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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위한 약속 [산드라 브라운]

by Casey,Riley 2023.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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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일을 위한 약속
                                          산드라 브라운
     1.                    
 아메리칸 에어라인의 124번편, 뉴올리안즈발 워싱턴 D.C.행은 위기에 빠져 있었다. 적어도 킬리  프레스턴에게는 그렇게 생각되었다. 그녀는 식은 땀으로 젖은 축축한 두 손을 무릎 위에서 꼭 쥐면서, 불안에 찬 시선으로 시퍼런 번개아 내리치는 창 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보통석 시트보다는 안전도가 높을 것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킬리는 비행기를 탈 때마다 언제나 특별석을 택하곤 했다. "프레스턴 씨."하고 부르는 소리에 킬리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통로 쪽 공석에서 몸을 내밀 듯이 하고 스튜어디스가 나직하게 물었다.
  "마실 것이라도 갖다 드릴까요?" 킬리는 캐러멜빛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면서 굳어진 입가에 억지로 미소를 띠려 했으나, 잘 되었는지는 의심스러웠다.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기분이 가라앉을 거예요. 폭풍 때문에 무척 신경이 쓰이시죠? 하지만 절대로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순조롭게 비행하고 있으니까요." 
킬리는 꼭 쥔 손을 내려다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나는 그저....." 그러고는 좀 전 보다는 좀더 자연스럽게 웃어 보였다. 
  "이젠 괜찮아요, 정말. "
젊은 스튜어디스는 사무적으로 방긋 웃었다. 
  "용무가 있으시면 언제든지 저를 불러 주세요. 앞으로 몇 분이면 이 폭풍권에서 벗어나게 될 거예요. 위싱턴 도착은 약 한시간 후입니다." 
  "감사합니다." 
킬리는 번갯불의 섬광을 차단하려는 듯이 눈을 감고, 편안하고 부드러운 시트에 파묻혀 불안을 떨쳐버리려 했다. 통로를 사이에 두고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는 옆에 있는 여자가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것은 전해지는 분위기로 알고 있었으나, 방금 스튜어디스와 나눈 이야기를 듣고는 아주 배짱 있는 여자로구나 하고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졌다. 
 그는 자기보다 조금 늦게 자리를 잡은 그 여자의 모든 점이 몹시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머리칼만 해도 그랬다. 그녀의 머리숱은 풍부하고 자연스런 스타일로서, 요즘 유행하는 펑크록 계통의 가수를 모방한 듯한  헤어 스타일이나 여자 체조 선수처럼 짧은 머리를 싫어했던 
그의 마음에 꼭 들었던 것이다. 즉, 통로 저편에 앉아 있는 여자의 머리는 목을 움직일 때마다 부드럽게 물결치며 어깨를 애무할 뿐 아니라 깨끗하게 빗질이 되어 있어 꽃 내음이라도 풍길 것 같았다. 조금 전 옆으로 지나갈 때 그 자그마하고 청초한 모습에 그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기로 말았는데, 만일 그녀를 무관심하게 보아 넘긴다면 남자가 아닐 것이다. 그녀는 녹색 니트의 투피스 차림이었다. 
 스웨터는 허리 부분이 잘록하고, 스커트는 맵시 있는 히프의 선을 따라 흐르다가 플레어를 그리고 있으며, 길이는 무릎 바로 밑까지였다. 각선미도 멋졌다. 그녀가 자기 자리에 도착하여 머리 위에 잇는 선반에 트렌치 코우트를 던져 넣을 때, 그는, 그 멋진 각선미를 보았다. 옆얼굴과 둥근 어깨, 지나치게 크지 않은 가슴을 훔쳐 본 것도 그 때였다. 그는 겉으로는 이륙하자마자 곧 브리프 케이스에서 서류를 꺼내 열심히 읽고 있는 듯 가장했지만 사실은 계속 그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작은 스테이크 샌드위치를 받아들고는 우아하게 서너 입 베어 먹었다. 브로컬러 한 입에, 빵과 디저트는 생략하고 와인 로제를 반 글라스, 그리고 약간의 밀크가 섞인 커피를 한 잔 마셨다. 식후에 그는 다른 서류 몇 장을 훑어보고는 브리프 케이스를 집어 넣었다. 그리고는 타임지를 펼쳤으나 시선은 노상 그 여성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읽는 척하는 것도 포기하고 오로지 그녀만 바라보게 되었다. 이 때 비행기가 에어 포켓에 들어가자 기체가 갑자기 강하했다. 그녀는 깜짝 놀란 듯이 시트에서 몸을 일으켜 불안한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자기가 무슨 일을 하려는지 생각하기에 앞서 행동부터 했다. 즉, 통로를 건너 그녀 곁으로 가서 두 손으로 그녀의 손을 감싸며 말한 것이다. 
  "아무 일도 아니니까 염려할 것 없습니다. 무서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심야의 특별석에는 승객이 별로 많이 않았다. 그들은 잠을 자거나 다른 일에 신경을 쓰고 있었으므로, 그가 통로를 건너 겁먹은 그 여자 곁에 간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자기 손을 꼭 쥐고 있는 따뜻하고 억센 사나이의 손이 놀랍도록 손질이 잘 되어 있었기 때문에, 킬리는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러고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사나이의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었으나, 이상하게도 불쾌감은 일어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어느새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어째서 사과 따위를 하는 것일까. 
  "정말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저 약간, 저어........."
목이 멘 듯 목소리가 막히는 바람에 그녀는 놀라고 말았다. 평소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어디로 갔을까? 바보같이 더듬거리고..... 그리고 어째서 손도 빼지 못하고 이러고 있는 것일까? 손을 그대로 둔 채 킬리는 짙은 눈썹 밑에 있는 그의 검은 눈을 쳐다보았다. 
 눈 바로 밑의 광대뼈 위에 1센티 가량 되는 상처 자국이 있었다. 코는 가늘고 윤곽이 뚜렷했으며, 입술은 관능적이라 해도 좋을 남큼 도톰했다. 턱은 강한 의지를 나타내듯 긴장감이 있었으나, 오른 쪽 볼에 있는 보조개로 인해서 조금 부드러운 인산을 주었다. 
  "친구란 도움이 되는 것이죠." 
하면서 그는 친근감있게 미소지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 있는 미소, 언제나 상대를 경계하는 듯한 미소였다. 천연덕스러운 거짓말쟁이, 그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가 느끼고 있는 것은 우정 따위의 온당한 것이 아니었다. 
 처음 그녀의 얼굴을 정면으로 본 순간, 눈에서 심장으로 전류가 흘렀다. 그 기세에 비한다면, 창 밖에서 번쩍이고 있는 번개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크고 성실해 보이는 녹색 눈은 또한 섹시하게도 보였다. 피부는 크림처럼 희지도 않거니와 복숭아 빛도 아니다. 복숭아 빛에 꿀을 탄 듯한 살구 빛이라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틀림없이 여름에는 황금빛으로 탈 것이다. 엷게 화장한 품위있고 매력적인 얼굴, 귀에는 작은 금 귀걸이가 걸려 있었다. 가느다란 금고리가 빛을 발했다. 아직도 자기가 잡고 있는 순에는 반지가 없었다. 반지를 안 끼었군 ---그의 가슴이 뛰놀기 시작했다. 그녀는 약간 몸을 떨고 있었다. 
  그는 문득 어떤 욕망을 느끼고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남자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는 것을 그녀는 전혀 모르고 있을 것이다. 혼자만의 욕망이었으나 그 욕망을 부인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충동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그것 뿐 만은 아니었다. 자기 손안에 가두어 놓고 싶다는 기분, 그것은 지배하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지켜 주고 싶다는 강한 마음이 작용하고 있었다. 남자의 본능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자에 대해 그런 마음을 갖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생각하고 있는 바가 눈으로 나타난 모양이었다. 
여자가 가만히 손을 빼었다. 그는 어색함을 감추려는 듯이 말했다.
  "닥스 디발이라 합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아, 물론 지금 깨달았다는 뜻입니다마는.... 뵙게 되어 기쁩니다. 디발 의원님, 저는 킬리 프레스턴이라 해요."
  "킬리 프레스턴... 킬리 프레스턴."
닥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서 들은 이름인 것 같군요. 전에 만났던 일이 있던가요?"
  "뉴올리안즈를 드라이브하신 일이 있으시다면요. 저는 KDIK라디오의 교통 리포터로 일하고 있어요. 러시아워에 헬리콥터에서 도로 상황을 방송하고 있습니다."
  "아 그렇군! 킬리 프레스턴. 인기인을 만나 영광입니다."
그녀가 웃었다. 닥스는 그 웃는 모습도 마음에 들었다. 나직하고 깨끗한 웃음소리였다. 그 표정에서는 긴장이 완전히 가시어 있었다.
  "인기인이라니, 천만의 말씀이에요."
  "아니, 사실이오! 하늘에서 내려오는 그 목소리를 듣고 매일 아침 즐겁게 출근하는 사람을 나는 많이 알고 있어요."그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의아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쓸데없는 질문인지 모르나,  매일 아침 날아다니고 있는 당신이 어째서...?"
  "어째서 아까 그토록 놀랐느냐는 말씀인가요?"
킬리는 창밖으로 시선을 보냈다.  번개의 꼬리가 먼 지평선까지 이어졌다.
  "제 자신도 바보 같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말씀하시는 것처럼, 저는 매일 날아다니고 있기 
     때문에 무서워할 까닭이 없어야 하는데도  아마 천둥소
     리 때문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그녀는 자기가 듣기에도 
     어설픈 핑계를 대었다. 어째서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던 
     것일까---------프레스턴 이란 이름은 직업상  사용하
     고 있는 이름이라는 것을, 하늘을 나는 데 심한 공포감
     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헬리콥터를 타는 일은 
     심리적 장애를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자기 치료법이라
     는 것을.
     그러나 이러한 것은 생각해 내고 싶지도 않았고, 또 남
     에게 이야기하기란 더욱  싫었다. 그녀는  경험을 통해 
     남자에게, 특히 독신이고 매력적인 남자에게 지금 자신
     이 처한 상황을 설명하면 그들이 몹시 당황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킬리를  어떻게 대해야 할 것
     인지 고민하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그런 상황에 놓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킬리는 애매한  대답으로 얼버무리
     려 했다. 
     "다음 번에는 루이지애나 출신  상원의원으로서 국회에 
     나가실 생각인가요?" 화제를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킬 
     리가 물었다. "선거에서 내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
     요?"
     "단연코 우세하리라고 생각합니다." 킬리는 정직하게 말
     했다. "훌륭한 실적을 많이 올렸으니까요." 닥스 디발은 
     킬리의 고향인 루이지애나에서는 근로자들을 깊이 이해
     하는 정치가로 알려져 있었다. 진즈와 워크셔츠 차림으
     로 어부나 농민, 공장에서  일하는 블루 칼라들과 이야
     기하는 모습이 자주 보도되고 있었다. 정적들은 위선적
     인 제스처라고 비웃었으나,  지지자들로부터는 많은 환
     영을 받고 있었다. 어쨌든 그는 항상 많은 대중의 지지
     를 얻고 있었으며 주민의 주목을 한  몸에 모으고 있는 
     인물이였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 끊임없이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기
     회주의자---당신에게는 이렇게 생각되지  않는 모양이
     군요." 닥스가 최근의  비판적 논설을 인용하면서  말했
     다. 킬리도 그 논설을 읽었기 때문에 웃으면서 말했다. 
     "루이지애나 주에 사무실을 갖고  있으시다면 디발이란 
     이름이 유리하지 않을까요?" 닥스가 빙그레 웃었다.
     " 5대조가 화려한 프랑스계 사람인데, 그것이 내게 플러
     스가 되는지 마이너스가  되는지는 모르겠소. 당시에는 
     상당히 야만적인 일을 했던 것 같더군. 결투도 하고, 혈
     기왕성하고 성질이 급ㅎ나  조상들이 많았던  것 같소. 
     잭슨 장군이 영국을  무찌른 뒤 미국  처녀와 결혼하여 
     일족의 분개를 산 일이나, 뉴올리안즈가 연방 정부군의 
     손에 떨어졌을 때 양키(북군)에게  협력하여 집안 이름
     을 더럽힌 사람도 있었죠."
     킬리가 웃었다.
     "알겠습니다. 당신은 살인자와 배반자의 후예라는  뜻이
     군요. 하지만 당신의 선거  담당 참모는 고생하지 않아
     도 될 것이라고 늘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래요?" 닥스가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즉, 이름과 성이  모두 D로 시작되잖아요?  머리가 잘 
     도는 어드바이스맨이라면 순식간에 많은 슬로우건을 만
     들어 낼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당신은 젊고 핸섬해요. 
     존 F. 케네디 같은 타입이에요."
     "그러나 케네디 씨에게는  케네디 부인이 있었지  않소. 
     내게는 점수를 벌어 줄 아내가 없거든요."
     그것은 킬리도 알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다. 
     닥스 디발이 독신이란 사실은 정적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공격의 구실이 되었다.  정치가에 관한 한 핸섬하
     고 독신인 남자는 자격이 없다고 멋대로 생각하는 사람
     들이 많았던 것이다. 키리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닥스의 
     무릎이 거의 그녀의 무릎에  닿을 듯이 근접해 있었고, 
     바지가 약간 다리에 닿아  있었다. 그러나 킬리는 발을 
     움츠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결혼 상대자가 나타날 가망도  없죠." 
     닥스는 킬리를 자세히 쳐다보면서 말했다.
     "그래요?" 킬리의 목소리는 속삭이듯 낮았다.
     "네."
     영화와 소설과 노래에 싫증이 날 정도로 자주 묘사되고 
     있는 남녀간의 아름다운  마음. 그러나  자기가 맛보게 
     되는 경우엔 쓰라리기만 한  것이다. 닥스의 시선을 되
     받아 보는 킬리의 가슴은 어찌 된  일인지 설레기 시작
     했다. 오래동안 억제해  오고 죽여 온  것이 지금 둑을 
     무너뜨리고 흐르는 세찬 격류처럼 킬리의  가슴에 밀어
     닥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그러나 감미로운 형벌에 
     집행유예가 선고되었다.
     스튜어디스가 닥스의 곁에 와서 이렇게 말한 것이었다.
     "서로 인사를 나누셨군요.  마실 것이라도 갖다  드릴까
     요?"
     "브랜디가 어떨까요?" 닥스는 킬리에게서 눈을 떼지 않
     은 채 말했다. 그가 이렇게 말하자 킬리는 그저 고개만 
     끄떡였다.
     "브랜디 두잔을 부탁해요." 닥스가 스튜어디스를 돌아보
     며 말했다. 이 기회에 킬리는 자신을 되찾고자 깊이 숨
     을 들이마시고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는  촉촉이 젖은 
     손바닥을 스커트에 슬며시 문질렀다. 닥스의 다리는 아
     직 그 위치에 있었다. 어쩌면 아까보다 더 접근해 있는 
     것도 같았다. 그의 키는 얼마쯤  될까? 갑자기 옆에 와
     서 손을 잡는 바람에 그를 눈여겨볼 틈도 없었다.
     "킬리?" 쳐다보니 진지한 표정의 그가  있었다. "상원의
     원에 입후보하면 나한테 투표해 주겠습니까?"'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순간 긴장과 숨막
     힐 듯한 답답증이 풀렸다.  스튜어디스가 날라 온 브랜
     디를 킬리는 조금식  마셨다. 별로  브랜디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그것을 닥스에게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당신의 업무 이야기가 듣고 싶군요. 아마 날마다  즐겁
     고 활기에 차 있을 테죠?"
     "밖에서 상상하는 정도의 훌륭한 일은 못 됩니다.  하지
     만 나는 이일에 보람을 느끼고 있어요."
     "팬들의 사인 공세로 진땀을 빼는 일은 없습니까?"
     "착각하지 마세요, 나는 라디오  담당이에요. 내 얼굴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좀더 사람들 눈에 띄는 미디아에  진출하는 것은 어떨
     까요?"
     "텔레비젼 말씀인가요? 어림도  없어요. 카메라 상대는 
     친구인 니콜에게 맡기고 있어요."
     "니콜...............성은?"
     "니콜 캐슬맨이에요. 우리 라디오  방송국이 있는, 같은 
     건물의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여섯 시  뉴스의 캐스터를 
     맡고 있어요."
     "뉴올리안즈에서 본 적이 있죠. 금발의..............."
     "네, 그래요. 어떤 남자든지 첫눈에 반하고 말죠."
     그러나 킬리는 질투하는 기색이라곤 전혀 없이 말했다.
     "그녀와는 오래 된 친구 사이에요. 니콜은 자기의  인기
     이ㅔ 매우 만족하고 있어요.  같이 있으면 사람들의 눈
     길은 모두 그녀에게 집중된답니다."
     "과연 그럴까요?"닥스가 말했다. 눈을  보니, 그가 인사
     치레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킬리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  "그녀와 일을  바꾸고 싶지 않아
     요? 마음은 어떻더라도, 일을 바꾸에 되면 혹시 프라이
     빗한 면에서 지장을 초래하게 될까요, 가족이라거나?"
     은근히 탐색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킬리는 연막을 쳐두
     고 했다. " 그런 점은 물론..........."
     안전 벨트를 착용하라고  램프가 켜지고, 스튜어디스가 
     글래스를 가지러 왔다.  곧 내셔널  에어포트에 착륙할 
     것이라는 파일럿의 아나운스가  들려왔다. 수도의 일기 
     상황을 대충 들으면서,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
     지는 않았으나 뼈져릴 정도를 서로를 의식하고 있었다. 
     닥스의 손은 팔걸이 위에 놓여 있었다. 억세고 크며 끝
     이 가느다란 손으로서 검은 털이 약간 나 있었다. 아름
     다운 손, 왼손  약지에는 금 인장이  달린 반지를 끼고 
     있었다. 악어 가죽 밴드가 있는 시계------둥근 시계로
     서 문자반에는 굵은 로마  글자가 새겨져 있었고, 시침
     과 분침 외에는 날짜판이나 스톱 워치  등 일체의 군더
     더기가 없는 심플한 것이었다. 킬리는 마음에 들었다.
     국회의원이라면 곧 점잖은 회색 양복을  상상하게 되지
     만 닥스는 캐멀 바지에 감색 더블 블레이저, 낙엽빛 셔
     츠에 산뜻한 무늬의 넥타이  차림이었다. 어디 보기 싫
     은 곳이라도 있지 않을까, 단 한 군데라도. 그러나 킬리
     의 눈에는 그가 완벽하게 보였다.
     닥스도 그녀의 손을 보고  있는 체했으나, 사실은 좀더 
     아래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닥스의 눈 위치에서는 그것이  너무나 잘 보였다. 스커
     트 단으로부터 엷나  청색 레이스가 약간  드러나 보였
     다. 닥스의 심장이 이상하게 고동쳤다. 엷은 청색 슬립. 
     페티코우트만 입었을까, 아니면  어깨에 새틴끈이 달려 
     있는 것일까,............... 
     그는 그는 이상한 면으로 발전하는 자기 생각을 돌이켰
     다. 그녀에 대해 실례가 아닐 수 없다. 자신의 경박스러
     움이 드러나는 것 같아  불쾌했다. 닥스는 좌석에 앉은 
     채 몸을 움직이며 느닷없이 물었다.
     "워싱턴에는 언제까지?"
     "저어.......아직 확실치는 않아요. 사정에 따라서."
     "어디 머무를 예정입니까?" 킬리는 속으로 긴장했다. 위
     험하다! 너무 가까워지면 안된다. 그의 매력에 이끌리는 
     것이 무서웠다. 여기서 쐐기를 박지 않으면.........
     "아직 정하지 않았어요. 공항에 도착한 뒤 전화로  예약
     할 생각이에요."
     녹색눈이 내리깔리는 것과 부자연스러운 목소리로 보아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닥스는  알 수 있었
     다. 그러나 화가 나기는커녕 오히려 귀엽게만 여겨졌다. 
     첫인상은 정확했던 것이다. 그녀는 절대로 경박한 여자
     가 아니다.
     "잠시나마 즐거웠습니다." 닥스는 미소를 띠며 다정하게 
     손을 내밀었다. 킬리는 악수를 나누면서 그의 보조개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닥스는 흰 이가  살짝 드러나 보이는  킬리의 입술에서 
     겨우 시선을 뗄 수가 있었다.
     "잘 가요." 닥스가 일어섰다.
     "안녕히 가세요."
     닥스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  내릴 채비를 했다. 킬리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으나 저쪽에 있는  닥스를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다. 747기가 멎자, 킬리는  일어나 선반에
     서 코우트를 꺼냈다. 닥스 쪽은 보지 않으려 했으나, 시
     야 한 끝에 톱코우트에 팔을 꿰고  있는 닥스의 모습이 
     비쳤다. 코우트는 아직  입지 말아야지,  틀림없이 그가 
     입혀 주려 할 테니까. 아직 닥스와는 접하지 않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킬리는 백과 소형 어태시케이스를 손에 
     들고 코우트는 팔에  건 채 통로로  나섰다. 문 옆에서 
     닥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짐이 있습니까?"
     "네. 선생님은요?"
     "이번에는 맨손입니다."
     "아, 그런가요"대화는 여기서 끝났다. 킬리는 빠른 걸음
     으로 트랩을 내려왔다. 이상하지 않은가! 어째서 돌아보
     고 평범한 이야기라도 하지  못하는 것일까. 어째서 닥
     스는 가만히 있는 것일까. 두 사람 모두 서먹서먹해 하
     는 고등학생 같다. 그러나 이것이 제일 좋다. 이렇게 하
     는 편이 안전하다. 킬리는 공항  건물을 향해 걸어갔다. 
     문을 연 순간, 카메라를 메고 마이크를 든 보도진이 돌
     진해 오는 것이 눈에  띄었다. 킬리는 호기심을 버리지 
     못하고 그만 돌아다보았다.
     닥스는 곧 보도진에 둘러싸여 카메라 플래시를 받았다. 
     그는 보기좋은 웃는 낯으로 질문의 화살을 받아 넘기면
     서 워싱터느이 하늘에 대해  농담을 했다. 그리고 인파 
     너머로 킬리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약간  미안하는듯한 
     미소를 보냈다. 킬리는 입술로만  잘 가라는 인사를 하
     고 에스켈레이터 쪽으로 갔다. 킬리는 콘베이어 벨트에 
     실려 나온 짐을 받아 들고 공항  건물에서 나와 택시를 
     잡았다. 그러고는 운전사가  트렁크에 슈트케이스를 싣
     고 있는 동안 앞에 서  있었다. 이때 또 하나의 택시가 
     달려와 이웃한 차선에  멎는가 싶더니,  문이 열리면서 
     닥스가 뛰어내렸다. 추운 밤이었다. 킬리 곁으로 달려온 
     닥스의 입김이 하얗게 보였다.
     "킬리, 아직 작별 인사를  하고 싶지 않소.;어디서 커피
     라도 한잔 하는 것이 어떻겠소?"
     "닥스......"
     "알고 있어요. 나는 알게 된지 얼마 안 된 사람이오. 그
     리고 당신이 공항에서건 어디에서건 사람을  쉽게 사귀
     려 하지 않는 사람이란 것도 잘 알아요. 당신을 모독했
     다고는 생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나는 그저............"
     닥스는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렸다. 찬바람에 
     코우트 자락이 날리며 바지를 탁탁 치고 있었다.
     "즉.........잠시 동안만 킬리하고 같이 있고 싶은 거요.
     킬리에 대해 좀더 알고 싶어요. 아직 그렇게 늦은 것도 
     아니니 잠시 커피나 같이 나눕시다."
     그의 이 미소를 냉정하게 물리칠 사람은  이 세상에 없
     을 것이다. 그러나 킬리  프레스턴은 지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닥스"
     도로를 가로막고 있는 닥스의 택시 위에서 킬리의 짐을 
     실은 차가 요란하게 클랙슨을 울렸다.
     "다른 사람과 약속이라도?"
     "아니, 없습니다"
     "피곤해서 그럽니까?"
     "아니오, 말하자면........."
     "네?"
     "그저 싫습니다 "하고는 킬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건 대답이 안 되지 않소?" 그가 다정히 웃었다.
     " 내가 싫어서 그런다면........"
     "아닙니다!"
     킬리는 저도 모르게 외치듯  말한 것을 금방 후회했다. 
     그녀는 얼굴을 돌리고, 부드러운 안개 저쪽에서 빛나고 
     있는 공항의 불빛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자리를 같이 할  수 없는 이유는..........."킬리의  음성은 
     낮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닥스는 그 말을 들으려고 가
     까이 다가왔다.
     "결혼했기 때문입니다."
     
     
           2

          닥스는 한방 맞은 것처럼 고개를  뒤로 젖혔다. 
          정말 그런 충격을 받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축
          축한 레인 코우트에 시선을  떨구고 있는 킬리
          의 얼굴을 넔없이 바라보았다.
           "결혼을 했다고요?"
          그녀는 고개를 들어 똑바로   닥스를 쳐다보았
          다. 그 눈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안녕히 가세요, 닥스" 킬리는 택시  문을 열고 
          쓰러질 듯이 시트에 몸을 던지고는, 기다리기에 
          지친 표정을 짓고 있는 운전사에게 말했다.  
          "캐피털 힐튼으로 가 주세요"
          택시는 난폭하게  차의 물결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킬리는 두 손으로얼굴을 감싸고 이마 
          한 가운데를 가운뎃손가락으로 누르고  있었다.  
          마침내 밝혀지고야  말았어---------오랫동안 
          두려워하고 있던 사실이. 
          1만 미터 상공에서 한 남자를   만나고야 말았
          다. 킬리의 입장은 더욱더 쓰라린 것이 되고 말
          았다. 킬리  프레스턴 윌리엄즈는   결혼한 지   
          12년이나 된다. 그러나 실제로 결혼  생활을 한 
          것은 3주밖에 되지 않았다. 남편인 마크와는 고
          등학교 시절부터 사랑하는 사이로서, 풋볼 인기 
          선수와  치어 리더라는  전형적인 커플이었다. 
          1969년, 마약과 마리화나와 성  풍속의 문란 등 
          퇴폐한 조류는 아직 미시시피 강가의  작은 시
          골마을에까지는 밀려오지 않고 있었다.  두  사
          람이 자란 환경은 극히 바람직한  것이었다. 지
          역 대항 풋볼 시합,  온 마을이 참가하는  피크
          닉, 교회의 간친회  등, 예부터의  행사가 쇠퇴
          되지 않고 그대로 존속되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마키와 킬리는  미시시피 주립 대학
          에 진학했다. 풋볼 선수인 마크는  학업과 고된 
          훈련을 양립 시키지 못해  성적이 계속 떨어졌
          다.  결국 제 1학기에는 낙제를 하고 말았던 것
          이다.  당시는 베트남 전쟁이 한창인 때여서 젊
          은이들은 언제 소집될지  모르는  불안감을 안
          고 있었다. 마크에게 그 불운이   닥쳐왔다. 성
          적 부진이 군의 징병 위원회에  보고되자, 위원
          회는 즉시 마크에게 소집 영장을  발송했다. 그
          리하여 2 주일 후, 마크는 신병  훈련소로 떠났
          던 것이다. 그가 소집된 것을 알고 킬리는 한시
          라도 빨리 결혼하자고 졸라댔다. 킬리는 울면서 
          협박도 하고 애원도 했다. 마크도 결국 킬리에
          게 굴복하여 목사의  서재에서, 양가의  부모를 
          모신 가운데 간소하게 결혼식을 올리고 말았다. 
          두 사람은 뉴올리안즈로  드라이브하며 주말을 
          지내보고는, 고향에 돌아가 마크의 부모와 함께  
          나머지 기간을 보냈다. 
          
          2 주일이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마침내  
          군용 버스가 마크를  데려가고 말았다.  마크는 
          루이지애나 주  포트포크에서 석  달을 보내고
          는 헬리콥터 조종사 훈련을  받기 위해 텍사스 
          주의 포트월트즈로 보내졌다.  40 주  예정이던 
          훈련  기간이 25주로 단축되었다.  반년 동안의 
          별거 후, 마크는  출전 전의 일주일  동안의 휴
          가를 보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젊디 젊
          은 두 사람의 결혼이었으나, 마크가  지구 반대
          쪽의 지옥과도 같은 전쟁터로 떠나기 전의  짧
          은 애정생활은 정말 순순하고 달콤한 것이었다. 
          킬리는 학업을 계속하면서 방과후에는 일을 했
          다. 그리고 밤이  되면 이런저런 근황을 알리는 
          긴 편지를 마크에게 썼던 것이다. 마크에게서도 
          가끔  회답이 왔다. 두서너  통이 함께 모아져 
          오는 일도 있었고  몇 주일 동안  아무 소식이 
          없을 적도 있었다. 킬리는  그의  편지를 읽고 
          또 읽으면서  사랑의 말을  하나하나에 가슴을 
          설레었다. 마침내 마크로부터의 소식이 뚝 끊어
          졌다. 3주일이 지나고 4주일이 지나도 킬리에게
          는 물론, 애태우고 있는 부모에게도 엽서 한 장 
          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포트포크에서 한 
          사관이 찾아왔다. 헬리콥터가 추락하여  마크의 
          소식이 끊어졌다는  것을 전하러  왔던 것이다
          ------전사보고는 들려 오지 않았다. 헬리콥터 
          잔해에서 시체도 발견되지 않았다.  포로가  된 
          흔적도 없었다.-----즉, 행방불명이 되었던 것
          이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남편에 대해서는 그것
          밖에 모른다. 마크는 (동남  아시아 전투에서의 
          행방불명자)리스트에 올라 있는 2천 6백명  중
          의 한 사람이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킬리는 
          그저 멍청히  세월을 보낸 것은  아니다. [행방
          불명자]문제가 유야무야로  끝나  버려서는 안  
          된다고 여론에 호소하는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
          개해  왔다. 같은 입장에 있는 미망인들과 함께 
          철저한 해명을  요구하는 모임을 결성하여, 그 
          대변자로서의 일을  지금까지 몇  번이나 맡아 
          왔다. 킬리는 담배 냄새가 밴  먼지투성이의 택
          시 시트에  몸을 기대고,  창 밖으로 스쳐가는 
          워싱턴의 경치를 멀거니  내다 보았다.  12년의  
          세월이었다. 마크의 행방불명을 처음으로 안 그
          때에 비해 현재의 고통이 조금이라도 덜해졌다
          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밝은 앞날을  꿈꾸지도 
          못하는 무거운 마음으로 저널리즘 학위를 받고  
          대학을 나오자,  킬리는  뉴올리안즈로 나왔다. 
          그리고 타임즈   피카윤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원고 교정자라는 그럴듯한  직책이었으나 사실
          은 단순한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았다.  몇 년을 
          참은 끝에 겨우 외근 기자가 되기는 했지만, 이
          것도 누구 한 사람  부러워하지 않는 직책이었
          다.  지면 한 구석에 몇 줄이 실릴까말까한  사
          건의 기사만을  겨우 취급했던 것이다. 어느 날 
          킬리는 저널리스트 동료로부터,  지방 방송국의 
          뉴스 기자가  하찮은 트러블로  갑자기 사표를 
          내 버렸다는 말을 들었다. 킬리는  점심 시간을 
          기다려 라디오 방송국으로 달려가 뉴스 디렉터
          에게 면회를 신청했다. 자기 선전  작전이 훌륭
          하게 성공을 거두어, 킬리는 이튿날부터 새로운 
          직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일은 재미있었다. 적
          어도 신문사에서  지루하기 짝이  없는 기사를 
          쓰던 것에  비하면 얼마나 재미있는지  몰랐다. 
          니콜 캐슬맨과  알게 된  것은 카페테리아에서 
          케첩을 집으려던 두  손이 부딪친  것이  계기
          가 되었다. 그리고 헬리콥터에서 섹시한 여성의 
          음성으로 교통 정보를  알린다는  새로운 계획
          이 나왔을 때 니콜은 킬리를  추천했다. 회사에
          서 그 일을 명하자 킬리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마이크에 대고 이야기한 적은 지금까지 한번도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매일 같이  헬리콥터에 
          타야 하다니! 마크! 마크의  헬리콥터는 불길에 
          휩싸여 추락했던 것이  아닌가! 그리고  폭발했
          다. 유해조차 찾지 못했다. 
          안돼, 할 수 없어.
          그러나 킬리는 일을 수락했다. 마크에  대한 기
          억을 생생하게 가슴에  새겨 두기  위해서였다. 
          사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 모습은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과감하게 하늘을 나는 일을 택함으로써 비행기
          에 대해 품고 있던 이유 없는 공포심과 정면으
          로 대결하려 했던 것이다. 킬리  프레스턴 윌리
          엄즈는 어떤 일에 있어서나  공포심을 갖는 것
          이 아주 싫었다. 
          니콜과의 우정은 해를 거듭할수록  점점 더 두
          터워져  이제 와서는 서로 지나칠 만큼 솔직한 
          말을 하는 사이가  되었다. 어젯밤에도  니콜은 
          킬리의 침대 위에 올라앉아,  짐을 꾸리고 있는 
          킬리를 바라보면서 워싱턴행을  단념시키려 했
          다.
           "너는 이제 할 만큼 일을 했어, 성녀 킬리 씨! 
          행방불명이 된 사람의 일에 대해서는 정말  바
          보처럼 구는구나!" 니콜은, 그 드레스는 가져가
          지 말고 이것을  넣으라는 등 짐  꾸리는 것을   
          참견하던 끝에 말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하
          지 못할 거야. 또 처음부터 다시 말을  해야 하
          겠니? 차라리 녹음을 해 두어야 하겠군,  그 말
          이 나올 때마다 테이프를 돌리게  말이야. 서로 
          입을 놀리는 수고를 덜게 되기도 할 테고."
          "빈정거리는 것은 너한테 어울리지 않아, 킬리. 
          내 말이 옳다는 것은 너도  인정하고 있을거야.
          [프루프]회에 나갈 때마다  너는 어두운 얼굴을 
          하고 돌아와 몇 주일  동안이나 우울증에 빠져 
          있곤  하지 않니?"
          니콜은 같은 여자가 보기에도  반할 만큼 늘씬
          한 다리를 헤드보드에 걸치고 있었다. 물결치는  
          풍부한 금발, 바다와  같이 푸른  눈동자, 속삭
          이는 천사의 미소와도 같은 웃음. 그 큐핏과 같
          은 사랑스런  입술에서는 가끔가다  억센 바다 
          사나이도 손을 들 만한  거친 욕설이 튀어나온
          다.
           "이것은 내 의무야, 나는 여러  사람의 대변자
          이고, 또 그 일을 맡겠다고  모두에게 약속했어 
          그러니 나는 해야만 해. 그리고 이것은 아주 중
          요한 일이야. 나 한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같은 
          입장에  있는 여러 사람한테도 말이야.  의회에
          서 남편들이  전사자로 인정되면  군대 봉급이 
          끊겨.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르겠
          니? 도저히 팔짱을 끼고 방관만 할 수는 없어."
          "그런 것은 나도 잘 알고 있어. 그 때문에  [프
          루프]란 모임을 조직했다는 것도,  하지만 그것
          으로 슬픔이  끝나겠니? 포로가 석방되었을 때 
          그 속에 마크가  끼여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앓아 눕지 않았니? 그것을 나는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어. 네가 지옥의 고통에 빠진 것을. 
          앞으로 그런 일을 몇 번이나 당할 셈이지?"
          "몇 번이라도. 남편의 소식을 알게 될 때까지"
          "결국 아무런 소득이 없다면?"
          "그때에는 바보로 취급하거나  욕을 하거나 마
          음대로 해  그런데 이것 좀 봐줘 .감색  스커트  
          에는 아마색 블라우스가 맞을까, 아니면 회색?"
           "회색과 감색은 전혀 안 어울려". 니콜이 어이
          없다는 듯이 말했다. "아마색으로 해 그렇게 해
          야 미망인으로  보이지  않아"이리하여 킬리는 
          [동남  아시아 전투에서  있어서의 행방불명자]
          의 가족의 대표자로서 의회의 소위원회에 참석
          하고자 워싱턴에  온 것이다.
                    
          "다 왔어요" 택시 운전사가 무뚝뚝하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킬리가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니 
          택시는 이미 호텔 앞에 멎어 있었다.
          "감사합니다" 킬리는 입 속으로 말했다. 킬리는 
          운전사에게 요금을 지불하고  슈트케이스 하나
          만 든 채 로비로 들어갔다. 방은 몇  주일 전부
          터 예약해 놓았었다. 프런트에서 그녀는 무의식
          적으로 킬리 프레스턴이라 서명하고는,  갑자기 
          생각난  듯이 윌리엄즈라고 덧붙여 썼다.  방은 
          춥고 불품이  없으며 을씨년스러웠다. 대도시의  
          호텔은 대개가 그런  것이지만,,,,,,,,,,,,,,,,,,,,. 마크
          와 허니문을 보낸   호텔은 어땠었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마크와 결혼한 뒤의 일은 거의 기
          억에 남아 있지 않았다. 킬리의 가슴 속에 깃들
          어 있는 것은 풋볼 인기 선수로서의 마크, 고등
          학교 학생회장으로서의 마크, 또는 발렌타인 무
          도회 날의 마크였다.
          마크의 집에서 양친과 함께 지낸   어색했던 2
          주일동안-----마크는 자기 방에서  킬리와 같
          이 잘 때마다 몹시 신경을  곤두세우고 당황해 
          있었다. 첫날밤에 킬리는 좁은 매트리스에 몸을 
          내던지고 마크를 끌어안아 키스하려 했다. 마크
          는 긴장하면서, 엷은  벽 저쪽에서 양친이 있다
          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이튿날  밤, 그는 부모
          에게 서투른 핑계를 대고  킬리를 부추겨 외출
          했다. 두 사람은 호수로 드라이브를  나가 차를 
          세워 놓고 옹색한  시트에서 끌어안았다. 그 날 
          밤도, 또 그 다음   밤들도 킬리에게 있어서는   
          꿈같이 행복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킬리는  
          마크를 사랑했었고, 사랑한다는  것만으로 만족
          을 느끼고 있었다.  킬리는 코우트를  벗으면서  
          방안의 냉기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우
          선  베드  사이드테이블에 장치된  스테레오에 
          스위치를 넣고 온도 조절  다이얼을 돌렸다. 그
          러고는 슈트케이스에서 옷을 꺼내 정성껏 주름
          을  펴면서 옷장에 걸었다. 이때 침대 곁에  놓
          인 전화의 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킬리는 수
          화기를 집어 들었다.
           "킬리? 나 베티 올웨이에요. 무사히  여기  도
          착했는지 알고 싶어서 전화한 거예요"
          베티는 킬리보다 열  살  정도 연상으로서  세 
          아이의  어머니이기도 했다. 남편이 행방불명된 
          지 14년이  지났으나 아직도 단념하고 있지 않
          았다. 베티와는 수년 전에 알게 되었는데 [프루
          프] 위원회에서 같이 일도  하고 가끔 서신 왕
          래를  하고 있었다. 킬리는 불굴의 정신력을 가
          진 베티 올웨이에게서 언제나  용기를 얻고 있
          었다.
           "안녕하세요 베티? 아이들도?"
           "모두 잘 있었요. 당신은  어때요? 뉴올리언즈
          로부터의 여행도 즐거웠나요?"
          닥스 디발의 모습이 너무도 분명히  킬리의 뇌
          리에 떠올랐다. 심장이 몹시  뛰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네 아무 일도 없이 무사히 "
          이 거짓말쟁이! 하고 그녀는 마음속으로 꾸짖었
          다. 
          "내일 일이   염려스러워 마음이  편안치 못한    
          것은 아닌가요?" 하고 베티가 물었다.
           "나라의 돈주머니를 좀처럼 풀지 않으려는 의
          원들을 만날  때는 언제나 그런걸요."
           베티가 기분좋은 목소리로 웃었다.
           "첫째난관은 이미돌파했고, 나머지는   당신이 
          잘  처리하기만 믿고 기도할 뿐이에요"
           "모든 사람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열심히 
          일하겠어요"
          "하지만, 만일 우리 요구가  관철되지 않더라도 
          결코 당신의 책임이  아니에요. 그런데  내일은 
          몇 시에 만나야 할까요? "
          두 사람은 이튿날 호텔  로비에서 만나 식사를 
          하고 같이 하원 회의장에 가기로  약속했다. 킬
          리는 전화를  끊으면서 문득 실망 비슷한 것을 
          느꼈다. 그런 기분을 떨어버리려는  듯이  옷을 
          벗기 시작하는데 다시 전화가 울렸다.  아마 베
          티가 무슨  말을 하려다 잊어버린 것이리라.
           "여보세요?"
           "당신은 결혼반지를 안끼고 있더군.........."
          킬리는 깜짝 놀라 숨을 죽였다. 손에 든 페티코
          우트를 움켜쥐며 얼른 가슴을 가렸다. 전화  저
          쪽에 있는 닥스가  보고  있기라도 하는 듯이. 
          그녀는 무릎에 힘이 빠져 침대에 주저앉았다.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대관절 어떻게 ........?"
            "CIA에게 미행을 시켰죠."
            "CIA...........?"
            "농담이오 "하며 닥스가 웃었다. "내 택시 운
          전사가 당신이 탄 택시를 계속 추적했던 거요"
          킬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무랄 기분이 
          아니었던 것이다.
           "내 미행에 대한 감상은?"
           "네? 아아, 결혼 반지 말이군요.  평소에는 끼
          고 있어요. 다만 비행기에  탈 때는 손에  땀이 
          나서 빼놓곤 하지요."
          "그랬었군요" 닥스는 크게 낙담한 듯 한숨을 쉬
          었다. 
           "일루의 희망은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잘못 
          생각했었군. 과히 나쁘게 생각지 말아요.  아니, 
          벌써 기분이 언짢은가요?"웃을  기분은 아니었
          는데도 킬리는 그만 웃어 버리고 말았다.
          "언짢게 생각하지는 않아요.  결혼했다는  것부
          터  말씀드려야 하는 건데 그랬군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당신은 비행기 안에서  별로  들지  않더군요 
          배가  고프지는 않소? 같이 식사라도  하러 가
          는 것이 어떻겠소?"
           "닥스"
           "미안하오 깨끗이 물러서지  못하는 성격이라
          서"
           "같이 나갈 수 없는 이유를 아시지 않아요?"
           "유감이지만 할 수 없군요"
           "그러면.........."이런 경우에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만  쉬세요" 킬리는   
          아무렇게나 말해  버렸다. 안녕히 계시라는  말
          보다는 덜 결정적인 말이었다. 머리채라도 낚아
          채이는 듯한 기분으로  킬리는 전화를  끊었다.  
          '누구를 사랑할 수도 없게  되었니?' 니콜의 탓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니콜은 [프루프]활동에 대해서도  자주 반발하
          고 나섰지만,  킬리의  부자연스러운 정조관이 
          화제에 오르면  노상 분개하기가 일쑤였다. 
          니콜은 남자를 아주  좋아했고, 동시에  인기도 
          있었다.  그녀의 경우는  다른 여자와는  달리, 
          실연을 당하는 경우는 절대로 없다.  적당한 시
          기에 남자를 버리되, 그때 그때의  사랑은 최대
          의 정열로 연소시키는 것이다.
          그러한 니콜에게는,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
          는 남편을 기다리며 12년  동안이나 정조를 지
          키고  있는 킬리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남자에 대한 추억만 의지하고 살다니, 너무나 
          어리석어.' 이것이 니콜의 말이었다.
          "이런 말을 하기는 좀 안 됐지만,  어느날 갑자
          기 남편이 돌아올 희망이 과연 있겠니? 또 , 그
          이는 이 세상의  생지옥을 경험한  사람이니까, 
          네가 가슴속에 품고 있는  옛날의 그 모습과는 
          아주 다른 사람이 되었을 거야. 너 역시   마찬
          가지야. 이미 핑크빛 피부를  가진 옛날의 치어 
          리더가 아니야. 빈정거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
          려 그 반대야. 네가 성숙한 여자라는 것을 말해
          주고 싶어서 그래. 네게도 남자 한 두 사람쯤은 
          있어야해--------내가 구해줄게"
          화를 내면서도 킬리는 그만 웃고 말았다.
          "사양하겠어. 나는 남자에 대한  생각이 너하곤 
          달라. 하지만 찰즈만은 예외인지도 몰라"
          "그 사람? 그는  내 남자  리스트에 올라 있지 
          않아" "그럴까?""그래!"
          "그는 너를 사랑하고 있어, 니콜"
          "사랑? 침실로 유혹할 생각도  안 하고 있는걸.  
          열심히 나를 피해 다니고 있어"
          "그는 장난삼아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야"
          "찰즈와 나 사이는  아무래도 좋아, 지금은  너
          의,  남자에 대한 생각이 문제되고 있는 거야"
          "알겠어. 그렇다면 내가 어떤 남자와 교제를 시
          작했다고 하자, 과연 그 사람은 같이 영화 구경
          을 하거나 식사를  하는  것만으로  만족할까? 
          다른 것을 요구하지는 않을까?"
          "그야 당연히 요구할 테지, 너는 매력적이고 섹
          시하니까"
          "그렇다면 곤란해. 나는 남편이  있는 몸이니까 
          그  이상은 안돼. 결국은  우정도 끝나게 되고 
          다시 외톨이로 돌아가는 거야."
          "그렇지 않아. 같이 자면 되지 않니?  저장되었
          던 정열이 폭발하여, 어쩌면 진짜  사랑에 빠지
          게 될지도 몰라. 그렇게 되면  마크에 대해서도 
          죽은................."
          "제발 그만둬, 니콜 킬리가 말을 가로막았다.
          니콜은 후회하는  듯이 고개를  숙이고 깨끗이 
          손질된 손톱을 내려다보고 있었으나, 이윽고 머
          리를 틀면서 미안하다는 듯이 미소지었다.
          "미안해 내가 너무 했어, 나는 네가 좋아, 그래
          서 그만 허물없이 말해 버린 거야."
               
