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넌 박사를 잡아 난 세상을 잡을 거야
문인석
제1장 나를 알면 길이 보인다
들어가는 말
어느 한 분야에 똑부러진 실력을 가진 사람이 주목받는 세상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수천, 수만 가지 길이 존재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남들이 가는
길로만 가려고 한다. 그 길이 어느 방향으로 뻗어 있고 그 종착점이 어디인 줄도 모른 체
오늘도 어제처럼 터벅터벅 걸어가고 잇다. 그렇게 중간쯤 가다가 문득 뒤를 돌아다본다. 그
리고 뜬금없이 자신에게 묻는다.
'지금 이렇게 사는 게 옳을까?' '지금 이 길이 맞는 길일까? 다른 길은 없었을까?'
그러나 이미 돌아가기에는 너무 많이 걸어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언제나 내판단,
내 결정으로 살아온 것 같지만 돌이켜보면 수동태 인생이다. '사는'게 아니라 '살아지는'것이
다. 물론 과거는 언제나 후회스러운 법이다. 후회하기 위해 사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우리가
열심히 사는 이유는 그런 후회를 조금이라도 더 최소하하기 위해서다.
자, 이제 마인드를 바꿔보자. 대다수 사람들이 몰려가는 그 길에 무조건 발을 들여놓기보
다는 내가 걷고 싶은 길을 찾아보자. 시작은 조금 늦어도 괜찮다. 중요한 건 진짜 내가 가고
싶은 길을 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비록 그 길이 비포장 도로이고 안개가 자욱해 보이더라도
내가 가야 할 길이라는 판단이 섰으면 신발끈을 다시 한 번 조여매보자.
여기 My Way를 찾아 먼저 길을 떠난 사람이 있다. 올해 30세. 바로 동대문 패션 타운에
서 작은 성공을 이룬 문인석, '문군'이라는 패션 회사를 창업한 그는 남들이 걷는 길을 과감
히 마다하고 나만의 길을 개척한 프런티어다. 물론 창업을 성공으로 이끌기까지 쉽지만은
않았다. 중간중간 그만두고 싶을 때도 많았고, 세상은 고비마다 그를 시험하려고만 들었다.
하지만 상황이 어렵다는건 그만큼 해야 할 일이 많다는 또 다른 말. 문인석은 긍정적인 사
고 방식과 추진력으로 걸림돌을 차곡차곡 디딤돌로 다듬어 나갔다.
내심 1등급에 서울대만 들어가면 장밋빛 미래가 보장되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오랜 속담이 있지만 지금은 하룻밤 지날 때마다 세상이 휙휙 업데이트 된
다. 12년 간의 입시 교육 -> 명문대 입학 -> 대기업 입사 혹은 고시 패스...이제 이런 1차
선 성공 코스는 각광받기 힘들다. 날이 갈수록 멀티플해지는 세상에서 살아 남으려면 보다
탄력적이고 유연한 사고 방식으로 무장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자기가 속한 집단에서 무조건 1등을 해야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넘버 원'세상
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숨쉬고 있는 지금은 'Only One'세상이다. 뭔가 나만이 유일하게 할
줄 아는 재능을 살리는 게 이 시대의 생존법이다. 모든 방면에 팔방미인인 사람보다는 어느
한 분야에 똑부러진 실력을 가진 사람이 더 주목받는 세상이다. 모두 다 잘한다는 건 거꾸
로 말하면 어느 것 하나 특별한 게 없다는 말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인석은 자
기가 가진 능력을 빨리 알아내 사업으로 연결했다. 그 결과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할 수 있
는 행복과 적지 않은 돈을 손에 쥐게 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한 삶을 지향한다. 조금이라도 더 불행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아마
지구상에 단 한 면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행복이란 뭘까. 행복의 정체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누군가는 행복이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어디에나 널려 있고, 그리고 열심히 찾는
사람 몫이라고 했다. 그러다. 행복이란 내가 가장 나다울 때 맛볼 수 있는 감정이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판,검사가 됐다고 해도 당사자가 보람을 느끼지 못
하면 그걸 행복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 직업으로
연결된 사람이다. 내가 정말로 좋아서 하는 일은 날 새는 줄 모르고 매달리게 돼 있다. 비록
월급이 적고 근무 환경이 열악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돈을 벌기 위해 억지로
하는 노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루하루가 흥미진진하다는 문인석. 그에게 내일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두근두근 설
레는 오늘의 또 다른 시작인 것이다. 오직 한 번뿐인 인생. 그래서 더욱더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인생에는 절대 재방송이 없다. 언제나 On-Air다.
편집자주
1.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라
확 뒤집다
내가 대학을 휴학한 건 3학년 1학기를 마치자마자였다. 5학기 편균 평점은 겨우 1.9. 이대
로 가다가는 정말 안 되겠다 싶었다. 슬슬 취업 걱정도 먹구름처럼 밀려들던 그 무렵. 공인
회계사 시험을 공부하기로 마음먹고 휴학계를 낸 것이다. 동기들은 대부분 군입대를 했지만
난 본의 아니게 '신의 아들'이었다. 왼쪽 손가락이 굽혀지지 않는, 총을 다루어야 하는 군인
으로서는 치명적인(?)장애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얼떨결에 군대를 면제받고 보니, 갑자기 없던 시간이 덤으로 생겨난 기분이었다. 그 당시
에는 차라리 군대에 갔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현실을 인정하고 나에게 타일렀다. 자, 이
제 좋든 싫든 휴학을 했고, 이제부터 내 앞에 펼쳐질 시간들을 어떻게 요리하는가는 전적으
로 나에게 달려 잇다.
그때부터 장래에 대한 본격적인 고민이 시작됐다. 어차피 취직을 하기에는 형편없는 성적
이었다. 2.0에는 못 미치는 학점으로는 명함도 못 내미는게 솔직한 현실이었다. 물론 누구를
탓할 일이 아니었다. 굳이 잘잘못을 따지자면 대학 입학 후 줄곧 오지랖 넓게 생활한 나 자
신을 탓할 일이었다. 하지만 지난 과거는 후회하지 않고 싶다. 열심히, 그리고 잘 놀았다는
것에 대한 후회는 추호도 없었다. 사람이 왜 사는가?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기에도 부족한
인생 아니던가? 이것이 그때나 지금이나 나를 지배하는 모토다. 나는 스스로 위축되어가는
나 자신을 다잡았다. 지금의 나를 인정하자. 그리고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내가 신나
게 할 수 있는 일을 찾자고.
그때 내가 살 길은 오직 취직뿐이라고 생각했다면 아마 늦었지만 피 터지게 토익과 상식
책을 들고 씨름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취직이라는 게 영 와닿지 않는 것이었
다. 열심히 재수강해서 학점 땜방하고 토익9백50점 맞아 번듯한 대기업에 입사했다고 치자.
청운의 꿈을 꾸고 입사한 그곳에서 아무리 열심히 일한다 해도 샐러리맨 아닌가. 남의 밑에
서 시키는 일만 하는 처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조여오고 답답해서 미칠것만
같았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공인회계사였다. 전문직이니만큼 자기 실력껏 일하고, 능력만큼 페이
도 보장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때부터 나의 무대뽀 공부법이 동원됐다. 가장
먼저 한 건 이사였다. 통학 시간을 아끼려고 삼성동에서 학교 근처인 신촌으로 둥지를 옮겼
고 날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학교 뒷산으로 생수를 길어 나르며 운동을 시작했다. 학교 도
서관이 문을 여는 새벽 5시, 가장 먼저 형광등을 켠 것도 나고 밤 11시 마지막 퇴실자도 나
였다. 석 달 동안 4시간만 자는 고3 생활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아니, 대입보다 더 열심히
공부에만 매달렸다.
나의 고등학교 시절.... 입학 시험에서 성적이 우수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부반장을 했다.
그런데 입학 후 야금야금 놀다 보니 2학년 여름방학 때는 어느새 반에서 20등 밖으로 밀려
나 있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더 열심히 하는 아이들 틈에서 난 거꾸로였다. 정말 나도 모
르는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래서 2학년 2학기부터는 마음을 다잡고 죽어라고 공부만 했다. 그 동안 함께 놀던 친구
들과도 절교를 선언, 집과 학교, 독서실만 오가는 시계추 생활을 했다. 수백 명의 수강생이
몰려 한증막 같던 왕십리 단과 학원에 다니기도 했다. 성문종합영어와 정석을 얼마나 보았
던지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다 외울 정도였다. 마침내 고3이 끝나갈 무렵에는 반 석차가 10
등 안에 들어와 있었다. 전교 52등으로 내신 2등급에 간신히 턱걸이했지만 첫번재 입시에서
연세대에 낙방하고 말았다. 결국 재수 끝에 연대에 합격. 열매는 달고 인내는 썼다.
이런 나의 고3 시절, 그리고 재수 시절로 다시 돌아갔다. 대학 입시 못지않게 공인회계사
공부도 치밀하게 준비했다. 그런데 그때와 달리 공부를 하면 할수록 원인 모를 회의가 샘솟
았다. 예를 들어, 똑같이 시간 투자해가며 공부를 하는데도 마음먹은 대로 진도가 나가지 않
았다. 똑같이 시작했는데도 내가 5페이지를 공부할 때 남들은 10페이지를 넘기고 있는게 보
였다. 단순히 속도의 문제는 아니었다. 내가 곁눈질해 보기에도 다른 친구들과 내 실력은 처
음부터 비교 대상이 못 되었다.
그러다 보니 공인회계사라는 직업에 대한 매력도 점점 하강 곡선을 긋기 시작했다. 정말
내 적성에 맞을까, 라고 자문했을 때 영 자신이 없었다. 회계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이건 아
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 직업일 때 사람은 행복해지는 법이다. 아
무리 전문직이고 월급이 많다 하더라도 정작 내가 보람을 느끼지 못하고 권태롭다면 그건
불행한 삶이다. 책상에 않아 날마다 숫자 싸움이나 한다는 건, 너무 비경제적이라고 확신한
순간, 난 또 한 번의 결단을 내렸다.
'난 책상 체질이 아니다. 어차피 공부로는 경쟁력에서 뒤처진다. 더구나 내가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일도 아닌데 억지로 귀중한 시간을 쏟아가며 내 인생을 투자할 필요는 없다. 더 이
상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
공인회계사를 위해 준비한 시간은 딱 1백 일. 짧다면 짧을 수 있는 시간이지만 난 그 기
간 동안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공인회계사가 되는 것이 경영학도의 최종 목표일지는
몰라도 적어도 나 문인석에겐 살아가는 많은 경우의 수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도서관에
서 책을 챙겨 나올 때의 기분은 정말 솜털처럼 홀가분했다. 잘 맞지도 않는, 꼭 끼는 옷을
벗어 던진 것처럼 상쾌했다.
자신이 없어서 중도 하차하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포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시험 삼
아 한번 해본 'try+to부정사'가 아니라 정말 맘먹고 달려들어본 'try+ing'였기 때문에.
될까, 안 될까, 이리저리 재보며 정작 도전하지 않고 포기 하는 게 얼나마 많은가? 해봐서
안 되는 건 과감히 하루라도 빨리 집어치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작정 남이 하니까, 남한테
뒤질 수 없으니까 밀고 나가는 건 똑똑한 태도가 아니다. 중요한 시간과 에너지의 낭비일
뿐이다. 그렇게 밀고 나간다 해도 남들보다 앞서 나가기는 커녕 전전긍긍하며 살아갈 뿐이
다.
그러느니, 뒤집을 때는 확 뒤집어버리는 결단이 어는 순간엔 필요하다. 안되는 건 죽어도
안 되는 거다. 그럴 때는 미련 갖지 말고, 과감하게 내던질 줄 알아야 한다. 이제 3년밖에
살지 않았지만 매사가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문제에 갇혀서 전전긍긍할 때는 다른 길
이 보이지 않는다. 마치 영화 '큐브'에서 미로에 갇힌 사람들처럼. 그러나 일단 그 문제에서
한 발자국 이라도 벗어나 보면 비로소 다른 길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다. 그것도 세상을
살아가는 경쟁력이다. 빠른 결단은 곧 빠른 행동을 취하게 해주니가. 엔터 키를 누르는 것이
중요하다.
안 되는 건 빨리 포기한다
내 취미는 사람 만나기다. 학창 시절 아르바이트도 과외보다는 주차장 교통 정리나 이벤
트 진행 등을 찾아다니며 했다. 택시를 타도 앞자리에 앉아 기사분과 이런저런 얘기를 할
정도로 오지랖이 넓은 편이다. 사방에 모르는 사람 없고, 남들 하는 얘기에 한마디 끼어들
만큼의 상식도 두루두루 갖추려고 했다. 책에서 읽은 죽은 지식이 아니라 바로 체험에서 얻
어지는 생생한 라이브 지식을 찾아다녔다.
그대들은 아는가? 책에서 얻은 것보다 사람들 속에서 얻은 지식이 훨씬 실생활에 유용하
게 활용된다는 사실을?
내 별명은 발바리였다. 학교도 강의실이건 도서관이건 동아리방이건 부지런히 뛰어다녔다.
필요한 정보가 있으면, 어디든 곧바로 찾아나섰다. 그게 바로 타고난 내 성격인 것 같다.
'인간은 행동하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말은 만들어 퍼뜨리고 다닐 만큼 난 액티브하게 살
았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고 싶다. 책상에 않아서 머리를 굴리다가도 뭔가 '번쩍'하고 떠오르
면 그대로 행동에 옮겨야 직성이 풀렸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분주하게 뭔가르 도모
하고 일을 만들어가는 성격이었다.
공인회계사 공부를 스스로 접자마자 다른 대안을 찾아나섰다. 그때 내 머릿속을 지배한
생각은 하나였다.
'뭐든 남들보다 신나게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
당분간 나 자신에게 너그러워지기로 했다. '조급하게 굴지 말자. 시간이 걸리더라도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을 수 있을 거야. 그것이 무엇인지 찾는 게 문제지. 일단 찾기만 하
면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해낼 자신이 있어.' 나는 그렇게 믿었다. 아니 믿기로 했다.
비로소 찾아낸 것이 방송국 PD였다. 그것도 구체적으로 예능국 오락 프로 PD. 생각할수
록 내가 적격으로 여겨졌다.
술과 담배를 즐기지는 않지만 노는 일이라면 물불 안 가리는 사람이 바로 나다. 나스스로
정말 재밌게 놀아봤고, 논다는 친구들과 어울려도 봤다. 풍부한 경험(?)을 밑거름 삼아 많은
사람들을 즐겁게 해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꿰고 있다고 자부했다.
다시 타깃이 정해졌으므로 곧장 행동에 나섰다. 뭐든 엔터 키를 누르는 게 중요하다. 가장
먼저 닥친 문제는 막연함이었다. 방송국 PD라는 직업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저 브라운관에 비쳐지는 연출자로서의 모습이 전부였다. 수동태로서의 지식은 내게 필요
없었다. 직접 몸으로 부딪쳐 깨닫는 그런 이해만이 필요했다.
그때부터 여의도를 헤집고 다니며 공개 방송이란 공개 방송은 모조리 구경하러 다녔다.
그러다 보니 점점 방청석에서 낯익은 동지들을 만나게 되었다. 바로 인기 연예인 팬클럽 회
원들인 여고생들이었다. 아예 나한테 아는 척하는 여고생들도 있었다. 아마 나를 같은 연예
인 팬클럽으로 오해하고 호의를 보이는 것 같았다. 나같이 늙은 오빠(?)도 같은 팬이라는
사실에 자부심마저 느끼지는 않았을까? 그때 피부로 실감한 사실이지만 팬클럽의 방청석 출
석률과 연예인을 향한 열정은 기가 막힐 정도였다.
그때 그 여고생들을 보며 마치 내가 PD라도 된 듯 책임감 같은 것도 느겼다. '이 여고생
들에게는 이게 전부일지도 모르는데, 그렇다면 보다 책임감 있는 태도를 방송을 만들어야겠
다'는 주제넘은 생각을 하기도 했다.
공개 방송을 보고 어두컴컴해진 거리로 나와 집으로 향할 대는 속으로 부듯해지곤 했다.
머지않아 내가 멋진 방송을 만들고 내 프로를 보며 수많은 시청자들이 즐거워할 생각을 하
니 가슴이 쿵쿵 뛰기도 했다.
그때 내가 가장 좋아했던 PD가 MBC의 주철환 씨였다. 지금은 이화여대 교수로 적을 옮
겼지만 그가 만드는 프로그램은 끝까지 신선했다. 그는 쥐어짜서 억지로 웃게 만드는 괴로
움을 주지 않았다. 뭐랄까, 삶의 진정성을 그려내는, 그래서 잔잔한 감동과 웃음을 함께 주
는 참 방송인이라는 생각을 나름대로 했다.
그래서 그가 쓴 책들을 모조리 찾아 밑줄 그으며 섭렵했다. 방송국이라는 곳과 방송이라
는 신세계에 대해 간접 체험을 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가 공개 강연을 한다는 정보라도
입수하면 다른 일 팽개치고 달려갈 정도로 난 열혈 방송 지망생이 됐다.
그렇게 달콤한 꿈에 젖어 있기를 몇 개월. 현실적인 문제가 나는 괴롭히기 시작했다. 방송
국 PD라는 게 끼와 열정만으로 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누가 인생을 허들 게임이라고 표
현했던가. 먼저 공채 시험을 합격을 해야 PD든 뭐든 해볼 일이었다.
역시 문제는 학점이었다. 언론사, 특히 방송국 시험은 엄청난 경쟁률로 유명한 시험이다.
오죽하면 언론고시라는 말이 나왔을까. 전국에서 공부깨나 한다는 인간들이 구름처럼 몰려
드는 곳이 바로 여의도 방송국이다. 그러니 학점도 형편없고, 영어 공부도 손 놓은 지 오래
인 나로서는 첫번째 허들도 높아만 보였다. 어차피 공부로는 경쟁력이 없다는 걸 일찌 감치
파악한 나. 정보 수집 결과, 내 성적으로는 첫번째 허들인 서류 전형을 통과하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내 생활의 모토가 무엇인가. 첫째 '최선을 다하자'. 둘째 '안 되는 건 빨리 포기하자'아닌
가.
한번 결정한 일에는 최선을 다해 죽도록 덤벼들지만, 아니다는 판단이 서면 바로 접을 줄
도 안다. 곧바로 목표 이동을 하고, 재빨리 그에 대응한다는 점이다. 내 추진력의 힘은 바로
여기에 있다. 또 내 작은 성공의 비결 또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방송국 PD는 누구보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장벽이 너무 높았다. 하
고 싶은 일을 다 하면서 살 수는 없는 법이다. 서류 전형으로 통과할 수 없다면 빨리 포기
하는 게 자신을 위해서도 유익하다.
결국 방송국에는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기로 했다. 괜히 되지도 않을 일에 연연하느니
재빨리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일이었다. 하나 다행스러운 건 내가 판단이 빠르고 지난 일
에는 집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려면 조직 생활보다는 사업!
나의 주제는 늘 하나였다. '내가 신나고 남보다 잘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이번에 차선 변경한 직업은 광고 회사 PD였다. 광고란 현대인에게 산소 같은 존재다. 24
시간 내내 느끼지는 못하지만 이미 광고는 산소처럼 우리곁에 다가와 호흡하고 잇다. 하루
가 다르게 변해가는 광고 세계를 내 손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점이 내 마음을 움직였다.
무엇이든 한번 마음먹으면 곧바로 행동에 돌입하는 나. 머릿속으로만 '어떻게 해야 되나'
를 걱정하며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다. 우서 가까운 곳부터, 그리고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
부터 찾아보는 거다. 그러면 거기서 또 다른 길을 찾는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렇게 연속해
가는 과정이 바로 시행착오라고 생각한다. 실패?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아니 오히려 얼마든
지 실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언제가는 실패할 수조차 없는 나이가 들이닥칠 테니말이다.
내 경우에는 뭔가 하고 싶은 일일 생겼을 때 주변에 직접적인 도움을 줄만한 사람이 없었
다. 언제나 맨땅에 해딩하는 식으로 혼자서 해결해나가야만 했다. 매사가 그렇다 보니, 나중
에는 어떤 일이든 혼자서 해나가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은 생
각을 안 하게 된 것이다. 사실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다는 건 유리한 일이다. 하지만 내 경험
으로 볼때 누군가에게 기대면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했다. 차라리 되든 안 되든 내 힘으로
밀어붙이는 게 훨씬 값지고 빨랐다.
지금 하고 있는 패션 사업도 마찬가지다. 아버님이 대리석 석재 사업을 하셨지만 전혀 다
른 분야라 직접적인 어드바이스를 받을 수 없었다. 또 주위에 누구도 패션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이 없었다. 역시 나 혼자 준비하고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도 그랬다. 일단 성적을 올려야겠다고 판단하자마나 곧 바로 단과 학원
에 등록했다. 그때 학원비가 2만 5천원이었는데, 부모님은 그마저도 흔쾌히 주지 않으셨다.
공부란 제 할 나름이지 학원 다녀야만 공부를 잘하느냐는 말씀이였다. 하지만 그것이 내 성
적을 올리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고 판단한 나는 끝까지 밀고 나갔다. 결국 부모님을 설득
하는 데 성공, 학원비를 타서 등록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학원 수강은 내게 부족했던 영어,
수학 성적을 올리는 데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
이번에도 한국광고연구원 PD과정에 등록하고, 6개월 동안 부지런히 다녔다. 광고의 이론
과 실제를 공부해두면 막상 입사 시험에서 유리할 것 같았다. 또 학원에 다니면 비슷한 관
심과 목표를 가진 사람들과 알짜배기 정보를 나눌 수 있는 부가가치도 떠올렸다. 학교에서
도 '애드쿠스'라는 광고 동아리를 조직했다. '광고하는 인간'이라는 뜻이었다. 친구들과 밤새
스토리 보드를 만들고 신문을 볼 때도 늘 하단 광고가 먼저 눈에 들어오던 때였다.
노력한 보람은 있었다. 아무래도 남들보다 많은 정보를 얻었고, 덕분에 4학년 여름방학 때
오리콤에서 인턴 사원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낚아챘다. 물론 광고 PD일이었다. 비록 짧
은 기간이었지만, 인턴 사원으로 일한경험은 내게 광고 PD라는 직업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
을 심어주었다. 학점은 재수강 덕분에 많이 버전 업 됐다. 졸럽할 때 평점은 2.4. 광고 관련
과목과 마케팅 등 A플러스는 고작 4개에 불과했지만 난 내 성적표가 자랑스러웠다.
마침내 학사모를 썼다. 그리고 원하던 광고 회사 엘지애드에 공채로 당당히 입사했다. 내
마음은 한껏 부풀었다. 비로소 내가 가진 끼를 발휘하여 누구 못지않게 능력 있는 PD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 꿈이 일장춘몽이었음을 안 것은 입사하자마자였다. 내가 발령받은 부서는 PD
가 아닌 기획(AE)업무였다. 일종의 광고주와 광고대행사의 중간 다리 역할을 하는 일이었
다. 영업을 통해 광고주를 섭외하고 광고를 진행할 때 총괄 진행을 맡는 일인 것이다. 신입
사원이었지만 뭔가 일이 꼬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숱한 진로 선택 끝에 결정한 광고대행사. 그 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무기삼아 천신만고
끝에 입사 시험에 합격했는데 난데없이 기획 업무라니.... 첫 직장 생활을 하는 사회 초년병
인 나에게는 회의와 절망의 나날이었다. 도대체 내가 왜 기획 파트로 발령이 났는지 약속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일에 대한 의욕이 높을 리 없었다.
난생 처음 맛본 직장 생활, 그건 마치 대학에 입학했을 때와 같았다. 한껏 꿈에 부풀어 들
어간 대학. 그러나 캠퍼스는 기대만큼 근사하지 않았다. 그래서 누구나 신입생 시절에는 방
황 아닌 방황을 한다. 기대와 실망의 정비례 관계.
내 첫 직장 생활이 딱 그랬다. 번듯한 광고대행사에 다닌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근
사하게 생각한다. 뭔가 자유롭고 재미있게 일할 것이라는 상상을 하며 부러운 시선으로 바
라보기도 한다. 그러나 실상은 아니올시다. 조직의 보수성이라는 측면에서는 대기업 역시 여
느 직장과 다를 바 없었다.
무엇보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 직장 생활에 대한 의욕을 팍팍 꺾었다.
처음 사회에 발을 내딛을 때는 꿈과 희망에 부풀었지만 내눈에 비친 사회는 예상보다 훨씬
구태의연했다. 나름대로 의욕을 보여도 그 동안 해온 관행에 밀리고 상사 눈치 따위나 살펴
야 했다. 날마다 짜즈의 연속이었다. 선배와 외근을 나갈 때마다 칠판에 'MH'라고 써놓고
나가곤 했다. MH란 '맨따에 헤딩하기'를 가리키는 우리끼리만 통하는 일종의 암호, 은어였
다. 그정도로 업무도 고달펐다. 하지만 정작 힘든 건 인간 관계에서 오는 어마어마한 스트레
스였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오래 버텨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아니, 버텨내야 한다는 생각 자
체를 밀어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건 아니야. 내가 하고 싶은 건 이게 아니었다고....'
이미 내 일이 아니라고 판단한 이상, 뭔가 다른 일을 찾아야 했다. 몸은 사무실에 있었지
만, 마음은 늘 다른 궁리뿐이었다. 그때 생각해낸 것이 바로 사업이었다. 샐러리맨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꿈꿔본다는 사엄, 난 조금 일찍 깨달았을 뿐이다.
어차피 직장 생활이란 게 남의 밑에서 일하는 거고, 자신의 꿈을 펼치기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해보려면 조직 생활보다는 사업이 제격이었다. 그래서
요모조모 사업에 대한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사업 구상을 하는 데는 학창 시절 해외 여행 경험이 밑거름이 됐다. 대학때 일본과 미국,
러시아로 여행을 다녀온 경험이 있었다. 그 당시 여행하면서 보고 듣고 생각한 창업 아이디
어를 다시 떠올리며 가능성을 계산해보곤 했다. 물론 머릿속으로만 생각한 건 아니었다. 경
우의 수 하나하나를 따져가며 관련 스크랩을 병행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라면 전문점 같은 먹는 장사를 한다고 가정해봤다. 그러면 시중에 나와 있는
라면을 종류별로 사다가 다 먹어보면서 맛을 분석했다. 그리고 그 독특한 맛을 살리는 요리
법을 고아하기 위해 나름대로 여러 가지 라면 끓이기를 시도했다. 너무 느끼한 라면은 한
번 끓여낸 물을 버리고 다시 끓여보기도 하고, 스프가 아닌 양념장으로 국물맛을 내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메뉴도 독특하게 만들기 위해 이름을 짓느라 골몰하기도 했다.
최근 우연히 신문을 읽다 눈에 띈 책 광고가 있었다. 스스로 일본통임을 자임하는 영화감
독 이규형 씨의 '일본을 알면 돈이 보인다'는 제목이었는데 일본에서 따온 장사 아이템을 모
은 것이었다. IMF시대를 맞아 너나할것없이 장사에 관심을 기울이는 터라 그 책은 단박에
베스트셀러가 된 걸로 알고 있다. 나름의 아이디어가 대중들에게 어필한 것이다.
나는 그 책을 보면서, '아차' 싶었다. 나도 새로운 정보를 수집하는 고성능 정보 안테나라
고 자부해왔는데, 하며 말이다. 그때 내가 정리해둔 메모 노트만 있었어도 나 역시 '아이디
어 맨'으로 돈 좀 벌었을 텐데.... 지금은 그 메모 노트가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이 없다.
드디어 찾았다. 결론은 패션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드디어 나에게 문이 열렸다. 고민 고민 하며, 회사 생활을 계속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때
까지도 패션 사업을 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의 아이디어 안테나에 드
디어 패션 사업이 걸려들었다. 그 무엇도 예사로 보아 넘기지 않고, 내 사업과 연결시켜 고
민해낸 성과물이었다.
엘지애드에서 광고 기획 업무를 하다 보니 여러 분야를 두루 접할 기회가 많았다. 그 중
의 하나가 패션 광고였다.
한번은 의류 브랜드인 게스(GUESS)와 로엠(ROEM)광고 제작 지원을 하게 되었다. 그 준
비 작업으로 관련 업체뿐만 아니라 의류 업계 전반에 걸친 자료를 찾아 정리하게 되었다.
그때 패션 관련 자료를 읽으면서, 그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주목하게 되었
다. 놀랍게도 의류 업계의 여러 경영자는 시장에서 옷장사로 시작해서 성공한 사람들이 많
았다. 그러니까 맨주먹으로 사업체를 일군 사람들이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성공 스토리에 나도 모르게 환호를 보내는 나 자신을 만났다. 점차 그
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니 '나도 패션 사업을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막연하게나마 내 관심을 끌었다는 것에서 출발해, 구체적이고 분석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먼저, 내가 왜 패션 사업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해봤다.
첫째는 패션 사업은 대기업보다는 중소기업에게 유리한 분야라는 게 내가 내린 최종 분석
이다. 물론 남성 정장복 등은 여전히 대기업이 시장을 점유하고 잇다. 그 이유는 중년 이상
의 소비자층은 아무래도 브랜드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 캐주얼 시장은 상황이 달라진다. 소비자들인 젊은 세대는 나름의 독특한 개성
을 추구한다. 그만큼 그들 욕구에 맞는 작은 규모의 시장이 많이 형성될 수밖에 없다. 매출
액이 몇 조씩 하는 대기업으로서는 그 작은 시장을 넘겨다볼 필요가 없다. 결국 중소기업에
맞는 시장인 것이다. 더욱이 젊은 세대는 회사 규모를 따지지 않는다. 오로지 개성 있는 디
자인을 중시한다. 더욱이 작은 회사에서 만드는 만큼 희소 가치가 있기 때문에 더 어필할
수 있는 메리트도 있다.
이에 비해 대기업은 규모를 중심으로 한다. 때문에 그 거대한 조직이 한번 움직이자면 시
간적 경제적으로 더딜 수밖에 없다. 수많은 결제 라인과 리포트들. 그러나 패션은 유행에 민
감하게 대응해야 하는 민첩한 사업이다. 이런 사업을 대기업으로서는 발 빠르게 대처할 재
간이 없는 것이다. 중소기업은 그런 점에서 몇 곱절 유리하다.
그래서 그런지 패션 사업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맨손 맨발로 창업했다는 공통 분모가 있었
다. 실제로 현재 패션 사업가 가운데는 남대문 리어커로 옷장사를 시작한 분들이 많다. '잠
뱅이'와 '옹골진', 'TBJ'등을 만든 사장이 바로 그런 분들이다. 또는 미싱사, 재봉사로 일하던
분이 패션 사업가로 성공한 예도 많다. 이건 아무 경제적 기반이 없는 나로서 무엇보다 매
력 있는 점이었다.
둘째는 나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라는 결론이다.
패션 사업은 감성과 이성의 절묘한 조화가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아무나 할 수 없는 분
야다.
흔히 보면 공부 잘하는 사람은 감성이 무디고, 공부 못하는 사람은 이성적인 면이 부족한
감이 있다. 예를 들면, 경영학과 친구들도 그랬다. 나보다 훨씬 공부 잘하던 친구지만 감각
은 내가 앞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 경우는, 이성적인 면에서나 감성적인 면에서 어느 한
쪽이 크게 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나야말로 패션 분야에 강점을 가진 것
이다. 어차피 사회 생활의 성공은 성적순이 아니다. 그러니까 성적이 안 되면 굳이 공부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 그러느니 자기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를 찾아 준비하는 게 성공을
앞당기는 지름길이다. 남들이 모두 걷는 길이 반드시 모범 답안은 아니다. 내겐 나만의 길이
따로 있는 것이다.
우리 나라 패션 업계에서도 마찬가지로 문제를 읽을 수 있었다. 패션 업계에 종사하는 사
람들이 감성과 감각은 뛰어난 반면 마케팅이나 경영 기법에는 약하다는 점이다. 그런 면에
서 은근히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배운 공부를 실전에 써먹을 수 있다는 설렘
과 함께 뭔가 나만의 일을 한다는 흥분이 기분 좋았다.
세번째는 빠른 시간 안에 성장 가능한 분야라는 점이다.
무엇보다 패션 사업은 감각적인 센스가 으뜸이다. 가령 반도체나 전자 산업이라면 오랬동
안 쌓인 기술이 중요할 것이고, 식품 회사라면 맛을 내는 기술이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패션 사업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성공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 반
대라고 생각한다. 대중들이 바라는 새로운 감각, 새로운 발상에 끊임없이 발맞춰야 하기 때
문이다. 그래서 나 같은 초보도 얼마든지 열정만 있으면 도전장을 내밀 만한 분야라는 판단
을 했다.
뿐만 아니라 고부가 가치 산업이란 점도 끌렸다. 한번 히트하면 매장 하나에서 수십 억원
의 매출도 올릴 수 있는 게 바로 패션이다. 이것은 여타 분야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네번째는 내가 정말 재미있게 할 수 있는 분야라는 사실이다. 내가 재미있게 할 수 있다
는 건, 즉 남보다 더 잘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나는 중학교 시절부터 패션에 관심이 많은 팝콘 같은 학생이었다. 톡톡 튀고 싶어서 몸부
림을 친 내 눈과 귀는 자연히 옷에 집중되었다. 하도 개성 강한 옷을 입고 다니는 바람에
별명이 양아치였을 정도였다.
언주중학교 시절 단돈 만원만 손에 쥐면 위아래 한 벌을 쫙 뽑아 입을 수 있었다. 용돈을
타자마자 달려간 곳은 남대문 시장이었다. 친구를 부를 것도 없었다. 엄마를 졸라 같이 갈
필요는 더더욱 없었다. 무조건 나 혼자였다. 이 가게 저 가게를 기웃거리다 보면 요즘 뜨는
유행이 어떤 스타일인지 금세 파악할 수 있었다. 시대가 원하는 유행을 따르되, 캡 중요한
건 내 개성에 맞느냐다. 아무리 곰팡이 청바지가 유행이라도 내가 싫으면 눈에 들어오지 않
았다.
새로 산 옷을 입고 학교에 가면, 한마디로 시선 집중이었다. 어디서 샀냐는 질문부터 얼마
에 샀느냐는 질문까지 답하기가 귀찮을 지경이었다. 한두번 친구들 오 사는 데 따라가 코디
를 해줬더니 같이 가달라는 부탁이 끊일줄 몰랐다.
어쨌거나 난 확실히 '튀는' 아이였다. 친구들은 운동화를 신는 게 대부분이었지만 이왕이
면 구두로 멋을 낼 줄도 아는 아이였다.
이런 남다른 외모 가꾸기는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에 가서도 빛을 발했다. 오히려 복장이
자유로워짐으러써, 그야말로 성역 없는 멋 내기에 박차를 가했다.
지금이야 흔하디 흔한 패션이지만 당시에는 거의 볼 수 없었던 가죽 샌들에 찢어진 청바
지도 즐겨 입었다. 남학생 가운데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극소수였지만 과감히 반바지를 입
고 다니기도 했다. 액세서리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목걸이를 한다는 게 어색하던 때였다.
당연히 학교에서도 거리에서도, 나를 향해 꽂히는 수많은 눈길에 우쭐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패션 잡지의 스트리트 캐스팅 칼럼에 단골로 나오기도 했을 정도로 '한패션'하던 나
였다. 패션 디자인을 공부한다며 나를 모델로 사진을 찍고 싶다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이
러다 보니 '연세대에서 문인석을 모르면 간첩'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이처럼 나는 개성 있는 패션을 연출할 줄 아는 능력을 갖고 있다. 순전히 남보다 튀어 보
이기 위해서였지만, 그건 곧 내 취미이기도 했다.
이만하면 나야말로 패션 사업가가 될 자격이 충분하다는 생각이 새록새록 들었다. 아니
패션 사업은 나처럼 끼 있고 감각 있는 사람이 해야 한다는 건방진 생각도 들었다. 어쨌든
뭔가 잘될 것 같은 확신이 점점 들기 시작했다.
2. 수업 시절 / 드디어 워밍업에 들어가다
수업료 없이 성공할 순 없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그랬다. 똑같은 아침이 열리고, 똑같은 차를 타고 똑같은 거리를 달려, 똑같은 회사 사무
실에 가 앉아 있지만, 난 이미 예전의 문인석이 아니었다. 더이상 회사에 나오는 길이 짜증
스럽지도, 내 인생이 엉키고 있다는 답답함도 없었다. 정말이지 'everyday happyday' 그 자
체였다. 내 인생을 걸어볼 만한 일을 찾아냈다는 것, 그건 내 삶을 모처럼 의욕으로 가득 차
게 했다.
그 당시 엘지애드에 다닐 때도 베스트 드레서로 꼽힐 만큼 옷차림에 많은 신경을 썼다.
