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소설 111편 3
< 차 례 >
26. 불신 시대 / 박경리
27.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 박상우
28. 유서 / 박성원
29. 모범 경작생(模範耕作生) / 박영준
30. 겨울 나들이 / 박완서(朴婉緖)
31. 꿈꾸는 인큐베이터 / 박완서
32. 옥상의 민들레꽃 / 박완서
33. 우황청심환 / 박완서
34. 아랑의 정조 / 박종화
35. 강(江) / 서정인(徐廷仁)
불신시대 ☞ 박경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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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읽는 현대소설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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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불신 시대
- 박경리
9·28 수복 전야에 진영(塵纓)의 남편은 폭사했다. 남편은 죽기 전에 경인 도로(京仁 道路)에서 본 괴
뢰군의 임종(臨終) 이야기를 했다. 아직 나이 어린 소년이었다는 것이다. 그 소년병은 가로수 밑에 쓰러
져 있었는데 폭풍으로 터져 나온 내장에 피비린내를 맡은 파리 떼들이 아귀처럼 덤벼들고 있더라는 것
이다. 소년 병은 물 한 모금 달라고 애걸을 하면서도 꿈결처럼 어머니를 부르더라는 것이다. 그것을 본
행인(行人) 한 사람이 노상에 굴러있는 수박 한 덩이를 돌로 짜개서 그 소년에게 주었더니 채 그것을
먹지도 못하고 숨이 지더라는 것이다.
남편은 마치 자신의 죽음의 예고처럼 그런 이야기를 한 수 시간 후에 폭사하고 만 것이다.
남편을 잃은 진영은 1·4후퇴 때 세 살 먹이 아이를 업고 친정어머니와 같이 제일 마지막에 서울에서
떠났다. 그러나 안양(安養)에 이르기도 전에 중공군이 그들을 앞질렀고, 유우엔군의 폭격 밑에 놓였다.
수없는 피난민이 얼음판에 거꾸러졌다. 피난 짐을 끌던 소는 굴레를 찬 채 둑 밑으로 굴렀다. 피가 철철
흐르는 시체 옆에 아이가 울고 있었다. 진영은 눈을 가리고 달아났던 것이다.
악몽과 같은 전쟁이 끝났다.
진영은 아들 문수(文秀)의 손을 잡고 황폐한 서울로 돌아왔다. 집터는 쑥대밭이 되어 축대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진영은 잡풀 속에 박힌 기왓장 밑에서 물씬 물씬 무너지는 책 한 권을 집어들었다. 『프랑스
文學의 展望』이라는 일본 책이었다. 이 책이 책장에 꽂혔을 때 -- 순간 진영의 머리 속에 그러한 회상
이 환각(幻覺)처럼 지난다. 진영은 무심한 아이의 눈동자를 멍하니 언제 까지나 바라보고 있었다.
문수가 자라서 아홉 살이 된 초여름 진영은 내장이 터져서 파리가 엉겨붙은 소년병을 꿈에 보았다. 마
치 죽음의 예고처럼 다음날 문수는 죽어 버린 것이다. 비가 내리는 밤이었다.
일찍부터 홀로 되어 외동딸인 진영에게 붙어서 살아온 어머니는 내가 죽을 것을, 하며 문지방에 머리
를 부딪치는 것이었으나 진영은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는 앓다가 죽은 것이 아니었다. 길에서 넘어지고 병원에서 죽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뿐이라면 차라
리 진영으로서는 전쟁이 빚어낸 하나의 악몽처럼 차차 잊어버릴 수 있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의사의 무관심이 아이를 거의 생죽음을 시킨 것이다. 의사는 중대한 뇌수술(腦手術)을
엑스레이도 찍어보지 않고, 심지어는 약 준비조차 없이 시작했던 것이다. 마취도 안한 아이는 도수장(屠
獸場) 속의 망아지처럼 죽어 갔다. 그렇게 해서 아이를 갖다버린 진영 이였다.
