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째 비가 오고 있다. 온세상이 그저 빗물에 젖어 있을 뿐이다. 온세상이 비에 젖어 꼼짝을 안한다. 닭들한테 비 피할 집을 마련해주지 못했다. 닭들은 한방울의 비라도 덜 맞기 위해 자꾸 살구나무 밑으로, 밑으로만 꼬여든다. 아, 저 살구나무. 정옥은 처음에, 그러니까 나무에 꽃이 피고 파란 열매가 맺힐 때까지, 그 열매를 따서 '매실주'를 담글 때까지도 저 나무가 살구나무라는 것을 몰랐다. 파란 매실로 술 담그는 것은 알고 있었으므로 파란 열매를 따서 소주를 부어 '매실주'를 담그려고 했다. 그것이 어떤 열매든 파란 열매 따서 술을 담그면 다 매실주인 줄 알았다. 정옥이 '매실'을 한 광주리 가득 따놓고 소주를 사려고 읍에 나간 사이 친구 순아가 제 신랑하고 정옥의 집에 와 보고는 배꼽을 잡고 웃어댔다고 했다. 사홉들이 소주 세 병 사고 아이들 여름옷 한 벌씩 사고 긴 머리가 눈을 가려서 눈을 자꾸 이상하게 치뜨는 버릇이 생겨버린 둘째딸의 머리띠를 사고 자두 천원어치 사서 하루에 한번 있는 버스를 타고 집에 와보니 둘째가 일러줬다.
"엄마, 주리 엄마가 그러는데 이 매실이 매실이 아니라네요."
일단 머리띠부터 건넸다. 둘째는 엄마가 사온 머리띠가 자기가 원하던 분홍색이 아니고 검정색인 것이 마음에 안 들어서 더는 말을 하지 않으려 했다.
"그럼 무엇이라더냐?"
붕어입같이 입을 내밀고 아이는 아무 소리를 안했다. 이것을 담그려고 소주를 세 병이나 사왔는데. 무엇보다 순아 부부한테 매실이 아닌 것으로 매실주를 담그려고 한 자신의 무지가 우세스러워 얼굴이 발긋발긋 달아오르는데 딸이 입을 봉해버리자 득달같이 달려들어 머리띠를 빼앗고 말았다. 머리띠를 빼앗으며,
"그럼 무엇이라고 하드냐고오?"
"안 가르쳐줘요."
"너까지 엄마를 무시하는 거냐?"
"머리띠 분홍색으로 바꿔다주세요. 그럼 가르쳐줄게요."
"관둬라. 머리띠? 아나, 머리띠."
머리띠를, 돈 천원을 그 자리에서 작살내버렸다. 둘째 눈에 금세 눈물이 고이는 것을 못 본 체하고 그 길로 언덕빼기 순아네 집으로 세살배기를 업은 채로 달려갔다.
"야, 순아야, 왜 우리 딸 앞에서 내 무색을 주고 그러냐?"
순아 부부는 천성이 착한 사람들이라 고릴라같이 푸푸거리는 정옥을 그저 순한 얼굴로 바라볼 뿐이었다. 순아 신랑이 자기 집에 담가둔 매실주병을 꺼내와 정옥이 앞에 놓고 차분히 앉으며,
"자아, 그 집이 담그려고 한 매실과 이 집 매실이 어떻게 다른가, 직접 눈으로 확인하시길 부탁하는 바입니다."
보고 있으려니 괜히 부아가 치밀어올라 한잔씩 홀짝거린 것이 취해버렸다. 어미가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집에 돌아오자 새끼들이 울며불며 난리를 쳤다. 첫째는 뒤로 돌아서서 에미 얼굴 한번을 안 쳐다보고 억장이 무너져라 한숨을 몰아쉬고 있고 둘째는 에미 오목가슴을 콩콩 찧어대며 엄마가 이러면 자기들은 누굴 믿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며 악다구니를 써댔던 것이다. 그날을 생각하면 괜히 진저리가 쳐지며 입술 끝이 실룩거린다. 이건 순전히 그날 이후 생긴 증상이다.
바람이 한번씩 불 때마다 살구나무가 진저리를 쳐서 후드득 빗방울들이 가여운 닭들의 정수리며 날개 위로 떨어져내린다. 저 노릇을 과연 어찌할 것인가. 팔짱을 끼고 닭장 앞에 서서 하염없이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긴 했다. 하지만 비가 온다. 비가 와서 꼼짝을 안하고 싶다. 비 맞고 해야 할 짓은 다 했다. 부러진 고춧대 세웠지, 옥상에 올라가 방수비닐 쳤지, 물 안 나가는 하수구 뚫었지, 숨이 턱에 차도록 뛰어다녔다. 이제 정말 지긋지긋하다. 하지만 걱정이 된다. 비 맞는 닭들 생각에 잠도 편히 못 잔다. 심지어는 꿈속에서 닭들이 다 죽어나가는 꿈을 꾸고 소스라쳐 일어났다. 그랬으면서도 또 밖에 비가 오는 것을 보고 교실바닥에 맥없이 퍼질러앉아버렸다. 기실, 이제 교실은 교실이 아니다. 교실이 교실로서의 용도로 사용 안되고 있는 지도 일년이 넘어간다. 한 칸짜리 교실 벽면에 이불장과 아이들 책상과 옷걸이가 주욱 늘어섰다.
이곳은 폐교다. 작년까지 분교였다가 마지막까지 남은 두 학생, 순아네 아이들이 십리 떨어진 본교로 옮겨 다니게 된 뒤, 학교는 도시에서 이사온 정옥이네 살림집이 되었다. 마룻장 사이를 뚫고 자꾸 습기가 올라온다. 발바닥에 눅눅한 습기가 들러붙는다. 파충류 계통의 동물을 밟은 것처럼 기분이 영 불쾌하다. 선풍기를 틀어본다. 작동이 안된다. 하여간 말 안 듣는 족속들은 기계든 사람새끼든 한대 쥐어박아줘야 정신을 차릴 것이다, 하고서 선풍기를 내리치려는 찰나 히터 생각이 떠오른다. 그 물건이 아직까지 무사한지는 잘 모르겠다. 도시 살 때도 삐걱거리던 물건인지라 꺼내기가 영 부담스럽다. 하지만 습기도 싫고 찬바람도 안 나오는 마당에 대안은 그것뿐이다. 녹이 탱탱 슨 히터를 끄집어내는 일도 보통은 아니다. 땀이 삐질삐질 난다. 전기코드를 꽂고 작동버튼을 누른다. 그럴 줄 알았다. 점화가 안된다. 작동 안되는 히터를 이리저리 두들겨도 보고 발로 내질러도 본다. 녹이 부슬부슬 마룻바닥으로 떨어져내린다. 그러다가 정옥은 녹슨 히터 때리던 손으로 이녁 머리를 쳤다. 전기가 안 들어온다는 사실을 깜빡한 제 머리를 히터 때리던 것보다 더 매웁게 한대 쳐주고 말았다.