연봉 1천 7백만원대의 신입 사원이었지만 한 달 용돈으로 1백만원을 펑펑 써버렸다. 그만큼
많은 시간과 돈을 먹고, 놀고, 입는 일에 보냈다.
하지만 난 이제 더 이상 그런 한심한 사람이 아니었다. 퇴근만 했다 하면 패션 사업을 위
한 준비로 1분 1초를 아껴 썼다. 우리 나라뿐 아니라 세계 유명 패션 회사들에 관한 자료를
찾으러 다니고, 그들의 성공사를 꼼꼼하게 분석해서 정리하느라 하루가 24시간뿐인 걸 원망
하기도 했다. 그 정도로 시간이 모자랐다.
마침내 대략적인 사업 계획을 짜냈다.
패션 사업을 위한 첫 단계는 바로 동업이었다.
사실 패션 사업에 대한 확신은 있었지만, 패션이라는 것, 사업이라는 것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그렇다고 주위에서 도움을 받을 만한 사람을 찾을 수도 없었다. 내가 처음부터 알아
서 시작해나가야 할 일이었다.
먼저 준비 기간을 갖기로 했다. 1997년부터 2000년까지 만 4년을 일종의 워밍업 단계로
잡았다. 내가 30세가 될 때까지는 무조건 배우자는 생각을 갖기로 한 것이다. 그 도안 만반
의 준비를 갖춰나가기로 했다.
가장 먼저 작게나마 옷가게를 직접 해보기로 했다. 소비자의 반응이나 영업, 유통에 대한
실질적인 경험을 해보고 싶었다. 이렇게 하는 데는 같은 회사 선배의 영향이 컸다. 그 선배
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친구 영화사에 돈을 투자하여 짭짤한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그 선
배 역시 영화 쪽에 관심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언젠가는 영화사를 해보겠다는 야심을 갖
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선배에게도 그 투자는 일종의 준비였던 셈이다.
난 그 선배가 부럽다 못해 존경스러웠다. 내가 그럴 때마다 그 선배는 내게 말했다.
"난 돈을 버는 게 아니라 사업을 배우기 위해 수업료를 내고 있다. 수업료 없이 성공할
순 없다." 그 말에 크게 자극받은 나는 더더욱 용기를 냈고 내 선택이 옳았음을 확신했다.
'그래, 나도 4년 동안 수업료를 내보는 거야.'
드디어 나도 직장 생활을 하면서 옷가게를 오픈하게 됐다. 본격적인 사업을 위한 연습 게
임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지만 흥분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마침 여자 친구로부터 친언니가 옷장사에 관심이 많다는 말을 들었던 터라 일단 그 분과
동업하기로 했다. 월급을 탈탈 털어 3백만원을 만들었다. 그 돈은 초도 물건을 떼 오고 인테
리어를 하는 데 쓰여졌다. 그때가 1996년 겨울이었다.
얼마 전 개봉한 영화 '반칙왕'에 나오는 송강호처럼 나에게도 이중 생활이 시작되었다. 낮
에는 직장 다니고, 밤에는 내 장사를 하는 비밀이 생긴 것이다.
가게를 얻을 때 생각이 난다. 회사에서 일을 하다가도 점심 시간이면 택시를 타고 홍대
앞을 휘젓고 다니며 가게 터를 물색하곤 했다. 퇴근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마침내 터
를 잡았다. 보증금 1천만원에 월세 60만원짜리였다. 주차장을 개조한 곳이라 다소 쌌다.
터가 그렇다 보니, 인테리어가 걱정이었다. 주차장이라 바닥이 평탄치 않은 것도 마음에
결렸다. 상황이 어렵다는 건 그만큼 해야 할 일이 많다는 또다른 이야기. 퇴근만 하면 그곳
에 가서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시멘트 작업을 시작했다. 일요일도 없었다. 바닥을 고르게 메
우는 일처럼 내 모든 자투리 시간도 몽땅 한곳으로 모았다.
실내 인테리어도 우리가 직접 했다. 공사장에 가서 파이프나 폐타이어 등을 가져와 재활
용하고, 바닥과 천장에는 잡지책을 통째로 더덕더덕 붙였다. 포스트모던한 인테리어였다고나
할까. 하여튼 이 인테리어가 얼마 가지 않아 대유행이었다. 그 근방 홍대 앞이나 이대 옷가
게들이 우리 인테리어를 많이 베껴 간 것이다.
조그만 가게 하나 오픈하는 일이 이렇게 힘든 일일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퇴근 후 가
게에서 뚝딱거리다 보면 어느새 새벽 2시가 훨씬 넘어서 있곤 했다. 집에 가서 겨우 손발만
씻고 곯아떨어졌다가, 다시 아침이면 출근하고.... 그때 회사 가서 엄청 졸았었다. 96년 11월
부터 연말연시를 그렇게 보냈다.
마침내 그 해 12월 26일 가게를 오픈했다. 가게 이름은 '키치'. 비주류, 언더 등을 뜻하는
문화 용어로 내가 직접 지었다. 그건 우리 가게에서 취급할 물건을 고려한 이름이었다. '주
류'에서 벗어난 '비주류'들이 찾는 옷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때 우리 가게에서 주로 팔았던 게 중고 의류였다. 당시 중고 의류가 한창 유행이기도했
고, 동업한 친구 언니가 중고 옷을 워낙 좋아하기도 했다. 언제부턴가 우리 숍에는 연예인들
과 코디네이터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게 됐다. 옷이 좀 독특했던 모양이었다.
낮에는 아르바이트생을 쓰면서 누나가 주로 장사를 했다. 난 엘지애드에서 퇴근하자마자
곧바로 그 곳으로 다시 출근(?)해야 했다. 그날그날 매출에 대한 상의, 옷에 대한 고객들의
반응을 이야기하곤 밥 10시면 가게문을 닫았다. 이대부터가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는 시간
이다.
우선 누나와 동대문 시장에 가서 물건을 떼 오는 일부터가 시작이다. 3시간 동안 여기저
기서 산 물건은 다 내 차에 실어놓고, 날마다 누나를 의정부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리고
다시 가게로 돌아와 물건을 내려놓고 나면 새벽 3시를 넘기는 게 보통이었다.
그제서야 회사 앞 고시원으로 돌아가 잠깐 눈을 붙이고, 다시 아침이면 출근하는 생활의
반복이었다. 그때 난 삼성동 집에서 나와 회사 근처 마포에서 한 달 18만원짜리 고시원 생
활을 하던 중이었다. 아무래도 집을 오가는 시간을 줄이기 위한 일종의 생존 전략(?)이엇다.
물론 몸은 무척 고달펐다. 그렇지만 내겐 희망이 있었기에 그 힘든 생활을 힘들게 받아들
이지 않았다. 비록 지금 내 시작은 보잘 것 없을지 모르지만, 4년 후면 이 가게가 발판이 되
어 사업을 하리라는 희망으로 부풀어 있었기 때문이다.
동업은 절대로 하지 마라
여기서 정말 피 같은 충고 한가지를 하고 넘어가야겟다.
절대 동업은 하지 말 것.
내가 동업을 했던 이유는 이랬다. 가게를 할 경우 직접 하거나, 동업, 아니면 종업원을 두
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내 경우는 일을 배우자는 게 가게를 하는 주목적이었다. 때문에 내
가 직접 하는 것은 도움이 안 되고, 종업원을 쓰는 것도 제대로 일을 배울 수 있는 방법이
아니었다. 결국 동업을 하는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직접 뛰지는 못하지만, 그와 같은 효과를
거두면서 일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업이란 건 너무 힘든 일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동업을 하다 보면 분명
사소한 문제로 싸우게 되고 아까운 시간을 허비해버릴 가능성이 99%다. 결국 일은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분쟁과 다툼으로 그쳐버리기 쉽다. 예를 들면 이렇다. 아이스크림을 사다
놓고도, 어떻게 먹을 것인지를 놓고 싸우게 된다. 목적은 맛있게 먹자는 것인데, 사소하게
자기 방식만을 고집하느라 아이스크림이 다 녹아버리는 거다.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수업료를 낼 각오가 돼 있으면 동업을 해도 좋다. 하지만 그만
한 각오가 없다면 애초에 그만두는 게 여러모로 유익하다. 물론 나처럼 어쩔 수 없이 동업
을 해야 할 경우도 많을 것이다. 불가피하게 동업을 하게 된다면 완전히 다른 사람끼리 확
실하게 역할 분담을 하면 그나마 괜찮다. 그러니까 '너는 회계만 담당하고, 나는 판매만 전
담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비슷한 사람끼리는 절대 동업을 해선 안 된다. 사업하려면
반드시 새겨들어야 한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한 가지 더. 가까운 사람과는 사업으로 엮이는 일은 가능한 피하는
게 좋다.
우리 문군네 대리점 1호는 나와 친한 친구 Y가 냈다. Y는 대학 시절 내내 단짝 친구로
지낼 만큼 가까웠다. Y가 낸 대리점은 장사가 잘되었다. 그것을 보고 다른 친구까지 덩달아
대리점을 낼 정도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대림점 1호의 장사가 잘 안 되기 시작했다. 내
가 보기엔 경영주도, 물건을 공급하는 우리 회사측도 책임이 있었다.
그 친구는 원래 작은 오퍼상을 해왔다. 그러니까 그 친구에게 우리 옷 대리점은 별도의
사업이었던 셈이다. 이 친구가 본래의 자기 사업에 신경을 쏟느라 대리점 운영은 직접 챙기
지 않으면서 누수 현상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장사라는 게 그렇다. 주인이 직접 챙기지 않
으면 어느 틈에선가 구멍이 생기게 마련이다. 음식점에서 반찬 하나라도 알아서 갖다 줄 수
있는 건 주인뿐이다. 종업원은 그러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주인이 일일이 신경을 쓰는 음식
점이 장사가 잘되는 법이다.
설상가상으로 우리 회사측에서도 물건이 제때 나와주지 않아 공급을 제대로 못 해준 책임
도 있었다. 결국Y는 대리점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친구여서 더욱 신경을 썼던 대리점이었는데, 이처럼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고 보니 여
간 기분이 울적한 게 아니었다. 한때는 아주 좋은 친구였는데, 이처럼 이해 관계가 얽히면서
우정마저도 금이 가고 말았다. 그 일 이후로 지금도 연락 한번 제대로 못 하고 있어 마음이
아프다. 다시 그 친구를 만나 마음속의 앙금을 털어내고 싶다. 그리고 이제는 사업의 동반자
로서가 아니라 옛 친구로서 다시 우정을 나누고 싶다.
정말이지 친구와 사업을 한다고 하면 도시락 싸 들고 다니면서 말리고 싶다. 친구와 돈,
모두 잃어버릴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출발선에 서다/나의 창업 수업
아무리 진부한 말이라도 자기 자신이 경험을 하고 나면 그 말의 속뜻을 사무치게 느끼게
되는 법이다. 이제 겨우 30년을 살았지만 나도 나이 들수록(?) 어른들 말씀이 진리라는 것
을 깨닫게 된다.
시작이 반이란 말만 해도 그렇다. 비록 작은 옷가게에 불과하지만, 그렇게 시작해놓고 보
니, 자꾸만 그보다 더 발전된 방향을 모색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내가 걸어야 할 길이 희미
하게나마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길을 따라가다 보면 언젠가는 내 목표 지점에 도달할 일
이었다.
한동안 광고주 섭외차 자주 들른 곳이 바로 의류 업체 쿠기(Koogi)였다. 이미 패션 사업
을 하겠다는 야무진 계획을 갖고 준비에 들어간 나로서는, 그 회사를 단순히 광고주로서만
바라볼 리 만무했다. 그 회사는 내 사업을 위한 샘플링인 셈이었다. 내가 업무 이사의 유별
난 관심을 보이자 그쪽 관계자들도 나란 인간에 대해 호감을 갖기 시작했다.
때마침 쿠기에서 홍보실을 신설하게 되어 사람이 필요하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TO(Table
Organization)가 난 것이다. 드디어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할 기회를 만
난 것이다. 면접을 보고 곧바로 입사가 결정되었다. 97년 6월까지 1년 반 동안 몸담았던 엘
지애드에 마침표를 찍고 7월부터 바로 쿠기 홍보실로 출근했다.
그때 주변에선 말이 많았다. 이른바 안정된 직장이라는 대기업을 제 발로 그만두고, 중소
기업을 택한다는 게 상식적인 행동으로 보이지 않았나 보다. 나를 아끼는 선배나 친구들이
날마다 술 마시며 엄청 말렸다.
하물며 부모님의 걱정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부모님은 내 결혼까지 들먹이며 설득하셨
다. 남자가 결혼을 하려면 무엇보다 든든한 직장이 있어야 대접받는다고 하셨다. 나중에 결
혼해서 처자식 거느리고 가장이 되고 나면 분명히 후회할 거라고 은근히 협박까지 하셨다.
부모님의 그런 우려는 월급 액수에서 나온 것이기도 했다. 엘지애드에서 받던 연봉은 2천
1백만원인 데 반해 쿠기의 월급은 이것의 1/2남짓이었다. 워낙 패션 회사 월급이 적은 탓이
기도 했다.
그러나, 늘 그래왔듯이, 난 설득당하기보다는 설득하는 편에 더 익숙했다. 더욱이 나에게
는 확신이 이었으니 물러서야 할 이유가 없었다.
"저에게도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어서예요.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행복한 거 아닙니
까? 단편적으로 지금만 바라보지 마세요. 5년 후 10년 후, 더 먼 미래를 위해 준비하는 겁니
다. 제가 돈을 내고 배워야 할 처지인데, 돈을 받아가면서 배울 수 있는 찬스예요."
빈말이 아니었다. 내게 월급 같은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패션 회사를 운영하는 체
계를 배우자는 게 내 목적이지 월급을 얼마 받는지에는 사실 애초부터 관심이 없었다 입사
후 정말 신바람나게 일했다.
내 주요 업무는 쿠기를 홍보하는 일이었다. 엘지애드에서 하던 일과는 전혀 다른 일이었
지만 두려움이나 걱정 같은 건 전혀 없었다. 그냥 '하면 된다'는 무대뽀 정신으로 밀고 나갔
다. 엘지애드에서 배운 MH(맨땅에 헤딩하기) 정신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홍보맨이라 주로 경제부나 패션 담당 기자들을 자주 만나야 했던 나는 기자들을 만날 때
도 좀 독특한 방법을 택했다. 미리 전화 약속을 하지 않고 그냥 무작정 찾아가는 것이다. 불
쑥 찾아가서 만나면 좋고, 못 만나면 할 수 없었다.
대신 원칙이 하나 있었다. 바로 쿠기 옷만 입고 다니기였다. 내 업무가 홍보이므로, 자사
제품을 입고 다니면 나 자체가 홍보맨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결과는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3개월여 만에 웬만한 기자들과 친분을 나눌 만큼 친해지기
도 했다. 그들 가운데는 일부러 나를 찾아 어드바이스를 해주는 기자들도 있었다.
아마 거기에는 내가 남자라는 이유도 한몫하지 않았나 싶다. 대개 패션 회사 홍보 담당은
십중팔구 여자들이 많다. 그런데 난 청일점이라서 튀었고, 그래서 더 관심을 받지 않았나 싶
다. 최근에 문군 트렌드가 성장하면서 많은 인터뷰를 했다. 그런데 인터뷰하러 온 기자들 가
운데는 먼저 아는 척을 해오는 분들도 있었다. 당시의 나를 기억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
어는 그때부터 범상치 않은 홍보맨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기야 그때 일을 잘한
다고 사장님으로부터 특별 보너스를 받기도 했다.
그래서 얻은 결론 하나. 홍보는 무대뽀가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사실이다.
한편 그때도 홍대 앞 '키치'는 계속 운영하고 있었다. 당연히 낮에도 직장생활, 밤에는 가
게 일이라는 야누스 생활이 계속되었다. 그때는 키치도 장사가 제법 잘되었다. 특이한 옷가
게라 패션 잡지에 사진과 기사가 실렸고, 내 인터뷰도 곧잘 실리기도 했다. 때문에 혹시나
직장 동료나 사장님이 아시게 될까봐 전전긍긍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행히 아무도 나의 이
중 생활을 눈치채지 못했다.
마케팅 기법을 훔쳐라
내게 또 하나의 기회가 찾아왔다. 2000년 1월 부도가 났지만 한때 잘나가던 닉스와 클럽
모나코를 만들던 보성에서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회사를 설립했는데, 그곳에서 스카우트 제
의가 들어온 것이다. 신규 브랜드 론칭과 컨셉트를 잡는 일종의 브랜드 매니지먼트였다. 그
러니까 보성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브랜드별로 구매층을 잡는 문제, 각 브랜드의 이미지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는 일이었다. 그건 내가 사업을 시작했을때 우리 브
랜드를 어떻게 이미지화하고 마케팅할 것인지를 배울 좋은 기회였다.
뿐만 아니라 보성은 쿠기보다 규모가 컸다. 쿠기가 내실을 기하는 회사였다면 그 당시 보
성은 공격경영을 하며 회사 몸집이 한창 커지던 때였다. 난 좀 더 큰 패션 회사는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싶었다.
결국 쿠기에서 홍보 업무를 한 지 3개월 만에 보성으로 옮기게 됐다.
실제로 보성에서 근무하면서 마케팅에 관해 확실하게 배웠다. 마케팅 업무를 위해 늘 시
장 조사를 다녔는데 가장 많이 찾은 곳이 바로 나이트클럽이었다. 당시 나이트클럽 유행이
곧바로 대중적인 유행으로 흘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유해의 흐름을 가장 먼저 감지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나이트클럽은 춤을 추러 오는 곳이지만 남녀가 새로운 데이트 상대를 찾기 위해 한
껏 뽐내고 오는 곳이기도 하다. 때문에 남자든 여자든 최대한 멋을 내고 나타나는 법.
그 당시 나도 나이트클럽에 가면 부킹이란 걸 했다. 하지만 내 목표는 새로운 여자를 만
나는 게 아니라 그들의 패션 감각과 생각을 듣는 거였다. 그래서 이왕이면 가장 멋을 낸 여
자들을 겨냥했다. 그리고 그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들의 패션 의식을 분석한
것이다. 덕분에 넥타이 맨 회사원 신분에 이제 갓 스무 살을 넘긴 아가씨들과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참 많이 했다.
보성에 다닐 때는 오로지 한 생각만 했다.
'유행은 어떻게 시작돼서 어떻게 흘러가는가. 어떤 옷은 연예인으로부터 유행이 시작되고,
어떤 옷은 먼저 대중적인 유행을 얻는데 그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패션 유행에 대한 감각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한편 80년대부터 성공한 패션 회사들을 분석하는 일도 중요 업무였다. 글 성공 요인을 찾
아냄으로써 마찬가지로 보성이 성공하는 아이디어들을 창출해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 성공한 패션 회사들의 사례를 분석한 결과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회
사의 인지도를 알리는 데 주력한다는 점이다. 그를 위해 이슈화해서 홍보하는 방법을 사용
한다.
그 다음 단계는 이미지를 확보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주로 광고를 통해서 얻어진다.
또 그때 대규모 프로젝트도 진행되었다. 패션에 대한 소비자 여론 조사, 시장조사, 전문가
의견 조사를 해서 정리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 프로젝트가 거의 끝나고 정리가 되어갈 즈
음에 그만 회사가 문을 닫고 말았다. 하루아침에 갑자기 일어난 일이었다. 1997년 12월, 우
리 나라가 IMF체제로 진입한 때였다.
사실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회사라는 게 일종의 연구실에 해당되는 곳이다. 즉 수익을 내
는 회사라기보다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패션 회사의 방향을 정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을 하
는 회사인 것이다.
결국 IMF체제 아래서 기업도 살아 남기 위해 구조 조정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보성 마케
팅 커뮤니케이션도 그런 차원에서 문을 닫은 것이다. 당장 수익성 있는 사업은 아니었으니
까.
결국 나도 IMF가 낳은 실업자가 된 것이다. 회사가 갑자기 없어지는 바람에, 한창 진행중
이던 프로젝트 자료들도 뿔뿔히 흩어졌다. 하지만 나는 그때 갖고 있던 자료들을 챙겨서 가
지고 나왔다.
그런데 바로 그 자료들이 정작 내가 패션 회사를 만들고 운영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도움
을 주고 있다. 미안한 얘기지만, 남의 돈으로 만든 재산을 내가 유용하게 써먹고 있는 것이
다. 지금도 내 사무실 책장에는 그 자료들이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다.
지금 생각해봐도, 쿠기와 보성에서 일했던 경험은 돈 주고도 배울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이
엇다.
쿠기에서는 패션 회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얻었다. 그 동안 패션 기살르 보며 궁금
했던 것들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홍보에 대한 노하우를 배울 수 있어싸.
무엇보다 회사를 꾸려가느 시스템을 배운것이다.
그 다음 보성에서는 브랜드 이미지 창조에 대한 공부를 했다. 석 달 남짓 일을 했지만 패
션 회사를 경영하는 데 필요한 실제적인 도움을 얻은 것이다. 두 회사를 통해 배운 하나의
교훈은 패션 트렌드 비즈니스에서는 영원한 강자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규모가 커진다
고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었다. 소비자가 원하는 것을 민첩하게 만들어 공급하는 게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동업자에게서 배운 것들
쿠기와 보성을 다니면서도 여전히 옷가게는 계속 하고 있었다. 옷가게는 소비자의 반응을
직접 확인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옷이 잘 팔리고 어떤 디
자인이 외면받는지에 대해 산 공부를 한 것이다.
엘지애드를 그만두고 쿠기로 옮기면서는, 홍대 앞 '키치'에서 손을 떼고 의정부에 '키치2'
를 동업 형태가 아닌 단독으로 오픈했다. 그러자니 목돈이 필요했다. 하지만 벌어놓은 돈은
없었다. 할 수 없이 아버지 신세를 졌다. 아버지께 통사정해서 2천 5백만원을 빌려 가게 얻
는 데 2천만원, 물건 하는데 5백만원을 쏟아부었다.
무론 이때도 아버지가 호락호락 그 큰돈을 꿔주신 건 아니다. 더욱이 대기업을 그만두고
작은 회사로 옮긴 일도 탐탁지 않게 여기시던 터였다. 그런데다 아버지 역시 그만한 현금을
갖고 게시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장래'를 운운하는 내게 결국 설득당하셨다. 그러고는 은행에서 융자를
내 꿔주셨다.
그런 점에서 나는 부모님께 감사드린다. 항상 자식 하는 일을 못마땅하게 여기셨고, 그래
서 뭐든 한 번에 승낙해주신 적은 없었지만, 결국 아들을 믿고 밀어주신 것이다. 그것이 오
늘의 나를 있게 한 밑거름이었다.
하지만 어렵게 시작한 가게가 장사를 잘하지 못해 문을 닫을 지경에 이르렀다. 회사를 다
녀야 해 판매 사원을 고용한 게 불찰이었다. 그때 얻은 교훈은, 주인 손이 미치지 않으면 반
드시 누수 현상이 생긴다는 점이다.
보성으로 옮길 때에도 잊지 못할 경험이 있었다. 동대문 거평 프레야에서 '꼴통'이란 옷가
게를 했는데 이건 동업이었다. 여기서 그 동업자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사업을
하는 데 영향을 받은 사람을 말하라면 바로 이 동업자부터 꼽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 동업자는 전에 '키치'를 할 때 옷을 떼러 다니면서 만난 거래처 주인이었다. 옷을 떼러
다닐 때마다 농담처럼 사업 한번 같이 해보자는 말이 실제 상황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꼴
통'은 그 동업자의 별명이기도 했다. 왜 그런 별명이 붙었는지는 지금까지 수수께기다.
'꼴통'을 시작할 때는 큰돈을 들이지 않았다. '키치2'를 정리하면서 남았던 재고 옷을 그대
로 유통했기 때문이다. 그때 그 옷값을 4백만원으로 계산 한 덕분에 현금을 낼 필요가 없었
다. 그러니까 실패라는 위기를 시작의 자본으로 삼은 셈이다.
지금도 그 '꼴통' 동업자를 생각하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분이야말로 내게 장사꾼의
기질을 가르켜주신 사부였다.
예를 들어보자. 그 분은 도소매상들이 오면 꼭 묻는 말이 있다.
"물건 많이 했어요?"
만약 "많이 했다"고 하면 그 사람에게는 절대 좋은 물건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미 물건을
많이 했으니까 돈이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이 하지 않았다"고 대답하는 사람
에게는 반드시 좋은 물건을 보여준다. 그 사람은 아직 돈이 많이 있기 때문에 구매를 많이
할 여지가 있는 까닭이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그건 하나의 노련한 장사 기술이다. 나는
그 동업자를 통해 소비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배웠다.
내가 이 동업자에게 배운 또 한 가지 노하우. 바로 이익 중심으로 장사를 한다는 점이다.
그분은 돈을 벌면 벌었지 절대로 손해를 보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것은 독특한 투자 방식
에도 기인한다. 그는 투자를 할 때 절대로 이익금 이상을 초과하는 법이 없다.
그분 논리는 이렇다.
"돈 없는 사람일수록 투자해서 벌겠다기보다는 이익을 남기는 데 우선해야 한다. 왜냐?
돈 있는 사람은 계속 투자할 자본이 있으니까 선투자도 해본다지만, 돈 없는 사람은 투자해
서 잘못되면 결과는 망하는 길밖에 없다."
이러한 그의 논리는 내가 사업을 시작하면서 하나의 좌우명처럼 떠받들고 잇다. 나 역시
사업을 하면서 이익금 안에서 투자할 뿐 절대로 이익보다 많은 지출은 하지 않고 있다. 그
것이 탄탄한 재무 구조를 갖게 하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처럼 제대로 된 장사꾼을 만난 덕에 우리의 동업은 하루가 다르게 번창했다. 97
년 9월부터 동업을 시작했는데, 97년 12월 내가 보성을 그만둘 즈음에는 가게가 4개로 늘어
나 있었다. 이만하면 그분의 장사 수완을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IMF로 옷장사가 안 되자 그분은 재빨리 가게를 정리하고는 음식점을 냈다. 투자 비용은
기껏2천만-3천만이었다. 그런데 장사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그분은 그 가게를 권리금만
1억을 받고 되팔아 이익을 챙겼다.
요즘 들어 장사 관련 창업 가이드 책들이 많이 쏟아지고 잇다. 무슨 장사를 하면 어떻고,
장사는 어떻게 해야 하고.... 나는 신문에서 그런 책 광고를 볼 때마다 그분이 떠오른다. 그
분이 장사하는 모습 그대로만 닮는다면 훌륭한 장사 가이드 책이 될 것이다.
실패 역시 나에겐 작은 성공이다
97년 12월 어느 날,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전원 일괄 사표를 제출하라는 방이 붙었다. 예고
도 없이 회사가 문을 닫는다는 것이었다.
물론 당황했다.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된다는 것이 남의 이야기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그
게 바로 내 일이 된 것이다. 샐러리맨 목숨이 파리 목숨이라는 말이 실감났다. 경영자가 필
요하면 썼다가, 필요 없으면 이처럼 내동댕이칠 수 있는 존재였다. 솔직히 분노도 일었다.
가만히 책상에 앉아서 생각해보았다. 내게 닥쳐온 상황을, 그리고 이후 내가 어떻게 햐야
할 것인가를. 조금씩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차라리 홀가분해지기 시작했다. 지금이 바로 기
회라는 희망적인 생각도 들었다.
어차피 나에게는 패션 사업이라는 불변의 목표가 있었다. 다만 그때는 내나이 30세부터이
고, 그때까지는 치밀하게 준비를 해나갈 참이었다. 때문에 회사를 언제 그만둘지에 대해 생
각해보곤 했었다. 그런데 우연히도 회사가 문을 닫는다는 것이다. 물론 타의에 의한 것이지
만, 내게는 '지금 시작하라'는 하늘의 계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이런 생각이 들자, '사직서'를 써내려가는 마음이 홀가분하고 신이 났다. 단숨에 사직서를
써서 던지고, 곧바로 내가 가야 할 곳으로 갔다.
밤이면 밤마다 찾던 곳, 바로 거평 프레야에 있는 동업 가게 '꼴통'이었다. 사실 낮에는 회
사 다니랴, 밤에는 도내 시장 다니며 물건 떼랴, 이중 생활이 고달픈 게 사실이었다. 어차피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꼴통' 덕분에 실업자가 되었다는 절망감 따위는 가질 여유가 없었다.
내게는 직장이 아니어도 내가 가야할 곳,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까.
내가 동업을 했던 이유는 두 가지였다. 패션 사업을 위한 워밍업이 하나이고, 회사를 다니
면 더 준비를 하기 위한 이유가 두번째였다.
하지만 이제 직장 생활을 그만둔 마당이므로 더 이상 동업에 연연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
가 그 동안 동업으로 장사를 하면서 판매 기술이라든가 소비자의 의식 등에 대한 흐름을 파
악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독립적으로 일을 벌여보기로 했다.
먼저 '꼴통' 동업을 청산했다. 먼저가게 하나로 시작했던 것이 4개나 되어 있었는데, 그 중
의 하나를 가지고 독립한 것이다. 그 동안에 쌓인 이익금의 일부를 챙겼다.
이렇게 해서 98년 1월 '꼴통'을 전신으로 한 나만의 가게가 생긴 것이다.
이름은 'Y짱'.
내가 이름을 짓는 아이디어는 이렇다. 먼저 주제를 정한다. 예를 들어 볼펜이라고 정했다
고 하자. 그 다음에는 그 주제를 놓고 온갖 소설적인 이야기를 구성해본다. 그러다 보면 그
주제에 대한 다양한 이미지가 유추된다. 그 가운데에서 내가 지금 목적으로 하는 이미지에
적합한 단어를 뽑으면 되는 것이다. 'Y짱'도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이름이다.
주제는 '젊은이의 옷'. 자연스럽게 'Young Generation'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또 내가 취
급하는 옷은 젊은이들이 추구하는 기발함이나 재미있는 느낌의 것이다. 여기서 당시 젊은이
들 사이에서 재미있는 말투로 유행되던 '짱'이란 단어가 나온다. 이렇게 해서 젊은이를 뜻하
는 'Y'와 '짱'을 결합시켜보았다.
'Y짱'은 기존에 장사하던 '꼴통'을 이어받은 것이기에, 새롭게 신경 쓸일이 많지 않았다.
다시 말해 내가 전적으로 매달릴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판매 직원을 한 면 채용해서 장사
를 해나갔다.
대신 나는 실제 경영 수업을 해보기로 했다.
97년 12월 초에 사표를 내고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 이왕이면 직장 생활에서 했던 일들을
바탕으로 해볼 수 있는 일을 찾았다. 그러니까 기획, 관리, 홍보에 대해 실제로 부딪혀보자
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98년 1월 대학로에 '신세대기획'이라는 사무실을 차렸다. 보증금 5백만원에
월세 50만원으로 만든 사무실이었다. 이번에도 빈털터리 신세였던지라, 부모님께 또 5백만원
을 꾸어서 시작했다. 먼저 디자이너 2명을 고용했다. 부모님께 또 5백만원을 꾸어서 시작했
다. 먼저 디자이너 2명을 고용했다. 탤런트 이의정 의상을 제작하는 일을 맡았기 때문이다.
보성에서 나오는 브랜드 가운데 '롤롤'이 있었는데, 이의정 의상 협찬을 했던 것이다. 그런
데 롤롤 옷이 모두 이의정을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 때로는 이의정에게 어울리는 옷이 없어
서 따로 제작해 입어야 했다. 나는 그에 착안하여 이의정 의상을 전담해서 제작하기로 계약
한 것이다.
당시 이의정이 '남자 셋 여자 셋'이나 '기쁜 우리 토요일'등에 출연할 때 입었던 옷 가운데
일부는 내가 제작한 것이다. 아마도 이의정 하면 떠오르는 의상이 될 텐데, 예를 들면 화려
한 원색의 털실로 짠 모자, 스웨터 등이 내 작품이다.
그때 디자인은 내가 그 동안 중고 옷장사를 하면서 얻은 감각이 크게 도움이 됐다. 중고
옷에서 착안하여 이의정에게 맞게 제작한 것인데, 좀 특이하다는 인상을 주는 디자인이었다.
이의정 옷이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몇몇 신인 연예인들의 옷도 제작해주었다.
하지만 개별적으로 의상 제작을 했을 뿐 그 옷을 판매할 수는 없다 보니, 별 이익을 남기
지는 못했다.
점차 다른 일도 벌였다. 액세서리 디자인이 그것이다.
그때가 스티커 사진기가 막 들어와 붐이 일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길거리를 걷거나 전철
을 타보면 중고생들이 스티커 사진을 찍어서 그냥 공책이나 가방에 붙이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면서 그 사진을 넣어 밖으로 드러내놓고 다닐 수 있는 걸 만들면
유행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중고생들은 가방에 인형이나 열쇠고리 따위를 주렁주렁 매
달고 다니는 걸 좋아한다는 점에서 힌트를 얻었다.
바야흐로 지금은 자기 PR 시대. 누구나 주목받고 자신을 표현하고 싶어하는 심리가 있는
것이다. 연예인이 되고 싶은 마음도 여기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래서 만든 것이 사진 프레임이다. 그러니까 스티커 사진을 넣을 수 있는 작은 사진틀을
말한다. 이것을 열쇠고리로 만들어 매달고 다니거나, 핀 형태로 만들어 꽂고 다닐 수 있게
했다.
제작비는 개당 2백50원씩 들었다. 이것을 4개씩 한 세트로 만들어서 1천3백원씩 시장에
공급했다. 제작비를 아끼기 위해 내가 직접 틀을 만들고, 줄을 꿰서 고리를 만드는 일을 했
다. 그때도 숱하게 밤을 세웠다. 가족들뿐만 아니라 우리 사무실에 놀러 온 친구들까지 반
강제로 동참시켰다.
밤새워 만든 프레임을 들고 낮에는 영업에 나섰다. 남대문이나 이대 앞 액세서리 가게들
을 찾아다니며 매장 반입을 부탁했다. 거절당하기도 하고, 시답잖은 표정으로 받아주기도 했
다. 그래도 줄기차게 찾아다니며 물건을 받아달라고 통사정했다.
그때 배운 게 하나 있다. 사업을 하려면 유통망을 직접 가져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유통망
이 없다 보니 제작에서 단가 결정, 결재 방식 등을 유통업자 뜻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는 마진이 너무 적다는 점이다. 그렇잖아도 단가가 비싸지 않은 물건인데, 아무리 팔아
봤자 중간 마진을 떼고 나면 내 손으로 들어오는 돈은 얼마 되지 않았다. 결국 액세서리 장
사는 재미를 보지 못했다. 1개를 팔아서 약 3백만원의 마진이 남는데 하나를 만들려면 3일
을 매달려야 했다. 결국, 계산을 해보니 인건비도 안 나오는 것이었다.
지금도 그때 만들었던 액세서리 재고가 사무실 창고에 수북이 쌓여 있다. 언젠가 다른 방
식으로 재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잘 간직하고 있는 중이다.
한편 이 사업을 하면서도 개인적인 작업을 병행했다. 그 중 하나는 패션잡지에 신세대 패
션 유행에 관한 글을 연재하는 거였다. 그 일이야말로 내게는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
었다. 실제로 거평 프레야에서 'Y짱'옷가게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세대들이 좋아하는 옷
의 흐름은 훤하게 파악하고 있는 터였다.
또 하나는 '피가로'라는 잡지의 홈쇼핑 코너를 맡은 일이다. 그러니까 잡지 한 코너에 몇
개의 옷을 코디해서 보여주고 전화로 주문하면 직접 사다가 배달해주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일은 힘든 정도에 비하면 돈은 되지 않았다.
모든 일이 그렇듯이, 처음 시도되는 일이라 매끄럽지 않았다. 그때 내가 얻은 결론은 우리
나라에서 속옷 같은 기능성 의류는 몰라도 겉옷은 홈쇼핑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옷을 살 때 직접 눈으로 보고 만져보며 구매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 손에 쥔 옷이 처음 본 것과 달라 반품하는 사례도 심각했다.
이렇게 해서 처음으로 시작한 단독 사업은 쓴맛을 봐야 했다. 겨우 직원들 월급 주고, 사
무실 유지할 정도밖에는 수입을 올리지 못했다. 한마디로 간신히 유지한 것이다.
또 동업 형태를 벗어나 독립해서 시작해본 'Y짱'도 장사가 안 돼 개점 휴업 상태에 빠졌
다. 그때는 나뿐만 아니라 IMF로 인해 옷장사들이 다 죽어가던 시점이었다. 그래서 시작한
지 3개월 만인 98년4월에 문을 닫아야 했다.
그래소 난 조금도 실망하지 않았다. 어차피 30세, 사업을 시작할 때까지는 수업료를 내겠
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옷가게도 그렇고, 신세대기획 경영도 어디까지나 연습 게
임이었을 뿐이다. 연습 게임에서 졌다고 낙담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제부터 본 게임이 남
아 있기 때문이다.
