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탈현대적 <인간> 이해
목차
1. 문제제기
2. 문제로서의 <인간>
1) 종래의 일체의 인간 비판
2) 열려있는 <인간>
3. 니체의 탈현대적 <인간> 이해에 대한 해석의 두 얼굴
1) 탈현대적 <인간>: 근/현대적 주관(성)의 종말적 완결 -하이데거의 니체 해석의 경우-
2) 탈현대적 <인간>: 근/현대적 주관의 해체 -구조주의자들의 니체 해석의 경우-
4. 해석학적 평가: 니체의 경계에 선 <인간>
1. 문제 제기
“니체는 경험과 운동으로서 사고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한 편의 드라마 혹은 오페라를 창조한 것이다.” (들뢰즈)
니체와 <탈현대주의>와의 관계라는 모습을 그려보기 위해서 여기서는 니체의 탈현대적 <인간> 이해를 시론적으로 밝혀보고자 한다. 그러나 <탈현대성>이란 개념이 아직도 확정된 것도 아니고 계속 확장, 축소, 변형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여기서는 잠정적으로 “탈현대적”이란 용어를 포스터모더니스트들로서 자리를 잡아가는 사상가들 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탈현대의 선구자들의 사상을 지칭하는 넓은 의미로 사용하고 한다. 여기서 탈현대성은 근/현대성과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더욱이 여기서 거론될 탈현대의 <인간>이란 개념도 일의적으로 고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이해될 수가 있다. 특히 니체에 있어서 <인간>이란 의미는 원근법적이며, 발생학적이며, 즉 유동중이며 다층적인 의미를 담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우선 고려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주제인 니체의 탈현대적 <인간>이해에 가로놓여 있는 아포리아는 언뜻 보아 이 주제에 대해 우리에게 주어진 대표적인 두가지 해석들이 주는 상반성의 문제이다. 그 하나는 하이데거의 해석으로서 니체의 <인간>이해는 “근/현대적 인간관의 종말적(최종적) 완성”이요, 다른 하나는 일군의 (후기)구조주의자들의 해석으로서 니체에게서 “근/현대적 인간의 해체 내지 죽음”을 읽어낸다. 이제 <인간>은 니체 속에 변형된 형태로 살아있는가, 아니면 완전히 그림자도 없이 사라졌는가? 근/현대적 인간관과의 연속성 또는 불연속성이란 측면에서 두 해석들은 상반된다. 요즈음 하이데거의 니체-인간관 해석의 일방성과 오류에 대한 질타의 소리가 높은 반면, 후자의 해석만이 니체 인간관의 유일하고 정당한 평가라는 의식이 포스터모더니즘의 유리한 물결에 편승하여 확산되어 가고 있다. 이 두 해석의 불일치성과 간극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본 논문에서는 이 물음을 실마리로 삼아서 니체의 탈현대적 <인간>이해의 모습을 그려 보고자 한다.
주지하다시피 소위 탈현대주의의 선구로서 니체는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의 극복”, “휴머니즘의 극복”(<형이상학적> <인간> 극복), 푸꼬의 “인간중심주의적 지식의 종말”, “주체의 죽음”, 데리다의 “형이상학의 해체”, “인간의 종말”에 사상적 동인을 부여하였다. 더욱이 들뢰즈, 료따르, 보드리야르 등의 포스트 구조주의자들의 탈로고스 중심주의, 반토대주의, 주체성 비판에 니체 사유는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특히 푸꼬, 라깡, 데리다, 료따르의 인간비판은 자아 뿐만 아니라 인간을 모든 것의 중심에 두는 휴머니즘 자체에 비판적이기 때문에 반휴머니즘이라고도 평가된다. 이와 관련하여 니체의 급진적이며 비판적 휴머니즘은 인간중심적 휴머니즘과는 달리 어 이상 자신의 토대 위에 중심을 두고 살지 않는 “인간없는 휴머니즘”이라고도 한다. 그러면 도대체 니체에 있어서 인간의 정체성이란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
우리의 문제에 대한 해법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든 니체의 후원을 요청할 수 밖에 없겠다. 그것은 니체의 텍스트로 돌아가는 길이다. 여기서는 주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SZ)를 독해하면서 우리의 주제를 다루고자 한다. 하지만 니체의 텍스트 읽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대다수는 니체의 문장에 걸려 넘어졌고, 그것에 발부리를 채이지 않았던가? 종래의 철학자 중 니체보다 오해를 ㄷ 받은 사람이 또 있는가? 그의 철학은 국가사회주의 철학, 시적인 철학, 생철학, 실존철학, 언어철학, 형이상학, 반형이상학, 신비론 등으로 다양하게 레떼르가 붙여져 왔다.
니체 사유는 그의 단순한 실존으로부터 해명할 수도 없고, 소위 사태 자체로서 객관화하기도 용이하지 않다. 그는 확정된 명제들을 비튼다. 니체의 명제들(문장들)은 명제-논리학에 모순되는 도약이며, 비약과 탈선이다. 그의 논리는 춤의 논리요, 공중으로의 비상인데, 그 이유는 형이상학적 토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니체는 전도(轉到)의 상을 가지고, 이른바 햄머를 손에 들고 철학한다. 니체의 실존 형식은 찾음(추구함)과 시도와 유혹이며, 그의 사유는 한마디로 실험적 사유이다. 니체는 무엇을 점유하고 레떼르를 붙이는 것에 저항한다. 그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정반대인 하나의 열려진 구조이다. 그는 스스로를 하나의 극점에 매거나 삽입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니체 사유는 대립들의 지양이 아니라, 대립 쌍의 한쪽의 우월권에 반대한다. 대립들은 지양될 수 없고, 우리들은 그것을 지탱해 나감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반시대적이고, 비사교적이고, 뒤틀려 있고, 기대했던 것과 항상 다르다. 니체는 스스로의 허물을 벗는 뱁을 칭송한다. 그는 양립감정의 정조 속에서 실존하면서, 실존론적 긴장 속에 있다. 그에 있어서 삶은 단편들이 아니라 총계이며, 인간은 대립적인 정조들을 참아내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다.
또한 인간은 자신의 가능성들에 따라 열려있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구조는 열려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아포리즘, 메타포, 패러디 또는 암시와 절규의 형식으로 그의 사유의 뒤틀림, 양극성, 파라독스, 모순성, 대립성, 급진성, 개방성을 드러내고 있다. 데리다는 니체를 참조하여 글자 그대로의 의미는 존재하지 않고, 글자 그대로의 의미는 바로 메타포(참조, Derrida, Of Grammmatology, p. 15)라고 한 사실을 상기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기본적인 전망을 고려하면서 우리의 주제로 한걸음 나아가야 한다.
2. 문제로서의 <인간>
주지하다시피 철학의 모든 물음은 인간에 대한 물음으로 집중한다. 니체에 있어서도 인간은 문제로서 그의 전체 철학의 핵심으로 드러난다. 도덕, 철학, 종교가 잘못 걸어 온 것에 대한 비판은 인간의 오류에 대한 비판이다. 니체는 기독교를 비롯하여 유럽 철학의 본질 주의, 이상주의 및 도덕(동정 윤리)을 약자 또는 노예가 강자 또는 귀족에 대하여 지니는 원한ressentiment 내지 복수 감정의 발로라고 폭로한다. 이런 사상들은 권력에의 의지가 거세된 약자의 전도된 복수 의지의 산물이라고 한다. 특히 그의 이성에 근거한 형이상학 비판과 인간(주관)중심주의적 이성 비판은 근대적인 인간을 문제로서 인식한 하나의 본보기가 된다.
1) 종래의 일체의 인간 비판
(1) 신학적인 인간 이해에 대한 비판: “신의 죽음”과 “인간의 죽음”
“‘모든 신은 죽었다. 이제 우리들은 초인이 살기를 바란다.’ 이것이 그 위대한 대낮에 있어서의 우리들의 궁극의 의지이다.”(ASZ, p. 340)
서양의 역사에서 서양의 인간은 자기의 존재 근거를 자기 스스로에서 찾을 수 있었던 존재자가 아니라 신에 의하여 부여받았던 존재자이기 때문에 이 신의 죽음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막다른 골목인 인간의 죽음을 초래했다는 사실은 쉽게 인정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서양에서의 기독교의 신은 단순한 신학적인 원리일 뿐만 아니라 철학적, 도덕적, 인간학적 원리로서 작용했기 때문이다.
신중심주의(신론)에서 인간중심주의(인간론)에로의 통로는 없다. 그는 인간중심주의의 극복이 관건이었다. 인간은 기존의 신을 거역하고 새로운 신에게로 돌아가거나, 인간으로서의 인간(인간학)에게로 돌아가지 아니했다. 그러므로 자유는 샤르트르처럼 신의 죽음 후 자동적으로 오지 않는다. 인간의 목표는 인간이 아니라, 오히려 초인이다. 신의 죽음과 인간의 죽음은 동시적이며, 그 후에 초인이 등장한다. 니체는 포이에르바하 처럼 인간을 통해 신을 추방하지 않고 인간의 유한성(니힐리즘)을 인식한다. 자신의 존재근거인 신의 죽음과 동시에 인간은 신처럼 성금요일karfreitag을 맞이한다. 신의 죽음은 니체에 있어서는 지금 신의 왕국이 끝났거나 혹은 맑스처럼 인간의 왕국이 개화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죽음을 의미한다. 서양 2천년을 지배해 온 기독교적, 철학적, 도덕적인 인간에 대한 사망 선고이다.
신의 죽음은 니힐리즘의 완성의 시작을 의미한다. 특히 허무주의는 최고 가치의 무가치화, 종래의 일체의 가치의 몰수 및 전도를 의미하므로 최근의 가장 큰 사건으로서 “신은 죽었다”로 표현된다. 신의 죽음은 기독교의 몰락을 가져오고 동시에 신학적 인간의 종말을 가져오고 허무주의를 도래케 하는 것이다.
(2) “마지막 인간” 비판
마지막 인간은 자신 외에 어떤 것도 모른다. 그는 너무 경멸적이어서 스스로를 더 이상 경멸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을 변화시킬 더 이상의 여유를 가지고 있지 않고, 취생몽사한다. 그는 자신을 넘어서 나올 목표를 모르고 있고 부인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를 넘어서 나오는 그의 유일한 가능성을 모르고 있다. 그는 의지를 소유하는 힘을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다. 인간은 더 이상 지배자(목자, 통치자)도 피지배자도 아니고, 번거로운 이상의 별을 싫어하는 짐승의 무리이다. 동물적인 무차별적 평등을 원하고 평등 속에 안주한다. 무차별적 평등을 거역하는 자는 정신병자로 간주된다. 잡다한 모든 세상 지식(피상적인 호기심에의 예속)과 몸을 상하지 않을 정도의 적절한 쾌락에 탐닉한다. 세련되고 영리하며 건강을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기면서 행복을 찾았노라고 자부한다.
또한 이어서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를 통하여 마지막 인간에 대해서 구토를 느끼면서 폭로하고 있다. 마지막 인간은 소위 착하고 올바른 자로 자처하는 자이다. 그는 그러나 거짓 속에서 살고 있다. 거짓의 강기슭에 서서 거짓의 안전을 도모하며 가르치는 자이다. 그 속에 갇혀서 마지막 인간은 인간의 대양으로 나오지 못한다. 거짓된 착한 자들과 올바른 자들은 모든 것을 거짓 증거하며 왜곡시키고 있다.(참조, ASZ, 서문(5), 제4부)
여기서 묘사하는 마지막 인간은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자화상을 선취한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이상을 상실한 나약한 현대인, 점증하는 자본주의 속의 소시민, 건강의 의미를 모른채 건강을 위한 건강주의 내지 건강 이데올로기에 빠져 있는 자, 정보화 시대의 영리한 인간, 자신의 초월 가능성을 스스로 거부하는 자이다.
(3) “고차적인 인간” 비판
넓은 의미로 한편으로 마지막 인간의 부류에 속하지만, 그래도 다른 한편으로 그 속에서 벗어나고자 나름대로 노력하는 자를 고차적인 인간으로 묘사한다. 여기에는 예언자의 입을 통해 말한 고차적 인간(또는 고차적 인간을 찾는 사람)과 짜라투스트라의 입을 통해 말한 고차적 인간 모두를 포함한다. 두 명의 왕들, 거머리(와 함께 있는 인간), 마술사, 퇴직자(마지막 교황), 가장 추한 인간, 자발적인 거지와 그림자이다. 이러한 다양한 특징들을 통해 고차적인 인간의 양면성이 잘 드러난다.
두 명의 왕들은 허위에 가득찬 도금한 짙은 화장을 한 천민들로 부터 도망온 자들이다. 허위와 부패로 가득 찬 소위 좋은 풍속에서 탈출한 자들이다. 그들은 혈통도 부패하고 모든 것이 썩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최선의 고귀한 종족은 농부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농부들은 투박하고 빈틈없고 강인하고 참을성 있기 때문이다. 왕 자신이 천민의 왕궁에서 가짜가 된 것을 인정하고, 거짓과 사기 앞에서 구토를 느끼고 천민들의 왕이기를 거부한다.
거머리와 함께 있는 인간은 지적 양심을 가진 자로서 정신적인 문제에 대해서 엄격, 정밀, 가열한 태도를 취하는 자이다. 그의 지적 양심은 오직 하나만을 알고 다른 것을 알지 말기를 요구한다. 애매하고 부동적이고 망상적인 자를 경멸한다. 그러나 그의 앎은 삶을 위한 진정한 앎이 아니라, 삶을 가로막는 것이다.
마술사는 정신에 복종해서 고행을 하는 자, 정신의 속죄자이다. 고통을 위해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는 잘못된 비극적 존재이다.
퇴직자는 신의 죽음 후 물러난 교황, 교부이다. 그래서 그는 신을 가장 많이 잃어버린 사람이다. 그는 인간에 의한 신의 대체를 보았다. 그의 주인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짝잃은 나이든 종이다. 그는 주인 없이 존재하지만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가장 추한 인간은 그가 살해했던 신의 자리에 자신을 앉혀 놓았다. 그는 동정에서 도망친 자이다. 그는 양심의 가책과 원한으로 가득차 반동적인 인간이 된다.
자발적인 거지는 자신의 재산과 부자임을 부끄럽게 여기고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몸을 피해서 그들에게 자아의 충실과 자아의 마음을 준 사람이다. 가난하거나 부유한 천민들로부터 탈출한 자이며, 하늘의 왕국을 보상으로 알았다.
그림자는 목적지도 고향도 없는 방랑자이다. 그러나 재앙으로서 고향을 탐구한다.