이렇게 춥고 눅눅할 때는 술이라도 한잔 먹으면 그래도 좀 나을까 싶다. 전기 안 들어와서이건 어쨌건 작동도 안되는 게 눈앞에 버티고 있는 것이 볼썽사납다. 말 안 듣는 히터를 들어내는 일 또한 사람 힘을 빼리란 걸 끄집어낼 때 알아봤으므로 힘 뺄 일이 겁나서라도 술을 한잔 하고 볼 일이다. 술이 일단 몸속으로 들어가면 제정신이 아니라서 힘든 일도 힘든 줄 모르고 하게 된다.
그것이 무슨 큰 비밀이라고 학교 바로 윗집 사는 할멈이 속닥속닥 가르쳐주었다. 주름살투성이 얼굴에 우는지 웃는지 분간 못할 표정을 가진 할멈이 속곳 속에 대롱대롱 꼼쳐가지고 온 것은 다름아닌 '집이하고 나하고 암도 모르게 노나묵을' 술이었다.
"그렁게, 내 말이 뭣이냐 허믄, 젊은 과수댁 새겨들어보더라고이. 요것이 뭔 요술을 부리냐 허믄 말이여. 귀 좀 대보랑게……"
아무것도 아닌 소린데도 귀까지 대게 하는 심보란 또 무엇인가. 참 별스런 방법으로 사람 웃기는 재주를 가진 할멈 덕분에 지난 일년 그런대로 잘 견뎌내며 살았다.
하여간 힘들 땐 술이 보약이다. 순아는 그런 정옥을 늘 근심한다. 오늘 같은 날 순아가 또 들를 것이다. 비가 오면 햇빛 나는 날보다 할일이 현저하게 없기 마련인 순아는 자기 식구들 먹을 것 더하기 정옥이 식구들 먹을 것을 준비하여 오라는 전갈을 보낸다. 전화를 하고 그래도 안 가면 제 아이를 보낸다. 그래도 안 가면 이제 제가 스스로 음식을 싸들고 온다. 순아는 불시에 들이닥친다. 문을 드르륵 열고 뭐하냐고 묻는다. 정옥은 술병을 후닥닥 치운다. 담배도 비벼끈다. 순아는 근심한다.
"술 담배 먹지 말고 음식을 먹어야지. 촌에서 여자가 혼자 살려면 몸가짐을 조심해야 한다구. 괜히 입초시에 오를 짓은 아예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순아가 해온 음식은 맛이 있다. 아이들이 생쥐들처럼 고물고물 엄마 친구가 해온 음식 주위에 모여든다. 삽시간에 방안은 고소한 음식냄새, 행복한 냄새로 가득 찬다. 순아는 그것이 만족스럽다. 제 손 조금 조물거려서 이토록 한 식구들을 행복하게 해주다니. 그녀는 그런 맛에 산다. 정옥이 새끼들을 바라보는 그녀의 흡족한 미소. 그리고 정옥에게 넘어오는 근심스런 시선. 그럴 때마다 변명처럼, 아니 진심으로,
"이제 차츰 나도 너처럼 되어갈 거야."
순아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음식을 다 '파먹은' 아이들이 텔레비전이 있는 교실로 가고 나면 그래서 이제 말귀를 못 알아듣는 세살배기만 남게 될 때,
"아무래도 아이들하고만 살면 밥먹는 것도 그렇고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야. 결혼을 해야지. 남자가 있어야 하지 않겠니? 더군다나 촌에서는 말이야."
"걱정 말래도. 아이가 셋이야. 그것만으로도 벅차."
"촌에서 여자가 혼자 산다는 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동네사람들 눈초리 봐봐. 싸늘하잖니. 촌에서 산다는 건 장난이 아니라구."
"누가 혼자 살아? 아이들하고 벌써 네 식구잖아. 그리고 나 장난으로 시골 내려온 거 아니야. 너도 알다시피 발바닥에 불나게 살고 있잖아."
"그러니까 하는 소리야. 왜 발바닥에 불나게 살아? 편하게 좀 살아. 너 소원하는 글도 쓰고. 그러자면 벌어다주는 서방이 있어얄 거 아냐, 서방이."
"글써서 먹고살 거야. 그리고 닭도 키우고 개도 키우고 있잖아. 텃밭도 있고. 요새 우리 돈 하나도 안 들어. 물론 니 덕을 좀 보고 있긴 하지만 말야."
순아는 제 충고가 관철되지 않아 쓴 입맛만 다신다. 그래도 그 친구가 있어서 홀어미 정옥이 촌바닥에 짐을 부릴 수 있었다. 아이가 셋 딸린 여자, 그것도 갓난이가 딸린 여자가 홀로 산골에 와 살다니. 마을은 서로 다르지만 순아와 정옥이는 이곳에서 멀지 않은 초등학교를 함께 다녔다. 초등학교 졸업하고 같이 부산으로 가 신발공장 다니면서 산업체 부설 야간중고등학교를 또 같이 다녔다. 이곳은 순아가 공장 다닐 때 미팅으로 만나 결혼한 신랑의 고향이다. 객지서 고향사람 만나기도 쉽지 않은 법인데 이쪽 살 때 모르고 살다가 객지서 만나 결혼하여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이곳에 와서 애기 둘 낳고 잘산다, 지금.
그들이 그렇게 사는 동안 정옥은 부산 남자와 결혼했다.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학교 다닌 도시 남자다. 남편의 어머니는 자갈치시장 상인들을 상대로 하는 식당에서 종업원으로 이십년째 일하고 있고, 아버지는 트럭운전을 하다가 운전해서 버는 돈보다 지입료니 보험료로 나가는 돈이 더 많아 결국 빚을 지고 트럭을 팔아 빚을 갚고 난 뒤로 이십년째 실업자로 늙어가는 중이었다. 남편은 그런 부모의 맏이이자 여섯 동생의 형이자 오빠였지만, 이건 순전히 정옥의 판단이긴 하지만, 손에 흙 한번 묻히고 살아본 적 없는 도시 남자였는지라 끝없이 자기 부모 원망하면서 성장하였다. 머리가 커지자 부모를 향한 원망이 이제 사회를 향한 원한으로, 적의로 변질되어갔다. 그와 헤어진 이유라면 그것이 이유다. 성실하게 일해서 먹고살 생각보다는 크게 한탕 해서 일확천금을 노리는 곳으로 시선이 옮아갔다.
