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나는 조선의 국모다1
제1권 철(鐵)의 시대
----- 차 례 -----
작가 소개
제1장 여우사냥
제2장 기인(奇人)과 야인(野人)
제3장 잠용(潛龍), 일어서다.
제4장 감고당(感古堂)의 천재 소녀
제5장 피를 부르는 바람
제6장 멀고 긴 봄의 시작
제1장 여우사냥
1
땡~.
인정(人定:인경)을 알리는 보신각(普信閣)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지자 야경꾼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딱따기(擊析)를 치며
순라를 돌기 시작했다.
1895년 10월 7일"음력 8월 19일". 조선왕조 5백 년의
고도(古都)인 한성은 푸른 달빛 아래 지극히 평화롭게 잠들어
있었다. 만호 장안은 불이 꺼진 채 조용했고 푸른 달빛만이
신비한 광망(光芒)을 뿌리고 있다.
그러나 자정이 가까워 지면서 대검을 꽂은 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의 대오 (隊伍)가 한성으로 물밀듯이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에는 살기가 번뜩이고 대오는 기세가
삼엄했다.
이따금 날카로운 호각소리가 한겨울 삭풍처럼 밤공기를
흔들어대고, 그 사이 사이에 말을 탄 사관(士官)이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병사들을 질타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그들은 긴박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오늘 밤에 무슨 일이 있나 보지?"
"낸들 어떻게 알겠어? 왜놈들이 도성에서 활개를 치고
다닌것이 어디 어제 오늘의 일인가?"
"임진년에 그 꼴을 당하고도 또 왜놈들이 판을 치게
놔두다니....."
야경꾼들은 일본군의 대오를 발견하고 불안한 기색으로
수군거렸다. 그것은 야경꾼들뿐만이 아니었다. 성민들은 군마가
움직이는 소리에 잠자다 말고 밖으로 뛰어나와 웅성거렸다.
성 안은 달빛이 교교했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고
6조관청을 종로에 번듯하게 세워 임진왜란 이후 모처럼 한성이
나라의 위용을 갖춘 것도 잠깐, 민비(閔妃) 세력이 정권을 잡고
병자년(丙子年)에 일본과 수호조약(修好條葯)을 체결함으로써
일본인들의 조선침략의 길이 트이게 되었다. 병자수호조약은
일본의 강압에 의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인들은 기아에 허덕이는 농민들로부터
미곡(米穀)을 헐값에 사들여 제 나라로 실어가고 그들은 조악한
상품을 비싼 값에 팔아 조선 경제를 파탄에 빠뜨렸다.
이에 당황한 조선정부는 급기야 미곡 반출 금지령까지
내렸으나 일본이 군대를 앞세워 협박을 하는 바람에 오히려
손해배상금을 물어 주어야 했다.
"상감이 정치를 잘못해서 그래"
"나랏님이 왜 정치를 잘못해? 나라가 이 꼴이 된 건 모두 민씨
일파가 매관매직을 해서 그래....."
"저놈들은 사무라이인가?"
"사무라이가 아니라 낭인이래...."
"낭인?"
"부랑배 말이야. 그러니 옷차림이 저렇게 숭하지...."
하오리 차림에 일본도를 허리에 찬 낭인들 무리도 자주 눈에
띄었다. 그들은 살벌한 기세로 한성신보사(漢城薪報社)와
파성관(巴城館)으로 바쁘게 몰려가고 있었다. 한성신보사는
일본인이 발행하는 신문사였고 파성관은 일본인이 경영 하는
술집이었다.
성민들은 여기저기서 수군댔다. 성 안이 온통 뒤숭숭했다.
"수비대의 이동 상황은 어떤가?"
그 시간 미우라 고로오(三浦梧樓) 일본 공사는 정동(貞洞)에
있는 공사관 관저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각하! 인천에 있는 우리 군대가 한성까지 무사히
잡입했습니다."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 일등서기관이 빳빳하게 서서 대답을
했다. 미우라 일본 공사는 육군 중장 출신의 무인이었다.
