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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시조 [이문열]

by Casey,Riley 2023. 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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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시조(金翅鳥)

이문열(李文烈)

 무엇인가 빠르고 강한 빗줄기 같은 것이 스쳐간 느낌에 고죽(古竹)은 눈을 떴다. 얼마 전에 가까운 교회당의 새벽 종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어느새 아침이었다. 동쪽으로 난 장지 가득 햇살이 비쳐 드러난 문살이 그날 따라 유난히 새카맸다.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피려는데 그 작은 움직임이 방안의 공기를 휘저은 탓일까, 엷은 묵향(墨香)이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고매원(古梅園)인가, 아니, 용상봉무(龍翔鳳舞)일 것이다. 연전(年前)에 몇 번 서실을 드나든 인연을 소중히 여겨 스스로 문외제자(門外弟子)를 자처하는 박교수가 지난봄 동남아를 들러 오는 길에 사왔다는 대만산(臺灣産)의 먹이다. 그때도 이미 운필(運筆)은커녕 자리보전을 하고 누웠을 때라 고죽은 웬지 그 선물이 고맙기보다는 서글펐었다. 그래서 고지식한 박교수가,
 "머리맡에 갈아 두고 흠향(歆香)이라도 하시라고……"
하며 속마음 그대로 털어놓는 것을, 예끼, 이사람, 내가 귀신인가, 흠향을 하게…… 하고 핀잔까지 주었지만, 실은 그대로 되고 말았다. 문안 오는 동호인(同好人)들이나 문하생들을 핑계로, 육십 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 지내 온 분위기를 바꾸지 않으려고 매일 아침 머리맡에서 먹을 가는 추수(秋水)의 갸륵한 마음씨에 못지 않게 그 묵향 또한 좋았던 것이다.
 묵향으로 보아 추수가 다녀간 것임에 틀림없었다. 조금 전에 그의 잠을 깨운 강한 빗줄기는 어쩌면 그 아이가 나가면서 연 장지문 사이로 새어든 햇살이었을 게다. 고죽은 그렇게 생각하며 살며시 몸을 일으켜 보았다. 마비되다시피한 반신 때문에 쉽지가 않다. 사람을 부를까 하다가 다시 마음을 돌리고 누웠다. 아침의 고요함과 평안과, 그리고 이제는 고통도 아무것도 아닌 쓸쓸함을 의례적인 문안과 군더더기 같은 보살핌으로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참으로---고죽은 천장의 합판무늬를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했다---이 한살이(生)에서 나는 오늘과 같은 아침을 얼마나 자주 맞았던가. 아무도 없이, 그렇다, 아무도 없이…… 몽롱한 유년에도 그런 날들은 수없이 떠오른다. 다섯인가 여섯인가 되던 어느 아침에도 그는 장지문 가득한 햇살을 혼자 맞은 적이 있다. 밖에는 숨죽인 곡성이 은은하고---그러다가 흰옷에 산발한 어머니가 그를 쓸어안고 혼절하듯 쓰러진 것은, 너무 오래 혼자 버려져 있다는 기분에 이제 한번 큰 소리로 울음이나 터뜨려 볼까 하던 때였다. 또 있다. 그때는 제법 일 여덟이 되었을 때인데 전날 어머님과 함께 잠이 들었던 그는 또 홀로 아침을 맞게 되었다. 역시 할머니가 와서 그를 쓸어안고 우시면서 이렇게 넋두리처럼 외인 것은 방안의 고요가 갑자기 섬뜩해져 문을 열고 나서려던 참이었다.
 "아이고, 내새끼, 이 불쌍한 새끼를 어쩔고? 그 몹쓸 년이, 탈상도 못 참아서……"
 그뒤 숙부의 집으로 옮긴 후에도 대개가 홀로 깨는 아침이었다. 숙모는 언제나 병들어 다른 방에 누워 있었고, 숙부는 집보다 밖에서 더 많은 밤을 새웠다. 그런 숙부의 서책(書冊) 냄새 배인 방에 홀로 잠드는 그로서는 또한 아침마다 홀로 깨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이 유년으로 돌아가자 고죽은 어쩔 수 없이 지금과 같은 그의 삶 속으로 어린 그가 내던져진 첫날을 떠올렸다. 50년이 되는가, 아니면 60년? 어쨌든 열 살의 나이로 숙부의 손에 끌려 석담(石潭) 선생의 고가(古家)를 찾던 날이었다.

 이상도 하지, 까마득히 잊고 지냈던 지난날의 어떤 순간을 뜻밖에도 뚜렷하고 생생하게 되살리게 되는 것 또한 늙음의 징표일까. 근년에 들수록 고죽은 그날의 석담선생을 뚜렷하고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이제 갓 마흔에 접어들었건만 선생의 모습은 이미 그때 초로(初老)의 궁한 선비였다.
 "어쩌겠나? 석담, 자네가 좀 맡아 쥐야겠네. 내가 이 땅에만 있어도 죽이든 밥이든 함께 끓여 먹고 거두겠네만"
 숙부는 그렇게 말했다. 무슨 일인가로 쫓기고 있던 숙부는 기어이 국외(國外)로 망명할 결심을 굳힌 것이었다.
 "병든 아내를 맡기는 터에 이 아이까지 처가에 짐이 되게 하고 싶지는 않네. 맡아 주게, 가형(家兄)의 한 점 혈육일세"
 그러나 아무런 표정 없이 듣고 있던 석담 선생은 대답 대신 물었다.
 "자네 상해(上海), 상해하지만 실제로 거기 뭐가 있는지 아는가? 말이 임시정부라고는 해도 집세도 못 내 쩔쩔매는 판에 하찮은 싸움질로 지고새고 한다더군, 거기다가 춘강(春江) 선생님께서 아직까지 거기 계신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여긴들 대단한 게 뭐 있겠나? 어찌됐건 맡아 주겠는가, 못하겠는가?"
