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마스의 토의적 민주주의 이론
--- 민주주의의 규범적 의미와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화해
1. 들어가는 말
나라가 생긴 이후부터 지금까지 한국사회의 진행방향을 규정해왔던 하나의 큰 흐름은 민주화운동이었다. 건국 초기부터 90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이승만 일인독재와 그후 30년간이나 지속된 군사독재에 맞서, 민주화를 위해 싸웠다.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눈물을 대가로 치르고서 한국사회는 군사독재를 끝내고 이제 부족한대로 어느 정도 형식적 민주주의를 이루어냈다. 그 동안 민주주의는 우리에게 매우 선명하고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겨우 약간의 형식적 민주주의를 성취한 지금 민주주의라는 이념은 그 빛이 바래고, 그 높던 위상이 급속하게 추락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민주주의에 관심도 없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공공연히 민주주의의 이념이 도전받기도 한다. 사회 일각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흐름을 이루고 있는 박정희에 대한 향수는 민주주의보다 경제발전이 우선이라는 일반적 정서의 표출이다. 민주주의만 따로 고려하면 많은 사람들이 긍정적이지만, 그것을 효율성이나 경제발전, 규율, 질서 등 다른 가치와 나란히 놓고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이다.
사실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 이념은 독재정권 덕분에 지난 수십 년간 세계에서 예외적으로 호강을 누렸다고 할 수도 있다. 인터넷을 통해 싱가포르나 일본 등 여러 아시아 사람들과 토론을 자주 한다는 어떤 사람의 말을 빌리면, 민주주의가 긍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나라는 아시아에서 한국밖에 없지 않는가 하는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진중권: 189-90) 싱가포르의 수상 이광요는 대놓고 말한다. "나는 한 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것은 민주주의라기보다는 규율(discipline)이라고 믿는다. 과도한 민주주의(exuberance of democracy)는 발전에 해로운 방종(indiscipline)과 무질서한 행위를 유발한다." 이러한 생각은 단지 상식적인 수준에서 표현되는 것을 넘어, 소위 유교적 자본주의론 또는 권위주의적 자본주의론(개발독재론)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이와 맥은 다르지만 요즘 득세하고 있는 신자유주의도 민주주의의 효율성을 비판하면서 민주주의가 상당히 제한된 범위 안에 머물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란 권위주의, 전제주의, 독재 등과 더불어 그냥 단지 하나의 정치체제에 불과한 것인가? 그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그만인 것인가? 아니면 꼭 해야만 하는 규범적 가치를 갖는 것인가? 우리의 필요를 우리보다 더 잘 알며 우리를 우리보다 더 사랑하는 마음씨 좋은 철인왕이 있다고 해보자. 우리는 그의 배려와 사랑을 마다하면서까지 민주주의를 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가? 이 논문을 이끄는 주요한 문제의식은 이것이다.
민주주의 이론사를 일별해 보면 우리는 두 가지 큰 흐름이 있음을 어렵지 않게 간취할 수 있다. 하나는 로크로 대표되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루소로 대표되는 공화주의적 민주주의이다. 자유주의는 신체의 자유, 재산권, 사생활보호권 등 소위 소극적 권리를 중심으로 한 기본권 보호를 우선시 한다. 이에 반해서 공화주의는 정치적 참여권, 의사소통의 권리, 사회권과 같은 적극적 참여적 권리를 중요시하면서 인민의 자기결정(self-determination)을 민주주의의 핵심으로 생각한다. 지금까지 민주주의 이론사에서 이 두 흐름은 갈등관계에 있다고 여겨져왔다.
이 갈등관계는 현대 정치이론에서 두 가지 큰 논쟁으로 비화되어 계속되고 있다(Jean Cohen and Andrew Arato, 1997: 4-15). 첫번째 논점은 권리지향적(right-oriented)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 간의 논쟁이다. 자유주의에 따르면 인간은 자연권과 같은 양도할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권리를 날 때부터 가지고 있다. 정치란 이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며, 이것이 최우선이다. 공화주의의 현대적 미국적 변형인 공동체주의에 따르면 그러한 자유주의적 견해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이다. 인간이 인간이 되는 것은 단지 인간의 유전자를 타고나서가 아니라 특정 공동체의 성원으로서 그 공동체의 문화와 전통을 배우며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성장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권리를 개인이 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난다는 소유적 개인주의는 허구이며, 그런 생각이 현대의 병리의 표현이자 원인이다. 권리란 공동체에 의해서 서로에게 부여되고 인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이 보기에 이러한 공화주의적 견해는 위험하다. 그것은 공동체를 강조함으로써 인권을 침해할 소지가 다분하고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과 개성을 가로막을 수도 있다. 그래서 자유주의자는 기본권 보호와 법치를 강조한다. 법을 통해 권력이 다수에 의해 자의적으로 행사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화주의적 입장에서 보자면 공동체에 앞선 개인과 권리란 허구일 뿐만 아니라 인민주권이라는 원칙에도 반한다. 법은 외부에서 인민의 의지 위에 부과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인민의 의지의 표현이다.
다른 하나는 엘리트 민주주의와 참여민주주의 사이의 논쟁이다. 엘리트 민주주의로 대표되는 자유주의적 이론가들은 현대사회의 조건 하에서 실질적인 인민의 자기지배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현대사회의 복잡성과 다양성에 비추어볼 때 이제 정치는 다른 전문분야처럼 고도의 전문지식이 필요한 분야가 되었고, 그런 만큼 이제 정치도 정치 엘리트들에게 맡겨져야 한다는 것이다. 인민주권이란 자신들을 다스릴 대표자를 뽑는 투표의 권리로 축소되고 만다. 공화주의쪽에서 보기에 그것은 민주주의를 형해화시키는 것이며, 민주주의를 과두제(oligarchy)로 만드는 것이다. 그런 민주주의는 지배를 은폐하는 장식일 뿐이다.
최근의 서구의 민주주의 이론사를 간략하게 살펴보면 195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엘리트 민주주의 이론, 합리적 선택이론을 응용한 경제적 민주주의론(economic theory of democracy), 경쟁적 다원주의 이론(competive pluralist model of democracy) 같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이론이 자신들의 현실적 설명력을 강점으로 내세우며 민주주의 이론을 주도해왔다. 그러다가 1970년대 중반부터 60년대말의 시대적 경험에서 자극을 받아 서서히 단지 형식적 수준에서가 아니라 실적적인 차원으로까지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참여민주주의가 힘을 얻기 시작했으며, 80년대 들어 토의적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라는 분명한 형태로 개념화되었다(James Bohman and William Rehg: x-xvii).
다른 한편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새롭게 평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이전에 정통 맑스주의는 형식적 민주주의를 단지 부르조아 계급 지배의 외피로서만, 환상적인 것이고 사기적인 것으로 간주해왔다. 정치적 다원주의에 대해서도 복수정당이나 정치조직의 다원주의는 적대적 계급투쟁의 산물이기 때문에 계급 대립이 해소된 사회주의에서는 필요없다는 식의 태도를 취해왔다. 그러나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할 때 그 나라 국민들이 사회주의 정권에 대해서 보여준 태도는 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민주주의 없이 사회주의가 가능한지, 절차적 민주주의 없이 실질적 민주주의가 가능한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고,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절차들과 다원주의적 정치조직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다(손호철: 360-73).
하버마스의 토의적 민주주의 이론도 이론사적으로 보자면 이러한 큰 흐름 속에 있다. 그는 공화주의적 이념을 살리고자 하면서도 자유민주주의적 절차도 등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한 발 더 나아가 그 두 가지가 서로를 가능하게 해준다고 주장한다. 그는 의사소통적 행위이론을 바탕으로 한, 자신의 토의적 민주주의 이론이 민주주의의 규범적 의미와 현대사회에서 그것의 가능성을 밝힘과 더불어, 이론사적으로 긴장 관계에 있어왔던 자유주의와 공화주의, 다시 말해서 인권(혹은 법치)과 인민주권의 관계를 화해시킬 수 있다는 야심적인 주장한다.
