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적 주체의 구성에 관한 이론들
1.주체 철학에서 주체 생산의 이론으로
근대 철학은 ’주체‘라는 개념을 확고하고 자명한 기초요 근거로 하여 성립한다. 개념들의 내포적인 명확함과 외연적인 뚜렷함을 근거지우는 확고한 기초를 찾으려던 데카르트는, “의심하라, 의심하라, 또 의심하라”라는 슬로건으로 요약되는 이른바 ‘방법적 회의’를 통해 의심하는 ‘나’의 존재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확고한 기초라는 결론을 내린다. 이러한 ‘나’, 사유하는 주체는 인식과 판단의 기초이자 출발점이다. 이 때 주체는 대상과 분리되고, 그 실체를 달리하는 것으로--대상은 연장(延長)을, 주체는 사유를--간주된다. 어떤 인식이나 판단이란 이러한 주체가 하는 것이요, 지식은 이러한 인식 주체가 소유하는 무엇이며, 진리는 그러한 인식 내지 지식이 도달해야 할 목표가 된다.이에 대한 좀더 자세한 논의는 이진경, ?철학과 굴뚝청소부? 새길, 1994 참조
다른 한편 홉스(T. Hobbes) 이래 대부분의 사회이론은 사회적 주체 내지 정치적 주체를 출발점으로 하여 성립한다. 즉 홉스가 명확히 보여주었듯이, 근대의 사회이론은 대개 그러한 주체들의 개별적인--따라서 그만큼 상충적인--의지 내지 욕망이 자유로운 것으로 존중되어야 할 때 “대체 사회(적 질서)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근본적 질문에 대해 대답하려고 했다.홉스 자신의 ‘리바이어던’이나 로크, 루소 등의 ‘계약론’, 혹은 헤겔, 스펜서 등의 ’유기체론‘은 물론,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등등은 이러한 홉스의 질문에 대한 나름대로의 대답을 시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사회적 주체는 욕망 내지 의지, 행동의 주체로 간주되며, 정치적 주체는 권리?자유의 주체로 간주된다. 이러한 정치적 사회적 주체의 개념은 더 이상 의문의 여지가 없는 당연한 이론적 출발점이 된다.이같은 근대적 문제설정은 철학에서나 사회이론에서나 해소하기 힘든 이율배반을 포함하고 있었다. 우선 철학적으로 그것은 대상에 주체를 분리함에 따라, 주체의 인식이 대상과 일치하는지, 다시 말해 어떤 인식이나 지식이 진리인지를 확인하고 입증할 길이 없어진다는 역설을 낳는다. 사회이론에서는 루소의 경우 극단적으로 보여주듯이 개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질서는 논리적으로든 현실적으로든 화해할 수 없는 이율배반에 빠진다.
따라서 데카르트 이래의 근대철학이나 홉스 이래의 사회이론 전체를 자명하고 통일적인 ‘주체’ 개념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체철학‘적 전제를 공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설정은 쉽게 말해 인식 내지 판단이란 주체가 하는 것이요, 권리 내지 자유는 주체가 갖고 행사하는 것이라는 일종의 상식에 기초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상식이 앞서의 문제설정으로 진전되기 위해서는 ‘주체’들 간의 좁힐 수 없는 차이--신과 인간, 귀족과 평민, 인간과 노예 등등의 차이--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소거되어야 했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분명 근대 사회에 이르러 나타났던 사회적 변화 위에서 가능했던 이론적 전환이었다.
그런데 맑스와 니체의 선구적인 비판을 필두로, 근대의 사상과 이론을 특징짓는 주체철학적 전제에 대한 의문과 비판이 행해졌다. 맑스는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는 명제를 통해서 주체란 사회적 관계의 산물임을 보여주었고, 니체는 주체의 자명함이란 문법의 환상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비트겐슈타인 역시 주체를 생활형식(Lebensform)과 언어게임 안에서 작동하는 문법적 기능으로 간주하며, 하이데거는 이미 특정한 역사성을 갖는 세계 내에서, 그것을 전제로 사유하고 해석하는 ’세계-내-존재‘로 본다.
이러한 비판은 레비스트로스(Levi-Strauss)가 구조주의적 흐름을 만들면서 이간중심주의 내지 역사주의를 겨냥해 명시적인 공격을 함으로써 더욱 선명한 구획선을 긋게 된다. 그는 하나의 생물학적 개체가 인간 내지 인간의 자식으로 되는 계기를, 모든 인간 사회에 존재하는 보편적 규칙인 ’근친상간의 금기‘에서 발견한다. 이는 보편성과 등치되는 자연, 규칙과 등치되는 사회/문화적 질서의 접합점을 이루는 축이며, 여자의 교환관계로 정의되는 친족관계적 질서를 형성하는 기초다.C. Levi-Strauss, Les structures elementaires de la parente, PUF, 1949, tr. by Bell et al., The Elementary Structure of Kinship, Beacon Press, 1969, 3-11쪽.