외교에는 전혀 경험이 없었으나 이번 작전을 위해 전권공사로
임명된 사람이었다.
"차질없이 해치워야 한다.!"
"핫!"
"이 일이 열국 공사들에게 알려지면 우리는 조선침략에
희생양이 된다. 공을 세우고도 처벌을 받는다는 말이다. 내말
알아듣겠나?"
"핫! 심려하지 마십시오. 각하! 쿠스노세 중좌의 수비대는
특공대나 다름없는 부대입니다. 반드시 장애물을 제거하고
여우사냥에 성공할 것입니다.!"
"미야모토 소위도 대기하고 있겠지?"
"핫!"
"미야모토 소위도 그의 부하 다섯을 낭인으로 변장시켰습니다.
파성관 패와 함께 출발할 예정입니다."
"좋다. 나가서 다시 한번 작전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살피도록 하라!"
"핫!"
스기무라가 절도 있게 경례를 한 뒤 관저에서 물러갔다.
미우라 공사는 술잔을 든 채 2층으로 올라갔다. 거실의 창을
통해 깊이 잠들어 있는 조선의 수도 한성을 내려다보기
위해서였다.
조선은 아름다운 나라였다. 특히 한성은 5백 년 사직을 이어온
왕도답게 고색창연한 건물이 즐비했고 숲이 울창했다. 한을
풍부한 강(江), 때로는 연두빛으로, 때로는 초록빛으로 옷을
바꿔 입는 조선의 사계(四季).... 어느 날은 불이라도 붙은 듯이
단풍이 붉고, 또 어느 날은 하얗게 눈이 내리는 조선의 사계를
그는 가슴 시리도록 좋아했다 .
정치만 제대로 이루어지면 조선은 얼마든지 풍요롭게 잘 살 수
있는 나라였다. 농토는 비옥하고 자원은 풍부했다. 일본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천혜의 나라였다
그러나 5백 년을 백성들 위에 군림한 왕조는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대신들은 무능하고 백성들은 기아에 허덕였다. 일본에는
이때 정한론(征韓論)이 팽배해 있었다. 청일전쟁(淸日戰爭)에
승리를 하고서도 삼국간섭에 의해 요동 (遼東)을 러시아에
빼앗긴 일본은 '이토오 내각은 할복하라!'는 일본 우익 청년들의
격렬한 항의에 고심하고 있었다. 이에 일본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장주벌(長州閥)은 우익 청년들을 달래고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인아거일(引我拒日)정책을 쓰고 있던
조선의 왕비를 제거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그 실행의
책임자로 미우라 중장을 내세운 것이다.
(이제 이 나라는 우리 대일본제국의 지배를 받아야 돼.....)
미우라는 2층 서재로 올라가자 커튼을 열어 젖히고 밖을
내다보았다. 군인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기 때문인지
민가에서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달은 중추절이
지난 지 나흘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반달이었다. 거리는 달빛이
희미해 군대가 이동을 하고 있는 것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그는 희미한 달빛 속에서 일사분란하게 정동으로 몰려오고 있는
일본군대가 믿음직스러웠다.
조선의 군대는 허울뿐이었다.
일본군은 이미 지난 해(年)에도 경복궁을 점령한 일이 있었다.
(오늘은 조선의 국모가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다.!)
미우라는 머리 속에 한 여인의 조야한 얼굴이 떠오르자 전신이
바짝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일본의 조선침략 정책은 그
여인으로 인하여 번번이 실패를 거듭 하고 있었다.
2
피리소리가 앙상한 나뭇가지를 흔들고 지나가는 삭풍처럼 길게
여운을 끌면서 들려왔다.
조선의 제26대 국왕 고종(高宗)은 잠결에 어렴풋이 그 소리를
들었다. 고종은 눈을 번쩍 떴다. 그 소리는 어릴 때
사가(私家)에서 듣던 소리였다. 한겨울 언 하늘이 갈라지고
문고리가 쩍쩍 달라붙던 밤이면 봉사가 퇴창 밑을 지나가며
피리를 불었었다. 폐부를 찌르듯, 혹은 죄리를 파고 들듯이
날카로운 소리였다.
