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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3대 문학상 수상소설집 손창섭

by Casey,Riley 2023.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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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3대 문학상 수상소설집
손 창 섭

    혈서(지은이: 손창섭)
  날이 어두워서야 달수는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자기네 집이 아니다.  규홍
이가 임시로 들어 있는 집이다. 그것이 누구의 집이건 간에, 달수가 찾아 들어갈 곳이라고는 
그 집밖에 없는 것이었다. 공동묘지같이 쓸쓸한 문밖 거리에는 행인도 없었다. 상여 뒤를 따
르는 상제처럼 달수는 지금 절망을 앞세우고 풀이 죽어서  돌아오는 것이었다. 나는 도대체 
언제까지나 이렇게 친구네 집 신세를 저야 하는가? 
  그는 돌아오는 길에서 날마다 하는 생각을 되풀이해 보는 것이다. 달수는 매일 아침 조반
을 치르기가 무섭게 쫓겨나듯 밖으로 나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취직 자리는 아무데도 그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진종일 꽁꽁  얼어서 거리바닥을 헤매노라면, 달수는 몸보다도  먼저 
마음부터 견딜 수 없이 무거워지는 것이었다.
  거리에 어둠이 오면, 시각을 통해서 보다 더 짙은 어둠이  그의 마음을 덮어 버리는 것이
었다. 그러면 어디라도 갈 곳이 없는 그는, 무거운 걸음으로 규홍이네 집 쪽을 향하고  걷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어둡고 무겁기만 한 귀로에서 (최선을 다한 나의 노력은 오늘도 수포로 돌아갔다)
는 생각이 어쩔 수 없는  결론이 난 것처럼 선명하게 의식되는  것이었다. 수포라는 통속적 
한자어는, 어둠속에 무수히 떴다 사라지는 물거품을 그에게 거푸 보여주는 것이었다.
  한편 그러한 그의 헛수고는 비단 오늘에 한 한 일만이  아닌 것 같았다. 그것은 오늘이라
는 시간을 기준으로 출생 이전의 무한한 공간에서부터 이랬고,  앞으로는 또 죽은 뒤에까지
도 영원히 이렇게 불행할 것만 같았다.
  대문 없는 대문 안에 들어서며, 어쩔 수 없이 이제부터 나는 파멸인가 보다, 라고 신음 소
라같이 중얼거려 보는 것이다. 방안에는 어느 날 저녁이나 꼭  같은 광경이 달수를 더 한층 
피로하게 해주는 것이었다.
  올 겨울 들어 불이라고는 지펴 본  적 없는 방 한가운데, 다리 하나  없는 준석은 이불을 
쓰고 누워 있는 것이다. 그는 낮이나 밤이나 한 장 밖에 없는  이블 속에 엎드린 채 일어나
려 하지 않는 것이다. 첫째 춥기도 하려니와 일어나 앉아  그에게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것이었다.
  준석이가 누워있는 발치 쪽으로 취사 도구가  놓여 있는 구석에는 돌부처와 같이  창애가 
앉아 있는 것이었다. 거기에 놓여있는 석유 풍로와 나란히, 창애는 언제나 그렇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었다. 방 안에 들어설 때마다 달수에게는 이러한 풍경이  따분해 견딜 수 없는 것
이었다. 절해고도에서 혼자 헤매다가 기진해  쓰러지는 것 같은 심정으로, 달수는  아무데고 
주저앉아 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준석은 자라처럼 목을 빼서 달수를 보고, 그냥 말없이 도로 
목을 움추려 버리는 때도 있지만, 무어라고 한두 마디 애기를 걸어 주는 일도 있었다.  그런 
경우 그 몇 마디가 엉뚱한 도화선이 되어 그들 사이에는 맹랑한 논쟁이 벌어지기가 예사였
다. 오늘 저녁도 방금 돌아와 앉는 달수를 향해 "어이 무턱, 오늘도 점심  저녁 다 굶었지?" 
하고 준석은 노상 아는 체를 했다. 남보다 턱이 짧아 있는 둥  마는 둥하다고 해서 그는 늘 
달수를 무턱이라고 불렀다.
  "오늘두 취직을 못해서....."
  이것이 달수의 대답인 것이다. 자기가 취직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 달수에게는 누구  앞에
서나 죄스러웠던 것이다. 그러나 달수의  뚱딴지 같은 대답에 준석은  실없이  화가 동하는 
것이었다. 밥을 굶었느냐고 묻는데 취직을 못했다는 건 무슨 얼빠진 수작이냐는 것이다.
  그야 뻔한 일이 아니냐, 네까짓 게 일 년을 두고 싸다녀  본들 누가 똥싸놓고 간 자리 하
나 얻어 걸릴 턱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달수는 이 말이 좀 억울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한가운데는, 이삼 일 뒤에한번 들
러 보라고 그랬는데, 하고 항변해 보는 것이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준석은 대뜸  이
마에 핏줄을 세우더니, 이 자식이 미쳤어? 하고 벌떡 일어나 앉는 것이다. 그리고는  계속해
서, 이 민충아, 그래 넌 그 말을 곧이 믿고 있어? 곧장 이삼 일 뒤에는 취직이 될 줄 알아? 
어디 배째기 내기라도 할까? 이 멍텅구리가 세상을 어떻게  보는 거야, 그렇게 만만히 취직
이 될 줄 알어? 하고 몰아세우는 것이었다. 
  이런 때 달수의 얼굴은 그지없이 난처해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울음과 웃음이 반반씩 섞
인 운명적인 표정인 것이다. 그러한 달수는 그래도, 너는 공연히 자꾸 나보구 화만 내, 하고
는 애원하듯 준석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자 준석은, 이 자식아, 누가 괜히야, 누가 괜히 화
를 내는 거야, 그래 이걸 화 안 내구 견딜 수 있어? 네 그 바보 같은 음성만 들어두 오장육
부가 뒤틀리는 걸 어떻게 참는단 말이냐, 하고는 별스레 씨근거리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너 같은 건 군데에 나가서 톡톡히 기합을 좀  받구 와야만 사람이 된다는 것이
다. 날마다 벌벌 떨면서 공연히  취직을 구해 싸다니지 말고 어서  군문에 자원 입대하라는 
것이었다. 군대에 나가기 싫으면 기피자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달수는 기피자임에 틀림없
는 것이다. 기를 쓰고 학교에 다니려는 것은 공부가 목적이 아니라, 병역을 기피하기 위해서
라는 것이었다. 
  "그럼 내가 군대에 나가기 싫어서 학교에 간단 말이냐?"
  "그렇지 뭐야, 팔자에 없는 대학을 뭐하러 다니는 거야?"
  "공부하러 다니지 뭐하러 다녀."
  "공부?"
  준석은 그만 어이가 없다는 듯이 미친 사람처럼 웃어 버린다.  그리고는 금세 또 약이 바
짝 치솟는 표정으로 대드는 것이었다. 세상에 공부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다. 누구나 다 대학교를 나오고 싶은 생각이야 간절하지만, 형세가 미치질 못하니  별수
없이 단념하는게 아니냐? 군속으로 일선을  편력하다가 한쪽 다리를 호개에게 먹힌  자기만 
하더라도, 결단코 공부하기가 싫어서 그리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도대체 네가 대학을  갈 
터수냐? 사지가 멀쩡한 놈이 남 위에 얹혀 지내면서 대학은 다 뭐냐, 여러 말 말고 어서 군
대에 자원해 나가라고 야단인 것이다. 
  "그래도 난 꼭 대학을 마쳐야겠는걸. 그리고 나서 군대에 나가도 되잖어."
  "이 자식아, 그렇게두 말귀를 못  알아들어. 어엿이 공부할 처지가 돼서  대학엘 댕긴디문 
좋단 말이다. 그렇지만 네가 어디 대학에 댕길 팔자냐 말이야."
  "고학을 해서라도 되레 가난한 사람이 공부해야 되잖어."
  "이 자식이 원, 이게 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대갈통야."
  준석은 속이 답답해서 죽을 지경이다. 정강이에서 잘라져 없어진  왼쪽 다리를 달수 앞으
로 바짝 내밀고 다가 앉으며 잡아먹을 듯이 서두는 것이다.
  "이 메주대갈아, 남 다 못 가는 대학을 왜 너만 유독 댕기겠다고 앙달이냐 말이냐."
  "나 말구도 고학생이 얼마든지 있는데 그래."
  "이 자식아 네가 고학생이야? 거지지 무슨 고학생이야, 그래 거지가 대학엘 가? 거지가."
  "그래두 난 정말 대학을 마치구 싶은 걸 어떡허노. 그래야 성공 하잖아."
  "이런 맹초 봐, 성공? 아니 성공이라구?"
  준석은 숨이 다 컥컥 막힐 지경이었다. 그는 하도 기가 차서 말을 할 수 없다는  듯이, 목
석이나 다름없는 창애 쪽으로 고개를 돌려 동의를 청해 보는 것이다.
  "창애야 이 자식, 이게 아주 빙충이지? 형편없는 천치 아냐.?
  물론 창애는 아무런 대답도 없는 것이었다. 옆에서 벌어진 이 기괴한 논쟁에도 창애는 전
연 무관심한 태도였다.
  준석은 그만 피곤해지고 말았다. 걷잡을 수 없는 흥분에서 온 피로인 것이다. 이런 멍텅구
리하고는 더 떠들어 봐야 소용없어, 괜히 내 입만 아퍼, 그렇게 중얼거리고  준석은 때에 절
은 이블 속으로 도로 들어가  버리고 마는 것이다.
  달수는 울음과 웃음이 뒤섞인 그 얄궂은 표정으로  이블 속으로 머리만 내민 준석을 원망
스러이 내려다보며, 왜 내 속을 이렇게도 몰라줄까, 하고 언제나처럼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달수와 준석은 거의 저녁마다 이와 같이 어처구니없는 토론을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영원
히 일치점에 도달할 수 없는 괴이한 논전은, 부질없이 두  사람에게 피로를 가져다 줄 뿐이
다. 이 집의 주인격인 규홍이가 들어오는 것은 밤 아홉 시가 훨씬 넘어서였다. 그는  저녁마
다 불어 강습에 나가는 것이다. 문학을 하는 데는 불어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돌아와서는 
늦도록 손가락을 호호 불어 가며 남포불 밑에서 시를 쓰는 것이다.
  최근 한 달 동안을 걸려서 그가 만들어 놓은 시는 "혈서"라는 것이었다.
  혈서 쓰듯
  혈서라도 쓰듯
  순간을 살고 싶다.
  (1연 생략)
  모가지를
  이 모가지를 
  뎅겅 잘라
  내용 없는
  혈서를 쓸까!
  이게 규홍에게는 여간 대단한 작품이 아닌 모양이었다. 날마다 한두 구절씩, 혹은 한두 자
씩 고쳐서는 다른 종이에 새로 베껴 책상 뒤 벽에 붙여 놓는 것이었다. 이밖에도 그는 수십 
편의 시작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또한 거의 매달  신문이나 잡지에 투고를 하는 것
이었다. 그러나 규홍의 시가 한 번도 발표된 일은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꾸준히 남의 시를 외고 또 자기의 시를 썼다. 그것만이 그에게는 최고의 
생활인 모양이었다.
  규홍은 충청남도에 속한 고향에서 면장을  지내는 꽤 부유한 집안의  장남이었다. 법대를 
나와 가지고 판검사가 되어야 한다는 조건하에 그의 부친은 아들을 서울로 유학 보낸 것이
다. 그러나 부친의 의사와는 반대로 규홍은 국문과에 적을 두고 문학 공부에만 몰두하고 있
는 것이었다. 규홍이가 법률 공부를 하고 있는 줄로만 믿고  있는 그의 부친은 매달 또박또
박 하숙비를 보내오는 것이었다.
  그것은 결코 여유 있는 금액이 아니었지만, 준석을 위시해서, 창애나 달수까지도 그  해택
을 입고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들은 규홍의 식객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탓에  달수에게는 
그처럼 으르대는 준석도 규홍의 앞에서는 한수 꺾이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준석에게는 도
대체 규홍이가 문학을 한다는 것부터가 비위에 거슬렸다.
  정치, 군사, 실업, 자연과학 같은 부문 외에는 모두 여자들이나 할 일이지,  대장부가 관여
할 사업이 못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준석이었다. 그러한 그는 규홍이가 밤을 새우다시피 해  
가면서 시를 외고 쓰고 하는 것이  유치하기 이를 데 없어 보였다. 더욱이  책상 뒤에 붙어 
있는 규홍의 시란 걸 읽으면 당장 밸이 뒤틀려서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어이 무턱, 저게 뭐야, 저게. 도대체 무슨 개수작이야."
  규홍이가 없을 때, 준석은 벽에 붙은 시를 손가락질하며 조소를 퍼붓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에게는, 모가지를 뎅겅 잘라 혈서를 쓴다는  대목이, 무슨 모욕이나 당한 것처럼 참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모가지를 잘라서 혈서를 써? 모가지를 잘라서 말야. 이 모가지를 잘라서 말야. 그러면 어
떻게 되는 거야. 내원 별 자식 다 보겠어. 규홍이 같은 건 일선에 나가서 콩알맛을 좀 봐야 
돼. 검정 콩알이 가슴패기를 뚫구나가두 모가지를 잘라서 써? 대관절 그게 시야, 그게."
  "현대시란 대개 그런 거야. 신문이나 잡지에도 그 비슷한 시가 왜 자주 나지 않어."
  달수의 변명에 준석은 더 화가 치받치는 모양이었다. 
  "신문이나 잡지문 제일이야. 어이 무턱, 그래 세상에서  신문 잡지가 제일이란 말야. 신문
에만 나문 그게 장한 겐가."
  "그렇지만 교과서에도 시가 있는데 그래. 문교부에서 만든 국정 교과서에두 시가 실려 있
어."
  "그건 여자가 지은 시겠지. 아무렴, 정부에서 남자의 시를 다 인정하구 싣는단 말야?"
  "아냐, 남자 이름이던데, 남자가 지은 시두 교과서에 얼마든지 있어."
  "이 자식아, 그래 이름만 보고 남잔지 여잔지 어떻게  알어? 남자 이름 같은 여자도 얼마
든지 있는 거야."
  "그래도 그 가운데는 남자가 쓴 시두 있다니까 그래."
  "이런 바보 같은 거 봐. 아무렴 정부에서, 남자 대장부가 밥 처먹고 앉아서 미친  소리 같
은 시나 쓰라고 장려한단 말야."
  "그렇지만 교과서엔 정말 남자가 지은 시가 있는 걸 어떻게."
  "있으면 당장 가져와 봐라. 남자의 시가 실려 있는 교과설 어디 가져와 보란 말야."
  준석은 마치 싸움하듯 주먹을 다 불끈거리며 대드는 것이다.  그러한 준석도 규홍에게 대
해서만은 제 성미를 나타내지 못하는 것이었다.
  누구를 찾아가 보아도, 다리 하나 없는 자기를 규홍이만큼  너그럽고 무탈하게 대해 주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밤낮 방에서만 뒹굴며 아무리 오래 얻어 먹고 지내도 규홍은 얼굴 한번 찡그리는 일이 없
었다. 방학이 되어 귀향한 뒤에도 잔류 부대를 위해서, 굶지 않을 정도의 자금은 어떻게  해
서든 변통해서 부쳐 보내는 규홍이었다.
  셋이 똑같이 규홍의 하숙비를 뜯어 먹고 지내는 처지이기는 하나, 창애 만은 그래도 떳떳
한 편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집에서 식모의 소임을 맡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창애는 간질병 환자다. 밥을 짖다가 말고, 혹은 밥을  먹다가 말고, 갑자기 얼굴이 퍼래지
고 입술을 푸들푸들 떨다가는 눈을 뒤집고 나가 뒹구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입으로 거품을 
뿜어 가며 사지를 허비적거리는 것이다.
  본시가 이 집은 규홍이 부친의 친구네 집이었다. 6.25 전 - 그러니까 중학 시대부터 규홍
이가 다년간 하숙하고 있던 집이다. 사변통에 내쳐 고향과 부산에 가 있다가, 환도하는 학교
를 따라 올라오는 길로, 규홍은 역시 이 집으로 찾아왔던 것이다. 대문짝은 물론, 안방 건넌
방의 문짝이며 마루청가지도 죄다 없어진 채로 있었다.
  안방에만 문 대신 거적이 드리워 있었다. 그런 속에서 주인  대신 십육칠 세의 낯선 소녀
가 나타났다. 그 소녀가 바로 창애였던 것이다. 
  창애에게는 육순이 넘은 노부가 있다. 그들 부녀는 1.4 후퇴 당시부터, 주인 없는 이 집을 
노상 자기 집처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박 노인이라 불리는 이 창애의 부친은 필사였다.
  모서리 떨어진 조그만 가죽 트렁크에다 도필과 먹 따위를 넣어 가지고 팔러 다니는 것이
었다. 서울에서는 붓이 그리 팔리지 않는다고 하며, 근자에는 주로 지방 행각을 하는 것이었
다. 그러다가 한 달이나 두 달에  한 번 정도로 박 노인은 딸을 보러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번번이 그는 맨손이었다. 그 자신도 매번 규홍이나 딸 보기가 안되었던지,  으레 
똑같은 변명을 하는 것이다.
  시골이란 현금이 귀하기 때문에 대체로 외상 거래라는 것이었다.  간혹 현금을 받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식대에도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한 행보만 더 하고 올라올 때는 
그 주머니가 불룩하도록 외상값을 거둬 가지고 오겠노라는 것이다.  그때엔 딸이 신세를 지
고 있는 규홍에게 충분히 인사를 차릴 뿐 아니라,  준석이와 달수에게도 '미야게'를 사다 주
겠노라고 장담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염소 수염 같은 노랑 수염을 한 손으로 싹 배틀어 훑고 나서, "이 근처에 잘 통
하는 술 가게가 없을까?"
  누구에게 없이 그렇고 묻고는 젊은이들의 얼굴을 번갈아 보는  것이다. 술이 먹고 싶은데 
자기 수중에 돈이 없다는 뜻이다.
  육십이 넘어서도 머리에 흰 터럭 한 올  없이 얼굴에 주름만 깊어가는 꾀죄죄한 이 노인
은, 단 하루도 술 없이는 못 견디는 것이었다.
  일생을 가장 안락하게 보내려면 이 괴로운 세상을 잊고 살아야 하는 것인데, 세상사를 잊
는 방법으로는 술에 취하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 술잔을 들  때마다 되뇌이는 이 노인의 철
학이었다.
  주기가 돌기 시작하면 박 노인은 창애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허, 내가 왜 이런 걸 
슬하에 두었던고, 단신이라면 차라리 죽음을  기다릴 뿐인 여생이, 이토록 한스럽지는  않을 
것을." 하고 눈물이 글썽해지는 것이었다.
  자신의 말과는 반대로 술만 취하면, 세상사를 잊기는커녕 더 서러워만지는 모양이었다.  
  창애와 달수하고 셋이만 있을 때면, 준석은 곧잘 창애의 얼굴을 멍하니 들여다보다가,  허 
내가 왜 이런 걸 슬하에 두었던고..., 하고  박 노인의 어투를 한껏 영탄조로 흉내내  보이는 
것이었다. 그래도 창애는 불쾌한 빛도 다른 어떤 표정도 보이는 일 없이 언제나 마찬가지로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것이다. 돌부처 이상으로 무표정한 소녀였다. 표정뿐 아니라 언어와  거
동도 그랬다. 누가 묻는 말에나, 그것도  두 번에 한 번 정도 마지못해  대답할 뿐, 그 밖에 
스스로 의사 표시를 하는 일이라고는 없었다.
  또한 몸도 움직이기를 싫어했다. 끼니 때에 밥을 끊이고 설거지를 하는 것이 고작 이었다. 
그 외에는 돌멩이처럼 늘 똑같은 자세로 방 한구석에 버티고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 옆에서 달수와 준석이 아무리 큰소리로 싸우듯 떠들어대도 못 들은 체 거들떠보는 일
조차 없었다. 그러한 창애에게 달수는 공포를 느끼는 일이 있는 것이다.
  어쩌다 창애와 단 둘이 마주앉아 있게 되는 경우, 마치 유령이나 귀신을 대한 것 같은 어
뚱한 착각을 달수는 일으키는 것이다.
  손을 내밀어도 만져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꼭 그러리라고 생각하며 그는 가만히 한 손을 
내밀어 본다. 이상히 손끝이 떨리고 가슴이 울렁거린다. 숨을 죽이고 떨리는 손을 창애의 얼
굴로 가져간다. 잡히지 않으려니 하고 창애의 코를 쥐어  본다. 그러나 뜻밖에도 잡힌다. 달
수는 그만 질겁을 해서 팔을 움츠린다. 그래도 어쩌자고 창애는 동일한 자세를 헝클지 않고 
앉아 있는 것이다.
  달수는 전신에 식은땀이 죽 내번지는  것이었다. 도리어 달수에게는 창애가  거품을 물고 
지랄 버릇을 할 때에 훨씬 더 인간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이러한 창애를 그래도 그 부친은  꽤 대견히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것은  박 노인이 지방 
행상 도중에 가끔 규홍에게 보내오는 기이한 편지를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서당에서 천자를 떼고, 신식학교(보통학교) 4학년을 졸업했노라는 박 노인의 서한은  이런 
것이었다.
  안규홍 청년선생 보오라.
  기간 청년 삼인과 처녀 일인이  무고 무탈 하난지 알고저 원이노라.  노생은 청년 삼인과 
처녀 일인이 주야로 넘네해 주신 덕분에 별고무하게 행상이 번창하노라.
  전번 귀가시난 특히 미주랄 후히 대접 받자와, 감개무량이노라. 한 가지 부탁은  전신에도 
간곡히 당부하였거니와, 미거한 노생의 독녀랄 청년선생이 배필로 삼아 주기랄 원하노라.
  경미한 간질 병이 있기는 하나, 미거한 대로 인품은 볼만한 데가 있느니, 청년선생과는 천
생연분인가 하노라. 남한각지랄 행상하여 보매, 처녀가 많기는  수없이 많으되, 창애아 만한 
처녀도 드물더라. 간질병도 결혼 후 잘 치료하면 즉시 완쾌될 것으로 믿노라. 이하 생략.
 이러한 편지가 온 날 저녁에는, 청년 삼인 중 이인은  처녀 일인을 앞에 놓고 결혼에 관한 
토론을 하는 것이었다. 이편지대로 규홍이가 창애와 결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준
석이었다. 
  "무조건 나는 찬성이야. 규홍이는 절대적 창애와 결혼해야 한다. 규홍이가 아니문 저런 지
랄쟁이와 혼인할 사람이 없다. 절대적이다. 건 절대적이다."
  이러한 준석의 절대적 주장 앞에, 그래도 달수는 정면으로 반대 의사를 표시해 보지 않고
는 견딜 수 없는 것이다. 긑판에 가서는 준석의 위압적인  기세에 눌려 굴하고야 마는 달수
였지만, 시초에는 꽤 자신 있게 자기의 의견을 내세워 보는 것이었다.
  "건 그렇게만 생각해선 안될 거야. 멀쩡한 사람이 누가 지랄쟁이를 데리고 살아.  나 같으
문 절대 결혼 안할 테야."
  "이 맹랑한 자식 봐. 누가 너더러 결혼하라는 거야. 너 같은 건 지랄쟁이하고 혼인할 자격
도 없어. 너 같은 건 문제도  안돼. 규홍이 얘기야. 지금 규홍이 얘기를  하고 있는 거 아니
야."
  "그렇기에 어디 내가 창애하구 결혼한대, 만일  나 같으문 지랄쟁이하고는 살지 않겠다는 
거지. 나두 그러니까 규홍이두 그럴거란 말이야."
  "이런, 천하에 바보 같은 자식. 야, 무턱, 그래 너하고 규홍이가 같어? 우선  생긴 게 너하
고 같어? 맘 쓰는 게 너하고 같어? 목소리가 같어? 이런  천치 같은 자식. 너하구 규홍이하
군 딴 사람야. 겉두 속두 새판 다른 거야. 그러니까  규홍인 창애하구 결혼할 수 있단 말야. 
절대적으로 결혼해야 된단 말야."
  "그렇지만 다른 사람은 다 비슷하지 뭐. 아무렴 지랄쟁이하고 살구 싶은 사람이 어딨어."
  "원, 이런 답답한 자식 봐. 이 자식아. 이 메주대가리 무턱아. 그래 규홍이하고  너하구 생
각이 같단 말야? 형제지간이나 부자지간에도 생각이 다른 법인데 규홍이하고 너하고 생각이 
같단 말야. 이거 봐. 도대체 시 쓰는 남자하구, 병역 기피자하구 생각이 같단 말야. 내가  하
는 소린 말야, 내가 하구 싶은 말은 말야, 결국 모가지를 뎅겅 잘라서 혈서를 쓸수  있는 사
람은 말야, 지랄쟁이하고 결혼을 할 수 있다는 거야. 절대적 결혼을 해야 된다는 거야. 알아 
들었어?"
  이렇게 무의미한 논쟁은 그칠 줄을 모르는 것이다. 당자인  규홍이나 창애야 어떻게 생각
하던, 준석이와 달수에게는 그것이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들 두 사람에게는 어디까지나  자
기의 생각과 주장만이 문제인 것이다. 그것은 규홍이나 창애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준
석이와 달수가 그 운명적인 논전을 되풀이하든 말든, 그리고  그것이 어떠한 결론에 도달하
든 간에 규홍에겐 모가지를 뎅겅 잘라 혈서를 쓰는 시만이 문제인 것이다.
  그러기에 그렇게 큰 소리로  떠들어대는 속에서도, 규홍은 그만큼이나  여러 차례 신문과 
잡지에 투고를 해도 발표되지 아니 하는 그  시를 어떻게 고치면 될까 하고 책상에 엎드려 
머리를 앓고 있는 것이었다.
  창애는 또한 창애대로 준석이와 달수가 아무리 자기를 가리켜 지랄쟁이니 결혼이니  하고
들 까불어도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그저 허탈한 태도로  석상처럼 한구석에 우두커니 앉아 
있으면 그만인 것이었다.
  이와 같이 규홍이와 창애를 앞에 놓고, 준석과 달수의 그  보람 없는 토론은 같은 식으로 
얼마를 더 계속하다가, 마침내는 공식된 것처럼 준석의 위압적인  주장이 승리를 거두게 되
는 것이다.
  "이 자식아 너는 그래 어디까지나 나한테 반항할 생각이냐.  죽어도 너는 내 말에 찬성하
지 못하겠단 말이냐?"
  준석은 여차하면 후려갈길 것 같은 자세를 보이는 것이었다.
  "내가 언제 너한테 반항한대."
  "그럼 찬성한단 말이지?"
  "찬성이야 뭐, 억지루 찬성하는 것도 찬성이야."
  "이 자식아, 복잡하게 여러 소리 말구 간단히 한 마디로 대답하구 말어. 나한테 끝끝내 대
항할 테냐, 그렇지 않으문 찬성할 테냐?"
  "글세 반항하는 게 아니래두 자꾸 그래."
  "그럼 찬성한단 말이지?"
  "찬성하구두 싶지만, 강제루 하는 찬성은 정말 찬성이 아니래두 그냥 그러네."
  "이 자식이 나를 놀리는 거야 뭐야. 말로 해결이 안나문 결국 주먹으로 결판을 짓는 것밖
에 도리가 없어. 최후 수단은 그 뿐이야."
  준석은 달수 앞으로 바싹 다가앉으며 주먹을 내밀어 보이는 것이었다. 그쯤 되고 보면 울
음 반 웃음 반 섞인 달수의 표정은 그대로 더 심각해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자기의 전부가 파멸이라고 생각하며  절망적인 한숨을 토하는 곳이다.  그것은 즉시 
그의 영혼의 무거운 신음 소리로 변하여, 입 밖으로 새어 나오고 마는 것이다.
  "왜 이렇게도 내 속을 몰라줄까!"
  한 주일이 지나도, 두 주일이 지나도 달수의 취직 행각은  역시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
하는 것이다. 어느새 십이월이건만 그는 겨울 내의도 없이 맨살에다 미군 작업복 상하를 걸
쳤을 뿐이다.
  까칠해진 그의 얼굴은 언제나 먼지 투성이다. 그리고 멍든 것처럼 퍼렇게 된 입술을 의식
하고 꾹 다물지 않으면 덜덜덜 떨리는 것이다. 그래도 그는  날마다 닥치는 대로 회사고 음
식점이고 서점이고 시계방이고 그렇게 구별없이 십여 군데 내지는 이십여 군데나  찾아들어
가 보는 것이었다.
  물론 요즘 와서는 손톱만한 희망도 거는 일 없이 그냥 그렇게 찾아다니며 중얼거리기 위
해 세상에 태어난 것처럼, "저는 법과 대학생인데,  고학생입니다. 학비와 식만 당해 준다면 
무슨 일이든 목숨을 걸고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하고 거기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두루 
쳐다보는 것이었다. 달수는 취직하기 위해서 그 이상의 어떠한  수단도 방법도 발견하지 못
하는 것이었다. 자기로서는 최선을 다한 취직 운동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몇 달을 두고 진력해도 어째서 자기만 취직이 안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그
가 모를 일이란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우선 그 자신이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부터가 달수에게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한번은 거리에서 바로 자기 앞을 걸어가던 사람이 미군 트럭에 깔려 즉사했다. 그
때 달수도 하마터면 트럭 앞대가리에 이마빼기를 들이받을 뻔했다.
  그날 이후  달수는 자기가 살아 있다는 데 불안을 느끼게  되었다. 이상하게도 대량 살육
이 자행되었던 6.25때가 아니라 그러한 불안은  실로 그날부터였다. 따라서 자기는 왜  죽지 
않고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을까 문제되기 시작했다 
  그 생각은 납덩어리처럼 무겁게 잠시도 쉬지 않고 그를  짓누르는 것이었다. 그러한 달수
에게는 준석이가 살아 있다는 것은 더욱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모가지나 허리통이 뚝 끊
어져 나가지 않고 어째서 공교롭게도 한쪽다리만이 저렇게 잘려졌을까 하고 달수는 늘 신기
해 했을 뿐 아니라 한번은 그런 생각을 입 밖에까지 냈다가 준석의 격분을 산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일이 아니라도 준석은 도대체가  실없이 화를 잘 냈다. 세상 만사가  그에게는 
하나도 비위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개중에도 달수의 언동은 더했다.
  준석은 달수를 향해서만은 화를 내지 않고는 이야기를 할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러한 자
신을 저도 알고 있는 모양이라, 오랫동안 군대밥을 먹어 왔기 때문에 자기는 고분고분 말을 
못하노라고 스스로 변명하듯 하기도 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준석은 가짜 상이군인인 것이다. 군속으로  전방에만 나가 있던 그는 
한쪽 다리가 절단되어 가지고  후방으로 돌아와서부터  어엿이 상이군인 행세를 하려 드는 
것이었다.
  그가 걸핏하면 달수보고도 군대에 나가라거니, 기피자라거니 하는 데는 그러한 심리적 연
유가 있는 것이다. 어떤 날 저녁 준석은 취직을 구하러  가서 어떻게 말을 꺼내느냐고 물었
다. 솔직하게 실지대로 일러 주었더니 준석은 담박 얼굴을 붉혀 가지고, 이 자식아 어서  죽
어라, 죽어. 공부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어서 군대에 나가서 공산군의 총알받이나 되라고 
고함을 질렀다. 도대체 이런 자식이 이십여 년이나 세상에서 살아 왔다는 게 아주 기적이라
고 하고는 마치 음식에 관격이라도 된 때처럼, 아이구 답답하다,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는 주
먹으로 제 가슴을 난타했던 것이다.
  그러나 역시 달수는 이십삼 년 동안을 이만큼 살아온 것이다. 악성 전염병이 그토록 무섭
게 창궐한 해에도 그는 병사하지 않았고 수없이 많은 생명들이 애매히 또 무참히 쓰러져 간 
6.25도 그는 무사히 넘겼고 해마다 발표되는 교통사고로 인한 사망자의 엄청난 숫자 속에도 
그는 끼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준석이처럼 한쪽 다리가 절단되는 일조차 없이 지구상에 있는 
20억 인류의 그 누구와도 꼭 마찬가지로 그는 역시 우연히 살아 있는 인간임에는 틀림없는 
것이다. 어디 그뿐이냐. 달수는 군대에 나가기 전에 대학교 법과를 마치고 싶었고 그 뒤에는 
고시에 합격하여 판사나 검사가 되었다가  국회의원으로 진출하려는 뚜렷한 희망조차  품고 
있는 것이었다. 준석이가 아무리 그를 조소하고 죽으라고 공격한대도 어떠한 인간이나 매일
반으로 장래라는 무한대한 미지수에 대하여 약속 없는 기대를 품어 볼 수 있는 자격을 그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어제도 오늘도 추위에 떨면서 취직을 구하기 위해 서울 거리를 헤매
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만 달수는 역시 이 저녁에도 최선을  다한 나의 노력은 오늘도 수포로  돌아갔다는 
자신의 신음 소리를 들으며 물거품이 수없이  떴다가는 꺼지고 떴다가는 꺼지고 하는  탁류 
속에 자신이 휩쓸려 내려가는 것 같은 착각을 안은 채, 어둠에 쫓겨 돌아오는 것이었다.
  방 안에는 언제나 다름없이 준석이 때에 절은 이블 속에서 목만 내밀고 있었고 창애는 목
석 같이 한구석에 멍청이 앉아 있는 것이다. 손이 곱아서  숟가락을 제대로 잡을 수 없을이
만큼 찬 날씨인데도, 창애는 추위마저 느끼지 못하는 형세로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다.
  사실 오늘은 유달리 혹독한 추위다. 올 겨울에 들어 최고의 추위인 것이다. 불어 강습에서 
돌아온 규홍이까지도 오늘만은 시를 주무를 엄두조차 못 내고 일찌감치 자자고 서두를 지경
이었다.
  창애가 옆방으로 자러 간 뒤 셋이는 불을 끄고 언제나처럼 입은 채로 한 이블 속에  기어 
들어갔다. 그러나 고사하고 몸이 자꾸만 더 죄어 드는 것이었다. 규홍의 양쪽 옆에 누워  있
는 준석과 달수는 등과 엉덩이가 시려 제가끔 이블을 끌어당기는 것이었다. 가운데 누워 있
는 규홍이 역시 어깨쭉지가 얼어 들어와서 제대로 잠이 들 도리가 없었다.
  그들은 마침내 불을 키고 도로 일어나 앉고야 말았다. 어떻게  하면 눈을 붙이고 밤을 보
내나 하는 궁리 끝에 저쪽 방에서 창애가 혼자 덮고 자는 이블을 가져다가 넷이서 두  이블
에 나누어 자자는 의견이 나왔다.
  한 이블에 둘씩 갈라 자는 것이다. 그것이 좋은 방법이기는  하지만 결국 누가 창애와 한 
이블 속에서 자느냐 하는 난문제에  그들은 부닥쳤다. 창애에게 병적으로  공포를 느껴오는 
달수만은 애초부터 별문제였다. 결국 규홍이 아니면 준석이가 창애와 같이 자야할 형편이었
다. 규홍은 늘 하는 버릇대로 히죽히죽 웃으면서 어떻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로서는 누가 
창애와 같이 자든 간에 그것은 난처한 문제였던 것이다. 그러자 준석이가 불쑥 자기가 창애
하고 자겠노라고 자청해 나선 것이다.  그는 당연한 주장인 것처럼 자기  말고는 창애와 잘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달수와 규홍은 그러한 준석을 잠시 동안 덤덤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달수는 마
침내 그 의견에 반대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당황히 제 주장을 내세우는 
것이었다.
  "그럴 게 아니라고 난 생각해. 그건 아무래도 규홍이가 창애하고 자는 것이 좋을 거야."
  "이 자식 봐. 규홍이가 언제 창애하고 잔다고 그랬어? 규홍이도 그렇구, 무턱 너두 그렇구 
모두 창애하고 자기를 꺼려하는 거 아냐. 그러니까 나밖에 없잖어. 누군 지랄쟁이하고  자기
가 좋은 줄 알어."
  "언제 규홍이가 싫다고 그랬나?"
  "이런 빙충이 자식 봐. 같이 자겠다는 말을 안하니까 싫다는 거나 마찬가지지 뭐야."
  " 말 안하문 싫대는 건가?"
  "그럼 뭐야. 이 바보야, 잠자코 있으문 싫다는 거지 뭐란 말야?"
  "그렇지만 넌 여태껏 규홍이더러 창애하고 결혼하라고 하잖았어? 그러구서는 네가 창애하
고 자문 어떻게 되는 거야." 
  "이건 또 무슨 트집이야. 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돼. 규홍이는 언제든  창애하고 결혼하
문 되잖어. 언제든 결혼하란 말이야. 내가 창애하고 같이 잔다구 해서 규홍이가 창애하고 결
혼 못하란 법이 어딨어?"
  "난 통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어. 난 암만 생각해두 그래선 안될 것 같은데"
  "똑똑히 좀 말해 봐. 이 자식아, 뭐가 안될 것 같단 말야, 뭐가."
  "내 생각으론 말야, 네가 창애하고 자는 건, 건 좀 안될 것 같단 말야."
  "어이 무턱, 그래 넌 언제든 나한테 대항만 할  테냐. 반대만 하겠느냐 말이야. 단 한번이
라두 내 의견에 찬성해 본 일이 있어?"
  "거야 찬성 할 일이문 찬송해. 내가 어디 찬성 안한대."
  "그럼 왜 반대만 하는 거야. 오늘두 어째서 기를 쓰구 반대만 하러 드느냐 말야."
  "그거야 내가 어떻게 알아. 암만해두 그래서 안되겠으니까 그저 안된다는 게지."
  "안되나 되나 당장 너 같은 자식이 반대한다구 내가 겁낼 줄 아니?"
  그러고는 누가 미처 뭐라고 할 사이도 없이 준석은 외다리로 성큼 일어서더니 창애가 기
거하는 저쪽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도무지 어떻게 되는 판인지 모르겠다고 중얼거리는 달수의  머리속에, 벌써 오래 전
부터 준석은 창애에게 손을 대온 것이나 아닌가 하는 의심이 부쩍 떠오르는 것이었다.
  겨울 방학이 되어 규홍이가 내일이면 귀향한다는 날 저녁에, 자기 딸하고 부디 결혼을 해 
달라는 박 노인의 편지가 또 왔다. 그날 밤에 그들은, 규홍이가 창애와 결혼을 해야 되는냐, 
안해야 되느냐 하는 맹랑한 문제에 관해 또다시 열심히 토론을 시작한 것이었다.
  그들이라고 하지만 창애는 여전히 한구석에 물건처럼 놓여 이었고,  무명 시인 규홍은 서
울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의 회포를 시로 엮느라고 책상에 달라붙어 여념이  없는 
것이다. 결국은 판에 박은 듯이 준석과 달수의 그 운명적인 대립인 것이다.
  오늘 밤에 준석이가 강경하게 내세우는 이유로는 육십이 넘은 박 노인에게서 전후 세 차
례나  결혼을 청하는 간곡한 편지가 오지 않았느냐, 늙은 어른이  머리를 숙이다시피 세 번
씩이나 보내온 간청에 응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니 서울
을 떠나기 전에 박 노인이 만족할 만한 확답을 하라는 것이다.
  아무리 준석이가 그렇게 끝까지 버티더라도 오늘 밤만은 이래 가지고는 안되겠다고  달수
는 노상 여느 때 없이 흥분을 느껴 보는 것이었다.
  그것은 얼마 전부터 창애의 몸에는 놀라운 이상(異狀)을 발견해 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건 안되다고 난 생각해.  규홍이는 암만해도 창애하고 혼인  할 수는 없는거
야."
  "어째서 안된다 말야, 이 민충아,  어째서 규홍이가 창애하고 결혼할  수 없다는 거야. 난 
절대적 규홍이니까 창애하고 결혼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암만해두 그건, 그렇게 될 수 없는 일인 걸 어떡하노."
  "이런 어쩌리 같은 자식 보게, 그렇게 왜 않된다  말야. 어째서 안된다는 거야. 워 이렇게 
답답한 자식이 어딨어."
  달수는 잠깐 무엇을 망설이는 듯하였다. 그러다가 최후의 기력을  짜내듯이 한 손으로 창
애의 배를 가리켰다.. 그리고는 신(神)에게 항의라도 하듯 필사적인 어투로 중얼거리는 것이
었다.
  "저 배를 봐. 창애의 배가 저렇게 불렀는데.....저 배를 좀 봐."
  간신히 그러고 나서는 어린애처럼 입을 비죽거리다가 마침내 달수는 눈물을 솨르르  흘리
는 것이었다. 그는 연방 두 주먹으로 눈을 문질러 가며 흑흑 느껴 우는 것이었다.
  물론 그 자신, 자기는 왜 그다지 섧게 울어야 하는지를  알 수 없었다. 어렸을 때, 제힘으
로는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일에 닥뜨리게 되면, 결국 으아  하고 울어 버리는 길 밖에 없었
듯이, 달수는 지금 그와 흡사히 절박한 감정에서 울고야 마는 것이었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그 무엇에 대해서, 항거할 수  없는 무의미한 항거는 마침내 그에게 
있어서 울음으로밖에 터져나올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달수의 울음소리를 듣고 규홍이는 그래도 고개를 돌려 히죽히죽 웃으며 바라보았다.
  창애는 그래도 바위 같다. 물론 문제는 준석이다. 그 얼굴에서 살기를 담고 당장 잡아먹을 
듯이 달수를 노려보고 앉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준석이 시선에 부닥친 달수는 대뜸 울음을 그치고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자기는 
이제 모든 것이 마지막이라고 번개처럼 생각나는 것 이었다.
  "어이 무턱, 너는 낳고 무슨 원수를 졌니? 대천지 원수냐?"
  준석은 또 한참이나 도기오른 눈초리로 달수를 쏘아보고  나서, "이 자식아, 창애의 배는, 
어디까지나 창애의 배지, 내 배는 아니다. 창애 배가 부른게 어째서 내 죄란 말야."
  하고 악을 쓰듯이 들이대는 것이었다.
  "나두 잘 몰라......나는 왜 이런 쓸데없는 말을 했을까?"
  달수는 울음과 웃음이 반반씩 섞인 그 비극적인 표정으로 명문 모를 소리를 간신히 그렇
게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이 육실할 자식아, 너는 국적(國敵)이다. 병역  기피자니까 너는 국적이나 같다. 이  자식 
어디 견디어 봐라. 내 당장 경찰서에 고발하구 만다. 너 같은 건, 너 같은 악질은 문제 없이 
사형이야, 사형. 내 당장 가서 고발하고 올 테다."
  준석은 일어서서 나가려고 하는 것이다.  그제야 규홍이가 따라 일어서며  준석의 소매를 
붙잡았다.
  "아냐 못 참어. 절대적 못참아. 이건 내 개인적 문제가 아냐 국가적 문제야. 이런 가짜 대
학생을, 이런 기피잘 그냥 둬."
  준석은 소매를 뿌리치고 한사코 나가려고 버둥거렸다.
  그런 걸 규홍이가 겨우 붙들어  앉히었다. 할 수 없이 주저앉기는  했으나 준석은 그래도 
성이가시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이 무턱, 넌 국적이야, 넌 기피자란 말이다. 그래 군대는  나갈 테냐, 안 나갈 테냐, 낼
이라두 당장 입대할 테냐, 안할 테냐?"
  "그렇지만 난 정말 국적은 아닌데......잔 정말 어떡하문 좋을꼬!"
  달수의 눈은 와전히 절망에 떨고 있었다.
  "국적이 아니야? 기피자가 그래 국적이 아니야? 그럼 당장 군대에 지원 할 테냐?  국적이 
안될래문 당장 군대에 들어가란 말야."
  "사실은 난 기피자도 아닌데, 난 고학생인데...?"
  "이 자식아 네가 무슨 고학생이야. 생판 룸펜이지, 기피자지 뭐야. 어이 무턱. 네가 참말로 
국적이 않될래문, 당장 이 자리에서 혈서를 써라. 자원 입대라고 혈서를 쓰란 말야, 쓰지?"
  취사 도구를 놓아 둔 한편 구석에서 준석은  재빨리 도마 위에 얹혀 있는 식칼을 도마째 
달수 앞에 가져다 놓는 것이었다. 달수는 흠칫 놀라며 뒤로 약간 물러 않았다. 준석은  연거
푸 달수더러 손가락을 내노라고 재촉하며, 규홍이에게도 손을 내밀어 종이를 청하는 것이었
다.
  규홍은 여태도 히죽거리다가 바라보다가 지나친 농담일랑  삼가라고 하며, 책상위에 있는 
종이를 되려 감춰 버렸다. 농담이라니, 이게 농담인줄 알어? 어디 농담인가 진담인가 보기만 
하라고 하며, 준석은 문창지를 북 찟어 달수 앞에 펴놓는 것이었다.
  "자, 무턱. 어서 손가락을 내놔. 이 자식 못 내놀 테야?  싫단 말야? 그러문 이걸로 네 모
가지를 뎅겅 잘라서 혈서를 쓸테다."
  달수의 얼굴에서 서서히 핏기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죽은 사람처럼 눈을 감으며,  할 
수 없다는 듯이 집게손가락을 가만히 내밀었다. 그 손가락 끝을 바르르 떨리었다.
  규홍이가 놀라서 준석의 팔을 붙잡으려 하는 순간 어느새 도마 위에서는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몇 방울의 피가 뻗쳤다. 이에 절단된 손가락에서는 선혈이 철철 흘러내려 도마와 방바
닥을 적시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자, 써라 얼른 혈서를 써!"
  준석의 음성도 흥분에 떨었다. 달수의  얼굴에 이미 시체의 살색처럼 더욱  창백해지더니, 
입술을 약간 떨다가 그 자리에서 푹 고꾸라지고 말아다. 기절한 것이다.
  규홍이가 쫓아와 부등켜 안고 달수, 달수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준석은 불뚝 일어서더니 황급히 밖으로 달려나가는 것이다. 어디 가느냐고 규홍이
가 묻는 말에 그는 잠시 멈칫했다. 그 자신, 자기는 어디를 가지 위해 뛰어나왔는지를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준석은 그냥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는 없었다. 어디로든  발길을 옮겨 놓아야 
했다. 그는 걸음을 떼었다. 밖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 대문밖으로 걸어 나가졌다. 하
늘의 별이 문제가 아니었다.
  준석은 한쪽 다리 대신 사용하는 지팡이로 언 땅을 울리며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것이
다.
   
    바비도 (지은이: 김성한)
  일찍이 위대하던 것들은 이제 부패하였다.
  사제는 토끼사냥에 바쁘고 사교는 회계와 순례를 팔아 별장을 샀다.
  살찐 수도사를 외면하고 위클리프의 영역 복음서를 몰래 읽는 백성들은 성서의 진리를 성
직지의 독점에서 뺏고 독단과 위선의 껍데기를 벗기는 교회의 종소리는 헛되이 울리고 김빠
진 찬송가는 먼지 낀 공기의 진동에 불과하였다. 불신과  냉소의 집중공격으로 송두리채 뒤
흔들리는 교회를 지킬 유일한 방패는 이단분형령과 스미스필드의 사형장뿐이었다.
  영역 복음서 비밀독회에서 돌아온 재봉직공 바비도는 일하던 손을 멈추고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희미한 등불은 연신 깜박인다. 가끔 무서운 소름이 온몸을 스쳐 지나간다. 생각하면 
할수록 못된 세상에 태어난 것만 같다. 순회재판소는 교구마다 돌아다니면서 차례차례로 이
단을 숙청하고 있다. 내일은 이 교구가 걸려들 판이다. 성경만이 진리요, 그 밖의 모든 것은 
성직자들의 허구라고 열변을 토하던 경애하는 지도자들도 대개 재판정에서는 영역 복음서를 
읽는 것이 잘못이요, 성찬의 빵과 포도주는 틀림없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라고 시인하고 전
비를 눈물로써 회개하였다. 자기와 나란히 앉아 같은 지도자의 혁신적 성서 강의를 듣고 그 
정당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목숨으로써 지키기를 맹세하던 같은 재봉직공이나  가죽직공들도 
모두 맹세를 깨뜨리고 회개함으로써 목숨을 구하였다. 온 영국을  휩쓸고 있는 죽음의 공포 
앞에서 구차한 생명들이 풀잎같이 떨고 있다. 권력을 쥔 자들은 권력 보지에 양심과 양식이 
마비되어 이 폭풍에 장단을 맞추고 힘 없는 백성들은 생명의 보전이라는 동물의 본능에 다
른 것을 돌아볼 여지가 없다.
  어저께까지 옳았고, 아무리 생각하여도 아무리 보아도 틀림없이 옳던 것이 하루아침에 정
반대인 극악으로 변하는 법이 있을 수  있는 일이냐? 비위에 맞으면 옳고 비위에  거슬리면 
그르단 말이냐?
  가난한 자, 괴로워하는 자를 구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본의일진대 선천적으로 결정된 운명
의 밧줄에 묶여서, 라틴말을 배우지 못한 그들이 쉬운 자기  말로 복음의 혜택을 받는 것이 
어째서 사형을 받아야만 하는 극악무도한 짓이란 말이냐? 성찬의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분신이니 신성하다지마는 아무리 보아도 빵이요, 먹어도 빵이다. 포도주 역시 다를 것이  없
다. 말짱한 정신으로 거짓이 아니고야 어찌 인정할 도리가 있을  것이냐? 무슨 까닭에 벽을 
문이라고 내미는 것이냐? 절대적으로 보면 같은 수평선상에 서 있는 사람이 제멋대로 꾸며
낸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근거가 어디 있단 말이냐? 바비도는 울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위로 로마 교황부터 아래는 사제에  이르기까지 거창한 조직체가 자기
를 억누르고 목을 졸라매는 위압을 느꼈다. 전체 로마 교회와 일개 재봉직공과는 너무나 어
처구니없는 대조였다. 선택의 자유는 있을 수 없었다. 죽음이냐 굴복이냐 두 갈래  길밖에는 
없다. 죽음…… 소름이 끼친다. 등불에 비친 손을 어루만지고  다시 얼굴을 만져 보았다. 이 
손, 이 얼굴이 타서 재가 되어 버린다! 아무것도 없이, 생각이라는 것도 없어진다!
  그는 공포에 떨었다.
  그래도 사람이라는 것이 자기의 똑바른 마음을 속이지 않을 권리가 이 천하의 어느 한 구
석에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자체가 현실에서는 망상이다. 이런 조건하에서도 흑백을 똑바로 
말해야 하느냐? 그럼으로서 재가 되고 영원한 시간의 흐름의 이 일점에 단 한 번 존재하는 
이 주체가 없어져야만 하느냐?
  전신의 힘이 일시에 풀렸다.
  -나같이 천한 놈이 양심을 안 속였다고 별수  있을 것도 아닌데…… 되는 대로 대답하고 
목숨을 구하는 것이 상책이 아닐까?
  이렇게 변명하면 할수록 마음 속은 더욱 더 께름칙하고 가슴이 답답하였다. 맥이 풀린 손
에서는 일감이 저절로 떨어졌다.
  일이 손에 붙지 않아서 그냥 자리에 드러누웠다. 얼빠진  사람같이 등불을 물끄러미 보았
다. 사형의 선풍이 전국을 휩쓸자 거짓 회개와 거짓 눈물을 방패로 앙달방달 이것을 막아내
는 짓밟힌 백성들의 눈물겨운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하루살이가  등불에 튀어들어 씩 하고 
죽는다.
  "그러니까 무조건 옳단 말씀이죠?"
  -불행의 시초는 도대체 인간세상에 태어나는  사실에 있다. 누가 이 세상에  나고 싶다고 
했더냐? 이 놈은 이 소리 하고, 저 놈은 저 소리 하다가  자기 말을 안 듣는다고 도끼질 할 
권리는 어디서 얻었단 말이냐? 너희들은  자기가 옳다는 것, 아니  자기에게 이익되는 것을 
창을 들고 남에게 강요할 권리가 있고, 나는 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내 자신만 행할 
권리, 가슴에 간직할 권리조차 없단 말이냐?
  식은땀이 온몸을 적셨다.
  -힘이다! 너희들이 가진 것도 힘이요, 내게 없는 것도 힘이다. 옳고 그른  것이 문제가 아
니라 세고 약한 것이 문제다. 힘은 진리를 창조하고 변경하고  이것을 자기 집 문지기 개로 
이용한다. 힘이여, 저주를 받아라.
  바비도는 가래침을 뱉았다. 흉칙한 힘의 낯짝에 검푸른 가래침을  뱉아 짓밟힌 자의 불붙
는 증오심을 내뿜고 싶었다.
  자리에서 핑 돌아누웠다.
  가물거리는 등불과 더불어 그림자가 깜박인다.  주먹으로 힘껏 벽을 두드렸다. 쿵  소리와 
함께 울리고는 도루 잠잠해진다. 벽에다 또 가래침을 뱉았다. 그는 자기 자신이 정의 자체인 
양 참을 수 없이 화가 치밀었다. 힘이란 불의의 주구였다.
  -가래침아, 너는 영원히 남아서 바비도의 묘멸을 기념하여라.
  쳐다보니 일전에 주문을 받아 어저께  완성한 무에라고 하는 귀족의 옷이  걸려 있다. 그 
놈의 옷이 공연히 사람의 부아를  돋군다. 번개같이 일어나서 잡아채었다. 힘껏  마룻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짓밟았다. 그래도 시원치 않았다. 옷을 겨누고 오줌을 쌌다.
  이번에는 구석에 있는 궤짝이 밉살스럽다. 발길로 젱겨찼다.  문짝이 부서졌다. 잡아서 모
로 쓰러뜨리고 두 발로 힘껏  구르고 문질러서 쪼각쪼각 부셔 버렸다.  사람이 꾸며낸 것은 
무엇이든지 눈에 불아 나듯 원수 같았다. 닥치는 대로 찢고 물어뜯고 짓밟았다. 깜박이는 등
불이 얄밉다. 문을 열어제치고 힘 자라는 대로 멀리 냅다 던졌다.
  숨을 허덕이면서 자리에 모가지를 비틀어서  쑥 잡아빼 버리고 싶었다.  큼직한 빗자루가 
있으면 영국에 사는 놈을 모조리 쓸어다가 템즈 강에 처박고  침을 뱉아 주고 싶었다. 이러
구 저러구 꾸미구 죽이구 뽐내구 눈물을 짜구 애걸하구 손을 비비는 인간의 연극이여, 저주
를 받아라.

  -뒷짐을 묶인 바비도는 종교재정판정에 나타났다.
  검은 옷을 입은 사교는 가슴에 십자가를 그리고 엄숙하게 개정을 선언하였다.
  "네가 재봉직공 바비도냐?"
  "그렇습니다."
  "밤이면 몰래 모여들어서 영영 복음서를 읽었다지?"
  "그렇습니다."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느냐, 그르다고 생각하느냐?"
  "옳다고도 그르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옳으면 옳구 그르면 그르지 그런 법이 어딨단 말이냐, 똑바루 말해."
  "전에는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럼 그렇지, 지금은 그르다구 생각한다는 말이지?"
  "그렇지 않습니다."
  사교는 상을 찌푸렸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단 말이냐?"
  "다 흥미가 없어졌다는 말입니다."
  흥미가 없어지다니, 신성한 교회에 흥미가 없단 말이냐?"
  "교회뿐만 아니라 온 인간 세상, 나 자신에 대해서까지 흥미가 없어졌습니다."
  "오오, 이 무슨 독선인고!"
  사교는 눈을 감고 외쳤다.
  "내가 이렇게 재판을 연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너를  구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이 
간절한 심정을 살펴서 회개하고 바른 대로 대답해라."
  그렇게 간절하걸랑 아무치도 않은 사람을 구한다고 수다를 떨지 말고 내버려 두시죠."
  사교는 온 낯이 새빨개지면서 북받쳐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다.
  "아무치도 않다니?"
  "보시는 바와 같이 말짱한 사람을 미치광이 취급을 해서 구하느니 마느니 들볶는 그 심뽀
가 틀렸다는 말입니다.
  이런 일에 능란한 사교는 성난 얼굴에서 곧 미소로 변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묻기 시작
하였다.
  "처음부터 묻기루 하자. 무슨 마귀의 장난으로 영어 복음서를 읽구 듣구 했지?"
  "마귀의 장난이라뇨? 천만에. 우리말루  읽는 것이 왜 그렇게까지  옳지 못하다는 말입니
까?"
  "교회에서 금하니까 옳지 못허지."
  "교회에서 하는 일은 무어든지 다 옳습니까?"
  "암 그렇구 말구. 교회는 성 페테로에 시작되고 페테로는 직접 그리스도의 위임을 맡으셨
으니까."
  "……."
  "그렇지. 교회의 명령은 교황의 명령이요, 교황의 명령은  성 페테로의 명령, 성 페테로의 
명령은 그리스도의 명령이시니까."
  "사실 당신과 이러니 저러니 말하고 싶지도  않습니다만 기왕 말이 나왔으니 한 가지  더 
묻지요. 간통죄를 용서하고 대신 돈받는 것도 그리스도의 명령인가요?"
  독선두 유분수지 그런 법이 어딨단 말이냐!"
  사교는 흥분한 나머지 주먹으로 책상을 쳤다.
  "허어, 저의 옆엣집 프랑시스코의 처가 당장 당신한테 지난  봄에 그런 판결을 받지 않았
습니까?"
  사교는 안색이 홱 변했다.
  "아암, 더 고칠 수 없는 마귀에 걸려들었구나."
  사교는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될 수 있는 대로 침착을 보이려고 애썼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건 너와 교리를 다투자는 건  아니다. 이러다가는 끝이 없으니 사실
만 물어 보기루 한다. 그래 네 소행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렇게도 저렇게도 생각지 안습니다."
  "회개한단 말이냐, 안 한단 말이냐?"
  "잘못이 없는데 무슨 회갭니까?"
  "으음, 알았다. 성찬의 빵과 포도주는?"
  "빵은 빵, 포도주는 포도주죠."
  "너는 그 신성함을 모르느냐?"
  "신성이라는 그 자체가 인간의 조작이죠. 하여튼 그리스도가  이 자리에 계시다면 당신과 
나는 자리를 바꿔야 할 것입니다."
  나졸들이 달려들어 바비도의 입을 틀어막으려 하였으나 사교는 손짓으로 말린다.
  "바비도, 한 마디 회개한다고 말할 수 없느냐?"
  사교는 애걸하는 어조였다.
  "당신은 내게 강요하는 것을 모두 옳다고 확신하십니까?"
  "그렇다."
  사교는 서슴지 않고 대답하였다.
  "그것은 당신 자신의 양심입니까?"
  사교는 안색이 변하면서 입을 머뭇거리다가 손을 내저으면서 외쳤다.
  "나는 조직, 교회라는 조직에 복종하는 사람이다. 내게는  교회의 명령이 있을 뿐이요, 양
심은 문제가 안된다."
  "사람을 위한 교횐가요, 교회를 위한 사람인가요?"
  "사람은 하나님의 교회에 모든 것을 바쳐야지. 교회 앞에서는 죄 많은 사람은 보잘것없는 
물건이야."
  "그럼 사람은 교회의 도구에 불과하군요."
  "도구라도 하나님의 도구니 얼마나 영광이냐?"
  사교는 미소를 띄우면서 바비도를 내려다보았다.
  "……잘 알았습니다."
  "그럼 회개한단 말이지?"
  바비도는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얼마든지 살 길이 있는데 구태여 죽음을 택하는 그 심사를 모르겠구나."
  "산다는 것과 존재한다는 것은 다른 문제죠. 당신같이 썩은  사람은 살아 있지도 않고 살 
가망도 없습니다. 산송장이죠, 구데기가 이물이물하는."
  참는 것이 자기 본직이라는 듯이 침을 꿀꺽 삼키면서 사교는 미소를 띠었다.
  "무슨 곡절이 있구나, 왜 그러지?"
  "곡절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명명백백한 것을 이리저리 비틀어 옳은  당신네들한테 있
죠."
  "도저히 안되겠느냐?"
  "나는 나대로 인간을 폐업하렵니다. 이 인간사를 뛰어넘은 길을 가야 겠습니다."
  "아, 바비도……."
  사교의 가슴속에는 압도적인 교회 조직에 억눌린 인간의 양심이 꿈틀거렸다. 바비도의 눈
에서도 눈물이 한 방울 뚝 떨어졌다.
  "……회개하지?"
  바비도는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장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머리를 떨어뜨리고 발끝만 
보고 있다.
  "……그럼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느냐?"
  "……별로 없습니다. 다만 어지러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슬퍼할 뿐입니다."

  스미스필드의 사형장에는 사람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런던  시민뿐만 아니라 멀리 시골
에서까지 사람이 사람을 붕에 태워 죽이는 구경을 하러 보따리를 짊어지고 온 친구도 적지 
않았다. 개중에는 어린 것을 등에 업고 있는 아낙네들도 간간이 보였다.
  "어어 울지 마라 응, 좋은 구경 시켜주께. 엄마하구 같이 보자 응?"
  "왜 이리 늘장 부릴까? 얼른 해치지. 벌써 사흘 묵었는데. 오늘은 꼭 보구 내려가야 할 텐
데."
  여기저기서 이런 말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네가 젊었을 땐 목을 매 죽이더만 세상이 달라지니 죽이는 법두 달라지나베."
  백발이 성성한 꼬부랑 할머니가 장작을 산더미같이 쌓아올린 형장을 중심으로 빽빽이  둘
러선 친구들을 지팡이로 이리저리 헤치고 맨 앞에 나서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제 보일 만하군. 자네들은 몇번이나 구경했나?"
  옆에 서서 떠들썩하는 젊은 친구들을 보고 이렇게 묻는다.
  "열 번은 더 되죠. 연극은 문제도 안되니까요. 볼 만합니다."
  "그래도 목을 졸라 죽여 버리는 거에 대면 어림이나 있을라구? 눈깔이 툭 튀어나오구  혓
바닥이 길쭉한 것이 볼 만허이."
  "목을 졸라 죽이는 건 보지 못했다만 불에 태는 것두 통쾌합니다. 꽁꽁 묶여 가지구두 꼬
부라질을 하는 꼴이란 별맛이거든요."
  헤챙이 젊은 친구는 두 팔을 걷어 올리면서 기염을 토하니 노파는 끄덕였다.
  "허지만 그 놈이 냄새만은 고약해. 목을 졸라 죽이면 냄샌 없겠죠?"
  "없구 말구. 그러니까 졸라 죽이는 편이 낫다니까……."
  이때 모두들 조용하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태자 헨리가 오신다는 것이다.  군중은 
길을 비키고 태자를 향해 경의를 표하였다. 마차에서 내린  태자는 군중을 한바퀴 휘둘러보
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장작더미 옆에 있는 의자에 않았다.  한때 물을 끼얹은 듯이 잠잠하
던 군중 속에서는 조심성 있는 귓속말이 새어나오기 시작하였다.
  "태자두 마찬가진가부지."
  "뭐가?"
  "보구 싶어하니까."
  "그도 사람 아냐."
  "별수없군."
  "그렇잖으면 별수 있다던?"
  "쉬-쉬, 듣겠다. 모가지가 달아날라구."
  사형수 바비도를 실은 마차가 들어왔다. 온몸은 볼 모양이 없이 되었다. 옷은 찢기고 얼굴
에서는 피가 흘렀다. 거리를 끌려다니면서 믿음이 두텁고 나라에 충성된 백성들로부터 받은 
모멸의 흔적이었다. 입구에 들어서자 군중은 앞을 다투어 덤벼들었다. 애기 업은 중년  부인
은 앞장서서 침을 뱉았다. 돌멩이도 수없이 날아왔다. 진흙을 묘하게 뭉쳐서 바비도의  얼굴
에 명중시킨 용사도 있었다. 가장 용감한 친구는 마차에 튀어올라  발길로 한 대 차고 침을 
뱉고 나서 춤추듯이 내려뛰었다. 멀리서 있는 사람들도 기회를  놓칠까 두려워서 애써 침을 
뱉고, 노파들은 주먹질하고 젊은 여자들은 생각할 수 있는 욕설은 빠치지 않고 퍼부었다. 나
무 꼬챙이를 휘둘르면서 처음부터 이 사형수의 뒤를 딸던 아이들은 이 행렬이 걸음을 멈추
자 손에 든 것으로 구루마의 꽁무니를 갈기로 발길로 차면서 외쳤다. 인간 세상의 증오라는 
증오는 모조리 바비도를 향하고 두터운 신앙과 충성은 뜨거운 물같이 뒤끊고 있었다.
  바비도는 고개를 떨어뜨린 채 아무 반응도 없었다. 그가 목숨이 아직 붙어 있다는 증거는 
가끔 떴다 감는 두 눈뿐이었다.
  헨리 태자는 버럭 자리에서 일어나  조급히 바비도의 옆으로 걸어갔다.  무질서한 군중을 
제지하고 두 손으로 바비도를 부축하여 차에서 내리게 하였다.  수군대던 군중은 깜짝 놀라 
잠잠해졌다. 가장 용감하던 자들 중에는 태자의 이 거동을 보고 도리어 화가 자기에게 미칠
까 두려워서 슬금슬금 맨 뒤꽁무니로 물러서는 자도 있었다.  바비도와 태자는 나란히 걸어
서 장작더미 옆으로 갔다. 태자는 앉고 두 팔을 묶인 바비도는 장작더미에 기대 섰다.
  태자는 친절하게 말을 건넸다.
  "바비도, 나는 태자 헨리다."
  바비도는 흥미 없다는 듯이 한번 태자를 내려다보고 이어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바비도, 나는 너를 구하러 왔다."
  태자는 손수 의자를 갖다 앉기를 권하였다. 바비도는 물끄러미 태자를 바라보다가 입맛을 
다시고는 말없이 의자에 앉았다. 태자는 형리를 불러 포승을 풀게 하였다.
  "바비도, 나는 너를 구하러 왔다."
  태자는 바싹 다가앉으면서 같은 말을 되풀이하였다.
  "왜요?"
  바비도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너두 사람인 이상 죽구 싶지는 않을 테지?"
  "……구태여 죽구 싶은 것두 아니지만 악착같이 살구 싶지두 안습니다."
  "죄를 씻고 천국으로 들어갈 마련을 해야지, 멸망의  길을 걸어서야 쓰겠느냐? 이브의 조
그만 죄는 인류를 영원한 괴로움으로 몰아넣지 않았던가?"
  바비도는 대답이 없었다.
  "……죄의 씨는 영원히 퍼져서 걷잡을 수 없는 화를 가져오거든."
  "선은 그 보수를 받고 악은 반드시 화를 당한다는 말씀이죠?"
  "그렇지, 바비도."
  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사는 그렇지두 않은가 봅니다.  우선 당신의 조상 헨리  2세만 하더라도 사냥터에서 
쓰러진 자기 형의 시체를 팽개치구 부리나케 돌아와서 왕위를 가루채지 않았습니까? 자자손
손이 그 덕분에 영화를 누리고 당신도 그 '악'의 혜택으로 일국의 태자요, 장차의 천자가 아
닙니까?"
  태자는 침을 삼키고 흥분한 빛을 띠었다.
  "……나는 대대로 종살이하는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앉으라면 앉고 서라면 서고  일년 삼
백육십여 일을 일해 왔습니다. 이 손을 보시우, 남한테 싫은 소리 한 마디 한 일 없고, 남의 
것을 넘겨다본 일도 없고, 양심대로 살아오고 양심대로 말한 결과가 사형입니다."
  "바비도, 나루선 더 할말이 없는가 보구나. 시비는 어떻든 간에 너는 한마디만  하면 목숨
을 구하고 새출발을 할 수도 있지 않느냐?  나두 내 힘 자라는 데까지 네 앞날을  개척하는 
데 조력하지."
  바비도는 말없이 빙그레 웃었다.
  "어때?"
  "오히려 나는 내가 걸어온 길이 지금 생각하면 즐거운  길이었습니다. 이 길을 그냥 가렵
니다. 다행히 하찮은 영혼이라도 없어지지 않고 지옥 한 구석에  남아 있으면 오시는 걸 기
다리고 있겠습니다. 그 동안 될 수 만 있으면 권력세계의 주역을 깨끗이 치르고 오십시오."
  태자는 한숨을 쉬었다.
  "……할 수 없구나. 법은 법이니까 집행해라!"
  '법……' 하고 빙그레 웃는 바비도에게 달려들어 사형집행리들은 다시 포승으로 묶고 장작
더미 위에 비틀어매었다.
  바짝 마른 장작에 불은 순식간에 퍼져서 불길은 각각으로 바비도에게 육박하고 있었다.
  고개를 떨어뜨리고 생각에 잠겨 있던 태자는 별안간 뛰어 일어나면서 고함을 질렀다.
  "불을 꺼라, 사람을 끌어내려라!"
  사형집행리와 포졸들은 벌떼같이 달려들어 불을 끄고 바비도를 끌어 내렸다.
  "바비도, 누가 옳고 그른 것은 논하지 말자. 하여간 네 목숨이 아깝구나."
  "……."
  "마음을 돌렸느냐?"
  "그 뜻은 잘 알겠습니다만 내 스스로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가는 심사로 떠나는 길이니 염
려할 건 없습니다. 이미 동정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닌가 합니다."
  땅에 주저앉은 바비도는 한 바디 한 마디  고요한 어조로 말하고 나서 맑게 개인 하늘을 
쳐다보았다.
  "도저히 안되겠느냐?"
  바비도는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할 수 없구나, 잘 가거라. 나는 오늘날까지  양심이라는 것은 비겁한 놈들의 겉치장이요, 
정의는 권력의 버섯인 줄만 알았더니 그것들이 진짜로 존재한다는  것을 내 눈으로 보았다. 
네가 무섭구나 네가……."
  스미스필드의 상공에는 다시 연기가 오르고 장작더미는  불을 토하였다. 이따금 일어나는 
군중의 고함소리에 섞여서 한결 높은 폭소도 들려왔다.
  한 생명은 연기와 더불어 사라지고 구경에  도취한 군중이 흩어진 뒤에도 하늘은  여전히 
푸르렀다.
  
    213호 주택 (지은이:김광식)
  퇴근 시간, 오후 다섯 시를 지난 서울의 거리. 종로, 을지로, 세종로, 남대문로, 소공동, 명
동의 거리, 오가는 남녀노소의 물결에는 긴장이 풀린 호흡이 흐른다.
  그들은 가끔 화려한 상품이 진열된 쇼윈도에 비친 자기 얼굴을 힐끗힐끗 바라보며 지나간
다. 사치한 상품의 강렬한 색채가 그들의 눈을 황홀케 하나  그것은 한갖 원색그림인 양 바
라보며 지나갈 뿐이다.
  어떻게 하면 가족을 부양하는가, 이것만이 머리에 가득 찬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것이 갖
고 싶다는 욕망은 한낱 사치스러운 욕망이고 관념일 뿐이다.
  전차 정류장, 버스 정류장에는 이렇게 거리를 지나온 사람들이 어제도, 오늘도 교외로  달
리는 버스를 기다린다. 간신히 탄 전차나  버스는 발을 옮길 길이 없다. 남녀노소의  육체와 
육체가 맞부딪쳐 안고, 등지고, 진동이 일어날 때마다 밀고, 당기고, 엎치고…… 덮치고 그래
도 타고 가야하는 전차요, 버스다.
  버스는 오늘도 오후 다섯 시를 넘는 이 시각에 만원이  되어 교외로 교외로-신촌으로, 청
량리로, 약수동으로, 미아리로, 돈암동으로, 흑석동으로, 상도동으로,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가
는 서울의 남편들을 싣고 달려간다.
  기사 김명학 씨는 오늘도 매일과 같은 오후 여섯 시를 지나 공장에서 나와 상도동 행  버
스를 탔다. 그러나 지금 자기가 어디로 간다는 의식도 없이 손잡이를 붙잡고 흔들려가고 있
었다. 침울한 얼굴이었다. 밀고, 덮치고 해도 그는 동상처럼 흔들려가고 있었다.
  김명학 씨는 조경인쇄주식회사 공장의 기사였다. 이 공장은 한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공
장의 하나였다. 김명학 씨는 일제시 공고 기계과 출신으로 회사에서는 그를 채용하고,  기사
장이라는 사령장을 주었다. 그의 밑에 기사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를 돕는 조수가 한  사
람 있을 뿐이었다.
  그는 부산서 환도와 더불어 이  공장에 취직을 했다. 본래 그는  방직공장 기사였으나 그 
공장이 동란으로 파괴되고, 환도 재건의 길이 막히어서 그는  임시로 이 인쇄공장에 취직했
던 것이다. 그 후 방직공장이 재건된다고 해서 가려 했으나 인쇄공장에서는 그를 놓지 않았
다. 미국과 독일에서 수입한 인쇄기와  주조기와 제본기와 재단기들이 들어와  그 설치에는 
기계과 출신인 그가 절대로 필요했다. 그는 한국에서 처음  수입되어 들어온 기계들을 설치
하고, 그 기능과 조종을 시험하여 직공들에게 그 운전과 조종법을 지도하는 그야말로 이 공
장 설비에 있어 없어서는 안될 기사였다. 그는 묵묵히 일하고 돌아가는 사십대의 건실한 기
사였다. 회사에서는 사장 이하 직공에 이르기까지 그의 기술과 인격을 믿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는 이 한 달 사이, 제23호 인쇄기와 특히  자가 발전기의 빈번한 고장으로 우울
한 고된 날을 보냈다.
  이 인쇄공장의 제일 중요한 시기는 신학기 교과서를 인쇄하는 2, 3월이다. 한데 2월에서 3
월에 걸쳐 발전기와 인쇄기의 고장은 이 공장의 제일 큰 타격이었다. 인쇄기의 빈번한 고장
은 그 원인을 발견하게 되어 고장을 고치고 수리하고 해서 면목이 섰으나 발전기만은 하루
가 멀다 하여 고장이 나고, 한 달이 되었어도 그 고장의 원인을 발견할 수 없었다.
  사장과 공장장은 그의 기계에 대한 권위를 믿지 않게 되었다. 야간조업을 한다던가,  또는 
정전이 되면 발전기를 돌려야 하는데  그것이 고장만 났다. 이렇게 되면  수백 명의 직공이 
할 일 없이 놀아야 하고, 회사측에서는  그로 인한 손해만을 계산했다. 회사의 간부들은  그 
전 책임을 기사장 김명학 씨에게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드디어 오늘은 사장과 공장장 앞에서 권고 사직의 이야기를  들었다. 결국은 파면인 것이
다.
  서울역에서 남으로 향하여 한강 인도교를 건너가면 인편으로는 흑석동으로 넘어가는 언덕
길이 뻗었고, 우편으로는 사육신 무덤이 있는 산을 돌아 영등포로 향한 아스팔트 길이 플라
타너스 가로수의 그늘을 받고 뻗어갔다. 노량진 장터를 지나면  바로 왼편으로 넓은 오르막
길이, 산허리를 굽이굽이 돌아 올라가는 길이 있다. 이 오르막길을 아침 저녁으로  오르내리
는 산 너머 사람들이 이 고개를 아리랑고개라고 한다. 산  너머 사람들이라고 하면 마치 두
메산골 사람으로 관념할지 모르나 이 아리랑고개를 아침 저녁으로 넘나드는 사람들은  대개
가 서울 장안에 있는 공무원이나, 회사원인 양복을 입은 한국의 지식인들이다. 처음으로  이 
아리랑고개를 올라선 사람이라면 깜짝 놀랄 것이다.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우거진 넓은 길이 
좌우로 갈라져 내려가고, 종로 화신 앞 같은 로터리가 이기 때문이다. 이 로터리를 해서  동
서남북으로 갈라진 십자로 길가로는 주택영단, 꼭  같은 형의 특호 주택이 즐비해 섰다.  이 
로터리에서 서로 향한 길을 내려가면 또 아담한 로터리가  있다. 여기에서 동으로 관악산을 
바라보는, 가로수가 늘어선, 길 한복판으로  맑은 산물이 흘러내리는 내전이  있다. 이 애천 
양편으로 수양버드나무 늘어진 가지가 푸른 바람을 받고 실가지를  내전에 적신다. 멋진 길
이 이러한 데 있으리라고는 상상 못할 것이다.
  이 로터리의 길을 기점으로 주택이  좌우로 줄지어 아득히 보이는  산허리에까지 뻗었다. 
잔잔한 계곡을 타고 자리잡은 꼭 같은 형의 특호 주택, 꼭 같은 형이 갑호 주택, 꼭 같은 형
의 을호 주택이 줄줄이 좌우로 마치 전차 기갑사단이 푸른 기를 꽂고 관병식장에 정렬하여 
서 있는 것 같은 감이다. 관악산의 줄기가 병풍처럼 천여 호의 주택을 둘러쌌다. 이  주택촌
을 상도동이라고 한다.
  오늘도 저녁이 되자 달려오는 버스마다 만원이 되어 무거운 듯이 굴러 온다. 질식할 듯한 
이 버스를 매일 꼭 같이, 꼭 같은 시각에 타야 하는  그들은 모두 하루의 일을 마치고 나의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일 것이다. 그 속에는 여인도 있고,  남녀 학생도 있을 것이다. 대개는 
역시 피곤한 몸을 싣고 집으로 돌아가는 남편들이다.
  그 남편들은 그렇게도 집이 그리워설까. 늦게 돌아가면 아내가  짜증을 내는 것이 무서워
설까. 배가 고파설까. 할 수 없어서 그렇게도 꼭 같은 시각에 질식하는 버스를 타야 하는 것
일까. 도심에서 주택이 늘어선 교외로의 달려가는 남편들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그 하
루를 온갖 정력을 기울여 일했다. 돌아가는 길에 한 컵의  술로 메마른 목을 축이지도 못하
고, 숨도 돌리지 못하고 곧장 집으로 가야 하는 남편들이다. 그들은 가끔 이러한 자기  자신
들을 생각하며 버스에 흔들려 간다. 그러나 김명학 씨는  오늘 사장으로부터의 사직 권고의 
이야기만 해석해 보는 것이다.
  "김 기사장의 인격이나 기술을 우리  회사에서는 믿고 맡기고 있었소.  한 회사라는 것은 
그 회사의 사 업을 위주로 해서 사람을 쓴다는 것은 두말도 할 필요도 없겠지요. 김 기사는 
우리 회사가 환도 후 재건에 있어서 가장 큰 공로를  세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소. 그러
나 금년 3월에 들어 발전기와  제23호 인쇄기의 고장은 우리  회사의 치명적인 타격이었소. 
이렇게 되면 회사에서는 그 기계를 다루는 기사장의 책임으로 돌리지 않을 수 없소. 기사라
는 것은 기계의 고장을 사전에 발견하는 것이라고, 아니 고장이 나지 않게 하는 것이 큰 직
책이라고 회사에서는 생각하고 있소. 한두번이 아닌  고장의 수리가 2, 3일이 멀다 해서  또 
고장 또 고장이라면 결국 기사는 고장의 원인을 모르는 것이라고 해석하지 않을 수 없겠지
요. 그 책임을 기사장이 져야 한다면 현명한 기사장은 자기  처신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
은 여기서 민망한 말을 하지 않아도 잘 이해해 줄 것이라고 아오. 회사의 고충을……."
  "네, 알았습니다."
  "이해해 주어서 고맙소."
  기사장은 공장장실에서 사장의 이 말을 듣고 나와, 전기실 자기 의자에 앉아 침울한 생각
에 자기 자신을 걷잡을 수 없었다. 기사로서의 패배감이 머리를 쳤다.
  그러나 사직원을 썼다.
  기사장으로서 사고 전에 고장을 발견하지 못하였다는 윤리의 세계, 그는 이것만을 생각했
다.
  우리나라 전기 사정은 공장마다 자가 발전기를 놓아야 하는 현실이다. 이 공장의 총 마력
은 백 마력이 조금 넘는다. 야간 종업과 정전에 대비해서  자가 발전기를 설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이렇게 되면 제2종 전기기사를 채용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회사에서는 기
사를 채용하지 않고, 기사장의 전기 기술을 믿는다고 하며  전기실의 책임도 김명학 기사장
에게 맡긴다는 것이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전기실 책임도 맡기는 맡았으나 전기에 대해서
는 기계과 출신으로서의 상식밖에 없다는 것을 자기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인쇄공
자의 요만한 전기 시설쯤은 그의 기술로서 감당 못할 바도 아니었다.
  전기 기계에 있어서 우기라는 것은 고장이 나기 쉬운 시기다. 금년 따라 교과서 인쇄기에 
눈비가 그치지 않는 우기를 만나 습기로 인한 것인지는 모르나 발전기와 인쇄기 모터에 고
장만 났다. 하루는 단상교류로 인해서 인쇄기의 모터들이 우우 하는 비명을 지르며 파란 연
기를 내며 모터의 코일이 타버리고 말았다. 이 수리는 즉석에서 고쳐지는 것은 아니었다. 모
터 수리공장 직공들을 불러 고쳤으나 사흘이 걸렸다.
  사장과 공장장은 김명학 씨만은 원망하는 것 같았다. 왜 고장이 일어날 것을 미리 발견하
지 못했는가 했다. 그럴때마다 동력의 삼상교류의 원칙을 설명하고, 공장 밖에선 합선이  된 
것으로 어찌할 수 없는  고장이라고 변명했으나, 사장과 공장장은  구구한 그의 변명으로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러한 고장이 일어난 얼마 후에, 또다시 발전기의 스프링과  인슐레이
션의 상태가 좋지 않았던지 그것이 또 타버리고 말았다. 그는 밤을 밝혀서 수리를 완성했다. 
그는 고장의 원인을 과열로 인한 고장이 아닌가 생각했다.  이튿날 협소한 발전기실의 냉각
을 위해서 큰 창을 두 개나 내게 했다.
  한데 그 고장의 수리가 일 주일도 못되었는데 또 그것이  타버리고 말았다. 그는 야간 종
업을 싫어했다. 그날 조수에게 맡기고 여섯 시 정각에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에 일어난 것이었다.
  갑자기 때 아닌 모진 바람에 눈비가 뿌렸다. 그 발전기의 통풍창으로 휘날려 들어간 눈비
는 발전기를 녹인 모양이었다.
  조수는 발전기실에 무엇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전기실 자기 의자에 기대어 졸고  있다가 
발전기가 완전히 타버린 후에야 당황해 했다.
  기사 김명학 씨는 사직원을 쓰고 의자에서 일어나 인쇄공장으로 들어가  제1호기에서부터 
32호까지 하나하나 바라보며, 이 인쇄기의 고장은 어디에서 나고, 저 인쇄기는 어디가  약하
고…… 직공들이 인사하는 것도 모르고 기계만을 응시하며 지나갔다. 제1, 제2, 제3, 제4, 제
5 기계실을 빙 돈 후, 출입구에 서서 인쇄기를 바라볼 때, 그는 그 인쇄기들이 움직이는  괴
물처럼 보였다. 또 자기를 덮칠 것같이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강한 고독을 느꼈다. 공허한 가슴을 느꼈다. 매일같이 매만지고 바라보던 저  인쇄기
들을 다시 대하지 못한다는 것으로 이렇게 차가운 고독이 절박해 오는 것일까.
  이 공장의 일체가 자기에게 적의를 갖고, 자기를 조소하고, 자기와는 무관이라는 것이  이
렇게도 자기를 공허하게 하는 것일까.
  그는 사직원을 내고 모자를 들고 나오며 그는 자기의 이 시간을 무슨 행동으로써 자기의 
공허한 가슴을 메우려는 충동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공허한 시간이 자기를 
싸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삭막한 상도동 버스 종점에는 하루의 일을 마치고 어두워서야 돌아오는 아버지를  기다리
는 아이들이 서성거리고 있다. 때로는 남편을 기다리는 젊은 여인이 한둘 서 있으나 그것은 
아마도 신혼의 꿈 많은 아내들일 것이다.
  만원 버스는 헤드라이트를 켜고, 길 한복판으로 내천이 흐르는 우편길의 수양버드나무 가
지와 플라타너스 잎을 스치며 달려와 정거했다. 모두들 조금이라도  먼저 내리려고 앞을 다
투다시피 내려 뿔뿔이 흩어져갔다.
  그들 남편들 속에는 그리웠던 처와, 즐거운 저녁식사가 반가이  맞아주는 사람도 있을 것
이다. 그러나 대부분 남편들은 따분한 주택에 아무런 사랑도, 아무런 기대도 갖지 않고 맞아 
주는 아내가 있는 집으로 찾아간다.
 만원 버스에 흔들려 가는 남편들은 가끔 꿀벌이 꿀을 모아 가지고 벌집으로 찾아가는 것처
럼, 자기도 월급을 받기 위해서 밖으로 나갔다 돌아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도 해본다. 꿀벌은 
꽃을 상대로 한 아름다운 정이 있다.  꿈이 있다. 그러나 인간의 오늘의 직장에는  아름다운 
인정도 꿈도 없다. 비정의 기계가, 비정의 의자가 있을 뿐이다.
  김명학 씨는 버스에서 내려 무거운 걸음으로 갑호 주택길을 건너가 제3행 을호 주택길에 
들어 묵묵히 걸었다. 그는 무작정 걸어갈 것 같았으나 발은  습관대로 23호 자기 집 현관문 
앞에 가 섰다. 그는 아내 얼굴을 생각했다. 가난한 살림에 신경질이 된 아내의 여읜  얼굴이
나, 또 자식들의 얼굴을 생각했다. 건방져  가기만 하는 고등학교 졸업반인 장남 석기의  얼
굴, 멋만 내고 맵시만 내겠다는 여고생, 장녀 석란의 얼굴,  팔목시계가 갖고 싶다는 중학 2
학년 짜리 2남 석운이, 돌아올 때마다 아버지의 손만 바라보는 석희와 석만이.
  내일부터 직장이 없는 이 남편, 이  아버지를 바라보는 무수한 얼굴을 그는 생각만  해도, 
그 시선, 그 표정은 바늘 끝 같았다.
  그는 오늘 저녁 어떠한 일이 있어도 실직당한 이야기는 하지 않아야 한다고 느꼈다. 이대
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너무나 침울해서 눈치채일 것만  같았다. 그는 돌아서 걸었다. 구멍
가게의 불빛을 느끼자 그는 그리로 가서 과자 한 봉지를 샀다. 수다스런 구멍가게 할머니는,
  "석희와 석만이가 귀엽지요. 그 애들은 아버지를 잘 만나서 과자도 늘 먹구……."
  그는 못 들은 척 과자 봉지를 받자 돌아섰다. 그때 그의 앞으로 양키와 하이힐을 신은 젊
은 여성이 팔을 끼고 지나갔다. 그들은 을호 주택 4행길로 접어 들어갔다. 그도 그들이 뒤를 
따라 4행길로 들어서 걸었다. 얼마 그들은 한 집으로 들어갔다. 김명학 씨는 생각했다. 저들
이 이 동네에서 산다는 미국 군인과 한국 여성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4행길을 빙 돌아 자기 집 문 앞에 섰다. 그는 문을 드르릉 열고 현관문을 들어서며,
  "우리 막내 있나? 아버지 왔다."
하고 구두끈을 푸는 것이나 자기가 한 말에 어색함을 느꼈다.
  아이들은 현관으로 우루루 달려 나왔다. 아이들은 과자 봉지를  보자 서로 들고 들어가겠
다고 야단들 이었다. 그 야단이 그만 과자 봉지를 마룻바닥에 터치고 말았다. 아이들은 흩어
진 과자를 제가끔 자기 포켓에 넣고 치마에 싸고, 서로를 빼았고, 집은 수라장이 되고  말았
다. 김명학 씨는 이러한 자식들의 꼴을 바라볼 때 갑자기 서러움 같은 것이 가슴에 왔다.
  장남 석기 놈이 나오더니,
  "이 돼지 같은 것들, 이게 뭐야."
하며 닥치는 대로 동생들을 갈기는 것이다. 엄마가 또 뒤따라 나오며,
  "야, 이것들아 사흘 굶은 거지 애들이라도 이러지 않겠구나. 다 이리들 내놔, 똑같이 나누
어 줄 테니까, 방으로 들어와."
  어머니의 날카로운 소리에 석희가 먼저 치마에 쌌던 과자를 방바닥에 내어 놓고 뾰로통해
서 구석지로 가 섰다. 입들이 부어서 한 사람씩 내어 놓았다. 멋만 부리고 맵시만 내던 석란
이도 어느새 감추었던지 슬그머니 내놓았다.
  "여보, 당신은 돈도 많군요. 돈이  있거든 찬거리나 사오지 이건  뭐요. 불집을 일어 놓고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면 좋우?"
  "이럴 줄이야 알았나."
  이렇게 말을 했으나 억지로 한 말이다.
  아이들의 야단도 슬펐고, 아내의 말도 슬펐다.
  그는 저녁상을 받았으나, 몇 술 뜨는  척만 했다. 친구들과 점심을 늦게 먹어서  그렇다고 
변명을 했다.
   명년 대학 시험을 앞두고 밤을 밝히다시피 공부한다는 석기가 아버지 밥상이 물러나오는 
것을 보고, 
  "밤을 밝히려면 밤참을 먹어야겠어. 석란이 너, 저 밥상 그대루 신문지 덮어서 내 방에 가
져다 놔."
  "흥."
  "뭐 흥이야, 가져다 놓으라면 가져다 놔."
  "솔직하게 두부찌개가 먹고 싶다면 먹고 싶다고 그러지, 내 방에 가져다 놔. 난 오빠 심부
름 하려 이 세상에 나오진 않았어."
  "요것이……."
하더니, 벌썩 석란이의 뺨을 갈겼다. 아버지는 이렇게 되면 그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만들 못해!"
하고, 벌떡 일어섰을 때는 석기 놈은  재빠르게 자기 방으로 달아나고 말았다. 벌떡  일어선 
김명학 씨는 또 슬펐다. 모두가 가슴을 메우는 슬픔 이었다.
  아버지가 되어서 남처럼 아이들을 먹이고 기르지 못한다는 슬픔보다도  저 눈들이, 저 몸
부림들이 아팠다. 내일부터 면직을 당한 아버지를 바라볼 아내와 자식들의 눈들이 슬펐다.
  그는 오늘 저녁, 이대로 잠을 이룰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술을 혼자 즐기는  편은 아
니나, 술의 힘을 빌려 아픈 생각을 잊어야 할 것  같았다. 아내에게 술을 사오라고 했다. 아
내는 남편의 울적한 기분을 알 것만 같았다. 아이들을  생각하고 사온 과자가, 물린 밥상이, 
남편을 상심케 한 것이라고 알았다. 또 그의 아내는 가끔  신경질이 난다고 해도 남편의 말
을 거역해 본 적은 없다.
  김명학 씨는 아내가 사온 소주 한 병을 다 마셨다. 그는 억지로 기분을 돌려 막내를 안고 
좋아하는 척도 했다.
  맏딸 석란이는 이렇게 기분 좋은 아버지에게 용돈이 타고 싶어 어리광을 부렸다.
  "자, 내일 저녁에 네 청구대로 중 테니까 네 방에 가서 자거라."
  "네, 오백 환만 네, 아버지."
하고, 방을 나가는 딸의 뒷모양을 바라보며 옛날의 아내의 모습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석란이는 꼭 당신 닮았소. 당신 여학교 시절의 사진과 비슷해."
  이러한 말이 오고 가고, 밤은 깊어갔다.
  자리에 누운 그의 아내는 기분이 좋아진 남편이라고 생각하며 가끔 하는 말을 했다.
  그의 아내는 젊은 시절을 회상도  하고-또 그래도 남만치 살며, 집구석에서  이렇게 박혀 
살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때로는 산뜻한 옷차림으로 문밖으로 나가 거리를 걷고 싶고, 영화
도 보고 싶다고. 밖의 시원한 공기를  마시며 자유스럽게 남과 사귀고, 사회적 호흡도  하고 
싶다고 했다.
  남편은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러나 집을 비울 수가 없다는  것이다. 밖으로 나가면 집의 일이  밀리고 그보다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가끔 아리랑 고개를 넘어 노량진 수산시장이나, 어쩌다 
버스를 타고 남대문 시장으로 나가는 일이 있어도 아이들에게 맡긴 집 생각을 하면 빨리 돌
아가야 하겠다는 마음부터 앞선다는 것이다.
  김명학 씨는 아내의 이러한 말을 들을 때마다 자기는 아내를 억지로 집구석에 가두어 놓
고 마구 부리는 무지막지한 고용주가 아닌가 생각하는 것이다.  아내는 남편을 위해서 식사
를 만들고, 남편의 와이셔츠를 빨고-역시 개미 모양 모든 즐거움을  잊고 자기의 몸이 지쳐 
허리가 구부러질 때까지 일하여야 하는  것이겠는가. 그는 자기의 아내만은  이렇게 시키지 
않으려 했으나 지금의 자기 현실을 생각하면, 어찌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할 뿐이었다.
  그는 한 사내로서 한 기사로서 성심껏 일하고 일했다.  아내에게 대한 변명이라면 이것뿐
이었다.
  그는 온갖 정력을 기울여 일하고 일했다. 기계와 살아왔다. 헌데 발전기와 인쇄기들은, 아
니 사장은 고장의 사전 발견을 못하고 나를 내어  쫓는다. 기계나, 사람이나, 너희들은 나의 
식구를 생각하지 않아도 좋으냐? 사장 당신은 인간이 아닌가? 내가 고장의 사전 발견은 못
했으나 고쳐 놓은 것만은 사실이 아닌가. 기계란 건, 특히 전기란 전혀 예측 못하는데  고장
이 난다는 것을 기술자라면 안다. 기사는 사람이다. 사람은 고장전에 기계의 고장을  발견하
는 기계는 아니다. 사람은 기계가 못되는 것이다. 나는 기사로서 십칠 년 간 기계의  고장을 
고친 사람이다. 못 고친 것이 없다. 고장이 문제가 아니고, 고장을 고치는 것이 문제가 아니
고, 사고 전에 고장 날 것을 발견하라고? 그리고 나를 면직시킨다?
  그러나 그의 울분도 잠으로 사라졌다.
  김명학 씨는 이튿날도 언제나 같이 같은 시가에 집을 나와 버스를 탔으나 회사로 가지 않
았다. 대서소에 들러 이력서를 부탁했다. 글씨를  쓸 줄 몰라서가 아니라 쓸 장소와  도구도 
없었고, 또 사십이 넘어서 정성스레 이력을 쓰기가 싫어서였다.
  믿을 만한 친구들을 찾아가 이력서를 주고 취직을 부탁했다. 쑥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으
나 처자식의 얼굴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후 세 시가 넘어 회사에 들러 회계과로부터 이달 월급과 다소의 퇴직금 이라는 것을 수
표로 받았다. 가까스로 마감 시간  전에 은행에 들러 십만 환만은  보증수표로 하고 나머지 
만 환 정도는 현금으로 받아 넣고 은행을 나와 거리를 걸었다.
  오래간만에 다방이라는 곳에 들러 차도 마시고, 시간을 보냈다. 그는 오늘만은 이대로  집
으로 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다방을 나와 또 걸었다. 사치한 사람들이 물밀 듯 흘러가고 흘
러오는 명동 입구에 서서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도 그 물결에 흘러 들어갔다.
  학생 시절에 이 거리를 걷던 기억이 새롭다. 저 젊은 남녀와 같이 희망과 꿈을 안고 걸었
다. 인생은 즐겁기만 했었다. 지금은 자기 에게도 이러한 기억이 있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김명학 씨는 취하고 싶었다. 친구가 따라 줄 사이도 없이 자기 손으로 따라 마셨다.
  고등 동창인 오학삼은 이렇게 술만 마시는 김명학을 보지 못했다.
  "여보게 천천히 술을 마셔. 공장을 그만 뒀다고 이래선 안돼. 취직은 곧 된다니까."
  "회사를 그만둔 것이 아니라 쫓겨났어."
  그는 갑자기 말이 많아졌다.
  "우리 이야기 좀 해보자. 자네는 아나? 오늘의  사회는 인간의 노동을 강제노동으로 타락 
시켰어.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노동을 고통으로 아는 거야."
  "이 친구가 또 갑자기 왜 이래."
  "왜 이러긴 왜 이래…… 사회란, 그 놈의 조직이란 의무도, 약속도, 규칙도, 질서도 강제적
으로 인간에게 요구해. 우리는 대등이 아니야. 그러니까 우리는 노동에서 고통을 느끼는  거
야."
  "이 친구가 왜 자꾸 이래. 그런 말은 후에 하고 술이나 마셔."
  "그럼 하나 물어볼까. 노동이 강제적이 아니고 자발적으로 존재하던 시대가 있었나? 미래
에도 있을 수 있을 것으로 아나?"
  "나는 과거고 미래고 몰라. 그러나 나는 기사로서 직장의 의무와 약속을 성실하게 지켜왔
어. 그런데 응, 나는 쫓겨났어. 사고 전에 고장날 것을  발견 못했다구. 나는 귀신이 아니야. 
사람에게 귀신이 되라고 강요하는 것이야 뭐야, 응."
  "그러니까 현대인은 고독하지."
  "자네는 고독이란 것을 가지고 위로하나. 자네가 정말 자유라면 고독은 경멸할 것이다. 임
마 고독이 무엇이야 고독이."
  "자넨 그럼 자유인이 되고 싶던가. 자유는  또 뭐야. 응 기계과를 나온 놈이  기계 앞에서 
자유를 부르짖나? 도피하지 않는 자유가 필요해. 자유는 절대로 도피처가 아니야. 자유는 최
고의 선은 아니야."
  "임마 누구한테 설교야 응?……"
  "아아, 우리 취했네. 취했어……."
  그들은 자기네 한 말이 싱거워졌다. 두 사람은 묵묵히 술을 마셨다.
  "자, 우리 남과 같이 살아가……."
  "그렇다. 그러나 외롭다."
  "자네는 고독은 경멸해야 한다고 하더니 외롭다는 건 뭐야."
  "뭐 시비야. 외로우니까 외롭다는 거지."
  "나도 외롭다. 외롭지 않기 위해서 술을 마시는데, 자네는 외롭고 나는 고독하구나."
  그들은 주점을 나와 명동 거리를 걷다가 파란 불이 비치는 스탠드 바에 들러 또 마셨다.
  김명학 씨가 상도동행 종차 버스를 타고 종점에 가 내린 것은 통행금지 예고 사이렌이 난 
후였다. 종차에 내린 손님이라고는 칠팔 명뿐이었다. 그들은 빠른 걸음으로 어둠길을 사라져 
갔다. 김명학 씨는 그저 내일 부터의 자기의 처신이 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어릿한 취기
에 흥얼흥얼 어둠속을 걸었다. 213호 자기 집으로 간다는 의식도 없이 그저 걸어 간다. 그러
나 그 걸음은 무의식이라고 해도 집으로 향해 걷는 것만은 사실이다.
  김명학 씨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다들 자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남편이  돌아온다
고, 아버지가 돌아온다고 현관까지 마중은 못 나오나 불은 켜 놓아야 할 것이 아닌가.  어렴
풋이 그러한 생각을 하며 구두를 아무렇게나 벗고 방문을 열었다.
  방안 공기가 이상했다. 별안간,
  "후·아·유?"
  "누구요? 누구요?"
  놀란 남자의 목소리와 여자의 목소리가 한꺼번에 뒤섞여 나왔다.
  김명학 씨는 그만 기절을 할 뻔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랐다. 플래시를 비치며 
사내가 침대에서 내려서는 것이다. 그는 그때야 사태를 짐작했다. 그는 현관으로 달아나며,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했다. 그러나 사내는 뒤따라 나와 억센 손으로 김명학 씨의 뒷덜미를 잡아 낚아채는 것이었
다. 그는 그만 현관 마룻바닥에 꽝 하고 나자빠지고 말았다. 그는 마룻바닥에 넘어져 머리가 
아찔했으나 벌떡 일어섰다. 자기를 넘어진 사내를 봤다.
  양키였다.
  그는 그저 당황해서,
  "아이·앰·쏘리. 아이·엠·쏘리."
를 연발했으나 팬츠만 입은 사내는  그를 다시 넘어쳤다. 슈미즈를 걸친  젊은 한국 여자가 
양키에게 옷을 내다 주는 것이었다.
  김명학 씨는 다시 일어날  생각도 않고 정말  미안해서 '아이·앰·쏘리'만을 부르짖었다. 
그 목소리는 울음 섞인 비명이었다.
  사내는 옷을 입고 그를 일어서라고 했다. 그는 일어서서 슈미즈를 입은 젊은 여자에게 허
리를 굽혔다.
  "미안합니다. 그만 술이 취해 길을 잘못 들어 이렇게 됐습니다. 용서하시오. 나는 213호에 
사는 사람이오."
  젊은 여자는 쌀쌀하게 바라볼 뿐이다. 김명학 씨는 모든 것을 알았다. 4행길로 잘못  들어 
걸었기 때문에 양키와 젊은 한국 여자가 산다는 집에 뛰어든 것을 알았다. 참으로 미안하고 
죄송하다고 생각하나 외국 사람에게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말이  통하는 한국 여자는 얼음
과 같이 차가웠다.
  김명학 씨는 현관에 떨어진 모자를 집어들고 양키를 따라 나섰다. 그는 모든 것을 각오했
다. 양키는 그의 팔을 붙잡고 로터리 앞 파출소로 갔다. 양키는 숙직 순경에게 도둑놈이라고 
했다.
  순경은 양키를 눈짓 손짓으로 잘 처리할 것이라고 일러 보냈다.
  김명학 씨는 이렇게 된 사유를 잘 말했으나  순경은 자기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다고 했
다. 그리고 순경은 본서로 연락을 취하는 전화를 거는 것이었다.
  열한 시 통금 사이렌이 들려올 때, 오늘 저녁은 집에서 잘 수 없는 몸이라고 생각하자 눈
이 뜨거워 왔다.
  열두 시경에 지프차가 달려와 두 형사가 그를 본서로 연행했다.
  김명학 씨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악몽이라고  생각했다. 현실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나 슬픈 일이었다. 남은 모르되 나에게만은 있을 수  없는, 있어서는 안될 일이었다. 그러나 
자기 손으로 넓적다리를 꼬집어 보면 분명히 아픈 감각이  온다. 꿈은 아니다. 현실이다. 자
기가 뜬 눈으로 분명히 저 유리창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내가 유치장에 들어간다. 아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보고 도둑놈이라고…….
  김명학 씨는 절망에서 떨었다.
  형사는 그에게 취조를 계속했다.
  "도둑이라는 것이, 나는 도둑놈입니다. 하고 어디 써붙이고 다니는 것이 아니야."
  "네, 맞습니다."
  "그런데 왜 똑똑히 말을 하지 않는 것이야."
  "글세 아무리 변명을 해도 왜 이렇게 안 통합니까.  저희 집은 을호 주택 3행길로 들어가 
칠십 미터쯤 가면 틀림없는 저희 집 213호인데…… 그만 제가 술이 좀 취해서 4행길로 잘못 
들어갔기 때문에 우리 집인 줄 알고 들어간 것입니다."
  "그런 소리만 말고 양심으로  대답해. 회사는 파면이라……  생각하니 도둑질이라도 해야 
되겠다고……."
  "아, 아닙니다. 아무리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남의 것이라면 쳐다보지도  않는 사람입니
다. 우리 집 변소 똥만도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뭐라고? 다시 한 번 말해봐. 여기 있는 우리가 바본 줄 아나. 다시 한번 말해 봐."
  김명학 씨는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어째서 성을 내는지 몰랐다. 형사는 자꾸 다시 말해 보
라고 했다.
  "저는 원래 아무리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남의 것이라면 쳐다도 보지 않습니다. 남의 집
은 우리 집 변소 똥만도 못하다고 생각하는……."
  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듣고 있던 형사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이봐, 몇 살이야, 응?"
  "네, 마흔두 살입니다."
  "임마, 마흔두 살이나 처먹었어?"
  "네, 그렇게 먹었습니다."
  형사는 처음에 김명학을, 적어도 고공을 나온 자식이요, 기사라고 생각해서 지능적으로 자
기를 놀리는 줄만 알았다. 하기는 범죄자  가운데 형사를 놀리려 드는 자가 한둘이  아니다. 
형사는 내일 아침 다시 취조하기로 하고 유치장 문 앞에 가서 그를 오라고 했다.
  "이리 와, 유치장 맛을 한 번도 못 봤다지?"
  "네, 못 봤습니다."
  "하룻밤 맛을 봐야 정신을 차리겠어. 이리 와."
  김명학 씨는 가지 않고 그저  허리만 굽혀 그것만은 용서하라고 했다.  사실 그는 경찰서 
유치장을 본다는 것은 난생처음이다. 유치장만 바라봐도 떨리는 것이 이 말을 듣자 더 떨렸
다.
  형사는 그가 몹시 떠는 것이 우스웠다. 형사는 그이 떨리는 팔을 잡아 끌어 유치장 문 앞
에까지 와서 자물쇠를 열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눈과 턱으로 들어가라고 가리켰다.  김명학 
씨는 울상이 되어,
  "이거 정말입니까? 정말 이럴 수가 있습니까?"
  형사는 시끄러워 졌다. 그의 등을 밀어 유치장 감방 속에 넣었다.
  형사는 생각했다. 저런 놈은 지능범이 아니면 바보일 것이라고.
  이튿날 오후가 되어서 유치장에서 형사실로  나온 그는 아내를 봤다. 알  수 없는 눈물이 
핑 돌아 아내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형사는 어제 전과 달리 친절했다.
  "이리 앉으시오. 조사를 해보니 그럴 사람이 아니란 것을 알았습니다. 앞으로는 약주를 좀 
덜 하시고 주의해서 이웃 집에는 들어가지 않도록……."
  "네, 고맙습니다.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김명학 씨는 아내와 같이 경찰서를 나와 걸어가다 눈물이 자꾸 고이고, 인생이 슬펐다. 아
내가 무슨 말을 하나 그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는 입을 꽉 다물고 머리를 숙이고 걸어갈 
뿐이었다.
  그는 을호 주택 3행길을 접어들면서 눈을 감고 소경처럼 걸어가는 것이었다. 아내는 남이 
창피하다는 듯이 머리를 숙이고 땅바닥만 보고 걸어갔다.
  눈을 감고 걷던 김명학 씨는 칠십 미터쯤 해서 눈을 떴다. 틀림없는 자기 집 앞이었다. 그
는 현관에 들어가 웃저고리를 벗어 던지고 곳간으로 나가 삽을 들고 나오는 것이었다. 그리
고 길가에서 현관으로 들어가는 뜰길에 발자국을 내어놓고, 그  발자국 하나 하나를 파내는 
것이었다.
  아내는 보다 못해,
  "여보, 왜 이러세요, 왜 이래요."
  "그는 곳간 담 밑에 가서 벽돌을 안고 왔다. 벽돌을 수없이 날라 놓고, 그  발자국 구멍에 
벽돌 둘씩을 가지런히 놓고 발디딤 길을 만드는 것이었다.
  아내는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이러한 남편이 슬프게만 보였다.
  "여보, 당신, 정말 이게 뭐예요. 사람이 돌기도 한다더니 정말 돌았수?"
  "돌아? 누가…… 돌지 않기 위해서 이렇게 해놓는 거야."
  그는 발디딤 길이 되자 몇 번이고 그 발디딤 길을 걸어 본다. 또 눈을 감고 걸어 본다. 아
내는 남편이 가여웠다.
  김명학 씨는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 식칼을 들고 나오는 것이다. 그의 아내는 깜짝 놀랐다. 
아내는 남편의 칼 든 손을 붙들고 그 칼을 뺏으려 했다. 무슨 영문인지 몰랐다. 그는 아내를 
밀어 버리고 현관문의 손잡이 근방을 깎아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눈을 감고 손잡이 부
근을 쓸어 보는 것이다.
  김명학 씨는 다시 길가로 나와 현관 발디딤  길을 눈을 감고 걸어가 문의 손잡이 부근을 
쓸어 보고, 문을 드르릉 하고 열어 보는 것이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같은 동작을 계속하는 것이다. 그이 아내는 형용할 수 없는  서러운 
눈물에 흐느꼈다.