          닥스 디발-----더없이 호감이  가고 매력적인 
          독신 남성에게  차 마시자는  것을 거절했다는   
          사실을 니콜이 안다면,  그녀는 틀림없이  미친 
          듯이 날뛸 것이다. 하지만  안돼. 니콜. 미안해.   
          킬리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하면서 욕실의 형
          광등을 켰다. 뜨거운 물에 감겨 몸을 풀고 싶었
          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침대에 들어가  내일 연
          설할 원고라도 한번 더 읽어 보아야지. 젖은 머
          리에 타월을 두르고 두꺼운  파일 천의 가운으
          로 몸을 싼  뒤 머리맡의 스탠드에   스위치를 
          넣었을 때, 조용히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혼
          자 사는 여자의  몸에  밴 경계심이 발동했다. 
          킬리는 가만히 문 곁으로 가서 체인이 잘 걸려 
          있는지 확인했다.
           "누구세요?" "룸 서비스입니다."
          킬리는 깜짝 놀라 이마를 싸늘한  문에 대었다.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무언가  말하려 
          했으나 입안이 바싹 말라 잘 나오지 않았다.
          "제정신이에요?" 쉰 목소리를 겨우 짜냈다.
          "미쳤는지도 모르죠" 닥스가 말했다."최근의 내 
          행동가운데서  가장 치졸한 행동인지도 모릅니
          다. 하지만..........좀 들어갈 수 없겠소?"
          "안 됩니다"
          "문 앞에서 이러고 있는  것을 누가 본다면 나
          뿐만  아니라 킬리도 입장이 난처하지 않겠소? 
          만약 칼 번스타인이나 봅  우드워드 같은 민완
          기자에게 들킨다면 나는 끝장이오. 제발 부탁이
          니, 내가 파멸하기 전에 문을 열어줘요. 킬리에
          게 무엇을 좀 전하고 싶어서 그러니까."
          얼굴을 보기 전에는 그는  절대로 물러가지 않
          을 것이라고  킬리는 직감했다. 킬리는 도어 체
          인을  벗기고 문을 열었다. 닥스는  접시를 들
          고 서 있었다. 셔츠와 진즈 차림으로서, 벨보이
          의 모자를 머리 위에 올려 좋고 있었다. 킬리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런 곳에 대체 무슨 일이 있기에........"
          "나는 여기 살고 있어요"
          그는 킬리 곁을 지나 작고  둥근  테이블 위에 
          접시를 놓았다. "살고 있다고요?"
          "그렇소, 제일 위층에, 독신자가 워싱턴에 집을 
          갖는다는 것은 불편할  뿐만아니라 비경제적이
          조, 그래서 스위트룸을 빌어 살고 있죠"
           "그래서 미행하기도 수월했던  것이군요" 킬리
          가  빈정거리듯 말했다. "사실이오.  하지만 나
          는 어차피 킬리의 거처를 확인할 작정이었으니
          까."
          닥스의 어주에는 농의 기미라곤 전혀 없었다.
          킬리는 머뭇거리면서 흰 보로  덮인 접시에 시
          선을 보냈다.
          "저건 뭐예요?"
          "룸 서비스" 닥스가 벨보이의 모자를 벗으며 농
          담을 했다.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킬리
          는 자기가 머리에 타월을  감고 가운에 맨발이
          라는 것을 문득 생각해 내고 얼굴이 붉어졌다.
           "잠시 실례하겠어요"
           "그대로가 더 좋은걸"  닥스는 웃으면서  킬리
          에게 손을 내밀었다. 만일 닥스가  건드리지 않
          았다면 다음과 같은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
          았을 것이다. 킬 리가 꼼짝하지 못한  것은  붙
          드는 그의 손의 힘이 강해서가  아니라, 손목에 
          스며드는 닥스의 체온  때문이었다. 닥스의  웃
          음도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그는 킬리의 얼굴
          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그 빰에 손을 대고 떨리는  입술에  가만히 엄
          지손가락을 가져갔다. 킬리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닥스는 주저하면서도  머리를 기울여 
          킬리의 입술에 자기  입술을 포개었다.  뜨거운 
          전류가 닥스의 온 몸에 흘렀다. 두 몸이 가까워
          지고 닿고 또 하나도 합쳐졌다.  본능의 밑바닥
          에 있는 욕망이 두 사람을 사로잡았다. 묶여 있
          던 마음이 사슬이 풀렸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두  사람 사이에 싹트고 있던  것이 이제 한꺼
          번에 열기를 토하기  시작했다. 닥스는  킬리의 
          몸을  껴안으면서 강하게 입술을  탐했다. 희미
          하게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은 감각 속에서 
          킬리는 어느새  닥스의 등에 손을 돌려 부드러
          운 셔츠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킬리의 머리에서 
          타월이 미끄러져 내려  가펫 바닥에  떨어졌다. 
          닥스는 앞으로 흘러내리는 그녀의 머리털을 거
          칠게  쓸어 넘기면서, 더욱 세차게 킬리의  입
          술을 구석구석까지 탐했다. 그리고 너무나 강한 
          입맞춤으로 인해 두 사람은 깜짝 놀라 몸을 떼
          었다. 한 줄리 눈물이 킬리의 빰 위로 흘러내렸
          다. 킬리는 용서를 구하듯 가만히  어깨에 올려
          놓은 닥스의  손을 뿌리치고  도망치듯 창가로 
          달려갔다. 싸늘한 유리에 몸을 기대고는,  해서
          는 안 될 일을 했다는  생각에 몸을 떨면서 눈
          들 꼭 감고 소리 없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닥스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의자에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킬리 부탁이오 제발 울지 말아요. 내가 잘못했
          소, 여기 온 것이 잘못이었소. 결코 이런  일은 
          하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맹세했었는데........."
          "아니에요, 내가 나빴던 거예요" 킬  리가 가느
          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당신을 방안에 들
          여놓지만  않았더라면...........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던 거예요"
          돌아다보니 닥스는 몹시 울적한  듯 카펫에 시
          선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닥스, 미안해요. 나는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요. 꼭 말씀드려야 할 이
          야기랍니다. 그러면 반드시 이해해 주실 것이라 
          믿어요."
          닥스가 괴로운 듯이 고개를 들었다.
          "아무말도 하지 않아도 좋소,  킬리. 나는 당신
          에 대해 이미 알고  있어요. 나는 내일  당신의 
          진정을 들을 입장에 놓인 사람이오."
               
3
          
          느닷없이 뛰쳐나와 칼을 들이댔다고 해도 이처럼 놀
          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킬리는 아연해져서 닥스를 쳐
          다보았다.
          "그럴 리가.........당신의 이름은  리스트에 올라  있지 
          않아요. 소위원회 맴버의 리스트는 몇 주일  전에 입
          수해서 가지고 있어요.  거기에 당신의 이름은  실려 
          있지 않았어요." 킬리는  무너지려는 마음의  평정을 
          되찾으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했다.
          "지난주 콜로라도 출신의 해일리  의원이 세입 재정 
          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기 때문에 내가 그 자리를 
          매우게 되었소."
          킬리는 무의식적으로 가운의 띠를 단단히 고쳐 매고 
          자기에게 강요하듯 창가에서 떠났다. 그러고는  몸을 
          지키듯 가슴에 팔짱을 낀 자세로 닥스 앞에 섰다. 수
          키와 분노가 교차되고 있었다.
          "과연 그렇게 된  것이군요, 디발  의원님. 이것으로 
          강력한 반박 자료를 입수한 셈이 되었군요.  나는 내
          일을 위해 애써 연설문을 준비해 왔지만,  모든 것이 
          물거품........그렇죠?"
          "킬리"
          "정말 일에 열중하시는군요.  훌륭해요. 정치 문제를 
          유리하게 해결하기 위해 언제나 이렇게 수고를 하시
          고 있나요?"
          "그만!" 닥스가 큰  소리로 킬리를  가로막았다. "킬 
          리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은 내 방에 가서야 비로
          소 알았소. 내일을 위해 검토해야 할  서류가 산더미
          같이 많았소. 그 중에 문득  [프루프]의 대표자 킬리 
          윌리엄즈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요.  킬리란 
          이름은 그리 흔한 것은 아니오. 혹시나  하고 프런트
          에 알아 보았더니 킬리 프레스턴 윌리엄즈라는 여성
          이 714호에 들었다고 하더군. 나는 그제서야 모든 것
          을 알았소. 맹세하지만, 그때까지 나는 킬링 대해 전
          혀 알지 못했던 것이오."
          "그것을 알자 당신은 곧 이리로  달려왔군요. 그리고 
          우리들 미귀환 병사의 아내가 얼마나 정조가 굳은지 
          시험해 보려 한 것이군요."킬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분노의 눈물을 흘렸다.
          "천만에! 내가 여기 온  것과 당신에게 키스한  것은 
          내일 일과는 전혀 관계가 없어요."
          "그럴까요..............?"
          "그렇고 말고!"닥스가  우뚝 서서  소리쳤다. 그러나 
          고통으로 어쩔 줄 모르고  있는 킬리를 보자,  "결코 
          그렇지 않아요." 하고 목소리를 낮추어 호소했다. 킬
          리는 닥스에게 등을  돌리고 두 팔로  자기 몸을 꼭 
          안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마음과 몸이 산산이
          부서져 모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마음속에서  두 가
          지 상념이 격렬하게 맞붙어 싸우고 있어 고통스러웠
          다. 그러나 그보다도 닥스 디발이 이런  식으로 자기 
          인생에 관여해 오는 것이 백배나 더 쓰라렸다. 
          "당신은 몰라요"킬리는 신음하듯 말했다.
          "닥스는 킬리를 끌어안고, 절대로 걱정할  필요가 없
          다며 안심시켜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한  충동을 
          애써 억제했다. 그런 말을 하면 오히려  킬리의 마음
          이 산란해질 것이다.
          "이해할 수 있을 지도 몰라요. 어서 이야기해 봐요."
          킬리의 녹색 눈이 다시 나무라듯  빛을 발하는 것을 
          보고 닥스가 덧붙여 말했다. "하원의원인  닥스 디발
          에게가 아니라, 인간 닥스에게 이야기해 봐요."
          킬리는 몸을 경직시키면서  침대 강에 걸터  앉았다. 
          닥스도 의자로 돌아갔다. 킬리는 감정을 억제하고 냉
          정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마크 윌리엄즈와 결
          혼하게 된 이야기,  그가 행방불면이 되었다는  이야
          기, 그 후의 자기 생활에 대한 이야기 등을.
          "나는 미망인도 아니고 이혼한 여자도  아닙니다. 어
          엿한 유부녀입니다. 그러나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어
          요. 독신자처럼  생활하고 있지만,  독신자와는 전혀 
          입장이 달라요." 킬리는 말을 끝내고  가만히 무릎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입장에서  자유로와지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
          소?"
          킬리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마크를 죽음 사람으로 생각하라는 말인가요?" 닥스
          는 그녀의 마음속 깊숙한 곳에  있는 숙연한 자세에 
          압도되어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남들이 무어라 하건 나는  지금까지 남편을 배반하
          지 않고 살아왔어요. 그는  살아있다고 믿고 있어요. 
          돌아 올 가능성이 비록 일 억분의 일밖에 되지 않는
          다해도 나는 기다겠다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그에게
          는 아무도 없어요. 그의 부친은 자식이 행방불명되었
          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 후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머
          니는 요양원에 들어가 있어요. 이미 자기  자신도 돌
          보지 못할 상태가 되어서 말입니다.  슬픔이......"
          킬리는 한숨을 쉬며 손끝으로 이마를  긁었다. "마크의 
          봉급은 고스란히 어머니한테 보내고 있습니다." 킬리
          는 고개를 들었다. "시어머니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
          람들, 또는 자식과 함께 남겨진 아내들은  남편의 봉
          급이 없으면 살아가지 못합니다. 만일 그  안건이 통
          과되어 남편들이..............." 킬리는 갑자기  입
          을 다물고 도전하듯 턱을 펴들었다. "여기 대해서는 
          내일 정식 회의석상에서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닥스는 피곤한 표정으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래요, 내일 듣기로 합시다."  그는 이렇게 내뱉고 
          문 쪽으로 걸어가 도어를 열었다. "어쨌든 무얼 조금 
          들도록 해요. "그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접시 쪽
          을 턱으로 가리켰다. "잘자요. 킬리" 하고 그는 밖으
          로 나갔다. 킬리는 갑자기 썰렁해진 방  한가운데 서
          서 닫혀진 문을  바라보았다. 문득 절망감이  무겁게 
          내리눌렀다. 쓸쓸했다. 참을 수 없이 쓸쓸했다.
          
          킬리는 거울을 보며 이 정도면 되었다고 생각했다.니
          콜의 말을 듣지 않고, 역시 심플한  잿빛 블라우스를 
          가져올 것을 그랬다고 후회했다. 지금 입고  있는 것
          은 가슴께가 틜레이스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제 와
          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너무  점잖은 감색 
          불레이저 슈트에는 이 정도로 여자다운 면을 곁들이
          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감색  수에드 펌프
          스와 짝을 이루는 백, 캐시미어 코우트의  빛깔과 캐
          러멜빛 머리는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킬리는 
          가죽으로 된 서류  가방을 옆에  끼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로 내려왔다.  베티 올웨이와 아침  식사를 
          같이 할 약속이었다.
          "당신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군요."  베티는 부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미각의 도시 뉴올리안즈에 살
          면서 어쩌면 그렇게도 날씬하죠? 나 같으면 한 달도 
          못 가서 백 킬로도 넘을 거예요"
          킬리는 어느새 베티의 명랑한 대화에 말려  들어, 직
          장 이야기며 베티네 아이들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빌은 틀림없이 아이들을 자랑스럽게 여겼겠죠?" 킬 
          리가 조용히 말했다.
          "그래요, 그이가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겨우 4개월 된 핏덩이였는데,  지금은 고등학교
          의 농구 선수가 됐어요." 언제나 낙천적인 베티의 눈
          에도 잠시 슬픔의 그림자가 감돌았다. 킬리는 거칠어
          진 베티늬 손을 잡았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슬픔은 가시지  않을 거예요. 
          이런 마음에서 탈피할 날이 언제쯤 올까요?"
          "나한테는 불가능해요. 그리고 빌이 죽었다는 확증을 
          얻기 전에는 언제까지나  빌이 살아  있다고 믿겠어
          요."베티는 커피를 마셨다. "그런데  약간 골치 아픈 
          일이 생겼어요. 오늘 아침에 위원장인 파커 의원으로
          부터 전화가 걸려 왔어요."
          킬리에게는 무슨 이야기인지 예측이 갔다.
          "우리 편이 되어 주리라 믿었던  의원 한 사람이 빠
          지고, 그 대신 루이지애나 출신의 닥스  디발 의원이 
          들어왔어요.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것이 좀 있나요?"
          "루이지애나에서는 누구나 그를 알아요."  킬리는 용
          케 빠져나갔다. " 그 사람이 반대파인가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는 대단한  야심가로서 다
          음 선거에서는 상원에  들어갈 것을 노리고  있어요. 
          세금 감면을 기치로 내세우고 말이에요. 정부 지출의 
          삭감을   강력히  추진하고   있는  사람이니까   아
          마.........."
          "위원은 그 사람말고도 열 명이나 있어요, 아직 우리
          가 졌다고는 볼 수 없어요." 킬 리가  낙관적으로 말
          했다. 
          "물론이죠" 베티는 잿빛 눈을 진지하게 빛내면서 킬
          리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당신에게만 어려운  일을 
          떠맡겨서 미안해요."
          그 말을 듣자 무척 마음이 괴로웠다. 자기가 몹쓸 배
          반자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어쨌든  최선을 다하겠어요." 생
          각만 해도 낯이 뜨거워지는 키스를 어젯밤에 닥스와 
          한 것을 그녀가 안다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이제 그만 가요. 지각을  하면 인상만 나빠져요."베
          티가 서둘러 일어났다. 밖에 나가자 어젯밤부터 내리
          던 비는 그쳤으나,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이 몹시 불었
          다. 두 사람은 택시를 잡아타고 러시  아워라 붐비는 
          길을 뚫고 의사당으로 향했다. 킬리는 닥스와 얼굴을 
          대할 것이 무엇보다도 두려웠다. 지난밤에는  제대로 
          잠도 자지 못했고, 꿈속에서는  마크가 나타났다. 가
          슴이 뛰었다. 마크가 베트남으로 막 떠났을 무렵에는 
          매일 밤마다 마크의 꿈을 꾸었었다. 행방불명의 소식
          을 들었을 때에도.......
          그러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마크의  꿈을 꾸는 회수
          가 점점 줄어들고, 꿈속에 보는 마크의  모습도 차차 
          19세의 젊은이였다. 만일 그가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것
          이 무서웠다. 부부인데도 한길에서 마주치면 서로 얼
          굴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생각하니 그것이 무서웠다.
          "킬리?"
          베티가 부르는 소리에 킬리는 현실로 돌아왔다.
          "어마, 벌써 도착했나요? 머릿속에서 연설 연습을 하
          다 보니 그만............." 도 거짓말이 시작되었다. 
          언제
          부터 이처럼 거짓말만  하게 되었을까. 닥스를  만난 
          뒤부터였다. 그와 이야기하고 웃고 키스를 하고 나서 
          부터였다. 마크와 헤어진  후 처음으로 남자의  품이 
          그립다고 생각한 때부터였다.
          회의실 복도에서는 이미 세 사람의 동료가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가 미귀한  장병을 전사자 명부에  넣지 
          않도록 하기 위해  활발하게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낯익은 사람들이었다. 일행은 제복을 입은 보이의 안
          내로 청문회 회장에 들어갔다. 킬리는  키이크로폰이 
          장치된 테이블에 착석했다. 베티는 옆에 앉고  그 밖
          의 세 사람은 뒤에 앉았다. 킬리는  서류철에서 연설 
          원고를 꺼내어 데스크 위에 잘 정리해  놓았다. 닥스
          가 들어오는 것이 눈에 띄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
          쳤다. 그들은 장소도 남의 이목도 잊고 잠시 서로 바
          라보았다. 킬리는 닥스의 표정에서 자기와 같은 심정
          이란 것을 읽을 수 있었다. 시선을 떼기가 괴로웠다. 
          어젯밤 잠자리에서 무서운 꿈을 꾸고 깨었을  때, 킬 
          리가 원한 것은 남편인 마크의  품이 아니라 닥스의 
          품이었다. 닥스의 모습을 생각하며 마음의  두려움을 
          잊으려 했던 것이다. 의원 한사람이 닥스에게 악수를 
          청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겨우 시선을  떼었다. 킬리
          는 깍지 낀 손으로 스커트 자락을 쓸어 내리고 원고
          에 시선을 떨구었다. 그러나 원고를 읽는  것이 아니
          라 읽는 체할 뿐이었다. 손바닥에 땀이 배었다. 대표
          자로서 과연 맡은 바 임무를 다 할 수 있을 것인가.
          몇 분 후, 미시간 출신인 파커 의원이 개회를 선언하
          고, 위원을 한 사람씩 [프루프]대표에게 소개했다. 닥
          스 차례가 되었을 때, 베티가 킬리의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베티의 얼굴을 보니 그녀가 무엇을 말하려는
          지 금방 알수 있었다.-------그가  제일 젊어, 아주 
          핸섬한데. 하지만 적일까, 아니면 우리 편일까?
          파커 의원이 안경을 치켜 올리고 그 테 너머로 킬리
          를 보면서 말했다.
          "윌리엄즈 부인, [프루프]의 성명을 준비했으리라 믿
          는데, 우선 그것부터 듣기로 합시다."
          "네, 감사합니다, 파커 의원님." 킬리는  의원과 보도
          진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 나서 침착하게,  약간의 
          남부 악센트가 섞인 말로 연설을 시작했다. 원고에는 
          거의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연설조가 아니라, 강한 
          신념을 갖고 마음속에서부터  위원 각자에게 호소하
          듯이 이야기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런 말로 연설
          을 끝냈다.
          "여러분은 미국 국민의 약심을 대변하는 사람들입니
          다. 원컨대, 이 의제가 국회에 상정되지 않도록 저희
          들의 힘을 되어 주십시오. 아무런 확증도 없아, 아직 
          베트남에서 돌아오지 않는 우리 남편들을 죽은 사람
          으로 취급하지 말아 주십시오. 이것을  마음으로부터 
          부탁드립니다. "
          킬리가  말을 마치가 장내는 한때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다. 아무도 움직이는 사람이 없었다. 이윽고 
          베티가 "부라보!" 하며 외치고 이에 따라  나머지 사
          람들도 박수를 보냈다.
          "감사합니다. 윌리엄즈 부인." 하고  파커 의원이 말
          했다. "그러면 의원 여러분,  지금 연설에 대해 의견
          이 있으십니까?"
          이어서 한 시간 반 동안, [프루프]와 위원 사이에 질
          문과 응답이 되풀이되었다. 쌍방이 일진 일퇴의 공방
          전이었으나, 위원들의 대부분이 [프루프]에게 동정적
          인 분위기였다. 킬리는 닥스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
          으려 했으나 역시 무리였다. 그는 시종  침묵을 지키
          며 콧마루에 손을 댄 자세로 열띤 논쟁에 귀를 기울
          이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아무도 몰랐
          다. 정면으로 반대  의견을 내세운 사람은  아이오와 
          출신의 윌시 의원뿐이었다. 그는 킬리를  이모저모로 
          뜯어 보면서 야유하듯이 말했다.
          "실례입니다마는 윌리엄즈 부인,  당신이 경제적으로 
          큰 곤란을 겪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군요. 그리고 
          아직 돌아오지 않은  남편을 가진  부인이나 자식을 
          가진 모친의 대부분은 이미 새로운  인생을 걷기 시
          작하고 있어요. 그렇지 않아도 쓸 곳이  많은 나랏돈
          을 끝까지 짜내려는 것은 좀 심하지 않습니까?"
          킬리는 울컥 화가 치밀었으나 조용하게 대답했다.
          "정당한 돈을 받는  일에  어찌  부끄러워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우리들의 남편이나 자식들은 아직도 어
          딘가에서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고 있을지도 모릅니
          다. 그들은 아직도 이 나라의 군인입니다. 봉급을 받
          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요?"
          "윌리엄즈 씨..........."
          "제발 끝까지 들어  주세요."킬 리가  싸늘하게 말했
          다. "여기에는 단순한 금전 문제 이상의 것이 있습니
          다. 미귀환 장병들을 전사자  취급한다면, 정부나 군
          대에서는 그 이유를 어떤 자료에 입각하여 우리에게 
          납득시키려 하는  것입니까? 그들은  포로로 붙잡혀 
          있을지도 모릅니다. 또는 어떤 방법으로 어딘가에 살
          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희박하다 해도  그 가
          능성이 있는 한, 근거도 없는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입니다."
          윌시 의원은 불룩 나온 배 위에서  두 손을 깍지 끼
          고 설교라도 하려는 듯이 자못 의젓하게 반문했다.
          "정직하게 말해서, 당신네들은 그들 중에서  몇 명이
          나 살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그는 이마가 훌
          떡 벗어진 얼굴을  닥스에게로 돌렸다.  "디발 의원, 
          당신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당신도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을 텐데요?"
          킬리는 깜짝 놀라 닥스를 바라보았다. 닥스가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그렇습니다" 닥스가 대답했다.
          "군대에서의 지위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닥스에게 집중되었다.
          "해병대의 지휘관을 지냈습니다."
          "베트남에는 얼마나 있었죠?"
          "3년입니다."
          "그렇다면 해병대 지휘관으로서, 직접 전투에 참가한 
          사람의 입장에서의 의견을 말해 보시지요.  행방불명
          된 사람들이 아직 살아 있을 가능성이 있을까요?"
          닥스는 데스크 위에 깍지 낀 자기 손을 잠시 바라보
          고 나서 입을 열었다.
          "베트남 전쟁에는 전투의 룰 같은 것은 전혀 없습니
          다. 그들은 어린이를 매수합니다. 그 아이가 미군 부
          대에 몰래 기어 들어와 수류탄의  핀을 뽑는 경우를 
          여러분은 상상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나는 실지로 
          그러한 장면을 보았어요. 장교가 마약에 중독되어 환
          각증상을 일으킨 부하에게 사살당한다는, 있을 수 없
          는 장면도 목격했습니다.  나는 어느 작은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습니다. 베트남인인 늙은 농부가 내게 물
          을 주고 상처에 붕대를 감아 주더군요.  이튿날 아침 
          눈을 떠보니, 그 노인의 목이 잘려 대나무에 걸려 있
          었습니다." 그는 눈을 둥그랗게 뜨고 있는 윌시를 대
          들 듯이 노려보며 말을 계속했다. "상상을 초월한 잔
          인한 행위가 태연히 자행되는 곳이 베트남입니다. 보
          통 상황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것이  전쟁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내 
          대답이기도 합니다."
          기침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킬리의  눈에는 눈물
          이 맺히고 있었다. 점심 식사를 위해  휴식에 들어간
          다고 알리는 파커 의원의 얼굴은 땀에 젖어 있었다.
          "킬리, 정말 훌륭했어요." 베티가 달려오며 껴안았다.
          "우리 요구가 관철될지 어떨지는 아직  모르지만, 적
          어도 강력한 일격을 가한 것만은 분명해요."
          "글세, 어떨지 모르겠군요. 월시 의원은 좀처럼 물러
          설 것 같지 않아요.  디발 의원한테 꼼짝 못한  것을 
          마음에 두고 더욱 강경하게 나올지도 몰라요."
          "윌시는 여섯시 뉴스에 이름이  나올 것을 예상하고 
          마구 떠들어댄 거예요. 닥스 디발에 비하면  휠씬 격
          이 낮아요."베티는 텔레비전 리포의 인터뷰를 응하고 
          있는 닥스에게 시선을 보냈다.
          "정말 저렇게 매력적인 사람은 본 일이 없어요."
          "누구말이죠?"" 킬리가 일부러 딴전을  부렸다."아아, 
          디발의원? 하지만 약간 카리스마적이에요."
          "그는 틀림없이 상원에 들어갈 거예요.  최소한 여성
          들의 표는 모두 그에게 몰릴  테니까."베티는 여학생
          처럼 깔깔거리고 웃었다. "그 보조개에는  모든 여자
          가 반할 거예요."
          "저어, 올웨이 씨, 윌리엄즈 씨."돌아다보니  갈생 양
          복을 입고 순진해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서있었다.
          바람에 불려 반백의 머리가 날리고 있었다.
          "왜 그러시요?"킬 리가 응했다.
          "A.P.통신의 알 밴  돌프라는 사람입니다.  실례지만 
          같이 점심이라도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프루프]
          의 견해를 좀더 듣고 싶습니다마는."
          킬리는 첫눈에 그 기자가 마음에 들었다. 뻔뻔스러워 
          보이지가 않고, 식사를 권유하면서도 수줍어하는  태
          도에 호감이 갔다.
          "네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 레스토랑에 자리를 준비하죠."
          밸 돌프는 베티에게 메모를  건네 주었다. "30분  후 
          이곳에서."
          킬리와 베티는 보도진의 질문공세를 받으면서 긴 복
          도를 빠져나와 겨우 밖에 나왔다. 얼른  택시를 잡아  
          타고 약속한 레스토랑으로 갔다. 택시는 불과 2, 3분
          만에 앨버시 로와 가까운 거리에  있는 조용하고 아
          담한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이름도 대기 전에 지배인
          이 두사람을 구석진 자리로 안내했다.
          안내된 벽 옆의 테이블에 닥스가 있는 것을 보고 킬
          리는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하마터면  카핏의 이
          음매에 하이힐의 굽이 걸려 넘어질 뻔했다.  밴 돌프
          와 함께 파커 의원  및 월시 의원도 있었다.  그들은 
          여성들을 맞이하기 위해 일어섰다. 베티도 킬리와 마
          찬가지로 일이 좀 이상하게 됐다고 생각했다.
          "올웨이 씨, 윌리엄즈  씨,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윌시 의원의 태도에는 아까  회의 때보
          인 오만함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일동은 새삼스럽게 인사를 하고 악수를 나누었다. 닥
          스는 킬리의 손을 의미있게 꼭 쥐었다.  킬리는 가슴
          을 두근거리며 닥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열띤 시선
          을 누가 눈치채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킬리는 걱정이 
          되어 견딜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닥스가  "다시 만나
          게 되어 기쁩니다."라고 했을 때는 너무 놀란 나머지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4

     킬리는 당황해지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려 하면서"안녕
     하세요"하고 인사했다.  "아는 사이입니까?"파커  의원이 
     여러 사람의 의문을 대신하여  질문했다. 베티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네, 어젯밤 비행기에서 우연히 알게 되었죠." 닥스가 주
     저없이 대답하고, 자기  곁의 의자를 킬리를  위해 뒤로 
     당겼다.
     닥스의 침착성에  감탄하면서도, 너무  솔직하고 않은가 
     하고 킬리는 걱정했다. 다른 의원들은 어떻게 생각할 것
     인가. 혹시 의심을 품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  그러나 괜
     찮을 것 같았다. 파커는 이미  메뉴를 들여다 보고 있었
     고, 윌시는 다른 테이블에 있는  자기 지지자들과 큰 소
     리로 이야기 하고 있었다. 다만 베티만은 적잖이 당황한 
     듯, 물컵을 든 손이 떨리고 있었다.
     "담배를 피워도 괜찮을까요?" 밴 돌프는 이렇게 말하고, 
     다른 사람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양절 연초에 불을 붙
     였다. 그러고는 테이프 레코더를 테이블 중앙에 놓았다.
     "회의장이 아닌 곳에서 솔직한 의견을 교환하는 것이 어
     떨까 해서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이 문제는  정치. 외
     교. 군사, 그리고 인간의 심리 문제와도 관계되는 것이므
     로 신문에서 취급하는 것이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
     다.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내 생각은 이미 아실 것 아니요?" 윌시가 입을 열었다.
     "윌시 의원님의 발언에 대해서는 우리가  크게 기대하고 
     있습니다."
     뚱뚱한 아이오와 출신의원은 밴 돌프의 빈정거림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촌티가  나던 아까의 그 밴 
     돌프는 어디로 가고, 지금 그의  눈은 안경 너머에서 예
     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딴사람 같았다. 킬리는 속았
     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 수법으로 많은 사람들을 골탕 
     먹였을 것이 틀림없으리라. 킬리는 풀이 잘 먹은 린네르 
     냅킨을 무릎 위에 펼쳤다. 닥스도 같은 동작을 취하면서 
     테이블 밑에서 재빨리 킬리의 손을 잡았다. 킬리는 깜짝 
     놀라 숨을 죽였다. 곧 이어 닥스의 테이블 위로 손을 옮
     기고는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킬리의 숨결은 고르
     지 못했다. 윌시의 진부한 조크 때문이라고 다른 사람들
     이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시저 샐러드를 주세요." 킬리가 주문을 받으러 온 웨이
     터에게 말했다.  닥스의 스테이크  샌드위치를 주문하고 
     킬리를 바라 보았다.
     "성숙기의 여성으로서는 너무 소량이군요?"
     "네, 나이를 먹고  싶지 않아서요." 하며  킬리는 조용히 
     웃었다.
     "당신은 거의 먹지 않더군."
     "나는..............." 킬리는 어젯밤에는 샌드위치를 
     반 조각이나 먹었다고 대답하려다가 밴  돌프의 시선을 
     의식했다. 
     귀를 꼿꼿이 세우고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한마디도 놓
     치지 않으려 하는  여우------그러한 상상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베티는 윌시와 파커를 상대로  이야기하고 이었다. 아무
     런 경계심도 품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킬리와 
     마찬가지로 닥스도 밴 돌프가 만만치 않은  상대라고 눈
     치챈 모양이었다. 그가 기자를 향해 말했다.
     "알, 특종감을 쫓아다니지 않을  때는 지금도 당신 래킷 
     볼을 하고 있소?" 닥스는 남의 심리를 잘 파악하는 요령
     을 터득하고 있는 듯싶었다. 밴 둘프는 우쭐해져서, 최근
     에 이긴 게임에 대해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식사하는 
     동안의 화제는 세상 이야기였다.  누구나 마음을 짓누르
     고 있는 문제는  거론하려 하지 않았다.  이윽고 식후의 
     커피가 나오자 밴 돌프는 테이프 레코더에  새로운 테이
     프를 넣고 다시 담배를 피워 물었다. "올웨이 씨, 당신은 
     아직도 주인께서 살아 계시다고 생각합니까?"
     베티는 뜨거운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갑자기  질문이 던
     져지자 당황했다. "나는 ..........저어.........어째서..
     ................"
     킬리가 재빨리 끼어 들었다.
     "이번 청문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그런  것이 아
     닙니다. 베티나 내 남편이 살아  있느냐 하는 것은 문제
     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당면 목표는 미귀환 장병의 
     생사를 결정짓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족이 정당한 연금
     을 받을 길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의견도 마찬가지입니까, 올웨이 씨?"
     "네" 베티도 침착함을 되찾고 대답했다.
     "오후에 군부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파커가 말
     했다. "윌리엄즈 씨, 예측할 수 있습니까?"
     "지난번 이야기로는 상당히  호의적인 인상을  받았습니
     다. 그 노선이 변경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윌시가 의자에 깊숙이 파묻힌 채 말했다.
     "하지만 아주머니.........."
     "아주머니 따위로 부르지 마시기 바랍니다. 윌시 의원님. 
     불쾌합니다."
     킬시가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윌시는 한순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곧  웃는 낯
     으로 변했다.
     "나는 별로........"
     "아닙니다. 의워님들은 우리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는 명
     백합니다. 당신네들의  귀중한 시간을  뺏는 히스테릭한 
     여자들이라 생각할 것입니다. 만일  이 모임이 남성들의 
     조직이었다면 당신은 지금과  같은 태도를  취했을까요? 
     우리 활동을 진지하게  생각해 주셨으면 하는  마음에서 
     말씀드립니다마는, [프루프]에는 남성  회원도 많습니다. 
     부친, 자식, 형제 등. 그들도 여성들과 같은 관심을 가지
     고, 적당히 결정되어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마음을 가지
     고 있습니다. 다만 남성들은 감정적인 것을 공공연히 표
     현하기가 어려울 뿐입니다. 그러므로 여성들의 활동만이 
     눈에 띄는 것입니다."  일동은 쥐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이윽고 파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편견에 사로잡히고 공평한 관점을 갖지 못한 사람이 이 
     위원회에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날카
     로운 눈으로 윌시를 바라보았다.
     "나는 모독할 생각에서 한 말이 아니고, 남존여비사상에 
     빠져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뜻으로 받아들여졌다면 
     사과합니다, 윌리엄즈 씨." 윌시가 노기를 띄고 말했다.
     "알겠습니다."킬 리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말씀을 중단시켜서 죄송합니다. 계속해 주시지요."
     무려 30분 동안이나 여러 가지 의견이 나오고 논의가 거
     듭되었다. 밴 돌프는 절도 없는 호기심을 그대로 들어낸 
     시선을 테이블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에게 보냈다. 이
     윽고 그는 수표장을 꺼내 사인하고 벌떡 일어섰다.
     "이제 회의장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모
     여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지배인이 택시를 불러 드릴 
     것입니다."
     "나는 좀 걸을까 합니다.  올웨이 씨, 코우트  입는 것을 
     도와드리죠."파커가 베티를 에스코트하고 입구로 향했다.
     "디발 의원, 나하고 같이  가실까요?" 하고 윌시가 말했
     다.
     "나는 사무실에 볼일이 있어서."
     "그럼 먼저 가겠소."
     밴 돌프는 카세트 테이프를 주머니에 넣고는  담배 자동 
     판매기가 있는 데로 달려갔다.  킬리와 닥스는 순식간에 
     단 둘이만 남게 되었다.
     "당신을 화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명심하리다." 닥
     스가 속삭이듯 말했다. "보복이 무서우니까."
     "그런 사람이 국회의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니, 소름이 
     끼쳐요."
     "당신은 아주 훌륭했어요." 닥스가  킬리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관찰력이 있는 사람이 보았더라면,  단순한 에스
     코트라기보다는 포옹으로 보였을 것이다.
     "왜 우리가 전에 만났다는 말을 하셨죠?"
     "참고로 말해 두는데, 밴 돌프는 빈틈없는  사람이요. 그
     는 제 2의 워터게이트  사건을 노리고 있어요. 킬리,  그 
     사람에게는 조심해요, 양가죽을 쓴  이리 같은 사람이니
     까."
     "이리라기보다는 아주 영리한 여우 같아요. 베티와 나만
     을 점심에 초대하는 체 해  보였어요. 연극에 말려 들어 
     버린 거예요."
     "치사한 녀석이오. 그 테이프 레코더를 면상에 내던지고 
     싶을 정도였소." 
     "당신을 화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나도 명심하겠어
     요." 킬리가 웃었다.  닥스도 보조개를 만들며  미소지었
     다. "프랑스계 이주민의 기질이 약간 엿보이는 군요."
     "그래요?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오히려 매력적인걸요."
     "그렇게 생각하오?"
     킬리는 침착성을 잃었다. 베티와  파커는 문에서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윌시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고, 밴 
     돌프는 동전만 집어삼킨 패 담배가 나오지 않는 자동 판
     매기 앞에서 욕을 퍼붓고 있었다.
     "우리가 어젯저녁에 만났다는 것을 왜 여러 사람에게 말
     했어요?"
     "참, 그 이야기를 하다 말았군. 당신 곁에 있으면 마음이 
     들떠서 그만 다른 얘기를 하게  되는군요.........그것은,
     어젯저녁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을 누가 보았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오. 그렇다면 모른 체하는  것이 도리어 호기심에 
     불을 지르는 결과가  돼요. 진실을 말하는  것이 최고의 
     전술이랍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어젯밤  내 방에  들어왔다가 나가는 
     것을 본 사람이 있었다면?"
     닥스는 장난기 있는 미소를 지었다. 
     "그럴 경우에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최고죠."킬리도 웃
     었다.
     "과연 당신은 전술에 밝군요."
     닥스는 언짢아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고 웃었다.
     "어젯밤에는 잘 잘쏘?"
     너무 빤히 쳐다보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킬리의 
     가슴은 파열할 것 같이 높이 고동치고 있었다.
     "아니에요, 잘 자지 못했어요."
     "내 탓이로군."
     "천만에요."
     "아니, 사실일 거요.  킬리의 마음이 산란해져서  그랬을 
     거요. 틀림없소. 공항에서 당신이 결혼했다는  것을 들었
     을 때 깨끗이 단념하는 것인데  그랬소. 그것이 가장 현
     명했었는데."
     "그래요?"
     "그렇지 않은가요?"
     두 사람의 몸은 안 보이는 실에 꿰인 듯이 접근했다. 닥
     스는 몸에 피가 끊어 오르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를 안
     고 싶다. 킬리의 입술의 감촉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랬었군요." 킬 리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틀림없이 
     그것이 상책이었을 테죠" "킬리!"베티의 목소리였다.
     "그녀가 부르는 소리에 킬리는 문 곁에 있는  베티를 몽
     롱한 눈으로 돌아보았다.
     "택시가 왔나요?"
     "그래요" 베티는 킬리의 상기된  얼굴을 바라보며, 역시 
     그렇구나 하고 생각했다. 킬리와 베티는 닥스나 파커, 그
     리고 회계에서 돈을 되돌려 달라고 소리치고 있는 밴 돌
     프에게 작별을 고했다.
     택시에 타고 베티나  단둘이 있게 되자,  킬리는 어색한 
     마음으로 백을 만지작거렸다.
     "아무말도 할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정직하게 말해서 
     흥미가 있어요."베티가 말했다.
     "무슨 말이요?"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킬리는 딴전
     을 부렸다.
     "시치미를 떼는군요. 오는 아침에  내가 닥스 디발에 대
     한 것을 물었을 때, 보통때 같았으면 제일 먼저 그 이야
     기를 했을 텐데 당신은 하지 않았어요."
     "그건 별로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에
     요."
     베티가 촉촉이 젖은 킬리의 손을 덥석 잡았다.
     "여자는 남자보다 눈치가  빨라요. 다른  사람은 당신과 
     그 핸섬한 의원이 시선을 교환할 때 보통 사이가 아니라
     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을 거예요. 하지만 나에게는 짚이
     는 것이 있더군요. 별로 그것을 나무라는 것은 아니에요. 
     당신의 생활 태도에 간섭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다만 
     도가 지나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랄 뿐이에요. [프루프]의 
     일은 고사하고라도, 고십의 대상이  되어 당신의 품위가 
     손상되는 것은 참을 수가 없어요."
     "베티,나는 절대로 그런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아요."
     "당신이 빈틈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어요. 킬리, 단지 당
     신의 입장에서 볼 때 나 같은 사람은 늙고 무미건조하게 
     보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나도 여자예요.  14년 동안이나 
     어쩔 수 없이 혼자 살고 있는 여자예요. 닥스 디발 같은 
     매력적인 남자에게는 성녀도 반할 것이라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어요."
     킬리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자신을 꾸짖듯 하늘을 
     가리키며 서 있는 워싱턴 빌당을 멍청히  바라보고 있었
     다.
     
     오후의 청문회에서는 육군을 대표하는 장군의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가 오래 계속되었다. 그는 계속해서 군
     대 각처로부터의 보고서를 읽었으나, 그 내용은 문제 해
     결에 새로운 빛을 던져 주는  것은 못 되었다. 답답하게 
     여긴 파커 의원이 결론을 재촉할 때마다 장군은 판에 박
     은 듯한 말로 확언을 피했다.  마침내 의장이 망치를 두
     드리며 첫째 날의 회의를 마감하자 누구나 다 안도의 숨
     을 토해 내었다.
     회의장을 나오면서 킬리는 닥스의 모습을 찾았으나 눈에 
     띄지 않았다. [프루프]의 대표는 르 리용  도로에서 호화
     로운 디너를 대접받게 되어 있었다.
     "아담스 장군의 지루한 전사 이야기를 두 시간이나 들어 
     주었으니 그 정도로 대접받는 것도 당연해요."
     하고 베티가 말했다.
     모두 캐피털 힐튼 호텔로 돌아가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
     다. 킬리는 가능하다면 디너 같은  데 참석하고 싶지 않
     은 기분이었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실크의 산호빛 
     드레스로 갈아입었으나  기분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그러나 로비에서 베티를 만나자 애써 명랑하게 보이려고 
     애썼다.
     르 리용 도르는 요리나 분위기  모두 더할 나위 없었다. 
     모든 사람이 약속이나 한  듯 청문회에 대한 말은  전혀 
     입밖에 내지 않았다. 그들은  할리우드의 스캔들이나 아
     이들에 대한 것, 헤어스타일에 대한 것, 영화와  책과 다
     이어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이처럼 일류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것을 윌시 의원이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이야
     기하면서 웃었다.
     킬리는 대화에도 활발히 가담하고 요리도 보통으로 먹었
     으나, 호텔에 돌아와 혼자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는 어서 
     침대에 가 쓰러지고  싶을 정도로 피로해  있었다. 그날 
     밤 킬리는 여러 사람과 같이 있는 동안에도 계속 닥스의 
     모습만 좇고 있었다. 비행기 안에서 손목을 잡아  준 그. 
     벨보이의 모자를 쓰고 야식을 갖다  준 그, 그때의 뜨거
     운 입술............
     자기 방으로 돌아오자 킬리는 의자에 코우트를 걸쳐놓고 
     화장대 위에 백과 열쇠를 던졌다.
     "너는 아무래도 이상해." 킬리는 거울 속의 자신을 보고 
     달려들 듯이 말했다.  "자신이 자기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다니"
     발이 납덩어리처럼 무거웠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얼굴
     을 씻은 뒤. 크림을 바르고  머리를 빗고는 침대에 쓰러
     지듯 누웠다. 자명종을 조절하려고 손을 뻗친 순간 전화 
     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혹시 닥스가 아닐까?
     "핼로우, 어떻게 됐지?"
     "니콜!" 킬리는 실망을 삼키고 말했다.
     "나말이야" 그래..........어제는  거의 자지  못하고 
     오늘은 지옥에 떨어진 것 같은  하루였어. 
     회의장에 있으려니까 숨이 막혀. 그쪽은 어때? 
      아무 일도 없겠지?"
     "응. 오늘 밤은  두 명의 스폰서와  함께 찰즈가 식사에 
     초대해 주었어. 그 아낙네들이란 원! 블루헤어 앤드 밍크 
     클럽의 창립 회원들말이야! 지독한 친구지 뭐니! 찰즈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약은 사람이야."
     찰즈 햅번은 텔레비전 방송국의 전체 영업  사원이 덤벼
     도 당하지 못할  정도로 유능한 영업  사원이다. 영리한 
     두뇌, 그러나 조용한 인품이 사업 이전에 스폰서의 신뢰
     를 얻게 하는 것이다.
     "니콜, 거짓말 하지마.  사실은 그를  아주 좋아하지  않
     니?"
     "응, 그는 좋은 사람이야. 있으면서 단 둘이서 다른 일을 
     하지 않을 때는."
     킬리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니콜은 절대로 비
     관 같은 것은 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남한테 용기를 불러 
     넣어 주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 
     "여기 신문에서는 닥스 디발이 그 소위원회의 위원이 되
     었다고 크게 보도하고 있는데. 나는 몰랐어. 너는?"
     "나도 여기 도착할 때까지는 모르고 있었어."
     "그래서?"
     "그래서라니?"
     "그야 뻔한 일 아니겠어, 이미 그를 만났을 테지?"
     "응"
     "어땠어?"
     "어떻다니?"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있는거야!"
     "어떻게 생각하고말고가 어디 있어. 그저 얼굴만 대했을 
     뿐인데."
     "아아, 말을 못 알아 듣는군. 아직도  모르겠니? 그는 매
     우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인 데다 한눈에 반한 만큼 사나
     이다와. 나 같으면 쳐다보는  것만으로 그만두지는 않았
     을텐데."
     "니콜, 어디서 그를 만난 일이 있어?"
     "사실은 만난 적이  없어. 여름에 어느  파티에 간 일이 
     있는데, 그도 거기 왔던 것이 확실해. 그는  로빈스와 꼭 
     달라 붙어 있었다는 소문이 있어. 알지 않아? 그 사람말
     이야. 할아버지와 같은 사람과 결혼한  사람말이야. 식을 
     올린지 반년만에 돈과  가든 지구의 저택과  미시시피의 
     면화 농장, 게다가 배 몇 척까지 굴러들어왔다는............"
     킬리는  가슴이   답답했다.  닥스와  마들레인   로빈스
     ----------뛰어난 미모의  소유자인, 분방하고  명랑한 
     미망인과 닥스가 나란히  있는 모습이 떠오르자  그녀의 
     가슴은 몹시 아파왔다.
     "듣고 있니?"
     "으응, 너무 피곤해서 그만. 전화  고마워. 나는 좀 쉬어
     야겠어."
     "괜찮겠니? 아무래도 이상한데."  니콜의 목소리는 정말 
     근심하는 것 같았다.
     "응, 아무렇지도 않아.[프루프] 이야기 따위로 너를 실망
     시키고 싶지도 않고."
     "아아, 그랬었군. 그 때문에 네가  워싱턴에 간 거지. 거
     기 있는 동안 실컷 즐기도록  해. 아주 에로틱한 영화라
     도 보러 가서 변태가 틀림없다고 여겨지는 남자 곁에 앉
     는 거야. 아니면  어떤 파렴치한 나라에서  온 임금님과 
     즐기는 것도 좋고!"
     "안녕."
     "정말 색에는 취미가 없는 사람이로군."니콜이 웃으면서 
     전화를 끊었다. 킬리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전화 벨이 울렸다. 킬리는 귀찮은 생각으로 어둠 속에서 
     손을 내밀어 겨우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안녕하세요?"
     갑자기 잠이 달아났다.  이런 식으로 잠에서  깨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남자의 목소리로,  또 바
     로 그 사람의 목소리로.
     "깨어 있었소?"
     "아뇨. 지금 전화 벨 소리로 눈을 떴어요. 몇 시죠?"
     "일곱 시"
     "어마 큰일났네! 늦잠을 자고 말았어요.!"
     "서두를 건 없어요, 청문회는 열 시 부터니까."
     "그렇군요. 언제나 직업상  일찍 일어나는  버릇이 있어
     서."
     "평소에는 몇 시에 일어나죠?"
     "다섯 시예요"
     "왜 그렇게 일찍?"
     "잊으셨나요? 여섯 시  반까지는 헬리콥터를 타고  러시 
     아워의 교통 정보를 알려야 해요."
     "어제는 인사도 없이 헤어졌기에   전화를 걸어 보았죠. 
     사무실에 일이 산더미같이 쌓여서 도저히 만날  수 없겠
     기에 그만............."
     "어젯 저녁에는 베티와 같이 식사를 했어요." 그는 누구
     하고 식사를 했을까 하고 생각하며 킬리는  말을 계속했
     다. "피곤해서 돌아오기가 바쁘게 잠이 들어 버렸어요."
     "푹 쉬어야 해요. 오늘도 큰일이 남았으니까."
     "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말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말이 두 
     사람을 연결하고 있는  전화선 사이에서 응결되고  있었
     다.
     "그럼 나중에"
     "네"
     "킬리"
     "네?"
     "오늘 회의석상에 킬 리가 얌전히 앉아 있는 동안, 같은 
     방에 있는 사나이 중 최소한 한 사람은 킬리를  끌어 안
     고 싶어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라오......." 
     그리고는 전화가 끊겼다. 


