로 제품을 생산했다. 이런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원료가 필요했지만
그 원료는 대개 유럽에서 나지 않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제품이 생산되면 그것을 팔
시장이 필요했다. 그래서 서유럽은 원료를 공급해 주고 제품을 사줄 나라를 찾아
나섰다. 아시아와 아프리카는 좋은 대상이었다. 유럽은 힘이 약한 아시아와
아프리카에게 마치 맹수처럼 덤벼들었다. 영국은 이러한 제국주의 경쟁에서 우세한
공업과 해군력 덕분에 쉽게 선두에 나설 수 있었다.
  유럽은 거인 같은 아시아를 짓눌렀다. 북쪽에는 러시아 제국이 대륙을 가로질러
길게 뻗어 나갔고, 남쪽에서는 영국이 모든 면에서 가장 큰 노획물인 인도를
손아귀에 꽉 틀어쥐었다. 서쪽에서는 투르크 제국이 해체되고 있었는데, 당시
투르크는 '유럽의 환자'라는 별명을 얻기까지 했다. 페르시아는 명색이
독립국이었으나 영국과 러시아에 의해 좌우되고 있었다. 동남 아시아버마,
인도지나, 말레이시아, 제바, 수마트라, 보르네오, 필리핀 등은 작은 섬을 빼고는
모두 유럽 강대국에 의해 점령당했다. 극동에서는 유럽의 여러 강대국이 덤벼들어
중국을 침식하여 잇달아 조계(19세기 후반에 중국의 개항 도시에 있었던 외국인
거주지로, 외국의 행정권, 경찰권이 행사되었다)를 빼앗아 냈다. 다만 일본만이
어깨를 펴고 대등한 지위에서 유럽에 대항했다. 당시 일본은 쇄국 상태에서 벗어나
놀라운 속도로 새로운 환경에 적응했던 것이다.
  아프리카는 이집트를 제외하면 크게 뒤떨어져 있었다. 아프리카는 유럽에 전혀
저항할 수 없었으며, 그 약점을 노리는 유럽 열강은 미친 듯이 제국주의 경쟁을
연출, 앞을 다투어 쳐들어가서 이 거대한 대륙을 분할해 버렸다. 수에즈 운하가
1869 년에 개통되자 유럽에서 인도에 이르는 길이 훨씬 가까워졌다. 영국은 이 운하
때문에 이집트를 더욱 중시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집트가 운하를 위협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서 인도로 가는 항로를 견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기계 혁명의 결과 자본주의 문명은 전세계로 펴져 나가고 유럽은 모든
곳을 지배하였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제국주의로 나아갈 길을 터놓았다. 자본주의는
또한 민족주의를 앙양시켰다. 그러므로 이 19세기를 민족주의 세기라고 해도 좋다.
이런 종류의 민족주의는 단순히 자기 나라에 대한 애국심일 뿐만 아니라 모든 다른
나라에 대한 증오이기도 했다. 이처럼 자기가 속한 국가만을 신성시하는 것과 다른
나라에 대한 모욕적인 비방은 필연적으로 여러 나라 사이에 마찰과 분규를
불러일으켰다.
  이탈리아는 북부에 있는 오스트리아인과 중부의 교황을 몰아내어 통일 국가를
이루었다. 뒤따라 독일도 프로이센의 지도 아래 통일을 성취했다. 프랑스는 독일에
패배하여 굴욕을 당하고 국경 지방의 알사스와 로렌 두 지방을 떼어 주었다. 그
뒤로 프랑스는 복수를 별렀다.
  영국의 산업상 우세는 독일, 프랑스, 그리고 미국이 추격해 옴으로써 점차 격차가
좁혀졌다. 세기말이 되자 사태는 정점에 이르고 있었다. 세계는 유럽 열강의 끝없는
야심에 비하면 너무 좁았다. 각국은 서로 위협하고 질시하고 증오했다. 이 위협과
증오는 군대와 군함을 강화하고 확대하게 만들었으며, 이런 파괴 수단을 만들기
위해 굉장한 경쟁이 전개되었다. 다른 나라와 싸우기 위한 동맹이 여러 나라
사이에서 체결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두 개의 동맹 체제가 유럽을 양분하며
대립했다. 하나는 독일을 우두머리로 한 동맹이었다. 또 하나는 프랑스가 이끄는
동맹으로 여기에는 영국이 비공식적으로 가담하고 있었다. 유럽은 무장한 진지가
되었고, 산업과 무역, 군비의 경쟁은 점점 맹렬해질 뿐이었다. 편협한 민족주의는
이들 나라에 박차를 가하여 대중이 거짓 선동에 속아 이웃 나라 사람들을 미워하고,
그에 따라 전쟁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했다.
  민족주의는 아시아에서도 발달했다. 맨 처음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외국의
지배에 저항한 것은 봉건주의의 잔존 세력이었다. 자기 지위가 위협 당한다고
느꼈기 때문이었지만 그들은 필연적으로 실패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새로운
민족주의가 일종의 종교적인 사고 방식과 결합하여 일어났다. 이 종교적인 색채는
점차 퇴색하고 서유럽형 민족주의가 출현했다. 일본은 외국의 지배를 모면할 수
있었으며, 격렬한 반봉건적 민족주의가 고양되었다.
  서양의 제국주의가 점차 침략적으로 되어 가자 이에 대항하여 싸우려는 아시아의
민족주의도 점점 고조되어 갔다. 서쪽으로는 아랍의 여러 민족부터, 동쪽으로는
몽고족, 코리아에 이르기까지 온 아시아에 민족 운동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고 온건했으나 점차 첨예한 요구를 하며 나서게 되었다. 인도에는 비로소
국민 회의가 그 모습을 나타냈다. 아시아의 반역이 시작된 것이다.
  나폴레옹이 죽은 직후, 즉 19세기 초엽에는 유럽 어느 나라에서도 자유를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이들 여러 나라에는 국왕의 전제 정치가 있었고, 또 예를 들어
영국 같은 나라는 소수의 귀족과 부유한 계급이 권력을 잡고 있었고, 도처에서
자유의 요소가 억압당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프랑스의 혁명은
민주주의와 정치적 자유의 관념을 보급시켰고, 자유주의 사상가의 갈채를 받았다.
  실로 민주주의는 모든 국가와 국민의 결함과 고민을 고쳐 줄 구제책으로서
존중받기 시작하였다. 민주주의의 이상은, 국가는 그 어떤 특권도 인정하지 말아야
하며, 모든 사람을 평등한 사회적, 정치적 가치가 있는 존재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저마다 여러 가지 점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강하고, 또 어떤 사람은 현명하고 덜 이기적이다. 그러나 민주주의
신봉자의 말을 빌리면, 아무리 사람 사이에 차이가 있다 해도 누구나 동일한 정치적
지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모든 사람에게 투표권을 줌으로써
실행에 옮겨진다. 진보적 사상가와 자유주의자는 한결같이 민주주의의 장점을
확신하여 그것을 실시하기 위해 애썼다. 보수주의자와 반동이 이에 반대하여
곳곳에서 큰 투쟁이 벌어졌다. 어떤 나라에서는 혁명이 일어났다. 영국은 선거권이
확대되기에 앞서, 즉 의원 선출 투표권이 종래 보다 광범위한 사람들에게
부여되기에 앞서 내전 일보 직전에까지 이르렀다. 그렇지만 대체로 여러 곳에서
민주주의가 승리하여, 서유럽과 미국에서는 적어도 세기말까지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투표권을 갖게 되었다.
  19세기를 '민주주의의 세기'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민주주의는 세기의 큰 이상이
되었다. 민주주의는 마침내 승리를 얻었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이 일단락 될 즈음,
사람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민주주의가 빈곤과
궁핍, 그리고 자본주의 제도가 안고 있는 많은 모순을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주린 배를 움켜쥔 사람이 투표의 권리를 행사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리고 또 그의 투표, 그의 노력이 몇 푼의 식비에
매수된다면, 도대체 그는 어느 정도의 자유를 향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때문에 민주주의는 대중의 신망을 잃어버렸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정치적
민주주의는 신용을 잃었다.
  노동을 함으로써 사회에 기여하는 사람들이 몇 푼 안되는 보수를 받고, 나머지는
모두 노동하지 않는 사람들의 주머니로 들어간다. 이것이 산업 자본주의 체제에서
제기된 중대한 난점이었다. 이와 같이 보수는 노동에서 분리되었다. 그러자 그
결과로 한쪽에서는 노동하는 자들의 지위 저하와 궁핍이 일어나고, 다른 한쪽에서는
생산 과정에 들어가 노동하거나 부를 만들지 않고서 다만 산업에 의해
생활한다기보다는 기생한다고 말해야 옳은 계급이 생긴다. 노동의 성과를 분배하는
이러한 방법이 불공정하다는 것은 분명했다. 게다가 노동자는 오랜 세월 동안 참고
견디어 온 농민과는 달리, 이것이 공정치 못하다는 것을 깨닫고 반발했다.
  사태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악화될 뿐이었다. 공업화한 서구 여러 나라에서는
이러한 모순을 더 이상 은폐할 수 없게 되었다. 사려 깊고 진지한 사람들은 이
미로를 빠져나갈 출구를 찾고 있었다. 그리하여 일반적으로 '사회주의'라 불리는,
자본주의의 아들이자 적인 사상, 아마도 자본주의를 대체할 운명을 지닌 것으로
생각되는 사상이 생겨났다.
  19세기 중엽에 마침내, 사회주의의 예언자요 사회주의의 한 종류인 '공산주의'의
아버지가 될 운명을 타고난 인물이 나타났다. 그의 이름은 칼 마르크스였다. 그는
단순히 강단적 이론을 논하는 애매한 철학자나 교수가 아니었다. 그는 실천적
철학자이며, 그의 입장은 과학적 방법을 정치, 경제 문제에 적용함으로써 세계의
질병을 치유하려는 것이었다. 종래의 철학은 단지 세계를 설명하려고 했으나,
공산주의 철학은 이를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마르크스는
또 한 사람의 주역인 엥겔스와 함께 자기 철학의 골자를 기술한 '공산당 선언'을
발표했다. 뒤에 그는 독일어로 '자본론'이라는 대저서를 펴내어 세계 역사를
과학적으로 검토하고, 사회가 어떠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촉진하자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설명했다. 나는 여기서 마르크스 철학을
설명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저작이 사회주의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또 그것이 소비에트 러시아의 바이블이 되었다는 것만은
알아두었으면 한다.
  19세기의 중반 무렵에 영국에서 발간되어 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또 하나의
유명한 책이 다윈의 '종의 기원'이다. 다윈은 생물학자였다. 즉 그는 자연, 특히
동물과 식물을 연구했다. 그는 많은 실례를 들어 대자연 속의 식물과 동물의 발달
경로를 규명했는데, 하나의 종이 자연의 도태 과정을 거쳐 다른 종으로 이행하며,
단순한 형태가 점차 복잡한 형태로 변화한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과학적 해명은
세계와 인간과 동물의 창조에 관한 종교적 교리와 정면으로 대립하는 점이 있었다.
그리하여 진화론을 주장하는 과학자와 교리를 믿는 신자들 사이에 대논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참된 논점은 사실에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생활 일반에 대한
태도에 있었다. 그것은 모든 사물을 면밀히 음미하고 미신을 배제했다. 그리하여
실험이나 이성에 의해 확정된 것만을 믿었다.
  과학 정신은 투쟁을 통하여 고루한 종교적 태도에 대해 승리를 거두었다. 이렇게
생각한 사람들은 이미 18세기부터 대개 합리주의자가 되었다. 내가 프랑스에서 혁명
전에 나타난 철학 사상의 물결에 대해 이야기한 것을 기억하고 있겠지? 그러나 이제
변화는 보다 더 깊숙이 사회에 스며들고 있었다. 어느 정도 교육받은 사람들은
누구나 과학의 진보에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아마도 이 문제를 그다지 깊이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며, 또 과학에 관해 아는 것도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눈앞에 펼쳐지는 발명과 발견의 장관에 자극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철도,
전기, 전신, 축음기, 그 밖에 갖가지 것들이 잇달아 쏟아져 나왔으며, 그것들은 모두
과학적 방법의 소산이었다. 그것들은 과학의 승리를 알려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과학은 인간의 지식을 늘려 줄 뿐 아니라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을 증대시켜
주는 것으로 보였다. 과학이 승리하자 사람들이 이 전능하고 새로운 신 앞에 무릎을
꿇은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래서 19세기의 과학자들은 매우 독선적이고 자신감에
차 있었으며, 의견은 항상 명확했다.
  19세기의 특징으로서 거론해야 할 또 한 가지는, 서양에서 보통 교육이 크게
발달한 점이다. 이는 지배 계급에 속하는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맹렬한 반대를
받았다. 그들에 따르면 보통 교육의 확대가 서민에게 불평을 야기하고, 오만
불손하게 만들며, 비기독교적으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말한다면
기독교란 부자와 권력자에 대한 자발적인 복종과 무지 위에 서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초등 교육이 설치되고, 보통 교육은 널리 보급되었다.
19세기의 다른 많은 특징들처럼 이러한 교육의 확대 역시 새로운 공업 문화의
결과였다. 왜냐하면 대공장이나 대기계는 생산의 능률을 요구하는데, 이는 오로지
교육에 의해서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사회에서는 온갖 종류의 숙련
노동이 널리 요구되었는데, 이 수요는 보통 교육에 의해 충당되었다.
  초등 교육의 보급은 수많은 식자 계급을 낳았다. 그들은 교육 수준이 그리 높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읽고 쓸 수는 있었기 때문에 신문을 읽는 습관이
퍼졌다. 값싼 신문이 발행되어 방대한 발행 부수를 올렸다. 그것은 때때로 사람들의
정열을 오도하여 이웃 나라에 대한 배타적인 감정을 선동한 일도 적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것이 전쟁의 실마리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어쨌든 '신문'은 반드시
고려해야 할 주요 세력이 되었다.
  19세기에는 유럽 문명이 꽃을 피웠다. 이 문명은 부르주아 문명이라고
일컬어진다. 왜냐하면 부르주아 계급은 산업 자본주의에 의해 태어났고, 또 이들이
산업 자본주의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문명의 갖가지 모순과 결점을 말했다.
그러나 어느 나라, 어느 국민이든 어딘가 위대한 자질을 갖고 있지 않는 한
번영하고 대성할 수 없다. 서유럽은 그와 같은 위대한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유럽의 우월한 지위는 물론 군사력에 의한 것이지만, 또한 유럽을 위대하게 만든
자질에 바탕을 둔 것이기도 했다. 유럽의 곳곳에 풍부한 생활과 생명력과 창조성이
나타났다. 위대한 시인, 저술가, 과학자, 철학자, 음악가, 그리고 기술자와 실천가가
나왔다. 그리고 서유럽에서는 일반 사람들도 예전의 어떤 시대보다 나은 생활을
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수도나 도시런던, 파리, 베를린, 뉴욕은
점점 팽창하고, 건축물들은 앞을 다투어 높이 솟아올랐으며, 사치는 정도가
높아졌다. 그리고 과학은 인력 노동의 고역을 덜어 주고, 생활의 쾌적과 향락의
향상을 위한 여러 수단을 제공했다. 상류 계급의 생활은 풍요롭고 문화적으로도
수준이 높아졌으며, 어떤 자기 만족과 자부심과 매끈함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문명의 쾌적한 오후, 또는 황혼처럼 보인다.
  이와 같이 19세기 후반의 유럽은 즐겁고 떠들썩한 양상을 보여주었으며, 이
원숙한 문화와 문명은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영원히 번영하며 오직 승리만 계속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겉껍질을 벗기고 안을 들여다보면 이상한 혼란과 불쾌한
광경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번영하는 문화는 대체로 유럽의 상층
계급에 국한된 것이며, 수많은 나라와 수많은 민중의 착취 위에 기초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여러 모순들이 있고, 민족간의 증오가 있으며, 제국주의가 그
추악하고 피에 주린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 이것을 본 사람은 이미 19세기 문명의
지속성과 매력을 겉모양 그대로 믿지는 않게 될 것이다. 육체의 겉모양은 상당히
혈색이 좋았으나 정신은 썩어 가고 있었다. 툭하면 건전과 진보라는 말을 입에
담지만 실은 퇴폐가 부르주아 문명의 생명을 갉아먹고 있었다. 
  1932 년 9월 9일, 12월 5일
    51. 영국의 인도 지배

  이제 영국이 어떻게 인도를 지배하게 되었는가를 살펴보자. 1526 년 델리에서
이미 극도로 쇠약해진 아프간인 술탄에 대해 바베르가 승리함으로써 인도에 새로운
시대와 새 제국무굴 제국의 기초를 세웠다. 중간에 잠깐 중단되기는 했지만,
그것은 1526 년부터 1707 년까지 181 년 동안 존속했다. 이 왕조는 6 명의
대군주가 번갈아 가면서 왕위에 오른 다음 멸망하였으며, 그 뒤를 이어 마라타족,
시크족, 그 밖의 부족들이 나라를 세웠다. 그리고 그들 뒤를 이어 영국이 와서 중앙
권력의 붕괴와 농촌의 혼란을 틈타 점점 그 지배를 확고히 해나갔다.
  바베르에 이어 전제 권력을 확립한 악바르 대제 치세에는 종교적인 관용의 기풍이
있어 힌두교와 이슬람교를 접근시키려는 노력이 있었다. 이러한 기풍은 그의 아들인
자한기르 시대에도 이어졌다. 그러나 그 후 힌두교와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가해졌다. 루이 14세와 동시대인인 샤 자한 시대에는 아름다운 꿈을 형상화한 타지
마할이 세워졌다. 이렇듯 그의 시대에는 무굴 건축이 절정을 이루었다. 하지만 그는
종교나 빈민에 대하여 그다지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악바르의 관용, 인자,
선정은 과거의 것이 되었다. 사태는 바야흐로 혼란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다음에 왕조에 오른 사람은 대무굴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아우랑제브였다. 그는
자신의 종교 이외에는 어떤 종교도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힌두 교도에 대한
이두세를 부활시키고, 또 가능한 한 힌두교도를 모든 관직에서 추방했다. 제국은
점차 썩기 시작했으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약해지고 사방 팔방에서 적이 들고
일어났다. 특히 인두세에 대한 힌두 교도들의 반응은 거세었다. 그 후 50 년 동안
인도에 닥친 대변동의 전주곡은 바로 일반적인 궁핍이었다. 아우랑제브가 죽은 다음
이 변동이 한창 기세를 떨치고 있을 때, 무굴 제국은 갑자기 뿌리째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인도를 둘러싸고 네델란드, 영국, 프랑스가 각축을
벌였으며, 이들의 세력은 점차 강화되어 갔다.
  이 무렵 남부 인도에서 일어난 중요한 사건은 영국인과 프랑스인의 각축이었다.
18세기를 통해서 양국은 유럽에서 자주 전쟁을 했다. 본국에서 공식적으로 평화
관계에 있을 때에도 인도에서는 자주 싸움이 계속되었다. 양쪽의 세력은 막상
막하로서 부와 권력의 획득에 저돌적이고 뻔뻔스러운 모험가가 많았기 때문에
대립은 격렬하기 짝이 없었다. 프랑스 측에서 이 시대에 가장 두각을 나타내고 있던
인물은 뒤플렉스였고, 영국 측에서는 로버트 클라이브였다. 뒤플렉스는 어떤 두 부족
국가 사이의 싸움에 개입하여 훈련된 자신의 군대를 한쪽에 빌려주고, 이에 대한
대가로 지방민을 무자비하게 착취하여 많은 이익을 얻는 도박을 서슴지 않았다.
이리하여 프랑스의 세력이 꽤 커졌지만, 영국이 곧 그 수법을 모방하여 한술 더
뜨고 나왔다. 마치 굶주린 이리처럼 양편은 모두 사건을 찾아 헤매었고, 그 먹이는
도처에서 발견되었다. 남부 인도에서 후계자 계승과 관련된 싸움 같은 것이 있으면,
반드시 프랑스가 한쪽 편을 들고 영국이 상대방을 후원하는 실정이었다.
  영국은 15 년간(1746--1761)의 주도권 싸움에서 드디어 프랑스를 압도했다.
인도에 있는 영국 모험가들은 본국으로부터 충분한 후원을 받고 있었지만,
뒤플렉스나 그 동료들은 프랑스로부터 조금도 그런 원조를 받지 못했다. 알고 보면
그리 이상할 것도 없다. 인도 주재 영국인의 배후에는 동인도 회사의 주주로 있는
영국 상인들이 후원자가 되어 막강한 그들의 힘이 의회와 정부를 움직이는 적극성을
보였다. 이에 반해 프랑스인의 배후에서는 파국이 다가오는 것도 아랑곳없이 그날
그날의 즐거움에 도취된 루이 15세(루이 14세의 증손이며, 그의 후계자)의 허약함이
대조를 이루었다. 더욱이 영국이 해양을 지배했다는 것도 영국의 제패에 크게
기여했다.
  1757 년 영국의 클라이브는 플라시에서 벵골 태수를 격파했다. 플라시 전투는
후에 커다란 결과를 낳았다. 그것은 벵골의 운명을 결정지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흔히들 인도에서 영국의 제패는 플라시에서 시작된다고 전해진다.
  영국인들이 인도에 들어왔을 무렵 인도에서 가내 공업이 발전하고 있었다. 생산
방법을 자연스러운 발달에 맡기고 외부에서 전혀 간섭하지 않았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인도에서도 기계 공업이 등장했을 것이다. 인도에는 석탄도 있고 철도 있다.
이것은 우리가 영국에서 본 것처럼 공업의 발달을 크게 도우며, 어느 의미에서는
공업을 낳았다고도 볼 수 있다. 혼란한 정치 정세 때문에 그 시기가 어느 정도
지연되었을지는 모르지만, 결국은 인도에도 영국과 같은 현상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영국인이 개입하였다. 그들은 이미 대규모 기계 생산을 하는 나라와
사회를 대표하고 있었다. 그들은 인도를 장래의 경쟁자로 보면서 공업의 발달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인도는 그 때 주목할 만한 상황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발전한 국민이었던 영국인은 인도에서 가장 뒤떨어진 보수적인
계급과 결탁하였다. 그들은 몰락해 가던 봉건 계급을 안아 일으켜 지주로 만들고,
반봉건 국가에 군림하는 수백 명에 달하는 지방의 예속 영주들을 지지하였다.
그들은 인도의 봉건주의를 강화하였다.
  영국인이 왜 인도에서 이러한 태도를 취했는가는 쉽게 알 수 있다. 자본주의의
기초를 전적으로 지탱하고 있는 것은 무자비한 경쟁과 착취이며, 제국주의는 그
정도가 한 걸음 앞선 것이다. 그러므로 그만한 힘을 기른 영국인은 현재의 적을
타도하는 동시에 다음에 대두할 적에 대해서도 예방책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착취하는 자와 착취당하는 자의 이해 관계는 결코 같을 수 없다. 그리하여 그들은
인도에 아직 남아 있던 봉건 시대의 유물에 의지하였다. 이 유물은 영국인이 인도에
왔을 무렵에는 이미 힘을 잃고 있었지만, 이들은 영국인의 앞잡이가 되어 착취한
이윤을 약간 나눠 갖게 되었다. 영국인은 이미 수명이 다한 계급에게 한동안 도움을
준 것이다. 만일 영국인이 준 버팀목이 쓰러지면 그들은 멸망하거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나가는 두 가지 길밖에 없었다. 영국의 호의에 의존하는 인도의 지방
토후령은 크고 작은 것을 합쳐 7백 개에 이르렀다.
  한편 영국은 종교적 보수주의를 지원하였다. 영국인이 기독교 신자임을 내세우는
것을 생각하면 좀 이상한 이야기지만, 영국인의 도래는 인도의 힌두교나 이슬람교를
더욱 완고하게 만들었다. 이것도 어느 정도 수긍할 만한 이야기다. 한 나라의
종교나 문화는 외부의 침략이 있으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자기 껍질 속에
움츠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 교도가 침입한 이후 힌두교가 더욱
완고해지고, 카스트가 발달한 것도 바로 이런 경우다. 이번에는 힌두교와 이슬람교가
모두 이런 식으로 반발했다. 그러나 이러한 점은 차치하고라도 인도의 영국인
정부는^6,36^계획적이든 무의식적이든^3,63^사실 이 두 종교의 보수적 요소를
조장했다. 영국인의 관심이 종교나 개종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오직
돈벌이에만 전념했을 뿐이다. 그들은 민중이 분노하고 반항할까 두려워 하며 애써
종교 문제에 개입하지 않으려 했다. 그리하여 행여 종교에 간섭한다는 의심을
받을까 두려워, 오히려 이 나라의 종교, 아니 종교의 외형을 보호하고 지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종교는 외형은 남되 내용은 텅 비게 되었다. 
  1932 년 12월 7일
    52. 인도의 각성

  1885 년에 접어들자 드디어 변화가 일어났다. 모든 신흥 부르주아지의 희망이
한데 어우러져, 그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한 하나의 조직이 탄생했다. 이리하여
인도 국민 회의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이 조직은 대중의 주장을 수렴하며, 어느
정도는 대중의 기수가 되었다. 그것은 또한 인도에 대한 영국의 지배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그에 항쟁하는 대규모 대중 운동을 지도했다. 독립의 커다란 깃발을 높이
쳐들고 당당히 자유를 요구하여 싸웠다.
  첫 번째 국민 회의가 1885 년 봄베이에서 개최되었다. 벵골의 본네르지가 최초의
의장이었다. 그 밖에 초기의 두드러진 인물로는 수렌드라나트 바네르지, 바드루딘
티야부지, 페로제샤 메타 등이 있다. 그런데 이 모든 이름 위에 한 이름이 우뚝 서
있다. 그는 '인도의 대장로'가 되어 인도가 추구해야 할 목표를 제시하였으며, 맨
처음으로 '스와라지(자치)'라는 말을 사용한 다다브하이 나오로지다. 또 한 사람의
이름을 들어보자. 너는 이 이름 역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국민 회의의
장로로서 지금도 생존해 있는 판디트 마단 모한 말라비야다. 그는 50 년 이상
인도의 현실 속에서 온 힘을 쏟아 일해 왔다. 그리고 고령과 노고로
쇠약해졌으면서도 청년 시절에 품었던 꿈을 실현하고자 했다.
  이와 같이 국민 회의는 해를 거듭함에 따라 전진하여 그 힘을 더해 갔다. 국민
회의의 구호는 예전의 힌두 민족주의처럼 편협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주로
힌두 계통의 것이었다. 이슬람 교도의 소수 지도자는 이에 합류했고 간부가 되기도
했지만, 이슬람 전체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 무렵 이슬람의 위대한 지도자는
사이이드 아하마드칸 경이었다. 그는 교육의 결여가 이슬람 교도에게 큰 장애가
되어 낙후를 초래했다는 것을 통찰했다. 그는 이슬람 교도에게 국민 회의와 결별할
것을 권하고, 지금은 훌륭한 대학이 된 학교를 정부와 협력해서 알리가르에 세웠다.
사이이드 경의 충고는 국민 회의에 합류하려고 하지 않는 대다수 이슬람 교도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일부 교도는 줄곧 국민 회의와 행동을 같이했다. 내가
소수니 다수니 말할 때는 언제나 상류 중간 계급, 즉 이슬람이든 힌두든 영국식
교육을 받은 계급의 소수자와 다수자를 말한다. 힌두든 이슬람이든 대중은 국민
회의에 관여하지 않았고, 또 당시에는 아직 국민 회의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것도
드문 일이었다. 하층 중간 계급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는 없다.
  국민 회의는 발전을 거듭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빨리 성장한 것은 민족 관념과
자유를 향한 욕망이었다. 국민 회의의 호소는 필연적으로 한정된 것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영어를 아는 사람들만의 요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국민
회의는 여러 지방을 어느 정도 서로 접근시켜 공통된 윤곽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민중 속에 깊이 침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만큼 힘은 약했다.
  때마침 그 무렵, 벵골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인도 전체를 들끓게 한 사건이
발생했다. 영국 정부는 당시 비하르까지 포함하고 있던 벵골주를 둘로 분할하고, 그
가운데 하나를 동벵골이라고 명명했다. 이러한 조처는 벵골에서 성장하고 있던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의 분노를 샀다. 그들은 영국인이 그들을 분할하여 힘을
약화시키려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동벵골에는 이슬람 교도가 많았다. 그래서 이
분할 문제를 두고 힌두 대 이슬람의 문제가 재발되었다. 대규모 반영 운동이
벵골에서 발생했다. 대다수의 지주와 인도인 자본가도 이에 참가했다.
'스와데시(국산품 애용)'라는 슬로건은 이 때 처음 출현했고, 그와 함께 영국 상품에
대한 불매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인도의 자본과 공업에 도움을
주었다. 이 운동은 대중 속으로도 어느 정도 번져 갔고, 어느 정도는 힌두교에서
영감을 받은 운동이었다.


  1932 년 12월 14일
    53. 영국이 중국에 아편을 강요하다.

  무역은 19세기에 들어와 유럽인에 의해, 특히 영국 무역의 독점권을 가지고 있던
동인도 회사에 의해 급격히 증대했다. 동양의 네덜란드인은 담배 속에 아편을
섞어서 말라리아 예방약으로 피웠다고 한다. 이들을 통하여 아편을 피우는 습관이
중국에 퍼졌다. 훨씬 나쁜 형태로 말이다. 왜냐하면 중국에서는 다른 것과 섞지
않고 그저 아편만을 피웠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는 이 습관이 백성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거니와 아편 무역이 이 나라에서 거액의 화폐를 빼앗아 간다는 이유로
이를 금지시키려 했다.
  1800 년 중국 정부는 용도를 불문하고 아편 수입을 일절 금지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 무역은 외국인들에게는 엄청나게 이윤이 많은 장사였다. 그들은
아편 밀수를 계속하면서 중국 관리에게 뇌물을 바쳐 못 본 척 눈감아 달라고 했다.
그러자 중국 정부는 관리가 외국인과 교제하면 안된다는 법령을 만들었다.
외국인에게 중국어 또는 만주어를 가르치는 행위도 엄벌로 다스렸다. 그러나 이렇게
여러 모로 손을 써도 목적을 달성할 수는 없었다. 아편 무역은 여전히 계속되고,
아마 거액의 뇌물과 독직 행위가 있었다. 영국 정부가 중국에 대한 무역의 독점권을
동인도 회사에서 회수하여 모든 영국인에게 개방한 1834 년 이후,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아편 밀수액은 점점 늘어났다. 마침내 중국 정부는 이를 억압하기 위해 강경
조치를 취할 결심을 했다. 그들은 이 목적을 위해 한 사람의 탁월한 인물을
기용했다. 임칙서가 밀수를 단속하기 위한 흠차 대신에 임명된 것이다. 그는 즉시
민첩하게 행동을 개시했다. 그는 이 불법 무역의 중심인 남부의 광동에 부임하자, 그
지역의 모든 외국 상인에게 소지한 아편을 모두 자기한테 제출하라고 명령했다.
처음에 그들은 이 명령에 복종하기를 거부했다. 그러자 임칙서는 복종을 강요했다.
그는 그들을 상관 안에 격리시키고 그들의 중국인 노동자와 고용인을 떠나도록
하여, 외부에서 식량이 공급되지 못하도록 했다.
  이 철저한 강제 조치에 결국 외국 상인은 기가 꺾여서 중국인에게 아편 2만
상자를 넘겨주게 되었다. 그는 명백한 밀수품인 이 대량의 아편을 불태워 버렸다.
그는 또 외국 상인들에게, 선장이 아편을 가지고 다니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지 않는
한 어떠한 선박도 입항을 허가하지 않겠다는 요지의 포고를 했다. 만약 이 포고를
위반하면 중국 정부는 배와 그 화물을 전부 몰수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임칙서는
이 조치로 인하여 중국이 궁지에 빠지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 궁지란 곧 영국과의 전쟁, 중국의 패배, 굴욕적인 조약, 그리고 중국 정부가
금지하려고 했던 바로 그 아편이 중국의 입으로 강제로 처넣어진 것이다. 아편이
중국에 좋은지 나쁜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중국 정부가 무엇을 의도했는가 하는
것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중국에 아편을 밀수하는 것이 영국
상인에게 엄청난 이익을 안겨 주었다는 사실이다. 영국인은 이 수입원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흠차 대신 임칙서가 불태운 아편은 대부분 영국 상인의
소유물이었다. 그러자 1840 년 영국은 국가의 명예를 내세우며 중국과 전쟁을
개시했다. 이 전쟁은 아편을 중국에 강요할 권한을 얻어내기 위한 것이었고, 또 그
권한을 얻어냈기 때문에 '아편 전쟁'이라 부른다.
  중국은 광동과 그 밖의 항구를 봉쇄한 영국 함대에 대해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2 년 뒤 중국은 어쩔 수 없이 굴복하고, 1842 년 '남경 조약'으로 당시
거의 아편 무역을 뜻하는 외국 무역을 위해 다섯 개 항구가 개방되어야 한다는
결정을 했다. 이 다섯 항구는 광동, 상해, 하문, 영파, 복주였다. 이 항구들은
'조약항'이라 일컬어진다. 그 밖에 영국은 광동 근처의 홍콩을 차지하고, 소각된
아편과 영국이 중국과 싸우는 데 든 전쟁 비용에 대한 거액의 배상금을 받아 냈다.
  이것은 중국과 서양의 여러 제국주의 나라 사이에 잇달아 일어난 분쟁의
시초였다. 고립 시대는 막을 내렸다. 중국은 외국 무역을 받아 들여야만 하였고,
게다가 기독교 선교사까지 받아들여야 했다. 이 기독교 선교사들은 중국에서
제국주의의 앞잡이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뒤이어 일어난 중국의 분쟁은 한결같이
선교사와 관계된 것이었다. 그들의 행동은 때때로 오만 불손했지만, 중국 법정은
그들을 재판할 수 없었다. 새로운 조약에 따라 서양에서 온 외국인은 중국의 법률,
또는 중국의 재판에 따르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그들은 본국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다. 이것은 '치외 법권'이라 하여 지금껏 존속하며 원성의 표적이 되었다.
개종자들까지 이 '치외 법권'의 특별 보호를 받을 권리를 주장했다. 그들은 어떤
점으로 보나 그런 자격이 없었지만, 그들의 배후에는 강력한 선교사들, 즉 제국주의
열강의 대표자가 존재하기 때문에 자격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중국에서 가장 무섭고 참혹한 반란을 일으킨 것도 한 기독교 개종자였다. 이것은
1850 년쯤 반정신병자 홍수전에 의해 일어난 태평 천국의 난을 말한다. 이 종교적
광신자는 묘한 성공을 거두어 "우상 숭배자를 죽여라!"고 함성을 지르면서 마구
설쳐대며 무수한 백성을 살해했다. 반란은 중국의 절반을 휩쓸어 약 12 년 동안,
적어도 2천만 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기독교 선교사, 또는 여러 외국이
이 반란과 살육에 책임이 있다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처음 얼마 동안은
선교사들이 그 사태를 축복하는 듯이 보였으나 곧 그들은 홍수전을 부인했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기독교 선교사가 이에 관여하고 있는 것으로 줄곧 믿었다. 이
확신은 중국인들이 그 당시부터 훗날까지 오래도록 선교사의 활동을 얼마나
증오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증거다. 중국인이 볼 때 선교사들은 복음과 선의의
사자로 온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곧 제국주의의 앞잡이였다.
  결국 진압은 됐지만, 한 병적인 광신자에 의해 지도된 반란이 그토록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 진짜 원인은 중국에서 낡은 질서가 파탄
중이었다는 사실이다. 중국에서는 조세와 경제 상태의 변화가 백성들의 불만을
증대시켰다. 반만주 비밀 결사가 도처에서 들고 일어나 반란이 보편화되어 있었다.
아편이나 외국 무역은 사태를 한층 악화시켰다. 물론 중국의 외국 무역은 과거부터
있었다. 그러나 이 때는 조건이 달라져 있었다. 대기계 공업이 줄기차게 생산한
제품은 서양 각국이 자체 내에서 다 소화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다른
곳에서 시장을 찾아내야만 했다. 그리하여 인도와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도 시장의
강요라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들 상품, 특히 아편은 기존의 거래 제도를 뒤집어
버렸다. 때문에 경제적 혼란은 한층 격화되었다. 인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중국
시장도 국제 물가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런 모든 사정이 백성의 불만과 궁핍을
더욱 극심하게 만들어 태평 천국의 난을 뒷받침하게 된 것이다.
  남경 조약은 영국인을 위해 중국의 문을 열어 주었다. 그러나 영국인 혼자서만
익은 과일을 따먹을 수는 없었다. 프랑스와 미국이 끼여들어 마찬가지로 중국과
통상 조약을 맺었다. 중국은 속수 무책이었다. 그리고 중국에 대한 이들의 강압은
외국인에 대한 우정이나 존경을 만들 수 없었다. 중국은 이 오랑캐들을 보는 것조차
싫어했다. 외국인들 또한 결코 만족하지 않고 있었다. 중국을 쥐어짜려는 그들의
욕망은 점점 커져 갔다. 영국이 역시 그 선두에 섰다.
  중국이 태평 천국의 난으로 여념이 없어 저항할 수 없었던 때는 외국인에게는
다시 없는 좋은 기회였다. 그래서 영국은 전쟁의 구실을 잡으려고 책동을 시작했다.
1856 년 10월에 중국의 광동 총독(엽명침)은 해적 행위 혐의로 중국인 선원을
억류했다(애로 호 사건). 그 배, 애로 호는 중국인의 것으로서 외국인과는 관계가
없으나 홍콩 정부의 허가를 얻어 영국기를 게양하고 다녔다. 사실 그 허가는 이미
만기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냇가의 이리와 양의 우화처럼 영국 정부는
이것을 전쟁 구실로 삼았다.
  영국 군대가 중국으로 수송되었는데, 때마침 인도에서 1857 년 반란(세포이
항쟁)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 군대는 인도로 향하게 되었다. 중국과의 전쟁은
인도에서 반란이 진압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을 수 없었다.
  1858 년에 제 2차 중국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 동안에 프랑스도 한쪽에서 거들고
나설 구실을 찾아냈다. 프랑스인 선교사가 중국 광서성 서림현에서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영국과 프랑스는 태평 천국의 난으로 경황이 없는 중국에
덤벼들었다. 영국과 프랑스 양국 정부는 러시아와 미국에게도 함께 행동하자고
권유했으나 호응을 얻지 못했다. 하지만 미국과 러시아도 전리품 분배에는 한몫 낄
용의가 있었다. 실제 교전도 하지 않고 전보다 훨씬 큰 특권을 차지하려는 천진
조약이 1858 년에 4개국 사이에 체결되었다. 그 내용은 (1) 영국과 프랑스의 공사가
북경에 주재하며, 각 통상항에 영사관을 설치한다. (2) 우장, 등주, 한구, 대만, 조주,
남경 등의 통상항을 추가 개방한다. (3) 통상 및 포교의 자유를 인정한다. (4)
영국과 프랑스에 배상금을 지불한다 등이다. 이듬해 6월 이 조약을 비준하기 위해
각국 공사가 북경에 진입하려 하자 청 정부는 대고에 방어진을 설치하고서 이들을
막았다. 이로 인해 제2차 아편 전쟁이 터지고, 1860 년 영, 불 연합군이 대고와
천진을 함락시킨 뒤 북경에 진입하자, 청 정부는 할 수 없이 이들과 북경 조약을
체결했다. 이로 인하여 러시아 연해주를 획득하게 되었다.
  1932 년 12월 27일, 29일
    54. 청일 전쟁, 러일 전쟁

  1853 년에 미국의 페리 함대가 미국 대통령의 편지를 지니고 일본에 왔다. 이것은
일본이 처음 보는 증기함이었다. 1 년 뒤에 쇼군은 2개 항구를 개방하는 데
동의했다. 뒤이어 곧 영국인, 러시아인, 네덜란드인도 달려와 똑같은 조약을 쇼군과
체결했다. 이리하여 일본은 213 년 만에 다시 세계를 향해 개방되었다.
  그런데 소동은 그것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쇼군은 여러 외국 앞에서 마치
황제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쇼군은 이미 민중의 신망을 잃은 상태였기 때문에
쇼군과 그가 맺는 대외 조약에 반대하는 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몇몇
외국인이 살해당하자 여러 외국의 해군이 공격해 왔다. 사태는 갈수록 곤란해질
뿐이었다. 마침내 1867 년 쇼군은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1603 년 이에야스 때 창시된 도쿠가와 막부는 막을 내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7백년 가까이나 계속된 막부 제도가 이와 함께 무너져 내린 것이다.
  새로운 천황은 이제야 제 구실을 할 수 있는 지위에 놓였다. 이제 막 황위를
이어받은 천황 무쓰히토는 14살 소년이었다. 그는 1867 년부터 1912 년까지 45
년간 황위에 있었다. 이 시기가 바로 메이지(계몽된 정치라는 뜻) 시대로 잘 알려진
때다. 본이 약진을 시작하고 서양을 모방하며 여러 면에서 그들의 경쟁자가 된 것은
그의 치세 때였다. 이 때 이루어진 헤아릴 수 없는 변화는 실로 놀라운 것으로서
역사상 비교할 대상이 없을 정도다. 일본은 대공업국이 되어 서양 여러 나라를
뒤쫓아 제국주의적 약탈 국가가 되었다. 일본은 진보의 온갖 외면적 특징을
갖추었으며, 공업에서는 그의 교사라고 해야 할 선진 열강을 능가하기까지 했다.
  일본은 산업의 방식뿐만 아니라 제국주의적 침략에 대해서도 유럽의 뒤를
따라갔다. 일본은 유럽 열강의 충실한 제자를 넘어서서 때때로 그들을 능가하기도
했다! 일본의 가장 큰 고민은 새로운 공업 문화와 구 봉건주의 사이의 불협화음에
있었다. 양자를 동시에 실행하려 한 일본은 경제적인 균형을 이룰 수 없었다.
과세가 너무 무거워 백성은 내심 불평하고 있었다. 국내의 저항을 막기 위해 일본은
구태의연한 방식에 의존했다. 즉 전쟁과 제국주의적 모험으로 관심을 분산시키는
것이다.
  새로운 산업도 일본으로 하여금 원료와 다른 나라 시장을 획득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내몰았다. 그것은 산업 혁명이 영국을, 그리고 뒤에는 다른 유럽 열강을
대외 침략과 정복으로 내몬 것과 똑같은 것이다. 생산은 늘어나고 인구는 급속히
증가했다. 따라서 점점 많은 식량과 원료가 필요해졌다. 일본은 어디서 그것을 얻을
것인가? 가장 가까운 나라를 둔다면 코리아와 중국이다. 중국은 무역을 허용했으나
인구가 조밀한 나라였다. 그런데 중국의 동북쪽 변경을 이루고 있는 만주에는,
진출해서 식민할 만한 땅이 남아돌 만큼 있었다. 그래서 일본은 코리아와 만주에
탐욕스러운 눈길을 돌렸다. 일본은 터무니없는 이유를 들어 코리아에 침입하여,
무역을 위해 강압적으로 항구를 개방시켰다(1876 년 강화도 조약).
  코리아는 오랜 옛날부터 중국과 우호 관계에 있던 나라였다. 코리아는 중국에
원조를 요청하려 했으나 중국은 도와줄 능력이 없었다. 일본이 너무 큰 세력을 갖는
것을 두려워한 중국 정부는 코리아에게 일시적인 양보를 권하고, 일본의 진출을
막기 위해 서양 여러 나라와 조약을 맺으라고 권유했다. 이렇게 해서 코리아는 1882
년 서구에 개방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것으로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일본은
중국의 곤경을 틈타 다시 코리아 문제를 거론하고, 코리아를 일본과 중국의 공동
보호 아래 두자고 주장하여 중국의 동의를 받아 냈다. 가엾은 코리아는 두 나라의
종속국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것은 관계자인 두 나라에 모두 만족할 수 없는
상태인 것이 분명했다. 결국 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일본은 이런
사태가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1894 년에 마침내 일본은 중국에 전쟁(청일
전쟁)을 강요하고 나섰다.
  1894 년부터 95 년까지 벌어진 청일 전쟁은 일본으로서는 식은 죽 먹기였다.
일본의 육해군은 신식이었으나, 중국군은 구식이고 노후하였다. 일본은 연전
연승하여 일본을 서양 열강과 동등한 지위로 인정하도록 하는
조약시모노세키 조약의 체결을 강요했다. 코리아의 독립은 선언되었으나
이것은 일본의 지배를 눈가림하는 것에 불과했다. 중국은 또 여순 항을 포함한 요동
반도, 대만, 그리고 몇 개의 섬을 할양해야 했다.
  그러나 일본은 끝내 그 곳을 계속 차지할 수 없었다. 러시아, 독일, 프랑스 등
3개국은 일본에게 그 곳을 포기하라고 주장했다(3국 간섭). 일본은 두려움과 원한을
품은 채 그 요구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은 아직 이들 3국을 상대로 싸울
만큼 충분한 힘을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한편 러시아가 만주, 코리아로 전진하자 일본은 크게 자극 받았다. 일본은 말없이,
그러나 부지런히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청일 전쟁 뒤 여순 항을
빼앗으려 했을 때, 1895 년 3국이 연합해서 간섭한 일을 잊지 않았다. 때문에
일본은 똑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획책했다. 그들은 영국 역시 러시아의 남하를
두려워하여 그것을 막고자 한다는 것을 간파했다. 그리하여 1902 년 극동에서 다른
나라들이 연합하여 영국과 일본 양국을 압박하는 것을 방지할 목적으로 영일 동맹을
체결하였다. 이제 일본은 안전을 보장받고 러시아에 더욱 공격적인 태도로 나섰다.
일본은 러시아 군대의 만주 철수를 요구했다. 그러나 당시의 어리석은 차르 정부는
일본을 깔보고 일본이 결코 싸울 생각이 없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1904 년초 양국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일본은 충분히 준비가 되어 있었고,
일본 국민은 자기 정부의 선전과 천황 숭배 선동에 휩쓸려 애국적 열정 속에 힘차게
일어났다. 반면 러시아는 전혀 준비가 없는데다가, 차르 전제 정부는 끊일 새 없는
민중의 항쟁을 겨우 겨우 막아내고 있었다. 1 년 반에 걸쳐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는데, 아시아, 유럽, 그리고 미국은 육해전에서 일본이 승리하는 것을
목격했다. 여순항은 일본 병사의 놀라운 희생적 행위와 엄청난 출혈을 본 뒤에
마침내 함락되었다. 러시아의 대함대가 아득히 먼 유럽에서 해로를 거쳐
파견되었다. 이 강력한 함대는 수천 마일이나 되는 세계의 절반을 돌아오느라
갑판에 녹까지 슬면서 동해에 이르렀으나, 코리아와 일본 사이의 좁은 해협에서
제독까지 깡그리 일본군에 몰살 당했다. 함대는 이 패배로 거의 전멸해 버렸다.
  러일 전쟁은 1905 년 9월의 포츠머스 조약으로 끝났다. 포트머스는 미국에 있다.
미국 대통령이 두 나라 대표를 그 곳으로 초청하여 강화 조약이 체결되었던 것이다.
이 조약에 의해 일본은 마침내 여순 항과 요동 반도를 다시 차지했다. 일본이 청일
전쟁 후 그 곳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정은 기억하고 있겠지? 일본은 또
러시아가 만주에 건설한 철도의 대부분과 일본 북방에 위치한 사할린의 절반을
차지했다. 또한 러시아는 코리아에 대한 일체의 권리를 상실했다.
  대일 전쟁과 그 패배는 러시아의 일반 민중에게 더욱 고통을 가져다 주었다.
노동자는 때때로 정부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 공장에서 파업에 돌입하기도 했다.
1905 년 1월 22일 수만 명의 비무장 노동자, 농민이 가퐁이라는 신부의 지도 아래
차르에게 구제를 호소하기 위해 떼지어 동궁으로 출발했다. 차르는 그들의 호소를
듣는 대신 그들에게 총격을 가하고 무서운 학살을 자행했다. 2백여 명이 학살당해
페테르부르크의 흰 눈은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 날은 마침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피의 일요일'이라 일컬어진다. 나라는 뒤죽박죽이 되어 온통 소란하기만
했다. 잇달아 노동자의 파업이 일어나 혁명으로까지 발전했다. 1905 년 혁명은 차르
정부의 잔악한 탄압으로 진압되었다. 이 사건은 몇 가지 이유로 우리의 관심을
끈다. 그 사건은 10 년 뒤 러시아의 모습을 크게 변화시킬 혁명을 준비한 일종의
예비 행위였다. 그리고 혁명적 노동자가 훗날 소비에트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새로운 조직을 창조한 것은, 실패로 끝난 이 1905 년 혁명 당시의 일이었다.

  1932 년 12월 29일, 30일
    55. 중국이 공화국이 되다.