    불꽃(지은이: 선우 휘)
  산과 산. 또 산. 이어간 산불기와 굽이치는 골짜구니. 영겁의 정적. 멀리서 보면 북에서 남
으로 흐르는 이 골짜구니가 마치 푸른 모포를 드리운 것같이  부드러운 빛깔로 보였다.  그
러나 골짜구니를 뒤덮고 있는 관목의 가지와 잎사귀에 가리어,  험한 바위가 짐승처럼 엎드
리고, 담그면 손목이 끊길 것 같은 차디찬 냇물이 그 밑을 흐르고 있었다.
  이 골짜구니가 내려다보이는 서녘, 부엉산 산마루 거기 동굴이  있었고 그 동굴을 등지고 
고현은 앉아있었다. 기대고 있는 바위가 차가왔다. 해가 산마루 뒤로 기울기 시작하면서  골
짜구니의 이편에 지어졌던 그늘이 차차 저 편 산허리로 물들어갔다.
  그곳 검푸르게 우거진 솔밭 가운데 현이 증조부의 산소가  보였고, 거기서 눈길을 북으로 
돌리면 보이지 않는 오욕의 날이 영겁의 산줄기를 끊어 놓고 있었다.
  아니 지금은 그 흔적뿐 포성과 함께 피를 뿜고 남쪽으로 옮겨간 오욕의 날. 오욕,  인간이 
땅과 인간에게 가한 오욕. 현은 손바닥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짐승처럼 사람의 눈을 피해 쫓겨다닌 기나긴 시간이 턱과  뒷덜미에 흐르고 있었다. 가마
솔같이 거치른 턱수염, 덜미를 뒤덮은 머리카락, 그리고 가슴에는 무수한 가시가 돋혀  있었
다. 이 동굴에 기어오른 지 두 시간. 방금 소총의 손질을 끝냈다. 두 달 남짓, 누더기로 감싸 
동굴 안 바위 위에 올려둔 소총은 싸리를 박아 놓았던 총열 안 탄도를 남기고 거의 붉은 색
깔로 변해 있었다. 엣.셋.세.엘 소련제 아식 보총. 그와 흡사히 녹슬은 삼바의 탄환 손바닥에 
스며드는 싸늘한 그 감촉. 현은 가만히 무릎에 놓은 소총 멜빵을 어루만져 보았다. 따각  하
고 고리가 총신 목판을 치는 소리를 냈다.
  견디기 어려운 죽음 같은  고요가 그의 전신을 엄습했다.  사르르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바위에 돋은 풀 잎사귀가 하늘 거렸다. 그리고 뒤이어 풀숲에서 벌레소리가  들려왔다. 갑
자기 외로움이 현의 가슴에 흘러들었다. 현은 그 외로움을 누르려는  듯이 두 팔을 가슴 위
에 얹었다. 뚝하고 동굴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났다. 그는 가만히 고개를  돌려 
어두운 동굴 안을 들여다보았다. 31년 전 바로 이 동굴 안에서 그의 부친이 스물네 살의 짧
은 생애를 끝마쳤던 것이다.  
  1919년 3월 상순. 일요일도 아닌 어느 날 하오. 서울에서 북으로 백여리 떨어진 P고을. 이
곳 조그만 교회 안에서는 남녀교인 삼십여명이 조용한 모임이 열려 있었다. 한 늙은 교인이 
일어서서 손을 움켜쥐며 고개를 숙이자 여러 교인들도 자리에 앉은 채 눈을 감았다. 노인의 
기도소리가 천장에 튀어 울렸다. 간간이 교인들 입에서 ' 아-멘 '소리가 흘러나왔다. 
  기도가 끝나자 노인은 옆에 놓은 보따리를 풀어 차곡차곡 접어 놓은 헝겊을 들어 한 장씩 
나눠 주었다. 교인들은 말없이 그것을 펴보았다. 그것은 삼색으로 물들여진 태극의 기폭이었
다. 한 젊은이가 싸리로 깍은 한 묶음의 대가지를 가져왔다. 모두 말없이 그 댓가지에  기폭
을 달았다. 어떤 교인은 그것을 좌우로 가만히 흔들어 보고, 어느 젊은 여인은 기폭을  손으
로 꼭 쥐어 보았다. 일행은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교인들의 경건한 얼굴에 갑자기  긴장의 
빛이 떠올랐다. 교회를 나와 거리에 나서자  깃대를 나눠주던 키 큰 젊은이가 선두에  섰다.   
  결의에 얼굴이 핀 젊은이는 번쩍 두 팔을 들며 만세를 절규했다. 삼십여 명이 그 뒤를 따
랐다. 대한 독립 만세! 일행의 걸음은 갈수록 빨라지고  목이 터질 것 같은 만세 소리는 더
욱 높아갔다. 몇 차례의 만세소리가 그치면 흥분된 가락의 찬송가가 뒤를 이었다. 믿는 사람
들아 군병 같으니 앞에 가신 주를 따라 갑시다. 이때 아닌 만세 소리에 문을 열고 내다보는 
군중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어떤 사람은 놀란 표정을 하고 황급히 문을 닫았다. 어떤 사람은 
저도 모르게 밖으로 뛰어나와 뒤를 따라가며  마구 미친 듯이 만세를 불렀다. 창백한  얼굴. 
찢어진 입부리 휘청이는 다리와 다리, 감동과 공포에 찬 눈, 눈, 눈.
  경찰서 가까운 싸전가게 앞에 군중들이 밀려갔을 때 목에서 찢어진 만세소리는 마치 울음
처럼 들였다. 경찰서의 담장 위에는 밀물 같은 이 군중들을 기다리는 싸늘한 총구가 햇볕에 
번득이고 있었다. 싸전가게에서 이 군중의 선두에 선 키 큰 젊은이를 발견한 혹부리 주인은 
'악'하고 경악의 비명을 질렀다. 목에 달린 혹이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손발이 떨리고  눈
앞에 확! 검은 장막이 내리는 듯했다.
  "저 녀석이, 저 녀석이" 하고 외쳤으나 그 소리는 목구멍 안에서 굴고  있었다. 무거운 덩
어리가 머리 위를 꽉 짓누르는 것 같았다. 어이쿠, 주인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비명 같은 만세소리에 뒤섞여 튀는 듯한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집안이 망했구나!"
  주인은 가슴을 쥐어 뜯었다. 뿌 하면서 뜯겨진 옷고름이 떨리는 손아귀에 남았다. 또 콩을 
볶는 듯한 총소리가 들여왔다. 만세소리는 멎고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우르르 흩어져 달아
나는 어지러운 신발소리가 들려왔다. 주인의 눈에 총을 맞고 피를 흘리며 저편 가게와 골목
으로 뛰어드는 군중들이 보였다. 총알이 그 뒤를 쫓았다.  주인인 버쩍 정신을 차렸다. 벌떡 
일어나 버선발로 뛰어나가자 가게문에 덥석 손을 대었다. 한 장을 그리고 미친 듯이 문짝을 
뜯어 밖으로 내동댕이치기 시작했다. 마지막 한 장을 밀어던지고  몸을 날려서 방안으로 통
하는 문짝에 손을 대었을 때 덩그래진 가게 안에 총에 몰린 몇 사람이 뛰어 들었다.
  경악에 눈고리가 찢진 주인은 쌀되는 글대를 들고 개액 하고 짐승 같은 소리를 지르며 덤
벼들었다.
  "나가아, 썩 나가아" 고함에 목젖에 걸려 비켜나갔다. 이 주인의 기세에 그들은 다시 밖으
로 뛰어나갔다. 그중 한 명이 가게 문턱을 나서자 총에 맞아 시궁창에 몸을 처박았다.  주인
은 펄쩍 가게 한가운데 다리를 걷고  황급히 도사리더니 떨리는 손으로 담뱃대를  끌어당겨 
불을 그어 댔다. 그리고는 눈을 꾹 감고 뻑뻑 담배를 빨았다. 군중을 쫓아 총질하며 가게 앞
까지 이른 경찰들은 사나게 이그러진 얼굴로  힐끗 안을 들여다보고는 그대로 달려가  버렸
다. 그때마다 한편 눈을 지그시 뜬 주인은 '허우'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한 시간 후 피투성이
의 시체가 늘어진 도로를 줄줄이 묶인 군중들이 개새끼처럼  끌려가기 시작했다. 경찰은 절
룸거리는 상한 다리를 총대로 후려갈겼다. 공포와 죽음의 그림자기 며칠 이 고을 위에 무겁
게 뒤덮고 있었다. 여덟 명이 죽고 이십여 명이 상했다. 팔십여 명은 경찰서 유치장과  복도
에, 그리고도 모자라 마구간에까지 꾸역꾸역  수용되었다. 그 안에서 밤새 무딘  신음소리가 
들려나왔다. 일행의 선두에서 만세를 절규하던 젊은이는 총에 맞은  다리를 간신히 끌며 친
구 두 명의 부축으로 그곳서 사십 리 떨어진 부엉산  산마루 동굴속에 몸을 감췄다. 출혈이 
심했다. 사십 리 길에 염증이 생겼다.  몽롱한 정신 속에 고통을 견디는 젊은이의  얼굴에는 
차차 죽음의 빛이 짙어갔다. 한밤을 신음으로 지낸 젊은이는 날이 밝자 친구가 떠다준 골짜
구니의 얼음같이 찬물을 마시고 죽었다. 다음날은 비가 내렸다. 살아남은 두 명은 이 동굴까
지 뻗친 경찰의 손에 잡혀가고 젊은이의 시체는 그의 부친에게 인도되었다. 싸전 주인인 젊
은이의 부친은 눈물 한 방울 없이 아들의 시체를 공동묘지에 묻었다.
  그는 죽은 아들을 가엾다기보다 증오했다.
  "이것은 내 아들이 아니오." 하고  냉정히 딱 자른 그의  한마디는 일경이 입회한 탓만은 
아니었다. 애비를 두고 죽은 자식은 자식이 아니라 요물이라는 것이었다. 본가에 갔던  며느
리는 소식을 듣고 몇 번 기절한 끝에 간신히 몸을 가누어 달려와 남편의 무덤 앞에서  한밤
을 새웠다. 아침에 사람들이 묘를 찾아갔을 때 흙투성이가 된 며느리는 거의 실신한 병자같
이 되어 있었다. 스무 살에 과부가 된 며느리는 본가에 돌아가 아홉달 만에 아들을  낳았다.  
  이름을 현이라고 불렀다. 한 달 후 어린것을 안고 시집을 찾아가 며느리는 시아버지가 석 
달 전에 맞았다는 젊은 여인에게  머리를 숙여 공손하게 인사를  드려야 했다. 며느리를 데
리고 공동묘지를 찾아갔다. 돌아오는 길, 주인은 말없이 '헙,헙'느끼기만 했다. 며느리는 자기
보다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시아버지가 대문을 들어서자 왈칵 목에서 피를 토하고 
거꾸러지는 것을 부축해야 했다. 사흘만에 정신을 가다듬은 주인은 며느리더러 손자를 두고 
본가로 돌아가 때를 보아 재가하라고 일렀다. 그러나 며느리에게는  이미 남편과 같이 지냈
고, 또 남편이 죽은 이곳에 머루를 결심이 되어있었다. 며느리는 조용하고도 분명한  어조로 
시아버지의 분부를 거절했다. 그때부터 현의 모친의 눈물과 피와 땀에 엉킨 30여 년의 인종
의 삶이 시작되었다. 싸전주인은 이 일 년 간, 갑자기 얼굴에 깊은 주름이 파이고 머리와 수
염이 회색으로 변했다. 고 노인이라고 불리우기 시작했다. 고 노인은 자라나는 현을  냉랭히 
대하는 듯하면서도 남모르게 귀해 했다.  현이 계집애가 아니고 사내라는데 있었다.  그러나 
자기의 핏줄을 보는 고 노인은 어린 현에게서 때때로 어두운 그늘을 보는 듯했다. 그렇게도 
맹랑하게 죽은 자식. 그 자식의 생명을 이어 그렇게도 야릇이 태어난 손자. 고 노인은  아들
이 죽은 다음 해 가을, P고을에서 이백여 리 떨어진 곳에 모셨던 선친의  무덤을 파서 뼈를 
옮겨다가 부엉산에 건너다 보이는 저편 산허리 양지 바른 곳에 이장했다. 선친의 묘자리 탓
에 아들에게 화가 미친 것이라는 늙은 풍수장이의 얘기를 들으며 고 노인은 이제는 마음 든
든하다는 듯이 굳게 어금니를 물었다.
  다음해 겨울 고 노인은 아들  영선을 보았고, 또다시 겨울이 찾아오기  직전 죽은 아들의 
뼈를 옮겨다 선산 발치에 묻었다. 그것은 현이란 핏줄을 남긴 탓이며 자라나는 현에게 바랄
만한 싹이 보인다는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며느리에게는 엄격했다. 첫째, 아들이 죽은 책
임의 절반은 며느리의 타고난 팔자에 있었다는 것, 둘째 젊은 과부가 어느 때 어떻게 될 것
인지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고 노인은 본시 여자란 것에 한푼의 가치도 두지 않고 있었
다. 그러한 고 노인이 현에게 떼어준  강 건너 논밭 몇 마지기가 현이  모친의 손을 갈고리 
같이 만들어 놓았다. 현모는 거의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땅을 다루었다. 어린 현은  노끈에 
매어져서 밭머리 나무 밑에서 놀았다. 해가 떨어져 어두운 길을 더듬어 두 간 방인 초가 돌
아올 때면 스며드는 외로움이 시달린 팔다리를 더욱 쑤시게 했다. 저녁을 먹고 누우면 과로
한 탓으로 앓는 소리를 했다. 앓는 소리는 때로 울음 소리로 변했다. 고 노인은 여전히 싸전
을 보며 때때로 생각난 듯이 강을 건너와 현을 보고  갔다. 어느덧 현은 할아버지가 말없이 
옷고름에 매어주고 가는 동전 냄새를 그리워하도록 자랐다. 가혹한  현모의 삶에 마음의 의
탁은 현이 자라가는 것을 보는 기쁨이며, 고 노인의 눈을 꺼리며 일요일마다 찾아가는 교회
의 복음이었다. 교회에 들어서면 현모는 거기서  어느 때나 남편의 체취를 느낄 수  있었다.   
  드높은 천당에 울리는 그윽한 오르간의 선율. 하나님을  찬송하는 노래와 경건한 기도 소
리. 예상하는 피안의 안식처에서가 아니라 바로 그곳에서 남편을 대할 수 있었다.  찬송가의 
가락에서 남편의 음성을 느끼고, 기도 속에서 남편의 모습을 그릴 수 있었다. 환상이면서 그
것은 더욱 가까이 있는 것, 상한 마음과 시달린 팔다리의 아픔을 잊게 하는 것, 현모는 이처
럼 일 주일에 한번 교회 안에서 남편과 상면하고 있었다.  
  "퍽 괴로와요."
  "얼마나 고생이 되겠소."
  "보세요, 현은 이처럼 자라고 있어요."
  "당신이 그처럼 애쓰는 탓이오."
  "언제나 당신 옆에 갈 수 있을까요."
  "현이 곧 나요. 나는 항상 당신의 옆에 있는 것이오."
  "저를 도와 주세요. 견디기 어려울 때가 많아요."
  "주께서 도와 주실 것이오, 주께서는 모든 것을 살피고 계시니까."
  현에 대한 사랑. 남편에 대한 흠모. 거기 하나님의 깊은  은혜가 있었다. 현이 네 살 되던 
해 가을. 고 노인은 현을 계속 교회에 데리고 가려거든 그대로 맡겨 둘 수가 없다고 일렀다.  
  그때부터 현은 일요일이면 할아버지 싸전에서  놀았다. 어린 현에게는 아버지라는 개념이 
극히 희미한 것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저 높은  하늘나라에 계신다는 어머니의 얘
기. 푸른 하늘과 흐르는 구름과 은하수. 그러므로 애비 없는 자식이라는 걷잡을 수 없는  모
멸보다 오히려 현에게는 할아버지의 목에 달린  혹을 조롱당했을 때의 충격이 더욱  강렬했
다. 현은 어느 일요일 할아버지의 혹을 두고 조롱하는 싸전 근처의 애들에게 맹렬히 대들어 
얼굴에서 피를 내고 갈갈이 옷을 찢긴 일이 있었다. 할아버지의 명예를 위해 싸운 자랑에서 
현은 으젓이 할아버지에게 사연을 얘기하고 은근히 공명과 찬사를  기다렸다.  그러나 할아
버지의 입에서 떨어진 것은 뜻밖에도 질책이었다.
  "뭐? 혹 얘기? 그래, 그렇다고 이런  꼬락서닐 하고, 누구하고? 뭐? 김주사 아들  녀석을? 
이런! 야 이 녀석아, 웬 말썽이냐, 제발 네 애비처럼......"
  허둥지둥 가게를 달려나가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어린 현의 가슴에 예기치  않
았던 불안이 밀려들었다. 할아버지에게 가해진 모며. 분연히  일어선 행동의 동기. 용감했던 
대결. 까닭 모를 할아버지의 심뇌와 분노. 그것은 마치 주인에게 대드는 사람에게  덤벼들다 
되려 주인의 몽둥이를 맞고 꼬리를 거두는 개에게 비길 수 있는, 의혹과 환멸의 감정이었다.  
  그후 현은 그러한 경우 말없이 발길을 돌렸다.  처음에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으나 나
중에는 되려 일종의 쾌감까지 느끼게 되었다. 현이 열 살을 넘으면서부터 가끔 죽은 아버지 
얘기를 물을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현모는 초점 없는  시선을 저편에 부으며 흠모와 자랑
을 떠는 목소리로 일렀다. 
  "참 훌륭한 분이었어. 남을 위하는 마음이 두터웠고 바른 일을 위해서는 무엇이고 두려워
하시질 않으셨지. 야학을 짓고 애들을  가르치기도 하시고 지나가는 가엾은  행인을 그대로 
보내시는 일이 없었지. 그리고 이 고을에서 너의 아버지처럼 의젓한 이는 또 없었단다."
  그리고 현이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고는 그 눈매와 입언저리에 죽은 남편의 모습을 엿보
고, "아버지 얼굴을 보려거든 거울을 들여다보렴." 하며 손가락으로 현의  머리를 똑똑 두드
리곤 했다. 가엾고 귀여운 내 아들. 단 하나의 내  생명. 그러한 현모에게 있어서 돌아간 남
편에게 내리는 고 노인의 가혹한 평가는 가슴을 어이는 아픔을 주었다. 그것은 현이 열일곱 
살 나던 해 여름. 바깥은 햇볕이 내려쏟던 어느 날. 고 노인은 아들의 묘에서 멀찍이 떨어져
서 현더러 절하게 하고는 자리에 제물을 펴놓고  먼저 한잔을 마시고 나서 또 한잔을 따라 
현보고 마시라고 일렀다. 현모는 그것을 보고 고개를 돌렸다. 현이 놀라면서 머뭇거리는  것
을 보자 고 노인은, 
  "너두 이전 마실 나이가 되었느니라." 
  현은 그래도 잔을 들고 주저하다가 간신히 한잔을 삼키고는 느껴서 기침을 했다.  
  "술은 어른 앞에서 배워야 하느니, 그래야 술버릇이 점잖아지지."
  ".........."
  "요즘 젊은 녀석들은 버릇이 없어. 신학문했다는 녀석은 버릇이 없어 탈이란 말이야."
  "........"
  "신학문이니 뭐니 하지만 글은 제 이름자만 쓰면 족한  것이고, 예의 범절은 명신보감 한 
권이면 알아본단 말이야."
  "그런데 할아버지...돌아가신 아버지 얘기 좀 들려 주세요." 
  "음, 네 애비가 사람은 똑똑했지,  유달리 영특하였기에 나는 내 앞장감이  생겼다고 적지 
아니 바란 것이 있었다만, 이르는  말을 안 듣고 '야소교'를  믿기 시작해서부터 잘못되어갔
지." 고 노인은 저편 언덕에 햇살을 받고 눈부시게  솟아 있는 예배당을 내려다보고 이맛살
을 찌푸렸다. 현모는 고개를 숙였다.
  "그때부터 네 애비는 산소에 가서  간신히 절은 했다만 죽어도  음복은 안했거든. 절조차 
어디를 보고 했는지 모르지, 조상을 위하는 미풍을 저버리고  생고집을 부리다가 그 몰골이 
되고 만 것이지. 어디서 흘러 왔는지 그 '야소'란 귀신이 탈이란 말이야."  
  현은 말없이 풀을 뜯고 있는 어머니를 훔쳐보고 취기를 느끼며 다시 물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훌륭한 일을 하시고 돌아가신 것이라고 저번에  선생님도 말씀하시던데
요."
  고 노인이 버럭 화를 내고 소리를 질렀다. 성성한 흰수염이 떨렸다. 
  "어떤 놈이 그런 소릴 하든. 훌륭한 일을 했다구? 애비 두고 죽은 불효가  훌륭하다든, 네 
어미를 청상과부 만든 것이 훌륭하다든." 
  "그러나 나라를 찾으려구 한일 아닙니까?" 
  현모가 현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눈짓을 했다. 
  "나라라구, 그래 그놈의 나라가 뭘 하는 나라랬다든, 벼슬하는 놈들만 버티고 앉아서 백성
들 것 모주리 훑어가기질이나 하구, 아내면  잡아다 볼기나 치구. 그런 놈들의 나라가  뭣이 
아쉬워서 도루 찾느니 뭐이니 야단이냐 말이다. 나라를 판 놈들도 바로 그놈들인걸, 그래 그
렇지 않다치고, 나라를 찾는다니 뭐라고 제가 나서서 야단을 했다는 거냐."
  "그러나 할아버지"
  "글세 그때보다야 지금이 살기가 낫고 사람들도 많이 깼지. 네 애비 죽은 생각을 하면 나
도 가슴이 아프다만, 그래 어리석은 짓을 했지  뭣이냐. 그 총칼 가진 놈들 앞에 무슨  수가 
있겠다구 맨손을 덤벼들었단 말이냐 죽으려구 환장을 한 것이지."
  "..........."
  "네 애비가 살아 있었으면 네 어민들 무슨 고생을 그리  하겠느냐. 나는 네 어미 볼 때마
다 죽은 네 애비가 고얀 생각이 들더구나." 
  고 노인의 음성은 차차 젖어들었다. 
  "네 애비가 살아 있었으면 이 늙은 것두 오죽이나  편하겠니, 요즘은 도무지 습증 때문에 
요동을 할 수가 없으니 말이다." 
  잠시 입을 다물었던 고 노인은 이마에 땀을 훔치고 다시 노기 띤 소리를 질렀다. 
  "그래 네 애비 훌륭한 일 했다니, 그 놈들은 어째서 번번이 살아서 너한테 쓸데없는 귀뜨
임을 한단 말이냐. 고을 놈들도 봐라, 네 애비가 죽은 뒤에 무어 거둘어 주는 놈  하나 있드
냐, 이런 놈의 세상이니라. 네 애비를 쏜 놈두 일본놈이 아닌 같은 조선 종자 보조원 녀석이
었느니라. 네가 공립 중학엘 못 가고 사립을 가게 된 것두 그 때문이 아니냐." 
  현의 등뒤에서 현모의 참으며 견디려고 애써도 새어나오는 오열이 들려왔다. 
  "사람은 순리대로 해야 하느니라. 나라 빼앗긴 것도 좋을  리야 있으랴만 종자가 원래 제
구실 못하는 말종이니 말이다. 그리구 언제는 나라가 사람 살렸다든, 그저 세상 형편에 따라 
제 주먹으로 제 일처리를 해야지. 믿을 것은 자기밖에 없으니. 딴 녀석을 위해 손가락  하나 
까닥거릴 것도 없고, 손톱만큼이라두 남의 도움을 바랄 것도 없어. 제몫으로 제 살림을 해야
지." 
  고 노인은 얘기를 그치고 현모를 건너보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얘기가 좀 과했나 보다만 말인즉 그렇다는 게지." 
  고 노인은 담배를 한 대 담아 물고 으흠으흠 헛기침을 몇 번하더니,
  " 이전 집으로 돌아가자."
  하고는 먼저 일어서서 뒤도 안보고 성큼성큼 산을 내려갔다.  집으로 돌아온 현모는 눈이 
붓도록 울었다. 그리고 현더러 다시는 할아버지 앞에서 아버지  얘기를 꺼내지 말라고 애원
했다. 그러나 현은 할아버지의 얘기가 그처럼 가혹한 것이기만 하다고 생각치는 않았다.  물
론 그렇다고 부친의 죽음을 할아버지처럼 생각할 수는 없었다. 오직 그때 부친이 그렇게 하
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어쩔 수 없었던 마음 가운데의 그 무엇, 빈손으로 으젓이 죽음과 대
결하고 생명을 태웠던 그 무엇에 대한 모색과 두려움이 현의 첫술에 타는 가슴속에서 사납
게 회오리 치고 있었다.
  현은 중학에서 수영선수를 지낸 일이 있었다. 그것은 현이 운동이 특별한 관심을 둔 때문
은 아니었다. 알몸으로 혼자 물 속에서 몸을 담그고 마음대로  헤엄칠 수 있는 것이 번잡한 
어느 운동보다도 현의 성격에 맞았던 것이다. 
  어느 날 현이 늦게 혼자서 헤엄치고 있을 때 그것을 엿본 수영코치는 즉석에서 그를 선수
단 속에 집어넣었다. 선수 생활에 필요한  얼마간의 금전 지출에 고 노인은 비위를  상했다.   
  "학교에 보내면 공부나 할 게지, 돈을 들여가며 헤엄이란 무슨 짓이야, 헤엄 잘치는 놈 물
에 빠져 죽는 영문도 모르는군."
  그러한 할아버지의 비위 때문이 아니라 현은 곧 수영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규정에 
얽매인 조직생활, 한 초를 다투는 경쟁의식.  그것은 거침없이 뛰놀 수 있는 수영을  견디기 
어려운 한가지 체형으로 만들었다. 일년도 못 가서 현은 애원하다시피 간청한 끝에 선수 생
활에 종지표를 찍고 말았다. 그후 현은 식물 채취에 취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산과 들을  헤
매다니며 가지각색의 화초를 취하는데는 특별한 즐거움이 있었다. 허리가 굽은 식물학 선생
과 함께 들을 헤매는 한나절, 한마디 대화도 교환 않는 것이 예사였다. 지쳐서 누우며  높고 
푸른 하늘에 흐르는 구름이 눈을 시울게 했고, 말없는 꽃과 풀줄기에서 흐르는 생명의 소리
를 들을 수 있었다.  
  오 학년 되던 해 초여름. 시간을 마친 M선생이 교실을  나서자 그 자리에서 일경 고등계
에게 끌려가고, 이튿날 같은 반 학생 두 명이 붙들려간 뒤, 현과 같은 P고을 출신인 R을 포
함한 다섯 명이 행방을 감춘 사건이 일어났다. 젊과 팔팔한 M선생은 시간이면 가끔 암시적
인 얘기를 하는 적이 있었다. 그 어조에는 항상 냉소하는 가락이 섞여 있었다.  들려오는 사
건의 내용은 M선생이 주최하여 몇 명의 학생이 불온한 독서회를 열었고, 모종 과격한 행동
까지 꾀했다는 것이었다. 현은 어느 땐가 R한테서 그런 권유를 받은 일이 있었으나 당장 해
야할 숙제나 시험만 해도  자기에겐 과중하다고 거절했던 일을  생각했다. 끌려간 M선생은 
학생들의 은근한 여론 속에서 하나의 우상이 되고 말았다. 더욱 옥중에서 쪽지를 보내 학생
들을 격려했다는 소문은 어쩔 수 없는 흥분의 도가니를 이루게 했다. 며칠 후 현은  R의 부
친이 외아들의 행방불명과 경찰의 추궁에 기겁해 뇌일혈로 돌아갔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그는 어쩐지 그 도가니 속에 혼연히 몸을 담글 수 없는 주저를  느꼈다.---무엇을 하려고 
한 것일까. M선생 혼자서는 단행할 수 없었던 그런 거대한 일이었을까. 연해해 가던 형사의 
굵직한 팔다리. 창백한 얼굴에 안경알만이  빛나던 M선생의 메마른 얼굴. 옥중에서  연락된 
종이 쪽지. 우상화. 흥분의 도가니. 소년 잡지에 나오는 모험담. 팔인조 소년 모험단 단장. R
의 행방. 그 부친의 죽은. 전과 다름없이 이어져가는 생활. 눈앞에 닥친 시험. 
  이듬해 봄, 현은 학교를 졸업했다. 친구들이 고등학교니 전문대학이니 서두는 때에도 현은 
오직 집으로 돌아갈 생각만 하고 있었다. 현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담임 선생도 너무나 무
관심한 그 태도에 놀랐다. 
  "이만하면 저는 족합니다. 무리를 할 생각은  없습니다. 저는 집에 돌아가 어머니  모시고 
편히 살아갔으면 합니다."
  "그러면 인생에 대한 아무런 목적도? 청년다운 아무런 야망도?"
  "네, 남을 괴롭히지 않고 그저 저는 저대로 살아간다는 것, 저는 그것뿐입니다."
  현은 돌아가는 차안에서 눈앞을 스치는 낯익은 시골 풍경을 내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저 나대로 살아가겠다는 것은 할아버지 같은 생각일까. 아니 할아버지와는 다르다고 생
각되지만 설혹 같은 것이라면 그것이 또 어떻다는 것이냐. 인생의  목적? 야망? 포부? 모두 
그에게는 걷잡을 수 없는 희미한 술어에 지나지 않았다. 남이야 어떠하든 내야 얼려들 것이 
무엇이랴. 검푸른 부엉산 밑에 질펀한 들이 눈앞에 전개되고, 창문으로부터 흙냄새 섞인  바
람이 날아들었을 때 상쾌한 아픔이 찌르르 가슴을 스쳐갔고 전류 같은 흥분이 전신의 혈관
을 굽이쳐 흘렀다. 그리운 땅. 그에게 있어서 오직 이것만이 분명한 것이었다.  현은 어머니
의 힘을 덜어주는 일이 즐거웠다. 모자가 같이 아침을 치르고 들로 나가 밭을 갈고 씨를 뿌
렸다. 현이 삽으로 도랑을 칠 때면 어머니는 삽에 맨 줄을 당겼다.  저녁이면 어머니는 먼저 
돌아가 밥을 지어 놓고 민요처럼 찬송가를 부르면 아들을 기다렸다. 푸성귀찬이나마 그것은 
철에 맞아 신선한 맛이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도 어머니는 일요일의 예배를 빠지는 일이 없
었다. 흰 무명옷으로 차린 어머니가 성경책을 들고 싸릿문을 나설 때마다 현의 그 뒷모습에
서 젊었을 시절의 어머니를 그려  보곤 했다. 어머니의 그 얼굴에서  슬픔과 신고의 그늘을 
거두면, 아직도 꺼지지 않은 아름다움의 자국이 피어져서 현의  안막에 젊은 어머니의 얼굴
이 되살아오는 것이다. 그리고 오랜 세월 오직 자기에게 바쳐진 희생된 어머니의 젊음에 생
각이 가면 현의 마음은 스스로 암연해지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무병한 어머니는 때때로 
허벅다리를 어루만지며 신음하는 때가 있었다. 현이 걱정을 하면 어머니는 까닭없이 얼굴을 
붉혔다. 한번은 몹시 열을 내고 몽롱한 상태에 빠져 의사를 부른 일이 있었다. 무슨  까닭인
지 어머니는 흐릿한 정신 가운데서도 두 손으로 한편 허벅다리를 꼭 누르며 의사의 진단을 
거부했다. 현은 그 손을 물리치고 어머니가 손으로 누르던 곳을 들여다보았다. 무릎  가까이
가 몹시 곪기고 붉은 줄이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현은 그 붉은 줄이 좌우에 생생히 남
아 있는 무수한 상흔을 보았다. 그것은 끝이 뾰족한 것으로 찔러서 낸 상처였던 것이다.  그 
상처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현이 그것을 깨닫기에는  그로부터 오 년이  지나야 했다.    
  일년이 흘렀다. 그해 추석, 묘지에서 돌아온 현은 마당 꽃밭을 가꾸고 있었다. 
  현의 집 꽃밭은 이 마을뿐 아니라 강 건너 P고을의  어느 가정에서도 볼 수 없는 하려한 
것이었다. 이른 봄부터 늦은 가을에 이르는  동안 십여 종의 꽃이 뒤이어 마당을  장식했다.   
  마루에 걸터앉아 현의 넓직한 어깨에 시선을 붓고  있던 어머니가 혼자 말처럼 얘기했다.  
  "영선이는 내년에  대학을 간다지?""뭐  그런 답니다."현은  아무 흥미도  없는 화제였다.      
  "너는 그대로 집에서 농사나 지을 테냐?"
  "네?"
  현이 획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어머니는 시선을 땅에 떨구었다. 현은 손을 털고 일어서서 
어머니 옆에 와서 앉았다.
  "저는 어머니 모시고 이렇게 지내면 됩니다." 
  부엉산 쪽을 바라다보던 어머니는 한참 있다 입을 열었다. 
  "나는 조금만 일삯을 사면 농사를 지을  수 있으니 할아버지 보고 얘기해서 너두  대학에 
가도록 하렴."
  현은 벙어리처럼 한참 말을 못했다.
  이 일년이 넘는 기간 어머니의 힘을 덜게 했다는 자위가 하나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현은 
이 일순에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현은 바람에 흔들리는 흰 코스모스와 붉은 다알리아를 보며 한참 시름에 잠겨있었다.  
  결국 무위에 그친 일년간. 어머니의 착한 가슴에 솟는  불퇴전의 의지 .그것은 사랑. 그러
나 어머니의 운명에 어떻게 할 수 없는 숙명적인 고독과 신고의 그림자가 뒤따르고 있는 것 
같은 불안이 현의 마음을 어둡게 했다. 고 노인은 아들 영선에게, 글은 이름자만 쓰면  족하
다는 원래의 처세철학을 적용시키지 않았다. 연소시 부터의 적수  김주사의 아들이 연전 군
수로 나간 때부터 마음에 기약하는 것이 있었던 때문이다. 현이  중학을 나올 수 있는 것도 
고 노인의 영선에 대한 교육열의 부산물이었는지도 모른다. 현은 차라리 할아버지가 완강히 
거부했으면 했다. 그러나 고 노인의 도리는 현의 청을 최소한도의 출혈로 받아 들였던 것이
다. 다음해 봄에 현은 낡은 트렁크를 들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아름다운 나라라고 생각했다.  
  사람들도 생각한 것보다 인정이 있고 살뜰했다. 그러나  어딘지 빈틈없이 빡빡한 것이 싫
었다. 엄지발가락을 겹쳐 놓는 앉음 앉음이에서 정신을 가다듬는다는 자학. 칼질하는 것조차 
도로써 불려지고 부정을 탄다는 지붕 밑에 무리하게 기를 쓰는  육체의 힘, 일본은 그때 이
미 전 중국을 석권하고 있었으나  현은 놀라움 보다 어딘지 요기가  감도는 인산을 받았다.   
  일본도의 푸른 날. 번득이는 찰나에 떨어지는 사람이 모가지. 정예의 천황의  군대와 빈약
한 미훈련의 중국군. 어렸을 때 P고을에서 본 호떡집  주인의 모습. 삼 년의 예비단계가 끝
나고 학부에 들어가는 날 백발의 총장은  점잖은 어조로 대학생활의 커다란 하나의  소득은 
좋은 벗을 얻는데 있다고 했다.
  그러나 현의 친구라면 친구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정도의 아오야기라는 한 명의 일인 학생
과 가까워졌을 뿐이었다. 나가사끼 출신인 아오야기는 소위 만주사변에 부친을 여의고 잡화
상을 경영하는 어머니 밑에 자라난 독자였다. 핏기 없는 얼굴을 하고 이가 높은 '게다'를 신
어야 키가 겨우 현의 귀밑에 닿았다. 그렇게 흡사히 외로운  경우에서 자라난 두 성격이 서
로를 당겨서 가까이 했는지도 몰랐다. 아오야기는 즐겨' 다꾸보꾸'의 노래를 읊었다.  
  동해의 작은 섬 바닷가 흰 모래터에 
  나 홀로 눈물 젖어 게와 노닐다.
  그는 항상 가락을 붙어 이 노래를 불렀다.
  현이 대학생활에서 얻은 지식은 강의에서보다 오히려 독서에 있었다. 당시 일반 학생들의 
교양에 다대한 영향을 준 영국 옥스퍼드 학파의 이상주의 철학에 관한 서적이 그를 매료했
다. 거기에는 개인 존재에 대한 깊은  배려와 이상에 대한 겸허하고 불타는 정열이  있었다.   
  일부 학생들은 그런  것은 자본주의의 마지막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웃으며, 그때 
아직도 꺼지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한 구석에 타고 있던 마르크시즘에 대해 이상한 관심을 기
울이고 있었다. 물론 거기에는 종전의 사상과는 판이한 새롭고  직선적인 논리의 명확한 전
개가 있기는 했다. 그러나 도식화환  관념으로 역사를 판가리하고 집단의  위력으로 인간을 
조여 틀에 박으려는 살벌한 냉혹과 숨막히는 병적 흥분이 있는  듯 했다. 그것은 차차 일인
학생들간에 젖어들기 시작한 전체주의 경향과 흡사한 체취를 풍기고 있어서 현은  본능적인 
혐오를 느꼈다. 현에게는 현실의 국가적 요구에 응해야 하는 긴박한 조건도, 눈앞에  매달린 
긴급한 과제도 없었던 까닭에 별다른 제약 없이 그 성품에  맞는 의논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현에게 있어서 결국 종이 위에 씌어진 인간의 하나의 꿈으로서  직접 
그의 행동에 변동을 일으키는 힘은 가지고 있지 못했다.
  오직 현의 마음을 움켜잡고 있었던 것, 그것은 한 달에도 몇 번 꿈에 보는 P고을. 봄철에 
피는 부엉산의 진달래꽃 내려다보이는 푸른  골짜구니. 여름이면 그 숲속에 열리는  산딸기. 
목마르면 떠 마시던 차디찬 냇물. 선산의 잔디. 마을  사람들. 싸전을 보실 할아버지 외로이 
계실 어머니.
  "해치웠어, 기어이 해치웠단 말이야."
  으슥히 추운 겨울에 들어선 어느 날 아오야기는 한 장의 호외를 움켜쥐고 현의 하숙으로 
뛰어 들었다. 진주만 공격. 이어서 싱가포르 함락. 비율빈 상륙. 자바 점령. 축하 행진.  광적
인 흥분과 도취가 떠돌고 거리에는  국방색이 범람해 갈 때, 현은  어진지 각본에 어긋나는 
연극이 연기자도 관중도 예기할 수 없는 엄청난 종막을 향해 줄달음치고 있다는 인산을 받
았다.
  동양 윤리를 강의하는 다까다 교수는 갑자기 엄숙한 표정을 짓게 되었고, 서양 문명의 몰
락과 절망, 동양의 정신 문화의 세계사적 의의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날도 다까다 교수는 마치 십억 아시아 민족 전체를 눈앞에 놓은 듯이 신이 나서 떠들어 
대고 있었다.
  "오노오노 소노 도꼬로위 에시무.....(각기 그 응당한 자리에 서게 함....)이라 만고불역의 진
리다. 개인을 절대적 단위로 하고 무원칙적인 평등과 무제한한  자유를 목적으로 한 서구의 
사회질서는 극도의 혼란을 조장케 되었고 그 문명은 바야흐로 몰락의 과정에 돌입하게 되었
다....으흠."
  "그러므로 일찍이 니체나 슈펭글러는 솔직히 그들 자체의 몰락을 예언했고......"
  ".......서구사상 자체의 모순의 필연적 기형아로서 출생한 유물 변증법은 계급 투쟁을 도발
하여...서구의 기계 문명은 총와해에 직면에 있고.....이때야말로 빛은  동방으로부터....천손 민
족의 궐기할 때는 당도한 것이다........""오노오노.....,그것은 존재의 조화  원리를 투시한 것이
며 겸허한 인간 정신의 가치를 고에 다까라까니 우다우모노(소리 드높이  노래하는것)이다."
이까지는 또 몰랐다.  
  "역사적 대사명.....팔굉일우, 얼마나 장엄한 선언이냐.....대동아 공영권 건설의 정신이 바로 
이것이다....미영의 굴레에서 억압된 황색민족을 해방하고. 새로운 아시아의 질서를 회복한다.  
  일본은 그 맹주가 되는 사명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얼마나 비장 차 장엄한 사명이냐?  그
래서?
  "따라서 국민 각자는 높은 긍지를 파지하고 전 아시아 창생의 구출과 나아가 거룩한 정신
을 펴기 위해....자아를 멸하여  이 대목적에 헌납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의 섭리인  것이다.  
그것은 또한 얼마나 빛나는 영광이겠느냐.......""보다, 들에 노니는 축생일지라도 그들 자신을 
멸함으로써 그 가치를 발휘하고 있지 아니하냐....그들은 그들의 한가닥 뼈마저 달게  인간을 
위해 바치고 있는 것이 아니냐, 창생의 절, 섭리의 묘."
  달게?
  "축생조차 그러하거늘 하물며 인간에 있어서랴! 아시아 민족이 각기 그 응당한 자리에 서
게 하기 위해서 자아를 멸하여 대의에 살아야 한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인간 존재의 대 원
칙이다.."
  불쾌!
  거기에는 현의 부친도 그 희생자의 한 사람인, 평화적 시위의  군중에 총탄을  퍼부은 일
경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할아버지와 같은 무원칙적 순종의 인생을 요구하는 강요가 있었다.  
  천손 일본 민족과 아시아의 여러 민족. 이간과 축생. 괭이와 쥐와의 우애와 단합. 더욱 현
의 비위가 상한 것은 교수의 고고한 것  같은 표정과 강의답지 않은 웅변에서 누구도 원치 
않는데 스스로 나서서 결과적으로 남을 괴롭히는 선민의식과 값싼 영웅주의적 감상, 그리고 
자기 기만을 발견한 것이다.
  현은 어느덧 자기 손에 들려진 것을 깨달았다. 교수는 유창한 자기 강의에 취하고 있다가 
얘기를 멈추고 불쾌한 얼굴을 했다.
  "한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자아멸각과 대의에 순해야 한다는 뜻은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소나 돼지가 인간을 위해 달게 그 생명을 바친다고 하셨는데, 물론 인간은 그
들 고기를 부득이 먹어야 겠지요. 그런데 저는 어렸을 때 도살장에 가본 일이 있습니다.  소
는 도살장에 끌려 들어갈 때  발을 버티고 들어가기를 주저했습니다. 특히  돼지 같은 것은 
굉장한 소리를 지르며 야단을 하다가 도살당하는 것으로 보았는데, 그들은 결코 달게 그 생
명을 바치는 것 같이는 안보였습니다. 이점에서 약간의 설명을."
  교수는 쓴웃음을 짓고 학생들은 소리를 내어 웃었다. 교수가  불쾌히 생각한다는 것은 문
제가 아니었다. 공연히 충동을 받고 발끈하고  일어선 자기의 멋이 싫어 졌던 것이다.  십억 
아시아 민족의 청탁이나 받은 듯이 스스로 일어서서 항의한 것이 싫어 졌다. 그래서 어쩌자
는 것이었던가? 
"비유라는 것은 때로 오류를....그러나 이 경우는.....동양인의 직관력은...." 중얼거리는 교수의 
얘기가 귀에 들리지 않았고 그는 다만 자기 혐오속에 깊숙히 잠겨 들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드러냈던 자기의 알몸이 부끄러워 다시 R껍질 속에 몸을 처박은 소리와도 같았다.  철
학사를 가르치는 젊은 히다까 조교수는 다까다 교수와 좋은  대차를 이루고 있었다. 명철한 
두뇌와 섬세한 정서를 가진 그는 소집을 받고 떠나면서 찾아간 연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 
  "틀렸어. 모두 돌아 있어. 늦으막히 세계 역사의 조류에 뛰어든 일본의 한다는  모든 일이 
엇먹고 있단 말이야. 칠십 년의 달음박질에 무리가 생긴 탓이겠지. 빅토리아 왕조의 꿈과 전
체주의의 결합, 온전한 시대 착오지. 중원에 사슴을 쫓는다. 이미 그런 시대가 아닌데,  중국 
민중에 대한 선무 하나 제대로 안되는 모양이야. 그래서 전진훈도 나와야 하는게지.  중국인
은 되려 대범한데 이 편에서 공연히  독이 들어 까불어 대거든. 구할 수  없는 도국 근성의 
비극이지. 전투엔 이겨도 승리를 거두기는 힘들어. 강력한  문화의 뒷받침이 없거든. 아시아 
민족의 해방, 좋은 말이야. 그렇다면 선결 문제는 조선의 자치나 독립에 있었지. 기껏한다는 
것이 창씨 개명, 성명을 고쳐놓는다고  무엇이 되겠나, 웃지 못할  난센스지. 나가긴 하네만 
나는 이 나라의 국민된 죄로 국가가 뿌린 씨를 거두러 나가는 셈이야."
  그리고 중부 중국으로 떠난 조교수는 일년도 못 가서 전사하고 말았다. 
  다시 일년. 전세는 반전되기 시작했다. 병력증가에 따르는 하급 간부의 부족을 느끼게  된 
일군 당국은 젊은 학생들에게 단기간의 훈련을 베푼 후 전렬에 배치하는 안을 세웠다.
  학도 출진에서 돌아온 아오야기는 현을 찾아와 흥분에 익은 얼굴로 죽는 얘기만 했다.  
  "전쟁터에 나간다구 모두가 죽는 것은 아니겠지."
  "아니 죽는다는 결의가 되려 마음을 거울같이 맑은 심경으로 이끌어 가거든. "
  산란하는 마음을 모으기 위해 아오야기는 기를 쓰고 있는 것이라고 현은 생각했다.
  "이전 마음을 남길 아무것도 없어."
  그리고는 약간 어두운 표정을 짓더니,
  "다만 어머니 일이 걱정되기는 하지만 그도 전렬의 뒤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돌봐 주겠
지." 
  현은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토마스 그린 것과 학생총서는 자네한테 주지.  나는 '하기꾸레'하고 '만뇨슈' 두권이며 되
네, 실토하면 고민이 없지는 않아,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아시아의 해방이라는 명분은  어떻
든 하나의 구원이야."
  현은 가슴에 젖어드는 감정을 억제치 못했다. 여기 어긋나는 하나의 톱니바퀴. 원치도  않
는데 기를 쓰며 구해 주려는 것은 고맙지 않은 참견.  깊은 밤 아오야기의 멀어져가는 게다 
소리를 들으며 현은 고향에 생각을 보냈다. 일인 학생들을 휩쓴 회오리 바람 속에서 벗어나 
그는 한껏 고독한 자신을 발견했던 것이다. 앉은자리에서 그는  어머니를 그리는 긴 편지를 
썼다. 곧 모두 편안하며 허약한  탓으로 고향으로 돌아와 있던 영선은  면소에서 일을 보게 
되었다는 회답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처음 못마땅히 입맛을 다셨으나 지금은 아들을 아전한 
곳에 잡아두게 된 것을 적이 만족하고 계시며 어느 때나 그러하듯이 편지의 말미에는 항상 
너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 드리고 있다고 씌어있었다.
  아오야기의 경우는 얼마 후 그대로 현의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와 다른 점이란 현에게는 
어거지로 내세운'아시아 해방'이란 슬로건도 '하가꾸레'나 '만뇨슈'에 해당되는 책  한권도 있
을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렇다고 독일 전몰  학생의 수기도 당치 않았다. 현의 전쟁  참가란 
아무 의미도 없었다. 고향에 돌아오자 그는 어머니가 주는 얼마간의 돈을 가지고 해주 가까
이서 어업 조합장을 지내고 있는 외조부뻘 되는 집으로 도망을 갔다. 며칠을 지낸 후,  현은 
까닭 모를 어떤 범죄의식에 못 이기기 시작했다. 이처럼 엄습해오는 불안감은 무엇일까.  울
타리다. 울타리 안에 들어 있는 것이다.  거대한 감옥으로 화한 울타리 안에서 뼈에  젖어든 
옥안의 터부, 그것을 범하는 죄인의 불안. 날아올 간수의 채찍 마련된 옥안의 옥. 하나의 길
은 있었다. 그러나 현이 이 울타리를 벗어나기에는 두리의 담장이 너무나 높았다.  다만 숨
어 있는 죄인일 수밖에 없었다. 이 주일 후 현은 날카로운 눈초리의 형사의 방문을  받았다.  
  그리고 기한 넘은 지원서에 이름을 써넣어야 했다.  불안의 해소. 그것은 노예의 안도. 죄
인의 굴종. 현은 해주를 거칠 때 하루 저녁 유행가 같은 멋으로 마음껏 술을 마셨다. 그리고 
간단히 술집 여자와 몸을 섞었다. 홧김에 저지른 욕정에서 그는 처음여자를 안았던  것이다.  
  이튿날 어지러운 정신으로 그 집을 나서며 연거푸 몇 번 헛구역을 했다. 집으로 돌아오자 
자기가 붙잡힌 것은 유능한 일경의 조직망 탓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할아버지는 현의 도
주가 다음해 중학에 들어가게 될 둘째 아들 영철에게 미치는 영향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
러나 현은 할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다. 자기 탓으로 어린 삼촌 영철에게 화가 미친다는 것
은 현의 본의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P고을의 몇 친구와 함께 떠나게 
되는 전날, 현은 조용히 어머니와 함께 지냈다. 
  어머니는 대학에 가라고 이른 권고의 용서를 빌었다. 더욱 현모는 현의 나이가 꼭 돌아간 
남편의 나이와 일치하는데서 어떤 불길을 느끼고 몸을 떨었다. 현은 어머니를 달래 쉬게 하
는데 땀을 흘렸다. 벽을 보고 돌아누운 현모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기도만 드
리고 있었다.
  "주여,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 죄인을  용서 하시와.....은혜를 베푸시옵기.....이것은 단 하
나의 죄인의 소원이온즉....."
  원죄의식과 박명의 검은 강박관념의 굴레 속에서 갈피를 못 잡고 극도의 고뇌에 사로잡힌 
현모는 자기에게 가해질 하나님의 형벌에서 그 아들을 제외해 달라고 애원했다.
  "아들에 대한 사랑에서 주께서 부르신 남편에  대해 더욱 깊은 사랑을 느낄 수  있사옵는 
이 죄인, 주어진 단 하나의 아들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옵는 
믿음이 약한 이 죄인.  주어! 저의 깊은 죄를  용서 하시와 아들의 생명을  구해 주옵소서."  
현은 가슴을 치미는 대상 없는 노여움에  떨었다.---나는 내 자신이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신의 존재를 인정해 왔다. 그것은 어머니의 신선한 생활에 마음의 평안을 주는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어머니는 까닭 없는 깊은 죄인을 자처하며 신 앞에 몸을 떨고 있다. 살고 있는 
모든 인간이 죄인일 망정 어머니는 죄인일 리가 없다. 형무관 같은 신. 이유 없는 원죄.
  어머님, 나기도 전의 일에 책임을 질 수 없지 아니합니까.
  이튿날 역전에서 열린 환송식에서 군수가  격려사를 하고 서장이 만세를  선창했다. 함께 
떠나는 B는 술이 만취해서 빈정대려 떠들어 대고 있었으나  현은 그런 것이 무의미를 가하
는 것이라고 행각하며 무표정한 얼굴로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현은 뒤죽박죽 앞서
고 뒤서는 거친 군가를 들으며 군중의 대열에 버티고 서서 군소와 서장의 인사를 받고 있는 
할아버지를 보았다.
  할아버지는 그 뒤에서  눈을 가리고  있는 어머니를  돌아보며 간간이  타이르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이렇게 생각하시겠지. 내가 죽으로 떠나게 되는  것은 거역할 수 없는 천운이
며 산소 탓이라고. 삼촌 영선이  허약해서 학교를 중퇴하고 면서기가 된  것이 또한 묫자리 
탓이라고, 그리고 어느 경우가 어느 산소 탓인지 청룡, 백호부터 풍수의 원리를 뇌까리고 계
시겠지.
  아득한 때의 혼돈, 고온의 기체, 흐르는 용암, 풍화작용, 지술, 무덤 속의 뼈다귀.  나를 보
내 면목은 서고 영선의 탓으로 공출이  헐케 될 것을 만족하고 계시겠지. 그러나  할아버지, 
등뒤에서 울고 계시는 어머니를 언짢다고는 생각하시지  마십시오. 그는 멀어져가는 부엉산 
검푸른 산봉우리를 바라보며 차안에서 생각을 이었다. 그렇다면 너무나 가혹한 일이지 어떻
든 죽고 싶지는 않은 일이다.
   창씨한 탓으로 산자가 붙어 '다까야마'가 된 현은  일본 나고야 부대에 입대하였다. 치중
병이 되었다. 마구간 당번을하게 되었다.  때로는 손으로 말똥을 긁어모아야  했다. 어느 달 
밝은 밤. 말다리 밑에 기어 들어가 말똥을 긁어모으고 있다가 유난히 비쳐드는 달빛에 고개
를 들었다. 둥근달이 말의 배밑에 늘어진 거대한 것 끝에 걸려서 마치 손잡이가 검은, 큰 놋
주걱 같이 보였다.
  현은 히히히하고 저도 모르게 웃었다.  덩그란 마구간 안에 웃음소리가  반향을 일으키는 
것이 기괴한 감을 주었다. 갑자기 말한테 조롱 당한 것 같은 모욕을 느꼈다.
  이 자식한테! 치밀어 오르는 홧김에 삽을 들어  힘껏 그것을 후려갈겼다. 놀란 말이 껑충 
뛰자 현은 뒤로 쓰러졌다. 
  어느 일요일 일인 친구를 따라가서 마음껏 뱃속에 집어넣고  온일이 있었다. 어떻게 먹었
던지 씨걱씨걱 흐흡이 곤란했고 자유로이 몸을 가눌 수 조차 없었다. 그리고도 저녁에는 또 
한 그릇을 비웠다. 그 날밤은 밤새 변소 출입에 바빴다.
  다음날 아침 관물 몇 가지가 분실된 것을 알았다. 분대장의 주먹은 현의 얼굴에서 폭발했
다.  
  "자식에, 잃었거든 멍청하지 말고 딴데 것을 훔쳐와." 
  그래도 이튿날 현은 취사장에서 얻어낸 누룽지를 가지고 간밤에 쪼그리고 앉았던  변소간
에서 먹었다. 그것을 뜯으면서 현은 그린의 '의지와 인간의 도덕적 발전에 쓰여지는  자유의 
각종 의미에 대하여'가 어떤 것이었던지 우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현에게 있어서 가장  고통
스러웠던 것은 모두를 두 줄로  마주 세워 놓고 서로 두드리게  하는 일이었다. 개인적으로 
손톱 만한 원한이 없는 인간끼리 서로의 육체에 고통을 가한다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일이
었다. 치명적 때리고, 때리면 치고, 한참 그것을 반복하고 있으면 차차 서로에 대한 근거 없
는 증오심이 끓어올랐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얼마나 덧없고 슬픈 일이었을까.
  다음해 봄, 현은 북부 중국에 파견되는 노병들 가운데 섞여 있었다. 황막한 중국 땅에  내
려섰을 때 현은 틈을 타서 도주할 결심을 했다. 구타,  학대, 잔인, 오만, 비굴, 허위의 범벅. 
군대란 인간이 있을 데가 못된다. 그래도 명분이 있다면 참기도 하겠다. 그런데 내게는 털끝 
만한 명분이 없다 . 어째서 내가 중국인을 죽여야 하는가.
  얼어붙었던 대지가 철을 맞아 지르르 녹아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밤이 되면 추위가 뼛
속에 스며들었다. 어스름 달밤, 현은  보초를 서다가 틈을 탔다.  덮어놓고 서쪽으로 달리면 
된다는 막연한 계획이었다. 숨겨 두었던 건빵 두 주머니, 통조림  한 통, 캬라멜 두 개를 끼
고 밤새 허리까지 오는 마른 잡초 사이를 걸었다. 몇 번 뒹굴어 손등과 얼굴을 긁혔다.
  끝없는 대지 위 칠흑 속에서  현은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공포에 떨었다.  지구 밖 어두운 
허공 속에 혼자 던져진 느낌이었다. 그대로  지옥으로 열린문을 향해 걷고 있는 것  같았다.   
  동쪽 하늘이 희미하게 밝아 올  때, 현의 손에는 이미 소총이 없었다.  불그레 동쪽하늘이 
물들기 시작하더니 붉디 붉은 커다란 덩어리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대로 대지에 못 박
혀진 현은 꼼짝 않고 그 장엄한 광경을 황홀히 주시하고 있었다.
  아아! 이 커다란 것, 그 앞에 초라한 이 모습. 그는 갑자기 짐승 같은 소리를 질렀다.  아
--악, 갸--악, 갸--악, 고였던 잡것이 터져나가는 가슴속에  태양은 새로운 생명을 부어 넣
어 주는 듯했다. 이튿날 멀리 조그만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이르자 추위와 주림과 공
포와 피로에 지친 그는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고 말았다. 현이 눈을 떴을  때 태양은 머리 
위에서 빛나고, 대여섯 가옥의 인가 근처에는 주민 두서넛이 얼씬거리고 있었다. 좁다란  길
이 현이 누운 언덕 밑을 지나 마을 쪽으로 뻗고 있었다. 중국인을 만나면 어떻게 해서 자기
의 입장을 알려야 할는지 궁리가 나지 않았다. '마을로 가야 할텐데' 몸을 가누기가  싫었다.  
이렇게 그대로 영원히 누어있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현은  그대로 막연히 바위틈에 기대고 
누워서 나머지 몇 개가 건빵을 씹으며 마을 있는 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을 어귀에 이
리로 발을 옮기는 조그만 사람의  그림자기 보였다. 느릿한 걸음으로 언덕  밑 길로 가까이 
오고 있는 것은 단발한 애띤 중국 소녀였다. 소녀의  불룩한 젖가슴과 허리에서 허벅다리로 
내리 흐르는 자극적인 선을 주시했다. 현은 저도 모르게 꿀꺽 생침을 삼켰다.  하반신이 취
하는 듯 했다. 벌써 그는 지난  이틀 밤의 공포를 깨끗이 잊고  있었다. 할단새. 히말라야에 
산다는 가상적인 새. 밤새 떨면서  아침이 되면 둥지를 틀리라 마음먹고  해가 뜨면 깨끗이 
잊고 만다는 할단새.  현은 두리를 돌아보았다. 넓은 이 벌판에 아무것도 움직이는 것이 없
었다. 전신에 저린 감각, 단 한번 이름 모를 여인과의 욕정에서 느낀 야릇한 감촉이  명렬한 
속도로 되살아났다. 헛구역을 느끼던 환멸은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다만 그 따스하였던  체
온만이.... 목이 타고 침을 삼키면 꼬르륵 이상한 소리가 났다.  현은 자기 이성이 흐려져 가
는 것을 억제치 못했다.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느덧 그 손에는 허리의 대검이 들려 있었다.  
  그때, 태양의 빛을 가리고 땅에 던져진 그의 그림자기 너무도 선명히 그의 눈에 뛰어들었
다. 그는 꼼짝 않고 그림자가 보여주는 꼬락서니를 내려다보았다. 영화에서 본 타잔. 맹수를 
노리는 타잔. 맹수와 소녀. 타잔과 맹수와 소녀와 나.  휘휘 머리가 어지러운 듯하더니 번쩍 
정신이 되살아 오면서 가슴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만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벌써 소녀는 멀찌기 저편을 걸어가고 있었다. 현은  얼빠진 사람모양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이마의 땀을 씻으며 대검을 자루에 넣으려고 했다.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 취한 듯한 하반신
의 감각. 이 고깃덩이가. 현은 그대로 칼날을  허벅다리에 내리 질렀다. 욱! 붉은 피가 군복 
자리를 통해 쭈르르 흘러내렸다. 몸에서 욕정의 불길이 일순에 걷어졌다. 내의를 찢어  다리
를 동여매고 그대로 바위  틈에 몸을 뉘어 물끄러미  배어 나오는 붉은 피를  보고 있었다.  
그때 현의 뇌리에 지난날의 한가지 일이 번개 같이 스쳐갔다. 
  어머니의 다리에 새겨졌던 그 무수한 상흔. 무수했던, 무수했던  그 상흔. 어찌할 수 없는 
애타는 그리움과 함께 어머니의 환상이 현의 안막에 떠올랐다.  그것은 인가의 가누기 힘든 
새로운 조건에 항거하는, 한 젊은 여인의 피는 듯 아름답고 처절한 얼굴이었다.  그와 함께 
높은 가락의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것은 대지 위를 뒤덮고 그의  머리 위를 감돌아 
무한히 흘러가는 환각의 가락, 어머니에의 찬가. 뒤이어 주림과 추위에 저린 현의  가슴속에 
인간의 슬픔과 고통이 회오리 쳤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몇  방울의 눈물로 변해 아득한 대
지 위에 뿌려졌을 따름이었다. 저녁에 현의 중국인 부탁으로  내려가 한자를 써가며 시유를 
납득시키고 따뜻한 한 그릇의 옥수수 죽을 마실 때 걱정어린 눈으로 싸매인 다리를 응시하
고 있는 소녀의 영롱한 눈은  현에게 끝없는 기쁨과 안도를 주었다.  그곳은 주로 팔로군이 
유격활동을 하는 지역이어서 그 길로 연안으로 안내되었다.
  그는 여기서 숨을 돌리기 전에 먼저 놀랐다. 토굴 같은 집에 살고 있는 그들의 양식은 수
수밥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느 때고 그들이 활기를 칠 수  있는 세계가 오고야 말리라는 확
신이었다. 현은 중국 거지같은 초라한 모습을 한 김모라는 노인을 접하고 아연했다.  인민의 
행방이 머지않아 이루어지리라고 예언하는 김  노인은 실로 까닭모를 복수심을  만족시키는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이었다.
  공산주의 이론은 '정감록'과 다름없는 운명의 예언서 다르다면 그것은 과학의 이름을 붙인 
예언서라는 것, 김 노인은 그것을 놓고 잃어진 자기 반생의 몇 배를 미래에 충당할 수 있는 
노다지 판을 그리고 있었다. 그렇지 못하면 초라한 그 모습이  사진틀 속에 담겨 벽에 걸리
우거나 그 이름이 당사의 찬란한  한 페이지를 차지하리라는 개기름같이  번쩍거리는 욕망.  
인민의 해방이란 방정식에 절대적인 의미를 붙이고 이를 갈고 있는 이들은 말하자면 청탁자 
없는 청부업자였다. 도대체 이들은 어째서 그렇게도 남의 걱정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야단
일까. 그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솜옷에 끓는 이를 퇴치하는 것이 급선무일텐데. 아마  이들은 
이들의 때가 오기만 하면 겪어온 빈궁과 고통의 몇백 배의  보수를 요구하겠지. 현이 한 달
도 못되어 다시 이곳을 빠져나와 남만주에 잠복한 것은 1945년 7월 중순이었다.  넓고 어수
선한 것이 중국의 대지였다. 
  만주에서 헤매던 현은 9월 중순이 지나 고향 p고을로 돌아  왔다. 그 동안 소련군이 진주
한 만주에서, 현이 목격하고 느낀 것은 인간이란, 개 이하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엇다.
  약탈, 강간, 파괴, 살인. 현은  그 책임을 전쟁에다 돌려버리는 의견에  찬동할 수 없었다.   
  문제는 그러한 행동을 저지를 수 있는 본질적인 것이 인간에게 잠재해 있다는 데 있었다.  
  그것은 오히려 개보다 못했다. 인간은 거기에 이유를  붙이기 때문 어떻든 일본을 대신해
서 인민의 해방자로  나선 청부업자  소련인들은 처음부터  그처럼 으리으리  했던 것이다.     
  원래 청부업자란 수지가 맞는 법이니까. 현은 인간에 대한 실망과 환멸을 거쳐 이렇게 뇌
까리고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남루한 차림을 하고 낯익은 싸릿문을 들어섰을 때 마
루에 앉았다.  어머니는 잠시 멍하니 현을 바라보다가 버선발로 뛰어나와 와락 현을 붙들고 
울기만 했다. 동리 사람들이 집으로 몰려들었을 때, 어머니는 마루에 엎드려 소리를 내어 기
도를 드리고 있었다. 8.15를 당하고도 절실한 해방의 듯을 느끼지 못한 현모는 이 순간에 남
다른 해방감에 가슴이 터질듯했다.
  현모의 가슴속에 굳게 뿌리박고 있던 원시 종교적 숙명의식의 장벽이 소리를 지르며 분화
구처럼 터져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현모는 그것이 터져나가 화안히 트이는 곳에서 소낙비처
럼 쏟아져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는 듯했다. 고 노인의 경우 8.15는 쌀 공출로부터의 해
방을 의미했다. 아들 영선의 덕을 보기는  했으나, 워낙 냅뜰성 없는 영선의 힘이란  별것이 
없었다. 고 노인은 전쟁 말기의 일제 당국의 처사에 대해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고작은  꾀
를 부려서 고런 짓을 했으니 망하지 않을 리가  있었겠느냐고 떠들었다. 아슬아슬한 고비에
서 38선 이남으로 책정된 이 고을에는 미군들이 풍부한 물자의 시위가 있었다. 모두가 놀라
워 보이는 고 노인은 둘째아들더러 단단히 영어 공부를 하라고 일렀다. 그리고 영선이 무사
했고 현이 목숨을 건져 돌아온 것은 선친의 묘를 이장했던 탓이라고 더욱 풍수원리에 대한 
믿음을 굳게 했다. 현에게는 몇  갈래로 찢겨 서로 엇먹고 켕기는  소용돌이가 모두 현실의 
정곡에서 빗나가고 있다고 밖에 보이지 않았다. 해방이란 앉아서 얻어진 것, 그러므로  나서
서 호통을 칠 이유도 없었다.
  아무에게도 남에게 돌을 던질 자격이  없었다. 따지고 보면 있어야 할  것은 오직 얼굴을 
붉힐 부끄러움과 조심성 있게 건너야 할 조용한 어조뿐이었다.  그런데 오고가는 무수한 돌
멩이와 고막이 터질 노호. 또한 논하자면 해방이란 당연한 것. 응당 있어야 할 것이  지금까
지 그렇지 못했다는 것. 그런데 누구를 보고 국궁재배, 아양을 떨어야 한단 말인가.  '스파씨
-바 그라스나야 아-르미아(고맙소 붉은 군대),' 또 그렇지 않으면 어린애 같은 경탄. '원더플 
C레이숀'.
  이런 곳에서 생겨날 것은 과연 어떤 것, 암담한 실망이  현의 마음을 뒤덮고 내어 디디려
던 그의 일보는, 허공을 휘젓고 다시 제자리에  못 박혀 버리고 말았다.  그는 또다시 자기 
껍질 속에 몸을 오무리고 만 것이다.  3.1절을 맞아 선열의 유가족으로 현모와 현이  특별한 
좌석을 배당 받았을 때 할아버지도 그 옆에 점잖이 앉아  있었다. 고르지 않은 가락의 애국
가. 우국의 절규에 가까운 열변. 만세. 만세소리의 진동. 기념품인 놋상을 들고 돌아오던  갈
림길에서 현의 언뜻 할아버지의 눈에 빛나는 것을 보았다. 주름지고 늘어진 눈시울 밑에 가
득히 고인 눈물. 현에게 있어서 그것은 하나의 새로운 발견이었다.  
  험구의 할아버지는 기실 아버지의 죽음을 누구에게도 못지아니 마음속에서 슬퍼한 것인지 
모른다. 아버지의 죽음 어머니의 신고. 할아버지의 고통. 가난한 이 사회. 특설된 좌석과  기
념품인 놋상.  다음해 현은 교장의 간청으로 여학교 교원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네 소견대로 하려무나."
  어머니의 의견은 조용한 이 한 마디였다. 사회의 혼란은 더욱 조장되고 대립은 더욱 첨예
화되어 갔으나 학교의 울타리 안은 그래도 그 권외에 놓여있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나 학교
만을 남겨 두지는 않았다. 사회의 혼란이 반영되어 학생들이  동요하기 시작하고 몇몇 교원
은 거기다 불을 지르는 역할을 했다. 교내에 삐라를 뿌린  학생들은 마치 순교자 같은 얼굴
로 끌려갔다. 어지러운 흥분 속에 사로잡힌 어린 학생들은 보면 현은 가엾은 생각이 들었다.  
  무엇 때문의 흥분. 누구를 위한 순교. 불을  지르는 교원들. 시간이 들어가 가르치는 것은 
걷어치우고 무책임한 발언으로  철없는 학생들이 머리를  어지럽히는 것은  죄악에 속했다.    
  자신이 있거든 걷어붙이고 나서서 직접 행동을 해야 할 것이다. 교단과 연단. 교원과 연기
자와의 차이 ---학생에겐 손을 대지 말고 그대로 두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신념은  다면 
현 자신에게만 적용되는 좁은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북에서 남으로 흘러가
는 인간의 행렬은 그치지 않고 그  수효는 더욱 늘어만 갔다. P고을에서 하루  이틀을 묵어 
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으리으리한 청부업자의 입찰을 거부한 사람들. 현은 지금
은 그곳서 대단한 감투를 쓰고 있다고 전해지는 중국 연안에서 만난 노인 김모를 생각해 보
았다. 하루 몇 번 목욕을 하고 눈이 부신 흰밥에 입맛을 다실 그 모습을.
  대를 이어온 땅을  버리도록 낙찰된 가격은?  그러나 현에게 있어서 이러한 현상은 그의 
눈앞을 지나가는 한낱 영화의  화면에 지나지 않았다. 현은  그것을 보고만 있으며 되었다.     
  다만 비극 영화를 구경하는 관중이 느끼는 그런 정도의 동정심을 가지고. 현의 흥미는 이 
이 년간에 확대된 꽃밭에 들어가  갖가지 꽃을 가꾸는 데 있었다.  가지각색의 꽃이 봄에서 
가을에 이르는 동안 그치지 않고 화려히 장식을 하는 화단이 있음으로써 현의 마음은 푸근
했다.  금잔화. 봉숭아.  카카리아, 석적, 나팔꽃 , 카네이션, 문플라워, 나비꽃..... 
  넓은 하늘 밑에 하루의 노동에 노곤해진 다리를 뻗고 부엌에서 새어나오는 생선 굽는 냄
새를 맡는다. 왕성한 기능의 위 재촉을 하면 어머니는 어린이 같다고 꾸중을 한다.  찬란한 
꽃밭. 매미의 울음과 뭇새의 지저귐. 이것이 곧 인간의 삶. 생명을 받고 태어난 인간이면 누
구나가 향유할 수 있는 삶의 조그만 권리. 그 동안 현은 몇 번 혼담을 퇴했다.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현실의 혼돈 속에서 혼인이란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저 북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꺼슬리고 피로한 얼굴에 슬픔과 분노를 가득히 담은 눈
동자. 그 무수한 눈동자는 다만 살곳을 마련하면 그대로 안주할 그런 미지근한  눈동자일까.  
그 무수한 눈동자에 그토록 분노의 불길 불어넣은 으리으리한  신흥 청부업자들. 그득은 한
가지 공사를 끝냈다고 그대로 있을 그런 절제있는 업자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악착같은 이
윤의 추구. 그들이 즐겨 퍼붓는 기성업자에 대한 욕설.  그것은 그대로 그들이 어어받은 것. 
태풍의 징조에 불안을 느끼며 새로운 집을  지으려는 어리석은 짓은 삼가야 한다고  생각했
다.  자신이 없는 자기의 미래에 한사람의 남을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나 자신이 그러하거
늘 더욱 남의 생애에 대한 자신이란. 현은 그러한 때에  더욱 뼈저리게 어머니의 반생을 그
려보았다.
  어두운 초가 안에서 지낸 30년. 외로움과 신고. 자기의 혼인이 또 하나의 어머니를 만들어 
낼는지도 모른다는 의구. 고 노인은 몇  번 달래보다 내어 던지고 말았고, 현모는  현모대로 
병정을 보낼 때 한번 겪고 나서는 무엇이고 간에 강요는커녕 권유도 않고 현이 하는 그대로 
두었다. 그 팔에 한번 묵직한 손자의 무게를 느껴보자고 목마르게 원하고 있으면서도.
  그러한 불안은 불안대로 두고 현은 눈앞에 걸린 자기의  직책에 충실하려고 했다. 꼬박꼬
박 시간을 채우는 현은 그리 인기 있는 선생은 못되었다.  가을이 와서 교사를 증축하게 되
었을 때 상서롭지 않은 한가지 문제가 생겼다. 공사비를 둘러싸고 불미한 일이 생겼는데 교
장도 거기 한몫 끼어 들었다는 것이다. 전투적인 교원 몇  명이 말썽을 일으키고 교장을 규
탄한다는 불온한 공기가 떠돌았다. 현은 분명치도 않은 일을 가지고 떠들 필요가 어디 있느
냐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말썽을 일으킨 교원들은 이 사건을 들고 나가 
오랫동안 사상적인 문제 때문에 교장으로부터 받아온 굴욕의 울분을 일거에 풀어  보리라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한편 교장은 때마침 일어난 일부 학생들의 조그만 정치적 소동이 교
장의 배척을 한가지 슬로건으로 들고 나섰던 까닭에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들 교원에게 사
건의 책임을 뒤집어 씌우고 말았다. 세명의 교원은 그날로  경찰에게 구속 문초를 받게되었
다.  그러나 그 교원들이 학생 소동의 책임을 진다는 것은 이번만은 누가 보아도 부당했다.   
  그러나 교원들은 교장의 교활을 눈앞에 보고도 감히 입을 열어 정면으로 대항하지를 못했
다. 직원회의가 열렸을 때 교장은 점잖은 어조로 유감의 뜻을 표하며 세명의 교원이 경찰에 
끌려간 것은 참으로 안된 일이라고 했다. 현은 아연했다. 교활과 비열이 뒤섞인 교장의 얼굴
을 쳐다보다 저도 모르게 불쑥 일어섰다.
  "교장 선생님, 어떤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장은 평소 온건하던 현이 뜻밖에도 긴장한 얼굴로 자기를 정시하는데 놀랐다.
  "대책이라야 세울 도리가 없는걸 어떻게 하우."
  "대책이 없다니요. 세분 선생이 이번 소동이 아무런 관련도 없다는 것은 교장선생님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니, 고 선생 내가 그런 것을 어떻게 아우."
  "배선생은 그동안 부친상을 치르러 가서 사건때는 안계셨고, 두김선생은 일주일간의 수학
여행에서 그제야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그건 모르디요. 없었다고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닐터이니까?"
  "그러나 그것은 경우와 상식으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고 선생은 왜 그렇게 그런 사람들을 두호 하시우."
  "두호가 아닙니다.  과거에는 어떻든 간에 그대로 버려 둔다면  그것은 세분 선생에 대한 
공정한 처사가 못되기 때문입니다."
  "그거야 경찰이 공정히 하갔디요."
  어디까지나 시치미를 떼는 교장을 보고 현은 가슴속에서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교장 선생께서 직원들의 신상에 대해서 그렇게 냉정하셔서야 어떻게  안심하고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교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니 고선생, 그게 무슨 말이요. 사상이 불손하다고 경찰이 하는 일을 나보고  어드케 하
라는 거요."
  파렴치.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교장선생님은 이번 부정사건 때문에 일부러 세선생님을  몰아 넣었
다는 비난을 듣게 됩니다."
  교장의 낯색이 변했다.
  "고 선생, 말을 조심하우. 그게 무슨 소리요. 그럼 내가 부정사건에 관계가 있단 말이요?"
  진일보-- 앞으로 --결정적인 공격!  그러나 ---
  "저는 그런 단정은 안 했습니다.  말하자면 남들이 그렇게 보기가 쉽다는 겁니다."
  그것을 단정한다는 것은 또한 교장에 대해 공정을 결한다는 생각이 현의 얘기를 끊게 했
다. 슬픈 일이다. 이북 출신인 늙은 교장은 모든 못마땅한 것의 처리 방법으로 저렇게  사상
적인 데다 결부시키게 되었으니. 그리고 또 하나의 불쾌.  끌려간 세선생. 그들은 어느 때나 
조금 들려오는 얘기만 있으면 그것의 확실 여부를 확인하기도 전에 떠들어대는 것이 일쑤였
다. 어린 학생들에게 자기의 첨단적 경향을 번쩍거리던 것도 다름 아닌 그들이었다.  여하튼 
창피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교문을 나섰을 때 뒤따라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조선생, 여
대를 중퇴한 조선생이었다. 깨끗이 접힌 흰 셔츠 흰자위가 맑은 검은눈. 검은 스커트.
  "고선생님이 오늘은 어떻게 그렇게 대단하셨어요. 교장 선생님이 '패배'정도가 아니라,  고
선생님 말씀처럼 완전히 '패북'당하고 말았어요."
  현은 고소를 지었다. 그는 말없이 걸으면서 굳어졌던 자기  마음이 차차 풀려져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조 선생이 가까이 있으면 어느 때나 따뜻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 저도  모르게 
끌리는 것을 느낀다. 그러면서도 욕정을 느끼지는 않는다. 이것이 아마 이성에 대한  애정의 
삭인지 모른다.  패북, 아아 그때의 얘기로군. 겨우 맞춤법을  한권 들춰본 현의 한글실력으
로는 국문과를 다닌 조선생을 당할 수 없었다. 그가 '일절'이니 '패북'이니 하였을 때 조용히 
가르쳐 준 것은 조선생이었다. 그때 그는 낯을 붉히며,
  "그래두 어쩐지 일절이니 패북이니 해야 어감이 바로  맞아드는 것 같은데요. 일체, 패배, 
좀약한데."
  "그것은 잘못된 일어의 습성에서 나온 거예요."
  외모가 나약해 보이면서도 조 선생은 강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땐가 남녀 교원이 
함께 걷고 있을 때 미군 병사와 나란히  걸어오는 여인을 보내놓고 어느 남선생이 야유 겸 
힐난을 한 일이 있었다.
  "저것이, 저게 다 인간이라구,  창피두 모르구 턱을 쳐들고  걸어가다니 원 더러운 것이."    
  그때 조 선생이 얘기를 가로막았다.  
  "왜 저런 불쌍한 여자를 탓하시지요?"
  "불쌍하긴, 자기가 택해서 저런 짓을 하고 다니는걸."
  "그렇게 얘기할 게 아녀요. 택하긴 누가 좋아서 택했겠어요. 남자들이 참견한 사회가 여자
들을 저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게 아녀요?"
  "남자들이 어떤 사회를?"
  "글세, 선생님도 정신차리세요. 연약한 여자하나 지키지 못하는 이 땅의 남성들이 참 가엾
기도 하지."
  그리고 이런일도 있었지.
  어떠한 경우에도 별다른 의사표시를 않는 현보고 어느 땐가 이렇게 물은 일이 있었다.  
  "고 선생님은 아무 일에도 관심이 없으세요?"
  "네?"
  "왜 어떤 일에도 의사표시가 없으세요?"
  "그것은 할 사람이 따로 있겠지요.  저는 남의 일에 이러니  저러니 할 입장에 있지 못합
니다."
  "소극적이시군요."
  "소극적일는지 몰라도 저는 남의 일에 흥미도 없거니와 남의 한계를 침범할  생각은 더욱 
없습니다."
  "어쩌면 그러실까."
  "싸움을 말리려다 더 큰 싸움을 만드는 일이 있지요. 자기 하나도 가누기 힘든 형편에 남
의 일 참견이란."
  "주위가 어떻게 되어도 괜찮으세요?"
  "되어가는 것이야 제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선생님은 그렇게 뵈이진 않는데요."
  "저는 공연히 참견해서 남에게 누를 끼치는 경우를 여러 번 보아왔습니다. 남을 위한다는 
것이 결과적으로 남을 해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을 너무나 많이."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지 않겠어요?"
  "물론 그야 그렇겠지만 사리를 통찰하는 예지나 심성에 있어서 훨씬 뛰어난 성자 같은 소
수인에게만 해당되겠지요."
  "고 선생님은 자신이 뛰어나셨다고 생각지는 않으세요?"
  "천만에. 저는 제 자신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아무 특징도 없는 일개 속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기껏 자기만을 지키고 이처럼 살아가면 됩니다."
  "그러면 저같은 경우 즉 생활 양식을 강요받게 된다면 그때도 고 선생님은 자기를 지키고 
그대로 살아가실 수 있겠어요?"
  조 선생은 8.15다음해 가을 가족과 함께 이북에서 넘어왔던 것이다.
  "글세 그건 지내봐야 알겠지만."
  "저는 지내봤어요. 더욱 부친은 뼈저리게 느끼셨지요."
  "무슨 해를 입으셨습니까?"
  "해가 아니라 처음은 몹시들 떠받들었지요. 부친은 젊은  시절에 사회주의 운동을 하시다 
몇 년 고생을 하신 일이 계셨대요. 과수원을 하시던 부친은 해방이 되자 끌려나가다시피 인
민위원장을 하시게 되었지요. 그런데 소련군이 진주하면서부터  부친은 퍽 언짢아 하시더니 
쌀 공출을 강요받고는 거북해 하시던  끝에 사임하시고 말으셨지요. 아버지는  내가 젊었을 
때 하려고 한 것은 저런 것이 아니었다고 하시면서  우울증에 걸리셨어요. 그후부터 그들은 
뒤에서 이러니 저러니 귀찮게 굴기 시작하더니 한번은 무슨 혐의가 있다고 보안서에서 아버
지를 불러갔어요. 두 주일 후  나오신 부친은 아무 말씀도 않고  계시더니 갑자기 이남으로 
떠나자고 하셨어요. 거기서 자기를 지킨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에요."
  "물론 저도 제가 하고 싶은 일 , 꽃밭을 가꾸며 즐기고 싶은 시간이나, 마루에  누워 하늘
을 쳐다보는 시간조차 못 가지게 된다면 글세, 저도 생각을 달리 하겠지요."
  "그것뿐이겠어요. 무슨 집단에 가입해라. 모임에 빠지지 말라, 누구를 미워해라, 누구를 쫓
아내야 한다. 누구를 죽여야 한다, 연설에 찬성하는 박수를 쳐라, 주먹 쥔 팔을 높이 흔들어
라, 하면?"
  "그야 그렇다면 그땐 저도."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럴땐, 그럴땐 조선생처럼 도망을 치지요."
  현이 자기 얘기가 우스워 그만 실소를 하자 조 선생도 따라 웃었다.  
  "어디까지나 소극적이시군요."
  갈림길 가까이 와서 추상에서 깨어난 현은 입을 열었다.
  "실은 교장한테 얘기하고 나선 퍽 후회가 되었습니다."
  "왜요?"
  "멋없이 떠들었다는 생각이, 남은 것은 불쾌 뿐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결코 청부업자가 될 수는 없지요."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후, 문제의 선생들은 경찰에서 돌아오자 곧 학교를 떠나고야 말았다. 현은 우울했다. 어
쩐지 학교에 나가는 것이 거북했고 교장을 대하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한달도 못가서 사표
를 내고 말았다. 이층 교실을 찾아 인사를 하는 현에게 조선생은 뚫어질 것 같은 시선을 부
었다.
  "왜요? 무엇이 거리끼는 게 있으세요."
  "모든게 귀찮아져서."
  현의 조 선선생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신 게 아니겠지요. 교장 선생님을 보기가 거북해서 그러시지요."
  "그것도 그렇지만 "
  "역시 마음이 몹시 약하시군요"
  "그야말루 완전 패북하셨군요"
  한참 침묵이 흐른 뒤에 현이 입을 열었다. "패북이고 패배고 할 나위가 없는 일이지요. 조 
선생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든, 그저 저는 그만둔다는 인사를 드리러 온 것 뿐입니다."현은 곧 
발길을 돌려 교실을 나선 탓으로 조 선생님의 눈에 서리기 시작한 뽀얀 안개 같은 것이  방
울지면서 마루에 떨어지는 것을 보지 못했다. 
  어머니는 아무 얘기도 없었다. 할아버지는 쯔쯔 혀를 찾다. 
  "관운이 없군. 그거도 팔자 소관이지"
  이해 겨울이 들어서기 전,현은  고을에 들어갔다가 여수와 순천에서  일어난 사건 얘기를 
들었다. -무엇 때문에 사람을 죽이려 드는 것일까. 현은 송아지 한 마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여물을 썰고 분뇨를 떼내고  짚을 갈아 주는데 열중했다. 콩짚과  볏짚에 콩을 섞어 주면 
소는 보는 눈앞에서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일군에서 말을 먹이던 때와는 달랐
다. 여기엔 아무런 강제가 없었다. 키우고 보면 소도 한 가족과 같았다. 밭갈이가 심해 잔등
이 벗겨져 피를 낼 때면 표정이 없는 까닭에 더욱 가엾었다. 그럴때면 그 한가닥 뼈마져 달
게 비친다던 다까다 교수를 생각했다.
  지금쯤 살아계신다면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여의하다면 스끼야끼냄비 속에 저를 넣어 쇠
고기를 끄집어내다 자아를 멸할 수 없어 달게 잡숫고 계셨겠지. 이젠 퍽 늙었다. 
  한없이 퍼진 허허벌판이었다. 현은 잃어버린 총을 찾으려고 애를 태웠다. 다리가 땅에  박
혀서 떨어지질 않았다. 피아의 군대가 뒤섞여 우왕좌왕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거기엔  아오
야기도 하니까 조교수도 보였다. 중국군  일본군 모두가 적으로 보였다.  포탄이 터졌다. 총 
총이 없다. 총! 총이 있었다.  아, 이번에는 총검과 탄환이  없었다. 밀려드는 적군, 쿵 하는 
포소리, 아악 아악! 현을 잠에서  깨어났다. 쿵! 포 소리가 들렸다.  아직 날이 밝지 않았다.    
  그날을 하루종일 포성이 들리더니 부상자를  실은 후송열차가 숨가쁘게 P역을 지나 남하
했다. 또 한 밤을 세운 이튿날 아침, P  고을에는 전차의 캐터필더 소리도 요란히 인민군의 
대열이 지나가고 있었다. 늘어진 시체, 붉은 깃발을 시위,--이것이 또  무슨 짓이냐? 그러나 
하고 싶거든 멋대로 하려무나. 여하튼 간에 나는 모르는  일이고 나에겐 손톱만큼의 관련도 
없다. 너희는 너희고 나는 나다. 의혹, 끝없는 혐오 하늘도 산도 들도 눈에 띄는 모든 것, 꽃
을 보아도 회색이었다. 며칠 후, 이북으로 갔다던 연호가 머리를 길게 늘이고 P고을로 돌아
오자 먼저 현을 찾았다. "어때, 고생 많이 했지?"  "뭐 별반." "고통이 많았을 거야." 그러나 
강도놈들도 물러가고.
  "그런데 자네 왜 이러고 있나?" 
  "뛰어나와 일을 해야 할 게 아닌가."
  "일을?"
  "이 사람아! 자네가 이처럼 배겨 있는 것도 이때를 기다린 것이 아닌가?"
  "때를 기다리더니?"
  무슨 뜻인지 의아해 하는 현의 표정.
  "물론 예기치 않았던 일이니까!" 
  "그러나 어리둥절할 것은 없어."
  "그야 충격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나야 한 개 평범한 속인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래 이대로 이러고 있을 작정인가?" 
  "이대로 나는 흡족하니까."
  "아니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을 셈인가?"
  "떡은 둘째치고 굿을 볼 흥미조차 없네."
  "자네 왜 그러나?" 뜻밖이라는 연호의 표정.
  " 왜 그러긴 나야 원래 이런 놈이 아닌가. 부탁이니 나를 이대로  가만히 버려두어 주게."  
  "버려 두다니, 자네야 말로 열성적으로 일해야 할 사람이 아닌가?"
  "일이야 할 사람이 얼마든지 있는걸. 나까지 뛰어들 필요가 없지. 나는 모든  것이 귀찮게
만 생각이 드네. 자네가 들어오기전  나는 들로 나가던 길가에서 어떤  젊은 군인의 시체를 
보았지 살 눈썹이 길고 검은 머리를 늘인 애띤 얼굴을  하고 있더군. 나보다도 십년이나 어
려뵈는 젊은 소년이야 그는 며칠 전만 해도 자기 가족에게 편지를 보냈고 이웃에 사는 어떤 
처녀를 그리고 있었는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니 어째서 그가  이 길가에서 이처럼 생명을 
잃어야 했는가 의문이 들더군. 살아야 했을 인간이 인위적으로 죽은 것이다. 어째서? 누구의 
탓으로?"
  "물론 사람이 죽는다는 건 유쾌한 일이 못되지. 그러나 피의 대가 없이 어떻게 혁명의 성
취를 바랄 수 있겠나?"
  "누구의 피, 누가 흘려야 하는 피인데?"
  "그것은 혁명을 가로막는 고귀한 피, 그러나 더 많은 원수들의 피가 요구되지."
  "자네는 죽는 사람의 경우를 생각해 본 적이 있나? 다만 한 가지 살고자 발버둥치는 인간
들의 죽음을. 고통과 공포. 죽는 인간에 있어서는 죽는 그  순간에 그 자신의 모든 것, 아니 
전 세계가 상실된다는 것을."
  "그러나 새로운 희망 '프롤레타리아트'는 그 시체를 넘어서 전진해야 하지."
  "전진? 어디를 향해? 얼핏 들으면 감동적인 얘기 긴 하지. 그런데 그 감동이란 게 탈이거
든."
  "든 것이 불가피한 혁명의 첫 과정이니까."
  "도대체 그처럼 많은 시체를 넘어서야 하는 혁명의 목적이란 무엇인가?"
  "착취 없고 계급 없는 사회의 건설." 어린애 같은 질문에 불과하다는 표정의 연호.
  "나도 그런 사회가 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네. 그러나  그 목적에 이르는 과정이라는 것 
이며 또 언제까지를 과정으로 치나, 과정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최후의 목적 그런 것
이 있을 리 없지, 구태여 말하자면 조그만 중간 목표가 있다고 할까."
  "그럼 자네는 전적으로 이 혁명을 인정치 않는군."
  "혁명이 획득한 어떠한 결과도 인간의 생명보다 귀할 수는 없으니까."
  "그러면 자네는 역사 자체를 부정하는군."
  "혁명이란 말에는 확실히 매력이 있겠지. 역사가들도 그 태반은 혁명은 역사적 전환에 필
요한 하나의 중요한 계기라고 하니까."
  "자네도 그것까지 부정하지 않는 군."
  "아니지, 다만 역사가들이 다루기 좋은 재료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야. 요행히 삶이 골패짝
을 쥐어든 인간들은 태연히 소파에 앉아 '소수의 희생된 생명 운운'하고 뇌리까릴 수도 있겠
지. 그렇게 허다한 혁명이 없었던들 별고 지금보다 못한 세상은 안되었을 것이네."
  "이건 놀랬는데."
  "어떻든 나는 분명치도 않을 목적을 위해 공연히 남에게 미움의 눈길을 보낸다든가 내 생
명을 희생할 그런 용기는 가지고 있지 못하니까."
  "인민의 투쟁을 그렇게 보는 군."
  "투쟁?" 
  "어째서 그렇게 싸우고 싶은가. 그렇게 싸우고 싶거든 싸우고 싶은 친구끼리 클럽을 만들
어 게임을 하면 되지 그래.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은 인간들까지  끌어들여 싸우게 하고 
있으니 말이야. 애매히 피를 흘리는 것은 이들이거든. 자네 익수를 보게."
  "익수 그는 기막힌 투사야."
  "자네, 지금 그가 올바른 제정신을 가지고 있다고 생가하나? 익수 같은 처지에 있는 친구
가 가난을 벗어나야 하고 인간다운 생활을 해야한다는 데는 의론의 여지가 없어. 그러나 지
금의 익수는.....?"
  "그의 눈을 보게. 무엇에 열중하는 것이야 좋겠지. 그러나 그의 눈에는 독기가 가득 차 있
어. 귀염성 있고 선량하던 그의 조그만 눈 속에 차 있는 것은 증오와 살기뿐이란 말이야. 나
는 그를 보았을 때 어째서 인간이 저런 눈을 해야  하는가의 의문이 생기더군. 그리고 측은
하다는 생각이. 물론 자네야 되면 이러한 나를 측은히 생각하겠지만."
  "도대체 지금이 어떤 때인 줄 아나?" 답답하다는 연호의 표정.
  "근거 없는 미움이 들끓고 있는 때이겠지."
  "근거 없는 미움이라니?"
  "그럼 자네는 그렇게 뼈아픈 원한을  누구한테 품게되었고 대체 누구를 저주하고  어떻게 
미워하고 있나?"
  맑은 눈으로 연호를 응시하는 현.
  "지금에 와서 그런 질문을 하다니."
  "자본가, 자주, 친일파, 반동분자, 이런 거란 말이지?"
  "그리고 기회주의자." 연호의 어성이 튀었다.
  "나는 기회주의자가 아니야. 미워할 것은 지적할 수 있는 그 누구가 아닐세.  인간 서로의 
미움이란 미움이 미움을 낳는 악순환밖에 가져오질 않아."
  "그러면?"
  "미워할 것은 인간이 지닌 어리석은 조건일세. 자네나  내 가슴속에 숨어있는 인간심리의 
독소. 남을 억압하려는 포악성 .착취하려는 비정. 남보다 뛰어났다는 교만. 스스로  나서려는 
값싼 영웅 주의적 참견, 남을 죽일 수도 있다는 무엄. 그런 것들이겠지.
  "언제부터 자네는 목사가 되었나?"
  "나는 신자도 아니네만, 이웃을 사랑해라. 뺨을 치거든 또 하나의 뺨을 내어놓으라고 이른 
때부터 지금은 50년이 모자란 2000년. 인간은 겨우 이 모양 요 꼴일세. 물론 자네야 내 뺨을 
칠 리도 없고, 나도 왼뺨을 맞고 바른 뺨을 내놓을 아량까지는 없네만."
  "그래서?"
  "나는 싸운다는 건 질색이니까. 내놓기 전에 도망을 치고 말겠지. 이전 나는  내가 인간으
로 태어난 것 자체가 창피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네. 내 자신이 싫고  또 그 누구 할 것
없이 인간이란게 싫어졌어. 그렇고 무슨 대단한 전망을 느꼈다고  지레 죽을 것까지는 없으
니 살아갈 대로 살아가 보는 게지."
  연호는 멸시와 동정이 뒤섞인 눈으로 현을 쳐다보았다. 자본주의  사회의 혼탁 속에서 갈
피를 못 찾고 허우적거리는 푸치. 푸르의 퇴영. 그는 현에게 혁명가들의 영웅적인 고난과 자
기 희생을 얘기해 주라고 했다.
  "혁명가들의 자기 희생을 생각해 보게."
  "어째서 그것이 자기 희생인가 단지  값이 비싸게 먹었다는 것뿐이지.  되려 일반 대중의 
꼬락서닌 즉 기관이지. 그것은 불의의 재액이며 더 할 수 없는 모욕이니까."
  "모욕이라니?"
  "그럼, 모욕이지. 그 이상의 모욕이 또 어디 있나. 누구한테서 무엇을 받았다는 거야. 되려 
응당 받아야 할 것을 오래도록 막아온 것은 다름 아닌 청탁 없는 그들 청부업자들이지."
  "청부업자."
  "그들은 자기 멋에 겨워서 흥분하고 비분하고 때로는 웃고  때로는 눈물을 흘린다. 그 노
호와 웃음과 눈물속에 애매한 인간들이 희생되거든. 어떤 존경과  무슨 갈채를 보내라는 거
야. 각기 제 생명을 타고난 인간들 어떤 존경과 무슨 갈채를 보내라는 거야. 각기 제 생명을 
타고난 인간들은 그것이 어떻게 초라하든 간에 모두 자기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법이야. 그
것은 누구도 범할 수 없지. 그들은 결코 청부업자들의 연기에 동원된 엑스트라는 아니거든 . 
나는 이렇게 생각하네 다음에는 어떠어떠한 세계가 반드시 올 것 이니 재빨리 끼어들어 한 
몫을 보려는 인간, 그러한 인간이란 폐품 불하에 눈치  빠르게 달려들어 낙찰시키는 장사치
와 다름이 없다고. 자기가 나서야 이 사회를 건질 수 있다는 무엄은 자기가 그 폐품을 맡아
야 소비자들이 헐값으로 쓰게 된다는 장사치의 헛소리나 다름이 없거든. 다름없기보다 되려 
못 되었다고 볼 수 있지. 장사치는 이윤만을 탐내는데  그들은 존경과 기배까지를 요구하거
든. 청탁도 않는 청부를 맡아가지고는 더욱 괴롭게 한단 말이야."
  "자네 그런 의견이 통용될 줄 믿는가."
  "얘기가 났으니 나대로의 생각을 말해 본 게지.  일제시대에도 나는 병정으로 끌려가기까
지 나대로 살았네. 8.15후에도 역시 난 나대로 살아왔네. 이제부터도 난 나대로 살고싶네 떠
들어 대봤자 인간이 산다는 건 별것이 아니니까, 난 나대로 조용하게 살아가자는 게지. 다만 
그 뿐이야."
  "그건 어려울 걸, 혁명은 무위의 한 사람도 용인하지 않아. 마비된 인간의 잠을 깨우고 그 
머리속에 새로운 인간의 의식을 부어 넣어야 하니까."
  연호가 떠난 뒤 현은 마루에 앉아 혼자 시름에 잠겼다. 뉘우칠 것은 없었다. 얘기를  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한 마음 가운데의 그 무엇. 망연히 꽃밭을 바라보았다. 며칠동안 느끼지 못
한 꽃들의 개성이 드러나 있었다. 인간은 꽃에다 여러 가지 뜻을 붙인다.정열,불안,비애,고결,
죄악,분노,모호,온순,광약, 그러나 꽃은 그저 아름다울 뿐인데, 때가 오면 피고 때가  가면 말
없이 지고, 그런데 인간은 꽃에다 제멋대로의 의미를 붙인다. 뿐더러 인간 자신을 색깔로 갈
라 놓고 편과 편을 만들어  서로의 가슴에 칼날을 겨눈다. 여태까지  현은 황금률을 뒤집어 
놓은 것, 즉 남에게서 괴로움을 받기 싫은 것처럼 나도  남을 괴롭히지 않는다는 신조를 굳
게 지켜왔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현은 자기에게  파상적으로 몰려닥치는 위협을 느
끼기 시작했다. 이번의 청부업자는 종전의 유가 아닌 것 같았다. 한 명도 놓치지 않고  건들
여 놓고야 말려는 유능하고 가혹한  업자. 구석구석을 파헤치려는 집요하고 치밀한  계산자. 
현이 웅크리고 있는 껍질도 그들의  날카로운 눈길에서 빠져날 수는 없는  듯 싶었다. 무엇 
그런 자식이 있나. 이번 그가 공작의 임무를 맡고 고향인 P고을에  파견되었다는 것은 삼년
이 넘은 자기의 신산을 갚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는 고을 사람들이 자기에게 부어지는 눈초
리에 제법 흡족한 것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승이자에게 보내는 존경과 경탄, 외포와 선망의 눈초리, 그렇지 않으면 가시가 돋힌  분노
와 증오의 눈초리, 어떠한 눈초리든 간에 거기에는 어떤 반응의 표시가 있었다. 그런데 현의 
눈만은 그렇지가 않았다. 거기에는 아무런 반응의 표시가 없었다. 두려움의 빛은커녕 무관심
과 권태와 혐오가 뒤섞인 눈에  어딘지 연민과 동정의 빛조차 깃들이고  있던 것이 아닌가.   
  공포가운데서 또는 완강한 조직가운데서 그렇게 애써 쌓아올린 탑을 그렇게도  가벼이 보
아 넘기다니. 거기다 걷잡을 수 없었던 허망한 얘기의 논리. 청부업자라고 승리자로서의  여
유와 관용을 가지고 현의 얘기를 들어 넘긴 자신이 기특  했다기 보다 어리석었다. 가슴 한 
귀퉁이에 생긴 솜사탕 같은 공허. 연호는 그 공허를 증오의 불길로 메꾸어 갔다. 다시  열흘
이 지난 어느날, 칠월의 하늘아래  찌는 듯 뜨거운 땅 위에서  청부업자들은 하나의 잔치를 
베풀었다. 이글거리는 태양은 처참한 잔치에는 너무나 강력한 조명이었다. 아직도 명확한 태
도를 결정치 못하고 서성거리고 있는 '인민'들에게 산 제물을 도륙함으로써 그들의 손에  인
간의 피를 발라 놓고 가슴마다에 결정적인 공포와 증오의 씨를 심어 놓아야 했다.
  죄악의 조각은 나눠줘야만 했다.P고을 중앙 네거리에서 열린 인민재판, 연호는 그 자리에 
현을 불렀다. 현에게 피를 보이고 그  반응을 보고자 한 것이다. 예정하였던 규탄과  계획한 
대로의 군중의 아우성이 쏟아지며 인간의 것이 아닌 잔인한 흥분의 도가니를 이루어 갈 때 
연호는 옆에 세워 놓은 현의 얼굴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반드시 무슨 변화가 있을  것이다.   
  초연히 홀로 고고하겠다는 너는 돌멩이가 아닌 이상 반드시 어떤 마음의 동요가 생길  것
이다. 공포, 당황, 기겁, 애원 그러면 너는 수월히 내 손아귀에 들어오게 된다.  그것은 굴복. 
네 사설은 결국 하나의 관념의 유희.  첫째번의 희생자, 국민회 회장이 언도를 받자  군중의 
까닭 모를 아우성과 함께 집행자들의 손에 쥐어졌던 굵다란 곤봉이 얼굴이 거의 흙빛이 된 
반백의 머리 위에 쏟아졌다. 
  뼈가 부서지는 소리, 살이 떨어져 나가는 무딘 소리 어떻냐. 연호는 현을 뚫어질 듯이  쏘
아 보았다. 그러나 그는 현의 얼굴에서 한 오리 공포의 빚도 찾아낼 수 없었다. 경화된 현의 
얼굴에서는 다만 땀이 흘러내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그러나 그것은 연호의  오진이었다.   
  현의 얼굴을 흐르는 땀은 더위 때문이 아니라 가슴에서 타는 분노의 불길 때문이었다.
  두 번째의 희생자가 끌려나왔을 때 현이 흘린 땀은 땀이 아니라 전신의 혈관에서 베어나
오는 피였다. 희생자는 다름아닌 조선샌의 부친이었다. 다만 어울리지 않은 생활 양식을  거
부하고 남으로 내려온 것 외에 아무런 반항도 꾀하지 않은, 한 무력한 늙은 이에 지나지 않
았다. 순간적으로 현의 뇌리를 조선생이 모습이 스쳐갔다. 현은 땀이 흐르고 있는 얼굴을 돌
려 연호를 쳐다보았다. 그 야릇하나 눈동자와 입가에 띠운 까닭모를 웃음, 이것이 같이 자라
난 친구, 인간의 얼굴이라니. 그 얼굴이 눈앞에서 크게 확대되는 착각을 느끼자 현의 입에서 
찢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살인이다."
  오랜 회상에 잠겼던 현은 감았던 눈을 크게 뜨며 어두운 하늘에 송송히 박힌 별들을 쳐다
보았다. 뚝! 동굴 안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어느덧 바람은 자고  벌레 소리도 가 
있었다. 그 다음의 일을 더듬을 수 있는 분명한  기억이 없었다. 그것은 불연속선. 순간적으
로 내민 자기의 주먹에 쓰러지던 연호, 앞에 버티고 섰던 보안서원의 소총을 낚아채고 군중
들의 비명, 몇 발의 총성. 눈앞에 드리웠던 황갈색 베일.  그 베일을 통해 눈에 뛰어들던 땅
을 밟으며 어디를 어떻게 달리었던지. 쫒기던 끝에 00강 하류에 이르러 물속에 뛰어들던 기
억. 그래도 소총은 그 손에 있었다.  그때의 충동. 그렇게 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한 마음의 
충동은 무엇이었을까. 이 검은 눈으로  목격한 살인, 목격은 일종의  묵인. 묵인하는 군중의 
일원으로 그대로 늘이고 있을 수 없었던  마음의 줄, 그리고 아픔. 희생자의 머리와  어깨와 
허리에 내려지는 아픔은 곧 나 자신의 머리와 군중. 거기에는 아무런 육체적인 연결이 없었
다. 그런데 나는 아픔을 느꼈다. 그리고 결국 도망을 치고 말았던 것이다. 현은 지난날의 그 
몇 번인가의 저항의 충돌을 생각해 보았다. 
  일인 교수에 대한 반발. 자기 혐오와 함께 몸을 오무린 퇴각. 하교장에 대한 항의 .겸연쩍
어 사직을 하고 만 패배, 아니 패북. 일군에서의 탈주,  또 다시 연안에서의 도주 도피의 연
속. 어느 때 정면으로 싸워본 일이 있었는가. 단 한번  그것은 극히 어리던 시절의 일. 할아
버지의 혹을 두고 얼굴에 흘린 피와  갈갈이 찢긴 옷. 뜻밖에도 할아버지는 노하셨지.  모든 
거북한 일에 등을 돌리는 습성이  내 가슴에 깃들인 것은 어느  때부터였던가. 그리고 껍질 
속에 몸을 오무린 삼십년의 결산은 결국 도망을 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 이처럼 다시 
귀딱지를 늘이고 P고을을 찾아든 것은 무슨 까닭일까? 
  지구의 끝까지 도망을 칠 수 없었던 때문이었던가 실상 한없이 외로웠고 지금도 또한 말
할 수 없이 외롭다. 수풀이나 산골짜기의 어둠 속에서 외로움에 못 이겨 어린애처럼 어머니
를 그리던 나날, 어머니 삼십년의 신고를 견디며 길러준 어머니를 버려 두고 나는 거침없이 
혼자 도망을 쳤던 것이다. 외로움 그것은 뭇 사람들과 떨어져 홀로이 있는 외로움이 아니었
다. 한 번도 그들과 함께 있어 본 일이 없었다는 인식에서 오는 외로움이었다. 섞어  있으면
서도 거기엔 보이지 않는 장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완전히 단절되어 있었던 것이다. 견딜 수 
없는 이 외로움 거기서 더욱 목마르게 바래지는 그리움. 어째서 사람들이 무서우며 또 그리
운가. 파상적으로 밀려닥치는 그리움. 그리움 속에서 더욱  생생히 피어오르는 하나의 얼굴. 
그것은 바로 이 동굴에 기어오르기 전 저 지금은 칠흑의 어둠  속에 파묻힌  S 촌 그 앞들
을 비껴 흐르는 내에서 만난 조 선생의 얼굴, 때묻은 베옷에 골이 떨어진 집세기.  아무렇게
나 뒤로 동여맨 먼지 앉은 머리카락. 꺼슬린 얼굴. 경악에  차던 그 눈동자. 현은 거기 인간
의 모욕을 보았다. 
  절망과 슬픔이 뒤섞여 멀거니 흩어진 그 눈동자. 살아 있는  인간이 그런 눈을 가져야 하
다니 거기에 갑자기 환희의 빛이 몰아치며 터져 나오던 눈물, 아니 그것은 피. 날이  밝으면
서 조 선생님이 이 동굴을 찾아올 것이다. 이런 속에서도 한 줄기의 빛이 몰아치며 터져 나
오던 눈물. 아니 그것은 피 날이 밝으면서 조 선생이 이 동굴을 찾아올 것이다. 이런 속에서
도 한 줄기의 빛은 있구나. 그때를 기다리고 한잠 눈을 붙여야 한다. 현은 흩어진 풀을 모아 
깔개를 하고 누웠다. 소총에 탄환을 재우고 그것을 베개로 했다. 녹슨 쇠 냄새가 났다. 올려
다보는 눈에 무수한 별들이 아름다웠다. 서로 당기고 있으면서  저렇게 자리에서 빛나고 있
다는 실감이 들지 않았다. 문득 가슴에 치솟는 한 가지 불안이 있었다. 
  조 선생님과 헤어져서 마을 어귀를 지날 때  느낀 방앗간 영 밑에서 자기를 응시하던 한 
젊은이의 시선. 잠시 깃들였던 그 불안은 곧 피로 속에 흩어지고 현의 두 눈이 감기더니 어
느덧 가느다란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골짜구니에 드리운 안개를 가르며 핏빛  같은 태양이 솟아올랐다. 흩어진  안개가 천천히 
동굴을 향해 기어올라갔다. 찬 기운이  서린 골짜구니의 숲속에서 두  그림자가 나타나더니 
안개를 타고 동굴을 향해 걸어 오르기 시작했다 고개를 숙이고 앞에서 걷고 있는 고 노인과 
뒤따르는 연호. 연호의 허리에 비스듬히 박힌 소제 때때 권총. 쿵! 하고 남쪽 멀리서 은은한 
포 소리가 들려왔다. 연호의 신경을 날카로이 하는 저 소리. 그리고 어쩌면 이렇게도 날카로
운 바위가 깔려 있을까. 연호는 금세 몸을 일으킬 수 있었으나 그 순간에 그가 쌓아올린 공
든 탑은 산산이 조각을 내고 무너져 버렸던 것이다.
  이미 지금은 현에 대한 심리적인 대결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그후 중앙당부로부터 지
난날 현이 연안에서 탈주한 까닭에 체포해 넘기라는 지령을 받고 설욕과 임무를 겸해 갖은 
애를 태워가며 현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 
  어제 저녁 현이 나타났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미끼로 고  노인을 끌어내었던 것이다. 자식
이 연안까지 갔다면서, 그런 어려운 경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혁명을 배반하고 나의 피와 땀
에 젖은 탑을 무너뜨리고 말다니. 고 노인은 걷고 있다기보다. 들뜬 발을 간신히 옮겨  놓고 
있는데 불과했다. 인민군이 P고을에 나타난 다음 고 노인은 그의 팔십년  생애에서 몇 번이
고 넘었던 고비와는 달리 내어놓을 어떠한 골패짝도 찾을 길 없다는 절망을 깨닫게 되었다. 
국민회의 일을 보던 영선은 어디론지 도망을 했고, 둘째아들은 의용군으로 끌려 나갔다.  혹
시나 하고 힐오리같은 기대를 걸었던 현은 더욱 아득한 절망의 장막을 고 노인의 눈앞에 드
리우고 말았던 것이다. 그 장막을 뚫고 간신히 새어드는 한 가닥의 빛깔. 고 노인은 지금 그
것을 찾아 사시덤불의 길 없는 날카로운 바윗길을 걷고 있었다. 흐르는 안개의 틈으로 검푸
른 동굴 앞 바위가 보이자 고 노인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안개가 흘러가는 저편 푸른 
솔밭 사이에 선친의 산소를 바라보았다.
  "어서" 등에서 사늘한 연호의 목소리와 함께 절컥 하고 권총을 재우는 쇳소리가 났다. 
  고 노인은 동굴을 향했다. 그리고 무거운 입을 열었다 
  "현아"
  흩어진 머리와 맑고 날카로운 두 눈이 조심스럽게 바위위로 들렸다. 말할 수 없는 그리움
이 왈칵 고 노인의 가슴에서 솟아 올랐다. 그 그리움은 또한 비길 수 없는 고통.
  "애기해요 빨리!" 연호의 소리. 고 노인은 무거이 입을 열었다.
  "현아. 내말 듣거라. 네가 내려오기만 하면 선생님들도  모두 용서해 주신다. 현아 걱정말
고 내려오너라." 
  고 노인은 얘기를 끊고  대답을 기다렸다. 견디기 어려운 침묵의  순간 대답은 없이 현의 
내어졌던 얼굴은 다시 바위 밑으로 사라져  버렸다. 고 노인은 한 발자국 발을  내디디었다.   
  "현아"
  또한 발자국 
  "현아" 저도 모르게 현의 이름을 부르며 동굴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현아, 현아 네 어미도" 문득 고 노인은 오는 길에 들렀던 현모의 생각을 했다.
  고 노인과 연호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내 아들아 내 아들아 나직이 아들을 부르며 두툼한 
성경책을 소리내어 낭송하던 현모. 그 절실하고 애타는 음성은 아직도 고 노인이 귀에 쟁쟁
히 담겨 있었을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네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
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채우고 두 사환과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지시하던 곳
으로 가더니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바라본지라. 아브람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려 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이라 하는지라. 사자가 가라사
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네게 아끼지 아
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
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 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거기 서요" 뒤에서 날카로이 쏘아지는 연호의  목소리 .고 노인은 멈칫 그  자리에 섰다. 
이제 가지의 생애는 이미 진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손에 쥐어진 풋알밤 같이 확실한 
것 같았다. 쿵! 하고 또 멀리서 포 소리가 들려왔다. 다가왔다 멀어졌다. 그리고 또 다시 되
돌아오는 저 소리. 차라리 한 번 스쳐가고 영영 돌아오지 않았으면, 그렇다면 고 노인은  설
령 지옥 같은 참호 속이라도 어떻게든지 비벼대려고 애썼을 것이다. 둘째 놈이 의용군에 끌
려나갈 때도 고 노인은 뼈를 어이는 아픔을 느끼면서 한치나마 발 붙일 땅을 발견했던 것이
다. 그런데 되돌아오는 저 소리. 혹시나 저 소리는 첫째 놈이 되돌아오는 소리일는지도 모른
다. 고 노인의 마음은 몇 갈래도 찢기고 엉켜서 사납게 뒤틀렸다. 고개를 돌려 선친의 묘 있
는 곳을 건너다 보았다. 그리고 괴로움을 이기려는 듯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 일순에  고 
노인은 자기의 팔십 생애를 일별 했다.  고달팠던 기나긴 생애, 몇 번이나 뒤바뀐  세태였던
가. 자기를 낳은 선친 까마득히 올려 뻗은 대대의 조상 고 노인은 연호의 재촉이 이제는 아
무렇게도 생각되지 않았다. 
  다만 기나긴 생애 속에서 항상 재촉하는 소리에 떤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만 이 있었다.  
  그래도 자기 딴에는 주어진 팔십 년의 생애를 악착같이 살려고 애를 써왔다는 생각이  들
었다. 또 한번 쿵 하는 포 소리  저 포 소리만 없었어도 고 노인은 현을  불러내는 데 다시 
한번 애를 썼을는지 몰랐다. 그러나 다가오는  저 소리. 삶과 죽음, 그  어느 하나의 선택을 
재촉하는 저 소리. 고 노인은 또 한번  동굴을 올려다 보았다. 저 동굴 안에서 아들이  죽었
고, 지금 또 손자가 저 속에서 죽음의 위험에 직면해 있다. 그리고 자기도 또한 그것을 목격
하며 위기의 순간에 서 있었다. 이 야릇한 숙명적인 불행의 부합, 다시 고 노인은 눈길을 선
친의 산소에 돌렸다. 문득 이처럼 가혹한 숙명의 사슬이 엉키도록 자기는 조상의 뼈를 묻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변사-전쟁 앞에는 과거의 어떠한 원리도 무색
해지는 것일까. 혈통이 이어져 뻗어가는 기준이 상실. 골수에 젖은 풍수원리를 굳게 믿고 조
상의 뼈다귀를 메고 다닌 지난날이  노력의 공허. 그렇게 허탈해 가는  고 노인의 마음속에 
차차 하나의 새로운 감정이 흘러들었다.  모두가 기정의 숙명에서 벗어나  있다는 해방감과 
다음 순간의 운명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다는 어떤 종류의 감동이었다. 
  그 감동 속에서 고 노인은 팔십 평생에 처음 무엇에도 구애되지 않는 순수한 자기 자신의 
의지를 결정했다. 이까지 용케 견디어 온 가상할 자기의 팔십 생애. 산소의 탓도, 목에 달린 
복의 상징이란 혹의 탓도 아닌 맨 주먹 알 몸으로 기를  쓰며 살아온 팔십 평생, 나는 이것
으로 족한 것, 지금은 가는 것이다. 현아 이전 네가 살아야 한다. 
  여울 같은 감동이 고 노인의 전신을 흘렀다. 머리카락과 수염이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빛
나고 있었다. 크게 숨을 들이 모았다. 
  "현아! 너는 살아야 한다. 저 대포 소리를 듣거라. 어떻게 든지 여길 도망해서......"
  순간 고 노인은 등을 꿰뚫는 불덩어리를 느꼈다. 중심을 잃고 풀숲에 쓰러지는 고 노인은 
총성의 메아리 속에 현의 절규를 들었다. 
  그리운 그 음성. 
  "할아버지!"
  따각! 불발탄을 끄집어내고 다음 탄환을 밀어재운 현의 소총과 연호의  권총에서 불이 튀
었다. 순간 현은 왼편 어깨에 뜨거운 쇠갈고리의 관통을 느끼며 연호가 천천히 왼쪽으로 몸
을 틀면서 숲속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할아버지"
  바위를 넘어 밑으로 내달리려던 현은 아찔하면서 그대로 바위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어깨
를 움켜쥔 손가락 사이로 붉은 피가 뿜어 나왔다. 땅으로 끌려 들어가는 듯한 의식의  강하. 
어깨의 고통. 꼭 삼십 년을 살고 지금 여기서  죽는구나. 생각을 모아야겠다. 목숨이 끊어지
기 전에 생각을, 생각을 모아 보자.  이것이 한 인간을 삶? 삼십년! 어떻게  살았던가? 외면 
도피 도주 그밖에 무엇을 하고 지내왔는지 도무지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첫 번째 탄환처럼 
불발에 그친 삼십년 그것은 영 산송장 그렇다면 결국 살아 본 일이 없지 아니한가. 나는 다
음 탄환으로 연호의 가슴을 뚫었다. 사람을 죽인 것이다. 남에게 손가락 하나 가풋하지 않으
려던 내가 사람을 죽인 것이다. 
  가엾은 연호. 연호와 나와는 아무런  원한도 없었는데. 인간이란 이래서 죄인이라는  것일
까. 어쩔 수 없이 살인을 하게 되는 인간의 불여의. 죄악을 내포한 인간의 숙명? 그것은  원
죄? 우거진 꽃밭의 울타리 안에서 스스로 죄 없다는 내 자신을 잠재우고 있을 때, 밖에서는 
검은 구름과 휘몰아칠 폭풍이, 그리고 사람이 죽어 가는 비명이 준비되고 있었다. 그것은 먼
저 내가 질러야 할 비명이었을는지도  모른다. 그 어린 병사대신 내가  그 길가에 누웠어야 
했을는지도 모른다. 나 같은 인간은 아직 살아있었고, 살아야할 인간은 죽었다.
  이런 것이 그대로 용허 될 수 있는가. 동굴에서 죽은 부친 강렬히 살아서 아낌없이 그 생
명을 일순에 불태운 부친 부친을 살아남은 인간들을 대신해서 죽었고 그들의 삶에 어떤 의
미를 부여했을는지도 모른다. 저 숲속에 누운 할아버지 시체가 아니라 그것은 삶의 증거. 모
든 불합리에 알몸으로 항거하고 불합리 속에 역시 불합리한 삶을 주장한 피어린 한 인간의 
역사. 거인의 최후같은 그 죽음. 어머니 .가냘픈   여인의 몸으로 그토록 견딘 인간의 아픔.    
  그 아픔을 넘어서 내게 대한 사랑, 죽은 부친에 대한 사랑, 그리고 기어이 모든 것을 의탁
하는 신에 대한 사랑으로 높인 어머니. 너는 어느 때 어떠한 아픔을 견디었던가. 껍질  속에
서 아픔을 거부한 무엄과 비열. 너는 너절한 녀석이었다. 생생한 여자의 알몸을 안기가 두려
워 자독 행위로 스스로의 육체를 기만한 너절한 자식. 져야 할 책임이 두려워 되지 못한 자
기 변명으로 자위한 비겁. 껍질 속에 몸을 오므리고 두더지처럼 태양의 빛을 꺼린 삶. 산 것
이 아니라 다만 있었다 마치 돌맹이처럼 결국 너는 살아  본 일이  없었던 것이다. 살아 본 
일이 없다면 죽을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살아 본 일이 없이 죽는다는 것. 아니 죽을 수도 
없다는 안타까움이 현의 마음에 말할 수 없는 공포의 감정을 휘몰아 왔다.
  현은 잃어져 가는 생명의 힘을 돋구어  이 공포의 감정에 반발했다. 살아야 겠다.  그리고 
살았다는 증거를 보이고 다시 죽어야한다. 현은 기를 쓰고 반발의 감정 속에서 예기치 않은 
새로운 힘이 움터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힘이 조금씩 조금씩 마음에 무게를 가하더니 전신
에 어떤 충족감이 느껴지자 현은 가슴속에서 갑자기 우직하고 깨뜨려지는 자기 껍질의 소리
를 들었다. 조각을 내고 부숴지는 껍질. 그와 함께 거기서  무수한 불꽃이 튀는 듯 했다. 그
것은 다음 차원에의 비약을 약속하는 불꽃 무수한 불꽃. 찬란한 그 섬광. 불타는 생에의  의
욕. 전신을 흐르는 생명의 여울. 통절히 느껴지는 해방감.  현은 끝없는 푸른 하늘로 트이는 
마음의 상쾌함을 느꼈다. 나머지 한 알의 탄환. 그처럼  내가 살아남는 것이라 하자. 그러면 
어떻게 된 것일까. 그것은 누구도 모른다. 
  먼저 나 자신이 선택할 것이다 다음은, 그것은 더욱 누구도 모른다. 분명한 한가지는 외면
하거나 도피하지는 않을 것이다. 외면하지 않고 어떻든 정면으로 대하자. 도피할 수가  없도
록 절박된 이 처지. 정면으로 대하도록 기어이 상황은 바싹 내 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이미 꽃밭의 시대는 끝난 것이다. 살아서 먼저 청부 업자들을 거부하자. 떠들어대어야  인
생은 더욱 무의미할 뿐이라는 것을 뼈저리도록 가르쳐 주자. 꺼리고 비웃는 데 그치지 말고 
정면으로 알몸을 던져 거부하자. 나 같은 처지의 아니 나 이상의 경우의 무수한 인간들.  이
웃을 보는 눈 귀 하나에도 조심을 담고, 건네는 한  마디의 얘기에도 남을 괴롭힐사 애쓰는 
인간들. 늙은, 젊은 어린 남녀의 수많은 얼굴들. 그리운 그 얼굴들이 있지 아니한가. 나는 외
로울 수 없다.
  이제부터 그들 가운데서 잃어진 나  자신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청부업자들을 격리하고 
주어진 땅 위에 그들과 함께 새로운 마음을 세우자. 거기에 내 더움의 삶을 바치는  것이다.  
  청부업자는 사라지고 '조용한' 인간들의 세계가 와야한다. 조용한 인간들의  세계. 현은 가
슴에서 피어오르는 훈훈한 것을 억제치 못했다. 되살아오는 어깨의 아픔-땅위에 가득 찬 이 
몇백 배의 아픔. 이만한 아픔이면 기꺼이 받고 조용히 내가 지내온 얘기를 들려주어야 한다. 
그리고 살아서 먼저 가까운 사람들에게 조용히 내가 지내온  얘기를 들려주어야 한다. 현은 
흐려져가는 의식 속에서 자기를 부르는 하나의 소리를  들었다. 쿵! 하고 들려오는 포 소리
보다 가까운 하나의 부르짓음.
  "보아, 저 소리, 벌써 저기 가까워오는 그리운 저 목소리."
  울음에 가까운 그 부르짖음은 차차 이 동굴로 가까워오면서 산과 산에 부딪치고 골짜구니
를 감돌아 메아리에 또 메아리를 일으켜 갔다. 산과 산 어디까지나 이어간 산줄기. 굽이치는 
골짜구니. 영겁의 정적은 깨뜨려지고 거기 새로운 생명이 날개를 치며 퍼득이기 시작했다.





