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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영혼에 그물을 드리울 때 [고진하]

by Casey,Riley 2023.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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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대 영혼에 그물을 드리울 때 



    전2권 중 제1권

  저자: 고진하


  @[  새벽이 왔음을 알아차리는 법을 배우라

  어떤 영적 스승이 제자들에게 물었다.
  "너희는 밤이 언제 끝나고 낮이 언제 시작된다고 생각하느냐?"
  한 제자가 대답했다.
  "멀리서 한 마리의 동물을 보았을 때, 그것이 양인지 개인지 구별할 수 있을 
때입니다."
  스승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아니라고 했다. 다른 제자가 대답했다.
  "멀리서 나무를 보았을 때, 그것이 무화과나무인지 복숭아나무인지 구별할 
수 있을 때입니다."
  역시 스승은 고개를 흔들며 아니라고 했다. 제자들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스승님, 그러면 대체 그것이 어느 때입니까?"
  "너희가 사람의 얼굴을 보고 너희의 형제인지 자매인지를 알 수 있을 
때이다. 너희가 이것을 구별할 수 없다면, 아직도 깊은 밤에 머물러 있는 
것이야."
        "탈무드"에서

  히브리인들의 삶의 지혜가 담긴 이 이야기는 자비심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너희의 형제인지 자매인지를 알 수 있을 때"란, 우리 안에 이웃에 대한 
자비심이 피어오를 때를 말하는데, 바로 이때 존재의 새벽이 밝아온다는 
것입니다.
  존재의 새벽은 태양이 떠오르고 지는 자연 현상과는 무관합니다. 밝은 태양 
아래 있으면서도 우리 삶의 창에 커튼을 내려두고 있으면 그곳은 여전히 
밤입니다. 이웃과 더불어 있으면서도 우리 속에 자비심의 햇살이 환하게 
피어오르지 않는다면 아직은 캄캄한 밤입니다.
  커튼을 내린 삶의 창을 열어 이웃과 더불어 사랑의 교감을 나눌 때, 비로소 
삶의 먼동이 북소리를 울리듯 동터와 존재의 새벽이 비롯되는가를 또한 잘 
보여줍니다.

  하얀 만년설을 머리에 인 히말라야 산 속 한 동굴 안에서 묵상하고 있던 
늙은 수도자가 눈을 떠보니, 자기 앞에 한 낯선 방문객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 방문객은 잘 알려진 한 카톨릭 수도원의 원장이었습니다.
  "왜 날 찾아왔소?"하고 늙은 수도자가 물었습니다.
  늙은 수도자 앞에 무릎을 꿇고 있던 수도원장이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대답했습니다.
  "스승님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저희 수도원은 한때 젊은 지원자들로 늘 
북적댔었고 성당에는 수도자들의 찬양소리가 끊일 날이 없었지요. 한데 요즘은 
영혼의 양식을 얻으려는 지원자들의 발길이 뚝 끊어져 성당은 고요하고, 
소수의 지도자들만 남아 있는 형편입니다. 저희 수도원이 이렇게 된 것이 무엇 
때문일까요?"
  가만히 눈을 감고 수도원장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늙은 스승이 살며시 눈을 
뜨며 말했습니다.
  "그대들의 죄 때문이오!"
  수도원장이 놀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습니다.
  "우리들의 죄 때문이라고요?"
  "그렇소. 무지라는 죄 때문이오."
  "무지라니요? 그게 무슨 죕니까? 좀더 구체적으로^5,5,5^"
  눈썹이 하얀 스승 호수처럼 맑고 푸른 눈을 하늘로 향한 채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어 말했습니다.
  "당신네 수도자들 중에 변장을 한 메시아가 한 분 계신데, 당신들은 그분을 
모르고 있지 않소?"
  스승이 이렇게 말하자 수도원장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다시 
물었습니다
  "저희 수도원에 변장한 메시아가 계시다구요?"
  "그렇소!"
  늙은 스승은 분명한 음성으로 이렇게 대꾸하고는 눈을 감고 다시 묵상에 
빠져들어 갔습니다.
  스승에게 작별을 고하고 나귀를 타고 수도원으로 돌아오면서 원장은 
수도원으로 돌아오면서 원장은 수도원에 있는 이들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스승은 분명히 수도자들 가운데 변장한 메시아가 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수도자들의 얼굴을 떠올려 보아도 메시아의 인품과 자격을 
갖춘 이는 없는 것 같았습니다.
  "참 모를 일이야. 내가 보기엔 메시아가 없는 것 같은데! 하지만 메시아가 
변장을 하고 있다니^5,5,5^"
  이렇게 그는 중얼거리며 수도원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즉시 모든 수도자들을 모아놓고 히말라야 동굴 속 스승에게서 들은 
사실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원장의 이야기를 들은 수도자들은 믿기지 않는 듯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중얼거렸습니다.
  "메시아께서 여기에? 그건 말도 안 돼!"
  "그렇다면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군. 만일 그분이 변장을 하고 계시다면, 
누가 그분인지 알아볼 수 있겠는가?"
  그들은 이렇게 수군거리기도 하고 메시아가 누구일까를 생각해보기도 
하다가, 마침내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메시아가 설사 자기들 가운데 계시더라도 변장을 하고 있는 그분을 알아 
뵙지는 못할 것이라고!
  그들은 그 순간부터 서로를 존중했고 서로를 대할 때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바로 이 수도자가 변장한 메시아일지도 몰라!"
  그 결과 수도원의 분위기는 차츰 바뀌게 되었습니다. 모든 수도자들이 
서로를 메시아처럼 대하며 생활했기 때문입니다. 수도원은 곧 기쁨과 감사와 
사랑이 흘러 넘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수도원의 소문은 하얀 민들레 홀씨가 바람을 타고 
멀리멀리 날아가듯 이곳 저곳에 퍼져 나가게 되었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목마른 젊은이들이 사방에서 기쁨과 사랑의 샘을 찾아 
수도원으로 몰려들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수도원의 거룩하고 즐거운 성가가 
매일 그칠 줄을 몰랐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닙니까. 진리를 추구하는 수도자들이지만, 그들이 
가까운 형제들 속에서 메시아를 발견하지 못했을 때, 그들의 삶은 기쁨과 
행복을 모르는 캄캄한 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자기 형제들을 메시아처럼 공경하며 살게 되었을 때 그들의 
삶에 여명이 동터왔던 것이지요. 그들이 함께 살아가는 이들을 신의 아들로 
여기게 되었을 때 그들의 공동체에는 찬양과 감사와 사랑의 향기가 피어나게 
되었습니다.
  밤이 지나면 새벽이 밝아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웃들의 얼굴에서 신의 
아들과 딸의 모습, 즉 형제 자매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삶은 늘 
흑암 속을 헤맬 수밖에 없습니다.
  새벽이 밝아옴을 알아차리는 것을, 저는 "생명감각"의 회복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내 목숨이 천하와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하듯이 다른 이의 
영혼도 소중하다는 것, 이것을 알아차림이 곧 생명 감각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감각을 일러 자비심이라 할 수 있을 것이고, 이런 자비심으로 우리 삶의 창을 
활짝 열 때, 치렁 치렁한 어둠은 물러가고 존재의 새벽은 환하게 밝아올 
것입니다. 
  @[  한가로움을 누리라

  조물주가 사람에게 공명과 부귀를 아끼지 않으나 한가한 것만은 아낀다. 
천지 사이에는 천지 운행의 기틀이 발동하여 돌고 돌아 한 순간도 정지하는 
때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천지도 한가할 수 없는데, 하물며 사람에 있어서랴.
    허균의 "숨어 사는 즐거움" '김원우 엮음, 1996'에서

  어떤 선비가 가난에 쪼들린 나머지 밤이면 향을 피우고 하늘에 기도를 
올렸습니다. 날이 갈수록 그가 기도에 더욱 정성을 기울이자, 어느 날 저녁 
하늘에서 천사의 말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보게, 신께서 그대의 정성을 어여삐 여기셔서 나로 하여금 그대의 소원이 
무엇인지를 물어보라고 하셨네."
  선비가 반가운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제가 원하는 바는 아주 작은 것입니다. 결코 지나친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어서 말해보게."
  "저는 다만 이승에서 의식이나 조금 넉넉하여 산수사이에 유유자적하다가 
죽었으면 족하겠습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천사가 크게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지금 그대가 바라는 것은 하늘나라 신선의 낙인데, 어찌 쉽게 얻을 수 
있겠는가? 만일 그대가 부귀를 구한다면 얻을 수 있을 것이네."
  "그러면 저의 소원을 들어주실 수 없다는 말씀입니까?"
  "세상에 가난한 자는 춥고 배고픔에 울부짖고 부귀한 자는 명예와 이익에 
분주하여 죽을 때까지 거기에 골몰한다네. 지금 그대가 바라고 있는, 의식이 
넉넉하여 산수사이에 유유자적하는 것은 참으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극락이건만, 이것은 하늘이 매우 아끼는 바이기에 사람이 쉽게 얻을 수 
없다네. 비록 가난하다 할지라도 도시락밥 한 그릇 먹고 표주박물 한 잔 
마시고서 고요히 방안에 앉아 천고의 어진 이들을 벗으로 삼는다면, 그 
즐거움이 또한 어 떠하겠는가. 어찌 즐거움이 반드시 산수 사이에만 
있겠는가."
  이 이야기는 자못 의미심장합니다. 한가로움은 하늘이 지극히 아끼는 
것이기에 쉽게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참으로 한가로움에 처해 사는 이는 드뭅니다. 그래서 
한가로움은 하늘을 아끼는 자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한 것이 아닐까요.
  오늘날처럼 분주함을 미덕으로 여기는 세상에서는, 한가로움이란 세상을 
도피하는 자나 은둔자의 항목으로 치부합니다. 무릇 현대는 빠른 속도를 
숭상하는 듯이 보이고, 모두가 "바쁘다"는 말을 처마 끝의 주렴처럼 늘어 고들 
삽니다.
  텅 빈 하늘에 눈길을 주고 산다는 종교인들조차 삶의 여백이 없습니다. 
여백이 없으니 모두가 탈진해 있습니다. 교회나 사원을 드나드는 마음조차 
모질고 각박해 보입니다.
  이처럼 여유와 한가로움을 잃어버린 마음에 어찌 하늘이 개입할 틈이 
있겠습니까.
  한가로움을 상실하고 각박한 삶을 살았던 중국의 한 시인이 자신의 지난날을 
뉘우치며 쓴 다음의 시는 우리에게도 많은 깨우침을 줍니다.

  고요히 앉아본 뒤에야
  보통 때의 기운이 경박했음을 알았다.
  침묵을 지킨 뒤에야
  지난날의 언어가 조급했음을 알았다.
  일을 되돌아본 뒤에야
  전날에 시간을 허비했음을 알았다.
  문을 닫아건 뒤에야
  앞서의 사귐이 지나쳤음을 알았다.
  욕심을 줄인 뒤에야
  예전의 잘못이 많았음을 알았다.
  정을 쏟은 뒤에야
  평일에 마음씀이 각박했음을 알았다.
      진계유의 "안득장자언"에서 
  @[  그대의 내면을 탐구하라

  신은 그대 안에 거하며, 그대 삶 속에서 일어난 작은 일들 속에도 거하신다.
  이제 그대 자신에게로 돌아와야 할 때다!
    조안 사우로의 "온 세상의 명상" (1992)에서

  옛날에, 아주 멋진 사향노루가 살았습니다.
  그 노루는 언제나 코끝에 밀려오는 향긋한 향기는 점점 더 그를 매혹시켰고, 
또한 그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습니다.
  어느 날, 사향노루는 자신을 향해 중얼거렸습니다.
  "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향기가 어디서 오는지를 꼭 알아내고 말겠어. 
반드시 그 원천을 찾아내고 말 테야."
  그래서 이 용감한 사향노루는 향기의 원천을 찾아 산을 넘고 물을 건너고 
사막을 가로질러, 이윽고 세상의 경계선에까지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그의 그런 노력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습니다.
  어디를 가든 그 향기는 끊임없이 그의 코끝을 유혹하고 있었습니다. 
사향노루는 끝내 그 향기가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를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사향노루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어느 산간 지방에서 가장 높은 절벽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 주변을 샅샅이 살펴보는 동안, 여전히 향기가 코를 간지럽히고 있는데도 
사향노루 그 향기의 원천을 찾아 낼 수 없었습니다.
  결국 절망에 빠진 사향노루는 그만 절벽 꼭대기에서 뛰어내리고 말았습니다.
  벼랑 밑바닥에 떨어진 사향노루는 사지가 처참하게 부서졌습니다
  그 순간, 그의 몸에서는 짙은 사향 냄새가 피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내 
계곡은 향긋한 사향으로 가득 찼습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사향노루가 그 향기의 원천을 발견하기에는 이미 때가 너무 
늦어버렸던 것입니다.

  어느 책에선가 이 이야기를 읽고, 저는 지루하게 흘러가던 시간이 뚝, 멎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토해내는 진실이 제 삶에 
강렬하게 부딪쳐왔기 때문입니다.
  제 몸 안에 그윽한 향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그 코끝을 자극하는 향기의 
원천을 알지 못하는 사향노루, 그 노루는 바로 제 자신의 모습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향기를 뿜어내는 원천이 바로 제 몸 안에 있는데, 그 
원천을 제 몸 밖에서 찾으려 산과 들을 헤매 다니는 사향노루처럼 우리는 
"나"를 "참 나"되게 하는 존재의 원천'뿌리'을 찾아 얼마나 많이 
방황했습니까?
  이 우화가 드러내주는 하나의 진실은, 우리 존재의 뿌리가 되시는 분은 
우리의 몸 밖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의 언어로 말할 때 
그분은 우리를 벗어나 계십니다'초월'. 하지만 그분은 이미 우리 안에 계신 
분'내재'입니다.
  "너희는 그분을 안다. 그것은 그분이 너희와 함께 계시고, 또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요한 #14^1,1245^)
  예수의 제자 가운데도 이 말뜻을 깨닫지 못하던 어리석은 사향노루가 
있습니다. 다름 아닌 빌립이란 인물입니다.
  "주님, 우리에게 신을 보여주십시오."
  예수는 책망하는 듯한 어조로 빌립에게 말합니다.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사람은 이미 신을본 사람이다." (요한 #14^125,36,24^)
  우리는 제자 빌립에게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오랜 신앙의 연륜, 
경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 교우들 사이의 매끄러운 인간관계, 열심어린 봉사와 
헌신등을 앞세워 보지만, 빌립 같은 영적 근시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여, 
영적인 방황을 되풀이할 때가 많습니다. 영적인 방황, 그것은 우리가 자꾸 내 
몸 바깥만 기웃거리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을 그윽하게 하는 향기의 원천은 밖에 있지 않습니다. 동양의 한 
현자도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큰 진리'도'가 그 가운데로부터 나오니, 현묘한 기틀'원기'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다."
  질그릇저럼 흙으로 빚어진 하찮은 우리의 몸뚱어리일지언정 신은 우리 속에 
값진 보화를 담아주셨습니다. 이 보화를 캐내는 일, 곧 우리 자신의 깊은 
내면을 탐구하는 이 소중한 일을 더 이상 내일로 미루어선 안 되겠습니다. 
시간의 벼랑 아래로 굴러 떨어진, 바로 제 몸 안에 있는 향기의 원천을 
발견하기에는 때가 너무 늦어버린 사향노루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 
  @[  자족의 샘물을 마셔라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빈천하여도 또한 즐거우나,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은 부귀해도 또한 근심하느니라.
        "명심보감"에서

  사막을 횡단하며 장사하는 한 아라비아 상인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실수로 길을 잘못 들었다가 우연히 자그마한 오아시스를 
발견했습니다. 그건 실로 뜻밖의 발견이었습니다. 그 길은 사막을 가로지르는 
지름길이라 할 수 있는 곳에 있었습니다. 뭇상인들이 이 지름길로 다니지 않는 
것은 단지 오아시스가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이 우연한 발견에 상인은 무척 기뻐했습니다 그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사막을 
횡단하면, 족히 하루 이틀쯤은 단축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 뒤부터 상인은 
그 지름길로만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역시 시간은 많이 단축되었지요, 그는 이 
사실을 다른 상인들에게는 일체 말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상인들이 이 길을 
이용하면 혹시라도 오아시스가 고갈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상인은 오아시스 곁에 서 있는 야자수를 보고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야자수 때문에 다른 상인이 이 오아시스를 발견하게 될는지도 몰라. 그렇게 
되면 큰일이지. 그리고 이 야자수는 귀한 오아시스 물을 먹고 있잖아. 어쩌면 
이 야자수가 오아시스의 물을 다 먹어버릴지도 모르지 않은가?"
  이렇게 생각한 상인은 곧바로 그 야자수를 잘라버렸습니다, 그렇게 하고서야 
그는 안심이 되어 그곳을 떠났습니다.
  며칠이 지난 뒤, 장사를 끝내고 돌아오던 상인은 그 오아시스에 이르렀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오아시스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던 것입니다.
  다만 그 자리에 오아시스가 있었다는 사실은 웅변이라도 하듯 바짝 말아버린 
야자수가 덩그렇게 놓여 있을 뿐이었습니다.
  "백유경"이라는 경전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밑 빠진 독과도 같아서 자족함을 모릅니다. 이 아라비아 
상인의 이야기는 인간의 이런 측면을 반영합니다. 사막에서 만난 오아시스, 
그것은 그것 자체로 감사해야 할 대상이며, 혼자 독차지하기에는 너무도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상인은 그것을 독차지하려 했지요.
  소유욕은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킵니다. 혼자만 차지하겠다고 하는 욕망의 
지배를 받게 되며, 인간은 신이 가꾸어놓은 아름다운 창조의 질서를 마비시킬 
뿐만 아니라 타인의 생명을 해하는 지경에까지 이릅니다.
  "내가 못 먹는 방에 재나 뿌린다" 는 속담이 있지만, 욕망에 집착한 인간은 
결국 그 재가 자기에게 돌아오는 줄도 모릅니다. 오아시스의 귀한 물을 
독차지하기 위해 야자수를 잘라버린 상인의 처사는 곧 그것을 잘 말해줍니다.
  이 이야기는 또한 현재 내게 주어진 조건에 자족하지 않으면 내일의 행복도 
놓쳐버린다는 암시를 던져줍니다. 옛사람은 악식을 고량진미보다 맛있게 
여기고, 초라한 베두루마기도 여우나 담비의 가죽으로 만든 옷보다 더 
따뜻하게 여겨 부족함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인생이 있다며, 그는 곧 황제의 행복을 누리는 자 입니다. 
그렇지 않고 끝없는 탐욕에 끄달리며 사는 자는 평생 거지 신세를 면치 못하는 
법입니다.
  "누항자락"이란 말이 있습니다. 더럽고 누추한 곳에 살면서도 늘 스스로 
만족하고 즐긴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살았던 인물로 공자의 제자인 안회를 
꼽을 수 있습니다.
  "어질도다, 안회여,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물로 누추한 거리에 살고 보면 
남들은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는데, 그대는 그 즐거움을 그치지 않으니, 
어질도다, 안회여!"
  스승인 공자가 안회를 칭찬한 말입니다. 누구나 안회처럼 살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그렇게 살고자 노력할 때,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더욱 큰 행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시각을 바꾸라

  여행자: 오늘 날씨가 어떨까요?
  목자: 내가 좋아하는 날씨가 되겠죠.
  여행자: 그걸 어떻게 압니까?
  목자: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음을 깨달은 후부터 나는 항상 내가 가진 
것을 좋아하는 법을 배웠죠. 그래서 나는 오늘 내가 좋아하는 그런 날씨가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앤소니 드 멜로의 "깨어 있는 자의 마음" (1989)에서

  이 목자는 바다처럼 너그러운 가슴을 지닌 자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신이 자기에게 준 삶을 값진 보물로 여기며 살아가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마음의 소유자입니다.
  바다가 자기에게 흘러드는 강물을 어느 강줄기에 속했는가 묻지 않고 다 
받아들이듯이,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하늘이 준 선물로 여기는 이는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바다와 같은 넓은 가슴을 열어 기꺼이 수용합니다.
  이런 삶의 태도는 어디에서 비롯될 수 있는 것일까요? 이것은 존재계에 
대한 깊은 신뢰에서 옵니다. 신뢰가 없으면 이런 절대 긍정의 삶을 누릴 수 
없습니다. 존재계에 대한 신뢰는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하지만, 이런 
신뢰를 잃어버리면 자기의 삶 전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아래의 이야기는 존재에 대한 깊은 신뢰와 긍정적인 눈을 지닌 자가 그의 
삶을 얼마나 아름답게 하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어떤 공원에 별로 할 일이 없어 보이는 노인이 매일같이 나와 앉아 
있었는데, 그 노인은 뭐든지 수를 헤아리기를 좋아했습니다. 공원에는 부모와 
함께 놀러 나온 아이들, 노인들, 경찰관 등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노인은 오늘도 공원에 나와 있는 사람들의 수를 헤아렸습니다. 서른일곱 
명이었습니다. 노인은 때로 공원에 있는 나무며 꽃들의 수효도 헤아렸지요.
  바로 이때, 10개월이 좀 넘었을 만한 어린아이를 팔에 안고 있는 30 대 
초반의 사내 하나가 노인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사내는 그가 않아 있는 벤치 
쪽으로 걸어왔습니다. 잠시 후, 이 노인이 않아 있는 벤치 옆에 자리를 잡은 
사내는 어린아이에게 걸음마를 가르쳤습니다. 이젠 간신히 일어서는 아이의 
옷깃을 잡고 사내는 아이를 걷게 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아직 
다리에 힘이 없는지 한 발짝을 떼고는 곧 넘어지곤 했습니다.
  이때마다 사내가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아가야, 넌 할 수 있어, 다시 한 번 걸어보렴!"
  이렇게 아이에게 용기를 북돋우며 다시 걸음마를 시키지만, 아이는 두 
발짝도 못 떼고 계속 넘어지곤 했습니다. 이러기를 한 시간쯤 가까이 
했을까요, 그러다가 아이가 지쳤는지 잠시 칭얼대더니, 사내의 무릎에 누워 
잠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30여 분쯤 잤을까, 다시 잠에서 깨어난 아이를 사내는 다시 걷게 하려고 
걸음마를 시켰습니다. 아이를 다독거리고 입을 맞추며 해질 무렵이 되도록 
아이에게 걸음마 연습을 시키던 사내는 공원을 휘 둘러보며 일어섰습니다. 
마침 옆 벤치에서 지켜보고 있는 노인을 의식한 사내는 노인에게 다가서서 
말했습니다.
  "보셨어요? 도와주지 않았는데도 오늘 제 아이가 세 걸음이나 걸었다구요!"
  노인이 퉁명스럽게 대꾸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보니, 그 애는 오늘 마흔여덟 번이나 넘어지더군!"
  사내가 약간 놀란 눈치였습니다.
  "그걸 세셨군요 저는 넘어지는 것은 몰랐는데!"
  이렇게 대꾸한 사내는 팔에 안고 있는 아이의 볼에 쪽하고 입을 맞추더니, 
노인을 향해 씩 웃으며 말했습니다.
  "걸음마를 배우는 데 마흔여덟 번쯤 넘어진 게 뭐 대숩니까?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구요."
  사내가 팔에 안긴 제 아들을 내려다보며 행복에 겨운 표정으로 멀어져 가는 
동안, 노인은 다시 시무룩한 표정을 짓더니,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그래, 신은 저 사내와 같으신 게야. 그분은 우리의 도덕적 과오의 
횟수보다는, 영원한 사람의 길을 가는 우리의 발걸음 수에 더 관심이 
깊으시지."
  이제 노인도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벤치에서 일어섰을 때는, 신의 가슴 
깊숙한 곳을 들여다본 기분이었습니다. 노인은 오랜만에 좋은 기분에 취한 
나머지, 돌아가는 길에 가로등 수를 헤아리는 것도 잊어버렸습니다.

  이 아름다운 얘기는 예수회 신부인 닐 기유메트의 글모음 속에 나옵니다.
  어떤 사물이나 풍경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이 어떠냐에 따라 삶이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이는 매사를 긍정적인 눈으로 보고 어떤 이는 
매사를 사팔뜨끼처럼 삐딱하게 바라봅니다. 어떤 이는 사랑의 눈길로 보고, 
어떤 이는 미움이나 무관심의 눈길로 봅니다, 그래서 어떤 이의 눈에는 기쁨과 
행복이 고이고, 어떤 이의 눈에는 슬픔과 눈물이 고입니다.
  비록 몇 시간 동안 세 발짝밖에 떼어놓지 못했지만, 사랑으로 자기 아이를 
바라보는 사내는 어린 생명의 몸짓에서 무한한 행복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사늘한 헤아림의 눈길로 아이가 넘어지는 것만 바라본 노인은 살아 있음의 
황홀이나 기쁨보다는 무익한 수고로움에 젖어 금보다 귀한 시간을 허비하는 
초라한 자신의 모습만을 볼 분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눈이 보배"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싸늘한 헤아림이 아닌 
사랑으로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는 사내의 맑고 긍정적인 눈에 적용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닐 기유메트는, 절대 긍정의 눈길로 아기의 대견한 걸음마를 
세었던 사내의 헤아림을 "사랑의 수학"이라고 부릅니다.
  종교에서는 우리의 눈이 바뀜을 "회심"이라 하기도 하고, "깨달음"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성 바울의 회심 사건을 살펴보면, 그가 새로운 존재로 
탄생되는 순간 그의 "눈의 비늘"이 떨어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멋진 상징적 표현입니까.
  그야말로 눈의 비늘이 떨어져 시각이 바뀌며, 전혀 새로운 차원의 삶이 
시작됩니다. 이 새로운 차원의 삶은 자기 속에 살아 있는 신성을 자각한 
삶입니다. 그것을 자각한 이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린다" 표현이 전 혀 
낯설지 않습니다.
  멀게만 느껴지던 천국을 이제는 삶의 매순간마다 경험하게 됩니다. 멀게만 
느껴지던 행복이 이제는 자기 삶 속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시각이 바뀜으로 얻게되는 하늘의 은총입니다.
  한 기독교 신비가의 다음과 같은 경구도 우리 가슴에 깊이 새겨둘 필요가 
있겠습니다.
  "내가 만물을 보는 눈을 통해 신은 나를 보신다.""마이스터 에크하르트" 

    @[  삶을 즐겨라

  매일 아침 천국에서 잠을 깨지 않는다면,
  그대는 결코 세상을 올바로 즐기지 못하는 것이다.
  그대는 그대 아버지의 궁전'Father's Palace'에 있는 자신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하늘, 땅, 공기를 천국 같은 기쁨으로 바라보라.
  마치 천사들 속에 있는 것처럼 모든 것에 숭고한 열정을 갖도록 하라.
    그레험 도웰의 "세상 즐기기" (1990)에서

  우리의 삶은 대체로 행복보다는 불행에 익숙해 있습니다. 불만의 모래알을 
씹듯 밥을 먹고, 항상 염려와 근심의 물을 마시며 사는 이는 신이 선물로 주신 
삶을 누리지 못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천국을 자신의 삶 속에 끌어 들여 사는 
감각을 잃어버리고 날마다 불행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립니다.

  한 주정뱅이가 길을 걷고 있었는데, 양쪽 귀에 물집이 나 있었습니다.
  길에서 그와 마주친 한 친구가 어쩌다가 그렇게 귀에 물집이 생기게 
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마누라가 뜨거운 다리미를 놔두었는데, 전화벨이 울렸을 때 그만 실수로 그 
다리미를 집어들었지 뭔가."
  "그랬군, 그러면 다른 쪽 귀의 물집은 어떻게 해서 생겼나?"
  주정뱅이가 대답했습니다.
  "그 머저리가 또 전화를 걸었잖아!"