이러한 고차적 인간에게 짜라투스트라는 권고한다. 왜소한 덕과 왜소한 현명과 모래알 같은 짐작과 개미들의 움직임과 동정해야 할 안온과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초월하라고 권유한다. 굴종하는 것보다 오히려 절망하고 목격자가 있는 곳에서의 용기가 아니라 이미 보고 있는 신도 없는 고독자의 용기, 즉 독수리의 눈으로 심연을 바라보고 독수리의 발톱으로 심연을 움켜쥐는 용기를 가지라고 독려한다. 고차적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을 뛰어넘고 춤을 추는 일과 성스러운 웃음을 웃는 일이라고 한다. (참조, ASZ, 제4부)
이와 관련하여 들뢰즈는 고차적 인간에게 부족한 네가지를 니체의 텍스트들을 참조하여 아래와 같이 정리하여 해명한다. 그 하나는 웃고 놀이하고 춤추는 것이다. 삶 속에 고통이 있다해도 웃는 것은 삶을 긍정하는 것이다. 놀이하는 것은 우연과 우연의 필요성을 긍정하는 것이다. 춤춘다는 것은 생성과 생성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이다. 그 둘은 고차적 인간은 나귀의 울음 소리와 그의 긴 귀에 숨겨진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다. 나귀는 예, 그렇소(Ye, a)라고 말하는 동물로서 긍정하는 동물이며 디오니소스적인 동물이다. 그 셋은 그림자의 상징은 상관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림자는 인간의 능동성이지만 그것은 더 고차적인 근거로서 빛을 필요로 한다. 빛이 없다면 그것은 자취를 감추며, 빛과 더불어 그것은 변형되어 또 다른 방식으로 사라진다. 그 넷은 불개의 능동성은 반동적 생성을 부양하고, 따뜻하게 데우고 유지하는 데 봉사할 뿐이다. 우주 속에 냉소를 생성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불개는 긍정적인 동물이다. (참조, G. Deleuze, Nietzsche and Philosophy, p. 285 이하)
짜라투스트라는 다른 곳에서 고차적 인간을 신의 죽음 후 부활하여 주인된 자로 묘사한다. “신 앞에서는! 그러나 이제 신은 죽었다. 그대들 고차적인 사람이여! 이 신은 그대들에게 가장 위험한 사람이었다. 신이 무덤에 들어가고 난 다음 그대들은 비로소 그대들은 비로소 부활했던 것이다. 이제 위대한 대낮은 온다. 지금 고차적인 사람은 주인이 되는 것이다. 이 말을 이해했는가? 나의 형제들이여, 놀랐는가? 현기증을 느끼기 시작했는가? 그대들 앞에 심연이 입을 열었는가? 지옥의 개가 그대들ㅇ게 ㅉ으며 달려드는가? 자! 그대들 고차적인 사람이여! 지금이야말로 인간의 미래의 산이 진통하기 시작한다. 신은 죽었다. 이제 우리들은 바란다. 초인이 태어나기를.” (ASZ, p. 796 이하)
(4) “낙타와 사자의 정신을 소유한 인간” 비판
짜라투스트라는 정신의 세가지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어떻게 해서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가 사자가 되며 사자가 어린 아이가 되는가를 말한다. 외경을 간진한 채 강하고 무거운 짐에 견디는 강인한 정신은 가장 무거운 것을 요구한다. 낙탗럼 무릎을 꿇고 충분히 무거운 짐을 실어주기를 바란다. 여기서 가장 무거운 것이라면 자아의 교만에 아픔을 주기 위해 자기를 낮추는 것이고 자기의 지혜를 조소하기 위해 자기의 어리석음을 밖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은 신에 대한 맹목적인 정신의 복종의 단계이다.
정신의 고독의 극단인 사막 속에서 사자가 되어 자유를 자기의 것으로 하려하고 자기 자신이 선택한 사막의 주인이 되려한다. 그 사막에서 그는 그를 최후로 지배한 자인 그의 신의 적이 되려한다. 승리를 얻기 위해 그는 이 거대한 용과 싸운다. “너희는 행할지어다.” 그것이 그 거대한 용의 이름이다. 그러나 사자의 정신은 “나는 하고자 한다”라고 말한다. 새로운 여러 가지를 창조한다는 것, 그것은 아직 사자로서 할 수 없다. 하지만 새로운 창조를 목표로 자유를 자기의 것으로 하는 것, 이것은 사자의 힘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자기가 사랑하고 있었던 것으로 부터의 자유를 강탈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강탈을 위해서 사자가 필요하다. 이것은 신의 죽음에 대한 자각의 단계이다. (참조, ASZ, 제1부)
초인에 비친 인간이란 하나의 웃음거리, 고통으로 가득 찬 하나의 치욕임을 짜라투스트라는 설파한다. 이와같이 인간의 탈을 벗기는 일은 종래의 신학적, 형이상학적, 도덕적, 인간중심주의적, 휴머니즘적, 주체적 인간 이해를 비판하는 것이다.
2) 열려있는 <인간>
니체는 인간종Menschenart에 대하여, 즉 종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비판을 가한다. 물론 인간은 자연적 존재로서 진화의 과정에 속해 있다는 것도 인정한다. 종으로서의 인간을 벗어난 종을 초월한 초인을 향하고 있다. 니체는 짜라투스트라의 입을 통해 우리의 길은 위쪽으로 나아간다고 말한다. 인간은 자신을 넘어서서 밖으로 드러냄(창조해냄)이 중요하다. 니체는 그가 누구인지를 스스로 창조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니체는 전통적인 인간학Anthropologie, 인간중심주의Anthropozentrismus, 의인론Anthropomorphismus을 넘어서서 밖으로 나오고자 한다. 그리하여 <인간>을 진지하게 알아보고자 한다. 언제든지 니체가 형이상학적 도덕적인 인간 규정을 넘어서서 인간존재에 대한 발생학적 규정을 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1) 자연적 사실로서의 <인간>: 육체Leib
짜라투스트라 텍스트의 앞부분에 벌써 인간의 유래를 밝히고 있다. “그대들은 모두 벌레에서 인간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그대들의 내부에는 많은 벌레들이 꿈틀대고 있다. 또한 일찍이 그대들은 원숭이였다. 더욱이 지금도 인간은 어떤 원숭이에 비해 보더라도 그 이상으로 원숭이이다. 그대들 가운데 가장 현명한 자도 식물과 유령의 잡종에 불과하다.” (ASZ, 서문) 그러나 니체는 인간 진화를 인정하면서도 적자 생존의 원리를 수용하지 않고 진화의 힘을 “힘에의 의지”에서 찾고 자연 상태의 복귀를 강조한다. 초인이란 니체의 이상적인 미래의 인간 유형에 대한 진화론적 구상이다. 여기서는 무차별적 종의 진화가 아니고, 개별적 목적론적 진화를 의미한다.
자연적 존재로서 인간은 약자(병든 동물)로 머물러서는 안되고, 생을 위한 힘에의 의지에 충실한 자가 되어야 한다. 니체는 생과 적대적인 도덕과 의식을 비판하고 생의 담지자인 육체를 옹호한다. 자연적 존재, 강자, 살아남은 자, 생을 위한 힘에의 의지에 충실한 자, 생과 적대적인 의식이 아니라 친숙한 육체를 강조한다. 육체는 니체에게 실제성(현실성)이다. 예컨데, 무용수는 삶을 산다. 무용수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유롭게 조정한다. 그는 황홀 속에 있다. 자기 위로 움직인다. 모든 현실성의 표현으로서의 춤은 인간의 해방과 인간의 탄생을 의미한다. 황홀감은 심미적인 기본 상태이다. 예술은 니힐리즘에 대한 반대 운동이다. 예술은 삶의 자극물이며 예술은 다양한 기분들, 즉 신체감각들을 야기시킨다. 예술은 힘에의 의지의 탁월한 방식이다. 니체는 단지 춤추는 신을 믿고자 할지 모른다.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를 통해 창조하는 육체(창조하는 자아)가 자아의 의지의 도구로서 정신을 창조했다는 새로운 사실을 설파한다. 육체에서 세계가 이제 열리고, 이성에서 자연에로의 발생학적인 길은 인간의 육체적인 구성상태로의 복귀이다. 전통적인 육신(플라톤: 영혼의 감옥)과 영혼의 지양적 종합으로서의 육체, 즉 커다란 이성에 대한 짜라투스트라의 말을 이제 귀담아 들어보자.
“‘나는 육신이고 영혼이다.’ 어린이는 이렇게 말한다. 어째서 사람들은 어린이 처럼 그렇게 말해서는 안되는 것일까? 또한 눈을 뜬 자, 통찰한 자는 말한다. 자기는 전적으로 육체 이외의 다른 아무 것도 아니고, 영혼이라는 것은 육체에 속한 어떤 것을 나타내는 말에 불과한 것이라고. 육체란 하나의 커다란 이성이다. 하나의 뜻을 가진 다양한 실체, 전쟁이며, 평화이고, 짐승의 무리이며 목자이다. 나의 형제여, 그대가 ‘정신’이라고 이름 붙이고 있는 그대의 그 작은 이성도, 그대 육신의 도구이다. 그대의 큰 이성의 작은 도구이며 장난감이다. 그대는 자아를 ‘나’라고 부르고, 이 말을 자랑으로 삼는다. 그러나 보다 위대한 것은 그대가 믿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 즉 그대의 육체와 그 육체가 가지는 커다란 이성이다. 그것은 ‘나’를 주장하지 않으면서 ‘나’를 향하는 것이다... (중략) ... 나의 형제들이여, 그대의 사상과 감정의 배후에는 하나의 강력한 지배자, 알려져 있지 않은 현자가 있다. 그 이름은 ‘본래의 나’이다. 그대의 육체 속에 그는 살고 있다. 그대의 육체가 바로 그것이다.” (ASZ, p. 574)
육체는 니체에 있어서 방법적인 개념 또는 종합적인 개념이며, 그것으로서 형이상학적 이분설 또는 이원론을 넘어선다. 육체는 소여된 최종적인 자연적 사실이다. 육체는 영혼이 깃든 신체이다. 니체가 예로 든 그리스도의 영혼을 지닌 케자르, 괴테의 영혼을 지닌 나폴레옹에서 육체의 의미를 간취할 수 있다.
(2) 확정되지 않는 동물(X)
짜라투스트라의 말에 의하면 인간은 동물과 초인의 사이에 있는 하나의 밧줄이며, 다리이며, 하강(몰락)과 상승의 과정이다. 인간(현재의 인간)은 미래적 인간의 맹아, 즉 운반인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ASZ, p. 720)으로 위로 향하여 나아가야 할 도상에 있는 존재이다.
“인간에 있어서 위대한 것은 그가 하나의 다리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에 있어서 사랑받을 수 있는 것은 그가 하나의 상승이며 하강이라는 것이다. 나는 사랑한다. 몰락하는 자로서 사는 것 이외에는 사는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들을. 그는 저 위를 향하여 건너가는 자이기 때문이다.” (ASZ, 서문(4))
여기서의 인간 규정은 초인의 성격을 어느정도 드러내고 있다. 인간은 아직도 확정되지 않는 동물(X)이다.
(3) 초인: 탈현대인Post-moderner Mench
“무릇 생이 있는 자를 발견해낼 수 있는 곳에 나는 힘에의 의지도 발견한다. 그리고 복종하고 봉사하는 자의 의지 속에서도 나는 주인이 되려는 의지를 발견한다... 그리고 생 스스로가 나에게 이 비밀을 말하였다. ‘보라’ 하고 생은 말했다. ‘나는 언제나 자기 자신을 초극하고, 뛰어넘지 않을 수가 없다.’” (ASZ, p. 645)
"‘모든 신은 죽었다. 이제 우리들은 초인이 살기를 바란다.’ 이것이 그 위대한 대낮에 있어서의 우리들의 궁극의 의지이다.“ (ASZ, p. 614)
"초인은 대지의 의미이다.“ (ASZ, 서문(3))
인간은 최종목적이 아니다. 초인은 초도덕을 지향한다. 즉 도덕의 자기지양은 인간 자신 속에서 이행되는데, 만일 인간 스스로가 자신을 목적으로 보지 않고 자신을 넘어서 나올 때 그러하다.
초인이란 최고로 완성된 인간의 유형이며, 즉 현대인과 반대되는 탈현대인이라는 말이다. “‘초인’이란 말은 최고로 완성된 유형의 인간을 가리키는 것으로 ‘현대’인, ‘선한’ 인간, 기독교인, 그리고 다른 허무주의자들과는 반대되는 말이다. 그것은 기성 도덕의 파괴자인 짜라투스트라의 입에 오르면 대단히 의미심장한 말이 된다.” (Ecce homo, I. S. 338)
(4) 어린이의 정신을 가진 <인간>
어린이는 순진무구하여 모든 것을 망각하고, 새롭게 시작하며, 즉 시원의 운동을 할 수 있으며, 창조적인 유희를 할 수 있으며, 성스러운 긍정을 할 수 있으며, 그의 정신은 자아의 의지에 따라 움직일 수가 있다. 그리하여 세계에서 길 잃은 자는 자아의 세계를 정복하게 된다. (참조, ASZ, p. 568) 어린이의 정신을 소유한 인간은 새로운 가치의 정립을 할 수 있는 자이며 능동적인 허무주의자이며 운명을 사랑하는 자이다.
데리다는 이와 관련하여 어린이의 긍정적 태도를 기호의 세계를 긍정하는 태도로 주해하고 있다. “니체의 긍정적 태도... 세계의 놀이와 생성의 무구를 긍정하는 태도... 해석에 직면된 오류도 진리도 기원도 없는 기호의 세계를 긍정하는 태도이다.” (Derrida, Writing and Difference, p. 292)
니체의 <인간> 이해는 종래의 신학적, 형이상학적, 인간중심적 인간관의 빗장을 열었다. 인간을 그 무엇으로 확정하고자 하는 일체의 시도들은 니체에 와서 무산된다. 그는 이른바 인간을 넘어선 <인간> 내지 초인을 바라본다. 초인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고, 초인은 무엇으로 규정되지 않은 열린 형식일 뿐이다. 니체의 <인간>은 도상에 있으며 <경계>에 서 있는 존재로서 열려있는 <인간>인 셈이다.
3. 니체의 탈현대적 <인간>이해에 대한 해석의 두 얼굴
니체의 <인간>이해에 대한 급진성을 다른 각도에서 주제화하여 해석한 두가지 입장이 두드러진다. 그 하나는 하이데거의 입장으로서 니체의 <인간>관은 근/현대의 주관 개념의 최종적 완성(심화)이라는 주석이다. 다른 하나는 프랑스 (후기)구조주의 진영(푸꼬, 데리다, 들뢰즈 등)의 입장으로서 니체의 <인간>관은 근/현대의 주관개념의 해체(폐기)라는 입장이다. 이 둘은 상반된 두 얼굴을 노정한다. 과연 이 둘은 다리를 놓을 수 없는 대립된 입장인가? 니체의 <인간>이해의 탈현대성이란 근/현대적 인간이해를 완전히 벗어나는가?