스무살 때 순아랑 똑같이 한 장소에서 미팅을 한 남자 중에 순아는 촌 남자와 짝이 되었고 정옥은 도시 남자와 짝이 된 것이 지금 이토록 서로의 인생이 달라진 원인이 되었다고 정옥은 믿고 있다. 스무살의 '공돌이'는 삼십이 될 때까지는 아직은 옆에서 살아줄 만했다. 삼십이 넘자 뭔가 남편의 눈빛이 변했다. 삶을 대하는 태도가 불성실해졌다. 저녁에 술먹고 늦게 들어오고 아침에 늦게 일어나 지각을 하고 결근을 했다. 그러다가 해고를 당했다. 남편의 해고는 정옥이 이혼한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해고를 당한 남편이, 이제 갓 셋째아이를 낳은 정옥을 두들겨팼다. 사회에서 실패한 남자한테 가장 만만한 것이 자기 마누라인 것은 공식이고, 정옥은 자기가 그런 만만한 마누라들 중의 한 사람이 되어 살아간다는 것이 소름끼쳤다. 해서 순아와 순아의 남편을 보증인으로 해서 이혼을 하고 말았다. 남편은 자신이 책임져야 할 가족이 스스로 떨어져나가는 것에 홀가분한 미소까지 흘렸다. 속으로 이혼을 안해주면 어쩌나 걱정했던 정옥은 남편의 가증스런 미소가 차라리 고맙기도 하였다. 생각해보면 불쌍한 인생들끼리 뭉쳐도 시원찮을 판국에 또 불쌍한 인생들끼리 싸움박질을 해대는 게 이 세상이다. 남편과 이혼을 하고 나서야 정옥은 남편이 불쌍해서 눈물을 조금 흘렸다.
이 마을에도 도시 살다 들어온 집이 정옥이네말고 두 집이 있다. 제비새끼같이 조그만 새끼 둘 데리고 들어온 순아네 윗집 남자는 직장을 잃자 마누라가 집을 나가버렸다고 했다. 그리고 또 한 집은 정옥이 이사오기 전 가출한 마누라 찾아 남편도 집을 나가서 비어 있던, 마을에서 좀 떨어진 외딴 움막집에 언제부턴가 조칸지 아들인지를 데리고 살고 있는 젊은 남자다. 그러고 보면 세상은 온통 실업자 남편과 집 나간 마누라들 천지인 것도 같다. 지난주 토요일에도 텔레비전에서 그런 프로를 보았다. 서세원의 좋은 세상 만들기라나, 뭐라나. 어디를 가나 꼭 그런 집이 하나씩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엄마 빨리 돌아오세요, 며늘아, 새끼들이 너무 불쌍타, 이 프로를 보는 즉시 연락이라도 좀 주려무나. 새끼들 떼어두고 집 나간 며느리를 애타게 부르는 노인의 눈에 달라붙은 꾸적꾸적한 눈물. 그 장면만 나오면 왠지 짜증이 난다. 그 프로를 보고 있으면, 하여간 집 나간 년들은 무조건 나쁜년들이다,란 생각이 절로 들기 때문이다. 새끼 떼어두고 집 나간 여자 심정 헤아려줄 생각 같은 건 아예 없다. 무조건 돌아오는 것이 최선이다. 돌아오면, 무엇이 달라지나. 새끼들 데리고 노인들 데리고 여자 혼자 이 시골바닥에서 뭘 해 먹고살아가나. 뭘 해 먹고살든 일단 늙은 시부모와 아이들 있는 시골로 돌아온다면, 그 여자는 또 시골사람들 매서운 눈초리를 어떻게 견디나.
폐교에서 산 하나 너머에 정옥이 고향집이 있다. 그곳에 가면 돌아가신 부모님이 살았던 집도 있다. 하지만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건 보통 용기 가지고는 힘들다. 고향이 좋다지만 그건 성공한 사람들 얘기다. 정옥이 아직 고향에 살고 있는 큰집 큰어머니한테 고향에 내려와 살고 싶다는 의향을 전했을 때 큰어머니가 단박에 그러셨던 것이다.
"소박맞고 친정 동네에 와 산다고? 아이고, 우세스럽다, 우세스러워. 암두 모르는 곳에 가 살아라. 새끼만 없다믄 혀 깨물고 자진을 할 일이다"라고. 그리하여 결국 고향마을로 들어가지 못하고 친구 순아가 살고 있는 이곳 산골로 들어오게 되었던 것이다. 정옥은 남편 모르게 지방신문 신춘문예에 응모하여 '합격'을 했다. 그것이 정옥이 삶의 근거지를 도시에서 시골로 옮기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됐다. 남편하고 이혼을 하고 온 날 저녁 정옥은 불현듯, 하지만 가슴에 오래 묵혀두었던 그 생각이 들었다. 정옥의 눈앞이 갑자기 환해졌다. 글쓰는 사람이 되어야지. 그걸로 먹고사는 사람, 말이다. 그러자면 생활비가 적게 드는 시골에 가서 살아야지. 그 생각은 무슨 계시처럼 정옥의 눈앞을 갑자기 환하게 했다. 물론 가장 큰 응원자는 순아였다. 정옥은 버릴 것 버리고 남은 최소한의 짐을 싸서 순아가 주선해준 이곳 폐교로 이사를 오게 된 것이다. 글을 써서 먹고산다는 막연하지만 그럴듯한 그것, 그것은 말하자면 정옥이 지닌 마지막 카드였다. 이제 정옥은 그 카드 하나로 배수의 진을 쳤다. 그랬던 것이 작년 여름의 일이다. 그 일년 동안 정옥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 애초에 글을 써서 생계를 잇고자 했던 정옥의 야무진 포부에 가장 강력한 지지자였던 순아가 맨 먼저 돌아섰다. 순아가 정옥의 집에 들어서며 버릇처럼 묻는 말이, "오늘 어디서 청탁온 거 있느냐"였다. 청탁온 곳은 없었다. 청탁이 안 와서였겠지만 정옥은 "청탁받아 글 안 쓴다"고 했다. 순아가 "어디서 니 글을 사겠다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 "아직 그런 사람 없다"고 했다. 순아가 "그러면 청탁오는 데도 없고 니 글 사겠다는 사람도 없는데 뭘 해 먹고살 거냐"고 물었다. 정옥이 "그냥, 당분간 이대로 살다가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겠다"고 했다. 순아가 "그러면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려면 다시 도시로 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정옥은 "그러기는 싫다"고 했다.
그날 이후부터였을 것이다. 순아가 은근히 정옥의 결혼 말을 내놓기 시작한 것이. 정옥은 그러나 순아가 결혼 운운하는 것을 내버려두었다. 뭔가를 말하고는 싶었지만 아껴두기로 했다. 순아가 옆에서 뭐라고 뭐라고 할 때 제 속에서는 또 그것이, 그 뜨겁고 등등한 것이 이윽히 차오르고 있다는 것을 함부로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 외로움이, 내 가난함이, 사실은 내 힘이라는 사실을. 그 힘이 자기를 이곳에 오게 했다는 사실을.