이는 인간이 사회 문화적 관계나 질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러한 관계나 질서를 통해 인간이 구성되는 것이라는 점을 내포하는 것이었다. 이후 그는 ’야성적 사유‘가 어떻게 구성되는가를 보여줌으로써 이러한 내포를 명시화한다.C. Levi-Strauss, Savage Mind, Weidenfeld & Nicolson, 1966
라캉은 주체가 되는 과정과 메카니즘을 욕망과 언어를 통해서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으며, 그것을 통해서 개개의 사람은 상징적 질서 안으로 들어간다. 생물학적 욕구(besoin)는 이제 그러한 상징계의 질서 안에서 요구(demande)되지만, 욕구와 요구 간의 간극과 격차는 메울 수 없다. 욕구와 요구 간의 이러한 간극을 욕망(desir)이라고 하는데,J. Lacan, “The Signification of the phallus," Ecrit: A Selection, tr. by A. Sheridan, W.W.Norton, 1977, 286-287쪽; “욕망은 요구가 욕구로부터 분리되는 그 한계지점에서 형태를 취하기 시작한다.”(“The Subversion of the Subject and the Dialectic of desire in the Freudian Unconscious," 앞의 책, 311쪽). 이와 연관하여 주체의 구성과정에 대한 라캉의 입론에 대해서는 이진경, ?자크 라캉: 무의식의 이중구조와 주체화?, ?철학의 탈주?, 새길, 1995 참조.
이는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근본적 대상을 언제나 결여하고 있음을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라캉은 욕망이란 결여(manque)라고 한다. 욕망은 언제나 그 대상을 갖지만, 이러한 근원적인 결여로 인해 그 대상은 끊임없이 다른 것으로 치환된다.
그런데 여기서 욕망은 근본적으로 타자(l'Autre), 특히 부모나 어머니로 대표되는 타자로부터 남근(Phallus)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다.같은 책, 312쪽
이러한 인정욕망으로 인해 스스로를 타자가 욕망하는 특정한 형태의 주체로 만들어간다. 이런 맥락에서 라캉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고로 나는 생각하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J. Lacan, "The Agency of the letter in the unconscious or reason since Freud,", 앞의 책, 164-165쪽.
이는 생각하는 나에서 나의 존재를 추론했던 데카르트를 직접 겨냥하여 뒤집는 명제인데, ’나‘라고 불리는 주체가 사실상 타자로서, 타자의 응시 속에서 구성되며, 따라서 ’나‘라는 존재는 ’생각하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리고 그는 ’거울단계‘에 대한 유명한 이론을 통해,J. Lacan, "The mirror stage as formative of the function of the I as revealed in psychoanalytic experience," 앞의 책, 1-7쪽.
이처럼 획득된 ’자아의 이상‘을 타자가 아니라 자신(이상적 자아)이라고 ’오인‘하는 상상적 동일시가 작동한다고 설명한다. 주체의 정체성(identite; 동일성)은 이런 메카니즘을 통해 구성된다.같은 책, 2쪽; 이진경, ?자크 라캉; 무의식의 이중구조와 주체화?, 앞의 책, 34-36쪽 참조.
따라서 주체란 언어적으로 구조화된 무의식을 통해, 타자인 상징계가 구성해낸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관점에서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를 무의식으로 정의하고, 그러한 이데올로기를 통해 개개인은 주체로 구성되는 것임을 보여준다. 이를 위해 그는 ’호명‘(interpelation)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즉 이데올로기 안에서 작동하는 큰 주체(Sujet)가 개개인을 주체(sujet)로서 호명하며, 이에 대답하고 그에 따름으로써 개개인은 주체화(subjectification)된다고 한다.L. Althusser,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김동수 역, ?아미엥에서의 주장?, 솔, 1991, 115-121쪽.
또한 푸코는 ?지식의 고고학?에서 주체와 지식 사이의 근대적인 관계 설정을 뒤집는다. 그는 주체란 특정한 담론 안에서 정의되는 기능이며, 이 점에서는 그 짝인 대상 역시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리고 이 양자가 연관되는 방식을 표시하는 개념이나 전략 역시 담론 안에서 정의되는 것이다.M. Foucault, L'archeologie du savoir, Gallimard, 1969, 이정우 역, ?지식의 고고학?, 민음사, 1992, 83-106쪽
예를 들면 정신병리학에서 주체는 ’의사‘라고 불리는 어떤 기능이며, 정신병원에서 언표할 수 있는 주체는 오직 의사 (및 간호사) 뿐이다. 환자들은 의사 등이 행하는 조치(진료, 치료)의 대상일 뿐이며, 의사 등이 행하는 조치에 대해 따라야 한다. 그에 항의하는 말들은 언표가 되지 못한다. 즉 말하되 들리지 않고, 즉시 무효화된다. 환자 아닌 방문자 역시 이 점에선 마찬가지다. 어떠한 강제적이고 폭력적인 조치조차 치료의 이름이 붙으면 정당한 것이 된다. 거기서 ’사유하는 주체‘는 오직 의사의 기능을 수행하는 자에게만 허용될 뿐이다.