  늙은 서태후가 지배하는 중국 정부는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백성의
움직임은 더욱 빨랐다. 서태후는 일본과 같은 급격한 개혁 수단을 취하지는
않았으나 신식 군대의 창설에 힘을 기울였으며, 방위를 위한 지방 의용군의 결성을
장려했다. 이 지방 의용 군대를 의화단^6,36^공정한 평화의 단체라 한다. 혹은
의화군^3,63^공정한 평화의 철권이라고도 했다. 이 후자의 명칭이 항구 도시에
거주하는 유럽인에게 전해져 그들은 이를 '권투 선수(boxer)'라고 번역했다. 훌륭한
이름을 졸렬하게 번역한 것이다. 의화단은 외국의 공격, 중국 또는 중국인에 대해
가해진 숱한 모욕에 대한 애국적 반발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들이 악의 화신으로만
보이는 외국인을 좋아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특히 중국인을
혹독하게 괴롭힌 선교사들을 증오하고, 중국인 기독교도를 매국노로 취급했다.
이것은 낡은 중국이 새로운 질서에서 스스로를 지키려고 마지막으로 노력했던
몸부림이었다. 물론 이런 방법으로 성공할 가망은 없었지만 말이다.
  애국적, 배외적, 반선교사적, 보수적인 단체와 서양인 사이의 분쟁은 불가피했다.
곳곳에서 분쟁이 일어났다. 영국인 선교사 한 명이 살해당하고, 수많은 유럽인과
무수한 중국인 기독교도가 죽음을 당했다. 외국 정부들은 중국 정부에 이 '애국
권법 운동'을 억압하라고 요구했다. 중국 정부는 살인 사건 관계자를 처벌하긴
했으나, 애당초 그들의 입장에서 자기 자식이나 다름없는 민중들을 진심에서
혹독하게 억압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는 동안 권법 운동은
급속도로 확대되었다. 외국 사신들은 당황해서 함대의 군대를 긴급 출동시켰다.
이것을 본 중국 정부는 또다시 외국의 침략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했다. 사태는
긴박해졌다. 독일 공사가 살해당하고, 북경 주재 각국 공관은 포위되었다.
  중국의 대부분은 애국 권법 운동에 동의하며 무장 궐기하려고 했다. 다만 어떤
지방 총독은 중립을 유지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외국 세력을 돕기도 했다. 서태후는
의심할 필요도 없이 '의화단'을 동정하고 있었으나 공공연하게 그들과 행동을 함께
하지는 않았다. 외국인들은 '의화단'들이 비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히려고
애썼다. 그러나 사실 1900 년의 의화단 운동은 중국을 외국의 간섭에서 해방하려는
노력이었다. 로버트 하트 경은 해관 총감독관으로 있던 영국의 고관으로서 공사관의
포위망을 뚫은 사람이었는데, 그는 중국인의 감정을 폭발시킨 책임은 외국인, 특히
선교사들에게 있다고 했다. 그는 "폭동은 애국적인 열망을 갖고 있으며, 그 목적이
대부분 정당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것을 지나치게 주장하는
것도 잘못이다"라고 표현했다.
  중국이 갑자기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식으로 나오자 서양 열강들은 무척
초조해졌다. 그들은 북경에 포위되어 있는 자기 국민을 보호하고 원조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군대 파견을 서둘렀다. 독일 사령관의 지휘 아래 각국의 연합군이
공사관을 구조하기 위해 달려왔다.
  연합군은 북경에 도착하여 공사관을 구출했다. 그리고 북경서 약탈을 시작하였다.
그것은 '피사로의 전성기'(남아메리카 문명을 정복하면서 재물을 무자비하게 약탈한
스페인 장군의 이름이 피사로이다) 이래 사상 최대의 약탈 행위라고 한다. 북경의
고미술품은 그 진가를 모르는 야만스럽고 무지몽매한 인간들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더구나 이 약탈에서 선교사가 큰 역할을 담당했다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이들은
떼지어 집집마다 저희들 소유라는 딱지를 붙이면서 돌아다녔다. 어느 집의 가보를
몽땅 팔아 없애고 나면, 다음 대저택에 대한 습격이 시작되었다.
  결국 1901 년 '북경 의정서'에 서명한 중국은 유럽 제국주의자들에게 군대의
주둔, 상업적 특권 부여, 거액의 배상금의 지불을 해야 했으며, 권법 운동에 나선
지도자들을 사형시켜야 했다. 1894 년에 이미 중국인 손일선, 즉 손문 박사에 의해
'흥중회'가 창립되었는데, 당시 불공정하고 일방적인 조약^6,36^중국인들은 이를
'불평등 조약'이라 부르고 있다^3,63^에 반대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 밑에 모여
들었다. 이 모양은 눈부시게 성장하여 이 나라 청년들 사이에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이 조직은 1911 년 국민당으로 이름을 바꾸어 중국 혁명의 핵심을 이루는
조직체가 되었다. 운동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손박사는 미국을 모델로 삼았다. 그는
공화국 체제를 택하여, 영국과 같은 입헌 군주제, 또는 일본과 같은 황제 숭배를
배척했다.
  중국인은 일찍이 황제를 맹목적으로 숭배한 일이 없을 뿐더러 당시 군림하고 있던
왕조는 중국인 출신이 아니었다. 그 때의 왕조는 만주계여서 백성들 사이에는 반청
감정이 강했다. 서태후를 움직인 것도 백성 속에서 들끓고 있던 이런 기운이었다.
그러나 늙은 부인은 장래의 헌법에 관하여 선언한 뒤 얼마 안 가서 죽었다.
공교롭게도 서태후가 제위에서 추방한 그녀의 조카 뻘인 황제 광서제도 1908 년
11월 서태후가 죽은 지 하루만에 뒤따라 죽었다. 그래서 어린 황제 선통제가
허울뿐인 황제 자리에 올랐다.
  다시 의회 정치의 소집을 외치는 소리가 높아지고 반청적, 반군주적 감정은 더욱
고조되었다. 혁명파는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세력을 집결했다. 당시 그들에 대항할
수 있는 강력한 인물은 어떤 성의 총독인 원세개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교활한 늙은 여우로서 '신군'이라는 중국의 유일한 근대적 정예 부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만주의 지배자들은 어리석게도 그를 건드려 노하게 한데다가 면직
처분까지 해버렸다. 그리하여 그들은 어쩌면 얼마 동안 제 목숨을 구해 주었을지도
모를 유일한 인물을 잃어버린 것이다.
  1911 년 10월 혁명은 양자강 유역에서 일어나 급속도로 중국 중부와 남부 중간을
휩쓸었다. 1912 년 설날 아침에 이 혁명에 가담한 여러 성은 공화국을 선포하고
수도를 남경에 두었다. 손문 박사가 대통령(대총통)에 선출되었다.
  그 동안 원세개는 이 혁명 드라마를 관람하면서 개입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어린 황제의 아버지가 섭정을 하면서 원세개를 면직시켰다가 다시 복직시킨
사정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데, 모두 다 옛 중국다운 정중한 허례 속에서
이루어졌다. 원세개를 면직할 때는 그의 발에 병이 났다고 포고되었다. 물론
원세개의 발은 아무 이상 없이 튼튼했지만, 이는 그를 추방하기 위한 편의상의
구실에 불과했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원세개가 이에
복수를 했다. 2 년 뒤인 1911 년 정부에 대한 반란과 폭동이 일어나자 섭정은
당황하여 그를 불렀다. 원세개는 원래 자기가 요구하는 대로 지휘관을 장악할 수
있는 지위를 주지 않는 한 갈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섭정의 요구에 대하여,
발에 난 병이 아직 낫지를 않아 집을 나가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대단히
유감스럽다는 요지의 회신을 보냈다. 1개월 뒤 원세개가 내세운 요구가
받아들여지자 그의 발은 놀라운 속도로 완쾌(?)되었다.
  그러나 혁명을 저지하기에는 때가 너무 늦어 있었다. 원세개는 양편 틈에 끼여
스스로를 궁지에 몰아넣을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결국 그는 만주인의 퇴진을
권고했다. 공화국의 위협에 직면하여 부하 장군에게까지 버림받은 만주인에게는
이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1912 년 2월 12일, 황제는 퇴위를 발표했다. 이리하여
만주인 왕조는 250 년에 걸친 치적을 뒤로 하고 중국의 무대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중국인의 옛말을 빌리자면 "그들은 범의 포효와 더불어 와서 뱀 꼬리처럼 사라져
갔다(용두사미)."
  같은 2월 12일에 새 공화국의 수도이며 명나라 초대 황제의 영묘가 있는
남경에서 신구의 풍습이 뒤섞인 보기 드문 식전이 거행되었다. 공화국의 대통령
손문은 내각을 이끌고 이 영묘에 나아가 옛 의식을 따라 제물을 바쳤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인사말을 했다. "우리는 아시아에 공화제의 새 본보기를 보여주려 하고
있다. 노력하는 자에게는 조만간 성공이 오게 마련이며, 선한 자는 마침내 반드시
보답을 받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승리가 이처럼 늦어진 것을 탄식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손 박사는 국내에서, 혹은 망명을 하면서 오랫동안 중국의 자유를 위해 분투해
왔다. 그리고 승리는 마침내 다가온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자유라는 것은 붙들기
어려운 친구와 같아서, 승리는 손안에 들어오기 전에 충분한 대가를 요구한다.
승리는 때때로 부질없는 희망으로 우리를 조롱하기도 하고, 우리에게 안기기 전에
많은 고난을 주어 시련을 겪게 한다. 중국과 손 박사의 시련은 아직도 종착역에
도달한 것은 아니었다. 오랜 세월을 신생 공화국은 생존을 위해 싸워야 했다.
  만주인은 물러갔으나 원세개는 여전히 새 공화국의 앞날을 가로막고서 언제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북방을 장악하고 공화국은 남방을 지배하고 있었다.
내란을 회피하고 평화를 위하여 손 박사는 자진해서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났고,
원세개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원세개는 공화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자기의 지위를 강화하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대통령이라는 영예를
준 공화국을 쳐부수기 위해 외국에서 자금을 차용해 왔으며, 의회를 부인하고
국민당을 해산시켰다. 이것이 분열의 불씨가 되어 손 박사를 원수로 하는 대항
정부(광동 정부)가 남방에 수립되었다. 손 박사가 온갖 노력을 기울여 피하고자
했음에도 불구하고 분열이 찾아와 중국은 두 개의 정부 아래 제 1차 세계 대전을
맞이하게 되었다. 원세개는 황제가 되려다가 실패한 뒤 얼마 안 가서 죽었다. 
  1933 년 1월 3일
    56. 필리핀과 미국

  스페인인의 필리핀 제도 점령은 1565 년에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이 제도는
아시아에서 최초로 유럽의 근거지가 된 셈이다. 스페인의 통치는 포르투갈이나 영국,
네덜란드의 방법과는 전혀 달랐다. 무역은 장려되지 않았으며, 종교가 정부의 배경을
이루었고, 관리는 대부분 선교사나 교회 직원이었다. 따라서 '선교사 제국'이라고
불렸으며, 민중의 생활을 개선하려는 노력은 전혀 없었다. 악정과 압제, 무거운
세금과 기독교로의 강제 개종이 횡행했다. 이러니 당연히 반란이 거듭 일어났다.
무역을 하기 위해 이 섬에 건너온 많은 중국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거부하자,
그들에 대한 조직적인 대학살이 감행되었다. 영국이나 넬덜란드의 상인은 입국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들이 적국인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들은 개신
교도들이었으므로 로마 가톨릭 교도인 스페인인의 눈으로 볼 때는 이교도였기
때문이다.
  사태는 악화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좋은 결과도 나타났는데, 그것은 여러 섬의
모든 지방과 집단들이 통일되었으며, 19세기에 들어와 민족 의식이 대두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19세기 중엽 외국 상인에 대한 여러 섬의 개방은 미약하나마
교육과 기타 부문에서 개혁의 길을 열었으며, 상업 무역도 증대되어 서서히 중간
계급이 형성되었다. 전부터 스페인인과 필리핀인 사이에는 잡혼이 행해졌는데,
스페인인의 피를 이어받은 필리핀 사람이 많아지자 스페인은 거의 조국과 다름없는
애정을 받게 되었으며, 따라서 스페인적인 여러 관념이 유행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민족주의 정신은 성장하였으며, 탄압을 받음에 따라 혁명적으로
바뀌었다. 처음에는 스페인으로부터의 분리라는 생각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자치
정부의 수립과 '코르테스'라는 미약하고 무능한 스페인 의회에 참가시켜 줄 것을
요구했을 뿐이다. 어떤 민족 운동이나 처음에는 온건한 형태로 출발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필연적으로 첨예화하여 결국은 분리와 독립을 주장하는 데까지
이른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다. 억압된 자유를 향한 욕구는 머지않아
이자를 붙여서 벌충되어야만 한다. 필리핀인의 요구도 강력해졌다. 또한 이 요구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국민 조직이 결성되고, 동시에 비밀 결사가 파급되었다. 그
가운데 호세 리잘 박사가 지도하는 '청년 필리핀 당'은 눈부신 활동을 보였다.
스페인 관헌은 그들이 유일하게 알고 있는 방식페러리즘으로 이 운동을
진압하려 했다. 그리하여 리잘과 다른 많은 지도자들이 1896 년에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
  이로써 둑은 터졌다. 스페인 정부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으며, 필리핀인은 '독립
선언'을 발표했다. 투쟁은 만 1 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스페인인은 반란을 진압하지
못했다. 그래서 실질적인 개혁을 하겠다는 약속이 제시되고 잠시 휴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스페인인은 약속을 전혀 이행하지 않았다. 그러자 1898 년에
다시 반란이 폭발했다.
  그 무렵 미국 정부는 다른 사건(쿠바를 둘러싼 분쟁)으로 스페인과 다투게 되어
두 나라 사이에 전쟁(미국스페인 전쟁)이 일어났다. 미국 함대는 1898 년 4월
스페인으로 쳐들어갔다. 필리핀 반란 세력의 지도자는 위대한 미국이 필리핀의
독립을 지원하리라는 기대를 품고서 미국을 도왔다. 그들은 거듭 독립을 선언하고
공화국 정부를 조직했다. 1898 년에 의회가 소집되었다. 스페인은 무력했다.
그리하여 그 해가 지나기 전에 패배를 인정함으로써 전쟁이 끝났다. 강화 조약에
따라 스페인은 필리핀 제도를 미국에 넘겨주었다. 스페인은 이렇게 인심 좋은
선물을 넘겨주고도 전혀 자기 호주머니를 축내지 않았다. 필리핀의 반란 세력들이
필리핀의 스페인 정부의 숨통을 끊어 버린지 오래였기 때문에 스페인으로서는
오히려 잘된 셈이었다.
  그리하여 미국은 여러 섬들을 접수하는 절차를 밟았다. 필리핀은 이에 항의했으며,
스페인은 이미 양도할 것을 전혀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미국에 여러 섬을 넘겨줄
자격도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나 이러한 항의도 허사로 돌아가, 새로 획득한
자유를 축하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다시 싸워야만 했다. 더구나 이번에는 스페인
정부보다 훨씬 강대한 미국 정부가 적이었다. 그들은 3 년 반 동안 과감한 투쟁을
계속했다. 처음 몇 개월은 하나로 조직된 정부에 의해, 그리고 그 뒤에는 게릴라
전투로 계속 항쟁했다.
  반란은 마침내 진압되고 미국의 지배권이 확립되었다. 교육을 비롯해서 각 방면에
현저한 개혁이 단행되었다. 그러나 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1916 년에 미국 의회는 '존스 법'으로 알려진 법안을 통과시켰으며, 그에 따라
미국인은 일정 범위의 권한을 선거로 성립된 입법부에 양도했다. 그러나 미국인
총독은 간섭할 권리를 갖고 있었으며, 이 권리를 자주 행사했다. 
  1933 년 1월 28일
    57. 혁명에 대한 일반적 고찰(1848 년 혁명)

  지금까지 이 편지를 계속 쓰고 있는 동안에도 우리는 자주 여러 나라들에서
혁명과 전쟁에 의해 변화가 초래되는 상황에 부딪히고 있다. 과거의 전쟁을 보면
어떤 때는 종교 전쟁이고, 어떤 때는 왕위 쟁탈전이며, 또 때로는 한 민족에 의한
다른 민족의 정치적인 침략인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모든 원인의 배후에는 대개
경제적인 원인이 뒤따랐다. 예컨대 중앙 아시아의 여러 부족에 의한 유럽 및
아시아에 대한 침략은 굶주림 때문에 서진하게 된 결과였다. 경제 발전은 한
민족이나 국가의 힘을 강화하여 다른 민족에 대한 우위를 갖게 한다. 나는 유럽의
이른바 종교 전쟁이나 그 밖의 전쟁에서도 경제적인 요인이 배후에 작용하고
있었음에 주의를 환기시켜 둔 바 있다.
  우리가 현대로 접근함에 따라 종교 전쟁과 왕위 쟁탈 전쟁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전쟁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불행하게도 그것은 더욱
격렬해졌다. 그러나 그 원인은 지금은 분명히 정치적, 경제적인 것이다. 정치적
원인은 주로 민족주의와 관계가 있다. 즉 한 민족에 의한 다른 민족의 압박이거나
또는 두 개의 호전적인 민족 사이의 싸움이다. 더구나 이와 같은 싸움이라도 대개는
근대적인 공업 국가가 원료 산지와 소비 시장을 요구하는 것과 같은 경제적인 원인
때문에 생긴다. 그러므로 경제적인 원인은 전쟁에서 더욱 더 그 중요성이 높아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야말로 오늘날에는 경제적 원인이 그 밖의 모든 원인을
압도해 버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혁명도 역시 성격에 있어서 이와 같은 변화를 거쳐왔다. 옛날의 혁명은 대개는
궁정 내의 왕권 혁명이어서 지배자의 가족에 속하는 자들이 서로 음모를 꾸미고,
서로 싸우고 서로 죽이곤 했던 것이다. 혹은 압박을 견디다 못한 서민이 봉기하여
압제자를 쓰러뜨리거나, 또 야심을 가진 군인이 군대의 힘을 빌려 왕위를 빼앗은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궁정 혁명은 대개 소수의 사람들 사이에 벌어진 것이어서
대중은 그것에 별로 영향을 받지도 않았고, 또 관심을 갖는 경우도 없었다. 군주는
바뀌어도 제도는 여전히 그대로여서 민중의 생활은 변함없이 계속되었다. 물론
압제가 심하여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혹독한 지배자도 있었을 것이고, 비교적 관대한
군주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배자의 좋고 나쁨에 상관없이 대개 단순한
정치적인 변동으로는 민중의 생활은 영향을 받지 않으며 사회 혁명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민족 해방 혁명은 보다 큰 변화를 일으킨다.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의
지배를 받게 되면 외국인 지배 계급이 권력을 차지한다. 이것은 종속국이 외국이나
또는 그와 같은 지배에 의해 이익을 얻는 외국의 한 계급의 편익을 위한 도구로
이용되는 것이므로 여러 가지 의미로 보아 불합리한 일이다. 그것이 종속 국민의
자존심을 몹시 해치는 것임은 물론이다. 게다가 외국인 지배 계급은 종속국의 상층
계급을 권력과 권위의 자리에서 배제시킨다. 민족 해방 혁명이 성공하면 적어도
외국적 요소는 제거되고, 그 나라의 지배 계급이 권좌를 차지한다. 이렇게 하여 이런
종류의 계급은 외국인 계급을 배제함으로써 큰 이익을 얻는다. 하층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은 민족 해방 혁명에 사회 혁명이 따르지 않는 한 별로 이득이 없지만, 나라
전체로서는 다른 나라에 이익을 주면서 지배받지 않게 되므로 역시 이익이 된다.
  사회 혁명은 단순히 사회의 표면에서만 사태의 변화가 생기는 다른 혁명과는 크게
다르다. 그것은 동시에 정치 혁명도 초래하지만 사회의 구조를 바꿔 버린다는
점에서 정치 혁명 이상의 것이다. 의회에 우위를 부여한 영국 혁명은 단순한 정치
혁명에 그치지 않고, 그것이 결국은 비교적 부유한 부르주아 권력에의 합류를
의미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사회 혁명이기도 했다. 상층 부르주아 계급은
이로써 정치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상승하였으나, 하층 부르주아와 대중은 대체로
별로 영향을 받지 않았다. 프랑스 대혁명은 사회 혁명 이상의 성질을 띠고 있었다.
그것은 사회 질서를 완전히 뒤집어 놓았고 얼마 동안은 대중의 힘이 크게
작용하기까지 했다. 결국 부르주아는 여기에서도 승리했고, 대중은 혁명에서 그
역할을 다해 버리자 원래의 지위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특권 귀족 계급은
배제되었다.
  옛날에는 사회적, 경제적 변동이 완만하게 진행되어 생산, 분배, 수송 방법 등은
오랫동안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변화 과정을 깨닫지 못하고, 옛날의 사회
질서를 영구 불멸의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종교는 또 이 질서와 이에 따르는
습속과 신앙에 신성한 후광을 마련해 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사태가 분명히 앞길이
막힌 상태에 이르러도 여전히 질서의 변경이라는 데에는 조금도 생각이 미치지 못할
만큼 깊이 이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산업 혁명과 수송 방법의 급격한 변화와 함께 사회적 변화의 속도는 갑자기
가속도가 붙었다. 여러 신흥 계급이 대두하여 유복한 생활을 누렸다. 지금까지의
수공업자나 농업 노동자와는 아주 딴판인 새로운 공업 생산 계급이 출현했다.
이러한 사정이 얽혀서 새로운 경제적 전환과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다. 서유럽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은 것 같은 기묘한 상태에 있었다. 사회가 현명한
것이라면 필요가 생길 때마다 그만큼 변화하고, 변화된 조건에서 충분한 이익을
흡수할 것이다. 그러나 사회란 대개 현명한 것이 아니며, 또 하나의 전체로서의
생각을 갖는 것도 아니다. 개인이라면 자기 일을 생각하고, 무엇이 자기 이익이 될
것인가를 추측한다. 비슷한 이해 관계를 갖는 사람들의 집단인 계급도 대개 그와
비슷한 행동을 한다. 어느 계급이 어떤 사회에서 우위를 차지하면, 그들은 자기의
지위를 유지하고 다른 여러 계급을 그 밑에 종속시켜 착취함으로써 이익을 얻고자
한다. 긴 안목으로 보면 자기가 그 일원으로서 소속하고 있는 사회 전체에 이익을
가져다줌으로써 그것이 결국 자기의 이익도 된다는 것은 보다 예리하게 생각해 보면
쉽사리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권력을 잡은 인간 또는 계급은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을 언제까지나
계속해서 가지려 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은 타인
또는 다른 계급으로 하여금 현존의 질서야말로 가능한 한에서는 최선의 것이라는
점을 믿게 하는 일이다. 이것을 민중의 머리 속에 주입시키기 위해 종교가
이용된다. 교육도 같은 내용을 가르치도록 꾸며진다. 그 결과 놀랍게도 거의 모든
인간이 그것을 절대적으로 믿고, 따라서 그것을 변경하려고는 생각지도 않게 된다.
실제로 그 제도 탓에 괴로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도, 어떤 사람들이 한껏 사치한
생활을 즐기고 있는 한편에서, 그 제도가 유지됨으로써 매를 맞고 발길로 차이는
등의 고초를 겪으며 굶주림에 우는 것도 그저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 세상에는 유일한 영구 불변의 사회 제도가 존재할 수 있을
뿐더러 설사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누구의
죄도 아닌 것처럼 생각한다. 그것은 그들 자신의 죄이고 천명이고 숙명이며, 전생의
업보 때문에 감수해야 하는 징벌인 것이다. 사회는 어떤 시대에도 보수적이어서
변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과거로부터의 관습을 굳게 지키며, 일단 습관이
되기만 하면 영원히 그 상태가 계속되도록 정해진 것이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만큼 더욱 더 그것은 그런 상태를 개선하려 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벌주고,
사회의 테두리 바깥으로 물러갈 것을 명령한다.
  그러나 사회적, 경제적인 여러 조건은 사회의 자기 만족과 무지를 기다리지는
않는다. 그런 것들은 사람들의 관념이 한군데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전진한다. 따라서 이러한 시대에 뒤떨어진 통념과 현실과의 사이는 더욱 커지며, 이
거리를 축소하고 두 개를 하나로 만드는 어떤 조치가 취해지지 않으면 체제는
와해되고 파국이 온다. 이것이 곧 사회 혁명의 원인인 것이다. 만일 상태가 이런
것이라면 재래의 여러 관념 때문에 다소 연기되는 수는 있더라도 혁명은 조만간
반드시 일어난다. 만일 그런 상태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소수의 개인이 아무리 애써
보아도 그것을 성취하지는 못한다. 일단 혁명이 폭발하면 사람들의 눈에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가리고 있던 베일이 제거되고, 이내 사람들 사이에 현실을
직시하는 눈이 생긴다. 틀에 박힌 제도 밖으로 한 걸음 나선 그들은 이제는
전속력으로 돌진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혁명의 시기에 사람들이 놀라운 에너지를
발휘하여 전진하는 이유인 것이다.
  내가 혁명에 관해 이렇게 길게 이야기한 것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19세기의
유럽에서 많은 반란과 소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란, 특히 금세기의
전반에 일어난 반란은 대개 외국 지배에 대한 민족주의적 봉기였다. 이전 것들과
병행하여 공업화한 여러 나라에서는 사회 반란의 관념이 새로운 노동 계급과
자본주의적인 고용주와의 투쟁을 보편화시켰다.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사회 혁명을
생각하고 거기에 몸을 던지게 되었다.
  1848 년은 유럽 혁명의 해라고 일컬어진다. 많은 나라에서 반란이 일어나, 어떤
것은 부분적으로 성공했지만 대개는 실패로 돌아갔다. 폴란드, 이탈리아, 보헤미아,
헝가리의 반란에는 억압된 민족 의식이 뒷받침되어 있었다. 폴란드의 반란은
프로이센에 대한 것이었고, 보헤미아와 이탈리아의 반란은 오스트리아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진압되고 말았다. 헝가리의 오스트리아에 대한
반란은 그 중에서도 가장 격렬한 것이었다. 그 지도자는 애국자이며 또 자유를 위한
투사로서 헝가리 역사상 가장 뛰어난 인물인 라조스 코슈트였다. 2 년 동안
저항했으나 이 역시 진압되었다. 몇 년 뒤 헝가리는 또 한 사람의 위대한 지도자인
데아크의 지도 아래 다른 투쟁 방식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데아크의 방식이
수동적인 저항이었음은 주목할 만하다. 1867 년에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는 일단
평등의 기초 위에 병합되어 합스부르크 가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를 받듦으로써
'이중 군주제'라고 불리는 형태를 취했다. 데아크의 수동적인 저항 방식은 반세기
후에 영국에 대한 아일랜드의 투쟁에 모범이 되었다.
  프랑스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이미 1830 년 7월 혁명으로 부르봉 왕가가 쫓겨난
뒤 루이 필립이 일종의 반입헌 군주로서 왕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루이 필립의 치정
기간 동안 민중은 그에게 싫증을 느끼고, 1848 년 2월에 혁명을 일으켜 그를
폐위하고 다시 공화국을 세웠다. 이것은 대혁명 기간 중의 제1공화정에 이어
제2공화정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 소란을 틈타 나폴레옹의 조카인 루이
보나프르트가 파리에 나타나 자유의 동지인 체 행세하여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위장에 지나지 않아, 지위가
확고하게 다져지자 그는 군대의 지휘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1851 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그의 군대를 파리로 진군시켰다. 그리하여 그는 민중을 사살하고 의회를
굴복시켰으며, 이듬해에는 스스로 제위에 올라 나폴레옹 3세라 칭했다(제2제정).
나폴레옹의 아들은 끝내 황제는 되지 못했지만 나폴레옹 2세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제2공화정은 5 년이 약간 넘는 단기간의 정부로서 막을 내렸던
것이다.
  1848 년 3월에는 독일 베를린에서도 혁명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것은 민중들에게
별로 중대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 채 진압되고, 장래의 개혁만이 약속되었다. 또한
프랑스의 2월 혁명 소식이 전해지자 오스트리아 빈에서도 3월에 혁명이 일어나
메테르니히가 영국으로 망명하였고, 7월에 소집된 제헌 의회는 9월에 개혁안을
마련하고 농민의 부역 의무를 폐지하였다.
  영국에서는 혁명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역시 소요와 분규가 잇달아 일어났다.
영국은 분규가 심해지자 그것을 완화시키는 방도를 강구하여 이것을 무마했다.
융통성 있는 법률이 그것을 위해 도움이 되었고, 또 오랫동안의 경험에 따라
영국인은 탈출구가 없을 것처럼 보이면 어느 정도의 타협을 받아들이는 방책을
취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그들은, 보다 융통성이 없는 헌법과 더 비타협적인
민중이 있는 다른 나라에 자주 닥쳐온 것 같은 갑작스러운 큰 변화를 피해 왔다.
  1832 년 선거권을 확대하는 '개혁 법안'을 둘러싸고 영국의 여론은 크게
들끓었다.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그것은 매우 미온적이고 별로 달지도 쓰지도 않을
정도의 법안으로서, 중간 계급의 소수의 사람들을 유권자로 추가한 데에 지나지
않았으며, 노동자와 그 밖의 대다수 사람들은 아직 투표권을 갖지 못했다. 의회는
소수의 부유층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 특권과, 손쉽게 그들을 하원에
보내 준 '부패 선거구'를 잃을까봐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들은 온 힘을 다해 이
법안을 반대했고, 만일 이 법안이 통과되면 영국은 개들이 날뛰는 곳으로 전락하고,
세계는 종말을 고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 반대론자가 여론을 두려워하여 법안
가결에 동의했을 때에는 영국은 내란이 일어나기 직전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영국이 그것을 극복하고 의회가 그 전대로 존속하며, 여전히 부유층에 의해 장악된
것은 물론이다. 비교적 유복한 중간 계급은 더욱 세력이 강해지게 되었다.
  1848 년 전후에는 1838 년부터 시작된 또 하나의 큰 소동이 영국을 떠들썩하게
했다. 각종 개혁을 요구하는 '인민 헌장'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민중의 권리를
주장하는 청원서를 의회에 제출할 수 있는 길을 제도화하자고 제안한 데서 이것은
'차티스트 운동'이라고 불린다. 이 운동은 지배 계급을 크게 두렵게 했지만 결국
진압 당했다. 공장에서는 노동자 계급 사이에 심각한 빈궁과 불평 불만이 쌓여
갔다. 이 무렵에 처음으로 몇 개의 노동법이 제정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법률은 약간이나마 노동자의 처지를 개선했다. 영국은 번성하는 무역을 통해 급속히
돈을 모으고 있었다. 영국은 그야말로 '세계의 공장'이 되려 하고 있었다. 수익의
대부분은 공장주들의 호주머니로 들어갔지만 그 가운데 일부는 노동자들에게도
분배되었다. 이러한 사정이 겹쳐서 1838 년에 시작되어 1848 년에 막을 내린
차티스트 운동을 막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로서는 반란은 금방이라도
일어날 듯한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나는 아직 1848 년에 대해 이야기를 다하지 못했다. 그 해에 로마에서 일어난
일은 다음 편지에서 이야기하도록 하자. 
  1933 년 1월 30일
    58. 이탈리아의 통일과 독립

  1848 년에 관한 서술 가운데 나는 이탈리아에 대한 이야기를 남겨 두었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1848 년의 모든 사건들 중에서 로마에서의 영웅적인 투쟁이야말로
가장 우리들의 마음을 끄는 것이다.
  나폴레옹 시대 이전의 이탈리아는 작은 군주국들의 모자이크 같은 형태로
구성되어 있었다. 나폴레옹은 그것을 단기간에 하나로 통합했다. 나폴레옹 이후
그것은 다시금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간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욱 심한 상태가
되었다. 1815 년의 빈 회의에서 연합국은 이 나라를 서로 나누어 가졌다.
오스트리아는 베네치아와 그 주변의 큰 지역을 차지하고, 몇몇 오스트리아 왕족에게
그들의 요구에 따라 그것을 분배했다. 교황은 로마로 돌아갔고, 로마에 인접한 여러
지역은 '교황령'이라 불렸다. 나폴리 및 남부 지방은 부르봉계의 국왕 아래 '두 개의
시칠리아 왕국'을 형성했다. 프랑스에 인접한 서북 지방에는 피에몽과 사르디니아
왕국이 있었다. 이렇게 재분할된 소국의 지배자들은 피에몽을 제외하고는 매우
전제적인 방법으로 통치했기 때문에 나폴레옹 시대 이전의 지배자들보다도 더
민중을 압박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내습은 이 나라에 활기를 주었고, 청년들의
가슴에 자유와 통일 이탈리아의 꿈을 안겨 주었다. 지배자의 압박 때문에 오히려
소규모의 반란이 잇달아 일어나고, 비밀 결사가 결성되었다.
  얼마 후, 나중에 독립 운동의 지도자가 된 투지가 넘치는 청년이 나타났다. 이
사람이 바로 이탈리아 민족주의의 선각자 주세페 마치니였다. 1831 년에 그는
이탈리아 공화국 수립을 목표로 하는 단체인 '지오바네 이탈리아'(청년 이탈리아
당)를 조직했다. 그는 오랫동안 이탈리아에서 통일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다가
국외로 추방되었고, 자주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그의 저서 대부분은 민족주의에
관한 고전으로 꼽히고 있다. 1848 년 북이탈리아 전역에 반란이 일어났을 때,
마치니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로마로 들어갔다. 교황은 쫓겨나고 세 사람으로
이루어진 위원회 아래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이것은 고대 로마에서 따온 명칭으로
트리움비리(3인 집정관 가운데 한 사람)라고 불렸다. 마치니는 세 명의 트리움비리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이 젊은 공화국은 사면 팔방, 즉 오스트리아, 나폴리, 또 교황의 재기를 위해
원군을 파견한 프랑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주로 로마 공화국 편에 서서 분투한
사람은 가리발디였다. 그는 오스트리아를 물리치고 나폴리 군을 무찔렀으며,
프랑스도 저지시켰다. 이것은 모두 의용군의 원조로 가능했고, 로마의 가장 용감하고
뛰어난 청년들이 공화국을 방위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로마
공화국은 용전 분투한 보람도 없이 프랑스에 굴복했고, 프랑스는 교황을 다시
데리고 왔다.
  그리하여 투쟁의 제1 단계는 끝났다. 마치니와 가리발디는 방법을 바꾸어 선전
활동을 전개하는 동시에 다음 단계의 대활약을 준비함으로써 운동을 계속했다.
그들은 서로 매우 성격을 달리하는 인물로서, 한쪽은 사상가이자 이상주의자인 데
비해 다른 한쪽은 게릴라전에 천재적인 능력을 가진 군인이었다. 두 사람 모두
이탈리아의 자유와 통일을 위해 열렬한 투지를 품고 싸웠다.  이윽고 이 큰 연극의
세 번째 주역이 나타났다. 그는 피에몽의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재상
카보우르였다. 카보우르의 관심은 주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를 이탈리아의 국왕으로
앉히는 데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군소 군주를 누르고 또 제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마치니와 가리발디의 활동에 편승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6,36^당시에는 나폴레옹 3세가 프랑스의 군주였다^3,63^와 흥정하여
그의 적국인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 끌어들였다. 이것이 1859 년의 일이었다.
  가리발디는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에 패배한 기회를 이용하여 나폴리와 시칠리아
왕에 대한 대대적인 원정을 감행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가리발디와 1천 명의 '붉은
셔츠 부대'의 원정인데, 그들은 본격적인 무기도 물자도 없으면서 상대방의 정예
부대와 싸웠던 것이다. 붉은 셔츠 부대의 병력은 훨씬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불타는 정열과 민중들이 그들에게 베푼 호의에 힘입어 거듭 승리를 얻었다.
가리발디의 명성은 올라갔고, 그는 전설적인 인물이 되어 적군도 그가 접근한다는
말만 들으면 사방으로 달아나는 판이었다. 그렇지만 그의 과업은 어려움에 가득 찬
것이었다. 그와 그의 부대는 여러 번 패배와 궤멸의 위기에 빠졌다. 그러나 패배의
순간조차 행운의 여신이 그에게 미소를 던졌기 때문에 패배를 승리로 이끌었다.
  가리발디와 1천 명의 부하는 시칠리아에 상륙했다. 그들은 이탈리아 본토를 향해
서서히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는 남이탈리아의 마을들을 행군하면서도 의용병을
모집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엄청난 고액의 보수를 주었다. "오라!"하고 그는 말했다.
"오라! 고향에 머무르는 자는 비겁자다. 나는 그대들에게 피로와 고초와 전투를
약속한다. 그러나 우리는 정복하지 않으면 죽음이 있을 뿐이다." 성공만큼 성공을
가져오는 것은 없다. 가리발디의 초기 승리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민족주의 정신을
고무시켰다.
  카보우르는 가리발디의 성공에 편승하여 결국 1861 년에 피에몽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이탈리아의 국왕으로 즉위하게 만들었다. 로마는 여전히 프랑스
군의 점령하에 있었고, 베네치아는 오스트리아군의 손안에 있었다. 그러나 10 년이
채 지나지 않아 베네치아와 로마는 이탈리아에 가담하였고, 로마가 수도로 되었다.
이리하여 이탈리아는 마침내 하나의 민족이 되었다. 그러나 마치니는 행복하지
않았다. 그는 그의 생애를 걸고 공화국의 이상을 지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탈리아는 피에몽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왕국에 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아무튼 새 왕국은 입헌 왕국이었고, 이탈리아 의회는 에마누엘레가 즉위한 직후에
소집되었다. 
  1933 년 1월 31일
    59. 독일의 발흥과 파리 코뮨

  나폴레옹 이후 반 세기 동안 독일은 분열 상태가 계속되었다. 몇 번인가 연방을
결성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군주와 정부가 서로
주도권을 잡으려고 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그 동안 모든 자유주의적인 요소의
반응이 활발하게 일어나 1830 년과 1848 년에는 내란으로 번졌으나 진압되었다.
민중을 달래기 위해 약간의 개혁이 있었다.
  그 무렵인 19세기 중엽에 그 뒤 오랫동안에 걸쳐 독일뿐 아니라 전 유럽의 정치에
영향을 미친 인물이 프로이센에 나타났다. 이 사람은 오토 폰 비스마르크라고
하는데 그는 융커, 즉 프로이센의 지주 계급 출신이었다. 워털루 전투가 일어나던
해에 태어난 그는 오랫동안 많은 나라의 궁정에 외교 사절로 주재했다. 1862 년
수상이 된 그는 존재를 과시하기 시작했다. 수상으로 취임한 지 1주일이 못되어
그는 한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시국의 중요 현안은 연설이나 다수의
결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철과 혈(iron and blood)로써 해결될 것이다."
  철과 혈! 널리 알려지게 된 이 말은 그가 빈틈없이, 또 과감하게 추진한 정책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그는 민주주의를 증오하고 의회와 대중 집회를 백안시했다.
그는 과거의 유물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능수 능란한 그의 수완은 사태를 잘
요리하여 그의 의도대로 따르게 했다. 그는 독일을 건설하는 동시에 19세기 후반의
역사를 만들었다. 철학자와 과학자의 나라로서의 독일은 퇴색하고 철과 피의 군사적
능력에 뛰어난 새로운 독일이 유럽 대륙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독일을 유럽의
강국으로 만들려고 하는 그의 정책은 국민의 환심을 얻었다. 즉 민족적
우월감이라는 영광 때문에 그에 대한 모든 반발은 무시되었다.
  비스마르크는 취임할 때 이미 그가 해야 할 일의 한계를 명확하게 마음속에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빈틈없이 계획을 수행했다. 그는 그것을 결연히 단행하여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프로이센을 통해 독일을 유럽의 지배자로 만들려고
했다. 당시 나폴레옹 3세 치하의 프랑스는 대륙의 최강국으로 생각되었고,
오스트리아도 독일의 무서운 적이었다. 당시의 국제 정치와 외교의 기준에서 볼 때,
비스마르크가 여러 외국과 어떻게 교섭하고, 또 그들을 어떻게 처리했는가는 놀랄
만하다. 그가 맨 먼저 착수한 일은 독일의 여러 소국의 지도권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하는 것이었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사이의 전통적인 대립은 더 이상 방치해
둘 수 없었다. 이 때 문제를 철저하게 프로이센에 유리하게 해결하여, 오스트리아로
하여금 앞으로는 1인자가 아니라 조연자의 지위를 차지하게 될 것임을 깨닫게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프로이센의 대두는 오스트리아의 몰락 이후에 와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끝나면 다음에는 프랑스 차례다.
  비스마르크는 묵묵히 군사 편제의 완성을 서둘렀다. 그 동안에 나폴레옹 3세는
오스트리아를 공격하여 무찔렀다. 그리고 이 오스트리아의 패배가 남이탈리아에서
가리발디의 투쟁을 승리로 이끌어 주었고, 나아가서는 이탈리아 독립의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이것은 모두 오스트리아의 힘을 약하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비스마르크에게는 유리했다. 러시아령 폴란드에 반란이 일어났을 때, 비스마르크는
필요하다면 폴란드인을 사살할 수도 있는 준비를 갖추고 러시아 차르를 원조했다.
이것은 수치스러운 처사였으나 장차 일어날 유럽의 분쟁시에 차르의 지원을
얻으려는 목적에서였다.
  이어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와 연합하여 덴마크를 친 다음,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지지를 얻을 수 있도록 공작을 해놓고 오스트리아에 맞섰다.
오스트리아는 1866 년 극히 단기간 내에 프로이센에 의해 압도되었다. 독일의
지도권 문제가 해결되어 프로이센이 맹주임이 명백해지자, 그는 현명하게도 나중에
원한을 사지 않도록 하기 위해 오스트리아를 관대하게 다루었다. 이제는 프로이센의
지도 아래 북부 독일 연방의 결성 방향이 명확해졌다(오스트리아는 여기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비스마르크는 북독일 연방의 수상이 되었다. 요즘 우리
나라(인도)의 어떤 정치, 법률 학자들은 자주 연방이니 헌법이니 하는 논의로 세월을
보내고 있지만, 이에 비해 비스마르크가 5시간 이내에 북독일 연방의 헌법을 구술로
끝낸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리고 약간의 수정은 있었지만, 이 헌법이 세계 대전
뒤 1918 년 독일 공화국이 수립되기까지 5 년 동안 독일 헌법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최초의 목적을 달성했다. 즉 프로이센이 독일의 주도 세력이
되었다. 다음 단계는 프랑스를 꺾음으로써 유럽에서 지배적 지위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비스마르크는 독일을 단결시키고 다른 유럽 열강의 의심을 풀어 주는 데
애쓰는 한편, 몰래 착착 준비를 갖추어 나갔다. 오스트리아조차 매우 관대한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거의 악의를 품지 않았다. 영국은 오래 전부터 프랑스의
적대국이어서 나폴레옹 3세의 야심적인 계획에 깊은 의혹을 품고 주목하고 있었다.
그래서 비스마르크로서는 프랑스와 어떤 분쟁을 일으키더라도 영국의 지지를 얻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전쟁 준비가 끝나자, 1870 년 비스마르크는 교묘한 방법으로 나폴레옹 3세 쪽에서
서둘러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하게끔 했다. 유럽의 눈에는 독일이 침략적인 프랑스
때문에 죄 없이 희생되는 것처럼 보였다. "베를린으로! 베를린으로!"하고 파리
사람들은 소리 높이 외치고 있었다. 그리고 나폴레옹 3세는 기고 만장하여, 얼마 뒤
승리에 도취된 군대의 선두에 서서 베를린에 입성하는 광경을 꿈꾸고 있었다.
그런데 일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비스마르크의 잘 훈련된 군대는 프랑스의 동북
국경으로 신속히 진격하여 프랑스는 여지없이 격파 당했다. 몇 주일도 되기 전에
나폴레옹 3세 자신이 그 군대와 함께 독일인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곧이어 파리에 공화 정부가 수립되고(제3공화정), 프랑스의 제2제정은 막을
내렸다. 나폴레옹 3세가 쓰러진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주요한 것은 그의
압제 때문에 민심이 이탈했기 때문이다. 그는 어려운 사태에 당면한 국왕과 정부의
상투적인 수단을 본받아 전쟁으로 민심을 수습하려 했던 것이다. 그는 성공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전쟁 자체가 그의 야심에 종지부를 찍는 결과가 되었다.
  파리에서는 국민 방위군 정부가 조직되었다. 그들은 프로이센에 화평을
제의했으나 비스마르크의 조건이 너무나 굴욕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군대가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계속할 것을 결의했던 것이다. 독일군은
장기간 파리를 포위했고, 베르사유를 비롯하여 시의 거의 모든 지역이 독일군에
점령되었다. 드디어 파리는 함락 당했고, 새 공화국은 패전과 더불어 비스마르크의
가혹한 조건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하게 된데다가, 특히 불행한
일은 알사스와 로렌의 두 주가 2백년 이상 프랑스령으로서의 전통을 깨뜨리고
독일에 할양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파리 포위전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베르사유는 또다시 새로운 제국의 탄생을
경험했다.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 제국은 1870 년 9월에 끝났지만, 1871 년 1월에
프로이센 국왕을 카이저라고 칭하는 연합 독일 제국이 베르사유 궁전 루이 14세의
호화로운 홀에서 선언되었던 것이다. 독일의 모든 제후와 대표자들이 여기에 모여
그들의 새로운 황제카이저에 대해 신하의 예를 맹세했다. 호엔촐레른의
프로이센 왕실은 이제 제실이 되었고, 독일 연방은 세계의 대강국의 하나가 되었다.
  베르사유가 만세 소리에 싸이고 경축 식전이 떠들썩하게 벌어지고 있을 때,
파리는 비탄과 고통과 견딜 수 없는 굴욕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인민은 거듭되는
재난 때문에 동요하고 있었으나, 안정되고 굳건한 정부는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폭동이 일어나 1871 년 3월 '파리 코뮨'이 선언되었다. 이것은 일종의 민중 자치
정부인데 멀리 프랑스 대혁명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점에서 한 걸음 진보한 것으로, 막연하기는 했지만, 그 뒤에 나타난 새로운
사회주의적 관념을 구체화한 것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러시아 소비에트의
선구자였다.
  그러나 파리 코뮨은 단명으로 끝났다. 이 서민 계급의 봉기에 당황한 왕당파와
부르주아지는 파리 코뮨의 지배 아래 있는 한 구역을 포위 공격했다. 바로 옆의
베르사유 등지에 주둔하고 있던 독일군은 침묵을 지킨 채 보고만 있었다.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석방된 프랑스 병사들은 파리에 돌아오자, 그들은 장교 편에 서서
코뮨과 싸웠다. 그들은 1871 년 4월 말에 코뮨을 무찌르고, 3 만 명의 남녀를
가두에서 사살했다. 사로잡힌 코뮨 대원도 나중에 사정 없이 총살당했다. 그리하여
결국 코뮨은 쓰러졌지만, 당시의 유럽을 크게 동요시켰다. 이 동요는 그 피비린내
나는 탄압에 의한 것이었을 뿐 아니라, 그것이 기존의 사회 체제에 대한 최초의
사회주의적 반란이었던 데서 온 것이다. 가난한 자의 부자에 대한 봉기의 예는
옛부터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까지 그들을 가난하게 만들어 온 제도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데 생각이 미친 적은 없었다. 코뮨은 민주주의를 위한 반란인
동시에 경제적인 반란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그것은 사회주의 사상의 이정표가
되었다. 프랑스에서의 코뮨에 대한 폭력적인 진압은 사회주의 사상을 지하로
몰아넣었고, 그 회복은 쉽지 않았다.
  비스마르크의 외교 수완은 여전히 탁월하여, 그는 그 시대의 국제 정치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그 때부터 성행되었고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이런 종류의 정책은
음모와 책략, 그리고 사기와 공갈이 기묘하게 뒤섞인 그물 같은 것으로서 모든 일이
비밀리에 베일 뒤에서 진행되었다. 만일 그것이 백일하에 드러난다면 그것들은
유지될 수가 없는 것이다. 때로는 무서운 전쟁을 초래하기도 하는 이 베일에 싸인
위험한 장난을 사람들이 방임해 온 것은 정말 우스운 일 아니겠느냐?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와 함께 '삼국 동맹'이라고 불리는 동맹을 맺었다. 이번에는
프랑스의 복수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쌍방 사이에 군비 확대와 음모와
반목이 계속되었다. 
  1933 년 2월 1일
    60. 19세기의 유명한 문필가들

  유럽 문학에 관한 한 내가 아는 바는 약간의 번역물을 읽은 것에 지나지 않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 주제에 대해 무엇인가를 말해 두고 싶다는 나의
생각이 내 마음을 사로잡아 아무래도 단념할 수가 없구나. 나는 이 매혹에 넘치는
분야의 여행에 깊이 관여할 만한 이야기 상대는 되지 못하더라도, 아무튼 나아갈
방향만은 제시해 두어야 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술과 문학은 때때로 군중의
표면적인 활동에서보다도 더 잘 민족 영혼의 깊은 데까지를 엿보게 해주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일시적인 정열이나 편견에 구^36^애받지
않는 조용하고 차분한 사색의 세계로 끌려 들어가게 한다. 그렇지만 요즈음 같은
때에 시인과 예술가가 내일의 예언자로 간주되는 일은 매우 드물며, 그들의 당연한
명예로서 보장된 적은 좀처럼 없다. 그들이 명예를 얻은 것은 대부분 그들이 사망한
다음에 이루어진다.
  나는 아마 너도 틀림없이 잘 알고 있을 몇 사람의 이름을 밝히는데 그치고,
그것도 19세기 초기에 대해서만 언급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다만 너의 식욕을
돋우기 위한 양념에 지나지 않을 줄 안다. 어쨌든 19세기 유럽의 여러 나라는
문학의 풍부한 보고였다는 것을 잊지 않았겠지.
  괴테는 1749 년에 태어났기 때문에 원래는 18세기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그는 83세의 장수를 누려, 19세기의 3분의 1을 충분히 볼 수 있었다. 그는 유럽을
휩쓴 폭풍의 시대에 살면서 나폴레옹에 의해 정복당한 조국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하여 그의 생애에는 많은 번민이 있었지만 한 걸음 한 걸음 삶의 괴로움을
내면적으로 극복하고, 드디어는 초연함과 평정의 경지에 이르러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그는 여러 가지 많은 일을 했는데 무슨 일에나 솜씨가 뛰어났다. 그는 철학자이자
시인이며, 극작가인 동시에 여러 학문에 흥미를 가진 과학자였다. 그뿐 아니라 그의
실제적인 직무는 독일의 한 작은 공국 바이마르의 재상이었다. 그 중에서도 그는
작가로서 가장 잘 알려져 있는데, 가장 유명한 대표작은 '파우스트'다. 그의 명성은
그의 긴 생애를 통해 한껏 떨쳤고, 그의 본령인 문학 방면에서 그는 국민들에게
거의 신으로까지 숭앙 받을 정도였다.
  괴테는 그보다는 약간 손아래이지만 역시 시인이었던 실러(1759--1805)와 같은
시대의 사람이었다. 하인리히 하이네(1797--1856)는 훨씬 젊지만 역시 위대하고
호감이 가는 독일의 시인으로서 매우 아름다운 많은 서정시를 썼다. 이 세
시인괴테, 실러, 하이네는 모두 고대 그리스의 고전 문화를 열렬히 사랑했다.
  독일은 또한 예로부터 철학자의 나라로 알려져 있다. 네게는 별로 흥미가 없을지
모르나 그 가운데 한두 사람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런 종류의 문제에 흥미를 가지는
사람들만이 그들의 저서를 읽는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왜냐하면 그런 책들은
굉장히 까다롭고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철학자, 또는 일반적으로
철학자라고 하는 자들은 흥미로운 존재이며 그들에게 배울 바도 많다. 그들이야말로
사상의 등불을 밝히는 사람들이며, 그들을 통해 우리는 사상의 발자취를 더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임마누엘 칸트(1724--1804)는 18세기 독일 최대의 철학자였는데, 그도 오래
살다가 80세 때에 세기가 바뀌는 것을 보았다. 헤겔(1770--1831) 역시 철학
방면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그는 칸트를 계승하는 동시에 공산주의의
아버지 마르크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철학자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해두자. 19세기초에는 영국에 많은 시인들이 나타났다. 러시아의 가장 고명한 민족
시인 프슈킨(1799--1832)도 이 무렵의 인물이었다. 그는 결투로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프랑스에서도 몇 사람의 시인을 꼽을 수 있으나 나는 두 사람에 대해서만
말하겠다. 한 사람은 빅토르 위고인데 1802 년에 태어나 괴테와 마찬가지로
83세까지 살았고, 역시 괴테처럼 프랑스 문학에서 일종의 신으로 숭앙 받고 있다.
그는 작가로서, 또 정치가로서 다채로운 경력을 가지고 있다. 처음에 그는 열렬한
왕정주의자로서 전제 정치의 신봉자라 해도 좋을 정도였으나, 점차 그는 조금씩
변하여 1848 년에는 마침내 공화주의자가 되었다. 루이 나폴레옹이 단명했던
제2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자, 그는 위고를 공화주의자라 하여 국외로 추방했다. 1871
년에 빅토르 위고는 파리 코뮨을 지지했다. 보수파의 최우익에서 그는 서서히,
더구나 견실하게 사회주의의 최좌익으로 옮겨갔다. 많은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보수 반동으로 변하는데 위고는 정반대였다. 그러나 우리는 작가로서의 위고만을
화제로 삼도록 하자. 한마디로 그는 위대한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극작가였다.
  내가 다음에 말하려고 하는 사람은 오노레 드 발자크다. 그는 위고와 같은 시대의
사람이었지만 성격은 매우 달랐다. 그는 유난히 정력적인 소설가여서 비교적 짧은
생애에 엄청나게 많은 소설을 썼다. 그의 이야기는 서로 줄거리가 연속되어 같은
인물이 여러 번 등장한다. 그의 목적은 그 시대의 프랑스 생활 전체를 그대로
소설이라는 거울에 비춰 보자는 것이었다. 그는 그 연작을 통틀어서 '인간
희극'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것은 무척 야심적인 구상이었고, 그는 오랫동안
창작에 열중했지만 그 방대한 일을 완성하지는 못했다.
  또한 19세기 초 영국에서는 세 사람의 시인이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같은 시대의 사람인데 3 년 동안 잇달아 숨졌다. 이 세 사람은 키츠, 셸리 그리고
바이런이다. 키츠는 빈곤과 절망의 괴로운 삶을 살았다. 그리고 1821 년 로마에서
아직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채 26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몇 개의 매우 아름다운 시를 남겼다. 키츠는 중간 계급 출신이었지만, 일생을 통해
돈의 결핍이 얼마나 큰 장애가 되었으며, 더구나 가난한 사람이 시인이나 작가가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바이런도 자유를 찬탄하는 좋은 시를 썼다. 그러나 그것은 셸리의 시 같은
경제적인 자유가 아니라 민족의 자유였다. 그는 셸리보다 2 년 뒤에 투르크에 대한
그리스의 해방 전쟁에 참가했다가 숨졌다. 나로서는 어쩐지 인물로서의 바이런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친구 같은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그는 중학교와 대학교를 나하고 같은 해로우 스쿨과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칼리지를 다녔기 때문이다. 키츠나 셸리와 달리 그의 명성은 비록
나중에는 떨어졌지만, 청년 시절부터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고, 런던 사교계에서
한동안 인기 있는 존재였다.
  이 무렵 이 세 청년들보다 훨씬 오래 산 두 사람의 유명한 시인이 있었다. 1770
년부터 1850 년까지 80 년 동안 산 윌리엄 워즈워스는 영국의 최대 시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자연을 깊이 사랑한 그의 시는 대개가 자연을 노래한 시다. 나는
그를 좋아하는 편이라고는 할 수 없다. 또 한 사람은 콜리지(1772--1834)다. 그의
시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매우 좋은 작품이다. 
  1933 년 2월 10일
    61. 민주주의의 전진