 그러자 석담선생은 한동안 말없이 그를 바라보더니 가벼운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먹고 입히는 것이야---어떻게 해보겠네, 하지만 아이를 기른다는 것이 어찌 그뿐이겠는가……"
 "고마우이, 석담. 그것만이면 족하네. 가르치는 일은 근심 말게. 이놈의 세상이 어찌될지 모르니 가르친들 무얼 가르치겠나? 성명 삼자는 이미 깨우쳐 주었으니 일단은 그것으로 되었네"
 그렇게 말한 숙부는 그에게 돌아섰다.
 "너 이 어른께 인사올려라. 석담 선생님이시다. 내가 다시 너를 찾으러 올 때까지 부모처럼 모셔야 한다"
 그러나 숙부는 끝내 다시 그를 찾으러 오지 않았다. 나중에, 그러니까 그로부터 이십 년이 훨씬 지난 후에야 환국하는 임시정부의 일행 사이에 늙은 숙부가 끼어 있더라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지만, 그 무렵 무슨 일인가로 분주하던 그가 이듬해 상경했을 때는 이미 찾을 길이 없었다.
 숙부와 동문(同門)이요, 오랜 지기(知己)였던 석담선생은 퇴계(退溪)의 학통을 이었다는 영남 명유(明儒)의 후예였다. 웅혼한 필재와 유려한 문인화로 한말 3대가의 하나로 꼽히기도 하지만, 사실 그는 스승 춘강이 일생을 흠모했다는 추사(秋史)처럼 예술가라기보다는 학자에 가까웠다.
 "너 글을 배웠느냐?"
 숙부가 떠나고 석담선생이 그에게 처음으로 물은 말은 그러했다.
 "동몽선습(童蒙先習)을 떼었습니다"
 "그렇다면 소학(小學)을 읽어라. 그걸 읽지 않으면 몸둘 바를 모르게 된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 뒤 그는 몇 안 되는 선생의 문하생들 사이에서 몇 년이고 거듭 소학을 읽었지만 선생은 끝내 못 본 체했다. 그러다가 열셋 되던 해에 선생은 그를 난데없이 가까운 소학교로 데려갔다.
 "세월이 바뀌었다. 너는 아직 늦지 않았으니 신학문(新學問)을 익히도록 해라"
 결국 그의 유일한 학력이 된 소학교였다. 나중의 일이야 어찌 됐건, 그걸로 보아 선생에게는 처음부터 그들 문하(門下)로 거둘 뜻은 없었음에 틀림이 없었다.
 
 돌아가신 스승을 떠올리게 되자 고죽의 눈길은 습관적으로 병실 모서리에 걸린 석담선생의 진적(眞蹟)에 머물렀다. 모든 것이 넉넉지 못한 때에 쓴 것에다 오랫동안 표구(表具)를 하지 않은 채 보관해 온 터라, 종이는 바래고 낙관의 주사(朱砂)도 날아가 희미한 누른색을 띠고 있었지만 스승의 필력만은 여전히 살아 꿈틀거리고 있었다.
 金翅劈海 香象渡河
 불행히도 석담선생은 외아들을 호열자로 잃고 또 특별히 제자를 택해 의발(衣鉢)을 전한 것도 아니어서, 임종 후로는 줄곧 석담의 고가(古家)를 지킨 고죽에게는 비교적 스승의 유품이 많았다. 그러나 장년(壯年)을 분방히 떠다니는 동안 돌보지 않은데다 동란까지 겹쳐 남아 있는 진적은 몇 점 되지 않았다. 언젠가 고죽은 병석에서 이제 머지 않아 스승을 뵈올 터인즉 후인(後人)의 용렬함을 어떻게 변명하겠는가, 하며 탄식한 적이 있는데 그 속에는 자신의 그와 같은 소홀함에 대한 뉘우침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중요한 예외가 지금의 액자였다. 그가 일평생 싫어하면서도 두려워하고, 이르고자 하면서도 넘어서고자 했던 스승의 가르침이 거기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이상 붓을 놀릴 수 없는 요즈음에 와서도 그 액자의 자획 사이에서 석담선생의 준엄한 눈길을 느낄 정도였다.
 스물 일곱 때의 일이었다. 조급한 성취감에 빠진 그는 스승에게 알리지도 않고 문하를 빠져나왔다. 좋게 말하면 자기 확인을 위해서였고 나쁘게 말해서는 자기과시의 기회를 찾아서였다. 그리고 그 뒤 석달간 적어도 그 자신에게는 성공적인 유력(遊歷)이었다. 적파(赤坡)의 백일장에서는 장원을 했고, 내령(內嶺), 청하(淸夏), 두산(豆山) 등 몇 군데 남아 있던 영남의 서당(書堂)에서는 진객이 되었으며 더러는 산해진미에 묻혀 부호의 사랑에서 유숙하기도 했다. 석 달 뒤에 그 동안 글씨나 그림을 받아 가고 가져온 종이와 붓값 대신 받은 곡식을 한 짐 지어 돌아올 때만 해도 그의 호기는 만 장이나 치솟았다. 그러나 석담선생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그걸 내려놓아라"
 문 앞을 가로막은 석담선생은 먼저 짐꾼에게 메고 온 것을 내려놓게 했다. 그리고 이어 그에게도 말하였다.
 "너도 필낭(筆囊)을 벗어 이 위에 얹어라"
 도무지 거역할 엄두가 나지 않는 음성이었다. 그는 영문도 모르고 필낭을 벗어 종이와 곡식 꾸러미 위에 얹었다. 그러자 선생은 소매에서 그 무렵에는 당황(唐黃)으로 불리던 성냥을 꺼내더니 거기에다 불을 붙였다.