바깥 거리에는 솨아! 하며 밤비가 내리고 있었다.
누워서 멀거니 천정을 바라보고 있는 진영의 눈동자가 이따금 불빛에 번득인다. 창백한 볼이 불그스름
해진다. 폐결핵(肺結核)에서 오는 발열(發熱)이다.
바깥의 빗소리가 줄기차 온다.
아이가 죽은 지 겨우 한달, 그러나 천 년이나 된 듯한 긴 날이었다. 진영은 가만히 눈을 감는다. 진영
의 귀에 조수(潮水)처럼 밀려오는 것은 수술실 속의 아이의 울음소리였다.
진영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술병을 들이켠다. 잠이 오지 않을 때 마셔 보라고 동무가 보내준 포도주
였다.
이불 위에 엎드린 진영은 여울처럼 멀어지는 수술실 속의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는 것이었다.
어떻게 해서 잠이 든다. 진영은 꿈 속에서 희미한 길을 마구 쏘다니며 아이를 찾아 헤매다가 붕대를
칭칭 감은 눈도, 코도, 입도, 보이지 않는 아이 모습에 소스라쳐 깬다. 흠씬 땀에 젖은 몸이 가늘게 떨고
있었다.
별안간 무서움이 쭉 끼친다.
비가 멎은 새벽이 창가로부터 서서히 방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허공을 보고 있는 진영은 왜 무서움을 느끼는지 알 수 가 없었다. 아이가 이미 유명(幽冥)의 혼령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렇게 서글픈 인간 관계가 어디 있겠는가. 진영은 구역이 나올 정도로 자
기 자신이 싫었다.
성당의 종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요다음 주일날에는 꼭 나를 성당에 데려가 달라고 갈월동(葛月洞)
아주머니에게 부탁을 한 일이 생각난다. 바로 오늘이 그 주일날이다.
갈월동의 아주머니는 약속한 대로 여덟 시가 못 되어서 왔다. 아주머니는 옛날에 죽은 진영의 칠촌 아
저씨의 마누라였다. 자식도 없는 그는 아주 독실한 천주교(天主敎)의 신자였으나 근래에 와서 계로 인해
서 상당히 말썽을 빚었다. 진영이만 해도 그 짤짤 끓는 돈으로 겨우 다 넣어 온 이십만 환짜리 계를 소
롯이 포기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만큼 계주를 한 아주머니의 사정이 핍박했던 것이다.
매미 날개같이 손질을 한 모시옷을 입은 아주머니는 울고불고 하는 어머니를 위로하는데 아주머니가
말할 적에는 금으로 씌운 송곳니가 알른알른 보였다.
어머니는 아는 사람을 보기만 하면 언제나 손을 잡고 손자를 잃은 하소연을 했다. 진영은 그러는 어머
니가 싫었지만, 그러나 딸 하나를 믿고 산 어머니가 여러 가지 면으로 서러운 위치에 놓인 것은 사실이
다.
「우시지 마세요, 형님. 산 사람 생각도 하셔야지. 진영의 마음이 오죽하겠어요? 이러지 마세요. 그리고
살아 갈 길이나 생각합시다.」
진영이 실직을 하고 있는 형편이라 살길도 막연하긴 했다.
아주머니는 갖가지 말로 어머니를 달래다가 풀어진 고름을 여미여(아주머니는 적삼에도 반드시 고름을
달았다),
「우리 어디 사는 대러 살아 봅시다…… 그리고 나도 생각하고 있었어요, 형님 돈만큼은 돌려 드리려
고. 원금만이라도요……」
어머니의 얼굴이 좀 밝아진다. 진영은 잠자코 양말을 신고 있었다.
세 사람은 거리에 나왔다. 아침이라 가로수가 서늘했다.
본시 불교도인 어머니는 성당으로 가는 것이 마음에 꺼렸으나, 그러나 아무래도 좋았다. 의사는 항상
딸에게 있는 것이었으니까…….