  지난번 편지는 19세기에 등장했던 유명한 문필가들을 개략적으로 너에게 얘기해
주고 싶어서 썼지만, 이번에는 같은 세기의 다른 측면인 민주주의 사상의 성장을
살펴보기로 하자.
  18세기 후반 영국에 주목할 만한 저서가 나타났는데 바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의미의 정치에 관한 서적이 아니라, 정치 경제학
또는 단순한 경제학에 관한 책이었다. 이 주제는 그 무렵의 다른 주제에서도 모두
마찬가지였듯이 종교 및 윤리와 뒤죽박죽이 되어 매우 혼란한 상태에 있었다. 애덤
스미스는 이것을 과학적 방법으로 다루어 논리적인 혼합물을 일체 도외시하고 경제
속에 작용하는 자연의 법칙을 발견하려고 했다. 그는 이들 일체의 매우 복잡한
작용이 어떤 일정한 자연 법칙에 따라 행해지는 것으로 생각했다. 또한 이 법칙이
저해 받지 않기 위해서는 완전한 자유가 있지 않으면 안된다고 믿었다. 이것이
앞에서도 잠깐 다급한 적이 있는 자유 방임주의 정책의 기원이었다. 애덤 스미스의
저서는 당시 프랑스에 싹이 돋아나려 하고 있던 민주주의 사상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인간 또는 국민에게 깊은 영향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에 과학적인 연구 방법을 시도한 것은, 분명히 그 때까지 세상 만사를 낡은
신학적 견지에서 보던 것을 지양하고, 새로운 방향으로 옮아가고 있음을 보여줬다.
애덤 스미스는 '경제학의 아버지'라 일컬어졌으며, 19세기 영국의 많은
경제학자들에게 커다란 자극을 주었다.
  새로운 과학으로 등장한 경제학은 교수나 소수 지식인들의 전매품이었다. 그러나
그 동안 민주주의의 새로운 이념은 계속 퍼져 나갔고, 미국 및 프랑스 혁명이
그것에 측량하기 어려울 정도의 커다란 보급력을 부여해 주었다. 미국의 독립
선언과 프랑스 인권 선언의 매력에 가득찬 영향력은 사람들의 마음을 밑바닥부터
흔들어 놓았다. 그 영향력은 압박 당하고 착취당하는 수백만 사람들에게 전율과
해방의 메시지를 안겨 주었다. 이들 두 선언은 그 어느 것이나 자유와 평등과 모든
사람이 누려야 할 행복에 대한 권리를 논했다. 그러나 소중한 권리에 관한 참으로
자랑스러운 이들 선언도 결국 민중에게 이것을 보장해 주지 못하고 끝났다. 이들
선언이 발표된 지 1세기 반이 지난 오늘날에도 혜택을 누리고 있다고 할 만한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여러 원칙의 선언만으로도 거기에는
우리에게 비상한 생기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있었다.
  유럽이나 그 밖의 곳, 기독교나 여타 종교의 옛 관념에 따르면 죄와 불행은
인간의 보편적이고 불가피한 숙명인 것처럼 되어 있었다. 종교는 이 세상의 가난과
고통을 항구적일 뿐 아니라 영예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도록 강요했다. 종교의
약속과 보상은 모두 피안의 세계에 관한 것이며, 이 세상에서 우리들은 체념하고
우리들의 운명을 감수하여 기본적인 변화를 바라지 않게끔 설교 당한다. 자선이나
가난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일은 장려되었지만, 가난 자체나 가난의 근본이
되는 제도와 결별하는 일 따위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유와 평등의
이념이야말로 교회와 사회와의 권위주의적인 사고에 대립하는 것이기도 했다.
  민주주의는 원래 모든 사람이 모든 면에서 평등하다고 규정지은 것은 아니었다.
각양 각색의 사람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을 것이 뻔한 일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주장하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육체적 차이로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강하다는 것으로, 지능적 차이로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현명하다는
것으로 나타나며, 한편 도덕적 차이로는 어떤 사람은 희생 정신이 강하지만 또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것 등이 있다. 이들 차이의 대부분은 성장 과정이나 서로
다른 교육 혹은 교육의 결여 등에서 비롯되는 수가 많다. 거의 비슷한 재능을 지닌
두 사람의 소년 혹은 소녀 가운데, 한쪽에는 좋은 교육을 시키고 다른 한쪽에는
교육을 시키지 않았다면 몇 년 뒤에는 쌍방간에 커다란 차이가 나타날 것이
틀림없다. 또한 한 사람에게는 영양이 있는 식사를 제공하고 또 한사람에게는
보잘것없는 식사를 그나마 불충분하게 제공했다면, 한 사람은 정상적인 성장을
하겠지만 또 한 사람은 병약하여 제대로의 성장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람의 성장 과정이나 환경이나 교육은 커다란 차이를 초래하는 것이어서,
만약 우리들이 누구에게나 똑같은 환경과 기회를 부여하는 일이 가능하다면
서로간의 차이는 오늘날 우리들이 알 수 있는 것보다는 훨씬 작을지 모른다. 이것은
확실히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에 관한 한 그것은 인간이 실제에 있어 불평등함을 용인했다.
단지 그것은 인간이 평등한 정치적, 사회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서 취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을 뿐이다. 만약 우리가 이 민주주의 이론을 액면 그대로 인정한다면,
우리는 모든 부류의 혁명적 결론에 이끌려 가게 된다. 지금 우리는 거기까지 논의를
진행시킬 필요는 없다. 다만 이 이론에서 하나의 명백한 귀결은 각자가 국정의 집회,
바꿔 말하면 의회를 위한 대표자를 선거함에 있어 반드시 한 표를 던질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투표권은 정치적 권력의 상징이었다. 만일 모든 사람이
투표권을 한 표씩 갖는 것이라면 그 사람은 정치적 권력에 대하여 한 개의 평등한
배당을 받는 것이라는 가정이 성립된다. 그리하여 19세기를 통해서 민주주의의
주요한 요구 사항은 선거권, 곧 투표하는 권리를 확장시키는 데 있었다. 오랫동안
여성들은 투표권을 인정받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이, 특히 영국의 여성들이 격렬한
참정권 운동을 벌인 것은 그다지 오래된 일이 아니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성년 남녀에 대해 선거권이 인정되고 있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대개의 사람들은 선거권은 취득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특별한
이익을 가져온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투표권은 주린 배를 움켜쥐어야 할
사람에게는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이었다. 진정한 의미에서 권력의 소유자란 배고픈
사람들의 공복을 미끼로 하여,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입장에 있는 패거리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렇게 하여 투표권을 통해 응당
부여되어야 할 정치적인 권력은 경제력을 지니지 않는 한 실체가 없는 그림자와
같은 것이 되었다. 평등은 선거권에서 비롯된다는 초기 민주주의 투사들의 거창한
꿈은 진정 환멸로 그치고 말았다.
  프랑스 혁명은 19세기 전반에 걸쳐 파급된 민주주의 사상의 모체가 되었다.
게다가 급속히 변화하는 환경에도 불구하고 혁명 사상만은 고수되었다. 이들
민주주의 사상은 국왕이나 전제 정치에 대한 지적 반발이었다. 이에 관해 좀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그것들은 공업화 이전의 상태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산업증기와 큰 기계는 구질서를 뿌리째 뒤엎어 버렸다.
그런데 묘한 사실은 19세기 초기의 급진주의자나 민주주의자들이 이 변화를 무시한
채 여전히 혁명이나 인권 선언의 미사 여구를 되풀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견해로는 아마도 이들 변화는 오로지 물질적인 것이어서 민주주의의 고매한 정신적,
도덕적, 정치적 요청과는 하등 관련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물질적인 사항이란 아무래도 무시 못할 어떤 성질을 띠고 있는 법이다.
사람들이 낡은 관념을 버리고 새로운 관념을 받아들이는 일이 얼마나 커다란
어려움을 수반하는 것인가는 지극히 흥미로운 일이 아니냐. 그들은 눈을 감고
보기를 거부하며, 낡은 것이 그들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경우에마저 그것을
지속시키기 위해 싸우려 한다. 그들은 새로운 관념을 받아들여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일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일이라도 거의 다 해내었다. 보수주의의 힘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강한 법이다. 자신의 생각으로는 머리가 앞서 있다고 자부하는
급진주의자마저 낡고 낡아 파탄 상태에 이른 봉건적 관념에 매달려, 새롭게
변화하는 환경에는 낯을 돌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진보가 완만하여 이따금
객관적인 현실 상태와 사람들의 관념 사이에 커다란 괴리가 생겨 혁명을 필요로
하는 상태가 초래된다 해도 놀라울 것은 없다.
  초기의 민주주의자는 말할 필요도 없이 합리주의의 입장을 취했다. 그들의 사상,
언론의 자유에 대한 요청은 교조적인 종교나 신학과는 양립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신학적 교조의 근거를 약화시키기 위해 과학과 손을 잡았다.
사람들은 '성서'를 하나의 흔해 빠진 서적과 마찬가지로 취급, 맹목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비판하는 용기를 갖기 시작했다. 이 성서 비판은 '고등
비판(higher criticism)'이라 일컬어졌다. 비평가들은 '성서'는 서로 다른 시대에
서로 다른 몇 사람들에 의한 기록의 수집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또한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예수는 하나의 종교를 창립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비판에 따라 재래 신앙의 대부분이 뿌리부터 흔들렸다.
  낡은 종교의 기초가 과학과 민주주의 때문에 흔들리자, 그 대신에 철학을
확립하려는 시도가 행해졌다. 이같은 시도의 하나로 1798 년부터 1857 년까지
생존했던 프랑스의 오귀스트 콩트에 의한 것이 있다. 콩트는 낡은 신학이나
독단적인 종교는 시대에 뒤떨어져 있다는 것을 인정했으나, 역시 일종의 종교가
사회에 필요하다는 것을 믿었다. 그래서 그는 '인간성의 종교'를 제창하여 이것을
'실증주의'라고 명명했다. 이것은 사랑, 질서, 진보를 기초로 하였다. 거기에는
초자연적인 요소는 아무것도 없었으며 단지 과학에 기초를 두었다. 19세기의 모든
시대 사상을 받쳐 주고 있던 인류의 진보 관념이 그것을 배후에서 지탱해 주고
있었다. 콩트의 학설을 믿은 것은 소수의 지식인에 한정되어 있었지만, 그가 유럽
사상에 끼친 일반적인 영향력은 실로 큰 것이었다. 그는 인간의 사회와 문화를
취급하는 사회학이라는 학문을 처음 시작한 사람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콩트와 같은 시대에 나서 그보다도 훨씬 오래 산 영국의 철학자이며 경제학자인
존 스튜어트 밀이 있다. 밀은 콩트의 학설 및 그의 사회학상의 여러 관념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애덤 스미스의 학설을 중심으로 전개된 정치 경제학의 영국 학파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새로운 경제 사상이라는 일종의 사회주의적 원칙을
도입했다. 그러나 그는 특히 '공리주의자'로 세상에 알려져 있다. '공리주의'는
그보다 조금 이전에 영국에서 비롯되어 밀에 의해 한층 뚜렷한 지위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 명칭이 말해 주는 것처럼 공리주의의 중심 사상은 '공리성' 혹은
'유용성'에 있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것이 공리주의자의 근본
원리였다. 이것이 선과 악,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위한 유일한 기준이 되었다.
행위는 행복을 증진하는 경향에 비례하여 올바르거나 혹은 그릇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사회와 정부는 응당 이 관점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의
촉진이라는 관점에서 조직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이 견해는 모든 사람을 위한
평등한 권리에 관한 초기의 민주주의 교의와 꼭 같은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은 당연히 소수자의 희생이나 불행을 요구하는 일이 있을 수
있었다. 나는 단지 그 차이점을 지적할 뿐으로 여기서 그것을 논의할 필요는 없다.
민주주의는 이렇게 하여 다수자의 권리를 뜻하는 것이 되었다. 존 스튜어트 밀은
개인의 자유와 개인의 자유에 관한 민주주의 사상의 강력한 옹호자였다. 그는
'자유론'이라는 작은 책자를 썼는데 상당히 훌륭한 것이다.
  나는 19세기를 일관해 온 이념의 발자취를 더듬어 사상계의 이정표로 삼기 위해
두서너 명의 주요한 사상가 이름을 들었다. 그런데 이들뿐만 아니라 대체로 초기
민주주의자의 영향을 받은 사람은 많건 적건 지식 계층에 한정되어 있었지만, 어느
정도 그것은 지식 계층의 범위를 넘어서 다른 일반인에게도 침투되었다. 대중에
대한 직접적인 영향은 경미한 것이었으나 간접적인 영향은 컸다. 또한 직접적인
영향에서도, 이를테면 선거권의 요구와 같은 그러한 문제에 관해서는 대체로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19세기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별개의 운동노동자 계급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들 운동은 그 시대의 지배적인 민주주의 사상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지만, 또한 그것에 의해 스스로 영향을 받기도 했다. 일부 사람들은
사회주의를 평가하여 민주주의의 상관 요인으로 삼고, 또한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민주주의의 불가결한 일부를 이루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가 보아 온 바와 같이
민주주의자들은 자유와 평등과 행복에 관한 만인 평등의 권리 의식에 충만해
있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그들은 행복을 단순히 기본적 권리로 삼는 것만으로는
행복은 결코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먼저 육체적인
복지가 필요했다. 굶주림에 고통을 받는 자가 "나는 행복하다" 따위의 말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그들은, 행복은 사람들 사이에 보다 나은 재화의
분배를 실현하는 데 달려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사회주의로 이끄는 길은
이렇게 하여 열렸다. 
  1933 년 2월 13일, 14일, 16일
    62. 사회주의의 등장

  영국에서 초기 공업화가 진전되면서 노동자들 사이에는 만성적인 굶주림과 과로
때문에 죽어 가는 자가 속출했다. 그러는 동안에 인도주의자로서 노동자의 비참한
상태에 상심하고 있던 한 인물이 맨체스터의 공장 소유자 가운데서 나타났다. 그가
바로 로버트 오언이었다. 그는 자신의 공장에 여러 가지 개혁을 단행하여
노동자들의 생활 개선을 도모했다. 그는 자기가 속해 있는 고용주 계급에 호소하여
설득함으로써 고용주들의 마음을 노동자의 처우 개선에 돌리려 했다. 영국의회가
고용주의 탐욕과 이기심에 대해 노동자를 보호하는 최초의 법률을 통과시킨 것은
어느 정도까지는 그의 덕택이었다. 이것은 1819 년의 '공장 조례'를 일컫는 것으로,
이 조례는 9세의 아동은 하루 12시간 이상 일을 시키면 안된다는 것을 정했다. 이
규정은 그 무렵 노동자가 강요당하고 있던 무시무시한 상태를 다소나마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사회주의'라는 말은 1830 년쯤에 로버트 오언이 처음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말할
것도 없이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격차를 좁혀 재산을 다소나마 평등하게 분배하려는
착상은 결코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옛날부터 이런 종류의 주장을 한 사람은
많았다. 또한 원시 사회에서는 일종의 공산주의가 존재하여 공동체 내지는 촌락
전체가 토지와 그 밖의 재산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것을 원시 공산주의라고 하는데,
인도를 포함한 많은 나라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사회주의는 사람들을 평등화하려는 막연한 욕망을 훨씬 초월한
것이다. 그것은 보다 명료한 것으로 애당초 새로운 공장 생산 체제에 적용할 것을
의도하면서 출발했다. 그러므로 그것은 공업 체제가 낳은 자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언의 구상은 노동자들이 상호 부조 단체를 설립하고, 또 공장 재산의
일부를 분배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실제로 모범 공장과 집단 주택을 미국과
영국에 세워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렇지만 그는 고용주들과 정부를 설득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그래도 그 시대에는 그의 영향력이 매우 커서, 그 때부터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사회주의라는 말을 유행시켰다.
  19세기 중엽 주목할 만한 새로운 인물이 유럽의 노동자와 사회주의 세계에
나타났다. 그는 바로 칼 마르크스이다. 그는 1818 년 유태계 독일인으로 태어나
학생 시절에는 법률과 역사와 철학을 공부했다. 그는 그가 편집한 '라인 신문'
때문에 독일 당국과 충돌한 뒤 파리에 가서 새로운 사람들과 접촉하여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에 관한 서적을 읽고 사회주의의 신봉자가 되었다. 동시에 그는, 이미
영국에 살면서 신흥 면직 공업의 유복한 독일인 공장주인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만났다.
  엥겔스 역시 당시의 사회 상태를 우려하고 이에 불만을 품으면서 그가 피부로
느낄 수 있던 빈곤과 착취에 대한 구제 수단을 찾고 있었다. 로머트 오언의 사상과
개혁의 시도가 그의 마음을 움직여, 그도 오언의 추종자인 오언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파리를 방문하여 마르크스를 처음 만나게 되었고, 이후 그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이들은 이때부터 가깝게 지내면서 같은 견해를 가지고, 같은 목적을 향해
진심으로 협력하는 동지가 되었다. 나이도 비슷한 그들의 관계는 그들의 저서가
대부분 공저로 발표될 만큼 깊은 것이었다.
  당시 루이 필립의 프랑스 정부는 마르크스를 파리에서 추방했다. 그는 런던에
가서 오랫동안 그 곳 대영 박물관의 책 속에 묻혀 살았다. 그는 일에 열중하여 그의
이론을 완성하고 그것에 관한 저서를 썼다. 하지만 그는 결코 속세의 일에 초연하여
그저 이론만을 전개하는 단순한 학자는 아니었다. 그는 비교적 막연했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발전시키고 명확하게 하여 구체적인 사상과 목표를 내세우는 동시에,
그 운동과 노동자 조직 속에서 적극적으로 지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유럽 혁명의 해인 1848 년에 일어난 일은 말할 것도 없이 마르크스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같은 해에 그는 엥겔스와 공동으로, 나중에 매우 잘 알려지게 된
하나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것은 '공산당 선언'이라는 것으로, 그 속에서 그들은
프랑스 혁명과 그 뒤에 잇달아 일어난 반란의 배후에 깔린 여러 사상들을 논하여,
그것들이 얼마나 현실에 대해 불충분했고 또 모순된 것인가를 지적했다. 또한 그
시대에 유행하고 있던 '자유, 평등, 박해'라는 민주주의의 표어를 비판하여,
그것들이 민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르주아 국가를 위한 그럴듯한 연설에
지나지 않음을 폭로했다. 그은 더 나아가 그들 자신의 사회주의 이론을 간단
명료하게 전개하고, 모든 노동자 대한 하나의 호소로써 이 선언을 끝맺었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당신들은 당신들의 쇠사슬 외에 잃을 것이 하나도 없으며, 얻을
것은 세계 전체이다!"
  1867 년 마르크스의 저서 '자본론'이 독일어로 발간되었다. 이것은 런던에서의
여러 해에 걸친 그의 노작으로, 그 속에서 그는 기존의 여러 경제학 이론을 비판한
후 사회주의 이론을 마지막에 밝혔다. 그것은 과학적 방법을 채용한 역작이었다.
그는 일체의 모호함과 관념론을 배척하면서 냉정하게 과학적으로 역사와 경제의
발전을 다루었다. 그는 또 특히 큰 기계에 의한 공업 문명의 성장을 논평하고, 인간
사회의 발전 과정과 역사와 계급 투쟁에 관해 광범한 결론을 끌어내었다. 때문에 이
명확하고도 이론적으로 논증된 새로운 마르크스의 사회주의는 재래의 모호한
'공상적' 또는 '관념적' 사회주의에 대해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불렸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읽기 쉬운 책이 아니다. 그렇기는커녕 평이하다는 말과는 아주 정반대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책은 대다수 사람들의 사고 방식에 많은 영향을 주어
그들의 이데올로기 전체를 변하게 했으며, 이를 통하여 인류의 발전을 좌우한
서적의 하나로 손꼽힌다.
  그러면 대체 마르크스주의란 무엇일까? 그것은 역사와 정치와 경제와 인간 생활,
그리고 인간의 욕망을 해석하는 하나의 방법이며, 다방면에 걸친 인간 생활의
활동에 관해 나름대로의 견해를 제시한 하나의 철학이다. 또 그것은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한 인류사를 일종의 운명의 필연성을 띤 엄밀한 논리적 체계로 정리하려는
시도이다. 물론 생활이 반드시 그렇게까지 논리적인 것이고, 그렇게까지 엄격한
철칙에 의존하는 것인지 어떤지는 명백한 일이 아니며, 또 많은 사람들이 의심한
바였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과거의 역사를 과학자로서 음미하여 거기에서 어떤
일정한 결론을 끌어내었다.
  마르크스는 태고의 시대부터 인간이 자연에 대해, 또 같은 동포에 대해 생존을
위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음을 보았다. 그 밖의 생활에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노동을 했는데, 그 방법은 시대가 흐름에 따라 더욱 복잡하고 발달된 것으로 변화해
갔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생활 수단의 생산 방법은 인간 생활과 모든 시대를 통한
사회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의의를 지니는 것이었으며, 그것들은 역사의 각 시대를
지배하고, 그 시대의 모든 활동과 사회 관계에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그것이
변화함에 따라 역사적이며 사회적인 큰 변화가 뒤따랐다. 어느 정도까지는 우리도
이 편지를 통해 이 변화의 큰 효과의 자취를 더듬어 왔다. 예를 들면 농업이
도입되자 무섭게 큰 변화가 생겼다. 떠돌던 유목 종족이 정착하면서 촌락과 도시가
발달했다. 농업에 의한 생산력 확대를 통해 잉여 물자가 발생하고, 인구가 증가하고,
재부가 늘어나고, 여가가 많아져서 예술과 수공업의 발달에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또 하나의 알기 쉬운 실례로는 생산을 위해 도입된 큰 기계가 또다시 엄청나게 큰
변화를 가져왔던 산업 혁명을 들 수 있고, 이 밖에도 예를 들자면 많이 있다.
  역사의 어떤 한 시대의 생산 방법은 민중의 성장 과정의 일정한 단계와 상응한다.
이 생산 노동을 계속하는 동안에, 또 그 결과로서 사람들은 생산 방법에 규정되고,
생산 방법에 상응하는 어떤 일정한 관계(예컨대 물물 교환, 매매, 거래 등과 같은)를
갖는다. 이 관계가 사회 전체의 경제 구조를 구성한다. 그리고 이 경제적 토대 위에
법률, 정치, 사회 관습, 여러 관념, 그리고 그 밖에 일체의 것이 구축된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견해에 따르면 생산 방법이 변함에 따라 경제 구조도 변하며, 잇달아
사람들의 관념과 법률과 정치 등도 변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또 역사를 계급 투쟁의 기록으로 보았다. "모든 인간 사회의 역사는
과거에도, 또 현재에도 계급 투쟁의 역사이다." 생산 수단을 지배하는 계급이 우월한
지위를 차지한다. 이들은 다른 계급의 노동을 착취하여 거기에서 이익을 얻는다.
일하는 사람들이 그들 노동의 대가를 고스란히 다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다만 그 중에서 꼭 필요한 부분만을 얻을 뿐이며, 그 밖의 부분, 즉 잉여 부분은
착취하는 계급의 호주머니에 들어간다.
  또한 국가와 정부는 생산을 지배하는 계급에 지배되며, 따라서 국가의 제1의
목적은 이 지배 계급을 보호하는 일이 된다. 그러므로 "국가는 하나의 전체로서
지배 계급의 업무를 운영하는 집행 위원회다"라고 마르크스는 말했다. 법률은 이
목적을 위해 제정된다. 그리고 교육과 종교를 이용하여 또 다른 방법에 의해 이
계급의 우월성이 정의와 자연의 이치에 합당한 것임을 민중으로 하여금 믿게 한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착취 받는 여러 계급이 사태의 진상에 눈뜨고 불만을 품게 되지
않도록 정부와 법률의 계급성을 은폐하는 모든 종류의 시도가 행해진다. 마침
누군가가 불만을 품고 이 체제에 도전하면 그는 사회의 적으로 지목되며, 옛날부터
내려오던 관습의 파괴자로 국가에 의해 압살 당한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하나의 계급이 영원히 지배권을 장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 계급에 우월성을 부여한 요인 자체가 결국은 거기에 대항하는
작용을 하게 된다. 원래 그들은 당시에 현존해 있던 생산 수단을 지배했기 때문에
지배 계급이 되고, 착취 계급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새로운 생산 방법이 생기기
시작하면, 이윽고 그것을 지배하는 새로운 계급이 세력을 얻어 착취당하는 것을
거부하게 된다. 새로운 관념이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고, 이데올로기 혁명이라고도 할
만한 것이 일어나 낡은 관념과 도그마를 몰아낸다. 그리고 잇달아 새로 일어나는
계급과 여전히 권력에 매달리는 낡은 계급 사이에 투쟁이 시작된다. 새로운 계급은
이제는 경제적인 힘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승리하게 되며, 역사 위에
그 역할을 다해 버린 낡은 계급은 몰락하게 된다.
  이 새로운 계급의 승리는 정치적 승리인 동시에 경제적 승리이며, 또 새로운 생산
방법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사회의 모든 구조의 변화가 이에
따른다. 새로운 관념, 정치 기구, 법률, 관습 등모든 것들이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이 신흥 계급은 이후에 피지배 계급 가운데 어떤 무리에 의해 교체될 때까지
다른 계급에 대해 착취 계급으로서 군림한다. 이와 같이 투쟁은 되풀이되어 다른
자를 착취하는 계급이 존재하지 않게 될 때까지 끊임없이 계속된다. 계급적 차별이
소멸되고 오직 하나의 계급만이 남겨질 때, 비로소 투쟁은 끝날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더 이상 착취의 기회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계급이 하나라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착취할 수는 없다. 그렇게 함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끊임없는
투쟁과 경쟁 대신에 사회의 균형과 완전한 협력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때는
국가의 주요한 임무인 강제는 필요하지 않으며, 국가 자체도 '소멸'할 것이다.
따라서 무정부주의자의 이상에도 접근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
  마르크스는 이처럼 역사를 불가피한 계급 투쟁에 따라 형성되는 큰 규모의 발전
과정으로 보았다. 마르크스는 엄청나게 많은 상세한 예증을 들면서 과거에 어떻게
이와 같은 과정이 생겼고, 또 큰 기계의 출현과 함께 어떻게 봉건 시대가 자본주의
시대로 바뀌었으며, 봉건 계급이 자본가 계급에서 그 지위를 물려주었는가를
보여주었다. 그에 따르면 현대야말로 부르주아 계급과 노동자 계급 사이에 마지막
계급 투쟁이 벌어지고 있으며, 자본주의 자체가 결국은 자본주의를 쓰러뜨리고, 계급
없는 사회와 함께 사회주의를 건설할 계급(노동자 계급)과 그 세력을 스스로 낳을
뿐 아니라 계속 증대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설명한 이러한 역사관은 '유물 사관'이라고 일컬어진다. 이
'유물론'이라는 말은 마르크스 시대에 매우 특수한 의미로 사용된 '관념론'이라는
말에 대해 관념론이 아니라는 뜻으로 그렇게 불렸던 것이다. 어떤 철학자들은
인류의 진보를 정신의 진보라는 모호한 관념으로 설명하려 했다. 마르크스는 문제를
이렇게 설정하는 방식은 잘못이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뜬구름 잡기와 같은
모호한 사색과 관념론은 사람들이 이런 종류의 방법으로 구체적인 사실에 기초를
두지 않은 온갖 종류의 일들을 공상하기 쉽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사실을 검증하는 과학적인 절차를 밟았다. 거기에서 '유물론'이라는 것이 생겼다.
  마르크스는 끊임없이 착취와 계급 투쟁을 입에 담는다. 우리들 대부분은 주변에서
보는 불공평에 화를 내거나 흥분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생각에 따르면, 이것이
화를 낸다거나 도덕적으로 그럴듯한 충고를 한다거나 할 문제가 아니었다. 착취는
착취하는 개인의 잘못이 아니다. 한 계급의 다른 계급에 대한 지배는 역사가
진보하는 데 따르는 자연적인 결과이며, 때가 지나면 또 다른 관계로 옮겨지는
것이다. 가령 어느 개인이 지배 계급에 속하여 그 입장에서 남을 착취했더라도
그것은 그 자신에게 그토록 무서운 죄라고는 할 수 없다. 그는 하나의 체제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를 증오에 가득 찬 이름으로 부른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1933 년 2월 27일
    63. 미국의 남북 전쟁

  1775 년 영국에서 분리된 연안 13개 주에는 기껏해야 4백만도 못되는 인구였다.
19세기에 들어와 이 대국은 면적 및 인구뿐 아니라 근대 산업과 무역, 부와
세력에서도 크게 확대되었다.
  유럽이 여러 번 혁명과 반동을 되풀이하고 있을 동안 미국은 서쪽으로 전진을
계속했다. 유럽에서의 반동 정치는 이민을 촉진하여 많은 사람들이 광대한 영토와
높은 임금의 소문을 전해 듣고 미국으로 모여들었다. 인구가 서부로 확대됨에 따라
새로운 주가 만들어지고, 이들이 연방에 가입되었다.
  북부의 여러 주와 남부의 여러 주 사이에는 처음부터 큰 차이가 있었다. 북부는
공업을 주로 하여 거기에는 현대적인 대기계 공업이 급속히 발달했고, 남부에는
대부분 노^36^예 노동에 의해 경영되는 대농장이 많았다. 노^36^예 제도는 법률로
공인되어 있었지만, 북부에서는 이것이 보편적이지 않았으며 중요성도 갖지 못했다.
반면에 남부는 전적으로 노^36^예 노동에 의존하고 있었고, 노^36^예는 물론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이었다. 백인으로 노^36^예가 되는 자는 없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평등하다"고 독립 선언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백인을 위한
것일 뿐 흑인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흑인들이 아프리카에서 노^36^예로 끌려온 이야기는 말할 수 없이 비참하다.
노^36^예 무역은 17세기초에 시작되어 1863 년까지 계속 정규적으로 공급되었다.
맨 처음에는 서아프리카^6,36^그 연안의 일부는 지금도 '노^36^예 해안'이라고
불리고 있다^3,63^로 다니는 화물선이 편리한 대로 아프리카인을 납치하여 미국으로
끌고 갔다.
  노^36^예선은 너댓 번 항해하면 쓰지 못하게 될 정도로 불결했다. 그러나 이익은
막대한 것이어서 18세기말부터 19세기초에 걸쳐 해마다 10만 명 이상의 노^36^예가
아프리카의 노^36^예 해안에서 끌려갔다. 더구나 이 정도의 인원을 납치하려면
이들을 확보하기 위한 흑인 사냥에서 이보다 훨씬 많은 수를 죽여야만 했다.
  19세기 중엽까지 뉴욕을 중심으로 노^36^예 무역이 행해지는 동안, 북부에서는
노^36^예 제도를 반대했다. 그러나 남부는 큰 농장을 경영하기 위해 계속
노^36^예가 필요했다. 노^36^예 제도를 폐지한 주도 여럿 있었지만, 또 다른
주에서는 이것을 그대로 유지했다. 노^36^예 제도가 유지된 주의 흑인은 노^36^예
제도가 폐지된 주로 빈번하게 도망하여 그들에 관한 논쟁이 그치지 않았다.
  1860 년 에이브러햄 링컨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는데, 이것이 남부가 연방에서
분리하는 신호가 되었다. 그는 노^36^예 제도에는 반대했으나, 역시 기존의 것에
대해서는 굳이 논의하지 않을 것을 그 전부터 천명하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새로
추가된 주에 확대하거나 합법성을 부여할 의사가 없었다. 그러나 남부는 이 보장에
대해서도 타협하지 않았다. 잇달아 여러 주가 연방에서 탈퇴하고, 미국은 분열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내전을 막으려고 한 링컨의 노력은 실패했다. 남부는 탈퇴를 결정하고, 11개 주가
이에 따랐을 뿐 아니라 인접한 여러 주에서 이에 동정하는 자도 있었다. 탈퇴한
여러 주는 '연합주'라 호칭하고, 제퍼슨 데이비스를 독자적인 대통령으로 뽑았다.
1861 년에 내전이 시작되어 약 4 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그 동안에는 형제와
친구끼리 쌍방으로 갈라져 싸우는 사람도 많았다.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각각 방대한 군대가 형성되었다. 북부는 여러 가지로
유리했는데, 인구면에서나 재력면에서 모두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공업 지대였기
때문에 물자도 훨씬 풍부하고 철도도 발달해 있었다. 반면에 남부는 우수한 군인과
군, 특히 리 장군을 비롯한 유능한 지휘관을 가지고 있어 초기에는 남부가 연전
연승을 거듭했다. 그러나 막바지에 이르러 남부는 피폐해지고, 북부의 해군이 남부를
유럽 시장으로부터 완전히 차단하여 목면과 담배를 수출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남부는 전투력을 잃었고, 또 랭커셔는 목면이 부족하여 조업을 중지하는
방직 공장이 속출하여 적잖은 피해를 입었다. 랭커셔의 노동자들은 실직하여 가두를
헤매게 되었고, 심한 빈궁에 시달렸다. 이 전쟁에 관한 영국의 입장은 대개 남부에
기울어져 있었는데, 부유층은 남부를 편들었고, 진보 세력은 북부를 지지했다.
  노^36^예 제도가 전쟁의 진짜 원인은 아니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링컨은
끝까지 기존의 노^36^예 제도에는 대체로 손대지 않을 것을 보장하고 있었다. 사실
싸움은 남북간 이해의 불일치와 이것저것 서로 얽힌 모순 관계에서 생겨났다.
그리고 링컨은 드디어 연방을 지키기 위해 일어섰다. 전쟁이 시작된 뒤에도 링컨은
노^36^예 제도에 관해서 만은 북부에도 이해 관계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음을
고려하여, 이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명백한 의견을 공표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점점 명확한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다. 그는 우선 노^36^예
소유주들에게 보상을 조건으로 노^36^예를 해방시킬 것을 의회에 제안했다. 이윽고
그는 이 보상이라는 생각도 버리고, 1862 년 9월에는 드디어 '해방 선언'을
발표하여 1863 년 1월 1일 내지 그 뒤에 반란에 가담한 모든 주의 노^36^예가
해방되리라는 것을 언명했다. 이 선언을 발표한 주요한 목적은 남부 여러 주의 힘을
약화시키는 데 있었다. 이로써 4백만의 노^36^예가 해방되었다. 이것이 남부의 여러
주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한 조치였음은 명백한 일이다.
  내전은 남부가 기진 맥진한 1865 년에 끝났다. 전쟁이란 언제 어떤 경우에도
무서운 것이지만, 내전의 경우에 오히려 더욱 처참해지는 수가 있다. 이 무서운 4
년 동안의 내전에서 가장 무거운 짐이 누구보다도 대통령 링컨의 두 어깨를 심하게
짓눌렀다. 그것은 주로 그가 주위의 실망과 모든 비참한 시태를 무릅쓰고 목표를
향해 돌진하려는 냉철한 결의를 다졌기 때문이다. 그가 목적한 바는 그저 이기는 데
그치지 않고, 될 수 있는 대로 서로의 악의를 배제하여 연방을 강제적인 방법이
아니라 진정한 마음으로부터 결합체로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전쟁에 이기자 패배한
남부에 대해 관대한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며칠이 가지 못해 흉탄에
쓰러졌다.
  링컨이 사망한 뒤 미국 의회는 남부의 백인들에 대해 링컨이라면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될 정도의 관대한 태도는 보이지 않았다. 남부의 백인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처벌을 받았고, 그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선거권을 박탈당했다. 즉 그들은 투표할
권리를 빼앗겼다. 한편 흑인들은 시민으로서 완전한 권리를 얻었고, 이것이 미국
헌법에 명문화 되었다. 동시에 어떤 주도 한 인간에게 인종, 색깔, 노^36^예였다는
경력 때문에 공민권을 박탈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결정하였다. 
  1933 년 2월 28일
    64. 미국의 라틴 아메리카 지배

  라틴 아메리카의 여러 공화국은 독립을 얻은 지 1백년이나 되는데도 불구하고
좀처럼 안정되지 않았다. 주기적으로 혁명과 군사 독재를 겪어야만 했기 때문에,
끊임없이 바뀌는 그들의 정책과 정부의 자취를 더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남아메리카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던 국가는 아르헨티나와 브라질과
칠레^6,36^각국의 머리 글자를 따서 ABC 3국이라 불린다^3,63^이다.
북아메리카에서는 멕시코가 지도적인 라틴 아메리카 국가이다.
  한편 미국은 유럽의 간섭에 대해 먼로주의로써 라틴 아메리카를 방위했다. 그러나
그들이 부유해짐에 따라 그들은 새로운 팽창의 영역을 국외에서 찾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이 맨 처음 라틴 아메리카로 쏠린 것은 당연하다. 그들은 이러한 여러
나라를 예전처럼 제국 건설이라는 방법으로 차지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즉 그들의
상품으로 라틴 아메리카의 시장을 장악한 것이다. 또 그들의 자본을 남아메리카의
철도와 광산과 그 밖의 사업에 투자하고, 여러 나라의 정부와 때로는 혁명의
소용돌이 에 휘말린 파벌에 자금을 빌려주기도 했다. 나는 앞에서 '그들'이라고
말했지만 이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미국의 자본가와 은행가를 말한다. 물론
그들의 배후에서는 미국 정부가 도움을 주고 있었다. 점차 은행가들은 돈을
빌려주거나 투자함으로써 남아메리카와 중앙 아메리카의 작은 나라들을 지배했다.
또 그들은 어느 당파에는 돈과 무기를 빌려주고 다른 당파에는 빌려주지 않음으로써
혁명까지도 일으킬 수 있었다. 은행가와 자본가의 배후에 미국 정부가 있는 이상,
미력하고 약체인 남아메리카 여러 나라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니? 때로 미국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는 명목 아래 실제로 어느 한 나라의 특정 당파를 위해
군대를 파견한 적도 있었다.
  이같이 미국 자본가들은 남아메리카의 여러 작은 나라에 효과적인 지배력을
행사함으로써 은행과 철도와 광산을 움직여 자기의 이익대로 그들을 착취했다. 라틴
아메리카의 비교적 큰 나라들에서조차도 그들은 투자와 금융 지배를 통해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것은 말하자면 그들이 이러한 여러 나라의 재화나 또는
재화의 대부분을 차지했음을 뜻한다. 그런데 이것은 제국의 새로운 형태와 근대적
형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주목할 만하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경제적인
것으로서 아무런 외부적인 징후도 없이 착취하고 지배한다. 남아메리카의 여러
공화국은 정치적, 국제적으로는 독립 국가이고, 지도상으로도 광대한 대국이다.
그리고 그들이 독립 국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는 조짐도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대다수는 완전히 미국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
  우리는 여러 시대의 여러 가지 제국주의를 차례로 보아 왔다. 처음에는 전쟁에서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이기면, 그것만으로 승자는 피정복국과 피정복 국민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그들은 토지와 국민을 한꺼번에 병합했다. 다시 말하면
피정복 국민은 노^36^예가 되었다. 이것이 흔히 볼 수 있는 과정이었다. 성서를
읽어보면 유태인이 전쟁에서 바빌로니아인에게 졌기 때문에 포로로 끌려갔다고
기록되어 있고, 이 밖에도 같은 예는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 차차 이것이 다른
제국주의 형식으로 바뀌어 토지만이 병합되고 민중은 노^36^예가 되지 않게 되었다.
이것은 분명히 과세와 그 밖의 착취 방법을 통해 그들로부터 합법적으로 돈을
빼앗는 편이 더 쉽다는 사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우리의 대다수는 인도에서의 영국과 같은 종류의 제국을 연상하면서, 만일
영국인이 실제로 인도에서 정치적 지배를 하지 않았다면 인도가 자유로울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러나 이런 형식을 지닌 제국의 시대도 이미 지나, 더 발전되고 더
완전한 법으로 바뀌려 하고 있다. 가장 새로운 종류의 제국은 토지조차도 차지하지
않는다. 다만 그 나라의 재화나 재화를 낳는 여러 요인을 차지하는 데 그친다. 이런
방법으로 그것은 자기 이익을 위해 톡톡히 착취할 수 있고 지배할 수 있으며,
동시에 그 나라의 통치와 치안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질 필요도 없다. 실효면에서
보면 그 나라와 민중은 모두 지배를 받게 되고 아주 쉽게 장악되어 버린다.
  이와 같은 경로를 거쳐 제국주의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완성된 형태를
취하게 되어 제국의 현대적 형식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경제 제국이 되었다. 노^36^예
제도가 폐지되고, 또 봉건적 양식의 농노 제도도 몰락했을 때, 인간은 진실로 해방된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윽고 인간은 돈의 힘을 등에 업고 있는 자들에 의해
지금도 착취당하고 지배당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노^36^예와
농노로부터 임금 노^36^예로 모습을 바꾸었다. 그들을 위한 자유는 아직 먼 곳에
있다. 나라도 마찬가지여서 사람들은 한 나라의 다른 나라에 의한 정치적 지배가
유일한 화근이며, 만일 이것이 없어진다면 자유는 자동적으로 올 것처럼 상상한다.
그러나 이것은 정치적 독립국도 경제적인 지배를 통해 완전하게 다른 나라의 조종
아래 놓일 수 있다는 사실이 있는 이상 그렇게 간단 명료하지가 않다.
  그런데 인도에서 영국 제국은 누구의 눈에도 명료하게 보인다. 영국은 인도를
정치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이 눈에 보이는 제국과 병행하여 영국인은 그 필연적인
요소로서 인도에 대한 경제적인 지배를 강화하고 있다. 인도에 대한 영국인의 눈에
보이는 지배력이 멀지 않아 소멸하리라는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래도 경제적 지배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제국으로서 남을지도 모른다. 만일 그런
일이 있다면 그것은 영국인에 의한 인도의 착취가 여전히 지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1914 년에 파나마 운하가 개통되었다. 이것은 중앙 아메리카의 좁고 긴 지대에
있으며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것이다. 이것은 50여 년 전에 수에즈 운하를 건설한
레셉스가 설계했는데, 미국인에 의해 개통되었다. 그들은 말라리아와 황열병 등의
어려움 속에서도 이러한 장해를 극복하여 마침내 성공을 거두었다. 그들은 말라리아
모기와 그 밖의 병균의 매개물을 모두 제거하여 운하 지대를 완전한 위생 지대로
만들었다. 운하는 작은 파나마 공화국 안에 위치하고 있는데, 미국은 이 공화국과
함께 운하도 지배하고 있다. 여기를 거치지 않으면 배는 남아메리카를 일주해야
하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이 운하가 다시 없는 보물인 셈이다. 그래도 파나마
운하의 의의는 수에즈 운하의 중요성만큼 큰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하여 미국은 더욱 더 커지고 부유해져서 여러 가지 변화를 보였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백만 장자와 고층 빌딩을 잇달아 만들어 내었다. 미국은 여러
면에서 유럽을 상대로 경쟁하고 한 걸음 나아가 그들을 앞질렀다. 산업상으로도
미국은 세계의 지도 국가가 되었고, 노동자의 생활 수준은 다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을 만큼 높아졌다. 
  1933 년 3월 14일
    65. 투르크, '유럽의 환자'가 되다.

  최근 2백년 동안의 투르크 역사는 끊임없이 남하해 오는 러시아인과 종속된 여러
민족의 반란에 대한 전쟁의 역사였다.
그리스.루마니아.세르비아.불가리아.몬테네그로.보스니아는 모두 발칸의 나라들이며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다. 그리스는 1829 년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러시아의 원조를
얻어 분열해 나갔다. 러시아는 슬라브 국가였고, 발칸의 불가리아와 세르비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러시아는 발칸과 슬라브 여러 나라의 큰 기둥이 되어 수호자의
지위를 차지하려 했다. 러시아의 진짜 목표는 콘스탄티노플이었다. 따라서 외교
정책은 모두 이 낡은 제국의 중심지를 궁극적으로 차지하려는 데 집중되어 있었다.
차르는 비잔틴계(동로마 제국)의 후계자로 자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730 년 러시아와 투르크 사이에 일련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휴전
기간을 사이에 두고, 1768 년, 1792 년, 1807 년, 1828 년, 1853 년, 1877 년에
계속되어 마지막에는 1914 년의 대전으로 돌입했다. 1774 년 러시아는 투르크에서
크리미아를 빼앗음으로써 흑해에 이르렀다. 그러나 흑해는 내해인데다가
콘스탄티노플이 목을 조이고 있어서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1792 년과 1807 년
러시아는 콘스탄티노플을 향해 국경을 넓혀 가고 있었고, 이에 따라 투르크의
국경은 줄어들어 갔다. 그리스의 독립 전쟁 중에 차르는 투르크의 허를 찔러
공격하려고 했다. 영국과 오스트리아의 간섭이 없었더라면 차르는 벌써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였을 것이다.
  영국과 오스트리아는 왜 투르크를 도와주었을까? 그것은 투르크를 동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러시아에 대한 경쟁심과 두려움 때문이었다. 나는 아시아와 그 밖의
다른 지역에서 영국과 러시아와의 전통적인 대립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 특히
영국이 인도를 영유한 결과 두 나라의 국경이 가까워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차르의 러시아가 인도를 건드리지 않을까 싶어 늘 겁을 내고 있었다. 그리하여
러시아의 진출과 강대화를 방지하는 것이 곧 영국의 정책이었다.
  가엾은 투르크는 이런 강대한 이웃 나라 사이에 끼여 궁지에 빠진 채, 누군가
덤벼들어 갈기갈기 찢을 것을 기다리고 앉아 있는 꼴이 되었다. 러시아의 차르는
1853 년 영국 대사에게 투르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우리는 환자,
그것도 아주 아픈 환자를 앞에 두고 있소. 어쩌면 급사할지도 모르는 환자요." 이
말은 곧 유명해지고, 투르크는 '유럽의 환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 환자는 정말이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죽었다!
  한편 투르크에는 커다란 변화가 진행되었다. 1774 년 러시아에 의해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자 투르크인들은 처음으로 큰 충격을 받고 자신들이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게 뒤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군사 대국이었던 관계로 군대가
최신식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이 일은 어느 정도 진행되었고, 서구의
사상이 투르크로 들어온 것도 바로 새로운 장교들을 통해서였다. 투르크는 중간
계급이 미약했고 그렇다고 조직된 계급도 달리 없었다.
  1853--56 년에 벌어진 크리미아 전쟁 이후 서구화를 이루려는 본격적인 시도가
진행되었다. 술탄의 전제 정치 대신 민주적인 의회가 갖추어진 입헌 체제를
수립하고자 하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미드하트 파샤가 이 운동의 지도자였다. 1876
년에 헌법을 요구하는 봉기가 일어나 술탄의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불가리아에서
일어난 봉기와 러시아와의 전쟁 때문에 이 조치는 곧 취소되었다. 이 전쟁의 무거운
비용과 근본적인 경제적 변화가 없는 상층부의 개혁이 가져온 재정상의 부담은
투르크 정부의 파산을 가져왔다. 결국 서방 금융가들에게 돈을 빌려 올 수밖에
없었고, 이들이 지출의 일부를 통제하였다. 이래서 서구화와 개혁에 대한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과거의 제국 체제로 이러한 시도를 하는 것이 아귀가 맞을 리
없었다.
  20세기초 헌법에 대한 요구가 강해졌다. 전과 마찬가지로 조직된 계층이라고는
장교들밖에 없었다. '청년 투르크 당'이라는 새 정당이 급속히 성장한 것도 이들
사이에서였다. '통일과 진보 위원회'라는 비밀 조직이 구성되고, 군대의 대다수를
장악하였다. 1908 년 이들은 1876 년의 헌법을 술탄이 회복하도록 강요했다.
도처에 큰 축제가 개최되었으며, 그전까지 서로 살육을 되풀이해 온 투르크인도,
아르메니아인도, 그 밖의 사람들도 모두 평등하게 되고, 종속 민족도 완전한 권리를
얻게 되자, 새 시대의 여명을 축하하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풍채가 당당하고 멋을
잘 부리기는
하지만 과감한 결단력이 있는 엔베르 베이가 이 무혈 혁명의 주역이었다. 투르크의
구국자가 된 무스타파 케말도 청년 투르크 당의 중요한 지도자였지만, 엔베르
만큼은 화려하게 활약하지 못했고, 또 이 두 사람은 서로 호감을 갖고 있지 않았다.
  청년 투르크 당이 걸어온 길이 결코 평탄한 것은 아니었다. 술탄이 그들을
억압하여 유혈 사건이 일어나 그는 폐위되고, 다음 술탄에게 제위를 물려주었다.
외국 열강과의 분규도 잇달았다. 오스트리아는 혼란에 편승하여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1878 년의 베를린 조약 이후 오스트리아는 이미 이곳을 점령하고
있었다)의 병합을 선언했다. 이탈리아는 북아프리카의 트리폴리를 강탈하고 선전
포고했다. 해군다운 해군이 없던 투르크는 어쩔 수 없이 이탈리아의 요구에
굴복했다. 그것이 끝나자 곧 더 가까이에서 새로운 위험이 닥쳐왔다. 유럽에서
투르크를 추방하고 그 유산을 노리고 있던 불가리아와 세르비아와 그리스와
몬테네그로는 호기를 놓칠세라 '발칸 연맹'을 결성하여 1912 년 10월 투르크를
공격했다. 투르크는 기진맥진한데다 헌정파와 반동파 사이의 권력 투쟁이
계속되었다. 투르크는 발칸 연맹의 공격으로 철저하게 괴멸하여 엄청난 손해를
입었다. 그리하여 제1차 발칸 전쟁은 몇 달로 끝나고 투르크는 거의 완전히
유럽에서 쫓겨나 겨우 콘스탄티노플만을 유지하게 되었다. 투르크가 유럽에 가지고
있던 가장 오랜 도시 아드리아노플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그런데 얼마 뒤 전승국 사이에 전리품을 둘러싼 분규가 일어나 불가리아는
느닷없이 지난날의 연합국에 배신적인 공격을 가했다. 상호간에 살육이
되풀이되었는데, 전에는 국외자로 있던 루마니아가 이에 개입했다. 결국 불가리아는
한번 얻은 것을 모두 잃고, 루마니아와 그리스와 세르비아는 크게 영토를 늘렸으며,
투르크도 아드리아노플을 회복했다. 발칸의 여러 나라 국민 사이의 적대 감정에는
놀라운 것이 있다. 발칸 여러 나라는 모두 작은 나라들이지만 여러 번 유럽의
화약고가 되었다. 
  1933 년 3월 16일
    66. 차르 시대의 러시아

  1689 년 차르 표트르가 즉위하여 표트르 대제라고 일컬어졌다. 그는 러시아를
서방으로 진출시키기로 결심하고, 그 상태를 연구하기 위해 유럽 여러 나라를
시찰하는 긴 여행을 떠났다. 그는 그가 보고 들은 많은 것을 모방하고, 다루기
힘들며 무지한 귀족들에게 그의 서구화 사상을 강제로 고취시켰다. 대중은 물론
훨씬 뒤떨어져 있었고 또 짓눌려 있어, 그들이 그의 개혁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문제는 표트르의 안중에도 없었다. 표트르는 그 시대의 강국이 해상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는 것을 보고 해군력의 중요성을 통감했다. 러시아는 광대하기는 했지만,
별로 쓸모가 없는 북극해를 제외하고는 바다로 출구를 갖고 있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서북에서는 발트 해, 또 남쪽에서는 크리미아에 눈길을 던졌다. 그는
크리미아에는 손이 닿지 못했지만, 스웨덴을 무찔러 발트 해에 도달했다. 그는 네바
강가의 발트 해로 통하는 핀란드 만 앞에 페테르부르크라 불리는 서구식 도시를
건설하여, 이곳을 수도로 정하고 모스크바에 얽힌 낡은 전통의 굴레를 끊어 버리려
했다. 표트르는 1725 년에 세상을 떠났다.
  반 세기 이상이나 지난 1782 년 또 한 명의 러시아 군주가 이 나라의 '서구화'를
계획했다. 이 사람은 여성인데 역시 대제라고 불리는 예카테리나 2세였다. 그녀는
성격이 강한 반면 잔혹했으며, 매사에 유능하였고, 사생활에서는 불미스러운 소문이
자주 돌았지만 비범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남편인 차르를 살해하고 러시아의 전제
군주가 되어 14 년 동안 통치했다. 그녀는 또 문화를 애호하여 볼테르와의 교제를
자청해 그와 편지 왕래를 하기도 했다. 그녀는 베르사유의 프랑스 궁정을 다소
모방하기도 했으며, 몇 가지 교육상의 개혁을 도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상층 계급에 국한된 일이었고, 전시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문화는 갑작스럽게 모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깊이 뿌리 박히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단순히 선진 국민을 모방하는 후진 국민은 금이나 은에 비길 만한
참된 문화를 주석이나 놋쇠 등의 가짜로 만들어 버린다. 서유럽의 문화는 일정한
사회적 조건들의 소산이었다. 표트르와 예카테리나는 이러한 여러 조건을 만들어
내려고는 하지 않고 다만 상층 구조만을 모방하려 했다. 그 결과 이러한 변화의
부담은 대중의 어깨에 전가되어 농노 제도와 차르의 전제 정치를 강화할 뿐이었다.
  이런 식으로 차르 시대의 러시아에서는 1 파운드의 진보가 1 톤의 반동을
수반하면서 진행되었다. 러시아 농민은 사실상 노^36^예와 같았다. 그들은 토지에
얽매여 있어서 특별한 허가 없이는 거기에서 떠나지 못했다. 교육은 모두 시골 귀족
계급에서 뽑힌 관리와 지식 계층이 독점하고 있었다. 중간 계급이 없었으며, 대중은
모두 문맹자로서 진보의 과정에서 뒤떨어져 있었다. 과거에도 지나친 압박에 대한
맹목적인 반항으로 여러 번 피비린내 나는 반란이 일어났으나 곧 진압되곤 했다.
그런데 상층부에 약간의 교육이 보급되자 서유럽에 유행하고 있던 사상이 흘러들어
왔다. 그 때가 바로 프랑스 혁명부터 나폴레옹에 이르는 시대였다.
  나폴레옹의 몰락은 전 유럽에 반동 세력이 기승을 부리게 했으며, 차르
알렉산드르 1세는 그가 고안한 황제들의 '신성 동맹'을 통해 이 반동에 앞장을
섰다. 그의 후계자들은 더 혹독했다. 그리하여 청년 관리와 일단의 지식인들이
궐기하여 1825 년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지주 계급에 속해 있었던
만큼, 대중과 군대의 지지를 얻지 못하여 곧 진압되었다. 그들은 12월(러시아어로
데카브리라고 한다)에 봉기했기 때문에 데카브리스트라고 불린다. 이 반란은
외면적으로 최초로 나타난 정치적 각성의 징후였다. 모든 정치 결사는 차르 정부에
의해 억압당했기 때문에 비밀 결사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러한 비밀 결사는 그
뒤까지 존속하여 특히 지식인 계층과 대학생 사이에 혁명 사상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크리미아 전쟁(1853--56)에서 러시아가 패배한 뒤 몇 가지 개혁이 이루어져서
1861 년 농노 제도는 폐지되었다. 이것은 농노들에게는 큰 사건이기는 했지만,
해방된 농노도 생계를 유지할 만한 토지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크게 도움은 되지
못했다. 한편 지식인 사이에 혁명 사상이 보급되고 그들에 대한 차르 정부의 탄압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이들 진보적 지식인과 농민 사이에는 연관성도 공통의 지반도
없었다. 그래서 1870 년대가 되자 사회주의적 경향을 지닌 학생들(그들은 모두 매우
막연하고 이상주의적이었다)은 농촌으로 들어갔다(니로드니키 운동). 그들의 의도를
모르는 농민들은 그들을 신용하지 않았으며, 농노 제도를 부활하려는 음모를 품고
있지 않나 의심했다. 심지어 농민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온 많은
학생들을 붙잡아 차르의 경찰에게 넘겨준 일까지 있었다. 이것은 대중과의 접촉이
없고 뿌리깊은 기반없이 활동하는 경우의 대표적인 한 예다.
  농민들에 대한 공작에서 완전히 실패한 학생들은 심각한 타격을 받고 자포 자기에
빠져, 이른바 테러리즘폭탄과 그 밖의 수단으로 요인을 살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것이 러시아에서의 테러리즘과 폭탄 예찬의 시초이며, 이와 함께
혁명을 위한 활동은 새로운 양상을 보였다. 이들 테러리스트는 '폭탄을 가진
자유주의자'라 자칭했고, 그들의 조직을 '인민의 의지'라고 불렀다. 이에 관여한
사람들은 비교적 소수의 그룹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명칭은 좀 과장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렇게 해서 일어난 남녀 혁명주의자들과 차르 정부 사이에 새로운
투쟁이 시작되었다. 혁명 세력은 러시아의 많은 종속 인종과 소수 민족이
참가함으로써 점점 증가했다. 이들 인종과 소수 민족 모두는 정부의 박해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언어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강요당했고, 이
밖에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천대를 받고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이런 일들이 잇달아 일어나고 있는 동안에도 러시아의 세력은 끊임없이 동쪽으로
뻗어, 그 영토가 드디어 태평양에까지 이르렀다. 중앙 아시아에서 그들은
아프가니스탄 국경에 육박했고, 남쪽에서는 투르크의 국경을 밀어 제치고 있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16세기 이후 서부에서 이루어진 공업의 발달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페테르부르크와 그 근교, 그리고 모스크바 같은 소수의 지역에 한정되어
있어서 전체적으로 보면 여전히 농업 위주였다. 그러나 새로 건설된 공장은 매우
신식이어서 대개는 영국인이 경영을 맡았다. 여기에서 두 가지 결과가 생겼다.
러시아 자본주의가 이러한 제한된 공업 지대에서 급격하게 발달했으며, 노동자
계급이 역시 급속히 성장한 것이었다. 영국 공장 제도의 초기처럼 러시아의
노동자들은 몹시 착취를 당하고, 거의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해야 했다. 그러나
영국과 러시아의 노동자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었다. 러시아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새로운 사상이 도입되자, 소박한 정신의 소유자였던 러시아의
노동자들은 쉽사리 그런 관념을 받아들인 반면, 오랜 전통을 배경으로 갖고 있는
영국의 노동자는 보수적으로 기울어 낡은 관념에 얽매여 있었던 것이다. 
  1933 년 3월 23일, 31일. 4월 1일
    67. 1914--1918 년, 제1차 세계 대전