고종은 갑자기 등줄기가 서늘해 왔다. 대궐 밖 어느
여염집에서 개 짖는 소리 가 사납게 들리더니 뜰에서 쿵하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 담장을 뛰어 넘은 것 같았다. 고종은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이내 창문에 거한의 그림자가 비쳤다.
거한이 들고 있는 일본도의 그림자에서 섬뜩한 살기가 뻗쳐
왔다.
(자, 자객....!)
고종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중전!"
고종은 옆에 누운 중전을 다급하게 불러댔다. 그러나 소리가
목구멍에서 꽉 막혀 입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방문이
소리도 없이 스르르 열리고 거한이 그림자처럼 방으로 스며들어
왔다.
고종은 머리 끝이 곧추서고 등골이 오싹해 져 왔다. 대궐을
수비하는 시위대는 어디로 가고 무감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고 있었다.
"주, 중전....."
고종은 허공으로 팔을 내뻗고 쇠리를 힘껏 질렀다. 다급했다.
그런데도 소리가 전혀 입 밖으로 터져나오지 않았다.
자객이 민비를 향해 가까이 다가왔다. 일본인이었다. 어둠
때문에 자세히 보이지 않았으나 미우라 일본공사라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펄럭거리는 하오리 자락 사이로 미우라의
사타구니가 드러나 보였다. 흉칙하게 미우라는 사타구니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아 그것이 뚜렷이 보였다.
(저, 저런 짐승 같은 놈.....!)
고종은 분기 때문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흉악한 자였다. 감히
조선국 국모 앞에서 짐승처럼 그것을 드러내 놓다니! 그런데 왜
온몸이 결막을 당한 것처럼 꼼짝을 할 수 없는 것일까. 고종은
몸부림을 쳐댔다.
"주, 중전.....!"
고종은 기를 쓰고 민비를 불러댔다.
"전하!"
"....."
"전하!"
그때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이 고종의 어깨를 마구 흔들었다.
고종은 그 순간 눈을 번쩍 떴다.
(아!)
고종은 그때서야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꿈이었다. 사위가 칠흑처럼 어두웠으나 미우라 일본공사는
어디론가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전하! 꿈을 꾸셨사옵니까?"
민비가 조용히 물었다.
"그렇소."
고종은 필흑 같은 어둠 속을 더듬어 민비의 손을 잡았다.
등줄기가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불길한 꿈이었다.
대전(大殿)뜰 밖에서 나뭇잎들이 우수수 몸을 떠는 소리가
들렸다. 바람이 일고 있는 것일까. 나뭇잎을 흔들고 자나가는
바람소리가 스산했다. 가을이 깊어 가고 있었다.
"신첩이 옆에 있으니 안심하시옵소서"
민비가 다정하게 속삭이며 고종의 손을 자신의 가슴에 올려
놓았다.
"고맙소"
고종은 탄력을 잃어가는 민비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느끼며
편안한 기분이 되었다. 민비의 나이 벌써 마흔 다섯, 이제는
결코 젊다고 할 수 없는 나이였다. 열 여섯 꽃다운 나이에
중전으로 간택되어 대궐에 들어왔으니 그 세월이 얼마인가.
열강(列强)의 조선책략과 시아버지인 대원군(大院君)과의
갈등으로 젊은 시절을 훌쩍 보낸 민비였다. 고종은 새삼스럽게
민비가 안쓰러웠다. 그 30년 의 세월은 남자도 견기기 어려운
파란의 나날이었다.
"전하......"
민비가 고종을 나직히 불렀다. 고종은 대답 대신 민비의 둥근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젊었을 때처럼 탄력이 느껴지지 않았으나
민비의 가슴에서 고종은 포근하고 아늑한 어머니의 가슴을
연상했다. 사사로이는 자신의 자식을 낳고 키우는 아내였다.