 "선생님, 어쩔 작정이십니까?"
 그제서야 황급하게 묻는 그에게 석담선생은 냉엄하게 대답했다.
 "네 숙부의 부탁도 있고 하니 한 식객으로는 내 집에 붙여 두겠다. 그러나 그 선생님이란 말은 앞으로 결코 입에 담지 말아라. 아침에 붓을 쥐기 시작하여 저녁에 자기 솜씨를 자랑하는 그런 보잘것없는 환쟁이를 나는 제자로 기른 적이 없다"
 그 뒤 고죽은 노한 스승의 용서를 받는 데 꼬박 2년이 걸렸다. 처음 문하의 끝자리를 얻을 때보다 훨씬 참기 어려운 혹독한 시련의 세월이었다. 그리고 지금 올려 보고 있는 글귀는 바로 그 감격적인 사면(赦免)을 받던 날 석담선생이 손수 써서 내린 것이었다.
 글을 씀에, 그 기상은 금시조(金翅鳥)가 푸른 바다를 쪼개고 용(龍)을 잡아 올리듯하고, 그 투철함은 향상(香象)이 바닥으로부터 냇물을 가르고 내를 건너듯하라…….
 그리고 보면 어렵고 어려웠던 입문(入門)의 과정도 고죽의 기억 속에는 일생을 가도 씻기지 않는 한(恨)과도 흡사한 빛 속에 싸여 있다.
 그 어떤 예감에서였는지 석담선생은 처음 그를 숙부에게서 떠맡을 때부터 차거운 경계로 대했다. 명문이라고는 해도 대를 이은 유자(儒者)의 집이라 본시 물려받은 살림도 많지 않았지만, 그리고 그 무렵은 그나마도 줄어 몇 안 되는 문인(門人)들이 봄가을로 올리는 쌀섬에 의지해 살아가고는 있었지만, 어린 그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석담선생의 심기를 건드릴 만큼의 경제적인 부담은 아니었다. 거기다가 나중 그가 자라 거의 지탱할 수 없는 스승의 살림을 도맡아 살 때조차도 석담선생의 그런 태도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거기에는 무언가 본질적인 문제가 있었다.
 남들이 한두 해면 읽고 지나갈 소학을 몇 년씩이나 거듭 읽도록 버려둔 것하며, 열셋이나 된 그를 소학교 사학년에 집어넣어 굳이 자신의 학문과는 거리가 먼 곳으로 밀어낸 것도 석담선생의 그런 태도와 연관을 가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거기 못지않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런 석담선생에 대한 그 자신의 감정이었다. 스승의 생전 내내, 그는 스승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사모와 그에 못지 않은 격렬한 미움으로 뒤얽혀 보내었다. 가만히 돌이켜보면, 그런 그의 감정 역시 어떤 필연적인 논리와는 멀었지만, 그것이 뚜렷이 자리잡기 시작한 시기만은 대강 짐작이 갔다. 열 여섯에 소학교를 졸업하고 석담선생의 집안에 남은 후부터 열 여덟에 정식으로 입문할 때까지였다. 그 동안 그는 학비를 도와주겠다는 당숙 한 분의 호의도 거절하고, 또 나날이 달라지는 세상과 거기에 상응하는 신학문에 대한 동경도 외면한 채, 가망없는 석담선생의 살림을 맡아 꾸려 나갔다. 이미 문인들이 가져오는 쌈섬으로는 부족하게 된 양식은 소작 내준 몇 뙈기 논밭을 스스로 부쳐 충당했고, 한 점의 땔감을 위해서는 이십 리 삼십 리 길도 마다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갸륵하게 여겼지만 실은 그때부터 그의 가슴에는 석담선생을 향한 치열한 애증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봄날 산허리를 스쳐가는 구름 그늘처럼, 또는 여름날 소나기가 씻어 간 들판처럼, 가을계곡의 물처럼, 눈 그친 후에 트인 겨울하늘처럼 유유하고 신선하고 맑고, 고요하면서도 또한 권태롭고 쓸쓸하고 적막한 석담선생의 삶은 알듯 말 듯한 미소에 젖어 조는 듯 서안(書案) 앞에 앉아 있을 때,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은 이제는 다만 지난 영광의 노을로서만 파악되는 어떤 유연한 세계를 넘나들 때나 신기(神氣)가 번득이는 눈길로 태풍처럼 대필(大筆)을 휘몰아갈 때, 혹은 뒤꼍 한 그루의 해당화 그늘 아래서 탈속한 기품으로 난(蘭)을 뜨고 거문고를 어룰 때는 그대로 경건한 삶의 한 사표(師表)로 보이다가도, 그 자신이 돌보아 주지 않으면 반년도 안 돼 굶어 죽은 송장을 쳐야 할 것 같은 살림이나, 몇몇 늙은이와 이제는 열 손가락 안으로 줄어든 문인들을 빼면 일 년 가야 찾아 주는 이 없는 퇴락한 고가나, 고된 들일에서 돌아오는 그를 맞는 석담선생의 무력한 눈길을 대할 때면 그것이야말로 반드시 벗어나야 할 무슨 저주로운 운명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결국 고죽의 삶을 지배한 것은 사모와 동경 쪽이었다. 새로운 세계로의 강렬한 유혹을 억누르고 신학문을 포기했을 때 이미 예측됐던 것처럼 그는 어느새 자신도 모를 열정으로 석담선생을 흉내내고 있었다. 문인들이 잊고 간 선생의 체본(體本), 선생이 버린 서화의 파지(破紙)나 동도(同道)들과 주고받다 흘린 문인화 같은 것들이 그의 주된 체본이었지만 때로는 대담하게 문갑에서 빼낼 때도 있었다.