1) 탈현대적 <인간>: 근/현대적 주관(성)의 종말적 완결
- 하이데거의 니체 해석의 경우 -
하이데거의 니체-해석은 하이데거 사유에 낯선 독자에게는 오해를 불러 일으킬 소지가 있다. 첫째는 하이데거가 사용하는 언어에서 오고, 둘째는 니체-해석의 배후에 놓여 있는 하이데거의 기본입장을 추적하지 못하고, 셋째, 하이데거의 니체에 대한 입장의 이중성을 간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것은 주의를 요하는 주제이다. 하이데거는 니체 사상의 위상을 인식하고 극복하는 것을 이 시대의 최대의 사유의 과제로 삼았다. 하이데거가 사용하는 “형이상학”, “인간의 본질”, “주관성의 완성 내지 종말” 등의 개념은 그의 독자적인 사유의 지평에서 고유한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
그는 “존재사”의 관점에서 니체-해석을 시도한다. 존재사란 존재가 그때 그때마다 자신을 형이상학 속으로 증여함으로, 즉 개명함으로 일어나는 “존재역운의 역사”이다. 존재사는 자신을 우리에게 은폐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형이상학은 더 이상 인간의 독자적인 철학적 창작물이 아니다. 하지만 존재사는 존재 단독의 역사가 아니고 자신의 개명적 장소로서 인간(사유)를 필요로 한다. 존재의 은폐의 방식으로 자신을 나타낸 것을 형이상학적 사유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존재의 은폐, 즉 퇴행을 방치하거나 다른 것으로 전취시킴으로써 형이상학 역사에 관여해 왔다는 것이다. 그는 시종일관 니체 철학의 텍스트에 숨어있는 존재사의 광맥을 천착해 들어간다.
하이데거는 니체 철학이 지니고 있는 기본입장들의 내적인 일원성을 밝히고 그것이 서양 형이상학의 기본구조, 즉 “주도적 질문”(존재자란 무엇인가?)과 어떤 연관 속에 있는가를 밝히고자 한다. 둘째, 존재 역사가 니체 철학 속에 회집되어 종말에 이르렀다는 것을 해명함으로써 니체 철학의 존재사적 위치를 규정하고자 한다. 셋째, 서양 형이상학의 종말의 시대, 즉 존재와 인간본질 또는 사유가 극단적 위기에 처해 있는 이 시점에서 니체철학 극복의 시급성과 그 극복의 의미와 아울러 새로운 사유의 과제를 제시하는 것이다.
니체 사유의 다섯가지 기본 테제들, 즉 “힘에의 의지”, “동일자의 영겁회귀”, “일체의 가치의 전도”, “초인”, “정의” 들이 서로 내적으로 일관성 있게 연관되어 있다고 본다. 동일자의 영겁회귀는 힘에의 의지의 존재방식이고, 일체의 가치의 전도의 시도는 힘에의 의지이고, 초인은 힘에의 의지의 수행자이고, 정의는 힘에의 의지의 자기 정당화라고 해석한다. 그리하여 하이데거는 힘에의 의지를 니체 사유의 기본원리로 파악한다. 이 원리가 바로 서양형이상학 역사의 본질연관 속에서 계승된 것으로 이해한다. 다시 말해 “존재자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니체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이 세계는 힘에의 의지이다- 그리고 그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게다가 또한 여러분 자신이 이 힘에의 의지이며- 그리고 그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Der Wille zur Macht, 1067번)
하이데거는 니체의 모든 존재자의 존재 규정(서양형이상학의 유일하고 공통적인 내면적 사태)으로서 힘에의 의지를 서양 형이상학의 주도적 질문의 최종적 전개로 풀이한다. 니체가 부지불식간에 힘에의 의지를 최종적인 존재론적 사실로 설정함으로써 플라톤주의를 전도된 형태로 또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계승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바야흐로 존재의 본질 가능성이 완전히 차단되었고, 하나의 존재 역사가 종국에 이르렀다고 파악한다. 존재의 세계는 거부되고 인간 및 존재자들의 의욕의 세계 만이 유일한 실재로서 인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존재 편에서 보면 힘에의 의지의 형이상학은 인간 프리드리히 니체 사유의 산물 만이 아니고 존재 역사가 니체 형이상학 속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니체는 이 종말의 역사에 관여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이 바로 니체 철학에 나타난 형이상학의 완결이다. 이 완결은 단순한 완성이나 부족한 부분을 마지막으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존재 은폐의 역사가 그 종말에 임하게 된 것을 드러낸다. 이 완결은 이미 플라톤주의, 근대철학, 니힐리즘의 완결로 구체화된다고 본다.
데까르트가 진리의 흔들리지 않는 기초를 표상하는 주관 속에서 찾듯이 니체는 의욕하는 육체 속에서 확실성을 찾는다. 즉 데까르트의 “나는 사유한다”(ego cogito)를 “나는 의욕한다”(ego volo)로 환원시켰다고 본다. 충동과 정열의 주체, 즉 육체의 본질을 힘에의 의지로 보는 것이다. 이제 힘에의 의지에만 절대적으로 실제성이 귀속되며, 의지는 스스로의 순수한 자기 입법자가 된다.
하이데거의 해석에 의하면 힘에의 의지 속에 근대철학의 지평 위에서 절대적 주관성이 유일한 실제성으로 드러나고 이것을 통하여 존재자의 존재가 규정된다. 왜냐하면 힘에의 의지는 그것이 세계이든지, 인간이든지 간에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힘에의 의지의 실현 속에서 각각의 단계에 나타나는 것의 자기 정당화 또는 자기보증은 니체에 있어서 정의를 의미한다. 이제 힘에의 의지는 절대적으로 최종적으로 전체에 있어서 존재자를 지배하고 조정함으로써 근대철학의 주관형이상학의 최종적 전개로 나타난다. 니체는 하이데거의 생기로서의 존재를 망각하고 그의 힘에의 의지는 형이상학적 존재 개념으로서 펼쳐 드러내는 것, 생성하는 것, 흐름 속에 있음이다. 니체에 있어서 존재와 생성은 서로 얽혀 있다.
하이데거는 초인을 주관성의 최고 형태, 말하자면 힘에의 의지의 주관성으로 해석한다. “이제 인간은 이 완성된 주관성에 그것의 순수본질의 장소를 제공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유독 표상하고 가치를 설정하는 의지로서 전체에 있어서 존재자 자체의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Heidegger, Nietzsche(2권), p. 303) 그래서 초인은 데까르트적 인간적 주관의 극한적 전개로서 “힘에의 의지를 수행한다. 이러한 연계 하에서 하이데거는 니체 형이상학을 ”힘에의 의지의 무조건적이고 완결된 주관성의 형이상학“(같은 책, p. 325)으로 주해한다.
하이데거는 짜라투스트라의 상을 통해 니체 <인간>이해에 대한 주석을 아래와 같이 시도한다. 니체는 짜라투스트라가 아니고 오히려 짜라투스트라의 본질을 생각해 내고자 하는 질문하는 자이다. 우선 니체의 말대로 짜라투스트라는 삶과 고통과 순환과 디오니소스의 대변자임을 하이데거도 전경에 내세운다. 더욱이 짜라투스트라는 모든 존재자가 창조하고 마주치는 의지를 감내하고, 자신을 동일자의 영겁회귀 속에서 의욕하는 힘에의 의지라는 사실의 대변자이다.
니체는 초인이란 이름으로 바로 단지 초차원적인 종래의 인간을 명명하진 않는다. 초인은 인간적인 것을 내팽개치거나 벌거벗은 자의적 횡포와 거대한 광포를 휘두르는 인간종을 의미하진 않는다. 오히려 초인은 유일하게 지금까지의 인간을 맨 처음으로 아직도 오지 않은 자신의 본질 속으로 데려오고, 그를 그 속에 확고하게 세우기 위해서는 종래의 인간을 넘어서 나오는 바로 그 사람이다. 초인은 종래의 오늘날의 인간의 종을 넘어서며 그리하여 하나의 통과요 다리이다. 그 위로 넘어가는 자로서의 초인은 자신의 가장 고유한 본질에로의 귀향에로의 도상에 있다. 가장 최고의 힘에의 의지, 즉 일체의 삶의 가장 삶적인 것은 소멸을 동일자의 영겁회귀 속에 지속적인 생성으로 표상하는 것이다. 이런 표상이 니체의 말대로 존재자(생성)에 그의 존재의 성격을 각인하는 사유이다. (참조, Heidegger, Wer ist Nietzsches Zarathustra? pp97-122)
2) 탈현대적 <인간>: 근/현대적 주관의 해체
- 구조주의자들의 니체 해석의 경우 -
프랑스 구조주의 진영의 들뢰즈, 푸꼬, 데리다 등은 하이데거의 니체-해석의 입장에 강력하게 반기를 든다. “우리는 초인을 인간본질의 실현으로, 그리고 심지어 인간본질의 결정으로 변화시키는 하이데거의 해석과 같은 것도 따를 수 없다.” (Deleuze, p. 283)
푸꼬는 하이데거의 주관성의 완성과는 달리 “인간없는 휴머니즘”을 강조하면서 자아는 폐기되었고(인간의 사라짐) 자아 내지 인간의 탈중심화를 표방한다. “그리하여 마지막 인간은 신의 죽음도다 더 최근이고 동시에 더 오래된 것이다; 그는 신을 살해했기 때문에, 그 스스로 자신의 유한성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 하지만 그는 신의 죽음 속에서 말하고 생각하고 실존하기 때문에, 그의 살해는 그의 죽음을 가져왔다. 새로운 신들, 즉 동일자들은 벌써 미래의 바다를 흉용하게 만든다. 인간은 사라질 것이다.”
(푸꼬, Die Ordnung der Dinge, Eine Archaologie der Humanwissenschaften, p. 460)
데리다의 니체 해석에 따르면 하이데거에 반대하여 니체는 결코 최후의 형이상학자가 아니며, 형이상학을 해체의 대상으로 삼은 최초의 인물이라는 것이다. 데리다는 그의 텍스트 이론에 의하면 니체에 있어서 이미 인간주체가 텍스트 주체로 전이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니체는 근대적 주관, 인간의 이성중심주의를 해체시켰다고 본다. 하이데거의 니체 해석은 “폭력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거의 내적인 필연성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하고 있으며, 실제로 좌절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해석의 내부에 포섭되는 것을 거부하는 다른 해석으로 열려있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있다.(Derrida, Spurs, p. 115) 왜냐하면 데리다에 의하면 하이데거의 주석은 자신의 존재의 진리의 문제를 다루는 해석학적 공간에 니체 텍스트를 한정시켰고 다시말해 자기의 해석학적 목적을 위하여 니체 텍스트를 이용하려 했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무엇보다도 니체의 문체가 지니는 에너지를 해방하고, 그 텍스트가 형이상학적 개념과 의미의 한계를 넘어서서 의미를 산종(散種)Dissemination하도록 다양한 방법을 모색한다.
노리스C. Norris는 아래와 같이 데리다의 편에 서서 철학과 해체와 관련하여 두 사람의 니체-해석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데리다와 하이데거가 매우 비슷한 해체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이데거가 사고의 전통적인 원천과 근거를 설정하는 지점에 까지 오면, 즉 분절적 언어에 성행하는 존재, 혹은 충실에 가까이 오면 그들의 차이가 차츰 나타난다. 데리다에 있어 이것은 진리와 기원을 갈망하는 형이상학이 곧잘 행하는 방법 가운데 또하나의 고전적인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하이데거 해석학 전체의 기저에 있는 것은 의미작용의 놀이를 긍정적으로 지워 없애려고 하는 자기 현전, 혹은 그 놀이에 선행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자기현전이야말로 진리라고 보는 생각이다. 니체가 소크라테스를 넘어서 다양하고 유동적인 사고의 선역사를 돌아다 보았다고 한다면, 하이데거는 존재라고 하는 단일한 장 안에서 정당한 진리를 낳는 원천에 눈을 돌렸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형이상학의 파괴의 의도는 의미의 다양성을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그 본래의 자기동일적인 원천으로 불러들이는 것이며, 그 의미에 있어서 데리다와는 다른 것이다. 이처럼 하이데거는 데리다에게 전략적으로 가장 가까운 동맹자이면서도 이와 같은 결정적 차이 때문에 현대의 주요한 데리다의 적대자가 되어있는 것이다.” (E. Norris, Desconstruction, p. 55)
니체에게는 형이상학적 인간관을 거부하고 역전시키고자 하는 모습을 하이데거도 인정한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존재 사유의 관점에서 모든 존재자를 규정하는 힘에의 의지의 원리는 형이상학의 내적인 논리에 사로잡혀 있고, 존재와 인간 본질존재의 공속성을 극단적으로 망각했다는 것을 지적한다.
데리다가 하이데거 니체-해석을 비판하면서 하이데거가 자신의 해석학적 목적을 위해 니체 텍스트를 이용(도용)했다고 꼬집었는데, 그것은 데리다에게도 해당된다. 종전에 개별과학 내지 특수과학이 형이상학의 재가나 인준을 통해서 자신의 학문의 정체성을 보장받은 사실을 현대에 마치 재생이나 하듯이, 니체를 끌어다가 자신의 사상의 후원자로 내세우는 것은 해체주의의 면모에 썩 어울리는 것은 아닌 것 같다.
하이데거의 니체해석과 관련하여 자주 등장하는 형이상학, 인간본질, 주관성 개념 등은 하이데거 텍스트 내에서 독자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 개념들에 대한 니체의 입장과 사뭇 다르다. 이런 변별적인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하이데거의 니체-해석을 재단하는 것은 온당하지가 않다. 적어도 하이데거 형이상학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반형이상학(Anti-Metaphysik)을 포함하고 있으며 인간본질에 있어서도 인간과 존재와의 연관 속에서, 주관성도 기체의 관점에서 운위하고 있다. 니체사유를 “힘에의 의지의 무조건적 주관성의 완결”도 존재사적인 측면에서 존재 편에서의 종말적인 은폐라는 관점을 놓쳐서는 안된다. 이 니힐리즘의 종말의 시대에 인간과 전체 존재자의 관계가 어떤 자리에 놓여있는가를 니체 사유는 극명하게 보여준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입론인 것이다.
4. 해석학적 평가: 니체의 경계에 선 <인간>
이제 우리는 니체의 탈현대적 <인간>이해의 특징을 정리할 단계에 이르렀다. 그것은 넘어서는 구조, 열린 구조 내지 원리이며, 도상에 있고, 떠나게 하고 벗어남이다. <인간>의 발생학적 원근법적 의미는 원숭이, 마지막 인간, 고차적 인간, 천민, 광인, 육체, 초인, 낙타, 사자, 어린이 등에서 다층적으로 나타난다. 더욱이 주관을 날조된 허구로서, 전망적인 환상으로써 주관의 원자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따라서 니체의 <인간>은 근/현대적 인간중심주의적 주관주의를 넘어서고 해체한다.