3. 문군네 뜨다
창업 비용 350만원, 밀리오레에 입점하다
1998년 9월 11일은 우리 나라 패션계의 한 장으로 기록될 날이다. 바로 우리 '문군 트렌
드'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우리 회사가 현재 잘나간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바로 무
한한 내재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문군 트렌드의 시작은 우연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예견된 우연이었다. 차곡차곡 벽돌
쌓듯 오래 전부터의 준비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대문 시장이라면 98년 홍대 앞에 '키치'를 내면서부터 다녔으니, 시장분위기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한번 동대문 시장에 나오면 옷만 사 오는 데 그치지 않았다. 일부러 시장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네며 친하게 지내려 애썼다. 그 사람들의 이야기야말로 살
아 있는 알짜배기 패션 정보였기 때문이다.
98년 가을, 그 무렵도 동대문 시장을 다니다가 상인들로부터 밀리오레가 개점한다는 정보
를 입수했다. 난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밀리오레에 가봤다.
여기서 또 나의 성격이 드러난다. 난 무슨 이야기를 들으면, '그런가 보다' '그런 게 있나
보다'하고 흘려듣는 법이 없다. 길을 걷다 받는 전단지 한 장도 그냥 버리지 않는다. 한 번
이라도 읽고 버린다. 최소한 내용을 내 머릿속에 입력시켜놓는 것이다. 언젠가 도움이 될지
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관심이 가는 내용이면 곧바로 확인하는 행동에 들어간다.
다리품을 판 끝에 알아보니 목돈 없이 일세로 입점하는 방법도 있었다. 막 IMF가 터져
옷장사들이 죽을 쑤고 있었던 터였고 그러다 보니 밀리오레도 분양이 잘 안 돼서 빈 상가가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귀가 솔깃해졌다.
많은 사람들이 장사가 안 돼 미래를 부정적으로 보던 시절이었다. 분양은 끝났지만 입점
은 망설이던 때였다. 나는 입점을 신청했지만 한 번에 거절당했다. 일세 입점은 조건이 있었
다. 장사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거나 디자이너 등 이른바 동대문 시장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사람들에 한정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일세인 만큼 돈을 제대로 낼 수 있는 사람을 확보하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난 입점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사람들에게 정보를 얻으러 쏘다녔다. 그러다가 홈쇼
핑 하면서 알게 된 상가 주인이 자기도 밀리오레에 들어갈 거라며 같이 가보자고 했다.
난 그분을 믿고 밀리오레 운영이사를 찾아갔다. 그분은 우리에게 두 칸을 하나로 터서 쓰
는 조건으로 입점을 허락해주었다. 분양이 안 되니 한 칸이라도 더 빨리 운영하려는 계산이
었다. 우리는 그렇게라도 하겠다고 의기투합했다.
결국 상가 두 칸을 터서 한쪽은 내가 쓰기로 했다. 대신 나는 보증금 1백만원에 선수관리
금 50만원을 먼저 냈다. 일세는 2만5천원에 하기로 합의했다.
이렇게 해서 밀리오레 3층 106호 한쪽에서 '문군'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정주영도 첫 시작은 쌀가게 점원
왜 이름이 '문군네'인지 궁금할 것이다.
가장 중요시한 점은 내 이름과 캐릭터를 어필해보자는 생각이었다. 드디어 내 사업을 시
작하는 것이니까 더더욱 그래야 했다. 그러다 보니 내 성시인 '문'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 다음은, 영 캐주얼인 만큼 밝고 싱싱한 이미지를 담아야 했다. 내가 사업을 해서 60세
가 되어도 젊은 감각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나온 게 바로 '군'이다. 사람은 불려지는
대로 된다고 믿는다. 예를 들면 '우승'이라고 부르면 그 당사자는 계속 우승하는 인생을 살
것이고, '성공'이라고 불리면 성공하게 된다고나 할까. 물론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만
큼 이름이 중요하다는 뜻이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계속해서 '문군'으로 불린다고 생각해보자. 나는 50세가 되든 환갑이 되
든 '문 아저씨'나 '문 할아버지'가 아닌 '문군'인 것이다. 한마디로 언제까지나 젊은 오빠로
사는 것이다.
세번째는 '문군의 가게'라는 뜻으로 '네'가 붙었다. 이렇게 해서 가게 이름이 탄생한 것이
다.
'문군네'를 열면서도 부모님 신세를 지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신세대기획 사무실을 운영
하고 있는 상태였지만, 사무실 수입으로는 직원 월급과 사무실 운영비만으로도 빠듯한 상태
였다. 그러니 내게 모아진 돈이 있을 리 없었다.
부모님께 5백만원을 꿔달라고 어렵사리 부탁했다. 물론 부모님이 쾌히 승낙하실 리가 없
었다. 아버님은 내가 고등학교 때 신나게 놀다가 마음잡고 공부할 결심으로 학원비를 달라
고 해도 순순히 주시는 분이 아니셨다.
아버님은 내게 장황한 훈계를 하셨다. 내가 사는 모습이 영 불안하다는 말씀이셨다.
"아직 앞길이 창창한 놈이 그렇게 사는 게 아니다. 한 직장에서 성실하게 일해서 승진할
생각은 안하고 사업한답시고 시장 바닥에 나앉아 장사나 하겠다는 거냐?"
아버님이 보시기에 내가 건반을 떤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남 보기에 4년제 대학 나왔
지 졸업하자마자 대기업인 엘지애드에 들어간 아들이 옷장사를 하겠다니 기가 막히실 법도
했다.
어머님은 더 불안해하셨다.
"좋은 직장 팽개치고 무슨 짓이냐? 착실하게 일해서 돈 모아야 결혼도 할게 아니냐. 그렇
게 살아서 처자식은 어떻게 먹여 살릴 거냐?"
이미 모든 게 결정된 상태이니, 부모님 말씀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이미 진행이 될 일이었다. 부모님을 설득하는 게 그 당시 지상과제였다.
나에겐 가뭄 속에 단비 같은 창업 자금이 필요했으니까.
"사업하는 사람들 다 이렇게 초라하게 시작해요. 정주영이 처음부터 빵빵하게 사업했어
요? 쌀가게 점원 하다가 점포 하나 마련해서 시작한 게 오늘에 현대그룹입니다. 저도 마찬
가지예요. 머지않아 큰 사업할 겁니다. 그러니 당장 지금만 보고 말씀하지 마세요. 장래를
보셔야죠."
부모님은 이번에도 설득당하고 마셨다. 아들이 한번 한다고 하면 기어이 하고야 만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시기 때문이었다. 결국 부모님이 5백만원을 꿔주셨다. 그 돈으로 보증금 1
백만원, 선수관리금 50만원을 내고, 초도물건값으로 2백만원을 써서 가게를 시작했다. 그리
고 나머지 1백50만원은 신세대기획 사업을 하며 진 빚을 갚는데 썼다.
그러니까 내 창업 자금은 정확히 3백 50만원이었다.
사업이란 제대로 알기만 하면 적은 비용으로도 시작할 수 있는 거다. 자고로 잘 모를수록
돈을 물 쓰듯 하게 되는 것이다.
난 매장 정보를 제대로 알았고, 싸게 입점할 수 있는 방법도 찾아내 쓸데없는 지출을 막
은 것이다. 게다가 물건값도 2백만원 선에서 해결했다. 이미 2년여 동안 동업으로나마 옷장
사를 해봤기 때문에 2백만원어치 물건으로도 장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내 경험으로 보견대,
그 정도면 재고 없이 장사할 수 있는 최적의 옷 구매 액수였다.
흔히들 무슨 일을 시작하면 두려워한다. '잘될까? 안 되면 어떡하지? 잘 되어야 할 텐데...'
하는 걱정부터 앞세우기 때문이다.
그러나 난 걱정이라곤 깨알만큼도 없었다. 그냥 배짱 좋게 생각했다.
'날려봐야 5백만원이다. 그까짓 거 날리면 막노동이라도 해서 만회하면 되지 뭐. 내가 언
제는 뭐가 있어서 시작했나?'
'망해도 망하지 않는다. 죽어도 죽지 않는다.'
왜냐? 언제든 내밀 수 있는 히든 카드가 있으니까.
하나의 일이 끝날 즈음이면 나는 또 다른 일을 시작하곤 했다. 하나의 일이 끝난 다음에
그때부터 부랴부랴 계획하는 일은 없었다. 끝내기 전에, 이미 다른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꼬리에 꼬리를 문 폭주 기관차식 사업 방식이었다.
엘지애드를 다닐 때부터, 옷가게를 시작했었고 또 엘지에드를 그만두고 쿠기와 보성으로
회사를 옮기는 동안에도 옷가게를 열었다. 보성을 그만두면서는 동업 형태를 정리하고 단독
으로 'Y짱'이라는 옷가게를 시작했으며, 동시에 신세대기획을 오픈했다. 그리고 신세대기획
을 접기도 전에 이미 밀리오레에 '문군네'를 연 것이다.
자본금이 두둑해서 그럴 수 있었느냐? 천만에다. 늘 은행 빚이 있었고, 부모님께 빚이 있
었다. 그래도 끊임없이 시작했다. 목표가 있었고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했으니까.
장사는 기술도 기술이려니와 운이 좋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이에 대한 내 생각
은 한마디로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행운이란 노력이 만드는 부산물이라고 생각한
다. 저절로 찾아오는 행운이란 없다고 믿는다.
아직 서른 살밖에 안 됐지만 세상이 그렇게 운이나 따지고 있을 만큼 만만하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어쩌다 스타가 된 연예인 인터뷰를 보면 '운이 좋았다'고 대답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건 인터뷰용 멘트라고 생각한다.
스타가 되기까지 그 사람은 보이지 않는 고통, 그리고 외로움과 무수한 싸움을 벌였을 것
이다. 가수라면 데모 테이프 들고 음반 회사를 전전했거나, 잠 안자고 춤추느라 불면의 밤을
보냈을 것이다. 탤런트라면 단역의 설움과 멸시를 받아가며 이를 갈고 노력한 끝에 마침내
자기 배역을 만나 떴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 고생스런 과거가 밑바탕이 되어 오늘의 스타가
되었다는 생각이다.
한마디로 내가 마랗고 싶은 것은, 오늘의 '문군 트렌드'가 어쩌다 성공한게 아니라는 것이
다. 꾸준히 연구하고, 치밀하게 준비해온 결과다. 내 사업을 준비하고 일구어온 그 과정들이
이를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은가.
발토시를 유행시키다.
오늘의 무군 트렌드를 있게 한 일등 공신은 바로 '발토시'다.
한때 멋깨나 부린다는 여성치고 발토시, 손토시를 안 한 여성이 없던 때가 있었다. 얼마
되지 않은 이야기다. 98년 11월부터 이듬해 겨울 동안의 이야기다.
내가 바로 그 유해의 붐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우리 나라 젊은 여성들이 일본 패션을 따라 한다는 것쯤은 다 알 것이다. 일본 잡지 '논
노'나 '앙앙'을 끼고 다니는 여성이 있을 정도니까. 또 패션 잡지들도 일본 잡지 아이템을 상
당 부분 참고하는 게 현실이다.
따라서 옷가게를 하는 나로서도 일본 패션 잡지를 빼놓지 않고 눈여겨봐야만 했다.
그런데 일본 잡지를 보니 스커트 밑에 발토시를 한 패션이 눈에 자주 들어왔다. 이렇게
일본에서는 흔한 발토시가 우리 나라에는 왜 없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곧바로 그
이유를 알아보았다. 그랬더니 이미 어느 브랜드에서 발토시를 내놓았다가 실패했다는 사실
을 알았다. 역시 그 까닭이 궁금해졌다.
결국 우리 나라에서 발토시가 실패한 이유는 일본처럼 발토시를 스커트와 끈으로 연결했
기 때문이었다. 일본에서야 그런 스타일이 별 무리없이 받아들여졌겠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그 모양이 마치 술집에 나가는 여성들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는 사실이었다.
문제는 간단했다. 그 끈을 없애면 되는 것이었다. 대신 토시 자체에 고무줄을 넣어 묶게
하면 될 일이었다.
우선 시험적으로 샘플 몇 개를 마들어보았다. 일단 재료가 풍부했기 때문에 만드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홍대 앞에 문은 연 '키치'에서도 중고 옷을 팔았지만 줄곧 중고 옷을 거래하던 중이었다.
특히 문군네를 오픈하면서부터는 스웨터를 주로 팔았다. 그런데 물건이란 게 항상 다 팔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으레 재고가 남게 마련이다. 그 재고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고민해
왔는데 마침내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이다.
양쪽 팔 부분은 잘라서 방울을 달아 모자르 만들거나 위아래 쪽에 끈을 묶어 토시로 변신
시킨 것이다. 또 몸통 부분은 역시 끈을 묶어서 스커트로 만들었다. 결국 하나도 버리지 않
고 상품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더욱이 중고 옷은 외국에서 들여온 것이 대부분이다. 솔직
히 말해 우리 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컬러인 데다 원단도 좋아서 인기가 있었다. 따라서 그
옷으로 모자나 토시를 만드니 당연히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몇 개 만들어 가게에 장난스럽게 디스플레이해놓았다.
그러던 어느 날, 대구에서 물건을 데러 온 분이 그 토시들을 사 가겠다고 하는 게 아닌가,
그분 부탁대로 있는 대로 다 팔았다. 그런데 이분이 그 다음날 또 올라와서는 더 달라는 것
이었다. 나는 일단 주문만 받고는 곧 다시 오라고 말했다.
그리고 곧장 못 쓰게 된 스웨터를 모으기 시작했다. 우선 중고 옷부터 수집했다. 보통 중
고 옷을 들여올 때는 보따리째로 거래하기 때문에 못 입을 옷이 들어 있어도 어쩔 수 없었
다. 대부분의 상인들은 그런 옷을 그대로 버리기 일쑤였다. 나는 돌아다니며 그 버려진 중고
옷들을 수집한 것이다.
스웨터도 마찬가지였다. 흠집이 있어서 버리는 물건도 잇지만 재고로 버리는 물건도 수두
룩했다. 이것들 역시 다 끌어모았다. 물론 공짜나 다름없는 헐값에. 버리는 물건 치워주는
것만도 감지덕지할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들을 가지고 와 집에서 가내 수공업 하시는 아주머니들에게 하청을 주었다. 어
떻게 자르고, 끈은 어떻게 만들어서 묶는지까지 일일이 가르쳐주었다. 많은 시간 들이지 않
고 물건은 금세 뚝딱 만들어졌다. 물론 대구에서 주문하신 분께 일차적으로 물건을 보냈다.
그런데 이 양반이 자꾸만 물건을 더 달라고 주문하더니, 마침내 지역 독점권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그분에게 독점권을 주고 본격적인 제작에 들어갔다.
그때 문군네는 토시 전문점으로 불렸다. 모자뿐만 아니라 헤어밴드도 만들었고, 토시와 치
마를 세트로 만들기도 했다. 다양한 아이템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특히 다리가 못생긴 사람
의 경우 발토시가 아주 유용했다. 자기의 콤플렉스를 커버해주기 때문에 순식간에 유행이
되었다. 정말 없어서 못팔 지경이었다. 누구 말대로 바빠서 죽을 시간도 없을 정도였다. 이
제 돈 세는 일만 남은 것이다.
새벽 5시, 밀리오레가 문을 닫자마자 내가 달려간 곳은 바로 오산이다. 그때 수입 물건이
오산 쪽에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서울에 오면 동틀 무렵이었다. 숨돌릴 틈 없이 다시
그 재료들을 가내 수공업 하는 아주머니들에게 배분해서 맡겼다. 그제서야 잠깐 토끼잠을
잔 다음 다시 시장으로 가곤 했다.
이렇게 한 달은 보내자, 문군네 하면 '발토시' 전문점으로 지방 상인들게까지 알려졌다.
처음 9월에는 순수익 2백만원 정도 올리던 것이 11월의 토시 장사로 매출이 2천7백만원,
12월에는 4천만원까지 올랐다. 웬만한 샐러리맨 연본을 한달에 벌었던 것이다.
그 사이에 문군네 직영점이 명동 2군데, 이대 2군데로 더 늘어났다. 밀리오레 가게 하나만
으로는 판매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행복한 비명을 질러야 했다. 당연히 주위의 부러움과 질시가 쏟아졌다. 토시 장
사는 겨울 지나면 끝물이니, 저 집도 봄이 되면 별 볼일 없을 거라는 소리도 들렸다.
하지만 난 어떤 소리에도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그 정도쯤은 나 자신도 너무 잘 알고 있
었다. 뭔가 또 새로운 걸 만들어야 했다. 지금 현재 잘되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달도
차면 기우는 법이고 산이 높으면 그만큼 골도 깊다. 이미 내게는 새로운 준비가 시작되고
있었다.
발토시를 개발해서 자신감을 얻은 나는 '바로 이거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의 물건을 떼어
다 장사하는 수준을 뛰어넘어야 제대로 돈을 번다는 것. 바로 내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
이다. 본격적으로 패션 사업을 시작해보기로 했다.
지금까지 구경하지도 못한 큰돈을 만지며 정말 기뻤던 것은 단순히 돈이 아니었다. 하루
두세 시간 자며 뛰어다닌 게 헛되지 않았다는 보람이 더 컸다. 어차피 돈 벌겠다고 시작한
게 아니라 패션 사업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때문에 그 돈은 내 돈이 아니다. 패션 사업을
위해 재투자해야 할 돈인 것이다.
대박이 터지다
본격적인 사업 채비에 들어갔다. 99년 1월 밀리오레 15층에 5평짜리 사무실을 얻었다. 디
자이너도 스카우트해왔다. 삼성재단의 디장인 학교 SADI에서 공부중인 여자 친구도 휴학시
키고 우리 회사로 불러들였다.
'문군'의 제품 생산 기획에 돌입했다. 이제 봄 시장을 겨냥한 옷을 준비해야 했다.
문제는 무엇으로 기존의 브랜드 제품과 차별화를 하느냐였다. 다시 말하면 '문군'의 구체
적인 컨셉트였다. 숱한 회의 와 고민 끝에 우리 컨셉트는 샤머니즘으로 결정됐다.
문명화되어 있는 현대 사회에서도 샤머니즘은 무의식중에 우리의 생활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우리는 바로 이 점에 착안했다. 샤머니즘이 느껴지는 색채와 문양을 재구성해 표현하
기를 수십 수백 차례, 소비자들에게 심리적으로 묘한 감성과 분위기를 느끼게 만들어야 했
다. 그 첫번째 모티프로 선택한 건 바로 '문신'.
연예인뿐만 아니라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문신은 유행이었다. 그러더니 99년 초부터는 신
드롬이라 부를 만한 붐이 조성됐다. 다만 아직도 한편에서는 문신한 사람들을 색안경 끼고
보는 경향이 있었다. 때문에 문신을 하고 싶어도 남들이 어떻게 볼까 하는 마음에 선뜻 하
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우리의 타깃이엇다. '문군'의 옷을 입음으로써
그런 욕구를 대리 만족하는 것이다.
우리 옷을 입으면 뭔가 주술적이고 미스터리한 기분을 가지도록 했다. 흔히 지갑이나 몸
에 부적을 갖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부적의 힘으로 액을 막고, 일이 잘 풀리기를 바라는
일종의 무의식적인 심리 현상이다. 우리 옷이 바로 그런 느낌을 주자는 것이다.
옷의 색깔은 블랙과 레드로 정했다. 중세 동굴 안의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가운데에서는
빨간 장작불이 이글거리고, 그 옆에는 까만 망토 옷을 걸친 사제가 있다. 바로 여기서, 불의
빨강색과 사제의 검정색이 떠오른 것이다.
흔히 샤머니즘이라고 하면 과거적인 음울한 분위기를 떠울리기 쉽다. 그러나 우리가 채택
한 샤머니즘은 미래적이고 밝은 분위기를 내도록 했다. 미래의 주술사라고나 할까. 그러다
보니 사이버적인 분위기도 묻어나왔다.
특히 당시만 해도 프린트물(옷에 프린트 찍는 방식)이 드물던 시기였다. 그런데 우리는 빨
강색 바탕에 검정색, 검정색 바탕에 빨간색으로 그린 기하학적인 문신을 프린트물로 내놓았
다. 당연히 느낌은 강렬했다.
구매층은 한정짓지 않기로 했다. 우리 옷이 추구하는 감성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구매층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감성이란 대부분 신세대적인 감성이게 마련이다.
한 달 간의 이 같은 기획 작업을 마치고, 마침내 2월이 되자 컨셉트대로 옷이 만들어졌다.
내가 의도한 컨셉트는 적중했다. 매장의 진열해놓자마자 소비자 반응은 무섭게 나타났다. 밀
리오레 안에서도 3층, 그것도 106호 '문군네' 앞 통로는 사람들로 막혀서 걸어다니기가 불가
능할 정도였다. 손님들끼리 한 물건을 놓고 서로 사 가겠다고 싸움이 일어날 정도였다.
그때가 5, 6월이었는데 너무 사람이 많아 마치 적도 지방처럼 무더웠다. 돈을 넣어두는 전
대도 부족해 쇼핑백에까지 가득 돈이 들어왔다. 정말 신바람이 무엇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실제로 길거리에서 우리 옷을 입은 사람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 내가 만든 옷을 다
른 사람이 입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의 기분? 뿌듯했다. 달려가서 그 사람을 꽉 껴안고 말
해주고 싶었다.
"이거 내가 만들었어요."
지금은 그때보다 많이 담담해졌다. 우리 옷을 입고 가는 사람을 만나면, 쳐다보며 빙그레
웃어준다. 혹은 누구랑 같이 있을 때는 태연한 척 모른 척 한다. 그러면 같이 있는 사람이
'너네 옷이야'라고 살짝 귀띔해준다.
'그러네'
무덤덤한 척하지만 속으론 무지무지하게 기분이 좋다 한마디로 그건 내 공생을 인정받는
느낌이다. 때론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과연 저 사람은 왜 저 옷을 샀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잘되는 사람에겐 항상 시기와 질투가 따르는 법. 나도 그 대상이 되었다. 바로 구설수에
오르는 일이다. 밀리오레 같은 곳에서는 모든 가게가 동료이자 적이다. 오늘의 우리 편이 내
일의 적군이 되는 것이다. 잘 팔리는 디자인이 나오면 바로 다음날 카피 제품이 옆집, 앞집
에서 나오기 일쑤다. 총알만 안 날아다녔지 전쟁터다. 정글의 법칙, 서바이벌 게임이 진행되
는 것이다.
98년 함께 장사를 시작한 사람들 중에는 망해서 가게를 뺀 사람도 있다. 혹은 잘된다 해
서 한 달 매출이 2천만-3천만원인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난 희망의 대상일 수 도
있지만 시기와 질투의 표적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전혀 기분 나쁘지 않다. 시기하는
입장보다는 시기의 대상이 된 게 훨씬 좋다.
밀리오레 안에서도 우리 옷을 모방해 만들어 파는 가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이미테
이션들이 잘 팔려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만큼 우리
옷이 유명하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그럴수록 우리 옷에 대한 가치는 높아질 것이기 때문
이었다.
모든 게 계획대로 가고 있다
98년 9월 11일, 동대문 밀리오레에 '문군네'를 오픈하던 날의 일기다. 이건 나와의 약속이
자 내 미래의 청사진이기도 했다.
'드디어 오픈,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다. 내일이면 오늘보다는 많을 것
이다. 목표를 갖자. 99년 매출액 10억. 매장 10개. 2000년 8월 법인 설립. 그런데 내가 과연
이 목표를 이룰 수 있을까?'
혹자는 웃을지도 모른다.
'1.2평짜리 옷가게 하나 내면서 매출액을 10억이나 올리겠다고? 뭐? 매장도 늘려? 어쭈?
법인 운운해? 회사를 설립하겠다 이거지? 아무리 돈 안 드는 꿈이라지만, 그렇게 사람이 허
황되면 쓰나.'
그러나 나는 그 목표를 2년이나 앞당겼다. 매출은 이미 초과 달성을 했고 매장도 대리점
을 포함해 10개를 넘겼다. 법인 설립도 이미 99년 8월에 했다. 인천 신세계를 비롯해 목동의
행복한 세상, 명동 유투존, 창동 덤프 패션몰 등에도 입점했다.
98년 9월 11일 오픈해서, 그 달 매출액 6백만원에 순수익 2백만원.
새벽 5시까지 장사하고, 잠깐 사우나 가서 눈붙인 다음에, 시장에 나가 물건 떼다 진열해
놓고, 다시 아침 11시부터 장사를 시작해 번 돈이다. 모든 일을 나 혼자 힘으로 해냈고 효율
적인 운영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10월에는 판매 직원 한 명을 채용했고, 매출액만도 1천6백만원을 넘겼다. 11월부터 매출액
이 급상승했고, 직원도 5명으로 늘어났다. 이때부터 우리 문군네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 또
성장하기 시작했다. 직원수가 늘고, 매출액이 널뛰듯 가파르게 뛰었다.
99년 1월에 밀리오레 15층에 5평짜리 사무실을 얻어 본격적인 사업 채비에 들어갔다. 디
자이너를 스카우트하는 등 직원이 10명으로 불었다. 두 달 뒤에는 바로 옆의 10평 사무실로
이사했다. 직원은 14명으로 늘었다.
4월에는 99년 총매출액 목표 10억을 달성했다. 어쩔 수 없이(?) 99년 매출 목표를 상향
조정해야 했다. 5월에는 다시 같은 층에서 20평짜리 사무실로 이사했다. 제품 생산과 공급이
늘어나면서 물류 창고가 좁아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젠 옷가게 이미지는 완전히 벗어나야 했다. 누가 보아도 문군네는 패션회사였다. 따라서
그에 걸맞는 회사 이름을 지어야 했다. 고민 고민하다 얻은 이름이 '문군 트렌드(Trend)'.
앞으로 우리 문군네가 우리 나라 패션 트렌드를 만들어가겠다는 야심찬 계획에서 나온 이름
이다. 브랜드 이름은 '문군'.
99년 8월에는 패션의 메카로 불리는 압구정동에 사무실을 얻으면서 법인 등록가지 했다.
본격적인 패션 회사로 새 출발을 다짐한 것이다. 사무실 평수만도 총1백17평. 직원수도 가장
많았던 때였다. 그 당시 거의 매일 직원을 뽑았기 때문에 직원 면접이 아예 하루 일과가 되
었을 정도였다.
그 동안 대리점만도 22군데나 오픈했다. 우리는 대리점 모집을 따로 할 필요가 없었다. 직
접 찾아와서 대리점을 내겠다고 신청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대구에 있는 어느 대리점도 그렇다. 그 대리점 주인은 내가 밀리오레에서 장사를 처음 시
작할 때부터 우리 가게에 와서 물건을 도매해 가던 분이었다. 그분은 내가 취급하는 물건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분 역시도 대리점을 내겠다고 찾아왔었다. 그 밖
에도 신문에 실린 내 기사만을 보고 찾아와서 대리점을 내겠다는 분도 많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대리점이 22군데나 된 것이다.
일부 백화점의 경우 쇼핑 몰에도 진입했다. 또 젊은이들을 주고객으로 하는 옷가게들이
몰려 있는 거리에는 '문군'간판을 단 가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밀리오레에서
는 우리 '문군'을 우수 점포로 선정해 밀리오레 간판격 점포로 홍보에 활용했다. 그만큼 밀
리오레의 대표적인 성공 점포로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99년 3월에는 마침내 한국패션 협회에서 패션 벤처 기업으로 지정받아 산업자원부의 벤처
지원금과 1년 간 패션 기획사의 무료 정보 제공, 홈페이지 제작 관리 등을 받게 되었다.
뿐만 아니다. 99년 5월 4일부터 7일까지 서울무역전시장에서 열린 '제1회 섬유수출대전'에
산업자원부의 지원을 받아 무료로 참가하기도 했다. 또 7월 13일에서 16일까지 열린 홍콩
패션 위크에도 초청돼 2000년 봄, 여름 상품 전시회와 패션쇼도 가졌다.
그 이후 70여 개국의 바이어들이 상담을 해왔고, 그 중 20여 개국에서는 지속적인 거래를
희망한다는 의사를 전해왔다. 그 가운데 호주와는 이미 거래를 시작했다. 일본과도 거래 준
비가 시작됐고, 대만 등 4개국에는 샘플이 나가 있다.
모두가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3백 50만원으로 1.2평짜리 가게 하나 얻어 장사를
시작한 지 불과 1년만에 일어난 일들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건 나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98년 가게를 시작하면서 일기장에 적어
보았던 그 꿈들이 실제로 이루어졌다는 것만으로도 황홀할 지경이다. 그런데 그것이 몇 달
사이에 이루어졌으니, 나로서도 꿈인가 생시인가 싶을 때가 있다.
나는 수첩에 지난 1년 간 우리 '문군'의 성장사를 한마디로 요약해 적어 놓았다.
'준비해오고, 그것을 실험해봤다. 그리고 그 실험이 제대로 맞았다.'
나는 그 동안 내가 가진 느낌을 실제 행동으로 주저없이 옮겼다. 그런데 그것이 잘 맞아
떨어졌다.
4. 내가 걸어온 모든 길은 땀방울이다. 행운조차도
기회는 준비하는 자의 몫이다
나는 호기심이 아주 강하다. 그래서 점이라는 걸 본 적이 있다. 팔짱을 끼고 가보자는 여
자 친구와 못 이기는 척 간 것이다. 98년 11월로, 밀리오레 매장을 비롯해 5개의숍을 운영하
던 중이었다. 잘된다는 느낌이 들던 때였다.
점괘를 보고 나오는데 발걸음이 가벼웠다. 점괘가 너무 훌륭했던 것이다.
내 사주가 '괴물 사주'란다. 무슨 소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내가 이해하는 수준에서,
내가 듣기 좋은 풀이는 이런 거였다.
나는 항상 가방을 메고 산과 강으로 떠나곤 하지만 집에는 쌀과 금은보화가 가득하단다.
그만큼 재운이 높다는 말이었다.
그러면서 역술가가 내 여자 친구에게 하는 말이, "이 남자 잘 잡아!"였다. 겉으로는 표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무지 기분 좋았다. 돈 번다는 이야기보다 더 기분이 좋았다. 그때까
지만 해도 여자 친구가 툭하면 잘난 척하면서 퉁기곤 했던 것이다. 그때부터 여자 친구가
엇나가려고만 하면 내가 외친다.
"이 남자 잘 잡아!"
누군가 나에게 노력과 행운의 비율을 묻는다면 나는 노력이 100%라고 말할 것이다. 물론
운도 따랐지만 그건 열심히 땀 흘린 결과라고 생각한다. 누구든지 사업을 시작할 때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은 바로 행운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나도 그랬다.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방심하지 않으려 했다. 행운은 어디까지나 뜻하지 않은 재수다.
지금가지는 어느 정도 내 계획대로 이루어진 셈이다. 나는 패션 사업을 시작할 때 막연하
게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패션계의 서태지가 되자.'
그랬는데, 정말 그렇게 되었다. 방송도 많이 나갔고, 신문이나 잡지에도 내 기사가 많이
실렸다. 덕분에 거리에서 나를 알아보며 아는 척을 해오는 분도 있다.
동대문 시장의 붐과 내 창업의 히스토리가 시기적으로 잘 맞아떨어진 것이다. 물론 아직
패션계의 서태지가 되었다고 말하기에는 이르다. 하지만 멀지 않았다고 확신한다. 서태지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가수다. 일단 그의 노래는 참신하고 독특하다. 소비자가 원하는 것을 정
확히 캐치하고 차별화에 성공했다. 그런 마케팅 전략이 정상의 길로 인도했다고 생각한다.
이른바 마케팅 전략이 주효한 것이다.
또 나는 패션 전문가가 되어서 언론계에 패널로 진출하고 싶은 생각을 했다. 실제로 방송
에 나가 패션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도 있다.
지금 나는 생각해본다. 지금까지 걸어온 내 길을.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안전하고 빠르게
나아가기 위해 백미러를 보는 것처럼.
곰곰이 생각해보니, 정말 난 부지런히 살았다. 그리고 한번 마음먹으면 누구보다 열심히,
끈기 있게 달려들었다. 그것이 하나하나 실력으로 쌓였고 나도 모르는 사이 성공이라는 길
로 접어든 것 같다.
처음 밀리오레에 '문군네'를 오픈하면서 2000년에는 법인 설립을 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겨우 1.2평짜리 가게로 장사를 시작하던 당시 상황으로서는 전혀 실현 불가능한 꿈이었을지
도 모른다.
그런데 99년 8월. 진자로 '문군 트렌드'라는 이름의 법인 회사로 등록했다. 이제 나도 상법
상 어엿한 사장이 된 것이다. 경영학과 나온 사람 아무나 붙들고 물어보라. 10명 중 8명은
주식회사를 경영하는 게 최종 목표라고 대답할 것이다. 나 역시 그 꿈을 꾸었고, 실제로 이
루어낸 것이다. 그것도 계획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물론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더 먹고 험할 것이다. 아직 내가 경험하지 않은 길이 더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의 내 모습에 자부심을 갖고 싶다.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아 저절로 사장이 되는 경우는 흔히 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처
음부터 끝까지 내 힘으로 이루어내고 있는 중이다. 아버지가 사업을 하셔서 경영 수업을 받
았던 것도 아니고, 주위에 패션 관련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있어서 도움을 받았던 것도 아니
다. 순전히, 내가 개척해나갔다.
역시 '하면 된다'는 말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나는 그걸 체험으로 깨달았다. 그래서 직원들
에게도 당당하게 말한다.
"하면 됩니다."
난 끊임없이 기회를 만들고 그 기회를 발판으로 도약했다.
동업으로 옷가게를 시작했고, 그것을 발판으로 나 홀로 가게를 운영했다. 또 그것이 경험
이 되어 마침내 회사까지 설립할 수 있었다. 확대 재생산이 된 것이다.
회사 설립 이후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우리 회사 한달 성장 수치가 50이라고 하자. 하지만 일을 자꾸만 벌여 추진하
다 보면 성장 수치는 훨씬 높은 100에 이른다는 게 내 생각이다. 다시 말하면 계속해서 일
을 벌여나가야 발전도 있다는 이야기다.
99년에 패션 벤처 기업으로 선정돼서 1년에 2번의 패션쇼 참가 경비를 지원받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 회사 외형 규모로 보자면 패션쇼를 연다는 건 무리한 일이었다.
아직은 내실조차 다지고 있지 못하는, 신생 패션 회사인 것이다. 더구나 제품 생산이 늘어
나면서, 그에 주력하기에도 힘든 형편이었다.
그러니까 패션쇼에 참가할 시간과 여력이 있다면 차라리 제품 기획, 생산에 치중해서 회
사 매출을 올리는 게 현명한 일이었다. 어차피 패션쇼는 다음에 해도 되니까. 하지만 난 패
션쇼를 강행했다. 모든 면에서 무리라는 걸 알면서도, 그것이 '기회'라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
다.
패션쇼는 국내외에 우리 '문군'을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또 그렇게 큰 행사를 치
러내는 과정에서 디자이너들의 실력이 향상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우리 문군 트렌드이 브랜드인 '문군'이 널리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거래량과
매출이 급증했다. 패션쇼는 우리 회사가 급성장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할까 말까 망설였다
면 이런 열매를 따지 못했을 것이다. 신중한 생각은 좋지만 망설인다는 건 모든 면에서 낭
비다. 과감한 도전이 필요하다.
부딪혀라, 부딪혀라, 또 부딪혀라
지난 99년 봄의 일이다. 자신들을 중앙대학교 경영학과 학생이라고 소개한 몇 명이 나를
찾아왔다.
"리포트 때문에 왔습니다. 문군네가 어떤 경영 전략으로 성공했는지 사례 연구를 해서 보
고서를 작성해야 하거든요."
사실 내 남동생이 중앙대학교 경영학과에 다닌다. 그래서 처음에는 남동생을 아는 학생들
인가 싶었다. 그런데 물어보니 동생이 같은 학과에 다닌다. 그래서 처음에는 남동생을 아는
학생들인가 싶었다. 그런데 물어보니 동생이 같은 학과에 다닌다는 것조차 모른다고 했다.
순전히 교수님이 문군네를 지목하며 주신 연구과제라는 설명이었다.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대학에서 연구 과제 대상이 될 만한 인물이라니. 너무 놀라웠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랐지만 참 기뻤다.
내가 성공한 첫번째 요인은 패션에 대한 접근 방법이 달랐다는 점이다.
내가 패션 사업을 하면서 가진 기본 마인드부터 설명했다. 나는 '패션은 옷을 파는 게 아
니라 이미지를 파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비자가 단순히 옷을 사 입는 시대는 지났다. 옷이 몸을 가리는 것이라는 사고는 구태의
연한 것이 된 지 오래다. 옷이란 옷을 그때 그때마다 자기 변신을 하기 위한 수단이며, 자기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한 적극적인 방법이다. '옷차림은 전략이다'라는 카피도 있지 않은가.