     5
     청문회는 그 날과 이튿날 반나절 동안  단조롭게 계속되
     었다. 석방되어 온 포로 한 사람이  [프루프]의 협력자로
     써 출석하여, 자기들 포로는 끝까지 귀국의 희망을 버리
     지 않고 나라에 충성을 지켰으며, 아무리 가혹한 상태에 
     처했을 때라도 미국은 결코 자기들을 버리지  않을 것임
     을 굳게 믿었다고 호소했다. 그 말은, 듣는  사람들의 마
     음을 깊이 감동시켰다. [프루프]의 대표자들은 약간의 승
     리감에 도취했으나 그것은 별로  오래 계속되지 못했다. 
     다음에 재무성의 대표가 일어나,  이미 사망했을 가능성
     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전사자로 단정할 수  없기 때문에 
     현재까지 지불되고 있는 군인 봉급이 납세자에게  큰 부
     담이 되고 있다는 것을 숫자를 나열하며 설명했다. 윌시
     를 비롯한 몇몇 의원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가 계속되는 동안 킬리는 닥스를 피하듯이  하고 있
     었다. 그 역시 킬리와 접촉하는 것이 상책이 아닌 줄 알
     았던지 애써 말을 걸어 오지 않으려고 했다.
     낯선 사람처럼 행동하면서도 그 내심으로는 서로를 아플
     정도로 의식하고 있었다. 킬리는 닥스의 시선이 가끔 자
     기한테 돌려지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다. 아침에 전화로 
     닥스가 한 말이 생각나서  머리끝까지 홍당무가 되었다. 
     안 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어느새 눈이 그에게로 향하
     는 것이었다. 닥스의 버릇을 차차 알 수 있게 되었다. 넥
     타이가 한 시간도 제자리에 있을 때가 없었다. 귀찮다는 
     듯이 넥타이 매듭을  잡아당기기 때문에 곧  느슨해지고 
     만다. 목의 단추도  풀려 금세라도 햇볕에  그을은 목이 
     드러날 것만 같았다.
     닥스는 갈색 가죽의자에 앉아 팔걸이에 한쪽  팔을 얹고
     는 손으로 턱을 받치고 있었다. 그러면서 발언자의 말에 
     자세히 귀를 기울이고 있다. 가끔가다 재빨리 메모를 하
     기도 했다.
     그가 킬리를 보았다.
     마음을 뒤집어 놓을 듯한 그 눈초리에 킬리는 그만 저도 
     모르게 시선을 마주치고 말았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목
     이 죄는 것 같아 숨이 가빴다. 닥스의 눈은, 누가 무엇이
     라 말하건 지금 마음속에서는 킬리의 일만  생각하고 있
     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는 뺨에 대고 있는 손을  가만히 쳐들었다. 다른 사람
     은 깨닫지 못할 약간의  움직임이었으나, 킬리는 조용히 
     시선을 내리깔아서 그것에 대답했다.  그것은 단순한 신
     호가 아니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
     다.----킬리와 이야기하고 싶어. 킬리와 이런 곳에 있고 
     싶지 않아, 이런 일을 하고 싶지 않아.  그들에게는 정말 
     어색하기 짝이 없는 장소였다.
     사흘째 되는 날 정오에 파커 의원은 점심 시간의 휴식을 
     고하면서, 그날 오후와 이튿날을  휴회하는 것이 어떻겠
     느냐고 제의했다.
     "우리는 사흘 동안에 걸쳐  논의를 거듭해 왔으나, 여기
     서 잠시 시간을 두고 각자가 지금까지의  경과를 돌이켜
     보며 의견을 정리한 뒤 최종 토론에 들어가는 것이 어떻
     겠습니까?"
     만장 일치로 휴회가 결정되자  그는 의장봉을 두드렸다. 
     이로써 청문회는 일단 산회하게 되었다.
     "휴회하니 고맙군요." 베티가 말했다. "미장원에 가서 머
     리와 손톱을 좀 다듬어야겠어요. 그리고 은행에 가서 돈
     도 좀 찾아야겠고요. 킬리, 오후에 쇼핑이라도 같이 하지 
     않겠어요?"
     "고마운 말씀이지만, 나는 방에서 책이나 읽다가 낮잠이
     라도 자면서 지내겠어요."
     "그렇다면 저녁에 만나요."
     "네, 호텔에 돌아오거든 전화해 주세요."
     베티는 몸을 돌려 걷기 시작하면서 약간  고개를 갸웃했
     다. 킬 리가 왜 그럴까 하고  생각할 틈도 없이 누가 어
     깨를 두드렸다. 닥스였다. 웃고 있었다.  너무나 기쁜 듯
     이, 너무나 친근하게, 너무나 공공연하게.
     "윌리엄즈 씨, 지난번 점심 식간 이후  처음이군요. 청문
     회에 진력이 난 것이나 아닙니까?"
     "전혀 그렇지 않아요. 지지분할 것이라는 것은 예측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여러분의 노력으로  우리의 희망이 바
     람직한 방향으로 진행되리라 생각해요."
     닥스는 아주 위엄 있는 태도로 고개를  끄덕이고 팔짱을 
     낀 뒤, 잘 닸여진 구두 끝을 내려다보고 몸을 가까이 가
     져왔다. 그러고는 옆  사람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음성으로 말했다.
     "피곤한가요?"
     "아뇨."
     "사실은 오늘 밤 프랑스 대사관의 칵테일 파티에 초청되
     었는데, 괜찮다면 킬리도.........."
     "안돼요. 닥스. 그 이유는 알고 있을 테죠?"
     "그렇군.........그러면, 이 문제가 모든  사람이 납득할만한 
     결과가 될 것을 바랍니다."  닥스는 다시 평소의 목소리
     로 말하고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손을 잡으면서 
     두 사람은 조용히 시건을 교환했다.
     심장이 뛰고 주위의 세계가 사라진 듯 느껴졌다. 그러나 
     이것도 한 순간의 일이었다.
     "여어, 의원님." 알 밴 돌프가 뒤에서 말을 걸었다. 
     "군비 확장안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은데요."
     "좋습니다, 알. 그러면 위리엄즈 씨, 편히 쉬십시오."
     "고맙습니다. 그러면  전  이만 실례하겠어요.   밴 돌프 
     씨."
      킬리는 두 사람과 헤어져 납덩어리처럼  무거운 발걸음
     으로 밖에 나왔다. 펜실베이니아  거리에서는 좀처럼 택
     시를 잡기가 어려웠으나 신경질을 낼 기력도 없었다. 차
     라리 베티의 쇼핑에 동행할  것을 잘못했다고 후회했다. 
     호텔 방에 혼자 틀어박혀 이루지 못할 꿈을 꾸며 괴로워
     하는 것보다는 나을텐데.
     
     그러나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날  오후의 일은 거의 생
     각나는 것이 없었다. 방으로  돌아가기가 바쁘게 킬리는 
     잠에 곯아떨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베티가 문을 두드릴 
     때까지 눈을 뜨지  못했다. 날씨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은 외출하지 않고 호텔 안에서 저녁을 먹었다.
     "오늘 슈트를 샀어요. 내 방에 가지  않겠어요, 패션쇼우
     를 보여 줄 테니까." 베티가 말했다.  "그리고 오늘 밤에
     는 로버트 테일러와 바바라 스탠위크가 나오는  옛날 영
     화를 텔레비전으로 방영해요. 물론  그런 영화가 있다는 
     것을 킬리는 모를 테지만."
     "알고 있어요!" 킬리가  웃었다. "베티만  좋다면 그렇게 
     하겠어요." 그녀는 방에 돌아가고 싶지가 않았다. 낮잠을 
     잤기 때문에 잠이 올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면 와인을 주문하고 힘껏 날개를 펴 보기로 해요." 
     베티가 활기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날 밤 킬리는 와인을 마시고 센티멘털한 흑백 영화를 
     보기도 하면서 긴장을 풀었다.  베티와 함께 여학생처럼 
     웃기도 하고 달콤한 사랑 이야기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
     다. 이윽고 킬리는 하품을 하는  베티에게 잘 자라는 인
     사를 하고 방에서 나와 텅빈 복도를 천천히 걸어가기 시
     작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킬리는 긴장한 나머지 한꺼
     번에 취기가 가셨다. 한구석에 침울한 얼굴로 닥스가 서 
     있었던 것이다.
     닥스는 무서운 훈련 교관의 명령이라도 받은  듯이 차렷
     자세를 취했다. 그 바람에 어깨에 걸치고 있던 코우트가 
     발밑으로 떨어졌다.
     "위로?" 그의 얼굴이 빛났다.
     "아니, 아니예요."
     "어쨌든 타요."  그는 주저하고  있는 킬리에게  말했다. 
     "같은 호텔에 묵고 있는 사람들끼리  같은 엘리베이터에 
     탔다고 해서 트집 잡을 사람은 없을 테니까. 어서."
     킬 리가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서자 문이 닫혔다. 그곳은 
     두 사람만의 격리된  세계가 되었다. 숨이  가빠지는 것 
     같아 킬리는 기침을 했다.
     "파티는 재미있었나요?"
     "소음, 담배 연기, 그리고  사람, 사람, 사람." 닥스는  
     그 말밖에 하지 않았다. 
     불과 몇  분 전에 나왔으나 머리에
     는 거의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재미도 흥도 없는 
     파티였다. 카나페를 먹고 와인을  마시는 동안에도 킬리 
     생각뿐이었서 그만 과음을 하고  말았다. 보석으로 휘황
     찬란하게 장식한 외교관 부인들의 날카로운 목소리를 들
     으면서, 그는 킬리의 고운 입술을 상상하고 입술을 겹치
     고 싶다는 것만을 생각했다.
     글래머로서 정평이 높은 상원의원의 여비서에게  윙크를 
     보내는 사람이 많았다. 오늘 밤 그녀는 몸에 꼭 붙는 빨
     간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묵직하고 풍만한 가슴,  큰 히
     프를 흔들며 걷고 있었다. 일주일 전이라면 닥스도 다른 
     남자들처럼 눈길이 쏠렸을 것이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그녀가 한낱 어리석고 추잡한 여인으로 밖에  비치지 않
     았다. 닥스의 머리에는 좀더 날씬하고 청초한 사람의 모
     습만이 새겨져 있었다. 여자답게  부드럽고 또한 신선한 
     모습, 닿을 듯하면서도 손에 닿지 않는 사람..............
     "도착했어요." 킬리가 조용히 말했다. 
      엘리베이터가 맨 위층에 멎자 문이  열렸다. 복도 저쪽
     은 을씨년스러운 자기 방이다.--닥스가 눈을 들었다.
     "당신은 어디 가 있었소?"
     "베티네 방에요. 와인을 한 병 따 놓고 텔레비전에서 옛
     날 영화를 보았어요."
     닥스가 7층의 단추를 눌렀다.
     "킬리의 층까지 같이 가겠소."
     "안돼요."
     "말 안해도 알아요."
     킬리는 얼굴을 돌렸다.  토해 내듯 하는  난폭한 어투에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미안하오. 당신에게 화를 낸 것이 아니오. 나느......."
     "알고 있어요." 킬 리가 얼른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말
     은 적을수록 좋은 것이다.
     엘리베이터가 7층에서 멎자 문이 열렸다.  그러나 킬 리
     가 내리기 전에 닥스는 또 다른 층계의 단추를 눌렀다.
     "닥스........."
     "내일 아침 호텔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소. 시간은 열시.
     가벼운 몸차림으로."
     "안돼요."
     "가벼운 몸차림이?" 닥스가 농담을 했다. 평소의 미소가 
     비로소 그의 얼굴에 나타났다.
     "갈 수 없어요."
     "와야 해요."
     엘리베이터가 멎고 문이  열렸다. 중년 부부가  서 있는 
     것을 보고 킬리와 닥스는 깜짝  놀랐다. 이 세상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거의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안녕하세요, 몇 증에 가시죠?" 닥스가 친절하게 말했다.
     "3층이오."사나이가 말했다.
     닥스는 3층의 단추를 누르고 아무 일도 없는  듯이 가장
     하며 벽에 기대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뉴멕시코죠, 라스 쿠르세스." 사나이가 대답했다.
     동행자는 바닥에 떨어진 채로 있는 닥스의  코우트를 보
     고 있다가 킬리를 수상쩍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대도시의 음란한 남녀에게서 몸을 지키려는 듯이 남편의 
     팔에 매달렸다.
     "아아, 뉴멕시코에는 훌륭한 대학이 있죠."
     "뉴멕시코 주립 대학이오." 사나이가 자랑스럽게 대답했
     다.
     "옳아, 그것이오." 닥스는 손가락으로 탁 하고 소리를 냈
     다. 킬 리가 눈으로 핀잔을 주었다. 닥스는  희롱하며 재
     미있어 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3층에 닿자  사나이가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는 아내의 등을 떼밀고 밖으로 나갔다.
     "즐거운 여행이 되시기를." 닥스는 상공회으소 팜플렛을 
     장식하기에 알맞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문이 닫혔다.
     "자아, 조금전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안 돼요. 당신과 함께 외출할 수는 없어요."
     "청문회는 휴회요. 며칠씩이나  회의장에 틀어박혀 있다 
     보니 모두 신경이 예민해졌소.  킬리도 지겹다는 표정이
     고."
     그러나 사실은 반대였다. 와인  탓으로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고, 실컷 잠을  자고 괜찮은 영화를  보았기 때문에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머리도 약간 흐트러져 있었다. 킬 
     리가 이처럼 아름답고 매혹적이며 섹시해 보인  적은 일
     찍이 없었다.
     닥스의 눈은 반론하듯 열렸다가 다시 닫혀진  킬리의 입
     술에 못  혀 있었다. 루즈도 안 바른 채 이슬에 젖은 듯 
     자연 그대로 빛나고  있는 입술. 입을  맞추었으면 하고 
     닥스는 애타게 갈망했다.
     "친구끼리 몇 시간을 같이 지내는 것이 안된다는 이유라
     도 있소?" 친구가 아니다, 결코  친구일 수 없다는 것은 
     서로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당치도 않은 구실이나마 
     입에 올림으로써, 닥스는 킬리를  끌어안고 입술을 뺏고 
     싶다는 충동을 억제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잠자코 서로 바라보았다.  눈은 입술보다 더 
     많은 것을 나타낸다. 7층에 도착하여  문이 열리자 닥스
     는 오픈의 버튼을 눌렀다.
     "내일 열 시"
     "누가....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밴 돌프나........"
     입만이  헛되게 거역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마음속은 이미 약속이 되어 있었다.
     "아무도 모를 것요. 내가 친구의 차를  빌겠소. 실버다트
     산이오. 킬 리가 K스트리트에 올 때까지 그 부근을 빙빙
     돌고 있겠소. 어색하게 행동하면 안돼요. 자연히 문을 열
     고 타도록 해요."
     "닥스....."
     "잘자요."닥스는 집게 손가락 끝을  가만히 킬리의 가슴
     에 대고 엘리베이터 밖으로  밀어내었다. 그녀에게서 떨
     어지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다. 자기  마음속에  이는 동
     요를 떨쳐버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버튼에서 손을 떼
     자 문이 닫히고, 두사람은 격리되었다.
     킬리는 그 자리에 선 채 멀거니 엘리베이터의 문을 바라
     보고 있었으나, 이윽고 설레는 마음으로 방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내일 무엇을 입고 나갈 것인가를 벌써부터 생
     각하면서.........
     
     킬리는 망설인 끝에 그레이 슬랙스에 검정  테틀네크 스
     웨터, 그리고 그 어느 쪽에도  어울리는 능직 상의로 정
     했다. 검은 수에드 부츠를 신으면  발도 시리지 않을 것
     이다. 비온 뒤의 쌀쌀한 아침으로서 봄의 조짐은 아직도 
     멀었다. 닥스가 어디로 갈 생각인지 몰랐기 때문에, 그녀
     로서는 모든 경우에 대처할 차림을 고려해야만  했던 것
     이다. 킬리는 열시  5분전에 오우버코우트를  팔에 걸고 
     방을 나섰다.
     킬리는 사람들이 많은 로비를 태연한 얼굴로 가로질렀으
     나 마음속에서는 불안과 설렘이  교차되고 있었다. 정면
     에 있는 큰 유리문 너머로 한길을 서행하고 있는 은빛 
     다트산이 보였다. 킬리는 상하게 불어치는 바람을 정면
     으로 받으면서 밖으로 나가, 핸들을 잡고 있는 닥스의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  얼른 차에 올랐다.  두 사람은 
     소리내어 웃었다. 차가 재빨리 달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정확하군."
     "그것이 내 직업적인 특징이에요. 이  거리를 몇 번이
     나 돌았어요?"
     "제 번. 서두르는 것이 내 결점이지."
     두 사람은 또다시 웃었다. 단둘이 있는 것이 기뻤다.
     "어디로 가는 거죠?"
     "마운트 바논."
     "마운트 바논이라고요?" 킬리는 비에 젖은  차창 너머
     로 잔뜩 흐린 하늘을 쳐다보았다.  "이런 날씨이ㅔ 마
     운트 바논에 가는 사람도 있어요?"
     닥스는 신호 대기에서 차를 세우고는 킬리의 코를  살
     짝 건드리며 대답했다.
     "아무도 없지. 그러니까 가는 거요."
     "과연 상원 의원 후보로  물망에 오른 것이  우연만은 
     아니군요, 닥스 씨. 아주 머리가 잘 도는군요."
     "그렇소. 가끔가다 나 자신도 놀랄 때가 있지."
     닥스는 링컨 메모리얼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킬리는 
     코우트를 접어 뒤에 놓고 카 라디오의 스위치를  넣었
     다. 차는 포트맥  강에 걸린 알링턴  메모리얼 다리를 
     건너 조지 워싱턴 저택을 향해 강가의 하이웨이를  달
     려갔다. 길 양쪽의 가로수는 아직 벌거벗은 채였다.
     "몇 주일 후 접시꽃이 피게 되면 아름답겠죠?"  킬 리
     가 황홀한 듯 말했다.
     "음, 나는 꽃 피는 계절의 고향을 좋아하죠. 우리 집은 
     철쭉으로 사방이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만발했을 때는 
     정말 아름답다오."
     "우리 집이요?"
     "아아, 정확히 말하면 그렇지 않아요. 아직  부모와 같
     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버릇처럼 그  말이 나오는군. 
     부모는 몇 해전에 농토가 있는 데로  가 버렸다오. 아
     버지가 계단 오르내리는 것이  편하다면서. 하지만 사
     실은 그런 의미가 아니었을 거요. 내가  혼자 남아 쓸
     쓸해지면 결혼할 생각이  들리라 생각했기 때문일  거
     요."
     "왜 결혼을 안 하세요?"
     "인생을 같이 보냈으면 하는 사람이 아직 나타나지 않
     았기 때문이죠." 닥스는 흘끗 킬리를 바라보았다.
     "그런 사람이 발견되면 나는 목숨을 걸고  싸워서라도 
     차지하고 말거요."
     킬리는 목이 졸린 것처럼 숨이 막혀왔다. 그녀는 닥스
     의 강한 시선에서 눈길을 돌렸다.
     "어떻게 생겼을까요,  당신의 집은?  남북전쟁 때부터 
     있던 집인가요?"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디발네 집은 북군에게  파괴되
     었소. 전쟁의 상처를  딛고 일어나 오늘의  저택이 선 
     것은 1912년의 일이었소. 나는  저택을 사랑하지만 그 
     말은 안 하기로 합시다. 언젠가 킬  리가 직접 보았으
     면 하기 때문에."
     "땅은 어느 종도 가지고 있나요?"
     닥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적당한 토지와 말 두서너 마리정도."
     "디발 의원님, 연막 전술이 정말 능하시군요."
     "탄로가 났군." 닥스가 웃었다.
     킬리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닥스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부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지도 모른다. 닥
     스의 재력에 대해서는 가끔 신문에서 고십거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고, 그러나 즐거
     운 마음으로 나머지 20킬로를  달렸다. 마침내 도착한 
     주차장에는 몇 대의 차밖에 없어  거의 텅 비어 있었
     다.
     "저것 봐요. 내 말이 옳지 않소?" 하고 닥스가 말했다.
     "우리 단둘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요.  아마 조지 워
     싱턴 부부도 이렇게 조용한 곳은 찾지 못했을거요."
     닥스는 킬리의 팔을 부축하고 문으로 향했다.
     "이런 날씨여서 유감입니다마는,  비가 오더라도 바깥 
     건물까지 모두 구경하시기 바랍니다."  격자무늬 창너
     머로 식민지 시대의 복장을 한 여자가 말했다.
     "마침 가이드가 한 그룹을 안내하려는 참이니 같이 보
     시지요."
     "고맙소." 닥스가 그 특유의 미소를 띄였다. "이왕이면 
     날씨가 좋을 때 오려고 했지만, 누이동생이 오늘이 아
     니면 안된다고 하기에."'
     킬리는 어안이벙벙하여 바보처럼 입을 벌리고  멍청히 
     닥스를 쳐다보았다.
     "제정신이 아니군요.!"걸으면서 킬 리가 말했다.
     닥스는 코우트 주머니에서 접는 우산을 꺼내 기세있게 
     펴들었다.
     "내가 당신의 누이동생이라니,  남들이 믿을  것 같아
     요?"
     가랑비 속에 우산을 받쳐 들면서 닥스가 킬리를  바라
     보았다.
     "아마 안 믿겠지. 그렇다면 한바탕  연극을 할 필요가 
     있겠군. 자아, 이것을 들어요." 그는 킬리의 손에 우산
     을 쥐어 주었다. "동생아, 아름답게 성장한  그 모습을 
     이 오빠가 똑똑히 보게 해주렴."  그러고는 몸을 굽혀 
     킬리의 입술에 힘껏 키스했다. 킬리는 어이가 없어 말
     도 할 수 없었다.
     "킬리는 어떤 빛깔의 옷을 입어요 잘 어울리는군."
     닥스가 가만히 킬리의 뺨을 어루만졌다. "검정도 좋고. 
     비행기에서 입었던 그린도 좋아. 노란 타월로 된 로브 
     차림의 모습도 아름다웠어."
     닥스의 엄지손가락이 턱을 쓰다듬듯 미끄러져 내려 갔
     다. 쳐다보니 그의 검은 눈동자속에 자신의 얼굴이 작
     게 비치고 있었다. 이렇게 몸을 가까이하면 안돼. 그러
     나 킬리는 이 말을 입  밖으로 냄으로써 감미로운 이 
     한때를 파괴하고 싶지 않았다.
     입술을 건드리면 안돼. 그러면 남매가 아니란 것이 금
     방 탄로나게 돼.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킬리는 닥스의 
     손가락이 시키는 대로 가만히  입술을 벌렸다. 닥스가 
     자신을 잊고 얼굴을 가까이 하려 했을  때. 뒤에서 네 
     명의 그룹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닥스는 얼른 몸
     을 떼었다.
     "자아, 어서 가야지."
     그는 킬리의 손에서 우산을 받아 들고 언덕 밑에 서서 
     견학하고 있는 사람들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육중한 
     건물이 언덕 뒤에 서 있었다.
     이윽고 가이드가 나타나 일행을 언덕 위의집으로 안내
     했다. 모든 사람은 숙련된 그녀의 알기 쉽고 재미있는 
     설명에 귀를 기울이면서, 입구에  로우프를 친 방들을 
     들여다보았다.
     정해진 견학 코스가 끝난 뒤, 일행은 사방으로 흩어져 
     부엌과 마구간 등  외부의 건물을 구경하며  돌아다녔
     다. "생각해 본 일이 있어요?" 킬리가 말했다. "당신이 
     대통령이 되었다고 가정해요. 2백년 뒤 사람들이 당신
     네 집을 둘러보고 당신이 쓰던 면도칼을 구경할  거예
     요." 두사람은 소리내어  웃고, 닥스는 킬리를  껴안았
     다. 두 사람은 워싱턴 집안 사람들이  잠든 무덤 쪽으
     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닥스가 조용히 말했다.
     "워싱턴이 유부녀를 사랑했다는 말을 알고 있소?"
     "워싱턴이?"
     "그렇소, 소문이지만."
     "비극이군요."
     "그렇다고만도 할 수 없지. 그  여자에 대한 워싱턴의 
     사랑이 대단했기 때문이 아닐까?"
     "네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왜  그런지 킬리는 갑자기 
     울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렇다고 워싱턴의 위업이 손상되는 것은 아니지. 그
     러니 특히 그 일에 대해 떠들어 댈 것은 없으리라  여
     겨지는군"
     "현대로서는 그럴지도 몰라요....하지만 당신에는  그들
     에게 있어서 매우 중대한 일이었을 거예요"
     "킬리의 말이 맞을 것 같군."
     두 사람은 묘지를 뒤에 두고 안채로 되돌아왔다.
     돌아가기 전에 가볍게  식사라도 하자고 닥스가  말했
     다. 침울해진 분위기를 떨어버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이곳 레스토랑이 괜찮다는 소문이더군요.  예약이 없
     어도 된다니까."
     레스토랑은 문자 그대로 비어 있었다.
     바닥은 나무로 깔았고, 단풍나무  재료로 된 테이블과
     의자가 잘 정리된 채 놓여 있었다.  창에는 풀을 빳빳
     하게 먹인 흰 프릴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으며, 각 테
     이블마다 키가 큰  놋촛대가 놓여 있었다.  그 촛불이 
     시골풍 벽지를 바른 벽을 따뜻이 비추고 있었다.
     손님은 세 쌍뿐이었다. 몇 개의 난로에서는 모두 불이 
     훨훨 타오르고 있었다. 닥스는 불이 가깝고 바깥이 잘 
     내다보이는 창가로  킬리를 인도했다.  식민지 시대의 
     복장을 한 웨이트레스가  와서 공손하게 주문을  받았
     다. 두 사람은 크림차우더를 주문했다. 이것을 거의 다 
     먹었을 무렵에 닥스가 다시 웨이트레스를 불렀다.
     "디저트로는 무엇이 있지?"
     "홈메이드 파이가 있습니다. 버찌로 하셔도 좋고 애플
     로 하셔도 좋습니다."
     "그거 좋겠군. 그럼 버찌 파이로 두 개."
     "싫어요, 나는 애플로."
     "조지 워싱턴의 집에 와서 버찌를  안 먹다니, 어디도
     리 말인가. 미국인답지  않은 태도야." 닥스가  일부러 
     희롱조로 말했다.
     킬리는  웃었으나 애플을 고집했다.
     "할 수 없지." 하고 닥스가 말했다. "거기다 바닐라 아
     이스크림을 곁들여서 줘요."
     "아니에요. 나는 거품이 있는 아이스크림으로."
     "누가 주문하는  것이지? 킬리인가,  나인가?" 닥스가 
     눈을 부릅떴다. 그 바람에  킬리와 웨이트레스가 한바
     탕 웃고 말았다.
     "무엇으로 할지 묻지 않은 것이  잘못이에요. 나는 거
     품 있는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은 걸요."
     닥스는 못 당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커피로 하시겠습니까?"
     "홍차로 하겠어요."
     닥스는 웨이트레스를 쳐다보며 짐짓 목소리를  죽이는 
     흉내를 냈다.
     "이 여성은 여권 운동자거든."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는 부부라고 보는 것이  좋겠어
     요."웨이트레스는 이렇게 말하고 긴  옷자락을 끌면서 
     가버렸다. 킬리는 테이블 위에 얹혀진 자기 손을 바라
     보았다. 왼손 약지에 보석이 박히지 않은 금반지를 끼
     고 있었다. 닥스의 손이 뻗쳐 와 그 손을 덮쳤다.
     "우리를 부부로 아는  모양이군. 그러니  손을 잡아도 
     괜찮겠군."
     "그래요." 킬리도 닥스의 손을 쥐었다. 두 사람은 난로
     에서 탁탁 타오르고 있는  장작을 바라보았다. 창문에 
     부딪치며 흘러내리는 빗물도 바라보았다.  비는 이 세
     상의 윤곽을 흐리게 하고, 있는 그대로를 비추는 불빛
     마저 뿌옇게 했으며, 두 사람을 잠시나마 꿈의 세계로 
     인도했다. 닥스와  킬리는 마음속의  생각을 거역하지 
     않고 뜨거운 시선을 교환했다.
     "지금 비로소 깨달은  것인데, 피어스를 했군.  구멍을 
     뚫을 때 아프지 않던가요?"
     "몹시."
     닥스가 미소지었다.
     "정치가 기질이 못되는군. 프레스턴 씨. 너무 솔직하다
     니까."
     프레스턴---윌리엄즈 부인이 아니다. 분명히 지금  여
     기서 그와 마주 앉아 있는 것은 킬리 프레스턴이었다.
     "눈 밑의 상처는 어째서 그렇게 되셨죠?"
     "추해 보이나? 성형 수술이라도 해야겠는걸"
     "천만에요! 당신의 악당같은 분위기를 그대로 살려 주
     니 좋아요."
     "조상 가운데는 진짜 악당도 있었지."
     "그럴 것 같군요. 당신에게서도 해적의 풍모가 느껴져
     요."
     "나도 두 귀에 구멍이라도 뚫을까. 아니,  한쪽이 좋겠
     군. 그래야 더 악당처럼 보일테니까."
     웃고 있는 동안에 웨이트레스가 디저트 쟁반을 가지고 
     왔다.
     "또 필요한 것이 없소?"  먹기를 끝내자 닥스가  물었
     다.
     "더는 못 먹겠어요. 벌써 숨도 쉬지 못할 정도예요."
     "그렇다면 차 있는 데까지 달음박질이라도 하여  칼로
     리를 좀 소모시켜야겠군."
     두 사람은 계산을 끝내고 따뜻한 레스토랑에 아쉬움을 
     남기면서 추운 밖으로 나갔다.  물 웅덩이를 뛰어넘으
     며 차가 있는  데까지 뛰어갔다. 비가  세차게 퍼붓고 
     있었다.
     냉각된 엔진이 시동될  때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
     다. 이윽고 닥스는 천천히 하이웨이로 차를 몰았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모양이군요."  폭포수 같은 빗속
     을 3킬로쯤 달린 곳에서 킬리는  불안에 떨며 말했다. 
     와이퍼가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으나.  그래도 물줄기 
     때문에 도로가 뿌옇게 흔들리는 것 같았다.
     "이런 빗속을 달리는 것은 약간  무리이기는 하군, 분
     명히......."닥스는 흐려진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여기가 좋겠군."
     그는 천천히 브레이크를 밟고 스피드를 떨어뜨리면서, 
     차를 세워도 괜찮을 듯한 옆길로 들어섰다.
     "여기서 잠시 비를 피하도록 합시다."
     

     6.
     
     샛길에 타이어가 자국이 깊이 패며 차가 크게 흔들렸
     디. 닥스는 몇 미터 들어간 곳에 가지를 펼치고 있는 
     떡갈나무 밑에 차를 세웠다. 정적이 주의를 압도하는 
     것 같았다. 카 라디오의  음악이 그치고 와이퍼도 멎
     었다. 엔진의 진동도  없었다. 비만 여전히  억수같이 
     퍼붓고 있었다.
      "춥지 않소? 코우트를 입지 그래."
      마운트 바논을 떠날 때 두 사란 모두 코우트를 벗고 
     있었다.
      "괞찮아요, 아직 얼마 동안은 히터의 역이 남아 있을 
     테니까요."
     닥스가 킬리의 손을 잡았다.
     "손이 언 것 같은데."
     "항상 그런걸요."
     "주머니에 손을 넣지 그래."
     "소용없어요."
     "그럼 내 호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그렇게 하면 자기 손은 어떻게  하고요?" 희미한 빛 
     속에서 닥스의 눈이 번쩍 빛났다.
     "남의 손까지 생각하다니." 그는 자기 손과  부드러운 
     킬리의 손을 나란히 비교해 보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자그마한 손을 자기 입으로 가지고 가  그 손끝을 입
     술에 살짝 대었다.
     "미귀환 장병의 부인과 같은 비행기에  탄 것이 우연
     의 장난이었다 해도, 하필이면 킬리와 같은 사람----
     아니, 킬리 바로  그 사람이었을까?"  닥스가 킬리의 
     손바닥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싫어요, 그런 이야기는......."
     "제발 말이나마 하게 해줘요."
     손바닥 오목한 곳에서 닥스의 혀 끝을 깨닫고 킬리는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만일 그 사람이 킬 리가  아니었다면 나는 길거리의 
     건달처럼 통로를 건너 킬리 곁에  달려가거나 하지는 
     않았을 거요."
     킬리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닥스의 혀가 손바닥마디 
     하나씩 하나씩 천천히 핥고  있었다. 이런 것을 허용
     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거절할  수 없을 정도로 황홀
     한 느낌이었다. 닥스는 킬리의 손에 입을 댄 채 그녀
     를 조용히 쳐다보았다.
     밀폐된 작은 공간에서 억제되었던 욕망이  고개를 쳐
     들었다. 두 사람의  열띤 입김으로  유리창이 뽀얗게 
     흐려졌다. 정적이 음향을 증폭시키고,  킬리를 위에서 
     덮쳐 누르려 하는  닥스의 옷 스치는  소리가 바람에 
     우는 고엽처럼 귀에 들렸다. 닥스의 얼굴이 다가왔다, 
     킬리의 눈썹을 한 올 한 올 셀 수 있는 거리까지. 그
     녀의 입술이 쉴 때마다  가만히 떨렸다. 아름다운 입
     술이었다.
     킬리는 지금까지 이런 기분을  맛본 적이 없었다. 태
     어나서 처음 경험하는 감각---허공에 떠  있는 듯한, 
     그러면서 몸은 불타는  욕망에 무겁게  짓눌려 있다. 
     강하게 몸을 찌르는 것이  있는가 하면, 근육은 녹아 
     들린 듯 맥이 없다.  생명이 격렬하게 불타고 있는데
     도 당장에 죽을 것만 같았다.
     어느 정도 이성을 되찾았을 때는 이미 킬리는 닥스의 
     앞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눈 밑의 상처를 엄지손가
     락으로 만지작거리면서.
     "킬리............"속삭이듯 부르며 닥스가  가만히 
     입술을 접근시켰다, 눈을 감고 있었더라면 깨닫지 
     못할 만큼 조용히. 
     갑자기 킬리의 눈에서 닥스의 몸이 멀어졌다. 
     실망했다. 그의 뜨거운 입술을  탐닉하고 싶었다.아까
     는 성급한 것이  자기 약점이라고 했는데  웬일일까? 
     닥스는 킬리의 무드에  금방 동조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킬리의 두 손을 잡고 자기  수웨터 밑으로 넣었
     다.
     "내 체온으로 따뜻하게 해주지."
     킬리의 손이 그의  가슴털에 닿았다.  그러자 난롯불 
     같이 뜨거운 피부에  닿은 손이  움칠움칠 움직였다. 
     눈을 감았다. 손이  그리는 원이 조금씩  대담해졌다. 
     약간 벌려진 입술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닥스의 입
     술이 재빨리 내려와  그 달콤한  숨결을 빨아들였다. 
     잇몸이 간지러워 입을 벌리자 혀끝이 마주쳤다. 킬리
     는 그만 그를 꼭 부둥켜안고 말았다.
     닥스는, 처음으로 키스를  경험하는 소녀같이 부끄러
     워하고 두려워하는 킬리의 태도에 놀라지 않을 수 없
     었다. 그는 킬리를 으스러져라  하고 품속에 꼭 껴안
     았다.
     "조금도 무서워할 것은 없어, 킬리"
     "알고 있어요. 그런 것이 아니에요. 걱정이 되어 그래
     요, 너무 서투르지 않나 해서.....  이미 오랫동안 키스
     를 하지 않았고, 또 그때는 한창 철없던 시기여서." 
     "그렇기에 더욱 킬 리가 사랑스러워."
     닥스는 킬리의 스웨터 깃을 손으로  내리고 목덜미에
     서 귀로 입술을 미끄러뜨렸다.  귓불을 혀로 핥고 금 
     귀걸이를 가만히 깨물었다. 킬리는 숨을 몰아쉬며 몸
     을 떨었다.
     "추워?"
     "아뇨." 킬리는 가만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추우면 춥다고 말해."
     "네" 춥다니? 닥스의 품안에 있는데  추울 까닭이 없
     다. 닥스의 입술은 잔인할 만큼 킬리를  불붙게 했다. 
     남자가 이처럼 예리하게 여성이 요구하는  것을 터득
     하고 있으리라고는 미처 알지 못했다. 닥스는 킬리가 
     가진 육체의 모든 욕망을 깡그리 알고  있는 것 같았
     다. 결코 난폭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계산된 동작
     으로 킬리의 쾌감을 이끌어냈다.
     킬리는 차차 격하게 헐떡이면서도 공포를 느꼈다, 숨
     이 멎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고. 그리고 별천지로 
     떨어져 내려가는 듯한 마음에서, 붙잡을 것을 찾듯이 
     스웨터 속에서 닥스의 등을 필사적으로 더듬었다. 닥
     스는 다시 한번  입술에 키스했다.  흥분이 고조되어 
     아까보다 더욱 깊숙이 두 손이 뺨에서 목으로 미끄러
     져 내려가 목을 감싸고 쇄골을  엄지손가락으로 애무
     했다. 끌어안으려던 손에 가슴의 융기가 만져졌다. 이 
     이상은 안 된다. 더 이상 깊어지면 이미 그녀를 떼어
     놓지 못하게 된다. 킬리의  몸이 약하게 떨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솜처럼  부드러운 촉감의 빠른 숨결이 
     닥스의 입술에 와 닿았다.
      닥스의 마음은  자제력을 잃고,  킬리를 으스러지게 
     껴안았다. 두 사람의  입김이 달콤하게 서로  섞였다. 
     닥스는 천천히 애무했다. 눈을  감고 손에 닿는 것을
     --------스웨터의 털실을, 그 빛깔을 머리에 그리면
     서.
     "귀여워." 닥스는 킬리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속삭
     이고 스웨터에 밴 그녀의 향긋한 내음을 들이마셨다. 
     "멋져." 손가락을 살며시  움직이면서 닥스는  입술을 
     가져갔다.
     "아아, 닥스!" 킬 리가 닥스를 밀어 버렸다. 닥스는 벌
     떡 몸을 일으키다가  차의 천장에  머리를 부딪쳤다. 
     "아프게 다루었나?" 깜짝  놀란 닥스가 물었다.  아니
     다, 그것이 아니야.  아팠던 것이  아니다. 12년 전에 
     마크도 키리를 안았었다. 그러나  지금 닥스가 한 것
     처럼 우아하고 능숙한 방법이 아니었다. 이처럼 격렬
     힌 기쁨은 처음으로 알았다. 그것은 육체의 밑바닥을 
     뒤엎고, 내부에 간직할 수  없게 된 욕망을 들추어내
     는 그 무엇이었다.  킬리는 그 격렬함에  몸부림쳤다. 
     두렵고 무서웠다.
     닥스는 겁먹은 킬리를  보고 자신의  행위를 책했다. 
     죄의식과 자기 혐오에 빠져 힘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
     다.
     "미안해, 킬리. 나는 그저 당신에게 키스하고 싶을 뿐
     이야."
     킬리는 슬픈 마음으로 닥스가 자동차에  기어를 넣는 
     것을, 그리고 와이퍼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을 바라
     보았다. 진창 속에서 차바퀴가 몇 번인가 공전하다가 
     마침내 붕 소리를 내며  달리기 시작했다. 차는 하이
     웨이를 달렸다.
      빗줄기는 가늘어지기 시작했으나, 그  대신 짙은 안
     개가 끼기 시작하고  있었다. 라디오는  아까 닥스가 
     껐기 때문에 들리는 것이라곤 와이퍼가  유리창을 닦
     는 소리뿐이었다. 시내에 들어서자 닥스는 혼잡한 길
     을 천천히 차를 몰면서 화가 난  듯 신음소리를 내었
     다.
     닥스는 난폭하게 브레이크를 밟고 호텔 앞에 차를 세
     웠다. 그러고는 잠자코  앞만 노려보고 있었다.  얼마 
     후 킬리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녀의 눈에서는 눈
     물이 흐르고 있었다. 닥스는 가슴이 뜨끔했다.
     "킬리........."
     "멋진 하루였어요. 미안해요. 닥스.............
     당신이 한 일이 무서웠던 것은 아니에요. 
     나는 자신에게 브레이크를 걸 수 없었어요. 
     그것이 두려웠던 거예요."
     닥스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그녀는 차에서 뛰어 내
     려 호텔 입구로 재빨리 달려갔다.   
     
     킬리는 속옷 바람으로  담요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을씨년스런 방에 
     들어서기가 바쁘게 서둘러 옷을 벗어 던지고 침대 속
     으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피곤하니 어서 쉬어야지 하
     고 스스로 다짐했으나,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마음속에 소용돌이치고 있는 죄의식을 좀처럼 떨어버
     릴 수가 없었다. 죄의식---마크를 배반하고  만 것이
     다. 행위는 어쨌든 간에 정신적으로는 분명히 부정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지금까지 진지하게 싸우고 있던 
     큰 사명도 배반한 것이  된다. 그리고 닥스에게 그런 
     모든 것을 노출시키고 말았다.  오늘 이후 닥스는 경
     멸어린 눈으로 밖에 나를  보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킬리의 가슴이  크게 뛰었다. 방안에  들어올 
     때 그녀는 [취침중]이라는 쪽지를 문에  달아 두었다. 
     전화의 수화기도 내려놓고  있었다. 그런데도 문밖에
     서는 예의를 무시하고 노크를 계속하고 있었다.
     킬리는 침대에서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 둥근 열쇠
     구멍으로 내다보니 호텔 제복을 입은 사나이가 서 있
     었다.
     "왜 그러시죠?"
     "윌리엄즈 씨입니까?"
     "네"
     "저는 부 지배인인 바르텔리입니다. 울웨이 씨라는 분
     이 아까부터 몇 번이나 손님에게 전화를 했으나 받으
     시지 않아 걱정된다면서  저한테 확인을  부탁했습니
     다. 아무 일도 없으십니까?"
     "네 , 방해를 받지 않고 실컷 자고 싶었기 때문에  수
     화기를 내려놓았어요.  올웨이 씨에게  저는 아무 일
     도 없고 내일 아침에 뵙겠다고 전해 주세요." 자신이 
     직접 전화할 수도  있었으나 현재로서는  아무하고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정말 괜찮으신 거죠?"
      "네, 물론이에요. 걱정을 끼쳐서 죄송합니다."
      "편히 쉬십시오. 방해를  해서 오히려  송구스럽습니
     다." 부 지배인은 황송해 하면서 저쪽으로 멀어져 갔
     다.
      이왕 일어난 김에 샤워를 하기로 했다. 샤워의 효용
     은 훌륭했다. 굳어졌던 근육이 풀리는 것  같았다. 더
     워진 몸으로 탕에서 나와 킬리는 거울 앞에 섰다. 피
     부가 장미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가만히 손을 가슴
     에 가져다가 닥스가 애무하던 황홀한  감각이 되살아
     났다.
     그리고 뜨거운 것이, 마치  잉크가 퍼지듯이 온 몸에 
     퍼져 나갔다.
       킬리는 자기 욕정을 부끄럽게 여기고  화를 내면서 
     침대로 돌아가 담요를  몸에 감았다.  침대가 이처럼 
     쓸쓸하고 처 빈 듯 느껴진 적은 일찍이 없었다. 킬리
     는 예비 베개를 끌어당겨  가슴에 품었다. 따뜻한 체
     온이 그립다. 사람의 말이 그립다. 킬리는  육체도 마
     음도 충족되지 못한 채 고통의 눈물을 흘렸다.
     