짜라투스트라 텍스트를 참조하자면 주관에 대한 니체의 또 하나의 다른 면모와 만나게 된다. “본래의 나인 육체”(ASZ, p. 574), "주인이 되려는 의지“(ASZ, p. 645), "모든 사물의 척도이며 가치인 창조하고 의욕하고 평가하는 나”(ASZ, p. 572), "인간이 근원이며“(ASZ, p. 597), "본래의 너로 돌아가라”(ASZ, p. 753) 또는 “완성된 인간의 유형”(Ecce homo I, p. 338)이라는 사태는 주관으로서의 <인간>을 유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더욱이 그는 인간에 대한 믿음에 회의를 가져오는 약한 자들을 비판한다. “이들, 가장 약한자들이야말로 사람들 사이의 생을 가장 위태롭게 하는 자들이며, 생에 대한, 인간에 대한, 우리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가장 위험하게 독을 치며 회의를 가져 오는 자들이다.”(Zur Genealogie der Moral, KSA, 5권, p. 368)
니체는 결국 인간 주관의 영역과 탈주관의 영역이 만나는 경계선 상에 서 있음을 볼 수 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니체의 초인은 인간 밖으로 나오는 것으로 인간의 질적 상승이지 인간 극복이 아니라고 주석한다.(참조, Hidegger, Nietzsches Wort "Gott ist tot", p. 206) 하이데거는 니체를 철학(철학자)- 사유(사상가)- 존재사유(본질적 사상가)의 도식에서 경계(중간)에 위치시킨다. “더군다나 한 사유가 형이상학을 완결에로 가져오는 곳에 그 사유는 하나의 예외적인 방법으로 생각되지 않은 것을 분명하게 동시에 혼란되게 가리킨다.”(Heidegger, Wer ist Nietzsches Zarathustra?, p. 118)
니체는 철두철미 인간의 자기 초월 가능성을 초기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구조주의자의 인간 이해 즉 인간은 근원적 존재가 아니라 파생적 존재라는 입장과는 사뭇 다르다. 니체는 인간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질적 쇠퇴를 비판한다. 객관화된 인간은 소멸하고, 객관화되지 않은 인간만이 존재하고, 도상에 있고, 자기 위치를 차지한다. 인간은 넘어서는 동물/초동물로서의 상승과 하강이다. 니체는 한계에 직면하여 철학한다. 모든 것과의 결렬(불화) 속에서 거리유지Distanz의 파토스는 그의 삶의 이행이다. 종래의 인간 내지 인간상과 거리를 유지한다.
그리하여 니체의 방법론은 도상에 있게 하고 떠나게 하는 데 있다. 자신을 넘어서는 방향은 인간적인 것, 너무나 인간적인 것을 넘어서고, 즉 인간과 거리를 두면서 초인(비인간 또는 탈인간)으로 있음에로 나아간다. 넘어서는 구조는 본래적인 방향이다. 초인은 이제 도덕을 넘어서고 도덕에서 자유롭다. 인간은 자신에게로가 아니라 자신을 넘어서기 위해 인간의 구조는 열려있지 않으면 안된다. 휴머니즘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 희망이고, 기독교는 구원에 대한 희망을 가지지만 니체의 <인간>은 열린 원리이며, 열린 희망이다. 이리하여 초인은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고 종래의 도덕-서열 질서들을 넘어선다. 니체에게는 신(기독교-신에게로 돌아감)과 인간(맑시즘-인간에게 돌아감)의 극복이 문제였다. 후자들은 둘다 도착증이다. 초인은 열린 문제이다. 니체에게는 돌아감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감(진보)이 중요하다.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는 종교, 도덕으로부터 해방된다.
하이데거의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누구인가?”를 주석하면서 초인이란 넘어서 앞으로 나아가는 자로서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종래의 인간종 내지는 근/현대적 인간을 넘어서는 자로 이해된다. 다시말해 니체 <인간>이해의 탈현대적 성격을 인정하는 셈이다. 그러나 그의 <존재사>의 관점에서 니체의 철학은 부지불식간에 플라톤주의 및 근대의 주관 형이상학을 전도된 방식으로, 종말론적 방식으로 완결한 것으로 해석한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사유의 독자적인 입장에서 니체 텍스트에 폭력을 가하면서 초인을 아래와 같이 규정한다. “‘초인’이라는 이름은 근대적인 것으로 자기 시대의 본질의 완결로 나타나기 시작한 인류(인간성)의 본질을 일컫는다. ‘초인’은 힘에의 의지로부터 규정된 현실성으로부터 이것을 위해 존재하는 인간이다.”Heidegger, Nietzsches Wort "Gott ist tot", p. 247) 니체 철학에 여전히 주체의 힘이 그야말로 탈현대적 방식으로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니체에 있어서 존재생기는 은폐되고 주관의 의욕의 세계가 존재의 구석 구석까지 완전히 침투하여 존재자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힘에의 의지가 초인의 원천적인 가능성을 규정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힘에의 의지는 새로운 지평으로서 인간의 보존과 고양에 이바지한다. 객관화된 인간은 소멸한다.
니체는 짜라투스트라 텍스트에서 “창조하는 자아Selbst", ”창조하는 육체“, ”가치를 부여하며 평가하는 자“를 거론하며 자아의 개념을 철저하게 해체하지 않는다. ”창조하는 자아가 스스로를 위해서 경의와 경멸을 창조했다. 스스로를 위해서 쾌락과 고통을 창조했다. 창조하는 육체가 자아의 의지의 도구로서 정신을 창조했다.(ASZ, p. 575) "진실로 인간은 자기가 받드는 선과 악의 모든 것을 자신의 손으로 그들 자신에게 주었던 것이다. 그것은 타인으로부터 받은 것도 아니고 어디선가 주워온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하늘의 소리로써 그것이 그들에게 떨어져 내려온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의 가치의 근원은 인간이다. 인간이 자아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것들의 가치를 여러 사물에 부여한 것이다. 인간이 근원이고, 그것이 여러 사물의 뜻, 즉 인간적인 뜻을 만들어 부여한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스스로를 ‘인간’, 즉 ‘평가하는 자’라고 부른다.“(ASZ, p. 597)
니체는 존재 자체가 중요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넘어서 초인에 도달할 수 있기 위한 인간의 탁트여진 인간존재가 중요하다. 초인은 니체가 인간에게 설정했던 가장 어려운 과제이다. 초인은 내용이나 형태에 대해서 아무 것도 진술하지 않는 텅빈 형식이다. 의지는 항상 더 많은 의욕함, 즉 자기 자신을 넘어서고자 함이다. 힘에의 의지는 본질의 의지이다. 본질의 의지는 실체적인 것, 고정적인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항상 자기 자신을 넘어서고자 하기 때문이다.
남는 문제는 현재의 인간이 어떻게 인간과 인간학, 인간중심주의를 넘을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다시말해 어떻게 정말 아직도 존재하지 않는 초인이 묘사되어야 하는지, 묘사할 수 있는 것인가? 인간의 자신의 최고 가능성에 의한 새로운 인간의 탄생으로서의 초인은 주체성의 최종적인 강화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넘어서고자 함은 자기 자신에 대해 주인이 되고자 함이며 의지는 자기 자신 속에서의 권력이기 때문이다.
니체의 탈현대적 <인간> 이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해석학적인 평가가 요청된다. 니체 사유는 근/현대성과 탈현대성, 다시말해 주관성과 탈주관성 내지 인간과 탈인간(초인)의 대립적 긴장이 해소되지 않은 채 있는 “경게에 서 있는”(이쪽, 저쪽에 속하면서도 이쪽 저쪽이 아닌) 영역에 속한다. 그의 대지의 의미는 하늘과 땅의 이원론을 넘어서 있는, 차안과 피안의 피안이다. 그의 인간에 대한 탈현대적 입장은 주관성의 완성과 주관성의 해체에 걸쳐 있는 경계에 놓여 있다. 따라서 혹자는 경계의 한 쪽을 바라볼 수도 있고(하이데거), 혹자는 경계의 다른 쪽(구조주의자들)을 볼 수 있고, 혹자는 경계의 이 편, 저 편을 전체적 통일성으로 보거나 아니면 이쪽, 저쪽의 피안으로서의 경계영역을 볼(필자) 수 있다. 위의 두 대립적인 관점들은 제 3의 관점에 의해서 지양 극복될 수 있을 것 같다. 제 3의 관점이 우리의 주제와 관련하여 적어도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를 읽고난 잠정적인 결산이다. 물론 양자를 양시론적으로 끌어안는 것이 사유의 태만함이라고 비난받을 수도 있고, 아니면 니체, 하이데거 양쪽에 모두 충실하지 못하다는 이유있는 비난을 감수하고라도, 우리가 대립과 모순을 감내하는 니체 사유의 생명력과 역동성을 감안하면서 제 3의 입장이 다소나마 몰이해와 대결국면으로 치닫는 니체-해석에 대한 현상황을 진정시킬 수 있는 니체 독해의 한 선을 보여주기 위한 접근이기를 기대한다.
참고문헌
1. F. Nietzsche, Also sprach Zarathustra, hrsg. von K. Schlechta, Frankfurt a. M./Berlin/Wien, 1984
2. ___________, Ecce homo
3. M. heidegger, Nietzsche I, Ⅱ, Pfullingen, 1961
4. ___________, Wer ist Nietzsches Zarathustra? in
<강학순 교수의 논문에 대한 논평>
최상옥 (프라이부르크대 박사, 외대 강사)
강학순 교수는 니체의 탈현대적 <인간>이해에서 니체를 “근/현대적 인간관의 종말적(최종적) 완성”으로 보는 하이데거적 입장과 “근/현대적 인간의 해체 내지 죽음”으로 보는 후기 구조주의자들의 입장을 비교하면서 제 3의 해석 가능성을 시도하고 있다. 이를 위해 그는 “니체의 텍스트”로 돌아가기를 요청하며, 이로써 “대립들을 지양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지탱해 나감으로 극복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러한 자신의 입장을 그는 “이쪽 저쪽의 피안”에 선 입장이라 칭하며,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니체의 인간론은 “인간주관의 영역과 탈주관의 영역이 만나는 경계선 상에 서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제 3의 해석 가능성을 찾으려는 발제자의 노력을 존중하며, 단지 그 과정에서 나타난 몇가지 해명되어야 할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1. 니체를 둘러싼 대립된 두 입장에 대한 단순 비교가 가능한가?
이제까지 니체는 다양하게 수용되어 왔다. 단순한 실존주의적 사상가(야스퍼스), 전통적 존재론을 다룬 마지막 형이상학자(하이데거), 기독교에 대한 그리스적 사유의 옹호가(뢰비트), 사회주의에 대한 반명제로서 제국주의 이론을 제창한 자(루카치), 국가사회주의 이론의 지주(보이믈러), 탈로고스, 주체성비판의 토대(후기구조주의자) 등등. 이들 모두는 자가 자신을 위한 니체의 상을 가지고 있다. 해석된 니체는 해석하는 자 만큼이나 많다. 다만 분명한 것은 니체는 각 시대 각 사람들에게 해석을 요청한다는 점이며, 이것은 니체가 독자들에게, 짜라투스트라가 제자들에게 자신을 떠나라고 한 것에 부응한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어느 특정한 시대의 니체 해석이 반영하는 것은 엄밀히 말해 니체 자신이 아니라 니체에 대한 시대적 해석이며, 이 해석은 다양하기 때문에 니체 해석 중의 일부분을 “대표적인 사례”로 선택하고, 그 둘을 단순비교함으로써, 니체의 전체모습을 발견할 수 있으리란 기대는 일단의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2. “텍스트”에 대한 이해에 대하여
발제자 역시 선택된 두 입장, 즉 하이데거와 후기구조주의자들의 견해를 견해를 단순 비교하는 일이 쉽지 않음을 “이 두 해석의 불일치와 간극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표현하며, 그 해결책으로서 “니체의 텍스트로 돌아가기”를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두가지 문제점을 지적하려고 한다.
첫째, 텍스트로서 니체에 대하여 하이데거와 후기구조주의자들의 입장이 상이하다는 점을 간과한 것을 지적할 수 있겠다. 일단 하이데거는 ‘니체’를 다루고 있다. 반면 후기구조주의자들은 ‘새로운 니체’(der neue Nietzsche), 즉 “해체적 읽기 방식의 거장”을 다루고 있다. 이에 따르면, 하이데거는 니체를 그 이전의 철학과의 연관성에서, 그리고 특히 내용의 연관성에서 다루고 있는 반면, 후기구조주의자들은 내용적, 주제적인 사상의 내용보다 사상의 문헌학적 스타일(les styles de Nietzsche)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하이데거의 경우, 그는 니체가 자신의 텍스트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N. I 13 이하) 따라서 해석자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텍스트에서 “말하여 지지 않은 것”, 즉 이전의 철학과의 감추어진 내용적 연관성에서, 그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야 하며, 그 방식으로서 “따라서 사유하기”(nachdenken)를 요구하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하이데거는 발표된 니체의 저작보다, 발표되지 않은 텍스트 “권력에의 의지”를 선호한다. 반면 데리다의 경우 니체의 사상 내용보다 그 스타일에 관심을 가지며, 니체는 자신이 쓰려고 한 것을 다 썻다고 생각한다. 즉 해체적 쓰기 방식을 통하여 니체는 자신의 “쓰려고 한 것”을 텍스트를 통해 이미 썼다는 입장이다.
니체의 경구 “나는 우산을 잊었다”(KSA 9. 597)를 예를 들어 추론한다면, 하이데거는 이 문장을 감추어진 철학적 내용 연관성에서, 그 감추어진 말을 드러내려는 입장에서, “우산이라는 드러난 텍스트”로부터 “드러나지 않은 존재라는 텍스트”를 드러내야 하며, 따라서 위 문장은 “존재를 잊었다”로 해석되는 반면, 데리다는 이 문장을 니체가 쓰려고 했던 것, 즉 니체는 자신의 텍스트 전체를 “나는 우산을 잊었다”는 방식으로 썼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 두 입장을 아무 전제없이 단순비교하는 것이 일단의 문제점을 지님을 알 수 있다.
둘째로 발제자가 두 입장에 대한 해결책으로 텍스트로 돌아가기를 요청할 때, 이때 발제자는 “텍스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해명이 필요하다. 니체의 표현: “고대의 가장 아름다운 후예인 플라톤은 어디서 그런 병을 얻었을까? 그도 사악한 소크라테스가 타락시켰는가?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을 타락시킨 자였고, 그래서 독약을 자초했다면 말이다.”(KSA 5. 12), 라는 이 표현은 위의 방식에 의하면 전혀 상이한 두 해석을 이끌어 낼 수 있다. 따라서 발제자는 텍스트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명백히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3.