  국가간의 시기심과 욕심, 즉 제국주의적 약탈성은 결국 유럽을 대결 국면으로
몰아갔다. 이윽고 전쟁의 공포가 유럽에 점점 번져 가서 열강은 자기 나라를
방위하기 위해 동맹을 찾았다. 강국의 대열은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의 3국
동맹과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3국 협상의 두 계열로 나뉘었다. 이탈리아는 3국
동맹 가운데서는 매우 소극적인 일원이어서 실제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는 맹약을
어기고 적측으로 돌아섰다.
  이리하여 전 유럽은 공포의 분위기 속에 완전히 빠져 있었다. 각국은 다투어 전쟁
준비를 하고 최대한의 군비로 무장했다. 그리하여 군비 확장 경쟁이 벌어지게
되었는데, 한 나라가 군비를 증강하면 다른 나라도 이에 따라 증강하지 않을 수
었다. 무기즉 총포, 군함, 탄약, 그 밖의 온갖 종류의 전쟁 물자를 제조하는
개인 회사가 많은 이익을 얻어 살찐 것은 당연하다. 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여러
나라가 그들에게 더 많은 무기를 사게 하기 위해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풍문을
퍼뜨리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군수 산업체는 많은 재부와 세력을 가지고 있었고, 또
영국과 프랑스와 독일 등의 내각 각료와 관리들은 그 주주였기 때문에 군수 산업의
번창으로 이익을 얻는 입장이었다. 군수 산업체의 번영은 전쟁에 관한 풍문, 그리고
전쟁과 함께 온다.
  1914 년 6월 28일은 불길을 솟아오르게 한 불꽃이 튄 날이었다. 오스트리아의
왕위 계승자인 대공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발칸의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36^예보를
방문하고 있었다. 보스니아는 전에 말한 것처럼 그보다 몇 해 전에 청년 투르크
당이 그들의 술탄을 추방하려는 동안 오스트리아에 합병되었던 것이다. 대공은 그의
부인과 함께 포장이 없는 마차를 타고 사라^36^예보 시가를 행진하다가 총격을 받아
부인과 함께 피살당했다. 오스트리아 정부와 국민은 분격하여 세르비아 정부가 이
범죄에 개입되어 있음을 규탄했다. 물론 세르비아 정부는 이것을 부인했다.
조사하여 판명된 바에 따르면 세르비아 정부는 이 살인 사건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그 준비 행위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
살인의 책임은 전적으로 세르비아의 '검은 손'의 조직에 돌아가야 하는 것이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겉으로는 매우 분개하였으나, 내심으로만 정책적으로
세르비아에 대해 몹시 고압적인 태도를 취했다.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를 영원히
무너뜨릴 결심을 했으며, 전쟁이 확대될 경우 독일의 강력한 원조를 기대했다.
그리하여 세르비아의 변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1914 년 7월 23일,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최후 통첩을 보냈다. 그리고 5일 뒤인 7월 28일, 드디어 세르비아에
선전 포고를 하였다.
  7월 30일 러시아가 군 동원령을 내렸다. 이어서 이틀 뒤인 8월 1일에 독일은
동원령을 내리고 프랑스와 러시아에 대해 선전 포고를 했다. 그리고 갑자기 독일의
대군은 벨기에에 침입하여 비교적 진격이 용이했던 이 방면을 거쳐 프랑스로
향했다. 이 가엾은 벨기에는 독일에 해를 끼친 일이 없었다. 그렇지만 한번 국가가
목숨을 걸고 싸우기 시작하게 되면, 그들은 그런 사정이나 또 전에 한 약속 따위는
염두에도 없다. 독일 정부는 군대를 벨기에 영토를 통과시키기 위해 벨기에 정부의
허가를 요구했다. 물론 이런 요구가 단호하게 거절당한 것은 당연하다.
  영국을 비롯하여 각국에서 독일이 중립국 벨기에를 침범한 데 대해 비난의 소리가
몹시 높았다. 영국은 이것을 독일에 대한 선전 포고의 이유로 삼았지만, 실제로
영국이 어느 쪽에 붙을 것인지는 훨씬 전에 이미 정해져 있는 일이어서 벨기에
문제는 다만 적당한 구실로 이용된 데 지나지 않았다. 지금은, 프랑스 군측에서도
전쟁 전부터 필요하다면 그 군대가 벨기에를 통과하여 독일을 공격한다는 계획을
입안하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아무튼 영국은 조약을 '한 조각의 휴지'으로
만들어 버린 독일에 대항하는 동시에, 정의와 진리의 위대한 옹호자이며 작은
나라의 수호신인 듯한 태도를 취했다. 8월 4일 밤 영국은 독일에 대해 전쟁을
선언했다. 그러나 어떤 재해를 방지하기 위해 그보다 하루 먼저 그 군대영국
파견군을 영국 해협 저편에 보낼 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세계가
영국이 참전하느냐 아니면 얼마 동안 보류하느냐를 놓고 여러 가지로 추측하고 있는
동안, 영국군은 이미 대륙에 도착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오스트리아.러시아.독일.프랑스.영국이 잇달아 전쟁에 휘말려 들어갔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이 파국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세르비아 역시 이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이었던 이탈리아는 어떻게 하고 있었을까?
이탈리아는 어느 쪽이 우세한가를 관망하고 있다가 드디어 6개월 뒤에 영국,
프랑스, 러시아 진영에 가담하여 예전에는 동맹국이었던 나라들의 반대편에 서서
참가했다.
  이와 같이 해서 1914 년 8월 1일을 기해 유럽에서는 여러 나라 군대가 집합하여
행진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 군대란 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옛날에 군대는 일정한
수의 직업 군인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고, 그들은 영구적인 상비군이었다. 그런데
프랑스 혁명은 그것에 큰 변화를 주었다. 혁명으로 외국의 공격을 받게 되자 숱한
일반 시민이 소집되어 훈련을 받았다. 그 때부터 유럽에서는 한정된 수의 직업적인
지원병 군대가 징병 군대국내의 적격한 남자 모두가 의무적으로 복무해야
하는 군대로 바뀌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종류의 모든 남성 적격자들의 보편
일률적인 군대 복무 제도는 프랑스 혁명의 소산이었다. 이것은 대륙 전체에
보급되어 청년 남자는 모두 2 년이나 그 이상을 병영에서 훈련받고, 그 뒤에
소집되었을 때에는 군대에 복무해야만 했다. 따라서 현역 군대는 그 국민의 모든
청년 남자를 집합시킨 것과 다름없었다. 이것은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또
러시아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이런 나라에서 동원한다는 것은 전국의 거리와 마을에서
해당되는 청년을 소집하는 것을 의미했다. 영국에는 전쟁이 시작되던 당시에 이런
종류의 일반 의무 제도가 없었다. 영국은 강대한 해군에 의지하여 비교적 소수의
상비군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전쟁 중에 영국도 다른 나라의 예를
본받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징병 제도, 즉
강제 복무 제도를 마련했다.
  모든 참전 국가에서는 국민의 열광적인 애국심을 북돋워 주기 위하여 용의 주도한
대책이 강구되었다. 두 진영에서는 각각 상대방을 '침략자'라 부르고, 오로지
자기들은 침략에 대한 방위를 위해 싸우고 있는 듯이 가장하였다. 독일은 자기
나라가 적의 포위 속에 놓여 있었는데, 러시아와 프랑스가 먼저 침략의 포문을
열었다고 이를 규탄했다. 영국은 독일이 뻔뻔스럽게도 중립 국가인 벨기에를
짓밟았기 때문에 정의를 방위하기 위해 나서야 한다고 했다. 이렇게 참전국들은
각각 자신의 공정한 태도를 내세우고 적국을 향해 모든 비난을 퍼부었다. 이리하여
각 나라의 국민들은 모두 자신들의 자유가 침해당했기 때문에 방위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 신문은 적국의 국민에 대한 맹렬한 증오심을 의미하는 전쟁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전쟁이 나날이 격해짐에 따라 각국은 잇달아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들었다.
어느 편이나 모두 은밀히 뇌물을 써서 중립국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혈안이 되었다. 이러한 종류의 공식적인 제안은 한결같이 세상에 널리 펴져 있는
높은 이상과 훌륭한 문구로 채색되어 있었는데, 이 점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보다 한 걸음 앞섰다. 그리하여 나중에 참전하게 된 중립국의 대부분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측에 가담하였다. 독일의 동맹국이었던 이탈리아는 소아시아와 그
밖의 영토를 보장받는다는 비밀 조약을 맺음으로써 연합국과 손잡게 되었고, 또
하나의 비밀 조약은 러시아에 콘스탄티노플을 제공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렇게
자기네끼리 세계를 나눠 가지는 것은 통쾌한 일이었을 게다. 이들 비밀 조약은
연합국 정치가들이 공공연히 떠들어댄 것을 완전히 뒤엎어 놓았다.
  그리하여 결국 열두 나라, 혹은 그 이상의 나라가 연합국(잠시 영국, 프랑스 측을
연합국이라고 부르기로 하자)에 가담하였다. 그것은 즉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미국, 벨기에, 세르비아, 일본, 중국, 루마니아, 그리스, 포르투갈 등등의
나라들이었다. 이 밖에도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한두 나라가 더 있을지 모른다.
한편 독일 측에는 독일, 오스트리아, 투르크, 그리고 불가리아가 가담했다. 미국은
전쟁이 일어난 지 3 년 뒤에 참전하였는데, 이를 계산하지 않더라도 연합국 측이
보다 우세한 것은 사실이었다.
  연합국은 훨씬 더 많은 인구와 재력과 군수품 공장을 갖고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그들은 중립 지역의 자원을 쉽사리 거두어들일 수 있는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연합군은 해군력을 바탕으로 미국으로부터 무기와 식량을 확보할 수 있었고,
또 돈을 빌려 쓸 수도 있었다. 그로 인하여 독일과 동맹국들은 적국에 포위
되었는데, 당초 독일과 손잡은 나라들은 너무나 보잘것없는 약소국들뿐이었다.
그들은 경우에 따라서는 오히려 독일의 짐이 되어 원조를 받아야 했다. 그러므로
실제로는 독일이 단독으로 거의 세계 각국을 상대하여 싸우는 형편이었고, 모든
점에서 이것은 승부가 빤히 들여다보이는 싸움이었다. 그러나 독일은 4 년 동안이나
세계를 궁지에 몰아 놓고, 몇 번이나 리의 직전까지 이르기도 하였다. 해를
거듭할수록 승패는 가까스로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것을 한 국가의 힘으로
유지하는 데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는데, 그것은 독일이 쌓아 온 강력한 군사
무기가 있었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한 일이었다. 독일과 동맹국들이 굴복한 전쟁
말기에도 독일 군대는 여전히 건재하여 대부분 국경을 넘어 외국 땅에 가 있었다.
  한편 독일은 참수함으로 연합국의 함선을 격침하기 시작했다. 이 잠수함 공격은
큰 효과를 올렸다. 그 때문에 영국에 대한 식량 공급이 몹시 감소하여 영국에
기근의 위험이 닥쳤을 정도였다. 1915 년 5월 한 독일 잠수함은 영국의 대서양
항로를 운항하는 거선 루시타니아 호를 격침하여 많은 사람들이 익사했다. 이
배에는 미국인도 많이 타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여론을 격노하게 했다.
  독일은 또 하늘에서 영국을 공격했다. 체펠린 비행선은 달빛을 받으며 그 거대한
모습을 상공에 나타내고는 런던과 여러 군데의 무기 공장 지대에 폭탄을
떨어뜨렸다. 나중에는 비행기가 이 폭격을 계속했다. 비행기의 굉음이 머리 위에서
울린다고 생각하면 고사포의 불을 뿜는 소리가 들리고, 그러면 사람들은 급히
지하실 같은 곳으로 뛰어 내려가 몸을 숨기는 것이 일상사가 되었다. 영국인은
비무장 시민에 대한 이 폭격에 몹시 분격했다.
  1916 년 말 쯤에 승리는 연합국 측으로 기울어진 것처럼 보였다. 연합국의 신형
탱크는 서부 전선의 주도권을 그들에게 주었다. 영국을 공습하던 체펠린 비행선은
천재를 만나 조난 당했다. 독일의 잠수함 작전을 무릅쓰고 중립국 선박에 의해
충분한 식량이 영국으로 수송되었다. 1916 년 5월 북해에서 유틀란트 해전이
벌어져 영국의 승리로 끝났다.
  한편 독일에 대한 봉쇄 작전은 오스트리아와 독일 국민을 한층 더 기아의 위험
속으로 몰아넣었다. 시운은 중부 유럽 세력에서 멀어져 오래지 않아 결말이 날 것이
틀림없을 듯싶었다. 독일은 화평을 타진하기까지에 이르렀으나 연합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완승의 여지를 남겨 두고 전쟁을 끝내기에는, 연합국 정부들이
여러 나라를 분할하기 위해 그들 사이에 맺은 비밀 조약에 너무 지나치게 구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도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자 독일의 지도자들은 그들의 잠수함 작전을 강화하여 영국을 기아 상태로
몰아넣음으로써 굴복을 강요하려는 방침을 취했다. 그들은 1917 년 1월 중립국이
영국에 식량을 수송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일정한 해역 안에서는 중립국의
선박일지라도 격침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 성명은 미국의 감정을 몹시 상하게
하였다. 미국은 이와 같은 방법으로 자기 나라 상선이 격침되는 것을 좌시할 수
없었다. 이것은 미국의 참전을 불가피하게 하는 일이었으며, 또 독일 정부로서도
그들이 무제한으로 잠수함 작전을 벌일 결의를 했을 때 틀림없이 이 점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 그들은 다른 방도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짐짓 위험을 무릅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또는 그들은 미국의 금융가들이 이미 연합국을 충분히
원조하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미국은 1917 년 4월 선전
포고를 했다. 다른 나라들이 모두 극도로 피폐했을 때, 방대한 자원을 가지고 있었고
신선한 조건 아래 있던 미국의 개입은 독일 측의 패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더구나 미국이 선전 포고를 하기 전에 이미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닌 또 하나의
사건이 발생하고 있었다. 1917 년 3월 15일, 제1차 러시아 혁명의 결과 차르가
퇴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독일군 당국은 이런 종류의 징후가 의미하는 바를
알지 못한 채, 1918 년 3월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고압적이고 굴욕적인 강화를
강요했다. 소비에트는 다른 방도가 없었고, 또 무엇보다도 평화를 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받아들였다.
  1918 년 3월 독일군은 서부 전선에서 마지막 강력한 작전을 감행했다. 독일군은
영국과 프랑스 진지를 돌파하여 그 곳의 부대를 격파하면서 바로 3 년 반 전에 그들
자신이 격퇴되었던 장소인 마른 강가에 다시 도착했다. 이것은 대단한 노력이었으나
동시에 마지막 노력이 되어 독일은 피폐해졌다. 그 동안 미국에서 대서양을 건너
새로운 부대가 도착했다. 그리고 쓰라린 경험으로부터 배운 완전한 합동 작전과
목표의 통일을 기하기 위해 서부 전선의 모든 연합국 군대영국, 미국, 프랑스
군대는 하나의 최고 지휘권 아래 놓이게 되었다. 또한 프랑스 군의 포시 원수가
서부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18 년 중반쯤에는 전세가 결정적으로
변했다. 주도권과 공세는 연합국 측에 옮겨져서 독일군을 압박하며 전진했다.
10월에 전쟁은 종말에 가까와져 양측 사이에 휴전이 논의되었다.
  11월 4일 킬에서 독일 해군의 반란이 일어나고, 5일 뒤에는 베를린에서 독일
공화국이 선언되었다. 같은 11월 9일 카이저 빌헬름 2세는 독일에서 네덜란드로
떠나 그와 함께 호엔촐레른 가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1918 년 11월 11일 휴전 조약이 성립되어 전쟁은 끝났다. 이것은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시한 '14개 조항'에 입각한 것이었다. 그것은 대체로 교전한 소수 민족
자결의 원칙, 군비 축소, 비밀 외교의 폐지, 열강에 의한 러시아의 원조 및 국제
연맹 결성을 골자로 하는 것이었다.
  전쟁에서의 사상자의 총계만도 4천 6백만 명이나 되었다. 한편 금액으로 따지면
얼마나 막대한 비용이었을까? 어느 미국인의 추계에 따르면 연합국 측의 전쟁 비용
총액은 4백 9억 9천 9백 60만 파운드로 약 4백 10억 파운드, 독일 측의 총액은 1백
51억 2천 2백 30만 파운드로 1백 50억 파운드 이상, 총계 5백 60억 파운드
이상으로 되어 있다. 이런 수치는 우리의 일상 생활의 기준과는 전혀 비교가 안되는
것이어서 그 크기를 상상할 수도 없다. 그것은 태양이나 별자리의 거리를 재는
천문학적인 수치를 연상하게 한다. 지난날 교전국들전승국도 패전국도 다
같이 지금도 해결될 가망이 없는 전쟁 재정의 뒤처리에 골치를 앓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1933 년 4월 7일, 9일
    68. 러시아에서 볼세비키의 권력 장악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1914 년 이미 러시아의 도시 노동자 계급은 각성하여
다시 혁명화 하고 있었다. 커다란 정치 파업이 잇달아 일어났다. 이윽고 전쟁이
시작되자, 이것이 모든 관심을 빼앗아 버려 진보적인 노동자의 대부분이 병사로서
전선으로 보내졌다. 레닌과 그의 그룹은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전쟁을 반대하고
있었다. 그들은 다른 나라 대부분의 사회주의자들처럼 전쟁 때문에 얽매이지는
않았다. 그들은 이를 자본주의 전쟁이라 부르고, 노동자 계급이 자신의 자유를 얻기
위해 이를 이용할 수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아무 관계도 없다고 주장했다.
  전쟁터에서 러시아 군은 모든 교전국 가운데 최대의 손해를 입었다. 러시아의
장군들은 대부분 별로 지능이 우수하지 못하다는 정평이 난 군인으로 알려져 있기는
했지만 정말 놀랍도록 무능했다. 장비가 변변치 못한 러시아 병사는 때때로 탄약도
없고 엄호 사격도 없이, 무턱대고 적을 향해 돌격하여 한꺼번에 수백 수천 명이나
되는 사상자를 냈다. 한편 전쟁 때문에 페트로그라드^6,36^페테르부르크는 이렇게
개칭되었다^3,63^와 그 밖의 대도시에서는 투기 상인이 엄청나게 많은 돈을 벌고
있었다. 이들 '애국적' 투기꾼들과 폭리 취득자들은 물론 소리 높이 전쟁의 완수를
요구하고 있었다. 전쟁이 영원히 계속되면 그들로서는 물론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병사와 병사의 공급원인 노동자와 농민은 기진 맥진하여
굶주림에 허덕이고, 불만의 소리가 높아졌다.
  1917 년 위기는 확대되었다. 페트로그라드에 식량 기근이 생겨 소요가 잇달았다.
그리고 3월초에, 오랫동안 참아 온 노동자들의 고통 속에서 아무도 예기하지 못했던
자연 발생적인 혁명이 일어났다. 3월 8일부터 12일(러시아력으로는 2월 24일부터
28일)까지의 5일간은 혁명의 개가를 올린 시기였다. 이것은 궁정의 분규도 아니고,
상층의 지도자들이 면밀하게 계획을 세운 조직적인 혁명도 아니었다. 그것은 가장
학대받은 하층의 노동자들 사이에서 일어나 명확한 계획도 지도도 없이 맹목적으로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어서 지역 볼셰비키를 비롯한 여러
정당은 이것을 어떻게 지도해야 할지를 몰랐다. 대중 자신이 주도권을 잡고 그들이
페트로그라드에 주둔한 병사들은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순간, 승리는 그들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런 혁명 대중이 지난날 농민 봉기 때 흔히 보였던 것처럼
조직도 없이 파괴를 일삼은 폭도였다고 상상해서는 안된다.
  이 3월(러시아력으로는 2월) 혁명에서 중요한 것은 역사상 처음으로
프롤레타리아, 즉 공장 노동자가 지도적 지위에 섰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노동자들은 걸출한 지도자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레닌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옥중이나 망명지에 있었다), 그래도 레닌의 조직에서 훈련받은 많은 무명
노동자들이 섞여 있었다. 수십 개의 공장에 진을 친 이러한 무명 노동자들이 운동
전체의 중심이 되어 명확한 노선으로 운동을 이끌었던 것이다.
  3월 8일에 혁명의 뇌성이 울렸다. 맨 처음에 궐기한 것은 여성들로, 방직 공장의
여공들이 공장 문을 나서서 가두 시위를 벌였다. 이튿날에는 파업이 확대되어 많은
남성 노동자들이 가두에 나가 빵을 달라고 소리치고 '전제 정치를 타도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당국은 항상 차르 권력의 기둥이었던 코사크 병사들을 노동자들의
시위를 막는 데 동원하였다. 코사크 병사들은 민중을 밀어붙이기는 했지만
발포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노동자들은 코사크 병사들이 관제의 가면을 쓰고는
있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들에게 친근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몹시 기뻐했다.
민중은 이내 열광하며 코사크 병사들에게 우정의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경찰은
증오의 표적이 되어 투석을 당했다. 3일째인 3월 10일에는 코사크 병사들과 손을
잡는 경향이 더욱 짙어졌다. 이미 군중에게 발포하고 있던 경찰과 코사크 병사들이
교전했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찰은 거리에서 물러났다. 여성 노동자들이 병사들
앞으로 나아가 열정적으로 호소했다. 그러자 병사들은 일제히 총검을 거두어들였다.
  이튿날 3월 11일은 일요일이었다. 노동자들이 거리의 중심가로 모여들자 경찰은
엄폐된 장소에서 그들에게 총격을 가했다. 병사들 중에는 연대의 병영 앞에서
자신들의 어려운 처지를 애절하게 호소하는 민중에게 발포하는 자도 있었다. 민중의
호소에 감동한 연대는 민중을 보호하기 위해 하사관의 지휘 아래 출동하여 경찰과
총격전을 벌였다. 연대는 저지 당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3월 12일이 되자 반란은
다른 연대로 번져 나가 병사들은 소총과 기관총을 들고 출동했다. 거리에서는
총소리가 어지럽게 터졌지만 누가 누구를 향해 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윽고
노동자들과 병사들은 몰려가서 일부 대신들(다른 자들은 이미 도망쳐 버리고
없었다)을 체포하고, 또 경관과 비밀 특무 기관원을 체포했으며, 감옥에서 정치범을
풀어 주기도 했다.
  혁명은 이미 페트로그라드에서 승리를 얻었다. 모스크바도 곧 그 뒤를 따랐다.
농촌은 혁명이 진전되는 경과를 지켜보고 있었다. 농민은 서서히 새로운 질서를
받아들이게 되었지만 열광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오직 두 가지, 즉
토지와 평화뿐이었다.
  때마침 4월 17일에 레닌이 무대에 등장했다. 그는 전쟁 계속되고 있는 동안
스위스에 있다가 혁명 소식을 듣고는 러시아로 돌아왔다. 레닌은 곧 정세를
파악하고, 그의 참된 천재적인 지도력으로  마르크스주의 프로그램을 적응시켰다.
이제 투쟁 방향은 농민과 제휴한 노동자 계급의 지배를 위해 자본주의 자체로
돌려져야 했다. (1) 민주 공화국, (2) 토지 자산의 몰수, (3) 8시간 노동제가
볼셰비키의 당면한 구호가 되었다. 이런 구호는 삽시간에 노동자와 농민의 투쟁에
구체성을 주었다. 그 구호는 그들에게 내용 없는 모호한 이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생활이고 희망이었다.
  혁명이 성공한 후, 임시 정부를 더욱 소비에트와 조화시키려는 노력이 기울여지고,
급진적인 법률가이며 도도한 능변가인 케렌스키가 정부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연립 정부를 세우는 데 성공하여 소비에트 내의 멘셰비키 다수파는 몇 사람의
대표를 여기에 참가시켰다. 그는 또 독일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여 영국과 프랑스의
환심을 사려고 힘썼다. 그러나 이 공격은 민중도 병사들도 이제는 더 싸울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실패했다.
  그러는 동안 전 러시아 소비에트 회의가 페트로그라드에서 열렸다. 회의를 거듭할
때마다 공기는 더욱 험악해졌다. 볼셰비키의 대의원 수는 자꾸 늘어나고, 멘셰비키와
사회 혁명당(농민 정당)의 세력은 날로 기울어졌다. 볼셰비키의 영향력은 특히
페트로그라드의 노동자의 힘에 의해 커졌다. 전국에 걸쳐 소비에트 세력이 비약하여
그들은 소비에트에 의해 승인되지 않으면 정부의 명령에 복종하려 하지 않았다.
임시 정부가 약체인 이유 가운데 하나는 러시아에 강력한 중간 계급이 없었던 데
있다.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 정권을 둘러싼 격렬한 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농민은
자주적으로 일을 추진했다. 농민들은 3월 혁명에 대해서는 그다지 열의를 보이지
않았으나 그것을 반대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시기를 기다리며 경과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거대한 토지를 소유한 지주들은 그들의 재산을 빼앗길 것이 두려운
나머지 토지를 작게 분할하여 명의상의 소유자를 날조해서 나누어주고, 자기 대신
그것들을 보유하게 했다. 그들은 또 그들의 많은 재산을 외국인에게 양도함으로써
그들의 토지를 보존하려고 했다. 농민이 이런 짓을 좋아할 리가 없었다. 그들은
모든 토지의 매매 행위를 법령에 의해 금지해 줄 것을 정부에 청원했다.
  정부는 뒷걸음질쳤다. 대체 정부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느냐? 정부는 쌍방을 모두
자극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농민은 자기 힘으로 행동을 시작했다. 4월쯤부터
그들 가운데 어떤 자들은 지주를 감금하고 토지를 빼앗아 이것을 나누어 가졌다.
전선에서 돌아온 병사들(물론 원래는 농민)이 주역이었다. 이 운동은 점점 확대되어
막대한 토지가 농민에게 몰수되었다. 6월 쯤에는 시베리아의 스텝 지역에까지 그
물결이 번졌다. 시베리아에는 대지주가 없었기 때문에 농민은 교회와 황실의
소유지를 빼앗았다.
  이러한 농지의 대대적인 탈취가 오로지 농민의 의사에 따라 이루어지고, 그것도
볼셰비키 혁명(11월 혁명)이 일어나기 몇 달 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레닌은 즉각적으로 조직적인 방법에 의해 토지를 농민에게 분배할
것을 지지했다. 그는 우발적이며 무계획적인 탈취에는 극력 반대했다. 그래서
나중에 볼셰비키가 정권을 장악했을 때, 소비에트는 농민이 토지를 소유하는 나라가
되었다.
  레닌이 도착한 지 꼭 한 달만에 또 한 사람의 탁월한 망명가가 페트로그라드로
돌아왔다. 그는 뉴욕에 억류되어 있었지만 영국을 거쳐 귀국 길에 오른
트로츠키였다. 트로츠키는 오래 전부터 볼셰비키의 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또한 멘셰비키도 아니었다. 그는 즉시 레닌의 전열에 참가하여 페트로그라드의
지도자로서 활약하기 시작했다. 그는 걸출한 웅변가이고 세련된 문필가였으며,
정력에 넘치는 큰 축전지처럼 레닌의 당을 위해 최대의 원군이 되었다.
  볼셰비키의 세력과 영향은 잇달아 여러 공장과 소비에트의 내부로 확대되어 갔다.
이에 놀란 케렌스키는 탄압의 결의를 굳혔다. 맨 처음에는 레닌에 대해 대대적인
허위 선전을 폈다. 레닌은 독일의 앞잡이로서 러시아를 교란하기 위해 파견되었다는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레닌은 스위스에서 독일을 거쳐 귀국했는데, 독일 당국은
이것을 보고서도 못 본 체하고 통과시키지 않았던가? 그를 매국노라고 생각한 중간
계급 사이에서 몹시 평판이 나빠졌다. 케렌스키는 혁명가로서가 아니라 독일의
간첩으로서 레닌에 대해 체포령을 내렸다. 레닌 자신은 이 도전에 대해 감연히
법정에서 싸우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동지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고 억지로 그를
지하에 잠복시켰다.
  레닌은 페트로그라드의 교외까지 와 있었다. 볼셰비키는 이제 임시 정부로부터
권력을 탈취할 시기가 왔음을 결의했다. 트로츠키가 봉기를 위한 일체의 계획을
세울 임무를 맡았다. 어느 요충지를 언제 탈취할 것인가모든 것이 면밀하게
계획되었다. 11월 7일이 봉기할 날로 정해져 그날에는 전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가
개막되기로 되어 있었다. 그 날짜는 레닌이 정했는데 그 이유에 관한 그의 설명이
재미있다. "11월 6일은 너무 빠를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봉기를 감행하기 위해 전 러시아적인 기반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 6월에는 대회의
대표자들이 아직 도착해 있지 않을 것이다. 한편 11월 8일이면 너무 늦을 것이다.
그날까지 대회는 조직될 것이다. 사람들이 큰 단체로 조직되어 버리면 신속하고
과감한 행동을 취하기가 어려워진다. 따라서 우리는 7일에 행동을 일으켜야 한다.
그날 대회는 성립된다. '여기에 권력이 있다. 우리는 이것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혁명의 성공은 흔히 매우 사소한 사건에
좌우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던 이 노련한 혁명가는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마침내 11월 7일(러시아력으로 10월 25일)이 왔고, 소비에트 병사들은 정부의
건물, 특히 전신국과 전화국, 국립 은행 등의 중요한 전략적인 요충지를 점거했다.
저항은 없었다. "임시 정부는 간단히 무너졌다."영국 관리는 본국 정부에
이렇게 공문을 보냈다.
  레닌은 새 정부의 수반(인민 위원회 의장)이 되고, 트로츠키는 외무장관(외무 인민
위원)이 되었다. 이튿날인 11월 8일 레닌은 스몰니 학교에서 개최된 소비에트
회의에 모습을 나타냈다. 회의는 우뢰와 같은 박수로 그들의 지도자를 맞았다.
  제2차 혁명은 그 해 안에 완전히 성공을 거두었다. 그것은 그 때까지는 놀랍도록
평화적인 혁명이었다. 권력은 거의 피를 보지 않고 넘겨졌다. 3월 혁명 때에는
무수한 교전과 살상이 있었던 것이다. 3월 혁명은 자연발생적이고 비조직적인
것이었으나, 11월 혁명은 주의 깊게 세부까지 계획이 세워져 있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가장 가난한 여러 계급, 특히 산업 노동자 대표가 국가의 중추에 들어갔다.
  레닌과 그의 볼셰비키 정권이 수립되었지만 독일과의 전쟁은 아직 계속되고
있었다. 독일과의 강화는 그들의 가장 시급한 현안이었기 때문에 주저하지 않고
즉각 휴전을 제의했다. 두 나라의 대표는 브레스트^36^리토프스크에서 회견했다.
독일은 볼셰비키에게는 전투력이 남아 잇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체면을 세우고 싶은 심정과 어리석은 생각에서 굉장히 고답적이고 모욕적인
요구를 했다. 볼셰비키는 오직 평화의 회복을 바라고 협상을 시도했던 것인데,
독일이 전혀 예기치 않은 그러한 협상 조건을 내걸자 어안이 벙벙했다. 그들
대부분은 그런 조건을 거부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러나 레닌은 어떤 희생을
감수해서라도 강화 조약을 맺을 것을 주장했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강화 회의의
러시아 측 대표 가운데 한 사람이던 트로츠키에게 어떤 행사에 이브닝 코트를 입고
출석하라고 독일인이 요청한 일이 있었다. 트로츠키는 몹시 난처했다. 노동자의
대표가 그런 부르주아적인 옷차림을 해도 좋을까? 그래서 그는 레닌에게 전보를
쳐서 의견을 물었는데, 즉시 회신이 왔다. "만일 강화에 도움이 된다면 여성용
속옷이라도 입고 참가하게!"
  소비에트가 강화 조건을 논의하고 있는 동안 독일은 페트로그라드를 향해 진격을
개시했다. 그와 동시에 그들의 강화 조건은 그 전보다 더 오만한 것이 되었다.
레닌의 권고는 드디어 소비에트에서 채택되고, 그들은 1918 년 3월
브레스트^36^리토프스크에서 강화 조약에 서명했다. 물론 그들은 이 강화를 몹시
증오하고 있었다. 이 강화 조약에 따라 러시아령 서부의 대지역이 고스란히 독일
영토에 합병되었다. 평화 협상은 어떻게 해서든지 성공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1933 년 4월 14일
    69. 일본이 중국을 괴롭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진행되는 동안 극동에서도 우리들의 주의를 끌 만한 사건이
두세 가지 일어났다. 중국에서 공화국이 수립되었고, 곧 내란이 일어난 것이다. 그
뒤에 원세개가 황제가 되려 했지만, 그것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공화국도
전국에 그 권위를 확립할 수 없었다. 그래서 중국 전체를 완전히 지배할 수 있는
권력 단위는 하나도 없게 되었다. 즉 몇 년 동안 두 개의 중요한 정부북방
정부와 남방 정부로 대립되어 있었다. 남방에서는 손문 박사와 그가 영도하는 민족
정당인 국민당이 패권을 쥐고 있었던 데 반해, 북방에서는 원세개가 패권을 쥐고
있다가 실각하자 장군과 군인들이 그 뒤를 이어 번갈아 가며 패권을 잡았다. 그
후부터 이들 군인 정치가를 군벌이라 일컫는다. 그들은 근대 중국사에 커다란
화근이 되었다.
  한편 일본의 중국에 대한 정책은 지난 40 년 동안 놀라울 정도로 일관되게
계속되었다. 그들은 군대를 근대화하고 공업화를 추진하기 시작하자마자, 무슨 일이
있어도 중국을 그들의 지배하에 두어야겠다는 결의를 굳혔다. 그들은 공업을
확대하고 팽창시키기 위해 보다 넓은 공간이 필요했다. 코리아와 중국은 둘 다
거리가 가깝고, 게다가 국력이 약하기 때문에 지배하고 착취하는 데 안성맞춤일 것
같았다. 일본이 처음으로 시도한 것은 1894--95 년의 청일 전쟁이다. 그들은 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유럽 열강의 반대로 말미암아 그들이 원하는 대로
전리품을 손에 넣을 수는 없었다. 그 다음에는 1904 년 러시아와 보다 더 어려운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그들은 이 러일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코리아와 만주에서
확고한 기반을 닦았다. 코리아는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합병되어 불행히도 일본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세계 전쟁이 벌어졌을 때 일본은 즉시 연합국에 가담하고 독일에 대하여 선전
포고를 했다. 일본은 중국 교주를 침략하여 자기네들 것으로 만들고, 그 다음에는
교주가 있는 산동성을 넘어서 내륙을 향하여 손을 뻗치기 시작했다. 이것은 일본이
중국 본토에 침입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독일은 이 지역에 아무 관계도 없었기
때문에 이것이 독일에 대한 작전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에 중국 정부는
일본에 대하여 철수할 것을 공손히 요구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오만 불손한
짓이냐! 하고 생각한 일본은 즉시 21개조의 요구를 써넣은 공식 각서를 만들었다.
  이 '21개조 요구'는 유명한 것이 되었다. 나는 여기서 그것들을 일일이 들지는
않겠지만, 그것은 특히 만주, 몽고, 그리고 산동에 있는 온갖 종류의 권리와 특권을
일본에게 양도한다는 것이었다. 만일 이 요구에 동의했다면 중국은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변하고 말았을 것이다. 힘이 약한 북방의 중국 정부는 이 요구를
거절했지만, 그들은 강대한 일본 군대에 대항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게다가 이 북방의 중국 정부는 자기 나라 국민한테서도 신망이 두터운 편이
못되었다. 그렇지만 그 정부는 한 가지만은 쓸모 있는 일을 했는데, 그것은 바로
일본의 요구를 공표 했다는 점이다. 순식간에 중국 전체가 분노에 찬 여론으로
들끓었다. 전쟁에 몰두하고 있던 여러 외국조차도 이것을 보고 격분했다. 특히
미국이 이에 거세게 반발했다. 그 결과 일본은 그 요구 가운데 어떤 것은 철회하고
또 어떤 것은 수정했다. 그러나 일본은 그 밖의 조항에 관해서는 중국에 강요하여
마침내 1915 년 5월 이것을 수락하게 했다. 이것이 중국으로 하여금 격렬한 반일
감정을 품게 하는 결과가 되었다.
  전쟁이 벌어진 지 3 년째인 1917 년 8월 중국도 연합국에 가담하여 독일에 선전
포고를 했다. 당시 중국은 독일에 대항할 별다른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이것은
우스운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연합국과의 관계를 조정해서 더 이상
일본에 말려 들어가는 것을 피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나는 세계 대전이 끝난 뒤 그것의 수습을 위해 개최되었던 파리 강화 회의에
대하여 아직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이 강화 회의에서 여러
강대국특히 영국, 프랑스, 그리고 미국이 중국의 산동성을 일본에 넘겨주기로
결정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이리하여 그들의 연합국인 중국은 억울하게도
영토의 일부를 포기할 것을 강요당했던 것이다. 그 이유는 전쟁 중에 영국, 프랑스,
그리고 일본 사이에 체결된 어떤 종류의 조약 때문이었다. 이유는 무엇이든 중국에
가해진 이 비열한 거래는 중국 민중을 분노에 떨게 만들었고, 중국 민중들은 북경
정부에 대해서 만일 조금이라도 양보하는 일이 있으면 혁명이라도 일으킬 것만 같은
기세였다. 또한 일본 상품에 대한 불매 운동이 엄중하게 선언되고, 반일 폭동이
자꾸만 일어났다.(1919 년에 일어난 5^3456,145^운동). 중국 정부(내가 말하는 것은
중국을 대표하는 정부였던 북방 정부, 즉 북경 정부이다)는 강화 조약에 대한
서명을 거부했다.
  2 년 후에 미국 워싱턴에서 회의가 열려 거기에서 산동 문제를 다루게 되었다. 이
회의는 극동 문제에 관계가 있는 모든 열강이 참석하는 회의였는데, 원래 그들은
해군력의 규모를 감축하는 논의를 위해 모인 것이었다. 1922 년의 '워싱턴
회의'에서는 중국과 일본에 관한 몇 가지 중요한 성과가 있었다. 일본은 산동성의
반환에 동의했고, 그로써 중국 민중을 몹시 흥분하게 만들었던 한 문제가
해결되었다. 
  1933 년 4월 16일. 5월 11일
    70. 간디가 인도를 지도하다.

  전쟁 직전에 인도의 정치적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전쟁의 발발은
정치에 대한 관심을 더 한층 희박하게 했다. 게다가 영국 정부가 취한 수많은 전쟁
조치는 효과적인 정치 활동을 어렵게 만들었다. 전시란 언제나 정부가 그들 이외의
모든 집단을 모조리 억압하고, 그들 마음대로 행동하는 데 알맞은 좋은 변명이 되게
마련이다. 허용되는 유일한 자유는 오직 그들을 위한 자유뿐이다. 진실을 탄압하고,
툭하면 거짓말을 퍼뜨리며, 비판을 가로막는 검열 제도를 실시하고, 국민의 거의
모든 활동을 통제하기 위해 특별법이라든가 규칙 따위가 통과된다. 이것은 전쟁을
벌이고 있는 어느 나라에서나 마찬가지이며, '인도 방위 조례'라는 것이 제정된
인도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전쟁 또는 그와 관련된 모든 것에 관한
대중의 비판은 효과적으로 통제되었다.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다른 어디나 마찬가지로 극소수의 사람들은 막대한 이익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더욱 절실히 압박을 느끼게 되었고, 불만은
점점 더 심해졌다. 전선에서의 증원 요구는 한층 더 커질 뿐이었으며, 따라서 징병은
더욱 더 가혹해졌다. 신병들을 제공하는 자에게는 온갖 유혹의 손길이 뻗쳤고,
일정한 보수도 주어졌다. 자민다르(지주)는 소작인 중에서 일정한 비율을 군대에
내보내야 했다. 특히 펀자브 지방에서는 군대나 노무대의 인원을 모으기 위해 강제
징집 방법이 많이 실시되었다. 인도에서 군인이나 노무대로 각 전선으로 끌려간
사람들의 수는 모두 1백만 이상이나 되었다. 이러한 수법은 인도인의 엄청난 분노를
일으켰으며, 전후 펀자브에서 일어난 소요의 한 원인이 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인도의 자본가들은 영구계건 인도계건 성장의 기회를
잡았고, 외국과의 경쟁도 거의 없었다. 그들은 이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였고, 가난한
인도 대중의 희생을 바탕으로 많은 이윤을 올렸다. 물가는 폭등하고, 믿을 수 없을
만큼 거액의 배당금이 주주들에게 배당되었다. 그러나 이 배당금과 이윤을 낳는
노동자들의 비참한 처지는 여전했다. 임금은 약간 올랐지만, 생활 필수품 가격은
그것보다 훨씬 심하게 폭등하여 그들의 실제 지위는 더욱 악화되었다.
  그러나 자본가들은 크게 번창하여 막대한 이윤을 축적했고, 이를 다시 산업에
재투자하려고 했다. 처음으로 인도의 자본가들은 정부에 압력을 가할 만한 힘을
갖게 되었다. 이런 압력이 없었다 하더라도 당시 영국 정부는 전시 동안 인도의
산업을 돕지 않을 수 없었다. 인도를 더욱 공업화시키기 위해, 당시 인도에서는
만들지 못했던 많은 기계들이 외국으로부터 수입되었다. 그 결과 영국에서 인도로
수입되던 경공업 제품 대신에 지금은 더 많은 기계들이 수입되고 있다.
  전쟁 동안 힘을 기른 인도의 자본가 계급과 상층 부르주아들은 정치 운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정치는 전쟁 이전, 그리고 전쟁 초기의 소강 상태로부터 벗어났고,
조금씩 자치 정부 등의 다양한 요구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로카마니야 틸락은
오랜 형기를 마치고 출옥했다. 내가 전에도 이야기했다시피 그 당시 국민 회의는
온건파가 지배하고 있었고, 민중과의 접촉이 거의 없는 영향력이 약한 단체였다.
좀더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국민 회의에 속하지 않고 따로 '자치 연맹'을
결성했다. 이런 종류의 연맹이 두 개 창립되었는데, 그 하나는 로카마니야 틸락이,
그리고 또 하나는 애니 베산트 여사가 창립한 것이다.
  인도의 자치 요구가 높아짐에 따라 영국 정부는 여러 가지 약속을 하게 되었고,
인도 민중들의 관심사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다. 1918 년 여름, 당시의 인도부
장관과 총독은 공동 보고서^6,36^그들의 이름을 따서 '몬타구^36^쳄스포드
보고서'라고 한다^3,63^를 출했는데, 그 보고서에는 인도를 어떻게 개혁하고
변화시킬 것인가에 대한 여러 가지 제안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즉시 이 시안에 대한
대대적인 논쟁이 전국에서 일어났다. 국민 회의는 이를 강력히 반대했고, 만족스럽게
여기지도 않았다. 한편 자유파는 이를 환영했고, 그 때문에 그들은 국민 회의와
관계를 끊었다.
  전후의 인도는 노도와 같은 투쟁 의욕에 들끓어, 별로 큰 희망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떤 기대를 갖고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그토록
기대했던 로운 영국 정책의 결실은 혁명 운동을 단속하기 위한 특별법들을
통과시키려는 형태로 나타났다. 자유는커녕 탄압을 강화하려는 것이었다. 이들
법안은 한 위원회의 보고에 기초하고 있었는데, 오룰라트 법안이라고 알려졌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법안을 '암흑 법안'이라고 불렀으며, 가장 온건한 사람들까지
포함한 모든 인도인의 비난을 받았다. 그 내용은 정부가 달갑게 여기지 않거나, 또는
의심스러운 사람을 마음대로 체포하여 재판을 거치지 않고 투옥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갖는 것이었다.
  이 때 등장한 사람이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였다. 그는 전쟁 중에
남아프리카에서 인도로 돌아와 사바르마티의 한 아슈람(힌두교의 종교적 은거지)에
그의 일행과 함께 거처를 정하였다. 그는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았고, 정부를 도와서
전쟁을 위한 모병에 협력까지 한 적이 있었다. 그는 물론 남아프리카에서의
사티아그라하(진리의 힘, 영혼의 힘 이라는 뜻으로, 악과 부당한 것에 저항하는
비폭력 운동을 지칭) 투쟁 이래 인도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간디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총독에게 정중한 경고의 호소문을 발송하였다. 전
인도가 하나로 뭉쳐 반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 정부가 법안을 통과시키려는
것을 보고, 그는 그 법안이 법률이 된 첫 일요일을 전 인도 애도의 날로 설정하여
하르탈, 즉 모든 업무를 중지하고 집회를 개최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것은
사티아그라하 운동의 막을 여는 것이었으며, 그리하여 1919 년 4월 6일 일요일에
도시와 시골을 막론하고 인도 전역에서 사티아그라하의 날이 지켜졌다. 이런 종류의
전국적인 시위는 인도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지만, 그것은 각계 각층의 사람들과
단체 참가한 굉장히 인상적인 시위였다. 이 하르탈 때문에 분주했던 우리들도 그
성공에 놀랐다. 지금까지 우리가 접촉할 수 있었던 사람들의 범위는 도회지의
주민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제 새로운 정신이 세상에 가득해지고, 그 내용은 이
거대한 나라의 벽촌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이 때 처음으로 농민들은 도시의
노동자들과 함께 대규모 정치적 시위에 참가하였던 것이다. 
  1933 년 4월 21일
    71. 유럽의 새로운 판도(베르사유 체제)

