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답게 사는길
한국인답게 사는 법
차례
1. 인: 그것은 사람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마음이다
사람을 가장 중히 여기는 마음
안팎이 하나로 이어지는 마음의 구조
대립을 조화하는 마음
사소한 일상사 속에서 행하는 '인'
정으로 이어지는 인간관계
상호 보완관계로서의 부부
손에 붙어 있는 다섯 개의 손가락
젓가락의 자상한 기능이 곧 '인'
상대방의 입장에 서보는 '인'의 정신
'인'의 사상 속에 노사가 함께
'인간적인 해결'의 숨은 뜻
자연과 함께 살아온 한국인
고봉문화 속에 살아 있는 한국인의 '인'
'남'의 거울에 비친 나를 배운다
사람을 알아보는 눈
리더십에서 발휘되는 '인'
누구나 다 온전한 '사람'으로 본다
겉과 속이 같은 인간관계
'성실'은 최대의 자산
자연과 인간의 조화
'우리'로 융합되는 한국인의 마음
(실례) 큰 사랑의 씨앗 /꽃동네 오웅진 신부
2. 의: 그것은 올바른 사회규범을 따르는 마음이다
* 법에 앞서는 사람다움의 도리
* 주체적으로 받아들이는 마음
* 옛것에서 새것을 찾는 마음
* 안중근 의사의 철저한 한국인다움
* 기'를 가장 높은 덕목으로 본 한국인
* 대립을 화합하는 삶의 도리
* 자신에겐 엄격하고 남에겐 너그러운 마음
* 성급하지 않은 너그러움
* 공익을 위한 자기희생
* 참다운 인간관계
* 남을 돕는 데도 '큰손'인 한국인
* 마에 가면 로마의 '의'를 따르라
* 고발정신과 공의
* 사회를 건전케 하는 객관적인 규범
* '의'가 없는 '용'은 위험하다
* 행동으로 나타나는 보편적인 '선'
* 생색내지 않고 실행하는 마음
* 복조리를 몰래 던져주는 마음씨
* 작은 실수라도 시인하는 자세
(실례) 오늘의 젊은 의인 /임명희씨의 경우
예: 그것은 사회의 질서를 지키는 룰이다
* 높을수록 지킬 예의의 폭이 넘다
* 살펴본 한국인의 선물문화
* 자신의 진솔한 마음의 표시가 곧 '예'
* 3년을 꼬박 기다린 작은 선물
* 분수를 넘어선 선물의 한계
* 사람의 심성을 병들게 하는 뇌물
* 한국인의 마음의 고향인 선비
* 교통질서 지키는 것이 곧 '예'
* 영조시대의 새생활운동
* 과소비추방에도 '예'의 정신이
* 자기 분수를 아는 지혜가 '예'
* 새로 읽어보는 "명심보감"
* 청렴한 생활의 실천
* 올바른 법의 집행도 '예'
* 솔선수범이 갖는 힘
* '감사합니다'의 생활화
* 상급자일수록 엄한 '예'
* 가까운 사이일수록 필요한 '예'
* 주변사람을 이해하려는 성의
* 자연보호 캠페인도 '예'
* '예'는 어려울 때의 처신에서 드러난다
(실례) 새시대 적응능력으로써의 예절 /김영태씨의 경우
지: 그것은 자기자신을 닦는 배움이다
* 지천명의 현대적 의미
* 바른 습관들이는 것이 '지'의 길
* 옛것에서 새것을 찾는 지혜
* 자기것을 보다 소중히 가꾸는 마음
* 여성의 '지'는 이런 것이다
* 참답게 안다는 것의 의미
* 실천에 옮기는 지식의 가치
* 정직이 최대의 교육적 자산
* 바른 지식을 가진 사람은 언제나 외롭지 않다
* 사람을 바르게 보는 눈
* 오늘 다시 본 '맹모삼천지교'
* 가장 절실한 마음공부
* 조급해 하지 않는 인내의 마음
* 다시보는 청렴한 선비문화의 유산
* 어떻게 사느냐가 더 큰 문제
(실례) 지혜의 거울/이재수씨의 경우
신: 그것은 사람을 믿는 마음이다
* 작고 큰 것이 없는 '신'의 마음
* 신용은 사회가 채점한 사람의 값
* 한국인 특유의 '신'의 세계
* 다소의 결함이 사람을 따르게 한다
* 신뢰가 생명인 한국인의 '계'
* 단체적 놀이방식과 가래질
* 협동정신을 말해 주는 '두레'
* 깊은 신뢰는 기적을 낳는다
* 사제지간을 묶는 신의
* 기업문화의 바탕에도 신뢰가
* 소비자와 생산자를 잇는 유대
* 신의가 만드는 범상한 능력
* 인격에서 우러나는 강한 신뢰
(실례) 믿음은 모든 것을 소통시킨다/강재업씨의 경우
충. 효: 그것은 낳고 길러준 부모와 사회를 위하는 마음이다
* 사회윤리 확립의 기초인 '효'
* '효'는 모든 도덕률의 시발점
* 상호 교류적인 보살핌의 세계
* 손의 앞면과 뒷면 같은 '충'과 '효'
* '효'보다 앞섰던 '충'의 예
* 참다운 '충'은 '의'에서 나온다
* 자신의 뿌리를 생각하는 마음
* '충효'로 가늠된 한국인의 인격
(실례) 나라사랑의 방법 /박현섭 목사의 경우, 한국적 생명력의 끈/고승녀씨의 경우
새질서 새생활의 길
* 새질서 새생활운동이란 무엇인가?
* 새질서 새생활운동은 오늘 필요한가?
* 새질서 새생활운동을 통해서 구체화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 이제 국민 모두가 함께 나서야 한다
머리말
여기 한 가지 흥미있는 옛 고사를 소개하고 싶다. 오랜 동안 한국인의 전통문화 뿌
리 속에 용해되어 온 유학의 창시자로 알려진 공자에 얽힌 이야기다.
공자는 자신이 '닦은 학문을 실정치에 펴기 위해 여러 나라를 순방했다. 제자들과
더불어 위나라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도시에 들어서니까 많은 사람들이 번잡을 이루고 있었다. 인구가 적지 않게 팽
창해 있었던 것이다.
"인구가 왜 많이 늘었군" 하고 공자가 함께 동행한 제자들을 돌아보며 말한다. 이
말을 들은 염유라는 제자가 공자에게 묻는다. "사람들이 이처럼 많이 늘어 모여들면
그 다음에 할 일은 무엇이어야 합니까." 이에 대해 공자가 대답한다. "의식을 넉넉하
게 마련해 주어야하느니라." 그러자 다시 염유가 공자에 묻는다. "의식을 넉넉하게 마
련해 주고 난 후에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공자가 단호히 대답한다. "그 다음에는
가르쳐야 하느니라."
공자는 평생 사람이 사는 도리를 가르쳐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학자였다. 그러나
그 공자도 인간사회에 있어 시급한 과제 중의 하나로 경제력의 향상을 중요시했다. 그
러나 그 경제력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면 반드시 사람답게 사는 길을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고 했다.
우리나라 속담에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이 있고 '광에서 인심난다'는 말도 있다.
경제력이 넉넉지 못한 상황에서는 예를 지키고 지식을 닦기가 수월치 않음을 말해 준
다.
우리의 현실을 살펴보자.
6. 25 동란 등의 수난을 겪으면서 우리는 어려운 경제적인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
러나 7, 80년대를 지나면서 우리 경제는 자족을 넘어서 낙후된 외국에 경제지원을 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잘살아보자는 국민들의 강한 의지가 '한강의 기적'을 실현시켰다. 의식의 충족이 아
니라 여유있는 풍족한 단계에 와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지적인 자질을 닦고 높은 문화민
족의 후예답게 사는 방법을 배우는 일인지 모른다.
이 책은 물질적인 욕구의 성취와 균형을 이루어야 할 우리 국민의 지적, 윤리적인
생활을 찾기 위한 오솔길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그래서 우리의 혈맥 속에 아직도 흐르고 있는 한국인의 착한 '심성'의 광맥을 찾아
보려고 우리 전통 문화생활의 골간을 이루어왔던 인. 의. 예. 지. 신. 층. 효의 7개
덕목을 되새겨본 것이다.
"미숙한 근대화는 전통문화를 죽이지만 성숙한 근대화는 전통문화를 살린다"는 문화
인류학자 클럭혼(Clyde Kluckhohn)의 말처럼 우리는 이제 성숙한 근대화를 해야 할 시
점에 있다. 전통문화를 찾고 그 뿌리를 다시 다듬어 오늘날 창의적으로 되살려야 할
것이다.
1991년 8월
편저자 씀
한국인답다는 것은 무엇인가
'답다'는 것은 한국인의 인간조건
우리말에 '...답다'라는 접미어가 있다. 보통 사람을 칭하는 명사에 붙어 그 사람의
입장과 처지에 부합하는 인격을 나타낼 때 쓰인다. '사람다운' '어른다운' '아이다운'
'남자다운' '여자다운' '학생다운' '스승다운' 등등, 모든 사람이 지닌 본질적 속성과
외형적 조건이 조화롭게 합일되어 나타나는 긍정적 인간성을 말할 때 '답다'고 한다.
그래서 '답다'라는 표현 속에는 '다움'을 나타내는 주체와 그 주체를 보는 객체의
시선이 함께 들어 있다. '답다'라는 말을 쓰려면 반드시 두 사람 이상의 상대적 인간
관계가 전제되며, 내가 남을 말하는 게 아니라 남이 나를 말하거나, 남들이 어떤 다른
남을 말할 때만 적용된다. '답다'란 말에는 개개인의 가치기준보다 사회 공동체가 묵
시적으로 공인하고 있는 정신적 가치기준이 개입된 시선이 들어 있다.
그래서 '답다'라는 평가에는 과학적 논리기준이 아닌 문화적 성격과 그 사회의 전통
적인 도덕 윤리의 가치기준이 반드시 포함된다고 하겠다. '답다'라는 그 말에는 한국
인의 보편적 문화의식이 들어 있다. 한국이라는 사회체제 속에서 사람을 총체적으로
표현하는 독특한 말인 '답다'는 곧 한국인으로서의 인간조건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장부다운 기상'이라고 할 때, '장부다움'이란 기, 즉 그 사람이 타고난
기질과 상, 겉으로 드러난 태도와 모습이 하나로 어우러져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그
리고 그 나타난 바를 표현하는 '...다운'이라는 말에는 사회적인 시선이 포함되어 있
다.
'...답다'는 '같다'라는 뜻과 비슷하다. 원래의 성질과 드러난 모양이 같을 때 우리
는 '...다운, ...답게, ...다움' 등의 말을 붙여 쓴다 이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운'
것을 인간의 바른 가치로 생각해 왔음을 말해 준다.
우리는 속과 겉이 같고 생각과 행동이 같은 것을 좋게 평가한다. '학생답지 않게 그
옷이 뭐냐?'라는 표현을 보더라도 우리가 생각하는 '다움'의 인간적 가치를 잘 알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을 말할 때, '다운'이란 말을 붙여주면 그를 인정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반대로 '답지 못하다' '답지 않다'라고 하면, 그를 비난받는 인물이나
부정적 인물로 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움'이란 그 인물의 특성을 나타내는 말이라는 점에서, '개성'이라고도 볼 수 있
다. '자네다운 생각이야'라는 말은, '자네'라는 인물의 개성을 긍정하는 표현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개성이란 이처럼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시선이 개입되
는 것이다. '다움'으로 나타나는 개성에는 '다움'의 주체를 바라보는 객체의 시선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가 보는 개성과 서양 사람들이 보는 개성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양에서의 개성은 근본 어원에서부터 다르게 출발한다. 서양의 개성, In
dividuality는 나누어진다는 말에서 생겼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개성을 분리의 개념으
로 보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분명히 다르게 나타나는 단독적 성질을 개성이라 하는
것이다.
이런 개성에 대한 근본적 개념의 차이는 서양과 우리의 인간에 대한 가치기준의 차
이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서양 사람들은 '무엇이 다른가'가 그 사람의 평가기준
이 되지만, 우리는 '무엇이 같은가'가 인간으로서의 가치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한 사람에게 있어 '다움'이란 개성이고, 그 개성이란 곧 그의 존재가치며 생명력이
듯, 마찬가지로 우리 민족에게 있어 '다움', 즉 '한국인다움'은 한국인의 민족성이며
동질성이고, 한국인의 생명력을 이어온 근성이 되는 것이다.
이 근성은 우리가 수천 년의 역사를 지닌 민족으로 오늘까지 살아남게 한 힘이다.
또 이 근성은 온갖 수난과 수없는 위기를 거쳐오면서도 수천 년의 세월 동안 한국인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생명력의 근거며, 한국인다운 마음의 비밀인 것이다.
우리가 한국인다운 마음을 잃었을 때 역사적으로 수난을 겪었고 사회적으로 혼란을
겪었다. 우리가 한국인다운 마음을 신바람으로 풀어냈을 때 우리의 국력도 강성해졌고
문화도 융성한 꽃을 피웠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언제 어느 때든 나라나 사회는 저절로 유지되고 발전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인다움
에서 멀어질 땐 반드시 위기의 시대를 맞게 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한국인다움을 지켜온 일곱 가지 의식의 코드
한국인답게 사는 길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한국인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 자신의 얼굴, 한국인의 얼굴을 알기 위해선 우리의 모습을 비
춰주는 거울을 보아야 할 것이다. 그 거울에 비쳐진 암호와 같은 의식의 코드를 읽을
때 우리의 참모습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은 바로 우리의 삶이 이루어지는 생활 속에 있다. 의식
주를 비롯해서 갖가지 생활양식과 습관, 풍습, 민속, 삶의 수단, 언어생활, 기호, 취
미, 종교 등등, 모든 생활방식이 우리의 거울이 된다.
이 거울에서 우리는 한국인의 마음을 읽는 코드를 찾아 풀어보아야 한다. 무의식적
이고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생활 속에 반복되는 평범한 생활방식에서 우리는 한국인의
뿌리깊은 의식의 근거인 독특한 마음의 내면을 읽을 수가 있다.
그 코드가 지시하는 한국인의 마음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첫째, 한국인은 무엇보다도 앞서 사람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민족으로 나타난
다. 우리의 언어습관에서 설화나 각종 대상을 바라보는 태도에서 한국인은 모든 기준
을 사람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한국인 사이에서 인간관계의 자력 같은 구실을 하는 것으로 정을 들 수 있다.
인정이란 이성이나, 합리성, 지적인 판단력 등과는 반대적인 뜻을 지니는 성질로써 오
랜 시간에 걸쳐 사람의 본능적 감정이 문화 도덕성과 밀착해서 좋은 감정을 나타내는
마음이다. 분명한 것이기보다 어렴풋한 것, 시비가 확실하지 않고 애매한 것이지만,
넓게 포용하여 감싸는 마음이다. 얼핏 보기에는 불합리한 것, 반이성적인 것으로 나타
나지만 시와 비를, 흑과 백을 차원높게 수용하여 화합하는 마음이 '정'이다.
사람을 중시하고, 정으로 얽힌 사회를 이룬 우리나라 사람들의 이 특별한 의식의 근
본 성격은 갖가지 양상의 갖가지 특성을 지닌 문화를 이루었다. 여유와 다양성, 신축
성과 융통성, 포괄성과 화합력이 뛰어난 민족 공동체로서의 정신적 결속을 지니게 하
였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자로 따져보면 약점일 수도 있는 이런 성질들은, 생명력의
본성과 우주 자연의 근원적 성질과 어울려 한국인의 끈질긴 생명력의 근성으로 한국인
의 마음속에 뿌리내리고 있다.
사람을 중시하는 인본사상, 인존사상과 조화와 화합의 정신, 남을 중시하고 상대방
의 입장과 처지를 먼저 생각하는 마음 등이 한국인 전체에 생명의 유전인자처럼 이어
져왔다. 이 독특한 성질은, 유교적 법도로 이루어진 조선사회를 거치면서 한충 뚜렷한
정신적 특질로 굳어지고 있다. 이는 조선조가 유교사상을 통치이념으로 하는 사회였기
때문에 생긴 특성이라고만 할 수 없는 본성이다. 한국인이 아득한 옛날부터 지녀온 마
음의 인자와 유학의 근본이념인 인의 사상이 매우 유사한 성질을 띠었기 때문에 인간
주의, 인본주의의 '인'의 사상은 자연스럽고도 필연적으로 한국인의 행동이념, 행동규
범의 원리로 뿌리내리게 된 것이다.
한국인의 마음을 비춰보는 거울에는 이처럼 사람과 인정, 조화의 정신을 반증하는
수많은 기호들이 나타난다.
이와 같은 한국인의 마음이 지시하는 행동방식과 사고방식은 일곱 가지 의식의 코드
에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인. 의. 예. 지. 신. 충. 효 등 한국인다움
을 나타내는 이 일곱 가지 코드는 한국인의 동질성으로 대표되는 정신의 본질이며 마
음의 본성을 나타낸다. 이 성질은 한국인이 지켜야 하는 것이지 지녀야 하는 후천적
성질이 아니다. 본래적으로 타고난 정신적 유전인자와 같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선
시대에 정치적 통치이념으로써의 억압 논리의 성격을 띠었던 유교사상의 '인'이라기보
다 한국인의 자연스런 본래의 마음을 표현하는 '인'인 것이다. 자유. 민주사상적 측면
에서도 인. 의. 예. 지. 신. 충. 효의 사상과 행동논리는 바로 한국인답게 사는 정도
가 된다는 것이다.
이미 잘 알다시피 억압적 통치논리의 기준으로써, 통제와 억압의 근거로 이용되었을
때 '인'의 사상, 충효의 정신은 한국인의 본성에 반하는 갖가지 폐해와 폐습으로 나타
나기도 했던 것이다. 형식논리에 급급한 이념은 한국인이 본래적으로 지향하는 '다움'
의 의식에 반하는 것으로 사회악의 성격을 띠고 한국인의 인간성을 역전시키는 부정적
가치로 전락했던 것이다.
한국인다움을 나타내는 인. 의. 예. 지. 신. 충. 효의 온갖 행동규범과 사고방식이
한국의 근대화 산업화 과정에서 얼마나 큰 역작용을 했으며, 부정되고 배척되었는가를
우리는 잘 보아왔고 체험해 왔다.
수정이 아니라 부정과 배척의 관점에서 보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는 가치
기준이나 도덕관, 행동규범의 붕괴현상을 가져왔고 사회적 혼란이 계속되었다. 이런
현상은 물질적 빈곤에서 벗어나더라도 참다운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상적 욕구불
만을 초래했다. 모든 가치기준이 무너졌기 때문에 행복의 감도를 갖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욕구불만은 가중되고, 파괴와 폭력과 퇴폐적 행동으로 나타나는 자아상실에 이
르게 된다. 자아상실은 인간상실과 비인간화로 나아가며 반문화 상황을 야기시킨다.
이는 사람다움이 포기된 야만상태로 역행한다는 말과 같다.
'다움'을 잃은 상태가 곧 자아상실이며, 반문화, 반생명적 상황에 놓인 것을 뜻한
다. 선생다음과 학생다움, 아버지다움과 아들다움, 어른다움과 아이다움 등등, 사람들
이 각각 자신의 '다움'을 잃는다는 것은 그 존재가치를 잃는 것이 된다.
한국인다움은 이와 같이 사람 개개인의 자기다움과 사람다움이 조화롭게 나타나는
상태를 말한다. 이런 상태를 계속적으로 지켜주는 행동 규범이 되었던 마음의 근성이
곧 인. 의. 예. 지. 신. 충. 효다. 한국인의 본성과 외형상의 행동양태를 결집한 삶의
방법인 그것은 오랜 동
안 한국인의 생명력을 유지해 온 존재가치였으며 인간조건이었다. 현대의 문명이 엄청
난 가치변화, 생활의 변화를 가져온 상황에서 자칫 낡은 구식의 관습으로 시대착오적
인 생활규범이나 가치관을 내세운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말했듯이 조선사회에서 그룻 적용되었던 형식논리를 답습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 근본의 참뜻을 바탕으로 인 의. 예. 지. 신. 충. 효의 방법을 찾
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옛날과 오늘을 비교하여 그 바른 뜻을 알고, 그 슬기
를 오늘의 삶 속에 되살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다음에 인. 의. 예. 지. 신. 충. 효를 차례로 이야기하며, 그 근본 뜻이 우
리의 삶 속에서 무엇을 말하는가, 어떤 행동방식을 말하는가 살펴보기로 한다.
"인" 그것은 사람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마음이다
인은 사람 인자와 두 이자가 모여서 이루어진 회의문자다. 사람이 하나가 아니라 둘
이면 그 사이의 관계가 생긴다. 그래서 '인'은, 사람이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인간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하겠다. 이와 같은 뜻의 '
인'은 유교의 중심 이념으로서 인간의 도를 가르치는 핵심 사상이다.
또 '인'자를 다르게 풀이하면 사람 인자 옆의 두 이자가 하늘과 땅을 가리키는 우주
대자연이라고 보아, 사람과 대자연과의 관계를 나타낸다고 본다. 우주의 중심을 사람
으로 보고, 사람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존재라고 보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인'은, 사람과 대상(또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말하며, 사람이란 혼자
서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다른 사람 또는 자연과의 조화로운 관계를 이루며 살아
가는 존재임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사전에 의하면 '인'의 글자 뜻은 어질다, 사랑하다, 동정하다 등으로 되어 있다. 이
뜻을 보면, '인'이란 사람이 혼자서 갖는 느낌이나 생각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사람
이 다른 대상에 대해 갖는 감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인'에는 천지 만물, 만사를 상통하게 한다는 뜻도 있다. 불인이란 동양의 의학
용어를 보면 '인'의 뜻이 좀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불인'이란 손발이 마비되는 증상,
즉 아프거나 가려워도 그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증상을 말한다. 말하자면 불통이란 뜻
이다. 그 느낌이나 생각이 통하지 않는 단절, 분리되려는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 '불
인'이다. 그 반대가 '인'이라고 보면, '인'은 하나로 통하는 것, 화합하고 조화를 이
루는 것을 말한다. 몸을 예로 들어보면, 온몸이 하나의 감각체계 속에서 아프고 가려
운 데를 잘 알고 하나의 온전한 마음과 정신을 유지할 수 있도록 조정하는 힘이 바로
'인'인 것이다.
그래서 '불인'과 반대되는 뜻으로 쓰이는 말 중에 도인, 행인이란 말이 있다. 생명
의 힘을 지니고 새 생명을 돋아나게 하는 복숭아씨, 살구씨를 일컫는다. 도인과 행인
이란 말에서 우리는 '인'이 생명력의 근원에서부터 생명의 형통을 이루는 생명사상에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의 관계는 생명체와 같이 한 몸으로 통하는 것이어
야 한다는 것이 바로 '인'의 원리라 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그리고 곳곳에서 자행되는 자연환경 파괴에서 우리는 '불인'을 절실
히 느끼고 있다. 부모 자식간의 '불인', 사제간, 직장 동료와 상사간의 '불인'은 우리
사회가 병들고 썩어가도 느끼지 못하게 되는 심각한 위기의 시대를 가져오게 한다. 자
연이 오염되고 파괴되는 것은 곧 우리의 생명력의 위험과 파멸에 직결되는 것이다. 환
경보호나 사람관계의 조화, 따뜻한 정을 느끼는 것 모두가 '인'의 사상이 기본이 되는
것이다. '인'이란 어렵고 낡은 공맹사상이라고 생각하기 전에 우리의 일상 속에서 모
든 관계를 통해 느끼고 실현되는 마음의 깊은 오솔길 같은 것이다.
유교의 핵심 사상인 '인'이 한국인에게 특히 많은 영향을 끼치며 조선조 500년의 통
치이념으로 무리없이 받아들여졌던 것도 한국인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본성과 잘 맞
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인'의 사상은 조선조에 와서 유교의 영향을 받아 새로이
한국인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윤리체계라기보다, 단군의 개국신화에서부터 한국인의 근
본 성질로 나타난 정신적 특성이었다는 것이다.
유학에서는 '인'으로 구현된 최고의 인격자를 군자라고 한다. 중국인들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우리나라를 가리켜 '군자국'이라고 불렀고, '삼국유사'에 실린 신라의 향가
에도 군자란 말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한국에서의 '인'의 사상은 조선조 이후에 생긴
새로운 가치체계가 아니라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본성에 의해 일찍부터 생활철학으로
인식되어 왔고, 한국인 전체를 통합해 온 사상의 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산해경"에도 우리나라에 대해서 "동방의 인국으로서 군자들이 살고 있는데 아주 예
절이 바르고 서로 사양하기를 좋아한다"라고 적혀있다.
동방삭의 "신이경"에도 우리나라 사람들을 "그들은 서로 칭찬하기를 좋아하고 서로
헐뜯지 않으며, 사람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는 죽음을 무릅쓰고 서슴지 않고 구해
준다"라고 적고 있다.
우리가 흔히 들어온 '동방예의지국'이란 말이 이를 근거로 하여 널리 알려졌다. 이
외에도 우리 민족은 오랜 옛날부터 매우 우수한 인간적 근성을 타고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만한 기록이 많다.
신라 향가에 나오는 많은 다양한 한국인상을 보아도, 어진 민족, 정신적 우월성을
지닌 민족임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처럼 '인'의 사상은 수천 년 동안 한국인의 마음
속에 이어내려온 윤리 도덕의 근본 체계였다. 그래서 지금 우리의 생활과는 거리가 먼
낡은 시대의 윤리 도덕일 뿐이라는 생각은 한국인의 마음을 모르는 데서 오는 생각이
라 할 수 있다. 한국인들은 근본적으로 남을 헐뜯기 좋아하고 공중도덕을 지키지 못하
는 민족이라는 그릇된 인식이 한때 공공연히 이야기되곤 했다. 또 실제로 그런 면이
많이 노출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일제 식민통치시대와
동족상잔의 불행을 겪어오는 동안 전통적 가치체계, 도덕체계가 붕괴되면서 한국인다
움을 잃어버린 데서 오는 일시적인 반문화상태에서 야기된 것일 뿐 한국인의 본성이
그런 것이 아니다.
아무리 사회가 혼란하고 범죄가 만연한다 해도, 아직 우리나라 사람의 본성을 이어
오는 다수의 한국인들이 보이지 않는 정신의 뿌리를 깊이 간직하고 우리나라의 숨은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오늘 우리가 다시 생각하고자 하는 인. 의. 예. 지. 신의 행동규범은 구시대의 낡은
생활규범을 그대로 따라 불합리성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한국인다움을 많은
부분에서 회복해야 하는 것이다. 잘못 인식해 온 인. 의. 예. 지. 신을 바르고 새롭게
알고 행함으로써 아주 평범하고 작은 우리 주변의 여러 가지 일들, 가족관계와 직장
동료와 친구 사이의 관계에서 한국인의 자연스런 윤리감각을 되찾고 마음이 지향하는
자연스런 인간적 행동규범을 따라 행동할 때, 인. 의. 애. 지. 신의 인간적 도리와 질
서를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그 행동
규범의 대원칙은 조화로움에 있다.
인간관계에서는 서로 존중하고 조화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한
국인은 다른' 어떤 나라 사람보다 융화와 화합의 능력이 뛰어나다. 그런데도 오늘의
현실을 보면 너무나 대립과 갈등이 심하고, 찬사보다 비난의 목소리가 높다. 과연 왜
그럴까, 요즘 나타나고 있는 그런 형상들은 한국인이 갖고 있는 본성 자체를 스스로
거스르는 행동이다. 그런 어긋난 행동은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매우 불
편하고 고통스럽기 그지없다.
사람의 가치를 중히 여기고 남을 먼저 생각하는 한국인의 본성을 다시 인식하는 것
이야말로 오늘의 우리 마음을 바로 세우는 기초가 될 것이다.
사람을 가장 중히 여기는 마음
한국인은 사람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예는 우리들이 일상생활
에서 쓰는 말들 속에도 수없이 많이 나타난다. 서양에서 인도주의니 휴머니즘 (Humani
sm)이니 하여 인권을 중시한다고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모든 것에 우선하여 사
람의 가치를 최고로 인정하는 민족은 드물 것이다.
우리나라는 건국신화에서부터 인간 숭앙의 정신이 근본이 되고 있다. 하느님의 아들
인 환웅도 사람이 부러워 땅으로 내려오고, 땅 위의 짐승인 곰도 사람이 되려고 쑥과
마늘과 어둠의 고통을 감내하여 사람이 된다. 이들 천상적인 존재와 지상적인 존재가
결합하여 태어난 아들이 바로 우리나라의 국조 단군이라는 것도 우리나라 사람의 마음
을 읽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러한 것들을 그저 하나의 가상적인 이야기라고 치부하
기 전에 그런 신화를 만들어낸 한국인의 마음을 암호처럼 해독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
다. 사람을 중요한 존재로 생각하는 한국인의 마음이 단군신화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
는 것에는 매우 깊은 뜻이 숨어 있다.
신화가 아닌 지금 우리의 현실 속에서도 한국인이 사람을 가장 중요한 존재로 생각
하고, 최고의 가치기준으로 삼고 있음을 반증하는 말들이 너무나 많이 있다. 위험에
처했을 때 한국인이 본능적으로 소리치는 '사람 살려'는 한국인의 의식을 단적으로 보
여주는 좋은 예다.
일곱 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도 위험에 빠졌을 때 '사람 살려'라고 소리치는 것이다.
어떤 한국인이 영국 여행중에 인적이 드문 산길을 가다가 도둑을 만났다. 도둑이 칼
을 들이대고 물건을 빼앗으려 하자 나그네는 '사람 살려'라고 비명을 질렀다. 이때 영
국인 신사가 옆을 지나다가 그 장면을 보고 고민에 빠졌다. '둘 다 사람인데, 저 한국
인 나그네는 도둑이 목에 칼을 대고 있는데도 사람 살리라고 하는 걸 보니 대단히 훌
륭한 동양의 성자와 같은 사람이다. 그러나 흉악한 도둑을 살려줄 수는 없으니 어떻게
하나'하고 고민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영국인은 '사람 살려'라고 소리친 사람이 '나'를 살려달라고 하지 않았으니, 거
기서 '나(소리친 사람)'를 빼면 사람은 도둑뿐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건 다만
재미로 꾸며낸 이야기이겠지만, 서양 사람들에게 있어 나, 즉 개인의 자아의식과 한국
인의 사람에 대한 인간주의의식의 차이를 나타내는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한국인의 마
음을 읽을 수 있다.
그 경황없고 위급한 순간에 곤경에 처한 사랑이 자신의 목숨을 구해 달라고 하지 않
고 '사람'을 살려달라고 하는 것이다. 한국인은 본능적으로 사람에 대한 깊은 믿음과
존경심을 가지고 있고,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는 의식을 갖고 있다는 반증이다. 사람은
꼭 살려주어야만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사람' 살리라는 말을 들은 사람은 그냥 못 본
체하고 지나가지 않는다는 믿음이, 생명이 위급한 순간에 맨 먼저 '사람'이라는 말을
소리치게 하는 것이다.
서양 사람들의 경우 예를 들어, 영국인이나 프랑스인 같으면, '헬프 미(Help me)''
에데 므와 (Aidezd Moi)'라고 소리친다. '나 좀 도와줘'하는 것이다. 그들의 의식 저
변에는 '나'라는 존재가 무엇보다 앞선 중요한 존재인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도 사람인 이상, 자기자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인지
상정일 것이다. 또한 사람은 누구나 자기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정한 이치다.
그러나 서양 사람이 생각하는 '나'와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나'의 의식은 근
본부터 큰 차이가 있다. 서양에서의 '나'는 철저하게 독립된 개인이다. 그러나 우리나
라 사람들은 '나'와 '너'를 분리된 개인적 존재로 생각하지 않는다. '나'와 '너'가 합
쳐진 '우리'를 '나'로 생각하는 것이다. 모든 것에서 '나'가 먼저가 아니고, 나와 관
계를 맺고 있는 상대를 먼저 생각한다. 그 관계 속에 있는 존재가 사람이다. '나'는
관계 속에서 비로소 사람이 되고, 참다운 인간존재가 된다. 그래서 '나'보다 먼저 '인
간'이 중시되는 것이다.
(서양에서의 '나'는 철저하게 독립된 개인을 의미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나'와 '
너'가 합쳐진 '우리'를 '나'로 생각한다. 나는 관계 속에서 사람이 되고 참다운 인간
존재가 된
다. 그래서 '나'보다 먼저 '인간'이 중시되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누가 물에 빠지면 '나'를 돌보지 않고 그 사람을 구하기 위해 물에 뛰어
든다. 그런 마음과 행동은 바로 한국인의 본성에서 나오는 '...다움'이다.
한국인의 '나'를 먼저 돌보지 않고 나와 관계된 사람을 먼저 돌보는 마음은, 인의
사상, 충효의 사상, 의의 사상의 근본이 되었다.
자기의 목숨을 버려 나라와 어버이를 구한 일화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셀 수 없이 많
다. 역사적인 위대한 인물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라도 자신을 버려 남을 구한 일을
특별한 일이 아닌 당연한 일로 여긴다.
만약에 '사람 살려' 하는 소리를 듣고도 그냥 못 본 체 지나간다면, 그는 그 물에
빠진 한 개인을 못 본 체한 게 아니라 사람을 못 본 체한 것이 되므로 그의 태도는 결
국에는 반도덕적, 반인간적인 것이 된다. 그건 불인이며 불의다. 손가락이 아픈데도
그걸 모르고 그냥 두어 자기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것과 같다. 앙심을 버리는 것과 같
다.
그러나 '나 좀 도와줘'라고 할 때는 그 개인(나)을 말하는 것이므로 '댁의 사정이
지' 하면
그만인 것이다. '사람'이 물에 빠진 것과 '나', 즉 어떤 독립된 개체가 물에 빠진 것
은 그 의식에 있어 천지 차이가 있다. '나'와 '사람'은 이처럼 우리 민족의 의식 속에
서 전혀 다른 의미로 쓰여졌으며 그 중요성에도 큰 차이가 있다. 사실 사람 개개인에
게 있어 가장 중요한 존재는 자기 자신이지만,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나'보다 '사람'
이 더 중요한 존재라는 것이다. 이 평범한 한마디 말이 한국인의 마음을 읽는 매우 중
요한 암호가 된다.
왜 위급한 상황에 처한 자신(나)을 살려달라고 하지 않고 '사람'을 살려달라고 하는
것일까, 한국인이 생각하는 사람은 바로 '나'라는 뜻일까, 한국인은 사람을 무엇으로
보는 것일까. '사람 살려'라는 이 짧은 비명은 이처럼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한국
인의 마음을 담고 있다.
또 어떤 사람이 이웃에게 쌀을 꾸러 갔는데, 창고에 쌀을 많이 쌓아두고도 없다고
거절할 때 그 사람에게는 백 마디의 비난보다도, '사람이 어쩌면 그럴 수가 있느냐'는
말이 가장 가슴을 찌르는 말이 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냉정한 사람도 '사람'임을 부정
당하는 말을 들을 때는 체면상 거절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당신이 그럴 수 있어'란
말보다 '사람이 그럴 수 있어'란 말이 훨씬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싸울 때도 어떤 욕보다 기분을 상하게 하는 말이 '너도 사람이냐' '무슨 사람이 이
래'와 같이 사람임을 부정하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의 욕 중에는 사람 아닌 존재에 비
유되는 것이 많다. '개 같은, 여우 같은, 돼지 같은'처럼 사람 아닌 다른 존재에 비유
하면 욕이 된다.
사람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의식을 지닌 우리 사회에서 사람임을 부정당하
는 말처럼 큰 모욕은 없다.
사람을 가장 중시하고 사람의 존엄성을 근간으로 해온 우리 선조들의 마음이 우리나
라의 수천 년 역사를 지탱해 온 힘이었다. 그런 마음은 유교의 '인'의 사상을 받아들
이면서 더욱 분명하고 강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을 존중하는 이런 마음은 후기 산업시대의 우리 사회를 떠받치는 새로
운 정신력의 원천이 될 것이다.
안팎이 하나로 이어지는 마음의 구조
우리나라 사람은 일단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으면 거'와 '나'의 존재가 아닌 하나
의 통합된 존재라는 의식을 갖게 된다. 개인과 개인의 대립적인 관계가 아니라 서로
얽혀 있는 생활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인식으로 인간관계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전혀 모르는 남이라도 서로 관계가 이루어지면 곧바로 형님 아우가 되고 언니 동생이
된다. 그러나 서양 사람들은 아무리 친해도 형이나 언니란 말을 쓰지 않는다.
한 피를 나눈 가족과 같은 인간관계로 자연스럽게 오랜 전통적 생활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사실상 남남끼리의 관계가 쉽게 호형호제의 가족관계로 전환될 수 있
는 의식은 바로 한국문화의 본질적 측면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생존 본능적인 친화력
에서 나온 것이어서 그 관계는 쉽게 분리될 수 없는 진한 결속력이 있다. 그런 힘이
한국을 지켜온 힘이 되었고, 그런 사람이 한국인의 인성을 키운 인자가 되었다. 개인
의 이익, 눈에 보이는 이득을 위해서 쉽사리 관계를 끊는 사람을 한국인은 사람으로
인정해 주지 않는 것이다.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 한국인의 본래적인 마음인
것이다. 한마디로 '조화'의 인간관계라고 표현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전통적 인간관계에는 장유유서라는 규범이 엄존하고 있다. 어른을 우대
하고 노인을 대접하는 사회규범은 아름다운 한국인의 정신을 이룬 기틀이다. 아랫사람
은 윗사람 을 본받고, 윗사람은 아랫사람의 미숙한 일상사를 잘 가르쳐서 생활의 원활
한 질서를 이루었던 마음의 기조가 '인'의 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마음의 기조는 현대적인 사회생활, 조직사회에서의 인간관계로 전환
되면서도 직장의 동료들은 직책으로 구분지어지는 관계라기보다는 한 지붕 아래 있으
면서 정을 주고받는 식구라는 인식으로 얽히는 관계가 되게 했다. 한국인의 인간관계
는 밖으로 드러나는 표면적인 관계와 내면에 흐르고 있는 전통적 가족관계와 같은 대
인의식이 밀접하게 융화될 때 더욱 진한 친밀감이 생기고, 직업상의 업무에서도 더욱
능률이 오른다.
예를 들어, 기업이라는 조직체에 있어서 계장이나 과장은 직책상으로 윗자리에 있
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계나 과에 속해 있는 하위직 사람들의 부형같은 존재다.
다시 말해 직장의 상급자일 뿐 아니라 한 가족으로서의 위아래 관계가 서로 얽혀 인생
의 선배, 선험자, 형의 역할로서 친밀한 관계가 어울려 남이 아닌 한울의 한 가족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직책상의 표면적인 '자리'보다 그 마음속에서 이어지는 가족적인
인간관계의 의식이 생길 때, 서로의 친화력은 더 강해지고 그 영향력이 효과를 나타낸
다.
이에 비해 미국 같은 서양 사람들의 인간관계는 조직체내의 '포지션'이 갖는 단순한
인간관계가 전부다. 상위 직위자와 하위 직위자, 그리고 같은 수평선에 있는 동료들이
라도 직책이라는 선으로만 이어져 있는 관계다. 업무내용을 떠나면 서로 무관한 개체
적 존재로 돌아가게 된다.
한국인의 인간관계는 선만의 것이 아니라 호흡을 함께하는 공간영역에 있다. 선으로
이어져 있는 연관이 아니라 우주적 입체적 공간 속에서의 전인적 관계다.
이런 한국적인 인간관계는 한국인의 생활공간 구조와도 흡사한 양상을 보인다. 한옥
의 구조는 한국인의 마음의 구조와 같다. 방과 방은 독립된 공간이면서도 동시에 하나
로 통합될 수 있는 가변적 화합의 공간이 될 수 있다. 양옥의 방처럼 완전히 분리, 독
립된 별개의 공간과는 다른 방 구조다. 창호지문은 공간을 완전히 차단하지 않고 반쯤
열려 있는 공간을 연출한다. 좀 떨어져 있는 방이라도 한 지붕 아래서 언제든 한 공간
으로 터놓을 수 있는 구조로 연결되어 있다. 겉으로는 떨어져 있으나 속으로는 통하고
있는 그런 구조다. 다시 말해 경계가 애매한 공간이다.
이와 달리 서구의 건물구조는 완전히 차단된 공간이 별개의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
게 되어 있다. 밀폐된 벽 속의 공간과 공간은 움직이는 벽과 같은 문으로만 왕래가 가
능하다. 서양 사람의 개인주의는 이와 같은 밀폐된 주거공간으로도 잘 나타난다.
한국인의, 경계가 없는 주거공간의 구조는 한국인의 열린 마음이 갖고 있는 포용력
과 조화의식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위계질서가 엄하게 있으면서도 안방과 건넌방의 사
람들이 언제나 큰기침 하나로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는, 따스한 체온이 흐르는 공간 속
의 인간관계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전통적인 가옥구조는 한국인의 인간관계를 상징하며, 미국 등 서구식
의 독립된 개체 상호간의 대립적인 인간관계와는 대조되고 있다.
한국인들은 집의 구조를 통해서도, 어울려 사는 삶이야말로 가장 사람답게 사는 길
이라고 생각해 온 민족이었음을 말해 준다.
대립을 조화하는 마음
한국의 역사 인물 중에는 아량과 인내로 반목을 화합으로 이끈 지도적 인물이 많다.
세종대왕 때의 황희 정승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조선조는 창건과 더불어 배불숭
유의 정책을 국책으로 삼았다. 그러나 1천여 년에 걸친 불교 숭앙사상은 쉽게 사그러
지지 않아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는 숨어서 지속되었다.
세종대왕이 이와 같은 사실을 인지하고 태조 때부터 은근히 완화하는 정책을 폈다.
사실 궁중에서는 배불이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던 때였다.
그래서 유생들이 세종대왕의 이와 같은 배불 완화정책에 반기를 들었다. 유생들의
비판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고 급기야는 성균관 유생들이 오늘의 동맹휴학격인 권당
을 벌이고 시위를 했다. 이에 동조하여 집현전 학자들도 세종대왕에게 "숭불을 억제하
옵소서" 하고 간언을 드리고 권당을 벌였다.
어진 임금으로 알려진 세종대왕은 가장 아끼던 집현전 학자들의 집단시위에 가슴이
아팠다. 그래서 고민 끝에 황회 정숭을 불러 이 문제의 해결을 부탁했다.
황희 정승은 임금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집현전 학자들의 설득에 나섰는데 젊은 기
개의 집현전 학자들인지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개중에는 아예 황희 정승을 면전에서
꼬집는 일도 서슴지 않은 학자도 있었다.
"아니 정승으로 계시면서 상감을 바로 모시지 못하고 그 꼴이 무엇이오" 하고 노골
적인 면박을 주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황희 정승은 내심 기뻐했다. 젊은이들의 이와 같은 굽힘 없는 기개가 나라의
앞날에 크게 유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황희 정승은 젊은 학자들을 탓하고 벌을 주기보다는 인간적인 넓은 마음으로
설득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사람의 따뜻한 마음을 깨우쳐 느끼도록 하고, 한국인
의 뿌리깊은 믿음에 대해 폭넓은 아량을 가지도록 했다. 그리하여 드디어는 설득하는
데에 성공했다. 세종대왕도 치자로서의 왕도와 체면을 세우게 했다.
황희 정승은 우리나라 역사상 누구도 흉내내기 어려운 높은 학덕과 도량, 그리고 넓
은 인격의 소유자였다. 당쟁과 사화가 계속되던 어지러운 정치풍토 속에서 황희는 '
인'을 바탕으로 한 높은 덕으로 반목하고 있는 상대방을 감복시켰다. 아무리 첨예한
대립도 황희가 나서면 화해를 이끌어내는 중재가 이루어졌다.
뒷날 당쟁에 시달린 임금들은 세종 때의 황희를 그리워했다. "방촌만 곁에 있으면
이런 일들이 모두 원만히 풀릴 것을...." 하면서 그의 인덕을 아쉬워했다.
황희의 넓은 도량과 인격은 시대를 초월해서 완성된 한국인의 인물형으로 대표되고
있다.
'흑백논리'가 사회정의의 기준을 가르는 오늘의 사회에서 우리 조상들의 폭넓은 도
량과 '인'의 정신이 발휘된 중용적인 인간관계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그런 포용력
이 진정한 한국인 다움이기 때문이다.
사소한 일상사 속에서 행하는 '인'
공자는 '인'을 행하는 마음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이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인'의 정신에 위배돼서는
안 되며, 불시에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인'을 지키고, 발에 무엇이 걸려 넘어지게 될
입장에 처하게 되더라도 반드시 '인'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인의 마음'이란 어려울 때일수록 더욱 잊어서는 안 될 덕목이라는 걸 강조한 말이
다. '인'은 자신이 부유하거나 마음이 편할 때만 남을 생각하는 마음이 아니라, 자신
이 어려울 때라도 남을 위해 자신을 버리고 상대의 처지를 이해하는 마음이다. 남과
경쟁에 처해 있을 때라도 경쟁자에게 어진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어떤
순서를 위해 줄서기를 해야 할 때, 버스를 타거나 극장표를 사거나 가게에서 물건을
사고 지불을 할 때, 자기의 순서를 기다릴 때나 택시를 잡을 때, 공중전화를 걸 때 질
서를 지키는 것도 '인'이다. 우선 앞서고 본다는 생각을 하기 전에 급한 사람에게 양
보를 하는 마음도 '인'의 마음 가짐이요, 연장자에게 선뜻 자리를 양보하는 마음가짐
도 '인'이다.
이처럼 '인'의 마음가짐은 일상생활의 작은 대인관계에서부터 비롯한다. '인'이란
다름아닌 사람과의 접촉에서 드러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여행을 할 때 옆자리의 사람에게 다정한 태도를 보이는 것도 '인'의 마음이다.
요즈음 한국인들은 너무나 생활에 쫓겨서 그런지 이웃 사람에 대해 갈수록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는 비한국인적인 사람으로 변해 간다.
함께 옆자리에서 장거리여행을 하면서도 말 한마디 나눔이 없이 눈을 감고 있거나
무표정한 채 앉아 있다. 어떤 경우에는 오히려 경계하는 눈치까지 보이기도 한다. 그
러다가 차 안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거나 하면 남은 상관없다는 듯 큰 소리로 떠들어댄
다. 남이 시끄러워한다거나 방해가 될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게 보통이다.
담배를 주거니 받거니, 심지어 열차 안에서 소주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떠든다.
옆에 있는 사람은 전혀 안중에도 없다. 같은 자리에 우연히 동석했던 사람들에게 불쾌
감을 주면서도 전혀 미안함을 느끼지 못한다.
'인'은 먼 곳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 이와 같은 사소한 곳에 있다. 다시 말해서 한
국 전통문화 속에 자리를 함께하고 있는 '인'은 어떤 경우나, 즉 긴 시간이거나 짧은
시간이거나를 불문하고 사람과 접촉했을 때에 표현하는 마음이다. 따스한 마음의 주고
받음이다.
다방에서 사람을 만나 인사를 나눌 때, 혹은 식당에서 합석을 하고 식사를 같이해야
할 때, 몇 가지 음식을 장만해서 친구나 친지를 초대할 때, 그리고 부부동반으로 초청
에 응해서 남의 집을 방문할 때 등이 모두 사람과의 접촉을 의미한다. 이럴 때에 '인'
의 정신이 있어야 한다.
함께 담소를 나누면서 자신의 얘기를 솔직하게 하고 남의 얘기를 경청하는 태도가 '
인'이다. 교제를 한다거나 교류한다는 것이 모두 '인'이다. 이런 접촉이 쌓여가면서
서로를 알게 되고 서로를 배우게 된다.
그런 교류를 통해서 상대방이 곤경에 처해 있을 때 그것을 알게 되고 자신의 어려움
을 전하여 상호 도움을 주고받는 것이 '인'이다.
상부상조의 터전이 이런 일상적인 접촉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사람을 사귀고 정을 깊게 하며 좋은 점을 주고받는 것이 '인'이 갖고 있는 아름다움
이다. 접촉하는 사람의 단점보다는 장점을 찾고 그 장점을 배우려는 마음이 바로 '인'
의 시작인 것이다.
정으로 이어지는 인간관계
한국인은 정이 많은 민족이라고 한다. 정이란 비합리적인 감정에서 오는 것이다. 그
러나
이 정 속에는 인간적인 훈훈한 맛이 있다. 정으로 이어지는 인간관계는 법이나 계약에
의해 맺어지는 이기적인 인간관계에서 느낄 수 없는 마음으로부터의 끈끈한 유대감이
있고 훈훈한 체온이 있다.
개인주의가 첨예화한 서구사회에서는 인간관계가 법에 의해 형성된다. 가장 가까운
부부관계부터 인간적인 '정'의 관계라기보다는 법적인 관계인 것이다.
아내와 남편은 법적으로 부부가 되는 그날부터 계약 속에서 살고 있다고 느낀다. 부
부가 그렇게 밖에 느낄 수 없는 까닭은 그 부부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가 법적 계약 속
에 있기 때문이다.
비단 부부 사이뿐만이 아니다. 자녀와 부모 사이도 마찬가지다. 자녀도 성년에 이르
면 법적으로 독립적인 개체가 된다는 사실을 배운다. 자녀가 성년이 되어 법적으로 독
립한다는 말은 부모 자식간에 문제가 생겼을 때에 법이 개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
모자식간에 이해충돌이 일어났을 때 법이 해결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의 변호사가
있는가 하면 자녀의 이해를 대신 해 주는 변호사도 있다.
정이 있어야 하는 자리에 '법'이 있는 것이 서구사회, 특히 미국사회라고 볼 수 있
다.
부부지간에는 '정' 대신 눈에 보이지 않는 이해관계가 눈을 번득인다. 직장에서 남
편의 귀가가 좀 늦어지거나, 아내가 과도한 쇼핑을 해서 남편의 심정을 건드릴 것 같
으면 으레 서로가 사랑한다는 말을 주고받아야 마음을 놓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부부지간에 사랑한다는 말을 일상적으로 자주 한다. 얼핏 보기에
는 부부의 정이 대단히 깊어서 그런 것같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미국인들은 오히려 상대방에게 정이 푹 들어 버릴까봐 겁을 낸다. 다시 말해 자신의
이성이 마비될 정도까지 상대방에게 빠져들지 않을까 우려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필요한 경우에 자기방어를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심적인
갈등은 자신만 그런 것이 아니다. 상대방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부부는 약점을 잡히지
않으면서 상대방의 비위를 상하지 않게끔 서로 노력한다. 일상생활에서 자주 쓰는 '러
브(love)'란 말은 상대방을 안심시키며 자신의 마음이 변함없음을 전달하는 말일 뿐
진실로 깊은 애정을 나타내는 말이라 보기는 어렵다.
이에 비해 한국인의 정의 세계는 어질고 훈훈한 마음이 우선한다.
한국인의 정은 근대 합리주의 산업화 사회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장애요인이 되는 역
기능으로, 부정적 가치로 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 개인주의적인 서구인들의 합리주의적 인간관계가 실제로 서구사회에 끼
친 역기능도 적지 않다.
모든 일을 정만을 앞세워 처리하는 것도 문제는 있다. 특히 조직사회의 인간관리에
있어 사사로운 정을 앞세워 처리한다는 것은 기회균등의 형평원칙에 어긋나는 일이다.
그러나 인간관계에 있어 정은 욕심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정의 세계는 이
성의 세계처럼 분명한 것이 아니다. 어렴풋한 달빛과 같이 사람의 마음을 감싸주는 것
이 정이다. 맹목적인 것 같고, 논리를 초월하는 것 같은 것이 정이기 때문에 남의 잘
못이나 모순까지도 끌어안을 수 있는 폭넓은 마음이 정의 관계를 맺어준다.
한국인의 특질인 '정이 .많다'는 것은 우리의 삶 구석구석에서 잘 나타나 있다. 예
를 들어 우리의 수 개념을 나타내는 말도 정확하게 하나나 둘이 아니라 두엇, 또는 서
넛, 대여섯이라고 하는 애매한 말을 잘 쓴다.
술을 마시다가도 "몇 병 더 가져올까요?" 그러면 "두어 병 가져와" 그런다.
어떤 때는 아예 "알아서 가져와"라고 말할 때도 있다. 그러면 일하는 사람은 알아서
가져오고, 큰 다툼이 일어나지도 않는다.
정이 앞서는 사회의 미풍이라 할 수 있다. 정의 문화가 만든 풍속이다.
정이 많은 민족이라는 점을 나타내는 예는, 우리의 옷과 집의 방문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치수를 정확하게 재지 않아도 입을 수 있는 옷이 한복이다. 문짝도 치수가 안
맞는다. 그래서 문풍지라는 것을 달아 겨울 바람을 조정한다.
정이 많다는 것은 이성적인 합리성보다 마음이 더 많은 작용을 한다는 뜻이다.
한국인은 회사나 공장의 일터에서도 딱딱한 환경보다 부드러운 여유가 있는 환경에
서 더 많은 능률을 올린다.
이런 정의 문화를 이루어온 우리 민족의 풍부한 감정은 정확성을 중시하던 조직적
산업사회에서는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을 해서 많은 부작용을 낳기도 했지만, 앞으로
는 이 풍부한 마음이 더 중요한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하는 시대가 될 것으로 예상된
다. 정이란 무한한 가능성을 포괄하는 생명력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계나 광물, 플라스틱은 정이 없다. 정확한 것이지만 늘 한계가 있는 것이다. 법이
나 기계와 같이 정확하고 한정된 범위내에서의 제한적인 가치가 아닌, 무한한 가능성
의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이 정이다.
그러므로 '인'의 인간관계는 정으로 맺어지는 관계다. 한국인의 가능성은 정 속에
있다. 빡빡한 현대 문명사회에서 정은 축축한 물기와 같은 것이어서 사람의 마음을 풍
요하게 하고 여유를 갖게 한다.
오늘날 우리에게 더욱 절실히 필요한 것은 푸근한 정이다. 정이 메마르면 사회는 그
만큼 더 삭막해지고, 개개인은 저마다 단절감을 느껴 정신적 황폐감은 커져만 간다.
정으로 이어지는 인간관계가 한국인다움을 지니고 살아가는 참모습이다.
한국인이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은 정에서 찾을 수 있고, 정은 곧 한국인다움
을 주는 중요한 요소다.
상호 보완관계로서의 부부
한국인의 부부애는 '인'을 바탕으로 한 상호 존중의 마음에서 우러난다.
신사임당과 남편인 이원수와의 관계에서 우리는 한국인의 전통적 부부애가 과연 어
떤 것인지 알 수 있다.
[신사임당 (1504-1551)은 조선조 메의 문인. 서화가로서 호는 사임당, 임사재, 진사
명화의 딸, 감찰 이원수의 부인, 율곡의 어머니다. 효성이 지극하고 지조가 높았으며
어려서부터 경문을 익히고, 문장. 침공. 자수에 이르기까지 일가를 이루었다. 안견의
영향을 받은 화풍에 여성의 섬세함과 정밀함을 더하여 우리나라 제일의 여류화가라는
평을 받았다. 자녀 교육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 현모양처의 귀감이 되었다.]
율곡 이이의 어머니 사임당은 한 가정의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그리고 어머니로서
한국적인 여성이 지녀야 할 덕목을 두루 갖춘 여성이었다. 사임당의 자녀 교육열은 역
사의 사표 가 되고 있다.
신사임당은 남편인 이원수에 비해 학문적인 깊이나 재능이 훨씬 뛰어났다. 그러나
자신의 재능이나 학문을 한번도 남편 앞에서 드러내는 일이 없었다.
결혼 이후 신사임당 부부는 사임당의 친정이 있는 강룽에서 함께 지낸다. 사임당은
남편의 학문을 위해 남편에게 서울에 머물면서 학업을 닦도록 권유한다.
"우리가 이렇게 한 집안에서 사는 것이 부부된 도리로 보면 마땅한 일이나, 당신이
공부에 힘쓸 사이가 없게 됩니다. 앞으로 10년 동안 서로 헤어져 당신은 서울에 가서
공부하시고 저는 이곳에서 자녀 교육에 힘쓰도록 해요" 하고 사임당은 남편에게 권유
했다.
사임당의 간절한 권고를 듣고 이원수는 길을 떠났으나 겨우 강릉에서 20리밖에 안
되는 성산이란 곳까지 갔다가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 되돌아오고 만다.
그 다음날에는 다시 굳게 약속을 하고 또 길을 떠난다. 그러나 이 날도 겨우 30리쯤
되는 가맛골이란 데까지 갔다가 되돌아온다.
그리고 세 번째로 다시 아내에게 굳은 약속을 하고 떠나는데 이번에는 대관령을 넘
지 못하고 그 중턱 아래 반쟁이라는 곳까지 갔다가 되돌아온다.
이때에 사임당이 남편에게 말한다.
"대장부가 뜻을 세우고 10년을 작정하고 학업을 닦으러 길을 떠난 것인데 이같이 계
속 사홀을 잇따라 돌아오니 당신이 장차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이원수는 "공부도 중요한 것이긴 하지만 하루도 당신 곁을 떠나기가 싫은
데 10년이라니 그 긴 세월을 어찌 공부만 하면서 떨어져 있겠소"라고 한다.
그러자 사임당은 남편의 나약한 의지를 잡아주기 위해 바느질 그릇에서 가위를 꺼내
서 다음과 같이 말을 한다.
"만일 당신이 이처럼 의지가 굳지 못해 공부를 못하겠다고 하면 제가 무슨 희망으로
살겠습니까. 그럴 바에야 이 가위로 머리를 자르고 여승 이 되어 절에 들어가든지 하
겠습니다." 이 말을 듣고 이원수는 다음날 서울로 떠나 학문에 열중한다. 10년을
서울에 머물진 않았지만 이렇게 공부를 한 그는 벼슬길에도 오르게 된 것이다.
사임당과 이원수 부부의 부부애는 이처럼, 대등한 인격자로서 서로의 장단점을 보완
하는 사랑이다. 사임당은 스승과도 같은 아내였지만 남편 대하기를 하늘같이 했고 또
모든 예를 갖추어 처신했다. 사임당으로부터 교화를 받은 이원수 역시 부인을 존경했
다.
이들 부부의 사랑에는 한국적인 '인'이 그 바탕이 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손에 붙어 있는 다섯 개의 손가락
형제 사이의 우애나 그 관계를 말해 주는 이야기로 '흥부와 놀부' 이야기가 있다.
한국인이면 누구나가 알고 있는 이 이야기는 재산이 많은 심술궂은 형과 재산이라고는
쓰러져가는 오막살이 집 한 채밖에 없는 착한 아우인 흥부의 형제간에 얽힌 내용이 그
줄거리가 되고 있다.
[흥부와 놀부 이야기는, 형제는 근본적으로 한 손에 달려 있는 손가락과 같은 존재며
형제애는 결국 이웃사랑 등으로 이어진다는 한국인의 윤리관을 말해준다.]
이 이야기는 선과 악이라는 각도에서 인용되기도 하고 형제간의 우애의 시각에서 인
용되기도 한다. 요즈음에는 자본주의사회에 걸맞게 자산증식능력이 있는 놀부, 구두쇠
적인 절약형의 놀부로서 이해되기도 한다.
그래서 형제애조차 없는 악역인 놀부가 다시 각광을 받기도 했지만 형제 사이의 인
간관계라는 면에서 형인 놀부의 모습은 자본주의라는 시대적인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역시 본받을 인물은 되지 못한다. 그리고 더더욱 한국적인 형제애라는 점에서는 지탄
받을 만하다.
한국인의 형제애라고 한다면 다음과 같은 민간 설화가 그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다.
농사를 짓고 있는 두 형제가 살았다. 그런데 추수 때가 되니까 형은 '동생은 새 살
림을 냈으니 나보다 어렵겠지'라고 생각하고 아우의 살림 걱정을 한다. 그러나 아우는
아우대로 생각이 다르다. 아우는 '나야 식구가 적어서 이 정도면 넉넉하지만 형님은
애들이 많고 커서 나보다 살기가 힘들겠지'라고 속으로 형의 살림을 걱정한다. 그래서
형제는 밤중에 서로 몰래 추수한 볏짐을 지고 서로의 볏짐이 쌓여 있는 곳까지 짊어지
고 가서 옮겨놓곤 한다. 형은 형대로, 아우는 아우대로 그렇게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얼마를 지나도 서로의 볏짐이 줄어들지가 않는다. 형은 형대로 아우는 아우
대로 기이하게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날 두 형제가 또다시 볏짐을 잔뜩 짊어지고 서로
의 집으로 향하다가 길 복판에
서 마주치게 되었다. 마주친 두 형제는 서로 싸안고 울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한국인들이 자녀들에게 형제애를 가르치기 위해 들려준 이
야기다. 한국적인 우애의 한 예로서 많이 인용되는 민간설화이기도 하다.
한국인은 형제를 한 손에 붙어 있는 손가락에 비유한다. 우리나라에는 장자가 가족
의 전
통을 잇는 가속전통이 있어 장자에 대한 뚜렷한 우선권이 있기는 했지만 부모들은,
형제
는 근본적으로 하나이며 형제애가 모든 사회생활의 출발점이라는 인식을 암암리에 가
지고 자녀교육을 했다. 그래서 넉넉한 형은 모자라는 아우를, 넉넉한 아우는 모자라는
형을 드러내놓고 돕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 서로 도와야 한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흥부와 놀부' 이야기에서도 끝내는 형제애가 정상화한다는 말로 이야기의 끝이 맺
어진다. 부자가 된 아우가 형을 돕는 것으로 형제애가 되살아나 해피앤딩이 되는 것이
다.
이에 비해 서구의 형제애는 인간의 근원적인 서로 돕는 마음보다는 다분히 이기적인
데가 있다. 이를테면 형제애를 가르칠 때에 등장하는 이야기는, 한 개의 화살을 꺾기
는 쉽지만 다섯 개의 화살을 한꺼번에 꺾기는 어렵다는 줄거리다. 이 이야기는 형제를
협력자로서의 관계, 그리고 위기에 처할 때에 합심하는 동맹자의 관계라고 가르친다.
동맹자라는 것은 밖에서 오는 위협이 없어지면 남남으로 되돌아간다. 아니 그럴 뿐
만 아니라 안으로는 대립의 관계를 갖고 있다는 인식이 그 바탕에 깔려 있다. 이해를
함께 할 때에는 같은 방향에 선다. 그러나 이해가 끊어지면 타인이며 경쟁자가 된다.
한국인의 형제애는 그 뿌리에 '인'의 마음이 있다. 그것은 한 손에 붙어 있는 손가
락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젓가락의 자상한 기능이 곧 '인'
여행자들은 서양과 동양의 문화 차이를 식당에서 가장 먼저 느낀다. 동양의 어느 지
역을 가도 식당에 들어서면 젓가락이 있다. 그러나 서양은 다르다. 냅킨과 함께 나이
프와 포크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나이프는 음식을 자르는 칼이요 포크는 그것을 찍어먹기 위한
도구다.
칼을 잡고 고기를 썰어내어 포크로 찔러 입에 넣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사자
나 독수리 같은 야생동물이 잡은 희생물을 뜯어먹는 모양과 흡사하다. 날카로운 발톱
으로 먹이를 찢어내고 칼끝 같은 부리로 먹이를 갈라먹는 독수리의 모습과도 흡사하
다.
사실 나이프와 포크는 칼과 창,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후식으로 과일 등을 찍어먹
는 세 갈래로 되어 있는 작은 포크를 우리들은 삼지창이라 불렀던 것이다.
나이프와 포크를 양손에 들고 비프스테이크를 잘라먹는 서구인들의 음식문화는 유목
민족의 오랜 습성에서 비롯했다고 한다. 유목민족의 음식은 육식이 위주가 되어 있기
때문에 고기를 입에 넣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칼이 필요하다. 우리가 외국영화에서 자
주 보듯이 포크가 없을 때에는 갖고 있던 나이프를 꺼내 고기를 잘라서 입에 넣어 먹
기도 한다.
그러나 농경문화의 전통을 갖고 있는 동양에서는 포크가 하는 역할을 젓가락이 해낸
다. 그래서 젓가락의 음식문화라 할 수 있다.
젓가락의 기능은 포크처럼 찍는 것이 아니라 집어드는 것이다. 서양 사람들은 이른
바 '촙스틱 (chopstick)'이라는 젓가락을 이용해서 음식을 집어먹는 동양인들의 식사
광경을 보고 황홀해하기까지 한다. 아무리 작은 밥알이라도 젓가락으로 집어서 입으로
운반한다. 그래서 동양인들의 젓가락을 '매직 스틱(magic stick)'이라고까지 극찬한
다.
아무리 포크의 명수라고 할지라도 작은 밥알을 찍는 재주는 없다. 젓가락처럼 섬세
한 기능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서양에도 농업문화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서양의 농업은 밀농사가 전부다. 밀은 넓
은 들판을 갈아서 씨를 뿌리는 일, 그리고 그 밀이 자란 후에 거두어들이는 것으로 농
사가 끝난다. 두 배의 수확을 원할 때에는 두 배의 경작지에 두 배의 밀을 뿌리면 된
다는 생각이 전부다.
그러나 같은 농업이라도 한국이나 일본 같은 논농사의 농업은 그렇지가 않다. 한 번
옮겨 심어 놓은 모가 이삭이 되기까지 온갖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 적기에 물을 대주
고 피를 뽑아주는 줄기차고 섬세한 손길이 가야 한다. 수확을 더 많이 내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경작지를 가져야 한다고 단순하게 산술적으로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잔손을
더 쓰고 정성을 더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벼를 더 빽빽하게 심는다든가 더욱 노
력을 기울여야 더 많은 수확을 거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우리의 도작문화가 젓가락문화를 낳는다.
따라서 젓가락문화의 전통 속에는 젓가락처럼 자유자재로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집
어서 입에 넣을 수 있는 섬세한 정성문화가 깃들여 있다.
이 섬세한 감각의 정성문화가 곧 '인'의 문화다. '인'을 먼데서 찾지 말고 우리 생
활 주변에서 찾아야 한다. 작은 일에도 열의를 쏟는 자세, 아무리 하찮은 사람에게도
성의를 다하는 태도가 곧 '인'의 인간관계다. 한국인들의 마음속에는 이런 '인'의 마
음이 오래전부터 뿌리내리고 있다. 다만 그것을 자각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 속담에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는 말이 있다. 작은 일이라고 해서 범
연하게 넘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작은 것이 큰 것을 만들기 때문이다. 아무
리 하찮은 사람의 아이디어라도 가만히 귀를 기울이는 자세가 중요한 것이다.
섬세한 정성이 있는 '인'의 본질을 오늘의 사회에 활용하면 이 사회를 개선할 수 있
는 무궁무진한 아이디어가 있다. '인'의 정신이란 자신의 입장에만 서서 매사를 판별
하는 마음가짐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입장에 서서 많은 사람의 불편이나 아쉬움을 자
상하게 살펴보는 마음씨다.
오늘의 기업체 운영자들이 기업에 성공하기 위해서도 이러한 '인'의 섬세하고 자상
한 정신은 필요하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는 '인'의 정신
'인'의 정신이란 자상한 마음에서 우러나는 인간관계라고 앞서 말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자상한 마음은 언제나 자기본위로 사물을 판별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는 마음이 그 밑바닥에 깔려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인'자 풀이에도 '동
정할 인'이라는 것이 있다.
이를테면 자동차를 타고 거리를 질주할 때에 보행자의 입장에 서보는 것이 '인'의
생각이다. 물건을 만들 때에 사용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것이 '인지다. 약을 만드
는 제약회사는 약을 복용하는 환자의 입장에 서서 약을 만들고, 의사는 환자의 심정을
이해하는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 '인'이다. 그래서 이런 마음의 의료행위를 '인술'이라
고 한 것이다.
가르치는 교사는 배우는 학생의 입장에 서보는 자세, 자녀는 부모의 심정을, 부모는
자녀의 입장을 고려해 보는 자상한 배려가 곧 '인'이다.
일상생활의 온갖 사소한 일이 곧 '인'의 마음과 통한다. 거리를 질주하는 자동차가
차선을 지키며 위험한 추월을 삼가하는 일, 불필요한 경적으로 주변을 놀라게 하지 않
는 일, 놀이터에서 고성방가를 하지 않고 명랑한 분위기를 유지하는 일 등 어느 것 하
나 '인'이 아닌 것이 없다.
언제나 자기본위의 생각에 빠져 있지 않은가를 반성하면서 대인관계를 갖고 상대방
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자세도 '인'의 생활방식이다.
이런 동양 특유의 자상한 배려를 기업에 응용하면 성공하는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
다. 서비스업은 서비스업대로, 제조업은 제조업대로 어느 업체건 이 정신이 기저에 깔
려 있으면 사업에 실패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언제나 사용자, 다시 말해서 고객의 입장에 서서 사물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자동차 생산자가 자동차 이용자의 마음을 잘 파악해서 자동차를 생산한
다면 그 자동차가 어찌 잘 팔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제는 고전적인 이야기가 되었지만 자동차 왕국인 미국에 일본 자동차가 홍수를 이
루게 된 배경에는 이 '인지 가리키는,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보는 '동정의 마음씨'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쉽게 풀이해서 자동차를 타는 사람, 운전하는 사람의 사정
을 고려했다는 말이다.
자동차의 운전자석이 아닌 조수석 위쪽에 손잡이를 부착한 자동차를 처음 만든 것이
일본이었다.
이제는 웬만한 미국산 자동차에도 이것이 붙어 있지만 일본 자동차가 미국에 한창
상륙하기 시작한 70년대 초에는 일본에서 수입한 일제차에만 그것이 붙어 있었다.
'논리적으로 보아 앞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을 위한 손잡이를 만들 아무런 이유가 없
기 때문에 미국차는 1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도 이 손잡이를 만들지 않았다.
사용자편에 서보지 않은 '인'의 부재에서 오는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사용자편에 서본 일본 사람들은 운전석 옆자리에 앉아 있는 승객의 오른손이
무엇인가를 잡고 싶어한다는 점을 알아냈던 것이다. 운전석 옆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
은 핸들을 잡고 직접 운전을 하는 사람과는 달리 무엇인가를 잡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눈여겨 본 자동차 메이커가 손잡이를 만들게 된 것이다.
일본 자동차들은 계속 그 손잡이를 달아 차를 시판했는데 미국 자동차는 그런 편리
한 것을 일체 무시해 버렸다. 그 자리에는 논리상 손잡이가 필요없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0 년쯤 후, 일본 자동차가 편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판매량이 엄
청나게 늘어난 후에야 어쩔 수 없이 대세에 밀려 그 손잡이를 만들기에 이른 것이다.
통조림 기술이 개발되며 통조림 음식이 보관식품으로 널리 보급이 됐는데도 통조림
따는 간편한 기구는 그로부터 60년 후에야 고안되었다는 사실 역시 사용자편에 서보
는, 다시 말해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사물을 헤아려보려는 '인'의 마음의 부재에서 온
것이다.
이처럼 오늘날 '인'의 정신을 되살리면 어떤 일을 해도 실패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어
느 사회도 명랑하며 건전한, 그리고 보람있는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인기 사상 속에 노사가 함께
'인'이라는 회의문자는 사람이 둘 있다는 뜻이 있음을 앞에서 잠시 훑어보았다. 그
래서 인이 둘인 것이 곧 인이다.
'인'이 셋이면 '킨'이라는 글자가 될 수도 있는 데 실제 그런 글자는 없으나 그에
대응되는 것으로 중이라는 글자가 있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이 글자를 사람이 셋 이상
있는 글자라는 뜻으로 파악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인'의 뜻은 혼자 있는 것이 아
니라 둘 이상이 무리지어 있는 가운데의 인간관계를 말한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
이라고 했다지만 '인'의 철학에는 이런 근대적인 사상이 이미 일찍부터 배태되어 있었
다는 말이다.
'인'의 참뜻을 이해한다면 요즈음 한국사회의 문제점으로 등장하고 있는 노사분규는
일어날 수가 없다. 노사문제도 결국은 인간관계에 귀착되기 때문이다.
'인'에는 천지를 몸으로 하여 사지백체(수족과 그 밖의 신체의 여러 부분)로 삼는다
는 뜻이 있다. 그러므로 옛날 의서에서는 손발이 마비되어 통양(아프고 가려운 감각)
을 모르는 증상을 가리켜 불인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따라서 '불인'이란 말을 뒤집어보면 '인'의 참 뜻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나타난다. '
인'은 단절되거나 단절되려는 분신을 아프게 보는 마음이며 몸의 맨 끝과 몸체가 하나
가 되려는 마음이자 그런 정신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인'과는 반대로 복숭아나 살구씨를 땅에 심으면 그 생명이 되살아
나 싹이 돋아 생명이 자라게 되는 것을 도인, 행인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렇게 '인'을 분석해 보면 오늘 한국에서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인'의
정신이라고 생각된다.
인명을 해치는 흉악범에 대한 기사가 신문지상에 오르내리고 자연이 파괴되고, 인륜
이 뒷걸음질치고 공해가 만연해 가는 지금의 현실에 우리가 절실히 되찾아야 하는 것
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새로운 도덕률과 생명이 되살아나게 하는 '도인'이나 '행인'이
아닐까. 우리는 너무나 많은 '불인'을 우리 사회 속에서 체험하고 있다.