     
      아침이 되었을 때는 기분이 어느 정도  가라앉아 있
     었다. 그래서 그런지 결의도 굳어져 있었다. 불장난을 
     하다 화상을 입는 것은 누구의 탓도 아니다. 자기 자
     신의 잘못인 것이다.  남자와 교제하는  것은 시간과 
     정력의 낭비일 뿐 결국은 비 비참하게 끝난다는 것을 
     니콜에게 얼마나 강조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닥스와 
     같이 있을 때는 킬리 자신이 이 말을 깡그리 잊고 마
     는 것이다. 역시 내 말이 옳았어, 하고 니콜에게 말한 
     수 없는 것이  유감스러울 정도였다.  그러나 첫째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시작되기도  전에 끝아 
     버린 것이다. 시나몬색 크에이프 드레스는 마음이 굳
     어진 사람의 옷차림으로서는 맞지 않을  것 같았으나 
     그대로 입기로 했다. 머리는  뒤로 돌려 하나로 묶고 
     액세서리는 전혀 착용하지 않았다. 필요 이상 여자답
     게 보이는 것도, 느끼게 하는 것도 피하고 싶었다.
      첫날과 마찬가지로 베티와 합께 택시로 의사당에 도
     착하자, 킬리는 등을 쭉 펴고 턱을 쳐든 자세로, 곁눈
     질도 하지 않고  하원 회의장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자기 자리에 앉아 서류에서 고개를 들지 낳았다.
      "오늘은 다시 군대  각부로부터의 미귀환  장병수사 
     보고서를 낭독하겠습니다. 해밀턴  육군 대령부터 보
     고해 주십시오."
      대련은 거의 두 시간에 걸쳐 듣기 흉한 콧소리로 보
     고서를 한 줄  한 줄 낭독해  나갔다. 오늘 아침처럼 
     경이 곤두서지 않았더라면 킬리도 졸았을  것이 분명
     하다. 가끔 대령의  목소리보다 원시  의원의 코고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킬리는 자기의 손톱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테이블 
     나뭇결을 바라조기도 하면서, 또 샹들리에에 쳐진 거
     미줄을 바라보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으나, 닥스 쪽
     으로만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저 지루한 대령이 보고에는 눈물이 날 지경이지 뭐
     예요. 자기 자신이 지루해  하는 데다가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어요, 그러니 우리  발언에도 트집 잡을 사
     람이 없을 거예요." 베티가 말했다.
       킬리는 미소만으로 대답했다. 여기 있는 내가 엄청
     난 배반자라는 것을 베티가 안다면............
      정오가 거의 다 되었을 무렵에야 겨우  대령은 보고
     를 끝내고 원고를  정리했다. 파커  의원이 의사봉을 
     제게 두드리며 침체된 장내의 공기를 환기시켰다. 그
     러고는 킬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윌리엄즈 씨, 폐회하기 전에 무슨 발언할  말씀이라
     도 있습니까?"
       프로그램에는 없는 의장의  배려였다. 갑작스런 일
     에 킬리는 긴장하며 혀로  입술을 적셨다. 그러나 자
     세를 바로 하고 입을 열자 자기로서도 의외라 여겨질 
     만큼 침착하게 말이 났다.
       "말씀드리고 잎은 것은 이미 모두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여러분-----미국 국민의 대표자인  여러분이, 
     적어도 이 나라의 국민 된 자를 아무 확증도 없이 죽
     은 자로 묻어 버리려는 의안을 국회에 제출할 생각은 
     안 가지셨으리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하면 재정은 절약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목숨이 
     갖는 존엄성은 어떻게  될 것입니까? 목숨은  돈으로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행방 불명자 가운데는 이미 
     생존해 있지 않은 사람도  물론 있을 것입니다. 그러
     나 이 오랜 세원을 기다려 온  가족에게 온정을 베풀
     어주시기 바랍니다. 만일  나리에서 사형선고를 내려 
     봉급의 지급을 중지하는 경우가 생긴다면, 우리 자식
     이라고도 할 국민에게 대한 가장 무서운 형벌이라 하
     지 않을 수 없습니다."
       파커 의원은 칭찬이 깃들인 미소를  킬리에게 보냈
     다. 그러고는 반론이 있으면  말해 보라는 듯이 양쪽
     에 앉은 위원들을 노려보듯 둘러보았다. 이의를 말하
     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파커가 의사봉을 집어 들
     고 힘차게 두드렸다.
      "그러면 이것으로 인단 산회했다가 두 시 반에 다시 
     모여 결과를 발표하기로 합니다. 위원들은 토의를 위
     해 한 시 45 분까지 이리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다
     시 의사봉을 두드리자 사람들은 제각기  움직이기 시
     작했다.
       킬리는 기자단에게 둘러싸여  질문 공세와  카메라 
     플래시를 받으면서 출입구로 향했다.  복도에 나오자, 
     실례한다면서 포위를 풀고 여자 화장실로 뛰어들어갔
     다. 베티는 킬리와 꼭 붙어 다녔다.
      "훌륭했어요., 키리. 고마워요." 베티는  킬리를 껴안
     으려다가 깜짝 놀랐다. "왜 그래요? 얼굴이 새파랗군
     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카메라 플
     래시를 받아서 그래요. 나는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
     이 서툴러서."
      "비극의 여왕 역할을 그토록 멋지게  연출하지 않아
     도 좋았는데." 킬 리가 웃지  않는 것을 보자 베티는 
     얼른 덧붙였다. "그럼 내가 먼저 나가 그들을 쫓아 버
     리고 계단 위에서 기다리고 있겠어요." 그러고는 문을 
     열면서 돌아다보았다. "킬리,  우리가 이겼어요.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킬리도 처음으로 미소를 보였다.
      "나 역시 동감이에요."
      혼자 남자 킬리는 낡은 의자에 쓰러지듯이  앉아 떨
     리는 손으로 창백한 얼굴을  감쌌다. 이제 끝난 것이
     다. 어쨌든 끝났다. 모든 사람이 나보고 잘 했다고 했
     으나, 과연 내가 칭찬받을 만한  자격이 있을 것인가. 
     없다----정말 없다. 킬리는 깊이  한숨을 쉬었다. 그
     녀는 답답한 마음으로 세면대에 가서 얼굴을 고쳤다. 
     루즈를 덧바르자 얼굴이 더욱 창백해 보였다. 
       코우트와 백을 들고 복도에  나간 순간, 킬리는 하
     마터면 숨이 끊어질  뻔했다. 눈앞에  닥스가 버티고 
     서 있지 않은가?
      "태연히, 태연히 해요. 우연히 만난 것같이 행동하도
     록......."
      "이런 데서 무얼 하고 계세요?"
      "일을 하죠." 그가 농담삼아 말했다. "아니, 미안. 사
     실은 킬리와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는 목소리를 죽
     이고 빠른 소리로 말했다. "어젯밤 몇  번이나 전화를 
     걸었는데도 불통이더군. 수화기를  내려놓은 것 같았
     어. 익명으로 프런트에  전화를 걸어  킬리의 상태를 
     확인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부  지배인이 벌써 
     다녀왔다는 대답이더군. 킬리는 아무 이상이 없고, 그
     저 조용히 쉬고 싶어서 그런다고 하더군."
      "네, 그래요......지금도."
      "그렇다면 곤란한데."
      "닥스...."
      "쉿, 거머리 같은 밴 돌프가 나타났어. 오늘 밤 여덟 
     시 50분에 뉴올리안즈행 비행기를 타도록."
      "네."
      "그런, 그때 이야기하기로 하죠."  닥스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말했다. "이것은 비공식적인 의견이지만, 
     의안은 아마 보류될 것입니다. 여어, 알. 다른 멋쟁이 
     기자들과 식사하러 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가
     요?"
      "멋장이가 어디 있어야죠." 밴 돌프가 의미 있는  듯
     이 미소지었다. 
     "윌리엄즈 씨,  여전히 달변이시더군요.  그것은 모두 
     진심에서 나온 말일 테죠?"
      "물론입니다!" 킬리는  버릇없는 질문에  화가 나서 
     말했다.
      "알겠습니다, 잘 알았어요. 그저 물어 본 것뿐입니다. 
     그런데 어제 일을 좀 여쭙고 싶은데, 당신은 아침 일
     찍 은빛 다트산을 타고 나갔다면서요?"
       킬리는 닥스에게 시선을 보내고 싶은  마음을 억제
     하고 태연을 가장하면 대답했다.
      "네, 친구하고 명소 구경을 했어요."
      "명소를 찾을 만한 날씨가 아니었지 않습니까?"
      "그렇더군요."
      "그런데도 가셨단 말이군요. 그 친구가 누구인지 가
     르쳐 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당신과 관계없는 일이에요."
      밴 돌프는 탐색하는 듯한 눈으로 킬리를 바라보면서 
     턱을 쓰다듬었다. 킬리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그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고 보니 당신도 외출하셨더군요." 이번에는  돌
     프가 닥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뭔가  이상한데요. 
     지금도 두 분이 이렇게  같이 계시고, 그러면서도 어
     디 갔었는지 모른다니."
      "어제 나한테 볼일이 있었소? 그렇다면 유감이군요.
     나는 공짜로 신문에 나는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않는 
     사람이거든요." 닥스의 웃는 얼굴에는 전혀 꾸밈이 없
     었다. 킬리조차 믿어 버릴 정도였다. 이  사람의 말은 
     도대체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 걸까,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괜찮으시면 이만 실례하겠어요." 킬리는 도망치고 싶
     은 마음을 억지로 참으며 두 사람  곁에서 천천히 빠
     져 나왔다.
     
     예상대로 파커 의원은 의안의 제출을  보류한다는 오
     지를 알리고 청문회를 폐회했다.  기쁨의 순간, [프루
     프]의 맴버들은 킬리와 베티를 끌어안고 기쁨의 눈물
     을 흘렸다.
     킬리는 회의장을 나서면서 자석과도 같은  닥스의 시
     선을 느끼고 눈길을 마주쳤다.  그러나 밴 돌프의 일
     로 경계심이 생겼기 때문에 말을 나누거나 하지는 않
     았다. 장하다고 칭찬하는 따뜻한  눈초리였으나, 실제
     로는 그 이상의 마음이  담겨져 있었다. 킬리의 다리
     가 부들부들 떨렸다.
      그럼 나중에 보자는 듯이 닥스는 약간  고개를 끄덕
     여 보이고 등을 돌렸다.  그러나 나중이란 없는 것이
     다. 킬리는 모래를 씹은 듯이 대충 점심을 먹고 나서 
     호텔에 돌아와 짐을 꾸려 공항으로 보냈다. 그러고는 
     전화로 비행기 예약을 오후의 것으로 변경했다.
      닥스와는 수치스러운 관계에  빠지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그렇다. 
     그리고 더 이상 있을 수도 없다. 
     킬리는 남편의 생사가 확인될 때까지 결코 남성과 사귀
     지 않겠다고 지금까지보다  더 굳게  결심한 것이다. 
     자신이 유부녀란 사실을  기도문처럼 자기  자신에게 
     다지면서, 킬리는 달려가 매달리고 싶은 마음을 억제
     하며 사라져가는 닥스의 뒷 모습을  바라보았던 것이
     다. 베티는 킬리가 곧  워싱턴을 떠난다는 말을 듣자 
     아쉬워했다.
     "오늘 밤엔 모두 밖에 나가 다 같이  축하를 하려 했
     는데."
     "미안해요. 너무 오래 쉬면 방송국에서 잔소리를 하거
     든요." 거짓말이었다.   방송국에서는 오히려  킬리가 
     [프루프] 활동으로 매스콤의 화제가  되는 것을 환영
     하고 있었다. 닥스를 만난  이후 몇 번이나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내일  아침에는 출근하겠다고  전화해 
     놓았어요. 나를 위해 건배나 해주세요."
     "몇 번이라도 하겠어요." 베티가 말했다. "정말 잘 해
     주었어요, 킬리. 새삼스럽게 감사드립니다, 고마워요."
     킬리는 의사당 앞에서 택시를 타고  곧바로 공항으로 
     갔다. 머릿속은 닥스의 일로 가득 차 있었다. 여덟 시 
     50분 비행기에 내가 타지 않은 것을  그가 안다면 걱
     정할까, 아니면 화를  낼까? 닥스는  무슨 말을 하려 
     한 것일까?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러나 이
     제는 아무래도 좋다.........지나간 일이니까.
      킬리는 비행기 속에서  시트에 기대고 자는  체하고 
     있었다. 스튜어디스가 말을 걸어오는 것이 싫었기 때
     문이다.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은 여행이었다.  번개도 
     치지 않았다. 손을 잡아 주는 사람도 없었다.
     
     7.
     "어째서 같이 가지 않으려는 거지?"
     "말하지 않았어, 니콜? 가기 싫다고 말이야."
     "그런 것은 이유가 안 돼."
     "가장 큰 이유야."
     "아아, 그런 문답은 이제 싫증이 나."
     "그러니까 나를 내버려두라니까." 킬리는 내뱉듯이 말하고 난폭하게  데
     스크에서 일어나 먼지 낀 창문을  통해 사르트르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프랑스 식민지 시대의 면모를 고이 간직한 프렌치  쿼터는 킬리의 마음
     을 그대로 반영하듯  안개비로 어두컴컴했다.  며칠동안 킬리는 니콜과 
     만나는 것을 피해 왔으나, 그 니콜이 라디오 방송국으로 킬리를 찾아왔
     던 것이다. 킬리의 사무실은 어둑어둑한 긴  복도 끝에 있는 창고와 같
     은 방이었다. 보기 흉한 빛깔의 스틸제  데스크가 두 개 놓였을 뿐인데
     도 비좁기 짝이 없는 방이었다. 킬리는 이 방을 심야 방송의 디스크 자
     키와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만난 일은 없으나, 그의  데스크 위에 
     소중히 장식하고 있는 사진으로 얼굴만은  알고 있었다. 각선미가 뛰어
     난 금발 아가씨와 나란히 찍은 것인데, [즐거웠어, 신디]라는 사인이  들
     어 있었다. 킬리는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그동안에  비가 창문을 깨
     끗이 닦아 주었으면..........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답답한 가슴도
     풀어지지가 않았다.
     "미안해." 킬리가 돌아서며 말했다.  "왜 그런지 마음이 울적해서  그래. 
     하지만 너한테 신경질을 부린 것은 정말 나빴어."
     "알았어." 니콜은 모양좋게 생긴  히프를 디스크 자키의 데스크에  올려 
     놓고 신디의 사진을 뒤엎었다. 그러고는 팔짱을 끼며 킬리를 찬찬히 바
     라보았다. "나는 호기심 때문에 못 살겠어. 언제쯤 그 입을 열겠어?"
     "입을 열다니, 무슨 뜻이지?" 킬리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지난주 위싱텅에서 돌아온 후부터 너는 마치 송장처럼 우울해졌어. 무
     슨 일이 있었던 거야? 무엇을 그토록 고민하고 있는지 친구인 나한테도 
     말하지 못하겠니?"
     "어마, 그것 새 이어링이구나?"
     " 말을 돌리지마. 도대체 워싱턴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전보다 더 침
     울해졌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 어서 말해 줘. 네가 말할 때까지 나는 
     여기서 버티고 있을 테야."
     "왜 내가 침울해졌다고 생각하니?"
     "그렇게 보이는 걸 어떡하니. 너는  조개처럼 껍데기 속에 틀어박혀  있
     어. 누가 끄집어내 줄 필요가 있어. 킬리, 어서!"
     킬리는 데스크로 돌  의자에 앉았다.
     "알고 있지 않니? [프루프] 일을 하면 언제나 침울해진다고 한 것은  바
     로 너였어."
     "말했지. 하지만 이번에는  대성공이었지 않니?  침울해지는 대신 들떠 
     있어야 하는 거야. 코메디언이 햄릿을 연기하는 것 같아."
     "물론 기뻐하고 있어. 다만 좀  과로해서 그래. 그래서 잠시  혼자 있고 
     싶을 뿐이야 "........ 어떤 사람을 만났어, 멋진 사람을. 그는 나에게 키스
     를 했어. 그리고 나를 껴안았어.  그런 느낌은 처음이었어. 나는 틀림없
     이 그를 사랑하게 됐나 봐.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이렇게 
     정직하게 말한다면 니콜은 어떤 표정을 지을 것인가.
     "그것은 좋지 않아. 혼자 틀어박혀 있으면 안 돼. 오늘밤엔 같이 리셉션
     에 가기로 해. 잠시 얼굴만 내 밀면 되는 거야. 네가 돌아오겠다면 나도 
     곧 돌아오겠어."
     "가고 싶지 않아."
     "안 돼! 예쁜 드레스를 입고 술도 마시고 춤도 추는 거야. 원기가 날 거
     야, 킬리." 니콜이 데스크에서 뛰어내렸다. "네가 안 가면 나  혼자 찰즈
     를 상대해야해. 난 그것이 싫어. 나를 위해서라도 같이 가."
     킬 리가 웃었다.
     " 무슨 소리야, 그에게 열중해 있으면서도.  그리고 찰즈와 단둘이 있게 
     될 염려도 없어. 또 한 사람, 남자가 온다고 하지 않았니?"
     "응, 찰즈와 비슷한 사람이야. 어쨌든 틀어박혀 있으면 안 돼, 알겠지?"
     "몇 시에.......어디서지?" 킬 리가 할 수 없이 말했다.
     "마리오트 호텔이야. 포멀한 모임이지. 미술  연맹인가 뭔가가 주최하는 
     거야. 여덟 시에 데리러 가겠어." "하지만, 어떻게 될지 몰라."
     "여덟 시야." 니콜이 막무가내로 말했다. "그 머리 좀 고쳐야겠어.보기에 
     안 좋아. 제인 에어같아."
     "햄릿이니 제인 에어니, 오늘은 꽤나 문학적이로구나. 읽은 일은 있는지 
     모르겠어?"
     "전혀. 포르노밖에 안 읽는 주의야. 알겠지, 여덟 시?"  니콜은 웃으면서 
     나가 버렸다. 
     여덟 시----그때까지 남 앞에 나설 마음이 생길 것인가. 워싱턴을 떠나 
     다시 일에 몰두하게 되면 닥스에 대한 생각도 자연히 잊혀질 것이라 생
     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그의 존재가 멀어진 지금, 그의 
     모습이 더욱 짙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나를 생각하고나 있는 것일까------
     하루 종일 그런 일만 생각하는 킬리였다.
     안 돼. 도저히 이루지 못할 꿈에  빠지다니, 바보 같다. 그러나 자기 자
     신으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전화 벨이 울리면  닥스에게서 온 것이 
     아닌가 하여 심장이 뛴다. 마음 어딘가에서 그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약속한 비행기에 타지 않은 나를, 웬일일까 하고 조금이라도 근
     심해 보았을까. 물론 그도 뉴올리안즈에 왔을 테니까 라디오로 내 목소
     리를 듣고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기는 하겠지만...........
     아무말도 안 한다는 것은 바로 그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 닥
     스에게 있어서는 워싱턴에서의 그 일이 하찮은 에피소우드에 지나지 않
     을 것이다. 또 그에게는 재미없는 에피소우드였을 것이다, 내가 몸을 맡
     기지 않았으니까. 닥스 디발 같은 사람이  나 같은 사람에게 연연해 있
     을 까닭이 없다. 그가 열중할 여자는 얼마든지 있을 거야.
     니콜의 말이 옳다. 방에 틀어박혀  언제까지나 이불만 뒤집어쓰고 있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오늘 밤 리셉션에 참가하여 기분이 일신하도록 
     노력해야지. 킬리는 시계를 보았다. 어떤 스폰서와  상의하러 가야 한다
     는 것을 상기했다. 아직 상의할 사항에 대해서도 읽어보지 않았다.
     "이제 됐어, 킬리. 그만하면 충분히 고민한 거야."
     그녀는 거울을 보고 이렇게 말하면서 탁 하고 콤팩트를 닫았다. 그리고 
     래디얼 타이어의 커머셜 원고를 읽기 전에 전화로 미장원 예약을 했다.
     
     아직은 괜찮아. 킬리는 미장원에서 두 시간, 집에서 한  시간을 보낸 결
     과를 바라보며 이렇게 생각했다. 머리는 정수리에 우아하게 고정시키고, 
     뺨과 목덜미에 몇 올의  머리칼을 컬해서 늘어뜨렸다.  오우트 밀 팩을 
     했기 때문에 안색도 혈기가  있어 보였다. 정성  들여 우아해 보이도록 
     화장했다. 눈 밑에 보이는  그늘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었지만, 대충 
     숨길 수는 있었다. 도어의 벨이 울렸다. 킬리는 검은  새틴 게이프를 걸
     치고 이브닝 백을 든 채 상대의 얼굴을 보로 나갔다.
     니콜이 말했듯이 그는 순진해 보였다. 그는, 로저 패터슨입니다 하고 공
     손히 인사를 했다. 광고관계의 일을 하고 있는 듯했으나, 아무래도 직업 
     선택을 잘못한 것 같았다. 만난  지 5분이면 잊어버릴 수  있는, 평범한 
     인상이었다.
     니콜은, 킬리가  찰즈의 메르세데스벤츠의  뒷자리에 올라앉자"아주  멋
     져."하고 자세히 보지도 않고 말했다.
     찰즈도 백 미러를 통해"정말 아름답군요,  킬리"하고 말했다. 킬리의 집
     은 아름다운 주택이 즐비해 있는 가든  지구에 있었다. 옛날에 지은 큰 
     집을 두 개의 주택으로 개조한 것이었다. 한때는 버려졌던 대가족용 넓
     은 저택도 지금은 아파트나 맨션으로 개조되어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찰즈는 세인트 찰즈 거리에서 카날 거리로 나왔다가  다시 마리오트 호
     텔이 있는 미시시피 강 쪽으로 차를 몰았다.
     호텔 로비에는 턱시도우 차림의  남자들과 화려한 포멀  드레스로 몸을 
     감싼 여자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리셉션은 분명히 3층 무도실일 텐데요." 하고 로저가 말했으나, 일부러 
     그 말을 할 것도 없이 로비 도처에 그 요지가 게시되어 있었다.
     "나는 이런 분위기를 사랑해. 사랑이란  언제나 좋은 것이지만." 니콜이 
     들뜬 기분으로 노골적인 말을 했다. 그리고 누가 와  있다는 둥, 무엇을 
     입고 있다는 둥, 누구하고 함께 있다는 둥 하며 떠들어댔다.
     "마들레인 로빈스가 그 유명한 다이아몬드를 달고 왔어."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걸으면서 니콜이 말했다.
     "그녀가 누구하고 있는지  알아?.......아아, 닥스 디발이로군.  
     킬리, 너는 워싱턴에서 그와 만난 일이 있겠지?"
     킬리는 충격을 받고, 하마터면 그 자리에 쓰러질 뻔  했다. 로저가 곁에 
     있다가 그녀를 붙들었다. 니콜의  시선을 좇자 윤기  있는 검은 머리가 
     보였다.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관자놀이 위에 약간의  은빛이 보였다
     -------그 사람의.................
     닥스는 스탠드 바 의자엥 등을 기대듯이 하고 앉아 동행한 여자와 함게 
     소리내어 웃고 있었다. 이쪽을  향한 눈이 킬리에게 와  멎었다. 웃음이 
     사라지고 흰 이가 감춰졌다.  그 얼굴에 갑자기  얻어맞은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인사하러 가지 않니?" 하고 니콜이 말했다.
     "응? 응" 킬리는 허둥거리면서  얼른 닥스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한번 
     얼굴을 보았을 뿐이야. 저쪽에서는 나  같은 사람을 기억하지 못할지도 
     몰라." 니콜의 얼굴은 분명히 거짓말! 하고 말하고 있었으나 그 이상 아
     무말도 하지 않았다. 킬리는 에스커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 케이프를 
     고치는 체하고 어깨너머로 아래쪽 로비를 바라보았다. 이쪽을 올려다보
     고 있는 닥스와 시선이  마주쳤다. 한편 찰즈는  회장 입구에서 여우털 
     코우트를 벗은 니콜의 모습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것은 검정조
     젯으로서 어깨에서 소맷부리까지, 그리고 깃에서 허리까지 트여 있었다. 
     완전히 노출시키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관능적이었다.
     킬리도 그녀 자신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놀랄만큼 아름다웠다. 
     검정 태피터의 튤립 스커트------- 옷단이 꽃잎 같은 디자인으로 되어 
     그렇게 부르는 것인데, 겹쳐진 틈새로 드러나 보이는 무릎이 아주 매력
     적이었다. 여기가 깊게 팬 가슴에 러플이 물결치는 버찌빛 블라우스. 검
     은 새틴 샌들 뒷굽의 가는 가죽 끈은 라인스톤에서 이어지는 것이었다.
     "너무나 멋진 음악이야." 니콜은 오케스트라의 이듬에 맞춰 몸을 흔들었
     다. "찰즈, 나하고 춤워요."
     니콜은 부인하고 있었으나, 사실은 찰즈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것
     이다. 찰즈도 니콜을 사랑하고 있다. 킬리는 니콜과 찰즈가 같이 춤추는 
     것을 바라보면서, 두 사람  사이에 흐르고 있는  감정을 분명히 눈치챌 
     수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서로의 마음을 정직하게 표현했으면 좋겠는데.
     "추시겠습니까?" 로저가 어색하게 물었다. 그가 있다는 것을 킬리는  완
     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오늘은 사양하겠어요. 그보다 무언가 마실 것이 있었으면 합니다마는." 
     평소에는 별로 마시지  않는 그녀였으나 닥스를-------특히  마들레인 
     로빈스와 같이 있는 그를 본 뒤에는, 기분이 가라앉히기 위해서라도 알
     콜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요? 무얼로 드릴까요?"
     "찬 것으로, 워커 콜린즈같은 것으로."
     "워커 콜린즈, 곧 가져오죠."
     로저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킬리는 자리가 비어 있는 테이블을 발
     견하고, 한곡을 추고 난 니콜과 찰즈에게 신호를 보냈다.
     알콜을 마시면서 앉아 있는 동안  어느새 한 시감 정도가  지나고 말았
     다. 낯익은 사람이 발걸음을  멈추고 말을 걸기도  하고 소개를 하기도 
     했다. 킬리는 니콜이 유명인 취급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으나, 
     사람들이 자기도 그런 눈으로 보는 것을 알고  당황하기도 하고 놀라기
     도 했다. 
     상류 사회의 기라성같은  사람들. 뉴올리안즈  세인트의 맴버도 두서너 
     사람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  밖에도 도시의 유명한 아티스트들이 
     기금 모집을 위해 초대되어 있었다. 빛나는  얼굴들이었다. 뷰티 테이블
     에 차려진 요리도 최고였고, 댄스 음악도 최고였다.
     그러나 킬리는 한시바삐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별로 멀지 않은 테이
     블에 닥스와 마들레인이 있는 것을 보기란 비참한 일이었다. 닥스가 마
     들레인에게 마실 것을 갖다 주었다. 그녀가 닥스의 접시에 허물없이 내
     미는 손을 장난인 것처럼  뿌리쳤다. 그녀가 닥스의 뺨에  키스했다. 두 
     사람은 춤을 추었다. 속삭이고 있었다. 닥스가  마들레인의 입술에 가볍
     게 키스했다.
     킬리는 그만 참지를 못하고 일어서서 여자 화장실로  들어가 되도록 오
     랫동안 거기서 시간을 보냈다. 돌아와 보니 니콜과 찰즈는 없었다. 로저
     는 저쪽에서 교향악단 지휘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킬리는 혼자
     서 김이 빠진 술을 마셨다.
     "공항에서 나를 따돌린 기분은 유쾌한 것이었을까?"
     킬리는 하마터면 글라스를 떨어뜨릴 뻔했다.  닥스가 킬리의 의자 등받
     이에 두 손을 얹고 몸을 구부리고 있었다.
     "아니에요, 그렇지는 않았어요."
     "나는 그랬어, 비행기에 탈  때까지는. 킬리를 기다렸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하고 걱정하면서."
     "죄송합니다." 킬리는 닥스의 나무라는 듯한 시선이 괴로워 눈을 내리깔
     았다.
     "춤이나 추지"
     "마들레인은?"
     "신경이 쓰이나?"
     "당신은 그렇지 않은가요?"
     닥스는 어깨를 으쓱하고 킬리의 손을 붙잡아 일으켰다.
     닥스의 손이 얹힌 살이 탈 것만 같았다. 그의 품에 안기자 이제는 죽어
     도 좋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완만한 사랑의  발라드 곡에 알맞게 
     조명도 어두컴컴했다. 닥스의 손이 킬리의 등을 꼭 받치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머리칼에 닿아 있었다.
     "지금 내가 무어승ㄹ 하고 싶어하는지 알겠어? 킬리는  고개를 가로 저
     었다. "킬리의 빛나는 돌을 깨물고 싶어." 킬리는  닥스가 하는 말의 뜻
     을 잠시 동안은 깨닫지 못했다.  
     빛나는 것이라고는........킬리는 그만 웃어 버렸다.
     "파렴치해요."
     "이런 섹시한 구두는 본 적이 없어. 구두와 다리의 페티시즘에 빠져 버
     리고 싶군."
     "어마, 정치가로서의 경력을 물거품으로 돌릴 셈이세요?"
     "아니, 오히려 드높이는 것이지. 요즘 나는  섹시한 몽상에 사로잡혀 있
     지. 다음 이야기를 좀더 듣고 싶어?"
     "싫어요. 틀림없이 부끄러워질 거예요."
     "아마 그렇겠지." 닥스가  속삭였다. "그 꿈속의  주인공이 바로 킬리니
     까."
     "닥스, 그런 이야기는 싫어요."
     "알겠어, 미안해." 닥스는 자연스럽게 리드하면서  킬리의 몸을 더 바싹 
     끌어안았다. "이런 말은 해도 괜찮겠지, 오늘 밤 킬리는 매우 아름다워."
     킬리는 눈을 내리떴다가 다시 닥스의  어깨며 얼굴을 쳐다보았다. 하지
     만 그렇게 하려면 어깨에서 얼굴을 떼지 않으면 안 된다.
     "고마와요. 당신도 턱시도우가 무척 어울려요."
     "저 남자는 누구지?" 갑자기 닥스가 말했다. "킬리의 동행자말이야."
     닥스의 질투가 재미있어서 킬리는 미소를 머금었다.
     "오늘 밤 처음 만났어요. 니콜이 데려온 사람인데."
     "다행이군." 닥스는 빙긋 웃으며 킬리의 몸에 감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
     다. 킬리는 닥스의 팔에 안기는 즐거움을 모르는 다른 여자들을 가엾게 
     생각했다. 다리가 마주 닿을 때마다,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오싹한 전율
     이 온 몸에 흐르곤 했다. 닥스의  숨결은 뜨겁고 향기로와 가슴 가득히 
     들어 마시고 싶었다. 순식간에 곡이 끝나고 말았다. 두 사람은 미소지으
     며 테이블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니콜이 마들레인과 무어라 이야
     기 하고 있는 것을 보고 킬리는  발이 굳어지고 말았다. 닥스가 재촉하
     듯이 등을 떼밀었다.
     "어마, 왔군요. 당신이 언제 자기 동행자를 생각해 줄 것인지 그것만 생
     각하고 있었어요." 마들레인은 웃고 있었으나 킬리에게 보낸 눈에는 심
     술이 깃들여 있었다.
     "마들레인, 이쪽은 킬리 윌리엄즈. 직업명은 프레스턴. 베트남 미귀환 장
     병 일로 활약하고 있는 사람인데 얼마 전 워싱턴에서 만났었지" 닥스가 
     일사천리로 말했다. "킬리, 이쪽은 마들레인 로빈스요."
     "처음 뵙습니다." 킬 리가 싸늘하게 말했다.
     "만나게 되어서 기뻐요."마들레인이 멸시하는 듯한  태도로 말했다. "주
     인께선 참 불행하게 됐군요. 오늘 니콜한테서  들었어요, 당신이 유부녀
     도 미만인도 아닌 어중간한 입장을 얼마나 용케 지켜 왔는지를."
     대답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킬리는 잠자코 있었다.
     "킬리, 소개시켜 주지 않겠어?" 니콜이 말했다.
     "아, 그렇군. 미안해" 킬리는 이것 보라는 듯이  닥스의 팔짱을 끼고 있
     는 마들레인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마들레인은 번쩍거리는 메탈릭 그린
     의 긴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디발 의원님,  이쪽은 친구인 니콜 캐슬맨
     와 찰즈 햅번, 그리고 로저............"
     "패터슨 입니다"로저가 말하며 악수를 청했다.
     니콜은 재빨리 말괄량이 기질을 발휘했다.
     "한번 뵙고 싶었어요. 하지만 언제나 운이 나빠서."
     "텔리비젼에서 많이 봤죠. 그래서 전부터 아는 사이인 것처럼 여겨지는 
     군요."닥스는 이렇게 말하고  찰즈에게 텔레비전에서의 선거 운동에 대
     해 질문했다. "전문가의 의견을 듣고 싶군요. 꼭 한번 만날 기회를 갖고 
     싶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다만 텔레비전  캠페인에는 상당한 자금이 
     필요합니다만."
     "자금이라면 내가 손을 쓰고 있으니 염려 없어요."
     마들레인이 닥스의 몸에 찰싹 달라붙으면서 말했다.
     "이미 캠페인을 위한 자금 계획을 세워 놓고 있어요. 닥스의 선거 운동
     에 대해서는 내가 모두 계획을 세웠는걸요."
     한 순간 닥스의 입이 굳어졌다. 그러나 곧 상냥하게 웃었다.
     "나는 어떤 원조든 다 환영하죠."
     예술에서 날씨에 이르기까지 한바탕 이야기가 끝나자 화제가 끊어졌다.
     "만나게 되어 즐거웠어요, 윌리엄즈씨."마들레인이 말했다.
     "내가 오히려........."킬리도 예의상 이렇게 말했다.
     닥스는 찰즈와 로저에게 악수를 청하고  니콜의 뺨에 키스했다. 그리고 
     킬리에게도 똑같이.닥스의 순간적인 접촉에 킬리는 쓰러질 것만 같았다.
     "댄스 고마웠어요, 윌리엄즈씨. 그리고 워싱턴에서의  성공을 다시금 축
     하드립니다."
     "당신은 우리 편이 되어 주셨나요?"
     "알고 계실 테죠."닥스의 눈에서 뜨거운  빛이 발하며 보조개가 패었다.
     "그러면 이만." 닥스는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마들레인의  팔짱을 
     끼었다.
     로저가 의자를 끌어 주었다. 킬 리가  의자에 앉아 스커트 주름을 펴려
     고 할 때, 마들레인의 애교 있는 음성이 들려 왔다.
     "이미 찾아볼 사람과는 인사가 다 끝났어요. 어서 돌아가기로 해요."
     킬리는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로저가  갖다 준 음료를 단번에 들이켰
     으나 효과는 별로 없었다. 니콜이 뚫어지게 킬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녀는 닥스와 마들레인 쪽을 힐끗 바라보고는 다시  킬리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입술이 천사의 그것처럼 벌어졌다. 아무리  시치미를 떼어도 속
     아주지 않을 것이라고 킬리는 생각했다.  니콜의 눈은 순식간에 호기심
     으로 불타올랐다. 이윽고 찰즈와 로저가 코우트를  가지러 일어섰다. 니
     콜이 킬리에게 바싹 다가앉으며 말했다.
     "디발 씨는 넋을 잃을 정도야."
     "응, 그런 것을 보고 그렇게 말하는 모양이지?"
     "내가 워싱턴으로 전화했을 때, 너는 그 사람과 얘기도 나누지 않은 것 
     같은 투였는데."
     "그래."
     "춤추는 걸 보니 아주 친밀한 사이인 것 같던데?"
     "그는 그냥 예의상으로 나와 춤을 춘거야."
     "응, 어쨌든 좋아. 그런데, 마들레인 로빈스를 어떻게 생각하니? 그 의원
     과 어느 정도의 사이가 되었을까?"
     "뻔하지 않겠니." 킬 리가 씁쓸하다는 듯이 말했다. 닥스는 이제부터 마
     들레인과 어디를 가려는  것일까? 그녀의 집?  버튼 루즈에 있는  그의 
     집? 아니면 이곳 호텔의 어느 방?
     "그녀는 닥스에게 상당히 열을 올리고 있는 것 같아." 니콜이 말했다.
     "하지만 그는 별로 탐탁하게 생각지 않는 모양이야."
     돌아오면서 킬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으나, 역
     시 가지 말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집에  혼자 남아 닥스의 이미지가 천
     천히 소멸되기를 기다려야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상처가 다시 터져 
     또 한번 고통을 당해야 하는 꼴이 되었다. 더구나 마들레인 로빈스까지 
     끼어들어...........
     킬리는 로저와 현관에서 악수를 나누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찰즈의 차
     가 인사대신 클랙슨을 울리며 사라졌다. 킬리는  힘없이 문에 기대었다. 
     피곤하고 비참했다. 테이블 위에 있는  작은 스탠드를 켜고 2인용 소파
     에 케이프와 백을 내려놓았다. 샌들을 벗으려 할 때 닥스가 한 말이 생
     각나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걷어차듯 구두를  벗자 갑자기 키가 줄어든 
     듯한 느낌이 들었다. 블라우스의 단추를 끄르면서 2층에 올라가려 했을 
     때 현관 벨이 급하게 울렸다. 차에 무언가 놓고 내리기라도 한 것일까. 
     킬리는 단추를 채우면서 문을 열었다.

8
     본능적으로 킬리의 손이 벽에  있는 스위치로 뻗어  포치의 
     불을 껐다.
     "누가 망이라도 보고 있나?" 약간 익살맞은  목소리로 닥스
     가 말했다. "글쎄요, 혹시나 해서."
     "상관없어." 그가 어깨를 으쓱한다는  것을 낌새로 느낄 수 
     있었다.
     킬 리가 비켜 서며 그를 지나가게  했다. 그는 안에 들어서
     자 호기심에 찬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킬리는 자기의 
     집에 대해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 낡은 집을 개조하여 둘로 
     나눈 것을 3년 반쯤 전에 사서 자기 취미에 맞게 개조한 집
     이었다. 집의 외관은 오래 된 벽돌 벽에 흰 창틀, 창과 이층
     의 작은 발코니에는 검은 쇠장식 격자가 달려 있는  전형적
     인 뉴올리안즈 스타일이었다. 킬리는 인테리어를 옛것과 새
     것을 격조 높게 조화시켜 놓고 있었다. 중고 가구상에서 사
     들인 과일나무 재료로 된 골동품 가구와 현대 감각의 가핏, 
     모랫빛 벽에는 소박한 흰  나무조각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
     다. 액자에 넣어진 에칭, 방안을 장식한 장미색, 청색,  녹색
     의 쿠션, 다이닝 룸의 벽에는 큰 태피스트리가 걸려 아름다
     운 효과를 나타내고 있었다.
     "훌륭한 집이군. 킬리라는 인간이 잘 표현되어  있어." 닥스
     가 말했다.
     "107세라는 나이가요?"
     "저런, 그런 노구가 용케 버티고 있군." 닥스는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으며 코우트를 벗어 현관 옆의 놋쇠 옷걸이에  걸
     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킬리 곁으로 돌아왔다.
     몇 시간, 몇 년,  영원의 몇분의 1----두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그날 밤 헤어진 이후 줄곧  마음속에 쌓여 있던 상념
     을 서로의 눈 속에서  확인했다. 남의 이목도  없고 아무런 
     구속도 없었다. 도대체 세상의 관심이 무어란 말인가. 두 사
     람만의 이 순간, 양심도 아무것도 없이 오직 마음이 움직이
     는 대로 몸을 맡길 뿐이다.
     닥스는 두 팔을 벌려 킬리를 끌어 안았다. 두 몸은 잠시 움
     직일 줄을 몰랐다. 닥스는 머리와 귀와 목덜미에 입술을 비
     볐다. 턱에서 빰을 따라 이마로, 그리고 다시 입가로 입술이 
     미끄러져 내려왔다.
     "킬리에게는 더 이상  접근하지 않으려 했어.  하지만 내겐 
     그것이 불가능했어."
     닥스는 자기 입술로 킬리의 입을 닫았다가 다시 열고, 킬리
     의 내부에서 솟아나오는 생명의 물을 마시려 는 듯  격렬하
     게 빨아들였다. 킬리는 희열에 취하면서 그를 갈망했다.  언
     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이 순간이  지속되었으면, 하고. 닥스
     의 혀가 때로는 격렬하고 때로는 다정하게 모든 감각을  탐
     색하며 움직여 나갔다. 그 움직임에, 그 냄새에, 그 맛에, 목
     구멍에서 솟아오는 울림에 킬리의 몸은 불타오르고  목마른 
     듯이 욕망에 허덕였다.
     닥스는 팔을 풀고 두 손으로 킬리의 얼굴을 감싸면서  불타
     는 눈동자를 들여다 보았다.
     "왜 그런 짓을 했어? 왜 아무말도 없이 가버렸어? 공항에서 
     나는 킬 리가 무슨 사고라도  당한 것이 아닌가 하여  미칠 
     것만 같았어."
     "닥스." 킬 리가 신음하듯 말했다."두번 다시  안 만나는 것
     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더 이상  교제를 계속하다가는 그
     만........."
     "마운트 바논에서 돌아올  때의 일은 정말  미안해. 킬리의 
     품위를 손상시킬 생각은  추호도 없었어. 사과하고  싶었어. 
     그러나 킬리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이튿날에는 이야기할 
     기회조차 없었어." 닥스는 감촉을 확인하려는 듯 킬리의 뺨
     에 가만히 손을 미끄러뜨렸다.
     "나에게도 일말의 양심은  있어. 킬 리가  유부녀라는 것도 
     알고 있어. 만일 내가 킬리의  남편이었다면 그런 사나이를 
     죽이려고 들었을 꺼야........그러나, 그러나, 나는 킬  리가 필
     요해."
     "나도........."
     더 이상의 말은 필요가 없었다. 닥스는 킬리의 입술을 더듬
     으면서 힘껏 끌어 안았다.
     킬리는 환희의 세계로 한없이  떨어져 내려가는 것을  느꼈
     다, 돛을 잃고 포류하는  작은 배처럼 욕망의  바다에 몸을 
     내맡기면서. 30세가 될  때까지 남자에게서  이토록 광적인 
     감각을 느껴 보기란 처음이었다. 머리가  딩하며 정신이 혼
     미해졌다.
     "킬리는 정말 아름다워." 입술을 겹친 채  닥스가 속삭였다. 
     "킬리와 춤추고 있는 동안, 사실은  이렇게 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어." 그는 몸을 굽혀  킬리의 블라우스 속 가슴의 
     골짜기에 입술을 갖다 댔다.  그러고는 차차 더  깊은 곳으
     로........
     "킬리, 킬리." 닥스의 음성이 점점 더 잠겨 갔다.
     "이 이상 계속 할 수가 없어."
     "그래요."
     "나는 더 참을 수가 없어."
     "그래요."
     "이제 돌아가겠어."
     "네"
     "킬리는 내일 아침에도 다섯 시에 일어나겠지?"  닥스가 아
     쉬운 듯 몸을 떼고 옷걸이에서 코우트를 벗겼다.
     "네" 킬리는 미소지으려 했으나 입술만이 떨릴 뿐이었다.
     "이미 상당히 늦었어. 실컷 잘 수도 없겠군."
     킬리로서는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오늘 밤 버튼 루즈까지 돌아가시나요?"
     "아니, 내일 여기서 할 일이 있어. 뉴올리안즈에  있을 때는 
     언제나 비언빌 하우스에 머무르지. 알고 있어?"
     "네, 들어가 본 일은 없지만."
     "아늑하고 조용한 곳이지."
     "그럴 테죠."
     두 사람은 정작 할말을 하지 못한 채 우물우물 이별의 사간
     만을 늦추고 있었다.
     "이곳 나머지 반 채에는 누가 살고 있지?"
     "나이 든 부부예요. 철학을  가르치는 분인데, 내것보다  더 
     큰 그레이트 데인을 기르고 있어요."
     "다행이군, 킬 리가 이쪽에서........"하고 말하다가 닥스는 부
     아가 난 듯이 주먹으로 손바닥을  때렸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런 데 서서 쓸데없는 이야기나 지껄이고 있담! 이웃에 대
     한 것은 아무렇든 어떻담!  나는 다만 킬리를  슬프게 하지 
     않기 위해 입을 놀리고 있을 뿐인데,  나 스스로도 무슨 말
     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킬리를 품에 안고 싶다는 생각밖
     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어. 벌거벗은 킬리를 보고 그 
     곁에 눕고 싶다.-------이런 더러운 생각에는 소름이 끼치
     겠지. 미안해. 하지만 이것이 나의  참마음이야." 평소와 달
     리 그의 음성은 들떠  있었다. "그러나 이것뿐만이  아니야. 
     그 이상의 것을 머릿속에, 마음속에 느끼고 있어.  킬리와는 
     순수한 친구 관계를 유지하려 했으나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
     었어. 일고 있겠지? 이렇게 남의 눈을 속여 가며 만나고 있
     으려니 미칠 것 만같아. 그러니 두 번 다시 만나지 않는 것
     이 두 사람을 의해 좋을 거야. 잘 있어요."
     닥스는 문을 열고, 미련을 떨쳐버리려는  듯이 뒤도 돌아보
     지 않고 나가 버렸다. 킬리는  괴로움에 애태우면서 막대기
     처럼 서 있었다.
     닥스의 말이 옳다. 닥스의 행동은 정당하다. 이런 일을 계속
     한다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이것으로 그만이다. 그렇다, 
     그렇고말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킬리의 뺨은 눈물로 젖어 있었다.
     