    불신시대(지은이: 박경리)
  9·28수복 전야에 진영의 남편은 폭사했다. 남편은 죽기 전에 경인도로에서 본 괴뢰군의 임종 이야기
를 했다. 아직도 나이 어린 소년이었더라는 것이다. 그 소년병은 가로수 밑에 쓰러져 있었는데 폭풍으로 
터져나온 내장에 피비린내를 맡은  파리떼들이 아귀처럼 덤벼들고 있었더라는  것이다. 소년병은 물 한 
모금만 달라고 애걸을 하면서도 꿈결처럼 어머니를 부르더라는 것이다. 그것을 본 행인 한 사람이 노상
에 굴러 있는 수박 한 덩이를 돌로 짜개서 그 소년에게 주었더니 채 그것을 먹지도 못하고 숨이 지더라
는 것이다.
  남편은 마치 자신의 죽음의 예고처럼 그런 이야기를 한 수시간 후에 폭사하고 만 것이다.
  남편을 잃은 진영은 1·4후퇴 때 세 살먹이 아이를 업고 친정어머니와  같이 제일 마지막에 서울에서 
떠났다. 그러나 안양에 이르기도 전에  중공군이 그들을 앞질렀고, 유엔군의  폭격 밑에 놓였다. 수없는 
피난민이 얼음판에 거꾸러졌다. 피난짐을 끌던 소는 굴레를 찬 채 뚝 밑으로  굴렀다. 피가 철철 흐르는 
시체 옆에 아이가 울고 있었다. 진영은 눈을 가리고 달아났던 것이다.
  악몽과 같은 전쟁이 끝났다.
  진영은 아들 문수의 손을 잡고  황폐한 서울로 돌아왔다. 집터는 쑥대밭이  되어 축대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진영은 잡풀 속에 박힌 기왓장 밑에서 물신물신 무너지는 책 한  권을 집어들었다. 『프랑스 문
학의 전망』이라는 일본책이었다. 이 책이 책장에 꽂혔을 때-순간  진영의 머리 속에 그러한 회상이 환
각처럼 지나다. 진영은 무심한 아이의 눈동자를 멍하니 언제까지나 바라보고 있었다.
  문수가 자라서 아홉 살이 된 초여름,  진영은 내장이 터져서 다리가 엉겨붙은  소년병을 꿈에 보았다. 
마치 죽음의 예고처럼 다음 날 문수는 죽어 버린 것이다. 비가 나리는 밤이었다.
  일찍부터 홀로 되어 외동딸인 진영에게 붙어서 살아온 어머니는 '내가  죽을 거로'하며 문지방에 부딪
치는 것이었으나 진영은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는 앓다가 죽은 것이 아니었다. 길에서 넘어지고 병원에서 죽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뿐이라먄 차
라리 진영으로서는 전쟁이 빚어낸 하나의 악몽처럼 차차  잊어버릴 수 있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
나 그것이 아니었다. 의사의 무관심이 아이를 거의 생죽음을 시킨 것이다. 의사는 중대한 뇌수술을 엑스
레이도 찍어보지 않고, 심지어는 약 준비조차  없이 시작했던 것이다. 마취도 안한  아이는 도수장 속의 
망아지처럼 죽어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아이를 갖다 버린 진영이었다.
  바깥 거리 위에는 쏴아 하며 밤비가 내리고 있었다.
  누워서 멀거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진영의 눈동자가  이따금 불빛에 번뜩인다. 창백한 볼이 불그스
름해 진다. 폐결핵에서 오는 발열이다.
  바깥의 비 소리가 줄기차 온다.
  아이가 죽은 지 겨우 한 달, 그러나 천 년이나  된 듯한 긴 날이었다. 진영은 가만히 눈을 감는다. 진
영의 귀에 조수처럼 밀려오는 것은 수술실 속의 아이의 울음소리였다.
  진영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술병을 들이킨다. 잠이 오지 않을 때 마셔 보라고 동무가 보내 준 포도
주였다.
  이불 위에 엎드린 진영은 산울림처럼 멀어지는 수술실 속의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는 것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해서 잠이 든다.  진영은 꿈속에서 희미한 길을 마구  쏘다니며 아이를 찾아 헤매다가 
붕대를 친친 감은 눈도, 코도, 입도, 보이지 않는 아이 모습에 소스라쳐 깬다. 흠씬 땀에 젖은 몸이 가늘
게 떨고 있었다.
  별안간 무서움이 죽 끼친다.
  비가 멎은 새벽이 창가로부터 서서히 방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허공을 보고 있는 진영은 왜 무서움을 느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이가 이미 유명의 혼령이기 때문
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렇게 서글픈 인간  관계가 어디 있겠는가. 진영은 구역이  나올 정도로 자기 
자신이 싫었다.
  성당의 종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요다음 주일날에는 꼭  나를 성당에 데려가 달라고 갈월동 아주머
니에게 부탁을 한 일이 생각한다. 바로 오늘이 그 주일날이다.
  갈월동의 아주머니는 약속한 대로 여덟 시가 못 되어서 왔다. 아주머니는 옛날에 죽은 진영이의 칠촌 
아저씨의 마누라였다. 자식도 없는 그는 아주 독실한 천주교의 신자였으나 근래에 와서 계로 인하여 상
당히 말썽을 받았다. 진영이만 해도 그 짤짤 끊는 돈으로  겨우 다 넣어온 이십 만 환짜리 계를 소롯이 
포기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만치 계주를 한 아주머니의 사정이 핍박했던 것이다.
  매미 날개같이 손질을 한 모시옷을 입은 아주머니는 울고불고 하는  어머니를 위로하는데 아주머니가 
말할 적에는 금으로 씌운 송곳니가 알른알른 보였다.
  어머니는 아는 사람을 보기만 하면 언제나 손을 잡고  손주를 잃은 하소연을 했다. 진영은 그러는 어
머니가 싫었지만, 그러나 딸 하나를 믿고 산 어머니가 여러 가지 면으로 서러운 위치에 놓인 것은 사실
이다.
  "우시지 마세요, 형님. 산 사람 생각도 하셔야지. 진영의 마음이 오죽하겠어요. 이러지 마세요.  그리고 
살아갈 길이나 생각합시다."
  진영이 실직을 하고 있는 형편이라 살길도 막연하긴 했다.
  아주머니가 갖가지 말로 어머니를 달래다가 풀어진 고름을  여미며(아주머니는 적삼에도 반드시 고름
을 달았다.), 
  "우리 어디 사는 대로 봅시다.…… 그리고 나도 생각하고 있었어요. 형님 돈만큼은 돌려 드릴랴구,  원
금만이라도요.……."
  어머니의 얼굴이 좀 밝아진다. 진영은 잠자코 양말을 신고 있었다.
  세 사람은 거리에 나왔다. 아침이라 가로수가 서늘했다.
  본시 불교도인 어머니는 성당으로 가는 것이 마음에 꺼렸으나, 그러나  아무래도 좋았다. 의사는 항상 
딸에게 있는 것이었으니까…….
  아주머니는 진영의 양산 밑으로 바싹 다가오면서 소군거리기 시작한다.
  "천주님이 계신 이상 우리는 불행하지 않다. 천주님이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런 기회를 주어 우리는 
불행하지 않다. 천주님이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런 기회를 주어 너를 부르신 거야. 모든 것이 다 허망
한 인간 세상에 다만 천주님만이 된다."
  신자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꼭 같은 말을 아주머니는 말했다.
  진영은 땅을 내려다본 채, 
  "지가 구원을 받자고 가는 건 아니에요. 천당이 있어서 그곳에 문수가 놀고 있고 말고."
  연장자답게 위로하는 것이었으나 말투가 너무 어수룩했다.
  "아무리 꽃동산 이래도 그애는 하늘을 보았다. 너울처럼 엷은 구름이 가고 있었다.
  "그런 소리 말고 영세나 받도록 준비해. 상배도 영세를 벌써 받았어."
  아주머니의 목소리는 먼 지평선에서 울려오는 것 같았다. 진영은 기계적으로,
  "그 무신론자가…… 영세를……?"
  "그애도 요즘 심경이 많이 변했어."
  분냄새가 엷게 풍겨온다. 진영은 금니가 알른알른 보이는 아주머니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상배는 아주머니 댁에 하숙한 대학생이다. 지나간 봄에만 해도 그는,
"아주머니요. 예수가 물 위로 걸었다켓능기요. 하핫핫! 아마  예수는 왼발이 빠지기 전에 오른발을 올렸
고, 오른발이 빠지기 전에 왼발을 올렸던가배요. 하핫핫……!"
  그런 부산 사투리의 조롱이 자기 딴에는  아주 신통했던지 상배는 콧마루를 벌름거리며  웃었던 것이
다. 진영이 그것을 생각하는 동안 아주머니는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그애도 우리집에서 쉬이 옮기게 될 거야. 아버지가 사업 때문에 서울로 오신다니까…… 그래서 그애
가 나가기 전에 영세받도록 할려구……."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들이 성당 앞까지 왔을 때 은행나무에 자잔한  햇빛이 부서지고 있었다. 뜨락에는 연분홍빛 글라디
올러스가 피어 있었는데 진영은 불교의 상징인 연화를 왜 그런지 연상했다. 그리고 엉뚱스럽게 그 꽃들
이 자아내는 서양과 동양의 거리를 생각해  보는 것이었다. 막연한 생각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진영은 
얼떨떨하게 자기의 마음을 더듬었다. 문수를 위하여 신을 뵈러 온 마당에서 아무런 경건함도 없이 이렇
게 냉정히 사물을 헤아리고 있었다는 것을, 그것을 다만  시각에서 온 하나의 자연발상 이라고만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내 슬픔 속에 그만치 여유가 있었더라는 말인가. 진영은 문수에게 부끄러웠
다. 미안했다.
  진영은 땀에 젖은 분냄새가 풍겨오는 아주머니의 젖가슴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나무 그늘 아래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그 옆에는 중년 남자가 한 사람  십자가, 성경책 같은 것을 벌
려 놓고 팔고 있었다. 진영은 어느 유역의 이방인인 양 그런 광경을 건너다 보았다. 분위기에 싸이지 않
는 마음 속에는 쌀쌀한 바람이 일고 있었다.
  진영은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아주머니는 신발을 책보에 까면서, 
  "주로 아이들을 위한 미사 시간이 돼서 시끄러워. 다음엔 일찍 와요."
  진영은 아주머니의 말보다 거창스럽게 신발을 싸들고 가는 신자들의 모습에 눈이 따라가는 것이었다. 
진영은 문득 예수 사랑할라고 예배당에 갔더니 눈 감으라고 해놓고 신도둑질 하더라. 야유에 찬 노래를 
생각했다. 그러나 진영은 곧 형용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신전에서 신을  모독하다니-그런 죄악 의
식에 쫓기며 진영은 아주머니의 뒤를 따랐다.
  얼마 후에 미사는 시작되었다.
  "가엾은 나의 아들 문수를 위하여 기도를 올리나이다. 진심으로……  진실로 비나이다. 그 고통으로부
터 놓이게 하시고, 어린 영혼에게 평화가 있기를……."
  진영은 눈을 감고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 있는 헤살꾼의 속삭임이 더 집요했다. 
헤살꾼은 속삭인다. 문수는 죽어 버린 것이다. 아주 영영 없어진 것이다. 진영은 눈앞이 캄캄해 오는 것
을 느낀다. 헤살꾼은 속삭인다. 칼끝으로 골을 짜개서 죽여 버린다. 무참하게 죽여 버린 것이다.
  진영은 눈앞에서 시뻘건 불덩어리가 굴러가는  것을 본다. 헤살꾼은 자꾸만 속삭인다.  어둡고 침침한 
명부에서 압축한 듯한 목 쉰 아이의 울음 소리, 진영은 땀을 흘리며 눈을  떴다. 코 앞에 닿은 어머니의 
머리에서 땀내가 뭉클 풍겨 온다. 현기증을  느낀다. 신자들의 머리에 쓴 하양  미사포가 시계와 의식을 
하나로 표백시켜 버리는 것이었다.
  얼마 동안이 지났는지 진영은 고개를 돌렸다. 구제품이  정렬한 듯한 성가대의 아이들이 눈앞에 나타
났다. 아이들의 각색의 음계가 합한 성가는  바람을 못 마신 오르간의 잡음처럼  진영의 귓가에 울렸다. 
이 속에서 무릎을 꿇고 앉았는 을씨년스런 자기 자신의 모습, 진영은 그것이 얼마나 어설픈 위치인가를 
깨닫는다.
  진영은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미웠다. 결코 자기라는 의식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미
웠던 것이다. 진영은 어떻게 해서라도  객관적인 자기 의식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진영은 잃어버린 
낭만을 찾아 보듯이 신과 문수의 죽음이 동렬의 신비라는 것, 그리고 아무도 신과 죽음을 비판할 수 없
다는 것, 그것은 사실이라 생각했다.
  진영이 처음 성당에 나가려고 결심했을 때  그것이 가공에 설정된 하나의 가상일지라도  다만 문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이야 피에로도 오뚜기도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의식적인 맹
목은 끝내 맹목일 수 없었다.
  미사가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진영은  긴 작대기에다 연금 주머니를 여민  잠자리채 같은 것이 가슴 
앞으로 오는 것을 보았다. 아주머니가 성급하게 돈을 몇 잎 던졌을 때 잠자리채 같은 연금 주머니는 풍
각쟁이의 낡은 모자를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계기로 하여 진영은 밖으로 나와 버렸다.
  진영은 나무 밑에 주저앉아서 성당에서 나오는 어머니의 빨간 눈을 보았다. 문수 또래의 아이들이 신
발을 신으며 나오는 것도 보았다.
  여름 햇빛 아래 서 있는 성당이 가늘게 요동하고 있는 것 같이 진영에게는 느껴졌다.
  아침부터 진영은 마루 끝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가깝하게 그러지 말고  밖에라도 좀 나갔다 오라는 
어머니의 말이 도리어 비위에 거슬려 진영은 이맛살을 찌프리며 머리를 부여안는다.
  가깝한 때문만이 아니다. 진영은 일자리를 찾아 밖에 나가야 하는 것이다.
  진영은 머리를 부여안은 채 도대체 어디를 가야 하며, 누구에게 매달려 밥자리를 하나 달라고 하겠는
가. 더군다나 폐까지 앓고 있는 내가…….
  진영은 문수를 생각했다. 살겠다고 버둥대는 어머니와 자기의 모습이 한없이 비루하게 느껴지는 것이
었다.
  마당에는 대낮 햇빛이 쨍쨍 쏟아지고 있었다. 그늘이  짧아진 쌍나무의 둘레로 닝닝거리고 다니던 파
리떼들이 진영의 얼굴 위에 몰린다. 어머니는 장독대 옆에서 발래에 풀을 먹이고 있었다. 넓적한 해바라
기 잎사귀 사이의 그 찌들은 옆얼굴을 바라보는 진영은 바다에 떠밀려 다니는 해파리를 생각했다. 그렇
게 둔하면서도 산다는 본능만은 가진 것, 그저 산다는 것, 진영은 어머니에 대한 잔인한 그런 주시를 더 
이상 계속할 수가 없었다. 진영은 성가시게 구는 파리를 쫓으며 마룻바닥에 드러눕는다.
  하늘이 파아랬다. 구름이 둥둥 떠내려 가는 것이다. 그러나 하늘이 갑자기 바다같이 느껴졌다. 구름은 
바다위로 둥둥 떠내려 가는 해파리만  같았다. 진영이 자신이 누워서 하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엎드려서 바다를 내려다보는지도 모른다는 그러한 착각이 든다.
  해가 서쪽으로 좀 기울었다. 쌍나무의 그늘이 두서너 치나 늘어난 것 같다.  진영은 몸을 왼쪽으로 돌
려서 마루 밑의 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문이 비거걱 하더니 열린다. 땅을 보고 있던 진영의 눈에 우선 사람의  그림자가 먼저 들어왔다. 그림
자를 따라 천천히 눈을 치떴을 때 그 곳에 바랑을 걸머진 신중(여승을 흔히 이르는 말, 편집자 주)이 서 
있었다. 초현실파의 그림같이 그림자를 밟고 선 신중의 소리없는 길다란 모습.
  드디어 합장을 하고 있던 신중이 입을 열었다.
  "아씨!"
  완전히 조화를 깨뜨린 소녀와도 같이 카랑카랑하게 맑은  목소리다. 바랑에 휘인 어깨는 아무래도 사
십 고개일 터인데-신중은 부시시 일어나서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는 진영의 형용할 수 없는 어두운 눈빛
에 지친다.
  마침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나오는 어머니를 본 신중은 잠시 숨을 들이킨 듯이,
  "마나님?"
  의연히 맑은 목소리다.
  어머니는 마루 끝에 주저앉으며 긴 한숨을 쉰다.
  "이날로 부처님을 섬기고 잘 살 적에는 절마다 불을 켰건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공든탑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말도 헛말이더군……."
  바야흐로 아이가 없어진 하소연이 시작되는 것이다. 판에 판박은 듯한  푸념이 언제 그칠지 모르겠다. 
눈을 꿈벅거리며 말할 기회만 노리던 중이 드디어 어머니의 말허리를 꺾어 버린다.
  "……아이고 딱하기도 해라. 그러게 말이유……그렇지만 시주 하십사고 온 게 아니라……행여 쌀을 해
서……아아주 무거어서요……."
  그런 구슬픈 이야기 보다 빨리 거래부터 하고 싶다는 표정이다. 진영은 값싼 동정까지도 인색해진 세
상이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동정을 바라는 어머니가 밉기보다 딱한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말이 미진한 어머니는 좀 어리둥절한 얼굴이다.
  "무거워서 어디 가져 갈 수가 있어야지요. 좀 짐을 덜고 갈려구요."
  신중은 마루 끝에 바랑을 내리며 의사를 거듭 표시한다. 그제야 중의 수작을 알아채린 어머니는 여태
까지의 감정을 일단 수습하고 치마 밑을 추키며 재빨리 응수한다.
  "우리도 됫쌀을 팔아먹으니 기왕이면 사지요. 되나 후히 주세요."
  중은 바랑을 끌러 놓고 쌀을 되기 시작한다. 어머니는  몹시 쌀되가 야위다고 보채고 중은 됫박 위에
다 쌀을 집어얹는 어머니의 팔을 떠밀며 그러지 말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럭저럭 거래는 끝난 모양이다.
  셈을 마친 어머니는 인사로,
  "스님이 계신 절은 어디지요?"
  "네? 아이 에. 마로 학교 뒤에 절이지요."
  학교 뒤라면 쌀을 팔고 갈 정도로 먼 곳은 아니다.
  중이 가고 난 뒤 어머니는 무슨 생각에 잠긴 듯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애 진영아."
  나직이 부른다. 진영은 대답 대신 어머니의 눈을 본다.
  "문수를 그냥 둘라니 이리 가슴이 메인다. 이렇게 흔적 없이 두다니……절에 올려 주자."
  어머니를 쳐다보고 있는 진영의 시선은 그대로 고정되어 있었다.
  "절도 가깝고 신당이니 만만하고……세상에 너무 가엾어. 아무래도 혼백이 울면서 떠돌아다니는 것 같
아 잠이 와야지."
  진영은 고개를 돌려 장독대의 해바라기를 바라본다. 한참만에,
  "그렇게 합시다."
  해바라기를 쳐다본 채 한 대답이다.
  "그런데 왜 그리 중을 장사꾼 대접을 했어요? 아이를 부탁할 생각을 했으면서……."
  진영의 시선은 여전히 해바라기에 있었다. 자기가 하는 말에도  별반 흥미를 느끼고 있는 것 같지 않
았다.
  "앗다, 별소릴 다 하네. 공은 공이고 신은 신이지.  하기야 뭐 시주받은 쌀 팔고 가는 그게 진짜  중인
가?"
  진영은 그러는 어머니가 미웠다.
  "그럼 왜 그런 절엔 갈려구 해요?"
  "누가 중 보고 절에 가나? 부처님 보고 가지."
  진영은 잠자코 옳은 말이라 생각했다. 그와 동시에 며칠 전에 아주머니가 우선 쓰라고 돈 이 만 환을 
주면서 성당에 나가지 않는 진영을 나무라던 일이 생각났다. 이렇게 절에 갈 것을 동의하고 보니 왜 그
런지 아주머니에 대하여 변절을 한 듯 미안하다. 그리고  돈만 하더래도 당연히 받을 돈을 받았건만 다
른 사람에게 베풀지 않았던 호의가 빚이 되는 듯싶다.  그러나 진영의 종교가 오직 문수를 위한다는 명
목 뿐 이라면 성당보다 절이 훨씬 표현적이다. 적어도  돈만 낸다면 절에서는 문수를 위한 단독적인 행
사도 해주게 마련이다.
  진영은 자리에서 후딱 일어섰다.
  해가 서산에 아주 기울었다. 거리로 나왔다. 진영은 약국에서 '스트랩트 마이신' 한 개를 사들었다. 내
내 다니던 Y 병원에는 아무래도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약을 산 것이다. 갈월동의 아주머니는 Y 병
원의 의사가 같은 신자이니 믿고 다니라고 했다. 그러나 여태까지 주사 분량인 한 병에서 겨우 삼 분지 
일만 놓아 주고 이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을 안 이상 그 병원에 다시 갈 수는 없었다.
  약병을 만지며 길 위에 한동안 서 있던 진영은 집 근처에  있는 S 병원으로 들어간다. 이웃이기 때문
에 의사와 안면쯤은 있었다. 그러나 S 병원은 엉터리 병원이었다.
  진영은 모든 것이 서툴러 보이는 갓 데려다 놓은 듯한 간호원을  불안스럽게 쳐다보며 약병을 내밀었
다. 진찰도 하지 않고 주사만 맞으러 오는 손님을 의사는 언제나 냉대한다.  그래서 진영은 애시당초 의
사를 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환자를 진찰하고 있던 의사가  뒤로 고개를 돌렸을 때 진영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의사가 아니었다. 그나마도 근처에 사는 건달꾼 이었던 것이다. 진짜 의사는 그때야 서류 같
은 것을 들고 안에서 분주히 나오더니 바쁘게 밖으로  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청진기를 든 건달꾼은 진
영의 눈살에 켕겼는지 우물쭈물 해치우더니 간호원에게,
  "페니실링 이 그람!"
하고 밖으로 슬그머니 사라진다.
  '페니실링'이라면 병명을 몰라도 만병통치약으로 건달이는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진영이 멍청이 섰는데 간호원은 소독도 안 한 손으로 아주 서툴게 마이신을 주사기에다 뽑고 있었다. 
진영이 정신을 차렸을 때 주사기에 들어가고 있는 액체가  뿌옇게 보였다. 약이 채 녹기도 전에 주사기
에다 뽑은 것이다. 진영은 더 참지 못했다.
  "안돼요. 녹기도 전에, 큰일 날려구!"
  앙칼지게 소리치며 진영은 약병을 빼앗아 흔들었다.
  "페니실링'을 맞을려고 기다리고 앉았는 낯빛이 노란  할머니가 주사기를 들고 엉거주춤하니 서  있는 
간호원을 불안스럽게 보고 있다.
  병원 문을 나섰다. 이미 밤이었다.
  아까, '큰일 날려구' 하면서 약병을 빼앗던 자신의 모습이 어둠  속에 둥그렇게 그려진다. 참 목숨이란 
끔찍이도 주체스럽고 귀중한 것이고-몇 번이나 죽기를 원했던 자기 자신이 아니었던가.
  진영은 배꼽이 터지도록 밤 하늘을 보고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이 터지고 마는 순간부터 진영은 미
치고 말리라는 공포 때문에 머리를 꼭 감샀다. 사실상 내가 미쳤는지도 모른다. 모든 일은 미친 내 눈앞
의 환각일지도 모른다. 지금은 밤이 아니고 대낮인지도 모른다.
  진영은 머리를 꼭 감싼 채 집을 향하여 달음박질을 쳤다.
  밀짚모자를 쓴 냉차 장수가 뛰어가는 진영의 뒷모습을 얼없이 바라본다.
  달무리한 달이 불그스름 했다. 비라도 쏟아질 듯이 뭉뭉한 더운 바람이 불어왔다.
  진영의 어머니는 쌀을 팔러 온 중이 가고 난 뒤 백중날을 기다렸다. 백중날은 죽은 사람의 시식을 하
기 때문이다.
  백중 전날에 어머니는 문수의 사진과 돈 이 천 환을 가지고 절에 가서 미리 연락을 해두었다. 그래서 
다음 날 아침에는 날이 휘번해지자 진영이도 과실 바구니를 들고 어머니를 따라 집을 나섰던 것이다.
  B 국민학교를 돌아 약간 비탈진 길을 올라서니 이내 절  안마당이 보였다. 백중맞이를 하노라고 한창 
바쁜 절에는 동리 아낙네들이 와서 일을 거들고 있었다.
  큼직한 몸집을 한 주지중이 어머니를 보고 반색한다.
  "아이구 정성도 지극해라. 이렇게 일찍부터……."
  어머니는 눈에 손수건부터 가져간다.
  "시님. 우리 아이 천도 좀 잘 시켜 주세요. 부탁입니다. 너무 가엾어서……."
  콧물을 짠다. 어제 저녁에 실컷 어머니의 설움을 들었을 주지중은 새삼스럽게 그 말이 탐탁해질 리가 
없다. 주지중은 극히 사무적으로,
  "그런데…… 첫째로 하갔다던 서장 부인이 아직두 안 오시니 어떻거나."
  잠시 생각에 잠긴다.
  무슨 서장인지 알 수는 없으나 이 절에 있어서  대단히 소중한 손님인 모양이다. 어머니는 비굴한 웃
음을 띠면서 주지중을 쳐다본다.
  "시님, 그만 우리 아일 먼저 해주세요."
  주지는 한동안 어머니를 보고 있더니,
  "……그럼 댁부터 해드릴까……."
  주지는 그렇게 작정하고 마침 지나가는 중을 부른다.
  "아우님!"
  아우님이라고 불리는 신중은 돌아본다.  얼굴이 쪼골쪼골 쪼그라진 그  신중은 아직도 팽팽한 주지에 
비하여 훨씬 더 늙어 보인다. 게다가 표정마저 앙상하다.
  "어제 저녁에 이 천 환 낸 분인데 아직 서장댁이 안 오시니 우선 하나라도 먼저 끝내지요."
  주지의 말투는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한 것이었다.
  늙은 중은 대답대신 진영의 모녀를 훑어보더니 돈의 액수가 심에 차지  않아서 무뚝뚝하게 그냥 가버
린다.
  진영과 어머니는 법당 옆에 서로 등을 보이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바라보이는 산마루에 막 해가 솟고 있었다. 그 영롱한 아침을 진영은 벽화처럼 감동 없이 대한다.
  진영은 최저의 돈을 내고 첫째로 하겠다고 새벽부터 온 것이 얼마나 얌치머리 없는 것이었던 가를 생
각한다.
  공양을 들고 오던 젊은 중이 온다.
  "여보세요. 그 키 큰 시님은 안 계시나요?"
  어머니는 쌀을 팔러 온 중을 두고 묻는 말이다.
  "그이는 절에 잘 붙어 있지 않아요."
  젊은 중은 간단히 대답하고 법당으로 들어간다.
  곧 시식불공이 시작되었다. 진영은 늙은 중이 목탁을  두드리며 조으는 듯한 염불을 시작하자 적잖게 
실망했다. 몸집도 크고, 목소리도 우렁찬 주지중이 아니었던 것이 섭섭했던 것이다. 기왕이면 굿 잘하는 
무당으로 하는 따위의 기분이었다.
  중은 염불을 하면서 열심히 절을 하고 있는 어머니 옆에 멍청히 섰는 진영을 흘겨본다.
  보라 빛깔의 원피스를 입은 진영의 허리는 말할 수 없이 가느다랗다. 핏기 없는 얼굴에는 눈만 검다.
  중은 여전히 마땅치가 않아 진영을 흘겨본다. 진영은 중의  눈길을 느낄적 마다 재촉을 당한 듯이 어
색하게 엎드려 절을 했다. 진영은 중의 마음이 염불에 있지  않고 잿밥에 있다는 속담 같이 지금 저 중
의 마음도 염불에 있지 않고 절에 와서 예배를 하지  않는 내 태도에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 진영은 중
과 무슨 대결이라도 한 듯이 점점 몸이 피로해지는 것이었다.
  얼마 동안이 지난 것 같았다. 주지중이 씨근덕거리며 법당으로 쫓아왔다.
  "아우님 빨리 하시오. 지금 막 서장댁이 오셨구려. 대강대강 하시오."
  주지는 법당 구석에 걸어 둔  먹물들인 모시 장삼을 입으며 서두르는  것이었다. 늙은 중은 불전에서 
영전으로 자리를 옮긴다. 제대로 불경이나 끝마쳤는지 의심스러웠다. 아까 공양을  나르던 젊은 중이 이
번에는 넓다란 그릇을 들고 들어온다. 그는 진영의 모녀를 돌아보며 영가 앞으로 오라고 손짓한다.
  진영은 문수의 사진이 놓인 앞에 가서 엎드렸다.  차가운 마룻바닥에 처음으로 뜨거운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쏟아지는 것이었다. 문수의 손결이 생생하게 마음 속에 느껴진 것이다.
  "문수야, 많이 많이 먹어라. 불쌍한 내 녀석아!"
  진영은 어머니의 목소리를 이처럼 슬프게 들은 적은 없었다. 어머니는 향을 꽂고 빨빨한 은행에서 갓 
나온 듯한 십 환짜리 스무장을 영전에 놓았다. 진영도 일어서서 향을 꽂았다.  그리고 돌아섰을 때 중이 
목을 길게 뽑아가지고 영전에 놓인 돈을 기웃거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 빨빨한 새돈은 흡사 백환
권으로 보이는 것이다. 진영은 송구스런 생각에서 고개를 푹 수그리고 말았다.
  그릇을 들고 온 젊은 중이 돈을 옆으로 밀어 놓으면서 시무룩하게,
  "영가 노자가 너무 적군요. 이 세상이나 저 세상이나 그저 돈이 있어야지, 동무하고 쓰고 놀다가 돌아
가지 않겠어요?"
  진영은 머리 속에 피가 꽉  차오는 것을 느낀다. 돈을 그렇게밖에  준비하지 못한 어머니의 인색함을 
격심히 저주하는 것이다.
  젊은 중은 들고 온 그릇에다 영가 앞에 차린 음식을 조금씩 덜어 놓는다. 나물, 떡, 자반, 과실, 그렇게 
차례차례 손이 간다. 마침 먹음직스런 약과에 손이 닿자 별안간 목탁을 치던 중이,
  "그건 그만두구려!"
  바락 소리를 지른다. 젊은 중은 진영을 힐끗 보면서  총총히 바깥 시식돌로 음식을 버리러 나가는 것
이다.
  진영은 기가 막혔다. 처음부터 거래임에는 이의가 없었다. 그러나 이쯤되면  어지간한 감정도 폭발 아
니할 수 없었다. 진영은 양손으로 얼굴을 폭 쌌다.  울음이 터진 것이다. 누구에게도 향할 수 없는 역정
을 그는 울음 속에다 내리 퍼부었다. 울음 속에 그 목을 감던 문수의  손결이 느껴진다. 미칠 듯한 고독
과 그리움이 치솟는 것이었다.
  음식을 버리고 돌아온 젊은 중은 과실을 모으며,
  "이걸 가져 가셔야지. 보자기를……."
하며 어머니를 돌아본다. 진영은 새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젊은 중을 노리며,
  "일 없소. 그만두시오."
  진영의 목소리는 악을 쓰는 것 같았다. 일을 다 마치고 법당밖에 나온 늙은 중이,
  "왜 가져 온 걸 안 가져 가슈."
  쳐다보지도 않는 진영이 대신 어머니가,
  "뭐 그걸……."
  진영의 얼굴을 어머니는 숨어 본다. 늙은 중은 침을 꿀꺽 삼키며,
  "댁 같으면 중이 먹고 살갔수."
  진영의 눈이 번득였다.
  "조반을 자셔야 할 텐데 너무 일러서 찬이 제대로 안 됐어요. 좀 기다리실까요."
  젊은 중은 그런 말을 남기고 가버린다.
  진영은 법당 축돌 위에 주저앉았다. '이 세상이나 저 세상이나 그저 돈이 있어야지요' 하던 말이 되살
아온다. 물론 처음부터 거래였다. 그렇다면 화폐의 액수에 따라 문수에 대한 추모의 정이 계산된단 말인
가. 진영이 그러한 울분에 젖어 있을 때 말쑥하게 차려입은  그 서장의 부인인 듯 싶은 젊은 여인이 주
지중에게 인도되어 법당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잠깐 후  불경 읽는 소리가 저렁저렁하게 밖으로 흘러나
왔다. 잠들었던 부처님이 처음으로 일어나서 귀를 기울일 만한 뱃속에서  밀어낸 목소리였다. 진영은 발
딱 일어선다.
  "어머니 그냥 갑시다."
  밥을 얻어먹으러 절에 온 것은 분명히 아니다. 그냥  걸어가는 진영을 만류 못할 것을 아는 어머니는 
뜰에 서성거리고 있는 늙은 중에게,
  "그만 갈랍니다. 시님."
  "이크, 아침이나 잡수시지…… 가려오?"
  굳이 잡지는 않았다. 그는 절문까지 전송을 하며,
  "당신네들 같으면 중이 먹고 살갔수."
  진영은 울화보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내리막길에서 잡풀을 뽑으며 진영은 말없이 울었다. 여비도  떨어진 낯선 여관방에다 문수를 혼자 두
고 가는 것만 같은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이었다.
  진영은 불덩어리 같은 이마를 짚는다.

  한여름 내내 진영은 앓았다. 애당초 극히 경미하게 발생한 폐결핵이 전연 방치되었기 때문에 점점 악
화되어 갔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다른  병까지 연속적으로 병발하는 것이다. 찬물만  마셔도 배탈이 났
다. 눈병이 나고 입이 부르트고 그것은 일쑤였다. 앓다 못해 귀까지 앓았다. 그리고 수년 내로 건드리지 
않고 둔 충치가 일시에 쑤시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욱신거렸다.
  진영은 진실로 하나의 육신이 해체되어 가는 과정에서  몸서리치는 무서움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쨍
쨍하게 내리쬐이는 햇빛 아래 늘어진 한 마리의 지렁이 같은 생명이었다.
  이러한 육신과 더불어 정신도 해체되어 가는 과정 속에 진영은 있었다.
  밤마다 귓가를 울려오는 아이의 울음 소리, 산이, 언덕이, 집이  무너지는 소리, 산산이 바스라진 유리
조각이 수없이 날아와서 얼굴 위에 박히는 환각, 눈을 감으면 내장이 터진  소년병의 얼굴이, 남편의 얼
굴이, 아이의 얼굴이, 분홍빛, 노랑빛, 파랑빛, 마지막에는 시꺼먼 빛, 그런 빛깔로 차례차례 뒤덮여 가며
는 드디어 무한정한 공간이 안개처럼 진영의 주변을 꽉 싸는 것이었다.
  소리와 감각과 색채, 이러한 순서로 진영의 신경은 괴도에서 무너져 나갔다.
  진영은 그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내버려  두었던 몸을 이끌고 H 병원으로 갔다.  그러다가 그곳에도 
일 주일이 멀다고 그만 가는 것을 중지하고 말았던 것이다.
  얼마 남지 않은 돈은 생활비에나 써야 한다는 이유도 있었다. 그러나 직접의 동기는 외국제 주사약의 
빈 병들을 팔아 버리는 장면을 본 때문이다.
  Y 병원에서는 주사약의 분량을 속였고, S 병원은  엉터리였다. 그리고 H 병원에서는 빈 약병을 팔았
다.
  진영은 간호원이 빈 병을 헤아리고 있을 때 짐작으로 가짜 주사약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H 병
원만이 빈 약병을 파는 것은 아니다.  또 그 빈 병만 하더래도  반드시 가짜 약병으로 사용된다고 말할 
수도 없다. 잉크병으로 물감병으로 혹은  후추가루병으로 흔히 이용되고 있다. 그렇지만  사실 거리에는 
가짜 주사약이 범람하고 있는 것이다. 상인들은  의연히 그런 가짜를 진짜 속의  진짜라고 나팔 불었다. 
진영은 그것을 생각하니 인술이라는 권위를 지닌  이사가 그런 상인 따위들 같아서  신뢰감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물론 아무리 대수롭잖은 빈 병일지라도 그것은 전연 그 의사의 소유이며 처분의 자유는 그의 
기본 권리에 속한다. 그래도 진영은 그의  기본적 권리보다 무수히, 마치 페스트처럼  눈에 보이지 않게 
만연되어 가는 가짜 주사약 생각만 하는 것이었다.
  해바라기의 꽃이 씨앗을 안았다.
  며칠 전에 아주머니가 원금만은 돌려 주겠다던 약속대로 마지막 남은 만 환을 가지고 왔다. 이것으로 
원금 십만 환은 다 받은 셈인데, 조금씩 조금씩 보내 준 돈은 지금 집에 한푼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주머니는 돈을 주고 난 다음 갈려고  일어서면서 문수의 위패를 절에다 모신 데  대한 불만을 말했
다. 그리고 왜 그런 우상을 숭배하느냐고 나무래는 것이었다. 진영은 어느 것이면 그저 멍멍히 아주머니
를 쳐다보았던 것이다. 자기 자신이 지닌 모순을 설명할 도리가 없어서 그랬던 것이다.
  추석날 이었다.
  진영은 어머니가 절에 가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도리어 정성들여서 사다 넣은 실과를 바구니에 넣어 
주었다. 배, 사과, 포도, 밤, 대추, 먹음직한 과자도 서너 가지 있었다.
  어머니가 바구니를 들고 걸어가는 뒷모습을 문 앞에서 바라보고 섰던 진영은 '당신네 같으면 중이 먹
고 살갔수' 하던 말이 문득 생각났다. 문수가 먹을  것을 중이 먹다니, 아깝다. 밉살스럽다. 그러나 진영
은 다음 순간 부끄럼 때문에 얼굴이 붉어졌다. 이러한 파렴치한 생각을 내가 왜 했던고-.
  진영은 문을 걸고 뒷산으로 올라갔다. 울고 싶었고, 외치고 싶은 마음 에서였다.
  산에는 게딱지만한 천막집이 군데군데 서 있었다. 들꽃  한 송이, 나무 한 뿌리 볼  수 없는 이곳에는 
벌써 하나의 빈민굴이 형성되어 말이 산이지 이미 산은 아니었다.
  짜짜하게 괴인 샘터에서 물을 긷는 거미같이 가늘은 소녀의  팔, 천막집 속에서 내미는 누렇게 뜬 얼
굴들-진영은 울고 싶고, 외치고 싶은 마음에서 집을 나와  산으로 올라온 자기 자신이 여기서는 차라리 
하나의 사치스런 존재였다는 것을 뉘우친다.
  진영은 한참 올라와서 어느 커다란 바위에 가서 앉았다.
  산등성이에서 바라보이는 시가는 너절했다. 구릉을 지운 곳마다 집들이 마치 진딧물 모양으로 따닥따
닥 붙어 있었다. 그 속에는 절이  있고, 예배당이 있고, 그리고 서양적인 것,  동양적인 것이 과도기처럼 
있고, 조화를 깨뜨린 잡다한 생활이 그 속에 있었다.
  이러한 도시 속에 꿈이 있다면 그것은 가로수라고나 할까! 보랏빛이 서린 먼 산을 스쳐가는 구름이라
고나 할까.
  진영은 얄팍한 턱을 괴인다.
  꿀벌떼처럼 도시의 소음이 귓가에 울려오는데 고급 승용차가 산장이 있는 고개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진영은 산등성이에서 그것을 보니 그것은 별것이 아닌 한 마리의 딱정벌레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꼬물
꼬물 기어가는 딱정버러지.
  진영은 새삼스리 사방을 두리번 거렸다. 무의미하기 짝이 없는 충돌들이다.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진
영은 이유 없이 자지를 다잡아 보았다. 사실  그러했다.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딱정벌레 같아서 어쨌단 
말인가. 진딧물 같고, 가로수, 구름, 그래서-.
  진영은 머리를 쓸어올린다.
  모든 괴롬은 내 속에 있었다. 모든 모순도 내 속에 있었다. 신도, 문수의 손결도 내 속에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곳에도 실제 있지는 않았다. 나는 창기처럼 절조 없이  두 신전에 참배했다. 그리
고 제물과 돈을 바쳤다. 그러나 그것 역시 문수와  나의 중계를 부탁한 신에게 주는 수수료였는지도 모
른다. 그 수수료는 실제에 있어서 주의 몇 끼의  끼니가 되었다. 결국 나는 나를 속이려고 했다. 문수는 
아무 곳에도 있지 않았을 것이다.
  진영은 이마 위에 흘러내리는 숫한 머리를 다시 쓸어올린다. 파르스름한 손이 투명할 지경이다.
  신비라고, 예고라고, 꿈, 아니야 그것은 우연의 일치였지. 문수의 죽음,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인위
적인 실수 아니었던가. 인간은 누구나 나이 들면 죽는다고? 물론 죽는  게지, 노쇠해서 죽는 거지……설
령 아이가 그때 이미 죽을 목숨이었다고 치자. 그래도 그렇게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도수장의 망아지처
럼……사람을, 사람을 좀 미워해야겠다.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를  신을 왜 생각은 해. 아니 아까는 없다
고 하고선……아니야 모르겠어. 사람을 좀 미워해야겠다.  반항을 해야겠다. 모든 약탈적인 살인자를 저
주해야겠다.
  진영은 술이라도 마신 사나이처럼 두서도 없는 혼자말을 언제까지나 중얼거리고 있었다.
  진영의 해사한 얼굴에 그늘이 진다. 한없이 높은 가을 하늘에 구름이 지나가는 것이었다. 시가에는 마
치 종이를 찢어 놓은 것 같이 추석치레가 오가고 있었다.
  진영의 열에 들뜬 눈이 그것을 쳐다보며 일어선다. 그에게는 반항정신도  아무것도 없었다. 허황한 마
음의 미로가 끝없이 눈앞에 뻗어있을 뿐이다.
  진영이는 버릇처럼 머리를 쓸어 올리며 산을 내려온다.
  천막집에서 내미는 누렇게 뜬 얼굴들, 진영은 또다시 이곳에 있어서는 내 자신이 차라리 하나의 사치
스런 존재라는 아까의 뉘우침을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음력 설이 임박해진 추운 날, 갈월동 아주머니가 목도리를 푹 뒤집어 쓰고 찾아왔다. 웬일인지 몸가짐
이 평소보다 좀 산란해 보였다.
  "나 의논할 게 좀 있어서 왔는데…… 참 기가 막혀……."
  "……."
  아주머니는 말을 꺼내기가 거북한 듯이 가만히 앉았다가
  "저, 저 말이야 돈을 좀 빌려 준 사람이 죽었구나. 어떻게 해."
  진영은 의심스럽게 아주머니를 처다본다.
  "지난 오 월 달에 가져간 돈을 이자 한 푼 못 받고 그만……."
  진영의 변해가는 표정을 보고 아주머니는 입을 다물어 버린다. 오 월이면 진영의 곗돈을 찾을 달이다. 
그리고 계가 끝나는 달이기도 했다. 그것뿐 아니다. 벌써 몇 달 전부터 곗돈을 받을려고 몸이 달아서 다
니던 사람이 몇 명 있었던 것이다.
  "빌려준 돈이 얼마나 돼요."
  진영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오십 만 환이야."
  진영은 속으로 놀랐다. 계를 해서 빚만 뒤집어쓴 줄 알았는데 그런 대금의 비밀거래를 하고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진영은 차갑게 아주머니를 처다본다.
  아주머니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자식도 남편도 없는 내겐 그것만이 남겨진  것이었어. 낸들 얼마나 돈을 떼였니. 설마  내가 잘 되면 
빚이야 갚고 살겠지만 그때 그 돈마저 내주게 되면 난 아주 영영 파멸이지."
  진영은 어디 밑천 든 장사였더냐고 오금을 박아 주고 싶었다.
  아주머니는 한참만에 눈물을 닦고 일의 경위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 내용인즉 죽은 사람은 돈을 쓴 
회사의 전무였으며 오 월 달에 빌려간  오십 만 환의 이자라고는 한푼도  받아 본 일이 없다는 것이다. 
불안해진 아주머니는 전무에게 원금을 뽑아달라고 졸랐으나 영 내놓지 않아서 생각다 못해 같은 신자에
게 의논을 했더니 그의 남편인 김씨가 일을 봐 주겠노라 하기에 일을 맡겼다는 것이다. 그 김씨란 사람
이 수단이 비상하여 마침내 사장 명의로 된 약속 어음을 받게 되고 그 며칠 후에 전무는 교통사고로 죽
은 것이라 한다. 사장 명의로 된 약속어음을 받은  것은 무엇보다도 다행한 일이었으나 웬 까닭인지 김
씨란 사람이 약속어음을 도무지 주지 않고 무슨 협잡을 하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를 의심한다거나 비위를 거슬려 놓는다면 돈 준 사람도  없는 지금, 여자인 내가 어떻게 사장이란 사람
에게 받아낼 수도 없고, 이렇게 속이 탄다고 하면서 아주머니는 가슴을 치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진영은,
  "대관절 그 전무란 사람을 어떻게 알고서 그런 대금을 주었어요."
  "저…… 저 왜 그 상배 있잖아. 그 상배 아버지야."
  아주머니는 얼굴이 빨개진다. 진영이는 기가 딱 막혔다. 그러고 보니 사업 때문에 상배 아버지가 서울
로 오게 될 거라고 하던 말이 생각났다.
  "산뜻하게 종교를 이용했군요."
  아주머니는 진영의 눈길이 부신 듯이 눈을 내리깐다.
  "글세 지금 생각하니 모두가 계획적이었어. 영세받은 것만 해도……."
  "신용 보증으론 종교보다 더 실한게 있어요?"
  아주머니는 비꼬는 진영의 말에 풀이 죽는다. 진영은 풀이 죽는 아주머니로 부터 눈을 돌린다.
  영세를 받았기 때문에 믿고 돈을 준 아주머니, 신자이기 때문에 믿고 일을 맡긴 아주머니, 단순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진영은 다시 아주머니를 쳐다보았다. 그의  약점을 추궁할 마음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서 어떡하실 작정이에요."
  "글쎄 말이다. 그래서 의논이지."
  "지 생각 같아서는 김씨가 일은 봐주되 어음은 아주머니가 가지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어음을 찿아 간다고 일을 안 봐 주면."
  "그럼 김씨가 그이에게 딴 야심이 있다고 봐야지요."
  "그럼 김씨가 일 안 봐 줄 적에 너가 좀 협조해 줄 수 없을까?  여자 혼자니 아무래도 호락호락 보일 
것 같아."
  아주머니의 말투는 애원이었다.
  "글세……."
  그런 일에는 아주 딱 질색이었다. 그러나 진영은 약점을 안 후 거절을 해버리는 것이 무슨 악마 취미 
같아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같이 저도 가지요."
  그러자 아무것도 모르는 어머니가 점심을 차려왔다. 점심을 먹으면서 아주머니는 한결 마음이 후련해
졌는지 여러 가지 잡담을 꺼냈다.
  "글세 돈이 있어도 문제야. 이제 당초에 겁이 나서 남 줄 생각이 없어."
  진영은 무표정하게 밥을 삼키고,
  "아무 말씀 마시고 돈 찾거던 장사허세요. 체면이고 뭐고…… 저도 자본이나 장만해서 장사할래요."
  "너야 취직하면 되지."
  "취직이 그리 쉬운가요? 하다 안 되면 거리빵이라도 구어 팔아야지요."
  "너야 공부 많이 했으니까 할려면 취직 못할 것 없잖아. 난 정작  장사라도 해야겠어. 그러나 돈 벌이
긴 계가 제일이야. 힘 안 들고……."
  아주머니는 아무렴 그렇겠지 그런 배짱이면…… 하다 말고 아주머니의 눈을 들여다본다. 아무런 악의 
그늘도 없는 맑은 눈이었다.
  "아무튼 돈을 벌어야 해. 돈이 제일이야. 세상이 그런걸……."
  이번의 말투에는 어느 상인지 모르게 저지른 자신의 일에 대한 짜증과 반발 같은 것이 있었다.
  "그럼. 옛날 속담 말마따나 자식을 앞세우고 가면 배가 고파도 돈을 지니고 가면 든든하다고 안  하던
가."
  어머니의 맞장구다.
  진영은 가벼운 현기증을 느낀다. 시야 속에서 그들의 얼굴을 지워 버리듯이 얼른 고개를 돌린다.
  "형님, 이래서 천당 가겠습니까? 돈, 돈 하다가 호호……."
  아주머니는 까르르 웃으며 일어서서 장갑을 낀다.
  진영은 그 웃음 속에서 또 불안과 자포에 대한  반발을 느낀다. 진영은 고개를 들어 아주머니를 쳐다
보았다. 역시 괴롭고 고독한 사람이고-.
  아주머니가 가버린 뒤 진영은 자리에 쓰러졌다 솜처럼 몸이 풀어진다.
  진영은 진영은 방 속에 피운 구멍탄 스토브에서 가스가 분명히 지금 방에서 새고 있는 거라고 생각한
다. 방 안에 가득히 가스가 차면 나는 죽어 버리는 거라고 생각한다.
  어느새 진영은 괴로운 잠이 드는 것이었다.
  내장이 터진 소년병이 꿈에 나타났다. 진영은 꿈을 깰려고 무척 애를 썼다.
  "모레가 명절인데 절에다 돈 천 원이나 보내야겠는데……."
  어렴풋이 들려오는 어머니의 말소리다. 진영은 몸을 들치며 눈을 떴다.
  "귀신이나 사람이나 매한가진데…… 남들은 다 저 몫을 먹는데 우리 문수는 손가락을 물고 에미를 기
다릴 거다."
  잠이 완전히 깬 진영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외투와 목도리를 안고 마루에 나와 그것을 몸
에 감았다.
  진영은 부엌에 성냥 한 갑을 외투 주머니에다 넣고 집을 나갔다.
  오랫동안 마음 속에서만 벼르던 일을 오늘에야말로 해치울 작정인 것이다.
  진영은 눈이 사북사북 밟히는 비탈길을 걸어 올라간다.  진영은 고슴도치처럼 바싹 털이 솟은 자신을 
느낀다.
  목도리와 외투 자락이 바람에 나부낀다. 그러며는 잡나무 가지 위에 앉은 눈이 외투깃에 날라 내리는 
것이었다.
  진영은 절로 가는 것이다.
  진영이 절 마당에 들어갔을 때 '당신네들 같으면 중이 먹구 살갔수' 하던 늙은 중이 막 승방에서 나오
는 도중이었다. 절은 기괴하니 다른 인적기는 통 없었다.
  진영은 얼굴의 근육이 경련하는 것을 의식하며 중 옆으로 다가선다.
  "저 말이지요, 저희들이 이번에 시골로 가는데 아이 사진과 위패를 가지고 가고 싶어요."
  고개를 숙인 채 진영은 나지막하게 말한다. 허옇게 풀어진 눈으로 진영을 쳐다보던 중이 겨우 생각이 
난 모양으로,
  "이사를 하신다구요? 그럼 어떠우. 그냥 두구려. 명절에 우편으로라도 잊어버리지 않으면 되지."
  진영은 숙인 고개를 발딱 세우더니 옆으로 홱 돌리며,
  "참견할 것 없어요. 사진이나 빨리 주세요!"
  쏘아부친다. 중은 좀 어리둥절해 하더니 무엇인지 모르게 중얼중얼 시부렁거리며 법당으로 간다.
  이윽고 중이 문수의 사진과 위패를 가지고 나오자 진영은 그것을 빼앗듯이  받아들고 인사말 한 마디 
없이 절 문밖으로 걸어간다.
  화가 난 중은 진영의 뒷 모습을 꼬누어 보다가 중얼중얼 시부렁거리며 뒷간으로 간다.
  진영은 중에게 화를 낸 것은 아니다. 다만 진영으로서는 빨리 사진을 받아가지고 절 문밖으로 나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초조했던 것이다.
진영은 비탈길을 돌아 산으로 올라간다. 올라가면서 진영은 이리저리 기웃거린다.  어느 커다란 바위 뒤
에 눈이 없는 마른 잔디 옆에 이르자 진영은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그리하여 문수의 사진과 위패를 놓
고 물끄러미 한동안 쳐다본다.
  한참만에 그는 호주머니 속에서 성냥을 꺼내어 사진에다 불을 그어댄다.  위패는 이내 사루어졌다. 그
러나 사진은 타다 말고 불꽃이 잦아든다. 진영은 호주머니 속에서 휴지를 꺼내어 타다 만 사진 위에 찢
어서 놓는다. 다시 불이 붙기 시작한다.
  사진은 말끔히 타버렸다. 노르스름한 연기가 차차 가늘어진다.
  진영은 연기가 바람에 날려 없어지는 것을 언제까지나 쳐다보고 있었다.
  "내게는 다만 쓰라린 추억이 남아 있을 뿐이다. 무참히 죽어 버린 추억이 남아 있을 뿐이다."
  진영의 깎은 듯 고요한 얼굴 위에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겨울 하늘은 매몰스럽게도 맑다. 잡나무 가지에 얹힌 눈이 바람을 타고 진영의 외투깃에 날라 내리고 
있었다.
  "내게는 아직 생명이 남아 있었지. 항거할 수 있는 생명이."
  진영은 중얼거리며 잡나무를 휘여잡고 눈 쌓인 언덕을 내려오는 것이었다.

    모반(지은이: 오상원)
  1930년 평북 선천에서 태어나 서울대 문리대 불문과를 졸업했다. 1953년 [한국일보]신춘문예에 [유예]
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1958년에 동인문학상을  수상했으며, 1985년에 작고했다. 소설집으로 [백지의  기
록]이 있다.

  심사평
  오상원씨의 [모반]은 정당 난립 좌우익의 혈투가 치열했던  해방 1년후의 한 시기를 포착하여 정치적 
테러리스트의 심중에 강력하게 살고  있는 휴머니티를 빈틈없는 구성에  조져놓은 작품이다. 격량 같은 
시대 분위기도 나타났고 무었보다 구성에 장점이 있다.  하수하는 장면을 직접묘사하지 않고 그 전후의 
묘사나 서술로 함축을 보여준 것은 고도한 기교라고  하겠다. 심사석상에서 논의된 문장에 대한 소견을 
말한다면 씨의 문장은 군소리가 없는 직선적인 것이어서 스피드와 함께 박력으로 독자에게 어필해 오나 
자칫하면 침착성을 잃을 우려가 있고 무엇보다 우리말의 어휘가 부족하고  따라서 우리말로서의 어감의 
미에 시련이 요망된다. 그러나 간결, 정확, 속도가  현대 문장의 특색이며 이것이 산문 문장의 본도라고 
한다면 씨의 문장은 그런 것을 지향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 안수길.
  이작가의 특질이자 장점처럼 돼 있는, 허지만 내가 보기에는 결함의 하나인 관념적 어휘의 남용과 거
기 따르는 추상적인 구성등이 이 [모반]에서는 퍽 가시어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 이 작품에 있어
서도 군데군데 필요 이상의 흥분된 용어와 작자 취미의 과장된 대화 등이 눈에  거슬림을 어찌할 수 없
다. 구성면에 있어서도 과거의 삽화가 좀 더  유기적으로 삽입됐어야 전체적인 통일감이 강해졌을 것이
다. 물론 의식적으로 얼마든지 그것들을 헝클어져  놓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삽화와 삽화가 
서로 인력을 갖고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어야만 할 것이다. 황순원.

  4279년 늦가을, 해방 만 일년의 환희가 혼돈된 갈등 속에 기울어져 가던 어느 날 저녁, - 커다란 벽보
가 신문사 게시판마다 나붙고, 가는 곳마다 커다랗게 쓴 먹글씨 위에 수없이 줄을 긋고 내려간 붉은 잉
크의 무질서한 자국이 시민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다. 벽보를 급히 읽어내려가는 의문에 가득 찬 시
민들의 표정은 삽시간에 창백하게 질리고 불안한  듯 서로 말없이 얼굴들만 마주보고 있었다.  호외! 호
외! 네모진 종잇장은 특호 활자를 싣고 가두에서 가두로 쏜살같이 퍼져가고 있었다.
  여기는 어느 뒷골목에 들어앉은 조그만 선술집, 술취한  실없는 친구들이 문을 나서기가 바쁘게 벽에 
대고 오줌을 흘린 탓인지 구석지마다 해가 바뀌어도 축축히 습기가 떠돌고  퀴퀴한 내음새가 풍기고 있
다. 아직도 시간이 이른 탓인가, 호젓하다. 다만 삽십이 넘어 뵈는 두 남자가 아까부터 술잔을 기울이며 
무언지 조용히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틈틈히 정객들의 이름이 그들의 입 사이로 오르내리는 것을 보
아 정담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들과는 달리 테이블을 하나 건너서 이쪽 구석지에 혼자 앉아 술을 마
시고 있던 25,6세 가량의 청년은 자주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가는 또 술잔을 훅 들이키곤 하는 
폼이 보기에도 초조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청년의 눈가에는 일종 불안한 그림자가 이따금 스쳐 지나가
고 마저 있었다. 
 "그러니까 삼팔선 철폐 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해야 돼 "
  마주 앉아 술을 기울이고 있던 둘 중 키꼴이 장대한 친구가 이렇게 말을 하고 나서 술에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쓱 문질렀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것을 알고 움직여야 하거든, 지금 삼팔선 철폐운동을 극구 주도하고 있는 자들  말
이야. 실은 겉으로는 그러지만 그들 중에는 실지  마음속으로는 삼팔선이 그대로 어느 정도의 시기까지 
지속되기를 원하고 있는 자들도 있거든, 특히 이것은 좌익계열 중에 농후한데 말이지. 결국 자기들의 세
력 기반을 어느 정도 만들 기간이 있어야 한다는 거거든."
  둥근 얼굴에 비하여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가느다란 눈을 가진 상대방은 그 어울리지 않는 눈처럼 음
성도 가늘었다. 
  "그러나 그런 자는 그 즉시로 해치우면 되는 거야."
  가느다란 눈을 가진 상대방은 보기에도 날카로이 얼굴을 지푸렸다. 
  "테러가 정치의 전부는 아니야. 정치를  위해서 필요불가결한 한 요소일 뿐이지.  그것도 이용을 위한 
요소일 뿐이야."
  그 순간 이쪽 구석지에서 술을 먹고 있던 청년이 힐끔 그들을 한 번 노려보았다. 청년의 얼굴은 어둡
게 흐려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술집 시근부리 아이가 네모진 종이 쪽지 한 장을 들고 헐레 벌떡거리면서 뛰어들어왔다. 
  "아저씨, 큰일났어요. 길거리마다 사람들이 막 웅성거리고 야단이예요." 
  주인 할아버지가 주춤거리며 종이 쪽지를 받아들었다. 술을 먹고 있던 삽십이 넘어뵈는 두 남자도 고
개를 들고 주인을 쳐다보았다. 주인 할아버지는 돋뵈기 안경  너머로 종이 쪽지를 읽다 말고 훅 한숨을 
내쉬었다. 주인할아버지에게 시선을 모아가고 있던 가느다란 눈을 가진 친구가 곧 그 종이 쪽지를 받아
들고 읽었다. 키꼴이 장대한 친구도  곧 따라 읽었다. 호외였다. 그들은  호외를 다 읽기가 바쁘게 거의 
충동적으로 그것을 꾸겨 쥐었다. 
  "아까운 인물이 또 하나 죽었군!"
 잠시 그들 사이에는 말이 없었다. 긴장이 그들의 얼굴을 가로 덮고 있었다. 
 "누가 쏘았을까?"
 "물로 적대방이겠지. 알 수 있어. 결국 그자들일 거야."
 그러나 잠잠히 생각에 잠겨 있던 눈이 가느다란 친구는 곧 입을 열었다. "하지만 반드시  적대방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거야. 암살이란 반드시  정적에 의해서만 행해지는 건 아니니까.  어쩌면 가장 긴밀히 
손잡았던 쪽일지도 모르지. 조건도 유리하거든, 자기네가 죽이고 나서도 표면적으로는 최대의 애도를 표
시하고 나오는 거니까. 결국 민중만이 속는거지, 정치란 게 원래 그런 거거든...."
 이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은 심각하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구석지에 앉아서 혼자 술을 먹고 있던 청년
이 그때 고개를 들고 힐끗 또다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호외를 꾸겨 쥐었던 키꼴이 장대한 친구가 청년의 시선과 마주치는 순간 그는  꾸겨 쥐었던 호외를 다
시 펼쳐 들고 청년앞으로 다가와서 테이블 위에다 아직 주름살이 펴지지 않은 호외쪽지를 내려놓았다. 
 "여보시오, 이걸 좀 읽어 보시오"
 그러나 청년은 호외 쪽지를 보려고도 않고 나머지 술을 쭉 들이켜고 난  다음 무표정하게 돈을 치르고
는 이야기를 해온 사람에게 한눈도 두지 않고 그대로 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지저분한 책상과 겉상이 흩어진 사무실, 어둑침침하고 행길가의 소음이 먼 거리를 두고 뜨음히 들려오
는 것을 보아 쑥 들어박힌 방임이 틀림이 없다. 
 "자-- 건배다, 인제 오겠지."
 맑은 액체를 담은 투명한 유리컵은 경쾌한 음향을 남기며 서로 가벼이 부딪쳤다. 
 "멋진 놈이야. 가뜬하게 해치워 버리곤 하거든, 난  실패할까 봐 몹시 초조했었는데, 내가 담배를  붙여 
무는 순간 총성이 두 발 귓전을 울리고 지나가는 거야.  내가 담배를 꺼내어 물 때가지도 그 친구는 담
배가게 앞에서 건들먹거리고 서 있었는데 어느 사이에  쏘았는지 바람 같다니까... 그런데 이 친구가 왜 
이렇게 늦어...."
 세모진 얼굴에 눈이 가늘게 찢어진 게 날카롭기보다는 독기가 엿보이는  이 친구는 팔뚝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그러나 시계를 들어다보던 시선을 곧 창문 쪽으로  겼다. 
 문을 열고 들어서 친구는 눌러 쓴 중절모자를 가볍게 위로 치켜 올리면서 실내에 있는 두 친구를 마주
보고 고개를 한번 끄덕 한 다음 손에 들었던 신문지를 그들에게 내던졌다. 
 "기사를 좀 읽어 봐, 하여튼 만사 오케이야."
 하고 이 친구는 또 한번 고개를 혼자 끄덕하였다. 실내에 있던 두 친구는 신문을 곧 펼쳐 들었다. 
 범인은 무직 청년, 의식불명으로 배우 수사 불능, 사진은 상금도 의식을 잃고 얼굴의 형체도 갖추지 못
하고 스러져 누워 있는 범인, 큰  제목과 사진 설명만을 급히 읽어  내려가던 세모진 얼굴의 청년은 훅 
얼굴에 미묘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여튼 이번도 멋진 성공이야!"
 "그런데 다음 신문을 또 봐요."
 중절모를 쓴 친구는 벗겨진 이마 위에 잔주름을  지으면서 눈매를 한번 씰룩해 보였다. 그러나 세모진 
얼굴의 입가에는 미묘한 웃음이 상기 그대로 떠돌고 있었다. 친구가 곧 다음  신문을 펼쳐 들었다. 과연 
범인은 누구? 체포된 피해자는 진범이 아닌 듯,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는 소녀는 체포된 범
인(?)의 여동생, 아래는 아들의소식을 듣고 실신한 노모
 "기사를 읽어 봐"
 "여동생의 이야기..... 어머니의 오랜 병환으로  오빠는 오늘도 돈을 구하러  간다고 거리에 나갔습니다. 
오빠가 그런 일을 결코 할 리가 만무입니다. 하나님 앞에 맹세합니다. 결코  오빠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
을 .......( 소녀는 울음에 목메어 기자 질문에 말을 더 계속하지 못하고 있었다)."
 기사의 내용을 들으면서도 세모진 날카로운 청년의 입술에선 연상 미묘한  웃음이 떠나지를 않고 있었
다. 
 "하여튼 일은 끝났어. 그 이외의 일은 상관할 바 없거든. 자--, 김도 한잔 들어"
 중절모를 쓴 친구는 잔을 받아들였다. 세모진 얼굴의  청년은 술을 잔에 따르고 나서 신문을 들여다보
고 있는 친구를 잠깐 눈 주고 섰다가 빼앗듯이 신문장을 끌어당겨 차곡차곡 개어서  그의 포켓 속에 집
어 놓어주었다.
 "자식이 보면 좋찮어. 주머니에 넣어뒀다가 집에 가서 봐요. 그런데 김?"
 중절모를 쓴 친구는 술을 쭉 들이켜고 잔을 내려놓으며 세모진 얼굴을 마주보았다.
 "정 선생한테 연락 취했어? 준비는 됐겠지?"
 중절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도 근사한 걸로 골라다 놨을 테지. 응?"
 중절모는 대답 대신 씩 웃었다. 세모진 얼굴의 가느다란 눈 가장자리에도  웃음이 훅 스쳐가고 있었다. 
그러나 곧 그 눈 가장자리에는 어두운 그늘과 함께 수없는 물결이 주름잡혀갔다. 
 "요즘 자식 태도가 좀 이상해 뵈지 않아?"
 "자기 어머니가 죽은 다음부터 좀 저조해지긴 했어."
 포켓 속에 꾸겨 넣은 신문을 다시 끄집어 내어 들던 신경질적인 뻬쪽마른  친구가 시원찮은 어조로 중
얼거렸다.
 세모진 얼굴은 입맛이 쓰게 침을 바닥에 뱉았다.
 "그것보다 주관에 동요가 생긴 게 아냐. 응?"
 그 순간 세모진 얼굴은 급히 말을 끊고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문이  드르륵 열리기 때문이었다. 찬 
바람이 쏜살같이 방안을 휩쓸고 지나갔다.
 " 왜 이렇게 늦었어? 하여튼 축하해."
 세모진 얼굴은 술컵을 쳐들고 입술 가득히 웃음을  보냈다. 그러나 들어온 청년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문간에 우뚝 선 채 동료들을  잠시 마주보고 있다가 테이블 앞으로  터덕터덕 걸어왔다. 그리고는 주위 
사람들에게는 한눈도 주지 않고 술병을 들고 그대로 한두 모금 꿀컥꿀컥 마셨다. 바로 아까 선술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던 청년이었다. 술기가 불그레 젖어가는 눈 가장자리에는 어딘지 어두운 빛이 떠돌고 있
었다. 그리고 막술에 젖은 붉은 입술이 눈 가장자리에  뒤덮인 어두운 그늘과 이상한 대조를 이루고 있
었다.
 "벌써 어디서 한잔 걸쳤군, 응? 우리는 지금껏 너하고 한잔 하려고 기다렸었는데......"
 세모진 얼굴은 넌지시 그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는 술잔을 받으려고도 하지 않고 세모진 얼
굴과 자기 앞에 내민 술잔을 한번 훑어보았다. 
 "자 한잔 더 들고 여자한테로 가는 거야. 그러면 기분이 가라앉을 테니까.... 준비는 이미 다 되었고, 지
금 여자 혼자서 쓸쓸히 너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거야."
 세모진 얼굴은 그의 감정을 몽땅 자기  손아귀에 쥐고나 있는 듯한 어조로 지껄이며  입가에 버릇처럼 
떠도는 미묘한 웃음을 흘렸다. 
 "격렬한 순간이 지나간 뒤에 일어나는 초조감, 그리고 그 다음에 내려덮이는 어두운 그늘, 사람을 죽인 
다음에 반드시 뒤따르는 감정이거든, 그럴땐 여자가 제일인거야. 즉 여자의  살결 속에다 채 가시지않은 
나머지 정열을 다 배설해 버리는 거지. 그리고 나면 푹 잠이 쏟아져오거든, 다음에는 모두가 평상시처럼 
가쁜해진단 말이야."
 말끝과 함께 세모진 얼굴은 힐끗 그를 노렸다. 청년의 얼굴은 더욱 더 어둡게 흐려가고 있었다. 
 "자 한잔 더 들고 여자한테로 가요. 부드러운 살결이 침대위에서 기다리고 있어, 응?"
 그 순간 청년의 날카로운 시선이 세모진 얼굴을 마주 지켰다.  그러나 청년은 곧 멋쩍은 듯이 숨을 훅 
죽이고 입을 열었다.
 "여자를 돌려보내 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이미 세모진 얼굴의 입가에는 일종의 조소에 가까운 웃음이 떠돌고 있었다. 
 "그럼 어디로 ....."
 "집으로."
 "집?"
 의문에 찬 가느다란 시선과 어둡고 흐려가는 두 시선이 조용히 마주쳤다. 
 "농담은 그만둬 집이라니?"
 청년의 눈앞을 한줄기 어둠이 스치고 지나갔다.
 "집....."
 청년은 세모진 얼굴을 다시 한번 올려 치어다보며  입 속에서 중얼거렸다. 세모진 얼굴은 가느다란 눈
을 깜작거리며 가볍게 한숨을 속으로 죽이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더이상 말이 오고 가지 않았다. 청년은 술을  한잔 따라 단숨에 마신 다음 돌아서 나와
버렸다. 세모진 얼굴은 잠시 그가 나간 문 쪽을 바라보며 무거운 침묵을 씹고 있다가 술병을 들고 그대
로 쭉들이켰다. 그의 입술 언저리에서 흘러내리는 술의  여적이 턱을 스쳐서 목줄기로 주루루 흘러내리
고 있었다. 그는 잠시 숨을 쉬고 난 다음  또 꿀꺽꿀꺽 마셨다. 그리고 다 마시고 난  빈 병을 화풀이나 
하듯이 멋쩍게 한 구석지로 굴려 팽개쳤다.
 어둠이 쪽 깔려 간 밤하늘에는 별들이 빙판에  얼어붙은 구슬들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찬 바람이 나뭇
가지를 흔들고 지나갈 때마다 낙엽이  우수수 발 밑으로 떨어져 흩어졌다.  그는 지금 가로수에 기대어 
서서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무거운 마음이 좀처럼 가라앉지가 않았다. 그는 즈봉  포켓 속에 꾸겨 넣
은 신문지를 다시금 손으로 꾸겨 쥐었다. 어머니--, 그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부르짖었다. 그 순간 '아래
는 아들의 소식을 듣고 실신한 노모'라는 신문 구절과 함께  노파의 주름진 얼굴이 어머니 얼굴과 겹쳐
서 떠올랐다. 그러나 곧 '모두가 조국을 위해서다'하는 음성이 그의 마음을 뒤덮고 지나갔다. 
 "이미 우리는 조국을 위해서만이 있는 몸이다. 지금의 네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보다 더 보람 있
는 하나를 위해서 하나를 버려야지."
 약 이 개월 전 일이었다. 그가 투신하고 있는 비밀  결사에서는 한 사람을 암살하지 않으면 안될 경지
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바로 계획된 그날밤 오랜 신병  끝에 오직 한 분밖에 없는 그의 어머니가 숨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클랙슨 소리가 짧게 밖에서 또 한번 울려오고 있었다. 정각에서 삼십분 전, 야광초점이 파란 빛깔을 그
으면서 아라비아 숫자가 나열된 동그란 원반  위를 움직이고 있었다. 클랙슨 소리가  다시 짧게 울렸다. 
그는 묵묵히 고개를 들고 어둠과 마주셨다. 
 "연기는 안 돼, 생각해 봐, 우리가 오늘  이 기회를 잡기 위해서 얼마나 시간과 정력을  소비했나를....... 
그것뿐만이 아니라 오늘 실패하는 경우엔 이미 우리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야 하는 거야, 그렇게 되
면 우리는 하나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거야. 지금 우리들은 삼이라는 성공숫자  앞에 와 있다. 알
겠지? 어머니는 우리가 맡을 테다. 조국을 위해서 이미 모든 것을 버리기로 한 우리들이 아니냐?"
 나직하면서도 몹시 초조한 음성이었다. 그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어머니의 신음서리가 무겁게 방 안에
서 울려 나오고 있었다. 

 해방과 더불어 난립하는 정당, 무질서한 사상의 혼돈된  갈등 속에 청년들의 정치 의식은 더욱 강렬히 
자극되어 범람하는 정쟁의 전위로 청년들은 모든것을  버리고 뛰어들어갔다. 누구나가 조국을 위해서였
다. 중학을 마치고 조그만 회사에서 꾸준히 일하고 있던  그는 중학 동창인 세모진 얼굴에 여러번 자극
되어 비밀결사에 가담하였다. 비애국자들에 의하여 조국은 늘 굴욕과 타락의  길을 걸어왔던 것이다. 그
러한 비애국자를 색출하여 사전에 제거하여  버리는 것이 이 비밀결사의 목적이었다.  조국을 위해서다. 
죽어야 할 자는 마땅히 조국의 이름과 명예를 위하여 죽어야 하는 것이다. 그는 사격을배웠다. 운동신경
이 예민한 그의 사격은 어느 사이엔지 목표에 거의 적중되어 들어가고 있었다. 목표들이 파열되며 쓰러
질 때마다 그는 일종의 흥분과 보람을 갖는 것이었다. 이윽고 토론이 거듭되었다. 진주한 미군 사령관은 
한국 실정에 어두워서. 그에 대하여 한국의 실정을  왜곡되게 주입시키고 제멋대로 조종하고 있는 자가 
누구냐? 그 자의 이름이 자주 토론석상에서 오르내렸다. 치밀한 계획이  다시금다시금 거듭되었다. 그는 
거의 집을 잊어버려 가고 있었다. 어머니의 병환은 점점 더 무거워 갔다.  모든 계획과 저격수로서 그가 
지명된 날 밤 그는 늦게야 집으로 돌아왔다. 
 의식을 잃고 누워 있던 어머니는 방문이 부시시 열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천장이 툭 처져서 내려앉은 
방 안은 더욱 답답하고 어두웠다. 그는  어머니 앞으로 조용히 다가서서 꿇어앉았다.  고개를 약간 모로 
눕히면서 아들 모습을 더듬어 가고 있는 그 눈빛은 다 꺼져 가는 모닥불처럼 희미하게 등잔불빛에 반사
되어 빛나고 있었다. 
 "어머니--."
 노파는 아들의 음성을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간신히 흔들어 보이는 것 같았다. 
 "어머니 의사가 왔댔어요?"
 그러나 노파는 가만히 있었다. 그는 어머니가 말귀를 못 알아들었는가하여 다시 한 번 어머니 귀 가까
이에 입을 대고 물어 보았다.그리고 나서 어머니 표정을 조용히 지켰다. 험하게  주름져 간 입술이 우직
거리는 것 같았다. 어머님 손이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는 듯하므로 그는 어머니 손을 마주잡으며 물었다. 
 "왜 그러세요?"
 어머니는 아무 말없이 아들의 손만을 꾹 움켜쥐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곧 아들의 손을 끌어당겨 자기 
뺨 위로 가져갔다. 그리고 이미 시선과 손의 감각만으로서는 아들을 느껴 볼 수가 없는 듯이 아들의 손
을 자기 입술에 가져다 대어 보는  것이었다. 그는 가슴이 뭉클 뜨거운  물결속에 휩쓸려 들어 가는 것 
같았다. 그는 순간 며칠 전 집을  나갈 때 간신히 입을 열고  중얼거리던 어머님 말씀이 눈앞에 또렷이 
아로새긴 것처럼 떠오르는 것이었다. 
 "언제 돌아오냐?"
 "오늘은 못 돌아올 것 같아요. 저 옆집 아주머니한테 부탁을 했어요.  그리고 좀 봐달라고 돈도 드렸으
니까 근심마세요. 의사도 이따 저녁에 다시 한 번 들를 거예요"
 "오냐"
 그리고 나서 어머니는 잠시 멍하니 허공에 눈 주고 있다가 혼자말처럼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아들만을 위해서 있단다. 나이  들면 들어갈수록......그러나 아들이야 그럴 수  있겠니. 제 할 
일이 더 중한데....."
 그말을 듣는 순간 노쇠한 어머니의 애틋한 기대를 깨닫지 못하는 바 아니였으나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
던 것이었다. 
 그는 지금 이러한 생각에 사로잡힌 채 자기 손을 끌어당겨다 입술 위에  대고 어루만지고 있는 어머니
의 모습을 잠시 지켜 가고 있었다.얼마후 자기손을 어루만지던 어머니의손은 맥없이 그대로 멈추어졌다. 
그는 뼈만이 앙상한 여윈 어머니의 손가락으로부터 어머니 눈 위로 시선을 옮겼다. 자기를 쳐다보고 있
는 희미한 어머니의 눈빛, 마치 그것은 먼지 속에 퇴색하여 버린 유리알처럼 빛을 잃고 있었다. 그 순간 
어머니는 지금 아들의 모습을 바라다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마음 속에서 느끼고 있을 뿐이라는 생
각이 그의 마음에 어두운 선을 그으며 지나갔다.
 다음날 그는 밀회 시간을 어기고 그대로 어머니 곁에 있었다. 정오가  가까워서였다. 자동차의 엔진 소
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집앞에서 급히 브레이크 밟는 소리가 났다.
 "어떻게 된 노릇이야?"
 문을 열고 들어서며 조급히 지껄여대는 동료의 말을 손짓으로 막으면서 그는 밖으로 나갔다. 
 "그래?"
 동료는 곧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안색을 흐렸다. 
 "그럼 내가 의사를 불러다 네 대신을 할 테니 곧 그리로 가야 할 거야. 모두 기다리고 있으니까"
 "지정된 장소로 정각까지 직행할 테니 모두에게 그렇게 일러 줘."
 동료의 얼굴 위에 다시금 초조한 긴박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왜?"
 동료는 마치 그의 마음이 동요를 일으킨 것이 아닌가 하고 짧게 의문을  남기며 그를 날카로운 시선으
로 마주 지켰다.
 "다만......."
 "다만?"
 "나는 다만 내게 용납될 수 있는 순간까지만이라도 어머니 곁에 있어 주고 싶어서야."
 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약간 말을 흐렸다. 
 "하지만......"
 "알고 있어. 결정된 하나만을 위해서 나는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는 어머니 곁에 앉아 있었다. 의사가 여러 번 왔다 갔다.햇볕이 점점 창문가에서 이어지고 잔광이 높
은 축대 위 옆집 담너머로 뚝 떨어지자 회색빛  그늘이 나지막한 이집 마당으로 넘어지듯 내려섰다. 그
리고 곧 창문가로 밀려오는 어둠의 연한 물결과 함께 혼돈된 의식이 어머니 입가에 떠돌기 시작하였다. 
하얀 가운데 너무도 어울리지 않게  검은 가방을 들고 의사가 다시  찾아왔다.맥을 짚고 조용히 머리를 
떨구고 앉아 있는 의사의 손가락 사이로 노파의 맥박은 희미하게 이어가고 있었다.
 이윽고 밖에서 요란스럽게 자동차의 클랙슨 소리가 울려왔다. 그러나 그는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끓일 
듯 이어가는 어머니의 주름진 눈까풀위로 죽음의 그늘은 서서히 내려덮여 가고 있었다. 그때 클랙슨 소
리가 짧게 또 한 번 밖에서 울렸다. 
 그날 밤 어머니는 임종하였던 것이다. 지금그의 눈앞에는  그날 밤 숨져가며 자기의 이름을 부르던 어
머니의 모습이 그대로 눈물에 젖어 떠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께서 임종할 때의 광경을 이야기해 
주던 한 동료의 말을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울음에 목메인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얹으면서 그 동료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렇게 서러워하지 말아요. 어머니는 눈을 감으시면서도 만족해 하시는 것 같았어. 거의 숨져 간 임박
에 주주 네 이름을부르더군. 그래 내가 네 대신을 했었지. 잠시 후 무엇을  자꾸 더듬기에 내가 손을 잡
았더니 내 손을 간신히 끌어당겨 자기 입술에 가져대  대시고 오래도록 부벼 보시더군, 그리고 나서 곧 
운명하셨어. 그리니까 네가 없었다 해도 어머니는 네가 자기 곁에 있는 줄  아시고 눈을 감으셨던 거야. 
물로 네가 아닌 나였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어머니는 너로 믿고 만족하며 눈을 감으셨으니까 다행이었다
고 할 수 있지 않아. 자, 그만해요."
 그는 차가운 밤 하늘에 총총히 늘어붙은 별들을  쳐다보며 이처럼 무거운 생각에 잠겨가고 있었다. 그
는 다시금 포켓속에 꾸겨 넣은 신문지를 만지작거려 보았다.  뒤얽히는 여러 가지 생각에 빠져 나갈 한 
가닥 틈을 찾아 허덕이는 자신을 눈앞에 그리면서 그는 묵묵히 발 밑에 흩어진  담배의 아직 꺼지지 않
은 불빛을 내려다보았다. 어머니--, 그는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아들의 소식을 듣고 실신한 노파의 얼
굴이 어머니 얼굴과 겹쳐지면서 다시금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순간 그는 자기도 모르게 꾹 꾸겨 
쥐고 있던 신문지를 꺼내어 들었다. 그리고 사방을 한 번 휘둘러 본 다음 가로등이 눈에 띄자 그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가서. 그는 곧 신문지를 펼쳐서 3면을 뒤집었다.급히 띄엄띄엄 기사를 이리저리 눈주어 한 
구절을 입속에서 두세 번 중얼거렸다. 
 택시! 올라타자마자 뒤를 돌아보며 방향을 묻는 운전수의  시선을 향하여 '한강로 쪽으로'하고 그는 조
용히 말했다.차가 U자 형으로 오던 길을 돌아 달리기 시작하였을 때 그는 다시  어두움 생각에 잠겨 가
고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부터 약간 그에게는 마음의 동요가 일어나고 있었다. 자기가 한 행위는 하나의 
의의를 갖는 반면 하나의 의의를 상실하고 있었던 것이다. 
 
 날이 갈수록 정치적 혼돈은 더욱 극심하여 가고 있었다.저명한 애국투사들 간에 일어나는 분열과 반목, 
집회석상에서의 노골적인 폭행과 선동, 복잡 미묘한 배후와 배후는 서로 얽히면서 모반은 거듭되어가고 
있었다. 
 비가 막 쏟아지던 어느 날 저녁이었다. 사무실 안에는 음산하고 살벌한 감정이 서로의 시선과 시선 속
에 스쳐가고 있었다. 세모진 얼굴의 눈매는 더욱 날카로이 독기를 뿜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유달리 미묘
한 웃음을 자주 쿡쿡 입가에 터뜨리고 있었다. 
 비좁은 지하실 쪽 문을 통하여  한 친구가 걸레조각 같은 것으로  손을 문지르며 올라왔다. 그 손가락 
사이에는 검붉은 혈흔이 끈적끈적하게 말라붙어 있었다. 
 "어때?"
 세모진 얼굴이 힐끗 그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갓 올라온 친구는 다만 멋쩍게 입맛을 한 번 다셨다. 
 