만물을 소생시키고 생명의 싹을 되살리는 만물 일체인 '인'을 기업 속에 되살리면
회사를 곧 자기 몸으로 생각하는 사원의식이 싹트고 사원을 자기 몸의 한 지체로 생각
하는 마음이 되살아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사지백체의 철학 속에는 '너'와 '나'의 대립이 아니라 회사의 모든 종업
원이 한 몸통을 이루어 생활하는 마음가짐이 움트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노사대
립이란 뿌리에서부터 없어질 수밖에 없다. 회사와 한 몸이고 회사에 연관된 모든 종사
자가 지체가 되고, 그 지체의 한 부위가 괴로우면 전체가 그 아픔을 느끼는 그런 '인'
이 부활되는 회사에서는 노사대립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사실 가족을 '식구'라고 부르는 것도 이처럼 같은 지체라는 강한 유대감에서 온다.
서양에서 말하는 패밀리(family)나 세대가 함께 기거하는 가족을 의미하는 하우스홀드
(household)의 개념과는 전혀 다르다. '먹는 입'이라는 뜻은 한 몸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우리가 한 회사의 사원을 '회사 식구'라고 할 때 그것은 서구적인 고용자라
는 말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 된다.
모든 것을 대립으로 나누어 보는 서구에서는 고용주라는 임플로이어(employer)의 대
립개념으로서 종업원이라는 임플로이이(employee)가 존재한다.
이를테면 낮과 밤이라든가 남과 여, 출구와 입구, 여름과 겨울 등 모든 것을 대립하
는 대립관계에서 보는 개념이 서구의 고용주와 고용인 사이에서는 존재한다.
그러나 '인'의 고장인 한국에서는 이와 같은 대립관계에서의 노와 사가 아닌 한 식
구로서의 노사가 있다. 이런 것이 한국적인 기업조직이어야 할 것이다.
노조가 결성되어 고용주측과 대결하고, 계약조건을 가운데 두고 파업을 하는 투쟁,
노사의극한 대립은 사실 한국적인 기업과는 전혀 거리가 먼 서구의 것이다.
한국의 기업에서는 이제 이 '인'의 기본정신을 찾아야 한다. 회사의 모든 종업원이
한 몸을 이루는, 그래서 근로자의 어려움이 몸 전체의 어려움으로, 고용주의 고통이
몸 전체의 고통으로 함께 느껴지는 그런 '식구'로서의 기업체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인'의 부활이다.
인간적인 해결'의 숨은 뜻
'인간적으로 해결하자'는 말이 한동안 우리 사회에서 유행했다. 이 말은 서구의 합
리주의 사고방식과는 상반되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인간적'이란 본뜻과 달리 분명히 선과 후를 가르고 흑과 백을 확연히 구분
짓는, 근대 합리주의 정신에 비해 너무나 동떨어진 한국인의 후진성을 꼬집는 부정적
인 의미로 쓰여왔다.
이를테면 정해져 있는 규칙이나 법 절차를 밟아서 어떤 일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적당히 뒷구멍으로 일을 해결하는 나쁜 방법이라는 뜻이 인간적
인 해결이란 말속에 내포되어 있다. 그래서 인간적인 접근 방식은 부도덕하고 부정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런 인간의 심성에 호소하는 대인관계나 사회생활이 반
드시 나쁜 것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나름대로의 깊은 뜻이 있기 때문이다. 비정상적
인 엄격한 사회규범에서 벗어난 것이지만 사람이 갖고 있는 도량의 폭을 이용하여 융
통성 있는 화해의 방법을 찾는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기도 하다.
물론 이런 것이 탈법에 이용된다면 비난받아야 하고 지탄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통
념상 상례에서 좀 벗어난다고 해서 여유있는 인정으로 융통성있게 해결된 일로 사람
을 규탄하거 나 사회를 각박하게 만든다면 삭막한 단절의식을 야기시키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 사람의 숨결이, 훈훈한 마음이 통하는 사회가 곧 '인'의 정신이
흐르는 사회다. 결국 계율이나 높은 도덕의 덕목은 인간사회를 보다 원활
하고 무리없게 운용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 우선적 가치를 지닌 존재가 인간이다. 다른 계율이나 도덕은 인간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만든 것이다.
자신에게도 엄격한 유교적인 규율을 갖고 일생을 지낸 이율곡은 언제나 관대하고 온
후한 성품을 지녔다. 율곡의 제자인 이윤우가 스승을 평한 말을 들어보면 율곡의 인품
의 한 모습
을 볼 수가 있다. "선생을 모시고 있으면 항시 춘풍이 가득한 방안에 있는 것 같아 마
음에 평안이 온다. 비록 철없고 학문의 정도가 낮은 사람들이라도 선생의 안색을 한
번 보면 그 평안한 모습 때문에 곁에서 모시고 싶은 생각이 절로 솟아오른다"고 말했
던 것이다.
유학의 높은 철리를 터득한 대학자의 인간다운 인품을 살펴볼 수가 있다.
율곡이 원접사로 황주에 갔을 때의 일화가 하나 있다. 고을 원이 그 고을에서 으뜸
으로
이름이 나 있는 유지라는 기생을 율곡에게 보내 수청을 들게 했다. 이들은 내심으로
이 대유학자가 유지라는 그 명기를 거들떠보지도 않기를 바랐다고 한다. 그러나 율곡
은 유지라는 기생의 존경과 사랑을 순수하게 받아들였다는 설이 있다. 기생은 그 이후
율곡이 해주에서 살고 있을 때에도 그를 찾아갔고 율곡 또한 그녀를 반갑게 맞았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율곡이 그녀에게 시 한 수를 지어주고는 쫓아냈다고 했다. 이율곡
의 명예가 이로 인해 훼손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옛선비들
은 가능한 한 인간성을 죽이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모범이 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
다.
물론 이와 같은 한국적인 선비사회의 인간성 말살과는 달리 서구에서의 몰인간성은
개인주의적인 이해충돌이 그 배경이 되고 있다. 가능하면 인간성을 배제한 상태에서
타인과의 교류를 가지라는 것이 서구의 합리주의적인 사고방식이다.
인간의 개재가 아니라 법의 개재가 합리주의라는 사회를 전진시키고 발전시킨다는
생각에서다. 그래서 인간적인 해결이 필요할 때에도 되도록 억제하고 법의 해결에 맡
긴다.
미국사회에서의 높은 이혼율도 인간적인 해결의 부재에서 비롯한다. 우리는 '부부싸
움은 칼로 물 베기'라 하지만, 서양 사람들은 '부부싸움은 칼로 치즈 베기'라고 한다.
마음과 마음에 정이 있어야 할 자리에 법이라는 인위의 계약이 있고, 그 계약의 운
영자며 해석자인 변호사나 법관이 최대한의 인간성 배제라는 원칙으로 문제를 해결한
다.
이혼하는 부부도 그렇지만 이혼부부 자녀의 양육문제 역시 인간성이 배제된 상태에
서 극히 법적인 기준하에 이루어진다. 애정의 깊이와는 상관없이 경제적인 수입 등에
따라 자녀의 양육권이 결정되곤 하는 것이다.
오늘의 우리 사회도 전통적 가치체계가 무너지고, 인간적인 해결, 인간적인 교류,
인간적인 접촉이 점점 빛을 잃어가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아주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제 우리는 사람을, 정을 그 바
탕에 두고 사람과의 관계를 따뜻한 인간의 마음으로 생각했던 한국인다운 본성을 회복
해야 한다.
'인'의 가치관이 우리의 마음속에 되살아날 때, 대립이 화합으로, 그리고 창조적 생
명력으로 전환하여 우리 민족이 번영과 발전을 이루는 밑바탕이 될 것이다.
자연과 함께 살아온 한국인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은 덕을 베풀고 정을 주고받으면서 사는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오랜 옛날부터 아무리 가난하게 살아도 이웃을 한 집안처럼 알고 서로
나누어주는 삶을 살았다. 그래서 '이웃사촌'이란 말도 생겨났다. 이웃 사람을 남이 아
니라 한 집안 혈족으로까지 생각한 것이다. 사람뿐만 아니라 동식물, 새나 짐승, 나무
나 꽃, 풀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있는 것들을 중히 여겼다. 그래서 그런 것들에게도
일일이 마음을 나누고 정을 주었다. 우주만물과 공존동생하는 삶의 철학, 조화의 사상
이 한국인의 마음바탕이었다.
그래서 마음이 언제나 넉넉했다.
돌과 물을 친구로 생각했고, 산을 인자로 바다를 지자로 보았다. 소나무와 대나무는
높은 지조와 변함없는 마음을 지닌 곧은 선비의 성품에 흔히 비유되었다.
우리의 고전 문학 작품 중에는 동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우화가 특별히 많이 있다. "
별주부전" "장끼전" 등 잘 알려진 것뿐 아니라 "두꺼비전" "쥐전" "금송아지전" 등 많
은 고전소설에서 우리는 동물을 사람의 마음에 비유하여 나타낸 것을 볼 수 있고, 근
대의 신소설에도 "금수회의록"이라 하여 동물들, 새와 짐승들이 회의하는 것처럼 구성
하여 사회상을 나타낸 작품이 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설화나 동화에도 호랑이나 사
슴, 토끼 등 동물이 등장하여 사람과 관계를 가지고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을 볼 수 있
다. 이 모든 것들을 볼 때 한국인은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의 의식을 갖고 있었고, 자
연을 인격화하여 마음을 주고받는 존재로까지 승화시키는 범우주적 사랑의 정신을 지
니고 있었다.
짐승들을 먹이 사냥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공존동생하는 대상으로 보았기 때문에 적
대적 대립 관계를 나타내기보다 인간화된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나무에 품계를
정해 준다든지 미륵바위, 망부석 등 바위에 이름을 붙여 부르는 것에서 세상 만물에
인간적인 마음을 부여하는 한국인의 '인'의 사상을 읽을 수 있다.
또 일상생활에 사용하는 도구들까지 사람의 마음을 부여하여 인간적인 관계로 대하
는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조침문"에서는 바늘을 부모형제 이상의 인간적 대상으로 생
각하고 슬픔과 동정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조침문"은 조선조 순조 때 유씨 부인이 지은 수필이다. 바늘을 의인화하여 쓴 운문
으로, 섬세하고 애절한 운치를 지니고 있다. 부인이 출가 후, 남편을 여의고 바느질에
재미를 붙여 나날을 보내왔는데, 어느날 자기가 쓰던 바늘이 부러지자 슬픈 심회를 누
를 길 없어 이 글을 지은 것이라 한다.]
글을 쓰는 선비는 문방구를 문방사우라 하여 친구로서의 인간적 대상으로 격상시켜
부르곤 했다. 종이, 붓, 먹, 벼루를 문방사우라 한 우리네 조상들의 마음에서 독특한
한국인의 사람의 정신과 세계에 대한 인식을 읽을 수 있다.
그 바탕은 '인'이고, 여유와 넉넉함이다.
우리의 풍습에 '고수레'라는 것이 있다. 음식을 먹을 때 조금씩 떼어 산과 들의 자
연에게 주는 것이다. 산에 소풍을 가거나 들놀이를 갔을 때 장만해 온 음식을 사람들
이 나누어 먹기 전에 먼저 산이나 들에, 나무나 바위에게 던져준다는 것, 그런 풍습은
분명 한국인의 넉넉한 마음에서 생긴 것이다.
가을에 감나무에 감이 열리면 사람들은 즐겁게 따서 먹고, 곶감도 만들고, 온동네에
나눠주며 함께 결실의 기쁨을 즐긴다. 우리는 과일을 따면 반드시 이웃에게 나누어주
는 습관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람끼리만 그런 과일을 나누어 먹고 끝내지는 않는
다.
가을 감나무에는 따지 않은 감이 남겨져 있다. 까치에게 줄 밥이라 까치밥이라고 한
다. 자연이 거둔 식량을 사람이 모두 차지한다는 것은 야박한 마음이다. 우리나라 사
람들은 야박한 마음을 정이 없는 마음으로 알았다. 우리나라 사람의 정은 사람 사이에
만 오가는 마음이 아니라 동물에게도 나누어주는 따뜻한 마음이었다. 그래서 감나무의
감을 모두 따지 않고 까치밥으로 남겨두었던 것이다.
이처럼 한국인들은 아무리 가난하고 먹을 것이 부족했던 시절에도 마음의 여유가 있
었고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다. 짐승까지도 사람의 마음과 정으로 대했다.
고봉문화 속에 살아 있는 한국인의 '인'
함께 어울려 사는 한국인의 여유있는 마음을 말해 주는 것으로 우리의 독특한 고봉
문화가 있다. 한두 푼이라도 이익을 남겨야만 하는 상인조차도 차원높은 '인'의 정신,
여유있는 마음을 바탕으로 장사를 했다.
오늘에는 아예 적정량을 계량해서 담은 포장쌀이 나오고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되나 말로 되어서 쌀을 팔고 샀다. 그런데 쌀 한 톨이라도 덜 가야 이익이 되는 장삿
속의 상인들임에도 됫박이나 말에 쌀을 될 때는 더이상 올라갈 수 없을 만큼 수북히
고봉으로 쌀을 준다. 쌀말을 싹 깍아 되주면 그 쌀집에 사람들이 가지 않기도 하지만,
파는 쪽에서도 깍지 않는 게 상식으로 되어 있었다. 거기다 오히려 한 줌씩 더 집어주
는 여유와 정을 보였다.
그 고봉으로 올라간 쌀은 쌀이라기보다 한국인의 마음이며 여유였다. 그와 같은 고
봉문화의식은 온갖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던 한국인의 생명력이었다.
그릇에 밥을 담을 때도 마찬가지다. 밥이 흘러내리지 않을 만큼 수북하게 담는다.
마치 밥그룻 위에 또 하나의 밥그릇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일본 사람들처럼 작은 공기에 밥을 담아 젓가락으로 쓸어넣는 식의 식사가 아니다.
그룻에 수북히 담은 고봉밥은 그 밥의 양이 아니라 넉넉한 마음의 표시다.
쌀밥이 아니라 깡보리밥이거나 수수밥이었을 망정 한국인들은 고봉으로 주고받는 마
음의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런 마음의 여유가 한국적인 '인'의 마음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유유자적의 마음가
짐, 넉넉한 도량, 미물에게까지도 마음을 쓰는 아량, 원만한 인간관계 등이 바로 '인'
의 세계다.
자기만 알고, 자기의 이익 이외에는 전혀 남을 생각하지 않는 독선적인 행위를 하는
사람, 남의 희생 위에서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악덕 기업인 등은 오랜 전통의 한국인
다움을 나타내는 민족성을 역행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근시안적인 대인 의식, 기업의
식은 언젠가는 구멍을 내고, 둑이 터지는 수재와 같은 큰 재해를 부르게 마련이다.
한국인들의 아름답고 너그럽고 어진 마음은 일제의 식민통치시대를 겪으며 상실되었
고, 그후 6. 25동란과 근대산업화 과정을 거치며 급속히 부정적 가치로 역전되었다.
그리고 우리의 윤리 도덕관이나 가치체계와 판이한 외래문화의 범람에 의해 한층 무질
서하고 저속하게 변질되고 이질화가 심해졌다.
그러나 아직도 한국인의 어진 마음은 우리의 혈맥 속에 유전인자로 전해 내려오고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오늘날 전개되고 있는 새생활, 새질서 캠페인도 한국인이 갖고 있는 본래의 어진 마
음을 다시 찾는 데서부터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비록 가난하더라도 짐승인 까치에게 베풀 수 있었던 그 어진 마음을 되살린다면 한
국사회는 세계 어느 사회보다도 깨끗하고 명랑한 사회가 될 것이다.
'남'의 거울에 비친 나를 배운다
우리나라 속담에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는 말이 있다. 자신에게 더
큰 실수가 있는데도 자신의 잘못은 모르고 남의 약점을 찾는 경우를 두고 나온 말이
다.
이와는 정반대로, 겨 묻은 개가 똥 묻은 개를 보고 자신의 몸에도 똥이 묻어 있는
건 아닐까 살펴보다가 겨가 묻은 것을 알고 털어내는 현명한 관찰의 시선을 가진 사람
을 보고 '겨 묻은 개가 똥 묻은 개를 보고 제 몸의 겨까지 털어낸다'는 속담도 나옴직
하다. 남의 잘못을 보고 자신을 더욱 바르게 하려는 마음가짐을 갖고 있는 사람은 반
드시 남보다 나은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남의 실수를 통해 자신의 바른 모습을 찾아보는 눈을 가진 사람이야말로 참다운 지
성인상이라 할 수 있다. 교실에서만 참다운 지식을 깨우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훌륭
한 사람에게서만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배우려는 마음, 겸허한 태도만이 참된 지
혜를 깨우치고 너그러운 사랑의 정신을 지닐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주변 사람에게서 끊임없이 우리는 무언가를 배운다. 무언가를 계속
깨우치는 사람은 완성된 인격에 도달할 수 있고, 성공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무례
한 사람, 모자라는 사람에게서도 배울 수 있는 마음, 남의 잘못을 비난하기에 앞서 자
신을 돌아보는 마음이 나와 남을 함께 구하는 '인'의 마음이다.
공자도 말씀하셨다. "세 사람이 함께 길을 걸어가면 그 가운데에는 반드시 스승이
끼어 있다"는 말이다. 항상 배우고자 하는 겸허한 마음의 준비가 갖추어져 있으면 어
떤 상황에서든지 배울 수 있고 누구에게서나 배울 수 있다.
조선시대 대유학자로 조광조란 인물이 있다. 그는 유학의 가르침을 급진적으로 실정
치에 이용하려다 결국 실패하고 말았지만 그의 인격과 높은 학문은 본받을 점이 많았
다. 그가 남 긴 갖가지 일화에는 오늘의 우리도 깨달을 만한 점이 많다.
조광조는 항시 배우려는 자세로 사는 학자의 태도를 지녔다는 점에서 인간적 폭을
가진 인간형이었다. 그는 배움이란 반드시 고명한 학자에게서만 배울 수 있는 것이 아
니라는 생각을 가졌다는 점에서 양반적 보수신분사회에서 보기 드문 열린 마음을 보여
준 인물인 것이다. 그래서 초야에 묻힌 인사를 더 많이 찾아다니며 참다운 마음에서
나오는 살아 있는 지혜를 터득하려 했다.
그는 높은 벼슬자리에 올라서도 안일만을 구하지 않고 정치적 개혁을 시도했던 능동
적, 적극적 인물이었다.
[조광조(1482-1519)는 조선 중종 때 학자다. 자는 효직, 호는 정암. 사림파의 영수로
서 도덕적 이상정치를 뫼하여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였으나 훈구파가 일으킨 기묘사
화로 능주로 귀양갔다가 사사되었다. 문묘에 배향. 시호는 문정이다.]
'열린 마음, 진실에 대한 믿음과 자신감은 개척정신의 원동력이다. 인간 사회를 진
보시키는 힘이다. ' 그런 개혁의지의 소유자였던 조광조는 겉껍데기에 불과한 신분으
로 사람을 대하지 않고, 그 사람의 작은 진실이나 지혜라도 인정하고 배우려는 마음으
로 사람과의 관계를 맺었다. 정치개혁을 추진하려는 단계에서 천민 신분의 갖바치에게
서 조언을 구한 예는 그의 근본적인 인간 정신을 잘 나타내고 있다. 갖바치는 비록 천
민이었지만 그 눈은 정확했다. 대학자 조광조에게 답한 천연의 말은, 조광조와 당대의
상황을 정확히 짚어냈다. "마음에 품고 있는 뜻과 학식, 그리고 강직한 성품은 우리시
대에선 누구와도 견줄 수 없습니다만, 그런 뜻을 펴려면 임금을 잘 만나야 합니다. 지
금 현실로선 어려움이 많겠습니다"하며 갖바치는 조광조에게 사려 깊은 충언을 했던
것이다.
[갖바치는 가죽신 만드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으로 주피장이라고도 한다.]
쇄국정치의 대명사로 알려졌지만, 실은 조선왕조 후기의 어려움 속에서 탁월한 지도
력과 넓은 도량을 지녔던 흥선대원군 또한 그 근본은 열린 정신의 소유자였다. 남의
장점을 평가할 줄 알았고, 깊은 혜안으로 자신을 낮추고 안으로 다스려 나라를 경영했
던 대인적 풍모의
지도자가 대원군 이하응이다.
근대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백범 김구를 들 수 있다. 그의 호 백범이란 글자도, 백정
과 범부라는 말에서 파서 썼고, 그 합쳐진 의미는 인간의 근본에 차별을 두지 않는 평
등주의와 넓은 도량을 나타내는 것이다.
[김구(1827-1898)는 독림 운동가며 정치가다. 호는 백범. 젊었을 때부터 일제에 항거
하여 여러번 투옥되었다. 1940년 광복군 조직, 1944년 임시정부 주석, 1945년 한국 독
립당 위원장으로 재임할 때 암살당했다. 저서에 ' 백법일지'가 있다.]
백범은 상해 임시정부의 주석이었지만, 처음에는 문지기 일부터 자청해서 맡았다.
임시정부 일을 맡아보기 시작하면서 주석에 오르기까지 배워가며 일한다는 태도를 버
리지 않고 임시정부의 정통을 지킨 인물이다. 그는 항상, 애국이란 실천으로 보여주는
것이지 명성이나 웅변으로 대신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언제나 열려 있는 마
음으로 배워야 한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었고 정신의 근본이었다.
백범의 위대한 점은 자신이 상민 출신임을 감추지 않은 점뿐 아니라 보다 적극적이
면서 겸허하게 남을 본받고 자신의 인격을 닦아 높은 정신 세계를 열어갔다는 것이다.
김구가 상해 임시정부의 주석으로 피선되자 양반 출신의 독립운동가들이 '저런 상민
밑에서 함께 일하기가 부끄럽다'는 태도를 노골적으로 표시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백범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는 의연한 지도자의 자세와 신념을 보여주었다. 현대 양반
의 기준은 그 인격과 애국심의 깊이에 있다고 역설하며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백범
이 어렸을 때에 자기 집안 어른이 상민이기 때문에 수모를 당해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보고 통곡을 했던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사려깊은 인격을 가지고 누구를
증오하는 마음을 갖지 말아야 한다는 소신을 실천하며 살았다. 그리고 비록 상민이라
도 노력하고 배우면 대접받을 수 있다고 믿고 실천에 옮겼던 사람이다. 백범의 인간적
대성은 어떤 배경의 도움없이 자신의 수양과 노력으로 이루어졌다. 백범은 근세 한국
이 낳은 인물로서, 한국인다움을 스스로 실천한 위인으로서, 타인의 조력이나 힘을 이
용하여 자신의 입신출세의 길을 열어야겠다는 사람들에게 큰 사표가 되는 인간형이다.
자신의 삶을 가치있게 하기 위한 뜻은 자신이 세워야 하는 것이고, 뜻을 세웠으면 성
취를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함을 일깨워주었던 행동인이요, 현대의 지성적 인간형으로
수난기의 한국을 온 몸으로 살아낸 백범의 자세는 바로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중요
한 진실을 가르쳐준다. 백범의 정신이 바로 '인'이다.
자기를 낮추고 겸허한 자세로 남을 대하고, 항상 배우려는 마음이 바로 '인'의 마음
이다.
백범은 한국인의 마음 깊이 흘러내려온 '인'의 정신을 실현한 진정한 한국인이었다.
[1919년 4월 상해에서 조직 선포한 한국의 임시정부는 3. 1운동 후 해외로 망명한 애
국지사들이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임시헌장을 제정, 국무원을 조직함으로써 수립되
었다. 그후 내분. 재정 궁핍 등으로 파란을 겪었으나 외교활동. 항일전 등으로 독립
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해체되었다.]
사람을 알아보는 눈
'사람이 재산'이란 말이 있다. 진정으로 마음을 주고받는 사람은 백 석 천 석의 재
물과 같다는 의미일 것이다. 사람을 재산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인간관계는 우선 올바른
사람을 알아보는 눈에서 시작된다. 겉으로 드러난 외모만 보고 사람의 인품을 알아내
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외모 뒤에 숨은 사람의 참모습을 볼 줄 아는 사람은 사람을
재산으로 삼을 수 있는 높은 인격과 능력을 지닌 사람이다.
사람을 제대로 보려면 우선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 그룻된 차별의식을 버려야 한다.
아니 버린다기보다 그런 마음이 아예 생겨나지 않도록 늘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진실
을 볼 줄 아는 눈 을 가져야 한다. 스스로 많이 생각하고, 옳은 판단력을 길러야 한
다.
그런 마음의 바탕에서 '인'은 씨앗처럼 눈을 뜨고 싹을 틔우고, 무성한 잎을 피워내
는 여유와 너그러움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인'은 처음부터 변함없이 갖고 있는
마음이 아니라 생명을 간직한 씨앗처럼 마음의 밭에 묻혀 있던 것이 자라는 것이다.
그것이 싹을 틔우면 아름답고 활기찬 생명력을 얻을 수 있지만, 싹을 틔우지 못하면
황폐한 불모의 마음밭이 되는 보잘것없는 모래알과 같다.
그래서 '인'의 씨앗을 틔우는 마음바탕에는 무엇보다 오만한 마음, 선입견, 위선에
찬 차별의식이 없어야 한다. 그런 것들이 바로 우리의 마음을 황폐한 사막으로 만드는
요인이 된다.
외모와 사회적 ·가정적 배경과 재물로 사람을 판단하고, 마음에 없는 아부로 환심
을 사려고 노리는 사람의 허상을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런 눈
앞의 이득을 버릴 줄 알아야 한다.
사람을 겉으로만 보지 않고 그 내면의 진실한 모습을 꿰뚫어볼 줄 알았던 인물이 우
리 역사 속에 많이 있지만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흥선대원군이다.
대원군이 거인적 지도자의 풍모를 보였듯이, 사람을 볼 줄 아는 인물은 훌륭한 지도
자인 경우가 많았다.
흥선대원군은 어려운 파락호 시절을 보내는 동안 사람의 내면을 꿰뚫어보아 그 진실
을 발견할 줄 아는 높은 안목을 갖게 되었다. 그는 인간의 참모습을 알기 위해선 선입
견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일찍이 깨달았고, 그런 마음은 인물의 참된 품성을 발견하는
눈을 갖게 했다. 그가 선택한 인물은 그의 판단에 벗어나지 않았다.
사람의 본성에 기준을 두지 않고, 인상, 학벌, 출신 지역, 경제력, 직업, 또는 가정
의 외형적 배경과 신분을 위주로 사람을 기용하고 사람을 사귀는 풍토가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의 고질적 병폐로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한국인의 본성인 화합과 조화의식
이 깨지고, 인간성을 중시하는 가치관이 비뚤어져 사회적 혼란과 위기의 시대로 치닫
고 있다.
불신과 이질감, 소외감 등은 한국인다운 인성이 아니었다. 그것이 좋지 않은 인성이
라도, 사회구조상, 생활 전통상 화합과 조화, 인간성을 중시하는 특성을 일찍부터 지
녀온 민족이라면, 그런 것들을 긍정적 가치로 전환하는 슬기도 함께 터득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서양 사람들은 생활수단이 유목과 수렵 등 투쟁적 대립의 방법이었기 때문
에 과학과 합리주의 정신이 일찍이 발달했고, 우주정복의 꿈을 실현하려는 바람직한
개척 정신이 오늘의 문명에 큰 기여를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서양에 비해 과학의 발달이 늦었고, 경제 발달도 늦어 오랫동안 후진국 상태
에 머물러 있었다.
우리 민족은 침략을 모르는 어진 마음을 지닌 백성이었고, 물질보다는 정신을 중히
여긴 민족이었기 때문이다. 대립해서 쟁취하기보다는 화합하여 함께 사는 사회를 지향
한 민족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의 근본이었던, 천하지대본인 농사를 주로 한 농경
생활과 농경문화가 자연스럽게 한국인의 마음을 여유있고 너그럽고, 기다릴 줄 아는
성질로 가꾸어주었다. 그래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한국
인의 생명력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오랜 길을 걸어서 마침내 과학기술과 생산능력이 급성장을 이루는 경제적 풍
요의 시대를 만들어냈다. 이제는 한국인의 본성, 문화적 저력인 '인'의 가치를 다시
실현할 때다.
정보화시대, 소통의 시대에서 무엇보다 중요성을 띠는 것이 마음이다. 다양하고 폭
넓은 마음과 마음, 개성을 수용하면서 신축성있고 융통성있게 표현할 수 있는 전통적
특성과 전통문화의식인 '인'의 정신이 만개할 계절이 된 것이다.
한국인의 마음마다 깊숙이 묻혀 있는 '인'의 씨앗이 모두 남김없이 눈뜨고 싹틀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자신을 가꾸어야 한다. 사람을 보는 마음의 시력을 지녀야 한다.
잠든 본성의 씨앗에 생명의 불꽃을 붙여야 한다. 그 근본이 사람이고, 생명의 존엄성
이다. 사람의 본성을 그대로 보고 너그럽게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요즘엔 인물을 제대로 볼 줄 아는 시력이 점차 약화되고 있는 것 같다. 지방색이 개
성으로 칭송되지 못하고 갈등의 요인이 되고 서로를 헐뜯는 약점이 되고 있다. 사실보
다 소문을 더 믿고, 실물보다 외형조건을 더 따지는 빗나간 마음속에서 '인'의 씨앗은
죽어가는 것이다.
편견의 함정 속에 진실이 모두 빠져 있고, 허상들만 거리를 활보하는 것 같은 시대
다. 그러나 그런 느낌 역시 선입견이고 편견일지 모른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한국인의 마음속에서 '인의 나무가 자라고 있고, 보이지 않는 '인'이 숲을 이루고 있
는지 모른다.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았기에, 어쩌다 색은 나무, 죽은 나무, 병든
나무가 더 두드러지게 보이는지 모른다.
리더십에서 발휘되는 '인'
남을 지도하는 일이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명령이나 강압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직위로만 이끌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연장자라 해서, 직장 상사라 해서 아랫사람을 쉽
게 통솔할 수는 없다. 물리적인 힘이나 외형적 조건으로만 남을 다스릴 수는 없다. 사
람을 이끄는 근본적인 힘은 마음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리더십'이란 바로 인격이다. 동양사회에서의 리더십은 덕에서 나온다. 지혜나 힘보
다 덕
을 중시하는 사회에서는 특히 직위와 힘으로 사람을 누를 수가 없다.
그래서 힘을 기본으로 한 용기를 지닌 지도자를 용장이라 하고, 지혜가 있고 지략이
뛰어난 지도자를 지장이라 하고, 어진 마음과 사람을 화합하게 하는 덕이 높은 지도자
를 덕장이라 할 때 일반적으로 최고의 지도자는 덕장으로 친다. 다음이 지장, 그리고
마지막이 용장이다.
동양이나 우리나라에서는 앞에서도 여러 번 말했듯이 사람의 마음을 가장 우위에 두
었고, 물질적이고 물리적인 힘보다는 정신적이고 지적인 것, 마음과 정을 가치기준의
근본으로 삼았다.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도 군사적인 힘이나 물질적인 힘보다는 글의 힘, 마음의 덕과
신뢰와 의리, 그리고 겸허 등을 바탕으로 했다.
문치주의가 우리나라 전통 봉건 왕조시대의 정치적 기본이었다. 그런 문인 우대사상
은 나라의 힘을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무인과 상인의 사회적 위치와 인간적 대우
가 낮았기에, 백성은 늘 배고파했고 뿌리깊은 가난을 면치 못했다.
[문치주의는 유가에서 주장하는 예악사상에 기초를 둔 정치로 문치정치, 예문정치, 문
식정치
등의 이름으로 불렀다. 한에서 청에 이르는 중국의 정치사에서 특히 중용되던 통치방
법으로서 무단정치, 형법주의에 대비되는 말이다.]
그럼에도 한국인의 본성과 가치관은 쉽사리 바뀌지 않았다. 가난을 면하지 못하면서
도 글을 숭상했고 공부하는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그 나약한 글과 추상적인 마음이
한국인의 삶을 이끄는 질긴 끈이 되고 힘이 되었다는 것은 놀랍기까지 한 일이다. 오
히려 그런 정신의 힘이 한국인의 강인한 생명을 이어온 원동력이 되었다.
세계 역사 속에서 보면 강성한 국력과 용맹 넘치는 군사의 무력으로 세계를 휩쓸던
국가가 흔적도 없이 멸망한 예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런 흥망성쇠의 인류 역사 속에서 4천여 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국가로 독특한
문화와 독자적인 언어 문자를 지니고 살아가는 나라는 그리 흔치 않다. 한국인은 그만
큼 민족적으로 강인한 정신력을 지니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한국인이 오늘까지 문화와 역사를 이어온 힘은 한국인다운 특성에 있지만, 더불어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한 인물이 많았던 데에도 있다. 훌륭한 임금도 많았고 훌륭한 신
하도 많았다. 그들은 '인'을 가장 적절하고 효과적으로 쓴 덕장이며, 인자였다. 사람
다움을 완성한 인격자였다.
한국인은 인격을 믿어야 그 말을 믿고 그 지휘를 따랐다.
인격과 말로만 사람을 다스릴 수도 없다. 글 첫머리에서 밝혔듯이 사람다움, 한국인
다움의 '다움'은 말과 행동, 마음과 외모, 안과 밖이 하나로 합치되어 실현되었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지도자의 경우는 특히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 하고, 생각과
드러냄이 같아야 한다. '인'의 완벽한 성취인 '다움'의 완성이 중요하다. '인'의 마음
만 있어서는 안 된다. 그건 씨앗일 뿐이다. 싹트고 자라고 꽃피고 열매맺는 성장과 결
실의 인간적 완성의 단계로 나아가는, 실현되어 가는 것을 드러내 보여줄 수 있는 정
신력이 '인'이다.
그래서 지도자적 인간형이 보여주는 태도, 인격적 정신적 행동의 표현을 나타내는
말로 '솔선 수범'이란 말이 있다.
남이 따라오게 하려면, 앞선 이가 먼저 가보아야 한다. 남이 따라하게 하려면 지도
자가 먼저 그 일을 해보여야 한다. 그럴 능력이 있어야 지도자 자격이 있는 것이다.
능력은 없이 말로만 명령하고 남에게 시키기만하는 지도자는 사람들이 따르지 않는
다.
또한 한국사회에서 지도력과 통솔력은 제한된 업무나 한정된 시간으로 끝나지 않는
다. 업무를 떠나 인간적인 화합으로 관계를 맺어야만 한다. 이런 사사로운 정이 한동
안 병폐적인 현상으로 나타나 폐해가 많기도 했다. 그러나 폐해 이상으로 많은 도움이
되고, 인간적 결속을 깊게 하는 측면이 많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가 이루어져 함께
일을 하고, 함께 적과 싸울 때는 냉정한 업무관계나 의무적 관계로 일할 때보다 몇 배
의 능률이 나게 된다.
우리의 역사 속에 나오는 인물을 보아도 뛰어난 지도자는 많다. 그런 지도자의 지도
력은 평범한 때보다 어려운 상황일 때, 국가적인 위기에 처했을 때, 전쟁이 일어날 때
특히 두드러진 능력을 드러냈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행주대첩의 영웅 권율 장군의 경우도 탁월한 덕장의 면모를
보인 지도자다. 그는 단순히 전술이나 의무로 싸움에 임하지 않았고, 부하들을 강압적
으로 밀어부치지도 않았다.
권율이 보인 지도력의 기본 정신이 '인'이었다. 친화력과 애정과 믿음과 너그러움이
었다."연려실기술"에 보면 권율의 인간성과 인간관계를 잘 기술해 놓고 있다.
["연려실기술"은 조선 정조 때의 학자인 연려실 이긍익이 지은 조선시대 야사총서로
59권 42책으로 되어 있다. 400여 가지에 달하는 야사에서 자료를 수집. 분류하고 원문
을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 사서 중에서도 매우 뛰어난 저작인 이 저서는 객
관적인 기사본말체로 기록되었다는 점과 공정한 필치로 엮어졌다는 점이 특징이다.]
"사람을 거느림에 있어서 잘 친화하고 사랑하여 성심을 보이고, 엄격하지 않았기 때
문에 사람이 즐겨 복종함으로써 위급할 때에 힘입었던 것이다"고 그의 인간관계를 평
하고 있다.
권율의 부하관리는 문자 그대로 '인'에 입각한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했다. 엄한 상
관으로서가 아니라 같은 피와 살이 있는 동등한 인간으로서의 횡적인 관계를 갖고 있
었다.
이런 인간관리가 국가적 위기의 상황에서 이치대첩이나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끌게
한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특히 행주산성 싸움에서는 그의 병사가 아닌 일반 주민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행주치
마에 돌을 나르는 지원을 했다는 전설적인 일화까지 남기고 있다.
권율의 인격을 흠모한 일반 백성들이 싸움을 하는 군병 못지않은 헌신적인 지원을
하게 된 마음에는 권율의 '인'을 바탕으로 한 리더십이 큰 작용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인간관리에 있어서도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였던 권율의 전승은 다만 전략 전
술이나 무력만이 아닌 사람의 진심에서 우러나온 마음이 더 큰 힘이 되었던 것이다.
그의 리더십의 요체는 무엇이든지 아랫사람에게 시키기보다는 먼저 자신이 직접 행
하는 솔선수범에 있었다고도 한다.
간언에 의해 옥에 갇혀 있다가 호남의 거진 방어의 특명을 받고 임지로 떠날 때 권
율은 자기의 집도 들르지 않고 그 길로 전선으로 향했다.
"왜 그렇게 떠나십니까" 하고 묻는 승정원 당직인 이항복(권율의 사위)의 말에 권율
은 "내 사사로운 일을 공직에 앞서 보면서 어찌 생사를 가늠하는 싸움터에서 부하를
인솔할 수 있겠느냐"고 대답했다고 한다.
자신에 대해서 엄격하고 부하나 동료들에게는 애정과 신의로써 관대하게 대하는 권
율이야말로 참다운 '인'의 리더십을 갖추고 있는 상사라고 할 수 있다.
[권율(1537-1599)은 조선조 선조 때의 도원수로 자는 언신, 호는 만취당. 광주 목사로
있다가 임진왜란 때 방어사가 되었고, 중랑장을 거쳐 도원수가 되어 이치의 싸움, 임
진왜란 때 3대 전첩의 하나인 행주의 싸움에서 1만 병사로 왜병 3만여를 대파시켜
대승하였다. 정유재침 때 다시 활약 하다가 병사하였다. 시호는 충장이다.]
[이항복(1556-1618)은 조선조 때의 문신으로 자는 자상, 호는 백사. 필운. 임진왜란
때 병조판서로 크게 활약해 오성 부원군에 봉직되고 호성공신의 원훈이 되어 영의정에
이르렀다. 광해군 9년(1617) 폐모론을 극력 반대. 북청에 유배되어 죽었다. '청구영
언'에 시조 4수가 전하며, 저서로 "백사집". "북청일기". "사례훈몽"등이 있다. 시호
는 문충이다.
리더십에 관해서만은 우리가 서구에서 배워야 할 점이 있다.
미국사회의 경우 위치가 높으면 높을수록 일을 많이 한다. 평직원보다 계장이, 계장
보다는 과장이, 과장보다는 국장이 더 일을 많이 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상황은 작은 규모의 기업이건 대기업이건 혹은 공무원사회건 다 같다. 부하직
원은 오후 5시에 퇴근시키지만 상사는 일을 끝내놓고 자리를 떠나야 한다는 의식이 미
국인 조직사회에서는 상식화되어 있는데 그것은 솔선수범이라는 동양적인 윤리관과 상
통하는 지도자적 자세다. 그들의 이런 솔선수범의 태도는 그 조직체가 갖고 있는 책임
감에서 비롯한 것이다. 또 그들의 합리주의 의식은 상사인 자기들이 보다 많은 대우를
받고 있다는 생각에서 당연히 더 많이 일을 한다는 의식을 갖게 했다. 심지어 타이피
스트까지 퇴근시켜 놓고 스스로 다음날 회의에 임하기 위한 타이핑을 하는 상급자가
흔하다.
사람들에게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지시하기 전에 자신이 앞장서서 열심히 일을 한
다. 그런 자세를 지속하면 사람들은 결국 그를 따라 열심히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부하들은 앉아서 쉬게 하라. 그러나 상사는 서서 쉬어라. 그래야 부하들이 당신을
따라온다"는 말은 리더십의 본질을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누구나 다 온전한 '사람'으로 본다
'인'의 자구풀이를 보면 사람됨의 근본인 '신'이 있고 동정할 '인'도 있다. 이 두
가지 '인'의 풀이를 가만히 살펴보면 이 글 속에는 인간접촉에 있어 누구를 막론하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아야 한다는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 접하는 사람이 누구건 자신
과 똑같은 사람으 로 대하라는 뜻이다.
쉬운 말인데 이것이 오늘 우리 사회에서는 잘 소화되지 않고 있다. 현재 우리 사회
가 펼치고 있는 '함께 사는 사회'라는 새생활운동도 이 정신이 그 바탕이 되고 있다고
도 할 수 있다.
출신 지역이 다르다고 해서, 학벌이 다르다고 해서, 사회 계층이 다르다고 해서 눈
에 보이지 않는 차별을 하는 수가 적지 않다. 펼쳐보면 손바닥만한 작은 국토인데도
그렇다.
출신 지역에 따르는 차별을 이야기한다면 당연히 미국과 같은 나라가 더 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출신 지역이라는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미대륙의 동서횡단은 제트 비행기를 타고 쉬지 않고 날아도 5시간을 비행해야 한다.
캘리포니아주와 미국 동부의 주는 문화적인 전통으로 보나, 지리적인 여건으로 보나
다른 나라라고 보는 것이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출신 지역에 따르는 인물의 편견이나 평가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다.
오히려 타지역, 다른 학교 출신이기 때문에 이 쪽에서 갖고 있지 않은 장점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는 것이 보통의 경우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다는 인식,
누구에게나 똑같은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기회균등의 정신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반상의 계급의식이 뚜렷했던 조선시대에 출신 성분에 관계없이 사람의 가치, 귀중한
인간성을 누구보다도 제고한 사람이 황희 정승이었다. 27년 동안 정숭자리에 있었던
조선 초기의 명재상 황희는 너그러운 휴머니즘의 소유자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그는 자신의 손자들이나 노비의 손자들을 똑같이 대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머무
는 사랑방에는 언제나 어린이들이 놀이판을 벌였고 노복의 자식들이 그의 무릎에 앉아
매달리거나 수염을 잡아당기거나 했다고 한다.
심지어 황회 정숭이 붓글씨를 쓰고 있는 자리에서 노복의 아이가 오줌을 싸도 그가
스스로 걸레로 오줌을 훔치면서도 결코 그 아이를 나무라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이런 휴머니즘은 서구의 인본주의에 비해 훨씬 본원적이며 넓
다.
황희 정승이 등장하는 또 하나의 일화가 있다. 황희가 젊은날 시골길을 가다가 검은
소와 누런 소를 부리면서 밭갈이를 하고 있는 어느 늙은 농부를 만났다.
황희가 "노형, 검은 소와 누런 소 두 소 가운데서 어느 소가 일을 더 잘하오?" 하고
물었다. 그러자 일하던 농부가 하던 일을 멈추고 황희에게 다가와서 그의 귀에 대고
소근거리는 목소리로 "검은 소가 일을 더 잘하오"하고 대답했다.
어리둥절한 황희가 "아니 이 말을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할 필요까지야 있소이까"라
고 되물었다. 그러자 농부는 정색을 하고 "아무리 동물이라도 면전에서 자기의 잘못을
말하면 오죽 기분이 상하겠소" 하고 답변했다는 것이다. 이 농부의 말에 젊은날의 황
희는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고 한다.
한국인들은 이처럼 사람만이 아니라 동물에까지 정을 베풀고 마음을 쏟는 어진 민족
이었던 것이다.
이런 어진 마음이 오늘 우리 가슴속에 면면히 이어오고 있음을 스스로 자각해야 한
다.
겉과 속이 같은 인간관계
우리나라 속담에 '정승이 죽으면 문상객이 없으나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상객이 들
끓는다'는 말이 있다.
겉과 속이 다른 인간관계를 꼬집은 속담이다. 사람과 사람과의 교류가 마음에서 우
러난 교류가 아니라 다른 목적이 있는 가식에서 비롯된 것임을 경계한 속담이다.
'인'을 통해 사람을 사귄다는 것은 사람의 본질과 사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사람
이 누리고 있는 종속적인 것, 다시 말해 가문이나 벼슬이나 자산 등을 떠나 사람의 됨
됨이를 보고 사귄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이 가르치고 있는 사람 사귐의 본질이다.
그런데 요즈음 사람들은 인간관계의 본질을 떠나 이해뿐인 교류만을 갖는 것 같다.
그래서 권력이나 금력이 있는 사람에게 접근하려 하고 그런 속성이 싫어지게 되면 언
제 그랬냐는 듯이 그간의 우정을 하루아침에 내팽개친다. '인'이 가르치는 우정은 친
구가 좋은 환경에 있을 때나 곤경에 처해 있을 때나 계속 조언자로서 협력자로서 필요
할 때 옆에 있어주는 정신이다.
그 좋은 예를 우리는 중종 때의 인물인 김안국이라는 학자의 모습을 통해서 볼 수
있다. 김안국은 가까운 친구로 김안로란 사람을 어렸을 때부터 사귀고 있었다. 두 사
람의 우정은 처음 사귈 때부터 한결같았다.
김안로는 출세지향형의 인물로서 지조가 곧은 선비사회에서는 속으로 지탄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가 워낙 권력의 핵심에 있었기 때문에 누구나 그를 가까이하려
고 했다. 속으로는 욕을 했을망정 그의 권력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은 그의 주변에 몰려
들였던 것이다. 그러나 김안국은 어렸을 때부터 그와 친한 사이였지만 김안로와의
우정을 다른 목적으로 이용한 일이 없었고 언제나 같은 차원에서 머물러 있었다. 아니
그보다 그의 행실을 준엄하게 꾸짖을 때가 더 많았던 것이다.
김안국 형제가 모함에 의해 옥에 갇혔을 때가 있었는데 김안로가 다른 사람은 그대
로 두고 친구인 김안국만 빼냈던 일이 있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김안로가 친구인 김안국을 찾아와 정담을 나누게 되었는데 김안
국이 오히려 자신만을 구해낸 일에 대해 김안로를 마구 꾸짖는 것이었다. 법 집행상
형평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권력의 핵심에 앉아 있어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는 처지에 있는 그의 비리를 서슴
없이 지적하고 마구 규탄하는 것이다. 그러나 듣고 있는 김안로도 차분히 앉아 이야기
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지언정 낯을 붉히거나 이에 대해 격한 말을 하려 하지 않는 것
이었다.
그러던중 세월이 흘러 김안로가 역신으로 형을 받아 죽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이제
까지 그를 찾아다녔던 사람들은 발길을 끊게 되었다. 그를 찾아가는 문상객은 한 사람
도 보이지 않았다. 사실 역신으로 형을 받아 죽은 사람을 문상하러 갔다가는 어떤 문
책을 당할는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김안국은 떳떳이 그를 문상갔다. 나라에 죄
를 입어 형사한 김안로의 집에 문상을 간 사람은 김안국 한 사람뿐이었다고 한다.
이것이 '인'과 '의'를 바탕으로 한 교우다. '인'의 우정은 잘못했을 때는 준열하게
그 잘못을 꾸짖고 어려운 곤경에 처해 있을 때에는 좋은 입장에 있을 때보다 더 자주
찾아보고 위로하며 같은 처지에 서려고 하는 정신이다.
[김안로(1481-1553)는 조선조 중종 때의 권신으로 자는 이숙, 호는 회락당. 좌의정까
지 지냈으나 여러번 대옥을 일으켜 자신의 반대파들을 내쫓았다. 결국 사사되었다.]
[김안국(1478-1543)은 조선조 때의 문신. 학자로 자는 국경. 호는 모재다. 박학능문한
성리학자로서, 천문지리에도 정통한 그는 조광조와 함께 기치주의를 주장했으나, 급격
한 개혁에는 반대하였다. 경상 감사로 있을 때 향교에 소학을 나누어주어 가르치게 하
고, 농서. 잠서의 언해와 벽은방. 창진방 등을 간행 보급하였다. 저서에 "동몽 선습",
"이륜행실록" 등이 있다.]
오늘 우리 사회를 가리켜 정이 없는 사회, 인정이 메마른 사회라고 말하기도 한다.
한국인들은 원래 어느 민족보다도 정이 많다. 정이 많고 인정이 풍부한 민족이다.
그런데 이런 정에 앞서 이해상관을 따져 갖는 교섭만이 판치고 있기 때문에 따스한
정이 메말라 있는 듯이 보이는 것이다. 친구 사이의 관계도 어진 마음에 의해 싹트는
것이기보다 이해에 얽혀, 피상적인 관계로 지속되기 때문에 정작 참다운 우정을 찾아
보려고 할 때에는 전혀 눈에 띄지 않게 되는 것이다.
길을 가다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정이 갖는 '인'의 인연은
가없이 깊고 넓은 것이다.
성실'은 최대의 자산
대인접촉에 있어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 것은 '성실'이다. 일단 사람이 성실하
다고 평가를 받으면 어떤 일이라도 성사시킬 수가 있다.
비단 우리나라와 같은 동양권내에서만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실용주의 생활습관이
뿌리박혀있는 서구에서도 성실한 사람에게는 끝내 감복하고 만다.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한 한국인이 겪은 일이다.
미국의 어느 직장에서 그는 그야말로 성심을 다해서 일을 했다. 아침에 일찍 회사에
출근한다. 9시 정각부터 업무가 시작되지만 30분 전에 도착하여 책상을 정리하고 간단
한 주변의 청소를 한다. 그리고 다른 동료처럼 아침 9시에 본격적인 일을 했다. 점심
시간도 남보다 짧게 갖고 일을 했다. 저녁의 퇴근 시간은 오후 5시 30분. 다른 사원들
은 5시 30분 정각이면 마치 기계처럼 일하던 손을 놓고 소지품을 챙겨들고 퇴근을 한
다.
그러나 이 한국인은 퇴근시간이 되어도 하던 일을 끝마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
던 일을 도중에서 중단하기가 싫었던 것이다. 그리고 일을 끝낸 후에는 책상을 정리하
고 주변을 깨끗이 마무리하고는 사무실을 떠났다.
이런 직장생활이 몇 개월 계속되자 주변 동료들이 따돌리는 것이었다. "왜 일을 더
하는지 모르겠다" 혹은 "그렇다고 급료가 더 많아지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다"는 등의
손가락질을 하는 것이었다.
동료뿐 아니라 직속 상관도 그를 이상하게 보는 것이었다. 심지어 '오버타임' 수당
을 노리기 위한 것인지 모른다고 생각한 상급자가 어느날 그에게 '오버타임'이 우리
직장에서는 필요하지 않으니 남들처럼 제시간에 와서 제시간에 자리를 뜨라고 말하기
도 했다.
영어가 짧아 마음속에 있는 뜻을 충분히 설명할 수가 없었지만 이 한국인은 '오버타
임'을 원해서가 아니라 하던 일을 마저 끝내놓고 가려는 생각과 아직 일을 잘 모르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더 일을 배우려는 생각으로 좀 오래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이라고 설
명을 했다. 일을 열심히 하겠다는 뜻을 전달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이후의 반응은 계속
냉담했다. 이제는 아예 '워크흘릭(work-holic, 노동중독자)'으로 몰아붙이는 것이었
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알콜중독자를 알콜릭 (al-cohollc)이라고 말하듯이 일을 하지 않으면 못 견디는 사람
을 워크흘릭이라고한다. 일종의 정신병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이런 가운데서 1년이 지나고 2년을 맞이하게 되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점점 바뀌
어갔다. 이들은 이 한국인의 성실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아예 '워크흘릭'이라고 정
신병자 취급을 하거나 '오버타임'을 노리는 돈독이 오른 사람이라고 수군대던 사람들
이 그의 부지런하고 성실한 근면성에 감복된 것이다.
청소는 청소부의 일이라고만 생각해 온 직장 동료들이 저녁때 자리를 뜰 때 주변을
정리하고 떠날 때면 그의 어깨를 툭 치면서 "너는 참 멋진 사람이야"라고 하는 것이었
다. 2년을 넘기는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직장동료들이 이 한국인을 '올해의 최우수 사
원'으로 선정하고 모두가 한마음으로 축하의 박수를 보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다. 성실이야말로 오랜 옛날부터 한국인이 가장 높이 여
겨온 덕목이었다.
성실은 어느 사회 어느 이질환경에서건 인간관계에 있어 가장 큰 자산인 것이다.
[러스킨(buskin, John)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만약 어떤 목표없이 인생
을 허송세월한다면 그 일생은 물론 단 하루라도 인생의 존귀한 것은 모르고 말 것이
다....인생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고, 성실로써 내용을 이루어 가는 것이라야 한다. 우
리는 하루 하루를 그저 보내는 것이 아니고, 하루 하루를 내가 가진 그 무엇으로 채워
가는 것이라야 한다." 또한 "중용"에는 다음의 글이 있다. "성은 천리본연의 길이며,
그 성을 몸에 얻으려고 노력함은 반드시 사람이 해야 할 길이다."]
자연과 인간의 조화
우리 전통의식의 뿌리에는 삼재사상이 있다.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을 뜻하는 3재를 근본으로 하는 이 정신체계의 기본은 사람
이다.
하늘은 위대한 것이지만 하늘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땅은 우리 인간의 삶을 지탱해 주는 터전이지만 땅만으로는 그 가치가 없다.
사람이 있기 때문에 하늘과 땅을 통합하는 조화의 세계를 이루고, 대자연의 위대성
이 발휘된다고 믿는다.
한국인의 이러한 의식이 삼재사상의 바탕이 된다. 하늘과 사람과 땅, 이 세 가지가
사람 중심으로 해서 조화를 이를 때 온전한 우주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우리 민족의 마
음속에 오랜 옛날부터 뿌리박혀 내려왔다.
[삼재는 중국 고대의 사상으로 우주의 세 가지 근원, 즉 천. 지. 인을 가리킨다. 삼재
사상에는 '인간은 자연에 순웅해야 하는 존재, 또 스스로 만물을 기르는 천지의 작용
에 참가해야 하는 존재며,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발견할 수 있다. 천지의
움직임은 무한한 조화와 목적이 있는 법칙성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세
계에도 역시 공통되는 것이다'라는 철학을 품고 있는 사상이다. 삼극이라고도 한다.]
이 삼원의 세계는 상대성에 의해 변하는 것이며 그러기 때문에 그 변화의 매개자인
인간은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중심적 위치에 있다.
이런 한국인의 사상은 한민족이 한반도에 정착하기 시작하던 아득한 옛날부터 한
국인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말을 타고 수렵을 하던 기마족이었던 우리의 먼 조
상들이, 유목생활에서 농경생활로 정착하면서 자연과 사람과의 조화를 삶의 근본태도
로 생각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농사는 하늘과 땅이 화합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생산해 내지 못하기 때문에 농경민족으로 자리잡으면서, 한국인의 의식은 자연과의 조
화를 강하게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연과의 조화는 하늘과 땅을 잘 이용한다는 것과 같다. 사람이 우주의 중심이요,
하늘과 땅을 조화시키는 가장 존귀한 존재라는 인식은 우리의 건국신화에서부터 나타
나는 우리 민족의 핵심사상이었다. 건국신화에 있어서 왕(통치자)은 신격화되는 게 보
통인데, 우리의 경우에는 고대한국의 창시자며 왕인 단군부터 인간이었다는 것이 강조
된다. '천지인'의 삼재사상은 태극의 삼색무늬처럼 둥근 원형 속에서 조화를 이룬다.
그 조화의 가운데가 사람이다.
[사람이 우주의 중심이요, 하늘과 땅을 조화시키는 가장 존귀한 존재라는 인식은 우
리의 건국신화에서부터 나타나는 우리 민족의 핵심사상이었다.]
이제마는 "동의수세보원" 서문에서 "하늘과 사람과 땅은 로직 하나의 생기의 화기
다"고 말하고 있다. 하늘, 사람, 땅을 부분으로 보았을 때에는 삼극의 생이고 전체로
합치면 화기를 이루어 태극 같은 조화를 이룬다는 것이다.
[이제마(1838-1900)는 조선 후기의 한의학자로 사상의학의 시조다. 자는 무평, 호는
동무. 한의학에 뜻을 두어 수세 보원의 학설을 창안, 확립하고 많은 중환자들을 고쳤
다.]
농사를 천하지대본으로 내세우고 있는 한국인 고유의 사상도 사람이 천지를 조화한
다는 의식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농자천하지대본'이란 말은 '농사짓는 사람은 하늘,
땅, 인간의 삼재를 조화시키고 실현하는 자'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한국인의 의식을 대
표한다.
실학자의 한 사람이었던 이규경은 농업을 재물의 근원으로 보고, 천시에 따라 지의
를 이용하여 인력을 대하는 것으로 풀이했다. 천시란 계절이나 기후와 같은 하늘이고
지의는 논밭과 같은 땅이다. 그리고 기후에 맞추어 씨를 뿌리고 땅을 갈아 밭을 일구
는 것은 인간이다. 하늘의 힘과 땅의 힘을 사람이 조화시키는 것이 곧 농업이며, 그런
조화를 이루는 사람이 천하지대본이라는 말이다.
[이규경(1788- ? )은 조선 현종 때의 실학자로 자는 백규, 호는 오주 또는 소운. 중국
과 조선 기타 고금의 사물을 고증한 "오주연문장전산고" 60권을 저술하였다.]
이처럼 우리나라 사람은 오랜 옛날부터 인간 중심사상의 뿌리를 지니며 살아왔다.
이 전통사상이 근세에 와서 보다 분명한 인간존엄사상의 체계로 나타난 것이 동학의 '
인내천'사상이다.
인내천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간존엄사상을 말해 준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사상은 인간성 속에 영원한 존엄성이 있고 사람의 마음 속에는 하늘과 같이 범할 수
없는 신성함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인내천은 천도교 교리의 하나로, 사람이 곧 하늘이며 만물이 모두 하느님이라고 보는
사상이다 이러한 신관에서 비롯된 인내천의 교리는 인간을 누구나 평등하게 보고, 근
본적으로 귀천이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삼재, 삼원사상이나, '농자천하지대본'의식, '인내천'사
상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고유하게 지니고 있던 사상의 한 맥락으로써, 인간중심주의와
자연과의 조화사상의 기초가 된다.
한국인이 자연과의 조화를 마음의 바탕에 두고 있음은, 고대 이후 최근까지의 l여러
문화예술 작품 곳에서도 큰 맥을 이루고 있음을 보면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고산 윤
선도의 시조 '오우가'의 경우도, 자연을 벗으로 생각하는 자연조화의식이 기본이 되고
있다.
수. 석. 송. 죽. 월 등 다섯 가지의 자연물을 다섯 친구로 생각하고 노래한 이 시에
서, 우리는 한 시인의 시심을 읽기 이전에 한국인의 마음속에 뿌리박혀 있는 자연과의
합일사상을 읽을 수 있다. 이 다섯 가지 자연물은 시인의 마음과 합일되면서 동시에
한국인의 마음과 합일되고 있다. 이것들의 특징은 그대로 한국인의 마음의 특질을 나
타낸다고 하겠다. 이 모든 마음의 바탕을 이룬 성질은 '인'의 사상과 상통하는 것이
다.
[윤선도(1587-1671)는 조선 중기의 문신. 시조 작가로 자는 약이, 호는 고산. 여러 관
직을 역임하였으나 성격이 곧고 강하여 27여 년을 귀양살이했고 19년간을 은거 생활을
했다. 문집인 "고산유고"에 시조 77수와, 한시문 외에 두 권의 가첩이 전한다.]
오늘 우리 사회는 인간 부재, 인명 경시, 인간 소외라는 말을 자주 쓰고 있다. 인간
부재나 인명 경시의식은 한국인의 본래적인 마음이 아니다. 부지불식간에 우리나라에
침투해 온 외래관습이 우리답게 적응되지 못한 채 드러난 마음의 허상이라 할 수 있
다.
'우리'로 융합되는 한국인의 마음
한국인은 어법상 '나'라고 표현해야 할 자리에 '우리'라는 말을 쓴다. 나의 집, 나
의 학교, 나의 어머니, 나의 형제라고 표현하지 않고 우리 집, 우리 학교, 우리 어머
니, 우리 형제라고 말한다.
영어로 표현하면 마이 스쿨(my school), 마이 머더(my mother) 등 '마이'라고 써야
할 경
우에 우리는 '아워 (our)'라는 말을 쓴다.
논리적으로는 어법에 맞지 않는 말이다. 그러나 한국인이 많이 쓰는 '우리'라는 말
은 영어의 '위(we)'나 '아워'와는 크게 다른 뜻이 내포되어 있다.
영어에서의 '위'나 '아워'는 단지 '아이(I)'의 복수다.
그러나 '우리'는 '나'의 복수를 가리키는 뜻 외에 한국인만의 독특한 인간의식이 잠
재된 또다른 복합적인 의미가 첨가되어 있다.
'우리'는 '나'의 복수이기 전에 '울+이'로써'을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
나'라는 독자적 개인의 복수가 아니라 하나의 공동체 상황 속에 있는 사람들이란 뜻이
'우리'라는 말속에 내포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단순한 숫자적인 개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공간의 개념,
운명과 상황의 개념에서 나온 독특한 한국어다. 영어에서 '위'라고 할 때에는 그 '위'
안에 불특정 다수의 '아이'가 독립된 개체로 존재한다.
그러나 한국어의 '우리'는 '나'라는 개체의식 없이 한데 어울려 있는 복합체를 말한
다. 운명을 한데 나누는, 한데 어울려 있는, 한 묶음 속에 존재하는 사람들을 지칭하
는 낱말이다. 여러 명이 독자적인 '나'가 아니라 하나로 일체화된 '나'가 '우리'다.
그래서 '나'를 쓸 자리에 '우리'란 말을 써도 이상하지가 않은 것이다.
'우리 식구'라고 말할 때에도 울 안에 있는 사람들, 즉 하나의 존재공간 속에 통합
되어 있는 사람으로서의 가족이라는 뜻이다. 영어의 '마이 패밀리(my family)'와는 의
식의 내용이 다르다. 울 안에서 함께 기거하고 있는 같은 동아리의 사람들이라는 뜻에
서 '우리'는 여러 명의 개체가 아닌 하나다. 그래서 '저 사람은 우리 식구'라고 말할
때에는 직계가족만을 뜻하지 않고 동료나 공동운명체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을 뜻하
기도 한다.
이런 한국말의 특이한 쓰임은 옛부터 한데 어울려 살던 공동체 생활양식에서 비롯한
것으로 해석된다. 한민족이 농경생활로 정착하면서, 인간 관계에 대한 인식이 개체보
다는 공동체가 우선한다는 화합의 개념에 큰 영향을 받은 데서 기인하는 해석이다.
서구 개인주의는 유목민의 생활방식에서 싹튼 것이다. 조화와 화합의 공동체의식은
농경생활에서 그 바탕이 이루어졌다.
유목민은 여럿이 함께 협동하여 일하는 농경민과 달리, 뿔뿔이 흩어져서 자신이 기
르는 양메나 소떼를 먹일 목초지를 찾아나서야 한다. 어디까지나 개체로서 행동하는
방식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다.
이와는 달리 농경민은 협동하지 않고 살 수가 없다. 농업이란 제한된 시간과 장소에
서 하는 것이다. 목축은 시간에 얽매이지 않으며 공간이동이 자유롭다.
농사는 때를 놓쳐서는 안 되며 생업의 공간도 일정하여, 자손대대로 한 곳에 뿌리박
고 살게 되어 있다. 싫으면 그만둘 수 있고 떠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 환
경과 상황에 적응하여 같이 어울리지 않으면 안 된다.
적기에 파종해야 하고 때맞춰 손보고 거두어야 하므로 모든 사람이 함께 힘을 모아
야 한다.
그래서 농경민인 우리 민족은 옛부터 함께 어울려 협조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생활
전통이 체질화한 것이다.
이런 생활환경이 '나'의 복수로서의 '우리'가 아니라 한데 어울려 삶을 공유해야 하
는, 울 안에 함께 존재하는 '우리'라는 한국인 특유의 공동체의식을 표현하는 언어가
발생되게 한 것이다. 그래서 한국인은 체질적으로, 그 본성 속에 서로의 인격을 존중
하고 공동운명체로서 함께 살아야 한다는 의식을 자연스럽게 지니게 되었다. 이런 한
국인의 마음에 잘 맞는 사상의 바탕인 '인'이 한국인들의 윤리도덕관으로 받아들여지
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잠깐 일본인들이 단합과 화합의 대표적 명사로 내걸고 있는 '화'와 한국인
들의 공동생활체의 규범인 '인'을 비교해 보자.
'화'는 '곡식을 나누어 먹는 입'이라는 뜻이다. 곡식을 함께 나누어 먹기 위해 찬데
어울려 있다는 뜻도 된다. 그러므로 '화'는 곡식이라는 물질적 재물과 육체적 생리적
한계성과 관계가 있는 말이며, 그런 의식을 대표한다.
따라서 '화'는 아무리 고르게 곡식을 나누어 먹는다고 해도 제한된 범위 안에서의 '
화'를 나타낸다. 그 물질적 조건이 맞지 않을 때는 불화, 대립의 양상으로 전이될 수
밖에 없다.
그러니까 곡식이 넉넉하면 조화로운 관계가 가능하지만 곡식이 부족하면 그 조화관
계는 깨질 수 있다.
그러나 '인'은 생리적 물질적 차원이 아니라, 정신적인 차원이며, 마음의 관계다.
인위적으로 또는 물질적으로 분리할 수 없는, 정신적 조화로써의 윤리다. 그래서 인간
은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고 한데 어울려 살아야 한다는 정신자세를 갖게 된다. 따라서
'인'이 '화'보다 훨씬 협조와 결집력이 강할 수밖에 없다.
'화'를 중시한 일본인보다, '인'을 중시한 한국인의 '울이'가 훨씬 포괄적이고 신축
성있는 정신능력을 나타낸다고 하겠다.
우리의 힘은 이처럼 '우리'로 묶여지는 융합, 화합에서 생기는 것이지 대립에서 나
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묶는 마음의 끈인 '인'의 사상을 끊임없이 새로운
창조의 매듭으로 이용해야 할 것이다.
큰 사랑의 씨앗 - 꽃동네 오웅진 신부
충북 음성에 기적의 꽃동네가 있다. 그리고 이곳에는 우리나라 최대의 복지시설이
세워져 있다. 지난 15년 동안 이 경이의 땅을 가꾸어온 분이 오웅진 신부다.
그는 1976년 8월, 31세의 나이로 막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5개월만에 음성이라는 작
은 시골 마을 성당의 주임신부가 됐다. 그로부터 불과 3개월 만인 같은 해 11월, 오신
부는 그 외진 땅에 기적의 꽃씨를 심게 된다.
티끌만한 씨앗을 심기 위해 그는 삽질을 시작했다. 그리고 용왕산 기슭에 다섯 동의
집을 지었는데, 그 집은 1천 300원 짜리 시멘트 블럭집이었다. 아무도 1천 300원이라
는 적은 돈이 집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이는 없을 것이다. 1976년, 15년 전이라 해도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보잘것없는 초라한 집이 1천만 원을 하던 때였다.
그러나 당시 오신부가 가진 전부였던 1천 300원이 시멘트로 바뀌고, 시멘트는 벽돌
로 바뀌고, 작은 벽돌들이 쌓여서 집이 되었다. 아마도 그건 지상에서 볼 수 있는 가
장 작은 천국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곳은 18인의 갈 곳 없는 부랑인과 장애자에겐 너무나 평화로운 사랑의 보금자리였
다. 젊은 신부의 집념과 땀이 만들어낸 작은 천국은 그렇게 이 땅 한 구석에 자리잡게
되었다.
그로부터 7년 뒤인 1980년, 청주교구 사제 총회가 나서서 지금의 꽃동네가 세워진
위치인 맹동면 인곡리에 사랑의 꽃씨를 심기에 이른다. 사랑이란 본래 씨앗과 같은 것
으로 생명의 근원이라고 믿고 있는 한국인의 뿌리 깊은 의식이 천주교 사제들에 의해
큰 사랑의 꽃을 피우는 꽃동네의 모습으로 우리 눈앞에 생생히 드러나게 된 것이다.
거기에 또 24만여 명의 손길이 모여 그 복된 땅을 꽃이 지지 않는 마을로 키우자는 뜻
을 실현했다. 익명의 독지가는 인근의 산 2만 평을 내놓기도 했다.
그리하여 1983년부터 1985년까지 부랑인들이 살 집을 지어 815명의 큰 식구를 맞아
들였다. 이어서 정신질환자들을 위한 요양원이 세워지고 400여 명의 정신 장애자들이
이 복지마을에서 영혼의 평화를 얻을 수 있는 진료의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노인의 집이 생기고, 병원이 들어서고, 登양원이 건립되고, 사랑의 연수원이
세워져 우리나라 최대의 사회복지 시설이 되어, 지금은 1천 740명의 대식구들이 살고
있다.
이 복지의 땅은 오늘도 정신장애자, 불구자, 걸인, 부랑자, 알콜 중독자, 노인 등
불우하고 외로운 영혼을 불러들여 평화롭고 기쁨에 찬 삶의 시간을 나누어준다.
씨를 심으면 싹이 나고, 꽃이 피고, 다시 얼매가 맺어진다. 생명의 이치는 곧 사랑
의 이치다.
하늘과 땅의 기운을 합하여 새 생명을 일구어내는 존재가 사람이다. 사람의 마음에
서 나오는 정성과 사랑은 씨앗과 같아서 반드시 위대한 생명을 키우게 된다. 그런 마
음을, 우리나라를 비롯한 유교문화권에서는 인이라고 한다. 기독교나 불교에서 말하는
사랑과 자비가 곧 '인'의 덕목과 같은 것이다.
'인'의 사상적 원리는 유교의 바탕이 되지만, 본래 한국인의 마음에는 사람을 사랑
하는 마음의 뿌리가 깊다.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씨앗처럼 자리잡고 있는 정신의 생
명력이 '인'이었다.
우리가 어떤 종교를 믿고 살아가든 수전 년을 이어온 한국인다운 생명의 본질이나
의식의 본성은 다를 리 없다 우리의 본성은 언제나 융합과 조화의 미를 이루는 정신적
특질을 지니고 있다. 우리의 역사는 한국인의 우수한 창조적 화합능력에 의해 유지되
어 왔다. 그런 성질은 우리 문화의 특성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천주교 사제로서 성직을 맡고 있는 오웅진 신부의 정신적 근본은 어디까지나 그 종
교에 있을지라도, 그 마음의 깊은 바탕에는 한국인다운 독특한 '인'의 정신이 배어 있
음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너도 나도, 이 꽃동네를 돕겠다고 마음을 보태고 손길을 보탠 24만여 멍의 사람들과
오웅진 신부와 불우한 처지의 사람들 1740멍, 이들은 바로 각기 혼자서는 이를 수 없
는 일을 함께 화합하여 이룬 것이다. 이들은 하늘과 땅을 화합하는 사람의 일을 한 것
이다.
꽃동네의 보호 수용자와 이를 후원하는 숨은 손길을 화합하여 큰 사랑을 성공적으로
가꾸어낸 오웅진 신부야말로 한국인다운 덕목을 갖춘 대표적 인물, 즉 인자다운 인간
형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지금 이 땅에는 오웅진 신부 외에도 많은 '인자'가 있을 것이다. 그 중에 특히
오웅진 신부를 대표적인 사례로 소개하는 것은, 그분이 이룬 사랑의 큰 뜻이 한국인다
운 사랑과 천주교적인 사랑이 아름답게 조화 융합되어 우리 모두의 마음을 밝게 비추
고 있기 때문이다.
'인'이란 이렇게 지난 시대의 낡은 인격윤리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날 우
리 시대의 등잔 속에 잠긴 불의 심지다. 불을 당기면 불꽃을 밝히는 심지요, 어두운
땅 속에서 생명의 싹을 돋아올리는 씨앗이다. 그와 같은 생명의 힘은 한국인의 마음속
에 유전인자처럼 간직하고 있는 '인'에서 나온 것이다. 오웅진 신부와 같은 큰 사랑의
얼굴에서 우리는 오늘 우리 시대의 '인'을 느낄 수 있다.
'의' 그것은 올바른 사회규범을 따르는 마음이다
'의'는 양 '양'자와 나 '아'자가 합쳐서 이루어진 글자다. '양'과 '나'가 함께하는
관계는 무엇을 나타내는가.
양이란 짐승의 속성을 생각해 보자. 우선 양은 반드시 무리지어 사는 짐승이며, 그
성질이 온순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여 베푸는 삶을 사는 짐승이다. 이런 성격
은 개인을 위한 개인적 삶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여럿이 함께 사는 삶의 방식을 나
타낸다. 공동생활에는
반드시 공통되는 질서와 규범이 있다. 하나의 사회를 이루는 기본적인 원칙은 소속된
모든 개체의 삶을 보다 이롭고 바르고 옳게 이끌어주는 것이다. 그래서 '의'라는 글자
는 '양'과 '나'라는 공동체 속에서의 나의 자세와 인간관계를 나타내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인이라는 글자는 사람 인자가 강조된 말이다. 따라서 '인'이 나타내는 뜻은 사
람의 본질적인 성격을 말하며, 인간의 추상적이고 근원적인 철학, 사상에 관한 것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 비해 '의'는 보다 구체적인 현실과 관계되는 것으로 '인'의 실천적인 면을 강
조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인'에서도 물론 인간관계를 나타내고는 있지만, '의'에서
의 인간관계는 개인 대 개인의 관계보다 다수의 사회적 공동체 속에서의 사람의 존재
의식이 주로 실천적 측면에서 강조되고 있다.