아주머니는 진영의 양산 밑으로 바싹 다가오면서 소곤거리기 시작한다.
「천주님이 계신 이상 우리는 불행하지 않다. 천주님이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런 기회를 주어 너를
부르신 거야. 모든 것이 다 허망한 인간 세상에 다만 천주님만이 빛이 된다.」
신자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똑같은 말을 아주머니는 말했다.
진영은 땅을 내려다본 채,
「지가 구원을 받자고 가는 건 아니에요. 천당이 있어서 그곳에 문수가 놀고 있거니,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서」
「그래, 천당 갔다. 그렇게 착한 아이가…… 아암 행복하게 꽃동산에서 놀고 있고 말고」
연장자(年長者)답게 위로하는 것이었으나 말투가 너무 어수룩했다.
「아무리 꽃동산이래도 그 애는 외로울 게요. 엄마 생각이 날 거예요.」
진영은 혼자 중얼거리며 하늘을 보았다. 너울처럼 엷은 구름이 가고 있었다.
「그런 소리 말고 영세나 받도록 해. 상배(相培)도 영세를 벌써 받았어」
아주머니의 목소리는 먼 지평선(地平線)에서 울려오는 것 같았다. 진영은 기계적으로,
「그 무신론자가…… 영세를……?」
「그 애도 요즘 심경이 많이 변했어」
분 냄새가 엷게 풍겨 온다. 진영은 금니가 알른알른 보이는 아주머니의 입매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상배는 아주머니 댁에 하숙한 대학생이다. 지나간 봄에만 해도 그는
「아주머니요, 예수가 물위로 걸었다캤능기요. 하핫핫! 아마 예수는 왼발이 빠지기 전에 오른발을 올렸
고, 오른발이 빠지기 전에 왼발을 올렸던가 배요. 하하핫……」
그런 부산 사투리의 조롱이 자기 딴에는 아주 신통했던지 상배는 콧마루를 벌름거리며 웃었던 것이다.
진영이 그것을 생각하는 동안 아주머니는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그 애도 우리 집에서 쉬이 옮기게 될 거야. 아버지가 사업 때문에 서울로 오신 다니까…… 그래서
나도 그 애가 나가기 전에 영세 받도록 하려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들이 성당 앞까지 왔을 때 은행나무에 자잘한 햇빛이 부서지고 있었다. 뜰에는 연 분홍빛 글라디올
러스가 피어 있었는데 진영은 불교의 상징인 연화(軟化)를 왜 그런지 연상했다. 그리고 엉뚱스럽게 그
꽃들이 자아내는 서양과 동양의 거리를 생각해 보는 것이었다. 막연한 생각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진영
은 얼떨떨하게 자기의 마음을 더듬었다. 문수를 위하여 신을 뵈러온 마당에서 아무런 경건함도 없이 이
렇게 냉정히 사물을 헤아리고 있었다는 것을, 그것을 다만 시각(視覺)에서 온 하나의 자연발상(自然發
想)이라고만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내 슬픔 속에 그만큼 여유가 있었다는 말인가. 진영은
문수에게 부끄러웠다. 미안했다.
진영은 땀에 젖은 분 냄새가 풍겨오는 아주머니의 젖가슴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나무 그늘 아래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그 옆에는 중년 남자 한 사람이 십자가, 성경책 같은 것을 노점
처럼 벌여놓고 팔고 있었다. 진영은 어느 유역의 이방인(異邦人)인 양 그런 광경을 건너다보았다. 분위
기에 싸이지 않는 마음속에는 쌀쌀한 바람이 일고 있었다.
진영은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아주머니는 신발을 책보에 싸면서,
「주로 아이들을 위한 미사시간이 돼서 시끄러워. 다음엔 일찍 와요」
진영은 아주머니의 말보다 거추장스럽게 신발을 싸들고 가는 신자들의 모습에 눈이 따라가는 것이었
다. 진영은 문득, 예수 사랑하려고 예배당에 갔더니 눈감으라 해 놓고 신 도둑질하더라, 그런 야유에 찬
노래를 생각했다. 그러나 진영은 곧 형용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신전(神殿)에서 신을 모독하다니
-- 그런 죄악 의식에 쫓기며 진영은 아주머니의 뒤를 따랐다.