후궁이 여럿 있었으나 고종이 민비에게 느끼는 감정은 여염집의
장부나 다를 바가 없었다. 때때로 아내의 가슴을 아이들처럼
만지고 싶어 했고 아내의 가슴에 안기어서 잠들고 싶어 했다.
"전하, 흉몽을 꾸셨사옵니까?"
민비는 철의 여인이었다. 냉혹할 때는 눈에 서릿발이 서려
감히 마주보는 자가 없었다.
"그렇소"
고종이 낮게 대답을 하였다.
"어인 흉몽이길래 식은땀까지 이렇게 흥건히 흘렸사옵니까?"
민비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고종은 우두커니 어둠 속의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꿈이 흉칙해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전하!"
민비가 살갑게 고종을 불렀다. 민비의 음성은 고종을 향한
애정이 듬뿍 실려 있었다.
"제 팔베개를 하소서"
"고맙소"
고종이 망설이지 않고 민비의 팔을 베고 누웠다. 민비의
몸에서 향긋한 살(肉) 냄새가 풍겼다. 고종은 그 냄새에 가슴이
뛰었다. 민비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자객이 드는 꿈이었소. 거한이 일본도를 따르고 낭인
복장으로 우리 침전까지 뛰어들었소. 그래서 중전을 그렇게
불렀었소."
이윽고 고종이 천천히 꿈 얘기를 했다.
"일본인이었습니까?"
"그렇소"
"왜인들은 꿈속에서까지 나타나서 전하를 괴롭히는군요"
민비가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민비도
일본인들이 자신을 미워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뒤로 조선을 속국으로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미 경제는 파탄이 났고 군대조차 유명무실했다.
민비는 그로 인해 인아거일(引我拒日)정책을 펴왔는데 그것은
러시아를 이용해 일본을 견제하려는 등거리 외교 정책이었다.
그런 까닭으로 일본은 민비를 격렬히 미워하고 있었다.
"중전"
고종이 민비의 어깨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예?"
"이렇게 누워 있으니 옛 생각이 나는구려. 내가 중전을 아줌마
아줌마 하고 따라다녔지......."
"전하두......"
민비가 부끄러운 듯이 얼굴을 붉혔다.
"왜? 그때가 싫었소?"
"아니옵니다. 그때도 전하에게 외가 쪽으로 아줌마이지만
지금도 아줌마인 것입니다."
"내 아낙이 되었는데두?"
"그렇지 않구요? 신첩은 전하에게 아낙이기도 하지만
외가쪽으로 13촌 아줌마가 되는 것도 변할 수 없는 일이옵니다."
"허허......"
고종이 공허한 웃음을 터뜨렸다. 민비가 따라 웃으며 고종의
어깨를 아기 안듯이 품에 안았다.
"중전"
고종의 어수가 민비의 허리에서 둔부로 미끄러져 내려가
둥글게 원을 그렸다.
"예?"
민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합궁합시다."
"아이...."
고종은 민비의 서양사(西洋紗)로 지은 속치마 위로 계속
둔부를 쓰다듬었다. 서양사는 명주보다 더 부드러운 옷감이었다.
위에는 한삼(汗衫)을 입었는데 역시 비단보다 더 부드럽고
가벼운 서양사였다.
"예."
민비가 교태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숨이 가빠오고 몸이
더워져 왔다. 그러나 심음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입을 다물었다.
밖에는 지밀(至密)상궁 넷이 직숙(直宿:숫직)을 하고 있다.
비록 나이가 6,70대인 노상궁이라고 하지만 합방을 하는 소리가
그들에게 들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고종은 한 손으로 민비의 한삼 옷고름을 풀었다. 이내 민비의
둥근 가슴이 뽀얗게 윤곽을 드러냈다.
고종은 민비의 가슴으로 얼굴을 가져갔다. 민비가 가늘고
긴팔로 고종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그들은 국왕과 왕비이기에
앞서 부부였다.