하버마스는 자신의 민주주의 이론을 정치이론의 형태로 직접 제시하지 않고 법이론의 형태로 돌려서 제시한다. 현대사회의 사회통합에서 법은 대체될 수 없는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는데, 법이 부작용 없이 기능하기 위해서는 제재력이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규범적 정당성 또한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한다. 바로 그 규범적 정당성이 민주주의로부터 나온다. 반면 현대사회에서 민주주의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사회통합 매체와 사회의 조직 수단으로서 법이 필요하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는 민주주의의 규범적 의미와 법치국가와 민주주의의 내적 관계를 밝힐 수 있다.
2. 사회통합 매체로서의 법
1) 사회통합의 사실성과 타당성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물질적으로 재생산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사회통합(soziale Integration)이 이루어져야 한다. 물질적 재생산의 측면에서 볼 때 사회는 체계(System)로 나타나고, 사회통합의 측면에서 볼 때 사회는 생활세계(Lebenswelt)로 나타난다. 체계통합에 적합한 통합 매체는 돈과 권력이다. 그러나 구성원들간에 연대성과 집단적 정체성이 생겨나기 위해서는 그것으로 안 된다. 서로간에 합의(Einverstandnis)를 통해 행위를 조정하는 의사소통적 행위가 필요하다. 의사소통적 행위란 "자신들의 행위계획과 행위를 합의를 통해(einvernehmlich) 조정하기 위해서 행위상황에 대해 협의(Verstandigung)"하는 적어도 두 사람 이상의 상호작용이다(Habermas, 1981a: 128).
의사소통적으로 행위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발화행위를 통해 서로에게 타당성 주장을 제기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자신들의 주장을 근거로서 정당화한다. 그런데 이 때 의사소통적 행위자들이 제기하는 타당성 주장은 단지 지금 여기에만 국한되는 타당성 주장이 아니다. 물론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토의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행위조정 효과를 낼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타당성 주장은 지금 여기의 지방적 기준을 넘어서 "무제한적 해석공동체의 이상적으로 확장된 청중"을 향하고 있다(FG: 35). 그럴 때에만 그것이 정당화될 수 있다. 타당성 주장의 지금 여기에서의 사실적 수용과 무제한적 해석공동체에서의 그것의 수용가능성 사이의, 다른 말로 하자면 사실성과 타당성 사이의 이러한 긴장이 사회통합 일반에 깔려 있다(FG: 35).
서로의 행위를 조정하기 위해서 토의를 할 때 토의 참여자들은 근거를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한다. 그러나 근거는 더 나은 근거에 의해서 그리고 맥락이 변함에 따라 부정될 수 있다. 따라서 사회통합이 공동의 확신에 의지하는 한, "사회통합은 평가절하하는 근거들의 탈안정화 효과에 대해서 … 허약하다." 합의를 통해서 행위를 조정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거기에는 불일치의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다. 어렵게 합의가 된다하더라도 그것은 사실성과 타당성 사이에서 가랑이가 찢어지려 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실성과 타당성 사이의 폭발적 긴장에 의해서 위협받고 있는 합의형성 과정으로부터 어떻게 사회질서가 나올 수 있는가"?(FG: 37)
2) 탈형이상학적 시대에 필수불가결한 사회통합 매체로서의 법
이러한 긴장을 일차적으로 감소시켜주는 것이 생활세계이다. 의사소통적 행위는 특정 상황 속에서 일어나고 생활세계는 그러한 상황의 지평을 형성한다. 생활세계는 또한 상황을 공동으로 정의하기 위해 의사소통 참여자들이 길어올릴 수 있는 믿음의 저수지, 해석의 원천, 배경전제들의 저장물이기도 하다(하버마스, 1995b: 172-5). 그것은 우리의 시각을 규정한다. 그것이 그럴 수 있는 것은 생활세계가 우리에게 언제나 이미 친숙하기 때문에 그것의 타당성이 애당초 문제삼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의사소통적 행위를 하는 동안 생활세계는 직접적 확실성의 양상으로 우리를 감싼다. 우리는 그러한 확실성에 직접적으로 힘입어 살아가고 대화한다(sprechen)."(FG: 38) 이러한 확실성 속에서 사실성과 타당성 사이의 긴장이 해소된다. 생활세계적 확실성이 의사소통적 행위 안에 있는 터질 것 같은 불일치의 위험을 덜어준다. 그 덕에 사회통합이 가능하게 된다.
생활세계와 마찬가지로 사실성과 타당성 사이의 긴장을 덜어줌으로써 불일치의 위험을 줄여주는 다른 하나는 고대의 자연발생적(naturwuchsig) 제도들이다. 고대의 종교적 제의, 신성한 세계상, 신비롭게 신성시되는 규범적 합의 등이 이러한 제도의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고대의 자연발생적 제도가 생활세계와 다른 점은, 생활세계와 달리 이러한 제도는 문화적으로 전승되고 습득되는 "명백한 지식"의 수준에 있다는 것이다(FG: 40). 그러나 그것은 지식으로서 주제화될 수 있기는 하지만 유보(Vorbehalt) 하에서만 그렇게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제도는 신성시되고 당연시되며, 쉽게 의문시될 수 없는 강한 권위를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권위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규범과 가치는 … 협의과정의 문제화 소용돌이를 벗아나 있는 틀(Datenkranz)을 형성한다."(FG: 55)
사회가 진화하기 전에는 생활세계와 고대의 제도를 통해 "타당성 주장 일반과 같은 깨지기 쉬운 토대"(FG: 23)는 안정화될 수 있었고, 그를 통해 사회의 통합이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런데 사회가 진화함에 따라 생활세계가 합리화된다. 생활세계가 합리화된다는 것은 "상호작용 연관이 점점 더 합리적으로 동기지워진 협의의 조건, 그러니까 최종적으로는 보다 나은 논증의 권위에 의지하는 합의형성의 조건 밑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Habermas, 1981b: 218). "그 결과 … 논란이 되고 있는 문제들의 범위가 점점 더 넓어지고 있으며, 합의에 이를 수 있는 공유된 토대가 점점 줄어드는 조건에서, 갈등은 점점 더 그러한 문제들에 대한 명시적 합의를 통해서 해결될 수밖에 없게 된다."(Regh: xviii) 그 만큼 불일치의 위험도 높아지고 사회통합의 비용도 늘어난다.
다른 한편 사회가 복잡해짐에 따라 사회가 기능적으로 분화된다. 경제와 행정과 같은 영역에 있어서는 합의를 통합 행위조정이 비용만 많이 들 뿐, 꼭 필요하지도 않다. 오히려 효율성을 앞세우는 성공지향적 행위가 필요하다. 이러한 영역에 대해서는 돈과 권력이 적절한 매체로 등장하며, 경제와 행정이 생활세계로부터 분화되어 간다.
"한쪽에서는 사회의 다원화가 공유된 정체성을 파편화시키고 합의를 위한 실질적인 생활세계적 자원을 파괴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물질적 재생산의 기능적 요구가, 개인들이 합목적성에 따라 자유롭게 자신들의 목적을 추구할 수 있는 영역의 확대를 요구하는 그런 조건에서"(Rehg: xix), "불일치의 위험을, 그 위험을 높임으로써만 진정시킬 수 있"는 의사소통적 행위는 "자기에게 맡겨진 사회통합의 짐을 벗어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진지하게 지고 나갈 수도 없는 그러한 역설적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렇게 곤란한 상황에서 사회는 어떻게 통합될 수 있을까? "족쇄가 풀린 의사소통이 스스로를 부인하지 않으면서 사회통합이라는 짐을 벗을 수 있는 그러한 메커니즘은 어떤 것일"까?(FG: 56, 강조는 인용자) "이러한 곤경에서 벗어나는 길은 행위자들이 전략적 상호작용의 규범적 규제에 대해서 스스로 협의하는 것이다."(BFN: 26/FG: 44) 쉽게 말해서 전략적 행위를 마음껏 풀어놓되 그것의 경계와 그것을 규제하는 규범에 대해서는 토의를 통해 결정하는 것이다.