 허리를 구부리고 비좁은 계단을 조심스럽게 밟으면서  민은 어두컴컴한 지하실로 내려갔다. 땅과 잇대
어 구형으로 뚫린 조그만 철장사이로 흘러들어오는 희미한 광선속에 한 청년이 벽에 기대어  죽은 듯이 
쓰러져 누워있었다. 민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서 있다가 청년 앞으로 다가갔다. 인기척을 채었음인지 청
년은 간신히 고개를 들고 반항적인 몸짓을 했다. 그리고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그 순간 입술 사이로 검
붉은 핏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눈은 저주와 항거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민은 묵묵히 그를 내려다보
았다. 왼쪽 귀밑으로 흩어진 머리카락은 핏물에 젖어 얼룩지고 목줄기에도 핏덩어리가 엉켜 있었다. 
 "또 심문을 하려는 거야? 아예 죽여줘!"
 청년이 입을 움직거리자 다시금 입술 사이로 핏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민은 아무런 표시도 없이 다만 
그를 지키고 섰다가 양쪽 손을 펼쳐 보였다. 그 손에는 아무것도 든 것이 없었다. 
 "그럼?"
 민은 다만 가볍게 입 속으로 숨을 죽였다. 그의 이즈러진  모습과 다시는 햇볕을 보지 못하고 죽어 갈 
이 동료의 얼마 남지 않은 종말을 생각할 때 민은 이상  더 그 앞에 머물러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무거이 걸음을 돌렸다. 계단을 한 걸음 올라서려는 순간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다시금 서로 시선이 마
주치자 청년은 뭐라고 핏물을 입가에 퉁기면서 중얼거렸다.
 "너도 나를 배반자라고 생각하고 있니?"
 민은 아무런 표시도 주지 않았다. 상대방의 마음을 꿰뚫듯이 노려 가던 청년은 시선속에 한 줄 그늘이 
다시 스쳤다. 
 " 나는 다만 반대 정당 친구들과 이야기를 자주 나눴을 뿐이야.  물론 그들과의 접촉은 빈번했어. 그러
나 그것은 '나'를 더 명확히 알고 싶어서였어, 내가그들에게 기밀을 팔았다고? 제기랄!"
 청년의 시선은 점점 저주스러이 불타오리고 있었다.
 그는 핏물에 젖은 입술을 질근질근 깨물고 마저 있었다. 
 "정치 강령은 그야말로 근사했어. 그래 들어왔거든. 나만이 아닐거야. 누구나  다 그럴 거야. 결국 우리 
이십 대가 너무도 정치 의식이 박약했던 때문이야.  정치적 훈련이 없었던 탓이거든, 조국, 조국하고 있
지만 우리들은 조국이 무엇인지를 그 실은 모르고 있어. 즉 맹목적인 정열뿐이지. 이것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 정치가들이거든, 나는 처음에는 몰랐어. 하지만 내 의지를 혼돈이 일어나기 시작했단 말이야. 우리
만이 아니거든, 어느 정당 단체를 막론하고 그 강령은 다 멋진 바 있어.  내가 반대당 친구들과 자주 이
야기하게 된게 뭔지 알어?"
 청년은 피거품을 입가에 가득히 문 채 정치적 거물들의 이름을 죽 나열하였다. 
 "자, 봐요. 그들은 과거에 모두 애국자였어. 그러나 지금부터의 애국자는 그들 중 누구인지 우리는 지금 
알지 못하고 있는거야. 과연 지금부터의 애국자가 그들  중의 누구라고 할 수 있겠어? 우리들이 그야말
로 생명을 내걸고 따를 수 있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해서 싸웠다는  그 공적. 즉 과거에 애국자였다
는 이름을 내걸고 지금 그들은 각자 자기밑에 누구보다도 많은 당원을  흡수하여 자기 정권을 수립하려
는 판국이거든, 그러나 우리 청년들은 그러한 의미에서 정계에 투신한건 아니야. 
 그야말로 우리들 손에 돌아온 조국을 순수한 입장에서 확립해 보자는 거였지. 그러나 그들은 그야말로 
정권욕뿐이야. 하루 해가 지기 무섭다고 무질서하게 난립하는 정당들의 동태를  보란 말이다. 그속에 우
리들은 휩쓸려 들어가서 조종되고 있거든, 다시 말하면  우리들의 조국에 대한 순결한 정열이 더렵혀져 
가고 있단 말이야.  청년단체들의 충돌과 그 빈발하는  유혈극을 봐도 알 수 있거든, 그  미묘한 배후에 
얽히면서 충돌하는........."
 그는 한입 물었던 피거품을 뱉았다.그리고 핏덩어리 같은 것을 줄줄 흘리면서 그래도 말을 이었다.
 "너희들은 처음 집에서부터 나를 고히 유인해 냈다. 그러나 내가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집으로 되돌아
가려 할 때 그것을 용서하지 않았어. 나는 이상 더 내 정열을 헛되게  더럽히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나
는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눠야 했어. 나와 같은 동세대의 친구들과....  그것뿐이야. 그러나 너희들은 나를 
오해했어."
 여기까지 이야기하였을 때였다. 이 동료는 갑자기 잔 기침을 하다가 그냥  피를 연거푸 토했다. 그리고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저주스러이 눈을 부릅뜨며 피거품을 입가에 가득히 문 채 미끄러지듯 벽을 스치며 
쓰러졌다. 그 순간 민은 눈을 꾹 내려감았다. 
 정쟁의 도는 어두운 그림자를 마치 태양의 그림자처럼 배후에 서로  드리우면서 가열하여져 가고 있었
다. 정치적 결탁은 모반을 끼고서만 이루어져 갔다. 이윽고 XXX를 죽여야  한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
자는 입으로는 우리와 손을 잡고 있으면서  실은 우리의 정적인 X파와 협상중에 있다.  그 자의 이름은 
날이 갈수록 시선과 시선, 입과 입을 따라  오르내렸다. 그리고 드디어는 XXX에 대한 암살이 계획되었
다. 사수의 부주의로 인한 실패. 계획은 다시 어그러졌다.
 "민, 너는 요전번처럼 멋지게 해치울 수 있을 거야. 할 수 있겠지?"
 민은 그리 자신이 서지 않는 표정을 하였다. 
 "왜?"
 "그를 죽여야 한다는 자신이 서지를 않기 때문이야"
 왜? 왜? 왜? 하는 질문이 그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연거푸 떨어졌다. 세모진 날카로운 시선......그는 
날카로운 시선을 대수롭지 않게 겉으로 받아 넘겼다. 날카롭던 상대방의 시선이 곧 부드럽게 개여갔다. 
 "또 어머니 생각이 난 모양이군, 응? 그러나 우리는 하나만을 위해서있지 둘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
란 것을 알아야지."
 "그만!"
 민은 상대방의 말을 급히 가로막았다.
 "다만 쏘아달라고만 해. 그 이상의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아,"
 수다한 난관이 겹쳐서 일어났다. 십육시, 대낮이다. 쏘는 것은 문제없지만  도망하는 것이 곤란하다. 다
만 유리한 조건이란 인적이 드문 행길이라는 것뿐이다. 그러나 곧 묘안이 제의되었다.  즉 정각 이십 분 
전부터 한 동료와 함께 담배가게 앞에 서있는다. 그는 될 수 있는 한 담배가계 쪽을 향하여 서 있고, 한 
동료는 길 건너편 건물 입구 쪽을 향하여 서있는다. 만일 그자가 나오면 그에게 암시를 주고 길을 건너
간다. 곧 뒤따라 길을 건너다가 앞서가는 그 동료를  엄페물로 이용하여 틈을 보아 상대방을 쏘아 넘기
고 맞은편 골목길로 뛴다. 그러면  그 주위에 대기시켰던 동료들이 그자의  호위 경관이 달려오기 전에 
범인을 잡는 듯이 보이며 그 골목으로   추격한다. 다행이 그 시각에 골목  안을 지나가고 있는 청년이 
있으면 무조건 그를 때려눕힌다. 그리고 그를 범인처럼 만든다.  그런데 될  수있는 한 수사 기간을  연
장시키기 위하여 의식불능케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만일 불행히도 그 시각에 그 골목안을 통과하는 청
년이 없으면 비상수단으로 추격하는 척하며 길을 방해하다 도주한 방향으로 모호하게 만들어 놓는다. 
 계획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 시각에 그 골목을 지나가던  청년이 있었던 것이었다. 
그 청년은 계획대로 범인으로 체포되고 신문은 그대로 보도하였다. 
 그는 저격 후 그곳에서 가까운 한 동료의 집에 들르자마자 옷을 벗어 던지고 잠시 쓰러져 누워있었다. 
그는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얼마 후  그는 가슴이 답답하여 거리로 나왔다.  그리고 선술집에 들렀다가 
나오던 길에 석간 신문을 사보았던 것이었다.
 자동차가 갑자기 끽 소리를 무겁게 남기며 정거하였다. 그러나 그는 정신잃은 사람처럼 쿠션에 그대로 
파묻쳐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한강론데요!"
 하고 운전수가 일깨워 주어서야 비로서 그는 차에서  내렸다.차에서 내려서도 그는 마치 길을 잃은 사
람처럼 멍하니 서 있다가 신문지를 꺼내어 펼쳤다. 그리고 주소를 다시금 재확인한 다음 조그만 구멍가
계에 들러 방향을 물었다. 그는 약 한 시간 가량이나 이렇게 길을 물으며 골목길을 배회하다 드디어 철
로변에 내려않은 다 쓰러져가는 오막집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얼기설기 퇴색한 신문장으로 풀칠되어 있는 문을 열고 나서는 소녀는  분명히 무모하게 범죄자로서 체
포된 청년의 여동생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를 보자마자.
 "경찰에서 오셨어요?"
 하고 대번에 말을 더듬는 소녀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가득 차 있었다. 
 "............"
 그는 대답 없이 시선을 떨구었다. 
 "오빠는..........."
 소녀는 입을 열려다 곧 울음이 북받치는 듯 입술을 꾹 깨물었다. 간신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아니 그런 것 때문에 온 것이 아닙니다."                            
 " 그럼..... 그럼..... 신문사에서 오셨군요?"
 소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오빠가 범인이 아니라고 좀 써 주세요. 네? 오빠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곧 아시게 될거에요. 오빠가 
결코 범인이 아니라고 한 마디만이라도 좀 써주세요. 어머니가 불쌍해요.  어머니가 불쌍해서 못 보겠어
요. 오빠는 어머님 약값을 구하러 나갔던 거예요. 어머니는 이대로 돌아가셔요."
 소녀는 흑흑 소리 죽여 흐느꼈다. 그러나 잠시 후 눈물을 닦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드는 순
간 소녀의 시선은 놀랍게 빛났다. 낮선 이 청년의 두 눈에서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리고 있기 때문이
었다. 
 민은 소녀에게 자기의 눈물을 뵈지 않으려고 약간 시선을 밑으로 떨구었다. 
 "그래 의사가 왔었소?"
 민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소녀는 말을 잊어버린 듯이 의아한 시선으로 다만 그를 마주볼 뿐이었다. 민
은 포켓에서 돈을 꺼내어 소녀의 손에 쥐어 주었다. 소녀의 손은 차돌처럼  싸늘히 식어 있었다. 소녀는 
너무도 뜻밖의 일이라 아무런 반응도 없이 다만 그가 쥐어 주는 돈을 받아들고  마치 넋을 잃어버린 사
람처럼 멍하니 그를 쳐다보고 섰을 뿐이었다. 그는 너무도 가슴이 벅차서 그대로 돌아셨다. 소녀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이 몸을 움직거렸다. 
 "저 누구신지.....
 그는 대답없이 소녀를 잠시 돌아보았다. 
 "오빠는 곧 돌아올 거예요. 안심하고 어머님 잘 돌보고 있어요."
 그리고 나서 그는 가볍게 머리를 한 번 숙이고 걸음을 옮겼다. 소녀의 눈에서 눈물이 다시 흘러내리고 
있었다. 

 다음 날 저녁 민은 동료들과 함께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분위기가 몹시 초조스럽게 서로의 호흡을 죽
여 가고 있었다. 
 "그래서?"
 세모진 날카로운 시선이 반득 빛났다. 
 "나는 너한테 심문을 받고 있는 게 아니야!"
 민은 그의 발언을 묵살이나 하듯이 쿡 찔렀다. 그 순간 세모진 얼굴은 그 기묘한 웃음에 또 입가에 훅 
날렸다. 
 "신경이 몹시 날카롭군, 응? 너와 나와는  그러한 사이가 아닐 텐데..... 그렇잖어?  왜 너는 아홉이라는 
숫자 앞까지 와서 마지막 한 숫자를 스스로 버리려나 말이다.  눈앞에 점점 트여 가는 큰 길을 못 보고 
있는 건 아닐 테지...."
 그러나 민은 그 말을 상대도 하지 않았다.
 "잘 들어 둬. 나는 평범한 인간들을 한 사람이라도 더 사랑해 보고 싶어졌단 말이야. 위대한 하나의 일
을 성공보다는 나는 오히려 소박하게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들이 하나라도 더 소중스러워졌단 말이다."
 "너는 아직 역사라는 것을 모르고 있군."
 "나는 너희들이 말하는 그러한 희생을 강요하는 역사를 요구치 않아."
 "그럼 너는 의의라는 것을 부인한단 말이냐?"
 "인간의 의의를 묻고 살기보다는 나는 오히려 묻지 않고 살기를 원해."
 "변절이야"
 "아무렇게 생각해도 좋아. 나는 돌아가겠어."
 "어디로?"
 "집으로"
 "집?"
 세모진 얼굴에 경멸적인 조소가 어두운 그늘을 깔며 스쳐갔다. 
 "자수할 생각이냐"
 "그처럼 어리석진 않아."
 민이 일어서는 것과 동시에 상대방이 벌떡 일어서며  권총을 빼어들었다. 순간 긴장이 물결처럼 쭉 깔
려 갔다. 그러나 민은 한 점 표정의 동요도 없이 침착한 태도로  돌아서서 문쪽으로 걸어나갔다.문을 열
고 나서려는 찰나 총성이 요란하게 주위를 뒤흔들었다. 민은 멈칫했다.  머리가 갈래갈래 부서져서 공중
으로 휙 날아가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없는 하얀 공간만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그리고 다시금 부서졌
던 머리 조각들이 제자리로 모여 오는  것 같았다. 그는 잠시 그대로  문간에 서 있다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걸어 나갔다. 긴장이 아직  풀리지 않은 동료들의 시선은 걸어  나가는 민의 뒷그림자를 묵묵히 
지키고 있었다.
그의 뒷그림자가 까마득히 사라지자 그들은 총탄에 파열된 마룻바닥을 무기력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만한 위협으로 그가 돌아올 리는 만무다."
 세모진 얼굴은 혼자 입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민은 침착한 걸음걸이로 길 한복판을 서서히 걸어 내려가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는 소녀의 얼굴과 앓
아 누워 있는 소녀 어머니의 모습이 돌아가신 어머니  얼굴과 겹쳐져서 떠돌고 있었다. 마치 그는 오래
간만에 집으로 돌아가는듯한 마음이었다.

    갈매기(지은이: 이범선) 
  1920년 평남 신안주에서 태어나 동국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55년 [현대문학]에 소설 [암표]  와 
[일요일]을 추천받아 등단했다. 1958년에 현대문학상을 수상했고, 1960년에  동인 문학상을 수상했다. 소
설집으로 [학마을 사람들], [오발탄], [피해자], [동트는 하늘 밑에서]등이 있다. 1982년에 작고했다.

 파도소리가 배개를 때린다.
 좀처럼 잠이오지 않는다. 여느 날 같으면 벌써 나갔을 전등이 그대로 들어와 있다.  아마 이 포구에 또 
무슨 일이 생겼나 보다. 기쁜 일이나 그렇지 않으면 슬픈 일이
 섬 안은 그대로 한 집안이다. 그러기 어느 집안에든지 무슨 잔치가 있거나 또는 상사가 생기면 이렇게 
밤새도록 전등이 들어오는 것이다. 시장에서 생선 장사를 하는 상이군인이  새색시를 맞던 날도 그랬다. 
읍장님의 어머님 진갑날도 그랬다. 고아원에서 어린애가 죽던  날도 그랬고, 일전 파도가 세던 날, 나갔
던 어선 한 척이 돌아오지 않던 밤도 그랬다.
 훈이 피난 내려왔던 부산서 중학교 교사 자리를 얻어 이섬으로 들어온 지가 뻘서 칠 년이 된다. 
 처음 들어왔을 때는 퍽도 외로웠다. 조그마한 포구에  말려들어 왔다가는 또 말아 올라오곤 하는 단조
로운 파도 소리가 그저 졸리기만 했다. 
 그래도 섬에서는 도민증이나 병적계를 지니고  다닐 필요가 없는 것이  좋았다. 당시 부산 등지에서는 
그런 것들이 그야말로 심장보다도 더 소중하던 때였지만 어쩌다 하루 저녁  여인숙에서 묵고 가는 나그
네까지도 저녁 해변에서 쉬 친구가 되어 버리는 이 포구에서는 그런 것은 있으나 없으나였다.
 이제는 벌써 훈네도 피난민이 아니다. 애기를 안고  길가에 나와 섰던 이웃집 아주머니들도 제법 그와 
인사를 나누게 되었고 배에서 돌아오는 옥희 아버지나 이쁜이 오빠는,
 "이거 참 오래간만에 잡은 도밉니다. 아직 살았어요."
 "꽤 큰 소라지요. 가을 들어 처음입니다."
 하며 대바구니 속에서 도미나 소라를 집어내어 훈네 집 대문옆에 누워 있는 소바우-- 그 모양이 꼭 누
워 있는 소잔등 같아서 그들은 그렇게 부른다.-- 위에 놓고 지나가는 것이다.
 칠년 섬에서는 한 해가 하루처럼 흘러간다. 그야말로 흘러간다. 어제와 오늘이  다를 아무런 사건도 없
다. 마디가 없다.
 "왜 선생 보기엔 좀 깨끗지 않게 보이재,그래도 이 짠물이 이게 좋은 게라이."
 바닷가에서 맛조개를 캐던 옆집 할머니가 바닷물에 손을 씻고 들어와 받아 준  어린애가 벌써 다섯 살
이다.
 
 지극히 단순한 생활.
 아침자리에 일어나 앉으면 안개 낀 포구가 유리창에  그대로 한 폭의 묵화다.칫솔을 물고 마당으로 내
려간다.마루 밑에서 기어나온 바둑이가 신고 선 그의  흰고무신 뒤축을 질근질근 씹어  본다. 뒷산 동백
나무 잎이 아침 햇빛에 유난히 반짝거린다. 어디선가 까치가 운다.  마당한구석에 돌각담을 지고 코스모
스가 상냥스레 피어 웃는다. 추석도 멀지 않은 거기  감나무에는 주홍빛 감이 가지마다 세 개, 다섯 개, 
내개 탐스럽게 달렸다. 빨갛게 툭 가지 끝에서 튀어 난다. 팽글팽글 팽글팽글  허공에 원을 그리고 사뿐
히 땅바닥에 내려앉는다. 부엌문 앞을 돌아나오던 흰 암탉이 주르르 달려온다. 쿡하고 지금 떨어진 감나
무 잎을 쪼아본다. 핏빛 면두가 흰 머리 위에서 흔들거린다.
 조반이 끝나면 훈은 한손에는 가방을 들고  또 한손에는 국민학교 이학년인 딸의 손목을  끌며 대문을 
나선다. 겨우 두 사람이 나란히 걸을 수 있는 들길이다. 오른편은 발밑이 그대로 바다이고, 왼편은 깍아
진 벼랑이다. 그들은 바위틈에 핀 들국화가 내려다보이는 밑을 천천히 걷는다. 바둑이가 따라오며 흰 수
건에 싸 든 딸애의 도시락을 킁킁  맡아 본다. 아내와 다섯 살짜리 아들  종은 대문 옆 소바우 잔 등에 
서 있다. 꼬불꼬불 돌길을 더듬어가는 그들은 C자형으로 된 포구 중앙에 다 가도록 빤히 보인다. 그러니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배웅을 하자면 그들이 포구를 반 바퀴 돌아가는 동안을 거리  그렇게 서 있어야 하
는 것이다. 그래 아내와 아들 종이  상이에는 말없이 가운데 약속이 생겼다.  그들을 따라가던 바둑이가 
돌아서 돌길을 껑충껑충 뛰어 집으로 오면 아내와 종은 바둑이를 앞세우고 문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아침마다 그들을 따라나서는 바둑이가 돌아서는 지점은 정해져 있다. 훈네 집에서 거리에까지 가는 도
중에는 중간쯤에 단 한 채 아주 초라한 오막살이가 있을 뿐이다. 그 오막살이에는 노인 거지가 세 사람 
살고 있다. 훈네는 그들을 신선이라고 부른다. 그건 어느 여름방학에  서울서 놀러왔던 고등학교에 다니
는 훈의 동생이 지어 주고 간이름이다. 이들 세 노인은 할 일이 없다. 종일 바다만 바라보며 지낸다. 그
래 신선이다. 나이는 육십이 거의 다 되었을 듯한 동년배들인데 그 인상은 각각이다.
 신선1호라는 서노인, 머리칼 눈썹, 그리고  긴 수염 할 것없이 은빛으로  센 노인이 키가 크다. 신선들 
중에서는 제일 풍채가 좋다. 그리고 신선2호 박노인 이 노인은 머리를  중모양 박박깍았다. 얼굴이 둥근 
이 박노인은 항상 군복을 걸치고 있다. 신선3호 김노인, 신선중에서는 제일 인품이 떨어진다. 곰보다. 턱
에 꼭 염소 같은 수염이 난 신선3호는 구제품 회색 신사복 저고리를 입었다.
 인상은 어쨌든 그들은 다 신선 별호를  탈 만한 데가 있다. 걸식은 해도  그들은 결코 떼를 쓰는 법이 
없다. 또 자기네 사이에 무슨 정해진 바가 있는 듯, 같은 집에 두 사람이 들어가는 법도 없다.
 훈네 집에 늘 오는 것은 신선1호, 서노인이다. 아침에  오는 수도 있고 저녁에 들르는 날도 있다. 이즈
음 훈의 아내는 서노인을 위하여 밥을 넉넉히 짓지는 않았지만 줄 밥이 남지  않는 날이면 걱정을 하게
끔 되어있다. 그런데 바둑이도 이 서노인을 알아본다. 청결검사를 나왔던 순경이 총을  맨 체 지급을 해 
달아날 만치 사나운 바둑이면서도 서 노인은 짖지 않는다.
 아침마다 훈을 따라가던 바둑이가 돌아서는 지점이 바로  이 신선들이 살고 있는 오막살이 앞이다. 앞
을 지나다 서 노인에게 목도리를 한 번 내보이고는 돌아선다.
 서노인은 바둑이와만 사귄 것이 아니다.
 언젠가 사흘 동안이나 서 노인이 들리지 않은 때가 있었다. 이상하다고 들 했다. 그날은 훈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오막살이 안을 들여다보았다. 세노인이 다 있었다. 신선3호 김노인은 웃목에 벽을 향하고 
앉아 거기 기둥에 박힌 못에다 실 코를 걸어놓고 무엇에 쓰자는 것인지 그물을 뜨고 있고, 2호 신선 박 
노인은 문께로 나앉아 고무신 뒤축을 깁고 있고, 서노인은 아랫목에 벽을 향해 누워있다. 서서 다닐때보
다도 더 큰 키다.죽은 사람처럼 뻗친 그의 무릅 위에서 다람쥐가 한 놈 앞발로 얼굴을 닦고 있다.
 "서 노인이 어디 편찮은 모양이군요."
 그제야 박 노인이 늙은 호박 같은 머리를 든다.
 '네, 체해 가지고 한 사날."
 그는 한 번 서노인을 돌아본다.
 그날 저녁 국민학교 이 학년인 딸과 종과 바둑이가 우유죽 그릇을 들고 오막살이로 갔다.
 "불쌍하더라!"
 돌아온 딸애가 제법 국민학교 이 학년답게 낯을 찌푸린다.
 "불쌍하더라!"
 꼭 같은 어조로 종이 따라한다.

 다음 날이다.
 훈이 학교에서 돌아오자 종이 마루로 달려나와,
 "아버지 아버지 나 다람쥐 있다.
 하며 구두도 미처 벗기 전에 훈의 손을 끈다.
 낮에 서 노인이 오래간만에 집엘  들렀더란다. 한손에는 언제나 끌고  다니는 꼬불꼬불한 가무태 나무 
지팡이를 짚고, 또 한손에는 이쁜 다람쥐 한 마리 쥐고,
 "이거나 애길 줄라고."
 서노인이 일 년을 방안에서 키웠다는  다람쥐는 아주 길이 잘 들엉  있다. 놓아도 달아날 생각을 하지 
않고 마구 사람의 목덜미로 기어올라 서는 오물오물 가슴팍으로 파고 든다.
 그로부터 종은 훈의 방에서 부지런히 꽁초를 까서 빈 캐러멀  갑에 넣었고, 그런 다음 날 저녁이면 서 
노인이 그 캐러멀 갑을 도토리로 가득히 채워다 종에게 돌린다.
 "먹진 못하는 거야. 다람쥐 주란 말야."
 
 이 조그마한 포구에도 다방이 한 집 있다. 이름이 '갈매기'다
 다방이라야 왜인이 살다 간 목조 건물 이층을, 피난온 젊은 부부가 약간 뜯어고친 것이다.
 훈은 때때로 이 다방엘 들른다.
 학교가 끝나고 교문을 나서면 훈이 선 지점은 바로 정확하게 포구 중앙지점인 것이다. 거기서 훈은 한
참 바다를 바라본다. 호수처럼 동굴한 포구 한가운데는 경찰서 수상 경비선이 하얀 선체를 한가이 뛰우
고 있고, 왼쪽 시장 앞에는 돛대 끝에 빨간 헝겊을 단 어선이 네 척 어깨를 비비고 머물렀다. 그리고 저
만치 앞에 두 대의 흰 등대, 그 등대 허리에 가는 수평선이 죽 가로 그어졌다.  바로 그의 발 밑에서 넘
실거리는 바다가 아득히 수평선을 폇고, 그선에는 다시 또 하나의 바다, 맑은 가을하늘이 아찔하니 높이 
피어올랐다.
 훈은 오른편으로 눈을 돌린다. 벼랑 밑 돌길을 더듬을 필요도 없이 포구를 엇비슷이 가로건너 거기 빤
히 집이 보인다. 동백나무가 반짝거리는 산을 지고 바로 물가에 선 아담한 기와집, 선생들이 감나무장이
라고 부르는 집이다. 마당에는 흰 빨래가 걸렸고, 돌각담 밖에 채소밭 가운데는  쭈그리고 앉은 아내 앞
에 선 종의 빨간 스웨터가 빤히 보인다. 이렇게 밖에  나와 있는 식구들을 보는 날이면 훈은 곧잘 집과
는 반대방향인 왼쪽으로 발길을 돌리곤 한다. 집엘 다녀서 나오는 것 같은 가벼운 기분으로,
 우체국 앞을 지난다. 빨간 포스터를 보면 새삼스레 편지를 띄워 보고  싶어진다. 중국집을 지나 여인숙
이 있고, 거기서 조금 더 가면 다방 '갈매기'가 있다. 
 장기판만한 널쪽에 흰 페인트로 쓴 '갈매기'라는 서툰 간판 밑을  끼고 이층으로 올라가면 층계가 삐걱 
삐걱 소리를 낸다. 거기 베니어 판으로 만든 문을 득 연다. 대개 다방 문은 밀거나 당기게 되어 있는 게 
상식이다. 그런데 이 다방 '갈매기'의 문은 왜식 그대로 옆으로 열게 되어  있다. 다방안은 대개 비어 있
다. 손님이 없다는 뜻만이 아니다. 주인마저 없는 때가 많다.
 훈은 언제나 오면 정해 두고 앉은 창가로 가 앉는다. 그래도 테이블 위에는  선인장이 놓여 있고, 창에
는 푸른 색 커튼이 드리워 있다. 창밑이 곧 한길이고 그 길 가장자리가 바로 바다다. 훈은 멀리 맞은 편
으로 누을 띄운다. 그의 집 자기 방 유리문과 정면으로 마주친다. 벌써 채소밭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고, 
그의 집 대문 앞을 어떤 부인이 머리에 무엇을 이고  지나간다. 갈매기가 한 마리 펄럭 다방 창문을 스
치고 지나간다. 팔만 내밀면 잡힐 것도 같다. 그래 다방 이름이 갈매긴지도 모른다. 별로 그러자는 것도 
아닌데 눈은 자연히 갈매기의 뒤를 따라 허공에 어지러운 불규칙 선을 긋는다.
 안방 문이 열리고 주인 여자가 나온다. 그녀의 나이를 딱히  알 까닭도 없지만 보기에는 이제 겨우 삼
십을 하나둘 넘었을까 말까 한 젊은 부인이다. 갸름한 얼굴에 눈이 반짝 밝은 그녀는 키가 날씬하니 큰 
게 연분이다. 치마가 분명히 예쁘다.
 "아이! 오신 지 오랬어요?"
 약간 코가 멘 귀여운 음성이다.
 "네, 서너 시간됩니다."
 "아무리 선생님두"
 여인은 웃으며 돌아선다.
 "여보, 저 건너 이선생님이 오셨어요."
 그녀는 안방 문을 열고 소리친다. 그리고 거기 뒤로 난 창문 턱을 훌쩍 넘어 나간다. 아마 왜인이 살고 
있을 때는 그게 이층 빨래를 너는 곳이 었을 게다. 그곳이 지금은 이 다방의 주방인 것이다.
 훈은 이제 나올 다방 주인을  기다리며 벽에 걸린 그림들을 바라본다.  제법 이 다방에는 별실이 하나 
있다. 화장실로 가는 문 옆에 발가벗은 어린애 둘이 하나는 서고 하나는 두 무릎을 세우고 앉아서 불을 
쪼이고 있는 그림이 걸렸다. 그 밑이 바로 별실이다.  그런데 그 별실이란 게 아주 걸작이다. 옛날 왜인
이 소위 '오시이레'를 뜯어내고 그 자리에 테이블과 걸상을 들여 놓고 그 앞을 노랑색 커튼으로 가린 것
이다. 훈은 맞은 쪽 벽에 걸린 모나리자의초상으로 눈을 옮기며 피식 웃는다.
 뒤 창문 밖에서 부채질을 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제부터 풍로에 불을 피워 가지고 키피를 대릴 판이다. 
어쩐지 미안한 생각이 든다.
 안방 문이 조용히 열린다. 주인이 나온다. 마룻바닥에 발을 질질끌며 한 걸음 한걸음 이리로 나온다.
 그는 손을 못보는 것이다.
 "이 선생님이슈?"
 그는 훈의 테이블 가까이까지 와서  서며 두 손을 내밀어 불안스레  허공을 더듬는다. 훈은 얼른 그의 
한쪽 손을 잡는다. 여자의 손처럼 연한 손이다.
 가락가락 긴 손 끝에 뾰족한 손톱이 곱기까지 하다.
 "오래간만에 오셨군요."
 "앉으슈."
 혼은 새삼스레 주인의 얼굴을 건너다 본다. 반듯한 이마에 두서너 오라기 머리카락이 길게 흘러내렸다. 
까만 눈썹 밑에 사뿐히 감은 두눈의 긴 살눈썹이 슬프다. 쭉 곧은 콧날에 조각처럼 단정한 입술, 표정을 
읽은 그 입술을 결코 웃어 본 일이 없는 입술 같다.
 "별일 없지요?"
 "그저 그렇게"
 그가 그저 그렇게 지내고 있다는 것은 훈도 안다. 그  어떤 추억을 약처럼 갈아 마시며 외롭고 슬프게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그들 부부 
 훈은 어제 저녁에도 그 '집시의 달'을 들었다.
 두 등대에 불이 들어와 청홍의 물댕기를 길게 수면에 드리울 때, 고요한 밤 하늘에 수문처럼 번져나가
는 색소폰 소리, 자꾸자꾸 그 고요한 밤하늘에 수문처럼 번져나가는 색소폰 소리, 자꾸자꾸 그의 상념을 
옛날로 옛날로 밀어 세우는 그 서러움에 목  쉰 소리. 밤마다 흐느껴 흐르는 그  색소폰 소리를 들으면, 
누가 부는 것인지도 모르는 대로 그는 자기 방 마루 기둥에 기대 앉은 채 별이 뿌려진 밤하늘을 우러러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훈은 다방 한구석 자리에 은빛 색소폰을 어루만지고 있는 장님을 보았다. 그사람이 바
로 다방 주인이었다. 훈은 놀랐다. 그러나 곧 그럴  게라는 생각이 들었다. 옛 친구를 만난 것처럼 둘이
는 가까워졌다.
 그러게 훈이 때때로 이 허줄한 다방을 찾아오는 것은 그 여인이 풍로에  부채질을 해가며 대려다 주는 
사탕물 같은 커피를 마시기 위함이 아니다.
 이제 칠 년 섬 생활에 완전히 표백된 마음 한구석에 그래도 어쩌다 추억의 그늘이  스며들 때면 왜 그
런지 지금 그의 앞에 고요히 감은 그 슬픈 긴 속눈썹이 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멀리서 기적 소리가 솜처럼 부드럽게 들려온다.
 "벌써 저녁 때군요."
 엷은 회색 스웨터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 앉은 주인이 가만히 얼굴을 든다.
 "그렇군요"
 훈도 따라서 눈을 든다. 아직 연락선은  보이지 않는다. 지금쯤은 저 앞의  벼랑 밑을 돌고 있을 게다. 
퉁퉁퉁퉁 기관 소리가 포구의 맑은 공기를 흔든다.
 훈은 건터편 자기 집으로 멀리 시선을 돌린다.
 과연 그의 집 대문 옆 소바우 위에는 빨간 스웨터가 앉았다.

 종은 배를 참 좋아한다. 아침에  연락선이 떠날 때나 저녁에 이렇게  연락선이 돌아 들어올 때면 종의 
위치는 언제나 그렇게 소바우 잔등으로 정해진다. 방안에 앉아서라도 창문으로 빤히 보이는 것이었지만 
부우응하고 고동이 울리기만 하면 밥을 먹다가도 술을 던지고 대문밖으로 뛰어나간다. 그리고는 소바우 
위에서 다섯 살짜리 치고는 너무나 조숙한  포즈로 앉는다. 두 무릎을 앞에서  세워 가슴에 안고 그 두 
무릎 위에 턱을 딱 올려 놓고, 그렇게 얄미운 자세로 종은 눈도 깜짝 않고 연락선을 지켜보는 것이다.
 아침에 연락선이 육지를 향해 떠날  대면, 붕 소리를 지르며 부두를  밀고 나온 배가 포구 한가운데를 
돌아 커다랗게 원을 그리며 선체로 바로 잡아 가지고,  두 등대 사이를 조심스레 빠져나가 저만치 왼쪽
으로 머리를 돌려 흰 파도가 항상 그 발부리를 씻고 있는 벼랑 밑을 돌아 배꼬리에 달린 태극기가 감실
감실 사라지고 또 한 번 꿈속에서처럼 멀리 고동소리만이 들려올 때까지.
 또 오후 네 시 반이면 돌아 들어오는 배가  아침에 사라지던 그 벼랑 밑으로 코를 쓱  내밀며 붕 하고 
고동을 울린다. 그러면 종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든지 곧 수평선을 향해 선다. 잠깐 동안 귀를 기울인
다. 쿵쿵쿵쿵 기관 소리가 간지럽게 들린다. 종의 두눈은 반짝 빛을 발한다.
 그리고는 무슨 마술에나 걸린 애처럼 달린다. 소바우 잔등에 가 앉는다. 
 언제나 꼭 같은 자세로.
 연락선이 두 등대 사이를 미끄러져 들어와서 종의 앞으로 크게 원을 그으며, 손님을 맞을 사람들은 빨
리 부두로 모이라고 이르기나 하듯 감나무 잎이 파르르 떨리도록 한 번 더 크게 고동을 울린다.
 배가 흠씬 부두에 가 멎자 밧줄이 부두에 던져지고 널판이 배 옆구리에 걸터지고 그 위를 제법 파랗고 
빨갛고 한 새옷자락에 육지의 냄새를 묻혀 온 선객들이 섬을 내려선다. 짐짝들이 굴러떨어진다. 한참 복
작거리던 사람들이 다 흩어져간 뒤 빈 부두에 갈매기만이  너더댓 마리 깩깩 외마디 소리를 울며, 흠실
흠실 아직 숨이 덜 가라앉은 연락선 굴뚝을  날아 들고 있을 때까지 종은 꼼짝도 않고  어느 동화 속의 
소년처럼 꿈을 보는 것이다.
 연락선이 부두에 닿자 제법 기쁨 같은 것이 흥성거린다.
 훈은 물끄러미 부두를 내려다보고 앉았고, 그의 앞에 앉은 다방 주인은 고개를 약간 뒤로 젖힌 자세로 
감은 눈 속에 그 어딘가 먼 곳을 보고 있다. 둘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조용하다.
 "선생님, 아드님은 여전하군요. 고것 봐, 얄미워"
  커피잔을 받쳐 들고 온 여인이 창밖을 내다보며 말한다.  
 훈은 다시 건너편으로 눈을 돌린다. 빨간 점 옆에 꺼먼 점이 하나 늘었다. 종이 바둑이를 안고 있는 것
이다. 아마 바둑이는 지금 그 보기에만도 징그러운 하얀  이빨로 종의 조그마한 손을 잘근잘근 씹고 있
을 게다. 그건,
 "아버지, 입에 손을 넣어도 물지 않는다!"
 하며 신기해는 하면서도 그래도 늘 어떤 불신을 손 끝에 모으며 오랫동안 시험해 온 뒤에 비로소 맺어
진 그들 둘만의 우의니까.
 "저도 봅니다"
 ".........?"
 "연락선의 고동 소리를 들으면 저도 저기 바위 위에 두 무릎을 딱 안고  앉은 소년의 모습을 볼 수 있
지요."
다방주인은그 긴 손가락으로 창밖을 멀리  가리킨다. 그의 손끝은 마치 눈  뜬 사람의 그것처럼 정확히 
맞은편 한 점을 지시하고 다. 훈과 여인의 눈이 잠깐 서로 부딪친다.
 "그 놈은 배를 참 좋아합니다."
 "배를요? 제가 색포폰을 좋아하는 것처럼-. 그도 무언가 그리운 아닌가요?
 "이 섬에서 나서 이 섬에서 자란 앤 걸요 뭐."
  "그렇지만 저 콜럼버스같이."
  "콜럼버스같이?
  여인은 둘의 대화를 들으며 스푼으로 남편의 찻잔을 젓고  있다. 보동한 손이 여왼 손을 들어다 찻잔
을 쥐어 준다.

  나흘 있으면 추석이다. 바람이 분다, 파도가 거세다. 집채 같은 파도가  와와 소리를 지르며 밀려든다. 
방파제를 때리고 부서진 파도가 허옇게 거품이 되어 등대  꼭대기를 넘는다. 훈네 집 앞 돌길은 완전히 
바다에 잠겼다. 포구 안에는 쫓겨 들어온 어선들이 서로 어깨를 부비고 있다. 
포구 가장자리에도 파도가 한 길은 넘게 한길 위로 추어오른다.
  이틀 후에야 파도는 갔다. 수평선이 더 가깝다. 지구가 그 회전을 멈추기나 한 것같이 고요하다.
 훈은 학교로 나갔다. 파도로 해서 돌길이  말이 아니다. 소방서 앞 한길 가운데  떡돌만치나 큰 바위가 
밀려 올라와 있다. 포구 가장자리의 큰 길은 홍수를 치르고 난 뒤 같다,
 훈은 학교 사환애에게서 슬픈 소식을 들었다.
 다방 '갈매기'의 부부가 죽었다는 것이다.
 그 파도가 무섭던 날 밤 밖에 나왔던 다방 주인이 잘못하여 물에 휩쓸려 들어가자 그를 구한다는게 그
만 부인마저 빠졌단다.
 훈은 수업을 하면서도 문득문득 눈을 창밖의 바다로  띄웠다. 그때마다 훈은 꼭 껴안고 물로 뛰어드는 
젊은 부부를 생각했다.
 그러나 아마도 그들의 과거를 모르던 것처럼 또 이젠 아무도 그들의 죽음의 진상을 모른다.
   추석날 오후다. 훈은 마루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여느 날보다 일찍 서 노인이 들렀다. 새 옥
양목 적삼을 입었다 
   "선생님, 아들이 왔습네다."
   밑도 끝도 없는 말이다. 훈은 통 알 수가 없다.
  "아들이 왔습네다?
  "아들이라니요?
  "네, 아들이 있습네다."
  훈은 서 노인을 따라 대문밖으로 나갔다. 거기 젊은 군인이 군모를 벗어 들고 서 있다. 눈이 서글서글 
큰 군인은 발을 모두어 서며 꾸벅 절을 한다. 작업복 깃에 육군 대위 계급장이 반짝 한다.
 "여러 가지로 감사합니다."
 훈은 그저 서 노인과 군인의 얼굴만 번갈아 본다.
"전연 모르고 있었습니다. 돌아가신 것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군인은 면목없다는 듯이 또 한번 머리를 숙인다.
  단둘이 살다 아들이 국민방위군에 소집되어 나갔더란다. 후에  돌아가 보니 집은 잿더미가 되었고 아
무도 서 노인의 행방은 모르더란다. 그 후 찾기도 무척 찾았단다, 그러나  그저 기적을 바라는 마음에서
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기적이 바로 한 시간 전에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 섬의 경비를 맡아 파견된 아들이 배에서 내려  지프차를 타고 시장앞 다리를 건너던 때란다. 길에 
사람들이 꽉 모여 섰더란다. 차를 세웠다. 물에 빠져 죽은 시체를 건졌다는 것이다. 아들은 차에서 내렸
다. 아버지를 잃은 뒤로는 어쩐이 횡사한 시체를  꼭 들여다보게 된 그였다. 그런데  그건  젊은 부부의 
시체더란다. 그는 커다란 안도감과 함께 그 어떤 엷 실망을 느끼며 돌아섰단다. 그때 발 앞에 그는 기적
과 마주 섰더란다.
  "참 잘 됐습니다. 잘 췄습니다."
   훈은 그저 잘 줬다고만 한다.
   그길로서 노인은떠났다. 한십 리 떨어진 곳에 있는아들의 부대로 가는 것이다.
  큰 길에까지 배웅을 나간 훈과 봉과 또 박 노인과 김 노인이 늘어선 앞에 지프차 뒷자리에 올라 앉은 
서 노인은 얼빠진 사람모양 말이 없이 없다.
  "그럼 또 곧 찾아뵙겠습니다."
  군인이 거수 경례를 한다. 영문을 모르는  종은 아까부터 군인만 빤히 쳐다본다.  부르릉 엔진이 걸린
다. 군인이 운전수 옆자리에 올랐다. 마악 차가 움직이는  때다. 서 노인이 황급히 목을 차 밖으로 내민
다.
  "선생님! 애기, 잘 있어라. 다람쥐 도토리는 뒷산에....... 아니 산엔 가지마. 그러구 박 노인 김 노인,....."
 지프차가 언덕길을 넘어간다. 돌아서는 종의 스웨터 양  호주머니에는 정말 알이 들은 캐러멀이 한 갑
씩 꽃혀 있다.
 
  땅거미가 내리깔리자 등대에 불이 켜졌다. 오른쪽에는  빨강등, 왼쪽에는 파랑등. 긴 물댕기가 가물가
물 움직인다. 달이 뜬다. 그 청홍 두 개의 등 바루 바운데로 수평선에 달이 끓어오른다. 멀리 아주 멀리 
금빛 파도가 훈의 가슴을 향해 달을 굴려온다.
  딸애가 라디오의 스위치를 넣었나 보다. 무슨 드라마의 끝인가 기차가들을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누나 누나 이거 기차지?
  "그래 ."
  "기차는 배보다 커?
  "그럼! 바보."
  "배보다 빨라?
  "그럼?
  "연락선보다도?
  "그럼?
  "경비선보다도?
  "그럼! 바보야."
  "누난 기차 타봤어?" 
  "그럼!"
  두 살때 피난길에 화물차 꼭대기를 탄 제가 무슨 그때 기억이 있다고 그래도 뽐낸다.
  "나도 기차 타봤음!"
  훈은 밖에 어두운 마루에 앉아 애들의 대화를 들으며 담배를 꺼내 문다.
  "콜럼버스같이,,, "
  마당으로 내려선다. 바둑이가 마루 밑에서 기어 나온다. 어느 새 달은 꽤 높이 솟아올랐다. 가는 구름
이 둥근 추석달에 가로 걸렸다. 어디선가 색소폰의 그 목 쉰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집시의 달.
 훈은 맞은쪽을 건너다 본다. 언제나 빤히 불이 켜져 있던 그 이층 창문은  캄캄하다. 어쩐지 이제 자기
도 이 포구를 떠나가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는 다시 달을 향해 선다. 밤에  어디로 가는 것일
까, 갈매기가 두 마리 훨훨 달을 향해 저 앞으로 날아간다.





    잉여인간(지은이: 손창섭)

  만기치과의원에는 원장인 서만기씨와 간호원 홍인숙양외에도 거의 날마다 출근하다시피하는 사
람 둘이 있다. 그 한 사람은 비분강개파 채익준 씨요,  다른 한 사람은 실의의 인간 천봉우 씨다, 
두 사람은 다같이 서만기 원창의 중학교 동창생이다.  그들은 도리어 원장보다도 먼저 나와서 대
합실에 자리잡고 신문을 읽고 있는 날도 있었다.  더구나 채익준은 간호원보다도 일젝 나오는 수
가 많았다 큼직한 미제 자물쇠가 잠겨 있는 출입문 앞에 버티고 섰다가 간호원이 나타날 말이면,
  "미스 홍 오늘은 나에게 구려."
  익준은 반가운 낮으로 맞이하는 것이었다. 그선 날은 흥인숙이가 아침 청소를 하는 데 한결 편
했다. 한사코 말려도 익준은 굳이 양복 저고리를 벗어 붙이고 소매까지 걷고 나서서 거들어 주기 
때문이다, 대합실과 진찰실을 합쳐도 겨우 다섯 평이  될까 말까한 방이지만 익준은 손수 마룻바
닥에 물을 뿌리고 방 구석이나 테이블 밑까지도 말끔히 쓸어내는 것이다. 무슨 일에나 몸을 사리
지 않고 앞장을 서는 그의 성품은 이런 데도 잘  나타났다. 청소가 끝나면 익준은 작달막한 키에 
가로 퍼진 그 둥실한 몸집을 대합실 의자에 내어 던지듯 털색 걸터앉아서 신문을 본다.
그러느라면 원장과 천봉우가 대개 전후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오늘도 간호원을 도와 실내 청소를 마치고 난  익준은 대합실에 자리잡고 신문을 펴들었다. 아
마도 세상에 그처럼 충실한 신문 톡자는 없을 것이다. 이  병원에서 구독하고 있는 두 종류의 신
문을 그는 한 시간 이상이나 시간을 소비해  가며 첫 줄 첫 자에서 끝줄끝자까지  기사고 광고고 
할 것 없이 하나도 빼지 않고 죄다 읽어버리는 것이다. 익준은 또한 그저 신문을 읽는 데만 그치
지 않는다. 거기 보도된 기사 내용에 대해서 자기류의 엄격한  비판을 가할 것을 잊지 않는 것이
다. 지금도 익준은 신문을 보다 말고 앞에 놓여 있는 소형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격분하 
여 고함을 질렀다,
  "천하에 이런 죽일 놈들이 있어?
  참지 못해 신문을 든 채 벌떡 일어섰다.  익준은 진찰실로 달려들어가서 그 신문지를 간호원의 
턱 밑에 들이대며,
  "미스 흥 이걸 좀 봐요. 아니 이런 주리를 틀 놈들이 있어 글쎄!"
  눈을 부라리고 치를 부르르 떨었다. 신문 사회면에는  어느 제약 회사에서 외국제 포장갑을 대
량으로 밀수입해다가 인체에 유해한 위조품을 넣어 가지고 고급 외국약으로  기만 매각하여 수천
만 환에 달하는 부당 이득을 취하였다는 기사가 크게 보도되어 있었다. 인숙이가 그 기사를 읽는 
동안 익준은 분을 누르지 못해 진찰실과 대합실  사이를 왔다갔다 하며 혼자 투덜거렸다. 이윽고 
인숙에게서 신문지를 도로 받아든 익준은그것을돌돌 말아가지고 옆에 있는의자를 한번 딱치고 나
서,
  "그래 미스 홍은 어떻게 생각해. 이놈들을 어떻게 처치했으면 속이 시원하겠느냐 말요?"
  마치 따지고 들 듯했다,
  "그야 뻔하죠 뭐. 으레 법에 의해서 적당히 처벌될 게 아니겠어요."
  그러자 익준은 한층 더 분개해서 흡사 인숙이가 범인이기나 한 듯이 핏대를  세우고 대드는 것
이었다.
  "뭐라구? 법에 의해서 적당히 처벌될 게라? 아니 그래 이  따위 악질도배들을 그 뜻뜻미지근한 
의법 처단으루 만족할 수 있단 말요? 미스 홍은 그 정도루 만족할 수 있느냔  말요. 무슨 소리요, 
어림없소. 이런 놈들은 그저 대번에 모가질 비틀어 버리구  말아야 돼, 아니 즉각 총살이다. 그저 
당장에 빵빵 하구 쏴 죽여 버리구 말아야 돼. 그지구  두 모가지를 베어서 옛날처럼 네거리에 효
수를 해야 돼요. 극형에 처해야 마땅하단 말요!"
  "어마 선생님두 온. 끔찍스레 그렇게까지 할 게 뭐예요!"
  "끔찍하다? 아 그럼 그 놈들을 몇만 환의 벌금이다,  몇 년 징역이다 하구 감방 속에 피신시켜 
놓구 잘 처먹구 낮잠이나 자게 하다가 세상에 도로 내놔야 옳단 말요?
  익준은 잠시 인숙을 노려보듯 하다가,
  "이거 봐요, 미스 흥. 우리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못 사는지 알우?  우리나라가 누구 때문에 이
렇게 피폐해 가는지 알우? 모두가 이 따위 악당들때문이요  이거 봐요 그런 놈들은 말야, 이완용
이나 마찬가지 역적이또 나라야 망하든 말든 동포들이야 가짜 약을 사 쓰구 죽든 말든 내 뱃대기
만불리면 그만이라구나 생각하는 그딴 놈들은 살인강도  이상의 악랄범이요. 그런 놈들을 극형에 
처하지 않으니까 유사한 사건이 꼬리를 물구 발생한단 말요 난 그 놈들의 뼈를 갈아 마셔두 시원
치 않겠소......"
  익준은 아직도 분을 끄지 못해  이를 가는 것이었다. 그는 대합실  의자에 돌아가 앉아서 다른 
기사들을 읽어 내려가다가도 잠자기 땅이 꺼지게 한숨을  푸우 내쉬고는,  "츤하에 죽일 놈들 같
으니,,,,,,."
  내뱉듯 하고 비참한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그가 나머지 기사를 죄다 주워 읽고 차츰 흥분도 가라앉을 때쯤 해서야 이 병원의 주인이 나타
났다. 서만기 원장은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보이며 가방을 들고 문 안에 들어선 것이다.
  "어서 나오게?
  익준은 늘 하는 식으로 인사를 건네고 나서 만기가 횐 가운을 걸치고 
자리에 앉기가 바쁘게,
  "여보게 만기, 세상에 그래 이런 날도둑놈들이 있나?"
  그렇게 개탄하고 신문을 펴들고 만기 곁으로  가 앉는 익준의 얼굴은 흥분으로  도로 붉어지기 
시작했다, 만기는 여전히 품 있는 미소를 머금은 채,
  "그러지 않아두 집에서 신문을 보구 자네가 또 몹시 격분했으리라구 짐작했네."
  그러면서 담베 케이스를 열고 먼저 익준에게 권하였다.
  권하는 대로 익준은 손을 내밀어서 한 대 뽑아 들었다.
  "이게 나 흔자만 격분할 일인가? 그럼 자네나 딴 사람들은 심상하다. 그 말인가?
  "아니지. 남달리 정의감과 의분이 강한 자네니까 남보다  몇 배 격분하지 않을 수 없으리란 말
일세. 그렇지만 혼자 흥분해서 펄펄 뛰면 뭘 하나?"
  만기도 탄식하듯 하였다. 둘이는 담배에 불을 붙여 물었다.
  "정의감의 강약이 문젠가, 이 사람아. 그래 이런 극악무도한 놈들을 보구  가만하구 있을 수 있
겠나. 가슴속에서 불덩이가 치미는데 잠자쿠 있을 수 있느냐 말야?"
  익준은 만기가 함께 흥분해 주지 않는 것이 불만인 모양이었다. 그때 마침 봉우가 기척도 없이 
슬그머니 문 안에 들어섰다. 언데나 다름없이 수면 부족이 느껴지는 떠름한  얼굴이다. 그는 먼저 
인숙이 쪽을 바라보고 다음에 만기와 익준을 번갈아  보면서 멋쩍게 씩하고 웃었다, 그리고는 거
의 자기 자리로 정해진 대합실 소파의 맨  구석자리에 조심히 걸터앉았다. 그러자 자기의 흥분을 
같이 나눠 줄 사람이 나타났다는 듯이 익준은 탁자 위에 놓았던 신문블 집어서 봉우 눈앞에 바루 
가져다 댔다.
  "봉우, 이거 봐. 글쎄 이런 능지처참할 놈들이 있느냐 말야."
  익준은 핏대를 세우며 다시 흥분하기 시작했다. 봉우는 선잠을 잰 사람처럼 어릿어릿한 표정으
로 익준을 쳐다보았다. 희미하게 옷었다. 그리고 흥미 없이 신문을 받아들었다.
  "뭐 말이야?
  "뭐 이야가 뭐야, 이런 방충이 같은 녀석, 그래 자네 눈깔엔 이게 안 뵌단 말야?
 
  화가 동해서 연딜 수 없다는 듯이 익준은 손가락 끝으로 톱 기사의 먹 같은 활자를 찔렀다. 봉
우는 강요하듯이 제목을 입속말로 읽었다, 용은 마지못해 두어 줄 읽다가 말았다. 이어 딴 제목들
을 대강 훌어보고나서 봉우는 도로 신문을 접어서 탁자 위에 얹었다. 그러더니 만기와 익준을 번
갈아 쳐다보고 웃으려다가 말았다. 익준은 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고함을 질렀다.
  "왜 아무 말이 없는 거야?"
  봉우는 동정을 구하듯 하는 눈동자로 만기와 익준을 번갈아 보았다.
  "임마, 그래 넌 아무렇지두 않단 말야? 눈뜬 채 코를 베어 먹히구두 심상하단 말야?
  "누가코를 베어 먹혔대? 난 잘 안 봤어?"
  봉우는 얼른 신문을 다시 집어 들었다. 그러자 익준은 그 신문지를 낚아채서는 탁자 위에다 힘
껏 동댕이를 리고 나서,
  "이런 쓸개 빠진 녀석......에잇 난 다신 자네들과 얘기 않네?"
  우뚤해 가지고 홱 돌아서더니 댓바람에 문을 차고 나가 버리었다.
 
  익준이 다시는 안 올 듯이 밖으로 사라지자 한동안 어리둥절하고 있던 봉우는  다시 신문을 집
어들고 기사 제목을 대강 더듬어 보기 시작했다. 봉우는 언제나 그랬다.  게슴츠레한 낮으로 대합
실에 나타나쳔 익준이 한 자 빼지 않고 샅샅이 읽고 놓아 둔 신문을 펴들고  건성건성 제목만 되
는 대로 주어 읽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는 진찰을  받으러 온 환자처럼 말없이 우두커니 시
간을 보내는 것이다.
  그의 시선은 자주 간호원에게로 갔다. 그때만은 그의 눈도 노상 황홀하게  빛난다. 그러다가 간
호원과 시선이 마주치면 봉우는 당황한 표정으로로 외면해 버리는 것이다. 빼빼 말라붙은 몸집에 
키만 멀쑥하게 큰 그는 언제나 말이 적고 그림자처럼 조용하다. 어딘가 방금 자다 갠 사람모 
정신이 들어 보이지 않는 표정을 하고 있다가 그는 대합실 구석자리에 앉은 채 곧잘 낮잠을 즐긴
다. 봉우의 낮잠 자는 모양이란 아주 신기하다. 소파에 앉은 대로 허리와 목을  꼿꼿이 펴고 깍지
낀 두 손을 얌전히 무릎 위에 얹고는 눈을 감고 있다. 그러고 자는 것이다.  그는 밤에 집에서 잘 
때에도 자세를 헝클으지 않는다고 한다. 천장을 향하고 반듯이 누우면 다음 날 아침까지 몸을 움
직이지 않고 고대로 잔다는 것이다. 그러한 봉우는 언제나 수면 부족을 느끼고 있다고 한다. 그것
은 6,25사 변을 치르고 나서부터 현저해졌다는  것이다. 전차나 버스를 타도 자리를  잡고 앉기만 
하면 그는 으레 잠이 들어 버린다. 그렇지만 자다가도 그는 자기가 내딜 정류장을 지나쳐 버리는 
일이 없다. 자면서도 그는 차장의 고함 소리를 꿈 속에서처럼 어렴풋이 듣고 있기 때문이다, 밤에 
집에서 잘 때에도 그렇다. 자는 동안에도 그는 주위에서 일어나는 소리를 다 들을  수 있다, 재깍
재깍 시계 돌아가는 소리, 천장이나 부엌에 쥐 다니는 소리, 아내나 아이들의 잠꼬대며 바깥의 바
람 소리까지도 들으면서 잔다. 말하자면  봉우는 오관중 다른 감각기관은  다 자면서도 청각만은 
늘 깨어 있는 셈이다. 그러니까 자연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렇게 된 연유를 그는 6,25사변으로 들리는 것이다. 피난 나갈 기회를 놓치고  적치 삼 개월을 
꼬박 서울에 숨어 지낸 봉우는 빨갱이와 공습에 대한 공포감 때문에 잠시도  마음놓고 깊이 잠들
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밤이나 낮이나 이십사 시간 조금도 긴장을 완전히 풀어 본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처럼 불안한 긴장 상태가 어느덧 고질화되어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러기에 꼬집어 말하면 그는 자면서도 깨어 있고, 깨어 있으면서도 자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그는 
밤낮없이 자면서도 항시 수면 부족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모양이다. 그것은 단지 육체적으로 오
는 증상이기보다는 더 많이 정신적인 데서 결과하는 심리적 현상인 것이다.
  이러한 봉우는 자연 무슨 일에나 깊은 관심과  정열을 기울이지 못하는 것이었다. 중학 시절에
는 그토록 재기 발랄하고 야심가였던 그가  일단 현실 사회에 몸을 잠그고  부대끼기 시작하면서 
부터 차츰 무슨 일에나 시들해지기 시작하더니 전란통에 양친과 형제를 잃고 난 다음부터는 영딴 
사람처럼 인간 만사에 흥미를 잃은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심지어 그는 자기 아내에게까지 
남편다운 관심과 구실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 달이면 절반은 사업을 합네, 혹은 친정에 
가 있습네 하고 집을 비우기가 일쑤인 봉우 아내는 여러 가지 불미한 소문을 퍼뜨리고 다니었다. 
그 여자는 본시 평판이 좋지 못하였다. 봉우와 결혼한 지 여덞달 만에 낳은 첫 아기가 봉우의 친
자식이 아니라는 것은 가까운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둘째 아이 역시 누구의 아인지 
알게 뭐냐고 봉우 자신 신용을  하려 들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둘이  헤어지지 않고 지내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리라고 만기는 생각하는 것이다. 이를테
면 활동 의욕과 생활력을 완전히 상실하다시피한 봉우는 아내의 부양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고, 
경제 활동이 비범한 봉우 처는 무슨 짓을 하며 나가 돌아다녀도 말썽을 부리지 않으니 어쨌든 봉
우가 편리한 남편이었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아무튼 봉우는 그만큼 가정에  대해서나 세상 일에 
무관심한 인간이었다. 이상한 것은,  그러면서도 단 한 가지  간호원인 인숙 양을 바라볼  때만은  
잠에서 덜 잰 사람같이 언제나 게슴츠레하던 그의 눈이 깨어 있는 사람의  눈다웁게 빛나는 것이
었다. 봉우는 인숙을 사랑하고 있는 성싶었다.
  그러고 보면 봉우가 날마다 이 병원 대합실을 찾아와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오로지 인숙을 보
기 위해서친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의 다음과 같은 거동으로서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퇴근 
시간이 되어 만기와 인숙이가  병원문을 잠그고 한길로  나서면 물론 봉우도 그림자처럼  따라나  
선다. 그러면 인숙은 만기와 봉우에게 인사를 남기고 헤어져 전차 정류장 쪽으로 간다. 거기서 인
숙이가 전차를 기다리다 보면 어느새 봉우가 옆에 척 따라와 서 있는 것이다.
  "어마, 선생님 어디 가셔요?
  인숙이가 의외란 듯이 물으면 봉우는 아이들모양 손을 들어 한 방향을 가리키며 
  "저어기 좀...."
  그러고는 자기도 같이 전차를 기다리는 것이다. 인숙이가  전차를 타면 얼른 봉우도 따라 오른
다. 전차 안에서도 봉우는 별로 말이 없이 인숙이 곁에 서 있다가 인숙이가 내리면 그도 따라 내
리는 것이다. 인숙은 한참와서 걷다가 자기 집 골목 어귀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고,
  "그럼 안녕히 다녀가세요."
  머리를 숙이고 나서 인숙이가 빠른 걸음으로 골목길을 걸어 들어가면 봉우는 처량한 표정을 하
고 서서 인숙의 뒷모양을 지켜보다가 보이지않게 되어서야 풀이 죽어서  발길을 돌이키는 것이었
다. 봉우는 거의 매일 그러하였다. 어떤  기회에 인숙에게서 우연히 그 얘기를 들었을  때 만기는 
단순히 웃어 버릴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만기와 익준이와 봉우는 중학 시절에 비교적 가깝게 지낸 사이지만 가정 환경이나 취미나 성격
이나 성장해서의 인생 태도는 판이하게 달랐다 만기는 좀처럼 흥분하거나  격하지 않는 인물이었
다. 그렇다고 활동적인 타입도 아니지만 봉우처럼 유약한 존재는 물론 아니었다.  반대로 외유 내
강한 사내였다. 자기의 분수를 알고 함부로 부딪히지도  않고 꺾이지도 않고 자기의 능력과 노력
과 성의로써 차근차근 자기의 길을 뚫고 나가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놀라운 일에 부닥치거나 비
위에 거슬리는 사람을 대해서도 도리어 반감을 느낄 만큼 그는 침착하고 기품  있는 태도를 잃지 
않는다. 그것은 본시 천성의 탓이라고도 하지만 한편 그의 풍부한 교양의 힘이 뒷받침해 주는 일
이기도 하였다. 문벌 있는 가문에  태어나서 화초 가꾸듯 정성어린  어른들의 손에서 구김살없이 
곧게 자라난 만기는 예의범절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있을 뿐 아니라  미술, 음악,문학을 비롯해
서 무용, 스포츠, 영화에 이르기까지 깊은 이해와 고급한 감상안을 갖추고 있었다, 크레졸 냄새만
을 인생의 유일한 권위로 믿고 있는 그런 부류의 의사와는 달랐다. 게다가 만기는 서양 사람처럼 
후리후리한 키와 알맞은 몸집에 귀공자다운 해사한 면모를  빛내고 있었다 .또한 넓고 반듯한 이
마와 맑고 잔잔한 눈은 그의 총명성과 기품을 설명해 주고  있었다. 누구를 대해서나 입을 열 때
는 기사가 바둑돌을 적소에 골라 놓듯이 정확하고 품 있는  말을 한 마디 신중히 골라썼다. 언제
나 부드러운 미소와 침착한 언동으로 남에게 친절히 대할 것을 잊지 않았다. 좋은 의미에서 그는 
영국풍의 신사였다. 자연 많은 사람들틈에 섞이면 군계일학격으로 그의 품격은 더욱 두드러져 보
였다. 그는 한편 같은 치과 의사들 가운데서도 기술이 출중한 편이었다.  그러면서도 현재는 근방
에 있는 딴 치과에게 많은  손님을 뺏기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것은  단지 시설이 빈약하고 병원 
건몰치 초라한 까닭이었다. 그렇지만 지금의 만기로서는 딴 도리가 없었다. 좀더  많은 손님을 끌
기 위해서는 목 좋은 곳에 아담한 건물을 얻어 최신식 시설을 갖추는 길밖에 없는데 현재의 경제 
실정으로는 요원한 꿈이 아닐 수  없었다. 이나마도 병원 건물은 물론  시설 일체가 만기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건물이나 기구 일습이 봉우 처가의 소유물인 것이사. 봉우의  장인이 생존했을 당
시 빛값에 인수했던 담보물이었는데 막상 팔아치우려고 하니 워낙에 구식인데다가 고물이어서 값
이 나가지 않기 때문에 625사변 이래 줄곧 세를  놓아오던 터였다. 그것을 봉우의 소개로 만기가 
빌려 쓰게 되었던 것이다. 다달이 그  셋돈을 받으러 오는 것은 봉우 처였다.  친정에서도 도리어 
오빠들보다 발언권이 강한 봉우 처는 종내 오빠를 휘어잡아 병원 건물과 거기에  딸린 시설을 거
의 자기 소유나 다름없이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이 분방하기  이를 데 없는 봉우 처로 말미암아
서 만기는 난처한 일을 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봉우 처는 툭 하면 병원을찾아왔다. 한 달
에 한 번씩 셋돈을 받으러 들르는 외에도 치석이 끼었느니 입치가 어떠니 충치가 생기는 것 같다
느니 핑계를 내걸고 걸핏하면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봉우 처는 짙은 화장과 화려한 의상
으로 풍요한 육체를 장식하고 있었다. 그러한 경우 물론 봉우 부부는 대합실에서 서로 얼굴을 대
하게 마련이나 잠간 보고는 그만이다. 모르는 사이처럼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거는 일조차 거의 
없다. 봉우는 이내 도로 반수반성상태에 빠지고 그  아내는 만기에게 친밀한 미소를 보내며 다가
앉는 것이다. 얼마 전 치석 소제를 하러왔을 때 일이다. 얼굴을 젖히게 하고  만기가 열심히 잇사
이를 긁어내고 있노라니까 눈을 감고 가만하고 봉우 처가 슬며시  만기의 가운자락을 잡아당기었
다. 그러면서 눈을 감은 채 배시시 웃었다. 만기는 내심 적지 아니 당황하여 얼른 봉우 아내의 손
을 추리치려 했지만 여인은 손에 더욱 힘을 주어서 끌어당기었다.  만기는 할 수 없이 봉우나 딴 
사람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몸으로 가리듯이 하며 다가서서 하던 일을 계속 했다. 대강 치석을 긁
어 내고 양치질을 시켰다. 봉우 처는 그제야 만기의 가운 자락을 틀어 쥐고 있던 손을 놓고 컵에 
준비된 물을 머금고 울렁울렁 입을 부셔냈다. 그러더니,
  "아파서 그랬어요?
  만기를 쳐다보며 변명하듯 하고 애교 있게 웃었다.
  언젠가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충치가 생긴 것 같아 들렀다고  눈이 부시게 차리고 나타난 
봉우 처는 만기의 지시도 없이 치료 의자에 성큼올라앉았다. 만기가 다가가 어디 입을 벌려 보라
고 하니까 봉우처는 지긋이 눈을 찌그리며 웃어 보이고는 일부러  그러듯이 입술을 오물오물하다
가 겨우 삼 분의 일쯤 벌리고 말았다,
  "좀 더 힘껏, 아,,,,,,"
  그래도 여자는 다시 입술을 오물오물해 보이고는 역시  삼 분의 일쯤 벌리고 그만이었다. 그리
고는 미태를 담뿍 담은 눈으로 연신 소리없이 웃었다. 그때부터 만기는 의식적으로 봉우 처를 경
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본시가 만기에게는 여자들이 많이 따르는  편이었다. 여자들은 기
회만 있으면 만기에게 지나친 호의를 보이려고 애쓰곤 하였다.
  사철을 가리지 않고 국산지 춘추복 한 벌로  몇 년을 두고 버티어 오는 가난한  치과 의사지만 
귀공자다운 그의 기품 있는 풍모와 알맞은 체격과 교양인다운 세련된 언동이 여자들로 하여금 두
말없이 매혹케 하는 모양이었다. 심지어는 그의 처제까지도 그를 사모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기 
그 부인이 가끔 농담삼아 만기에게 이런 말을 걸어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결코 잘난 남편을 섬길 게 아닌가 봐요?
  "그게 무슨 소리요? 대체."
  "모두들  당신에게   눈독을  들이구  있으니,   미안하기두  하고,   민망하기두해서 그래요!"             
  "온 별소릴 다,,,,,, 그래 내가 그렇게 잘났던가?
  물론 그러고 둘이 다 농담으로 웃어 넘기고 마는 일이었으되 만기 자신  이상히도 여자들이 자
기를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그러고 보면 병원을 찾아오는 단골 환자의 거개
가 젊은 여자들이라는 사실도 무심히 보아넘길 일만은  아니었다. 많은 여자 환자 가운데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만기에게 호감을 보이려 드는 사람도  있었다. 한 주일이면 끝날 치료를 자진해서 
열흘 내지 보름씩 받으러 다닌다거나 완치된 다음에도 사례라고 하며 와이셔츠나 양복지 같은 것
을 사들고 일부러 찾아오는 여자가 결코 한둘에  그치지 않았다. 그때마다 여자들의 단순하지 않
은 호의를 물리치기에 만기는 진땀을 빼곤 했던  것이다. 그러한 여성들 가운데는 외모로나 교양
으로나 퍽 매력적인 상대가 없지도 않아서 만기는 맑고 잔잔한 마음 속에  뜻하지 않았던 잔물결
을 일으 키는 경우도 간흑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저 그것뿐이었다.  사랑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비극이 두려웠다. 더구나 현대적 의미에서의  현처양모인 아내를 
생각하면 부질없는 마음 구석의 잔물결도 이내 가라앉아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십 년 가까이나 
가난한 살림에 들볶이면서도 한결같이 변함없는  애정과 신뢰로써 남편을 섬기었고  심혈을 쏟아 
어린것들을 보살펴 오는 아내의 쪼들인 모습을 눈앞에 그려볼 때 만기는 꿈에라도  딴 생각을 품
어 볼 수가 없었다. 그러기 아름다운 여성 환자의 지나친  호의를 물리친 날이면 만기는 으래 아
내가 좋아하는 물건을 무엇기고 사들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신혼 때나 다름없이 지금도 대문께까
지 달려나와 남편을 맞아들이는 아내에게 사갖고 온 물건을 들려 주고 나서  까칠해진 아내의 손
을 꼭 쥐어 주며,
  "고생시켜 미안허우?
  혹은,
  "나이 들면 더 예뻐지는구려!"
  그러고는  봄볕처럼 다사로운 미소를 아내 얼굴에 부어 주는 만기였다.
  그러한 만기라 봉우 처에 대해서는 항시  경계해 오고 있었지만 요즘와서 은근히  골치를 앓지 
않을 수 없었다. 만기에 대찬 봉우 처의  접근공작이 너무나 집요하고 대담하게 나타나기 시작했
기 때문이다. 어제만해도 만기는 봉우 처를 딴 장소에서 만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며칠전부터 병
원 건물과 시설에 관해서 긴급히 의논할 일이 있으니 꼭  좀 만나달라는 연락이 오곤 했다. 그때
마다 만기는 바쁘기도 하고 몸도 좀 불편해서 지정한 장소까지 나갈 수가  없으티 안되었지만 병
원으로 내방 해줄 수는 없느냐는 회답을 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봉우 처에게서는 자기도 여러 가
지 사정으로 찾아갈 수가 없으니 꼭 좀 나와달라는 쪽지를 사람을 시켜서  거푸 보내오는 것이었
다. 어제는 마침내 자기와의 면담을  고의적으로 회피하는 것은 결국  자기를 공공연히 모욕하는 
행위라는 위협조의 연락이 왔던 것이다. 그래서 만기는 할 수 없이 퇴근하는 길로 지정한 다방에 
봉우 처를 만나러 갔던 것이다. 여자는 역시 여왕처럼 화장을 하고 먼저 와 있었다.
  "고마워요. 귀하신 몸이 이처럼 행차를 해주셔서."
  만기에게 맞은쪽 자리를 권하고 나서 여자는  친밀한 미소와 함께 약간 비꼬는  어투로 인사를 
던져왔다,
  "퍽 재미있는 농담이십니다."
  만기가 그랬더니,
  "선생님은 농담을 덜 좋아하실지 모르겠군요 워낙 고상한 신사이시니까."
  그래서,
  "너무 기술적인 용어에는 전 대답할 자신이 없습니다."
  만기는 그러고 가볍게 웃어 보였다. 봉우 처는 만기 의향을  묻지도 않고 오렌지 주스 두 잔을 
시키었다. 그것을 마셔 가면서 대체 의논할 일이란 무엇이냐고 만기 편에서 먼저 물었다.
  "다른 게 아니라, 병원 건물이 하두 낡아서 전면적인 수릴 해야겠어요."
   그래서 병원 옆에 있는 사무실이나 아래층 가게에서들은 셋돈을 인상하는 동시에  삼 개월 분
씩 선불을 받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여러가지 점으루 선생님께만은 말씀 드리기가 안되어서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가 솔
직히 의논해 보려구 뵙자구 헌 거예요."
  여자는 말을 마치고 만기의 얼굴을 살짝 치떠 보았다. 아닌게아니라 만기로서는 아픈 이야기였
다. 현재도 매달 셋돈을 맞춰 놓기에 쩔쩔매는 판이었다. 게다가 석 달치 선불이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얼마나 올려 받으실 예정이십니까?
  "삼 할은 더 받아야어요. 그 근처에서들은 다들 그 정도 받는걸요."
  "그럼 우리 옆 사무실이나 아래충 가게에서들은 이미 양해를 얻으셨습니까?
  그러자 여자는 만기의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보며,
  "선생님, 우리 그런 사무적 얘기는  딴 데 가서 하십시다.  이런 장소에선 싫어요. 제가 저녁을 
대접하겠어. 늘 폐를 끼쳐왔으니까요."
  그러고는 만기가 뭐라고 할 사이도 없이  여자는 일어서 카운터로 가더니 셈을  치르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만기가 어리둥절해서 따라 나가자 봉우 처는 어느 택시늘 불러 세웠다.
  "먼저 오르세요?
  만기는 다음 날 다시 만나 사무적으로 타협하기로 하고 우선 빠져 돌아가려고 했으나,
  "고의로 남의 호의를 무시하는 건 신사도가 아니에요?
  여자는 만기를 차 안으로 떠밀 듯이 했다. 번잡한 길거리에서  실갱이를 할 수도 없고 해서 만
기는 시키는 대로 차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십 분도 채 달리지 않아서 택시는 어느 음식집 앞에 
닿았다. 여염집들 사이에 끼어 있는 그 음식집은 외양과 달리 안에 들어가 보면 방도 여러 개 있 
고 제법 아담하게 꾸려져 있었다. 봉우 처는 그집 마담과는 친숙한 사이인 모양이라 허물없는 인
사를 나누고 나서,
  "별실 비어 있니?
  하고 물었다. 마담은 호기심에 찬 눈으로 만기를 힐끔 쳐다보고,
  "별실 삼 호가 이어 있을 거야. 그리루 모tu."
  그리고는 안을 향하고,
  "별실 삼 호실에 두 분 손님!"
  소리를 질렀다. 열대여섯 살 먹은 소녀가 조르르 달려나와 안내를 했다. 자그마한 홀을 지나 긴 
복도를 휘어 도니 저쪽으로 돌아앉은 참한방이 있었다.
  "이 집 마담, 여학교 동창예요. 그래서 귀한 손님을 대접할 일이 있으면 가끔 오죠."
  여자는 묻지도 않는 말을 하고  다가와서 만기의 양복 저고리를 벗기려  했다. 만기는 얼른 제 
손으로 벗어서 벽에 걸려고 했다. 그러자 여자는  그것을 낚아채듯 뺏어서 옷걸이에 얌전히 걸었
다, 조그만 식탁을 사이에 하고 마주앉아 여자는 만기를 쳐다보며 피로한 듯한 미소를 짓고 가늘
게 한숨을 토했다. 소녀가 물수건과 찻물을 날라왔다. 봉우 처는 이집은  갈비찜이 명물이라고 하
고 약주와 함께 안주와 음식을 시키었다.
  소녀가 사라지자 여자는 식탁에 기대어 두 손으로 턱을 고이고 한동안 가만하고 있었다. 왜 그
런지 몹시 피로해 보였다. 삼십을 한둘 남긴 여자의 무르익은 모습은 어떤 요염한 독소조차 느끼
게 해주었다. 만기도 까닭모를 피로감과 함께 저절로 긴장해졌다.
  "병원 시설을 사겠다는 사람이 있어요. 헐값이지만 고물이라서 차라리 팔아치울까 생각해요!"
  여자는 만기를 빠끔히 쳐다보며 엉뚱한 소리를 했다. 만기는 속으로 놀랐다.  여자의 마음을 얼
른 파악하기 힘들었다. 진담인가, 그렇지 않으면 야비한  복선인가, 어느 쪽이든 만기에게는 타격
이었다. 그 시설은 지금의 안기에게  있어서 생명선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기는 
그러한 내심을 조금도 표면에 키치지 않고 태연히 듣고만 있었다.
  "낡아빠진 그 시설을 쓰기에는 선생님의 탁월한 기술이 아까워요. 그래서 작자가 나선 김에 팔
아치우고 선생님에게는 현대적인 최신식 시설을 갖춰 드리구 싶어서 그래요 제게 그 정도의 자금
은 마련되어 있어요!"
  여자의 음성과 표정이 왜 그렇게 차분차분할까? 거기에는 심리적 호흡의 기술이 필사적으로 팍
용되고 있었다. 그러기 아까 다방에서 내논 말과는 아주 다른 딴 얘기라는 점을 노골적으로 지적
해 줄 수가 없었다.
  "경제적 면에서 제게는 그런 최신 시설을 빌릴 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셋돈 말씀이죠?"
  여자는 간격 없이 웃고 나서,
  "선생님이 독립하실 수 있을 때까지 오 년이구 십 년이구 그냥 빌려 드려두 좋아요!"
  만기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상대편에서 이렇게 자꾸 엉뚱하게만 나오니 더욱 조심해질 뿐이었
다.
  "이상하게 생각하실 건 없어요. 이왕 놀고 있는 돈이 있으니까 제가 존경하고 있는 선생님에게 
조금이라도 편리를 봐드리구 싶은 것뿐예요!"
  순간 여자의 표정이 놀랄 만큼 진지한 빛으로 변했다. 만기는  봉우 처의 이러한 얼굴을 본 일
이 없었다.
  마침 주문한 음식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식사를 하는 동안 봉우 처는 소매를 걷고 마치 남편에
게 하듯 잔시중까지 들었다. 만기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
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만기의 그러한 예감은 마침내 적중하고야 말았다.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 봉우 처는 상 밑에서 한쪽 발을 슬며시 만기 무릎 위에 얹었다. 그러고는 지긋이 힘을 주며 
요염한 웃음을 쏟았다. 그 눈이 불같았다. 만기는 왜 당황했지만 시선을 피하며 슬그머니 물러 앉
았다. 여자는 발끝으로 움추리는 만기의 무릎을 쿡 찌르고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미 전기가 들
어와 있었다. 잠시 멋쩍게 앉아서 먹다 남은 음식들에 공연히 젓가락질을 하다 말고 여자는 갑자
기 자리를 떠서 밖으로 나가버리었다. 한참 동안 여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만기는 어지간히 불쾌
하고 불안한 생각에 앉았다 섰다  하며 마음의 자세를 가다듬었자. 십  분 이상 지나서야 여자는 
돌아왔다. 대번 알아보게 얼굴에는 주기가 돌았다. 여자는 방안에 들어서면서 안으로 문고리를 잠
갔다. 짤그락 하는 소리가 이상하게 도전적이었다. 여자는 다시 창문의 커튼까지  내리고 제 자리
에 가 앉았다. 초가을 저녁 무렵이었지만 밀폐되다시피한 실내는 한증 속처럼  더웠다. 여자는 술
잔을 들어 만기 앞으로 내어밀며,
  "따라 주세요!"
  명령조였다. 원래 만기는 한두 잔밖에 못하기 때문에  주전자에는 술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었
다. 만기는 한 손으로 주전자 뚜껑을 누르고,
  "인제 그만 돌아가실까요. 오늘은 정말 오래간만에 포식했습니다."
  달래듯 했다.
  "내버려 두세요. 거룩하신 선생님 눈엔 제가 사람같이 안 보일 테니까요"
  여자는 무리로 주전자를 뺏어서 자기  손으로 따라 마시었다. 안주도 안  먹고 거푸 물 마시듯 
했다. 만기는 겁이 났다. 이 이상 취하면 어떤 추태를 부릴지도 모른다. 버려 둘  수가 없었다. 만
기는 간신히 술 주전자를 뺏어 감추었다. 그러자 여자는 그것을 도로  뺏으려고 덤벼들었다. 앉은  
채 잠시 붙잡고 돌아갔다. 주전자를 떨어뜨려 술이 엎질러졌다. 여자는 그것을  훔칠 생각도 않고 
만기 무릎 위에 쓰러지듯 푹 엎드려 버리고 말았다.
   "골샌님!"
   여자는 어린애처럼 어깨를 추며 울기 시작했다.
   대합실 문밖에서 웬 소년이 안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넌 웬 아이냐?"
   간호원이 먼거 발견하고 물었다. 소년은 대답 없이 조심히 문을 밀고 들어섰다.  여남은 살 먹
었을 그 소년의 얼굴은 제법 귀염성 있게 생겼지만 거지 아이나 다름없는 꼴을 하고 있었다.
  "여기가 병원이죠?"
  소년은 어릿어릿하며 조그만 소리로 간호원에게 물었다.
  "그래. 너 어째서 왔니?"
  소년은 이번에도 대답을 않고 대합실과 진찰실 안틀 두리번거리고 나서,         
  "울아버지 안 오셨어요?"
  영문 모를 질문을 했다. 테이블 앞에 앉아서 외국 잡지를 뒤적이고 있던 만기가,
  "너의 아버지가 누구냐?"
  물으니까,
  "울아버지, 채익준 씨야요."
  그리고 소년은 다시 한 번 방안을 둘러보았다.
  "오, 너 익준이 아들이구나!"
  만기는 일어나 소년 옆으로 다가갔다.  좀 불안한 표정을 하고 섰는  소년의 손목을 잡아서 옆 
의자에 앉히고 만기도 소파에 마주 앉았다.
  "너 아버지 찾아왔구나. 이름이 뭐지?"
  "채갑성이에요!"
  "나이는?"
  "열한 살예요!"
   만기가 친전히 말을 걸어 주는 바람에 안심이 되었는지,
  "울아버지 안 오셨어요?"
  소년은 걱정스레 다시 물었다.
  "아버진 아침에 잠간 다녀 나가셨는데‥‥‥ 그래 너 왜 아버필 찾아왔니?"
  "어머니가 아버지 찾아오랬어요. 어머니 죽을 것 같대요!"
  소년에게는 여동생 하나와 남동생 하나가 있어서 외할머니까지 합치면 모두  여섯 식구라고 한
다. 그런데 지금까지 집안 살림의 중심이 되어 오던 모친이 반년 가까이나 병석에 누워 지낸다는 
것이다. 모친은 자리에 눕기까지 생선 장사를 했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자고  있는 꼭두새벽에 첫 
차로 인천에 가서 생선을 한 광주리 받아 이고는 서울로 되돌아와서 행상을 하였다는 것이다. 모
친이 병으로 누운 다음부터는 오십이 넘은 외할머니가 어머니 대신 생선 장사를  해서 간신히 가
족들 입에 풀칠을 하고 지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제대로 의사의 치료를 받아 보지도 
못한 채 집에 누워서 앓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병세는 나날이 더 심해만 갔는데 아까 점심 때
쯤 해서 어머니는 소년을 불러 놓고 숨이 자꾸  가빠오는 걸 보니 곧 죽을 것 같다고  하며 얼른 
가서 아버지를 찾아오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만기가 차근차근 캐어묻는 말에  대충 이상과 같은 
내용의 대답을 하고 난 소년은 별안간 훌적거리고 울기 시작했다. 만기는 우선 소년을 달래 놓고,
  "그래 너 이 병원은 어떻게 알았니?"
  "접대 아버지하구 돈 꾸러 왔댔어요."
  "돈 꾸러? 여길?"
  "네. 아버지 엄마하구 무슨 얘기하다가 울었어요. 그리구 나 데리구 여
 기까지 왔댔어요."
  "그래서 돈은 꾸어갔니?"
  "아니요. 나보구 길 거리에 서서 기다리라구 해서 한참이나 이 앞에서 기다리구 있었는데 아버
지가 나와서 그냥 돌아가라구 했어요. 그러면서 저녁에  돈을 마련해갖구 돌아갈 테니 집에 가서 
엄마보구 조금만 더 참구 기다리라구 했어요."
  만기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마음이 복잡하거나 괴로울 때 하는 버룻이었다. 옷이라고는 언제나 
탈색한 사지 군복 바리에 퇴색한 해군 작업복 상의만을 걸치고 다니는 초라한  익준의 몰골이 감
은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면서도 익준은 병원에  와서 돈을 뀌라고 한번도 손을 내밀어본 
일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단 한 마더도 딱한 집안 사정을 입밖에 비치어 본 일조차 없었다. 
만기도 그의 가정 형편이 그렇게까지 말이 아닌 줄은 모르고 있었다.
  "너 몇 학년이니?"
  "학교 그만뒀어요."
  "그럼 놀고 있어?"
  "신문 장사해요."
  만기는 그런 말까지 캐어물은 것을 도리어 후회했다. 그는 소년을 위로해서 돌려보내고 나서도 
마음이 무거웠다. 남의 일 같지 않았다. 남의 시설을 빌려서나마 개업을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만
기 자신 생활에는 극도로 시달리고 있었기 빼문이다. 자그만치 열 식구에 버는 사람이라 곤 만기
뿐이니 당할 도리가 없었다. 대가족이 먹고 입는  일만도 숨이 가쁠 지경인데 동생들의 학비까지 
당해 내야만 했다. 대학이 하나, 고등학교가 둘, 거기에 국민학교 다니는 자기 장남까지 합친다면 
그야말로 무서운 지출이었다. 피를 짜내듯 해서 거의 기적적으로 감당대 오고 있었다. 그 밖에 늙
은 장모와 어린 처남 처제들만이 아득바득하고 있는 처가에도 다달이 쌀말값이라도 보태 주지 않
아서는 안 되었다. 하기는 그런대로 개업을 하고 있는 만기에게는 다소라도  수입이 있었다. 그러
나 동란 이래 직업을 갖지 못하고 있는 익준네 생활이 그만치라도 지탱되어 왔다는 것은 한편 수
수께끼 같은 일이기도 했다. 익준은 취직을 단념하고 있었다. 왜정 때 겨우 중학을  나왔을 뿐 특
수한 기술도 빽도 없는 데다가 나이마저  삼십고개를 반이나 넘어섰고 보니 취직이란  말 그대로 
별따기였다. 게다가 남달리 정의감과 결백성이 세기 때문에 사소한 부정이나 불의를 보고도 참지 
못하는 그는 설사 어떤 직장이 얻어 걸렸다해도 오래 붙어  있지 못했을 것이다. 사변 전에도 직
장다운 직장을 오래 가져 보지 못했던 것은 오로지 그러한 그의 성격 탓이었다. 그렇다고 장사를 
하자니 밑천도 없었거니와 이 또한고지식한 그에게 될  일이 아니었다. 언젠가는 생각다 못해 노
동판에도 섞여 보았다. 그 역시 해보지 않던 밀이라 한몫을 감당할수도 없었거너와사무실에서 인
부들의 임금을 속여 먹는 줄 알게 되자  대뜸 쫓아가서 시비 끝에 주먹다짐까지 벌어  졌던 것이
다. 그러기 최근 일 년 동안은 양심적이고 동지적인 자본주를 얻어 먹고 살 수포 있고 동시에 국
가 사회에도 비익할 수 있는 사업을 스스로 일으켜야 하낀다고 하며 그는  찰마다 거리를 휘젓고 
다니었다.
  그가 말하는 국가 사회에도 비익하며 먹고 살 수도 있는 사업이란 한국에 와 있는 외국인 상대
의 일용잡화 및 식료품 상회였다. 그의 친지  가운데 외국인 선교사들과 교섭이 잦은 기독교인이 
있었다. 그 친지 말에 의하면 현재 한국에 와 있는 외국인 민간인들의 대부분이 식료품이나 일용
품 같은 것을 거의 도쿄나 홍콩에서 주문해다 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외국인 자신들에게 있
어서도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상당한 손실일 뿐 아니라 불편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지만 한국 
상인의 물품은 그 가격이나 질에 있어서 도무지 신용을 할 수가 없으니 부득이한 일이 라는 것이
다. 그러기 때문에 외국인을 상대로 식료품과 일용품을 공급해 줄 만한 양심적인 한국 상점의 출
현을 누구보다도 외국인 자신들이 절실히 요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친구에게서 그 말을 들은 익
준은 담박 얼굴이 벌개가지고 병원으로 달려와서 이게 얼마나 수치스럽고  손실을 자초하는 일이
냐고 탄식했던 것이다. 그런 지 텨칠 뒤부터 익준은 자기 자신이 양심적인 출자자를 구해서 외국
인 상대의 점포를 자기가 직접 경영해 보겠다고 서둘며 싸돌아다니었다. 최고 일  이득을 목표로 
철두철미 신용과 친절 본위로 외국인을 상대하면  자연 잃어진 한국인의 체면도 회복할  수 있고 
그들의 신용과 성원을 얻어 사업도 번창해질 게 아니냐는 것이다. 그 뒤 익준은 양심적인 출자자
를 찾아내기 위해 명렬한 열의로 거리를 헤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찾고 있는 돈 있
고 양심적인 동지는 상금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점심 요기조차 못하고 나서지 않는 출자자
를 찾아 거리를 휘젓고 다니다가 저녁 때  맥 없이 돌아오는 익준은 보기에 딱하도록  지쳐 있었
다. 쓰러지듯 대합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버린 그는 비참한 표정으로 세상을 개탄하는 것 이다. 
친구의 소개로 돈 푼이나 있다는 사람을 만나 얘기를 비치어 보았더니 지금 세상에 일 할 장사를 
위해 돈 내놀 시러베 아들이 어디 있겠느냐고 영 상대도 않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다는 소리
가 양키 상대라면 한두 번에 팔자를 고칠 구멍을 뚫어야지 제정신 가지고 금리도 안되는 미친 짓
을 누가 하겠느냐고 핀잔을 주더라는  것이다. 그러니 세상사람이 모두 도둑놈이  아니냐고. 외쳤
다. 사리사욕을 위해서는 남을 속이거나  망치는 일쯤 당연하다고 생각할  판이니 도대체 이놈의 
세상이 끝장에 가서는 어떻게 되겠느냐고 익준은 비분강개를 금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런 때마
다 그는 행정 당국의 무능을 통매하면서 'D·D·T 정책'이란 말을 내세우곤 했다. 디·디·티를 
살포해서 이나 벼룩을 박멸하듯이 해충적 존재에 대해서는 강력한 말살정책을  써야 한다는 것이
다. 이를테면 소매치기나 날치기에서부터 간상 모리배도 총살,  협박 사기한도 총살, 뇌물을 먹고 
부정을 묵인해 주는 관리도 총살,  밀수범도 총살, 군용 물자를 훔쳐  내다 팔아 먹는 자도 총살, 
국고금을 횡령해 먹는 공무원도 총살, 아무튼  이런 식으로 부정불법을 자각하면서도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서 국가 사회에 해독을 끼치는 행위를 자행하는 대부분의 형사범은 모조리 총살해 버려
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는  양민이 안심하고 살수 없을뿐  아니라나라의 앞날이 위태롭기 
짝이 언다는 것이다. 흥분한 어조로 이러한 지론을 내세을 때의 익준의 눈에는 살기에 가까운 노
기가 번득거리었다. 그런 때 만일 누가 옆에서 그의 지론을 반박할 말이면 당장 눈앞에 총살형에 
해당하는 범법자라도 발견한 읏이 격분하는 것이다. 언젠가  어느 경솔한 외국 기자가 한국을 가
리켜 도둑의 나라라고 해서 물의를 일으켰을 때의  일이다. 대개의 신문이나 명사들이 그 기사를 
쓴 외국 기자를 비난하고 한국의 사회 실정을  엄폐 변명하려는 논조로만 치우쳐 있었다. 당시의 
익준은 거의 매일같이 흥분해 있었다. 그 외국  기자야말로 당국의 현실을 날카롭게 투시하고 가
차없는 비평을 가해 왔다는 것이다. 잠깐 다녀간  외국 기자의 눈에도 도둑의 나라로 비치리만큼 
부패한 우리 나라의 현실이 늘프고 부끄러울망정 바른 소리를 한 외국 기자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덮어 놓고 외국  기자를 비난 공박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을 냉정히 반성하고 
다시는 외국인으로부터 그처럼 치욕적인 말을 듣지 않도록 전국 국민이 깊은 각성과 새로운 노력
을 가져야 할 일이 아니냐. 결국 도둑놈 소리가 듣기 싫거든 도둑질을 하지 않으면 될 게 아니냐
는 것이다. 그래서 만기는 몇 마디 반대 의견을 말해 본 일이 있었다. 어쨌든 그 외국 기자가  한
국에 대해서 호기심을 갖고 보지 않았다는  것만은 사실인 이상 국교상의 우호  관계로 보아서도 
경솔한 태도였다는 비난을 면할 수는 없었다는 점과 어느 나라치고 도둑이 없는  나라란 있을 수 
없을 터인데 정도가 좀 심하다고 해서 왜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었는가 하는  객관적인  원인과 
이유를 밝히는 일이 없이 일언지하에 대뜸 도둑의 나라라고 단정해 버린다는 것은 너무나 피상적 
관찰에만 치우친 편견이 아닐 수 없다는 점을 들어서 만기는 은근히 익준의  소견을 반박해 보았
던 것이다. 그랬더니 대번에 안색이 달라져 가지고 만기에게 대들 듯이 덤비었다.
  "아니,도둑놈에게 도대체 변명이 무슨  변명야?그래 자넨 아직두  한국놈이 도둑놈이 아니라구 
꾸길 수 있단 말야? 이 지구상에 우리  나라처럼 도둑이 들끓구 판을 치는 나라가 또  있단 말인
가? 이거 봐, 만기, 덮어 놓구 자기 나라를  두둔하구 치켜올리는 게 애국자 애국심은 아닌 거야. 
말을 좀 똑바루 하란 말야. 그래 아무리 조심을 해두 전차나 버스를 한번 탔다 내리기만 하면 돈
지갑이나 시계 만년필 바위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리는데 이래두 한국이 도둑의 나라가 아니란 말
인가? 백주에 도로상을 걸어가노라면 바람도 안 부는데 모자가 행방불명이 되기 일쑤구, 또 어떤 
놈이 불쑥 나타나 골목으로 끌구 들어가서는 무조건 두들겨 팬 다음 양복을  벗겨 가지구 달아나
는 판이니, 아 이래두 한국은 도둑의 나라가 아니자구 알량한 동방예의지국이군 그래. 시장바닥은 
물론 심지어는 일국의 수도 한복판에 있는 소위 일류 백화점이란 델 들어가  물건을 사두 가격을 
속이구 품질을 속이구 중량을 속여 먹기가 여반장이니 아니 이래두 한국은 의젓한 신사국이란 말
인가? 아무리 아전인수라두 분수가 있지 열 놈이면 아홉 놈까진 도둑놈이아눈뜬 채 코 베어 먹힐 
세상인데 그래두 자넨 한국이 도둑의 나라가 아니라구 뻔뻔스레 잡아뗄 셈인가? 그야  물론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구 자네 말대루 도둑질하는 놈에게도 이유야 있을 테지. 이를테면 사흘 굶어 도
둑질 않는 사람 있느냐는 식으루 말일세. 그렇지만 남은 사흘은 고사하구 닷새 엿새를 굻어두 도
둑질 않구 배기는데 한국놈은 어째서 단 한 끼만 굻어두 서슴지 않구 도둑질 을 하느냐 말야. 아
니 한 끼를 굶기는커녕 하루에 네 끼  다섯 끼 배지가 터지도록 처먹구두 한국놈은  왜 도둑질을 
하느냐 말야. 이러니 죽일 놈들 아냐. 복통할 노룻이 아니냐 말야!"
  익준은 홉사 미친 사람모양 입에 거품을 물고 핏발 선 눈알을 뒹리었던 것이다.
 
  어느 날 퇴근 시간이 임박해서다. 미스 홍이 조용히 의논할 말이 있노라고 했다. 그 동안 석 달
치나 밀린 급료 얘기가 아닌가 싶어 만기는  새삼스레 가책을 느끼었다. 홍인숙은 만기에게 있어
서는 소중한 사업의 보조자였다. 치의전을  나온 이래 십여 년 간의  의사 생활을 통해서 수많은 
간호원을 부려 보았지만 인숙이만큼 만족하게 의사를 돕는  솜씨도 드물었다. 가려운 데 손이 가
듯이 빈 구석 없이 만기를 받들어 주었다.  눈치가 빠르고 재질도 풍부해서 간호원으로서의 지식
나 기술 뿐 아니라 웬만한  의사 못지않게 능숙한 수완을 발휘해  주었다. 중태가 아닌 진찰이나 
치료 정도는 만기가 없어도 충분키  대진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다.  그만큼 인숙은 자기 직무 
이상의 일에까지도 열성을 기울여 묵묵히 만기를 도아왔다.  한 말로 말해서 인숙은 이처럼 시설
이 빈약한 변두리의 개인 병원에는 분에 넘칠 만큼 더할 나위 없이  유능하고 성실한 간호원이었
다. 인간적인 면에서 볼 때에도 얌전하고 귀엽게 생긴 얼굴니어서 환자에게  호감을 주었다. 그러
한 인숙에게 스스로 만족할 정도의 충분한 물질적 대우를 해주지 못하는 것이  만기에게는 늘 미
안한 일이었다. 그러나 인숙은 삼 년 이상이나 같이 있는 동안 단 한 번도 불만이나 불평을 말해 
본 일이 없었다. 도리어 인숙은 자기 집의 생활이 자기의 수입을 필요로 하리만큼 군색한 형편이 
아니라면서 미안해 하는 만기를 위로하듯 했다. 그만치  이해하고 봉사해 주는 인숙에게 최근 삼 
개월 분의 급료를 지불치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가뜩이나 미안하던 판이라 만기는 저녁 
식사라도 같이 하면서 애기할까 했으나 
  인숙은 굳이 마다고 했다.
  "정 그러시문 차나 한 잔 사주세요."
  병원을 잠그고 나서 그들은 밖으로 나갔다. 물론 대합실 소파에 지키고 앉아 있던 봉우도 따라 
나섰다. 그들은 가까운 다방으로 갔다. 역시 봉우도 잠자코  따라 들어왔다. 인숙은 퍽 난처한 기
색으로 걸음을 멈추고 만기를 쳐다보았다. 만기는 이내 눈치를 채고 봉우를 돌아보며,
  "미안하네, 봉우. 병원 일루 둘이서 조용히 의논할 일이 있어 그러는데‥‥‥‥ "
  사양해 달라는 뜻을 표했더니,
  "그럼 문밖에서 기다릴까?"
  봉우는 도리어 어린애같이 솔직한 태도로 반문해 왔다.
  만기도 딱해서,
  "무슨 딴 볼일이라두 없는가?"
  그랬지만,
  "딴 볼일은 없어. 그럼 문밖에서 기다리지!"
   돌아서 나가려는 것을,
  "그래서야 되겠나. 그러면 저쪽 빈 자리에서 기다려 주게나,"
  도리어 만기 쪽이 민망하기 이를 데 없었다.  봉우와는 멀찍이 떨어진 위치에 자리잡고 앉아서 
만기는 차를 시켜 놓고 인숙의 이야기를 들었다. 급료 독촉이 아니었다. 거북한 듯이 인숙이가 꺼
내 놓는 이야기는 봉우에 관한 문제였다. 봉우는 거의 하루도 거르는 날이 없비 인숙을 따라다닌
다는 것이다. 퇴근하고 돌아가는 인숙을 같은 전차를 타고 집 앞 까지 따라와서는 인숙이가 자기 
집 대문 안으로 사라지는 걸 보고 나서야 봉우는 처량한 얼굴로 발길을 돌이킨다는 것이다. 그런 
말은 전에도 잠간 귀에 담은 일이 있었지만 어쩌다가 봉우 자신 그 방면에 볼일이 있으니까 그러
려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얘길 자세히 듣고 보니 딴 용건이 있어서가 아니라 인숙을 따라다
니는 행동 그 자체가 엄연한 목적이라는 것이다. 날마다 병원 대합실에 나와서 낮잠을 자듯이 저
녁 때 마다 봉우가 자진해서 인숙을 집에까지 바래다 주는 것은 하나의 일과 로  되어 있다는 것
이다. 인숙이 자신 처음 얼마 동안은 봉두의 엉뚱한 행동에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요즘 와
서는 미칠 것만 같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남의 이목이 두렵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벌써 동
네에서는 별별 소문이 다 떠돌고 집안 어른들에게도  잔소리를 듣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숙은 더
러 그러한 봉우를 피하기 위해서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일부러 반  방향으로 돌아가 보기도 
했지만 봉우는 역시 어린애처럼 떨어지지 않고 줄줄 따라다닌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지긋지긋 귀
찮게 실없는 수작을 거는 것도 아니다. 고작 꿈을 꾸듯  황흘한 눈을 인숙의 전신에 몰래 퍼부을 
뿐이다. 처음엔 그러한 봉우가 그저 우습기만 했다. 그 뒤에는 징그러웠다. 요즘 와서는 무서워졌
따는 것이다.
  "저를 바라볼 때의 천 선생님의 그 이상히 빛나는 눈이 꼭 저를 어떻게
할 것만 같아요. 소름이 돋아요!"
  그래서 인숙은 밖에도 잘 못 나온다는 것이다.  꿈에서까지 그런 봉우의 눈과 마주쳤다가 소스
라쳐 깬다는 것이다. 병원이 휴업을 하는 일요일아침이면 봉우는 직접 인숙이네 집 대문 앞에 와
서 우두커니 지키고 섰다는 것이다. 하두 기가 차서 인숙이가 홧김에 쫓아나가,
  "천 전생님, 왜 또 여기 와 서 계셔요?"
  따지듯 하면,
  "오늘은 병원이 노는 걸 어떡해요?"
  그러니까 이리로밖에 찾아을 데가 없지 않느냐는  듯이 무엇을 호소하는 듯 한  눈으로 인숙을 
내려다본다는 것이다.
  "이웃이 챙피해요. 집 식구들두 시끄럽구요. 얼른 돌아가 주세요, 네!"
  사정하듯 하면 봉우는 갑자기 풀이 죽어서 천천히 골목을 걸어나간다 
는 것이다. 그렇지만 얼마 있다 밖을 또 내다보면 봉우는  어느새 대문앞에 도로 와서 척 지키고 
서 있다는 것이다. 이래서 인숙은 자나깨나 신경이 쓰여 흡사 미칠 것만 같다는 것이다.
  "어떡하면 좋겠어요, 선생님."
  말을 마치고 만기를 쳐다보는 인숙의 귀여운 얼굴이 아닌게아니라 이제 보니 핼쑥하게 좀 파리
해 있었다.
  "천 선생은 가정적으루차 사회적으루나 퍽 불행한 사람이요."
  만기는 호젓한 말씨로 그렇게 대신 변명하듯 했다 
  "저두 대강은 짐작하고 있어요."
  "또한 본래 바탕이 너무나 선량한 사람이요.중학 때부터 남에게 이용 
이나 당하구 피해나 입었지, 전연 남을 해칠 줄은 모르는 사람이었소.
  그러니까 미스 홍두 천 선생에게 악의나 증오감을 품구 대하진 말아요."
  "저두 알아요. 그러니까 여태 참구 지내다 못해 선생님께 의논하는 게 아니에요."
  "천 선생은 분명히 미스 흥을 사랑하구 있나  보오. 그러나 사랑을 노골적으루 고백할 수 있으
리만큼 천 선생은 당돌하지 못한 사랗이요 그만치 인간의 자격에 자신을 잃구 있는 분이지. 그러
면서두 미스 홍을 떠나서는 못 살겠는 모양이요. 잠시두 미스  흥을 안 보구는 못 배기겠다는 모
양이란 말요. 그렇다구 일방적인 천 선생의 애정에 대해서 미스흥이 책임을 질 필요는 없을 테지. 
다만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피차 더 큰 괴로움을 가져올 방향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서는 안된다
는 것뿐요. 물론 미스 흥의 불쾌하구 불안하구 난처한 처지는 알 수 있소만 조금 더 참구 지내요  
적당한 기회에 내가 천 선생하구  조용히 얘길 해볼 테니. 그렇다구  이런 문제를 제삼자인 내가 
아무 때나 불쑥 들구 나설 수두 없으니까 좀 기다리란 말요 그 동안에 자연스럽게 얘기할 기회를 
만들어볼 테니까."
  인숙은 붉어진 얼굴을 숙이고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얘기를 마치고  나서 만기는 인숙이더러 
먼저 돌아가라고 했다. 인숙이가 문밖으로  사라진 뒤에야 만기도 일어나  봉우 자리로 가려니까 
봉우는 그제야 눈이 휘둥그레서 벌떡 일어서더니 만기를 밀치듯이 하고 황황히 밖으로 쫓아가 어
리었다. 만기도 할 수 없이 얼른 셈을 치르고 차라나가 보았다. 전차정류장 쪽을  향해 저만치 걸
어가고 있는 인숙의 뒤를 봉우는 부리나케 쫓아가고 있었다. 그 광경이 흡사 엄마를 놓칠세라 질
겁을 해서 발버등 치며 쫓아가는 어린애 모양과 비슷했다. 그  꼴을 묵묵히 바라보고 서 있던 만
기는 저도모르게 가만한 한숨을 토했다 계산이 닿지 않는 애정에 저렇게 열중해야 하는  봉우가-
그리고 저러지 않고는 못 배기는 인간이 딱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만기 자신을 중심으로 자꾸만 
엉클어지는 애정과 애욕의 미묘한 혼란이 숨가쁜 까닭이기도  했다. 물론 봉우 처의 저돌적인 육
박도 골치 아픈 일이기는 했지만 그보다도 오히려 처제인 은주의 문제가 만기의  마음을 더 어지
럽게 하겼다.
 