나아가 푸코는 ?감시와 처벌? 등에서 주체와 권력의 근대적 관계를 전복한다. 홉스의 이론은 물론 계약론의 자유주의나 혹은 전통적인 맑스주의에 따를 때, 권력이란 주체들이 소유 내지 점유하고 있는 속성/재산이고, 탈취하거나 탈취당할 수 있는 대상이다. 그러나 푸코에 따르면 차라리 그 반대가 진실이다.M. Foucault, Surveiller et punir, Gallimard, 1975, 박횽규 역, ?감시와 처벌?, 강원대출판부, 1989, 50-51쪽
그리고 주체란 감옥이나 가정 등의 특정한 권력의 배치 안에서 권력에 의해 구성되는 결과물이라는 것이다.같은 책, 53쪽
데리다나 들뢰즈/가타리 역시 이 점에 관한 한 유사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데리다는 주체란 항상-이미 존재하는 흔적들(traces)과, 그 흔적들을 만들어내고 차이화하는 운동(차연, differance)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며, 또한 그러한 운동에 의해 변환되고 해체될 수 있는 것이라고 본다.J. Derrida, De la Grammatologie, Minuit, 1967, 김성도 역, ?그라마톨로지?, 민음사, 95-97쪽
들뢰즈/가타리는 분자적-미시적인 차원의 생산적인 힘을 ’욕망(하는 생산)‘으로 정의하고, 이 욕망을 포섭하거나 길들이려는, 또 때로는 강제하려는 또 다른 권력의지를 반대 극에 설정한다.G. Deleuze/F. Guattari, L'anti-OEdipe, Minuit, 1972, 1장 참조.
욕망은 일차적으로는 탈주선(ligne de fuite)으로 존재하지만, 그것은 특정한 방식으로 코드화(codification)되고 영토화(territorialisation)되는 배치(agencement)로서 존재한다.G, Deleuze/F. Guattari, Mille Plateaux, Minuit, 1980, 48-50, 91-92 등 참조.
주체란 그러한 배치 안의 어떤 기능일 뿐이며, 배치 안에서 분자적인 욕망의 특정한 통접(conjonction)에 따른 결과물이다.
이러한 여러 이론적 입장에 한결같이 공통된 것은 데카르트적인 것이든 칸트적인 것이든 주체를 자명한 출발점으로 간주하지는 않는다는 점이고, 그런 점에서 주체철학에 대한 반대라는 점이다. 거꾸로 주체는 이제 특정한 사회적 혹은 역사적 과정을 통해 구성되고 만들어지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렇다면 이제 오히려 중요한 문제가 부상한다. 그것은 이러한 주체가 대체 어떠한 과정과 조건을 통해 구성되는 것인지를 사회적 내지 문화적으로, 혹은 역사적으로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서구에서 근대적 주체에 대해, 신에서 분리된 인식의 주체라는 것만으로는, 또 자유의지와 욕망을 가진 정치적 주체라는 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보여주지 못한다. 근대적 주체는 대체 어떠한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졌는지, 개개인을 그러한 근대적 주체로 만들어내기 위해 동원하는 방법과 메카니즘은 또 어떠한 것인지를 역사적으로 연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점에서 근대적인 주체 철학에 대한 비판은 주체가 만들어지는, 즉 개개인이 주체로 생산되는 이러한 과정에 대한 역사적 연구로 나아갈 전환점을 마련한 셈이다. 우리는 이 전환점을 ‘주체 생산의 이론’을 위한 계기로서 파악할 것이다.
한국(식민지 조선)에서 근대적 주체의 형성 내지 생산과정을 파악하려는 본 연구에서는, 주체란 이미 처음부터 전제된 무엇이 아니라 특정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이상의 비판적 문제설정을 공유한다. 왜냐하면 예컨대 조선 시대의 사람들과 이른바 ’근대화‘ 이후의 사람들 모두가 어떤 식으로든 ’주체‘라는 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며,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관계지워지며,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행동하는가가 문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들이 어떻게 다른 형태의 주체로 되는가가 문제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체를 어떠한 과정의 결과물로 보는 이러한 입장에는 크게 상이한 두 가지 입장이 있다. 본 연구가 취하는 이론적 및 방법론적 가정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입장의 차이가 결코 사소하지 않기 때문에, 약간의 도식화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여러 이론들을 그 두 가지 패러다임으로 분류해 정리하겠다.