성공지향적 행위를 인정하고 풀어 놓으면서도 안정된 사회질서를 유지해야 하는 근대 이후 사회에 적합한 행위규범은 다음의 두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 그것은 규범에 대해서 성공지향적 자세취하기를 허용하지만, 다시 말해서 규범을 준수하는 동기에 대해서는 개의치 않지만, 규범준수를 사실적으로 강제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그러면서도 그 규범은 정당하다는 인정을 누려야 한다. 그것은 규범에 대한 존중으로부터도 준수되어야 한다. "따라서 추구되는 종류의 규범은 사실적 강제에 의해서 그리고 동시에 정당한 타당성을 통해서 기꺼이 준수되어야 한다."(FG: 44-5)
이러한 "수수께끼"(FG: 45)의 답은 무엇일까? 이러한 "막다른 골목에서의 탈출구"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법의 완전한 실증화"이다(FG: 56). 근대의 실정법이 바로 그러한 법이다. "근대법"은 "협의성취라는 지나치게 무거운 짐을 이미 지고 있는 의사소통적 행위자들로부터 의사소통 영역의 제한 없애기를 원리상 후퇴시키지 않으면서도 사회통합의 과제를 덜어주는 메커니즘"이다(FG: 57). "우리가 근대에, 말하자면 사회적 학습과정의 결과로 발견하는 실정법은, 자신의 형식적 특성을 근거로 해서 자신을 행위기대의 안정화를 위해 적합한 수단으로 내세운다. 복합사회에서는 그것에 대한 어떠한 기능적 등가물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N: 667, 강조는 인용자)
3. 법치국가와 민주주의의 내적 관계
1) 법의 정당성
? 인권과 국민주권
현대사회에서 법은 사회통합을 유지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매체이다. 탈형이상학적이고 고도로 분화된 근대 이후, 자유롭고 평등한 구성원으로 서로를 인정하면서 자신들의 공동 삶을 영위해 나가려는 사람들에게 행위조정 매체로서 법의 기능을 대신할 수 있는 다른 매체는 없다. 그런데 법이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사실적으로 유효한 것에 그쳐서는 안 되고 정당하다는 인정 또한 누려야 한다. 법의 사실적 타당성은 제재력을 갖춘 국가권력으로부터 온다. 그렇다면 법의 정당성은 어디서 오는가?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 법은 사회 구성원들이 공동으로 가지고 있는 형이상학적 가정이나 종교적 세계관, 집단적으로 구속력있는 윤리로부터 자신의 정당성을 길러왔다. 이제 그런 것들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다원화된 사회에서 법의 정당성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법은 …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자유를 보장하는 한에서 정당하다."(FG: 49) 법은 모든 법적 인격의 자율성을 보장해야 정당하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법의 실정성은 자율성을 [둘로] 쪼갠다(Aufspaltung)."(N: 665) 도덕에서는 규범을 만드는 사람과 그 규범을 따르는 사람이 구분되지 않는다. 도덕에서는 행위자가 자율적으로 만들거나 받아들인 규범만이 규범으로 성립한다. 그러나 근대의 실정법은 동기를 문제삼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정치적 입법가의 결정에 의해서만 법적 규범으로 성립한다. 법의 영역에서는 법의 저자와 수신자가 구별된다(Habermas, 1998: 257). 물론 법이 정당하기 위해서는 자기입법의 이념이 충족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러한 구분은 단지 "잠정적일 뿐인 역할구분"이다(N: 666). 그러나 중요하고 불가피한 구분이다.
둘로 쪼개진 법적 자율성의 이름은, 하나는 법의 저자의 역할에서 의사소통적 자유를 공적으로 사용하는 공적 자율성이고, 다른 하나는 수신자의 역할에서 주관적 자유를 사적으로 사용하는 사적 자율성이다(N: 666). 사적 자율성과 공적 자율성은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에 의해서 각각 법의 지배 또는 인권보호와 인민주권이란 이름으로 불려져 왔다(Habermas, 1998: 258). 인권과 인민주권, 다시 말해서 법치와 자기입법이라는 두 이념은 근대에 법을 정당화하는 유일한 원칙으로서(FG: 129), "오늘날까지 민주적 법치국가의 규범적 자기이해를 규정하고 있다."(FG: 124) 그렇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인권과 인민주권이, 법이 정당화되려면 동시에 보호해야 할 두 자율성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두 이념은 지금까지 상호보완적으로 제시되기보다는 서로 대립적인 것으로, 하나를 희생해야만 다른 하나가 관철될 수 있는 것으로 제시되어 왔다. 자유주의자들은 정치적 공동체에 우선하는 인권이 다수의 전제에 의해서 침해될까봐 두려워한다. 그래서 이들은 법의 지배를 강조하면서 인민의 주권에 제한을 가하고자 한다. 이와 달리 공화주의자들은 자기조직화(Selbstorganisation)의 내재적 가치를 강조한다. 이들에 따르면 법을 제정하는 인민의 의지에 앞서는 것은 없으며 공동체의 진정한 삶의 기획과 일치하지 않는 어떤 것도 인정될 수 없다(FG: 117, 130).
법의 정당성에 대해서 온전한 설명을 하고자 하는 하버마스는 인권과 인민주권, 다시 말해서 사적 자율성과 공적 자율성 사이의 이러한 잘못된 대립을 극복하고 그 둘 사이의 내적 관계를 보여주어야 한다. 또 그러한 극복과 내적 관계가 합법적인 절차에 따른 입법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설명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언뜻 보기에는 말이 안 되는, 합법성에서 정당성이 나오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이데올로기적으로 다원화된 시대상황(context)에서 법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유일한 원천인 민주적 절차를 토의이론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Habermas, 1998: 259)
? 민주적 절차에 대한 토의이론적 해석: 실천적 토의의 절차적 합리성
우리가 정치적 의견 및 의지형성을 국민투표나 여론조사처럼 이미 정해져 있는 선호를 모으는 것으로 해석하는 한, 입법과정은 사회통합 과정이 될 수 없고, 인권과 인민주권은 대립적인 것으로 나타나며, 합법성에서 정당성이 나온다는 것은 역설로만 들린다. 우리는 오히려 정치적 의견 및 의지형성을 자유롭게 의견과 정보를 교환하고 자신의 주장에 대해서 성실하게 근거를 대는, 그리고 그런 과정 속에서 참여자들의 견해와 선호가 보다 나은 논증의 힘에 의해서 변화되면서 합의에 이르는 실천적 토의로 해석해야 한다.
토의는 정보와 관점이 교환되고 전파되는 과정이다. 토의에 참여함으로써 참여자는 자신이 생각지도 못했던 관점과 정보를 접한다. 그러한 새로운 사실들은 토의에 참여하기 전에 가지고 있던 판단이나 선호를 변화시킨다. 보다 중요한 것은 토의에 참여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견해를 주장하는 절차 자체가 자신의 선호와 의견에 대해서 한번 더 반성하게 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사람은, 자신에게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받아들여질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해야 하고 이것은 다른 사람의 관점에 서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된다(Benhabib: 71-2).
하버마스는 논증(Argumentation)의 구조를 띠는 실천적 토의에서 도달한 규범 판단이 합리적이라고 인지주의적 주장을 한다. 우리는 일상언어적으로 어떤 사람이 자신의 행위나 믿음에 대해서 적절한 근거를 댈 수 있을 때 그 행위나 믿음을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고, 그렇지 못할 때는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합리적이란 다른 사람에게 근거를 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꼭 근거지움에 성공해야만 합리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자신이 생각했던 근거가 틀린 것으로 판명될 경우 자신의 판단을 수정할 태세가 되어 있다면 그는 여전히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합리성이란 판단의 진리성보다는 판단을 수긍할 만한 근거에 따라 정당화하거나 반박하는 과정, 즉 논증의 과정 자체에 내재하는 절차적 합리성이 된다."(장춘익, 1998: 293, 강조는 인용자) 실천적 토의에서 이루어지는 합의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토의 절차에 내재하고 있는 바로 이러한 절차적 합리성이다. 실천적 토의 중 하나인 법적 토의를 통해 제정된 법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도 입법과정에 구현되어 있는 절차적 합리성이다.