그래서 대의라는 말에 '의'의 본질이 잘 함축되어 있다. 여기서 대란 공동체 다수가
이루는 사회, 국가 등을 말하는 것이다.
그와 대비되는 것은 소라 할 수 있다. '소'는 바로 나라 할 수 있다. 개체적 존재로
서의 나라. 전체 다수의 존재에 비해 나는 작은 존재다. 전체인 '대'를 위해서 '소'인
나는 의로운 태도와 행동과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게 '의'의 기본 정신이다.
'대'의 사상으로만 '의'의 정신이 고정되는 것은 아니다. '대'든 '소'든 나 아닌 남
을 생각하고 행하는 태도가 '의'의 기본이다. '인'과는 그 근본 정신의 개념에 있어서
는 같다고 할 수 있다.
사회생활에 있어 '의'는 구체적이고 행동적인 표현이 중시되는·실천적 사상의 근본
이다.
'의'의 글자 뜻이 '옳을 의' '바를 의'다. 옳고 바른 것에 마음과 행동이 일치되어
나타나는 것이 '의'다. 그래서 '의'는 '인'보다 좀더 정확한 기준이 있다. 사사로운
정이나, 너그러움의 신축성있는 인성과는 좀 다른 측면이 '의'에서는 강조된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사로운 정의 관계라도 무시하고, 생각하는 바를 끝까지 밀
고나가 실천하는 것이 '의'다. '의'자가 들어가는 말로, 의사, 의리, 정의 등이 있다.
'의'란 한 사람의 개인적 판단이나 기준이 아니라 사회를 이루는 여러 사람이 공통
으로 지닌 옳은 생각이 기준이 되는 것이다.
푸른 목초지를 따라 움직이는 양떼들의 단체움직임에서 한두 마리의 양이 떨어져서
는 살 수가 없듯이 사람들도 그 사회가 지향하는 사회규범에서 벗어나서는 살 수가
없다. 살 수는 있을지 모르되 올바른 삶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오늘의 사회에서도 분명히 변함없이 지녀야 할 태도는 도덕적인 공동의식으
로서의 사회규범에 대한 동참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의'에 대한 사례를 많이 얘기하
고 '의'의 중요성을 거듭 설파했던 공자는 '의'를 '사람이 이상적인 사회생활을 영위
하기 위한 객관적인 규범'이라고 그 핵심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고 싶어한다. 그러나 사람의 개성에 따라 처해
있는 환경이나 성장 배경에 따라 이상적인 사회를 보는 시각이 약간씩 다르다. 한마디
로 사회정의라고 표현되는 그것이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그 내용이 약간씩 다를 수
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회 속에서 함께 삶을 나누고 있는 사람들이 보는 공통적인 시각이 있는
것이다. 공통분모가 있다. 함께 걸어가는 공동지표가 있고 그 공동지표에 도달하기 위
해 사람들이 함께 나누는 공감대가 있다. 이것을 우리는 객관적인 사회생활규범 또는
사람의 도리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의'는 '인'에 비해 사회적인 개념이 더 강조되고 보다 이성적인 뜻이 근본
이 된다.
'의'자가 들어간 말로 이미 예를 든 '의사'란 말을 생각해 보면 '의'의 뜻이 보다
분명하게 이해될 수 있다. 안중근 의사나 윤봉길 의사 등 의사란 칭호를 붙일 수 있는
인물은 국가민족을 위해 자신의 개인적인 것 '사'를 희생한 사람이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의'를 찾는 것은 민주주의 의식과 상통하는 일이 된다. '의'는
한국인의 민주주의 의식의 기본이라 할 수 있다.
공동의 이익과 목표를 위해 희생과 봉사를 자원하는 사람이 곧 의인이다.
'의'에는 희생이 따를 수밖에 없다. 목숨까지 바치는 희생도 있지만, 목숨이 아니라
도 자신의 이득과 편리를 버리고 공공의 이익과,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게 될 때
많은 물질적 정신적 희생을 하게 된다.
희생양이란 말처럼, 양은 인류 역사상 사람에게 줄곧 희생되어 온 동물이다. 언제나
털과 가죽과 고기를 사람에게 제공해 주었다. 그런 물질적 희생뿐이 아니라 사람의 신
앙, 종교생활에 있어서 양은 희생의 상징물이 되었다. 그 희생의 정신이 '의'고, 그
실천이 '의'다. 다수를 위해 희생하는 '의'의 위대성을 실현하지는 못하더라도 공공의
질서, 규범을 지키는 생활태도를 지닌다면 그 사람도 의인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
의'라는 회의문자가 말해 주듯이 바른 길로 향하고 있는 양의 무리에 자신을 일치시키
는 일이 곧 '의'인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의'란, 함께 삶을 나누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옳다고 보고 있
는 공동목표, 그 사회구성원의 공감대를 이루고 있는 도리를 알고 이에 조화하려는 마
음이다. 내일의 사회를 보다 풍요롭고 정의롭게 키워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태도가
'의'다.
참다운 사회, 번영하는 국가가 되는 가장 구체적이고 근원적인 힘은 '의'에서 나오
는 것이다. '양'과 '나'가 합치되는 삶이 의로운 삶이고, '양'과 '나'가 떨어지는 삶
은 불의요, 생존불능이 된다. 그래서 '양'의 사회로부터 벗어나는 삶, 그런 행동과 태
도를 금지하지 않고는 하나의 사회가 유지되지 않는다.
옛날에 법무담당 관청을 의금부라 했다. 그 명칭에서 우리는 국가 기강인 법의 정의
를 '의'에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의'는 사회 규범, 법률의 기준이었고, 그래서 나라
에서는 '의'에 벗어나는 일을 금하는 관청을 두었고 그 이름을 의금부라 했던 것이다.
법에 앞서는 사람다움의 도리
한국인들은 대체적으로 사람이 사람다운 도리에 맞게 사는 것을 최상의 생활규범으
로 생각한다. 따라서 법은 부차적인 것이고 법이 개재하게 되면 무엇인가 잘못된 상황
이라고 본다. 그 이유는, 사람은 살아가면서 모두가 법 이전의 전통적인 생활규범, 도
덕률, 윤리의식 등을 따라야만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른들에게는 공경
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하고 이웃 사람이나 친구들에게는 사랑과 신의를, 형제 사이에
는 우애가 있어야 한다는 일반적인 도덕률이다.
국가 민족을 위해서는 사를 버리고 충의를 지켜야 하며, 한 집단내에서는 그 집단내
의 규범을 따르고 소속인으로서의 의리를 지켜야 한다고 믿는다.
부정한 행위를 하면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하지만 그 행위의 배경에 의로움이 숨어 있
으면 그에 동정하는 여론이 높다.
그래서 옛날에는, 의도니 의적이니 의병이니 의사니 하는 이름을 붙여 '의'가 개재
된 행위에는 특별한 평가를 하는 사회적 인식이 강했다. 반대로 작은 잘못이라도 신의
를 배반하고 인간관계의 기본 도리를 벗어나면 준엄하게 다스렸고, 공동사회의 일원으
로서
소외당하는 입장에 처해졌다.
인간으로서의 천륜을 어기는 행위에 대해 다른 일에 비해 법적 제재가 엄격한 우리
의 법정신도 한국인의 근본의식에서 비롯된다.
부모, 스승에 대해서는 설사 그들이 좀 잘못을 보이더라도 맞대어 항의하는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되는 게 우리 사회의 법도였다. 논리적으로만 보면 부당한 것 같지만, 마
땅히 본받아야 할 어른에 대해서는 일판 신뢰를 지니고 존경심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의식이 사회의 정신질서를 유지해 온 힘이었음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살상의 흉악행
위를 저지르지 않는 한 스승이나 웃어른에 대해선 예를 갖추고 대하는 게 도리다.
친부모형제인 경우는 설사 살상의 행위라도 혈육의 의리로 감싸는 게 한국인의 근본
마음이었다. 역으로 생각하면 그런 의리가 분명한 사회에서는 흉악범죄가 일어나기 어
렵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의로운 사람, 마음 좋은 사람을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칭송한다. 이 말
은 그 의인을 칭송하는 뜻도 있지만, 법은 없어도 좋은 것이라는 인식이 한국인의 일
반적인 생각 속에 뿌리박혀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웬만한 일을 가지고는 법 앞에 나가 재판을 받는 일을 금기로 생
각하고 있다. 남에게 사기를 당하고 많은 재산을 빼앗긴 상황에서도 법에 호소하기를
꺼리고, 소송을 하다가도 중간에 포기하는 예가 많다. 도난을 당하고도 신고하는 사람
의 비율이 낮다. 마음과 마음의 화해를 통해 해결하려는 게 한국인의 일반적인 의식이
다.
미국 같은 사회는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모든 것을 법으로 해결하려 한다. 세계에서
가장 송사가 많고, 가장 변호사가 많은 나라가 미국이다.
법으로 옳다고 판정난 것은 정의고 그렇지 않은 것은 불의다. 분명히 범죄행위를 했
어도 법에서 판정내리지 않은 것은 죄가 아닌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1990년 초, 미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하며 물의를 일으켰던 사건
하나를 들 수 있다. 워싱턴 D.C. 시장의 마약복용사실에 대한 무죄 판결이다.
연방수사국의 함정수사에 의해 시장이 코카인을 복용하는 장면이 비밀 비디오 테이
프에 촬영되어, 재판과정에서 이 비디오 테이프가 전 매스미디어를 통해 방영되었는데
도 당사자는 재판에서 배심원들이 유죄라고 평결하기 전까지는 무죄라고 선언했고 일
반인들도 그렇게 수긍을 했다. 결국 이 사건은 배심원들의 견해 불일치로 유죄판결이
내려지지 않아 무죄가 된 셈이 됐다.
불법으로 되어 있는 마약 흡입 장면을 세상 사람들이 목격했는데도 법적 절차에 따
른 유죄판결이 내려지지 않아 무죄가 된 것이다.
법만능사회가 갖고 있는 맹점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이제 우리 사회도 사회규범과 도덕적 윤리체계가 크게 흔들리고 있고, 많은 부분 그
뿌리가 뽑혔다. 천륜을 어기는 범죄가 심심찮게 일어나고, 노인문제가 심각한 사회문
제화 되어 있으며, 스승을 폭행하는 등 사도를 짓밟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되고 있는
상황이다.
법보다도 준엄했던 인간다운 도리와 인간관계의 의리가 무너지고 있다. 우리 사회의
범죄를 다스릴 수 있는 것은 법 이전에 법에 앞서 있던 인간의식의 회복이다. 사람을
중시 여긴 우리 민족의 가치관은 인간에 대한 믿음과 외경심이었다. 의리가 뿌리쁩혔
다 해서 한국인의 본질이 쉽게 변하는 것은 아니다. 나무가 뿌리뽑혀도 캄캄한 땅 속
에는 씨앗이 숨어 있게 마련이다.
씨앗이 다시 눈뜨고 자라서 뿌리내릴 수 있도록 우리는 우리의 본성, 한국인다운 인
간성을 알고 믿고 되찾아야 할 것이다.
주체적으로 받아들이는 마음
우리 민족은 사람관계에서만 '의'를 바탕으로 인 것, 새것을 받아들이는 데도 '의'
를 바탕으로 했다. 자기 것을 버리지 않고 남의 것을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을 늘 지녀
왔다. 한국인다운 것, 우리다운 것을 지킨다고 하니 남의 것을 무조건 배척
하고, 새것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것으로 오인하는 수가 있다. 그러나 사실 한국인
은 남의 것을 받아들여 내것과 조화시키는 능력을 천부적으로 지니고 있다. 남의 것을
숭상하는 사대주의에 관해서는 많은 논쟁이 있어 왔으나, 우리 민족은 한 번도 우리
자신의 근본을 완전히 버리고 남의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음이 여러 사례에서 증명되고
있다. 내것을 버리지 않고 지키는 것이 바로 '의'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은 외국것을 받아들이되 내것과 반드시 융합시키는 특징을 나타낸다. 예를
들어, 외래어를 쓸 때도 '깡통' '빳다 방망이'라고 하여 우리말을 덧붙여 쓰는 것이
다. 그렇게 해야 그 말이 마음에 맞고 시원하게 느껴지기 때문인 것 같다. '역전 앞'
도 흔히 쓰는 말이고, 가방도 '백 가방'이라고 하고, '소파 의자'라든지, '대청마루'
등 우리말과 한자어, 외국어를 이중으로 쓰는 것이다.
중국 사람 같은 경우는 철저하게 자기말로 바꾸어 만든 말을 쓴다. 에스컬레이터가
'전기 사다리'가 되고, TV는 '전기로 보는 것'이란 이름으로 바꾸어 쓴다. 고유명사까
지도 중국
사람들은 의미를 붙여 다른 이름으로 만들어버린다. 코카콜라를 '가구가락'이라고 한
것은 입에 좋고 즐거운 것이라는 발상으로 재미를 느끼게 한다. 펩시콜라도 '백사가
락'이라 한다. 미국 본사에서 선전문구로 이용할 만하다.
그에 비하면 일본 사람들은 뜻을 번안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 직접 그대로
받아들여 서양문화에 적극적 태도를 보인다. 외국어 여행사 간판에 '도라베루'라는 말
을 버젓이 내걸고 그것을 트래블(travel)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일본의 언어 특성상 영어식 외국어 발음이 잘 안 되기 때문에 '트래블'이 '도라베
루'가 된 것이다. 그래도 자기들 말로 고쳐본다는 생각을 하기보다 그대로 서양문화를
빨리 받아들인다는 마음이 앞서는 일본인다운 특성을 잘 엿보게 한다.
비행기를 '날틀'이라고 하자던 애국심 높은 국어학자의 훌륭한 뜻에도 불구하고 우
리나라 사람들은 외국것을 완전히 우리것으로 바꾸지는 않았다. 공존 속의 조화라는
체질적인 본성을 바꾸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초가집이나 양옥집이란 말을 당연하게
쓰고 있다. 한자문화를 천 년이 넘게 유지해 왔으면서도 우리의 고유한 언어를 고스란
히 지니고 있는 것은 오히려 놀라운 일이다.
우리가 일제 식민통치를 벗어날 수 있었던 정신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말을 '모찌
떡'에서 발견한다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우리가 그냥 '모찌'로만 받아들였다면 우
리는 벌써 일본화되고 말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한국인은 모찌떡이라는 말에서처럼 어
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강한 자아의식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의'란 이처럼 공공의 외부상황과 '나'의 자아의식이 각기 분명하면서도 서로 잘 조
화하는 마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언어사용문제에서 뿐만이 아니었다. 한국인이 외래의 것을 받아들일 때는 전적으로
본디의 그것에 합일되는 방식을 취하치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부터 전래된 불교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의 종교생활을 가장 강력하게
지배해 온 대표적 종교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불교에 대한 깊은 신앙심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은 철저히 불교적인 불교인이 되기보다 한국화된 불교를 믿고 있음을 보게 된
다. 불교는 개인의 인연을 무상으로 생각하고 크게 중시하지 않았다. 아무리 친부모
형제간이라도 불교적 신앙정신의 근본원리에서는 그 인연에 연연해서는 안 되는 것으
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한국불교는 초기에 받아들일 때부터 효의 마음, 찬국인의 본질적인 인간관을
융합
시킨 불교로 전환하여 그것을 신앙심의 기초로 삼았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불교
는 호국불교라 할 만치 국가와 임금에의 충의를 절대적으로 생각하는 불교정신을 지녔
다. 유교사상과 가장 잘 통하는 한국인 본래의 정신적 특질이 그대로 다른 종교사상과
도 접목되는 것이다. 한국불교는 충의가 특히 중시되어 명맥을 이어왔던 것이 큰 특성
이다. 많은 국난 때 의병의 중심을 이룬 사람들이 바로 중이었다는 사실도 한국인의
특질을 잘 말해 준다.
또 반대로 유교정신에도 한국인의 인본주의사상과 재물욕(물질적 욕심)을 멀리하는
무욕의 불교적 정신이 깊이 혼용되어 있다.
[호국신앙은 우리나라 불교의 일관된 신앙으로, 숭신으로 호국한다는 사상이다. 불교
를 굳게 믿음으로써 왕실의 번영을 생각하는 이른바 현세불교적 신앙에서 나왔다. 고
려시대에 외침을 막기 위해 "대장경"을 간행한 것은 유명하다.]
현대에 와서도 우리 종교에 새로운 종교적 세력을 나타내는 서구적 종교인 기독교,
천주교 등도 한국인의 전통의식과 밀접하게 접착되어 자리 잡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
를테면 조상이나 부모의 제사를 드리는 우리의 전통적 조상숭배의식은 기독교적 사상
으로 보면 우상숭배사상과 비슷한 것으로 경계하는 것인데, 우리의 기독교인은 여전히
부모의 제사를 무시하지 않고 지낸다. 그 형식이 조금은 다르게 고쳐지더라도 우리의
제사 관례를 버리지 않고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한국인들은 체질적으로 자신의 본성을 완전히 바꾸는 성격을 갖고 있지 않
다. 사회가 혼란하고, 급변하고 있다고 하지만 한국인처럼 잘 변하지 않는 사람도 드
물 정도다. 그것이 우리가 끈질기게 살아남은 생명적 저력이기도 하지만, 적응력이 약
한 민족적 체질의 특징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것은 외국에 이민 가 있는 교포들의 생활상에서 잘 엿볼 수 있다.
한국인들은 쉽게 동질성을 잃고 이민족화할 가능성이 없다는 점에서 볼 때 오늘의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많은 혼란과 이질화현상도 크게 걱정 할 정도는 아닌 것 같다.
지금으로서는 심각한 도덕적 타락과 범죄현상을 보는 것 같지만, 결국엔 이런 현상을
거쳐 마침내 한국인다운 새로운 창조적 문화가 나오게 될 것을 믿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어떤 경우에도 한국인다움을 철저히 벗어나지 못하는 근본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외국문화를 철저히 배척하는 배타적인 사람들도 아니다. 여러 가
지가 그것을 반증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인은 뛰어난 융합 능력으로 세계가 놀랄 창조
문화의 주체자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우리의 본성만 잘 발휘되면, 즉 우리의 체질적인 화합력과 정신적 집중력의 극치인
'신바람'이 어울리면 세계 어느 민족과도 견줄 수 없는 능력이 창출될 수 있을 것이
다. 우리는 받아들일 줄 알고, 소화할 줄 알고, 다시 창조해 낼 줄도 아는 민족이다.
'의'자에서 양이 위에 있고 아가 아래 있다는 것을 깊이 생각해 보면 양 아래에 아
가 있다는 것은 바로, 다수의 사회적 인식이 먼저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
리고 내가 아닌 남(상대)을 존중하는 마음의 근본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더 중요
한 '의'의 본질은 '나'의 존재의식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남을 받아들이고 존중하면서도 '나'의 의식이 배제되지 않는 것을 말해 준다.
이렇듯 한국인의 '의'는 너와 내가 조화를 이룬 것이지만 그 속에는 남을 받아들이
는 나의 마음가짐이나 태도가 드러나 있다.
한국인이 '의'를 지키는 방법은 바로 남의 것을 받아들이는 방법에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옛것에서 새것을 찾는 마음
"사람들이 다만 새것이 새것인 줄만 알고 새것이 옛것에서 생겨난 줄을 모른다면 빛
이 없는 곳에서 그림자를 찾는 어리석은 이치와 다름이 없다. 창해도 작은 물방울이
모인 것이요, 태산도 티끌이 쌓여서 이룩되는 것이니 뿌리를 북돋우면 열매가 번성하
고, 서리를 밟고 나면 얼음이 굳어질 것이다."
이것은 한말의 사상가며 교육자며 의병운동의 대부로 알려진 이항로가 제자들에게
온고지신의 참뜻을 풀어 들려준 말이다.
이항로가 생존했던 한말은 외세가 물밀듯이 밀려들어와 한국 고유의 문화의식과 가
치관이 크게 도전받던 전환의 시대였다. 이러한 속에서 우리가 옛부터 물려받아온 한
국 본래의 문화적 특성을 망각하고 외국의 문물에 갑자기 횝쓸리는 세태를 탓하면서
제자들에게 한국인의 근본을 잃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비유적으로 나타내어 가르친
말이다.
[이항로(1792-1868)는 조선 말기의 학자로 자는 이술, 호는 화서. 1878년(순조 8) 한
성시에 합격했으나 과거에 부정이 있음을 보고 이를 단념, 오로지 학문에만 전심하여
후진을 양성했다. 1808년 병인양요 때에는 주전론을 적극 주장했다. 학설은 주리론으
로써 우주론에 있어서는 이원론을 주장했다. 우국과 존왕양이의 대의를 주장했기 때문
에 그의 문하에서 위정척사 운동의 중심인물이 많이 나왔다. 저서로는 '화서집'이 있
다.]
이처럼 사회에는 반드시 엄청난 변혁의 시기가 오고, 그런 때는 기존의 질서와 가치
관이 크게 흔들리며 도전받아 혼란이 생기게 된다. 이때 물결에 휩쓸려 옛것을 모조리
없애고 기존의'가치관을 일시에 부정하게 되면 그 사회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전
에 수재를 만난 것처럼 모든 삶의 근거를 잃어버리게 된다.
온고지신의 정신은 한민족의 문화가 급속히 몰락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정신의 방
파제와 같다. 하지만 아무리 옳은 진리도 절실하게 깨닫지 않으면 소용이 없게 된다.
우리는 물리적인 힘도 약했지만, 온고지신의 정신으로 마음의 방파제를 미리 마련해
두지 못했기 때문에 국권상실의 불행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이항로와 같은 사람이 있어 의식의 빛을 잃지 않고 제자에게 온고지신의 사
상을 폈던 그 조그만 마음의 씨앗들이 오랜 혹한의 동토에서 죽지 않고 남아, 독립정
신을 키웠고 광복의 의지를 지켰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온고지신의 정신은 사람들의 사사로운 생활을 영위하는 근본적인 마음의 기초일 뿐
아니라 한 나라의 백성으로서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의 기본이 되어야 하고, 학문하는
태도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항로는 30세를 전후한 시기에 이미 학문의 대가로서 명성이 높아 전국에서 제자들
이 모여들었다. "무엇이 '의'인지를 아는 것이 학문의 첫걸음이다"라고 그는 제자들에
게 설파했다. 그리고 실제로 나라와 백성 전체에게 이익이 되는 실리의 학문을 제자들
에게 가르쳤다.
그의 문하생으로 최익현, 유중교, 유인석 같은 이들이 뒷날 항일의병에 가담하였으
니 그가 뿌린 마음의 씨앗이 죽지 않고 싹을 틔웠고, 그가 마련한 정신의 방파제가 의
협인사를 배출하게 된 것이다.
또 그는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한국정신의 근본을 가르쳤다.
이항로의 이와 같은 가르침은 물론 그 당시의 상황에서도 매우 시의에 맞는 강론이
었지만, 오늘의 우리 상황에서도 큰 가르침이 되는 내용이다. 지금의 시대도 변혁기
요, 전환의 시대로 일컬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항로는 무엇이 '의'인가를 아는 것이 학문의 첫걸음이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우리의 전통적인 학문은 '의'의 가르침이 곧 핵심이었다.]
외국문화가 범람해 들어오고 있는 개방의 시대에 우리 문화를 자칫 소홀히 하게 되
면 뜻하지 않은 화를 자초할 수 있다. 세계는 이제 국제화시대를 맞고 있다. 국제화시
대일수록 자기것, 독자적인 문화의 특성이 있어야 세계 속에 분명한 자기 얼굴을 보여
줄 수가 있다. 다 똑같은 얼굴, 똑같은 생각이라면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우리
다움을 지닌 문화의식, 문화상품으로 국제사회에 신선감을 주어야 한다.
다행히 근래에 와서 우리 문화의 바람이 전통적 특성을 되살리는 쪽으로 불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문화적 감성인 정통정서의 참맛에 반응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어 바람직
한 내일에의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
먼저 자신이 자기것을 소중히 여기고 아껴야 남도 그 중함을 알게 된다. 내 가족을
내가 중히 여기지 않고 구박하면 남도 구박한다고 한다.
이항로는 모든 사람이 자기가 갖고 있는 재능, 자기의 직업, 자기의 일을 스스로 자
부심을 갖고 소중히 가꾸고 성장시켜야 한다고도 말했다.
그는, 사람은 누구나 일을 해야 하며 자신의 일에 긍지를 가지고 열심히, 보다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깨우쳤다.
직업에는 반드시 직업인으로서의 긍지가 있어야 한다. 선비는 선비로서 학식과 덕을
양성하는 것이 직분이요, 농민은 좋은 곡식을 잘 길러 수확하는 것이 도리고, 기술자
와 장인은 훌륭한 기술을 양성하는 것이 도리다. 누구나 맡은바 직업에 충실하는 것이
지성이며 '의'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직업에는 결코 귀하고 천한 것이란 존재 할 수
없고 누구나 맡은바 직업에 충실하는 것이 사람의 옳은 도리라고 했다.
이항로의 실천철학은 당시의 상황에선 매우 새로운 것처럼 들릴 수 있지만 사실 그
의 실학체계의 근본은 새로운 것이라기보다 한국인의 본성 속에 수천 년을 내려온 한
국인다움의 재발견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전통의식과 서구문화가 충돌한 구한말의 격변기에 한국인의
본성에
바탕을 두어 형성된 그의 이론은 그로부터 또한 세기가 가까운 세월이 지난 오늘에도
똑같
이 적용될 수 있는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자신이 타고난 능력을 최대한 살리면서 공익을 위해 맡은바 직무에 충실한 사람이
많은 사회는 언젠가는 발전된 모습을 나타낸다.
또한 자기자신의 장점을 살리는 일은 큰 안목으로 보면, 자기 민족의 장점을 찾아
선양하는 일과도 같은 것이다.
안중근 의사의 철저한 한국인다움
의로움은 마음속으로 생각할 때가 아니라 그 의협심을 행할 때 가치가 있다. 아무리
훌륭한 생각을 하고 있다 해도, 남의 어려움을 보고만 있다면 의인이라 하기 어렵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아무리 크다 해도 그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런 마음을
갖지 않음만 못하다. 몰라서 안하는 것은 죄가 되지 않지만 알고도 안하는 것은 죄라
고 생각하는 것이 한국인의 불의에 대한 근본인식이다.
'의'를 행하는 것은 남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자기를 회생해야 한다는
마음의 각오가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의 이익을 버리고 오직 공공의 이익을
위해, 나라를 위해 한 몸을 바친 사람을 의사라고 하여 우리는 그 높은 의리를 칭송해
왔다.
그중에 대표적인 인물로 안중근 의사를 꼽는다. 안중근은 하얼빈 역에서 이토오 히
로부미를 저격하여, 한민족을 강탈한 침략자를 응징했다. 개인적으로는 조용히 모른
체하고 있는 것이 유리하지만,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면 적의 수괴를 응징하는 컷이 마
땅한 도리며 의리다. 그런 도리를 실행할 수 있는 안중근의 과감한 실천력이야말로 진
정한 의사상의 표본이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그에 맞서 자신을 희생하고 적과
싸워서 민족적 자존심과 의기를 표현한 많은 의병과 의사들이 있었기에 한국은 지켜질
수 있었고, 역사의 맥을 이어올 수 있었다. 한 나라는 저절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강한 정신력과 힘이 균형있게 보유될 때 나라도 안전하고 개인의 삶도 편안하게 보장
된다. 모든 이가 개인의 이득만 챙기고 공공의 이해에 협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과
적으로 모두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된다. 자신을 잃는 것이 된다.
[안중근(1877-1917)은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한학을 수학하고 승마. 궁술을 익혀 문무
를 겸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경영하던 석탄상점을 팔아서 돈의학교를 세운
후에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했다. 1909년 이토오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살해한 뒤 체포
되어 1710년 여순감옥에서 순국했다. 글씨에 뛰어나 많은 유필을 남겼으며 재감중에
집필한 "동양평화론"은 해박한 사적 감각으로 당시의 역사적 현실을 정확히 분석했다.
]
안중관 의사는 이토오 히로부미를 저격한 사실로 잘 알려졌지만, 우리가 단순히 그
사건만으로 안중근을 의사라고 칭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일생을 바쳐 조금도 비뚤어
짐이 없는 철저한 '의'의 정신을 실현했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그의 일신 전부를 던
져, 나라를 위해 자기를 바치는 완전한 '의'의 실현자로 일관했기에 그에게 의사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
안중근은 4세 때부터 글을 읽기 시작해서 정치 경륜의 역사책인 "자치통감"을 여덟
권까지 읽었다. 그는 성장하면서 문에만 치우쳐서는 안 된다는 자각에서 궁술과 마술
및 병서까지도 탐독하며 인격도야를 위한 수련을 했다.
["자치통감"은 중국의 역사서로 총 294권이다. 중국 북송의 사마광이 1065년부터 1084
년까지 19년간에 걸쳐 편찬한 편년체의 역사책이다. 주 나라 위열왕으로부터 후주 세
종에 이르기까지의 l13왕 1362년간의 역사적 사실을 기술한 것이다. 자치통감이라 함
은 치도에 자료가 되고 역대를 통하여 거울이 된다는 뜻으로, 곧 역대의 사실을 밝혀
정치의 규범으로 삼으며, 또한 왕조 흥망의 원인과 대의명분을 밝히려 한 데 그 뜻이
있다.]
그가 16세 때에 동학혁명이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민란과 화적떼가 창궐했었고
도적의 무리가 안중근 의사의 마을을 에워쌌다고 한다. 부락민들이 전전긍긍하며 도망
갈 길만을 찾고 있을 때에 안중근이 지휘를 맡아 도적의 지휘자가 있는 본거지를 오히
려 역습해서 승리를 거두었던 일도 있다.
안중근은 나라의 근본이 혼들리면 모든 인간의 삶이 바탕에서부터 흐트러진다고 믿
고 나라의 수호를 위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국가 방위엔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늘의 민방위개념을 일찍부터 깨닫고 신봉한 선구적인 의식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안중근 의사의 의인다운 면모를 말해 주는 일화는 참으로 많다.
그는 일찍이 한만국경으로 망명해서 독립군을 인솔하여 항일전투를 벌였다. 기습전
술로 일본 수비대를 전멸시킨 예도 있었다. 그는 일본군 포로를 잡으면 언제나 '의'의
정신을 설파하여 감복시켰다.
자신이 잡은 포로들에게 "너회들은 일본국의 백성인데 어찌해서 너희 국왕의 뜻을
받들어 행동하지 않는 불충을 범하고 있느냐. 나라와 임금의 뜻을 저버림은 죽는 것만
못하다. 너희 일본 국왕은 노일전쟁을 시작할 때 한국에서 러시아의 세력을 몰아내고
우리나라의 독립을 보장한다고 언명하였는데 그 임금의 뜻을 이토오 히로부미가 거역
하고 한국을 침략 강탈했다. 그런데 너희가 일본국왕의 신하로서 국왕의 명을 따르지
않고 이토오의 명을 쫓음은 불충이다"고 설득했다. 그 때 그의 뜻을 이해하고 순순히
따르는 일본군 포로는 모두 다 되돌려 보냈다. 게다가 목숨을 보존해서 되돌아가는 일
본 병사가 총을 잃게 되면 군에서 처벌되는 것을 알고 무기까지 되돌려주며 석방시켰
다.
안중근의 인격이나 의로운 행위는, 그가 이토오를 죽인 후 여순감옥에 수감되어 있
는 동안에 일반인들을 오히려 더 감화시켰다고 한다.
안중근은 사형 직전에 찾아간 정근, 공근 두 아우에게 "나는 천국에 가서 마땅히 우
리나라의 독립과 자유의 회복을 위해서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공
로를 세우도록 일러다오"라고 했다.
'의'를 철저히 실행한 안중근 의사는 애국지사이기에 앞서 한국인다움을 완벽하게
실현한 한국 정신의 순교자라고 할 수 있다.
'의'를 가장 높은 덕목으로 본 한국인
'의'를 찾아 목숨을 던진 일화는 우리 역사에 적지 않다. 한국인들은 옛날부터 의리
를 존중하고 충절을 높이 평가했다.
그것이 공의를 위해서 그랬건 사사로운 정의에 의해서였건, 자신이 옳은 길이라고
판단하고 그 의리를 위해 다른 것을 저버리는 일은 시대를 초월해서 아름답다.
우리 역사에서 '의'를 위해 목숨을 버린 사육신의 이야기는 힘에 의해서 왕위를 빼
앗긴 선왕에 대한 충의라는 점뿐만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믿는 소신을 끝까지 지켰다
는 점에서 오늘날 오히려 더 값지다.
힘으로 왕권을 빼앗기 위해 김종서 등 선왕의 충신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를 제
거하기 위해 성삼문을 비롯한 세종 때부터의 신하들이 단종의 복위를 꾀한다. 다시 말
해 쿠데타를 시도한다. 그러나 그 쿠데타는 밀고자의 출현으로 실패하고 연관자들은
일망 타진된다. 그래서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이개, 하위지, 유성원은 죽음을 당한
다. 이들이 바로 조선 역사를 통해 가장 훌륭한 충신의 표본으로 알려져 오는 사육신
이다.
단종의 복위를 꾀한 성삼문 등의 쿠데타가 실패한 후 그는 세조의 친국을 받으면서
함께 집현전에서 공부한 지난날의 동료인 신숙주를 향해 "옛날 너와 내가 집현전에 입
적해 있었을 때에 영룽(세종)께서 원손(단종)을 안으시고 뜰을 산책하시면서 간곡히
부탁하시던 그 말씀이 아직도 내 귓전에 울리고 있다. 네 이놈, 너만이 까맣게 잊었단
말이냐. 네가 이렇게 극악할 줄은 정말 몰랐다"고 외쳤다. 그러자 세조는 자기 옆에
시립해 있는 신숙주를 다른 곳으로 피하도록 하고 성삼문의 국문을 계속했다고 한다.
한 사람은 죽음 앞에서도 초연한 '의'의 사람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부귀를 따라 '의'
를 저버린 사람이었기 때문에 비록 성삼문이 죄인의 위치에 있었지만 신숙주보다는 백
번 떳떳했던 것이다.
[신숙주는 뛰어난 학자요 많은 업적을 남긴 인물이었지만 한국인들은 그를 '의'를 따
르지 않은 배신자로 낙인찍는다. 한국인들은 언제나 '의'를 무엇보다도 앞세웠다.]
조선의 제7대 왕인 세조는 능력이 출중하고 부왕인 세종에 이어 많은 치적을 쌓은
왕으로 알려져 있다. 학자에 따라서는 이씨 왕조의 기틀이 세종과 세조 때에 이르러
확고하게 섰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한국인의 전통적인 윤리관에 비추어 볼 때 왕으로서의 치적보다 왕위를 비정
상적인 수단으로 빼앗았다는 점에서 세조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신숙
주의 경우는 한층 더 가혹하다. 신숙주는 세종과 문종 때의 대 학자였다. 그는 성삼문
과 함께 집현전 학자로서 이름이 높았다. 그뿐 아니라 한글창제에 있어서도 많은 업적
을 남긴 유수한 음운학자로 알려져 있다. 신숙주는 성삼문, 정인지 등과 함께 요동에
귀양와 있던 명나라의 대학자인 황챈을 찾아가 음운에 대한 연구를 한 음운학자였다.
그리고 세조를 도와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신숙주를 '의'를 따르지 않은 배신자로 낙인찍는다. 후세사람들
은 '숙주나물'이라는 말을 만들어 그를 비하했다.
우리는 이토록 '의'를 높게 평가했던 것이다.
이런 풍조는 동양문화권내의 다른 나라들도 흡사한 것 같다. 집권자들은 그런 '의'
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일반국민들은 이런 '의'를 숭상했고 모범으로 삼았다.
한국인들은 '힘은 곧 정의'라는 서구적인 파워 게임을 아직도 좋아하지 않는다.
대립을 화합하는 삶의 도리
모든 일을 끝까지 파헤쳐 옳고 그름을 가르고 꼬치꼬치 따지는 문화가 서양의 문화
다.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분명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 서구인들의 생활관습이다. 이
런 속에서 근대합리주의사상이 싹텄다고도 한다.
이에 반해 한국인들의 문화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분명한 양자택일의 문화가 아니
라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는 그러한 양면성의 중간지대를 갖고 있다.
한국인들은 옛부터 무엇인가를 극명하게 둘로 자르듯이 각각 분간하는 것을 좋은 일
로 생각하지 않았다. 논쟁이 있으면 적당히 그 중간점을 취득하거나 대립을 지양하는
회색지대를 택하는 재주가 있다. 그래서 타협점을 찾는 것이 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다.
이렇게 논쟁이 있으면 그 중간점을 취해 적당한 타협점을 찾았던 인물로는 조선 5백
년 역사에서 명재상으로 이름이 높은 황희 정승이 그 대표적인 예에 속한다. 그에 얽
힌 일화를 보자.
어느날 황희 정승댁의 계집종들이 이러쿵 저러쿵 시비를 벌이더니 책을 읽고 있는
황희 정승에게 한 계집종이 주르르 달려왔다. 그러고는 자기의 주장을 늘어놓는 것이
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더니 황희 정승이 "네말이 옳다"라고 했다. 그것을 본 다른
계집종이 황희 정승에게로 달려왔다. 그리고는 자신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
이었다. 가만히 앉아 이야기를 듣고 있던 황희 정승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래 네말
이 옳구나"를 연발했다.
이런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황희 정승의 조카가 정숭에게 "아니 숙부님 저 계집아이
의 말도 옳고 또 다른 계집아이의 말도 옳다면 도대체 어느 쪽이 옳다는 말입니까? 한
편이 옳다면 당연히 한편은 틀려야 하고 또 다른 한편이 옳지 않으면 다른 편이 옳아
야 사리가 분명하지 않습니까"라고 반문했다.
이에 대해 황희 정승은 "듣고 보니 네말도 옳구나" 하면서 읽고 있던 책을 계속 읽
는 것이었다. 이를 보다 못한 부인이 "당신 같은 양반이 어떻게 정사를 돌보시는지 모
르겠소. 시비가 있으면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분명히 갈라주셔야지 어찌 그렇게 흐리
멍텅하오" 하고 핀잔을 하자 황희 정승은 "당신말도 옳구려" 했다고 한다.
황희 정승의 이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그러나 이 속에는 한국인들의 생활철학의
한 모습이 숨어 있다. 모든 일을 얼버무려보려는 것이 아니라 일을 처리함에 있어 한
편만을 취하지 않고 양편의 가치를 모두 보고자 하는 태도다.
서구의 합리주의나 기능주의는 사물을 끝까지 쪼개어 대립의 개념으로 포착한다. 그
러나 한국인들은 태극이 그렇듯, 가능하면 하나의 화합 속으로 지향하려고 한다.
우리나라 말에는 낮과 밤의 개념이 함께 있는 '하루'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보통 '
사람' 하면 남자와 여자를 통틀어 지칭한다. 그러나 서구적인 개념으로는 영어의 Day
나 Man이 그런 것처럼 우리말의 남녀를 함께 지칭하는 '사람'이나 낮과 밤의 통칭인 '
하루'라는 말이 없다. Day는 Night에 대립하는 낮의 뜻이 강하고 Man은 Woman에 대립
되는 남성의 뜻이 강하다.
앞에서 잠시 언급이 되었지만 서양의 문화는 무엇이든 끝까지 따지는 문화고 한국인
의 문화전통은 따지기보다는 원만하게 포용하는 문화다.
무엇이건 따져서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가려내는 습성은 흑백논리의 문화다.
한국인들을 가리켜 자기 주장만을 내세우고 합의를 창출하지 못하는 흑백논리의 민
족성을 갖고 있느니, 자기의 고집에 너무 집착하여 상대방의 논리를 수용할 줄 모르는
극한 대립만을 내세우는 편협한 사람들이라고 보는 견해는, 한국민이 갖고 있는 대립
을 하나로 융합할 줄 아는 민족성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한국인들이 즐겨 듣는 황희 정승의 일화는 단순히 황회 정승의 인격이 원만하고 도
량이 넓다는 것만을 말해 주는 것은 아니다. 대립된 개념을 하나의 융화로 다스리는
한국인의 심성을 말해 준다. 한국인들은 그것이 바로 사람사는 도리라고 보기도 했던
것이다.
자신에겐 엄격하고 남에겐 너그러운 마음
자신의 언행에 대해 일일이 반성하고, 자신의 실수에 의해 피해를 본 사람이 없는가
를 자주 성찰했던 대표적인 인물로 우리나라의 문근이란 사람이 있다.
그는 사리판단에 밝아 '사'가 없는 공무집행을 한 유능한 판관으로 알려져 있다. 그
는 직책상 많은 송사를 맡아 처리하느라고 잘못된 판단을 하지는 않았는지 언제나 자
신의 판단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태도를 지녔던 의로운 판관이었다.
지난 일이라도 석연치 않은 것은 기록된 것을 다시 찾아 읽어보고 티끌만한 잘못이
라도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를 깊이 따져보곤 했다. 의는 단순한 사실이나 진리가 아니
라, 인간사에 연관된 갖가지 여건과 정황을 합쳐서 얻게 되는 옳은 판단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어느날 문근은 죄인들의 자백이란 것이 정말 진실한 것인지 아닌지를 알아보기 위해
한 가지 일을 꾸몄다.
그는 집안 사람에게 닭장 속에 있는 알을 가리키면서 만약 어느 누구든 이 닭장 안
에 있는 달걀을 가져가는 사람이 있으면 엄하게 문초하겠다고 일렀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그 자신이 밤에 닭장 안에 들어가 달걀 두 개를 꺼
내어 몰래 감추어두었다.
그리고는 평소 소행이 좋지 않고 도벽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한 계집종에게 그 죄를
덮어씌웠다. 그는 일부러 그 계집종을 잡아 가두게 하고 죄를 자백하라고 엄하게 꾸짖
으면서 매를 때리는 등 문초를 가했다. 그러니까 겁과 매에 질린 계집종이 자신이 훔
쳤다고 허위자백을 했다. 계집종은 "제가 꺼내어 삶아 먹었습니다" 하고 거짓 실토했
다.
문근은 이에 대해 "이제까지 10여 년 동안 내가 죄를 다스려온 사람들 가운데서 죄
인의 자백이 매로 인한 허위가 아니었다는 보장이 어디 있겠는가"라며 탄식했다고 한
다.
자기의 잘못이나 관심을 철저하게 반추하는 문근의 태도에서 우리는 '의'의 실천이
얼마나 어렵고, 또 얼마나 신중해야 하는 것인지 잘 느낄 수가 있다.
[문근(1471- ?)은 조선조 중종 때의 문신으로 자는 사휘, 호는 매계. 조광조와 함께
신진사류로 중종의 신임을 받았으나 훈구파 남곤 등의 무고로 형조참에서 좌천, 파직
당하였다.]
[정철의 '송강가사'에 '의'에 관한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마을 사람들아 옳은
일 하자스라 사람이 되어나서 옳치곳 못하면 마소를 갓고깔 씌워 밥먹이나 다르랴."]
한국인들은 대체적으로 어물어물 넘어가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좋게 말해서 너그러
운 마음이다. 적당히 넘어가는 게 좋을 때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남의 잘못은 너그럽
게 넘어가더라도 적어도 자신에 대해서만은 엄격해야 한다. '의'는 자신에 대해 엄격
한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자기자신에게 엄격한 사람은 남에게 너그러워지게 된다. 자기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않고 사리 사정에 급급한 사람은 남에 대해선 필요 이상으로 가혹하다. 남에게 관용을
베푸는 태도는 훌륭하고 본받을 만하다. 그러나 지나치게 남에게 관대하고 정이 넘쳐
서 옳고 그른 것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불의에도 동조하는 지경이 되면 의인이라
할 수가 없다. 친한 사림일수록 그 그룻됨을 바르게 알려주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대체로 남애게 싫은 소리를 하기 싫어한다. 상대방의 실수를 실
례가 되지 않는 적절한 방법으로 넌지시 전달해 줘서 상대방이 다시 같은 실수를 범하
지 않도록 하는 것이 남을 돕는 마음이며 의리다. 그러나 우리는 비웃는 마음이 있으
면서도 겉으로는 좋은 낯을 하고 어물어물 비위에 맞는 말을 하면서 곤란한 상황을 회
피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뒷전에서 그 사람 흉을 보고 비난하는 것이다.
대개 자신에게 엄격하지 않은 사람은 매사를 어물어물 적당히 넘기는 불성실한 태도
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맺고 끊는 데가 없는 사람이라는 평가
를 하며, 그에 대한 신뢰감을 갖지 않게 된다.
서양 사람들도 적당히 얼버무리는 경우에 쓰는 말이 있다. 립 서비스(lip service)'
라는 말이다. 우리말로 '입에 발린 소리'와 비슷한 의미를 갖고 있다. 속으로는 전혀
딴청을 부리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원더풀'이니 '그레이트'니 하고 과장된 감탄사를
써서 진짜 느낌을 얼버무리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것이 마음에 드는 경우에는 진지하게 구체적으로 꼬치꼬치 캐묻는다.
무조건 칭찬하는 말이나 감탄하는 말을 쓰지 않고 신중하게 사실을 알아보는 태도를
취한다. 좋은 음식일 경우에는 어떤 소재를 썼느냐, 조미료는 무엇을 썼으며 요리는
어떤 방법으로 했느냐는 등 구체적인 것을 캐묻는다. 그것이 관심의 표현이다.
그냥 몇 모금 입에 대보고 나서 '원더풀' 하면서 웃음만 지어보이는 것은 속과 겉이
다르다는 표현이다.
남에 대해서나 자신에 대해서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짚고 넘어가는 것이 뒷날을
위해 좋은 때가 많다. 그렇다고 남의 잘못을 공공연히 트집잡고 따지는 태도는 결코
의리가 아니다. 아무리 잘못이 있어도 비난을 목적으로 상대방을 몰아부치는 태도는 '
의'가 아니다. 그래서 한국인은 예로부터 따지는 것을 싫어했고 그것을 또 의롭지 않
은 것으로 여겼다.
성급하지 않은 너그러움
[오늘의 한국인은 무슨 일을 하든 단시간에 끝내려 한다. 시간을 두고 차분히 일을 끝
내려 하는 우리 고유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되살리는 것이 '의'의 실천이다.]
산업화 과정을 겪어가면서 한국인들이 대단히 성급해졌다는 평을 듣고 있다. 무슨
일을 하든 단시간에 끝내려 한다. 시간을 두고 차분히 일을 끝내려 하는 우리 고유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은 이제 찾아볼 수 없을 정도다.
동남아 지역 등을 여행하는 한국인들의 성급함은 현지 주민들의 조롱거리로 등장해
있을 정도다. 동남아 관광지에서는 한국인을 가리켜 '빨리 빨리' 사람들이라고 평한다
는 것이다.
한국인들이 언제부터 이렇게 성급해졌단 말인가. 은근과 끈기가 한국인의 민족성이
라고 믿어 온 시절이 바로 얼마 전이었는데 어쩌다 이처럼 매사를 '빨리빨리' 서두르
는 성급한 민족이 됐는지 모를 일이다.
매사에 성급해하지 않고 시기를 기다리며 차분하게 일을 처리하던, 조선 초기 태종
과 세 종 때의 재상으로 있던 윤회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윤회가 아직 관직에 들기 전 젊었을 때의 이야기다.
시골길을 가다가 날이 저물었다. 그래서 그는 주막을 찾아가서 하룻밤 유숙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그의 행색이 너무나 초라해 주막집 주인은 그에게 선뜻 잠자리를 내
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추녀 밑에서 하룻밤을 지새워야 했다. 그런데 그때 마침 주
인집 아이가 큰 진주알 하나를 갖고 마루에서 놀고 있었는데 그 진주알이 땅에 떨어져
때마침 그 근처를 거닐고 있던 큰 거위가 진주알을 꿀꺽 삼켜버렸다.
진주알을 마당에서 찾지 못한 어린 아이가 주막집 주인에게 찾아달라고 해, 주막집
주인이 찾으려 했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주인은 초라한 행색을 한 윤회를 의심했다. 그는 윤회를 범인으로 단정하고
진주를 내놓으라고 다그쳤는데 윤회가 적극적인 변명을 하지 않자 그를 기둥에다 묶어
버렸다.
이때에 윤회는 아무 저항없이 주막집 주인에게 "저 거위도 내 곁에 묶어주시오"라고
요청하자 주인이 기이하게 생각하면서 그 거위를 그의 곁에 묶었다. 이런 속에서 밤이
지났다.
밤이 지나 다음날이 되었다. 아침이 되자 거위가 똥을 쌌는데 그 똥 속에 진주가 섞
여 나왔다. 진주알을 찾은 주인이 사지를 하면서 "어제는 왜 거위가 진주알을 먹었다
고 이야기를 하지 않아 이렇게 묶인 채 하룻밤을 지냈소" 라고 윤회에게 물었다.
그러나 윤회가 이렇게 대답했던 것이다. "만약 내가 어제 본 것처럼 거위가 진주알
을 먹었다고 말했다면 성급한 당신은 그 거위를 죽이고 배를 갈라서 그 진주알을 찾았
을 것이오. 애꿎은 짐승을 죽이게 하느니 내가 하룻밤을 고생하는 편이 좋지 않겠소."
윤회의 말을 들은 주인은 크게 뉘우치며 그의 너그러움에 탄복했다는 것이다.
윤회는 학문이 깊고 사리판단이 분명한 너그러운 인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사람의
마음을 통찰해 보는 안목을 지녔다. 그리고 인자한 마음씨를 갖고 있어 어떤 일도 실
수없이 처리했을 뿐 아니라 한 번도 상대방에게 불쾌한 느낌을 갖게 한 일이 없었다고
한다.
[윤회 (1380-1436)는 조선조 세종 매의 명신. 학자로 자는 청경, 호는 청향당. 1432년
(세종 14년) 예문관 제학으로 신장과 "팔도지리지"를 편찬하였다. 동 16년 집현전에서
왕명으로 "자치통감훈의"의 편집을 맡았으며 벼슬은 병조판서, 예문관 대재학에 이르
렀다. 시호는 문도.]
[윤회의 이 이야기는 "연려실기술"에 나오는 것이다. 이 책은 조선 정종 때의 문인 이
긍익이 조선조의 역대 중요 사실들을 여러 책에서 발췌하여 그 전말을 밝히고 문물제
도의 연혁과
연원을 고찰한 일종의 기사본말체 사서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이 너그러움과 인내심이 아닐까 한다. 매사
를 성급하게 졸속으로 처리해서는 결코 아무 일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우리나라 사람은 일본인들에 비해 훨씬 온후하며 성질이 느긋했다. 일본인들은 섬나
라 사람의 기질이 있어 성질이 급하고 참을성이 없는 대신 우리나라 사람은 느긋하게
인내심이 강한 민족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근래에 들어서면서 오히려 일본인들에 비해 더 조급하게 일을 처리하려는 풍
조가 눈에 띄고 있다.
이런 성급하고 조급한 마음이 실수와 연결되기도 한다. 그리고 한꺼번에 모든 걸 성
취해야 한다는 무모함을 가져와 그것은 결국 내실없는 결과를 낳았다.
가정생활에 있어서나 사회생활에 있어서나 성급한 마음으로 일상사를 처리해서는 실
수하기 쉽다. 윤회와 같은 너그럽고 느긋한 심성이 아쉽다. 그 너그러운 심성이 '의'
의 마음인 것이다.
공익을 위한 자기회생
한국 역사상 공공의 이익을 위해 자신이 옳다고 신봉한 길을 추구하면서 일생을 보
낸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로 '대동여지도'로 유명한 김정호를 들 수 있다.
김정호만큼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뜻을 위해 고독한 길을
걸은 인물도 많지 않다.
김정호가 평생을 바쳐 만든 한국 최초의 지도 '대동여지도'는 특별히 다른 사람의
재정적인 지원을 받고 한 것도 아니요 누구의 지시를 받아서 한 것도 아니다. 몇몇 친
구들의 관심을 제외하면 거의 혼자 힘으로 만든 것이 바로 한국지도였다.
그는 지도를 만들어 나라로부터 칭찬을 받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입신양명을 위해
그 고생을 한 것도 아니었다. 후세에 이름을 남기려는 생각도 가진 일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한국 최고의 지도인 '청구도' 및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는 자신이 만든 '
청구도'와 '대동여지도'를 당시의 실제 통치자인 대원군에게 국가를 위해 사용해 달라
는 뜻으로 증정했으나 이렇다 할 보상도 못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김정호는 자신의 작업에 대해서 "나라가 어지러울 때는 적을 쳐부수고, 난폭
한 무리들을 토벌 진압할 때는 도움이 되며, 평화시에는 정치를 수행하고, 사회의 모
든 일을 다스리며 경제정책을 시행 조절하는 데에 나의 지도가 이용되기만을 바랄 뿐
이다"라는 나라와 사회를 위하는 일념만이 있었다. 그는 이런 자신의 지도작업 이유를
'대동여지도'의 제1첩 '지도류설'의 끝머리의 '방여기요'에 썼다.
그가 지도제작에 뜻을 두고 산천을 답사하고 다닐 때, 가족은 물론 그의 친족, 친구
들이 그의 당돌하고 당시로서는 무모한 계획을 극구 만류했다고 한다. 당시 지리에 관
한 상식을 갖는다는 것은 국가기관원이 아니면 엄두도 내지 못하는 큰 일이었기 때문
이다.
김정호는 한국지도 제작을 위해 40년간 전국을 두루 답사했다.
그는 자신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한 그것을 위해 자신이 갖고 있던 모든 것을 불살라
버린 우리 나라 역사상 보기 드문 인간이다.
사람은 누구나 쉽게 공명심도 얻고 지위도 누리는 안이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 더욱
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일을 위해 희생하기를 꺼려한다.
작은 일을 하면 그것을 큰 것으로 돋보이게 하고 싶어하는 자기광고, 그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특히 어떤 일을 추진하려 할 때에 주변 사람의 눈치에 민감하다. 남들이 나의 일을
어떻게 생각할까, 이 일이 성공할까, 성공하더라도 그 일에 따르는 보상이 얼마나 될
까 등등을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은 일에 따르는 보답, 그리고 공명심이 있기 때문에 일을 하는 수가 많
다.
그러나 일의 보수나 공명심보다 자기의 일이 공공이익을 위해 필요한가를 먼저 생각
해야 한다. 김정호가 지도제작에 나섰을 때도 자신이 한국지도를 만들 수 있다는 가능
성은 갖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주변인사들이 거의 만류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이 일을 완성시키지 못한다면 다음 대에 가서 누구라도 지도를
완성시킬 것이라는 굳은 신념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실천철학의 신봉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어 전국 해안선을 서너 차례 답사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 한국인을 통해 옳은 목표를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의'의
정신을 본다. 그리고 대가를 바라지 않는 공공이익을 위한 순수한 탐구정신을 아울러
본다.
지금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물은 이와 같이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묵묵
히 걸어가는 실천적인 인물이다. 즉, 주변의 비판에도 끄떡없이 국가사회를 위해 자신
의 길이 옳다고 생각하면 어떤 난관이라도 극복할 수 있는 의지의 인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우리는 김정호를 통해 옳은 목표를 위해서는 어떤 회생도 마다하지 않는 의의 정신을
본다. 그리고 대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공공이익을 위한 탐구정신과 개척정신을 아
울러 본다.]
[김정호(? -1864)는 조선 말기의 지리학자. 자는 백원, 호는 고산자. 미천한 가문의
출신이었으나 학문을 열심히 닦았으며, 정밀한 지도작성의 뜻을 품고 전국각지를 두루
돌아다니며 37여 년간의 노력끝에 순조 말 년에 '청구도' 2첩을 완성했다. 그후 청구
도에 불만을 느끼고 다시 전국을 답사하여 1861년 (철종 12) 보물 제 850호인 '대동여
지도' 2첩을 완성, 교간했다. 대동여지도는 손수 그려 판각했으며, 이를 흥선대원군에
게 바치자 그 정밀함에 놀란 고루한 정부에 의해 나라의 기밀을 누설한다는 죄목으로
각판은 불태워지고 투옥, 옥사했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수사본이다.
참다운 인간관계
우리나라 속담에 '정승이 죽으면 문상객이 없으나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상객이 들
끓는다'라는 말이 있다.
겉과 속이 다른 인간관계를 꼬집은 속담이다. 사람과 사람과의 교류가 진실한 마음
에서 우러난 교류가 아니라 다른 목적이나 이득을 위해 이루어지는 교류의 거짓됨을
나타내는 속담이다.
한국인답다는 것은 겉과 속이 같은 것을 말한다. 그런 인간관계를 의리라고 표현한
다.
의리를 가지고 사람을 사귄다는 것은 사람과 사람의 마음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먼
저 상대방을 생각하고, 상대에게 이로운 일을 행한다는 것을 뜻한다.
지니고 있는 외형적 조건, 즉 가문이나 벼슬이나 재산을 보고 그것들이 나에게 도움
이 될까를 생각지 않고, 오직 사람의 됨됨이를 보고 관계를 맺을 때 진실로 참다운 인
간관계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 사회는 의리가 없는 사회라는 개탄의 소리가 높다. 사람 사이의 관계가
이해관계로 얽혀 있고, 자신에게 손해가 된다고 생각하면 서로 관계를 맺지 않으려고
한다.
한국인들은 원래 자신보다 남을 높여 대우하고 남을 공경하는 태도를 상식으로 생각
했다. 자신의 목숨을 버리더라도 공인에게 이로운 일이라면 서슴지 않고, 콩 한쪽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이 바로 한국인들이었다.
그래서 서민들 사이에 널리 불리어온 민요는 대개가 상부상조의 사람관계를 노래하
고 있다. 서로 나누어주는 자세가 풍속으로 뿌리박혀 있는 것이다.
살강(선반) 밑의 밤 한 톨을 반으로 쪼개서 할머니를 드리고, 또 반을 반으론 쪼개
서 형님을 주려고 아끼고 아껴서 살강 밑에 감춰두었는데 감춰두고 흔자서 노래부르며
나누어 줄 기쁨을 즐기고 있다가 마침내 꺼내보니까 쥐들이 다 먹고 없다는 내용의 민
요가 있다. 집집마다 아이들을 키우는 어머니가 어렸을 때 불러주던 우리나라 우애의
주제가 같은 노래였다.
이렇게 자기 것을 나누어주려는 마음이 남의 것을 받으려는 마음보다 앞선 의식을
지닌 사람들이 한국인이다. 얼마나 남 주기를 좋아한 민족인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서도 그런 일화는 수없이 듣는다.
음식을 좀 별식으로 만들었다 하면 우선 남의 집에 줄 것부터 담아 돌리고 나서 자
기가 먹는 것이다.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친척이나 가족의 필연적 관계가 아닌, 가장 근본적인 인간성
을 바탕으로 한 순수한 마음으로 연관되는 관계가 우정을 나누는 친구 사이일 것이다.
직장이나 업무로 얽힌 이해관계도 아니고, 혈연관계도 아니고, 군신간의 의무와 도리
가 전제되는 관계도 아니다. 오직 인간 개인이 순수한 존재로서 서로의 마음을 끈으로
하여 맺어지고 합일하는 인간관계다. 이런 순수한 우정관계를 맺은 사람들의 아름다운
의리에 얽힌 이야기는 동양사회, 한국사회에서는 매우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이
야기로 전해지곤
한다.
서양에서는 친구관계라도 그 대립적 측면이 강조된다. 서로 상반되는 인물의 특성이
화젯거리가 되고, 그런 개성들이 우정의 양쪽 끈이 되어 서로 당기고, 당김을 당하는
팽팽한 선을 유지한다. 양쪽의 마음이 똑 같을 때는 똑같은 힘으로 당기는 셈이 되어
끈은 끊어지게 된다. 한쪽의 힘이 세면 다른 쪽은 센 쪽의 수하가 되는 분명한 관계가
서구인들의 그것이다.
그러나 한국인은 분명하게 자신의 마음을 나타내지 않는다. 오히려 마음을 감추고
표현을 삼가한다. 그런 숨은 마음을 서로 알고 서로 느낄 수 있어야만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우정의 표시는 어려움을 당할 때 비로소 가시화되고 적극성을 떤다. 친구가
높은 자리에 있고 재산이 넉넉하여 근심이 없을 때는 찾지 않다가도, 친구가 위험에
빠지고 병들고 죽음에 이르렀을 때는 의리를 지켜 친구를 도와주고 우정을 표시하는
한국인의 마음은 고사에도 많은 예를 보이고 있다.
남을 돕는 데도 '큰손'인 한국인 한국인들의 수천 년 생활사를 살펴보면 가장 두드
러진 특징으로 상부상조정신을 들 수가 있다. 한국인들의 상부상조정신은 하나의 신앙
처럼 우리 역사의 혈맥을 통해 흘러 내려왔다.
앞서 약간 설명을 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 농촌에 있었던 '두레논'이라든가
'두레삼'을 '향약' '계' 같은 것들이 한국인들의 생활 속에 뿌리를 내린 상부상조정신
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두레는 농촌에서 농사일을 서로 협력하여 공동조직을 하기 위해 부락이나 이 단위로
된 조직이다. 농번기의 모내기에서 김매기를 마칠 때까지 시행된다. 두레의 조직은 부
락내의 장정이 주가 되며, 참여 자격은 노동능력에 따라 두레의 역원이 재가한 후에
가입이 허락된다. 농악에 맞추어 작업에 들어가는데 농악은 일꾼들의 피로를 덜게 하
는 동시에 서로의 일손을 맞춰주었다. 두레가 끝나면 풍농을 기원하고 술. 노래. 농
악으로 마을 전체의 잔치가 벌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 우리나라가 급격한 산업화를 겪으면서 한국인이 갖고 있는 상부상조의
미풍이 사라져가고 있자 않은가 하는 우려의 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한국인이 갖고 있
는 어진 심성과 이웃을 제몸같이 생각하는 상부상조정신은 연연히 연맥을 이어오고 있
다.
이를테면 얼마 전 신문이나 방송에 소개된 이복순씨의 경우도 그 한 가지 예가 된
다.
이복순씨는 1953년 39세의 나이로 남편과 사별한 후 외아들을 혼자 키워가면서 김밥
장사를 해서 모은 50억 원의 재산을 충남대학교에 장학 기금으로 바쳤다.
이씨는 30여 년 동안 사시사철 검은 고무신에 검은 통바지 차림으로 장사를 했다.
이씨는 대전시 일대에서 또순이 아줌마로 알려졌는데 한푼 두푼 모은 돈으로 대전 주
변의 야산을 사모은 것이 그만한 재산으로 불어났다고 한다.
이복순씨의 자선사업의 연맥은 조선 정조 때의 여성 자선가로 널리 알려진 제주도인
의
대모 김만덕에서 이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만덕의 이야기는 한국인이 갖고 있는 통이 큰 자선사업을 그린 서너 폭의 병풍 그림
같다.
만덕은 일찍이 전염병으로 부모를 잃어 동네여인의 주선으로 기녀의 집에 의탁하게
되어
기녀로서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만덕은 본시 자신의 가족이 양반임을 내세워
관가에 나가 기적에서 삭제해 주기를 청원해 그 허락을 받은 후 독립한다.
그녀는 타고난 상재를 살려 제주도의 주요지에서 객주집을 경영해 거금을 모은 것이
다. 만덕은 제주도와 육지를 연결하는 무역업에 손을 대고 물자를 교역하면서 거상으
로 올라선다.
그런데 만덕의 이름이 조정에까지 알려지게 된 것은 그녀가 큰 재산을 모았기 때문
이 아니라, 제주도에 서너 해 겹쳐 일어난 흉년으로 제주도 민이 아사지경에 빠지자
자신의 전재산을 털어 육지에서 양곡을 사들여 제주도민을 살려낸 데에 있다.
'가난은 나라도 구제 못한다'는 말이 있듯이 그당시 거듭된 제주도의 흉년은 조정에
서조차 구호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런데 만덕은 모아둔 천금의 돈을 풀어 큰 배를
세내어 육지에서 양곡을 실어오도록 했던 것이다.
만덕은 실어온 양곡의 10분의 1은 직접 안면이 있는 친지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머지
10분의 9는 제주도 관가에 보내 관가에서 처리하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제주도민은
기아에서 목숨을 건질 수가 있게 되었다.
만덕의 이 자선사업은 조정에까지 알려졌다. 실상을 전해들은 정조가 만덕에게 대궐
의 '내의원 의녀반수'라는 벼슬을 내리고 특별알현을 허락했다.
임금은 만덕을 보고 "너는 한낱 여자의 몸으로 의기심을 발하여 천여 명의 기민을
구호하여 귀중한 인명을 살렸으니 참으로 기특한 일이로다"라고 칭찬하고 상을 후하게
내렸다.
그런 연후에 만덕은 평생 소원이던 금강산을 구경하고 서울을 경유해서 제주도로 되
돌아왔다.
만덕을 추모하는 제주도민들은 1977년 한라산 사라봉 공원에 만덕관을 건립하여 만
덕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또 만덕상을 제정하여 매년 10월에 열리는 한라문화제 때에
그녀를 기념한다. 전생애를 근검과 절약으로 역경을 이겨내 성가한 후 사회를 위해 공
헌한 모범여인 한 사람을 선정하여 만덕상을 주는 것이다.
정조시대의 여성 독지가인 제주도의 만덕이나 오늘의 독지가인, 대전에 살고 있는
이복순씨나 자신의 역경을 극복하고 억척스럽게 모은 돈을 사회를 위해 내놓은 '의'의
여인이다.
우리 사회에는 이처럼 두드러지게 나타난 자선 사업가들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
게 남을 돕는 자선인들이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만치 많다. 일일이 소개하지 않아서 모
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한국인의 자선사업의 특징은 남을 도와도 듬뿍 돕는 데에 있다. 자질구레하
게 돕지 않는다. 한 번을 도와도 큰손으로 왕창 준다. 한국인의 독특한 점이다.
[현종 6년, 제주도로 유배되어 온 추사 김정회는 만덕의 행적을 듣고 감동하여 '은혜
의 빛이 온 세상에 번진다'는 뜻으로 '사광류세'라 크게 쓰고는 "김종주의 대모가 이
섬의 큰 흉년을 구흘하고 임금님의 특별하신 은혜를 입어 금강산을 구경하였으니, 벼
슬아치들이 모두 전기와 시가로 이를 노래하였다. 이는 고금에 드문 일이므로 이 편액
을 써보내어 그 집안을 표하는 바다"라고 했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의'를 따르라
오늘날은 국제화시대다. 88년 서울 올림픽대회가 열린 이후 서울을 비롯한 한국의
주.5도시의 국제화 경향은 1988년 이전에 비해 훨씬 짙게 나타나고 있다.
이를테면 일반 시내버스를 타도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라는 표어가 눈에 들
어온다. 서울은 한국만의 서울이 아니라 국제도시로서의 모습을 날이 갈수록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 일반 버스를 타는 외국인들의 모습도 이제는 흔히 눈에 뜨일 정도다.
서울만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한국인의 국제화 추세는 해를 거듭할수록 크게 성
장하고 있다. 오늘날은 서울의 국제화가 아니라 한국민의 국제화시대인 것이다.
그런데 해외에 나가 있는 한국인들 개개인의 국제화 템포는 해외 한국인 수의 증가
추세보다 훨씬 뒤지고 있는 듯이 보인다. 정작 해외 거주 한국민들이 늘어가면서 해외
한국인들의 국제화 추세는 퇴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예를 들어, 한국민들의 해외진출이 적었던 60년대에 해외에 나가 있던 한국인들은
가능하면 빨리 자신이 살고 있는 국가의 룰을 따르려고 했었다. 그래야만 하루속히 적
응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해외 거주자의 수가 늘어나면서 거주국의 룰에는 무관한 채 한국식대로 살려
는 사람이 점차 늘어난 것이다. 우선 해당 국가의 언어를 배우려는 노력도 줄어들고,
그 나라의 사회관습을 습득하려는 생각도 한국인의 수가 적을 때보다는 훨씬 못한 것
이다.
그래서 해외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은 한국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도 아니요, 삶의 뿌
리를 내리고 있는 해당 국가의 국민도 아닌 어중간한 거주민으로 변모하곤 하는 것이
다.
이와 같은 한국인들에 비해 일본 사람들은 같은 동양계라도 다르다. 물론 일본인의
문화전통을 바탕으로 하고는 있지만 가능하면 자신이 살고 있는 국가의 국민으로서의
몫을 다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 한 가지 좋은 예가 남미의 이민 2세로서 그 나라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서 대통령
으로 당선된 한 일본인의 경우일 것이다.
해외에서의 생활도 국내에서의 생활처럼, 자신의 역량에 의해서 평가를 받는 시대지
출신이나 간판에 의해서 평가되지는 않는다.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들의 단점은 가능하면 같은 한국인끼리 모임을 갖고 지
내려 하는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이 한국의 독특한 문화를 유
지하며 동질성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의 법과
관습, 그리고 사회방식에 잘 적응하고 난 연후에 한 국민이 갖고 있는 우수한 문화를
창의적으로 전개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흔히 한국인 셋이 모이면 회장이 셋 생기고, 중국인 셋이 모이면 차이나타운이 생기
며, 일본인 셋이 모이면 주식회사가 생긴다는 말을 한다. 해외에서 살고 있는 동양 3
개국의 민족성을 잘 나타내주는 말이다.
중국인들은 몰려살면서 자기들만의 집단 거주지를 만드는 재질이 능한 데 비해 일본
인들은 합자를 해서 주식회사를 만들어 함께 돈버는 일에 열중한다고 한다. 일본인들
의 독특한 단결심을 가리키는 말이다. 또 한국인들이 회장을 만든다는 말은, 한국인들
은 다른 민족에 비해 감투욕이 크다는 말을 풍자한다.
물론 이런 비유는, 그 말이 꼭 맞는 것은 아니지만 각 나라 국민성의 한 부분을 말
해 주고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동양 3국 가운데서 외국 이민의 역사가 가장 긴 중국보다는 오히려 일본 사
람들이 현지의 생활양식을 보다 잘 소화하고 현지 사회에 능동적으로 진출하고 있음을
우리는 보게 된다.
앞에서 대통령 선거에 당선된 남미 거주 일본인 이민자의 예를 들었지만, 미국의 경
우를 보더라도 주지사나 상. 하원 의원으로 가장 많이 진출하고 있는 동양 민족이 바
로 일본 민족이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에 따르고 로마의 '의'를 배우라는 것은 국제화시대를 맞고
있는 세계 속의 한국민이 배워야 할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고발정신과 공의
누구나 자신의 실수를 지적받으면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 아니 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지적을 한 사람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더욱이 사실과 다른, 근거가 없는 일에 대한 잘못을 지적받을 때에는 분노가 치솟게
되고 그런 지적을 한 상대에게 반발하고 싶은 악감정이 생긴다. 그러나 그런 지적이
실수에 의해 야기됐건 그렇지 않건간에 '공익'을 위해 이루어진 것이라면 당연히 그런
지적을 한 사람에게 불편한 마음을 갖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의'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잦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옳지 않은 행위나 처신을 하면
그 잘못을 지적해 주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의'다.
친구가 하는 일에 대해서 좋은 뜻이건 나쁜 뜻이건 가리지 않고 위급하니까 가세해
야 한다는 것은 '의'가 아니다. 한국인들은 곧잘 '의리가 있지 어떻게 친구가 얻어맞
았는데 그냥 있어' 하는 식으로 사리분별은 제쳐놓고 그저 친구이기 때문에 합세하기
를 좋아한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덮어놓고 친구가 가니까 동행한다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의리가 아니다. 의리란 그런 것이 아니다. 의리란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잘못이 있으면 나무라는 마음이요, 또 그런 지적을 받는 사람도 겸허하게 받
아들이는 마음이다.
선조 때에 영의정으로 있던 노수신이 값진 초피갖옷을 선물로 받은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안 강직한 인품의 소유자로 알려진 김성일이 왕과 자리를 함께 하는
경연에 임했을 때에 이런 사실을 왕에게 직접 고하였다.
김성일은 왕에게 "영의정 노수신이 값비싼 초피갖옷을 뇌물로 받은 사실이 있으니
어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직언했다. 이와 같은 김성일의 직언에 대해 노수신은
정색을 하면서 왕에게 "김성일의 말이 옳습니다. 사실은 신의 노모가 병중에 있고 겨
울에 추위를 몹시 타서 마침 변방에 가 있는 일가친척 변장에게 당부해서 초피갖옷을
하나 구해 노모에게 드렸습니다"라고 말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그런 사실이 있음을 직언한 김성일과 그런 사실을 숨김없이 사실
대로 털어놓은 노수신을 똑같이 칭찬하였다고 한다.
[노순신(1514-1590)은 조선조 선조 때의 상신으로 자는 과회, 호는 소재. 1543년(중종
13)에 등제하여 1573년(선조6)에 우의정, 1585년(동18)에 영의정이 되었다. 기축옥사
때 정여립을 추천한 죄로 파직되었다.]
[김성일 (1538-1593)은 조선조 선조 때의 분신으로 자는 사순, 호는 학봉. 1590년 통
신부사가 되어 황윤길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 실정을 살피고 귀국, 일본의 침략을 경고
한 서인 황윤길의 보고에 그는 동인으로서 침략의 우려가 없다고 보고했다. 임진왜란
이 일어나자 잘못 보고한 책임으로 처벌이 논의되었으나, 유성룡의 변호로 화를 모면
했다.]