즉 옷은 그 사람의 심리나 이미지를 표현하는 것이다.
쉬운 예를 들어보자.
한 여자가 있다. 예전에 이 여자는 자기가 섹시하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싶을 대 "나는 섹
시해"라는 말로 표현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말로 표현하지 않는다. 바로 옷으로 섹시함
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옷을 만드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은 '이미지'다. 그래서 우
리 문군의 옷은 이미지가 강렬하다.
설문 조사를 해본 결과 소비자들은 강한 이미지를 원하고 있었다. 나는 이 일부 소비자들
이 유행을 선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왕 이미지를 모토로 하는 옷이라면 소비자에게
강하게 어필할 수 있어야 했다. 그것은 곧 패션 시장에서 확실한 차별성을 갖는 것이기도
했다.
두번째로는 마케팅에 관한 것이다.
마케팅 전략상 택한 것은 바로 중저가 정책. IMF이후 호주머니가 가벼워진 고개들은 실
리적인 가격을 가장 중요시했다. 이에 따라 고가 제품 시장이 대폭 축소되었다. 이른바 거품
이 빠진 것이다. 결국 소비자들의 심리를 따르기로 결정했다. 한마디로 유통과 시대 상황을
고려한 마케팅을 한 것이다.
또 백화점 입점보다는 대리점 유통과 시장 소매를 목표로 했다. 대리점도 완사입 형태(대
리점에서 돈을 주고 물건을 사다가 파는 형태)로 운영했다.
자금 등의 여건 때문에 광고는 하지 않는다. 대신 신문이나 방송 등에 젊은 이미지를 내
세워 홍보에 주력하는 편이다.
마지막으로 판매 사원을 뽑을 때 디자인을 전공하거나 패션 감각이 뛰어난 사람으로 기용
한다. 이들에게는 '패션 코디 컨설턴트'라는 직함을 주었다. 고객에게 잘 어울리는 옷, 이미
지에 맞는 옷을 골라주는 것이 이들의 일이다.
내 이야기를 들은 학생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놀라워했다. 그들이 학교 수업 시간에 배운
이론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난 패션 전공자도 이론가도 아니다. 순전히 경험에서 나온 판단대
로 해왔을 뿐이다. 그런데 그 경험에서 얻어진 것들이 사실은 이론에 근거한 것들이라니....
나도 놀랐다. 비록 짧은 경험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것이 대단한 공부였다는 것을 다시금 깨
달았다.
학생들은 내게 어떻게 하면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느냐고 질문해왔다.
내 대답은 간단했다. 바로 적극성이라고 말해줬다. 그리고 나 자신을 어는 한 틀에 규정해
버리지 않는 점이라고 덧붙였다. 나는 학생이기 때문에 또는 나는 직장인이기 때문에 어떻
게 해야 하고, 어떻게 해서는 안 되고 하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무작정 내가 속하지 않은 세계로 뛰어들어본다. 환경에 지배받는 걸 싫어하는 성격
때문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대학 다닐 때, 집이 서울 삼성동인데도 학교 근처에서 하숙을 했다. 신촌까지
통학하는 시간도 아까웠고, 부모님께 통제받는 환경도 싫었다. 대부분은 그런 환경이 싫으면
서도 그러려니, 어쩔 수 없는 것이려니 하면서 적응해간다. 하지만 난 환경에 적응하려고 애
쓰기보다 환경을 나에게 맞게 바꾸는 스타일이다. 한마디로 내가 세상의 조연이 아닌 주인
공이 되는 것이다. 당연히 환경에 순응하는 사람보다 더 많은 경험을 할 수밖에 없다.
시인 서정주는 '자화상'이라는 시에서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라고 했다. 나로 말하면
'나를 키운 건 8할이 경험'이다. 그만큼 나는 경험으로 모든걸 배우고 익혔다. 하지만 그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훨씬 실용적인 공부였다는 것은 오늘의 내 모습이 증명해준다.
문인석이 사기를 당했다?
가끔 나에게 '너무나 치밀해서 틈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물론 난 치밀한 편이다.
아마 여러분은 이 책을 읽어가면서 오늘의 '문군'이 있기까지 내가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해
왔는지를 어렴풋이나마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일에 있어서만큼은 누구 못지않게 치밀한
나다. 그런데 어찌된 것인지 한번씩 대책이 안 서는 어리숙한 짓을 할 때가 있다. 인간적인
내 약점이다.
내가 치밀하다는 것은, 그런 내 약점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다.
내가 시가도 당했다고 하면 믿는 사람이 별로 없다. 오히려 이런다.
"천하의 문인석이 사기를 당해? 사기를 친게 아니고?"
사업을 하면서 돈을 꾸거나 꿔줘야 하는 경우가 많다. 한번은 우리 문군의 거래처 사장에
게 1천만원을 꿔준 적이 있다. 그분이 공장을 지으려고 한다는 이야기에 선뜻 돈을 꿔준 것
이다. 거래처가 잘되어야 나도 성장한다는 생각에 차용증도 안 썼는데 지금까지 돈을 못 받
고 있다. 아니 돈 받겠다는 생각을 포기해버렸다. 그래서 지금은 돈 꿔달라는 부탁에는 무조
건 거절이다. 친구에게도 마찬가지다. 아예 안 받을 생각이라면 모르지만 말이다. 사업을 하
면서도 난 철저히 내 돈으로만 한다. 은행 대출이나 남의 돈을 차입하지 않는 게 내 신조다.
난 사람을 너무 잘 믿는다. 또 사람한테 아쉬운 소리나 싫은 소리를 못 한다. 그래서 얼떨
결에 끌려가는 일도 허다하다. 보험만 해도 그렇다.
"어머! 같은 문씨네. 종씨끼리 돕고 그래야지? 내가 딱 맞는 보험 추천해 줄게 들어봐요."
이렇게 같은 문씨라며 영업하는 보험설계사도 쉽게 뿌리치질 못한다. 후회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냥 들어주고 마는 것이다. 가입하자마자 해약한 보험이 부지기수다.
사실 사기도, 그래서 당했다. 싫은 소리를 못 해서.
98년 12월 두산타워 분양 때다. 그곳에 매장 하나 더 얻으려다가 그만 사기를 당한 것이
다.
내가 밀리오레에 들어갈 때 소개시켜준 분양 업자가 있었다. 이 사람은 밀리오레에서 매
장을 갖고 장사를 하기도 했다. 나는 두산타워 분양 소식을 듣자마자 그 사람을 찾아갔다.
매장을 하나 얻을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얼마 뒤, 그 사람으로부터 커피숍에서 만
나자는 전화가 왔다. 만나자마자 그가 안타깝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매장당 프리미엄이 2백만원이면 가능했는데, 지금은 프리미엄이 5백
만원이라네. 문제는 다음주면 1천만원이 넘을 거라는 소식이 있어. 그러니 아깝지만, 매장
잡으려면 지금이라도 빨리 잡는 게 좋아. 뒷일은 내가 다 알아서 처리해줄게."
나는 그 사람 말을 의심하지 않고 액면 그대로 믿었다. 그리고 두말없이 5백만원을 건네
주었다.
그 즈음 텔레비전 뉴스에서 두산타워 분양 사기 사건이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있었다. 나
는 그 사람을 보면서 전혀 그런 사기 사건과 연관짓지 못했다. 그런데 그가 먼저 그 사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아닌가.
"조심해야지, 사기꾼들이 들끓고 있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인석 씨는 걱정 마."
난 정말 그 사람 말대로 걱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람이 추첨일에 전화해주겠다고 해
서 그러려니 하고 잊어버렸다. 그런데 추첨일이 지나도 연락이 없었다. 기다리다 못한 내가
전화해보니, 추첨일이 연기되었다고 둘러댔다. 나는 또 그려러니, 하고 기다렸다. 그런데 다
시 그 약속한 날이 지났다.
그때는 나도 그가 사기꾼이라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를 다그치지 못했다. 겨
우 하는 말이라고는 부탁한다는 것뿐이었다.
문제는 그 사람에게 돈 준 사람이 나만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밀리오레가 성공한 걸 보면
서, 내가 아는 한 사람도 두타에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었다. 그래서 그 사람까지
그에게 돈을 건네준 상태였다.
99년 1월 말쯤 그 사람은 아예 잠적해버렸다.
그때 나는 매장이 늘어나는 상황이어서 너무 바빴다. 그래서 죽자살자 하고 그 사람을 찾
을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 성격이 그랬다. 사기당하는 걸 알면서도, 차마 면전
에 대고 나쁜 소리를 못 했다. 그러니 그 사람 입장에서는 더없이 사기 치기 좋은 인물이었
던 셈이다.
그가 잠적하고 나자 그에게 사기당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물론 한둘이 아니었
다. 다같이 그 사람을 고소하고, 경찰서에 가서 진술서를 썼다. 하지만 그때 진술서를 쓰면
서도 내 솔직한 심정은 그랬다.
"어차피 떼인 돈 빨리 잊어버리자. 신경 쓸 시간에 다른 사업에 노력해서 빨리 만회하자."
그런 경험이 있은 뒤, 나는 내 사업을 더 열심히 추스리게 되었다. 다행히도 그 결과가 좋
아, 사업은 계획대로 승승장구했다.
결국 그 사람은 경찰에 잡혔다. 하지만 돈을 받지는 못했다. 그 당시 5백만원이라면 내게
는 큰 돈이었지만 깨끗이 포기했다. 지난 일에 연연하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은 없다. 지금
당장 내 눈앞에 펼쳐진 현실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한 번 실수는 병가지상사라고 하지 않던가. 그렇게 당했으면, 다음부터는 매사에 조심해야
하는데 나는 또 그렇지 못했다.
그 즈음에 또 한 번 돈을 떼인 것이다. 그때 명동의 어느 편집 매장(큰 매장에서 각 코너
를 만들어 코너별로 장사하는 매장)의 한 코너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 코너 장사는
그 총매장 경영자가 매출을 결산해서 10일 간격으로 결재를 해준다. 그런데 그 매장 운영자
가 12일 동안의 매출액 4백만원을 떼먹고 사라져버렸다.
거의 동시에 두 번의 사기를 당한 셈이다.
이럴 때 사람들은 '이젠 죽었다'하면서 의기소침해지기 쉽다. 그러나 나는 이런 악재에 연
연하지 않았다. 돈을 떼인 날도 두 발 죽뻗고 잤을 정도로 난 긍정적인 성격이다. 안 좋은
일이 생기면 그 상황에 빠져서 절망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빨리 극복할 것인지를 먼저 생
각한다. 하루하루 나아가기도 바쁜 마당에 지난 일에 사로잡혀 있다가는 남보다 뒤지게 마
련이다.
내가 속도감 있게 일을 추진할 수 있는 것도 이런 성격 덕분이다.
난 분명히 어리숙한 인간이다. 그건 내게 큰 단점이지만 그 단점을 치밀함으로 커버한다.
또 '더 잘하겠다'는 의지로 어리숙했던 행동을 쉽게 잊어버릴 수 있다.
헝그리 정신이 회사를 살린다
영화 '넘버 3'에 나오는 명장명.
송강호가 졸개들을 꿇어앉혀놓고, 침을 튀기며 더듬거리는 말투로 한창 강의중이다.
"허 헝 헝그리 정신이 피 필요해, 거 누 누구야?"
그러다 잘난 졸개가 감히 끼어들어 임춘애 선수라고 말했다가 피박살 나는 장면이 나온
다. 배꼽 빠지게 웃기는 그 한 장면으로 스타덤에 오른 배우 송강호. 나도 송강호처럼 우리
직원들에게 강요하는 게 있다.
한번 헤퍼지면 끝이라는 사실.
"복사 용지는 이면지를 쓰세요."
"화장실 불 좀 잘 끄고 다니세요."
"원가 절감 더 해보세요."
"종이컵 대신에 머그잔 갖다 놓고 쓰세요."
"헝그리 정신이 없으면 성공 못합니다. 특히 우리같이 돈 없는 작은 회사일수록 더욱 헝
그리 정신이 필요합니다."
젊은 사장이 짠돌이라고 놀리는 사원들이 개중에 있다.
내가 걱정하는 건 지금 우리 회사가 잘나간다 해서 혹시라도 직원들이 우리의 어렵던 시
절을 잊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씀씀이가 한번 헤퍼지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어지
는 법이다. 직원들이 똘똘 뭉쳐 걷잡을 수 없이 낭비심에 사로잡히면 우리 같은 작은 회사
는 언제 위험해질지 모른다.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절약 정신은 중요하다. 그리고 회
사 물건을 아껴 쓰다 보면 알게 모르게 애사심도 몸에 배게 된다. 직원들이 '왕소금 사장'이
라고 불러도 난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나를 짠돌이라고 부를 수록 아끼는 습성이 몸에 밸
터이니 속으론 은근히 더 좋다.
솔직히 내가 짠돌이 노릇을 하는 건 사실이다.
내가 지금 쓰는 차는 97년에 산 아반떼다. 법인 명의로 된 9인승 트라제를 얼마 전에 구
입하긴 했지만 내 소유의 차는 7만Km를 나와 함께 뛴 아반떼다. 좋은 차를 봐도 관심과 흥
미가 없는 나지만 트라제를 마련한 건 이유가 있다. 나는 직원들과 삼삼오오 놀러 다니는
걸 좋아한다. 바쁘다는 핑계로 요즘엔 자주 못 가지만 전에는 춘천으로 닭갈비 먹으러도 가
고 낚시도 심심찮게 다녔다. 동고동락하는 직원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고 기
분 전환을 하기에 여행은 안성맞춤인 것이다. 그래서 짐도 싣고 여러 명이 같이 움직일 수
있는 9인승을 산 것이다.
지금도 나는 움직일 때 차를 쓰는 일이 별로 없다. 시내는 물론 지방에 갈때도 주로 대중
교통을 이용한다. 차를 가지고 다니면 막히는 것도 짜증나지만, 워낙 기름값이 많이 먹히고,
주차비로 생돈 날리는 게 아까워서다.
작년 여름까지는 도시락으로 점심을 때울 정도로 식비를 아꼈다. 그때까지 사무실에서 먹
고 자는 생활을 했기 때문에 집에 들어갈 시간이 없었지만 어머니에게 부탁해 남동생한테
매일 도시락 배달을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찮게 어머니 앞에서 한마디한 게
실수(?)였다.
"점심은 그냥 사 먹을까봐요."
내 말을 듣자마자 어머니께서 만세를 부르셨다.
"이제 나도 해방이다!"
어머니는 진짜로 두 손까지 번쩍 치켜들며 환호성을 부르기까지 하셨다. 그 모습을 보니
그 동안 어머니가 도시락 때문에 스트레스깨나 받으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말
나온 김에 지금도 직장 근처에서 사 먹는 중이다.
어차피 다 먹자고 하는 일이었지만 음식점에서 사 먹는 밥값이 너무 비싸 보였다. 그래서
5천원이 넘는 밥집은 아예 얼씬조차 안 했다. 지금은 비록 돈이 좀 아깝지만, 어머니가 편하
시게 됐으니 만족한다. 그리고 저녁 식사는 직원들과 함께 먹는다. 보통 퇴근 시간이 9시를
넘기는 직원들에게 저녁 식사만큼은 해결해주고 싶어 회사에서 전액 지불해주고 있다. 별다
른 복지제도가 없는 미안함 때문에 따뜻한 밥이라도 같이 먹고 싶은 내 소박한 바람인 것이
다.
사업을 하면서부터 거의 들지 않는 지출 항목이 바로 옷값이다. 직장 생활 할 때는 카드
긁어가면서 한 달에 1백만원 정도는 옷값으로 썼다. 회사에서 베스트 드레서라고 불릴 정도
라면 어느 정도인지 대강 짐작할 것이다.
그런데 옷장사를 시작해보니까 선뜻 돈 주고 옷 사기가 망설여졌다. 옷을 보면, 원가 계산
부터 하게 되는 것이다. 이 원단은 얼마고 공임비는 얼마 정도 들었겠다. 하는 생각부터 드
니까 더더욱 그랬다. 게다가 내가 만드는 옷을 입으면 옷값 안 들이면서 홍보 효과도 있으
니, 그래서 난 문군만 입고 다닌다.
구두도 그렇다. 회사 다닐 때는 의레 메이커 구두였다. 그런데 사업하면서부터는 동대문
시장에서 모조리 사 신는다. 웬만하면 싼 걸 사고, 4만원만 넘어도 손이 떨려서 돈을 셀 수
가 없다.
내년 1월, 화촉을 밝히기로 굳게 약속한 애인 조미경. 그녀에게 선물 사주는 것도 엄청 짜
졌다. 샐러리맨일 대는 월급 받았다고 옷 사주고, 보너스탔다고 꽃다발 사주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 사달라고 졸라대면 겨우 머리핀 하나 사주고 만다. 오죽하면
작년 언약식 때 시계 사달라는 것도 안 사줬을까. 그냥 뽀뽀로 선물을 대신했다.
어쩌면 사람들은 이런 나를 비웃을지도 모른다. 우리 직원들처럼 '짠돌이'라고 말이다. 하
지만 난 그에 대해 충분히 변명할 수 잇다. 만약 회사 매출이 늘어나고 이익을 많이 남긴다
고 해서 내가 손이 커지면 어떻게 될까. 누가 스폰서를 자청, 자본을 대주는 것도 아니기 때
문에 우리 회사가 오늘처럼 성장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돈을 펑펑 쓰는 곳이 딱 한 군데 있다. 바로 재투자다. 돈을 버는 대로 거의
다 재투자하는 데 사용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사람들은 내가 사업을 한다고 해서 몇
천 만원, 몇 억의 부자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사장이긴 하지만 나도
정해진 액수의 월급만 받는다. 나머지 수익은 내 돈이 아닌 회사 돈이다. 그리고 그 돈은 더
큰 우리 회사를 만들기 위해 다시 쓰여지는 것이다.
그래서 정작 내 속에는 한 번도 큰돈이 들어온 적이 없다. 어떤 때는 정말로 내가 돈을
벌기는 하는 건지 의심이 들 정도다. 특히 요즘은 온라인으로 거래되기 때문에 마치 돈이
전자오라그이 스코어처럼 여겨질 때도 있다. 빳빳하고 두툼한 돈을 만져봐야 실감할 텐데
늘 통장 사이를 오가는 아라비아 숫자뿐이다. 사업은 총알만 안 쓸 뿐 그야말로 전쟁이다.
돈은 나를 지켜주는 실탄이므로 함부로 쓸 수 없다는 게 내 작은 자본론이다. 하지만 써야
할 곳에는 과감히 써야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돈을 얼마나 버느냐보다 돈을 얼마나 '잘 쓰
느냐'인 것이다.
지금보다 매출액이 늘고 더 많은 돈을 벌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회사에서 벌어들이는
돈은 회사 발전을 위해, 직원들을 위해 투자될 것이다. 내 개인 재산을 축적하기에 급급해한
다거나, 회사 돈을 어떻게 유용한다거나 하는 구태의연한 짓은 안 할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돈을 많이 벌겠다는 게 아니라 세계적인 패션 회사를 만들겠다는 것이기 때문이
다.
지금 우리 회사는 압구정동에서 다시 동대문 근처로 둥지를 옮겼다. 사실 작년까지는 무
리하게 확장을 하다가 쓴맛을 보기도 했다. 직원들도 필요 이상으로 많이 뽑아 관리하는 데
도 어려움이 컸다. 이대로 가면 안 되겠다 싶어 다시 동대문 근처로 회귀했다. 중요한 건 내
실 있는 알짜배기 경영이라는 초심으로 돌아온 것이다. 올해는 외형적인 확대보다 내용적으
로 살을 붙이는 해로 목표를 수정했다. 자본도 만들어놓고 무리한 재투자도 가급적 조심스
럽게 진행할 계획이다.
사장 월급 250만원
눈치 코치 발달한 사회라고 하지만 아직 세상에는 순진한 사람이 많은가보다. 내게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도 그런 사람들이다.
"매출액이 10억을 넘겼다면서요? 우와! 그럼 돈을 얼마나 번다는 거예요? 재산이 몇 억이
나 돼요? 한 달에 월급만도 수천 만원이겠네요?"
이 정도면 경제 개념이 제로에 가까운 사람이다. 매출액과 순수익의 개념이 없는 것이다.
"예, 월급이요? 2백20만원 받아요."
그런 사람은 내 대답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다.
"정말이에요? 왜요? 왜 그거밖에 못 받아요?"
그러면 난 또 이런 대답을 들려준다.
"사장이 그것만 주라고 시켰거든요."
그랬더니, 어느 분이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어머나! 그 사장 굉장히 못됐다."
하지만 우리 회사 사장은 절대 못된 사람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직원 월급깎을가 고민하
는 치사한 악덕 기업주는 아니다. 다만, 조금 짠 건 사실이다.
솔직히 내 월급 2백50만원도 황송하다. 그다지 쓸 데도 없는데, 돈을 너무 많이 받는다.
사실 작년 8월까지 내 월급은 3백만원이었다. 그런데 그해 9월 법인을 만들면서 50만원 깎
았다. 난 월급쟁이 사장이다. 처음 사업 시작 할 때부터 그랬다. 사장인 내가 정한 회사 방
침이다.
물론 회사를 내 개인 재산이라고 생각하면, 모든 수입은 곧바로 '인 마이 포켓'해야 할 것
이다. 하지만 나 스스로 자신을 월급쟁이 사장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내 월급은 처음에는 2백만원이었다. 내가 내 통장에 매달 2백만원만 입금시켰다.
나머지는 회사 통장으로 이체시켰다. 지금은 총무가 따로 있어서 그렇게 하고 있다. 물론 회
사 통장에 들어 있는 돈은 모두 회사를 위해 재투자하는 용도로만 쓴다.
어쨌든 월급이 2백50만원이지만, 그나마 나 자신만을 위해 쓰는 돈은 50만원도 채 안 되
었다. 직원들 간식 사다 나르고 사무실 운영하는 데 이리저리 쓰다 보면 돈이 어느새 다 빠
져나간다. 그러니까 말이 월급 통장이지, 이마저도 회사 운영 비용으로 거의 사용되는 셈이
다.
그런데 하나 신기한 일이 있다. 월급쟁이 시절에는 카드까지 긁어가며 써대도 늘 돈이 부
족했는데 지금은 거꾸로 돈 쓸 곳이 별로 없다. 사고 싶은 물건도 없고 먹고 싶어 안달인
음식도 없다. 글쎄 돈에 대해 더 무감각해지는 것 같다.
그 이유를 생각해봤다. 월급쟁이 시절에는 노는 것과 일이 구분된 생활이다. 또 일도 스트
레스를 많이 받았다. 그런 이유 때문에 놀고 먹고 돈 스는 일에 더욱 치중했던 것 같다. 옷
도 잘 사 입어야 했고, 스키장도 많이 다녀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노는 것과 이르이 구분이 사라졌다. 일하는 게 곧 노는 것이라고나 할까.
그러니 돈 쓸 일이 없다. 옷도 잘 사 입을 이유가 없고, 놀러 다닐 시간도 없다. 그냥 사업
이 내 모든 것이 돼버린 것이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여유가 아닐까 싶다. 내가 돈을 쓰고 싶다면 언제든지 쓸 수 있기
때문에 정작 돈에 대한 욕구가 사라진 것 같다. 그리고 특별히 돈을 모야야겠다는 생각도
없다. 하루 이틀 사업할 것도 아니고 돈이야 나중에 저절로 모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 돈에 대한 집착이 없는 것 같다.
엘지애드 다닐 때, 난생 처음 적금이라는 걸 든 적이 있었다. 솔직히 그것도 순순하게 돈
을 모으려고 시작한 게 아니다.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어야 하겠기에, 어쩔 수 없이 통장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게 99년 5월에 만기였고 금액은 9백만원이 넘었는데도 아직 그 돈을 찾
지 않았다. 그만큼 내가 변한 것이다.
당시 적금을 부울 때만 해도, 3년 뒤에 9백만원을 타면 어디에 쓸까, 하고 행복한 고민을
했었다. 한 달에 한 번씩 적금을 부을 때마다 내 자신이 대견스럽다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불과 3년이 지난 지금, 그 돈쯤은 신경도 안쓰고 있다. 그만큼 돈에 대한 생각이 몰라보게
달라진 것이다.
단순히 경제적으로 넉넉해졌기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돈에 대한 가치관과 마인드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하여튼 난 지금 2백50만원 월급 사장이다. 비록 오너는 나지만, 내 자신
에게 그 이상의 월급을 줄 생각은 아직 없다.
잊을 수 없는 압구정동 시절 / 아직도 사무실에서 자냐?
요즘 난 거의 블랙 계통 옷만 입는다. 우리 '문군'의 옷이 바로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인
블랙 컬러가 많아서다. 나 자체가 걸어다니는 홍보맨이라 생각하고 우리 옷만 입는 것이다.
의류 업체에서는 연예인에게 옷 협찬을 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것도 일종의 광고 효과를
노리는 거다. 유명 연예인이 입고 방송에 나오면 그 연예인의 유명세 덕에 옷 역시도 시천
자의 눈길을 끈다. 그러다 '탤런트 누구누구의 옷'이라는 유행을 타면, 몇 억짜리 광고 만들
어 빵빵 내보내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부가 가치를 창출해내는 것이다. 매출과 수익도 동반
상승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특별히 연예인 협찬을 하지 않고 있다. 연예인측에서 우리 옷을 입어줄 테
니 협찬비를 대라고 제안해온 적이 있지만 한마디로 '노 생큐'였다. 굳이 우리가 돈 들여 그
럴 필요를 못 느낀 것이다.
그렇다고 잡지 광고를 내보내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가장 좋은 홍보 방법이 있다. 바로
내가 스타가 되면 만사는 오케이다. 내가 신문, 잡지, 방송에 우리 옷을 입고 나오면 그만큼
우리 옷도 저절로 알려지게 되는 것이다.
작년 9월 이곳 동대문으로 이사 오기 전 압구정동에 사무실을 차린 적이 있었다. 외형적
으로 회사가 가장 잘나가던 때였고 직원도 40여 명으로 가장 많았던 시절이었다. 그곳에서
의 추억은 아마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사무실에서 먹고 자며, 고생이라면 고생이었
던 그때. 의자에 앉은 채로 자는 갖가지 방법을 터득할 정도로 회사에서 20시간 이상을 보
냈다. 좀 편하게 자는 정도라야 사무실 한켠에 있는 침대에서 누어 자는 것이었다.
씻는 건 사우나 가서 대충 씻고, 밥은 근처 식당에서 월식을 했다. 옷도 사무실에서 그때
그때 갈아입었다.
압구정동 사무실에서는 내 전용 옷걸이가 따로 있었다. 새로 나온 우리 옷샘플을 걸어놓
는 옷걸이 뒤편에 또 다른 옷걸이가 바로 그것이다. 청바지며 티셔츠, 점퍼 등을 아무렇게나
걸어놓고 입었다 벗어서 휙 던져놓곤 했다. 며칠 전 벗어 던져놓았던 옷을 다시 집어서 걸
쳐 입기도 했다. 검정색이 대부분이라 빨아 입지 않은 티도 별로 안 났다.
'사무실의 가정생활화'는 1년이 넘게 이루어졌다.
98년 9월 처음 밀리오레에 '문군네'를 열었을 때부터 이듬해 1월까지도 그랬다. 밀리오레
는 아침 11시에 문을 열고 새벽 5시에 문을 닫는다. 그러니까 문을 닫고 집에 가서 바로 잠
자리에 듣다 해도 수면 시간은 고작 4시간 남짓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금싸라기 같은 4시간
도 주어지지 않았다.
새벽 5시에 문을 닫으면 사우나에 가서 2-3시간 자고 나오기 바빴다. 물건을 떼다 진열을
해놓아야 또 장사를 시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사무실을 열기 시작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아예 사무실에서 일하다 잠깐 자고, 일어
나 다시 일하는 생활의 반복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침 8시 30분이면 직원들이 출근을 하기 시작했다. 난 직원들이 출근하
는 소리를 들으며 의자에서 일어났고, 직원들이 다 출근하기 전에 사우나에 가서 씻고 다시
사무실로 들어왔다.
9시부터 시작되는 직원 회의. 팀별로 업무 보고와 지시가 있고 결재도 한다. 직영 매장을
돌아다니며 매출과 재고 관리에 주력하느라 하루 24시간이 언제나 빠듯했다.
회의가 끝나고 몇 군데 전화 통화 좀 하다 보면 금세 점심 시간이 닥친다. 요즘은 사무실
밖에 나가서 점심을 먹는데,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에도 지나가는 사람들을 힐끔거리며 본
다. 거리에서 소비자를 관찰하는 것이다. 일종의 직업병인 셈. 그 가운데 눈에 띄는 사람 몇
명만 유심히 살펴보면 된다. 한때 유행이란 누가 그리고 어떻게 만드는 것일까. 궁금해한 적
이 있었다. 흔히 첨단을 걷는다는 유행 선도자들이 궁금했고 그 사람들만 제대로 살펴 보아
도 소비자의 욕구가 무엇인지 금세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연구 끝에 내린 결론은 유행이
란 패션 기획자와 소비자들의 합작이라는 사실이다. 즉 구매자와 디자이너의 관계는 닭과
달걀 같은 존재다. 서로의 욕구와 기호가 맞물려 움직일 때 진정한 유행 상품이 탄생하는
것이다.
내가 주로 가는 곳은 도심 한복판 명동이다. 우리 옷의 주요 타깃들인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이 활개치는 곳이라 시간만 나면 그곳을 찾게 된다. 명동이야말로 우리 나라의 전통적
인 유행 진원지라고 생각한다.
점심을 먹고 와서는 사무실에서 신문을 읽거나 관련 업계 자료들을 점검한다. 나는 국내
외 패션 관련지는 다 읽으려고 노력한다. 관련 잡지나 신문을 꾸준히 읽다 보면 패션 흐름
이 보이기 때문이다.
저녁 9시면 직원들이 하나둘 퇴근을 시작한다. 우리 회사 퇴근 시간이 저녁 8시라고 했더
니, 악덕주라고 비난하는 분이 있었다. 하지만 난 퇴근 시간에 관해서도 직원들에게 당당하
게 말한다.
"우리 회사에 와서 복리 후생을 기대하지 말아라. 만약 그건 걸 기대한다면 아예 다른 회
사로 가라."
아직까지 우리 직원들은 나의 이런 방침에 적극적으로 잘 따라주고 있다.
직원들이 퇴근하고 나면 사무실엔 나 혼자만 남는다. 이런저런 사업 계획을 구상해보는
내겐 가장 소중한 시간이다.
회사에서 숙식하던 때는 저녁 11시쯤이 되면 어김없이 밀리오레 매장으로 향했다. 매출액
도 점검하고, 디스플레이도 요모조모 살펴본다. 손님 반응도 지켜보고, 직원들에게 문제점이
있는지도 알아본다.
그러다 보면 얼추 1시가 넘는다. 이 시간에 밀리오레 옆에 있는 도매 상가인 'Team 204'
로 간다. 그곳에도 우리 매장이 있었다. 역시 우리 매장을 꼼꼼하게 살펴보고는, 그곳 상인
들과 온갖 잡담을 나눈다. 겉으로 보기에는 잡담 같지만, 사실은 패션 흐름 등에 대한 정보
를 얻는 중요한 시간이다. 또 시장 상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 가게가 유난히 잘
된다는 소문을 듣게 된다. 그러면 왜 그 집이 잘되는지 이유를 꼭 알아본다. 분명히 거기에
는 내가 배워야 할 요소가 있게 마련이다.
새벽 5시. 동대문 상가들이 문을 닫는 시간이 돼서야 다시 압구정동 사무실로 돌아오곤
했다. 그러다 보니 그 당시 우리 직원들이 출근해서 바라보는 내 첫 모습은 늘 잠에서 막
깨어난 부스스한 얼굴이었다.
사실 그런 생활을 1년도 넘게 했으니 나 역시 체력적으로 무척 힘들었다. 문군네 가게를
시작하면서부터 방바닥에 등 붙이고 제대로 자본 적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제대로 쉬어본
적도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밀리오레가 매주 월요일에 쉬지만 그날도 쉬지 않았다. 새로운
디자인을 생각해야 하고, 판매 계획을 세워야 했기 때문에 쉴 틈이 없었다.
그 시절, 심지어는 일요일도 밤을 새우는 날이 많았다. 일요일도 매장은 운영되니까 물건
을 공급해줘야 했던 것이다. 직원들도 쉬는 일요일에 나 혼자 발바닥 부르트도록 뛰는 것이
다. 물건 공급하랴 매장 체크하랴 정신없이 낮밤을 쪼개 썼다. 새벽 5시쯤에야 밀리오레 문
을 닫고 나서 판매 직원들과 밥을 먹을 때도 있다. 밥 먹고 나면 판매 직원들은 집으로 뿔
뿔이 흩어지지만 난 다시 버스를 타고 압구정동 사무실로 왔다. 그 시간쯤이면 아침 7시가
넘는다. 8시 30분이면 직원들이 출근할 테니 눈붙일 시간이 없다. 그냥 사우나 가서 씻고 신
문 좀 보다가 바로 출근하는 것이다.
솔직히 그런 날은 몸도 피곤하지만 정신적으로 외롭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직원이 40
명 가까이 되는데 사장인 내가 나와서 물건 공급하러 다녀야 하나 싶으면 직원들에게 서운
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회사일을 마치 내 일처럼 해줄 수는 없는 것일까, 하고 말이
다.
밤을 새웠다고 해서 낮에 자는 일은 결코 없었다. 토막잠을 잘 시간도 없거니와 나 자신
을 그렇게 한가롭게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나도 사람인데 집에 가서 편하게 자고 싶고,
하루쯤 저절로 깰 때가지 실컷 자보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는가.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면
곧바로 나 자신에게 이렇게 타일렀다.
'남들처럼 잘 것 다 자면 어떻게 경쟁력을 얻을 수 있을까? 내가 가진 경쟁력이란 남들
자고 놀 때도 일하는 것뿐이다.'
아마 부모님께서도 나를 인정하고 믿어주시기 시작한 게 그 무렵이었던 것 같다. 가게 하
나로 시작해서 1년 만에 직원 20명이 넘고 연매출 20억원의 회사로 키워놓아서만은 아니었
다. 그보다 잠 못 자고, 쉬지 못하면서까지 일에만 몰입해 있는 내 모습을 보고 믿어주신 것
이다.
다시 벤처 정신으로
하지만 압구정동 사무실 시절 뼈아픈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바로 직원 관리를 효율적
으로 못한 것이다. 직원수가 늘면 업무 분담이 잘돼 매출이 늘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
니었다. 오히려 정반대 일들이 벌어졌다. 서로 일을 미루거나 누구 일인지 여할 분담이 전혀
안 되는 것이었다. 이른바 업무 누수 현상이 곳곳에서 벌어지기 시작했다. 일이 잘못돼도 책
임 소재가 불분명해지다 보니 모든 게 뒤죽박죽이었다. 직원 하나하나가 현재 무슨 일을 진
행중인지 전혀 체크가 안 되던 상황이었다.
여름 지나고 가을에 접어드는 시즌을 비수기로 친다지만 매출도 내리막 길을 걷고 있었
다. 보통 패션 업계는 봄, 여름인 S/S(Spring Summer)와 가을, 겨울인 F/W(Fall Winter)
두 시즌으로 나뉜다. 우리 문군도 9월 이후 슬럼프에 빠지게 된 것이다. 다지이너와 생산 업
체가 서로 커뮤니케이션이 안 맞아 보통 1주일 만에 나와야 할 물량이 한 달이 지나서야 생
산되곤 했다. 결국 가을 아이템을 제대로 준비 못한 것이다. 자금이 바닥나는 소리가 들렸
다. 매출보다 지출이 커지고 불필요한 낭비가 점점 많아지기 시작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직원들의 근무도 전보다 많이 해이해졌다. 창고에도 재고가 상이기 시작했다. 사업을 하면
서 가장 두려운 건 바로 재고가 늘어나는 거다. 시체말로 장난이 아니다. 뭔가 정리를 해야
할 시점이라는 걸 느꼈다.
결국 고심 끝에 압구정동에서 철수하기로 했다. 1년 만에 다시 동대문으로 둥지를 옮기기
로 결정한 것이다. 퇴사한 직원들의 공백도 메우지 않고 다시 처음 시작할 때의 마음가짐으
로 남아 있는 직원들을 독려했다. 다시 벤처 정신을 떠올리자며 말이다.
지금 우리는 신당동 근처 지하실을 임대해 사용중이다. 직원수는 모두 13명. 거래처 사람
들이 왜 지하로 옮기냐며 이상한 시선으로 물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겉으로 보여지는 번지
르르함보다 곱절 중요한 실속을 챙기기로 한것이다. 더 이상 주위 시선을 의식할 필요가 없
었다. 나도 모르게 자신감이 자만심으로 변질되던 것이었다.