토의 결과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 근거를 주고받는 과정의 절차적 합리성이라면, 이제 중요한 것은 합리성을 구현할 수 있는 절차와 조건들, 논증규칙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다. 법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법적 토의에 고유하고 적합한 절차와 근거와 논증규칙은 무엇인가? 실천적 토의는 그 토의가 다루는 문제(Materie)의 종류에 따라, 실용적 토의, 윤리적 토의, 도덕적 토의, 법적 토의 등으로 나누어진다(FG: 196부터 : 하버마스, 1997b: 123부터). 각 토의마다 토의 참여자, 다루어지는 규범의 종류, 적합한 근거의 종류가 다르다. 따라서 각 토의마다의 고유한 합리성을 구현해 내는 논증 규칙(Argumentationsregel)도 따로 있다. 법이 정당하기 위해서는 법적 토의에 고유한 절차와 근거에 의해서 법이 제정되어야 한다. 하버마스는 법적 토의에 고유한 절차가 인권보호와 인민주권을 똑같이 필요로 한다고 주장한다. 그를 통해 인권과 인민주권의 동근원성을 설명한다.
우리가 정치적 의견 및 의지형성 과정을 토의 과정으로 해석한다고 하더라도 지금까지의 자유주의 대 공화주의 구도로는 법에 고유한 토의와 논증 규칙이 있고, 따라서 고유한 합리성과 그것을 구현해낼 수 있는 고유한 절차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자유주의처럼 인권을 법보다 상위의 도덕적 권리로 보게 되면 실정법은 자연법의 모방으로 생각된다(FG: 136). 이렇게 되면 법적 토의는 자신의 고유성을 상실하고 도덕적 토의에 종속된다(FG: 130). 이것은 전근대적인 생각으로 실제의 법현실과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권을 인민주권에 대한 외적 제한으로, 둘이 서로 경쟁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 공화주의 입장에 서게 되면 법적 토의는 공동체의 공유된 가치와 좋음의 문제에 집중하는 윤리적 토의로 축소된다(같은 곳). 루소에게서 잘 드러나듯이 공화주의는 전통과 공유된 신념에 의해 강하게 통합된 공동체를 가정하며 시민들에게 지나치게 높은 덕을 요구한다. 이러한 가정은 근대의 '다원주의의 사실'을 애써 무시하고 있다. 법적 토의가 윤리적 토의로 줄어들면 도덕적 관점, 즉 정의의 문제가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다. 그렇게 되면 좋음에 대한 다른 견해들이 공정하게 조정될 수 없으며, 다수의 횡포에 대한 우려가 현실화될 수도 있다(FG: 132-3 ; Blaug: 53-4).
하버마스는 이제 도덕적 토의로도, 윤리적 토의로도 축소되지 않는 법적 토의의 온전한 모습을 찾아내려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전에 그는 뿌리깊은 자연법주의와 대면해야 한다. 하버마스는 법의 정당성을 합법성으로 환원하는 법실증주의자들의 주장과 달리 법이 자신의 고유한 정당성 원천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지금까지 합법성말고 법의 정당성 원천의 가장 강력한 후보는 자연법이었다. 그러나 법을 도덕에 종속시키는 자연법은 법을 정당화하는 근본원칙 중 하나인 인민주권의 원칙을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법적 정당성의 고유한 원천일 수 없다. "토의이론적 법 개념은 법실증주의와 자연법이라는 암초 사이를 피해서 항해한다."(N: 668)
법을 도덕의 제한으로 보아서 인권과 인민주권을 대립관계에 놓게 된 것은 법과 도덕의 (종속적이 아닌) 보완적 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버마스는 법과 도덕의 보완적 관계를 밝힌 후에, 법적 정당성의 고유한 원천인 법적 토의의 축소되지 않은 모습을 보여준다(2). 그리고 그것이 사적 자율성과 공적 자율성을 어떻게 화해시키는지를 설명한다(3).
2) 법과 도덕의 보완적 관계
? 법과 도덕의 상호보완적 관계
법과 도덕은 같은 문제를 다룬다. 그것들은 행위갈등을 정당화된 규범에 의해서 합의를 통해 해결하고 그를 통해 정당한 상호주관적 질서를 세우려고 한다. 그러나 법과 도덕은 근거지워지는 방식도 다르고 행위를 조정하는 방식도 다르다(FG: 137). 따라서 법은 도덕의 단순한 축소가 아니다. 하버마스는 도덕은 인격적으로(personlich) 책임질 수 있는 사회적 관계, 그러니까 사적 영역에만 해당하고 법은 제도적으로 매개된 상호작용 영역으로, 즉 공적 영역으로까지 확장된다는 오래된 편견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한다(FG: 141). 칸트의 독백적 윤리학을 상호주관적으로 변형시키고자 하는 토의이론에 따르면 도덕은 더 이상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탈형이상학적 근거지움의 수준에서 법적 규칙(Regel)과 도덕적 규칙은 전통적 인륜성으로부터 동시에 분화되어 나왔다. 그것들은 두 가지 서로 다른 그러나 상호보완적인 행위규범의 종류로서 나란히(nebeneinander) 나타났다."(FG: 135)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한편에서는 형식적?규범적으로, 다른 한편에서는 사회학적?기능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법과 도덕은 먼저 서로 다른 각각의 준거집단(Referenten)을 가지고 있다(N :666) 도덕의 준거집단은 "모든 자연인"(같은 곳), "인류", "세계시민의 공화국"(FG: 139)이다. 법의 준거집단은 "법규범을 통해 비로소 스스로 생겨난 공동체의 동료로서 서로를 인정하는 행위자"이다(FG: 144). "법과 도덕은 외연적으로도 차이가 있다."(N: 666) 법이 다루는 문제(Materie)가 도덕보다 좁기도 하고 넓기도 하다. 법은 행위자의 동기를 문제삼지 않고 오직 외적 행위만을 규제한다. 그런 면에서 법은 도덕보다 좁다. 그러나 법은 개인들 간의 갈등을 규제할 뿐만 아니라 특정한 시공간에 위치하고 있는 법공동체의 자기조직화를 위한 수단으로서, 집단적 목표의 추구와 정책의 이행에도 관여한다(Habermas, 1998: 256) 그런 면에서 법적 문제영역이 도덕적 문제영역보다 넓다.
도덕과 법은 준거집단이 다르기 때문에, 도덕 규범은 모든 사람의 일반의지를 나타내지만, 법적 규범은 특정한 법공동체의 구성원들의 특수한 의지도 표현한다. 따라서 법은 도덕과 어긋나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법이 다루는 문제가 도덕적 문제로 제한되지도 않는다. "법공동체의 정치적 의지는, 확실히 도덕적 통찰과 일치해야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상호주관적으로 공유한 삶의 형식, 주어진 이해처지(Interessenanlage), 그리고 실용적으로 선택된 목적을 표현한다. (……) 그 결과 정치적 의지형성과 관련된 근거들의 스펙트럼이 넓어진다. 도덕적 근거에 더해서 윤리적 근거와 실용적 근거가 추가된다."(FG: 188-9)
법과 도덕의 다름과 그것들의 상호보완적 관계는 사회학적?기능적으로 살펴볼 때 더욱 뚜렷하다. 법과 도덕 모두 행위갈등을 폭력 없이 합의로 해결하면서 서로 간의 행위기대를 안정화시키는 역할을 맡고 있다. 그러나 도덕은 보편주의적 관점에서 불편부당한 판단을 내릴 수 있고, 무엇이 옳은지는 제시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도록 동기부여하는 힘은 약하다. 도덕은 문화적 수준에서 하나의 상징체계, 즉 지식체계에 그치기 때문이다. 도덕은 다르게 행동할 좋은 근거가 없다는 동기를 주거나 도덕 원칙의 내면화를 통해서 지식에서 행위로 이전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정도의 동기부여로는 너무 약하고, 도덕 원칙을 내면화하는 사회화는 현실적으로 너무 드물다(FG: 145-6). 법은 법조문과 그에 대한 해석과 판례로 구성된 지식체계일 뿐만 아니라, 강제할 수도 있는, 규범적으로 규제된 행위 복합체, 즉 제도로서 즉각적인 행위 효과를 발휘할 수 있기 때문에, 법은 도덕의 불확실성을 보충할 수 있다. "도덕이 만약 내면화 외에 다른 방식, 그러니까 탈관습적 도덕(Vernunftmoral)이 행위에 효력을 미칠 수 있도록 보충하는 법체계를 제도화함으로써 행위자의 동기를 유발할 수 없다면, 좋은 인성구조의 고분고분한(entgegenkommend) 토대에 의존하는 도덕은, 제한된 효력만을 가질 것이다."(BFN: 114/FG: 146) 나아가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사회화 과정과 개인의 양심에 의존하는 도덕은 분화된 사회 전반을 규제할 수 없다. 특히 전략적 행위가 필요한 체계의 영역을 규제할 수 없다. 고도로 분화된 복합 사회에서 "도덕은 자신과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법체계를 통해 모든 행위영역, … 더욱이 매체에 의해 조정되는 상호작용의 체계적으로 자립화된 영역으로까지 퍼져갈 수 있다."(FG: 150)
? 토의 원칙, 도덕 원칙, 민주주의 원칙
법의 정당성은 적법한 입법과정을 거쳐서 나온다. 그러나 합법성 자체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니다. 궁극적으로 법의 정당성은 법에 따른 입법과정이 구현하고 있는 실천적 토의의 절차적 합리성으로부터 나온다.