  삶의 감각을 잃어버린 이의 모습을 희화화한 유머입니다. 과연 우리는 이런 
무감각에 빠져 하늘이 선물로 준 삶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요?
  그런데 우리 삶의 감각을 마비시키는 것이 어찌 술분 이겠습니까. 재산을 
모으는 재미에 홈빡 빠지든지, 어떤 정치적, 종교적 이념에 갇히든지, 우리가 
그 무엇에 빠지거나 중독되면 우리의 몸과 마음은 중풍병자처럼 뒤틀리고 
편협해지고 맙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천국을 피안에서 찾게 되고, 매순간 
지옥을 창조하는 일에만 혈안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신이 주신 삶을 누리러 왔지 지옥의 주민으로 삶을 견디러 온 곳이 
아닙니다.
  어떤 종교에서는 인간의 생을 "고해"와 같다고 하지만, 생의 해안에 물결쳐 
오는"고"의 파도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이에게는 인생이 반드시 고해만은 아닌 
것입니다. 물론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불행에 집착하고 아직 오지 않는 
미래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이들 에게는, 즐기며, 누려야 할 "현재"는 
실종되고, 세상은 온통 괴로움이 물결치는 바다여, 죽음의 기운만이 떠도는 
"사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은총을 나르러 온 예수 같은 이의 삶은 전혀 다릅니다. 그는 
천국의 보화를 실어다주는 수레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데 신명을 바쳤고, 
존재의 근원되시는 이와 자신의 삶을 일치시키는 신뢰의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삶 속에 이루어진 하늘 나라를 기쁨으로 선보였던 것입니다. 적어도 그에게는 
삶이 무거움의 멍에가 아니라 깃털의 가벼움이며 황홀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위대한 구도자의 길을 간 어떤 승려의 표현을 빌면, 이런 이의 삶의 
하루하루는"모든 날이 최고의 날'일일시호일'"이 됩니다. 삶의 아름다움을 엿본 
순간, 자기의 몸과 마음을 다 바친 어떤 수도사가 시간의 지평 위에서 영원을 
발견하고 놀라워한 것처럼 말입니다.

  어떤 수도사가하루는 수도원 동산을 거닐다가 아름답게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는 무척 황홀해서 쫑긋 귀를 세웠습니다. 일찍이 새가 노래하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그러니까 정말로 들어 본 적이 없는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새가 노래하기를 그친 다음에 수도원으로 돌아와 보니, 어이없게도 그는 
동료 수도사들에게 낯선 이였고, 그들도 그에게 낯설었습니다.
  한참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비로소 그들과 수도사는 그가 수백 년이 흐른 
뒤에 돌아왔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온몸과 온 마음으로 새소리를 
들었기에, 시간이 멈추었고, 그만 저 영원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던 것입니다. 

  @[  새로운 페이지로 넘겨라

  당신의 삶이 끝에 다다랐다고 느꼈을 때,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갈 수 없을 때,
  그리고 삶의 목표를 상실했을 때,
  바로 이 때가 당신이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고
  새 페이지로 넘길 수 있는 좋은 기회임을 알라.
    더글라스 블로흐의 "나는 항상 너와 함께 한다." (1992)에서

  어떤 마을에 큰 불이 나서 모든 가옥을 태워버릴 기세로 번지고 있었습니다.
  마을사람들은 기적을 행하는 현자로 알려진 수도자가 사는 움막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제발 불길을 잡아달라고 애원했습니다. 하지만 
수도자는 시큰둥할 뿐 놀라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애가 탄 마을사람들이 수도자에게 통사정을 했습니다.
  "제발 불 좀 꺼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주세요."
  수도자는 말없이 움막으로 들어가더니, 평소에 엮어 두었던 갈대 바구니 
여러 개를 손에 들고 나와 그것을 마을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이런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길 이 없어 어리벙벙해할 
뿐이었습니다.
  이때 수도자가 입을 떼어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지금쯤 마을이 몽땅 타 없어졌을 거요, 각자 집으로 돌아가서 이 바구니에 
숯을 긁어모으도록 하시오, 집에 남은 것이라고는 그것밖에 없을 터인즉!"
  그들은 화가 나서 소리쳤습니다.
  "당신은 지금 우리를 놀리는 거요?"
  수도자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꾸했습니다.
  "비극이란 거꾸로 뒤집힌 하나님의 축복인 거요."
  수도자는 거침없이 말을 이어나갔습니다.
  "이미 겨울이 목전에 닥쳐왔으니, 인근의 수많은 마을은 숯이 절실히 필요할 
거요. 그들에게 숯을 팔아서 돈을 넉넉히 벌어들이시오. 그 돈이면 훨씬 크고 
멋진 집을 지을 수 있을 거외다."
  사람들은 그제야 수도자가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마을에 돌아오니, 정말로 집은 몽땅 타서 없어진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저마다 숯을 주워 모았고, 그것을 인근 마을로 가져다 팔았습니다. 그리하여 
숯을 판 돈으로 그들은 크고 멋진 집을 지울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삶에는 많은 장애가 밀어닥칩니다. 때로는 유한한 인간의 힘으로 
넘을 수 없는 장애나 곤경에 부딪칠 때도 있지요, 이때, 사람들의 반응은 대개 
두 가지입니다. 낙담과 절망에 빠져 무기력한 삶을 이어가는 경우가 그 
하나요. 또 다른 하나는 그러한 장애나 곤경을 새 삶을 위한 기회로 받아들여 
이전과는 다른 새 삶의 지평을 여는 것입니다.
  "비극이란 거꾸로 뒤집힌 하나님의 축복이다."
  수도자가 한 이 말은 단지 곤경에 빠진 그들을 위로하기 위한 방편이 
아닙니다. 인간의 위기는 신이 개입할 기회가 된다는 말이지요.
  어떤 의미에서 인간의 영혼은 시련과 장애를 통과하지 않으면 성숙되지 
않습니다. 천둥 번개와 비바람이 없으면 들판의 곡식이 제대로 여물지 
않는다는 말처럼, 인간의 영혼도 시련의 비바람이 없으면 신이 기뻐할 만한 
존재로 여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긍지에 몰려 더 이상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고 
느낄 때, 그 순간이 바로 삶의 새 장을 열어갈 절호의 기회라는 것을 자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을 사랑하시는 신은 우리가 어떤 장애에 부딪쳤을 때, 
그것을 우리 영혼의 성숙을 위한 좋은 기회로 활용할 수 있기를 바라시는 지도 
모릅니다.
  보통 사람들은 삶의 곤경이나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불행감에 젖어들지만, 
그것을 하나의 도전으로 받아들여 멋진 새 삶을 시작할 수 있는 자는 신의 
도움과 축복을 끌어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  일상적인 것에서 신성한 것을 찾으라

  진정한 신비가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교훈은
  신성한 것은 일상적인 것에 속하며,
  매일의 생활, 이웃, 친구, 가족, 그리고 뒤뜰에 있다는 사실이다.
    아브라함 매슬로우의 "정신적 영감을 주는 어린 시절의 경험" (1992)에서

  어느 날, 유대인 랍비가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여러분은 거룩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어떤 학생이 대답했습니다.
  "신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학생이 대답했습니다.
  "늘 기도하는 것이지요."
  학생들은 저마다 다른 대답했습니다. 그들의 대답을 듣고 난 랍비가 
말했습니다.
  "거룩함이란 무엇을 먹을 것인가와 너희들이 어떻게 야다를 행하느냐에 
있다."
  "야다"란 성행위를 가리키는 유대적인 표현입니다.
  랍비의 말을 들은 학생들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습니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든지 ,어떤 때에 섹스를 하지 않는다든지, 그러한 
일이 거룩한 것입니까?"
  랍비가 대답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집에서 무엇을 
먹고 있는지는 다른 사람이 알 수 없지 않느냐. 누구의 집을 방문하거나, 또 
도시로 나가서 유대인이 모두 지키고 있는 계율에 따른 식사를 해도 집에 
돌아가면 다른 것을 먹을 지도 모른다. 또 성행위도 남이 보고 있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랍비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어 갔습니다.
  "그러므로 집에서 식사하고 있을 때와 성행위를 하고 있을 때 인간은 
동물과 천사 사이의 어디에나 있을 수 있다. 이때 자기 인격을 높일 수 없는 
사람이 진정 거룩한 사람이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성스러움은 우리의 일상 속에서 추구되어야 
함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을 자꾸 구분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이 칡덩굴처럼 우리의 삶 속에 
뒤엉켜 있기 때문입니다.
  성스러움이 일상 속에서 추구되지 않을 때, 우리는 일상의 현실로부터 
도피하게 되거나, 거짓과 위선에 떨어지기 쉽습니다.
  예수가 바리새파 사람들을 꾸짖으신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들은 
종교적인 의식을 성실히 이행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말과 행동의 부조화, 종교 의식과 일상적 행위의 분리 ,이것은 종교인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사실 바리새파 사람들만큼 종교적인 계율을 철저히 
지킨 이들도 드물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형식적인 계율의 준수에 치중 한 
나머지, 그 계율이 가리키는 본질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려 했지만, 그들은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가 안식일에 병든 자를 고쳤을 때, 그들은 그가 
안식일을 범했다고 죄인시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이 본래 사람을 
위해 만들어 진 것임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종교인들은 누구나 성스러운 존재가 되기를 갈망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갈망은 자칫 일상생활과 무관하게 추구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먹는 것, 
마시는 것, 일하는 것, 성행위 등 우리의 구체적인 삶 속에 신을 모시고 신과 
더불어 사는 삶, 그것이 곧 진정한 성스러움인 것입니다.
  신은 우리가 예배하는 사원에만 계신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사모하는 
열정과 항상 환한 의식으로 우리가 깨어 있다면, 우리는 어디에서나 신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가 시끌벅적한 시장이든, 회사나 교실이든, 
농장이든, 부엌이든, 어디에서든지 우리의 일상적인 일을, 그리고 그 일을 하는 
삶의 공간을 소중히 여길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떼이야르 샤르뎅 신부가 남긴 유명한 경구를 우리는 가슴 깊이 새겨둘 
필요가 있겠습니다.
  "신은 농부들의 호미 끝에, 학생들의 펜 끝에, 광부들의 곡괭이 자루에, 
밥짓는 여인들의 젖은 손끝에 계심을 기억하라." 
  @[  그대의 악기를 조율하라

  우리의 몸은 신이 그의 신성한 목적을 위하여 직접 만든 가장 신성한 
악기이다.
  만약 그 악기가 잘 조율되어 있고, 현들이 느슨해지지 않는다면,
  신이 그대를 창조한 목적에 부합하는 조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돈 캠벨 편집의 "음악과 기적들" (1992)에서

  인간의 행복은 삶의 조화와 균형에서 비롯됩니다. 조화와 균형이 깨어지면 
인간에게는 부자유와 불행이 따르게 마련이지요.
  불교의 한 경전에는 붓다가 어떤 제자에게 거문고를 비유로 하여'도'를 
가르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한 제자가 밤에 경전을 읽고 있는데, 매우 구슬프고 마음에 뉘우침과 의심이 
피어올라서 경전 읽기를 멈추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생각을 내었습니다.
  이때, 제자의 마음을 꿰뚫어 본 붓다가 그 제자를 불러서 묻습니다.
  "너는 집에 있으면서 무엇을 생업으로 삼고 있었더냐?"
  제자가 대답했습니다.
  "항상 거문고를 탔었습니다."
  붓다가 다시 물었습니다.
  "줄이 느슨하면 어떻더냐?"
  "소리가 나지 않지요."
  "줄이 너무 팽팽하면 어떻더냐?"
  "줄이 끊어졌습니다."
  "줄을 좀 늦추고 조음이 알맞으면 어떻더냐?"
  "여러 소리가 고르고 아름다웠습니다"
  제자의 말을 듣고 난 붓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도를 배우는 것도 그와 같아서 마음가짐이 고르고 알맞으면 도를 얻을 수 
있느니라."

  그렇습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우리의 몸과 마음은 거문고와 같아서 그 줄이 
너무 느슨해도 안 되고, 너무 팽팽해도 좋은 소리를 낼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몸은 때로 근육이 필요하지만, 너무 이완되면 나태에 떨어져 
진리로부터 멀어지고, 팽팽한 거문고 줄처럼 너무 긴장하면 삶의 가벼움과 
기쁨을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다른 비유를 들자면, 우리의 삶은 어릴 적의 시소를 타는 것과도 같습니다. 
시소를 타는 사람이 서로 내리고 오르기의 적절한 배합을 해야 그것이 즐겁지, 
그렇지 않으면 시소 타기는 흥을 잃고 맙니다. 시소 타기 역시 그것이 
즐거우려면 균형과 조화가 필요합니다.
  신이 창조한 피조물 가운데 인간은 가장 신성한 존재임에 틀림없습니다. 
더구나 인간에게는 다른 존재들과 조화를 이룰 줄 아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신성한 악기"라고 부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신성한 악기로 
지음받은 존재인 우리가 조화와 균형의 삶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삶의 
행복과 기쁨을 잃어버리고말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삶 속에는 조화와 균형을 깨뜨리는 요소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기쁨과 슬픔, 획득과 상실, 경쟁, 분주함, 질병, 죽음 등 인간 삶의 
조화와 균형을 깨뜨리는 것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또한 인간의 삶은 바다의 
색깔처럼 천변만화하기 때문에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사는 것이 그만큼 
힘들기도 합니다.
  이러한 삶 속에서도 위대한 악사라면 조화로운 음악을 연주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자기 영혼의 현을 잘 다루는 사람이겠지요. 위대한 
항해사가 되려면 희로애락의 파도를 잘 타지 않으면 안 되듯이, 창조주를 
기쁘시게 하는 혼은 자기 자신을 잘 조율하여야 우주와 의 조화를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이런 영혼을 일컬어 "깨달은 자"라고 부르는 것이 아닐까요? 
  @[  신뢰를 가지라

  신이 나에게 요구하시는 한 가지는, 내가 그분께 의지하라는 것이다.
  즉 내가 그분만을 완전히 신뢰할 것이며 그분께 전적으로 자신을 바치라는 
것이다
    도로시 헌터가 엮은 "마더 테레사 묵상집" (1987)에서

  어느 겨울날, 한 소년이 들판에서 연을 날리고 있었습니다.
  연은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높이높이 솟아올랐습니다. 그런데 
나지막이 떠다니던 구름이 그 연을 에워싸 소년의 시야에서 연을 
가려버렸습니다.
  마침 지나가던 한 사람이 그 소년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너는 손에 줄을 움켜쥐고 뭘 하니?"
  소년이 천진난만한 음성으로 대답했습니다.
  "연을 날리고 있어요.'
  그 사람이 하늘을 쳐다보았으나 눈에 보이는 것은 구름뿐이었습니다.
  "얘야, 연도 없는데, 넌 뭘 가지고 연을 날린다고 그러느냐?"
  소년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제 눈에도 연은 안 보여요. 하지만 연은 분명히 위에 있어요. 이따금씩 
연줄이 약하게 당겨졌다 세게 당겨졌다 하거든요."

  연을 날리는 이 아이에게는 어른들이 갖지 못한 깊은 신뢰가 있습니다.
  어른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이 아이는 비록 눈에 보이지 않지만, 
손끝에 닿아오는 연줄의 미세한 덜림을 통해서 연의 존재를 확신합니다.
  우리가 생명의 근원이라고 여기는 신은 우리의 육안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신의 살아 계심을 알 수 있는 것은'신뢰'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신의 현존을 깨닫게 되는 것은 마치 소년의 연줄의 떨림을 통해서 현존을 
확신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우리 영혼의 촉수에 미세한 떨림으로 닿아오는 
체험을 통해서 우리는 그분의 현존을 알 수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 체험 
역시 신뢰가 선행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의 삶이 이런 신의 살아 계심에 대한 신뢰에 터할 때, 삶의 불확실성이 
가져다주는 불안과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고, 내적 평화에도 이를 수 
있습니다.

  지진이 잘 일어나는 일본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일본인들은 늘 지진을 대비하고 사는데, 어느 날 한 영적 스승과 제자들이 
어떤 집을 방문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집이 요동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던 이들이 
모두 집 바깥으로 뛰쳐나갔습니다. 그들이 바깥으로 나간 뒤 1분 가량 
흔들리던 땅이 멎었습니다. 다행히 집이 무너질 정도는 아니었지요.
  바깥으로 피신했던 이들이 들어와 보니, 집안에는 스승 혼자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혼비백산한 제자들과 주인이 놀라서 태연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스승에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는 모두 지진을 피해 바깥으로 피신했는데, 선생님은 어찌 
여기에 계십니까? 선생님은 무섭지도 않으셨습니까?"
  "아니야, 나도 무서웠지"
  "그러면 왜 안전한 바깥으로 피하지 않으셨습니까?"
  스승이 한바탕 껄껄대고 웃더니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난 더 안전한 곳으로 피해 있었다네."
  "더 안전한 곳이라뇨? 일단 지진이 나면 집 바깥이 가장 안전한 곳으로 
저희는 알고 있는데!"
  "아닐세. 내면보다 더 안전한 곳을 나는 알지 못하네."

  이 영적 스승의 말에서 우리는 깊은 깨달음을 얻어야 합니다. 신이 머무실 
곳은 우리의 내면밖에 없습니다. 스승은 그것을 체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이 
스승은 자기내면에 거하시는 신에 대한 불굴의 신뢰를 가지고 있습니다 적어도 
그는 자기의 생사를 존재의 근원이신 분에게 내맡기고 있었습니다. 이런 
신뢰를 지녔기에 그는 균열된 땅속에 파묻혀 죽을지도 모르는 지진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내면으로 뛰어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불굴의 신뢰를 지닌 자를 우리는 진정 영적 성숙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  고대의 지혜 속으로 잠수하라

  종교적인 삶을 추구하는 사람은 삶을 환히 비출 수 있는 생각들이 표면으로 
떠오르도록 하기 위해 고대의 지혜 깊숙이 뛰어들어야 한다.
  모든 진리가 미래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진리는 잊혀진 것으로부터 발견될 수도 있다.
    데이비드 J. 볼프의 "말과 침묵: 신에 대한 유대인의 추구" (1992)에서

  중국 제나라의 환공이 고죽국을 토벌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출발할 때는 봄이었는데 돌아올 때는 겨울이었습니다. 절이 바뀐 
연고로 주위의 풍경이 전혀 달라져 그들은 도무지 길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모두가 당황해하고 있는데, 그들 중에는 지혜로운 관중과 습붕라는 사람이 
함께 있었습니다. 관중이 무리 앞으로 나서며 말했습니다.
  "이럴 때는 늙은 말에게 배워야 합니다."
  뾰족한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관중의 말대로 늙은 말을 풀어주고, 그 
뒤를 따라가 보니, 과연 올바른 길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곧이어 산길에 들어서게 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먹을 물이 없어서 
그들은 산 속에서 헐떡거리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습붕이 나섰습니다.
  "원래 개미는 겨울에는 산의 남쪽에서 살고, 여름에는 산의 북쪽에서 사는 
습성을 지니고 있지요. 개미집 아래를 여덟 자만 파면 거기에 반드시 물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한번 산기슭 남쪽으로 돌아가, 개미집을 찾아보면 
어떨까요?"
  역시 대책이 없던 터라 그들이 개미집을 찾아서 여덟자를 파보니, 과연 물을 
구할 수 있어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이 이야기를 들은 한비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관중이나 습붕같은 지혜로운 사람도 모르는 것이 있으면 말이나 개미를 
스승으로 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날의 사람들은 어리석음에도 
불구하고 성인의 지혜를 스승으로 받들 줄 모르니, 지극히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종교적인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이는 탐욕과 무지와 어리석음 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런 벗어남을 위해서는 밝은 지혜를 갖춘 스승의 도움이 
필요하지요.
  우리의 영혼이 깨어 있을 때는 만물이 우리의 스승이 되어 삶의 지혜를 
가르쳐줍니다. 따라서 개미나 말과 같은 동물, 식물 등의 자연을 통해서도 
우리는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보다 앞서간 종교적인 선각자들의 삶으로부터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들의 삶의 지혜가 담긴 것 가운데 우리는 여러 경전은 
물론 오래된 것들입니다. 그렇지만 이 경전들은 무궁무진한 지혜의 보물을 그 
안에 내장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곤경에 처할 때마다 우리는 지혜의 
보물이 묻힌 바닷속을 잠수해 들어가야 합니다.
  진실한 열정과 노력으로 그 바닷속에 뛰어들면, 그 속에는 어김없이 우리의 
삶을 밝혀줄 지혜의 보물이 광채를 뿜으며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그 지혜의 보물을 건져올려 더욱 갈고 닦아야 합니다. 그것을 갈고 
닦아야 한다는 말은 우리의 혼을 갈고 닦아야 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무지와 어리석음의 미로 속을 헤매는 우리의 앞길을 비춰주는 
환한 등불이 될 것입니다.
  위대한 종교적인 성인들이 남긴 지혜의 가르침들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혼을 
존재의 근원이신 분께 붙들어매 줍니다. 만일 우리가 자기 존재의 뿌리를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 광활한 우주 공간에서 정처 없이 떠도는 행성같은 존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히브리 성서의 지혜자는 간곡하게 권합니다.

  지혜로운 말에 귀를 기울이고
  바른 판단에 마음을 두어라.
  슬기를 잦아 구하고,
  바른 판단을 얻고 싶다고 소리쳐 불러라.
  은을 찾아 헤매듯 그것을 구하고
  숨은 보화를 파헤치듯 그것을 찾아라.
  그래야 눈이 열려 신을 경외하게 되고
  신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되리라.
            '잠언 2장' 
  @[  그대가 갖고 있지 않은 것에 초점을 맞추지 말라

  바로 이 순간 행복을 느끼지 못한 단 한가지 이유는 당신이 갖지 못한 것을 
생각하거나 그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 당신은 지극한 
행복을 느끼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갖고 있다.
    엔소니 드 멜로의 "인식: 현실의 위험과 기회들" (1992)에서

  한 선객이 절에 놀러 왔다가 스님들을 상대로 문제를 냈습니다.
  "우리 집에 작은 솥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 떡을 찌면 세 명이 먹기엔 
부족하지만 천명이 먹으면 남습니다. 그 이유를 아시는 분 있습니까?"
  선객의 질문에 대중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멀찌감치 앉아 있던 노스님이 말했습니다.
  "항상 자기 배만 채우고 나눠먹어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겐 항상 음식이 
모자라는 법일세."
  그러자 선객이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서로 다투면 항상 부족하고, 사양하면 남는 법이지요,"
  이번에는 노스님이 그 선객에게 문제를 냈습니다.
  "그러면 세상에서 가장 큰 떡이 뭔 줄 아십니까?"
  이 물음에 선객이 선뜻 대답을 못하자 노스님이 말했습니다.
  "입안에 있는 떡이라오"

  먹을 수 없는 떡이 아무리 크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의미입니다. 
자기 입으로 들어와 자기가 맛볼 수 있는 떡, 즉 자기의 깨달음만이 쓸모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도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남의 입에 
있는 떡으로는 절대 그 떡맛을 알지 못합니다. 자기 입안에 들어온 떡만이 
자기 떡이 되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하길 원합니다. 그러나 행복을 찾는 사람들의 방식은 
대부분 자기가 갖고 있지 않은 것에서 찾으려 합니다. 즉 자기가 가진 떡은 
작다고 생각하고 남의 떡만 크게 생각하지요, 그런 이의 가슴에는 행복의 
파랑새가 날아와 둥우리를 틀지 않습니다.
  내 삶의 조건과 남이 진 것을 비교하며 사는 인생은 행복의 문을 열 수 
없습니다. 우리가 행복의 문을 열려면 신이 우리 각자에게 선물로 준 생의 
조건에 대해 자족하는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자족하라는 것은 자기에게 
주어진 것에 초점을 맞추라는 말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것이 아무리 보잘것없고 하찮아 보이더라도, 신은 
우리 각자가 캐낼 만한 행복의 보화를 우리 속에 감추어두었습니다. 내 안에 
감춰져 있는 보화를 캐낼 생각은 않고 남이 가진 보화만 탐내는 것은 도둑의 
심보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것이 진리든 행복이든 그것을 찾는 
방식에 있어서는 자기 바깥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뛰어난 영적 스승들이 각고한 눈짓으로 가리키는 깨달음에 이르는 
화살표요, 행복의 문을 여는 열쇠이기도 합니다. 
  @[  침묵을 창조하라

  침묵 속에서 비로소 인간과 신의 신비가 대면한다.
  그리고 이 침묵에서 생기는 언어는 아직 아무 것도 말한 적이 없는 최초의 
언어같이 근원적이다. 그러므로 이 언어는 신의 신비에 대해서 말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신의 신비가 언제나 하나의 침묵의 층을 자기 앞에 전개하고 
있는 것은 신의 사랑의 표현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신의 신비에 근접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도 하나의 침묵의 
층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M. 삐까르의 "침묵의 세계" (1977)에서

  하루는 어떤 부인이 성 빈첸시오 신부를 찾아와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습니다.
  "신부님, 저는 더 이상 남편과 살지 못하겠어요, 그 사람의 신경질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를 넘어섰어요, 어떻게 하면 우리 가정이 다시 화목해질 수 
있을까요?"
  빈첸시오 신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부인 우리 수도원 앞뜰에는 작은 우물이 하나 있답니다. 수위에게 가서 그 
우물물을 좀 얻어 가십시오, 그리고 남편이 돌아오시면 그 물을 얼른 한 모금 
입에 머금으십시오, 삼켜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놀라운 일이 일어날 
거^36^예요."
  착한 부인은 신부의 말대로 수도원의 물을 얻어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날 밤 늦게 서야 귀가한 남편은 또 여느 날처럼 부인에게 불평과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전날 같았으면 부인도 마구 달려들었지만, 그녀는 
빈첸시오 신부의 가르침대로 성수를 얼른 입 안 가득히 물었습니다. 그리고 
물이 새지 않도록 입술을 꼭 깨물었습니다.
  그러자 남편의 떠드는 소리가 점차 잠잠해졌습니다. 그날 밤 이들 부부는 더 
이상 다투지 않고 무사히 밤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날부터 부인은 남편이 신경질을 부릴 때마다 그 성수를 입안 가득히 
머금곤 했습니다, 그것을 여러 차례 반복하는 동안 남편의 행동은 눈에 띄게 
변했습니다. 신경질도 줄어들었고, 오히려 부인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었습니다.
  부인은 남편의 달라진 태도에 무척이나 기뻐하며 신부를 찾아가서 감사의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빈첸시오 신부는 아주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인 기적을 일으킨 것은 수도원 앞뜰의 우물물이 아닙니다. 바로 당신의 
침묵이죠, 당신의 침묵이 남편을 부드럽게 한 것뿐입니다."