얼마 후에 미사는 시작되었다.
「가엾은 나의 아들 문수를 위하여 기도를 올리나이다. 진심으로…… 진실로 비나이다. 그 고통으로부
터 놓이게 하시고, 어린 영혼에게 평화가 있기를……」
진영은 눈은 감고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 있는 헤살군의 속삭임이 더 집요했다.
헤살군은 속삭인다. 문수는 죽어 버린 것이다. 아주 영영 없어진 것이다. 진영은 눈앞이 캄캄해 오는 것
을 느낀다. 헤살군은 속삭이다. 칼끝으로 골을 짜개서 죽여 버린 것이다. 무참하게 죽여 버린 것이다.
진영은 눈 앞에 시뻘건 불덩어리가 굴러가는 것을 본다. 헤살군은 자꾸만 속삭인다. 어둡고 침침한 명
부(冥府)에서 압축한 듯한 목쉰 아이의 울음소리, 진영은 땀을 흘리며, 눈을 떴다. 코 앞에 닿은 어머니
의 머리에서 땀내가 뭉클 풍겨온다. 현기증을 느낀다. 신자들이 머리에 쓴 하얀 미사포가 시계(視界)와
의식을 하나로 표백(漂白)시켜 버리는 것이었다.
얼마 동안이 지났는지 진영은 고개를 돌렸다. 구제품이 정렬한 듯한 성가대(聖歌隊)의 아이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아이들의 각색의 음계가 합한 성가는 바람을 못 마신 오르간의 잡음처럼 진영의 귓가에 울렸
다. 이 속에서 무릎을 꿇고 앉았을 을씨년스런 자기 자신의 모습, 진영은 그것이 얼마나 어설픈 위치인
가를 깨닫는다.
진영은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미웠다. 결코 자기라는 의식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미웠
던 것이다. 진영은 어떻게 해서라도 객관적인 자기 의식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진영은 잃어진 낭만
(浪漫)을 찾아보듯이 신과 문수의 죽음이 동렬(同列)의 신비(神秘)라는 것, 그리고 아무도 신과 죽음을
비판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은 사실이라 생각했다.
진영이 처음 성당에 나가려고 결심했을 때 그것이〔〕가공에 설정된 하나의 가장일지라도 다만 문수를
위한다는 명목만으로 자신이야 피에로도 오똑이도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의식적인
맹목(盲目)은 끝내 맹목일 수 없었다.
미사가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진영은 긴 작대기에다 연금(捐金) 주머니를 여민 잠자리채 같은 것이 가
슴 앞으로 오는 것을 보았다. 아주머니가 성급하게 돈을 몇 닢 던졌을 때, 잠자리채 같은 연금 주머니는
슬그머니 뒷줄로 옮겨가는 것이었다. 진영은 구경꾼 앞으로 돌아가는 풍각쟁이의 낡은 모자를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계기로 하여 진영은 밖으로 나와 버렸다.
진영은 나무 밑에 주저앉아서 성당에서 나오는 어머니의 빨간 눈을 보았다. 문수 또래의 아이들이 신
발을 신으며 나오는 것도 보았다.
여름 햇빛 아래 서 있는 성당이 가늘게 요동(搖動)하고 있는 것같이 진영에게는 느껴졌다.
아침부터 진영은 마루 끝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갑갑하게 그러지 말고 밖에라도 좀 나갔다 오라는 어
머니의 말이 도리어 비위에 거슬려 진영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머리를 부여안는다.
갑갑한 때문만이 아니다. 진영은 일자리를 찾아 밖에 나가야 하는 것이다.