     "자아, 여덟시 55분입니다. 올리비아, 뉴튼존의 음악을 들으
     면서 작별하기로 합시다. 그전에 킬리, 한마디 해주시오. 하
     늘에서 본 상태는 어떻습니까?"
     킬리는 헤드폰 끝에 달린 작은 마이크를 향해 말했다.
     "좋은 편이에요, 론. 경찰이 계속 폰처트렌 고속도로의 브로
     드 스트리트 인터체인지에서 연쇄 충돌 사고의 처리에 임하
     고 있습니다. 이 방면으로 가시는 차는 다른 루트를 생각하
     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오늘 아침은 
     평온한 하루의 시작이 될 것 같습니다."
     "수고했습니다. 나중에 커피라도 함께 할까요?"
     "유감이지만 안 되겠군요, 론. 오늘은 할일이 많아서."
     론은 가슴이 찢어질 듯한 비통한 신음소리를 내었다.
     "여러분, 우리 하늘의 천사는 마음이 돌로 된 것 같습니다."
     론이 작별의 인사를 고하고 올리비아 뉴튼존의 노래가 흘러
     나오자 킬리는 마이크의 스위치를 껐다. 매일 같이 론과 나
     누는 농담을 청취자들은 좋아했다. 불쌍한  론에게 좀더 친
     절히 대해 줄 수 없겠느냐는 팬레터가 심심치 않게 오곤 했
     다. 팬들은 그가 아내와  세 아이를 가진  가장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파일럿인 조  콜린즈가 헬리콥터를 선
     회시켜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아래  세상이 비스듬히 기
     울자, 킬리는 평소와 같이  두 손을 꼭 쥐었다.  헬리콥터가 
     추락하여 남편이 행방불명이  되었다.-----그 사실을 도저
     히 잊을 수가 없었다.
     "괜찮아요, 엔젤?" 좍 조롱하듯 말했으나, 눈에는 근심이 깃
     들여 있었다. "네" 킬리는 맥없이 대답하며 미소지었다. "어
     제는 거의 잠을 자지 못했어요." 그것은 사실이었다. 닥스가 
     돌아간 뒤 애타는 마음으로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에  어느
     새 샤워를 하고 출근할 시간이 되었던 것이다. "그것뿐만이 
     아닌 것 같은데. 무리하는  것은 좋지 않아요."  헬리콥터가 
     슈퍼 돔의 발착지에 도착했다. "그럼 오후에 다시."
     "네" 킬리는 백을 들고  헬리콥터에서 내려, 선회하고 있는 
     프로펠러 밑을 달려나가며 다시 떠오르려 하는 조에게 손을 
     흔들었다. 킬리는 차의 문을 열었다. 오늘 아침에는 정말 몸
     이 불편해서 쉬겠다는 전화를 걸려고  했었다. 그러나 어제 
     일을 머리에서 떨어버리기 위해서는 혼자 쓸쓸히  있기보다
     는 바쁘게 일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킬리는 아직 러시 아워의 여파가 남은 길을 프렌치  쿼터를 
     향해 차를 몰았다. 언제나 혼잡한 길이었다. 좁은 도로는 이
     미 현대의 교통 사정에  불편하게 되어 있었으며,  특히 이 
     시간에는 상점이나 레스토랑 앞에서 짐을 내려놓는  트럭이 
     많아 교통을 더욱 혼잡하게 만들었다. 킬리는 낡은 빌딩 옥
     상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KDIK방송국까지  걸어서 갔다. 
     어제 내리던 비가 개고 습기를 머금은 햇빛이 비치고  있었
     으나, 킬리는 조금도 반갑지 않았다. 오늘은 해가 나지 않았
     으면 싶었다. 마음속이 이렇게 어두운데  햇빛이 무슨 소용
     이 있으랴.
     킬리는 오랫동안 사무실에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닥스
     의 포옹이 되살아났다. 닥스가 한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마
     음속에 남아 있었다. 그가 진심에서 한 말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가 진심으로 두 번 다시  만나려 하지 않는 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친구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너무나 서로 마음이 이끌리고 있었다. 만나면  마
     크뿐만 아니라 자기들의 도의도 배반하게  된다. 그렇지 않
     아도 문제가 많은 상황에 닥스까지 관계된다는 것은 바람직
     하지 못하다. 닥스로서도  그렇다. 미귀환 장병의  아내라는 
     입장에 있는 여성과  교제를 계속한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그의 경쟁 후보자의 귀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다시는 닥스
     에 대해 생각하지 말아야지. 킬리는  데스크로 돌아가 편지
     의 답장을 쓰려고 기계적으로 파일을 펼쳤다.
     세 30분이 되면 다시 슈퍼 돔에세 조의 헬리콥터를 타고 오
     후의 방송에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자유로운 
     시간이 있었다.
     점심 때쯤 되어 평소대로 외출하려 하자 니콜이 숨을  헐떡
     이면서 뛰어들어왔다.
     "다행이야. 있어 줘서. 생명의 은인!"
     "왜 그러지?"
     "네가 정오 뉴스의 인터뷰를 해줘야겠어."
     "그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킬리, 심각한 이야기야. 예정했던 게스트가 급한 병으로 나
     오지 못하게 됐어. 그래서 대신 부탁해. 지난 주 워싱턴에서 
     있었던 청문회 이야기를 해줘. 문제 없겠지?"
     문제가 있다.-------킬리는 텔레비전에 나갈  마음 따위는 
     전혀 없었다.
     "다른 날이라면 괜찮아. 하지만 오늘은 마음이 내키지 않아. 
     얼굴도 엉망이고."
     "아주 예쁜데 뭐"
     "눈 밑에 그늘이 생겼더!"
     "그건 나도 있어. 메이크업으로 감출 수 있어.  그리고 내가 
     궁지에 빠져 있지 않아? 눈 밑의 그늘 정도는 괜찮지  않겠
     어?"
     "잘 생각해  보면 적당한   사람이 나설 거여,   시장이라거
     나......"
     "그런 사람은 재미없어. 어서 결정해 줘. 시간이  10분 밖에 
     없어." 니콜이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아직 원고도 보지 
     못했어." 그녀는 킬리의 팔을 붙잡고 복도로 끌어냈다.
     "벌써부터 떨리고 있는걸."
     "아스피린을 먹으면 돼."
     "옷도.,..........."
     "그정도면 충분해." 니콜이 킬리를 화장실로 끌고 갔다. "얼
     굴을 고치거든 밑으로  내려와. 인터뷰는  일기예보 직후인 
     열 두 시 12분전부터야.  그러나 마이크 시험도  있고 하니 
     좀 일찍 와야 해."
     킬리는 물때가 묻은 세면대에 가서 거울을 들여다보며 화장
     을 고치고 루즈를 짙게 바른 뒤  머리에 빗질을 했다. 비취
     색 셔츠 드레스는 카메라를 잘 받을 것 같았다. 
     손목시계를 보니 정오가 되려 하고  있었다. 킬리는 화장실
     에서 나와 콘크리트 계단을 내려가서  스튜디오로 갔다. 오
     우픈 에어의 붉은 램프가 켜져 있었으나 킬리는 두꺼운  문
     을 가만히 열고 몸을 미끄러뜨려  들어갔다. 내부는 어두웠
     다. 니콜과 또 한사람의  젊은 남성 캐스터가  뉴스를 읽고 
     있는 데스크에만 라이트가  비치고 있었다.  킬리는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기를 기다려 바닥에  깔린 코드를 넘어  걷기 
     시작했다. 모니터에 코머셜이 나왔다. 플로어 디렉터가 카메
     라를 떠나 헤드폰을 벗으면서  다가와 킬리의 팔을  붙들었
     다.
     "여어, 미인 아가씨. 세트까지 안내하지.  언제 나하고 자지 
     않겠어?"
     "당신 부인의 허가를  받아 오면,  랜디." 킬  리가 웃었다. 
     "요즘 어때요?" "언제나 바쁘기만 하지. 핀치 히터가 돼 주
     어서 정말 고맙군. 디발과 같이  출연한다면 꺼리는 사람도 
     있는데."
     "네----?" 킬 리가 숨을 삼켰다. 랜디의 도움을  받아 세트
     로 올라가 보니  닥스가 소파에 앉아  양복 깃에  마이크를  
     부착하고 있었다.
     "소개할 필요는 없겠지."하며  랜디가 무선  마이크를 건네 
     주었다. "실크 스커트를 찢지  않도록." "랜디, 30초면 코머
     셜이 끝나네." 카메라맨이 말했다.
     "다음 코머셜이 끝나면 인터뷰가 시작돼." 랜디는 헤드폰을 
     다시 쓰고 카메라 있는 곳으로 갔다.
     "왜 미리 말해 주지  않았어요?" 킬 리가 목소리를  낮추고 
     닥스에게 말했다.
     "예정에 없었기 때문이지-----오늘 아침 갑자기 니콜이 전
     화를 걸어 우는 소리를 하더군."
     "그녀의 음모예요. 나에게도 똑같이 우는 소리를 했어요. 설
     마 당신이 오리라고는.......미안해요."
     라이트가 눈부시게 세트를 비추기 시작했다.
     "여어, 귀여운 사람." 디렉터의 음성이 스튜디오  위로 튀어
     나온 조정실에서 울려 왔다. 다시  코머셜이 시작되고 있었
     다. 카메라가 두 사람 앞으로 이동해 왔다.
     "아, 실례했습니다. 디발 의원님! 지금  한 말은 킬리에게였
     습니다."
     "안녕하세요, 데이브?" 킬리는 라이트의 빛을 한 손으로 막
     으면서 조정실의 디렉텅게 손을 흔들었다.
     "다시 한번 더 말해 줘요. 마이크 테스트를 할테니까."
     "안녕하세요, 데이크. 이쪽은 킬리 프레스턴, 마이크 시험중
     입니다. 하나 둘 셋."
     "오우케이. 다음에는 디발 의원님께 부탁합니다."
     "여어, 데이브. 아기는 어떻게 되었소?"
     "그렇군요, 지난번 당신을 만났을  때는 아내가 입원중이었
     죠.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자가 모두 건강하답니다."
     "축하하오."
     "니콜, 세트에 가 줘. 앞으로 60초 후면 시작이야." 머리 위
     에서 소리가 들렸다. 니콜이 뉴스  세트에서 뛰어내려 스튜
     디오 거울 앞에서 잠시 머리를 매만진 다음 빠른  걸음으로
     플로어를 가로질러 왔다. 그러고는  마이크를 부착시키면서 
     소파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잘 부탁드립니다, 디발 의원님."
     "곧 시작이야, 니콜." 랜디가 말했다. "15초 전."
     "그럼 시작합니다." 니콜은 카메라를 향해 웃는  낯을 짓고, 
     카메라 위의 빨간 램프가 켜지자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오
     늘 인터뷰에는 킬리 프레스턴과 닥스 디발 의원을 모셨습니
     다." 이어서 7분동안 , 킬리와 닥스는 니콜의 질문에 대답하
     기도 하고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인터뷰는 별 실수 없
     이 진행되었다. 킬리도  닥스도 사적인  감정은 티끌만큼도 
     나타내지 않았다. 닥스는  자신감에 넘치는  음성으로 요령 
     있고, 명확하게 할말을 분명히 말했다. 복지에 대해서는  말
     을 아끼지 않았다. 킬리는 닥스를 강한 신념을 가진 남성으
     로 새삼스럽게 평가하게 되었다.
     "오늘은 두분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니콜이 마지막 인사를 
     함으로써 뉴스 쇼우가 끝났다.
     "내 억지를 들어줘서 정말 고마워."
     "도움이 되었다니 영광이야." 킬리는 마이크를 떼면서 싸늘
     하게 말했다. 니콜이 무슨  뜻에서 이런 일을  했는지 뻔히 
     알 수 있었다. "일이 있어서 먼저 실례하겠어." 킬리는 닥스 
     곁을 빠져 나와 스튜디오를 나섰다.  킬리는 떨리는 발걸음
     으로 계단을 올라가, 보도 끝에 있는 자기 사무실로 돌아가
     서 의자에 주저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어젯밤 닥스는 두 번 다시 만나지 않겠다는 말을 분명히 남
     기고 돌아갔다. 그로부터 몇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같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 같은 공기를 호흡하게 되단. 닿을 듯이 
     가까이 앉아 있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표정을 짓기
     란 정말 고통스러웠다.
     이 어두컴컴한 사무실 한구석에  혼자 앉아 상처를  달래는 
     시늉을 하는 것은 좋지 않다. 한시라도 빨리 밖에 나가야지. 
     옷걸이에서 코우트를 집어 들려 했을 때, 조용히 문일 열리
     면서 닥스가 들어왔다.
     두 사람은 잠시 동안 아무말도 없이 서로 바라보았다.
     "어디로 가는 거지?"
     킬리는 코우트를 입었다. 조금이라도 자기  몸을 더 감추고 
     싶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심장이 세차게 뛰고 있었다.
     "밖에요. 두어 시간 정도 자유로운 시간이 있기에."
     "그렇군." 닥스는 이렇게  말했으나 문 앞에  버티고 선 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정말  그녀는 아름답다.-----어젯밤
     에도 진심으로 그런 말을 했었다. 앞으로도 그런 밀회를 계
     속할 수는 없다. 거짓말을 하는 것과  몰래 어떤 일을 하기
     란 정말 싫다. 그렇게 하면 킬리를 생각하는 마음까지도 더
     러워지는 것 같았다. 어떤 이유로써도  이목을 속이고 싶지
     는 않았다. 깨끗이 헤어져야지. 그 길밖에는 킬리에 대한 욕
     망을 잊어버릴 방법이 없다. 마음은  아직 흔들리고 있었으
     나, 그렇게 해야 한다고 굳게 결심을 한 뒤 아까 그 텔레비
     전 방송국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킬리를 본 순간 언
     제 결심을 했던 가 싶었다.
     "킬 리가 그 프로그램에  나올 줄은 정말  몰랐어. 그 말을 
     하려 온 거야. 킬리와 마찬가지로 나도 깜짝 놀랐어."
     "당신에게는 아무 책임도 없었요. 모든 것은 니콜이 꾸며낸 
     거예요."
     "꾸며내다니? 우리가 인터뷰한 것 외에 또 다른 무엇이  있
     다는 건가?"
     "어젯저녁 우리가 춤을 추지 않았다면 니콜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 일이 있은  뒤에 그녀는 여러 가지
     를 물어 왔어요." 킬 리가 맥없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어떤 것을?" 닥스가 곁에 와서 데스크 가에 앉았다.
     "당신과의 일말이에요. 워싱턴에서 당신과  어느 정도 친해
     졌느냐는 둥."
     "그래서 무어라 대답했지?"
     "그저 얼굴을 마주 대했을 뿐이라고 했죠........  하지만 니콜
     은 우리가 춤추는 것을 보고 도저히 내 말을 믿을 수  없다
     는 것이었어요."닥스는 킬리의 두 손을 잡고, 매니큐어를 한 
     그녀의 길고 빛나는 손톱을 엄지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 그 밖에는?"
     "당신을 멋지다고 생각지 않느냐고 묻더군요."
     "멋지다? 음, 그래서 킬리는 무어라 대답했지? 그것이 알고 
     싶어 못 견디겠군." 닥스가 허리를 구부렸다. 두  사람의 몸
     이 가까워졌다.
     "그렇다고 했어요."
     두 사람은 조용히 웃었다. 닥스는  미소짓는 킬리의 입술에 
     집게손가락을 갖다 대었다. 그리고 그 손을 목덜미 뒤로 돌
     려 몸을 끌어당기면서 입술에 키스했다.
     문의 손잡이를 돌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두 사람은 깜
     짝 놀라 몸을 떼었다. 킬리는 용수철처럼 의자에서 튀어 일
     어나고, 닥스는 킬리를 가리듯이 문 쪽으로 버티고 섰다. 들
     어온 사람이 니콜인 것을 보고 두 사람은 안도의 숨을 내쉬
     었다.
     "할 수 없는 사람들이로군. 이럴 때는 문을 잠그는 거예요." 
     니콜은 어머니가 자식을 나무라듯 말했다. 
     "니콜, 너를 죽여 버리고 싶어! 어째서 그런 짓을 했지?"
     "화난 체하지는 말아." 니콜은  태연하게 말하고 또 하나의 
     테이블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어제 보니  두 사람 모두 열
     을 올리는 것 같기에 불을 붙여  주려고 그랬지. 아까 것은 
     성공한 것 같아. 사실은 좀더 강렬한 장면을 기대하고 있었
     지만."
     "니콜!"
     킬리는  얼굴이   빨개졌다.  "닥스는..........저어  ...........우리
     는........"
     닥스가 달래듯이 킬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확실히 우리는 워싱턴에서 만나 서로 가까워지게  되었소.l 
     그것은 운명의 장난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불가피한 일이었
     어요. 그러나 어떻게도 될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어요.  킬
     리는 유부녀이고, 나는 상원의원에 입후보하려 하고 있으니 
     말이오. 유부녀와의 정사같은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오. 어
     젯밤 리셉션이 끝난 뒤, 우리는 다시 만나지 말자고 맹세를 
     했어요. 사적인 일은  물론이고 공적인  장소에서도 되도록 
     피하지고 말이요."
     "어젯밤?" 니콜이 날카롭게 되물었다. "파티가 끝나고 어디
     서?"
     "킬리의 집에서."
     "어마, 누가 보지 않았나요?"
     "왜?" 하고 이번에는 킬 리가 물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
     었다. "나뿐만이 아닌 것 같아. 두 사람이  뜨거운 사이라는 
     사실을 느낀 사람이. 여기 석간의 제 1면을 좀 봐요. 두  사
     람에게 보이는 것이 좋을 듯해서 신문을 가져왔어."
     킬리와 닥스는 그제서야 비로소 니콜이 신문을 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니콜이  신문을 킬리에게 내밀었다.  킬리는 
     가슴을 죄면서 사교란을 펼쳐  들었다. 두 사람이  몸을 꼭 
     맞대고 있는 사진이 실려 있었다. 닥스는 킬리의 얼굴을 들
     여다보고, 킬리는 해바라기가 태양을 향하듯이 그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서로 교환하고 있는 미소가 보통 이상의 친밀
     도를 나타내고 있었다. 사진 밑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디발 의원과 미귀환 장병의 부인  킬리 프레스턴. 두 사람
     이 춤추며 돌아갈 때마다 모든 사람의 시선도 그쪽을  따라 
     움직인다.]
     "이것이 무슨 짓이람!" 닥스는 저주의  말을 퍼부으며 신문
     을 마룻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두 사람 모두 조리에 맞는 대답을 준비해 두는  것이 좋겠
     어요." 니콜이 말했다.  "누군가가 추적하고 있는  모양이에
     요. 닥스, 킬리의 집에 계신 것을 봄 사람은 없나요?"
     "그러리라 생각합니다, 세인트 찰즈  거리의 레스토랑에 차
     를 맡겨 놓고 걸어갔으니가."
     "걸어서요?" 킬리는 놀랐다. "그런 일을  하면 위험해요. 그 
     근처는 밤에는 시끄러운 곳이에요, 그리고 춥기도 하고요."
     "킬리는 춥던가?" 닥스가  킬리의 머리칼을 살짝  쓰다듬었
     다.
     "야호!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니콜이 말
     했다. "신문의 억측도 일리가 있군요. 하지만 조심하는 것이 
     좋을 거에요."니콜이 도어로  향하며 말했다. "한마디만  더 
     하겠어요. 나는 어디까지나 두 사람 편이라고요. 오늘은  정
     말 미안해요. 먼저 신문을 보았더라면 그런 일은 하지 않았
     을 거예요.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어제 일에 대한 변명이 
     되기도 할 거예요. 오늘 프로그램에 대해 미리 상의하기 위
     해서 킬리네 집에 갔었다고 말하면,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
     런대로 구실이 될 거예요." 니콜은 나가 버렸다.  닥스와 킬
     리는 닫혀진 문을 바라보면서 한참 동안 그대로 멍하니  서 
     있었다.
     "드디어 마음을 결정할 때가 온 것 같군."
     "그렇군요, 당신의 선거 운동을 불리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
     어요."
     "알고 있어. 킬리에게 댄스를 신청한 것은 바로  나였어. 아
     주 순수한 마음으로  끌어안을 생각이었는데.  신문을 속지 
     않는군."
     "어쨌든 더 이상 연막을 칠 수는 없어요.  두 번 다시 만나
     서는 안 되겠어요.........절대로. 나는  아직 마크의 아내예요. 
     이것은 변할 수 없는 사실이에요."
     닥스가 문의 손잡이를 잡으면서 돌아다 보았다.
     "괜찮겠어? 그 사진에 대해 추궁을 받는다면?"
     "당신과는 워싱턴에서 만났고, 다른 의원과  [프루프]멤버와 
     같이 점심 식사를 했다, 당신의 도움에 감사하며 상원에 진
     출할 것을 기대한다-----------바보같이 이런  말만 되풀
     이하겠어요."
     닥스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형장에 끌려가는 사람처럼 
     나가기를 망설였다.
     "혹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킬리는 [아니오]하고 눈으로 대답했다.
     닥스가 나갔다. 킬리는  데스크로돌아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소리 없이 울었다. 그때 전화 벨이 울렸다.
     "네" 킬 리가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프레스턴 씨죠? 타임즈 피카윤의 그래디 시어즈입니다."
     킬리는 있는 힘을 다해  침착을 되찾으면서 수화기를  고쳐 
     쥐었다.
     "무슨 일이시죠?"

     9.
     
     이것을 신호로 하여 같은 종류의  전화가 잇달아 걸려왔다. 
     기자들은 이것저것 날카롭게 질문을 퍼부었으나, 킬리의 침
     착한 대답을 듣고는 대개가 실망하는  눈치였다. 디발 의원
     과 연애 관계가 있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킬리는 
     조용히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나같이 나이 많고 늙은 유부녀와 소문이 난 것을 알면 그 
     는 몹시 기분이 언짢을 거예요."
      "당신의 남편은 12년 동안이나 소식이  없고, 당신도 아직 
     젊지 않습니까? 디발 의원의 로맨스 상대는 여러 분야에 걸
     쳐 있으니까요."
      그럴까? 그 상대가 얼마나 될까? 나는 단순히 그 중의 하
     나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디발 의원의 연애 사건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대단히 친밀한 무드로 춤을 추고  있었는데, 거기 대해서
     는? 사진이란 속일 수 없는 것이 아닙니까?
      "그럴 테죠. 하지만 때로는 오해도 낳게 되는 것이 아닐까
     요? 디발 의원과 나는 워싱턴의 성과에 대해 적지 않게  만
     족하고 있었어요. 그는  <프루프>를 지원해 주셨어요. 선거 
     운동도 댄스처럼  능숙하다면 틀림없이  승리하게 될  거예
     요."
       어느 질문도 모두 비슷한 패턴이었다.  킬리나 닥스는 그 
     후 스캔들이 될 만한 일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문은 
     곧 가라앉을 징후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장  귀찮은 
     기자를 물리쳤다고 여겨 겨우  한시름 놓을 무렵에  최악의 
     사태가 일어나고야 말았다.
      닥스와 같이 텔레비전 인터뷰에 나간 지 4일 후의  일이었
     다. 킬 리가 일을 끝내고 조의 헬리콥터로 슈퍼돔에 돌아오
     자 차가 있는 곳에 밸 돌프가 기다리고 있었다. 
      "물체가 하늘을 난다는 것은 언제 보아도 경탄할  만한 일
     이군요." 밴 돌프가 멀리 날아가는 헬리콥터를 눈으로 좇으
     면서 말했다.
      "안녕하세요, 밴 돌프 씨. 뉴올리안즈에는 웬일이세요?  워
     싱턴에서는 기사거리가 끊어졌나요?" 킬리는 가시 돋친  행
     동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  경계했다. 적의를 부여서
     는 불리하다. 그녀는 방긋 웃음으로써 비꼼을 숨기려 했다.
      "이곳에 더 재미있는 기사거리가 있을 듯싶어서."
     안경 너머로 그의 눈이 먹이를 쫓는 짐승처럼 빛났다. 오만
     한 미소가 천천히 얼굴 전체로 퍼져 나갔다. "예를 들면 당
     신과 디발 의원의 관계 같은 것 말입니다."
      킬리는 오스카상이라도 탈 만한 연기로 깜짝 놀라는  체했
     다.
      "도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죠?"
      "어디서 한잔하면서 이야기할까요?"
      "고마운 말씀이지만,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그럼 여기서라도." 그는 겉저고리에서  접은 신문을 꺼냈
     다. 그리고 킬리와 닥스가 춤추고 있는 사진을 짓궂게 바라
     보았다. "사진이 참 잘 나왔군요, 윌리엄즈 부인."
      "고맙습니다." 킬리는 가볍게 그 말을 받아 넘겼다.
      "의원도 아주 훌륭하군요, 정말 핸섬하고."
      "네, 아주 핸섬하교." 킬리가 침착한 것을 부자  밴 돌프는 
     기대에 어긋났는지 약간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킬리는 선수
     를 쳤다. "내게 무슨 할말이라도 있으신 가요?"
      밴 돌프는 이 여자가 보통이 아니라는 듯이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디발 의원은 연설 못지 않게 여자를 안는  데도 능하던가
     요?"
      킬리에게 충격을 줄 셈이었다면, 그 질문은 과연 성공적이
     었다. 순간 킬리는 할말을 잊었다.
      "도가 좀 지나치군요, 그런 억측은!"
      "디발 의원과 당신은 친한 사이인가요?"
      "아뇨."
      "그럼 이 사진은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당신은 어떻게 설명하시겠어요?"  킬 리가 되받아물었다. 
     충격이 분노로 바뀌어 있었다. "춤은  누구하고나 출 수 있
     는 것이 아닐까요? 물어 보겠는데, 당신은 대통령이 화이트 
     하우스에서 춤춘 여성 전부와 정사라도 맺었다고  생각하십
     니까?"
      "분명히 춤은 누구하고라도  추죠. 그러나  이처럼 즐거운 
     표정은  좀처럼 볼 수 없거든요."
      "디발 의원은 매력적인 분입니다. 이번 청문회에서<프루프
     >편에 서 주신 것을 깊이 감사하고 존경, 이 두 가지뿐입니
     다." 거짓말, 하고 킬리의 마음이 말했다.
      "단 한 번 춤을 춘 일을 가지고 왜 그토록  신경을 쓰십니
     까?
      "그뿐만이 아닙니다. 워싱턴에서 남몰래  나누던 시선이나 
     미소. 비 오는 날. 당신들  두 사람이 다 같이 행방  불명이 
     되었던 일, 그러니 뭐 이상하게 생각할 법도 하잖소."
      킬 리가 웃었다.
      "그 억측보다는 진정한 이유를 찾는  것이 좋겠군요. 나는 
     디발 의원의 애인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실이었다. "장래에
     도 그렇게 될 가망이 없습니다." 이것은 거짓말. "이 정도면 
     춘분한 시간을 드렸다고 생각합니다. 상상으로 기사를 꾸며
     대기보다는 좀더 진실한 것을 쓰시기 바랍니다."
      킬리는 밴 돌프의 곁을 빠져나가 떨리는 손으로 차의 문을 
     열고 올라탔다.
      "디발 의원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밴 돌프가 빙그레 웃었다.
      "네, 그렇게 하죠."
      그날 밤 침실에 든 뒤에도 킬리는 불안하여 견딜 수가  없
     었다. 해서는 안 될 말이라도 하지  않았나 하고 밴 돌프는 
     내 말을 믿을까? 아마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기사에 쓸 
     만한 것은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확실한 증거
     도 없다. 사실 닥스와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모든 사람이 나를 닥스의 애인으로 취급하려  들
     고 있다. 닥스가 여자와 플라토닉한 관계를 맺는 제도 닥스
     의 많은 <상대자>이름이  신문의 사교란을 장식했다.   그 
     리스트의 말미에 내 이름이  실리지 않도록 극력  부인하고 
     있으나,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 만일에 닥스의 애무를  끝까
     지 받아들였다면, 나도 그에게 있어서  그런 여자의 하나로 
     취급되고 말았을까. 단순히  그의 몇 번째  여자로. 하지만, 
     아니다. 그건 아니야........... 
      석간에 닥스의 인터뷰  기사가 실려 있었다.  킬리와 찍은 
     사진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차라리 어
     업 조합의 대표와 찍는 편이 나을  뻔했군. 그러는 편이 사
     람들은 윌리엄즈 부인처럼 아름답지는 않겠지만. 이런 경우
     이니 가볍게 받아넘기는  것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이것이 그의 진심인지도 모른다......
      킬리는 침실의 벽에  있는 책장에 시선을  보냈다. 세단째 
     선반에 마크와 찍은 결혼 사진이 놓여 있었다. 신부는 앞머
     리를 내리고, 긴 머리를 양쪽 어깨에 늘어뜨리고 있었다. 푸
     른색 초미니 원피스에 흰  부츠, 지금에 와서  보면 우습기 
     짝이 없는 모습니다. 웨딩 드레스 따위는 없었다. 그것을 잔
     만할 틈조차 없었다.
     마크! 당신은 지금 어디 있나요? 어떻게 되었나요? 아직 살
     아 있나요? 눈물로 사진이 흐리게 보였다. 친절하고 활달하
     며 이상적인 첫사랑의 남자!
     사진 속의 마크는 장발이었다. 입대하기  며칠 전의 모습이
     었다. 큰 체구에 상의를 꽈 째게 입고, 그 무렵에  유행하던 
     벨 보텀(선원의 나팔바지)의 바지를 입고 있었다. 두 사람은 
     웃고 있었다, 결혼이란 어른스러운 일을  했다는 사실이 기
     뻐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사진 속의 앳된 처녀와 지금의 자기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남남인 것만 같았다. 그리고  마크도. 만일 그가 살아  있다 
     해도 옛날 그대로의 젊은이가 아니다.  어떤 사람이 되었을
     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사진 속의 사나이는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리고 여자도.
     킬리는 반듯이 누워  천장을 쳐다보았다.  마크와의 즐거운 
     추억을 회상하려 하면 할수록 생각나는 것은 닥스뿐이었다.
     눈을 감고 환상의 연인을 맞아들였다.  그 사나이는 마크와 
     같은 금발이 아니라, 프랑스  계통의 피를 받은  검은 눈과 
     검은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깊고도 강한 키스. 그는 혀를,  이를, 입술을 감미로운 기구
     처럼 구사하여 욕정을 불러일으킨다. 가슴의 골짜기에서 무
     언가를 속삭이고, 부드러운 살갗에 다정한  키스의 비를 퍼
     붓는다. 손이 천천히 몸 아래쪽으로 미끄러져 내려오고,  귀
     에다 찬사를  부어 넣는다.  몸을 움직인다.-----주고받고, 
     또 그와 하나가 되어 온 몸이 환희에 넘치는 음악을 연주한
     다.
     킬리는 몸을 활처럼 구부렸다. 따스한  파도와도 같은 감각
     이 몸속에서 물결치며, 숨결을 거칠게 만든다. 깜짝 놀라 눈
     을 떴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
     지를 깨닫자, 킬리는 부끄러움으로  몸 둘 바를 몰랐다.  이 
     순간 그녀는  남편이 아니라  닥스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
     다.----고통의 눈물이 베개를 적시고 있었다.
     
     "점심때 잭슨 스퀘어에서 샌드위치를 먹지 않겠어?"
     여느 때처럼 니콜은 아무 전제도 없이 이런 말로 전화를 걸
     어 왔다.
     "나.........."
     "더 좋은 약속이라도 있어?"
     "아니."
     "그럼 30분 후에  정문 입구에서 만나기로  해. 샌드위치를 
     가지고 나갈 테니."
     킬리와 닥스를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끌어낸  이후, 니콜은 
     계속 킬리를 피하고 있는 듯했다.  전화도 자주하고 복도에
     서 만나 이야기하던 이전의  일을 생각하니 쓸쓸한  생각이 
     들었다.
     약속 시간에 킬리는 밑으로 내려가 니콜을 만났다. 두 사람
     은 사르트르 거리의 빌딩을 나와 상 루이 대성당이 있는 공
     원으로 발길을 향했다. 그곳은 킬 리가 좋아하는  장소였다. 
     거리의 화가들이 그림을 진열해  놓고 있는 길을  걷노라면 
     저절로 마음이 느긋해지곤 하는 것이었다.
     맑게 갠 날이었다. 광장에 들어서자 앤드루 잭슨의 동상 머
     리 위에서 비둘기가 한가롭게 날개를 펴고 있었다. 이른 봄
     의 꽃봉오리가 조금씩 고래를 내밀기  시작하고 있었다. 비
     어 있는 벤치를 찾아서 앉자 니콜이 종이 봉투에서  샌드위
     치를 꺼냈다.
     "망설이고 있는 중이야."  니콜이 달걀  샐러드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말했다. "말을 할까말까 하고."
     "무언데?"
     "용서해 줘."
     후회하는 듯한 니콜의 얼굴을 보자 킬리는 저도 모르게  웃
     음이 나왔다. 그러면서 니콜을 꼭 껴안았다.
     "사과할 사람은 나야, 너하고 제대로 이야기도 나누지 못해
     서 아주 쓸쓸했어."
     니콜이 눈물에 젖은 눈을 깜박였다.
     "아아, 다행이야, 끝나 버려서. 평생  우울한 마음으로 지내
     야 하는가 하고 생각했어."
     "그 방법은 반칙이야. 하지만 그대  나는 다른 일로 부아가 
     나 있었어." 킬리가 말했다. 닥스와 안 만나게 된  지도 2주
     일이 지났다. 시간이 상처를 아물게 해  준다고? 그것은 거
     짓말이라고 생각되었다. 만나지 못하면 못하는 것만큼 닥스
     의 모습이 짙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왜 순교자처럼 자신에게 고통을 주고 있지? 그를 사랑한다
     면 그대로 하면 되지 않겠어? 그는 국회의원이지만  남자임
     에는 틀림이 없어. 지금 시대에는 누구와 잤다고 해서 심각
     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자기 마음이 시키는 대
     로 하는 것이 어때?"
     "그에 대해서도 생각해 줘야 해."
     "어째서? 그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 거야. 킬리가 그를 유
     혹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어. 적극적으로 나온 것은 그 사
     람이 아니겠니?"
     "응, 하지만...............나도 거부할 수 없었어............."
     "벌써 관계가 있었니? 지나친 간섭인지 몰라도."
     "아니" 킬리는 분명하게 대답했다.
     "알겠어. 그러니까 자꾸 생각이 나는 거야. 한번  관계를 가
     져 봐. 그러면 곧 잊어버리게 될 테니까!" 니콜은  촉촉해진 
     킬리의 푸른 눈을 들여다보았다. "아아.........아아, 킬리는 정
     말 사랑에 빠졌구나!"
     "나는 너처럼 사랑과 섹스를 구별해서 생각하지 못해. 너처
     럼 홀가분한 남자  침대에 들어가거나 하지는  못해." 말해 
     버리고 나서 킬리는 곧 후회했다. "미안해. 널  비난할 생각
     에서 한 말이 아니야. 네가 무슨 생각을 하건 그것은 네 자
     유야." 니콜이 짤막하게 웃었다.
     "그래, 나는 그런 여자야." 그녀는 한참 동안 허공을 바라보
     고 있다가 이윽고 빛나는  금발을 나부끼면서 킬리  쪽으로 
     돌아앉았다. "나도 너 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하고 바란 적
     이 많아." 킬리가 깜짝 놀랐다. "놀라는구나. 왜 그럴까? 틀
     림없이 네가 인생의 가치를  분명하게 깨닫고 있기  때문일 
     거야. 너처럼 진지한 사람이 되고 싶어. 너처럼 남의 존경을 
     받아 보고 싶어."
     "어째서.........어째서? 너는 많은 남자들과........."
     "잤다는 말이지?" 니콜이 씁씁하게 웃었다. "언제나 누구한
     테 요구받지 않으면 살아 있을 마음이 생기지 않아. 어머니
     는 내가 아직 철도 들기 전에  집을 나갔어. 아버지는 어머
     니에 대한 분풀이로 밤낮 없이 나를 윽박질렀어, 에미를 닮
     아 칠칠치 못하다면서." 니콜은 스커트의 주름을 펴면서 말
     을 계속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는 남자들에게서 충족
     되지 못한 아버지의 사랑을 찾고  있는 듯싶어. 브래지어를 
     하던 그 날부터 아버지는 나를 화냥년으로 취급했어. 그 말
     이 맞아, 나는 화냥년이야."
     "아니야! 그렇지 않아. 너 역시 진실한 사랑을 하겠다는  마
     음은 가지고 있어. 다만 아버지에게서처럼 거절당하지 않을
     까 하는 강박관념 때문에, 그것이 무서워 진정한 사랑을 하
     지 못한는 것 뿐이야."
     "지금 우리는 누구 이야기를 하고 있지? 네 이야기를  하려
     던 것이 아니었니?"
     "오늘은 네 이야기를 하기로 해.  표면과는 다른 네 쓸쓸한 
     면을 받아들여 준 남자도 있을  거야----예를 들면 찰즈라
     거나..............."
     니콜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야 말로 헛일이야! 아무리 그를 침대에 끌어들이려 해도 
     전혀 움직이지 않는거야.  이렇게 되면 프라이드의  문제지. 
     그러니 자연히 반항심이 생길 수 밖에 ............."
     "그 점이 바로 그의 훌륭한 면이야."
     "그를 위해 다른 모든 남자를 단념한다면.........."니콜은 콘크
     리트 바닥에 딩구는 자갈을 발끝으로 찼다.
     "너한테 여러 가지로 잔소리를 많이  하지만, 사실은 네 생
     활 방식과 이상을 존경하고 있어."
     킬 리가 미소지었다.
     "나는 너의 넓은  아량이 무척 부러워.  모랄이란 두려움과 
     상통하는 것이 있는 지도 몰라."
     "닥스는 너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니?"
     "글쎄.............진지해 보이긴 하지만.......그러나....."
     "킬리, 이것은 너보다 조금은 더 남자를 알고 있는 내 견해
     인데, 그 역시 너와 마찬가지로 중병에 걸린 것 같아.  절대
     로 화내지 말고 들어 줘. 사실은  내가 그에게 약간의 모우
     션을 걸어 봤어."
     킬리는 어이가 없어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날 네가 화를 내며 스튜디오에서  뛰쳐나간 뒤, 내가 시
     험을 해 봤어. 하지만 그는 전혀 반응하지 않았어. 네가  나
     가 버린 문 쪽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어."
     "그렇다고 어떤 증명이 되는 것은 아니잖아?"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내 직감으로는  너와 그가 아직 끝
     났다고는 생각되지 않아." 킬 리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야, 이미 끝났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로."
     "킬리, 솔직하게 대답해 줘. 오늘 밤 남자를  택해야 한다면 
     닥스와 마크 중 어느편이 좋다고 생각하니?"
     킬리는 한 대 얻어 맞은 듯이 펄쩍 뛰며 일어섰다.
     "어마! 그런 것은 대답할 수 없어!"
     니콜은 동정하듯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그것이 바로 대답이야."

10.
      킬리와 니콜은 여학생처럼 간드러지게 웃으면서 스튜디오의 
     육중한 문을 밀치고 복도로 나왔다.  잭슨 스퀘어에서 점심
     을 먹은 지 2주일이 지나 있었다. 그날 마음을 서로 터놓은 
     이래 두 사람의 우정은 전보다 더욱 두터워지게 되었다. 그
     날은 니콜이 저녁 뉴스 프로그램의 빈 시간에 같이  식사를 
     하자고 킬리를 청한 것이었다.
      "거짓말 같아, 정말 거짓말 같아." 니콜은 얼마나 웃었는지 
     눈물까지 흘렸다. 두 사람은 또다시 배꼽을 쥐고 웃었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가르쳐 줄 수 없을까?"  두 사람이 
     돌아다보니 찰즈 햅번이 서 있었다. 곁에 닥스 디발도 함께 
     있었다. 진공 소제기에 먼지가 빨려  들어가듯 킬리의 몸에
     서는 한꺼번에 웃음이 빠져나가고 말았다.  입은 웃는 모양
     을 한 채 굳어져 꼼짝할 수가 없었다.
      "찰즈, 오늘 뉴스를 보지 못했어요?" 니콜이 그의 목에 팔
     을 감고 계속 웃으며 말했다.
      "아니, 지금 막 닥스  씨와 상의를 끝내고 나오는  길이야. 
     무슨 일이 있었나?"
      "큰 사건이에요. 틀림없이  스폰서가 모드 달아날  거예요. 
     하지마 우리는 너무너무 우스워서!"
      니콜의 웃음이 감염되었는지 닥스도  빙그레 웃었다. 찰즈
     는 마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처럼 나콜을  바라보았
     다. 
      "어서 말해 봐."
      "CPR----구급 소생법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었어요.  그리
     고 이런 말로 끝을 맺었어요. 잘 보아 주세요. 다음  필름은 
     당신과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라고. 그런데 방영된 필름은 CPR의 것이 아니
     라 설사약 코머셜이었어요."
      찰스와 닥스도 허리를 잡고 웃어댔다.
      "내가 목숨을 구하기  위해, 라고 말했을  바고 그 순간에 
     설사약 상자가 클로우즈업되어, 아하하하.....안되겠어,  킬리. 
     다음은 네가 설명해 줘."
      "코머셜이 끝나고 카메라가  니콜에세 향해졌지만, 니콜은 
     하도 우스워서 말도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원고를 모두 일
     기 예보로 메워 버렸어요. 이것이 또 불찰이었어요.  리포터
     는 아직 상의를 입지 않은  상태였거든요. 다행히 마이크만
     은 부착하고 있었어요. 어쨌든 그는 겨우 원고를 읽기 시작
     했기는 했으나, 그 순간 담배를 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만......."
      "그 후가 더 재미있어요."하고 니콜이  말을 받았다. "그는 
     시치미를 떼고 담배를 바닥에 떨어뜨렸어요. 그런데 발밑에
     는 천기도와 원고 따위가 쌓여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불이 
     붙었어요. 그래서 그는 불을 끄려고 바닥을 막 발로 비벼댔
     어요, 막대로 천기도를 가리키면서. 그 막대가 흠칫흠칫하면
     서......"하고 니콜이 그  내를 내 보였다.  모두 허리가 끊어
     져라 웃어댔다. '아침이 되면 틀림없이 우리같은 고함  소리
     를 듣겠군."
      "설마! 높은 사람들도 할말이 없을 거예요, 그렇게  재미있
     는 뉴스는 개국  이래 처음이니까요?"
      니콜과 찰즈가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킬리와 닥스는 빨려
     들 듯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킬리는, 그가 무척 피곤한지 눈 주위에  깊은 그림자가 져 
     있다고 생각했다. 닥스도, 그녀가 창백해지고 큰 눈이  더욱 
     켕해졌다고 생각했다.
      킬리는, 그의 귀밑머리가 전보다 더 하얘졌다고  생각했다. 
     킬리는, 그의 아름다운 얼굴은 꽃향기가  풍기고 있다고 생
     각했다.
      킬리는, 그의 보조개가 더욱  매력적으로 보인다고 생각했
     다. 닥스는, 약간 벌려진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고 싶다는 생
     각했다.
      킬리는, 그는 키도 크고 늠름해 보이는 남자라고 생각했다. 
     닥스는, 그녀는 정말 아름다운 여자라고 생각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닥스?"
      찰즈가 묻는 바람에 두 사람은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아, 시례........그만 듣지를 못해서."
      "니콜과 킬리도 같이 저녁  식사에 초대하는 것이  어떨까 
     싶어서."
      "물론 좋죠."
      "아로노의 가게에 가고 싶은데 어떨까?"
      "좋아요." 니콜은 즐거운 듯이 대답하고, 킬리를 향해 가지 
     않으면 그냥 두지 않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는 닥스에게 라디오를 통한 선전 활동에 대해 이야기하
     는 것이 좋겠어. 그 일이라면 찰즈보다 더 상세할 테니까."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킬리가 우물쭈물하면서  말했다. 
     이언 것이 단순히 같이 나가기 위한 명목에 지나지  않는다
     는 것은 누구나 다 잘 알고 있었다.
      이야기는 결정되었다 이 만남은 우연한 것으로서 킬리에게
     는 아무런 책임도 없었다. 닥스도 기뻐하는 것처럼  보였다. 
     몰론 이런 경우에 그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으리라. 킬리는 
     미안한 생각이 들어  사과하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닥스의 눈은 이러한 결과가 오히려 기쁘다는 듯이 다정하게 
     빛나고 있었다.
      닥스는 잠자코 킬리의 팔에서 얇은 레인코우트를 받아  입
     혀 주었다. 킬리는 등을 돌리고 팔을 꿰었다. 그와 몸이  닿
     기라도 한다면 틀림없이  비틀러리며 쓰러지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한 것이었다.  닥스의 몸에서 시
     트라스 계통의 화장수 향기가 은근히 풍기고 있었다.
      "안됐지만 차 있는 데까지 잠시 걸어야 하겠는걸." 찰즈가 
     니콜의 어깨에 팔을 얹고 입구 쪽으로 걸으면서 말했다.
       비좁고 울퉁불퉁한 보도로 나오자 닥스는 킬리의 팔을 붙
     들고 걸었다. 신사라면 누구든지 그렇게 할 것이다.  에티겟
     이니까. 그러나 닥스의 행동은 무척 에로틱하게 생각되었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킬리의 관절의 오목한 곳을 따라 움직이
     며 천천히 애무했다.
      두 사람은 찰즈의  메르세데스벤츠 뒷자리에 나란히  앉았
     다. 그러자 두 사람의 무릎이 서로 닿았다. 다른 곳은  아무
     데도 닿지 않았다. 차가 흔들림에  따라 스타킹과 플란넬의 
     양복바지가 스쳤다.
      니콜과 찰즈는 열심히 떠들어대고  있었으나, 킬리와 닥스
     는 제대로 듣고 있지 않았으므로 건성으로 하는 것이었다.
      찰즈는 드핀 거리에세 차를 세웠다. 일행은 비언빌 거리까
     지 다시 한참을 걸었다. 이름을 부를 정도로 친밀해진 주인
     이 직접 그들을 구석진 테이블에 안내해 주었다.
      킬리는 유럽식으로 구민 아르노 레스도랑의 분위기가 매우 
     마음에 들었다. 아늑하고 우아한 장식이나 웨이터들의 속삭
     이는 듯한 저음이 모두 마음에  들었다. 접시나 나이프까지
     도 조용한 분위기를 파괴하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놓여졌다.
      그러나 오늘밤의 킬리에게는 곁에 있는 남자 이외에는  아
     무것도 흥미가 없었다. 두 사람은 메뉴를 보는 체하면서 서
     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찰즈가 무었을  먹겠느냐고 묻자 두 
     사람을 어떨결에 똑같은 송어 무니엘을 먹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다시 서로의 눈길에 신경을  집중햇다. 찰즈는 지금
     의 두 사람은 먹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적당
     히 수프와 샐러드를 주문했다.
      "오늘 오후에는 졸곧 닥스 씨와 지냈지." 찰즈가 아페리티
     프를 마시면서 설명햇다.
      "머마, 그래요?" 니콜이  대고햇다. "그래,  코머셜 시간을 
     샀나요, 다그?"
      "나는 원체 머리가 나쁜 사람이라서, 조건과 그 밖의 것을 
     설명하면 할수록 점점 더 모르겠거든. 그리고 아주 돈이 많
     이 드는 것 갖더군----필름 제작을 제외하고도......"
      "그렇지요. 코머셜을 내보내려면 우선 코며셜 필름이 필요
     하죠."하고 찰즈가 빙그레 웃었다. "우리가 종은 프로덕션을 
     소개하죠."
      "우선 이런 일은 모두 전문가를 고용하는 것이  선결 문제
     가 아닐까요?"
      "그렇군요. 워낙 바쁜 몸이니 전문가에게  모든 것을 맡기
     고 당신은 자기 일에만 전념하는 것이 좋겠군요."
      웨이터가 친네를 냅킨을 깐 바구니에 프렌치 로울을  담아 
     가지고 왓다. 한가운데에 희게  칼집이 난 빵은  잘 구워져 
     있었고, 속은 잘 부풀어  있었다. 닥스는 빵을 잘라  버터를 
     듬뿍 발라 가지고 킬리에게 건네었다.  손끝이 닿자 눈길도 
     마주쳤다. 살갗이 약간 닿기만 해도 전류가 흐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을 끌어당기는 자력선이 웨이터가 가져온 양파 스프
     로 인해 한 순간 끊기고 말았다.
      평일 밤이었기 때문에 래스토란은  혼잡하지 않았다. 그러
     나 누가 어디서 호기심의 눈을  빛내고 있는지 알 수  없었
     다.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단순히 테이블 같이하고 있
     을 뿐이라는 사실을 위장할 필요가 있었다. 식사 도중의 대
     화는 유쾌하게 진행되었다. 가끔가다 니콜이 찰즈를 도발시
     키려고 점잖지 못한 말을 내밷곤 했다.
      "디저트가 필요한 사람은?" 호스트격인 찰즈가 물었다.
      "나는 당장 펑크가 날 것만 갚아요." 하고 말한 것은 니콜
     이었다.
      "커피로 하겠어요."하고 킬 리가 말하자 나도, 하고 닥스가 
     덧붙였다. 커피가 나오자 닥스는 아무 말도 없이 킬리의 컵
     에 밀크만을 타고 젓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은연중에 나타
     내는 친밀성에 니콜과 찰즈는 가만히 눈을 깜박거렸다.
      출입구에서 코우트를 입으면서 니콜이 말했다.
      "조금 걸은 뒤 디저트를 먹겠어요. 내가 좋아하는 것 알고 
     있겠죠? 카페 드 몽드의 도너츠."
      "카페 드 몽드까지 걸어가자는 말인가?" 찰즈가 물었다.
      "그래요. 노인네에게는 무리인가요?"
      "어떻게든 도착하기는 할 테지만, 다시  돌아오는 것이 문
     제지. 더구나 시간이 없어. 잊어버리면 안돼, 니콜에게는 아
     직 할 일이 남아 있어."
      "택시로 돌아오면 돼요. 그리고 오늘밤에는 장편영화가 방
     영되니까 틀림없이 뉴스 시간은 짧아질 거예요."
      "어떻게 하겠소?"
      "나는 별로 예정이 없지만."하고 닥스가 대답했다.
      "나도 별로.........." 킬리도 말했다.
      이것으로 결정이 되었다. 두 사람 모두 가슴이 뛰었다.  비
     즈니스라는 명목하에 남의 이목을 상관하지 않고 저녁 한때
     를 같이 지낼 수 있는 것이다.
     "버번 스트리트를 지나서 가요."  하고 니콜이 말하자 찰즈
     는 마음이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곳은 시끄럽고 풍기도 문란하고  난잡한 곳이야. 타락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지."
     "알고 있어요. 나는 타락이 아주 좋거든요." 니콜이 푸른 눈
     을 빛냈다. 그러고는 찰즈의 팔을 붙들고  끌 듯이 하며 걸
     어갔다. 버번 스트리트에 다다르자 네  사람은 사육제의 마
     지막 날과도 같은 인파 속에  휩쓸리고 말았다. 뉴올리안즈
     의 버번 스트리트에는 그곳만의 냄새와  소리가 있다. 스파
     이스를 친 생선 요리와 맥주 냄새가 프렌치 쿼터의  구수하
     고 습한 분위기와 혼합되어  일종의 독특한 공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또 재즈를 연주하는 나이트 클럽이 거리에 즐비
     하여, 이것을 컨트리 웨스턴 밴드의  멜로디와 어울려 불협
     화음을 내고 있다. 토플리스 바의 안내자가 가끔 문을 열고, 
     안에 있는 무용수의 모습을 슬쩍 보여줌으로써 통행인의 눈
     길을 끌려 하고 있다. 갖가지 빛깔의 라이트가 점철되는 가
     운데 반나의 육체가 흘끗 보였다. 어느  클럽 앞에 있는 간
     판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섹스 플레
     이 상영중!]
     "어째서 세계적으로 유명할까?" 찰즈가 말했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아직 들어가 본 일이 없는 모양
     이군요?" 하고 니콜이 조롱했다.
     걸어감에 따라 길이 점점 번화가에서 벗어나 조용해지기 시
     작했다. 네 사람은 세인트 피터 거리로 접어들었다.  여기에
     는 카페가 있는 잭슨 스퀘어로 가는 길이 있었다. 거리에는 
     사람의 왕래가 없고 어두컴컴했다. 니콜과  찰즈가 앞서 걷
     고 있었다. 닥스가 킬리의 어깨에 팔을 감고 끌어 당겼다.
     "그동안 잘 있었나?"
     "네, 당신은요?"
     "나도 잘 있었지."
     "피곤해 보이는군요. 바쁘셨어요?"
     "약간, 3주일 동안 워싱턴에 가 있었지, 삼의할 일이 산더미
     같이 쌓여서."
     "그랬었군요."
     "화이트 하우스에서 대통령 부부와 저녁을 가이 하기도  했
     지."
     "어머나!"
     "물론 의례적인 회식이었지만 기분이 좋더군." 닥스는 소년
     과 가이 환한 얼굴을 했다.
     잠시 동안 말없이 걷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킬리의 담화를 신문에서 읽었지."
     "나도 당신의 기사를 읽었어요."
     "그것이 모두 사실이라고는 믿지 않았겠지?"
     "예를 들면 어떤 것?"
     "예컨대 이런 대목말이지. 아주 중요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 
     그녀를 용기 있는 여성으로 칭찬하고 싶다. 그러나 연애 감
     정은 전혀 느끼지 않고 있다.-------" 킬리의 가슴은 몹시 
     두근거리고 있었다. 앞엣말은 사실이지만 뒷말은 사실과 달
     라. 내가 킬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안다면 이렇게 어
     두운 거리를 같이 걷는 것이 무섭게 생각될지도 몰라. 지난
     달엔 잠도 잘 이루지 못했고 식욕도 없었어. 아침마다 일어
     나 보면 매일같이 흰머리가 열 개는 늘어나 있었어. 킬리는 
     그 이유를 알수 있을까?"
     어느새 잭슨 스퀘어에 도착해 있었다.  야간에는 공원 문이 
     닫히곤 한다. 퐁타르바 빌딩 앞을 지나 쇼 윈도우를 들여다
     보는 체하며 걷고 있었으나, 실은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기자들이 시끄럽게 굴어서 혼이 났겠지?"
     "별로요. 고작 이삼일 동안이었어요."
     "미안해, 킬리. 나는 그런  일에 익숙해져 있어서  대수롭지 
     않지만..............."
     "어쨌든 모두 잘 넘어갔어요. 하지만 밴 돌프가........"
     "밴 돌프? 그 녀석이 킬리에게도 왔었나?"
     "네, 슈퍼 돔에서 붙들렸어요......"
     "그 얼간이 녀석.....킬리를 중상하지는 않았을 테지?"
     킬리는 웃음을 터뜨리며 닥스의 레인코우트 자락을  가만히 
     만졌다.
     "하지만 좀 심한 말을 묻더군요."
     "어떤 말?"
     "그것은 ..........저어............."
     "무어라 했는데?"
     킬리는 얼굴이 빨개지며  시선을 돌렸으나,  닥스가 그녀의 
     턱을 붙들고 자기 쪽으로 돌렸다.
     "저어..........당신의 잠자리에서의 그 일도 능숙하냐고.........."
     "망할 녀석이!" 닥스가  킬리의 어깨를  힘주어 꼭  쥐었다. 
     "만일 킬리를 모독하는 글을 한 줄이라도 쓴다면..........."
     "괜찮아요. 쓰지 않을 거예요. 그는 더러운 인간이지만 바보
     는 아니에요. 기사화할 아무 증거도 갖지 못했다는 것을 알
     고 있을 거에요."
     "그래서 킬리는 무어라 대답했지?"
     "정직하게 모른다고 했죠."
     갑자기 닥스는 장난기가 섞인 미소를 띠었다.
     "알아맞혀 봐, 어떨지."
     "무엇을요?"
     "잠자리 속에서 내가 어떨지."
     "어마!"
     "내가 힌트를 줄  테니까."
     "싫어요."
     그러자 닥스가 킬리의 귀에 입을 갖다 대고 속삭였다. 
     "아직 [세계적으로 유명]한 정도까지는 못 되지만 노력하고 
     있지." 킬리는 조금 전 나이트  클럽 앞에서 니콜과 찰즈가 
     나눈 대화를 생각해 내고 웃음을  터뜨렸다. 닥스는 킬리의 
     머리를 자기 가슴에 끌어 안으며 머리 뒤를 더듬어 귀 뒤쪽
     을 가만히 애무했다.
     "킬리에게 키스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어. 하지만 길 한
     가운데라서 곤란하군."
     킬 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닥스는 안타깝다는 듯이 팔을 풀
     고, 모퉁이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니콜들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카페 드 몽드는  백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오랜 
     가게였다. 지금도 뉴올리안즈에서 인기 있는 곳으로 손꼽히
     고 있다. 가루 설탕을 뿌린 베네라는 도너트와 카피만을 파
     는 곳이었으나 하루 24시간 내내 손님의 발길이 끊이지  않
     는다. 바로 강가에 있기 때문에 싸늘한  안개가  끼어 있었
     나, 네 사람은 지붕이  있는 포치의 테이블에 앉았다.  녹색 
     비닐로 된 의자와 잿빛 내열 플라스틱 테이블이 놓여  있을 
     뿐인 아무런 장식도 없는 가게였지만,  손님들은 맛있는 도
     너트와 뜨거운 커피를 마시기 위해 찾아든다. 도너트 두 접
     시, 불랙 커피 석 잔, 그리고 킬리를 위해 카페 올레를 주문
     했다. 방금 튀겨 낸  향기로운 도너트와 강한  향기가 나는 
     뜨거운 티콜리 커피가 나왔다.
     가루 설탕이 떨어져 입 언저리는 물론 손과 옷이 하얗게 되
     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네 사람은 도너트를 맛있게 먹었다. 
     니콜은 접시에 떨어진 설탕을 손가락으로  찍어 먹었다. 일
     부러 그렇게 해 보이는 것이다.  그러고는 강변으로 나가자
     며 찰즈에게 수상한 시선을 보냈다.
     "니콜에게는 앞으로 할 일이 남아 있어."
     "시간은 충분해요." 니콜은 발딱  일어나 제방에 이르는 터
     널 쪽으로 달려갔다.
      달밤의 산책길이라 불리는 이 길은 희미한 가로등  불빛에 
     의해 그 로맨틱한 분위기가 더 살아나는 것만 같았다.
     세 사람이 터널을 빠져나와 길에 이르자, 니콜은 이미 찰즈
     와 자기 벤치를 확보하고 있었다. 킬리와 닥스는 좀더 걸어 
     나갔다. 벤치에 앉자 밤의 그림자와  미시시피 강의 안개가 
     두 사람을 포근히 감쌌다. 가로등의 불빛이 수면에 비쳐 흔
     들리고 있었다. 낮에도 경치가 좋은  곳이지만 밤에는 더욱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닥스가 킬리를 품속으로  끌어당겼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의 숨결이 얼굴에 닿고 이어서  입술이 겹쳐왔다. 오랫동
     안 금지당했던 키스는 두 사람의 마음을 더욱 뜨겁게  만들
     었다. 그들은 한참 동안 열정적으로  입술을 교환하고 나서 
     깊은 숨을 내쉬며 몸을 떼었다. 잠자코 서로 바라보았다. 두 
     사람만의 수중한 한때였다. 머리를,  눈을, 귀를, 입을......
     .그리고 또. 그들은 참지  못하고 꼭 껴안았다. 
      겹쳐진  입술이 서로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던 불신과 의혹을 
     깨끗이 씻어 주었다.
     닥스는 입술을 떼고 안개로 촉촉해진 킬리의 머리에 얼굴을 
     파묻었다.
     "킬리, 최근 몇 주일은 흡사  지옥 같았어. 킬리에 대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어."
     "나도 안타까왔어요. 어쩌면  당신은 신문에 이야기  한 것 
     정도로 밖에 나를 생각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싶어서요."
     "아니야, 내 마음을 이해하겠지? 무슨 말이든 해야 했기 때
     문에 그저 할 수 없이.........."
     "네, 하지만.........."
     "킬리에게 전화하고 싶었어. 그러나  혹시 도청이라도 당할
     까봐서........"
     "그런 일까지 걱정하고................" 그가 귓불을  살짝 
     깨무는 바람에 킬리는 신음소리를 냈다.
     "나 자신보다도 혹시 킬리가..........."
     "닥스, 우리는 그토록 주목받는 일을 했을까요?"
     "많은 사람이 우리가 춤추는 것을 보고 있었어. 그렇게까지 
     우리한테 이목이 집중되어 있다는 것은  미처 몰랐어. 나는 
     다만 킬리를   끌어안고 싶었고  킬  리가  필요했기 때문
     에.........." 닥스는 킬리의 손을 끌어당겨 꼭 쥐었다. 
     "킬리, 나는 킬리가 필요해, 킬리의 모든 것이 필요해."