오늘 우리 사회에는 분에 넘치는 뇌물성 선물이 적지 않게 물의를 빚고 있는 듯하
다. 이에 대한 사회의 지탄도 높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으례 그렇게 되어왔는데 이
제와서 뭘 그런 것을 문제삼느냐 하는 식으로 넘겨버리는 수가 많다.
직접 나에게 연관된 것이 아닌데 내가 나설 계제가 아니지 않을까, 내가 그런 사실
을 지적한다고 되는 일인가 하는 소극적인 생각으로 지적을 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그런 소극적인 생각이 결국 사회를 병들게 하는 것이다. 사회정의에 입각한
고발정신이 아쉽다. 그리고 고발을 당한 사람도 그런 사실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이다.
서구에서는 시민의 고발정신이 하나의 상식으로 되어 있다. 소위 커뮤니티(communit
y)라는 공동체의 안위에 관계되는 일이라는 인식이 있으면 지체없이 사직당국에 고발
한다.
예를 들어, 눈이 많이 와서 자기집 앞의 눈을 치워야 하는데 한두 집이 눈을 그대로
둔다거나, 쓰레기처리가 잘 안 돼서 전체적인 경관을 헤친다거나 하면 이웃 사람들이
전화를 통해서 직언을 한다. 심지어 잔디를 깎지 않아 이웃 사람들에게 불쾌한 느낌을
주는 경우에도 서슴지 않고 상대방에게 통고를 한다.
그러나 이런 지적을 받는다고 해서 당사자가 불쾌한 표정을 짓는다거나 하지는 않는
다. 시민의 고발의식이 공동체의 안위나 복지향상을 위해 도움이 된다는 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긍정적인 의미의 고발정신이 필요한 것
같다. 이러이러한 일은 전체를 위해서 삼가해야 하지 않은가 하고 지적하는 용기다.
그리고 그런 지적을 유쾌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아량도 배울 필요가 있다.
사회를 건전케 하는 객관적인 규범
'의'의 참뜻은 사람으로서 행해야 하는 도리라고 앞서 말한바 있다. 이미 여러 번
말한 바와 같이 인간사회란 복잡다기한 것이어서 살다보면 이런 길을 걸어야 하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아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고, 사람에 따라 판단의 기준이 달라 어
쩔 수 없이 타협할 수밖에 없을 때도 적지 않다.
자신의 생각으로는 이 길이 옳은데 다른 사람은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 따라서
자기가 옳다는 길만을 걸어가는 것이 과연 바른 것인지 의문을 갖게 되기도 한다.
이런 경우 자신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를 살펴볼 필요
가 있다. 다시 말해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에서 함께 삶을 영위하고 있는 타인들
의 공통적인 가치기준, 쉽게 말해 함께 공유하고 있는 공감대를 쫓아하는 편이 우선
안전하다는 것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가고 있는 방향, 많은 사람들이 지향하고 있는 행동양식이 모두
옳다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은 아예 포기하고 그 공동체가 갖고 있는 공
감정신을 조건없이 따르라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생각을 일단 유보하고 다른 사람들
의 형태를 우선적으로 받아들여 보려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좀 구체적으로 표현해 본다면, 어느 특정사회가 제시하고 있는 보편 타당한 의견에
따르라는 것이다.
위의 정신과 같은 것을 사회에 존재하는 객관적인 규범이라고 풀이한 것이다. 여기
에서 말하는 그 객관적인 규범은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 마련된 사회공약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사회적인 공감대라는 것도 이런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 예를 들면,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표출되는 여론조사에 나타난 평가기준 같은
것이 그 범주 안에 들어갈 수 있다.
국회의원이 특정기업이 주는 뇌물성 자금으로 해외여행을 했다고 할 경우 많은 사람
들이 그것을 잘못이라고 인정한다면 그것은 명확한 불의에 들어간다.
어려운 경제국면에 처해 있을 때에 함께 경제난국을 헤쳐나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해
야 할 때에 누군가 사재기를 일삼고 있다면 그 역시 불의다.
이와 똑같은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지역감정이 국가사회에 해를 준다고 믿는데도 불
구하고 이에 역행을 하거나, 현재 한국인 소득수준에 비해 볼 때 외래수입품의 남용은
좋지 않다는 것이 여론조사를 통해 드러났는데도 시대조류를 거스르는 것이 바로 불의
다.
'의'란 우리 생활 곳곳에 있다. 사람들은 '의'를 의리라든가 충의 같은 위계질서 사
회에서
상사에 대한 충성, 아니면 벗들과의 의리가 모두인 것처럼 쉽게 생각하기가 쉬운데 사
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함께 삶을 영위하고 있는 공동체의 이익에 반대되는 모든 모순을 지적하는
것도 '의'요, 많은 사람들이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기준에 승복하는 것도 '의'
다.
때로는 팽팽하게 의견이 양립되어 있을 때에 자신의 주장을 유보하고 상대방의 주장
에 귀를 기울여보려는 자세도 옳다. 어째서 상대방이 자신의 옳은 견해를 따르려고 하
지 않는가, 상대방에 대한 설득능력의 부족이 원인인가 하고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를 먼저 자신에게 묻고 당장의 대립과 파국은 피하고 다시 원점에서 문제해결을
시도하는 마음가짐이다. 그리고 어떤 것이 현사회를 건설적으로 이끌어가는 객관적인
사회규범에 맞는 길인가를 찾아서 다시 해결의 실마리를 함에 찾는 마음이 곧 '의'의
마음이다.
'의'가 없는 '용'은 위험하다
"논어"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자로가 스승인 공자에게 묻는다. "군자에 있어 역시 중요한 것은 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만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에 대해 공자는 "물론 '용'은 사람
누구에게나 필요하지만 '의'가 그보다 훨씬 중요하다"라고 대답한다.
공자는 이어 한 걸음 더 나아가 "'용'만 있고 '의'가 없는 경우 군자(지위가 있는
사람을 가리킴)라면 반란을 일으키고 소인(서민을 가리킴)리라면 도적이 된다"라고 좀
더 구체적으로 풀어 말한다.
['논어'는 중국, 유교의 근본문헌이다. 유가의 성전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사서의 하
나로, 중국 최초의 어록이기도 하다. 공자의 가르침을 전하는 가장 확실한 옛 문헌으
로, 공자와 제자와의 문답을 주로하고, 공자가 수시로 한 발언과 행적, 그리고 고제의
발언 등 인생의 교훈이 되는 말들이 간결하고도 함축성 있게 기재되어 있다. 현존본은
'학이편'에서 '요왈편'에 이르는 20권으로 이루어졌으며, 각기 편 중의 말을 따서 그
권명을 붙였다.]
'의'란 여러 번 풀이해 온 바와 같이 '사람이 행해야 할 바른 길'을 의미한다. 그리
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를 건전케 하는 객관적인 사회규범이라고도 풀이될 수 있
다.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는 '용'이 필요하다. '마음에 있는 뜻이
객관화되어 밖으로 나타나는 과정에서 구체적인 '용'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용'은 '의'라는 바탕이 없고서는 공자의 말과 같이 엉뚱한 방향
으로 나타날 수가 있다. 공자는 '의'가 없는 '용'은 크게는 반란이라고 했고 작게는
도적이라고까지 극언한 것이다.
자신과 함께 공통의 것을 추구하는 조직이나 사회의 보편타당한 논리가 아니더라도
자신이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면 그러한 자신의 뜻을 객관적으로 납득이 가능
한 방법으로 구현하는 것이 바로 '용'이다.
다시 말해 합법적이고 정상적인 방법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남들이 어떻
게 보든, 남의 견해야 어떻든 나만의 생각이 옳다는 식으로 밀어붙이는 타당성이 없는
극한적인 수단을 동원하는 것은 불의라 할 수 있다.
자신의 힘만 믿고 자신의 소신과 주장만이 옳고 따라서 어떤 수단이 동원돼도 좋다
고 생각하는 것처럼 위험한 불의는 없다. 더욱이 사회의 질서를 무력으로라도 제 뜻대
로 하겠다는 것은 공자의 말처럼 '의'가 없는 '용'이다. 일찍이 공자가 지적했듯이 '
용'만 있고 '의'가 없는 행동은 반란이 된다. 그리고 사회질서를 파괴하는 도적이 된
다.
이런 경우의 예로 우리 역사상 알려진 인물로는 왕건과 궁예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통일신라 말기, 신라에 반기를 들고 태봉이라는 나라를 만든 궁예는 '용'은 있었으나
'의'가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이미 사양길에 접어든 신라왕조에서 벗어나려는 민중들을 가혹하게 다스렸다.
그러나 그의 수하에 막료로 있던 왕건은 '의'가 바탕이 된 '용'이 있는 인물이었다.
결국 궁예의 포악한 학정에 시달린 신하들이 '의'를 따르는 왕건을 중심으로 모이게
된다. 그리고 결국 인심을 떠난 궁예 정권을 스스로 자멸케 한 것이다. 궁예는 결국 '
용'은 있으되 '의'가 없어 대성을 못하고 중도에서 비명으로 생을 마쳤다.
궁예와 왕건의 고사는 얼핏 보기에는 현실과 동떨어진 예로 보일는지 모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이와 흡사한 예는 시대를 초월해서 항상 존재한다.
일상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의'는 있으되 '용'이 부족해서 자기의 뜻을 펴지 못하
는 경
우가 적지 않다. 남을 도와주는 일을 해도 '제가 뭐 잘났다고 남들이 오히려 이상하게
보지 않겠는가' 혹은 '고행을 하더라도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러는 것처럼 보지는 않을
는지' 하며 마음을 쓰는 것이다.
[궁예( ? -918)는 마진. 태봉의 왕이었다. 신라 47대 헌안왕 또는 48대 경문왕의 서자
라고도 한다. 891년에 북원에서 일어나 898년에 송도에 도읍을 정하고, 자칭 왕이 되
어 국호를 후고구려. 마진. 태봉 등으로 정하고 뒤에 서울을 철원으로 옮겼다. 918년
왕건에게 쫓기어 달아나다가 토민에게 피살되었다.]
[왕건(877-943)은 신라말 군웅의 한 사람인 궁예의 부하게 되어 중신이 되었다가 918
년 부하에게 옹립되어 송도에 도읍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래서 공자도 '용'을 높게 평가했던 것이다. '용'은 일상생활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면서도 '용'보다 '의'가 먼저 와야 하고 '의'가 없는 '용'은 아예
없느니만 못하다고까지 극언을 했다.
요즈음 한국사회는 '의'가 있는 '용지 아니라 '의'가 배제된 '용'이 적지 않은 것
같다. 버젓이 남들 앞에서 외래 사치품으로 몸을 휘감고 있는다든가, 보란 듯이 배짱
좋게 공공질서를 파괴한다든가, 방약무인한 태도로 불법을 자행하는 일 등이 바로 여
기에 속한다.
행동으로 나타나는 보편적인 '선'
유교적인 전통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아온 우리 나라 사람들은 옛부터 다섯 가지 덕
목을 가장 중요시했다. 이 다섯 가지 덕목은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인, 의, 예, 지,
신으로 요약된다. 이것을 5덕목이라 하기도 했고 5상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이 다섯 가지 실행덕목 가운데서도 '의'의 덕목은 가장 포괄적으로 고르게
걸쳐 있는 윤리강령이다.
'옳은 의'를 바르게 실천하면 결국 '인'의 완성도 되고, 적극적인 '예'의 실현도 도
모할 수 있는 것이고, 자기자신의 수양과 인격도모를 위한 '지' 나 '신'도 함께 실천
하는 길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의'를 추구하는 생활이란 양심적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생활, 사회생활을 바
르게 하고 이웃을 위해 도움이 되려고 노력하는 생활, 하루 하루를 보람있게 자신이
속해 있는 조직체에 공헌하고 원만한 가정생활을 이끌어가려는 마음가짐을 뜻한다.
사람은 누구나 노력하면 개선의 여지가 있다. 잘못된 일이 있으면 반성하고, 남의
잘못에는 관대하지만 자신의 허물에는 엄격한 마음가짐 등이 우리 생활에서 구체적으
로 숨을 쉬고 있는 '의'의 생활태도인 것이다.
그뿐 아니다. 자신이 사회에 어떻게 공헌할 수 있는가를 항상 생각하며 그것을 위해
노력하려는 마음, 그리고 그런 길을 찾아 노력하는 생활도 '의'의 생활이라 할 수 있
다.
"글공부를 한다고 글을 잘 외고 잘 짓는 것만 일삼아서는 못 쓴다. 그보다는 몸가짐
을 단정하게 하고 행실을 바르게 하는 것이 더 소중한 법이다"라는 어머님의 가르침을
평생 동안 지켜왔다고 성리학의 대가인 이퇴계는 말했다.
요컨대 한국의 유학자로서 최고봉에 오른 퇴계도 자신의 학문적인 위치보다는 바른
몸가짐, 옳은 행실에 인간의 가치를 두고 그것을 끊임없이 실천했던 것이다.
[이황(1501-1577)은 조선조 중종 ·명종 메의 유학자·문신으로 자는 경호, 호는 퇴
계. 예조판서, 양관 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일생을 통하여 학문에 전주하여 학자적
태도는 후세의 사림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주자학을 집대성하고, 이기이원론. 사단칠
정론을 중심사상으로하여 율곡 이이와 양대 학파를 이루었다. 저서로는 '퇴계전서'가
있으며 이중 '주자서절요' '사서석의 ' '논사단칠정서' 등은 주요한 저술이다. 작품으
로는 시조 '도산십이곡'이 있다. 문묘에 배향. 시호는 문순이다.]
'의'의 생활은 평생을 지속해서 이어지는 노력의 생활, 자기 극기의 생활, 또한 한
발 한 발 바른길로 자신을 개선해 가는 생활의 과정을 말해 준다.
노력을 통한 자기 개선에는 연령의 제한이 있을 수 없다. 공자가 생존했던 5천여 년
전에도, 40세가 불혹의 연령이며 50세에 자기의 길을 안다고 했던 것이다.
오늘의 시대는 어떤가. 인간의 수명이 훨씬 길어지고, 사회가 더욱 다양하고 복잡해
진 현시대에는 50대가 새로운 뜻을 세우는 입지의 연령이 될 수도 있다. 자신이 밟아
온 생애를 되돌아보고 새 인생의 설계를 할 수 있는 연령이라 할 수도 있다. 어떤 의
미로는 50세가 새 출발의 시기가 될 수도 있다.
일생을 배우는 자세로,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자세가 또한 '의'의 자세다.
배워서 알고 있는 '의'가 아니라 실천으로써의 바른 생활에 대해 퇴계는 "유학의 근
본은 사서, 다시 말해 "논어", "맹자", "중용", "대학" 속에 다 들어 있다. 지식으로
써의 유학을 위해 이것을 공부하고 외우고 과거나 보는 데에 주력하다보니 마음이나
몸을 닦고 바른 행실을 하는 데에는 상관이 없이 되고 말았다"라고 말하고 바른 학문
의 실천도리로써 그는 "주자서절요"를 저술하여 학문뿐 아니라 몸가짐의 지침서로 삼
았다.
["주자서 절요"는 주자가 문인지구와 주고받은 서독을 뽑아서 이황이 역은 서간선집.
20권 10책. 1558년(명종13) 간행.]
오늘날의 '의'는 지식이 지식으로서 잠재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 사회의
발전에 기여를 하는 구체적인 형태로 드러나야 한다.
'의'라고 하면 우리의 머리 속에는 우선 충의나, 의협, 의리 같은 것만이 머리에 떠
오른다. 그러나 '의'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 사회를 이상적인 사회, 합리적으로
운영되는 사회로 만들어가기 위한 보편타당한 객관적인 가치라고 보아야 옳다.
그런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작은 일이라도 보다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참여하는 것이
곧 '의'의 길이 아닐까.
생색내지 않고 실행하는 마음
의로운 일은 진심으로 남을 돕는 일이다. 남에게 도움을 주는 좋은 일을 하고, 겉으
로 드러내어 자신의 공을 알리지 않는 태도가 '의'의 근본이다. 자신의 체면을 세우
고, 자신의 입장을 유리하게 하는 일은 아무리 남을 위한 것이라고 명분을 내세워도 '
의'라고 할 수 없다. 마음속으로부터 남을 위한다는 진실한 마음과 실제로 행하는 행
동이 일치할 때 '의'가 되는 것이다.
'의리를 지킨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을 통해 보면, 의리는 자신의 입장에서 남을 생
각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그 상대를 생각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
로 하지 않아도 될 일을 내가 선심을 쓰고 베푸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내 일
을 한다는 생각에서 행하는 일이 '의'라는 것이다. 내가 남을 위해 한 일이긴 하지만,
내가 남에게 해준 일이 아니라 내가 곧 그 사람(남)이 되어 내 일을 내가 한 것이 된
다. 그래서 자기의 얼굴을 내세워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내가 남이 된 마음에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는 '남' 속에 합일되어, 그 '남'과 동일화되는 것이다.
그래서 '의'로써 행한 일은 마땅한 일이 되고 꼭 해야 할 일을 한 것이 된다. 약속한
일을 이행하는 것과 같다. 안해도 될 일을 한 것이 아니고 꼭 해야 할 일을 행한 것이
기 때문에 의리를 '지킨다'는 말로 표현된다. 지킬 것을 지키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이기 때문에 생색을 내서는 안 되는 게 의리다. 자기의 행동을 남 모르게 하며,
자신을 낮추고 감추는 마음은 남을 도울 때나 남을 대접할 때 한국
인이라면 누구나 보이는 태도다.
예를 들어, 누가 물에 빠졌다고 할 때 그 사람을 물에서 구해내는 행동은 '의'고,
물에 빠진 것을 보고도 구하지 않는 것은 불의다. 물에 빠진 것은 그 사람 사정이지
내가 빠뜨린 게 아니니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서양의 합리주의
적인 정의감의 입장에서 본다면 남이 물에 빠진 것이 내 잘못은 아니라고 해도 될지
모른다. 그래서 그때 구해 준다 하면 구해 준 사람의 공이 강조될 것이다. 그러나 한
국인이 생각하는 '의'는, 구해 준 내 행동을 잘한 듯이 스스로 생색내지 않는 것이다.
마땅한 일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참 장한 일을 하셨소"라고 칭찬을 해도, "뭘요, 당
연한 일인데...." 하고 제 공을 내세우지 않는다.
좋은 일을 한 때일수록, 푸짐한 대접을 한 때 일수록 자기를 낮추고, 자기가 한 일
을 보잘것없다는 말로 표현하는 것이 한국인이 대인관계에서 보이는 태도다.
그래서 남을 청하여 음식을 대접할 때도 상에 그득한 음식을 두고 "차린 것은 없지
만 많이 드세요"라고 말한다.
생색내지 않는 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좋은 선물을 하고서도 "변변치 못한 것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한다. 이런
일상적인 말씨에도 오랜 전통 속에 이어져 내려온 한국인의 겸손한 마음이 배어 있는
것이다.
'공치사'란 말이 있다. 그것은 생색내는 마음을 경계하는 말이다. 빈말로 남을 치켜
세우는 말을 할 때에는 생색내는 마음이 은연중 들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베풀지
않으면서 말로만 공치사를 하여 자기의 낯을 세워보려는 의도가 들어있는 것이다 생색
낸다는 것은 자기를 지나치게 과시하는 마음과, 자기가 한 일을 의식적으로 드러내서
남으로부터 그에 대한 대가를 기대하는 마음을 말한다. 체면의 부정적 측면에 초점이
맞추어진 태도가 생색이다. '의'로움과 반대되는 표현이 생색낸다는 말뜻에 들어 있
다.
그래서 '의'란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행할 때 참다운 가치가 있다. '의'는 행하는
자신이 인정하고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남이 인정하고 옳다고 믿어주는 것이다. 자랑
하지 않는 태도는 한국인의 기본 성품을 나타낸다. 좋은 일, 옳은 일은 남이 칭찬해
주는 것이지 자기가 드러내서 자랑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아무리 잘한 일도 자신이
말할 때는 그 가치가 반감되는 것이 우리 사회의 통념이다.
조선 초 성종 때의 일이다. 성희안이 궐안에서 한밤중까지 근무했던 일이 있었다.
그때 홍문관의 정자벼슬직에 있었던 성희안에게 임금이 술과 과실을 내려 위로했다.
그날 임금이 내린 희귀한 과실은 감자와 귤이었다. 성희안은 하사한 술을 먹은 후
여염에서는 맛보기 힘든 귤 몇 개를 먹는 체하면서 소매 속에 넣었다. 집에 홀로 계신
어머니에게 드리려고 했던 것이다.
성희안이 술에 취해 내시가 업고 나가는데 그의 소매 속에 감추어두었던 과실이 떨
어져 마룻바닥에 홑어졌다. 그때 그것을 성종이 보았던 것이다. 그 이튿날 성종은 감
자와 글 한 쟁반을 은밀히 홍문관에 하사했다. "어제 성희안이 과실을 소매 속에 넣고
나간 것은 그것을 늙은 어머니에게 드리려 한 것이 분명하다. 내가 이것을 내리느니
성희안의 어머니에게 내려 효도를 하라"고 말했다.
이것은 많은 사람에게 알려 자신의 선심을 과시하지 않고 진심을 전하는 임금의 생
색내지 않는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일화다.
신하를 아끼는 성종은 은밀히 행함으로써 더욱 강한 의리를 느끼게 하는 군왕다움을
나타냈다. 이런 작은 일이 쌓여 군신간의 의리가 두터워지게 되는 것이다.
[성회안(1471-1513)은 조선조 중종 때의 공신으로 자는 우옹, 호는 인재. 연산군 10년
에 이조참판이 되었으나, 왕을 풍자하였다 하여 좌천되었고, 후에 중종반정을 성공적
으로 이끈 공로로 창산부원군에 봉함을 받고 영의정이 되었다. 시호는 충정이다.]
서구인 같으면 정식으로 불러 하사하고 떠들썩하게 널리 알렸을 것이다.
선물을 주고받는 것은 마음을 주고받는 것이다. 그래서 비록 작은 선물이라도 그 안
에 전하는 이의 마음이 담겨 있다면 그것보다 귀한 선물은 없다.
한국사회가 산업사회로 변해 가면서 마음으로부터의 선물이 어느덧 다른 목적을 담
고 있는 뇌물성격으로 변질되어 '선물' 하면 의로운 것이 아닌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
한 불의로운 것으로 인식되어 갔다.
마음의 진실이 담기지 않은 값비싼 선물이나 분수에 맞지 않는 선물은 받는 사람에
게 부담을 가중시킬 뿐만 아니라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사이의 '의'마저 끊게 하는
경우가 있다.
복조리를 몰래 던져주는 마음씨
서양 사람들은 카드를 좋아한다. 편지와 그림이 합쳐진 형식의 표현전달 수단이다.
짧은 말 몇 마디와 그림에 자기의 마음을 담아 전해 주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전하
는 표현수단으로써의 편지나 전화보다도 더 개인적이고 간편한 방법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카드가 등장하게 된 시기는 상당히 오랜 옛날로 거슬
러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카드가 보편적인 전달수단으로 일반화되고, 거의
모든 사람의 생활 속에서 관례화되어 사용된 것은 현대에 들어와서다. 옛날 사람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대표적인 수단으로 편지를 사용했다.
통신으로써의 편지, 사무적인 용건을 전하는 측면에서의 편지뿐 아니라 문학적 가치
를 지닌 편지나 사적인 정신내용을 담은 마음을 전하는 편지는 인간 사회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류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과학이 발달하고 생활의 급진적 발전과 더
불어 교류 유통이 빨라지는 스피드 시대가 돼가면서 편지로 마음을 적을 만한 여유와
시간이 줄어들게 되었다. 게다가 전화나 온갖 전파의 발달로 모든 소식을 급속히 직접
적으로 전달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전화나 방송 등 직접적이고 공적인 매체로는 사적인 내면의 마음을
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빠르고 간편하고 개인적으로 '너와 나' 이인칭적인 관계
로 만날 수 있는 수단으로 편지와 유사한 성격의 카드를 널리 선호하게 되었다.
편지처럼 세세하게 자기 표현을 하지는 못하지만 짧고 간편한 형식을 통해 많은 말
을 상징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그림을 곁들인 카드가 편지를 대신하는 추세가 확산되
어 갔다.
미국 같은 경우는 카드가 사치스런 몇몇 애호가들의 기호상품이 아닌, 모든 보통사
람들의 생활 필수품처럼 취급되고 있다. 쇼핑센터의 생필품코너에는 반드시 카드 판매
대가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쇼핑센터는 말할 것도 없이 식료품점이나 구멍가게
에서까지 카드를 팔고 있다. 크리스마스, 신년, 추수감사절 같은 중요 명절은 물론 온
갖 공적인 기념일에서부터 개개인의 기념적인 일들까지 축하하며 자기 마음을 표현하
는 카드가 판매되고 있다. 그 종류도 세분되어 주고 받는 이들의 구체적인 가족관계,
인간관계가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마음을 표현하는 내용도 다양하게 세분되어 있다.
결혼 카드라도 결혼을 축하한다는 뜻만 담긴, 누구나 쓸 수 있는 카드가 아니라, 축하
해 주는 사람의 신분에 따라 아버지, 어머니, 형, 아우, 친구 등 다양하게 구분되어
있다. 축하 카드가 있는가 하면 축하 카드를 잘 받았다는 감사 카드도 있다.
이렇게 전문적이고 예술적이기까지 한 카드의 영역은 서양문화 속에서 매우 큰 동질
감을 형성하는 카드 문화로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하여 산업화된 우리의 생활문화에 깊
숙이 뿌리박고 있다. 물질문명이 발달한 외향적이며 적극적인 사회, 개인주의가 발달
하고 대립의식이 심한 서구 사회에서 카드 문화가 더욱 발달하게 된 것은 당연한 현상
일 것이다.
카드는 우선 시각적이고, 화려하고 뚜렷한 영상적 기억을 줄 수 있는 표현수단이다.
개인주의가 발달한 서구사회에서는 개성적인 자기 표현욕구와 전달욕구를 충족할 만한
대리 표현방식을 필요로 하게 된다. 또한 서구사회는 대립과 갈등 의식을 역동적인 정
신으로 전환하여 발전한 사회기 때문에 적과 친구 사이인가를 밝히는 관습이 있다. 언
제 변하여 적대관계에 서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확인이 기회 있을 때마다
필요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서 발달하게 된 것이 카드 문화다.
반면에 농경사회에서는 생존 수단이 농사이기 때문에 유목사회에서와 같이 눈앞에
늘 적을 두고 먹고 먹히느냐 하는 상황 속에서 살아온 것이 아니다. 그래서 여유있는
생활을 하게 되며, 갑작스레 신의를 저버리는 상황이 유목사회에서처럼 일상화되어 있
지도 않다.
하지만 유목사회에서는 상대를 정복하고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투쟁 상황 속에서
살아가야 했다. 그래서 용기있는 자, 강한 자가 우선적으로 인정받는다. 서열의식과
질서규범의식이 철저하게 생활화되어 있다.
그 질서규범은 공존 사회의 장치지만, 그것만으로 인간관계가 완전하게 유지되지는
않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확인이 필요하다. 그래서 일찍부터 대화의 문화가 발달했
다.
이제 현대에 와서는 카드가 사람들의 상호 인간관계를 확인시켜 주는 전령 역할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카드는 보내는 사람의 마음을 추상적인 글로써만 전하는 게 아니
라 눈으로 분명히 볼 수 있는 그림이 곁들여지기 때문에 그들의 기호에 잘 맞는 것이
다.
그에 비하면, 한국사회의 카드 문화는 아직도 형식적인 사치품의 범주에 머물러 있
고, 시장성이 약하기 때문에 세련된 상품가치를 지니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
사회에서의 카드 문화는 서구문화의 유입과 더불어 이식된 외래문화의 전형이다. 이런
문화적 차이는 바로 한국인의 마음과 한국인다움의 특성을 말해 주는 것이다.
'카드 문화'로 대변되는 서양인의 생색내는 문화적 성격과 한국인의 생색내지 않는
문화적 성격은 뚜렷하게 대비될 수 있다.
이런 사례를 통해 우리 자신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다. 또 최근 우리 사회가 전통의
식과 한국인다움을 얼마나 잃고 있으며 이질화현상이 얼마나 심해졌는가도 느낄 수 있
다
따라서 이제 고리타분하고 현대 생활감각과 많은 격차가 있는 한국인다움을 어떻게
오늘의 생활감각과 통일시키는가가 하나의 문제다.
이제는 맞지 않는다고 해서 한국인의 본질을 버린다 해도 근사한 서양식, 미국식 문
화가 한국인의 새로운 문화적 특성으로 교체될 수는 없는 것이다.
한국인의 깊은 마음속에 박혀 있는 생명력의 씨앗을 눈뜨게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
한국인다움'인 것이다.
우리의 풍속에 설날 아침에 아무도 모르게 복조리를 던져주는 습관이 있다. 복조리
란 복을 전하는 것이요, 행운을 전해 주는 상징적 표현물이다. 즉 남에게 행운의 기쁨
을 전해 주는 아주 길한 물건이다. 그런데 이 좋은 선물을 우리는 아무도 모르게 아무
도 못 보게 비밀스럽게 전한다. 일생 동안 복조리를 누가 주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
래도 복조리를 받은 기쁨은 늘 우리의 마음속에 보이지 않는 어떤 정다운 것과의 끈과
연결되어 있다는 안도감을 안겨준다. 그런 생색내지 않는 마음의 끈이 한국인을 지켜
온 힘이며 의리를 지켜온 끈이다.
작은 실수라도 시인하는 자세
사람이면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다. 실수를 하기 때문에 인간이다. 그렇지 않으면
신이라 할 것이다. 실수를 했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수했을 때의 마음가짐,
그 반응, 태도다. 그때의 태도와 마음이 곧 '의'에 대한 의식을 나타내는 것이다.
'의'란 실천도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의로운 생각과 마음을 지니는 것이 더 중요하
다. '의'야말로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심에 의하지 않고는 실천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진리는 지적 능력과 판단만 있으면 비록 마음이 맞지 않더라도 실현 가
능한 것이다.
그러나 '의리'는 뜻과 마음이 합치하지 않으면 실현하기가 어렵다. 의리는 단순한
논리적 지적인 옳음이 아니라 의지와 마음이 하나의 통합된 정신을 이를 때 지켜질 수
있는 일의 이치다.
그래서 논리적으로는 좀 맞지 않더라도 진심으로 생각해서 한 일이 결과적으로 남에
게 해로움을 안겨주었을 경우 그 일은 의로운 일로 인정을 해줘 비록 잘못한 일이었다
해도 그 잘못을 용서해 주고 벌을 사해 준다.
그러나 잘못을 하고서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을 때는 더 큰 책벌을 가하는 것
이 '의'를 기반으로 하는 우리 사회의 상식이다. 똑같은 잘못이라도 의로운 마음이 근
저에 있었는가 없었는가에 따라 판단의 결과가 달라지는 것이다.
우리의 옛날 형벌은 이처럼 그 판결 기준이 '의'에 있었다. 그래서 의도적인 잘못이
아닌 실수에 대해선 너그러운 사회였다. '의'의 한계 밖의 것에도 늘 여유가 있었고
인정이 개재되었다. 웬만한 실수는 너그러이 용서하는 것이 한국인의 성품이었다.
그러나 실수란 것이 애매해서 겉으로 나타난 사실만으로는 실수 여부를 분명하게 판
단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실수가 분명하다는 판단이 서고, 정황상 실수라는 느낌이
들 때라도 실수한 당사자가 방자한 태도를 보일 때는 그를 용서하지 않는다.
실수를 하고도 자신은 잘못이 없었다는 주장만 하고 미안한 태도를 갖지 않을 때 그
사람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한다. 실수는 반드시 그에 대한 사의의 뜻을
밝히는 말과 태도가 곁들여져야 용서되고 이해된다.
'의'란 이처럼 옳은 것과 그른 것을 판단할 수 있는 마음이다. 사실적으로 또는 논
리적으로는 맞는다 해도 그 마음과 동떨어진 행동은 결국 불의가 된다.
'의'는 결론적으로 객관적 기준과 공동체 사회 전체의 기준이 중요하지만, 당사자
자신의 올바른 인식이 전제되지 않고는 행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
자가 양만으로 되어 있지 않고 나가 들어가 있는 글자로 이루어 진 것으로 보인다.
'의'의 행동주체는 바로 '나'고, 그 기준은 공동체 사회의 규범이라는 것을 명확하
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의'는 한국사회의 든든한 의식의 골조며 뼈대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자기 과오에 대한 올바른 성찰은 사람에 따라 다른 듯하다. 보통사람은 자신
의 과실에 대해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 또 어떤 사
람은 젊었을 때에는 자신의 과오를 깊이 깨닫고 인정하는 자세를 보였는데 나이가 들
어가면서 옹고집으로 변하기도 한다.
유학의 가르침은 그 근본이 평생을 통한 자기 수양이다. 제일 먼저 자기자신을 닦고
그 다음에 가정을 다스리고 나서 나라와 천하를 다스려 평화롭게 해야 한다고 했다. '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유학의 근본사상이기 전에 한국인이 오랜 옛날부터 가져온 마
음의 근본이었다.
한국인이 자기자신에게 엄격한 모습은 우리의 역사나 고전설화, 그리고 전설에서도
흔히 나타난다. 남을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또는 사랑을 위해서 먼저 회생하고 양보
하며 참는 쪽은 언제나 '나'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의인들은 신라시대부터 화랑을 비롯해서 너무나 많다. 논
개는 그 애국적인 행위로 '의기'라 불리운다. 일제시대의 애국자는 의사라 했다. 이런
'의'는 너무나도 당연한 정의다.
[논개 (? -1592)는 임진왜란 때의 의기로 성은 주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서울
을 빼앗기고 진주성만이 남았을 때, 6만의 왜병을 맞아 싸우던 세 장군 이하 수많은
관민이 전사 또는 자결하고 마침에 성이 함락되자 왜장들은 촉석루에서 주연을 벌였
다. 논개는 울분을 참지 못한 나머지 열 손가락 마디마디에 반지를 끼고 술취한 왜장
을 꾀어 벽류속에 있는 바위에 올라 왜장의 목을 껴안고 남강에 떨어져 죽었다. 뒤에
이 바위를 의암이라 불렀으며 사당을 세워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는 반드시 나라나 부모에 대해서만 나를 낮추고, 나라나 부모에
대해서만 나 혼자 모든 어려움을 감수하려는 수신의 자세를 나타내고 있지는 않다.
고려가요의 '가시리'를 비롯해서 님을 노래한 많은 문학작품에서 '나'는 언제나 양
보하고, 낮추고 희생하는 마음을 갖는 것으로 나타난다.
김소월의 서정시 '진달래꽃'을 보아도,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와 같이 '나'를 먼저 다스리는 마음을 나타낸다. 이 시구 속에서 우리
는, 한국 인이 남을 탓하기 앞서 자신을 탓하고 자기 수양의 정신을 지닌 민족임을 알
수 있다. 김소월은 한국인의 보편적 전통정서를 대표적으로 나타낸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김소월(1902-1934)은 시인으로 본명은 정식. 평북 구성군 출신. 오산학교 중학부를
거쳐 배재고보의 지도와 영향 아래 시를 쓰기 시작하여, 1920년에 "창조"를 통하여 문
단에 데뷔했다. 1722년에 "개벽"지에 떠나가는 임을 진달래로 축복하는 우리나라 서정
시의 기념비적 작품인 "진달래꽃"을 발표하여 크게 각광을 받았다. 1925년에 그의 유
일한 시집인 "진달래꽃"이 매문사에 의해 간행되었다. 그 후 실의의 나날을 보내다가
1734년 음독자살하였다. 그의 문단생활은 5, 6년에 지나지 않았으나 154편의 시와 시
론 "시혼"이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 우리 국민들 사이에서 자신의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풍조가 은근히 퍼지게 되었다. 혹자는 조선시대의 당파싸움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고, 또 일제 식민통치시대의 잔재라고도 한다.
어쨌든 남의 탓이라고 발뺌하는 습관은, 남에게 탓을 돌리지 않고는 목숨을 부지하
기 어려웠던 상황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편법의식에서 나왔던 것이다.
한국인다운 공동체 의식이 그 가치를 발휘할 수 없었던 이질화된 식민지시대의 나약
한 인간적 허점에서 기인하는 마음이, '의'를 잊고 남을 탓하는 마음을 갖게 했던 것
으로 보인다. 그러나 예로부터 모든 일에서 내가 먼저 잘못했다는 '내탓의식'은 한
국인의 뿌리깊은 의로운 마음과 깊이 맺어져 있다. 남의 잘못이 분명한데도 자기가 일
부러 허물을 뒤집어쓴 의인도 우리 역사 속에는 많이 있다.
이제 이런 의로운 정신을 회복하고 한국인의 바른 본성을 실현하여 오늘의 혼란과
무질서를 극복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책임감을 분명히 인식하게 하고 자신의 잘못에 대해 분명히
깨달을 수 있는 의로운 마음을 가르쳐야 한다. 이런 '의'의 마음은 지식보다 앞서 사
람이 사람다움을 지닐 수 있는 을은 것에 대한 인식과 판단이기 때문에 세상에 눈을
뜨기 시작할 때부터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바른 것에 대한 판단과 인식을 일찍부터
익히고 마음깊이 인식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보다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
많은 어려움이 닥칠 것이다. 심지어는 비뚤어진 생활로 일생을 망칠 수도 있을 것이
다. 옳은 것에 대한 인식이 없는 것은 눈, 코, 귀가 없는 것보다 더 불행한 것이다.
더 위험한 일이다. '의'가 무너진 사회는 부패하고 타락한 사회다.
엄청난 범죄도, 작은 실수에 대한 자기 잘못을 시인하지 않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모든 고난과 궁핍과 고통이 나 아닌 남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데서 사회적 불의는 독버
섯처럼 퍼져간다.
버스를 탔을 때, 갑자기 차가 움직이는 바람에 실수로 남의 발등을 밟는 경우는 흔
히 있는 일이다. 그때 '죄송합니다'라는 말 한마디하는 사람이 드물다. 미안한 마음이
있는데도 잘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역시 한국인의 특색이라 할 수 있다 마음속으로는
언제나 깊이 생각하고 있지만 겉으로는 잘 드러내지 않는 것은 한국인의 미덕이기도
했다. 그러나 잘못을 저질렀을 때만은 용기있고 솔직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
의의 뜻을 밝히는 것이 옳다. '미안합니다'라는 말 한마디는 상대방에게도 불쾌감을
덜어주는 효과를 나타내지만 자기자신의 마음도 가볍게 씻어주는 효과를 나타낸다. 도
리를 따라 행하면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이다.
미국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남에게 폐가 되는 일에는 '익스큐즈 미(Excuse me)'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사람 사이를 스치듯 지나갈 때도 '익스큐즈 미'라고 한다. 기침
이 나올 때도 '익스큐즈 미', 상대방 이야기를 잘못 알아들었을 때도 '익스큐즈 미'나
'아이 백 유어 파든(I beg your pardon)'이라고 말한다.
한국인들은 어쩔 수 없이 생긴 실수이므로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상대방이 이
해할 거라는 묵계라도 되어 있는 듯, 웬만한 실례에는 미안함을 나타낸다거나 이해를
구하는 말을 하지 않고 그냥 지나친다.
물론 한국인끼리는 서로 문화적인 배경이 같으니까 그런 미안한 느낌을 반드시 말을
통해서만 전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한국인은 마음을 더 중히 여겼고,
말하지 않아도 그 심정을 알아차리는 정신적 풍토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은 실례가 쌓여서 큰 실례가 되고 은연중 남을 경시하는 마음이 싹틀 수도
있다.
요즘은 스피드 시대다. 여유있게 오래 생각하고 남을 이해할 만한 시간이 많지가 않
다. 또 단절의 시대다. 옛날처럼 한동네 한이웃 사람을 한집안 식구처럼 자주 얼굴을
마주 볼 기회도 드물다. 그래서 한 번 실례한 일은 나중에라도 풀 기회를 마련하기가
어렵다. 그때그때 자기표현을 분명히 해야 오해가 쌓이지 않고 사람 사이에 단절감이
생기지 않는다.
한국인은 체면을 중시하는 특성이 있었다. 체면 때문에 마음에 없는, 능력도 안 되
는 일을 무리하게 추진하는 일도 많았다. 그래서 체면을 매우 부정적 의식으로 보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체면은 사람다움을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인간적 여건이었다.
체면은 사람의 진실을 나타내는 얼굴로서, 그것은 개인적인 얼굴이 아니라 남과의 관
계에서 남을 대하는 체제를 갖춘 얼굴이다. 공적인 얼굴이다. 자기다운 인격에 맞춘
얼굴이고, 남에게 보여도 손색이 없는 얼굴이 체면이다. 그러나 요즘은 '체면'이 가진
본래의 참뜻과는 달리 자기다움을 벗어난 가면과 같은 뜻으로 변해 버렸다.
그러나 본래적 의미로 볼 때 체면이 없어진, 체면 차리는 마음이 사라진 사회는 무
서운 범죄가 훨씬 많이 심각하게 일어난다. 우리의 체면은 아름다운 풍속을 많이 만들
어냈다. 따라서 우리는 체면의 부정적 측면만 보지 말고 체면의 아름다운 얼굴을 다시
볼 필요가 있다 체면은 눈곱이 끼고 검댕이 묻은 더러운 얼굴이 아닌 깨끗이 세수하여
로션도 바르고 자연스럽게 화장도 한 호감이 가는 얼굴이다. 체면은 남에게 즐거움을
주는 얼굴이며 남을 기쁘게 하는 얼굴이다.
얼굴에 뭔가 더러운 것이 묻었으면 닦아야 한다. 그건 자기가 잘못한 것을 시인하
고, 이해와 용서를 구하는 것과 같다. 더러운 얼굴을 하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남의 얼
굴을 대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부끄러움은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알게 되는, 본
성적으로 사람이 지닌 마음이다.
'의'는 바로 부끄러움을 가리키는 저울과 같은 것이다. 저울은 정확하다.
작은 실수에 대해서도 저울처럼 분명히 나타내주는 마음의 저울을 우리는 간직하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어쨌든 체면이란 한국인에게 있어 인간다움을 잃지 못하게 하는 최소한의 외형적 장
치로 중요한 도덕적 윤리적 기준이 되어왔다. 체면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억제했고,
체면 때문에 남을 도와주기도 했다. 그런 체면을 유지할 수 있었던 때까지는 적어도
그 사람은 인간다움을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체면이고 뭐고 없다' 하게 되면, 그
건 인간임을 포기한 야만의 상태로 떨어진다는 얘기가 된다. 남을 생각하지 않고 남이
자기를 어떻게 보든 말든 상관하지 않기 때문에, 규범도 기준도 없는 혼란 속에서 온
갖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작은 잘못이라도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마음에서부터 '의'는 시작되는 것이다.
오늘의 젊은 의인 - 임명희씨의 경우
대구의 칠성시장 주변에서 일흔이 넘은 할머니 한 분이 폐휴지를 수집하고 다녔다.
20대의 청년이 우연히 그 외롭고 불쌍해 보이는 할머니를 돕게 되었다. 보통은 무관심
하게 지나칠 일이다. 그런 안쓰러운 광경은 우리 주변에서 늘 마주치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의로운 마음의 눈은 그런 광경을 그냥 지나지지 못하는 것이다.
대구에 사는 임멍희씨는 전혀 낯모르는 할머니의 고생스런 모습을 보고 가슴속으로
부터 뜨거운 의협심을 느끼게 된다.
그토록 연로한 분이 어찌하여 시장가에서 휴지를 줍고 다녀야만 하는가, 그 할머니
는 가족도 없는가, 남들처럼 공부할 것 다하지 못하고 일찍이 생계를 유지해야 했기에
사회적. 경제적 활동을 누구로다 빨리 시작했던 임명희씨는 그만큼 일찍 속깊은 어른
이 된 청년이었다. 그래서 그만한 연배의 다른 젊은이보다 삶에 대해 깊은 안목을 지
니고 있었다. 일찍 체험한 인생의 고통만큼 알찬 마음을 지닌 청년이었다.
임멍희씨는 어느날 우연히 보게 된 할머니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떨치지 못하고, 할
머니의 살아가는 사정을 알아보는 등 마음을 쓰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그 할머니가 대구 북구 침산동에 살고 있으며, 윤판암이란 이름을 갖
고 있으며, 일흔 네 살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돌보는 이 없이 혼자 사는 외로
운 노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애초에 그의 마음을 찌르던 그 의협심이 노인의 사
정을 알고 나니 더욱 그의 마음을 아프게 건드렸다.
수시로 시장 주변에서 마주치는 노인을 볼 때마다 그의 마음은 편지가 많았다. 휴지
따위를 주워 팔아서 끼니를 제대로 이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는 마침내 쌀을 사들고
할머니의 집을 잦아가기에 이른다. 자신도 고향을 떠나와 먼 외지에 와서 사는 처지였
다.
할머니는 자신의 외로운 처지와는 비교도 안 될 환경이고, 노구에다 재산도 가족도
없는 것이다. 그때부터 임명희씨는 윤판암 할머니를 친척 어른 모시듯 마음을 쓰기 시
작했다.
자신도 장사일로 바쁜 생활에 쫓기는 처지였지만 할머니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한달에 한두 번 이상 틈나는 대로 할머니를 찾아가 쌀도 사다드리고 용돈도 매달 2, 3
만 원씩 챙겨드렸다. 설이 되면 친부모 대하듯 세배도 다니며 아들과 같은 가족의식으
로 대하게 되었다. 그렇게 남 모르게 의로운 일을 실행해 온 지가 현재 9년째다.
임명희씨는 지금 자동차 부품을 파는 상점을 운영하고 있다. 큰 기업가도 아니고,
대자본가도 아니다. 남보다 일찍 고생을 시작했으니 구두쇠 소리를 듣기 쉬운 처지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그 젊은 나이에 놀랍게도 완벽한 의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의인으로서 이 사회를 떠받치는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이다.
요즘은 의인이 사라져가는 시대라고 한다. 남이 어려움에 처하거나 위급한 상황을
보고도 눈감고 지나가는 살벌한 시대다. '의'를 행한다는 것은, 남을 돕는 것에서 끝
나는 게 아니다. 남을 돕다가 자신의 일에 피해를 볼 수도 있고 극단적으로는 목숨을
걸지 않으면 안 되는 정의감이 요구되기도 한다.
그래서 '의'는 알기도 어렵지만 실천하기는 더욱 어려운 것이다. 아무리 '의'가 어
렵고 힘들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라 해도 어느 시대에나 어느 사회에나 의인은 있
다 그래서 그들은 그 사회의 희망이며 빛이다.
임명희씨의 경우도 많은 의인 중의 한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그의 의로움은 한층
돋보이며, 우리의 마음에 부딪쳐오는 파장이 유별나게 다르다.
그는 큰 의인의 길을 저음부터 택한 종교인도 아니고, 넉넉한 재산가도 아니고, 학
식이 높은 이도 아니다. 처음부터 거창하게 큰 돈으로 남을 도울 수 있는 처지가 아니
었지만 그는 순수한 의협심을 바탕으로 남을 돕기 시작했다. 물질적인 나눔에 그치지
않고, 마음의 나눔을 실현했다. 그는 체질적으로 참다운 의인의 자질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그렇게 시작한 임명희씨의 의로운 행동의 실천은 그후 꾸준히, 그리고 적극적으로
계속되었다. 이웃의 노인들, 양로원, 보육원의 노인과 어린아이들, 불우 청소년들, 무
단가출한 청소년들, 신문배달하는 근로청소년들, 절도행각에 빠져든 불량우범 청소년
들 등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봉사하고 뒷바라지를 했다.
경로잔치를 열고 위문품이나 용돈을 전달하는가 하면 방범장비,·청소도구를 구입.
지원해 주는 등의 물질적 도움을 비롯해서, 직접 방범 순찰에 참여하고, 청소년 선도
활동이나 거리 교통질서 활동을 벌이는 등 온몸으로 '의'를 실천해 왔다.
특히 1984년에 대구 상업은행 평리동 지점에서 돈을 찾아오던 여자 손님이 날치기
당하는 현장을 목격하고 용감하게 범인을 붙잡아 경찰서에 인계한 용기있는 행동은 자
신의 위험을 돌보지 않고 남을 돕는 의로운 행동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이 일로 임명
희씨는 용감한 시민상을 탄 바 있다.
많은 사람이 남을 위해 봉사하고 돕는 것을 본다. 우리 주변에서는 알게 모르게 많
은 도움의 손길이 오가고 있다 하지만 임멍희씨와 같이 위험을 무릅쓰는 이는 드물다.
또 어떤 사회의 문제의식을 선전하기 위한 과시적인 행위가 아닌, 이웃사랑의 새생활
의식으로 순수한 인간적인 의리를 바탕으로 한 의인의 자세로 '의'를 실천하는 예는
그리 흔치 않다.
사람이 죽어가는 광경을 보고도 그냥 지나지는 비정한 시대에 임명희씨의 수많은 의
행은
우리 시대에 특히 인상적인 의인의 모습으로 비춰진다.
"예" 그것은 사회의 질서를 지키는 룰이다
예란 현대적으로 쉽게 풀어보면 '매너'나 한 사회의 질서를 지키는 사회생활의 '룰'
을 존중하는 마음가짐을 의미한다. 어느 사회이건 그 속에 예속되어 생활하는 사람들
이 지켜야 하는 질서와 행동양식이 있기 마련이다.
서양은 서양대로 동양은 동양대로 오랜 전통과 관습에 의해 형성된, 사회구성원들이
지켜야만 하는 행동거지가 있다. 그것이 곧 '예'다.
이를테면 오늘날 이스라엘을 지탱하고 있는 사회의 룰은 수천 년을 헤아려 오늘에
이르고 있는 유태교의 교리에 따른 생활전통과 그 윤리 의식이다.
이들과 맞서 견원지간의 대립세를 이루고 있는 아랍권은 이슬람 종교가 바탕이 된
생활규범과 행동양식이 있다.
어느 국가, 어느 사회, 어느 조직체에도 이와 같은 룰이 존재한다. 쉽게 표현하면
이런 것들이 모두 오늘의 '예'에 속한다. 비단 민족이나 사회의 구성원이 지켜야 하는
매너뿐만 아니라 작은 규모의 회사라고 할지라도 그 회사의 종사원들이 지켜야 하는
사풍, 사시가 있다. 이런 것도 '예'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최근 한국의 기업체에서
유행하고 있는 기업문화라고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넓은 의미로 보아 기업내 사원들
의 '예'에 넣어도 좋을 것이다.
다시 말해 '예'란 것은 조직이나 사회의 질서를 원활하게 유지할 뿐 아니라 전향적
으로 움직이게 하는, 조직원들이 갖추어야 할 마음가짐과
행동양식이라고 볼 수 있다.
'예'를 제창한 공자는 당시 이미 없어진 주나라의 도덕률을 부활하고 잃어버린 국가
사회질서의 부흥을 꾀하기 위해 노력했다. 세상 사람들이 예의에 따르는 행동을 하면
아무리 어지러운 사회라고 할지라도 능히 부활할 수 있고 사람답게 사는 사회로 재활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이다.
공자가 살았던 시절은 뒷날 난세로 기록될 만큼 어지러운 사회였다. 공자는 그런 사
회일수록 '예'가 무엇보다도 절실한 과제라고 설파했던 것이다.
'예'가 올바로 서 있는 사회에서는 형식적이고 강제력있는 법이 뒷전에 서게 된다.
'예'가 사람들의 생활규범을 내면에서 강하게 지배하고 있는 사회에서는 법이 표면에
나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거꾸로, '예'가 설 땅이 없어지거나 그것이 존중되지 않는 사회나 국가에서
는 법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법이 사람들의 생활규범을 묶어 사회의 질서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동양사회와 미국사회의 예를 보면 우리는 그런 양극의 대립된 사회 상황을 극명하게
볼 수가 있다.
한국사회나 일본사회는 오랜 유교적인 전통의 사회여서 '예'가 사람들의 의식을 지
배하고 있다. 누구나 성장하면서 가족의 생활을 해가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족
이 갖고 있는 소단위 조직의 룰인 '가족의 예'를 익히게 된다. 자녀는 부모를 공경해
야 한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으로써 바르게 가르쳐야 한다. 형제는 형제대로 서로 아
끼고 살펴보는 우애가 있다. 이런 예의가 사회로 연결되고 또 사회생활을 하면서 사회
가 가지고 있는 위계질서 등의 예의도 몸에 배게 된다.
그러나 이런 '예'가 뒷전에 있는 사회를 상상해 보라. 미국 같은 다민족국가가 이와
비슷한 경우다.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으로(법에 저촉이 되지 않는 한) 보장받고 있
는 나라는 질서의 유지를 위해 피부에 와닿는 것이 법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예의가
살아 있는 나라와 예의가 없는 나라와의 차이는 법에 의해 질서가 유지되는 나라와 법
이전에 사람의 도의심으로 질서가 잡히는 나라로 나뉘게 된다.
그런데 법에 의해·질서가 유지되는 나라일수록 범죄가 많고 위법자가 많고 사회가
험악하다. 인간의 내면을 지배하는 예의가 없는 나라일수록 인간의 외면을 지배하는
법이 많아야 할 뿐 아니라 날이 갈수록 범죄의 종류도 많아지고 범죄건수도 늘어난다.
인간의 외면을 규제하는 법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유교가 오랫동안 사회생활의 기본이 되어 있는 동양권에서는 끔찍한 범죄사건이 적
고, 가정불화나 성격파탄자가 적은 이유가 바로 인간 내면 세계를 움직이는 '예'가 살
아 있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예'가 살아 있다는 것은 그 사회를 건전하게 향상시키는 사회의 기강이 살아 있음
을 뜻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룰이 살아 있어 사람의 마음을 감시하고 바른 궤도에 따
라 움직이게 하고 있음을 뜻한다.
그러나 이 '예'가 외관상으로만 존재해서는 곤란하다.
'예'의 진수는 마음속에서 우러나야 하는 것이지 외관적인 예의범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더욱이 가식으로 겉뿐인 예의에 그쳐 더욱 위험하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 사회에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이 외관상의 겉치레 '예'가 아닐까. 진정
한 '예'가 아닌 겉치레 '예'는 오히려 하나에서 열까지 법으로 묶어야 하는 '법 규제
의' 사회보다 못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예'를 다한다는 마음으로부터의 선물이 뇌물로 둔갑한다든가, 스승으로서
의 '예'를 받아온 선생이 존경심을 잃게 된다든가 한다.
사회가 이렇게 되면 예의는 껍데기만 남게 되고 사회는 공동화한다. 앞서 지적한 것
처럼 방향을 잃어버리는 사회가 된다.
오늘 우리 사회처럼 현실에 맞는 '예'의 부활이 절실할 때도 없을 것 같다.
높을수록 지킬 예의의 폭이 넓다
사람이 사회적인 지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처신이 어려워진다. 아랫사람의 예의
를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 또 주변인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자기 신분에 맞고 또 예의
에 어긋나지 않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신경을 쓰게 된다.
지위도 낮고, 조직체에서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위치에서 일을 할 때에는 남의 눈치
를 보면서 행동거지를 배울 수도 있지만 지위가 높아질수록 그런 기회는 없어진다.
상사의 지시를 따르기만 했던 시절에는 사실 일에 대한 책임도 없다. 시키는 일을
하고 나면 그만이다. 또 처신하기 어려운 경우가 생기면 선배에게 도움을 얻어 일을
처리할 수도 있고 몇 차례이건 실수를 거듭해서 일의 순서를 습득해도 되고 또 웬만한
실례도 그때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지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자신이 해야 할 예의 범위가 넓어진다. 그것은
자기자신의 접촉 영역이 넓어진다는 뜻만이 아니다. 자신의 '예'가 다른 사람에게 주
는 영향의 폭이 커지고, 그 결과가 또한 자신이 생각하지도 못하는 방향으로 전파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독단적으로 그 행동의 방향을 선택해야 하고 결단을 내려야 한다. 경
영의 최고 위치에 오르게 되면 판단의 참고가 될 만한 선례도 적어진다. '이렇게 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라든가 '이런 경우에 이렇게 하십시오'라는 충고도 듣기 어렵게 된
다. 더욱이 판단을 잘못했을 때에 강한 충고를 받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최
고의 자리에 있는 사람 주위에는 그런 진정한 충언을 할 만한 사람보다 아부하는 사람
이 늘어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판단이 가장 옳다고 생각하며 남의 말에 귀
기울이기를 싫어하는 습성이 몸에 붙게 된다. 한창 중견간부 시절에 처신을 잘하고,
기백에 넘쳐 윗사람이나 동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던 사람이 사장이 된 뒤에 사람
이 달라졌다는 말을 듣게 되는 실례를 자주 볼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자신의 입신출세는 완벽한 자신의 능력에 의해서 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따
라서 다른 사람들에 비해 자신이 월등하다는 자신감이 큰 인물일수록 조직의 정점에
오르면 방향감각을 잃게 되는 수가 많다.
우리 역사를 보면 자신의 직위가 높으면 높아질수록 아랫사람에게 더욱 접근해서 예
의를 더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외로운 위치에 있으면서도 판단을 그르치지 않고 훌륭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이 적지 않다.
조선시대 태조 때부터 세종 때에 자신의 입신출세가 오로지 이르기까지 무려 18년
동안 재상직에 앉아 새로 탄생한 조선의 국권을 튼튼하게 한 황희 정승이 그 대표적인
예에 속한다.
황희는 워낙 위계질서에 연연해하지 않고 지위가 높을수록 아랫사람과 더 가깝게 접
촉하면서 지냈기 때문에 고려 초부터 내려온 폐습을 누구보다도 먼저 체득한 사람이었
다.
천첩의 소생이라도 천한 노동에서 면제시키도록 한 획기적인 민권개혁 등과 평민에
게 고초를 주는 악법을 30여 가지나 개정케 했다는 것은 지위가 높음에도 불구하고 아
랫사람들과 가깝게 지내며 아랫사람의 상황을 잘 파악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위와 같이 위아래를 구별하지 않는 그의 너그러운 성품 때문에 항시 시기와 암투가
무성했던 조정내에서도 그를 모함하려는 사람이 감히 불만을 입밖에 낼 수 없었다고
한다.
어떤 자리에 있어도 자신이 지니고 있는 '원칙'에 따라 사람의 운신의 폭은 좁아지
기도 하고 가없이 넓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살펴본 한국인의 선물문화
선물에 대한 우리나라의 관습은 출생, 돌, 생신, 회갑 등이나 고유명절을 축하하기
위한 마음의 표시로 선물을 주고받는 것이 관행으로 행해져왔다.
우리 민족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정이 많은 민족이다. 사회적으로는 계모임이나
두레 등으로 상호 협조정신이 강했던 민족성을 갖고 있다. 인간의 본성 가운데 하나인
누구에겐가 무엇인가를 주고 싶어하는 마음이 남다른 것도 이때문이다.
우리 고사에 실려 있는 선물에 관한 몇 가지 일화를 소개해 본다. 우리 선인들은 선
물을 가려서 받곤 했다.
이퇴계가 주변에서 받거나 물리친 선물의 실례를 보기로 한다. 퇴계의 한 제자가 선
물을 가려받는 퇴계의 처사에 대해 "의성의 선물에서 마른 고기는 물리치고 .필묵은
받았으니 만일 그것이 의로운 것이라면 모두 받았어야 할 것이요, 의롭지 않은 것이라
면 모두 받지 않았어야 할 것인데 어째서 그 크고 작은 것을 가려서 받았습니까" 하고
물었다.
이에 대해 퇴계는 "내 일찍이 주자가 조자직의 선물에서 인삼과 부자는 받고 금품은
물리쳤으며 또 어떤 사람의 선물에서는 강게는 받고 베는 물리친 것을 보았다. 대개
그때에 조공이나 어떤 사람은 다 잘못이 있었지만 그 허물이 절교할 만큼 크지 않았기
때문에 가벼운 물건을 받아서 절교하지 않을 뜻을 보이고 중한 물건은 물리쳐 그 사람
의 잘못을 깨우친 것이다. 내가 사양하고 받은 이유는 말할 것도 없지마는 그때의 처
리로서는 약간의 곡절이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답변했다.
사람이 정말 좋은 뜻으로 주는 선물을 받는 것은 주는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는다는 '예'로서 받되, 지나치다고 생각되는 것은 받지 않음으로써 상대방에게 그런
교육을 시킨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가장 한국적인 선물의 수수방법일 것 같다. 정으로 주는 것은 정으로 받아야 예의나
그 정의 표시가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보아 털끝만치라도 지나치다고 판단될 때에는 단
호하게 물리쳐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언적의 "회재집"에도 선물에 대한 동양적인 개념이 실려 있다.
"옛 당나라 육지는 어진 재상이라 청렴 결백하여 사람의 선물을 받지 않았는데 덕종
(당시의 황제)이 알고 말하기를 '만일 전혀 받지 않으면 변방이나 해안의 진 같은 데
의 정의를 받지 않으려 함이니 오히려 좋지 않다. 가벼운 선물, 예를 들어 채찍이나
신 같은 것을 받는 것이 가하리라' 했다. 이와 같은 황제의 말에 대해 육지는 '만일
작은 물건이라도 받으면 반드시 큰 물건을 보냅니다. 그런고로 큰 물건을 받지 않기
위해 작은 물건을 받지 않은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언적 (1491-1553)은 조선조 중종 때의 성리학자로 자는 복고, 호는 회재. 1530년
(중종 7) 사간으로서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도리어 숙청되어, 경주 자옥산에 들
어가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그 뒤에 다시 등용되어 좌찬성 겸 원상까지 지냈으나 윤원
형 등의 모함으로 유배되어 배소인 강계에서 죽었다. 저서에 "회재집" 등이 있다.]
아무리 사소한 선물이라도 선물을 받게 되면 그것이 받는 버룻으로 굳혀질 것임을
경계한 실례다. 여기에서는 선물을 받는다는 것은 선물의 내용보다 받는다는 행위 자
체를 어려워해야 함을 지적하고 있다.
이와 비슷한 예화를 하나 더 찾아본다.
공자의 '재액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언젠가 증자가 다 떨어진 옷을 입고 노나라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노나라
임금이 이 소문을 듣고 증자에게 한 고을을 떼어주었다. 그러나 그것을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이때에 사람들이 누구나 다 말하기를 '그대가 원한 것이 아니고 노나라
임금이 자기 마음에서 주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굳이 사양하는가' 하며 증자에게 받기
를 권유했다. 그러나 증자는 '듣자니 남의 것을 받는 자는 항상 남을 두려워하게 마련
이고 남에게 물건을 주는 자는 항상 남에게 교만하게 마련이라고 한다. 임금이 나에게
땅을 주기만 하고 교만을 부리지 않는다 할지라도 나로서야 어찌 두려운 마음이 없겠
는가' 하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선물이 선물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받는 자와 주는 자 사이에서 일
어나기 쉬운 마음의 갈등을 말해 준다. 아무리 순수한 뜻에서 주는 선물이라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부담이 되는 것이고 주는 사람은 아무래도 무엇인가 남에게 혜택을
주었다는 우월감에 젖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선물의 심리학이라 해도 좋은 듯하다.
이렇듯 선물을 주고받는 것은 아름다운 마음의 오고감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사람의
마음을 변하게 하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예'의 범주를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진솔한 마음의 표시가 곧 '예'
자기의 진솔한 속마음을 꾸밈없이 전달하는 것도 생활 속에서 늘 접하는 '예'의 한
가닥이다. 그리고 그런 예의가 몸가짐이나 얼굴 표정에서, 정성을 담은 선물에서 상대
방에게 전해질 때에 그런 예의를 받는 사람들로부터 마음에서 우러나는 응답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산업화사회로 치달아가면서부터 인간의 마음을 떠난 물질만으로
표현되는 '예'가 '예'의 거간물로 바뀌어가고 있는 실정에 있다.
사람의 마음은 없고 물질이 그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정의 표현으
로 마음을 담은 선물까지도 예의의 형식을 빌린 물질로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샴의 법칙이 여기에도 적용되어 이제 마음으로부터의
선물이 있어야 할 자리에 뇌물이 들어서고 있다는 것이다.
선물을 주고받는 일은 즐겁고 아름다운 인간사회의 정의 오고감이다. 선물을 받는다
는 것은 다만 물건을 받는 기쁨이 아니라 보내는 사람의 사랑과 정성을 받는 기쁨에
있다. 그리고 받는 기쁨보다는 주는 기쁨이 더하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생각해 보자. 사랑을 받는 기쁨보다는 사랑을 하는 기쁨
이 더하지 않는가. 누군가를 기쁘게 해주려는 그런 마음이 없는 사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메마른 사회일 것이다.
프랑스의 소설가인 아나톨 프랑스(Anatole France)는 "이 세상의 참다운 행복은 무
엇을 받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주는 데에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어떤 계
기를 맞아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 사람이 좋아할 물건을 사서 포장하는 기쁨은,
그 선물 속에 자신의 진실된 마음이 실려 있으면 있을수록 더 크다.
오 헨리(0 Henry)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단편소설이 있다. 서양 사람의 선물에
대한
감각을 잘 이야기해 주는 작품이다.
가난한 부부가 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 서로가 무엇인가 마음으로부터의 선물
을 해주려고 한다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무엇인가를 선물하려고 하는 것
이다.
크리스마스 이브가 됐다. 아내는 남편이 가장 아끼는 물건인 회중시계를 생각한다.
그런데 그 회중시계에는 시곗줄이 없다. 시곗줄이 있으면 얼마나 멋질까. 그래서 어떻
게 해서든지 그 회중시계의 줄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주고자 한다. 그런데 돈이 없
다. 생각다 못해 아내는 자기의 긴 머리를 팔기로 했다. 긴 머리를 잘라 팔면 얼마간
돈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편 몰래 긴 머리를 가발상에서 잘라 팔고 그
돈으로 멋진 시곗줄을 샀다.
남편 역시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사랑하는 아내에게 무엇인가를 선물하고 싶어한
다. 궁리를 한 끝에 아내의 아름다운 머리를 생각하고 그 머리를 빗고 꽃을 수 있는
예쁜 머리빗을 사기로 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것을 살 돈이 없다. 생각다 못해 자기
가 아껴온 회중시계를 팔아서 머리빗을 사려고 한다.
크리스마스 이브가 됐다. 그는 회중시계를 판다. 그리고 자기 아내의 아름다운 긴
금발머리에 어울리는 예쁜 빗을 샀다. 이 예쁜 빗이 아내의 금발에 얼마나 잘 어울릴
까 하면서 집에 이른다. 부부가 선물을 주고받는다. 회중시계가 없는 시곗줄, 아름다
운 긴 금발이 없는 머리빗을 서로 주고받고 흐느끼면서 서로 마음을 위로했다는 것으
로 이 이야기는 끝난다.
이 이야기는 서양 사람들이 주고받는 선물의 의미를 우리에게 말해 준다. 서구사회
의 선물문화를 잘 설명해 주는 것이다.
선물은 이와 같이 사랑과 정의 표시다. 선물을 주고받는 아름다움은 곧 마음을 주고
받는 데 있는 것이지 물건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사회에는 이와 같은 마음을 전하는 선물문화가 뿌리를 내리고 있지 않은 듯이
보인다
3년을 꼬박 기다린 작은 선물
정성이 담겨 있는 서구인의 선물에 관해 말해 주는 실화를 하나 소개한다.
미국에 살고 있는 어느 한국인이 겪은 이야기다. 친근하게 지내는 독일계 미국인 노
부부가 있었다. 노부부의 어린 손자들과 어울려 지내는 동안 그들은 가까운 이웃이 되
었다. 마치 한 가족처럼 가깝게 지내게 됐다.
크리스마스나 어린이의 생일이 되면 서로 선물을 주고받고 연말이 되면 서로 초청해
서 마련해 놓은 음식을 나누어 먹는 그런 오고감이 몇 년 동안 지속됐다.
그런데 선물을 주고받을 때 그 물건의 감을 따져보면 언제나 한국인의 것이 훨씬 비
쌌다. '남에게 선물을 하면서 어떻게 싼 물건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심리가 언제나 한
국인의 마음 한구석에 있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한국인의 마음속에는 푸짐하지는 못할
망정 적어도 선물을 뜯어볼 때에 상대방에게 낯간지럽게는 되지 말아야 한다는 인식이
있다. 다시 말해 한국인다운 체면이 있기 때문이다.
서구인들은 선물을 주고받으면 으레 준 사람과 받는 사람들이 보는 데서 뜯어본다.
'매이 아이 오픈 일(May I open it)'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런 양해는 의례적인 것
이고 반드시 선물을 준 사람 앞에서 뜯고는 정말 갖고 싶었던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
고 준 사람에게 꼭 '생큐(Thank you)'라고 말하고 격의없는 사이거나 아이들 같으면
포옹을 하기도 한다.
잘 포장된 선물 꾸러미를 끌러볼 때의 기쁨, 상대방이 끌르는 것을 볼 때의 행복감
같은 것이 선물을 주고받을 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주는 마음이며 받는 마음
이다.
언젠가 그 한국인은 앞서 이야기한 노부부로부터 네 개의 커피잔을 크리스마스 선물
로 받았다. 커피잔이라기보다 커피 머그(mug)라고 부르는 한국의 작은 뚝배기 비슷한
커피잔이다. 둥글게 생긴 이 머그는 단조로운 세계지도가 그려져 있는 것인데 맥스웰
하우스 커피 회사에서 비매품으로 만들어 고객에게 주는 것으로서 대형 커피 한 통에
머그 한 개를 받을 수 있는 쿠폰이 들어 있다. 비매품이라 그렇지 값으로 치면 3달러
를 채 넘지 못할 것이었다.
노부부는 네 통의 커피를 3년에 걸쳐 마셨다고 한다. 커피에 들어 있는 카페인이 몸
에 좋지 않아 매일 아침에만 엷게 탄 커피를 한 잔씩 마시는 것으로 그쳤던 것이다.
그러기를 3년, 그래서 네 통의 맥스웰하우스 커피를 모두 마셨다. 커피 머그를 네
개 받을 수 있는 네 장의 쿠폰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맥스웰하우스 커피 회사에 그
쿠폰을 보내서 네 개의 커피 머그를 얻은 것이다
그 노부부는 그것을 그해 크리스마스 선물로 이웃의 한국인에게 보낸 것이다. 네 개
를 보낸 이유는 그때 친하게 지내던 한국인 가족이 바로 네 명이었던 까닭이다.
사실 돈으로 환산하면 몇 푼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한국인에게는 이 네 개의 커피
잔이 가장 값진 커피잔이라고 한다. 값으로 치면 이보다 휠씬 비싼 선물용 고급 도자
기 커피잔 세트가 있지만 투박한 맥스웰하우스의 상호가 밑에 새겨져 있는 그 커피머
그가 가장 소중하다고 한다.
그런 것이 값진 선물의 한 예다.
결혼선물로 자신이 몇 년을 공들여 키운 실내 온상식물, 자신이 아껴온 화분 같은
것도 서구인들은 즐겨 선물한다.
결혼식장을 찾아가는 하객이 현찰로 축의금을 내는 예는 거의 없다. 작은 것이든 돈
이 좀 들어가는 것이든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사서 아름답게 포장을 해서 결혼식장에
전달한다. 현찰을 주든가 수표를 전달해 주면 성의가 없어 보인다. 사실 그렇다. 결혼
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바쁜 시간을 내서 물건을 사러 여기저기 다녔다는 사실 자체가
정성이기 때문이다.
분수를 넘어선 선물의 한계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선물의 종류도 갈수록 다양해지고 있다.
출산 때에 산모나 출생아에게 주는 선물, 입학 축하선물, 졸업 축하선물, 영전 ·진
급선물, 이사 할 때의 선물, 생일 축하선물, 수연 축하 선물 등 일반적인 축하선물이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그 반대의 경우다. 문병 갈 때의 선물, 재해를 당했
을 때의 선물, 일반적인 명절 때의 선물 등이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어떤 계기가 주어져서 하는 선물이라도 마음을 전하는 정도에서
그쳐야 함은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다. 정도가 지나치면 어떤 경우에 한 것이든 받는
사람에게 부담이 된다. 특히 공직자들에게는 더할 나위가 없다. 공직자들이 받는 선물
의 상한선을 법으로 엄하게 제한하고 있는 대표적인 나라가 바로 미국이다. 모든 것을
법으로 못박고 있는 나라인 미국은 연방정부 공무원이라면 하급자건 대통령이건 50달
러 이상 되는 물건을 선물로 받으면 반드시 신고하고 관에 전달해야 한다.
대통령이라면 국가원수가 아닌가. 따라서 미국의 국가원수인 대통령이 해외여행을
했을 때나 아니면 미국을 방문한 외국의 국가원수나 기타 국빈급 인사들에게서 받는
선물은 모두가 국가에 헌납된다. 50달러라고 하면 우리돈으로 약 3만5천 원 정도다.
그러니까 대통령이나 부통령 등 행정고위급 인사들이 공식적으로 받는 선물은 백프로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이 된다.
이런 상한액은 상징적인 것이어서, 모든 공직자가 공직에 있는 동안에 받는 선물은
일체 자기 것이 아니고 공공소유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것이 10달러 상당의 것이든
그 이하의 것이든 자기의 것이 아니라 국가재산이라는 의식을 심어주게 하는 것이다.