진영은 머리를 부여안은 채 도대체 어디를 가야하며 누구에게 매달려 밥자리를 하나 달라고 하겠는가,
더군다나 폐까지 앓고 있는 내가 -- 진영은 문수를 생각했다. 살겠다고 버둥대는 어머니와 자기의 모습
이 한없이 비루 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마당에는 대낮 햇빛이 쨍쨍 쏟아지고 있었다. 그늘이 짧아진 쌍나무의 둘레로 잉잉거리고 다니던 파리
떼들이 진영의 얼굴 위에 몰린다. 어머니는 장독대 옆에서 빨래에 풀을 먹이고 있었다. 넓적한 해바라기
잎사귀 사이의 그 찌드른 옆얼굴을 바라보는 진영은 바다에 떼밀려 다니는 해파리를 생각했다. 그렇게
둔하면서도 산다는 본능만은 가진 것, 그저 산다는 것, 진영은 어머니에 대한 잔인한 그런 주시를 더 이
상 계속할 수가 없었다. 진영은 성가시게 구는 파리를 쫓으며 마룻바닥에 드러눕는다.
하늘이 파랬다. 구름이 둥둥 떠내려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늘이 갑자기 바다같이 느껴졌다. 구름은
바다 위로 둥둥 떠내려가는 해파리만 같았다. 진영이 자신이 누워서 하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엎드려서 바다를 내려다보는 지도 모른다는 그러한 착각이 든다.
해가 서쪽으로 좀 기울었다. 쌍나무의 그늘이 두서너 치나 늘어난 것 같다. 진영은 몸을 왼쪽으로 돌려
서 마루 밑의 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문이 삐걱 하더니 열린다. 땅을 복 있던 진영의 눈에 우선 사람의 그림자가 먼저 들어왔다. 그림자를
따라 천천히 눈을 치떴을 때 그곳에 바랑을 짊어진 신중이 서 있었다. 초현실파의 그림같이 그림자를
밟고 선 신중의 소리 없는 기다란 모습.
드디어 합장을 하고 있던 신중이 입을 열었다.
「아씨!」
완전히 조화를 깨뜨린 소녀와도 같이 카랑카랑하게 맑은 목소리다. 바랑에 휘인 어깨는 아무래도 사십
고개일 터인데 -- 신중은 부스스 일어나서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는 진영의 형용할 수 없는 어두운 눈빛
에 지친다.
마침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나오는 어머니를 본 신중은 잠시 숨을 돌이킨 듯이,
「마나님!」
의연히 맑은 목소리다.
어머니는 마루 끝에 주저앉으며 긴 한숨을 쉰다.
「이날까지 부처님을 섬기고 잘 살 적에는 절마다 불을 켰건만 무슨 소용이 있읍디까. 공든 탑이 무너
지지 않는다는 말도 헛말이더군……」
바야흐로 아이가 없어진 하소연이 시작되는 것이다. 판에 박은 듯한 푸념이 언제 그칠지 모르겠다. 눈
을 끔벅거리며 말할 기회만 노리던 중이 드디어 어머니의 말허리를 꺾어 버린다.
「……아이 딱하기도 해라. 그러게 말이유……그렇지만 시주하십사고 온 게 아니라……행여 쌀을 살려
나 해서……아아주 무거워서요……」
그런 구슬픈 이야기보다 빨리 거래부터 하고 싶다는 표정이다. 진영은 값싼 동정까지도 인색해진 세상
이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동정을 바라는 어머니가 밉기보다 딱한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말이 미진한 어머니는 좀 어리둥절한 얼굴이다.
「무거워서 어디 가져갈 수가 있어야지요. 좀 짐을 덜고 갈려구요.」
신중은 마루 끝에 바랑을 내리며 의사를 거듭 표시한다. 그제야 중의 수작을 알아차린 어머니는 여태
까지의 감정은 일단 수습하고 치마 밑을 추키며 재빨리 응수다.