대전 밖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한 것은 얼추 두 시간쯤 뒤의
일이었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고종이 잠이 오지 않아
엎치락뒤치락하다가 민비의 옆에 일어나 않아서 우두커니 허공을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게 누구 없느냐?"
고종은 나직한 음성으로 직숙 상궁을 불렀다. 민비는 가늘게
코까지 골면서 자고 있었다.
"김 상궁 대령해 있사옵니다."
밖에서 김 상궁이 조용히 대답했다. 또 바람이 이는지 뜰에서
나뭇잎이 우수수 몸을 떠는 소리가 들렸다.
"내전이 소란스러운데 무슨 까닭이냐?"
"방금 무예별감이 다녀갔사옵니다."
"무예별감이?"
고종은 누썹을 꿈틀했다. 공연히 가슴이 철렁했다.
"궐 밖에 병정들이 집결하고 일본인들의 왕래가 빈번하다고
하옵니다."
"무슨 연유라 하더냐?"
"무예별감도 영문을 모르겠다고 하옵니다."
"이런 변고가 있나? 무예별감을 들라 하라!"
"예."
문밖에서 김 상궁이 대전 밖으로 나가는 기척이 들렸다.
고종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수 불을 밝히고 주섬주섬 옷을 입기
시작했다.
"전하, 불러 계시옵니까?"
고종이 의관을 정제하고 곤령합(坤寧閤)의 대청으로 나섰을 때
무에별감이 황망히 달려와 부복했다.
"궐 밖이 소란하다는데 사실인가?"
"그러하옵니다."
"무슨 연유냐?"
"연유는 알 수 없으나 병정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고
일본인들의 왕래가 잦은 줄로 아옵니다."
"연유를 모른다고?"
고종은 언성을 높여 소리를 버럭 질렀다. 갑신정변이
일어날때는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등이 미리 정변이
일어날 것을 알려 주었으나, 임오군란 때는 사정이 그렇지 못해
민비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충주(忠州)까지 피신을 했다가
간신히 살아 돌아왔던 것이다.
고종은 불길했다. 아무래도 꿈이 예사롭지 않게 생각되었다.
"황공하옵니다."
"답답한 위인 같으니... 그러고도 어떻게 대전의
무예별감이라고 할 수 있느냐?"
"황공하옵니다. 이제 궁성을 지키는 직책은 시위대가 맡고
있사옵니다. 시위대 대장 현흥택(玄興澤)에게 하문하소서"
"오늘의 당직은 누구냐?"
"농상공부 협판 정병하이옵니다."
"정병하를 들라 하라"
"분부 받자옵니다."
무예별감이 깊숙이 허리를 숙이고 뒷걸음으로 물러갔다.
고종은 혀를 찼다. 가슴이 답답했다.
"김 상궁은 들으라"
"예."
"김 상궁은 장아당에 가서 세자를 기침하도록 하라. 궐 밖이
소란스러운 것은 필히 곡절이 있을터, 속히 변란을 대비하라고
이르라."
"분부 받자옵니다."
김 상궁이 허리를 깊숙이 숙인 채 장안당으로 가기 위해
조심스럽게 곤령합의 대청을 나섰다. 고종은 다시 침전으로
들었다. 민비는 그때서야 밖이 소란한 기색을 눈치챘는지
일어나서 주섬주섬 옷을 입고 있었다.
"방이 야심한데 궐 밖이 무슨 일로 소란하옵니까?"
"아직 모르겠소."
"무예별감은 무엇이라 하옵니까?"
"자신은 무슨 까닭인지 모른다 하오, 이제 궁궐을 지키는
직책은 시위대의 현흥택이 맡고 있다고 하오."
"저런 고약한 위인이 있나!"
민비의 누썹이 파르르 떨렸다. 불빛에 드러난 얼굴이 약간
창백했다.
"전하, 장안당으로 납시옵소서."
"장안당으로?"
"장안당에는 세자가 있지 않사옵니까?"
"세자에게는 기침을 하라고 김 상궁에게 일렀소"
"우리도 세자와 함께 있어야 하옵니다."
"그러면 그렇게 합시다."