     
     11.
     킬리는 가슴에 안긴 닥스의 머리를 끌어안으면서 그 머리를
     조용히 쓰다듬었다. 위로가 될 말을  해주고 싶었으나 생각
     이 나지 않았다. 킬리도 닥스와  마찬가지로 고통스러운 마
     음에 잠겨 있었다.
     찰즈가 이쪽으로 왔다. 그리고  약간 떨어진 곳에  서서 강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킬리는 닥스의  머리를 가만히 흔들
     면서 이름을 불렀다. 닥스가 얼른 고래를 들었다.
     찰즈가 크게 헛기침을 하면서 말했다.
     "미안하지만 니콜이 방송국에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물론 
     우리만 먼저...................."
     "아니.............우리도 가야 해야."  
     닥스가 킬리의  팔을 잡았다. 
     킬리는 얼른 코우트의  단추를 잠그고 백을  집어 들며 
     일어섰다.
     니콜은 벤치에 나른하게 앉아 시치미를  떼고 있었으나, 그 
     모습에는 만족감이 깃들여 있었다. 킬리는  혹시나 하고 찰
     즈 쪽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침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겉만  보아서는 알 수  없는 일이라며 
     킬리는 혼자 빙그레 웃었다.
     네 사람은 잭슨 스퀘어의 정면으로 돌아왔다.
     "차는 방송국 주차장에 있으니까 여기서 방송국까지 걸어서 
     갑시다. 나는 나중에 택시를 잡아타고 가서 차를 가져올 테
     니까." 찰즈가 보이 스카웃의 단장처럼 말했다.
     "그렇게 합시다."닥스는 킬리의 허리를 팔에 두르고 안개로 
     젖은 길을 걷기 시작했다. "부질없는 생각은 그만두자고 결
     심을 하지만, 그렇게 하면 할수록 더 생각이 간절해지는군."
     "우리 이름이 신문에 난 것을 마들레인은 어떻게  생각하나
     요?"
     "글쎄, 물어 보지 않았는걸?"
     "어떻게 생각하건 상관없다는 말인가."
     "킬리에 관한 한에서는. 그녀는 큰 부자이고 미인이어서 때
     로는 같이 있는 것이 즐겁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소유욕
     이 강하고 질투심이 많아 탈이지."
     "당신은 그 여자와..........?"  
     킬리는 자기 마음을  거역할 수 없어 이렇게 말하고는 촉촉히  
     젖은 콘크리트 길을  내려다 보았다.
     한 구획쯤 말없이 걸은 끝에 닥스가 대답했다.
     "그 물음에 대답하는 것은, 마들레인에 대해서나 내가 상대
     했던 다른 여자에 대해서도 실례가 되는 것 같군."
     "미안해요, 물을 권리도 없으면서 이런 말을 해서."
     이가 갈릴 정도로 킬리는 자기 자신이 싫어졌다.
     "아니, 권리가 있어. 사과할 것 까지는  없어. 그리고 킬 리
     가 그런 일에 신경을 써 주는 것이 오히려 고맙기도 한걸."
     그들은 KDIK 방송국 건물 모퉁이에 닿았다. 닥스가 킬리를 
     끌어 안으며 조용히 말했다.
     "이것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지. 킬리와 알게 된 후로는 아
     무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았어."
     치솟는 기쁨에 킬리는 닥스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눈을 
     감았다. 닥스에게는 다른 여자가 있다는  생각을 하며 계속 
     속을 태워 온 킬리였다. 그러나 지금 킬리의 마음은 하늘을 
     날 듯이 기뻤다.
     "그런 말은 해주지 않아도 좋았는데요."
     "하지만 이야기를 듣고 보니 아주 기쁘지?"
     마음속을 그렇게도 잘 꿰뚫어 볼 수가 있는가 생각하며, 키
     릴는 "네" 하고 정직하게 대답했다.
     "방해할 생각은 없어요.-----어떻게 되었나  하고 잠시 살
     피러 왔어요. 아주 잘 되어가는 것 같군요."  니콜이 조롱했
     다. "찰즈가 뉴스 끝날 시간까지 기다리다가 집에 바래다주
     기로 했어요. 지장 없으시다면 두 분도."
     "나는 돌아가야 해, 다섯 시에 일어나야 하니까."
     "내가 킬리를 차 있는  데까지 바래다주지." 닥스는 찰즈와 
     악수를 교환했다. "오늘은 여러 가지로 고마웠읍니다.  그리
     고 맛있는 음식도. 아주 즐거웠습니다. 곧 텔레비전  캠페인
     을 맡길 사람을 찾아 연락을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KDIK가 도움이 된다면 정말 영광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니콜."
     "안녕히 가세요." 니콜은 가볍게  인사하고 종업원 전용 문
     으로 향했다. 적을 정복한 여왕처럼 찰즈를 뒤에 따르게 하
     고.
     "저 두사람, 서로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눈으로 전송하면
     서 닥스가 말했다.
     "네, 찰즈는 그런 것 같아요. 하지만 니콜이 어떨는지."
     "멋진 커플이 되겠군! 약간 엉뚱한 데가 있긴 하지만."
     "우리 경우는 어떨까요?"킬 리가 약간 쓸쓸한  표정으로 말
     했다. 주차장은 텅 비어 있어 어둡고 으스스했다. 킬리의 소
     형차를 제외하고는 짙은 갈색의 링컨이 한 대 있을  뿐이었
     다.
     "당신 것이에요?"
     "응" 닥스는 이렇게 대답하면서 킬리의 코우트 속으로 팔을 
     넣어 허리를 끌어안고 입술을 겹쳐 왔다. 킬리는 지금 자기
     가 있는 장소도, 또 그 어떤 것도 잊고 있었다. 의식을 점하
     고 있는 것은 닥스의 입술과 그 관능적인 움직임뿐이었다.
     이윽고 닥스가 입술을 떼고 말했다.
     "킬리, 주말에 우리  집에 가지 않겠어?"  그러면서 대답을 
     기다렸으나, 킬리는 놀란 나머지 입도  다물지 못할 지경이
     었다. "딴 생각이 있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야.  그저 부모님
     을 만나 주었으면 해서 하는 말이지." 
     기뻤다. 가고 싶었다.  그러나 거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킬리의 가슴은 찢어질  것만 같았다.  한마디로 거절하기가 
     괴로워 킬리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 일을 하는 게 현명한 태도일까요?"
     "제정신이 아닌지도 모르지. 힐튼 호텔에서 킬리의 방에 간 
     것도 그렇지만, 집에 간다는 것은 그 정도가 아니겠지. 하지
     만 그렇게 하고 싶어."
     "부모님은 뵙고 싶어요. 하지만 당신은  두 분에게 나를 어
     떻게 소개하겠어요?" 나는 그의 집에 초대되는 몇 번째  여
     자일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어서 가슴이 답답해졌다.
     "깊이 생각하고 있는 부인이라고  소개하겠어. 아버지는 남
     부의 신사도를 발휘하며 킬리를 매우 환영할거야. 어머니는 
     음식 공세를 취하고 나서 그 다음에는 갖가지 비기로  공격
     해 올테지."
     킬리가 웃었다.
     "그 밖에 같이 사는 사람은 없나요? 예를 들면  가정부라든
     지..............."
     "가정부는 저녁 후에 집으로 돌아가지."
     "그래요?"
     "킬리, 거기 간다고 해서  킬 리가 지키고  있는 선을 넘볼 
     생각은 없어. 우리 관계를 더 깊게 하겠다는 의도에서도 아
     니야. 만일에 걱정이 된다면 못과 망치를 준비해 두지. 킬리
     는 해가 지자마자 자기 방에 들어가 못질을 해 두면 될  거
     야." 닥스가 웃었다. "나는 그저 잠시라도 킬리와 단둘이 있
     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이야기도 하고 산책도 하면서. 정원
     을 돌보는 것도 좋겠지. 말을 타고 낚시질도 하고  네킹....... 
     또는 보우트를 젓거나 가구의 위치 변경을.........."
     "잠깐! 다시 한번 말해 주세요."
     "전부터 서재의 가구를 새로 배치하려고 생각했었지.........."
     "그보다 먼저 한 말........."
     "부근에 작은 호수가 있으니까."
     "또 그 전의 말."
     "아아." 닥스는 킬 리가 좋아하는 장난기 있는 웃음을 띠었
     다. "네킹 말이군. 킬 리가 제대로 듣고 있는지 시험하기 위
     해 그런 말을 했어." 킬리도 웃었다. 닥스는  그녀를 끌어안
     은 채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가 주겠어?"
     "안 돼요, 닥스. 왜 안되는지는 잘 알고 있을 테죠? 무척 가
     고는 싶어요. 하지만 그것은 안 될 말이에요."
     닥스는 잠시 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고 실망을 되씹고  있었
     다.
     "경박한 행동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겠어."
     "나는 자신의 마음이  무서워져요. 편안해야 할  데서 잔뜩 
     긴장되어 즐겁지도 않을 거예요."
     "절대로 그런 일은 없도록 하겠어."
     "위험도 적지 않아요. 내가 당신네 집에 있는 것을 누가 보
     기라도 한다면, 이번에는 그냥 두지 않을 거예요."
     "분명히 그럴 위험은 있어. 하지만 극히  조심할 생각이야." 
     닥스가 킬리의 머리털을 쓸어올렸다. "어때, 가 주겠지?" 킬 
     리가 안 된다고 머리를 가로  저으려 하자 그가 얼른  말을 
     계속했다. "생각만이라도 해 볼 수  없을까? 목요일 밤까지 
     대답을 기다리겠어. 생각이라도 해 봐요."
     목요일 밤이 돼도 그 대답에는 아무 변함이 없을  것이었으
     나, 킬리는 한 걸음 양보하고 이렇게 대답했다.
     "좋아요, 생각해 보겠어요."
     
     킬리는 생각했다, 밤이나 낮이나, 그  한 주일을 계속. 수요
     일에는 이미 그 일로 머리가 혼미해졌다.  엎친 데 덮친 격
     으로 그 날은 부주의한 운전자들이 몇 대나 충돌 사고를 일
     으켜 간선 도로가 거의 마비 상태가 되고 말았다.
     킬리와 조는 조급해진 통근자들에게 정보를 알리기 위해 상
     공을 이리저리 날아다니지 않으면 안 되었다.
     "킬리, 오늘은 좀 어떻게 된  것이 아니야?" 오후의 디스크 
     자키가 윌리 넬슨의 레코드가  방송되고 있는 동안에  물었
     다.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클라크." 킬리는  쏘아 붙이듯 
     대답했다. "20분 동안에 무려 다섯  건이나 충돌 사고가 일
     어났어요."
     "도시의 하늘은 정신없이 빙빙 돌고 있다는 말인가?"
     "그래요! 나는 멀미 때문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아요. 말해 두
     지만, 내가 일부러 사고를  일으키게 한 것은  결코 아니에
     요.!"
     "알았어, 알았어. 내가 잘못했어. 그런데  좀더 짤막하게 말 
     할 수 없을까? 내가 말할 시간이 없어져 버리니까."
     킬 리가 교신란의 스위치를 꺼 버렸다.
     "흥, 자의식 과잉이군!"
     이 말을 듣고 조가 껄껄 웃었다.
     
     목요일 아침 다섯 시 1분 전에 전화 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어때, 결정했나?"
     "아직."
     그는 전화를 끊었다.
     그날 밤 일곱 시 30분에  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  킬 리가 
     오믈렛을 먹으면서 어떻게 대답할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여보세요."
     "결정했어?"
     "한밤중까지 기다리세요."
     킬리는 긴 밤을 딜레마 속에서 고민했다. 닥스는 후회할 만
     한 일은 결코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었다. 그것을 의심할 생
     각은 전혀 없었다. 그가 억지로 잠자리에  끌고 갈 리는 절
     대로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없는 것은 킬리 자기였다.
     그 주 동안에 킬리는 꺼림칙한 마음으로 마크의 사진을  꺼
     내 들여다보았다. 마크의 어머니한테 편지도 썼다. 고등학교 
     졸업 앨범과 스크랩 북의 페이지를  들추면서, 아직 마크를 
     사랑한다고 자기 자신에게  다짐하려 했다.  그러나 마크는 
     이미 종이 위에만 존재한다는 것을 분명히 느끼게 될  뿐이
     었다. 피도 살도 체온도 음성도 없다. 언제까지 추억에만 의
     지하고 살려는 것일까? 마크는 이미 몇 년 전에 저 세상 사
     람이 되었을 것이 분명한데. 인생을, 젊음을, 사랑을 정절이
     란 이름 아래 희생해 버릴 작정인 것일까?
     닥스를 사랑한다는 것은 속일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것은 반
     짝했다 사라지는 철없는  청춘의 사랑과는  다르다. 성숙한 
     한 여인의 한 남자에  대한 사랑이었다. 장밋빛  꿈에 싸인 
     사랑이 아니라 고뇌를 수반한 애달픈 참 사랑이었다. 두 사
     람 모두 어린아이가 아니다. 자기들이  무엇을 하려 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어떤 일이  생기든 고난에 대처해 나
     갈 힘만은 있을 것 같이 생각되었다.
     여기까지 생각하다가 킬리는 마음을 결정했다. 주말을 닥스
     와 같이 보내자. 마음이  이끄는 대로 솔직하게  몸을 맡겨 
     보자. 그 뒤에 어떻게 될 것인지는 운명에 따르기로 하자.
     기운을 차리고 마음을 격려하면서 그녀는 옷장이 있는 데로 
     가서 몇   가지 옷을  골라  보았다. 승마와   낚시와 산책
     -------닥스가 한 말을  생각하면서. 막상  옷을 챙기려고 
     슈트케이스를 열었으나, 이틀의 여행에 30분이나 거려 고른 
     옷은 2주일 분 정도나 되었다.
     열 두 시 10분 전에 전화가 왔다. 킬리의 가슴이 뛰었다. 그 
     사람도 참지 못했던 모양이야. 킬리는  수화기를 집어 들어 
     맑고 큰 소리로 말했다.
     "예스,예스,예스. 가겠어요!"
     그런데 상대편 쪽에서는 아무말이 없었다.  얼마 후에야 당
     황한 듯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례합니다만, 킬리 윌리엄즈 씨  댁이 아닌가요?" 그것은 
     귀에 익은 음성이었다.
     "그렇습니다."
     "킬리! 나 베티 올웨이예요"
     "베티!"킬리는 놀란 나머지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런 말을 
     해 버린 것을 어떻게 변명할  것인가? 후회로 가슴이 아파 
     왔다. 그러나 무엇이 꺼림칙하다는 말인가, 이미 거기  대해
     서는 결론이 내려 졌을 것인데.
     "사실은 뉴스가 있어요." 베티가 먼저 입을 열었다.
     평소에는 낙천적이 베티였는데, 그 음성에 긴장감이 돈다는 
     것을 킬리는 느꼈다.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듯 킬리는 힘없이 침대 가에 걸터  앉
     았다. 눈은 반사적으로 책장 선반에  있는 마크의 사진으로 
     향해졌다.
     "네?"
     "캄보디아의 정글에서 26명이 탈출해  나왔어요. 그들은 적
     십자사의 난민 캠프에 보호를 요청했는데,  거기서 구급 처
     치를 위해 다시 독일로 보내졌어요.  지금도 독일에 있지만 
     이틀 후에는 파리에 도착한대요. 그래서  우리도 초청을 받
     았어요."
     킬리는 잠시 동안 입을 열 수  없었다. 베티는 킬리의 머릿
     속에서 소용돌이칠 생각을 상상하며, 자기보다 젊은 그녀가 
     이 뉴스의 의미를 분명히 깨닫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킬리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저어, 저어, 마크는..............."
     "군부에서는 아직 이름을 일체 발표하지 않고 있어요. 사실 
     신원 확인이 어렵지 않을까 생각해요.  영양실조와 질병 때
     문에 정신 상태도 정상이 아닐 것  같아요. 현재까지 알 수 
     있는 것은 26명이라는 숫자뿐이에요."
     "그 뉴스는 언제?"
     "약 한 시간 전이에요. 국방성의 밴더스라이스 장군이 전화
     를 걸어 왔는데 파견단을 보내겠다는 것이었어요. 국회의원
     과 군인, 보도 관계자가 가기로  되었대요. 우리는 [프루프]
     의 대표로 가고요. 26명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회복되
     기까지 상당한 시일 동안 격리시켜야 한다나 봐요."
     "그렇군요.........."킬리는 자기 손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손이 중풍 환자처럼 부들부들 떨리고, 겨드랑이  밑과 무릎 
     안쪽에서는 식은땀이 흘렸다. 귀에서 잉잉거리는 소리가 났다.
     "킬리도 갈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기간이 어느 정도가 될
     지는 확실히 모르지만 삼사 일 걸릴 거예요."
     "네.........네, 가겠어요." 킬리는 당장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아 주먹으로 입을 막았다.
     "베티, 어떻게 생각해요? 당신은............."
     "모르겠어요. 빌이 그  중에 끼여 있을까 어떨까 하고 천번
     은 생각했어요. 하지만 생각한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너무 기대하는 것이 무서워져서 아이들한테도 아직 말을 못
     했을 정도예요. 14년은 정말  긴 세월이었어요......
     ....아는 것이 무서워요. 
     그러나 어찌 되었건  26명이 살아 돌아온다는 것은 기쁜 일
     이라고 생각해요."
     "네, 그야 물론이죠."  킬리는 무의식적으로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몸이 긴장으로 아플 만큼 굳어져 있었다.
     "그럼 출발은? 또 어디서?"
     "내일 저녁 여섯 시, 앤드루  공군 기지에서 전세 비행기로 
     떠나요."
     "내일?" 킬 리가 맥없는 음성으로 물었다. 너무나 촉박했다. 
     마음의 준비를 갖출 시간조차 없었다.
     "일단 내셔널 공항에 모였다가  기지로 향하게 되어있어요. 
     각오는 해야 할 거예요, 틀림없이 수라장이 될 테니까."
     "그럼 거기서 만나기로 해요. 비행기 시간이 결정되면 연락
     하겠어요."
     "킬리, 겨우 26명이에요!"
     2천 명이 넘는 사람 가운데서 불과 26명. 그 속에 자기들의 
     남편이 끼여 있을 가능성이 얼마나 희박한지 두사람은 깨닫
     고 있었다.
     "그래요, 그 사실을 잊지 않도록 하겠어요."
     베티는 한 숨을 쉬며 "그럼." 하고 전화를 끊었다.
     어째서 베티와 나는 기뻐할 수 없는 것일까. 무섭기 때문이
     다. 킬리는 침대 위에 늘어놓은 옷을 멍청한 눈으로 바라보
     았다. 그리고 이 옷들이 왜 거기  나와 있는지 이유를 깨닫
     고는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신음소리가 잇새로 새어나왔다.
     이삼 분이 지나 전화 벨이 울렸다. 정확히 열 두시 였다. 그
     러나 킬리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12.
         
      피곤해서 등줄기가   쏘는 듯이   쑤셨다.  킬리는        
      응어리를 풀려고 어깨를 움직이고 목을 회전시켰다.
      방은 사람으로 가득 찬데다  난방이 잘 되어   있어 
     후덥지근했다. 담배 연기가  자욱하여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가  뿌옇게 보였다. 파리의  미국 대사관 리
     셉션 룸이 오늘은 대합실로  변해 있었다. 상의를 벗
     은 남자들이 주위의 벽 가까이 모여  수염이 자란 얼
     굴을 맞대고 작은 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기자들은 테이프 레코더를  몇 번이나  체크하고, 카
     메라맨들은 필름을 갈아  끼우거나 플래시의  밸브를 
     교체하거나 하고 있었다. 텔레비전 뉴스 팀은 만일의 
     순간에 대비하여 배터리 점검에 여념이 없었다. 침착
     하게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군복  차림의 사람들뿐이
     었다. 킬리와 베티는 작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이미 
     몇 시간 점부터 발표가 나기를  조마조마하게 기다리
     고 있었다. 대사관 안의 다른 곳에 있는 26명에 대해
     서는 여러 가지 억측이 구구하게 나돌았으나, 킬리는 
     들려 오는 소리를 진실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드골 공항에서 대절 차로 파리 시내에  들어와, 잠시 
     기다리라며 이 리셉션  룸 안내된  지 이미 열  다섯  
     시간이나 지났다. 할말은 이미  다 해 버렸기 때문에 
     지금은 그저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활자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가브리엘 거리에 면
     한 창에서  파리 시가를 바라보며 즐길  마음의 여유
     도 없었다. 잠자코 앉아 멍청히   주위를 둘러보면서, 
     무의식중에 기도하는 마음을 갖고 그저  기다릴 뿐이
     었다.태평양을 건너는 하늘의 여행도 무척  피곤했다. 
     기자들이 앞을 다투어 담화를 취재하려고  몰려 들었
     다. 청문회에서  의장을 맡았다  하여 파견단의 한사
     람이 된 파커 의원이, 이것을   보다못해 좀 쉬게 해
     주라고 기자들에게 간청할  정도였다.  파커  의원은  
     아버지처럼 다정하게 킬리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잠
     시 눈을 붙이라고  했다. 그러나  도저히 잠을 잘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같은  비행기에 닥스 밴 돌프
     가 타고 있는 이상에는................
     텔레비전 기자와 인터뷰하고 있을 때  비행기 안으로  
     들어온 닥스를 보자,  그녀는 혀가  굳어지고 귀에서 
     소리가  나 질문의 요지를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
     다.
     극히 짧은 순간에 교환된 닥스의  눈에는 백 가지 사
     연이  담겨져 있었다. 그의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
     었다.---이번 일에는  그 자신도  무척 놀랐다고, 마
     크가 26인  가운데  포함되어  있기를 기원하면서도 
     고뇌로 마음이 찢어질 것  같다고. 달려오지 않을 수 
     없었다,  마크의 이름이 귀환자  명부에 실려 있는지
     의 여부를 곧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고.
     그 순간적인 교감이 있은 후, 킬리는 비행기  안이나 
     리셉션 룸에서도 닥스와 한번도 시선을  교환하지 않
     았다. 할 수가 없었다.  밴 돌프가 예리한  시선을 번
     뜩이고 있었다. 현미경을  들여다보는 과학자처럼 킬
     리를 관찰하고 있는 것이다.  킬리의 언동을  하나하
     나 수첩에 메모하고 있었다.  그 녹색 수첩과 연필을 
     보면 가슴이 뜨끔했다.밴 돌프는  조금 떨어진  곳에 
     줄곧 눌러앉아 있었으나,  꼭 한  번 킬리 곁으로 왔
     다. 전혀 조급할 것이  없다는 듯한 걸음걸이로 천천
     히  다가와 킬리의 정면에 우뚝 서서  느닷없이 물었
     다.
      "윌리엄즈 씨, 주인이 26인 중에 포함되었느냐  아니
     냐에 대해 희망적 관측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다지 희망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주인이 포함되어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까?" 
     킬리는 머리를 똑바로  세우고 그 녹색  눈에 분노를 
     떠올렸다.
     "그런 질문을 하다니, 형편없이 둔감한 사람인 것  같
     군요. 대답할 수 없습니다." 
     베티가 놀라는 것을 보면서 킬리는 밴   돌프를 노려
     보았다. 결국 밴  돌프가 지고  눈길을 떨어뜨렸으나, 
     위협을 하듯 수첩에 무어라 적어 넣고 있었다.
     "윌리엄즈 씨나 나는  지금 머리가  어지러워 질문에 
     대답할 만한 상태가 아닙니다." 베티가 변명하듯 덧붙
     였다.밴 돌프는 베티에게 가볍게 머리를 숙였으나 물
     러갈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묻겠습니다. 당신은 디발 의
     원이 파견단에 포함되었다는  것을 사전에  알았습니
     까?"
     "아뇨. 비행기에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어요."
     "그는 왜 왔을까요?" 밴 돌프가  음흉한 웃음을 띠고 
     탐색하듯이 물었다. 이쪽이  버럭 화를  내기를 노린 
     것이다. 그러나 킬리는 조용하게 대답했다.
     "파커 의원님에게 여쭈어 보시죠. 파커 의원님이 그를 
     선발한 모양입니다."
     "이상하군요. 워싱턴에는 그 밖에도 많은 의원이 있는
     데, 하필이면 디발 의원을?"
     "이상할 건 아무것도  없읍니다."베티가 대신 말했다. 
     그녀는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대화의 속사정을 이해
     하지는 못했으나, 어디까지나 킬리의 편이었다. "디발 
     의원님은 소위원회의 멤버였고 [프루프]   쪽에 서서 
     의안이 상정되는 것을 연기하는 데  전력해 주셨습니
     다. 특히 베트남 전쟁에도 참전하셨고요. 어쨌든 지금
     은  킬리나 나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밴 돌프는 이 정도로 납득하려 하지는  않았다. 그러
     나 안경 너머로 의미가 담긴 눈으로  다시 한번 킬리
     를 바라보고  천천히 저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감사합니다."
     "왜 그러나요? 그  사람은 왜 당신에게  디발 의원에 
     대해 꼬치꼬치 캐어묻는 것이죠?"
     "모르겠어요."
     "정말?"
      킬리는 베티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때 해병대원 한 사람이  뚜벅뚜벅  베티에
     게 걸어왔으므로 킬리는 대답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올웨이 씨입니까?"
       "네"
       "같이 가 주시겠습니까? 밴더스라이스 장군께서 하
     실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베티는 당황한 표정을  킬리에게 보이면서  일어섰
     다. 그리고 군인을 따라서 조각 장식이 있는 문 안으
     로 들어갔다. 다시 한 시간이 지났다. 킬리는 혼자 앉
     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닥스에게 시선을 보내지는 않
     았으나, 그는  언제나 눈 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는 
     뻣뻣해진 목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리고 상의를 벗어 
     의자에 걸쳤다. 또 조끼 단추를 끌렀다.  이쪽을 보았
     다. 기침을 세  번하고  얼음과 캔  음료수가 차려진 
     테이블로 걸어갔다.  콜라를 플라스틱 컵에  따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파커 의원이 와서 작은  소
     리로 이야기했다. 그들은  베티가 들어간  문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그리고 이쪽을 보았다.
     두 해병대원이 한 단 높게 마련된  스테이지 뒤의 문
     을 활짝 열었다. 밴더스라이스 장군이 빠른 걸음으로 
     모습을  나타냈다. 은발을 곱게  빗어 넘기고 다부진 
     몸에 군복을 단정히 입고 있었다. 장군은 마이크로폰 
     쪽으로 다가가면서 실내에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그 태도는 바로 군인의 전형이라 할 수 있었다.
     실내가 순식간에 조용해지고 모든  사람의 눈이 일제
     히  장군에게 쏠렸다. 장군은 한 묶음의 서류를 탁자
     에 올려놓았다.
     "오랫동안 기다리셨습니다.  우선 여러분의  인내력에 
     경의를 보내는 바입니다. 무척 초조하셨을 것이라 생
     각합니다. 이  방은 결코  쾌적하다고는 할 수  없고, 
     또 여러분이 오랜 비행기 여행을 통해 휴식도 제대로 
     취하지 못하고 기다리셨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발표가 매우 늦어지게 된 것을  죄송스럽게 생각합니
     다. 그러나  모쪼록 사정이  중대하다는 것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장군은 근엄한 어투로 말하고 나서 
     기침을 한 번 한 뒤 마이크 밑에 있는   서류에 시선
     을 떨구었다. 킬리는 꼭  쥔 주먹을 내려다보고 있었
     다. 심장이 터질 듯 고동치고 있었다. 혀가 바싹 마르
     고 목이 타 들어갔다.
      "여기 한 인물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영웅이란  이름
     을 붙이기에 가깝지 않은 용사, 크게 용맹을 떨친 용
     사에게  저는 항상 찬사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는 16
     년  전, 육군 소령으로  베트남에 참전했던 사나이입
     니다. 오늘 아침에 그는 그 공으로 육군 중령으로 승
     진되었습니다. 윌리엄 다니엘  올웨이!" 킬리는  저도 
     모르게 기쁨의 외침을  터져 나오려는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빌 올웨이! 베티의 남편! 킬리는  눈물이 
     뺨으로 흘러내리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스테이지 뒤
     의 문을  지켜보았다. 베티의  팔에 의지하듯 하면서 
     키가 크고 피골이 상접한 사나이가  모습을 나타내었
     다. 새 군복이 수척한 그의 몸에 헐렁해 보였다.
     밴더스라이스 장군이 돌아서서 부부를 따뜻이 맞이했
     다.
      "올웨이 중령, 올웨이 부인 , 어서 앞으로."
      실내가 술렁거리고 카메가  플래시가 불꽃처럼  일
     제히 터졌다. 요란한 박수  소리와 환성이 귀를 찢을 
     듯이  울려 퍼졌다. 감격한  사람들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영웅, 영웅,  용감한 영웅이라고  외치고 있었
     다. 킬리도 일어나 친구의  남편이 무사히 돌아온 것
     에  눈물을 흘리며 박수를 보냈다.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실해졌다. 26명 가운데 마크 윌리엄즈가 없다는 사
     실이 그것이다. 만일 그가 돌아왔다면,   베티의 경우
     와 마찬가지로 미리 두 사람이 재회할 기회를 마련해 
     주었을 것이다.
     박수와 환성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빌  올웨이가 마이
     크 앞에 나섰다. 몹시 여위어 있었고, 남아 있는 머리
     털은 새하얗게 되어  있었다. 뺨이 쑥 들어가고 눈언
     저리에는 짙게 그림자가 져있었다.   하지만 그는 밝
     은 얼굴로 아내를 꼭 껴안고 있었다. 
     밴더스라이스 장군이 말했다.
      "아시다시피 올웨이  부인도 오늘날까지  긴 세월을   
     불굴의 정신을 가지고 싸워  오신 분입니다. 이 사실
     은  부인과 여러 차례논쟁을 거듭한 제가 가장 잘 알
     고 있습니다." 왁 하고 울음소리가 일어났다.
     "빌 올웨이가 이렇게 돌아온 것은  정말 기쁘기 한량
     이 없습니다. 그리고  부인께서 [프루프]의  대표로서 
     여기에 오신  것도. 그리면 올웨이 중령, 당신이 직접 
     이번에 귀환한 사람들의 명단을 발표해  주시기 바랍
     니다."
     빌과 올웨이는 끌어안은 채 장군과 마이크를 바꿔 잡
     았다. 빌이 아내에게  가볍게 키스하자  장내는 다시 
     한번 술렁거렸다. 베티는 아름다웠다.  남편을 지켜보
     는 모습에서는 사랑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다시........다시 이처럼 고국 사람들의 얼굴을  대하게 
     되어 정말 기쁘게 생각합니다." 빌이 울먹이는 소리로  
     말했다. 움푹 팬 눈에서 쏟아지는 눈물을 닦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 모두가 울고 있
     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 남고 어떻게 탈출했나  하
     는 것이 무엇보다도  여러분의 관심거리일 것입니다. 
     여기 대해서는 나중에  반드시 말씀드리겠다는  것을 
     약속하겠습니다."
     "여기 대해서는 나중에 기자 회견을 갖겠습니다."
     장군이 보충해서 말했다.
     "그러면, 귀환자의 명단을 출신지의 알파벳순에  따라  
     행방불명되었다고 알려진 날짜와  함께 말씀드리겠습
     니다."
     세계 각지의 텔레비전 방송국의 카메라가  빌 올웨이
     와, 장병들이 모습을 나타내려 하는 문에 향해졌다.
      "크리스토퍼 디 캐스 중위, 페닉스, 애리조나, 1969년 
     6월 17일. 조지 알 디킨즈  중위, 게인스빌, 플로리다, 
     1972년 4월23일........"
     장병 한 사람 한 사람이 박수와  환호를 받으며 소개
     되었다. 그들은 약간 어리둥절해 하며 문을  열고 나
     왔다. 생가의  심연에서 헤매고 온갖 고난을 겪어 왔
     는데도 사람들과 카메라  앞에서는 겁을 먹고   있는 
     것 같았다. 머리는 짧게 깎고,  몸에 맞지는 않았으나 
     새 군복을 입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훈장처럼 고난의 흔적이  깊이 새겨
     져 있었다. 빌  올웨이가 명단을  다 읽었다.  20명의  
     장병이 엄숙하게 단상에 서 있었다. "나머지 다섯  명
     에 대해서는  병세가 좋지 않은 점도  있고 해서, 
     자세한 진단이 끝날 때까지 발표를  보류하겠습니다." 
     빌은 베티의 허리에 팔을 감으며 말을 계속했다.  "저
     는  목사가 아닙니다. 그러나 허락해 주신다면 이 자
     리에서 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
     아무리 완고한 무신론자가 있었다 해도  이런 경우에
     는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을 것이다. 비디오 카메라를 
     멘 사람 이외에는 모두 엄숙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우리 목숨을 지켜 주시고 우리
     를 구원으로  이끌어 주신 것을 충심으로 감사드립니
     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낯선 곳에서  살아 돌아오기 
     위해 고난과 싸우고 있는 숱한  장병들을  구해 주시
     옵기를 기도드립니다. 그들을 보살펴  주옵소서. 지공
     과 같은 고난에 처했을 때도 주께서  저희와 함께 하
     셨듯이 그들도 지켜 주옵소서. 이렇게 살아서 돌아온 
     저희는 앞으로의  삶을 부끄럼 없이  지낼 것을 맹세
     합니다. 하나님께 모든 영광이 돌아가기를 기도 드립
     니다, 아멘."
      거기 모인 모든 사람의 눈이  젖어 있었다. 빌은 베
     티의 부축을 받으며  내려오고, 밴더스라이스 장군이 
     다시 단상에 올랐다.
     "기자 회견은 두 시간 후 바로 이 장소에서 열겠습니
     다. 여러분도 휴식이 필요할 것이고, 그들에게도 마음
     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
     다. 그럼 오후 세 시에. 수고하셨습니다."'
     장병들이 퇴장했다. 라이트가  꺼지고 카메라가 메탈
     박스에 넣어졌다. 얼른 코우트를 집어 드는 사람,  담
     배에 불을 붙이는 사람......아직 흥분에서 깨어나지 못
     한 사람들이 출입구를 향해 줄을 이어 섰다.
     킬리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소파에 앉아 멍청히 발밑
     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은  구두가 눈에 띄어 깜짝   
     놀라 쳐다보니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이 있었다.
     그의 검은 눈은 사과를 하고 있는 듯했다. 마크가 그 
     문으로 걸어 나오지 않은 것에 대한   안도감이 떳떳
     하지 못한  자책감과 뒤섞여 있었다. 
     닥스의 기분은 잘 알수  있었다. 킬리는 그것을 눈으
     로 전했다.
     "유감스러운 일이야. 진실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내 마음 알고 있겠지?"
      "알겠어요."
      "앞으로 어떻게 하겠어?"
      "글쎄........" 킬리는 눈을 내리깔았다. "현재로서는 샤
     워를  하고 조금 자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어요."
      "내 질문이 나빴지?"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하며  킬리는 닥스를 쳐
     다보았다. 리셉션 룸에는 이미  아무도 없이 텅 비었
     으나 두 사람은 그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닥스
     는 킬리의 얼굴에 나타나 있는 고뇌를 보고, 그녀를 
     위로해 줄 능력이 없는 자기 자신이 미워했다.----킬
     리, 그대를 껴안고 싶어.
      "일단 호텔로 돌아가겠지?"
      "네"----닥스, 당신이 곁에 있었으면 좋겠어요. 
      킬리는 백을 들고 일어섰다. 슈트케이스는  미리 호
     텔에 보내졌을 것이다.
     "킬리는 어떤 호텔을 할당받았나?"
     "크리욘 호텔"
     "나도 그곳이지."----다행이군, 그대를 지켜 줄 수 있
     어서.
      "잘 되었군요."--------기뻐요, 당신과 떨어져 있지 
     않게 되어서.
     정면 현관으로 나오자, 파견단   일행은 미리 준비된  
     차에 오르고 있는  중이었다. 호텔은  걸어가도 얼마 
     안 걸리는 곳에 있었으나,  모두 당국의 배려를 받아
     들여 차를 타기로 했다.
     "윌리엄즈 씨, 크리욘 호텔행에 좌석이  하나 더 비어
     있습니다." 대사관 직원이 말했다.
     "타고 가요, 조금이라도 몸을 편히 하는 것이 좋을 테
     니까."
      "하지만, 나는............." 
     닥스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디발 의원님. 걱정해 주셔서. 절대로 희
     망을 버리지 않겠어요."
     닥스는 킬 리가 갑자기 어투를  바꿨기 때문에 밴 돌
     프가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럼" 킬리는 닥스와 악수를 한  뒤, 기다리고  있는 
     차를 향해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그녀가 당황하고 있는 것  같군요." 밴 돌프가  차를 
     전송하고 있는 닥스 곁에 와서 말했다.
      "당연한 일이죠."
     닥스는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말했다.
     "남편이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냘픈 희망마
     저 사라졌으니까."
     "그거 놀랍군요" 밴 돌프가 중얼거렸다.
     "뭐가?" 
     닥스는 상대방의 내심을 알고 짐짓 이렇게 물었다.
     "그녀가 남편에 대해 그토록 신경을  쓰는 것이 말입
     니다."
     "어째서?" 
     닥스가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
     밴 돌프는 빈정거리는 듯한 불쾌한 미소를 지었다.
     "의원님, 당신도 혈기 왕성한  남자겠지만, 그녀도 한
     창때랍니다. 그런 여자가  얼마 동안이나  남자 없이 
     지낼 수 있겠습니까? 한달,  두달? 하지만 12년은 너
     무 길죠."
      프랑스인의 피를 받은 격한 기질이 닥스에게서 폭발
     되었다.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주먹이 날아가
     려는 것을  억지로 참고 밴 돌프의  멱살을 움켜쥐었
     다.
      "인간 쓰레기 같은 당신은  인간의 품위와  정절 따
     위는  이해하지 못할 테지!"
     격분해서 성큼성큼 걸어가는 닥스를 밴  돌프는 희미
     한  웃음을 띠고 바라다보았다.
          