「우리도 됫쌀을 팔아먹으니 기왕이면 사지요. 되나 후히 주세요」
중은 바랑을 끌러 놓고 쌀을 되기 시작한다. 어머니는 몹시 쌀되가 야위다고 보채고 중은 됫박 위에다
쌀을 집어 얹는 어머니의 팔을 떼밀며 그러지 말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그럭저럭 거래는 끝난 모양이다.
셈을 마친 어머니는 인사로,
「시님이 계신 절은 어디지요?」
「네? 아아 네. 바로 학교 뒤에 있는 절이지요」
학교 뒤라면 쌀을 팔고 갈 정도로 먼 곳은 아니다.
중이 가고 난 뒤 어머니는 무슨 생각에 잠긴 듯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애 진영아」
나직이 부른다. 진영은 대답 대신 어머니의 눈을 본다.
「문수를 그냥 둘라니 이리 가슴이 메인다. 이렇게 흔적 없이 두다니 …… 절에 올려 주자」
어머니를 쳐다보고 있는 진영의 시선은 그대로 고정되어 있었다.
「절도 가깝고 신당이니 만만하고…… 세상에 너무 가엾어. 아무래도 혼백이 울면서 떠돌아다니는 것
같아 잠이 와야지」
진영은 고개를 돌려 장독대의 해바라기를 바라본다.
한참만에,
「그런데 왜 그리 중을 장삿군 대접을 했어요? 아이를 부탁할 생각을 했으면서……」
진영의 신선은 여전히 해바라기에 있었다. 자기가 하는 말에도 별반 흥미를 느끼고 있는 것 같지 않았
다.
「아따, 별소릴 다 하네. 공은 공이고 신은 신이지. 하기야 뭐 시주 받은 쌀 팔고 가는 그게 진짜 중인
가?」
진영은 그러는 어머니가 미웠다.
「그럼 왜 그런 중이 있는 절에 갈려구 해요?」
「누가 중보고 절에 가나? 부처님보고 가지」
진영은 잠자코 옳은 말이라 생각했다. 그와 동시에 며칠 전에 아주머니가 우선 쓰라고 돈 이만 환을
주면서 성당에 나가지 않는 진영을 나무라던 일이 생각났다. 이렇게 절에 갈 것을 동의하고 보니, 왜 그
런지 아주머니에 대하여 변절(變節)을 한 듯 미안하다. 그리고 돈만 하더라고 당연히 받을 돈을 받았건
만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지 않았던 호의가 빚이 되는 듯싶다. 훨씬 표현적(表現的)이다. 적어도 돈만 낸
다면 절에서는 문수를 위한 단독적인 행사(行事)도 해 주기 마련이다.
진영은 자리에서 후딱 일어섰다.
해가 서산에 아주 기울었다. 거리로 나왔다. 진영은 약국에서 스트렙토마이신 한 개를 사 들었다. 내낸
다니던 Y병원에는 아무래도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약을 산 것이다. 갈월동의 아주머니는 Y병원의
의사가 같은 신자니 믿고 다니라고 했다. 그러나 여태까지 주사분량인 한 병에서 겨우 삼분지 일만 놓
아주고 있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을 안 이상 그 병원에 다시 갈 수는 없었다.
약병을 만지며 길 위에 한 동안 서 있던 진영은 집 근처에 있는 S병원으로 들어갔다. 이웃이기 때문에
의사와 안면쯤은 있었다. 그러나 S병원은 엉터리 병원이었다.
진영은 모든 것이 서툴러 보이는 갓데려다 놓은 듯한 간호원을 불안스럽게 쳐다보며 약병을 내밀었다.
진찰도 하지 않고 주사만 맞으러 오는 손님을 의사는 언제나 냉대한다. 그래서 진영은 애당초 의사를
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환자를 진찰하고 있던 의사가 뒤로 고개를 돌렸을 때 진영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의사가 아니었다. 그 나마도 근처에 사는 건달이었던 것이다. 진자 의사는 그때야 서류 같은 것
을 들고 안에서 분주히 나오더니 바쁘게 밖으로 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청진기를 든 건달을 진영의 눈
살에 켕겼는지 우물쭈물 해치우더니 간호원에게,
「폐니시링 이 그람!」
하고 밖으로 슬그머니 사라진다.