  인간의 삶은 이처럼 오묘하고 신비한 측면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에서 
만나는 고통과 장애는 때때로 말보다는 침묵을 통해서 해결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서 속의 욥이라는 인물을 보면, 그는 자기에게 닥친 엄청난 고통 앞에서 
신에게 항변하고 친구들과 신의 침묵에 대해서 논쟁을 벌입니다. 하지만 그의 
항변과 논쟁은 부질없는 말 잔치일 뿐입니다. 비장하기까지 한 말 잔치 
속에서도 그가 겪는 고통의 문제는 미궁의 늪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욥의 
항변이 끝날 무렵에 침묵을 지키던 신이 등장합니다.
  "부질없는 말로 나의 뜻을 가리우는 자가 누구냐?" (욥기 #38^12^)
  이처럼 신이 등장하여 침묵을 깨뜨렸을 때, 욥은 할말을 잃고 맙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진정 삶의 의미를 깨달은 자가 벌렸던 입도 다물게 되는 법이지요, 신의 
침묵과 존재의 신비 앞에서는 사실 아무 말도 필요 없음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신이 어떤 분인지를 알고 싶다고 찾아온 알렉산더 대왕에게 디오게네스가 
며칠 동안 아무 대꾸도 않다가 드물게 입을 떼어 한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저는 신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할 말이 없소, 사실 신에 대해 안다고 
말하는 자는 신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요."
  디오게네스의 말인즉슨, 신에 대해서는 말로 이러쿵저러쿵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체험한 사랑을 말로다 표현할 수 없듯이 우리가 신을 
몸겪음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말로써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은 
언제나 우리의 언표를 뛰어넘어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겪으신 체험을 고백하는 신비가들은 다만 "두려움"과 "떨림"속에 있었음을 
토로할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신을 찾는다는 사원이나 교회조차 침묵이 
아니라 소란에 휩싸여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신과 대면하기 위한 
목적에서 드려지는 기도조차 침묵에 의존하지 않는 듯이 보입니다. 진정한 
기도는 인간의 침묵을 신의 침묵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는 현대의 종교 생활을 병들어 있다고 진단하면서, 
침묵의 가치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침묵을 창조하라. 인간을 침묵에로 안내하라. 이런 모양으로는 신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만일 신의 말씀이 소란 속에서도 들리도록 소란한 
수단을 서서 시끄럽게 소리친다면. 그것은 이미 신의 말씀이 아니다 그러므로 
침묵을 창조하라!" 
  @[  역경을 피하려 하지 말라

  시험과 시련이 닥치고 괴로움을 겪을 때 나는 내 영혼 속에 있는 이 모든 
자질에 의지한다. 나는 내 안으로 깊이 파고들어 가서 내 자신 속에 있는 가장 
좋은 것을 끌어낸다.
  그때 기적이 일어난다.
  모든 괴로움은 사라져버린다. 용서가 괴로움을 덜어주고, 인내와 관용이 
시련을 견디게 하며, 믿음이 의혹을 사라지게 한다.
  사실 모든 역경은 우리 영혼이 자랄 수 있는 기회이다.
    존 그레이의 "영혼의 선물" (1995)에서

  아주 오랜 옛날, 신이 이 세상에 살던 때, 한 초로의 농부가 신을 찾아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정말 신일지 모르지만 농부는 아니오 농사일을 조금도 모르지 않소 
당신이 꼭 알아야 할 게 있소"
  신이 농부에게 물었습니다.
  "뭘 말하고 싶은 건가?"
  농부가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내게 일 년만 시간을 주시오 딱 일 년 동안만 나로 하여금 날씨를 
주관하게 해주시오, 그리고 가만히 지켜보시오, 이 세상에서 가난이 싹 걷힐 
테니까 말이오."
  "알겠네"
  신은 농부의 뜻대로 일 년 동안의 날씨를 농부가 주관하도록 허락했습니다.
  농부는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농사짓기에 아주 좋은 날씨를 만들었습니다. 
심한 비바람도 없고, 천둥과 번개가 치는 일도 없고, 찌는 듯한 뙤약볕도 
없도록 했습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잘 되어 가는 듯했습니다. 농부는 
즐거웠습니다. 적당한 햇빛을 원하면 적당한 햇빛이 내리쬐었고, 적당한 비를 
원하면 적당한 비가 내렸습니다. 그해에는 태풍도 불지 않았고, 홍수도지지 
않았습니다. 모든 게 좋은 일 년이었습니다. 곡식도 잘 자라는 듯싶었습니다.
  농부가 다신 신을 찾아가서 말했습니다.
  "앞으로 한 십 년만 농사가 이렇게 잘 된다면, 사람들이 일을 안 해도 
양식이 충분할 거요,"
  신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곡식을 거둘 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이 모여서 타작을 하고 
보니, 껍데기만 있을 뿐, 알맹이는 한 알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농부가 신을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이게 어찌 된 겁니까? 뭐가 잘못된 걸까요?"
  신이 대답했습니다.
  "이 어리석은 사람아 도전이 없었기 때문일세, 혼란과 갈등, 시련이 없었기 
대문이야 방해되고 좋지 않은 건 모두 피했기 대문이란 마릴세, 그래서 
껍데기만 있을 뿐 알맹이가 없는 것이야, 곡식이 여물어 열매를 맺으려면, 
고난 천둥 번개 소나기 시련이 필요한 법일세, 그래야 껍데기 소의 영혼이 
영글지 않겠는가?

  어찌 이 농부뿐이겠습니까,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의 삶 속에서 시련의 
바람과 역경의 파도가 없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도정이 없는 인생은 
성숙하지를 못합니다. 희로애락의 파도를 타면 도전 받지 않는 영혼은 
자라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영적인 성숙에 이르기 위해 많은 구도자들은 스스로 고난을 택해서 
시련의 도가니 속에 몸을 던지지 않았습니까. 메마른 광야로 들어가서 
자기와의 치열한 싸움을 자청했던 예수나 붓다, 한없이 외롭고 위험한 
사막으로 들어가서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서 새로운 존재로 변모되어 세상을 
구제하는 길에 나섰던 많은 구도자들의 삶에서 우리는 그러한 예를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며, 그들은 그런 영적 단련을 통해서 놀라운 변모를 보여준 영혼의 
연금술사들입니다. "납"과 같은 보잘 것 없는 존재가 "금"과 같은 위대한 
영혼으로 거듭나는 기적을 연출한 것이지요.
  이것을 위의 이야기에서는'껍데기 속에 영근 영혼'이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잘 영글었다는 것은 그것이 이제 다시 새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튼실한 씨앗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역경을 넘어 잘 영근 영혼도 이와 같아서, 그런 영혼은 튼실한 신의 씨앗을 
품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이가 영적으로 성숙했다고 하는 것은, 
그가 품고 있는 신의 씨앗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난과 시련의 용광로를 거쳐 나온 영혼은 마치 "정금"과 같아서, 이때에야 
비로소 그는 눈부신 신의 광채를 세상에 뿜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  무심으로 행하라

  나는 무심을 자비보다 더 차원 높은 것으로 여긴다.
  왜냐하면 자비는 동료의 결핍을 향해 밖으로
  나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히기 쉽다.
  간단히 말해서, 내가 모든 덕들을 살펴보건대,
  무심만큼 신께 도움이 되는 덕은 없다는 것이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무심에 대하여"에서

  오랜 전에 믿음이 깊은 한 성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매우 거룩한 
사람이었으나 스스로 거룩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주위의 사람들이 그를 
일컬어 성자라고 말했지만, 그는 결코 자신을 성자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그는 평범한 일을 하면서도 자기 주위에 생명의 향기를 그윽하게 
내뿜었습니다. 꽃이 스스로를 의식하지 않으면서 향기를 내뿜듯이, 가로등이 
말없이 빛을 내어 밤길을 환하게 밝히듯이!
  그는 어린아이처럼 순진무구했고,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용서했습니다. 어느 날, 신의 천사가 와서 그에게 말했습니다.
  "신께서 나를 그대에게 보냈다네. 무엇이든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하게. 혹시 
치유의 은사를 받고 싶은가?"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신께서 친히 치료하시길 바랍니다."
  천사가 다시 물었습니다.
  "죄인들을 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고 싶은가?"
  그가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을 건드리는 것은 제가 할 일이 아닙니다. 그건 
신께서 하실 일입니다."
  "그러면 그대는 덕행의 모범이 되어 사람들이 본받고 싶게 마음이 끌리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가?"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제가 관심의 중심이 됩니다. 저는 제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답답한 천사가 물었습니다.
  "그러면 그대는 무엇을 바라는가?"
  그가 대꾸했습니다.
  "저는 다만 신의 은총을 바랄 뿐입니다. 신의 은총만 있다면 저는 더 바랄 
게 없습니다."
  이때 천사가 다시 말했습니다.
  "안 되네. 어떤 기적이든 그대가 원하는 것을 말해야 하네. 안 그러면 한 
가지라도 억지로 떠맡기겠네."
  "정 그러시다면, 저를 통해서 좋은 일이 이루어지되, 제 자신이 알아차리는 
일이 없게 해주십시오."
  "알겠네."
  그래서 천사는 그의 소원대로 그 거룩한 성인의 그림자가 그의 뒤에 생길 
때마다 그곳이 치유의 땅이 되도록 해주었습니다.
  이제 그가 지나는 곳마다, 그래서 그의 그림자가 생기는 곳마다 병자들이 
치유되고, 땅이 기름지게 되고, 말라붙었던 샘물이 다시 솟고, 삶의 고달픔에 
시달린 이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성인은 이런 일이 생기는 것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관심이 온통 그의 그림자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그는 
잊혀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는 잊혀진 채 자기를 통해서 
좋은 일들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그의 소원은 충분히 성취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성인의 이야기는,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잘 드러내줍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이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자신을 통해서 일 하시는 신의 활동을 드러낼 뿐입니다.
  그러나 이런 깊은 믿음의 소유자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할 수만 있으면 
사람들은 자기가 행한 선행이 세상에 알려지기를 바랍니다. 아^36^예 
플래카드를 내걸고 자기의 선행을 세상에 광고하는 세상이지요.
  이런 선행이라면 차라리 하지 않느니만 못한 것입니다. 동양의 한 지혜자는 
그래서 우리에게 이렇게 간곡히 권유합니다.
  "만물을 낳으면서도 그것을 자기의 소유로 하지 않으며, 만물을 생성하는 
작위를 하면서도 자기의 능력이라 뽐내지 않으며, 공덕을 이루고도 그 공덕에 
거처하지 않는다""도덕경"
  참다운 도를 행하고 사는 성인의 행위는 마땅히 이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매일 우리 눈앞에 떠오르는 태양을 보아도 그렇지 않습니까. 태양은 빛을 내어 
만물을 낳고 자라게 하고 결실을 맺게 하면서도, 만물을 자기의 소유라고 
주장하거나 자기가 한 일을 뽐내지 않습니다.
  이야기 속의 성인의 경지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치유의 은사나 죄인들을 
돌아오게 하는 능력을 주겠다는, 그래서 세인의 관심을 끄는 존재가 되게 
해주겠다는 달콤한 속삭임을 악마의 그것인 양 성인은 단호히 거절합니다. 더 
나아가 그는 신의 은총만으로 만족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래도 천사가 원하는 것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자, 그는 자기가 
하는 선행을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해달라고 천사에게 간곡히 부탁합니다.
  이 성인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했을까요? 인간의 본성 속에 깃들인 
간사함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사람은 누구든 자기의 한 
선행으로 인해 세인의 주목을 받기를 원합니다. 성인은 자칫 이렇게 잘못될 
가능성까지 그 스스로 차단하고 있는 셈입니다.
  신은 그의 요구대로 그를 통해 나타나는 선행을 그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해줍니다. 사람들은 오직 그의 그림자만을 주목할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성인의 그림자, 그것은 곧 그의 "자기 비움"을 상징합니다. 사람들이 성인의 
그림자에만 관심할 뿐 성인을 잊었다는 말이 바로 그것이지요.
  아무튼 이 사람 속에는 무릇 "자기"라는 게 없습니다.
  어떤 시인의 말처럼 그는 조물주의 손에 들린 대나무 피리에 불과합니다. 
조물주가 입을 대어 뜨거운 숨을 불어넣으면 그때서야 피리는 아름다운 가락을 
낼 뿐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음악이 사람들의 가슴을 찡하게 울려도, 피리는 
그것을 자기가 한 일이라 뽐내지도 않고, 그것을 자기의 공으로 돌리는 일이 
없습니다. 무아라는 말처럼 피리의 속은 텅 비어 있기 때문입니다. 온갖 
탐욕의 아상을 여읜 이 성인은 신의 손에 들린 속이 텅 빈 한 자루 피리일 
뿐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사랑과 나눔을 소중한 덕으로 꼽습니다. 하지만 그 사랑과 
나눔이 은밀한 중에 보시는 신께 하듯 하는 행위가 아닐 때 그런 덕행은 
아니함만 못합니다. 그래서 에크하르트는 남의 결핍을 향해 나아가는 자비보다 
"무심"을 더 차원 높은 것으로 여긴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무심"은 어떤 
이가 남에게 자비를 베풀고도, 그것을 자기가 베풀었다는 생각조차 텅 비울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성서는, "신의 완전함"에로 나아가는 것이라 말하는데, 우리가 바로, 
"무심"에까지 자라서 하늘이 기뻐할 완숙한 그릇이 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늘이 선사하는 형언할 수 없는 천국의 환희와 기쁨을 담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  자연의 리듬을 따르라

  자연은 해와 바람과 비, 그리고 여름과 겨울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순수하고 자애로워서 우리에게 무궁무진한 건강과 환희를 안겨준다.
  그리고 우리 인류에게 무한한 동정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만약 어떤 
사람이 정당한 이유로 슬퍼한다면 온 자연이 함께 슬퍼해 줄 것이다.
  태양은 그 밝음을 감출 것이며 바람은 인간처럼 탄식할 것이며 구름은 비의 
눈물을 흘릴 것이며 숲은 한여름에도 잎을 떨구고 상복을 입을 것이다.
  내가 어찌 대지와 교류를 갖지 않겠는가?
  내 자신이 그 일부분은 잎사귀이며 식물의 부식토가 아니던가?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 Walden" (1854)에서

  공자의 제자인 자공이 남쪽 초나라에서 놀다가 진나라로 돌아올 때에 한수의 
남쪽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마침 길을 지나다 보니, 하얀 수건을 늘어뜨린 노인이 밭이랑에 물을 대고 
있었습니다. 고랑을 파고, 우물에 들어가서 물을 길어 동이를 안고 나와 밭에 
물을 대었습니다. 힘은 몹시 들었으나 일은 좀체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밭가에서 그것을 보고 있던 자공이 노인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노인장! 여기 기계가 있는데, 하루 백 이랑의 물을 대도 별로 힘들지 
않고 공은 많을 것이오. 당신은 그것을 가지고 싶지 않소?"
  노인이 자공을 쳐다보고 물었습니다.
  "그것은 어떤 기계요?"
  "나무를 깎아 만든 것이오. 뒤는 무겁게 하고 앞은 가볍게 하여 물을 자아 
올리는 것이오. 그래서 자주 자으면 물은 끓는 듯이 넘쳐 오르는 것이오. 그 
이름을 "용두레"라 하오."
  노인은 분한 듯한 얼굴빛을 지었다가 웃으면서 대꾸했습니다.
  "나는 우리 스승에게 이렇게 들었소. 기계를 쓰게 되면 반드시 기교로운 
일'기사'이 생기고, 기교로운 마음'기심'이 생기며, 기교로운 마음이 가슴속에 
있으면 그 마음의 참됨이 없고, 마음의 참됨이 없으면 그 정신 편안하지 
못하며, 그 정신이 편안하지 못하면, 도에 고요히 살 수 없다고 하였소, 
그러므로 내가 기계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다만 마음에 부끄러워 쓸 수가 없을 
뿐이오"
  자공은 노인의 이야기를 듣고 부끄러워 머릴 숙이고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조금 있다가 노인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이오?"
  "나는 공자의 제자요"
  "아 그러면 자네는 저 많이 아는 것으로써 스스로 성인에 비기고 인의를 
풍떨어 사람을 억누르며, 혼자 거문고를 타고 슬픈 노래를 부르면서 
그것으로써 이름을 천하에 파는 그 사람이 아닌가? 만일 자네의 마음 기운을 
잃어버리고 자네의 몸뚱이의 애착을 떨어버리면 거의 도에 가까울 수 있을 
것이네, 그런데 자네는 아직 자네 한 몸도 다스리지 못하면서 어느 겨를에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자네는 물러가게. 더 이상 내 일을 방해하지 
말게!"
  자공은 부끄러워 얼굴빛이 빨개졌는데, 노인으로부터 떠나 삼십 리를 가서야 
제정신이 돌아왔습니다.

  문명의 편리를 누리게 된 후 인간은 하늘이 준 자연의 리듬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장자"에 나오는 위의 이야기는 자연의 리듬을 잃어버린 인간이 
얼마나 생명의 본성에서 멀어지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이렇게 생명의 본성에서 멀어진 상태를 장자는 "기심"에 물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소위 "기심"에 물들어 있는 사람은 매사에 조급하고 여유가 없지요, 
맞물러 돌아가는 톱니바퀴처럼 빡빡하기만 해서 자기 영혼조차 돌아볼 틈이 
없습니다. 자기 영혼을 살피지 못하면서 세상을 위해 일 하겠다는 것은 남의 
비웃음을 사기에 딱 알맞습니다.
  "기심"에 사로잡히면, 인간 자신을 포함한 자연은 자연 그 자체로 여기지지 
않습니다. 자연은 물욕이 대상일 뿐입니다. 산은 더 이상 산이 아니고, 물은 더 
이상 물이 아닙니다. 자본의 노^36^예가 된 인간에게는 터전인 땅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처럼 인간이 자연과 자신들의 삶을 분리한 결과 자신들의 
생존조차 담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인간과 자연이 분리되지 
않았을 때 인간은 전체적인 삶을 살았으나, 인간이 자기를 자연으로부터 
스스로 소외시켰을 때 인간의 삶은 부분적이 되고 아주 왜소해지고 
말았습니다.
  인간들은 이제 뒤늦게 자신들이 자연의 일부일 뿐이라는 지각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지요, 하지만 문명의 편리라는 선악과를 
따먹어 본 인간들이 그 새콤달콤한 과일을 쉽게 포기 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만 우리는 이제라도 성스러운 자연의 리듬을 따라 살리는 의지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자연스러움을 잃어버린 존재가 영혼의 자유를 얻기를 바랄 수 
없고, 자연과의 조화를 깨뜨린 인간이 건강한 삶을 바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 그 영혼이 깨어 있는 존재는 자신이 자연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 
속에 있음을 압니다. 인간 속에 신성이 존재하는 것처럼 자연 속에도 생동하는 
선의 뜨거운 입김이 서려 있음을 알기 대문입니다. "우파니샤드"에는 자연과의 
아름다운 교감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해가 지는 아름다운 광경이나,
  산의 아름다움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고,
  아! 감탄하는 이는
  벌써 신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 
  @[  신성한 공간에서 살라

  신성한 공간에서 산다고 하는 것은 영적인 삶이 가능해지고,
  당신 주변의 모든 것이 영혼의 고양을 눈짓해주는
  상징적인 환경에서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D. K. 오스본 편집의 "삶의 예술에 관한 성찰" (1991)에서

  엘 베델이란 사람은 수도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수도원을 찾아가서 뛰어난 영적 스승인 에피파무스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에피파무스는 수도원의 원장이었습니다.
  그가 수도원장에게 말했습니다.
  "원장님, 저는 수도자가 되고 싶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점이 한가지 가 있습니다."
  "무엇인가?"
  에피파무스가 물었습니다.
  "수도자는 무엇 때문에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 은거 생활을 하는 겁니까? 
속세에서도 신을 사랑하는 일은 가능한데 말입니다."
  수도원장 에피파무스는 아무런 대답 없이 촛대를 가져다가 초에 불을 
붙였습니다. 그런 다음 엘 베델에게 바깥으로 나가자고 했습니다.
  바깥에는 바람이 매우 심하게 불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방문을 나서기 
전에 수도원장은 촛불을 엘 베델에게 넘기면서 말했습니다.
  "밖에 나가거든 촛불을 꺼뜨리지 않도록 조심하게, 바람에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하라는 말일세."
  엘 베델은 그러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방을 나와 겨우 세 걸음을 떼어놓자 
금방 세찬 바람이 불어닥쳐 촛불을 꺼뜨리고 말았습니다. 엘 베델은 다시 불을 
붙여보았지만, 불은 붙자마자 금세 꺼져버렸습니다.
  엘 베델은 수도원장 에피파무스에게 말했습니다.
  "원장님, 촛불이 제대로 타오르게 하려면 아무래도 방안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바깥에서는 바람 때문에 불이 도무지 견뎌나질 못합니다."
  그러자 에피파무스가 엘 베델에게 대답했습니다.
  "지금 그 말이 그대의 의문에 대한 해답일세. 바깥에서는 바람 때문에 
촛불이 잘 타지를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속세의 바람이 수리로 불어닥치는 
바깥 세상에서는 피어오르는 하나님의 사랑을 간직하기가 불가능하다네, 이 
사랑이 타오르게 만들자면 은수 생활로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네. 이제 
아시겠는가?"
  엘 베델은 마음이 환해졌고, 그리하여 수도자가 되었습니다.

  앤드류 마리아의 "한 묶음의 전설"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신성한 공간에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잘 보여줍니다.
  일상 속에 파묻혀 사는 우리가 비일상적인 "거룩"의 차원을 경험하려 할 
때는, 우리의 일상적 공간과는 다른 장소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타오르는 
촛불로 표상된 "거룩"과의 만남을 위해서는 일상의 바람이 불지 않는 공간이 
요청된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일상과, 격리된 비일상적 공간에 머물 필요가 
있습니다. 비일상적 공간이란 "성"이라 일컬어지는 존재의 근원과 대면할 수 
있는 장소를 말합니다.
  예컨대, 인간에게는 누구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있지요, 고향은 인간의 
삶의 근원이고 중심입니다. 그러나 결코 지리적인 혹은 기하학적인 의미에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고향이 중심이고 근원일 수 있는 것은, 고향이라는 
장소의 비일상적 차원 곧 성의 차원에서만 가능한 경험입니다. '정진홍의 
"종교학 서설" 참조'. 이 "성"의 차원을 경험하는 고향이라는 자리, 그곳이 
바로 신성한 공간입니다.
  인간은 자기 육체를 낳아준 고향뿐만 아니라 존재의 근원에 맞닿고싶은 
그리움이 있습니다. 이것을 성서의 한 지혜자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이런 마음이 가 닿아 머물며 영혼의 인식을 발견 할 수 있는 곳, 그곳 
또한 신성한 공간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이런 영혼의 안식을 
발견하기 위해 세속에서 격리된 사원이나 고요한 수도원을 찾곤 합니다.
  무릇 신성한 공간은 성스러움과의 소통이 가능한 자리입니다. 성스러움과의 
소통은 영혼의 휴식은 물론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의 차원을 발견하게 
해주고, 또한 우리에게 넘치는 삶의 활력을 제공해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신성한 공간을 "바깥"에서만 찾아 기웃대서는 안 됩니다.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서도 우리가 깨어 있을 수만 있다면, 일상적인 삶의 
공간을 신의 뜨거운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바꿀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마치 양치기였던 모세가 양떼에게 풀을 뜯기던 호랩산 기슭에서 불타는 
가시덤불 속에 나타난 "신성"을 경험했듯이! 
  @[  의미를 구별하라

  이 세상에 존재한 모든 것은 감춰진 의미를 갖는다.
  인간, 동물, 나무, 별들은 모두 상형문자이다.
  보는 것만으로 당신은 그들을 이해하지는 못한다.
  당신은 그들이 인간, 동물, 나무, 별들이라고 생각할 뿐이며,
  몇 년이 지나서야 당신은 그들을 이해하게 된다.
    레리 도쎄이의 "의미와 약" (1991)에서

  어느 도시에 신비가들이 바글바글하였는데, 아무개 신비가가 마침 그 도시로 
오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도시의 신비가들은 곧 서로 의논을 하여 아직 도시의 외곽에 머물러 있는 
아무개 신비가에게 급히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그들이 보낸 메시지는 찰랑찰랑하게 담은 조그만 항아리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 메시지를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여기는 지금 이 항아리처럼 가득 찼소."
  물이 가득 찬 항아리를 받은 아무개 신비가는 한겨울 이었는데도 
어찌어찌하여 한 송이 장미를 '피워서' 물항아리에 꽂아 돌려보냈습니다.
  어떤 사람이 또 그 메시지를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난 이만한 도력이 있고, 거기 항아리가 아무리 가득 찼다 하더라도 내가 
묵을 곳은 있소."
  이 메시지를 전해받은 도시의 신비가들이 외쳤습니다.
  "아무개 신비가는 우리들의 장미다!."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인지요!
  도시의 신비가들이 보낸, 물이 가득 찬 항아리의 의미를 읽고 한 송이 
장미를 피워 보낸 아무개 신비가! 그는 참으로 존재 배후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는 자가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꽃피우기 위해서는 이만한 
혼의 예민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요?
  고루한 습관과 타성에 젖어서 하루하루를 살다 보면, 우리의 혼은 녹슨 
칼날처럼 무디어집니다. 신비 그 자체인 우리의 삶은 마냥 무디어진 감성으로 
사는 자에게는 그 베일을 벗어 보여주지 않는 법이지요.
  더구나 현대인들은 자기의 삶을 백지처럼 하얗게 비워두지 못합니다. 채우지 
않아도 될 것들로 가득 채워 백지를 시커멓게 만들어야 직성이 풀려 하지요. 
장미는 커녕 바늘 하나 꽃을 틈도 없지요. 이런 여백 없는 가슴을 지닌 이가 
어찌 물이 가득 찬 항아리의 메시지를 읽을 여유와 예민함이 생겨나겠습니까.
  이른 아침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찬란한 태양을 보거나 서산 마루에 
아름답게 걸린 저녁노을을 보아도 이런 이들의 가슴에는 존재의 신비와 
경이로움의 감동이 피어나지 않을 겁니다. 또한 곁에 있는 동료의 기쁨과 
아파하는 이웃의 괴로움을 함께 나누는 동병상린의 뜨거운 우^36^애도 가슴에 
품지 못할 겁니다. 감춰진 삶의 의미를 읽어낼 수 없으니까요.
  우리가 "종교적"이 된다고 하는 것은 우리 삶의 배후에 감춰진 신비를 읽는 
눈을 갖는 일입니다. "영안"이 열린다는 말이 바로 그것이지요. 참으로 열린 
눈을 가진 이는 사물의 표면에 집착하지 않고, 그 이면에 숨겨진 깊은 의미를 
읽어냅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그 내부에 성스런 의미를 갈무리하고 있습니다. 신이 
창조한 물상 가운데 신성하지 않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작은 돌멩이 하나에도 신성이 깃들여 있다고 한다면, 인간의 삶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인간이야말로 "현재와 미래를 알 
수 있는 감각""전도서"을 지니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신이 우리에게 준 이 소중한 선물을 우리는 고마움으로 잘 활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도 아무개 신비가처럼 "아름다운 메시지 하나"를 
이웃에게 보낼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  천사의 존재를 인식하라

  푸른 목장의 모든 풀잎들은 스스로 허릴 굽히고
  "자라나라! 자라나라!"고 속삭이는 천사를 가지고 있다.
    낸시 멜론의 "이야기하기와 상상력의 예술" (1992)에서

  오랜 옛날에 뛰어난 한 영적 스승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자기 제자들에게 악행으로 지옥에 떨어진 사람이 염라대왕과 
주고받은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세상에는 세 종류의 천사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었습니다.
  "너는 인간 세상에 있을 때 첫째 천사를 본 적이 있느냐?"
  염라대왕의 물음에 지옥에 떨어진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대왕이시여,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너는 나이가 들고 허리가 굽어서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비틀거리며 걷는 사람을 못 보았느냐?"
  "그런 사람이라면 물론 보았습니다."
  "너는 그 천사를 만났으면서도 너 자신도 그처럼 늙을 것이니 서둘러 착한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결과 지금의 업보를 받게 된 
것이야, 그렇다면 너는 인간 세상에 있을 때 둘째 천사를 본적이 있느냐?"
  지옥에 떨어진 사람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습니다.
  "대왕이시여,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병에 걸려 혼자서는 일어나지도 못하고 뼈가 앙상하게 마른 
사람을 본 적이 없단 말이냐?"
  "그런 사람이라면 물론 보았습니다."
  "너는 그 천사를 만났으면서도 너 자신도 병들 몸인 것을 생각하지 않고, 
몸이 성한 동안 심신을 정하게 하고자 애쓰지 않았기 때문에 이 지옥에 떨어진 
것이야. 그렇다면 또 묻겠다."
  염라대왕이 그에게 또 물었습니다.
  "너는 인간 세상에 있을 때 셋째천사를 본적이 있느냐?"
  "대왕이시여,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썩은 송장을 본 적이 없단 말이냐?"
  "물론 보았습니다."
  "너는 그 천사를 만났으면서도 너 자신도 언젠가 죽을 목숨임을 등한시했다. 
그 때문에 이 업보를 받게 된 것이야. 내가 한 일은 모두 너 자신이 그 업보를 
받을 수 밖에 없게 하지 않았느냐?"
  스승은 이런 문답을 제자들에게 들려준 다음 다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자들아, 이 노, 병, 사가 세상에 파견된 천사이다. 천사의 깨우침을 
받아들이는 이는 불행을 면하겠지만, 천사를 보고도 깨닫지 못하는 이는 
영원히 슬퍼해야 할 것이다."