 처음 한동안 그가 썼던 지필(紙筆)은 후년에 이르러 회상할 때조차도 가슴에 썰렁한 바람이 일게 하는 것들이었다. 작은 글씨는 스스로 만든 사판(沙板)이나 분판(粉板)에 선생의 문인들이 쓰다 버린 몽당붓을 주워서 익혔고 큰 글씨는 남의 상석(床石)에 개꼬리 빗자루로 쓴 후 물로 씻어 내리곤 했다. 그가 맨 처음 자신의 붓과 종이를 가져 본 것은 선생 몰래 붓방과 지물포에 갈비(솔잎) 한 짐씩을 해다 준 후였다…….
 석담선생은 나중에 그걸 고죽의 아망이라고 나무랐다지만, 그렇게 어려운 수련을 하면서도 그가 끝내 석담선생에게 스스로 입문을 요청하기는커녕 자신의 뜨거운 소망을 비치지조차 않은 것은 그 둘의 관계로 보아 잘 믿기워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그의 예술적인 자존심, 어떤 종류의 위대한 영혼에게서 발견되는 본능적인 오만이나 아니었던지.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석담선생 내외가 나란히 집을 비워 그 홀로 빈집을 지키게 된 그는 선생의 서실을 치우다가 문득 야릇한 충동을 느꼈다. 그때까지의 연마를 한눈으로 뚜렷이 보고 싶다는 충동이었다. 마침 석담선생이 간 곳은 백리 길이 넘는 어떤 지방 유림(儒林)의 시회(詩會)여서 그 날 안으로는 돌아올 수 없었다.
 그는 곧 서탁을 펼치고 선생의 단계석(端溪石) 벼루에 먹을 갈기 시작했다. 선생의 법도에 따라 연진(硯脣)에 먹물 한 방울 튀기지 않고 묵지(墨池)가 차자 선생이 필낭에 수습하고 남긴 붓과 귀한 화선지를 꺼냈다.
 먼저 그는 해서(楷書)로 안체(顔體) 쌍학명(雙鶴銘)을 임사(臨寫)했다. 추사(秋史)가 예천명(醴泉銘=구양순이 쓴 九成官醴泉銘)을 정서(正書)를 익히는 데에 으뜸으로 치던 것처럼 석담선생이 문인(門人)들에게 가장 힘써 익히기를 권하던 것인데, 종이와 붓이 익숙해짐과 동시에 체본과 흡사한 자획이 나왔다. 다음도 역시 안체 근례비(勤禮碑)……차츰 그는 고심참담하면서도 황홀한 경지로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그가 돌연한 호통소리에 정신을 차린 것은 그 무렵 들어 익히기 시작한 난정서(蘭亭序) 첫머리 <永和九年歲在癸丑……>을 막 끝낸 적후였다.
 "이놈, 그만두지 못하겠느냐?"
 놀란 눈을 들어보니 어느새 어둑해진 방안에 석담선생이 우뚝 서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호통소리는 높았지만 얼굴에는 노기보다 까닭 모를 수심과 체념이 서려 있었다. 그 곁에는 시(詩), 화(畵), 위기(圍棋), 점복(占卜), 의약(醫藥) 등 일곱 가지에 두루 능하다 해서 칠능군자(七能君子)란 별호를 가진 운곡(雲谷) 최선생이 약간 기괴하다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당황한 그는 방 안 가득 널려 있는 글씨들을 허겁지겁 주워 모았다. 예상과는 달리 석담선생은 그런 그를 망연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때 운곡이 나섰다.
 "글씨는 두고 가거라"
 허둥거리며 방안을 치운 후에 자신이 쓴 글씨를 들고 문을 나서는 고죽에게 이르는 말이었다. 그는 거의 반사적으로 시키는 대로 따랐다. 그러나 야릇한 호기심과 흥분으로 이내 사랑채 부근으로 돌아와 방안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 사이 불이 밝혀진 방안에서는 한동안 종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만 들리더니 이윽고 운곡이 물었다.
 "그래, 진실로 석담께서 가르치시지 않았단 말씀요?"
 "어깨너머 배웠다면 모르되 나는 결코 가르친 바 없소"
 석담선생의 웬지 우울하고 가라앉은 대답이었다.
 "그렇다면 실로 놀라운 일이오. 천품(天品)을 타고났소"
 "……"
 "왜 제자로 거두시지 않으셨소?"
 "비인부전(非人不傳)--운곡께서는 왕우군(王右軍=왕희지)의 말을 잊으셨소?"
 "그럼 저 아이에게 가르침을 전하지 못할 만큼 사람답지 못한 데가 있단 말씀이오?"
 "첫째로 저 아이에게는 재기(才氣)가 너무 승하오. 점획(點劃)을 모르고도 결구(結構)가 되고, 열두 필법(筆法)을 듣지 않고도 조정(調停)과 포백(布白)과 사전(使轉)을 아오. 재기로 도근(道根)이 막힌 생래의 자장(字匠)이오"
 "온후하신 석담답지 않으신 말씀이오. 석담께서 그 도근을 열어 주시면 될 것 아니겠소?"
 "그게 쉽겠소? 게다가 저 아이에게는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가 있을 리 없소. 그런데도 이 난(蘭)은 제법 간드러진 풍류로 어우러지고 있소"
 "석담의 문하가 된 연후에도 문자향과 서권기에 빠질 리가 있겠소? 그만 거두시구려"
 "본시 내가 맡은 것은 저 아이의 의식(衣食)뿐이었소. 나는 저 아이가 신학문이나 익혀 제 앞을 가리기를 바랐는데……"
 "석담, 도대체 왜 그러시오? 인연이 없는 자도 배움을 구해 찾아들면 내쫓을 수 없는 법인데, 벌써 칠팔 년이나 한솥밥을 먹고 지낸 저 아이에게만 유독 냉정한 건 무슨 일이시오? 듣기에 저 아이는 벌써 몇 년째 석담의 어려운 살림을 도맡아 산다는데, 그 정성이 가긍하지도 않소?"