      킬리는 목욕을  마치고 나서   침대에 푹 쓰러졌다.   
     한 시간 뒤 여행용 자명종 소리에 눈을 떴다. 부족한 
     수면은 오히려 피곤을  더해  주었다. 겨우 일어나기
     는 했으나 기자  회견에 나가고  싶지  않았다. 가지 
     말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안 나갈 수가 없었다. 예
     의에  어긋나는 일이고 또 신문에도 나올 것이다. 특
     히 밴 돌프가 무어라 악담을 늘어놓을지  않 수 없었
     다. 
     킬리는 박스형의 녹색 원피스를  입고 금빛 사슬  벨
     트를 메었다. 이른  봄의 파리는  공기가 습했으므로 
     머리는 브러시로 자연스럽게 웨이브를 만들었다.
     대사관에 돌아와 보니 리셉션 룸은 구조가 바뀌어 있
     었다. 정면에는 마이크로폰을 설치한, 좁고 긴 테이블
     이 준비되어 있었다. 킬리는  맨 뒷줄의 의자에 앉았
     다. 그녀는 인터뷰에 답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미귀한 장병에 대한 조사가 앞으
     로 더욱 강화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베트남이나 캄보
     디아에 아직  많은 생존자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커
     졌기 때문입니다. 귀환하신  분들의 보고에  따라 이 
     문제에 좀더 밝은 전망이 생기도록 원할 따름입니다."
      닥스가 들어와 창가에 있는 파커 의원 곁에 앉는 것
     이 보였다. 그는 킬리를 보고 약간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으로도 킬리는 여간  마음이 든든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기자 회견은 약속된 시간에 정확히 행해졌
     다. 귀환 장병들이 빌  올웨이를 중심으로 정면 테이
     블에 자리잡았다. 베티는 남편  뒤에 있는 의자에 앉
     아 있었다.
      질문이 시작되었다. 장장 두 시간 동안 장병들은 각
     국 언어에 의한 여러 가지 질문의  집중 포화를 받았
     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사실이 밝혀졌다.  그 26명 
     중 10명은 포로 수용소에서 집단으로 탈출했다는 것, 
     도중에 같이 탈주하던 3명이  사망했다는 것  등이었
     다.  그리고 이 3명의 명단이 발표되었다.  그 체험담
     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으로서, 이야기하면 할수록 그
     들의 생존이 기적처럼  생각되었다. 끝으로 밴더스라
     이스 장국이, 내일 귀환 장병들이 개별적으로 인터터
     를 받을 용의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기자 회견을 끝
     냈다. 모든 사람이 일어나서, 회장에서 나가는 장병들
     에게 박수를 보냈다. 킬리는 출입구의 혼잡이 가라앉
     기를 기다려 의자에서 일어났다. 코우트를 입으려 할 
     때 파커 의원 가까이 왔다. 닥스도 함께였다.
      "우리와 같이  저녁이라도 하실까요?"  파커 의원이 
     말했다.
     승낙해도 좋을 것인가? 파커 의원이 함께 있으면  아
     무도 수상한 눈으로 보지  않을지도 모른다. 킬 리가 
     <네.>하고 대답하려 했을 때, 해병대원이  다가와 경
     례를 햇다.
      "실례합니다. 윌리엄즈 씨. 올웨이 씨가 찾고 계십니
     다. 입원중인 장병의 일에  대해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킬리의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았다. 어쩌면.......
     "곧......곧 가겠어요." 킬리는 닥스와 파커를  돌아다보
     았다.
      "죄송합니다마는....."
     "어서 가 보세요, 남편에 대한 무슨  소식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파커 의원이 말했다.
     킬리는 닥스와 시선이 마주치는 것을 피하며  해병대
     원을 따라 리셉션 룸을  나섰다. 길고 어두컴컴한 복
     도를 지나  인기척 없는 어느 방에 안내되었다. 안내
     를 한 군인이  나가 버리자 반대쪽  문이 열리며  올
     웨이 부부가 들어왔다.
      "베티!"
     킬리는 두 사람에게 달려가 그녀를 껴안았다. 
     "축하해요! 정말, 정말 다행이에요!"
     "킬리 , 무척  기뻐요. 하지만 킬리에게는  미안한 듯
     한............"
     "그런 말 마세요. 기뻐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어요?" 
     킬리는 베티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나서  빌에게 손을 
     내밀고 꼭 쥐었다.
     "처음 뵙습니다. 말씀은 진작부터  들어 왔습니다. 정
     말 무사히 돌아오셔서............"
     "당신에 대해서는 베티한테 들었습니다. 주인이  같이 
     돌아오지 못해 유감입니다."
     "저어, 입원해 있는........"
     베티가 슬픈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유감스럽게도 마크는............우리는 그 말을 
     하고 싶었어요. 킬리가 아직 그 다섯 명의 입원 환자에게 
     희망을 갖고 있으리라  여겨서.....초조하게 기다리는 것
     도 괴로울 것 같아서............."
      "킬리" 빌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베티로부터 
     주인에  대한 말을 듣고 곧 알아 보았읍니다마는, 유
     감스럽게도 아무단서도 잡지  못했습니다. 물론 입원
     중인 환자에 대해서는 아직 확인해 보지 못했지만."
     킬리는 두 사람에게 등을 돌리고 창가로  가서, 불이 
     켜지기 시작한 파리 시내에 눈길을 보냈다.
      "감사합니다. 두 분에게는 쌓였던 말씀도 많았을  텐
     데. 저나 마크에 대해 배려해 주셔서........."
     "킬리"
     동정을 받는다는 것이 오히려 괴로웠다.
     "괜찮아요. 저는....... 두분께서는 좀더........"
     "정말이에요..........?"
     "네" 킬리는 억지로 웃는 낯을 보였다.
      "그럼, 내일 다시 만납시다." 빌이 말했다.
      "네"
      올웨이 부부가 나가고 킬리 혼자 남게 되었다. 혼자
     있는 쓸쓸함을 그때처럼 참기 어려운 적은 없었다 올
     웨이 부부의  재회를 기뻐하는 마음에 
     거짓은 없었으나 역시 일말의 질투심이 없는 것도 아
     니었다. 부러운 것일까? 정말 그럴까? 하지만 만일에 
     마크가 오늘 그 사람들 상에 끼여 있었다면----불려 
     나가서 거의 낯을 잊을 정도가 된 사람에게, 
     법률적으로 결혼했다는 굴레에  매여 있는  것밖에는 
     이미 아무런 감정도 남아 있지 않은 사람에게 인도된
     다면, 과연 그  사나이 품속에 뛰어들  수 있을 것인
     가? 이것이 정말 내 남편인가 하며 무서워하게 될 것
     은 아닌가? 베티와  빌에게는 출전 전에 부부로서 서
     로를 이해할  중분한 세원이 있었다. 
     그러나 킬리와 마크에게는 그런 시간의  여우가 없어
     선 것이다.
      방안의 네 벽이 자기를 향해 다가드는 것 같아 킬리
     는  복도로 뛰어나왔다.  그러고는 사람들로  혼잡한  
     정면의 현관을 피해 옆문으로 한길에 나왔다. 그녀는 
     목적 없이 샹젤리제  거리를 향해  걸어갔다. 때마침 
     러시아워여서 거리에는 차가  잇달아 있었고, 보도는 
     귀가 길에 오른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이 사람들에
     게는 오늘도 아무 일이 없는 평범한 날이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왜 그런지  부아가  있다. 콜코르드 광장의 
     번화함도, 유명한 오벨리스크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
     다. 킬리는 콜코르드 다리를 건너 세 강 왼쪽 기슭으
     로  나갔다. 다리 밑을 지붕   달린 배가 미끄러지듯 
     지나고  있었다. 그러나 킬리는  아름다운 배의 일루
     미네이션에도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그저 앞으로 앞
     으로 걷고만 있었다. 상제르망 거리의 교차점에서 그
     녀는 적신호로 인해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곁에 있
     던 사나이가 수상쩍은  눈길을 보내며  치근덕거리며 
     가까이  왔다. 킬리는 하마터면  차도로 떨어질 뻔했
     다. 그녀가 노려보자 사나이는  오히려 빙긋 웃는 것
     이었다. 킬리는 마구 달려오는  관광 버스 앞을 지나 
     달려갔다. 반대쪽 보도에 당도했을 때.  그녀는  차에 
     치여 죽지도  않고, 사나이에게서도  도망친 것을 이
     중으로 고맙게 생각했다. 다시 두 구획 정도 가자 몹
     시  피곤해지는 것을 느꼈다.  킬리는 길가의 벤치에 
     앉았다. 투명 인간이 되어 사라지고 싶었다.
     모든 것이 지겨운 생각이 들었다.
     등뒤에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 그 사나이
     였다. 사나이는 킬리의 옆자리에  버젓이 와서  앉았
     다. 말을 모르는 것이 다행이었다. 킬리는  고개를 가
     로 저으며 쫓아 버리려 했으나 사나이는 움직이지 않
     았다. 이때 뒤에서 위협하듯 하는  또 다른 프랑스어
     의  음성이  들려 왔다.  사나이는 벤치에서  일어나  
     변명하는 듯한 몸짓을 하며 냅다 도망쳤다.
      돌아다보니 닥스가 있었다.   그는 잠자코   벤치를 
     한바퀴 돌아 그녀  곁에 와서 앉았다.  알고  있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감싸주는 듯한  검은 눈동자가 
     믿음직스러웠다. 긴장했던  마음이  한꺼번에 풀리는 
     것 같았다. 닥스는, 쓰러질 듯이 몸을 던져  온  킬리
     를 두 팔로 안아들이고, 가슴속에 꼭 감쌌다.
          

    13


     닥스는 흐느껴 우는 킬리를 아무말 없이 그저 꼭 껴안고만 있
     었다. 연약한 어깨가 품속에서  있었다. 닥스는 부드러운 갈색 
     머리에 얼굴을 대고 그  향기를 들이마시면서, 가능하다면 그
     녀의 슬픔까지도 흡수하고 싶었다.
       남의 눈에 어떻게 보일 것이라는 따위는 염두에도  두지 않
     았다. 품안에 있는 여인에  대해서밖에는 아무것도 염두에 없
     었다. 소중한 사람. 그녀의 강인한 성격, 아름다운, 활동, 그리
     고 그녀가 지켜 온 생활  방식을 존경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
     금 이렇게 약한  일면을 대하자 또  다른 감정이 솟아올랐다.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 그리고 지켜 주
     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혔다.
       오랫동안 두 사람은 가만히 껴안고 있었다. 제비꽃 빛 하늘
     이 짙은 청색으로  바뀌고, 다시 밤의  빛깔로 변한 다음에도 
     계속 끌어안고 있었다. 
       마침내 킬 리가 몸을 일으켰다. 마스카라가 눈물에 섞여 흘
     러 내린 뺨을 닦고 머리를 매만졌다. 마스카라가 눈물에 섞여 
     흘러내린 뺨을 닦고 머리를 매만졌다. 눈물로 얼굴이 얼룩졌
     건 머리가 흩어졌건 그녀는 아름다웠다. 닥스는 이렇게 생각
     했으나 입밖에 내어 말하지는  못했다. 말한다면 마음에도 없
     는 말을 하는 것같이 들릴  것이다. 지금 킬리는 이성을 잃은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다. 그녀가 마음을 가라앉힐 때 까
     지 가만히 있는 것이 좋으리라
      "같이 걸어 주시겠어요?" 킬 리가 말했다.
      닥스가 일어나 팔을 내밀었다. 킬리는  팔짱을 끼고 걷기 시
     작 했으나, 얼마 걷지 않아 손을 빼었다. 닥스도 감히 팔을 다
     시 붙들려고 하지 않았다. 사실은 누가 뭐래도 그대는 내 것이
     란 감정을 은연중에 나타내고는 있었지만......
       누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끔 미소와 시선을 교환
     하면서 쇼윈도를 들여다보며 천천히 거닐었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다. 어느  정도 걸은 것일까.  갑자기 킬 
     리가 걸음을 멈추었다.
      "배고프지 않으세요?"
      "약간. 킬리는?"
      "나도 그래요."
      "그럼 저녁을 먹도록 하지."
      "어디서?"
      "킬 리가 좋아하는 곳에서."
      처음 찾아간 레스토랑은 혼잡하고  어수선했다. 둘째번 레스
     토랑은 다 식은 샌드위치밖에 팔지 않는 곳이었다. 그러나 셋
     째 번에 들어선 곳은 나무랄 데가 있었다. 전형적인 비스트로
     로서, 데이지 화분이 있는  테이블에는 격자무늬의 보가 덮여 
     있었으며, 촛불이 흔들리며 부드러운 빛을 던지고  있었다. 아
     늑하고 포근한 분위기가 감도는 곳이었다.
      테이블에 안내되자 킬리는 곧 "잠깐 실례하겠어요"하고 자리
     를 떴다. 돌아온 킬리는 얼굴을  말끔히 씻고 머리 곱게 빗었
     으며 루즈를 발라 깨끗이 화장을 한 모습이었다. 닥스는 뒤로 
     돌아가 의자를 당겨 주면서  그녀에게 키스하고 싶은  마음을 
     억제했다.
      "당신이 프랑스어에 능통하다는 것은  미처 몰랐어요. 그 사
     나이한테 무어라 했어요?"
      "급사에게 말인가?"
      "나는 쫓아오던 사나이 말이에요."
      "아아....그 사람. 사정을  찾아도 안 나오는  말이지." 닥스는 
     빙그레 웃으며 모서리가  닳은 메뉴를  펴들었다. "무얼로 할
     까?"
      "와인으로 찐 닭고기가 먹고 싶어요."
      "다행이군, 여기 씌어 있어. 그리고  샐러드?" 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프는?"
      "싫어요."
      급사가 왔다. 그의 턱시도우의 무릎이 빤질 빤질 하게 닳고 
      커프스가 약간 해어진 것도  두 사람은 깨닫지  못했다. 어떤 
     얼굴을 한 사나이인지도.  다만 서로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
     다.
     "음료는?" 닥스가 물었다.
     "식후에 커피를." 킬리는  레이스로 된 커튼  너머로 끊임없이 
     차들이 다니는 한 길을 내다보았다.
     "어떻게 내가 간 곳을 알았어요?"
     킬리가 이쪽을 보았으면, 하고  닥스는 생각했다. 킬리의 목소
     리가 너무나도 가냘프고 쓸쓸해 보였기 때문에, 닥스는 그녀를 
     끌어안아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대사관 현관에서 올웨이 씨 부부를  만났지. 킬리에게 이리저
     리한 말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킬리는 틀림없이........ 구석방
     에 가 보았더니 아무도 없더군. 그래서  미친 듯이 뛰어다니며 
     찾았다. 발견하고도 쫓아가는 데  애를 먹었어, 킬리는 다리가 
     기니까." 농담 비슷한 말이 효과를 나타냈다. 킬리가 웃으며 고
     개를 돌렸던 것이다. 닥스는 힘을 얻어 말을 계속 했다
      "멀리서 지켜보고만 있을 생각이었는데, 그  사나이가 나타나
     기에......"      
     "마침 타이밍이 맞았어요."
     "그렇다면 킬리를 방해한 것이 아니었군 그래."
     킬리가 다시 웃었다. 침착을 되찾은 모양이군, 하고 닥스는 생
     각했다.
     샐러드가 나올 무렵에는 두 사람 모두 마음이 풀려있었다.
     "와인을 주문하지 않으면 욕을 먹을지도  몰라, 여기는 파리니
     까." 닥스가 테이블 앞으로 몸을 내밀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어마, 넥타이에 드레싱이."
     "아차." 닥스는 넥타이를 닦고 그 손가락 끝을 핥았다. "와인을 
     주문할까?"
     급사가 오는 것을 보고 킬리는 그가 영어를 아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래요.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면요.........."'
     닥스가 부르기도 전에 그는 이미 테이블에  와 있었다. 킬리는 
     닥스가 프랑스어로 주문하는 것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급사는 
     근엄한 발걸음으로 사라졌다가, 이윽고 차게 한 백포도주를 가
     지고 왔다.
     "이곳은 와인으로 유명한 음식점인  모양이로군." 닥스가 말했
     다. 그는 형식대로, 맛을 보기 위해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그
     러고는 크게 입맛을 다셔  보았다. 급사는, 어이가 없어하기보
     다는 그 장난기 있는 표정에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재미있는 사
     람이군요, 하는 듯이 킬리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닥스가 와
     인을 꿀꺽 들이켰다."좋아! 아주 좋군."
     급사는 엄숙한 태도로 글라스에 와인을 따르고 나서 저쪽으로 
     갔다.
     "그러고 보니 파커 의원님이 안 계시는군요. 그에게 무슨 일이
     라도?"
     "시차 때문에 피곤하다고 하더군."
     감자와 강낭콩과 당근을 곁들인 닭고기  요리는 아주 맛이 있
     었다. 급사는 그 접시를 치우더니, 곧 초콜렛 무스(거품이 이는 
     크림을 얼리거나 젤라틴으로 굳힌 것)를 가지고 왔다. 킬 리가 
     반 밖에 먹지 못하고 남긴 것을 닥스가 마저 먹어 없앴다.
     와인도 깨끗이 비우고  나서, 그들은 만복감을  느끼며 커피를 
     마셨다. 테이블이 말끔히  치워지자, 킬리는  이야기할 기회는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했다.
     "닥스, 내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겠죠?"
     "억지로 물을 생각은 없어. 만일  킬리가 이야기해준다면 듣겠
     지만. 나는 그저  이렇게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족해, 그리고 
     킬리가 나를 필요로 하고 있기만 하면."
     "내게는 당신이 필요해요." 킬리는 빨아들일 듯한 시선을 닥스
     에게 보냈다. 입술이 떨렸다.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머릿속이 어지러워 제대로 표현 할 수가 없어요."
     "상관없으니 말해봐요."
     킬리는 무겁게 한숨을 쉬고 나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아무래도 어디가 잘못된 사람인 것 같아요. 그것을 오늘 
     뼈저리게 느꼈어요. 마크가 그 사람들 속에  끼여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을 때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어요. 하지만 그것은 마
     크를 위해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였어요.......
     그가 26명 가운데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을 때, 
     내 머릿속에는 다시  이런 고통이  매일같이 계속될 것이라는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어요.  마크의 생사는 역시  알지 못하
     고, 또 나는 공중에 뜬 상태로 있어야 한다는 것............."
     킬리는 닥스가 듣고  있는지를 확인하려고나  하는 듯이 흘끗 
     그를 쳐다보았다. 닥스는 진지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었
     다.
     "나는 나 자신이 얼마나 염치없고 냉정한 인간인가를 알게 되
     었어요. 고통스런 세월을 참아  온 용기 있는 그  사람들을 보
     고, 또 이야기를 들으면서.......정말로 깨닫게 되었어요. 그 사람
     들은 체험을 이야기하면서  몇 번이나 몇  번이나 강조했어요. 
     살아 남기 위해 온갖  일을 다 했다고 말이에요.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라도 살아 남으려 했다.-----그것은  당연한 일이 아
     니겠어요?"
     닥스는 킬리가 동의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님을 알고 아무 말
     도 하지 않았다. 킬리는 닥스를 잠시  쳐다보고 약간 주저하듯 
     입술에 침을 바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들은 이런 말도 했어요, 미국 군인 가운데는 귀국하기를 바
     라지 않는 사람도 있다고요. 만일 마크가  살아 있으면서도 돌
     아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면, 또 같이 사람이  있어 아이를 
     몇씩이나 낳고 생활하면서 나를 이미  아내로 생각지 않고 있
     다면------이렇게 생각했던 것이에요. 어쨌든 한 가지만은 분
     명해졌어요. 베티와 빌이라는 부부를  보고 알게 되었어요, 내
     가 쓸쓸해 하는 것은 결코 마크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아마 죽었을 거예요. 공식 기록은 그렇게 되어 있지 않지
     만, 그는 이미 오래 전에  내 마음속에서는 죽었어요. 내가 계
     속 혼자 살아온 것은 아직까지  마크를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
     은 아니에요. 만일에 마크가 전사했더라면 아마 나는 재혼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다만 사정이 사정이니 만큼  어쩔 수가 없
     었던 거죠. 나는 훨씬 오래 전부터  자신을 미망인으로 여기고 
     있었어요. 다만 마크의 죽음을 확인하지 못한  것만이 다른 미
     망인과 다른 점이었어요. 그래서 내 인생을  어떻게도 하지 못
     했다는 것, 그것뿐이에요." 킬리는 고개를 들어 호소하듯  닥스
     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나 역시 내 인생을 살고 싶어요.  일생
     을 헛되이 보내고 싶지는 않아요."
     오랫동안 두 사람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가만히 서로를 바
     라보고 있는 두  남녀 사이의  진지한 분위기를 알아차렸는지 
     급사도 곁에 가까이 오지 않았다. 얼마 후 닥스가 겨우 무거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그 말에는 잘못이 하나도 없어, 킬리. 하지만 염치없고 냉혹하
     지는 않아. 킬리는 정직한 사람이야. 킬리 자신에게나 또 지금
     은 나에게 대해서도. 정말 이기적인 사람은  자기를 그렇게 평
     가하지 않아."
     "내 마음을 편하게 하려고.........."
     "그렇지 않아."
     "정말이에요?"
     "정말이지. 나도 정직해지려고 노력하고 있어."
     킬리가 한숨을 쉬었다. 닥스는 그 한숨을 보고 킬 리가 안도감
     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역시 내 심정을 잘 전하지 못한 것 같죠?" 킬 리가 가만히 웃
     었다. "아직.......아직 하지  못한 말이  얼마든지..........." 킬리는 
     생각에 잠긴 듯한 눈을 창 밖으로 돌렸다. 그리고 다시 닥스를 
     보며 말했다. "고마와요."
     "나는 아무 힘도 되어 주지 못했는데."
     "내 이야기를 들어 주었어요."
     "그 정도야.........."
     "아니, 정말 감사해요."
     테이블 위에 계산한 돈을 놓고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왔다.
     "자아, 이제부터 어덯게 하지?"
     닥스가 킬리의 팔을 끼며 말했다.
     "명소 구경, 아니면  나이트 클럽?  혹은 호텔로  돌아가 자겠
     어?"닥스가 그녀의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한없는 정감을 
     갖고..............."킬리!"
     킬리는 눈을 내리깔지 않았다. 빨아들일 듯  깊은 눈길로 닥스
     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당신이 필요해요........당신의 모든 것이."
     닥스는 입술의 움직임을 보고 희미하게  새어나온 그 말을 알
     아들을 수가 있었다. 닥스의  목줄기가 꿈틀하고 움직였다. 그
     는 두 손을 킬리의 어깨에 얹었다.
     "나는.........."말이 막혔다. "나도  킬리가 필요해. 견딜  수가 없
     어. 그래서 이런 말을 하여 킬리의  마음을 상하게라도 한다면 
     두고두고 자신을 원망하리라 생각해.  그러나 킬리, 킬리는 어
     느 때보다도 동요되기 쉬운 상태에 있어.  감정이 고조되어 있
     는 거야. 촛불이 켜진 테이블에서 저녁을 먹고 와인을 마셨어. 
     그리고 파리라는 로맨틱한 이 도시 때문에. 나중에 오늘 밤 일
     을 생각했을 때, 내가 킬리의 그 같은 상태를 이용했다고 여겨
     지기는 싫어." 킬리의 어깨에 놓인 손에 힘이 가해지고 숨결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정말 그것을 원하고 있나, 킬리?" 지금 호
     텔에 같이 들어가면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게  돼. 정말 그래
     도 되겠어?"
     과연 사랑의 도시였다. 킬 리가 발끝으로 서서 두 손으로 닥스
     의 뺨을 감싸도 지나가는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지
     나쳐 버렸다. 킬리는 닥스에게 키스했다.
     
     두 사람은 상제르망 거리 뒷골목에 있는 작은 호텔에 방을 정
     했다. 여주인의 안내를  받아 3층으로  갔다. 벽은 떡갈나무로 
     되어 있었으며 벽지의  무늬는 구식이었다. 각각의  방 입구에 
     깔아 놓은 카핏은 오리엔트 스타일로서  얼룩 하나 없이 깨끗
     했고, 모든 것을 잘 정리되어 있었다.
     닥스는 장밋빛 얼굴에  흰머리를 정수리에  틀어 올린 뚱뚱한 
     여주인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마침 오늘 아침에  방이 하나 비
     었기 때문에 우리는 운이 좋았다고 닥스가  통역해 주었다. 놀
     랄 만큼 경쾌한 걸음으로 앞서 걸어가는 여주인을 따라가면서, 
     킬리는 닥스에게 미소를 보냈다.
     창문이 두 개 있는 방이었다. 여주인이 창문을 들어 올리고 문 
     사용법을 설명해 주었다. 자랑스럽게 욕실의 문을 열고는 수도
     꼭지 돌리는 법, 변기 쓰는 법, 샤워의 노즐 사용법, 비데 사용
     법 등을 자세히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타월이나 모포도, 와인
     이나 커피도 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자, 닥스가 주는 
     팁을  완강히 거절하면서 잘 쉬라는 인사와 함께 방에서 나갔
     다.
     단 둘이 되자 갑자기 어색하고 침착을 잃게 되었다.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손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어쨌든 킬리는 
     코우트를 벗어 구석에 있는 흔들의자에  걸쳐놓았다. 흔들의자 
     위의 쿠션은 베드에 있는 장식  베개와 한 쌍으로 패치워크로 
     된 것이었다. 베드 커버는 폭신한 아마빛 직물로서, 그 가장자
     리 장식은 번쩍이는 바닥에 닿을 듯이 길었다.
     닥스도 얇은 모직으로 된 오우버를  벗어 흔들의자의 다른 한
     쪽 팔걸이에 걸었다. 킬리는 타원형 거울이  달린 화장대 쪽으
     로 가서, 거기 비치는 자기 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머리에 손을 얹어 풀어헤쳤다. 닥스는 창문의 고리를 만지작거
     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돌아다보았다. 그리고 서로  다가가 방 한가
     운데서 하나가 되었다. 닥스가 킬리의 뺨을 가만히 만졌다. 이
     때 주저하는 듯한 조심스런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두 
     사람의 구에 크게 울려 펄쩍 뛰듯 몸을 떼었다.
     닥스가 문을 열자 여주인이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생화를 꽂
     은 화병을 닥스에게 건네  주었다. 그 날 아침에  꽃을 갈아야 
     하는데 깜박 잊었다고 했다. 닥스가 고맙다는  말을 하고 문을 
     닫았다.
     닥스는 꽃병을 들고 난처하다는 듯이 서 있었다.
     "예쁘군요." 킬리가 말했다. "문갑 위에 놓는 것이 어떨까요?"
     "아아, 그렇군." 그는 고맙다는 듯이 말하고, 마치 뜨거운 것이
     라도 들고 있는 듯 허둥지둥 문갑 위에 꽃병을 놓으려고 갔다. 
     그리고 예술품을 감상하듯 자세히 바라보았다.
     "이렇게 하면 되겠지?"
     "네"
     닥스가  킬리를  돌아보았다.  "아  참,  킬리가........먼저  욕실
     을..........."
     "나는.............지금은...........어서 먼저 하세요."
     닥스는 입술 가장자리를 긴장시키듯 하며 미소지었다.
     "그럼, 그렇게 하지."
     욕실의 문이 닫히자 곧 요란한 물소리가 났다. 저렇게 물을 많
     이 틀어 놓고 어쩌자는 것일까, 하고 킬리는 생각했다.
     킬리는 머뭇거리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옷을 벗어버리는 것이 좋을  것인가? 먼저 침대 속에 
     들어가 있어야 하는 것일까? 정말 바보로군, 서름 살이나 되었
     는데도 남자와 잘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르다니.
     모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치고라도, 어쨌든 그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너무 부끄러움을 모르는  체해도 안 될 것이고.......
     킬리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구두를  벗고 원피스의 벨트를 풀
     었다. 어디다 둘 것인가, 장롱 안에 넣는다면?
     문을 조금 열고 구두를 가지런히 놓은 다음 벨트를 문의 손잡
     이에 걸었다. 스타킹을 신고 있으면 무드가  깨질 것이라는 것
     쯤은 킬리도 알 수  있었다. 나중에 신경을 쓰는  것보다 지금 
     벗어 두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욕실의 물소리가 그쳤다. 킬리는  흠칫 놀랐다. 당장에라도 닥
     스가 나와 볼꼴 사나운 모습을 보게 될까봐 얼른 스타킹을 발
     에서 벗겨 버렸다. 욕실 손잡이에서 찰칵하고 소리가 났다. 킬 
     리가 벗어서 뭉친 스타킹을 장롱에 던져 넣고 문을 닫는 순간
     에 닥스도 욕실에서 나왔다.
     그는 킬리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제 킬리 차례야."
     킬리는 백을 들고  도망치듯 욕실로 들어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물소리가 컸는데 젖어  있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
     다. 틀림없이 닦아 낸 모양이다.  샤워 커튼이 쳐진 금속 막대
     에 젖은 타월이 널려 있었다.
     킬리는 씻을 필요도 없는데, 하고 생각하면서 손을 씻었다. 머
     리를 풀었다. 귀와 목덜미에 향수를 뿌렸다. 운 것이 후회스러
     웠다. 눈이 아직  부어 있었으나 도리가  없었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욕실에서 나와 스위치를 껐다.
     천장의 불이 꺼지고 침대 가의  스탠드만이 방안을 비추고 있
     었다. 커버를 젖혀놓은  침대의 시트가 부드러운  불빛 속에서 
     눈처럼 희게 보였다.
     닥스는 맨발에 상반신은 벗고 있었다. 벗어  놓은 옷은 보이지 
     않았다. 장 속에 넣을 때  그 스타킹을 보지 않았을까. 흔들의
     자에 백을 놓고 돌아서니 바로 그곳에  닥스가 있었다. 킬리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넓은  어깨, 검은 털로 뒤덮인 널찍
     한 가슴, 탄력 있는 피부.
     닥스는 킬리의 머리에서 어깨로 손을 미끄러뜨렸다.
     긴장한 탓인지 그 손이  떨리고 있는 것 같았다.  정다운 입맞
     춤. 그러나 이것은 곧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격렬한 입맞춤으로 
     변했다.
     "킬리, 이렇게 되기를 오랫동안 기다려 왔어. 꿈만 같아."
     닥스는 킬리를 끌어안았다.
     "닥스, 나는 무서워요."
     "나도 마찬가지야. 그러나 킬리가 필요해."
     등줄기를 따라 전율이 흘렀다. 킬리는 그의  따뜻한 체온을 구
     하듯이 몸을 더욱 밀착시켰다.  오늘의 적막감, 지금까지의 고
     독이 모두 닥스의 체온으로 불태워져 재가  되었다. 힘있게 감
     긴 닥스의 팔, 자비를 베풀 듯 하는 닥스의 입술. 이미 무섭지
     가 않았다. 불안하지도 않았다. 킬리도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
     었던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인생의 일부를 함
     께 나누어 갖는 일인 것이다.
     닥스의 손이 원피스의 등을 더듬어 천천히 지퍼를 끌어내렸다. 
     그리고 킬리의 몸에서 옷을 벗겼다. 열  개의 손가락이 목덜미
     에서 가슴으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을 느끼면서 킬리는 눈을 
     감았다. 살갗과 살갗의 접촉이 이렇게  황홀한 것일 줄이야......
     그러나 아직 부족하다. 비취색 브래지어가  벗겨지면서 흘러내
     렸다. 닥스는 베일이 벗겨진 킬리의 몸에 한참 동안 키스를 퍼
     붓더니 두 팔로 안아 올리고는, 마치  깨지는 물건이라도 되는 
     듯이 조심조심 침대에 갖다 뉘었다.
     "킬리, 아름다운 킬리." 닥스는 이렇게 속삭이며 킬리의  몸 위
     에 천천히 자기 몸을 올려놓았다. 킬리는  닥스의 몸무게를 자
     기 몸 위에서 묵직하게 느꼈다. 킬리는  난생 처음으로 맛보는 
     황홀감에 낮은 신음소리를 내었다.
     "괜찮아?" 닥스가 놀라서 물었다.
     "네, 닥스,.............사랑해요.........닥스............."
     두 몸이 하나가 되었다. 사랑의 마술이란 의식 속에서.

     
     14.
     "얼마나 잤을까?" 닥스가 눈을 뜨면서  말했다. 그러한 닥스를 
     킬리는 미소를 머금고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기쁜 마음으로 
     눈을 뜬 것은 처음이었다.
     "30분 정도 될 거예요" 킬리는 손으로 그의 뺨을, 귀족적인 코
     를, 은빛 머리가 섞인 귀밑머리를 쓰다듬었다.
     닥스가 킬리의 등에 팔을 감고 끌어당겼다.
     "어떻게 잠을 잘 수가 있었을까?"
     "에너지를 소모해 버렸기 때문이에요."  킬리는 장난스럽게 말
     하고 닥스의 어깨에 팔을 돌렸다.
     "킬리도 그랬나?"
     "나도 그랬어요." 킬리가 웃었다. "하지만 잠을 잘 수는 없었어
     요." 하며 닥스의 입술에 손을 가져갔다. 이렇게 탄탄한 살갗인
     데도 닿은면 어째서 그토록 부르러운 것일까?
     닥스는 킬리의 손을 잡고 손바닥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왜 그랬지?"
     "처음으로 느꼈으니까요----그런 것은 지금까지 한번도........."
     킬리가 닥스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닥스는 기쁜 듯이, 그리고 자랑스러운 듯이 눈을 빛냈다.
     "정말인가?" 좀더 무슨 말을 해주었으면 했다.
     "네, 정말이에요." 비교한다는 것은 마크에게 미안한  노릇이었
     다. 그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 "이것이 전쟁의 상처인가요?" 
     그녀는 화제를 돌리려고 닥스의 어깨뼈  밑에 있는 흉터 자국
     을 만졌다.
     "응, 유탄에 맞았지.  속도가 떨어진 것이어서  운좋게 살았어. 
     삼사 일 동안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해 몹시  곪아 버렸지. 그
     래서 1파운드 정도의 살을 떼어내지 않으면 안 되었지."
     "무서워요...........더 이상 말하지 마세요." 
     하며 킬리는  그의 턱에 키스했다. "눈 밑의 상처는요?"
     "열 세 살 땐가 사촌하고 싸우다가 그랬지." 닥스는 실망한 듯
     한 킬리를 보고 웃었다. "드라마틱하지 않아서 실망했나?"
     "그는 어째서 당신을 괴롭혔나요?"
     킬리의 음성은 유혹하는  듯했다. 앉은 자세로  몸을 덮쳐오는 
     킬리를 닥스는 약간의 놀라움을 갖고 바라보았다. 머리가 부드
     럽게 얼굴 언저리에 흘러내리고 있었다. 스탠드의 희미한 불빛
     이 육체의 기복에 짙은 실루엣을 던지고  있었다. 킬리는 수줍
     어하면서 키스했다. 주저하면서 닥스의 입술을 더듬어 찾았다. 
     닥스는 킬리의 머리털에  손을 넣고  얌전하게 그녀의 유혹에 
     몸을 맡겼다. 킬리의 입술이 눈 밑의 상처 자국을 더듬다가 목
     에서 가슴으로 흘러가듯 미끄러져 내렸다.
     닥스는 저도 모르게 신음하며 킬리의 머리를 휘어감았다. 몸을 
     돌려 킬리의 등을 매트리스 위에 밀어붙이면세 세차게 입술을 
     빼앗았다.
     "완전한 여자로서의 정점에 도달한 순간의 킬리처럼 아름다운 
     것도 없어. 그것을 다시 한번 내게 보여 줘. 킬리."
     그러나 닥스의 이것을 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마지막 순간
     에는 닥스도 달콤한 죽음과도 같은 심연에 빠져들어갔기 때문
     이었다.............
     
     이튿날 아침 두 사람은 호텔을 나왔다. 파리의 거리는 아직 눈
     을 뜨고 있지 않았다. 밤 사이에 비가 내려  거리가 말끔히 씻
     겨져 있었다. 상점의  영감이 셔터를 올리거나  노점상이 장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침 공기에는 커피와 크르와상의 향기가 
     녹아들어 있었다. 닥스는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카페의 문을 두
     드렸다. 연인들에게 관대한 파리의 마스터는, 무어라 중얼중얼 
     불평을 하면서도 크로와상을 봉투에 넣고 따끈하게 김이 나는 
     커피를 플라스틱 컵에 따라 주었다. 킬리와  닥스는 천천히 걸
     으면서 빵을 씹고 커피를 마셨다.
     "킬리는 매우 민감했어."
     "그랬어요?"
     "무척, 더 말할 나위 없이."
     킬리는 먹고 있던 크르와상에 시선을 떨구었다.
     "혹시 수치를 모르는 여자라고..........."
     "천만에." 닥스는 빵 봉지와 컵을 버리고 와서 킬리의 뺨을 쓰
     다듬었다. "킬리는 아주 정숙해, 그 품위 있고 섬세하고 근엄한 
     것, 그 모든 것이 내  마음에 들어. 그리고 잠자리에서 그러한 
     것들을 모두 던져 버리는 킬리도 매우 마음에 들어...........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무엇이?"
     "지금 당장 킬리에게 키스를 하고  싶어서." 닥스는 손을 들어 
     택시를 세웠다 그리고 운전사에게 행선지를 말하기도 전에 격
     렬히, 마치 자기  것이라고 낙인이라도 찍듯이  키스를 퍼부었
     다.
     "닥스, 운전사에게..........."
     "내버려 둬." 그는 코우트 속으로  손을 킬리의 가슴을 더듬었
     다. 킬리의 의식이 몽롱해져갔다.  얼마나 달렸을까? 몇 시간? 
     아니면 몇 분?
     두 사람은 크리욘 호텔  한 구획 앞에서 차를  내렸다. 닥스가 
     카에서 내리는 킬리의 손을 낚아챘다. 킬리는 웃으면서 비틀거
     렸고, 닥스는 이러한 그녀를 두 손으로 안아 올렸다.
     호텔 쪽으로 발을 돌린 순간, 킬리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
     다. 올웨이 부부가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서로 팔짱을 끼고 
     행복한 듯이 미소를 지으면서. 그러나 이쪽에서도 그러고 있는 
     닥스와 킬리를 확인하자 삽시간에 표정을 바꾸었다.
     네 사람은 말없이 서로 바라보았다. 그들  부부는 바쁜 하루가 
     시작되기 전에 조용한 한때를 보내고자 거리에 나온 것이리라.
     킬리는 놀라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심장에 칼을 찌른 것 같
     았다. 죄악감이 가슴을 도려냈다. 그것은 또 차디찬 땀으로 변
     해 온 몸에서 흘러 내렸다.
     친구를 배반한 것이다. 남편은 반드시 살아  있다는 신념을 갖
     고, 지금까지 한 마음으로 싸워 온 모든 친구들을 배반한 것이
     다.
     남편도 배반했다. 성적으로 관계를 가졌다고 하는 것은 지극히 
     작은 불의의 한 국면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 큰  문제는 만일 
     언젠가 마크가 돌아온다고 해도, 킬리에게는 그가 들어설 곳이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닥스를 위해서만 있었다.
     자기 자신도 우롱했다. 사랑이란 미명 하에  모든 모랄을 타파
     해도 좋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닥스를 사랑한다는 것이 
     마크를 배반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것
     이다. 배신에 기초한 사랑은 멸시를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알
     고 있었다. 어젯밤까지는 그 양심의 소리에  순응해 왔던 것이
     다. 
     이처럼 아침 햇빛 속에서, 정절을 지켜 온 사람  앞에 서자 킬
     리는 자신의 과오가 더욱 뼈저리게 느껴졌다.  사랑은 결코 댓
     가가 없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그 값을 치러야만  하는 것이
     다.
     "밖에서 아침을 먹으려고요." 빌이 침묵을 깨고 조용히 말했다.
     "괜찮다면 같이..........."애교를 띠며 말한 베티의 목소리가 
     중도에서 끊기고 말았다. 
     베티의 눈에는 책망하는  듯한 기색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킬리는 자기 가슴에  주홍글자가 뚜렷이 새겨져 있는 것을 
     깨달았다.
     이름 아침에 남녀가 구겨진 옷을  입고 얼굴을 붉히며 택시에
     서 내리는 것을 본다면, 누구든지 무슨 일이 있었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킬리는 죄의식과 수치로 죽고 싶었다.
     "말씀음 고맙습니다마는." 킬리가 대답했다. 닥스는 잠자코  킬
     리를 보고 있었다.
     "그럼, 우리나 가기로 하지." 빌이 베티의 팔을 잡아끌 듯이 하
     며 걸어갔다. 그러는데도 베티는 아직 자기 눈이 의심스럽다는 
     듯이 킬리와 닥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를 봐요." 닥스가 말했다.
     "싫어요." 킬리는 얼굴을 돌렸다. 
     "보라니까." 닥스는 킬리의 어깨를 붙들고 몸을 돌리게 했다.
     킬리는 할 수 없이 턱을 들고 닥스를 쳐다보았다. 그 거절하는 
     듯한 굳은 표정을 보고 닥스는 섬뜩했다.
     "킬리가 무얼 생각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아."
     "모를 거예요"
     "아니, 알고 있어.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는거야.  베티와 빌을 
     보고 양심이 고개를 쳐든 것이지. 분명히  그들은 축복받은 행
     복한 부부야. 그러나 킬리와 마크의 경우는 달라."
     "다르지 않아요. 그런데, 베티는 정숙했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
     어요."
     "정숙?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에게 말인가? 두 번 다시 
     소식을 듣지 못할 것이 확실한  사나이에 대해서 말인가?" 닥
     스의 음성이 차츰 거칠어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베티는 남편의 생사를  알지 못했어요. 그러
     나 돌아왔어요. 마크 역시 내가 기다리고  있으리라 여기며 언
     젠가 돌아올지 몰라요."
      닥스는 말을 듣기가 거북스러웠다. 무어라 말 할  수 없는 외
     침이 몸속에서 꿈틀거렸다.
     "그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해. 꿈과  같은 일이지. 그러나 우리 
     사이에 생긴 일은 분명한 현실이야."  닥스는 가슴속에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라 음성을 낮추었다.
     "나는 사랑하고 있어, 킬리. 사랑하고 있어."
     킬리는 입술이 아플 만큼  주먹으로 입을 꼭 눌렀다.  눈을 꼭 
     감고 고개를 저었다.
     "그만, 그만..............듣고 싶지 않아요."
     "아니야, 킬 리가 들을 때까지  말을 계속하겠어. 나는 킬리를 
     사랑해."
     "싫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에요. 
     마크가 정말 죽었다는 것이 확인될  때까지 나는 사랑할 권리
     도 자격도 없어요." 킬리는 닥스의 손을  떨쳐 버리고 뒤로 물
     러났다. "상관하지 마세요........더 이상 내게 간섭하지 마세요.."
     킬리는 닥스에게 등을 돌리고 도망쳤다. 크리욘 호텔 현관에서 
     하마터면 사나이와 부딪칠 뻔했다. 그녀는 자기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몸을 던지고 흐느껴 울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무서운 
     일이 생긴 것을 깨닫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 사나이는 알 밴 돌프였던 것이다.
     
     닥스는 공항의 콩코스를 날 듯이 달리고  있었다. 마음의 날개
     가 돋은 것 같았다. 정말 날아가고 싶었다.
      바로 그날 아침, 닥스는 사라져 벌니 킬리를 불안과 슬픔으로 
     전송했었다. 도대체 어디서 돌아오느냐고 야비한  질문을 하고 
     덤벼드는 밴 돌프를 하마터면 두들겨 줄  뻔했다. 닥스는 그의 
     가슴을 난폭하게 밀어젖히고 폭풍과도 같은 기세로 방에 돌아
     왔다. 그리고 방안에서 몇 시간이나 서성거렸으나  견딜 수 없
     는 마음은 시간이 갈수록 더해질 뿐이었다. 객관적으로 생각할 
     때, 이것은 선을 긋고 선악을 가려낼 성질의 문제가 아니었다.
     간단히 해답이 나올 수도 없고 직접적인 해결 방법도 없다. 이
     치를 따져 해답을  찾아낼 수가 없는  것이다. 죄악감과 사랑, 
     이 두 가지 감정 가운데 어느 하나가 이겨야  하는 것이다. 킬
     리의 마음이 내리는 심판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도대체 어느 
     쪽이 이길 것인가? 생각하기조차 무서웠다.
     전화벨이 울렸다. 킬리 일지도 모른다. 닥스는 덤벼들 듯이 수
     화기를 집어 들고 큰 소리로 말했다.
     "여보세요?"
     "씩씩하군요." 하며 파커  의원이 웃으며 말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실례" 닥스는 실망했다.
     "무슨 일입니까?"
     "그렇게 물으니 고맙군요. 사실은 부탁이  하나 있어서 전화했
     어요. 나는 오늘도 기자 회견에 나가야 하는데 또  한 군데 갈 
     일이 생겼어요. 즉, 정부  대포로 입원중인 장병을 위문하라는 
     명을 받았어요. 그래서 디발  의원이 내 대신 가줄  수 없을까 
     해서."
     그것이 오히려 나을지 모른다. 기자와 카메라맨한테 하루 종인 
     시달린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알겠습니다. 준비할 시간을 주십시오. 그리고 가기 전에  무슨 
     주의 사항이라도 없습니까?"
     "어젯밤에 한 사람이 죽었어요, 지나치게 쇠약해져서."
     "원 저런!"
     "불행한 일이죠. 그들에 대한 자료는 모두 보여 드리기로 하겠
     어요. 나갈 때는 프런트에게  차를 부탁하세요. 서두를 필요는 
     없어요, 오늘 밤 비행기를 탈 생각이라면 몰라도."
     "비행기?"
     "그들 중에 한시라도 빨리  귀국했으면 하는 희망자가 있어서 
     대통령도 동의했어요. 그래서 파견단 중에서도  귀국을 서두를 
     사람은 그들과 함께 오늘밤에 떠나기로 했어요."
     "비행기는 몇 시죠?"
     "아홉 시. 드골 공항에서."
     "알겠습니다."
     "그럼 부탁하오, 닥스."
     이리하여 닥스는 파커 의원 대신에 병원에  갔던 것이다. 만일 
     가지 않는다면? 만일 그 진  콕스라는 병장이 눈을 뜨지 않았
     다면? 불행히도 어젯저녁 숨을 거둔 사람이 그 병장이었다면?
     생각만 해도 식은땀이 흘렀다.
     닥스는 여행 가방을 꼭 쥐고  코우트 자락을 날리면서 달려갔
     다. 게이트가 보였다.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다행이다. 시간에 
     닿을 수 있었다.
     닥스는 이목을 무시했다. 자신의  신분과 위치도 무시했다. 대
     합실을 둘러보다가, 한쪽 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는 푸른 램프
     가 즐비한 밤의 활주로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창
     문의 유리에 그녀의 쓸쓸한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닥스는 발 밑에 가방을 놓고 곧바로  킬리에게 다가갔다. 킬리
     는 유리창에 비친 닥스의 모습을 알아보았다.
     "킬리에게 할 말이 있어." 닥스는 조용히 말했다.
     "이젠 아무것도 할말이 없어요." 킬리는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
     다.
     "만일 킬 리가 여러사람 앞에서 말하라면 그렇게 하겠어. 그러
     니 이것은 킬리만이 들었으면 하는데 어떻겠어?"
     킬리가 겨우 닥스에게로 방향을 돌렸다. 
     "알겠어요." 하고는 일어섰다.
     피곤해서 그런지 무관심해서 그런지, 걷기 시작한 두 사람에게 
     시선을 보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넓은  중앙 통로에 이르
     자, 닥스는 비어있는 전화박스를 발견하고 그리고 킬리를 끌고 
     갔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킬리가 물었다.
     "할 이야기라는게 무엇인가요?"
     닥스는 그녀의 냉정함을 용서할 수 있었다.  곧 그녀의 마음이 
     바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용서 할 수가 있었다.
     "킬리" 닥스가 다정하게 입을 열었다.
     "마크는 죽었어. 12 년 전 헬리콥터가 추락한 날에."
     킬리의 얼굴에서는 아무런 감정의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눈
     물도 흘리지 않았다. 숨도 죽이지도 않았다. 마음이 흩어진 기
     색도, 기쁨도, 슬픔도 없었다. 흡사 가면과 같았다.
     "듣고 있나, 킬리?"
     킬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네. 하지만   어떻게 ......당신은   
     어떻게 그   사실을 ........?"
     닥스는 파커 의원 대신 병원에 갔던 사정을 이야기했다.
     "공식적인 인사와 그 밖의 일이 끝난 뒤 한 사람 한 사람과 이
     야기를 나누었지. 그들이 부대에서 이탈하게 되었을 때의 상황
     도 들었어. 진 콕스라는 병장이 자기  헬리콥터가 추락하던 날
     짜를 기억하고 있더군. 킬리, 그 날짜는 마크의 헬리콥터가 떨
     어진 날짜와 일치했어.------콕스가 타고 있던 헬리콥터는 추
     락을 당한 것이었어. 불길에 싸여 떨어진 거야. 그와 파일럿은 
     폭발직전에 겨우 탈출하여 정글에 들어갔어. 파일럿은 두 다리
     가 부러지고 내장이 파열되어 한 시간도 못 살고 죽었어. 콕스
     는 시체가 베트콩에게 발견되지 않도록 풀과 나뭇가지로 숨겼
     어. 그래서 발견되지 않았지. 그러나 콕스는 그 이튿날 베트콩
     에게 발견되어 포로가 되었던  거야." 닥스는 킬리의  손을 꼭 
     쥐었다. "킬리, 그  파일럿의 이름은 마크  윌리엄즈였어. 키가 
     크고 금발인 청년으로 남부 사투리를 쓰고 있었어."
     닥스는 킬리가 충격으로 쓰러지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삶을 보
     전하지 못한 젊은이를 위해, 젊은이의 목숨을  산 제물로 바친 
     전쟁이란 잔혹한 산물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킬리의 반응은 닥스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킬리는 더러운 것이라도 되는 듯 닥스의 손을 떨쳐 버렸다. 그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웃음이었다.----소름끼치는  듯한, 얼음
     처럼 찬, 경멸이 깃들인 웃음이었다.
     "당신은 정말." 킬리는 혐오감을 나타내며 말했다.
     "누구의 양심을 구하려는 거예요? 내 양심,  아니면 자기 자신
     의 양심?"
     닥스는 아연해져 할말을 잊었다.
     "대관절"
     킬리가 다시 이상한 소리로 웃었다.
     "콕스라는 군인의 체험은 분명히 사실일테죠.  하지만 그 파일
     럿의 이름이 윌리엄즈이고 남부 사투리를 썼다니 너무나 우스
     워요. 당신은 내가 그런 말을 순순히 믿을 줄 아세요?"
     닥스는 처음에 벌어진  입이 아직  다물어지지 않았으나 차차 
     부아가 났다.
     "나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닥스는 억지로 흥분을 참았다. 
     "이런 중대한 일에 내가  거짓말을 할 것  같나? 어째서 그럴 
     필요가 있겠어?"
     "오늘 아침에 내가 마크의 생사를 확인할 때까진 당신을 사랑
     할 수 없다, 이제 끝장이라고 말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당신
     은 그 병장의 이야기에 마크의 이름을 적당히 맞춰 넣은 것이 
     아닐까요? 너무나 이야기가 극적이에요." 킬리는 성이 난 듯이 
     고개를 들었다.
     "당신은 원하는  것이면 모두  다 손에  넣는다는 소문이더군
     요.------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말 그 소문이 거짓이 아
     니군요, 디발 의원님."
     그의 자랑스러운 조상들은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을 묵과하지 
     않았다. 닥스도 그러했다. 거짓말쟁이라는  말을 듣고 참을 수 
     없었다. 닥스는 홱 하고 몸을 일으켜 불같은 눈으로 킬리를 내
     려다보았다.
     "알겠어, 킬리. 그렇다면 마음대로 생각해. 킬리의 인생을 희생
     하란 말이야. 수전노처럼 사랑을 혼자 뭉쳐  가지고 있으란 말
     이야. 킬리는 스스로를 순교자로 만들려 하고 있어. 우리와 같
     은 동물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할 테지. 그러나 말해 두지만, 성
     인 군자처럼 옹색한 존재는 없다는  것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
     어."
     킬리는 홱 몸을 돌려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나가 버렸다. 닥스
     는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심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다시 부르기에는 자존심이  용서하지 않았다. 어젯밤의  그 일 
     이후 어째서 그녀는 이토록 심한 말만  하는 것일까? 어제.......
     함께 나누었던 기쁨과 행복한 기억을  떨쳐 버리려는 듯이 닥
     스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도대체 어째서..........'
     "그녀가 도망쳤나요?"
     끈끈한 목소리가 닥스를 현실로 돌아오게 했다.  깜짝 놀라 얼
     굴을 들어 보니, 밴 돌프가 전화 박스 벽에  기대어 구역질 날 
     것 같은 엷은 웃음을 띠고 있었다. 사람을 바보로 취급하는 듯
     한 그 얼굴을 보자 닥스는 마음속에 억눌려 있던 것이 폭발했
     다.
     해병대에서 단련된 민첩성을 살려 밴 돌프에게 달려들었다. 멱
     살을 잡고 구석으로 끌고 가 벽에 밀어붙였다. 안경이 반쯤 벗
     겨지고 두 손이 뒤로 돌려진 밴 돌프는 무릎으로 허벅지를 얻
     어맞고 커다랗게 비명을 질렀다. 무쇠와 같은  팔이 목을 죄기 
     시작했다.
     "네놈은 지나치게 말이 많아, 벤 돌프! "닥스가 말했다.
     "보았으니까.........."
     "네놈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어. 아무것도 듣지 못했어.  어쨌든 
     증거가 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  만일 한마디라도 더러운 
     소리를 지껄이면 고소하겠다. 돈이 아무리 들어도 상관하지 않
     겠어. 네놈이 어디에서든 두  번 다시 기사를 쓰지  못하게 할 
     테니 각오해. 알겠어?"
     닥스는 위협을 하기 위해 다시 한 번 발길질을 했다.
     밴 돌프는 비참하게 우는 소리를 냈다.  생각했던 대로 무기력
     한 사나이였다.
     "대답을 해, 알겠느냐 말이야?"
     밴 돌프는 졸린 목을 애써 움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한 말은 윌리엄즈 부인에게도  마찬가지야. 쓸데없는 글
     을 한 줄이라도 썼다가는 죽을 줄 알아!"
     닥스는 손을 놓고 경멸의 일별을 던지고  발길을 돌렸다. 게이
     트로 올라가 아까 놓아두었던 가방을  집어 들고 적막감을 씹
     으면서 벽에 몸을 기대었다. 그리고 도착이  많이 지연되고 있
     는 비행기를 기다렸다.