니체의 텍스트를 다루면서 발제자는 “신의 죽음은 필연적으로 ... 인간의 죽음을 초래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신의 죽음이 인간의 죽음을 의미하는가? 오히려 인간의 완성이 아닌가? 그런데 이때 발제자는 인간과 신의 죽음의 사건을 이중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우선 발제자는 인간과 초인을 구별하며(4), 신의 죽음은 인간의 죽음이며, 허무주의의 완성이며, 그후에 초인이 등장하고, 이 초인을 발제자는 긍정적인 의미에서 “탈현대인”(9)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렇다면 탈현대인으로서 초인은 허무주의를 극복한 자이다. 반면 발제자는 동시에 하이데거를 해석하면서 초인을 “주관성의 최고 형태”(12)로, 따라서 허무주의의 완성된 형태로 해석하고 있다. 여기서 초인은 인간과 구별되지 않고, 오히려 인간의 최후의 절대적인 허무주의적 형태로 파악되고 있다. 그렇다면 초인은 현대인인가 혹은 탈현대인인가 하는 구별의 기준은 초인을 인간과의 단절로 볼 것인가 혹은 그 연결선상에서 볼 것인가에 달려 있고, 또한 허무주의를 단절의 분기점으로 볼 것인가 혹은 연결선상의 최후점으로 볼 것인가에 달려 있다. 그런데 문제는 발제자가 초인에 대한 두 입장을 비교하기 전에 초인을 탈현대인으로 이미 선취하여 결정하고 있다는 점이다.(9) 그리고 또다른 문제점은 발제자가 초인에 대한 상이한 해석에 앞서 이미 신학적 인간, 마지막 인간, 고차적인 인간, 낙타와 사자의 정신을 소유한 인간을 <인간>에, 자연적 사실로서의 인간: 육체, 확정되지 않은 동물(X), 초인: 탈현대인, 어린이의 정신을 가진 <인간>을 <초인>의 범주에 놓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발제자의 앞선 분류는 이미 한쪽으로의 경도성을 전제로 두 입장에 대한 해석이 이뤄지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분류는 니체의 의도와 상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발제자가 초인을 탈현대인으로 이미 파악했을 경우 그것은 허무주의를 분기점으로 해석했을 때 가능하며, 이때 마지막 인간이나 고차적 인간은 허무주의 이전의 인물로 파악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니체가 이들을 허무주의 이전의 인물상으로 보고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오히려 허무주의에 대한 이들의 태도, 즉 능동적 혹은 반동적 태도 여부에 해석의 중심이 놓여져야 하는 것은 아닌가?
4. “탈현대적”에 대하여
발제자는 “탈현대적”이란 용어가 아직 확정되지 않았고, 따라서 “탈현대성은 근/현대성과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모두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 사용한다고 밝히면서, 이때 니체에 대한 하이데거나 후기구조주의자들의 해석 모두를 이미 탈현대적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즉 발제자는 탈현대라는 개념을 이중적으로, 즉 한편으론 근/현대성의 완성, 다른 한편으론 근/현대적 주관의 해체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발제자는 또 다른 곳에선 좀더 분명히 “니체의 탈현대적 <인간>이해에 대한 해석의 두 얼굴”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우린 이 표현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우선 분명히 추론할 수 있는 것은 발제자는 이 표현을 통해, 하이데거와 후기구조주의자들 모두 니체에서 ‘탈현대적’인 것을 발견했고, 그것을 ‘탈현대적’으로 해석했다고 주장하는 듯이 보인다. 그렇다면 발제자는 완성과 해체에 관계없이 탈현대라는 개념을 “완성”-왜냐하면 완성은 그 이후 새로운 개념을 필요로 하고, 해체는 그것이 완성되었든 미완성되었든 어떤 의미에서는 그 모두를 한 경향의 끝으로 보기 때문에-에 의존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현대는 끝난 것인가? 하버마스는 “현대-아직 성취되지 않은 계획”이라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발제자는 넓은 의미로 탈현대적이란 개념을 사용한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탈현대적을 끝이란 좁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발제자는 탈현대를 시기적으로 파악하고 있는가?
그러나 한편 하이데거가 “탈현대”에 대하여 언급한 적이 있는가? 혹은 발제자가 하이데거를 해석하여 하이데거에서 탈현대적인 면을 발견했다고 한다면, 다음 문제는 어떻게 탈현대라는 개념을 근/현대적 주관성의 완성과 그 해체 모두에 적용시킬 수 있는가?하는 점이다. 혹은 이 문제를 주관성 자체에 대한 질문(관심)으로 보고자 한다면, 즉 발제자 스스로 자신의 논문 후반부에서 인간 주관성에 대한 질문을 주된 질문으로 논하고 있듯이, 탈현대적이란 개념을 주관성 자체에 대한 질문(관심)으로 파악하고자 한다면, 이 경우 양쪽 모두에 탈현대라는 개념이 적용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이때 탈현대의 범위는 발제자가 상정한 이상으로 넓어져야만 한다. 따라서 발제자는 탈현대라는 표현을 어떠한 범위에서 사용하고 있는지 명백히 할 필요가 있다.
끝으로, 발제자는 니체에 대한 하이데거 해석이 일방적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반면 후기구조주의자들의 해석만이 올바른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데 대하여 약간의 우려를 표현하며, 두 입장을 니체텍스트에 의거해 그 한계점들과 정당한 점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때 발제자가 니체->하이데거->후기구조주의자들->니체의 입장 뿐만 아니라, 니체->후기구조주의자들->하이데거->니체의 가능성도 제시하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이데거의 니체해석을 비판하는 후기구조주의자들에게 하이데거는 무슨 말을 했겠는가 하는 것을 추측하는 것도 의미있는 작업이었을 것이다.
니체에 있어서의 주체?자아와 자기의 문제
-도덕적?미학적 자아관-
김정현(고려대)
목차
1. 들어가는 말
2. 형이상학적 주체의 해체
3. 주체, 자아와 자기의 문제
1) 두가지 자아모델에 대한 비판
(1) 유럽의 플라톤적 자아개념
(2) 아시아의 베단타 학설의 자아개념
2) 몸성(Leiblichkeit)과 자아의 관계
(1) 몸(Leib)개념
(2) 자아와 몸의 관계
(3) 보다 높은 자기의 형성
4. 도덕적 미학적 자기형성
1. 들어가는 말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이 자연(physis)에 대한 우주론적 질료인적인 물음이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BC480-410)와 같은 소피스트에 있어서 도덕, 법률, 사회제도 등의 노모스(nomos)에 대한 승인과 더불어 나타난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라는 명제와 상대적 진리관으로 바뀐 뒤, 인간에 대한 철학적 관심은 이미 서양 고대철학의 주류를 된다. 그 하나의 예가 소크라테스의 “네 자신을 알라”(gnothi seauton)고 하는 자신에 대한 이성적 인식과 로고스적 자각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주체 개념이 중요한 철학적 테마로 등장한 것은 인식론과 더불어 근대적 개인의 출현을 가능케 한 근대철학에 이르러서였다. 데까르트는 이를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고 하는 순수 자기 확실성의 명제를 사유 속에서 정초하였고, 로크(L.Locke)는 근원적으로 내용이 없는 경험에 의해 기술되는 백지상태(tabula rasa)로, 라이프니쯔(G.W.Leibniz)는 우주적 조화 속에 총체적으로 형성된 의식의 명증성으로서의 모나드(Monad)로 보았는가 하면, 회의론자였던 흄(D.Hume)은 이를 경험의 우연성에 의해 도달된, 혹은 습관에 의해 생긴 인과성을 심리적으로 객관화하는 과정에서 오는 표상의 더미로 생각하였다. 반면 칸트(I.Kant)는 이를 심리학적인 관찰 대상으로서의 경험적 주체와 인식 가능성의 근거로서의 의식 일반(Bewußtsein uberhaupt), 그리고 자유의 근거로서의 에지적 성격을 갖는 주체로 분별하였다. 그래서 야스퍼스(K.Jaspers)는 근대철학이 주체개념과의 논쟁을 통해 시작하고 발전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K. Jaspers, 'Die großen Philosophen‘ Munchen 1988, p434 참조
즉 “주체”라고 하는 것은 자아의 계보학이 정치 경제 문화 영역에서 근대적인 개인주의를 형이상학적으로 정당화하는 작업을 수행한 것은 근대에 와서였다. 그래서 우리는 근대적 개인주의를 정초하는 자아의 실체화를 자아의 자율성의 선언으로, 혹은 형이상학적 자아의 독립성 확보로 묘사하곤 한다.
그러나 베버(M.Weber), 벨(D.Bell)과 하버마스(J.Habermas)등과 같은 사회 사상가들이 현대사회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으로 분석한 합목적성(Zweckrationalitat)의 기술-경제구조, 평등에 대한 민주주의적 합법성의 정치토대 및 개성적 자아의 표현을 추구하는 문화적 가치체계 등이 층위적 이질성, 즉 가치체계의 불연속적, 부조화의 결합을 보여주었듯, 현대의 대중, 대량 소비사회 속에서 인간 존재의 내적 갈등과 균열은 정치 경제 문화 영역의 괴리 속에서 “개인적 이기주의”의 출현과 “문화적 개인주의”의 요청이라는 배리적 문제의식을 우리에게 던져 준다. 기실 자아의 주체성이 형이상학적 근원주의에 대한 회의, 종교적 가치체계의 붕괴, 역사적 니힐리즘의 대두와 더불어 철학적인 문제로 다루어진 것은 19세기였다.
자아의 존재론적 확립과 가치론적 균열이라는 배리현상 앞에서 근대적 개인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그들의 공저 “독일 이데올로기”(Deutsche Ideologie, 1845)에서 비판한 스티르너(Max Stirner:1806-1856)의 극단적 개인주의로서의 ‘벌거벗은 자아’(das nackte Ich), 마르크스의 역사적 주체,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적 ‘단독자’(das Einzelne) 혹은 근원의 부재와 절대적인 진리의 상대화에 대한 인식으로 역사성 앞에 홀로 선 니체의 ‘극복인’(ubermensch)과 같은 개념으로 인간의 근원적인 주체성에 대한 종교 역사 실존적 물음을 다시 제기한다. 이는 곧 주체 혹은 자아의 형이상학적 물신화에 대한 비판과 인간 존재에 대한 가치론적 물음으로의 전향을 의미한다.
니체는 ‘신의 죽음’으로 상징화된 니힐리즘 속에서 ‘인간의 종말’(Ende des Menschen)을 본다. M. Foucault, 'Die Ordnung der Dinge' ubers. von U.Koppen, Frankfurt a. m. 1989. p411
이는 곧 신에 대한 믿음과 그와 연관된 모든 진리, 가치와 도덕률의 궁극적 근원의 상실 속에서 인간의 존재론적 자기 규정이 불가능해졌다는 파산 선고였다. 니체의 인간학적 물음은 칸트가 그의 마지막 저서 “논리학”(Logik, 1800)에서 네 번째로 제기한 “인간이란 무엇인가?”(Was ist der Mensch?)라는 본질물음(Was-Frage)로부터 “나는 인간으로서 누구인가?”(Wer bin ich als mensch?)라는 주체물음(Wer-Frage)으로 바뀌며, 이는 ‘반형이상학적 인간’(antimetaphysische Anthropologie)으로의 전향을 의미한다. 이는 곧 미셸 푸꼬(Michel Foucault: 1926-1984)가 파악하듯, 형이상학적 근원주의에 기초한 ‘인간학의 사변’(antropologisches Viereck)으로부터의 해방 혹은 ‘인간학의 꿈에서 깨어남’(das Wecken aus dem antropologischen Schlaf)를 의미하며, 같은 책, pp410-411
좌초된 근대철학적 인간학의 해체 및 재구성을 뜻한다. 근대의 존재론적인 자아 규정이 해체되고 가치론적으로 자아가 재구성되는, 즉 인식론적 자아로부터 심리적 자아로 이행되는 이러한 과정은 인간 개체가 자기자신으로부터 자기 가치를 재발견하는 도덕적 미학적 자아 형성의 과정을 말한다. 뤽 페리(Luc Ferry:1951- )는 니체의 이러한 새로운 주체성의 모색을 ‘초-개인주의’(ultra-individualisme), ‘가치론적 개인주의’ 혹은 ‘미학적 개인주의’라 부른다. 뤽 페리, ‘미학적 인간학’, 방미경 옮김, 서울, 고려원, 1994, p226,229,241 참조
이는 합리성의 기조 위에 세워진 근대적 가치 체계의 모색과 가치 패러다임의 이행을 뜻한다. 이러한 의미맥락에서 볼 때 우리는 니체 사상의 주요 관심사가 인간에 대한 가치론적 물음으로 귀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형이상학적 구도 아래서 진행되었던 지금까지의 철학적 인간학(Philosophisch Antropologie)과 구분하여, 필자는 이러한 니체의 가치론적 인간학의 재복권 작업을 서양 형이상학과의 대결 속에서 이해될 수 있는 “반인간학적 인간학”(antiantropologische Antropologie)하이데거(M. Heidegger)는 “인간학”(Antropologie)을 형이상학의 문제와 결부시키고(‘Nietzsche', Bd.2, Pfullingen 1961, p.486), 형이상학을 니힐리즘과 주관성(subjektivitat)의 문제와 연관해 파악한다. 그에 따르면 니힐리즘이란 존재자 자체의 역사다. 그는 니체의 니힐리즘의 극복이 단지 니힐리즘의 완성에 다름아니라고 본다.(같은 책, p360) 이런 의미에서 니체철학은 그에게는 서양 형이상학의 완성, 즉 주관성 형이상학의 완성이다.(같은 책, p.199) 그는 니체가 니힐리즘의 본질을 잘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Nietzsches Wort "Gott ist tot"', in: 'Holzwege', Frankfurt a.M.1980, p.260), “존재신학”(Onto-Theologie)의 형이상학에 머물고 있다고 본다. 이에 대해 데리다는 니체의 1881년 가을에 쓴 유고의 한 문장 “나는 내 우산을 잊어버렸다.”(ich habe meinen Regenschirm vergessen)(니체의 인용은 콜리(G.Colli)와 몬티나리(M.Montinari)에 의해 1980년 뮌헨에서 편집된 비판적 전집을 따르며, 이하의 인용약호는 그 전집판 14권을 따른다. n 12 [62], in:KSA, Bd.g, p.587)를 “해석학적 몽유병의 기념물”(Monument fur hermeneutischen Somnambulismus)로 표시하면서, 하이데거의 존재 망각(Seinvergessenheit)과 연관해 설명하고, 니체를 존재 망각의 극단이 아닌, 형이상학의 극복으로 본다(‘La question du style', in: 'Nietzsches aujourd'hui?' Bd.1, Paris 1973, pp.278-285). 그는 또한 니체의 차이사상(Differenzdenken))이 형이상학에 선행할 뿐 아니라, 존재 사상을 넘어선다고 본다.('Grammatologie' ubers. von H.J.Rheinberger und H.Zischler, Frankfurt a.M.1983, p248), 로티(R.Rorty) 또한 니체를 “비형이상학자”(NichtMetaphysiker)로 평가한다(’Kontingenz, Ironie und Solidaritat', ubers. von Ch.Kruger, Frankfurt a.M.1991, p166). 그러나 하이데거와는 달리 핑크(E.Fink)와 듀리치(M.Djuric) 등은 니체사상이 형이상학을 극복하고 있지만 아직 형이상학적 전통과 완전히 단절하지 못한 “반형이상학”(Halb-Metaphysik)에 머물러 있다고 본다.(E.Fink, 'Nietzsches Philosophie', Stuttgart 1986, pp. 179-189; M.Djuric, 'Das nihilistische Gedamkenexperiment mit dem Handeln', in: Nietzschs-Studieng(1980), p. 172)
필자는 이러한 맥락 속에서 “反인간학적”이라는 형용사를 “反형이상학”, “형이상학 비판”, 혹은 “형이상학 극복”과 연관하여 사용한다.