 거기서 문득 운곡의 목소리에 결기가 서렸다. 운곡도 석담선생과 그 사이의 기묘한 관계를 들은 게 있는 모양이었다.
 "너무 허물하지 마시오. 실은 나 자신도 왜 저 어린아이가 마음에 걸리는지 알 수 없소. 웬지 저 아이를 볼 때마다 이건 악연(惡緣)이다. 이런 기분뿐이오"
 석담선생의 목소리가 가볍게 떨렸다.
 "그럼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소? 석담, 정 거리끼신다면 사흘에 한 번이라도 좋으니 저 아이를 내게 보내시오. 이미 저 아이는 이 길을 벗어나기는 틀린 것 같소"
 그러자 한동안 방안에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석담선생의 낮으나 결연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실 필요는 없소이다. 내가 길러 보겠소"
 그때 석담선생께서 악연이라 한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말이었을까? 그리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갑자기 그를 받아들인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고죽이 석담 문하에 정식으로 이름을 얹은 것은 그 다음날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슨 엄숙한 입문의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지게를 지고 대문을 나서는 고죽을 석담선생이 불렀다.
 "이제부터는 들일을 나가지 말아라"
 마치 지나가면서 하는 듯한 말투였다. 그리고 갑작스런 명(命)에 어리둥절해 있는 고죽을 흘깃 건네보고는 약간 소리높여 재촉했다.
 "지게를 벗고 사랑에 들란 말이다"
 ---그것이 그들 사제간의 숙명적인 입문의식이었다.

 갑자기 방문을 여는 소리에 아련한 과거를 헤매이던 고죽의 의식이 현실로 돌아왔다. 잘 모아지지 않은 시선으로 문께를 보니 매향(梅香)이 들어서고 있었다. 그러자 이상하게 등줄기가 서늘해지며 눈앞이 밝아 왔다. 얼마나 원망스러웠으면 이리로 찾아왔을꼬----고죽은 회한과도 흡사한 기분에 젖어 다가오는 매향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아버님, 일어나셨읍니까?"
 추수였다. 가만히 다가와 그의 안색을 살피는 그녀의 화장기 없는 얼굴에는 짙은 수심이 끼어 있었다. 그는 힘을 다해 몸을 일으켰다. 그런 기색을 알아차렸던지 추수가 가만히 거들어 등받이에 기대 주었다. 몸을 일으키기가 어제보다 한결 불편해진 것이 그 자신에게도 저절로 느껴졌다.
 "과일즙이라도 좀 내올까요?"
 추수가 다시 물었다. 그는 대답 대신 그런 그녀의 얼굴을 멀거니 살피다가 힘없고 갈라진 목소리로 불쑥 물었다.
 "네 어미를 기억하느냐?"
 그가 이렇게 묻자, 추수가 놀란 듯한 눈길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마지막으로 데리고 살던 할멈이 죽은 후 7년이나 줄곧 그 곁에서 시중을 들어 왔지만 한 번도 듣지 못한 물음이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사실 그는 그보다 더 긴 세월을 매향의 이름조차 입에 담지 않았었다.
 "사진밖에는……"
 그럴테지, 불쌍한 것. 핏덩이 같은 것을 친정에 떼어 두고 다시 기방(妓房)에 나간 지 이태도 안 돼 그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으니…….
 "그런데 아버님, 그건 왜?……"
 "나는 조금 전에 네 어미가 들어오는 줄로 알았다"
 "……"
 "원래가 늙어 죽을 상(相)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서두를 필요도 없었는데……"
 그가 그렇게 말하며 새삼 비감에 젖는 것을 보자 일순 묘하게 굳어졌던 추수의 얼굴이 원래대로 풀어졌다.
 "과일즙이라도 좀 내올까요?"
 이윽고 분위기를 바꾸려고나 하는 듯이 추수가 다시 물었다. 그도 얼른 매향의 생각을 떨치며 대답했다.
 "작설(雀舌) 달여 둔 것이 있으면 그거나 한 모금 내오너라"
 그러나 추수는 잠깐 창을 열어 방 안 공기를 갈아넣은 후 조용히 방을 나갔다"

 그 어떤 열정이 나를 그토록 세차게 휘몰았던 것일까--- 추수가 내온 식힌 작설을 마시면서 고죽은 처음 매향을 만나던 무렵을 회상했다. 서른 다섯, 두번째로 석담선생의 문하를 떠난 그는 그로부터 십 년 가까운 세월을 이곳저곳 떠돌며 보내었다.
 이미 중일(中日) 전쟁이 가까운 때였지만, 아직도 유림이며 서원 같은 것이 한 실체로 명백을 잇고 있었고, 시회(詩會)며 백일장, 휘호회(揮毫會) 같은 것들이 이따금씩 열리고 있을 때였다. 시(詩) 서(書) 화(畵)에 두루 빼어났다 해서 삼절(三絶) 선생이라고까지 불렀던 석담의 전인(傳人)이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 스승에게 꾸중을 들어가며 참가한 몇 번의 선전(鮮展) 입선(入選) 덕분인지 그의 여행은 억눌리고 찌든 시대에 비하면 비교적 호사스러웠다.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팔도(八道) 어디선가 그에게 상좌(上座)를 내어주는 모임이 있었고, 한 고을에 하나쯤은 서화(書畵) 한 장에 한 달의 노자(路資)를 내줄 줄 아는 토호(土豪)가 남아 있었다.