이곳으로 이사한 다음 모든 게 하나둘씩 제자리로 돌아왔다. 직원들도 마음가짐을 새롭게
했고 매출도 조금씩 오르기 시작했다. 뭔가 일이 꼬일 때마다 속으로 막막하고 답답했지만
누구에게 물어볼 수 없는 심정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대기업 오너가 된 사람들은 이런 슬
럼프를 어떻게 극복했는지 정말 궁금했다. 하지만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는 말처럼 내게 닥
친 시련을 정면 돌파해야 했다.
사람들마다 새 천년을 맞아 꿈과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우리 문군의 새해 계획은 내실을
기하는 것이다. 패션 벤처 기업으로 육성, 코스닥에 상장시킬 계획도 세워두고 있다. 그리고
진짜 꿈은 회사를 더 알차게 꾸려 직원들 월급을 더 많이 주는 일이다.
2000년 들어서는 해외 출장도 잦아졌다. 홍콩 패션 위크, 파리 프레타 포르테 등 전시회에
참가해 세계 패션 트렌드를 읽으며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고 있다. 또 일본
의 대학로격인 하라주쿠를 찾아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일본의 10대 유행을 눈여겨보고 온다.
외국에 나가보면 우리 나라 패션 산업의 발전을 실감하게 된다.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이
대 후문에 가면 일본이나 홍콩보세옷이 많았지만 지금은 정반대다. 외국에 우리 나라 보세
옷이 상당수 진출해 있다.
요즘 하루 일과는 전과 별반 다르지 않다. 구리에서 출발, 9시까지 출근한 다음 회의와 진
행 상황을 체크하는 것으로 오전 업무를 마친다. 식사하고 매장을 다니거나 디자이너들과
수시로 기획 회의를 갖는다. 틈날 때마다 동대문 상가를 돌아다니며 안테나 역할을 하는 건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일과다. 퇴근 시간은 평균 10시.
간혹 나에게 성공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멀고, 더 큰 목표가 잇기 때문에 난 지금 성공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
'문군'이 오늘 여기에 이르기까지 위에서 말한 숨은 노력이 있었다는 것만은 말하고 싶다.
누구에게 인정받고 싶다는건 아니지만 나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게 꾸려온 것 같다. 작은
성공이라고 불러준다면 이런 노력 덕분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성 차별? 학력 차별? 우린 그런 거 몰라요
아직 내 나이 만 29세. 직원들의 평균 연령은 27세다. 20대 사장과 20대 직원들이 만드는
회사는 어떤 분위기인지 궁금할 것이다.
일단 무엇보다 자유롭다. 사장인 나부터도 한여름에는 배꼽티를 입고 활보하는데 직원들
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배꼽에 링을 하든 코에 링을 하든 마음대로다. 자신을 마음껏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 더 감각적인 옷을 디자인 할 수 있는 법이다. 신입 사원의 경우 이런 분위
기를 몰라 넥타이를 매고 정장 차림으로 출근하기도 하지만 하루 이틀에 그치고 만다. 캐주
얼 차림만큼 우리 회사의 분위기 역시 캐주얼이다. 특히 10대를 자주 만나야 하기 때문에
더 그렇다.
일도 자기 스케줄대로 움직여서 하면 된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기가 맡은 일을 스스로
알아서 개척해나가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직원 하나하나가 프로덕션인 셈이다.
1년 전쯤 파격적인 직원 채용을 한 적이 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직원을 뽑은 것이다. 그 동안은 나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만 채용했으
니, 하나의 관행이 깨진 것이다. 나는 이것을 우리 회사의 발전이라고 본다. 그 동안은 사실
일부러 나보다 나이 어린 사람만을 채용하려고 노력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초보 사장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아직은 내가 능수능란하게
직원을 다룰 줄 모른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나이 많은 사람이라면 더 어렵고 조심스러울 것
만 같았다. 직원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기보다 나이 어린 사장을 대한다는 건 여
간 껄끄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한마디로 일을 제대로 시키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비로소 그 관행을 깼다. 바로 30대 영업팀장을 영입한 것이다.
지금은 퇴사했지만 그분은 우리 '문군 트렌드' 대리점을 운영하고 계신다. 그 경험을 통해
나는 직원 관리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겼다. 앞으로도 나와 호흡이 맞고 우리 회사에 도
움이 된다면 나이 따위는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통솔력만 갖춘다면 노 프라블럼인 것
이다. 현재는 30대 후반의 개발실 패턴부장이 유일한 연장자다. 아무래도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까지 헤아리는 세심한 면이 있으시다. 젊은 사람들이 미처 가지지 못한 연륜을
보여주고 있어서 든든하다.
난 직원 채용에 대해 효용 가치를 으뜸으로 생각한다.
98년 9월에 밀리오레에서 처음 가게를 냈을 때다. 처음 한 달은 나 혼자 장사하랴, 물건
떼다 진열하랴, 잠잘 시간이 없었다. 그러나 정작 내가 안타까웠던 점은 잠을 못 잔다는 사
실이 아니었다.
나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시간이었다. 좀더 물건을 잘 떼 올 방법을 연구하고, 좀더 장사
를 잘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가게를 발전적인 방향으로 키울 방법을 연구할 시간 말
이다.
그래서 10월에 판매 직원 한 명을 채용했다. 흔히 사람들은 비용을 먼저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까 우선 나갈 돈만 생각하지. 그 사람이 창출해낼 가치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
는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직원 채용을 할 때는 그 사람이 창출해내는 효
용 가치를 가장 우선해야 한다.
그때도 나보다 장사를 더 잘하는 사람을 고용해서 더 많은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한 것
이다.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나 혼자 장사할 때보다도 매출이 엄청 올랐다. 뿐만 아니라 나
는 내 나름대로 가게를 키우는 데 시간을 쏟을 수 있어서 일석이조였다. 그것은 장기적으로
더 많은 매출과 직결되는 것이었다.
내가 직원을 뽑을 때 성 차별이나 학력 차별을 하지 않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사실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남성이니 여성이니 하는 구분은 그다지 필요가 없다. 마찬가지
로 대학을 나왔느니 안 나왔느니 하는 구분도 쓸모없다. 능력은 학벌이 보장해주는 게 절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나름의 능력이 있다. 다만 자기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일을 찾느냐 못 찾
느냐가 관건인 것이다. 오너는 그 사람이 가진 능력을 십분 살리기 위해 맞는 역할만 주면
된다. 그러면 누구든 열심히 일하게 돼 있다.
내가 직원을 채용할 때 가장 눈여겨보는 것은 그 사람이 과연 얼마나 일을 하고 싶어하는
가 하는 의지다. 이력서에 쓰여진 학력과 경력에는 눈길을 주지도 않는다. 그러다 보니 심지
어는 입사한 다음에야 그 직원의 학력을 아는 경우도 있다.
월급도 성별이나 학력은 반영하지 않는다. 오로지 능력별로 차등을 둘 뿐이다. 그렇다고
결과만을 중요시하는 건 아니다. 성실하게 일했는데도 결과가 나쁠 수 있다. 예를 들면 디자
이너 자신은 훌륭한 디자인을 했는데, 공장에서 제품이 제대로 안 나오거나 제품에 대한 소
비자 반응이 좋지 않을 수 도 있다. 이럴 때 그 디자이너에게 잘못을 돌릴 수는 없는 것이
다.
때문에 결과보다는 과정을 더 꼼꼼하게 따져 월급에 반영한다. 과연 그 사람이 일을 해나
가는 과정에서 얼마나 자기 일처럼 성심성의껏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우리 직원들의 약 70%는 무경력자다. 나는 경력, 무경력을 따져 채용하지 않는다. 참신하
게 일해보겠다는 의욕을 가진 사람이면 가장 먼저 뽑아서 임무를 준다. 그런 사람은 꼭 자
기 영역을 확보해나가면서 반드시 회사에 이익을 안겨준다.
물론 꼭 필요한 일에는 적절한 경력자를, 좀더 많은 보수를 주며 스카우트해오기도 한다.
그만큼 그의 경력과 능력을 인정해주겠다는 뜻이다. 또 당사자에게 이 회사에서 자신이 대
우받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하고 싶다. 그래야 더 열의를 가지고 일하기 때문이다.
물론 경력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 장점만 있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 경력이 없는
사람은 해야 할 일 하나하나를 일일이 지시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당연히 일을 해내는
과정도 더디고 답답하다. 또 발전 속도도 현저히 느리다.
이런 경우는 내 입장에서 보면 시행착오를 한 셈이다.
그렇더라도 그들을 버리기보다는, 끝까지 함께 나갈 수 있도록 격려한다.
"나도 무경력자다. 지금 배워나가고 있는 중이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배워나가고 있는
과정이라고 생각하자."
내가 진정 바라는 건, 초보자들이 경력자들과 함께 서로의 능력을 발휘하면서 발전해나가
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결국에는 자신들도 잘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으면 좋겠다.
오너가 되다 보니 예전 샐러리맨일 때가 생각난다. 만약 다시 샐러리맨이 된다면 누구보
다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주어진 일만 수동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일을 찾아서
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조직과 내가 함께 커나가는 길이다.
직원에게 투자하라
우리 회사에 입사하는 직원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것은 비전이다. 비전이란 한마디로 희망
이다. 이 비전만 확실하다면 월급이나 노동 강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만큼 비전
이란 한 조직을 끌어나가는 데 있어서 핵심 같은 존재다.
다행히도 우리 회사에 대해 잘 알고 입사한 사람들에게는 필요 이상으로 강조하지 않는
다. 그들 자신이 스스로 비전을 만들 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회사에 대해 잘 모르고
온 사람들에게는 틈틈이 비전을 심어준다. 그것은 우리 회사가 앞으로 어떻게 발전할지를
보여주는 청사진일 것이다.
"나는 욕심이 많다. 가까운 시일 안에 우리 나라에서 수많은 브랜드를 가진 패션 회사를
만들 것이다. 내가 그런 회사의 사장이 되면, 그때 각 브랜드의 사장이 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여러분들이다. 그러자면 여러분이 커야한다. 여러분이 커야 내가 클 수 있고, 우리 회
사가 큰다. 우리 회사가 비록 자본은 없이 시작했지만, 자본만 있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의
회사보다 더 가능성 있다는 것을 보여주자."
물론 말로만 꿈을 심어줄 수는 없다. 구체적으로 꿈을 실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나는 이것을 직원에 대한 투자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직원들의 해외 출장을 자주 보내는 편이다. 보통 일반 회사에서는 5년차 이
상은 되어야 해외 출장을 보낸다.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신입 사원까지 신경을 못 쓰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99년 1월, 실무 담당자 몇 명을 시장 조사차 일본에 보내줬다. 99년 7월 '홍
콩 패션 위크'에는 5명을 보냈다. 우리보다 훨씬 큰 회사도 한두 명만을 보냈는데, 우리는
당시 직원의 절반을 보낸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회사가 가장 많은 직원을 보냈다.
해외에 나가 보면 알게 모르게 견문이 넓어진다.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누가 알려주지 않
아도 뿌듯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직원에 대한 투자는 일을 하는 방식에서도 얼마든지 적용시킬 수 있다.
흔히 신입 사원은 위에서 하라는 일만 하게 된다. 그럴 경우 일을 하고도 자기도 실력이
발휘되는 걸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직원이 이렇게 일을 하겠다고 제안해오면 두말없
이 그렇게 해보도록 한다. 내 판단에 거절해야 할 상황이어도 눈 질끈 감고 우선은 한번 해
보도록 한다.
시행착오가 발생해도 문책을 하기보다는 스스로 깨닫게 한다. 그 사람은 자기 돈이 아닌,
회사 돈으로 시행착오를 했기 때문에 더 긴장해서 빨리 발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회사 직원이 아닌, 밖에서 일하는 디자이너에게 무조건 돈을 지원할 테니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보도록 한 적이 있었다. 그 디자이너는 여러 시행착오를 겪었다. 물론
그 손실은 고스란히 내 부담이었다. 하지만 그 디자이너는 지금 우리 회사 사람이다. 그처럼
전적으로 자신을 믿고 뒷받침해주는 사장과 함께 일해보고 싶다며 이력서를 가지고 온 것이
다. 누구든 빨리 능력을 갖추려면 시행착오를 거쳐야 한다. 실수를 두려워하면 발전은 그만
큼 더디게 온다. 물론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해서는 안 되지만....
사람들은 나에게 성공했다고 말한다. 물론 칭찬해주는 이야기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 말이
꼭 기분 좋은 것만은 아니다. '성공했다'는 표현이 왠지 현재완료형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마
치 모든 걸 다 이루어서 더 성취해야 할 게 없다는 것처럼 들린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모
습이다. 완료형이 아닌 진행형으로서의 성공을 하고 싶다.
나는 누누이 강조했다. 30세부터 본격적인 사업을 할 계획이라고. 그래서 지금의 과정은
단지 연습 게임일 뿐이고, 이제 막 본격적인 스타트 라인에 섰을 뿐이라고.
여기서 다시 그 말을 하고 싶다. 난 직원들에게 과감하게 투자한다. 어차피 지금은 연습
게임이기에. 정작 본 게임에서 성공하려면 직원들부터 능력있는 인물들이어야 한다. 직원들
이 제대로 능력을 갖추었을 때 우리 '문군'도 성장할 수 있다.
제2의 창업 시대를 맞이한다
"조촐해도 좋다. 우리가 직접 꾸몄다는 데 의의가 있다. 음식부터 기념식장 인테리어까지
우리 손으로 해보자."
99년 9월 11일. 창업 1주년 기념식을 앞두고 직원들을 이렇게 독려했다. 직원들이야 일하
기도 바쁜데 행사 준비까지 해야 되나, 하고 불만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의외로
아기자기한 즐거움을 찾는 편이다. 여자 친구에게 선물 하나 줄 때도 밤새 이벤트 기획을
꾸밀 정도다.
하물며 회사 창립1주년 기념 행사 아닌가. 아직은 큰 회사도 아닌데, 틀에 박힌 기념식 따
위는 하고 싶지가 않았다. 우리 식구끼리 아기자기하게 꾸며서 즐겁게 하루를 보내고 싶었
다.
결과는 만족 그 자체였다. 패션 감각 있는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 감각적으로 처리하는
법. 샌드위치 하나를 만들어도 예쁘게 장식할 줄 알았다. 거창한 파티는 아니어도, 50여 명
의 손님이 충분히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돌아갔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건, 그날 직원들에게 들려준 이야기다.
"여러분은 이 회사 창립 멤버들입니다. 왜냐? 우리 회사는 오늘 이 시간부터 본격적으로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랬다. 밀리오레에서 '문군네'라는 가게로 시작해서 1년이 되는 그날에 이르기까지는 회
사를 만드는 준비 과정이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사무실도 마련됐고 회사 시스템도 정비되었
으니 회사다운 회사가 된 셈이다. 바로 그날이 회사 창립일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고생해준 직원들 모두는 우리 회사의 창립 멤버가 된다는 이야기다.
나는 우리의 창립 멤버들이 자긍심을 가지고 우리 회사의 발전과 더불어 성장해가기를 바란
다. 우리 회사의 별명은 '창업사관학교'다. 지금까지 우리 회사에 몸담았다가 퇴사한 사람들
은 한 명도 빼놓지 않고 창업을 했다. 그것도 탄탄히 자리를 잡은 사람이 대부분이다. 처음
에는 필요한 것만 배우고 빠져나가는 사원들이 야속했지만 사장인 나부터도 창업을 했기 때
문에 누구를 원망할 수는 없었다. 그들이 잘되기를 소리 없이 응원할 뿐이다.
우리 회사는 창업사관학교다. 이 이야기는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다. 우리 회사를
거쳐간 직원 중에 정말 창립 멤버다운 창립 멤버가 한 명 있었다.
99년 5월 어느 날이었다. 밤 11시 30분쯤 되었는데 한 남자가 밀리오레3층 매장으로 와서
는 나를 꼭 마나보고 싶다고 했다. 그때 나는 15층 사무실에 있던 터라. 올라오시라고 하곤
그를 만났다. 그 사람은 시골 청년같이 수수한 첫인상을 지닌 30대였다.
어떻게 오셨느냐고 묻자, 전날 신문에서 나에 관한 기사를 읽고 무작정 찾아왔다고 했다.
그러더니 잠시 머뭇거리면서 말하길, "여기서 일하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그러고는 한마디
덧붙였다.
"월급은 필요 없어요. 그냥 함께 일하게 해주세요."
솔직히 당황됐다. 이럴 땐 뭐라고 말해야 하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뾰족한 생각이 떠
오르질 않았다. 대신 영화 속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영화라면 흔쾌히 채용할 텐데, 난 어떡하지?'
그러면서 이런 생각도 들었다.
'이 사람이 여기까지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을까?'
잠깐 예전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나도 대학 때 그랬다. 막연하게나마 내가 일하고 싶은
곳에 불쑥 찾아가보곤 했던 것이다. 직장 다니면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광고 회사에서 하
는 기획일이 마음에 들지 않아 PD를 꿈꾸며, 무작정 일하겠다고 덤비는 상상을 하곤 했었
다.
하지만 그는 나이가 너무 많아 보였다. 아무래도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부담스러웠
다. 이야기를 나눠보니, 나이가 턱없이 많은 건 아니었다. 낚시를 좋아해서 야외를 다니다
보니 얼굴이 까맣게 그을린 탓이었다.
전공은 산업미술학과라고 했다. 우리 사업과 관련이 없는 것도 아니어서 이력서를 한 통
가져와보라고 했다. 그는 금세 얼굴이 확 펴지더니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바로 이력서를 들고 다시 찾아왔다.
나는 그의 그런 모습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하겠다는 의지가 강한 사람이라면 무
슨 일을 맡겨도 잘 해내리라는 믿음이 들었다. 나는 그런 직원이 절실했다. 그는 그날부로
나와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우리 회사의 VMD일을 맡았다. VMD란 매장 디스플레이와 인테리어 업무를 주로
하는 직종이다. 그는 지금까지도 처음 보인 의지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다. 자신이 적극적으
로 일을 찾아 하는 편이고, 또 굉장히 열심이다.
언젠가 방송에 나가 그 친구 이야기를 했다. 그랬더니 다음날부터 전화통에 불이 나고, 사
무실로 사람들이 찾아오는데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 가운데 2명을 채용했다. 물론 적극
적으로 일을 하겠다는 의지가 높아서 뽑은 사람들이다.
이들이야말로 참다운 창립멤버다. 큰 회사도 아닌데 함께 일해보고 싶다는 의지 하나로
시작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리 회사가 오늘에 이르는 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훌륭한 창립 멤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위에 말한 사람들 역시 퇴사해서 창업에 성공했
다.
5. 나의 사랑 / 창업만큼 흥미진진한 러브 스토리
그녀를 본 순간 바람기가 발동하다
'심증은 있지만 확실한 물증이 없다.'
약혼녀 조미경은 나의 과거에 관해 틈만 나면 시시콜콜 물어오곤 했다. 그러나 나, 이럴
땐 한없이 무거운 입을 자랑한다.
"내가 사랑을 느낀 여자는 너뿐이라니까."
하지만 용의 주도한 그녀, 끝가지 물고늘어질 태세다. 그렇다고 나 역시 모든 걸 고백해버
릴 만큼 순진하지는 않다. 그럴 때일수록 긍정도 부정도 한하는 이른바NCND(No Confirm
No Deny)정책으로 일관해야 한다. '그것이 알고 싶다'의 문성근처럼 집요해지면 이렇게 말
한다.
"야! 내가 노느라고 여자 사귈 시간은 없었다니까 그러네."
믿거나 말거나지만 이 말만큼은 사실에 가깝다. 학창 시절 나이트와 록 카페를 수없이 들
락거렸지만 부킹에만 열올리는 막가파 청년은 아니었다.
오로지 매순간 진실한 마음으로 한 여자씩만을 조신하게 사귀었을 뿐이다. 문제는 이런
사실조차 여자 친구에게 고백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오로지 그녀가 첫사랑인 것처럼 잡아
뗐을 뿐이다.
때문에 지금 이 순간, 나로서는 약간의 갈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진실을 밝히자니 여자
친구가 달려들어 꼬집을까 두렵고, 진실을 감추자니 내 양심에 빨간 불이 들어올 것 같아서
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결심했다. 양심 선언하기로.
지금 우리 회사 기획실장인 조미경. 그녀를 만난 건 96년 6월 12일. 나와 그녀가 각각 26
세, 21세일 때다. 그 당시 나는 엘지애드에 갓 입사한 신입사원이었고, 그녀는 대학 1학년생
이었다.
당시 삼성동 무역센터에서 세계광고대회가 열리고 있었는데, 내가 근무하는 회사도 그 대
회에 참여하고 있었다. 마침 내가 근무하는 부서가 그 대회 실무 담당 부서였기 때문에 신
입 사원인 나는 선배들과 함께 그 행사에 참여하고 있었다.
마침내 대회 마지막 날. 그날은 다음 개최국인 이집트 주최로 만찬 행사가 준비되고 있었
다. 본행사는 오후 5시에 끝나고, 만찬은 7시로 예정되어싸.
만찬 때가지는 2시간의 공백이 있었다. 부서 동기와 내가 그 2시간을 때우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가 행사장으로 막 들어가려던 때였다. 회전문 한쪽을 밀고 들어가는데, 안쪽에서 같은
회전문을 밀고 나오는 여자가 있었다. 그냥 무심코 흘겨보았는데, 순간적으로 그녀가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때의 느낌? '괜찮은데'였다. 첫인상은 무척 깔끔하고 신선했다. 물론 지금까지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다시 되돌아 그녀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한동안 잠잠했던 바람기가 그녀를
보자마자 발동했던 것이다.
그녀는 밖으로 나가자마자 벤치에 앉았다. 나도 자연스럽게 그녀 곁에 앉았다. 그리고 흘
금흘금 그녀를 훔쳐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조안 리의 '사람과 성공은 기다리지 않는다'를 읽
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그래.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되지'하고 나 자신에게 타일렀다. 영문도
모르고 따라 나온 동기녀석은 그제서야 내 표정에서 심상치 않음을 발견하고는 실실 웃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감 잡았어!'하는 눈치였다.
나는 약간의 여유를 두고 지켜보다가, 마침내 학창 시절 갈고 닦은 부킹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항상 그랬듯이, 내 방법은 솔직 담백하게 접근하기였다.
"여기 광고 대회에 오셨나 봐요?"
그녀는 나를 본 듯 만 듯 짧게 대답했다.
"네."
그 대답만으로도 이미 난 그녀를 꼬실(?) 자신감이 생겼다.
"왜 오셨어요?"
"그냥 관심이 있어서 한번 보러 왔어요."
"학생인가 봐요."
역시 그녀의 대답은 간단 명료했다.
"네."
"전공이 광고 관련 학과인가요?"
"아니요, 컴퓨터학과예요."
상대방이 학생이라면 가장 중요한 건 신뢰감을 주는 것이다. 꽤 순진해 보이던 그녀에게
나는 명함을 주며 나를 소개했다. 그리고 이 행사에 업무차 참여하고 있노라고 했다. 회사
이야기를 하니까 그녀가 신기하다는 듯 호기심을 보였다.
그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마치 동문회에서 만난 선배라도 된 듯이 그녀에게 부드럽고 친
절한 말투로 광고 대회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마침내 그녀에게서 나에 대
한 경계정보가 해제되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10분 정도 흘렀을까. 만찬 시간이 가까워졌다.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생각나지 않았을 바로
그때.
"오늘 이집트 주최로 만찬이 열리거든요. 우리랑 같이 들어가서 이집트 요리 먹고 갈래
요?"
오! 순진한 그녀! 한 방에 걸려들었다.
"그러죠 뭐."
나중에 알고 보니, 그때 그녀는 몹시도 배가 고팠다고 했다. 그런데 마땅히 밥 사 먹을 돈
도 없고 해서 잠시 의자에 앉아 있다가 막 집에 가려던 참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녀로
서는 내 제안이 아주 괜찮았던 셈이다. 더욱이 그녀는 먹는 걸 엄청 밝히는(?)여자였다.
그날의 만찬이 더욱 근사하고 아름다웠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난 그녀에게 신사적으로 보였고 그녀가 식탁에서 당황하지 않고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세
심하게 배려해주었다. 헤어질 때는 다른 여운을 남기지 않고 굿바이 인사를 했다.
드디어 다음날, 내 삐삐에는 낯선 전화번호가 하나 찍혔다. 전화를 해보니 어제의 그녀였
다. 두 주먹을 움켜쥐고 '앗싸!'를 외쳤다. 어제 내 덕분에 즐거웠다는 음성 메시지가 날아온
것이다. 그녀는 완전히 내 포위망에 결려든 것이다. 우리는 다음주 과천 대공원역 1번 출구
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물론 그녀가 순순히 약속을 한 건 아니었다. 디자인 패턴
을 사진으로 찍어 오는 게 숙제라고 그녀를 돕는다는 단서가 붙었다.
CC와 헤어지다
한편, 당시 내게는 사귀는 여자 친구가 있었다. 이른바 CC였다. 만난 지 꽤 되었는데, 그
즈음에는 서로 뭔가 엇나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난 지금의 여자 친구를 만나면서 갈등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새로 사귄 여자 친구를 만
나면 만날수록 '바로 이 여자다'하는 확신이 드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전에 사귄 여자 친구
와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사실 그 여자 친구도 처음 사귄 여자는 아니었다. 그 이전에 사귀던 여자가 있었다. 내가
무지 좋아했던 여자였다.(아무래도 여자 친구가 이 글을 본다면 분명 난 전치 3주감이다!)
그런데 그 좋아했던 여자에게서, 키 180cm에 몸매 좋고 잘생긴 이 킹카(?)도 채였던 것이
다. 그때 내 마음의 상처를 어찌 글로 표현할 수 있을까.(실연의 아픔을 겪어본 독자들은 아
마 아실 겁니다.) 어쨌든 그 버림받는 심정을 아는지라 CC에게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러면서 점점 시간만 흘렀다. 시간이 갈수록 두 여자에게 더욱 미안해졌다. 결국
결론을 내려야만 했다.
그때 다시 생각한 것이 나를 차버렸던 여자였다. 그때 그녀는 부여잡는 나를 정말로 모질
고도 냉정하게 뿌리쳤다. 물론 그 때문에 그녀에 대한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도 없었고, 그
녀를 내 마음에서 빨리 지우는 데 도움이 되었다. 바로 그것이었다. 헤어질 때는 냉정하게.
그것이 당사자를 위해서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난 그녀와 모질게 헤어졌다.9새삼스레 그녀에게 너무 미안한 마음이든다. 그녀에게
난 정말 나쁜 인간이었다. 부디 그녀의 용서를 바란다.)
비록 마음은 아팠지만, 석연치 않은 관계를 청산하고 나니 한편으로는 홀가분해졌다. 그로
부터 나의 과거를 알 리 없는 순진한 내 여자 친구와 나의 달콤한 연애가 시작됐다.
어쩌면 여자 독자분들은 이 시점에서 내게 욕을 할지도 모른다.
"이 인간, 순전히 바람둥이 아니야! 나빴어 정말!"
하지만 좀더 냉정히 생각해보자. 내가 한 사람에게 마음의 상처를 준 건 부인할 수 없는
잘못이다. 그러나 정말 아닌 건 다시 생각해도 아니다. 다시 말해, 마음이 떠난 사람들끼리
는 더 이상 연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난 바람둥이는 아니다. 내가 바람기가 있다고 고백했지만, 내가 생각하는 바람기란
그저 여자들에 대한 호기심이자 관심일 뿐이다. 이 정도의 바람기는 남자라면 누구나 다 갖
는 감정 아닐까. 다만 나는 곧장 행동에 돌입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
내가 바람둥이가 아니라는 이유는 진정으로 내 마음이 가는 여자만 사귀었다는 것이다.
모든 경험은 약이다. 그래서 연애 경험도 다양할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나의 연애학 1장 1
조 1항은 '사랑을 해보면 인생을 안다'는 것이다.
사랑을 시작할 때의 그 가슴 떨림. 상대를 향해 나아가는 뜨거운 마음, 도취감.... 그러나
사랑이 항상 해피 엔딩은 아닌 법이다. 조심스럽게 시작해도 얼마든지 황당하게 끝날 수 있
는 것이다. 사랑은 마치 한 편이 소설과 비슷하다. 기승전결이 있고 갈등과 화해 혹은 이별
이 있다. 그 시간 동안 겪게 되는 마음의 갈등, 정신적인 방황.... 그래서 연애가 끝나면 마치
인생을 도통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때문에 연애를 해본 사람과 해보지 않은 사람은 사람을
이해하는 폭이 다르고 삶을 바라보는 시선도 다르다. 그러므로 연애는 선택이 아닌 필수 과
목이어야 한다.
나의 연애 경험 역시 실제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었다. 예를 들면, 광고 회사 시절 광고를
만들며 상황 설정이나 심리 묘사, 카피를 뽑을 때에도 도움이 되었다. 다양한 연애 경험들이
아이디어를 제공할 때가 많았다.
지금 옷을 만들고 옷을 파는 데도 마찬가지다. 특히 우리는 여성 의류를 만드는 회사라
여자들의 심리나 욕구를 민감하게 건드릴 수 있는 센스가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여성을
'좀 아는' 나로서는 큰 도움이 되는 게 사실이다.
아무래도 나의 바람기는 옷 사업을 하라는 뜻으로 신이 주신 선물이 아닌가 싶다.
사랑도 남들과 다르게
내가 정말 싫어하는 단어들이 있다.
'무난하다. 좋은 게 좋다. 다 그런 거지 뭐.'
독자들은 내가 무엇을 싫어하는지 짐작할 것이다. 그렇다, 나는 평범하거나 비슷하게 살아
가는 것을 너무 싫어한다. 앞에서 힘주어 강조했지만, 난 다른 사람과 같은 건 죽어도 못 견
딘다. 뭔가 달라도 달라야만 한다. 그만큼 난 '튀고' 싶다. 나의 모든 행동거지는 그 신조로
똘똘 뭉쳐 있다.
연애라고 다를 게 없다. 난 남들처럼 하는 연애는 무조건 싫다. 누가 봐도 '기발하다' '재
미있다'는 소리를 듣는 연애를 하고 싶었다. 그러자면 시간과 돈이 투자되어야 한다. 난 그
런 시간과 돈은 조금도 아끼지 않는다.
그래서 이왕이면 창의적인 연애를 하기 위해 무진장 애썼다. 뭘 먹어도 다르게 먹고 싶고,
데이트를 해도 다르게 하고 싶고, 선물을 주고받아도 다르게 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밤새
워 아이디어를 짜고 또 짜고 하는 날들도 수없이 많았다.
지금도 잊지 못하는 반지 사건.
애인에게 반지를 건네는 방법1
2년 전 화이트 데이였다. 이미 한 달 전 발렌타인 데이에 초콜릿을 받았기 때문에 이번에
는 내 차례였다. 나름대로 3월 1일부터 보름 동안 고민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재미와 감동
을 동시에 주는 선물을 할 수 있을까.
마침내 화이트 데이, 난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사탕 3개를 사서 작은 박스 안에 넣었다.
그 박스에는 간단한 메모식 편지도 썼다.
'파란색 사탕은 네가 먹고, 노란색 사탕은 나에게 먹여주고, 빨간색 사탕은 열어봐.'
사실 빨간색 사탕은 내가 꺼내 먹고 그 속에 작은 반지를 넣어두었던 것이다. 난 그녀가
빨간색 사탕을 뜯었을 때 나올 반지를 보녀 느낄 환희와 감동을 떠올리며 나 스스로 대견해
했다.
역시 치밀한 준비를 한 보람이 있었다. 그녀는 한펴으로는 너무너무 재밌어 하고 그러면
서도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나 치밀한 가운데도 실수는 있었다. 그만 반지가 그녀
손가락보다 큰 것이었다. 내 딴에는 그녀 손가락을 유심히 살펴보고 선택한 사이즈엿는데,
보기보다 그녀 손가락이 너무 가늘었던 것이다.
애인에게 반지를 건네는 방법2
또 하나의 반지 사건. 한번은 반지를 예쁘게 포장해서 신촌 지하철역 사물함에 넣었다. 그
리고 그녀를 만나 그 열쇠를 건네주며 말했다.
"미경아, 내가 지금 급하게 회사에 다녀와야 되거든. 내 졸업증명서와 성적증명서를 떼서
지하철역 사물함에 좀 넣어줄래."
그러고는 바쁜 듯이, 그녀와 헤어졌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또 한번 즐거웠다. 이른
바 두번째 반지 깜짝쇼가 시작된 것이다.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 지하철역에 도착했다. 흐뭇
한 미소를 짓고 있을 그녀를 상상했는데 이게 웬일? 그녀가 사물함 앞에서 울고 있는 게 아
닌가.
아, 그녀가 너무 감동한 나머지 우는구나. 싶었는데 나를 보자마자 그녀가 소리를 꽥 질렀
다.
"오빠 지금 장난이 심한 거 아냐? 사물함이 활짝 열려 있더라구. 신촌역이 사물함이 맞긴
맞는 거야? 학교 수업까지 빼먹고 왔단 말이야."
이럴 수가!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사물함은 그녀 말처럼 활짝 열려 있었고, 그 안에는
정말 아무 것도 없었다. 부랴부랴 역 사무소롤 달려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역 사무소 아저
씨는 사물함 물품 보관소로 가보라고 했다. 오래도록 안 찾아가는 사물함 물건을 모아서 보
관하는 곳이라고 햇다.
둘이서 손 잡고 부리나케 달려갔다. 그런데 바로 거기에 내가 준비한 반지가 있는 게 아
닌가. 눈물이 핑 돌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나 스스로의 아이디어에 기특해하느라 사물함 열쇠를 잘못 채우
고 온 것이었다. 관리 아저씨들이 누군가 찾아가겠지, 하고 보관해주신 것이었다. 다행히 그
반지를 되찾고 보니, 어느 선물보다 더 값져 보였다. 난 애써 분위기를 잡아가며 그녀의 가
느다란 손가락에 그 예쁜 반지를 살짝 끼워주었다. 그녀는 조금 전의 화나고 놀란 가슴을
뒤로하고 배시시 웃기 시작했다. 어느 선물이나 사연이 있는 법이지만 우리에게 그 지하철
반지는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사건이 된 셈이다.
그러나 그 반지는 지금 여자 친구 손가락에 없다. 그만 분실했다는 것이다. 그녀가 망설이
다 그 사실을 이실직고하던 날, 나로부터 싫은 소리를 엄청 들어야 했다. 간만에 큰소리치며
혼내주었다.
지금 그녀의 손가락엔 노 액세서리다. 그녀도 차마 사달라고 조르지 못하고 내 눈치만 살
피고 있다. 나, 그래도 모른 척 외면하고 있다.
꽃 한 다발에 감동하는 그녀
'데이트의 이벤트화'가 연애학 1조 2항이었던 나, 그러나 지금 나는 예전과 사뭇 달라졌다.
사업을 시작하면서부터다. 너무 바빠지다 보니 그런 아기자기한 재미를 생각할 시간이 없어
진 것이다. 지금은 그녀가 사달라는 것조차 제대로 못 사주는 무늬만 애인으로 전락했다.
실은 그게 내 본모습이다. 초반부 환심을 살 때는 간, 쓸개 모두 빼줄 것처럼 잘 사주다가
어는 정도 주도권을 잡았다 싶으면 지갑 여는 일이 드물다. 그냥 입으로만 여왕 모시듯 할
뿐이다.
학교 다닐 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선배들의 충고 때문이기도 하다. "인석아! 여자
는 항상 잘해주면 안 돼. 그러면 잘해주는 줄 몰라요. 어쩌다 한 번씩 잔잔한 감동을 줘야
효과가 있다구!"
"형, 좀 자세히 얘기해줘요. 예를 들면 어떻게 해야 잔잔한 감동을 받는데요?"
"간단해, 꽃 한 다발이면 돼. 어떤 여자든 꽃에 약하거든."
역시 인생 선배는 선배였다. 이 말이 진리라는 걸 후배들에게 꼭 당부하고 싶다. 꽃 한 다
발, 단돈 1천원으로도 여자는 무장 해제된다.
난 약혼녀 조미경과 지금까지 4년 가까이 사귀면서 꽃 선물을 딱 4번 했다. 말 그대로 연
중행사였다.
여느 연인처럼 처음 사귈 때는 싸울 일이 거의 없었다. 길에서 토닥거리는 사람을 보면
'왜 저럴까'하며 서로 깔깔거리기 바빴다. 서로 좋아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라는데, 싸운다는
건 있을 수 없었다. 아마 서로 잘 보이려고 애를 쓰다 보니 싸움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서서히 의견이 엇갈리기 시작했다. 서로 알 만큼 다 알았다 싶으니까 싸움이 시
작되는 것 같았다. 정말 만날 때마다 죽어라고 싸웠다.