으로 명명하며, 그의 실천적 인간학을 다루어 볼 것이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주체의 해체와 도덕적 미학적 자기 회복의 문제는 서양의 근대성과 근대적 인간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뿐 아니라, 가치 부재 속에 존재의 균열을 처절히 체험하고 있는 돈에 대한 물신주의 속에 수단적 대상으로 물화되어 인간 존재 가치의 실종을 도처에서 찾을 수 있는 우리의 현실에도 하나의 철학적 문제 의식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2. 형이상학적 주체의 해체
데까르트에 대한 니체의 철학적 관심은 그의 초기 저작인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고찰 2”(Unzeitgemaße Betrachtungen 2)에서부터 주체 문제를 인식, 영혼, 종교 문제와의 연관성 속에서 다루고 있는 “선악의 피안”에 이르기까지 지속된다. 특히 그는 데까르트가 그의 “방법서설”에서 철학의 제 1원리로 제기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에 주목하면서 이성과 주체의 상관관계를 근대 형이상학의 자아구성 원리와 연관해 다루고 있다. 특히 신과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이신론(Deismus)과 기계론적 유물론의 갈등 속에서 기하학적 수학적 방법을 통해 새로 정립하고자 한 데까르트의 합리주의가 인간에 대한 규정에 새로운 확실성을 부여하고 있음을 니체는 “안티크리스트”(Antichrist)에서 지적하고 있다. 인간은 이제 아우구스티누스(A.Augustin:354-430)의 인간신학(Anthropo-Theologie)에서 처럼 신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가 아닌, 이성적 동물, 즉 간지를 가지고 있기에 가장 강한 동물로 규정된다.AC 14, in:KSA, Bd.6, p.180; H.Scholz, 'Augustin und Descartes', in:Blatter fur deutsche Philosophie 5 )1931-32=, pp.405-423 참조
그러나 데까르트에 있어서 아르키메데스의 기점으로서의 사유의 주체는 궁극적으로 역시 신에 의해 지지되는 근원주의에 의존하고 있음을, 그러기에 데까르트에 있어 사유의 방법적 철저성이 결여되어 있음을 그는 또한 지적한다. N 40 [10], in:KSA, Bd.11, p.632; N 40 [25], 같은 책 p.641
자기의식 속에서 모든 확실성의 움직일 수 없는 마지막 기반을 발견한 데까르트보다 니체는 근대성(Modernitat)의 정점에서 더욱 철저히 회의하면서, 자기의식의 환상과 자기인식의 우상을 비판하고 인간의 자아인식에 새로운 방법을 제시한다. K.Lowith, 'Gott, Mensch und Welt in der Metaphysik von Descartes bis zu Nietzsche', Gottingen 1967, p.166; H.G.Gadamer, 'Hermeneutik als Praktische Philosophie' (1972), in:'Vernunft im Zeitalter der Wissenschaft', Frankfurt a.M, 1971, p.93
이제 우리는 데까르트의 근대적 자아, 형이상학적 주체 문제를 니체가 어떻게 회의하며 비판했는가를 살펴 볼 기회가 있다. 니체는 자기의식에 기초한 인식론적인 주체의 구성이 “언어 형이상학의 전제”(Grundvoraussezungen der Sprach-Metaphysik), 즉 문법적 주어-술어 구조(grammatische Subjekt-Pradikat-Struktur)에 상응하는 실체-속성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있다. GD, Die "Vernunft" in der Philosophie 5, in:KSA, Bd.6, p.77
사유하는자아가 인식론적인 논증을 통해 사유하는 실체로 구체화되는 데까르트의 형이상학적 주체에서 니체는 원자적 주체라고 하는 하나의 픽션을 읽는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실체(Substanz, Sub-iectum, ?ποκε?μεγογ)의 의미로 사용되었던 주체(Subjekt)개념이 인식론적 반성을 통해 발견된 인간의 의식적 자아, 혹은 결정론(Determinismus)과 목적론(Teleologie)의 투쟁 속에서 대상(객체 Objekt)과 구분되는 대립개념으로서 인식주체로 바뀌어 사용된 것은 실상 데까르트에서 였다. 그러기에 니체는 “주체”개념의 심리학사를 논증하며 근대의 기계론적, 형이상학적 세계의 영향 속에서 행위와 행위자의 구분, 행위자와 행위의 원인의 구분이 “작용하는 원자”(Wirkendes Atom)로서의 주체로 남게 되었다고 본다. N 2 [158], in:KSA, Bd.12, p.143; N 9 [91], 같은책, pp.383-384
그는 더 나아가 흄과 칸트에 있어서의 인과성(Kausalitat)의 문제를 논하며- 이 문제는 본 고에서 다룰 수 없는 별도의 자세하고 복잡한 논의를 필요로 한다- 주객의 대립쌍이 근대 인식론적인 형이상학적 패러다임 위에 세워진 가설적 성격을 띠고 있음을 보여준다.
원인과 결과의 인과성을 규약적 허구로 보듯, 그는 데까르트의 사유주체(denkendes Wesen)를 “자아의 잘못된 실체화”(falsche Versubstanzialisierrung des Ich) 위에 세워진 허구일 뿐만 아니라, 인과적 질료성과 연관된 형이상학적 사유의 구성물로 본다. N 10 [57], in:KSA, Bd.12, p.486; 그외 N 9 [91], 같은책, p.384; N 7 [108], 같은책, p.398; N 10 [19], 같은책, p.465 및 N 35 [35], in:KSA, Bd.11, p.526; N 38 [3], 같은책, pp.597-598을 참조할 것
즉 인식론적 자기구성의 원리란 “주체개념의 신화”(Mythologie des Subjekt-Begriffs) N 2 [78], in:KSA, Bd.12, p.98
에 기인한 자아구성에 다름이 아니다. 지속적 단위, 원자, 모나드와 같은 통일된 주체개념으로서의 자아개념은 실천적인 유용한 관점에서 만들어 낸 인식의 고안물일 뿐, 니체는 주체개념이 근대적 의미의 원자개념으로, 실체개념으로 환원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형이상학적 주체의 해체는 곧 인식론적으로 실체화된 근대적 자아에 대한 부정을 의미하며, 경험적 현실속에서 복잡다단한 인간 충동들의 상호작용과 상황성에 따라 변화하는 다중심적 중심의 다원적 주체로의 재복권을 의미한다. 외관상 우리가 주체라 할 수 있는 그 주체의 체계 중심은 다중심적이고, 항시 조직과 해체, 형성과 부정의 끊임없는 역동성 속에 하나의 통일된 모습을 한다.: “주체-‘원자’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한 주체의 영역은 항시 성장하거나 작아진다. 체계의 중심은 항시 밀려나간다. 그것이 적당히 조직할 수 없을 경우, 그것은 둘로 나뉘어진다. 그 밖의 경우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 나약한 주체로, 그 기능자로 변형되고 어느 정도까지 그것과 더불어 하나의 새로운 단위로 형성된다. N 9 [98], in:KSA, Bd.12, p.391
즉 통일적 주체란 다양한 충동력들의 조직과 해체, 투쟁과 조화의 놀이(Zusammenspiel)에서 야기된 지배현상(Herrschaft-Gebilde)에 다름 아니다. N 2 [87], 같은책, p.104
그는 복합적 조직적 체계로서의 몸과 연관해 “주체의 복수성”(Subjekts-Vielheit) JGB 1, 12, in:KSA, Bd.5, p.27
을 예기하면서, 사회적 역사적으로 조건화된 몸과 생리적 심리적인 몸의 결합, 즉 경험적 현실세계와 그에 반응하는 인간의 내면세계의 상관관계 속에 새로운 자아관을 모색하고 있다.
3. 주체?자아와 자기의 문제
1) 두 가지 자아 모델에 대한 비판
(1)유럽의 플라톤적 자아 개념
진리를 여성에 비유하고 있는 “선악의 피안”(Jenseit von Gut und Bose)의 서문에서 니체는 아시아의 베단타 학설과 유럽의 플라톤주의에 있어서의 영혼 주체 자아 등에 대한 거짓믿음(Aberglaube)에 대해 말하고 있다. 필자는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에 나오는 말(Pferd)의 비유와 “카타 우파니샤드”(Katha-Upanishad)에 나오는 마차의 비유에서 묘사된 인간 자아에 대한 두가지 모델은 몸 개념을 실마리로 한 니체의 자아 자기 개념을 이해하기 위한 선행 작업으로 고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먼저 본성, 이성, 에로스와 영혼에 관한 플라톤의 한 쌍의 말과 그 마부(Lenker)에 대한 비유를 상기할 수 있을 것이다. Platon, "Phaidros", in:Platon, Samtliche Dialoge Bd.2, hrsg,von O.Apelt, Hamburg 1988, pp.58-59, 69-70
플라톤은 여기에서 아름답고 고상하며 이성에 대해 복종적인 흰 말과 제어하기 힘든 거칠고 나쁜 검은 말을 묘사하며 이성을 마부에 비유한다. 이성은 완전한 신적 세계로서의 이데아 세계(Ideenwelt)를 본 고상한 말(Roß)과 지상적인 것에 머물고자 하는 말 사이의 갈 등을 조정하는 지배자(Herrscher)로 나타난다.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본성에 대해 우선권을 부여하는, 인간을 합리적 이성적 주체로 여기는 플라톤 이래의 서구철학의 전통을 만나게 된다.
화이트헤드(A.N.Whitehead)가 이성(Vernunftigkeit)개념을 토대로 하여 유럽철학 전통의 성격 규정을 플라톤에 대한 각주로 파악할 때, A.N.Whitehead, "Prozeß und Realitat. Entwurf einer Kosmologie“, ubers. von H.G.Holl, Frnkfurt a.M.1984, p.91
이는 인간의 자연을 제어하는 마지막 법정(Instanz)으로서의 이성에 최고의 위치를 부여하는 철학적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자아란 이성의 주체일 뿐만 아니라 이성의 산물이다. 카울바하(F.Kaulbach)에 의하면 몸, 정열과 정서 등에 대해 지배권을 주장하는 사유하는 자아의 이성을 마부에 상응시킬 수 있고, 이때 플라톤의 비유는 근대의 이성철학적 세계관에도 역시 적용될 수 있다. F.Kaulbach, Philosophie des Perpektivismus, Tubigen 1990, pp.294-295
데까르트에 있어서의 사유하는 자아("ich denke"), 혹은 칸트에 있어서의 실천이성의 의욕하는 자아(“ich will")- 플라톤의 비유에 있어 고상한 말에 해당하는 도덕감, 또는 인간을 의무를 행하게끔 하는 도덕법칙에 대한 감정-가 보여주듯, 자아이성(ich-Vernumft)은 몸의 주인으로 나타난다. 니체가 형이상학적 주체의 해체, 즉 순수사유에 의해 구성된 추상적인 자아의 해체를 통해 논증하고자 하였던 바는 보다 큰 이성으로서의 살아있는 몸을 통한 실천적 자아의 구체화였다.
(2) 아시아의 베단타 학설의 자아 개념
니체는 플라톤적 자아 개념에 반대하듯 마찬가지로 아시아의 베단타(Vedanta)의 자아 사상(Atmangedenke)에 대해서도 반대하는 입장을 취한다. 우리는 힌두의 종교적 체험과 형이상학적 사유의 정수를 담고 있는 베단타 문헌 중 그 최고 정수에 해당하는 “카타 우파니샤드”(Katha-Upanishad)에서 자아, 육체, 사유와 감각에 관한 말과 마차의 비유를 찾아 볼 수 있다. 필자는 순수의식에 대립하여 경험적 현실 속에서 그 행위의 결과로 체험하는 감각적 자아와 절대적 우주론적 자아의 가정을 위 문헌을 통해 예증해 보고자 한다.
“아트만을 마차의 주인으로 인식해 보자. 육체는 마차이고, 붓디(Buddhi)는 마부(Wagenlenker)이며, 생각은 고삐(Zugel)이다. 감각들은 말들이며, 대상들은 길들이다. 현자는 육체, 감각, 생각과 연결된 아트만을 향유자라 부른다. 붓디가 항시 빗나가게 되는 생각과 연결됨으로써 자신의 분별력을 잃으면, 감각은 고삐 풀린 말들처럼 콘트롤되지 않는다. 그러나 붓디가 항시 지배된 생각과 연결되어 분별력을 갖게될 때, 감각은 마부의 복종하는 말들과 같이 콘트롤 속에 놓이게 된다.” Die Katha-Upanishad. von der Unsterblichkeit des Selbst, ubers. von K.Friedrichs, Bern und Munchen 1989, pp.80-85
카타 우파니샤드는 인간존재를 말, 고삐, 마부, 마차 등과 연관해 비유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말이란 외적 감각기관을 나타내며, 말을 콘트롤하는 고삐란 플라톤에 있어서의 이성에 해당하는 사유기능으로서의 마나스(Manas)를 나타낸다. 말과 마차 사이에 있는 마부로서의 붓디는 손에는 고삐를 쥐고 마나스를 제어한다. 이는 아트만을 마차의 주인으로 인식하며, 현실 속에서 아트만을 세계영혼의 우주(Universum der Weltseele)로서의 브라만(Brahman)과 일치시키는 내적인 지성 능력을 갖는다.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서 무엇을 해야하고, 무엇을 해서는 안된다 하는 것을 주로 그것을 규정하는 붓디에 의존한다. 경험적 현실 속에서 감각과 이성의 역동적 상관성을 인정하고 있는 베단타의 세계관은 데까르트적 자아와는 달리 자아가 경험적 행위 속의 붓디를 통해 규정된다고 보지만, 다른 한편 마차의 주인으로서 절대적 자기를 상정하고 있다. 니체는 베단타 학설이 규정하는 자아관 역시 이러한 절대적 자기를 전제한다는 의미에서 또 하나의 도그마로 비판을 한다.