그런데 어쩌자고 어제 부른 보일러수리공은 아직까지 감감무소식인지 모르겠다. 참 책임감 없는 인간이다. 이 보일러집은 얼마 안 가 파산할 것이다. 이따위로 영업을 해서야 원, 그 장사가 오래갈 것인가. 전기수리공은 산아래 마을까지 왔다가 되돌아간다는 연락이 왔다. 아랫한배미와 정옥이 살고 있는 윗한배미 사이에 산사태가 나서 길이 막혔다는 것이다. 영업하는 사람이 이 정도는 돼야지 말이야, 크윽. 일상이 뒤숭숭하니 정신도 갈피가 없어 괜히 혼잣말이 많아졌다. 길이 막혔다고? 크윽. 그러면 어디에다가 신고를 해야 하나. 군청에다 해야 하나, 군청 어디? 재해대책반이라나, 뭐라나, 그쪽으로 해야 하나? 전화통을 든다.
"여보세요? 거기 군청 재해대책반 좀 부탁합니다. 저는 섬진강 옆 윗한배미라고 하는 마을에 사는, 거기 폐교된 분교에 사는 사람인데요. 신고 하나 하겠습니다, 크윽. 윗한배미 마을하고 아랫한배미 마을 사이에 시방 산사태가 나서 교통두절된 상태에 있습니다. 뭐라구요? 언제 났냐구요? 글쎄요, 잘은 모르겄지만서도 어젯밤에 났지 싶은데요. 새벽 한시쯤에 으르릉 쾅 할 때 우리 집 전기제품들이 일제히 스톱모션을 취해버렸지 않습니까, 나 원 참. 수리공들이 왔다가 되돌아가는 형편입니다. 빨리 복구를 해주셔야지 안 그러면 이거 우리 집 식구들 전부 얼어죽게 생겼습니다요."
"금일 공한시라. 알겠습니다. 민원 접수하겠습니다. 기다려주시면 후속조치가 나갈 겁니다."
"아, 예 감사합니다. 그럼 전화받으신 분 말씀만 믿고 기다리겠습니다, 크윽."
폐교는 정옥이네가 살림집으로 쓰는 관사와 도시 살 때 쓰던 온갖 살림살이가 들어와 있는 교실, 그리고 정옥이네가 살구나무 밑 한귀퉁이에 닭장을 만들어놓은 손바닥만한 운동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 숙소로 쓰는 관사, 부엌이 있고 장판 깔린 보일러방이 두 개 있는 그 관사의 전기가 나간 지 이틀째다. 아, 깜빡했다. 어젯밤이기는 어젯밤이지만 새벽 한시였으니 이틀은 아니다. 정정할 것은 정확히 정정하면서 살아야지 안 그러면 큰코다칠 일이 틀림없이 생기고야 말 테니까. 흐응, 갑자기 코웃음이 떠오를 게 뭐람. 말이든 마음이든 고칠 때는 후딱후딱 고쳐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지난번 '감 사건' 같은 일이 또 생길 수도 있으니까. 그 생각을 하면 지금도 오싹 긴장이 되면서 뒤미처 재채기가 나오려고 한다.
지난해 가을, 가을도 깊어 겨울의 문턱에 있었던 일인데, 아이들을 데리고 산으로 소풍을 갔다. 목적이 있는 소풍길이었다. 그 전날, 정옥이 큰 아이들 학교 보내놓고 셋째 업고 산에 갔다오다가 그 감나무를 발견한 거였다. 한차례 진눈깨비도 내렸는데 아직 감이 달려 있는 감나무가 산골짝 여기저기 산재해 있었다. 웬 감이냐, 하고 일요일인 다음날 포대자루 하나씩 아이들 손에 들려서 본격적으로 감을 따러 간 거였다. 저렇게 비탈진 곳에, 수풀이 우거진 곳에 있는 감나무가, 더군다나 겨울 문턱인 지금까지도 감이 달려 있는 감나무가 임자 있는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포대자루는 금방 찼다. 감은 한차례 눈을 맞아서인지 태반이 짓물러 있었다. 그래도 이거면 아이들 간식거리만 하기에는 그 양이 떡을 치고도 남을 만했다. 갑자기 부자가 된 듯한 기분으로, 마치 전리품을 획득한 병사들처럼 씩씩하게 산길을 내려왔는데, 그날 밤 순아가 정옥이집에 자박자박 내려와서는 산에 가서 혹시 감 땄더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다. 순아 표정이 일그러지며 당장 가서 감 임자한테 용서를 빌라고 했다. 감 임자가 정옥이 얼굴 한번 쳐다보지도 않고 몸을 외로 꼬고는 이러구러, 여차저차, 장광설을 늘어놓는데 정옥이 나름대로 종합해서 내용을 요점정리 해보니, 이 영감이 지금 하는 소리가 자식들까지 데려가서 남의 물건에 손댄, 언뜻 듣기에도 도둑년 취급을 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결론이 나왔다. 이왕 일이 이렇게 된 것, 솔직히 감값을 달라고 하면 피차에 얼마나 깨끗할 것인가. 조금만 더 듣고 있다가는 속이 뒤집힐 것 같기도 했지만 이 영감이 지금 돈 달라는 소리를 저렇게 빙빙 돌려서 하는지도 모른다는 판단을 내린 정옥이 대뜸 자루 하나에 얼마냐고 물었다. 아니나다를까, 여태 점잖은 체 질질 장광설을 늘어놓던 영감이 갑자기 태도를 바꿔 바싹 마른 뺨을 파르르 떨며 "집이가 정 그렇게 나온다면, 거두절미하고 오만원을 내라"는 것 아닌가. 다 짓물러터진 감 한 부대에 오만원이라니. 그 돈이면 사실 정옥이네 네 식구 한달을 살 수 있는 돈인데. 눈물이 쏙 나왔다. 감 임자가 오만원이나 달래서 눈물이 난 게 아니라 오만원으로 자기 식구들이 한달을 산다는 생각이 새삼 목울대를 아프게 했던 것이다. 순아한테 가서 감 한 자루에 오만원이 정상 가격이냐고 물었다. 순아 말이 그렇지는 않지만 감 임자가 입은 정신적 피해를 생각하면 그 정도 가격이 나올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감 임자가 정신적 피해를 입을 만한 건덕지가 어디 있느냐고, 감 임자 앞에서는 꼼짝도 못하다가 애먼 순아한테 분노를 터뜨렸다. 순아는 냉정하게, 외지인이 지역에 뿌리내리는 데 드는 비용이 그 정도면 싼 것 아니냐고 되레 눈을 치떴다. 덧붙여 말하기를 이런 경우는 공정이니, 정상이니 돈을 따질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감 임자가 십만원을 불렀다 한들 어차피 주인 허락도 없이 감을 딴 입장인 네가 어쩔 것이냐고, 지가 무슨 감 임자 딸이나 된 것처럼 따지고 드는 데는 친구고 뭐고 만정이 떨어졌다. 