난 웬만하면 상대방에게 맞춰주고 화가 나도 참는 편이다. 그런데 여자 친구는 다르다. 막
내라서 그런지 화가 나거나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다. 혼자 부르르 화
를 내고 그냥 가버리는 날도 있었다.
본격적으로 싸우기 시작한 날은 홍대 앞에서 '키치'라는 옷가게를 운영할때였다. 무슨 일
인지 소리를 버럭 질러가며 싸웠는데, 여자 친구가 "우리 끝내!" 한마디를 남기고는 사라져
버리는 게 아닌가. 나는 그런 경우 절대 붙들지 않는다. 갈 사람은 그냥 가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다.
이튿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기분이 영 찜찜했다. 당시 옷가게에 아르바이트생을 구하기 전
이라 여자 친구가 장사를 거들고 있었다. 곧장 가게로 다이얼을 돌렸다. 끝내자며 돌아섰으
니 혹시 가게가지 안 나온 건 아닌가 확인해보고 싶었다.
따르릉, 그런데 불행중 다행이라고 여자 친구가 전화를 받았다. 난 얼른 끊어버렸다. 입가
에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여느 때처럼 칼퇴근하며 홍대 쪽으로 향했다. 꽃다발을 뒤로 감춘 채 옷가게로 들어갔다.
여자 친구가 날카롭게 째려보는 순간, 그 절묘한 타이밍에 맞춰 꽃다발을 내밀었다. 냉정하
게 돌아서려던 여자 친구? 그 꽃다발을 보더니 피식 웃는 게 아닌가.
두번째로 그녀에게 꽃 선물을 한건, 그녀가 앓아 누웠을 때였다. 치료약이 아닌 내 꽃 선
물에 감동한 그녀는 벌떡 일어나 완쾌했다. 예고 없이 의정부 그녀 집으로 꽃 배달을 시킨
것이다.
세번째 꽃 선물은 또다시 화해의 제스처였다. 그때도 별 이유 없이 싸운 것 같다. 확실하
지는 않지만 그때도 내 잘못은 크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어쩌랴. 이해심 많은 내가 먼저
화해해야지.
그때도 회사 다닐 때였는데, 가진 돈이 넉넉하지 않았다. 그래도 꽃은 사줘야 되겠다. 해
서 대학로 꽃집을 차례차례 순례했다. 천원이라도 더 싸게 사보려고.
난생 처음 장미 99송이를 손에 쥐었다. 언젠가 여자 친구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자기는
잎사귀나 가시를 떼지 않은 장미를 신문지에 둘둘 말아 받는게 더 좋더라고. 그래서 비닐
포장 대신 신문지로 포장해 건네주기로 했다.
밤 10시쯤 장미꽃 99송이를 안고 의정부 그녀 집으로 갔다. 그녀 집 문 앞에 꽃다발을 살
며시 내려놓고는 핸드폰 폴더를 열었다. CF 속 주인공처럼 전화 속 그녀에게 지금 창문을
열어보라고 말하고 끊었다. 마치 1시간처럼 길던 1분 후, 핸드폰이 울렸다.
"올라와!"
그녀는 장미를 내가 보는 앞에서 항아리에 옮겨 꽂았다.
"근데 왜 하필 99송이야?"
"나머지 한 송이는 너를 향한 내 사랑이야."
아무튼 장미 99송이 덕분에 냉전을 종식할 수 있었다. 정말 우리에겐 장미란 비둘기처럼
평화를 상징하는 고마운 존재였다. 우리는 서로 싸워도 오래가지 않았다. 가장 길었던 냉각
기간이 1주일 정도였다. 다시 만나도 언제 그랬냐는 듯 싹 잊어버린다. 그만큼 성격이 잘 맞
는 편이다.
네번째 꽃 선물은 최근의 일이다. 일요일이었는데, 그녀와 둘이서 사무실에 나와 일하고
있었다. 그녀가 무척 힘이 드는지 책상엘 얼굴을 파묻고 잠이 들었다. 나는 조용히 사무실에
서 빠져 나와 꽃가게를 찾았다.
그날따라 눈에 띄는 꽃가게는 모조리 문을 닫았다. 내가 꽃가게 찾아 삼만리일 때 그녀는
사라진 나를 찾으려고 핸드폰을 걸어왔다. 그런데 마침 핸드폰 배터리가 다 돼 전화를 받을
수 없었다.
2시간쯤 흐른 뒤 겨우 꽃 한 송이를 사 들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사무실에 도착하니 여자
친구는 울고 있었다. 힘든 자기를 혼자 놓아두고 사라진 줄 알았던 모양이다. 그녀 앞에 말
없이 꽃을 들이밀자 그녀는 어쩔 줄 몰랐다. 눈물과 웃음이 뒤범벅된 그녀, 내겐 너무 아름
다운 당신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데 이유가 있을까? 물론 예쁘고 키 크고 날씬하고 돈 많고, 이런
이유들이 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진정으로 좋아하는 데에는 이유가 없다고 본다. '너, 그
사람 어디가 그렇게 좋냐?'라는 질문의 정답은 '그냥'이 아닐까 싶다. 굳이 이유를 찾을 필요
없을 만큼 그냥 좋은 게 진짜 좋은 것이 아닐까.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 이유? 궁리해보면 몇 가지가 떠오른다. 그 중 으뜸은 소탈함이다.
요즘 연애하려면 남자들은 돈깨나 있어야 한다. 영화 봐야지, 차 한잔 마셔야지, 술 마시면
노래방에 가고 싶다는 그녀.... 아무리 잔머리를 써도 몇 만원은 쉽게 사라진다. 드러내놓고
남자에게 뭔가 사달라고 조르는 여자들도 많다. 친구들끼리 모여 각자 애인에게 받은 선물
을 자랑하기도 한단다. 바로 그런 자리에서 기죽고 싶지 않은 것도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런
데 약혼녀 조미경에게는 그런 게 없다. 근검절약이 몸에 밴 여자다. 더욱이 내가 사업을 하
면서부터는 바쁘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뭐 사달라고 조르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런 그녀도 한 번씩 화나면 무섭다. 아마 인내의 한계에 이를 때즘인 듯 싶다. 옷을 사달
라고 조를 때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선뜻 사준 적이 한 번도 없다. 미루고 미루다가, 겨
우 한 번씩 사주는 정도다.(이 부분에선 부모님께 죄송합니다. 부모님 생신도 잘 못 챙기면
서 애인은 옷 사줬다고 서운해하실까 봐서요.)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애인 자랑 하나만 더. 내 애인은 따뜻한 아내 같은 느낌을 줄 때가
있다. 예전에 어디 놀러 갈 때면 그녀는 꼭 먹거리를 손수 준비해 온다. 냉장고에서 그냥 이
것저것 가져오는 게 아니라 그야말로 정성을 듬뿍 가져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김밥을 싸 와도 한마디로 예술이다. 어떻게 그런 갖가지 모양을 낼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다. 클로버 무늬 김밥에 소도 먹음직스럽게 색 배합을 해서 싸 온다. 그럴 때마
다 난 애인이 너무 사랑스럽다. 여성스럽고 가정적인 것 같아서, 그녀와 나는 내년 초 결혼
하기로 약속했다. 물론 부모님 허락도 받았다. 처음 애인 집에 인사드리러 갔을 때 예비 장
인 어른이 했던 말씀이 생각난다.
"자네, 내 딸 책임질 거야? 그래 결혼해."
그녀와 함게 살 미래는 생각만으로도 너무 행복하다.
나이 들어도 섹시한 남자이고 싶다
남자는 귀엽다느 말보다 멋있다는 말을 좋아한다. 그런데 약혼녀 조미경은 나에게 늘 귀
엽다고 한다. 조성모보다 훨씬 귀엽다며 볼을 꼬집기도 한다. 그러면 난 속으로 말한다. '어
험 다섯 살이나 많은 오빠한테 감히 귀엽다니.'
하지만 가끔 그녀가 누나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여러분은 아는가? 여자들이 남자에게 귀엽다고 말하면 그건 그 남자가 섹시하게 보인다는
뜻이라는 걸. 그러니 혹여 어떤 여성이 당신에게 귀엽다고 덤벼들면 당신은 그녀에게 섹스
어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주 아닌 여자(?)만 아니라면, 그 또한 기분 나쁠 리 없겠지요?
섹시함, 바로 내가 추구하는 바다. 난 모든 여자들에게 섹시하게 보이고 싶다. 왜? 매력
있으니까. 내가 몸에 달라붙는 옷만 입는 이유도 바로 섹시하게 보이고 싶어서다.
전에 직장 다닐 때 베스트 드레서였다는 건 이미 말한 바 있다. 물론 직장인이이라 정장
에 넥타이 차림이었지만 난 그 한계 속에서도 튀고 싶었다.
나는 머리부터 발 끝가지 신경 쏟지 않는 곳이 없다. 이른바 토털 코디네이션. 물론 옷에
만 신경 쓰는 건 아니다. 전체적인 이미지를 만들 졸 아는 게 중요하다. 내가 궁극적으로 추
구하는 이미지는 깔끔하고 지적이며 도시적이고 세련된 분위기다. 물론 기본은 섹시함이다.
그래서 와이셔츠를 입어도 꼭 컬러 있는 것을 입었다. 그때 좋아했던 건 파란색 남방이었
다. 정장 차림이지만, 바지는 붙는 스타일을 선호했고 신발도 밋밋한 정장 구두는 멀리했다.
꼭 패셔너블한 구두만을 신었다. 머리는 무스를 발라서 정리해주고.
내가 좋아하는 컬러는 블랙. 블랙은 센스가 느껴지고 날씬하게 보인다. 그래서인지 패션
종사자들은 블랙을 좋아하는 경향이 짙다. 또 멋쟁이들 가운데는 블랙을 즐겨 입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내가 섹시하게 보이려고 몸에 꼭 끼는 옷을 좋아했지만 문제가 생겼다. 취향은 변하지 않
았는데 몸매가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전에는 꼭 기는 옷을 입고 돌아다니면 지나가는
여자들이 거의 눈길을 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물론 지금도 여자들이 쳐다본다. 하지만 그
시선에서 느껴지는 게 다르다. 예전처럼 탄성의 눈길이 아니라 조금은 비웃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도 그럴 것이 꼭 끼는 티셔츠 아래로 불룩한 배가 튀어나온 것이다.
한번 살을 뺀다고 마음먹으면 빼는 성격이지만 아직은 바빠서 그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더 이상은 안 된다는 생각이 들면 독한 마음을 먹고 다이어트에 돌입할 것이다.
패션에 관한 여자 친구와 나의 취향은 궁합이 서로 맞지 않는다. 그녀는 개가 니트 같은
헐렁하고 편안한 느낌의 옷을 입었으면 한다. 바지도 헐렁한 것으로 입으라고 말한다. 머리
에도 무스를 바르는 대신 덥수룩하게 하고 기르고 다니라고 한다.
말이 나온 김에 여자 친구에게 부탁하고 싶다.
'제발 나에게도 내 마음대로 옷 입을 자유를 달라!'
난 여자 친구가 어떻게 입고 싶어하든 마음대로 하게 한다. 예를 들면 여자 친구가
" 나 한번 머리 길러볼까?"
"그래 길러봐. 한번 해봐."
이렇게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그런데 여자 친구는 내가 좀 튀는 차림을 하겠다면 난리도
아니다. 아예 협박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기만 해봐라. 다신 안 만난다."
그 말이 무서워서 내 마음대로 못 입고 산다.
그런데 딱 한 번 내 마음대로 한 적이 있다. 난 빨간 머리가 하고 싶었는데 여자 친구가 또
안 만나겠다며 협박하는 바람에 못 하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여자 친구와 크게 싸우고는
'헤어지기'로 합의했다. 그 일이 있고 나자마자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빨갛게 염색해버렸다.
물론 기분 전환도 할 겸해서 말이다.
그랬는데, 며칠 뒤 화해하는 바람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내머리는 상황 종료
인 상태, 그녀도 어쩔 수 없어는지 피식 웃고 말았다.
지금 내가 가장 하고 싶은 건 귀고리를 하는 거다. 오래 전부터 하고 싶었는데, 여자 친구
때문에 못 하고 있다. 정말 난 너무 제약이 많다. 난 남들이 흔히 입는 옷을 입으면 모든 의
욕이 떨어진다. 외출하기도 싫고, 일하기도 싫고, 노리고 싫고, 밥 먹기도 싫다.
우리 '문군'도 이런 맥락에서 만들었다.
난 내가 입고 싶은 옷은 소비자도사 입는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내가 입고 싶지 않은
옷은 소비자들도 입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런 점에서 우리 옷은 내가 입고 싶은
옷이기도 하다. 내가 좋아하는 취향인 것이다.
난 요즘 매주 토요일이면 테크노바에 간다. 여자 친구랑도 가고 직원들과도 우르르 간다.
테크노바는 우리 옷이 추구하는 분위기와 비교적 잘 어울린다. 그래서인지 얼만 전 테크노
가수 이정현으로부터 의상 협찬 제안이 들어오기도 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 직업인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나는 내가 좋아하고, 소비자가 좋아
하는 옷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나 역시 누구 못지않게 행복한 사람이다.
어쨌거나 난 과거도 현재도 그리고 미래도 섹시한 남자로 살 것이다. 아마 난 늙어서 머
리가 하얗게 세도 섹시한 남자라는 소리를 들으며 살고 있을 것 같다.
그녀는 투자 가치가 있는 사람
늘 내가 주장하는 바이지만 여자 친구는 날 너무 좋아한다.
그런데 정작 이런 내 말을 듣는 사람들은 나에게 손가락질까지 하며 비웃는다.
"천만에! 모르긴 몰라도 네가 더 좋아서 죽는 것 같다."
그 말을 듣고 생각해보면, 또 그 말이 맞는 것도 같다. 여자 친구 얼굴만 떠올려도 저절로
기분이 좋아지니까. 또 전화목소리만 들어도 좋아죽겠는 건 엄연한 사실이다. 얼굴도 예쁘고
인상도 좋고 성격도 좋고, 왜 이렇게 난 그녀가 좋은 걸까?
싼 옷도 고급스럽게 소화하는 그녀. 여자 친구를 본 사람들은 다소 의외라는 표정을 짓는
다.
'아니 어떻게 저런 참한 여자를?'
말만 안했지. 표정에 딱 그말이 써 있다. 내 옷차림이나 헤어스타일을 보면 여간 튀는 게
아닌 모양이다. 그런데 여자 친구는 소탈하고 평범한 분위기니, 놀랄 만도 하다.
우리 커플을 보고 어떤 분이 말했다. 자고로 바람둥이 남자는 순진한 여자를 좋아하고, 바
람둥이 여자는 순진한 남자를 좋아한다고. 듣고 보니 그 말도 일리가 있는 것 같다. 내 여성
편력에 비해 그녀는 연애 한번 못 해본 순진둥이였다.(그녀는 내가 처음 사귄 남자라고 매
번 주장한다.)
여자 친구는 옷 입는 취향도 나와 다르다. 나는 튀어야만 직성이 풀리는데 비해 그녀는
차분하게 입는 걸 좋아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함께 실을 걸으면 애인 사이라고 보기가 쉽지
않다. 그저 조금 아는 사이로나 볼까.(그래도 여자 친구가 나 만나면서 조금씩 과감해지기는
했다. 얼마 전에는 머리 염색도 하고....)
하지만 난 여자 친구 옷 입는 취향에 전혀 간섭하지 않는다. 나처럼 튀지는 않지만, 그녀
의 옷 입는 센스는 내가 보기에도 수준급이라고 생각한다.
그녀에게는 언니가 셋이나 있다. 그러다 보니 어릴 때부터 옷을 사지 않아도 언니 옷이
많았다. 그녀 바로 위 언니가 멋쟁이여서 코디 감각도 시나브로 늘었다고 한다.
대개는 사람마다 어울리는 스타일이 있다. 어떤 사람은 정장이 어울리고, 또 어떤 사람은
캐주얼이 어울린다. 그 둘 다 어울리는 사람은 드물다. 그런데 여자 친구는 정장은 정장대
로, 캐주얼은 캐주얼대로 잘 소화해낸다. 그녀가 정장을 입으면 품위가 있어 보이고 거꾸로
캐주얼을 입으면 편안하고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녀가 비싼 옷을 입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그녀가 입은 옷을 본 사람들은
다들 비싼 옷인 줄 안다. 그건 옷을 고급스럽게 입을 줄 아는 코디 감각 덕분이다.
그녀의 옷 입는 센스도 센스지만 몸매 역시 받쳐준다. 보통 여자들이 소화하기 힘들어 하
는 니트 원피스도 완벽하게 소화할 정도의 몸매다.
그녀가 한때 사진 작가들의 모델도 했다면 아마 짐작이 갈 것이다. 얼굴 이미지도 한국적
이라 한복 모델을 하기도 했다.
그녀의 유일한 핸디캡은 '엉뚱하다'는 것. '엉덩이가 뚱뚱하다'는 뜻이다. 그래도 옷을 입어
서 보기 싫은 정도는 아니다. 그 정도면 섹시한 정도로 봐줄 수 있다.
나 역시 여자가 섹시해 보일 때가 제일 좋다. 그래서 그녀도 야하게 입었으면 좋겠다. 하
지만 이런 내 주문은 들은 척도 안 한다. 정말 고집불통이다. 그러면서도 나한테는 간섭이
심하다. 이건 너무 불공평하다.
"미경아! 날마다 섹시하게 입으라는 건 아니야. 그냥 어쩌다 한 번씩이라도 야하게 입어봐
라. 응?"
조미경의 학력은 대학교 1년 중퇴다. 정확히 말하면 자퇴다. 어디까지나 그녀가 선택하고
결정한 일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내 책임도 상상 부분 있음을 시인한다. 그녀의 자퇴를 은근
히 부추긴 장본인이 바로 나니까. 그런 점에서 난 그녀를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다. 사실은
내가 그녀를 책임지고 싶어서 자퇴를 부추겼지만....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컴퓨터 관련학과 1학년생이었다. 난 그녀에게 종종
묻곤 했다.
"졸업하면 뭐 할 생각이니?"
그러면 그녀는 뚜렷함 목표를 대지 못했다. 졸업하고 취직하겠다는 정도의 막연한 대답뿐
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의 그런 문제는 곧 내문제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이미 그녀와 결혼을 결정한 상태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녀의 미래는 곧 내 미래이기도 했다.
당시 나는 광고 회사에 근무하고 있었다. 광고 PD가 되고 싶어 입사했지만 정작 내게 주
어진 일은 광고 PD가 아닌 기획 업무였다. 나로선 회사 생활이 만족스러울 리 없었다. 난
하루하루 다른 꿈을 꾸었다. 내가 정말로하고싶은 일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회사에서 패션 회사 광고 업무를 하게 되면서 패션 분야에 새롭게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여자 친구를 만나면 그런 내 마음을 이야기하게 되었고, 여자 친구 역시 나의 그
런 문제에 많은 관심을 보여주었다.
그러던 차에 그녀는 자퇴를 결정했다. 나 역시 그녀의 U턴 결정에 찬성했다. 어차피 자기
분야라고 여겨지지 않는다면 더 이상 시간 낭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녀는 자퇴를 결정
하더니 디자인 학원에 등록을 했다. 내가 보기에도 그건 뜻밖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 해 겨울 어느 날이었다. 그녀를 만났더니. 대뜸 자신이 삼성그룹에서 운영하는
디자인 스쿨에 합격했다는 것이다. 미국식 교육으로 유명한 디자인 센터 사디(SADI).
그 학교라면 나도 익히 들어 조금은 알고 있었다. 삼성에서 디자이너를 전문적으로 발굴
하기 위해 만든 3년 과정의 학교로, 이미 우리 나라에서 제대로 만든 디자인 학교로 정펼이
나 있었다. 입학 자격도 고교 졸업 이상이면 주어지고, 실력 위주로 뽑는 학교였다. 그런데
그런 학교를 디자인과는 전혀 동떨어진 전공을 한 그녀가 합격한 것이다.
그녀가 새삼스럽게 보였음은 물론 이다. 그녀가 그토록 재능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감
탄했고, 또 신기해했다.
그녀는 1년 뒤에야 집에 대학을 자퇴했다고 털어놓았다. 물론 디자인 학교 합격 사실과
함께. 그 소식을 들은 그녀 부모님은 놀라고 걱정했다. 다른 아이들처럼 대학 나와서 취직하
면 될 일을 난데없이 디자이너가 되겠다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등록금을 스스로 해결하고 싶어했다. 나로서는 그녀의 뜻이 너무도 신통하고 대견
해서 선뜻 등록금을 내주었다. 연봉 1천8백만원대의 월급쟁이에, 씀씀이도 만만치 않던 나로
서는 모아둔 돈이 한푼도 없었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어 일단 1백50
만원을 그녀에게 주었다. 그건 그녀에 대한 투자이지만, 장기적으로는 나에 대한 투자라고
생각했다. 이미 의류 사업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있던 시점이었다.
이후에는 옷가게 '키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했고, 월급을 주며 학비에 보태도록 했다.
그녀는 지금 삼성 디자인 스쿨 2학년을 휴학하고 우리 회사에서 기획실장겸 디자이너로
근무중이다. 회사가 점점 커지면서 그녀를 팀장에서 기획실장으로 발령을 낸 것이다. 사실
그전까지는 다른 직원들과의 불협화음이 생길까봐 회사 외적인 일을 도와주고 있었다. 그녀
로서도 현장 경험이 좋은 공부가 될 것이라고 여겨 이렇게 결정한 것이다. 언젠가 그녀는
다시 복학해 3학년 과정을 마칠 게획이다.
지금 우리 사이는 연인 사이라기보다는 사업을 위한 동반자적인 파트너다. 아무래도 같은
공간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업무적인 대화를 더 많이 나누고 있다. 난 회사 직원으로서 동
료로서 그녀를 대할 때마다 든든해진다. 그녀에게서 디자이너로서의 능력을 확인하기 때문
이다.
그녀는 확실히 감각이 있다. 옷을 디자인하는 데 있어 기본이라 하는 컬러 감각이나 배색
감각이 뛰어나다. 사실 옷은 아주 미세한 컬러로도 그 느낌이 확 달라지는 법이다. 그녀는
그런 차이를 정확하게 짚어내고, 어울리는 컨셉트에 맞게 배치하는 능력도 있다.
더구나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 바로 일에 관한 그녀의 집중력이다. 그녀는 한번 일에 몰두
하면 철저하게 그 일에만 빠진다. 김밥 하나 만드는 데도 모양과 색깔을 고려해서 밤새워
만드는 성격이라면 아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옷을 만드는 재료인 원단을 정확히
수량에 맞추어 주문하는 일에도 그녀가 없으면 안 된다. '이 정도 원단이면 옷 몇 벌이 나오
겠다' 하는 것도 기획실장의 중요한 업무다. 직원들에게 싫은 소리 못 하는 나를 대신해서
할말을 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선 나보다 낫다. 경영이란 곧 사람 관리다. 대부분의 창업 실
패는 바로 조직과 사람 관리를 못 하는 데에서 빚어진다.
여러모로 그녀에게 투자한 보람을 느낀다. 정말이지 내가 사람 하나는 제대로 보았다는
생각에 흐뭇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녀에게 더 많은 투자를 할 생각이다. 삼성 디자인 스쿨을 졸업하고 나면 해외 유
학도 보낼 생각이다. 2000년 들어 프랑스 프레타 포르테 패션쇼에도 참관시켰다. 세계 패션
동향과 국내 시장이라는 숨과 나무를 두루두루 알게 해주고 싶다. 그건 사랑하는 사람을 위
한 일이기도 하지만, 내 사업을 키우는 일이기도 하다.
정말이지, 그녀는 투자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
함게 일하고 함게 사랑하고...
우리에게 특별히 데이트 시간이라는 게 없다. 우선 낮 시간은 같은 사무실에서 하루 종일
같이 일한다. 근무 시간인 만큼 특별한 미팅 시간이 아니고서는 서로 찾지 않는다. 점심 식
사도 함께 할 때가 거의 없다. 난 내 스케줄대로, 그녀는 동료 직원들과 함께 해결한다.
저녁 9시, 직원들이 퇴근을 시작하면서부터 그녀와 둘만의 시간이 생긴다. 비로소 우리의
데이트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무실이어서인지 우리의 대화도 일의 연장이기 일쑤다.
너무 무미건조한 연인이라고? 그래도 바라보는 서로의 눈길은 달콤쌉싸름(?)하다는 말씀.
우리의 10년 뒤 모습? 혹은 20년 뒤의 모습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같다. 여전히 우
리는 한 회사에서 사장과 여러 부랜드 가운데 한 브랜드의 디자인팀장으로 일하고 있을 것
이다.
내가 본격적으로 패션 사업을 하기로 마음먹고 준비에 들어갔을 때다. 국내외 여러 패션
회사에 관해 그 시작부터 성장 과정을 분석해보면서 하나의 공통점을 찾아냈다. 성공한 회
사 대개가 디자인실장이 오너라는 것이었다.
패션 회사는 이성과 감성이 조화를 이루어야 성공할 수 있다. '관리'라는 이성적인 측면과
'디자인'이라는 감성적인 측면이 함께 맞물려야 한다는 뜻이다. 오너가 아무리 관리를 잘해
도 디자이너가 호흡을 맞춰주지 않으면 그 회사는 절대 성공할 수 없다. 결국 디자이너와
오너가 확실한 파트너여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측면에서, 난 애인을 볼 때마다 마음 든든하지 않을 수 없다. 나와 그녀, 우리 두 사
람이야말로 우리 회사의 기본 재산인 셈이다. 심지어 이런 생각도 든다. 만약 우리가 망한다
해도, 우리 두 사람이 함께할 수 있기에,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그런 점에서 그녀
는 내게 엄청난 백그라운드인 셈이다.
혹시 이 글을 읽고 오해의 여지가 있을지 모르겠다. 하나는, 어떻게 사랑마저도 그토록 사
업과 연결시켜 철저하게 계산적으로 하느냐고, 또 하나는 결국 당신 회사는 남편과 아내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가족 경영 회사가 아니냐고.
먼저 첫번째 오해를 풀어보자. 어디까지나 우리 두 사람의 만남은 이성간의 관심에서 시
작되어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인생의 동반자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처음
부터 장래 사업 계획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인위적으로 결합된 남녀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
처럼 함께 장래를 계획하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같이 해나갈 수 있는 일을 찾아
낸, 다소 행복한 커플이라고 생각한다.
생각해보자. 연애할 때는 모든 게 좋기만 하다. 그러나 막상 결혼이라는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치면 이런저런 문제들로 갈등을 겪기 시작한다. 더욱이 결혼을 하면 문제는 심각해지기
도 한다. 연애가 감정 놀음이라면, 결혼은 일상을 함께 나누는 생활 공동체이기에 자질구레
한 문제들로도 쉽게 갈등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이럴 때, 둘이 공통분모가 많으면 많을수
록 그 갈등은 극복되기 쉽다.
그러니까 결혼 이후의 문제를 미연에 방지하는 차원에서라도 뭔가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공통된 화제도 있고, 생활에서뿐만 아니라 일에서도 영원히 파트
너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 오해, 그러니까 가족끼리 다 해먹느냐는 지적이다. 이에 관해서는 정말이지 오해
다.
우리 회사는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지만, 팀별 운영 체제다. 그러니까 디자
이너와 영업, 판매 각 팀이 독자적인 작업을 할 수 있도록 하고, 경영자인 내가 전체를 총괄
해서 경영한다. 여기서 디자인팀의 경우 하나의 디자인팀만 있는 게 아니다. 내 계획대로라
면 우리 회사는 머지않아 수십 개의 브랜드를 가질 것이다. 이때 각 브랜드별로 디자이너팀
이 꾸려질것이다. 따라서 내 애인도 그 여러 브랜드 가운데 어는 한 브랜드의 디자인팀을
맡게 되는 것이다.
난 직원에 대한 투자를 과감하게 하자는 경영 원칙을 갖고 있다. 직원 한사람 한사람의
실력이 모여 우리 회사의 실력이 되고, 곧 우리 회사의 경쟁력이 된다고 믿는다. 나는 지금
함께 고생하는 직원들이 모두 우리 회사 창립 멤버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나 혼자만의 바람
일지도 모르지만, 창립 멤버들에게 과감하게 투자해서 우리 회사의 큰 자산으로 삼고 싶다.
내 애인도 그들 중의 한 사람일 뿐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혹시나 우리 창립 멤버들이
다 떠난다 해도 애인만큼은 아내로서 영원히 곁에 있을 것이기에. 최후의 보루라는 믿음이
있다. 최근 전면적인 조직 개편을 했다. 회사 규모도 커졌지만, 그만큼 효율적인 조직 관리
를 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그 조직 개편 때 여자 친구가 기획실장직에 임명되었다. 난 영업이나 마케팅에 주력하고,
그녀에게 디자인팀 업무를 일임한 것이다. 보다 많은 권한이 주어진 그녀는 능력껏 소신껏
잘 해나가고 있다.
도대체 그 애인과는 언제쯤 결혼할 생각이냐고?
애초에는 만난 지 꼭 4년이 되는 올 6월 18일 화촉을 밝히기로 했으나 집안 사정으로 내
년 초로 연기했다. 며칠 전 난생 처음 사주라는 걸 보기도 했는데 자식 3명을 주르르 낳으
면 사업도 잘 풀린다고 해 기분이 좋았다. 요즘 뭔가 남들과 차별화한 결혼식을 열심히 구
상중이다. 결혼식장을 패션쇼처럼 진행해볼까 생각해본다. 여러 모델들과 함께 우리 옷을 입
고 워킹을 하다가 마지막에 우리 둘만 웨딩 드레스와 정장을 입고 등장하는 거다. 모든 일
의 이벤트화, 재밌지 않은가. 인생을 그렇게 길지 않다.
애인은 약혼식 대신 언약식을 하자고 졸랐다. 애인 관계인 것은 알지만, 우리의 관계를 공
식화하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여자들은 뭐든 확실히 대두고 넘어가야만 안심이 되는 모양이
다. 쯧쯧, 나를 못 믿는 건지 원....
결국 애인의 주장대로 창업 1주년인 지난 99년9월11일, 전 직원이 모인 자리에서 언약식
을 가졌다. 너무 조촐했지만 풍선 등으로 분위기를 띄웠다.
그날 애인은 내게 시계 선물을 받고 싶어했다. 예전부터 노래를 불렀던 선물이었다. 그런
데 어찌어찌 하다 보니 시계 살 시간을 놓치고 말았다. 결국 우리는 주고받는 선물 없이 아
주 실속 있는(?) 언약식을 치렀다.
"꼭 결혼하겠습니다."
이렇게 외치고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뽀뽀 선물만을 주고받은 채 언약식을 마쳤다.
제2장 나 자신을 사랑해야 사업도 성공한다
들어가는 말
바람 불지 않는 날 바람개비를 돌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바람개비를 앞세우고 내가 달
리면 된다. 그렇다 사업도 역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게 참 중요하다. 참신하고 독특한 아
이디어와 탄력적인 사고, 그리고 맨땅에 헤딩할 수 있는 MH정신까지 갖춘다면 금상첨화다.
사랑도 그렇지만 모든 일에 열정만큼 중요한 건 없다. 하지만 가장 먼저 사라지는 건 열정
이므로 그것만으로 똘똘 뭉쳐서는 곤란하다. 의욕만 가득하고 능력이 부족한 사람을 상상해
보라.
사업을, 그리고 성공을 하려면 필요한 정신이 바로 '나를 사랑하기'다. 사업을 하다 보면
늘 생각지 못했던 장애물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게 마련이다. 아무리 치밀하게 준비했더라도
이런 복병들을 피하기는 어렵다. 주위 환경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럴 때 가장
중요한 건 역시 긍정적인 생각이다. 나 자신의 판단을 최대한 믿어주고 돌파구를 찾아야지
'내가 왜 그랬을까'하며 한숨만 쉬다가느 오히려 헤어나오기 어려워진다.
문인석도 그런 어려움 때문에 숱한 불면의 밤을 보내야 했다. 직원들이 모두 돌아간 사무
실에서 혼자 남아 풀리지 않는 문제를 안고 끙끙대며 밤을 수없이 샜다. 과연 다른 오너들
은 이런 문제를 어떻게 이겨냈을까. 하며 벙어리 냉가슴을 앓은 것이다. 그는 그런 어려운
일을 있을 때마다 초심을 떠올렸다고 한다. 수많을 시행착오 끝에 결정한 패션 사업. 발바닥
이 부르트도록 동대문을 휘젓고 다니던 그때, 밤을 낮 삼아 일하느라 늘 시차에 적응을 못
하던 그때로 돌아가보는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건 정보다. 인터넷의 발달로 이 세상을 정보 홍수가 됐다. 너무 많은 정보
가 떠돌아다니다 보니 어떤 게 실속 있는 정보인지 헷갈릴때가 많다. 여기서 중요한 건 내
게 꼭 맞는 맞춤 정보를 찾아내는 것이다. 마치 광부가 금광을 캐듯 내게 필요한 정보가 어
디에 있는지 찾아내는 능력이 필요하다. 예전에는 노하우가 중요했다면 지금은 노웨어가 중
요한 시대가 된 것이다.
이렇게 열심히 준비하면 기회가 와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준비 과정을 게을
리 하면 기회가 내 곁에 스치고 지나치는 줄도 모를 수 있다. 그만큼 기회는 준비하는 자의
몫이다. 더불어 인생은 저지르는 자의 것이다. 늘 노심초사 걱정만 하는 사람은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뭔가 저질러보고 시작하는 결단력도 때에 따라 필요하다. 문인석의 창업 성공
비결과 또다른 계획에 귀기울여보자.
편집자주
1. 창업을 꿈꾸는 사람을 위하여
기회는 준비하는 사람에게만 온다
자주 만나는 젊은 친구들에게 가장 많이 받는 단골 질문이 있다.
"나도 내 사업을 하는 게 꿈인데요. 어떻게 하면 되죠?"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을 보면 몇 년 전 내 모습이 떠오른다. 직장 생활에 대한 회의를
느끼며 얼마나 내 사업, 내 일을 갈망했던가. 마찬가지로 지금 그들도 자기 일을 갖고 싶다
는 생각이 클 것이다. 이런저런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월급에 연연하는 생활에 과감히 마침
표를 찍고 싶을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나를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볼지도 모른다. 지금 내
결과만을 바라보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 사업체를 꾸려간다는 것
이 얼마나 어려운 과정을 겪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드물다. 나는 자기 사업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이 점을 제대로 알았으면 한다.
1. 망설이지 말고 지금 당장 시작하라!
세상 사람들은 몇 종류의 스타일로 나눌 수 있다.
첫번째는 '좋겠다'만을 연발하는 사람들이다. 남 잘됐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얼마나 좋을
까"하며 부러워하지만 어디까지나 남의 이야기로 끝나는 스타일이다.
두번째는 '나도 돈만 있으면...'식의 사람이다. 남 잘됐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우선 배부터
살살 아파오는 것이다. 오로지 자신이 그보다 못한 건 돈이 없거나 배경이 없어서일 뿐이라
고 생각하는 스타일이다.
세번째는 '까짓 거 나도 해봐?'하는 인간이다. 남의 성공담에 자극받는것까지는 좋은데, 확
률적으로 망설이다 제풀에 죽는 형이다.
마지막 네번째는 '나라고 안 될 것 없잖아'하는 사람이다. 자신만만하게 일단 저질러놓고
보는 인간이다.
나는 이 가운데 네번째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인간형이다. 당신
은 이 가운데 몇 번째 스타일에 속하는지?
첫번째나 두번째 인간형이라면 언급을 피하고 싶다. 하지만 세번째에 해당하는 분이라면
충분히 그 가능성을 믿어 한 말씀 해주고 싶다.
기회는 가만히 있다고 오는 것이 아니다. 변화와 발전을 주는 기회란 항상 저지르는 자에
게 온다는 걸 잊지 말자.
2. 내게 맞는 일,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라
왜 자신 있게 시작하지 못하고 망설일가. 그건 다름아닌 두려움 때문이다. 혹시나 실패하
면 어떡하나 하는.
하지만 솔직히 누군들 두려움이 없겠는가. 나도 마찬가지다. 그야말로 '잠 못 이르는 수많
은 불면의 밤'이 있었다. 두려움은 내 안에 있는 가장 큰적이다.
내가 가장 먼저 마주했던 고민은 '내가 가진 능력이 무엇인가'하는 거였다. 도대체 어떤
일이 나에게 가장 맞는 일이고, 어떤 일을 해야 내가 행복할까. 하는 고민이었다.
나 자신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자신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나 자신이니까.
하지만 그때까지 난 나 자신을 잘 모르고 살았다.