2) 몸성(Leiblichkeit)과 자아의 관계
(1) 몸(Leib) 개념
니체에 있어서 몸(Leib)은 자연과학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신체(Korper)와는 다른 존재론적 개념이다. M.Heidegger, "Nietzsche", Bd.1, p.119
즉 몸은 생물학적 의미로만 파악할 수 없는, 생을 추진하는 내우주(Endokosmos)의 담지체이자 그 추진력(기능적 구조)이다. 우리 몸의 통일적 역동성(die einheitliche Dynamik)은 곧 “사유, 느낌과 의욕”(Denken, Fuhlen, Wollen) FV5, 354, in:KSA, Bd.3, p.590; N 35 [15], in:KSA, Bd.11, p.514; N 37 [4], 같은책, p.577; N 40 [21], 같은책, p.639; N 14 [152], in:KSA, Bd.13, p.335 찹조
의 복합적 상호연관적 작용에서 야기된다. 그러기에 니체는 활동하는 몸의 역동성을 때로 “생”(Leben)의 표현으로 읽는다. 의식과 감정과 의지의 영역을 포괄하는 전체적인 몸의 기능을 그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성이라고 일컫는 정신(Geist)- 작은이성(Kleine Vernumft)-과 구분하여 ‘큰 이성’(große Vernunft)이라 부르며, 서구의 전통적인 의식철학의 한계를 벗어나고 있다. Za I, Von den Verachtern des Leibes, in:KSA, Bd.4, p.39
정신적인 것은 “몸의 기호언어”(Zeichensprache des Leibes)로서, 그는 의식과 정신에 우월성을 부여한 전통철학의 위계를 거꾸로 바꿈으로서, 이제 의식의 차원은 이차적 단계(Rangordnung)에서 다시 몸의, 큰 이성의 활동에 수반하여 그 기능을 하게 된다. N 7 [126], in:KSA, Bd.10, p.285; N 40 [15], in:KSA, Bd.11, p.635
이러한 위계의 바꿈을 우리는 정신과 의식, 혹은 이성적 활동이 불필요 하다거나 혹은그 활동이 가치가 없다는 식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아차적’, ‘부수적’, ‘표피적’, ‘소극적’이라는 의식활동을 지시하는데 붙는 이러한 수식어로부터 오는 오해의 소지는 니체 자신의 표현에서 야기되었지만, 그의 몸개념에는 이미 의식의 활동까지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생의 활동이 함축되어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의식활동으로서의 정신이란 몸의 표피적(대외적) 기능으로 “보다 높은 생에, 생의 향상에 봉사하는 수단이요, 도구”로 세계와 접촉하며 세계를 설명하고(erklaren), 해석하는(auslegen), 즉 인간의 종적 보존을 위해 현실(Realitat)을 도식화(Schematisierung)하고 범주화(Kategorisierung)하는 인식 기능을 갖는다. 이러한 외적 세계를 받아들이고 그에 반응하는 의식세계 아래 그는 더 큰 형태없이 살아 움직이는 근원적인 충동(Trieb)의 세계가 있음을, 즉 무의식과 연관된 총체적인 충동의 생(Triebleben)이 활동하고 있음을 프로이드(F.Freud)에 앞서 하나의 철학적 정초로 제시하고 있다. H.F.Ellenberg, "Die Entdeknung des Unbewußten", Zurich 1985, p.714 그외 B.Nitzschke, "Zur herkunft des 'ES': Freud, Groddeck, Nietzsche-schopenhauer und E.V.Hartmann", 1.2., in:Psyche 37 (1983), Heft 9, pp.769-804와 39 (1985), Heft 12, pp.1102-1132 참조할 것
니체가 “원형질”(Protoplasma)의 비유로 묘사한 충동의 내면적 구조 N 35 [58], [59], in:KSA, Bd.11, p.537
는 영혼의 원자(Seelen-Atome)가 아니라, “성장하고, 투쟁하며, 쓰로 커지기도 하고 다시 쇠잔해지는 무엇”(etwas Wachsendes, Kampfendes, SichVermehrendes und Wieder-Absterbendes) N 37 [4], 같은 책, p.577
으로서 끊임없이 활동하는 몸의 내면적 총체적 상태(Gesamtzustand)로 이루어진다. 그러기에 우리의 생의 표현은 몸을 매개로 한 다양한 충동들의 상호놀이(Zusammenspiel), 여러 힘에의 의지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표출된다.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영향 아래 있었던 초기와 중기까지는 생을 단순히 맹목적인 힘 내지는 어둡게 추동하는 비논리적인 욕구로 보았지만, 이제 후기에 와서는 몸의 합리적 자기규제의 지성적 측면을 보완하여 충동의 세계를 설명한다. 몸은 지성적 본능의 기능 JGB 7, 218, in:KSA, Bd.5, p.153
과 “자기규제의 충동기관”(Triebapparat der Selbstregulierung) N 25 [179], in:KSA, Bd.11, p.62
으로 생에 적극적으로 봉사하는 역동성을 갖는다. 여러 가지 다양한 힘들이 충돌하고 투쟁하며 지배형태(Herrschafts-Gebilde)로 조직되고, 다시 밀려나고 재형성되는 이러한 내면적인 힘들의 놀이(Zusammenspiel)를 그는 힘에의 의지들의 상호작용으로 묘사하듯, 그 상징으로서의 몸을매개로 우리는 주체, 자아의 문제를 실천적 행위 영역과 연관해 조명할 수 있을 것이다.
(2) 자아와 몸의 관계
니체에 있어서 인간의 자아 및 자기는 몸의 행위와 의미 지평과 연관해 밝혀질 수 있다. 라깡(J.M.E.Lacan:1901-1981)에 앞서 니체는 존재로 환원될 수 없는, 항시 생성하는 자아의 의미지평을 문제시한다. M.Frank, "Was ist Neostrukturalismus", Frankfurt a.M.1984, pp.267-268
우리가 생성론적 입장에서 니체의 자아 및 자기의 문제를 볼 때, 자아란 과연 어떻게 규정될 수 있는가? 니체에 있어서 자아란 세계와 내면의 관계 속에서, 즉 세계를 받아들이고 이 세계의 경험적 자료를 내면의 투쟁과정을 거쳐 조정하여 다시 세계에 반응하는 행위론적 맥락의 의미론적 순환의 역동성을 갖는다. 즉 자아란 행위에 의해, 행위 속에서 행위와 더불어 규정될 수 있는 의미론적 기능(semantische Funktionnalitat)이다. 자아는 단순한 말하는 행위가 아니라, 말과 더불어 하는 큰 이성으로서의 몸의 의미활동과 연관되어 있다. 그러기에 “하나의 유기적 세포”(eine organische Zelle)처럼 활동하는 자아 N 1 [20], in:KSA, Bd.10, p.14
는 고정된 실체적 존재가 아닌 “생성하는 무엇”(etwas Werdendes) N 7 [55], in:KSA, Bd.12, pp.313-314; N 7 [63], 같은책, p.317
이다.
니체에 있어서의 자아란 테까르트적인 이성적 실체도, 베단타 철학에서 말하는 붓디에 의해 실현될 수 있는 개체화된 절대적 영혼도 아닌, 몸이성과 더불어 행위 속에서 움직이는 생성의 상황적 규정에 대한 이름이다. 니체에 있어서 몸이성과 더불어 행위하는 자아는 피히테의 관념론적 자아를 벗어나 경험적 현실 속에 그 규정 근거를 갖는 심리학적 지평을 획득한다. 이러한 자아의 행위론적 의미론적 심리학적 의사소통적 측면에 대해서는 별도의 방대하고 자세한 논구를 필요로 하기에, 이 글에서 필자는 주로 니체 자아의 정의적 측면만을 다룰 것이다.
그럼 니체에 있어 주체와 자아와 자기와 몸은 어떤 상관관계에 있는 것인가? 형이상학적인 인식론적 자아를 해체하면서 그는 하나의 주체의 가정과 주체의 통일의 가정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N 40 [42], in:KSA, Bd.11, p.650
주체(Subjekt)란 힘에의 의지의 다수성으로서 단지 하나의 허구적 통일 안에서 하나의 존재로 응축된 것이다. 주체의 다수성(Subjekt-Vielheit)이란 충동세계의 복종과 명령 속에서 힘투쟁의 표현이자 동시에 흘러가는 힘한계 규정의 결과(Resultat des fließenden Machtgrenyenbestimmen)이다. N 40 [21], 같은 책, p.638
따라서 주체란 내면 세계의 힘들의 투쟁과 그 조직적 통일에서 성립하는 잠정적인 힘중심에 대한 명칭일 뿐이다. 이에 대해 자아는 행우론적 의미론적 활동속에서 성립하는 인간의 개체적 특성과 관련이 있다. 한 인간의 개체적 성격, 즉 “그가 누구인가?”하는 문제는 그의 본성의 가장 내면적 충동이 어떤 위계질서(Rangordnung)속에 서로 층위적으로 위치하고 있느냐에 따라, 즉 어떠한 지배현상으로 배열되고 현상화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나 항시 재구성되는 가장 내면적인 충동들의 지배질서(Herrschftsordnung)는 몸이성에 기초를 두고 있다. 몸이성은 경험적 현실 속에서 또한 상황적 자기를 형성시킨다. 감각과 정신의 종합으로서 몸이성(Leibvernunft)는 궁극적으로 자기(das Selbst)를 형성시킨다.
정신과 몸, 의식과 충동은 한 마차의 두 바퀴와 같다. 정신없는 몸이란 맹목이며, 몸없는 정신이란 공허하다. 몸과 정신은 자기창출의 두 축이다. 몸은 의식활동을 통해 고양되며, 몸이성의 실현체로서 자기는 실천 속에서, 즉 원근법적 의미 부여와 자기극복의 삶 속에서 보다 높은 몸으로 구현된다. 자기는 형성되며, 보다 높은 자기의 실현은 곧 몸의 닦음(자기수련)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몸의 신체적 자기실현을 니체는 “자연인”(Homonatura)인 근본 텍스트로의 복귀인 동시에 보다 높은 자기로의 형성이라고 말한다.
(3) 보다 높은 자기의 형성
자연으로 되돌아 감으로서 자기를 형성한다는 의미는 루소적인 의미의 자연 복귀가 아닌, 괴테적 의미의 자기형성 가능성(die gestaltbarkeit des Selbst)을 함축하는 자연성으로의 상승(Aufstieg zur Naturlichkeit)을 말한다. 생의 예술(Lebenskunst)에 대해 말하고 “즐거운 지식”(Die frohliche Wissenschaft=은 주로 니체의 인간학적 테마로서 자기형성 가능성에 대해 다음과 같은 명제를 내세운다: “너는 너 자신인 네가 되어야 한다.”(Du sollst der werden, der du bist) FW3, 270, in:KSA, Bd.3, p.519
자신이 된다는 것(das Selbstwerden)은 자기 안에서 삶의 깊은 의미와 폭넓은 세계 체험과 높은 정신적 관조의 질적인 발전, 즉 초자아(Superego)의 형성을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위대한 정신”(megalo-phychia)은 곧 니체에게서 참된 자기로의 회복을 통해 얻는 자유정신의 “깊이, 넓이, 높이”(Tiefe, Breite, Hohe)의 실현에 해당한다. GM2, 16, in:KSA, Bd.5, p.322; 그외 B.Magnus, "Aristoteles and Nietzsche: 'Megalophychia and ubermensch'", in: "The Greeks and the Good Life", ed.by D.G.Depew, Fullerton 1980, pp.260-261
자기 안에서 자기에게로 “방향을 부여하는 행위”(Richtung-geben) MA1, 9, p.521, in:KSA, Bd.2, p.324
는 곧 자기의 생의 양식(Still)을 창출하는 행위이기에, “위대한 양식의 경제학에 대한 의지”(der Wille zur okonomie grossen Stils) AC, Vorwort, in:KSA, Bd.2, p.167
는 스토아 학파의 금욕주의와는 구별되는 정신적 절제(Diat)와 강한 의지의 힘을 필요로 한다. 자기 형성은 따라서 자기 극복의 과정을 통해 비로소 실현될 수 있다. 자기형성의 가능성은 주체성, 숭고한 영혼, 자기 자신에 대한 존경과 도덕적 성실성과 같은 덕목의 삶의 태도(Lebenshaltung)에서 발견될 수 있다. 니체는 항상적인 자기극복 속에 인간애(Humanitat)를 정초하며, EH, Warum ich so weise bin 8, 같은책, p.276
몸의 극복을 설파한다. 자기극복이란 충동의 승화(die Sublimierrung des Triebes: W.Kaufmann)이자 변형(Transfiguration: H.Barth)이며, 충동의 변화(Verwandlung des Triebes: K.Jaspers)를 말한다. W.Kaufmann, "Nietzsche-Philosoph-Psychologe-Antichrist", ubers, von J.Salaquarda, Darmstadt 1988, p.245-298; H.Barth, "Wahrheit und Ideologie", Frankfurt a.M. 1974, p.320, Anm.139; K.Jaspers, "Nietzsche-Einfuhrung in das Verstandnis seines Philosophierens", Berlin 1950, p.134
자기극복을 통해 얻어지는 높은 자기로서의 자유정신은 문화 속에서 삶의 실천적 의미를 구현하게 된다.
4. 도덕적 미학적 자기형성
니체에 있어서의 도덕 혹은 윤리 문제는 복잡하고 다양한 관점의 논의를 필요로 하는 테마 중의 하나다. 이는 기독교와의 관계, 선과 악의 개념에 대한 계보학적 설명, 형이상학과 서구 도덕의 관계 구조, 칸트의 자유의지, 공리주의 비판이나 쇼펜하우어의 동정윤리와 같은 전통적 윤리학과 대결, 도덕과 근대성의 연관관계 및 심리학적 고찰 방식 등 실로 다양한 시간의 별도의 논의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도덕과 자기형성의 문제에만 축약적으로 초점을 맞추어 보고자 한다.