  승리한 연합국은 1919 년에 파리에서 강화 회의를 개최했다. 파리에서 세계의
장래가 그들의 손에 의해 윤곽이 정해지게 되자, 수개월 동안 이 유명한 도시는
세계적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멀고 가까운 곳곳에서 온갖 사람들이 이 도시를
향하여 몰려들었다. 그 중에는 무거운 사명을 어깨에 짊어진 정치가 또는 정상배도
있었고, 외교관, 전문가, 군인, 은행가가 있는가 하면 브로커도 있었는데, 그들은
저마다 한 무리의 수행원, 타자수, 서기 등을 거느리고 있었다. 물론 당연히
언론인의 대부대도 있었다. 아일랜드인이라든가, 이집트인, 아랍인이라든가, 또는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나라들에서 자유를 위해 싸우는 민중들의 대표들, 게다가
오스트리아나 투르크 제국 자리에 자신들의 나라를 세우려는 동유럽 사람들도 왔다.
그리고 사기꾼들도 몰려와 있었음은 물론이다. 세계는 바야흐로 새롭게 분할되려
하고 있었는데, 동물의 시체를 먹어 치우려는 독수리들이 이 기회를 놓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강화 회의에 대한 기대는 컸다. 사람들은 전쟁의 무서운 체험을 로하고, 공정하고
영구적인 평화가 이뤄지기를 바랐다. 무서운 내핍 생활은 아직까지도 대중들
사이에서 꼬리를 끌고 있었고, 노동자 계급 가운데에서는 불만이 높았다. 생활
필수품 가격은 폭등하고, 이것이 민중의 고통을 배가시켰다. 1919 년 유럽에는
혁명이 임박했음을 말해 는 갖가지 징조가 나타났다. 제2의 러시아가 당장이라도
모습을 드러낼 듯이 보였다.
  이것이 1871 년 독일 제국이 선포되었던 바로 그 베르사유의 같은 홀에서 소집된
강화 회의 당시의 상황이었다. 대규모 회의가 매일 열리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수많은 위원회로 나뉘어졌다. 이들 위원회는 비공개로 회합을 열어 깊숙한 베일
뒤에서 흥정도 하고 서로 다투기도 했다. 회의의 주도권은 연합국의 '10개국
이사회'가 잡고 있었다. 이것은 뒤에 다섯으로 줄어서 '5 대국'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와 일본이었다. 여기서 일본이 제외되어
'4개국 이사회'가 되었다가 마지막에는 이탈리아도 빠져 '3 대국'미국, 영국,
프랑스만 남았다. 이 세 나라의 대표는 각각 윌슨 대통령, 로이드 조지,
클레망소였으며, 새로이 세계를 개조하고 그 끔찍한 상처를 고치는 일이 이들 세
사람의 어깨에 지워졌다.
  몇 달간이나 논의와 토론을 거듭한 끝에 강화 회의에 참석한 연합국은 마침내
하나의 성문 조약에 동의하고 그들 사이에서 합의를 본 다음, 이 조약을 통고하기
위해 독일 대표단을 불렀다. 4백40개 조항으로 된 방대한 조약 초안이 독일 대표들
앞에 놓이고, 그들은 서명할 것을 독촉 받았다. 그들과는 아무런 토의도 하지
않았고, 약에 대한 제안이나 변경의 기회도 전혀 주지 않았다. 바야흐로 평화가
강요되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대로 서명하던가, 아니면 그 결과를
감수해야만 했다. 새로 탄생한 독일 공화국의 대표단은 이에 항의했지만, 마침내
유^36^예 기간 마지막 날에 이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했다.
  결국 이들 조약으로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 영토 변경은 대부분 동부 유럽,
서아시아, 아프리카에서 이뤄졌다. 아프리카의 독일 식민지들은 전리품으로서 연합국
손에 들어갔는데, 그 중에서도 영국이 가장 좋은 몫을 차지했다. 동부 아프리카의
탕가니카와 그 밖의 영토를 더함으로써 영국은 북쪽의 이집트부터 남쪽의
희망봉까지 아프리카를 관통하는 제국을 확보한다는 대망의 꿈을 실현했다.
  유럽에서도 상당한 변화가 일어나, 많은 새로운 국가가 지도상에 나타났다. 이런
화 가운데 일부는 러시아 혁명의 결과였다. 러시아 국경 지방에 살던
비러시아인들은 소비에트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을 선언했다. 소비에트 정부는
그들의 민족 자결권을 인정하고 간섭하지 않았다. 새로운 유럽 지도를 보기로 하자.
하나의 큰 나라였던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그 대신에
흔히 '오스트리아 계승국'이라고 표현되는 다음의 몇몇 소국들이 출현했다.
오스트리아는 과거 영토 에서 아주 작은 한 조각으로 축소되었지만 커다란 도시인
빈만은 수도로 삼고 있다. 헝가리 역시 크기가 엄청나게 줄어들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옛 보헤미아를 포함한다. 예로부터 우리가 불쾌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유고슬라비아의 일부인 세르비아는 몰라볼 만큼 커졌다. 그리고 일부 지방은
루마니아, 폴란드, 이탈리아의 영토가 되었다. 그것은 철저한 해체였다.
  더 북쪽으로 가면 새로 생겼다기보다 다시 세워진 옛 나라폴란드가 있다.
이것은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에서 떼어 낸 영토로 이루어졌다. 폴란드에
바다로 이어지는 길을 열어 주기 위해 매우 특이한 조처가 강구되었다.
독일이라기보다는 프로이센을 두 동강으로 나누어 바다로 통하는 육지의 회랑을
폴란드에 내주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프로이센 서부에서 동부로 갈 사람은 이
폴란드의 회랑을 가로질러야만 하게 되었다. 이 회랑 부근에는 유명한 단치히 시가
있다. 이 도시는 자유시가 되었다다시 말하면 독일의 영토도 아니고,
폴란드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체로서 하나의 국가를 형성하고 있으며, 국제
연맹이 직접 관리한다.
  폴란드의 북쪽에는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핀란드 등 발트 해 여러
나라가 있는데, 모두 과거의 차르 제국에서 갈라져 나온 나라들이다. 이 나라들은
작은 국가이기는 하지만 각기 독자적인 언어가 있어서 뚜렷한 문화적 독립성을
가지고 있다.
  유럽에서 그 외의 주요한 영토 변화는 프랑스에 속하게 된 알사스와 로렌
지방뿐이었다. 이제 이러한 변화들이 많은 새로운 국가들을 탄생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을 너도 알았으리라 생각한다. 그 대부분은 매우 작은 나라였다. 이제
동유럽은 발칸의 여러 나라와 비슷해졌으며, 강화 조약이 유럽을 '발칸화 했다'는
말을 종종 듣게 된다. 수많은 국경선이 새로 생기고, 이들 작은 나라 사이에서
분쟁이 그칠 날이 없었다.
  지도를 다시 한번 보아라. 그러면 일련의 나라들즉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루마니아가 고리를 이루어 러시아를 서유럽으로부터
완전히 갈라놓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이야기한 바와 같이 이 나라들
가운데 대부분은 베르사유 조약이 아니라 소비에트 혁명의 결과로 생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나라들은 비볼셰비키 유럽으로부터 러시아를 격리시키는 줄
이룬다는 점에서 연합국의 환영을 받았다. 그들은 볼셰비키라는 전염병을 차단는 데
쓸모가 있는 '교통 차단선'인 것이다! 이 발트 국가들은 모두 비볼셰비키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나라들은 소비에트 연방에 참가했을 것이다.
  서아시아에서는 과거 투르크 제국의 여러 지역이 서구 열강의 구미를 당겼다.
전쟁 중 영국은 아라비아, 팔레스타인, 그리고 시리아에 걸친 아랍의 연합 왕국을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으로 아랍인들로 하여금 투르크에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키도록
선동했다(맥마흔 선: 1915 년). 아랍인들에게 이런 약속을 하고서 동시에 영국은
프랑스와 바로 이 지역을 분할한다는 비밀 조약(사이크스^36^피코 협정: 1916 년)을
맺고 있었다. 따라서 이 약속은 그다지 신용할 만한 것이 아니며, 영국 수상 램지
맥도널드는 이것을 가리켜 '노골적인 일구이언'이라고 불렀다.
  끝으로 나는 윌슨 대통령이 탄생시킨 국제 연맹에 대하여 이야기해야겠다. 이것은
자유로운 독립국들의 연맹이어야 하며, 그 목적은 "정의와 명예를 바탕으로 국제
관계를 맺음으로써 장래 일어날 전쟁을 막고, 세계 여러 국민 사이에 물질적, 지적
력을 증진하는" 일이었다. 참으로 찬양할 만한 목적이었다! 연맹의 각 가맹국은
그들 사이의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모든 가능성을 다 동원한 다음,
그러고서도 9개월이 지날 때까지는 절대로 다른 가맹국과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것을 서약했다. 만약 어느 가맹국이 이 서약을 어겼을 경우에는 다른 나라들은 그
나라와 재정적, 경제적 관계를 끊는다는 것도 약속해야만 했다. 표현으로만 본다면,
이런 것들은 참으로 좋은 이야기이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더구나
이론상으로도 연맹은 전쟁을 종식시키려고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는 아무
가치가 없는 서약이었다. 그것은 다만 시간이 흐르고, 화해하도록 노력하는 사이에
전쟁을 일으키고 싶은 감정이 식게 해서 전쟁을 막아 보려고 한데 지나지 않았다.
또한 전쟁의 원인을 제거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연맹은 모든 가맹국의 대표가 참가하는 총회, 강대국들이 영구적으로 대표권을
가지고 총회에서 몇 나라를 추가로 선출하는 이사회로 구성되기로 했다. 너도
알다시피 연맹 본부와 함께 사무국은 제네바에 두기로 했다. 그 밖에도 여러 활동
기구들이 있었는데, 즉 노동 문제를 다루는 국제 노동국, 헤이그의 상설 국제 사법
재판소, 그리고 지식 협력 위원회 등이다. 이 기구들 모두가 처음부터 연맹에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 가운데는 나중에 추가된 것도 있다.
  연맹의 원래 규약은 베르사유 조약 속에 담겨져 있었다. 이것은 '국제 연맹
규약'이라 한다. 이 규약 속에는 모든 국가의 군비는 국가 안보를 위해 필요한 최소
한도까지 축소해야 한다는 규정도 있었다. 독일의 무장 해제(이것은 물론 강요된
것이지만)를 이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길의 첫걸음으로 보고, 다른 나라들도 독일의
뒤를 따르기로 했다. 그 위에 만일 어떤 나라든 다른 나라를 공격했을 경우, 이를
응징하는 일련의 조치를 취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그러나 어떠한 것이 공격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명백하게 규정된 것이 없었다. 두 민족이, 또는 두 나라가
서로 싸울 때는 반드시 각기 상대방을 비난하고 침략자라고 부르는 법인데 말이다.
   연맹에서는 중요한 사항을 결정할 때는 반드시 만장 일치여야만 했다. 그러므로
만일 가맹국 가운데 비록 한 나라라도 어떤 제안에 반대한다면 그 제안은 그대로
사장되었다. 이는 다수결에 의한 강제가 없다는 뜻이며, 나아가 국가의 주권은
여전히 독립적으로 남아 있어서 예전과 다름없이 거의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을
뜻했다. 국제 연맹은 결코 각 나라들 위에 서는 초월적 국가가 되지 못했다. 이
조항은 연맹의 힘을 매우 약화시켜, 실제로는 자문 기관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바로 이것이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을 끝낸 베르사유 조약이었다. 나중에 귀족
작위를 받고 영국 내각의 각료에 올랐던 필립 스노든은 이 조약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이 조약은 약탈자, 제국주의자, 그리고 군국주의자를 만족시키는 이었다. 전쟁의
종결이 평화를 가져올 것을 기대한 사람들의 희망에 대해서는 치명적인 타격이다.
그것은 평화조약이 아니고, 다음 전쟁의 선언이다. 그것은 민주주의와 전사자들에
대한 배신이다. 이 조약이야말로 연합국의 참 목적을 폭로하는 것이다. 
  1933 년 3월 9일, 4월 28일
    72. 공화국 수립을 위한 아일랜드의 투쟁

  아일랜드는 무장 봉기와 의회 활동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면서 아일랜드는 힘의 원천이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솟아난다 자각이 싹트고 있었다. 의회에서의 정치적 차원의 활동에 대해서는 이미
환멸을 껴, 그와는 다른 방법으로 민족을 더욱 견고한 기초 위에 놓으려는 시도가
있었다. 20세기 초기의 새로운 아일랜드는 옛날의 아일랜드와는 그 면모를 달리하고
있었다. 여러 방면에서 르네상스의 기운이 감돌았다. 문학과 문화 방면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경제 방면에서도 농민을 협동 조합의 기초 위에 재편성하려는
노력을 기울여 드디어는 성공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의 배후에는 자유에 대한 갈망이 여전히 작용하고 있다.
영국 의회에서 아일랜드 민족주의당 의원은 아일랜드 민중의 신임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상 그들에 대한 신망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들은 그저
연설만을 좋아할 뿐 실제로는 아무것도 할 능력이 없는 단순한 정치꾼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예전의 페니언 당원이나 독립을 찾는
사람들은 이러한 국회 의원과 그들이 말하는 '자치'를 신뢰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새롭고 젊은 아일랜드 역시 의회에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자주, 자립
사상이 시대의 풍조가 되어 있을 때 어떻게 이것을 정치에 적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람들의 가슴속에 무장 반란의 관념이 다시 싹트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같은 행동에 대한 의욕에 새로운 전기가 주어졌다. 아일랜드의 한 청년 아서
그리피스가 '우리 스스로의 손으로'라는 뜻의 '신 페인(Sin Fein)'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된 새로운 정책을 제창했던 것이다.
  이 용어 자체가 그 배후의 정책을 시사하고 있는데, 신 페인주의자는 스스로를
의지할 뿐, 영국의 원조와 동정을 구하지 않는 아일랜드를 원했다. 그들은
아일랜드의 힘을 내부로부터 기르려고 했다. 그들은 게일어 부활 운동과 학문
부흥을 지지했다. 한편 그들은 무장 봉기를 실행할 수 있는 것으로는 생각지
않았다. 그들은 의회 활동에 대립한다는 의미에서의 '직접 행동', 즉 영국 정부에
대한 일종의 비협력 수단에 호소할 것을 제창했다. 아서 그리피스는 한 시대 전에
수동적 저항 정책에 성공한 헝가리의 예를 들어 이와 비슷한 정책을 채용함으로써
영국을 궁지에 몰아 놓고자 했던 것이다.
  1916 년 부활절 주간에 더블린에서 봉기가 일어나 아일랜드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며칠 동안의 싸움 끝에 봉기는 곧 영국에 의해 진압되었고, 아일랜드에서 가장
용감하고 걸출한 청년들 몇몇이 이 잠깐 동안의 반란에 참가했다는 죄로 그 후
계엄하에서 총살당했다. 이 반란^6,36^'부활절 봉기'라고 부른다^3,63^이 영국에
대해서 심각한 위협이 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아일랜드가 아직까지도
공화국의 꿈을 버리지 않고, 영국의 지배에 자진해서 복종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세계에 알리는 일종의 용기 있는 표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봉기를
일으켰던 용감한 청년들은 세계에 이 표현을 알리기 위하여, 당장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언젠가는 그들의 희생이 열매를 맺어 독립을 촉진시킬
것을 기대하며 자진해서 목숨을 내던졌던 것이다.
  이 봉기 당시에 독일에서 아일랜드로 무기를 반입하려다가 영국 관헌에 체포된 한
아일랜드인이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영국의 영사 업무에 종사하고 있던 로저
이스먼트 경이었다. 케이스먼트는 런던에서 재판을 받고 사형이 선고되었는데, 그는
법정의 피고석에서 아일랜드 혼의 뜨거운 애국심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단히
감동적인 명문의 서명서를 낭독했다.
  봉기는 실패했다. 그러나 바로 그 실패를 통해 성공했다. 그에 잇따르는 영국
정부의 탄압과 청년 지도자들의 총살은 아일랜드 민중의 가슴에 깊은 인상을 새겨
놓았다. 신 페인 사상이 급속히 보급되었다. 그것은 처음에는 별로 성공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요원의 불길처럼 퍼지기 시작했다.
  영국과 아일랜드 대표는 런던에서 2개월에 걸친 토론과 담판 뒤에 1921 년 12월
잠정적인 협정에 서명을 끝냈다. 이 협정은 아일랜드에 공화국을 인정하지는
않았으나, 한두 가지 문제를 제외하고서는 종래 영국의 어느 영토가 지녔던 것보다
훨씬 많은 유를 주는 것이었다. 아일랜드 대표는 이것조차도 받아들이기를 꺼렸지만,
영국이 그들에게 가공할 전쟁을 즉시 벌이겠다는 협박을 하자 할 수 없이 동의했다.
  다일 에어런은 마침내 이 협정을 받아들였고, 이로써 아일랜드에는 공식적으로는
'사오스타트 에어런'이라는 이름의 '아일랜드 자유국'이 성립되었다. 
  1933 년 5월 7일
    73. 새로운 투르크가 폐허 속에서 솟아오르다.

  세계 대전 당시 투르크는 독일보다 불과 며칠 앞서 무너졌고, 연합국과 독자적인
휴전에 합의했다. 국가는 실제로 몇 조각으로 분열되었고, 제국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으며, 정부의 기능도 무너지고 말았다. 이라크와 아랍 국가들이 잘려 나가
대부분 합국 차지가 되었다. 콘스탄티노플까지 연합국의 지배하에 들어가, 이 위대한
도시 앞에 있는 보스포러스 해협 위에는 영국 군함이 승리를 상징하듯 자랑스럽게
정박하고 있었다. 또한 영국, 프랑스 및 이탈리아 군대가 곳곳에 진주하고, 영국의
비밀 정보 기관원이 어디든지 돌아다니고 있었다. 1918 년 말부터 1919 년 초에
걸친 투르크의 상황은 대략 이와 같았다. 투르크는 완전히 기진 맥진한 상태였으며
정신까지 나약했다
  케말 파샤(파샤는 투르크나 이집트에서 군사령관, 주지사를 의미한다)와 소수의
투르크인들은 아나톨리아에서 민족적 저항 운동을 조직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조심스럽고 은밀하게 일을 추진하여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와 장교를 자기들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다. 아나톨리아 동부 여러 주의 투르크인은 케말 파샤의
호소와 지도에 크게 귀를 기울였다.
  그리스 군대는 영국 배를 타고 소아시아를 건너 가서 1919 년 5월 영국, 스랑스,
미국의 군함이 엄호하는 가운데 이즈미르에 상륙했다. 연합국이 투르크에 선물로
보낸 이 군대는 상륙하자마자 대규모의 학살과 폭력을 일삼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벌어진 공포는 전쟁에 싫증이 나서 지칠대로 지친 세계의 양심에마저 충격을
주었다. 투르크 자신만 하더라도 매우 심각한 영향을 받았다. 투르크는 연합국이
그들에게 강요하려는 운명을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의 적이며
예속자였던 그리스인에 의해서 학살되고 이와 같은 취급을 받다니! 투르크인의
가슴속에는 분노가 타오르고 민족 운동은 거세어졌다. 이 운동을 지도한 것은 케말
퍄샤였지만, 그리스의 이즈미르 점령이야말로 이 운동을 만들어 낸 근원이었다.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던 대부분의 투르크 장교들도 이 운동이 술탄에 대한
반항을 뜻한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참가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술탄은 이미
무스타파 케말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술탄과 케말 파샤가 제국주의자들의 보호 앞에서 대립하는 동안 이즈미르의
그리스군은 영원히 이 나라의 주인이 된 듯이 굴었다. 더구나 그들은 몹시 야만적인
주인이었다. 그들은 기름진 들을 황무지로 만들었고, 그 때문에 집을 잃은 수천 명의
투르크인들을 내쫓았다. 그러나 그들은 투르크인으로부터 거의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았다.
  민족주의자들에게 이것은 좋지 않은 정세였다. 안에서는 그들을 토벌하고자
종교가 주도하는 내전이 벌어지고, 외국인 침략자는 그들을 향하여 덤벼들었다.
그리고 술탄과 그리스의 배후에는 독일을 이긴 뒤로 세계를 제 세상인 양 거리낌
없이 주물러 대는 연합국 열강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러나 케말 파샤의 슬로건은
"승리냐, 멸망이냐"였다. 어느 미국인이 만일 민족주의자들이 실패하면 어떻게 할
작정이냐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살기 위해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다
바치는 민족은 절대로 패배하지 않는다. 패배는 곧 그 미족의 죽음을 의미한다."
  1920 년 8월에는 연합국이 가엾은 투르크에 대해서 작성한 조약이 공표 되었다.
세브르 조약이라고 하는 이것은 투르크의 독립이 끝났음을 알리는 것이었으며,
독립국 르크에 대한 사형 선고가 기재되어 있었다. 국토는 갈기갈기 찢겨졌을 뿐만
아니라 이스탄불마저 연합국의 감독관이 주재하면서 지배하게 되어 있었다.
  캐말 파샤와 그의 동지들은 투르크 군 패잔병들을 가지고 제대로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정예부대를 만들어 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마침 구원의 손길이,
그것도 매우 때가 알맞은 구원의 손길이 그들이 그것을 가장 필요로 하고 있을 때
뻗쳐 왔다. 소비에트 러시아가 그들에게 무기와 자금을 제공해 준 것이다. 영국은
그들에게는 공통의 적이었기 때문이다.
  1922 년 9월, 갑작스럽게 그러나 면밀히 준비한 뒤에 투르크 군은 그리스 군을
총공격하여 그들을 단번에 바다로 몰아내었다. 8일 동안에 그리스 군은 160
마일이나 퇴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후퇴하다가 만나는 투르크인을 남자건
여자건, 어린아이건 어른이건 닥치는 대로 모두 학살함으로써 분풀이를 했다.
투르크인도 마찬가지로 그리스인을 용서하지 않았다. 그래서 포로가 된 사람이
드물었지만, 그래도 포로들 중에는 그리스의 총사령관과 그의 참모들도 있었다.
그리스 군은 대부분 이즈미르에서 해로를 통해 탈출했고, 이즈미르 시 전체는 거의
불에 타버렸다.
  케말 파는 승리를 거둔 후 때를 놓치지 않고 군대를 이스탄불로 진군시켰다.
이스탄불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차나크에서 영국군이 그를 가로막았고,
1922 년 9월의 며칠 동안 투르크와 영국은 회담을 갖게 되었다. 여기서 영국은
투르크의 요구를 거의 모두 받아들여 휴전 협정에 서명을 했으며, 연합국은 아직
트라키아에 남아 있는 그리스 군을 모두 투르크에서 철수시키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새로 탄생한 투루크의 배후에는 항상 소비에트 러시아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래서 연합국은 러시아가 투르크를 원조할 우려가 있는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다.
  무스타파 케말은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고, 그리하여 1919 년에는 한줌밖에 되지
않았던 반도들이 이제는 여러 열강의 대표들과 대등하게 의견을 교환할 수 있게
되었다. 주변 정세가 이들 용감한 일행에게 힘이 되어 주었다(전후의 반동, 여러
연합국 사이의 반목, 영국이 인도나 이집트 문제에 정신이 팔려 있었던 점, 소비에트
러시아의 원조, 영국이 가한 모욕 등등).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그들에게 승리를
가져다준 것은 그들 자신의 철석같이 굳은 결의와 독립을 쟁취하려는 의지였으며,
투르크 농민과 병사들의 참으로 놀랄 만한 전투 능력이었다.
  로잔에서 열린 강화 회의는 몇 달 동안이나 질질 끌며 계속되었다. 영국 대표로
오만하고 위압적인 태도의 커즌 경과, 조용히 웃으면서도 마음에 들지 않는 말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아 상대로 하여금 분해서 발을 구르게 만들기도 하는 말수가 적고
둔해 보이는 이스메트 파샤가 흥미진진한 대결을 벌였다. 그렇잖아도 매우 거만한
커즌은 인도 총독 시절의 습관이 몸에 배어 소리를 버럭버럭 질러 댔지만, 무슨
말을 해도 묵묵히 미소만 짓고 있는 이스메트에게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커즌은
울화통이 터져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기 때문에 회의는 결렬되었다. 그 후 회의가
다시 열렸으나, 이번에는 커즌 대신에 다른 영국 대표가 왔다. '국민 헌장'에
기술되어 있는 투르크의 요구들이 한 항목만 빼놓고는 그대로 받아들여졌고, 1923
년 7월 로잔 조약이 조인되었다. 여기서도 소비에트 러시아의 지지와 연합국
상호간의 반목이 또다시 투르크를 도왔다.
  1923 년 앙고라를 수도로 하는 터키 공화국이 공식적으로 선포되었다. 무스타파
케말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모든 권력을 한 손에 쥔 절대 권력자가 되었고, 국회는
그의 지시를 수행하는 기관이 되었다. 그는 이제 그 밖의 여러 가지 낡은 관습에
도전하기 시작했고, 종교적인 면에서도 사정을 두지 않았다.
  '가지(Ghazi)', 즉 승리의 전사 케말 파샤는 그가 목표로 삼았던 것을 거의 모두
이루었다. 그는 술탄(황제) 제도와 칼리프(종교적 수장) 제도와 여성을 격리시키는
관습, 그 밖에도 많은 낡은 관습을 폐지했다.


  1933 년 5월 20일.22일
    74. 이집트의 독립 투쟁

  1918 년에 평화가 회복됨과 동시에 이집트의 민족주의자들은 또다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파리 강화 회의와 영국 정부에 제출하기 위한 독립 청원서를
작성했다. 당시 이집트에는 본격적인 정당이 없었다. 다만 하나 존재하고 있던 것은
와타니스트라고 하는 민족주의 정당인데, 당원은 얼마 되지 않았다. 사아드 자글룰
파샤를 단장으로 하는 모가 큰 대표단을 런던과 파리에 파견하여 이집트의 독립을
주장하게 한다는 제안이 나왔으며, 이 대표단을 강력한 배경을 가진 거족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광범위한 조직체가 수립되었다. 이것이 이집트 와프드 당의
시초이다. '와프드'는 대표라는 뜻이다. 영국은 이 대표단의 런던 입국 허가를
거부하고, 1919 년 3월에 자글룰과 다른 지도자를 모두 체포했다.
  이것이 피로 물든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몇 명의 영국인이 살해되고, 카이로
시와 그 밖의 중심지는 혁명 위원회의 손에 들어왔다. 민족주의자 치안 유지
위원회가 곳곳에서 결성되었다. 이 반란에서 대학생들은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처음 단계의 승리에도 구하고 여기 저기서 영국의 관리가 살해되기는 했지만,
반란은 대체로 진압되었다. 그러나 행동적인 봉기는 진압되었지만, 운동 자체는 결코
소멸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전술을 바꾸어 제2 단계소극적 저항 단계로
옮겨갔다. 이것은 상당히 성공을 거두었고, 영국 정부는 할 수 없이 이집트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모종의 조처를 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알프레드 밀너 경을 위원장으로
하는 위원회가 영국에서 파견되었다. 이집트 민족주의자들은 이 위원회를
거부하기로 결정하고, 성공리에 그것을 실행했다. 밀너 위원회를 보이콧 할 때에도
역시 대학생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위원회는 이 민족적 저항에 깊은 인상을 받아
상당히 광범위하고 진지한 권고서를 정부에게 제출했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그것을
묵살했고, 투쟁은 1919 년부터 1922 년 초까지 3 년간 계속되었다. 이집트인은
완전한 독립을 주장하면서 한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자글룰 파샤는 1919 년 체포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석방되었다. 1921 년 12월
그는 다시 체포되어 몰타 섬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영국 측에 유리하게
사태를 호전시키지 못했으며, 그들은 이집트인을 달래기 위해서 어떤 조처를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자글룰은 결코 비타협적인 극단론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절충을 위한 모든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사실 그가 영국에 대해 저자세로 타협을
함으로써 나라를 배반했다고 규탄하는 사람들이 그를 암살하려고 한 일조차 있었다.
그러나 그 때 영국 정부와 이집트 민족주의자들이 의견이 일치하는 데 실패한 참된
이유는 근본적인 것이다. 이집트 민족주의자들은 이집트에서의 영국의 모든 이익을
무시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이것들을 토의하고, 또한 영국의 제국
무역이라든가 전략 루트라든가 그 밖의 문제에 관한 영국의 특수한 이익을 인정할
용의를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다만 그들은 자신들의 완전한 독립이 승인된 다음에
그 독립의 권리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에서 이것들을 토의하려고 했다. 이에 대해서
영국은 어느 정도의 자유를 주어야 하는가를 분명히 표명하는 일은 그들 자신의
권한에 속하는 일이며, 이 자유는 우선 확보해 놓아야 할 그들 자신의 이익에
비하면 차후 문제인 것이었다.
 따라서 의견 일치를 위한 공통의 지반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하여간 곧 어떻게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1922 년 2월 28일 성명서를
발표했다. 여기서 그들은 장래에 이집트를 '독립 주권 국가'로서 승인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다음 네 항목에 관해서는 추후에 고려할 문제로서 유보한다는
중대한 단서 조항을 덧붙였다. 그 네 항목이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1) 이집트에서 영국 제국의 안전한 통신
  (2) 직, 간접적인 외국의 모든 침략과 간섭에 대한 이집트의 방위
  (3) 이집트에서 외국 권익의 보호 및 소수 그룹의 보호
  (4) 수단의 장래에 관한 문제

  이 유보 조항들은 인도에 있는 그 사촌뻘 되는 것들과 혈연적으로 매우 유사한
점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들은 이를 '유보 조항들'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그 종류는
여기에 훨씬 더 많다. 이 유보 조항은 단순하고 순수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대내적으로나 대외적으로 실질적인 독립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에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그래서 1922 년 2월 28일의 독립 선언은 이집트 측에서는
승인하지 않는, 영국 정부의 일방적인 행위가 되었다.
  1924 년 11월에 의회가 해산되고, 1925 년 3월에는 새로운 의회가 소집되었다.
와프드 당이 의석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다시 자글룰 파샤가 하원 의장에 뽑혔다.
영국인도 푸아드 왕도 이것을 달갑지 않게 여겨, 바로 그 날로 갓 생겨난 의회는
해산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만 1 년간은 헌법 규정에도 불구하고 의회가 구성되지
않은 채 진정한 실권자인 영국 고등 판무관을 등에 업은 푸아드 왕의 독재 정치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전국적으로 반발이 일어났기 때문에 사아드
자글룰은 국왕 푸아드와 영국과의 야합에 반대하는 모든 그륩의 통일 전선 결성에
성공했다. 1925 년 11월에는 정부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의회가 소집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의사당 건물이 군대에 의해 점령되었기 때문에 의원들은 따로
장소를 마련하여 회합해야 했다.
  그 때 푸아드는 단지 그의 궁전에서 한 통의 포고령을 내리는 것만으로 헌법을
송두리째 개정해 버렸다. 그의 목적은 앞으로 의회를 통제하기 쉽게 만들어, 자글룰
측근을 모조리 축출해 낼 수 있도록 헌법을 더욱 보수적으로 개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여론이 들끓어 신제도에 의거한 선거가 완전히 보이콧 당할
지경에 이른 것은 사태의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그러자 국왕 푸아드는 이를
단념했고, 구제도대로 선거가 행해졌다. 그 결과는 자글룰의 당이 200 대 14로
압승을 거두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글룰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와 이집트가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에 대한 이 이상의 뚜렷한 증명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인도 주지사 출신인 영국의 고등 판무관 로이드경은 자글룰의 수상 취임에 반대
의사를 표명했고, 따라서 다른 사람이 수상에 지명되었다. 과연 영국이 이러한 일에
간섭할 수 있는 어떤 종류의 권한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러나 신정부는 대체로 자글룰 당에 의해 조정되는 상태였으며, 그리하여
극단적으로 거만하고도 강압적인 인물로서 때때로 영국 군함을 위협의 도구로
사용하는 로이드 경과 여러 차례 충돌을 일으켰다.
  1927 년에 또 한 차례 영국과의 협정이 시도되었으나 푸아드 왕 휘하의 무능하고
나약한 수상마저도 영국이 제시한 안에는 대경 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제안은
겉으로는 독립이라는 가면을 쓰고는 있었으나 사실상 영국의 보호령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섭은 실패로 끝났다.
   푸아드는 또다시 그의 재위 중 세 번째의 독재 정치를 펴기 시작했다. 의회는
해산되고, 와프드 당 기관지는 폐간되었으며, 모든 면에 걸쳐 독재 정치가 철권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하원과 상원의 모든 의원은 국정의 유력자들 정부를 부인하고
의사당에 몰려들어 토의를 진행했다. 1930 년 6월 23일 그들은 엄숙히 헌법에 대한
충성을 서약하고 전력을 기울여 이를 수호할 것을 다짐했다. 격렬한 데모가 국내
도처에서 일어났으나 이들은 군대의 무력 탄압을 받고 많은 피를 흘리게 되었으며,
나하스 파샤 자신도 부상을 당했다. 이렇게 하여 영국군 장교가 인솔하는 군대와
경찰은, 국왕과 밀착되어 있는 극소수의 귀족과 부호들을 제외한 온 국민의 분노의
표적인 독재 정치를 유지하는 수호자 역할을 했다. 와프드 당 이외의 사람들, 즉
강경 수단에 반대하고 있던 온건파나 자유주의자들까지 독재 정치에는 반기를
들었다.
  와프드 운동은 순수한 부르주아 민족주의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민족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것에 그칠 뿐 사회 문제에까지 개입하지는 않았다. 의회가 기능을
발휘하고 있을 때는 반드시 교육 혹은 기타 부문에서 무언가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민족 투쟁이 절정에 달해 있던 이 단기간에 의회가 이룩한 것은 종래의 영국 통치
40 년의 실적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농민들 사이에서의 와프드 당의 인기는 선거나
대규모 시위를 통하여 증명되었다. 그런데 이 운동은 본질적으로 중간 계급의
것이었기 때문에 사회적 변화를 목표로 하는 운동만큼 대중을 움직이게 할 수는
없었다.
  1935 년에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아비시니아(에티오피아)를 침략했다. 이 침략은
이집트는 물론 나일 강 하류 유역의 영국의 이해에도 위협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이
새로운 위협은 이집트와 영국 사이의 관계에 변화를 가져왔다. 이집트와 영국은
이제는 서로 다툴 만한 겨를이 없었다. 이집트의 지도자들은 영국을 손이 미치는
곳에 있는 가까운 친구로 보게끔 되었다. 와프드 당은 선거에서 승리하여 나하스
파샤가 수상이 되었다. 이탈리아의 아비시니아에 대한 침략의 결과 아비시니아,
이집트, 그리고 영국 사이에는 새로운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분위기는
상호간에 협상의 길을 열게 하여 1936 년 8월에 나의 조약이 서명되었다. 이집트는
협정을 성립시키기 위해 종전의 주장에서 많이 후퇴하여 수단의 현상 유지와 영국에
의한 수에즈 운하의 방위권을 승인했다. 나아가 이집트의 외교 정책은 영국에
동조하게 되었다. 한편 영국은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에서 군대를 철수시키고,
양국인으로 구성되는 혼성 재판소와 치외 법권의 철폐, 그리고 이집트의 국제 연맹
가입에 협력할 것을 약속했다. 
  1933 년 5월 29일
    75. 팔레스타인과 트란스(요르단)

  영국이 국제 연맹으로부터 위임 통치권을 부여받은 팔레스타인은 시리아의 이웃
나라다. 인구는 1백만에도 채 미치지 못하는 더욱 작은 나라이지만, 오랜 역사와
문화를 지니고 있는 주목할 만한 나라다. 그것은 이 나라가 유태인과 기독교도, 또한
어느 정도까지는 이슬람 교도에게도 성지이기 때문이다. 주민은 이슬람 교도
아랍인이 대다수를 점하고 있으며, 그들은 독립을 요구함과 동시에 시리아의 신앙을
같이 하는 아랍인과의 통일을 바라고 있다.
  그런데 영국의 정책은 여기에도 소수 민족 문제^6,36^유태인 문제^3,63^를 일으켜,
유태인들이 영국 편에 서서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반대하게 했다. 그들은
팔레스타인의 독립이 곧 바로 아랍국에 의한 지배로 이어지는 결과가 올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두 파는 서로 다른 목표를 설정하고 있기 때문에 충돌이
불가피하다. 아랍인 측은 사람 수가 많은 반면, 유태인들에게는 막대한 재력과
세계적인 조직이 있다. 영국은 유태인의 종교적 민족주의를 아랍인에게 대항시키는
방법을 통하여, 이러한 충돌을 방지하고 양자를 조정하여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영국의 개입이 불가피한 것처럼 정세를 꾸며댔다. 이것은 제국주의의 지배하에 있는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로 흔하게 볼 수 있는 상투적 수법에 지나지 않는다.
  19세기 후반 이래 시오니즘 운동은 점차 팔레스타인 귀환 운동의 형태를 취하기
시작하여, 정착을 목적으로 한 많은 유태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옮겨갔으며, 또한
헤브루어도 부활되었다. 세계 대전 중 영국군은 팔레스타인에 침입하여 1971 년
11월 예루살렘을 향하여 진군하던 중에 이른바 '발포아 선언'이라는 것을 발표했다.
이 선언에 따르면 그들의 목표는 팔레스타인에 '유태 민족 정착지'를 건설하는 데에
있었다. 이 선언은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는 유태인들의 호감을 사려고 발표된
것으로서, 돈 많은 태인들의 지원을 얻는 데에는 매우 효과적인 것이었다. 아무튼 이
성명은 유태인에게 환영을 받았다.
  그렇지만 발포아 선언은 가장 중요한 문제를 간과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팔레스타인은 미개척지도, 사람이 살지 않는 공간도 아니었다. 이미 이곳을 조국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따로 있었다. 그러므로 영국 정부의 이 너그러운 제스처는
사실상 당시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희생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따라서
아랍인, 비아랍인, 이슬람교도, 기독교도 할 것 없이 유태인이 아닌 모든 사람들은
일제히 이 선언에 항의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경제적인 문제였다. 그들은
유태인들이 모든 방면에서 자기들과 경쟁하게 될 것이며, 배후에 거느린 거대한
부의 힘을 빌려 이 나라의 경제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지위에 올라서리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유태인이 그들의 생활 수단을 빼앗고 농민으로부터는 토지를 수탈
해갈 것을 걱정했다.
  이 때 이래로 팔레스타인 문제는 아랍인 대 유태인의 투쟁이 되었고, 그 중간에
있던 영국 정부는 경우에 따라서는 간에도 붙고 쓸개에도 붙었지만 대개는 유태인
편을 들었다. 팔레스타인은 자치 정부도 없이 영국의 일개 식민지 대접을 받았다.
때문에 기독교도나 그 밖의 비유태인들로부터 지지를 받는 아랍인들은 민족 자결과
완전 독립을 요구했다. 그들은 위임 통치는 물론, 더 이상 인구를 받아들일 여지가
없다는 이유로 유태인의 이주에 강력히 반대했다. 유태인 이주민이 흘러 들어옴에
따라 그들의 불안과 걱정은 점점 더 높아 갔다.
  1936 년 4월,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총파업을 단행하자 영국 관헌들은 군사력에
의한 보복 행위를 통해 그 진압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것은 6개월 가까이나
계속되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나치 방식의 거대한 집단 수용소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종류의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자 영국 정부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조사할 왕립 위원회를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이 위원회는 위임 통치에 실패했음을
솔직히 인정하고 그것을 포기하도록 보고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을 세 지역, 즉
아랍인 지배하의 넓은 지역과 유태인 지배하의 바다에 면한 지역, 그리고 영국의
직접 지배하에 두는 예루살렘 등으로 분할할 것을 건의했다. 이 분할 안은 아랍인,
유태인 할 것 없이 거의 모든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혔으나 유태인 가운데에는 이에
협력할 뜻을 표명한 자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아랍인들은 전혀 별개의 행동을
취해 그들의 민족적 저항을 강화시켰다. 그것은 영국에 대해 격렬한 적의를 품는
거대한 민족 운동의 형태로 발전되었으며, 팔레스타인 국내 대부분 지역에서 이미
영국의 통치는 사실상 끝장나고 아랍인 민족주의자들이 지배게 되었다. 이에 대해
영국 정부는 이 나라를 재차 점령하기 위해 원기 왕성한 새로운 군대를 증파시키고,
팔레스타인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1933 년 6월 13일
    76. 혁명의 좌절

  너도 알다시피 19세기에 영국은 여러 번 혁명 직전까지 갔었는데, 이것은
소부르주아와 노동자에 의해 야기된 사회 혁명이었다. 그러나 최후의 순간에
다다르면 귀족 계급은 반드시 한발 양보하여, 선거권을 확장시켜 약간의 의석을
그들에게 주거나 해외의 제국주의적 착취에서 얻은 이익의 일부를 나누어줌으로써
임박한 혁명을 가라앉히곤 하였다. 영국 제국은 팽창 일로를 치달아 식민지로부터
많은 돈을 빨아 들였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그만한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영국에서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혁명의 그림자는 종종 이 나라를 휩쓸어 공포
분위기가 사태의 방향을 결정짓곤 했다. 그래서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던 그
사태가 지난 세기 최대의 사건이라고 일컬어졌다.
  이러한 의미에서 아마 전후 서유럽 최대의 사건을 실현되지 못한 혁명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과 똑같은 여러
조건들이, 정도는 보다 낮았다 하더라도, 중부 유럽과 서유럽 국가들에도 역시
있었다.
  혁명 초기에 소비에트 정부는 영토를 병합하려는 모든 제국주의적 기도를
비난했다. 그들은 차르의 러시아와 영국, 프랑스 사이에 체결된 비밀 조약을 근거로
무엇 하나 요구할 의사가 없다고 말했다. 즉 성명을 통해 콘스탄티노플은 투르크의
영토임을 분명히 했다. 그들은 동양 여러 나라들과 차르 제국의 압제하에 있던 여러
나라 민족들에 해서도 관대한 조건을 내세웠다. 그리고 국제 노동자 계급의 기수가
되어 세계 방방곡곡의 노동자들에게 그들이 했던 것처럼 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할
것을 호소했다.
  볼셰비키의 호소는 독일 정부나 연합국의 여러 정부에 의해서는 묵살 당했으나 각
방면의 전선이나 공장 지대에 침투해 들어갔다. 그것은 어디서나 꽤 반응이 좋았고,
특히 프랑스 군대 안에서는 현저한 분열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독일 군대와
노동자들은 훨씬 더 심한 동요를 보였다.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그리고
헝가리^6,36^패전 국가들^3,63^에서는 봉기와 폭동마저 일어나 수개월 동안 유럽은
그야말로 강력한 사회 혁명의 위기에 처한 형세였다. 전승 연합국들은 패전
국가들에 비해 얼마간 여유가 있었다. 왜냐하면 승리는 그들의 기분을 북돋워
주었고, 패전국의 희생을 바탕으로 그들의 손실을 얼마간이라도 메울 수 있다는
희망(그 뒤의 진행 사항에 비추어 보면 그것은 전혀 허망한 환상에 지나지
않았지만)을 안겨 주었기 때문이다.
  세계 대전이 끝나고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정세는 점차 안정되어 가는 것처럼
보였다. 혁명 세력은 반동적 보수주의자, 왕정주의자, 봉건적 지주 계급을 한편으로
하고, 온건 사회주의자 내지는 사회 민주주의자들을 다른 한편으로 하는 기묘한
동맹 관계에 의하여 진압되었다. 이것은 참으로 이상한 동맹 관계였다. 왜냐하면
사회 민주주의자들이 마르크스주의와 노동자 정부의 수립을 공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상은 지금 한 바와 같이 언뜻 보면 소비에트나 공산주의자의
이상과 같은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사회 민주주의자들은 자본가
이상으로 공산주의를 두려워했으며, 자본가와 결탁하여 공산주의를 타도하려 들었다.
그들은 너무나도 자본가를 두려워 한 나머지 그들 자본가에게 대항할 용기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평화적이고 의회적인 수단을 통하여 자신들의 지위를
굳히고 나서, 점진적으로 사회주의를 도입하려고 했다. 그들의 동기가 무엇이었든
간에 그들은 반혁명 세력이 혁명 정신을 압살하는 데 조력했고, 그리하여 실제로
유럽의 많은 나라에서 반혁명을 성취시킬 수 있었다. 세계 대전이 계속되는 수 년
동안 유럽에서 사태는 대개 이러한 방향으로 형성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대립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어서 두 적대 세력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투쟁은 계속되었다. 러시아와 공산주의가 한쪽 끝에 서 있으며, 다른
한쪽 끝에는 서유럽의 거대한 자본주의 국가와 미국이 이들과 대치하고 있다. 양자
사이에 존재하는 자유주의자나 온건파 및 중도파 정당들은 어디에서나 영락의 길을
걷고 있다. 대립과 불만의 원인은 실은 경제의 근본적인 혼란과 전세계에 퍼져 있는
빈곤의 증대에 기인하고 있다. 어떤 일정한 균형이 잡힐 때까지 이 싸움은 계속될
것이 뻔하다.
  전후 잇달아 일어났다가 실패로 끝난 혁명 가운데 독일 혁명은 그 중에서도 가장
흥미롭고 교훈적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것에 대해서 약간 이야기하려고 한다.
유럽 여러 나라의 사회주의자들은 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들의 이상과 공약에 따라
행동하지 못했다. 그들은 각국의 격렬한 민족주의에 압도되고 전쟁의 광기에
말려들어 사회주의의 국제적 이상을 망각했다. 1914 년 6월 30일 전쟁 발발 직전에
독일 사회 민주당 지도자들은 합스부르크 가(그 무렵에는 오스트리아의 제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암살을 둘러싸고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사이에 분쟁이
격화되고 있었다)의 제국주의적 기도를 위해서는 '어떤 독일 병사의 피든지 한
방울'도 희생시킬 수 없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5일이 지나자 독일 사회 민주당은
전쟁을 지지하고 나섰으며, 다른 나라의 유사 정당들도 전쟁을 지지하고 나섰다.
그뿐 아니라 오스트리아의 사회주의 지도자들은 폴란드와 세르비아를 오스트리아
제국에 통합시키는 문제를 실질적으로 논의했는데, 이것이 '병합'은 아니라고
우겼다!
  1918 년 초 볼셰비키가 유럽 노동자에게 한 호소는 독일 노동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쳐 여러 병기 공장에서 대규모 동맹 파업이 연달아 일어났다. 이것은 당시
독일 제국 정부에 아주 심각한 사태를 야기시켰으며, 파국을 초래할 정도의
사태였다. 그래서 사회주의자들은 동맹 파업 위원회에 참가하여 그 내부에서 동맹
파업을 깨뜨림으로써 이 사태를 모면했다.
  1918 년 11월 4일에는 북부 독일의 킬에서 해군 반란이 일어났다. 독일 해군의
군함은 해상 출동 명령을 받았으나 수병들과 화부들이 이를 거부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진압하기 위해 투입된 군대도 반란군 측에 가담하여 그들과 행동을
같이했다. 장교들은 직위 해제 당하거나 억류당했으며, 노동자와 병사들의
평의회(소비에트)가 결성되었다. 그것은 흡사 러시아 소비에트 혁명의 개시를
상기시켰으며, 독일 전체에 파급될 기세를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사회 민주당의
지도자들이 킬에 나타나 수병들과 노동자들의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리는 데
성공했다. 그러자 수들은 그들의 무기를 휴대하고 킬을 떠나 방방곡곡으로 흩어져서
반란의 씨앗을 퍼뜨리고 다녔다.
  그리하여 혁명 운동은 다시 확대일로를 걷게 되었다. 바이에른(남부 독일)에서는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아직까지 카이저는 왕좌를 지키고 있었다. 11월 9일에는
베를린에서 총파업이 시작되었다. 모든 작업은 정지되고, 이 도시의 수비대도 전원
파업자 측에 가담했기 때문에 폭력 사태는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낡은 질서는
차례차례 허물어져 갔으며, 문제는 무엇으로 구질서에 대체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몇몇 공산당 지도자들이 소비에트 내지는 공화국을 선포하려고 했는데, 사회
민주당의 한 지도자가 그들보다 먼저 선수를 쳐서 의회주의적인 공화국을 선포했다.
  이렇게 하여 독일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름뿐인 공화국이었고,
실제로는 무엇 하나 변한 것이 없었다. 정세를 좌우할 수 있는 지위에 있던 사회
주의자들은 거의 모든 것을 종전 그대로 방치했다. 그들 가운데 몇 명은 높은
관직에 올라 각료직 등을 차지했으나 군, 관, 사법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카이저
시대 그대로 행정 체제를 답습했다. 이리하여 최근의 어떤 책의 제목처럼 "카이저는
떠나고 장군들은 남았다." 이런 상태로는 혁명이 일어나지도 않을 뿐더러 결코 그
기반을 굳힐 수도 없는 것이다. 진정한 혁명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구조를
변혁시키는 것이라야 한다. 권력을 적의 수중에 남겨 둔 채 혁명이 존속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그야말로 바보스러운 짓이다. 그런데도 독일 사회 민주주의자들은
혁명을 일으킴으로써 반혁명 세력이 혁명을 진압하는 데 필요한 준비와 조직을
갖추기에 충분한 기회를 주었다. 그리하여 재래의 군국주의자가 여전히 독일을
지배하게 되었다.
  새로운 사회 민주당 정부는 킬의 수병들이 전국을 누비며 혁명 사상을 퍼뜨리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 그들은 베를린에서 활약하고 있던 이들 수병을
탄압하려고 했는데, 1919 년 1월 초에는 폭력적인 충돌이 일어났다. 그러자 독일의
공산주의자들은 소비에트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시민 대중에게 호소하여 그 지지를
촉구했다. 그들은 꽤 많은 민중의 지지를 얻어 정부 관청 건물을 점령했다. 1월 중
한 주 동안^6,36^베를린에서 '붉은 주간'으로 알려진^3,63^은 그들이 이 도시의
권력을 장악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대중으로부터의 반응은 충분하지 못했다.
민중의 대다수는 주저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는 형편이었다. 베를린의 정규군도 역시
주저하며 중립을 지쳤다. 이들 정규군에 기대할 수 없다고 본 사회 민주주의자들은
그 목적을 위해 특별한 의용군을 모집하고, 그 힘을 빌려 공산주의자의 봉기를
진압했다. 전투는 인정 사정 없는 잔혹한 것이었다.
  전투가 끝난 며칠 뒤에는 두 사람의 공산주의 지도자인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가 그들의 피신처에서 발각되어 잔인한 방법으로 학살되었다. 이 학살과
그것에 뒤이은 사건 책임자의 석방은 공산주의자와 사회 민주주의자 사이에 심각한
증오감을 빚게 했다. 카를 리프크네히트는 19세기의 저명한 사회주의 투사인 빌헬름
리프크네히트의 아들이었고, 로자 룩셈부르크도 옛날부터 투사로서 레닌과도 친교가
있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두 사람은 모두 그들을 함께 죽음으로 몰아넣은
공산주의자의 봉기에 반대했었다.
  공산주의자는 이미 사회 민주 공화국에 압도되어 있었고, 그로부터 얼마 안 있어
바이마르에서 공화국 헌법이 기초되었다. 그런 연유로 이 헌법은 '바이마르
헌법'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3개월도 채 되기 전에 이번에는 다른 방향에서 새로운
정세 변화가 생겨 공화국을 위협했다. 반동주의자들이 공화국에 대항하여 반혁명
음모를 꾸몄으며, 퇴역 장군 패거리들이 들고일어난 것이다. 이 반란은 '카프
푸치(Kapp Putsch)'로 알려져 있다. '카프'는 지도자의 이름이고, '푸치'는
독일어로 이런 종류의 봉기를 의미한다. 그러자 사회 민주당 정부는 베를린을
포기하고 도망쳐 버린 데 반해, 베를린의 노동자들은 총파업을 단행하고 일체의
작업을 포기하여, 이 대도시의 기능을 마비시킴으로써 '푸치'의 숨통을 틀어막았다.
그리하여 카프와 그 일당은 조직 노동자의 위력 앞에 맥을 못 추고 베를린에서
도망쳐 나가고, 사회 민주당 지도자들이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와 통치권을 행사했다.
정부는 공산주의자에 대한 보복과는 아주 딴판으로 카프 반란군을 매우 대하게
대했다. 그들 가운데는 연금을 받고 있는 퇴역 장교들도 많이 끼여 있었는데, 반란
행위에도 불구하고 연금은 종전대로 계속 지급되었다.
  바이에른에서도 이와 비슷한 반혁명적인 푸치, 또는 봉기가 조직되었다. 이것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 중에서 흥미를 끄는 것은 그 조직자가 당시 오스트리아의 퇴역
하사관이었으며, 오늘날 독일의 독재자인 히틀러였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정을 종합해 본 결과로 알 수 있는 것은 "독일 공화국은 이름만
존속하고 있으며, 날이 갈수록 약체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회주의자간의 분열,
즉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 사이의 분열은 양쪽 세력을 동시에 약화시켰고,
공공연히 공화국을 비난하는 반동주의자들이 날이 갈수록 조직적이고 공격적으로
되어 갔다. 대지주들^6,36^독일에서는 '융커'라 부른다^3,63^과 대산업가들은 정부
각 부처에 실오라기 만큼씩 남아 있던 사회주의적 요소를 서서히 제거해 나갔다.
  베르사유 강화 조약은 독일 국민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으나 반동주의자들은
이것까지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했다. 이 조약에 따르면 독일은 군비를
축소하고 군대를 감축해야만 했다. 독일은 겨우 10만에 지나지 않는 수의 군대를
유지하도록 허락 받았을 따름이다. 그 결과 표면적으로는 군비 축소가 이루어졌으나
실제로는 대량의 무기가 숨겨지게 되었다. 거대한 '민병', 즉 각 당파에 소속하는
의용군이 조직되었다. 보수적인 민족주의자 의용군은 '철모단'이라 불렸고,
공산주의자의 노동자 의용군은 '적색 전선'이라고 불렸다. 또한 그 뒤에 히틀러의
일파가 '나치' 군단을 결성했다.
  어떻게 혁명이 부침 했으며, 반혁명과 얼마나 치열하게 투쟁했던가 하는 것을
이야기하자면 아직도 한이 없다. 독일의 그 밖의 지방인 바이에른이나 작센에서도
역시 봉기가 있었다. 강화 조약에 따라 옛날 영토를 분할 당해 손바닥만한 나라가
되어 버린 오스트리아도 역시 똑같은 조건 속에 있었다. 빈이라는 커다란 수도를
지닌 이 조그마한 나라는 언어나 문화면에서 완전히 독일권에 속했다. 이 나라는
1918 년 11월 12일, 곧 휴전 바로 다음날 공화국이 되었다.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한
부분이 되기를 희망했지만, 연합국은 그것이 자연스러운 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금지시켰다.
  오스트리아에서도 독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사회 민주당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점차 자신을 잃어 가면서 그들은 부르주아 정당들의
타협 정책을 추종했다. 그 결과 사회 민주당 세력은 크게 축소되고, 정권은 다른
사람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독일과 마찬가지로 민병이 조직되고 마지막에 가서는
반동적 독재 정권이 세워졌다. 오랫동안 사회주의자의 도시 빈과 지방의 보수적인
농민층과의 투쟁이 끊이지 않았다. 사회주의자의 도시 빈의 시 당국은 노동 계급을
위한 좋은 주택 시설이나 그 밖의 사회주의적 계획으로 유명해졌다.
  헝가리에서는 전쟁이 끝나기 5주일 전인 1918 년 10월 3일에 이미 혁명이
일어났고, 11월에는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그로부터 4개월이 지난 1919 년 3월에는
제2차 혁명이 일어났다. 이것은 지난날 레닌과 협력한 바 있는 공산주의 지도자
벨라 쿤이 지도하는 소비에트 혁명이었다. 소비에트 정부가 세워지고 이것이
수개월간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에 대해 이 나라의 보수 반동 세력은 도움을
요청하여 루마니아 군을 끌어들였다. 루마니아 군은 쌍수를 들어 이것을 수락하고,
벨라 쿤 정부 타도에 힘을 빌려준 다음 헝가리를 집어삼키기 위해 이 나라에 진을
치고 앉아 물러나지 않았다. 루마니아는 그들에 대하여 행동을 개시하겠다는
연합국의 위협에 부딪히자 어쩔 수 없이 철수했다.
  루마니아 군이 철수하자 헝가리의 보수파는 두 번 다시 혁명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나라 전체의 자유주의적이며 진보적인 세력에 대한 테러를 감행하기 위해 민병
내지는 의용군을 조직했다. 이렇게 하여 1919 년 '전후 역사상 가장 피비린내 나는
페이지'로 손꼽히는 헝가리의 이른바 '백색 테러'가 시작되었다. 헝가리는 여전히
봉건성이 남아 있었는데, 이 봉건적 지주들이 전시에 크게 한몫을 본 대산업가들과
결탁하여 공산주의자뿐만 아니라 일반 노동자, 사회 민주주의자, 자유주의자,
평화주의자, 그리고 유태인에 이르기까지 학살과 테러의 범위를 넓혀 갔다. 이후
헝가리는 반동적 독재 정치의 압제하에 놓여 있다. 형식만을 갖춘 의회가 있기는
하지만 선거는 기명 투표로 행해지고즉 의원 선출을 위한 투표는
공개되었으며, 경찰이나 군대가 독재 정치에 바람직한 인물만이 당선되도록
감시하고 있었다. 또 정치 문제에 관한 공개 집회는 허락되지 않았다.
  내가 이 편지에서 이야기 하고자 하는 최종 결론은 전후의 수 년 동안에 걸쳐
유럽에서는 사회 혁명이 곧 닥쳐올 것 같은 정황을 보여주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
사실은 소비에트 러시아에게 크게 도움이 되었다. 왜냐하면 제국주의 열강이 자기
나라 노동 계급의 반발을 두려워한 나머지 혁명의 원천인 소련에 공격을 가하는
것을 삼갔기 때문이다. 어쨌든 약간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혁명은 성취되지 못한 채
끝났다. 사회 민주주의자는 그들의 당이 사회 혁명 이론에 기초를 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 혁명의 탄압과 회피에 괄목할 만한 역할을 했다. 이들 사회
민주주의자는 자본주의가 자연적으로 사멸할 것이라고 믿고 또한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자본주의를 격렬하게 공격하기보다는 오히려 당분간 그것을 존립시키기
위하여 도왔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그들의 거대하고 유복한 당 기구가
아주 안락한 것이어서, 사회적 격동의 위험을 조장하기에는 너무나도 기존 질서
속에 깊숙이 안주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될 수 있으면 중도적
입장을 취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들의 임무 수행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그들이
본래 지니고 있던 것마저도 상실해 버렸다. 최근 독일에서 일어난 일들이 이것을
뚜렷이 말해 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나는 이 편지에서 패전국들을 이야기했다. 영국이나 프랑스는 중부 유럽에서와
같은 봉기나 격동을 면했지만, 여러 전승국은 비슷한 분규를 겪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커다란 변동이 일어나자 지극히 비정상적인 결말을 초래하고 말았다. 
  1933 년 6월 15일
    77. 제1차 세계 대전 후 배상금 지불 문제