  은주는 어머니를 모시고 밑으로 어린 두 동생을 거느리고 어느 관청에 사무원으로 나가고 있었
다. 6·25동란 이후 삼사 년 간은 전적으로 만기에게 얹혀 지냈다. 그러니까  만기는 처가네 식구
까지 열네 명이나 되는 대가족을  거느리고 있었던 것이다. 친동생을  학교에 보내면서 처제들이 
라고 모르는 체할 수는 없었다. 쓴주와 그 두 동생까지  모두 여섯 명이 나 중학교, 고등학교, 대
학교에 집어 넣었다. 그들의 학비와 열네 식구의 생활비를 위해서 만기는 문자 그대로 고혈을 짜 
바쳤다. 물론 동생들은 고학을 한답시고 각자 능력껏  활동들을 해서 잡비 정도는 저희들이 벌어 
썼지만 그렇다고 만기의 짐이 덜릴 수는 없었다. 만기는 자연나날이 쪼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얼
마 안되는 병원 수입만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참다 참다 급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여기 저기서 
돈을 둘러다 썼다. 부모가 남겨 준 유일한 재산이었던 집  한 채마저 팔아 버리고 유축에 전셋집
을 얻어갔다. 이러한 곤경 속에서도 만기는 가족들 앞에서 결코 짜증을 내거차 불평을 말하는 일
이 없었다. 얼굴 한 번 찡그려 본 일이 없었다. 아무와도 나눌 수 없는 고민이란 영혼까지도 고갈
하게 만드는 법이다. 만기는 자기에게 지워진 고통을 혼자서만 이를 사려 물고 이겨 나갔다. 하두 
고민이 심할 때는 입맛을 잃고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그러한 만기의 심중을 아내만은 알았
다. 밤새껏 엎치락 뒤치락 하며 남편이 잠을 못 드는  밤이면 아내는 말없이 만기를 끌어안고 소
리를 죽여가며 흐느껴 울었다. 그런 때 만기는 도리어 아내의 등을 어루만지며 위로해 주는 것이
었다.
  "『쟝 크리스토프』라는 로랑의 소설 가운데 이런 말이 있다우. '사람이란 행복하기  위해서 살
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정해진 길을 가기위해서 살고 있는 것이다.'  여보,  나를 위해서 진
심으로 울어 줄 아내가 있는 이상  나는 결코 꺾이지 않을 테요.그러니까  나 위해 과히 걱정 말 
구 어서 울음을 그쳐요. 자 어서, 이게 뭐야 언내처럼."
  만기가 그러고 달래듯이 눈물을 닦아 주려면 아내는 참아오던 울음 소리를 탁 터뜨리고 발버등
치며 더욱 섬게 우는 것이다. 아채는 세상의 어떤 아내보다도 만기를 깊이 이해하고 존경하고 사
랑하고 동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밖에 또 한 여인이 만기 아내에게 못지않게 만기를 존경하고 동정하며 한 지붕 밑에 
살고 있었다. 그는 물론 처제인 은주였다. 은주는 소녀다운 깊은 감동으로  형부를 우러러보고 사
모했다. 귀공자다운 풍모, 알맞은 체격, 넓고 깊은 교양, 굳은 의지와 확고한  신념, 강한 의리, 감
과 풍부한 인정미, 어떤 점으로 보나 형부 같은 남성은 세상에 다시 없을 것 같았다. 그러한 형부
가 보잘것없는 가족들을 위해서 노예처럼  희생당하고 있다. 형부를 위해서는  이 따위 가족들이 
다 없어져도 좋지 않을까. 아니, 형부를 둘러싸고 있는 너절한 인간들이 촌통 사라져  버려 도 좋
지 않을까. 불공평한 현실 속에서 가족을 위해 죄인처럼 고민하는 형부를 생각할 때 은주는 속으
로 혼자 울며 그렇게 중얼거려 보기도 했다. 은주는 그처럼 형부를위해  마음이 아팠다. 자연스럽
게 형부를 사랑 했다.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심경이었다. 은주는 형부를 위해서라면, 사
랑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서슴지 않고 웃으며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은주는 오랜 동안 여러 
가지로 혼자 궁리한 끝에 대학교 일학년을  마치는 길로 자진해서 학업을 중단하고  취직해 버렸
다. 그러고는 어머니와 동생들을 데리고 셋방을 얻어 나가 짜립 생활을 시작했다. 조금 이라도 사
랑하는 형부의 짐을 털어 주고 싶어서였다. 이사해  나가는 날 마지막으로 식사를 같이하고 나서 
은주는 가족들이 있는 앞에서 언니에게 대담하게 이런 말을 했다.
  "언니, 나 형부를 사랑해두 좋아?"
  다들 웃었다. 물론 농담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기와 그의  아내만은 겉으로는 웃었지
만속으로는 웃지 못했다. 은주의 말이 결코  농담에 tm치는 것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던 탓이
다. 작년부터는 가족들사이에 자주 은주의 결혼 문제가 화제에 올랐다. 장모가  들를 적마다 사위
와 딸 앞에서 은주의 나이 걱정을 해서다. 하기는 아버지  없는 은주에게 대해서 언니나 형부 노
룻뿐 아니라 아버지와 어머니 노릇까지도 대신해야 할 그들의 처지로서는 은주의 졀혼 문제에 무
심할 수는 없었다. 만기 부처는 기회  있는 대로 은주의 배필을 물색해 보았다.  그러다가 적당한 
상대가 나서면 사진을 구해 두었다가 은주가 들를 때 내보이곤 했다. 그러나 은주는 그때마다 사
진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고,
  "미안합니다. 누가 시집 간댔어요!"
  그러고는 장난꾸러기 같이 어깨를 으쓱하며 쿡쿡 웃었다.
  "애두, 그럼 평생 처녀루 늙을래?"
   언니가 가볍게 눈을 흘기면,
  "형부만한 신랑감을 골라 주신다면‥‥‥‥ 
  또 아까와 같이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나보다 몇 갑절 나은 청년야. 우선 사진이나 구경해,"
   만기가 남자 사진을 눈앞에 들이대도,
  "사랑하는 사람을 두구 시집을 가란 말씀예요!"
   정색하고 은주는 사진들 받아 던지었다.
  "그렇지만 딱허지 않니? 형부를 이제 와서 둘이 섬길 수두 없구‥‥‥ 
  그럼 차라리 내가 형부를 양보할까!"
  만기 처가 농담 아닌 농담을 건네고 미묘하게 웃었다.
  "언니, 건 안될 말씀. 난 언니두 사랑하는 걸요"
  그러고는 살며시 다가앉으며 서양 사람이 그러듯 언니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여보, 세상에 나 같은 행운아가 어딨겠소.선녀처럼 예쁘구 어진  당신과 비너스같이 황홀한 우
리 은주 아가씨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됐으니 말이요!"
  은주의 태도를 어디까지나 장난으로 수슬려 버리려는 만기의 의도를 은주는 묵살해 버리듯,
  "언니, 나 꼭 한 번만 형부하구 키스해두 괜찮우?"
  어리광 피우듯 해서,
  "여보, 이 애 소원을 불어 주시구려!"
  언니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만기를 쳐다보았더너 은주는,
  "가짓말, 언니 가짓말!"
  언니를 나무라듯 몸부림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언니 무릎 위에 푹  엎드려 버리고 말았
다. 얼마 뒤에 고개를 드는 은주의 두 눈이 의외에도 젖어 있었다. 신뢰에 찬 미소로 시선을 교환
하는 만기 부처의 얼굴에는 똑같이 복잡하고 난처한 기색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다행한 
것은 만기와 단 둘이 만났을 때는 은주는 추호도 연정을 표시하는 일이 없었다. 어디까지나 처제
의 위치에서 형부를 대하는 담담한 태도였다. 은주가 만기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사랑을 언동으
로 표시 하는 것은 반드시 언니가 동석한 자리에서만이었다. 그만큼 은주는  깨끗한 아이였다. 만
기 처 역시 그랬다. 형부에 대한 은주의 사랑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으면서도 남편과 동생의 사
이를 의심하지는 않았다. 그만치 남편과 동생을 믿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알뜰한 아내와 은주 사
이에 끼어서 만기는 참말 난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혼하기를 주위에서들 아무리 달래고 권해
도 은주는 영 듣지 않았다. 한평생 만기만을 생각하고 사랑하며 깨끗이 혼자 늙겠다는 것이다. 그
것이 일시적인 단순한 흥분에서가 아니라 필사적인 각오로 은주 스스로가 택하는 자기 인생의 엄
숙한 선언이었다. 그러니만치 주위 사람들도 다 함께  괴로웠고 당자인 만기는 더할 수밖에 없었
다. 거기에 봉우 처마저 노골적인 추태로써 만기를 위협해 왔고  봉우와 미스 홍의 어잴 수 없는 
문제, 외면해 버릴 수 없는 익준의 암담한 가정 내막, 나날이 더 심해가는 경제적인 고통,이런 복
잡한 관계들이 뒤얽히어 만기의 마음 속을 더욱 어둡고 무겁게 만 해주었다. 그러나 만기는 역시 
외면의 잔잔함만은 잃지 않았다. 한결 같이 추드럽고  품 있는 미소로서 누구에게나 친절히 대하
기를 잊지 않 는 것이다.
 
  삼십이 좀 넘어 보이는 낯선 남자가 봉우 처의 편지를 가지고 병원을 찾아왔다. 만기는 남자에
게 의자를 권하고 편지를 펴보았다. 비교적 달필로  남자 글씨처럼 시원스레 내리갈긴 편지의 내
용은 이러했다.
 
  일전에는 실례했나 봐요, 저를 천한 계집이라고 아마 비웃었을 것 입니다.  그건 아무래도 좋아
요. 지극히 인격이 고상하신 도학자님의 옹졸한 취미를 저는 구태여 방해하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한편 저 같은 계집에게도 선생님 같이 점잖은 분을 비운을 권리나 자격이 어쩌문 아주 없지도 않
을 거예요. 삶을 대담하게 엔조이할 줄 아는 현대인 가운데  먼지 친 샘플처럼 거의 폐물에 가까
운 도금한 인간이 자기 만족에 도취하고 있는 우스꽝스런 꼴을 아시겠습니까?선생님 자신이 바로 
그러한 인간의 표본이야요. 선생님에게도 또 비웃음받을 이 따위 수작은 작작하고 그러면 용건을 
말씀 드리 겠습니다.
  다름아니라 그날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병원 시설을 작자가 나섰을  때 팔아치을 생각입니다. 
이 편지를 갖고 간 분에게 기구 일습을 잘 구경시켜 드리기 바랍니다. 매매 계약은 대개 오늘 안
으로 성립 될 것이오며 계약 성립 즉시로  통지해 드리겠사오니 그때는 일 주 일  이내에 병원과 
시설 일체를 내어주시기 바람니다.
  저는 선생님이 원하신다면 새로이 현대적 시설을 갖추어 드리고 싶었고 현재도 그러한 제 심정
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솔직한 제 호의를 침 뱉아 버리는 선생님의 인격 앞에 저는 헐 일 
없이 물러서는 수밖에 없나 봅니다.
 
  그러한 본문 끝에 추백이라고 하고 '만일 제게 용건이 계시면 다음 번호로 언제든지 전화를 걸
어 주시기 바랍니다'에 이어서 전화번호가 잔글씨로 적히어 있었다. 편지를 읽고 난 만기는 언제
나 다름없이 침착한 태도로 알맹이를  도로 접어서 봉투 안에 집어  넣었다. 그의 손끝이 가늘게 
떨리었다. 인숙이만이 재빨리 그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만기는 편지를 서랍  속에 간직하고 나서 
그 편지를 갖고 온 남자에게 친절한 태도로 시선을 보여  주었다. 남자는 의료 기두상을 하고 있
다고 하면서도 기계에 대한 내용을 잘모르는 것 같았다. 그  남자가 돌아간 뒤 만기는 자기 자리
에 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몹시 피로해 보였다. 얼굴색 도 알아보게 창백해져 있었다.  인
숙이가 조심히 다가와서,
 "이제 그 분 뭐하러 왔어요?"
 걱정스레 물었다.
  "시설을 보러 왔소,"
  "건 왜요?"
  "어찌 되면 이 병원의 시설이 그 사람에게 팔릴지두 모르겠소."
  그 말에 놀란 것은 간호원뿐이 아니었다. 대합실 소파의 구석자리에 앉아서 반은 자고 반은 깨
어 있는 봉우가 별안간 눈을 휘등그렇게 뜨고 만기를 건너다 보았다.
  "정말인가?"
  "그런가보이!"
  "그럼 이 병원은 아주 문을 닫아 버린단 말인가?"
  "그렇게 되기 쉬울 거야."
  봉우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입을 벌린 채 잠시 만기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대체 자네나 미스 홍은 어떻게 되는 건가?"
  "글쎄, 아직 막연하지!"
  봉우는 거의 절망적인 눈으로 만기와 인숙을 번갈아 보았다.
  "천 선생님, 이 병원을 팔지 말구 이대루 두라구 사모님께 잘 좀 부탁하세요, 네!"
  인숙은 심각한 표정으로 애원하듯 했다.
  "내가? 내가 부탁헌다구 들어 줄까요?"
  "선생님 사모님이신데 아무렴 선생님이 간곡히 부탁하떤 안 들으실라구요."
  "그럼 뭐라구 하문 될까요?"
  "어마,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선생님이 잘 생각해서 말씀하셔야죠."
  봉우는 더 대답을 옷하고 고개를 숙여 떠리고  말았다. 그에게는 아내를 움직이는 일은 하늘을 
움직이는 일만큼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내를 움직이지 못한다면 그는 유일한 휴식
처요 보금자리인 이 대합실 소파를 뺏겨 버리고 말 것 아닌가! 봉우는 그만 처참할 정도로 푹 기
가 죽어 버리고 말았다.
  몇 시간 뒤의 일이었다. 마침  환자가 있어서 치료해 보내고 만기가  자기 자리로 돌아와 환자 
카드를 정리하려는데 허줄한 소년이 대합실 문앞에서 기웃거리며 안을 살피고  있었다 전번에 왔
던 익준의 아들이었다.
  "넌 웬일이냐?"
  만기가 직감적으로 어떤 불길한 예감에  쏠리며 물었다. 소년은 먼젓번처럼  가만히 문을 밀고 
대합실 안에 들어섰다. 소년의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있었다 소년은 병원 안을 한 바퀴 둘러보고 
나서 만기를 보았다.
  "울아버지 안 오셨어요?"
  "안 오셨다. 이삼일 전부터 통 보이질 않는구나."
  소년은 한 발에만 고무신을 신고 왜 그런지 한짝은 벗어서 손에 들고 있었다.
  "아버지 집에두 안 들어오셔요."
  "그래? 언제부터."
  만기는 이상해서 다구쳐 물었다.
  "어저께두 그 전날두 안 돌아오셨어요."
  "웬일일까?"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소년은 무큰 말을  할 듯 할 듯 하다 말고 그대로  돌아서 나가려고 
했다. 만기는 얼른 소년을 도로 붙들어 세운 다음,
  "어머닌 좀 어떠시냐?"
  묻고서 그 대답이 무서웠다.
  "죽었어요!"
  소년은 수치스러운 일처럼 고개를 숙이고 가만한  소리로 대답했다. 예측했던 일이지만 만기는 
가슴이 섬찔했다. 언제 돌아가셨느냐니까,
  "좀 아까요!"
  소년은 그리고 외면을 했다. 더 자세히 얘기를 듣고 보니 소년의 모친은 약 두 시간 전에 눈을 
감은 모양이었다. 집에는 두 동생과 주인집 할머니만이 시체를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외할머니도 
아침에 생선 장사를 나간 채 아직 들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만기는 소년의 한쪽 손을 꼭 쥐어 주
며,
  "대체 아버지는 어딜 가셨올까?"
  다정하세 물었다.
  "모르겠어요!"
  소년은 슬그머니 손을 빼고 돌아서 나가려고 했다.
  "가만 있거라, 나랑 같이 가자."
  만기는 횐 가운을 벗고 양복  저고리를 바꾸어 입었다. 그리고 오늘  들어온 돈을 죄다 긁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여보게 봉우, 자네두 같이 가지."
  "뭐? 나두?"
   봉우는 자다 깬 사람처럼 얼떨결에 놀라 묻고 좀 머뭇거리다가 엉거주춤 따라 일어섰다. 간호
원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만기가 앞장 서 막 병원을 나서려는 참인데 이십 살쯤 되었을 어떤 청년
이 들어섰다. 청년은 원장 선생님을 찾더니 만기에게 한 장의 쪽지를 전하였다. 봉우 처에게서 온 
통지였다.
 
 병원 시설은 매매 계약이 성립되었습니다. 앞으로 일 주일 이내에 병원을 비워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언제든 용건이 있으면 서슴지 말고 연락을 해달라고 하고 전화번호가 적혀 있
었다. 만기는 말없이 쪽지를 편 대로 간호원에게 넘겨주고 밖으로 나왔다.
  익준의 아들은 밖에 나와서도 고무신을 손에 든 채 그  쪽은 맨발로 걷고 있었다. 남 보기에도 
덜 좋으니 그러지 말고 한쪽 고주신마저 신으라고 권해도,
  "발에 땀이 나서 그래요."
  소년은 점직한 듯이 그러고 한쪽 손에 든 고무신을 뒤로 슬며시 감추었다. 그러나 만기는 그제
야 눈치를 채고 소년이 들고 있는 고무신을 걸으면서 유심히 보았다. 그것은 달아서 뛰꿈치가 터
지고 코뚜리가 쭉 찢어져서 도무지 발에  걸리지 않게 되어 있었다. 만기는 가슴이  찌르르 했다. 
전차를 타기 전에 그는 소년에게 고무신부터 한 켤레 사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 근처에는 고무신 
가게가 눈에 뜨이지 않았고 때마침 전차가 눈앞에 와 멎어서 그대로 이내 차에 오르고 말았다.
 
 소년의 가족이 들어 있는 집은 지붕을 기름종이로 덮은 토담집이었다 소년의 어린 두 동생이 거
지 아이 꼴을 자고 문턱에 기운 없이 걸터앉아 있었다. 역한 냄새가 울컥 코를 찌르는 침침한 방
안에는 옆방에 산다는 주인 노파가 역시 이웃  아낙네와 마주앉아 시체를 지키고 있었다. 방바닥
에 착 달라붙은 듯한 시체 위에는 낡은 담요 조각이  덮여 있었다. 우선 집주인 노파에게 인사를 
하고 나서 만기는 할 일을 생각했다. 주인이 없더라도 사망  진단서와 사망 신고 등의 절차는 밟
아 두어야 했다. 요행 반장의 협력을 얻어서 그런 일들은 무난히 끝낼 수가  있었다. 아이들의 외
할머니는 저녁 때가 되어서야 비린내 나는 광우리를 이고 돌아왔다. 딸이 죽은 것을 알고도 그리 
슬퍼하지도 않았다. 그저 노,파의 전신에는 보기에 딱하리만큼  심한 피로가 배어 있었다. 노파의 
말에 의하면 익준은 이삼 일 전에 인천 방면의 어느 공사판을 찾아갔다는 것이다. 환자에게 주사 
몇 대라도 맞쳐 주면 한이나 풀릴 것 같아서 벌이를  떠났다는 것이다. 부득이 만기가 주동이 되
어서 장례식 일을 맡아보아주는 수밖에  없었다. 첫째 비용이 문제였다. 만기는  자기 호주머니을 
톡톡 털어서 당장 사소한 비용을 썼다. 봉우는 그저 시무룩하니 앉아서 만기 눈치만 살피다가 어
디를 나가면 그림자처럼 따라다닐 뿐이었다. 상가에서 밤을  새우고 나서 만기는 이튿날 아침 잠
간 병원에 들러 보았다. 물론 봉우도  함께 와서 대합실 구석자리에 앉아 있었다.  만기도 나른히 
지쳐 있었다.
  인숙이가 걱정즈레 만기를 바라보며 무슨 말을 할 듯 하다가 말았다. 만기는 한동안 묵연히 생
각에 잠겨 있다가 대합실 소파로 가서 봉우 옆에 바싹 다가 앉았다.
  "여보게, 같이 가서 자네 부인을 좀 만나 보고 올까!"
  "아니, 건 또 무슨 소리야."
  "당장 장례 비용이 있어야 할 게 아닌가. 그러니 자네두 같이 가서 조언을 좀 해줘야겠단 말이
네."
  만기는 봉우 처에게서 장례 비용을  좀 뜯어 볼 생각이었다. 아무리  간소히 치른다 해도 관은 
사야 할 게고, 세 어린것에게  상복을 입히고 영구차도 불러야 하겠는데  그 비용을 변통할 길이 
달리는 전연 없었기 때문이다. 밖에 나가 전화를  걸고 찾아가려고 만기는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봉우를 끌고 일어섰다. 그러자,
  "선생님 잠간만‥‥‥‥ 
  무슨 각오를 지닌 듯한 표정으로 인숙이가 불러 세웠다.
  "왜 그러우?"
  인숙은 만기를 진찰실 구석으로 끌고 가서 나지막한 소리로,
  "이 병원 결정적으루 팔리게 되었나요?"
  캐어 묻듯 했다.
  "그런 모양이요!"
  인숙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었다. 잠시 말을 못하고 서 있었다. 밀린 급료 문제나 실직
될 것을 걱정해서 그러는 줄로 만기는 알았다. 
  "미스 홍이 삼 년 이상이나 마치 자기 일처럼 성의껏 거들어 준 데 대해서는 그 고마움을 평생 
잊지 않겠소. 그런 만큼 헤어지게  될 때는 충분히 물질적 사례를  취하는 것이 도리겠지만 미스 
홍도 아다시피 현재의 내 경제적 사정으로는 그건 어렵겠으나 밀린  급료만은 어떡해서든 책임지
고 청산하도록 할 테니 그리 알아요. 그리구 미스 홍의 취직 문젠데 나도 딴 병원을 극력 알아볼 
테니 미스 홍도 오늘부터라두 아는 사람에게 미리 부탁해 두어요."
  만기는 한편으로는 사과하듯 한편으로는 위로하듯 했다. 그러자 불시에 고개를 바짝 들고 정면
으로 쳐다보는 인숙의 시선에 부딪친 만기는 가슴에 뭉클하는 충동을 받았다. 원망스러이 쳐다보
는 인숙의 눈에는 눈물이 핑그르 돌았기 때문이다.
  "절 그렇게만 보셨어요!"
  인숙은 외면하면서 손가락 끝으로 눈물을 뭉개고 나서,
  "건 가혹한 오해세요!"
  입술을 깨물었다.
  "미스 홍, 내가 피로해 있었기 때문에 실언을 했나 보오. 너무  노골적인 말이어서 노엽거든 용
서해요."
  "선생님, 커보다두 실상 선생님이 더 큰일 아니에요. 그 숱한 식구의 생활비며 학비며‥‥‥ 개
업 중에두 늘 곤란을 받으겼는데 병원을 내놓게 되면 당장 어떡허세요!"
  "고맙소. 그러나 스스로 애쓰는 자는 하늘이 돕는다지 않소. 우선 채 선생네 장례식이나 끝내고 
나서 나도 백방으로 살 길을 찾아볼 테니 과히 걱정 말아요."
  인숙은 이상히 빛나는 눈으로 만기를 쳐다보다가,
  "선생님, 새로 병원을 차릴려면 최소한도 얼마나 자금이 필요해요?"
  주저하며 물었다.
  "아마, 팔십 만 환은 가져야 불충분한 대로 개업할 수 있을 게요."
  인숙은 잠간 동안 입술을 깨물고 섰다가 불시에 고개를 들고 호소하는  듯한 눈으로 만기를 쳐
다보며,
  "선생님,제게 오십 만돤이 있어요.  그걸 선생넘께 드리겠어요.그리구  오빠에게 부탁해서 삼십 
만 환은 어디서 싼 이자루 빌려 오도록 하겠어요. 선생님 병원을 내세요!"
  말을 마치자 인숙의 눈에서는 갑자기 눈물이 주르르  쏟아졌다. 인숙은 그것을 씻을 생각도 않
고 젖은 눈으로 열심히 만기를 쳐다보며 서  있었다. 조금이라도 만기가 움직이기단 하면 인숙은 
쓰러지듯 그대로 만기 가슴에 얼굴을 묻고 매어달럴 것 같았다.
  "미스 흥이 어떻게 그런 대금을 자유로 할 수 있겠소!"
  만기는 그럴수록 냉정한 언동을 유지하려고 애쓰며 물었다.
  "그 동안 제가 받은 급료에는 일체 손을  대지 않구 제 몫으루 고스란히 모아왔어요. 어른들은 
제 결혼 비용으로 생각하고 계셨지만 저는  선생님께 병원을 채려 드릴 일념으루  모아온 돈이에
요."
  동일한 자세로 만기의 얼굴을 지켜보고 섰는 인숙의  눈에는 새로운 눈물이 계속해 흘렀다. 그 
눈물 저쪽에 타오르고 있는 인숙의 눈에서  만기는 아내의 애정을 보았고 은주의  열정을 느끼었
다. 영롱하게 젖은 그 눈  속에는 모든 여자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남자에게만 보여 주는 마음의 
비밀이 빛나고 말았다. 만기도 가슴속이 훅 달아오르는 것을 참고 눌렀다.
  "미스 홍, 입이 있어도 내게는 당장 대답할 말이  없소. 인제 그만 눈물을 닦아요. 어제 오늘은 
내 머리도 몹시 복잡합니다. 훗날 머리가 좀 식은 다음에 천천히 얘기합시다. "
  겨우 그런 말을 중얼거리고 만기는 문간에서  기마리고 섰는 봉우를 따라 밖으로  나와 버리고 
말았다.
  봉우 처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딴 사람이 전화를 받았지만 이내 만날 수 있게 연락을 취해 주었
다. 지정한 다방으로 가보니 봉우 처가 기다리고 있었다. 앞장서 들어서는 만기를 보고 반색을 하
다가 뒤따라 들어오는 자기 남편을  보더니 여자는 놀라픈 눈치였다.  마주앉기가 바쁘게 만기는 
용건부터 얘기했다. 익준이와 봉우와 자기는 중학 시절  이래 막역한 친구임을 말하고 나서 익준
이네 비참한가정 형편을 들려 주었다. 그러고는 장례  비용을 희사하거나 빌려 주기를 간청한 것
이다.
  "정말이야. 이 친구 말대루야. 나두 보구 가만 있을 수가 없어. 몇 달 동안 내 용돈을 만 타 써
두 좋으니까 사정을 봐줘."
  봉우는 제법 용기를 내서 아이가 어머니에게 조르듯이 옆에서 거들었다. 그 사이 봉우 처는 몇 
번이나 낯색이 변하였다.
  "선생님에게두 저 같은 여자가 소용에  닿을 때가 있군요. 좋아요. 저는  점잖은 선생님의 청을 
거절할 용기가 없어요!"
  여자는 언어 이상의 의미를 표정으로 나타내고 나서 일어서 저쪽으로 가려다가,
  "오 만 환 정도라면 당장 되겠어요. 물론 현금이 좋으시겠죠."
  대답도 듣지 않고 카운터 뒤로 사라져 버리더니 좀 뒤에 현찰을 신문지에  꾸려 가지고 돌아왔
다. 만기가 치하를 하고 일어서려니까,
  "이 돈 그냥 드리는 건 아니에요."
  여자가 그래서,
  "알겠습니다. 이 자리에서 기일 약속은 할 수 없지만 판드시 책임지고 갚아드리 겠습니다. "
  그랬더니 봉우 처는 문간까지 따라 나오며 애교 띤 농담조로,
  "고지식한 양반. 그렇다면 원금만 가지고는 안되겠어요. 적당한 이자까
지 듬뿍, 아시겠어요?"
  거의 아양에 가까운 교태였다. 봉우의  눈치를 곁눈질로 살피며 당황히  줄달음을 치듯 나오는 
만기 등 뒤에다 대고,
  "일간 다시 들더 주세요. 선생님 일루 꼭 의논할 일이 있으니까요!"
  여자는 거리낌없이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하여튼 그 돈으로 간소하나마 격식을 갖추어 장례식을 무사히 치를 수 있은  것은 다행한 일이
었다. 관을 사오고 광목을 떠다 아이들에게 상복을 지어 입히고 고무신도  사다 신겼다. 의논해서 
화장을 않고 망뚜리에 무덤을 남기기로  했다. 장지로 향하는 차 안에서  익준이가 없는 것을 만 
기가 탄식했더니,
  "살아서두 남편 구실 못한 위인, 죽은 댐에야 있으나 마나지!"
  익준의 장모는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좀 늦게나마 남편 구실을 못한 익준이 그날로 집에 돌아
오기는 한 것이다. 거의 황혼 무렵이 피어서 산에서 돌아온  일행이 익푼네 집 골목 어구에서 차
를 내렸을 때였다. 저쪽 에서 머리에 횐 붕대를 감고 이리로 걸어오는 허줄한 사내가 있었다. 아 
들이 먼저 알아차리고,
  "아, 아버지다!"
  소릴 질렀다. 아 그러자 익준은 멈칫 걸음을  멈추었고 이쪽에서들도 일제히 그리로 시선을 보
냈다. 익준은 머리에 상처를 입은 모양이었다. 한 손에는 아이들 고무씬  코숭이가 비죽이 내보이
는 종이 꾸레미를 들고 있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쪽을 향하고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석상 
처럼 전연 인간이 느껴지지 않는 얼굴이었다.
  "어이구, 차라리 쓸모없는 저 따위나 잡아가지 않구, 염라대왕투 망발 이시지!"
  익준의 장모는 사위를 바라보면서 그렇게 중얼대고  인제야 눈물을 질금거리었빠. 그래도 아이
들이 제일 반가워했다. 일곱 살 먹은 끝의 놈은,
  "아부지!"
  하고 부르며 쫓아가서 매어달렸다.
  "아부지, 나, 새 옷 입구 자동차 타구 산에 갔다 왔다!"
  어린것이 자랑스레 상복 자락을 쳐들어 보여도 익준은 장승처럼 선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오늘과 내일(지은이: 서기원)

  1930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을  졸업했다. 1956년  『현대문학」에 「암사지
도」로 추천을 완료했다.  1959년에 현대문학상을 수상했으며  .1961년에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집으로 『마록 열전』 『이 성숙한 밤의 포옹」 『왕조의 계단』 등이 있다.
 
  1951년 정월, 서울을 두 번째  점령한 공산군은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 남하해서 오산으로부터 
충청북도 d읍, 그리고 삼척을 연결하는 선까지 진출했다.
  중공군의 대거 침입으로 후퇴를 거듭하던 국련군은 적의 핵심 세력을  오산 부근에서 저지시키
면서 반격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제공권을 국련군에게 완전히 빼앗긴 적은 보급선이 점점 길어짐에 따라서  저돌적인 진격의 속
도가 둔화되었다.
  그러나D읍을 거점으로 한 적은 빈번히 정찰 행동을 취하여 기회만 있으면 대공세로서 중부 지
대에 돌파구를 뚫으려는 기세를 보였다.
 사실상 국련군측은 일본 등지에서 증원된 병력을 주로 서부와 동부 전선에  배치한 까닭으로 중
부는 성산이 있는 방어진을 펼 수가 없었다. 만일 적이 D읍에서 더 남하하여 소백산맥을 타고 청
주 지방까지 침범하게 되면 서부 전선을 더 이상 지탱하기가 어렵게 될 판국이었다.
  D읍 주변 일대에는 항공 정보에 의하여 중공군 두 개 사단과 사단 병력의 북한 괴뢰군으로 편
성된 한 개 군단 병력이 포진하고 있는 것으로  관측하고 있기는 했으나, 그들의 장비며, 보급 등 
전투력을 종합적으로 파악하지를 못해서 적의 집요한 수색전이 주력 공격의 전조인지 또는  단순
한 신경 작전인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이와 같은 정세 아래 전투 정보 기관인 조오 부대의 박병렬은 동료 하나와 함께 D읍에 잠복하
도록 명령을 받은 것이다.
   첩자로서 그보다 더 중한 임무가 없었다. 파격적인 명예라고 해야 마땅할 것이었다. 사지에 들
어가는 것이 영예로운 일이 아니라, 이번 잠복근무의 보고는  미 정보 장교의 정보와 동등한 제1
급의 신빙성(그들의 전문어로는 프라이어리티라고  했다)을 부여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인  첩자에  
의한 정보는 대개 제3급 혹은 제4급의 대접밖에는 받지 못했으니까 병렬의 경우는 각별한 대우라
고 아니할 수 없다. 그건 앞으로 미 육군의 장교 대우를 한다는 뜻과 같았다.
  "내 정보에 대해서 제1급의 프라이어리티를 준다는 건 무슨 의도인가?"
  병렬은 작전 장교인 헤링거 소령에게 다소 비꼬는 말투로 물었다.
  "그대의 치밀한 관찰력과 정확한 판단력을 높이 평가하는 까닭이다. "
  그리고는 '마이 보이'를 덧붙였다.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보 보낼 것이 아닌가?"
  "물론이다. 그러나 D읍은 그대의 고향이니  지리에 밝을 것이므로 반드시 성공할  것으로 믿는
다. "
  "고향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아버지가 공산주의자들에게 총살당 한 곳이다. "
  "매우 유감스럽다. 어쨌든 그대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는  의미에서도 충분히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
  "그런 어린애 수작은 치워라! 내가 이 부대에 있는  것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가 아니
다. 한민족을 위해서다. "
  그 말을 듣고 헤링거 소령은 입술을  비틀어 조소의 빛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보이면서 반문했
다.
  "그대의 민족을 위해서라.그럼 그대는 왜 한국군에 지원하지 않았는가?"


  병렬은 헤링거의 저의를 짐작하였다. 미군 부대에 근무하는 한국 청년들 가운데는 병역 기피자
가 너무도 많았던 것이다. 그는 치솟는 분노를 간신히 참고 대답했다.
  "한국군에 들어갈 기회보다 여기에 들어올 기회가  앞섰기 때문이다. 피난 생활의 혼란된 상태
에선 예사로운 일일 것이다. "
  "한국군으로 가면 그대는 훌륭한 장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한국청년들이 미군 부대에 
들어오는 이유는 급료가 좋고 생명이 안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나를 모욕하는가?"
  "파악!(그들은 병렬의 성을 이렇게 발음했다) 진정하라."
  "당신은 아직 나를 이해 못하고 있다. 나는 적과 싸우기가 초조하다. Ml총을 한 방 한 방 쏘면
서 싸우기엔 나는 너무도 서두르고 있다. 위험할수록 두려워 않기 때문이다. 내가 한 번이라도 명
령에 불만을 표명한적이 있었는가?  위험할수록 좋다. 무엇이든지 그중  중요한 그리고 빠른길을 
택하고 싶다. "
  병렬은 위스키 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한국군 병사도 중요한 직책이다. "
  "지금이라도 소집 영장이 오면 기꺼이  응하겠다. 그러나 지금 이 상태가  나의 생리에 맞는다. 
보람 있는 생활이다. 보복하는 사람에게 그중 적합한 장소가 이 부대라고  믿는다. 적을 기만하고 
암살하고 정확한 정보를 탐지하여 단번에 수천 명을 학살하고‥‥‥‥ 
  "그것 보라, 그대는 역시 아버지의 원술 갚겠다는 복수심에 불타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헤링거 소령의 눈에서 모멸의 빛은 이미 사라졌다.
  "어쩌면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원한을 풀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
  병렬은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대 어머니는 그대가 많은 공산주의자를 죽이기를 원하고 있는가?"
  "노우! 절대 그렇지 않다. 내가 사람을 죽이는 직업을 버리고 병역을 기피해서라도 살기만을 하
나님께 빌고 있을 것이다. "
  "나는 무슨 얘기인지 이해 못하겠다. "
  "당신이 관여할 바가 아니다. 그러니까  나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싸우고 있는 것이지 결코 
양친을 위해서 살인하는 것이 아니다. "
  "좋다. 어쨓든 그대가 맡은 바 임무나 완수하라."
  헤링거 소령은 논쟁에 싫증이 난 얼굴로 병렬의 어깨를 가볍게 치면서
밖으로 내어 보냈다.
  일변 독일 계통으로 짐작이 바며,  냉혹하고 무자비한 인간성으로 정평이  있는 헤링거 소령도 
병렬에게는 한몫을 단단히 놓고 있었다.  그건 병렬의 영어가 능숙하고 대학을  다닌 지식층이요, 
또한 B반의 반장이어 서라기보다  그의 크레이지한 용감성과 사물을  처리하는 능력이 출중하게 
일치되어 있기 때문이었는데, 이런 데다가 미군인을 대하는 태도가 만만치 않아서 실없는 농이나 
덜된 수작을 당한 일이 없는 것이다. 졸병들간에서도 '크레이지 파악'은 예외적인 한국인으로, 저
들 장교들과의 상대거니, 널리 인식이  된 터이었다. 전투 정보 부대에서는  서류만 만지작거리는 
미군들보다 공로를 세우고 능력이 있는 한국인 첩자들이  한결 소중히 여겨지고 있은 것이다. 그
들이 약간 눈에 거슬리는 짓을 했다고 피부 색깔의 우월감 따위를 내세우기란  어림도 없는 일이
었다.
  병렬과 동행하게 된 대원은 B반의 부책임자격인 김한균이었다.  전력이 은행원이라고 자칭하는 
그는 미인 상사에의 아부가 거의 습성화된  사내로서 걸핏하면 '노골적으로 얘기한다면' '까놓고 
말자자면''가족적 분위기에서 솔직히 털어놓자면' 등속의 전주를 붙이고는 모든일을 '인간적'으로 
처리하기를 몹시 좋아하는 친구였다.
  병렬은 한균을 경멸하고 있었으며 한균 또한 병렬에게 잠재적인 적의와 라이벌 의식을 품고 있
었다. 말하자면 둘은 생리적으로 맞지 않는 것이다. 병렬은 어찌하여 헤링거  소령이 피차에 싫어
하는 한균과 짝을 지어 주었는지, 그 의도를 모르는 바 아니었다. 첩자들을 한곳으로 보낼 경우에
는 으레 서로 어울리지 않는 사이를 용히도 골라내어 한패를 짜는 일이  그들의 상투적인 수법이
었다.
  이러한 수범은 첩자 공작에 대한 다년간의 경험과 과학적인 근거에 입각한 결론이었겠지만, 병
렬은 그들이 한국 전선의 체험에 따라서 유달리 한국인을 다루는 데에만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것
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씻어 버릴 수 없었다.
  한균과 동행한 것을 생각하니 마음에 무거운 부담과  침통한 우울감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
렇지만 그러한 명령에 한해서는 발언권이 아무리 센 병렬의 힘으로도 어쩔 누 없는 것이다.
  명령에 의하면 그들은 이튿날 오후 네 시에 지프차로 부대를 출발하여 어두워  버리기 전에 아
군의 전초 진지에 도착, 그로부터 걸어서 D읍에 침투하기로 되어 있다. 소요 시간은 출발 시간으
로부터 36시간 이상 48시간 이내에  귀환해야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루  반 동안은 부대에 돌 
아올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걸어도 24시간 동안은 D읍 내에 숨어 살핀 다음  돌아올 것을 요
구하고 있었다.
 
  병렬의 아버지는 모 은행 D읍 지점장이었다. 은행원 생활 근 십 년만에 겨우 책임자의 늦은 감
투를 쓰고 말하자면 고향으로 금의환향한 셈이었다. 말이 금의환향이었지 D읍 지점이라면 모두가 
머리를 흔드는 산간 벽지였다.
  좌천도 아닌 더군다나 영전이라고는 빈말이라도 할 수 없는 인사로서  이를테면 부려먹기 힘든 
늙은이 하나를 승격이라는 허울좋은 이름을 달아 본점에서 멀리 쫓아보낸 것이었다. 그렇지만 은
행 지점장으로 고향에 돌아온다는 사실은 아버지의 노후를 장식하는 데 결코 부족이 없었다.
  D읍에서 국민학교까지 마친 병렬이었지만 중학 이후의 서울 생활이 몸에 배어서 방학 때에 가
끔 시골의 친척들을 방문하기도  했으나 D읍을 고향으로 의식하지는  못했다. 아버지가 D읍으로 
부임하게 되자 당시 대학에 다니던 병렬은 서울에 남아서 하숙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가 D읍 정도의 지점장으로 가느니보다는 그냥 본점에 눌러 있든지 그런 형편이 못 
된다면 차라리 이 계제에 은행을 그만두고 퇴직금을 타서 그걸로 학교를 나오기까지 꾸려 나가자
고 제안했었다. 아버지는 크게 노했다.  아무한테나 지점을 맡길 줄  아느냐고, 나를 믿기 때문에 
지점장이란 중책을 명한 것이니, 정년으로 물러나기까지 은행두취('은행장'의 전 이름. 편집자 주)
를 비롯한 여러분의 기대에 어긋 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회적 책임과 인간 관계의 신의를 강력히 주장하는 아버지를 위선적이라거나, 고루한 관념의 
과장된 표현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기실 평생의 꿈은 이제야 실현되었다는 기막힌 기쁨과 만족
이 아버지 가슴에 충만하고 있음을 민감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아버지는 송별연이라 해서 마시지도 못하는 술에 며칠 동안 취해 있다가 어머니와 함께 황급히 
서울을 떠나고야 말았다.
  외아들일 병렬은 하숙에 들면서부터 가정의 분위기를 그리워하거나 가족의  안부를 궁금해하기
보다 독신 생활의 자유와 해방감을 만끽하였다. 겨울 방학에도 D읍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이듬해 봄 학년말 시험을 치르고 나서 만일 이번에도 집에 오지 않는다면  자식이 아니니 학비
도 보낼 수 없다는 강경한 사연을 받고서야 방자한 하숙 생활에서 얻은 학우 그리고 여자 학생들
과의 교제에 미련을 품은 채 서울을 떠났다.
  D읍에선 아버지도 어엿한 지방 유지의 행세였다. 읍장, 경찰서장, 세무서장 같은 쟁쟁한 지방의 
명사들을 집으로 초청하고 마작으로 밤을 새우는 일까지 생겼다는 것이었다.
  결혼 이후 출장이나 야근을 제외하고는 외박이란 한 번도 없다는 아버지 치고서는 이른바 장족
의 진보라 아니할 수 없다.
  "아버지가 마작을 다 하시게 웬일이세요?"
  병렬은 아버지도 이제는 아들의 생활을 얼마만큼  이해할 수 있게 될듯도 해서  다로 희롱삼는 
목소리로, 그러나 전적인 공감의 빛을 보였던것이다.
  "고향에선 별수가 없지. 다 그렇게 어울려 지내기 마련이다. "
  노인답지 않게 부끄러운 기색을 헛기침으로 감추면서  아버지는D읍의은행 지점장 생활에 이를 
데 없이 쾌적하고 보람이 있는 성싶었다.
  병렬은 물이 맞지 않는 데다가 닭을 잡는 등 환영 공세로 배탈이 나고 그것이 위장염으로 악화
되어 이내 상경하지 못하다가 뜻밖에 6·25를 당하고야 말았다.
  처음D읍사람들은 공산군의 남침이 어떠한 의미를 가진  사건인지, 그저 난리가 터졌다, 『정감
록』이 과연 맞았느니, 된 소리 안된 소리 마구 지껄였을 뿐, 위급한 사태의  본질을 이해하는 이
가 없는 듯하였다. 읍에서는 최고의 인텔리 가정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병렬의 집에서도 당장 남
으로 피난을 내려가야 할는지, 그대로 견디고 있어야 할는지, 딴은 병렬의  신병의 탓도 있었지만 
가부간의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뒤숭숭한 나날을 보냈다.
  경찰서장은 벌써 가족을 부산으로 보내 놓고도 국군의 반격이 시작되면 D읍은 아무 염려가 없
다고 허세를 부리면서 은행 지점장더러 가족을 먼저 피란시키라는 통고도 없었다. 그러던 경찰서
장이 부하 직원들과 일제히 자취를 감추어  버린 다음 손바닥만한 읍내 거리에도  피란 보따리가 
부쩍 늘게 되자, 병렬네도 이러고 앉았을 때가  아니라고 갑자기 낭패해서 짐을 꾸리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늦었던 것이다.
  공산군의 유격대가 아무 저항이 없었던 D읍을 하룻밤 사이에 장악해버린  것이다. 그날 밤으로 
아버지는 잡히고 이튿날 아침 경찰서 광장에서 소위 인민재판을 받고  즉석에서 따발총으로 총살
되고 말았다.
  관중 속에서 손을 높이 쳐들고 인민의  피를 빨아먹은 박 아무개는 마땅히  총살되어야 한다고 
악을 쓰던 자는 바로 아버지 은행 지점의 행원이었다.
  '인민의 이름'으로 총살형에 처한다는 선고가 내리자 옆에서  병렬의 손을 틀어쥐고 있던 어머
니의 손이 풀리면서 그 자리에 졸도하고 말았다  재판이 시작된 순간부터 어머니는  스스로 실신
하기를 바랐을는지도 모른다 하나님한테 또는  신령님에게 남편의 구명을 원하기에  앞서 스스로 
자신의 목숨이 끊어져 의식을 잃어버리기를 절박한 마음으로 원했을 것이다.
  병렬은 땅 위에 뒹굴고 있는 어머니가 정녕  시체이기를 바랐다. 어머니를 일으켜 세울려고 두
어 사람이 모여들었다.
  "어머니에게 손을 대면 죽인다!"
  병렬은 헤엄치듯 팔을 내저으면서 신음소리를 토했다.  아버지가 총살되기 전에 어머니부터 눈
을 감기를 빌었다. 아버지의 총살이 끝나기까지, 아니 아버지의 시체를 내가  묻어 버리기까지 어
머니는 눈을 감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파랗게 질린 어머니의 입술은 간헐적으로 경련을 일으켰다. 갑자기 사방이 고요해졌다.
  돌담 앞에 어느 늙은이가 빨간 헝겊으로 두 눈을 동여매고 서 있었다.
  병렬은 먼지가 묻어 눈썹과 머리가  뽀얗게 된 어머니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머니의 
속눈썹이 두어 번 꿈실거렸다. 병렬은 어머니에 대해서 살의를 의식했다. 시든 목을 두 손으로 누
르고싶은 억센 충동에 사로잡혔다.
  어느 놈이 아버지를 쏠 사수인지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너희들을 모조리 죽일 테니까, 한 놈도 
빼놓지 않고 불에 태워 죽여 버릴 테니까, 한두 놈 빨갱이 아닌 것이 섞인들 그게 어떻다는 거야. 
고스란히 불에 태워서 죽여 버릴 테니까, 우리 어머니를 내  손으로 죽인 다음에야 뉘 애민들 뉘 
애빈들 가릴 것 없이 죽일 테니까. 따발총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병렬도 입에서  거품을 뿜고 쓰
러졌다.
  그날은 새벽부터 눈이 내렸다.
  병렬은 한균과 함께 기밀실에서 브리핑을 들은 다음 자니 천막으로 돌아와 양주를 들이켜고 잠
을 청했다. 그는 아버지를 가매장한 나지막한 언덕을 그리고 있었다. 아버지의  시체는 그 동안에 
고루고루 썩었을까.
  이윽고 정신을 차린 어머니는 손가락으로  부스스 머리를 빗으며 상체를  일으켰으나 아버지가 
쓰러진 방향을 향해서 털썩 주저앉은 채 탈진한  눈으로 허공을 우러러보고 있었다. 병렬이는 아
버지의 시체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살아 있는 병렬 자신과는 아무
런 관계가 없었다. 눈을 가리웠기 때문에 아버지로서 지각할 수 없는 것일까.
  그는 아버지의 눈을 가린 빨간 헝겊을 풀었다. 눈은 반쯤 감고 있었다. 그래도  살아 있는 병렬 
자신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성싶었다. 눈을 제대로 뜨고 있지 않아서일까, 그 반쯤  가린 두 눈
알은 아직껏 썩지를 않고 함부로 두들겨 맞춘 송판 관 속에서 이 구석 저 구석 뒹굴어 다니고 있
을 것만 같았다.
 
  병렬이 잠이 깨었을 때는 이미 눈이 그쳤고 밖은 한결 매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병렬은 광목 솜바지 저고리에 퇴색한 다백 외투를 걸치고 나섰고, 한균은 외투 같은 것은 없이 
그 대낀 털로 짠 긴 목도리를 감고 있었다.
  "그렇게만 입고 추워서 견디겠나?"
  "가벼운 낙타 오버가 있는데 글쎄 난 요꼴로 가라는 거야."
  한균의 볼멘 목소리는 불평을 감추지 못했지만  얼굴은 딴판으로 억지웃음을 자아내고 있었다. 
병렬 앞에서 약점을 잡히지 않으려는 약빠른 심사가 분명했다.
  "루테나! 추운데 천막 안에서 쉬시지."
  병렬은 그들을 지프차로 전방까지 호송할 젊은 소위에게 농을 걸었다.
  "나의 임무다. "
  무뚝뚝하게 내뱉은 그의 임무란 원래가 첩자의 호송이나 안내보다도 도망  또는 탈출을 감시하
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전방 보병 진지에서 그들은 따뜻한 커피를 대접받고 지프차와 헤어지게 되었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이 마일만 더 태워다 줄 수 없겠는가?"
  물론 거절당할 것은 뻔히 알면서 지껄이는 말이었다.
  "나의 임무 밖의 주문이다. "

  여전히 무표정한 대꾸였다. 자동차 엔진 소리가 돌아갈 것을 바삐 재촉했다.
  "도대체 당신의 임무란 무엇이냐?"
  병렬은 현재의 자기의 위치를 기피하고 있다거나  맡은 바 임무를 못마땅히 여기고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니었는데, 공연히 앳된 얼굴의 소위를 건드리고 싶은 것이었다.
  소위는 얼굴을 붉히며 잠시 당황해 하였다. 나의 마음 어느 한구석에는 역시 가라앉지 못한 울
분의 덩어리가 응고하고 있어서 그것이 나로 하여금 나의 의식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내닫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옳은 말이다. 내 나라에서 내가 싸우고 있으니까."
  병렬은 자조적인 웃음을 띠고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내 땅에서 내가 싸우러 나가는 이 순간에 동생 또래밖에 안되는 저 외국인에게 새삼 무엇을 기
대하려는 것일까. 가령 저 젊은 장교와 운전병이 적과 가까운 참호에서 한시 바삐 후방으로 물러
나고 싫어하는 겁쟁이라 한들 내가 그걸 비웃거나 업신여길 권리는 전혀 없는 것이다.
  D읍으로 향한다는 생각이 병렬을 지나치게 흥분시켰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약 50미터의 거리를 
두고 병렬이 앞장을 서서 걷기 시작했다.
  가슴패기에 품은45밀리 권총도 지금쯤은 체온과 같이 따뜻해졌을 것이다. 두 자루의 권총은 한 
자루의 따발총만 못한 것이다. 어림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민간인이라곤 하나도  남지 않은 이 
일대에서 어울리지도 않는 외투를 걸친 채 적에게 붙잡히는 날엔 다시 돌아올  궁리란 아예 말아
야 한다. 그들의 임무는 분명 첩자의 침투 공작이지만 사실상  권총 두 자루뿐인 무장 경찰과 한
가지인 것이다. 장해가 나타나면 도망쳐야 한다. 도망칠 수 없게 되면 싸우는 수밖엔 다른 도리가 
없다. 필연적으로 투항이라는 문제가 남게 된다. 사이가 나쁜 두 사람을 짝지어 준 까닭이 이러한 
문제와 관련이 없지 않다 할 것이다.
  하늘에 별이 늘어갔다. 시계는 점점 좁아졌다. 동쪽으로 내달은 산허리에서 파란 신호탄이 서로 
호응하고 있었다. 소식 장총 소리가 산발적으로 울리고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바싹 나를 따라오게,"
  지름길로 찾아드는 모퉁이에서 병렬은 한균을 기다렸다. 뿌드득뿌드득 눈을 밟은 구두소리만이 
앞뒤의 전우를 서로 확인시켰다. 때로 뒤따라 오는 발자국 소리가 끊어졌다.  한균이 뒤로 되돌아
가 버린 듯한 의혹과 공포가 엄습했다.
  어쩌면 놈은 발자국 소리를 죽이고 내 등허리에 가까이 붙어서 권총을 뒤통수에 들이대고 있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진 안에서 총소리를 내는 따위 자살 행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이토록 서
로 믿지 못하는 우리들이 대체 무슨 일을 한다고 이렇게 나섰는가‥‥‥‥ 
  조오 부대의 한국인 첩자 두 명은 하오 여섯 시경 그들의 목적지인 D읍 근교에 도착했다. 예정
보다 빨리 온 듯도 싶었고 반면에 꾀죄죄한 느낌이 기도 했다.
  읍내 시가지에는 집 세 채에 하나쯤의  비율로 파괴되어 있었다 크고 논은  긴물일수록 파괴의 
대상이 되었는지 병렬의 기억 속에 살아 있는 건물의 모습이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도리
어 그선 건물의 위치보다 길가의 전주 비스듬히 기울어진 간판,개가 몹시 짖어대던 골목 같은 까
맣게 잊어버린 것들이 어둠 속에서 생생하게 되살아오는 것이었다.
  D읍의 중심지 한가운데를 잘라 놓은 신작로 위에는  적의 차량이 헤드라이트를 점멸하면서 오
가고 있다. 가끔 삼삼오오 떼를 지어 공산군  병사들이 따발총의 쟁반 같은 탄창을 달그락거리면
서 지나갔다. 중국말이 들릴 때도 있었고 평안도 사투리가 들리기도 했다.
  허위대가 성한 집들은 빠짐없이 적의 숙소가 되어 있었다.
  병렬은 어느새 아버지의 은행 지점  옆에 서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이 층은 기둥만 앙상하게 
날아가 버렸지만 아래층은 헐은 지폐 냄새가 금세 풍겨올 듯 친밀한 추억이 남아 있었다.
  "우리집으로 가는 거다. "
  병렬은 떨리는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순간 핏덩어리를  뿌릴 것 같은 통곡이 목청을 치밀어
올랐다.
  반달은 중천에서 화석처럼 빳빳이 얼어붙었다.  어차피 나는 이 거리에  서 놈들에게 들키고야 
말 것이다. 아버지 은행 앞에서 가가대소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빨간 수건으로  눈을 가리운 채로 
경찰서 담장 앞에서 총살당하는 것이다. 어머니만 홀로 남게 된다. 죽어서 시체가 된 나와 부산판
잣집에서 엄연히 살아 있는 어머니와의  사이는 남과 남이 되는 것이다.  죽은 자는 모두가 선한 
것이다. 살아 있는 놈치고 악하지 않은 놈이있느냐. 지구상의 30억, 모조리 죽어라.  한 놈도 남김
없이 말끔히 죽어라. 내가 지옥의 고문 끝에 총살당하고 나면 나와 어머니와 아버지가 비로소 어
떤 눈물겹도록 가까운 관계를 새로이 맺게 되겠지‥‥‥ 
  마침내 그들은 병렬의 옛집으로 들어갔다. 은행 지점장 사택인 왜식 목조 가옥은 현관으로부터 
바른편 반쪽이 무너지고 없었다.
  "집이 누추해서 안됐네."
  병렬은 이번에는 목구멍 속에서 꿈틀거리는 기묘한 웃음을 참으면서 한균을 안내하였다.
  병렬이 응접실 겸 아버지의 서재로 쓰던 방문을  살며시 젖혔을 때 방구석에 웬 인기척  이 났
다. 짧은 신음 소리 같은 것이었다.  뚫어진 장지문안으로 비친 달빛 속에는 머리가  하얀 노인이 
벽을 향해서 모로 누워있었다. 가슴으로루터 희끄무레한 이불  같은 것을 덮고 있었지만 길이 가 
짧은지 뽀족한 버선발이 튀어나와 보였다. 가까이 몸을 굽혀 살피니까 덮은 것은 방석이었다.
  병렬과 한균은 동시에 권총을 다시 가슴패기에 박아 넣고 얼굴을 마주보았다.
 "여보! 여보시오!"
  한균은 노인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우묵 패인  눈자위 속에는 윤기를잃은 눈알이 깊숙이 박
혀 있었다.
  "노인이 웬일이오?"
  병렬은 아까부터 등허리에 차가운 전율을 느끼고  있었다. 불안과 어떤막연한 기대가 착잡하게 
엉클어진 기이한 예감에 가슴이 설레는 것이다.
  "이 집에 사시는 분입니까?"
  병렬은 쪼그려 앉고 노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우리는 노인을 해치려는 사람이 아니니 말씀하십시오"
  "먹을 것을 좀 주시오"
  노인은 입술을 헤벌리고 나직이 웅얼거렸다. 병렬은 외투 호주머니에 넣고 온 떡 한 조각을 노
인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것은 얼음 덩어리나 다름이 없었다.
  노인은 그걸 입술에 대고 혓바닥 끝으로 핥았다..
  "불에 녹여 올 테니 기다리시오."
  병렬은 성냥을 끄집어 내고 방안을 둘러보았다.
  "여기서 불을 피울 작정인가?"
  한균이 힐난하는 음성으로 뇌까렸다.
  "우릴 잡으러 오라고 신호할 테야?"
  "다락 속에서 잠깐 불을 피우면 될걸."
  "연기가 날 것 아니야!"
  '기 근처는 모두 파괴되었으니까 놈들이 없을 걸세."
  병렬은 떡을 불에 녹일 생각인 것이다.
  "미쳤군!"
  "뭐야?내가 하는 일에 간섭 마라. 무섭거든 너 혼자 멋대로 도망치란말야."
  병렬은 저 시든 노인의 입 속에 따뜻하고 부드러운 떡을 넣어 주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것은 사뭇 초조하고 목마른 갈망이었다. 목이 탄다. 물을  마시고 싶다. 물 속에 독이 있어도 
당장 마셔야 견디겠다.
  그는 나무 토막을 짜개서 불쏘시개를 만든 다음  다락으로 기어올라 불을 붙였다. 다락문 틈에
서 새어나오는 연기는 향로의 향연처럼 가늘게 흐르면서 밖으로 사라졌다.
  한균은 병렬이 다락 안에서 질식해서 죽을 것을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노인께서는 혹시 박00 씨를 모르시는가요?"
  우물거리고 있는 노인의 입을 만족스런게 쳐다보면서 병렬은 물었다.
  "나 이 고장 사람이 아닙니다. "
  노인은 강원도에서 아들 내외와 D읍까지 피난을 왔다는 것이다. 중풍이  도져서 걷지를 못하게 
된 데다가 공산군의 포성이 다가오자, 아들 내외는 저들 자식 둘만을 데리고 노인을 버리고 가버
렸다는 것이다.
  "아드님이?"
  병렬은 노인의 담담한 어조가 흡사 남의 얘기 같은 인상을 주었기에 그렇게 물어 본 것이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한테 버림을 받았으니 천상 죽으라는 팔자일 거요"
  그러나 노인은 병렬네가 어느 편 사람인지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병렬로서는 도무
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일부러 이쪽의 신분을 밝혀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되었
다.
  북쪽에서 멀리 천둥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탱크의 대군이  점차로 까까워지고 있는 
소리였다. 북쪽 하늘에선 붉은빛 노랑빛 그리고 하얀 예광탄이 교차하고 있었다.  중부 전선에 처
음으로 나타나는 탱크부대인 것이다. 전차의 출동만으로 적이 과연 주력 공세를 시작하려는 계획
인지 경솔하게 판단할 수 없는 노릇이었으나 국련측으로는 중요한 정보가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추위 때문에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적의 전차의 수효에 대해서 소견을 교환한다든지 이
튿날의 행동 계획을 의논한다든지 해서 얼마든지 긴요한  시간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노인
의 출현과 그 뒤 병렬의 태도는 한균에겐 몹시 불쾌한 것이어서 귀환한 뒤 제출할 보고서의 서두
를 '박병렬은 정보 활동에 도리어 장애물이 될 정체  불명의 노인을 보살피는 데 열중하여' 이렇
게 시작하는 것이 어떨까. 그런 궁리마저 해보는 것이다.
  이튿날 아침부터 그들은 말끝마다 의견을 달리하여 적이 전차를 어디에  엄폐해 놓았는지 나가 
보자고 병렬이 제안하면 한균은 어둡기를 기다리자고 반대하였다. 이번에는 한균이 한 군데 오래 
있으면 들키기 쉬우니까 다른 곳으로 아지트를 옮기자고  주장하면, 나는 이 집에서 움직이지 않
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적의 전차가 나타났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라도 이번 공작의 임무는  거의 다한 것이니까 해만 
지면 출발하세."
  양지쪽에서 낮잠을 자고 깬 한균은 비굴한 웃음을 띠면서 말했다. 병렬은 들은 척을 하지 않았
다. 내 용기가 무디어진 것이 아니라고 스스로 다짐하고 있었다. 오늘 저녁에 전차의 대수와 위치
와 그 밖에 보병의 병력도 확인할 작정으로 있었던 것이다.
  "뭐 미국 사람들의 고용인이 아닌가."
  한균은 그렇게 투덜거리다가 문득 입을 다물었다.
  조오 부대의 어떤 작자는 병렬에게 냉혈 동물이란 별명을 지었었다. B반원  열한 명도 죄다 나
를 그렇게 보고 있을 것이다.
  작년 가을 진남포 지방에 낙하산으로 내렸을 때가 회상된다. 수송기에서 단번에 뛰어내리지 못
하고 머뭇거리는 대원을 하나하나 뒤에서 발길로 걷어차곤  했었다. 물론 맨 마지막에 나도 뛰어
내리긴 했다. 손으로 등을 밀어 줘도 됨직한 일이 아니었던가, 발길로 차는 놈은  나밖에 보지 못
했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젊은이 !"
  노인이 병렬을 불렀다.
  "나 간청인데 남으로 데려다주슈."
  그리고는 얼굴을 고통스럽게 쥐어짜면서 눈을 감았다.
  "자식놈을 봐야겠어! 그 자식을 이 눈으로 보아야 눈을 감겠단 말이어!"
  고개를 쳐들고 주먹으로 앞가슴을 두드리는 것이었다.
  "그 따위는 잊으시오, 잊어!"
  병렬이 외쳤다.
  "조용히 해."
  한균이 말했다.
  "그 놈에게 죽여 달라고 해야지. 그 자식은 여기다,  여기다가 칼을 꽃고 날 죽일 것이어, 능히 
그럴 수 있는 놈이어."
  노인은 상반신을 일으켜 가슴을 풀어 헤쳤다.
  "돌았군!"
  한균은 침을 뱉었다.
  "이 애빌, 그래 꼼짝없이 굶겨 죽이려구, 그래 이 늙은 것을‥‥‥‥ 
  노인은 갑자기 옆구리가 결리는지 등허리를 움츠리며 할딱거렸다.
  "할아버지! 걱정마세요. 제가 꼭 모셔다 드릴 테니."
  병렬은 혼자말처럼 그러나 결의에 찬 목소리로 말하고는 별안간 발작하듯 흐느끼기 시작했다.
  "영감님! 갑시다. 내가 총을 줄 테니까,총으로 아들놈을 쏘아 죽이시오. 빨간  헝겊으로 눈을 처
매고 심장에다 대고 총을 쏘시오. '아버지의 이름'으로  사형을 언도하시오. 그런 다음 당신도 눈
을 감으시오."
  병렬의 흐느낌은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아버지가 죽었을  때에도 이처럼 애처롭고 슬픈 줄 몰
랐었다.
  어둠이 짙어지자 한균은 부대로 귀환하자고 다시 제의했다.
  "잠복 기간인 이십사 시간도 얼만 남지 않았어.오늘  밤까지 여기 있을 필요가 어디 있느냐 말
야."
  한균은 흥분했다.
  "어쨌든 사십팔 시간 안에 들어가면 될 것 아닌가."
  병렬은 싸늘하게 대꾸했다.
  "‥‥‥‥병렬이 그러지 말구, 자, 부탁이야 빨리 돌아가세."
  한균은 눈, 입, 손, 어깨 온몸으로 애걸했다.
  놈은 진심으로 나를 의지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끝으로 애원  전술을 써보자는 심산인 
것이다. 그러나 병렬은 노인을 업고 돌아가야 할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한균과 교대로 업을 수밖
에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이다.
  "오우케이! 가세. 허지만 자네도 알겠지만 저 노인을 교대로 업고 가야 해."
  그러면서 병렬은 일어섰다.
  "정신이 있어?우리 둘이 빠져나가기도 결사적인데,저 병신을 업고 간다구?"
  신작로 방향에서 중국의 선율 같은 군악 소리가 들려왔다.
  "군소리 마라! 남으로 가고 싶다는 노인 하나를 왜 못 살린단 말야."
  병렬은 단정적인 말투로 이의가 허락될 수 없다는 듯 잘라 말하고는 탈출로를  미리 탐색해 두
기 위해서 밖으로 나갔다.
  아버지를 가매장한 언덕은 보이지 않았으나, 그 주변 하늘에서 파란 예광탄이 솟아오르고 있었
다. 아버지는 노하로 있을 것이다. 왜 나는 아버지를 쏘려고 앞으로 나선 사수에게 대들지 못했던
가. 어머니가 쓰러졌기 때문일까. 어머니를 죽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었다. 이번 임무가 끝나면 
나는 조오 부대를 그만두고 어머니에게 돌아갈 것이다.
  그가 집으로 되돌아와 그들이 기다리는 방문을 막  열었을 순간이었다. 한균이 노인의 채 위에 
올라타고 있지 않은가? 팔을 뻗친 채 노인의 목을  졸라매고 있는 것이다. 병렬은 한균의 옆구리
를 걷어찼다. 한균은 벽으로 몸을 기대면서 권총을  뽑으려고 했다 병렬은 호주머니 속으로 옮겨 
넣었던 권총을 빼어들고 주저없이 방아쇠를 당긴다.
  그는 축 늘어진 한균의 몸뚱이 아래서 노인을 끌어냈다. 노인은 살아있었다.  그는 노인을 업었
다. 화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는 노인의 체온을 의식하지 못했으나 이상스레 한층 냉철해지는 자신을  저릿저릿한 쾌감 속
에서 반추하고 있었다.
  마당을 건너 허물어진 담을 넘어섰을 때 왼편에서 날카롭게 수하하는 목소리가 귀를 쑤셨다.
  그는 줄달음치기 시작했다. 총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귓전과 머리 위를 스치는  총알의 예리한 
파열음만이 들리는 것이다. 그의 목은 노인의 앙상한 팔이 휘어감고 있었다.
  노인의 체중은 점점 가중되었다. 그러나 쇠붙이처럼 무거워진 노인의  몸뚱이를 선뜻 길바닥에 
내던지기만 하면 적병의 추적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단순한 한 가지 생각이 미처 나지를 않
았다.





    오발탄(지은이: 이범선)
  
  계리사 사무실 서기 송철호는 여섯 시가 넘도록 사무실 한구석 자기 자리에 멍청하니 앉
아 있었다. 무슨 미진한 사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당부는 벌써 집어치운 지 오래고  그야
말로 멍청하니 그저 앉아 있는  것이었다. 딴 친구들은 눈으로 시계  바늘을 밀어 올리다시 
피 다섯 시를 기다려 휘딱 나가 버렸다. 그런데 점심도 못 먹은 철호는 허기가 나서만이 아
니라 갈 데가 없었다.
  "송 선생은 안 나가세요?"
  이제 청소를 해야 할 테니 그만 나가 달라는 투의 사환애의 발에 철호는 다 낡아빠진  해
군 작업복 저고리 호주머니에 깊숙이 찌르고 있던 두 
손을 』빼내어서 무겁게 책상 위에 올려 놓았다.
  "나가야지 "
  하품 같은 대답이었다.
  사환애는 저쪽 구석에서부터 비질을 하기 시작하였다. 먼지가 사정없이 철호의 얼굴로 몰
려왔다.
  철호는 어슬렁 일어섰다. 이쪽 모서리 창가로 갔다. '바께쯔'의 물을 대야에 따뤘다. 두 손
을 끝에서부터 가만히 물 속에 담갔다. 아직 이른 봄이라 물이 좨 손끝에 시렸다. 철호는 물 
속에 잠긴 두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펜대에 시달린  오른손 장지 첫 마디에 콩
알만한 못이 박혔다. 그 못에서 파란 명주실 같은 것이 사르르 물 속으로 풀려났다. 잉크 그
것은 잠시 때야 밑바닥을 기다 말고 사뿐히 위로 떠올라 안개처럼 연하게 피어서 사방으로 
번져나갔다. 손가락 끝을 중심으로 하고 그 색의 농도가 점점 연해져 나갔다. 맑게 개인  가
을 하늘색으로 대야 가장 자리까지 번져나간 그것은 다시 중심의 손끝을 향해 접어돌며 약
간 진한 파랑색으로 달무리 모양 둥그런 원을 그렸다.
  피! 이건 분명히 피다!
  철호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슬그머니 물 속에서 손을 빼내었다. 그러자 이번엔 대
야 밑바닥에 한 사나이의 얼굴을  보았다. 철호의 눈을 마주 쳐다보는  그 사나이는 얼굴의 
온 근육을 이상스레 히물히물 움직이며 입을 비죽거려 웃고 있었다.
  이마에 길게 흐트러진 머리카락. 그 밑에 우묵하니 패인 두 눈. 깎아진 볼. 날카롭게 여윈 
턱. 송장처럼 꺼멓고 윤기 없는 얼굴. 그것은 까마득한 원시인의 한 사나이 였다.
  뭉둥이 끝에 모난 돌을 하나 칡넝쿨로 아무렇게나 잡아매서 들고, 동굴속에 남겨 두고 나
온 식구들을 위하여 온종일 숲속을 맨발로 헤매고 다니던 사나이.
  곰? 그건 용기가 부족하다.
  멧도야지? 힘이 모자란다.
  노루? 너무 날쌔어서 
  링? 그 놈은 하늘을 난다.
  토끼? 토끼. 그래, 고놈쯤은 꽤 때려 잡음직하다. 그런데 그것마저 요즈음은 몫에 잘 돌아
오지 않는다. 사냥꾼이 너무 많다. 토끼보다도 더 많다.
  그래도 무어든 들고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사나이는 바위 잔등에 무릎을 꿇고  앉아 냇물에 손을 씻는다. 파란  물속에 빨간 노을이 
감겼다. 끈적끈적하게 사나이의 손에 묻었던 피가 노을빛보다 더 진하게 우러난다.
  무엇인가 때려잡은 모양이다. 곰? 맷도야지? 노루? 꿩? 토끼?
  그런데 사나이가 들고 일어선 것은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보기에도 징그러운 내장. 그것
이 무슨 짐승의 내장인지는 사나이  자신도 모른다. 사나이는 그 짐승의  머리도 꼬리도 못 
보았다. 누군가가 숲 속에 끌어내어 버린 것을 주워 오는 것이었다.
  철호는 옆에 놓인 비누를 집어들었다. 마구 두 손바닥으로 부볐다. 우구구 까닭 모를 울분
이 끓어올랐다.
 
  빈 도시락마저 들지 않은 손이 홀가분해 좋긴 하였지만,  해방촌 고개를 추어 오르기에는 
뱃속이 너무 허전했다.
  산비탈을 도려내고 무질서하게 주워  붙인 판자집들이었다. 철호는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레룡곽을 뜯어 덮은 처마가 어깨를 스칠만치 비좁은 골목이었다. 부엌에서들 아무데나 마구 
버린 뜨물이, 미끄러운 길에는 구공탄 재가 군데군데 헌 데 더뎅이모양 깔렸다.
  저만치 골목 막다른 곳에, 누런 시멘트 부대종이를 횐 실로 얼기설기 문살에 얽어맨 철호
네 집 방문이 보였다. 철호는 때에 절어서 마치 가죽끈처럼  된 헝겊이 달린 문걸쇠를 잡아
당겼다. 손가락이라도 드나들만치 엉성한 문이면서 찌걱찌걱 집혀서 잘 열리지를 않았다. 아
래가 잔뜩 집힌 채 비틀어진 문틈으로 그의 어머니의 소리가 새어 나왔다.
  "가자! 가자!"
  미치면 목소리마저 변하는 모양이었다. 그것은 이미 그의 어머니의 조용하고 부드럽던 그 
목소리가 아니고, 쨍쨍하고 간사한 게 어떤 딴 사람의 목소리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철호의 얼굴에 걸레 썩는 냄새 같은 것이 확 풍겨왔다. 철호는 문 안
에 들어선 채 우두커니 아랫목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중학교  시절에 박물관에서 미라를 본 
일이 있었다. 그건 똑 솜 누더기에 싸놓은 미라였다. 횐 머리카락은 한 오리도 제대로  놓인 
것이 없었다.
  그대로 수세미였다. 그 어머니는 벽을 향해 돌아누워서 마치 딸꾹질처럼 어떤 일정한사이
를 두고,가자 가자 하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 해골 같은 몸에서 어떻게 그런 쨍
쨍한소리가 나오는지 이상하였다.
  철초는 웃방으로 올라가 털썩 벽에  기대어 앉아버렸다. 가슴에 커다란  납덩어리를 올려 
놓은 것 같았다. 정말 엉엉 소리를 내어 울고 싶었다.
  눈을 꼭 지리감으며 애써 침을 삼켰다.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철호는 저녁 때 일터에서 돌아오면 어머니야 알아듣건 말건 그래도 
'어머니 지금 돌아왔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곤 하였었다. 그러나 요즈음은 그것마저 안하게 
되었다. 그저 한참 물끄러미 굽어보고 섰다가 그대로 웃방으로 올라와 버리는 것이었다.
  컴컴한 구석에 앉아 있던 철호의 아내가 슬그머니 일어섰다. 담요 바지 무릎을 한쪽은 꺼
멍, 또 한쪽은 회색으로 기웠다. 만삭이 되어서  꼭 바가지를 엎어 놓은 것 같은 배를  안은 
아내는 몽유병차처럼 철호의 앞을지나 나갔다. 부엌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분명 벙어리는 아
닌데 아내는 말이 없었다.
  "아버지."
  철호는 누가 꼭대기를 쿡 쥐어박기나 한 것처럼 흠칠했다.
  바로 옆에 다섯 살 난 딸애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철호를 쳐다보고 있었다. 철호는 어린
것에게 얼굴을 돌렸다. 웃어 보이려는 철호의 얼굴이 도리어 흉하게 이그러졌다.
  "나아, 삼춘이 나이롱 치마 사준댔다. "
  "응. "
  "그리구 구두두 사준댔다. "
  "응. "
  "그러면 나 엄마하고 화신 구경 간다. "
 
  철호는 그저 어린것의 노랗게 뜬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철호의 헌 셔츠 허리통
을 잘라서 위에 끈을 꿰어 스커트로 입은 딸애는 짝짝이 양말 목달이에다 어디서 주은 것인
지 가는 고무줄을 끼었다. 
  "가자! 가자!"
  아랫방에서 또 어머니의 그 저주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칠 년을두고 들어와도 전연 
모를 그 어떤 딴 사람의 목소리 철호는또 눈을 꼭 감았다. 머리 속의 뇟줄이 팽팽히 세워졌
다. 두 주먹으로 무엇이건 꽉 때려부수고 싶은 충동에 철호는 어금니를 바사져라 맞씹었다.
 
  좀 춥기는 해도 철호는 집 안보다 이 바위 잔등이 더 좋았다. 그래 철호는 저녁만 먹으면 
언제나 이렇게 집 뒤 산등성이에 있는 바위 위에 두 무릎을 세워 안고 앉아서 하염없이  거
리의 등불들을 바라보며 밤 깊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어느 거리쯤인지 잘 분간할 수 없는 
저 밑에서, 술 광고 네온사인이 핑그르르 돌고 깜빡 졌다가 또 번뜩 켜지고, 핑그 르르 돌고 
깜빡 지고 하였다.
  철호는 그저 언제까지나 그렇게 그 네온사인을 기켜보고 있었다. 바위잔등이 차츰차츰 식
어왔다. 마칩내 다 식고 겨우 철호가 깔고 앉은 고부분에만 약간 온기가 남았다. 이제  조금
만 더 있으면 밑이 시려울 이다. 그러면 철호는 하는 수 없이 일어서야 하는 것이다.
  드디어 철호는 일어섰다. 오래 까부려 붙이고 있던 두 다리가 저렸다.두 손을 작업복 호주
머니에 깊숙히 찔렀다. 철호는 밤하늘을  한번 쳐다 보았다. 지금까지 바라보던  밤거리보다 
더 화려하게 별들이 뿌려져 있었다. 철호는 그 많은 별들 가운데서 북두칠성을  찾아보았다. 
머리를 뒤로 젖혀 하늘을 쳐다보는 채 빙그르르 그 다리에서  돌았다. 거꾸로 달린 주걱 같
은 북두칠성은 쉽사리 찾아낼 수 있었다. 그 북두칠성 앞에 딴 별들보다 좀 크고 빛나는 별. 
그건 북극성이었다.
  철호는 지금 자기가 서 있는 지점과 북극성을 연결하는 직선을 밤 하늘에 길게 그어 보았
다. 그리고 그 선을 눈이 닿는 데까지 연장시켰다.
 철호는 그렇게 정북을 향하여 한참이나 서  있었다. 고향 마을이 눈앞에 떠올랐다.  마을의 
좁은 길까지, 아니 그 길에 박혀 있던 돌 하나까지도 선히 볼 수 있었다.
  으시시 몸이 떨렸다. 한기가 전기처럼 발끝에서 튀어 콧구멍으로 빠져 나갔다. 철호는  크
게 재채기를 하였다. 그리고 또 한번 부르르 몸을 떨며 바위 밑으로 내려왔다.
  철호는 천천히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가자! "
  철호는 멈칫 섰다. 낮에는 이렇게까지 멀리 들리는 줄은 미처 몰랐던 어머니의 그 소리가 
골목 어구에까지 들려왔다.
  "가자!"
  그러나 언제까지 그렇게 골목에 서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철호는  다시 발을 옮겨 
놓았다. 정말 무거운 발걸음이었다. 그건 다리가 저려서 만이 아니었다.
  "가자!"
  철호가 그의 집 쪽으로 걸음을 옮겨 놓을 때마다 그만치 그 소리는 더 크게 들려왔다.
  가자는 것이었다.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옛날로 되돌아가
자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렇게 정신 이상이 생기기 전부터  철호의 어머니가 입버룻처럼 되
풀이하던 말이었다.
  삼팔선, 그것은 아무리 자세히 설명을 해주어도 철호의 늙은 어머니에게만은 아무 소용없
는 일이었다.
  "난 모르겠다. 암만해도 난 모르겠다. 삼팔선, 그래 거기에다 하늘에 꾹 닿도록 담을 쌓았
단 말이냐 어쨌단 말이냐. 제 고장으로 제가 간다는데 그래  막는 놈이 도대체 누구란 말이
야."
  죽어도 고향에 돌아가서 죽고 싶다는 철호의 어머니였다. 그리고는, '이게 어디 사람 사는 
거냐.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하며 한숨과 함께 무릎을 치며 꺼지듯이 풀썩 주저앉곤 하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철호는,
  "어머니, 그래도 남한은 이렇게 자유스럽지 않아요?"
하고, 남한이니까 이렇게 생명을 부지하고 살  수 있지, 만일 북한 고향으로 간다면  당장에 
죽는 것이라고, 자유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갖은 이야기를 다 예로 들어가며 어
머니에게 타일러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유라는 것을 늙은 어머니에게 이해시키기란 삼팔선을 인식시시키기보다 몇백 갑
절 더 힘드는 일이었다. 아니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 했다. 그래 끝내 철호는  어머니
에게 자유라는 것을 설명하는 일을 단념하고 말았다.
  그렇게 되고 보니 철호의  어머니에게는 아들-지지리 고생을  하면서도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만은 죽어도 하지 않는 철호가 무슨  까닭인지는 몰라도 늙은 에미를 잡으려고  공연한 
고집을 피우고 있는 천하에 고약한 놈으로만 여겨지는 것이었다.
  그야 철호에게도 어머니의 심정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무슨 하늘이 알만치 큰 부자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왜 큰 지주로서 한마을의  주인격으로 
제법 풍족하게 평생을 살아오던 철호의 어머니 눈에는 아무리 그네가 세상을 모른다고는 해
도, 산등성이를 악착스레 깎아내고 거기에다 게딱지같은 판잣집들을 다닥다닥 붙여 놓은 이 
해방촌  이름 그대로 해방 촌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두 내 나라를 찾았다게 기뻐서 울었다. 엉엉 울었다. 시집 올 때 입 던  홍치마를 꺼내 
입구 춤을 추었다. 그런데 이 꼴로다. 난 싫다. 아무래두 난 모르겠다. 뭐가 잘못 됐건  잘못 
된너머 세상이디 그래."
  철호의 어머니 생각에는 아무리 해도  모를 일이었던 것이었다. 나라를  찾았다면서 집을 
잃어버려야 한다는 것은, 그것은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었다.
  철호의 어머니는 남한으로 넘어온 후로 단 하루도 이 '가자'는 말을 하지 않은 날이 없었
다.
  그렇게 지내오던 그날, 6·25사변으로 바로 발 밑에 빤히 내려다보이는 용산 일대가 폭격
으로 지옥처럼 무너져 나가던 날 끝내 철호는 어머니를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이었다.
  "큰애야 이젠 정말 가자. 저것 봐라, 담이 흠싹 무너졌는데 삼팔선의 담이  저렇게 무너뎄
는데야."
  그때부터 철호의 어머니는 완전히 정신  이상이었다. 지금의 어머니,그 것은 이미  철호의 
어머니는 아니었다. 아무리 따져 보아도 그것이 철호 자기의 어머니일 수는 없었다.  세상에 
아들 딸마저 알아보지 못하는 어머니가 있을 수 있는 것일까?
  그날부터 철호의 어머니는 
  "가자! 가자!"
  하고 저렇게 쨍쨍한 목소리로 외마디 소리를 지를 뿐 그 밖의 모든 것을 완전히 잃어버리
고 있었다. 철호에게 있어서 지금의 어머니는 말하자면 어머니의 시체에 지나지 않았다.
  뚫어진 창호지 구멍으로 그래도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철호는 웃방 문을 열
었다. 아랫방과 웃방 사이 문턱에 위태롭게 올려 놓은  등잔이 개똥벌레처럼 가물거리고 있
었다. 웃방 아랫목에는 딸애가 반듯이 누워서 잠이 들었다. 담요를 몸에다 둘둘 말고 반듯이 
누운 것이 꼭 송장 같았다. 그 옆에 철호의 아내가 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꺼먼 헝겊
과 회연헝겊으로 기운 담요바지, 무릎 위에는 빨간색 유단으로  만든 조그마한 운동화가 한 
켤레 놓여 있었다. 철호가 방안에  들어서자 아내는 그 어린애의 빨간  신발을 모두어 자기 
손바닥에 올려 놓아 철호 에게 들어 보였다.
  "삼촌이 사왔어요."
  유난히 실눈썹이 긴 아내의 눈이 가늘게 웃었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보는 아내의 웃음이
었다. 자기가 미인이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만 지 오랜 아내처럼  또 오래 보지 못하여 거
의 잊어버려가던 아내의 웃는 얼굴이었다.
  철호는 등잔이 놓인 문턱 가까이 가서 앉으며 아내의 손에서 빨간 어린애의 신발을 받아 
눈앞에서 아래 위를 살펴보았다.
  "산보 갔었소?"
  거기 등잔불을 사이에 두고 웃방을 향해 앉은 철호의 동생 영호가 웃으며 철호를 쳐다보
았다.
  "언제 들어왔니."
  "지금 막 들어와 앉는 길입니다. "
  그러고 보니 영호는 아직 넥타이도 끄르지 않고 있었다.
  "형님!"
  새삼스레 부르는 동생의 소리에 철호는 손에 들었던 어린애의 신발을 아내에게 돌리며 영
호의 얼굴을 뻔히 바라보았다.
  "이제 우리두 한번 살아 봅시다. 제길, 남 다  사는데 우리라구 밤낮 이렇게만 살겠수, 근
사한 양옥도 한 채 사구, 장기판만한 문패에다 형님의 이름 석 자를,제길 장님도 보게  써서 
대못으로 땅땅 때려 박구 한번 살아 봅시다. "
  군대에서 나온 지 이 년이 넘도록 아직 직업도 못 잡은 영호가 언제나 술만 취하면  하는 
수작이었다 
  "그리구 이 천만 환짜리 쎄단 차도 한 대 삽시다 거기다 똥통이나 싣고 다니게.모든 새끼
들이 아니꼬와서 일이야 있건 없건 종일 빵빵 울리면서  동리를 들락날락해야지. 제길 하하
하."
  비스듬히 벽에 기대어 앉은 영호는 벌겋게 열에  는 얼굴을 하고 담배 연기를 푸 내뿜었
다.
  "또 술 마셨구나."
  고학으로 고생고생 다니던 대학 삼 학년에서 군대에 들어갔다가 나온 영호로서는, 특별한 
기술이 없이 직업을 잡지 못하는 것은 별도리도 없는 노릇이라  칠 수도 있었지만, 이건 어
디서 어떻게 마시는 것인지 거의 저녁마다 이렇게 취해 들어오는 동생 영호가 몹시 못마땅
한 철호의 말이었다.
  "네, 조금 했습니다. 친구들이‥‥‥‥ 
  그것도 들으나 마나 늘 같은 대답이었다. 또 그것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도 철호는 알고 
있었다.
  "이제 술 좀 그만 마셔라."
  "친구들과 어울리면 자연히 마시게 되는걸요."
  "글쎄 그러니까 그 어울리는 걸 좀 삼가란 말이다. "
  "그럴 수도 없구요, 하하하,"
  "그렇다구 언제까지 그저 그렇게 어울려서 술이나 마시면 뭐가 되나."
  "되긴 뭐가 돼요. 그저 답답하니까  만나는 거구, 만나면 어찌하다 한잔씩  하며 이야기나 
하는 거죠 뭐."
  "글쎄 그게 맹랑한 일이란 말이다. "
  "그렇지만 형님. 그런 친구들이라도 있다는 게 좋지  않수. 그게 시시한 친구들이라 해도. 
정말이지 그 놈들마저 없었더라면 어떻게 살 뻔했나 하고 생각할 때가 많아요. 외팔이 절름
발이, 그런 놈들, 무식한 놈들, 참 시시한 놈들이지요. 죽다 남은 놈들. 그렇지만 형님, 그 놈
들 다 착한 놈들이야요. 최소한 남을 속이지는 않거든요. 공갈을 때릴 망정, 하하하하.  전우 
전우."
  영호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천장을 향해 후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철호는 그저 물끄러미 
영호의 모습을 쳐다볼 뿐 아무 말도 없었다. 영호는 여전히  천장을 향한 채 피어오르는 연
기를 바라보여 한 손으로 목의 넥타이를 앞으로 잡아당겨 반쯤 끌러 늦추어 놓았다.
  "가자!"
  아랫목에서 어머니가 소리를 질렀다.
  영호는 슬그머니 아랫목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참이나 그렇게 어머니 쪽으로 고개를 돌리
고 있는 영호는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눈만 껌뻑껌뻑 하고 있었다.
  철호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앞에 놓인 등잔불이 가물가물 춤을 추었다. 철호는 저고리 호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었다. 꼬기꼬기 구겨진 파랑새 갑 속에서  담배를 한 개비 뽑아내었
다. 바삭바삭 마른 담배는 양끝이 반쯤 빠져나갔다.
  철호는 그 양끝을 비벼 말았다. 흡사 비가 모양으로 되었다. 철호는 그 비가 모양의  담배 
한 끝을 입에다 물었다.
  "이걸 피슈. 형님."
  영호가자지 앞에 놓였던 담뱃갑을 집어서 철호의  앞으로 내어밀었다. 빨간색 양담뱃갑이
었다. 철호는 그 여느 것보다 좀 긴 양담뱃갑을 한번 힐끔 쳐다보았을 뿐, 아무 소리도 없이 
등잔불로 입에 문 파랑새 끝을 가져갔다. 영호는 등잔불 위에  꾸부린 형 철호의 어깨를 넌
지시 바라보고 있었다. 지지지 소리가 났다. 앞 이마에 흐트러져 내렸던 철호의 머리 카락이 
등잔불에 타며 또르르 끝이 말려 올랐다. 철호는 얼굴을 들었다.
  한 모금 빨자 벌써 손끝이 따갑게 꽁초가 되어 버린  담배를 입에서 떼었다. 천천이 연기
를 내뿜는 철호의 미간에는 세로  석 줄의 깊은 주름이 패어졌다.  영호는 들었던 담뱃갑을 
도로 방바닥에 내려 놓았다. 그리고 조용히 등잔불로 시선을 떨구었다. 그의 입가에는  야룻
한 웃음이‥‥‥애달픈, 아니 그 누군가를 비웃는 듯한, 그런 미소가 천천이 흘러 지나갔다.
  한참 동안 아무도 말이 없었다.
  "가자!"
  아랫방 아랫목에서 몸을 뒤채는 어머니가 잠꼬대를 했다. 어머니는 이제 꿈속에서마저 생
활을 잃어버린 모양이었다. 아주 낮은 그 소리는 한숨처럼 느리게  아래 웃방에 가득 차 흘
러 사라졌다.
  여전히 아무도 말이 없었다.
  철호는 꽁초를 손끝에 꼬집어 쥔 채 넋 빠진 사람 모양 가물거리는 등잔불을 지켜보고 있
었고,동생 영호는 비스듬히 벽에 기대어 앉은 채 철호의 손끝에서 타고 있는 담배꽁초를 바
라보고 있었고, 철호의 아내는 잠든 딸애의 머리맡에 나지런히  놓인 빨간 신발을 요리조리 
매만지고  있었다.
  "가자!"
  또 한번 어머니의 소리가 저 땅 밑에서 새어나오듯이  들려왔다. "형님은 제가 이렇게 양
담배를 피우는 게 못마땅하지요?"
  영호는 반쯤 탄 담배를 자기의 눈앞에 가져다 그 빨간 불씨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분에 맞지 않지."
  철호는 여전히 등잔불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렇지만 형님. 형님은 파랑새와 양담배와 두 가지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좋으슈?"
  "‥‥‥‥? 그야 양담배가 좋지. 그래서?"
  그래서 너는 보리밥도 못 버는 녀석이 그래 좋은 것은 알아서 양담배를 피우는 거냐 하는 
철호의 눈초리가 번뜩 영호의 면상을 때렸다.
  "그래서 전 양담배를 택했어요."
  "뭐가?"
  "형님은 절 오해하고 계셔요."
  " .......?"
  "제가 무슨 돈이 있어서 양담배를 사서 피우겠어요, 어쩌다 친구들이 사주는 것이니 피우
는 거지요. 형님은 또 제가 거의 저녁마다 술을 마시고 또 제법 합승을 타고 들어오는 것도 
못마땅하시죠. 저도 알고 있어요. 형님은 때때로  이십오 환 전차값도 없어서 종로서 근  십 
리를 집에까지 터덜터덜 걸어서 돌아오시는 것을. 그렇지만 형님이 걸으신다고 해서, 한사코 
같이 타고 가자는 친구들의 호의, 아니 그건 호의도 채 못 되는 싱거운 수작인지도  모르죠. 
어쨌든 그것을 굳이 뿌리치고 저마저 걸어야 할 아무 까닭도 없지 않습니까? 이상한 놈들이
죠. 술 담배는 사주고 합승은 태워 줘도 돈은 안 주거든요."
  영호는 손끝으로 뱅글뱅글 부펴 돌리는 담뱃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어쨌든 너도 이젠 좀 정신차려 줘야지. 벌써 군대에서 나온 지도 이태나 되지 않니."
  "정신차려야죠. 그렇지 않아도 이달 안으로는 어찌 되든 간에 결판을 내구 말 생각입니다. 
"
  "어디 취직을 해야지."
  "취직이요? 형님처럼요? 전차값도 안되는 월급을 받고 남의 살림이나 계산해 주란 말이치
요?"
  "그럼 뭐 별 뽀족한 수가 있는 줄 아니."
  "있지요. 남처럼 용기만 조금 있으면."
  "......?"
  어처구니없는 영호의 수작에 철호는 그저  멍청하니 영호의 얼굴을 쳐  다보았다. 손끝이 
따거웠다. 철호는 바로 깡통으로 만든 재떨이에 담배 를 부벼 끈다.
  "용기?"
  "네, 용기"
  "용기라니."
  "적어도 까마귀만한 용기만이라도 말입니다. 영리할 필요는 없ㄷ더군요.  우둔해도 상관없
어요. 까마귀는 도무지 허수아비를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참새처럼 영리하지 못한 탓으로 그 
놈의 까마귀는 애당초에 허수아비를 무서워할 줄조차 모르거던요."
  영호의 입가에는 좀 전에 파랑새 꽁초에다 불을 당기는 철호를 바라보던 때와 같은 야룻
한 웃음이 또 소리 없이 감돌고 있었다.
  "너 설마 무슨 엉뚱한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철호는 약간 긴장한 얼굴을 하고 영호를 바라보며 꿀꺽하고 침을 삼켰다.
  "아니요. 엉뚱하긴 뭐가 엉뚱해요. 그저 우리들도 남처럼 다 벗어던지고  홀가분한 몸차림
으로 달려 보자는 것이죠 뭐."
  "벗어던지고?"
  "네. 벗어던지고 양심이고, 윤리고, 관습이고, 법률이고 다 벗어던지고 말입니다. "
  영호의 큰 눈이 유난히 빛나는가 하자 철호의 눈을 정면으로 밀고 들었다.
  "양심이고, 윤리고, 관습이고, 법률이고?"
 
  "너는, 너는‥‥‥‥ 
 
   영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눈만은 똑바로 형 철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나 살자면 이 형도 벌써 잘 살 수 있었다. "
  철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렇게나라니요?"
  "양심을 버리고 윤리와 관습을 무시하고, 법률까지도 범하고!"
  흥분한 철호의 큰 목소리에 영호는 지금까지 철호의 얼굴에 주었던 시선을 앞으로 죽 뻗
치고 앉은 자기의 발끝으로 떨구었다.
  "저도 형님을 존경하고 있어요. 고생하시는 형님을. 용케  이 고생을 참고 견디는 형님을. 
그렇지만 형님은 약한 사람이야요. 용기가  없는 거지요. 너무 양심이  강해요. 아니 어쩌면 
사람이 약하면 약한 만치,그만치  반대로 양심이란 가시는 여물고  굳어지는 것인지도 모르
죠."
  "양심이란 가시?"
  "네. 가시지요. 양심이란 손끝의  가십니다. 빼어 버리면 아무렇지도  않은데 공연히 그냥 
두고 건드릴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든 거야요, 윤리요? 윤리 그건 '나이롱 빤쯔'같은 것이죠. 
입으나 마나 불알이 덜렁 비쳐 보이기는 매한가지죠. 관습이요? 그건  소녀의 머리 위에 달
린 '리봉'이라고나 할까요? 있으면 예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없대서  뭐 별일도 없어요. 법
률? 그건 마치 허수아비 같은 것입니다. 허수아비, 덜 굳은 바가지에다 되는 대로 눈과 코를 
그리고 수염만 크게 그린 허수아비. 누더기를 걸치고 팔을 쩍 벌리고 서 있는 허수아비,  참
새들을 향해서는 그것이 제법 공갈이 되지요.그러나까마귀쯤만  돼도 벌써 무서워하지 않아
요, 아니 무서워하기는커녕 그 놈의 상투끝에 턱 올라앉아서 썩은 흙을 쑤시던 더러운 주둥
이를 쓱쓱 문질러도 별일 없거든요. 흥."
  영호는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거기  문턱 밑에 담뱃갑에서 새로 담배를  한 개 빼어물고 
지금까지 들고 있던 다 탄 꽁다리에서 불을 옮겨 빨았다.
  "가자!"
  어머니의 그 소리가 또 들렸다. 어머니는 분명히 잠이 들어 있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간
간이 저렇게 가자, 가자,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어머니에게는 호흡처럼 생
리화해 버린 것인지도 몰랐다.
  철호는 비스듬히 모으로 앉은 동생 영호의 옆 얼굴을 한참이나노려보고 있었다. 영호대로 
퀭한 두 눈으로 깜박이기를 잊어버린 채 아까부터 앞으로 뻗힌 자기의 발끝을 바라보고 있
었다. 이윽고 철호는 영호에게서 눈을 돌려 버렸다. 그리고 아랫방과 웃방 사이 칸막이를 한 
널폭에 등을 기대며 모으로 돌아 앉았다. 희미한 등잔불 빛에 잠든 딸애의 조그마한 얼굴이 
애처러웠다. 그 어린것 옆에 앉은 철호의 아내는 왼쪽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손을 펴깔고 
턱을 괴었다. 아까부터 철호와 영호, 형 제가 하는 말을 조용히 듣고만 있는 그네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한쪽 손끝으로, 자미 방바닥에 가지런히 놓은 빨간 어린애의 신발만 몇 번 
이고 쓸어보고 있었다.
  철호는 고개를 푹 떨구어 턱을 가슴에 묻었다.
  영호는 새로 피어 문 담배를 연거푸 서너 번 들어 빨았다. 그리고 또 말을 계속하였다.
  "저도 형님의 그 생활 태도를 잘 알아요.  가난하더라도 깨끗이 살자는 .그렇지요, 깨끗이 
사는 게 좋지요. 그런데 형님 하나 깨끗하기 위하여 치루는 식구들의 희생이 너무 어처구니
없이 크고 많단 말입니다. 헐벗고 굶주리고, 형님 자신만 해도 그렇죠. 밤낮 쑤시는 충치 하
나 처치 못하시고, 이가 쑤시면 치과에 가서 치료를 하거나  빼어 버리거나해야 할 꺼 아니
야요. 그런데 형님은 그것을 참고 있어요. 낯을 잔뜩  찌푸리고 참는단 말입니다. 물론 치료
비가 없으니까 그러는 수밖에 없겠지요. 그겁니다. 바로 그겁니다. 그 돈을 어떻게든가 구해
야죠. 이가 쑤시는데 그럼 어떻게 해요.  그걸 형님처럼, 마치 이 쑤시는  것을 참고 견디는 
그것이 돈을-치료비를 터는 것이기나 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 안 쓰는 것은  혹 버는 셈이 
된다고 할 수도 있을 꺼야요. 그렇지만 꼭 써야 할 데 못 쓰는 것이 버는 셈이라고는 할 수 
없지 않아요. 세상에는 이런 세 층의 사람들이 있다고 봅니다. 즉 돈을 모으기 위해서만으로 
필요 이상의 돈을 버는 사람과 필요하니까 그 필요하니만치의 돈을 버는 사람과, 또 하나는 
이건 꼭 필요한 돈도 채 못 벌고서 그 대신 생활을 조리는  사람들. 신발에다 발을 추는 격
으로 형님은 아마 그 맨 끝의 층에 속 하겠지요 필요한 돈도 미처 벌지 못하는 사란 깨끗이 
살자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하시겠지요. 그래요. 그것은  깨끗하기는 할지 모르죠. 그렇지
만 그저 그것뿐이지요. 언제까지나 충치가 쏘아 부은 볼을 싸쥐고 울상인 수밖에  없지요.그
렇지 않습니까? 그야 형님! 인생이 저 골목 안 에서 십 환짜리를 받고 코흘리는 어린애들에
게 보여 주는 요지경이라면 야 자기도 가지고 있는 돈값만치 구멍으로 들여다보고 말을 수
도 있겠 지요. 그렇지만 어디 인생이 자기 주머니 속의 돈 액수만치만 살고 그만 두고 싶으
면 그만둘 수 있는 요지경인가요 어디. 돈만치만 먹고 말을  수 있는 그 편리한 목구멍인가
요 어디. 싫어도 살아야 하니까 문제지요.
 사실이지 자살을 할 만치 소중한 인생도 아니고요. 살자니까 돈이 필요 하구요. 필요한  돈
이니까 구해야죠. 왜 우리라고 좀더 넓은 테두리, 법률선까지  못 나가란 법이 어디 있어요. 
아니 남들은 다 벗어던지구  법률선까지도 넘나들면서 사는데, 왜  우리만이 옹색한 양심의 
울타리 안에서 숨이 막혀야  해요. 법률이란 뭐야요. 우리들이  피차에 약속한 선이 아니야
요?"
  영호는 얼굴을 번쩍 들며 반쯤 끌러 놓았던 넥타이를 마저 끌러서 방구석에 픽 던졌다.
  철호는 여전히 턱을 가슴에 푹 묻은 채 묵묵히 앉아 두 짝 다 엄지발가락이 몽땅  밖으로 
나온 뚫어진 양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이롱' 양말한 켤레 사면 반년은 무난히 뚫어지지 
않고 견딘다는 말은 들었다. 그러나  뻔히 알면서도 번번이 백 환짜리  무명 양말을 사들고 
들어오는 철호였다. 칠백 환이란 돈을 단번에 잘라낼 여유가  도저히 없는 월급이었던 것이
다.
  "가자!"
  어머니는 또 몸을 뒤채었다.
  "그건 억설이야."
  철호는 천천이 고개를 들었다. 신문지를 바른 맞은편 벽에, 쭈구리고 앉은 아내의  그림자
가 커다랗게 비쳐 있었다. 꼽추처럼  꼬부리고 앉은 아내의 그림자는  헝크러진 머리카락이 
괴물스러웠다.
  철호는 눈을 감았다. 머리마저 등 뒤 칸막이 판자에 기대었다.
  철호의 감은 눈앞에 십여 년 전 아내가 횐 저고리 까망 치마를 입고 선히 나타났다. 무대
에 나턴 그네는 더욱 예뻤다. E여자대학 졸업음악 회였다. 노래가 끝나자 박수 소리가 그칠 
줄을 몰랐다 그날 저녁 같이  거리를 거닐던 그네는 정말 싱싱하고  예뻣었다. 그러나 지금 
철호 앞에 쭈구리고 앉은 아내는  그때의 그네가 아니었다. 무슨 둔한  동물처럼 되어 버린 
그네. 이제 아무런 희망도 가져 보려고  하지 않는 아내. 철호는 가만히  눈을 떴다. 그래도 
아내의 실눈썹만은 전처럼 까맣고 길었다.
  "가자!"
  철호는 흠칠 놀라 환상에서 깨어났다.
  "억설이요? 그런지도 모르죠."
  한참이나 잠잠하니 앉아 까물거리는 등잔불을 바라보던 영호의 맥빠진 대답이었다.
  '제 말대로 한다면 돈 있는 사람들은 다 나쁜 사람이란 말밖에 더 되나 어 씨."
  "아니죠. 제가 어디 나쁘고 좋고를 가렸어요. 나쁘긴 누가 나빠요? 왜 나빠요, 아 잘 사는 
게 나빠요? 도시 나쁘고 좋고부터 따질 아무런 금도 없지요 뭐 "
  "그렇지만 지금 네 말로는 잘 살자면 꼭  양심이고 윤리고 뭐고 다 버려 야 한다는  것이 
아니고 뭐야."
  "천만에요. 잘못 이해하신 겁니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이렇다는 것입니다. 즉, 양심껏 살아
가면서 잘 살 수도 있기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적다. 거기에 비겨서 그 시시한 것들을 
벗어 던지기만 하면 누구나 틀림 없이 잘 살 수 있다. "
  "그것이 바로 억설이란 말이다. 마음 한구석이 어딘가 비틀려서 하는 억지란 말이다. "
  "글쎄요. 마음이 비틀렸다고요. 그건 아마 사실일는지 모르겠어요. 분명히  비틀렸어요. 그
런데 그 비틀거리기가 너무 늦었어요. 어머니가 저렇게 미치기 전에 비틀렸어야 했지요.  한
강 철교를 폭파하기 전에 말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누이동생 명숙이가  양공주가 되기전에 
비틀 렸어야 했지요. 환도령이 내리기 전에 하다 못해 동대문  시장에 자리라도 한 자리 비
었을 때 말입니다. 그러구 이놈의 배때비에 지금도  무슨 내장이기나  한 것처럼 박혀 있는 
파편이 터지기 전에 말입니다. 아니  그보다도 더 전에 제가 뭐  무슨 애국자나처럼 남들은 
다 기피  하는 군대에 어머니의 원수를 갚겠노라고 자원하던 그 전에 말입니다. " 
  "........"
  " ‥‥‥ 그보다도 더 전에 썩 전에 비틀렸어야 했을지 모르죠. 나면서부터 비틀렸더라면 
더 나았을지도 모르죠."
  영호는 푹 고개를 떨구었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이 후르르 떨고 있었다. 철호
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웃목에 앉아 있던 철호의 아내가 방바닥에 떨어진 눈
물을 손끝으로 장난처럼 문지르고 있었다. 영호도 훌쩍 코를 들이켜고 있었다.
  "그렇지만 인생이란 그런 게 아니야, 너는 아직 사람이란  어떻게 살아 야만 하는 것인지
조차도 모르고 있다. "
  "그래요. 사람이란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는 정말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이제 이 
물고 뜯고 하는 마당에서 살자면, 생명만이라도 유지하자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 것 같
애요. 허허."
  영호는 눈물이 글썽하니 고인 눈을 천장을 향해 쳐들며 자기 자인을 비웃듯이 허허 하고 
웃었다.
  "가자!"
  또 어머니는 가자고 했다 영호는 아랫목으로 눈을 돌렸다. 철호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앞
의 등잔불이 크게 흔들거렸다. 방 안의 모든 그림자들이 움직였다. 집 전체가 그대로 기울거
리는 것 같았다. 그것뿐 조용했다. 밤이 꽤 깊은 모양이었다. 세상이 온통 잠들고 있었다.
  저만치 골목길 에서부터 딱딱딱딱 구두발 소리가 뽀족하게 들려왔다.점점 가까워왔다.  바
로 아랫방 문 앞에서 멎었다. 영호는 문께로 얼굴을 돌렸다. 삐걱삐걱 두어 번 비틀리던  방
문이 열렸다. 여동생 명숙이가 들어섰다. 싱싱한 몸매에 까만 투피스가 제법 어느 회사의 여
사무원 같았다.
  "늦었구나."
  영호가 여전히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은 채 고개만 뒤로 젖혀서 명숙을 쳐다보았다.
  명숙은 영호의 말에도 아무런 대꾸도 없이 돌아서서 문 밖에서 까만 하이힐을 집어 올려 
아랫방 모서리에 들여놓았다. 그리고 빽을  획 방구석에 던졌다. 겨우 웃저고리와  스커트를 
벗어 걸은 명숙은 아랫방 됫구석에 가서 털썩 하고 쓰러지듯  가로 누워 버렸다. 그리고 거
기 접어 놓은 담요를 끌어다 머리 위에서부터 푹 뒤집어썼다.
  철호는 명숙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덤덤히 등잔불만 지켜보고 있었다.
  철호는 언젠가 퇴근하던 길에 전차 창문 밖에 본 명숙의 꼴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철호가 탄 전차가 을지로 입구 십자거리에 머물어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손잡이를 붙
들고 창을 향해 서 있던 철호는 무심코 밖을 내다보았다. 전차 바로 옆에 미군 지프차가 한 
대 와 섰다. 순간 철호는 확 낮이  달아올랐다. 핸들을 쥔 미군 바로 옆자리에 색안경을  쓴 
한국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것이 바로 명숙이었던 것이다. 바로 철호의 턱 밑에서였다.
  역시 신호를 기다리는 그 지프차 속에서 미군이 반 손은 핸들에 걸치고도 한 팔로는 명숙
의 허리를 넌지시 끌어안는 것이었다. 미군이 명숙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뭐라고 수작을 걸
었다. 명숙은 다리를 겹치고 앉은 채 앞을 바라보는 자세 그대로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  미
군 지프차 저편에 와 선 택시 조수가 명숙이와 미군을 쳐다보며 피시시 웃었다. 전차간에서
도 마찬가지였다. 철호 바로 옆에 나란히 서 있던 청년 둘이 쑥떡거렸다.
  "그래도 멋은 부렸네."
  "멋? 그래 색안경을 썼으니 말이지?"
  "장사치곤 고급이지. 밑천 없이."
  "저 것도 시집을 갈까?"
  "흥. "
  철호는 손잡이를 놓았다. 그리고 반대편 가운데 문께로 가서 돌아서고 말았다. 그것은  분
명히 슬픈 감정만은 아니었다. 뭐라고  말할 수조차 없는 숯덩어리 같은  것이 꽉 목구멍을 
치밀었다. 정신이 아뜩해지는 것 같았다. 하품을  하고 난 뒤처럼 콧속이 싸 하니  쓰리면서 
눈물이 징 솟아 올랐다. 철호는 앞에 있는 커다란 유리를 콱 머리로 받아 부수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어금니를 꽉 맞씹었다.
  찌르르 벨이 울렸다. 철호는 문짝에 어깨를 가져다 기대고 눈을 감아버렸다.
  그날부터 철호는 정말 한 마디도 누이동생 명숙이와 말을 하지 않았다 또 명숙이도 철호
를 본 체 만 체였다.
  "자, 우리도 이제 잡시다. "
  영호가 가슴을 펴서 내어밀며 바로 앉았다.
  등잔불을 끄고 두 방 사이의 문을 닫았다.
  푹 가라앉는 것같이 피곤했다. 그러면서도 철호는 정작 잠을 이를 수는 없었다. 밤은 고요
했다. 시간이 그대로 흐르기를 멈추어 버린 것같이 조용했다. 철호의 아내도 이제 잠이 들었
나 보다. 앓는 소리를 내었다. 철호는 눈을  감았다. 어딘가 아득히 먼 것을 느끼고  있었다. 
철호도 잠이 들어가고 있었다.
  "가자!"
  다들 잠든 밤의 그의 어머니의 소리는 엉뚱하게 컸다. 철호는 홈칠 눈을 떴다. 차츰  눈이 
어둠에 익어갔다. 며칠인가, 문틈으로 새어들은 달빛이 철호의 옆에서 잠든 딸애의 머리에서
부터 발끝까지 죽 파란 줄을 그었다. 철호는 다시 눈을 감았다. 길게 한숨을 쉬며 벽을 향해 
돌아누웠다 
  "가자!"
  또 어머니가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철호는 눈을 뜨지 않았다. 그도 마치 잠이 들어  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랫방에서 명숙이가 눈을 떴다. 아랫목에 어머니와웃목에 오빠 영호 사
이에 누운 명숙은 어둠 속에 가만히 손을 내어 밀었다. 어머니의 손을 더듬어 잡았다. 뼈 위
에 겨우 가죽만이 씌어진 손이었다. 그 어머니의 손에서는 체온이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축
축히 습기가 미끈거렸다. 명숙은 어머니 쪽을 향하여 돌아누웠다. 한쪽 손을 마저 내 
밀어서 두 손으로 어머니의 송장 같은 손을 감싸 쥐었다.
  "가자!"
  딸의 손을 느끼는지 못 느끼는지 어머니는 또 한번 허공을 향해 가자고 소리질렀다.
  "엄마!"
  명숙의 낮은 소리였다. 명숙은 두 손으로 감싸 쥔 어머니의 여윈 손을 가만히 흔들었다.
  "가자!"
  "엄마!"
  기어이 명숙은 흐느끼기 시작하였다. 명숙은 어머니의 손을 끌어다 자기의 입에 틀어막았
다.
  "엄마!"
  숨을 죽여 가며 참는 명숙의 울음은 한숨으로 바뀌며 어머니의 손가락을 입 안에서 잘근
잘근 씹어 보는 것이었다.
  "겁내지 말라."
  옆에서 영호가 잠꼬대를 했다.
  "가자!"
  어머니는 명숙의 손에서 자기의 손을 빼어 싸지고 저쪽으로 돌아 누워버 렸다  명숙은 다
시 담요를 끌어다 머리 위까지 푹 썼다. 그리고 담요 속에서 흐늑흐늑 울고 있었다.
  "엄마."
  이번엔 웃방에서 어린것이 엄마를 불렀다.
  철호는 잠 속에서 멀리 그 소리를 들었다. 그러면서도 채 잠이 깨어지지는 않았다.
  "엄마,"
  어린것은 또 한 번 엄마를 불렀다.
  "오오 왜. 엄마 여기 있어,"
  아내의 반쯤 깬 소리였다. 어린것을 끌어다 안는 모양이었다. 철호는 그 소리를 멀리 들으
며 다시 곤히 잠들어 버렸다.
  "오줌,"
  "오, 오줌 누겠니. 자 일어나, 착하지."
  철호의 아내는 일어나 앉으며 어린것을 안아 일으켰다. 구석에서  깡통을 끌어다 대어 주
었다.
  "참, 삼춘이 네 신발 사왔지 아주 예쁜 거. 볼래?"
  깡통을 타고 앉은 어린것을 뒤에서 안아 주고 있던 철호의 아내는 한손으로 어린것의 베
개맡에 놓아 두었던 신발을 집어 보여 주었다. 희미하게 달빛이 들이비쳤을 뿐인 어두운 방 
안에서는 그것은 그저 겨우 모양뿐 색채를 잃고 있었다.
  "내 꺼야? 엄마."
  "그래 네 꺼야."
  "예뻐?"
  "참 예뻐. 빨강이야."
  "응........"
  어린것은 잠에 취한 소리로 물으며 신발을 두 톤에 받아 가슴에 안았다.
  "자 이제 거기 놔두고 자야지,"
  "응, 낼 신어도 돼?"
  "그럼 . "
  어린것은 오물오물 담요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엄마, 낼 신어도 돼?"
  "그럼 ."
  뭐든가 좀 좋은 것은 아껴야 한다고만 들어오던 어린것은 또 한번 이렇게 다짐하는 것이
었다.
  아내는 어린것의 담요 가장자리를 꼭꼭 눌러 주고 나서 그 옆에 누웠다.
  다들 다시 잡니 들었다. 어느 사이에 달빛이 비껴서 잘날  같은 빛을 철호의 가슴으로 옮
겼다.
  어린것이 부시시 머리를 들었다. 배를 깔고 엎드렸다. 어린것은 조그마한 손을 베개너머로 
내밀었다. 거기 가지런히 놓아 둔 신발을  만져 보았다. 어린것은 안심한 듯이 다시  베개를 
베고 누웠다.
  또다시 조용해졌다. 한참 만에 또 어린것이 움찍거렸다. 잠이 든 줄만알았던 어린것은  또 
엎드렸다. 머리맡에 신발을 또 끌어당겼다. 조그마한 손가락으로 신발 코를 꼭 눌러 보았다. 
그리고는 이번에는 아주 자리위에 일어나 앉았다. 신발을 무릎 위에 들어 올려 놓았다. 달빛
에다 신발을 들이대어 보았다. 바닥을 뒤집어 보았다. 두 짝을 하나씩 두 손에 갈 
라 들고 고무바닥을 맞대어 보았다. 이번엔 발을 앞으로 내놓았다. 가만히 신발을 가져다 신
었다. 앉은 채로 꼭 방바닥을 디디어 보았다.
  "가자!"
  어린것은 깜짝 놀랐다. 얼른 신발을 벗었다. 있던 자리에  도로 모아놓았다. 그리고 한 번 
더 신발을 바라보고 난 어린것은 살그머니 누웠다.
  오물오물 담요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점심을 못 먹은 배는 오후 두  시에서 세 시 사이가 제일 견디기  힘들었다. 철호는 펜을 
장부 위에 놓았다. 저쪽 구석에 돌아앉은 사환애를 바라보았다. 보리차라도 한 잔 더 마시고 
싶었다. 그러나 두 잔까지는 사환애를 시켜서 가져오랄 수  있었으나 세 번까지는 부르기가 
좀 미안했다. 철호는 걸상을 뒤로 밀고 일어섰다. 책상  모서리에 놓인 찻종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출입문으로 나갔다. 복도에 풍로 위에서 커다란 주전자가 끓고 있었다. 보리차를  찻
종 하나 가득히 부었다. 구수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철호는 뜨거운 찻종을 손가락으로  꼬집
어 들고 조심조심 자기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리고  찻종을 입으로 가져갔다. 후 불었다. 
마악 반모금 들어 마시는 때였다.
  "송 선생님 전화입니다. "
  사환애가 책상 앞에 와 알렸다. 철호는  얼른 찻종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과장 
책상 앞으로 갔다. 수화기를 들었다.
  "네 송철호올시다. 네? 경찰서요‥‥‥ 전 송철호라는 사람인데요?  네? 송영호요? 네 바
로 제 동생입니다. 무슨?‥‥‥네? 네? 송영호가요? 제동생이 말입니까? 곧 가겠습니다. 네 
네."
  철호는 수화기를 걸었다. 그리고 걸어 놓은 수화기를 멍하니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사무
실 안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철호에게로 쏠렸다.
  "무슨 일인가. 동생이 교통사고라도?"
  서류를 뒤적이던 과장이 앞에 서 있는 철호를 쳐다보며 물었다.
  "네? 네, 저 과장님,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
  철호는 마시던 보리차를 그대로 남겨 둔 채 사무실을 나섰다. 영문을 모르는 동료들이 서
로 옆의 사람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는 것이었다.
 