2.주체의 구성을 보는 두 가지 이론적 입장
(1)표상체계와 주체화
그 하나는 대상들을 무의식적 표상체계로 포섭하는 것을 통해 주체의 구성을 설명하는 입장이다. 이를 일단 ’표상체계의 패러다임‘이라고 부르자. 이러한 입장은 앞서 잠시 언급한 라캉의 이론에서 두드러지며, 라캉의 영향 아래 형성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개념의 중요한 한 축이, 특히 ‘호명’과 ’이중의 거울놀이‘라는 개념이 여기에 포함된다.알튀세르의 경우 이데올로기 개념은 이러한 라캉적인 요소가 한 축을 이루지만, 또한 맑스적인 요소가 또 다른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이데올로기를 무의식의 차원에서 정의하고, 큰 주체와 작은 주체, 호명과 이중의 거울놀이 등을 통해 주체화를 설명하는 것이 전자라면(?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앞의 책, 102-127쪽), 라캉이 말하는 ‘기표의 물질성’과는 달리 이데올로기의 물질성을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 집약하는 부분은 후자라고 할 수 있다(같은 책, 88-102쪽). 그런데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에서 이 양자가 개념적으로 일관성있게 접속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는 그의 이데올로기론을 집약하는 논문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에서 각각을 서술하는 부분이 서로 자율적이라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또한 푸코가 에피스테메를 ”표상가능성의 조건“으로 정의하면서 인식이나 판단이란 그러한 조건 안에서, 그것이 이루는 지반 위에서 이루어진다고 볼 때, 나아가 ‘인간’이란 근대에 이르러 형성된 특정한 에피스테메의 산물이라고 볼 때 그러하다.M. Foucault, Les mots et les choses, Gallimard, 1966, 이광래 역, ?말과 사물?, 민음사, 1986
라클라우가 담론구성체를 접합에 의해 의미가 항상 타협되고 구성되는 구조로 보며, 주체란 그러한 담론구성체 안에서 주체의 자리라고 보는 경우에도 마찬가지고,E. Laclau/C. Mouffe, Hegemony and Socialist Strategy, Verso, 1985, 김성기 외 역, ?헤게모니와 사회변혁?, 터, 1990
보드리야르가 ’생산의 거울‘에 비친 ’상상계‘ 안에 모든 것을 밀어넣을 때도 마찬가지다.J. Baudrillard, Le miroir de production, Casterman, 1973, 배영달 역, ?생산의 거울?, 백의, 1994.
이 각이한 이론들을 이처럼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분류할 수 있게 해주는 공통성이 있다면, 그것은 표상을 조직하고 구성하는 표상체계로, 그리고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의미작용으로 사고와 행동의 주체화를 환원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들 이론은 대개 사람이 사고하고 지각하는 것, 행동하는 것을 특정한 범위 안에 제한하고 그것을 특정한 양상으로 규정하는 한계조건을 연구하려고 한다.
이러한 이론들에 어느 정도 공통된 문제설정은 기존의, 혹은 항상-이미 존재하는 어떤 사회 문화적 질서 속에 개인들이 어떻게 편입되는가, 개개인은 그러한 질서를 어떻게 내면화하는가 하는 것이다.”정신분석의 대상이란 무엇인가?...[그것은] 인간의 분만으로부터 생겨난 조그만 생물체가 인간으로 변화한 결과들 중의 하나로서, 무의식이라는 간단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L. Althusser, ?프로이트와 라캉?, 앞의 책, 19쪽.
즉 개개의 생물학적 개체들이 인간적 질서 내지 특정한 문화적 질서에 편입되는 것은 어떻게해서 가능한가라는 문제. 이를 알튀세르는 ’재생산의 문제‘로서 포착한다.L. Althusser,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앞의 책, 76-81쪽.
좀 거칠게 말하면, 자본주의 사회를 이루는 대다수의 구성원이 노동자의 자식임에도 불구하고 자본 및 자본주의가 재생산될 수 있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문제가 그것이다.
이러한 이론이 대개 의거하고 있는 이론적 자원은 기호학 내지 언어학과 정신분석적인 무의식 개념이다. 이는 위에 언급한 사람들에게 대부분 해당되는데, 아마도 이를 가장 분명하게 집약하는 것은 ’상징계‘라는 라캉의 개념일 것이다. 이미 들뢰즈는 구조주의에 대한 한 논문에서 구조주의를 특징짓는 요소들을 언급하면서 가장 먼저 ’상징적인 것‘(상징계)를 들고 있다.G. Deleuze, "A quoi reconnait-on le structuralisme?", F. Chatelet (ed.), Histoire de la philosophie, tom. VIII, Hachette, 1973, 300-304쪽.
이는 ’기표의 물질성‘이란 라캉의 테제와 프로이트의 무의식 개념이 결합됨으로써 성립된 것인데, 요체는 무의식을 언어적인 것으로, 징후를 기호로, 질서를 기표로 환원한다는 점이다.
라캉에게 욕망은 기표의 개입에 의해 발생하고 정의된다. 타자로서 무의식은 상징을 통해 욕망을 질서지운다. 욕망의 중심 또한 (음경penis이 아닌) 남근phallus이라는 기표로 정의된다. 요컨대 의식적/무의식적 사고와 욕망은 표상으로 환원되고, 표상은 기표로 환원된다. 타자라는 질서 역시 기표와 상징적 질서로 환원된다. 기표들이 조직되어 만들어내는 의미작용의 질서가 주체를 지배한다. 한마디로 ‘기표의 물질성’이 이제 모든 것의 지배자인 것이다.