그래도 순아 말 중의 한 대목에 힌트를 얻어 다시 감 임자한테 갔다. "감 한 부대에 오만원을 달라시니, 제 입장에서는 거짓말이 아니라 솔직히 그 돈을 내놓기가 곤란합니다. 그러니 어르신께서 너그러이 용서를 해주신다면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일명 '감 사건'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말 한마디 잘못하여 큰코다칠 뻔하다가 또 그 말 한마디에 만사형통한 일이 어디 감 사건뿐이랴. 어찌됐든 군청 직원의 표현대로 어젯밤 공한시에 전기가 나가서 기름보일러도 돌릴 수 없다. 보일러는 전기가 나가기 전 이미 고장난 상태에 있었다. 천둥벼락이 내리치자 집안의 많은 전자제품들, 전기기기들이 한꺼번에 고장나버렸다. 쿵 소리를 내며 보일러가 먼저 돌아가기를 멈추었다. 컴퓨터가 안되고 세탁기가 안되고 텔레비전이 차례로 작동을 멈추었다. 전자제품들이 자의든 타의든 총파업을 일으킨 것이다. 일상이 곤죽이 되어버렸다. 실내에 거미줄같이 쳐놓은 빨랫줄에서는 손으로 한 빨래들이 이상한 냄새를 풍기며 이틀째인데도 다 마르지를 않고 있다. 저놈의 히터라도 작동한다면 빨래들을 어떻게 해볼 수도 있을 텐데. 또 아차, 싶다. 이번에도 제 머리를 때릴 수밖에. 일상을 원천봉쇄하는 것은 전기인 것을. 한가지 사실을 두번씩이나 깜빡깜빡해대는 것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 순아 신랑이 두꺼비집이랑 누전차단기랑을 뙤작뙤작해보더니 자기 기술로는 안되겠다고 물러났으니 이제 하염없이 전기수리공 오기만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다. 자박자박하는 걸음소리가 나는 걸 보니 순아가 오는가보다. 순아 오는 소리가 나니 갑자기 술이 깨며 정신이 번쩍 든다. 그런 정옥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순아는 너울너울하는 빨래며, 딴에는 긴장하고 쭈그려앉은 정옥을 일별한 뒤에,
"관사에서 교실로 아예 이사를 했구나, 이사를."
심란한 표정과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또 그 수작임을 알겠다. 듣기 싫은 소리 외면도 할 겸 나도 너만큼은 하고 사는 엄마라는 걸 보여줄 필요도 있을 것 같아 저녁 반찬거리를 미리 다듬을 요량으로 윗집 할멈이 갖다놓고 간 감자와 고구마대를 가져다 껍질을 깐다.
"다름이 아니고, 우리 윗집에 애기 둘 데리고 온 남자 있잖니."
고구마대 껍질이 한번에 벗겨지면 기분이 아주 좋다. 하지만 한번에 벗겨지는 것은 열에 하나. 거개가 중간에서 똑똑 부러져버린다. 온 정신을 고구마대에다 집중해서 벗겨도 제대로 벗길까 말까 하는데, 다른 날과 달리 착 가라앉은 순아 목소리가 자꾸 신경에 거슬린다.
"고구마대를 그렇게 벗기면 안된다니까, 자꾸 그렇게 벗기네. 자, 나 하는 것 봐라. 이파리를 먼저 꺾는 거야, 그래서는 힘주지 말고 부드럽게 벗기면…… 봐라, 안 부러지잖아. 그건 그렇고."
"야, 예술이다, 예술. 어디서 고구마대 벗기기 대회 같은 거 안하냐? 그런 거 있으면 니가 일등할 텐데."
"자꾸 딴죽 걸지 말고 내 말 들어봐봐. 그 남자가 말이다, 다른 건 몰라도 빨래 하나는 기막히게 하더라. 그 집 처마밑에 주르르 걸린 빤스들이 어찌나 하얀지 내가 감탄을 했다, 감탄을 했어."
"빨래만 잘하는 줄 알어? 밥도 잘하고 청소도 잘하더라."
"너도 봤구나. 시골 남자들이 얼마나 더럽게 하고 다니냐? 우리 주리 아빠도 도시 살 때는 그런대로 깨끗했는데 시골 오니까 야만인도 그런 야만인이 없다."
"너희 윗집 남자도 이사온 지 일년도 안되서 그렇지, 마찬가질걸."
"그건 아닌 것 같애. 집구석이 얼마나 깔끔한지, 그 집 변소 한번 가봐라. 세상에나, 시골에서 그렇게 깨끗한 변소는 내 생전 처음 봤다."
"너희 집 것 놔두고 왜 그 집 변솔 써?"
"그러게 말이다. 홀아비집이라 어려워서 통 들여다보지도 못하고 산 것이 이웃된 도리로 안될 일이다 싶어 갔다가 변소 구경까지 했지 뭐야. 그런데 그 집 변소가 우리 집 안방보다 더 편하더라고, 세상에. 깨끗한 것이 편하다는 걸 그 집 변소에서 알았네, 그냥. 그 뒤로는 일보고 싶을 때마다 그 집 변소 생각이 나싸서 고민이네."
정옥이 웃을 걸 기대하고 순아 딴에는 우스운 얘기 한답시고 이런저런 잡다한 소리 늘어놓는 눈치건만 정옥은 닳아진 숟가락 더 닳아져라, 감자껍질만 벅벅 긁어대고 있다.
"얘, 너는 어쩜 그렇게 고집이 세냐, 그래. 우리 집에 내동 감자 깎는 칼 있다고, 하나 가져다 쓰랬잖아, 내가."
"나도 감자껍질 벗기는 칼이 있는 줄은 알어. 하지만 힘들긴 해도 숟가락으로 긁는 게 더 재밌어서 그래."
"니가 아직 감자껍질 전용칼 맛을 제대로 몰라서 그래. 너 사는 것도 마찬가지 아니야?"
"사람마다 다 생각이 다르니까."
"하여간, 그 남자가 서울에서 전기 계통 일을 했다고 하거든. 그래서 말인데, 지금 한번 불러올까 말까, 너한테 아무래도 허락을 받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말이야. 그래서 왔어."
마지막 말을 유난히 새침하게 마감한다.
"니가 언제 무슨 일이 있어야 오니? 그 아저씨가 전기 고치는 일 잘 아는 사람 같으면 잘되었네. 지금 모셔와라."
순아는 아줌마 품에 어울리지 않게 팔랑거리며 간다. 머잖아 순아 윗집 홀아비가 '눈부시게 깔끔한' 모습을 하고 순아를 따라왔다. 전기 계통의 일을 한 사람의 손치고는 지나치게 허옇고 손가락이 길쯤하다. 웬일인지 남자의 허연 손을 보자 소름이 쫘악 끼친다. 순아는 무엇이 좋은지 내력없이 겅중겅중, 히히덕거린다.