연방의회 의원의 경우는 누계로 계산해서 1년 동안 1백 달러 이상을 넘어서는 선물
이나 기타 향응은 뇌물로 간주한다. 이것은 의원의 윤리규정에 정해져 있다. 연방정부
뿐 아니라 주정부 의원의 경우도 주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대체적으로 연방의회의
수준에 준하고 있다. 주정부의 행정수반인 주지사의 경우도 비슷하다.
그래서 공직자는 가난하다는 사실이 미국에서는 상식으로 되어 있다. 공직자는 명예
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다른 데로 흐르지만 연방정부 대통령이나 국무장관 같은 현직 국가공무원
이 돈을 얻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그 직책을 떠난 후에 쓰는 '회고록' 정도가 된다.
현직에 있을 때의 일을 모아놓았다가 퇴임 후에 책으로 만든다. 이 때에 거액의 인세
를 받는다. 닉슨 전임 대통령, 포드, 카터, 레이건 등등 전임 대통령들이 모두 이 회
고록을 썼다. 그렇게 해서 비로소 거액을 만지게 된다.
현직에 있으면서 책을 내 후한 인세를 받았다가 그것이 후환이 되어 윤리규정에 저
촉되는 등의 고역을 치룬 실례가 있다. 연방 하원의장으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짐
라이트 의장의 경우다. 다수당인 민주당의 리더로서 하원 의장으로 있다가 스스로 물
러났다.
또하나의 여담을 싣는다. 공직자의 윤리를 까다롭게 법에 규정한 미국의 공직자들이
돈 버는 방법으로 사용한 것이 있다면 퇴직 후의 로비다. 로비는 미국에서는 합법화하
고 있기 때문에 법에 저촉되지 않는 한도내에서 활발하게 공직자를 상대로 해서 로비
한다.
공직자는 엄하게 다스리고 있되 로비하는 사람은 법망을 피하면서 합법적으로 로비
를 할 수 있다. 로비를 하자면 전문지식이 있어야 하고 요령이 있어야 한다. 대다수
전직 공무원이 로비업체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받고 로비에 종사한다. 외국상사나 외국
기관을 위해서 로비를 벌이고 있는 전직 고위급 인사들의 수는 상당히 많다.
물론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의 로비다.
사람의 심성을 병들게 하는 뇌물
뇌물처럼 사회를 그 뿌리에서부터 병들게 하는 것은 없다. 뇌물은 인간사회가 복잡
해지면서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건 부패의 온상이 되어왔다. 오늘의 한국사회가 가
장 경계해야 할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문제일는지 모른다.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보면 뇌물을 경계하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뇌물을 주고받는 일에 누군들 비밀히 하지 않는 이가 있을까마는 밤중에 하는 일이
아침이면 이미 널리 퍼지기 마련이다."
[정약용(1762-1837)은 조선시대의 학자. 문신으로 자는 미용, 호는 다산. 여유당. 180
1년(순조 1) 신유 교난 때 장기에 유배, 뒤에 황사영 백서사건이 일어나자 강진에 이
배, 그 곳 유배지의 다산 기슭에서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 간 학문에 몰두, 정
기치구의 개혁과 지방행정의 쇄신, 농민의 토지 균점과 노동력에 의거한 수확의 공평
한 분배, 노비제의 폐지 등을 내세웠다. 그는 실학의 중농주의적 학풍을 계숭하고 있
으며 북학파의 기술도입론을 과감히 받아 들였다. 그의 방대한 저서로 보아 실학을 집
대성한 학자로 평가된다. 저서에 "정 다산전서"가 있으며 그 속에 "목민 심서" "경세
유표" "흠흠신서" 등이 있다.
뇌물은 결국 아무리 은밀하게 주고받더라도 결국은 드러나게 되어 있음을 밝힌 경구
다.
얼핏 보기에 뇌물은 공짜로 얻어진 돈이나 재물에서 그치는 것처럼 생각하기가 쉽
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뇌물을 받으면 헤프게 쓰기 쉽고, 돈을 헤프게 쓰다보면 돈
이나 물질의 귀중함을 모르게 된다. 근로의 정신을 잃게 되고 사람을 부패시킨다. 결
국은 인간의 심성을 병들게 하고 파괴하게 된다. 가정을 파탄의 지경에까지 몰아 넣을
수도 있다.
그래서 뇌물은 쉽게 얻어진 재물 이상으로 쉽게 그 뇌물을 얻은 사람을 망친다. 그
리고 뇌물은 받은 사람의 양심만을 망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주는 사람의 심성까지도
병들게 한다.
뇌물에 얽힌 또 하나의 고사가 있다.
어떤 사람이 고기를 좋아하는 청나라 정승에게 뇌물로 고기를 바치려 하였으나 정승
이 이
를 거절했다. 한 사람이 이에 대해 이렇게 물었다. "정승께서 고기를 좋아하시면서 왜
고기를 받지 않았습니까," 이런 물음에 정승이 "내가 고기를 무척 좋아하기 때문에 오
히려 안 받은 것이오. 만약 고기를 받았다가 벼슬이 떨어지면 앞으로는 고기를 못 먹
게 될 것이오. 그러나 뇌물로 주는 고기를 받아먹지 않았기 때문에 별일 없이 벼슬직
에 있게 되고 좋아하는 고기를 간간이 즐길 수 있게 되지 않았소" 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 청빈한 재상으로 잘 알려진 청음 김상헌에게 뇌물을 좋아하는 부인을 둔
어느 관직에 있는 사람이 문제해결을 호소했다는 이야기도 유명하다.
"우리 안사람은 번번이 뇌물을 받는다고 비난을 듣습니다. 장차 어떻게 하면 좋겠습
니까?"라고 했다. 이에 김상헌이 "간단하지요. 부인이 청탁하는 것을 하나도 들어주지
않으면 비방은 없어질 것입니다. 이점을 지키면 부인의 뇌물 좋아하는 습성은 저절로
치유됩니다" 라고 했다.
관직에 있는 자가 김상헌의 말을 그대로 따랐다. 그런 이후 세월이 상당히 흘렀다.
부인이 뇌물을 받아도 별효과가 없으니 뇌물이 집으로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 부인이
김상헌을 가리켜 "저 늙은이가 자기나 청백리가 되었으면 그만이지 어째서 남으로 하
여금 본받게 만들어서 나를 이렇게 골탕먹인단 말인가?"라고 욕을 했다고 한다. 그러
나 그렇게 함으로써 결국 그 남편은 오랫동안 관직에 남아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정재륜의 "인계록"에 실려 있다.
뇌물은 사회를 병들게 하기 전에 자기자신을 먼저 부패케 한다. 그리고 가족을, 사
회를, 국가를 좀먹게 하는 젓이다.
'예'가 자취를 감추어가는 사회, 물질이 가치의 척도가 되는 사회는 무섭다. '예'의
회복이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김상헌(1570-1652)은 조선조 선조 때의 문신으로 자는 숙도, 호는 청음. 도숭지. 대
사헌 대제학을 거쳐 예조 공조. 형조. 이조 판서를 역임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예조
판서로서 척화를 주장한 탓으로 이듬해 강화되자 파직되고, 1639년에는 원나라의 심양
에 6년 동안 잡혀갔었다. 1945년 석방되어 좌의정을 역임했다. '청구영언' 등 가곡집
에 시조 4수가 전한다.]
[정재륜(1648-1723)은 효종의 사위로 자는 수훤, 호는 축헌. 사은사로 세 차례에 걸쳐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1716년(숙종 42) "열성지장"을 증보 간행했다. 생활이 검소하여
모두 왕의 사위인 줄을 몰랐다 한다.]
한국인의 마음의 고향인 선비
한국과 일본 등 유교권의 영향을 받은 사회에서는 오랫동안 사농공상의 사회질서가
기틀을 잡아갔다.
그런데 같은 사라도 한국에서는 그것이 선비를 가리키는 '사'가 되었고 일본에서는
무사를 가리키는 '사'가 되었다. 선비와 무사라는, 어떻게 보면 아주 대조적인 계층으
로 구분되어 발전한 것이다.
무력이 무사의 파워(powar)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선비의 파워는 역시 지식일 수밖에
없다. 지식과 높은 도덕률이 선비의 자격을 말해 주는 요소가 되었던 것이다.
무사는 보다 실질적인 것, 현실적인 것을 의미했으나 선비는 지적인 것, 관념적인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보다 강한 명분과 처신이 선비의 길이었던 것이다.
조선의 대유학자 이황은 선비의 길에 대해 "대개 선비가 세상에 나서 벼슬을 하거나
집에 있거나, 혹은 때를 만나거나 때를 만나지 못하거나를 막론하고 그 목적은 자기
몸을 깨끗이 하고 옳게 행하는 것뿐이니 화와 복은 논할 것이 못 된다"고 자신의 저서
인 "퇴계집"에서 밝히고 있다.
학문을 하는 것만이 선비됨의 목적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학문만이 전부가 아니라 자기자신의 수양과 그 배움을 통한 민생구제가 선비의 바른
길임을 나타내는 경우는 유교를 통한 개혁정치에 나섰던 조광조의 말에서도 잘 드러난
다.
그는 선비의 본분에 대해서 "선비가 세상에 나서 벼슬을 하거나 학문을 업으로 삼는
것은 그 포부를 펴서 생민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국인들은
학문이나 지식보다도 높은 도덕률을 선비의 귀감으로 삼았고, 또 그렇게 사는 것이 선
비답게 사는 것인 줄 알았다. 그리고 선비는 사회의 병폐를 제거하는 보루로 알았다.
[양반이란, 원래 문관벼슬을 가리키는 동반과 무관 벼슬을 가리키는 서반을 함께 부르
던 말로, 관직에 있는 사람을 통틀어 부르는 말이었다. 이것이 조선에 이르러서는 벼
슬을 할 수 있는 신분을 지칭하는 말로 그 뜻이 변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세습신분으
로서 양인과 천인을 나누었다. 양인에는 직업의 종류와 귀천에 따라 사. 농. 공. 상의
구별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왕권이 확고해지고, 관료조직이 정비되어 가면서 관
료들은 마침내 향리나 농민과 뚜렷이 구별되는 신분을 마련하였다. 하급관리. 지방행
정실무자. 기술관 등은 별도로 중인 신분을 이루었고, 농업. 상업. 수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상민이 되었다. 한편, 그 밑에는 천민 신분으로 노비. 광대. 사당. 무당. 창
기. 백정 등이 이에 속하였다.]
선비를 정의한 "채근담"을 보아도 그런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이 책에는, "선비가
권문과 요로에 있을 때에는 몸가짐을 엄정하고 명백하게 해야 하며 마음은 항상 온화
하고 평이하게 해야 하나니 조금이라도 비린내나는 무리를 따라 가까이하지 말 것이며
또한 너무 격렬하여 독침 가진 자가 되지 말지니라"라고 말하고 있다.
['채근담'은 중국 명나라 말기의 홍자성의 어록이다. 2권이다. 전집. 후집 합계356조
는 모두 단문이지만, 대구를 많이 쓴 간결한 미문이다. 이 책은 동양적 인간학을 말한
것이며, 제사에도, 이 저자가 청렴한 생활을 보내면서 인격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
며, 인생은 온갖 고생을 다 맛본 체험에서 우러난 주옥같은 지언이라고 적혀 있다.]
위의 글 역시 선비가 갖고 있는 자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른 몸가짐이며, 옳은
행실임을 밝히고 있다. 사회악에 초연해지는 것을 선비의 가장 큰 덕목으로 알고 있었
던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한국인은 훌륭한 선비가 되고 싶은 것이 가장 큰
이상으로 되어 있었다. 누구나 선비가 되고 싶어했던 것이다.
그것은 일본인들이 무사가 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사회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
던 것과 홉사하다.
선비가 되고 싶었던 한국인들에게 있어 학문을 한다는 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
어 가장 기본적인 자질을 얻는 것이었다.
유교권의 동양국가 사이에서도 한국인의 교육열은 가장 높다. 공부를 하고자 하는
한국인의 학구열은 중국이나 일본보다도 높다.
공부를 해서 관직에 나가야 된다는 과거 제도에서 오는 실리적인, 관직을 향한 목표
도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선비로서의 길을 걷기 위한 인간적인 수련이 그 바탕에 깔려
있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아니 오히려 그런 욕구가 더 컸을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한국인은, 지식을 남보다 많이 쌓는 것은 곧 인격적으로 연마된 사람이 된다
는 본래의 선비정신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지식은 보다 안락한 생활을 위한 단순한 기술 습득이라는 생각이 산업화 과정을 통
해 한국사회에 충만해 있다.
남보다 많은 재화를 얻기 위한, 보다 많은 물질적 보상을 위한 기술의 습득은 사회
를 황폐케한다.
자연과학을 전공하더라도 그 속에서 인격을 닦는 학문을 배운다는 마음의 자세를 갖
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교통질서 지키는 것이 곧 '예'
거리의 질서는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누구에게나 부딪치게 되는 첫 번째 사회질서
다.
그래서 해외여행을 하는 사람들에게 피부에 와닿는 외국의 첫인상은 그 나라의 교통
질서에서부터 온다. 공항에서 통관을 끝내고 거리에 나온다. 택시를 이용하거나, 아니
면 마중 나온 사람의 차를 타고 도심지로 들어설 때의 교통풍경이 그 나라에 대한 첫
인상으로 남는다.
교통신호를 지키는 차량들, 횡단보도를 걷는 시민들, 차선을 지키는 자동차들, 좌회
전이나 우회전시의 자동차의 움직임, 거리의 주차지역에 주차하고 있는 자동차들, 심
지어 자동차 운전자들의 표정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인 거리질서의 인상이 그 나라의 문
화수준으로 영원히 기억 속에 남는 것이다.
교통질서를 지키는 것이 곧 '예'다. 앞서 '예'의 개념을, 사회의 룰을 지키는 것이
며 자신과 타인 사이의 사회생활 '매너'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도 교
통규칙의 준수는 누구에게 있어서나 가장 먼저 피부에 와닿는 사회생활의 '예'가 된
다.
해외여행을 할 때 현지인과 마찰을 일으킬 소지가 있다면 그것은 가장 먼저 이 교통
규칙문제에서 온다.
미국 등 외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한국인들도 마찬가지다. 해외생활이라 검도 나고
해서 그 나라 법에 열심히 따른다. 따라서 법과 접촉할 기회란 여간해서 없다. 그런데
교통경찰관과는 접촉이 있게 된다. 교통규칙을 간혹 위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찰은 웃으면서 딱지를 발급한다. 그리고 몇 마디 위법사항을 알려주고는 훌쩍 떠
나버린다. 그 뒤에 오는 것은 벌금과 벌점이다. 위반자가 딱지 발급에 항의해서 재판
에 가는 수도 있다. 그러나 경찰관이 교통규칙 위반 사실에 대한 증거를 갖고 있기 때
문에 대체적으로 딱지를 발급한 경찰관이 이기는 것이 상례여서, 벌금을 사전에 법원
에 지불하는 것으로 일단락된다.
문제는 그 이후에 있다 벌점이 가중되면 운전면허 취소, 그리고 자동차보험금 인상
등의 문제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교통규칙 위반자는 결국 그 사회의 질서유지
를 위해 마련된 제재 조치망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자동차 운전면허 취소는 문자 그
대로 자동차 운전을 못하게 하는 것으로써, 미국의 경우 그것은 생존을 위한 취업과
직결되기 때문에 운전면허 취소는 곧 생계수단 취소 조치나 다를바 없다.
교통법규를 지킨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자신을 위한 것이다. 자
기생활을 지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자신이 교통신호를 지킨다는 것은 남에게 교
통편의를 주기에 앞서 자신의 교통을 보다 편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차선을 지키는 것도 마찬가지다. 모든 자동차가 최선을 다해 차선을 지킨다면 모든
차가 보다 원활한 주행을 할 수가 있다. 접촉사고율도 크게 줄어든다. 접촉사고 같은
주행시의 사고는 단순한 사고에서 끝나지 않는다. 잘잘못을 가리는 시비가 뒤따르고
이로 인한 경제적인 손실도 크지만 전체적인 교통의 흐름을 차단하기 때문에 교통질서
라는 측면에서 많은 차량들이 받는 고통은 헤아리기 어려울만치 크다.
불법주차도 마찬가지다. 자신만의 편의를 위해 주차 불허지역에 주차를 한다. 얼핏
보기에는 편리한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로 인해 그 일대의 교통질서가 혼잡해진다.
그런 불편은 결국 자기자신에게 되돌아오게 됨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교통질서를 지킨다는 것은 결국 자기자신이 편한 교통을 원하기 때문이지 다른 사람
들의 교통을 편리하게 해주기 위해서는 아니다.
운전시에 안전 벨트를 착용하고 음주운전을 하지 않는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남에게
재앙을 입히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이처럼 '예'를 지킨다는 것은 곧 자기자신을 위해서인 것이다.
영조시대의 새생활운동
소득수준은 5천 달러, 소비수준은 2만 달러라는 유행어가 나돈다. 과소비풍조를 경
계한 말일 것이다. 소득을 넘어서는 지출이 가 닿는 종착역이 어디라는 것은 누구나
분명히 알고 있다. 한 가정이건 사회건 국가건 결국에는 파산에 직면한다는 사실을 과
연 모르는 사람이 있을 것인가.
자기자신의 분수를 지킨다는 것이 곧 '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전개하고 있는 새
질서 새생활운동도 따지고 보면 한국인들의 분수 지키기 운동이라고 해도 틀림이 없
다.
이와 흡사한 새생활 실천운동은 언제나 있었다. 영조 때에 있었던 한 예를 들자.
흉년이 겹쳐 쌀의 절대량이 모자랐다. 국가적인 어려움을 벗어나기 위해 영조는 175
5년 9월, 전국에 금주령을 내렸다. 술의 제조와 음주자를 법으로 엄하게 다스리는 명
을 내린 것이다. 국법을 어긴 자는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엄한 형벌을 내렸다. 전국
의 상황을 알아보기 위한 암행어사도 수시로 파견했다. 유명한 암행어사 박문수 일화
도 이 당시의 것이다.
[박문수(1691-1756)는 조선조 영조 때의 판돈령부사로 자는 성보, 호는 기은. 영조 때
명어사로 명성이 높았고, 후에 호조판서로 있으면서 균역법을 만드는 데 힘을 썼다.]
당시 영조가 내린 윤음은 다음과 같다.
"만약 표적이 없다면 쏘는 사람이 없게 되고 길이 없으면 가는 사람이 없게 된다.
마치 술을 빚는 사람이 없으면 구해 마실 곳이 없는 것과 같도다. 술을 빚는 것은 팔
거나 마시는 자들과 다 같이 나라의 법을 범하는 것이로다. 장사하는 법은 여러 가지
인데 무슨 까닭으로 편한 것은 버리고 험한 것을 취하는가? 이로 볼 것 같으면 술을
빚는 자는 마시는 사람과 다를 것이 없도다. 제사에 드리는 막중한 것에도 단술을 써
서 술을 금하게 하였으니, 나라의 흥망이 오직 금주가 행해지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
려 있도다. 너희들이 이를 지키지 않아 나라의 법이 되지 못하는 것, 이것이 진실로
흥망에 관계되는 것이로다. 궁중의 의식에서부터 오늘을 시작으로 하여 아침 저녁의
상식 때 낮에 올리는 다례의 예에 따라 다로 단술을 대신하게 하라. 내 특히 대궐의
정문에 나가 마음을 열어 효유하노니 모두 이 타이름을 들으라."
영조는 솔선수범했다. 국가의 행사인 종묘에 술을 쓰지 않고 단술을 대신 제주로 쓰
게 한 것이다. 단술도 쌀로 빚어지는 것이긴 하지만 술을 쓰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종묘는 조선조 때 제왕가의 역대 제왕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이다. 큰 공이 있는 임금
의 위패를 모신 본전과 그 외의 임금 및 죽은 뒤에 왕호를 얻은 왕세자의 위패를 모신
영녕전이 남아 있다.]
궁중의 의식에서까지 이렇게 엄한 수범을 보였으니 이를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술도 밥이나 떡과 같은 일종의 음식이었던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영조의 금
주령은 획기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상의 제사에 빼놓을 수 없는
차림음식이 바로 술이었고 또 일상생활에서 약주나 탁주가 갖는 비중은 컸다. 국가의
주요행사였던 종묘나 사직 또는 산천에 올리는 제사에도 술을 올리지 않으면 예법에
어긋나는 전통적인 관습이었던 것이다.
그 당시 영조가 단행한 금주령을 어겨 관직에서 쫓겨나고 귀양살이까지 한 고위관직
자의 사례는 적지 않았다. 죄의 경중에 따라 형벌이 균형있게 시행되었다고 기록에 남
아 있다. 그런데 이 금주령에도 예외가 있었다. 정기훈련이 끝난 뒤에 군인들에
게 나누어주는 탁주나, 농사꾼들이 마시는 탁주나 보리술만은 금령에서 빼도록 한 것
이다. 군인들이 고된 훈련이나 관무를 마치고 피로를 풀기 위해 마시는 몇 잔의 탁주,
농사꾼들이 하루 농사일을 마치고 마시는 술이나 농사일에 힘을 더하기 위해 마시는
탁주는 예외로 했던 것이다.
국가의 중대한 행사인 종묘예식에서까지 술의 이용을 금했으면서 일반 농민들이 농
사일을 위해 마시는 탁주는 허용했다는 사실은 음미해 볼 만하다. 실생활에 반드시 필
요한 음주는 용서하고 그 밖의 음주는 금했던 것이다.
영조의 이 금주령을 통해 당시의 절미운동은 성공적이었다고 한다. 군주의 이와 같
은 강한 의지가 그대로 하부기관에까지 전달되었고, 위반자에 대한 예외없는 법적인
조치로 새생활운동이 성공한 것이다.
과소비 추방에도 '예'의 정신이
마음으로부터의 선물에 대한 이야기에서 우리는 오 헨리의 단편소설인 '크리스마스
선물'을 한 예로 들었다. 아내가 사랑하는 남편에게 줄 선물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아름다운 금발을 잘라 판다. 가슴아픈 사랑의 선물이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우리나라에도 있다.
몹시 가난한 선비가 있었다. 끼니조차 제때 잇기가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그런데
귀한 손님이 저녁에 찾아왔다. 손님을 접대할 주안이 있을 수 없음을 알고 있는 남편
이 손님과 불안한 시간을 보낸다.
그런데 조용히 방문이 열리더니 아내가 소반에 가득 차린 주안상을 내오는 것이었
다. 남편은 내심 크게 놀랐으나 태연한 척하며 손님과 함께 주거니 받거니 술과 음식
을 즐겼다. 아내가 어떻게 주안상을 차릴 수 있었을까. 아내는 자신의 머리를 잘라서
돈을 만든 것이다.
오 헨리의 소설에 등장하는 아내의 머리나 가난한 우리네 선비의 아내 머리를 돈으
로 바꿀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가발의 재료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가발은 조선시대 한국 여인들의 머리치장으로 상당히 폭넓게 유행되었다. 이것을 가
체라고 불렀다. 이 가체는 머리 위에 아름답게 꾸며진 가발을 올려서 보다 아름답고
크게 보이게 하는 덧머리 장식품이었던 것이다.
이 가체는 귀금속의 장식물이나 일본에서 밀수입되는 주옥 같은 보석류로 꾸며 썼기
때문에 양반사회의 사치품으로 기승을 부렸다.
특히 덧머리 가발인 가체는 양반사회에서 서민 사회까지 넓게 번져 가체를 구하지
못하면 아들 장가를 보내지 못할 만큼 심각한 사회문제로까지 대두되었다고 한다. 오
늘날 과중한 결혼비용금 부담과 흡사한 듯하다.
정조 때에 정승인 채제공이 에게 가체의 문제점을 거론했다고 한다.
[채제공(1720-1799)은 조선조의 문신으로 자 백규, 호 번암. 1780년 홍국영의 세도정
권이 무너진 뒤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 각 분야에 걸쳐 왕을 도와 충실히 보필했
다. 이듬해 '국조보감' 편찬에 참여했다.]
"지금 가장 큰 폐단은 가체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아주 가난한 선비의 집에서도
60 내지 70냥의 돈을 들여 이것을 사고 있으며 제모양을 내려고 한다면 수백 냥을 허
비해야 합니다. 그 형세가 밭을 팔고 집을 팔아야 할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때문
에 아들을 두어 아내를 맞아야 될 때에 이것을 구하지 못해 6년이나 7년을 넘겨도 시
집으로 와 시부모를 뵙지 못합니다."
그 당시 사대부 등 귀족충에서는 이런 머리를 꾸미는 수식이 너무나 크게 만연해,
수백 냥을 들여서 이 가체를 만들어 썼다고 한다. 부녀자들은 논과 밭을 팔아 이것을
사 썼다. 서로 머리 모양을 보다 크게, 보다 높게 하려 했고 더 많은 금은장식을 달았
던 것이다. 높은 것은 머리 높이가 반 자나 되었다고 하니 그 사치풍조를 가히 짐작할
만하다.
이 가체로 인한 폐단은 정조 이전의 영조 때에도 지탄의 대상으로 등장해서 새생활
정치를 펼친 영조가 가체추방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영조는 가체 금지령을 내려 궁중에서부터 이를 실시했다. 부녀자들에게 가체 대신
족두리를 올리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체 금지령은 사대부 등 상류사회에서 잘
지켜지지 않았던 모양으로 단속이 심할 때면 감추어두었다가 좀 풀리면 다시 꺼내서
머리 위에 얹었다고 한다. 가체라는 것이 부녀자들의 장식이고 보니 안방에 앉아 있을
때에는 부녀자들은 가체를 쓰고 있다가 외출할 때에는 벗어두는 등 나라의 금령을 기
술
적으로 벗어나면서 지속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끈질긴 군주의 뜻은 결국 정조 때에 이르러서 결실을 맺어 가체는 차츰 자취
를 감추고 부녀자들은 족두리를 쓰기에 이른 것이다. 서민이라도 시집갈 때에는 장식
한 족두리를 세내어 쓰게 하고 신분에 따른 간단한 장식을 족두리에 장식해서 쓰도록
했다. 오늘날 전통 혼례시에 쓰는 족두리는 이때부터 비롯된 것이다.
어느 때고 과소비와 허례허식은 있었다. 그러나 이런 허례허식의 추방에는 집권자의
솔선수범과 강한 의지가 필요했던 것이다.
자기 분수를 아는 지혜가 '예'
자기 분수를 아는 것이 바로 '예'다. 사회생활의 올바른 매너는 자신의 분수를 알고
처신하는 데에서 온다. 일상적인 소비생활에서나 언행에 있어서나 자신의 분수에 맞는
처신이 바로 '예'의 생활이다.
예를 들면, 한국인이 한국에서 만든 상품을 사서 소비하는 것도 자기 분수를 지키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버젓한 국산품이 있는데 외국제품에 눈을 돌리는 마음은 분수를
모르는 마음으로 한국인의 '예'에서 벗어난다.
우리의 분수를 지키자는 운동은 한말 일본과 서양의 문물이 밀려들 때에도 한창 고
조되었다.
한국의 개항을 강요한 일본과 서양에서 밀려드는 상품들이 개화사상을 타고 밀려들
면서 그나마 어려운 한국의 경제력을 한층 무력하게 했다. 그런 외국상품의 소비는 가
난한 서민층이 아니라 부유한 상류사회가 독점했다. 부유층의 외국상품 선호사상이 우
리나라의 경제를 뿌리채 뽑아냈다. 그것이 구한말 망국을 앞둔 우리의 경제현실이었던
것이다.
당시 지조높은 유학자로 알려진 이항로는, 한국인이 분수를 지켜야만 국가를 보존할
수 있다고 강하게 주장한 사람 중 하나다.
"나는 평생 동안 서양 옷감을 걸치지도 않았고 집에서는 남의 나라 물건을 쓰지 않
았다"고 술회했는데 그가 그런 자신의 분수 찾기를 기록으로 남긴 것을 보면 그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외국의 상품을 쓰고 있었는지 짐작이 간다.
그는 고종에게 다음과 같은 강한 상소를 올렸다.
"신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무릇 입고 먹고 쓰는 물건이 매일 생활할 적에 한 가지
라도 양물이 그 속에 끼여 있으면 모두 찾아내서 대궐 뜰에 모아놓고 태워버려서 좋아
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밝혀 보이소서. 이것으로써 궁중의 가까운 신하와 왕가의 친척
을 깨우치면 그들이 모두 전하의 뜻을 따라서 전하의 주변이 바로잡힐 것입니다. 또
이것으로써 조정이 깨우친다면 안으로는 조정으로부터 바깥으로는 민에 이르기까지 모
두 전하의 뜻을 따라서 전하의 나라가 바로잡힐 것입니다. 자기 몸을 잘 닦고 자기 주
변을 잘 정돈하고 나라가 바로잡히면 양물은 쓰여지지 않아 교역의 일은 저절로 끊어
질 것입니다. 교역의 일이 끊어진다면 저네들의 기이하고 못된 물건이 팔릴 수 없을
것입니다. 기이하고 못된 물건이 팔릴 수 없다면 저네들이 이익을 찾을 수가 없어서
반드시 침략해 오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과 같은 시장개방의 세계 경제질서 아래서 이항로의 이런 사상은 전혀 먹혀들지
않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외국상품의 사용을 억제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오늘이나
예나 우리에게 적지 않은 교훈을 준다.
이항로의 제자로 알려진 김평묵도 나라의 경제를 생각지 않는 상류사회의 사치풍조
에
경각심을 높였다고 한다. 그는 외국물건을 즐겨 쓰는 왕실을 향해 "임금으로부터 근검
절약하여 거친 베옷을 입고 거친 관을 쓰고 나물국을 들고 쇠 터럭 헌 버선 하나라도
함부로 버리지 말고 양물의 교역을 막아야 한다"고 외쳤던 것이다.
오늘의 세계 경제체제에서 보면 무리라고 할 수밖에 없는 주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속에는 자신의 분수에 맞는 경제생활을 해야 한다는 강한 의지가 들어 있다.
국산품을 애용하자는 '자기분수찾기'는 사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만 부르짖고 있는
캠페인이 아니다. 드러내놓고 있진 않지만 선진국들도 예외는 아니다. 꼭 필요한 물건
인데 국내에서 생산되지 않는 것은 외제를 쓸 수밖에 없지만 국내에서 생산되는 것은
국내 제품으로 사용하자는 마음은 미국을 비롯한 유럽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외국제를 써야 무엇인가 달라보인다는 생각은 자기의 분수를 모르는 생각이다. 그런
데 이런 한심한 풍조는 언제나 상류사회에서 비롯되어 왔던 것이 지난날 한국의 모습
이었고 그리고 그것은 바로 오늘의 실정이기도 하다.
새로 읽어보는 "명심보감"
도덕교육에 대한 문제점이 현재 한국사회에서 크게 대두되고 있다. 폭넓게 거론되고
있는 내용은 국민학교에서부터 중. 고등학교에 이르는 교과과정에 도덕에 관한 교육내
용이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가장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기에 바르게 사는 인간교육이 충분히 실시되고 있지 않
다는 지적이 있다. 도덕성 회복 캠페인이 우리 사회에서 활발히 거론되고 있는 현실적
인 이유의 일단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이런 현상은 기초적인 청소년 교육기관이 상급학교 진학을 목표로 한 예비단계의 지
식 습득 기능에만 머물러 있고 전인교육이나 윤리교육을 등한시하고 있는 데에 그 원
인이 있는 듯하다.
다시 말해 그것은 교육의 전반적인 목표가 기능 위주로 되어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런 현상은 지나친 윤리교육으로 실생활교육을 너무나 등한시 해온 지난날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일제의 식민지시대 교육내용을 논외로 하고 지난날의 교육을 보면 그런 대조적인 사
실이 확연히 드러난다. "천자문", "동몽선습", "명심보감" 등을 주요한 교육 내용으로
답습해 온 조선시대의 청소년 교육은 인격도야와 도덕성에 관한 내용이 전부였다.
"동몽선습"은 유교에서 가장 중요한 인간의 윤리로 지목하고 있는 5륜의 뜻을 풀어
놓은 책으로서 도덕교육의 핵을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부모에 대한 도리, 자녀교육, 임금과 신하간의 도리, 부부관계, 어른과 어린이의 예
의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동몽선습"은 조선시대 서당의 교재로 사용하기 위해 엮은 책이다. 중종 때의 학자
박세무가 저술, 1670년에 간행되었다. '천자문'을 익히고 난 후의 학동들이 배을 초급
교재로서, 먼저 오륜의 요점을 간략하게 서술하고, 이어 총론과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
사를 간단히 기록하여 학동들이 외기 쉽고 덕행함양에 도움이 되도록 편찬했다.]
"명심보감" 역시 책이름이 뜻하는 것처럼 역대 의 훌륭한 인물이 남긴 말과 행적을
모아 어린이 수양을 위해 편찬된 도의교육서라고 할 수 있다. 이어 "소학"과 "효경"도
주요 학습 용 교과서적으로 서당에서 가르쳤는데 이런 것들은 모두가 청소년들의 몸
가짐, 인격도야, 그리고 도덕률을 높이기 위한 내용이다.
["명심보감"은 서당에서 어린이들의 학습 교재로 사용하여 온 한문 교양서다. 어린이
들의 인
격수양을 위해 주로 중국 고전에서 짧은 잠언 163토막을 추려서 24부분으로 나누어
편집한 책이다. 고려 충렬왕 때 예문관 제학을 지낸 추적이 편찬했다고 전한다.]
"사략"과 "통감"도 있었다. 중국 역사를 간략하게 추린 이 역사서도 옛것에서 옳은
덕목을 배운다는 교육목적이 골자를 이룬다.
이와 같이 지난날 청소년교육은 지나치게 윤리 교육 일변도를 이루어왔다고 평할 수
있을만치 방대한 양에 이른다. 지나치다는 것은 실생활을 가르치는 과학기술교육 등과
비교했을 때 그렇다는 것이다.
이런 윤리교육 일변도의 교육은 실생활에 필요한 실기, 과학기술을 크게 낙후시켰고
결국 산업화를 저해하는 주원인으로 등장했다. 이런 점이 조선조 후기에 이르러 실학
을 공부하는 학자들에게 지적되었던 것이다.
사농공상의 사회체제가 이런 교육에 의해 굳혀졌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실생활을
윤택케 하는 '공'과 '상'이 천시되었다. 이런 것이 원인이 되어 산업화가 늦어졌고 결
국은 망국의 치욕을 자초케 한 원인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동몽선습" "명심보감" "
소학" "효경" 등의 윤리교육과 함께 인간의 실생활에 긴요한 생활기술 교육을 병행했
어야 옳았던 것이다.
['소학'은 주자가 제자 유자징에게 소년들을 학습시켜, 교화시킬 수 있는 내용의 서적
을 편찬케 하여, 주자 자신이 교열, 가필한 것이다. 내·외의 2편이며, 내편은 유교의
윤리 사상의 요강을 논하였으며, 외편은 한대 이후 송대까지의 현철의 언행을 기록하
여, 내편과 대조시켰다.]
['효경'은 유교 경전의 하나다. 공자의 제자들이, 공자가 제자인 증자에게 전한 효도
에 관한 논설 내용을 편저한 것으로, 효가 덕의 근본임을 밝히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는 조선시대에 '효경언해' 가 간행되어 유교효도의 기본서로 널리 유포되었다.]
그런데 오늘의 청소년교육은 어떤가. 지난날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인간교육의 영
역은 줄어들대로 줄어들었고 생활기술, 기능교육만이 팽배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지
난날의 청소년교육과는 그 내용이 완전히 전도되어 있다.
어떻게 하면 세상을 편리하게 살 수 있는가, 무엇을 배워야 물질적인 부를 쉽게 얻
을 수
있는가에 교육이 집중되어 있다.
중. 고등학교가 대학교 입학을 위한 기능교육장으로 변했고,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
한 과외교육이 가열화하고 있다.
도덕교육에만 치중해 온 균형 잃은 교육이 결국 국부의 쇠퇴를 자초했던 것이 지난
날의 잘못된 교육이었다면, 물질추구만을 위한 교육, 그래서 사회 도덕률이 뒷전에 몰
리고 있는 오늘날의 교육도 큰 문제를 안고 있다. 이 역시 균형을 잃고 있는 교육인
까닭이다. 현실에 맞는 "명심보감' 교육의 개발이 아쉽다.
청렴한 생활의 실천
조선시대 대유학자인 이율곡을 모르는 한국인은 아마 없을 것이다. 대사상가요, 대
교육자인 율곡은 자신의 지식이 지식의 영역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직접
행정에도 참가한 대정치가이기도 하다.
그는 호조좌랑으로 관계에 진출한 이래 청주 목사, 황해 감사, 대사헌, 호조판서,
대제학, 이조판서, 우찬성 등 고위관직을 두루 역임했다.
그는 학문으로 대성한 학자였다. 그리고 자신의 학문을 직접 정치에 반영하기 위해
관직을 두루 가졌던 것이다.
관직을 갖고 있었으나 율곡처럼 청렴하게 산 사람도 많지 않다 율곡은 자신이 받는
녹봉 이외에는 쌀 한 톨도 남의 것을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신보다 못한 빈한한 친
척을 언제나 도와가며 살았다. 42세 때에 해주 석담에 집 한 채를 지어 모든 가난한
친척이 같이 살도록 했다고도 한다.
언제나 가난하여 죽으로도 끼니를 잇기가 곤란했던 때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양식
이 떨어져 점심을 굶을 때도 허다했다. 율곡의 이런 어려운 소식을 들은 재령 군수 최
립이라는 친구가 쌀을 보내자 그는 이를 거절했다.
최립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하여 "모처럼 고마운 생각으로 보낸 쌀을 왜 받지 않는
가?"라고 하자 율곡은 "이것은 관가의 물건이니 받으면 죄가 된다. 옛친구 개인의 사
사로운 물건이라면 안 받을 리가 있겠는가"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최림(1539-1612)은 조선조 선조 때의 학자로 자는 입지. 호는 동고. 문학과 사학에
달식하여, 당시의 자문과 주청에 대한 글은 거의 그의 손으로 되었다.]
율곡이 부제학을 그만두고 파주로 내려가 있을 때 최해성이라는 사람이 찾아와 식사
를 같이한 일이 있었는데 찬이 없음을 보고 "어떻게 이 궁핍한 괴로움을 참느냐"고 하
였더니 "날이 저물면 찬 없는 식사도 거북함을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렇다고 정치가이자 학자인 율곡에게 괴이한 고집불통의 성벽이 있었던 것은 아니
다. 하루는 정철이 득남한 날이라고 해서 잔치가 벌어져 율곡이 초청됐는데 그 자리에
는 곱게 단장한 기생들도 자리를 같이하게 되었다. 율곡과 함께 간 유학자 성혼이 주
인인 정철을 보고 "오늘의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 아닌가?" 하고 언짢아하자
옆에 있던 율곡이 껄껄 웃으면서 "검은 물을 들여도 검어지지 않음이 또한 도"라고 말
해 비로소 성혼도 자리를 함께 했다고 한다.
[정철 (1536-1593)은 조선시대의 문신. 시인으로 자는 계함, 호는 송강. 벼슬은 좌의
정에까지 올랐다. 서인의 거장. 동인의 탄행 등으로 여러번 유배되었으며 만년을 강화
에서 보냈다. 당대 가사문학의 대가로서 시조의 고산 윤선도와 더불어 한국 시가사상
쌍벽으로 일컬어진다. 저서로는 "송강집" "송강가사"가 있고, 작품으로는 "관동별곡"
"사미인곡" 등이 있다.]
[성흔(1535-1598)은 조선시대의 학자로 자는 호원, 호는 우계. 일찍이 이이와 교분이
두터웠으나 학설에 있어서는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지지, 기발이숭일도설을 주장하는
이이와 1572년(선조 5)부터 6년간에 걸쳐 사단칠정에 대한 논쟁을 벌여 이이의 학설을
반발, 유학계의 큰 화제가 되었다. 저서에 "우계집"이 있다.]
율곡이 평생을 청렴으로 일관했다는 것은 그가 죽은 이후에 오히려 크게 드러났다.
그는 아무런 유산을 남기지 않았다. 심지어는 염습에 쓸 수의 조차 없어 친구들이 구
하여 예를 치루었다. 몸은 높은 벼슬을 두루 거쳤건만 모아둔 재산은 없었던 것이다.
서울에는 유족들이 거처할 만한 집 한 채도 없었다. 그 정경이 하도 딱하여 친구와 제
자들이 돈을 모아서 집을 마련해 유족들이 곤경을 모면케 했다.
이율곡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이퇴계 역시 청빈했던 대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퇴계의 서재가 너무나 초라해서 영천 군수인 허시가 방문했다가 놀라서 "이처럼 좁
고 누추한 곳에서 어떻게 견디는가" 하고 묻자 "오랜 습관이 되어 그런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고
했다는 그의 대답은 유명하다.
퇴계는 세수 그룻도 돌 그룻으로 만든 것을 사용하고 부들자리에 포의로 자족하였으
며, 출입할 때에는 칡으로 삼은 신에 죽장을짚어 담박한 차림을 했다.
퇴계는 당시 서울 서소문 안에 우거했는데 좌의정으로 있던 권철이 찾아와 식사를
함께 한 일이 있었다. 그는 너무나 담박한 소찬인지라 차마 먹을 수가 없어서 수저를
들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가 나중에 "스스로 입맛의 버릇을 잘못 길러 참으로 부끄러웠
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고백한 일도 있었다 한다.
이율곡이나 이퇴계는 한국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까지 큰 영향을 미친 대유학자다.
이 두 학자는 학문의 깊이만큼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청빈으로 일관했던 것이다. 그
들은, 진리는 평이한 일상생활에 있으며 몸소 실천하면서 남을 가르치는 것이 교육의
길이라고 생각한 실천인이기도 챘다.
올바른 법의 집행도 '예'
'예'는 사회생활의 매너나 규범이 되는 룰이라고 앞서 밝혔다.
'예'를 지킨다는 말은 그래서 그 사회의 질서를 지키고 법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준법정신이 희박하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그러나 공과 사를 구
분해서 법을 지킨 선인들의 예는 많다.
조선조 인조 때에 전라 감사로 허적이라는 강직한 사람이 있었다. 공과 사의 구별이
분명하고 공무처리에 한 가닥의 그릇됨이 없었다고 한다.
[허적 (1610-1680)은 조선시대의 문신으로 자는 여차, 호는 묵재. 남인의 거두로 집
권, 영의정에 올랐으며 재정의 고갈을 막기 위해 상평통보를 주조하였다. 그의 서자인
견의 삼복사건에 연루되어, 사사되었다.]
당시 인조의 총애를 받고 있던 후궁으로 조씨 성을 가진 후궁이 있었다. 조씨는 왕
의 총애를 방패삼아 재물을 모으는 등 민폐를 적지 않게 자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
나 워낙 세도가 있는지라 막강한 조정의 권신들도 섣불리 후궁 조씨의 폐해를 대놓고
왕에게 직간하기를 주저했었다.
그 조씨가 사사롭게 왕궁에서 부리고 있던 궁노를 시켜 전라 감영에 부탁을 해왔다.
그러자 강직한 허적은 그 궁노를 꾸짖고 그 부당함을 지적한 다음 물러가라고 호통을
쳤다.
그런데 그 궁노는 감사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행패를 부리는 것이었다. 어디에서
도 후궁 조씨의 청탁을 거절하지 않았는데 일개 전라 감사가 감히 조씨의 청탁을 들어
주지 않느냐고 오히려 대들면서 이런 식으로 하다가는 뒤끝이 좋지 않을 것이라는 협
박까지 하는 것이었다.
타일러 다시 서울로 보내려고 했던 허적이 궁노의 못된 행패를 보고 나졸들로 하여
금 결박을 짓게 하고 형벌을 가했다. 이렇게 해서 궁노는 떼를 쓰고 행패를 부린 끝에
나졸들에 의해 매맞아 끝내 숨졌다. 그가 죽자 허감사는 그 시체를 성밖에 내다버렸
다. 그리고 그 사실을 낱낱이 서울의 후궁 조씨에게 알렸다.
후궁 조씨는 이 사실을 전해들은 후 궁 안의 나인들에게 이런 사실이 있음을 절대로
입 밖에 내지 말라 하고 오히려 왕의 귀에 그 일이 들어 갈까 겁을 냈다고 한다.
또 한 가지 예화를 소개한다.
세조 때 포도대장직에 전림이라는 무골이 있었다. 치안을 담당하고 있던 전림은 아
무리 큰 세도가에 연관되어 있는 일이라도 법에 어긋나면 가차없이 다루었다.
[전림 (? -1509)은 조선시대의 무신으로 1507년(중종 2) 한성부 판윤이 되고 지중추부
사로 죽었다. 청백한 무장으로서 독서를 좋아했으며, 성각이 엄격하여 아들이 행패를
부리자 살해하고도 태연했다 하며 그가 병이 위독할 때 찾아온 친구 김전과 큰 바리로
이별주를 마시고 김전이 대문을 나서기 전에 숨졌다 한다.]
세조의 공신으로 세도를 누리고 있던 홍윤성의 하인들이 그 세도를 믿고 장안에서
횡포를 부린다는 정보를 입수한 전림은 나졸들을 요소에 매복시궈 횡포를 부리고 다니
는 그 하인 들의 횡포현장을 덮쳤다. "누가 감히 홍정승집 사람들을 잡으려 하느냐"
고 호통을 치는 그들을 전림은 직접 포승하고 "이놈들, 홍정승이 너희들을 범법하라고
명하셨느냐"고 한 후 날이 밝자 이들을 묶어 홍정승집으로 끌고갔다.
이제까지 감히 홍정승의 하인들을 묶어 그의 사저로 압송하는 등의 일은 있을 수 없
는 일이었으나 워낙 전림의 공사처리가 엄격해 홍윤성도 감히 어쩔 수 없었을 뿐 아니
라 오히려 그를 칭찬했다.
그는 "공과 같은 사회기강을 바로잡는 포도대장이 있기에 사람들이 마음놓고 생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했다고 한다. 홍윤성은 오히려 전림의 법 집행정신을 왕
에게 알려 벼슬을 높게 했다는 것이다.
이 전림에게는 또하나의 일화가 있다.
그가 한성을 순찰할 때였다. 왕자 회산군의 집 앞을 지나다가 집의 규모가 법도에
어긋나게 너무 크고 넓게 짓는 것을 보고 "집을 짓는 데에 있어 그 크기에도 법도가
있으니 왕자의 집이라 해도 그 법도를 따라야 한다. 이래서는 죄책을 벗어나지 못하리
라. 내가 다시 순시할 때까지 집의 규모를 법도에 맞게 줄이도록 하라. 만약 이를 무
시하고 그대로 실행한다면 왕자의 권세를 빙자한 죄까지 합쳐 다스릴 것이다"라고 강
하게 경고했다. 그래서 회산군의 집은 법에 따라 알맞게 개축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법을 지키고, 또 바르게 실행케 하는 용기가 곧 '예'이기도 하다.
솔선수범이 갖는 힘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우리 속담이 있다. 아무리 어려운 시대, 어지러운
상황이라도 사회의 지도층이 앞서서 바른 자세를 보이면 사회의 기강이 바로서게 된
다.
작은 조직체건 큰 조직체건 조직체의 책임자가 좋은 뜻을 갖고 솔선수범하여 모범을
보인다면 그 조직체는 점차적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그 반대로 지도층에 있는 사람
들이 솔선수범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시책을 시행하려 해도 궤도에 오르지 않게 된
다.
바른 지도자의 자세가 곧 국가사회의 올바른 기강으로 확립된 예는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도 엿볼 수 있으나 가장 잘 알려진 예를 우리는 조선조 세종 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세종 때의 사람들은 선비들을 신선처림 보았다고 한다. 선비의 주가가 그야말로 가
장 높
았던 시대였다. 선비뿐 아니라 '충이나 효, 신의 등 덕행이 뛰어난 사람들이 우러러
대접을 받았던 시대였던 것이다. 세종이 스스로 그런 모범을 보였고 그런 신하들을 우
대했기 때문이다.
세종의 호학은 유명하다. 세종이 세자 시절, 병이 들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읽
기를 그치지 않아 병이 더해지자 태종이 그의 건강을 염려하여 사람을 보내 그의 방에
있는 책을 모조리 가져가게 했던 일이 있다. 그러나 마침 "구소수간" 한 권이 병풍 틈
에 끼어 남아 있었다. 그러자 세종은 그 남아 있는 한 권의 책을 백 번인지 천 번인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읽었다고 한다.
왕으로 즉위한 지 2년을 맞는 해에 집현전의 규모를 크게 늘리고, 젊고 유능한 20명
의 선비를 선발해 학사로 임명해서 순전히 학문 연구에만 힘쓰게 했고, 세종 스스로도
이들과 항
상 가깝게 지내며 언제나 자상하게 뒷바라지를 했다.
서거정의 "필원잡기"에 실려 있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서거정 (1420-1488)은 조선시대의 문신 학자로 자는 강중, 호는 사가정. 세종 이후 4
5년간 여섯 왕을 섬겼다.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경국대전"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또
왕명을 받고 "향약집성방"을 국역했다. 성리학을 비롯, 천문. 지리. 의학 등에 정통했
다. 저서에 "동인시화" "동문선" "필원잡기" 등이 있다. 특히 "필원잡기"는 한문 수필
집으로 2권 2책으로 되어 있다. 내용은 우리나라의 예로부터 전하는 일사와 한담 중에
서 추려 모아 엮은 것이다. 사실파 부합되지 않는 내용도 있으나, 패관문학서로써 귀
중한 문헌이다.]
세종이 밤 늦게 집현전에서 공부하는 신숙주가 새벽까지 공부하고 잠드는 것을 환관
을 통해 알아본 후 잠들어 있는 신숙주에게 자기가 입고 있던 어구를 벗어서 환관에게
주어 "이것을 갖고 가서 신숙주가 잠든 뒤에 가만히 덮어주어라" 한 뒤, 자신도 새벽
녘에 침전에 들었다는 이야기다.
집현전 학사들에 대한 세종의 관심이 이렇게 컸기 때문에 그 당시 사람들은 학문하
는 사람들을 우러러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학문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도 늘
어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기풍이 세종시대를 학문의 황금기로 만든 것이다.
이런 세종의 극진한 배려로 최항, 성삼문, 권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정인지, 신
숙주, 양성지 같은 당대의 학자, 문장가들이 배출된 것이다.
비단 이와 같은 유학자뿐 아니다. 세종시대에는 천문, 지리, 의약, 복서, 인쇄술 등
과학기술이 일제히 개화했는데 이 또한 세종의 호학과 민생을 위한 연구진흥책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천문지리에 밝은 과학자인 김담, 김조, 이순지, 이천, 정흠지, 장영실 등을
배출시켰다. 또 천문 관측기를 제작하고 역법을 개정했고 천기 관측기인 대소관의, 천
체 측정기인 혼천의, 해시계인 앙부일영, 물시계인 자격루 등이 모두 이때 만들어졌
다.
물론 오늘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표음문자 한글도 이때 제정되었다. 세종 28년에 선
포된 훈민 정음이 바로 그것이다. 훈민정음의 연구에 몰두한 나머지 세종은 안질을 얻
어 눈의 치
료를 위해 청주의 초수에서 요양하기도 했다.
[훈민정음은 조선 제4대 세종이 1446년(세종 28) 9월에 제정. 공포한 우리나라 국자
다. 또는 그것을 해설한 책이다. 글자로서의 훈민정음이 완성된 것은 1443년(세종 25)
이었으며, 창제 목적을 실천하기 위하여 언문청을 설치하고, 혼민정음의 해례와 같은
원리를 연구케 하는 한편, 그 보급책의 일환으로 "용비어천가"를 짓고 운서를 번역하
는 등 과정을 거쳐 공포하였다. 이 국자 제정과 '해례' 편찬은 정인지를 비롯하여 당
시 집현전 학사들의 협조로 이루어졌다.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의
뜻이며, '정음'은 '우리나라 말을 정 히, 반드시 옳게 쓰는 글'임을 뜻한다.]
세종에게 왕위를 물리고 상왕으로 있던 부왕인 태종에 대한 그의 효심은 너무나 유
명하다. 태종이 사망 후 3년상을 치루는 동안 너무나 슬퍼해서 몸이 말할 수 없이 쇠
약해졌다고 한다.
폐세자가 된 형인 양녕대군에 대한 우애 역시 어느 형제간에도 보기 힘들만치 정성
을 다하는 '예'로 일관했다. 우애, 신하에 대한 극진한 예우, 서민들에 대한 깊은 배
려 등 세종은 이 모든 덕행을 솔선수범했다.
'윗물이 맑으면 아랫물도 맑다'는 말처럼 상층부가 솔선수범하면 어떤 난국, 어떤
상황 속에서도 국가는 부흥할 수 있다.
'감사합니다'의 생활화
한국인들은 대개 과묵하다. 말이 적은 편이다. 그것은 말보다는 글에 더욱 큰 가치
를 두어온 오랜 문화전통에 기인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으로써, 서양은 그리스시대부터 말이 가장 중요한 표현수단으로
되어 있었는 데 비해 우리나라는 글을 통한 표현이 합당한 표현방식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서구에서는 '말 잘하는 사람', '달변가'는 고대 그리스시대부터 그 사회에서 존경받
는 사람, 리더로서 자격을 갖춘 인물로 추앙받아 왔다. 아테네의 작은 광장에서 꽃피
웠다는 초기 민주주의는 말에 의한 의견제시, 그리고 토론 등으로 시종되었던 것이다.
이 전통이 서구의 의회정치를 활성화시킨 뿌리가 된 것 같다.
그러나 한국인의 전통문화에서는 말이 아니라 글을 통한, 문장을 통한 표현이 주요
한 커뮤니케이션의 방편으로 통했던 것이다. 서구에서의 달변가, 능변가가 차지하는
위치를 한국에서는 훌륭한 문장가가 차지했다. 그런 문화적인 영향 때문에 한국사회에
서는 오래전부터 말을 잘하는 사람을 오히려 천박하게 보는 인식까지 생겼다. '말 잘
하는 사람이나 '달변가'를 의도적으로 깎아내리고, 그런 장점이 있는 사람을 오히려
경박한 사람으로 보기까지 했다.
그러나 과묵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과묵함으로써 자신의 솔직한 표현이 전
달되지 못하고 상대방에게 예의가 없는 사람으로 취급되는 수가 많다.
일반적으로 서양 사람들은 '고맙다'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한다. 지나가는 사람의 몸
을 조금만 스쳐도 '익스큐즈 미(Excuse me)'라는 말을 하듯이 조금이라도 남의 친절을
받았다면 으레 '생큐(Thank you)'다.
승강기에 탔을 때 누군가가 들어설 공간을 만들어주어도 '생큐', 길을 물어보았을
때 상대방이 잘 모른다고 대답해도 '생큐'다. 아주 작은 친절에도 생큐가 붙는다. 이
'생큐'라는 말은 어린아이가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에 배우게 되는 기초언어 가운데에
들어간다. 심지어 기저귀를 하고 다니는 어린애도 기저귀를 갈아주는 보모에게 '생큐'
라고 할 정도다.
'생큐' 하는 말의 의미가 한국말의 '고맙습니다'와 같은 무게를 지니고 있다고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미국인들도 정작 고맙다고 느껴질 때에는 '생큐'보다 '어프리시
에이트(appreciate)'란 말을 쓴다. '생큐'는 그저 서로 불편한 느낌을 덜어주고 상대
방에게 편안한 마음을 갖게 하는 작은 '예'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말의 '고맙습
니다'라는 표현이 갖는 무게는 없지만 사회 생활을 원할케 하는 작은 성의표시일 수
있다.
한국이 좋아 한국에 오래 살고 있다는 어느 외국인이 신문투고란을 통해 다음과 같
이 제언한 바 있다. "한국인들은 전통적으로는 남을 돕는 마음, 친절한 마음씨를 갖고
있는 민족이다. 한국에서 오래 살면 한국인의 그런 속마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그런
표현을 한국인들은 억제하고 있는 듯하다. 그것이 불친절한 한국인이라는 인상을 주기
쉽다. 간단한 '생큐'에 해당하는 한국어는 없을까.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는 너무
길다. 그저 잠깐 스치듯 지나갈 수 있는 '감사'라는 말 정도가 어떨까."
이런 외국인의 제언이 옳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음미는 해볼 만하다. 속마음
씨는 아름답고, 그래서 남의 사소한 친절에도 감사하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무뚝뚝하
게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도 좋은 것은 아니다.
그런 과묵은 오히려 사회생활을 불편하게 한다. 자신의 속뜻은 아주 사소한 경우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표현하는 것이 좋다.
그래서 작고 사소한 남의 친절에도 '감사합니다'라는 표현을 하는 것이 예의다. 서
양 사람들의 생활관습을 닳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마음속을 드러내 보이자는
것이다. 조선조 말 실학사상의 대가인 정약용은 '예'에 대해 "시대의 고금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예절의 행사도 실정에 알맞게 참작할 바가 있는 법"이라고 말한
바 있다.
상급자일수록 엄한 '예'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법질서는 없고 정치권력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는 의식이 팽
배해 있는 듯하다. 법질서, 사회규범이 정치권력에 의해 쉽게 좌지우지된다는 인상이
짙기 때문이다. 쉽게 이야기해서 그 어떤 법질서보다 권력이 강하다는 인식이 크다.
그러나 군주국가였던 조선조에서도 사회의 기강을 유지하는 법도나 예절이 왕의 권
력보다 우선시 된 예는 얼마든지 있다. 절대권력자인 왕이 법도에 어긋난다거나 '예'
에서 벗어난다는 지적을 받고는 속수무책으로 이에 따를 수밖에 없었던 예는 얼마든지
있다.
사실 지난날의 우리나라처럼 예의나 전례법도가 권력을 누르고 그 횡포를 막아온 국
가사회도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온갖 전통예의와 법도에
의해 제 마음대로 처신을 못했던 것이 조선시대였던 것이다.
태종 때에 있었던 일이다. 태종은 이씨조선의 창업에 참여한 행동주의적인 권력자였
을 뿐 아니라 왕자의 난을 일으켜 스스로 왕위에 오른,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행동주
의 군왕으
로 알려져 있다.
그 태종이 가장 귀여워하는 권총이란 외손자가 있었다. 권총은 항상 임금의 무릎 위
에서
자라 버룻이 없었다고 한다.
그 권총이 사고를 냈던 것이다. 어린 그가 수염이 긴 어느 노신의 수염을 가위로 잘
라 버린 것이다. 물론 어린아이의 악의없는 장난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부모
의 유체라 하여 머리털 한 호락도 함부로 하지 않았던 당시에 이 사건은 아무리 어린
아이가 저지른 것이라고는 하나 문제를 일으키기에는 충분한 사건이었다. 조정에서는
이 어린아이에게 벌을 주어야 한다는 공론이 일어났다.
태종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태종은 벌을 내려야 한다는 신하들의 공론을
듣고 "조정의 예절을 저버릴 수가 없으니 권총의 죄를 엄하게 다스릴 수밖에 없으나
총은 너무 어려서 예절을 모르고 한 일이니 관대하게 처벌할 수는 없는가. 죽음만은
면케 해주기 바란다"고 탄원했다.
결국 태종은 한시라도 못 보면 견디기 어려운 어린 외손자를 숭례문 밖에 가두어둘
수
밖에 없었다.
그런지 1년이 흘렀다.
태종은 병세가 위중해서 자리에 눕게 되었다. 태종은 자신이 운명하게 됨을 알았고
중신들도 회복이 어려움을 알고 있었다.
태종은 자리에서 "내 외손 총이 몹시 보고 싶다. 그러나 조정의 예절을 저버릴 수가
없으니 데려오라고 말할 수가 없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절대권력자라도 이처럼 예절과 법도에 감히 도전할 수 없었던 것이 한국인의 질서유
지정신이었던 것이다.
조선조의 집권자들은 사회가 문란하면 집권자들이 부덕해서 문란하다고 믿었다. 자
신에게 흠이 있어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가물어도, 큰물이
져도 자신의 '예의'에 하자가 있기 때문이라고까지 생각한 것이다.
한 지역에 가뭄이 들면 그 지역을 다스리는 관리가 자신의 부덕을 생각하고 처신을
바로 하지 못한 죄를 스스로 탓했다.
조선조의 효종은 심한 한발이 계속되자 병중인데도 불구하고 기우제를 지냈다. 승마
도중 말에서 낙마하여 몸이 몹시 불편한 데에다 귀 밑에 종기가 크게 나서 온몸에 신
열이 대단했는데도 밤잠을 설치고 기우제를 지낸 것이다.
타는 듯한 폭양 아래서, 그리고 싸늘한 밤에도 잠을 잊고 기우제를 올린 결과 더위
와 피로로 인해 병세가 급격하게 악화되기에 이르렀다. 결국 효종은 이것이 원인이 되
어 목숨을 잃었다.
지난날 지배자들의 나라의 법도, 사회질서를 위한 예의의 정신은 이처럼 투철했던
것이다.
지위가 높아질수록 책임이 크고 '예'를 지켜야한다는 의식이 강력했던 것이다. 위에
있는 사람일수록 '예'와 절도를 생명처럼 알았던 우리의 선인들이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필요한 '예'
가까운 사이일수록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말이 있다. 가까운 사이인데 굳이 형식에
얽매인 예의를 찾을 필요가 있느냐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 있으나 사회생활의 '
예'는 그렇지 않다.
비록 그것이 형식으로만 보일는지 모르지만 그런 예의는 필요하다.
또한 가깝고 친근한 사이이기 때문에 예의를 지키지 않는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먼
거리에 있는 사람에게는 더욱 예의를 지키지 않을 것이다. 예의바른 것은 가까우면 가
까운 대로 멀면 먼 대로 지켜야 하는 선이 있다. 아무리 형식을 차릴 필요가 없는 듯
이 보일 때라도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 도의일 때에는 그런 예의는 지켜져야 한다.
1941년에 영국의 처칠(W.L.S. Church기)은 런던 주재 일본대사에게 선전포고에 관한
공식각서를 보냈다. 그는 그것이 형식에 불과한 것이지만 필요할 때에 형식을 갖추는
것이 '예'라고 하면서 "많은 사람 중에는 이런 형식을 좋아하지 않는 자도 있다. 그러
나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될 계제라고 하더라도 예의바른 처신을 한다고 해서 손해
될 것은 없다"고 일본대사에 말했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형식적인 것인데 굳이 격식을 갖출 필요가 있을까 하고 소홀히 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릴수록 예의는 필요한 것이다.
이런 실화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의 일이었다. 중국의 흑룡강성에 살고 있던 어느 여성의
이야기다. 그 여성은 일본으로 피해 달아난 어느 일본인의 자녀를 키웠다고 한다. 어
느날 밭일을 하고 집에 돌아오던 중 길가에서 어린 아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그래서 돌아보니 갓난 아기가 강보에 싸여 울고 있더라는 것이다. 일본 사람들이 입고
다니던 옷에 아기가 싸여 있어 일본아이인 줄 직감했다.
그 여성은 아기를 집에 데리고 갔다. 그리고 친자식 이상으로 키웠다고 한다. 그녀
에게는 자기 아이가 이미 셋이 있었다. 그래서 어려운 살림에 애들 넷을 키워야 하는
경제적인 부담이 컸으나 그 일본 아이를 끔찍이 아끼고 키웠다고 한다. 중국인들은 남
의 자식을 데려다 키울 때 제 자식과 차별을 두어 키우면 이웃 사람들까지 욕을 한다.
그래서 맡지 않으면 모르되 일단 맡아 키우면 제 자식보다 잘 먹이고 잘 입혀 키워야
체면이 선다는 것이다.
그렇게 키우기를 40년, 장성한 그 일본 아이는 어른이 되어 결혼을 했고 자식까지
낳아서 그 아이를 친손주 이상으로 귀여워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전쟁중에 잃었던 육친찾기운동이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일어났다. 이제는
할머니가 된 그 중국 여성이 일본에 연락, 지난날 자신이 시골에 버려졌던 일본 아이
를 데려다가 키운 사실을 일본 매스컴에 알려 수소문 끝에 그 일본인의 친부모가 나타
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돼서 그 일본 아이는 일본에 있는 친부모를 찾아 떠났다.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4개월 후 중국에 있는 그 양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어머니 아버지, 지난 40년 동안 여러 모로 고마웠습니다. 중국에 남게 된 고아인
저를 친아들처럼 키워주셔서 그 은혜를 어떻게 보답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일본에
돌아와 이곳 생활에 적응하는 데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여기 감
사의 표시로 5만 엔을 보냅니다. 받아주십시오" 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편지는 빨간색 잉크로 씌어 있었는데 중국에서는 절연 편지를 쓸 때에 빨간색 잉크
로 쓴다고 한다.
이 유명한 실화는 일본과 중국에서 '예'를 이야기할 때에 자주 인용되는 이야기다.
이 편지를 보던 중국인 할머니는 기절했다고 한다. 40년 동안 애지중지 키운 대가로
5만 엔을 보낸다는 내용에서 놀랐던 까닭이다. 액수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그것이 어
떻게 돈으로 환산될 수 있는 것인가?
이것이 적절한 예가 될는지 모르지만 인간사회에는 '예'가 있고 그 '예'에 합당한
처신이 있다.
가장 가까운 부모, 형제, 가족들에게 제대로 예의를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사회생활
에서 원만한 '아'를 지킬 수 있을까.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예'가 있는 법이고 소홀히 할 수 없는 선이 있는 법이다.
그것은 한 가족, 한 회사내에서도 마찬가지다.
주변 사람을 이해하려는 성의
작은 조직체에서나 큰 조직체에서나 공동생활에 있어 남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또한 자신의 마음이나 상황을 주변 사람들이 흡족하게 이해하기를
기대한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부부 사이도 그렇고, 부모와 자녀들 사이도, 또 형제 자매들 사이에서도 그것은 역
시 마찬가지다. 하물며 남이 자신을 충분히 이해해 주기를 바라고 또 그래야 한다고
기대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해는커녕 오해를 받는 일은 무척 괴로운 일이다. 남편이 부인을 오해하고
부인이 남편의 뜻을 오해한다. 뿐만 아니라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 오해가 싹트고 그것
이 쌓여가는 수가 있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다. 상사와 동료들 사이에서 오해가 자주 발생한다. 그래서 그
런 오해를 풀려고 애를 쓰는데 잘 풀려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상사의 지시를 받아 제 나름대로 열심히 일을 했는데에도 일을 성실히
하지 않았다는 오해를 받는다. 또 부하직원에게 상세한 설명을 했는데도 나중에 그렇
게 하지 않았다는 말을 듣는다. 동료에게도 할만큼은 했다고 생각하는 데에도 무엇인
가 틈이 생긴다.
이런 경우에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제까지 열심히 했다고 한
것이 사실은 겉으로만 그런 것이지 속으로부터 우러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엇이건 성의를 다하고 마음에서부터 우러나는 태도로 매사에 임해야 하는 것이 '
예'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서 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그런 태도가 은연중
전달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가볍게 인식되어 그 결과 오해를 낳게된 것이다.
성의를 다하고 진실이 그 속에 담겨 있으면 어떤 상대라도 충분히 설득이 된다.
이런 실례가 흔하다.
어느 한국인이 미국에 이민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운전도중 경찰관에게 교통규
칙 위반으로 딱지를 발급받았다. 그러나 자신은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것이 없다.
그래서 법원출두일에 불복을 호소하기 위해 출두한다. 이렇게 되면 법정에서 딱지를
발급한 경찰관과 맞서게 된다. 경찰관이 여러 모로 유리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잘
못이 없다는 신념으로 공판장에서 경찰과 싸우는 것이다.
영어 구사도 만족하지 않은 상태에서 교통경찰관과 논리적으로 맞서 싸워 이긴다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자신의 소신이 확실하다면 못하는 영어도 그 장벽이 뚫린다. 성
의를 다해 자신이 처해 있던 입장을 하나하나 설명한다. 성실한 자세로 설득하는 것이
다. 그래서 승소하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문제는 남을 이해하거나 남에게 이해받으려 할 때 이편이 얼마나 성실한 자세가 되
어 있느냐가 문제다.
아무리 말을 잘한다 해도 성의에서 벗어나면 이편의 뜻이 전달되지 않는다. 오히려
말이 너무 많다는 인상밖에 주지 못한다. 좋은 분위기에서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낸다
하더라도 '예'가 결여되었다면 상대방의 마음을 잡을 수가 없다.
여기에서 말하는 '예'는 자기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난 성의와 열의의 전달을 의미한
다. 겉으로 나타나는 테크닉이 아니라는 말이다.
말의 논리로서는 변호사의 기술을 따라갈 수가 없다. 그러나 변호사의 유창한 논리
와 언변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그의 말을 믿느냐 하는 것은 전혀 별
개의 문제다. "웅변이 쓸모가 없을 때에는 단순하고 티없는 침묵이 도리어 상대를 설
득시킬 때가 있다"라는 세익스피어의 말도 진실의 중요성을 지적한다.
남을 설득하기에 앞서 남을 이해하고 그에 앞서 자신을 돌아보는 자세가 바로 예의
다.
나의 말이 진심에서 우러나는 것인가, 그리고 나는 나의 성의를 다해 내 뜻을 전달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인가, 다시 말해 나는 과연 진실한가를 살펴본다. 이
것이 사회생활에서 타인과 접할 때에 필요한 '예'다.
자연보호 캠페인도 '예'
한국인처럼 자연과 친숙한 생활관을 가져온 민족이 있을까. 한국인들의 생활은 자연
을 그대로 삶 속에 영입한 생활을 해온 특이한 민족이다.
천지인이라는 삼재사상이 전통 문화 속에 뿌리내려온 한국인들은 자연과의 조화에서
생활의 지혜를 찾았던 것이다.
한국인의 수천 년에 걸친 의. 식. 주생활은 모두가 자연과의 조화 내지 자연에의 순
응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고유음식인 김치, 깍두기, 주거양식, 의복 등 모두가 자연법칙의
이용과 적용에서 그 원초적인 아이디어가 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날 자연환경 오염이니 파괴니 하는 자연 훼손문제에 대한 해결은 다른
어느 민족에 비해 우리 민족에게는 손쉽다. 자연을 자신의 지체처럼 사랑하고 아끼던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를 되살리면'되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일찍부터 자연을 벗하며
살았고 자연의 참모습을 잘 터득했던 까닭이다.
인간의 생활은 그 자체가 자연과의 대립, 그리고 정복이라는 서구에서 보는 바와 같
은 대립의 개념이 아니라 조화에서 온다는 한국인의 전통사상의 한 모습을 보자.
이제는 쉽사리 찾기 힘들어졌지만 시골 어느 곳에 가도 널려 있던 한국인의 초가집
을 보라. 벼수확을 끝낸 후의 짚으로 만들어진 지붕, 그것을 받치고 있는 소나무로 만
들어진 기둥, 흙으로 빚어진 벽, 이 세 가지가 조화를 이루는 한옥은 자연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오늘날 생태계의 파괴 운운하지만 초가에는 생태계의 질서가 그대로 유지됐던 것이
다. 굼벵이나 참새 같은 것이 기생하고, 그것들이 초가 속에 사는 지네, 모기 등을 잡
아먹고, 또 더러는 사람을 해치지 않는 구렁이가 나돌아 참새들의 지나친 번식을 막아
주기도 한다.
두툼한 초가의 벼는 가벼우면서도 한겨울의 혹한을 막아주고 한여름의 혹서를 차단
해 주는 절연체 역할을 한다. 흙과 짚을 섞고 수수깡을 군데군데 끼어 만든 벽은 대단
히 유연한 절연체 역할을 할 뿐 아니라 방안의 습기를 조절하는 데에도 월등한 역할을
해낸다.
가벼운 지붕, 유연한 벽면을 지탱하고 있는 소나무 기둥이나 서까래는 다른 목재에
비해 단단해 보이지는 않지만 송진이 있어 수명이 길고 오히려 쉽게 썩지 않는다. 겉
은 썩어보일는지 모르나 속은 그대로 있어 몇백 년을 견딜 수 있다.
오래 묵은 집을 보면 비록 지붕이 기우뚱하고 한편으로 넘어질 듯이 보이긴 해도 결
코 넘어지지 않는다. 집 전체가 마치 자연 그 자체처럼 서로 의지하며 유연하게 얽혀
있다. 집을 구성하고 있는 자재들이 마치 상부상조해 온 한국인의 생활사 같다.
한국인은 산을 사랑하고 나무를 아껴온 생활사를 갖고 있다. 특히 소나무에 대한 보
호정책은 역대 왕조에서 실행되었는데 그 까닭은 그것이 서민주택에서 자주 쓰일 수
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돌의 채취도 함부로 못했다. 조선조 중종 때에
는 나라에서 자연 훼손을 금했던 지역내에서 돌을 채취한 높은 관직자가 언관의 지탄
을 받아 조정에서 쫓겨났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영조 때에는 북한산의 도벌꾼에게
사형을 내렸다는 기록도 있다.
최근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자연파괴, 대기오염 등 공해문제는 이와 같은 자연
을 사랑해왔던 한국민의 전통문화를 일깨워줌으로써 해결의 실마리가 풀릴 수도 있을
것이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인간생활 캠페인이 펼쳐지고 있다. 자연의 훼손을 막고 살아 숨
쉬는 자연을 만들자는 운동이다. 합성세제의 남용을 막고 공장폐수의 정화, 비닐주머
니 추방 등의 자연보호운동도 현대인이 지켜야 할 예의지키기의 하나일 것이다.