  영토의 변화보다 훨씬 중요했던 문제는 배상금, 즉 패전국 독일이 전쟁으로 인한
경비와 손해의 배상을 위해 전승 연합국에 지불하기로 된 금액의 문제였다.
베르사유 조약에서는 확실한 액수를 정하지 않았으나, 그 후의 여러 회의에서
배상금 총액을 66억 파운드로 결정하고, 이것을 해마다 분할하여 지불시키도록
결정을 보았다. 이만한 거금을 지불한다는 것은 세계 어느 나라라도 힘에 겨운
일이다. 하물며 패전으로 지칠 대로 지친 독일의 경우에 그것이 가능할 리
만무했다. 독일은 이에 항의했으나 효과는 없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미국에서
돈을 꾸어 두서너 번 배상금을 지불했다. 독일로서는 우선 발등의 불부터 끈 다음에
차후의 문제는 보다 근본적으로 해결하고자 생각하고 있었다. 독일이 도저히 이런
막대한 금액의 지불을 계속하지 못하리라는 것은 독일뿐만 아니라 그 밖의 많은
나라들도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곧바로 독일의 재정 기구는 붕괴되었고, 배상금과 같은 대외 채무뿐 아니라 국내
채무를 변제할 만한 돈마저 말라 버렸다. 외국에 대한 지불은 금이 아니면
안되었다. 지불 기일을 넘기면 결국 지불 불이행에 따른 불이익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런데 국내 채무는 독일 지폐로 지불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정부는 무턱대고 지폐를
찍어내는 방법을 택했다. 각종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돈이 필요했던 독일 정부는
필요한 만큼의 지폐를 찍어내기 시작했다. 그 결과 물가는 폭등하고, 파운드, 달러,
프랑 등에 비해 독일 마르크는 상대적으로 가치의 폭락이 계속되었다. 그래서 독일
정부는 더욱 더 많은 돈은 찍어내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이에 따라 마르크의
폭락도 그 도를 더해 갔다. 이러한 과정이 자꾸만 겹치다 보니 끝에 가서는
1파운드나 1달러가 수억 마르크에 해당되는 꿈 같은 상태에 다다랐다. 마르크
지폐는 실제로 그 가치가 거의 제로 상태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통의 편지를
부치는 데도 1백만 마르크 상당의 우표를 사야만 했다! 그 밖의 다른 물가도 이것과
같은 형편이었고, 끊임없이 변동하고 있었다.
  독일의 재정적 혼란은 국제적으로 중대한 결과를 가져왔다. 연합국에 대한 배상금
지불이 이행되지 않은 것이었다. 이 배상금은 연합국간에 분배되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프랑스로 가는 몫이 가장 컸다. 러시아는 배상금을 한푼도 받지 않았다.
러시아는 배상금에 대한 자기들의 권리를 주장할 수도 있었으나 그것을 일절
포기했던 것이다. 독일이 배상금을 지불하지 못하게 되자, 프랑스와 벨기에는 독일의
루르 지방을 그들의 군사 점령하에 두었다. 연합국은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라인란트를 점령하고 있었다. 1923 년 1월에 프랑스 군과 벨기에 군의 점령 지역이
추가된 셈이다. 이 지방은 라인란트에 인접해 있으며, 풍부한 탄전과 공장이 많은
고장이다. 프랑스는 석탄이나 기타 산물의 차압으로 채무를 변제 받을 속셈이었다.
  그런데 골치 아픈 일이 생겼다. 독일 정부가 수동적인 저항 방법으로 프랑스에
대항하기로 결정을 내리고, 루르 지방의 광산주나 노동자에게 조업을 중지하고
프랑스인에게 전혀 협력하지 말도록 요청했던 것이다. 더구나 독일 정부는 수백만
마르크의 보상금을 풀어 조업 중단으로 인한 공산주나 기업가들의 손실을 보상해
주었던 것이다. 프랑스와 독일 쌍방에 모두 적잖은 손실을 가져온 9--10개월이
경과한 뒤, 독일 정부는 수동적인 저항을 철회하고, 이 지역의 광산과 공장 운영에
관해 프랑스에 협력하기 시작했다. 1925 년 프랑스와 벨기에는 루르 지방에서
철수했다.
  독일의 루르 지방에서의 수동적 저항은 좌절되었지만, 이것은 배상 문제가
재검토되어 보다 적절한 지불액을 결정하도록 하는 데 하나의 좋은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회의나 위원회가 계속 소집되면서 새로운 구상이 자주 발표되었다. 1924
년에는 도즈 안이 통과되었고, 5 년 뒤인 1929 년에는 영 안이 이를 이었으며, 또한
3 년 뒤인 1932 년에는 그 이상의 배상금 지불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관계국들
사이에서 사실상 합의가 이루어짐으로써 배상금 청구에 대한 구상 자체는 모조리
원점으로 돌아갔다.
  1924 년부터 몇 년 동안은 독일도 배상금을 규정대로 지불했었다. 그런데 한푼도
없는 알거지인 독일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해낼 수가 있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미국에서 꾸어다 지불했던 것이다. 독일은 여러 연합국에 대해 배상이라는 형식으로
돈을 지불할 의무가 있었다. 그래서 미국은 독일에 돈을 빌려주고, 독일은 그것으로
연합국에 배상금을 지불했다. 그럼으로써 연합국은 연합국대로 미국에 대한 부채를
갚을 수 있었다. 이것은 꽤 좋은 방법이어서 모든 일이 순조로운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는 이런 방법이 아니고는 따로 지불할 도리가 없었다. 물론 이 대차 관계의
회전은 전적으로 미국이 계속해서 독일에 돈을 빌려준다는 사실에 의존하고 있었다.
만약 이것이 중지되는 날이면 이 구조는 송두리째 허물어질 판이었다.
  이 돈의 대차는 현금으로 거래된 것이 아니라 모두 장부상으로 행해졌다. 미국이
독일에 대해 어떤 액수의 대부를 기입해 주면 독일은 이것을 여러 연합국 장부에
옮겨 적어 주고, 여러 연합국은 이것으로 다시 미국에 대한 셈을 치렀다. 실제로
돈이 오가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장부상에 몇 줄인가의 글자가 기입될 뿐이었다. 무엇
때문에 미국은 지난날의 빚에 대한 이자마저 내지 못하는 여러 가난뱅이 나라에
계속 돈을 빌려주고 있었던 것일까? 미국은 그들이 파산지경에 이르지 않고
어렵게나마 꾸려 나갈 수 있도록 그들을 도왔다. 유럽이 붕괴되면 여러 가지 골치
아픈 문제가 일어나리라는 것은 둘째로 치고라도, 미국에 대한 채무의 일체가 회수
불능이 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마치 약삭빠른 채권자처럼 미국은
채무국의 숨이 끊어지지 않는 범위 안에서만 그들을 도운 것이다. 그러나 몇 해가
지나자 미국도 이제는 이 대여를 계속하는 정책에 지쳐 이것을 중지했다. 그로
인하여 갑자기 배상과 채무 관계의 체제가 무너지고 지불이 이행되지 않자 유럽과
미국의 여러 국민은 도탄에 빠져들게 되었다.
  이와 같이 배상 문제는 전후 10여 년에 걸쳐 유럽을 먹구름 속에 몰아넣은 가장
큰 문제였다. 이 밖에도 전쟁 채무, 즉 독일보다도 연합국 상호간의 채무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세계 대전을 다룬 한 편지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전쟁 초기에
영국이나 프랑스는 그들과 동맹을 맺은 소국에 돈을 융통해 주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프랑스는 자금이 달려 더 이상의 대부를 못하게 되었으나 영국은 그래도 계속
융통해 줄 수 있었다. 나중에는 영국의 재정도 바닥이 나서 그 이상의 대부가
불가능하게 되었고, 오로지 미국만이 계속하여 융통해 줄 수 있었다. 미국은
자기들의 이익이 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에 영국, 프랑스, 기타 여러 연합국에
서슴지 않고 대부를 해주었다. 때문에 전쟁이 끝났을 때 몇몇 나라는 프랑스에,
그리고 많은 나라들이 영국에 빚을 지고 있었으며, 미국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연합국이 거액의 채무를 지고 있었다. 미국은 다른 나라에 채무가 없는 유일한
나라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미국은 이제 대채권국이 되어 그 옛날의 영국을
대신하여 세계의 채권국으로 등장했다. 
  1933 년 6월 18일
    78. 전후 유럽 열강의 외교 전략

  소비에트 러시아는 자신들의 노동자 정부를 스스로 지켜 내기는 했지만, 전승
열강에게는 분노와 두통거리의 끊임없는 근원이었다. 열강의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분노는 다른 나라의 노동자를 혁명으로 몰아넣는 그 제도에 기인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련이 열강의 동양에 대한 여러 가지 음모에 방해물로 다가오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대다수의 전승국들이 참가하여 소련을 타도하려 했던 1919 년, 192
년에 간섭 전쟁을 일으킨 바 있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이를 이겨냈고, 유럽 열강은
결국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지만 될 수 있으면 선의나 호의를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특히 제정 시대에 시작된 영국과 소련의 대립 관계는
여전히 지속되었으며, 때로는 곧 전쟁이 터질 것 같은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소련은 영국이 끊임없이 그들에 대하여 음모를 꾸미고, 유럽에서 반소 블록을
결성하려는 것으로 믿고 있었으며, 몇 차례인가는 전쟁이 터질 것만 같은
일촉즉발의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했다.
  서유럽과 중부 유럽에서는 전승국과 패전국 사이에 현저한 차이가 있었는데, 특히
프랑스가 전승국의 분위기를 대표하고 있었다. 패전국들은 물론 강화 조약의 내용에
카다란 불만을 품고 있었지만, 그에 대항할 만한 힘이 없었기 때문에 장차의 정세
변화를 꿈꾸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중병에 걸린 것처럼 보였고, 그들의
상태는 더욱 악화되어 가는 듯이 생각되었다. 한편 세르비아가 팽창하여 이룩된
유고슬라비아는 서로 융화되지 않는 여러 요소와 민족의 혼합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몇 해 안 가서 각 부분을 묶어 주는 감정이 냉각됨에 따라 분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독일이 보복 해오리라는 공포를 떨쳐 버릴 수 없었고, 그것이 전체
정책의 기초가 되어 '안전', 즉 프랑스가 이미 획득한 것을 유지하고 보존하기 위한
안전에 모든 정책 결정의 초점을 맞추었다. 베르사유 강화 조약에 실망한 모든
나라들의 불만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은 프랑스의 군사력이 우세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가 다른 나라의 반발을 무시한 것은 이 강화 조약의 유지가 프랑스의 안전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국의 지위를 강화시키기 위해
프랑스는 베르사유 조약을 유지함으로써 이익을 얻는 국가의 블록을 구성했다. 이
블록에는 벨기에.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루마니아, 그리고 유고슬라비아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렇게 하여 프랑스는 유럽의 헤게모니 혹은 지도권을 확립했다.
  전후 독일은 당초에는 여러 전승국으로부터 푸대접을 받고 있었다. 이들 열강의
호의를 획득할 수 없었던 독일은 약간은 그들을 놀라게 할 의도로써 소련으로 눈을
돌려 1922 년 4월 소련과 라팔로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을 위한 교섭은
비밀리에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것이 공표 되자 여러 연합국은 대단한 충격을
받았다. 영국의 지배층은 소비에트 정부를 매우 증오하고 있었기 때문에 특히 영국
정부로서는 심히 충격적인 일이다. 영국이 독일에 대한 정책을 변경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독일을 우대하고 회유하지 않는 한 독일이 소련 진영에 가담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들은 갑자기 독일의 곤경에 대해 동정적이 되었고,
갖가지 비공식의 우호적인 제안을 내놓았다. 그래서 그들은 '루르의 모험'(루르
지방의 점령)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이러한 일은 모두가 갑작스럽게 독일에 대한
애정이 솟아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독일을 소련으로부터 멀리하여 반소비에트 국가
그룹으로 묶어 두고자 하는 희망에서 나온 정책이었다. 이것이 몇 년간은 영국
정책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으며, 1925 년 로카르노에서 그들은 드디어 첫 성과를
올렸다.
  로카르노에서 열린 국제 회의에서 세계 대전 이래 처음으로 두서너 가지 점에
관해 전승국과 독일 사이에 진정한 의미의 협정이 성립되었고, 이것이 하나의
조약으로 마무리되었다. 이것은 완전한 조약이라고 할 수 없었으며, 배상이라는
거창한 문제와 기타 몇 가지 문제는 그대로 남겨졌다. 그러나 밝은 전망의 실마리가
풀려 많은 상호 확약과 보장이 이루어졌다. 독일은 서부 프랑스 국경을 베르사유
조약이 규정한 대로 받아들였다. 동부의 바다에 이르는 폴란드 회랑과의 국경에
관해서는 독일은 이것을 최종적인 관건으로서 승인하기를 거부했지만, 아무튼
이것을 변경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평화적인 수단 이외의 다른 방법을 사용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만약 조약 당사국 가운데 어떤 나라가 이 협정을 위반할 경우에는
다른 당사국은 힘을 합쳐 여기에 대처하기로 결정했다.
  로카르노 회의는 영국 정책의 승리였다. 이에 따라 영국은 어느 정도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조정자 입장에 서게 되었고, 독일은 소련권에서 떨어져 나왔다.
로카르노 회의가 갖는 최대의 의의는 실로 그것이 서유럽 여러 나라를 반소
블록으로 집결시켰다는 점에 있었다. 소련은 이러한 사실에 자극을 받아 몇 개월 뒤
터키와 동맹을 맺음으로써 이에 응수했다. 이 러시아, 터키 조약은 1925 년 12월,
모술 문제에 관해 국제 연맹이 터키의 견해와 반대되는 결의를 채택한 2일 후에
서명되었다. 1926 년에는 독일이 국제 연맹에 가맹하였고, 독일 대표가 회의장에
도착하자 다정한 악수와 포옹이 오고갔으며, 연맹국 회원들간에는 미소와 화제의
꽃이 만발하였다.
  군축 토의가 좀처럼 뚜렷한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있던 1928 년, 프랑스와 미국
두 정부가 회의를 개최한 결과 평화 유지를 촉진하는 새로운 제안이 이루어졌다.
이것은 전쟁을 '비합법화'한다는 결단성 있는 제안이었다. 애당초는 프랑스와 미국
사이의 협정에 이 조항을 삽입시키기로 되어 있었던 것에 불과했으나, 이것이
발전하여 드디어 전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들이 참가하게 되었다. 1928 년 8월, 이
조약이 파리에서 서명되었다. 그래서 이 조약은 1928 년의 '파리 조약'이라고도
한다. 켈로그는 이 문제에 앞장선 미국 국무장관이었고, 브리앙은 프랑스의
외상이었다. 이 조약은 국제 분쟁의 해결 수단을 전쟁에 호소하는 것을 비난하고,
서명국 상호간의 관계에 있어 전쟁을 국책 수행의 도구로 삼지 않을 것을 약속하는
극히 짧은 문서였다.
  파리 조약의 내용은 매우 듣기 좋은 고상한 것으로서 만약 이것이 진지한
동기에서 나온 것이라면 전쟁은 없어져야 마땅할 것이었다. 그러나 각국이 이
조약의 준수에 얼마나 불성실했는가 하는 것이 곧 드러났다. 프랑스도 영국도, 그
중에서도 특히 영국은 여기에 서명하기에 앞서 여러 가지 유보 조항을 붙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이 조약은 있으나마나 한 것이었다. 영국 정부는 이 조약에서
그들의 제국에 관련하여 그들이 장차 일으키지 않으면 안될지도 모르는 유사 전쟁
행위를 제외시켰다. 이것은 사실상 영국은 어느 때고 마음이 내킬 때는 전쟁을 할
수 있다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영국은 그 지배와 세력이 미치는 지역에 대해서
일종의 '먼로 독트린'을 선언한 셈이다. 
  1933 년 6월 21일
    79. 무솔리니와 이탈리아의 파시즘

  전후 이탈리아의 경제 상태는 대단히 나빠서 다른 어느 연합국보다도 피폐해
있었다. 경제 기구는 당장이라도 붕괴할 것처럼 보였으며,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지지자는 날로 증대해 가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러시아 볼세비키라는 본보기가
있었다. 한편에는 악화된 경제 상태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공장 노동자들이
있었으며, 다른 한편에는 제대는 했으나 전혀 직장을 얻지 못한 많은 제대병들이
있었다. 혼란은 더욱 심각해져서 중간 계급의 지도자들은 이 군인들을 조직하여
강해져 가는 노동자 세력에 대항하려고 했다. 1920 년 여름에 이르러서는 사태가
더욱 심각해졌다. 50 만 명의 조합원을 가진 거대한 금속 노동자 조합은 임금
인상을 요구하였으나 거부당했다. 이에 대항해서 노동자들은 '직장 파업'이라 불리는
잘 알려져 있지 않던 방법으로 파업을 단행했다. 이것은 노동자가 직장에 나가기는
하지만 작업을 포기하고, 나아가 시설의 파괴까지도 서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공장주들은 이러한 의사 진행 방해자적인 파업을 몰아내기 위해 공장 폐쇄로써
응수했다. 이에 맞서 노동자들은 전격적으로 공장을 점거하고 사회주의적인 원칙에
따라 공장을 운영하려고 했다.
  노동자측의 이러한 행동은 분명히 혁명이어서 이것을 강행해 나가면 사회 혁명의
성공이냐, 그렇지 않으면 실패냐로 귀결될 것이 불가피해졌다. 오랫동안 중간적인
입장은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사회당은 매우 강대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노동조합을 통제하고 있었으며, 3천 개에 이르는 지방 자치
단체를 지배하고, 의원 총수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1백50 명을 국회에 진출시키고
있었다. 재산을 소유하고 국가의 많은 공직을 보유함으로써 강력한 기반을 굳힌
정당이 혁명적이었던 적은 거의 없다. 그러나 이 정당은 온건파를 포용하면서도
노동자의 공장 점거를 지지했다. 하지만 그 이상의 것은 아무것도 취하지 못했다.
현상에서 후퇴를 바라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진할 용기도 없어 최소한의
저항이라는 안일한 길을 택해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파업은 그냥 와해되고 말았다.
노동자 지도자와 급진적인 정당들의 망설임 때문에 노동자들의 공장 점거도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러한 일들이 소유자 계급의 사기를 높여 주었다. 노동자 계급과 그 지도자의
역량이 생각했던 것보다 대단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그들은 노동 운동과 사회당을
궤멸시키려고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특히 그들은 1919 년에 베니토 무솔리니에
의해 결성된, 제대병으로 구성된 일단의 의용병을 이용했다. '파시 디
콤바티멘티(전투자 동맹)', 즉 '전투대'로 불린 이들의 주된 역할은 기회만 있으면
사회주의자나 급진파, 그리고 그들의 시설을 습격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주로
사회주의 계통의 신문사 윤전기를 파괴하거나, 사회당 내지는 급진파의 지배 아래
있던 지방 자체 단체나 협력 단체를 습격하고 돌아다녔다. 대기업가나 상층
부르주아지는 한결같이 이들 '전투대'를 후원하고, 노동자나 사회주의자들과의
투쟁에 자금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정부마저도 사회당 세력이 꺾이는 것을 바랐기
때문에 그들을 관대하게 취급했다.
  이 전투대, 간단히 말해 파시스트를 조직한 베니토 무솔리니(1883--1945)란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 그는 그 무렵 아직 청년이었는데도 이미 여러 가지로
모험적인 경력을 갖고 있었다. 대장장이였던 그의 아버지가 사회주의자였기 때문에
무솔리니도 사회주의적인 환경 밑에서 자라난 셈이다. 젊었을 때부터 그는 맹렬한
선동 연설가가 되었으며, 자신의 혁명적인 선전 때문에 스위스의 여러 주에서 추방
처분을 받기도 했다. 그는 온건파 사회주의 지도자의 미미한 태도를 격렬히
공박하고, 국가 기관에 대한 폭탄 세례나 그 밖에 새로운 테러리즘의 사용을
공공연히 주창했다.
  이탈리아가 투르크와 전쟁하는 동안에 대다수의 사회주의 지도자들은 전쟁을
지지했다. 그러나 무솔리니만은 전쟁에 반대했고, 어떤 폭력 행위에 관련되어 몇 달
동안 투옥 당하기까지 했다. 그는 온건파 사회주의 지도자의 전쟁 지지를 통박하고
그들을 사회당에서 추방했다. 그는 밀라노의 사회주의 일간 신문
'아반티'('전진'이라는 뜻)의 편집자가 되어 매일같이 노동자들에게 '폭력에는
폭력으로' 대할 것을 강조했다. 이러한 폭력에 대한 사주에 온건파 마르크스주의
지도자들은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럴 즈음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처음 몇 달 동안은 무솔리니도 전쟁에
반대하고 이탈리아의 중립을 옹호했다. 그런데 그는 매우 돌발적으로 그의 견해
혹은 주장을 바꾸었다. 그는 사회주의 신문을 그만 두고 새로운 정책을 제창하는
새로운 신문을 편집하기 시작했다. 그는 사회당에서 제명 당했다. 그 후 그는
지원하여 일개 사병으로서 이탈리아 군에 종군, 전선에 출동했으며 부상까지 당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 무솔리니는 스스로 사회주의자로 자처하던 것을 중지하였다.
그는 예전에 소속되어 있던 당으로부터는 미움을 받았으며, 노동자 계급에게는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하는 어중간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는 평화주의나
사회주의, 그리고 부르주아 국가까지도 한꺼번에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를 통하여 모든 종류의 국가를 비난하고, 스스로를 '개인주의자'로 자칭했으며,
무정부 상태를 격찬했다. 실제 행동 면에서는 1919 년 3월에 파시즘의 기초를
세우고 제대한 병사들을 모아서 그의 전투대에 수용했다. 폭력을 이 단체의 신조로
삼았는데도 정부가 조금도 이를 간섭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폭력적인 행동을
더욱 서슴치 않았다. 도시에서는 노동자 계급이 조직적인 투쟁을 전개하여 그들을
내쫓은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노동자들의 투쟁
정신에 반대하고, 참을성 있게 파시스트의 테러에 평화적으로 대응하라고 그들을
설득했다. 그들은 그렇게 하면 파시즘이 자연적으로 소멸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파시스트들은 부유한 사람들로부터 자금 원조를 받는 한편, 정부가
이에 간섭하는 것마저도 거부함으로써 대중이 지난날에 가졌던 저항 정신을 모조리
상실한 틈을 타 세력을 더욱 확대해 나갔다. 파시스트의 폭력에 대해 노동자들은
그들의 무기인 파업으로 맞서는 일마저도 시도해 보지 못했다.
  무솔리니 지도하의 파시스트들은 두 가지 상반되는 호소를 교묘하게 연결시켜
나갔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들은 자신들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적이라는
사실로서 유산 계급의 지지를 획득했다. 그러나 지난날의 사회주의 선동가이며
혁명적이었던 무솔리니는 다분히 대중적이며 반자본가적인 슬로건을 내걸고 있었기
때문에 최하층에 속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받았다. 그는 또 이러한 일들에
관해 전문가들인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선동의 기술에 대해 배운 바가 많았다. 이상과
같은 의미에서 파시즘은 일종의 잡다한 것의 혼합물이었으며,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도 있었다. 본질적으로는 자본주의 운동이면서도 자본주의에
대한 갖가지 위험한 슬로건을 내걸었다. 이리하여 그들은 잡다한 군중을 울타리
안으로 끌어 드렸다. 그 배경을 이룬 것은 중간 계급, 특히 하층 중간 계급 중의
실업자 층이었다. 이러한 세력이 조직되어 감에 따라 실업자나 노동 조합 조직에
가입하지 못한 미숙련 노동자들이 그 속에 끼여들기 시작했다. 파시스트들은
폭력적으로 가게 주인들로 하여금 판매 가격을 인하하게 함으로써 더욱 빈민층의
호감을 샀다. 사기꾼 나부랭이들이 파시스트들의 깃발 아래 모여들었다는 사실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러한 제반 사정에도 불구하고 파시즘은 여전히 소수 세력에
불과했다.
  그러나 사회주의 지도자들이 서로 믿지 못하고 주저하며 싸우고, 사회당이 분열
소동을 빚고 있는 동안 파시스트의 세력은 크게 증대했다. 정규군은 파시즘에
호의적이었으며, 무솔리니는 군의 장성들을 동지로 끌어 들였다. 이와 같이 상반되고
서로 모순되는 요소들을 모아서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그 진영 내부의 각
그룹에게 파시즘이 그들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처럼 느끼게 한 것은 무솔리니의
특출한 재능이었다. 부유한 파시스트들은 그를 자기들 재산의 보호자로 여겼으며,
그의 반자본주의적인 연설이나 슬로건은 대중의 눈을 기만하기 위해 꾸며진 공허한
미사 여구로 생각하였다. 반면에 가난한 파시스트들은 이러한 반자본주의적
요소야말로 파시즘의 진수이며, 그 밖의 것들은 부유한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꾸며진 것들에 불과하다고 믿었다. 이렇게 무솔리니는 이편저편을 자유 자재로
조종하면서 어떤 날에는 부자들에게 듣기 좋은 소리를 하는가 하면, 어떤 날에는
빈민의 친구라도 된 듯한 연설을 뇌까리기도 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그는
자신에게 자금을 공급해 준, 오래도록 유산 계급을 위협해 왔던 노동자와 사회주의
세력을 타도하려고 하는 유산 계급의 우두머리였던 것이다.
  그러던 끝에 1922 년 10월 정규군의 장군들이 지휘하는 일단의 파시스트들이
로마를 향해 진군했다. 그 때까지 파시스트의 활동을 용인하고 있던 수상 니티는
사태가 여기까지 이르자 비로소 계엄령을 선포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국왕까지도 파시스트 측에 동조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는 계엄 포고령을 거부하고
니티에게 수상직 사임을 권고하는 한편, 무솔리니에게 차기 수상직을 위촉하여
내각을 구성시켰다. 파시스트 군은 1922 년 10월 30일 로마에 도착하고, 같은 날
무솔리니는 수상으로 취임하기 위해 밀라노에서 기차로 달려왔다.
  파시스트들은 승리의 개가를 올리고 무솔리니는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그는
무엇을 대표하고 있었을까? 그의 강령과 정책은 또 무엇이었을까? 거대한
운동이라는 것은 확고 부동한 원칙을 기초로 생성되어 뚜렷한 목표와 프로그램을
가지며, 명료한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하여 확립되는 것이다. 파시즘의 특징은 확고
부동한 원칙이 없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그리고 자유주의에 대한 단순한 반대를
철학으로 할 뿐, 그 배후에는 이데올로기도 철학도 없었다.
  파시스트들이 실질적으로 권력을 장악하여 경찰과 국가 기구를 지휘하는 입장에
있었으면서도 계속 비합법적인 폭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들은 지금도 폭력을 휘두르고 있으며, 국가 경찰이 이에 간섭하지 않음으로 해서
더욱 마음대로 날뛰고 있다. 살인, 고문, 구타, 상당한 가치가 있는 물건들의 파괴
등이 속출했는데, 그 중에서도 파시스트들이 즐겨 애용한 방법은 자신들의 정책에
반대하는 자에게 다량의 피마자 기름을 먹이는 것이었다.
  무솔리니는 이탈리아에서 전능한 독재자가 되었다. 그는 수상일 뿐 아니라 외무상,
내무상, 식민상, 육군상, 해군상, 공군상까지도 겸하고, 게다가 노동상이기도 했다!
사실상 그는 내각 전체였다. 가련한 국왕은 완전히 뒷전으로 물러나 좀처럼
소문에조차 오르는 일도 없어졌다. 의회는 차츰 필요 없게 되어 그 자체가 색이
바랜 그림처럼 되어 버렸다. 반면에 파시스트 대평의회가 득세하게 되었고,
무솔리니가 파시스트 대평의회를 주재했다. 초기에 있었던 외교 문제에 관한
무솔리니의 연설들은 유럽에 커다란 충격과 경악을 안겨 주었다. 그것들은 정상을
벗어난 연설이었다과장되고, 협박으로 가득 찼으며, 전반적으로 외교적인
언사로서는 어울리지 않은 연설이었다. 그는 싸움을 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
같았다. 이탈리아의 제국적 숙명이니, 하늘을 뒤덮는 수많은 이탈리아 군용기니
운운하면서 가끔은 맞대 놓고 프랑스를 위협하기도 했다. 프랑스는 물론
이탈리아보다 강대했으나 싸울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무솔리니의 무례도 묵인하는
형편이었다. 국제 연맹에는 이탈리아도 가맹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솔리니의
야유와 경멸의 특별난 표적이 되었고, 어떤 때는 몹시 고압적인 태도로 국제 연맹에
도전했다. 그래도 국제 연맹이나 여러 나라들은 그것을 참고 견뎠다.
이탈리아에서는 여러 가지로 외면적인 변화가 일어나 여행객은 도처에서 모여
전시하기 위한 규율과 질서를 구경하고는 좋은 인상을 받았다. 수도인 로마는
아름답게 꾸며지고,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야심적인 개혁이 계획되었다. 무솔리니의
뇌리는 새로운 로마 제국의 건설이라는 환상으로 가득 차 있었다. 
  1933 년 6월 26일
    80. 중국의 혁명과 반혁명

  이제 우리는 분쟁으로 꽉 차 있는 유럽과는 일단 이별하고, 그 이상으로 성가신
문제로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중국과 일본으로 눈을 돌려보기로 하자.
  손문은 외국의 도움을 빌려 나라를 산업적으로 발전시켜 개혁하려고 했다. 그
중에서도 그는 미국과 영국의 원조를 기대했다. 하지만 누구도, 또 제국주의 열강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힘을 빌려주는 자는 없었다. 그들은 모두 중국을 착취하는 데
흥미를 느끼기는 했어도, 중국의 행복이나 중국이 강해지는 일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리하여 손문 박사는 1924 년에 이르러 소비에트 러시아로 눈을
돌렸다.
  공산주의는 은밀하면서도 급속히 중국의 학생이나 지식 계층 사이에 퍼져 나가고
있었다. 1920 년에는 이미 공산당이 조직되었으나 어느 정부도 그들의 공공연한
활동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밀 결사로서 활동하고 있었다. 손문은 물론
공산주의자라고 할 수 없다. 그의 잘 알려진 '삼민주의'에도 나타나 있듯이 그는
온건한 사회주의자였다. 하지만 그는 중국이나 그 밖의 다른 동양 여러 나라에 대한
소비에트의 관대하고 솔직한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리하여 손문은 그들과
우호 관계를 발전시켜 나갔다. 그는 몇 명의 러시아인을 고문으로 채용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보로딘으로, 그는 유능한 볼셰비키였다. 보로딘은 광동 국민당의
구심이 되어 대중의 지지를 받는 강력한 국민당 조직을 구축했다. 그는 모든 일을
공산주의자의 노선에 따라 행동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는 당의 민족적인 기반을
유지하려고 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이 때부터 국민당에 입당하는 것을 인정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민족주의적인 국민당과 공산당과의 비공식적인 연합이
이룩되었다. 국민당의 보수적인 부유층에 속하는 멤버들, 그 중에서도 지주층은
공산주의자들과의 연합을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편 많은 공산주의자들도
역시 그것을 기껍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의 강령을 유화
시키는 것을 의미했으며, 그들이 추진하려던 많은 계획을 뒤로 미루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연합은 내부적으로도 견고한 것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뒤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중요한 고비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이것이 중국에 불행을 초래했다.
서로의 이익이 상충되는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계급을 하나의 진영으로 묶는 일은
어떤 경우든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 연합은 계속되고 있는
동안만큼은 순조롭게 성장해 갔다. 빈농의 조직은 활발해지고 급속히 확대되었으며,
노동자의 노동 조합도 마찬가지였다. 광동의 국민당이 진정한 실력을 갖게 된 것은
이같은 대중의 지지 때문이었다. 또한 지주층의 지도자들을 공포에 떨게 하고,
마지막 단계에서 그들이 당을 분열시킨 것도 바로 이러한 대중의 지지 여하에
따라서였다.
  중국은 본질적으로 무수한 농민을 주축으로 하는 농업국이었다. 중국의 공업은
주로 5,6개의 도시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모두 외국인이 지배하고 있었다. 한편
수천만에 달하는 농민이나 빈농은 무서운 빚더미(고리채)에 짓눌려 있었다. 지대
또한 몹시 높았고, 농민은 긴긴 세월 동안 밭에 나가 봐야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게으름만 피우도록 강요당했다.  손문 박사의 정부는 보로딘의 제안에 따라 농민과
노동자를 구제할 법령을 제정했다. 지대는 25 퍼센트로 인하되었으며, 노동자를
위해서는 8시간 노동제와 최저 임금제가 정해지고, 또 농민 조합도 설립되었다.
이러한 개혁이 대중에게 환영받고, 그들을 열광시킨 것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그들은 새로운 조합 밑에 속속 모여들었으며 결속해서 광동 정부를 지지했다.
  이리하여 광동 정부의 지반은 굳어지고, 북방의 군벌들과의 결전 준비가
갖추어졌다. 군관 학교가 설립되고, 군대도 창설되었다. 종교적인 권위가 세속적인
권위로 대체되는 과정은 광동 뿐만 아니라 중국 전체의 흥미로운 발전이었으며,
어느 정도 동양 전체의 발전이기도 했다. 물론 중국은 좁은 의미에서의 종교적인
나라였던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욱 세속적인 나라가 되었다. 종교적인
색채를 띠는 것이 보통이었던 교육도 세속화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현재 많은
불교의 사찰들이 무엇에 사용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곧 알 수 있다. 광동의 어느
유명한 사찰은 현재 경찰 훈련소로 사용되고 있다! 다른 곳에서는 절이 청과물
시장으로 개조되기도 했다.
  손문 박사는 1925 년 3월에 죽었지만, 광동 정부는 보로딘을 고문으로 하여
더욱더 견고한 세력을 구축해 갔다. 그리고 또 얼마 안 가서 외국 제국주의자, 특히
영국인에 대한 중국 민중의 분노를 폭발시킨 몇 가지의 사건이 일어났다. 1925 년
5월에 일본인이 경영하는 상해의 한 방적 공장에서 파업이 일어났는데, 한 명의
노동자가 데모 도중에 피살되었다. 그를 위해 성대한 장례식이 거행되고, 이것이
학생들이나 노동자들의 반제국주의 시위의 도화선이 되었다. 한 영국인 경찰 간부가
부하 경관에게 시위 군중을 향해 발포를 명령했다. 명령은 '쏴 죽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몇 명의 학생이 사살되었다(5^3456,14,245^사건). 영국인에 대한 분노는
전국에 불타올랐다. 그 뒤를 이어 1925 년 6월에는 광동의 외국인 거류지(사문
지역이라고 불린다)에서 크나큰 사건이 일어났다. 중국인 군중, 주로 학생들이
기관총 총격을 받고 52 명이나 사망하고, 그 외 다수의 사람들이 부상당한
사건이었다. '사문 학살'으로서 널리 알려진 이 사건의 주요한 책임자는
영국인이라고 간주되었다. 광동에서는 영국 상품에 대한 정치적인 보이콧이
선언되었다. 그후 홍콩의 무역은 몇 달 동안이나 휴업 상태에 빠져 영국 상사나
정부는 큰 손해를 입었다. 홍콩은, 너도 아마 알고 있는 것처럼 남부 중국에 있는
영국의 영토이다. 그 도시는 광동 바로 가까이에 있어서 거액의 거래가 행해지고
있다.
  손문 박사의 서거 후 광동 정부 내에서는 보수적인 우파와 진보적인 좌파 사이에
격심한 투쟁이 되풀이되었다. 한편이 이겼는가 하면 곧이어 다른 편이 실권을
잡았다. 1926 년 중반 무렵 우파인 장개석이 총사령관이 되어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했다. 이로 양파는 이미 서로 신뢰하지는 않게 되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협력했다. 그런 상에서 광동군의 북벌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수많은 군벌들과 싸워
그들을 내쫓고 전국에 하나의 민족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상해로 진군하여 1927 년 3월 22일 중국인 거주지를 손에
넣었는데, 외국인 조계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이 상해 함락도 역시 교전다운 교전도
없이 이룩되었다. 민족주의자들은 자기편으로 넘어오는 적군과 민족주의자들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도시 노동자의 총파업 덕분으로 상해의 구 정부를 완전히
타도했다. 2일 뒤에는 남경도 민족주의자의 군대에 의해 점령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국민당 내부의 좌파와 우파 세력 사이에 분열이 일어났다. 이것이
민족주의자의 승리에 종지부를 찍는 화근이 되기도 했다. 혁명은 끝났다. 그리고
반혁명이 시작되었다.
  장개석의 상해 진격은 한구 정부의 다수 멤버의 의사에 반하여 추진된 것이었다.
양파는 서로 중상 모략하기 시작했다. 한구 민중은 군대 안에서 장개석의 세력을
일소하고 그를 추방하려 했다. 장개석은 남경에 그의 정부(남경 정부)를 수립했다.
이것은 모두 상해를 점령한지 며칠이 채 지나기도 전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장개석은 자신이 속해 있던 한구 정부에 반기를 들고, 이제까지 날뛰고 있던
공산주의자, 좌파들, 노동 조합주의 노동자들에게 도전했다. 이 노동자들이야말로
상해 점령시 사전 공작으로 장개석을 환호 속에 맞게 했던 바로 수훈의
동지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그들이 체포되고 짓밟힐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총살되고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혹은 구류, 투옥되는 자가
수천에 이르렀다. 민족주의자들이 가져다줄 것으로 믿어졌던 자유는커녕, 상해는
순식간에 아비 규환의 피비린내 나는 공포의 도가니로 변해 버렸다. 
  1933 년 6월 29일
    81. 일본 제국주의 침략 정책

  일본인은 철저한 애국주의와 조국에 대한 희생 정신으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애국주의는 몹시 침략적인 것이었으며, 세계 제국을 꿈꾸는 것이라는
사실은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 1915 년에 새로운 종파가 일본에서 창시되었다.
이것은 '오모토교'라고 일컬어지는 것으로서 급속히 전국에 보급되었다. 이 일파의
주요한 교리는 천황을 원수로 받드는 일본은 전세계의 지배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세계 대전 중에 일본은 '21개조의 요구'를 하여 중국을 괴롭히려고 했다. 일본은
미국이나 유럽 여론의 반발 때문에 뜻대로 소망했던 바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큼직한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전후 차르 제국의 붕괴를 일본은
아시아에서의 세력 확장을 위한 절호의 기회로 이용했다. 일본군은 시베리아에
침입하고, 그 특무 기관을 중앙 아시아의 사마르칸트나 부하라에까지 설치했다. 이런
불장난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회복, 그리고 미국의 반대와 불신 때문에 실패로
끝났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일본과 미국간의 이상한 기류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했다. 그들은 서로 심각하게 증오했으며,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서로 적대시하고
있었다. 1922 년의 워싱턴 회의는 일본에게는 대타격이었음에 반해 미국 외교로서는
일대 승리였다. 이 회의에서는 일본을 포함한 9개국의 중국 영토 보전을
서약했는데, 이것은 일본이 중국에 대한 일체의 세력 확장 야망을 포기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미국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적의를 띤 포위자들에 둘러싸여 고립감에 빠져 있던 일본은 러시아로 눈을 돌려
1925 년 1월 러시아와의 조약에 서명했다.
  일본은 궁지에 빠졌기 때문에 러시아와 협상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이
공산주의를 지지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공산주의는 천황 숭배와 봉건주의, 그리고
지배 계급을 위한 대중의 착취를 비롯한, 실로 기존 질서가 지지하는 모든 것에
대한 폐기를 의미하고 있었다. 이런 공산주의가 일본에서는 강대한 산업 세력에
의해 더 큰 착취를 당하고 있던 대중의 빈곤 때문에 널리 퍼지려 하고 있었다.
인구는 날로 증가해 가고 있었는데, 미국에도 캐나다에도 호주의 황무지에마저도
이주시킬 수가 없었다. 문호가 굳게 닫혀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은 가까이에
있었지만 이미 과잉 인구 상태였다. 코리아와 만주에는 얼마간의 이민이 건너갔다.
  일본은 자신들의 특유한 곤란과 여러 가지 문제 외에도, 전세계가 겪고 있던
공업화의 공통적인 난관과 무역 불황에 직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국내 정세가
더욱 위기를 맞게 됨에 따라 공산주의자와 아울러 일체의 진보 사상에 대한 극심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1925 년에는 '치안 유지법'이 제정되었는데, 그 조문이 무척
재미있어서 이 법률의 제1조를 너한테 보여주겠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국체를 변혁할 것을 목적으로 하여 결사를 조직하는 자는 사형이나 무기 또는 5
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그 정(설정 정)을 알면서 결사에 가입한 자는 2 년
이상의 유기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 사유 재산 제도를 부인할 목적으로 하여
결사를 조직한 자와 결사에 가입한 자는 10 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

  공산주의자뿐만 아니라 모든 형태의 사회주의적, 급진적 내지는 입헌적인 개혁을
봉쇄하는 이런 법률의 극단적인 엄격함은 일본 정부의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의
정도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1931 년 일본 정부는 만주에서 공공연히 침략적인 태도를 취했다. 극심한 경제
공황에 빠진 그들이 국민들의 관심을 밖으로 돌리고, 아울러 국내의 긴장을
완화시키기 위해서는 국외에서 무슨 짓을 저지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혹은
정부의 실권을 장악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또 다른 열강이 모두 자국의 문제나 무역
불황에 정신이 없어 간섭해 오지 않을 것을 예상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들 모든 이유가 한 덩어리가 되어서 일본 정부는 그와 같은 중대한 발걸음을 한
발짝 내딛게 된 것 같다. 이러한 조치가 중대했다는 것은 그것이 1922 년의 9개국
조약에 명백히 위반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 국제 연맹 규약을 위반한 것이기도
했다. 중국도 일본도 모두 국제 연맹의 가맹국이었으며, 가맹국인 이상은 국제
연맹에 통고하지 않고서는 서로 공격할 수 없었다. 그리고 끝으로 그것은 전쟁을
추방하기 위해서 체결된 1928 년의 파리(혹은 켈로그) 조약을 명백히 위반한
것이기도 했다. 중국에 대해 전쟁과 유사한 작전을 수행함으로써 일본은 계획적으로
이들 조약이나 협정을 깨뜨리고 세계에 도전했던 것이다.
  1932 년 1월 일본군은 돌연히 상해 일대를 공격하여 현대의 일로서는 가장
전율할 만한 끔찍한 학살 행위를 자행했다. 그들은 서구 열강을 자극하는 것을
고려해서 외국의 조계 지역은 피하고 인구가 밀집되어 있는 중국인 지구를
공격했다. 상해 부근의 광대한 지역, 즉 갑북은 폭격을 당해 철저히 파괴되었다.
수천 수만의 사람이 죽고 부지기수의 사람들이 집을 잃었다. 이것은 분명히 군대를
상대로 한 전투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무고한 민중에 대한
폭격이었다. 이러한 무모한 작전을 지휘했던 해군 제독은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면서
"일본군은 특별한 온정을 가지고, 민중에 대한 무차별 폭격은 앞으로 2일 이상 더
계속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언명했다! 친일적인 런던 '타임스'의 상해
특파원마저도, 이 일본인의 중국에 대한 말을 빌려 '대규모의 살육'에는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하물며 중국인이 그 사건에 대해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는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하겠다.
  공포와 분노의 물결이 휩쓸었고, 중국 내의 모든 군벌과 정부도 이런 야만적인
외국의 침략에 직면하자 역시 그들도 상호 적대 감정을 잊거나, 아니면 적어도 잊은
듯이 보였다. 일본에 대한 통일 전선 결성의 기운이 일어났으나, 오지에 있던 공산당
정부와 장개석은 분명히 전진해 오고 있는 일본군의 손으로부터 상해를 지킬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남경 정부가 한 것으로는 국제 연맹에 항의서를 제출하는
정도가 고작이었을 뿐, 일본에 대해서 통일적인 저항의 움직임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입으로만 허세를 부렸고, 게다가 나라 전체에서 분노가 들끓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저항할 의욕조차 없는 듯한 형편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남방에서 급히 편성된 군사가 달려왔다. 그들은 '19로군'이라고
불렸다. 이것은 광동인으로 구성된 부대였으나, 남경 정부나 광동 정부의 지휘하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변변한 장비도 구경이 큰 총포도 없었으며, 겨울철
중국의 혹한으로부터 몸을 지킬 만한 군복도 없는 초라한 차림새에 결함 투성이의
군대였다. 복무하는 병사 중에는 14--16세쯤의 소년이 많았고, 나이가 좀 들었다
해도 겨우 20세 정도밖에 안되었다. 이런 불완전한 군대가 장개석의 명령을
무시하고 일본군과 싸워서 그들의 침략을 막아냈다. 1932 년의 1월과 2월의
2주간에 걸쳐서 그들은 남경 정부로부터 아무 원조도 받지 못했지만, 훨씬 강대하고
장비가 우세한 일본군을 전혀 예기치 않았던 궁지에 몰아넣을 만큼 눈부시고도
영웅적인 정신을 발휘해 싸웠다. 일본인뿐만 아니라 외국의 열강이나 중국인
자신들까지도 모두 깜짝 놀랐다. 모든 사람들의 칭찬 속에서 이들의고군분투가
2주간의 계속된 뒤에야 비로소 장개석은 예하의 몇 개 부대를 투입했다.
  19로군은 어느 사학자의 말처럼 역사를 만들어 내고 세계에 이름을 빛냈다.
그들의 방어전이 일본의 계획을 뒤엎었을 뿐만 아니라, 서구 열강도 상해에서의
자신들의 권익에 관한 불안에 빠지게 되는 등 사태가 심각해지자, 일본군은 서서히
상해 지구에서 물러나 배를 타고 철수해 버렸다. 이들 서구 열강은 수천 수만의
중국인이 학살된 갑북 사건 같은 대만행이라든가 또는 엄중한 조약이나 국제 규약에
대한 위반 행위에 대한 관심보다도 자신들의 경제적인, 또 그 밖의 수지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기억해야 할 일이다. 국제 연맹은 몇
번이나 이 사건에 개입할 듯했으나 그 때마다 행동을 연기하는 구실을 찾아내었다.
이 사건에서는 공식적인 선전 포고가 없었기 때문에 진짜 전쟁이 아니라고 했다!
국제 연맹의 명성과 위신은 이러한 저자세와 거의 계획적으로 자행된 범죄에 대한
묵인으로 크게 실추되었다. 이에 대한 책임이 몇몇 강대국에 있었던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특히 영국은 국제 연맹 내에서 친일적인 태도를 취했다.
  일본은 상해에서 철수했지만, 그들은 만주에 이전보다 한층 더 많은 관심을
집중했다. 그들은 그곳에 괴뢰 정부를 세우고 만주는 자결의 권리를 행사한다고
선언했다. 이 새로운 괴뢰 국가는 '만주족'이라 일컬어졌고, 청나라의 후^36^예에
해당하는 그다지 풍채도 좋지 않은 청년이 새 국가의 군주로 추대되었다. 말할
나위도 없이 모든 것은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고, 만주의 현실적인 통치자는
일본이었다. 만약 일본군이 철수라도 한다면 만주국은 하룻밤 사이에 전복되어 버릴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었다.
  국제 연맹이 되도록이면 결정을 회피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동안 일본은 새로운
조치를 취했다. 1933 년 정초 설날을 틈타 일본군은 돌연 중국 본토에 진격하여
만리 장성의 중국 쪽에 있는 산해관을 공격했다. 대구경포나 구축함으로부터의
포격과 비행기로부터의 폭격이 자행되었다. 이것은 완전히 현대적인 공격이어서
산해관은 '잿더미'가 되고, 다수의 비무장 주민이 죽거나 중상을 입었다. 드디어
일본군은 열하성으로 진군해서 북경 부근까지 육박해 들어갔다. 비적들이 열하성을
만주국 공격의 본거지로 삼아 왔다는 것, 그리고 열하성은 만주국의 일부라는 것이
그들의 침략 구실이었다!
  이런 새로운 수법의 공격과 정초 설날의 학살 사건은 국제 연맹을 놀라게 했고,
비교적 작은 강대국들의 주장에 의해서 국제 연맹은 일본을 비난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일본은 이에 개의치 않고(그 이유는 영국을 포함한 몇몇 강대국이 몰래
일본을 후원했던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국제 연맹에서 자진 탈퇴해
버렸다. 국제 연맹을 탈퇴한 일본은 묵묵히 북경을 목표로 진격해 가고 있었다.
별다른 저항도 받지 않고 일본군이 북경의 성문에 도달한 1933 년 5월, 중국과
일본의 휴전을 발표되었다. 일본의 공격에 대해 비루한 모습을 보인 남경 정부와
국민당이 중국에서 현저히 인기를 잃은 것도 무리는 아니다. 
  1933년 7월 7일, 9일, 11일
    82.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이번에는 소비에트에 나라, 러시아로 돌아가서 일단 중단되었던 이야기의
실마리를 찾아 더듬어 보기로 하자.
  1917 년부터 1921 년에 이르는 혁명 후의 최초의 4 년간은 혁명을 수많은
적으로부터 방위하는 전쟁의 시기였다. 이것은 대중의 십자군적 열광과 이상을
지키기 위해 나타난 영웅적인 행위에 의해 빛나는, 전쟁, 반란, 내전, 기아, 죽음이
교차되는 숨막힐 듯한 시기였다. 당장의 수확으로 무엇 하나 얻어진 것 없이 끝나
버렸지만, 커다란 희망과 약속이 사람들의 마음을 충족시켜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무서운 고통을 견뎌 내게 했고, 한참 동안은 그들의 텅 빈 뱃속의 허기까지 잊게
했던 것이다.
  레닌이 1921 년에 신경제 정책, 즉 네프(NEP)를 채용하고부터 사소한 약간의
이완이 있었다. 이것은 공산주의로부터의 후퇴이며, 국내의 부르주아적 요소와의
타협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볼셰비키 지도자들이 그들의 목표를 변경해 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나중에 보다 큰 전진을 하기 위한 일보 후퇴로서, 휴식을
취하고 기운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소비에트는 태반의 파괴되어 황폐된 위에서 본격적으로 국가 재건이라는
방대한 사업에 몰두하게 되었다. 건설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이를테면 기관차,
차량, 트럭, 트랙터, 공장 시설 따위의 기계와 재료가 필요했다. 그들은 이들 물자를
외국에서 사들여야 했는데 그러자니 돈이 없었다. 이를 위해서 그들은 그들이
사들인 물자를 적당한 분할 불입으로 상환할 수 있도록 거래선인 외국 여러 나라에
신용 대부를 요청했다. 이것은 관계국이 상호 협상할 수 있는 관계에 있을 때 얻을
수 있는 것이며, 또한 쌍방이 상호간에 공식적으로 승인한 관계가 아니고서는
협상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소비에트 러시아는 다른 국가의 승인을
얻고 그들과 외교와 통상 관계를 수립하는 데 매우 열성적이었다. 그러나 제국주의
열강들은 볼셰비키와 그들의 혁명 사업 모두를 증오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공산주의는 그대로 방치해 두어서는 안될 해악이었다. 사실 그들은 간섭 전쟁 기간
동안 이 세력을 타도하기 위해서 전력을 기울였으나 결국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들은 가능한 한 소비에트와 교섭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세계의 6분의 1을
지배하게 된 정부를 무시하기는 어려웠다. 하물며 값비싼 기계를 대량으로
사들이겠다는 좋은 고객을 소홀히 대접하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러시아와 같은
농업국과 독일, 영국, 미국과 같은 여러 공업국 간의 무역은 러시아가 기계를 필요로
하면서 원료나 식량을 값싸게 공급할 수 있었기 때문에 쌍방은 서로 편리할 수밖에
없었다.
  돈에 대한 매력은 궁극적으로는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보다도 컸기 때문에, 거의
모든 나라들이 소비에트 정부를 승인했고, 그 중에는 이들과 조약을 체결하는
나라도 많았다. 소비에트의 승인을 완강히 거부한 유일한 강대국은 미국이었다.
그러나 러시아와 미국 간에 무역 거래는 계속되고 있었다.
  레닌이 1921 년에 채택한 신경제 중농층은 사회주의화하려는 것이었다.
부농^6,36^그들은 쿨라크라고 일컬어졌는데, 이 말은 주먹을 의미한다^3,63^은
소규모의 자본가이며, 사회주의화 과정을 저해하는 존재였기 때문에 우대 받지
못했다. 레닌은 또 농촌 지역의 대대적인 전기화 계획에 착수해서 거대한 발전
시설이 몇 개나 건설되었다. 이것은 여러 가지 점에서 농민의 이익을 도모하고,
국가와 공업화를 촉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특히 농민층 사이에 공업에 대한
심성을 양성하여 그들을 도시 노동자에 가까운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는 것이었다.
농민들은 마을마다 밝은 전등이 켜지고 많은 농경 시설이 전력에 의해 가동됨에
따라, 낡은 관습이나 미신에서 벗어나 새로운 노선에 따라 사고하는 힘을 갖추게
되었다.
  도시와 농촌, 도시민과 농민 사이에는 반드시 이해의 충돌이 있기 마련이다.
도시의 노동자는 농촌에서 산출되는 식량과 원료는 싼값에 얻고자 한 반면에,
자신들이 만든 공업 제품은 비싼 값으로 팔기를 원했다. 한편 농민들은 도시에서
생산되는 도구나 공업 제품을 값싸게 손에 넣기를 바라면서 자신들이 생산하는
식량이나 원료는 비싸게 팔고자 했다. 러시아에서의 이런 다툼은 4 년에 걸친 전시
공산주의의 결과로서, 더욱 더 첨예화되려 하고 있었다. 신경제 정책이 채용되어
농민들에게 개인적인 상업을 영위하는 편의가 주어진 것은 주로 이같은 사정
때문이며, 그러한 긴장을 완화시키려는 것이었다.
  내전 중 제정 러시아는 산산조각이 나고, 한참 동안은 소비에트 공화국도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주변의 소지역을 지배하는 데에 불과한 형편이었다. 서구
열강의 지원을 받은 발트 해에 접한 몇 민족^6,36^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3,63^은 독립 국가가 되었다. 폴란드도 물론 독립했다. 러시아의
소비에트가 내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외국 군대가 철수하자 개별적인 독립 소비에트
정부가 시베리아나 중앙 아시아에 속속 수립되었다. 공통의 목적을 가진 이들
정부는 당연히 서로 긴밀하게 제휴했다. 1923 년에 그들은 합류해서 소비에트 연방
혹은 정식 호칭으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을 결성했다. 이 명칭은 흔히
그 머릿글자를 따서 U.S.S.R로도 불린다.
  레닌이 죽자 정치 주도권을 놓고 분규가 일어났다.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대립은
개인적인 것이었으나 실은 개인적인 문제 이상의 것이기도 했다. 그들은 각기
상이한 정책을 대변하고, 상반되는 혁명의 전개 방식을 대표하고 있었던 것이다.
트로츠키는 혁명이 일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영구 혁명의 이론'을 제창하고 있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아무리 혁명에 좋은 조건이라 하더라도 단일 국가가 완전한
사회주의를 수립할 수는 없으며, 농민은 세계 혁명을 거쳐야 비로소 사회주의화되기
때문에 진정한 사회주의는 세계 혁명을 거친 뒤에 비로소 실현된다는 것이었다.
사회주의는 경제 발전 단계상으로 볼 때 자본주의의 다음 단계에 도래하는 보다
높은 단계로 간주되었다. 자본주의는 국제적이 됨에 따라 붕괴하기 마련이며, 오직
사회주의만이 이러한 국제적인 구조를 이롭게 할 수 있고, 여기에 사회주의의
필연성이 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러나 만약 어떤
나라^6,36^즉 국제적이 아니라 국가적으로^3,63^가 사회주의를 추진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경제적으로 보다 낮은 단계로 역행하는 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국제주의는 사회주의적 진보마저도 포함해서 모든 진보에 필요 불가결한 기초를
이루는 것으로, 거기서 후퇴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또 바람직한 일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트로츠키에 따르면 소비에트 연방과 같은 큰 나라도 어쨌든 고립된 한
나라만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것은 경제적인 관점에서 볼 때 불가능한
일이었다. 소비에트가 자립하기 위해서는 서유럽의 여러 공업국에 의존해야 할
경우가 수없이 많았다. 그것은 말하자면 도시, 농촌 혹은 지방과의 상호 의존
관계와도 같은 것이었다. 공업이 진척된 서유럽을 도시로 친다면 러시아는 한마디로
지방이었다. 정치적으로도 역시 고립된 사회주의 국가는 자본주의적 환경 속에서
오랫동안 생명을 유지해 갈 수 없다는 것이 트로츠키의 견해였다. 이 둘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여러 자본주의 국가가 사회주의 국가를 타도해서 없애거나,
아니면 도처의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혁명이 일어나 사회주의가 실현되거나 어느
하나의 길밖에는 없을 것이다. 물론 잠시 동안은 양자가 불안정한 균형을
유지하면서 공존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스탈린과 트로츠키 사이의 대립의 불씨가 된 것은 스탈린이 농민을 혁명의 주체로
끌어들이기 위해 어떤 농업 정책을 강행할 것을 제안한 데에 있었다. 이것은 여러
외국의 정서와 상관없이 러시아에 일국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을 기도한 것이었다.
트로츠키는 이에 반대하여 그가 제시한 '영구 혁명의 이론'을 고집하고 양보하지
않았는데, 이것을 전제로 하지 않는 한 농민은 완전히 사회주의화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실제로 스탈린은 트로츠키의 이론에서 배운 바 적지 않았으나, 그는
그것을 트로츠키의 방식이 아닌 자기의 방식대로, 자신의 손으로 실행했다. 이 일과
관련해서 트로츠키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그러나 정치에서 결정적인 것은 단지
'무엇을'이 아니라, '어떻게' 또 '누가'라는 것"이라고 쓰고 있다.
  결국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몰아내고 자신의 방식으로 경제 계획을 추진했다.
이것이 바로 5개년 계획(1928--32)이다. 5개년 계획의 목적은 소비체트 연방에
공업 문명의 확고한 기반을 구축하는 데에 있었다. 이 구상과 배치는 다른 것과
같이 아무나 물건을 생산하는 공장을 몇 개 짓는 것과는 달랐다. 그런 것이라면
외국에서 기계 부품을 도입하여 그것을 조립만 하면 되듯이 아주 쉬운 일이다.
이러한 소비 물자를 생산하는 공업을 '경공업'이라 한다. 경공업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중공업', 즉 제철업과 기계 공업에 의존해야 한다. 이런 중공업이 경공업을 위한
기계, 시설, 그리고 동력기 따위를 공급하는 것이다. 소비에트 정부는 먼 장래를
예견하여 5개년 계획에서는 이같은 종류의 기초 산업, 혹은 중공업의 기초를
견고하게 수립했다. 그리고 그 위에 경공업을 수립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중공업은 또한 기계 내지는 군수 자재에 있어서 외국에 대한 러시아의 의존성을
크게 경감시킬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중공업의 길을 택한 것은 명백하게 현명한 처사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것은 민중에게 훨씬 더 많은 노력과 무서운 괴로움을 지우는
것을 뜻했다. 중공업을 건설하려면 경공업에 비해 훨씬 더 많은 경비가 들며, 또
그것이 수지면에서 채산을 맞추게 되려면 더욱 더 긴 기간이 필요하다. 방적
공장에서 옷감을 생산하면 이것은 곧 많은 사람들에게 팔리게 된다. 소비 물자를
생산하는 경공업이라면 어떤 경우에든 대충 그런 것이다. 그러나 철강이나 제철을
다루는 공업이 되면 제조되는 것이 철도의 레일이나 기관차이다. 이들은 철도가
완성될 때까지는 소비되지도 않으며 사용되지도 않는다. 거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며, 때가 될 때까지는 많은 돈이 그 사업에 투자되기 때문에 국가는 더욱
재정적인 곤란을 겪게 된다.
  5개년 계획 기간 중 세계는, 아니 자본주의 세계는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최대의 불황에 시달리고 있었다. 무역은 감소하고, 공장은 휴업했으며 실업자는
늘어나고 있었다. 전 세계의 농민은 식량과 원료 가격의 대폭락 때문에 심한 타격을
입었다. 소비에트 연방의 놀랄 만한 활동성과 무실업 상태는 다른 나라들의
무기력과 실업자가 격증하는 사태와 비교해 볼 때 두드러진 대조를 이루었다.
연방은 세계 불황에 좌우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으며, 그것의 경제 기반은 전연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역시 불황의 영향을 피할 수는 없었다. 불황은 간접적으로
침투해 들어와서 소비에트의 곤란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었다. 나는 소비에트가 농업
생산물을 외국에 팔아서 그것으로 외국에서 기계를 사들이는 대금으로 충당해
왔다는 것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세계 시장에서 식량 등의 가격이 하락하자,
소비에트가 수출 대금으로 받아들이는 금액도 자연적으로 적어졌다. 그러나
외국에서 사들이는 기계의 대가를 지불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액수의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식량 수출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이런 사정이어서 세계 무역의 불황은
소비에트에게도 손실이었으며, 여러 가지 면에서 계획에 차질을 빚게 했다. 또한
이것이 이 나라에 많은 필수품의 부족을 조장함으로써 더욱더 생활을 고통스럽게
했던 것이다.
  1933 년 1월 1일 제2차 5개년 계획이 개시되었다. 이것은 생활 수준을 급속히
향상시키게 될 경공업 건설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거기서는 제1차 5개년 계획의
긴장과 결핍을 지나서 보다 많은 안락과 보다 좋은 생활 수준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제는 필요한 기계의 대부분을 더 이상 외국에서 구입하지
않아도 되었다. 왜냐하면 소비에트의 중공업이 이 기계들을 공급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수입 물품 대금을 지불하기 위해서 대량의 식량을 국외로
수출하지 않아도 되었다.
  읽고 쓰기의 보급과 교육의 진보는 광범위한 독서층을 만들어 내어, 아마 다른
어떤 나라보다 더욱 많은 서적과 신문이 인쇄되고 있을 것이다. 이들 책은 대부분
진지하고 '딱딱한' 서적으로,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있는 가벼운 소설 따위가 아니다.
러시아의 노동자들은 기술이나 전기에 관한 것에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에
관한 책을 소설보다 더 재미 있어 한다. 어린이들을 위한 옛날 이야기나 동화는
볼셰비키의 정신에 부합되지 않아 금해질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실제로는 옛날
이야기를 포함하여 아주 재미난 책들이 출판되고 있다.
  소비에트는 순수 과학이나 응용 과학 분야에서도 이미 최첨단을 걷고 있다. 여러
과학 부문의 거대한 연구소나 실험 시설이 잇달아 창설되고 있다. 레닌그라드에는 2
만 8천 종에 이르는 소맥을 연구하기 위한 방대한 식물 연구소가 있으며, 또한
비행기로 볍씨를 뿌리는 실험도 하고 있다.
  러시아의 여성은 아마 어떤 나라보다도 많은 자유를 누리고 있으며, 국가로부터
특별한 보호를 받고 있다. 그녀들은 모든 직업에 참가하여 무척 많은 숫자의
여성들이 기술자가 되었다. 세계에서 최초의 여류 대사가 된 것은 고참 볼셰비키인
콜론타이 여사이며, 또 레닌의 미망인 크루프스카야는 소비에트 교육성 장관이다.