하버마스는 법이 도덕에 종속되지 않고 고유의 정당성 원천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그는 법과 도덕의 다름을 형식적?규범적?사회학적 관점에서 논증하였다. 이제 그 주장에 쐐기를 박기 위해서 하버마스는 도덕적 토의를 이끄는 도덕 원칙(U)말고 법적 토의를 이끄는 민주주의 원칙(Dm)이 따로 있음을 논증하고자 한다. 법적 토의는 실천적 토의 중 하나이니만큼 Dm은 실천적 토의의 원칙(D)로부터 도출된다. 그러나 그것은 마찬가지로 D로부터 도출되는 U에 종속되지 않고 나란히 서 있다.
하버마스는 우리가 진지하게 토의하려면 전제할 수밖에 없는 화용론적 전제조건들로부터 D를 다음과 같이 정식화한다.
D : 합리적 토의의 참여자로서 직간접적으로 영향받는(moglichweise) 모든 당사자들의 동의를 얻을 수 있는 행위규범만이 타당하다(FG: 138).
D는 도덕 규범이든, 윤리적 규범이든, 법적인 규범이든 상관없이 모든 행위규범에 해당된다. 이것은 규범이 더 이상 공유된 신념이나 관습, 형이상학적 가정이나 세계관을 통하여 근거지워질 수 없는 시대에, 그래도 정당화될 수 있으려면 갖추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자격을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불편부당함"(Unparteilichkeit)이다(FG: 138). 이것이 탈형이상학적 시대에 정당화될 수 있는 규범의 최소한의 자격이 된 것은 단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의사소통적 삶의 형식 일반에 침윤되어 있는 균형잡힌 상호인정의 구조가 생활세계의 합리화 결과 분명해진 것이다(FG: 140).
하버마스는 D와 보편화 원칙이라고도 불리는 U와의 구분을 강조한다. 그것은 U와 Dm을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토의 원칙은 도덕과 법 사이의 구분에 대해서 중립적인, 추상적 차원으로 옮겨져야 한다. 한편으로 토의 원칙은, 행위규범 일반을 불편부당하게 판단하기에 충분한 규범적 내용을 가져야 한다. 다른 한편 그것은 더 이상 도덕 원칙과 일치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토의 원칙은 그때그때마다 다른 관점에서 도덕 원칙과 민주주의 원칙으로 비로소 분화되기 때문이다."(N: 676) U와 Dm은 각각 다음과 같다.
U : 어떤 규범이 타당하다면, 그것이 일반적으로 준수될 때 생겨날 것으로 미리 예견되는, 각 개인의 이해관심의 충족과 관련된 결과와 부작용이 모든 사람에 의해 강제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어야 한다(Habermas, 1991: 12).
Dm : 법적으로 규정된 토의적 입법과정에서 모든 법동료들(Rechtsgenosse)의 동의를 얻을 수 있는 법률만이 정당성(legitime Geltung)을 주장할 수 있다(FG: 141).
D는 가장 추상적인 원칙으로서 실제로 논증 규칙으로서는 사용되지 않는다. "논증의 규칙이란 일반적인 논증의 전제가 특수한 논증의 상황과 관련하여 원칙으로 구체화된 것"이다(장춘익, 1998: 305). D는 추상 수준이 높아서 특수한 논증과 직접 관계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논증 규칙이 되지 않는다. 그것이 특수한 논증과 관계할 때에 그것은 그 논증 상황에 맞는 원칙의 옷을 입고 나타나고, 그것이 그 논증상황의 논증 규칙으로서 사용된다. D는 협상과정이 토의적으로 근거지워진 절차에 의해 규제되는 한 협상과정과도 간접적으로 관계한다.
논증 상황을 우리는 그 논증이 다루는 문제의 성격에 따라서 실용적?윤리적?도덕적?법적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미 주어져 있는 목적이나 선호에 적합한 수단을 찾거나, 받아들이고 있는 가치에 적합한 목적을 정하는 문제는 실용적 토의에서 다루어진다. 여기서 토의 참여자들은 합목적성과 효율성의 관점에서 경험적 지식에 근거하여 토의한다. 윤리적 토의는 특정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가치, 삶의 형식, 정체성의 문제를 구성원의 관점에서 다룬다. 여기에서는 토의가 공동체에 무엇이 좋은가라는 기준에서 이루어진다. 도덕적 토의에서 문제되는 것은 규범에 구현되어 있는 이해관심이 모든 사람에게 보편화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참여자들은 정의의 관점에서 토의한다(FG: 197-200). 현대사회에서는 자주 특수하고 그래서 일반화될 수 없는 이해관심들만이 다투기도 한다. 그럴 때는 협상이 필요하고 허용된다. 협상은 반대자로 하여금 자신의 요구를 받아들이도록 강제하거나 유도하기 위해 의사소통에 참여하는 것이다. 여기서 참여자들은 '보다 나은 논증의 힘'이 아니라 위협과 약속에 의지해서 타협에 이른다(FG:204-5). 법적 토의는 이 모든 것을 포괄한다. 법은 개념상 어떤 예외도 인정하지 않고 적용에 있어 누구를 우대하지도 차별하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일반적이기 때문에 도덕적 측면을 갖는다. 그러나 그것은 시공간적으로 구체적인 공동체의 구성원들에 의해 채택되기 때문에, 정의의 관점을 넘어 그 공동체의 집단적 목표와 가치추구와도 관계한다. 그것은 실용적 문제와 이익타협의 문제도 포함해야 한다. 그래서 법규범은 도덕적 근거만이 아니라 실용적?윤리적 근거를 통해 정당화될 수도 있고 공정한 타협의 결과를 표현하기도 한다(FG: 190-3).
D는 고려되는 근거의 종류와 다루어지는 규범의 종류, 토의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범위를 정해 놓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 모든 논증 상황으로부터 추상되어 있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 의해 모든 사람의 이해관심이 동등하게 고려되어야 하는 도덕적 논증 상황에서는 U로 구체화되어 논증 규칙으로 사용되고, "자발적으로 참여한 결사체의 자유롭고 평등한 구성원으로 서로를 인정하는 법동료들"(FG: 141)의 실용적?윤리적?도덕적 근거가 함께 고려되어야 하는 법적 문제와 관련된 상황에서는 Dm으로 구체화되어 논증 규칙의 역할을 한다. "이러한 다양한 논증 규칙들은 토의 원칙이 작동하는(operationalizing) 여러 방식이다."(BFN: 109/FG: 140)
D에는 그것이 어떤 규범을 다루는지, 어떤 토의가 적절한 근거를 제공해 주는지가 모두 빠져있다. 이에 비해 Dm은 법적 규범에만 적용된다고 명시되어 있지만 근거를 제공해주는 토의는 열어두고 있다. U는 다루는 규범은 규정하지 않고 있지만 도덕적 근거만이 고려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규범이든 도덕적 측면에서 고려될 때에는 U에 따라 검토될 수 있지만, Dm은 법적 규범만을 검토할 수 있다. 반면 U는 도덕적 근거에만 의존하지만 Dm은 도덕적 근거를 포함하는 넓은 근거 스펙트럼에 의존한다(N: 676-7 ; FG: 142).