'예'는 어려울 때의 처신에서 드러난다
세상살이에는 언제나 기복이 있다.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다. 그런데 좋을 때
보다도 좋지 않을 때를 어떻게 지내느냐에 따라 사람이 크게 성장하든가 아니면 회복
불능에 빠지든가 둘 중에 하나가 좌우된다.
어려운 상황에 빠졌을 때에 하는 처신이 어떠한가에 따라 그 사람의 평소 '예'의 질
이 어느 정도인가가 가늠된다.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맞는 시기에 이르러서야 송백과 같은 상록수와 다른 낙엽수
의 구분이 생기게 된다"는 말이 있다.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에 사람의 진가가 나타난
다는 뜻이다.
개인의 경우도 그렇지만 국가사회의 경우도 같다. 세계경제가 침체국면에 있어 수출
이 부진하다든가, 혹은 여러 가지 경제적인 요인으로 주가가 하락한다든가, 물가가 오
를 낌새가 있다든다 하면 삽시에 변이 일어나는 듯이 호들갑을 떤다. 이것이 최근 눈
에 띄는 한국인의 조급증이다.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사회생활의 매너가 바르고, 전체 사회가 위기를 극복하기 위
해 마련한 룰을 그렇지 않을 때보다 한층 더 잘 지키는 것이 '예'의 진수다. 아니 여
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런 역경을 오히려 선용해서 건설적인 사회기강의 착근시
기로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역경을 오히려 자기연마나 수련의 시기로 삼은 한국인의 예는 많다.
시조문학에서 후세에 불후의 작품을 남긴 고산 윤선도, 조선조 중엽 가사의 대가인
송강 정철, 조선 후기의 학자인 정약용 등의 학문적인 업적은 대부분 유배지에서 이루
어진 것들이었다.
윤선도는 전훈 세 차례에 걸쳐 20년 가까운 시일을 유배지에서 보냈다. 그의 주옥같
은 시조는 모두가 역경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유배지에서 오히려 더 좋은 시조를 후세에 남겼다. 그의 문집 속에 실려 있는
75수의 시조는 한국 시조문단의 금자탑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대부분이 자연을 노래한
것들로써 벼슬직에서 떠나 은둔생활이나 유배지에서 지은 것이다.
"관동별곡", "사미인곡" 등 불후의 명작을 쓴 정철도 파란많은 유배생활의 역경을
겪으면서 작품을 완성했다.
["관동별곡"은 1580년(선조 13) 송강 정철이 지은 가사다. 그가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
하여 관동 팔경과 해. 내. 외금강 등 절 승지를 유람하여 옳은 작품으로 이루어졌으
며, 형식은 4 4조다. '사미인곡'은 정철이 1585년 조정에서 물러나 4년 동안 전남 창
평에서 우거할 때 지은 것으로, 임금을 그리는 정을 간곡하게 읊은 것이다.]
18년의 귀양살이가 없었다면 정약용의 깊은 학문이 있었을까. 정약용에게 강진의 귀
양살이 18년이 없었다면 그의 실학은 형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귀양지 현장에서 쓴 것
이 바로 그 유명한 "목민심서"였다.
["목민심서"는 지방 장관의 치민에 대한 도리를 논술한, 48권 16책으로 된 정약용의
저
서다. 이 책은 저자가 강진으로 귀양가 있는 동안 저술한 것으로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사서를 비롯 여러 책에서 자료를 뽑아 지방 관리들의 폐해를 제거하고 지방행정을
쇄신하고자 한 것이다. 모두 12편으로 각 편을 6조로 나누어 모두 72조로 엮었다.]
다산은 '자선묘지명'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바닷가로 귀양온 후로 지난 유년
시절을 생각컨대 학문에 뜻을 둔 지 20년이 되도록 세상일에 깊이 빠져들어 다시금 옛
성현들의 도리를 깨달을 겨를이 없더니 이제야 한가로운 틈을 얻게 되었는지라 이것을
기꺼이 경하롭게 생각하고 6경4서를 가져다가 여기에 깊이 파고들어 이의 깊이를 캐보
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한과 위 이래 명. 청에 이르기까지 무릇 유가의 학설로서 경전
의 뜻에 보탬이 되는 것을 널리 수집하기로 하고 이를 고증하여 잘잘못을 가려내기로
함으로써 일가견을 세우도록 노력하였노라"고 했던 것이다.
인생의 진가는 이와 같이 역경에 처해 있을 때에 한충 빛이 난다. 어려움에 빠져 있
을 때에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세계가 있음을 알게 되고 이제까지 소원했
던 인간관계의 참뜻도 알게 되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역경을 도약의 기회로 만드는 능력이 있다. 역경에 처해서 오히려 숨어
있는 능력을 개발한다. 역경이 주는 교훈을 안다
새시대 적응능력으로써의 예절 - 김영태씨의 경우
예절은 흔히 정신의 雲이요 의식의 거울이라고 한다. 옷은 때와 장소에 따라 알맞게
입어야 하고 거울은 늘 맑게 닦아서 모습이 바르게 보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예절을 지키는 일도 그와 같이 해야 그 시대의 삶을 바르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예절은 지키는 일에 앞서 바르게 아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바로 그런 예
절의 눈금을 알려주고, 시대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으로써의 예절을 정착시키기 위해 노
력하는 태도도 또한 예절이라 할 수 있다. 사회적 진실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정의되는
언론이 예절의 바른 눈금과 감각을 보여주는 태도, 그것은 의무이기 전에 예절에 속한
다고 하겠다.
우리 사회의 예의가 땅에 떨어지고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있다는 비판의 소리가 높지
만 구체적으로 도덕성을 회복하고 예의바른 행동규범을 말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와 같은 풍토 속에서 치밀한 기획으로 호소력있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참다운 예
절의 행동규범을 제시하는 방송과 신문의 刻도는 바람직한 예절문화 정착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 각 신문이나 TV와 라디오의 방송매제에서는 최근 우리 사회에 새로운 적응
력으로써의 질서의식, 정서적 대응방식으로써의 예절관을 널리 알려왔다.
그런 프로그램을 담당해 온 방송언론사 프로듀서가 많지만, KBS의 김영태씨는 특히
예절의식의 본질적인 문제에 접근하는 창의력있는 기획으로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김영태씨가 다룬 기획물을 보면, 우리 시대의 '예'에 접근하는 다양한 문제를 제기
하고 구체적인 예절의식과 행동 대응양식을 알리는 데 주력하고 있다. 교통질서의식을
다루는 경우에도 피상적인 태도로 잘잘못을 지적하는 구태의연한 방법을 지양하고, 누
구나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새로운 대응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예를 들어 교통질서문제를 다를 때도 강요된 법적 시각에서보다도 문화의식의 차원
에서 더욱 근본적인 접근을 보였다.
사회질서는 법이나 제도의 차원에서 이루어지기보다 문화적 예절의 차원에서 지켜질
때 바른 생활을 이끌어 갈 수 있다.
환경문제 역시 법 이전에 사람이 지닌 예절의식이 앞서야 한다. 자연환경을 오염되
지 않고 깨끗하게 지킨다는 것은, 한국인이 전통적으로 지녀온 자연에 대한 예절관과
부합된다. 한국인은 자연에 대립하고, 정복하기보다 순응하고 조화를 이루는 문화의식
을 지니고 살아왔다. 그래서 자연을 파괴하고 더럽히게 되는 일은 한국인의 도덕적 생
명력을 잃는 일이 된다.
이런 문화적 예절의식을 일깨우면서 새시대의 삶을 위한 환경문제의 심각성에 접근
하여 바른 행동규범을 제시해 줄 때 한층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 김영태씨는 바로 그런
문화적 시각으로 예절의식 회복에 노력했다. 김영태씨는 이외에도 우리 시대의 예절을
새로운 시대의 눈금과 문화감각으로 다룬 많은 새생활 문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향락놀이 문화, 선물 문화, 접대 문화, 全비 문화 등 구제적인 새생활 문화의식의
행동규범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으로 대중문화매제의 기능을 최대한으로 효과있게 활용
하여 문화의식의 질을 높였다.
소비는 미덕이라는 의식은 경제적 풍요시대의 자연스런 소비문화를 대변하고 있다.
그러나 소비를 어떻게 하는가는 소비문화의 예절이다. 우리 사회에서 일반화되어 있는
각종의 모임들이 분수를 모르는 과소비로 허례허식을 띠는 경향이 날로 심해지고 있
다.
그 대표적인 예가 호화판 망년회다. 김영태씨는 망년회와 같은 우리 시대의 풍속이
바른 예절을 가져야 한다는 문제에서부터 직장에서 고객을 접대하는 경우 향락업소 이
용문제, 그리고 선물의 예절을 우리의 현실 상황과 전통적 예절관에 맞게 적정한 규범
을 다룬 프로그램을 만들어 최근의 우리 사회가 잃어가는 예절의 바른 刻도를 일깨우
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1985년부터 지금까지 우리 시대의 문화예절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어 한국인의 삶
을 질적으로 향상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김영태씨의 직업인으로서의 자세는 본받을
만한 예절을 보여준다.
삶의 행복을 지키고, 문화적 생명력을 지키는 건 법이 아니라 예절의 옷이다. 우리
는 김영태씨에게서 그런 예절의식을 배울 수 있다.
"지" 그것은 자기 자신을 닦는 배움이다
한국처럼 교육열이 높은 나라도 흔치 않을 것 같다. 전 국민이 온통 교육열에 들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 교육열이 상급학교 진학을 위한 입시준비 교육에만 집중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 경쟁을 뚫고 상급 학교에 진학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국민학교에
입학한 뒤부터 어린이들의 의식 속에 굳게 자리잡는다.
그래서 좁은 문을 뚫고 들어가는 기능교육격인 과외수업이 성행한다. 고등학교를 졸
업하는 청소년들의 목표는 대학입시로 집약된다. 아니 학생들의 목표가 대학 입학에
있다기보다 부모들의 의욕이 더 대단한 듯이 보인다.
대학입시를 위한 전문 입시학원이 도처에 있어 대학입시에 낙방한 재수생들에게 뜨
거운 입시준비 장소를 제공한다. 재수에서 3수, 그리고 4수생까지 있다는 것이니 가히
대학 입학 집념을 짐작할 만하다.
과열 입시경쟁에 따르는 시비가 일어나게 되는 이유도 이와 같은 대학 진학 열병에
학생과 학부모가 들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이것이 '참다운 교육'일라. 이제 우리 사회는 교육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다
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볼 시기에 와 있는 것 같다.
유교의 가르침은 모두가 인간교육에 관한 것이지만 인. 의. 예. 지. 신 등 주요한
다섯 개의 덕목 가운데에서 특히 지가 인간생활에 있어 참된 지혜 내지 지식이란 무엇
인가를 중점적으로 가르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지'는 지식의 섭취나 서구적인 개념의 놀리지(knowledge)와는 다르다. 그것은 보다
철학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평생을 통해 끊임없이 계속되는
자기자신을 깨닫는 노력이다.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Socrates)의 유명한 말이 있다. 자기자신을 알고,
끊임없이 자기자신을 연마하는 노력이 곧 '지'의 길임을 나타내주는 말이다.
공자의 "논어"에 있는 "40에 불혹하고 50에 천명을 안다"에 나오는 '안다'가 곧 이
것을 뜻한다고 풀이할 수 있다. 그때쯤에서 자기자신이 누구인가를, 무엇을 해야 하는
가를, 좀더 깊게 이야기하면 자기의 운명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천명을 안다는 말은 '자기자신'을 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인생의 후반기
인 50대예 가서야 비로소 자기자신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도 멍청하게 남들이 하
는 대로, 사회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가서는 안 되며 끊임없는 자기연마가 있어야 한다
는 전제가 있다. 이렇게 열심히 노력하는 인생을 거친 연후에 50대쯤 되면 자기자신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 이 '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 준다. 가장 먼저 말해 주는 것은 자기자신
의 좌표찾기다.
남들이 원하는 길이 과연 자기의 길인가, 남들이 대학 진학에 온 정력을 집중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자기의 목표가 될 수 있는가, 남이 재수, 3수를 한다고 해서 자기
자신도 해야 하는가, 이런 것들을 되새겨야 함을 말해 준다.
쉽게 말해서 자기의 능력, 적성에 맞는 인생의 진로를 찾아야 함을 뜻한다. 그리고
이런 자기발견은 빠를수록 좋다. 중 ·고등학교 재학중 아니면 대학, 그리고 대학을
졸업한 뒤 사회에 진출한 후에도 끊임없이 자신을 찾는 마음가짐이 곧 '지'의 길이라
고 할 것이다.
'지'는 평생을 통한 지식의 섭취, 지혜의 닦음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평생을 통한
배움의 자세를 갖도록 가르친다. 자기수양, 자기극기, 연마의 마음가짐을 생활화해야
함을 의미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죽는날까지 배워가면서 자기자신을 닦아가는 것이 곧
인간의 삶이요, 가치있는 삶임을 가르쳐준다.
한국인의 교육열, 지식 섭취 의욕은 유교적인 전통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과거'라
는 지난날의 관리등용제도도 그런 배움의 의욕을 북돋웠을 것이다. 배워야 남보다 앞
설 수 있다는 교육열은 대단했다. 외국에 이민간 한국 이민자녀들이 대학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이유도 한국인의 교육열이 그 밑거름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교육열이 오늘에는 정상궤도를 벗어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방향을 잃
은 것이다. 교육이 세상을 보다 편하고 쉽게 살아가기 위한 수단만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지식은 힘'이란 말이 있다. 영국의 철학자 베이컨(Francis Bacon)의 말이다. 그러
나 지식이 온전한 힘(power)이 되는 것은 그 지식을 갖춘 사람이 자기본분을 잘 깨닫
고 있을 때에 한한다.
"지식은 사람에게 필요한 무기다. 그러나 무기를 잘못 쓰면 도리어 자신을 해하듯이
지식도 진실의 밑받침이 없다면 식자우환이라는 말처럼 오히려 몸을 망치기 쉽다. 진
정한 지식은 꾸밈새없는 순진한 마음에서 솟아나는 것이다. 진실과 함께 있는 지식이
참다운 지식이다"라고 페스탈로치 (J.H. Pestalozzi)도 지식을 정의했다.
자기자신의 참모습을 아는 것이 '지'다. 그런 후에 지식은 빛을 내는 것이다. '지'
는 끊임없는 자기연마의 산물이지 배워서 습득되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어렸을 때에 자신의 장래를 꿈꾼다. 내가 자라면 무엇이 될까, 무엇이 되어
야 좋을까 하고 생각한다. 의사, 과학자, 문인, 정치가, 실업가 등등 되고 싶은 것도
있다.
그런데 그런 꿈이 자라가면서 변하기도 한다. 학교에 들어가고 친구를 사귀면서 변
하기도 하고 부모나 형제의 권유에 따라 흔들리기도 한다. 혹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현실 속에 안주하다보니 자기 생활의 목표가 무엇이고 무엇 때문에 사는 것인지 모르
게 되기 쉽다.
그래서 오늘의 자신을 돌이켜보면 현재의 자기 인생이 자기의 뜻과는 관계없는 쌓이
고 쌓인 '우연'의 결과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대학 진학 때의 과 선택도 자신의 의사와는 달리 상황의 산물이었을 수도 있다. 그
리고 대학 졸업 후의 취직도 어떻게 우연한 기회에 된 것이었고, 결혼도 마찬가지로
우연에 의한 것이고, 지금 살고 있는 집도 어쩌다가 복덕방이나 신문 광고를 보고 찾
아간 곳일 수도 있다.
그러다보면 자기의 의사하고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온 자신을 회고하게 된다. 인생
이란 이런 것인가 하는 적막감도 든다.
공자는, "사람이란 40대에 이르러서야 불혹의 경지에 이르며 천명을 아는 데에는 50
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공자가 생존했던 시대는 지금부터 2천5백여 년 전. 인간의 평균 수명이 현재에 비해
상당히 짧았을 것을 생각해 보면 사람이 자신의 천명을 안다는 것은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자기가 걸어가야 했던 길, 자신이 그리고 싶었던 정직한 자화상을 잊은 채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본의건 그렇지 않건 일상생활에 쫓기면서, 그때그때 사
회의 가치관이나 관습에 이끌려다니는 길을 걸어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 공자의 '50세 지천명'을 되새기면 우리는 새로운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평균 수명이 70세를 넘어서고 있는 오늘날 '인생은 50부터'라는 말이 갖는 의미를 음
미할 필요가
있다.
공자의 '지천명'을 제2의 인생 출발이라는 뜻으로 새겨볼 만하다. 어렸을 때에 꾸었
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한 의욕을 펼쳐보고, 이제까지 살아온 생애를 다시 총정리하는
새로운 출발점으로 50대를 생각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런 풍조는 오늘날 활발하게 일고 있다. 이제부터 의미있는 생을 창조하겠다는 사
람들이 늘어간다. 50대에 대학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 그림 공부를 하는 사람, 글을
쓰기 시작하는 사람 등 자기의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한다.
30년 가까이 근무해 왔던 공무원직을 떠나 고향에 돌아가 향토사연구에 몰두하는 사
람이 있는가 하면, 큰 기업체의 사장직을 뒷사람에게 물려주고 시골학교 교장직을 맡
는 사람도 있다. 변호사직을 떠나 고향마을에 돌아가 봉사직을 맡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들을 보고 우리는 50대가 되어서 자신의 천명을 찾으려는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제2의 인생을 개척한다는 것은 이제까지 우연과 무의식 속에서 쌓아간
제1의 인생과는 달리,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보람을 찾는 인생이라고 할 수 있다.
천명을 안다는 것은 자기 인생의 의미를 터득한다는 말이다. 천명은 따라서 어린이
의 꿈이 아니라 '어른의 꿈'을 가리킨다. 이 '어른의 꿈'을 바로 찾는 사람은 행복하
다.
물론 이 천명이 이제까지 바로 걸어온 자기 운명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전환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의 발견이다. 새 가치의 발견이다. 사회관행, 사회습성에
물들지 않은 새 가치의 정립이다.
이렇게 잊고 있었던 인생의 가치발견도 '지'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바른 습관 기르는 것이 '지'의 길
어머니의 자녀교육을 이야기할 때 한국인이면 누구도 잊지 못하는 실화가 있다. 동
방의 서성으로 알려진 한석봉의 붓글씨 수련에 얽힌 이야기다.
조선조 중종 때에 송도에서 태어난 한석봉의 대성은 어머니의 바른 교육과 자신의
피나는 수련이 이룩한 산물이었다. 김정희를 비롯해 적지 않은 명필이 그 이후에 있었
으나 한석봉처럼 가난한 환경에서 글씨공부를 하고 대가를 이룬 명필은 없었다.
글씨공부가 말해 주듯이 한석봉의 대성은 어머니의 엄한 훈도에 따르는 무서운 반복
수련이 가져온 것이었다.
한석봉의 이야기를 더 살펴보자.
한석봉은 어려서부터 글씨쓰기에 비상한 재주를 보였으나 집이 가난해서 글씨공부를
할 붓과 먹, 그리고 종이를 제대로 얻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떡장사를 해서 근근히
생계를 유지하면서 아들의 공부를 위해 학용품을 사대었을 뿐 아니라 엄한 교훈으로
아들을 달래고 또 격려했다.
어느날 밤이었다. 한석봉은 글씨연습을 하고 어머니는 다음날 팔 떡을 썰고 있었다.
때마침 찢어진 창구멍으로 바람이 불어와 등잔불이 꺼졌다. 방안이 갑자기 캄캄해졌으
나 어머니의 칼소리는 전과 같이 고른 소리를 내고 있었다.
"석봉아, 너도 어두운 데서 글씨를 써보렴. 그래서 나중에 불을 켜고 네가 쓴 글씨
와 내가 썬 떡과 어느 편이 똑바른지 견주어보자"라고 어머니가 말한다. 어머니는 그
동안 열심히 공부해 온 아들을 시험해 볼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둠 속에서 어머니는 떡을 썰고 한석봉은 글씨를 쓴다. 한석봉은 붓 끝에
온 신경을 모으고 한 자 한 자 정성을 다해 글을 써갔다.
이윽고 긴 시간이 지나갔다. "자 이제 비교해 보자." 어머니는 다시 등잔에 불을 붙
이고 자신이 썬 떡과 한석봉이 쓴 글씨를 비교했다. 어머니가 썬 떡은 한 점 한 점이
똑같고 반듯했다. 그러나 어린 한석봉의 글씨는 크기도 서로 달랐거니와 바르지도 못
했다.
그러자 어머니가 말한다. "이제까지 오래 글씨 공부를 해왔지만 아직 멀었다. 더 열
심히 연습을 해야 한다. 눈을 감고 글을 써도, 어둠 속에서 글을 써도 눈을 뜨고 쓴
것처럼 바르고 고르게 되어야 한다. 무슨 일이든 열심히 노력하고 오래 오래 되풀이하
면서 익히면 안 되는 것이 없다. 눈을 감고 아무리 잔글씨를 많이 써도 훌륭하게 쓸
수 있을 때까지 계속 글씨공부를 다져라"라고 말한다.
가난하기 때문에 지필묵이 부족한 한석봉은 감나무와 떡갈나무의 넓은 잎을 따서 종
이 대신으로 썼으며 나중에는 큼직한 반석으로 된 돌다리 표면을 종이 대신 썼다. 먹
을 갈아서 쓰지도 않았다. 붓에다 물을 묻혀서 돌 표면에 글씨연습을 한 것이다. 한여
름에는 물이 급히 마른다. 그러면 다시 붓에 물을 적셔 또 글씨를 쓴다. 같은 글씨를
수천 번, 수만 번을 반복하면서 썼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한호, 1543-1605)는 조선시대의 서예가로 자는 경흥, 호는 석봉. 청사. 일찍이 서예
에 정진, 왕회지. 안진경의 필법을 익혀 해. 행. 초 등 각체가 모두 뛰어났다. 우리나
라 서예계에 김정회와 쌍벽을 이루고 있다. 그외 필적으로 "석봉서법" "석봉천자문"등
이 모간되어 있고, 친필은 별로 남은 것이 없으나 그가 쓴 비문은 많이 남아 있다.]
반복은 습관을 만든다. 반복하는 공부는 공부의 생활화, 습관화를 만든다.
습관처럼 무서운 것이 없다. 몸에 밴 습관은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사람을 움직
인다.
개인도 그렇고 사회도 마찬가지다. 나쁜 버릇, 나쁜 관습에 젖어버리면 여간해서 개
선하기 어렵다. 부지불식간에 몸에 밴 악습은 쉽게 고쳐지지 않기 때문이다.
좋은 버릇 들이기가 바로 교육인 것이다
옛것에서 새것을 찾는 지혜
사람의 일상은 겉으로 보기에는 타성처럼 보일는지 모르지만 순간순간의 삶에는 지
난날의 경험이 쌓여 있다.
어느 회사에 들어갔다고 하자. 아무리 책임이 작은 직책을 맡고 있다고 하더라도 직
장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수시로 언행을 어떻게 해야 좋은가를 의식하면서 상황에 맞는
처신을 하게 된다.
이와 같이 처신 능력이 좋아 주변에서 좋은 인식을 갖게 되면 능력있는 사람으로 알
려지게 되고 승진의 길도 열린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회생활의 옳은 처신은 부지불식간에 몸에 밴 경험과 그 결과에
서 얻어진 습관에서 비롯된다. 좋은 습관이 몸에 붙게 되면 좋은 처신이 저절로 나오
고, 나쁜 습관이 붙어 있으면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나쁜 처신, 나쁜 판단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은 새로운 것인지 모르되 자신 속에 축적되어 온 지난날의 과
거가 새 판단과 처신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온고지신이라는 말이 있다. 옛것을 연구해 새 지식이나 견해를 편다는 뜻이다. 이
역시 자신의 경험 속에 쌓여 있는 지식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이 겪어온 지식과 경험을
배우고, 새로운 상황에 처했을 때에 참고로 삼는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우리는 매일 새로운 상황에 부딪친다. 따지고 보면 어느 것 하나도 똑같은 것이 없
다. 그러나 이 상황과 흡사했던 적은 지난날에도 있었던 것이다. 똑같은 것은 없지만
공통적인 것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날의 경험에서 얻은 판단의 기준이 서게 된
다. 그리고 그 경험의 축적 위에서 자신의 것이 싹튼다.
"모든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와 플라톤(Platon) 철학의 주석에 불과하
다"는 말도 있다. 경험론도 실존론도 모두가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철학을 토대로
해서 나왔다는 것이다.
물론 새로운 아이디어의 창출도 있고 획기적인 창안도 많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라
고 해서 갑자기 나온 것은 아니다. 이제까지 발표된 방대한 연구논문을 소화하고 자기
것으로 다듬은 토대 위에서 꽃핀 것이다.
그동안의 연구는 다른 사람의 연구논문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성공
에서보다 실패에서 오히려 더 큰 경험을 얻었을 가능성도 있다.
독일의 문호 괴테(J.W. Goethe)가 이렇게 말한 일이 있다. "누구나 자기가 제일 잘
났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미 경험한 선배의 지혜를 빌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사람
들이 실패하고 눈이 떠질 때까지 헤매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무슨 어리석은 짓이랴.
그렇다면 선배들이 찾고 헤맨 것이 진보의 역할을 못하는 것이 아닌가. 뒤에 가는 자
는 먼저 간 사람의 경험을 이용하여, 두 번 다시 실패와 헤매는 일을 되풀이하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서 다시 앞으로 밀고 나아가는 점이 없어서는 안 된다."
괴테의 이 말 역시 축적된 지식으로서의 경험을 지적하고 있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흐른다. 어제는 이미 존재하지 않고 오늘도 내일 속에 묻힌다.
그러나 과거가 있기 때문에 현재가 있다. 긴 역사의 눈으로 보면 역사는 되풀이되고
있다. 인간의 드라마는 조금도 변하지 않고 되풀이된다. 그래서 '역사는 되풀이되는
시간'이라는 말도 있다.
불과 10여 년이 낡아보이는 이 시간의 급류 속에서 5백 년, 1천 년은 그야말로 옛날
이다. 그러나 사람이 살아가는 기본윤리는 시대를 초월해서 변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한국인들은 너무나 새것만을 찾아다녔던 것처럼 보인다. 서구의 것이면 모
든 것이 지난날의 우리것보다 좋다고만 보고 우리 문화에서 좋은 것을 찾으려 하지 않
았다. 이제 그런 습성을 버릴 때가 왔다. 이젠 진정으로 우리것에서 좋은 것을 찾아야
할 때인 것 같다.
자기것을 보다 소중히 가꾸는 마음
'남의 떡이 더 커보인다'는 우리나라 속담이 있다. 이 속담처럼 우리나라 사람은 남
의 것을, 남의 학문을, 남의 사상을 더 좋게 보는 좋지 않은 습관을 갖고 있는 듯하
다.
다르게 표현해서 자기것을 낮게 보려는 사고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
다.
이런 풍토 속에서 자기것을 찾고 그것을 역사에 길이 전한 두 사람의 위대한 인물을
찾아보기로 하자.
이런 인물 가운데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조선조 4대왕인 세종일 것이다.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는 처음부터 자기것 찾기였다. 우리말에 맞는 우리 문자의 창안처럼 자
기 것 찾기의 위대한 예는 아마 없을 것이다 절대 권력을 갖고 있는 군주였지만 세종
의 훈민정음 창제에는 죽음을 불사한 반대가 있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생각해도 흥미있
는 일이다.
오늘에는 서구사상 심취라고 표현되지만 당시에는 모화사상이었다. 이 사대사상에
물든 학자들이 강한 반발을 보인 것이다. 최만리를 필두로 한 이 유학자들은 6개 조의
긴 상소를 올려 훈민정음 제정에 반대를 했다.
[사대주의는 주체성이 없이 세력이 큰 나라나 세력권에 붙어 그 존립을 유지하려는 주
의다. 맹자의 '유지자위능이소사대', 손초의 '귀소부사대' 등에 그 어원이 나타나며,
이에 준하여 조선시대에서는 중국 명나라에 대한 국가적 자세를 '근사대치례'라 표현,
큰 나라를 섬겨 국가의 안존을 꾀했다.]
"중국 문자를 가지고도 충분히 의사표시를 해왔으며 그 글은 더없이 훌륭한데 무슨
이유로 다른 글을 만들려고 하십니까. 이는 옳지 않은 처사이옵니다"라고 했다.
이에 대해 세종은 몹시 노해서 반박했다
"신 등은 음운합자하는 것이 모두 옛적일에 위반된다고 하지만 설총의 이두는 이음
이 아니었던가? 또한 이두 제작의 본뜻은 백성을 편하게 하려 함이 아니었던가. 만약
에 그렇다면 오늘날의 정음도 백성을 편하게 하기 위함이 아닌가. 신 등은 설총이 만
든 것은 옳다 하고 임금이 만든 것은 나쁘다고 하니 어찌 된 일이냐. 우리 백성을 위
하고 우리말에 맞는 우리 글자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 어째서 법도에 어긋나느냐"고 했
다.
자기것 찾기 정신에서 훈민정음이 탄생한 것이다. 학문이나 진리탐구를 남에게서가
아니라 자신 속에서 얻어 대성한 학자로서는 신라의 고승 원효를 들 수가 있을 것이
다.
입당 유학을 위해 원효가 의상과 함께 길을 나섰다가 되돌아온 이야기를 모르는 사
람은 없을 것이다. 두 젊은이가 당나라로 가는 배편을 얻기 위해 서해안 바닷가를 헤
매다가 밤
을 맞는다. 하룻밤 지낼 곳을 찾아야 했다. 이들이 찾은 곳은 동굴이었다. 동굴 안
에 들어선 두 젊은이는 낮동안의 피로가 겹쳐 자리에 눕는다. 그리고는 곧 깊은 잠에
빠진다.
얼마가 지났을까. 원효는 심한 갈증을 느끼며 눈을 떴다. 아직 한밤중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물을 찾아 밖으로 나갔으나 물을 찾을 수가 없었다. 행여나 싶은 생
각으로 그는 다시 동굴로 돌아왔다.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하여 보니까 뜻밖에도 냉수
가 담긴 바가지가 있었던 것이다. 목이 마른 원효는 그 바가지 물을 마셨다. 갈증은
삽시에 가시고 시원한 생기마저 돌았다. 어찌나 맛이 있었던지 냉수의 맛을 그날 처음
맛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원효는 그 이튿날 아침 바가지에 담겼던 그 시원한 냉수는 해골에 고여 있던
송장 썩은 물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는 오장이 뒤집히고 구역이 잇따라 위 속에
있는 것을 모두 토해내고 만다. 그리고는 깨닫는다. '깨끗하고 더러운 것은 내 마음에
서 생겨난 것이다. 더럽다고 생각하면 더러운 것이요, 깨끗하다고 생각하면 깨끗한 것
이다. 모든 것은 객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마음에 있다'고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원효는 당나라 유학을 중단하고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간다. 그러면서 '진리
는 자기 속에 있으며 스스로 터득할 수 있다'고 믿는다.
원효의 일화 역시 참다운 '지'는 자기 속에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자기 문화를 찾
는 일, 자기것을 소중히 아는 마음도 이런 것이다.
[원효(617-686)는 신라의 중으로 성은 설, 원효는 법명. 648년(진덕여왕 2) 황룡사에
서 중이 되어 수도에 정진했다. 661년(문무왕 1) 의상과 길을 떠나 당항성의 한 고총
에서 밤중에 잠결에 목이 말라 마신 물이 해골에 괸 물이었음을 알고 모든 것은 마음
에 달렸다는 것을 크게 깨닫고 돌아왔다. 불교 사상의 종합과 실천에 노력한 정토교의
선구자로 대승불교의 교리를 실천했다. 저서에 "대혜도경종요" "법화경종요" "대승기
신론소" 등이 있다.]
여성의 '지'는 이런 것이다
"토털 우먼(Total Wonan)"이란 책이 있었다. 우리말로는 '완전한 주부'라고 번역될
수 있는 이 책은 마라벨 몰건이라는 미국 주부가 쓴 것인데 한때 베스트 셀러에까지
올랐다고 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한 가정주부의 역할을 이야기했는데 너무나
동양적인 부덕에 가까운 주장을 해, 여성민권운동가들의 거센 반발을 받았다고 한다.
'완전한 주부'라고 한다면 아마 동서를 통해 이율곡의 어머니인 신사임당만한 여성
이 드물 것이다 신사임당이야말로 시대를 초월한 완전한 여성상이 아닐까. 신사임당은
좋은 아내, 훌륭한 어머니, 지극한 효녀, 탁월한 예술을 두루 겸비한 문자 그대로 완
전한 여성이었던 것이다.
남녀의 성차별이 없어진 지 오래인 우리나라에서는 이제 여성의 교육문호가 넓어져
사회에 진출하는 여성인력이 늘어나고 있다. 여성의 취업률도 해를 거듭할수록 증가하
는 추세에 있다. 이제는 40대 여성의 사회진출이라는 새로운 현상이 눈에 띄기 시작한
다. 결혼한 후 낳은 자녀가 이제는 성장해서 독립하는 연령이 되어 어머니의 손에서
떠나게 되면서 어머니로서의 생활이 끝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40대에 들어서면서 시간이 남게 되고, 그런 속에서 할 수 있는 자신의 일을
찾아 직업을 갖거나, 아니면 새 취미생활을 한다.
그런데 이런 시기를 맞은 가정주부가 자신의 여가를 생산적으로 보내지 않고 소비적
인, 향략적인 방향으로 빠지다가 가정을 불행하게 하기도 한다.
우리가 신사임당의 모습을 되새겨보는 이유가 이런 데에도 있다. 앞서 이야기한 것
처럼 신사임당은 완전한 여성, 완벽한 주부로서 본받을 만한 귀감이다.
신사임당은 자기보다 학문이나 재능이 뒤지는 남편을 뒷바라지하는 데 온갖 정성을
기울였지만 한번도 아내로서의 부덕에 어긋나는 일을 한 적이 없다. 남편의 학업을 위
해 강한 권유를 했으나 언제나 남편 대하기를 하늘같이 했고, '예'에 따라 남편을 대
했다.
강룽의 처가에 와 살던 남편에게 서울에 가서 공부를 계속하라고 하면서 면학의지를
심어준 아내의 뒷바라지가 아니었더라면 남편인 이원수는 뒷날 벼슬길에 나서지 못했
을 것이라고 한다.
서울에서 공부하고 있던 남편이 정승을 지내고 있던 5촌 아저씨 이기와 가깝게 지내
자 이
기의 사람됨이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음을 알고 접촉을 하지 말라고 당부한 일도 있
었다. 뒷날 이기는 결국 사화를 일으켜 주변 선비들에게 큰 화를 입혔던 것이다.
남편에게만 이런 부덕을 행한 아내였던가. 누구나 알고 있듯이 사임당은 7남매의 자
녀를 모두 훌륭하게 키운 어진 교육자다. 그 자녀 가운데에 이율곡이 있다.
그뿐 아니라 사임당은 서화가로서도 한국 예술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다. 사
임당의 명필은 현재 강룽 오죽헌의 판각에 남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늘까지 남은
그림은 40폭 정도라고 한다.
한국 역사에 남아 있는 훌륭한 여성으로는 신라 김유신의 어머니 만영부인, 정몽주
의 어머니, 정인지의 어머니, 이준경의 어머니 신씨, 이항복의 어머니 유씨 등이 있
다.
학문에 조예가 깊고 시문에 능했던 부인으로서는 고구려의 여옥, 허난설헌 등이 알
려져 있다.
그러나 신사임당은 한 남성의 아내와 어머니로서, 학자로서, 예술가로서 가장 훌륭
한 경지에 이른 그야말로 '토털 우먼'이었다. 그래서 한국 역사상 가장 모범적이고 대
표적인 부인 한 사람을 꼽으라면 많은 사람들이 이율곡의 어머니인 신사임당을 든다.
신사임당을 배우는 마음이 현대 한국여성의 지교육이 될 것이다.
[허난설헌 (1562∼1590)은 조선 중기의 여류화가로서 본명은 경번으로 강룽 출신이다.
"홍길동전"으로 유명한 허균의 누이. 특히 한시에 능해 작품이 표일했다. 작품에는 "
규원가" "유선시" 등이 있다.]
참답게 안다는 것의 의미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다큐멘터리 드라마가 있었다. 극작가 신봉승씨가 나레이터로
등장한 이 다큐드라마는 '씨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세계적인 육종학자인 우장춘 박사
와 그의 아버지인 우범선 부자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다큐드라마에는 민비암살사건에 직접 가담했던 우범선의 끔찍한 국모시해범행이
있다. 우범선은 이 사건 이후 일본으로 망명했고 일본 땅에서 자객의 손에 죽음을
당한다.
우장춘 박사는 우범선과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우범선이 피
살된 것은 그가 네 살 때였다고 한다.
우장춘 박사는 온갖 고초를 다 겪으면서 동경제국대학 농학과를 졸업한다. 그리고
세계적인 유전육종학자로서의 생애를 시작한다. 모교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은 해가
1936년. 박사학위 논문은 '종의 합성설'이었다.
이 다큐드라마는 우장춘 박사의 농학자로서의 자질을 다룬 것이 아니라 우장춘이라
는 한 인간을 다루었다. 아버지는 모국의 국모시해사건에 가담한 반역자로, 모국에서
는 그 반역자를 죽이기 위해 자객을 보냈고 그 자객에 의해 그의 부친은 피살된다. 실
제로 그는 한때 어머니 곁을 떠나 고아원생활을 서너 해 동안 했다.
그의 생애는 육종학 연구와 조국에 대한 갈등으로 일관했던 것 같다. 개화를 도모하
기 위해서였다고는 하지만 아버지의 민비시해 가담이라는 조국에 대한 반역은 평생 그
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고 한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아버지가 가담한 범행을 보상하
려고 했던 것 같다. 자신의 모든 것을 고국을 위해 던지기로 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는 것이다. 8. 15해방이 된 후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오무라 수용소에 일부러 수용
되려 했던 일도 그런 노력의 하나였다.
1950년 3월, 그의 귀국을 주선한 대한원예협회회장인 김태홍씨에게 보낸 그의 서신
은 그런 심경의 한 끝을 보여준다.
"환국의 날을 앞둔 나는 마치 시집가는 처녀의 결흔 전야와도 같은 기쁨과 설레임으
로 얽힌 착잡한 감회를 금할 수 없습니다. 해방과 동시에 근 30년 동안 연구하여 오던
일본의 직장을 사임하고 교토 교외 사원의 한 구석에서 칩거한 지 어언 4년 반, 그동
안 나는 고국의 하늘을 바라보며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내 일편단심은 언
제나 조국에도 농업을 연구하는 기관이 생겨서 내가 목숨을 바쳐 일할 날이 올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
일본인 부인과 자녀들을 두고 단신 귀국한 그는 극도의 어려운 생활을 자청한다. 자
취생활을 하면서 허름한 잠바와 고무신을 신고 땅을 파고, 씨를 심고 하면서 연구생활
을 계속했다. 일본에 있으면 좋은 연구환경에서 더 큰 업적을 남길 수 있었을 텐데 그
는 학자로서가 아니라 한국인으로서의 삶을 찾으려 했다.
우장춘 박사는 고국에 돌아온 지 10년째를 맞은 1959년 떳떳한 한국인으로서 세상을
하직한다. 죽음을 이틀 앞두고 우장춘은 대한민국문화 포장을 받았다. 그는 병상에서
그 문화포장을 가슴에 달고 눈물을 흘렸다. 그는 "아마 내가 눈물을 흘리기는 어머님
별세 때와 지금 두 번뿐일 것이다. 조국은 내 마음을 알아주었다"고 말했다.
우장춘 박사의 생애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친일 반역자로 낙인이 찍힌 아버
지, 그래서 조국에서 보내온 자객에 의해 죽음을 당한 아버지. 그러나 그 조국을 위해
그는 몸을 바쳤다.
우리는 우장춘 박사를 통해 한국인답게 산 한 사람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안다는 것이 무엇이며 조국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배우게 된다.
[우장춘(1898-1959)은 농학자로 일본 동경 출신. 1919년 동경 제국대학 농학과를 졸업
하였다. 이해 일본 농림성 농사시험장에 들어가 1년 후 육종학 연구에 착수, 1930년
더블베추니아꽃의 육종합성에 성공, 다윈의 진화론을 수정하였고 종의 합성설로 1936
년 모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50년 귀국하여 한국 농업연구소장에 취임하였다.
육종학 연구에 전심, 채소 종자의 육종 합성에 성공하고 씨없는 수박과 벼의 일식이수
작을 연구하였다. 저서에 "십자화과 식물체 속의 게놈(Genorm) 분석과 유채의 합성"이
있다.]
실천에 옮기는 지식의 가치
한말의 지석영처럼, '의술은 곧 인술'이라는 말을 몸으로 실천한 사람도 많지 않을
것 같다. 남보다 많은 것을 알고 보다 깊은 지식을 갖춘 사람은 많으나 그 지식의 전
파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걸고 싸운 사람은 드물다.
안다는 것과 그 앎의 실천은 다르다. 지석영은 인명을 구한다는 마음에서 지식을 찾
았고 그래서 얻은 지식의 가치를 실천으로 보여준 대표적인 한국인이다.
지석영의 종두 실시에 관해서는 많은 일화가 있다. 무서운 전염병인 천연두로부터
어린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부산의 일본인 촌을 찾아가 종두법을 배운 것이 1876년
이라고 한다.
오해와 질시를 무릅쓰며 종두법을 배운 후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충청도 덕산에 있
는 처가에 들려 두 살 난 처남에게 종두를 실시한다. 이보다
앞서 1798년에 종두법을 발견한 제너(Edward fennel)가 첫 우두를 자기 아들에게 시
술했다는 일화와 비슷하다.
이렇게 시작된 종두법에 관한 관심으로 그는 고종 말 제2차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하
게 되는 김흥집 일행을 따라 일본을 방문한다.
지석영이 이처럼 종두법을 한국에 도입, 마마 병으로 알려져온 무서운 천연두로부터
한국인들을 보호하려고 애썼던 시기는 한말의 격동기였다. 1882년에 임오군란이 일어
나 보수파가 득세하고 쇄국. 배일정책이 등장했다.
이때 우두종법을 일본으로부터 들여온 지석영에게 매국을 한다는 이유로 체포령이
내려진다. 지석영은 몸을 피해 죽음은 면했으나 그가 전재산을 털어넣어 막 시작한 종
두장은 난민들의 기습으로 불타버린다. 그리고 그에게는 지명수배령이 내려지는 것이
다. 그러다가 정국이 바뀌어 국가에서 종두법의 필요성을 알고 다시 종두국을 설치하
자 그는 그곳에서 봉사한다. 그는 정부에 급진적인 개화정책을 건의하고 여러 가지 근
대과학에 관한 지식의 보급에 앞장선다. 그런데 오히려 이때문에 갑신정변 이후 개화
당으로 몰려 강진의 신지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게 된다.
많은 한국의 지식인들이 유배지에서 오히려 더 큰 학문적 업적을 남겼듯이 지석영도
이 유배지에서 계속해서 종두를 실시하고, 종두에 관한 서적을 우리말로 번역한다. 5
년 만에 유배생활에서 풀려났지만 그로부터 6년 후에는 망명중인 유길준과 내통했다는
혐의로 다시 무고를 받고 황해도 풍천 초도에 10년 유배형을 받는다. 그러나 유형지에
당도한 지 백일 만에 무죄가 판명되어 사면되는데 지석영은 이를 계기로 관계에서 완
전히 떠나게 된다.
지석영의 생애에서 배울 점은, 그가 벼슬을 누리며 편히 살 수 있는 가문에서 태어
나 교육을 받았으나 스스로 가시밭길을 택했다는 점이다. 종두법으로 귀중한 인명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안 이후, 그는 자신에게 돌아오는 온갖 파란을 무릅쓰고 희생
의 길을 걸어왔다는 점이다.
개화파로서 일본을 다녀왔고 일본어에 능통했으며 많은 일본인 친구가 있었으나 한
일합방
이후 일제에의 협조를 단호히 거부하고 지조를 지킨 일에서도 그의 훌륭한 인격이 드
러난다. 11년 동안 교장으로 있던 대한의학교에서 결연히 물러나 초야에 묻힌다. 그때
가 56세였다고 한다.
지석영은 또한 주시경과 더불어 한글 보급운동에도 노력했다. 그가 유배지에서 쓴
것이 한글로 한자를 해석한 "자전석요"였다.
의술은 인술이라고 한다. 그러나 오늘 우리 사회에서 이 말은 퇴색한 지 오래다. 의
사는 돈 잘 버는 직업인으로 인식되고 있다. 오랜 수련이 필요한 의과대학을 다녀서
의사가 되는 이유는 안정된 수입, 상류사회가 갖는 물질적으로 풍족한 생활인이 되기
위해서다. 이런 사회풍조 속에서 지석영의 삶을 되돌아볼 때 우리는 참다운 한국인의
인술을 본다.
[유길준(1856-1914)은 조선조 말기의 정치가 겸 개화운동가로 자는 성무, 호는 구당.
게이오의숙을 나와 보스턴 대학에서 수업, 1885년 유럽을 시찰하고 돌아와 "서유견문"
을 집필했다. 그는 개화기 최초의 유학생이며 위대한 선각자로서 곤욕과 계몽운동으로
대중을 지도하였고, 법률 등을 국문화하는 등 국어 운동에 있어서 그 공로가 크다. 저
서는 "대한문전" 등 모두 53권으로 "유길준 전서"에 수록되어 있다.]
[지석영(1855-1935)은 의사. 문신. 국문학자로 자는 공윤. 호는 송촌. 1876년(고종 1
3) 스승 박영선으로부터 "종두귀감"을 전해 받고 종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187
9년 처가가 있는 충주 덕산면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종두를 실시, 이듬해 서울에서도
종두를 실시하였다. 1880년 수신사 김흥집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두묘의 제조법
과 독우의 채장법 등을 배우고 귀국, 서울에서 적극적으로 우두를 실시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체포령이 내려 일시 피해 있다가 정국이 수습된 후 불타버린 종
두장을 다시 열어 종두를 보급했다. 1899년 경성의 학교 교장에 취임, 의학교육사업에
종사하는 한편 한글 보급에 힘써 "신정국문" 6개조를 상소, 1909년 "자전석요"를 집필
하는 등 국문연구에도 공적을 남겼다.]
정직이 최대의 교육적 자산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에 얽힌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가 어렸을 때 집 근처에서 손도끼를 갖고 놀다가 작은 벚나무를 찍어 쓰러뜨렸다.
어린 마음에 그런 것이 재미있었던 것 같다.
이윽고 출타중이던 아버지가 돌아왔다. 그는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벚나무가 찍혀 쓰
러진 것을 보고 몹시 노했다. 그래서 하인들을 모아놓고 누가 이런 짓을 했느냐고 따
졌다. 그러자 조지 워싱턴이 앞으로 나와 자기가 그랬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조지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아끼던 나무를 잃은 가슴 아픔보다
정직한 네 마음을 보는 기쁨이 더 크다. 정직하고 옳은 일을 위해서는 어떤 두려움이
있더라도 굴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라."
이 이야기는 평생을 정직과 정의를 위해 살았다는 조지 워성턴을 잘 말해 주는 널리
알려진 일화다.
조지 워싱턴이 생존했던 2백 년 전, 미동부 지역에 벚나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
에 이 이야기의 진부에 대한 시비는 간혹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조지 워
싱턴의 전기에는 반드시 등장하는 에피소드로써 우리나라에서도 잘 알려진 일화다.
이와 흡사한 실화를 우리는 한말의 위대한 한글학자인 주시경의 소년 시절에서 본
다.
황해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주시경이 6세 때의 일이다.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놀
다가 어느 집 뜰에 쌓여 있는 수수깡을 보고는 그것을 갖고 놀기로 했다.
아이들이 몰려들어 그 수수깡다발을 꺼내서 집짓기 놀이를 한 것이다. 그런 가운데
어른들이 요긴하게 쓰려고 했던 수수깡들이 모두 꺾이고 망가지게 되었다.
이윽고 밖에서 돌아온 어른들이 다 뭉그러진 수수깡을 보고 화를 참지 못하며 누가
이런 짓을 했느냐고 아이들에게 다그쳤다. 그러자 아이들은 어른들의 기세에 놀라 모
두 겁을 먹고 뒷걸음질 치는 것이었다.
그런데 주시경 소년이 앞으로 나서면서 "제가 했습니다. 제가 하라고 해서 다른 동
무들이 따라서 했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러자 어른들이 오히려 그를 칭찬하는 것이었다. "오냐, 너 정말 기특하구나. 비록
수수깡이 망가지기는 했지만 너는 참 정직하다. 나중에 자라서 많이 배워 훌륭한 사람
이 되도록 하라"고 했다.
[주시경 (1876-1914)은 한글학자로 호는 한힌샘, 1897년 배재학당 만국지지 특별과를
졸
업, 이어 보통과에 입학, 1900년에 졸업하였다. 독립신문의 교정원으로 일하면서 협성
회를 창립하였고 또 조선문동식회를 결성해 한글 기사체의 통일에 힘쓰는 한편, 한글
을 가르치고 보급하기에 전력을 다했다. 1895년 "국어 문법"을 완성, 1910년에 이를
수정 발간하였다. 1907년 '국문연구소' 위원이 되었다. 한편 한글 보급에 온 정성을
기울여 김두봉. 이규영. 최현배. 장지영. 이병기 등의 제자를 길러냈다. 1922년에 이
들 문하생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어연구회'를 창설함으로써 1933년 드디어 '한글맞춤
법통일안'을 제정, 그의 생애의 숙원이었던 맞춤법의 과학적 연구가 결실을 보게 되었
다. 저서로는 "국어문법" "말의 소리" 등이 있다.]
우리는 조지 워싱턴의 벚나무 이야기는 잘 알고 있지만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
이후, 한글 연구의 기틀을 닦은 주시경의 이 수수깡 이야기는 잘 모른다. 남의 것은
알고 자기것은 잘 찾지 않으려는 잘못된 인식의 한 예가 아닐까.
정직과 착한 마음에 얽힌 한국인의 예화는 참으로 많다. 한국인은 너무나 어질고 착
해서 자기 몫을 찾지 못한 민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시경이 뒷날 자기것 찾기에 온 생애를 걸어 한글연구의 기초를 닦을 수 있었던 것
은 자기것을 찾아야 한다는 그의 강직한 성품에서 기인했다고 보아야 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내것을 소중하게 가꾸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한국문화의 보존, 우리 고전 가꾸기, 전통사상연구 등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너무나 오랫동안 한국인은 한국을 잊어왔던 것 같다. 일제 36년, 그리고 그 이후에
불어닥친 외래문화의 홍수 등이 한국의 문화전통을 뒷전에 남겨두고 외래문화 심취의
폐습을 낳게 했던 것이다.
주시경은 10여 년 동안 서당에서 한자를 공부 한 후 눈을 한글에 돌린다. "아니 훈
민정음이 한자보다 못하지 않을 정도도 아니다. 그 어렵고 배우기 힘든 한자에 비한다
면 훈민정음은 얼마나 알기 쉽고 아름다운가"라고 하면서 한글연구의 뜻을 세운다.
우리는 주시경의 한글연구에서 우리글 찾기의 업적만을 보지는 않는다. 그보다도 옳
다고 생각한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은 강직한 정의감, 외래문화의 승상에 앞선 자기것
찾기정신을 보는 것이다.
바른 지식을 가진 사람은 언제나 외롭지 않다
아직도 우리나라에서는 정초가 되면 토정비결을 본다. 그뿐 아니다. 대학 입학 시기
만 되면 자녀를 갖고 있는 부모들이 자녀의 합격을 위해 부적을 붙이기도 한다. 대학
교 정문에 엿을 붙이고, 자녀들이 시험을 보고 있는 동안 혹한을 무릅쓴 채 밖에서 염
불을 외는 부모도 있다.
국회의원 선거 등 선거철에는 점쟁이 집이 성시를 이룬다. 그것은 인사이동이 있는
시기에도 마찬가지다.
현실이 이 정도니 옛날에는 어느 정도 심했을까 하는 것을 추측해 보기는 어렵지 않
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또 아니다. 우리 선인들 가운데에는 미신에 대한 바른 이
해를 위해 노력한 사람이 많다. 그리고 풍수설의 허실과 이로 인한 폐해를 일찍부터
인식한 사람도 많았다.
조선조 문종 때 어효첨이란 인물에게서 그런 예를 본다. 그는 고려시대 이후 우리
민족의 일상생활에 뿌리를 내려온 도참사상의 시정을 조야에 부르짖고 다닌 사람이었
다.
이런 일화가 있었다. 세종이 어느날 가까운 신하인 정인지를 불러 "효첨은 풍수설이
허황되다고 주장하고 이것이 가져오는 국력의 낭비를 간하고 있는데 그것이 입으로만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그 자신이 그대로 실행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가 제 부모
의 장사에는 풍수설을 따르고 있다면 그의 충심을 믿을 수가 없지 않은가"라고 말한
바 있다.
대개의 경우 입으로 말하는 것과 실제 행동과는 다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입으로
는 청렴결백을 주장하나 뒤에서는 치부를 한다든가, 밖으로는 바른 처신을 주장하나
그 이면에서는 축첩을 하는 등의 일은 시대를 초월해서 언제나 있는 경우다.
얼마 후 정인지는 어효첨의 부친의 부음을 받고 조정을 대표해서 문상을 가게 되었
다. 거기서 그는 어효첨의 언행이 일치함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아버지 시체를 풍수와는 아무 상관 없는 자리에 소박하게 묻었으며 장의 절차
일체가 당시 유행하던 도참설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그 이후 그의 어머니가 별세했
을 때의 장례식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그 자신이 죽었을 때도 자손들에게 유언해서 풍수설과는 전혀 관계없는
광나룻가에 조촐하게 묻혔다고 한다. 그리고 어효첨의 이와 같은 풍수지리에 대한 비
판적인 자세는 어씨 가문의 가풍으로 전습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 한국에는 중국에서 배워 각 지방의 관아에 부근당신을 차려놓고 있었고, 그
곳에 지전을 바치며 제사하는 등의 풍속이 성행했는데 어효첨은 지방관리로 부임하는
곳마다 그 부근당을 없애버리고 지전을 모두 불태워버렸다고 전한다.
이와 같은 그의 행동은 그 당시 사람들로부터 적지 않은 저항을 받았고 사실무근의
무고까지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굽히지 않고 옳다고 믿은 자신의 소신을 관철했
던 것이다.
[어효첨 (1405-1475)은 조선 초기의 문신. 학자로 자는 만종, 호는 귀천. 1429년 문과
에 급제, 검열에 등용, 이어 집현전 교리가 되었다. 제가의 요설을 수집, '예기일초'
를 편찬하고 1949년 직제학이 되고, 대사성을 거쳐, 대사헌 이조판서 등을 두루 역임
했다. 풍수설을 배격하고 척불을 주장한 대유로 이름이 높았다.]
[정인지(1396-1478)는 조선조 초기의 문신 학자로 자는 백휴, 호는 학역재. 대통력과
역법을 제정, 천문과 이악 등에 관한 많은 책을 편찬하고 김종서 등과 "고려사"를 찬
수했다. 그리고 훈민정음 창제에 공이 컸으며 다른 학자들과 함께 "용비어천가"를 지
었다.]
책을 통해서나 아니면 스승에게서 배워 지식을 쌓을 수는 있다. 그러나 자신이 옳다
고 믿는 진리를 위해 바르게 행동하기는 쉽지 않다. 더구나 많은 주변 사람들이 주저
하며 거부할 때에 혼자 그런 길을 걷기는 대단히 어렵다.
예를 들어 세상 사람들이 모두 부동산 투기에 열을 올리고 있는데 나만 하지 않는다
고 누가 알아주랴, 혹은 너나 할 것 없이 선생들에게 자녀를 특별히 잘 보아달라고 돈
을 바치는데 나만 이러고 있는 게 어리석은 짓이 아닌가라고 생각하기 쉽다.
뇌물을 써서 승진을 하는 세태에서 자기만 고고한 척하다가 막차도 놓치고 세상의
낙오자가 된다고 생각하기도 쉽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바른 배움을 실천하면 그 가
치는 반드시 나타난다. "덕이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해하는 사람이 나타
난다"라고 공자도 말한 바 있다. 이런 가르침은 시대를 초월해서 언제나 생생하게 살
아 있다.
사람을 바르게 보는 눈
사회생활에 있어 사람을 바르게 안다는 것처럼 중요한 것은 없다. 그리고 사람의 자
질이나 인품을 정확히 안다는 것만치 어려운 일도 없다. 사람의 인품을 잘 파악한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닦는 일만치나 어렵기 때문이다. 아무리 훌륭한 인품의 사람을 사
귀고자 하여도 자신의 사람을 보는 눈이 애당초 비뚤어져 있으면 바른 판단을 할 수가
없다.
다른 장에서도 잠시 언급을 했지만 조선조 세종대왕과 황희 정승과의 관계가 그런
특이
한 예에 속할는지 모른다.
조선 역사상 가장 오랜 정승생활을 한 황희는 그의 무난하며 유연한 성품으로 인해
누구에게도 호감을 사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당쟁과 사화 등 조정내의 극심한
정치적인 기복에도 그는 별로 탄핵을 받은 일이 없다.
태조 때부터 관직생활을 해온 황희는 단지 한 번의 유배와 한 번의 파직처분을 받았
을 뿐이었다. 그 한 번의 유배는 태종이 세자로 있던 양녕대군을 충녕대군(후일의 세
종)으로 바꾸려 했을 때에 극간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장자인 양녕대군이 세자로서 인
품이 뛰어나고, 맏아들이면서 도량이 큰 인물이라고 하면서 충녕대군의 왕세자 책봉에
반대했다. 그는 양녕대군의 가까운 친구이기도 했다.
그러나 세종은 세자로 책봉되었고, 뒷날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렇게 되는 경우
대개 자신의 세자 책봉을 극력 반대했던 인물에 대해 불만을 갖게 되는 것이 상례인데
세종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세종과 황희는 명군, 명재상의 콤비를 이루었다.
세종의 인물됨을 파악하는 안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황희는 세종을 도와 조선문화의
기틀
을 잡는 데에 큰 업적을 남겼다.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에 수많은 유생들이 반발하고
반대했으나 이를 잘 수습했다. 세종이 불교를 숭상하는 데 대해 집현전 학자들이 거센
반발을 했을 때에도 앞장서서 이들을 설득했고, 고려 때부터 있었던 각종 악법의 폐지
도 세종을 도와 무난히 치루어 냈다. 천첩 소생들의 천역 면제안에 대해 당시 귀족 양
반사회에서 큰 반발을 일으켰으나 세종의 뜻을 잘 받들어 황희는 큰 부작용 없이 일을
잘 마무리지었다.
황희에 얽힌 고사가 또 있다.
황회는 일찍이 김종서의 인물됨을 알았으나 그를 큰 인물로 키우기 위해 다른 사람
에 비해 더 많은 꾸지람을 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경우 황희는 사람들을 너그럽게 대했는데 김종서에게는 엄격했다고 한다.
그래서 성질이 불같은 김종서도 황희 앞에서만은 얼굴을 못 들고 쩔쩔맸다는 것이다.
황희는 김종서가 사소한 잘못이라도 하면 면전에서 지적하고 고치라고 엄하게 꾸짖었
다고 한다.
그런데 황희는 뒷날 관직을 떠나면서 왕에게 김종서를 후계자로 추천했다. 김종서를
엄하게 다스렸던 것은 그의 사람됨을 알았기 때문에 보다 큰 인물로 키우기 위한 것이
었다.
세종과 황희 정승의 관계, 그리고 황희와 김종서의 관계 같은 인물 기용에 얽힌 인
간관계는 그 당시보다 오히려 현대사회에서 더 필요하다.
[김종서(1390-1453)는 조선 초의 문신으로 자는 국경, 호는 절재, 세종의 지우를 얻었
다. 북쪽 육진을 개척하였고 그 공로로 문종 때 우의정이 되었으며, 고명으로 단종 때
좌의정이 되었다. 대호라는 별명까지 붙은 지용을 겸비한 명신으로 수양대군에 의해
두 아들과 함께 격살되어 효시되었다. "고려사"의 개찬과 "고려사절요"의 편찬을 총관
했다.]
좋은 친구를 갖고, 좋은 상하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사회생활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관건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회생활의 성공은 주변 사람의 자질을 정확히 알아보는
눈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인물식별의 안목은 자신의 수양에서 얻어지는 것이지, 다른 사람의 추천이나
소문 등으로 인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에
따라 자신에 대한 평가가 내려진다. 그리고 좋은 사람을 주변에 갖는 일은 자신의 인
격과 정비례하는 것이다.
오늘 다시 본 '맹모삼천지교'
중국 전국시대의 학자로, 성인 공자에 다음가는 아성이라고 일컬어지는 맹자의 교육
에 얽힌 고사가 있다. 유명한 '맹모삼천지교'다.
자녀교육을 위한 어머니의 정성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어서 이 '맹모삼천지교'는
시대를 넘어서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맹자는 유년 시절에 부친을 잃어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이 모자가 처음 살던 마
을은 공동묘지 근처였다. 매일 이 근처에는 죽은 사람의 장례행렬이 그치지 않았기 때
문에 어린 맹자는 묘지 파는 사람의 흉내만 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집을 옮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옮긴 집 근처는 시장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린 맹자가 장사하는 사람들 흉내만 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여기도
안 되겠다싶어 또 이사를 했다.
세 번째로 옮겨간 곳은 글방 근처였다. 어린 맹자는 이번에는 정중한 예절을 갖추는
흉내를 낸다든가 글 읽는 흉내를 내는 것이었다. 맹자 어머니는 크게 기뻐했다. 이곳
에서 어린 맹자는 예절과 글을 배우며 익히는 버릇이 생겼다.
어머니의 자녀교육열이 맹자라는 대학자를 만든 것이다.
[맹모삼천지교는 이웃을 가려 사귀고, 환경을 골라 옮긴다는 뜻이다. 맹자의 어머니가
맹자를 교육시키기 위하여 묘지. 시장. 학교 부근으로 세 번 집을 옮겼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이는 아동교육에 미치는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 흔히 인용되는 고사
다.]
어머니의 자녀교육열에 대한 것은 맹자이야기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유학의 시발자
인 공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명문가의 후손으로 태어나기는 했지만 공자는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다고 한다. 아버
지는 하급 무관이었다. 그는 부인과의 사이에 9명의 딸을 두었다. 딸뿐이라서 집안의
대를 이을 수가 없어서 첩을 두어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한쪽 다리를 쓰지 못하
는 불구였다고 한다.
공자의 아버지는 고심 끝에 64세에 이르렀을 때 자기 손녀뻘 되는 16세의 처녀를 얻
어 아들을 하나 보았는데 그가 공자였던 것이다. 사마천이 공자를 낳은 부로의 결합을
야합이라고 "사기"에 쓰고 있을 정도다. 당시의 풍습으로 보아 정상적인 부부관계는
결코 아니었다고 한다.
공자는 세살 때에 아버지를 잃었다. 그때의 어머니 나이는 불과 20세였다. 공자를
낳게 한 공자 아버지는 죽고, 어머니도 본처가 아니어서 공자 모자는 공자 가족으로부
터 지독한 차별대우를 받게 된다. 가족으로부터의 핍박, 사회로부터의 백안시라는 이
중고를 감수하면서 공자 모자는 가난하고 외로운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공자 어머니는 공자의 교육을 위해 온 정력을 다 기울인다. 공자의 학문은 뼈저린
가난과 역경을 딛고 서면서 깊어진 것으로 보인다.
[사마천(145?-86? B.C)은 중국 전한의 역사학자로 자는 자장. B.C 104년에 공손경과
함께 태초력을 제정하여 후세 역법의 기초를 이루었다. 그는 친구 이능이 흥노족에게
항복한 것을 변호하여 궁형에 처해져, 아버지의 뜻을 이어 "사기"를 지었다. 이 책은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 획기적인 역사책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중 자녀는 어머니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 앞선 장에서 우리는
이율곡의 어머니인 신사임당의 자녀교육에 대한 예를 보았지만 어머니가 자녀에게 미
치는 영향은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별 차이가 없다.
벙어리, 장님, 귀머거리의 삼중고를 이겨낸 미국인 헬렌 켈러(H.A. Holler)의 이야
기도 있다. 어렸을 때에 지독한 열병을 앓아 하루 아침에 볼 수도 없고 말할 수도, 들
을 수도 없게된 헬렌 켈러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구해 낸 것이 어머니였다.
그녀의 총명을 알고 있는 어머니는 끈질긴 노력을 기울여 그녀에게 특수교육을 받게
했다. 아무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을 헬렌 켈러의 어머니는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녀의 집념으로 보스턴 맹아학교의 교장으로부터 설리반 선생을 소개받는다.
헬렌 켈러는 설리반 여사의 도움으로 문학박사,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우리나라 어머니들의 자녀교육열도 이에 못지 않다. 자녀들의 좋은 교육환경을 위해
좋은 학군을 찾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너무 입시를 위한 기능교육에만 치우쳐 오히려
인간교육이라는 측면에서는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자녀교육에 대한 부모의 바른 마음의 자세가 아쉬운 시대다.
가장 절실한 마음공부
한국경제는 6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해서 큰 발전을 거듭했다. 그리고 70년대를 거
쳐 1788년에 올림픽대회를 치르면서 성장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다.
오늘날 사회주의 경제권이 붕괴하면서 한국의 경제발전을 하나의 모델로 소련을 비
롯한 동구권 국가들이 연구를 하고 있을 정도다. 최근에는 소련에 대한 경제지원적인
성격을 가진 경제협력이 이루어져 갈 정도니 가히 불과 20년 가까운 동안 한국경제의
양적인 팽창은 괄목할 만하게 발전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급팽창한 경제와는 달리 사회윤리, 도덕 같은 정신문화적인 측면에서는
오히려 뒷걸음질쳤다고 비판을 받기도 한다. 물론 그런 비판이 반드시 옳은 것이라고
만 단정을 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경제성장이라는 그늘 속에서 사람의 심성
을 닦는 일에는 소홀히 해왔음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한국에 첫발을 딛는 외국인들도 처음에는 한국경제의 발전에는 상당히 큰 인
상을 받고 부러워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늘에 묻혀 눈에 띄지 않았던 부조리 요소
들을 말한다.
생각해 보면 오늘 우리 사회에서 눈에 띄는 부조리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신문을
펼쳐들면 온갖 범죄사건이 눈에 띈다. 어린이 유괴살인, 인신매매, 부동산 투기, 사기
범죄 등이 빈발하고 있다.
그래서 도덕성 회복, 인간성 회복이라는 구호가 폭넓게 운위되고 있다.
공자의 예화 하나를 소개한다.
공자가 제자들과 위나라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위나라의 도시에 인구가 많이 늘어
활기가 있어 보였다.
"인구가 패 늘었군"이라고 공자가 말하자 제자인 염유가 묻는다.
"이처럼 인구가 많이 늘어나면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생활을 향상시키는 일이지."
"경제력을 높여 생활을 부유하게 한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 다음에는 가르쳐야 하느니라."
다시 말해 바른 교육의 실시라는 것이었다.
염유와 공자의 대화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공자가 말하고 있는 교육은 기술교육이 아니라 마음의 교육이다. 물질 획득에 사람
들의 관심이 집중되면 경제력이 신장되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물욕만이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잡게 되어 경제적인 부가 쌓이면 그 사람의
마음은 상대적으로 가난해진다. 심성이 조악해지고 사회가 각박해진다. 그리고 범죄가
늘어간다. 그래서 공자는 다음 단계로 심성교육을 통해 정신문화를 풍요케 해야만 사
람다운 생활이 가능해지게 된다고 말한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가난하게 살 때에는 좀 나쁜 짓을 했다고 해도 크게 나무랄 수가 없
다. 살기 위해서였다고 하면 누구나 동정하게 된다.
그러나 그 시기가 넘어서서 물질적인 풍요를 향유하고 있게 된 후에도 계속해서 물
질욕만이 확대된다면 그 사회는 평탄치 않다. 어느 시기에는 제동을 걸어 바르게 물질
을 얻고 그 물질을 옳게 쓸 줄 아는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이런 교육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작은 물욕은 큰 물욕으로, 작은 사치는 보다 큰 사
치로 이어진다. 결국 사회는 욕망의 늪에 빠진다.
학교교육은 상급학교 입시를 위한 기술습득 과정으로 대체된 것이 오늘 우리의 교육
현실이다.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사람답게 사는 길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의 교육현실에 비추어 볼 때 가장 시급히 필요한 것은 공자가 마지막 단
계라고 말한 사람의 마음을 바로잡는 교육일 것이다.
조급해 하지 않는 인내의 마음
최근에 와서 한국인들은 너무나 조급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그럴 만도 하다.
한꺼번에 자신의 목표를 이룩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눈에 많이 띈다.
매사를 차분히 단계를 밟아서 하려는 생각보다는 급하게 성취하고자 하는 욕구부터
앞세운다. 그래서 무리가 생기고 심하면 범법사태로 번지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나 공적인 사회활동에서도 마찬가지다. 기업의 화급한 신장욕구가 사회에
얼마나 큰 폐해와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가. 우리는 그와 같은 사례를 많이 본다.
좀 여유를 갖고 기다리는 마음이 없다. 서두르지 않고 기다리는 마음이 없다. 서두
르지 않고 자신의 역량을 키우고 있으면 언제고 기회는 오게 되고 그런 기회를 통해
큰 성취를 할 수가 있다. 조급해 하지 않는 마음, 실력을 쌓고 기다리는 자세, 그것이
요즈음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한국 역사에서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인물 중의 하나로 우리는 이순신 장군을 든다.
흔히 이순신 장군을 가리켜 대기만성의 위인이라고 부른다. 흔히 대기만성형의 인물
이 큰 업적을 남긴다는 말을 한다. 이순신의 생애는 근면, 자기충실, 그리고 인내로
점철되어 있다. 충. 효. 지. 용의 측면에서 특출한 인물이었지만 그런 자질은 만년에
와서 한꺼번에 나타난다.
이순신은 32세에 이르러서야 무과에 급제한다. 28세 때에 응시를 했으나 낙방의 고
배를 마신다. 달리던 말이 넘어지는 바람에 낙마했고 그것 때문에 평소의 실력을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32세의 무과급제라면 늦은 편에 속한다. 무인으로 첫발을 딛게 된 그가 가진 보직은
함경북도 동구비보의 권관이라는 하급무관이었다 이 보직을 시발로 시작된 15년간의
군인생활은 근면, 내실, 인내로 점철된 가시밭길이었다.
이순신은 전후 아흡 번이나 직위와 근무처를 바꿔가면서 상급자로부터 부당한 대우,
모함을 받았고 억울한 처벌까지 받았다.
32세 때에 북방수비의 하급장교로 임명된 이후 12년 동안 이렇다할 승진도 하지 못
하고 상사로부터 모함만 받는 생활을 한 후 한때는 군직을 버리고 아산의 본가로 돌아
와 한가한 시간을 갖기도 했다. 그로서는 엄청난 시련의 세월이었을 것이나 그는 인내
와 끈기로써 태연히 이 어려운 시기를 보낸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의 재능을 꽃피우게 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되기에 이른
다. 그의 나이 47세 때의 일이니 얼마나 오랫동안 그의 능력이 감추어져왔었는가를 짐
작할 수 있다. 이때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4개월 전이었다고 한다.
이순신의 근면과 인내에 얽힌 일화는 많다. 그가 하루도 빠짐없이 격무에 시달리면
서 진중일기를 써온 것은 유명하다. 그가 싸움마다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매일 써온
진중일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그날 그날의 훈련상황, 잘잘못의 검토, 새로운 계획
등이 이 매일 쓰는 일기를 통해 치밀하게 분석되었던 것이다.
'형세를 잘 살피라.'
'신중히 할 것이며 가벼이 나가 싸우지 말라.'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전 백승하고 나를 알고 적을 모르면 일승 일패하며 나도 모
르고 적도 모르면 싸울 때마다 패할 것이니 이는 만고에 변치 않는 진리다.'
이것이 매번 전투에 임할 때마다의 그의 자세였다.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진중에서 적은 일기책의 이름은 "난중일기"로 선조 25년
(1592) 5월 1일부터 선조 31년(1598)까지의 기록이다. "난중일기 초" 7책, "서간첩" 1
책, "임진장초" 1책, 모두 9책이 국보 제 76호로 지정되어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다.]
충무공 이순신의 이 마음가짐은 깊게 음미해 볼 만하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도 그렇
지만 기업인에게도 좋은 교훈을 준다.
그가 우리에게 보여준 보훈은 성실과 인내, 그리고 내실을 도모하는 자세다. 조급해
하지 않고 자기 마음을 닦으면서 기회를 기다리는 마음가짐이다.
다시 보는 청렴한 선비문화의 유산
한국사회가 사치와 과소비병을 앓고 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이대로 이 사치풍조가
계속 만연된다면 치유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지 않을까 하는 우려의 소리가 높다.
언제부터 이런 사치 과소비병이 깊어졌는지 모르지만 선비문화시대라고 일컬어지는
조선조 5백 년의 한국인들은 검소와 청렴이 당연한 생활윤리로 뿌리박고 있었다.
오히려 너무나 물질을 도외시했기 때문에 국가경제가 어려웠다고까지 비판되기도 한
다.
조선조 순조 때에 있었던 일이다.
영의정으로 있는 김익의 아들인 김재찬이 마침 평양 감사로 제수됐다.
영의정이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최고 직책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영의정직에 있던
김익은 청렴하기로 이름이 나 있어서 집이 초라했다.