 고죽이 진주에 들르게 된 것도 그런 세월 중의 일이었다. 무슨 휘호회인가로 그곳에서 잔치와 같은 열흘을 보내고 붓을 닦으며 행랑을 꾸리려는데 난데없는 인력거 한 채가 회장(會場)으로 쓰던 저택 앞에 머물러 그를 청했다. 전에도 없던 일은 아니었으나 재촉 속에 타고나니 인력거는 당시 진주에서는 첫째가는 무슨 관(館)으로 들어갔다. 두 칸 장방에 상다리가 휘도록 요리상을 벌여놓고 그를 기다리는 것은 뜻밖에도 대여섯의 일본 사람과 조선인 두엇이었다. 서화를 아는 관공서의 장들과 개화된 지방 유지들이었다.
 매향은 그 술자리에 불려나온 기생들 중의 하나였다. 한창 술자리가 무르익어 갈 무렵 그 자리를 마련한 듯 보이는 동척(東拓)의 조선인 간부가 기생들을 향해 빙글거리며 물었다.
 "누가 오늘 저녁에 이 선생님을 모시겠느냐?"
 그러자 기생들 사이에서 간드러진 웃음이 한동안 일더니 그 중의 하나가 쪼르르 다가와 그 앞에서 다홍치마를 걷었다. 드러난 것은 화선지 같은 흰 비단 속치마였다. 스물 두어 살이나 될까, 화려한 얼굴도 아니었고 요염한 교태도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사람을 끄는 데가 있는 여자였다. 보아 온 대로 필낭을 끌르면서도 그는 한꺼번에 치솟는 술기운을 느꼈다.
 "네 이름이 뭐냐?"
 "매향입니다"
 그녀는 전혀 주위를 의식하지 않은 듯 당돌하게 대답했다. 오히려 당황한 쪽은 그였다.
 "그럼 매(梅)를 한 그루 쳐야겠구나"
 그는 애써 태연한 척 말했지만 붓 든 손이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나중까지도 알 수 없던 것은 그가 친 매였다. 떠나온 스승에 대한 자괴감 때문인지 그녀의 속치마에 떠오른 것은 그 자신의 매가 아니라 석담선생의 매였다. 등걸은 마르고 비틀어지고, 앙상한 가지에는 매화 두어 송이, 그것도 거의가 아직 피지 않은 봉오리였다. 곁들인 글귀도 석담선생의 것이었다.
 梅一生寒不賣香
 얼핏 보아서는 매향의 이름에서 딴 것 같지만, 일생을 얼어 지내도 향기를 팔지는 않는다는 내용이 일제말 권번기(券番妓)의 속치마에 어떻게 어울리겠는가. 그러나 지금까지도 남 모르는 부끄러움으로 남아 있는 일은 정작 그 뒤에 있었다. 
 "이 매가 어찌 어렇게 춥고 외롭습니까?"
 낙관이 끝나고 매향이 그렇게 물었을 때 그는 매향에게만 들릴 만큼 낮고 침중하게 대답했다.
 "정사초(鄭思肖)의 난(蘭)에 뿌리가 드러나지 않은 걸 보았느냐?"
 그리고 뒤이어 역시 궁금히 여기는 좌중에게는 정월의 매화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지만, 매향은 분명 알아들은 눈치였다. 정사초의 난초를, 망국의 한과 슬픔을 표현하는 그 드러난 뿌리(露根)를.
 그 밤 매향은 스스럼없이 그에게 몸을 맡겼다.
 "이 추운 겨울밤에 제 속치마를 적시셨으니, 오늘밤은 선생님께서 제 한몸을 거두어 주셔야겠습니다"
 그 뒤 그는 매향과 함께 넉 달을 보내었다. 언젠가 흥겨움에 취해 넘은 봄꽃 화려한 영마루의 기억처럼 이제는 다만 즐거움과 달콤함의 추상만이 남아 있는 세월이었다. 그러다가 이윽고 그들의 날은 끝났다. 그가 망국의 한을 서화로 달래며 떠도는 선비가 아니었던 것처럼 그녀 역시 적장(敵將)을 안고 강물로 뛰어드는 의기(義妓)는 아니었다. 그가 자신도 모르는 열정에 휘몰려 떠도는 한낱 예인(藝人)에 불과하다면, 그녀도 또한 돌보아야 할 부모형제가 여덟이나 되는 가무기(歌舞妓)일 뿐이었다.
 둘은 처음부터 결정된 일을 실천하듯 미움도 원망도 없이 헤어졌다. 매향은 권번으로 돌아가고, 그는 그 무렵 전주에서 열리게 된 동문의 전람회를 바라고 떠났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는 마지막 이별이었다.
 그런데 이듬해 가을에 그렇게 헤어진 매향이 자신의 씨로 지목되는 딸아이를 낳았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 때 마침 내설악(內雪嶽)의 산사(山寺) 사이를 헤매고 있던 그는 별 생각 없이 추수(秋水)란 이름을 지어 보냈다. 슬프도록 맑은 가을 계곡의 물이 그 아이의 앞날에 대한 어떤 예감으로 그의 의식 깊이 와 닿은 것일까.
 그리고 다시 몇 년인가 후에 그는 매향이 죽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어떤 부호의 첩으로 들어앉은 그녀는 마나님의 등쌀에 견디다 못해 석 냥이나 되는 생아편을 물에 타 마시고 젊은 목숨을 스스로 끊었다는 것이었다. 비정이라 해야 할지, 매향의 그같은 불행한 죽음을 전해 들어도 그는 별다른 슬픔을 느끼지 못했다. 다만 그녀의 몸을 빌어 태어난 자기의 딸이 있었다는 것과 그 아이가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 하는 것을, 그것도 얼핏 떠올렸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가 정작 추수의 얼굴을 처음 대하게 된 것은 그가 살고 있는 도시의 여학교로 그녀가 진학을 하게 된 뒤의 일이었다. 불행하게 죽은 누이 덕분으로 그런대로 한 살림 마련한 그녀의 외삼촌은 누이에 대한 감사를 하나뿐인 생질녀(甥姪女)를 돌보는 일로 대신한 탓에 그녀는 별로 어려움 없이 지내고 있었지만, 그는 가끔씩 딸을 만나러 그 여학교엘 들르곤 했다. 다가오는 노년과 더불어 새삼 그리워지는 혈육의 정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그러다가 그들 부녀가 한집에 기거하게 된 것은 비교적 근년의 일이었다.