Dm이 U와 다른 또 하나는 Dm은 제도화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Dm은 '법적으로 규정된 토의적 입법과정에서'라고 하면서 Dm이 사용되고 준수될 입법과정의 법적 제도화를 전제하고 있다. Dm은 D가 법적으로 제도화된 것이다(FG: 154). Dm의 법적 제도화, 즉 정치적 권리 행사의 법적 제도화가 필요한 것은, 입법 과정의 참여자에게는 태도변화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입법 과정의 참여자는 사적인 법주체의 역할에서 벗어나서, 자신의 국가시민의 역할을 통해 자유롭게 결합한 법공동체의 구성원의 관점을 취할 것이라고 기대되어야 한다. (……) 입법 과정에 참여하는 국가시민이 다시 성공지향적으로 행위하는 법주체의 역할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는 그러한 입법 과정을 필요로 한다."(FG: 50) 제도화된 입법 절차는 참여자로 하여금 공정하게 규정된 절차를 지키게끔 구속할 수 있고, 지켜지는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렇게 되어야만 절차에 따른 결과가 정당하다는 가정을 누릴 수 있다(FG: 161)
3) 법치국가와 민주주의의 내적 관계
? 권리체계: 인권과 인민주권의 동근원성
탈형이상학적 시대에 사회통합을 성취할 수 있는, 대체될 수 없는 행위조정 매체로서 법은 강제력과 함께 정당성을 갖춰야 한다. 법의 정당성은 법적 토의의 절차적 합리성으로부터 나온다. 법의 정당성이 토의 절차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자유로운 토의가 보장되도록 토의 절차가 제대로 제도화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제도화를 할 수 있는 수단도 법이다. 법은 행위갈등의 조정에 소진되지 않고 공동체의 자기조직 매체로도 기능한다. 그러면 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법은 일단 권리를 부여하고 그것을 보호하는 식으로 구성된다. 법은 그러한 자신의 형식상 법적 인격의 주관적 행위자유를 전제한다. "법적 매체 자체는, 법적 인격의 지위를 권리 일반의 담지자로 정의하는 권리를 전제한다. 이러한 권리들은 … 개별화된 행위자의 선택의 자유(Willkurfreiheit)에, 다시 말해서 … 주관적 행위자유에 맞추어져 있다."(FG: 151) "법적 인격 일반의 사적 자율성 없이는 어떠한 법도 없다."(Habermas, 1998: 260-1) 따라서 법을 처음 만들고자 할 때 사람들은 먼저 서로에게 부여할 권리들을 정해야 한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법동료들의 결사체를 만들어서 자신들의 공동 삶을 실정법이란 수단을 통하여 정당하게 규제하고자 할 때, 그들은 상호적으로 서로에게 어떤 권리들을 부여하는가?"(N: 668) 서로를 자유롭고 평등한 구성원으로 인정하면서 함께 하는 결사체를 만들려는 사람들은 이러한 질문을 던지면서 서로에게 부여할 권리를 정한다. 이때 이들은 두 가지를 전제하고 있다. 하나는 실정법이란 자신들의 삶을 규제할 대체할 수 없는 매체이다(N: 670-1). 다른 하나는 "자신들의 공동 삶을 정당하게 규제하고자"하는 사람들은 전제할 수밖에 없는 토의 원칙이다.
서로를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로 인정하면서 자발적 결사체를 형성하려는 사람들이, 근대 이후 대체될 수 없는 행위조정 매체인 실정법과 근대 이후 행위규범의 유일한 정당성 원천인 토의 원칙, 두 가지를 교차(Verschrankung)시킴으로써 서로에게 부여하게 될 권리체계를 우리는 논리적으로 도출해 낼 수 있다(FG: 155-7).
(1) 가능한 한 가장 많은, 평등한 주관적 행위자유에 대한 권리를 정치적으로 자율적으로 형성하는 데에서 생기는 기본권
(2) 법동료들의 자발적 결사체 안에서 구성원의 지위를 정치적으로 자율적으로 형성하는 데에서 생기는 기본권
(3) 개인적 법적 보호를 정치적으로 자율적으로 형성하는 것과 권리들의 소송가능성(Einklagbarkeit)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생기는 기본권
(4) 시민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자율성을 행사하고 그를 통해 정당한 법을 제정하는 의견 및 의지형성 과정에 참여할 동등한 기회에 대한 기본권
(5) (1)에서 (4)까지 나열된 시민적 권리를 주어진 관계 속에서 동등하게 활용하기 위해서 그때그때 필요한 정도로, 사회적?기술적?생태학적으로 확보된 삶의 조건의 보장에 대한 기본권
법은 일단 법의 수신자들에게 자격과 권리를 부여하고 그것을 보호하는 형식을 띠게 된다. 이러한 법형식으로부터 '최대한의 자유에 대한 권리'가 나온다. 그러나 단지 법형식만으로는 어느 만큼의 최대한의 권리가 정당한지가 나오지 않는다. 우리가 토의 원칙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가능한 한 가장 많은 평등한 자유에 대한 권리"가 서로에게 인정될 수 있는 최대한의 정당한 권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토의 원칙과 "법형식 자체에 구성적인, 주관적 행위자유 일반에 대한 권리"(FG: 155)를 교차함으로써 (1)에 속하는 평등한 자유권이 나온다. 그런데 실정법의 다른 중요한 형식적 특성 하나는 그것이 시공간적으로 구체적인 공동체에 의해 제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1)의 권리들은 구성원 자격에 대한 규정을 필요로 한다. 이로부터 (2)에 속하는 구성원 자격의 권리들이 나온다. (1)과 (2)의 권리들로는 아직도 법이 제대로 만들어질 수 없는데, 그것이 침해되었을 때의 보상 규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3)의 법적 보호의 권리가 나온다. (2)와 (3)은 (1)에 상관적인 권리들(Korrelate)이다. 이 세 기본권들은 법적 주체의 사적 자율성을 보장한다.
그런데 주의해야 할 것은 이 권리체계가 구체적인 권리들의 목록이 아니라 권리들의 범주의 목록이라는 것이다. "권리들의 첫 세 범주는 개별 기본권의 상세화(Spezifizierung)를 위한 불완전한(ungestattigt) 자리지킴이(Platzhalter)이다. 그러니까 차라리 헌법 입안자들이 지향하는 헌법 원칙이다."(FG: 160) 앞의 세 권리 범주가 법 자체를 형성한다. 그러나 법 자체가 아니라 구체적인 실제의 법은 그렇게 추상적인 권리들의 범주로 이루어질 수 없다. 구체적인 법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이 정치적 입법가에 의해서 상황에 따라 해석되고 [구체적인] 모습을 띠어야 한다."(FG: 159) 그래서 앞의 세 범주에 속하는 권리들을 해석하는데 참여할 권리가 필요해 진다. 그것이 (4)의 정치적 참여권이다.
법적 주체는 공적 자율성을 사용하여 자신들이 복종할 법의 저자의 위치에서 자신들의 사적 자율성을 해석하고 구체화한다. 그런 의미에서 (4)의 권리는 재귀적이고 가장 기본적인 권리이다. 그러나 그들이 권리들의 범주를 임의적으로 해석하고 구체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권리들의 범주에 대한 해석은 권리들의 범주를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4)에 의해서 해석되고 구체화된 권리들은 앞의 법적 범주에 대한 해석으로 보여질 수 있어야 한다(FG: 159). 또 (4)의 권리들이 제대로 행사되기 위해서는 의사소통적 권리와 참여의 권리에 대한 법제화와 토의적 입법과정에 대한 법적 제도화가 필요하다(FG: 161). 곧 법이 필요하다는 얘기인데, 그런 한에서 정치적 참여권은 (1)에서 (3)까지의 권리를 전제할 수밖에 없다.