아버지는 현직 영의정 자리에 있는데 아들이 평양 감사로 제수받아 온 집안의 기쁨
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버지보다 활달한 성격을 갖고 있던 김재찬의 친
구들이 축하를 해줄 겸 김정승댁으로 찾아왔다.
그러나 워낙 청빈했던 김익 정승댁인지라 아버지의 친구와 아들의 친구를 맞아들일
변변한 사랑채가 없었다. 손님을 맞는 사랑방은 하나뿐이었다. 아무리 김익 정승에게
는 아들이지만 사회적으로는 평양 감사직을 제수받은 고위 관직자인 김재찬인지라 물
려오는 손님을 받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좁은 사랑방 한가운데에 휘장을 쳐서
아버지의 손님과 아들의 손님을 각각 맞을 수밖에 없었다.
김정승이 아들 친구들의 교류를 원만하게 하기 위해서 휘장 저편에서 손님을 맞고
있다가 외출한 뒤 다시 들어와 보니 휘장 너머에서 아들과 그 친구들이 담소를 즐기고
있는데 누군가가 담배를 피우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튿날 아침 궐내에 출근한 김익 재상이 임금에게 자기 아들의 파직을 강청하는 소
를 올렸다.
김익은 지난 저녁의 이야기를 하고 나서 "휘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애비를 속이는
놈이 어찌 수 백 리 떨어진 밖에서 상감을 속이지 않으리오. 상감께서는 김재찬의 평
양 감사 제수를 거두어주십시오"라고 하면서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놀란 것은 임금이었다. 일국의 재상집이 그토록 협소해서 아들과 아버지가 사랑방을
나누어 써야 하는 데에 놀란 것이다. 임금은 좋은 말로 김익을 달래 보내놓고 가만히
신하를 불러 김익 재상집의 사정을 알아보게 했더니 그야말로 김정승의 집은 허름한
작은 누옥에 불과했다.
임금은 일국의 영의정집이 그토록 낡고 협소한 집인 줄 이제야 알았다고 하면서 대
궐을 짓는 편수에게 영을 내려 영의정의 위상에 맞는 집을 짓도록 명했다.
이래서 마련된 것이 서울 약현(오늘의 서부역 근처)에 있던 김익 영의정의 사택이
다. 이 사택은 김정승의 완고한 고집에도 불구하고 99칸 크기로 지어졌다.
평양 감사를 지낸 김재찬은 이후 아버지 뒤를 이어 영의정을 지냈고 국가에 공로가
많아 종묘에 배향된다.
[김익 (1723-1790)은 조선시대의 문신으로 자는 광중, 호는 죽하. 대사헌을 거쳐, 예
조
판서로 동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온 후 영의정에 올랐다.]
[김재찬(1746-1827)은 조선시대의 문신으로 자는 국보, 호는 해석. 10년 동안 영의정
으로 있으면서, 당시 기근과 병혁으로 인하여 혼란된 세태를 평안하게 하였다.]
비단 김익, 김재찬 부자 정승만이 그랬다는 것이 아니다. 조선조 5백 년의 선비문화
사회의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거의 이러했다. 다만 김익 부자의 이야기는 알려졌고 그
밖의 선비의 예화는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도 마찬가지지만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선행이나 지조는 악행등
에 비해 훨씬 많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입에 잘 오르내리지 않는다. 더욱이 청렴이
오히려 자랑이었던 선비문화시대에는 더욱 그러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일는지 모른다. 사치와 과소비가 만연한 사회이기는 하지만 청빈
과 정직을 생활신조로 살고 있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다만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
을 뿐이다.
어떻게 사느냐가 더 큰 문제
사람이 사는 스타일은 가지각색이다. 인생을 보는 눈이 다르고, 하고 싶은 욕구도
다르다.
사람의 일생을 놓고 그를 평가할 때 그 사람이 얼마나 높은 자리에서 얼마나 위대한
일을 했느냐보다는 어떻게 살았느냐에 관심이 더 가기도 한다. 얼마나 자기의 임무에
충실했으며 얼마나 인간답게 살았는가 하는 것에 더 관심이 모아지는 것이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능력으로 많은 사람에게나 높은 자리에서 얼마나 위대한 일을
했느냐보다는 어떻게 살았느냐에 관심이 더 모아진다. 도움을 준 사람의 경우는, 어떤
자리나 어떤 상황 속에서도 무리없이 일을 한 사람으로, 일반인들에게는 오리 정승으
로 보다 친숙한 이원익을 들 수 있다.
이원익은 조선조 선조, 광해군, 그리고 인조 등 세 명의 임금을 위해 봉직한 정치인
이다.
그는 선조 때에는 높은 벼슬을 하면서 임진왜란으로 극도로 피폐해진 국가재건을 위
해 헌신했고 뒤이어 왕위에 오른 광해군의 두터운 신임으로 영의정에 발탁되었다. 그
리고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에 의해 다시 영의정으로 붕작했다.
그러나 광해군에 의해 한때 그는 홍천으로 유배됐었다. 이원익은, 광해군이 영창대
군을 죽이고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를 폐출하려 할 때 반대를 했는데 이로 인해 귀양
살이를 하게 된 것이다.
이원익은 언제나 자신에게 맡겨진 직무에 충실했을 뿐 아니라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후세에 이원익을 더 돋보이게 한 것은 그의 정치적인 성공보다는 다사로운
인간성이었다. 87세에 타계할 때까지 40여 년을 벼슬에 있었으나 천성이 단조롭고 곧
아서 언제나 그 인품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것이다. 그의 높은 관직이 아니라
뛰어난 인간성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던 것이다.
그의 청렴도 유명하다. 그가 높은 관직에 발을 딛기 전에 고향인 금양(오늘의 김포
지방)에 집을 지으려고 오랜 기간에 걸쳐 재목을 마련했던 일이 있었다. 그런데 졸지
에 호조판서에 오르게 되었다. 호조판서란 국가의 재정을 맡아보는 자리다. 호조판서
가 된 후 집을 짓게 되면 세상에서 의심을 하겠다 싶어 그는 집짓는 일을 단념했다.
그 뒤에도 그는 계속해서 벼슬자리에 앉게 되어 뒤에는 최고의 자리인 영의정에까지
오르게 되니 집을 지을 기회가 찾아오지 않아 결국 마련해 두었던 재목은 썩고 삭아버
렸다는 것이다.
광해군에 의해 유배되어 여주에 있을 때에는 그곳 호장(지방 말단관리)의 집에 붙어
지 내면서 돗자리를 만들어 팔며 지냈다 한다. 영의정을 지낸 그였으나 너무나 소탈해
서 인근 마을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고, 제사 때에는 지방을 써 주는 등 온화한 인품을
보였다고 한다.
그가 그곳에 있을 때에 호장의 부인이 죽었다. 호장의 부인은 미천한 집안 출신이었
다. 그런데 이원익은 자신이 재상의 몸이었다는 신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앞에 나서서
몸소 장례를 치루었다고 한다.
뒷날 그 지역의 수령으로 온 장현광이 이 사실을 알고 이원익의 소탈한 인격을 존경
하는 뜻에서 "영의정이 호장 마누라의 장례를 치러주었으니 호장으로서는 지나친 호
강"이라고 말한 뒤 한바탕 웃었다고 한다.
그는 가는 곳마다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흐뭇하게 했고 소박한 성품으로 존경을 받
았다. 그는 정치인이라기보다 소박한 인간관계 속에서 평범하게 산 보통사람이었다.
이원익은 기지가 풍부했던 사람이기도 해서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임
진왜란, 인 조반정, 정묘호란 등 정변의 시대에 살았건만 언제나 매사를 긍정적인 시
각으로 바라보고 해결하려고 노력한 낙천적인 성품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가 영의정으
로서의 이원익보다는 '오리대감'이라는 호칭으로 더 자주 불리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
다.
그는 사람답게 사는 것이 어떻게 사는 것인지를 몸소 보여준 인물이었다.
[이원익(1547-1634)은 조선시대의 문신으로 자는 공려, 호는 오리. 임진왜란 때 호성
공신으로 완평 부원군의 봉군을 받았다. 광해군 때 폐모론에 반대, 일시 유배되기도
했다. 인조반정 후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죽이고자 하였으나, 이를 간하여 유배에 그치
게 했다. 대동법을 실시하여, 불합리한 조세제도를 시정하였다. 청택리에 녹선되었고,
문장에 뛰어났으며, 성품이 원만하여 정적들에게도 호감을 받았으며, 서민적 인품으로
서 오리 정승이란 이름으로 많은 일화가 전한다.]
지혜의 거울 - 이재수씨의 경우
50년대 말 농과대학을 나온 24세의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수의학을 전공했고 수의사
자격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수의사가 아닌 농촌지도자의 길을 택한다. 그후 그
가 살아온 30여 년의 궤적을 보면 그가 얼마나 적절한 길을 택했고 얼마나 성공적인
삶을 살아왔는지 맑은 햇빛도 같은 명징한 느낌을 받는다
현재 전북 고장군 농촌지도소 소장으로 있는 이재수씨는 의무에 얽매여 있는 직업인
으로서의 삶보다는 창의적인 개척자의 삶을 보여준다. 그의 삶에서 투명한 빛을 느끼
게 되는 것은 지혜의 덕으로 일관한 능동적인 삶의 태도 때문일 것이다.
이재수씨는 1962년 28세 때 고창의 농촌지도소 지도사보로 들어갔다. 그는 성실하고
열정적인 성격인데다 지혜로운 개척자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농촌의 어려움을 꿰
뚫어보고, 문제의 핵심을 푸는 지혜의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자질은 지도사라는
입장과 결합하여 차츰차츰 발휘되기 시작했다.
그는 맨 먼저 농촌을 떠맡게 될 농민 후계자의 자질을 기르는 일의 중요성을 인식하
고 4H구락부 육성에 힘을 기울였다. 그의 노력은 4H중앙경진대회에서 모범 4H최우수상
을 받는 결과로 성공적인 지도력을 입증했다.
그후 지금까지 27년 동안 계속 4H 활동을 해왔고, 현재도 78 개 4H 회원 1578멍을
매월 한번씩 직접 지도하고 있다.
이재수씨가 농촌지도자로서 남다른 점은 맹목적인 농법을 답습하지 않고 끊임없이
연구하고 실험하고 개혁하여 농사를 발전적으로 성장시켰다는 데 있다.
그는 농민을 일본 등 외국에 보내 한 발 앞선 농업지식과 실상을 배우는 길을 열어
주었고, 영농방법을 과학적 기술과 지식으로 개선해 왔다. 손으로만 농사 짓던 구태의
연한 태도에서 벗어나 머리와 손과 가슴(정성)으로 농사짓는 자세를 보여주었다.
그런 태도는 전통적 문화의식의 바탕이 없이는 나오기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생각
만이 아닌 능동적 실천의 결과는 성공으로 이어졌다. 슬기와 땀과 정성된 마음이 잘
모아졌기 때문이었다.
농산물의 국제경쟁력을 미리 내다본 그의 혜안은 일찍이 외국에서 선호하는 작물을
수입, 우리 농산물과 전환 재배하여 성과를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그후 1989년에는 우
리의 논에 외국 농작물을 刻배하는 실험을 하여, 백 평의 논을 한국형 메론 재배지로
바꾸었고, 여기에 알타리무를 번갈아 심어 성공했다.
이어 2천 여 평의 땅에 수박과 고추를 연중교대로 경작하여 일년에 4,5천만 원의 농
가 소득을 올리도록 지도하는 등 이재수씨의 농촌지도력은 갈수록 성공적으로 꽃피어
갔다. 그리하여 해마다 지도사업의 우승자로 뽑혔고, 특히 그가 지도하는 지역을 콩,
땅콩 등을 가장 많이 수확하는 농가로 육성했다 그런 장기적인 성공의 결과, 6,70년대
를 넘어서면서 보릿고개를 완전히 해소하고 농촌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공로를 세우게
된 것이다.
또 그는 비닐하우스 재배 농법을 일찍이 지도하여 연중 신선한 과일과 채소를 공급
할 수 있게 함으로써 농가에는 소득을 올리도록 하고 일반인에겐 풍요한 식생활을 하
게 하는 데 기여했다.
이재수씨는 지금도 사무실의 의자를 비워두고 논과 밭을 직접 뛰어다니며 연구. 재
배의 영농지도를 계속하고 있다. 꿈을 현실로 바꾸고, 지혜로운 생각을 살아 숨쉬는
초록의 생명력으로 바꾸는 생명의 마술사와도 같이 이재수씨는 살아가고 있다.
지혜는 생명이라는 교훈을 살아 있는 농작물을 통해 분명히 증명해 보인 평원의 지
장 같은 이가 바로 이재수씨다 그는 우리 시대의 생생한 지혜의 거울이다.
60년대 초의 우리나라는 무엇보다도 식량의 궁핍을 벗어나지 못한 시대였다. 먹고사
는 문제가 우선 시급한 때였다. 이런 궁핍한 시절에 사회에 진출하여 자긴 나름대로의
삶을 걸머진 세대가 지금의 57대 중반이다 30년 전의 그들은 25세 전후가 되어 독자적
경제활동을 시작해야 할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었다. 이재수씨도 바로 그 세대의 한 사
람이다. 그들은 오늘 우리 시대의 풍요를 위해 적극적으로 경제의 땅을 판 개척자들이
다.
사람마다 살아가는 방법이 다르고, 선택하는 삶의 방향이 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사회는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기존의 가치관이 있고, 전통적으로 공유해 온
문화의식이 있다. 그것은 생명의 유전인자와도 같은 문화적 동질감이다.
사회가 변혁될 때마다 가치관이 변하고, 동질감이 깨지고, 도덕관념이 바뀔 수가 있
다. 그럼에도 그 사회를 받들어올리는 기둥과 같은 문화의식 중에 가장 정직하고 분명
한 의식은 지혜다. 다른 것이 다 흔들리고 깨지는 상황에서 그래도 가장 흔들림없이
버틸 수 있는 의식의 기둥이 지혜다.
사랑이 메마르고, 예절이 무너지고, 믿음이 깨지는 판에 최후로 남아서 피폐해져 가
는 삶을 깨워 일으키는 것이 지혜인 것이다.
지혜는 지식, 즉 안다는 것, 지적 능력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다. 지혜는 문화의
시초며, 빛과 같이 밝은 마음을 나타내는 덕이다.
껍질이 아니고 알맹이며, 형식이 아니고 내용이다. 특히 동양의 유교문화권에서 지
혜는 큰 덕으로 인식되어 왔다. 힘과 용기보다 높은 차원의 것이다.
오늘 우리 사회가 경제적 발전을 이루고 세계 속의 선진 대열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바탕이 바로 지혜였다.
60년대 이후 우리는 중요한 다른 가치를 소홀히 하면서도 지의 덕목만은 굳건히 지
켜서 국가사회의 버팀목으로 삼았다. 인심이 점차 각박해지고 의리가 희박해지고 도덕
과 예의를 잃어가면서도 '지'의 덕목만은 매우 소중한 삶의 언덕으로 삼았다.
그래서 가난하고, 혼란한 삶의 환경 속에서도 교육을 중시여겼고 많은 젊은 동량들
이 학구열에 넘쳐 있었다. 정치적 사회적 혼란 속에서 물질주의가 팽배하고, 부정한
방법이 횡행하는 가운데서도 지혜의 가지는 중시되고 제구실을 묵묵히 담당했다.
그 결과 그 무질서하고 어려운 생활을 극복하고 오늘의 풍요를 이루게 되었다. 그런
'지'의 덕목을 지켜온 사람들은 부자가 되지도 못했고 권력을 휘두르지도 않았지만,
우리 사회를 가장 핵심부에서 움직여왔다. 그들은 껍질이 아니라 알맹이기 때문에 쉽
게 눈에 띄지도 않는다. 알맹이기 때문에 우리 사회의 양분이 되어주었고 성장하는 힘
이 되어주었다.
그 중에는 훌륭한 교육자도 있고 학자도 梨고 예술인도 있다. 평범한 어머니, 아버
지지만 자식들을 잘 가르친 이들도 그 속에 포함된다.
'지'를 바탕으로 한 사랑, 믿음, 예절, 의리, 충심, 효심이 문화의식으로 확산될 때
그 사회는 가장 잘사는, 가장 번영한 복지사회를 이를 것이다. 맹목적인 감정은 사회
를 반문화적인 야수의 세계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문화는 지혜를 알맹이로 하고 예절,
즉 질서의 옷을 입고 살아가는 사람의 총제적인 삶의 의식이다. 그래서 아무리 훌륭한
형식이라도 지혜의 알맹이가 없으면 타락하고 야만화되는 것이다.
이재수씨와 같은 이가 지난 37여 년 동안 농촌에서 버팀목이 되어주었고, 농민에게
지혜를 주었기에 오늘 우리가 이만큼이라도 살수 있게 된 것이라고 믿지 않을 수 없
다.
우리가 풍년가를 부르던 시대에 풍년의 열쇠를 쥐고 있던 이재수씨와 같은 젊은 지
혜있는 이들이 이땅에 살아 있었음을 새삼 깨달아야 할 것이다.
"신"그것은 사람을 믿는 마음이다
믿고 살아야 하는 사회라고 한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정말 얼마나 깊이 서로 믿으
면서 살고 있을까. 마음으로부터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속에 있는 생각을 모두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를 한쪽 손의 손가락 수인 다섯만 갖
고 있어도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오늘 우리 사회를 불신사회라고 일컫는 사람이 많다. 스승이 제자를 믿지 못하고 상
사가 부하를 믿지 못한다. 심지어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미더워하지 못한다.
국민이 행정부를 믿지 못하고 자신이 직접 선출한 국회의원을 믿지 못한다. 그래서 오
늘을 불신시대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서로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사회는 너무 황량하다.
유학에서는 신의를 큰 덕목으로 꼽고 있다.
제자 한 사람이 정치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공자에게 묻자 공자는 "식량의 충족, 군
비의 충족, 그리고 사람 사이의 신의의 구축"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 중 가장 급
하지 않은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 공자는 '군비'라고 즉각 대답했다. 그리고 '
군비' 다음으로 버려야할 것이 있다면 식량'이라고 공자는 말했다. 공자는 이어 "사람
은 어느 때고 죽는다. 그러나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이 신의다. 신의가 없다면 그것
은 이미 죽어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다시 말해 먹을 양식이 부족해도, 하루에 두 끼를 먹고 살아도 신의를 잃지 않으면
훌륭한 삶을 영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나, 아무리 경제적으로 부족할 것 없는 생
활을 하더라도 신의가 없는 생활은 사람다운 생활이 아니라는 것이기도 하다.
미국사회를 비롯한 서구사회를 일반적으로 크레디트(credit) 사회라고 부르기도 한
다. 우리말로 직역하면 신용사회다. 소위 크레디트 카드(Credit Card)라는 신용카드의
신용대출액에 따라 그 사람의 경제생활뿐 아니라 사회적인 지위까지도 가늠된다.
그러나 서양사회에서의 신용은 법으로 묶여 있는 신용이다. 법이 신용의 깊이, 신용
의 질을 좌우한다.
그러나 우리의 전통문화 속의 '신'은 법이 아니라 인간에서 비롯되는 '믿음'을 말한
다.
'신는 사람과 말로 이루어진 회의문자다. '인'은 사람을 가리키고 '언'은 사람의 말
을 가리킨다. 따라서 '신'은 사람의 말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리고 '신'은 또한 인
구에서 나왔다고도 한다. 사람의 입이란 뜻이다.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 곧 '신'이
다.
따라서 믿을 신, 펼 신으로 풀이되는 '신'의 속뜻은,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기 때
문에 믿을 수가 있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말은 곧 믿음'이라고 생각해 온 것이 한국을 비롯한 동양인의 철학이었다.
거짓말을 하지 않고, 신의를 지킨다. 사사로운 약속은 물론 사회에 내놓은 공적인
약속인 공약은 어떤 위난이 있더라도 지킨다는 정신이 아쉬운 때가 바로 요즈음이다.
'신'은 약속을 지키고, 거짓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영역에만 머물지는 않는다. 지
킬 수 없는 약속은 처음부터 하지 말고 자신이 없는 공약은 애초에 하지 않아야 한다
는 마음의 자세를 가리킨다.
그것이 신의 있는 사람이 되는 첫 번째 조건인 것이다.
작고 큰 것이 없는 '신'의 마음
일구이언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은 한 입으로 두 가지 상반된 말을 한다는 뜻으로써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의미다.
우리나라 사람은 대체적으로 약속에 대한 감각이 둔하다. 한 번 약속을 하면 꼭 지
켜야 한다는 의지가 약하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도 그렇지만 약속을 어긴 상대방에 대해서도 으례 그러려니
하고 만다. 자기자신이 약속을 잘 지키지 않으니까 상대방도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정부의 시정을 믿으려 하지 않는 국민들도 적지 않다. 정치인들에 대한 불신의 폭도
크다.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가장 절실한 해결과제는 아마 이와 같은 불신풍조일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근래에 접어들면서 한국민들이 갖게 된 나쁜 습성임을 알아야 한다.
선비사회였던 지난날 '약조'라는 것은 생명처럼 소중한 것이었다.
영조 때 정승과 호조판서를 지낸 정홍순이 그런 인물이었다. 그는 한 번 약속을 하
면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켰던 신의의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한번 한 약속은 꼭 지켜야
한다고 믿은 사람이었다.
[정홍순(1720-1784)은 조선시대의 문신으로 자는 의중, 호는 호동. 호조판서로 10년간
재직하면서 재정 문제에 재능을 발휘, 당대 제일의 재정관으로 손꼽혔다.]
그가 호조판서로 있었을 때 그의 집을 수리하게 되었다. 집의 수리가 끝난 후 목수
가 당초 약속한 돈보다 좀더 달라고 하자 그가 단호히 거절했다. 그래서 목수와 그가
임금문제로 시비를 벌이게 되었다. 그러자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그의 아들이 아버
지에게 그까짓 것 몇 푼 안 되는 돈인데 주어버리는 것이 어떠하겠느냐고 진언했다.
그러자 정흥순은 아들의 말도 한 마디로 거절했다. 그는 그 이유에 대해 "첫째, 당
초부터 서로 약속했던 노임이었기에 그 약속을 서로 지킴 도리고 둘째, 노임을 마구
올려주면 돈이 없는 사람들이 곤경을 겪을 때가 있게 된다."라고 밝히면서 자신으로서
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정흥순에 대해서는 또다른 일화가 있다. .
그가 과거에 급제하기 전의 일이다. 왕이 동구릉에 행차를 했다. 정흥순은 왕의 거
동구경을 갔는데 우천에 대비해서 갓모를 두 개 가지고 갔다. 하나는 자신을 위한 것
이고 하나는 다른 사람의 소용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그는 그렇게 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다.
그날 비가 쏟아졌다. 그래서 그는 갓모를 썼는데 옆에서 함께 구경을 하던 사람이
비를 맞고 쩔쩔매고 있는 것을 보고 가지고 있던 다른 갓모를 빌려주기로 했다.
구경을 끝내고 헤어지게 되자 정흥순은 빌려준 갓모를 되돌려달라고 했다. 그런데
비는 그때까지도 그치지 않고 계속 내리고 있었다. 인정상 그냥 되받아오기도 곤란해
서 다음날 아침 정홍순네 집으로 갖다주기로 서로 약조를 했다. 정홍순은 자기집을 자
세히 일러주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상대방 집 주소도 알아두었다.
그 이튿날이 되었는데 갓모를 빌려간 사람이 갓모를 가지고 오지 않는 것이었다. 저
녁때까지 기다렸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해질 무렵에 그 집에까지 가서
갓모를 되찾아왔다.
그런 후 세월이 흘러 정홍순은 호조판서가 되어 새로 부임한 호조좌랑의 신임인사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정홍순은 그 신임자가 오래전에 갓모를 빌려갔다가 약속을 저버
리고 되돌려주지 않았던 당사자임을 알게 되었다.
정홍순은 "한갓 갓모 하나를 약속한 날 되돌려주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 하나만으로
도 사람의 신용을 알 수 있는 것인데 그런 사람이 어찌 나라의 살림을 맡게 되는 호조
의 관리가 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 후 그를 파직시켰다.
신용은 그 사람의 인격을 말해 준다. 인격을 말하는 데 가볍고 무거운 것이 없듯이
신용에는 사소한 것과 큰 것의 구별이 없다.
신용은 사회가 채점한 사람의 값
'세일즈의 진수는 물건을 파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을 파는 데에 있다'
라는 말이 있다. 세탁기 판매, 자동차 판매 등을 맡게 되는 외판원들의 교육에서 반드
시 등장하는 판매요령이라고 한다.
자기자신을 판다는 것은 바로 신용을 생명으로 해야 세일즈에 성공할 수 있다는 말
이다. 세일즈맨의 입장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소비자측에서 볼 때에는 신용처럼
중요한 것이 없다. 똑같은 물건을 사더라도 신용이 있는 상점에서 산다는 생각을 갖는
다. 값의 차이가 좀 있더라도 마찬가지다.
믿는 사람을 통해, 믿어온 상표를 찾아나서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신용이란 어떻게 쌓여지는 것일까. 언변이 좋거나 인상이 좋아서 신용이
쌓이는 것은 아니다. 인상이 좋은 사람이나 점잖은 사람에게 호감이 가는 것은 당연할
는지 모른다. 그러나 결국 신용이 없으면 마음이 떠나게 된다. 신용은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인간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공자는 "군자는 먼저 신을 생각하지만 소인은 먼저 이를 생각한다"라고 말했
다. 이 공자의 말은 오히려 오늘날의 우리에게 깊은 교훈을 준다.
특히 사업을 하는 사람은 되새겨봄직한 말이다. 이익만 찾는 기업은 처음에는 잘되
는 듯이 보일는지 모르지만 결코 오래가지는 못한다. 그것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사람들의 생활을 향상시키고, 그 기업이 몸담고 있는 사회에 공헌하고, 사회발전에
기여를 하는 것이 넓은 의미의 비즈니스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연후에 이익
을 생각해야 한다.
'코퍼레이트 시티즌(corporate citizen)'이라는 말이 있다. '기업시민'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 코퍼레이트 시티즌은 기업체도 그 자체 지역사회에 속해 있는 시민으로서
그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정당한 세금을 내야 하며 지역사
회 발전이 곧 기업의 발전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기업과 그 지역사회가
신뢰의 바탕 위에 공존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런 '기업시민정신'은 미국 대기업체들 사이에서 일찍부터 싹텄다. 예를 들어 도서
관, 병원, 학교 등등 공공시설이 황폐화한 지역사회에 있는 기업체는 기업체로서 온전
할 수가 없으며, 만약 건전한 운영을 하고 있다면 그런 사실 자체를 창피하게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지역사회의 발전을 도외시하는 기업체라면 공장에서 배출되는 폐수 등 공
해에도 둔감할 것이다. 결국 그 공해로 인해 지역주민의 건강이 악화되고, 지역사회
주민들의 노동력이 저하되고, 구매력이 떨어지고, 전체 사회가 병들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 기업체의 생산력이 크게 감소되어 기업체는 끝내 망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 못지않게 기업체와 지역사회간의 신뢰 역시 중요하다. 지
역사회가 아끼는 기업체라면 다른 지역에서도 사람들의 아낌을 받을 수가 있다.
쉬운 예를 들자,
국내시장에서 한국소비자들이 좋아하는 상품을 생산하는 기업체의 상표는 해외에 수
출되어도 역시 좋은 반응을 얻게 된다. 그 반대로 국내시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 선
례가 있는 기업체의 상품은 해외에 나가서도 역시 긍정적인 반웅을 얻기 힘들다. 아무
리 방대한 돈을 들여 매스컴을 통해 선전을 한다 해도 초기에는 잘 팔리는 듯하다가도
끝내는 외면을 당하게 된다.
기업은 어디까지나 신용에 생명을 걸어야 한다. 그리고 그 신용은 그 기업과 연관을
갖게 되는 사람들에게 선을 행한다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쌓여지기 마련이다.
한국인 특유의 '신'의 세계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우리 속담이 있다. 우정의 깊이를 헤아린 말이다.
친구 사이의 우정과 신의를 이야기할 때 자주 인용되는 일화로 세조 때의 서거정과
김시습의 이야기가 알려져 있다.
세조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왕위에 오른 후 서거정은 세조가 주는 벼슬을 받고 일생
동안 관직에 머물러 있는다. 그러나 김시습은 세상을 등지고 초야에 묻힌다.
이와 같은 상반된 시국관만을 본다면 두 사람 간에 신의는 없어야 옳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우의는 죽을 때까지 지속된다.
이런 일이 있었다. 왕위에 오른 세조는 세월이 흐를수록 단종을 죽인 일, 형제들을
죽인 일, 성삼문 등 재능있는 여섯 신하를 무참하게 죽인 일 등이 몹시 후회되었다.
그래서 추천재(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어주는 의식)를 지내주기로 했다. 그리고 이 추
천재를 김시습에게 맡겨야 한다고 생각하고 서거정에게 김시습을 찾아 그 일을 맡도록
하라고 분부했다.
김시습은 이미 그 당시 생육신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인물이었다. 성삼문, 하위지 등
처럼 세조에게 적극적인 반항을 한 나머지 쿠데타 음모를 꾸미지는 않았으나 세조의
녹을 받기 거절하고 초야에 묻혀 있었다. 그는 세조에 반항하다 역신으로 처형된 사육
신의 버려져 있는 시체를 수습해서 노량진에 묻기도 한 신의의 사람이었다.
서거정은 세조의 명을 어길 수 없었다. 그래서 김시습이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김시
습은 장안에 나타나면 다른 사람은 일체 만나지 않았으나 서거정에게만은 연락을 하고
술을 나누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김시습을 만난다고 해도 김시습이 그의 요청을 들어준다는 보장은 없었다.
세조의 청이라면 웅당히 반대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우정을 생
각한다면 시습이 마음을 돌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김시습(1435-1493)은 조선시대 단종 때의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자는 열경, 호는 매
월당. 5세에 이미 "중용" "대학"에 통하여 신동으로 이름났다. 1455년(세조 1) 수양대
군이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중이되어 이름을 설잠이라 하고 방랑의 길을 떠났
다. 뒤에 경주 남산에 금오산실을 짓고 독서를 했다. 47세에 환속하였다. 절개룰 지키
면서 불교. 유교의 정신을 아울러 포섭한 사상과 탁월한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했다.
저서로 "금오신화" "매월당집" 등이 있다.]
그러던 중 김시습이 홀연히 장안에 나타나 서거정에게 자신이 왔음을 알려왔다. 서
거정이 반가운 마음으로 김시습이 묵고 있는 허름한 주막에 들렀더니 그는 이미 반쯤
술에 취해 있었다. "어 강중(서거정의 아호)인가, 술 가져왔으면 들어오게"라고 김시
습은 말했다. 이날 두 사람은 오랫동안 막혀 있던 말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서거정은 김시습의 강직한 성격을 아는지라 어떻게 말문을 열어야 할는지 초
조할 따름이었다.
그러던 중 예민한 김시습은 서거정의 심중을 헤아렸다. 그는 대뜸 "자네 나에게 무
슨 할 이야기가 있군. 어서 말하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건 하지. 벼슬만 빼
놓고...." 이렇게 김시습은 운을 떼었다. 그제서야 서거정은 세조의 분부를 전했다.
"상감이 노산군(단종)을 위하여 재를 올리고 또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의 초혼제를
상감이 올리신다는군. 자네를 그 추천재의 법사로 부르시네, 자네가 맡아줄 수 있을
까," 그러자
김시습은 한동안 말이 없다가 "그래서 자네가 나섰군. 그렇게 하기로 함세"라고 이에
응했다.
그래서 김시습은 오랜만에 대귈에 들어가 추천재를 주관하고는 표연히 자취를 감추
었다. 세조는 서거정을 통해서 김시습을 꼭 만나보았으면 했다. 그러나 김시습은
끝내 응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그 자리에 간 것은 서거정과의 신의를 저버리지 않
기 위해서임을 분명히 밝히고 어떤 경우라도 왕과의 만남은 처음부터 하지 않기로 했
던 것이다.
서거정과 김시습의 신의는 이처럼 깊었다. 두 사람의 우의는 살벌한 정치적인 대결
상황 속에서도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다운 예의를 가르친 삼강오륜에서도 붕우유신을 말한다. 신의가 있어야 참다운
친구라고 할 수 있다. 친구 사이에 신의가 없는 사람은 형제간에도 우애가 있을 수 없
고, 부모에게 효도하기도 어려운 사람이다.
타인과의 접촉을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 친구를 사귀되 신의로써 사귀는 한국인의
전형을 서거정과 김시습을 통해서 본다.
[삼강 오륜은 유교의 도덕사상에서 기본이 되는 3가지의 강령과 5가지의 인륜이다 즉
삼강은 군위신강. 부위자강. 부위부강을 말하며, 오륜은 오상 또는 오전이라고도 한
다. 이는 "맹자"에 나오는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의 5가
지. 삼강오륜은 원래 중국 전한 때의 거유 동중서가 공맹의 교리에 입각해서 삼강오상
설을 논한데서 유래되어 중국에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과거 오랫동안 사회의
기본적 윤리로 존중되어 왔으며, 지금도 우리의 일상생활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도덕
적 윤리다.]
다소의 결함이 사람을 따르게 한다
사람이 너무 고원한 인격자라면 사람들이 접근을 어려워하게 된다. 그 반면에 지나
치게 나쁜 점만이 누구에게나 눈에 띄면 그 사람 역시 사람들이 접촉을 꺼리게 된다.
흠 없는 사람이란 없다. 누구에게나 다소간의 잘잘못은 있는 법이다. 결점이 눈에
띄면 그것을 덮어둘 줄도 알고, 좋은 점이 있으면 그것을 칭찬해 주기도 하면서 서로
서로 어울려 사는 것이 인간사회다.
성현으로 알려진 공자가 제자들에게 가르친 사람사는 방법도 그런 것이었다. "결점
을 크게 탓하지 말고 장점을 드러내 칭찬하면서, 교접을 하면서 점차적으로 단점을 없
애고 장점을 키워가는 것이 교육"이라고 했던 것이다.
공자 역시 크고 작은 결점이 없었던 사람은 아니었다. 젊었을 때에는 정치적인 야심
도 남다른 바 있었다. 노나라나 제나라에서 벼슬길에 나서기도 했었고 한때는 높은 관
직에 앉기도 했었으나 중도에서 그만두고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기도 했었다. 그가 지
향했던 사회는 그 옛날의 은이나 주나라 같은 평화롭고 예의가 충만한 나라로써 그는
그런 사회의 재건을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주변인사와 마음이 맞지 않아 좌절을 거듭하
면서 관직을 떠나곤 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평범한 사람같이도 보여진다. 그러나 그가 후일 많은 사람으로부터 추
앙을 받게된 것은, 완벽한 인간이 아닌 다소 결점이 있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이상실현
을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닦았고 사람들을 폭넓게 가르쳤다는 사실일 것이다.
공자를 따라다니는 제자들이 뜻을 펴지 못하고 좌절 속에서 길을 떠나는 공자에게 "
군자가 어째서 이와 같은 상황에 빠져야 합니까. 이럴 때에 군자는 어떻게 해야 합니
까"라고 묻자 공자는 "이런 어려운 상황에 빠져들어도 바른 행실을 하는 것이 군자의
길"이라고 대답한다
하고자 하는 뜻은 실현되지 못하고 실패의 연속인데도 그 역경을 극복하려는 마음의
자세가 제자들의 마음을 잡는 것이다. 완벽한 인간으로서 한 치의 실수도 없이, 마치
컴퓨터로 잰 듯이 매사를 처리했더라면 그의 주변에 그처럼 많은 제자들이 따라다니지
못했을 것이다.
조선조 성종 때에 이상주의 정치의 실현을 위해 자신을 불사른 인물로 우리는 조광
조를 손꼽는다. 후세사가들은 조광조의 개혁 정치가 실패했음을 아쉬워하면서 그의 높
은 뜻이 실현되었더라면 조선의 사회상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너무나 급진적인 개혁은 기존층과의 극한 대립을 낳았고 결국은 희생되었다.
너무나 완벽에의 길을 서둘렀던 것이다.
조광조에게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어렸을 때에 당시의 대학자인 김굉필에게 사사를 받았다. 어느날 김굉필이 어머니에
게 보내려고 말리던 꿩 한 마리를 고양이가 몰래 훔쳐먹게 되자 크게 화를 내어 지키
던 계집종을 꾸짖는데 그 말이 너무 지나쳤다. 이를 듣던 어린 제자 조광조가 스승에
게 말했다. "부모를 봉양하시는 정성은 지극해야 하겠습니다만 군자는 언제나 말을 가
려서 하셔야 할 줄 압니다"라고 곧바로 지적했다.
이 말을 들은 김굉필은 어린 제자 조광조의 손을 잡고 "내가 부끄러운 짓을 했구나.
네 말이 옳다. 네가 나의 스승이지 내가 네 스승이 못 되는구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실수가 눈에 띄면 못 참고 그 자리에서 꾸짖는 강직한 성품의 일면을 말해 준다.
[김굉필(1454-1504)은 조선시대의 학자로 자는 대유, 호는 사응 한훤당. 김종직의 문
하.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에 관련지어 유배되었고,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사사되었다. 평소 육정 연구에 전심, 성리학에 통달했으며, 문하에서 조광조. 이장
곤. 김안국 등 학자들이 나왔다. 저서로 "한훤당집" "가범" "경현록"이 있다.]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개혁주의 정치가 실패한 데 대해 뒷날 이퇴계는 "퇴도언행록"
에서 "요순시대와 같은 이상정치시대는 환경이 따라주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니 기묘사화도 이와 같은 것이니라"고 했다.
직접 정치에 참여하여 자신의 경륜을 폈던 이이는 "석담일기"에서 "아깝다. 공(조광
조)은 어질고 밝은 자질과 나라 다스릴 재주를 가졌음에도 학문이 이루어지기 전에 먼
저 정치계로 나갔으니...."라고 그의 좌절을 몹시 아쉬워했다.
신뢰가 생명인 한국인의 '계'
한국인이 고대로부터 갖고 있는 '계'조직처럼 한국인의 독특한 상부상조정신을 말해
주는 것은 없을 것이다. 두레도 한국만의 것이긴 하지만 '계'야말로 특이한 한국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계'는 수천 년 전 우리 사회에 굳건히 뿌리를 내린 후 오늘까지 내려오고 있다. 두
레 같은 모임은 농경문화권에서 산업사회로 이전하는 동안 스러져간데 비해 계조직은
연연히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을 뿐 아니라, 미국 등 다른 나라로 이민간 한국인 사
이에서도 지속되고 있다.
미국이나 남미로 이민간 한국인들은 '계'를 통해 사업자금을 마련하고 있다. 20여
명이 '계'를 조직한다. 생활비를 절약해서 어느 한 사람에게 목돈을 만들어주어 작은
규모의 사업을 시작하도록 서로 돕는다.
사업자금 출처를 따지는 미국 세무관리들은 이 '계'를 통해 자금을 확보했다는 한국
인들의 설명을 전혀 이해하지 못해 난감해 하는 경우가 허다하므로 당사자들이 곤욕을
치루는 수가 많다.
미국인들로서는 20여 명의 사람들이 돈을 풀(pool)해서 한 사람에게 준다는 일에 대
해 아무리 설명을 해도 이해를 못하는 것이다. 또 그것이 미국법에 위반되는 것이 아
닌 정당한 방법으로 행해지고 있으므로 '계(Kye)'라는 한국인의 독특한 자금염출 방법
을 신기해한다.
같은 동양권이라도 중국인들은 다르다. 그들은 아예 믿는 사람에게만 무담보로 자금
을 돌려준다. '계'라는 조직체를 만들어 이 조직체를 통해 각출한 돈을 융자해 주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미국내 한국인들이 소규모 사업에 쉽게 착수할 수 있는 비결이 바로 이 '계'인데 한
국인은 어느 곳에 살든지 이와 같은 공조방법으로 서로서로 돕는다고 한다.
"한국인의 도와 미풍양속"(손인수 저)을 보면 '계'는 "삼국유사"에 이미 기록으로
나오고 있다고 한다.
"신라 경덕왕 때에 강주(진주)의 남자 신도 몇십 명이 뜻을 극락에 두고 주경에 미
타사를 세웠으며 만일을 기하여 계를 만들었다"라는 기록이 나온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계'에 대해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정다산은 "계자약야합야"라는
해석을 내렸다. 여기에서의 '약'이 나 '합'은 모두 결합을 뜻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옛부터 식량을 조금씩 아껴 모으거나 촌락 사람들이 돈을 추렴해
서 상부상조의 기틀을 다졌는데 이런 모임을 '계'라고 했다는 것이다.
기록을 보면 이 겨1'는 불교를 숭상하는 불도들이 불공양을 위해 발전시켰다는 설도
있으나, 두레와 마찬가지로 불교가 이땅에 들어오기 훨씬 전부터 한국인들이 상부상조
를 위해 영위해 온 조직이었음이 확실하다.
'계'는 이처럼 같은 이해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지역적인, 혹은 동료적이고 혈연적인
상호 협력 조직체로서 뿌리를 내려왔다.
'계'는 친목과 상조, 그리고 공제 등을 주목적으로 하는 모임으로 조선시대에는 상
류사회에서부터 서민사회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시행되었는데 그 가짓수도 헤아리기 어
려울 만큼 많았다고 한다. 지금까지 기록에 나와 있는 것만 보아도 종계, 동갑계, 혼
상계, 동계, 우계, 농구계에서 글공부하는 사람들의 시계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어촌에서는 어선이나 어망의 구입을 위해 선계, 어망계 등을 만들어 돌아가면서 생
업에 필요한 자금으로 이용했다. 계원들이 상호 협동하여 돈과 노동을 출자하여 서로
도울 수 있는 사업자금으로 이용했던 것이다.
이런 상부상조의 '계'는 일제가 한국민의 민족의식을 조직적으로 말살시키려 했던
정책에 의해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으나 그런 가운데에서도 1936년 당시 조선총독부가
찾아낸 '계'의 수는 모두 481종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다.
단체적 놀이방식과 가래질
한국인이 협동을 잘하고, 천부적으로 조화의식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전
통 민속놀이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우리의 놀이는 유난히 많은 사람이 놀이의 주
체로 참여하는 형태로 발달했다. 개인기를 자랑하는 놀이보다 여러 사람이 힘과 마음
과 지혜를 합쳐서 승부를 가리는 단체 시합이 많고, 아예 승부에는 관심이 없는, 순수
한 즐거움과 화합의 동질감을 느끼는 것으로 만족하는 놀이 종류가 많다.
길쌈, 석전, 줄다리기, 횃불놀이, 사자놀이, 놋다리밟기, 관원놀이, 농악놀이, 답교
놀이 등은 일반 사람들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놀이다. 이외에도 조금은 더 놀이기능을
요하는 민속예술
에도 여러 사람이 참여하는 놀이가 많다. 놀이에 참가하는 사람이 한마음으로 협조하
지 않고는 안되는 놀이를 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일체감을 갖게 되고, 협동심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또 앞마을과 뒷마을이 석전놀이나 줄다리기를 한다고 할 때 참여하는 사람들의 수에
제한이 없다는 것도 하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몇 명이 참가해도 상관이 없는 것
이다.
서구적 놀이(game) 같으면 같은 수의 인원이 참가해야 한다는 등의 규칙이 있다. 까
다로운 경기규칙이 전제되어야 어떤 게임도 가능하다. 참가인원이 양측 동수가 아니면
당장에 반칙이 선언된다.
그러나 한국인의 놀이는 조직이나 단체의 협동심, 협조의식이 강조되는 놀이여서 까
다로운 규칙보다 같은 편끼리의 일체감이 중시된다.
이런 놀이는 한두 사람이 두드러지게 잘한다고 해서 당장 승부가 나뉘어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한두 사람이 잘하면 팀 전체의 균형이 깨져 불리하게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길쌈놀이의 경우, 삼을 닦고 실을 뽑는 데 있어 어느 한 사람이 특출나게
더 빠르게 더 잘한다고 해서 조건이 유리해지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팀 전체가 일정
한 속도감을 갖고 일이 조화롭게 연결되어야 훨씬 능률적이다.
각기 맡은 바를 충실히 이행하지 않으면 길쌈 놀이는 잘 진행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나의 일 못지않게 남의 일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이것이 역기능이 될 때는
남의 일을 방해하는 훼방꾼이 되기 쉽다. 그러나 잘 협력할 때는 서양의 분업주의나
조직주의가 따라갈 수 없는 초인적인 능률이 생겨 일의 성과가 매우 커지게 된다.
어느 사회건 위아래가 있고 위계질서가 있는 법이다. 윗사람은 아랫사람의 협조를
받아야 하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의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동료들 사이에서는
절묘한 호흡의 일치가 있어야 그 사회가 원활하게 잘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오랜 기간 두레적인 협조 속에서 공동체를 영위해 온 특이한 조화의 체
질을 혈맥 속에 이어왔다. 그리고 우리의 이 협조정신은 서구의 협동이나 일본의 협조
정신과는 방식이 다르다. 예를 들면, 자동차를 앞으로 밀어주는 것과 같은 단순한 협
조가 서구인들의 협조다.
그러나 한국인의 협조는 좀더 고차원적인 것에서 위력을 발휘한다. 뿐만 아니라 일
단 협력이 이루어지면 상상도 못하는 힘을 발휘해 어느 민족도 하지 못하는 일을 해낸
다. 한국인들의 협동심은 고차원적이며 기하학적이며 예술적이다.
이와 같은 절묘한 협동의 예를 우리는 가래질에서 볼 수 있다. 한 사람은 오른쪽에
서 또 한 사람은 왼쪽에서 각기 자기 앞으로 잡아당긴다.
한가운데 있는 사람은 중심부에서 앞으로 가래를 내민다. 방향이 다르고 잡아당기고
떠미는 힘이 각기 달라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서로의 호
흡이 맞지 않으면 가래는 제멋대로 끌려 다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국적 협동의 오묘
한 특징이 있고 비밀이 있다.
한국인의 협동은 가래질과 같아서 호흡만 맞으면 절묘한 효과를 나타내지만 맞지 않
으면 아무 쓸모가 없다. 서구인들의 협조가 기계적인 협동이라면 한국인의 협조는 마
음과 몸이 한덩어리를 이루는 협조인 셈이다.
가래질에서 나타난 오묘한 힘, 그것은 한국인만이 갖고 있는 협동의 예술이며 한울
타리 안의 의식이 만들어내는 조화며 한국인 특유의 협조정신이다.
그래서 두레적인 협조에 가래적인 절묘한 협조가 농악 같은 신바람에 실리면 한국민
은 어떤 난관도 극복할 수 있는 특유의 힘을 낼 수 있다.
오늘 우리 민족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개개인의 이해를 넘어선 높은 차원의 협력일
것이다.
기업도, 노사가 두레와 같은 협조체제를 갖추고 가래질과 같은 절묘한 힘을 발휘할
때 엄청난 발전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한국적인 협동심은 오랜 생활 속에서 싹튼 상호 신뢰가 그 바탕이 되고 있다.
협동정신을 말해주는 '두레'
우리나라 사람들의 협동정신을 말해 주는 생활 방식의 하나로 두레가 있다. 일찍부
터 논농사를 짓는 농경사회를 유지해 온 한국인의 긴밀한 협조 조직체로서 두레의 역
할은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두레는 농경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협동조직으로 한국인의 본성을 말해 주
는 화합정신의 산물이다. 두레는 다만 일을 하는 데 이용되기 위한 것이기보다 한국인
의 생활 그 자체였다.
두레놀이를 비롯해서 두레모, 두레길쌈, 두레논 등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인의 일상
생활은 개개인의 능력을 중심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함께 어울려서 서로의 능력을 합쳐
함께 일하고, 함께 놀고, 함께 누리는 생활이었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을 여럿이
함께 했기 때문에 여유있는 문화를 꽃피울 수도 있었다.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의 모를 한데 어울려 심어주는 것이 두레논이다. 길쌈 역시 같
다. 이웃 사람들이 한울타리 안의 한가족이 되어 함께 길쌈을 하는 매우 근대적인 협
동체제다.
모내기, 김매기, 추수와 같은 일은 단기간에 많은 노동력이 집중적으로 필요하기 때
문에 많은 사람들이 한 집안에서 한두 사람씩 동원되어 공동 작업단을 조직하는 것이
다. 두레로 이루어진 조직은 차례로 돌아가면서 마을내 모든 집의 논밭일을 집단으로
해낸다.
못자리와 모내기부터 시작해서 초벌, 두벌, 세벌 김매기를 하는데 농토의 크기에 따
라, 집집마다의 사정에 따라 한두 사람씩 배정된 인원이 동원된다. 보통 두레를 이루
는 인원은 20명 안팎이다. 이들은 일렬로 서서 모를 심기도 하고 때가 되면 김매기를
한다.
두레라는 말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원래 둥글다는 뜻인 '둘레' '
둘려'에서 나왔다는 설도 있고, 집단이나 취합을 뜻하는 말이라는 어원풀이도 있다.
"한국인의 도와 미풍양속"을 보면, 두레라는 조직체에는 이를 지휘하는 좌상이 있는
데 이 좌상은 두레의 주관자로서 두레 조직체에서 가장 나이가 많고 농사 경험이 풍부
한 사람이 맡는다고 한다.
이 좌상의 지휘에 따라 두레일이 차질없이 진행된다. 두레에는 그 조직체의 기가 있
었으
며 일의 능률을 고취하기 위한 농악대가 함께 운영되기도 했다.
농악은 농부들의 작업 능률을 높이고 일의 호흡을 맞추고, 노동의 피로를 잊게 하여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신명나는 일판을 만들기 위한 분위기 조성을 맡는다.
우리 민족은 이처럼 일과 놀이를 한 가지로 묶어 조화를 이루는 본성적인 친화력을
지니고 있었다. 본래 신바람을 체질적으로 타고난 한국인들은 신명이 나야 모든 일에
서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했다. 두레로 묶여진 여러 사람들이 마음을 합하고 호흡을 맞
추면, 저절로 신이 나고, 거기다 풍악소리가 곁들여지면 흥은 고조되기 마련이다. 그
래서 일과 놀이가 함께 이루어지는 신바람나는 삶의 장면이 연출된다.
한국인은 노래를 좋아하여 밤낮으로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 2천 여 년 전의 삼국시대 때 신라의 얘기다. 전국 각 지역에 풍부하게 남아 있
는 농요를 보더라도 음악적 리듬감과 노동의 행위가 하나의 율동으로 합쳐져 어렵고
힘든 경작일을 즐겁게 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힘든 일도 힘만으로 하지 않
고 마음으로, 감정으로 했던 것이다.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농악대는 신명나는 소리로 사람의 기를 북돋우어 일터로 이끌
어주고, 일하는 동안에도 날라리, 나발, 꽹과리, 징, 북 등 우리 고유의 농악기들을
울려주어 육체적인 노동의 고통을 잊게 해준다.
작업이 끝나 마을로 돌아올 때에도 농기를 든 사람이 선두에 서고, 두레 대원이 농
악에 맞추어 흥을 내며 앞장서면 하루의 피로가 흥겨움 속에서 풀려지곤 했다.
농촌 여인네들이 한 집단을 이루어 공동작업을 하는 두레삼은 여자들이 그룹을 형성
해서 삼을 삼는 일을 말한다. 대개 음력 7월 15일부터 매일 저녁 함께 모여 여러 집을
돌아가며 삼을 삼는다. 여럿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일을 하게 되니 능률도 오르고 일하
는 재미도 있다. 그리고 서로의 기술을 주고받기도 하여 이점이 많다. 이 두레삼의 풍
습은 신라 때부터 유래했다고 한다. 두레조직이 아니라도 우리의 농촌에선 이웃끼리
한솥밥을 지어먹는 풍습이 있었다. 한울타리 안의 한가족의식, '우리'의 상호 공존의
식은 한국인의 삶의 뿌리를 깊게 해준 원동력이었다.
농업용수를 대기 위해 물꼬를 트는 일, 홍수를 피하기 위해 방축을 쌓는 일, 길을
닦는 일 등 공동체가 갖고 있는 이 협조정신은 다른 어느 민족도 따를 수 없을 만큼
진하고 끈끈하다.
깊은 신뢰는 기적을 낳는다
상사가 부하를 신뢰하고 부하가 상사를 신뢰하지 않는다면 어느 조직도 그 운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하나의 상식이다. 이런 믿음은 굳은 결속을 낳고, 그런 결속은 어
떤 일도 해낼 수 있는 능력을 만든다.
혈맹과 같은 믿음을 자산으로, 범인으로는 해내지 못한 업적을 이룬 인물로 백범 김
구와 백범을 따른 윤봉길, 이봉창 의사를 우리는 본다.
[윤봉길(1908-1932)은 의사. 1931년 김구의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1932년 김구로부터
폭탄을 받고 일본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을 겸하여 상해사변 전승기념식을 하는 홍구공
원에 들어가 폭탄을 던져, 일본 거류민 단장과 상해 파견군 사령관 등을 살해하고, 여
러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오사카로 이송,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순국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질 수 있다는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도 그렇게 할 수 있
도록 믿음을 심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실제로 거사에 나서기가 어려운 법이다.
백범이 상해 임시정부에 있었을 때다. 이봉창이 그를 찾아왔다. 말로만 듣던 임시정
부를 찾아 백범에게 자신을 의탁한 것이다. 그의 딱한 처지를 듣고 백범은 선뜻, 당시
로서는 거금인 천 원을 그에게 준다.
[이봉창(1900-1932)은 독립운동가. 상해에서 김구의 지도를 받다가 1932년 1월 8일 도
쿄 사쿠라다문 밖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는 일본 천황을 향하여 폭탄을 던진 사
건으로 그해 10월 사형을 선고받고 순국했다.]
물론 백범은 이봉창을 처음 대했고,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러나 백범은 그
를 완전히 믿은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그 믿음을 실제 행동으로 이봉창에게 보였다.
뒷날 이봉창은 "나는 평생에 이렇게 신임을 받아보긴 처음이었다. 백범 선생이 하시
는 일은 영웅의 도량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믿어주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인
들 못하겠는가"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이봉창은 계속 백범의 인격에 감화되어갔고 그의 애국심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는
나라를 위해 자기의 한 목숨 버리는 것은 대단히 영광스런 일이라는 마음을 갖게 된
것이다.
백범은 그런 믿음으로 많은 젊은이들의 마음을 휘어잡았다. '쓸 사람을 의심하지 말
라'는 것이 그의 좌우명이었던 것이다.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의 거사도 백범의 이와 같은 믿음과 무관하지 않다. 윤봉길
의사도 이봉창 의사처럼 백범으로부터 많은 감화를 받고 그와 혈맹으로 이어진 관계를
가졌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윤봉길 의사의 장거로 인해 임시정부는 중국 국민당 정부로부터
물심양면에 걸친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독립운동에 나서고 있는, 세계 각처
에 흩어져 있는 지사들에게 큰 힘과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김구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도리 중 가장 으뜸이 되는 것이 인이며 그 다
음이 신이라고 언제나 말했다. 그래서 그는 첫아들의 이름을 김인이라고 했다. 그리고
둘째 아들의 이름을 김신이라고 했던 것이다.
김구의 인간신뢰는 그의 성실과 가식없는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났기 때문에 주변 사
람들을 설득할 수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의 순수성은 잘생기지 못한 얼굴 속에
근엄하게 나타나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백범은 언제나 "얼굴 좋음이 몸 좋음만 같지
못하고 몸 좋음이 마음 좋음만 같지 못하다"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그는 순수한 마음가짐과 정직, 그리고 그런 순수한 마음으로 갖는 신뢰를 좌우명으
로 삼고 살았던 것이다.
그가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령으로 지목되었을 때에 자신이 상민 출신이라는 점을 지
적하며 "미천한 사람이 나라의 원수가 된다는 것은 도무지 안 될 일이며 쟁쟁한 인물
도 조각을 못하고 주저앉아버린 일이 허다한데 내가 무슨 덕망으로 그것을 맡겠소"라
고 거절했다. 그 이전에 국무령으로 이동녕, 안창호, 양기탁, 이상룡 등이 지목되었으
나 내각 조직도 제대로 못하고 사퇴한 경우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동녕이 "내가 밀어주겠으니 협력해서 일을 잘 해봅시다"라고 했다. 백범은
그제서야 '이동녕 동지의 말을 믿겠소"라고 한 후 국무령 직책을 맡았고 조각에 성공
했던 것이다.
[이동녕 (1869-1940)은 독립운동가. 정치가로 호는 석오. 1910년 서간도로 이주, 신흥
강습소를 설립, 독립군 양성과 교포 교육에 진력하였다. 1919년 상해임시
정부 의정원 의장을 역임했고, 1926년 국무령에 취임하고 1928년 한국독립당의 이사장
에 피선, 이듬해 재차 의정원 의장에 추대되었다.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항일전에 투
신했다. 이듬해 중화민국 정부가 중경으로 천도할 때 임시정부를 이끌고 장사로 이전
했다가 사천성에서 병사했다.]
[안창호(1878-1938)는 독립운동가. 교육가로 호는 도산. 1900년 도미, 공립협회를 창
설, 1906년 귀국하여 신민회를 조직, 1908년 청년학우회 조직, 1910년 다시 미국에 가
서 흥사단을 창립했다. 3. 1운동 뒤에 상해임시정부 내무총장에 취임했고, '1737년 체
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르고, 1937년 재차 피검되어 옥환으로 타계했다.]
[양기탁(1871-1938)은 독립운동가. 언론인으로 호는 운강. 1904년 영국인 베델(Bethe
l)과 국한문 혼용의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였다. 1921년 '동아일보'가 창간되자 편
집고문을 맡았다. 같은 해 미국 의원단이 한국에 왔을 때 독립진정서를 제출하였다가
투옥되었다. 후에 상해임시정부 국무령으로 추대되었으나 사임하고, 항일운동에 진력
하다가 중국 강소성에서 병사했다.]
남을 믿되, 성실과 순수한 마음을 바탕으로 끝까지 신뢰하고, 남의 신뢰를 마음속
깊이 받아들이는 백범에게서 우리는 신의의 깊은 뜻을 배우게 된다.
불신풍조가 팽배해 있는 오늘날 이와 같은 '신의'는 우리가 반드시 배워야 할 덕목
일 것이다.
사제지간을 묶는 신의
사제지간의 애툿한 정의가 메말라가고 있다. 스승은 학문의 전수자로서 뿐만이 아니
라 보다 성숙한 인격자로서 제자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제자는 스승으로부터 아끼는
후학일 뿐 아니라 친자식처럼 사랑을 받는 아름다운 스승과 제자간의 신의가 아쉽다는
소리가 높다.
이 역시 산업화사회의 이기적인 정신풍토에서 기인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유교문화
전통의 우리나라에서는 사제지간의 신의가 남다른바 있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의 인물인 추사 김정희와 그의 제자인 강위와의 사제지간의 신의를 보자.
강위는 성리학자로 알려진 민노행에게서 사사하다가 민노행이 죽은 후 그의 유언을
따라 김정회를 스숭으로 모시게 된다.
[김정회 (1786-1856)는 조선시대 문신. 문인. 금석학자. 서화가로 자는 원출, 호는 완
당, 추사, 예당. 성균관대사성, 이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24세 때 생부를 따라 연경에
가서 당대의 거유 완원. 옹방강 등과 교유, 경학. 금석학. 서화에서 맡은 영향을 받
고, 귀국 후 고증학을 도입했다. 학문에서는 실사구시를 주장하였고, 서예에서는 독특
한 추사체를 대성시켰는데, 특히 예서 행서에 새 경지를 이룩하였다. 또한 북한산 비
봉에 있는 석비가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혔다. 저서에 "완당집" "실사구시설" "금석과
안록" 등이 있다.]
민노행이 대서예가로 알려진 추사 김정희를 찾아나섰을 때에 추사는 제주도 대정현
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다. 당시 대단히 불우한 처지에 있었다. 그의 아버지인 김
노경은 사사되어 비명으로 죽었고, 추사 자신도 언제 어떻게 될는지 모르는 귀양길에
있었던 것이다. 25세의 강위는 서책을 짊어지고 제주도로 추사를 찾아가서는 그
에게 배움의 뜻을 올린 후 정성껏 귀양지의 뒷바라지를 한다.
9년 동안 제주도에서 스승인 추사의 뒷바라지를 한 후 추사의 귀양이 풀려 서울로
올라오자 그도 스승의 뒤를 따랐다. 그뒤 3년 후에 다시 추사가 북청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되자 강위는 한반도의 북단인 북청까지 그를 따라가 정성껏 스승을 모셨다. 그런
연후 추사가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자 다시 그를 따라 추사의 고향으로 간다. 이것이 사
제지간의 신의였던 것이다.
[강우(1820-1884)는 조선시대 시인으로 자는 중무, 호는 추금. 민노행에게서 시를 배
웠으며, 김정회를 찾아가 많은 감화를 받았다. 한성순보를 간행했다. 국한문이 혼용된
가사체의 연구에 착수하여 1886년 "한성순보"를 "한성주보"로 고친 후 국한문을 혼용
하는 데 많은 공을 세웠다. 저서에 "동문자모분해" "용학해" 등이 있다.]
이와는 다르지만 사제지간의 애툿한 정의는 판소리의 대가로 알려진 신재효와 그의
제자 진채선에게도 엿보인다.
신재효는 조선조 말 판소리를 집대성한 명창으로서 '춘향가', '심청가', '토끼타령'
, '박타령', '적벽가', '가루지기타령' 등 여섯 마당을 정리해 제자들에게 전했을 뿐
아니라 '도리화가', '성조가', '광대가', '오섬가', '어부사', '방아타령', '괘씸한
양국놈아' 등의 새작품을 펴낸 대가다.
아전 출신인 신재효는 사재를 털어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는데 그 제자 가운데에
진채선이란 여성이 있었다.
당시 집권자인 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고 왕실의 권위도 선양할 겸, 경복궁 준공
기념대연회를 베풀고 전국의 명창들을 불렀다고 한다. 일종의 판소리 명창 경연대회였
다.
이 자리에 신재효는 제자인 진채선을 보냈던 것이다. 진채선은 스승이 지어준 '성조
가'와 평소 장기로 삼던 '춘향가'를 불렀는데 그녀의 소리가 전국에서 운집한 내노라
하는 명창들을 완전히 압도했다. 그녀의 창을 듣고 감격한 대원군이 그녀에게 "장하구
나 네 선생이 누군고?"라고 물었다. 그러자 스승의 지시대로 도포에 갓을 쓰고 합죽선
을 든 남장한 진채선이 "해동조선 전라좌도 고창현 북문하에, 십이간 줄행랑의 대문집
이요, 성관은 평산 신씨 있을 재 효도 효는 장적의 함자요, 일백 백 근원 원은 친구간
의 자호로다."라고 '동리가' 곡조에 맞추어 응답하여 대원군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 진채선으로 인해 신재효는 삽시에 대원군으로부터 오위장이라는 무관직 벼슬을
얻었고 그 뒤에는 통정대부라는 품계를 받았으며 죽기 전에는 가선대부로 올려받았다.
추사 김정희와 강위의 사제지간륵 신의나 신재효와 애제자인 진채선의 애툿한 사제
지간의 정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
신재효의 가르침을 받은 진채선은 후일 판소리로 대성하여 여류 국창의 자리를 차지
했다. 진채선은 우리나라 여류 판소리 광대의 효시가 되었다.
[신재효(1812-1884)는 판소리의 이론가·작가로 자는 백원, 호는 동리. 어려서 한학을
배워 '사서삼경' '제자백가어'에 능통하였으며, 치산에 솜씨를 보여 맡은 가산을 모았
다. 가산이 넉넉해지자 판소리 명창들을 후원하는 한편, 판소리 연구에 몰두했다. 그
는 종래 계통얼이 불러오던 광대 소리를 통일하여 '심청가' '박타령' '가루지기타령'
'토끼타령' '적벽가' 등 6마당으로 체계를 세우고 그 대문과 어구를 실감에 맞게 고쳐
독특한 판소리 사설문학을 이룩해 놓았다. 특히 '박타령' '토끼타령' 등은 창극화하였
으며, '광대가' '도리화가' 등의 판소리 단가를 짓기도 하였다. 문하에서 김세종. 전
해종. 진채선. 허금파 등 많은 명창이 나왔다.]
기업문화의 바탕에도 신뢰가
최근 들어서면서 기업문화란 말이 기업계에서 폭넓게 나돌고 있다. 기업이 침체에
빠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그 기업에 종사하고 있는 종업원들에게 건
전한 문화의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업문화(Corporate Culture)는 80년대 초부터 미국을 비롯한 선진산업국에서 광범
위하게 연구되기 시작했다. 특히 미국의 경우 70년대 말부터 두드러지게 눈에 띄게 된
기업의 생산력 쇠퇴와 무역 역조현상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면서 그 문제점의 하나로
기업문화가 거론되기 시작한 것이다.
다시 말해 기업의 성장은 자본과 우수한 장비, 그리고 종업원들의 능력에 맞는 임금
지불 등에 걸친 경영전략만 서 있으면 되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것만이 전부가 아님을
알아차린 것이다. 이밖에 종업원들의 문화의식이 기업성쇠의 열쇠가 되고 있음을 느끼
게 된 것이다.
우수한 기업문화란 그 기업체에 속해 있는 전체 사원의 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는 긍
정적이며 진취적인 정신자세라고 풀이할 수 있다. 자신이 속해 있는 기업체에 대한 깊
은 애정과 신뢰감, 기업체 종업원들을 하나의 지향점으로 인도하는 끈끈한 사우정신,
상사와 부하들을 결속하고 있는 깊은 신의 등이 우수한 기업문화의 요건이라 할 수 있
다.
우수한 기업문화를 갖추고 있는 기업체는 생산과 그 생산성에 따르는 급료지불이라
는 노와 사 사이의 단순한 도식이 아닌 정의와 신뢰로 이어져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같은 상품을 생산하고 있는 기업체로 보일는지 모르지만 우수한 기업문화를 갖고 있는
기업체와 그렇지 못한 기업체는 크게 다르다. 우수한 기업문화를 갖고 있는 기업체에
는 눈에 보이지 않는 활력이 있다.
자신의 일이 회사의 일이다. 회사를 구성하고 있는 전 사원이 하나의 유기체를 형성
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한편의 불편은 전체의 불편으로, 어느 한 부서의 기쁨은 전체
의 기쁨으로 확산된다.
하나의 실례를 든다.
일본의 어느 중간 규모의 반도체 생산공장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전체 사원이 결함
없는 우수한 제품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는데 그 회사제품의 결함률은 다른 회사제품
에 비해 상당히 높았다. 회사 간부들은 머리를 싸매고 그 원인을 규명했지만 도저히
찾아낼 수가 없었다.
어느날 그 회사의 말단 여직공이 하루일을 마치고 퇴근하면서 건널목을 지나가려 하
는데 마침 기차가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기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서
있는 지반이 약간 흔들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말단 여직공은 혹시 이 진동이
회사제품에 영향을 주지 않을까 혼자 생각한다. 그 철로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공장이
있었던 것이었다.
이튿날 그 여직공은 자기의 생각을 상사에게 전달했고, 그 상사는 곧 더 높은 자리
의 상사에게 그녀의 말을 전했다. 그렇게 해서 사장에게까지 금방 전해졌다. "옳거니
그럴 법하다"라고 사장이 무릎을 쳤다. 사장은 당장 진동을 막는 장치를 연구했다. 전
문가의 의견을 쫓아 철로와 회사건물 사이의 땅을 넓게 파고 거기에 물을 가득 채웠
다. 인공호를 만들어 그 진동을 줄인 것이다. 그렇게 하고 난 후 제품의 결손율은 아
예 없어지다시피 되었다고 한다. 그 여직공이 상사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할 수 있
었던 것은 상사에 대한 깊은 신뢰에서 온 것이다. 아무리 작은 일에 대한 의견이라도
언제나 귀담아 들어주고 보살펴준 상사에 대한 믿음이 그 바탕이 된 것이다. 그래서
상사의 고민이 자신의 고민이고 회사의 문제가 곧 자기 문제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회사가 한 가족이라는 사원들의 문화의식은 우리 기업에서도 절실하게 필요할 것이
다.
소비자와 생산자를 잇는 유대
기업이 하나의 유기체가 되고, 그 기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이 살아 있는 지체가
되기 위해서는 '신뢰'가 그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앞서 강조했다.
그런데 이 신뢰 구축은 기업체내의 노. 사 사이에서만의 문제가 아니라 기업체의 생
산품과 소비자 사이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초점이 된다.
우리나라 기업인으로서 일찍이 이 점에 눈을 뜬 인물로, '박가분'이란 화장품을 세
상에 내놓은 박승직이란 인물이 알려져 있다.
1897년의 일이라고 하니까 지금부터 약 1백 년 전인 한말 때다.
한국인 실업인으로서 근대적인 경영을 처음으로 기업에 도입한 박승직은 배오개에서
포목점을 차리면서 상업에 손을 대기 시작했는데 1904년에 26명의 서울 대상인들과 함
께 광장주식 회사를 차렸다. 이것이 한국 최초의 주식회사였다. 이 광장주식회사는 배
오개로부터 남쪽의 땅을 사서 시장건물을 짓고 다음해 1월부터 시장으로 개장했다. 이
것이 오늘날의 서울 동대문 시장의 전신이다.
그 이후 박승직은 서울의 대상인으로 부상하고 40명에 이르는 거물급 한국인 상인들
을 모아 외국 포목상에 대항해서 한국상권을 보호하기 위한 공영사를 설립한다. 1만
원으로 시작한 이 공영사는 동업조합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으나 한국상인들의 집결체
여서 서로 믿어 매사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 당시 한국 면포시장에는 영국면포와 일본면포가 시장을 양분하다시피하고 있었는
데 영국면포의 한국수입은 중국상인들이 독점하고 있어 사실상 중국과 일본 양국 상인
의 상권이 한국인 상권을 압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승직의 지도로 뭉친 한국인들의
공영사는 일본과 중국계 상인들과 맞서 시장을 넓히면서 1914년에는 주식회사로 개편
하고 박승직은 초대 사장을 맡는다.
박승직이 여성 화장품 공장을 차린 것은 그 이후의 일이었다. 서울 연지동 자택에
화장품 공장을 차렸고 그 화장품의 상표를 '박가분'이라고 불렀다. 상표에 성을 단 이
유는 기업체와 소비자와의 '신뢰'를 굳게 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자신의 성을 떳떳하게 내세움으로써 소비자와의 유대를 가시화시컸던 것이다. 이와
흡사한 상표로서 '이명래 고약', 그리고 그 이후의 '조고약' 같은 것도 있는데 이 역
시 소비자와 생산자의 신뢰 구축이라는 면에서는 그 효과가 높았다.
박승직의 '박가분'은 화장분의 생산기술을 개량하는 일에 전념하여 무독무연의 화장
분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그럼으로써 한국인 소비자들을 끌어들이는 데에 성
공하여 일본상품과 대결해서 맞설 수 있었던 것이다.
최초의 근대적인 한국기업이 만들어낸 국산화장품인 '박가분'이 한국인들의 시선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은 '박가'라는 상표 때문이었다고 한다. 같은 한국인이 내놓은 상품
이라는 것이 한국인 소비자를 끌어들이는 계기를 주었고, 한 번 써본 소비자들은 계속
사용했다. 그래서 한 번 이룩한 신용을 계속 지속시켰던 것이다.
1백 년 전의 기업이나 오늘의 기업이나 그 기업이 갖는 생명이 바로 '신용'이라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다. '박가분'이든 '이명래 고약'이든, 혹은 어느 상품이든 신용과
신뢰를 생명으로 알지 않는 기업이란 성장할 수 없다.
'박가분' 이야기를 하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오늘의 한국기업이 세계기업으로
비약하기 위해서는 눈앞의 이익에 급급해 하지 말고 장기 안목의 신용을 쌓아가야 한
다는 점이다.
한국기업이 해외시장에 내놓고 있는 상품 종류는 생필품의 거의 모든 종목에 걸쳐
있을 만큼 다양하다. 자동차에서 선박, TV등의 전자제품, 신발류 등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그 폭이 넓다.
그러나 지속적인 수출 증가의 열쇠는 생산자와 소비자를 잇는 '신뢰'의 구축에 있
다. 미국시장 침투에 앞선 일본기업이 성공한 이유가 바로 이 점에 있었다. 결합률이
낮은 제품에도 그 이유가 있었지만 철저한 '애프터서비스'라는 소비자와 생산자간의 '
신뢰 구축'에 있었던 것이다.
신의가 만드는 범상한 능력
신의와 의리로 뭉쳐 평생을 살아간 한국인 조직체로 보부상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등짐장수나 봇짐장수로서 시장을 찾아다닌 행상인의 조직체다.
[보부상은 봇짐 장수와 등짐장수를 아울러 이르던 말이다. 신라 이후 자연경제의 기반
위에 농업생산자, 소가내수공업자. 시장 상인 등과 소비자 사이의 물물교환을 매개하
던 행상이다. 보부상들은 이성계의 건국 사업에 많은 협력을 하여 조선시대의 개국을
계기로 한층 활동이 활발해졌으며, 전국적으로 보부상단을 조직하고 엄격한 규율 밑에
서 견고한 조직체를 이루었고, 이 조직체는 단순한 이익단체가 아니라 동지의식으로
결합한 중세적 사회조직의 한 단위인 신분공동체로서 견고한 결속은 때때로 정치적으
로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다. 보부상단은 정부를 위하여 정치적 임무도 수행함으로써
일종의 특권단체로 발전하였다. 1898년 친일 황국협회는 보부상을 이용하여 독립협회
를 없애고자 힘을 쓰기도 하였다. 교통이 발달하고 일본상인이 증가됨으로써 독점상권
을 상실하게 되었고, 자본의 열세로 일본 거상들에게 예속되게 마련이었다. 후에 상무
사는 진홍회사로 개칭되어 보부상 활동을 확장시키려 하였으나, 큰 효과를 거두지 못
하고 말았다.]