결국 무의식이란 언어처럼 구조화된, 개인의 사고와 욕망이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지반이요 공간이며, 동시에 사고와 욕망이 그 안에 제한되는 공간이다. 그것은 사고와 욕망에 의해 짜여지는 표상representation들을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이다. 즉 다양한 표상들이 얽히고 연출되는 무대Schauplatz인 것이다. 무의식은 표상을 가능하게 해주는 ’표상체계‘다. 따라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인간은 말한다. 상징이 그를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경우에 한해서만.“이는 라캉 자신의 말이다. R. Coward/ J. Ellis, Language and Materialism: Developments in Semiology and the Theory of the Subject, Routledge & Kegan Paul:1977, 107쪽에서 재인용.
요컨대 욕망과 언어를 통해 조직되는 표상체계로서 무의식은 인간의 사고와 욕망이, 일반적으로 말해서 표상이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이자, 동시에 표상을 가두는 질서다.대중적인 표상체계라는 개념은 뒤르켐의 ’집합 표상‘(representation collective)의 개념과 일정한 연속성 내지 연관성을 갖고 있다는 듀스의 지적은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동의할 수 있는 것이다(P. Dews, Logic of Disintegration, Verso, 1987). 푸코는 자신의 고고학적 방법을 언급하면서, 담론의 실증성을 주장하고는, 이에 대해 예견되는 비판을 ’행복한 실증주의자‘를 자처함으로써 빗겨간다(?지식의 고고학?, 182쪽). 이는 뒤르켐이 집합 표상을 실증성을 갖는 ’사회적 사실‘로 간주하고, 사회적 사실로서 다루겠다고 함으로써 표명했던, 프랑스적 실증주의의 전통을 또 다시 떠올리게 하는 발언처럼 보인다.
무의식을 통해 이제 개인은 그 사회의 표상체계 속으로, 그 질서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안에서 정의되는 ’자아의 이상‘(ideal-du-moi)을 자신의 ’이상적인 자아‘(Je-Ideal)라고 동일시함으로써 주체화/신민화(subjectification)된다.
표상체계를 통해서 구성되는 주체의 개념은 이렇듯 프로이트적인 무의식 개념과 구조주의적 언어학을 축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가정 중의 하나는 (상징적) 동일시를 통해서 무의식을 획득하며, (상상적) 동일시를 통해서 그러한 주체의 동일성이 무의식 차원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와 비판적 검토는 이진경, ?도둑맞은 편지, 도둑맞은 무의식?, 한국산업사회연구회 편, ?탈현대 사회사상의 궤적?, 새길, 1995; 이진경, ?자크 라캉: 무의식의 이중구조와 주체화?, 이진경/신현준 외, ?철학의 탈주?, 새길, 1995 참조.
사실 이러한 무의식 개념은 프로이트의 용어로 말하면 ’초자아‘와 ’자아‘에 매우 가깝다.라캉은 거시기(이드)를 생물학주의적이라는 이유로 제거하고, 단지 ’그것‘을 뜻하는 ca로 바꾸어버린다는 점은 이런 의미에서 시사적이다(J. Lacan, ”The Freudian Thing, or the Meaning of the Return to Freud in Psychoanalysis," 앞의 책, 128-129쪽).
그리고 프로이트에게서 이는, 특히 초자아는 오이디푸스적 거세와 아버지에 대한 동일시를 통해 획득된다. 상징계로의 편입 역시 마찬가지고, 주체화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여기서 왜 하필이면 ’동일시‘가 행해지는지는 자명하지 않다.
여하튼 무의식적 표상체계와 그에 대한 동일시를 통해 주체의 구성을 설명한다는 점에서, 이 이론에서 제시하는 주체의 개념을 주체화를 통해서 정립되는 셈이다. 이런 이유에서 ’표상체계의 패러다임‘은 ’주체화‘로서 주체의 개념으로 요약할 수도 있을 것이다.
(2)‘습속의 도덕’과 주체생산
다른 하나는 강제와 감금, 감시와 처벌 등의 방법으로 신체에 새겨지는 권력을 통해 주체의 구성을 설명하려는 입장이다. 이를 일단 ’습속-권력의 패러다임‘이라고 부르자. 이러한 입장은 ’습속의 도덕‘을 분석하고자 했던 니체에게서 그 개념적 연원을 가지며, 푸코의 계보학적 연구, 들뢰즈/가타리의 배치의 개념 및 부르디외의 ’하비투스‘ 개념, 엘리아스의 사회적 하비투스 연구 등이 이러한 패러다임에 포함된다.
푸코는 자신의 최초의 저서라고 자평했던 ?감시와 처벌?에서, 감옥과 처벌의 역사에 대한 계보학적 연구를 통해서 근대 사회에서 정상적이 주체를 만들어내는 메카니즘을 보여준다. 이는 성의 역사를 위한 서설로 씌여진 ?지식의지: 성의 역사 1?에서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면 벤덤의 팬옵티콘에 대한 유명한 분석은, 기하학적인 배치를 통해서 작동하는 ’보이지 않지만 보는 시선‘을 통해 감시당하는 자 스스로가 감시자가 있든 없든 스스로에게 강제하고 내면화하게 하는 권력의 도식(diagramme)의 실례를 보여준다.M. Foucault, ?감시와 처벌?, 255-292쪽; G. Deleuze, Foucault, Minuit, 1986, 권영숙/조형근 역, ?들뢰즈의 푸코?, 새길, 1995, 64쪽.