도덕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니체에 있어서의 도덕(Moral)이란 “한 존재의 생의 조건과 연관된 가치평가들의 체계” F.Nietzsche Werke in drei: Banden, hrsg von Karl Schlechta, Munchen 1966, Bd.3, p.925
, “그 아래서 ‘생’이란 현상이 발생하는 지배 관계의 학설” JGB 1,19, in:KSA, Bd.5, p.34
, 몸의 “기호, 증후학”(Zeichenrede, Symptomatologie) GD, die "Verbesserer" der Menschheit 1, in:KSA, Bd.6, p.98; N 4 [217], in:KSA, Bd.10, p.172 참조할 것
혹은 “정서의 기호”(Zeichensprache der Affekte) JGB 5, 187, in:KSA, Bd.5, p.107
이다. 니체에 있어서 생의 도덕적 실천 문제는 그의 내면 세계, 즉 충동 세계의 정돈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도덕은 충동에 대한 지배에서 성립한다. 충동은 도덕적 판단에 의해 변형된다. M 1, 38, in:KSA, Bd.3, p.45
도덕은 충동들의 질서로 파악될 수 있다. 인간은 동물들과는 달리 이러한 충동들을 종합함으로써 지상의 주인이 되고, 가치판단과 의미평가의 주인이 된다. N 27 [59], in:KSA, Bd.11, p.289
도덕은 몸의 가치평가의 활동, 인간의 정서활동과 상호관계 한다. N 9 [1], in:KSA, Bd.8, pp.137-142
가치 평가자로서의 인간은 몸을 매개로 자신의 삶의 가치를 만들 뿐만 아니라 가치있는 삶의 의미를 창출하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가치 평가가 인간 속에서 인간에 의해 인간과 더불어 진행된다고 볼 때, 도덕적 자기형성 및 자기 정립은 인간 속에서 얻는 자유정신과 즉 가치평가자의 힘의 성장과 관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힘의 성장이란 세속적 권력의 축적이나 그를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자기 극복을 통해 오는 현실에 대한 “인간의 가장 근원적 자기개방”을 말한다. K.Ulmer, "Nietzsche Idee der Wahrheit und die Wahrheit der Philosophie" in:Philosophisches Jahrbuch 70 (1962), p.300
사회 역사적으로 조건화된 삶 속에서 자기극복(Selbstuberwindung)의 도덕, 즉 자기 자신에 대한 지배의식(주인의식의 도덕;Herrenmoral)은 인간의 도덕적 자기형성의 가능 근거를 마련해 준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형성의 가능성은 도덕적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미학적 차원에서 “생의 예술”(Lebenskunst)로서 나타난다. 미셸 푸꼬의 “실존의 미학”(Asthetik der Existenz) M.Foucault, "Der Gebrauch der LusteA, in:"Sexualitat und Wahrheit" Bd.2, ubers. von U.Raulff und W.Seiffer, Frankfurt a.M. 1986, p.18
을 연상시키는 예술로서의 생의 형성 가능성에 대한 니체의 사상은 기실 그의 사상의 핵심에 속한다. 도덕이 생을 올바르게 전향시키는데 반해, 미학은 생을 전향적으로 추동시킨다. 도덕이 생에 방향을 주는데 비해, 미학은 생을 형태로 조형시킨다. 이 두 영역은 자기형성의 작업에서 불가결하게 상호 결합되어 있을 뿐 아니라, 이 작업에 하나의 고유한 리듬을 준다. 생은 이제 예술이 된다. 니체는 전통적인 미학과 도덕의 이원론을 극복할 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더 나아가 자기체험의 영역에서 외적 내적으로 연관된 두 영역의 통합적 작용에 새로운 해석을 부여한다. F.Fellmann, "Lebensphilosophie" Reiner bei Hamburg 1993, p.66 참조
그는 기존의 절대적 진리에 대한 믿음에서 오는 절대적 도덕을 포기하고, 도덕적 규범의 다원주의(Pluralismus)가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 가치 다원주의의 문화체계 아래서 개별적 삶의 가치정립과 의미 창출의 자기 조형이 하나의 가치로서 승인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니체의 미학적 인간학의 두 명제를 만나게 된다. (1)인간은 아름답다. 그러나 동시에 추해질 수 있다. (2)인간은 그가 미추의 대립을 생의 용광로에서 용해시킴으로서 존재의 본질적인 미를 얻을 수 있다. 생의 예술은 미추의 미학에 기초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슈미트(W.Schmid)는 니체를 생철학자가 아닌 생의 예술의 철학자(ein Philosoph der Lebenskunst)라고 말한다. W.Schmid, "Das Dasein-ein Kunstwerk. Zum verhaltnis von Kunst und Lebenskunst bei Nietysche“, in:Deutsche zeitschriff fur Philosophie 6/1991(39.Jg), p.654; 그외 그의 논문 ”Uns selbst gestalten. Zur Philosophie der Lebenskunst bei Nietzsche", in:Nietzsche-Studien 21 (1992), pp.50-62 참조할 것
니체가 후기에 “예술 생리학”(Physiologie der kunst) N 17 [9], in:KSA, Bd.13, pp.529-530
혹은 “미학의 생리학”(Physiologie der Asthetik) GM 3, 8, in:KSA Bd.5, p.356
이라 부르는 생의 예술은 인간 본성의 언어와 그 일상적 의미 속에서 출발점을 삼고 있다. FW 4, 299, in:KSA, Bd.3, p.538: "우리는 그러나 우리의 생의 작가가 되고자 한다. 가장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에서 먼저 생의 작가가 되고자 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니체의 자기에 대한 예술가적 완성의 주된 관심이 고전주의적 이념과 연관되어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뤽 페리는 고전주의와 니체 미학 사이에 존재하는 심층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그 차이를 극고전주의(Hyperclassicisme)라 부른다. 뤽 페리, 위의 책, p.265
- “힘의 최고의 감정은 고전주의 유형 속에 중심화되어 있다.” N 14 [46], in:KSA, Bd.13, p.240
고전주의의 유형 속에서, 냉정함과 엄격함으로 위대한 양식을 창출시키는 그 이념 속에서의 자기형성이란 자신의 모든 힘을 작품으로서의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개체성의 스틸화를 의미한다. M 5, 548, in:KSA, Bd.3, p.319
니체가 생의 예술을 통해 창출시키고자 했던 인간 유형은 -초기의 철학자, 성자와 예술가의 세가지 인간 실존 형태와는 구분되는- “자기 스스로를 형성하는 자”(Sich-selbst-Gestaltende)와 동시에 “자유정신”(Freie Geister)을 의미하는 “예술가-철학자”였다. N 37 [14], in:KSA, Bd.11, p.590; N 2 [66], in:KSA, Bd.12, p.89
예술가 철학자란 디오니소스적 세계 속에서 자신의 삶을 긍정하며 존재의 개방성을 갖고 자기 자신을 형성시키는 자유정신을 의미한다. 니체의 인간에 대한 관심은 소극적 인간 이해에 머물지 않고, 적극적이고 실천적인 인간 형성의 문제에 하나의 대답을 주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니체에 있어 주체, 자아와 자기의 문제”에 대한 논평
이창재(연세대 박사)
필자는 니체의 새로운 (비실체적, 가치론적, 미학적) 자아관을 기존 철학사와의 대비 하에서 매우 명료히 정리하고 있다. 니체 도덕관의 핵심이 ‘(도덕의) 자기극복’에 있으며, ‘자기극복’ 활동의 존재론적 근거가 실체적 ‘자아’, ‘존재’, 물질적 자연이 아닌 ‘몸’(‘생’, ‘힘에의 의지’)에 있으며, 미학과 도덕학의 탈이분법적 결합에 니체의 관심이 초점되어 있다는 서술에 본인은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런데 필자의 서술 방식이 어떤 전통적 니체해석에 대한 반박(푸꼬, 데리다, 코프만) 내지, 새로운 주장에의 시도가 아닌, 기존 독일 해석가들의 입장을 인용하여 소개하는 차원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이 글은 특별한 논쟁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 이 글은 니체에 대한 현대 독일 해석관들의 특징과 한계를 반영할 뿐이기에, 니체가 그토록 강조하던 <너 자신이 되라. (니체주의자가 아닌 주체적 해석가가 되라)>는 말의 아쉬움을 남긴다. 그리고 필자의 언어관이 니체가 독특하게 시도했던 탈이분법적 은유술과 생존술을 충분히 음미하지 못함으로 인한 니체해석의 문제점을 지님을 아쉬워 하며 다음의 몇가지 점들을 지적하고 보완하고자 한다.
필자는 먼저 서론에서 인식의 초점을 우주론으로부터 삶의 실용적(관습적) 음미에로 전회했던 소피스트의 가치관을 니체가 고대-중세의 차등적 존재형이상학과 근대의 자아형이상학을 해체시킴으로써 재복원하고자 했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이를 인식론적 자아로부터 심리학적 자아로의 이행이며, 특정 중심주의로부터 다원적 가치관에로의 이행이라고 정리한다.
그런데 니체를 다원적 가치론자 내지 심리학적 자아론자로 규정하게 되면, 이 글의 결론에서 필자가 강조한 <철학자-예술가>의 도덕관과 상충되는 부분이 생기게 된다. 이러한 상충결과는 니체를 반형이상학적 인간학자 내지, 가치론적 자아론자로 단순규정하는 데에 주원인이 있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본인은 필자에게 두 가지 물음에 대한 답변을 듣고 싶다.
1) 니체 철학의 핵심은 과연 반형이상학적 인간학(심리학, 생리학..)(카우프만의 해석관) 내지 가치론적(실용적) 자아관(미국적 해석관)에 있는가?
; 니체는 이미 “역사적 지식의 유익함과 해로움”에서 반형이상학적 지식관(역사계보학)의 문제점(괴기성과 보호력의 상실)을 지적한 바 있다. 비록 후기 저작들(‘반그리스도’...)의 많은 부분에서 반형이상학적 심리계보학의 입장을 계속 강조하기는 하지만, 그의 최후 관심은 형이상학 대 반형이상학의 이분법적 대립을 넘어서고자 하는데 있으며, 이것이 오늘날 니체가 재부각되는 핵심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필자는 자신이 강조 서술하는 예술가-철학자(‘비극의 탄생’ 서문에서 이미 강조됨)라는 상호대립적 원근법의 종합이 단순히 반형이상학적 인간학의 시각으로는 논리적으로 실현 불가능함을 간과한다. 세상을 냉정하게 심층 해부하여 자기환상의 베일을 벗겨가는 반형이상학적 계보철학자의 시각과, 세상을 보다 아름답게 현상화(가면화, 의미-가치화)하는 미학적 시각이 상호 공명작용하기 위해서는 이분법적 형식논리가 아닌 탈이분법적 은유술을 활용해야 함을 니체는 이미 초기 저작(“탈도덕적 의미의 참과 거짓”)에서 드러내고 있음을 필자는 서술치 않는다.
니체 도덕관의 핵심인 ‘(도덕의) 자기-극복’은 특정한 동일성에 고착되는 형이상학적 시각이나, 동일성 일반을 심리적 구성물이나 권력학적 이념으로 허구화하는 반형이상학적 인간학의 시각만으로는 결코 해명되지 않는다. 개념적 의미와 은유적 의미가 혼재적으로 표현된 ‘자기-극복’은, 극복활동의 중심이며 대상으로서의 ‘자기’의 통일성을 인정하고 활용함과 동시에 이 자기가 바로 극복되어야 하는 대상으로서의 허구적 관습적 잠정적 자기라는 의미를 표출하는 일종의 비유이다. 동일성과 차이성이 동시에 존립되어야만 비로소 낱말의 의미가 존립될 수 있다. 이처럼 동일성과 차이성을 동시에 표현하는 수사법은 유비나 은유법으로야 가능한 것이며, 반형이상학적 <설명어법>으로는 정리되기 어렵다.
동일성의 질서적 안정성을 강조하는 도덕과 탈동일적 해체 내지 해방 속에서 느껴지는 차이성들의 질감을 음미하려는 미학의 시각을, 생의 풍요와 고양을 위해 삶의 상태 내지 맥락에 따라 적절하게 상호 조화(상호작용, 공명)시키고자 니체 전략의 핵심은 탈이분법적 은유술에 있다. 가령 그는 형이상학의 근본 토대들을 허구화(해체)시키는 반형이상학적 계보학을 극단적으로 진행시키고서는, 형이상학이 강조하던 동일성 일반이 해체되면 반형이상학 역시 자신의 <학문적> 근거를 제공받을 수 없게 되어 <학>의 권위와 가치가 붕괴될 수 밖에 없음을 드러낸다. 그리고는 이러한 자신의 인식내용에 의해 자기활동의 진실성과 가치가 부정당하는 자가당착의 주원인이 기존의 이분법적 인식태도에 있음을 자각한다. 그래서 그는 ‘생’에 대한 이분법적 인식태도 내지 음미태도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탈이분법적 태도, 시각을 모색한다.
탈-근대적 인식관 내지 생존술로 인정되는 니체의 탈이분법술은 상호 대립쌍을 이루는 다양한 전통 이분법들(동일성과 차이성, 도덕과 예술, 이성인과 직관인, 소크라테스와 디오니소스, 형이상학과 반형이상학적 계보학...) 각각의 참-거짓, 유익함-해로움을 최대한 깊고, 넓고, 높게 순간 포착함으로써, 특정한 이분법의 장점을 충분히 활용하는 동시에 그 한계로부터 벗어나려는 전략율동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니체 도덕학의 핵심인 특정한 이분법적 관념과 태도에 매몰되어 그로 인해 정체성에 빠질 수 밖에 없게 되는 전통 ‘자아’에 대한 끊임없는 ‘자기 극복’활동이다. 탈이분법은 특정 이분법을 단순 부정하거나 전복함으로써 바로 그로 인해 기존 대상에 대립관계로 얽혀드는 또 다른 이분법이 아니다. 그것은 긍정과 부정이라는 이중활동을 함께 작동시킴으로써 기존 관습(문자적 의미)을 활용하는 동시에 또다른 체험영역을 확장시켜 가는 은유적 개방활동에 비유될 수 있다.
2) 필자는 니체 도덕학의 특징을 너무 결과적 차원에서 기술한다. 그런데 니체의 특유성은 도덕의 뿌리 내지 가치나 인식, 의미의 발생 기원이 무엇인가를 인간 의식에 보편화된 특정한 신념의 보호막을 뚫고서 계보학적으로 캐내려간 데 있다. 도덕의 기원 내지 정체는 당대의 (도덕적) 의식한계에 이르러 이를 용기있게 해체시킴으로써 밀려드는 자기분열 체험을 한 자에게만 전달될 수 있는 앎의 내용이기에, 이를 기존의 언어틀과 의미틀, 가치관 <안에서 설명>하려하면 왜곡이 발생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이런 체험에 대한 전달은 다분히 새로운 언어 표현법과 새로운 가치 관점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니체는 기존 언어를 활용하는 동시에 그것이 한계가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 다양한 언어 표기법들을시도했다. (아이러니, 패로디, 생략, 도치법, 말소기호법(‘ ’), ...침묵과 언설... 인식과 망각..) 따라서 필자는 힘에의 의지에 ‘ ’ 인용부호를 덧붙여야 했다. 이것이 니체가 형이상학과 반형이상학 모두의 독단적 자기 한계(주관주의, 의식중심주의)를 벗어나, 은유적 차원에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탈이분법적 앎의 표기임을 필자는 소홀히 한다.
탈이분법적 은유차원의 니체(영원회귀, 극복인)는 의미와 가치라는 관념들이 발생되는 한계선의 안과 밖을 넘나드는 철학자-예술가, 인식인-행동인.. 의 이중유희 속에서 더 이상 반형이상학적 인간학(계보학) 차원의 강하고 약함, 보다 높고 낮음에 연루되는 자아관을 지니지 않는다. 존재론의 한계와 인식론의 한계를 가치론적 차원(유용한 생존술)에서 재구성하려는 니체의 새로운 자아관 역시, <론>이나 <학>을 유발시키는 가치의식의 경계를 넘어서는 최후 일보의 순간에는 더 이상 <극복>할 주체나 대상으로서의 <자기>에 의식이 연루되지 않는 무념의 자기이어야 한다. 그런데 니체는 형이상학과 계보학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자기 생’을 위해> 양자의 장점만을 섭취하려는 가치론적 집착을 버리지 못한다. 그로 인해 ‘자아’라는 관념을 발생시키는 의식 경계 자체를 무근거화시킴으로써 허무/허무아님, 있음/없음, 같음/다름, 높고/낮음의 분별을 활용하고 떨쳐버리는 엄밀한 허무극복자로 해석되기 어려운 면을 지니고 있다.
(하이데거가 니체를 비판하는 핵심은 그가 탈존, 탈주관에 못미치고, ‘생’과 ‘힘에의 의지’ 고양에 대한 집착에만 매달려 있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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