  1933 년 7월 13일, 14일
    83. 과학의 발달

  나는 상당히 길게 전후 세계에서 일어난 정치적 사건에 대해서 쓰고, 또 경제적
변화에 대해서도 얼마쯤 언급한 바 있다. 이제 나는 방향을 바꾸어 주로 과학과
그것의 영향에 대해서 적어 보기로 하겠다.
  현대의 지식은 대단히 복잡하고 또 광범위하다. 수만 명이나 되는 연구자가
제각기 전문 분야에 따라 끊임없이 연구를 하고, 각자의 연구실에 틀어박혀 시험에
실험을 거듭함으로써 지식의 조각을 쌓아올려 산더미를 만들고 있다. 지식의 분야는
너무도 넓어서 여기에 종사하는 자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의 부문에서 전문가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는 지식의 다른 부문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도 종종 있다.
즉 그들은 지식의 어느 부문에는 정통하지만 다른 많은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수가 있다. 따라서 그들은 인류 활동의 총체에 대해서 현명한 전망을
갖기 어렵다. 그들은 옛날 말로 하면 교양이 있다고는 할 수 없다.
  물론 스스로 전문가이면서 좁은 전문 분야를 초월하여 더욱 넓은 전망을 가질 수
있는 사람도 없지 않다. 이런 류의 사람들은 전쟁이나 인간 상호간의 논쟁에도
꺾이지 않고 과학적 연구를 계속해서 최근 15 년 동안 지식에 대해 괄목할 만한
공헌을 했다. 오늘날 최대의 과학자는 독일 태생의 유태인으로서, 히틀러 정부의
유태인 배척 정책에 밀려 독일에서 쫓겨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라 생각된다.
  아인슈타인은 수학상의 복잡한 계산에 입각하여 전 우주에 관계되는, 어떤 종류의
새로운 기본적 물리 법칙을 발견했다. 그와 함께 그는 2백년에 걸쳐 자명의 진리로
받아들여졌던 뉴턴의 법칙을 정정했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매우 재미있는
방법으로 확증되었다. 이 이론에 따르면 빛은 독특한 운동을 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태양의 일식 기간 중에 실증될 수 있다. 사실 일식이 일어났을 때 빛은 그의
이론대로 운동을 한다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이리하여 수학적 추리에 의해 도달된
결론은 구체적인 실험에 의해 증명되었다.
  이 이론은 몹시 난해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너에게 설명할 생각은 없다. 그것은
'상대성 이론'이라 일컬어진다. 우주 문제에 몰두하면서 아인슈타인은 시간이라는
개념과 공간이라는 개념은 분리해서는 생각될 수 없는 것임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는 이런 두 가지의 분리된 개념을 배제하고 양자를 일체로 하여 고찰하는 새로운
개념을 제출했는데, 이것을 공간시간의 개념이라 한다.
  아인슈타인은 우주를 연구했다. 한편 그와는 반대로 어떤 과학자들은 또
무한소(없을 무, 한정 한, 작을 소)의 문제를 추구한다. 너의 육안으로는 겨우 보일
만한 미세한 것이를테면 핀의 끄트머리를 생각해 보아라. 핀의 끄트머리는
과학적 방법으로 논증된 바에 따르면, 어떤 의미에서는 우주 그 자체와도 같은
것이라 하겠다! 그 안에는 서로 맹렬한 속도로 회전하는 분자가 있는데, 그들
분자의 하나 하나가 또 상호 충돌함이 없이 무제한으로 상호 회전하는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각 원자는 방대한 수의 전기 미립자 혹은 전하체, 또는
그것이 무엇이든 역시 놀랄 만한 속도로 부단히 운동을 계속하고 있는 양자와
전자로 구성되어 있다. 양전자, 중성자, 중양자에 이르러서는 더욱 작아서 양전자의
평균 수명은 대충 1억분의 1초로 계산되고 있다! 이것은 모두 무한소로 작은
규모이기는 하지만 마치 혹성이나 항성이 우주 공간을 무한적으로 순환하고 있는
상태를 생각케 한다. 분자는 아무리 성능이 좋은 현미경을 사용해도 도무지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크기라고 생각하면 된다. 원자나 양자나 전자 등에 이르면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그래도 과학 기술은 이들 원자나 전자에 관한 방대한 연구
보고서가 산더미같이 쌓일 정도로 발전하고 있다. 그래서 최근에는 원자가 분할되게
되었다.
  과학의 최신 이론을 고찰해 보면 눈앞이 현란할 정도이다. 그리고 그 의의를
충분히 평가하기도 어렵다. 여기서 가장 놀랄 만한 것을 하나 소개하겠다. 우리는
우리에게 이렇게 큰 지구가 그 자체는 하찮은 별로서, 태양에 종속된 유성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태양계도 공간의 대해 속에서는 아주 작은 물 한 방울
정도밖에는 되지 않는다. 우주 속의 거리는 그 어느 곳에서 우리가 사는 곳까지
빛이 도달하는 데에 수천년이나 수만 년 또는 수백만 년이 걸릴 만큼 광대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늘의 별을 볼 때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지금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한테까지 도달한 광선이 거기를 출발해서 몇백년이 걸렸는지, 아니면
몇천년이 결렸는지 모를, 긴 여행길에 올랐을 때 다만 거기에 있었던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이같은 사정은 모두 일반적인 아인슈타인의 공간시간 개념이 이런
것들을 이해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공간은 잠시 놔두고,
시간만을 생각해 보더라도 과거와 현재가 너저분하게 혼돈 되고 만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는 별은 우리로서는 현재의 것이지만, 그러나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과거의 것이며, 광선이 여행길에 오른 뒤 지금보다 훨씬 이전에 사라졌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의 태양도 하찮은 별이라고 말했다. 그 밖에도 약 10 만 개의 별이 있어
이들이 모두 모여서 이른바 은하를 이루고 있다. 우리가 밤하늘에 보이는 별의
대다수는 이 은하를 형성하고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그 중에서도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강력한 망원경으로 보면 더욱 많은 별을
볼 수 있다. 이 방면의 전문 학자의 계산에 따르면 이 우주에는 10 만 개 정도의
서로 다른 은하가 있다고 한다.
  또 하나 놀라운 것은 이 우주가 자꾸 팽창되어 가고 있다는 점이다. 제임스
진스라는 한 수학자는 우주를 비누 방울의 둥근 면으로 보고, 이 비누 방울이 점점
커져 가는 것에 비유하고 있다. 이 비누 방울과 같은 우주는 그것을 꿰뚫고
여행하는 데 수억 수조 년이나 걸릴 만큼 큰 것이라고 했다.
  물리학과 화학은 19세기의 대표적 과학이었다. 그것은 인간에 의한 자연 또는
외계의 지배를 도왔다. 점차 과학은 관심이 내부로 돌려져서 자기 자신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생물학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이것은 인간이나 동물, 식물의 생활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벌써 그것은 눈부신 진보를 보여서 생물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주사나 그 밖의 방법에 의해 인간의 성격이나 기질에 변화를 일으킬 날도 머지 않아
오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아마도 비겁한 사람이 용기있는 사람으로 개조될 수도
있을 것이며, 또 더욱 일어날 수 있음직한 일은 어떤 정부가 이같은 방법으로 그의
비판자나 반대자의 저항력을 말살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생물학의 다음 단계는 인간의 마음이나 사상, 동기, 공포, 욕망 따위를 다루는
과학심리학이다. 과학은 그리하여 새로운 분야로 차례차례 손을 뻗어 우리들 자신에
대한 지식을 심화시키고, 그것에 의해 아마 우리들 자신을 지배하는 것을 돕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어느 특정 동물에 대한 연구가 과학의 발달에 기여한 것도 흥미 있는 일이다.
현대 러시아의 유명한 과학자 이반 파블로프는 특히 개가 먹이를 보았을 때 입에
침을 흘리는 것에 주의하여 자세하게 개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는 개의 입안의
침을 측정해 보았다. 이를 보았을 때 개의 입안에 고인 침은 '무조건 반사'라고
불리는 자동적인 현상으로, 유아가 아무런 사전 경험 없이도 재채기를 하거나
하품을 하거나 기지개를 켜는 것도 모두 같은 원리이다.
  파블로프는 이번에는 '조건 반사'를 낳는 연구를 했다. 즉 그는 개에게 어떤
일정한 신호를 보냄으로써 먹이를 얻을 수 있다고 느낄 수 있도록 가르쳤다. 이
신호가 개의 마음속에서 먹이와 일단 결부되면, 신호가 울리기만 하면 먹이가 당장
눈앞에 없어도 이가 있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낳는다는 결과가 얻어졌다.
  개와 그 침에 관한 이러한 실험은 인간 심리학의 기초가 되어 유년 시절의 인간이
얼마나 수많은 '무조건 반사'를 갖고 있고, 성장함에 따라 어떻게 차츰 '조건
반사'가 발달하는가를 제시했다. 사실 우리가 습득하는 것은 모두 여기에 기인한다.
우리는 이렇게 하여 습관을 기르고 언어 등을 배우고 익힌다. 우리의 행동도 말할
나위 없이 쾌감과 불쾌의 양쪽에 기인한 반사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공포에
대해서는 누구나가 동일한 반사를 나타낸다. 인간이 바로 가까이에서 뱀을 보았을
때나 혹은 뱀과 비슷한 모습을 한 것을 보았을 때에도 앞뒤 생각할 여유 없이
재빨리 피하는 것은 구태여 파블로프의 실험에 관한 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파블로프의 실험은 심리학 분야에도 혁명을 불러일으켰다.
  그렇다고 해서 과학이 절대 오류가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과학이 잘못된 길로
인도되면 현대 문명이라는 것을 공동의 재앙으로 몰고 갈지도 모른다. 이러한
재앙이 결코 우리와 거리가 멀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말아라.
우리가 이제까지 보아 왔듯이 과학은 많은 좋은 결실을 맺어 왔지만, 반면 또
전쟁의 공포를 극도로 심화시켰다. 국가나 정부는 때때로 순수 과학, 응용 과학을
불문하고 과학의 여러 부문을 관심을 갖고 고려해 보는 경향이 없었지만, 과학의
호전적 측면만은 결코 무시한 적이 없었다. 그들은 자기를 무장하고 강력하게 하기
위해서는 최신의 과학 기술을 철저하게 활용했다. 궁극적으로 볼 때 대다수 국가는
힘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과학 기술은 모든 정부를, 대부분은 전혀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상태에서 타국민을 침해할 수 있을 만큼 강대하게 만들었다. 
  1933 년 7월 19일. 21일
    84. 대공황과 세계의 위기

  자본주의 세계의 일반적인 관측으로는 경제 공황은 과거의 불황과 마찬가지로
언젠가는 지나가고, 세계는 서서히 다음 단계인 호경기로 안정되어 갈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었다. 사실 자본주의의 생명은 번영과 공황을 주기적으로 반복하면서
오늘까지 이어져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무계획적이고 비과학적인 자본주의
사회에 내재하는 본성으로서 이미 오래 전부터 지적되어 오던 바였다. 산업의
호황은 갑작스럽게 활기에 찬 경기를 초래하여, 누구든지 거기에서 이익을 올리기
위해 가능한 한 최대한 생산하려고 했다. 그 결과 과잉 생산즉 공황이
밀어닥쳐 산업은 또다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침체 기간 중에 쌓였던 재화가
조금씩 팔려 나가면, 산업은 또다시 활발해져서 곧 다음의 호경기가 되돌아왔다.
이렇게 흔히 볼 수 있던 순환에 비추어 많은 사람들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틀림없이 호황기 또는 번영이 돌아올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1929 년에 이르러 형세가 갑자기 역전되어 사태는 더욱 심각해졌다.
미국이 독일과 남아메리카 여러 나라들에 대한 금융 차관을 중지하자, 종래의 대차
지불의 인위적인 구조가 한꺼번에 무너지고 말았다. 미국 자본가들이 영구히
계속해서 돈을 빌려주지는 않으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오직 채무자의 부채를 증가시키기만 할 것이고, 기존의 부채마저도 완제 될
가망이 없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쓸데가 없는 현금이 남아돌았기 때문에
돈을 빌려준 것뿐이었다. 또한 유휴 자금의 범람은 그들을 주식 거래에 뛰어들게
했다. 투기 열기가 일반화되어 사람들은 누구나 일확천금의 벼락 부자를 꿈꾸게
되었다.
  독일에 대한 차관의 중지는 극심한 공황을 불러일으켜서 몇 개의 독일 은행이
완전히 파산했고, 배상과 채무의 지불 순환이 차츰 정지 되었다. 대부분의
남아메리카 국가들이나 다른 소국들은 채무 이행을 거절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신용
조직의 붕괴를 보고 놀란 미국 대통령 후버는 1931 년 7월에 1 년간의 지불
유^36^예를 선언했다. 이것은 채무자를 일률적으로 구제하기 위해 정부간의 모든
전쟁 채무나 배상 지불은 1 년간 정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는 동안 1929 년 11월에 미국에서 대단한 일이 벌어졌다. 주식 투기로,
주식이나 그 밖의 것이 터무니없이 값이 올랐다가 급격히 폭락한 것이다. 이로 인해
뉴욕의 금융계는 대공황에 직면하게 되었고, 그 날로 미국의 번영은 끝나 버렸다.
이리하여 미국은 황으로 고통받고 있던 다른 나라와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무역과 산업의 불황은 이제 전세계를 뒤덮은 대공황으로 변해 버렸다. 그렇지만
주식 투기나 뉴욕의 금융 공황이 미국의 몰락 또는 불경기를 초래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다만 그것은 낙타 등에 남은 마지막 한 개의 지푸라기에 지나지 않았고,
참된 원인은 더욱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전세계에서 무역은 위축되고, 물가 특히 농산물 가격이 급락했다. 거의 모든
상품이 생산 과잉 상태였다고 하는데, 사실 이것은 상품이 많이 생산되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생산된 상품을 살 수 있는 돈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구매력 부족으로 상품이 팔리지 않았기 때문에 쓸데없이 쌓여만 갔고, 이에 따라
이 상품을 제조하는 공장은 폐쇄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공장 측에서는 팔리지 않는
물건을 만들 수는 없었다. 이 때문에 유럽이나 미국에서, 또 다른 나라들에서도
실업자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증가하였고, 여러 공업국은 나라마다 심한
타격을 입었다.
  한편 세계 시장에 식량과 공업 원료를 공급하고 있던 농업국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물가의 폭락에 의한 농민층의 고통은 한층 더 심했다. 평소에 이처럼 식료품
가격이 졌다면 사람들은 식량을 싸게 구입할 수 있어 뜻밖의 요행에 기뻐
날뛰었겠지만, 아무튼 아무리 애써 보아도 자본주의 세계의 일인지라 요행이
둔갑해서 오히려 불행이 되었던 것이다. 농민은 지주에게는 소작료를, 또 정부에는
세금을 현금으로 지불해야 했기 때문에 현금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그들이 생산한
것을 팔아야만 했다. 그런데 그 가격이 터무니없이 싸고 보니, 때로는 그들의
생산물을 모두 팔아도 세금을 낼 수 있을 만큼의 현금을 손에 쥐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들은 토지에서 쫓겨났으며, 그들의 허술한 집과 얼마 안되는 가재
도구까지도 소작료를 조달하기 위한 경매에 붙여졌다. 그리고 이같은 처지에서는
식량 가격이 아무리 싸다 해도 정작 그것을 생산하는 장본인인 농민들은 굶주려야만
했으며, 또 유랑인으로 전락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형편이었다.
  세계의 상호 의존 관계는 이 불경기를 전세계로 파급시켰다. 아마 이것을 면할 수
있었던 곳은 세계에서 격리되어 생활하고 있던 티베트의 오지 같은 곳뿐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시간이 흐를수록 불황은 점점 널리 확대되고, 무역은 더욱
침체되어 갔다. 그것은 마치 마비 현상처럼 차츰 번져 나가 사회 구조 전체를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렸다. 엄청난 수의 남녀 실업자가 부랑인으로 전락하여
도시에서 도시로 일자리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었다.
  한편 미국이나 그 밖의 나라에 식량이나 공업 제품이 부족했던 것은 절대
아니라는 생각을 늘 잊어서는 안된다. 다만 곤란한 것은 그것들이 너무 많다는 것,
즉 과잉 생산의 문제였다.
  공황의 원인은 무엇일까? 유형이 다르기는 하지만 세계 대전을 방불케 할만큼
무서웠던 세계 공황의 원인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방대하고 복잡한 자본주의 기구가
공황으로 파탄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것은 자본주의의 위기로 일컬어졌다. 왜
자본주의는 이렇게 붕괴해 가고 있었을까? 그리고 그것은 자본주의가 아직 살아남을
수 있는 일시적인 위기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면 오랫동안 세계를 지배해 온 이
거대한 체제가 죽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몸부림치기 시작한 것일까? 이러한 갖가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어 우리의 관심을 끈다. 왜냐하면 그 해답이야말로 인류의
장래가 걸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1932 년 12월, 영국 정부는 미국 정부에 각서를 보내 전쟁 채무 지불을 면제해
줄 것을 호소했다. 이 각서에서 그들은 종래 사용했던 치료 요법이 도리어 병을
무겁게 했을 뿐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도처에서 과세는 가차없이 증액되고, 세출은
대폭 절감되었습니다. 그러나 혼란을 구제할 의도에서 나온 통제 조치는 오히려
그것을 더욱 격화시켰을 뿐입니다"라고 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이러한 손실과
고통은 자연의 인색함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점을 지적했다. "자연 과학의
승리는 더욱더 현저하여 참된 부의 방대한 잠재력은 하등 훼손됨이 없이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죄는 자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이 낳은 제도 속에
있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독일인은 공황의 진짜 원인은 배상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대내외를 막론하고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운 부담이 되어 모든 산업에 타격을
주었던 전쟁 채무가 불황의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와 같이 세계의
혼란은 대부분 전쟁의 책임으로 돌려진다. 어떤 경제학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진짜
혼란은 화폐의 이상한 행동과 가격의 대폭락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게다가 또
원인이 된 것은 금의 결핍이며, 금의 결핍은 어느 선까지는 세계의 수요에 채굴량이
미치지 못했다는 점에도 기인하지만, 주로 여러 나라의 정부가 금을 퇴장시켰기
때문에 야기된 것이라고도 했다. 그런데 아직도 다른 모든 혼란은 고율 관세를
부과함으로써 국제 무역을 저해하는 경제 민족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경제학자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과학 기술의 발전이 노동자의 수요를 감소시킨 결과, 실업이
증대한 것이야말로 진정한 원인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제국주의가 확대되는 동안 서양에는 많은 공황이 있었다.
어떤 나라는 너무 많이 축적했기 때문에 일어났고, 또 다른 어떤 나라는 쓸 수 있는
돈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일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공황은 자본가들이 잉여 자금을
가지고 계속 후진 지역을 개발하고 착취했기 때문에 모면할 수 있었다. 즉 새로운
시장이 개척되고, 상품의 소비가 증가했기 때문에 공황을 모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의 최후의 단계라고들 한다. 원래 이러한 착취 과정은 전세계가
공업화될 때까지 계속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곤란한 장벽이 딱 버티고 서
있었다. 제각기 최대의 몫을 노리는 제국주의 열강의 치열한 경쟁이었다. 또 하나는
여러 식민지 국가들에서 일어나고 있던 민족주의와 자기 나라 시장의 수요에
부응하기 시작한 식민지 공업의 성장이었다. 이 모든 과정들이 뒤얽혀 전쟁으로
치달았다. 그러나 전쟁은 자본주의의 곤란을 해결하지도 못했고, 또 해결할 수도
없었다. 한 개의 거대한 지역, 소비에트 연방은 완전히 자본주의 세계에서 이탈하여
이제는 착취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시장이 아니었다. 동양에서는 민족주의의 물결이
더욱 거세어지고, 공업화가 진척되었다. 전쟁 중에, 그리고 전후에 과학 기술은
놀라울 정도로 발전했는데, 이것 또한 부의 분배의 불평등과 실업 발생에 일조를
했다. 전쟁 채무 또한 강력한 요인이었다.
  나는 여러 가지로 설명된 공황의 원인들을 제각기 따로따로 논했지만, 물론
그것들이 일제히 작용해서 무역 불황을 일찍이 없었던 만큼 큰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공황은 근본적으로 볼 때, 자본주의에 의해 생겨나는 잉여 소득의 불평등한
분배에 기인한 것이다. 이것을 뒤집어 보면 대중은 그들 자신이 생산한 상품을
사들일 만큼의 돈을 임금이나 급여로서 받지 못했다는 것이며, 생산된 상품의
가치가 그들의 총수입을 웃돌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대중의 손에 건너갔더라면
상품을 사는 데 쓰였을 돈이, 바른 용도를 모르는 소수의, 특히 유복한 자들의 손에
집중되었다. 미국에서 독일로, 중부 유럽으로, 또 남아메리카로 쏟아진 차관들은
다름 아닌 이러한 과잉 자금이었다. 또한 전쟁으로 피폐해진 유럽과 자본주의
기구로 하여금 아직도 상당 기간 동안 기능을 영위케 한 것도, 게다가 공황의
원인의 하나였던 것도 바로 이러한 자금이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타격을 준 것은
이 대외 차관을 중지한 것이었다.
  만약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한 진단이 정확했다면, 치료의 방법은 소득을
평등화하거나 적어도 그런 방향으로 돌리는 것 외에는 없을 것이다. 그것을 철저히
시행하려면 사회주의를 채용해야 하는데, 자본가들은 환경이 그것을 강제할
때까지는 그것을 실행하려고 하지 않는다. 계획된 자본주의라든가, 후진 지역 개발을
위한 국제 협력 따위가 논의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논의의 배후에서는 국가간의
대립과 세계 시장을 차지하기 위한 제국주의 열강의 상쟁이 더욱더 치열해지고
있다. 
  1933 년 7월 29일
    85. 스페인 혁명

  무역 불황과 공황 따위의 지루하고 우울한 이야기는 이제 그만두기로 하자.
이제부터는 최근의 두 가지 큰 사건스페인 혁명과 독일에서 나치의 승리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자.
  스페인은 제1차 세계 대전 내내 중립을 유지했으며, 그로 인해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참전국에 물자를 공급했기 때문에 공업화가 진전되었다. 그러나 전후
수년간에 걸쳐 불황과 실업에 시달렸으며, 사회적 불안이 계속되었다. 한편 모로코
전쟁 중 프리모 데 리베라가 나타나 1923 년에는 독재자로 군림하여 헌법의 기능을
정지시켰다. 그는 6 년간 정권을 장악하였지만, 점차 군부의 신뢰를 잃어 1929 년
금융 공황이 일어난 후 퇴진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 사이 시종 재위하고 있던
국왕 알폰소는 반동적인 그룹들을 지원하면서 자기 위치를 굳히는 데 여념이
없었다.
  프리모 데 리베라의 독재 정치에 대한 경험은 모든 공화파를 단결하도록
만들었으며, 그들은 서로 협력하기 시작했다. 1931 년의 지방 선거에서 그들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에 크게 당황한 국왕(그는 부르봉 왕가와 합스부르크
왕가 양쪽의 혈통을 이어받고 있었다)은 황급히 국외로 도망쳤으며, 1931 년 4월
14일 공화국이 선포되고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와 같이 혁명은 평화리에
성취되었다.
  스페인 혁명은 제1차 러시아 혁명, 즉 1917 년 3월에 일어난 혁명과 아주 흡사한
점이 보인다. 마치 러시아의 차르 제도처럼 낡은 군주 정치 구조는 상대와 싸워볼
기운도 없이 하나도 남지 않고 산산이 붕괴되어 버렸다. 이 두 경우 혁명은 주로
빈곤에 허덕이는 농민 계급이 봉건 제도를 뿌리뽑아 토지 제도를 변혁하려 했던
뒤늦은 시도였다. 스페인에서는 러시아의 경우 이상으로 교회의 압력이 무서운
짐으로 짓누르고 있었다. 두 나라 모두 혁명 후에는 불안정한 정세로 말미암아 각기
다른 방향을 지향하는 각양 각색의 계급이 웅성대고 있었다. 우익과 극좌 양쪽에서
연달아 봉기가 되풀이되었다. 러시아에서는 이러한 불균형 상태가 10월 혁명으로
발전했지만, 스페인에서는 아직도 그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다.
  스페인의 신헌법은 몇 가지 흥미로운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의회는 코르테스
뿐이었고, 보통 선거 제도가 시행되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국제 연맹 승인 없이는
대통령이 전쟁을 선언할 수 없도록 못박고 있는 점이다. 국제 연맹에서 결정되어
스페인이 비준한 국제 조약은 모두 그대로 스페인의 법률이 되었으며, 그것과 서로
상충되는 국내법은 확실히 정해져 있는 경우라 할지라도 그에 준했다.
  신공화국 정부는 사회주의적 색채를 띤 좌익 자유 민주주의에 속했다고 한다.
따라서 신정부 내에서 세력을 잡아 수상이 된 사람은 마누엘 아자나(좌익 공화당
당수)였다. 이 정부는 대뜸 어려운 문제, 즉 토지, 교회, 군부 등 여러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에 관한 광범위한 입법 조치가 코르테스를 통과했으나
실제로 실행되지 않고 있는 것이 많다. 그리하여 어떠한 사람이나 가족도 관개
시설을 갖춘 25에이커 이상의 토지를 소유할 수 없었지만, 그것이 경작되고 있을
경우에 한해 보유할 수 있다는 법률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왕실 소유지와
반정부적인 귀족이 갖고 있던 장원이 몰수되었을 뿐 아직도 여전히 대장원은
존속하고 있다.
  스페인 의회는 교회 재산을 국유화하기는 했지만 이것 역시 실행되지 않고 있다.
교육 방면에서 교회에 어느 정도 제한을 가하게 되었지만, 그 외 부분에서는 교회를
방임하고 는 상태였다. 군 장교의 특권은 일부 폐지되었지만, 그들 대다수는 후한
연금을 받고 은퇴했다.
  1932 년 1월에 카탈로니아에서 한 아나키스트생디칼리스트파의 대반란이
일어났으나 정부에 의해서 진압되었다. 그 후 같은 해에 우익 측의 반란이 있었으나
무산되고 말았다.
  이 초기 몇 년 동안 신공화국의 업적은 칭찬할 만한 것이었는데, 특히 교육
방면에서 훌륭했다. 토지 문제의 해결과 노동자의 처우 개선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
실적이 있었다. 그러나 토지 개혁의 진전은 완만해서 농민들은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한편 기성 특권 세력과 반동적 세력들은 아직도 성채를 쌓고 공화국을
위협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적인 정부는 아직까지도 그들을
관대하게 대우하고 있다.
  1933 년에는 스페인의 반동 세력들이 통합되었으며, 이 우익 연합은 그 해에
실시한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반동 정부가 정권을 잡게 됨에 따라 농업 개혁은
중단되고 교회 세력은 강화되어, 많은 것이 이전 정부가 했던 것과 같은 상태로
후퇴되었다. 그리하여 반동에 대항하기 위하여 좌익 그룹들이 통일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좌익 세력은 제휴를 계속하여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그리고 공산주의자로 구성된 인민 전선을 결성했다. 1936 년 인민 전선은 코르테스
선거에서 승리하여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 정부는 토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강건한 조치를 취하여 교회 세력을 제압하고, 이전에 보였던 자유주의적인
통치 방식과는 달리 기득권 세력에 대하여 가차없는 행동을 취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 때문에 항쟁은 격화되고, 반동 세력들은 궐기할 것을 결의했다.
그들은 무솔리니와 나치 독일의 지지를 얻었다.
  1936 년 7월 프랑코 장군은 모로코의 독립을 약속 받은 무어인 군대의 원조하에
스페인령 모로코에서 반란을 개시했다. 군 장교와 군의 대세는 프랑코 편이 되어
정부는 바람 앞의 등불 격이 되었다. 그리하여 정부는 만약 무리가 없으면
맨손으로라도 항전하라고 대중에게 호소했다. 이는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를 비롯한
여러 지방에서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정부와 공화국은 위기를 벗어났지만,
프랑코는 스페인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그 후 독일과 이탈리아가 많은 군대, 비행기와 비행기 조종사, 그리고 탄약을 보내
프랑코를 대대적으로 지원함으로써 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공화국 측도 이에
대항하여 외국 의용군의 원조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와 동시에 당당하고도
새로운 스페인 군을 건설했다. 영국과 프랑스 정부는 불간섭 정책을 견지할 것을
선언했으나 이것은 사실상 프랑코를 도와준 셈이 되었다.
  스페인 전쟁은 무서운 양상을 나타내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프랑코 원조에 나선
이탈리아나 독일 비행기의 공중 폭격에 의하여 살육 당했다. 마드리드 방위전은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있다. 지금 형세로는 프랑코가 스페인의 4분의 3을
점령하고 있지만, 군사적인 의미에서 강력한 공화국으로 인해 유효하게 저지되고
있다. 공화국이 가장 곤란 받고 있는 것은 식량의 부족이다.
  스페인 내전은 한 나라만의 내전을 훨씬 넘어선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민주주의와 파시즘간의 투쟁을 상징하는 것이 되었으며, 따라서 폭넓은 주목과
동정을 모으고 있다. 
  1933 년 7월 31일
    86. 독일에서의 나치의 승리

  나는 이탈리아를 언급한 이전의 편지에서 파시즘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것이 경제 공황에 직면한 자본주의 국가가 사회 혁명이라는 위협을 받았을 때
생기는 것임을 지적했다. 유산 자본가 계급은 하층 중간 계급의 핵심 주변에 농민과
노동자를 끌어들이기 위하여 그들을 현혹시키는 반자본주의적 슬로건을 표방하는
대중 운동을 만들어 냄으로써 자신들을 보호하려고 한다. 권력을 탈취하고 국가의
지배권을 장악하면 그들은 민주주의적 제도를 폐기하고 그들의 적을 궤멸시키며,
특히 노동자들의 조직을 파괴한다. 이와 같이 그들의 지배는 근본적으로 폭력에
기초한 것이다. 중간 계급 지지자들에게는 새국가에서 직장이 주어지며, 보통의 경우
산업에 대한 어느 정도의 국가 통제 조치가 취해진다.
  전후 몇 년 동안 불어닥친 독일의 대인플레이션은 독일의 산업가들과
대지주들에게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무거운 부채에 허덕이면서 소유지를 저당
잡히고 있던 대지주들은 거의 무가치한 인플레 통화로 그들의 부채를 생각하고
토지의 소유권을 되찾았다. 대공장주는 공장 설비들을 개수하고 거대한
트러스트(기업 합동)를 조직했다. 그리하여 독일 제품은 어디서나 판로를 찾을 수
있을 만큼 가격이 내려 실업자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노동자 계급은 강력한 노동
조합을 조직하였으며, 마르크화가 붕괴하는 동안도 임금 인상을 성공시켰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은 중간 계급에 타격을 주어 그들을 비참한 빈곤 상태에
빠뜨렸다. 맨 처음 히틀러 밑에 모여든 사람은 1923--24 년에 영락한 중간
계급이었다. 은행의 도산과 실업의 증대에 따른 불황이 확대되어 감에 따라 더욱
많은 사람들이 히틀러에 합류했다. 그는 불평 불만을 가진 자들을 위한 피난처가
되었다. 그가 추종자를 모을 수 있었던 또 나의 사회 계층은 옛 군대의
장교들이었다. 이 군대는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해체되어 수만의 장교가 일자리를
잃고 빈둥거리며 살고 있었다. 그들은 그 무렵 만들어지고 있던 각종 사설 군대인
나치의 '돌격대'나 카이저의 복위를 기도하는 보수주의자로 구성된 '독일 국가
인민당'의 '철모단'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도대체 아돌프 히틀러란 어떤 자였는가? 놀랍게도 그는 권력을 잡기 1.2 년
전까지는 독일의 시민도 아니었다. 그는 전쟁 중에는 보잘것 없는 계급의 군인으로
복무했다. 독일계 오스트리아인인 그는 독일 공화국에 대한 실패로 끝난 어떤 반란,
즉 소규모 반란에 참가한 탓에 금고형을 선고받았으나 관헌의 덕택으로 관대한
처분을 받았다. 그 이후 히틀러는 사회 민주당에 대항하여 국가 사회당이라는
정당을 조직했다. 나치라는 말은 이 명칭에서 유래했다. 즉 Nationale의 'Na'와
Sozialist에서 'Zi'를 취한 것이다. 이 정당은 '사회당'이라고 불리었지만 사회주의와
아무런 인연도 내력도 없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의미에서의 사회주의자와는 적이었다.
  나치의 강령은 명료하고 적극적인 내용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극단적으로
민족주의적인 것으로서 독일과 독일인의 위대함을 강조하고 있으나, 그 밖의 것은
가지각색의 증오를 끌어다 넣은 잡탕이었다. 독일의 굴욕을 표출시켰다는 베르사유
조약에 반대함으로써 이것으로 많은 사람을 나치에 모아들였다. 그것은
반마르크스주의.반공산주의.반사회주의이며, 노동자의 노동 조합과 이와 유사한 것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또한 유태인은 '아리안계' 독일 인종의 순수성을 더럽히고 그
질을 저하시키는 외래 인종이라 하여 반유태주의를 취했다. 또한 막연한
반자본주의로서 이것은 벼락 부자나 부유층에 대한 매도에 그쳤다. 아주 모호하기는
하지만 유일한 사회주의적 경향이라고 한다면 어떤 범위의 국가 통제 같은
정도였다.
  독일은 그리하여 서로 균형을 이룬 여러 세력의 무장된 각축장이 되었으며,
소요와 살인, 특히 나치에 의한 노동자의 살해가 그칠 줄 몰랐다. 때로는 노동자측의
보복도 있었다. 히틀러는 서로간에 아무런 공통점도 없는 가지각색의 세력들의
돈줄을 잡는 데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다. 이것은 하층 중간 계급과 대산업가들,
그리고 부농들의 이상스러운 연합이었던 것이다. 대산업가들은 히틀러가 사회주의를
혐오하고, 또한 기세를 올리고 있는 마르크스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방파제가 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에 그를 지지하고 돈을 주었다. 중간 계급의 비교적 가난한
층과 농민,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노동자들까지도 그의 반자본주의적 슬로건에
마음이 쏠렸다.
  1933 년 1월 30일 나이 많은 대통령 힌덴부르크(그는 당시 86세였다)는 히틀러를
독일의 최고 집행 기관이며 수상에 해당되는 장관에 임명했다. 나치와 국민당
사이에 제휴가 성립되었으나 순식간에 나치가 완전히 지배권을 잡아 여타의 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 명백해졌다. 총선 결과 나치는 여당인 국민당까지 합쳐 겨우
제국 의회 내의 다수를 획득했다. 더구나 그들이 그만큼의 다수를 획득치 못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대세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치는 제국 의회 내의
반대파를 체포해서 모조리 형무소로 보냈기 때문이다.
  이윽고 독일 전역에서는 나치, 또는 전투 부대로서 갈색의 셔츠를 제복으로 입은
'갈색 셔츠'의 테러가 시작되었다. 그 시작으로(나치가 다수를 확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회가 해산되고, 일체의 권력이 히틀러와 그 내각에 맡겨졌다. 그들은
법률을 만들 수도 있었고, 무슨 일이든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바이마르 공화국 헌법이 폐기되었으며, 민주주의의 모든 형태는 공공연히
유린당했다. 독일은 일종의 연방이었는데, 이것도 역시 폐지되고 모든 권력이
베를린에 집중되었다. 오직 상급 독재자에게만 책임을 지는 독재자들이 도처에
임명되었다. 히틀러가 최고의 독재자였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나치가 정권을 잡은 이래 독일에서 행해져 온 갖가지 잔학 행위는 일일이 열거할
수조차 없을 정도이며, 야만적 구타, 고문, 발포, 살인 등이 대규모로 행해져 남녀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엄청난 수에 달하는 사람들이 감옥과 집단
수용소로 보내져 지극히 나쁜 대우를 받았다. 특히 공산주의자에 대한 박해는 아주
지독했으며, 온건파 사회주의도 그보다 별로 나은 편이 아니었다. 유태인은 사냥개가
사냥감을 노리는 것과 같은 공격의 첫번째 목표가 되었으며, 그 밖의 평화주의자,
자유주의자, 노동 조합원.국제주의자 등이 피습 당했다. 나치는 이것을 칭하여
마르크스주의, 마르크주의자, 아니 모든 '좌익'의 근절을 위한 전쟁이라고 선언했다.
유태인은 또한 모든 지위와 직무에서 쫓겨나야만 했다. 수천 명에 달하는 유태인
교수, 교사, 음악가, 법류가, 재판관, 의사, 간호사가 추방되었다. 유태인 상점 주인은
배척 당하고, 유태인 노동자는 공장에서 해고당했다. 나치에게 환영받지 못한 서적은
철저하게 소각되었으며, 관헌에 의해 분서가 행해졌다. 신문은 극히 경미한 견해의
차이나 비판 때문에 가차없는 탄압을 받았다. 테러 기사는 공표할 수조차 없었고,
조그마한 꼬투리만 잡혀도 엄중하게 처벌되었다.
  나치 이외의 모든 조직과 정당은 금지되었다. 공산당이 맨 처음 제물이 되었고,
이어서 사회 민주당, 다시 가톨릭 중앙당, 나중에는 나치의 동맹자인 국민당까지도
모습을 감추었다. 수 세대에 걸친 노동자의 노동과 검약과 희생을 대표하는 강대한
독일 노동 조합은 해산되었고, 그들의 기금과 자산은 전부 몰수되었다. 단 하나의
정당과 단 하나뿐인 조직나치당만이 남게 된 것이다.
  나치의 이상한 철학은 모든 사람의 목소리를 억눌렀는데, 테러의 공포 때문에
아무도 항변하는 자가 없었다. 교육, 연극, 예술, 과학 등무엇이든 간에
나치의 낙인이 찍혔다. "진짜 독일인은 자신의 피를 가지고 사색한다!"고 히틀러의
주요한 막료 가운데 하나인 헤르만 괴링은 말했다. "순수 이성과 선입관이 없는
과학 시대는 지나갔다"고 나치의 또다른 지도자는 말했다. 아이들은 히틀러는 제2의
예수이며, 제1의 예수보다 훌륭하다고 교육받았다. 나치 정부는 민중. 특히 여성들
사이에 교육이 지나치게 보급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사실 히틀러 추종자의
견해에 따르면 여성의 일터는 가정과 부엌이며, 여성의 주된 임무는 아이들로
하여금 국가를 위하여 싸우고, 또한 죽도록 키우는 데 있었다. 나치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공중 계몽 선전 장관' 요제프 괴벨스는 "일찍이 여성의 일터는 가정이다.
여성 고유의 사명은 그 여성의 조국과 국민에게 아동을 공급하는 데 있다. 여성의
해방은 국가를 위태롭게 한다. 여성은 남성에 속하는 일은 남성에게 맡겨야만
한다"라고 말했다. 괴벨스는 또한 그의 공중 계몽 방법을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진술한 바 있다. "내가 의도하는 바는 마치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과 같이 신문을
이용하는 것이다."
  나치 운동의 배후에는 잔학한 행위와 태러가 활개를 치고 있었다. 그러나 나치
당원들이 모두 그런 자들뿐이었다고 상상해서는 안된다. 노동자의 대다수는 별개로
하고, 엄청나게 많은 수에 이르는 독일인들이 의심할 여지 없이 히틀러에 대해
지극히 진지하게 열광을 보냈다. 1932 년의 선거 결과를 보면 그는 전체 유권자의
52 퍼센트의 지지를 얻었으며, 이 52 퍼센트가 나머지 48 퍼센트 내지 그 일부에게
테러의 위력을 휘둘렀다. 시간이 지나면서 히틀러는 그 이상의 사람들 사이에서
대단한 인기를 떨쳤을 것이다. 독일에 가본 사람들은 마치 종교적 부흥회와 같이
이상한 심리적인 분위기를 느꼈다고 한다. 독일인은 베르사유 조약에 의하여 빚어진
오랫동안의 굴욕과 핍박의 시절이 과거의 것이 되고, 이제 다시 그들은 자유롭게
호흡할 수 있다고 느낀 것이 아닌가 싶다.
  노동자 계급은 갈색 테러에 의한 가장 큰 피해자였다. 그렇지만 세계의 여론은
오히려 유태인에 대한 박해로 들끓었다. 유럽에서는 계급 투쟁이 그다지 희귀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나 동정의 방향은 계급의 분계선을 따라 갈라졌다. 그러나
유태인에 대한 공격은 하나의 인종 공격인데, 중세 혹은 제정 러시아와 같은
후진국에서나 종종 비공식적으로 일어나는 그런 일이었다. 한 인종 전체에 대한
공식적인 박해는 유럽과 미국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또한 독일에 있는 유태인
중에는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많은 사람들, 즉 아인슈타인이라는 위대한 이름을
필두로 명망 있는 과학자, 의사, 변호사, 음악가, 작가들이 포함되어 있어 충격은
더했다. 이들은 독일을 고국으로 생각했으며, 또한 가는 곳마다 독일인으로서 존경을
모으고 있었다. 어느 나라에서든지 그들과 같은 사람들을 갖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을 것일 틀림없다. 그런데 나치는 광기에 찬 인종적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
그들을 몰아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줄기찬 반대의 소리가 세계 도처에서 일어났다.
드디어 나치는 유태인 상점들과 전문 직업인들에 대한 배척 운동을 시작했는데,
이상하게도 그들은 일반적으로 이들 유태인의 망명을 허용하려 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한 정책은 결과적으로 그들을 아사시켰다. 세계의 여론이 들끓는 것을
본 나치는 공식적인 유태인 배척 방법을 완화했으나, 그래도 그 정책은 계속되었다.
  나치의 승리와 그 결과는 유럽을 비롯한 세계에서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으며,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것에는 너도 틀림없이 동감하리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파시즘이며, 히틀러 자신도 하나의 전형적인
파시스트이다. 그러나 나치 운동은 이탈리아의 파시즘에 비하면 훨씬 폭이 넓고
또한 한층 급진적이다. 이러한 급진적인 요소들이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아니면
단지 말살되고 말 것인가.
  권력을 장악한 뒤 히틀러가 먼저 노린 것은 독일 국내의 반대자를 분쇄하고, 나치
당의 기초를공고히 하는 일이었다. 독일을 '나치화'하고 난 그는, 제2의 반자본주의
혁명을 기대하고 있던 나치 당 내의 좌파를 일소할 것을 결심했다. '갈색 셔츠'는
해체되고, 그들의 지도자들은 1934 년 6월 30일 총살되었다. 더욱이 다른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거기에는 일찍이 수상을 역임한 바 있는 폰 슐라이헤르 장군도
끼여 있었다.
  1934 년 8월에는 대통령 폰 힌덴부르크가 죽었고, 히틀러가 그 뒤를 이어 수상 겸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독일의 절대 권력자가 되었으며, 독일 국민의
지도자가 되었다. 민중은 심각한 궁핍에 허덕이게 되고, 이 궁핍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거의 강제적으로 대규모적인 사적 구빈 기금 모금 사업이 조직되었다. 또한
집단 강제 노동이 시작되어 실업자들은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다. 유태인은 강제
퇴거 명령을 받았으며, 독일인이 그 자리를 이어받게 되었다. 독일의 경제 상태는
개선되기는 커녕 오히려 악화되었다. 그러나 보통 말하는 실업자는 자취를
감추었다. 그 사이 비밀리에 재군비가 진행되어 독일의 공포는 커질 뿐이었다.
  1935 년초 자르 분지의 국민 투표는 압도적으로 독일과의 합병 쪽으로
기울어져서 이 지역은 독일령으로 병합되었다. 같은 해 5월 히틀러는 공식적으로
베르사유 조약의 군비 축소 조항을 부인하고 강제 징병령을 발표하여 방대한 재군비
계획의 실마리를 풀었다. 프랑스를 위시한 국제 연맹의 여러 나라는 공포에 휩싸여
모두 어찌할 바를 몰랐다. 프랑스는 소비에트 러시아와 동맹을 시도했다. 영국
정부는 도리어 나치 독일과 제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 1935 년 6월 그들과 해군
협정을 맺었다. 결과는 더욱 우습게 되었다. 영국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한
프랑스는 이탈리아와 교섭을 시작했고, 무솔리니는 이 호기를 잃을세라
아비시니아(이디오피아) 침략을 개시했다.
  1938 년 3월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에 침입해서 독일과의 합병을 선언했다. 또
한번 국제 연맹의 여러 나라는 굴복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공격적이고 야만적인
유태인 사냥이 나치에 의해 개시되었다.
  이번에는 체코슬로바키아가 나치 침략의 목표가 되어 수개월간 수데텐 독일인의
문제가 유럽을 흥분시켰다. 영국의 정책은 적지 않게 나치에게 도움이 되었는데,
프랑스는 감히 이 정책에 반하는 행동을 단행하지 못했다. 독일 측으로부터 즉시
전쟁의 위협에 놓이자 프랑스는 동맹국 체코슬로바키아를 돌아보지 않았으며,
영국도 이러한 배신에 동조했다. 1938 년 9월 29일 독일, 영국, 프랑스 및 이탈리아
사이의 뮌헨 협정에 의하여 체코슬로바키아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수데텐 지방과
기타 넓은 지역이 독일군에게 점령되었으며, 또한 이 기회를 틈타 폴란드와
헝가리도 체코슬로바키아의 일부를 차지했다.
  이렇게 해서 새로운 유럽의 분할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유럽에서는 프랑스와
영국은 2등 국가의 대열로 떨어졌으며, 히틀러 지도하의 독일이 혼자서 우위를
자랑하고 있었다.
  1933 년 8월 2일 
    87. 군비 축소