물론 그가 여기서 강조하려는 것은 이러한 권력의 배치가 감옥 안에서 효과적이었다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당시에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고 그 근대적 질서에 상응하는 주체를 만들어내는 범례적인--그리고 이런 의미에서(만) 일반적인--도식이 감옥에서 극한적인 형태로 집약되고 실험되었다는 점이다. 즉 그에게 감옥이 문제인 것은 그것이 근대 사회의 모델을 형성했다는 점에서고,M. Foucault, ?감시와 처벌?, 281쪽.
이러 의미에서 본다면 그는 감옥의 탄생에 대해 얘기하는 경우조차도 감옥이 아니라 근대 사회의 신체적 권력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를 통해 그가 보여주려는 것은, 외부적으로 부과되는 어떤 권력이 없이도--왜냐하면 근대 사회는 이런 권력을 전제해선 안되기 때문에--개개인이 스스로 통제하여 사회적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근대적 고안물이다.근대의 이러한 딜레마와 연관해서 근대적 주체의 생산장치를 파악하려는 시도로, 박태호, ?근대적 주체와 합리성: 베버에서 푸코로??, ?경제와 사회?, 1994년 겨울호 참조.
또 엘리아스는 ?문명화 과정?에서 중세 이래 서양에서 매너의 역사를 통해 근대적 삶을 특징짓는 습속의 도덕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훌륭하게 보여준다. 거기서 그의 명제는 식탁이나 침실 등등에서의 매너를 통해 결국 사람들이 타인에게 불편을 주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통제하는 권력을 자신의 신체에, 그 내면에 새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이 바로 문명화 과정이라고 불리는 것인데, 이를 통해 개개인의 사이에는 두터운 벽이 생기게 되었다고 본다.N. Elias, Uber den Prozess der Zivilisation, Bd.1, 1939, 유희수 역, ?문명화 과정: 매너의 역사?, 신서원, 1995
이런 점에서 그의 분석은 근대인라고 불리는 주체의 신체에 새겨진, 자율적이고 자동적인 신체권력의 분석이라고 해석할 수 있으며, 주체란 결국 그러한 신체에 새겨지는 습속의 도덕을 통해, 그 신체적 권력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임을 보여 준다.이런 점에서 엘리아스는 푸코의 분석과 분명한 연속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보이듯이 ’습속-권력의 패러다임‘은 어떤 (단일한) 사회 문화적 질서를 전제하지 않으며, 차라리 상이한 집단 간의 투쟁을 전제하는 ’전쟁의 모델‘에 기초해있다. 이런 점에서 이는 언어학이나 기호학에 기초한 표상체계의 패러다임과 대립되며, 종종 그것을 비판적으로 겨냥하기도 한다. 자신의 이전 입장조차도 겨냥한 것으로 보이는 다음과 같은 푸코의 말은 이를 집약해서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가 분석의 근거로 마련할 수 있는 것은 언어나 기호라는 진부한 모델이 아니라 전투나 전쟁같은 역동적인 모델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의 모습을 규정했던 힘은 언어라기보다는 전쟁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즉 의미의 관계가 아니라 권력관계를 주목해야 한다는 뜻이지요...기호학은 갈등을 언어와 대화라는 고요한 플라톤 식의 형태로 환원시킴으로써 광포하고 피에 물들어 있으며 치명적인 성격을 띠는 갈등의 참모습 또한 외면하고 있습니다.“M. Foucault, "Truth and Power", C. Gordon ed., Power/Knowledge; Selected Interviews and Other Writings 1972-1977, 홍성민 역, ?권력과 지식: 미셸 푸코와의 대담?, 나남:1991, 147쪽
나아가 푸코나 들뢰즈/가타리에게서 ‘습속-권력의 패러다임’이 ‘표상체계의 패러다임’과 좀더 대비되는 지점을 지적하자면, 우선 후자와 달리 전자는 사회적 질서가 가능하게 되는 메카니즘을 찾아내려 한다기보다는 차라리 기존에 지배적인 권력이 작동하는 질서에 대해 저항할 수 있는 지점을, 탈주선과 탈영토화의 지점을 찾으려 한다.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는 푸코의 말은M. Foucault, Histoire de la sexualite, 1, Gallimard, 1977, 이규현 역, ?성의 역사? 제1권: 앎의 의지, 나남, 1990, 109쪽.