  철호는 전에도 몇 번 경찰서의 호출을 받은 일이 있었다.
  양공주 노릇을 하는 누이동생 명숙이가 걸려들면 그 신원보증을 해야하는 철호였다. 그때
마다 철호는 치안관 앞에서 낯을 못 들고 앉았다가 순경이 앞세우고 나온 명숙을 데리고 아
무 말도 없이 경찰서 뒷문을 나서곤 하였다. 그럴 때면 철호는 울었다. 하나밖에 없는  누이
동생이 정말밉고 원망스러웠다. 철호는 명숙을  한번 돌아다보는 일도 없이  전차길을 따라 
사무실로 걸었고, 또 명숙은 명숙이대로 적당한 곳에서 마치  낯도 모르는 사람이나처럼 딴 
길도 떨어져 가버리곤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누이동생이 아니라 남동생 영호의  건이라고 했다 며칠 전 밤에  취해서 
지껄이던 말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불안했다.
  그런들 설마하고 마음을 다시 먹으며 철호는 경찰서 문을 들어섰다.
  권총강도.
  형사에게 동생 영호의 사건 내용을 들은 철호는 앞에 앉은 형가의 얼굴을 바보모양 멍청
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점점 핏기가 가셔가는 철호의 얼굴은 표정을 잃은 채 굳어가고 
있었다.
  어느 회사에서 월급을 줄 돈 천오백 만  환을 찾아서 은행 앞에 대기켰던 지프차에 싣고 
마악 떠나려고 하는데 중절모를 깊숙히 눌러 쓰고색안경을 긴 괴한 두 명이 차 속으로 올라
오며 권총을 내어 들더라는 것이었다.
  "겁내지 말라, 차를 우이동으로 돌리라,"
  운전수와 또 한 명 회사원은 차가운 권총구멍을 등에 느끼며 우이동까지 갔다고 한다. 어
느 으슥한 숲속에서 차를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는 둘이 다 밖으로 나가라고 한 다음,  괴한
들이 대신 운전대로 옮겨 앉더라고 한다. 운전수와 회사원은 거기  버려 둔 매 차는 전속력
으로 다시 시내로 향해 달렸단다.  그러나 지프차는 미아리도 채 못  와서 경찰에 붙들리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차 안에는 괴한이 한사람밖에 없었다고 한다.
  형사가 동생을 면회하겠느냐고 물었을 때도 철호는 그저 얼이 빠져서 두 무릎 위에 맥없
이 손을 올려 놓은 채 아무 대답도 못챘다.
  이윽고 형사실 뒷문이 열리더니 거기 영호가 나타났다.
  "이리로 와."
  수갑이 채워진 두 손을 배 앞에다 모으고 천천히 형사의 책상 앞으로 걸어 나오는 영호는 
거기 걸상에 앉았다. 일어서는 철호를 향하여 약간 머리를 끄덕여 보였다. 동생의 얼굴을 뚫
어져라고 바라보고 서 있는 철호의 여윈 볼이 히물히물 움직였다. 괴로을 때의 버룻으로 어
금니를 꽉꽉 씹고 있는 것이었다.
  형사는 앞에 와서 선 영호에게 눈으로 철호를 가리켰다. 영호는 철호에게로 돌아섰다.
  "형님 미안합니다. 인정선에서 걸렸어요. 법률선까지는 무난히 뛰어넘었는데. 쏘아 버렸어
야 하는 건데."
  영호는 철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빙그레 웃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옆으로 비스듬히 얼굴
을 떨구며 수갑을 채운 채인 오른손 엄지를 권총 방아쇠를 당기는 때처럼 지그시 당겨 보는 
것이었다. 철호는 눈도 깜빡하지 않고 그저 영호의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내린 이마를 바라
보고 있었다 
  "돌아가세요. 형님,"
  영호는 등신처럼 서 있는 형이 도리어 민망한 듯이 조용히 말했다.
  "수감해 "
  형사가 문간에 지키고 있는 순경을 돌아보았다.
  영호는 그에게로 오는 순경을 향해 마주 걸어갔다. 영호는  뒷문으로 끌려나가다 말고 멈
춰 섰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형님. 어린것 화신 구경이나 한번 시키세요. 제가 약속했었는데."
  뒷문이 꽝 닫혔다. 철호는 여전히 영호가 사라진 뒷문을 바라보고 서있었다. 눈이  뿌옇게 
흐려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쏠 의사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 같은데."
  조서를 한 옆으로 밀어 놓으며 형사가 중얼거렸다. 철호는  거기 걸상에 가만히 걸터앉았
다.
  "혹시 그 같이 한 청년을 모르시나요."
  철호의 귀에는 형사의 말 소리가 아주 멀었다.
  "끝내 혼자서 했다고 우기는데, 그러나 증인이  있으니까 이체 차츰 사실대로 자백하겠지
만."
  여전히 철호는 말이 없었다.
 
  경찰서를 나온 철호는 어디를 어떻게  걸었는지 알 수 없었다. 철호는  술 취한 사람모양 
허청거리는 다리로 자기 집이 있는 언덕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철호는 골목길 어구에 들어
섰다.
  "가자!"
  철호는 거기 멈춰 섰다.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러나 그는 하늘을 쳐다보는 것이  아니었
다. 하 하고 숨을 크게 내쉬는 철호는 울고 있었다. 눈물이 콧속으로 흘러서 찝찝하니  목구
멍으로 넘어갔다.
  "가자. 가자. 어딜 가잔 거야. 도대체 어딜 가잔 거야."
  철호는 꽥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거기 처마 밑에 모여 앉아서 소꼽질을 하던 어린애들이 
부시시 일어서며 그를 쳐다보았다. 철호는 그 앞을 모른 래 지나쳐 버렸다.
  "오빤 어딜 그렇게 돌아다뉴"
  철호가 아랫방에 들어서자 웃방·구석에서 고리짝을 열어 놓고 뒤지고있던 명숙이가 역한 
소리를 했다. 웃방에는 넝마 같은 옷가지들이  한 무더기 쌓여 있었다. 딸애는 고리짝  옆에 
쪼구리고 앉아서 명숙이가 뒤쳐 내놓는 헌  옷들을 무슨 진귀한 것이나처럼 지켜보고  있었
아. 철호는 아내가 어딜 갔느냐고 물어 보려다 말고 그대로  웃방 아랫목에 털썩 주저 앉아 
버렸다.
  "어서 병원에 가 보세요,"
  명숙은 여전히 고리짝을 들추며 돌아앉은 채 말했다.
  "병원엘?"
  "그래요."
  "병원에라니?"
  "언니가 위독해요. 어린애가 걸렸어요."
  "뭐 가?"
  철호는 눈앞이 아찔했다.
  점심 때부터 진통이 시작되었는게 영 해산을 못하고 애를 썼다 한다.
  그런데 죽을 악을 쓰다 보니까 어린애의 머리가 아니라 팔부터 나왔다고 한다. 그래 병원
으로 실어갔는데, 철호네 회사에 전화를 걸었더니 나가고 없더라는 것이었다.
  "지금쯤은 아마 애기를 낳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명숙은 횐 헝겊들을 골라 개켜서 한 옆으로 젖혀 놓으며 말했다. 아아 어린애의 기저귀를 
고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좀 전에 아찔하던 정신이 사르르 풀리며  온몸의 
맥이 쏙 빠져 나갔다. 철호는 오래간만에 머리 속이 깨끗이 개이는 것을 느꼈다.
  말라리아를 앓고 난 다음 날처럼 맥은 하나도 없으면서 머리는 비상히 깨끗했다. 민 놀랄 
일이 있느냐 하는 심정이 되었다.  마기 회사에서 무슨사무를 한 뭉텅이  맡았을 때와 같은 
심사였다. 철호는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어  물었다. 언제나 새로 사무를 맡아  시작하기 
전에 하는 버릇이었다. 철호는 일어섰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어딜 가슈."
  명숙이가 돌아보았다.
  "병원에."
  "무슨 병원인지도 모르면서,"
  철호는 참 그렇다고 생각했다.
  "s병원이야요."
 
  철호는 슬그머니 문밖으로 한 발을 내디더었다.
  "돈을 가지고 가야지 뭐."
  "돈..."
  철호는 다시 문 안으로 들어섰다. 우두커니 발부리를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명숙이가  일
어섰다. 그리고 아랫방으로 내려갔다. 벽에 걸어 놓았던 핸드백을 벗겼다.
 "옛수."
 백 환짜리 한 다발이 철호 앞 방바닥에 던져졌다. 명숙은 다시  돌아서 서 백을 챙기고 있
었다. 철호는 명숙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따라보고 있었다. 철호의 눈이 명숙의 발뒤축에  머
물었다. '나이롱' 양말이 계란만치 구멍이 뚫렸다. 철호는 명숙의  그 구멍뚫린 양말 뒤축에
서 어떤 깨끗함을 느끼고 있었다. 오래간만에 참으로 오래간만에  철호는 명숙에 대한 오빠
로서의 애정을 느꼈다.
  "가자. "
  어머니가 또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철호는 눈을 발 밑에 돈다발로 떨구었다.  허리를 꾸부렸다. 연기가 든것처럼 두 눈이  싸 
하니 쓰렸다.
  "아버지 병원에 가? 엄마 애기 났어?"
  "그래 ."
  철호는 돈을 저고리 호주머니에 구겨 넣으며 문을 나섰다.
  "가자."
  골목을 빠져나가는 철호의 등 뒤에서 또 한번 어머니의 소리가 들려왔다.
  아내는 이미 죽어 있었다.
  "네. 그래요."
  철호는 간호원보다도 더 심상한 표정이었다.  병원의 긴 복도를 흐칭흐청  걸어서 널따란 
현관으로 나왔다. 시체가 어디 있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무엇인가 큰 일이 한 가지 끝났다는 
그런 기분이었다. 아니 또 어찌 생각하면  무언가 해야 할 일이 많이 생긴  것 잘은 무거운 
기분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좀처럼 생각이 나질 않았 다.  그
저 이제는 그리 서두를 필요도 없어졌다는 생각만으로 철호는 거 기 병원 현관에 한참이나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윽고 병원의 큰 문을 나선  철호는 전차길을 따라서 천천히 걸었다.  자전거가 획 그의 
팔구비를 스치고 지자갔다. 그는 멈춰  섰다. 자기도 모르게 .그는  사무실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여섯 시도 더 지났을 무렵이었다.  이제 사무실로 가야 할 아무  일도 없었다. 그는 
전차길을 건넜다. 또 한참 걸었다. 그는 또 멈춰 섰다.  이번엔 어느 사이에 낮에 왔던 경찰
서 앞에 와 있었다. 그는 또 돌아섰다.  또 걸었다. 그저 걸었다. 집으로 돌아가자는  생각도 
아니면서 그의 발길은 자동기계처럼 남대문 쪽을 향해 걷고 있었다.
  문방구점, 라디오방, 사진관, 제과점, 그는 길가에 늘어선 이런 가게의  진열장들을 하나하
나 기웃거리며 걷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무엇이 있는지 하나도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던  철
호는 또 우뚝 섰다. 그는 거기 눈앞에 걸린 간판을 쳐다보고 있었다. 장기판만 횐 판에 빨간 
'펭키'로 치과라고 써 있었다. 철호는 갑자기 이가 쑤시는  것을 느꼈다. 아침부터아니 벌써 
전부터 훌떡훌떡 쑤시는 충치가 갑자기 아파왔다. 양쪽 어금니가 아래 위 다 쑤셨다. 사실은 
어느 것이 정말 쑤시는 것인지 조차도 분간할 수가 없었다.
  철호는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보았다. 만 환 다발이 만져졌다.
  철호는 치과 간판이 걸린 층계를 이충으로 올라갔다.
  치과 걸상에 머리를 젖히고 입을 아 벌리고 앉았다.
  의사는 달가닥달가닥 소리를 내며 이것저것 여러 가지 쇠꼬치를 그의 입에 넣었다 꺼냈다 
하였다. 철호는 매시근 하니 잠이 왔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입을 크게 벌린 채  눈을 
강고 있었다.
  "좀 아팠지됴? 뿌리가 꾸부러져서."
   의사가 집게에 뽑아 든 이를 철호의 눈앞에 가져다 보여 주었다. 속이 시꺼멓게 썩은 징
그러운 이 뿌리에 뻘건 살점이 묻어 나왔다. 철호는 솜 을 입에  문 채 머리를 좌우로 흔들
어 보았다. 사실 아프지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됐습니다. 한 삼십 분 후에 솜을 빼 버리슈."
  "피가 좀 나을 겁니다. "
  "이 쪽을 마저 빼 주십시오."
  철호는 옆에 타구애 피를 밷고 나서 또 한쪽 볼을 눌러 보였다..
  "어금니를 한 번에 두 대씩 빼면 출혈이 심해서 안됩니다. "
  "괜찮습니다."
  "아니 내일 또 뵙지요."
  "다 빼 주십시오. 한몫에 몽땅 다 빼 주십시오."
  "안됩너다. 치료를 해가면서 한 대씩 빼야지요."
  "치료요? 그럴 새가 없습니다. 마악 쑤시는걸요."
  "그래도 안됩니다. 빈혈증이 일어나면 큰일납니다. "
   하는 수 없었다. 철호는 치과를 나왔다. 또 걸었다. 잇몸이 멍하니 아픈  것 같기도 하고,
또 어찌하면 시원한 것 같기도 했다. 그는 한 손으로  볼을 쓸어 보았다.
  그렇게 얼마를 걷던 철호는 거기에 또 치파 간판을 발견하였다. 역시 이층이었다.
  "안될 텐데요."
  거기 의사도 꺼렸다. 철호는 괜찮다고  우겼다. 한쪽 어금니를 마저  빼었다. 이번에는 두 
볼에다 다 밤알 만큼씩한 솜덩어리를 물고 나왔다.
  입안이 쩝쩔했다. 간간이 길가에 나서서 피를 뱉았다. 그때마다 시뻘건 선지피가 간  덩어
리처럼 엉겨서 나왔다.
  남대문을 오른쪽으로 끼고 돌아서 서울역이 보이는 데까지 왔을 때 으시시 몸이 한번 떨
렸다. 머리가 휭 하니 비어 버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때에 번쩍 거리에 전등이 들어왔다. 눈앞이 환해졌다. 그런데 다음 순간에는  어찌
된 셈인지 좀전에 전등이 켜지기 전보다 더 거리가 어두워졌다.  철호는 눈을 한번 꾹 감았
다 다시 떴다. 그래도 매한가지였다.  이건 뱃속이 비어서 이렇다고  철호는 생각했다. 그는 
새삼스레, 점심도 저녁도 안 먹은 자기를 깨달았다. 뭐든가 좀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구수
한 설렁탕 생각이 났다. 입 안에 군침이 하나 가득히 고였다. 그는 어느 전주 밑에 가서 쭈
구리고 앉아서 침을 뱉았다. 그런데 그것은 침이 아니라  진한 피였다. 그는 다시 일어섰다. 
또 한번 오한이 전신을 간지리고 지나갔다. 다리가 약간 떨리는 것 같았다. 그는 속히  음식
점을 찾아내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서울역 쪽으로 히청히청 걸었다.
  "설렁탕."
  무슨 약 이름이기나 한 것처럼 한마디 일러 놓고는 그는 식탁 위에 엎드려 버렸다. 또 입 
안으로 하나 쩝쩔한 물이 고였다. 철호는 머리를 들었다. 음식점 안을 한 바퀴 휘  둘러보았
다. 머리가 아찔했다. 그는 일어섰다. 그리고  문밖으로 급히 걸어나갔다. 음식점 옆  골목에 
있는 시궁창에 간서 쭈구리고 앉았다. 울컥 하고 입 안에 것을 뱉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주
위가 어두워서 그것이 핀지 또는 침인지 알 수 없었다.  철호는 저고리 소매로 입술을 닦으
며 일어섰다.
  이를 뺀 자리가 쿡 한번  쑤셨다. 그러자 뒤이어 거기에 호응이나  하듯이 판자놀이가 쿡 
쑤셨다. 철호는 아무래도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였다.
  이제 빨리 집으로 돌아가 누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다시 큰길로 나왔다. 마침  택시가 
한 대 왔다. 그는 손을 한번 흔들었다.
  철호는 던져지듯이 털썩 택시 안에 Tm러졌다.
  "어디로 가시죠?"
  택시는 벌써 구르고 있었다.
  "해방촌."
  자동차는 스르르 속력을 늦추었다. 해방촌으로 가자면 차를 돌려야 하는 까닭이었다. 운전
수는 줄지어 달려오는 자동차의 사이가  생기기를 노리고 있었다. 저만치  자동차의 행렬이 
좀 끊겼다. 운전수는 핸들을 잔뜩 비틀어 쥐었다. 운전수가 몸을 한편으로 기울이며 마악 핸
들을 틀려는 때였다. 뒷자리에서 철호가 소리를 질렀다.
  "아니야. 5 병원으로 가."
  철호는 갑자기 아내의 죽음을 생각했던 것이었다. 운전수는 다시 핸들을 이쪽으로 틀었다 
운전수 옆에 앉아 있는 조수애가 한번 철호를 돌아다보았다.  철호는 됫자리 한구석에 가서 
몸을 틀어박은 채 고개를 뒤로젖히고  눈을 감고 있었다. 차는 한국은행  앞 로터리를 돌고 
있었다. 그때에 또 뒤에서 철호가 소리들 질렀다.
  "아니야. XX경찰서로 가."
  눈을 감고 있는 철호는 생각하는 것이었다. 아내는 이미  죽었는데 하고 이번에는 다행히 
차의 방향을 바꿀 필요가 없었다. 그냥 달렸다.
  "XX경찰서 앞입니다. "
  철호는 눈을 떴다. 상반신을 번쩍 일으켰다. 그러나 곧 또 털썩 뒤로 기대고 쓰러져  버렸
다.
  "아니야 가."
  "XX경찰섭니다. 손님,"
  조수애가 뒤로 몸을 틀어 돌리고 말했다.
  "가자."
  철호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어디로 갑니까?"
  "글쎄 가."
  "하 참 딱한 아저씨네,"
 
  "취했나?"
  운전수가 힐끔 조수애를 쳐다보았다.
  "그런가 봐요."
  "어쩌다 오발탄같은 손님이 걸렸어. 자기 갈 곳도 모르게."
  운전수는 기어를 넣으며 중얼거렸다. 철호는 까무룩히 잠이 들어가는것 같은 속에서 운전
수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멀리 듣고 있었다. 그리고마음 속으로 혼자 생각하는 것이었다.
 -아들 구실. 남편 구실. 애비 구실. 형 구실. 오빠 구실. 또 계리사 사무실 서기 구실. 해야 
할 구실이 너무 많구나.너무 많구나.그래  난 네말대로 아마도 조물주의 오발탄인지도  모른
다. 정말 갈 곳을 알수가 없다. 그런데 디금 나는 어디건 가긴 가야 한다.
  철호는 점점 더 졸려왔다. 다리가 저린 것처럼 머리의 감각이 차츰 없어져갔다.
  "가자!"
  철호는 또 한번 귓가에 어머니의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하며 푹 모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차가 네거리에 다다랐다. 앞에 교통 신호대에 빨간 불이 켜졌다. 차가 섰다. 또 한번 조수
애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어디로 가시죠?"
  그러나 머리를 푹 앞으로 수그린 철호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따르르릉 벨이 울렸다. 긴 자동차의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철호가 탄 차도  목적지를 
모르는 대로 행렬에 끼어서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철호의 입에서 흘러내린 선지피가 흥건히 그의 와이셔츠 가슴을 적시고있는 것은  아무도 
모르는 채 교통 신호대의 파랑불 밑으로 차는 네거리를 지나갔다

    이 성숙한 밤의 포옹(지은이: 서기원)
  
  늙은 기관차는 유리창 너머 성하지 못한 객차들을 폐물이 되어 버린 혁대처럼 주체스럽게 
달고 고개를 기어 올라갔다.
  기관차의 심장은 차라리 터져 버리기엔 너무도 노쇠했다. 내  심장은 비록 당장 쫓기우고 
있는 불안에 떨고 있을 망정 벌떡벌떡 젊음의 절박한 고동소리를 온몸에 퍼지고 있었다. 다
만 기관차의 할딱이는 숨소리만은 나의 거칠은 가래 소리와  비슷했다. 그것은 중천에 이글
거리는 여름의 햇볕과 그 밑에서 펄펄 끓고 있는 객차 안의 더위 때문만이 아니었다.
  기관차는 만원의 객차들을 끌고 언덕바지를  기어오르기에 숨이 가빴지만 나는  이를테면 
그 기관차를 허리에 맨 밧줄로 끌어당기기에 절망적인 땀방울을 쏟고 있었다.
  기차는 고개를 넘기 전에 굴 속으로 들어갔다. 전등 하나  없는 객차 안에서는 빨간 담뱃
불이 두어 군데 어중간히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개어진 창  안으론 매캐한 연기에 꾸여 깔
깔한 석탄재가 코를 쑤셨다.
  나는 벌써 나흘째 갈지 못한 손수건을 끄집어 내어 코와  입을 막았다. 땀과 때기름에 쉬
어터진 내음새가 사뭇 친밀하게 내 자신의 체취를 깨닫게 했다.
  이 내음새만은 분명히 내 것이다.  그것은 내가 눈 똥이 남의  것보다 구리다는 으레껏의 
자애심에서라기보다 이 내 피부가 따거웁도록 강렬한 내음새야말로 바로 짐승의 삶을  깨우
쳐 구었기 때문이다.
  기관차는 암흑의 굴 속에서 임종을 고하는 딸꾹질을 계속하고  있었다. 객차 안은 굴뚝이 
막힌 아궁이였다. 나는 견디다 못해 숨을 들이켰다. 쉰 땀 내음새 대신에 아린 매연이  콧구
멍 속에 목젖을 쏘았다. 광물질의 날카롭고 차디찬 내음새였다. 땀과 때기름이 섞인 짐짓 내 
치부에서 풍길 성싶은 자기 혐오와 아득한 향수가 얽힌 손수건의 내음새와는 몹시도 대조되
고 이질적인 것이었다.
  아무리 코를 틀어막아도 이미 나의 체취는 사라지고 자줏빛의 화약 내음새만이  피어오르
기 시작했다.
  김 상사의 Ml총에 가슴팍을 뚫린 중머리의 적병의 군복에서도 같은 내음새가 났었다.  김 
상사는 주먹밥을 먹다가 말고 밥풀이 손으로 총을 잡고는 적의 포로를 단방에 쏘아 죽였다. 
그는 총구를 적병의 가슴에 바짝  붙인 채 방아쇠를 당겼다. 둔탁한  폭발음과 함께 적병의 
몸뚱이는 뒤로 튕겨졌다. 그 몸이  땅 위에 떨어지기도 전에 상처에  치솟은 핏덩어리는 김 
상사의 허리를 적시었다. 총을 잡은 손에도 피가 묻었다.
  그는 총을 부하에게 던져 추고는 그 손을 군복바지에 두어  번 문지른다음, 배낭 위에 던
졌던 주먹밥을 움켜쥐어 입 속에 틀어 넣었다. 주먹밥은 하얀 빛이었고, 그것을 쥔 그의  손
가락은 벌건 빛이었다. 그렇다고 포로를 함부로 죽이지 못함은  엄연히 군법이 가르치는 터
이었다. 그러나 소대장이 전사하여 그 대리 근무를 맡은 김 상사가,가령 적병 따나를 여름날 
시체에 들끓는 구더기만도 못한 생명으로 여겨 시장기를 채우는 반찬으로 삼았다 해서 어떤 
의분 같은 것을 느끼기에는 모두들 너무나 지쳐 버렸고  감각이 마비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김 상사의 검붉고 두터운 입술 속에 반쯤 가리운 하얀 밥덩이와 그걸 쥐고 있는 벌건 피의 
선명한 색채의 대조가 나를 발작적으로 광포한 소용돌이 속에  몰아넣고야 말았다. 나는 사
나운 짐승의 울음 소리를 지르며  김 상사의 턱을 발길로 걷어찼다.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네가 사람이야, 네가 사람이야, 하고  목청을 쥐어짰다. 그러한 나의  미치광이 춤은 누구의 
눈에도 실성한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고 때문에 김 상사의 보복도 모면할 수가 있었을것이었
다. 기실 누구나 다 미쳐 버렸었는지도 모른다. 광기는  단지 정도의 차이에 지나지 못했다. 
풀 위에 뭔굴고 있는 적병의 윗도리는 거무티티한 초연이 묻어 있었고, 상기 응고하지 않은 
피는 무성한 잡초의 향기 속을 헤치고 흘러내렸다. 그 짙은 피비린내 속에 섞인 화약 내 
음새는 역시 광물질이며 차거운 것이었다.
  지금쯤 상희의 폐에서도 붉은 핏덩어리가  쏟아져나을 것이다. 나는 상희를  잃고는 살지 
못한다. 죽을 때엔 만일에 네가 죽을 때엔 그 적병의 가슴에서 피를 쏟듯이 내 가슴테 붉고 
따뜻한 피를 뿌리고 숨을거두라. 내가 너에게 가기까지 살아 있어라. 너의 귀한 피 한  방울
이라도 뱉아 없애지 말라. 네 핏속에서 득실득실하는 폐균을 나는 증오하지 않는다.  차라리 
우정 비슷한 친밀감마저 느껴지는 것이다.  너의 맑고 불그레한 입속에선  우유맛이 났지만 
며칠째 양치질도 못한 나의 누렇게 뜬  입념에선 아마도 욕지기를 돋구는 내음새밖에  나지 
못할 것이다. 총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총소리는 산발적인  경우가 더 불안스러웠다. 기관총
의 연속음은 처음엔 호흡을 질식시키곤 했지만  나중엔 권태로운 시간을 다져 주는  쾌적한 
박자인 것이었다.
  기관차는 겨우 고개를 넘었지만 차 안은 아직도 캄캄했다. 나는 퍽이나 긴 굴이라고 생각
했다. 퍽이나 긴 성기라고 생각했다. 눈을 감으면 여인의 성기는 그처럼 깊고 어두웠다.
  불쑥 치밀기 시작한 나의 욕정은 바늘 끝으로 관자놀이를  찔렀다. 나의 하복부는 긴장하
고 온몸의 뼈의 관절이 서로 맞부딪치면서 음탕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이토록 벅찬 나
의 욕정이 이 곤비해 버린 육신에서  솟아날 수는 없다. 몇천 몇만 대를  이어 내려온 나의 
조상들을 꿈꾸어본다. 피들이 평생 연소시키지 못한 짐승의 본능이 필경은 나의 이 작은 몸
뚱아리 속에 누적되어 있을 것만 같다. 나는 손톱을 날카롭게 갈아 그 깊은 심연 속을 긁고 
할퀴고 쥐어뜯고 싶었다. 나는 나의 욕정에 혐오나 조바심을 버려야겠다. 나는 도리어  욕정
이 싸늘히 식어버릴까 두려워했다. 나는 온몸이 달아오른 열기  속에서 생명의 지속력을 진
득히 헤아려 보고 싶었다.
 
  기차는 정거장에 도착했다. 검은 구름이 무겁게 머리 위를 내리 누르고 있었다.
  나는 목덜미에 흐르는 땀을 훔치면서 개찰구 근처를 살폈다. 흰 헬멧을 뒤집어쓴 헌병 둘
이 양켠으로 지켜 서 있었다.
  나는 그 흔해 빠진 가짜 휴가증 한 장을 마련하지 못했었다.
  어떤 녀석은 뇌물을 써서 관인만이 찍힌 휴가증을 여러 장  얻어,한 달이고 두 달이고 뇌
물의 시세만큼 실컷 놀아먹곤 하지 않던가. 허나 내겐 백  장의 휴가증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상희의 폐가 악화되어 나를 불렀고, 나는 그 편지를 받자, 지체없이 탈영을 단행했을 따름
이었다. 나의 애인이 방금 죽어가고 있다고 선임하사에게 애걸했으면 아마도 휴가를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겐 상희에게로 달려가는  출발만이 중요했지 다시 돌아을  보증과 의무 
따위는 거치장스러운 사치에 지나지 못했던 것이다. 나의 호흡과  상희의 호흡은 피차 너무
도 절박한 것이어서, 그 막다른 시간의 밀도에 휴가라는 김빠진 공간이 용납될 수가 없었다.
  검은 비구름은 짙 점 짙어만 갔다.. 플랫폼에는 남루한 군복의 무리가 개찰구 쪽으로 몰려
갔다.
  이제부터는 상희의 입김이 서리어 있는 거리인 것이다. 나흘  동안의 피로가 졸지에 엄습
해 왔으며 피로는 나를 무척 감상적인 기분에 젖게 했다.
  내 눈에 눈물이 고였고, 속눈썹에 맺힌 투명한 눈물방울을 통하여 까맣게 그슬린 역의 구
내가 음산하게 비치었다.
  긴 여름 해도 겹겹이 싸이는 구름 때문인지 벌써 땅거미가 깔리어 가고 있었다.
  정거장 앞 광장엔 먹을 것을 파는 광주리 장수와  손구루마에 차린 음식점으로 혼잡했다. 
그 장사치쓸 틈에 긴 어린 소년들은 담배, 껌장수가 아니면 거의 펨푸들이었다.
  차에서 내려 배가 고프면, 목판 위에 차린 백 환짜리 상밥을 끝이 뭉틀하게 닳아 버린 나
무젓가락으로 군내나는 새우젓을 찬삼아 한 그룻 다 먹으면 된다.  배를 채우고 나면 그 다
음은 펨푸 소년을 뒤따라가면 된다.
  레이션 상자로 벽을 친 최하급의 창가에서 아침에 눈이 뜨이면 물론 또 배부터 고플 것이
다.
  내 옆을 지나가는 인파 중에서 내게 한 마디라도, 아니 짧은 시선이나마 부드러운 미소를 
보내 주는 사람 하나 없었다. 그것은 정녕 신기하리만치 놀랍고 섭섭한 일이었다.  우리들은 
싸움터에서 피를 흘리고, 그로부터 불과 몇십 마일 안 떨어진  이 도시에는 전혀 낮설은 남
들 뿐이 이렇게도 많구나. 그들은 하나같이 굳어 버린 얼굴에 초점을 끊은 시선으로 비실비
실 지나쳐 갔다.
  늙은이도 학생도 궁상스런 가정 주부들도 간혹 입술을 진하게 칠한 젊은 여인들도 도무지 
내가 기대했던 눈이 아니었다. 젊은 여자는 언제나 신선한 유혹과 호기가 번지어 있어야 했
는데 이케 그들은 염치 좋은 탐욕만을 드러내 뵈며 흡사 무엇을 물색하는 눈으로 사방을 두
리번거리는 것이었다. 아귀떼의 식욕과 녹슬은 양철조각 같은 욕망만이 그들의 메마른 안저
에 가라앉아 있었다.
  그들이 나를 배반하면 할수록 상희의 부드러운 시선이 눈부시게 감싸주는 깃이있으띠  따
느한 손길이 나의 두 뺨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러나 그녀의 손길은 차츰 체온을 익고 나의 소름끼친 목덜미에 얼어붙었다. 진저리나는 
전율이 등허리를 내리 훌었다. 구멍이 펑펑 뚫린 너의 허파를 짓누르지는 않을 것이다. 미열
에 익은 복숭아 빛의 젖가슴에 입술을 잠시 대어 볼 뿐. 네  가즈런한 이를 상하지 않을 만
큼 목이 말랐다. 거리에는 얼음솨자점이  즐비했고, '아이스 케이크'를 외치는  소년들의 쉰 
목소리가 쉴새없이 들렸지만 나는 냉수 한 그룻 마시는시간이  몹시 아까웠으며, 그러한 이
완된 시간을 상희를 위해서라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불현듯 산에서 내가 죽인 여인의 모습이 생생하게 되살아올랐고 처참하게 일으러진  여인
의 얼굴과 상회의 얼굴이 한데 겹쳐서 확대되어 눈앞을 가로막았다. 내가 죽인 여인은 틀림
없이 상희는 아니었다. 내가 죽이지  않았더라도 필경은 나와 꼭 괌은  다른 놈한테 비슷한 
욕을 당하게 마련인 것이 전쟁터의  현실이 아너냐고 다짐해 보았다.  나는 쓰레기통근처를 
헤매이고 있는 갈비뼈가 앙상한 째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나는  차라리 그녀가 죽어 없어졌
으면 하는 맹랑한 충동에 북받쳤다.  나는 얼굴을 쳐들어 다급한 시선을  이제는 어둠 속에 
녹아 버린 검은 구름 속으로 집어넣었다. 빗방울을 실어 오는 서늘한 바람이 이마를 스쳤다.
  행인들이 처마밑으로 피신하여 한적해진 인도 위에선 굵은 빗줄기가 전등빛 저진  밑으로 
쏠려 산산히 부서지곤 했다.
  나는 비를 맞은 채로 투박한 군화를 기계적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나분명히 눈물을 흘리
고 있었으나, 얼굴을 덮어 씌우는 빗물로 하여 미적지근한 눈물의 온도를 맛볼 수가 없었다.
  나는 그처럼 얼마 동안을 거닐어 갔다. 무의식적이며 기계적인 동작이문득 멈추어졌을 때 
어느새 상희의 집인 동네 어귀』를 지나쳐 버렸으며 정거장으로부터 서쪽으로 멀리  내달은 
외곽 지대에 들어선 나를 발견했다. 나는 제자리에 굳어 선 채, 어느 지붕 밑에서  새어나오
는 라디오의 뉴스 방송에 귀를 기울였다. 그 방송의 낱말  하나하나는 또켠이 들을 수 있었
지만 토막토막 단절된 나의 언어 신경은 그것들을 제재로 연결시킬수 없었으며,흡사 외국어
의 생소한 어감으로 안타깝게 귓속을 근질거렸다.
  나는 상희 집을 향해서 발걸음을 돌렸다. 나는 속내의까지 홈뻑 젖어 있었다. 공복에 오한
이 겹치었다.
  그렇지만 나는 다시 목적지로 접어드는 골목 앞을 이번에는 분명히 나자신의  걸음걸이를 
의심하면서도 그대로 지나쳐 버신 것이었다.
  그 골목 안으로 들어가기가 무서웠다. 그러한 공포의 질은 두려움 이나 무서움이라기보다 
밋밋한 정신의 집중을 강요하는 성질의 것이었으며, 이미 탕진해  버린 내 육신으로는 감당
하기 어림도 없을 긴장을 필요로 했다.
  그 골목 막다른 벽에 의지한 그녀의 집까지는 캄캄한 동굴 속을 더듬어 니어가는 악몽이
어야 했으며, 거기까지 이르기 전에 내 삭신은 두개골로부터  와그르 허물어져 버릴 것이었
다. 나는 패배하였다. 나는 내가 도망병이기 때문에 패배한 것이 아니라상희의 집에  들어가
지 못함으로 하여 끝내 패배한 낭비자인 것이다.
  나는 말할나위도 없이,대열에서 이탈하게 된 동기가무엇이었는지  한시라도 잊고 있는 것
이 아니었다. 용서해 다오, 너를 만날 자격을  잃었다. 너를 만나기 위해 무엇인지 지금,  이 
내 몸에서는 찾을 길 없는 다른가치가 있어야 하며, 또  그렇지도 못하다면 지금껏 내 잃어
버린 까마득한 원형 속에서 되찾아 지녀야 할 무엇이 기어이 있어야 할 듯하다.
  이 기막힌 도시와 최전방과의 교죠한 거리, 어떤 의미에서는  나에게 구원이었을 그 적당
한 거리를,수술대 위에서의 휴식파  같은 격리감이 실상은 무엇보다도  절실히 내가 괼요로 
하는 진투였는지도 몰랐다.
 
  나는 잠이 깨었다. 목이 타서 깨인 것이었다. 천장 밑 벽에 뚫린 구멍한가운데엔 벌거벗은 
전구가 매달렸고 그 전등불은 옆방과 반씩 나뉘어 비피고 있었다. 겨우 아랫도리만 가린 내 
곁엔, '부라쟈'를 달고 슈미즈만 걸친 여인이 검붉은 입을 반쯤 헤벌린 채, 잠들어 있었다.
  옆방에서 막걸리와 김칫국 내음새가 어울릴 듯한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북어가 척는 내
음새가 난다. 괄뚝 시계는 세 시를 좀 지났다.
  나는 창녀의 벌거벗은 어깨를 잡아 혼들어 깨우고 냉수 한 대접을 손짓으로 청했다. 창녀
는 흐리멍덩한 눈을 부비면서 부시시 일어나더니빙긋이 웃어 보였다. 창녀는 뭉틀하고 금이 
간 뒤꿈치를 뵈며 문지방을 넘어 밖으로 나갔다.
  머리가 쑤셨다. 취기가 상기 가시지  않았다. 비는 그쳐 있었다.  나무판장에 도배질을 한 
벽fl 나의 후줄근한 군복이 널려 있었다. 나는 빈 속에 소주를 너챗 잔 들이켰었고, 그 다음 
바로 이 창가로 기어든 것이다.
  나는 이 창가에 오기 위해서 탈주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창가를 찾을바에야 여기까지 올 
까닭이 없다. 그런데도 이 터무니없는 나의 안도감은 어디로부터 비롯하는 것인가. 옆방에서 
넘어오는 코고는 소리마저오랜 세월을 귀에 익은 싼 가족의 다정스런 흥처럼 느껴지는 것이
다. 창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것으로 갈면 족하다. 기실 나는 창부답지않게 수줍어하
는, 이를테면 다소 순진한 티를 깔끔히 씻어 버리지 못한 그런 종류는 싫었다. 나의  우연한 
상대가 그런 창부가 아니기를 바랐다.
  창부가 물을 떠왔다. 그녀의 이마는 머리와의 경계선이 먼명치 못한 은 삼각형이었다.  몸
뚱이는 짧고 피등피등 살이 얹혔으나 엉덩이가 유난스레 옆으로 퍼진 탓인지 허리는 깊숙이 
패어져 가늘었으며, 목으로부터 어깨를 씌운 두툼한 살은 가축의 지방층을 연상시켰다.
  낙하산 감으로 만든 부라쟈 밖으로 비져나온 육중한 젖통이 나를 압박했다.
  왜 자꾸만 쳐다보케요.
  창녀는 양미간을 일부러 좁히며 말했다. 나는 잡자코 그녀를 끌어당겨겨드랑이 밑을 휘어
감고 옆으로 쓰러뜨렸다
  나의 모진 갈비뼈는 탄력이 풍부한 여인의 가승속을 파고들었다.  내 쪽 가슴을 떠받치고 
있는 젖통의 응기(IffB)는 나의 체중을 빈틈없이 안정시켜 주었다.
  창부는 직업적인 교태도 부리지 않았고, 알맞게 나를 수용해 주었다.
  그녀의 굵은 머리카락에선 싸구려 향수가 시킴한 땀내음새와 함께 코를찔렀다.
  내가 허리의 힘을 풀고 포식한 개구리처럼 팔다리를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짧고 
굵직한목을 비틀어 일으키며 머리맡 베개 밑에 접어둔 기저귀를 집고,
  끝났음 비키세요.
  다른 팔로 내 가슴을 떠밀었다. 다는 다시 그녀를 덮어 씌우며 
  안돼, 안돼.
  입 안으로 중얼거렸다. 나의 섹스는 비참하고 가련하게 시들어  버렸으나 마음 속의 기갈
은 아직도 치열했다. 백의 계집이라도 그러한 나의 기갈을 채워  줄 수는 없었을 것으로 나
는 확신했다.
  치근치근 굴지 말아요.
하고 창녀가 쏘아붙였다. 나는 창녀에게서 그 어던 인간미 있는  분위기 나 값싼 감상을 보
급받고 싶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어떤 기구한 경로를 밟아, 쌀 한 가마 남짓한 무게의 고깃덩이를 방매 하기에 이르렀는지 
그녀의 신세타령 같은 것은 더더구나 원치 않는 터이었다:
  그것은 관객의 여유와 우월감이 있음으로써 비로소 가능한 심심풀이 장난일 것이었다. 불
행히모 나는 관객은커녕, 가면 밑으로는 억지로 흐느낌을 눌러야  할 삐에로나 다름이 없었
다.
  어쩌다가 전등에 부딪친 파리  한 마리가 나와 그녀의  사이를 번잡스럽게 날아다니더니, 
그녀의 어깨 위에 매달폈다. 나는 파리와 그 파리가 앉은 자리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녀
는 손바닥으로 찰싹 어깨를 쳤지만 파리를 잡지쓴 믓했다. 그 파리는 다시 전등불을 향해서 
날아들자, 이내 런은 원을 그리며 이번에는 그녀의 정강이 위에 내려앉았다. 나는 
목구멍 속에서 킬킬거리고 웃었다.
  참, 이상하네요.
  그녀는 다소 겁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 시골처녀가 기어이 나를 고발하고야 말 성
싶은 두려움 때문에 그녀를 죽였던 것과 꼭 같은  동기 모 지금 내 곁에서 잠이 든  창녀가 
날이 새면 밖으로 빠져나가 헌병대나특무기관에 밀고할지도 모를 위태로움에 걷을 집어먹고 
별안간 그녀의 목을 졸라 죽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녀는 입모퉁이로 거품을 뿜어내며, 괴이한 비명을 짧게  질렀다. 너는 상회겠지, 틀림없
는 상희겠지, 너는 상희여야 한다. 상회가 아니면 안된다. 그녀의 얼굴을 부벼대며 주문처럼 
외이던 헛소리를 잊을 수가 없다.  어쩌면 그것은 내 가슴속에서만  중얼대던 소리였는지도 
모르긴 하다. 해가 쉬이 지는 산속이어서 그녀의 얼굴이  과연 상희를 닮았는지 의심스러웠
다. 그녀는 실신하는 순간까지 몸부림을 멈추지 않았다. 해가 저물어가는 나무 그늘  속에서 
희무연 여자의 얼굴과 마주쳤을  때,그러자 그녀가 새파랗게 질린  낯을 돌리며 달아나려는 
순간, 나는 이런 기회가 평생에 두 번 있을까 말까 싶은 기막힌 아쉬움이 치솟았다.  그녀의 
비명은 나를 한층 광폭하게 했으며 그녀의 몸부림 또한 나의 욕망을 더욱 자극시켰다.
 너는 절대로 상회여야만 한다. 잠시 후 나는 그녀가 상회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뉘
우쳤다. 뉘우침보다는 겁이 앞섰다. 그녀는 반드시 나를 고발하게 될 것이며 그 때문에 나는 
군법회의에 걸려 꼼짝없이 총살 당하게 될 것 만 같은  어떤 숙명감마저 느껴졌다. 나는 두
손으로 그녀의 목을 졸랐다.
 나는 그 시체를 어느 후미진 바위틈으로 날랐다.
 나는 다시 총을 걸머지고 산을 내려갔다. 목이 타고 혀가 말랐다. 군침을 청했으나  혀끝은 
건조된 입천장만이 미끄러졌다.
 나는 모든 기억을 잃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모든 체험이 결국 나의 텅 빈 뇌
장 속에 결코 담아질 수가 없을 성싶은 완전한 허탈 상태에 빠져 있었다.
 창부는 내가 그녀의 몸값을 치르기에 넉넉한 돈을 지니고 있는 줄 확인한 다음 네  활개를 
펴고 깊이 잠든 것이었다.
 내 주머니 속에서 먼지가 나오기까지 그녀는 나를 쫓아내지 않을 것이 충족시켜 주는 것이
며 수십 수백 층으로 누적된 기억의 중압으로부터 신기롭게  해방시켜 주는 것이었다. 실상 
내가 진정 갈망하고 있는 것은 애정 그리고 육욕과도 아무런 연관이 없는 말하자면 무책임
한 자유인지도 몰랐다.
 창녀의 헝클어진 머리에선 여전히 싸구려 향수 내음새가 그치지 않았고, 원체 이지나 총명
과는 거리가 먼 콧구멍 속에선 불결스런 털이 숨을 내쉴 때마다 벌름거렸다.
 그녀는 유방은 억센 생활력을 상징하고 있었다. 창녀는 등뒤로 바싹 죽음과 밀착되어 있었
지만, 개기름이 흐르는 뱃가죽이며 탄탄한 허벅지에서는 생명의 숨결이 넘쳐 흐르는 것이었
다.
  나는 그 창가에서 우연히 선구를 만나게 된 일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첫눈으로 나는 
선구라는 사내가 나를 해치지  않을 사람으로 믿어졌으며, 관헌에  쫓기우고 있는 처지임을 
그에게 고백했던 것이다. 그는 나에게 아쉬운 대로 은신처를 제공해 주었을 뿐더러,  그의괄
괄 하면서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섬세한 마음씨로 하여 나에게 위로를 주었다.
  나에게 괵요한 것은 물곤 안:f:한 피신처떴으나, 그보다  나클 무한한 포옹으로 이해해 주
는 친구의 존재가 한층 절실한 터이었다. 원패 남을 좀 체 믿지 않는, 더구나 피신중인 내가
아무리 마음을 의탁할 수 있는 친구를 찾고 있다 하여, 사귀기  시작한 지 하루가 못 된 그
의 뒤를 따라왔다는 사실은 하나의 기적으로밖에 풀이할 길이 없었다.
  선구의 살림살이는 나를 몹시 놀라게 했다. 그것은 내 상상의 가능한 테두리를 벗어난 세
계였고, 어쩌면 항시 잠재덕으로나마 동경해  마지 않던 것이었는 성싶기도 했다.  서까래가 
썩어들어가는 고옥의 뜰 아래를 세든 그의  방에 대해 나는 그것이 쓰레기통이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다. 어쩌면 우리들은 너무나 깜찍스럼계 정돈된 방에 반발을 느끼는 반면 어처구
니가 없을 만치 나태스런 방엔 유쾌한 공감을 느끼고 공범자의 갈채를 보내는 것인지도 몰
랐다.
  방안에는 칠이 벗겨진 철침대와 그 위에 간 꾀죄죄한 매트리스와 군대용 담요밖엔 도무지 
가구라고 이름 붙일 물건이 없었다.
  눈여겨 보니 노란 흙이 드러난 장판 위에 지저분하게 박힌 검은 점들은 담뱃불에 탄 자국
이었다 
  코를 풀어 뭉쳐 던진 휴지,신문지,담배꽁초,사과 껍질,묵은  잡지 서너권, 그리고 무엇보다
도 나를 당황케 해준 물건은 침대 아래 꽉 들어 찬 빈 술병들이었다. 아니, 그것들은 빈병이 
아니었다. 마개가 없는 병 속엔 거의  액체가 차 있었는데, 병의 유리 빛깔에  따라노랗게도 
비쳤고 어떤 것은 푸른 빛으로도 보였다.
  그는 너털웃음을 한바탕 터뜨린 다음 한 잔 마셔보게 한다. 그 액체는 오줌이었다 
  변소가 굉장히 멀거든.
  하고 그가 변명했다. 나는 어깨에  민지가 뽀얗게 쌓인 소주병을 하나   집어내어 냄새를 
맡아 보았다. 나는 욕지기  나는 악취를 예기했었지만, 뜻  밖에도 엷은 내음새에  실망하여  
영 삭아버린 셈인가했더니 그는 한번 병을 흔들어 뒤집어놓고  나서, 다시 코를 대어보라는
것이었다. 내가 물끄러미 상표만 들여다볼 뿐 잠시 머뭇거리고 있자니까, 병을 뺏아 들더니, 
손바닥으로 마개를 덮고 흔들고 나서 나에게 디밀었다. 나는 손으로 그걸 가로막고 물었다.
  대체 이것들을 어떻게 처치할 생각인가?
  지금 나에게 가장 큰 고민이 있다면 바로 저 병들의 처리 방법일세  선구가 애써 심각한 
표텅을 지으며 양미간을 찌푸리고 대답한다. 반쯤웃는 얼굴이다. 이 집 주인한테 들키면  난
처하지 않겠느냐고 나는 궁금해 하였다.
  만일 내가 이 방에서 죽었다 하더라도 주인이  내 시체를 발견하려면 아마 한 달쯤 걸릴
껄, 방세만 받으면 되지, 도무지 남에게 관심이 없는 위인일세.
 그렇게 설명하면서도 저 많은 병 속이 온동 오물인 줄 알게 되는 날엔 나를 내쫓을 이치이
며 그런 까닭으로 해서 그것들의 처리가 난문제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자네가 싫다면 대청소를 한바탕 치루세.
라는 선구의 제안에 나는 얼른 손을 내저으면서 말했다.
  아, 아너 그럴 필요가 없네.
  내 생활 방식을 자네한테까지 강요하지는 않으니까.
  그는 내 진의를 떠토려는 상 내 눈 속을 웅시하면서 말했다.
  그 시선 속에서 나는 그 나름으로의 오만함과 파격적인 생활 태도에 대한 긍지를 넉넉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게 유일한 나의 저항 같은 것인지도 모르지 그 밖엔  반항할래야 할 대상이 없어. 무얼 
어떻게 하겠다는 세상인가. 누구에게 무얼 어떻게 반항하고 새로운  주장을 내세틀 수 있단 
말인가. 일선에선 동족끼리 서로 죽이고,도시에선 시욕과 성욕과 그리고는 허영밖엔 남지 않
았어 오줌이라도 이런 데 누지 않는다면 다른 축들과 다른 점이 무엇이 있나.
  그는 다소 자조하는 말투로 입맛을 다셨다.
  나는 자네가 자네의 게으른 성미를 변명하는 것은 아니라고  이해하지만, 나는 대략 그런 
뜻으로 더듬더듬 대꾸했다.
  지금 우리 환경에서 건실한 성격이란 뭣인가. 말하자면 건설적인 생활방식이란 뭣인가 어
떤 수단으로든지, 걸려들지 않도록 실수 없이 돈을버는 일밖에 무엇이 있어.
  라고 그가 열기를 띠며 말했을 때, 나는 그가 나처럼 여자를 사랑하고 또 사랑을 받아 본 
체험이 없다고 문득 생각키웠다.
  파괴적인 성격의 소유자는 연애가 결실하기 어려운 것이다. 대부분의 여자는 그러한 남자
들로부터 본능적으로 도망치고, 이른바 건실한 성격을 택하게 된다. 생존 본능에 틀림이  없
은 것이리라. 간혹 파괴적인,그러나 그 속에 무엇인지 새로운 창조의 암시와 가능성에  매력
을 느껴 끌리어드는 여자가 없는 바 아니지만, 그런  경우일수록 남보기 불행하다는 판국을 
초래하기 일쑤인 것이다.
  그건 그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아니냐. 나는 상희를 그려 보았다.
  잠시 나는 상희와 선구와 나 세 사람이 같은 혈연 관계에 있는 착각에 사로잡혔다 
 
  선구는 그 창가의 전등을 반씩 갈라 쓰고 있는 옆방의 손님이었다. 그창녀를 포함해서 누
구와도 낯선 사밤과 접촉을 피해야 될 나였으나 아침 해장으로 한잔 같이 하자는 나지막하
고 굵은그의 목소리를끝내 거절하지 못했었다. 그의 방에 술상이  차려졌고 창녀 둘도 함께 
앉아해장국을 한 그릇씩 차지했다.
  선구는 그 집 이 단골인 모양이었으며, 계집들도 차마 듣기 어려운 음담을 섞어가며 그와 
주고받았다. 그의 상대는 내캐 계집보다 서넛은 위로 뵈었으나  갸름한 얼굴에 밝은 눈매가 
판잣집에 썩고 있는 창녀로는 좀 아까운 느낌을 주었다. 내 계집이 그녀를 언니라고 불러가
며 바야흐로 술상은 가족들끼리의 흐뭇하고 다정스런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이었다. 계집들
은 딴판으로 쾌활한 얼굴로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들의 대화는 상스럽고도 저열했지만 
이상히도 혐오감은 일어나지 않았다. 계집들이갑자기 명랑해진 것은 덤으로 생긴 한 그릇의 
국밥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긴 했으나,육체의 매매 행위  말고라토 사내들과 대등한 위치에서 
함께할 수 있는 일이 없지 않다는 흡족함을 또한 부정할  수가 없었다. 술이 얼근해진 선구
는 그녀의 됫목을 잡아끌고는 경쾌한 소리로  입술을맞추었다. 잘들 노네, 나 참 하고  나의 
계집이 이죽거리는 것이었으나노상 보아온 풍경인지 전혀 악의나 질투가 없는 농담이었다.
  그 여자와의 관계는 창녀와 손님 이상인 것 같던데.
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 규칙적으로 거길 가지, 그년은 나한테 외상을 주거든, 그것뿐이야.
  그는 내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피로할 테니 자세.
  그는 발길로 대충 쓰레기를 구석으로 밀어 치우고는  그 위에 담요 한 장을 깔고 자기가 
그 위에서 잘 테니 손님일랑 침대를 차지하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한참 동안 제각기 침대에서 잘 수 없다고 다투었다.
  그런 끝에 하루 교대로 침대의 신세를 지게끔 타협을 보고 우선 내 차례로부터 시작하기
로 작정되었다.
  스프링이 늘어진 침대는 나의 엉성한 몸뚱이를 지탱하기에도 힘에 겨워 밑으로 내리 처졌
다. 나는 그날 밤 부대를 탈출한 후 처음으로 단잠을 잘 수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선구의 식객 노룻을 시작한 것이었다. 얻어 먹는 처지이므로 식객임엔 틀림
이 없었으나, 방만 릴리고 있는 때문에 불가불 끼니마다  외식하게 마련이었다 번번이 선구
가 밥값을 치르고 또는 외상을그어 놓고 나는 이쑤시개만 물면서 일어서곤 했다. 그의 직장
은 피난 내러온 무슨 협회의 지부장이라고 들었는데 원채 일거리가 없어서인지  어수룩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아침 출근은 열  시가 넘어야 하고, 대낮부터 벌건 얼굴로  돌아오기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협회의 예산이 있으니까 월급을 거르는 일은 없다는 것이며 할 일이라
고는 간판을 지키는 것뿐이라고 했다. 월급을 십 배 더 준대도 지금 직장을 놓치고 싶지 않
다는 것이었다. 그의 직장의 장래성이  어쨌든 간에 전쟁이 끝나기까지임시  방편으로 삼을 
만하기도 하거니와, 나로 말하면 그가  그와 같이 안이한 자리에 있는  덕택으로 하여 하필 
돈보다도 기식자로서의 마음의 부담이 한결  가벼운 것만큼은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었다. 
가령 그가 은행월쯤 된다고 가정하면 시게라늘i·1럼 절도 있는 생활의 템포에 쫓아갈 
염도 내진 못했을 것이었다.
  내가 사람의 구실다운 널도와 규칙이 남아 있다면 그나마 직장에 출퇴근하는 것이 아니라 
일 주일에 한 번씩 금요일마다 진숙에게 가는 일이겠지  그의 말은 사실과 정확히 부합되지
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거짓은 아니었다.
  어째서 하필 금요일인가라는 나의 물음에 토요일엔 손님이 많고 일요일엔 가기 싫다는 대
답이었다.
  올부터는 일 주일에 한 번 정도가 적당한 것 같거든,쾌락을  찾피 위해 서가 아니라 처리
하는 셈이니까, 그렇지 않다면 진숙한테만 갈 리가 없지.
  그건 자네의 역설이지 뭣인가.
  나는 삼 년 동안을 굶주려 지냈었고 그 갈증 때문에 살인을 저질렀던 것이다.
  글쎄, 자네 말이 옳을지 모르지만 하여튼 내 욕망이 급속도로 감퇴된건 어쩔 수 없네.  그
렇게 된 까닭도 그 놈의 국민방위군 때문이야,
  그리고는 그가 국민방위군으로 끌려갔을 때 지독스럽다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어처구니없
는 체험담을 끄집어내는 것이었다.
  그도 견디지 못해 거기서 탈출해  나왔던 것이지만, 이미 방위군 자체가  해체된 만큼 내 
경우와는 판이하게 다른 도망병이라고나 할까.
  내가 알기엔 영국만 하더라도, 일단 국가의 유사에 지원병으로  나가지 않는 놈은 친구는 
물론 이웃의 규탄을 받을 뿐만 아니라 애인한테 버림받기  마련이야. 헌데 여기선 입대하는 
놈은 병신 취급이요, 기피해서  반지르르 하게 머리를 붙이고  다니는 녀석들은 대환영이니 
도대체 자네는 지금까지 투구를 위해서 싸웠느냐 말이야!
  여느 때 그답지 않게 흥분하여 가래침을 칵 뱉았다.
  그건 나를 경멸하는 소리군.
  나 자신 뚜렷이 누구를 위해서 싸웠는지 알지 못했으나 그렇다구 지난삼 년이 난센스이고 
공백이었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구태여 따지자면 나는 양쪽에 있는 나와 꼭 같은 전우들의 흉내를 냈다 뿐이지, 그렇다면 
전쟁터에선 그것이 곧 나 자신을 위하는 행동이며 결국은 우리 편 전체를 위하게 되는 것일
세. 자네처럼 극단적인 얘기를 한다면 나도 한 마디 하겠네. 싸움터에선 모두가  단순해지는 
거야. 적이 아니면 우리 편, 어중간한 방해물이 없어, 적이라면 대들고 우리 편은 서로 도와 
주는 그것뿐이야, 그 밖에 무엇이 또 필요해.
  과거나 내 음성은 점점 낮아지고 맥이 꿀긴다.
  상희를 찾아가면 상희는 날더러 귀대하라고 권할까.
  나는 마음속으로 쿵얼거린다. 나는 선구에게  상희의 존재를 밝히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그를 상기 친구로서의 정을 못 미더워한다거나 이기적인 심사로  해서가 아니었다. 상희 때
문에 도망친 내가 어찌하여 그녀를 찾아가지 않고 남의 집에서 뒹굴고만 있는지 가끔 나 자
신마저 낭패하곤, 하는 그 까닭을  도저히 이해시킬 도리가 없었다. 당연한  일이지만강간과 
살인에 관해서도 암시조차 준 일이 없었다. 그것으로 하여 나는 양심의 가책 비슷한 미안함
을 아너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가까운 사이일지라도 누구에뻬나 한두 가지쯤 타
자에게 알릴 수 없는 일이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아침을 매운 대구탕으로 치르고 나서 선구는 사무소로,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공동  목욕
탕 속의 내음새가 풍기는 축축한 침대 위에 몸을 던지고,  먼지가 엉킨 것이 거미줄처럼 길
게 흐늘거리는 천장을 멍청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이른바 무위도식을 일삼는 데에도 어떤 의미가  있어야 하는 것이며 목적이 있어야  했었
다. 가령 취직이 되기까지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든지 은행에 돈을 맡겨  놓고 이자가 느는 
것을 낙으로 삼는다든지 어쨌든 간에 사장된  시간을 메꾸기에도 무슨 곡절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굳이 내게도 어떤 의미가 있다면, 내가 범법자로서 체포되는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
고나 붙일 수 있를는지  만일 내가 선구를 몹시 노엽게 하여 관대한 그로 하여금 나를 내쫓
게 한다면 나에겐 상희한테로 이 거추장스런 몸뚱이를 이동시킬  길밖에 없을 것이었다. 그
렇게 되기를 바라고 그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상희는 피가 번진 침을 재떨이에 털고 손바닥으로 입을 누른 채 자꾸만 치밀어오르는 기
침을 팍기 위해서 얼굴을 벌겋게 했다. 나에게 할수있는 일이 있다면 벅찬 숨결에 잔물결이 
일고 있는 그녀의 등어리를 문질러 주는 것뿐이었다. 그 밖엔 그녀의 기침조차도 막아줄 수 
없었으며하물며 그녀의 허파를 파먹고 들어가는 폐균의 창궐을 어찌할 도리는민있나.
  나는 입을 틀어막고 괴로워하는 상희에게 다가앉지 못했다. 다가앉으면 그녀의 손을 잡아 
주초 한 손으로 등허리를 쓸어 주는 가능성밖에없는 것이었으며,  나는 그것을 실지로 증명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녀의 기침은 멎었다. 그녀는 민망스런 미소를 보내왔다.  그것은 죄를 지은 얼굴이었다. 
상희조서는 자기의 병 자체가 나에 대한 죄로 가슴이아픈 것이리라.
  폐병쯤 요즈음의 의학으로는 아무것도 아니지.
  정말 나는 그렇게 생각한 터이지만 억지로  조작해낸 목소리는 허황 띤 가락으로  떨리었
다.
  나는 그녀의 눈망울에 맺힌 눈물 방울을 입술로 받아 마셨다. 그러나 다른 눈에서 넘치는 
눈물은 그녀의 여윈 볼 위를 줄지어 흘러내렸다‥‥‥ 
   나는 식곤증으로 어느새 잠이 들었었다. 눈이 뜨였을 때  서쪽으로 뚫린 창 안으로 햇빛
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선구가 준 다색 겨울바지에 위만은 시원스레 뵈는 하늘빛 노타이를 입고 밖으로 나
갔다. 가까운 이발관에서 머리와 수염을 깎고 오랜만 에  청결한 기분으로 도심지에 들어갔
다. 젊은 여자들은 한복이나 양장것 없이 모두가 속이 훤히 쳐다보이는 옷을 걸치고 파라솔
의 원색에 제각기 얼굴을 염색하면서 더위를  모르는 서늘한 눈매로 거리를 독점하고  있었
다.
  그런 파라솔 숲속에선 보얀 흙가루가 덮인 진한 녹색의 군복들이 겨드랑이서부터  허리띠 
근처까지 땀이 배인 채, 심술궂은 걸음걸이로 둔탁한 군화 소리를 내고 지자갔다.
  나는 이미 저 정거장으로 달려가고 있는 병사들과 친구일 수 없었으더구나 저 여인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내가 갈 곳은 아무래도 선구의 어지럽고 고리타분한 골방밖에 없었다.
  그것이 바로 내 집이며,내 이 좁은 체적의 몸뚱이를 허용하는 공간이었다. 아무리 많은 사
람이 전쟁으로 계속 도살당하고 있다 하더라도 지금껏 인류의 역사는 시체와  해골바가지로 
하여 땅 위에 공지가 없어진 일은 없는 것이다.
  어둠에 익숙해진 나의 두 눈은 강렬한 햇빛을 오래 지탱할 수가 없었으며, 밤마다 식은땀
으로 탕진해 버린 나의 몸뚱이는 끓어오르는 포장로 위의 아지랑이 속에서 더 견디어낼 수
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니, 선구가 그늘진 됫마루에 걸터앉아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모양을 잔뜩 내고 어딜 갔다 왔나.
  선구는 나의 이발한 것을 놀려 주는 것이었다.
  이 털바지는 겨울엔 따뜻하겠네, 꼭 궁둥이를 삶는 것 같더군.
  나는 예의 바지를 벗어 던지고 우스꽝스럽게 상을 찌푸려 보였다. 선구는 홍소를 크게 터
뜨리고 나서,
  그래 뵈두 영제들이야, 과히 괄세하지 말게.
하고 그 웃음이 가시지 않는 낮으로 말했다.
  오늘은 큰 마음먹고 일찍 돌아왔지.
  그는 침대 밑에 넝마장수처럼 쌓아둔  오줌병들을 처치하기 위해서 일찌감치  퇴근했다는 
것이다.
  오늘은 아침부터 신문을 읽고 나니 정말 할 일이 있어야지,
  상전들이 다방에 나간 김에 책상 위에 푸두발을 얹어  놓고 담배를 태우고 있노라니까,문
득 희한한 생각이 안 떠오르겠니, 천재적인 영감이란 바로 이런 것에 틀림이 없어.
  그의 천재적인 착상이란 구두닦이 소년 .하나를 불러서 그  병들을 주어 버리자는 것이었
다. 그러면 소년은 병을 밖으로  내다가 오줌은 버리고 빈 병은  넝마장수한테 괄면 병값과 
품삯이 어로 상쇄하게 되는 셈이 되니, 묘안 중의 묘안이 아니냐는 것이다.
  무엇이 그렇게도 우스웠는지 모른다. 나는 방바닥에 벌렁 나자빠져서 몸을 꼬아가며 눈물
이 눈 가장자리에 번지도록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선구는 처음으로 웃음 속에 도취되어 있는 나를 만족스럽게 내려다보며 나지막한  목소리
로 따라 웃었다.
  고부신을 끌고 나간 선구는 한찰만에 나무통을 걸어맨 구두닦이 소년하나를 데리고  들머
왔다.
  이런 횡재가 어디 있니.
  선구는 미닫이를 활짝 제낀 방 안으로 침대 밑의 병들을 가리키며 어안이 벙벙한 소년에
게 설명해 주었다.
  정말 그저 주시는 거죠?
  소년은 거듭 다짐을 받고야 도구를 내려놓고 방안으로 기어갔다.
  멀찌캄치 버려라.
  나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소년은 제 나이 또래의 동업자 하나를 구해다가 밖으로 내어보내서 병이 비게 되면 그걸 
지키게 할 요량인 듯했다.
  우리들은 다소 섭섭한 눈치를 서로 감추지 못하면서 소년의 작업을 구경했다.
  마침 주인 마나님한테 들키지 알은 게 또한 경축할 일일세, 그것들과의 고별의 정을 풀기 
위해서라도 한잔 안할 수 없지.
  선구는 물이 흐르는 맥주병을 다섯이나 들여왔다. 우리들로서는 무척 
  호화판인 주연이 벌어진 셈이었다.
  빈 속에 마신 술은 나의  모세관 구석구석까지 마취시켰다. 나는 침대  위에 몸을 눕히고 
선구는 친구한테 다녀온다고 일어섰다온 저녁해가 앞집 지붕 밑으로 가라앉고 방 안에는 어
둠이 짙어졌다. 그는 저녁값으로 몇 장의 지폐를 나에게 쥐어 주려 했다. 나는 끝내 그걸 받
지 않았다.
  내 군복 호주머니 속에는 아직도 약간의 돈이 남아 있는 때문이기도 했으나, 어쩐지 그때 
따라 굴욕감이 새삼스러워지며 비타협적인 고집을 피운 것이다.
  나는 전등도 켜지 않고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나는 선구가 진숙에게로 간 줄  짐작했다. 
돈이 자랄 적엔 으레 집요하게 나를 권유했었다. 그럴 때마다  그 창가의 구조며 창녀의 벌
거벗은 몸뚱이가 떠올랐었다.
  기생충은 기생충답게 꿈틀거리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침대 밑 창고 속에 
세워 두었던 오줌병과 꼭 같은 빠격으로 이 방에서 살아왔다.  오늘 그 병들은 하나도 남김
없이 추방되었다. 그 병들도 선구의 배설물로서 위를 채우면서 이 방에 기식하고 있었던 것
이다.
  나는 내가 사람이지 술병이 아니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술병들과 비유한 추
잡한 망상이야말로 바로 내가 인간이 아니라는 반증인 것이었다.
  그 여인들 겁탈하기 직전까지는 나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행위가 끝나고 그녀
의 목을 눌러 숨을 거두게 하기 직전까지는 상기 반쯤 사람이였는지도 모른다. 부대를 도망
쳐서 이 도시에 도착한 그 길로 
상희를 만났던들 다시 사람으로 변신할 기회가 생겼을는지도 모른다.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람이 되려는 용기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불안과 공포감조차 마
비된 나는 나를 향해서 밀려오는 시간의 감촉과 예감마저 마멸되어 버린 것이었다.
  안채로부터 괘종시계가 열 시를 알려  주었다. 그 괘종이 울린 다음  주위의 고요는 더욱 
깊어졌다. 잠시 후에 대문 소리가 나고 선구가 아닌 그보다도 조심스러운 발자국 소리가 들
려왔다.
  그리고 나에겐 결코 사소한 것이라고 할 수 없을 하나의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그 발자
국 소리는 방문 앞에서 멈추었다. 나는 가슴이 내려앉았다.
  계셔요.?
  여자의 목소리였다. 상회가 나 있는 곳을  알았을 리 없었다. 나는 불을 켜고  한참만에야 
그 여인이 선구의 창녀인 진숙으로 알아보았다.
  안 계시군요 
  나는 그녀를 올라오라고 해서 어떨는지 잠시 망설였다.
  들어가도 괜찮아요?
  그러면서 그녀는 벌써 신을 벗고 있었다.
  들어와서 기다리시오, 돌아올 시간도 되어 가니.
  나는 몸을 비켜 주면서 말했다. 그녀는 대뜸 나를  알아채린 듯했으며 그렇다면 나보다는 
그녀 자신이 이 방의 임자와 가깝다는 자신을 빤히 드러내 보이면서 청킁성큼 방으로 들어
오는 것이었다. 선구와 그녀가 단지 손님과 창녀와의 관계에  지나지 않다면 집으로까지 찾
아올 수가 없을 뿐더러 저처렁 익숙한 몸매무새로 도사려 앉아 있을 수도 없을 것 이었다.
  그 창가에서와는 달리 화장을 지운 그녀의 얼굴에서'창녀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림자가 짙게 깔린 그의 눈사위는 몹시 피로해 뵈었으나 그 피로의 빛은 밤마다 황폐한 육체
의 피로가 아닌 마음의 고달픔 같은 것이었다.
  내 소견으로는 무언지 안으로 생각이 잠겨 있는 성싶은 그런 따위의 창녀는 건방진 사치
로밖에 여겨지지 알았으며,어떤 반감마저 일으키게 하는 것이었다. 화장을 지워도 창녀는 창
녀인 것이다. 내가 지금의 나 이상이 될 수 없는 듯이.
  선생님께서 여기 줄곧 계시고 있는 줄 알고 있었어요.
  갈 데가 없으니까.
  선구 씨와 의논할 일이 있어서 바삐 찾아온 걸요. 겨우 빠져 나왔어요.
  그렇게 부자유스러워서야.
  빛이 도리어 늘어가거든요.
  많이 벌어야겠군요.
  여기서는 그런 얘기 맙시다.
  나는 입을 다물어 버틸 수밖에 없었다. 그런 쓰디쓴 침묵  속에서 나는 차츰 그녀에 대한 
증오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창녀의 위치에서 탈출하여 인간이 되려고, 어 림도 없는  수작이
다. 이미 내가 상희를 찾아갈 것을 단념한 깃처럼 너도 빛윽 간을 싱자인랑 아예 열도 네지 
말라.
  어때, 나하고 놀지 않겠어?
 
  돈 주면 될 것 아냐.
  여기서는 갈보가 아니케요.
  그런 우는 소리가 어딨어.
  나는 일부러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녀는 노기가 서린  눈초리로 나를 쏘아보았으나 대거
리는 하지 않았다.
  화대를 두 배 줄 테니.
  나는 잔인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치마를 쥐고 일어나 차라리 나를 가엾게 보는 눈
으로,
  고마운 말씀이지만 사절합니다.
  하고는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차는그녀의  뒷모습에서 내가 죽인 여인을 연상했다.  그 
여인은 잠시 질식했을 뿐 죽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나는 갑자기 현기증을 일으켜, 비척비척 다시 침대 위에 쓰러졌다.
  나는 주검을 생각한다. 누워 있으면 주검을 생각한다. 혹은 나의 가슴과 배와  허벅다리가 
쌍둥이 기형아처럼 밀착된 여인과의 포옹을 그려 본다. 뿌검의 자세는 하늘을 향해 누워 있
거나, 그렇지 않으면 땅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누워 있는 시체는 눈을 치뜨고 입을  비틀
면서 오직 허공을 향하여 그의 원통함을 호소하고 있었으며, 두  팔을 앞으로 뻗친 채 엎어
진 시체는 손톱으로 흙을 쥐어뜯으면서 땅을 향하여 구원을  호소하고 있었다. 철갑모가 비
스듬히 젖혀린 니의 머리맡에서는 검푸른 풀잎이  금세 물에서 나온 여인의 머리  내온새를 
풍기고, 라격포탄의 파편이 뚫은 너의 상처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태양 밑에서 섹스처럼 난
숙 해진다. 정녕 사랑하는 사람끼리의 포옹이 성스러운 의식일 수  있는 것과 칼이 너의 주
검의 모습은 참으로 엄숙하구나. 너의 의식은 끝났느냐. 너의 의식이 음탕하고 더럽게  보이
기 전에 우리들은 너를 땅 속에 고이 묻어 준다. 그러면 우리들은 영구히 헤어지게 된다. 살
아 남은 우리들은 땅 위에서 너는 땅 속에서 서로가 차츰차츰 얼굴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진숙이 나에게 성을 내고 돌아간 밤, 나는 새벽녘까지 잠을 청하지 못하고 신음했다. 밤새
껏 나는 주검들을 더듬어 보았고 주검의 모양들을 상상해 보았다.  내가 그럴 수 있는 시체
의 모양은 기껏해야 스무 가지를 넘지 못했다. 나는 초조했다. 적어도 내 나이만큼은 주검의 
종류를 이미지 속에서 파악해야 할 무서운 강박의식에 붙들린 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선구는 이튿날 정오 가까이 되어서야 수척해인 얼굴로 돌아왔다. 나는 시체를 생각했지만 
나 자신에 대한 죽음을 예상하지는 않았는데 선구는 죽음에 관하여 한 창녀와 밤새껏 희롱
한 것이었다.
  선구는 자학적인 억지 웃음을 짜내면서,
  만일 갈보년하구 함께 자살했다고 한다면 남들이 비웃겠지.
하고 물었다. 그의 표정은 내가 그중 불행했을 적과 혹사하다고 느껴졌다. 나는 고층건물 위
에서 굴러 떨어지는 환각에 빠져 구원이 차단된 절망을 의식했다.
  자살하려는 이유가 뭣인가.
  나는 그렇게 간신히 반문했다.
  진숙이가 나하고 함께 죽자는 거야.
  그는 비명에 가까운 높은 목소리로 끼익, 끼익, 웃었다.
  자살이 유회인 줄 아나, 농담은 그만하게.
  내 얼굴은 울상이었을 것이다.
  내가 함께 정사하리만큼 진숙을 위하고 있는 줄 아나. 우연히, 진실로 우연히 자기가 죽고 
싶다고 했고, 날더러 동행해 달라는 것뿐이지.
  이기적인 여자군.
  이기적인지 모르지만 예민한 여자지. 그런 얘길 할 수 있을  만한 맹점이 내게 있었을 것
이고, 진숙은 그걸 예민하게 느꼈을 테니까.
  목적이 없다는 것이 곧 사는 의미가 없다는 얘기는 아닐세.
  자네가 이런 일에 대해서 고민할 줄이야 정말 뜻밖이었는데.
  나는 죽지 않아, 안심하게, 진숙이가 한사코 죽겠다면 그걸 방조해 줄 용의는 없지 않지.
  선구는 여느 때의 여유를 다시 찾았지만, 나는 온 혈관의 피가 일순에 얼어붙는 느낌으로 
입술만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자네는 다만 살기 위한 목적이 없을 뿐이니까, 죽음을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에겐 죽어
야 할 이유조차도 발견할 수가 없어.
  죽는 데 무슨 이유 같은 것이 필요한가.
  선구는 모멸에 찬 싸늘한 시선을 쏘아왔다. 그것은 그로부터 처음당하는  것이었으며,그는 
나를 높은 낭떠러지에서 떠밀어 캄캄한 구렁이 속으로 추락시킨 것이었다.
  나는 비듬이 부옇게 일은 머리를 감고 침대에 올랐다.
  나른한 졸음이 눈앞에 검은 장막을 치기 시작했다.
  굉장히 넓은 광장엔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
  모두가 움직이지 않고 못박은 듯 서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전부가 주검들이었다.
  서 있는 주검이었다. 눈을 부릅뜬 채 서 있는 주검들이었다.
  그 속에서 역시 하나의 시체이던 나는  불현듯 서늘한 바람기를 감촉하면서 숨을  들이켰
다.
  그러나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얼어붙은 채로의 주검이었으며, 흰자위를 까붙
인 그들의 눈은 하늘을 향하여 사무친 원한을 풀지 못하고 있었다 
  숨을 쉬며 눈동자를 굴리고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으나, 실상은 주검은 나뿐이고, 다른  것
들은 모두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에 더럭 사로잡히는 것이었다.
  너희들이 가짜 아닌 시체라면 쓰러져  있어야 할 것이다. 너는 우리들  참호 밖에서 얼마 
안 떨어진 소나무 밑에 쓰러져 있었다. 우리는 너의 시체를 끌어다가 쏜송이라도 얹어 주고 
싶었으나 소대장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밤이 되자, 우리들은 다시 소대장에게  요청했
다. 그래도 그는 듣지 알았다. 낮에 소대장은 우리를 타이르기를 적의 저격이 위험하다 했었
다.
  그러나 피아의 총격전도 멎은 어둠 속에서도  그가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었던가. 죽어 버린 너는 아마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전사자를 
한 사람이라도 덜기 위해서였다.
  상부에 보내는 보고서에 한 사람이라도 전사자 수를 적게 기록하기 위한 맹랑한 욕심 때
문이었다. 전투는 벌써 근 열흘째 지구전으로 들어갔고,상부로부터의 명령은 앞으로의  공세
에 대비하여 희생을 최소한으로 막아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소대장은 그의 공명심을 채우기 
위내서는 부하 몇의 생사쯤 그것이 서로 뒤바뀌어져 있어도 무관한 셈이었다.
  나는 그날 밤, 우리 소대의 병력 일일보고가 거짓으로  작성되떠 중대본부로 전해진 사실
을 알았다. 세 명이 죽었다는데도 전사자는 단 하나로 되어 있었다. 이렇게 참호 속에서  대
치하고 있을 동안 죽은 병사도 살아있는 것으로 보고하고, 공격던이 벌어지면 그때 가서 전
사자 명단에 추가할 요량으로 짐작되었다. 말하자면 공문서상 죽음을 다소 유예시켜주는 셈
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들의 소대장은 용맹할 뿐만 아니라 치밀한 계획과 지휘관으로서의 통
솔력이 높이 평가되어 훈장을 타고 중대장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너의 시체는 이틀 동안 우
리들 시야 콕에서 살아 있었다. 소대장은 네가 한시  바ㅂㅂ1 적의 직격탄이라도 맞아 산산
이 날아가 버리기를 바랐을 것이다. 우리는 소대장의 기대와는  다른 간절한 마음으로 너의 
몸뚱이가 없어져 버리기를 빌었다. 그리하여 너는 정말 포탄을  받아 불룩해 뵈던 철갑모자
마저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예측한 대로 너는 그 뒤 고지 탈환 전누에서 비로소 공식적으로 
전사할 수 있었으며 너의 가족에게도 통지가 갔을 것이었다.
  내가 지금 이 시간에 자꾸만 너를 생각하는 까닭을 알  수가 없다. 네가 얼마 동안죽음이 
연기되었던 것과 같이 이미 죽어 버린  나자신도 아직 호적부에 기록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젠 됐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분에겐 잘못된 것인지도 모르죠,
  여자의 목소리가 말했다.
  그건 그렇지 않은 거야.
  다시 남자가 말했다.
  이 분, 처음부터 좀 이상스럼다고 생각했어요 
  여자가 목청을 높였다.
  그들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허지만 정말 뜻밖이었는데.
  상희라고 하던데, 누구예요7
  애인인가,
  그것두 모르세요.
  난 탈주병이바는 것밖에 몰라.
  여러 여자 때문에 고민한 모양이죠 
  여자 때문에 죽는 놈이 어딨어!
  나하구 같이 죽자던 얘긴 거짓말이군요.
  너 때문에 죽자고 해석한다면 오해야.
  나두 첨부터 그렇게 생각했어.
  한 번 자살하려고 한 사람은 자꾸 되풀이한다지.
  진작 죽어야 할 년은 난데.
  내가 죽여 줄까.
  내가 수면제를 먹어도 의사를 데려오지 마세요.
  그때 가봐야 알지.
  그들은 다름아닌 선구와 진숙이었다. 내 의식은 아직도 짙은  연기 속에서 방향을 가려내
지 못한 채 맴돌고 있었으나, 내 청각만은 또렸하게 그들의 대화를 하나하나 놓치지 않았다. 
나는 중요한 전갈을 전화로 받을때 처럼 귓속에 전신경을  집중시켰다. 수화기의 대화는 다
시 계속되었다.
  자기가 되살아났다고 알게 되면, 어떻게 할까요.
  기뻐하겠지.
  나 같으면 챙피해서 다시 죽고 싶을 거야.

  그렇게 죽고 싶으면 죽지 그래, 누가 말리는 사람 있나.
  저이한테 약을 더 먹여 볼까.
  살인이야.
  불쌍하잖아요.
  너나 나에겐 자샅한 용-기도 없다. 도리어 너는 존경해야 돼 
  나는 갑자기 숨이 가빠졌다. 분노와 루치감이 얽혀 가슴을 짓눌렀다.
  광포한 울부짙음이 목을 조여맸다.
  나는 눈을 치뜨고 고개를 애써 쳐들었다.
  나는 취기가 가시지 않은 몸뚱이를 가다듬으며 흔들흔들 침대에서 밑으로 기어내렸다.
  나는 벽의 문에 걸린 누더기 같은 군복을 입으려고 했다. 내 몸은 중심을 잡지 못하여 바
지통 속으로 다리를 끼어넣지 못챘다. 그는 나를 부축해 주었다.
  나는 그에게 미소를 보내 주었다. 거울 속의 나 자신에 웃음짓듯. 밖은 비구름이 낮게  내
리누르는 무더운 밤이었다. 나는 목이 타고 혓바닥이 빳빳이 굳어 있었다. 나의 무거운 군화
는 휘청거리는 무릎에 매달려 간길히 끌리었다. 식은땀이 자꾸만  솟을수록 갈증은 한층 심
해졌다. 나는 손수건을 꺼내어 이마와 목을 훔친 다음 코에 대어 보았다. 땀에 쉰 나의 체취
가 코를 쑤셨다.
  그 내음새는 분명히 내 것이었다.  상희야, 너한테 가서 내가  지닌 모든것을 털어놓는다. 
너의 뚫어진 허파에서 마지막 핏덩이가 쏟아져 나오기 전에 모든 것을 얘기해 준다.
  음식점과 창가가 꽉 들어찬 이  거대한 도시 위에 비가 쏟아지키  시작했다. 나는 얼굴을 
하늘에 쳐들고 혓바닥으로 빗방울을 받아 마셔가며  걸음걸이를 재촉하는 것이었다.




    이역의 산장(지은이:오유권)
  제1장
  
  눈보라가 휘날리는 황토산이었다. 핫바지 바람에 머리를  흩날리며 저편 고개에서 달려오
는 노인이 있었다.  골짝으로만, 골짝으로만 내닫는 노인의 몸짓은 그게 얼핏 사람이 아니라 
토끼가 껑충거린 듯한 몸가짐이었다. 손에 잡힐 것이라곤 잔디  하나가 없는 황토산에서 수
없이 넘어지며 달려오는 탓이리라. 그 노인이 손에 낫이 들려있고 발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
다. 노인의 발자국이 놓인 데마다  금방금방 엉기는 핏방울이 흰 눈속에  빨간 꽃잎을 뿌린 
듯 선연하였다. 그리고 눈보라에 슬려 아련히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사람 살리소오." 그
게 세찬 눈보라속에서 굉장히 힘을  뽑아 부르짖는 외마디 소리일것이었다.  방금 총소리가 
연달아 울렸던 까닭에서리라. 
  어느새 노인이 아래골짜기에까지 왔다고 느꼈다. 문득 얼음장이 깔린 개울에 앞이 막혔다. 
퍼석. 엷은 얼음장 깨지는 소리가 가벼운 음향을 그으며 물살속에 젖어들었다. 잠시후  개울
을 걷는 노인은 그대로 논을 가로질렀다. 그리 넓지 않은 논을 격한 저편 기슭에 조그만 초
가가 한 가우 어지러운 눈발 속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그으며 물살 속에 젖어들었다.
  잠시 후 개울을 걷는 노인은 그대로 논을 가로질렀다. 그리 넓지 않은 논을 격한 저편 기슭에 조그
만 초가가 한 가우 어지러운 눈밭 속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에잇! 고얀놈들!"
  집 앞에까지 다달은 노인이 거의 본능적으로 낫을 팽개치고 대문을 두들기다가 까무러쳐 버렸다.
 한참만에 이 집 여인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나이 마흔 살쯤 나보이는허리가 후릿한 여인이었다. 여
인의 휘둥그레한 눈이 자못 겁내 하는 표정이었다. 대문을 열지 않고 거기 담 밑에  있는 확 위에 올
라서서 조심스레 대문께를 살폈다. 그리곤 가만히 내려서서 대문 앞으로 가 빗장을뽑았다. 분명 좀전
의 총소리에 놀라서 쫓겨온 사람이리라. 여인이 노인을 사랑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피 흐르는 곳부
터 보았다. 그새 선지피가 엉겨서 까맣게 굳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상처만은  대수로운 것이 아
니었다. 탄알이 발뒤꿈치에 와 멎은 것이다. 피를 대강 씻고 우선 솜을 뜯어다 소복이 싸 주었다. 누
구든 간에 우선 살려 놓고 봐야 할 일 같았다, 이불을 갖다 얼마든지 씌워 주었다. 그리고 우선 미
음이라도 한 그릇 끓이려는데 나무가 없는  것이다. 어저께 닭의장을 부셔서 때고 남은  널빤지가 몇 
조각 남았을 뿐이었다. 이거나마 아끼지 않고는 안되는 것이었다. 광으로 갔다. 녹두와 모밀을 한 사
발 가량 냈다. 오랫동안 불을 넣지못한 사랑채 솥이 발갛게 녹슬어 있는 것이다.
  이윽고 불을 지핀 여인의 손이 가뜨다랗게 떨렸다. 또 총소리가 울리기 시작한 것이다.
  쿵쿵 쿵쿵 쿵쿵. 땅따르르.
 아련히 울려오는 총소리가 차차 가까이 들려왔다. 여인은 그만 아궁이의 불을 발로 으깨버리고 쏜살
같이 사랑방으로 들어갔다. 노인의 이불 위에 무명송이를 갖다 허옇게 덮씌웠다. 그리고 신
을 아궁이에 넣어 버린 다음 안채로 달려왔다. 가슴이 산발같이떨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어떻게 되
는 것일까? 눈을 갖다 창구멍에 대고 앞산을 보았다.
 붉은 띠를 띠고 왼켠 골짝으로 새까맣게 달아나는 한떼의 산사람들을향해 이쪽 봉우리에서 간단없는 
총질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좀 뒤에서는 서넛이씩 둘러싼 두 패의  사람들이 연달아 총
소리를 울리고 있었다. 봉우리에는 태극기가 팔락거리고 있고.
 정말 경찰이 들어왔는가부다. 그래서 지금 산사람들을 쫓고 있는 것이리라. 여인은  자기도 모를 눈
물이 주르륵 뺨을 타고 흘렀다. 그와 함께죽은 아들의 피어린 얼굴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
데 웬 사람들이 이렇게 나무 한 그루가 없는 민둥산으로 쫓겨온 것일까.  그러고 보니알만하였다. 필
경 강진 경찰서와 장흥 경찰서에서 합작해 가지고 모는것이리라.
 붉은 띠를 띤 사람들이 그새 봉우리께까지 올라갔다고 느꼈다. 그새 수가 반은 줄어 있었다. 그리고 
군데군데 쓰러진 시체 옆에는 빨간 피가 눈을 녹이며 있었다.
 쿵쿵. 땅따르르-
 그러더니야 산사람들이 아주 고개를 넘어서자 총소리는 그대로 멎고 말았다. 기켠에서 총질을 하던, 
모자에 허연 테를 두른 사람 한 사람이 아래 골짝을 타고 내려왔다. 연해 이쪽을 건너다보는 품이 분
명 자기 집을 목격하고 오는 것 같았다. 여인은 그만 깜짝 일어서서 항아리 속으로  가 숨어 버렸다. 
다시금 가슴이 산발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무릎의 치마도 달달 떨렸다. 그런 여인은  죽음에 대한 불
안과는 다른 또 하나의 두려움이 마음을 태우는 것이다. 만일 몸을 망친다면?  지난번 인민군
이 들어을 때, 여인은 아홉 사내에게 몸을 맡겼던 것이다. 그리고 단지하나이던  아들이 죽고 남편이 
붙잡혀 간 것도 이 때문이었다. 여인은 그 때 놀란 가슴이 아직도 완전히 안정되지  않았다. 샅도 먹
먹하였다. 여인 은 거의 본능적으로 손을 가져디 샅을 가리며 와들와들 떨었다.  그리고 가슴을 조이
며 있는 때였다. 문득 가느다랗게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저 건너 집에 태극기 꽃아라아"
 잠시 후 다시,
 "경찰이다. 저 건너 집에 태극기 꽃아라아."
 필시 개울에 막혀서 못 오고 거기서  소리를 지르는 것이리라. 순간 여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어느새 이마에는 진땀이 배어 있었다. 항아리 속에서 나온 여인은 그러나 선뜻  나가지를 못했다. 다
시 창구멍에 눈을 대고 바깥을 살폈다.
  태극기가 걷히우고 경찰이 가버렸다.
  여인이 태극기를 찾아들고 막 밖으로 나오는 때였다. 웬 또 한 사내가 이젠  동편 고개에서 머리를 
흩날리며 이리로 내달려오는 것이다. 서른 남짓한 장년사내로서 흰 핫바지, 저고리에 검정 조끼를 걸
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사내는 웬 달음질이 또  저렇게 날쌘 것일까. 허연 눈발 속에 서  검정 헝겊 
조각만이 날아오듯 사내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뒹구는 법 한번 없이  잘도 아래 
골짝에까지 내려왔는가 하자 펑 개울로 뛰어들었다. 엷은 얼음장 깨지는 소리가 먼젓번 노인이 건널
때보다 한결 요란스런 음향을 그으며 물살 속에 젖어들었다.
  어느새 사내가 물 속에서 나왔다. 그리고 금세 논을 가로질렀는가 하자,
 "쥔, 문 좀 여시요."
  여인이 이미 각오가 있었던 듯 조용히 문을 열고 나와 냉큼 빗장을 뽑았다,
 "나 좀 감춰 주시요, 아지머니."
   그런 사내의 입가에 게거품이 괴어 있고 턱이 반나마 처져 있었다. 사내는 거의 쓰러질 듯한 머리
를 갖다 여인의 어깨에 기대며, "어서 좀 감춰 주시요." 그런 가운데서도  사내는 기어코 뒷산비탈을 
한 번 돌아보았다. 행여 자기를 쫓은 사람이 그새 산비탈에나 나타나지 않았나 하고.
  여인이 무심코 사내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눈에 묻힌 발이 신을 거꾸로 돌려 신고 있는 것이다. 그
러나 사내의 발자국은 펑펑 날리는 눈으로 해그새 자취가 없어지며 있었다.
  여인이 잠자코 손을 뒤로 돌려 따라 오라는 손짓을 하면서 뒤뜰로 돌아갔다.
  사내가 따라가자, 여인은 바로 굴뚝 옆 항아리 앞으로 가서 가운데 항아리 하나를 들어 옳겼다. 항
아리 밑에 또 하나의 항아리가 있는 것이다.  그 놈은 땅에 묻혀 있었다, 이전 인민군이  들어올 때, 
몸을 망치고 나서 들어가 있던 항아리였다, 사내가 곧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자 여인은 윗항아리를 다
시 제자리에 옮겨 놓고 방금 자기들이  돌아온 발자국을 보았다. 발자국은 여전히 펑펑  날리는 눈에 
덮여 이내 자취가 없어지며 있었다.
  여인이 광 뒷문으로 해 방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었다. 어느새 누런 복장을 한 두 사내
가 대문으로 들어서면서 사람 안 왔느냐는 것이다. 여인은 냉큼 태극기부터 구겨서 품  속에 넣고 마
루로 나섰다.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장총을 들고 한 사람은 죽창을 들고 있었다.
 "온 사람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인의 대답 같은 건 아예  들을 생각도 아닌 듯, 방으로 썩 들어와서  광을 더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런 말들을 하였다. 
 "여하튼 당내 숙청부터 먼저 할걸, 우리의 실책이야.  글쎄 그런 놈을 숙청 않고 두니까 이런  사태 
속에서 빠져 나가지 않아."
 "그래도 머슴을 산 놈이래서 사상이 좀 확고한 줄 알았더니 고 모양아냐. "
 그리고 그들은 광을 나와 부엌으로 들어갔다. 때마침 부엌에서 웅크리고 자던 늙은 수캐가 왕왕, 달
겨들 듯 짖어딨다. 이때껏 총소리가 울려도죽은 시늉만 하고 있다 비로소 사납게 으르렁대는 것이다,
 부엌에는 단지 살강 밑에 물동이가 하나 있을 뿐, 달리 의심 갈 만한곳이 없었다.
 그들이 사랑채로 갔다. 순간 여인은 가슴이 두근 하였다. 거기 있는 노인은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
이다. 죽창을 든 사내가 문을 잦혔다. 그리고 허옇게 덮어 논 무명송이를 쿡 찌르며,
 "이게 뭐야?
 노인이 아야아 하고 가녀린 비명을 울렸다. 그러자 총을 맨 사내가 들
어가 이불을 제끼며,
"이게 누구야?
 여인이 태연히,
 "저의 아부지올시다."
 "늙은 아버지가 왜?
 "방금 날아오는 총알에 발을 상했습니다."
 "정말"
 그들은 여인을 아래 위로 훑어보다가 한참만에야 방을 나와 뒤뜰로 돌아갔다. 여인은 되도록 태연하
려 하였다. 이미 항아리 속의 사내는 자신의 천명에 맡긴 것이다. 좀만에 절그럭,  항아리 깨지는 소
리가 났다. 여인은 다시금 죽은 아들의 피어린 얼굴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절그럭, 절그럭, 위의 세 항아리가 다 깨지는 것이리라. 그리고 이윽하여 그들이  앞으로 돌아 나왔
다. 총을 멘 사내가 대문을 나서며,
 "아무튼 시기는 늦었어."
 '그럼 어서 빨리 가자구."
 한머리 싸움이 지나간 산골짝은 여기저기 시체만이  어지러이 널려 있고 그 위에는 흰  눈이 여전히 
내려덮고 있었다. 노인과 함께 사랑에서 잔 젊은 사내가 이튿날 아침, 여인께  누누히 사의를 표하면
서 가야겠다고 하였다. 집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여인이 그러고말고냐면서 어서 
돌아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노인만은 선뜻 떠날  기색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갖 발을 다친  데서만은 
아닌 듯했다. 돌아갈 곳이 막연해서인 듯했다,
 노인은 이불을 암만 들써도 몸이 자꾸만 떨렸다. 발뒤꿈치도 사뭇 따끔거렸다.  웃목으로 기어가 무
명송이를 끌어다 발치를 쌌다. 그래도 떨리기는 마찬가지였다. 불이나 좀  넣어 주었으면?. 그러는데 
여인이 들어와서, 발 상한 데를 좀 보자고 하였다. 그리고 까만 고약 같은 걸 주면서 무슨 곰쓸개니
까 잠깐 붙여 둬 보라는 것이다. 이전 자기 남편이 나무를 하다가 발을  상해가지고 쓰던 남저지('나
머지'의 경상도 방언, 편집자 주)라고 하였다. 약이 살에 닿자마자 상처가 더  따끔거리고 더 아리었
다, 노인은 두 손을 가져다 발목을 조이었다. 그러므로 해서 아픈 감각을 덜  느끼려는 듯이, 그러다
가, "미안하지만 방에 불 좀 때 주시오"  여인이 난처한 듯 노인의 해쓱한 얼굴을 보며,
 "금매 말이오, 나무만 있으면 때 드리면 좋겠소만."
 그리고 아랫목에 손을 넣어 보았다. 여태껏  이불을 깔아 논 때문일까. 방이 과히  선뜩하지는 않았
다. 그러나 노인은 이제도 무릎을 덜덜 떨며,
 "이렇게 떨려서,,, ,,."
 노인은 꼭이 방이 차워서만이 그런 것은 아닌 듯했타. 상처로 인한 오한이 찬기운을 더하게 할 듯하
였다.
 "금매 말이오. 나무만 있으면,,,- "
 이곳은 비교적 산이 험악한 남도 지방이지만 나무  사정이 좀 달랐다. 잔디 하나가 없는 순  흙메인 
것이다. 어느 쪽으로든지 이십 리를 나간 곳에 비로소 마을이 있고 나무가  있었다, 그것도 나무만은 
동북방으로 나가야 했다. 서남은 붉은 흙메를  넘고 넘어간 저편에 아득한 들만이 끝없이  펼쳐 있는 
것이다. 하필이면 이런 곳에 집이 한 가우 있게 된 것은 그래도 골짝에 있는  몇 뙈기의 전답을 의지
한 데서인지 몰랐다, 나무만은 해마다 전답에서 나오는 짚 보릿대, 콩대 같은 걸로 이어 댔다. 그것
도 흉작인 해는 별수없이 동북으로 이십 리를 나가서 해다 때는 수밖에 없었다.  그게 올해는 난리로 
해 통이 농사를 못 가꾼데다 어찌어찌 거두어 들인 짚단마저 산사람들이 오며가며 불을 질러 버린 것
이다. 난리도 난리지만 흘로 여인이 눈구멍 길을  이십 리나 가서 나무를 해올 수가 없었다.  불가불 
담마루를 싼 마름이며 궤짝 같은 걸  뜯어서 때고 마지막 닭의장까지 부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밥도 단지 아침에 불 한 번을 때 가지고 세 끼 것을 다 지었다. 우선 이렇게라도 죽지  않고 사는 것
만 이 다행이라 여겼다.
  여인네는 인민근이 들어와 가지고 사흘이 지난 뒤에까지도 인민군이 왔다는 소식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남자가 저자에 나가서야 비로 소  소식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여인이 몸을  망치고 식구를 
잃은 것도 역시 이날 밤이었다,
  이곳이 이렇듯 세상 소식이 뜬 것은 이 집이 면 행정에서 전혀 도외시되어  있는 때문이었다. 이십 
리 밖에 마을이 있는 이 골짝은 본래 지역상으로는 상면 학원리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이 집만은 또 
본래부 터 번지도 없고 대지세도 없는집이었다.  이 집 한집을 보고 이십리 골짝에까지  조사해 가는 
관리도 없고, 연락해 주는 구장, 반장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젊었을 적에 이 집을 마련한 이 집 남자 역시 그런 문서적인 것에는 흥미가 없는 위인이었다. 그저 
일하고 먹는 것만을 귀하게 여길 뿐 그런 집문서나 호적 같은 것은 또  있어서 뭣하느냐는 것이었다. 
물론 도민증도 있을 리 없었다. 그렇대서 또 아쉴 것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전답을 가꾸는 한
편 장날이면 겨우 저자에나 나가서 명태 마리나 사가지고 오는 게 고작인 때문이었다. 세상 돌아가는 
속도 역시 그 저자 에나 나가서 알 도리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걸로써 만족했던 것이다.
  노인은 거푸 사홀 동안을 꼼짝 않고 누워 있었다.
  아침에 더운 밥 한 술을 먹으면 낮과 저녁은 그대로 냉반이었다, 반찬은 겨우  간물로 숨을 죽였을 
뿐인 새까만 배추김치와 고치조림과 간장 뿐이었다.
 어찌어찌 몸을 일으키고 문을 열어 보았다. 선뜩 찬바람이 몸에 와 휘 감겼다.  오늘따라 바깥 날씨
는 한껏 푹하고 고드름이 방울방울 녹고 있는데도. 이내 문을 도로 떠쳐 버렸다. 창구멍 사이로 절로 
들어비치는 바깥 사람의 그림자가 있었다. 여인이었다. 그새 눈이 녹고 차차 마르며  있는 마당 가운
데서 무슨 풀을 먹이고 있었다. 그리고 여인의 뒤에는 늙은 수캐가 앞다리에 턱을  괴고 느물느물 여
인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춘디 그만 들어가거라."
 잠시 후 여인이 개에게 말하자 개는 곧 기지개를 한 번 크게 켜고 나서 어슬렁어슬렁 부엌으로 들어
갔다.
 노인은 문득 창구멍에서 눈을 돌려 방바닥을 보았다. 바야흐로 눈부신 햇살이 창구멍으로 새어 들어
와 방바닥에 조그만 동그라미를 그렸다.
 손을 갖다 거기에 대 보았다, 따스했다. 그러다 노인은 다시 문을 열어잡고 밖으로 나오면서,
 "거, 자식 하나 있는 것이 꼭 원수로 생겨났던 것이로구나!"
 한숨과 함께 속으로 뇌까렸다. 노인이 짜장 이곳으로 내달아온 것은 '빨치산'이 식구들을 방에 가두
어 둔 채 집에 불을 질러 버린  때문이었다. 노인의 아들 득쇠가 그 마을 좌익  우두머리로 있으면서 
여당원과 정을 맺고 지냈던 까닭에서였다.
 밖으로 나온 노인은 열이 약간 내렸을 뿐인 발을 절축절축 떼 옳기면서 대문께로 나아갔다.
 여인이 풀을 먹이다가 까만 눈을 이쪽으로 돌리며, 아니 춘디 뭣하러 나가느냐고 물었다.
 노인의 대답이 없으니까,
 "들어가시요."
 그러나 노인은 아무 말없이 대문에 의지하고 이전 날 자기가 달려오던  산비탈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힘이 적이나하면 꼭 가서 식구들의 재 묻은 얼굴이라도 한번 보았으면 싶은 것이다. 만일 그 
재 묻은 얼굴이라도 보지 못하면 뼈라도 한번 만져 봤으면 싶은 것이다. 그러나 노인은 더 이상 대문
께에 서 있지 못했다. 눈부신 햇살을 보기가 저주스러운 것이다. 식구가 그렇듯 불타 죽은 마당에 무
슨 낯을 들고 어디로 갈것인가 싶었다. 노인은  차차 맥이 풀리자 그 자리에 덥썩 주저앉아  버렸다.   
  햇살이 노인의 눈꺼풀에 와 어지러이 스며들었다. 눈이 자꾸만 감겨졌다. 아른아른한 그림자들만이 
어둠 속에서 더욱 어지러이 맴돌고 있는 것이다. 그러는데 무에 덥썩  어깨에 부딪히며, "노인양반이 
들어가시락 해도"  여인이 와서 일으켰다. 노인이 희멀건 눈을 돌려 멍하니 여인을 쳐다보았다.
"....."
"어서 들어갑시다."
여인은 첨부터 이 노인의 곡절을 물으려 하지 않았다. 마치 자기의 곡절을 이야기하지 않으려는 것과 
같다. 그러면서 아무튼 이 노인이 여기를 떠나서는 갈 곳이 없는 사람이거니 하는  것만은 짐작이 갔
다.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세상 소식이 그렇게 뜬  골짝에서 더욱 혼자 남겨진 여인은 선과 악  외엔 
세상의 다른 눈치를 몰랐다, 오늘도 어쩌다가 자기  집 앞을 지나가는 사람이 한 사람 있어,  그에게 
물은즉, 경찰이 들어온 뒤로 차차 길도 트이고  피난 간 사람들도 돌아온다고 해, 여인은 오직  자식 
잃고 남편 붙들려 간 것만을 슬퍼할 뿐, 이 노인을 도우는 데는 딴 의심 같은 것이 있지 않았다.
 방으로 들어온 노인은 다시 무명송이로 발치를 싸고 이불을 들썼다.
 "참, 무자상팔자라드니 놈이 꼭 원수로 생겨났던 것이로구나?
 겨울 해가 서편에 기울었다고 느끼자 땅거미가 깃들이고 저녁 찬바람이 문풍지를 울렸다. 노인은 웅
크린 몸을 더욱 웅크리고 이불자락을 샅샅이 여미었다. 무엇보다 발뒤꿈치가 쑤시고  등이 시려서 견
딜 수가 없는 것이다. 등을 갖다슬며시  벽에 붙여 보았다. 사람의 등과는 아예  달랐다. 바람벽에서 
내돋치는 찬 기운만이 더욱 등을 시리게 할 뿐이었다. 사람이라도 한 사람 있었으면.... 훈김이 더없
이 그리웠다. 마침내 노인은 이불을 제끼고 일어났다. 밤벌레의 울음소리가 한결 자지러졌다. 밤벌레
의 울음소리가 자지러질수록 한층 더해 가는 밤의 고요가 노인의 허허한 심회를 더욱 산란케 하였다.
 이윽고 바지를 추기고 밖으로 나왔다. 차거운 달빛만이 휑휑한 토담엔 하얀 눈이 어지럽도록 눈부셨
다. 그리고 간혹 반짝이는 눈의 모서리가 초롱초롱 빛났다, 어디를  둘러봐도 검푸른 산봉우리들만이 
밤하늘 아득히 도사리고 있을 뿐 안채는 죽음처럼 잠잠하였다,
 노인이 절축절축 안방으로 건너갔다. 사람의 훈김도 훈김이지만 하루 한 차례씩이라도 불을 때는 안
방은 아무래도 덜 차고 푸근할 것 같았다. 무람없는 짓이긴 하지만 잠깐 웃목에라도  앉아서 몸을 녹
이리라 하였다.
 사실 손발이 마비되듯 얼어 굳은 노인은  지금에 몸을 따스롭혔으면 하는 생각밖에 다른  염치 같은 
것은 잊고 있었다.  봉당에 을라서서 가만히 문을 열자 달빛이 웃목 농에 들이비쳤다. 그뿐  달이 비
치지 않은 곳은 도리어 깜깜하였다. 문을  닫치고 들어와 가만히 방바닥을 짚어 보았다.  사랑방보다 
약간 훈훈하였다. 그러나 휑뎅그렁한 기미는 다를  데 없었다. 역시 혼자 방이어서 그러는  모앙이었
다. 가만히 한 손으로 아랫목을 더듬어 보았다. 사람이 없었다.
 "이런!"
 그리고 다시 방바닥을 두루 더듬어 보았으나 방바닥은 대자리만이 우틀두틀할 뿐  사람이 없는 것이
다. 순간 노인은 와락 무서운 생각이 들면서 머리끝이 곤두섰다. 몸을 가만히  돌이키고 다시 구석을 
더듬거려 보았다. 선뜻 나무조각 같은 게 만져졌다. 물레였다. 그리고 옆에는 실뭉치가 몇 개 궁굴어 
있을 뿐이었다. 노인은 가만히 일어서서 다시 벽을 더듬거려 보았다. 병과 인두와 바가지, 그리고 여
인의 치마가 한 벌 걸려있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방금 여인의 치마가 잡힌  때만은 적이 마
음이 따스러웠다. 여인이 분명 있기는 있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혹 뒷간에라도  가지 않았을까? 그러
나 여인은 뒷간에도 가지 않았다. 알 수없는 일이었다. 설마 광이나 부엌 같은 데서  잘 리는 없겠는
데. 그러자노인은 그만 자기도 모른 새 방을 나와서 사랑으로 건너오고 말았다.  어두운 방에서 무에 
곧 쫓아나오는 것 같은 무서움을 느끼면서.
  이튿날 아침.
  여인이 여느 때처럼 밥상을 가지고 왔다.  역시 아침밥은 김이 무룩거리는 따순 밥이었다.  노인이 
새삼스레 여인의 갸름한 얼굴을 바라보며,
 "아니, 저녁에는 어디서 주무시요?"
하고 말이 곧 나오려는 걸 꿀꺽 삼켰다. 간밤에 놀라고 궁금해 하던 것을 생각하면 곧 묻고도 싶었으
나 그대로 참은 것이다.  밥상을 들여 논 여인이 상머리에 앉으며,
 "그새 발은 좀 나으신 게라우?"
 "예, 그저 그만하요."
 "어째, 약은 자주 갈아 붙이지요?"
 "예, 갈아 붙이구만이라우."
 "겨울이라 놔서 그것이 그렇게 쉬 안 낫은 것이요."
 노인은 여인이 자꾸 말을 건네는 게 귀찮았다. 단지 하루 한 끼인 따슨밥을, 따술 때 얼른 한술이라
도 더 떠 넣어서 속을 풀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러는데 여인은 거듭, 
 "참, 난리도 난리도 그렇게 허한 난리는 첨 봤소예."
 그러자 노인이 입의 밥을 냉큼 삼키고,
 "나, 속이 떨려서 근디, 밤 좀 묵고 이야기합시다."
 "아니 이불이 저만한디 그렇게 춥습디여. 나는 엊저녁에도 별로 춘지 모르고 잤소예."
 순간 노인은 다시금, 엊저녁에 어디서 잤느냐고 물으려다가 역시 그만두었다. 그리고 여인의 얼굴을 
새삼 또 한 번 바라보았다. 눈동자가 까만  여인의 갸름한 볼은 사십 대의 여인 같잖게  팽팽하였다. 
그리고 어디라 없이 우수가 어린 표정엔  도리어 누긋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런 여인의  오른편 턱에 
웸 횐 털이 한올 붙어 있었다. 노인이 얼핏  웬 털인가 해서 다시 한 번 쳐다보는 동안  털은 때마침 
문틈으로 새어드는 바람에 날려 상 옆으로 가 떨어졌다.
  해가 저물고 다시 밤이 엄습했다. 노인은 어젯밤의 훈김과는 다른 또 하나의 호기심이 마음을 채웠
다. 여인이 도대체 어디서 자는고?
  자정이 가까울 즈음해서 다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바깥은 여전히  푸른 달빛만이 휘영청하게 
밝고 하얀 눈이 어지럽도록 눈부셨다. 봉당을 지나 안방으로 들어갔다. 어젯밤 모양 방바닥을 더듬거
려 보았다. 여인이 없었다. 가만히 무릎걸음으로 다시 돌아가면서 벽을 더듬어  보았다. 그래도 여인
은 없는 것이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도대체 어찌된 사람일꼬?...  그러다가 노인은 문득 
자기 모른 새 샛문(부엌과 방 사이에 있는  문)을 열어 보았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부엌문 
틈새로 새어드는 달빛이 한줄기 부뚜막을 비쳤다.  그리고 그 부뚜막에였다. 웬 사람들 둘이  이불을 
들쓰고 누워 있는 것이다.
 "아하!"
 노인은 두루 짐작이 갔다. 저래 뵈도 한 사람은 분명 여인이고 또 한사람은 분명 사람 아닌 개일 거
라는 짐작이 그러고 보니 아침에 여인의턱에 횐 털이 붙어 있던 것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노인은 
한편 얄미웁고 한편 반가웠다. 하나는  여인이 아무리 쓸쓸하기로서니 하필이면 개하고  함께 자는가 
하는 반감이요, 다른 하나는 여인을 찾은 안심과 기쁨이었다.
 잠시 후. 노인은 사랑방으로 가 이불을  그러안고 안방으로 돌아왔다. 이왕 비어 둘  바에야 자기가 
이 방에서 자리라는 생각이었다 그런 노인은 밤이 한껏 깊은데도 졸음이 쉬 오지  않았다. 귀를 갖다 
가만히 아랫목 벽에 기대고 부엌의 인기척에 귀를 기울이었다. 가녀린 두  입김의 맞부딪히는 소리가 
또렷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순간 노인은 야릇한 분노가 물결쳤다.
 "에잇, 고얀 세상들!"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애써 부엌의 인기척을 잊으려고 하였으나 신경은 자꾸만 날카로워지는 것이다.
 문득 아픈 발뒤꿈치를 만져 보았다. 어느새 또 뚱뚱 부어 있었다. 날새다시  곪긴 모양이었다. 어서 
이 상처가 나았으면 좋겠다. 어서 나아가지고 저놈의 개라도 때려 잡아서 소복을  좀 했으면 좋겠다. 
그러자 노인은또 죽은 식구들의 얼굴이 어지러이 떠올랐다. 어느 날 개울가에서 끄슬려 죽은 개들 모
양, 새까맣게 타 죽었을 얼굴들이. 힘이  적이나하면 지금이라도 곧 쫓아가서 잿더미가 된  집이라도 
한번 보았으면 싶었다. 그러나 노인은 차마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어쩌면 자기는 이 세
상에 영원히 얼굴을 내놓을 수 없는 죄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을 잊자. 그리고 자
자.
  굳이 잠을 청하였으나 졸리지가 않았다. 부엌의 인기척이 자꾸만 신경에 거슬리는 것이다. 사실 부
엌에서는 무슨 소리 하나 들릴 리 없는 데도. 가만히 일어나서 창구멍으로  부엌을 내다보았다. 부엌
문 틈새로 새어 드는 달빛이 한 줄기 부뚜막을 비쳤다. 그 위에서 여전히 여인과  개가 자고 있는 것
이다. 노인은 불현듯 쫓아가서 개를 걷어차 버리고 싶었다. 여인도 떼밀어 버리고 싶었다.
 "순, 고얀것들 같으니라고!"
  노인은 사랑방에서 자고 난 때보다 몸이 훨씬  가벼웠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안방으로  가 잤
다.