  군축 회의는 국제 연맹 규약의 부산물이다. 베르사유 조약은(오스트리아와 헝가리
등 다른 패전국들과 마찬가지로) 독일을 무장 해제시켜야 한다고 결정했다. 독일은
해군과 공군을 보유할 수 없으며, 대규모 육군을 보유할 수는 더욱 없었다.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나라(전승국과 중립국)도 언젠가는 각국의 군비를 일제히 국가의
안보가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최소 한도까지 점차 감축되어야 한다는 것이
제안되었다. 이 계획의 제1단계독일의 무장 해제는 즉각 강행되었으나,
제2단계일반적인 군비 축소는 듣기 좋은 희망 사항에 불과한 것으로
남겨졌으며, 실행되지 않았다. 베르사유 조약 이후 13 년 가까이 지나서야 겨우
군비 축소 회의가 소집된 것은 이 계획의 제2단계를 실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식 회의가 성립하기에 앞서 먼저 준비 위원회가 설치되어 몇 년간에
걸쳐서 문제 전반에 대한 예비 조사를 실시했다.
  1932 년초 드디어 세계 군비 축소 회의가 개최되었으나 한 달 또 한달, 1 년 다시
1 년 하는 식으로 세월만 보내면서 갖가지 제안을 심의하기도 하고, 또한
기각하기도 하고, 무수한 보고서를 읽기도 하고, 그칠 줄 모르는 논의를 계속하는 등
헛되어 나날을 보낼 뿐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군비 축소 회의여야 할 것이 도리어
마치 군비 확대 회의와 같은 사태를 보이기도 했다. 참가국 가운데 어떤 나라도
문제를 보다 폭넓은 국제적 관점에서 논의하려는 용의를 가진 나라가 없었기 때문에
결론이 하나도 나오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각국이 말하는 군비 축소란 자기 나라는 현상대로 세력을 유지하면서 다른 나라는
군비를 해체시키거나 혹은 감축시키려고 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거의 모든
나라들이 자국 본위의 태도를 취했는데, 특히 이 점에 있어서 일본과 영국이 커다란
장애가 되었으며, 협정에 이르는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회의 진행 중에 일본은 국제
연맹을 무시하고 만주에서 피비린내 나는 침략 전쟁을 감행했으며,
남아메리카에서는 두 나라가 교전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영국은 인도의 서남 국경에
있는 부족에게 폭격을 계속하고 있었다. 일본의 중국 침략에 대한 미국의 반대는
영국이 완고하게 일본과 우호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바람에 비난 성명 정도로
상쇄되고 말았다.
  여러 가지 제안이 있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소비에트 러시아, 미국, 프랑스에서
제출한 것이었다. 러시아는 군비를 전면적으로 50 퍼센트 삭감할 것을 제안했으며,
미국은 3분의 1 감축을 사시했다. 그러나 영국은 이 두 가지 안에 모두 반대했는데,
특히 해군은 오로지 치안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이를 감소시킬 수 없다고
주장했다.
  프랑스는 과거 독일의 침략을 상기하고 항상 '안전 보장 '즉 만약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될 수 있으면 침략을 곤란하게 하는 어떤 조치를 역설했다. 프랑스는,
각국의 모든 공군력을 국제 연맹에 귀속시켜 소규모의 경장비 군대를 보유하는 데
그치고, 수시로 침략자에 대하여 사용할 수 있는 국제군을 창설해서 이것을 국제
연맹의 지휘 아래 둘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 제안은 그것이 모든 군사력을
대국에게 위임하는 꼴이 되어 사실상 프랑스가 유럽을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이유에서 거부되었다.
  침략자는 누구였는가? 이것을 판별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였다. 왜냐하면 모든
침략국은 자기 방위를 위하여 행동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관례이기 때문이다.
만주에서의 일본이 그렇고, 아비시니아에서의 이탈리아 또한 스스로를 침략자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세계 대전 중에는 모든 나라들이 적국을 가리켜 침략자라 불렀다.
그러므로 만약 침략자에 대하여 행동을 취하려 한다면 무언가 명료한 정의가
필요했다. 러시아가 여기에 대하여 하나의 안을 제출했는데, 그 내용은 "만약 한
나라의 국경을 넘어서 다른 나라에 무장한 군대를 파견한다던가, 또는 다른 나라의
해안을 봉쇄하는 경우 그 나라는 침략국이 된다"라는 것이었다.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나 국제 연맹에 설치되어 있는 위원회도 '침략자'에 대하여 같은 정의를
내렸다. 소비에트의 정의는 러시아와 그 인접 국가들과의 불가침 조약 속에
채택되었다. 큰 나라, 작은 나라, 프랑스를 포함한 대다수 강대국들이 이 정의에
동의했다. 일본은 말할 나위도 없이 이 정의에 극심한 당혹의 빛을 나타냈다.
그리고 영국은 이에 동의할 것을 거부하고 문제를 모호하게 남겨 두려고 했으며,
이탈리아도 영국에 동조했다.
  영국의 군축 제안은 어디까지나 영국은 군축을 할 필요가 없고, 다른 나라는
군축이 필요하다는 것을 기초로 해서 추진되어 왔다. 공중 폭격에 관해서는 누구나
그것을 완전히 금지하는 데 찬성을 했지만, 영국은 여기에 대해서도 '변경 지방에서
치안을 위해 사용되는 것을 제외하고'라는 조건을 덧붙였다. 이렇게 되면 영국은
그의 제국 내에서는 하고 싶은 대로 폭탄을 투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조건을
다른 나라에서 인정하지 않자, 결국 금지 제안 전체가 폐지되고 말았다.
  독일은 원래 다른 나라와의 평등, 즉 다른 나라들에게 인정된 한도까지 독일에
재무장하는 것을 허용 받든지, 그렇지 않으면 다른 나라들이 독일에게 부과한
한도까지 군비를 축소하든지 할 것을 주장했다. 이것은 토의에 붙일 여지도 없는
것이었다. 국제 연맹 규약에는 독일의 무장 해제가 다른 나라 군비 축소의
제1단계가 된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았던가? 이와 같은 온의가 교환되고 있을 즈음
나치는 독일의 정권을 장악하고, 침략적이며 위협적인 태도로 프랑스를 소스라치게
놀라게 하였으며, 프랑스를 위시한 다른 강대국들에게 경계심을 강화시켰다.
그리하여 독일 측이 주장한 두 가지 방안은 그 어느 것도 승인되지 않았다.
  군축 회의에 앞서 독일의 제안이 부결되자 1933 년 10월 독일은 회의에 불참한
데 이어 국제 연맹에서도 탈퇴했다. 그 이후 독일은 국제 연맹의 바깥에 있었다.
일본도 만주 문제를 계기로 국제 연맹을 떠났으며, 이탈리아도 또한 아비시니아
침략에 대한 국제 연맹의 태도 때문에 빠져나갔다. 이렇게 해서 세계의 강대국이
연달아 국제 연맹을 이탈했기 때문에 이러한 분위기 아래 국제 연맹이 앞장서
보았자 군축 문제에 대하여 어떠한 국제적 협정에 도달하기란 거의 불가능해졌다.
그리고 군축 회의가 사실상 결렬되자 모든 나라들이 맹렬한 기세로 재군비를
시작하였다. 독일은 방대한 육군 및 공군의 재건에 착수했으며, 영국, 프랑스, 미국,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도 군비 확장에 압도적 지지를 표명했다. 
  1933 년 8월 4일
    88. 루스벨트 대통령과 뉴딜 정책

  루스벨트는 1933 년 3월 초에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이미 진행되고 있던
대불황에 겹치는 굉장한 은행 공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몇 주일 후 그는 취임할
무렵의 국가 상황을 술회하면서 당시 미국은 '조금씩 죽어 가고 있는' 상태였다고
말했다.
  루스벨트는 신속하고도 과감한 행동을 취했다. 그는 이미 의회에 은행, 공업과
농업 문제를 처리할 권한을 요구하고 있었다. 공황 때문에 의기 소침해 있던 의회는
루스벨트에게 집중된 일반인들의 인기에 감동하여 그에게 그러한 권한을 인정했다.
그는 사실상(민주적인 사람이었지만) 독재자가 되었으며, 누구나 그에게서 자신들을
곤경에서 구해 낼 기민하고도 효과적인 행동을 기대했다. 그는 전광석화처럼
행동했으며, 몇 주일 동안의 눈부신 활동으로 미국 전체를 뒤흔들어 그전보다 더 큰
신뢰감을 얻게 됐다.
  루스벨트에 의하여 시행된 여러 가지 대책 가운데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1) 금본위 제도를 포기하고 달러 가격을 하락시켜 채무자의 부담을 경감시켰다.
이것은 인플레이션 정책이었다.
  (2) 보조금을 지출해서 농민을 구제하고, 농업을 구하기 위하여 20억 달러라는
거액의 공채를 발행했다.
  (3) 산림 벌채와 제방 건설 사업을 위하여 즉시 25만 명의 노동자를 모집했다.
이것은 실업 문제 타개에 상당한 효과를 올렸다.
  (4) 의회에 8억 달러의 실업 구제비 지출을 요청하여 승인을 얻어냈다.
  (5) 차입하기로 한 약 30억 달러의 막대한 금액을 고용 촉진을 위한 공공 사업에
충당했다.
  (6) 금주법의 폐지를 서둘렀다.
  이 막대한 경비는 모두 부유한 사회층으로부터의 차입으로 조달하기로 했다.
루스벨트의 정책을 요약하면 민중의 구매력을 증진시키는 것이었다. 그들이 돈을
갖게 되면 그들은 물건을 살 것이고, 따라서 불경기는 경감될 것이 아닌가.
노동자에게 직업을 주고 돈을 벌 수 있는 대규모 공공 사업을 몇 개고 계획하는
것도 그 목적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노동자의 임금을 인상하고 노동
시간을 단축하는 것도 역시 같은 목적에서 나온 것이다. 노동 시간이 단축되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직업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 방식은 공황과 불황일 때 보통 고용주들이 쓰는 방법과는 정반대의 것이다.
그들은 마치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생산비를 절감하기 위하여 임금을 깎아 내리고
노동 시간을 늘리려고 한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이렇게 주장한다. "만약 우리들이
상품의 대량 생산을 계속하려면 우리들은 높은 임금을 대중에게 지급하여 구매할
능력을 부여해야만 한다."
  또한 루스벨트 정부는 미국산 원면의 수매를 돕기 위하여 소비에트 정부에 차관을
주었다. 양국 정부는 양국간의 대규모 바터 무역의 가능성을 검토했다.
  미국은 지금까지는 완전하고도 무제한적인 경쟁을 하는 순수한 자본주의 국가,
이른바 '개인주의적인' 국가였다. 루스벨트의 신정책은 여러 가지 점에서 기업
활동을 제한했기 때문에 이 원칙에 맞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그것을 다른
이름으로 불렀으나 사실상 산업에 대하여 대폭적인 국가 통제를 도입한 셈이다.
그것은 사실상 노동 시간과 노동 조건을 조정해서 '파괴적인 경쟁'을 방지하는
일종의 국가 사회주의적 방법이다. 그는 그것을 '계획 입안과 계획 실행의 감시에
있어서의 협력'이라 칭했다.
  이 일은 그 나름의 미국적인 추진력과 에너지를 갖고 실행되었다. 아동 노동도
폐지되었다(이것을 위하여 아동의 연령 한도를 16세로 높였다). 보다 높은
임금^6,36^급여를 높이고 노동 시간을 짧게^3,63^이 그의 슬로건이었다. 고용주와 그
밖의 사람들에게 호소하기 위하여 갑작스레 비행기까지 동원되고 있다. 각 개별
대기업은 고임금 등을 정하는 '규약'을 작성하도록 종용받았으며, 또한 스스로 그
실행을 다짐했다. 만약 적당한 규약이 없을 때에는 정부가 이를 대신해서 할
것이라는 점잖은 위협이 사용되기도 했다. 각 고용주에게는 피고용자의 임금 인상과
노동 시간의 단축을 약속한 서약서에 서명할 것을 요청했다. 정부는 이 일들을
솔선해서 실행한 고용주에 대해서는 그 명예를 표창하는 배지를 수여하고, 그것을
게을리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도록 도회지 우체국마다 표창장을 걸도록 하는 취지를
알렸다.
  이런 것들이 한꺼번에 작용하여 물가라든가 무역의 상황은 상당히 좋아졌다.
그러나 참으로 눈에 띄도록 호전된 것은 업계의 감정과 도의심이었다. 패배감은
거의 사라졌고 국민, 특히 중간 계급 사이에서는 루스벨트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졌다. 그는 이미 남북 전쟁이라는 중대한 위기에 대통령에 재직했던 미국의
위대한 영웅 링컨과 비교될 정도가 되었다.
  유럽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기 시작하여 그가 불경기에 대한 세계적
지도력을 발휘할 것을 기대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세계 경제 회의에서 루스벨트는
자신이 보낸 대표에게 달러를 금본위 제도에 고정시키는 것을 거부하라는 훈령을
내렸을 뿐 아니라, 미국의 대계획을 방해하려 드는 일에는 결코 동의하지 말도록
지시했다고 하여 다른 나라 대표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인기가 떨어졌다.
  루스벨트와 정책은 철저한 경제적 민족주의 정책이었으며, 그는 미국의 상태를
개선하는 데 전념하고 있었다. 한편 유럽 각국 정부의 어떤 자는 이 정책을
환영하지 않았으며, 특히 은행업자는 그에 당황하고 있었다. 영국 정부 또한
루스벨트의 진보적 경향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대기업을 좋아했다.
  경제적 부흥이 진척됨에 따라 대기업은 차차 강경해져서 루스벨트에 대한 저항을
강화했다. 최고 재판소는 루스벨트의 2대 법률이라고 일컬어지는 국가 부흥법과
농업 조정법의 핵심적인 조항 대부분이 위헌이라고 판결하고, 따라서 그것이
무효임을 선고했다. 그리하여 루스벨트의 뉴딜(신정책)은 붕괴되고 말았다.
  1936 년 루스벨트는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그의 대기업과의
싸움은 다시 계속되었다. 미국 의회는 그의 주장을 따르지 않고, 그가 내놓은 여러
가지 안건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1933 년 8월 7일
    89. 세계 정세에 관한 마지막 개괄

  펜과 종이와 잉크가 허락할 때까지 편지를 쓰고 있자면 한이 없다. 그리고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도 쓰자면 끝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무한히 진행되고 있으며, 그 속에서 남자나 여자나 어린아이들은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면서, 사랑하고 미워하며 서로 끊임없이 싸우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어디까지나 무한히 진행되어 끝날 줄 모르는 이야기인 것이다. 더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서의 생활은 일찍이 없었던 속도로 움직이고 있으며, 그
템포는 더욱 빨라져 변화가 연달아 급속하게 다가오고 있다. 내가 이렇게 쓰고 있는
사이에도 그것은 변화하여, 오늘 쓴 것은 내일이면 벌써 뒤져서 아마도 필요하지
않은 것이 되어 버릴지 모른다.
  생활의 강물은 결코 정지하지 않는다. 정처 없이 흐르고 흘러, 때로는 아치
요즘같이 폭포를 이루어 바위를 깨고, 우리들의 작은 의지나 욕망을 모른 체하면서
악마 같은 에너지로 매정하게 쓸어버리고, 우리들의 사소한 자아 같은 것은
무정하게 비웃으며, 그 격류 속으로 마치 지푸라기처럼 우리들을 내던지고는 다만
물보라를 치면서 흐르고 흘러, 그리하여 그것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리라아니면 커다란 절벽에 부딪쳐 무수한 물방울로 흩어질까? 그렇지
않으면 광대 무변하여 헤아릴 수 없이 장대하고 냉엄한, 끝없이 변화하면서 또한
변화하지 않는 대해를 향하여 흘러 들어가는 것일까?
  나는 이미 나의 의도 혹은 의무를 훨씬 뛰어넘는 정도의 것을 썼다. 나의 펜은
쉬지 않고 달리고 있었다. 자, 이제 우리는 드디어 우리의 긴 여로를 마쳤고, 여행의
마지막 계에 이르는 기나긴 이야기를 끝마쳤다. 우리는 오늘이라고 하는 시대에
이르러 내일이라는 날이 오늘이 되면, 이번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내일의 문턱에 다다라 있는 것이다. 다시 한번 잠시 세계를
둘러보자. 1933 년 8월 7일은 어디에 서 있는 것일까?
  인도에서는 간디가 또다시 체포되어 형을 받고 예라브다 감옥으로 되돌아갔다.
시민 불복종 운동은 제한된 형태로나마 재개되었다.
  동아프리카에서 인도인은 케냐와 그 주변 지방을 건설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그러나 거기서도 지금껏 그들은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아프리카인의 반대
때문이 아니라, 한줌밖에 되지 않는 유럽인 농장주들이 반대하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지역, 즉 산악 지대는 이들 농장주들을 위한 것이고, 아프리카인과 인도인은
누구도 거기에 있는 토지를 소유할 수 없다. 불쌍한 아프리카인의 생활은
이제까지보다 더 한층 비참하게 되었다. 원래 모든 토지는 그들의 소유였으며, 그들
수입의 유일한 원천이었다. 그런데 광대한 땅덩어리가 정부에 의하여 몰수되고,
유럽인 정착민을 위하여 토지가 무료로 양도되었다. 그래서 이들 정착민이나
농장주는 현재 이 나라의 대지주가 되었다. 그들은 소득세를 내지 않으며 모든
세금을 거의 부담하지 않는다.
  세금의 부담은 대부분 비참하게 짓밟히고 있는 아프리카인의 어깨에 지워져 있다.
아프리카인은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세금을 받아 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 다. 그래서 밀가루와 의류 같은 생활 필수품에 세금을 부과하여 그들이
그것을 살 때 간접적으로 세금을 지불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터무니없는
세금은 16세를 넘은 모든 남자와 부녀자를 포함한 그 부양자에게 직접 내게 하는
가옥세와 인두세였다. 대개 세금은 사람들의 소득 혹은 소유물에서 징수하는 것이
원칙인데, 아프리카인은 사실상 따로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몸에
조세를 매긴 것이었다! 그런데 만약 조금도 돈을 갖고 있지 않았을 경우 그 사람은
1인당 연 12실링의 인두세를 어떻게 지불해야 되는 것일까? 바로 거기에 이 조세의
계략이 감춰져 있다. 왜냐하면 그것 때문에 그들은 싫더라도 유럽인 정착민의
농장에서 일하고, 얼마만큼의 돈을 벌어 그것으로 세금을 지불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프리카인에게는 돈벌이의 방편이 되었으나 농장에는 염가의
노동력을 공급하는 장치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 불행한 아프리카인은 7, 8백 마일
떨어진 오지에서 그들의 인두세를 바치기 위한 현금을 손에 넣기 위하여 해안
지방의 농원까지 머나먼 여행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오지에는 철도가 없었고,
겨우 연안 지방에 몇 개 노선이 있을 뿐이었다).
  자신들의 소리를 외부에 전할 수 있는 방법을 모르는 가엾은 이들 아프리카인이
겪는 일들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는 많은 사연들이 쌓여 있어, 그들의 비참상을
말하자면 한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묵묵히 그것을 감내 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좋은 땅에서 쫓겨난 그들은, 이번에는 이들 아프리카인의 희생 덕택에 토지를
공짜로 손에 넣은 유럽인의 소작인으로서 일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들 유럽인
지주는 반봉건 영주처럼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은 모조리 억압했다.
아프리카인은 돈을 모으는 것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개혁을 제창하는 단체를
결성할 수조차 없다. 아프리카인이 유럽풍의 노래와 춤을 흉내내고 놀림감으로
삼는다고 해서 춤까지 금지령이 내려진 형편이다! 농민들은 유럽인 개척자의 이익을
해친다는 이유로 차와 커피의 재배마저 금지 당하고 있다.
  3 년 전에 영국 정부는 아프리카인을 위한 신탁 통치국으로 자처하고 장차 그
토지를 빼앗지 않을 것이라고 엄숙히 선언했다. 그런데 아프리카인에게는
불행하게도 작년에 케냐에서 금광이 발견된 것이다. 서약은 씻은 듯 잊혀졌다.
유럽인 농장주들이 이 땅에 쇄도하기 시작해 아프리카인 농민을 쫓아내고, 금을
채굴하기 시작했다. 영국의 약속은 그것으로 끝이 났다. 그들의 변명에 따르면
이것은 모두 궁극적으로 아프리카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며, 원주민들은 그들의
토지를 잃어버린 것을 마음속으로 기쁘게 여긴다는 것이다.
  금광 지대를 개발하는 자본주의적 방법은 아주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지정된
지방에서 사람들이 파견되었으며, 각 개인은 제각기 그 지역의 일부를 소유한 후에
채굴을 시작한다. 그가 특정한 토지에서 금을 많이 캐내느냐 못 캐내느냐는 그의
운이 좋고 나쁨에 달려 있다. 이 방식은 자본주의의 전형적인 방식이다. 금광을
경영하는 데 이치에 맞는 방법이라 한다면 정부가 그것을 소유하고 정부의 손으로
국가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채굴하는 것일 게다. 이것은 소비에트 연방이
타지키스탄과 다른 여러 곳에서 실시하고 있는 방법이다.
  나는 지금까지 편지에서 아프리카에 대해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마지막 개괄에서 케냐에 대하여 조금 언급했다. 이 광대한 대륙은 수백년 동안
외국의 착취를 받아 왔고, 지금도 억압당하고 있는 아프리카인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들은 지독하게 뒤떨어져 있지만, 그것은 그들이
억압당하고 진보할 기회를 빼앗기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아프리카 서해안에 대학이
하나 설립되었는데, 이렇게 기회가 주어진 곳에서는 그들은 눈부신 발전을 보이고
있다.
  서아시아 여러 나라에 대해서 나는 많은 이야기를 했다. 이들 여러 나라와
이집트에서는 여러 형식과 여러 단계의 자유를 위한 투쟁이 계속되고 있다. 인도의
동쪽에 위치한 동남 아시아, 인도네시아, 시암 인도차이나, 자바, 수마트라,
네덜란드령 인도 제도, 필리핀 제도에서도 역시 같다. 그리고 독립국인 시암을
제외하고는 어디서나 투쟁은 두 가지 측면, 즉 외국 지배에 대한 민족주의적 요구와
학대받고 있는 계급의 사회적 평등 내지 적어도 경제적 개선의 요구를 갖고 있다.
  아시아의 동쪽 끝에서는 거인과 같은 중국이 침략자 앞에서 의지할 곳도 없이
벌거벗은 채로 집안 싸움 때문에 산산이 분열되고 있다. 중국의 일부는 공산주의에
매혹되어 있으나 나머지는 심하게 그에 반발하고 있다. 그 사이에 일본은 사정이야
어떻든 침략을 계속해 중국 영토의 광대한 지역에 걸쳐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그 유구한 역사를 통해 무수한 침략과 위험을 견뎌 왔기 때문에
이번에도 일본의 침략을 이겨내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
  반봉건적이며, 군부의 세력이 강하고, 지금은 공업적으로 고도의 진보를 이루고
있는 일본은 과거와 현재와의 이상한 혼합체이며, 세계 제국을 건설한다는 야망을
품고 있다. 그러나 그 몽상의 그늘에는 경제적 파탄과, 미국이나 광대한 무인 지대인
호주로 진출하지 못하는 엄청난 인구로 인한 무서운 궁핍에 가득찬 현실이 가로놓여
있다. 그리고 또한 현재 최강의 나라인 미국의 적대감은 이 몽상의 실현을 가로막고
있는 큰 장벽이 되고 있다. 아시아에서 일본의 팽창에 대한 또 하나의 강력한
장벽은 소비에트 러시아다. 많은 관측자의 예리한 눈길은 만주 또는 태평양의 넓은
해상에 이미 대규모의 전운이 드리운 것을 간파하고 있다.
  북부 아시아의 전지역은 소비에트 연방에 속해 있으며, 새로운 세계와 사회
질서에 대한 계획과 건설의 과정에 편입되어 있다. 문명의 진보에서 뒤져 일종의
봉건 제도에 지배되어 있던 이들 후진 여러 나라가 한꺼번에 서양 선진 여러
나라보다 더욱 진보한 단계로 비약한 것은 진기한 일이다.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있는 소비에트 연방은 오늘날 서방 세계의 흔들리는 자본주의에게 끊임없는 위협이
되고 있다. 무역 부진과 불경기와 실업, 수없이 되풀이되는 공황이 자본주의를 반신
불수에 빠뜨리게 했으며, 구질서가 활력을 되찾으려 허덕이고 있을 동안 소비에트
연방은 홀로 희망과 에너지와 정열로 사회주의 질서의 건설과 확립에 여념이 없다.
그리하여 소비에트 연방이 이미 달성한 이 넘쳐흐르는 젊음과 생명력은 세계의 모든
사려 깊은 사람들의 마음에 강한 인상을 주었고, 그들이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또 하나 큰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미국은 자본주의의 실패를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공황과 노동자의 파업과 미증유의 실업이라는 커다란 난제들의 와중에, 미국은
지금 자본주의 제도의 재건과 유지를 위하여 필사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
대규모 실험의 성과에 대한 판정은 아직도 장래의 문제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되든지 간에 이 나라가 광대한 영토를 보유하고 있으며, 인간에게 필요한
여러 가지 것, 즉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우수한 기술과 고도로 훈련된 숙련
기술자들이 풍부하다는 커다란 강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미국이 소비에트 연방과
더불어 장차 세계 문제에 있어서 극히 중요한 역할을 짊어지게 될 것은 필연적인
사실이다.
  그러면 북쪽과는 전적으로 취향을 달리하는 라틴 여러 나라를 안고 있는 광대한
남아메리카 대륙은 어떠한가? 북미와는 달리 여기에는 인종적 편견이 거의 없고
가지각색의 인종남유럽인.스페인인.포루투갈인.이탈리아인, 또한 흑인이나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이었다는 레드 인디언(아메리카 인디언)이 서로 큰 규모로
융합되어 있다. 이들 인디언들이 캐나다와 미국에서는 거의 사라져 버렸지만,
남미에서는 베네수엘라를 비롯해서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너는 남미의 여러 도시,
예컨대 부에노스아이레스나 리우데자네이루가 아주 클 뿐 아니라 근사한 가로수
길이 있는 무척 아름다운 도시라고 들으면 아마 깜짝 놀랄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는 2백 50 만의 인구를 갖고 있으며, 또한 브라질의 수도
리우데자네이루의 인구도 2백만에 가깝다.
  인종적 융합이 이루어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통치 계급은 백인 귀족 계급에
한정되어 있다. 보통의 경우 군과 경찰을 좌우하는 당파나 파벌이 지배자의 지위에
있으며,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상층부에서는 분쟁이 그칠 새가 없다. 남아메리카 여러
나라는 모두 막대한 광물 자원을 갖고 있다. 따라서 잠재적으로 대단히 유복해야 할
터이지만, 그들은 빚더미에 눌려 있어 4 년 전 미국이 자금 대여를 정지하자, 금세
수습할 수 없는 혼란 상태를 드러내 도처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ABC제국이라
일컬어지는 3대국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도 역시 재정적 혼란 때문에 혁명에
맞부딪혔다.
  1932 년 여름 남아메리카에서는 두 차례의 작은 전쟁이 있었으나, 일본이
만주에서 벌인 전쟁과 같이 공식적으로는 이것을 전쟁이라 칭하지 않았다. 국제
연맹 규약이나 켈로그브리앙 조약과 같은 것들이 나온 후로는 전쟁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침략해서 그 국민을 죽일 때는 이것을
'분쟁'이라 불렀으며, 분쟁은 조약에 의하여 금지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누구나
개의치 않았다! 이들 두 전쟁은 만주의 전쟁처럼 세계적 중요성을 갖는 것은
아니었지만, 국제 연맹을 비롯하여 무수한 조약이나 협정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로
극구 찬양 받았던 세계의 평화 기구 전체가 얼마나 취약하며 무력한가를 증명하는
구실을 했다. 국제 연맹의 한 가맹국이 다른 가맹국을 침략했다고 할 때, 국제
연맹은 단지 방관하거나 혹은 이 분쟁을 해결하기 위하여 아주 미약한 노력을
기울일 뿐이다.
  남아메리카에서 일어난 두 전쟁 또는 '분쟁'의 하나는 차코라고 하는 정글 지대를
둘러싼 볼리비아와 파라과이 사이에 일어난 것이다. 어떤 재치 있는 프랑스 사람이
"볼리비아와 파라과이의 차코 쟁탈 전쟁은 빗 하나를 서로 뺏으려고 대머리 두
사람이 싸움을 했다는 이야기를 연상케 한다"라고 말했다. 이 전쟁은 확실히
어이없는 것이었지만, 실제로 그다지 무의미한 것도 아니다. 이 광대한 정글
지대에는 석유 이권이 개입되어 있으며, 또한 파라과이를 관통하는 파라과이 강은
볼리비아와 대서양을 연결하고 있다. 양국은 대화를 거절하고 벌써 수천 명이 피를
흘리고 있다.
  또 하나의 분쟁은 라티시아라는 작은 마을을 둘러싸고 콜롬비아와 페루 사이에
일어난 것이며, 페루는 아주 불법적으로 이 마을을 점령했다. 국제 연맹은 페루를
강력하게 비난한 것으로 기억된다.
  라틴 아메리카(멕시코도 포함된다)는 종교적으로는 가톨릭을 신봉하고 있다.
멕시코에서는 국가와 가톨릭 신부 사이에 심한 분규가 일고 있다. 스페인의
경우처럼 정부는 교회가 갖고 있는 교육이나 기타 모든 방면에 걸친 커다란 세력을
제한하려고 했다.
  남아메리카의 언어는 포루투갈어를 공용어로 하고 있는 브라질 외에는 스페인어를
쓴다. 이 광대한 지역에서 널리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스페인어는 세계어의
하나가 되었다. 그것은 아름다운 운치를 가진 언어이며, 훌륭한 근대 문학을 낳았고,
지금은 남아메리카가 있음으로 해서 대단히 중요한 상업 용어이기도 하다. 
  1933 년 8월 9일
    (마지막 편지)

  이제 끝났다. 귀여운 내 딸아. 이 기나긴 이야기도 이것으로 끝난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쓸 필요가 없지만, 끝으로 꽃이라도 보내는 마음으로 이 편지를 쓰고 있단다.
(마지막 편지를!)
  나는 기껏 역사의 윤곽만을 너에게 보여주었다. 이것은 역사가 아니다. 우리의
유구한 과거에 대해 여기저기 급히 돌아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네가 역사에
흥미가 있다면 네 자신의 힘으로 지나간 시대를 알아보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을
얼마든지 찾아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책을 읽는 것만으로는 아무 소득도
없을 것이다. 만일 네가 과거를 알려고 하면 동정심과 이해심을 가지고 과거를
보아야 한다. 옛날에 살던 사람들을 이해하려면 너는 그들을 에워싼 환경과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사상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마치 그들이 지금
살아서 우리들과 같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오늘날에는 아무도 노^36^예 제도를 옹호하는 자가 없지만, 저 위대한 플라톤은
노^36^예 제도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근래에 일어난 일을 생각해
보더라도 미국에서는 노^36^예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수천만이나 되는 인명을
바쳤다. 우리는 현재를 기준으로 과거를 판단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누구라도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과거를 기준으로 현재를 판단하는 것이 반드시 어리석은
일은 아니다! 특히 다종 다양한 종교는 아마도 그것이 생겨난 시대나 나라에서는
어느 정도 효용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사는 현대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는
낡은 신앙이나 신념, 관습의 보존을 조장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만일 네가 동정의 눈초리로 과거의 역사를 바라본다면 무미건조한 뼈대는
갑자기 살과 피를 갖게 될 것이고, 너는 모든 시대, 모든 나라에서 비록 우리와는
다르지만 매우 유사하며, 서로 비슷한 장점과 단점을 지닌 남녀 노소가 끊임없이 긴
행렬을 지어 살아 나가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역사는 신비한 구경거리가
아니지만 그것을 볼 줄 아는 사람에게는 거기에 많은 신비가 있다.
  역사의 화랑에 진열된 그림들이 머리 속에 떠오른다. 이집트, 바빌로니아, 니네베,
고대 인도 문명, 아리아인의 인도 이주, 그리고 그들의 유럽과 아시아 진출, 중국
문화와 놀라운 기록, 크노소스와 그리스, 로마와 비잔틴 제국, 두 대륙에 걸쳐
승리를 자랑하는 아랍인의 진군, 인도 문명의 부흥과 퇴폐, 아메리카의 알려지지
않은 마야와 아즈텍 문명, 몽고인의 대정복, 아름다운 고딕 건축에서 찾아볼 수 있는
중세 유럽, 이슬람 교도의 인도 침입과 무굴 제국, 유럽의 학문과 문예 부흥,
아메리카와 동방 항로의 발견, 서양의 동양 침략, 기계의 발명과 자본주의의 발달,
공업화의 확산과 유럽의 우세와 제국주의, 현대 세계에서 과학의 경이.
  몇 개의 대제국이 흥했다가 망하고, 이윽고 그 폐허가 끈기 있는 탐험가의 손으로
흙 속에서 발견되기 전까지는 그 제국은 인간의 기억에서 사라졌었다. 그런데 여러
가지 관념과 꿈은 아직 살아 남아 제국보다 훨씬 완강하게 버티고 있다. 메리
콜리지는 이렇게 노래하였다.

  그토록 장엄하던 이집트는 무너지고 끝없이 깊숙한
  망각의 골짜기로 떨어졌도다.
  지금은 그 옛날 트로이의 꿈과 함께
  그리스의 그림자도 엿볼 수 없고
  로마의 영화는 어디 갔느뇨.
  베니스의 자랑도 간 데 없네
  그러나 남아 있는 것은 꿈, 그네들의 아들이 꾼 꿈
  있는 듯 없는 듯 끊임없이 떠도는
  허공의 얼굴인 양, 헛된 그림자인 양
  길이길이 흔적을 남긴다.

  과거는 우리에게 많은 선물을 보낸다. 실로 우리가 오늘 누리고 있는 문화, 문명,
과학 또는 진리의 어떤 측면에 관한 지식은 모두가 먼, 혹은 가까운 과거로부터
얻어 들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의 신세만 지고 있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미래에 대해서도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그리고 이 임무는 과거의 유산보다 더욱 큰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는 지나간 것이요 이미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변경시킬 수 없다. 그런데 미래는 앞으로 오는 것이고, 우리는 어느 정도
그것을 구체화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과거가 우리에게 진리의 어떤 부분을
주었다면 미래는 진리의 많은 측면을 그 안에 숨기고 있어 우리는 그것을 찾고
싶어한다. 그러나 가끔 과거는 미래를 질투하고 사나운 힘으로 우리들을
사로잡는다. 우리는 미래를 향하여 전진하며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투쟁해야만
한다.
  흔히 말하는 바와 같이 역사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또 역사는 되풀이되지
않는다는 말도 있다. 모두 맞는 말이다. 우리가 맹목적으로 그것을 흉내내려 하거나
그것이 반복 혹은 침체되기를 기대해도 아무런 소득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배후를 뒤져서 그것을 움직이는 힘을 찾아내려고 들면 우리는 무엇이고 배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간단 명료한 해답을 얻은 적이 없었다. "역사란 낡은
문제에 대하여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는 것 이외에 다른 해답을 갖고 있지 않다."
  옛날은 신앙의 시대, 즉 맹목적이고 문답이 필요 없던 믿음의 시대였다. 옛날의
굉장한 사원이나 교회는 건축가와 목공과 일반 백성들의 두터운 신앙이 없었던들
결코 세워지지 못했을 것이다. 경건한 태도로 하나하나 쌓아올린, 또 아름다운
무늬를 새긴 돌들이 그들의 깊은 신앙을 말해 주고 있다. 옛 사원의 뾰족한 탑, 높은
첨탑이 솟은 교회, 고딕 양식의 대성당그것들은 모두가 마치 마음을 돌이나
대리석에 쏟아 창공에 기도를 올리는 것처럼 보이며, 오직 굳은 신앙으로 하늘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옛 신앙을 우리가 지금은 갖고 있지 않더라도
한결같이 우리 마음을 감동시킨다. 그러나 그런 신앙의 시대는 이미 과거의 것이
되었고, 돌에 아로새긴 신비의 입김은 사라졌다. 지금도 많은 사원이나 교회가
세워지고 있기는 하지만, 거기에는 벌써 중세기의 생명을 쏟아 넣던 정신은
결핍되어 있으며, 현대를 대표하는 회사 사무실과 별로 다르지 않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는 옛날과는 다른 시대란다. 그것은 환멸의 시대이며,
회의와 불확실과 의문의 시대이다. 우리는 이미 옛날의 신앙이나 습관을 받아들일
수 없다. 아시아나 유럽 또한 미국에서도 지금은 아무도 그런 것을 믿지 않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새로운 길을 찾아 우리들의 환경과 한결 조화되는 진리의 새로운
면을 모색하고 있다. 우리는 서로 질문하고 토론하며 여러 가지 '주의(ism)'나
철학을 전개한다. 소크라테스의 시대처럼 우리는 의문의 시대에 살고 있는데, 이
의문은 아테네와 같은 도시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세계 도처에 던져지고 있다.
  세계에 산재하고 있는 부정, 불행, 야만성 등등은 가끔 우리를 억압하고 우리의
정신을 어둡게 해서, 우리는 여기에서 헤어날 길을 찾을 도리가 없다. 우리는 매튜
아놀드와 더불어 이 세계에는 희망이 없으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기껏
서로가 성실할 정도라는 것을 느끼게 한다.

  그것은 꿈나라처럼
  변화 무쌍하고 아름답고 새삼스러워
  세상이 눈앞에 보이지만
  실은 기쁨도 사랑도 빛도 없고
  믿음도 평화도 괴로움도 덜어 줄 수조차 없구나.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은
  싸우고 쫓기는 자들의 아우성으로 가득 차
  길 잃은 사병들이 뒤죽박죽 난투하는
  어두운 싸움터에 사는 것처럼, 오직 그뿐이다.

  하지만 이런 어두운 견해는 생활이나 역사에서 올바른 교훈을 배운 것이라 할 수
없다. 역사는 우리에게 생성과 발전, 무한한 진보의 가능성을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인생은 풍부하고 다채롭다. 거기에는 많은 흙구덩이와 습지와 진 구렁이 있는
대신에 넓은 바다와 높은 산과 눈과 빙하가 있고, 또 엄청난 별이 빛나는 하늘이
있으며, 가족이나 친구의 애정이 있고, 커다란 공동의 목표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의
동지^36^애가 있으며, 음악이 있고 책이 있고 사상의 제국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는 다음과 같이 말해도 좋을 것이다.

  주여, 저는 지상에 사는 대지의 아들입니다.
  그럼에도 별이 반짝이는 하늘이 저를 길러 주었습니다.

  우주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면서 사상과 상상의 세계에 살기는 쉽다. 그러나 남의
불행에 눈감고 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든지 아랑곳하지 않고 외면하는 것은
용기나 동포^36^애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사상이 그 자체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행동으로 인도되는 것이라야 한다. "행동은 사상의 종점이다"라고
우리들의 친구 로맹 롤랑은 말했다. "행동을 동반하지 않는 사상은 모두가
미숙아이며 변절이다. 만약 우리가 사상의 주인이 되려고 한다면 우리는 행동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행동에는 모험과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가끔 사람들은 그 결과가
두려워 행동을 회피한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보면 위험은 무섭기도 하다. 그러나
가까이 가서 잘 보면 그다지 무서운 것이 아니란다. 때때로 그것은 생활에 흥취와
즐거움을 가져오는 좋은 반려일 수도 있다. 평범한 생활은 가끔 권태를 느끼게 하며
빤히 들여다보이는 일들만 되풀이되기 때문에 기쁨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한 동안 거기서 떠나 있으면 그러한 일상적인 다반사가 그리울지 모른다. 많은
사람들은 높은 산에 올라가 애써 등산하는 기쁨과, 고난이 극복되고 위험이
정복되는 데서 오는 쾌감을 맛보기 위해 모험을 감행한다. 그들의 신변에 따르는
위험 때문에 그들의 의기는 한결 왕성해지고, 이에 따르는 위기 일발에 직면한
생명의 기쁨도 한층 더 커진다.
  누구나 어느 정도의 신체적인 안전을 누리고 있지만 서리나 안개가 감도는
축축하고 비위생적인 골짜기에서 생활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동료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면서도 산악 지대의 신선한 공기를 마시면서 넓은 조망을 즐기고 아침해를
맞기 위하여 높은 산에 올라가느냐의 두 가지 길을 눈앞에 놓고 있다.
  이 편지 속에서 나는 시인이나 그 밖의 사람들의 글을 많이 인용했다. 나는
여기서 하나만 더 소개하고 끝을 맺으려고 한다. 이것은 타고르가 쓴 시로
기도문이라고도 볼 수 있는 '기탄잘리' 가운데 있는 한 구절이다.

  거기서는 두려워 할 필요가 없고, 가슴을 쭉 펼 수 있는
  거기서는 지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거기서는 울타리 속에 또 울타리가 있어 세계가 잘게 부서지지 않는
  거기서는 말이 진리의 깊은 골짜기에서 튀어나오는
  거기서는 꾸준히 완성에의 노력을 할 수 있는
  거기서는 진리의 맑은 물결이 썩은 관습의 거친 사막으로 사라지지 않는
  거기서는 정신이 그대의 인도를 받아 앞으로 나아가고, 큰사랑과 행동으로 열매를
맺는
  원컨대 그런 자유의 천국의 아버지시여, 내 나라가 깨어나게 하소서.

  나는 일을 마쳤다. 마지막 편지도 이것으로 끝났다. 마지막 편지! 아니, 나는
앞으로 더욱 많은 편지를 쓸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길고 연속된 편지는 이제
끝났다. 그럼 안녕! 
  1996 년 2월 5일
    (편역자 최충식, 남궁원 추기)

  네루가 다루지 않았던 세계사를 간략하게 살펴보자. 독일의 히틀러는 권력을
장악한 후 위대한 '케르만의 재건'을 부르짖으며 군비를 확장하고, 침략의 기회를
노렸다. 뮌헨 회담 후 독일은 소련과 1939 년 8월 독, 소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고,
드디어 1939 년 9월 1일 선전 포고도 없이 대규모로 폴란드에 침입하였다. 1천5백
대의 비행기가 이륙하여 폴란드의 하늘을 장악하였으며, 전차에 몸을 실은 75개
사단의 군인들이 폴란드 땅을 덮었다. 소위 '전격 작전'이 시작된 지 2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폴란드의 반 이상을 점령하여 대세를 결정지었다.
  한편 소련도 이미 폴란드가 전투력을 상실한 9월 1일에 동쪽으로부터 폴란드를
침입하여 폴란드의 동쪽 반을 점령하였다. 그 사이에 9월 3일 영국과 프랑스도 상호
원조 조약에 근거하여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함으로써 이후 6 년에 걸쳐 계속된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폴란드 침공 7개월 뒤 1940 년 4월에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점령하고, 5월에는 돌연 서부로 진출하여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항복시켰다. 그리고 난공 불락의 마지노 선을 돌파해 프랑스로 쳐들어 가 6월 14일
파리를 함락시켰다. 독일은 프랑스에 페탱을 내세워 괴뢰 정부인 비시 정권을
수립했다. 한편 독일은 서부 전선에서 영국 점령이 어려워지자, 발칸 작전을
개시하여 동유럽을 점령한 다음, 1941 년 6월에 독, 소 불가침 조약을 깨고 소련을
침공했다. 소련 침략은 강력한 저항을 받아 전선이 장기화되어 갔다.
  한편 아시아에서는 3국 동맹국의 하나인 일본이 대동아 공영권을 외치며 중국
침입에 이어 남방 진출에 나섰고, 마침내는 1941 년 12월 8일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였다.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고, 전쟁 초기에는 일본이
주도권을 장악 필리핀, 말레이지아, 버마, 네덜란드령 동인도, 서남 태평양 제도를
차례로 점령하여 동남 아시아 전역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중국 대륙에서 의외로
시간을 끌었고, 태평양 일대의 남방 전선은 너무 넓어서 보급로 유지가 곤란했다.
결국 일본은 1942 년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국에 패배하면서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유럽 전선에서는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에서 소련에게 참패하면서 패배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점령지 하에서는 저항 운동이 계속되었고, 미국이 참전하면서
전쟁은 역전되었다. 1944 년 6월 아이젠하워가 이끄는 연합군이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하는 데 성공하여 프랑스를 탈환하면서 라인강으로 진격하였고,
동쪽에서는 소련군이 엘베강에서 독일을 공격하면서 독일은 패색이 짙어 갔다.
그리고 이탈리아 무솔리니는 이미 체포되어 처형당했고, 이탈리아는 연합군에
항복했다. 결국 히틀러는 베를린이 연합군에 포위된 가운데 정부인 에바 브라운과
자살함으로써 역사에서 막을 내렸다. 5월 7일에 독일이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유럽에서의 전쟁은 끝이 났다.
  한편 일본은 연합군의 항복 권고를 무시하고 최후의 항전을 하다가 1945 년
8월에 히로시마, 나가사끼에 원자 폭탄 세례를 받았고, 소련이 선전 포고를 해오자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이로써 6 년에 걸친 제2차 세계 대전은 끝이
났다.
  2차 세계 대전은 제1차 세계 대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대총력전이었다. 후발
제국주의 국가의 파시즘과 선발 제국주의간의 이념적 대립으로 표출되면서 수많은
사상자와 실종자를 낳았고, 물질적 재산 피해는 헤아릴 수 없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유럽은 세계 질서에서 2등 국가로 전략할 수밖에 없었다. 전후의 세계 질서는 이미
1941 년 대서양 헌장에서부터 1943 년 카이로, 테헤란 회당, 1945 년 얄타, 포츠탐
회담을 걸치면서 조정되어 1945 년 10월 24일 유엔이 창설되면서 확립되었다. 전후
세계 질서의 특징은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두 개의 진영이 대립하여 이른바 냉전
체제가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국제 연합이 창설되어 국제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무력 제재를 가할 수 있도록 했지만, 상임 이사국의 거부권을 인정하게
되면서 미, 소의 대립이 지속되었다. 이러한 냉전 체제는 동, 서 유럽의 대립을
격화시키고 군사적 대립으로 몰고 갔으며, 새로운 양상의 이념적 충돌을 가져오게
되고 세계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냉전 체제의 부산물로
나타난 사례가 동유럽의 독립과 공산화 현상, 한국에서의 6^3456,12,15^전쟁과 분단
고착화이고, 쿠바 전쟁, 베트남 전쟁 등으로 이어졌다.
  한편 2차 세계 대전 후에 많은 신생 독립국이 아시아, 아프리카 등에서 민족
국가를 수립하게 된다. 이들 국가들은 식민지 본국과의 독립 투쟁을 벌이면서 자주
국가를 세우고, 근대화라는 개혁을 통해 근대 국가로의 전환을 모색하게 되었다.
냉전 체제로서의 미, 소 양국의 이념적 대립은 신생 독립국 탄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양극화를 조장했다. 이런 틈바구니 속에서 신생 독립국들은 강대국에 희생되지
않기 위하여 신생국간의 동맹과 단결을 부르짖게 되었다. 이른바 제3세계의
등장이다. 인도의 수상 네루는 한반도에서 일어난 한국 전쟁을 보고, 냉전은 결국
세계 평화를 위협하리라 생각하여 '비동맹 중립주의'를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즉
국제 분쟁은 궁극적으로 강대국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생국은 이러한
분쟁을 없애도록 노력하며 세계 평화 유지를 위해 적극적으로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네루의 주장은 인도의 반둥에서 제1차 아시아 아프리카 회의가 열리면서
'반둥 10원칙'으로 채택되어 구체화되었다. 1961 년 1회 비동맹 수뇌 회담이
개최되어 비동맹 가입 조건이 갖추어지고, 많은 신생국들의 공감을 얻어 그 세력이
급속히 증대되었다.
  냉전 체제하에서 미국과 소련은 세계 여러 지역에 자국의 이익을 확대하고 영향력
하에 묶어 두려 했지만, 민족주의 고양을 막을 수 없었다. 2차 대전 후 중동 분쟁이
대표적인 것이다. 중동 분쟁은 1차 세계 대전 진행 중에 잉태된 산물로서, 영국이
해결하지 못하고 국제 연합에 넘겨 버리자 미국이 서아시아에 영향력을 확보할
교두보로 이스라엘을 지원하면서 확대되었다. 결국 6차에 걸친 중동 전쟁은 석유
자원을 무기로 하는 아랍 민족주의를 강화시켰고, 중동 지역을 세계 분쟁의
화약고로 만들었다. 또 한편 미국은 프랑스를 대신하여 베트남 독립 전쟁에
가담하여, 무수한 인명과 재산을 손실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쿠바
혁명으로 미, 소 양국의 대립은 '핵전쟁'으로 비화될 조짐으로 표출되어 세계를
긴장시키기도 했다.
  미, 소 양국의 대립은 제3국에 대한 영향력 강화뿐만 아니라, 핵무기 개발과 인공
위성 개발에 한치의 양보도 없이 치열하게 경쟁하여 우주 전쟁으로 확대되는 듯
했다. 그러나 소련에서 스탈린 사후 후르시초프가 등장하면서 스탈린 노선을
비판하고 평화 공존 정책을 추진하였고, 마침내 미국의 아이젠하워와 캠프 데이비드
회담을 가지면서 냉전의 해빙기를 맞게 된다. 이 회담의 주요 내용은 국제 분쟁을
무력 사용으로 해결해서는 안되며, 교섭을 통한 평화적 수단에 의해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해빙 무드는 핵무기 제한 협정으로 나타나고, 곧 이어
중국이 대만을 대신해 유엔의 상임 이사국으로 전격 진출하고, 닉슨이 중국을
방문하면서 소위 '데탕트'라는 긴장 완화 시기를 맞게 되었다. 한편 유럽에서는 2차
세계 대전 후 전후 복구와 경제력 회복을 위해 자구 노력을 취하면서 유럽 공동체
방안을 모색하였고, 그 결실이 맺어지면서 세계적 위상을 강화시켜 나갔다. 이로
인하여 세계는 다극화되면서 평화 분위기가 지속되었다.
  80 년대에 들어서 소련에서 고르바초프가 등장하면서 냉전의 해소는 급격히
나타났다. 그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는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정책은 소련의 내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점진적 개혁을 도모한 것이었지만, 동유럽에서 먼저 체제의 변동을 낳게 되었다.
결국 1990 년 10월 3일 0시를 기점으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동독은 서독에
흡수 통합되고, 공산주의 이념은 점차 사그라지게 되었다. 또한 소련에서도
고르바초프가 소연방을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대세는 보리스 옐친의
등장으로 소련은 해체되고 느슨한 연합국으로 분열되었다. 이로 인하여 냉전은
완전히 해소되고, 지금은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가 강화되어 간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이라크쿠웨이트 전쟁에서 미국의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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