  무릇 천사란 하늘의 메시지를 사람에게 날라다주는 수레 역할을 하는 존재를 
일컫습니다. 천사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천사는 아이들의 
동화나 화가들이 그린 상상도 속의 날개 달린 존재로서 유치원 상상력의 
산물이라고만 여깁니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만 천사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결코 하늘의 메신저인 천사를 만나는 은총을 맛볼 수 없을 것입니다.
  "늙음"과 "병듦"과 "죽음"을 세상에 파견된 천사라고 말하는 위의 이야기는 
천사가 상상도 속의 허황된 존재가 아님을 잘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실 우리 삶의 처소 곳곳에서 천사를 만나고 사는 셈이지요, 이렇게 도처에서 
천사를 만나고 있으면서도 우리의 눈이 닫혀있으면 천사를 보지 못합니다. 
눈이 닫혔다는 말은 천사를 천사로 인식할 안목이 결핍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천사는 우리 삶의 도처에 있습니다. 어찌 늙음과 병듦과 
죽음만이 세상에 파견된 천사이겠습니까? 사회라는 한 울타리 속에 섞여 
살면서도 누군가의 따뜻한 보살핌이 없어 외로워 떠는 사람들은 "사랑"이 
필요함을 호소하는 천사이며, 피비린내 나는 온갖 분쟁 속에서 부모를 잃은 
고아나 굶주림에 허덕이는 난민들은 "평화"가 필요함을 일깨워주는 천사들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무엇이 그리 바쁜지 제 영혼을 돌아볼 틈도 없이 분주하게 돌아치는 
인간들을 멀찌감치서 지켜보며 안타까워하는 은자와 같은 이가 있다면, 그는 
"한가로움과 여유"가 삶의 소중한 미덕임을 넌지시 일러주는 천사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탈무드"의 경구를 보면, 작은 풀잎조차 스스로를 향해 "자라나라!"고 
속삭이는 천사를 가지고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얼마나 아름답고 의미심장한 
경구입니까.
  만일 우리가 일상 속에서 하늘의 메시지를 날라다주는 천사를 만나는 은총을 
누리려고 한다면, 작은 풀잎에서 천사와 나직한 속삭임을 들은 이처럼 우리의 
영적 감각이 되살아나야 할 것입니다. 이런 섬세한 영적 감각을 회복할 수만 
있다며, 우리는 작고 하찮은 일상에서도 놀라운 존재의 신비와 경이를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  그대 존재의 유일성에 충실하라

  창조 이후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과 같지 않았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존재의 유일성(uniqueness)을 지니고 태어났다.
  인간은 모두 신이 주신 각자의 유일한 개성을 완성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자크린 스물의 "스스로 행동하는 예술가" (1992)에서

  한 위대한 무사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옵니다.
  어느 날 저녁, 위대한 무사는 문득 자기 집안에 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위대한 검객이었습니다. 그런데 쥐 한 마리가 집도 없이 자신의 눈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는 무척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칼을 
뽑아 들었지만 쥐는 도망갈 생각도 하지 않았어요, 그는 쥐를 향해 칼을 
휘둘렀으나 쥐는 잽싸게 피해버렸고, 돌에 부딪친 칼은 두 동강이 나고 
말았습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무사는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부러진 
칼을 잡고 미친 듯이 쥐를 쫓아다녔습니다. 하지만 그놈의 쥐가 어찌나 바르고 
약은지 잡을 수가 없었지요, 그가 계속 실패를 하자 쥐는 점점 
대담해졌습니다. 이제는 놀리기까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사는 어떻게 해야 
할지 친구를 찾아가 의논했습니다.
  "세상에 이런 일은 처음일세. 감히 쥐가 나에게 대항하다니, 하지만 이건 
기적이야, 나는 그 쥐한테 완전히 무릎을 끓었네."
  친구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사람이 쥐와 싸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네. 그런 일은 고양이한테 맡기는 
것이 제격이지. 고양이나 한 마리 갖다 놓게."
  위대한 무사가 쥐한테 무릎을 끓었다는 소문이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마침내 
고양이들도 그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고양이도 그 집에 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고양이들이 모두 모여서 지도자를 뽑아놓고는 그 지도자 고양이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가라, 그 쥐는 보통 쥐가 아니다. 위대한 무사도 졌는데 우리가 
가서 무얼 하겠는가? 우리는 보통 고양이다 그러니 지도자인 당신이 가라. 
당신이 가서 쥐에게 본때를 보여줘라."
  지도자 고양이는 겁이 덜컥 났습니다. 하지만 거부할 수는 없었습니다. 
지도자 고양이는 두려움을 감추고 그 집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그 뒤를 보통 
고양이들이 따라 갔습니다.
  지도자 고양이는 잔득 겁을 집어먹은 채 집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쥐는 
마침 침대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고양이는 그런 쥐를 처음 보았습니다. 쥐는 
꼭 왕 같았습니다. 위엄어린 모습으로 침대 위에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고양이는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했습니다. 지난 경험을 되새기면서 생각을 
해보았지만 아무런 묘안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쥐가 무서운 
기세로 공격해왔습니다. 고양이는 너무 놀라 줄행랑을 치고 말았습니다. 그런 
일이 한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고양이를 공격하는 쥐가 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었습니다.
  너무나 놀라 고양이는 도망치다가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친구들이 
무사를 찾아가 말했습니다.
  "이제 보통 고양이론 안 되겠어, 왕궁에 가서 왕의 고양이를 빌려다 놓게. 
왕의 고양이라면 뭔가 할 수 있을 것이네."
  그래서 무사는 왕궁으로 가서 고양이를 빌려왔습니다. 왕궁의 고양이는 아주 
평범해 보였습니다. 고양이들이 말했습니다.
  "지도자 고양이도 죽었는데 왕의 고양이라고 별수 있겠는가. 우리가 보기엔 
우리보다도 더 평범한 것 같은데. 이제 왕의 고양이가 죽어버리면 저 무사는 
왕한테 뭐라고 변명할 것인가?"
  하지만 다른 수가 없었습니다. 무사는 왕의 고양이를 집안으로 
들여보냈습니다. 그러자 잠시 후 고양이가 쥐를 물고 나왔습니다. 주위에 모여 
있던 고양이들이 모두 놀라 물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했는가? 지도자 고양이도 손 한번 못 쓰고 죽었는데, 도대체 
무슨 수를 썼는가?"
  왕의 고양이가 말했습니다.
  "수는 무슨 수가 있단 말인가? 나는 고양이고, 그는 쥐야,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다른 뭐가 더 필요한가?"

  그렇습니다.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고양이는 고양이고, 쥐는 쥐일 
뿐이지요, 이러한 자각을 갖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이 우화가 주는 소중한 
교훈은, 인간에게는 저마다 고유의 삶이 있다는 것이고, 또한 그 고유의 삶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을 남과 비교하면서 우월감에 사로잡혀 살거나 
열등감에 붙들려 자기 고유의 생을 소모하기 일쑤입니다. 또는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부러워하여 그의 삶을 턱없이 흉내냅니다. 이것은 신이 주신 고유의 
삶에 역행하는 방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연의 벗들이 사는 모습을 둘러보십시오, 도토리는 자기가 작고 
보잘것없다고 굵은 알밤을 부러워하지 않고, 화단 구석에 핀 작은 채송화도 키 
큰 해바라기를 시샘하지 않습니다. 좁은 닭장 안에 사는 닭도 지렁이도 숲을 
자유롭게 누비는 꽃뱀이 되려 하지 않습니다. 저마다 자기의 생을 살아내면서 
우주의 조화를 이루어갈 뿐입니다.
  "바가바드 기타"에는 다르마'Dharma'란 말이 있습니다. "존재의 법칙"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존재를 존재이게 하고, 사물을 사물이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존재와 사물은 저마다 자신만의 특성대로 살도록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나만의 길이 있다. 나에게는 내가 살야 할 빛깔이 있다. 나에게는 
나만의 고유한 생이 있다."
  이것이 곧 "존재의 법칙"입니다.
  쥐 앞에 선 고양이가 자신의 "고양이됨"을 망각했을 때, 즉 고양이는 고유의 
유일성을 상실했을 때, 고양이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고유의 특성을 
상실한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살아서 움직인다 하더라도 신이 주신 
고유의 생에 대한 자각을 갖지 못한다면, 그는 스스로 소중한 생을 허비하는 
것에 다름아니지요.
  세상을 창조한 이가 있다면, 그분은 세상의 어떤 피조물이든, 그의 존재의 
유일성에 충실하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그것이 곧 우주의 조화로움을 이루어 
가는 신의 활동에 참여하는 아름다운 삶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  춤추라

  영혼이 춤을 추기 때문에 우리는 춤을 추어야 한다. 생각해보라.
  실제로 춤추지 않는 것이 무엇이 있는가?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기쁨의 순간들, 즐거운 행동들,
  친절한 행위들과 같은 현실을 의미한다.
  오랜 침묵, 고요한 영혼에서 나오는 길은 정적조차 춤이 아닌가.
  우리의 육안에는 그것들이 춤추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말이다.
  팽이가 가장 완전하게 춤출 때, 그것은 겨우 정지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마치 움직이지 않는 듯이 보이는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며 춤을 
추고, 밤하늘의 별들이 춤을 추는 것처럼!
    P. 토마스 메론, T. 페트릭 멜론의 "경험의 창문들" (1992)에서

  러시아의 어느 작은 마을에 사는 유대인들이 한 랍비가 도착하기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랍비가 오는 일은 좀처럼 드문 일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 
성자에게 물어볼 질문들을 준비하느라고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마침내 랍비가 도착하자, 사람들은 반갑게 랍비를 맞이하여 마을 회관으로 
모셨습니다. 랍비는 그들의 분위기에서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모두 
랍비의 대답을 들으려고 단단히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랍비는 처음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한참 동안 그들의 눈을 뻔히 
바라보고만 있더니. 쉽게 잊을 수 없는 멜로디 하나를 콧노래로 
흥얼거렸습니다.
  그러자 마을 회관에 모인 이들 모두가 그 콧노래를 따라 흥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후, 랍비는 노래를 불렀고, 그들도 따라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랍비는 노래의 박자에 맞추어 스텝을 밟고 몸을 흔들면서 
춤을 추었습니다. 회중도 그대로 따라했습니다. 그들은 곧 그 춤에 몰입하여 
그 경쾌한 움직임에 완전히 동화된 나머지 세상의 다른 모든 것들을 까맣게 
잊은 듯이 보일 지경이었습니다. 춤의 황홀경에 빠진 그들은 완전히 하나가 
되었고, 진리로부터 떨어져 있던 분열된 마음이 치유를 받았습니다.
  춤이 점점 느려지면서 완전히 멈추기까지는 거의 한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들은 언제 시간이 흘렀는지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제 그들의 가슴에는 
어떤 긴장감도 없이 방안 가득히 고인 고요와 평화 속에 조용히 않아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그러자 랍비는 그곳에 모인 회중을 둘러보며 딱 한마디 말로 자신의 말을 
끝냈습니다.
  이것으로써 내가 여러분의 질문에 답변을 했다고 믿습니다.

  춤은 우주 생명의 신비입니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춤을 춥니다. 춤을 
춤으로써 모든 존재는 이 우주 생명의 신비에 참여합니다. 작은 풀잎, 바람, 숲 
속의 새와 짐승들, 구름, 강물, 달과 별들, 움직임 없는 것처럼 보이는 바위와 
산 등 모든 만물이 춤을 추며 우주 생명의 신비와 경이를 드러내줍니다. 이때, 
춤을 춘다는 것은 모든 존재가 우주적인 조화를 이루어낸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위의 이야기를 다시 음미해보면, 랍비를 만나기 전에 마을 회관에 모인 
유대인들은 그들의 가슴에 잔득 질문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의문투성이였습니다. 그들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두려움과 회의, 불안과 염려만이 그 들의 삶을 
지배했습니다. 그들의 내면에는 감동의 파도가 일렁거리지도 않았고, 기쁨과 
감사의 샘이 솟지 않는 메마른 사막과도 같은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의 메마른 삶을 적셔줄 은총의 소낙비만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하지만 그들 곁에 다가온 성자는 그들이 물음을 모른 체했습니다. 
그는 무엇을 원하느냐고 그들에게 묻지도 않았습니다. 사실상 랍비는 그들의 
질문에 관심이 없는 듯이 행동합니다. 그는 다만 콧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을 
뿐입니다.
  가슴속에 잔득 질문을 품은 채 안으로 웅크려 있던 그들은 기이한 성자의 
움직임을 지켜보다가 자기들도 모르게 성자의 노래와 춤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성자가 불러일으킨 흥겨움에 동화되어 함께 춤을 추던 그들은 
자기들 안의 질문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니, 춤에 몰입하다 보니, 그들의 
생을 괴롭히던 질문 자체가 사라져버리고 만 것입니다.
  질문이 사라졌다는 것은 그들 스스로 괴로워하던 내적 분열이 치유되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분열된 영혼의 치유, 그것은 존재의 근원과 하나가 
되었다고 하는 것을 뜻하지요, 이제 더 이상 자기 속에 물음을 만들어 가지고 
존재의 바깥을 배회할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물음에 답변해줄 스승을 찾을 
필요도 없어진 것입니다. 노래하며 춤을 추는 동안 자기들 속의 물음 자체가 
없어져 버렸으니까요!
  춤이 끝나자, 그들에게는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 없었습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막처럼 
메말랐던 그들의 내면에서는 이상한 희열과 감사가 샘물처럼 솟구쳤습니다. 
이것이 바로 춤이 지닌 놀라운 힘입니다. 시들었던 영혼들을 일깨워 준 
힘입니다. 입을 열어 토한 어떤 웅변보다 강한 힘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기를 원한다면, 춤을 추십시오, 노래하고 
춤을 추십시오.
  춤의 균형과 조화를 상실한 당신의 영혼을 깨어나게 할 것이요, 성스런 
우주적 생명의 신비에 참여하여 당신이 살아가는 매순간이 감동의 파도로 
일렁거릴 것입니다. 
  @[  쉬지 말고 기도하라

  건전한 기도는 일상적이고도 평범한 여러가지 다양한 경험들을 필요로 한다.
  산책이라든가 대화 혹은 건전하고 유익한 웃음거리들.
  화초가꾸거나 이웃과의 한담, 그리고 밥짓기나 유리창 닦기 등등.
  이 모든 일들이 다 기도를 하는데 소중하다.
  어디 그뿐인가, 부부간의 사랑이나 아이들과 놀아주는 일 그리고 열심히 
일하는 것도 기도하는 데 곡 필요한 요소들이다.
  그렇다 영적인 히말라야를 정복하기 위해서는, 일상생활이 작은 산들과 
골짜기에서 정기적으로 훈련받지 않으면 안 된다.
    리차드 포스터의 "기도" (1992)에서

  인도의 현자인 나라다는 신을 열심히 섬기는 신자였습니다.
  어찌나 신심이 돈독하던지, 그는 매일 시간을 정해 놓고 사원에 가서 기도를 
바쳤습니다. 어느 날 그는 온 세상에서 자기보다 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신께서 그의 교만한 마음을 읽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라다야, 너는 당장 갠지스 강변 마을로 가서 거기에 살고 있는, 열성 
있는 신자를 만나도록 해라. 그는 농부인데, 그와 더불어 사는 것이 너에게 
유익할 것이야."
  나라다는 신의 명령대로 갠지스 강변 마을로 가서 한 농부를 만났습니다.
  그 농부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는 신의 이름을 한 번 부른 다음, 쟁기를 메고 
들로 나가서 온종일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잠들기 직전에 신의 이름을 
또 한 번 불렀습니다.
  나라다는 이 농부의 살아가는 모습을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이 시골 촌뜨기가 신을 열심히 섬기는 자란 말인가? 내가 보니, 
온종일 세상일만 하고 있는데!"
  신께서는 이런 나라 다의 생각을 아시고 그에게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사발에 우유를 넘치도록 가득 담아 들고 시내를 한바퀴 돌아오너라 
한 방울도 흘러서는 안 된다."
  나라 다는 신이 말씀하신 그대로 했습니다. 그가 시내를 한바퀴 다 
돌아오자. 신께서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시내를 돌아다니는 동안 너는 나를 얼마나 자주 생각했느냐?"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는데요. 주님! 우유를 엎지를까봐 그것에 정신을 
쏟느라 한 번도 주님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신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그릇이 내 정신을 모두 앗아가서 너는 나를 까맣게 잊었었구나. 하지만 
저 농부를 봐라. 한 가족을 부양해야 할 짐을 진 저 농부는 매일 나를 두 
번씩이나 기억하지 않느냐?"

  흔히 사람들인 신께 바치는 기도는 사원이나 성당 같은 특별한 장소에서만 
행해질 수 있다고 여깁니다. 이것은 신이 그린 특별한 장소에만 계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들의 신앙은 일상적 삶과 분리됩니다. 
스스로 신심이 깊다고 교만에 빠졌던 나라다의 경우가 바로 그렇습니다.
  나라다는 사원을 드나들며 열심히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사원에서는 누구나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상 속에 있으면서 
기도하는 생활을 지속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농부는 하루에 두 
번 기도했다고 했지만, 몇 번 기도했느냐 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일이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기도의 질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매순간 신의 숨결을 
느끼며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곳이 농부들이 땀 흘리는 
일터든지 회사든지 시장이나 학교든지 우리가 처한 삶의 자리에서 신의 현존을 
깨닫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신에게 바치는 기도의 본질이라는 
것이지요.
  아무리 사원을 뻔질나게 드나들며 그럴듯한 기도의 형식을 갖춘다. 
하더라도, 일상 속에서 신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러한 기도는 존재의 근원이신 
분과의 결속보다는 분리를 촉진시킬 뿐입니다. 이러한 분리는 우리의 영혼을 
메마르게 하고, 무기력 속에 빠뜨릴 뿐만 아니라, 파릇파릇한 생기를 
잃어버리게 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호흡에 비유하곤 합니다. 그 이유는 기도가 일상 속에서 
추구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들숨 날숨의 균형 잡힌 호흡을 통해서 우리의 
몸이 건강을 유지하듯이, 일상 속에서 쉬지 않는 기도를 통해서만 우리의 
영혼이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처럼 항상 푸르른 생기를 간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메마른 일상 속에서 탈진하여 기도의 리듬을 일어버리면, 우리의 
삶은 곧 조화와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게 됩니다. 참빛이 되신 분이 비춰주는 
의식의 광명 속에서 느끼는 살아 있음의 감동과 희열도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사관의 하나됨에서 오는 평화와 지복의 느낌도 간데 없이 소멸되고 말지요.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기도는 깨어 있는 우리의 의식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막아줍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이 깨어서 높은 의식의 광명 속에 머물러 있으려면,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  늘 허락을 구하라

  멕시코의 노래하는 무당 돈 호세 마추와는 "허락 없이는 나뭇잎 하나도 
갖지 말고 돌멩이 하나도 치우지 말라"고 말했다.
  항상 허락을 구하라. 그렇게 함으로써 삶의 균형이 유지되고 겸손을 배울 수 
있다.
  그대가 뜯고자 하는 나뭇잎이 네 마음속에 품은 목적보다 훨씬 더 중요한 
수도 있다.
  그대는 알지 못한다. 그러니 먼저 허락을 구하라.
    스티브 맥퍼든의 "지혜의 소묘" (1991)에서

  "늘 허락을 구하라"는 말은 신이 창조한 만물에 대해 경외감을 지니라는 
것입니다. 땅에 기어가는 개미 한 마리, 이름 모를 작은 풀잎 길에 나뒹구는 
돌멩이 하나에도 경외감을 갖고 대하라는 것이지요.
  "신화의 힘"을 쓴 조지 캠벨은 만물에 대한 경외감을, 옛 인디언들의 
사냥꾼들의 의례 속에서 찾아서 보여줍니다.

  인디언들은 사냥을 나가기 전에 산꼭대기 흙바닥에다 자기가 장차 잡을 
짐승의 모양을 그린다. 산꼭대기는 해가 뜨면 첫 햇살이 비치는 곳이다. 해가 
뜨면 사냥꾼은 동료들과 함께 거기에 대기하고 있다가 의례를 베푼다.
  이윽고 햇살이 그 짐승 그림을 비추면 사냥꾼은 빛살을 따라 화살을 날려 그 
짐승 그림을 명중시킨다. 그러면 거기에 함께 간 여자가 사냥꾼의 도움을 받아 
손을 번쩍 들고는 소리를 지른다.
  사냥꾼은 이 의례가 끝난 다음에야 사냥을 나가서 짐승을 죽인다. 이때 
사냥꾼이 쓰는 화살은 조금 전에 산꼭대기에서 짐승 그림을 맞혔던 바로 그 
화살이다.
  이렇게 해서 짐승을 잡은 사냥꾼은 다음날 아침 해 뜰 녘에 산으로 
올라가서는 그 동물 그림을 지워버린다.

  캠벨은 이런 인디언 사냥꾼들의 의례가 갖는 의미를 다음과 같이 
풀이합니다.
  "이 의례는, 내가 짐승을 잡은 것은 자연의 뜻에 따른 것이지 나의 개인적인 
의도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이런 뜻을 지닌다."
  이런 인디언들의 삶의 태도에서 드러나는 것은 자연과 한치의 틈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들에게는 따로 만물에 대한 경외감이 요청되지 않습니다. 
해와 달과 별, 풀, 바위, 동물 등 모든 만물이 그들의 삶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그들이 어떤 종교적인 훈련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인위적인 겸손과는 다릅니다. 그들의 의례에 나타나는 '허락'을 
구하는 태도는, 동양의 한 성인이 말하는 "천지와 나는 같은 뿌리에서 나왔고, 
만물과 나는 한 몸이다."라는 삶의 태도에 다름아닙니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자연과 철저히 유리되어 있고, 따라서 만물과의 
일체감을 잃어버렸습니다. 그것의 결과 는 인간이 쉴 만한 성소의 상실과 
한밖에 없는 삶의 둥우리인 지구 파괴라는 엄청난 재앙을 목도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종교란 "함께 어울림"을 뜻합니다. 인간 따로, 자연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또는 자연 위에 인간이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자연의 일부일 
뿐인 것이지요. 오늘날 우리들은 만물을 공경하지 않으면 우리 자신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늘 허락을 구하라"는 말은 인간의 삶이 온 우주 만물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깊은 유기적 관련 속에 있으니, 이러한 점을 깊이 자각하고 만물을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만물을 공경할 때, 그것은 곧 우주의 주재이신 분을 공경하는 
것이며, 인간 자신을 공경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늘 허락을 구하라.
  이 말이 바로 우리 존재의 근원적인 바탕을 새롭게 일깨워줍니다. 한줌의 
흙, 한 포기의 풀, 한 개의 돌멩이가 그것을 사용하고 사는 어떤 인간이 품은 
목적보다 더욱 소중할 수도 있음을! 
  @[  균형을 찾아라

  애미쉬(Amish: 17세기 말 스위스의 종교 개혁가인 자콥 암만이 창시한 
기독교의 한 종파)들은 햇빛과 그늘이 번갈아 교차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들은 어둠과, 빛 정신과 육체라는 양면을 다 보여주며 그 대립적인 양면을 
큰 화합으로 이끄는 도전을 보여준다.그들은 존재의 양극단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않는다.
  즉 일치와 자유, 훈련과 상상, 수락과 의심, 겸손과 분노하는 자아와 같은 
양극단 중에서 하나를 택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상반된 것을 끌어안는 균형 잡힌 행동을 소중히 여긴다.
    슈 벤더의 "쉽고 간단한 것" (1991)에서

  옛날 어느 나라에 진기한 나무가 한 그루 있었습니다. 메마른 황야에는 넓게 
가지를 벌리고 있는 그 나무 한 그루만이 있었습니다 아무도 그 나무의 나이를 
몰랐고, 그 나무의 열매를 맛본 이도 없었습니다.
  그 나무의 열매에 황금빛으로 매우 탐스럽고 먹음직스러웠습니다. 그러나 그 
나무의 열매는 절반쯤이 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열매에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독이 든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열매의 외양은 똑같았습니다. 
거대한 몸통 위로 넓게 펼친 두개의 가지 가운데 한 가지는 죽음을, 다른 한 
가지는 생명을 담고 있었는데 어느 가지의 것이 죽음을 가져오는 열매인지 
그렇지 않은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 무서운 기근이 몰아닥쳤습니다. 나라 안에는 먹을 
것이라곤 없었습니다. 모든 곡식과 초목이 마라 죽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메마른 황야의 나무만은 건제했고 황금빛 열매들은 다른 해와 다름없이 두 
나뭇가지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너무 굶주려서 어쩔 수 없이 그 진기한 나무 밑으로 
물려들었습니다. 하지만 누가 먼저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때, 한 
사내가 용기를 내어 나무 밑으로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에게는 굶어 죽기 
직전의 아들이 하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내는 오른쪽 나뭇가지 밑으로 가서 
열매를 하나 땄습니다. 그리고 눈을 곡 감고 그 열매를 깨물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도 사내는 죽지 않았습니다. 사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그가 열매를 먹고도 죽지 않자, 오른쪽 나뭇가지에 달려들어 열매들을 맛있게 
따먹기 시작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열매를 따먹는 즉시 그 자리에 황금빛 
열매가 또 열렸습니다. 그들은 그 나무에서 맛있는 열매를 따먹으며 무려 
여드레 동안이나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날 이후, 사람들은 어느 쪽에 해로운 열매가 열리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왼쪽 가지 였습니다. 사람들은 그 가지를 증오와 멸시의 눈초리로 
바라보았습니다. 마침 내 사람들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왼쪽 가지는 
위험하기만 할 뿐 전혀 쓸모가 없다는 것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좋은 과일들과 
전혀 구분이 되지 않았으므로 멍청한 아이들이 언제라도 독이 든 과일을 
따먹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가지를 완전히 잘라버리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들은 마치 복수를 하는 듯한 쾌감을 느끼며 그 일을 
결행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오른쪽 가지에 달렸던 좋은 과일들이 전부 당위에 떨어져 
썩고 있었습니다. 자기 몸의 반이 잘려나간 나무에는 메마른 이파리 몇 장만이 
간신히 매달려 있었고, 껍질도 검게 변해 있었습니다. 나뭇가지 위에 앉아 
지저귀던 새들도 어디론가 날아갔습니다. 그 나무는 더 이상 살아 있는 나무가 
아니었습니다.