"어디서 누전이 돼나봐요. 비 안 오는날 수리공을 한번 불러서 전기선을 새로 설치해야겠네요."
홀아비가 전기를 못 고친 게 자기 죄나 된 것처럼 손을 싹싹 비벼대며 겸연쩍게 웃는다.
"그렇잖아도 수리공을 불렀는데 산사태 때문에 그냥 돌아갔어요."
"그럼 저는 이만……"
순아가 홀아비 뒤에서 그냥 가지 말라 하라고 정옥이한테 신호를 보낸다. 그냥 보내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격렬한 몸짓이다. 할 수 없이,
"이왕 오셨으니 누추하지만 들어오실래요?"
넉살도 좋아라, 주저하는 기색도 없이,
"그러지요."
순아 자기가 주인인 것처럼 부리나케 방석을 내놓는다.
"대접할 건 없고 술이나 한잔 드시지요."
홀아비가 손사래를 친다.
"술 못합니다. 아니 술 안할랍니다."
"술하고 무슨 원수라도……"
"맞습니다. 저희 일가가 술 때문에 망한 집안이 되어놔서."
정옥이 내놓으려고 하던 술병을 그것 봐라,는 식으로 순아가 치우고 있다. 홀아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집으로 돌아갔다.
순아 뜻대로 돌아가지 못하고 상황은 끝이 났다. 이제 더이상 결혼 운운하지는 못하겠지. 그러나,
"그렇다며언!"
"이번에는 또 누구야? 내 앞에 갖다만 줘. 얼마든지 상대해줄 테니까."
"저쪽 축사 있는 외딴집 말야, 그쪽에 술 기막히게 잘하는 젊은 남자……"
"그래."
스멀스멀 웃음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 젊은치 나이가 어떻게 되나, 싶다.
"요즘 세상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니. 남자 여자 만나 살면 그만이지."
순아도 그 젊은치 나이가 의식이 되긴 되는 모양이다.
"일부러 불러줄 건 없어. 그러잖아도 내일 그 친구 만나서 읍내 나갈 생각이다."
"그래? 야, 잘되었다. 일이 벌써 그렇게 돌아갔던 것을 왜 나한테 진작 말해주지 않고서는."
순아가 음흉하게 눈을 흘긴다.
"일 때문이야. 교육청에 갈 일이 있어서. 너희 집 애들은 교통비를 지급받는데 우리 집 아이들하고 그 친구 아들, 아니다 조카라더라, 그 아이한테는 왜 지급을 안해주는지 좀 알아볼려고."
"학교에다 문의 안했어?"
"왜 안해. 수차례 전화하고 찾아가도 자기들은 모르는 일이라고 하는걸."
"야, 교통비가 얼마나 된다고 그러냐? 돈 없는 사람 티날까 우세스럽구만."
순아가 저런 식일 때는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그만이다. 생각이 다른 사람한테 화를 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낮에 가면 사람이 없을까봐 내일 시간을 낼 수 있는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겠다 싶어 저녁밥 먹고 움막집으로 가본다. 멀리서 봐도 불이 깜박이는 게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기척을 내니 젊은 남자가 조카하고 낄낄대고 있다가 부스스한 몰골로 움막 출입문을 연다. 언뜻 들어오는 움막 안 풍경이 말할 수도 없이 심란한 것 같아 안으로 들어가는 건 자제한다. 그것이 없이 사는 사람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려는 배려, 혹은 최소한의 예의가 아니겠는가. 남자도 굳이 안으로 들어오라는 소리는 안한다. 가까이 살면서도 지난 봄에 한번 보고 이번이 두번째 만남이다. 일부러 축사 쪽을 바라보며 용건을 말한다.
"그동안 누차에 걸쳐서 학교 쪽에 문의를 해봤습니다만 계속 무책임한 소리만 들었잖습니까. 곧 있으면 여름방학인데 방학 되기 전에 어떻게든 아이들 교통비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서 그래요. 그래서 내일이 장날이기도 하고 겸사겸사 해서 같이 교육청엘 가서……"
무슨 일로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이 청년이 학교 교감선생하고 대판 싸움을 했다는 소식을 제 아이들을 통해서 들은 바가 있던 터라 학교 말을 꺼내기가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그러잖아도 한번 같이 갈 생각을 하고는 있었습니다. 그동안 여러가지 일로 좀 바빠서요."
"그래요. 마침 내일이 장날이기도 하네요. 그럼 내일 아침 아이들 학교 갈 때 같이 나서기로 합시다."
"그러지요."
집에 와보니 두 딸들이 전기 대신 켜놓은 카바이드 등불 밑에 주저앉아서 꺼억꺽, 서럽게 울고 있다.
"무슨 일이니?"
"주리 엄마가 그러는데 엄마 시집가게 생겼다며? 그럼 우린 어떻게 되는 거야? 어어엉."
"헛소리 말고들 자자."
우는 아이들 때려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마음이 심란할 때면 자버리는게 상책이다.
다음날 어디선가 쨍쨍하는 소리가 나서 눈을 떠보니 아닌게아니라 아침부터 해가 쨍쨍하다. 여러 날 비를 맞고 살구나무 밑에서 옹색하게 떨고 있던 닭들이 멋모르고 환호작약하고 있다. 빗속에서도 살아남은 그놈 중 몇놈을 오늘 읍내 장에 가서 팔 것을 생각하니 미안한 일이긴 하지만, 사람이 살려니 할 수 없는 노릇이다. 통통하게 살찐 세 마리를 잡아 종이상자 속에 야무지게 처넣어놓고 아이들을 단장시키고 그런 다음에 자기는 세수만 할까 하다가, 로션이라도 바르고 가야지, 이거 원 꺼칠해서, 괜히 혼잣소리가 나오는 것이 무안해서 결국 로션 바른 위에 약간의 분칠까지 하게 되었다. 분칠을 하고 나니 이번에는 또 입술만 유독 허염한 게 꼭 환자 인상 같아 둘째가 요망한 짓 하려고 훔쳐간 루주를 좋은 말로 달라고 했는데 그래도 안 내놓아서 본의 아니게 등짝 후려쳐 다시 뺏어냈다. 눈을 서 발이나 흘기며 훌쩍거리는 둘째를 흘끔거리며, 니 엄마 어디 도망 안 갈 테니 걱정 말아 이년아, 말은 하면서도 손은 부지런히 입술에 붉은 칠을 했다.
그러느라고 시간이 많이 지체된 것 같아 마음이 급해져서 아직도 훌쩍이는 둘째더러 뛰어가면 바람에 눈물이 마를 거라고 첫째, 둘째 앞서 뛰어가게 해놓고 자기는 셋째를 등허리에 질끈 동여매고 마지막으로 머리에 닭상자를 인 뒤 드디어 홀로어멈, 정옥이 산길을 내려가기 시작한다. 비온 뒤끝에 솟아오른 해맑은 아침해가 그들 네 식구를 눈부시게 비추고 있다.