고종이 먼저 보료에서 일어나고 민비가 뒤를 따랐다. 궁녀들이
재빨리 고종과 민비의 앞과 뒤에서 호위를 했다.
장안당(長安堂)에는 세자(世子)척(拓)이 김 상궁의 전갈을
받고 일어나 있었다. 문약(文弱)한 얼굴이었다. 기백이 보이지
않았다. 고종은 세자의 문약한 얼굴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장차 국왕이 되어 조선의 운명을 짊어질
세자였다. 그 세자가 문약하기 짝이 없어 고종은 가슴이 아팠다.
"아바마마, 야심한 시각이온데 어인 행차시옵니까?"
"궐 밖이 소란하다. 무슨 연유인지 모르겠구나."
"밤바람이 찬데 어서 안으로 드시옵소서."
"괜찮다. 모처럼 우리 세 식구 북연이나 거닐자꾸나."
고종이 낮게 한숨을 내쉬고 북연(北椽:북쪽 서까래)쪽을 향해
걸음을 떼어놓았다. 궐 밖은 어느덧 조용해 져 있었다. 궐 밖이
조용한 탓인지 숲과 뜰에서 풀벌레가 요란하게 울어 댔다.
"중전, 정말 오랜만에 함께 걸어 보는 것 같구려. 나라에
변란이 끊이지를 않으니 우리 부부가 이런 시간을 가질 틈이
없었구려."
지아비의 말이었다. 민비는 고종의 말에 가슴이 찌르르 울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러하옵니다,전하....."
민비는 고개를 푹 숙이고 대답했다. 시간이 얼마나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새벽이 가까이 오고 있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밤이슬이 내리고 어느 여염집에서인지 닭이
홰를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라가 너무 어지러워....."
고종이 새벽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을 했다.
그때 장안당 앞뜰이 소란스러워지더니
농상공부(農商工部)협판(協辦)정병하(鄭秉夏)가 황급히
달려왔다.
"전하, 불러 계시옵니까?"
"궐 밖이 소란하여 잠을 깼더니 궐 밖에 일본인들이 배회를
하고 병정들이 무리를 지어 다닌다고 한다. 무슨 연유인지 알고
있는가?"
"전하, 소신이 어제 아침 미우라 공사의 초대를 받고 공사관을
방문 하였사옵 니다. 그때 미우라 공사가 공사관에 있는
일본병사들은 모우 후비병이므로 인천에 있는 상비병과
교체시켜야 할 터인데, 아직 조선국의 결정이 없으므로 입궐하여
전하의 윤허를 받아 달라 하였사옵니다. 이로 미루어 병정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는 것은 일본 공사관을 수비하는 병사들을
교체시키는 것이 아닐까 하옵니다."
"그렇다면 걱정할 일이 아니구만."
고종이 비로소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농상공부 협판."
그때 민비가 조용하고 낮은 음성으로 정병하를 불렀다.
"일본 공사관 수비병을 교체하는 것은 밤에 해야 하오?"
"황송하옵니다."
"또 우리 병정들 외에 일본인들이 배회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오?"
"얼마 전 훈련대의 한 병정이 일본 공사관의 순검을 살해한
일이 있는데, 그 일로 송사가 있어서 안(安) 군부대신의 집으로
가는 것으로 아옵니다."
"훈련대가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오?"
"그런 것은 아닌 줄로 아옵니다. 또한 훈련대가 반란을
일으킨다고 하여도 일본군이 충분히 진압할 수 있사옵니다."
"아니 우리 훈련대의 반란을 일본군이 진압한다는 말이오?"
민비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정병하를 쏘아보았다.
"중전마마, 동학민란이 일어났을 때도 청군에게 도움을
요청해......"
"닥치시오!"
민비가 언성을 높였다. 정병하가 움찔하여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그때 청군이 들어와서 얻은 것이 무엇이오? 청일전쟁이
일어나 우리 조선 땅이 온통 남들의 전쟁터가 되지 않았소?"
"송구하옵니다."