  제2장

  여인이 나무를 장만하였다. 봉당의 마룻장과 광에 있는 헌 농을 부순것이다. 힘이 겨웁더래도 웬만
하면 나무를 좀 하러 가 봤으면 하는 것이나 여인으로서는 이십 리 길을 가서 도저히 해올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말이 이십 리지, 이십 리만 가서는 또 곧 나무를 해올 수도 없는것이었다. 인가가 가
까운 곳은 모조리 근처 마을 사람들이 해다  때고 거기서도 다시 오 리를 더 나가야  했다. 눈구멍도 
눈구멍이지만 짧은 겨울해에 왕복 오십 리를 걸어서 나무를 해온다는 것은 도저히  엄두도 못낼 일이
었다. 이전에 자기 남편만 차더라도 아침을 일찍이 먹고 급하게 나서도 해가 다 저물어서야 돌아오던 
것이었다. 그러고도 겨우 두 끼나 세 끼 땔 나무밖에 못해 오던 것이었다. 농짝을  부순 여인은 몹시 
서운하였다. 우지끈우지끈 부서지는 농 소리가 마치 어느 몸 한쪽이라도 부서지는 소리 같았다. 비록 
헐고 케케묵었을망정, 밤마다 남편과 함께 닦고 윤을 내던 농인 것이었다. 여인은  불현듯 노인을 도
우는 것이 뉘우쳐졌다. 당신의 밥까지 짓노라고 나무가 얼마나 더 드는지 아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올 데 갈 데 없는 노인에게 차마 모진  말은 할 수가 없었다. 다만 이번에 부순 나무로서는  한 스무 
날 남짓 땔 수 있다는 것과 그 뒤에는 어찌해야 하느냐는 걱정이 있을 뿐이었다.  이젠 정말 불땔 것
이라곤 널빤지 하나가 없는 것이다. 어디를 둘러봐도 질그릇이 아니면 사기그릇, 사기그릇이 아니면
쇠것만이 휑뎅그렁하게 놓여 있었다. 그러고도 오히려 땔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대문과 장농과 
헌 솜이 들어 있는 광우리며 바구니뿐이었다.
  여인이 이날부터 밥을 저녁에 지었다. 아침에 짓던 밥을 저녁에 지은것이다. 그림 이제부턴 저녁에 
불을 때서 세끼 밥을 다 지으려는가 보군. 노인은 은밀한 기대가 마음을 채웠다 아침에 밥을 지을 때
보다 방이 워낙 따술 것이라는 희망이었다.  게다 모처럼 저녁까지 따순 밥을 먹은  노인은 오랜만에 
밥을 먹은 속 같았다. 비로소 땀이 후터븐하게 나고 삭신이 풀리는 것이다. 그러자 끄르르 트림을 하
고 슬며시 배를 쓰다듬어 보았다. 우굴쭈굴한 뱃가죽이 적이 불룩하였다. 그럴수록 슬슬 배를 쓰다
듬으며 노인은 아직도 자기가 이만큼 건강하다는 사실에 일종의 희열같은 걸 느끼는 것이었다.
 한 가지 꺼림칙한 것이 있었다. 엷은  뱃가죽이 유난히 깔깔한 것이다. 노인은 그제야  자기가 달포 
동안이나 멱을 안 감았다는 것을 알고 버럭 구역이 치받히려 하였다. 지금은 비록 갈 데 없는 몸이지
만 육순이 지난 작년까지도 귓속에 때꼽재기 하나 안 끼던 노인인 것이었다. 열흘이  멀다고 물을 데
워서 멱을 감고 손톱을 잘랐다. 내일쯤은 별일이 있더래도 멱을 좀 감으리라.
  이튿날 아침, 노인이 밥상을 가지고 온 여인에게, 어째 목욕물 한 바가지만 데워 줄수 없느냐고 물
었다. 나무가 귀한 것을 빤히 알면서도 이런 말씀 드리기가 안되었지만 몸이 하도 군지러워서 그러니 
쪼끔만 데워 달라고 하였다. 여인이 생각하는 눈치이자,
 "쪼끄만 디어 주시요. 하도 끄끕해서 그요."
 "글씨라우. 나무도 나무지만-----"
 여인이 계속 망설이다가,
 "성찮은 몸에 물을 묻히면 덜 졸 것인디 그요."
 "상처에는 물이 안 가게 씻을라우. 쪼끄만 디어 주시오."
 "그러시요, 그럼."
 노인은 나무보다 도리어 몸을 염려해 주는  여인이 고마웠다. 그리고 이날 밤만은 부엌의  인기척에 
신경을 안 쓰고 편히 잘 수가 있었다. 낮에 목욕을 한 데다 방이 따뜻해서였다.  아니면 고루 염려해 
주는 여인을 믿는 마음에서인지도 몰랐다. 좌우간 딴 신경을 쓰지 않고 일찌감치 잠이 들었다.
 밤이 얼마나 깊었을까. 노인은 푸뜩 샛문 긁히는 소리에 잠이 깨었다.
 삐드득 삐드득 삐드득.
 분명 고양이가 아니면 개가 허비는 발소리일  것이었다. 그러나 노인은 처음부터 이 집에  고양이가 
있는 것은 보지 못했다. 문을 허비는 발 소리도 투박스러운 것이다. 저놈의 개가 오늘밤엔 웬일일까. 
그러는데 다시,
 삐드득 삐드득 삐드득.
 노인은 개의 문 허비는 소리가 세상없이 방정맞게 들렸다.
 "저놈의 개새끼가!"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도로 잠을 청하려 하였으나 개의 문 허비는 소리가 좀체 멎지 안는 것이다. 그
러자 자기 모른 새 벌떡 일어나 쿵쿵 샛문을 두들기며,
 "이놈의 개새끼야, 자빠져 자거라."
 순간 개가 허비기를 그만하고,
 왕왕
 달겨들 듯 으르렁댔다.
 "고얀 놈의 개새끼 같으니로고!"
 그리고 막 누웠던 자리로 돌아오는 때였다. 무에 나무토막 같은 것이 발에 밟혔다고 느끼자, 노인은 
그만 벌떡 뒤로 나가둥그러졌다.
 쿵
 뒤통수가 바람벽에 부딪치면서 찌잉 하고  울렸다. 한참만에 정신이 들었다. 가만히  몸을 일으키고 
발치를 더듬어 보았다. 선뜻 손에 잡히는 게 있었다. 밋밋한 몽둥이 같은 것이었다.  손을 차차 위로 
짚어 보았다. 밋밋한 몽둥이가 점점 커지더니 문득 머릿박이 잡혔다. 순간 노인은  오싹 소름이 끼치
는 걸 느끼면서 냉큼 손을 거두고 말았다.
 성냥을 그어서 불을 켰다. 여인이 거기에 누워 있는 것이다.
 "아하!"
 노인은 그제야 두루 알 것 같았다. 개가 문을 허비는 것이며 아침에 지어 오던 밥을 저녁에 짓는 까
닭도. 그림 여인도 이제부턴 방에서 자려는가보군.
 노인의 발끝이 여인의 발끝에 뻗치었다. 그러니까 노인과 정 구십 도의각도를 이루고 여인은 머리를 
웃목으로 향해 누워 있는 것이다. 말간  콩기름불이 쪽빛 이불 위에 미끄럽도록 반들거렸다.  여인의 
오른편 머리맡에 물레가 있고 그 옆의 사발옹배기에는 실뭉치가 들어 있었다. 여인은 과연 자고 있는 
것일까? 노인이 이불자락을 턱 아래까지 내리고  가만히 여인을 보았다. 이켠을 향하고 누운  여인의 
얼굴이 코 위까지 이불에 가려 있었다. 그리고  분명 눈이 감겨 있었다. 허지만 정말 자고있는  것일
까? 노인은 이런 생각을 늘 되풀이하다가 훅 입으로 불을 꺼버렸다. 그리고  불과는 반대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여인의 감은 눈은떠질 것이라고 믿었다.
  다음 날부터 노인은 여인과 함께 자게 되었다. 불행중 다행이 아닐 수없었다.  저녁 설거지를 하기
가 바쁘게 여인이 샛문을 꼭꼭 걸어 잠갔다. 개가 못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였다.
  지난 여름.
 하룻밤 사이에 식구를 잃어버린 여인은 문득문득 간이 벌름거리고 아랫도리가 떨렸다. 자기 모른 새 
손을 가져다 아랫배를 쓰다듬어 보았다.그때마다 깜짝 소스라치면서 여인은 예의 아홉 사내들이 눈앞
에 아른거리곤 하였다. 꼭 죽고만 싶은  것이다. 그러나 여인은 차마 죽지는 못했다.  도리어 열흘이 
지난 뒤에는 논에 나가 김을 매고 피를 뽑았다. 죽은자식이나 붙들려간 남편에게 참으로 면목이 없다
고 생각하였다. 이렇게해서 꼭 이녁 혼자만 살려는 것 같아. 그러나 그런 미안한 생각 이상으로 논을 
매게 하는 것이 있었다. 자기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다가 여인은 문득 아들의  무덤으로 달려가 한나
절씩 쓰러져서 흐느끼곤 하였다, 그런 가운데서 이레구레 여름 한철이 다 가고 소슬한 가을바람이 여
인의마음을 더욱 쓸쓸하게 하는 때였다. 개가 밤마다 방으로 들어오려고 문을 허비적거렸다. 일곱 해 
동안을 이집에서 살아온 개였다.
  이 집에 온 개는 대개들 제 명대로 살았다. 십이 년, 십오 년-이렇게들 살다가  죽은 것이다. 식구
가 단촐한 탓도 있지만 외딴 곳에서 사는 것이 노상 외롭지 앉는 것도 아니어서  평생토록 개만은 사
랑해 온 것이다. 언뜻하면 한 이불 속에서도 재우고 곧잘 한자리에서 밥을  먹이기도 하였다. 그대로 
한 식구인 거나 다를 배 없었다. 그러나 여인은 식구를 잃은뒤로는 개를 하룻밤도  방에 들이지 않았
다. 그저 낮이면 벼를 훑고 키질을 하는 한편 밤에는 무명을 앗다가 그대로 쓰러져  자곤 하였다. 그
러던게 그즘엔 밤이며 무명을 앗고 몸이 피곤해도 졸음이 쉬 오지 않았다. 밤이  깊어 갈수록 정신만 
한결 맑아 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삐드득 삐드득 문을 허비는 개의 발소리가 한갖 시끄럽게만 들리지 
않았다. 벌레의울음 소리와 함께 한 율조를 띠고 애련하게 들려오는 것이었다.
  그러한 어느 날 밤이었다. 여인이 문을 열어 주었다. 개가 훌떡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개는 방에 
들어온 지가 정말 오랜만이란 듯 천장이며 벽을 느물느물 돌아보다가 예전처럼 등잔 아래로 갔다. 그
리고 이내 앞다리에 턱을 괴고 눈을 반나마 감았다. 개는 허리가 날씬하고  흰털이 매끈하였다. 게다 
몽당한 주등이하며 가무스름한 콧등이 적이 온순해 보였다. 여인은 어디라 없이  방이 아늑해지는 듯
하였다. 그리고 혼자 있을 때보다 차차 훈김도 더했다. 급기야 피로가 탁 풀리면서 온 삭신이 개나른
하였다. 그런데도 짜장 졸음은 오지 않았다. 불을 껐다. 개의 숨쉬는 소리가  가냘프게 들렸다. 문득 
자기 아닌 또한 사람이 방에 있다는 착각을 일으킨다. 든든하였다. 이튿날 새벽, 여인은 잠결에 깜짝 
몸을 돌이켰다. 개가 바로 자기 옆에와 누워 있는 것이다. 희괴하였다. 개 자신이  옆으로 왔는지 자
기가 잠결에 개를 끌어왔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깜짝 몸을 돌이킨 여인은 그러나 개를 냉큼 떼밀
어내지는 않았다. 잠시후 손을 뒤로 돌려  가만히 개의 등을 만져 보았다. 자기  체온보다 따뜻했다. 
털도 탐스러웠다. 따뜻한 훈김이 손을 타고 차차 온몸에서 서려뻗쳤다. 여인은 다시  손만 아니라 팔
을 온통 갖다 개의 등에 얹어 보았다. 좀 만에 몸을 개 앞으로 돌이켰다. 개의  배꼽이 마치 자기 배
꼽 있는데 와 닿았다. 여인은 선뜩하였다. 그런데도 몸을 다시 돌이키지 않았다. 내내 그만큼 가까이 
대고 있었다. 그러다 여인은 슬며시 개를 그러안았다. 꼭 들어안겼다. 순간 여인은 이상한 충격이 머
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자 개를 갖다 저만치 떼밀어 버렸다. 개가 떼밀린 채 앞다리 하나를 두어 
번 허우적이다가 그대로 눈을 감았다. 이 날 밤부터 개는 방에서 잘 수 있는 운을 얻은 것이다.
  여인이 잠을 깰 때마다 개가 옆에 와 있었다. 자연 손이 개한테로 갔다.  아무래도 안되겠다. 이러
다가는 일 나겠다. 마침내 여인은 개를  다시 부엌으로 내쫓고 혼자 잤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었다. 
그 전에 개를 데리고 자기 전보다 훨씬 허전한 것이다. 꼭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것 같았다. 물론 훈
김도 덜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개를 다시 방으로 들일 수도 없었다. 밤마다 남편과  함께 자던 잠
자리인 것이다. 노인과 여인은 해 저물기가 바쁘게 문을 걸어 잠갔다.
  여인이 등잔을 내려다 심지를 손보고 나서
 "어디 발 좀 봅시다."
  노인이 바지가랑이를 올리고 상처를 끌러 보이자,
 "그새 많이 낫기는 나은 것 같소만."
  여인은 상처를 똑똑이 들여다보노라 이마에 잔주름을 지었다, 푸르스름한  상처가 가장자리만은 이
미 딱정이가 한물 지면서 가운데는 오히려 빨갛게 패여 드는 것 같았다. 차차  살리차서 곱이 걷히는 
탓이리라. 여인은 마저 남은 약을 갖다 바르고 다시 솜을 두툼하게 쌌다. 그리고 잠시  후 노인이 벗
은 핫옷을 뜯기 시작했다. 사뭇 입은 채 뒹군 노인의 옷은 때가 범벅되어 있었다.  유독 목덜미나 동
정께는 실오라기마저 까매서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여인은 추잡하다는 생각은  아예 없었다. 도리
어 지난날, 개 냄새를 코에서 몰아내고 사람 냄새라도 흠씬 맡으려는 듯이 옷을 뜯다 말고 연해 코로 
가져가곤 하였다.
 불을 끄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노인이 등을 여인에게로 돌려대며,
 "옷을 갈아 입어서 근지, 콕콕 쑤신 것 같네. 등 좀 긁어 주소."
 여인은 차차 말을 낮추어서 하는 노인에게 한결 허물없는 애정을 느끼면서 슬슬 등을 긁자,
 "시원하게 좀 뜩뜩 긁소."
 "나 손톱이 없어서 그요."
 "그래도 좀 뜩뜩 긁소"
 "...."
 "바로 그 옆에 좀 긁소"
 "....."
 "쪼끔 우게"
 "엣다, 엣다 시원하다."
 "당신은 늙었어도 나보다 더 등이 통통하요잉."
 "나는 다 늙었제 뭘!"
 "그래도 아직도 한 십 년은 더 살겄소."
 "고럼 자네 복이제 누구 복이여."
 "피이."
 그러자 노인은 여인이 며칠 전엔가 자기 남편은 인민군한테 붙들려 갔다고 하던 말이 얼핏 생각나,
 "그럼 자네는 흑 남편이 안 죽고 살아오면 어쩔란가?"
 곧 남편이 돌아오면 자기는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다. 여인은 아무 말 알고 있으니까,
 "나를 더 생각하소이."
 여인이 한참만에,
 "그럽시다."
 그러자 노인은, 이 여인이 아무리 물어도 자긴 남펀 불들려 간 곡절을 말하지 않아,
 "대관절 자네 남편은 어쩌다가 그랬단가?
 여인은 차마 그날 밤의 광경을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고  무서운데다, 그 맡
은 사내들에게 욕을 당한 이야기를 누구한테 할 수 있으랴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도 자꾸만 이런 
곡절을 물으려고 하는 노인이 마땅치 않아,
 "그런데 당신은 뭘라고 꼭 그런 것을 알락해쌌소. 자기 운이 나뻐서 잽혀 갔제 어째라우."
 "치이, 이렇게 살면서 그런 말 좀 물어 보면 못쓴가."
 "금매, 아나 마나 소용없는 말을 윌라고 물어싸라우, 그럼 당신은 어쩌
다가 이런 디까지 쫓져 왔습디여?"
 되잡아 물었다.
 "......."
"당신은 당신의 이야기나 해주고 남의 이야기를 듣든가 마든가 하시오."
 자기의 곡절을 이야기하지 않으려는 것은 노인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집이 불타 버려서 쫓겨 왔노라
고 하였을 뿐, 식구들의 불타 죽은 정상이며 그 꼬투리 같은 것은 차마 말하진  못한 것이다. 어쩌면 
자기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빛을 볼 수 없는 죄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마음을 억누르고 드
는 것이었다.
  노인이 이곳으로 달려오던 날.
 마을은 그때까지도 좌익 노래를 부르며 금명간에 남반부가 온전히 떨어지리라는 선전이 자자하였다. 
바로 그날 낮이 갓 지나서였다.
"년놈들이 인민전선에 나와서 함께 붙어다녀."
  어느새 누런 복장을 한 빨치산 두 사람이 사립문으로 들어서는 것이었다. 곧 경찰에 쫓겨가는 빨치
산들이 득쇠와 여당원의 비행을 알고 숙청을  하려는 것이다. 노인이 냉큼 뒷문으로 나왔다.  그리고 
자기 모른 새 처마의 낫을 빼 들었다. 그와 거의 동시에 곁방에 있던 득쇠와  여당원도 역시 곁방 뒷
문으로 해 뒤뜰로 빠져 나왔다.
 어느새 빨치산이 뒤뜰로 돌아온 것이다,
 쿵.
 여당원이 직통으로 머리를 맞고 그 자리에서 숨이 졌다.
 "저런!"
 순간 노인과 득쇠는 거의 때를 같이하여 울을 넘어서 뒷산으로 내닫기 시작했다.
 따다다다... .
 총소리가 그들을 향하여 연거푸 울렸다. 그들은 두 주먹을 부르쥐고 비탈로만 비탈로만 죽음 한하고 
내달았다. 거반 혼들이 나가 있었다. 봉우리께까지 다달은 노인이 문득 고개를  돌려 보았다. 어느새 
득쇠가 까마득 저어편 봉우리를 넘어 동으로 동으로 내달리는 것이다. 허연 눈발이 그새 득쇠를 감추
어 가고 있었다. 노인이 곧 득쇠 쪽으로 방향을 돌리려다 말고,
 "빨리 달아나거라아."
 그리고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빨치산이 둘러싼 마을에서 연기가 두 군데 자욱히 오르고 있었
다. 사이사이 불꽃도 솟구쳤다. 얼핏 본눈에도 분명 자기 집과 이전 구장질을 하던 오 선달네 집이었
다.
 "아이꼬들 다 죽네에!"
 노인은 봉우리를 넘어서자 한참 동안 정신을 잃고 눈 위에 나가 쓰러졌다. 허연 눈송이가 노인의 얼
굴 위에서 점점이 녹아갔다.
 "아이고들 다 타죽네에!"
 노인이 거듭 부르짖으며 몸을 일으켰다. 한사코 정신만은 안 잃어야겠다. 안 놓아야겠다. 그리고 다
시금 고개를 넘고 또 넘어온 곳이 이 여인네 집인 것이었다
 그런 노인은 그 날의 광경을 문득문득 이렇게 떠올려 보았다. 그 날 자기 방에는 분명 할멈과 세 딸
년과 지아비 없는 손자놈이 앉아 있었던것이다. 할멈은 꾀죄죄한 무명 치마에 손자놈을 앉혀 놀고 곁
두리를 먹이고 있고 셋째 딸은 또 마을에 노래를 배우러 간다고 문 앞에서 머리를  뎄고 있고 나머지 
두 딸년은 샛물켠에서 실꾸리를 감고 있다가 급기야 총소리가 울린 순간, 할멈은 할멈대로 딸들은 딸
들대로 다 같이 놀란 눈을 자기에게 보내던 것이 아닌가. 어찌해야 좋겠느냐는 듯. 그 초조하고
다급한 눈동자들을 보내던 찰나,
 "가만히들 있거라"
 그리고 노인은 재빠르게 뒷문으로 나왔던 것이 아닌가. 아아 어찌하여 자기는 그런 말을 할 수 있었
을까! 자기는 나오면서 그대로들 있으라는말을. 노인은 더욱 그러고 나온 뒤의 광경을 그려 보았다.
 여당원이 죽고 다시 총소리가 자기 부자를 향해 울리는 찰나, 식구들은 총이 방을 향해서 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와들와들 떨고 있었을 것이다.
정말 이젠 죽는가 부다 하고, 그런 순간,  빨치산들이 그들을 못 나오게 냉큼 문고리를 걸었을  것이
다. 그리고 기름을 뿌리고 불을 질렀을 것이다. 삽시에 불이 왼 처마를 돌아 하늘로 내뿜기 시작했다
고 하면, 아아 방에 있는 식구들은 얼마나 몸부림을 치며 뛰쳐 나오려고 발버둥 거렸을까, 얼마나 가
쁜 숨을 헐떡이며 가슴을 쥐어뜯었을까.
 "아부지 문 끌러 주시요오."
 몸에 불이 안 붙기 위해서 치마를 훌훌 벗으며 고함쳤을 것이다.
 "여보오, 새끼들 다 타죽소오."
 노인은 여기까지 환상을 그리다가 그만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뺨을 적시곤 하였다.  눈물 어린 눈에 
이어서 떠오르는 식구들의 타 죽었을 얼굴들.  어느 날 개울가에서 고슬려 죽은 개들모양  흰 이빨을 
드러내 놓고 타 죽었을 얼굴들.
 삐드득 삐드득 삐드득.
문득 개가 문 허비는 소리에 노인과 여인은 침묵을 깨뜨리고 마주 돌아누웠다.
 "저놈의 개가 또 그런다이....예, 좀 뭐락 하시요, 예."
 "자네가 나무라소."
 "나는 무서워서 그요. 당신이 좀 나무라시요."
 "치이, 나도 막 달라들락 하네. 자네가 나무라소."
 삐드득 삐드득 삐드득.
 "어서 좀 나무라란 말이요."
 노인이 일어나 샛문을 두들기며,
 "내이 빌어묵을 개새끼. 가만히 자빠져 자거라."
 왕왕왕왕.
 "보소, 거?"
 종일토록 부뚜막에서 죽은 듯이 누워 있던 개가 날로 달라져갔다. 조그만 소리에도  번쩍 귀를 세웠
다. 그리고 노인이 바깥에 비치기만 하면 종긋 일어서서 달려들 듯이 노려보는 것이다. 그런 개는 또 
여인이 부엌으로 들어을 때도 눈을  서서이 구을리고 암큼스럽게 돌아보았다. 이전에는  오히려 죽은 
시늉을 하고 엎드려 있던 개였다. 그리고 어느 개나가 그러는 것처럼 이 개 역시  밥을 줄 때는 꼬리
를 저었다. 그저 엎드린 채앞발만 세우고 꼬리를 탁탁 치다가 주둥이를 밥그릇으로 가져가는 것이다. 
늙은 개는 열 끼 대신 그만큼 안락만을 꾀하였다. 그러던 게 요즈음에는 밥을 주어도 꼬리를 젓는 대
신 눈을 표독스럽 게 뜨고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여인이 부엌을 나간 다음에야 비로소 주둥이를 밥그
릇으로 가져가는 것이다.
  날은 밤들면서부터 다시 찬 바람과 눈을  몰아왔다. 사나운 북풍이 처연히 용주릿재를  넘어섰는가 
하자 민둥산 마루에 와서 급기야 고개를 붙박고 어지러이 갈려가는 것이다. 지붕을 넘어가는 바람 소
리가 용마루를 걷을 것 같았다. 문풍지 우는 소리에도 마음이 떨렸다. 노인과 여인은 불을 끄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런데도 바람에 곧 떠날릴  것만 같은 것이다. 꼭들 껴안고 고개를  묻었다. 점점 
훈김이 오르기 시작했다. 노인이 슬며시 찬 손을 갖다 여인의 등에 꽂았다. 여인도 손을 갖다 노인의 
옆구리에 넣었다. 그리고 바깥 찬바람을 몰아낼 듯  더욱 바트기 다가 안았다. 순간 두 사람은  아무 
걱정도 잊고 다만 노인은 여인에게서, 여인은 노인에게서 우러나오는 따수로움에 몸이 풀리는 것이었
다. 그리고 '힘'이라는 걸 아른아른 터득하는 것이있다.
 개가 어느새 또 샛문을 허비기 시작했다.  여인이 곧 이불을 들쓰고 노인의 옆구리를  흔들었다. 어
서 또 좀 나무라라는 것이다. 노인이 벌떡 일어나,
 "내이 빌어묵을 놈의 개새끼. 가만히 자빠져 자거라"
 왕왕왕왕.
 왕-.
 그리고 다시,
 삐드득삐드득, 삐드득삐드득.
 "저놈의 개새끼가 자빠져 자래도
 그리고 노인이 이불 속으로 들어오며,
 "워이, 저놈의 개새끼 낼 잡아 묵어 버리세?"
"....."
"소복도 되고, 내 발도 안  빨리 낫겄는가. 그라고 저녁마다  저놈의 소리, 어디 시끄러워서  듣겄는
가."
여인은 차마 그러자는 말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막상 내쫓으면 내쫓아도 잡아 먹을  수야 있으랴 하
는 것이다.
 "워이, 잡아 묵자마시."
 여인은 종내 머리만 파묻고 있으니까,
 "치이. 자네는 그렇게도 아까운 것이네이."
"......"
"그러자마시"
여인은 갑자기 가슴이 후둘거렸다. 개가 죽는 것도 못 볼 일이거니와 노인의 말을  잡아 떼기도 딱하
였다. 그래 잠시 후 떨리는 가슴을 가까스로 주저앉히면서,
 "당신 알어서 하시요."
 노인은, 그림 됐다 하였다. 내일 당장 목을 매서 죽이리라. 그리하여 그동안 굶주린 배도 좀 채우고 
살도 찌우리라. 그러나 노인은 단순한 영양보충을 위한 이상의 쾌감이 마음  한복판을 차지하고 있었
다. 그런데 오늘 밤따라 개가 이상스럽게도 사뭇 오래까지 으르렁거리며 문을 사납게  허볐다. 그 바
람에 샛문 찢기는 소리가 자르르 하고 들렸다. 노인이 또 벌떡 일어나,
 "내이 빌어묵을 개새끼. 낼은 뒈질 텐께 가만히 있거라."
 문을 쿵쿵쿵 두들기곤 마른 걸레로 창구멍을 막았다.
 왕왕. 왕왕왕,
 웅 웅-
 달겨들 듯 울부짖는 소리가 자못 독기에 차  있었다. 여인은 십상, 저 개가 저를 잡겠다고  한 말을 
알아들었는지도 모른다 하였다. 그러자 금세 문을 박차고 들어올 것만 같아 더욱 가슴이 후들거렸다. 
다시금 노인에게 가까이 다가붙으며 목을  움추렸다. 그러나 노인만은 은근한 희망이  가슴속 가득히 
넘치고 있었다.
 이튿날.
 양기가 오를 즈음해서 노인이 과연 개를 잡을 참으로 식칼부터 갈았다.  올가미도 마련했다. 그리곤 
개에게 한사코 딴 눈치를 보여선 안 되려니 하고,
 "워이, 거그 개 밭그릇에 밥 좀 푸고, 개를 이리 데리고 나오소워이."
 여인이 부엌을 두리번거리며,
 "움메! 개가 없구만이라우."
 "응!"
 순간 노인과 여인은 이상한 직감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여인은 십상, 개가 어젯밤에 저를 잡겠
다고 하던 말을 알아듣고 그새 어디로 달아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요, 노인은 혹  여인이 개를 못 
잡게 쫓아 버리지 않았는가 하는 의심이었다.
 "안에까지 잘 좀 보소."
 "안에도 없구만이 라우."
"......."
노인은 몸소 부엌으로 해서 광이며 사랑채며 뒤뜰까지 돌아가 보았다. 과연 개가  없었다. 그러자 더
욱 여인을 의심하면서 대문밖까지 찾아보았다.  그래도 개는 없는 것이다. 여인  역시 걱정스러웠다. 
노인이 개를 잡고 안 잡고는 고사하고 일곱해 동안이나 길러온 개를 어쩌나 하는  것이다. 더욱 노인
이 오기 전에는 밤마다 체온을 함께 나누어 온 개가 아닌가. 그리고 엊저녁에는  차마 노인의 다짐에 
못 이겨서 알아서 하라고 하였지만, 그리고 여인 역시 날로 험악해지는 개가  무섭기도 하였지만, 그
러나 막상 달아났는가 하고 생각하니 급기야 눈시울이 슴벅거려지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왕 죽을
바에야 어디로든가 달아난 것이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노인이 밖에서 들어오며,
 "아 저놈의 개가 저기 있네이!"
 앞산을 가리키며 노리께한 눈동자에 웃음을 띠고 일면 감격해 하였다.
 여인이 번쩍 귀가 띄었다. 앞산을 보았다.
 과연 개가 앞산 등성이에 쭈그리고 앉아 이쪽을 건너다보고 있는 것이다. 여인은 오메! 속으로 반가
웠다, 그러나 되도륵 반가운 기색을 안 나타내랴 하며,
 "대체 거가 있소이."
 "아따 그 놈의 개새끼, 눈치가 날쌉네이."
 "저런 것도 다 제 목숨은 귀한 줄 아는 것 아니요."
 개가 집에서 저를 보아 준 게 용한 듯, 이내 고개를 숙이고 땅 냄새를  맡더니 한달음으로 봉우리까
지 올라갔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집을 돌아보았는가 하자 이내 고개 너머로 사라진 것이다.
 "제놈이 배 고프면 아무 때라도 오겠지."
그러나 개는 밤이 되어도 들어오지 않았다, 다음 날 그 다음 날도 들어오지 않았다.

  제3장

  해가 바뀌었다. 음력 정윌 초승달이 땅거미 위에 어리는 어느 날이었다. 비록 명절이라지만 허허한 
골짝은 더욱 적막을 극하였다. 여인이 수수에 버무린 좁쌀떡과 고사리나물 한  사발이 웃목에 앙상할 
뿐 명태 꼬리 하나가 얼었다. 노인은 한결같이 추위와 외로움과 허무 속에서 죽음 같은 나날을 보내
었다. 차라리 죽지 못한 게 한이었다. 사는 기쁨과 살아야 한다는 의욕을어느 구석에서도 느낄 수 없
었던 것이다. 머리맡에 모셔 논 재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다가 또 호주머니에서 할멈의 이빨을 꺼냈다. 
희미한 등잔불에 비치는 이빨이 보오얗게 아른거렸다. 일견 둥글고 은은한 무게가  깃들여 보이는 이
빨은 자기네의 오랜 전통을 고스란이 지니고 있는 듯하였다. 노인이 이빨을 도루 헝겊에  싸 담고 막 
뒷칸을 나가는 참이었다. 문득,
 "쥔 양반 잠 좀 잡시다아."
 웬 적은 아낙 한 사람이 옆구리에 바구니를 끼고 어둑어둑한 대문께로 들어서는  것이다. 모양이 초
라한 아낙으로서 머리에는 조그만 보따리가 하나 이어 있었다.
 노인이 주춤 걸음을 멈추고,
 "웬 사람이요?
 "구걸하러 댕기다 길을 잘못 들어서 이렇게 늦었소."
 그러나 아낙은 초라한 대로 말끔한 품이 얼핏 동냥하러 다니는 사람처림 추접해 보이지는 않았다.
 "이 집이 잘 디가 마땅찮은디이,,, ,,."
 노인이 혼자말처럼 중얼거리자,
 "아무 디서라도 하룻밤만 잡시다. 길이 저물어서 그요."
 "그럼 우선 좀 들어오시요."
 노인은 생소한 산골에서 새로운 사담을 보는  것이 어딘지 모르게 반가운 생각부터 들었다.  저편이 
어떤 신분의 사람이든 그런 건 상관할 것 없었다.
 안방은 벌써부터 자는 것일까, 오늘 밤따라 일찍이 불을 꺼버렸다.
 방으로 들어온 아낙은 보따리를 내루어 놓고 얼굴을 닦았다. 저고리 위에 입은  검정 작업복을 벗자 
안에는 말끔한 무의 저고리가 아담하였다. 어두운 밖에서 본 바와는 달리  얼굴도 곱살하고 탐스러운 
애동색시인 것이다. 나이 스무너덧이 됐을까  말까 한 팽팽한 색시로서 야들야들한  눈매가 등잔불에 
비쳐 보오얗게 빛났다. 예사 구걸하러 다니는 삶이 아닌가 보군. 노인은 은연중  더욱 다정한 생각이 
미치매
 "저녁을 못 대접해서 어쩌께라우."
 "말씀이라도 감사합니다."
 색시는 저고리섶을 고쳐 여미며,
 "이렇게 후한 할아버지를 만나서,,"
 "편히 내려 앉으시요. 불을 못 땐 방이어서 춥소."
 "이만큼이라도 얼마나 감사합니다."
 "누추하고 찬 방이지만 인가가 없는 곳인께 하릇밤 같이 고생합시다."
 색시도 이내 짐작이 갔다. 이 같은 골짝에서 아들, 딸을 잃고 혼자 고생 하는 노인이거니 하는 생각
이. 그런 색시는 비록 길은 잘못 들었지만 늦게라도 이런 집을 만나, 밤이슬을 피하게  되는 것을 다
행하게 생각하며 웃목의 무명송이며 까만 이불 등속을 찬찬히 들러보았다. 노인은  문득 긴찮은 것이
거니 하면서도 색시에게 웃목의 좁쌀떡을 권해 보았다. 색시가 떰이 없노라고 하였다.
 "차고 맛은 없지만 한번 띠어 보시요."
 잠시 후, 노인은 색시의 자리를 마련해 주면서
 "고단한디 일찍이 누우시요."
 색시가 자리를 보기를 기다려 불을 꺼버렸다.
  그런 노인은 과연 자기 아닌 또 한 사람이 방에 있다는 것이 어딘지  모르게 마음부터 훈훈하였다. 
추위도 그만큼 덜 느끼는 것이다. 문득 지난날, 부엌에서 자던 여인이 자기가 안방으로 와서 자는 곳
을 보과 말없이 들어오던 것을 생각하였다. 그 턴에는 개하고 같이 체온을 나누던  심사도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람이라는 사람은 다 가 버리고 어느  생명체하나 가까이 붙일 수 없는 노인은, 지금  비록 
죽지는 않랐지만 산 생명체일 수는 없다 하였다.  그리고 이처럼 허무하게 다 되어 가는 오늘날,  단 
하룻밤이라도 같은 사람과 체온을 나눈다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자 이왕이
면 저편으로 좀 가까이 다가 누웠으면 하고 무슨 말인가를 건네려는 참인데,
 "이렇게 깊은 산중에서 노인양반 혼자 사시요?
 그도 어둠 속에서 이편을 생각하고 있었던 듯 불쑥 이런 말을 물었다
 "예, 나 혼자 살고 있소."
 "식구들은 다 어쩌시고 혼자 살고 계시오?
 "사변통에 어찌 되었소?
 "예,사변통에 이렇게 혼자 몸이 되었소."
하고 노인은,
 "나도 실은 이 집의 주인이 아니요. 우리  집은 저어 행산리란 디가 있는디 다 불타  버려서 이렇게 
피해와 있소."
 "그럼 이 집에 또 사람이 살고 있소?
 "예,안채에서 이 집 여인이 나처럼 피해 온 남자 한 사람하고 같이 살
고 있소."
 그리고 노인은 이야기에 굻주렸던 참이라 차근차근, 자기의 처지를 얼추 말한 다음, 이 집의 사정과 
이곳에 와서 겪은 경위를 거의 빠짐없이 이야기하였다.
 색시는 노인의 이야기에 똑똑히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노인이 이야기를 끝마치자,
 "노인양반이 추위에 고생이십니다. 그런디 이런 깊은 골짝에가 다 집이 있소잉."
 "순 무법한 골짝이요."
 "그럼 이런 난리통에는 역시 이런 디가 피신은 할 만하것소"
 "그래 이렇게들 쏴서 힘을 가지고 시는 판들 아니요."
 "그나저나 안방 남사가 참, 무지한 사람이요잉, 자기가 안방을 뺏았으면 이방에 불이라도  좀 때 드
릴 일이제."
 "무법한 산골짝이라 하는 수 있소."
 "그럼 여기는 이때껏 경찰 한 사람도 안 지내갔소?
 '경찰은커녕, 사람 한 사람 지닥가는 것을 못  봤소. 나무만 있으면 피신처로서는 쓸 딴한 곳  아니
요."
 "그럼 이 집데 양식은 묵을 만큼 있다우?
 "양식은 휀딴큼 여유가 있는 개비요."
 "그럼 이 집 여인은 이래도 홍, 저래도 흥, 하고 마음만 선하제 주책은 없는 여자구만요잉?
 "하도 산골에서만 오래 산 여자라서 그런 모앙입디다."
 "그래 라우잉 ."
 "그런디 젊은댁은 오늘 어디로 가디가 이렇게 길이 저물었소?
 색시는 어더까지 스스럼이 없고 활발스러웠다. 그레는 대답하였다.
 "저도 실은 인공 떼 식구를 잃고 이렇게 흔자 돌아댕기요."
 "그래도 젊은댁은 그저 돌아댕기는 사람은 안 같는더라우,"
 "해도, 정처없이 돌아댕긴께 얻어 묵으로 댕기는 사람이나 별다름 있소"
 "그럼 젊은댁은 어쩌다 식구를 잃었겠소?
"인공 때 무슨 일을 해겠습디여?
 "노인양반 그런 이야기는 그만해 둡시다."
 그리곤 오히벼 자기 편에서 또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그럼 노인양반네는 좌익으로 몰렸습디여?
 "그런께 우리는 어느 쪽으로 물렸다고는 말할 수 없지라우. 자식놈이 좌익을  하다가 그 좌익들한테 
폐를 봤은께."
 "내것 주고 뺨 맞는다더니 꼭 그 쪼요잉."
 "이루 말할 수 있소.-
 "그래도 다 시국 탓이지, 이런 사람들이야 뭐 잘못이랄 것 있소"
 그리곤 색시는 비로소 자기의 정체를 이렇게 밝히는 것이었다.
 그네는 시집을 가자 흩진 단가살이에 남편 하나를 섬기고 있었다. 남편이 시집을 간 석  달 만에 지
서에 붙잡혀 갔다. 지하운동을 하다가들켰다는 것이다. 색시는 내내 덴 방을  지키고 있었다. 인공과 
함께 남편이 홀연 감옥에서 풀려 나왔다. 대번에 면의 우두머리가 되 보안서에도 멋대로 드나들었다. 
색시는 아무래도 시원찮았다. 사람들이 죽고 살림을 뺏아 나르는 것이 안 좋은 것이다. 그런 대로 남
편의 그늘 밑에서 한동안 편히 먹고 살았다. 경찰이 진주하자 남편은 산으로  달아났다, 색시는 날마
다 지서에 불려 다녔다. 때로는 무서운 매까지 맞았다. 남편을 찾아오라는 것이다. 색시는 남편 간곳
을 몰랐다. 말한마디 할새 없이 급하게 도망갔던  것이다, 참다 못해 색시는 바로 요 며칠  전, 임시 
몸을 피하고자 친정에를 갔었다. 거지모앙의 행색을 꾸미고서. 그 친정이 너무도 무참하게 폐가되어
있었다. 우익으로 몰려서 식구는커녕 오지 그릇 하나가 안 남아 있었다. 잠시  친정의 이름이라도 팔
아서 의지하려 하였다. 남부러워서 못 있고 말았다. 그림자도 없는 친정에 와서  무슨 낮으로 저렇게 
하고 있는고? 마을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는 것 같았다. 차라리 죽을망정 그 허무한 재터에서 살 수
는 없을 것 같았다. 숙으면 죽고, 살면 살고, 다시 시가로 가자. 그리하여 되도록  산골짝만 타고 오
다가 이렇게 인가가 없는 골짝으로 빠졌다는 것이다.
 그 색시가 이튿날 아침 일찌이 길을 뜨면서 이런 말을 하였다.
 "노인양반이 추위에 고생하시것소. 그럼 평안히 계십시요 내가 어쩌면 노인양반을 한  번이나 더 만
나게 될란지 모르것소."
통바지 처녀의 돈주머니에서 연희의 사진을 발견한 젊은 사내는 날마다 두 마음이 그를 괴롭혔다, 하
나는 통바지 처녀를 만나서 연희의 소식을 알고 싶은 간절함이요, 다른 하나른 다시는 통바지 처녀를 
만날 수없는 위험한 입장인 것이다. 비록 그날 통바지 처녀가 당돌하게 위협은 하였지만 일단 따라가 
보지 못한 것을 뉘우쳤으나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연희가 통바지 처녀의 오직 하나인 친구라면, 통바지 처녀는 연희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을 것이 
아닌가! 아니 그들은 지금, 함께 자고 함께 띤고 있는지포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과연 통바지 처녀
가 자기를 데리고 가려 하였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만일 그와 같은 호의로써 데리고 가려고 하였다면 또 그처럼 위협할 필요까지는 어디 있었겠는가 하
는 것이다. 사내는 연희-를 원망하였다. 경찰이 -주하기 전날, 그들 두 사람은 어떠한 경우가 있더라
도 입반만은 하지 않기로 약속하였다. 이미 정세가 기울어진 모양이니 어찌어찌 잘들 피해 가지고 한
세상 예를 이루고 편안히 살자고 맹세하였던 것이다. 기런데서 사내는 입산을  권유하는 친구들 몰래 
이 골짝으로 피해 왔던 것이 아닌가. 그런데 연희가 산으로 달아난 것은 아무래도 알 수 없는 일이었
다. 이미 그만한 자기와의 약속과는 반대로 처음부터 입산하러고 옳을 먹있있는지 모른다. 아니면
 혹 어리둥절한 고비에 함께 휩쓸려서 넘어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사내는 이제 다신 이전의 
골짝으로 나무를 하러 가지 못하였다. 통바지 처녀가 죽지 않은 이상, 그들  산사람들은 언젠가는 자
기가 그 산골짝에 나타나리라고 벼르고  있을는지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만일 그들에게  붙잡힌다면- 
...? 사내는 생각만 하여도 치가 떨렸다. 그러면서도 연희를 만나 보고 싶은 생각을  끝내 단념할 수
는 없었다.  오늘도 나무를 하러 온 사내는 언제나처럼 조바심스러됐다, 이전에 나무를  하던 골짝에
서 이십 리 왼편으로 띨어진 한수산 글리으로  나온 것이다. 나무를 할 수 있는 동북방  치고는 자장 
동편에 속한 산이었다.
  -.
사내는 도끼질을 하면서 문득문득 주위를 살폈다 항상 사람이 나타날까  보아 두려워하는 버릇에서였
다. 이전에는 경찰만 피하면 되었지만 지금은 산사람들까지 피하지 않으면  안쵱 것이었다. 그러면서
도 한사코 기다려지는 것은 역시 그 통바지 처녀요, 그래서 꼭 알고 싶은 것이 연희의 소식이었다,
 비륵 절후는 입춘이라지만 쌀쌀한 겨을 날씨는 변함이 없었다 골짝에는 아직도 눈이 발을 덮고 볕바
른 앙지쪽만이 군데군데 나뭇등걸과 시든 풀잎이 하늘거렸다. 밤이 깜깜해서야 나무를  해 가지고 돌
아온 사내는 속이 떨리고 밥도 다 식어 있었다. 낡알에 나가는 것이 이와 같이 두렵고 더욱 고생스럽
게 되자 사내는 이낀 이틀 걸려 하루씩만 산엘 가고 싶었다, 그리고 나무를 한사코 절약해서 때는
한편 사랑의 노인을 내보냈으면 하였다. 지금 역시 노인의 밥까지 지어 먹이노라 자기의 힘든 나무가 
그만큼 더 드는 것이 아깝고 언뜻 하면  안방으로 오려는 노인이 귀찮은 것이다.  여인이 물을  데워 
가지고 들어왔다. 밥이 식은 까닭이었다.
 "어째, 개는 요새 어디 안 나가들가?
 사내가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안 나갑디다. 한 댓새 전에 나갔다 오고는."
 "그럼 요새는 전 같은 링도 못 줏고 한께 저 암캐나 잡아 묵제?
 "거 조금 놔 둡시다. 수캐 흔자서 심심해서 쓸 것이요. 그라고 혹 제 짝을 잡게 되면 수캐가 가만히 
안 있을 것이요 막 물라고 덤빌 것이요예."
 "그래도 뭐 잡아 묵제. 개가 설마 사람을 잡을라든가."
 "그래도 봄까지나 더 기르고 봅시다. 수캐도 혼따서 있는 것이 심심해서 검둥이를 데리고 왔는디 그
렇게 해서 쓸 것이요."
 "그럼 더 쪼감 뒀다가 잡으까....."
 그러자 문득 부엌의 수캐가 방을 향해 왕왕 사납게 짖어댔다.
 사내가 숟가락을 멈추고 여인을 바라보았다.
 "보시요 거. 저 개가 아주 눈치가 빠르다 말이요. 방금 한 말을 알아듣고 저렇게 짖어라우."
"지랄-그래도 제가 비수 한번 들어파면 꼼짝 못하제."
 '거기다 또 두 개의 사이가 이만저만 아닌디, 아무 놈이라도 한 마리가 죽으면 남은 놈이 가만히 안 
있을 것이요."
 "그나저나 날이 좀 풀리면 잡제."
 "꼭 잡아잉."
 사내가 거듭 이렇게 다지고 밥상을 물린 다음
 "인자 참 나무도 못해 묵것어!"
하고 한탄하였다.
 "고생스럽지만 늦은 봄까지만 어떻게 좀 살아감시다. 새보리만 나면 나무는 걱정 없을 것이요:
 "참"
 "하는 수 있소. 이런 산골로들 오신 것도 다 인연인 것 아니요."
 "그래도 웬만큼 힘이 들어야제!"
 사내는 다시 한탄을 하고, 사랑방의 노인을 내보내자고 하였다, 나무하기가 어지간하면 이런 말까지
는 않겠는데 할 수 얼는 입장이라고 말하였다. 여인이 잠시 아무 말 않고 있다가, 그건 좀 생각해 볼 
일이라고하였자. 사내가 몸이 고단해서 자기도 이젠 이틀 걸려 한 번씩밖에 나무를하러 갈수없다고하
였다. 그렇지만을 데 갈데 없는노인을어찌하것소. 그 전에 남정네가 오기 전에는 집을 부순 널빤지를 
빠개서라도 먹여 살렸는데. 그러나 여인은 아까의 개에 대해서나 지금의 노인에게  대해서나 '꼭' 그
래야 한다는 결심은 없었다, 오직 미온간 인정과 선량만이 그네에게 남은 아름다운 덕이었다.
 이튿날, 사내는 과연 사랑방의 노인한테로 갔다.
 "이젠 추위도 거반 갔으께 노인양반 디른디로 좀 나가시요. 원체 나무하기가 사나워서 그요:
 노인이 내맥없이 일어나 앉으며,
 "내가 가기는 어디로 가라우."
 "그래도 나무가 없는디 하는 수 있소. 나도 인자 더 이상 나무를 못하로 댕기것소."
 '걸후는 봄이지만 아직도 추위가 두 달, 석 달이나 안 남았소. 이왕 힘입는 김에  쪼끄만 더 입읍시
다. 갈 디가 없어서 그요."
 "그러드래도 어디로든지 좀 나가시요. 안 나가면 인자 밥을 못 드리게 될 것이요."
 사내가 돌아가자 노인은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자기는 이젠 갈 데 없이 죽는구나 하였
다. 저년에 항의할 아무런 권리도 없거니와 대들 힘 한 점이 없는 것이다. 그렇대서  또한 사내를 원
망하는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힘기 귀결이거니 하면서 여인을 괘씸하게 생각하였다.
 다음 날부터 과연 노인의 방에는 밤이 들어오지 않았다. 불도 이전처림 하루 한 번을  때 가지고 세 
끼 밥을 다 짓는 모양이었다. 노인은 저물도록 죽은 듯피 누워 있었다. 웸일인지 입도 별로 구쁘지
않는 것이다, 천장을 보고 조용히 누워 있는 감은 눈시울에 눈물 같은 물이 흥건히  괴어 있고 그 가
장자리에는 잔주름이 실 얽히듯 얽혀 있었다. 그런 노인은 이젠 여인에게  대해서도 괘씸하다거나 섭
섭타는 생각이 없었다. 오직 힘과 목숨이 다하는 오늘날, 노인은 사람을 욕하지  않는 원망하지 않으
리라 하였다. 문득 머슴 둘에 식모,  침모를 거느리고 아침부터 밤까지 선비와 나그네를  맞이하기에 
바쁘던 낙낙한 젊은 날이 눈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식구들의 불타 죽은 광경이 또 스치고 지나갔다. 
뒤이어, 부엌에서 자던 여인이 말없이 안방으로 들어오던 일이며 개를 잡아 먹고자 흐믓한 기대를
가져 보던 일이며 빈방으로 들어 올려고 하는 사내와 싸우던 일이 또한 차례차례 머리를 스치고 지나
갔다. 그리고 앞서 밤에 젊은 아낙을 재우던 일이며 마지막 어제의 안방 사내에게 힘을 더 입자고 사
정하던 일까 지 눈 옆에 아른거렸다. 자신이 살아 움직이는 동안에 이와 같이 전개된 모든 즐겁고 슬
픈 일 들은 그것이 그대로 노인에게는 한 아름다운 행복처럼 추억되었다. 더욱 이  산골에 와서 자기
의 최후를 의탁한 여인과 사내는 더없이 고마운 은인들이라 하였다.
  문득 고개를 들려 머리맡의 재를 올려다보았다. 집과 식구와 살럼과 그리고  오랜 조상들의 피땀이 
한줌의 재로 화한 그것. 그 재 겉에서 자기는 마지막 낱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노인은 보 
자기 모른새 할멈의 이빨을 만전 보았다. 손에 만져지는 이빨의 감촉이 얼음처럼 싸늘하였다. 노인은 
그제야 문득 어렴풋한 의식 속에서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왔다. 이빨이 날새 얼어 버린지도 모른다 하
였다. 아니면 자신의 체온이 벌써 냉각해 가는지도 모른다 하였다. 스스로 자기  자신의 가냘픈 숨소
리에 귀를 기울여 본다. 룸소리는 정한 간격을 두고 여유 있게 맥박치고 있는 것이다. 정신을 차려야
겠다. 이렇게 죽어서는 안되겠다고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으며 서서히 창을 돌아보았다. 창이 훤했다. 
노인은얼핏 낮인지 밤인찌 분간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곧 창가에 부딪치는 냉냉한 바람결로  -미루어 
이내 밤이라는 걸 알았다. 그럼 벌써 달이 뜨는 것일까? 바곤 날짜를 더듬고 있는데  문득 창문 앞에 
웬 사람의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뉘?"
 노인이 나직이 묻자, 바깥 사람은 잠근 문을 잡아당겼다.
 "노인양반 저요. 그새 주무시요."
 노인이 일어나 문고리를 젖혀 주며,
 "아니 ?
 "예, 나 또 왔소예,"
 이전 날의 애동색시가 웬 짐을 잔뜩 가지고 온 것이다.
 "어서 오시요."
 노인이반기자, -
 "예, 나 노인양반한테 신세 좀 질라고 이렇게 또 왔소."
 숨을 쌔근거리며 들어오는 애동색시의 상기한 얼굴에서 땀 냄새가 촉하고 끼쳤다. 그런 색시는 이윽
고 마음놓이는 숨을 내쉬더니, 저고리 위의 짐정 작업복을 벗으며,
 '저째 그 사이라도 편히 계셨소?
 "예, 잘 있었소. 젊은댁도 무고하시오?
 "예, 나는 무고하나마나 하마트면 큰일날 걸 이렇게 왔소."
하고 색시든 예의 명퀘한 얼굴에 더윽 안심에 찬 읏음을 띠었다
 "그나저나 반갑소."
 "저도 참 감사하시구만이라우."
하며 색시가 다시금 전날 모양 웃목의  무명송이 까만 이불 등속을 돌아보다가 으스스  몸을 떨었다. 
그새 땀이 식고 찬 기운이 오르는 모앙이었다
 "발 넣시요."
 노인이 이불을 젖혀 주며,
 "그정, 지금 밤이 얼마나 되었소?
 "이제 한 여덟, 아곱 시밖에 안됐구만이라우. 테가 막 땅검이 드는 것을 보고 집을 나섰은께."
 그리고 잠시 후 색시는 이와 같이 말하였다.
 "내가 그날 밤 여기서 자고 가지 안했소잉,,,,, 그래 그날 막 집으로 돌아간께 그새 또 순경들이 나
를 찾아왔어라우 그리고는 나보고 산으로 연락 갔다온 것이 아니냐고 그냥 지서로 데리고 갑디다. 그
러더니 또 막 장작새비로 내리치지 않소. 등이건 다리건 머릿박이건 할 것 없이  마구 내리치면서 어
디로 가서 무슨 연락을 취했느냐고 한디, 내가 어잴 것이요. 그래 막 뛰고 소리를  치며서 나는 친정
에밖에 안 댕게왔다고 해도 그래도 막무가내고 치드란 말이요. 아따아! 얼마나 아플 것이요. 그랜 정
신을 잃고 자빠지니까 구류간에다 처넣다가 사홀  만에사 내주지 않소. 그러면서 또 기"i이  저 사람
(남편)을 안 찾아가지고 오면 이젠 경찰서에다 넘길 것이니 그리 알라고 하지 않소.  그리니 자, ,-,
내가 저 사람의간 곳을 알것소오, 또 설혹 간 곳을 안다드래도 찾아다 주것소? 그래  무서워서 더 있
지 못차고 마침 노인 jrl신 곤이 생각나서 이렇게 왔소이."
 노인이 그럴 것이란 듯 고개를 까닥까닥 초덕이자,
 "그래 접때 들은 말도 있고 해서 우선 내 옷벌하고 쌀하고 또 장작을 여나무  개피하고 가지고 왔소
예. 어째 같이 좀 있을 수 있으께라우?
 "죽을 약 절에 살 약이 있다고 않습디여."
 노인은 노인 자신에겐지 색시에겐지 모르게  증얼거렸다. 애동색시는 때로는 아버지를 받들듯이  또 
때로는 남편을 섬기듯이 노인에세 정성을 다하였다. 사람이 안 보는 데서라면 한때의 난을 피하기
러한 이만한 동거가 큰 허물이겠느냐는 껑각이었다. 아니 보다 서로가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이라면 
이러한 동거야말로 도리어 떳떳한 것이라 하였다.
 색시는 이곳에 온 지 사홀 만에 노인한테 몸을 맡기고 나서 아침부터 밤까지 손을 부지런히 놀렸다. 
빨래를 한따, 밥을 짓는다, 나무를 구하러다닌 것은 물론 사랑채 솥에 밥을  지어 먹으면서 둘이만의 
살림을 위하여서인 것이다, 게다 안방 사람들과도  알고 개들도 사귀었다. 나무는 가져온 장작을  다 
때자 친정 마을에 가서 한두 번 얻어다  때곤 그네도 곧 산으로 나무를 하러 다녔다.  때로는 안방의 
사내와 같이 골짝으로 나무를 하러 가기도 하였타. 그리고 양식만은 연해 안방의 여인한테서 가져
다 먹는 한편 때로는 또 친정 마을에서 얻어 오기도 하였다. 네 사람 가운데서  그래도 제일 여유 있
고 활발스런 사람이 이 색시였다. 사람 역시 수럭수럭하고 구김살이 없어서 좋은 인상을 주었다
 막막한 골짝에 이 같은 색시가 든 것은 전녕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골짝은 나날이 빛을 띠어 가는 듯하였다.  노인은 물론 안방의 여인과 사내의 마음도  차차 풍성해졌
다. 그렇게 되면서부터 그들 네 사람은 캄캄한 방에 모여 앉아 놀기도 하고  난리통에 겪은 경험들도 
이야기하였다. 노인은 할멈과 자식들과 집을 잃고 색시는 남편을 잃었다. 사내는 약혼자를 잃고 여인
은 또 남편과 아들을 잃었다. 그들은 제마다  의지할 곳과 짝을 잃고 우연히들 만났던 것이다.  힘과 
힘으로써 다시 제 짝을 맺고 그 체온들에 의지하였다. 그러나 사람의  힘이란 이상한것이어서 색시가
온지 두달만에 기어이 또알력이 일어나고 말았다. 곧 사내가 언뜻하면 안방외  여인에게 사랑방의 색
시 이야기를 하는 까닭이었다. 뼈 없이 좋은 꼭인도 색시에 패한 이야기만은 결코  안 들으려고 하였
다. 저번 날도 색시와 함께 나무를 해 가지고 온 사내가, 
"참, 사랑방의 여자가 보통내기가 아니여 오늘도 나는 나무를 한 뿌리 패는디 그 여자는  막 두 뿌리 
세 뿌리까지 패."
 감탄하자,
 "아 그럼, 그 여자하고 같이 사씨요. 웅? 당신은 젊은께 그 여자하고 살어."
 입술을 뭉당해 가지고 내뱉았다.
 "참, 손놀림도 다기지고."
 "아 그런께 잔소리 말고 그 여자하고 살란 말이요. 그럼 나무도 안 하로 댕기고 안 편하것소."
 "그럼 말은 바로 말이제, 늙은 사람께 댈까.-
하자 여인은 눈물을 종종이 흘렸다.
 여인이 사내와 동거하게 된 것은 물론 나무를 해다가 먹여 살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인의 희망은 
첨부터 더 먼 곳에 가 있었다. 이만한 젊은 남자하고 산다면 붙들여간 남편이 안 오더래도 농사는 걱
정없이 지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사내가 색시에 대해서 그와 같은 관심을 표명하게 되자 여인은 사랑방에 양식을  주지 않았다. 그리
고 노인에게, 색시와 함에 딴 데로 나가  주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사랑방의 남녀는 아직 이  골짝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날씨만은 점차 해동해 가지만 다같이 의지할 데도 없거니와 갈  곳이 막연한 것
이다. 산사람들도 이젠 거의 다 자취를 감추고 세상은 질서가 많이 잡혀 있었다. 그러나 좌익들에 대
한 경계와 처벌은 아직도 삼엄하였다.
 여인은 오늘도 사내와 색시가 나무를 하러 가고 노인만 남자,
 "정말 인자 날도 따뜻해지고 했은께 그 여자랑 데리고 가치 나가시요예."
 사랑방의 문지방을 차 걸터앉았다.
 사랑방은 그 동안 왜 말끔해졌다. 희김은 무명송이도 깨끗이 치워지고 불도  말쑥하였다. 뿐만 아니
라 노인도 옷을 깨끗하게 입고 얼굴의 주름이 점점 펴걱가는 듯하였다.
 "우리가 첨부터 갈 곳이 있었으면 이런 디로 왔을 것인가. 아주 있는 김에 더 조끔 있세."
 노인이 대답하였다,
 "노인양반만 같으면 얼마든지 있어고 괜찮해라우, 그렇지만 그 여자 땜에"
 "아, 그 여자가 어쨌단가?
 '거쩌나마나 그런 눈치도 없소원?
 "왜?
 "아, 거 보면 모르겄습더여? 안방의 남자가 늘 눈짓하는 것 보시요.
 "치이, 그래도 걱정없어. 다들 이녁 중심이 있은께.-
 '거따어따. 그러다 혹 두 젊은 것들이 눈이 맞어 가지고 나가 버리거나 또 저이들이 나무를 해 나른
다고 늙은 우리를 쫓아캐면 어쩔라우?
 "아, 그래돈 이녁 중심이 있은께 괜찮단께."
 "어따어따! 힘 하나도 없는 노인이."
하고 여인은, 만일 두 젊은이가 눈맞아 가지고 살게 되면 늙은 우리가 큰 낭패니까 하루 속히 나가라
고 하였다.
 "아, 그러면 또 우리 둘이 같이 살제 어째."
 노인이 웃으면서 말하였다.
 "당신은 소용없어라우. 당신이 뭐 나무 하나를 할지 아요? 농사 한 마지기를 질 힘이 있소?
 "그래도 자네 혼자 사는 것보다는 낫제 어째."
 "나나마나 늙은 노인도 나하고 사는 것보담 젊은 사람하고 사는 것이더 낫을 텐께 어서 나가란 말이
요."
 "어쨌든 자네하고는 틀려서, 다들 이녁 중심이 있은께 걱정 마, 그라고 자네는 아무리 그 남자가 그
런다고 이 방에 양식마저 안 주는가. 에잇 사람 같으니라고! 아무피 갈려서 살지만 사람의 정리가 그
럴 수가 있단가.-
 "정리고 뭣이고 오늘이라도 당장 나가란 말이요, 양식은 절대 안 줄텐께."
 그리고 여인은 거기 발 밑에 와서 희롱하고 노는 두 개를 쓰다듬어 주며,
 "참 우리 개들 이이쁘다. 엣다, 참, 순하고 이이쁘다."
하곤,
 "이런 개들도 한번 의가 맞어 논께 꼭 이렇게 안 나가고 같이 살어라우잇. 그런디 이 낌등이는 어디
서 온 갠지 갈 지도 모르고 이렇게 오래까지 사는지 모르것소. 어쨌든 저의 집보다  여가 더 존께 이
렇게 안 갈 테지라우."
 노인을 돌아보면저 오붓해 하였다.
 "그럼, 그런 개도 한 번 의가 맞으면 그렇게들 같이 사는더 자네는 윗사람이 되어 가지고 이 남자한
테도 흥, 저 남자찬테도 흥, 하는가."
 "그런에 사람이 영리하다우. 늙븐 당신하고 평생을 같이 살면 뭣할 것이요."
 "그래도 사람은 마음을 지키는 것이 사람이여."
 "사람이나니나 그 통에 당신은 차라리 더 안  잘피었소. 가만히 있어도 나무해다 밥 지어 주고,  옷 
빨아 주고, 백날 묵고 땡 아니요."
노인이 대꾸를 않자, 여인은 다시,
 "엣다, 우리 개들 이이쁘다."
 혼자말처럼 뇌이곤,
 "그런디 노인양반, 또 안방의 남자가 지 암캐를 잡어 묵자고 해싸드날 말이요.  진작부터 졸라싼 걸 
이때까지 말어 왔소예,"
 "아, 잡소. 그럼 덕분에 개정국이나 한그릇 얻어 묵께."
 "당신들은 그렇게 괴기 목는 것밖에 모르요. 당신은 그 전에 또 수캐를 잡자고 하더니,,-,."
 "인자 제 짝들이 있은께 절대 못 잡어라우."
 그리고 여인은 이내 개를 거느리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오늘도 밤이 어두워서야 놨알에서 돌아온 사내는 하루 바삐 뜨슨 수가 좀 났으면 하였다.
 그 사이 사내는 눠알에 갈 때마다 혹시 통바지 처녀를 만났으면 하고 끊임없이  연희를 생각해 왔으
나 연희는커녕 통바지 처녀도 만나지 못한 것이다. 그런 사내는 과연 여인의 말마따나 사랑방의 색시
를 무시로 생각하고 있었다. 얼굴도 곱칼한 데다 일마다 억척스럽게 잘하는 색시가 무시로 마음을 사
로잡는 것이다. 그리고 보다 젊은 사내는 숫제 젊은 색시하고 같이 살았으면 하는 원인 것이다. 그는 
문득문득 이런 공상을 되풀이하였다.
 만일 색시가 나를 따른다면, 사랑방의 노인은 다시 안방으로 들여 보내고 우리가 사랑방에서 살자.
 그리고 우리 두 사람이 나무늘 하고 농사를 지어서 안방의 늙은 부부를 도웁자.
 저편이 승낙만 하면 꼭 그렇게 하자, 사내는  밥상을 물리고 자리 속에 들어가자 여인에게 또  이런 
말을 하였다.
 "자네는 사랑방의 노인을 안 생각하는가?
"릿하면 둘이 또 안방에서 살제. 내가 사랑으로 가께."
여인이 곧 뒤돌아 누으며,
"알량한 소리 마시요"
"아, 그렇게 말할 것이 없어. 서로 당의대로 하자는 것이제."
"몰라요 몰라. 나는 몰라."
노인은 예순둘, 색시는 스물다섯, 그들은 부부라기보다 차라리 아버지와 딸  같은 나이였으나 그래도 
아직은 맥맥이 스며 흐르는 노인의 피와 서로의 체온들이 한덩어리로 만들기에 힘들지 않았다.
 노인은 쇠잔한 목숨이 다하는 오늘날, 이와 같이 귀한 사람을 보내 준것은  정녕 무량한 하느님이라 
하였다. 수없이 감사를 올리면서 무시로 색시를 위안하였다. 색시가 나무를 하러 가는  날은 손수 저
녁을 지어 놓고 밤 늦게 돌아오는 색시를 기다렸다. 때로는 길 마중을 나가는 때도 있었다.
 "오소 이리, 따순 디로 앉소."
 날알에서 돌아온 색시에게 말하고 부엌으로 밥을 가지러 나가자,
 "놔 내가갖다묵을라우."
 색시가 버선을 벗다가 일어나서 밥상을 가지고 왔다. 색시의 푸릿한 얼굴이 따뜻한 방에서 발그족족
하게 풀려갔다. 포동포동한 볼에는 생생한 피가 건강해 보였다.
 '질라고 꼭 나오도록까지 기다리고 계시요 밥도 식고 한디 먼저 자시제."
 노인은 색시가 돌아오기를 기다려 밥을 같이 먹으려고 안 먹고 있었던 것이다.
 "별로 시장한 줄 도르것네."
하며 노인이 숟가락을 들자,
 '거째, 양식은 얼마나 남았습디여?
 "한 댓새 남짓 묵제맨."
 "그럼 양식 점에 큰 탈이요."
 "그래 오늘도 안방 예펜네보고 쌀을 좀 주란께 결코 안 주겄다고 하드란 말이."
 "탈이,우 거."
 색시는 안방 여인이 양식을 골 주게  되면서부터는 줄곧 친정 마을에서 가져다 먹었으나  이제는 더 
갖다 먹을 수가 없었다. 친벙이 없는 마을에는 외삼촌 한 분과 일가들이 몇 집  살고 있을 뿐인 것이
었다.
 "왜 밥을 그렇게밖에 안 묵는가. 더 뜨소."
 "별로 염이 없구만이라우."
 "나무조차 해 갖고 와서 배 고프겄구만 더 좀 뜨제 근가."
 색시가 맥없이 등잔불만 보고 있으니까,
 "왜 오늘 안존 일 있었던가?
 "아니라우."
 "왜 그러 밥도 쪼끔밖에 안 묵고 그렇게 하고 앉었는가?
 그 사이 아닌게아니라 색시는 이중 삼중의 괴로옴이 그를 곤란에 빠뜨렸다. 무엇보다 안방의 여인이 
양식을 안 주자 먹고 살 것 때문에 걱정이요, 또 여인의 말마따나 안방의  사내가 치근치근 달라붙는 
것이 괴로운 생각거리였다. 그리고 그 사이 벌써 태기가 있는 까닭일까, 입덧이나고 몸이 무거워지는 
것이 또한 쏠라웠다. 색시는 이와 같은 괴로움이 거의 한꺼번에 밀어닥치자 적잖이 당황하였다. 어느 
하나도 자기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이왕의 일들인 것이다. 다만 사내의 치근거리는 손만은 생각
에 따라서 뿌리칠 수도 있는 일이지만 그게 쉬이 단정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사내는 오늘도 날알에서 
이런 말을 건네었다.
 "둘이 합의만 뢰면 양식은 절로 문제없이 풀릴 것이요. 노인 걱정도 할것 없고."
 "어떻게 해서라우."
 "우리가 없으면 나무 때문에 밥을 못 지어 묵을 것 아니요."
하고 사내는 또 이런 말을 되풀이하였다.
 우리 둘이 뜻이 맞아서 한 방에 있게 되면 노인은  다시 안방으로 안 갈래야 안 갈 수가 없고  여인 
역시 노인을 안 받을래야 안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나무들을 못하는 까닭이며 또한 우
리들의 힘을 막을 수가 없는 때문이라고 하였다.
 "아무리 늙은 사람들이라고 그렇게 만만이 보아서 쓴다우."
 그러자 사내는, 그것은 결코 이쪽의 안락만을 죄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어디까지 뜻뜻하고 상
반한 도리라고 하였다. 숫제 늙은 사람들은  늙은 사람들끼리 살아야 힘이 아울씨고 뜻이  맞지 젊은 
사람과 살면 서로 힘이 고르지 못한 데서 남모르는 괴로옴이 더 따른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두 노인
을 안방으로 모시고 우리들이 나무를 하고 농사를 지어서 공경하면 서로 기쁜  일이 아니겠느냐는 것
이었다.
 색시는 과연 그럴듯한 말이라고는 생각하였으나 다시금 한 사내에게 몸을 허락할 것이 문제였다. 쿳
제 안방의 여인을 비웃어 온 그네가 아닌가. 그러나 만일 그와 같이(사내의  말대로) 하지 않는다면? 
자기는 물론, 같이 사는 노인도 이곳을 뜰 수밖에 없는 숙명인 것이다. 두 삶이  하나같이 숙명 속에
서 살 길을 쓸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사내와 일단 뜻을 같이 해 보는 것이 선책이 아닐까 하였다. 사내의 말마따나  자기들이 나무를 하고 
동사를 지어서 공경하면 두 늙은이도 자기의 행실을 책하거나 섭섭타 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럼 생각해 봅시다."
 색시가 사내에게 대답하였다.
 "그럼 사랑에 양식도 엄고 한디 되도록 노인을 빨리 안방으로 보내시오"
색시는 한숨을 몰아쉬면서 반승낙을 하였다. 그리고 새삼 전쟁의 가혹함을 한탄하면서 몸이 구겨지는 
것을 슬퍼하였다. 비록 노인과 자기가 다 같이 살기 위한 회생이기는 하지만 또한  노인을 대할 면목
도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우선 사는 것이 더 급하고 보매 일을 결정짓지 않을 수 없었다.
 맥없이 등잔불을 보고 있는 색시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말씀 드릴 것이 있는디,,,,,,."
 노인이 나직이,
 "무슨 말인가? 해 보소."
 색시가 잠시 후,
 "아무래도 우이가 따로 지내야만 안 굻구 살겄는디----이렇게 하시면 어떻게라우?
하고 색시는 차마 말씀 드리기 거북하지만 서로 살기 위한 것이니만큼, 딴 맘 잡숫지 말고 들어 달라
고 하였다. 그리곤 사내가 누차에 걸쳐서 건의한 이야기를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알한 다음,
 '저를 그룻다고 하실란지 모르겄소만, 차라리 그렇게 하시는 것이 더 안 낫겄소?  서로 살기 위해서 
말이요."
'생각대로 말씀해 보시요 부당하시다 하면 내가 이곳을 뜨든가 할라은"
노인이 아무 말없이 곰곰 생각에 잠겨 있으니까,
"말씀해 보시요. 나는 말씀하신 대로 순종할랍니다."
그래도 노인은 더욱 생각던 끝에,
 "사정이 그렇다면 별수 있는가. 내가 안방으로 가제."
 "참, 두루 말할 수가 없구만이라우."
 여인이 종내 울적해 하자,
 "그렇게 생각 마소. 다 같이 시국을 못 만난 닻 아닌가. 어쪘든 자네는 은인일세. 섭섭이 생각 말고 
같이 사소."
 "내가 친정만 무사했어도 이렇게까지는 안하고 살 텐디-"
 노인은 색시의 한결같은 맘결에 속이 절로 누그러지는 듯하였다. 자기는 이제 죽어도  한이 없을 몸
이라고 하였다. 더욱 애까지 실온 색시는 이떼 비록 따로 산다더래도 영원한  자기 사람이요, 자기의 
손과 가문을 이을 갸륵한 은인이라 하였다.
 그리고 사내의 의견이자 색시의 생각은 서로를 위하여 나무랄 수 없는 일이라  하였다. 그러나 노인
은 지난날 자기를 내쫓고 구박하던 사내의 험악한 인상이 떠오르매,
 "틀림없이 그렇게 위할란지 모르겄네? 그전처럼 좇아내지 않고"
 "재가 있는디 그렇게 될 것이요 정성껏 모시도록 할 것이니 염려 마시요"
 "그런디 안방의 여인이 또 승낙할란지 모르겄네."
 "그이한테는 집이가 잘 좀 말하시요. 안방의 남자도 이야기하겄지만--그이도  젊은 우리들이 받들고 
섬긴다면 뭘라고 꼭 젊은 남자하고만 살라고 할랍디여,,, ,,,."
 마침내 이틀 만에 안방의 여인은 세 사람의 의견에 안동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이 명명하였다. 그럼 우리가 우연히들 만나서 이왕 목숨을 살린 아내가 되고 남편이
되었다가 이제 다시 힘과 나이에 따라서 부모와 자식지간이 된 거나 다름없으니만큼 젊은이들은 끝까
지 이 어른을 잘 받들고 우리 손이 아니더래도 농사를 열심히 가꾸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우선 
먹을 식량은 아직 넉넉하지만 설혹 장차 식구가 불어서 식량이 부족하게 되더래도 그건 염려할 것 없
다고 하였다. 이 골짝에 돌 하나 없는 빈 산이 첩첩이 싸여 있으너만큼 부지런히 개간만 하면 앞으로 
수천, 수만 평의 밭을이를 수도 있다고 하였다.그리고 새로 잠잘방은 사랑방의 양식이 다하는대
로 갈라서 들기로 하고 내일은 우선 그 재미로 개를 한 마리 잡자고 하였다. 정히 남식구믈을 얻은 
오늘날 개는 모름지기 선사되어도 기쁠 것이라고  생각 남은 세 사람은 다같이 찬동해  마지않으면서 
감사와 기쁨을 표하매 그리고 사내는 벌써부터 색시를 위하노라 내일 자기는 일찍이  가서 무를 한짐 
해 가지고 오-노라고 하였다. 그리고 와서 개를 잡는다는이었다.
사내는 아침부터 기분이 활발하였다. 이때껏 마음에 걸린 것들이 다리고 그새 자유의 몸이  된 것 같
은 것이다. 에라! 그럼 오늘은 그 가던 골짝으로 한번 가 보자. 그리고 어서 돌아와서 개를 잡아아겠
석 달, 넉 달 전부터 눈독을 들어오던 개가 아니냐. 사람의 행운이 이렇게 한꺼번에 다 닥치나 보군.
 그럼 이왕이면 그 산골에다 아주 길래 살  집을 마련해야겠다. 안 늙은 부부는 종내 깎듯이  썸기고 
먹고 살 식량만은 또 그 첩첩이 -개간지가 얼마든지 있으니만킁 뒤로 식구가 열 명,백 명이 불어도 C
없다지 않는가. 그러고 보니 내가 전날 사랑방의 노인한테는 너무부다. 노인을 사랑방으로 내보낸 것
은 불가불 여인과 같이 살기 위해서였지만 일단 사랑으로 내보낸 뒤에는 간혹 불이라도 한 번씩 때 :
을걸. 그리고 아무리 나무따기가 힘들지만 밥만은 끝까지 드렸어야 올걸.  사정이 절박하긴 하였지만 
내가 참, 너무했나부다. 그 대신 앞으로  정성껏 위해 드리자. 사내가 낡알에 이르렀을  때는 어느새 
해가 산마루 높이 떠 올라 왔다. 따스롬게 내리비치는 햇살이 사내의 앞가슴에  와 눈부시게 갈려다, 
바람 한 점이 없는 산골은 이젠 완연한  봄 기운이 구석구석깍치 동하고 있었다. 참꽃은 진  지 벌써 
오래요, 골짝의 보리들도 어느새 늑께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나무, 나무 하였지만 여인네 집에 나무
가 풀 날도 이젠 달포밖에 안 남았다. 새보리만 먹으면 보릿대 나무가 얼미 지  나을 것이었다. 보리
는 이천 평 가까이 심어 있는 것이었다. 날이 따수워서 이사이는 나무도훨씬덜 방도두방이다
머지않아 나무가 풀릴 것을 생각하니 사내는 더욱 힘이 나고 기뻤다,
쿵 쿵.
 봄바람에 말린 나뭇등걸이 가볍게 넘어갔다. 뿌리는 패이지 않고 욋줄기만  파삭깍삭 바수어지는 것
이다. 흘가분해서 불 때기가 해플 것 같았다. 그러나 나무는 예나 이제나 색은 나뭇등걸밖에 다른 것
이 없었다.
푸르디 푸른 연록색 잡초만이 온 산을 휘덮고 있었다.
쿵쿵쿵쿵---.
 "이노무 나무야 어서 넘어가거라. 빨리 가서 개 잡을란다,"
 저녁 나절 샛때쫌 해서 나무는 한 지게가 다 되었다. 해가 긴 까닭이었다.
 "아아 함?
 하품을 기다랗게 하고 막 나무를 질머지려는 때였다.
 "예 말이요예."
 얼핏 들은 듯한 말소리가 있어 뒤를 돌아보았다. 순간 사내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듯하였다. 예의 
통바지 처녀가 부르는 것이차,
 "오메?
 사내가 속으로 부르짖으며 몸을 그 편으로 돌렸다. 처녀가 예사,
 "옥바우양반, 나 좀 만납시다예."
 하고 바위 아래로 내려서는 것이다. 의연 곤색 통바지에 곤색 저고리를 입은 처녀의 얼굴이 사뭇 해
쓱하였다. 말소리도 이전과는 달리 유순하였다. 게다 어떻게 안 것일까? 이젠  자기의 이름까지 바로 
부르는 것이
 아닌가. 사내는 선뜻 차거운 전율이 몸을 쉽쌌다. 그러나 저편의 태도가  온화하자 곧  머리를 스치
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연희의 친구?
 그와 함께 사내는 자기의 품 속에 들어 있는 예의 비수를 생각하였다.  만일의 경우를  위하여 노상 
품고 다녔던 것이다, 어쨌든 한번 만나보자, 마음을 가다듬고 서서히 처녀  앞으로 나아갔다. 처녀도 
이편을 향하여 걸어왔다. 두 사람의 거리가 십 보, 오 보 이렇게 가까웠다고 느끼는 순간이었다. 문
득 처녀가 입을 열었다.
"실은 연희의 부탁이 있어서 거의 날마다 와서 기다렸습니다만."
 사내가 경계하는 눈초리로, 그러나 이미 짐작하겠는 듯 가벼이 고개를 끄덕이며,
 "예, 나 대강 짐작은 하고 있소."
 "그래서 실은 나흘 전부터 만나 뵐려고 이곳으로 나왔었는디"
 "그래 지금 켠회가 어디가 있소?
 "나참, 지난번에는 너무하였습니다. 워낙 사태가 긴박한 때라 놔서 본의 아닌 짓을 해서--,---"
 "예, 나 그때의 일은 다 이해하겠소. 나도 당신이 연희의 친구인 줄 알었으면 그렇게는 안했을 것이
요. 왕사는 막론하고 연희가 지금 가 있소?
 통바지 처녀가 시종 이야기한 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다.
 그네가 연회와 친한 것은 이미 사년 전부터서였으며 이편도 어느 장소에서  보아서 자기는 미리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 그래 경찰이 하던 무렵에 자기는 군당 사람들과 입산을 하였는데 연회가 웬일인지
우연히 한곳으로 왔더라는 것. 그리고 이것은 뒤에 안 일이지만 연희가 입산을 한  것은 이편이 달아
난 것을 잘못 보아 산으로 들어가는 줄  그만 엉겁결에 입산자들 속에 치어들었다는 것. 그래  할 수 
없이 패잔병들과 행동을 함께하다가 그때 우연히 자기의 이편을 보았었다는 것. 그래 그걸 갖다 연희
에게 알렸더너 연회가 입산한 것을 뉘우치고 기회만 있으면 나와서 자수를 하려고  해도 경찰측의 태
도를 몰라서 아직껏 나왔었다는 것. 그러던 중 패잔병들은 다시 경찰의 기습을 받아 지리분산이 되고 
이젠 낭이산 족에 불과 십여 명밖에 안 남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금명간에 긴급한 지령이 내릴 것 
같다는 것이었다. 곧 도하에 있는 각 군당부가 총사령부의 지령을 받아서  전원이 지리산으로 철수될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장기적인 인민 투쟁이 감행된다는 것이었다. 그래  연회의 
소원인즉, 이편이 아직 살아 있으면 지리산으로 들어가기 전에 꼭 한번 만났으면 죽어도 원이 없겠다
는 것이었다. 그래 오직 하나인 친구의 입장에서 그 정상을 보다 못해 이와 같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
었다면서 같이 낭이산으로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였다. 더욱 이젠 지리산으로 들어가면 일신상의 
안전을 보장할뿐만 아니라 장차 영웅적인 지도원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사내가  느낄 것이라도 느낀 
듯 고개를 까닥까닥 하였다. 그리고 골똘히 생각에 잠기었다.
 이 처녀를 따라서 낭이산으로 간다. 연회를  만난다. 그 동안의 회포를 속삭이고 앞날을  약속한다. 
그리고 장차는 부부가 다 같이 인민의 영웅적인 지도원이 되어 뭇사람한테 환대를 받는다. 그러나 믿
기 어려운 말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말이 훌륭하고 꼭 이긴다고 하였다. 이번  남한침입만 하여도 그
들은 말과는 달리, 지고 도망을 갔다. 다 망한 패잔병들이 지리산으로 몰려서 언제 무슨 승리를 가져
온단 말인가. 그리고 나는 이미 살 집이 마련되었다. 바람 한 점이 없는 그  아늑한 골짝 말이다. 땀
만 흘리면 얼마든지 먹고 살 길이 있다. 내게는 새 일이 있는 것이다. 허나 잊지  못할 것은 역시 연
희였다.
 "그럼 지금 낭이산에 십여 명이 남었다고 하였지요?
 "열두 명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예의 애동색시의 남편도 들어 있는 것이었다.
 "그럼 당신의 직책은 지금 뭣이요?
 "임시 조책을 보고 있소. 그래 이렇게 자유스럽게 나올 수가 있지요. 제 위로는 위원장동무 한 사람
뿐이니까요"
 "그럼 내가 산으로 들어가는 대신 당신이 연희를 데리고 나을 수는 없소? 아주 말이오."
 "....."
 "내가 산으로 들어가는 대신 당신들이 나오시오."