  인도의 이 민담처럼 우리의 존재는 대립적인 양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한 
나무에 "생명의 열매", "죽음의 열매"가 함께 있듯이, 삼과 죽음, 빛과 어둠, 
선과 악, 사랑과 미움이 공존하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전체"를 보지 않고, "부분"만 봅니다. 선이 있어서 악이 드러나고, 악이 
있어서 선이 드러납니다. 히틀러가 있어서 슈바이처가 돋보이고, 가롯 유다가 
있어서 베드로가 돋보이듯이 우리의 삶은 이 대립적인 양면을 포함합니다.
  가장 가까운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아도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빛과 
어둠, 선과 악, 사랑과 미움이 함께 머물러 있지 않습니까?
  구체적으로 예수의 가르침을 살펴보면, 그는 산상수훈에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다른 말로 "전체"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부분"만 사랑하지 말고 어떤 존재의 전부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가까운 이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도 사랑스러운 요소와 
미움의 요소가 공존합니다. 그런데 사랑스러운 것만을 보고 그를 사랑하는 
것은 누군들 못하겠습니까? 미운 요소까지 용납하고 사랑하는 것이지요. 어떤 
이의 부분만을 보고 그를 미워하거나 증오하는 것은 곧 진기한 나무를 가진 
나라의 사람들이 독이 든 열매의 가지를 잘라 죽게 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미워하는 것은 살인과 같다"고 한 것이 아닐까요, 미움 속에는 
"살인의 씨앗"이 이미 깃들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미운 것을 사랑할 수 있을까? 자기가 만난 대상 속에 있는 
그 미운 요소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지요, 
그것을 없애야겠다. 내가 바꾸도록 해야겠다. 이렇게 하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없애려 하면, 이상한 나라의 
사람들처럼 그 나무"대상"를 죽이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성서의 비유처럼, 
밭에 자라는 잡초를 뽑으려다가 곡식까지 뽑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래서 
예수는"잡초도 버려 두어라, 잡초를 뽑으려다 곡식까지 다칠라."하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잡초와 곡식을 함께 크게 두는 것, 이것이 예수의 
사랑법이었습니다.
  영성신학에 대한 뛰어난 책을 쓴 조이스 럽 수녀는 영혼의 성숙을 위해서는 
어둠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인생길을 가는 데는 반드시 빛이 필요한 것처럼 어둠도 필요하다. 
아마도 인생의 진리, 즉 빛의 행로뿐만 아니라 이처럼 어둠의 행로도 거쳐야만 
인생이 성숙하고 변화하게 된다는 역설적 진리를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작은 불꽃에서"
  아무튼 전체적인 삶은 균형을 이룬 삶입니다. 즉 대립적인 것 사이의 균형을 
이루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생명이 들숨과 날숨의 균형을 이루었을 때 
건강체로 살아 있을 수 있듯이 우리는 이 양 극단을 받아들여 균형 잡힌 
생동하는 삶을 살도록 해야 합니다. 전체적이고 균형 잡힌 삶, 그것을 우리는 
깨달음, 자유, 구원이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  나누며 살라

  모든 씨앗 속에는 수천 개의 숲의 약속이 들어 있다.
  그러므로 씨앗은 그냥 있어서는 안 된다.
  씨앗은 기름진 당에 그 지성을 주어야 한다.
  그렇게 주게 되면 보이지 않는 에너지가 흘러 물질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주면 줄수록 많이 받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줌으로써 우주의 풍요한 흐름을 당신의 삶 속에 순화시키는 것이 
되므로.
    디팍 초프라의 "성공을 부르는 마음의 법칙 일곱가지" (1994)에서

  비바람이 몹시 심하게 부는 어느 날 밤, 남루한 차림의 거지가 성 프란체스코의 
오두막으로 찾아왔습니다.
  "너무 배가 고프고 추우니, 먹을 것과 잠자리를 좀 마련해주세요."
  프란체스크는 얼른 그 거지를 데리고 들어와서 불빛에 비춰 보니 그 거지는 
얼굴과 코가 문드러진 문둥이 였습니다.
  그는 서둘러 음식을 준비해서 정성껏 대접한 뒤, 자기의 잠자리를 그에게 
내주었습니다. 침대에 들어간 거지는 그러나 잠시 후, 추워서 견딜 수가 없으니. 
당신의 몸으로 자기의 몸을 데워 달라고 했습니다.
  프란체스코는 그가 요구하는 대로 더러운 몸에 자기의 몸을 비벼 그의 몸을 뎁혀 
주었습니다.
  잠이 든 거지를 보고 프란체스크도 그 옆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새벽 기도 시간이 되어 일어나 보니, 침대에서 자던 거지는 간 곳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피고름이 흐르던 그 문둥이의 몸을 감사고 잤는데도 
프란체스코의 몸과 침대에는 그 더러운 이물질이 전혀 묻어 있지 않았습니다.
  프란체스코는 즉시 그 자리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문둥병자로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주님과 같이 동침했으니, 이 
죄인의 기쁨을 무엇으로 다 표현하리요!"

  한 알의 밀알처럼 썩어지는 자기 모화의 삶을 살았던 프란체스코의 이 이야기는 
아주 미묘한 신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비천한 이와 함께 고통을 나누고 난 뒤, 신과의 하나됨의 기쁨을 
얻었으니, 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입니까.
  가장 작은 자에게 물 한 그릇을 대접하면 그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예수는 
가르쳤습니다. 자기보다 큰 존재와 하나되는 신비를 몸소 체험하는 은총을 얻은 
것입니다. 진흙으로 빚어진 보잘것없는 유한한 한 인간이 우주적 신성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것이 나눔이 가지는 신비요 은총입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지닌 것을 나누면 내 소유가 줄어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너무 좁은 안목이 빗어내는 편견입니다. 풍요'affluence'란 말은"풍부히 
흐름"이란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삶을 순환하는 부와 풍요를 누리려면, 내가 가진 
것을 움켜쥐지 말고 흐르게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닐까요?
  현대 과학이 밝힌 것처럼 모든 물질은 에너지로 되어있습니다. 에너지는 멈추지 
않고 항상 흐르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에너지의 순환을 멈추는 것은 피의 
흐름을 멈추는 것과 같습니다. 피가 응고되어 흐르지 않으면 그것은 곧 죽음이지요, 
나눔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초프라의 말처럼 씨앗 속에는 수천 개의 숲의 약속이 들어 있습니다. 나눔은 작은 
씨앗을 부리는 것과 같습니다. 땅에 뿌려진 씨앗은 썩어야 싹을 틔우므로 없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썩어 없어짐으로써 숲을 이룰 수 있습니다. 예수나 
프란체스크처럼 스스로 낮아지는 사랑의 실천자가 되려면, 이러한 식물적 상상력이 
요청되는 것이 아닐까요?
  신이 선물로 베풀어준 당신의 소유를 나누십시오, 기쁨이 넘치는 삶을 원하면 
다른 이에게 기쁨을 주십시오, 사랑 받고 싶다면 다른 사람을 사랑하십시오, 
주목받고 싶다면 다른 사람을 주목하고 인정하십시오, 물질적으로 풍요롭기를 
바라거든 다른 사람을 물질적으로 풍부하게 도우십시오.
  당신이 뿌린 씨앗은 반드시 수천 배가 되어 돌아올 것입니다. 어떤 씨앗의 죽음도 
헛되지 않습니다. 우주는 단 하나의 쿼크(quark: 물질의 최소 단위)도 낭비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우주가 빚어내는 이 미묘하고 아름다운 신비에 참여함으로써 
우리의 기쁨과 행복은 배가 될 것입니다. 그 참여의 한 방법이 곧 나눔입니다. 
당신의 존재 자체를 내어주는 사랑의 나눔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  영적인 은신처로 가라

  영적인 은신처는 굶주리는 영혼을 치료하는 약이다.
  침묵, 외로움 연습, 소박한 삶을 통해 우리는 비어 있는 영혼의 저수지를 채우기 
시작한다.
  이것은 베일을 걷어내고, 가면을 해체시키며, 용서와 연민, 그리고 차단되어 있던 
다정스런 친절을 담을 공간을 창조한다.
    데이비드 쿠퍼의 "침묵: 단순성과 고독" (1992)에서

  어느 은수자가 거친 베로 만든 허름한 외투만 걸친 채 사막을 향해 떠났습니다.
  사흘 동안 걸은 후에 바위 위로 올라가니 웬 낯선 사람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바위 밑 쪽에서 짐승처럼 생풀을 뜯어먹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은수자는 들키지 않게 바위에서 내려오면서 그 사람을 덮쳤습니다. 그러나 그 
나체의 원로는 사람에 대한 감각이 없었습니다. 더 세게 껴안자 원로는 몸을 
빼내려고 버둥거리더니 이윽고 도망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은수자는 그를 따라잡으려고 달리면서 외쳤습니다.
  "기다려주세요, 신의 사람을 위해 당신을 뒤쫓고 있으니까요."
  상대방도 고개를 돌리고 말했습니다.
  "나도 신의 사랑 때문에 도망가는 거요."
  그러자 은수자는 걸치고 있던 외투를 벗어버리고 계속 추적했습니다. 원로는 
은수자가 옷을 벗어던지는 걸 보고는 우뚝 멈춰 섰습니다. 그리고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가 세속에서 가져온 것을 되던져버림을 보고는 오기를 기다렸네."
  은수자가 간절한 음성으로 말했습니다.
  "사부님, 제가 구원될 수 있는 특별한 말씀을 한마디만 해주십시오."
  원로가 빙그레 웃으며 대꾸했습니다.
  "사람을 피하고 침묵을 지키게. 그러면 그대가 구원될테니!"

  페라지오와 요한이 엮은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에 나오는 이야기 입니다.
  "사람을 피하고 침묵을 지키라"는 말은 영적인 은신처를 찾아서 인간의 본래 
면목을 보라는 것입니다.
  분주함과 소음이 요동하는 세속에 거하면서 자기의 영혼을 잘 돌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람들 틈서리에서 분주함과 소음에 시달리다 보면, 자신의 영혼을 
돌아볼 여유를 찾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아^36^예 우리의 영혼이 탈진에 이르고 
맙니다. 여백을 잃어버리고 탈진한 사람은 자기존재의 근원과의 생동하는 교류마저 
단절되지요.
  한 풋내기 수도사가 자기의 영적인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참된 수도자가 될 수 있습니까?"
  스승이 대답했습니다.
  "내 말을 듣고, 홀로이신 분 앞에 홀로 있게!"
  이처럼 위대한 영적 스승들은, 영적인 은신처를 찾아 홀로 있는 삶을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기도의 골방"으로 들어가기를 권면했습니다. 물론 예수 자신도 
몰려드는 군중들 틈에서 지내다 지칠 때면, 홀로 산이나 광야를 찾아가서 영적인 
기력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던 흔적을 자료로 남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특별한 공간에 홀로 머물러 있는다고 해서 홀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영적인 은신처에 가 있을 때의 우리의 자세가 더 중요합니다.
  어느 수녀는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산 위에 올라 수도자의 길을 걷던 많은 이들이 멸망했다. 그들의 행실이 
세속적이었기 때문이다. 혼자 살면서 도 마음으로 사람들과 섞여 사는 것보다는 
여럿이 함께 살면서도 마음으로 고요를 실천하는 쪽이 더 낫다."
  그렇습니다. 참된 구도의 길을 가고자 하는 자는, 영적인 은신처를 발견하고자 
하는 노력 이상으로 "내적인 고요"를 구하는 노력이 더 소중합니다. 우리는 내적인 
고요를 회복함으로써 우리의 존재의 근원과의 일치에 이르게 되고, 바짝 마른 
건초처럼 탈진된 우리의 영혼이 푸른 시냇가의 싱싱한 나무들처럼 다시 살아나는 
기적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부요를 구하는 이들은 먼저 홀로 거할 수 있는 은밀한 명상의 
처소, 혹은 기도의 골방을 찾아서 자기 영혼의 샘을 깊게 파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영적인 부요의 근원이신 분을 만나 내적인 고요에 이를 수 있다면,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  그대 몫의 역할을 다하라

  신에게 봉사하기 위해 자신을 포기한 사람들은 그들의 몸에 흉터나 얼룩, 
심지어는 진흙과 피로 더럽혀졌을 지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집 안에서 
깨끗하고 말쑥하게 앉아 있는 사람들보다 훨씬 가치 있는 사람들이다.
    D. H. 컨시다인의 "하느님께의 신뢰" (1982)에서

  한 스승이 제자 한 명과 여행을 떠났습니다. 제자는 그들이 타고 간 낙타를 
돌보기로 하였습니다.
  날이 저물었습니다. 여행에 지친 두 사람은 사막에 텐트를 치고 쉬기로 
하였습니다 .제자는 낙타를 잘 돌볼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는 낙타를 그냥 
놔둔 채 신에게 기도만 하였습니다.
  "신이여, 낙타를 돌봐주소서"
  그리곤 지쳐서 그만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낙타는 온데간데없었습니다. 낙타가 제 발로 어디를 간 
것인지 아니면 도둑을 맞은 것인지 어쨌든 낙타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스승이 물었습니다.
  "얘야, 낙타는 어디 있느냐?"
  제자가 대답했습니다.
  "글쎄요, 저도 모르겠는데요. 어제 낙타를 좀 돌봐주십사고 신께 맡겼거든요, 
그리고 너무 피곤해서 그대로 잠이 들었어요. 어쩐 일인지 모르겠어요. 어쨌든 제가 
책임질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전 신에게 맡겼거든요. 스승님께서도 신을 믿으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전 그저 믿었을 뿐이에요."
  스승이 기가 찬 표정을 지으면 말했습니다.
  "신을 믿되, 우선 낙타를 잘 묶어둬야 하잖니? 신은 너와는 달라. 그분은 손이 
없잖아!"

  신을 추구한다고 하는 이들이 잘못하여 이런 오해에 휩싸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제자처럼 자기 편리를 다라 신에게 자기 몫의 책임을 전가합니다. 신은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대신해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때로 신은 무능한 존재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손이 없고, 
발도 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겪는 어떤 문제들 앞에서 신은 침묵만 
지키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지한 사람들은 이런 신의 침묵을 그 분의 무능과 
무관심으로 오해하곤 하지요.
  하지만 신의 무능, 혹은 신의 침묵은 때때로 우리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일깨우는 
방편입니다. 또한 신은 그것으로 우리 몫의 책임을 깨닫도록 하시기도 합니다. 신의 
입이 되고 수족이 되어 자기 삶을 뜨겁게 불태웠던 사람들은 도리어 신의 침묵 
앞에서 그 분이 자기에게 요구하시는 뜻을 알아차리고 신의 자비의 도구가 되어 
일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오해하듯이 신에 대한 기도는 자기 몫의 책임을 신에게 떠넘기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자의 기도는 신의 요구에 대한 책임 있는 응답일 
뿐입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신으로부터 위임받은 고유의 삶이 있습니다. 그 고유의 삶을 
실현하는 것, 이것이 신 앞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책임이 있는 태도입니다. 기도가 
우리의 존재의 근원과의 조화로운 소통을 뜻한다면,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몫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성스러운 신의 역사에 참여하는 일인 것입니다. 
  @[  부드러운 마음을 지녀라

  미국 토박이들은 숭고함이란"촉촉한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아마도 그것은 인간 마음의 토양에는 눈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며눈물이 근본을 
부드럽게 한다고 믿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기반으로부터 새로운 삶이 잉태된다.
    촬린 스프레트닉의 "은총의 생활" (1992)에서

  중국 은나라에 상용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가 늙어서 병으로 자리에 눕자 노자가 그를 찾아가서 말했습니다.
  "선생께서 교훈을 남겨 제자들에게 알려줄 것이 없으신지요?
  상용이 자리에 누운 채 대답했습니다.
  "차차 자네에게 말해주겠는데, 고향을 지나다 수레에서 내리면 알게 될 걸세."
  노자가 그의 말을 듣고 물었습니다.
  "고토를 잊어버리지 말 것을 이르시는 것이 아닙니까?"
  다시 상용이 말했습니다.
  "높은 나무 밑을 지나가 보면 알 걸세."
  노자가 얼른 다시 물었습니다.
  "노인 공경할 것을 일르시는 것이 아닙니까?"
  이때 상용이 자기 입을 딱 벌리며 말했습니다.
  "내 혀가 남아 있느냐?"
  "남아 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도 입을 벌린 채 물었습니다. 
  "내 이가 남아 있느냐?"
  "없습니다."
  상용이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노자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이제야 알겠느냐?"
  노자가 대답했습니다.
  "강한 것은 없어지고, 약한 것은 남게 됨을 이르시는 것이 아닙니까?"
  이때에야 상용이 흡족한 표정으로 노자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그렇네. 내가 천하의 일을 자네에게 다 말했군."

  생명의 본성은 부드러움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까운 산에만 올라가 보아도 알 
수 있지요, 바람이 불면 말라죽은 삭정이는 쉽게 부러지지만, 살아 있는 나뭇가지는 
바람을 따라 휘청거릴 뿐 부러지지 않습니다.
  상용의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굳고 강한 것은 죽음의 무리이기 때문에 곧 멸망에 
이르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의 물이기 대문에 오래 살아남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러한 생명의 본성을 깨닫지 못하고 부드러움보다는 굳셈을 
근본으로 삼으려 하고 약함보다는 강함을 숭상합니다.
  노자는 부드러움의 상징으로 "물"을 예찬하고 있습니다.

  물보다 약한 것은 없다.
  그러나 강한 것을 이기는 데는 그것을 당할 것이 없다.
  어떤 것도 물을 대신할 만한 것이 없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단단한 것을 이기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것을 행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강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바위가 되기를 바랄 것이지만, 노자는 바위가 
아니 물을 찬양합니다. 물은 부드러움의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은 그 자신의 
형태가 없고 항상 흐릅니다. 물은 전체가 주는 형태면 무엇이든 취하지요 따라서 
우리가 물의 마음을 지니면, 어디서나 화평을 꽃피우는 매개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물은 항상 낮은 곳으로 흐르는 성질을 지닙니다. 물은 위로 올라가는 법이 
없습니다. 항상 아래로, 아래로만 흐릅니다. 무엇이든 위로 가려 할 때는 경쟁과 
질투와 다툼이 생겨납니다. 불이 항상 위로 올라가려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면, 물은 
항상 아래로, 낮은 곳을 지향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물과 같은 부드러운 마음을 
지니면, 다툼이 없는 아름다운 세상의 주제가 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처럼 약하고 부드러운 마음이 단단하고 강한 죽음의 세력을 이기는 
힘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힘은 아주 미묘하기 짝이 없습니다. 왜 미묘하다고 
하는가 하면, 누가 물이 힘을 가진다고 생각이나 하겠습니까. 그러나 깊은 산에 
가보십시오. 산 위에서 줄기차게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이 바위를 깎아내고, 더러는 
큰 구멍을 뚫어놓고 있음을 보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단단한 것을 이기는 생명의 신비요, 존재의 수수께끼입니다.
  노자뿐만 아니라 예수도 이러한 생명의 신비를 스스로 십자가를 지는 수난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었습니다. 사랑과 용서 외에는 다른 무기를 지니고 있지 않던 예수는 
그 비폭력의 힘으로 창이나 칼과 같은 강하고 단단한 것으로 무장한 죽음의 세력을 
굴복시켜, 그것을 입증해주었지요.
  힘으로 보여지지 않는 이 미묘한 힘, 즉 약함과 부드러움의 힘을 신뢰하는 자, 
그는 원초적인 생명의 근원에 굳게 뿌리를 내린 자가 아닐까요? 
  @[  칭찬과 비난에 초연하라

  하찮은 비평도 나를 화나게 하고, 작은 거절도 나를 의기소침하게 한다.
  약간의 칭찬이 나의 기분을 고양시키고 작은 성공이 나를 흥분하게 한다.
  나를 들어올리거나 내동댕이치는 것은 아주 작은 일에 달려 있다.
  종종 나는 완전히 파도에 내맡겨진 채 대양에 더 있는 작은 배처럼 느껴진다.
  균형을 유지하고 전복되거나 익사하지 않기 위해 기울이는 나의 모든 정열과 
시간은 내 삶이 생존을 위한 투쟁임을 말해준다.그것도 성스러운 투쟁이 아니라 
나를 규정 짓는 것이 세상이라는 잘못된 생각에서 비롯된 걱정스러운 투쟁이다.
    헨리 누웬의 "돌아온 탕아: 아버지, 형제, 아들에 대한 명상" (1992)에서

  열정적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어떤 젊은이가 마카리우스라는 위대한 수도사를 
찾아가서 말했습니다.
  "사부님, 제가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한 말씀 해주십시오."
  마카리우스가 대답했습니다.
  "공동묘지에 가서 죽은 자들을 요하고 오게!"
  이 젊은이는 곧 묘지로 가서 미친 사람처럼 욕을 퍼붓고 돌아왔습니다.
  마카리우스가 젊은이에게 물었습니다.
  "죽은 자들이 뭐라고 대꾸하던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던데요"
  "내일은 그곳에 가서 죽은 자들을 칭찬해 주고 오게."
  다음날, 그 젊은이는 수도사가 시키는 대로 묘지로 가서 잔득 칭찬을 늘어놓고 
왔습니다.
  "그대들은 성인이고 사도이며 의인들이오!"
  이렇게 죽은 이들을 칭찬한 그는 다시 마카리우스에게 돌아와서 말했습니다.
  "그들을 칭찬해주고 돌아왔습니다."
  "그들이 뭐라고 대꾸하던가?"
  젊은이의 말을 듣고 나서 마카리우스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대는 죽은 이들에게 하루는 욕을 퍼붓고 또 하루는 칭찬을 했어. 하지만 
그들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지. 그대가 구원을 얻고 싶으면 저렇게 죽은 
사람들처럼 되어야하네."

  남의 눈을 지나치게 의식하며 사는 자들. 타인의 칭찬과 비난에 쉽사리 흔들리는 
자들에게 좋은 교훈을 담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칭찬과 비난은 대체로 타인이 우리의 행위를 보고 가하는 도덕적인 판단입니다. 
그 판단은 상대적입니다. 상대적이란 말은 판단하는 이가 어떤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 판단이 달라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판단의 상대성을 
감안하면, 타인이 놀려대는 입방아에 맞추어 일일이 춤출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남을 쉽게 판단하는 이들을 보면, 자기 삶의 토대가 불안하고 허약한 
이들입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가 말한 것처럼 남의 눈에 티가 든 것을 보고 
비난하는 이들은 자기 눈에 들보가 들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고 산다면, 우리는 결코 남을 판단하지 않게 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남들의 칭찬과 비난에 쉽게 흔들립니다. 칭찬을 받으면 
우쭐해하고, 비난을 받으면 노여워하거나 잔득 움츠러듭니다. 타인의 칭찬과 비난에 
흔들리고 살며, 평생 자기가 주인이 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남의 눈치나 보는 
삶을 살게 되지요 이것은 남의 판단에만 끌려다니는 노^36^예의 삶이지 자유인의 
삶이 아닙니다.
  마카리우스는 구원에 대해 알고 싶어 온 젊은이에게 "죽은 사람처럼 되라"고 
합니다. 이것은 죽은 사람의 눈이 감겨져 있듯이 아^36^예 눈을 감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비유를 들면, '죽은 사람처럼 되라'는 수도사의 
말은 소금에 절여진 배추처럼 되라는 것이지요. 퍼들퍼들 살아 있는 배추에 소금이 
뿌려지면, 배추는 숨이 죽어 비로소 안으로 익어갑니다. 타인의 칭찬과 비난에 
초연할 줄 알아 그의 내면이 이렇듯 깊게 익어가고 여물어 가는 것을 우리는 혼의 
성숙이라 부릅니다.
  사람이 이렇게 성숙해지면, 외부에서 들려오는 온갖 소리에 더 이상 흔들리지 
않습니다. 칭찬하는 말을 진수성찬처럼 여겨 배불러 하지도 않고, 비난하는 말에도 
어깨가 축 처지거나 움츠러들지 않게 됩니다. 그의 내면은 바람 없는 날의 호수처럼 
고요하고 담담해지며, 그의 눈동자는 푸른 하늘을 우러르며 깊어집니다. 그리하여 
존재의 근원 되시는 분의 큰 숨결에 닿아. 그분의 뜻이 무엇인가를 헤아리게 
되지요.
  이처럼 하늘의 큰 숨결에 닿아 있는 자는 젊은 수도자처럼 무엇이 구원인가라는 
물음에 매달리지 않아도 되고 오직 "살아있음의 황홀"이라는 바다에 튼튼한 돛을 
올린 격으로 생기 가득한 삶의 항해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  늙은 피부를 벗어던지라

  우리 앞에서 기다리는 삶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우리는
  우리가 계획했던 것을 기꺼이 버릴 수 있어야 한다.
  새로운 피부가 올라오기 전에 늙은 피부를 벗어 던져야 한다.
    K. 오스본 편집의 "삶의 예술에 관한 성찰: 조셉 캠벨 편람" (1991)에서

  산길을 기어다니던 개미들이 우연히 뱀 껍질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날고 메마른 
껍질이었지만, 개미들이 보기에는 아름답고 값진 가죽으로 보였습니다.
  개미들은 곧 개미굴로 돌아와 동료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뭐? 뱀가죽을 발견했다고?"
  개미굴에는 일대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뱀 껍질을 발견한 개미들이 흥분된 어조로 
말했습니다.
  "비단처럼 아름답고 멋진 가죽이더라고요"
  수천 마리의 개미들이 뱀 껍질이 있는 곳으로 몰려갔습니다. 과연 산길에 버려져 
있는 뱀 껍질은 무척 아름다웠습니다.
  "정말 아름답고 값진 가죽이로구나 "
  "아마도 시장에 내다 팔면 많은 양식을 살수 있겠어요."
  "그러면 겨울나기를 걱정 안 해도 되겠네요."
  개미들은 저마다 침 마르도록 뱀 껍질의 아름다움을 칭찬했습니다. 신바람이 난 
개미들은 모두 힘을 합쳐 산길에 버려져 있던 뱀 껍질을 운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개미들이 이마에 구슬땀을 흘리며 뱀 껍질을 자기들의 굴 가까이 
옮겨놓았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그들 앞에 큰 뱀 한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삼각형의 머리에 푸른 몸뚱이를 
자랑하듯 구불텅거리며 그들 앞에 나타난 뱀은 큰 입을 딱딱 벌리며 말했습니다.
  "그래 뭔데. 그렇게 땀을 뻘뻘 흘리며 옳기는 거지?"
  뱀이 궁금한 한 듯 개미들에게 물었습니다. 개미들은 잔뜩 겁을 집어먹고 아무도 
입을 열어 대꾸하지 못했습니다. 개미들은 자기들이 끌고 온 뱀 껍질의 주인이 바로 
지금 자기들 앞에 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들은 사실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도 생각해보지 않은 채 무턱대고 끌고 왔던 것입니다.
  한참이 흐른 뒤에야 개미들이 용기를 내어 말했습니다.
  이건 뱀의 가죽인데요. 당신이 쓸모 없어서 버린 줄 알고 가져왔어요. 하지만 
이제 주인이 나타나셨으니. 돌려 드릴게요.
  뱀은 큰 입을 딱 벌리며 대꾸했습니다.
  "물론 그것이 전에는 내 몸의 일부였던 게 사실이지 하지만 이제 그것은 나의 
것이 아니오. 나는 낡은 옷을 벗고 새 옷을 입었소. 더 이상 나는 그것이 필요치 
않소. 그러니 그것이 필요하면 그대들이 가지시오."
  뱀이 껍질 벗는 것을 알지 못하는 개미들은 어안이 벙벙해 잠자코 있었습니다.
  "내가 돌려 달라고 하지 않을 테니. 아무 걱정 말고 가지시오. 하하하^5,5,5^"
  이렇게 웃어젖히던 뱀은 푸른빛이 감도는 새 옷을 자랑하듯 구불텅구불텅 온몸을 
흔들며 나무들이 무성한 숲 속으로 사라져갔습니다.