"일본군대는 하루빨리 이 나라에서 물러가야 하오!"
"그러하옵니다. 중전마마."
"또 일본군이 훈련을 시킨 훈련대를 일본군이 진압한다는 것이
사리에 맞는 일이오? 일본군과 훈련대가 한 도당이 분명한데
어찌 일본군이 훈련대를 진압한다는 말이오?"
"중전마마, 미우라 공사는 두 분 양전마마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하겠다고 소신과 약조하였습니다."
"그 말에 어김이 있으면 그대에게 역적의 죄를 물어도 좋소?"
"예."
"정녕 틀림이 없고?"
"그러하옵니다."
정병하가 허리를 깊숙이 숙이고 대답했다.
"됐고. 협판은 돌아가서 일을 보도록 하시오."
"홍송하옵니다."
정병하는 뒷걸음으로 세 걸음 물러선 뒤에
근정전(勤政殿)쪽으로 서둘러 걸음을 떼어놓았다.
"중전, 우려할 일은 아닌 것 같소."
고종이 물러가는 정병하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민비에게 말했다.
"그러하옵니다."
민비가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바람이 찬데 침전으로 듭시다. 세자도 들어가 자고......"
"예."
세자가 허리를 굽히고 물러갔다.
고종과 민비는 달빛을 밟으며 곤령합으로 걸음을 떼어놓았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고 나뭇잎이 우수수 흔들렸다. 벌써 새벽이
가까이 오고 있었다. 고종은 곤령합에 이르러 월대로 바로
오르지 않고 몸을 돌려 하늘을 쳐다보았다. 허전했다. 마치
무엇인가 소중한 것이 떠나가고 있는 듯 가슴속이 쓸쓸하고
공허했다.
민비도 고종을 따라 하늘을 쳐다보았다. 별빛이 점점 사위어
가는 북쪽 하늘에 기러기가 떼를 지어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하늘은 푸른빛이다. 대궐의 울창한 숲과 전각 위로는 희뿌연
달빛이 흐르고 있다. 새벽이라 달빛도 기울어 가고 있는
기분이었다.
시위대 대장 현흥택은 자정이 조금 지났을 때 대궐의
경비사태를 평소처럼 순찰했다.
궁성 시위대는 약5백 명으로 편성되어 있었는데 미국인
퇴역장군 맥이 다이(McEntyre Dye)가 훈련을 맡고 있었다.
그들의 주요 임무는 궁성 수비와 황실 경호였다. 시위대는
처음엔 우수한 무기를 공급받아 미국식으로 훈련을 했으나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청일전쟁 발발 3일 전:1894년 6월 21일)때
성능이 우수한 총기는 몰수하고 일부는 궁궐의 연못에 버려
무기다운 무기조차 확보하고 있지 못했다. 일본은 그 이후에도
시위대에서 필요한 탄약의 반입을 차단하고 공이와 대검이
부착되지 않은 낡은 소총을 지급하여 시위대의 화력을 약화시켰
다. 비록 우수한 군인이었던 다이 장군이 연못헤서 총을 건져
보수를 했다고 해도 시위대의 화력은 유명무실한 처지였다. 5백
명의 시위대 병사 중 절반이 비무장 상태였다.
현흥택은 시위대의 이러한 현실에 참담한 기분을 느끼며
대궐을 순찰했다. 일본은 청일전쟁과 동학군(東學軍)의 진압을
빎로 사실상 조선의 내정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그날 밤은 달빛이 비치는 맑은 날로 모든 것이 조용했다.
달빛은 5백 년 고도 의 심장인 대궐의 숲과 누각에 신비스럽게
흐르고 나뭇잎들은 달빛에 씻기어 하얗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바람은 이따금 불었다. 옷깃을 여미게 하는 서늘한 바람이
불때마다 나뭇잎들 이 살랑살랑 몸을 떨었다.
가을이었다. 중추절인 추석을 쇤 지 어느새 닷새째 되는새벽,
중천에 걸린 달이 점점 서쪽으로 기울면서 달빛도 흐끄므레하게
시들고 있었다.