정치적 참여권은 앞의 세 권리와 달리 법 자체를 형성하는 권리가 아니다. 정치적 참여권 없는 법은 가능하다. "소극적 자유권과 사회권은 후견주의적으로(paternalistisch) 주어질 수 있다. 법치국가와 사회[복지]국가 모두 원칙적으로 민주주의 없이 가능하다."(FG: 104) 그러나 정치적 참여권 없이, 다시 말해서 민주주의 없이 후견주의적으로 부과된 법은 정당성을 누릴 수 없다. 인민주권, 자기입법의 이념을 충족시키는 법만이 정당하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적 참여권이 법적 코드 자체를 구성하는 권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부작용 없이 임의로 처분될 수 있는 권리도 아니다. 오히려 (4)에 표현되어 있는 공적 자율성은 자기가 동의하는 규범에만 복종할 권리를 함축하는, 우리가 전제할 수밖에 없는 토의 원칙으로 소급된다(Baynes: 210)
"자기입법의 법적 제도화에 대한 요구는, 동시에 소송가능한 주관적 행위자유의 보장을 함축하는 법적 코드의 도움을 받아서만 실행될 수 있다. 반대로 다시 이러한 주관적 권리(와 그것의 '공정한 가치'(fairer Wert))의 평등한 분배는, 정치적 의견 및 의지형성의 결과가 이성적일 것이라는 추측을 근거짓는 민주적 절차를 통해서만 충족될 수 있다."(N: 670-1)
권리체계를 이렇게 재구성할 때 인권과 인민주권은 경쟁관계에 있기보다는 서로를 전제하는 관계에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근대 이후 우리의 삶을 정당하게 규제하려고 한다면 전제할 수밖에 없는 두 가지, 즉 법형식과 토의 원칙의 교차로부터 동근원적으로 나온다는 것이 밝혀진다. 주관적 자유권은 이제 더 이상 자연법에서처럼 입법가의 주권에 대한 외적 제한이 아니다. 오히려 법적 매체가 정치적 자율성의 행사를 제도화하는 데 이용되자마자 주관적 자유권은 정치적 자율성의 행사를 가능하게 하는 필수적인 가능조건(ermoglichende Bedingung)이 된다. 가능조건으로서 자유권은 입법가의 주권을 제한할 수 없다. 오히려 입법가의 정치적 자율성에 의해 비로소 구체화된다. 그렇다고 입법가가 주관적 자유권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입법가는 그것을 원칙으로 삼아서 상황에 맞게 해석할 수 있을 뿐이다(FG: 160-2).
하버마스는, 공적 자율성과 사적 자율성이 동근원적이고 서로를 전제한다는 토의이론적 해석은 우리에게 생소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것은 시민이 자신의 사적 자율성을 충분히 보호받고 있어서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할 수 있을 때 자신의 공적 자율성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고, 반대로 자신의 정치적 자율성을 충분히 행사할 수 있을 때 자신의 사적 자율성에 대한 규제에 강제 없이 동의할 수 있다는 우리의 직관을 정식화한 것이다(Habermas, 1998: 261).
권리체계에 대한 앞의 재구성도 "선험적 순수성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하버마스는 실정법을 통해 자신들의 공동 삶을 정당하게 규제하려는 사람들은 이러한 권리체계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이러한 권리체계가 보편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구체화된 내용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Baynes: 212). 권리체계에 법적으로 구속력있는 최초의 해석인 역사상의 많은 헌법들과 거기에 규정되어 있는 인권과 기본권의 목록에서 우리는 권리체계의 상황에 따른 구체화를 볼 수 있다(FG: 162).
우리가 사적 자율성과 공적 자율성을 이렇게 동근원적이고 상호전제하는 것으로 볼 때 합법성으로부터 정당성이 나온다는 역설이 해소된다. 법을 완전히 닫혀진 체계로 볼 때, 그래서 법이 법을 낳고 법이 법을 정당화한다고 생각할 때에만 정당성이 합법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역설로 보인다(FG: 165). 물론 법은 재귀적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법은 창 없는 모나드가 아니다. 그것은 시민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자율성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결과물이고 지금도 항상 새롭게 재해석되고 있다. "모든 헌법은 법을 생산하는 모든 수준에서 계속해서 진척되는, 진행되고 있는 해석으로서만 지속될 수 있는 살아있는 기획이다."(FG: 163) 법은 자유로운 시민들의 공적 자율성의 행사로부터 나오고, 다시 그 법이 공적 자율성의 충분한 행사를 법적으로 제도화한다. 그렇게 시민들의 공적 자율성을 보장하는 법적으로 구조화된 절차는 바로 합리적인 실천적 토의의 외피이다. 그러한 절차를 따르는 합법성의 결과는 실천적 토의의 합리성이다. 합법성으로부터 정당성이 나오는 것은 합리성으로부터 정당성이 나오는 다른 모습이다.
? 법치국가와 민주주의의 내적 관계
앞에서 우리는 평등하고 자유로운 결사체를 만들려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부여하게 되는 권리들의 체계를 구성했다. 그리고 그것이 안정화되기 위해서는 법제화와 제도화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나 법제화와 제도화만으로는 아직 불완전하다. 권리가 행사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보장할 정치권력이 필요하다.
권리가 정치권력을 필요로 하는 것은 단지 기능적인 보충이 아니다. 행사될 수 없는 권리란 형용모순이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권리는 그것의 행사를 보장하는 정치권력을 개념적으로 이미 전제하고 있다. 권리를 규정하고 있는 것이 바로 법이기 때문에, 권리와 정치권력의 관계는 바로 법과 정치권력의 관계이다. 권리가 행사되어야 하는 것처럼 법은 지켜져야 한다. 법은 규범준수를 강제할 국가권력을 전제한다. 그러나 법만 일방적으로 국가권력을 전제하는 것은 아니다. 국가권력은, 단지 억압하고 강제하는 강권(Gewalt)이 아니라 정당하다는 인정을 누리는 권력(Macht)이기 위해서, 법의 옷을 입어야 한다. 그것은 법이 정한 바에 따라 조직되고 법적 형식을 띠고 행사되어야 한다. 정치권력은 법을 전제하고 법의 형태로 성립한다. 법과 정치권력은 서로를 전제한다(FG: 166, 168, 173).
그러나 정치권력에 대해서 끊임없이 회의주의적 시선을 보내는 자유주의의 입장에서 법과 권력이 서로를 전제하고 있다는 생각은 어불성설이다. 법은 권력을 제한하기 위한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 권력이란 상대방의 의사에 반해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킬 수 있는 힘이다. 권력을 이렇게 보게 되면 정치권력은 호시탐탐 개인의 기본권 침해를 노리는 본질적으로 억압적인 것이 된다. 자유주의적 사유양식 속에서 법과 권력은 본질적으로 대립관계에 있다(FG: 185). 그래서 그들은 공화주의가 주장하는, 모든 권력은 인민으로부터 나와야 하고 그런 한에서 정당하다는 인민주권의 원리를 매우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정치권력은 아무리 법적 형식을 띠더라도 양의 탈을 쓴 늑대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기껏해야 필요악이고 잘해야 본전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주의적 사유양식은 법과 정치와의 구성적 관계를 적절하게 고려하고 있지 못하다. 그것은 인민주권과 강권독점을 혼동하고 있고, 법형식을 갖춰서 등장하는 … 행정권력의 의미를 놓치고 있다."(N: 673) 하버마스는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권력과 강권의 구분을 받아들여 법과 권력에 대한 자유주의적 시각을 교정하고, 법치와 인민주권과의 대립을 토의이론적으로 해소하는 방식으로 급진 민주주의적 전망을 확보하려고 한다.