    너는 뭐냐(지은이:남정현)

  아무리 그렇긴 하더라도 똥만은 좀 변소에 가서 싸시는 편이 좋겠다고 한번 다짐해 보는 관수였다.
다 큰 여인이 눈꼽을 짐벙거리며 방 가운데서 요강을 타고 끙끙거리는 꼬락서니를  쳐다봐야 하는 것 
자체부터가 미관상 과히 좋은 인상을 주는게 아니지만 그보다도 잠에서 깨자마자 당연히 신선해야 할
첫 번째의 호횹이 번번히 구린내로 망신을 당한다는 것은 일종의 생활감정에 치명상을 주기도 한다는 
그 사실 하나만 들고라도 똥은 기어이 방 안에서 싸셔야겠다는 아내의 견해는  확실히 한번쯤 재고할 
필요가 있다는 방향으로 관수의 의사가 언제나 가결되곤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스스로 가결한 관
수의 의사가 단 한 번이라도 아내의 주장을 변동시켜 본 적은 없었다. 누가  무어란대도 아내는 잠에
서 깨기가 무섭게 웃목의 요강을 태연히 끌어당겨 가지고는 그 위에 정중하게 앉아서 푸드득 하는 음
향과 더불어 하루 생활의 거보를 내디디는  것이었다. 얼만 전만 하여도 관수는 설마하니  원 아내가 
요강을 타고 뒤를 보시려니는 생각조차 가질 수 없었다. 요강은 그저 게으른 친구들의 생식기를 위해 
참으로 다행하게 만들어진 문명의 이기랄 것까지는 없지만 좌우간 잘  만들어진 가구의 일종이라고만 
여겨왔을 뿐이지, 이상의 어려운 일을 항문을 위해서까지 봉사하고 있는 줄은 상상치도 못한 점이 불
찰이라면 관수의 불찰이랄까. 어쨌든 요강이라는 낱말을 그 정도로밖에 해석하지 못한 자신의 두뇌는 
아내가 말하는 소위 그 '현대인'이 되기에는 얼마나 둔감한 신경의 거처였던가를 최근에 와서야 비로
소 관수는 뼈저리게 통감해 보는 터였다. 그렇다고 관수가 요강을 탄 아내를 훑어보며  저 분이 지금 
오줌이 아니고 혹시 뒤라도 보시는 게 아닌가 하고 전연 의심조차 품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그 오줌을 누는 자세부터가  범연치 않았으니 말이다. 그까짓 오줌쯤 누는  일이 무어 
그리 대단한 짓이라고 저 야단으로 몸을 주름잡으며 힘 줄 필요가 나변에 있을까 하고 아내의 생리를 
의아하게 여긴 적도 실은 한두 번이 아니지만, 원은 오줌 줄기가 뻗어나갈 때의 그 시원한 소리가 들
리지 않고 힘을 줄 적마다 푸득푸드득하는 그 둔탁한 음정이 사뭇 옆 사람의 기분마저 잡치게 한다:
  그 한 가지 예만으로도 요강을 탄 아내의 작업은 그냥 예사로운 배설작용이라고만 부르기에는 역시 
맘 안 놓이는 데가 있었던 것이다. 그보다도 관수가 결정적으로 의심을 사게 된  동기는 아내가 요강
에서 내려와 뚜껑을 닫을 때의 그  풋석하고 후각에 도전하는 고이한 냄새. 그것은  변소라고 이름진 
좀 한가한 곳에서만 접촉하게 될 성질의  전연 반갑잖은 냄새였기에 말이다. 그래 관수는  요강을 탄 
아내의 동정을 좀 수상하게 바라볼 때마다 저 양반이 지금 오줌이 아니고 혹시 뒤라도  보시는 게 아
닌가 하는 퀘스천이 전광처럼 머리를 스치곤 했지만 내 이 무슨 경망스런 생각인고 하는 뉘우침과 더
불어 삽시에 그 퀘스천 마크를 지워 버리기에 애써 왔던 것이다.
  '현대'라는 한문 두 자에다 전생애를 의탁하다시피 생활 신조를 '현대'라는 한문 두 자에다만 국한
시키고 있는 아내 신옥이가 아무렴 현대가 용서하지 않을 그따위 비위생적인 행위를 공공연하게 자행
할 수야 있겠느냐 하는 아내를 믿는 관수의 애정 때문이었다.
  아무리 아내의 인격을 깎아내려가 본대도 그따위 누추한 행동을 저 세상이면 몰라도 이 세상에서는 
차마 실현시킬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아내를 향해서 그러한 맹랑한 의심을 품게 되는 자신의 두
뇌가 아마 최근 벌받을 만치 애브노멀한 상태에 빠진 모양이라고 여겨온 관수였다. 이것은 아내의 권
유대로 '현대인'의 자질을 구비하기 위해서 주야로 분투하느라고 심신이 여지없이 허약해진 증거인지
도 모르겠다고 관수는 새삼스럽게 자신의 건강부터 염려해 보기가 일쑤였다. 때문에  관수는 저 양반
이 혹시 똥이라도? 하는 퀘스천 마크가 머리속에 그어지기만 하면, 
"역시 우니 신옥은 현대인의 패턴인데 그럴 수야 없지."  
빈틈없는 현대인을 아내로 맞이한 남편의 우월감 같은 것을 최대한으로 구사해 보는 것이었다.
  첫째는 저렇게 하찮은 오줌 방울에서까지 독자적인 강렬한 냄새를 풍겨야 하는 현대인의 체질에 대
한 경이요, 둘째는 참으로 묘하게도 오줌  방울로써 푸득푸득 하는 둔중한 소리를 발음시킬  수 있는 
현대인의 기교에 대한 선망이요, 셋째는 우선 구대인과 현대인의 판가름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실상
은 오줌을 누는 일 같은 그렇게 상습적인 행위에서부터 갈라지는 것 같다는 일종의 발견에 대한 쾌감
이었다. 그러나 관수는 그러한 경이와 선망과 쾌감만을 저작하며 언제까지나 세월을  즐길 수는 없었
다. 아내 신옥이가 배설한 요강 속의 오물은 그게 분명 오줌이 아니고 똥이라는  사실이 백일하에 판
명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확실히 관수에게 불행한 순시였다. 어쩌면 행복이라든가 불행이라든가 하
는 것들은 그렇게 릴레이식으로 인간의 생애를 점령하기로 결정된 숙명을 그냥 감수할 줄밖에 모르는 
참으로 가련찬 보수론자들인지도 모른다. 하필이면 그날따라 왜 밥을 짓다 말고  식모 계집아이가 외
출을 했었느냐 말이다. 사실은 외출을 한  것이 아니고 쓰레기통을 비우기 위해 잠시  대문간을 나선 
것에 불과했었지만.
 "요 배라먹을 년이!"
  우선 욕부터 내세우고 아내마저 식모 아이를 찾기 위해 요강을 그냥 방 한가운데 내버려 둔채 방을 
나선 것이 탈이었다.
  관수는 사실 방구석에서 요강에다 대고 태연히 소변을  볼 만치 그렇게 아주 간이 큰 편도  아니었
다. 언젠가 한번 꿈지럭대기가 하도 귀찮아서 요강에다 대고 소변이 나오기를 기다려 봤지만 누가 자
꾸만 뒤에서 엿보고 있는 것 같은 불안감이, 나오던 오줌마저 후퇴시켜 버려서 병신처럼 공연히 관수
는 끙끙대기만 하다 말았던 것이다.
  그 후부터 관수는 어디까지나 요강이라는 기물은 그 제작 동기가 여인을 본위로  한 것이지 사내를 
안중에 둔 것이 아니라고 믿어왔다. 우선 남자를 상대로 했다면 요강의 아가리부터가 직경이 거진 한 
뼘이나 되게 그렇게 크게 벌릴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어디든지 그저 미관상 과히  숭하지 않은 자
리에다 한 군데쯤 빠끔하게 구멍만 터놔도 누구나 그차 사내라면 소변쯤은 훌륭히 처리할 수 있지 않
겠느냐 말이다. 이 세상에 사나이로 태어난 자기와 요강과는 미안하지만 아무런  인연도 없다고 곧잘 
믿어오던 관수가 그날만은 무슨 덕을 보자고 요강을 가까이 하게 되었는지 그건 참 알고도 모를 일이
었다. 관수 제딴엔 아마 무슨 실험을  꼭 해보고 싶다는, 말하자면 열렬한 학구심의  발로에서였는지 
모른다.
  아내와 대등한 현대인의 자질을 구비하기 위해서  그 동안 꾸중도 들을만치 들으며 노력도  무던히 
해왔으니 이제는 자기 오줌에서도 독자적인 냄새를 풍길 시기가 됐거니만 여긴  것이 화근이었다. 젠
장 안되면 말더라도 한번 실험을 해본대서 밑질 것은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에 고만  요강을 당겨 뚜
껑을 열어봤을 때의 그 무어랄까 관수의 표정은 그대로가 딱한 사정의 표본이었다.
  "아! 저이가 그럼 여적 똥을 싸고 계셨단 말인가!"
  그것은 근본적으로 관수의 사상을 뒤흔들어 놓는 새로운 학설이어야 했던 것이다. 하도 믿어지지가 
않아서 문 가까이 밝은 데로 가지고 가서 충분히 살펴왔지만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항문을 통과한 
오물이었다.
  현대를 노상 입에 물고 생활하는 아내의 업적이라기에는 도무지 사실같지 않은 사실이었다. 처녀의 
잉태를 확인한 어버이의 그 당황하는 심사로 관수는 누가 알까 무서워 쉬쉬하면서  아내의 기색을 살
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그 이튿날 아침도 아내는 태연히 요강 위에 걸터앉아서 여전히 그  둔탁한 소리를 발음시키
는 것이 아닌가. 여인의 풍속치고는 참으로 본받지 못할 풍속이라고 관수는 생각했다. 그러나 아내가 
하는 짓에 정말로 수치스러운 '현대인'의 체면에 관한 건이라면 저렇게 언제까지나 태연을 가장할 수
야 있겠느냐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아직 몰라서 그러지 아내가 배설한 오물은 그게  식은 새로운 형
태의 오줌일는지 누가 아는가, 좌우간 핀잔을 듣든 말든 이제는 그 사실 여부를 한번 물어봐야 할 단
계에 이르렀다고 관수는 생각했다. 적어도 '현대인'이라면 그것만은 꼭 알아둬야 할  무슨 대단한 조
문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관수는 기대에 찬 엷은 흥분마저 느끼며 요강을 탄  아내의 자세를 이리저리 
엿보다가는,
 "어이 신옥."
  우선 불러 놨지만 다음 이을 말이 영영  만만치가 않았던 것이다. 관수는 할 수 없이  이런 질문을 
해야만 되는 내나 이런 질문을 받아야  하는 당신이나 똑같이 억울할밖에 없다는 표정으로  오만상을 
찌푸리며,
 "저 말이지 당신 말이여, 늘 뒤를 보는 게 아니냔 말이여!"
  말은 그래 놓았지만 이건 도무지 할 말이 아니었다고 관수는 금방  후회했던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아내의 눈빛이 단박에 달라지고 있었다. 아직도 지워지지 않은 눈잔등의 연한  회색빛 아이새도가 물
살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앗차, 또 실수했구나.'
  번번히 실수할 줄밖에 모르는 자신의 경솔한 성품은 그건 역시 운명인지도 모르겠다고 실망해 보는 
관수였다. 눈잔등의 근육이 흔들린다는 그것은  아내에게 있어서 여지없는 조소와 멸시의  정을 지금 
상대방 에게 보내고 있다는 그런 암호 비슷한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앞으로  주의하겠으니 너무 노하
지 말라는 사과의 말씀을 나눌 새도 없이 아내는, 아 글쎄 아직 이렇게 소소한 일까지 모르고 지냈느
냐는 그렇게 경멸에 넘치는 동작으로 눈을 흘겨보이더니 아무 소리도 없이 요강에서 일어나 책장에서 
의학전서라고 쓰인 책을 관수 앞에  꺼내 보이는것이었다. 도대체 당신 따위와는  말상대가 안된다는 
그렬게 오만한 처사였다. 이 한 아름이나 되는 책을 자기보고 어찌라는 것인지 또 의학전서라는 것과 
현대인이 방에서 뒤를 보신다는 것과의 사이에  무슨 인과율이 있다는 수작인지 관수는 자기가  취할 
다음 순서가 막연해서 그저 아내를 멍하니 주시하고만 있었다. 당신의 무슨 지시 사항이 없이는 나는 
이 책을 어떻게도 할 엄두도 내지 못하겠다는 그렇게 어이없는 안색이었다. 그때 아내는 관수를 쳐다
보고 무슨 놈의 사람이 일일이 얘기를 해야만 알 수 있게 그 지경으로 머리가  둔해 터졌느냐고 나무
래는 양 입을 두어 번 삐죽거리더니 점잖게 훈계조로 나오는 것이었다.
 "여봐요, 당신 그래도 대학을 나왔다니 말예요. 박테리아라는 것쫌 아시겠죠? 무슨 임균이니 결핵균
이니 티프스균이니 하는 족속들 말예요.  물론 박테리아 중에도 유산균이라든가 청국장균  또는 근류 
박테리아 등 생활에 유익한 것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박테리아들이 우리 인간들의 수명권을 장악하
고 있다는 사실쫌 아시겠죠."
 그리고 나서 아내는 아주 다정하게 의학전서의 목차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이었다.
  관수는 새삼스럽게 놀랐다, 목차의 병명을 하나씩 포개면 인체의 부피보다도 우세할  저 많은 질환
이 인간의 육신을 음식으로 계산하고 있다는 사실 앞에 하마터면 현기증을 일으킬 뻔했던 것이다. 그 
엄청난 병명의 정글 지대에서 그래도 용케 삼십여 년 간이나 목숨을 부지해 왔다는 사실이 도무지 자
신의 일 같지 않게 대견하기만 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 막대한 질병의 거지반이 박테리아의 행패로써 
비롯한다는 아내의 설명에 이르러서는 허허 참 유구무언이었다.
 "그런데 그 한국식 변소라는 데가 말예요. 박테리아의 아지트라는 거 쯤 아시겠죠.  그런데 글쎄 무
턱대구 한 가정의 건강을 담당한 주부 되는 사람이 매일 출입하란 말이죠? 그건  일종의 간접적인 살
인이에요. 스스로의 수명을 재촉하는 어리석은 방법이기도 하구요."
 "허허 참!"
 "물론 문명이 설계한 수세식 토일렛이라면  또 모르죠. 역시 문명이란 딸라의  가공품이라는 점으로 
볼 때 매일 찬거리 때문에 쩔쩔매는 주부들은 언제까지나 방에서 뒤를 볼밖엔 없단 말예요. 식구들의 
건강을 위한 부득이한 사정이죠."
 "허허 참!"
 "도대체 당신은 현대 생활의 모토인 위생학에 그렇게 등한하대서야 어떻게 조상들을 넘볼 자격이 있
느냔 말예요."
 "허허 참!"
 "내가 이만치나 정갈하게 위생학을 순종해 왔으니 망정이지, 아 그럼 당신은  당신 힘으로 그만큼이
나 건강을 유지하는 줄 아시유? 원 어림없는 소리!"
 "허허 참!"
 "허허 참이라니 무엇이 도대체 허허 참이냔 말예요. 몰랐단 말예요?"
 "허허 참!"
 허허 참을 골백 번 되풀이한대도 현훈한 감정에 휩싸인 관수의 분별 의식은 회복될 길이 없었다. 그
게 맞는 것도 같고 그게 틀리는 것도 같고 좌우간 삼십여 년 간이나 별반 거르는  날이 없이 소위 그 
한국식 변소 출입을 반복해 왔다는 사실이 공연히 누구에겐지 모르게 머리를 들  수 없이 무안해졌던 
것이다. 당시 관수는 약간 겁을 집어먹고 생전에 처음이랄 수 있게 자신의 건강  상태를 스스로 진단
해 보고 있었다. 몸에 이상이 있다면 딱 한 군데밖에 발견할 길이 없었다. 그것은  최근에 와서 턱없
이 식욕이 왕성해진 점이었다. 그 점만은 숨길수 없는 사실이었다. 끼니마다 게 눈 감추듯 한 사발을 
무난히 해치워도 불과 몇 시간이 못 가서 심한 공복이 찾아오곤 하는 것이었다, 관수는 이게 흑시 매
일 아침 한국식 변소에 드나든 죄로 박테리아의 피해를 혼자만 입고 있는  셈인지도 모르겠다는 두려
움에 가슴이 선뜩해지던 것이다. 그러나 박테리이아의 피해를 입으면 입었지 단박 현대인으로 승격하
기 위해 차마 방에서 그짓만은 못할  노릇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왜 그런지는 관수는  방 한가운데서 
요강을 잡아타고 몸을 뒤트는 그 꼴이 '현대인'이 가꾸는 풍경이라기엔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같
아서 아내를 쳐다보다 실없이 웃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아내는 그때 관수의 웃음이 만학의 기쁨이라도 표시하는 것으로 짐작했던지  금방 눈살을 부드럽게 
굴리며,
 "글쎄 말예요. 당신도 이제 위생학에 관해서  그만한 상식쯤 항시 몸에 지참토록 노력하세요.  내가 
다스리는 식모애의 태도를 좀 보란 말예요.  얼마나 정결한가를.... 그게 다 내 위생학의  표현인 줄 
원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허허 참!"
 관수는 또 한번 허허 참을 되뇌일밖에 없었다.
  아닌게아니라 식모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관수네 식모는 소위 그  아내의 위생학을 실천하느라고 
항시 입언저리가 헐어서 조금씩 진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것은 이 무더운 여름철에 잠시도 입에서 마
스크를 떼버리지 못하는 탓이었다. 살점이 흐물흐물 허물어져 내리는 것 같은  이 염제천하에서 콧구
멍이 열 개라도 답답할 지경인데 겨우 두 개있는 콧구멍마저 두꺼운 가제로 덮고 지내는 식모 아이를 
쳐다볼때마다 관수는 저도 모르게 번열증이 나서 가슴을 헤치고 식식 숨을  몰아쉬곤 하는 것이었다.  
  형세가 저대로 나가다가는 앞으로 며칠이 못 가서 식모의 코와 입은  형체도 없이 썩어 없어질지도 
모르겠다는 안타까움 때문이었다.
  제발 하루만이라도 입에서 마스크를 걷어 버리고 나면 입언저리의 사소한 염증쯤은 씻은 듯이 가시
고도 남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에 관수는 단박에 달려들어 마스크를 떼내 던지고  싶은 충동이 하루에
도 여러 번씩 출몰하는 것이었다. 헌데도 아내는 잠시나마 식모가 마스크를 하지않을까 봐 감시를 게
을리하지 않는 것이다. 아내 자신은 당초에 후텁지근하고 혓바닥까지 근지러워서 단 몇 분을 입을 가
리고는 못 배긴다면서 식모에게는 부단히 마스크를 강요하는 것이다. 그것은 세균 방지에 제일이라는 
아내의 현대적인 위생학 때문이었다. 자신의 위생학을 위하여서는 한 사람의 건강이 여지없이 무시당
해도 그것은 방에서 뒤를 본다는사실만치나 현대의 질서라고 인정하는 모양이었다.
  아내의 강렬한 특권 의식에 접할 적마다 관수는 암만해도 무엇인가가 좀 잘못  되어가는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이 꺼림칙해지는 것이다. 노예제 사회가 폐지된 지도 꽤 오래라고  믿어지는데 한 사람의 
육신이 저만치나 학대를 받는다는 것은 만민평등주의를 기초로 한 현대 사회 구조에서는 아무래도 조
화가 잘 안될 것 같다는 이론의 탓이었다. 그래 하루를 택하여 관수는 조용히  아내의 의사를 타진해 
본 적이 있었다.
 "저 식모애 얘긴데 말이지, 내 생각에는 그 애의 입이 좀 있으면 구데기의 집이  되고 말 것 같아서 
그러는데 말이지. 이 무더운 날에 그  박테리아라는 것들이 그 놈의 마스크 때문에  들도나도 못하는 
감금 상태에 빠져 있으니까 말이지, 그 입언저리가 어디 남아 있겠어 응! 그건 암만해도 생사람 잡는 
것 같아서 그런데 말이지, 내 의향으론 한 이삼일이라도 그 놈의 마스큰가 무엇인가를  좀 벗게 해줬
으면 좋겠어. 그 애의 입과 콧구멍을 구제하는 방법은 오로지 그것뿐일 것  같아서 그러는거야. 이건 
정말 다 혼자의 생각이라니까."
  오랫동안 벼른 관수의 이러한 진심은 당시 여지없는 아내의 조소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아내는 그
까짓 당신의 의향쯤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그렇게 얕잡아보는 어조로,
 "흥! 그것 참 훌륭한 의향이시군. 그러면 말이죠. 만약에 그 애의 입이나 코에서  우리의 밥상에 박
테리아가 떨어졌을 경우 말예요. 그 사후 수습에 관한 책임은 누가 지는 거죠? 응!  아 어서 대답 좀 
해보란 말예요."
  아내는 삿대질까지 섞어가며 박테리아에 침식당해 식구들이  모두 뻗으러진 경우, 아 그럼  당신이 
책임을 지겠느냐고 앙칼지게 따지면서,
 "제발 당신도 이제는 그따위 허무한 생각을 버려요. 인정이니 동정이니 연민이니  어쩌구 하는 그따
위 형이상학적인 사고의 관습을 말예요. '현대'란  네가 살자면 내가 죽고 내가 살자면  네가 죽어야 
하는 그렇게 조직적으로 째여서 빈틈없이 진행되는 거예요. 남들은 새로운 기계를  실험하기 위해 무
수한 생명을 초개같이 여기는 것으로 낙을 삼고 있는데 도대체 당신은 무어냔 말예요. 당신처럼 맨날 
그저 되지도 못하는 게 무엇이 안됐느니 불쌍하다느니 하는 그따위 실용성도 없는 전근대적인 잡념에 
얽매어 있는 한 우리 나라는 생전 가야 남의 나라 시장노릇밖에 못 한단 말예요."
  핏대를 세우며 달라붙는 아내의 신념 앞에 관수는 일종의 공포증을 느꼈던  것이다. 그것은 '현대'
의 제반 난제를 토의 연구하는 '국제연합'이라는 기관이 생각난 탓이었다.
  만약에 지금 한 사람의 인간이 다른 한 사람의 위생학으로 말미암아 코와  입이 무자비하게 썩어들
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국제연합의 인권위원회에  탄로되고 보면 한국이라는 나라는 그저  언제까지나 
국제연합의 테두리 밖에서만 거지 새끼처럼 빙빙 돌기만 하다 여생을 마칠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불길
한 예감의 탓이었다. 허지만 관수의 그러한  예감은 아내의 그 확고한 현대적인 신념  앞에서는 그저 
한 잎의 추풍 낙엽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멀리 있는 사람도 아닌 늘 옆에 데리고 지내는 하나의 인간이 지금 현대의 위생학으로 말
미암아 코와 입이 못 쓰게 되어가고 있는 참상을 태연히 보고만 있을 만치 또 그렇게 간이 큰 관수가 
아니었다. 할 수 없이 관수는 젠장 현대인이 못 되면 말지 하는 비장한 각오로 가까운 병원을 찾아가 
약간의 알코을 스폰지를 구해다가 이것으로 종종입 가장자리를 씻어내기라도 하라고 식모에게 당부했
던 것이다.
  그러나 아내의 의사가 참여하지 않은 관수의 그러한 성의는 당시 식모애의 코웃음거리에 지나지 않
았다.
 "흥! 아저씨나 많이 씻어내시죠."
  씹어뱉듯 한 마디 쏴붙이고 두 번 다시 거들떠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한  식모애의 모멸에 찬 
코웃음 앞에서 관수는 또 한번 권해 볼 용기마저 상실했던 것이다. 그것은 평시에  식모가 관수를 대
하는 언행으로 봐서 당연한 이치였다. 도대체 식모의 안중에 관수 따위는  온전한 인간으로 취급되는 
것이 아니었다. 우선 식모의 눈에 관수는 저 사람이 정말 사람인가를 의심할 만치  예술에 대한 소양
이 백지에 가까운 탓이었다.
  예술에 살고 예술에 죽자는 것이 식모  인숙이의 일관된 사상이니까 말이다. 철들면서부터  가슴속 
깊이 저장되어 온 그러한 충만한 의욕이  누구를 속썩이자고 아직까지 성취되지 않는가 하는  불만이 
인숙이의 고 둥글납작한 머리를 항시 우울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한 식모의 눈에 원 그다지도 하
찮아 빠진 배우의 이력은 고사하고 이름 하나 변변히 외우질 못하는 관수 따위가 도대체 무슨 소용이
냔 말이다. 때문에 어쩌다 관수가 뭐라고 하면 언제나 인숙이는 동문서답으로  흥흥 코웃음이나 치면
서 잠시도 같은 인간으로 상대해 주기를 꺼려하는 것이다. 예술을 모르는 관수 저  사람은 도무지 무
슨 재미로 살까 하든 의심이 영 풀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관수 앞에서는 번번히 도도할 수 있는 
식모 인숙이가 아내 앞에서는 참말 못 믿을 만치 맥을 못 추는것이다. 식모에게 던지는 아내의 말 한 
마디는 그대로가 식모에게 중천금으로 이전되는 모양이었다. 그만치 식모는 아내를 존경하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 한참 이름을 휘날리로 있는 샹송 싱어 '복거래'의 얼굴과 아내의  얼굴이 어쩌면 그다지
도 한 사람처럼 닮았느냐 하는 경탄  때문이었다. 아직 복거래의 실물은 못 봤지만  식모는 사진에서 
얻은 복거래의 희미한 인상을 아내의 얼굴에서 더듬어 내고는 항시 황홀해하는  터였다, 그러기에 누
가 봐도 좀 더럽다고 할 수 있는 아내의 뒤본 요강을 아침마다 부시면서도 조금도  불평하는 법이 없
었다. 늘 흠모하여 마지않는 복거래와 상사형의 인간이 배설한 오물쯤은 평생  주물러도 피로할 성싶
지 않은 그런 흐뭇한 기분에 항시 붕 떠 있는 인숙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인숙이가 언제까지나 남의 집 식모살이로 늙을 생각은 추호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말하
자면 식모살이란 인숙에게 있어서 어디까지나 잠정적인 직업이었다. 사실은  지금이라도 고향에 뛰어
내려가 좀더 예술에 대한 상식을 넓힌 뒤에  다시 상경하여 이번에 이루지 못한 예술계의 그  화려한 
대로를 쾅쾅 뛰어다니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기만 한 것이다. 그러나 그 굴뚝같은 생각을 시중들지 못
하는 딱한 사정이 인숙이에겐 가로놓여 있는 터였다.
  지금 이 상태로 고향에 내려가면 나는 친구들의 비웃음거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도 사실
인 것이 지금 고향 친구들은 인숙이가 주연으로 나오는 영화가 하루 속히 개봉되기만 눈이 빠지게 기
다리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것은 인숙이가 부모 몰래 고향을 탈출할 때 친구들에게 남긴 고별사속에
 "나는 어떤 영화사의 초청으로 서을 가게 됐지 뭐냐 얘."
하는 구절이 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고별사로 허풍을 떨게 된 것은 인숙이에겐 무리가 아닌 것이다. 신문지 쪽에서  배우 모집 광
고를 벌써 여러 번이나 보고 극비리에 그 입시 수속을 끝마친 후였으니까 말이다.  결국 낙선의 고배
를 마시고 하향을 단념한 부득이한 조치로 식모살이는 할 망정 인숙이의 마음만은 수시로 '예술계'에
서 활개치고 있는 터였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학교는 불과 중학 삼 학년을 시골에서 다니다 말았지만  노래를 곧잘 불러서 
뿐이 아니라 얼굴이 영낙없이 그 유명한 배우 김 아무개 양을 닳았다는 이유로 친구들이 만나기만 하
면,
 "넌 그만하면 부러을 것이 없겠구나 얘....."
  면전에서 침을 께 흘리며 몸시 새암나 하던 당시를 회상할 때마다 나는  팔자가 예술계에 투신해야 
될 인물이라는 인숙이었다. 그보다도 인숙이에게는 낙선했다고 실망하지 말고  꾸준히 노력하면 성공
하겠다던 그때 심사원의 격려의 말씀이 있지 않으냐. 관수의 생각에는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노력하
라는 어떤 자식의 말씀인지 참으로 막연하고 무책임한 발언에 지나지  않았지만 인숙이에게는 구세주
의 훈시만치나 신용하고 있는 금언이었다.
  그러기에 어제도 오늘도 인숙이는 예술가가 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느라고  입언저리가 상하는 데
도 비관하지 않고 어디서 울긋불긋한 표지의 잡지를 구해다 읽느라고 날마다 밤잠을 못 자는 게 아니
냐.
  인숙이가 예술가가 되기 위해 텍스트로 삼고 있는 책의 대부분은 한결같이 색동저고리처럼 그 표지
가 고운 색깔로 장정되어 있었다. 그렇게도 인숙이가 꿈에도 놓지 못하는  무슨 (야화)니 (도라지)니 
(양산도)니 하는 유의 잡지가 관수가 보기에는  참으로 타기할 만치 펀한 오락물에 지나지  않았지만 
인숙이는 그런 책 이외에 또 예술을 담은  책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도무지 신임하려  하지 
않았다. 사실 인숙이가 그렇게  자랑스럽게 간직한 예술에 관한  지식의 거반이 모두 무슨  (야화)니 
(도라지)니 하는 종류의 잡지에서 섭취한 것이니까 무리도 아니었다. 틈만 있으면 책을 줄줄 읽어 내
려가다가 예술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항목을 발견하게 되면 인숙이는 몇 번이나 되풀이해 읽어서 눈을 
딱 감고도 암송하게 되어야만 비로소 안심하고 다음 페이지로 눈을 옮기는  것이었다. 인숙이가 그렇
게도 중요하게 여기는 항목이란 다름아니라 어떤 배우는 나이가 몇이고 지금 누구와  좋아 지내고 있
다는 둥 가수 아무개는 명동 어느 쪽에 있는 변소를 잘 출입하하신다는 둥 하는  거리의 천박한 스캔
들을 추려 모은 구절이었다.
  또한 그것은 인숙이가 관수를 노골적으로 천시할 수 있는 충분한 재료가 되어 주기도 했다. 아무리 
예술을 모르기로서니 원 그래도 분수가 있지  아무렴 복거래가 주제가를 부른 영화의 제목조차  모를 
수야 있느냐 하는 점이 저 사람이 정말 사람인가 하고 인숙이가 관수를 의심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가
어 주었으니까 말이다.
  예술에 관한 책이 또 집안에 없다면 모른다. 가끔 가다 인숙이는 이걸 도대체  저 양반이 어떡허자 
보느라고 일부러 그 (도라지)다 (양산도)다 하는 소중한 책들을 슬쩍 관수의 책상머리에 놓아 두고는 
못 본 체 시치미를 떼기도 하는 것이다. 허지만 백날 가야 원 읽어 보기는 고사하고 그냥 장난삼아라
도 한번 들추어 볼 관상이 아니었다. 사내 자식이 맨날 방구석에서 무엇을 번역합네 하고 그 쓸 데도 
없이 두텁기 만한 책을 할일없이 주무르고 앉아 있는 꼴이 한편 측은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저 지경으로 '예술'에 관해서 무지한 사나이와 백년해로를 맺은  아주머니의 전도를 생각하면 
인숙이는 공연히 눈시올이 뜨거워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인숙의 생각대로 관수가 한 번도 그런 잡지를 뒤적여 보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언젠가 한번 목차를 쭉 훌어봤더니 과연 '예술'이라는 '예'자가 많기는 참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이
도 꽉 깔려 있었다.
  관수는 좀 현기증이 났다, 원 정신나간 사람이 아니면 이렇게도 흔하게 '예'자를 낭비할 수가 있느
냐 하는 공연한 울분 때운이었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이제 겨우 스무 살 남짓해 보이는 계집아이가 
어디서 춤을 한 번 췄다고 해서 그녀의 사진 밑에는 무슨 한국이 낳은이니 세계적이니 하는 형용사를 
거느리고 '예술인'이라는 이름씨가 주먹만한 활자로 버티고 있는 것은 물론 무슨 '그날 밤에 생긴 일
'이니 '첫날 밤의 비화'니 하는 타이틀 주변에도 '예술'이라는  '예'자가 '에스코트'처럼 따라다니고 
있었다.
  관수는 부득이한 사정이지만 한번 짬나는 대로  인숙이가 교과서로 삼고 있는 그 잡지의  편집인을 
만나보고 와야겠다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는 터였다.
  그것은 뭐 '예술'이라는 '예'자를 그렇게도 함부로 다달이 소모시키다가는 이  삼천리 근역엔 '예'
자가 한 자도 안 남을지 모르겠다는 그런 무슨 명분이 서는 애국심의 발로에서가 아니라 단순히 집에 
데리고 있는 식모애 인숙이의 건강을 우려해서였다.
  아내가 득의하게 사용하는 '현대'라는 낱말의 분량만치나 많은 '예술'이라는 낱말에  아직 뼈도 영
글지 않은 저것 인숙이 밤낮없이 저렇게 시달리다가는  정말 '그날 밤에 생긴 일'도 한번 생겨  보지 
못하고 일찍 돌아가시면 어쩌나 하는 그런 사위스런 생각이 이따금 관수의 마음을  괴롭혀 주기 때문
이었다. 어디서 한번 그 잡지의 편집인을 만나기만 하는 날이면 우선
 "여보시오!"
 하고 불러 놓고는 다음과 같은 건의 사항을 피력해 볼 생각이었던 것이다.
 "저 내가 지금 집에 데리고 있는 식모애의 건강에 관한 얘긴데 말이죠. 그  애가요새 귀지에 소개된 
그 훌륭한 복거래라나 누구라나 하는 예술인이 빈번히 출입하신다는 변소는  도대체 얼마나 사치스러
운 곳일까 하는 궁금증에 시달려서 말이죠. 헤헤헤 지금 그 애의 몸과 마음이 여지없이 허약해져가고 
있다는 얘긴데 말이죠. 혜헤헤 어떻게 그 애의 건강을 보살펴 주시는 의미에서 이왕이면 다음 호에다
가는 그 변소의 내부 구조까지를 좀 화려한 화보로서 낱낱이 취급해 주셨으면 좋다는 얘긴데 말이죠. 
헤헤헤 귀하의 의향은 어떠하옵신지?"
  허지만 이건 단돈 기만 환에 모가지를 매달은 편집자에게는 좀 과격한 부탁일 것 같아서 관수는 아
직 그 말을 보류하고 있는 터였다. 그러나 관수 그깐 자식이 제맘대로 무슨 말을 보류하고 있든 간에 
인숙이에게는 조금도 알 바가 아니었다. 다만 의젓하게 약간 미소를 담은 자기 얼굴이 이달에 등장한 
예술계의 '호프'라는 주석을 거느리고 잡지의 표지에 소개될 장래의 그  감격스러운 순간만이 인숙이
가 알 수 있는 전부였다. 장래의 그 감격스러운 순간을 현재에 끌어 잡아다가 그  안에서 놀 때의 인
숙이의 거동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가지고는 연방 히죽히죽 웃어싸면서 까
치발을 뜨고 옆에 누가 있든 말든 가릴 바 없이 괜히 엉덩짝을 이리 삐긋 저리 삐긋 흔들어 보이는것
이었다. 그러다가 정 제멋에 겨워 호흡이 곤란한 지경에 이르면 발가락으로 관수의 옆구리를 꾹꾹 찌
르며,
 "아저씨 이만하면 제 육체미도 괜찮겠죠?"
 제법 관수를 사람으로 상대하여 말을 걸기도 하는 것이다.
 이 의외로 부드럽게 나오는 인숙이의 대접에 어리둥절해지는 관수는 그런 때 대답 대신,
 "너, 몇 살이지?"
 새꼽맞게 엉뚱한 질문을 던지기가 일쑤였다.
 엉덩짝의 채점을 요구하는 인숙이가 지금 열여섯 살인지 열일곱 살인지 정말 자세한 연령을 알 수가 
없어서 묻는 것이었지만 좌우간 인숙에게는 저런 쑥맥(관수)은 생전  처음이었다. 육체미가 어떠냐는
데 너 몇살이냐니 이건 진실로 나무랄만한 상대도 못 되는 위인이 아닌가. 정 소생할 가망이 없어 보
이는 환자에게 그저 이 약이나 한번 써보시라는 절망조로 인숙이는 관수를 힘없이 쳐다보며,
 "아저씨도 예술을 좀 사랑해 보세요."
  일부러 관수의 턱 밑에서 잡지 (도라지에 소개된 어떤 '스트립 걸'의 얼추 다  벗은 몸뚱아리를 거
꾸로 봤다 바로 봤다 해싸며 관수의 동정을  엿보기가 일쑤였다. 그런 때,
 "나도 예술을 하는데!"
하고 그 쓸모도 없이 두텁기 만한 책을 뒤적거리기라도 하는 날이면 인숙이의  호흡은 그야말로 급박
해지게 마련이었다. 파자마 바람으로 쭈그리고 앉아서 만년필이나 쥐고 저 궁상을  떠는 상태가 예술
을 하는 것이라면 그럼 나는 공연히 살게, 하는 모욕감과 더불어 심한  구토증을 느끼기 때문이었다.  
 아내가 뒤 본 요강을 손으로 훑고 쓰다듬고 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인숙이지만 나도 예술을 한다
는 관수의 발언에는 견딜수 없이 비위가 상하는 모양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투엣!  하고 관수의 면상
에다 침이라도 뱉아야만 속이 풀릴 형편이었지만 인숙이는 차마 그러진 못하고 밖에 나가 수도가에서 
캑캑 침글 뱉아싸며 뒤집히는 창자를 가라앉히게 마련이었다.
  그렇다고 비단 인숙이만이 관수의 발언에서 구토증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인숙이는 그래도  나은 
편이었다. 가다가 제멋에 겨우면 관수에게 말을 걸기도 하고 육체미의 채점도  요구하는 경우가 있으
니 말이다. 그러나 이 집안에 있는 주인 집 애들이란 모두가 관수를 완전히 색다른 생물로 취급해 버
리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들은 한 번도 관수를 저희들과 동격의 인간으로 계산하여 주는 법이 없었
다. 저 분(관수)이 정말 사람의 종류로 이 세상에 출생했다면 원 그 지경으로  '라디오 드라마'에 관
해서 무심할 리야 없을 게라는 그들의 통일된 견해 때문이었다. 아직 젖비린내도 가시지 않은 어린것
들네게 여지없이 얕잡혀 보이고 천대를  당해도 사실 관수는 속수무책이었다. 원체가  관수는 그들의 
명석한 두뇌를 당해낼 재간이 없으니까 말이다.
  이제 겨우 국민학교 4학년짜리 경자란 년만 해도 하루에 한 차례썩 그 많은 배우들의 이름을 꼭 구
구를 암송하듯 단숨에 쭉 외어져야만 밥이 먹힌다는 팔자였다. 팔자치고는 참으로 이상스러운 팔자였
지만 좌우간 경자의 암기력은 천재의 성분을 타고난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경자는 눈에 보이는 형상마다 그 본연의 이름대로 그냥 놔두는  법이 드물었다. 그
것이 사람의 얼굴이건 설사 짐승의 얼굴이건 가릴 바 없이 경자는 언제나 배우 '아무하고 같다' 하고 
반드시 배우나 가수의 이름을 오용하여 주변의 인물들을 제멋대로 명명해 버리는  것이다. 도대체 언
제부터 그 숱한 배우들과 형제 이상으로 친숙해졌는지 그 비상한 속도의 교제법을  알아낼 힘은 없지
만 어쨌든 교과서에 잘 등장하는 철수다 영이다 하는 인물에게까지 배우 '누구  누구와 같다'하고 배
우들의 성함을 인용하여 붙이는 데는 정말이지 탄복할 수밖에 없는 관수였다,
  그런데 한 가지 해석하기 어려운 문제는 그렇게도 특출한 기억력을 타고난 경자였지만 하루의 절반
을 같은 울 안에서 생활하는 학교의  교장선생님이나 담임 선생님의 이름을 어쩌다 누가  물을라치면 
한참이나 그저 우물쭈물하다가 기어이 확실한 답변을 내리지 못하고 마는 점이었다.
  그 점은 관수에게 있어서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였지만 본인인 경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
이었다. 다만 어제 모 극장 앞에서 희극 배우 '땅딸보'를 봤다고 신바람이 나는  명자의 자랑에 나는 
무슨 못된 팔자로 그때 그 자리에 없었을까  하는 비운만이 억울하고 분했지 그 이외 일체의  이치에 
관하여서는 잠시도 눈을 돌리려 하지 않은 것이다.
  사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경자보다는 그래도 언니 행세를 하느라고 명자 편이  더욱 우세한지도 모
른다. 국민학교 6학년짜리 명자는 이제 그까짓 사진을 보고 배우 아무개라고 이름을  알아 맞추는 일
쯤을 가지고는 창피해서 도무지 뭣을 안다고 남 앞에서 입을 벌릴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기에 경
자가 신문지의 영화 광고에 나타난 배우들의 얼굴을 이건 누구다 이건 누구다  하며 일사천리로 외어 
내려갈때도 명자는 도무지 저런 짓은 이제 유치해서 못 보겠다는 듯이 때로는  경자의 머리를 쥐어박
으며,
 "넌 그것도 자랑이라고 하고 있니!"
 핀잔을 주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런 때 너 왜 패느냐고 한번도 대들지 못한 이유는뭐 그게 언니라고 대우해 줘서가 아니라 원체가 
명자처럼 목소리만 듣고도 얼른 이름을 분별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식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탓이었다.
  아닌게아니라 명자의 그 예리한 식별력은 항시 타인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다. 명자는 하나 둘 이
렇게 아주 초보적인 숫자를 헤아리듯 조금도 힘을 안 들이고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턱턱 알아 맞추는 것이었다. 라디오 앞에서 귀를 기울이며 이건 가수 누구다 저건 성우 누구다 또 이
건 아나운서 아무개다 하고 그 음성만 듣고도 출석을 부르듯 아주 간단히 그들의 이름을 호명할 때의 
명자라는 인물은 경자에게 있어선 적어도 이 세상에서는 제일 부러운 사람 중의 하나인 것이다. 그러
기에 그저 그 목소리가 그 목소리 같은 배우나 가수나 아나운서의 이름을 명자가 턱턱 호명하기 시작
하면 경자는 천연 공중곡예라도 구경하듯 그 진지한 '스릴'과 '서스펜스가 반주하는 시선으로 명자의 
입을 정신없이 쳐다보다가는 급기야,
 "아이 어쩌면!"
하는 경탄과 더불어 명자의 그 신통한 감식력에 완전히 반해 버리는 것이었다.
  이렇게 경자의 존경과 선망을 한꺼번에 독점하고 있는 명자였지만 우습게도 오빠인 중학교 2학년짜
리 현웅이 앞에서는 한 번도 내노라 하고  큰소리를 쳐보지 못한 사실이 고민이라면 명자의 단  하나 
남은 고민이랄까.
  '라디오 드라마'의 첫회만 듣고도 여지없이 그 사건의 결말을 폭로해  버리는 오빠의 선견지명에는 
사실 무조건 항복할 수밖에 없는 명자자니까 말이다. 새로운 드라마가 시작되기만  하면 현웅이는 점
잖게 동생들을 앞에 놓고 그 사건의 결말을,
 "흥! 그 자식이 멋 모르고 지금은 그 여자를 좋아하지만 결국에는 큰코 다칠걸."
  또는,
  "그 여자가 지금은 저렇게 궁뎅일 빼지만 나중엔 죽자사자 하고 덤빌걸. 그러단 또 그 남자한테 영
락없이 채이겠지."
  이렇게 제 손바닥을 보듯 시원하게 예언해 버리는 것이었다. 회를 거듭할수록  용케도 오빠의 예언
대로 드라마의 사건이 차곡차곡 풀려  나가기 시작하면 명자의 고민은 절정에  육박하는 모양이었다, 
공연히 풀이 죽어서 밖에 나가 놀지도  않고 방구석에서 까닭없이 동생이나 슬슬 튀기면서  화풀이를 
하는 것이다. 어쩌면 나는 죽을 때까지 배워도 오빠만치 우수한 두뇌를 가져 보지 못하고 말 것 같다
는 열등감 때문이랄까. 좌우간 번번이 실패만 되풀이해 온 자신의 예언을  향해서 북받쳐오르는 증오
심을 명자는 달랠 힘이 없었다.
  이러한 애들의 시야에 관수 따위가 도무지  사람으로 잘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사실 
말이지 관수는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음성만을 재료로 해서 그 주인공의 이름을 턱턱 알아맞추기는 고
사하고 요새는 어떠한 내용의 드라마가 진행되고 있는가라는 질문조차 답변할 만한 상식이 없었다.
  그래도 사람이 좀 모르면 모르는 대로 알고  싶어 노력하는 태도만이라도 남 앞에 보여 줬다면  또 
모르겠다. 도리어 이건(관수) '라디오 드라마'가 시작되는 그 흥미진진한  시간이 임박해질라치면 슬
금슬금 라디오를 피하여 숫제 자취를 감추어 버리는 게 아닌가.
  슬금슬금 라디오를 피하는 관수의 뒷모습을 처량하게 바라보다 그런때 현웅이와  명자와 경자는 서
로 다투어가며,
 "저 사람은 무슨 재미로 살까?
 "참 별꼴이야."
 "그것도 팔자겠지."
 한 마디씩 개탄과 동정이 연결된 언사를 아끼지 않는 것이었다.
 이 비참하리만치 창피한 애들의 손가락질을 등 뒤에 의식하며 이런 때 관수는 연거푸 나오는 기나긴 
한숨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이다. 대체 무슨 방법을 써야만 자신의 부서져  버린 인간으로서의 위신을 
고칠 수 있을는지가 영 생각나지 않는 탓이었다. 딱 한 가지 좋은 방법이 아주 없는 바는 아니었지만 
관수의 그 질기지 못한 인내력으로는 생전 가야 실천하지 못할 방법이니까 사실  그런 방법은 있으나 
마나 한 것에 불과했다.
  최소한 요새는 어떠한 내용의 드라마에 어떠한 분들이 출연하고 계시다는 상식쯤은 늘 가지고 있어
야 하는 것이 상책이었지만 그러자면 관수는 애들과 단짝이 되어 얼마 동안이라도 드라마를 경청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지지 않을, 상책이니까 말이다. 어찌된 친구가 관수는 드라마가  진행되는 시간에 한
해서만은 단 몇 분을 라디오 앞에서 견디지 못하는 그렇게 허약한 인내력의 임자였다.
  언젠가 한번 드라마가 한창 무르익어가던 라디오 앞을 무심코 지나가다가  우습게도 관수는 온몸이 
참을 수 없이 근지러워지는 바람에 하마터면 애들 앞에서 꼴사납게 넘어질 뻔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터였다. 훌쩍훌쩍 계집아이 하나가 뭣이 억울하다고 눈물을 짜내는 옆에서 그러지  말라고 달래는 품
이 지금 사내 녀석 하나가 난처한 입장에 빠져 들어가고 있는 드라마의 장면인가 본데, 도무지 '홍도
야 우지마라 오빠가 있다'는 식의 유행가를 다시 듣는 것만 같아서였다.
  오빠가 있으면 가만히 있지 그래서 건방지게 어떻단 말인가. 그런 소리만  들으면 괜히 혓바닥까지 
간지러워지는 관수였다.
  네 뒤에 누가 있으니 걱정 말라는 투의 사대적인 사상으로 말미암아 스스로의  선택과 비평 정신이 
여지없이 허물어져 흘러내리는 물결 속으로 하나의 도시가 점점 파묻혀 들어가는 참상이 눈앞에서 아
물거리는 탓이랄까, 실은 그보다도 라디오를 삥 둘러싸고 앉아서 주고받는 애들끼리의 대화가 참으로 
꼴같잖아서였는지 모른다. '라디오 드라마'가 시작되면 애들은 그렇게 떠들다가도  모두 전몰 장병의 
명복이라도 빌 듯 엄숙한 모습으로 라디오를 포위하며 조용해지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애수에 찬 음
악이 흘러나오고 누가 우는 소리가 들리게 되면 명자와 경자와 현웅이는 서로  안됐다는 듯이 고개를 
기웃거리며,
 "그 남자는 정말 그 여잘 버릴까."
 "그러게 말이야 참 불쌍하지? 남자가 나빠."
 "아니야 여자가 나빠. 약혼자를 두고도 딴 남자하고 그게 뭐니."
  이런 식으로 연장되는 애들의 대화는 아내가 요강을 탄 자세만치나 왜 그렇게  어울리지 않는지 차
마 눈물 없이는 단 몇 분을 귀담아 들을 수가 없는 관수니까 말이다.
  그래 이래 가지고는 언제까지나 인간으로서의 위신을 회복시킬 가망이 없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
도 관수는 애들과 단짝이 되어 라디오 앞에서 단 몇 분을 인내하지 못하고 방에 들어가 문을 닫을 수
밖에 없는것이다.
  방에 들어가도 근질거리는 기분이 쉽사리 가시지 않는 관수는 문틈으로 애들의 동태를 엿보기가 일
쑤였다.
  대개의 경우 애들의 눈에서는 눈물이 떠날 새가 없었다. 그만큼 슬프고  안타까운 연기만이 계속하
여 들려오는 모양이었다. 소리도 없이 흘러내리는 애들의 눈물 방울을 쳐다보노라면 자신의 혈액이라
도 빼앗기는 성싶은 착각에 관수는 오싹 소름이 끼치기도 하는 것이다. 한창 성장하는애들의 몸이 수
시로 저렇게 라디오한테 수분을 빼앗기고 나면 도대체 무슨 힘으로 건강을 유지할까  하는 의문이 가
슴속을 파헤치는 닻이었다.
  그래도 그 애들의 보호자 되는 안집 마나님은 자식들의 그 예민한 감수성과 기억력이 자랑스럽기만 
한 모양이었다.
  사실 그 애들의 어머니는 부모된 유세를 하느라고 한 번도 손수 '라디오 드라마'를 듣는 적이 없었
다. 언제나 지식이라는 밑천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자식들의 입을 통하여서만 편안히 드러누워 드라
마의 경과를 보고받게 마련이었다.
  드라마가 시작될 시간이 박두해지면 소리 높이 밖에서 노는 자식들을 불러싸며,
  "얘들아! 시간 다 됐다. 시간 다 됐어!"
  시간을 대어 귀빈이라도 역에 마중나갈 사람처럼  분망해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애들이  라디오를 
따라 몰려가는 광경을 확인하고서, 만족한 듯  눈을 내려깔고 방에 들어가 편안히 쉬시는  것이었다. 
자식을 뒀다 이런 때 쓰지 어따 쓰랴 하는 그렇게 흐뭇한 기분을 맛보시는 모양이었다.
  드라마가 끝나면 애들은 순번대로 방에 들어가 그날치의 경과를 어머님께 보고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 오늘은 어떻게 됐니?"
 "왜 그 순자라는 여자 있잖아 엄마, 사장한테 선물을 받았던 여자 말야."
 "응 그래 그래."
 "그런데 엄마 그 여자가 사장하고 영화 구경을 갔드랬는데 말야, 거기서 진이를 만났지 뭐야."
 "원 저런! 순자의 약혼자 진이 말이지?"
 "응."
 "그래서 어떻게 됐니?"
 "몰라. 오늘은 고게 끝이야."
 "하 참!"
  고것 참 묘하게 돌아간다는 표정으로 어머니 되는 사람은 뭣을 신중히 생각하다가는 벌떡 일어나,
 "에이그 보나마나 그 여잔 그 남자하곤 살기 틀렸다 얘."
  최후의 심판이라도 내리듯 자식들 앞에 엄숙히  선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선언이 들려올  때마다 
관수의 눈앞에는 별 죄도 없이 형을 받는 피의자의 억울한 심정이 자꾸만 어른거려서 저도 모르는 사
이에 불끈 주먹이 쥐어지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 번도 관수는 그 쥐어진  주먹을 어따가 사용
해 본 적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생트집이라도 잡아서 안집 마나님을 붙잡고 무슨  결말을 내야만 
속이 후련해질 형편이었지만 그럴 수가 없는 관수였다.
  아내를 생각해서였다, 공연히 시키지도 않은  일을 저질렀다가 아내의 그 '현대'라는  무기한테 또 
무슨 봉변을 당할지 전연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진실로 안집 부인의 그 엄숙한 선언이 '현대'의 질서에서 탈선한 것이라면 반드시  아내의 한 마디 
코멘트가 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내는 아직까지 침묵을 지키고 계셨다. 참말이지 아내가 관리
하는 현대의 정체를 대충이나마 파악하기 전에는  무슨 일에도 참견할 용기가 일어나지 않는  관수는 
항시 골치가 아팠다.
  참으로 아내가 구세주 이상으로 떠받들고 다니는 그 현대라는 용어는 말할 수  없이 관수를 피로하
게 해주었다.
  어디로 보나 그럴 여인이 아닌데 아침마다 남편의 턱 밑에서 구린내를 방매하는  아내의 그 현대적
인 위생학도 감당하기 어렵거니와 그러나 그보다도 아내 자신의 그 빈번한 실연  사건까지 그 책임을 
남편에게 뒤집어씌우려 드는 데는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관수였다.
  언제나 아내는 자신이 실연한 이유가  남편에게 있다고 따지는 것이다. 그것은  관수에게 '현대'를 
지배하는 '데모크라시'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협동 정신이 부족한 탓이었다. 어찌된 사람(관수)이 가
장 가까운 처지에 놓여 있는 아내의 생활 방침에조차 협조해 줄 줄을 모르니 멀리  있는 남에게야 뭐 
불문가지라면서 당신 같은 사람이 현대에 태어났다는 것은 '데모크라시의  치욕'이라는 것이었다. 그
러한 아내의 항의에 접할 적마다 관수는 억울해서 견디질 못했다. 도대체 무슨 말로써 자신의 무고함
을 증언하면 좋을는지가 얼른 생각나지 않는 탓이었다. 그럴 때마다 관수는 머뭇머뭇 아내의 노한 면
상을 죄스럽게 조금씩 바라보다가는 한참동안의 궁리 끝에,
 "그건 말이지 당신의 오해야. 암 오해구 말구. 내가 뭣 때문에 도와 주지는 못할  망정 당신이 좋아
하는 일을 방해할 리가 있겠어. 응! 생각해보란 말이야. 난 남편이라는  입장에서 어디까지 남편이니
까 말이지, 당신의 실연을 충심으로 동정해 줄 사람도 난 내가 제일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지. 당
신은 너무도 날 오해하고 있거든."
  이런 식으로 해명해 나가는 관수의 억울한 심정은 영락없이 아내의 그 노도처럼 밀려오는 '현대'라
는 어휘에 걸려서 맥을 못 추고 마는 것이 순서로 되어 있지만 그런 관수의 이야기는 진심이었다.
  관수의 생각에 아내의 실연 사건은 언제나 아내 자신의 불찰로 인해서였다. 말하자면 아내
는 너무나도 사나이들의 그 이상스러운 생리를 이해할 줄을 몰랐다. 아내는 항시 자기 주변의 사나이
들은 모두 자기 하나만을 좋아한다고 굳게 믿고 있으니까 말이다.
  밤 늦게 귀가하여 양주의 고 알알한 향내를 풍기며 아내는 곧잘 관수의 목을 얼싸안고,
 "내겐 정말 알 수 없는 무슨 마력 같은 것이 있단 말이야 하하하."
  하룻동안의 유쾌했던 장면을 회상하며 흡족한 웃음을 보여 주기가 예사였다.
  이러한 아내의 기쁘기만한 인생을 대할 때마다 관수는 어떤 화려한 역사를 가진  먼 나라에서 외유
라도 하는 기분으로 가슴이 점점 열리는 것이다. 그 열린 가슴속으로 부드럽고도  시원한 바람이! 그
것은 아내의 입술이었다.
  그 먼 나라의 호화스러운 역사를 진심으로 축복하듯 관수는 자신과 비교하여 과거도 현재도 너무나 
흥겹고 호사롭기만 한 역사를 창조하는 아내의 그 가득한 가슴을 가까이 할 수 있다는  이 사실을 이 
영광을! 도대체 어떻게 유지하면 좋겠느냐는 그렇게 못 견디는 몸짓으로 열렬한  키스의 축제를 올리
는 것이었다. 그러면 아내는 오로지 저 혼자만을 위해서 세계란 것이 있어 준 것 같은 흥분과 자만심
에 약간 떨리기까지 하는 어조로,
 "저 언젠가 말한 적이 있는 미스터 김이라는 친구 있잖아요. 왜 외교학을 전공하고 작년에 미국에서 
돌아온 그 미스터 김 말예요. 글쎄 그치가 오늘도 우리 회사까지 달려와서 사뭇 울상이지 뭐야, 사랑
한다는 거거든. 나와 인사를 교환하고부터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겨우  알았다잖아. 
글쎄 자식이 둘씩이나 되도록 자기 부인한테서는  그런 감정을 맛본 적이 없다는 거야.  내가 오케만 
하면 당장이라도 가정을 박차고 오겠다는 거야. 그 '댄디'한 친구가 말야. 하하하  나이 삼십에 회사
를 둘씩이나 거느린 그 사교계의 참피온이 말이지 하하하."
  신이 나서 프로포즈를 받은 상대방의 인격을 예산하여 내려가다가는 느닷없이,
 "그런데 이 사람은 뭘 바라고 사누."
 따로 걸 프랜드 하나 없는 관수의 무미하고도 건조한 생활이 보기에 딱하다면서 아내는 관수의 이마
에 입술을 대고 별 추잡을 다 떠는 것이었다. 이렇게 겁없이 자꾸만 달떠오르는  아내의 기분을 대하
게 되면 관수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이다.
  아내의 동정을 살 만치 무미한 자신의 생활이 부끄러워서 뿐이 아니라 관수는 조만간 이 집안에 찾
아올 또 하나의 실연 사건을 예상하고서였다.  실연 사건이 그냥 아내 자신의 일시적인  불행한 일로 
끝나 주고 만다면 별문제였지만 으례히 실연 뒤를 따르는 아내의 그 하루나 이틀 동안의 우울증은 생
각잖은 곳에까지 파급되어 식모 인숙이는 물론 관수 자신에게까지 적지 않은 피해를 입히고야 가라앉
아 주는 것이 무슨 정설처럼 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마음이 우울해지면 아내의 눈에 요강은 영락없이 현대적인 하나의 용상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용
상 위에 앉은 군주처럼 아내는 요강위에서 내려올 줄을 모르고 탕탕 인숙이를  향하여 서슬이 퍼렇게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공연히 아무것도 아닌 것을 다지고 트집을 잡아서  그렇잖아도 얼른 예술가가 
되어 주지 않아서 상하는 인숙이의 마음을 더욱 상하게 만드는 것이다.
  금방 달걀을 사오라고 시키고도 달걀을 갖다 대령하면,
 "저년이 귓구멍이 고막에 있는 년인가 없는 년인가! 내 능금을 사오랬지 언제  달걀이 먹고 싶다던! 
이 미친 년아!"
  백주에 저런 천치숙맥이 다 백성 행세를 하는 판이니 정치가도 오죽이나 속을  썩히겠냐고 제법 정
치인들을 위해서 한숨까지 내쉬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겨우 이제 빨아 말린 하이얀 옷가지를 집어 동
댕이를 치며,
 "이걸 빨래라고 했어! 이 엉터리 같은 년아! 도대체 이걸 손바닥으로 빨은 거냐 발바닥으로 빨은 거
냐!"
  의족으로 빨아도 이보다는 낫겠다면서 저 따위 엉성한 년 하나 처벌하지 못하는  정부를 믿고 살아
야 하는 내 팔자가 가관이라면서 바락바락 악을 쓰는 꼴이란 차마 민망해서 볼 수 없는 상태였다.
  그래도 인숙이는 외관상 조금도 동요되는 빛이  없이 아내의 호령대로 부지런히 종사하는  것이다. 
무슨 연극이라도 연습하는 기분이랄까, 인숙이는 정말 예술가가 되기 위해 자기는  지금 실기 시험에
라도 임하는이라고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줌마가 그러는 속을 내 빤히  알고있다는 눈치로 가
다가는 히죽이 웃기까지 하며 팬터마임처럼 묵묵히  동작하는 인숙이의 그 노련한 솜씨를 보면  말이
다.
  갖은 욕설을 다 퍼부어도 연상 불쾌하게 여기는 빛이 없이 태연하기만한 인숙이의 표정과 부닥치고 
나면 아내의 계획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지친 듯 요강을 웃목에 밀어박치고는,
 "저건 사람이 아니다."
  인숙이는 사람이 아니라고 스스로 긍정하고 나서 이번에는 우울증의 방매처로  남편의 입술을 선택
하는 것이었다.
  울적한 심사를 성적인 쾌감으로라도 해소시켜 보자는  수작인지 누가 보면 사뭇 어떤 년이  사람을 
잡는다고 고함을 칠 만치 이건 그냥 키스라기보다는  물고 핥고 비비고 깨물고 도무지 숨 쉴  여유를 
주지 않는 무슨 경쟁 같은 것이었다. 관수는 입술뿐이 아니라 입술을 중심으로 주변의 근육들이 모두 
뭉개져 나가는 성싶은 아픔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공포증에 사로잡혀 가지고는 어찌  보면 신의 가호라
도 비는 듯한 어조로,
 "여보 정말 이러기야. 난 어디까지나 당신을 위해서 하는 얘긴데 말이지. 왜 그 박테리아라는 것 있
잖아. 인간의 생사권을 쥐고 있다는 그 흉칙한 벌레들 말이지. 그런데 그 벌레들이 내 생각에는 변소
에보다두 내 입 속에 더 많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지, 여보 정말 이러기야 응! 입 속의 이 충치를 
보란 말이야. 이 단단한 상아질을 뚫은 박테리아들이 아 그까짓 당신의 혓바닥쯤이  문제겠어 응! 어
서 좀 비켜요. 정말 난 당신의 건강을 위해서 하는 얘기라니까."
  거진 울상이 되어 어서 좀 비켜나 주기를 애원해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원 천치 같은 소리. 그까짓 박테리아쯤은 말이죠, 얼마든지 소탕할 수 있는  뜨거운 온도를 인간은 
항시 유지하고 있는 거예요. 당신처럼 맨날  그 따위로 인간의 능력을 신용하지 않는  한 메카니즘의 
속박에서 인간은 언제까지나 구원될 수 없단 말예요. 정말 당신은 큰일이군요."
  뭣이든지 이렇게 자기의 편의대로 해석해 버리는 아내의 현대적인 사고의 광장에서는 한 번도 관수
의 애원이 통해 본 적이 없었다.
  관수는 할 수 없이 부상을 입고 말고는 운수에 맡기고 아내의 요구대로 입술뿐이 아니라 얼굴 전면
을 제공해야만 하는 것이다. 입술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 그까짓 계집년 하나 밀쳐  버릴 완력 정
도는 충분히 가지고 있는 관수였지만 최근 관수의 처지는 그만한 용단을 허락하지 않았다.
  소견백이 없이 입술의 안전만을 도모하기 위해서 만약에 아내를 밀쳐내기라도 해봐라.  그 후에 닥
쳐올 재앙을 생각하면 차라리 지금 입술 어디 한 군데 상처를 입는 편이 훨씬  마음 편한 노릇이니까 
말이다.
  그만치 아내는 자신의 의사가 거부되는 경우  그야 뭐 다음 순서는 생각하나마나 뻔하지  않으냐는 
듯이 단박에 태도를 바꾸어 그 노기에 파르르 떨리기까지 하는 눈자위를 관수의 턱 밑에 바싹 들이대
고는 이건 더욱 숨쉴 여유를 주지 않고 오늘중에 당장 부채를 청산하여 달라고 빗발치듯 재촉하는 것
이었다.
 "뭐예요! 소위 남자라는 동물이 응! 애인한테 돈을 다 꾸고. 자 워낙 천치라  부끄러운 줄은 모른다
고 칩시다. 그래도 갚겠다는 날짜까지 어겨? 원 어림없는 소리! 삼 개월이나 지났어요 삼 개월! 안되
지! 오늘은 내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받아내고야 말걸, 당신도 회노애락이 있는 동물이라면  말이죠 
생각해 보란 말예요. 내가 노할 만치 됐나 안됐나! 흥! 백주 지금이 어떤 세상인 줄 알고 이 핑계 저 
핑계로 남의 돈을 다 떼어먹을려고 드는 거요, 도대체! 응! 안되지! 더군다다 여인의 돈을.....암 안
되구 말구!"
  아무데서나 열을 내는 복음의 전도사들처럼 아내는 얼굴이 시뻘겋게 상기되어 가지고 내 이 지당한 
말씀을 좀 여러분들 들어보시라는 투로 동리가 떠나가게 큰 소리로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제발 며칠만 더 참아달라는 관수의 소원이 이런 때 통하는 수도 있다면 구태여 세상을 고해다 뭐다 
해서 시끄럽게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무슨 말대꾸를 하고 싶어하는 관수의  동태를 포착하기만 하는 날이면 벼락이,  그렇다  
'현대'라는 이름의 벼락이 여지없이 관수의 뒤통수를 난타하는 것이었다.
 "안되지! 현대인의 자격은 말이죠, 우선 금전 거래에서부터 시작되 거예요. 다시  말하면 금전 거래
의 신용의 척도만이 그 사람의 인격을 점할 수 있다는 거예요. 아무리 탁월한  식견과 비상한 지혜의
소유자라 한들 금전 거래에서 한번 불신임을 당하고 나면 그 즉시로 인간은  현대의 대열에선 철거되
는 거예요. 이렇듯이 중요한 금전 관계란 가장 가차운 사이일수록 더욱 분명하게 처리돼야 하는 거거
든요. 말하자면 당신과 나 사이처럼 아내와 남편 사이라든가 부모와 자식이 또는 친구와 친구 사이일
수록 말예요. 그런데 당신은 뭐냐 말예요! 암말 말고 어서 갚아요, 갚아! 이것도 다  당신을 위한 독
촉이니깐요. 방에서 생활하는 당신이 '현대'의 대열에서 철거당하는 꼬라지는 창피해서 죽아도 못 보
겠단 말예요"
  따지고 보쳔 나의 이 노기도 당신을 현대인으로 승격시키기 위한 어찌할 수 없는 한 가지 방편이라
고 설명하는 데는 그저 무조건 황송할수 밖에 없는 관수였다.
  이런 경우 황송한 마음을 표시하는 방법으로 고개나 숙이고 암말없이 몇 방울  눈물이나 흘리고 앉
았으면 일은 간단히 끝나 주고 말 것을 관수는 쓸데없이 사람 구실을 하자면 이런 때 한 마디 빈말이
나마 고맙다는 인사조차 없어서야 되겠느냐는 그런 부질없는 생각 때문에,
 "참 옳은 말씀이야. 설혹 내가 누구의 돈을 못 떼먹어서 하필이면 당신의 돈을 떼먹겠어. 내게도 그
만한 상식쯤은 있으니까 말이지. 당신도 알다시피  내 형편이 지금 워낙 말이 아니어서  그렇지 내가 
아직 당신의 돈을 다 떼먹을 만치 그 지경으로 타락하진 않았거든. 그러기에  이렇게 노력하지 않아. 
이번 이 소설만 다 번역하면 그깟 돈 몇만 환쯤은 문제도 아닌 거야. 이  원고만큼은 현금과 즉시 교
환한다는 조건 밑에서 번역하는 중이니까 말이지. 틀림없는 거야, 암 틀림없구 말구......"
  이렇게 몇 번이나 틀림없으니 안심해 달라고  머리를 굽실거리는 남편올 대하게 되면 아내  신옥은 
화통이 터지는 것이다. 명색이 그래도 사내자식인데 원 저 지경으로 아부할 수도 있느냐 하는 적개심 
때문이었다. 아내는 있는 문 없는 문을 닥치는 대로 활짝 열어제치며,
 "아니 뭣이 어쩌구 어째요? 사내 대장부가 아 돈이 없으면 없어서 못 갚겠다구 딱 잘라서 말할 것이
지 창피하게 머리를 굽히며 변명이 무슨 변명이냔 말예요! 옹 뭐 번역을 해서 빛을  갚겠다구. 원 세
상에 아니 여보 그게 당신 입에서 나온 소리요! 콧구멍에서 나온 소리요? 응! 어디 한번 물어나 봅시
다."
  아내는 방바닥에 널린 원고 용지를 아니꼽다는 듯이 발바닥으로 이리 쓸고 저리 쓸고 하면서,
 "아 되지들 못하게 소설 한 편을 가지고 이놈이 찢어 갖고 저 놈이 찢어 갖고  하길래 난 또 친구들
끼리 장난하느라고 그러는 줄 알았더니 아, 그럼 그 여러 놈이 번역한 걸 줏어  맞춰 가지고 책을 만
든단 말이요? 원 세상에 천벌을 받아요 천벌을! 난 암만 궁해도 똥지게는 질 망정 그따위 낯간지러운 
짓은 못해요! 못해! 그따위 비양심적인 짓을 하면서 뭐 돈이 나온다구 큰소릴 쳐! 나오긴 뭣이 나와. 
아 독자나 원작자가 알면 그래 몽둥이나 나을 것이지 백주에 당신 맘대루 돈이 나와.  내 참 기가 막
혀서......"
  당신같이 윤리 의식이 전연 없는 철면피와 내 수년 간을 한방에서 같이 살아왔다니 이건 도무지 수
수께끼와 진배없는 일이라고 관수의 등을 밀치며 아내는 화풀이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먼 데도 아
닌 바로 이웃 방에서 또 공짜 구경이 생겼다고 신바람이 난 경자와 현웅이는 라디오를 포위하듯 관수
네 방문 앞으로 우 몰려드는 것이다.
 "얘 아줌마한테 지는구나이....."
 "히히히 정말이야, 참 기운도 없구나이....."
 "그러기에 숙맥이라 하지 않아. 히히히."
  제각기 한 마디씩 사건의 소감을 발표하게쯤 되면 그 애들의 어머니 되는  분까지 등장하여 사건은 
바야흐로 점점 가경에 접근하는 것이었다.
 "원 사내 대장부가 여인의 돈을 다 떼먹어! 쯧쯧."
  저런 자식은 한번 혼꾸녕을 줘야만 속을 차린다고 쯧쯧 혀라도 차는 소리가  바깥에서 들리게 되면 
관수는 정말 몸 둘 곳을 모르는 것이다. 눈 가리고 나 찾아라 하는 시늉으로 관수는 문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구멍을 찾는 것이었지만 보이는 것마다  아내의 화려한 의상뿐 그 화려찬 의상의  맨꽁무니에 
천연덕스럽게 매어달린 자신의 단 한 벌 양복만이 저주스럽게 보여올 따름이었다.
  생각하면 그 단한 벌의 양복이야말로 관수의 인격을 철면피로 낙착시킨 장본이랄까.
  얼마 전이라기보다는 정확하게 삼 개월 전 아내의 그 한계가 이 확대해 가는 행복감은 기어이 관수
의 수면 부족을 초래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밤마다 아내는 관수의 감기는 눈을 혀끝으로 방해하며
자신의 잔뜩 도취된 연애 감정을 향락하는 것이었다.
 "이봐요, 어서 좀 눈을 떠 보시라구요. 이렇듯 즐거운 인생을 당신은 어이  잠으로 충당하겠다는 거
군요. 참 답답한 친구도 다 본다니까. 이봐요, 어서 좀 눈을 떠 보시라구요."
  오밤중인데도 아내는 어서 눈 좀 떠보시라고 관수의 눈자위를 핥아싸며 지금 연애중에 있는 미스터 
안이라는 친구의 사람됨됨을 거의 무아지경으로 칭찬하여 내려가는 것이었다.
 "그 탁 바라진 가슴둘레 하며 귀족형으로  얌전히 올라간 콧날. 또 콧날을 중심으로  알맞게 조화된 
이목이 수려하기로도 우등이지만 뭣보다도 그 금전을 다루는 솜씨가 말예요,  당할 사람이 없거던요. 
그리구 또 변소까지 나와 동행하고 싶어하는 그 열렬한 애정. 여인을 아낄줄 아는  그 현대인의 에티
켓. 남편이 있다니까 그럼 더욱 좋다고 손뼉을 치던 현대인의 그 멋."
  또 무엇 무엇해서 밤 가는 줄도 모르고 꺼내는 애인에 관한 치사는 멈출 새가 없었다.
  이렇게 남편의 품에 안긴 채 다른 사나이와의 관계에 도취되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좋아하는 아내
의 이 광활한 '프리 월드'가 관수의 마음엔 항시 썩 드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어떠한 여인에게서도 
맛볼 수 없는 아내 혼자만이 가진 찬란한 세계요, 또한 그것은 아내가 남과 구별되는 단 하나의 표적
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남이야 어떻게 생각하건 말건 오로지 자기 스스로의  인생만을 손질하기 위해
서 항시 정신이 통일되어 있는 아내의 그 광활한 '프리 윌드'를 견학할 수 있는  입장권은 자기 혼자
만이 가진 것 같은 자랑스러운 기분에 관수는 아내의 등을 어루만지며,
 "암 그렇구 말구. 당신의 눈에 든 사나이인데 뭐 여북 잘났겠어. 그러니 이제 그만하고 어서 주무시
자는 얘긴데 말이지, 매일 밤 이렇게 뜬 눈으로 새우다가는 당신의 건강이 위태로울  것 같아서 그러
는 거야. 물론 그 미스타 안이라는 사나이에게 있어서도 당신은 중요한 사람이겠지만 내가 당신을 중
하게 여기는 점은 또 의미가 다르니까 말이지. 좌우간 당신은 누구를 위해서나 오래도록 건강해 줘야 
할 것 아니겠어 응! 자 일찍 자지. 사실은 이르지도 않지만 말야 응."
  일껏 사랑하는 아내의 건강을 생각하고 위해 주는 말이었지만 당자인  아내에게 있어서는 쑥스러운 
잡담으로만 들리는 모양이었다.
 "아니 여보 당신은 기껏 아내를 아낀다는 방법이 그저 '일찍 자지' 하는 그 정도시군요. 참 내 기가 
막혀서. 암만해도 당신은 저 세상에 인생이 또 한 번 있는 걸로 착각하는 모양인데 참 야단났구만요.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매일밤 잠, 잠, 하고 잠의 노예 노릇을 하겠다는 말씀이신지 원. 젠장, 남들
은 절로 오는 잠도 미워 죽겠다는데 뎁세 이건 오지도 않는 잠을 청하기까지 하라니 원 될 법이나 한 
말씀이셔 응! 결국 그건 사랑이라는 그 황홀한 상황을 전연 모르는 친구만이 할  소린데 나이 삼십에 
그런 말씀을 창피해서 어떻게 하시는 건지 원. 이성을 향한 그 빛나는 애정이  주는 '엑스터시'를 맛
보지 못하고 사는 그것도 인생인가 뭐 내 참!"
  그러한 남편이 인생이 가련하다는 듯이 아내는 약간의 동정심을 발휘하여 관수의 입술을  몇 번 쪽
쪽 빨아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그것도 무리가 아니지. 만날 콘사이스나 뒤적이고 앉아 있으니 언제 세상 속을  알 새가 없었겠지. 
이제부터는 나와 함께 다니며 바람을 쏘입시다. 응, 모델 케이스로 내 미스터 안을 소개할게요. 그런 
사람의 본을 좀 따시라구요. 아내를 대하는 최상의 서비스가 '어서 자지'  정도밖에 모르는 사나이와 
동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미스터 안은 날 얼마나 무시하겠어. 그런 데데한 여인인 줄은 몰랐다고 
침을 뱉겠지. 아, 당신은 아내가  남한테 그 지경으로 무시당해도 마음이  편하시겠다는 말씀인가요?  
내 입장을 생각해서라도 당신은 하루 속히 현대인의 생활 노선을 알아 둘 필요가  있거든요. 여인 하
나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 백화점이다 극장이다 댄스홀이다 그것도 모자라서  산으로 들로 명승지를 
찾아 드라이브 파티다 하이킹 파티다 해싸며 정신을 못 차리는 사나이들의 그  정성어린 예절을 말예
요. 내 한번 미스터 안을 소개할테니 꼭 같이 갑시다. 응!"
  여인을 아끼는 '현대인의 본보기'로서 미스터 안을 소개해 주겠다는 아내의 알선이 고맙지 않은 것
은 아니었으나 당시 관수의 생각에는 사절할 수밖에 없는 성질의 알선이었다.
 "고마운 말씀이긴 한데 난 조금도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지. 사실 미스터 안이 당신을 
어떠한 방법으로 사랑하건 말건 그런 것과 나완 아무런 상관이 알는 거야.  그렇잖겠어? 우선 미스터 
안이 당신을 좋아하는 부분과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 부분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지. 
말하자면 미스터 안이 그가 좋아서 당신에게 할 일과 내가 좋아서 당신에게 할 일은  절대로 같을 리
가 없는 거야. 그렇잖겠어? 난 어디까지나  내가 좋아하는 부분을 위해서 내가 할  일만이 문제거든. 
정말 미스터 안이 당신을 어떠한 방법으로 대접하든 말든 애초에 그런 것은 알 필요도 없는 거야? 난 
언제까지나 당신과 나 사이에서 내몫으로 차려온 내 일만에 충실하면 그만이니까  말이지, 미스터 안
한테서 당신에게 할 일을 배울 것은 조금도 없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지, 그렇잖겠어?"
  무슨 말인지 모르게 '말이지'를 되풀이하며 기다랗게 늘어놓는 관수의 대답이  좌우간 가기 싫다는 
얘긴데 아내의 귀에는 역시 비위 상하기에 딱 알맞는 대답이었다.
 "뭐요? 그럴 필요가 없다구요? 어림없는 말씀!  인간은 죽기 전까지 배워야 하는  거예요. 하나라도 
더 알고 싶어 안달하는 욕망, 그것이 문명의 동력이니깐 말이죠. 나 할 일만 하면  고만이지 하고 태
평세월하는 그따위 고루한 처세술을 가지곤 당신의 머리는 평생 가야 개명될 수 없는 거예요. 당신같
이 비진취적인 그런 퇴물 비슷한 사람과 살고있다는 사실을 내 주변의 친구들이  알기라도 하면 도대
체 내 꼴이 뭐가 되는 거죠? 응!  안될 말씀! 내 사회적인 명예를 생각해서라도 당신의  머리는 한시 
바삐 깨우쳐 줄 의무가 내게도 있는 거예요 암, 분명히 있구 말구요."
  먼동이 틀 때가지 절대로 안된다는 아내의 강권에 못 이겨 관수는 할수 없이 울며 겨자먹는 격으로 
그렇게 하마고 허락했던 것이다.
  그렇게도 잘났다고 아내가 내세우는 인물이니 한번 봐두고 싶은 생각이 아주 없는 바도 아니었지만 
어렸을 때의 은사도 아닌 바에 그 앞에서 새삼스럽게 뭣을 배우겠다고 머리를 숙일 수는  없을 것 같
았다.
  좌우간 한번 만나는 김에 안형때문에 얻은 나의 이 수면 부족으로 인한 식욕 부진과 약간의 현기증
을 어떻게 다스리면 좋겠는가 하고 그 대책만을 잠시 상의해 볼 만한 일이라고 관수는 마음먹었던 것
이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아내의 태도는 딴판이었다.
  아내를 따라나서겠다는 관수를 보고 아내는 꼴불견이라는 듯이 입을 삐죽거리며,
 "아 여보, 당신은 그 옷차림으로 날 따라오겠단 말씀이시유? 참 내 별꼴을 다  봤어! 뭣보다도 당신
은 그 원시적인 파렴치한 심성부터 고쳐요. 아 이 백일하에 반반한 옷 한벌 없이 그따위 퇴색한 잠바
바람으로 날 따라오겠단 말이지요! 응? 짐꾼이 아닌 담에야 말예요."
  남 앞에 자기가 부리는 종녀석이라고 소개한대도 그 옷차림으로는 창피한 일이라고 아내는 눈을 부
라리며 꾸짖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아무리 미스터 안과의 소개가 급하더라도 반반한  신사복을 한 벌 
장만한 후의 얘기니 좀 진정하시라고 살살 관수를 달래는 것이었다. 관수는 조금 서운하긴 하지만 되
려 잘 됐다는 생각에 그럼 나의 지금 형편으로 미스터 안과의 인사는 기약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때 아내는 관수를 어떻게 봤는지 그만한 돈쯤은 지금 내게 있으니 너무  실망하지 말라고 위로해 
주는 것이었다.
  다음에 꼭 갚기만 하면 되니까 어서 차용증서나 쓰라는 것이다.
 '일금 사만환정'
  결국 맞춘 옷을 찾을 임시해서 그 미스터 안이라는 친구는 홍콩인가 뉴욕인가로  행방을 감춰 아내
도 관수도 다시 만나 볼 기회를 영 놓치고 말았지만 어쨌든 관수의 눈에 보이는 아내의 저 화려한 옷
가지의 맨꽁무니에 살려 달라는 식으로 걸려 있는 단 한 벌의 양복은 저주스러운 물건이었다.
  철면피라는 낙인과 동리 애들의 구경감 속에서 조속히 출옥하는 최선의 방법은 역시 차용증서에 서
약한 대로 차용한 금액을 틀림없이 반환해 주는 길만이 있을 뿐이다. 차용증서가 호주머니 속에 엄존
해 있는 한 아내의 실연 사건을 맞는다는 것은 어느 모로나 관수에게 있어  불리한 노릇이었다. 실연 
뒤에 따르는 아내의 그 하루나 이틀 동안의 우울증을 감당할 만한 능력이  아직은 관수에게 없으니까 
말이다.
  때문에 아내의 달떠오르는 기분을 대하게 되면 관수는 항시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이다. 대개의 경
우 아내의 달뜬 기분은 또 하나의 시련을 약속하는 무슨 절차처럼 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아내가 풍기는 양주의 고 알알한 향내로 목을 축이며 관수는 아내의 실연을 미연에 방지할 만한 이
렇다 할 대책을 강구해 보는 것이었으나 뾰족한  수란 없었다. 관수는 할 수 없이 죄  없는 머리통만 
긁적거리다가,
 "암만해도 당신은 남자라는 동물을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이지,  미국 아니라 달나라에서 
돌아온 친구라도 그게 남자인 바에야 어디까지나 남자가 아니겠느냐 그 말인데  말이지. 어떻게 여인
에게 주는 남자의 얘기를 더군다나 처자까지  있다는 그 미스터 김이라는 친구의 얘기를  곧이곧대루 
신임할 수가 있겠느냐 말이지 응! 미안하지만 남자란 말이지, 시야에 앙기는 모든 여인의 살을 좀 하
루씩이나마 만지고 싶어서 말이지, 밤낮 없이 고민하고 있는 거야. 그저 뻔한 틈만 있으면 자기 부인
이 아닌 다른 여인의 피부와 접촉하고 싶은 충동에 말이지. 말하자면 가련할 만치  항시 고생하고 있
는 거거든. 그러니까 여자의 경우는 자세히 모르지만 남자란 주책없이 아무 때나 늙는 것이 아니라
그 늙는 시기가 딱 결정되어 있다는  얘긴데 말이지. 그것이 어느 시기냐하면 어떤  예쁘장한 여인이 
눈앞을 스칠 때거든. 그것을 그냥 한 아름에 끌어안고 싶어 죽겠는데 그러지 못하고  놓쳐 버려야 하
는 경우, 참 정확하게 그때에 하나씩 딱 주름이 잡힌다는 얘긴데 말이지. 그러니까 남자란 대부분 여
인 앞에선 결사적인 거야. 무슨 수단을 쓰면 저 여인과 하룻저녁이라도 같이 지낼 수 있을까 하고 머
리를 쥐어 짤 때의 남자의  심리는 '코뮤니스트'들과 일맥 상통한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지, 당신으로 
말미암아 소위 그 '사랑'이라는 열매를 처음으로 맛봤다는 미스터 김의 발언도 나에게는 '코뮤니스트
'들의 음흉한 정책의 일면을 반영하는 일종의 감언으로밖엔 들리지 않는 거야. 그런  면으로 봐서 당
신의 이성관은 확실히 수정을 요할 '센텐스'가 한두 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지. 정말 지금처
럼 여인에게 주는 사나이들의 말을 찰싹 믿기만 하다가는 당신은 얼마 안 가서 지치고 말 거야. 타락
이라는 어휘가 하나의 인간이 기진한 자리에서 출세하는 버릇이 있다면  한방에 거주하는 사람으로서 
사실 난 책임이 무거워진다는 얘긴데 말이지, 물론 지성을 존중하는 당신 같은 현대인이 아무리 기진
했기로 타락할 리야 없겠지만 그래도 인간의 생애를 감히 누가 보장한다고 나서겠어! 응?
  최선을 다한 관수의 이러한 충고는 사실  아내에게 무료로 소화집을 배부해 주는격에 지나지  않았
다.
  전연 소리에 억양이 없이 과거라도 술회해 주는 허심한 어조로 잔잔히 이어가는  관수의 얘기를 듣
노라면 아내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앞서는 것이다.
 "하하하하."
  삶의 기쁨을 천명하는 웃음이라기보다는 아직도 이런 쓸개빠진 자식의 생존을  허락하는 세상 인심
이 하도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온다는 실소였다.
  훈감한 알코올의 온도가 삽시에 몸에서 이탈해 버리는 불쾌감을 느끼며 아내는 이  친구야 제발 좀 
정신을 차려 달라는 부탁으로 천장을 보고 반듯이 누운 관수의 뺨을 한번 철썩 갈기는 것이다.
 "도무지 그게 무슨 소리요? 응! 세상에 당신 말만 진짜고 다른 남자의 말은  모두 가짜란 말이지요. 
하하하. 그러니까 당신 말만 들어달란 그 말씀인데...., 맙소사! 그따위 뻔뻔스런  논리를 현대에 적
용시키겠다니 당신 정말 엉터리군요. 당신도 남자라면서 뭣 때문에 당신 말은 옳고,  다른 남자의 얘
길 듣는 것은 그게 모두 오해냔 말이에요 응? 어린애 같은 소리! 딴 남자와  어울리면 그건 타락이고 
당신과 어울리는 건 그럼 뭐죠? 그건 뭐 구원을 의미하겠군요. 에이 여보슈! 그  따위 야비한 전근대
적인 소유욕을 '사랑'으로 착각하고 있다니  당신이야말로 이성관을 대폭적으로 수정할 필요가  있는 
거예요."
  정말 나 당신 그렇게 야비한 인종인 줄 몰랐다면서 한시바삐 이성관을 개량하기  전에는 잠시도 당
신을 유치해서 쳐다보지 못 하겠다고 아내는 분개하는 것이었다. 그런 경우 그럼 앞으로 노력해 보겠
으니 염려하지 말아 달라고 뉘우치는 빛이나 보이면서 잠이라도 청하면 또 모른다. 관수는 호되게 큰
일이나 한답시고 아내의 오해를 풀어 주기 위해서 찬 말씀 꺼내는 버릇이 항시 사고의 발판이었다.
 "그게 아니라니깐. 내 얘기는 말이지, '남자'라는 보통명사의 '컨셉트'를 설명한  것에 지나지 않는 
거야. 정말이지 당신을 독점하겠다는 그런  무모한 의사는 조금도 포함되지 않았다니깐.  상식적으로 
판단해 봐도 뻔한 노룻이지. 아 글쎄  내가 아무리 미련하기로서니 어떻게 원 하나의  생명을 완전히 
소유하겠다고 나서겠느냐는 거야 응. 물건도 아닌  당신같이 존엄한 인간을 말이지 응! 정말이지  난 
당신을 독점하겠다는 그 따위 야비한 생각을 품어 본 적이 없어. 장기 집권이  잘못하다가 폭군을 해
산하듯 개인간의 장기 소유도 그런 불명예스러운 사건을 가져오지 말란 법은 없을 것 아니겠어? 그런 
뜻에서 말야, 나는 언제나 적당한 시기가 오면 당신과 나 사이에서 받은 이  '남편'이라는 작위도 선
선히 내놓을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거야. 그러한 내가 뭣 때문에 야비한 수단을  써서까지 당신을 독점
하겠다고 나서겠느냔 말이지 응? 그러니까 내 얘기는 단지 난 어디까지나 당신의 편이니까 만약에 당
신이 실연해서 우울해 하는 모습은 안타까워서 차마 볼 수 없다는 그저 그뿐인 거야. 그런 뜻에서 대
부분 먹자판으로 이루어진 남자들의 생리를 좀  일러 주고 싶었다는 건데 말이지. 정말  당신을 위해 
주는 마음에서 말이지. 그런데 이런 나의  진심은 조금도 참작하지 않고 무작정 날  전근대적인 유물 
비슷한 것으로 취급해 버리니 난들 사람인 이상 왜 서운한 생각이 없겠느냐 말이지  응. 언제도 말했
지만 정말 당신은 날 오해하고 있거든."
  오로지 당신을 위하는 일념에서 그런 말이 나왔으니 오해하지 말라고 된 달 안된 말  순서 없이 연
결하는 관수의 해설은 번번이 아내의 노기만 더하게 해주었다.
  뭣보다도 아내는 저런 음침한 사나이와 수년 간을  한 방에서 같이 지내왔다는 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억울한 것이었다. 이 이상 더  연장되는 관수와의 공동 생활은 한없는 치욕을  생애에 뿌리는 
작업에 지나지 않는다고 자신해 보는 아내였다.
  아내는 벌떡 일어나 조국의 위기를 갈파하고 분을 이기지 못하는 야당인사처럼,
 "아이고 맙소사! 뭐라고요? 날 위해서 남자들의 생리 현상을 일러 준 것에 불과하다구요? 아 당신은 
남자가 아니고 뭔데 남자들은 어떻다는 거요! 도대체 응 되지 못하게스리. 가만둬요 좀. 내게도 꿈이 
있단 말예요. 스스로의 찬란한 역사를 창조할 신성한 의무가 있단 말예요. 그런데 아니꼽게스리 뭐가 
도대체 어쨋다는 거요! 응 아 그럼 당신, 혼자만 먹자판의 사나이들 계열에서  흘가분하게 빠져 나가
겠다는 말씀이시죠? 응! 참 어림없는 수작을! 나의 눈에는 당신도 다른 남자들과 다 같은 남자로밖엔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하란 말예요 남자가 보는 남자의 세계와 여인이 보는  남자의 세계는 언
제까지나 결론에 합의할 수 없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쯤 당신 만한 연령이면 알  만도 할 텐데 
도대체 당신은 어린애도 아니고 뭐냔 말예요?  응? 당신같이 어른도 아니고 어린애도 아닌  얼치기와 
오늘날까지 공동전선을 펴왔다는 나의 이 모욕적인 행위에 대해서는 마땅히  당신측에 책임이 있다고 
떠드는 것이다. 그리고 아내는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으며,
 "사내 대장부가 어쩌면 그렇게도 속이 빤히 내다보이는 소리를 눈 한번 깜짝하지 않고 지껄일 수 있
을까. 유독 자기만이 날 위하는 체하고 날 감금하겠다는 거지 흥! 고 따위 음흉한  수작이 저쪽 철의 
장막에서는 통할지 몰라두 여기가 어디라구 자유진영인데 어림없지?"
  이렇게 어림없지로 피리어드를 찍으며 적당한 시기를 앉아서 기다릴 것이 아니라 하루 속히 당신과 
헤어질 수 있는 명분을 찾아야겠다고 높이 쳐드는 아내의 손, 그것은 훈풍을  받은 기폭이었다. 기폭
을 흔들며 여객선처럼, 그렇다 여객선처럼 둥둥 명분을 찾기 위해서 아내는 관수 옆을 떠나는 것이었
다.
 '현대인'은 어느 자리를 막론하고 그 거취에 있어서 뚜렷한 명분을 세워야 한다는 아내의 지론에 의
해서였다. 말하자면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명예를 손상시키지 않고 관수와 헤어져도 좋은 명분
을 찾아내기 위한 행각이었다.
  하루나 이틀이 지나면 결국 적당한 명분을 발견하지 못하고 또한 여객선처럼 둥둥 되돌아오는 아내
였지만 좌우간 그 '명분'이라는 단어는 곧잘 독수공방을 장만해 준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관수를 우
울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되돌아온 아내는 조금도 미안해 하는 빛도, 그렇다고 멋쩍어 하는 빛도 없이  다만 한 마디 
당신의 '멘탈 에이지'가 아직 유치한 선에 있다든가, 마음이 음침하다는 조건만  가지고는 도무지 남 
앞에서 명분이 서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런 애초에 공동생활을 시작한 너의 선택 의식이 실은 얼마나 
유치했었느냐는 친구들의 비웃음을 나의 자존심이  어떻게 허락하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좀더 
고상한 조건을 내걸고 당당한 명분을 내세울 수 있을 때까지 하는 수 없이 같이  또 지내는 도리밖에 
없다고 아내는 고 빨간 루즈의 방향을  관수의 입안에 끼얹으면서 어린애처럼 목에 매달리는  것이었
다.
  목을 감은 아내의 따스한 살을 어루만지며 관수는 돌아온 아내를 위한 환영사를  무슨 말로 엮어야 
할지 생각해 보는 것이었지만 전연 그 서두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조금도 어디 구애됨이 없이 어린애
처럼 무한정 무질서한 질서를 생활하는 아내의 이 귀여울 수밖에 없는 처신을  축하해야 좋을지 꾸짖
어야 좋을지 모르는 것이다. 잘못하다 아내의 '현대'라는 무기한테 또 무슨 봉변을 당할지 전연 예측
하지 못하는 탓이었다. 참으로 아내가 관리하는 '현대'의 정체는 맨날 이렇게  관수를 난처한 입장으
로 인솔해 주기가 일쑤였다.
  오늘 아침도 아내는 식구들의 건강을 위한 부득이한 사정으로 방에서 요강을 타고  태연히 뒤를 보
시는 판이었다.
 "푸득 푸득."
  그것은 아내에게 있어서 어디까지나 시종이 여일하게 화려한 스케줄로 채워진  하루 생활의 스타트
를 알리는 예포 소리 같은 것이랄까.  좌우간 관수에게 있어서는 시종이 여일하게 기분  나쁜 소리였
다.
  그것이 제 아무리 현대 생활의 '모토'인 위생학을 실천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론에서 데려온 소리라 
하더라도 그래도 그 소리만은 제발 좀 변소에 가서 들려 주셔야만 제격일 것 같다는  생각이 항시 관
수의 사상을 지배하는 탓이었다.
  푸득푸득 하는 둔탁한 발음을 동반하는 냄새는  언제나 관수의 상식을 미궁으로 안내하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악취라 하더라도 매일 접촉하게 되면 할 수 없이 친근해져서 별 괴로움을 당하지 않는다
는 것이 냄새에 관한 관수의 상식으로 되어 있었지만 어찌된 판인지 아내의  항문을 통과하는 냄세는 
세월이 가도 늘 새삼스럽게 처음 맡는 악취처럼 관수의 콧구멍을 성가시게 해주니까 말이다.
 탓으로 푸득푸득 하는 발음이 시작되면 관수는 별 수 없이 후각의 위생을 돕기  위하여 번번히 호홉 
회수를 평상시의 그 절반 이상이나 줄여야 하는 것이다. 비밀스러운 체조라도 하듯 이불 속에서 한참
씩 숨을 죽이고 땀을 흘리노라면 제일  고통이 심한 기관은 역시 허파였다. 까닭없이  콧구멍 때문에 
입어야 하는 화였다. 누구에게보다도 관수는 허파에게 미안한 것이다. 실상  허파에겐 눈꼽만한 잘못
도 없지 않으냐. 냄새를 맡는다는 것은 도무지 허파의 담당 사무가 아니니까  말이다. 쓸데없이 콧구
멍 때문에 당하는 허파의 수난은 마땅히 조물주에게 책임이 있다고 관수는  생각하는 것이다. 누구를 
속썩이자고 허파로 가는 경유지를 하필 콧구멍에 가설했느냐 말이다.
  만약에 자기가 인간의 면상을 설계했더라면 반드시  허파로 직통하는 구멍을 얼굴 어디 제일  좋은 
자리에다 내줬을 거라고 생각해 보는 관수였다.
  워낙 옛날 분이라 조물주께서도 그런 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한 모양이었다.
  어쨌든 이 이상 더 허파에게 까닭 없는 폐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똥은 기어이 
방에서 싸야겠다는 아내의 주장은 조속한 시일 내에 번복시켜 줄 의무가 있다고 관수는 생각했다.
 헛수고가 될 줄 뻔히 알면서도 좌우간 이런 계제에 아내의 의사를 다시 한 번 타진해  볼 필요가 있
다는 생각에 관수는 숨을 가다듬으며 아내 쪽에 얼굴을 돌렸다.
 헌데 저게 뭐냐!
  손톱을 치장한 연분홍 매니큐어의 고 자르르 흐르는 윤이 요강에 기대어 있지 않은가. 손의 미화를 
위해 주야로 회생된 로션의 그 많은 분량의  체면을 봐서라도 손을 저런 데에 기대다니 이전  도무지 
말이 아니라고 저도 모드게 흥분한 관수는,
 "어이! 여보! 어이! 손만은 그 손만은! 들고 싸셔야 할 것 아니겠어! 응!"
  턱없이 큰 소리로 손만은 하늘로 쳐들어야 이치에 맞는다고 항의한 것이다.
 그러나 아내는 반응이 없었다. 순간 관수는 다리를 갠 아내의 자세를 훑어보고 가슴이 섬찟
했다. 뒤를 다 보시고도 그냥 요강을 '췌어'로 알고 그 위에서 다리를 개셨다는 것은 지금 아내의 마
음이 심히 불편하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었다.
  마음 속에 무슨 사고가 발생하면 아내는 곧잘 요강 위에 앉은 채 그 해결  방법을 연구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럴 때면 영락없이 다리를 개고 요강 가장자리를 손으로 매만지면서 생각을 무르익히는 것이
다.
  지금 한창 희한한 생각이 날듯 말 듯 하는 아내를 향해서 턱없이 소리가 아니라  집에 불났다고 고
함을 친다면 아내가 무슨 반응을 보일 사람이냐. 분위기를 잘 탐지해 보지도 않고  턱없이 소리를 친 
관수는 멋쩍은 생각에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지금 아내의 심중은 심히 불편하신중이었다. 아무리 마음을 고쳐 먹어도 이 이상 더 연장되는 관수
와의 생활은 생애에 막대한 손실을 첨가할 뿐이라는 결론이 나서기 때문이었다.
  여인이 남자와 살을 부비며 산다는 것은 도무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인간이 수치스러울 수 있는 
제일 마지막 장면까지 공개해 버린 말하자면 결사적인 사업이니까 말이다. 형이상하를 막론하고 혼자
지낼 때보다는 판이하게 진보된 면과 성장한  모습을 전제로 하지 않고는 참으로 무의미한  모험이었
다. 그런데 관수와의 공동 생활에서는 그  정반대의 현상만 자꾸 노출되어 가니 하루가  급할 수밖에 
없는 아내였다. 뭣보다도 경제적인 손실은 아내에게  있어서 만만치 않은 것이다. 물론 법의  보호를 
요청할 수 있는 차용증서를 바탕으로 해서 꾸어 주는 돈이긴 했지만 우습게도 그 대부분의 법이란 것
이 대한민국에서는 고시 준비에나 필요했지 현실적으로 백성을 위해 무슨 작용을 할  만치 그렇게 위
엄이 있어 보이는 것도 아닌 담에야 관수에게  돌려 주는 돈은 이건 그냥 눈뜨고 도적맞은  셈이라고 
항시 생각해 오는 아내니까 말이다.
  이제 두고보라는 큰 소리는 혼자서 치지만 이삼 년이 지나도록 제가 먹는 쌀값 한번 제때에 내놔본 
적이 없는 관수다. 노상 뭣을 번역합네  하고 방구석에서 축 늘어져 있는 관수의  주제꼴을 쳐다보면 
원 거기서 지폐는 고사하고 공짜로 휴지 한 장 묻어나을 것 같지 않으니 말이었다.
  저 좋아서 하는 것이라 말리고 어쩌고 할 권한이 없는 아내는 정말 울화통이 터지는 것이다.
  관수에게 돌려 주는 화폐로 사의 동료들이나 친구들에게 저녁이라도 한턱씩 냈더라면 그만큼 더 자
신의 인기가 사회적으로 상승했을 것을  생각하면 어디 이만저만한 손해냐. 관수와의  공동 생활에서 
구태여 한가지 소득을 발견하자면 성욕의 해결이 혼자 지낼 때보다는 좀 순조롭다는 걸까. 그러나 그
런 것을 다소 득이라고 쳐주자니 낯간지러운 것이었다. '성욕의 해결'을 지주로 해서 남녀의 공동 생
활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태고 이후의 낡아빠진 상식에 속하니까 말이다. 헌데  그것조차 늘 이쪽에
서 먼저 서둘러야만 겨우 성립이 되는 실정이리 그것도 한두 차례지 숙녀의 위신상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욕이었다.
  그러나 그따위 자자분한 손해를 인용할 필요도 없이 관수 때문에 받은 어제의  타격을 생각하면 지
금 이렇게 망설이고만 있을 때가 아니었다.
  헤어지자, 아내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참으로 관수가 준 어제의 타격은 아내에게 있어서 치명상이
었다. 무슨 면목으로 사장을 대하면 좋을지 아내는 앞이 캄캄하기만 한 것이다.
  아내는 한숨이 나왔다. 헤어지자! 아직 누구 앞에서고 떳떳이 내세울수 있는 '명분'은 발견하지 못
하였다 치더라도 우선 헤어지자는 것만이 급선무라고 아내는 생각한 것이다. 대한민국에 체신부가 있
어서 인간생활에 편리하다는 것이 도대체 뭐냐. 적당한 명분은 헤어진 후에라도  재료가 수집되는 대
로 얼마든지 엽서로 연락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마지막 작별의 인사나 하자. 조용히.
 "여봐요."
  관수를 호명하는 의외로 부드러운 발음이었다.
  어느새 아내는 요강에서 내려와 헤어 브러시로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 격에 맞지 않은 잔
잔한 아내의 발음이 도리어 관수를 어이둥절하게 했다. 무슨 혁명이 없이 갑자기 질서가 바뀌는 예는 
그리 흔한 노릇이 아니니까 말이다. 관수는  초조한 마음으로 아내를 쳐다봤다. 사람을 불러  놓고는 
아내는 화장 준비를 하는 판이 아닌가. 제일 덩치가 큰 요강을 선두로 작고  큰 그릇들이 일렬횡대로 
서서 아내의 지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내는 그 중에서 제일 배가 나온 크린싱  크림을 얼굴에 찍어 
바르면서,
 "유치하게 뭘 그령게 노려보시는 거예요. 남 속상하는 줄도 모르고, 내가 뭐 어제는 참을 만해서 참
은 줄 아시나 봐. 하도 사람 같잖아 아예 입을 다문 건데. 좌우간 난 이제 당신과 헤어지기로 작정한 
사람. 밤새 잠을 안 자고 생각한 결과예요. 바른대로 말하면 당신과 하루를 더 살면  그 하루의 분량
만치 내 인생은 피해를 입는다는 결론을 얻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난 누구를 위해서도 아닌 오로
지 나 자신의 인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당신과 헤어지는 거예요. 실은 당신같이 여인과  공동 생활에 
자신이 없는 사람과 한 방을 쓰기  시작한 나의 행동이 애초에 '미스테이크'였지만 그  미스테이크를 
인정하고서도 가만둔다는 것은 그대로가 악덕이니깐요. 실은 만시지지탄인 감이  없는 바도 아니지만 
역시 지금이라도 교정은 봐야지요, 그렇잖아요? 관수씨, 자 그럼."
  아내는 한쪽 손을 내밀었다, 최후로 다정한 악수나 하자는 건가. 관수는 당황했다. 이 이례적인 아
내의 온건한 태도에서 이번에는 정말 집을 나갈 결심인 것 같은 실감을 느긴 탓이었다.
  도대체 나로 인한 어제의 막심한 타격이란 뭣을 지적하는 건가? 관수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관수
는 악수 대신 아내의 얼굴을 가린 주걱형의 거울을 잡으며,
 "나 좀 봐, 건데 그게 무슨 소리지? 난 조금도 이해할 수 없는 얘긴데  말이지. 물론 당신이 자신의 
인생을 더욱 잘 되게 하기 위해서 나와 헤어지겠다는 데 대해서는 조금도 이의가  없는 거야.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계획대로 세상을 유감없이 보낼 권한이 있으니까 말이지. 건데 나 때문에  참을 수 없
이 컸다는 어제의 타격이란 대관절 뭣을 의미하는 거야? 응? 난 어디까지나 당신의 생활 방침을 도우
며 살아왔다고 자부하는데 말이지. 난 정말 당신이 지금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목메인 소리로 관수는 자신의 억울한 입장을 밝혔다.
  관수의 말에 아내는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한참 동안 말도 못하고 입만 씰룩거리더니,
 "흥! 잘하시는군! 당신은 헤어지는 마당에서까지 말쌩이시군요. 어제의 일이란 무엇이냐구? 차 기가 
막혀서, 그 따위 질문을 난발하는 당신의 그 철면피한 낯가죽이 나의 생애를  좀먹는 병균인 거예요. 
아 그 당신이 어제 미스터 송에게 한 말을 잊어먹구 하는 말은 아니시겠죠. 미스터  송이 또 우리 사 
사장님의 영식이라는 사실을 모르시고 하는 말은 아니겠죠. 흥! 생각하면 가슴이 뒤집혀요! 가슴이!"
  아내는 정말 뒤집히는 가슴을 막기라도 하려는 듯 가슴의 브래지어를 단단히 여미며,
 "아 내가 사에서 미스로 행세했으니까 사장한테 이만치나 귀염을 받아왔지  세상에 비서감이 없어서 
사장이 날 여태 쓴 줄 아슈! 원 어림없는 소리. 그런데 어쩌자구 미스터 송에게  나와의 관계를 밝히
느냔 말예요! 응! 아직 인사는 없지만 미스터 송은 당신보다도 더 내 얼굴을 바로  알고 있는 사람인
데 아내가 사에게 내쫓겨도 그게 당신 탓이  아니란 말이죠! 응! 어제는 하두 당신이 인간  같잖아서 
꾹 참았더니 에이 여보슈?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무슨 말을 하고 싶지도 않으니 내게 아무 말도 걸지 말라면서 아내는 트렁크
를 열고 이것 저것 상용품을 집어 담는 것이었다.
  관수는 가슴이 탔다. 이건 정말 생전 처음 듣는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여보 그게 정말이요? 응! 난 정말 몰랐다니까 그 친구가 당신 사장의 아들 녀석인 줄 글쎄 내
가 무슨 재주로 알았겠어 응! 당신이 근무하는 사의 이름도 잘 모르고 지금이 금시초문인 거야. 엉말 
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니까,,, ,,,."
  울음 섞인 관수의 얘기는 모두 옳은 말이었다.
  사실 아내에 관해서 알고 있는 관수의 지식이란 보잘것이 없었다.
  아내의 이름이 신옥이라는 것, 신옥이는 꽤 용모가 아름답고 신옥이가 항시 신주처럼 모시고 
사는 '현대'라는 용어는 이따금 상대방의 두통을 일으키게 한다는 것, 가끔가다 돈을 꾸어  줄 수 있
는 실력으로 봐서 신옥이가 관계하는 사의 재정은 꽤 튼튼한 모양이라는 사실 등 그저 추측으로 어렴
풋 알고 있을 정도니까 말이다. 그 이외 한 가지 그나마 아내의 입을 통해서  알게 된 지식이 있다면 
아내의 과거는 연애를 한 횟수로나 뭣으로나 관수 자신과는 비교도  안되게 호화판이었다는 사실이었
다. 이렇게 현란할 만치 아름다운 과거를 지닌 여인한 방을 사용하게 된 긍지를  관수는 항시 간직하
고 있는 터였다.
  아내에 대해서 알고 있는 이만한 지식도 사실 관수에게는 과분한 것이다. 무슨 첩보대원이 아닌 이
상 한 방에 거주하는 인간의 신상에 관해서 그 이상의 것을 알려 든다는 것은  미안한 일이기도 하거
니와 그보다도 관수는 남의 나라 작품을 번역한다는 그 자신의 생활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도무지 
지금 아내에 관해서 알고 있는 지식 이상의 것을 더 알아야 될 아무런 필요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타인의 신상 문제를 캐고 들어갈 시간이 있으면 번역의 능률을 높이기 위하여  관수는 단어 하나라
도 더 내것으로 소화시켜야만 했으니까  말이다. 정말이지 아내가 '동방무역사' 사장의  비서라는 그 
어마어마한 지위에 계시다는 사실도 관수에게는 초문인 것이다.
  아내는 한 번도 자신의 직장과 직명을 밝힌 적이 없었다. 늘 그저 자기가가 근무하는 직장은 '근사
한 곳이라는 애매한 형용사로써 자신의 직작명을 대신했던 것이다. 그러니 송이  아내가 근무하는 사
의 사장 자식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겠느냐 말이다.
  어제였다.
  번역한 고료 독족차 관수는 T출판사를 방문하는 길이었다. 그때 만난 사람이  아내였다. 사의 일로 
향수다방에 손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랬다.
 마침 관수와 같은 방향이었다.
 청천백일하에 퇴색한 잠바 바람으로 성장한  아내를 맞이했다는 사실이 왜 그런지  사리에 
합당치 않은 것 같아서 관수는 서먹했다. 눈을 찡그리며  아내가 노골적으로 언짢아하는 표
시를 하자 관수는 자꾸만 지금 자기는 무슨 죄를 짓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에 발걸음도 제대로 떨
어지지않았다. 집에서 어떡하다 바빠서 복장이 이렇게 되었노라고 사과의 말씀을 올리고 싶었지만 참
았다. 해명을 하지 않는 편이 도리어  이로웠던 지난날의 경험을 참고해서였다. 혹시 누구에게  이런 
지저분한 사람과 말을 주고받았다는 사실이  누설될까 봐 아내는 불안한 모양이었다.  아내는 자꾸만 
어릿어릿 주위를 살피며 관수보고 어서 먼저 앞서 가 달라고 졸랐다. 관수는 밖에서 오래간만에 아내
와 둘이서 점심이라도 한 끼 같이 나누고 싶었지만 한시바삐 저 불안한 상태에서 아내를 구출해 줘야
겠다는 생각에 빠이빠이 손을 흔들며 한 발자국 아내보다 앞섰을 때였다.  앞에서 의젓하게 걸어오던 
신사 한 분이 바로 대학 동창 미스터 송이란 자식이었다. 그때 관수보다 먼저  미스터 송에게 고개를
약간 숙이는 척하다 고만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던 아내의 동태를 미처 관수는 파악하지 못한 것
이다.
 "하, 이거 자네가 어쩐 일인가."
 "글쎄 이것 참 오래간만이군."
 "요새 그래 재미는 어떤가?
 악수를 청하는 관수의 손을 잡은 척 미스터 송은 어떻게 손바닥만 펴 보이다 말고는,
 "나야 뭐 항상 바쁘지 하하하. 지금도 내무장관을 만나러 가는 길인데 자식이 원, 자리에 있을지 하
하하. 우리 회사가 바로 소공동에 있는데 한번 와. 동방무역회사라구. 그런데 참 내 자가용차 넘버가 
'자다다다'지. 하하하."
  그 느릿느릿 거드름을 빼는 말씨며 웃음 소리가 꼭 길바닥에서 친구의 자식이라도  만나 집안 안부
를 물으며 한 마디 하는 투였다. 당시 관수는 왜 그렇게 비위가 메스껍든지 모를  일이었다. 당장 주
먹이 자식의 면상을 향하여 올라가야만 속이 가라앉을 것 같은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고만 엉겁결에 
한다는 소리가,
 "저게 바로 내 마누라다!"
  저만치 선 아내를 가리키며 필요 이상으로  큰 소리를 쳤던 것이다. 엄청난 관수의  발설에 파랗게 
질리는 아내의 비참한 표정을 관수가 알  턱이 없었다.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다. 지금까지도  관수는 
뭣 때문에 자식에게 그런 쓸데없는 말을 들려 줬는지 모르는 것이다. 다만 미스터  송의 그 혼자서만 
완전히 구원을 받은 성싶은 호탕한 웃음 소리에 무엇으로라도 대항을 해야만 견딜 것 같은 심정이 부
풀어올라서 배창자가 땡기던 일만이 기억될 뿐이었다. 자가용 차 넘버 '다다다'에 도전이라도 하듯
관수는 화려한 의상과 미모의 여인 아내가 옆에 보이자 공연히 저게 내  마누라라고 강조하고 싶어졌
던 것이다, 참으로 무의미한 대결이었다. 미스터 송은 그까짓 것은 하찮다는 듯이,
 "응 그래 하하하, 자 그럼 난 바빠서."
  관수에겐지 아내에겐지 모르게 눈을 한 번 힐끗해 보이고는 너 같은 것과 이런 데서 시간을 허비할 
내가 아니라는 그렇게 으스대는 걸음걸이로 의젓하게, 그렇다 아주 의젓하게 사라지던 것이었다.
  정말이지 미스터 송이 아내가 근무하는 사의 사장 아들 녀석이라는 예비 지식을 미리 가졌었더라면 
아무리 다급했기로서니 원, 저게 마누라니 어쩌니  그따위 못난 소리를 했을까 보냐. 그러나  아내는 
끝끝내 관수의 이러한 말을 신용해 주지 않았다
 "아무것도 몰랐다니 그게 말이에요 뭐예요 원,  능글맞은 소리! 몰랐다는 게 뭐 자랑이나  되나. 아 
남들은 지구 밖의 일까지 모두 알겠다구 덤비는  판인데 이건 자기 아내 직장 이름도 몰랐다니  그게 
무슨 자랑이나 되느냔 말예요 응! 현대인이  고렇게 시야가 좁아가지구 그 주제에 그래도  살고 있는 
것이 장하우. 아 그럼 모르면 모르는 대루  동창을 만났으면 자기 얘기나 했으면 될 일이지  뭣 땜에 
세련되지 못하게 멀쩡한 남까지 끌어들이냔 말예요 응! 남을 내세워야만 자기를 나타낼 수 있는 당신
같은 그런 옹졸한 인간을 그럼 나보고 어쩌라는  거예요. 응! 담엔 무슨 꼴을 더 보자구.  치가 떨려
요! 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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