산사태 난 곳쯤에 이르렀을 때 동네사람들이 삽을 들고 나와 있다. 울력 나오라는 소리를 못 들었는데, 그러면 아침에 쨍쨍하던 그 소리가 바로 여기 나오라는 징소리였나? 분칠한 얼굴이 좀 부끄럽고 마을사람들은 다 울력을 나왔는데 자기는 외출을 하는 것이 미안하기도 하여 물어보지도 않았건만 이장님 앞으로 다가간다.
"저기요, 제가 분명히 어제 군청 재해대책반에 신고를 했거들랑요. 그러니까 굳이 동네사람들이 안 나와도 군에서 나오게 되어 있을 건데요."
"그렇잖아도 군에서 연락이 왔습디다. 웬 여자가 술에 취해서 전화를 했다더니 바로 그 집이구만요이. 맨정신으로 신고를 해도 시원찮을 판국에 여자가 술을 마시고 왜 그렇게 동네 우세를 사게 허요. 우리 마을이 어떤 마을인지나 알고 그러요?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 마을에서 일어난 일을 남한테 맡기고 살지 않았소."
"아니, 어떻게 군이 남입니까? 여기 고치는 일도 군청 사람들 돈으로 하는 게 아니고 우리가 낸 세금으로……"
"아이고 동네사람들 한나절 봉사하면 끝날 일을 가지고 무슨 신고를 허고 그러요. 뭘 모르먼 가만히나 있지 뭐 잘났다고 시키지도 않은 일을 나서고 그러냔 말이요, 여자가. 우리는 그렇게는 안 사요. 도시사람들은 뻑하먼 관을 욕허고 허는 버릇들이 있등만. 시골사람들은 안 그래요. 촌에서 살라먼 그 버릇부터 고치든지, 어쩌든지……"
얼굴이 확확 달아오른다. 지난번 감 사건으로 생긴 안 좋은 감정은 다 잊어버렸는데 감 임자 영감이 실실 이장 옆으로 다가와서는 찌르는 소리를 한마디 더 보탠다.
"고쳐야 헐 것이 그것뿐이간디. 뭣이든지 돈으로 해결허려는 버르쟁머리도 고쳐야제. 좌우간 고쳐얄 것이 많애부러."
조금만 더 서 있다간 눈에서 눈물이 다 솟을 판이다. 순아가 결혼 운운 했던 것이 다 헛말이 아님을 이제사 확실히 알 것도 같다.
"울력하라는 말은 안할 텡게 대신 오는 길에 막걸리나 두어 되 받아다 줏쇼. 사람이 한마을 삶스로 그 정도는 허고 살아야 헐 것 아니요?"
그러겠노라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 자리를 벗어나는데 설상가상으로 잘 내려가고 있던 어린것들 찌그덕찌그덕 다투는 소리가 거기까지 들리고 있다.
"니 엄마가 어떻게 살고 있는데 엄마를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동네 우세를 사고 만들어 이년들아!"
딸들이 엄마를 피해 화르르 달아나고 있다. 그렇게저렇게 해서 마을 입구까지 왔다. 섬진강사랑 슈퍼 앞에 움막집 총각이 자기 조카를 데리고 먼저 나와 있다. 가겟집 여자 순임이 정옥을 보고 인사를 보낸다.
"장에 갈란가보요? 히잉."
그 여자는 꼭 말하기 전이나 말끝에 말처럼 웃는 버릇이 있다. 그 웃음소리가 어느 땐 다정하게 느껴지다가도 어느 땐 그냥 콱 쥐어박아주고 싶을 정도로 듣기 싫을 때도 있다.
"장에도 가고 오늘은 또 다른 볼일도 있어서요."
"뭔 일이다요?"
정말 못 말리는 왕성한 호기심이다.
"꼭 알고 싶으세요?"
"히잉."
"저 총각하고 교육청에 좀 갈려고요."
"갑철씨허고요?"
순임이 어쩐지 갑철이라는 움막집 총각하고 다정해 보이는 것이, 그럴 이유도 없건만 정옥이 심사를 뒤틀리게 했는지도 모른다. 갑철이라는 총각 옆에 얼씬거리는 여자들을 순임이 어쩐지 경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말하자면 굳이 갑철이라는 총각을 들먹인 것은 그러잖아도 마을사람들 때문에 심기가 불편한 정옥의 막가는 심사가 그렇게 악마적으로 작용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나다를까 순임이 뭔가 심상찮은 눈길로 정옥의 화장한 얼굴을 일별한다.
"오늘 화장을 이쁘게도 했네요이, 히잉."
"아, 화장이요? 교육청에 가려면 아무래도 촌사람 행색으로 갈 수는 없어서 좀 했는데 덥기만 오살나게 덥네요."
"그렇지라. 촌사람 행색으로 가먼 공무원들이 쉬이보지라우. 갑철씨도 세수라도 허고 뭣이라도 바르고 가제, 그것이 뭔 꼴이다요? 가만 있어봐라, 그 옷 벗고 내가 지난번에 갑철씨 줄라고 사다논 남방이 어디 있을 것인디 좀만 기다려요."
순임이 옷을 가지러 안으로 들어간 새에 읍내 가는 버스가 저만큼서 오고 있다. 버스는 이미 떠나는데 순임이 알록달록한 남방을 흔들며 안타깝게 달려온다
"순임씨가 사준 남방으로 갈아입고 오시지 그랬어요?"
"신경쓰지 마십시오."
"그래도 사람 성의가 있는데."
갑철은 더이상 아무 말이 없다. 정옥도 입을 다물 수밖에. 아이들을 학교 앞에 내려주고 읍내로 들어간다.
닭상자를 어떻게 할까 고민을 좀 하다가 할 수 없이 그냥 보듬고 사무실 안으로 쭈뼛쭈뼛 들어간다. 바깥 날씨는 찜통 속인데 사무실 안은 선풍기 서너 대가 맹렬하게 돌아가고 있어 그런대로 시원하다. 폐교된 학교를 관리하기 위해 이따금 정옥이집을 방문한 적이 있는 주사 앞으로 공손히 다가간다.
"워메, 그렇잖아도 오늘 본교 교장선생님허고 그쪽에 나가볼라고 했더니 나오셨구만이라우."
주사가 무슨 판때기를 들어보인다.
'학교장의 허락 없이 일체의 출입을 금함. 만약 허락 없이 출입하여 학교 기물에 손상이 있을 시 손해배상과 처벌을 받을 것임.'
"아니, 이것을 우리 집 앞에다 붙이려고 한단 말예요?"
"위에서 시키는 것이라 할 수 없구만이라."