조선시대 때 우리나라의 시장은 전국에 걸쳐 1천여 개소가 있었다 한다. 이들 시장
은 대개 5일마다 열게 되어 있었는데, 이 시장과 저 시장을 연결하기도 하고 직접 소
비자들과 접하면서 공산품을 공급해 온 상인들이 바로 보부상이었다.
이들의 상거래는 철저한 신용과 신의로써 이루어졌다. 아니 상거래뿐 아니라 이들의
생활 자체가 상호간의 신뢰라는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신의가 곧 생명이었
다고 말할 수 있다.
보부상의 유래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조선조를'창업한 이성계가
함경도 만호로 있었을 때에 여진족과 전투를 벌이다가 머리를 다쳤다고 한다. 이때에
근처에 있던 등짐장수들이 지게에 이성계를 짊어지고 가서 구해 주었다고 한다. 이들
은 그 이후에도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에 협력했고 조선조 개국 이후 석왕사를 건축
할 때에도 이들이 필요한 양곡을 운반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성계는 이들의 은혜를 갚기 위해 각 고을에 임방을 설치하고 보부상의 침식. 질
병. 장례 등을 돕도록 했다고 한다.
신의로 뭉쳐진 보부상은 5명 내외의 단위로 접장을 두어 지휘를 받았고 접장의 명령
에 복종하되, 상호 신뢰가 활동의 기반이 되었다.
신의가 생명인 보부상은 철저한 상부상조 조직체였다. 이들이 생명처럼 지켜야 하는
규율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한다.
보부상끼리는 절대로 다투지 않는다. 그들끼리 길이나 시장바닥에서 싸움질을 하게
되면 접장이 합당한 형벌을 가했고 그래도 규율을 어기게 되면 관가에 고해 처리케 한
다.
또 동료 중에 노름을 하거나 시장에서 행패를 부리면 축출한다. 이들은 영영 보부상
에 다시 들어올 수 없다. 그리고 길을 가다가 보부상패나 일반인이라도 병든 자를 보
면 이를 구해 주고 만약 죽게 되면 연락처에 반드시 통고해서 장사를 지내주게 한다.
그리고 장사를 하다가 밑천을 날리게 되면 동료들이 서로 꾸어주어서 장사를 다시
시작케 하고 이익만을 탐내 물건이나 사람들을 속일 적에는 벌전을 내게 하거나 쫓아
낸다.
한편 이들이 아무 죄없이 두들겨 맞거나 관아에 끌려가게 되면 접장이 상대방을 관
아에 고해 해결케 한다.
이들의 상부상조는 철두철미 상호 신뢰를 기반으로 이루어졌다.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밑천이 떨어지면 자금을 서로 대주었으며 병고에 빠지면 만사를 제쳐놓고 서로
구해 줬고, 만일 객지에서 죽게 되면 장사를 지내주는 것은 물론 시체를 고향으로 옮
겨주기도 했다.
보부상의 이런 단결력은 너무나 유명해서 양반이나 토호들도 이들을 함부로 건드리
지 못했으며 깡패들도 이들을 넘보지 못했다고 한다.
이 보부상들은 나라가 위급할 때에는 행상단을 조직해서 무기와 양곡을 운반했고,
화적이 일어났을 경우에는 관군을 도와 질서회복에 나섰으며 관군과 함께 싸우기도 했
다. 흥선대원군은 이들을 조직화 했고 그들로부터 전국의 실정과 정보를 제공받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보부상의 실태를 보면 사람 사이의 '신뢰'가 갖고 있는 잠재력을 느끼게 한다. 신뢰
만 건전하면 얼마든지 큰 일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비단 이뿐만이 아닐 것이다. 인간사회 자체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믿음으로 움직이
고 있다.
현대사회를 신용사회라고 한다. 이렇듯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 신의, 신뢰,
신용처럼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다.
인격에서 우러나는 강한 신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의나 신뢰는 맹목적인 상호 의존에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서로 존중하는 인격에서 비롯된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던 것처럼 조선조의 세종과 황희 정승간의 신뢰는 단순한 절대권
력자와 그의 녹봉을 받는 신하라는 주종관계가 형성한 것이 아니다. 존경하는 사람에
대한 깊은 믿음에 기인한 것이다. 이런 인격이 바탕이 된 깊은 신뢰는 죽음도 불사하
는 유대를 낳는다. 백범 김구와 윤봉길, 이봉창 의사 사이에 형성된 죽음을 넘어선
의리는 애국이라는 대의도 있었지만 상호간의 깊은 믿음에서 온 것이다.
임진왜란 때에 빛을 발한 충무공 이순신이나 충장공 권율 장군의 무공은 이들에 대
한 부하들의 절대적인 신뢰가 가져온 것이었다. 빈약한 훈련장비를 갖춘, 사기가 떨어
진 군대라도 충무공이나 충장공의 지휘에 들어가면 강한 군졸로 변하는 것이다. 지휘
관에 대한 무서운 믿음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죽음을 불사하는 용기가 솟는다.
권율 장군에 얽힌 일화가 있다.
청주에서 일본군과 대치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권율은 새로 진을 칠 자리를 보기
위해 막료 몇몇을 거느리고 일본군 진지 근처에 나갔던 일이 있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일본군에게 포위를 당했다.
막료들은 죽음을 각오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권장군과 함께 있는 한 죽음도 두렵
지 않을 뿐 아니라 틀림없이 무슨 수가 생기려니 하는 생각이 들어 그리 놀라지 않았
다. 권율은 그 당시 아직 소년이었던 정충신에게 적진에 가서 적장을 만나 "양국이 대
병으로 서로 대치할 때에 정정당당하게 싸우지 못하고 이런 속임수로 이기려 하는가.
빨리 길을 열어 나를 돌아가게 하라"고 전하라고 명령했다.
다른 사람의 지시 같으면 이행되기 어려웠겠지만 권장군을 믿는 정충신은 단독으로
일본군 진지를 찾아가서 적장에게 권장군의 뜻을 전달했다. 그러자 일본 장수가 흔쾌
히 부하들에게 길을 터주라고 명령했다. 그래서 권장군과 그 막료들은 창과 칼이 벽을
이루고 있는 사이를 뚫고 유유히 본진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그때에 막료 중 한 사람이 끌고 갔던 말을 잃어버리고 온 것이 알려지자 권장군은
다시 정충신에게 "되돌아가서 말을 찾아달라고 해서 찾아 가지고 오라"고 해서 정충신
은 다시 적진을 찾아가 말을 찾아달라고 말했고 그들이 내준 말을 되찾아 돌아왔다.
서로간에 살벌한 살육전을 되풀이하는 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깊은 믿음은 어떤 일이
라도 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정충신(1576-1636)은 조선시대의 무신으로 자는 가행, 호는 만운. 임진왜란 때는 권
율의 휘하에 있었으며, 이괄의 난에 공을 세웠고, 정묘호란 때 부원수를 지냈다. 천
문. 지리. 복서. 의술 등 다방면에 걸쳐 정통하였다. 저서로는 "만운집"이 있다.]
충무공 이순신의 거듭된 승전도 부하들의 충무공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에서 온 것이
다. 임진왜란시 3대 대첩의 하나로 꼽히는 한산도 근해 해전에서 큰 무훈을 세운 순천
부사 권준, 광양 현감 어영담 등의 활약은 이순신에 대한 깊은 믿음이 가져온 결과였
다.
원균의 지휘 아래에서는 별볼일 없던 장병들도 일단 충무공 산하에 들어오면 용장으
로
돌변했다고 한다.
이런 신뢰, 신의가 낳는 기적은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다. 아무리 작은 조직
체라도 상사와 부하들이 서로 깊은 믿음으로 뭉쳐 있으면 어떤 역경이라도 쉽게 극복
할 수 있다. 포위된 적진 속을 유유히 탈출할 수 있는 담력도 생기게 되고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색다른 아이디어도 생기게 되는 것이다.
소위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다는 캔두이즘(Candoism)이 스스로도 느끼지 못하는 사
이에
마음속에 깊이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믿음은 모든 것을 소통시킨다 - 강재업씨의 경우
1983년 11월 제주도에 시내버스 회사 하나가 새로 생겼다 제주공항과 시내를 연결하
는 좌석버스를 운행하는 삼영교통이다.
대중의 발이라고 하는 버스를 운행하는 회사가 우리나라에는 수없이 많다. 그런데
창립된 지 불과 10년도 안 된 제주도의 한 버스회사가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은
이 회사를 운영하는 대표자의 탁월한 경영의식 때문이다.
삼영교통 대표 강재업씨는 우선 대중을 상대로 하는 운수업제의 경영자가 지녀야 할
윤리의식을 분명히 실현함으로써 기업인의 재산이라 할 만한 신용을 인정받고 있다는
점에서 성공한 사람이다.
강재업씨는 신의를 갖게 하는 갖가지 일을 실전함으로써 성공적으로 회사경영의 기
틀을 잡았고, 한국인다운 인격의 중요 덕목인 믿음을 얻었다.
그의 경영윤리는 우선 회사내의 식구들로부터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진실성이 있다.
전국이 벌집처럼 술렁대던 노사분규 사태가 삼영교통에서만은 창사 이래 한 번도 생기
지 않았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주목되는 성과의 하나다.
노사분규가 없었다고 해서 그 회사가 좋은 회사라거나 경영자가 훌륭하다고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버스가 운행을 중단하는 사태에까지 이르고, 전국이 들끓는
분규의 회오리 속에서 어떻게 이 회사의 근로자들은 중단 없는 소통을 계속 할 수 있
었는가. 그 원인이 바로 믿음이었다는 점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강재업씨는 모든 사원에게 우선 교통수단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의 기본양식과 윤리
의식, 질서의식을 갖도록 지도했다. 당연히 지켜야 할 운행질서, 불법주차와 정차행위
등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예사로 어기는 비양심적인 직업의식이 싹트지 않도록 지혜롭
게 유도했다.
그리고 회사원이 가질 수 있는 불만을 미리 파악하여, 근로조건을 합리적으로 개선
해 주고 자연환경과 사원 복지시설을 마련해 주었다. 근로자가 요구하고 나서기 전에
그 마음을 알고 근로자의 입장에 유리하도록 여건을 개선해 주었기 때문에 따뜻한 인
간관계를 깨뜨리지 않고 일할 수 있게 했고 효과적으로 근로의욕을 이끌어낼 수 있었
다.
서로 막히지 않고 통했기 때문에 분규가 생기지 않았고, 회사는 정상적으로 움직였
다. 시민의 발인 버스도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수익금이 늘어날 수 있었고, 그 수익
금은 근로자에게 고스란히 돌아갔다. 특벌상여금이란 명목으로 추가수익금 전액을 회
사원에게 나누어주니, 회사원의 믿음이 한층 깊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믿음이 이번엔 사회로 돌려졌다. 회사원은 상여금으로 받은 돈의 일부를 모아 불
우 소년소녀 가장인 학생 열 명에게 장학금으로 쓰도록 1백만 원을 제주시에 기탁했
다. 이를 계기로 근로자와 불우 소년소녀 가장이 결연을 맺어 한 가족같이 서로 마음
을 나누고 정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이런 마음의 끈이 이어져 어린 청소년 가장들의 어려움을 보살피고 용기와 믿음을
주는 도움의 손길이 계속되었다. 1987년 청소년의 달에는 여름용 이불을 선물했고, 19
89, 90년에는 연이어 제주도내 경관을 구경하도록 관광의 기회를 만들어주어 청소년들
이 정서함양을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믿음의 싹은 큰 나무를 키우고 열매를 맺어 풍
요한 사회환경을 이루어가고 있는 것이다.
강재업씨는 이렇게 한 운수회사를 통해 소통의 철학을 실현하여 신뢰의 바탕을 마
련, 경영의 성공을 실증한 사업가가 됐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긴 위한 기업이 아니라
함께 사는 사회의 아름다운 새생활을 창출한 새로운 한국인상을 보여준 것이다.
그의 힘은 한 달에 한 번씩 계속해 온 노사간담회라는 대화를 통해 얻어진 것이다.
전 회사원이 가족이 되고, 또 사회의 불우청소년과 노인을 감싸안아 가족적인 관계를
맺는, 그런 전통적인 화합의 의식이 강재업씨가 지닌 신의의 덕목에서 비롯되고 있다
믿음만큼 큰 재원이 없다는 걸 강재원씨에게서 다시금 깨달을 수 있다.
우리나에서는 전통적으로 신용을 물질적 재보에 앞선 가치로 여겼다. 사람의 말 한
마디가 천금의 재산과 동일시되는 가지의식은 한국인의 인간다운 덕목이었다. 신용만
있으면 통했던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신용, 즉 믿음을 소통의 의미와 같은 것으
로 생각했다. 통신이란 말에 믿을 신자를 쓰는 것에서도 우리는 믿음의 의미를 알 수
있다. 믿는 것은 통하는 것, 믿지 못하는 것은 통하지 않는 것이다.
통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서로 하나로 연결된다는 것이며, 막힘이 없이 트였다는 것
이며, 서로의 뜻과 마음을 안다는 裂이다. 그래서 金신을 전한다는 뜻의 '통신'에 믿
을 진'자가 들어가게 된 것이다.
믿음이 있는 사람 사이는 서로 통하고 이어지기 때문에 분리되지 않는다. 통하기 때
문에 서로를 잘 알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믿을 수 있고, 어떻게 통하는 사이가 될
수 있는가. 자기의 생각을 바르게 이야기하는 것이 최우선의 방법이다. 대화는 믿음의
출발이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생기는 갈등과 대립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믿음이 없다는 데
있다. 서로 상대방의 말을 믿지 않기 때문에 통하지 않고 벽이 두터워진다. 벽이 두텁
고 높아질수록 서로의 말은 더욱 들리지 않게 되고, 말로 안되니까 폭력이 나오고 싸
움이 된다.
최근들어 노사분규 현상이 우리 사회의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고, 극단적 투쟁의 사
례도 자주 일어난다. 적정한 임금이라는 물질적 보상의 문제만 노사분규의 원인이 되
지 않는다는 것도 주목할 일이다. 인간적 믿음으로 서로 통하는 인간관계를 갖지 못하
기 때문에 생기는 불만도 노사분규의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
요컨대 불화, 분규의 요인은 불통에서 시작되고, 불신에서 증폭된다. 그런 신의의
덕을 지니고 있는 지도자가 이끄는 회사의 경우 노사분규가 생기지 않는 예를 많이 볼
수 있다.
노사분규는 노사 양쪽이 모두 신뢰감을 회복하는 게 이상적이지만 이상론을 떠나 현
실적으로 볼 때 강재업씨와 같이 경영자측에서 믿음을 보여주는 방법이 가장 효과적인
것 같다. 함께 일하는 상황을 서로 분명히 아는 것이 신뢰 관계를 유지하는 최선의 방
법이다 그러려면 대화를 해야 하고, 경영자측에서 근로자측의 어려움을 간파하고 개선
해 주는 태도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이때 개선해 줄 수 있는 여건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바로 이런 여건의 진실성을 알리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어 이해와 믿음을 갖게 하는
능력이 곧 지도력이고, 하나의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는 경영자의 자질이다.
삼영교통 주식회사의 강재업씨는 바로 믿음을 회사 경영의 원동력으로 삼아 성공한
좋은 예다.
"충 , 효" 그것은 낳고 길러준 부모와 사회를 위하는 마음이다
한국인의 근본의식을 담고 있는 효는 아들이 늙으신 어버이를 업고 있는 상형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효'의 글자 모양에서부터 '효'문화는 업고 업히는 문화의 상징적
의미를 드러낸다.
한국인들은 아이를 업어서 기른다. 어릴 때는 어버이가 업어주고 성장한 다음에는
자식이 어버이를 업는 것이다. 업어준다는 것은 남을 떠맡는다는 것이고 업힌다는 것
은 남에게 완전히 내맡긴다는 것이다. 이 업고 업히는 관계에 의해 얽혀 있는 문화가
우리의 '효'문화다.
서양에서는 포옹의 방법으로 사랑을 표현한다. 이것은 일대 일의 수평적 애정관계를
나타낸다. 애정의 확인과 인간관계의 상징적 표현으로써 상대방을 업어주는 우리의 행
위와는 대조적이다.
이효석의 단편 "메밀꽃 필 무렵"을 보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확인하는 상징적
장면으로 동이(아들)가 허생원(아버지)을 업어주는 모습이 나온다.
이처럼 업는 문화, '효'의 문화로 이루어진 한국인의 인간관계는 감사하는 마음에서
비롯한다. 그래서 효도란 업힘의 은혜에 업어주는 것으로 보답하는 문화의 근본이다.
도움과 보살핌의 근원에 감사하는 유교적인 합리성을 나타낸다.
충 역시 도움과 보살핌의 근원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라는 점에서 '효'와 같은 범주
에 들어간다고 볼 수 있다.
본시 '충'과 '효'는 손의 안팎과 같은 것이라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보아왔다. 효자
가문에서 충신이 나고 충신 가문에서 효자가 난다고 믿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곡은 '충. 효'에 대해 "나가서는 임금을 섬기고 들어와서는 어버이를 섬기는데 천
성에 근본하고, 몸으로 실행해서 천지간에 설 수 있는 것은 충효다. 이것에 어두우면
새나 짐승과 같다. 무릇 충효하는 것은 인의의 일이니, 일은 두 가지나 이치는 한 가
지로다"라고 "가정집"에서 밝히고 있다.
지난날 '충'은 임금에 대한 충성을 의미하기만 했다. 그러나 이 역시 맹목적인 충성
은 아니었다. 임금의 잘잘못을 가려서 하는 올바른 비판과 보좌였던 것이다. 또한 우
리나라 사람들은 '효'의 근본은 부모와 자녀간의 상호 교류를 통한 주고받는 애정에
있다고도 보았다.
다시 말해 '효'의 기능은, 무조건 부모에게 복종하고 봉사를 강요당하는 일방통행식
의 윤리체계가 아니라 부모가 자녀에게 쏟는 희생적인 애정, 자녀가 부모에게 갖는 존
경과 사랑이라는 상호 교류적인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업고 업히는 관계가 생긴다.
그리고 '효'는 한 가족내의 윤리에서 끝나지 않는다. '효'는 이와 같은 가족관계를
이웃으로 확산하는 윤리체계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자기 부모에 대한 존경과 봉양이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서서 사회, 국
가로 확산되는 윤리로 본 것이다. 그래서 '충'과 '효'는 한 뿌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런 예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부모에 대한 극진한 효도로 알려진 인물
은 곧 충신이라는 등식을 낳은 예는 많다. 그래서 '낳아 주신 어버이, 길러준 나라'에
대한 고마운 느낌이 곧 '효'와 '충'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누구나 세 가지 은혜를 입는다고 한다. 부모의 은혜, 사회의 은
혜, 국가의 은혜다. 부모의 은혜를 알고 있는 사람은 사회나 국가의 은혜도 자연스럽
게 터득하게 된다고 한다.
자신이 보살핌을 입은 근원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라는 점에서는 서로 같기 때문이
다.
사회윤리 확립의 기초인 '효'
우리의 전통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인간관계로 중요시된 것이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
였다.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가 가장 중요한 인간관계로 일찍부터 우리 사회에 뿌리박
게 된 한두 가지 이유로 오랜 농경문화에서 오는 가족단위의 생활관습과 일찍부터 우
리나라에 들어온 유교사상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가치관은 조선조 세종 때에 6년이 라는 장구한 세월에 걸쳐 편찬된 "삼강행실
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책을 편찬한 이유는 온 국민들에게 '효'를 가르치기 위
해서였다. '효'가 가정생활 윤리의 핵이 될 뿐 아니라 국가사회 기강을 바로잡는 데도
매우 중요한 근본사상이 되기 때문이다.
["삼강행 실도"는 조선 세종 때 엮어진 도덕서로서 3권 1책으로 되어 있다. 1431년(세
종 13) 집현전 부제학 설순 등이 왕명에 따라 우리나라와 중국의 서적에서 군신. 부
자. 부부 등 삼강의 모범이 될만한 충신. 효자 열녀를 각각 35명씩 모두 105명을 뽑아
그 행적을 그림과 글로 칭송한 책이다. 그후 이 책은 1481년(성종 12)에 한글로 번역
하여 간행되었다.]
우선 이 "삼강행실도"에 나오는 대표적인 예화를 하나 소개한다.
민손의 계모는 추운 겨울날 자기의 친아들에게는 두툼한 솜옷을 입혔지만 민손에게
는 갈대옷을 입혔다.
어느날 민손의 아버지가 관가에 가려고 민손에게 수레를 끌어달라고 말했다. 추위에
떨고 있던 민손의 손이 아버지의 손수레를 잡자마자 손수레도 저절로 떨렸다. 아버지
가 민손에게 추우냐고 묻자 민손은 춥지 않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이상히 여겨 그의
옷을 만져보니 갈대로 지은 옷임이 드러났다. 그러자 아버지는 집에 다시 들어가 계모
를 쫓아내려 했다. 민손은 계모와 아버지 사이를 말리면서 "어머니가 계시면 한 아들
만 춥되 어머니가 나가시면 세 아들이 다 추우리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에 감동한 계
모가 마음을 바로 잡았고, 그의 아버지도 계모를 쫓아내지 않았으며 가정이 화평케 되
었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효심이 지극하면 어떤 악한 사람도 교화시킬 수 있으며, 가정의 평화는
자녀의 효심에서부터 비롯된다는 뜻을 전한다. 이 이야기가 실린 "삼강행실도"는 당시
의 사회윤리도덕서로서 가장 널리 읽힌 책이었다.
효심이 지극하면 어떤 역경도 극복할 수 있으며 결국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음을
말해 주는 한국인들의 고전으로는 "심청전"이 있다. 남녀간 사랑의 극치를 말하는 것
이 "춘향전"이라면 "심청전"은 효심이 지극하면 하늘도 감동한다는 것을 말해 주는 이
야기다.
"심청전"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한국인들은 '효'를 한 가족내의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
라고만은 보지 않았다. 사회적인 덕행으로 보았다. 심청이가 공양미 3백 석에 제물이
되어 인당수에 빠져 죽은 후 용궁에서 되살아나 다시 세상에 나가 왕후가 되고, 결국
나라에서 벌인 장님잔치로 아버지를 만나 소경이었던 아버지가 격한 반가움에 눈을 뜨
게 된다는 이야기다.
심청의 효행은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넘는 사회적인 국가적인 경사로서 취급된다.
"예기"에서는 효도를 3등분했다. 부모의 자애를 생각하여 자신의 고생을 모르고 봉
사하는
것이 소효며, 인의의 원리에 따라 사회를 위하여 봉양하는 것이 중효며, 멀리 나라와
국민에게 은혜와 혜택을 베풀고 생활을 즐겁게 만드는 것이 대효라고 했다.
이처럼 '효'는 단순한 어버이와 자식간의 인간 관계가 아닌 사회적이고 국가적인 덕
행임을 동양사상은 일찍부터 지적했던 것이다.
그래서 '효자의 길'이 바로 '인간의 길'의 근본이라는 인식이 우리나라의 전통문화
속에 오래전부터 자리잡고 있었고 "효경" 공부를 학에 들어가는 입문으로 여겼다. 효
자, 효녀는 가문의 자랑만이 아니라 그 사회의 자랑이었고 국가의 자랑이었던 것이다.
생활윤리 재건과 사회 도덕성 회복이 시급한 국민적 과제로 등장하고 있는 오늘날
효도에 대한 재인식은 우리 사회의 윤리 확립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일이 될는지도 모
른다.
'효'는 모든 윤리덕목의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효'는 모든 도덕률의 시발점
우리나라만큼 효행을 만덕의 근본으로 알고 전국민에게 그런 본을 따르도록 넓게 권
장한 국가 사회도 없었을 것 같다.
앞서 잠시 언급한 세종에서 광해군시대까지 계속해서 나라에서 편찬한 "삼강행실도"
가 그런 사실을 말해 준다.
세종 때에 나온 책은 "삼강행실도"였고, 중종 때에 나온 책은 이의 속편격인 "속삼
강행실도"며 광해군시대에 나온 책은 "동국신속삼강행실도"다.
이 책에는 충. 효. 열 부문에서 모범이 될 만한 인물을 실었는데 효자에 해당되는
인물이 모두 773명에 이르고 있다.
우리나라의 각 지역에서 오래전부터 발행되어 온 읍지에서도 반드시 그 지역의 효자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읍지에는 그 지역의 붕물, 인물 소개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그
인물 소개에 효자, 열녀가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실려 있는 효자에게
는 반드시 그 지역사회 뿐 아니라 국가사회가 보내는 칭송파 보상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많은 지역에는 효자리나 효자동이라는 동네 명칭이 있다. 이 역시 그 지
역에서 효자가 많이 출생했음을 기리기 위한 명칭이었다.
효자가 많이 출생한 지역에는 효맥이 흐른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땅값이
오른 예조차 있었다고 한다. 오늘 한국에서는 일부 부도덕한 투기꾼 등이 땅값을 부추
기고 있는 데 비해 예전에는 덕행이 출중한 효행자가 땅값을 올리게 했던 것이다. 좋
은 대조가 아닐 수 없다.
효행은 자신을 낳아준 어버이에 대한 당연한 인륜적인 행실임에도 불구하고 나라에
서는 효심이 지극한 사람에게 효자비를 세워주는 등 사회적으로 크게 선양했던 것이
다.
효자가 난 집안은 효가라 해서 신분이 낮더라도 대접을 받았고 평민의 지위향상이
도모되는 등 사회적인 예우가 컸다. 다시 말해 효행자는 사회계층과는 관계없이 훌륭
한 사람으로서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록 높은 신분의 선비라도 효행에 위배되는 행실을 하게 되면 사람 취급을 받지 못
했던 반면 아무리 천민이라도 효행이 뛰어나면 훌륭한 사람으로 사회적인 존경을 받았
던 것이다. 신분계층이 뚜렷했던 봉건사회였음을 감안해 본다면 그야말로 파격적이었
다고 볼 수 있다.
이런 효행에 대한 파격적인 사회적 예우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 아직도 남아 있다.
다른 선행에 비해 효도하는 선행자에 대한 사회의 관심은 지금도 비교적 높은 편이다.
한 예를 든다.
만성 신부전증으로 8년째 투병중인 아버지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12세 된 딸이 자신
의 콩팥을 떼어서라도 아버지를 살리고'싶다고 호소했다는 사연이 신문에 실렸던 일이
있다.
그러자 자신의 콩팥을 제공하겠다고 하는 같은 혈액형의 독지가들이 잇따라 나오는
훈훈한 반응이 있었다. 단순히 금전적인 도움을 준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장기를 떼
어주겠다는 것은 대단한 성의가 아닌가.
한 독지가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자신의 딸이 신부전증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었는
데 그 딸이 기적적으로 수술없이 완쾌돼 지금은 대학 2년 생이 됐으며 그 당시 자신은
"하늘이 딸을 살려주면 나의 장기를 남에게 기증하겠다고 맹세했었다"고 그 기증 이유
를 설명했던 것이다.
한국인들이 어떤 선행보다 효행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는 좋은 예다. 남의 효
행이라도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는 것이 한국인이 보는 효도관이다. 효행에는 남의 자
녀, 남의 부모를 가리지 않고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버스나 전철 등에서 연로한 사람들에게 곧잘 자리를 양보한다 특별한 도
의교육을 받지 않아도 한국인들은 그렇게 할 줄 안다.
서구인들은 그렇지 않다. 버스나 지하철내에 '시니어 시티즌 시트(senior sitizen s
eat)'라고 되어 있는 좌석에는 앉으려 하지는 않지만 다른 좌석이라면 노인들에게 자
리를 양보한다는 생각이 없다. 이런 점이 다르다.
상호 교류적인 보살핌의 세계
'효'의 기능은 무조건 부모에게 복종하고 봉사를 강요당하는 일방통행식의 윤리체계
가 아니라 부모가 자녀에게 쏟는 희생적인 사랑, 자녀가 부모에게 갖는 존경과 애정이
라는 상호 교류적인 것이라고 앞서 말한 바 있다.
어버이와 자녀의 상호 교류적인 자애와 효성의 대표적인 예화로 인조 때의 학자인
서포
김만중과 어머니 윤씨의 예를 들 수 있다.
서포는 편모슬하에서 자랐다. 그는 유복자였다. 아버지인 김익겸은 병자호란으로 강
화도가 청군에 의해 점령되었을 때에 폭약을 터뜨리고 자살했다. 그때에 강화도에 가
있었던 윤씨 부인은 5세 된 아들과 유복자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5세 된 아들은 김만
기였고 유복자는 김만중이었다.
김만중의 어머니 윤씨는 이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에 버금가는 여성으로 알려져 있
다.
김만기, 김만중 형제의 대성은 윤씨의 극진한 모성애와 교육에 의한 것이었다.
윤씨 부인은 두 형제에게 손수 학문을 가르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산이 넉넉지
못해 글방에 보낼 수가 없었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같은 학문이라도 어머니가 기초를
잡아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윤씨 부인은 만기와 만중 형제에게 "소학", "대학", "사략", "당시" 등을 직접 가르
쳤고 장성하면서 글방에서 공부를 하게 된 이후에도 반드시 침석에 들기 전에 복습하
도록 했으며 자신은 두 형제가 잠이 든 것을 확인한 연후에야 자리에 들었다고 한다.
이런 지극한 어머니의 정성은 보람찬 결실을 맺는다. 만기와 만중 형제는 연이어 과
거에 급제했고 형인 만기는 곧 이품직 벼슬에 오르게 된다. 어머니 윤씨 부인도 정부
인에 봉해졌으며 이어 만기의 맏딸이 숙종비가 되자 정경부인으로 봉해졌다.
어머니인 윤씨 부인에 대한 아들의 극진한 효성이야기는 장남인 만기보다는 둘째아
들인 만중과의 사이에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아마 장남인 만기는 어머니에 앞서 요
절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김만중(1637-1692)은 조선시대의 문신. 소설가로 자는 중숙, 호는 서포. 유배지에서
"구운몽"을 집필한 뒤 병사하였다. "구운몽"은 그의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쓴 것이
라고 하며, 전문을 한글로 집필하여 숙종 때 소설문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한편, 한글
로 쓴 문학이라야 진정한 국문학이라는 국문학관을 피력하였다. 작품에 "구운몽" "사
씨 남정기" "서포만필" 등이 있다.]
서포 김만중의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성은 평생을 통해 많은 일화를 남겼는데 그
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구운몽"은 어머니를 위해서 만든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윤씨 부인은 만년에 옛역사나 이야기책을 즐겨 찾았는데 서포는 어머니를 위해 많은
이야기책을 모아서 언제나 그것을 어머니에게 읽어드렸다고 한다. 젊어서부터 늙을 때
까지 공적인 일이 아니면 한 번도 어머니 곁을 떠난 일이 없었으며 벼슬을 그만두었을
때에는 이른 아침에 문안 드리러 가서는 저녁에 어머니가 침석에 들 때에야 어머니 방
에서 나왔다는 이야기조차 있을 정도다.
서포가 그의 어머니와 방에 함께 있는 모습은 마치 어린 아기가 어머님 품에 안겨
젖을 먹으려는 것과 같았다고 한다.
그러던 서포가 귀양지에서 어머니의 부음을 받는다. 절해고도에 위리안치된 서포가
어머니의 부음을 받고 눈물 속에서 어머니를 사모하면서 쓴 글이 바로 "정경부인 윤씨
행장"이다.
우리나라에 효자는 많지만 어머니의 일생을 자식이 직접 기록한 글은 흔치 않다. "
우리 어머님의 아름다우신 말씀과 행실을 능히 자손에게 본받을 바를 전해줄 길이 없
을까 해서 여기에 감히 슬픔을 참고 어머님 언행 한 벌을 내 손수 기록하노니..."라고
서포는 '어머니를 향한 사무친 글'을 "정경부인 윤씨행장"에서 쓰고 있다.
자신을 돌보지 않고 자녀를 위해 일생을 산 어머니, 그 어머니를 위한 서포의 효심
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
손의 앞면과 뒷면 같은 '충'과 '효'
'효'와 '충'을 손의 앞면과 뒷면 같다고 앞서 말한 바 있다. '효'에서 '충'이 나고,
'충'이 유별난 사람은 당연히 '효'에도 출중한 사람이라는 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
반적인 인물평가였던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예'의 지침으로 숭상해 왔던 주자학에서도 충효겸전을 이상으로
가르쳤다. 그래서 '충'과 '효'는 항시 같은 한 묶음의 덕목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충'과 '효'가 한꺼번에 겹칠 때에 어느 것을 우선시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
에서는 '효'를 '충'보다 앞세워왔던 것이 한국인들의 윤리의식이었다. 그래서 '효'를
버리고 '충'을 택하는 것은 유교 전통 윤리사상에 의해 비난받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에 부산진싸움에서 전사한 첨사인 정발은 '충'과 '효' 가운데 하나를 택
해야 할 시점에서 '효'를 버리고 충'을 택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정발이 부산진 첨사로 가게 되었을 때에 그의 어머니는 병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
충'보다 '효'가 우선시 되어왔던 당시의 윤리관으로 보아 당연히 첨사로 부임하지 않
고 이른바 양모하직을 해야 옳은데도 그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임금에게 충효겸전을 하겠다고도 하지 않고 거꾸로 어머니에게 충효겸전을 할
수 없음을 말하고 위급한 상황에서 임지에 떠나도 좋겠느냐는 허락을 청했던 것이다.
정발의 어머니는 아들의 말을 듣고 오히려 장하다고 그의 등을 어루만져주면서 격
려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충' 속에 '효'가 들어 있다고 하면서 사사로운 어머니
의 정에 매어 있지 말고 나라를 위해 일하라고 타일렀던 것이다. 그래서 정발은 '효'
에 앞서 '충'을 택했으며 침략군과 맞서 장렬한 전사를 했다.
[정발(1553-1592)은 조선시대의 무신으로 자는 자고, 호는 백운. 1572년 부산진 첨절
제사가 되어 이해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산에 상륙한 왜군을 맞아 싸우다가 중과
부적으로 성을 점령당하고 전사했다.]
이와 비슷한 예가 또 있다.
영조 때 평창에 살고 있던 명의로 알려진 나두삼의 경우다. 영조는 노환에 처해 있
을 때에 궁중의 어의이외에도 전국의 명의를 찾았는데 나두삼에게도 궁중에 오도록 명
령이 내려졌다. 그런데 그 당시 그의 노부모가 위급한 병중에 있었다.
임금도 위급한 형세에 있었지만 아버지도 언제 세상을 떠날지 모르는 위급한 상황에
있었던 것이다. '충'이냐 '효'냐를 양단해서 우선순위를 가려야 할 입장에 있었던 것
이다.
판단을 할 수가 없었던 나두삼은 아버지와 임금의 병구완 가운데서 어느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가를 고을 양반들에게 물었다. 그들의 대답인즉 임금은 죽더라도 다시
모실 수 있다. 그러나 아버지가 죽으면 다시 모실 수 없다는 것이어서 당연히 아버지
의 병을 보다 중하게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같은 중인들인 의원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아버지가 죽으면 그의 가족
들만
이 곡을 하지만 임금이 죽으면 온 나라 백성이 운다고 하면서 임금측이 오히려 중하다
는 의견을 내놓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의원은 아버지의 곁을 떠나 궁궐로 떠났던 것이
다. 그는 궁으로 향하던 도중 아버지의 부음을 전해 들었으나 그대로 임금의 침전으로
향했던 것이다.
영조는 침전에서 나두삼을 맞아들였고 전후간의 사정을 알았다. 영조는 그를 조용히
불러 상아패를 하사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다 못한 효도를 이것으로써 하라고 어명
전을 내렸다고 한다. 대궐에 한동안 머물다가 집에 돌아와 그것을 펴보니 돌아가신 아
버지에게 영조로부터 호조참판 벼슬의 증직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오늘의 '충'은 국가민족을 위하는 애국심이다. 그리고 국가가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에는 부모의 효행에 앞서 민족과 국가의 안위를 위해 나서야 한다고 보는 것이
다.
가문보다 사회, 그리고 사회보다 민족, 국가라는 대승적인 가치구조에서 온 것이다.
'효'보다 앞섰던 '충'의 예
'효'에서 '충'이 나온다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믿어왔다. 효심이 지극한 사람은 나라
를 위하는 애국심도 높다고 믿어온 것이다.
자기를 낳아준 부모를 향한 지극한 효심은 자신을 길러준 사회나 국가를 아끼고 사
랑하는 마음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인물을 충무공을 통해서 또 본다.
충무공 이순신은 조국에 대해서는 지극한 충성을 바쳤다 그것이 전투에 임해서는 불
굴의 용기와 위대한 통솔력으로 이어졌고 억울한 모함으로 인한 백의종군의 굴욕까지
도 감수하는 애국심으로 나타난다.
그러면서도 어머니에 대한 효성 역시 지극한 것이었다. 가족에게는 언제나 자애로웠
다. 그뿐 아니라 위 아랫 사람들과의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의가 있었다. 그를 가리켜
전인이라고 부르는 연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순신의 어머니인 초계 변씨는 위인의 어머니가 거의 그러했듯이 뛰어난 현모였다
고 한다. 특히 대대로 내려오는 문반 출신의 전통사상인 '충 효'의 윤리덕목을 그가
어렸을 때부터 엄하게 가르쳤다. 아들을 극진히 사랑하면서도 가정을 돌보기에 앞서
나라에 충성하라고
훈도했다.
이순신은 남해의 진중에 있으면서 언제나 어머니를 생각했다. 어머니의 병환소식이
있으면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한번은 진중에서 남몰래 점을 쳐 좋은 점괘가
나오자 어머니의 병세가 호전될 것으로 믿고 몹시 기뻐했다고 일기에 기록했다.
임진왜란이 소강상태에 있던 어느 해 정월, 이순신은 진중에서 틈을 내어 수일간 집
에 와서 어머니와 함께 지내다가 전선으로 향했던 때도 있었다. 삼도수군통제사인 쉰
살의 아들을 다시 전선으로 떠나보내면서 아들에게 가족생각은 끊고 싸움생각만 하라
고 어머니가 단호하게 일렀다.
효성이 지극한 이순신이 어머니의 부음을 받게된 때가 그가 모함으로 수군통제사에
서 쫓겨나 옥살이를 한 후 권율 장군 휘하의 계급없는 군졸로서 백의종군했을 때다.
그는 아산에 들러 어머니의 입관식을 마친 후 권율 장군 막하의 임지로 떠나면서 "나
라에 충성을 다하려 하였으나 죄가 이에 미쳤고 어버이에 효도를 다하려 하였으나 어
버이도 가셨네"라고 통곡했다고 한다.
이순신은 뒤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를 맡게 되어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승리
를 거둔 후 전사한다. 그의 경우 '충'이 '효'보다 앞서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충'이 '효'보다 앞서 있었던 인물로 역시 임진 왜란시 의주의 목사로 있던 이유징
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이유징은 전란중에 '충'. '효' 중 어느 한쪽을 택해야 하는 난
처한 입장에 놓였다. 그는 아우에게 어머니를 맡기고 임금을 따랐는데 어머니를 사지
에 두고온 가책에 시달렸다. 더욱이 소식이 끊어진 다음에는 한시도 편안한 시간을 가
질 수 없었다.
그러다가 아우들이 어머니를 모시고 피난을 나왔고 그가 왕을 모시고 있는 곳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유징은 그래서 다시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면서 어머니에게 효
도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이유징의 경우를 가리켜 충효겸전을 했다고 그를
칭송했다고 한다.
효자 집안에서 충신이 나고 충신이면 효자가 틀림없다는 한국인의 일반적인 통념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이유징 (1562-1593)은 조선시대의 문신으로 자는 징원. 이조좌랑. 교리를 거쳐, 1592
년 임진왜란 때 왕을 굉양에 호종하여 응교. 사간을 거쳐 이듬해 의주목사를 지냈다.]
그러나 '충'이 앞서느냐 '효'가 앞서느냐 하는 갈림길에서는 일반적으로 '효'를 택
하도록 하는 것이 유학의 전통적인 선택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오늘에는 국가의 안위
가 문제될 때에는 무엇보다도 먼저 국가에 대한 충성이 앞서야 한다는 인식이 크다.
자신이 속해 있는 국가민족이 안존해야 부모와 가족들의 안위도 있기 때문이다.
참다운 '충'은 '의'에서 나온다
'충'은 '의'에서도 나온다.
대부분의 애국자들은 훌륭한 품격을 갖추고 있는 인격자이기도 했다.
한말에 일본의 이토오 히로부미를 만주의 하얼빈 역두에서 암살한 안중근 의사가 그
런 인격을 갖춘 사람이다. 안중근 의사는 이토오 히로부미를 살해한 후 체포되어 여순
감옥에서 6개월 여 동안 수감되었다.
그 기간중 여순 감옥에 있던 모든 일본인 형리들이 안중근 의사의 인격에 감화되었
고 그에게 극진한 예우를 한 것은 유명하다. 뒷날 여순 감옥의 소장을 지낸 일본인이
지금까지의 생애에서 만나본 사람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이 누구였느냐는 질문에 대
해 주저없이 '안중근'이라고 대답했을 정도였다.
안중근 의사가 암살한 이토오 히로부미는 오늘 일본의 화폐에도 그 초상이 오르는
일본 역사상 불멸의 정치인으로 일본 근대사에 화려한 발자취를 남겼다. 그런데 그를
죽인 안중근을 가깝게 접한 일본인 감옥 소장이 주저없이 가장 위대한 인물로 안중근
을 첫손가락에 꼽은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여순 감옥내에서 지내는 6개월 동안 약 2백 폭에 이르는 유필을 남겼
다. 그런데 대부분의 그의 휘호는 감옥의 형리, 법원의 직원, 취조관 등등의 요청에
의해 쓴 글씨였다. 그의 글은 이들이 거의 집에 가지고 가서 가보로 전했다고 한다.
그가 남긴 인격의 깊이를 가히 짐작할 만하다.
오늘 전하고 있는 안중근 의사가 쓴 이 글들은 이들이 그 일부를 보존하고 있다가
가족이나 한국인 친구들에게 전해 준 것이다. 서울기독교박물관을 비롯해서 서너 곳에
서 현재 보관중인 안 의사의 유묵은 모두가 안 의사를 숭배한 일본인 간수들이 전해
준 것이라고 한다.
그는 사형집행을 앞두고 '동양평화론'을 기고하였는데 사형 이틀 전에 서론을 마친
상태였다고 한다. 그는 그 논문을 완성하기 위해 사형집행을 15일 동안 연기해 줄 것
을 청원했는데 그 청원을 일제가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 사실은 역시 일본 형사 사상
유례없는 일로서 안중근 의사의 인격에 일본인들이 얼마나 감화되었는지를 짐작케 한
다.
사건 직후부터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에 안 의사는 체중이 두 관이나 늘었다고
한다. 그 정도로 그는 태연하였다 다만 어머니에 대한 사무친 애정만이 그를 괴롭혔다
고 한다. 그는 감옥을 찾아온 안정근, 공근 등 아우에게 홀로 남은 어머니께 자기 대
신 효도하라고 이르고 어머니가 손수 지어 보내준 옷을 깨끗이 갈아입고 사형장에 나
갔다고 한다.
안중근의 인품을 말해 주는 또 한 가지 일화가 있다. 남만주 지역에서 독립무장투쟁
을 준비하고 있었을 때에 허기를 달래기 위해 어느 중국음식점에 동지 서너 명과 들어
갔다. 음식을 청한 뒤 동료 가운데 한 사람이 무심코 음식을 나르는 여자에게 몇 마디
농담을 했다고 한다. 그러자 여자가 물러가고 난 후 안중근 의사가 그 동료에게 이렇
게 말했다고 한다.
"여보게! 우리가 고국을 등지고 이곳에 와서 편한 잠을 못 자고 애쓰는 것은 오직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수호하기 위함인데 자네는 어찌해서 불쌍한 여자를 희롱하는가
?"
그러자 그 동료는 안중근을 비롯한 친구들에게 정중하게 사과를 했다는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옥중에 있을 때에 매일같이 책을 읽고 글을 썼다. "하루라도 글을 읽
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라는 그의 휘호는 유명하다.
현재 부산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그의 휘호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견리사의견위수명'(이로움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주
라.)'
참다운 '충'은 훌륭한 인격에서 나온다
자신의 뿌리를 생각하는 마음
자기것을 찾는 학문으로 '충'을 다한 인물로 단재 신채호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신채호(1880-1936)는 항일독립투사. 사학자. 언론인으로 필명은 금협산인. 무애생,
호는 단재. 1905년 그의 나이 26세 때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
황성신문"에 논설을 쓰기 시작, 이듬해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이 되어 활약하는 한편,
내외의 민족 영웅전과 역사 논문을 발표하여 민족의식 앙양에 힘썼다. 적과 타협없이
끊임없는 독립투쟁을 전개하는 동안 '독립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
다'라는 결론에 도달, 이와 같은 견해가 곧 그의 역사연구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이다'라는 명제를 내걸어 이른바 민족사관을 수립, 우리나라
근대사학의 기초를 확립했다. 저서에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사론" 등이
있다.]
한말에 태어난 신채호는 민족의 뿌리와 문화, 그리고 역사를 찾고 한민족의 긍정적
인 위치를 밝혀주기 위해 일생을 불사른 인물이다.
신채호는 자기 역사와 문화를 잊어버리는 민족은 어둠 속에 묻혀 있는 죽은 민족이
라고 보았다. 그리고 역사와 문화를 찾아내는 길이 가장 중요한 '충', 다시 말해 애국
의 길임을 스스로의 실천을 통해 밝혔다.
한일합방이 되기 직전에 그가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한 "독사신론", 그리고 그 후에
그가 쓴 "을지문덕전", "수군제일위인 이순신전", "동국거걸 최도통전" 등도 국사연구
를 통한 민족의 긍지를 일깨우고 민족의 자존심을 고취하기 위한 애국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학문을 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단재처럼 애국이라는 목표에 초점을 맞추어 학문을 한
사람은 흔치 않다. 그는 을지문덕, 이순신, 최영 장군 등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
한 국토방위의 장군들을 예찬하면서 민족수난기에 그와 같은 영웅이 없음을 개탄하고
바로 "오늘이야말로 구국의 영웅이 나타나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
단재는 이런 애국 충열사와 구국의 영웅을 국민들의 가슴속에 심어줌으로써 애국의
정열을 일깨우고자 했던 것이다.
단재의 역사연구는 민족의 긍지를 일으키기 위한 애국적인 정열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자기것을 소중히 하고 자기 역사 속에서 민족의 단점이 아니라 민족의 장점을 찾
아내어 키워야 한다고 믿고 그런 각도에서 우리 역사를 기술해야 한다고 했다.
한일합방 당시 만주와 블라디보스톡 지역을 왕래하고 있었던 단재는 만주 지역을 강
토로 갖고 있던 고구려 역사에 큰 관심을 갖고 그 유적을 답사했다. 아무도 돌보지 않
았던 광개토대왕비를 찾았고, 동북인의 강자로 군림했던 고구려의 기상을 한국민이 본
받아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단재는 북경 바로 근교에 연개소문이 건설한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진을 발견하고 우
리 민족의 웅자를 후손이 알아야한다고 주장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다시 말해 단재
는 이른바 민족사관을 구체적으로 확립한 사학자라고 할 수 있다.
단재는 만주 등지에서 망명생활을 할 때에 자신이 필사한 "동사강목"을 어디에든 가
지고 다녔다고 한다.
["동사강목"은 조선 숙종 때의 학자 안정복이 저술한 국사책. 20권 20책. 고조선시대
부터 고려시대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서술한 것으로, 1778년(정조 2)에 완성되어 사
본으로 전하다가 1915년에 조선고서 간행회에서 활자본으로 간행했다.]
우리가 애국을 한다고 할 때에 단순히 국토방위만을 생각하기가 쉽다. 외침하는 적
과 대항해서 싸우고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순국만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애국의 길은 이것만이 아니다. 신채호처럼 한국의 뿌리를 찾고 한국정신을
되살리기 위한 노력도 애국의 길이다.
을지문덕, 이순신, 최영 장군 등처럼 우리 역사의 큰 인물들에 대한 발자취를 찾고
국민들에게 널리 알리는 일도 '충'의 길이다.
노나라에서 태어난 공자에게는 이런 일화가 있다. 그는 자신의 뜻을 펴기 위해 노,
제, 위나라 등을 전전한다. 한 곳에만 머물러 있지 못했던 것은 위정자와 뜻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공자가 제나라를 떠날 때에는 일어놓았던 밥쌀까지 건져가지고 갔는데 노나
라를 떠날 때에는 언제나 "내 발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같은 중국이지만 노나라에서 자신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나라의 번영과 융
성을 다른 곳에 비해 더 바랐던 것이다.
형식이야 어떻든 애향심을 갖고 자기가 태어나고 성장한 고장을 위해 쏟는 정성이
곧 '충'이요, 애국일 것이다.
'충효'로 가늠된 한국인의 인격
"국가가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해주기를 요구하기 전에 내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물어라"라는 케네디(J. F. Kennedy) 전미국 대통령의 말은 음미해 볼 만
하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이 국가사회에 무엇인가 기여할 생각에 앞서 국가가 자신이
나 자신의 가족을 위해 어떤 혜택이라도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 아닐
까. 자기자신에게 부여된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이웃 사회를 위해 작은 정성이라도
기울이고 난 연후에 국가사회에 대한 요구를 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앞서 '충'과 '효'를 이야기하면서 '충'과 '효'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부모에 대한 효성을 소효라 했고 사회. 국가에 대한 충의를 대효라고 했던 것이
다. 그리고 대효와 소효는 손의 앞면과 뒷면같이 하나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 같다
고 했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 뿌리, 가문을 위하는 사람은 그 연장선 위에 있는 사회와 국가
를 위하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그것이 자기 자신을 위하는 길이 된다.
유태인들이 자녀들에게 유태인답게 사는 길을 가르치기 위해 항용하는 문답이 있다.
어느날 영리하기로 이름난 여우 한 마리가 바닷가에 갔다. 바닷속의 물고기를 잡아
먹고 싶은 여우가 물 속에 있는 작은 물고기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여러 작은 물고기
여러분, 바닷속은 위험하지요. 육지에 올라와서 우리와 함께 삽시다.
어부들이 그물을 쳐서 여러분을 잡으려 한답니다. 무섭지 않습니까. 그리고 바닷속에
는 큰 물고기들이 많아서 여러분들을 언제나 잡아먹고 있지요. 육지에 올라오면 어부
의 그물 걱정도 바닷속의 큰 물고기 걱정도 할 필요가 없지요."
작은 물고기들은 모여서 회의를 했다. 여우의 말을 쫓자는 측과 그대로 바닷속에 있
자는 안이 나왔다. 갑론을박의 토론이 전개된 끝에 이제까지 살아온 방식대로 바닷속
에 있기로 의견을 모은 것이다. 물고기 대표가 여우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를 생각
해 주는 것은 고맙지만 우리는 우리가 이제까지 살아왔듯이 물 속에서 살아야만 좋겠
습니다."
유태인 아버지는 아들에게 묻는다. "만약 물고기가 육지에 나오면 어떻게 되지?" 아
들이 대답한다. "물고기는 말라죽지요." 아버지가 맞장구를 친다. "바로 그거다. 유태
인은 유태인답게 살아야 하는 거야.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유태인답게 살아야 하고
유태인임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 어느 민족이나 고유한 전통이 있고 문화가 있다. 그
것을 버리고 다른 것을 쫓게 되면 결국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 된다."
한국인은 '효'와 '충'을 사람이 사는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지켜왔다. 한국인답게
사는 길은 이 '효'와 '충'을 생활이념으로 갖고 사는 것이라고 배워왔던 것이다.
예로부터 한국인은 가정에서 부모를 섬기고 효도를 다하고 나아가서는 사회, 국가에
대해 맡겨진 의무를 다하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길임을 배워왔다.
신라 화랑들이 삼국통일을 앞두고 국가공동체 의식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서로
다짐했던 임신서기석의 맹세가 있다.
"임신년 6월 16일에 2인이 함께 맹세하여 기록한다. 하느님 앞에 맹세한다. 지금부
터 3년 후에 충도를 집지하여 과실이 없기를 맹세한다. 만약 이 일(충도)을 잃으면 하
느님께 큰 죄를 얻을 것을 맹세한다. 만약 나라가 불안하고 세상이 크게 어지러우면
모름지기 충도를 실행할 것을 맹세한다... "
이와 같은 나라의 안위를 위한 화랑들의 충의 정신은 자신을 낳아준 부모에 대한 '
효', 그리고 자신이 태어나고 자라난 나라에 대한 충성심으로 이어진 것으로 볼 수 있
을 것이다.
옛부터 한국인들은 부모에 대한 효도와 나라에 대한 충성을 사람의 품위를 가늠하는
척도로 여겼다. 부모에게 불효하고 나라에 불충한 사람은 사람으로서의 대접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나라사랑의 방법 - 박현섭 목사의 경우
우리 속담에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다. 구슬이 하나 하나 따
로 떨어져 있을 때는 아무리 많아도 구슬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의 구슬이
한 사람의 마음이라고 볼 때 한 나라를 이루는 사람들의 마음이 서로 연결되지도 않고
제각기 자기자신의 가지만 내세운다면 아무리 훌륭한 생각을 가진다 해도 제가치를 나
타낼 수가 없다.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아무리 지극하다 해도 혼자의 생각이나 힘으로는 한 나라가
바로 서기는 어려운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지극한 충정은 하나로 합칠 때 잠다운
힘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군가 구슬을 꿰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구슬 꿰는 끈이
되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구슬, 즉 국민 다수의 바른 뜻을 모아 아름다운 보석의 가지를 만들어주는 그 구슬
의 끈은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구실을 하는 존재다.
나라를 위한다고 나서는 이들 중에는 개인의 명예욕이나 사리사욕, 불순한 야심 때
문인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을 우리는 흔히 보아오고 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충의사상
이 뿌리깊은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나라와 민족을 염려하고 나라를 위해 순수한 봉사
와 헌신을 다하는 분들이 많다.
그들은 구슬을 꿴 끈과 같이 진실로 참된 정신의 끈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에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런 분들 중에 많은 분이 종교계에 몸담고 있는 것을 볼 때, 나라사랑이란 종교와
도 같은 것임을 깨닫게 한다. 스스로를 희생하고 감추어 찬란한 보석의 가치를 만들어
주는 구슬 속의 끈과 같은 구실을 한 종교인이 우리나라에는 많이 있다. 역사적으로
나라를 위해 앞장선 이들 중에 특히 종교 지도자가 많았던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
다. 의병이 그렇고, 일제시대의 독립운동가들이 그렇다.
3. 1운동에 가담한 33인의 대표 중에도 많은 종교 지도자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들은 종파와 교리를 초월해서 하나로 뭉쳐 나라 구하는 일에 앞장
섰다 이처럼 한국적 충의사상은 종교적 이념을 뛰어넘어, 지고한 사랑의 정신으로 종
교적 사랑과 합치하는 것이었다.
그런 종교인의 전통적 중의사상은 시대와 상황을 넘어서, 오늘 우리시대에도 능동적
으로 계승되어 나타나고 있다. 나라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우리의 종교인들은 지극
한 마음을 다해 호국의 등불을 켜들고 어둠을 밝혔고, 마음과 마음을 잇는 끈이 돼주
었다.
현재 한국 개신교 교단 협의회 회장인 박현섭 목사가 바로 나라사랑의 구슬을 꿰는
끈이 된 분이다. 박현섭 목사는 28세의 젊은 나이에 목회자의 길을 걷기 시작하여 197
0년부터 1989년까지 20년 동안 서울 용산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줄곧 성직의 외길을 걸
어왔다.
그리고 1986년에는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총회장이 되었고 1990년에는 우리나라 개
신교 교단이 한 자리에 모여 종교적 화합마당을 이룬 개신교단 협의회의 대표가 되었
다.
그렇게 20여 년 동안 박목사는 보이지 않는 사랑의 끈으로 흩어진 마음을 꿰는 헌신
적인 목회자의 삶을 살아오며, 우리 시대의 광야를 방황하는 구슬들, 홀로 구르는 구
슬들을 꿰는 일에 생을 바지고 있다. 그리고 박목사는 근년들어 새로운 방법의 나라사
랑을 시작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 적극적이고 열렬한 기도를 시작한 것이다. 1989년
6월부터 매달 한번씩 계속하고 있는 윤리도덕과 인간성 회복, 나라 안정을 기원하는
연합기도 대성회가 그것이다.
또 1991년 2월 22일에는 여의도 광장에서 한국 개신교 교단 협의회 회원 2천여 명이
참석한 큰모임을 열고 국민의식 개혁을 위한 기도의식을 가졌다. 이 행사 직후에는 참
석한 사람 모두 대학로와 파고다 공원 사이를 행진하며 도덕적 인간성 회복의 캠페인
을 벌이고, 그 내용을 전하는 홍보용 유인물 1만 매를 시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 일주일 뒤인 1991년 3월 1일에는 파고다 공원에서 20개 개신교단 회원 1천여 명
이 모여 3. 1절 72주년 기념행사를 갖고, 3. 1 독립정신을 계승하자는 나라사랑의 뜻
을 널리 알리는 모임도 가졌다.
구슬이란 아무리 잘 꿰어놓아도 늘 소중하게 간직하지 않으면 더럽혀지고 흠집이 생
겨 제가치를 잃은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만다.
나라사랑하는 정신도 그와 같을 것이다. 그래서 박현섭 목사는 오늘도 구슬 꿰기와
구슬 닦기를 정성스럽게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과 정성, 변함없는 의지의 실현이
한국인의 충의사상이다. 박현섭 목사의 삶에서 우리는 그런 '충의'의 초상을 본다.
한국적 생명력의 끈 - 고승녀씨의 경우
우리나라에 전해 오는 전설, 설화, 일화, 문학작픔 속에는 유난히도 '효'에 얽힌 이
야기가 많다. 그만큼 '효'는 한국인의 마음속에 폭넓은 감동을 주는 주제였고, 한국인
다운 가지의식을 대표해 온 것이었다.
장님인 아버지의 눈뜸을 위해 임당수에 몸을 던진 심청의 이야기는 한국인이 생각하
는 '효'의 가지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효'는 한국인의 생명력을 이어온 정신의 끈이며 피와 같다 오늘을 살아가는 한국인
의 삶 속에서도 '효'는 가장 질긴 가족의식의 끈이요, 뜨거운 정신의 피며, 생명의 불
꽃임을 우리 시대의 실화를 통해서 분명히 느낄 수 있다. 그중에 고승녀씨의 이야기는
현재진행형의 전설과 같은 기적의 실화다.
제주도 남제주군 대정읍에 사는 고승녀씨는 올해 만 60세가 되는 할머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할머니라 보지 않고 효부라 생각하고 있다.
고승녀씨는 한 가정의 비운과 어둠을 지극한 효심의 불씨로 밝혀낸 초인적 의지의
여인이다.
34세 때인 26년 전 김동언씨와 결혼한 이래 시작된 고승녀씨의 이야기는 지금도 계
속되는 기적의 미담이다. 중풍으로 전신마비가 되어 누워 있는 85세의 시어머니, 선천
성 불구로 태어난 시동생과 자녀들을 포함한 네 명의 불구 가족들, 간질환으로 병석에
누운 남편 등 온 가족의 손발이 되어 살아온 고승녀씨의 삶은 현실적 삶의 실화라기보
다 전설적 설화의 현재진행형 기적의 실화라고 아니할 수 없다.
고승녀씨는 남달리 뜨거운 생명의 불꽃을 지니고 태어난 것 같다. 그녀가 고난의 어
둠 속으로 자진해서 걸어 들어갔을 때 그녀와 마음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사랑의
불씨가 뜻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타오르는 사랑의 불꽃으로
김동언씨 가정의 어둠을 밝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김동언씨는 그 집안의 장남으로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었다. 장남이니 어머니를 모시
는 일은 마땅한 도리였다. 그리고 그는 또 형님의 처지라 동생을 돌보지 않을 수 없었
다. 그냥 이쯤의 사정이라면 우리나라 가정에서 흔히 있을 수도 있는 형편일 것이다.
김동언씨의 두 동생은 선천성 불구로 태어나 혼자서 독립해 살 수 없는 사람들이었
다. 나이가 들어도 결혼할 수 없는 불구의 몸이었다. 건강한 가족이라도 부양하기 어
려운데 몸이 불편한 동생들의 시중까지 들어야 한다는 건 천형과 같은 고통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김동언씨와 결혼하여 3남매의 자식까지 낳고 살던 첫 부인은 마침내 그 역경
을 이기지 못하고 어느날 갑자기 집을 나가 자취를 감추었다.
이런 불운한 상황에 놓인 김동언씨는 노모와 함께 동생들과 자녀들 다섯 명을 보살
펴야 했고, 가족의 생계를 도맡아야 하는 극한적 고통 속에서 실의에 빠진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되었다.
그런 김동언씨의 집안 사정을 알게 된 고승녀씨는 자신의 마음속에 뜨겁게 타오르는
사랑의 불꽃을 느꼈다. 자신이 희생을 감수한다면 한 가정이 행복한 삶을 이어갈 수
있다는 신념이 생겼다.
고승녀씨는 기꺼이 그'고난의 삶을 택해 결혼하기로 결심하게 됐다. 모든 생활 여건
이 갖추어져 생계에 걱정이 없는 형편이라도 두 시동생과 전처 소생의 3남매 중에 세
명의 불구자가 있는 한 집안을 보살펴야 한다는 건 참으로 큰 고난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김동언씨의 생활형편은 밭 한 뙈기, 논 한 마지기 없는 농가의 극빈 가정이
다. 남편 김동언씨와 환갑에 이른 노시어머니가 막노동의 품삯으로 겨우 생계를 잇는
형편이었다. 재산이라고는 곧 쓰러질 듯한 열 다섯 평 남짓한 초가 한 칸뿐이었다. 이
조그만 집에서 후처로 들어간 고승녀씨까지 여덟 명의 가족이 살았다.
그러나 고승녀씨는 그 모든 어려운 사정을 극복할 수 있으리란 신념이 있었고 사랑
도 깊었다 그럼에도 실제로 불구자가 세 명이나 되는 여덟 식구의 생활을 감당하는 일
은 실로 그 어려움이 가시밭길을 걷는 형국 그대로였다.
그래도 스스로 택한 삶이기에 어떤 원망이나 한탄의 말 한 번 내지 않았다. 사는 일
이 힘들수륵 그녀의 마음속 깊이 가족에 대한 정은 더 뜨거워졌고, 같은 여인으로서
고난의 일생을 살아온 시어머니에 대해 남다른 효심이 불붙어갔다. 그런 효심은 고승
녀씨의 삶에 더욱 강한 마음의 버팀목이 되었다.
고승녀씨는 기적적인 사랑이 자신의 온 몸을 가득 채우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
런 마음이 그녀에게 힘과 지혜와 용기를 주었다. 생활이 어려워 병원 치료도 받지 못
한 상태에서 불구의 몸에 더욱 병이 깊은 시동생의 대소변까지 형수인 그녀가 받아내
야 하는 초인적 인내를 요구하는 삶이었다. 그런데 32세의 나이로 시동생이 사망했을
때, 고승녀씨는 병원에 입원 한 번 못 시킨 채 보낸 시동생을 생각하며 통한의 슬픔을
견딜 수 없어 한없이 울었다.
그 슬픔까지도 시어머니와 같은 마음으로 감당한 며느리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
들을 잃은 시어머니의 마음에는 비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고승녀씨는 시어머니의 아
픔 이상으로 그 불운한 생에 대해 비통해 했었다.
그녀는 이 슬픔을 남은 가족을 더 행복하게 보살피는 노력으로 감당했다. 전처가 낳
은 소아마비 딸까지 세 명의 집안 아이들을 모두 결혼시켜 복된 삶을 찾도록 뒷바라지
하는 것으로 그녀의 사랑은 실현되었다.
어려운 살림을 70평생이나 살아온 새어머니가 1980년 1월에 중풍으로 전신마비가 되
어 자리에 눕게 되었을 때 고승녀씨는 또 한 번 삶의 절벽 앞에 서 있는 듯한 고통의
충격과 절망에 눈이 캄캄해졌다.
시어머니가 살아온 한많은 삶을 생각하면 그녀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 아팠다. 그래
서 시어머니가 좋아하는 일이며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다 해드리고 싶었다. 아침 저녁
식사 시중드는 일고 시간 맞춰 정성을 다해 보살펴드렸고, 대소변을 받아내는 일도 즐
거운 마음으로 해드렸다.
그런 힘든 나날 속에 5년이 지날 무렵, 지난 1986년에는 남편이 간질환으로 방 밖
출입이 어려운 상태가 되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시어머니와 남편이 모두 환자가 되어 누워 있는 오늘 이 시간에도 고승녀씨는 오직
이들을 돌보는 일을 보람으로 여긴다고 말하고 있다.
두 시동생과 전처 소생의 딸 하나를 합해 모두 세 명의 불구자가 있는 집안에 들어
가서 처음에 고승녀씨는 자신의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심부터 했었다. 그런데 뜻 같
지 않게 그녀도 두 딸을 낳게 되었고, 그 두 딸 중 하나가 기형아로 태어났다.
고승녀씨는 기형의 딸을 낳았을 때도 절망보다는 사랑의 시련으로 받아들였다. 오직
자신이 처한 상황에 최선을 다하고, 늘 밝고 즐거운 마음을 지니고 살아가겠다는 신념
에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빈곤한 생활에 노동일을 하면서 아이들을 학교에 보
냈고 쓰러져가는 초가집을 20평 슬레이트 집으로 개량하여 시어머니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었다. 귀찮고 지쳐서도 시어머니 봉양에 소홀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고승녀씨는
시어머니 곁을 한시도 비우지 않고 돌보아드린다. 실로 지극하고 깊은 사랑이 아니고
는 실행하기 어려운 효성이다.
74세에 쓰려져 누운 시어머니는 지금 85세다. 5년 전에는 남편도 자리에 누웠다. 그
런 속에서도 큰딸을 고등학교까지 공부시켜 지금 대정농협에서 일하고 있다. 기형아로
태어난 작은딸은 제주에 있는 장애인학교에 입학시켰다.
무슨 힘이 고승녀씨를 이렇게 강하게 만들었을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깊
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다.
한국인에게 효보다 강한 사랑의 힘은 없는 것 같다.
부록 : 새질서 새생활의 길
한 개인이 성장하면 그 성장에 따르는 새 옷이 필요하듯이 한 민족 사회도 성장과
발전에 따라 이에 걸맞는 새 규범을 찾아야 한다.
이제까지 앞선 장에서 우리 민족 고유의 생활 덕목이었던 인. 의. 예. 지. 신. 충.
효를 다시 짚어낸 이유는 새 시대, 새 환경에 맞는 새 규범의 창출을 우리의 고유문화
속에서 우선 찾아보고 오늘 재활용시키자는 뜻에서였다.
우리 민족이 오랜 세월 동안 간직해 온 민족성에는 버려야 할 것도 있지만 오히려
창의적으로 되살려야 할 장점들도 많기 때문이다. 이 장점만을 오늘의 변화한 새 환경
에 창조적으로 재생시키면 어떤 난관도 능히 넘어설 수 있는 민족적인 역량을 방출할
수가 있을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새질서 새생활운동이란 무엇인가?
새질서 새생활운동은 한마디로 올바르게 잘살기 운동이다.
이웃에 폐가 되는 것, 우리 사회에 옳지 못한 것, 잘못된 것을 과감히 바로잡아 우
리 모두의 삶의 터전을 건강하게 가꿈으로써 본격적인 민주화시대를 맞아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에서 품위있고 행복하게 살자'는 운동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르게 잘 사는 길인가?
나 자신만큼이나 소중한 이웃과 더불어 사는 민주시민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또한 고
도산업사회의 시민으로서 지녀야 할 '도리와 책임'을 다하고, '호양과 절제'의 미덕을
키워나가면서 사람답게 사는 것이 올바르게 잘사는 길이다.
새질서 새생활운동은 오늘 필요한가?
사실 우리 사회는 지난 3,40년 동안에 엄청난 변화와 발전을 거듭해 왔다. 6 · 25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세계 10대 무역국가로 부상하는 동안 지각변동을 방불케 할만큼
급속도로 변화했다.
자동차의 홍수, 대중문화의 범람, 새로운 숲을 이룬 아파트 등 우리는 지금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산업사회의 한복판에 서 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이제 권위주의를
청산하고 마침내 민주주의 시대를 맞이하여 마음껏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대외적으로도 정치적. 경제적 관계에서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다. 동서냉전의 산물인
이념과 체제의 벽이 허물어지고 모스크바와 북경을 비롯해 북방세계로 가는 선린 우호
의 새 길이 열렸다.
이렇듯 국내외적으로 모든 것이 크게 바꿔 상황에서 우리의 의식이나 행동, 그리고
생활방식은 과연 어떠한가? 냉정히 말해서 이에 대한 답은 부정적이 아닐까?
그동안 땀흘려 일하고 애써 노력한 결과 이제 물질적으로는 나아졌지만, 정신적으로
는 우리의 전통적인 가치관이 무너지고 여러 가지 혼돈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어느덧 자기만을 아는 이기주의와 물질만능주의가 성행하고, 법과 질서를 무시한 채
모든 것을 물리적 힘으로 해결하려는 집단 행동이 빈번하게 보이기도 한다.
힘든 일은 하지 않으면서도 요행과 더 맡은 몫을 바라고, 분수에 넘치는 사치. 낭
비. 향락 풍조 등, 이것들은 우리들의 일상생활 주변에서 흔히 발견되는 현상들이다.
'이대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 솔직한 우리의 현실이다.
'새질서 새생활운동'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발견되는 온갖가
지 갈등과 혼란, 병폐적 현상을 개혁하고 민주산업사회에 알맞는 '새로운 가치관과 생
활규범'을 보다 명확하게 정립하기 위한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이 일찍이 '범죄와 작별선언'을 통해 국가공무원은 물론 우리나라 온
국민에게 '새질서 새생활 실천'을 호소한 것은, 그동안 국민의 염원이었던 진정한 민
주화 시대를 열면서 우리 사회의 규율과 행동양식을 올바르게 세우기 위한 결단이었
다.
이는 곧 우리 모두가 물질적인 여유와 풍요를 누리면서도 정신적인 가치가 바탕을
이루는 사회, 더불어 사는 살기 좋은 사회를 가꾸어가기 위한 국민적 바람을 담은 것
이다.
새질서 새생활운동을 통해서 구체화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새질서 새생활운동은 궁극적으로는 올바른 한국인상을 정립하고 '민주', '번영', '
통일'의 시대적 소명을 완수해 나가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을 한꺼번
에 다 이룩할 수는 없으며, 손쉬운 것과 절실한 과제부터 하나하나 착실하게 실천해
나가야 한다.
다행히 우리 민족은 오랜 전통 속에서 가꾸어 온 도덕률을 지녀왔고, 우리 사회 곳
곳에는 국가와 민족의 밝고 건강한 미래를 기약하는 소중한 새 기운도 일어나고 있다.
예컨대 '도덕성 회복운동'과 '질서지키기운동', '환경보호운동', '근검절약운동' 등
각계 각충의 자발적인 힘 등이 그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희망의 새싹을 더욱 알차게 가꿔나가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나
자신과 가정, 이웃과 사회, 국가를 위해 '새질서 새생활운동'의 참뜻을 가슴 깊이 새
겨야 할 시점이다.
새질서 새생활운동의 당면과제를 4대 분야 12개 과제로 나누어보면 다음같이 요약
된다.
범죄없는 사회
* 내 마을은 내가 지킨다는 자경의식을 갖추자.
* 범죄를 유발하는 유해환경을 없애자.
* 학교 주변의 폭력과 청소년비행을 예방하자.
질서있는 사회
* 법과 질서를 지키고 상식과 순리에 따라 행동하자.
* 자기이익과 권리에 앞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자.
* 공중도덕을 지키고 자연환경을 보호하자.
일하는 사회
* 우리 모두 일터를 소중히 하고 열심히 일하자.
* 분수를 지키며 검소한 생활을 하자.
* 에너지와 물자절약을 생활화하자.
서로 믿는 사회
* 서로 믿고 협력하며 양보하고 존중하자.
* 이웃간에 인정을 두터이 하며 어려운 이웃을 돌보자.
* 인간성을 회복하고 도덕사회를 이룩하자.
이제 국민 모두가 함께 나서야 한다
'새질서 새생활운동'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한국인 모두에게 필요한 '정신혁명운
동'이자 '사회개혁운동'이며 '국가발전운동'이다.
이제 국민 모두가 함께 나서야 한다. 가정에서, 마을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사
회에서 작은 일부터 스스로 실천해 나가야 한다.
법과 질서를 지키고 공중도덕을 지키며 분수에 맞는 검소한 생활을 하는 것, 바른
생각, 바른 마음, 바른 행동으로 사람답게 사는 것이 바로 새질서 새생활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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