그가 찾아내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들뢰즈/가타리는 모든 영역에서, 개개의 분자적인(moleculaire) 움직임과 힘을 통계적으로 표시되는 몰적(molaire) 권력에서 탈주하는 변이와 창조의 선으로 접속하려고 한다. 따라서 권력이 길들이는 방식에 대한 그들의 연구조차 이런 점에서 “사회적 질서는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홉스적, 근대적 질문과 어떠한 연속성도 갖지 않는다. 유사하게 니체적인 습속의 도덕에 대해 주목하는 베버와도이런 관점은 특히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근대적 에토스로서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방법론적 개념으로 나타난다(박성수 역,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문예출판사).
이 점에서는 근본적인 단절점을 보여준다.
다음으로 여기서 전제된 무의식 개념은 언어적으로 구조화된 어떤 것이 아니라, 때로는 공포와 잔혹을 통해, 또 때로는 강제와 감시를 통해, 반복적 습속을 통해 신체에 새겨지는 신체적 무의식이다. 그리고 앞서 표상체계의 패러다임에 대한 푸코의 비판에서 명시적으로 보이듯이 기호학이나 언어학적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며, 반대로 ‘기표의 물질성’과 같은 테제를 ’기표의 전제정(專制政)‘으로 간주하여 비판한다.M. Foucault, L'ordre du discours, Gallimard, 1971, 이정우 역, ?담론의 질서?, 새길, 1993, 41, 52쪽.
이와 달리 담론이나 언어적인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요소에 대한 강조가 이들 입장에는 두드러진다. 푸코는 담론으로 환원되지 않는 ’비담론적인 것‘을 독자적인 것으로 인정하며M. Foucault, ?지식의 고고학?, 77쪽, 98쪽; G. Deleuze, ?들뢰즈이 푸코?, 31쪽
담론에 대해서조차 담론의 ’사건성‘을 인정하고 발전시키려 한다.M. Foucault, ?담론의 질서?, 41쪽; 이진경, ?미셸 푸코와 담론이론?, 219쪽 이하 참조
들뢰즈/가타리는 기호적인 것을 언표행위의 배치라고 부르며, 이를 권력이 작동하는 일종의 체제(regime)로, 기호체제로 포착하고, 그 안에서 작동하는 권력을 분석한다.Deleuze/Guattari, Mille Plateaux, Minuit, 1980의 5번째 ‘장’ 참조.
나아가 언표행위의 배치와 달리 기계적 배치를 독자적인 분석 대상으로 간주하고, 기계적 배치가 갖는 ’우위성‘을 인정한다. 이러한 두 가지 분석 대상의 교차점은, 그 안에 포섭된 대상들의 반복적인 실천이다. 들뢰즈/가타리가 말하는 화용론은 이런 맥락에서 정의된다.
이러한 패러다임에서는 주체의 구성을, 어떤 질서나 규범에 대한 동일시를 통해 설명하지 않는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표상체계의 패러다임은 동일시를 통해서 주체(의 구성)을 설명하려 하는데 반해, 습속-권력의 패러다임은 차라리 (특정한 과정을 통해 생산된) 주체를 통해서 동일시를 설명한다는 것이다. 후자는 동일시 대신에 차라리 그 자체 균열된 채 존재하는 사회의 이질성과 투쟁, 개개인을 포섭하고 길들이기 위해 사용하는 다양한 강제와 통제, 그리고 그러한 강제와 통제장치를 통해서 작동하는 효과와 그 효과들의 통접적(統接的, conjoctive) 종합으로서 주체를 포착하려 한다. 주체는 강제와 감금, 감시와 처벌 등을 통해, 혹은 매너와 같은 규범적 행위의 반복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동일성 내지 동일시는 그러한 생산과정이 무사히 끝난 경우에 형성되는 것일 뿐이고, 그렇기 때문에 많은 경우 동일시로 환원할 수 없는 균열과 이탈을 피할 수 없다.한편 알튀세르의 제자 중 한 사람인 페쇠(M. Pechet)는 이러한 다양한 균열과 이탈의 양상을 ‘반동일시’, ‘역동일시’라는 개념으로 포섭하려 한다(Laguage, Semantics and Ideologies). 그러나 그러한 균열과 이탈을 왜 모두 동일시의 일종의 간주해야 하는지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남으며, 그 광대한 이탈과 균열의 폭을 감싸기 위해 부여되는 반동일시나 역동일시라는 말의 의미는 끊임없는 애드 혹(ad hoc) 수정을 겪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나아가 ‘동일성’ 혹은 ‘동일시’라는 개념이 이처럼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경우, 그 말에 담긴 동일성이란 말의 구체적 내포는 모두 허물어져 모든 것을 담는만큼 아무 것도 담을 수 없는 것이 되고 마는 게 아닐까?