 이 도시에 서실(書室)을 열고 집칸을 마련하여 정착하게 되면서부터 얻어 산 할멈이 죽자 다시 홀로가 된 그에게 월남전에서 남편을 잃고 역시 홀로가 된 추수가 찾아든 것이었다. 칠 년 전의 일로, 그때 추수의 나이는 가엾게도 스물 여섯이었다.
 
 탕제(湯劑) 마시듯 미음 한 공기를 마신 고죽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미음 그릇을 들고 나가던 추수가 비틀거리는 그를 부축하여 물었다.
 "오늘도 나가시겠어요?"
 "나가야지"
 "어제도 허탕치시지 않았어요? 오늘은 김군만 보내 둘러보게 하시지요"
 "직접 나가봐야겠다"
 지난 여름에 퇴원한 이래 거의 넉 달 동안 그는 하루도 걸르지 않고 도심의 화랑가를 돌았다. 자신의 작품이 나오기만 하면 무조건 거두어들이는 것이었는데, 처음 거두어들일 때만 해도 특별히 이렇다 할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차츰 어떤 결론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그것은 명확한 죽음의 예감과 결부된 것이었다. 담당의인 정박사는 담담하게 자신의 완쾌를 통고하였으나, 여러 가지로 미루어 그의 퇴원은 일종의 최종적인 선고였다. 줄을 잇는 문병객도 그러했지만, 그림자처럼 붙어 시중하는 추수의 표정에도 어딘가 어두움이 깃들어 있었다. 제대로 음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의 위도 정박사가 말한 완쾌와는 멀었다. 입원 당시와 같은 격렬한 통증은 없었지만, 그는 그의 세포가 발끝에서부터 하나씩 하나씩 파괴되어 오고 있는 듯한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초헌(草軒)은 아직 연락이 없느냐?"
 초헌은 추수가 김군이라고 부르는 제자의 아호였다. 그로부터 직접 호(號)를 받은 마지막 제자로 몇 년째 그의 서실에 기식하고 있는 젊은이였다.
 "반시간쯤 있다가 들른다고 했어요. 하지만 오늘은 집에서……"
 "아니, 나가봐야겠다. 채비를 해 다오"
 그는 간곡히 말리는 추수를 약간 엄한 눈길로 건너본 후 천천히 방안을 걸어 보았다. 몇 발짝도 옮기기 전에 눈앞이 가물거리며 몸이 자꾸만 기울어졌다. 추수가 근심스런 눈으로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그가 다시 이부자리에 기대앉아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그의 눈에 다시 석담선생의 휘호가 가득히 들어왔다.
 
 석담선생의 말처럼 정말로 그들의 만남은 악연이었을까. 그가 문하에 든 후에도 그들 사제간의 묘한 관계는 변함이 없었다. 석담선생은 그가 중년에 들 때까지도 가슴속에 원망으로 남아 있을 만큼 가르침에 인색했다. 해자(楷字)부터 다시 시작할 때였다. 선생은 붓을 쥐기 전에 먼저 추사의 서결(書訣)을 외우도록 했다.

 글씨가 법도로 삼아야 할 것은 텅 비게 하여 움직여 가게 하는 것이다. 마치 하늘과 같으니, 하늘은 남북극이 있어서 그것으로 굴대를 삼아 그 움직이지 않는 곳에 잡아매고, 그런 후에 그 하늘을 항상 움직이게 한다. 글씨가 법도로 삼는 것도 역시 이와 같을 뿐이다. 이런 까닭으로 글씨는 붓에서 이루어지고, 붓은 손가락에서 움직여지며, 손가락은 손목에서 움직여지고, 손목은 팔뚝에서 움직여지며, 팔뚝은 어깨에서 움직여진다. 그리고 어깨니 팔뚝이니 팔목이니 하는 것은 모두 그 오른쪽 몸뚱어리라는 것에서 움직여진다…….

 대개 그런 내용으로 시작되는 사백 자(字) 가까운 서결이었는데, 고죽은 그걸 한 자 빠뜨림 없이 외어야 했다. 그 다음에 내준 것이 이미 선생 몰래 써 본 안진경(顔眞卿)의 법첩 한 권이었다.
 "네가 이걸 백 번을 쓰면 본(本)은 될 것이고, 천 번을 쓰면 잘 쓴다 소리를 들을 것이며, 만 번을 쓰면 명필(名筆)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가르침은 오직 그뿐이었다. 그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드러내놓고 연마할 수 있다는 것과 이틀에 한 번씩 운곡선생에게 들러 한학(漢學)을 배우게 된 정도였을까. 그러다가 꼬박 삼 년이 지난 후에 딱 한 마디를 덧붙였다.
 "숨을 멈추어라"
 이미 삼천 번을 쓴 연후에도 해자가 여전히 뜻대로 어울리지 않아 탄식할 때였다.
 사군자(四君子)에 있어서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이를테면 난을 칠 때에도 손수 임사(臨寫)한 석파난권(石坡蘭卷) 한 권을 내밀며 말했다.
 "선자리에서 성불(成佛)할 수 없고, 또 맨손으로는 용을 잡을 수가 없다. 오직 많이 쳐본 연후에라야만 가능하다"
 그리고는 그뿐이었다. 가끔씩 어깨너머로 그의 난을 구경하는 일이 있어도 입을 열어 자상하게 그 법을 일러주는 일은 없었다. 그러다가 그의 난이 거의 이우러져 갈 무렵에야 한 마디 덧붙였다.