     
     15.
     달은 비행기 오른쪽에 있었다. 그러므로  킬 리가 내다보고 
     있는 왼쪽 창에서는 검은 밤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는  엷은 
     은백색의 빛밖에 보이지 않았다. 별빛은 멀고도 작았다.  눈 
     밑으로는 두꺼운 구름의 융단이  깔려 시계를 가리고  있었
     다.
     "잠들었나요?" 그 목소리로 킬리는 망연한 상태에서 깨어났
     다. 베티 올웨이가 통로 쪽 시트에 기대어 있었다. 원래  그 
     자리에는 어느 기자가 앉아 있었으나, 말을 걸어도 들은 체
     하지 않는 킬리에게 싫증을 느꼈는지 다른 자리로 옮겨가고 
     말았다. 킬리는 계속 혼자 앉아 있었다.
     "아뇨."
     "잠시 곁에 앉아도 될까요?"
     킬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레인코우트를 치웠다. 아무도 옆에 
     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 놓아두었던 것이다.
     "빌은 주무시나요?"
     "네. 그는 조금만 움직여도 곧  피로를 느끼기 때문에 자신
     도 화를 내고 있어요. 집에 돌아가거든 너무 움직이지 않도
     록 해줘야겠어요. 원래 그는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인데, 
     더구나 군대 생활의 습관이 몸에  배었거든요. 14년 동안의 
     공백을 이 삼 주 사이에 메우려 할 거예요. 한눈을 팔지 말
     아야겠어요."
     킬리가 따뜻한 미소를 보냈다.
     "얼마 동안은 베티 혼자 독점할 권리가 있을 거예요."
     두 사람은 잠시 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킬리의 눈에는 
     그 날 아침 닥스와 택시에서 내렸을 때 베티가 놀라던 표정
     이 아직도 뚜렷이 남아  있었다. 베티가 지금  이렇게 말을 
     걸어오는 것이 기적처럼 생각되었다.
     오랫동안 고통을 함께 나누어 온 존경하는 친구를 잃어  버
     리고 싶지 않았다.
     "킬리.........." 베티가 주저하면서 입을 열었다. 
     "쓸데없는  참견인지 모르지만 무척 쓸쓸해  보이기에 말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어때요?"
     킬리는 머리를 시트에 기대고 눈을 감았다.
     "크게 실망했을 뿐이에요. 이 삼  일 동안이 영원처럼 길게 
     느껴져요. 몹시 피곤해요. 나는 피곤하면 언제나 이래요."
     킬리는 애써 웃어 보이려 했으나 표정은 굳어질 뿐이었다.
     "하지만 그 밖의 일도 있지 않아요? 닥스 디발 의원과 관계
     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나는 생각하는데요."
     베티는 킬리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킬리,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거죠?"
     순간 거짓말이 튀어나오려 했다.  아니에요, 하며 완강하게.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어쩌겠다는 것일까? 베티는 킬리가  닥
     스와 같이 있는 것을 몇 번이나  보았다. 그 장면들을 연결
     한다면 저절로 하나의 결론이 나올 것이다. 밴 돌프가 끈질
     기게 닥스와의 관계를 캐내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리고 여
     자의 육감이란 것이 있는 것이다.  킬리는 베티에게 얼굴을 
     돌리고 그 눈을 보면서 말했다.
     "네, 그래요."
     "역시 그렇군요." 베티의  음성에는 동정하는  빛이 깃들여 
     있었다. "그러리라 생각했어요. 좀더 파고들어서 언제부터였
     냐고 물어도 될까요?"
     "청문회 일로 워싱턴에 간 날  밤부터예요. 그날 밤 비행기
     에서 처음 그를 만났어요. 당시에는 그가 위원의 한 사람이
     란 것을 알지 못했고, 그 역시  킬리 프레스턴과 미세스 마
     크 윌리엄즈가 같은 사람이란 것을 몰랐어요."
     "이해가 되는군요."
     "아니에요, 아마 이해하지 못하실 거예요. 나는....아니, 우리
     는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어요. 이렇게 되어선 안 된다고 
     저항해 왔어요. 하지만............."
     "사랑에 변명은 필요없어요. 킬리." 베티는 쥐고  있던 킬리
     의 손을 정답게 쓰다듬었다. "그는 당신의 기분을 이해하고 
     있나요?"
     "글쎄.............아니,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나는.........우리는 사소한 일로 말미암아. 그가.."
     킬리는 다른 손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그것은 별도로 치고라도........어떻게도  할 수 없는 문제가 
     많아서." "그 중에서 가장 큰 문제는?"
     킬리는 그녀의 추궁에 약간 놀랐다.
     "제일 큰 문제는 내가 결혼한 몸이라는 사실이에요. 그리고 
     남편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른다는 것. 잊었나요, 베티? 당
     신의 입장은 변했지만 나는 옛날과 같아요." 킬리는 불쾌한 
     듯한 투로 말한 자신의 어투에 부아가 났다.  "미안해요, 죄
     송해요, 베티.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나도 모르겠어요."
     "사과하지 않아도 좋아요, 킬리. 마음속의  갈등으로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이해할 수  있어요. 엄청나게 괴로울  거예요. 
     이봐요 킬리, 마크는 죽었다 치고 닥스와 결혼하세요!"
     이렇게 말한 베티도 놀랐거니와 당사자인 킬리는 문자 그대
     로 기절할 것만 같았다. 오랫동안 미귀환 장병을 위해 운동
     을 추진해 온 사람, 남편의 소식을  알 때까지는 결코 단념
     하지 않겠다던 사람, 그 사람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리라
     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킬리는 귀를 의심했다.
     "설마 진심에서 그런 말을 한.........."
     "아니, 진심이에요." 베티가 분명하게 대답했다.
     "킬리, 내 고백을 들어 줘요. 나는 오랫동안  당신을 이용해 
     왔어요. 부탁이에요, 끝까지 말을 들어  주세요." 베티는 킬 
     리가 이야기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 당신은 [프루프]를 위
     해서 많은 공헌을 했어요. 대표자로서  당신은 정말 적임자
     였어요. 총명하고 아름답고 훌륭한 직업을 가지고, 또  이름
     이 더 있었어요. 당신이 있으면 우리 모임의 영향력이 훨씬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어요. 당신을  대표자로 삼은 덕분에 
     우리 [프루프]는 히스테릭한 다른 여자들의 그룹과 같은 취
     급을 당하지 않게 되었어요. 하지만  지난번 워싱턴에 가면
     서부터 나는 자신이  부끄러워졌어요. 악의에서  그런 것은 
     아니에요.......하지만 당신을  끌어들여 마크에  대한 생각에 
     얽매이게 함으로써,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젊은 날을 헛되
     이 소모시켰다고 생각하면.........더구나 닥스와  같은 사람과 
     묘한 관계를 맺어 우리 모임의 평판을 떨어뜨린다고 언짢게 
     말하기도 했어요."
     "베티, 나는 그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에 했을 뿐이에요. 지
     금도 그 마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지금의 킬리로서도 또 한 가지 할 일이 있어요, 아
     주 중요한 일이. 만일 당신이 그를 사랑하고 있다면------
     사랑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렇다면  모든 것을 버리고 
     그 사람과 결혼해야 해요.  그 사람이 행위로  표시한 것을 
     당신은 마음으로 대답했잖아요?  그는 당신을 필요로  하고 
     있어요. 더구나 그는 분명히 살아 있고 분명히 가까이에 있
     어요. 마크와는 달라요. 아마 마크는 이미........"
     킬리는 화를 내며 베티에게로 향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나요?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당신 역시 빌이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전혀 몰랐어요. 그런
     데 현재 그는 돌아와  있어요. 그리고 당신은  계속 기다려 
     왔어요. 당신은, 당신은 줄곧 남편을 배반하지 않았어요."저
     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래요. 하지만 나에게는  마음을 쏠리게 하는  세 자식이 
     있었어요. 그리고 10년 동안에 걸친  빌과의 아름다운 추억
     도 있었어요. 곧 잊어버릴 1주일이나  2주일은 의미가 적지 
     않겠어요? 빌과 나 사이에는 함께 쌓아 올린 인생이 있었어
     요. 그러나 당신과 마크의 경우는 그렇지가 못해요. 물론 킬
     리더러 어떻게 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만일에 
     닥스와 함께 있고 싶다면 솔직히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자신과 그의 행복을 헛되게 할 필요는 없어요."
     킬리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이미 늦었어요. 오랫동안 싸워 왔는데 이제 와서 포기하라
     는 것은 무리예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아직 나를 의지하
     려 하고 있어요. 특히 지금은  이번에 돌아온 사람들로부터 
     뜻밖의 단서를 얻을 지도 몰라요. 어쨌든 닥스와 나는 처음
     부터 어떻게도 될 수  없는 운명이었어요. 한  순간 사랑이 
     반짝이기는 했어도 이미 꺼져 버렸어요." 
     베티는 가슴이 아팠다. 이처럼 젊은  사람의 얼굴에 그토록 
     처절한 슬픔과 절망이 떠오른 것은 지금까지 본 일이  없었
     다.
     "뉴올리안즈에 돌아가 다시 일을 시작하면 틀림없이 지금의 
     기분에서 헤어날 수 있을 거예요."
     킬리가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예상이 얼마나 어리석었나 하는 것을 곧  깨
     달을 수 있었다. 아직 피곤이 쌓여 있는 데다가 워싱턴에서 
     비행기를 바꿔 타는 동안에도 보도 관계자들의 끊임없는 질
     문 공세를 받아 심신이 극도로  피로해졌다. 집으로 돌아가
     자 킬리는 문과 창을 굳게 닫아걸고 수화기도 내려놓은  채 
     24시간 동안 푹 잠을 잤다. 겨우 잠자리에서 빠져나와 보니, 
     거리는 사육제의 마지막 날을 맞이하는 주간이 시작되고 있
     었다. 거리에는 차를 세울 곳이 없고, 레스토랑에서는  자리
     를 잡기 위해 길게 줄을 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보도를 걸
     으려면 퍼레이드가 지나갈 연도에는 관람석이 만들어져  있
     었고, 술 취한 사람의 치근거림을 물리치는데 여간 힘이 드
     는 것이 아니었다. 킬리의 정신 상태로서는 들뜬 축제 분위
     기가 여간 참기 힘든 것이 아니었다.
     킬리는 프로듀서에게 전화를 걸어 며칠만 더 휴가를 연기해 
     달라고 했다. 그는 불만을 표시하면서도 허락해 주었다.  킬
     리는 미시시피에 있는 부모의 집으로 차를 달렸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킬리의 침울한 기분을 이해하고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킬리는 잘 먹고 언제나 꿈을 꿀만큼 실컷 잤
     으며 걸프의 해안을 혼자 거닐었다.  그러나 요양소로 마크
     의 어머니를 찾아가자, 겨우 회복되기  시작한 정신 상태가 
     한꺼번에 악화되고 말았다.  이미 세상에서는  아무 희망도 
     없다 그런 어두운 생각을 품고 병원을 나섰다.
     
     일터로 돌아오자 모든 사람이 흡사 그녀가 깨지기라도 하는 
     듯이 몹시 신경을 써 주었다. 킬리는  이제 막 퇴원을 허락 
     받은 정신병 환자와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야기를 하면 짐
     짓 동정하는 듯한 어투로 대하고 측은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일부러 농담을  하여 웃기려고도 했
     다. 그러한 것들이 더욱 참을 수 없었다.
     남의 우울이지만 그런 꼴을  보지 못하겠다는 식인  니콜은 
     얼굴을 나타내지 않았다. 두서너 번  전화를 걸어오기는 했
     지만, 니콜은 닥스에 대해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얼핏 신
     문에서 읽었는데, 이번 귀환 장병 문제로 닥스의 이름이 다
     시 올라가겠다는 말을 한번 했을 뿐이었다.   킬 리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눈치를 챘는지 두 번 다시 닥스
     의 일에 대해서는 간섭을 하지 않았다. 킬리의 정신 상태가 
     계란 껍데기처럼 깨지기 쉽게 되어 있다는 것은 누가  보아
     도 얼른 알 수 있었다.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니콜로서도 
     그 껍데기가 깨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3주일즘 얼굴을 나타내지 않았던 니콜이 저녁을 먹으로  오
     겠노라고 했다.
     "믿을 수 있겠어? 토요일인데도  이 내가 데이트가  없다니 
     말이야. 치즈가 듬뿍 든 스파게티 카세로울을 만들어 줄 수 
     있겠니?"
     킬리가 웃었다.
     "뻔뻔스런 손님이군.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점잖은 손님이 
     싫어. 또 다른 요구는?"
     "크림 치즈와 피칸을 넣은 초콜렛 케이크"
     "그 밖에는?"
     "프랑스 빵"
     "그리고 또?'
     "그 정도면 됐어. 와인은 내가 가지고 갈 테니까."
     니콜은 말대로 찾아왔다. 저녁 일곱 시에 벨이 울려 진즈와 
     티 셔츠 차림으로 킬리가 나갔더니, 역시 평상복 차림의 니
     콜이 양쪽 겨드랑이에 빨간 포도주를 한병씩 끼고 문에  서 
     있었다.
     "멋진 파티를 열기로 해. 마음껏  떠들어 기분을 풀기로 하
     자구, 토요일에 남자 없이 위안을 받을  길은 하나 밖에 없
     어. 다이어트를 때려치우는 거야. 어제는 배가 아파 별로 먹
     지 못했는데, 그것을 오늘 보충해야겠어."
      "큰 병이 아니면 좋겠어." 함께  부엌으로 가면서 킬 리가 
     말했다.
      "아니야. 그저 무슨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을 뿐이야."
      "그럼, 이제 슬슬......." 니콜이  말하려 했을 때  벨이 울렸
     다. "도대체 누굴까? 이런 꼬락서니는 보이기 싫은데."
       "글쎄....너밖에는 아무도 부른 사람이 없는데."
      "좋아, 내가 나가서  쫓아 버리겠어, 어떤  사람이든 간에. 
     아아, 이 맛있는 냄새......  내 몫이 줄어드는  것은 참을 수 
     없어."
      니콜이 위세 있게 현관으로 걸어갔다. 킬리는 다시 스파게
     티 삶는 일에 몰두했다.
      니콜이 그녀답지 않게 허약한 소리로 불렀다.
      "킬리, 남자 분이야. 군인...." 허둥대듯 푸른 눈이 휘둥그래
     져 있었다.
      "군인?"킬리는 깜짝 놀라 들고 있던 국자를 떨어 뜨렸다.
      니콜이 그렇다고 했다.
      킬리는 니콜 곁을 빠져나가 행주로 손을 닦으며 거실로 갔
     다. 군복을 입은 사나이는 침착하지 못한 태도로 모자를 만
     지작거리며 서 있었다. 그는 몹시  여위었고 환자처럼 안색
     이 창백했다. 체구에 비해 손과 발이 유난히 커 보였다.  나
     이는 서른 살쯤 되었을까, 그러나  입 언저리에는 노인처럼 
     몇 개나 깊은 주름살이 잡혀 있었다.
      "내가 킬리 프레스턴 윌리엄즈입니다마는, 무언가 제게 볼
     일이.........?"
      "네, 윌리엄즈 씨. 저는 진 콕스 소위라고 합니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킬리는 이마에 화살을 맞은 듯  비틀
     거리며 의자 등에 기대었다. 귀에 찡  하는 소리가 나고 니
     콜의 놀라는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그녀는 부축하려 드는 
     니콜의 손을 뿌리치면서  필사적으로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했다.
      "앉으세요." 킬리는 힘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진 콕스는 자기가 중 충격이 너무나 큰 데에 놀라  당황하
     는 듯했다. 킬리의 얼굴은 종잇장처럼  하얗고 입술은 새파
     래졌다. 콕스는 권하는 대로 앉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킬 
     리가 쓰러질까봐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킬리는 무너져 내
     리듯이 의자에 앉아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무슨 일로 내게?"
      그는 제정신이 아닌 여성에게 어떻게 이야기했으면 좋겠는
     지 도움을 구하려는 듯 니콜을  바라보았다. 니콜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그는 순진해 보이는 시선을 킬리에게로 돌렸
     다.
      "저어, 당신에 대해서는 파리에 있을  때부터 알고 있었습
     니다. 병원에 있었지만  정보는 계속 들어왔으니까요.  아마 
     목사님을 통해서였던 것 같은데,  당신이 <프루프>라는 조
     직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는 말을 하시더군요." 콜스는 시
     선을 자기 손으로 떨구었다. "여러  가지 일이 한꺼번에 일
     어났기 때문에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머릿속이 어지
     러워서....."
      "죄송합니다." 킬 리가 상냥하게 말했다. "서두르실 필요는 
     없습니다. 천천히 말씀해 주세요."
      "저어,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마는, 당신은 <프루프> 활동
     을 하시면서 그  일로 파리에  가셨는데, 저어.....  윌리엄즈 
     씨, 제가 병원에서 한  말을 디발 의원님  한테서 들으셨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죽, 그분은 저와 함께 추락당한 동료
     가 당신의 남편 같다는  것을 알자 곧  돌아가셨기 때문에, 
     즉시 당신에게 가서 이 말을 전했으리라 생각합니다."
      니콜이 나직이 절규하는 소리가 들렸다. 킬리는 고개를 끄
     덕였다.
      "네, 들었어요. 하지만...."
      "저는 지난주, 워싱턴에서  디발 의원을 만났습니다.  저는 
     다름 사람보다 닷새나 늦게 귀국했어요.  워낙 몸이 쇠약해
     져 있어서.... 죄송합니다, 다시  이야기가 옆길로 벗어나서/ 
     워싱턴에서 디발 의원을 만났기에, 당신이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더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분의 말씀으로는,  당신
     은 저워 합께 있던 사나이가 과연 남편인지 의심하고  있다
     는 말씀이더군요. 당연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 단서가 될만한 것을 가지고 이렇게 찾아보게 된  것입니
     다."
      그는 겉저고리 포켓에서 나온 것은 은사슬에 달린  메달이
     었다. 킬리는 한눈에 그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저와 함께 추락 당한 마크 윌리엄즈는 군번과  함께 이것
     을 몸에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그는 죽는  순간
     에 이것을 저한테 맡겼습니다. 만일 내가 살아 남는다면 이
     것을 아내에게 전해  달라고 말입니다.  베트콩에게 잡혔을 
     때 빼앗겼습니다마는, 그들에게는 흥미가  없는 것이었던지 
     도로 돌려주더군요. 그 후로는 줄곧  제가 간직하고 있었습
     니다. 먹을 것과 교환하자거나 그 밖의 것과 바꾸자고 해도 
     절대 응하지 않았습니다.  꼭 전해  주겠다고 약속했으니까
     요."그는 다시금 몹시 수줍어하면서, 산화되어 빛이 바랜 메
     달을 킬리에게 건네 주었다.
      킬리는 손이 부들부들 떨려 좀처럼  그것을 받아 들 수가 
     없었다. 메달을 보았다.  성 크리스토퍼의 메달을  킬리에게 
     건네 주었다.
      ---결혼식 날 킬 리가 마크에게 선사한 것이었다. 뒤집어, 
     뒷면에 일부러 새겨 넣은 문자를 읽었다. <하나님, 우리 남
     편을 지켜 주소서.> 날짜도 함께 새겨져 있었다. 검게 변한 
     은의 표면을 엄지손가락으로 만지자 와락 눈물이 쏟아져 나
     왔다.
      "마크가 틀림없어?" 니콜이 물었다. 
      킬리는 힘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말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
     다.
      진 콕스가 쇼파에서 주뼛주뼛 몸을 움직였다.
      "그가 고통 없이 눈을 감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마
     는......무척 고통스러워했습니다.  두 다리가  부러지고 계속 
     토하며, 그 피..... 하지만 그는 영웅답게 최후를 마쳤습니다. 
     자기 발이 그렇게 되었는데도, 헬리콥터에  남아 있는 동료
     를 구하려 했습니다. 분명히 두 사람이 타고 있었다고 생각
     됩니다, 잘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마는. 기억하고 잇는 것은, 
     그를 끌다시피 하며 정글로 도망쳐  들어간 일뿐입니다. 최
     후는.....최후의 순간을 평온했습니다.  그는 두 다리를  잃고 
     당신에게 돌아가느니  차라리 이것이  낫다는 말을  했습니
     다."
      "그럴 리가 없어요!" 킬 리가 비통한 소리로 말했다.
      "네. 하지만 저는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콕스는 헛기침을 했다. "제....제 아내는  3년 전에 다른 남
     자와 결혼을 했더군요. 그녀는 지난주, 워싱턴으로 저를  만
     나러 왔었어요. 그러나 서로 얼굴도 몰라볼 만큼 변해 있더
     군요...."
      "불행한 일이에요." 킬 리가 눈을 들었다.
      콕스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두 주먹을 꼭 쥐고  있었다. 
     그는 일어섰다.
      킬리는 콕스에게로 가서 다정히 포옹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도움이 되어 다행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소식도 알았
     으면 좋겠습니다만.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모르겠습
     니다." 그는 현관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콕스 소위님, 한 가지만 더 가르쳐 주세요."
      "네?"
      "이 메달을 디발 의원에게도 보여 드렸나요?"
      "네."
      "그가 무슨 말을 하지 않던가요?"
      "그는 저어....이 메달은 제가  직접 당신에게 전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킬리는 콕스가 나가 버린 문에 이마를  대었다, 메달을 꼭 
     움켜쥐고서. 니콜이 그녀의 어깨를 껴안았다.
      "마크는 정말 안되었어. 어쨋든 이것으로 분명해졌어."
      "응."
      "물론 당장에는 비통하겠지만, 며칠 지나면 마음이 가라앉
     을 거야. 다시 태어났다는 생각이 들 거야. 이재 너도  재출
     발할 수 있게 되었어."하고 니콜이 말했다."그런데  너는 이 
     일을 파리에서 닥스한테서 듣지 않았니?"
      킬 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을 믿지 않았었니?" 그런 바보 같은 일이 어디 있
     느냐는 투의 말이었다.
      "응, 믿지 않았어!"킬 리가 외쳤다.  
      "어째서?"
      "나도 모르겠어." 킬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흐느꼈
     다. "그가 유치한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몹시 
     마음이 어지러운 데다 너무나 우연스러운 이야기라서. 그리
     고 아주 꺼림칙해서..."
      "꺼림칙하다니, 그게 무슨 뜻이지?" 니콜은 시선을 피하려
     는 킬리의 얼굴을 두 손으로  붙들었다. "어째 피하려는 킬
     리의 얼굴을 두 손으로 붙들었다. "어째서?"
      "왜냐면, 그 사람하고 잤기 때문이야!"
      "그게 무슨 상관이니?"
      "하지만, 나는 아직 마크의 아내야. 그리고, 그때는 아직..."
      "그만둬." 니콜은 화를 내며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너
     는 12년 동안이나 수녀  같은 생활을 했어.  그런데도 아직 
     고통이 부족하다는 말이니? 너를 사랑하는 사람과 자지  않
     았어! 마크는 이미 죽었던 거야. 도대체 무엇이 꺼림칙한지 
     말해 봐!"
      "너는 몰라."
      "몰라도 좋아! 어쨌든 나는 네가  깨끗한 순교자인 체하는 
     얼굴은 제발 하지 않았으면 해.  그러다가는 평생을 비참하
     게 지내게 될 거야!" 니콜은 등을 돌려 가지고 왔던 포도주 
     병을 들고 현관문을 박차며 나가 버렸다.
     
      킬리는 베드에서 흐느껴 울면서, 그 장면과  그 음성을 떨
     어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허사였다. 니콜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이 고통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어젯밤 그 일이 있은 
     뒤, 킬리는 만든 음식을  모두 쓰레기통에 버리고  울고 또 
     울엇다. 일요일은 우물우물 시간을 보내고  밤이 되어 겨우 
     잠자리에 들었으나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킬리를 사랑해.' 하고 말한 순간의 닥스의 모습이 눈에 떠
     올랐다. 어째서 그때 닥스의  가슴에 뛰어들어 두  번 다시 
     떠나지 말라고 말하지 못했을까? 그러나 후회해도 이미  소
     용없다. 스스로 사랑을 파괴하고 말았던 것이다. 설사  전화
     를 걸어 용서를 청하더라도  닥스의 사랑을 되돌리진  못할 
     것이다. 니콜의 말처럼 나는 정말  바보야.... 그래도 전화를 
     걸어 보는 것이 어떨까? 용서를 구해 본다면? 그렇다!
      킬리는 전화기에 손을  뻗쳤다. 그러나 이때  다름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닥스는 콕스가 메달을  전하러 왔을 것이
     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내가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는 아무 소식도 없다.
       나는 자유롭게 되었다. 그러나 닥스는 그렇지 않다.  그에
     게는 선거가 있다. 일요일 신문에  닥스와 마들레인 로빈슨
     이 나란히 찍은 사진이 실려  있었다. 마들레인이 파리에서 
     돌아온 닥스를 위해 화려한 파티를 열었던 것이다. 다시 말
     해서, 진 콕스가 찾아왔던 날 밤 닥스는 마들레인의 파티에 
     가 있었던 것이다. 함께 웃으면서 그녀를 껴안고 춤을 추고 
     있었던 것이다. 함께 웃으면서 그녀를 껴안고 춤을 추고 있
     었던 것이다. 상원 의원의 자리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닥스
     에게는 마들레인과 같은 사람이 꼭 필요한 것이다. 나는 필
     요 없는 인간.......
       다섯 시가 되어 자명종이 울리는 바람에 킬리는 할수  없
     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계적으로 옷을 입고 화장을  했다. 
     커피를 한잔 끓여 마시고 슈퍼 돔으로 차를 몰았다.
      공기는 적당히 습하고  따뜻했다. 벌써 봄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태양이 얼굴을 내밀 무렵에는 구름이 덮여  있었다. 
     잿빛이 섞인 짙은 라벤더빛 하늘을 몇 분동안 멍청히  쳐다
     보고 있으려니 프로펠러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다운타운
     의 빌딩 위에 거대한 모기 같은 헬리콥터가 모습을  나타냈
     다.
      "안녕." 큰 소리로 인사하는  조에게 응답하며 헬리콥터에 
     올랐다. 이리하여 평소와  똑같은 아침이 시작되었다.  여섯 
     시 55분에 레포트를 시작했을 때.  밑에서 하이웨이를 달리
     는 차는 아직 라이트를  켜고 있었고 인터체인지에는  차가 
     정체 없이 순조롭게 흐르고 있었다. 상쾌한 아침이 뒬 듯싶
     었다, 날씨는 어찌 되었던 간에.
       디스크 자키와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자
     동차 백파이어와 같은 빵  하는 소리가 크게  났다. 그리고 
     엔진 소리가 뚝 그쳤다.
      "제기랄!"조가 외쳤다. 킬 리가 돌아보니 조는  필사적으로 
     콘트로울 장치를 매만지고 있었다. 
      공포의 전율이 온 몸을 감싸고 흘렀다.
      "조!"킬 리가 외쳤다. 평소와 같은 침착한 태도로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 듣고 싶었다.
      "킬리, 위에서 무얼 하고 있는 거야? 지금 소리 풍선 터지
     는 소린가?" 헤드폰을 통해 농담 비슷이 말하는 디스크  자
     키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러나 킬리의 귀에는 그것이 희
     미하게 밖에 들려 오지 않았다.
      "조!" 킬리는 비명을 질렀다. 헬리콥터가 빙글빙글  돌면서 
     이상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꼼짝 말고 앉아 있어, 킬리." 조가 체념한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추락이야!"


     16.
     거리의 지붕과 지평선이  크게 흔들렸다.  프로펠러는 돌고 
     있었으나 엔진은 완전히 멎어 있었다.
     헬리콥터는 나선형을 그리며 떨어지고, 지면이 치받치듯 육
     박해 들어왔다.
     "안 돼!" 킬리가 외쳤다. "부탁이에요, 살려줘요!" 기체가 앞
     으로 크게 기울어지며 안전벨트가 복부로 파고드는 것을 깨
     달을 수 있었다. 그러나 벨트는 킬리의 몸을 지탱하지 못했
     다. 킬리는 방풍 유리에 머리를 세게 부딪쳤다. 퍽 하고  둔
     탁한 소리가 나면서 아픔과 구토가 몰려 왔다.
     "살려 줘요.!" 킬 리가 필사적으로 외쳤다.  "안 돼! 안 돼!" 
     눈을 뜨려고 했다. 그러나  눈이 부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 눈부신 광휘 속에서 하나의 모습이 나타났다.
     마크! 마크였다, 자랑스러운, 안심시키려는 듯한  미소를 띠
     고. 마크는 티 없고 원기에 넘치는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
     었다. 킬리를 보고는 기쁜 듯이, 또 놀란 듯이 눈을  빛내며 
     옛날과 다름없이 쾌활한 미소를 보냈다.
     마크! 킬리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당신,  살아 있었군요! 마
     크는 고통스러워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지구 반대쪽 정글
     에 묻힌 이름 없는 백골이 아니었다. 그는 지금 킬 리가 낙
     하하고 있는 같은 공기 속에 살아서 존재하고 있었다.
     벌써 떨어져 버린 것일까? 빛이  차차 희미해져 가고 있었
     다. 마크의 모습이 뿌옇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마크에게  말
     을 걸려고 했다. 그러나 마크는 킬리에게 손을 흔들고는 등
     을 돌렸다. 그리고 그의 모습은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사라져 갔다.
     커다란 막이 두 사람을 가로막았다.  그러고는 킬리를 삼키
     려는 듯이 사방에서 암흑이 다가왔다.  킬리는 마크가 있는 
     쪽 너머의 빛을 향해 손을 뻗으면서 암흑 속으로 빨려 들어
     갔다. 그러나 이 순간, 킬리는 최근 10여 년 동안에 느껴 보
     지 못한 마음의 안식을  분명히 느꼈던 것이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의 갈림길에 선  순간에, 킬리는 마크와  같이 있고 
     마크와 같이 죽는 다는 경험을 나누어 가졌다. 마크를 만나
     고, 마크가 빛나는 광휘 속에 평온히  살고 있는 것을 알았
     다. 그리하여 세상에서의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피안의 
     세계로 전송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킬리는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밀려드는 암흑 속
     에 몸을 맡겼다.
     
     
     "안심하고 편안히 누워 계세요. 프레스턴 씨, 여기는 병원이
     랍니다."
     일어나려고 뒤트는 어깨를, 강한 그러나  다정한 손이 침대
     에 눌러 뉘었다.
     "붕대가 풀어졌어요, 고친 다음에." 하며 누군가가  이마 위
     의 무엇을 만졌다. "자아, 눈을 뜨세요, 프레스턴 씨. 괜찮으
     니 떠 보세요."
     킬리는 애써 그렇게 하려고 했으나 눈꺼플이  납덩어리처럼 
     무거워 떠지지가 않았다. 짙은 안개 저쪽에서 들려 오는 듯
     한 목소리가 아직도 눈을 뜨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필사적
     으로 노력하는 동안에 겨우 한 줄기 빛이 눈에 들어왔다.
     "네, 좋습니다, 프레스턴 씨."
     간호원의 흰 제복이 눈을 찌르는 것  같았다. 혀 밑에 체온
     계가 끼워지고 맥박이 재어졌다.
     여기는 어디일까.........어째서........하고 생각하려니 머리가 쑤
     셔 왔다. 그렇다, 헬리콥터가 빙글빙글 돌며 추락하여-----
     킬리는 제지 당하면서도 계속 몸부림쳤다.
     "조! 조!"
     "그는 무사해요." 목소리가 말했다. "평소와 같이 슈퍼 돔에 
     안전하게 착륙했어요."
     "착륙? 하지만......" 
     "자세한 것은 나중에 말하겠어요. 지금은 우선 이것을 마셔
     요."
     킬리는 고개를 가로 저었으나, 스트로우가  입에 닿자 얌전
     하게 두서너 모금 마셨다. 그러자 다시 졸음이 엄습해 왔다.
     의식이 분명히 되살아날  때까지는 상당히  시간이 걸렸다. 
     깊이 잠들었다가 가끔 눈을 떠보면 머리가 어지럽고 혼미했
     다. 굵은 주사바늘이 팔  안쪽에 꽂혀, 손을 움직일  때마다 
     반창고가 켕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꿈속에서 부모의 모습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눈을 뜨자 부모가 실제로 베갯머리에 
     있었다. 어머니는 눈물을  흐리고, 아버지는 걱정을  감추지 
     못하며 킬리의 이마에 키스했다.
     한번을 눈을 뜨자 금발의 고수머리인 명랑한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여어." 하고 그가  말했다. "당신 친구의  간곡한 부탁으로 
     내가 상처를 꿰맸어요. 나는 성형외과의 월터 의사요.  머리
     와 이마 사이에 약간의  흉터 자국이 남겠지만,  얼른 보면 
     거의 알아 보지 못할 거요."
     킬리는 미소로 대답했다. 그리고 다시 잠이 들었다. 이튿날, 
     거미줄이 한꺼번에 걷힌 듯 거짓말처럼 의식이 명료해졌다. 
     몹시 두통이 났으나  정신은 또렷했다.  팔다리는 쇠약해져 
     떨리고 있었지만, 간호원의 부축을 받으며 조금씩 실내에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그날 밤에는  간호원이 가져다 준 신
     문을 읽고, 하마터면 사고가 일어날 뻔 했던 자초지종을 알
     게 되었다. 병실에 가득 찬 꽃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바라
     볼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간호원이 화분이라 꽃다발에 달
     려 있는 카드를 한 장 한 장 읽어  주었다. 그 중의 하나에
     는 이름이 씌어 있지 않았으나, 가장 크고 가장 아름다웠다.
     노랑 장미꽃이었다. 우연히 이름을 잊고 쓰지 않은 것이 아
     님을 킬리는 알 수 있었다. 킬리는  그 꽃다발 속에서 완전
     하게 핀 꽃가지를 하라 뽑아 베개  위에 놓았다. 눈물이 이
     슬처럼 꽃잎을 적셨다.
     이튿날 아침에 킬리는 일어나기가 바쁘게 샤워를 하고 네글
     리제로 갈아입은 뒤 화장을 했다. 어느새 킬리의 화장 도구
     와 자잘한 것들을 넣은 작은 가방이 나이트 테이블 위에 놓
     여 있었다. 어머니가 가져온 것이 아닌가 하여 물어 보았으
     나 그렇지 않았다. 겨우 면회가 허락되었다. 방송국의  상사
     가 스텝 일동을 대표로 문안을 와 주었다. 조도 왔다.  그는 
     눈물이 글썽해지며 킬리를 껴안았다.
     "무언가 작은 이 물질이 연료 파이프를 막았기 때문에 엔진
     이 멎었던 거야." 조가 말했다. "프로펠러가  여력으로 도는 
     동안에 겨우 슈퍼 돔에 착륙하기는  했지만 몹시 걱정했지, 
     킬리의 얼굴이 피투성이여서."
     그 날 밤, 저녁을 먹고 침대에  일어나 앉아 텔레비전을 보
     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네" 하고 대답하자 들어
     온 사람은 니콜과 찰즈였다. 니콜은  몹시 머뭇거리고 있었
     다. 킬 리가 두 팔을 내밀자  니콜이 와락 울음을 터뜨리며 
     안겨 왔다.
     "킬리, 지난번에는 미안했어. 너무 말을 심하게 했어. 네 비
     명을 들었을 때 나는 죽고 싶었어."
     "들었어?"
     "응, 디스크 자키와 이야기하던 도중이었으니까.  디스크 자
     키도 그만 놀라서 스위치를 미처 끄지  못한 것 같아. 그래
     서 라디오를 듣고 있던 사람은  모두 네 비명 소리를  들었
     어."
     "나는 몰랐어. 무척 사람들을 놀라게 했겠지?"
     "덕택에 킬리는 히로인이  됐어." 킬 리가  화를 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자 니콜은 느긋한 마음으로 말했다.
     "성혀외과 의사를 불러 주고 가방을 갖다 준 것은  바로 너 
     였지?"
     "찰즈와 내가........"
     "고마와." 두 친구의 손을  꼭 마주 잡았다.  하마터면 눈물 
     바다가 될 장면을 찰즈가 구해 주었다.
     "아직도 그 뉴스를 말하지 않긴가?"
     니콜이 찰즈를 짖궂다는 듯이 노려보았다.
     "거기 서서 히죽거리고만 있을 작정이에요!"
     "물론이지." 찰즈는 빙그레 웃고 있었다.
     "너무들 그러지 말아요. 대관절 무슨 일인데?"
     "사실은, 나 임신했어." 
     킬리는 눈을 둥글게 뜨고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니콜이 수도원에 들어가 수녀가 되었다 해도 이처럼 놀라지
     는 않았을 것이다.
     "뭐라고?"
     "방금 말한 그대로야. 아기가 생기게 됐어. 범인은........"
     니콜이 찰즈를 가르켰다.
     "저 사람."
     킬리는 웃었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머리가  쑤셨으나 
     웃는 것은 기분좋은 일이었다. 이윽고 니콜의 입도  벌어져, 
     두 사람은 소리를 내어 같이 웃었다.
     "믿을 수 없어. 도대체 언제.....?"
     "너하고 닥스가 카페 드 몽드에 갔던 날 밤이야. 그가 집에
     까지 바래다 주었을 때, 나는 갖은  수단을 다해 그를 침실
     에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어. 그런데 그는 여기 대해 보복을 
     한 것이었어."
     두 사람 모두 그 일을 후회스럽게  생각지 않는 것 같았다. 
     찰즈는 니콜을 끌어안고 코 끝에 키스했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는 어제 결혼했어요. 킬리가  곁에 있
     어주지 않아 유감이었지만 한시도 기다릴 수가 없었어."
     "어마, 축하해요. 정말로 축하해요!"  기쁨의 눈물과는 다른 
     눈물이 또 솟아났다.
     "어서 신랑에게 키스하게 해줘요."  찰즈는 허리를 굽혀 킬
     리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했다. "그럼 나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어." 그는 눈치 있게  두 여자를 남긴  채 병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니콜, 무척 행복해 보이는구나."
     "응, 그래, 파열해 버릴 만큼. 그를 사랑하고 있어.  그도 나
     를 사랑해 주고 있고. 내가 어떤  딱지를 달고 있는 여자인
     지 알면서도."
     니콜은 천 사람의 마음도 녹여  버릴 것 같은 미소를  지었
     다. 그러나 킬리의 표정에서 소름이 끼칠 듯한 그림자를 발
     견하자 진지한 얼굴로 돌아왔다.
     "너는? 아직 그 문제에 해답을 내리려 하지 않고 있니?"
     "대답은 이미 나왔다고 생각해" 킬리는 슬픈 듯이  노란 장
     미꽃을 바라보았다. "닥스를 죽도록 사랑해. 하지만 그는 내
     가 한 말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거야."
     "어떻게 그것을 알지? 그에게 물어 보았니?"
     "아니."
     "그렇다면 물어 봐야지. 그는 지금 문 밖에 있어."
     "그가........닥스가........?"
     "그는 구급차보다도 더 빨리 이곳으로 달려왔어. 방송을 듣
고. 
그때부터 줄곧 네 병실 곁에서 떠나지 않고 있어........
     ......킬리, 어쩌려고 이래. 그대로 침대에 누워 있어!"
     "싫어."킬리는 허둥지둥 담요를 젖혔다. 
     "나는 그에게로 가야 해."  킬리는 제지하려는 니콜의 손을 
     뿌리치고 비틀거리면서 문으로 향했다. 닥스를 만나야지. 내
     가 먼저 그를 만나러 가야지. 문은 킬리의 쇠약해진 몸으로
     써는 지나치게 무거웠다. 니콜이 대신 열어 주었다.
     닥스는 복도 끝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지친 듯 어깨
     를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머리가  흩어지고 수염도 텁수룩
     하게 자랐으며 옷도 구겨져 있었다.  그러나 킬리에게는 어
     느때 보다도 훌륭해 보였다.
     "닥스........."
     그는 취한 듯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문에 기대어 서 있
     는 킬리를 보았다. 그는  일어서다가 의자 앞에  있는 작은 
     테이블에 부딪혔다. 복도를 달리듯이 하며 다가왔다. 그리고 
     킬리를 힘껏 껴안았다. 킬리는 숨이 막힐 것 같았으나 기뻤
     다.
  "킬리, 킬리!"
닥스는 킬리의 머리에 대고 몇 번이나 이름을 불렀다. 두 사람은 복도 한 가운데서 이목도 개의치 않고 끌어안고  있었다. 니콜이 두 사람을 방안에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닥스는 떨리는 손을 킬리의 머릿속에 미끄러뜨리고 근심스럽게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킬리가 죽은 줄로 생각했어. 킬리의 음성이 듣고 싶어서, 만나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  없어서 라디오를 켜 놓고 있었어. 엔진이 멎는 것을 알 수 있었지. 나는 심장이 얼어붙었어. 나도 비명을 질렀어, 킬리가 죽은 줄 알고.....아 아, 킬리............"
  "죽지 않았어요. 죽지 않고 지금 이처럼 당신 앞에 있어요." 
킬리는 닥스의 젖은  속눈썹을 손으로  가만히 닦아주었다. 
  "왜 만나러 와 주지 않았어요, 그 메달에 대한 것을 알았을 때........?"
  "그럼, 킬리는 내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어째서 전화를 걸어 주지 않았어?"
  "어째서라뇨, 그렇게 심한 말을 해 버렸기 때문이에요. 절대로 용서받지 못하리라  생각했어요. 그리고 당신의 입장도 있지 않아요? 선거 운동에 지장을 초래하게는 할 수 없는 일이고, 게다가 당신이 마들레인과 같이 찍은 사진이 신문에 난 것을 보았기에........."
닥스가 웃었다.
  "그리고 또?"
  "그리고.......당신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당신에게 괴로움을 끼칠 일은 무엇하나 하고 싶지 않았어요."
  "킬리."닥스는 다시 한번 그녀를 힘껏 끌어안았다.
  "내가 킬리에게 가지 않은 것은, 킬리가 틀림없이 마크의 일로 슬픔에 잠겨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야. 파리에서 지나친 일을 했으므로 다시는 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고 싶지가 않았던 거야."
  "나는 마크가 포로로 잡히던가 하여 몇 년 고생한 것보다는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해요. 그는 이미 안식을 찾았어요. 나는 헬리콥터가 추락하고 있을 때...."
  "어떤 일이 있었는데?"
  "마크에게 작별을 고했어요. 물론 그를 언제까지나 잊지 않겠어요. 하지만 그는 죽은 사람이에요. 나는 다시 한번 새로 태어나고 싶어요. 살아 있는 나날을  하루라도 헛되게 보내고 싶지 않아요."
닥스는 그녀에게 키스했다. 길고 강하게 진지하게.
  "킬리, 나하고 결혼해 줘."
  "정말이세요?"
  "정말이야."
  "하지만 나는 이제 막 미망인이 되었을 뿐이에요. 내가 어떤 손가락질을 받아도 그것은 상관없어요.  하지만 당신의 선거 운동에 차질을 가져오게 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런 걱정은 내게 맡기면 돼. 킬리만 승낙한다면 내일 기자 회견을 열어 약혼을 발표하겠어. 제일 먼저  밴 돌프를 불러----그 녀석, 날 듯이 달려오겠지. 그리고 우리의 일을 멋지게 기사화해 줄 거야."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 사람과?"
  "자아, 가서 누워. 킬리는 아직 완전한 몸이 아니야. 그 이야기는 나중에 재미 삼아 하도록 하겠어. 나와 결혼해 주겠지?"
  "하지만 닥스, 유권자들은 틀림없이 이맛살을 찌푸릴 거예요."'
  "문제 없어. 킬리는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사고  있어. 그리고 킬리와 결혼했다는 이유로 투표해 주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좋아. 고향에 돌아가 농사를 짓겠어. 상원의 의석 따위가 대수로운가? 내게는 킬리가 무엇보다도 소중해."
  "닥스." 킬리는 그의 얼굴을 껴안고 입술을 겹쳤다.
  "다시는 나는 놓지 마세요."
  "물론, 결코 놓지 않겠어. 사랑해."
닥스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자 강하고 뚜렷한 심장의 고동 소리가 전해져 왔다. 그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니, 오랜 세월의 슬픔이 깨끗이 사라져 버리는 듯했다. 그렇다, 이제부터가 시작인 것이다. 슬픔은 모두 지난날의 것이다. 오늘은 이처럼 행복하지 않은가.  그리고 내일은--행복을 약속해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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