  이 우화는 새로운 삶을 위해서는 낡은 옷을 벗어 던져야 한다는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뱀이 껍질을 벗듯 낡은 옷을 벗고 새 옷을 갈아입는 이 행위를 종교에서는 
"거듭남"이라합니다. 종교에입문한 이는 누구나 "거듭남"이라는 문턱 앞에서 결단을 
요구받습니다. 낡은 생각, 낡은 습관, 구태의연한 행위, 즉 과거에 속한 모든 것을 
내던질 것을!
  말이 쉽지 낡은 과거를 스스로 단절하고 새 삶을 출발한다는 것은 겨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낡은 과거와의 결별이 없이는 눈부신 신생의 사건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신약성서에서 예수는 "영생"을 얻기 위해 찾아온 이에게 단도 직입적 요구합니다.
  "낡은 과거를 벗어 던지고 거듭나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요 #3^14^)
  예수가 말한 "하나님 나라"란 무엇일가요? 그것은 넓은 과거를 말끔히 청산한 
자들이 매순간을 존재의 기쁨과 황홀로 채우는 삶을 누림이 아니겠습니까.
  성 바울 역시 삶의 도상에서 눈부신 빛으로 다가온 예수를 만나 "거듭남"을 
경험한 뒤,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내 생명의 주인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나에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은 해로 여깁니다. 나는 이제 낡은 
과거의 모든 것을 분토로 여깁니다." (빌 #3^1245,36,125^)
  한문으로 번역된 분토란 "똥"이란 뜻입니다. 이렇게 낡은 과거와 철저한 결별을 
할 수 있었기에 바울의 생애는 후세 사람들이 본받아 따를 만한 성스런 빛을 
갈무리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늙은 피부를 벗어 던져라.
  이 말은 이미 쓸모 없이 죽어버린 과거에의 집착을 벗으라는 것입니다. 집착은 
딱딱하게 굳어버린 껍질일 뿐 그것이 몸을 싸고 있는 한 펄펄 살아 뒤는 생명의 
새살은 돋아날 수 없습니다.
  매순간 새로워지는 우주 만물과 그 안에 살아가는 모든 존재들과 행복과 희열이 
오고가는 싱싱한 교감을 위해서는 늙은 피부 낡은 옷을 과감히 벗어 던져야 
하겠습니다. 
  @[  가볍게 살아라

  수치심은 무겁고, 은총은 가볍다.
  수치심과 은총은 이간 정신 속에서 서로 상반하는 힘이다.
  수치심은 우리를 무겁게 내리누르고, 은총은 우리를 위로 들어올린다.
  수치심은 중력처럼 우리를 끌어내리는 심리적 힘이다.
  은총은 공중 부양처럼 중력을 거부하는 영적 힘이다.
  만일 우리의 영적 경험이 우리의 삶을 가볍게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은총을 경험 할 수 없다.
    루이스 B. 스메드스의 "수치심과 은총" (1993)에서

  하루는 주님이 두 제자를 데리고 어떤 길로 들어섰습니다.
  주님은 그길 위에서 두 제자에게 무게가 똑같은 심자가 하나씩을 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길이 끝나는 곳에 당신이 있을 테니. 그곳까지 십자가를 지고 오라고 
지시한 다음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첫번째 제자는 가볍게 십자가를 메고 가는 데 반해, 두번째 제자는 지독히 
힘들어하면서 뒤쳐져 따라왔습니다. 십자가를 걸머진 지 하루만에 첫번째 제자는 길 
끝에 당도하여 십자가를 스승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주님은 첫번째 제자의 등을 가볍게 쓸어주며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참 잘했다."
  두번째 제자는 이튿날 저녁이 되어서야 길 끝에 도착했습니다. 도착한 제자는 
십자가를 주님의 발 밑에 내동댕이치며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저한테는 다른 제자보다 훨씬 더 무거운 십자가를 
내주시다니요? 제가 이제야 온 것도 그 때문이라구요!
  주님은 마음이 상한 채 슬픈 얼굴로 두 번째 제자를 바라보며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둘 다 무게가 똑같았느니라."
  "그런데도 앞사람은 아주 쉽게 십자가를 옮겼는데, 유독 저만 십자가를 옮기느라 
쩔쩔맸다 이 말씀입니다."
  주님이 그를 타이르며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를 탓하지 말아라. 그 까닭은 십자가를 지고 오는 동안 줄곧 불평을 
늘어놓은 너한테 있느니라. 네가 불평할 때마다 십자가의 무게는 늘어났던 거야. 
앞서 온 제자는 십자가를 지고 있는 동안 사랑을 실천했기 때문에 그 사랑이 
십자가의 무게를 덜어준 거야. 그래서 힘들이지 않고 옮길 수 있었던 거지.

  십자가는 기도교의 한 상징이지만. 그것은 우리 각자가 져야 할 인생의 짐을 
가리키는 보편적인 상징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고유의 생의 짐을 지고 
삽니다. 하지만 어떤 이는 첫 번째 제자처럼 그것을 불평을 품고 짐으로써 무거운 
인생을 살기도 하고, 두 번째 제자처럼 기꺼이 짐으로써 가볍고 즐거운 인생을 
살기도 합니다.
  어떤 이가 뜻하지 않은 일로 상처를 입어 수치심이나 죄의식에 사로잡히면, 
연자맷돌 돌리던 삼손처럼 무거운 삶을 살아가는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그의 
삶의 하루하루는 노^36^예처럼 견뎌야 하는 고통스런 나날이 이어질 뿐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온 것은 신이 선물로 준 생을 누리러 왔지 다만 견디러 온 것이 
아닙니다. 견딤의 삶은 노^36^예의 삶이지 자유인의 그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견딤 속에 사는 노^36^예의 삶을, 니체는"중력의 영"에 사로잡힌 것이라고 
말합니다. 중력의 영에 사로잡힌 자의 삶은 매사에 심각하고 철저하고 심오하고 
엄숙할 뿐입니다. 이런 삶의 태도를 가진 자의 얼굴을 보니, 그가 곧 "악마"였다고, 
우리의 삶을 무거움으로 추락시키는 이런 악마를 죽여야 한다고, 분노가 아니라 
웃음으로 죽이자고 그는 속삭입니다. 그리고 그는 "가벼운 삶"을 예찬합니다.
  "내가 신을 믿게 된다면 춤출 줄 아는 신만을 믿으리라 나는 걷는 법을 배웠다. 
그때부터 내가 움직여 나가도록 나를 떠밀어 주지 않아도 되었다. 지금 나는 가볍고, 
지금 나는 날고, 지금 나는 내 자신을 내려다보고, 지금 나를 통해 한 신이 춤을 
춘다."'"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춤추는 신!
  그는 수치심, 불평, 죄의식 따위를 불살라버린 존재를 가리킵니다. 그는 은총으로 
받은 생을 사랑스러움과 고마움으로 받아 하늘로 날아오르는 존재입니다. 그는 선과 
악, 육체와 영혼, 즐거움과 괴로움 등의 존재의 이원성을 바다와 같은 너그러움으로 
받아들여 초극한 존재입니다.
  진정 생을 사랑하며 누리는 이는 연자맷돌을 돌리는 것 같은 무거움에 짓눌려 
있지 않고, 존재의 가벼움 속에 사는 자가 아닐까요? 
  @[  자기 자신을 부인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것은 영적인 삶의 가장 큰 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를 
"사랑스런 존재"라고 부르는 신성한 목소리를 거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 받는 존재가 되는 것은 우리 존재의 핵심적인 진리를 나타낸다.
    헨리 누웬의 "사랑 받는 자의 삶" (1992)에서

  유명 인사인 모어 씨는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캔버스에 
그름을 그리기 전에, 화가를 불러서 자신의 모습을 스케치하게 했습니다.
  화가의 스케치는 완벽했습니다. 모어 씨의 본래 모습을 찍은 사진과 똑같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화가가 그 스케치를 모어 씨에게 보여주자. 그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전혀 호감이 가는 얼굴이 아니었고, 어떻게 보면 거부감이 
느껴지기까지 했습니다. 모어 씨가 화가에게 말했습니다.
  "이게 뭐요? 이걸 나라고 그린 거요? 난 이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소."
  화가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뭐가 맘에 안 드십니까?"
  "이것 봐요. 당신은 내 다리를 너무 짧게 그렸소, 부탁이니, 이 다리를 좀더 길게 
그려주시오."
  화가는 순순히 그의 부탁에 응했습니다. 그가 그림을 다시 그려서 보여주자. 모어 
씨는 이번에도 화를 냈습니다.
  "당신 눈에는 내 팔이 어무 길어 보이지 않소? 팔을 더 짧게 그려요."
  화가는 또 한 장의 스케치를 했습니다. 이번에는 다리를 더 길게, 팔은 더 짧게 
그런 그림이었습니다. 모어 시는 이 그림을 보고도 여전히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어처구니가 없군요.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귀를 이 따위로 그려 놓은 거요? 너무 
작지 않소. 더 크게 그려요."
  몇 번을 다시 그려도 모어 씨는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습니다. 지우고 다시 
그리기를 여러 번 되풀이한 끝에 화가는 비로소 모어 씨의 마음에 드는 그림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제대로 됐군요 수고했소."
  모어 씨는 아주 흡족한 표정으로 화실을 나와 그 그림을 자기 집으로 
가져갔습니다. 그리고 자랑스럽게 친구와 친척들에게 그 그림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자 다들 웃음을 터뜨리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게 뭐야? 이런 터무니없는 그림을 그린 화가가 도대체 누군가? 이건 자네 
모습과는 조금도 닮지 않았네. 우리는 이 화가가 그린 자네 모습보다는 자네의 원래 
그대로의 모습이 훨씬 더 좋다네."
  모어 씨는 부끄럽고 화가 나서 그 초상화를 갈가리 찢어버렸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화실로 달려가 화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맨 처음에 그렸던 것대로 다시 그려줄 수 있겠소? 사람들은 그런 내 
모습을 가장 좋아하더군요. 아마도 나의 그런 모습이 사람들에게 가장 마음에 드는 
모양이오."

  이 우스꽝스런 이야기는 피터 라이브스의 "현대인을 위한 비유와 우화들"에 
나옵니다. 모어 씨처럼 우리는 때때로 자기 자신의 모습에 대해 불평하고, 심지어 
자기 자신을 부인하기까지 하지요.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삶의 태도입니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을 사랑 할 줄 알아야하겠습니다. 우리의 
외모가 잘났든 못났든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의지로 바꿀래야 바꿀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타인의 사랑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이 싫어서 자기보다 나은 다른 이의 모습을 흉내낸다고 해도, 
그것으로 타인의 사랑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경험합니다. 잘 아는 
벗이 자기 본래의 모습을 감추고 나의 삶을 모방하는 것을 볼 때 그 모습이 역겹고 
추악하게까지 느껴지던 것을! 참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모습을 존중할 때, 우리의 
이웃들도 우리의 모습을 존중해줄 것입니다.
  조물주 역시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조물주는 
우리 각자에게 저마다 다른 고유의 삶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부인한다면, 그것은 조물주의 사랑을 거절하는 것이고, 신이 우리 각자에게 
주신 신성을 거절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이 선물로 허락한 생을 사랑하고, 신의 솜씨로 아름답게 
빚어진 이 우주 안에서 자기 고유의 빛과 광채로 빛날 때, 우리를 지으신 신 역시 
우리를 흐뭇하고 사랑스런 눈길로 바라보실 것입니다. 
  @[  미래의 존재를 느껴라

  우리 몸 안에서 고동치는 삶이 지구의 시작에서 비롯된 것처럼 그 박동이 앞으로 
다가올 세계로 인도해준다.
  우리는 상상의 힘으로 우리 자신의 호흡의 리듬과 함께 숨쉬는 미래의 세대를느낄 
수 있으며, 증언의 구름처럼 공중을 날고 있는 그들은 느낄 수도 있다.
  때때로 나는 내 머리를 갑자기 돌릴 수만 있다며, 내 어깨 너머로 그들을 흘끗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 세대들과 그들의 삶에 대한 요구가 나에게는 현실이 
된다.
    에디^5,23^데비 샤피로 편집의 "새로운 천년을 위한 몽상" (1992)에서

  제2차세계대전이 막 끝났을 때였습니다.
  남을 돕는 일에 헌신적인 열정을 가진 에리자벳 커블러 로스 박사는 어느 날 
뜻밖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나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태인 소년들을 돌볼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들은 
아주 지쳤고 또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박사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런 전화를 받은 로스 박사는 기꺼이 그 요청에 응했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도움을 줘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는 그날 당장 짐을 구려 수용소 
막사로 떠났어요.
  수용소에 도착한 그는 곧 아이들에게로 달려갔습니다.
  "애들아 이제 전쟁은 끝났단다. 너희들을 괴롭히는 사람은 더 이상 아무도 없어. 
자, 어디 아픈 데나 불편한 곳이 있으면 나에게 말하렴!"
  어른들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쳐다보는 아이들을 보고 로스 박사는 착잡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습니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로스 박사는 누워 있는 아이들을 보살피기 위해 
이리 저리 침대를 옮겨다니다가 나무 침대에 하나같이 새겨져 있는 그림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매맞고 굶주리던 아이들끼리 일종의 형제애를 표시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무심코 흘러버렸지만, 그 그림이 주는 야릇한 분위기를 가슴에서 지울 수 
없었습니다.
  다른 여러 수용소에도 침대마다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 그림들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나비였습니다.
  그는 문득 호기심이 일어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얘들아, 이 나비들은 무엇을 뜻하지?"
  처음에 아이들은 대답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 아이가 대답했습니다.
  "그 나비들은 우리의 미래^36^예요. 나비를 그리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어요.'우리는 나비다. 곧 날아오를 거야!' 하고 말이에요."
  어른들의 잔인한 전쟁 앞에서도 끝가지 희망을 잃지 않았던 아이들에게 로스 
박사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더 이상 내려 갈 수 없는 깊은 절망의 심연에서 희망을 그린 아이들의 이 
이야기는 뭉클한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우리는 나비다. 곧 날아오를 거야!"
  현실적인 이해와 타산에 붙들려 살아가는 어른들은 이 아이들처럼 놀라운 상상의 
나래를 펴지 못합니다. 그것은 현실성이 결핍된 공상일 뿐입니다. 딱딱하게 굳어진 
사유방식 속에 살아가는 이들은 새 삶에 대한 뜨거운 갈망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모험도 도전도 지극히 결핍되어 있습니다.
  고착된 틀에 안주해 사는 그들에게는 나비가 되고 싶은 꿈이 없습니다. 그들의 
영혼은 웅덩이에 갇혀 그 안에서 맴맴 도는 장구벌레처럼 위로 열린 하늘을 쳐다볼 
줄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아^36^예 새로운 미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상상의 나래를 펼 줄 아는 아이들은 다릅니다. 나무 침대에 아로새겨놓은 
형상을 보면서 "그 나비들은 우리들의 미래^36^예요"라고 말합니다. 죽음의 안개가 
에워싸고 있음을 느끼지만, 자욱한 그 안개 너머에 훨훨 날고 있는 형형색색의 
나비들을 그들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봄'관', 그 봄이 그들의 현실이 된 
것입니다. 어른들은 보이는 것만을 보지만 아이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봄으로써 
그것을 꿈틀대는 현실로 구체화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산을 들어 
옮긴다는 말을 자기들 삶의 공간에서 실증해 보였고, 자기들의 혼으로 그려 넣은 
나비가 훨훨 날아오르는 것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했던가요. 그렇다면 아이다운 심성을 간직한 
자만이 천국으로 날아오를 수성으로 우리는 호기심, 모험, 도전, 신뢰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덕성을 지니 아이들이 참을 수 없는 가벼움으로 외칩니다.
  "우리는 나비야. 곧 날아오를 거야!"
  한없는 존재의 무거움 속에 살던 이들은, 가벼움을 잃지 않고 사는 아이들의 
음성을 듣고 깨어나야 할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새로운 미래의 창은 열리지 
않을 것이니! 
  @[  미소를 잃지 말라

  우리는 간단한 미소로써 거둘 수 있는 효과에 대해서 결코 알지 못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선하고 은유하고 이해심이 많으신 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그 산 증인이 되고 있습니까?
  항상 서로 미소를 지으며 만납시다. 왜냐하면 미소는 사랑의 시작이니까.
    도로지 헌터가 엮은 "마더 테레사 묵상집" (1987)에서

  유대의 랍비 베로카는 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저잣거리를 방문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저잣거리에는 예언자 엘리야가 가끔씩 그에게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은 
엘리야 예언자가 성스럽게 사는 자들을 안내해주기 위해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한 번은 랍비 베로카가 저잣거리에서 만나 엘리야에게 물었습니다.
  "여기 있는 사람 중에 장차 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큰 상을 받을 이들이 
있는지요?"
  엘리야가 대답했습니다.
  "없소."
  그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에 얼굴에 괴상망측한 탈을 쓰고 울긋불긋한 옷을 
걸친 두 사람이 지나갔습니다.
  엘리야가 문득 그 두 사람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저 두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서 큰 상을 받을 것이오."
  잠시 후, 엘리야가 사라진 뒤 베로카가 두 사람에게 달려가서 물었습니다.
  "당신들의 직업이 무엇이오?"
  그들이 짓궂은 웃음을 지으며 대꾸했습니다.
  "보면 모르겠소?"
  "그래서 묻는 거 아니오?"
  "우리는 광대요. 우리는 사람들이 마른풀처럼 잔득 시들어 있거나 낙심해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을 실실 웃겨서 다시 생기를 얻게 해 준다오^5,5,5^"

  유대 사상가인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의 "진실을 향한 열정"에 나오는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종교인들은 대체로 너무 심각하고 엄숙합니다. 얼굴에 내 천자를 그리고 사원을 
들락거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고해의 바다를 건너기 때문일까요. 아니며, 불의나 
악과 싸우느라 힘들어서 그런 것일까요.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은 "악과 싸우는 데는 금식과 고행보다는 황홀경의 불꽃이 
더 유리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스스로 신의 아들이라는 자가의 옷을 걸치고 
살았던 예수는, 자기가 이 땅에 온 것은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왔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깃들일 둥지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는 궁한 소리를 했으면서도, 그는 온 천하가 다 자기의 
것인 양 삶의 풍요를 누리며 사는 모습을 연출했습니다. 이런 예수의 삶의 모습에서 
우리는 광대가 누림직한 여유와 웃음과 해학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가 자기 아버지라고 불렀던 신은 우리의 생명이 고통과 슬픔에 
물들어 살기보다는 웃음과 기쁨의 색채로 물들어 살기를 바라시는 분이 아닐까요?
  만일 어떤 이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면, 그는 몸과 마음이 병들어 있다는 
적신호입니다. 그가 이 빨간 불을 보고 미소를 회복 할 수 있다면, 병든 그의 몸과 
마음은 치유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미소는 혼의 병들을 치유하는 힘이 
있습니다. 테레사 수녀의 말대로 미소는 살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모름지기 사랑의 가장 적극적인 표현인 미소는 균형을 잃은 병든 몸과 세상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잔잔한 미소를 간직한 헌신적 사랑으로 그것을 
입증해 보여주지 않았던가요? 
  @[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려 하지 말라

  세상에는 우리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과, 우리의 의지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이것은 단순하지만 더없이 심오한 생의 근본 진리이다.
  이 진리를 이해하는 것이 무어보다 중요하다.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하는 지혜를 가질 때, 마음의 
자유와 행복은 그대의 것이다.
    에픽테투스의 "삶의 기술" '류시화 엮음, 1996'에서

  인간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이러한 욕망을 지니 사람 모두에게 
행복의 파랑새가 날아와 둥지를 틀어주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삶이라는 현상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에픽테투스에 의하면, 우리의 삶 속에는 자기의 의지대로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이해 할 때 우리는 행복한 삶의 
터전을 일구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의지로 바꿀 수 없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출생, 육체의 조건, 
부모, 가문, 주위의 환경 등은 내 의지로 바꿀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의지대로 할 수 없는 것을 바꾸려고 할 때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은 괴로움뿐입니다. 
외부로부터 오는 것들을 바꾸려 할 때, 우리는 부질없이 소중한 에너지를 소모할 
뿐입니다.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기꺼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남보다 키가 
작다든지, 유전적인 질병이 있다든지. 가문이 보잘것없다든지 하는 것에 대해 우리가 
받아들이지 못하고 불평 속에서 산다면, 우리는 불행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려고 애쓰기보다는 바꿀 수 있는 것을 
과감히 바꾸는 노력을 통해서 삶의 행복을 찾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의지로 바꿀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가진 생각, 의견, 
욕망, 어떤 것에 대한 애착 등은 우리의 의지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이것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과 관계된 것들입니다. 외부에서 온 것은 바꿀 수 
없지만 내부의 것은 우리의 의지로 바 꿀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힘과 기술을 터득하면, 우리의 내면은 마음먹은 대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다루는 것이 어디 그렇게 말처럼 쉽습니까. 그래서 자신을 잘 
다루어 균형 잡힌 삶을 살았던 이들을 우리는"성인"이라고 부릅니다. 자신을 잘 
다루는 일이야말로 삶의 최고의 예술이지요

  옛날 중국에 재주가 매우 뛰어난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무엇이든 한번만 
보면 그대로 익힐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총명을 굳게 믿고 이렇게 
다짐했습니다.
  "내 반드시 천하의 기술을 다 통달하고 말리라!"
  그는 사방팔방을 돌아다니며 여러 스승 밑에서 온갖 기술을 배우고 익혔습니다. 
의약, 천문, 지리, 그리고 무너지는 산과 땅을 누르는 법, 축지법, 도박과 장기 등 
별의별 기술을 다 배우고 익혔습니다.
  "사내로서 이만하면 되겠지!" 하고 생각한 젊은이는 자만에 차서 인도를 가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인도에서 탁발을 하는 한 수행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처음 보는 
그의 모습에 이상하게 끌렸습니다.
  그래서 이 수행자에게 젊은이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당신은 다른 사람과 무엇이 다릅니까?"
  수행자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내 자신을 다루는 사람이오."
  "아니, 내 자신을 다루다니요? 무엇을 가리켜서 자신을 다룬다고 합니까?"
  수행자가 대꾸했습니다. 
  "젊은이. 활 만드는 사람은 활을 잘 다루고, 뱃사공은 배를 잘 다를 줄 알며, 
목수는 나무를 잘 다루지 않던가? 그러나 지혜로운 자는 자신을 다룬다네. 자신을 
잘 다룰 줄 알면, 비난과 칭찬에도 흔들리지 않고 깊은 연못처럼 늘 맑고 요하며, 
진리를 듣고 마음을 빨아 그 마음에 늘 천국을 이루지. 이제 내 말뜻을 
아시겠는가?"

  이처럼 자신의 의지로 바꿀 수 있는. "자신을 다루는 기술"을 가진 자야말로 
영적으로 성숙한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려 하지 말고, 자신의 의지로 바꿀 수 있는 것을 과감히 
바꾸면, 우리는 그 무엇에도 얽매임이 없는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위대한 성현들의 가르침입니다. "법구경"에서 붓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쟁에서 수천 명의 적을 혼자 싸워 이길지라도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야말로 
용감한 전사 가운데 최고의 전사이다." 
  @[  파트너를 잘 보살피라

  우리의 상대는 한 송이의 꽃이다. 우리가 잘 보살핀다면 아름답게 잘 자랄 것이고, 
잘 보살피지 않는다면 시들 것이다.
  꽃이 잘 자라도록 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성질을 깊이 이해해야 한다.
  얼마나 많은 물이 필요할까? 얼마나 많은 햇빛이 필요할까?
  우리는 우리의 참 본성을 알기 위해 우리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아야 하듯이.
  다른 사람의 성품을 알기 위해서는 그를 자세히 관찰해야 한다.
    틱 낱 한의 "평화 맛보기" (1992)에서

  화초를 매우 좋아하는 어떤 부인에게 어느 날 한 젊은이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무려 12 년 동안 꽃을 피우지 않은 나무가 있는데, 어떻게 하면 꽃을 피울 수 
있을까요?"
  부인은 느닷없는 질문을 받고 조금 당황했습니다. 그러나 곧 마음의 평정을 
찾고는 상대에게 물었습니다.
  "무슨 종의 나무입니까?"
  젊은이는 부인의 질문에 우물쭈물하며 대꾸했습니다.
  "전혀 모르겠는데요"
  곰곰이 생각하던 부인이 다시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은 그 나무를 좋아하십니까?"
  젊은이는 그 꽃나무를 장모가 선물로 준 것이기 때문에 버릴 수 없어서 억지로 
키우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럼 당신의 부인은 그 꽃나무를 좋아합니까? 또 당신의 아이들은?"
  부인의 질문에 젊은이는 냉랭하게 대답했습니다.
  "당연히 아니지요, 10 년이 넘도록 꽃 한번 피우지 않는 나무를 좋아할 리가 
있습니까?"
  그제야 부인은 그 꽃나무가 오랫동안 꽃을 피우지 않는 이유를 알겠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당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당신의 그 사람을 좋아하겠습니까? 
당신이이라면 무럭무럭 자라서 꽃을 피울 수 있겠습니까?"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습니다. 부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를 
조용히 타일렀습니다.
  "지금부터 그 나무를 잘 살펴보세요. 그리고 그 나무를 좋아하게 될 만한 것들을 
찾아보세요. 그 다음에 그렇게 멋진 나무가 당신의 정원에 있어서 기쁘다고 
이야기해보세요. 그러면 꽃이 필 것입니다."
  부인의 말에 젊은이는 당황한 듯 이내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런데 두 달쯤 지난 뒤 다 시 젊은이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혹시 두어 달 전에 꽃 피우지 않는 나무에 대해 조언을 구하던 사람을 
기억하십니까? 부인께서 시키는 대로했더니, 글쎄 그 나무에 거짓말처럼 꽃이 가득 
피었지 뭡니까. 너무나 아름다워 눈이 부실 지경이랍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식물과 같은 존재도 사람처럼 사랑의 
교감을 나눌 줄 아는 감각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식물학자들은 실험을 
통해서 식물이 그것을 돌보는 사람의 관심에 구체적인 반응을 하고 있음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어떤 식물이 좋아하는 음악의 파장을 알아내어 그런 음악을 그 식물에게 
들려준 결과 더 아름다운 꽃이 피고, 더 많은 열매를 맺거나 더 나은 소득을 
올렸다고 하지 않던가요?
  식물이 이러할진대 삶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사랑은 내가 상대방에게 일방적으로 무엇을 베풀어줌이 아닙니다. 사랑에는 
"이해"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상대를 이해하지 않는 사랑은 자기 소유욕의 
발로이거나 자기 과시욕에 불과한 경우가 많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에 대한 섬세한 관찰과 이해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사랑이 소유욕을 넘어 상대의 혼의 성숙에도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대상이 그대의 가족이든, 이웃이든, 회사의 동료이든, 또는 
신앙의 길을 함께 걷는 동료이든 따뜻한 이해에 더한 사랑일 때,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 꽃나무에서 풍겨나는 그윽한 꽃향기를 함께 
나누며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사물 속에서 영혼을 발견하라

  때때로 나는 일상적인 물건에 의식적으로 정신을 집중시킨다.
  그리고 잠시 주의를 기울인다.
  이렇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내 삶에 깊은 의미를 가져다준다.
  지금은 누구의 말인지 모르겠지만 어떤 물건이든 조심스럽게 주의를 기울이면 그 
창문을 통해서 우주를 볼 수 있다고 이야기해준 사람이 있다.
    로버트 풀 검의 "새벽 여섯시에 켜는 촛불" (1995)에서

  화가 미켈란젤로가 어느 날 화방 앞을 지나다가 버려져 있는 대리석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곧 화방으로 들어갔습니다. 화방에는 주인이 돌을 깎고 있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화방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주인장, 저 밖에 있는 대리석은 당신이 버린 것이오?"
  주인이 대답했습니다.
  "그렇소. 그 돌은 쓸모가 없어서 내가 버렸소."
  미켈란젤로가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왜 저 돌을 쓸모 없다고 하시오? 나는 당신이 버린 돌 속에서 자기를 꺼내주기를 
갈망하고 있는 한 천사의 모습을 볼 수 있소."
  화방 주인은 미켈란젤로를 미친 사람쯤으로 여기고 대꾸했습니다.
  "필요하면 가져가시구려?"
  미켈란젤로가 화방을 나오며 덧붙여 말했습니다.
  "고맙소, 내가 돌 속에 있는 천사를 꺼내주겠소."
  화방 주인이 쓸모 없다고 버린 대리석을 주워다가 미켈란젤로는 돌 속에서 
해방되기를 기다리는 천사를 끄집어 내었습니다.