하버마스는 정치권력을 의사소통적 권력과 행정권력으로 구분한다(FG: 171, 186). "의사소통적 권력과 법은 '많은 사람들이 공적으로 합의한 의견'으로부터 동근원적으로 나온다."(FG: 182, 강조는 인용자) 토의적 의견 및 의지형성 과정이 법과 의사소통적 권력을 동시에 산출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인지적 의미뿐만 아니라 실천적 의미도 갖기 때문이다. 인지적 측면에서 "관련된 주제와 의견(Beitrag), 정보와 근거를 자유롭게 처리하는 것(Prozessieren)은 절차에 맞게 이루어진 결과들이합리적일 것이라는 추정을 근거짓는다."(FG: 183) 동시에 의사소통적 행위에서는 근거가 동기를 형성하기 때문에 그것은 실천적 의미도 갖는다. 의사소통적 행위는 합의를 통한 공동의 확신에 따라 행동하겠다는 발화수반적 책무(Verpflichtung)를 포함하고, 이런 책무가 모여 의사소통적 권력으로 자라난다. 의사소통적 권력은 바로 이러한 공동의 확신의 동기유발적 힘이 구현된 것이다(FG: 194-5).
행정권력은 의사소통적 권력이 법을 매개로 하여 조직하고 실행할 수 있는 권력으로 전환된 것이다. 법은 행정권력의 행사방식을 규정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의사소통적 권력을 행정적 권력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매체를 형성한다."(FG: 209) 행정권력은 우리의 의사소통적 능력으로부터 강제 없이 형성된 권력이 조직화되고 제도화된 것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억압적인 것은 아니다. "행정권력은 민주적 법의 틀 안에서만 행사되는 한 본질적으로 기술적이고, 적어도 억압적이지 않"다(N: 673). 그것은 제재력과 조직력, 행정력을 갖춘 권력으로서 권리의 행사, 의사소통적 전제와 절차의 제도화, 규범준수를 가능하게 한다. 그런 한에서 그것은 민주주의의 "가능조건"(Ermoglichungsbedingung)이다. 물론 행정권력이 입법 및 재판과정에서 결정된 사항을 어기면서 행사될 때 그것은 "제한조건"(beschrankende Bedingung)이 된다(FG: 214). 중요한 것은 행정권력이 정당한 법에 구속되어 있는지의 여부이다. 이제 법의 사실성과 타당성이 국가권력의 차원으로 이전된다.
국가권력은 자신의 강제력만을 과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이 정당하다고도 주장한다(FG: 171).국가권력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법의 옷을 입고 행사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법형식 자체가 국가권력의 행사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법이냐는 것이다. 행정권력이 원하는 대로 어디에나 이용될 수 있는 법은 정당화하는 힘을 상실한다. 국가권력은 자유로운 의사소통의 전제를 만족시키는 절차에 따라 제정된, 그래서 아직도 정의의 편에 서 있는 법에 의해 정당화되어야 한다. "법형식 자체가 아니라 정당하게 제정된 법에의 구속(Bindung)만이 정치적 지배의 행사를 정당화한다."(FG: 169).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당하게 제정된 법"에 의한 "정당화"이다. 국가권력이 정당하기 위해서는 법이 정당하게 제정되어야 하고, 권력의 행사가 법에 의해 정당화되어야 한다. 이것이 "정당하게 제정된 법에의 구속"이다. 정당한 법의 생성과 행정권력의 법에의 구속을 제도화한 것이 법치국가이다. 법치국가는, 의사소통적 자유의 공적 사용을 제도화?안정화하고, 그렇게 해서 생겨난 의사소통적 권력이 행정권력으로 올바르게 번역되어 법에 따라 행사되는 것을 관장하는(FG: 217) "법적 제도들과 메커니즘의 중요한 집합"(Rehg: xxⅷ), "일반적인 제도적 가이드라인"(Baynes: 213)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법치국가는 국가시민들의 정치적 자율성 행사를 증진시키고 민주주의를 촉진시키기 위한 장치이다.
이러한 법치국가의 구성과 함께 스스로 통치하는 법동료들의 수평적 결사체는 국가적으로 조직된 수직적 조직으로 개념적으로 이동한다. 이러한 이동과 더불어 시민들이 자신들의 공적 자율성을 행사할 자기결정의 관행도 직접적인 대면에서 여러 방식으로 제도화된다. 눈에 가장 뚜렷한 제도는 입법부의 구성, 그곳에서의 토의와 결정, 주기적 보통선거 등이다(FG: 169-70). 그러나 그런 공식적 제도는 대리인 모델(Stellvertretermodell)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들은 단지 전사회적 정보유통의 중간점이거나 초점을 구성할 뿐이다(FG: 224). 물론 구속력있는 토의와 결정이 관련된 사람들의 대면 속에서 이루어질 것을 요구하는 인민주권의 원리를 우리는 글자 그대로 만족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은 원칙상 가능해야 하고, 따라서 공식적 대의기구의 토의와 결정은 비공식적 공론장(Offentlichkeit)의 자유로운 토의와 의견, 정보의 유입에 열려있어야 한다(FG: 210-1). 이로부터 공론장이 규범적 의미를 갖게 된다. "정부의 입법부문으로 조직된 정치적 의지형성은, 만약 자율적 공론장의 자발적 원천을 막아버리거나, 국가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시민사회에서 자유롭게 순환하는 쟁점, 의견, 정보, 근거들의 투입으로부터 자신을 차단한다면, 자신의 이성적 기능의 토대를 파괴하게 될 것이다."(BFN:183-4/FG: 225-6) 의회와 같은 공식적 기구에서의 결정이 합리적이라는 추정을 누릴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공식적 의견형성 및 결정이 비공식적 공론장과 상호작용한다는 데 있다(하버마스, 1996b: 131).
이제 인민주권은 자율적 시민들의 가시적 모임에서 구현되지 않는다. 그것은 의사소통의 전제들과 제도적으로 분화된 의견 및 의지형성의 절차들을 통해 실현된다(FG: 170). "완전히 분산된 주권은 결사체의 구성원들의 머리 속에서가 아니라, 도대체 아직도 구현체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면, 주체 없는 의사소통 형식에서 구현되어 있다. (……) 무주체적이 되고 익명적이 된 인민주권, 상호주관적으로 해체된 인민주권은 민주적인 절차와 이러한 절차의 실시에 따르는 높은 요구성을 가진(anspruchsvoll) 의사소통적인 전제 속으로 퇴각한다. 인민주권은 승화되어 법치국가적으로 제도화된 의지형성과 문화적으로 동원된 공론영역(Offentlichkeit) 간의 포착하기 어려운 상호작용으로 된다."(하버마스, 1996b: 132-3) 여기서 중요해지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직접적인 참여나 참여하는 시민들의 자질이 아니다. 여론이 충분한 정보와 동등한 기회 속에서 형성되도록 토의적 의견 및 의지형성의 절차가 법적으로 제도화되는 것이다(FG: 165).
시민사회의 공론장에서는 자유로운 토의 속에서 생겨나는 의사소통적 권력과 법을 자꾸 도구화하면서 자신을 확장하려는 행정권력과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신의 이해관심을 다른 사람의 반대를 무릅쓰고 관철시"키려는 "사회권력"(FG: 215)이, 제도화된 공식적 의지형성 및 결정과정이라는 수문을 통과하기 위해서 각축을 벌인다. 이러한 충돌의 결과가 어떤 것일지는 경험적 문제이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시민사회의 토의 구조가 사회적 행위자들의 불평등을 감소시키고 자유로운 토의를 활성화시켜 행정권력과 사회권력의 속셈을 폭로하고 중립화시켜줄 것으로 기대한다.
4. 맺음말
이제까지의 고찰을 마무리하면서 지금까지의 논의를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현대사회는 법치국가를 통해 사회가 유지되고 통합될 수밖에 없는데 법을 통한 성공적 사회통합은 민주주의를 요구한다. 다른 한편 민주주의는 안정화?제도화되기 위해서 법치국가를 필요로 한다. 민주주의는 더 이상 선택사항이 아니다.
법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민주주의는 인권과 인민주권 두 가지를 동시에 만족시켜야 한다. 그 둘은 서로를 전제하는 관계에 있다. 이때 민주주의란 인민이란 거대 주체에 의한 것도, 위임받은 소수의 대표자들에 의한 것도 아니다. 공식적?비공식적 공론장에서 이루어지는 자유롭고 개방적인 토의의 의사소통적 전제들과 절차 속에서 민주주의가 구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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