나는 남의 말을 잘 안 듣는 경향이 있다. 집에서도 그렇다. 부모님의 강요에는 죽어도 복
종하지 않았다. 그런 내가 밖에 나간들 달라질 리 없었다. 회사 생활을 할 때도 상사가 시키
는 일이 내가 보기에 불합리하다 싶으면 죽어도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방향
이 상사에게 먹혀들지 않으면 답답해서 일하기가 싫어졌다.
결국 난 내 일을 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누구의 간섭도 안 받고, 내가 판단하고 결정
해서 하는 일을 해야 했다. 물론 실패할 때 하더라도 일단은 내 멋대로 하고 싶었다. 인생은
저지르는 자의 것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래서 나온 결론이 창업이었다.
그 다음 봉착한 문제는 과연 어떤 창업을 할 것인가였다. 무엇보다 내가 관심이 있고, 내
가 잘할 수 있는 분야여야 했다. 사업을 한다고 해서, 내 적성과 상관없이 무조건 '뜨는 업
종'만을 선택할 수는 없었다. 설사 그다지 잘나가는 분야가 아니라도 내가 잘할 수 있는 분
야면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잘할 수만 있다면 충분히 그 업계에서 선두가 될 수 있으
므로.
마침내 패션 사업이라는 판단에 닿았다. 엘지애드에 다니면서 광고 업무차 패션 관련 정
보들을 많이 보았는데, 그때부터 내 분야라는 확신이 들었다. 더구나 내 개인적인 취향조차
패션에 남다른 감각과 주장이 있는 터였다.
다음은 저지를 차례였다. 바로 이 시점에서 나 역시 '시작해? 말아?'하는 갈등이 있었다.
과연 최선의 선택인지에 대한 의 문이 들기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해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어갔다. 지금 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은 어떤 실패를 해도 괜
찮은 나이지만 조금 더 지나면 실패할 수조차 업는 나이가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지금 돌이켜보건대 그때 만일 회사를 계속 다녔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 모른긴 몰라도 최연소 사장이 되려고 목표를 세웠을 것이다. 난 어디서든 튀는 걸 좋
아한다. 그렇지 않으면 존재 가치를 느끼지 못할 정도다.
그 당시 내 망설임은 최선의 선택인지에 대한 의문 때문이었지,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
은 아니었다. 물론 실패라는 가정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내게 큰 문제가 안 되었다. 실패
하면 다시 시작하면 된다.
3. 그 일에 대해 얼마나 아는가. 뭘 준비해야 하는가
이 시점에서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없고 자신감이 있는 사람은 어디서건 으뜸이 된다. 하
지만 실패할까봐 전전긍긍하는 사람은 늘 2인자밖에 될 수 없다.
세상은 냉정하다. 1인자만이 인정받고 기억될 뿐이다.
이왕 시작한 일, 1인자가 되고 싶은 건 누구나의 희망 사항이다. 실패할까 두려워하는 마
음은 지금 당장 휴지통에 분리 수거해서 벌려야 한다. '된다' 생각하고 달려들어도 '될까말
까'인데 '될까?'한다면 안 봐도 비디오다.
그렇다고 무작정 묻지 마 창업을 할 수는 없는 오릇, 준비를 해야 한다. 자신이 그 일에
대해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는 지 냉정하게 생각하고, 준비에 돌입해야 하는 것이다. 가령
김밥집을 창업한다면 먼저 서빙 아르바이트나 주방 보조 들을 거쳐야 한다.오토바이를 타고
배달이라도 줄기차게 다녀봐야 한다. '손님들이 몰리는 시간, 가장 인기 좋은 메뉴, 한 번 온
손님을 다시 찾게 하려면'등 다양한 경험을 미리 맛봐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실제 상황에
접해본 사람이 창업하면 실패할 확률은 그만큼 적어진다. 곧장 실전에 들어가면 곧장 간판
내리기 십상이다.
4. 준비되었으면 당장 시작하라
준비가 되었다면 이젠 시작하자, 컴퓨터로 아무리 많은 작업을 해놓아도 엔터키를 누르지
않으면 실행되지 않는 법이다. 몸으로 부딪치지 않으면 공염불에 불과하다. 일찌감치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면 나만 손해다. 어제의 잘못을 굳이 떠올릴 필요도 없고, 내일 있을지
모를 돌발 상황을 시뮬레이션해볼 필요는 더더욱 없다. 일단 저질러보는 거다.
일을 벌리고 나면 어떻게든 수습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이런저런 시도를 해 볼 수밖에 없
다. 나는 그 과정이 발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시도해본일이 실패한다 해도 결과적으론
이득인 셈이다. 실패라는 상황을 극복하려고 몸부림치는 과정에서 누구에게도 배울 수 없는
나만의 노하우를 터득하게 되는 까닭이다.
그렇다면 우선은 실패해도, 그 실패를 발판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다음은 이전
보다 더 나아갈 수 있다. 이것이 발전이고, 성공이다.
5. 실패가 두렵다면 실패에 대비하면 된다
만약 실패가 두려워 망설이다 그만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 사람은 실패를 겪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발전도, 성공도 없다. 그저 고만고만한 현상 유지의 인생을 살
뿐이다. 어느 날 우리 사무실로 무작정 일을 하고 싶다며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26세 청년
이었는데 패기만만해 보여 같이 일을 하다가 인천과 안양 쪽에 우리 대리점을 오픈하며 자
연스럽게 퇴사했다.
직원에서 거래처 사람이 됐지만 우린 사업상 자주 만났는데 얼마전 무리하게 벌인 사업
때문에 문을 닫게 됐다는 말을 들었다. 친형에게 빌린 돈 1천만원을 3개월 만에 다 날렸다
면서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했다. 난 그 친구에게 이런 말을 들려줬다. "물론 슬픈 소식이지
만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해라. 나도 문군네 시작하기 전에 2천만원을 까먹었다. 그 일 있은
후로 한결 조심스러워졌고 보다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결국 그 2천만원이 수업료가 된
셈이고 작은 성공의 밑거름이 됐다"고 말이다. 이 세상에 수업료 없이 배울 수 있는 건 없
다. 뭘 배우건 반드시 지불해야 한다. 액수의 많고 적음이 있을 뿐이다.
반드시 어는 한 분야에서 성공하는 것만이 인생을 잘 사는 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삶
이라는 게 어제보다는 오늘이 낫고, 오늘보다는 내일이 나아가는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제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오늘, 그리고 오늘과 달라질 것 같지 않은 내일을 산다면 지금의
나 자신을 돌아봐야 하는게 아닐까.
정 필새가 두렵다면 한 가지 방법이 있다.
실패에 대비하면 된다. 그러면 설령 실패를 해도 그 리스크를 적게 만들 수 있다. 즉 작은
실패를 만드는 것이다.
내 경우도 어느 정도 그랬다. 오늘은 잘나가지만 내일은 또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나역시 늘 또 다른 준비를 해둔다. 예를 들면, 지금 브랜드가 실패할 경우에
대비해 다른 브랜드를 준비하는 것이다. 이렇게 대비를 해두면 차마 실패를 하더라도 곧 일
어설 수 있게 된다.
그러니까 지금 '시작해? 말아?'로 고민중이라면, 지금 당장 시작하라고 말하고 싶다. 대신
늘 실패에 대한 새로운 준비도 함게 갖고 있어야 한다.
가장 힘든 건 역시 사람 관리
비교적 적은 자본으로 시작해, 단기간에 급성장을 했다는 점에서 난 비교적 운이 좋은 편
이다. 또 커다란 시련을 겪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하지만 늘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에게도 수없이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런 걸림돌은 누구에게나 예고 없이 찾아
오는 법이다. 걸림돌을 디딤돌로 만드는 사람은 현명한 사람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늘
자신의 현실을 투정하고 불평하기 일쑤다. 즉 마음먹기에 따라 다른 것이다. 누군가 인생을
허들 경기에 비유한 게 생각난다. 스타트 라인부터 열심히 달려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많
은 장애물을 넘어야 하는 인생. 힘들어도 절대 뜀박질을 멈춰선 안 된다. 관성의 법칙은 인
생에서도 참 중요한 거다.
지금가지 사업을 하면서 가장 큰 어려움이라면 단연 조직 관리였다. 부하 직원을 다루는
게 가장 힘들었다. 창업 1년을 넘기던 작년, 직원들이 대폭 바뀌었다. 함께 고생하던 사원들
이 마치 짠 사람들처럼 줄줄이 사표를 쓰고 나갔다.
사표 쓰고 나가는 사람의 마음은 정확히 모르겠다. 하지만 그 뒷모습을 바라보아야 하는
오너의 마음은 우울하기 짝이 없다.
'나에게 과연 무슨 문제가 있는걸까. 내가 저들에게 무슨 잘못을 했을까.'
혼자 앉아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면 마음이 착잡해진다.
나는 지금까지도 조직 관리 능력이 부족한 것 같다. 회사도 이제 틀을 잡아나가는 단계다
보니 정해진 풀과 메뉴얼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는 가운데 직원은 직원대로 힘들고, 경
영자인 나는 나대로 힘이 든다. 그런 보이지 않는 불만들이 쌓이면서 아마도 일할 의욕을
상실하는 면이 있지 않았나 싶다.
나는 나대로 직원의 의견을 존중하려고 애썼다. 직원이 아이디어를 제출하면 격려해주고
되도록 실행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실패하면 경영상으로는 손해지만, 직원 입장에서는 그 실
패가 경험이 되어 더 잘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함께 일하
는 직원들 서로에게는 앞으로 나가는 속도를 더디게 해서 일에 대한 의욕을 상실하게 한 원
인이 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원 입장에서는 내가 독단적이라는 비판을 할 때도 있다. 직원들의
의견을 수렴하지 않고 나의 판단으로 모든 게 결정된다는 불만 아닌 불만이다.
이럴 때는 정말 난감하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양쪽의 불만을 해소할 수 있
는 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이게 바로 오너 노릇하기의 어려움인가 보다.
하여튼 이렇게 직원들이 바뀌면 일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다. 제품 생산에 차질이 빚어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제품 생산 기획이 다시 수정되고, 공장에서는 원단 상태인 채로 공
정이 올 스톱이었다. 대리점들로부터는 물건 공급이 안 되는 것에 대한 독촉 전화가 빗발쳤
다. 본의 아니게 내일이면 물건을 주겠다. 또 내일이면 물건을 주겠다며 미루는 양치기 사장
이 되기도 했다. 더욱 미안한 건, 물건이 제때 공급되지 않아 대리점들에 손해를 입게 했다
는 점이다. 그러는 사이 힘들게 일해서 번 돈을 순식간에 날리기도 했다.
하지만 재빨리 인원을 보충하고, 조직을 재정비하면 이런 어려움은 어느정도 극복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내가 가장 힘들었고, 쉽게 극복되지 않는건 인간적인 실망감이다.
나로서는 직원들에 대한 투자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들의 성장이 곧 우리 회
사의 성장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또 하나의 나라고 생각하고 믿고
투자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건 나만의 짝사랑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표를 내는 많은 직원들 가운데 우
리 문군의 옷을 카피해서 판매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패션은 많은 돈을 투자해서 디자인을 개발해놓으면 다른 사람이 쉽게 카피할 수 있는 분
야다. 그들은 디자인 개발지가 들지 않았기 때문에 더 싼 가격으로 공급할 수 있다. 그로 인
해 우리 물건을 파는 대리점 입장에서는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다.
우리 회사는 지금도 그렇지만 줄곧 창업사관학교라고 불렸다. 입사하고 몇 개월 동안 배
운 뒤 창업하는 사람이 대다수, 아니 거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처음부터 '배신'을
작정하고 들어온 사람도 있다. 내가 단기간에 성공했다고 하니까 그 비결만 배워 나가겠다
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궁금한 걸 다 배웠다고 생각하면 미련 없이 사표를 던진다. 그러
고는 우리 대리점까지 빼앗는 일도 서슴치 않는다.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가 정글이라지만
이런 사람들을 보면 정말 인간적으로 미운 게 인지상정이다.
벌써 수없이 이런 일을 겪엇다. 경제적인 손실도 손실이지만 그보다는 내사람이라고 믿었
던 사람들이 그렇게 한순간 나를 배신할 수 있다는 사실에 실망감이 크다. 그리고 돈이야
또 벌면 그만이지만 한두 번 사람에 대한 미음이 무너지면 회보하기가 어려운 법이다.
난 사람을 잘 믿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이고, 또 장점이라면 장점이다. 그런데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그런 내가 변해가는 걸 느낀다. 이제 사람을 무작정 믿기에 앞서, 혹시 이사람도?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점이 나를 가장 힘들게 했다. 내가 삭막하게 변해간다는 게, 나 자신조차도
두렵고 무섭다.
내 마음 고생이 너무 심했던지 한동안 만나는 사람마다 '꼭 환자 같다'는 말을 하곤 했다.
하지만 조금씩 이겨내고 있다. 다행히도 그런 상황에서도 낙천적으로 생각하려고 애쓴 덕분
이다. 선배들 말대로, 어차피 겪어야 했던 마음 고생들이다. 남들보다 조금 일찍 겪었다는
걸 차라리 다행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선배들은 사업을 하려면 사람을 절대적으로 믿어서는 안 된다고 수차례 충고했다. 아직
그것이 내 삶으로까지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하지만 나 역시 필요에 따라서는 냉정해질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경영이 철저하지 않으면 사업은 실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
다. 그러자면 그 무엇에도 냉정하게 대처하는 습관을 들여야 할 것 같다.
사업은 무수한 시행착오의 연속이다
내가 사업을 하면서 힘들었던 또 하나의 문제는 바로 자금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사업하
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나마 나의 경우는 사업 초기에 자본 축적을 해놓았기 때문에 규모가 커지면서 자금난이
덜한 편이었다. 하지만 현금 유동성의 속도가 더뎌지고 있는 문제는 역시 내게도 심각하다.
현금 유동성 문제는 쉽게 말해 동맥경화 현상과 같다. 혈액 순환이 안 돼 제때 필요한 혈액
이 공급되지 않는 치명적인 현상이다. 어떤 회사건 부도를 맞는 금액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
적은 액수부터 결제하지 못해 부도라는 파국을 맞는 것이다. 단돈 1백만원 때문에 부도나는
회사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문제는 현금의 유동성이다.
예를 들면, 예전에는 현금 거래를 기본으로 했다. 그러니까 물건을 건네주면 바로 현금을
받았다. 그런데 점점 규모가 커지고 거래처도 다양해지면서 문제가 생겼다. 백화점이나 도매
전문점의 경우 물건이 가고 나서 한 달 혹은 두 달 뒤에 결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그
물건을 만들기 위해 투자한 돈이 한두 달 뒤에 들어오기 때문에 다른 물건을 생산하기 위해
돈을 마련해야 하는 일이 생긴다.
이 경우 대부분 은행 빚을 지게 된다. 하지만 나는 가능한 은행 대출을 받지 않으려고 했
다. 그러다 보니 돈을 융통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이다. 오너로서 하루하루 자금 관리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일이란 때론 피를 말리는 스트래스다.
남들 보기에는 자기 사업체를 갖는다는 것, 사장이 된다는 것이 근사해 보일 수 있을 것
이다. 하지만 실상은 수시로 회사의 존폐와 관련된 힘겨운 문제들과 부딪쳐야 하는 게 사업
이다.
그러니까 막연한 환상만을 가지고 자기 사업을 하겠다는 생각은 지금 당장 버려야 한다.
IMF 때문에 경제사범으로 전락한 사장들이 얼마나 많은가. 권한만큼 책임도 있다는 걸 명
심해야 한다. 어떤 예기치 못한 어려움도 꿋꿋하게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만 오너로서
의 자격이 생기는 것이다. 내가 굳이 그런 이들에게 조언을 해준다면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
고 싶다. 나이는 적지만 조금 일찍 사업을 시작한 사람으로서 말이다.
분명히 사업은 어려움의 연속이게 마련이다. 다만, 그 어려움들을 어렵다고 느끼지 말아야
한다. 오로지 자신의 시행착오일 뿐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 문제 해결 방안을 모색하
는 여유가 생긴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의 문제를 극복해나가는 과정에서 분명 어디서도 맛
볼 수 없는 성취감을 맛 볼 것이다.
사업의 가장 큰 매력은 돈을 많이 버는 데 있는 게 아니다. 무엇보다 성취감이다.
어떤 조직에 있으면 자신의 생각보다는 그 조직의 방식에 따라야 한다. 하지만 내 사업을
한다는 것, 내 아이디어와 내 방식대로 마음껏 일할 수 있다는 매력이 있다. 그것이 얼마나
내 인생을 행복하게 해주는지는 안 해본 사람은 모른다. 때문에 사업을 하면서 겪는 엄청난
스트레스마저도 즐거움일 수 있다는 얘기다.
만약 착실히 사업을 해나간다면 돈도 많이 벌 수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돈은 사업의 2
차적인 목표이어야 한다. 돈 버는 일이 최대 목표라면 사업을 금물이다. 차라리 증권을 연구
하거나 부동산 쪽을 알아보는 게 더 빠르다. 사업을 오히려 돈에 연연하면 투지와 의지를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패션 사업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99년 8월 컴퓨터 통신 천리안의 패션 동호회에서 연락이 왔다. 부정기적으로 이슈화된 인
물을 만나 강연을 듣는데, 이번 강연자로 나를 지목했다고 했다. 기존 강의자는 누구였는지
들어보니, 다들 승승장구하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그 대열에 끼었다는 게 신기하고 무척 기
분이 좋았다.
강연 주제로는 '내 브랜드로 성공하는 길'로 잡았다고 했다. 씰 그 동안 이런 주제의 질문
을 많이 받았다. 아무래도 성공 사례로 꼽히다 보니 패션 사업에 뜻을 두고 있는 사람들로
서는 가장 궁금한 내용일 것이다.
열심히 노력하고 준비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싶은 사람 문인석,
즉시 언제 어디냐고 물었다.
1. 시작이 반, 사전 준비를 잘하자
먼저 패션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해야 할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철저히 준비를 하라는 점이다. 둘째는? 반드시 첫번째를 잊지 말아라다. 그만큼 준
비가 성패를 좌우한다는 뜻이다.
가장 현명한 방법은 직접 발을 담가보는 일이다. 그러니까 패션 사업을 하고 싶다면 당장
패션 업계에 뛰어드는 게 유리하다. 옷가게 종업원도 좋고, 패션 회사 직원도 좋다. 돈 주고
라도 배워야 할 일인데, 오히려 돈도 받고 일까지 배울 수 있다니 꿩 먹고 알 먹고다. 특히
일을 잘하는 사람 밑에서 배우는 것만큼 좋은 방법은 없다.
일단 이렇게 그 분야에 들어가보면 자신이 패션 사업에 적당한 능력을 가졌는지 아닌지는
쉽사리 판단할 수 있다. 만약 자신이 패션 사업에 적당한 능력을 가졌다고 판단되면, 다음에
는 그 단계에서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깨닫게 된다. 그러면 그 필요한 것을 쫓아 다
시 영역을 넓혀 움직여보는 것이다.
내 경우에도 옷가게를 동업으로나마 시작해서 소비자들의 마인드를 어느 정도 읽을 수 있
었다. 그 다음에는 경영적인 측면을 배우고자 패션 회사에 입사했다.
또 한편으론 패션 흐름을 꾸준하게 꿰고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나 같은 경우에는 패션
관련 신문과 잡지 등을 빼놓지 않고 정기 구독했다. 또 인터넷에 들어가 패션 관련 자료를
계속 검색해서 스크랩해두었다. 이런 데이터들이 쌓이다 보면 어떤 참고서보다 훌륭한 길잡
이 역할을 톡톡히 한다.
또 패션 사업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다면 내가 어떤 부분이 부족한지 알아야 한다. 예를 들
어 회계 쪽에 문외한이라고 하자. 결국 그것 때문에 자신은 안 되겠다고 포기하는 일이 생
길 수도 있다. 하지만 알려고 노력해보자. 노력하다 보면 안 되는 일이 없다. 최소한 누군가
의 도움을 받을 길이라도 열리게 되어 있다.
자, 그런 다음에는 기회를 만들고 기다리자.
기회도 준비하는 사람에게 온다. 나만 해도 패션 사업을 하겠다고 옷가게부터 시작해서
패션 회사 직원으로 일하는 등 계속 준비를 해왔다. 그러던 중에 밀리오레 오픈 소식을 들
었고 그건 내게 기회였다. 준비를 해왔기 때문에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준비가 소
홀하면 기회가 내 곁에 왔다 갔는 줄도 모르게 된다.
그런데 가끔 보면 아무런 준비 없이 시작부터 하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내 가까이에서
나를 지며본 사람들 가운데 특히 많았다. 나의 작은 성공을 보면서 너무 쉽게 생각한 것일
까? 하지만 그 사람들은 내가 이룩한 결과만 보았던 것이지 그 이전 과정을 세세하게 들여
다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몇 단계를 점프하려고 하면 안 된다. 성급함은 성급한 실패만을 불러올 뿐이다.
2. 가급적 동업을 안 하는 게 좋다
한 가지 더. 가급적 동업은 안 하는 게 좋다. 굳이 동업해야 할 상황만 아니라면 동업은
말리고 싶다. 이 이야기는 앞에서도 자세하게 설명했으니 다시 반복하지는 않겠다.
어쨌거나 자신이 없다고 동업의 길을 선택했다가는 일도 제대로 못 배우고, 결국 벌여놓
은 사업만 그르치기 쉽다는 점을 명심해라.
일단 이렇게 준비해온 끝에 마침내 사업을 시작했다고 하자.
아무리 많은 준비를 해왔어도 막상 시작하고 나면 수많은 복병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물론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일들이다. 그런 일들을 침착하게 해결해나가야 한다. 그렇지 못하
면 시작과 함께 주저않고 말 수도 있다.
나도 조직 관리나 현금 유동성 문제를 늘 껴안고 왔다.
뿐만 아니다. 제품 판매도 그렇다 A라는 제품을 내놓으면 반응이 좋을 것이라고 믿었는
데, 시장에서는 전혀 움직여주지 않는 돌발 상황도 생기기 일쑤다.
그렇다고 의기 소침해지면 자칫 경경 의욕을 잃을 수도 있다. 나의 경우는 안 되는 건 빨
리 포기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대안을 찾아 얼른 대응했다. 안 되는 일에 몰두하는
시간을 빨리 없애고 자꾸만 새로운 쪽으로 의식적으로 움직였다. 경영자가 활기를 잃으면
회사는 하향 곡선을 긋고 언제가는 곤두박질칠 수밖에 없다.
모든 일이 다 그렇듯 마음 먹기에 달렸다.
나는 어려운 일에 부딪치면 늘 '지금은 연습 게임' 이라고 나 자신에게 타이른다. 연습 게
임에서는 얼마든지 실패해도 상관없다. 그러면 마음이 훨씬 가벼워진다. 일도 보다 적극적으
로 추진할 수 있게 된다 나만의 마인드 컨트롤인 셈이다.
3. 디자인이 생명이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내 브랜드로 성공할 수 있었는가. 무엇보다 기획력과 참신한 디자인
덕분이다.
나는 사업 규모가 커지며서 인력 투자에 힘을 쏟았다. 특히 문군에서는 마케팅의 기획과
디자인을 핵심 역량으로 삼고, 그 분야의 인원 충원에는 늘 적극적이었다. 디자이너들의 해
외 출장에도 과감히 지원했다. 그들의 안목이 넓혀지고 디자인이 좋아진다면 그건 그대로
회사의 역량이 커진다는 얘기다.
또 하나는 소비자층을 연령대별로 정해온 기존의 틀을 개고 과감히 감성대별로 잡았다.
일종의 포지셔닝 고정관념을 벗어난 것이다.
기존 패션 업계는 소비자층을 20대, 30대처럼 연령별로 나눴다. 그러나 나는 아예 처음부
터 다르게 갔다. 예를 들어 힙합을 좋아하는 연령은 10대에서 20대 초반인 경우가 많지만
30대도 좋아할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문군의 컨셉트인 '샤머니즘'을 20대로 묶지 않았
다. 그보다는 그런 감성을 좋아하는 소비자층으로 잡은 것이다.
여기에는 옷을 단순히 옷으로만 파는 게 아니라 이미지 상품을 판다는 대전제가 깔려 있
었다. 샤머니즘이 자신의 이미지를 만드는 데 적당한 옷이라고 판단하면 연령에 관계없이
우리의 고객이 된다는 생각이었다.
4. 매출에 급급하기보다는 비용을 줄여라
대부분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들은 초기 투자는 당연히 많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나중에 이익을 낼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내 방식은 다르다. 절대로 지출이 매출을 초과
하지 않는다. 물론 이익금에 대해서는 아낌없이 재투자에 쏟아붓는다. 결국 회사는 부채 없
이도 성장할 수 있다. 여기에는 '정보는 곧 돈'이라는 생각이 깃들어 있기도 하다. 어느 분야
건 잘 알고 있으면 그만큼 비용을 줄일 수 있는 법이다. 예를 들어 상가를 알아본다고 치자,
많은 사람들은 저네나 월세만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하루하루 세를 내는 일세도 존재한다.
또 분양과 임대도 알쏭달쏭하지만 엄연히 다른 말이다. 내게 유리한 쪽으로 창업하려면 많
이 알고 있어야 한다. 정보는 곧 현찰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많은 삶들은 부자들을 볼 때 과연 어떻게 저 많은 돈을 벌었을까, 궁금해한다. 나 역시 궁
금했다. 그런데 사업을 하면서부터 대강 알게 됐다. 돈은 버는 것보다 쓰는 데 신경을 써야
벌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매출을 올리려고 급급해하기보다는 각종 비용을 줄이는 게 훨씬 효율적이란 사실을 뒤늦
게 알았다. 사실 사업을 시작하면 매출에 가장 많은 신경을 쓰기 쉽다. 하지만 중요한 건 매
출이 아니라 살아 남는 것이다. 그리고 조금이라고 이익을 남기면서 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사업이나 장사를 오래 한 사람들일수록 매출에 연연해하기 않는다. 남들의 시선보다 실속이
훨씬 중요하다는 걸 경험상 알기 때문이다.
5. 새로운 변신을 추구한다
패션 사업은 남들이 디자인을 모방하기 쉽다는 특성이 있다. 이런 디자인이 잘나간다 싶
으면 서로 베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샤머니즘 컨셉트의 문군 트렌드 옷이 인기를 얻자마자
동대문에 카피 제품들이 쏟아졌다. 일일이 찾아다니며 우리 디자인이니 쓰지 말라고 할 수
없는 게 솔직한 현실이다. 아무리 저작권법이 발달해도 늘 반칙과 변칙은 법망을 교묘하게
빠져나가게 돼 있다. 이를 극복하려면 한 가지 히트 상품에 만족하기보다 늘 새로운 디자인
을 개발하는 수밖에 없다. 흉내내지 못하는 나만의 것, 우리만의 것을 위해 연구하는 게 가
장 뾰족한 방법이다.
6. 긍정적, 낙천적인 사람이 돼야 한다
사업을 하다 보면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을 때가 허다하다. 그럴 때마다 노심초사하는
안절부절 스타일보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여유로운 마음이 절실히 필요하다. 한 달 전 프
랑스에 출장 갔을 때의 에피소드다. 도착한 첫날 돈과 신용카드가 든 지갑을 통째로 분실해
버렸다. 지금까지 그런 일이 한 번도 없었는데 하필 외국 출장길에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순간적으로 놀랐지만 이내 평상심으로 돌아왔다. 일일이 신용카드 회사에 분
실 신고를 하고 없던 일로 삼아버렸다. 동행한 사람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물었지만
내 생각은 간단했다. '물론 눈물이 나게 아깝지만 이미 잃어버린 돈, 아타까워한다고 해서
돌아오지 않는다. 안 좋은 일은 빨리 잊어버리는 게 낫다'고 말이다. 잃어버린 돈에 연연해
서 모처럼 떠난 출장을 그르친다면 돈보다 더 큰 손해를 보는 것이다.
성공이란 뭘까 생각해본다. 내가 정의하는 성공은 '스스로 세운 목표점에 다다르는 과정'
이다. 사업이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미개척지를 걸어가는 일과 같다. 물론 나도 최종
목표까지 못 갈 수도 있지만 하루하루 그 목표에 다가가면서 느끼는 만족감과 성취감이 중
요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앞으로 실수를 해서 지금까지의 사업이 물거품이 된다 해도 난 다
시 일어날 것이다.
2. 미래를 고민하는 사람을 위하여
정보는 살아가는 힘이다
아직 고등학교나 대학을 다니며 이 책을 보는 사람이 있다면 정보의 소중함에 대해 들려
주고 싶다. 정보는 마치 공기 같은 존재다. 너무 흔하고 널려있기 때문에 소중함을 못 느끼
기도 한다. 하지만 주위에 널려 있는 정보를 잘 가공해서 활용한다면 엄청난 시간과 돈을
아길 수 있다. 나는 대학 다닐때 아르바이트 자리를 누구보다 쉽게 구했다. 취업보도실 게시
판이 몇 시에 새로운 정보를 바뀌는지, 아르바이트를 의뢰하는 회사로부터 오는 팩스 내용
들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다소 귀찮을 수도 있지만 이 번거로움만 감소하면 남들보다
늘 앞설 수 있다. 지금은 노하우(Know-How)보다 노웨어(Know-Where)가 중요한 세상이
다.
나는 바쁜 생활을 은근히 즐긴다. 아마 열심히 놀아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놀기만 하는
생활이 얼마나 바쁜 것인지에 대하여, 노는 것도 창의력이 요구된다. 날마다 비슷비슷한 나
이트클럽 가고, 록 카페 가는 것 같지만 그 가운데서도 변화를 모색하고, 보다 쇼킹한 즐거
움을 찾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것이다.
대학 생활이라는 것도 그렇다. 놀자면 24시간이 부족할 만큼 바쁜 게 대학 생활이고, 또
공부하자면 공부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라는 게 캠퍼스 생활이다. 대학이라는 게 타율적인 지
배를 받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넣은 캠퍼스를, 그 넓은 도서관을, 그 많은 동아리를
제공해주기만 할 뿐 선택하는 것은 개인의 몫이다. 때문에 고등학교 때까지 수동태로 '살아
지는' 생활만 해오다가 갑자기 한없는 자유에 어리둥절해하다가 4년을 허비하는 사람도 많
다. 그러니 대학 생활을 잘 보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결론은 공부와 놀기, 둘 다 잘하는 사람은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가 아닐 수 없다.
정말이지 너무나 바빠서 늘 학교를 뛰어다녀야 했다. 무엇 때문에 '러닝 맨' 이었느냐고?
물론 노는 일로 바빴던 건 기본이니 다시 말할 필요는 없겠다. 하지만 노는 일 외에도 무척
바빴다.
가장 먼저 동아리 활동이다. 낑깡족 생활도 했지만, 건전한(?) 생활도 열심히 누렸다. 예를
들면 여행 동아리 유스호스텔 활동을 했다. 난 뭐든지 일단 시작하면 주체적으로 움지이지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타입'이 아니다. 그러니 동아리 활동도 제법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
다. 주체적인 활동을 하다 보면 아무래도 함께 계획을 세우고 준비하는 데 시간과 다리품이
많이 드는 것이다.
그때의 동아리 활동은 지금까지도 좋은 도움을 주고 있다. 특히 돈 한푼없이 보름 동안이
나 여행을 다니는 일이 그랬다. 15일을 길에서 먹고 자고하려니 취사 도구만으로도 엄청나
게 큰 가방이 꾸려졌다. 그 큰 가방을 메고 걷기만 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더구나
돈이 없으니 가져간 음식을 최대한 아껴서 먹어야 했다. 덕분에 음식 아낄 줄 아는 소중한
체험도 할 수 있었다. 먹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렇게 여행하다 보면 뭐든지 소중하지 않을
수 없다.
뿐만 아니다. 그토록 힘들게 여행을 하다 보면 5일만 지나도 벌써 꾀가 난다. 너무 힘들어
서 그만둬벌리까 하는 갈등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곧 자신과의 싸움이 시작되는 셈이다. 그
러나 함께하는 친구들이 있기에, 자존심 때문에라도 그만둘 수가 없었다. 마침내 그 여행을
끝마쳤을 때는 극도의 고통에서 막 벗어난 안도감과 해냈다는 성취감으로 눈물이 날 정도였
다.
군대에 갔더라면 더 좋은 경험을 했을 것이다. 어느 경험이든 직접 할 수 잇는 경험이 밑
거름이 된다.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게 긍정을 포괄하는 삶이 된다. 세상을 네거티브가 아닌
포지티브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여행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알려주지 않아도 돌아올 때쯤
이면 작은 느낌표 하나를 찍게 되는 것이다.
대학 3학년 때는 광고 동아리를 조직하기도 했다. 도선관에 창립 멤버를 찾는다는 광고를
보고 곧바로 연락했다. 신나게 머리 굴려 이름도 지었다.
애드쿠스, 즉 광구를 뜻하는 'advertisement'와 오스트랄로피테쿠스'australopithecus'를 합
성해서 만든 말로 '광고하는 인간'이라는 의미였다. 역시 내가 앞장서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난 애드쿠스의 부회장을 맡아 열심히 활동했다. 물론 이 동아리 경험은 나중에 광고 회사에
들어가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역시 모든 경험은, 그것이 좋은 경험이든 나쁜 경험이든 피
가 되고 살이 되는 것이다.
아르바이트도 닥치는 대로 열심히 했다. 순전히 돈 때문이었다.
대학 3학년 때 아버지 사업이 실패한 것이다. 그야말로 남부럽지 않게 먹고 쓰고 놀던 내
가 등록금을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된 것이다.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그래도 낙천적인 성격
타세 절망하지 않았다.
대학 우체국에서 우편물 발송하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일은 힘들지 않았지만, 그만큼 보수
도 많지 않았다. 그래도 열심히 했다. 뭐든 했다 하면 열심히 하는 성격이니까. 용돈은 내
힘으로 벌어서 썼다. 부모님께 돈을 타서 쓸때는 물 쓰듯 썼는데, 막상 내가 일해서 번 돈은
소금 쓰듯 아껴 썼다. 너무 아까웠다.
내가 놀기만 했다니까 도서관 근처는 얼씬도 안해 본 사람으로 아는데, 그건 그렇지 않다.
나도 나름대로 도서관에 열심히 다녔다. 그런데 도서관 이용 목적이 좀 남달랐다.
내 경우에는 도서관 자리만 차지하는 학생이었다. 가방만 놓고는, 잡지 코너에 가서 온갖
잡지책이란 잡지책을 다 섭렵해서 읽었다. 연예 잡지는 물론이고, 여성지, 시사 잡지까지 전
부 읽었다. 덕분에 이슈가 된 문제라든가 유행에는 그 누구보다 박식했다. 친구들과 잡담을
하더라도 아이템이 풍부했다. 덕분에 친구들로부터 나는 '워킹 매거진'으로 불렸다.
뿐만 아니다. 남들 한다는 건 다 해보려고 했다. 수업 끝나면 일어 학원에도 갔고, 컴퓨터
학원에도 가봤다. 비록 가서 졸더라고 열심히 출석을 했다.
이러고 보면, 난 여느 대학생들처럼 평범한 학생이었다. 날라리 이면의 또다른 대학 생활
을 보낸 셈이다.
놀아야지, 서클 생활 해야지, 도선과 가서 수다 떨어야지, 아르바이트해야지, 얼마나 바빴
겠느가. 그러니 늘 러닝 맨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학교 게시판이란 게시판은 꼼꼼하게 다 훑고 다녔다. 덕분에 학교 안에 떠
도는 온갖 정보와 울타리 밖에서 돌아다니는 정보까지 다 꿰고 있었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친구들은 내게 묻는다.
"인석아, 너 그 얘기 어디서 들었냐?"
그런 질문을 던지는 친구들은 대부분 범생이들이다. 그들은 자기 전공 공부는 열심히 했
을지 몰라도 세상 돌아가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난 아니었다. 난 세상사를
다 경험하고 싶었고, 모조리 알고 싶어했다. 때무네 그만큼 호기심도 많았고 직접 부딪혀 알
아보고 경험하려고 햇다. 그러니 내가 정보맨이 된 것은 당연했다.
나는 바로 이 점을 말하고 싶다. 세상에서 앞서려면, 그만큼 정보에 민첩해야 한다. 세상
에 대한 정보가 많다는 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빨리, 그리고 제대로 찾아가는 지름길인
것이다. 곧 정보는 살아가는 원동력이다.
꿈도 알아야 가질 수 있다. 모르는 세계에 대한 꿈은 거머쥘 수 없는 법이다. 결국 자신이
아는 테두리 안에서 꿈도 형성되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 '딜러' 라는 직업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이 직업에 대해 모른다면, 그런 꿈을
가질 수 있을까? 딜러에 적합한 능력을 갖고 있는데도 그 직업 세계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
에 그 기회조차 가질 수 없다면 그건 얼마나 마이너스인가.