현흥택은 대궐을 순찰한 뒤에 다이 장군과 함께 사용하는
당직실로 들어가 취침했다. 별다른 징조는 보이지 않았다.
대궐은 안팎이 조용하여 지극히 평화로운 가을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성 안에 유포되어 있는 훈련대 반란설, 일본인들의 왕비
시해설은 단순한 유언비어인 모양이었다.
그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현흥택이 눈을 뜬 것은 다이 장군의 통역관으로 있는 장교
이학균(李學均)이 허겁지겁 달려와 어깨를 흔들어 댔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인가?"
현흥택은 눈을 부릅뜨고 이학균을 쏘아보았다.
"일본군 수비대 병사들이 추성문과 춘생문 밖에 몰려와
있습니다."
"일본군이 확실한가?"
"확실합니다. 일본군 동태가 수상합니다."
"다이 장군을 깨우게. 나는 전하에게 달려가 보고하겠네."
"예."
현흥택은 가슴이 급박하게 뛰는 것을 느꼈다. 우려하던 일이
현실로 닥쳐온 것 같아 다리가 후들거리고 떨렸다.
현흥택은 부랴부랴 건청궁(乾淸宮)의 곤령합으로 달려갔다.
고종가 민비는 궁녀들을 거느리고 대전 뜰을 산책하고 있었다.
양전(兩殿)도 잠이 오자 않는 모양이었다. 군대를 앞세운
일본의 행패가 심해 지자 고종은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전하!"
현흥택은 고종 앞에 다가가서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무슨 일이냐?"
고종이 떨리는 목소리로 하문했다. 민비는 서릿발처럼 차가운
눈으로 현흥택을 응시하고 있었다.
"전하, 일본군이 3군부에 들어와 있사옵니다. 변란을
대비하소서."
현흥택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고종은 가슴이 철렁했다. 일본군이 무엇 대문에 궁궐가지
들어왔는지 알 수 없었으나 불길한 꿈이 머리 속에서 되살아나
불안했다.
"일본군이 3군부에 들어왔다고?"
고종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그러하옵니다."
무슨 연유로 일본군이 궁궐을 침입했다더냐?"
"아직 연유를 알 수 없사옵니다."
"답답한 일이 아니냐? 일본군이 침입을 하면 마땅히 문정을
하여 연유를 묻거나 군사로서 내쳐야 하지 않느냐?"
"소신은 중전마마의 안위가 걱정되어....."
"현 부령은 당장 돌아가서 일본군을 대궐에서 내치시오! 내일
미우라 일본공사를 불러 엄중히 따지겠소!"
민비가 재빨리 대책을 지시했다.
"황송하옵니다. 소신 물러가옵니다."
현흥택이 허리를 깊숙히 숙이고 건선문(建善門)쪽으로 총총히
달려갔다. 민비는 고종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고종은 망연한
표정으로 현흥택이 달려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민비는 고개를 떨구었다 가슴으로 찬바람이 불고있는 듯 몸이
으슬으슬 떨려왔다.
같은 시간.
훈련대 연대장 홍게훈(洪啓薰)은 막사 앞에서 새벽하늘을
우두커니 쳐다 보았다. 별빛이 전에 없이 초롱초롱했다. 1895년
10월 8일. 미명의 새벽이었다. 그런데 아직도 야간훈련에 동원된
제1,2훈련대 병사들이 동아오지 않고 있었다. 제1훈련대는
대대장이 이두황(李斗璜)이고 제2훈련대는 대대장이
우범선(禹範善) 이었다.
홍계훈은 연대장이면서도 휘하 병력이 야간훈련에 동원되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는 연대 부관으로부터 병영을
지키는 1소대만 남기고 연대 병력이 야간훈련에 동원되었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어리둥절했다.
훈련대는 국왕으로부터 10월 8일자로 해산 명령을 받고
있었다. 훈련대의 대대장들이 모두 친일파인데다 교관들이
일본군 중대장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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