 "왼쪽부터 쳐라, 돌은 붓을 거슬러 써야지"
 또 석담선생은 제자의 성취를 별로 기뻐하는 법이 없었다. 입문한 지 십 년에 가까워지면서 그의 솜씨는 선생의 동도들에게까지 은근한 감탄으로 오르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선생은 그런 말만 들으면 언제나 냉엄하게 잘라 말했다.
 "이제 겨우 흉내를 낼 수 있을 뿐이오"
 스물 일곱 적에 그가 선생의 집을 나서게 된 것도 아마는 그런 선생의 냉담함에 대한 반발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칭송을 들으면 들을수록 이상하게도 그는 반드시 스승의 칭찬을 받고 싶었다. 그것이 그를 석담선생 곁으로 되돌아오게 만들고, 다시 용서를 받을 때까지의 2년에 가까운 모멸과 수모를 참아 내게 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 2년 동안 다시 옛날의 불목하니로 돌아가 농사를 돌보고 나뭇짐을 해 나르는 그를 선생은 대면조차 꺼렸다. 한번은 견딜 수 없는 충동 때문에 선생 몰래 붓을 잡아 본 적이 있었다. 은밀히 한 일이었지만, 그걸 알아차린 선생은 비정할이만치 매몰차게 말했다.
 "나가서 몸을 씻고 오너라. 네 몸의 먹냄새는 창부(娼婦)의 지분냄새보다 더 견딜 수 없구나……"
 그 뒤 다시 용서를 받고, 선생의 사랑방에서 지필을 만지는 것이 허락된 후에도 석담선생의 태도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가 나이를 먹고 글씨가 무르익어 갈수록 선생의 차가운 눈초리에는 이해할 수 없는 불안까지 번쩍였다. 느긋해지는 것은 차라리 고죽 쪽이었다. 그런 스승의 냉담과 비정에 반평생 가까이 시달려 오는 동안, 그는 단순히 그것에 둔감해지거나 익숙해지는 이상 스승이 괴로워하고 불안해하는 것을 찾아내어 행함으로써 그로 인한 스승의 분노와 탄식을 즐기게까지 되었다. 몇 번의 단체 전람회와 선전(鮮展) 참가 같은 것이 그 예였다.
 하지만 그들 불행한 사제간이 완연히 갈라서게 되는 날이 점점 가까와 오고 있었다. 석담선생이 불안해한 것, 그리고 그가 늘 스승을 경원하도록 만든 것이 세월과 더불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었다.
 본질적으로 일치될 수 없는 것은 그들의 예술관이라 할까, 서화에 대한 그들의 견해였다. 석담선생의 글씨는 힘을 중시하고 기(氣)와 품(品)을 숭상했다. 그러나 그는 아름다움을 중히 여기고 정(情)과 의(意)를 드러내고자 힘썼다. 그림에 있어서도 석담선생은 서화를 심화(心畵)로 어겼고, 그는 물화(物畵), 즉 자신의 내심보다는 대상에 충실하려고 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그들 사제 사이에 있었던 유명한 매죽(梅竹) 논쟁이었다.
 사군자 중에서 석담이 특히 득의해하던 것은 대나무와 매화였다. 그런데 그 대나무와 매화가 한일합방을 경계로 이상한 변화를 일으켰다. 대원군도 신동(神童)의 그림으로 감탄했다는 석담의 대나무와 매화는 원래 잎과 꽃이 무성하고 힘차게 뻗은 것이었으나 그때부터 점차 시들고 메마르고 뒤틀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것은 후년으로 갈수록 심해 노년의 것은 대 한 줄기에 잎파리 세 개, 매화 한 등걸에 꽃 다섯 송이가 넘지 않았다. 고죽에게는 그것이 불만이었다.
 "선생님께서는 어째서 대나무의 잎을 따고 매화의 꽃을 훑어 버리심니까?"
 이제는 고죽도 장년이 되어 석담선생이 전처럼 괴퍅을 부리지 못하게 되었을 때, 고죽이 그렇게 물었다.
 "망국(亡國)의 대나무가 무슨 흥으로 그 잎이 무성하며, 부끄럽게 살아남은 유신(遺臣)의 붓에서 무슨 힘이 남아 매화를 피우겠느냐?"
 "정소남(所南=정사초)은 난의 노근(露根)을 드러내어 망송(亡宋)의 한을 그렸고, 조맹부는 훼절(毁節)하여 원(元)에 출사(出仕)했지만, 정소남의 난초만 홀로 향기롭고 조맹부의 송설체(松雪體)가 비천하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서화는 심화(心畵)니라. 물(物)을 빌어 내 마음을 그리는 것인즉 반드시 물의 실상(實相)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글씨 쓰는 일이며 그림 그리는 일이 한낱 선비의 강개(慷慨)를 의탁하는 수단이라면, 그 얼마나 덧없는 일이겠읍니까? 또 그렇다면 장부로 태어나 일평생 먹이나 갈고 화선지나 더럽히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모르긴 하되 나라가 그토록 소중한 것일진대는, 그 흔한 창의(倡義)에라도 끼어들어 한 명의 적이라도 치고 죽는 것이 더욱 떳떳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가만히 서실에 앉아 대나무잎이나 떼어내고 매화나 훑는 것은 나를 속이고 물을 속이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다. 물에 충실하기로는 거리에 나앉은 화공이 훨씬 앞선다. 그러나 그들의 그림이 서푼에 팔려 나중에는 방바닥 뚫어진 것을 메우게 되는 것은 뜻이 얕고 천했기 때문이다. 너는 그림이며 글씨 그 자체에 어떤&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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