  쓸모없다고 버려진 이 대리석은 자기를 알아봐 주는 조각가를 만나서 자기 안에 
감춘 숨은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버려진 대리석에서 천사가 모습을 드러냈으니. 
숨은 영광이 드러났다고 할 만하지 않습니까. 미켈란젤로 그는 사물 속에서 영혼을 
발견할 줄 아는 예술가였습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사물에게까지도 영혼을 부여합니다. 돌이나 한 포기의 꽃, 
자기가 깔고 앉은 의자를 만질 때도 사랑과 존중으로 대합니다. 모름지기 뛰어난 
시인이나 예술가, 그리고 종교적인 사람은 마술사와도 같습니다. 그가 만지는 것은 
무엇이나 꿈틀꿈틀 생명을 지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마주치는 모든 사물에 
자기의 삶 전체를 쏟아 붓습니다. 자기의 삶을 쏟아 부으면 그 사물은 생명력을 
지니게 됩니다. 미켈란젤로가 버려진 대리석에 자기 삶을 쏟아 부어서 살아 있는 
천사를 빚어내듯이!
  그래서 시인 칼릴 지브란은 "예언자"라는 아름다운 시집에서 종교에 대하여 묻는 
사제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늘을 바라보라. 그러면 그분이 구름 속을 걸어다니며 번개 속에 팔을 뻗어 
빗속에서 내려오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너희는 그분이 꽃 속에서 미소지으면 
나무들 사이에 서서 손을 흔드는 것을 보게 되리라."
  여기서 시인은 사물들 속에서 존재의 근원 되시는 분의 모습을 찾아내고 
있습니다. 예민한 영적 감성을 지닌 시인에게는, 하늘, 구름, 번개, 꽃, 나무들은 
신성을 간직하고 있는 성스런 매개물들입니다.
  이처럼 신은 어떤 특정한 존재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모든 사물들을 통해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그렇습니다. 신이 창조한 모든 것은 신성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의 임무는 신성하지 않게 보이는 것에서조차 신성함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즉 죽은 것 같은 우리 주변의 사물들 속에서 살아 꿈틀거리는 
신성을 발견 할 수 있다며, 우리는 진정 우리의 영혼을 부유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이미 터득하고 있는 것입니다. 
  @[  파티를 놓치지 말라

  신은 다섯 살짜리 아이가 땅콩버터를 바르듯이 세상에 두루 은혜를 뿌리고 있다.
  두껍게, 흘러 넘치게, 열정적으로.
  만일 우리가 더럽히지 않으려고 뒷광에만 머무른다면.
  우리는 그것을 맛보지도 못할 것이다.
    도나 샤퍼의 "벗겨내기: 영적 부활의 기술" (1991)에서

  예수가 어떤 도시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몇몇 사람들이 매우 슬픈 표정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는 
지금까지 그토록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예수가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어떤 재앙이라도 닥친 것입니까?"
  그 사람들이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지옥이 두려워서 떨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지옥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구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이 두렵고 그것이 
괴롭습니다. 우리는 그 방법을 찾아낼 때까지는 잠을 잘 수도 마음 편안히 쉴 수도 
없습니다."
  예수가 이 사람들을 그냥 지나쳐서 조금 앞으로 나아갔을 때. 또 다른 몇몇 
사람들이 아주 괴롭고 슬픈 표정이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예수가 물었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이 도시에 무슨 일이 생긴 것입니까? 왜 그렇게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까?"
  그 사람들이 대답했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다만 우리는 천국을 놓칠까봐 두려워하고 있을 뿐입니다. 
어떻게 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천구에 들어가야만 합니다. 그것이 우리들의 고통이며 
압박감입니다."
  예수는 이 사람들 역시 지나쳐갔습니다. 예수는 왜 이 사람들을 지나쳤을까요? 
그것은 이 사람들이 종교적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이들에게 지옥을 
피하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사람들을 그냥 지나쳤습니다.
  얼마쯤 가다가 예수는 또 다른 몇몇 사람들이 정원에 모여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예수가 
물었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경사스런 일이 생긴 모양이지요?"
  그 사람들이 대답했습니다.
  "특별한 경사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신에게 감사드리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받을 자격도 없는데, 신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예수가 환한 미소를 띠며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대들 곁에 머물며 함께 기쁨을 나눌 것이오. 그대들이야말로 진정한 나의 
사람들이오."

  신의 왕국은 두려움과 탐욕의 지배를 받는 자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이야기의 소중한 교훈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지옥을 두려워하며 삽니다. 따라서 천국에 들어가야 한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삽니다. 지옥을 피하고 천국을 누리고 싶어하는 것 자체는 결코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천국과 지옥을 자신들의 삶과 분리시켜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사실 천국과 지옥은 인간의 마음 공장이 지어내는 거짓된 상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내 마음을 잘 다스릴 수 있다면, 우리는 천국과 지옥을 
오락가락하며 살지 않아도 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우리 마음이 지어내는 
두려움과 탐욕의 허상을 똑똑히 바로 볼 수만 있다며,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삶의 
기쁨과 황홀을 누리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두려움과 탐욕의 비늘만 벗겨내면, 우리는 우리가 누리는 삶이 곧 하늘의 무한한 
선물이며 은총임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삶의 매순간은 축제가 되고 우리 
몸의 움직임은 노래와 춤이 됩니다.
  봄동산의 나비와 새와 꽃들만 춤추는 게 아니라 사실은 살아 있는 만물이 신의 
은혜에 고마워하며 춤을 추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가슴이 바다처럼 넉넉해져서 생의 고통을 받아들일 줄 알게 되고, 우리가 
신이 주신 모든 것들에 자족하고 감사할 줄 알게 되며, 우리의 삶은 매일같이 
만물과 어우러지는 기쁨과 사랑의 축제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그 축제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행복은 어디 먼 곳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햇살처럼 값없이 내리는 신의 
은혜를 깨닫고 그것을 누릴 줄 알면, 행복은 항상 우리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  영혼에 장식을 달지 말라

  우리 가운데 어떤 이들은 수줍음으로 그 얼굴이 빨갛게 되어 있고, 어떤 이들은 
탈을 쓰고 있다.
  우리는 모두 너무 두꺼운 정신적인 화장을 하고 있다.
  자신의 얼굴을 거의 상실할 지경에 이르러 있다.
  그러나 신앙은 우리가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할 때, 우리 자신이 그분의 눈에 
띄고, 그분과 교통하고, 쏟아지는 빛살을 받으며 거기에 응답해야만 하는 고통을 
감수 할 때 비로소 우리에게 온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 속에 영혼이 살아 있어야 한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의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에서

  어떤 사람이 하루는 중앙박물관에 가서 그곳에 전시되어 있는 오래된 장롱을 
보았습니다. 그는 장롱의 아름다움에 취해 가슴이 아려오고 눈물이 나왔습니다.
  그는 일단 그 장롱을 사진에 담아, 어느 훌륭한 목공 노인을 찾아갔습니다.
  "어쩐 일로 오셨소?"
  "우선 이 사진을 좀 봐주십시오!"
  두꺼운 돋보기를 꺼내 쓰고 사진을 들여다본 목공 노인이 말했습니다.
  "이 장롱은 중앙박물관에 있는 대원군의 장롱이군요!"
  목공 노인은 그것을 대뜸 알아보았습니다. 그가 노인에게 말했습니다.
  "노인장, 이 장롱과 똑같은 장롱을 만들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못 만듭니다."
  목공 노인이 정중하게 그의 청을 거절하며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이 장롱에 쓰인 나무는 300 년 정도의 나이를 가진 나무로, 적어도 30 년 이상을 
강물에 담그었다가 꺼내어 말리기를 반복하였을 것이오."
  노인의 말을 듣고 난 그는 몹시 낙담한 표정으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얼마 뒤, 30 년 이상의 나이를 가진 나무를 구해 가지고 목공 노인을 
찾아가 다시 부탁했습니다.
  "이 나무로 대원군의 장롱과 똑같은 장롱을 만들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목공 노인이 대답했습니다.
  "물론 만들 수는 있소. 하지만 그 장롱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더라도 나는 책임질 
수 없소."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뒤, 그는 목공 노인이 만들어 준 장롱을 자기 집에 가져다 
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 번의 여름이 지난 어느 날, 장롱이 뒤틀려 있음을 그는 발견했습니다. 
즉시 그는 장롱을 실어다가 노인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것 보시오, 나는 이미 그렇게 되리라는 짐작이 있었소.
  웃으면서 이렇게 말한 목공 노인은 뒤틀린 장롱에 장식을 달아주겠다고 했습니다. 
뒤틀어진 것을 고정시키기 위해서는 부득이 "장식"이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대원군의 장롱에 얽힌 이야기는 존재의 분열 속에 살아가는, 그래서 뒤틀어져버린 
우리의 삶을 그나마 지탱하기 위해서는 부득이 "장식"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과연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장식의 시대"입니다. 우리의 삶이 
자연스러움을 잃어버리고 온통 현란한 화장과 주렁주렁한 장식으로 치장되고 있음은 
그만큼 우리의 삶이 건강하고 튼튼하지 못하다고 하는 증거입니다. 전체적이고 
온전한 삶이라면 거기에 무슨 화장이며 장식 필요하겠습니까.
  장식이란 말할 것도 없이 겉꾸밈을 뜻합니다. 따라서 겉만 화려하고 현란하게 
꾸며진 것은 세월이 지나면 그 허술하고 뒤틀려 있는 속알이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감춰진 것은 언제나 드러나게 마련이고 거짓은 때가 되면 벗겨지고 맙니다.
  그런데 영적인 풍요 속에 살기를 바란다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장식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종교적인 형식이나 교리에 집착하거나 거기에 얽매여 사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런 것들에 집착하거나 얽매이면 본말이 뒤바뀌어 버립니다. 강을 
건너려는 사람에게는 배가 필요하지마, 강을 건넌 뒤에는 더 이상 배에 집착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참으로 영적인 자유함을 누리며 사는 자는 겉을 화려하게 치장하지 않습니다. 
두꺼운 화장은 영혼의 아름다움을 가릴지언정 추함을 가려주지 못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에 두른 옷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칼릴 지브란은 "예언자"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대들은 옷을 좀 덜 입음으로써
  좀더 많이 그대들의 살이
  태양과 바람과 만날 수 있기를,
  삶의 숨결은 태양 속에 있으며
  살의 손길은 바람 속에 있으므로.

  그렇습니다. 아름다운 내면 깊이를 지난 시인의 노래처럼, 신은 우리가 주렁주렁한 
장식을 매단 거짓된 꾸밈 속에 갇혀 살기를 바라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맨발의 영혼으로 대지를 밟고, 맨살의 영혼으로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처럼 하늘을 
향해 자유롭게 춤추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  그대의 잠재력을 최대한 활용하라

  잠재력은 사람을 강화시키고 표면의 힘은 사람을 약화시킨다. 사랑, 자비, 용서는 
어찌 보면 굴복과 패배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강력한 힘이다.
  복수, 비난, 힐난 등은 예외 없이 약한 반응을 가져온다^5,5,5^
  잠재력은 고귀한 성품에 호소하고, 표면의 힘은 저속한 성품에 호소한다.
  표면의 힘은 한정되어 있으나 잠재력은 무한하다.
    데이비드 호킨스의 "의식혁명" 'Power VS Force. 1997'에서

  옛날에 어떤 농부가 숲 속을 걸어가다가,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새끼독수리 한 
마리를 발견했습니다. 그 새끼 독수리는 상처를 입어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농부는 불쌍한 생각이 들어 새끼 독수리를 집으로 가져와 병아리들과 함께 헛간에 
넣어두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끼 독수리는 병아리들과 함께 음식을 먹기 
시작했으며, 병아리들과 똑같이 행동했습니다.
  세월이 흐른 후 어떤 조류학자가 우연히 그 지방에 왔다가, 벌레와 곡물을 먹으며 
농장에서 살고 있는 독수리를 발견했습니다. 조류학자는 호기심에 사로잡혀 
농부에게 물었습니다.
  "어쩌다가 독수리를 병아리와 함께 기르게 되었습니까? 독수리는 새 중의 왕이며, 
하늘을 날아다녀야 할 짐승인데!"
  농부가 대답했습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나는 그 독수리가 아주 어렸을 때 발견했소, 그 뒤로 별다른 
생각 없이 헛간에서 키웠습니다. 다른 병아리들하고도 사이 좋게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더군요."
  조류학자는 고개를 가로 저었습니다.
  "그건 당신이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독수리에게 하늘을 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이 독수리는 자신의 능력과 잠재력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독수리는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이용할 수 있을 때에만 진정한 행복과 만족감을 
맛볼 수 있을 겁니다."
  조류학자는 당장 그 독수리를 안고 나는 법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소용이 없었습니다. 독수리는 날개를 펼치려고 조차하지 않았습니다. 
독수리는 날기를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독수리는 자신이 하늘을 날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조류학자는 다시 한번 독수리를 들어올렸습니다. 이번에는 머리 위로 높이 
독수리를 치켜든 다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하늘의 주인공이야. 저 하늘을 울려다보렴! 자. 이제 날개를 펼치고 하늘을 
날아봐."
  독수리는 어리둥절하고 겁에 질린 모습이었습니다. 땅에서 먹이를 쪼아먹고 있는 
병아리를 보자, 독수리는 털썩 땅바닥으로 떨어져 병아리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조류학자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동이 틀 무렵, 조류학자는 독수리를 데리고 근처의 조그만 산꼭대기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겁에 질리 독수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기 시작했습니다.
  "자, 날아라 날아. 독수리야! 날개를 펼치고 창공을 날아올라라. 저 아래의 
병아리가 사는 헛간 따위는 잊어버리렴. 자 하늘을 나는 거야!"
  그러나 독수리는 알지 못하는 자신의 능력과 높이를 무서워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저 까마득한 지상으로 떨어진다고 생각하니 온몸이 떨리기도 했습니다.
  산꼭대기의 절벽에 선 독수리는 계곡 아래의 농가를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때 조류학자는 독수리에게 솟아오르는 아침해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정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넌 병아리가 아니라 독수리라는 사실을 절대로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너는 
독수리야. 너는 하늘을 날 수 있어. 하늘은 네 아버지의 무대란다. 창공이 너를 
부르고 있어. 너는 땅위를 기어다니는 동물이 아니야. 자, 이제 날개를 활짝 펼치고 
마음껏 허공을 날아보려무나!"
  드디어, 독수리는 솟아오른 태양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아침햇살이 따스하게 
그의 날개를 어루만져주었습니다.
  날카로운 햇살이 독수리의 심장을 꿰뚫는 듯했습니다. 갑자기 독수리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습니다. 그의 영혼의 무엇인가가 깊은 잠에서 깨어난 것입니다. 
독수리는 이윽고 온몸을 부르르 떨며 천천히 날개를 펼쳤습니다.
  마침내 독수리는 날개로 대지를 박차고 날아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찬란한 
햇살을 바라보는 순가, 독수리는 점점 더 속도를 높이며 하늘 높이 날아올랐습니다. 
이윽고 이 독수리는 지금까지 그 누구도 도달해 보지 못한 높이에까지 오를 수 
있었습니다.

  피터 라이브스의 "현대인을 위한 비유와 우화들"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인간이 
지니 잠재력을 일깨워줍니다.
  신은 인간에게 무한한 잠재력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겉으로 드러난 표면적 
힘에 의존하는 삶의 방식 때문에 대부분 이 잠재력을 사장시키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기 눈에 "보이는 힘"만 신뢰하고 "보이지 않는 
힘'잠재력'"을 인정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화 속의 새끼 독수리도 그러했습니다. 독수리의 본성은 하늘을 나는 것입니다. 
땅위에서 사는 병아리들과는 다릅니다. 하지만 독수리는 병아리들 틈에서 살면서 
자신의 잠재력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독수리의 그 잠재력을 아는 조류학자가 
그걸 일깨워줍니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표면의 힘이 지배하는 세상에 길들여지면서 우리는 
잠재력의 가치를 잃어버렸습니다. 금력, 권력, 폭력 등의 표면적 힘의 유혹 앞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맙니다 하지만 이 힘은 일시적인 것이고, 한정적인 
것입니다. 표면적 힘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 같지만, 표면적 힘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 
같지만, 표면의 힘이 일시적이고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오래지 않아 스스로 
쇠진하고 맙니다.
  잠재력은 다릅니다. 이 힘은 무한합니다. 잠재력은 우주와 만물을 구성하는 
창조의 근원이 되는 어떤 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나무의 줄기를 
아무리 잘라내도 땅속 깊이 묻힌 뿌리의 힘으로 다시 새 잎과 줄기가 자라나듯이, 
잠재력은 이 근원의 힘에서 솟아나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표면의 힘이 
물질세계에 뿌리를 두고있다면, 잠재력은 순수의식에 뿌릴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잠재력은 한정되지 않고 무한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잠재력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요? 정신의학자이며 영적 
삶에 관한 훌륭한 저서를 낸 디팍 초프라에 의하면, 우리가 순수의식 속에 있는 
창조성을 충분히 활용하려고 하면, 매일 침묵, 명상, 비판단'nonjudgment'을 
실천하고, 자연 속에서 시간을 보내라고 권합니다.
  고독한 인간이 이러한 잠재력을 활용하여 위대한 역사를 이룬 사실을 살펴봅시다. 
인도의 성자 간디 말입니다. 45 킬로그램의 가냘픈 유색 인종 간디는 혼자만의 
힘으로 2/3의 인구를 지배하던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대영제국을 굴복시켰습니다. 
대영제국이 온갖 표면적 힘으로 무장하고 있었다면 간디는 바가바드 기타, 물레를 
잣는 일, 비폭력, 침묵, 명상, 사랑이 그의 무기였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표면의 힘을 
이긴 것입니다. 간디는 모든 세상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자기 희생이라는 
잠재력과 이기주의의 표면력이 대립되면 어떠한 결과를 낳는지를 똑똑히 
보여주었습니다'데이비드 호킨스의 "의식혁명" 참조'.
  이런 예는 우리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인류에 봉사하고 유익을 끼친 
많은 사람들은 모두 자기 안의 잠재력을 최대한 활용한 이들입니다. 예수나 붓다 
같은 성인, 단테나 셰익스피어, 칼리 지브란 같은 위대한 시인, 예술가, 과학자들은 
모두 신이 그들에게 준 창조력을 마음껏 발휘하여 인류에 헌신했습니다.
  자기 안에 잠재력이 있음을 깨닫지 못하거나, 그것이 있음 알면서도 활용하지 
않는 것은 우리를 이 땅에 내신 신의 뜻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잠재력을 충분히 
활용하는 것은 우리 안에 숨은 신성의 씨앗을 키워 가는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  아름답게 가꾸라

  아름다움은 욕구가 아니라 황홀경.
  아름다움은 목마름에 타는 입술도 아니며 앞으로 내미는 빈손도 아니다.
  오히려 불타는 가슴이며 매혹된 영혼인 것이다.
  아름다움은 두 눈을 감아도 보이는 영상이며 두 귀를 막아도 들리는 노래.
  아름다움은 신성한 얼굴을 가린 베일을 벗어버린 삶의 모습이다.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에서

  인도 뱅골어로 아름다운 시를 써서 노벨 문학상을 받은 라빈드라나드 타고르에 
대해서는 아마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의 부친은 매우 부유한 영주였습니다. 그의 영지는 수십 개의 마을을 포함해서 
수천만 평에 이르렀습니다. 그 영지 가운데로는 강이 흘렀습니다. 타고르는 작은 
나룻배를 타고 몇 달씩 이 아름다운 강 위에서 지내곤 했습니다. 그 강은 우겨진 
아열대의 숲으로 둘러싸인 더없이 고요하고 한적한 곳이었습니다.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뜬 어느 날 밤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타고르는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나룻배 안에 않아 촛불을 켜놓고 크로체라는 
철학자가 쓴 유명한 미학 논문을 읽고 있었습니다.
  크로체는 "아름다움"에 대해서 대표적인 저서를 남긴 철학자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알면 진리가 무엇인지도 알게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크로체는 
다양한 각도에서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사색하는 데 평생을 바쳤습니다.
  타고르 자신도 아름다움의 숭배자였지요, 그는 아름답고 미학적인 삶을 살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시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삶 자체가 한 편의 아름다운 
시였습니다.
  보름달이 뜬 그날 밤 타고르는 나룻배 안에 작은 촛불을 켜놓고 크로체의 
미학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밤이 깊어 크로체의 난해한 이론에 피곤해진 그는 책을 덮고 촛불을 껐습니다. 
그는 그만 잠자리에 들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나룻배에 켜두었던 그 작은 촛불이 사라지는 순간, 나룻배의 창문으로부터 달빛이 
춤추며 흘러들어 왔습니다.
  문득 달빛이 나룻배 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한 순간, 타고르는 침묵에 빠졌습니다. 그것은 놀랍고 신성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는 밖으로 걸어나가 뱃전에 섰습니다.
  고요한 밤, 고요한 숲에 떠오른 달은 너무나 아름다웠고, 강물 역시 숨을 죽이고 
천천히 흘러갔습니다. 타고르는 그날 밤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아름다움이 온통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을 외면한 
채 아름다움에 대한 책에 파묻혀 있었다. 아름다움은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 있었다. 내가 켜놓은 작은 촛불이 그 아름다움을 가로막고 있었다. 
촛불의 연약한 빛 때문에 달빛이 내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던 것이다."

  히브리인들이 쓴 경전을 보면, 신은 천지만물을 창조한 뒤, "보시니 좋았더라!"고 
흡족한 감상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신이 지으신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이 
아름다움을 보라고 신은 우리의 눈을 두 개씩이나 달아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두 개씩이나 달고 있는 눈으로도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시인 타고르처럼 먼데서, 또는 엉뚱한 데서 
아름다움을 찾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뒤늦게 그것을 깨달은 시인은 "관념과 촛불"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볼 자기의 눈을 가렸다고 말합니다. 얼마나 솔직하고 아름다운 
고백입니까.
  아름다움은 책 속에 있지도 않고, 관념 속에 있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구체적인 일상 속에 있습니다. 관념의 촛불을 불어 끄고 나니까, 달빛이 시인의 내면 
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아름다움이 우리의 구체적인 일상 속에, 아주 가까운 데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볼 눈이 없다면 우리의 내면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내면의 눈을 
뜨게 되면, 일상 속에 감춰진 아름다움도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만일 우리의 눈이 
온갖 물질의 욕심으로 덧칠되어 있다면, 어떤 아름다운 풍경도 아름다움으로 
다가오지 않을 것입니다.
  아름다움은 우리의 외부에 있는 그 무엇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존재의 바깥에 
있는 그 무엇이 아닙니다. 그래서 칼리 지브란은 '아름다움은 욕구가 아니라 
황홀경'이라고 말합니다. 아름다움이 황홀경이란 말은 그것이 우리 내면 깊숙이 
존재하는 그 무엇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내면이 아름다울 때, 우리는 
우리가 바라보는 사물이나 일상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가꾸기 위해서는 우리의 외부에서, 먼데서 그것을 
찾으려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을 먼저 아름답게 가꾸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내면이 분열되지 않고 참된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다면, 우리가 바라보는 
모든 것은 신성한 얼굴을 한 채 다가와 우리의 매순간을 신의 축복 속에 있게 할 
것입니다. 
  @[  무소유의 거울에 비춰보라

  우리 인디언은 자기가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
  자연에 자신의 모습을 자주 비추곤 한다.
  자연의 숨결과 자신의 숨결은 동일시하고,
  대지의 맥박과 자신의 심장을 한 박자로 여긴다^5,5,5^
  인간의 힘과 진정한 생존은 자신을 자연적 한 부분으로 여겨
  대지의 모든 생명들과 조화를 이루는 일에 있다.
    롤링 썬더의 "겨울 눈으로부터 여름꽃에게로"에서

  교우 중에 산에 가기를 즐겨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어느 봄날, 산을 다녀온 교우가 어린 단풍나무 한 그루를 가져와서 화분에 심어 
키워보라고 하였습니다. 나무이 파리가 겨우 둘 달린 어린 단풍나무를!
  단풍나무를 전해주며 교우는 단풍나무에 얽힌 재미있는 얘기 한 자락을 풀어 
놓았습니다.
  깊은 산을 다니다가 보면, 한군데 소복하게 돋아나 이런 단풍나무들을 가금씩 볼 
수 있답니다. 다람쥐의 짓이랍니다.
  다람쥐는 늦가을이 되면, 겨울 양식을 준비하기 위해 단풍 씨앗들을 물어다가 
저만 아는 곳에 은밀히 묻어둡니다. 그런데 기억력이 별로 좋지 못한 이 다람쥐는 
단풍씨앗 묻어둔 곳을 표시해두기 위해 슬쩍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드높은 파란 가을 하늘에는 하얀 구름이 뭉실뭉실 떠있습니다. 다람쥐는 바로 
자기가 단풍 씨앗들을 물어다가 감춰둔 곳과 수직의 위치에 떠 있는 구름에다가 그 
위치를 표시해둡니다.
  그러나 반들거리는 다람쥐의 까만 눈과 눈맞춘 구름은 이내 다람쥐의 눈빛을 망각 
속으로 아득히 흘려보냅니다.
  겨울이 다가와 먹을 것이 궁해진 다람쥐는 가을에 은밀히 묻어둔 단풍 씨앗들을 
찾으려 해도, 제 눈으로 점찍어둔 구름은 이미 흘러가 버렸으니. 결국 땅에 묻어둔 
단풍 씨앗들을 찾지 못하고 맙니다.
  이듬해 봄, 다람쥐가 찾지 못한 단풍 씨앗들은 싹을 틔워 한군데 소복하니 어린 
단풍나무들을 돋아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누가 지어내 것인지는 모르지만 "스스로 그러한" 자연의 조화로움을 감동적인 
이야기로 빚어놓았습니다. 특히 다람쥐가 단풍 씨앗을 감추기 위해 그것을 하늘에 
떠가는 구름에다가 표시해두었다는 대목은, 인간의 탐욕을 역으로 드러내기 위한 
기막힌 착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자기 소유를 확실히 해두기 위해 인감 도장을 눌러 
등기해두어야 안심하지 않던가요. 탐욕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인간들에게는, 하늘의 
뜬구름에다 소유권을 설정해두는 다람쥐는 어리숙함이, 새 봄 깊은 산 속에 여러 
그루의 어린 단풍나무들을 돋아나게 하는 것이지요.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면서도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기보다는 자연의 지배자로 
행세해왔습니다. 그 결과는, 누구나 다 아는 것이지만, 자연으로부터의 소외를 
낳았고, 인간은 스스로 막다른 벼랑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자연과의 조화를 
회복하지 않는 한 그 미래는 매우 어둡습니다.
  종교적으로 성숙한 혼들은 자연을 지배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공존공생의 
자리에서 보았습니다.
  성 스란체스코는 그래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들이나 다른 동물들, 식물들, 그리고 
무생물조차도 "형제", "자매"라고 불렀습니다. 환경 위기 따위에 대한 인식이 
전무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더 이상의 많은 이야기 더 필요할 것 같지 않습니다. 단풍 씨앗들을 부지런히 
물어 날라 땅에 묻어두고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을 흘끗 쳐다보던 다람쥐의 눈망울을 
떠올려봅시다. 그 고운 눈망울은 "무소유의 거울"이라 부를 만한 감동을 자아내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 맑고 투명한 거울에 일그러진 우리의 모습을 자주 비춰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  그대의 꽃을 피어 있게 하라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우리는 모두 아름다운 꽃이다.
  우리가 눈을 감고 있을 때 눈썹은 바로 장미꽃잎과 같다.
  우리의 귀는 새들의 지저귐을 드는 아침의 눈부심과 같다.
  우리가 웃을 때마다 입술은 아름다운 꽃 모양이 된다.
  그리고 우리의 두 손은 다섯 개의 꽃잎이 있는 연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일 뿐만 아니라 모든 이의 행복을 위해 "우리가 바로 꽃"이라는 
사실을 늘 체험 할 수 있도록 연습해야 한다.
    틱 낱 한의 "평화 맛보기" (1992)에서