실제로 대학을 무난하게 졸업해서 샐러리맨이 되어 그럭저럭 사는 친구들 가운데도 특출
난 아이들이 있다. 그런 친구를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곤 한다.
'만약 저 친구가 대학 시절에 다양한 경험을 했다면, 그래서 세상에 대해 좀더 많은 지식
을 갖고 있었다면, 저 친구의 진로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정말 내가 너무 잘난 척을 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쨌든 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컵을 만든다고 치자. 자기가 고안하고 직접 만든 컵이 비록 안팔려도 낙담할 필요는 없다.
두번째 만드는 컵은 첫번째보다 분명 더 잘 팔릴 것이다. 왜냐하면 컵이 안 팔린 이유를 누
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내게 이런 질문을 많이 한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사업을 할 수 있었냐고. 바로 그에 대한
내 대답은 이거다.
'인생은 주어진 환경에 의해 정해질 수 있다. 즉 자기가 보고 느낀 범위 안에서 자신의 인
생 설계가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난 대학 시절. 하나라도 더 보고 경험하려 했
다. 그것이 내 꿈을 빨리 찾는 데 도움이 되었다.'
결국 인생은 모범 정답이 없다. 객관식이 아닌 주관식이다. 돌다리를 두드려보고 가는 것
도 좋지만 어드벤처 정신으로 무작정 건너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나이가 조금 더 들면
실패가 두려워 시도조차 못하게 된다.
문제는 다양한 경험이다
요즘 대학생들에게 해외 연수는 정공 필수처럼 흔해졌다. 하지만 내가 대학 입학할 때만
해도 지금만큼 흔하지는 않았다.
내가 처음으로 해외 나들이를 한 건 대학 1학년 겨울방학 때였다. 당시 누나가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부모님께 누나를 만나러 간다는 명분으로 떠난 최초의 해외 여행이었다.
잠깐, 여기서 악바리 우리 누나 얘기를 해야겠다. 누나는 일어일문학을 전공했다. 그런 누
나가 어느 날 일본으로 3개월 어학 연수를 떠나겠다고 했다. 부모님은 여자 혼자 외국에 나
간다니 반대가 심하셨다. 그런데도 누나 태도가 워낙 완강했고, 사실 우리 형제들이 한다면
하는 성격인지라 결국 부모님도 허락하시고 말았다.
그런데 일본으로 떠난 뒤 누나는 아예 그곳에 주저앉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해왔다. 그곳
에서 공부를 다시 시작하겠다는 것이었다. 누나는 떠나기 전부터 그런 계획을 갖고 있었는
데, 부모님이 반대하실 게 분명하니 3개월만 연수하고 오겠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물론
부모님은 학비를 보내주지 않으면 오겠거니, 해서 송금을 끊어버렸다. 그런데도 누나는 돌아
오지 않았다.
오히려 누나는 씩씩하게 자기 살고 싶은 대로 살았다. 누나는 일본에서 아르바이트를 해
가며 공부를 하더니 기어이 와세다대학 대학원에 진학했다.
나는 그런 누나를 보겠노라며 무작정 일본으로 떠났다.
일보네 도착하자, 누나는 나를 전에 자기가 아르바이트하던 식당에 데려가 취직을 시켜줬
다. '오코노미야'라는 일종의 일본식 빈대떡을 만드는 식당이었다. 돈도 벌고 일본어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 생활은 힘겹기만 했다. 우선 아침 9시부터 12시까지는 학원에 가서 일본어
공부를 했다. 학원이 끝나자마자 곧장 식당으로가서 10시간 동안 중노동에 시달렸다. 내가
하는 일은 설거지였는데, 날마다 10시간을 앉지도 못하고 꾸부린 자세로 서서 설거지를 하
다 보니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았따.
게다가 말이 통하지 않아 설상가상이었다. 처음에는 히라가나도 모르는 상태였다. 그래서
우스운 에피소드도 참 많았다.
예를 들어, 주인이 내게 무얼 가져오라고 심부름을 시키면 나는 눈치껏 대충 갖다주고 했
다. 정확히 맞힐 때보다 틀릴 때가 더 많았다. 주인이 창고에 가서 밀가루를 가져오라면, 설
탕을 가져가 주인을 열받게 했다. 그래도 일본인 주인은 인내심을 갖고 참아주었다. 그 덕분
에 방학 끝날 때까지 2개월동안 그 식당에서 일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아르바이트로 1시간
에 6천원 정도를 받았으니 꽤 많은 돈을 벌었다. 돌아올 때 CDP와 전자 제품을 사다 보니
몇 푼 남지 않았다. 하지만 외화를 쓰고 온 것이 아니라 벌어 왔으니 스스로애국자라는 자
부심을 가지기도 했다.
일본은 역시 가깝고도 먼 나라였다. 비행기로 2시간이면 도착하는 나라. 그러나 그렇게도
가까운 나라에서 우리 나라와는 너무도 다른 문화적 환경을 체험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
만,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하는 점도 잇다. 일본은 우리 나라보다 훨신 앞서 있는 나라다.
서점에만 가봐도 알 수 있다. 그 다양한 정보를 잘 가공해서 만들어낸 책들을 보면 부러운
뿐이다. 분만 아니다. 거리에서 느껴지는 그들의 미의식도 상당한 수준이다.
나는 일본에서 두 달 간 있으면서 보고 느낀 것을 꼼꼼하게 메모해 왔다. 조금만 신경 써
서 바라보면 사업 아이템으로 그만인 것들이 너무 많았다. 오죽하면 돌아오자마자 '학교 그
만두고 사업이나 해볼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도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라면 전문점이라는 게 없었다. 그런데 일본에 가보니 라면
전문점이 엄청나게 많았고, 대부분 성업중이었다. 나는 그 라면 전문점들을 보며, 내가 사업
을 한다면 훨씬 경제적으로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무엇보다 장사는 인건비를 최소화해야 하는 법. 그 방법으로, 자판기를 이용하여 손님에게
먹고 싶은 라면 메뉴를 선택하여 티켓을 끊게 하는 거다. 그러면 따로 주문 받고 서빙하는
인력을 줄이고, 돈 받는 계산대 인력까지 줄일 수 있다.)놀랍게도 지금은 식당마다 티켓 자
동 판매기가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부엌과 홀이 따로 떨어져 있기 때문에 서빙하는 게 보통인데, 그 동선을 줄여보자
는 생각을 했다. 바로 주방을 가운데 두고 손님들이 주방을 바라보고 있으면 시간과 인력을
줄일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첫 일본 여행은 나의 견문을 너무 많이 넓혀주었다. 일본 여행
이 너무 좋았기 때문일까, 난 방학 때마다 해외에 나가려고 몸부림쳤다. 그래서 그 이듬해
그러니까 92년 여름에는 미국 하버드대학으로 가서 8주 과정의 서머 스쿨을 다녔다. 일종의
어학 연수였지만, 역시 세계 최강국이고 선진국인 미국 여행도 내게 큰 영향을 주었다. 하지
만 너무 익숙해 있어서인지 일본에 비해 별로 새로울 게 없었다.
다음해인 대학 3학년 때는 아버지 사업이 실패해서 집안 형편이 어려웠다. 돈 쓰는 데에
만 열을 올리던 내가 대학 우체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서 학비를 보태던 때였다. 그 해 여
름방학은 해외 나들이는 꿈도 못 꾸었다. 그러나 겨울 방학이 되자 다시 몸이 근질거리기
시작했다.
당시는 일본에서 공부를 마친 누나가 러시아에 가서 유학을 하고 있었다. 다시 누나를 만
날 겸 러시아로 향했다. 이번에는 아버지와 함께였다. 그때든 여행 경비는 내가 마련했다. 1
년 동안 학교 우체국에서 아르바이트하며 모은 돈으로 효도를 한 셈이다. 16박 17일 동안의
여행이었지만 큰 돈은 들지 않았다.
솔직히 러시아 여행은 말 그대로여행일 뿐이었다. 모스크바와 우크라이나 공화국 등을 다
니며 시야를 넓혔다. 대학 시절의 이러한 해외 여행은 결과적으로 내 인생에 커다란 보탬이
되고 있다. 세계 속의 한국을 살갗으로 느낀 것이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샐러리맨이다. 가끔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하다 보면 매사가 늘 푸념조
다. 사는 게 영 시답잖고 짜증스럽단다. 학창 시절엔 나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던 성실한 친
구들이었는데.... 난 친구들과 헤어지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역시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었군.'
공부 잘했다고 사장 되고, 공부 못했다고 말단 직원이 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성실하게
그리고 묵묵히 공부만 하던 친구들은 월급쟁이가 되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오너가 되는
경우가 많다. 내 경우에도 그랬지만, 나와 단짝으로 날라리 취급을 받았던 친구도 지금 현재
사업체를 꾸리고 있다. 그리고 자기 사업의 재미에 만족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
결국 인생에서는 공부 잘하고 못하고는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얼마나 다
야한 경험을 했느냐가 그 사람의 장래를 결정하고, 인생의 목표점을 다르게 하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난 공부 안 한 걸 후회하기보다는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다.
3. 또 다른 나의 꿈 / 나의 꿈은 패션계의 서태지
이제 더 이상 국내는 좁다
작년 여름 홍콩 패션 위트 참가는 '문군'이 세계 시장으로 진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안
겨준 계기가 됐다. 행사 기간 중 세계 각국 바이어들의 관심에서 이미 그 감을 잡을 수 있
었다. 70여 개 나라의 바이어들이 우리 부스로 몰려들어 앞다퉈 상담을 청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주변에서는 적잖이 놀라는 눈치다. 생긴 지 이제 갓 1년을 넘긴 회사가 그럴
만한 역량이 있는지 의아한 눈길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패션 사업은 유구한 역사롤
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얼마나 트렌드의 흐름을 제대로 읽고 앞서 나가느냐에 달린 것
이다.
나 역시 외국 바이어들이 상담을 해오기 시작했을 때 적지 않은 흥분을 느꼈다. 내 계획
이 제대로 맞아떨어지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 사실 처음 '문군' 이라는 브랜드를
기획할 때부터 해외 시장를 겨냥하고 작업에 들어갔다. 나만의 고유 브랜드를 가지려고 했
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시장에서 계속 장사하는 것만으로 만족할 요량이었다면 기존의 메이저 브랜드 옷이나 유
명 디자이너 옷들을 카피해서 만들어 내놓으면 되어싸. 하지만 난 나만의 브랜드를 만들었
다.
하나는 본격적으로 패션 사업을 시작하겠다는 야심 때문이었다. 패션 사업을 하자면, 당연
히 내 브랜드를 갖고 있어야 했다.
두번째는 국내 시장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는 해외로 진출하는 회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
각했다. 그러자면 무엇보다 개성이 뚜렷한 자체 브랜드의 옷을 만들어야 했다.
내가 해외로까지 진출하는 패션 사업을 하겠다고 생각한 건 내 나름대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흔히 미래는 불확실성의 연속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런 불투면함은 역설적으로 뭐
든 될 수 있다는 또 다른 말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물론 으뜸으로 중요한 게 자
본, 즉 돈이다. 하지만 돈만 있다고 성공하는건 절대 아니다. 돈이 다소 부족하더라도 참신
한 기획력과 아이디어, 거기에 로켓 같은 추진력을 갖춘다면 어떤 일도 해낼 수 있다고 생
각한다.
전에는 그저 교과서에나 나오는 말인 줄 알았지만 내가 막상 체험해보니 딱 들어맞는 말
이었다. 사실 어떤 지식이나 사실도 경험하기 전까진 내 것이 아니다. 살갗으로 직접 맞부딪
치는 직접 경험이든, 또는 누군가에게 전해 들은 간접 경험이든 체험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내가 가보지 않은 나라는 그저 상상 속에서나 존재할 뿐이다. 내가 직접 발 딛고, 내 눈으
로 조고, 내 코로 그 나라의 공기를 들이마셔봤을 때 비로소 그 나라가 존재하는 것이다. 난
아직 가본 나라보다는 안 가본 곳이 훨씬 많다. 하지만 내 또래들에 비해 많이 돌아다니려
고 노력했다. 미국과 일본, 홍콩, 필리핀, 러시아 등을 가본 결과 대한민국만큼 패션에 관심
많은 나라도 드물다는 생각이다. 물론 일본의 하라주쿠나 신주쿠 같은 젊은이의 거리에 가
보면 눈이 휘둥그래질 정도로 패셔너블한 사람들이 많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우리 나라의 관
심폭이 훨씬 넓다.
우리 나라는 보통 의, 식, 주라고 말한다. 즉 '의'가 '식'보다도 비교 우위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외국은 '식'이 먼저인 나라가 많다.
실제로 우리 나라는 패션 기반이 튼튼한 나라다. 그러니까 인력, 생산 기반은 충분한 편이
다. 동대문만 봐도 그렇다. 전세계적으로 볼 때 동대문의 패션물 같은 곳을 찾아볼 수가 없
다. 밀리오레, 두산타워, 거평 프레야 등 밤에 불야성을 이루는 패션물은 지구를 통틀어 거
의 유일무이한 현상이다. 그리고 우리 나라는 대부분의 대학에 패션 관련 학과가 포진해 있
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패션 전공자 배출도 세계적으로 손꼽힐 만한 수준일 것이다. 그만큼
양적으로 패션 인프라가 풍부한 셈이다.
다만 소프트웨어적인 측면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세계 패션 트렌드를 읽고 이끌어나가
는 실력은 다소 뒤처지는 편이다.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많지 않은 것도 이런 까닭이다. 일본
만 해도 세계적인 디자이너를 많이 배출했다. 패션 강국으로 발돋움하려면 20 - 30 대가앞
장서야 한다. 젊은 세대는 세계 패션 트렌드를 읽어나가는 감이 빠르고, 대응할 순발력도 갖
추었다. 그런 징후는 이미 동대문 상가에서 충분히 엿보인다. 기획력과 마케팅만 받쳐준다면
세계에서 돋보이는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주목하는 것도 바로 이 점이다.
패션은 늘 시대 흐름에 발맞춰가게 돼 이사. 아니, 반 박자 앞서 나간다. 그러므로 패션쟁
이들은 늘 남보다 앞서 생각해야 하고 남들이 미처 생각지 못하는 걸 생각해내야 한다. 함
박눈 내리는 겨울에 올 여름을 강타할 수영복 디자인과 색상을 연구해야 하고, 한여름에 패
딩 점퍼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패션은 바로 이미지즘에 입각한 옷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을 옷을 더 이상 신체 보호라는 1차적 목적을 충족하기 위해 입지 않는다. 그보다는
자신의 이미지를 창조해가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옷을 고르고 또 입는다. 내 목표도 이런 이
미지를 계속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특히 새로운 세대는 다양한 개성만큼 서로 다른 이미지
의 옷을 입고 싶어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런 옷들이 별로 없다. 사람들은 누구나 개성을
중요시하지만 거리에 나가 보면 비슷비슷한 옷들이 너무 많다. 남들과 다르게 보이려고 고
심 끝에 산 옷이지만 대부분 비슷비슷한 디자인과 컬러다. 개성의 몰개성화인 셈이다. 이런
틈새가 바로 우리의 타깃이다. 남들과 뚜렷이 구별되는 '뭔가 다른' 옷을 만드는 게 바로 내
일인 것이다.
이왕이면 수출에 있어서도 고부가 가치를 창출하고 싶다. 내가 굳이 OEM방식을 거부하
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사실 외국 바이어들 상담 내용의 대부분은 OEM방식이다. 물론 당장 해외 진출이라는 명
분을 내세우자면 충분히 바이어들의 요구에 귀기울여야 한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OEM방식
의 수출을 하기 시작하면 우리 회사는 '하청업자'라는 꼬리표가 붙어다닐 것이다. 또 거기서
벗어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우리만의 브랜드가 필요했던 것이다. 물론 자체 브랜드를 만들고 수출하기까지도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거시적으로 보면, 우리 브랜드를 수출하는 것이 우리 회사로 보
나 국가적인 차원으로 보나 훨씬 큰 이익이다.
솔직히 우리 브랜드를 수출하기까지도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거시적으로 보면, 우리
브랜드를 수출하는 것이 우리 회사로 보나 국가적인 차원으로 보나 훨신 큰 이익이다.
솔직히 우리 브랜드를 수출하겠다는 것도 자신이 있기 때문에 고집을 부리는 것이다. 앞
으로 2년이면 충분하다고 믿는다. 2년 안에 우리 브랜드는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도 인정받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미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몇몇 나라에 우리 옷이 선보이
고 있다.
중요한 건 브랜드 파워
지금은 우리 브랜드가 백화점에 입점해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백화점 입점 반
대주의자였다. 백화점 쪽에서 들으면, 코웃음을 칠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때까지의 내 생각은 단호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게 돼있다는 것이다.
백화점에서 먼저 찾아와 내 쪽에 유리한 조건으로 입점을 제의한다면 모를까, 굳이 내가 나
서서 백화점에 들어갈 이유는 없었다.
물론 백화점 입점으로 인한 이득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일단 어느 제품이든 백화점에 들
어가면 그만큼 부가 가치가 있는 건 사실이다. 1차적인 이점은 소비자들에게 효과적으로 알
려진다는 것이다. 광고나 홍보를 하지 않아도 브랜드에 대한 소비자 인식 역시 달라진다. 한
마디로 백화점에 입점하기 전에 시장에서만 거래될 때는 '시장옷'이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그러나 일단 백화점에 진열해놓으면 '백화점 의류'로 평가 절상된다. 다시 말해 고급적인 이
미지가 새로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면 대리점 모집도 한결 수월해진다. 대리점이 늘면 그만큼 유통과 판매망도 동반 상
승하므로 매출액도 껑충 뛴다. 회사가 빅뱅하듯 규모가 커지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어느 회사든 백화점에 입점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게 사실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백화점측은 입점 희망 업체들에게 언제나 상전이다. 느긋하게 이 조건 저 조건
을 제시한다. 다소 불리한 조건으로라도 그냥 감수하는 게 현 우리 나라 유통의 현실이다.
하지만 난 달랐다. 난 처음부터 백화점 입점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
다. 굳이 그럴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이다.
우리 브랜드는 백화점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대리점을 하겠다는 사람이 늘어나는 추세였
다. 특히 주 소비자층인 젊은이들이 몰리는 거리에는 거의 우리 대리점이 있었다.
내가 굳이 백화점 입점을 고집하지 않은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바로 내가 추구하는 유
통 방식과 백화점이 하고 있는 그것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내가 지향하는 유통 방식은 완사입 유통이다. 즉 대리점마다 물건을 현금을 주고 사다가
각자 파는 방식이다.
이에 비해 백화점은 한마디로 임대 사업이라고 보면 된다. 백화점 자리를 업체에 빌려주
고 그 수수료를 받는 방식인 것이다. 더욱 문제인 것은 판매 대금 결제가 바로바로 현금화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나마 어음으로 결제해줄 때도 많다.
나는 유통에 있어서 철저하게 현금 거래를 원칙으로 한다. 때문에 우리가 백화점에 들어
간다는 것은 오히려 손해라고 생각했다. 분만 아니다. 백화점은 파워가 세다. 세 내고 장사
하는 업체는 약자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백화점에서 벌이는 행사조차도 툭하면 업체 부담
으로 떠넘긴다. 그것은 곧 제품의 고가를 초래하고, 결과적으로 그 부담은 고스란히 소비자
에게 돌아가게 된다. 이런 방식은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백화점 쇼핑몰에는 우리 옷이 들어가 있다. 물론 내가 먼저 입점
을 시도한 건 아니다. 백화점 쪽에서 먼저 입점 의뢰를 해왔고, 그에 맞춘 것뿐이다. 결국
백화점조차도 굴복할 수 있을 만큼 우리 브랜드 파워가 강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소비
자들이 그만큼 우리 옷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물론 소비자들에게 더욱 어필할
수 있는 옷을 만들어야만 한다.
보통 경제학에선 수요와 공급이 만나는 점에서 가격이 결정된다고 한다. 하지만 패션은
아니다. 오히려 비싸면 더 잘 팔리기도 한다. 무조건 싸다고 날개 돋힌 듯 팔리는 것도 아니
다. 가치가 가격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난 옷 제작비와 유통비 등을 감안한 적정한 선에서 옷값이 정해지기를 바란다.
성공? 아직은 연습 게임일 뿐이다
유명세를 타다 보니 요즘 하루에 한 번꼴로 인터뷰를 한다. 처음에는 기자들과 이야기하
는 게 무작정 즐거웠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인터뷰를 마치고, 내 사진이 실린 지면이나 방송
을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를 공허감이 밀려온다. 뭔가 내 모습이 과장되고 왜곡되는 측면도
발견하게 된다. 어차피 언론이라는 건 독자나 시청자의 눈을 사로잡아야 하기 때문에 다소
선정적일 수 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마치 내가 대단한 성공이라도 한 젊은이인 것처럼 비
쳐질 때도 있다.
물론 지금까지 이룩한 나의모든 것들이 예사로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도 지
금의 내 모습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성공했다.'는 결
과에 대한 자부심이 아니다. 내가 이렇게 이룩하기까지 나 스스로 노력했고, 그것이 좋은 결
실을 맺은 것에 대한 일종의 떳떳함이다.
난 지금까지 나 스스로 성공했다고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건 목표를 다 이루었
다는 완료형이다. 하지만 난 어디까지나 현재진행형일 뿐이다.
어느 알피니스트에게 산을 오르는 이유를 묻자. '그저 산이 있기에 오른다'는 대답을 했다
고 한다.
나는 지금의 내 모습을 등반가에 비유하고 싶다.
히말라야나 에베레스트산에 오르려는 사람들을 보자. 그들이 처음부터 그 산에 곧장 도전
하는 건 아닐 것이다. 그 산을 정복하기 전에 수많은 다른 산을 차례차례 오르다가 마침내
그 산에 도전장을 내미는 것이다.
지금의 나도 그렇다. 세계 최고봉을 정복하기 위해 작은 산들을 정복해나가는 과정에 있
는 것이다. 점점 희박해지는 산소, 갑작스런 기후 변화, 셀파의 중요성 등을 차근차근 답사
해가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훈련은 별 무리 없이 진행된 것 같다. 산에 올랐다가 심한 기상이변으로 도중
하차를 해야 했던 일도 없었다. 또 등반중에 크게 부상한 일도 없었다. 물론 작은 상처는 수
도 없이 입었다. 그러나 다른 등반가에 비하면 상처랄 것도 없는 보잘것없는 것들이다. 손에
쥔 지도와 나침반을 보고 가고 있지만 외적인 환경에는 그때 그때 대응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상처 입을 각오 정도는 해야 한다.
난 일찌감치 내가 정복해야 할 산을 정해놓았다. 그리고 그 산을 정복하기 위해 치밀하게
준비해왔고, 노력해왔다. 그 결과 순탄하게 조금씩 높은 산들을 차례차례 정복해가고 있는
중이다.
내가 깃발을 꽂고 싶은 최종 도착지는 '세계 최대 패션 회사 창립'이다. 지금은 그 거대한
산을 정복하기 위해 막 발걸음을 내딛은 상태다. 우선 국내 의류 업계의 비주류 시장에서
작은 봉우리쯤 와 있다고 생각한다.
내 목표가 이루어지고, 마침내 '성공했다'고 말하기까지는 긴장을 늦추지 않을 셈이다. 패
션에서 오늘은 내가 강자일 수 있지만 내일 또 누군가가 혜성같이 나타나 내 자리를 빼앗을
수 있다.
나는 패션 사업은 전략적 시뮬레이션 게임이라고 정의한다.
패션 사업이야말로 대단히 재미있는 게임이다. 가격과 유통을 치밀하게 분석해서 동종업
자들을 물리치고 앞서 나가야 한다. 또 소비자들을 상대로 심리전을 벌어야 할 때도 있다.
그 과정은 극도의 긴장감의 연속이다. 마침내 동종업자들 사이에서 선두가 되고, 소비자들에
게 확실히 어필이 된다면 조심스럽게 성공이라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난 지금까지 게임에서 자신감을 얻었다. 숱한 실수와 몇 번의 좌절을 맛보기도 했지만 잃
은 것보다 얻은 게 많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붙었다.
예를 들어 내가 오늘의 이 결과물을 다 날린다 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는 것이
다. 30세까지는 연습 게임, 지금부터가 본 라운드다.
패션계의 서태지가 되고 싶다
동대문 밀리오레에는 장사를 함께 시작해서 호형호제하며 가깝게 지내는 분들이 많다. 비
록 처음 시작은 똑같았지만 2년여가 지난 오늘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그들은 똑같은 자리
에서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장사를 하고 있지만 나는 사업체를 경영하는 경영주가 되었
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더 큰 미래를 준비했느냐 아니냐에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현재를
살면서도 동시에 미래를 준비해간다.
1.2평짜리 가게에서 장사를 하면서도 더 큰 미래를 목표로 세우고 준비해왔다. 지금도 마
찬가지다. 예전 계획이 2년이나 앞당겨질 정도로 일이 순조롭게 풀렸고 기대보다 돈도 많이
벌었다. 물론 이 상태에서 만족할 수도 있지만 더 큰 발전을 위해 다시 채찍질이다. 지금 중
요한 건 내실을 다지는 일이다.
이제 매출액 규모보다는 순이익을 많이 내서 내실있는 회사로 키우는 게 중요하다. 순이
익이 생기면 그 돈을 아낌없이 재투자할 것이다. 그래서 내가 꿈꾸는 패션 벤처 회사를 만
들어 코스닥에 등록할 계획이다.
결국 회사를 잘 운영해서 이익을 남기는 것만이 내 목표가 아니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회사의 가치를 높이는 일이다. 그래야 더 튼튼하고 오래가는 회사가 되는 것이다.
밀리오레에 들어갈 때마다 그 높은 건물을 올려다본다. 머지않아 나 역시 그만한 패션 상
가 건물을 가지게 되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내 이름을 단 그런 큰 건물이 세워질 것이라는
꿈은 잠깐이나마 나를 흥분되게 한다. 비록 그것이 지금 당장은 꿈일 뿐이지만 머지않아 현
실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꿈은 실현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난 음악평론가는 아니지만 지난 1992년은 우리 나라 음악사에 하나의 획이 그어진 해라고
생각한다. 바로 '서태지와 아이들'의 출현이다.
지금도 서태지와 아이들을 텔레비전에서 처음 보았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무대를
휩쓸고 다니며 추는 춤만 해도 낯설기 그지없었다. 그건 그전의 댄스 가수들이 보여주었던
춤과는 차원이 달랐다. 더군다나 그들이 모습은 또 얼마나 자유로웠는가. 무릎까지 껑충 올
라온 바지, 목이 긴 운동화, 상표가 훤히 보이는 모자 등 노랫말은 더욱 압권이었다.
"난 알아요~."
경쾌한 리듬과 귀를 때리는 빠른 비트의 연주 소리 등 모두가 낯설기만 했다. 하지만 그
들이 범상치 않은 가수임에는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데뷔
한 달 만에 가요계를 평정하고 만 것이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그 자체로 신화였고 브랜드였다. 우리 나라 음악사에 하나의 획을 그
은 인물인 것이다. 지금은 각자 흩어졌고, 서태지는 은둔하며 작업에 열중하고 있지만, 여전
히 그들의 이름은 잊혀지지 ㅇ낳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서태지의 열광 팬은 아니지만 그가 대단한 음악가라는 점에서, 그를 높
이 평가하고 존경한다.
우리 나라 음악사에서 서태지가 그러했듯이, 나 역시 패션계에서 상징적인 인물이 되겠다
는 포부다. 음악사에 하나의 획을 그은 인물이 서태지라면, 우리 나라 패션의 역사에 전기를
마련하는 인물이 되고 싶다.
물론 서태지가 우리 나라의 음악의 한 흐름을 바꿔놓았다는 결과론적 의미만을 추구하는
건 아니다.
서태지는 천재적인 음악적 재능을 가진 인물이라고들 한다. 그렇지만 그가 우리 나라 음
악사를 다시 쓰게 하기까지에는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왔는지는 잘 알려져 잇다. 마찬가지
로, 서태지가 그러했듯이 나 역시 노력의 결과로 우리 나라 패션 변화의 주체가 되고 싶다.
그러자면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본다. 일상에서의 고정관념이나 관습
을 모조리 버려야 한다. 내 의식과 행동 역시 자유로워야 한다. 그래야만 창의적인 생각이
나올 수 있다.
패션은 한마디로 창조다. 그렇다고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만은 아니다. 기존의 것을 어떻
게 창조적으로 변화, 발전시키느냐가 중요하다. 그래서 패션 사업을 하려면 내가 무시해야
할 것은 무엇이고, 바꿔나가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따져보고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
나는 이른바 유행에만 관심을 갖지 않는다. 내가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작은 것 하나에
도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오로지 하나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다. 우리 나라 패션계의 문
군이라는 브랜드가 존재했다는 걸 알리고 싶은 것이다.
나는 35세가 되기 전에 우리 나라 패션계의 정상에 서겠다는 꿈이 있다. 지금까지의 성장
속도를 감안한다면 결코 무리한 꿈은 아니다. 난 충분히 실현 가능한 꿈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다음, 바로 그 자리, 패션계의 정상에서 물러나고 싶다.
패션 사업은 젊은 나이에 할 수 있는 분야다. 나이가 들면 패션에 대한 감각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패션은 10대들과 같은 눈높이를 가져야 한다. 소비자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원하
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젊은 감각을 지닌
직원들과의 경쟁력에서 뒤지는 것이다. 그때는 능력 있는 후배 경영인을 찾아 바통을 물려
주고 난 또 다른 시작을 해야 할 것이다.
돈을 벌었다면 그만큼 사회에 환원해야
요즘은 밀리오레에서 장사하시는 분들도 밀리오레의 대표적인 성공 주자로 우리 문군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밀리오레의 신화적인 인물이라는 극찬까지도 서슴치 않
는 분도 잇다.
내겐 너무 황송하고도 과찬의 말씀이다. 때론 부담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그만큼 나를 주
목하는 시선이 많다는 건 더 많은 사회적 책임감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질문을 받으면 매우 조심스럽다.
가장 솔직하게 대답하자면, 아직은 앞으로의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울 만큼의 여유가 없다.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상황에 대처하는 일도 장난이 아니다. 다만 내 나름대로 갖고 있는
큰 틀이 있다. 그것은 패션 사업을 시작하면서 동시에 계획해둔 마스터 플랜이었다.
나는 한 번도 자신을 단순히 장사꾼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는 이미지를 파는 사업
가다. 옷은 그 가운데 한 분야일 뿐이다.
사람들은 이미 옷을 단순히 옷으로만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이미지를 만드는 가장 중
요한 수단으로 여긴다. 내가 이미지를 중시하는 옷을 만드는 것도 그런 소비자 흐름을 익었
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경향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강해지고 있다.
지금까지는 연예인 등 일부 소수만이 자신의 이미지 관리를 중요하게 여겨왔다. 하지만
앞으로는 일반인들도 무엇보다 자신의 이미지를 중요시할 것이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어필하고 싶은 욕구가 강해지는 것이다. 경쟁 사회에서 남보다 앞서가기 위해서라도
자신을 제대로 표현하고 알려야 한다. 점차 이미지도 전략이 되고 있다.
지금 내가 이룩한 모든 것들은 너무도 빨리 찾아왔다. 내가 계획했던 것보다 2년여가 앞
당겨져 이루어졌다. 때문에 내 삶의 다른 계획들도 수정될 수 밖에 없다.
지금 계획으로는 35세까지만 패션 사업을 할 생각이다. 그때쯤이면 문군은 패션 전문 그
룹으로 성장해 있을 것이다. 물론 나 개인으로 보자면 패션계의 정상에 우뚝 서 있을 터다.
서태지가 그러했듯이, 그 정상에서 나 역시 물러나고싶다.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처럼....
하지만 그건 은퇴라는 개념은 아니다. 어떻게 보면 사업 확장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본
격적인 이미지 사업을 시작할 계획이기 때문이다. 일단 패션에서 성공했다면, 그 노하우를
살릴 수 있는 사업을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미지 사업이다. 이미지가 강조된 또 다
른 사업을 할 것이다.
사실 35세 이후의 패션 이미지 사업 계획도 언제 어떻게 수정될지 모르겠다. 요즘처럼 당
황스러울 만큼 급변해가는 상황에서는 나 자신조차 내가 35세에 어떤 모습으로 있을지 정말
모르겠다.
애늙은이 같은 소리 같지만, 돈은 개같이 벌어서 정승처럼 쓰고 싶다. 어차피 내 인생의
목표는 돈을 벌자는 게 아니다. 우리 나라 패션의 역사를 바꿔놓을 만큼 패션계의 한 정점
에 서는 것이다.
때문에 나는 매출액이 얼마니 하는 수치에 연연하지 않는다. 경영이라는 측면에서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려 노력하는 것뿐이다. 어차피 묙표가 이루어지면 자연히 돈은 따라오
게 되어 있다.
또 나만을 위해 돈을 쓰고 싶진 않다. 돈을 벌어 좋은 건 다른 사람에게 쓸 수 있는 입장
이 된다는 것이다.
나도 한때나마 돈이 없어 비참했던 시절이 있었다. 대학 3학년 때 아버지 사업이 실패했
을 때다. 그때까지 돈 귀한 줄을 모르고 물 쓰듯 했던 나였다. 학생 신분에 날마다 나이트클
럽이니 록 카페를 다니며 하루 3만-4만원씩 썼다. 그러던 내가 아버지 사업이 실패하면서
등록금을 걱정해야 할 입장이 되었으니, 얼마나 비참했겠는가.
그때는 학교에서 후배들 만날까봐 피해다니기도 했다. 선배는 영원한 물주라고, 후배를 만
나면 무조건 밥 사고 술 사고 해야 했는데 그럴 형편이 못되었던 까닭이다. 오죽하면 점심
시간에 후배들 만날까봐 전전긍긍하고, 혼자서 숨어 점심을 먹었을까.
하지만 그렇게 돈이 궁하던 시절에도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욕심은 없었다. 그러고 보면
애초에 나란 사람은 물욕이 많은 것 같지는 않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난 돈 한푼 없는 가난뱅이였다. 그때는 모임이 있다고 연락이 와도
회비 1만원이 없어서 망설였다. 그러던 내가, 이제는 모임에서 웬만한 액수는 혼자 계산하는
입장이 되었다. 친구들과 기분 좋게 어울리고 나오면서, 계산을 할 때의 기분은 너무도 좋
다. 결코 내가 이제는 부자라는 과시를 할 수 있어서가 아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망설임 없
이 돈을 쓸 수 있다는 게 좋을 뿐이다.
물론 나 자신에게만큼은 여전히 궁하게 쓴다. 8년 전에 산 시계를 최근까지만 해도 망가
질 때까지 차고 다녔다. 돈을 버는 게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어서인지 돈을 벌었다 해도 나
자신을 위해 쓰고 싶은 생각이 없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후한 마음이 된다. 앞에서도 말한 적이 있지만, 그만큼 나 자신이
여유가 있다는 뜻일 것이다.
최근에 시장에서 장사하면서 알게 된 분이 1천만원만 꿔달라고 찾아왔다. 난 아무런 조건
없이 그분에게 1천만원을 선뜻 내줬다. 그분에게 언제까지 갚을 수 있느냐고 물어보기는 했
지만 솔직히 그 돈을 꼭 받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빌려준 건 아니었다.
이 일로 우리 회사 감사 역할을 해주시는 아버지께 꾸중을 들어야 했다. 그렇게 돈 거래
가 분명치 않아서 무슨 사업을 하겠느냐고 충고하셨다. 그때 나는 아버지께 이런 말씀을 드
렸다.
"세상을 빡빡하게 사록 싶지는 않아요. 나라고 늘 잘되라는 법은 없잖아요. 혹시라도 내가
어려워졌을 때, 그분이 나를 외면하겠어요? 미래를 생각하면 투자인 셈이죠."
실제로 이런 식으로 돈을 꿔준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난 그분들에게 한 번도 돈을
독촉해본 적이 없다. 내가 어려워서 그분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보다는, 그분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입장이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유쾌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굳이 돈을 벌고 싶은 이유는 바로 패션 박물관을 짓고 싶어서다. 최근 신문을 보니
영화배우였던 신영균 씨가 제주도에 영화 박물관을 지었다고 한다. 그 기사를 읽으면서, 그
분은 참 보람 있겠다 싶은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사실 우리 나라만큼 패션을 공부하는 사람이 많은 나라도 드물다. 그러나 패션을 공부하
는 학생들의 입장에서 제대로 보고 배울 수 있는 곳도 역시 드물다. 이런 학생들을 위해 패
션 박물관을 지어 패션 발자취를 한눈에 볼 수 있게 해주고 싶다.
나는 돈을 번다면 그만큼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의 꿈은 패션 벤처 회사의
창립이다. 우리 나라 패션 사업 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게 내 희망이다. 우리 나라는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아이디어로 승부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패션은 무궁무진한 미개척지다.
나는 그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컬럼버스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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