이런 점에서 우리는 ’생산‘이라는 말의 강한 의미에서, 주체는 다양한 양상의 습속 내지 배치를 통해 작동하는 권력에 의해 ‘가공’되고 ‘생산’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동일시 내지 주체의 동일성(정체성)이란 이러한 생산과정의 결과 중 하나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앞서 ‘주체화’라는 개념과 대비해서 ‘습속-권력의 패러다임’에 ‘주체생산’이라는 개념을 연결할 수 있을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이 두 가지 패러다임 가운데 후자의 입장을 취할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 적어도 한국에서 근대 이전의 주체와 근대적 주체가 보여주는 삶의 양상이나 무의식적인 사고방식 사이에는 분명한 역사적 단절이 있었으며, 그 차이는 매우 심대하다. 그런 점에서 한국에서 근대적 주체의 형성에 관한 연구는 하나의 생물학적 개체가 인간이 되는 과정에 대한 연구로는 전혀 포착할 수 없는 변화를 그 대상으로 하는 셈이다. 더욱이 표상체계의 패러다임이 크게 의존하고 있는 프로이트적 무의식 개념은 역사적 변화를 포착할 수 있는 개념적 고리를 갖지 못하고 있다. 알튀세르 말을 빌면 그 경우 ”무의식은 역사를 갖지 않는다.“ 반면 무의식을 습속의 도덕이란 차원에서 포착하는 경우, 그것은 사회 역사적인 내용을 가지며, 역사적으로 가변적인 것이 된다. 즉 근대 이전의 습속과 근대의 습속이 역사적으로 달라지는 점을 포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한국에서 근대적 주체의 구성을 동일시라는 메카니즘을 통해 설명할 수 없다는 문제다. 알다시피 동일시란 당연히 동일시할 어떤 대상을 전제하며, 정신분석에서는 아버지에 대한 동일시를 그 대상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이러한 가족적 관계를 좀더 ‘일반화’하여 파악한다고 하는 경우에조차 그 대상에 대해서 동일시하는 것을 자명한 것으로 간주할만한 어떤 관계가 전제되어 있다. 반면 아버지와 아이 간의 자연적 및 사회적 근접성을 찾을 수 없는 대상이 개입하는 경우, 그 대상에 대한 동일시가 자명한 것으로 작동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즉 한국처럼 자국의 지배자도 아닌 외부의 침략과 침탈에 의해 어떤 ‘근대적 모델’이 제시되었을 때, 그에 대한 동일시를 통해 근대적 주체가 구성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오히려 ‘근대적 주체’로 만들려는 시도는 기존의 사회적 습속과 더불어 민족적 습속의 마찰, 나아가 제국주의적 강제에 대한 반발과 투쟁이라는 강력한 저항을 압도하는 강제와 통제를 통해서 수행되게 된다. 이 경우 주체의 생산은 일 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이 갖는 미시적 효과일 뿐이다. 즉 그것은 기존의 삶의 방식 내지 사고방식과 근본적으로 충돌하는 것이었으며, 이 충돌과 대립을 넘어서기 위해 법적, 정치 경제적 및 물리적 강제와 압력, 통제와 회유가 동원되어야 했다. 상투 대신 목을 가져가라는 고집에 대해서는 단발령이란 법적, 경찰적 강제가 필요했고, 서구 근대 의학의 보급을 위해선 모든 한방과 민간의학을 미신과 비과학의 이름으로, 한의사 등은 무면허, 무허가의 이름으로 일소해야 했다. 공장에선 높은 강도의 단조로운 반복작업을 견디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탈출을 막기 위해 감옥같은 벽과 기숙사, 감시가 필요했고, 학교에 아이들을 데려가기 위해선 부모들을 여러 가지로 회유해야 했다. 이러한 과정은 앞서 푸코의 말대로 전쟁과 같은 ‘가공’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따라서 동일시를 통한 주체화라는 개념으로 식민지 조선에서 근대적 주체의 형성을 설명할 수는 없으며, 나아가 이미 생산된 근대적 주체의 동일성은 그 자체 안에 강력한 균열과 갈등을 내포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지극히 불안정한 것이었다.
셋째, 표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제도나 장치, 조직과 같은 권력의 배치와 표상체계 간의 관계 문제. 식민지 조선에서도 근대적 표상체계의 요소들은 점차 확산되어 갔고, 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유에서 의식적인 ’근대화론‘이 나타나고 퍼져갔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표상체계의 패러다임을 비판하는 것이 이러한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표상체계적 요소의 확산은, 대개는 자본이 주도하는 자생적인 근대화에서 보이듯이 그 자체의 내적인 동력을 갖는 것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 표상체계를 이루는 요소들이, 대부분의 경우 협박과 유혈적인 폭력까지 수반하는 제도적이고 조직적인 장치, 매우 극단적인 형태를 취했던 공장이나 감옥, 병원이나 수용소, 그리고 그 안에서 감독자나 관리자와 대중들의 위계적인 관계, 대중들의 노동 습관이나 위생 관리 등등을 만들어 간 요인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전자는 후자를 통해서 만들어진 결과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심지어 근대적 표상체계에 대해서 연구하는 것조차도 다양한 제도와 장치, 감시와 통제, 때로는 회유와 ‘문화통치’ 등등을 포함하기도 하는 권력의 배치를 통해서만 가능하리란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본 연구는 권력-습속의 패러다임이라고 부른 입장에서 식민지 조선에서 근대적 주체가 생산되는 과정을 연구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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