  어떤 젊은 수도자가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영적 스승을 찾아갔습니다.
  "어디서 왔는고?"
  스승이 그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물었습니다.
  "월주에서 왔습니다."
  수도자가 공손히 대답했습니다.
  "뭐하러 왔누?"
  "진리가 무엇인지 알고자 왔습니다."
  수도자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스승이 큰 주먹으로 수도자의 이마빡을 갈기며 
고함을 질렀습니다.
  "야, 이 미친 놈아! 네 놈의 보물 창고를 감춰두고 그것도 모자라서 남의 보물을 
빼앗으려는 게냐? 욕심 많은 놈 같으니라구!"
  스승의 느닷없는 고함소리에 수도자는 잠시 당황했습니다.
  "보물이라니? 가진 것이라고는 낡은 옷 한 벌에 밥그릇 하나뿐인데^5,5,5^"
  "스승님, 제게 무슨 보물 창고가 있다고 그러십니까?"
  수도자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항변하듯 말했습니다.
  "그러면 네놈이 보물 창고가 아니란 말이냐?"
  스승의 이 말을 듣고 수도자는 불현듯 깨달음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가진 것이라고는 낡은 옷 한 벌에 밥그릇 하나뿐인 젊은 수도자를 두고 "보물"을 
지니고 있다고 한 영적 스승의 말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지니 "신성"을 가리키는 상징에 다름아닙니다.
  어떤 종교에서는 인간이 지닌 신성을 가리켜 진흙탕에서 피어나 "연꽃"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무엇이라 부르든 그것은 인간의 이해를 돕기 위한 상징입니다.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을 표현하려고 할 때 상징을 사용합니다. 인간이 지닌 
신성 역시 언어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그와 같은 상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러한 상징들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그처럼 귀하고 값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젊은 수도자는 진리를 알기 위해 영적 스승을 찾아왔지만, 그 
진리라는 보물이 사원 같은 어떤 특별한 곳에 존재하는 게 아니고 젊은 수도자 속에 
이미 내재해 있다는 것이지요. 스승은 그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 이마빡을 
때린다든지 심한 언사를 사용하는 것조차 서슴지 않습니다.
  "네놈이 값진 보물인데. 네놈이 우주의 꽃인데, 뭘 더 찾으려 헤매다니느냐?"는 
것이지요.
  이제 필요한 것은 "보물이"이나 "꽃"을 찾아 헤매다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그것을 찾을 필요가 없고 자신이 우주에 핀 한 송이 꽃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더 이상 그것을 발견하려고 진흙탕을 헤매다니며 질척거리지 않아도 됩니다. 보물은 
스스로 광채를 발할 것이요, 꽃은 스스로 그윽한 향기를 토해낼 테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틱 낱 한의 말처럼 우리는 이 아름다운 우주에 핀 한 송이 꽃입니다. 
이 놀라운 신비를 깨닫기만 하면, 우리는 내면의 풍요를 누릴 수 있고, 이 풍요와 
행복을 다른 이들과도 나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것을 억지로 나누고자 
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 내면의 왕국에서 피어나오는 그 향기는 콜레라처럼 
전염성이 강합니다. 따라서 그것은 저절로 세상에 스며들게 됩니다. 꽃이 저절로 
그윽한 향기를 세상에 퍼뜨리듯이! 
  @[  모든 일에 감사하라

  신이 주신 가장 고귀한 선물은 생명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가장 큰 죄는 이 고귀한 선물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도 지니지 않고 
풀어보지도 않은 채 되돌려 보내는 것이 아닐까?
    존 포웰의 "마음의 계절" (1987)에서

  하늘나라에 갓 도착한 한 영혼이 성 베드로의 영접을 받았습니다.
  어서 오게, 나는 베드로라네.
  베드로 사도가 그를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사도님. 만나서 영광이네요. 저는 엘리자입니다.
  그가 인사를 하자, 베드로는 엘리자를 데리고 하늘 나라를 구경시켜주었습니다.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천사들로 가득 붐비는 거대한 작업실로 들어섰습니다.
  베드로는 첫 번째 부서로 가서 걸음을 멈추며 말했습니다.
  "여기는 접수처라네. 신게 기도하는 온갖 청원이 이곳에서 접수된다네."
  엘리자가 그 접수처를 유심히 바라보니, 천사들이 매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천사들이 세상도처에서 보내온 두툼한 분량의 종이에 적힌 온갖 
청원들을 분류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을 나온 베드로와 엘리자는 곧 두 번째 부서에 도착했습니다. 베드로가 
엘리자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여기는 포장 및 발송처라네. 사람들에게 보내줄 은총과 축복이 포장되어 지상의 
청원 당사자들에게 발송되는 거지."
  엘리자가 보니, 이곳 역시 정신없이 바빴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축복이 포장되어 
지상으로 배달되기 때문에 많은 천사들이 모여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끝으로 작업실 가장 후미진 구석에 마지막 부서가 있었고, 두 사람은 거기서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이곳은 놀랍게도 단 한 명의 천사가 아무 할일 없이 
빈둥거리고 있었습니다.
  "이곳은 확인처라네."
  베드로가 그에게 일러주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곳은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는 겁니까?"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서글픈 일이야, 지상 사람들은 부탁한 축복을 받고 나서 확인서를 보내는 일이 
없거든."
  "신의 축복을 어떻게 확인하는 건데요?"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간단하다네, 그저 "주님, 감사합니다" 하면 되는 거지."

  인간은 신의 축복을 받기를 갈망하지만, 신으로부터 받은 축복에 대해서 고마움을 
표현하는 일에는 인색하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우화입니다.
  신앙은 신이 내려주신 무한한 은총을 깨닫고 그것에 감사하는 행위에 
다름아닙니다. 하지만 신이 베풀어준 사랑과 은총에 대해서 자족하고 고마워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은 자기 살의 결핍의 조건들을 
찾아내어 신에게 더 많은 요구를 하기에 여념이 없지요. 결구 이런 이들이 신에게 
바치는 기도는 감사와 찬양보다는 불평과 원망에 물들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부러 눈을 감고 사는 자가 아니면 다 아는 사실이지만,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엄연한 인간의 실상입니다. 그런데도 잠시 머물다가 가는 
인생이라는 수레에 신은 얼마나 많은 보물을 채워주었습니까. 일생을 누려도 다 
쓰지 못해 제 후손에게 물려줄 만큼 엄청난 은총을 우리에게 베푸시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손으로 만지며 사용하는 물질 말고도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얼마나 많이 끌어다 누리며 삽니까. 평생 값없이 받는 햇빛, 어두운 인생길을 
비춰주는 달빛과 별빛, 잠시도 마시지 않고는 생명을 영위할 수 없는 공기며 물, 
바람, 한 여름날 소나기 뒤에 나타난 둥근 무지개, 아름다운 저녁놀 등 신이 
누리도록 허락해준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저물 녘, 우리가 조용히 앉아 하루를 
돌이켜 보며 깊은 묵상에 잠길 때마다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의 시와 감사의 노래말이 
떠올라 흥얼거리는 것은 다 이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존재의 흥을 불러일으키는 시와 노래는 감사할 줄 아는 마음자리에서만 꽃핍니다. 
불평의 항목을 겨울날 초가집에 매달린 고드름발처럼 늘어뜨리고 사는 인생은 알지 
못합니다.
  거듭 결핍의 조건들을 끄집어내어 불만의 모래알을 씹고 사는 이는 평생 행복을 
싹틔우지 못할 것이요, 살아있음만으로도 황홀해하며 사는 이의 뜰은 아름다운 
벌나비가 모여들고 온갖 새들이 깃들여 노래하며 춤추는 신의 정원으로 바뀔 
것입니다. 
  @[  변화시키는 사람이 되라

  우리는 모두 세계의 일부분씩을 변화시켜야 할 책임이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부분들은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들, 가정, 일, 그리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 등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의 삶이다.
  우리 자신이 처해 있는 모든 상황은 두려움 대신에 사랑을 가르치기 위해 신이 
완벽하게 마련한 기회이다.
    마리안느 윌리엄슨의 "사랑에로의 복귀" (1992)에서

  스위스의 어떤 목사님이 며칠간 가족들과 함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호텔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불며 산더미 같은 
파도가 밀려와 해안 기슭을 때렸습니다
  다음날 아침 그는 일찍 일어나서 밤새 얼마나 많은 피해가 있었는지 알아보려고 
해안가로 나갔습니다. 밤새 불던 바람도 자고 바다도 평온을 찾아 잔잔해져 
있었습니다.
  이리저리 거닐다 보니 해변에는 지난밤에 밀려들어 왔다가 나가지 못한 
불가사리들이 바다에서 몇 피트 떨어진 곳에 가득히 뒹굴고 있었습니다 구름에 
가려져 있던 햇살이 내리쪼이기 시작하면 모래 위에 팽개쳐진 불가사리들은 말라 
죽을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발걸음을 더 멀리 옮기고 있을 때 그는 우연히 한 어린 소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소년은 허리를 굽혔다 폈다 하며 불가사리를 집어 바닷속으로 던지고 있었습니다 
허리를 구부릴 때마다 불가사리 한 마리씩을 집어!
  "뭐하러 그런 일을 하니?"
  그는 불가사리를 열심히 주워 던지는 소년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물었습니다.
  "너 혼자 아무리 열심히 해도 이 많은 불가사리를 저바닷속으로 다 집어넣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네 그래요"
  소년은 간단히 대꾸하고는 여전히 허리를 숙여 다른 불가사리를 집어올려 
바닷속으로 던지면서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방금 제가 던져놓은 그 불가사리에게는 분명히 변화를 일으켰다고 
생각해요"

  이 소년의 이야기는 우리 가슴에 잔잔한 감동의 파문을 던집니다. 보통 사람들 
눈에는 하찮게 보이는 것 속에 일으킨 변화를 읽어내는 소년의 아름다운 눈과 그 
마음씨 때문입니다.
  밝은 마음을 가지 사람이라면 누구나 세상을 밝고 아름답게 만드는 변화의 주역이 
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사람이 되려면 한 마디 불가사리 속에 일으킨 
변화를 읽을 줄 아는 소년처럼 먼저 좋은 눈을 갖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면 이 "좋은 눈"을 갖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을 저는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랑은 존재계에 대한 신뢰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존재 속에 
신의 숨결이 깃들여 있다는 신뢰에서 비롯됩니다. 불가사리 같은 작은 미물 속에도 
신의 숨결이 깃들여 있다는 신뢰가 있을 때 즉 그 작은 생명과의 사랑의 교감이 
오고갈 때 비로소 자신의 행위가 일으키는 변화도 읽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슈바이처 박사나 마더 테레사 수녀 같은 큰 변화의 물결을 
일으킨 이들도 있습니다 이들의 행위도 따지고 보면 보잘것없는 것들 속에 깃들인 
우리의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신의 숨결을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을 생명의 
근원과의 소통, 혹은 교감이라고 불러도 되겠지요. 그러한 교감이 그들의 행위의 
동기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행위의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들의 
행위가 일으킨 변화의 작은 기미들을 읽으며 그 행위 자체에 기쁨으로 몰두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얼마나 큰 변화를 일으키느냐가 아닙니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 가슴속에 세상을 밝고 아름답게 만들고자 하는 의지와 열정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의지와 열정이 불쏘시개가 되면 우리가 세상에서 맺고 있는 관계들이 
살아 있음의 기쁨과 사랑을 나누는 생명의 연대로 바뀌어지고 이 바뀜의 불꽃은 
들불이 둘러싼 어둠의 울타리를 불살라 버릴 것입니다.
  하지만 밝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우리의 추구는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내 영혼의 거듭남"중생" 없이는 타인과 세상을 변화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만일 우리 속에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뜨거운 에너지가 고이게 되었다면 
우리에게는 바다처럼 열린 너그러운 마음과 사랑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햇살이 
내리쪼이면 죽을지도 모르는 작은 불가사리 한 마리에 대한 소년의 따스한 눈길은 
우리에게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작은 모래알 속에 우주가 깃들여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작은 겨자씨 하나가 
자라면 큰 그늘을 이루는 우람한 나무가 된다는 천국의 비유도 있습니다. 우리 
영혼에 일어나는 미미해 보이는 변화일지라도, 그것이 진실하다면 세상을 바꾸는 큰 
힘이 될 수 있습니다. 
  @[  산만하지 않도록 하라

  "산만"이라는 단어를 이곳에서 특히 유용하다.
  그것은 우리가 견인력과 존재의 기반을 잃는다는 것이다.
  그것의 상실은 우리가 현존하는 것으로부터 미끄러져 떨어져나갈 때 일어난다.
  우리가 현실 속에서 경험하는 것을 깨닫고, 그 경험이 펼치지는 것과 함께 있을 
수 있는, 고요와 단순성 속에 머물러 있을 때 우리의 삶은 진정으로 바르게 
인식되고, 이 지구 위에 활기차게 살아 움직이는 존재의 평범한 마법과 연결된 수 
있다.
    존 웰우드의 "평범한 마법" (1992)에서

  닐 기유메트라는 예수회 신부의 "영혼에서 샘솟는 아름다운 이야기"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항상 불면증으로 고생하는 마이르나는 병원에 들러 독한 진정제 주사를 맞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침대에 누운 마이르나의 귓전에는 의사가 
당부하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당신은 너무 지쳤소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탈진해서 드러눕고 말 거요."
  잠시 후, 마이르나는 곧 약효를 못 이겨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잠을 자던 그녀는 아이들이 가지고 놀다가 마룻바닥에 그대로 어질러놓은 
장난감들이 나누는 대화를 엿들었습니다. 물론 장난감들은 그들의 언어로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마이르나는 그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양철로 만들어진 
장난감 병정이 친구 장난감들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여주인 마이르나는 너무 여러 가지 일에 매달려 쩔쩔매는 것 같애. 남에게 
뒤처지지 않으려면 좀더 단호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의욕적으로 현실을 직면해야 할 
것 같아."
  옆에 있던 둥근 고무공이 말했습니다.
  "그건 말도 안돼 정반대라구. 그녀는 너무 호전적이야. 직장에서도 늘 제일인자가 
되려고 하는데, 그렇게 경쟁심이 지나치니 저렇게 지쳐 쓰러지고 말잖아? 만사를 
여유있고 느긋하게 해야지."
  이 말을 듣고 옆에 있던 곰인형이 말했습니다.
  "말이 쉽지 학교 선생 노릇하며 세 아이를 기르고, 남편 시중들랴, 하루 스물네 
시간 쉴 틈이 없는걸. 네 말대로 느긋한 마음을 가지려면 우선 직장을 그만둬야 
한다구!"
  이때, 곁에서 듣고 있던 장난감 전기기관차 째지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내가 보기엔 우리 주인은 너무 틀에 박힌 생활을 한다구. 모든 일을 훌훌 
털어버리고 여행을 한번 다녀오면 제일 좋을거야."
  기관차 옆에 있던 돛단배도 맞장구를 쳤습니다.
  "그래, 맞아. 여행을 떠나 세상 구경을 하며 좀 돌아다니다가 오면 저렇게 잠이 안 
와서 야단을 지친 않을 거야."
  이렇게 모든 장난감들이 저마다 여주인공을 위해 한마디씩 하는데, 그 중에 
팽이만은 아무 말도 없이 잠자코 있었습니다.
  나무 말'마'이 팽이에게 말했습니다.
  "넌 왜 그렇게 가만히 있지? 뭐라고 말 좀 해봐!"
  이때 팽이가 드디어 침묵을 깨뜨리고 떠듬떠듬 입을 열었습니다.
  "솔직히 난 할 말이 없어. 내가 어떻게 마이르나의 고민을 알겠어? 겪어보지두 
않았는데. 물론 그녀와 나는 공통점이 없지는 않아 빠르게 움직인다는 점에서는 
말야. 그러나 나와 그녀가 다른 것은 나는 한 방향으로만 움직이는데 그녀는 모든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거야. 그녀는 너무 많은 방향으로 움직이는데 문제가 있는 것 
같애. 나는 중심축을 만들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구 그렇지 않았으며 나 역시 
방향 감각 없이 이리저리 돌았을 거야."
  "우리 주인 마이르나처럼?"
  "그랬겠지. 그러나 난 누굴 판단하고 싶진 않아. 하지만 마이르나에게 영혼의 
중심축 같은 게 있으면 어떨까 생각할 뿐^5,5,5^"
  팽이는 이렇게 여운을 남긴 채 입을 다물었습니다.
  그 순간 잠이 들었던 마이르나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팽이를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내게 영혼의 중심축이 없단 말이지?"
  문득 그녀는 팽이를 손으로 잡고 돌려보았습니다. 팽이는 중심축을 바닥에 대고 
멋지게 팽팽 돌았습니다 힘도 안 들이고 잘도 돌았습니다.
  "그래, 나도 너 같으면 좋겠다 내게도 중심축이 있었으면!"
  마이르나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따르릉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친구 
셜리였습니다.
  "오늘밤 기도회에 오면 어떻겠니?"
  "난 무척 바쁜데 일을 더 늘리고 싶지 않아."
  "네가 바쁜 것은 잘 알아. 하지만 내 경험으로는 기도할 시간도 없이 그렇게 
바쁘게 살면 정신이 없어진다는 거야. 네 생활의 문제도 바로 이 점인 것 같애. 
네게도 중심축이 필요해."
  "중심축?"
  "그래, 그 중심축이 바로 하나님이야. 하나님께 매달려봐. 뒤숭숭해서 잠 못 자는 
일은 없어질 거야."
  셜리의 말을 듣고 난 마이르나는 한동안 생각하다가 중심축을 발견하기 위해 
기도회에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기도회에 참석하기 시작한 후 여러 달이 
지나 셜리의 말이 옳았음이 밝혀졌습니다.
  그녀는 드디어 삶의 중심축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이전보다 더 많은 일들을 해야 
했지만 그녀는 하나님이라는 삶의 중심축을 중심으로 해서 돌았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 닥쳐와도 느긋하고 생기에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 속에 나오는 주인공 마이르나는 너무 바빠서 죽을 시간조차 
없다고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현대인의 초상입니다. 점점 빨라지는 속도를 
숭상하고 매일같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온갖 정보들에 휘둘리고 사는 우리들의 
모습에 다름아니지요.
  우리는 이런 분주함 속에서 피로와 불면으로 뒤척이는 마이르나와 같은 이웃들을 
우리 주변에서 자주 마주칩니다 몸도 마음도 병들어 삶의 생기를 아^36^예 잃어버린 
이들, 탈진하여 싱싱한 활동력을 상실한 이들, 이런 삶 속에 무슨 새로움이나 창조의 
열정이 생겨날 수 있겠습니까?
  기유메트가 말하는 "중심축"의 발견이란, 다른 말로 분주함을 벗어난, 빈 백지 
같은 여백 위에 놓여지는 삶을 말합니다.
  노자가 "찰흙을 빚어 그릇을 만드나, 그 그릇의 빔'공'에 그릇의 쓰임이 있다"고 
말할 때 그 "빔"이라는 말은 분주함의 벗어남을 이르는 말이며, 또한 그 
"없음'무'"이 "있음'유'"에 유용함을 이르는 말입니다.
  현대인의 특징은 "텅 빔", "없음"을 못 견뎌 합니다 홀로 고요히 있는 순간을 
견디지 못합니다. 고요함 한적함보다는 시끄러운 소음에 익숙하고 그것을 오히려 
편안해하지요. 그들은 시끄러운 소음과 북적댐 속에서 자기들이 부지런히 무언가를 
한다는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심지어 기도한다는 이들조차도 이런 
고요함 텅 빔을 못견디는 이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많은 이들이 북적대는 그런 
장소에서 함께 소리지르고 날뛰는 것만 기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이들의 기도는 대체로 그들이 세상에서 북적대고 살던 방식의 연장일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기도 속에서 그들이 중심축을 발견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는 어느 날 마리아와 마르다라는 자매가 사는 집을 방문합니다. 
마리아는 예수가 자기 집으로 들어서자, 곧 예수를 방으로 모셔들이고, 그의 무릎 
앞에 앉아 예수가 들려주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런데 언니인 마르다는 
예수를 접대하는 일로 방과 부엌을 오가며 분주합니다.
  바쁘게 움직이던 마르다가 문득 방안을 들여다보니, 마리아는 손끝 하나 까닥하지 
아니하고 예수의 말씀만 듣고 있는 것을 보고 불평을 털어 놓았습니다.
  "주님 동생에게 제가 하는 일을 거들라고 말씀해주십시오."
  이때 예수는 마리아를 두둔해 말합니다.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분주하여 들떠 있구나. 그러나 내가 보기엔 필요한 
일은 하나뿐이다. 네 동생 마리아는 오히려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그는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야!"
  꼭 필요한 일을 택한 마리아 그녀의 삶은 "중심축" 위에 굳게 서있습니다 중심축 
위에 서있다는 말은 우리가 삶의 근원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온갖 일로 
분주하여 산만해진 마르다에게 "필요한 일은 하나"라 고 하셨던 예수는 오늘도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그대는 그대에게 곡 필요한 그것을 발견했는가?" 
  @[  초보자의 마음가짐을 갖도록 하라

  만일 당신의 마음이 비어 있다면
  당신은 무엇이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며
  모든 것을 향해 열려 있는 것이다.
  초보자의 마음에는 많은 가능성이 열려 있지만
  전문가의 마음에는 가능성이 닫혀 있다.
    소갈 린포케의 "삶과 죽음에 관한 티베트의 책" (1992)에서

  언젠가 저명한 작가 마크트웨인을 찾아간 어느 젊은 문인은 날이 갈수록 
작가로서의 능력부족을 절감하게 된다고 자신의 흉금을 털어놓고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께서도 그럴 때가 있습니까?"
  질문을 받은 마크트웨인 대답했습니다.
  "나도 딱 한번 그랬던 적이 있었소 글을 쓰기 시작한지 대략 15 년쯤 지난 어느 
날 갑자기 나의 저술 능력이 형편없이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었지."
  "그래요 그럼 그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글쓰기를 포기하셨나요?"
  그러자 마크트웨인이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 있겠소. 난 그때 이미 유명해져 있었는데^5,5,5^"

  세상에서 명성을 획득한 작가나 예술가는 그 명성 때문에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처녀작이 
대표작이 되고 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지요.
  사실상 우리들의 삶은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거듭되는 변화의 연속이지요. 
변화가 실재란 말입니다. 따라서 변화 그 자체인 삶에 대해 항상 초보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마크트웨인은 이런 초보자의 마음가짐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가 지닌 
명성 때문에 말입니다 이럴 때 그가 가진 명성이란 그의 삶의 성숙을 가로막은 
걸림돌에 다름아니지요. 어찌 이런 일이 마크 트웨인 같은 작가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이겠습니까.
  영적인 삶을 추구하는 신앙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영혼의 놀라운 변화를 
가져다준 단 한번의 어떤 사건에 집착하여 거기에 머물러버리고 마는 경우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종교인들은 "회심"이라는 탈바꿈의 경험을 합니다. 그런 탈바꿈의 
경험이 소중한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단 한번의 회심이 계기가 
그의 영혼의 구원을 보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영국의 어떤 신학자는 "성화"를 말합니다. 성화란 자기의 생이 존속하는 
동안 거듭된 종교적 수련을 통해서 "신의 완전"에 이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어느 순간 "신성의 빛"을 보았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무엇이 된 양 
자만에 빠지지 말고 항상 초보자의 마음가짐으로 영적 수련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무엇이 다 된 것처럼 생각하는 전문가의 마음은 꽉 닫혀 있기 때문에 그의 
삶은 더 이상의 향상이나 도약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초보자의 마음은 텅 
비어 있어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무한히 열려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위대한 전도자의 삶을 살았던 성 바울은 생의 말년에 이르러서도 겸손히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이 희망을 이미 이루었다는 것도 아니고 또 이미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달음질칠 뿐입니다." (빌립보서 
#3^1,12^)
  이런 고백이야말로 여전히 초보자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 위대한 성인의 생생한 
가르침으로 우리가 가슴 깊이 아로새겨야 하지 않을까요? 
  @[  바로 이 순간을 살아라

  나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잠겨 있었다.
  이때 갑자기 하늘에서 한 음성이 들렸다.
  "나는 '현재'의 하나님이다."
  하늘의 음성이 천둥치듯 계속 울려왔다.
  "만일 네가 실수와 후회를 간직한 채 과거 속에서 산다면 무척 힘들 것이다.
  나는 그곳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과거'의 하나님이 아니다.
  또 만일 문제와 두려움을 갖고 미래 속에서 산다면 그것 또한 힘들다.
  그 '미래'에도 나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여기'에 있으며,
  오로지 '현재'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마르시아, 잭 켈리 편집의 "백 가지 은총" (1992)에서

  어떤 수도원의 성탄절 아침은 밤새 내린 하얀 눈꽃으로 덮여 해맑았습니다. 그 
수도원에 사는 사람들은 눈을 뭉치고 굴리며 신비롭고 해맑은 아침을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맞이했습니다.
  눈꽃의 매혹에 이끌린 젊은 수도사들이 설레는 가슴으로 늙은 수도원장을 
찾아갔습니다 그들은 수도원장을 스승이라고 불렀습니다.
  "스승님 빨리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드리지요."
  수도원장이 제자들의 말을 듣고 문득 달력을 쳐다보며 대꾸했습니다.
  "오늘이 목요일인가. 난 차라리 목요일을 축하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는군!"
  젊은 수도사들은 스승의 뜻밖의 대꾸에 어리둥절해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속상해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를 닮아야 한다고 날마다 가르침을 
베풀던 스승이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일에 대하여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생각을 눈치챈 수도원장이 다시 입을 떼어 말했습니다.
  "수천만의 사람들이 '오늘'이 아니라 '성탄절'을 즐기지. 오늘 그대들도 
마찬가지야. 이보게들, 성탄절이라고 법석을 떠는 사람들의 즐거움은 잠깐인 게야. 
하지만 '오늘'을 기뻐할 줄 아는 사람은 날마다 '성탄절'이라네. 아시겠는가?"

  성탄절에 얽힌 이 이야기는 타성에 젖어 황금 같은 "순간"을 누리지 못하는 삶을 
일깨워줍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추억으로만 남아있는 과거의 집착해 살거나, 수수께끼 같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두려움 속에서 살면서 소중한 "오늘"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오늘을 누리지 못할까요?
  여기서 우리는 시간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어에는 "시간"을 나타내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크로노스'kronos'"와 
"카이로스'kairos'"가 그것입니다. 크로노스는 가만히 있어도 흘러가는 자연적 시간 
무의식적 시간이며 카이로스는 목적을 가진 사람에게 포착되는 의식적 시간입니다.
  위의 이야기에서, 달력에 표시된 성탄절을 "축하"라는 미명하에 즐기려 하는 
제자들의 행위는 무의식적인 시간 '크로노스'의 지배에 놓여있기 때문에 그들의 삶에 
진정한 신의 아들의 탄생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을 즐길 줄 아는 
스승의 행위는 삶의 순간마다 신의 아들의 탄생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허공에 별이 뿌려지던 태초의 그 순간이 "오늘"과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매순간마다 "신성"의 탄생을 경험하는 기쁨 속에 살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똑딱거리는 금속성 시계의 무의식적 시간 속에 자신을 내맡기지 
않는다면 성스런 의미를 띤 오늘이라는 생동하는 시간 속에 존재 전체로 참여하여 
"신성한 탄생"의 종을 울릴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날마다 "영원한 
현재"를 누릴 수 있는 것이지요. 자기 내면에서 울리는 이런 "신생" 황금종 소리를 
듣는 자는, 이야기 속의 스승의 말마따나 그가 사는 나날이 "성탄절"일 것입니다.
  신은 우리의 과거 속에나 미래 속에 계시지 않습니다. 신은 항상 "현재"를 즐길 
줄 아는 이들 속에 계신 법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과거는 이야기요 미래는 수수께끼이며, 이 순간은 신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영어로 현재'present'와 "선물"은 같은 단어인 것입니다.
  신이 선물로 주신 "오늘"을 누리십시오.
  바로 이 순간을 즐기십시오,
  이처럼 우리가 현재를 끌어안고 현재와 하나가 된다면, 우리의 혼은 노래와 춤과 
창조가 일어나는 생동하는 삶을 누리게 되고, 목숨 있고 느낌 있는 모든 존재 
속에서 번뜩이는 황홀경의 섬광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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