"그러면 저도 날마다 학교장의 허락을 받아야 우리 집에 출입할 수 있겠네요?"
"우리는 위에서 시키는 대로만 헐 뿐잉게 뭐라고 말은 못허겄습니다. 그건 그렇고 뭔 일로 여그까지 오셨습니까?"
정옥은 용건을 말한다. 주사가 무슨무슨 과장 앞으로 그들을 데려간다. 과장이 일이 바쁘다고 소파 쪽을 가리킨다. 하릴없이 소파에 앉아 있는데 어딘가를 바쁘게 갔다온 과장이 대뜸,
"이렇게 교육청까지 직접 오실 일이 아닌 것을 가지고 왜 이런 수고를 하십니까?"
"학교에 누차 문의를 해도 자기들은 모르는 바라고 교육청에 가서 알아보라고 해서요."
"이런 식으로 무슨 민원이 있을 때마다 교육청이 학부모 개개인을 상대할 수는 없잖습니까? 어찌됐든 이왕 여기까지 오셨으니 말씀을 드리기는 합니다만, 저희 교육청은 폐교된 이후 들어온 학생들에 대한 교통비 지급 건에 해당하는 상부지침을 아직 받지 못한 관계로 저로서도 어떻게 달리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교통비 문의를 한 지가 벌써 한 한기가 다 되어가는데도요?"
"어차피 교통비든 뭐든 저희 교육청 예산도 이미 책정되어 있는 상태라서요. 다음 학기 때 어떻게 올려보겠습니다. 이사올 학생들 교통비까지 예상해서 예산을 책정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막말로 자식 학교 보내는 차비 정도는 조달하는 게 부모의 의무 아닙니까? 기왕에 다니던 학생들이야 강제로 학교가 문을 닫게 되어 할 수 없이 교통비를 보조해주고는 있지만 이후의 학생들이야 폐교된 지역임을 알고도 자의로 이사를 온 것이고 거기까지 교육청보고 책임을 지라는 건 좀 억지가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만. 솔직히 아이들이 먼길을 통학하며 학교 다니는 고생을 하는 건 폐교된 지역으로 이사온 부모 잘못이지 교육청 잘못이 아니잖습니까."
"아저씨, 정말 말 함부로 하시네요? 그러면, 부모 노릇 제대로 하려면 말이지요, 대한민국의 모든 폐교된 지역에는 아예 이사를 들어와서는 안되겠네요? 아저씨 말 가만히 듣고 있자니까 아저씨는 꼭 저희가 이곳으로 이사와서 골치아픈 일이 하나 더 는 게 귀찮아 죽겠다는 그 말씀으로 들리네요마는."
"이 아줌마가 근데……"
"그것이 아니고 뭐예요? 관내에 아이가 하나라도 더 늘어나면 일이 하나 더 늘어난 것만 생각하지 아이들 교육에는 도통 관심이 없다는 태도지요, 지금. 그러고도 교육공무원이라고 밥을 벌어먹고 살아요? 아이들 하나라도 더 늘어난 것을 고맙고 기쁘게 생각할 줄도 모르는 교육공무원이 무슨 교육공무원……"
"아줌마야말로 말이면 단 줄 알아? 정말 듣자듣자 하니까."
"당신하고는 더이상 말하고 싶지 않고 교육장님하고 직접 하겄소."
그런데 이 총각은 왜 이렇게 아까부터 꿀 먹은 벙어린지 모르겠다.
"왜 그래요?"
"저는 말을 잘 못해요."
"조금만 더 살아봐요. 없는 사람이 살아갈려면 나같이 되고 말 테니까."
교육장실은 이층에 있다. 닭상자를 거기까지는 차마 들고 가서는 안될 것 같아 문앞에다 두고 교육장실 문을 왈칵 열어젖혔다. 여기는 사무실처럼 시원한 게 아니고 서늘하다. 교육장이 일단 사무원 아가씨를 시켜 차를 내오게 하고 정옥과 갑철을 소파에 앉힌다. 소파는 짐짓 푹신하다.
"민원은 해결해드리지요. 우선 거기 녹차나 드시고 마음 진정하십시오."
교육장은 적어도 과장 같지는 않다. 녹차는 뜨겁다. 뜨거운 여름날, 시원한 실내에서 마시는 뜨거운 녹차라. 그 맛도 괜찮은 것 같다. 교육장의 친절한 언사와 행동에 마음이 많이 누그러져서 정옥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녹차 대접까지 받고 나니 아까 아래 사무실에서 큰소리쳤던 것이 미안하기까지 하다. 교육장이 과장을 불러올린다. 과장은 아직도 씩씩대고 있다.
"어이 김과장, 학부모님께 사과드려요. 그런데 어떻게 이런 시골까지 이사를 오시게 됐는지요?"
"아, 그러니까, 그것이, 음, 말을 하자면 글을 쓰려고요."
"아, 그래요? 무슨 글입니까?"
"소설이요."
교육장은 새삼 놀란다. 아직까지 사과를 안하는 과장에게,
"어이, 작가님께 얼른 사과하소. 저도 젊었을 때 글을 좀 썼었지요. 장르는 수필 분얀데, 저기 어디 있을 텐데, 잠깐 기다려보십시오. 졸고지만 한번 보여드리겠습니다."
자신의 '작품'을 찾기 위해 책장을 뒤적이는 교육장을 내버려두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작품은 다음에 보지요. 어쨌든 다음 학기부터 저희 아이들에게도 교통비가 지급되는 걸로 알고 저희는 이만."
교육장실 문을 열고 나와서 교육장의 깨끗한 매너에 기분이 좋아진 정옥이 이왕 기분좋은 김에 닭이나 한 마리 선사해야지 싶어 닭상자를 열고 있는데,
"김과장, 저 양반 사는 곳 계약이 언제 끝나지? 만료되면 계약하지 마시오. 학교를 안 빌려줬으면 이런 일도 없을 거 아냐? 임대를 하려거든 사람 봐가면서 하라구. 괜히 일 만들지 말구."
"알겠습니다."
교육장실 안으로 다시 쳐들어갈 것인가, 말 것인가, 입술 끝만 괜히 씰룩거리는데 지금까지 가만 있어서 불만이었던 갑철이 총각이 말릴 새도 없이 교육장실 유리문을 와장창 박살내버렸다.
"말 안 들으면 말로 할 게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줘야죠. 그것이 바로 제가 사는 방법입니다요."
그 서슬에 정옥이 안고 있던 닭이 공중으로 푸드덕 솟구쳐오르더니 쏜살같이 도망을 간다.
정옥과 갑철이 닭을 잡으러 뛰어가고 교육청 공무원들은 유리창 깨놓고 도망가는 인간들을 잡으러 뛰어오고 있다. 햇빛은 쫓겨가는 닭과 쫓아가는 인간과 쫓아오는 인간들 머리 위로 사정없이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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