페니실린이라면 병명을 몰라도 만병통치약으로 건달은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진영이 멍청히 섰는데 간호원은 소독도 안한 손으로 아주 서툴게 마이신을 주사기에다 뽑고 있었다.
진영이 정신을 차렸을 때 주사기에 들어가고 있는 액체가 뿌옇게 보였다. 약이 채 녹기도 전에 주사기
에다 뽑은 것이다. 진영은 더 참지 못했다.
「안돼요, 녹기도 전에. 큰일날려구!」
앙칼지게 소리치며 진영은 약병을 뺏어서 흔들었다.
페니실린을 맞으려고 기다리고 앉았던 낯빛이 노란 할머니가 주사기를 들고 엉거주춤하니 서 있는 간
호원을 불안스럽게 보고 있다.
병원 문을 나섰다. 이미 밤이었다.
아까, <큰일날려구> 하면서, 약병을 빼앗던 자신의 모습이 어둠 속에 둥그렇게 그려진다. 참 목숨이란
끔찍이도 주체스럽고 귀중한 것이고 -- 몇 번이나 죽기를 원했던 자기 자신이 아니었던가.
진영은 배꼽이 터지도록 밤하늘을 보고 웃고 싶었다. 그러나 웃음이 터지고 마는 순간부터 진영은 미
치고 말리라는 공포 때문에 머리를 곡 감쌌다. 사실상 내가 미쳤는지도 모른다. 모든 일은 미친 내 눈앞
의 환각(幻覺)인지도 모른다. 지금은 밤이 아니고 대낮인지도 모른다.
진영은 머리를 꼭 감싼 채 집을 향하여 달음박질을 쳤다.
밀짚모자를 쓴 냉차(冷茶) 장수가 뛰어가는 진영의 뒷모습을 얼 없이 바라본다.
달무리진 달이 불그스름했다. 비라도 쏟아질 듯이 뭉뭉한 더운 바람이 불어왔다.
진영의 어머니는 쌀을 팔러 온 중이 가고 난 뒤 백중날을 기다렸다. 백중날은 죽은 사람의 시식(施食)
을 하기 때문이다.
백중 전날에 어머니는 문수의 사진고 돈 이천 환을 가지고 절에 가서 미리 연락을 해 두었다. 그래서
다음 날 아침에는 날이 원해지자 진영이도 과실 바구니를 들고 어머니를 따라 집을 나섰던 것이다.
B국민학교를 돌아 약간 비탈진 길을 올라서니 이내 절 안마당이 보였다. 백중맞이를 하느라고 한창 바
쁜 절에는 동네 아낙네들이 와서 일을 거들고 있었다.
「아이구 정성도 지극해라. 이렇게 일찍부터……」
어머니는 눈에 손수건부터 가져간다.
「스님, 우리 아이 천도 좀 잘 시켜 주세요. 부탁입니다. 너무 가엾어……」
콧물을 짠다. 어젯저녁에 실컷 어머니의 설움을 들었을 주지 중은 새삼스럽게 그 말이 탐탁해질 리가
없다. 주지 중은 극히 사무적으로,
「그런데 첫째로 하갔다던 서장 부인이 아직두 안 오시니 어떡허나」
잠시 생각에 잠긴다.
무슨 서장인지 알 수는 없으나 이 절에 있어서 대단히 소중한 손님인 모양이다. 어머니는 비굴한 웃음
을 띠면서 주지 중을 쳐다본다.
「시님, 그만 우리 아일 먼저 해 주세요」
주지는 한동안 어머니를 보고 있더니,
「……그럼 댁부터 해 드릴까……」
주지는 그렇게 작정하고 마침 지나가는 중을 부른다.
「아우님!」
아무 님이라고 불린 신중은 돌아본다. 얼굴이 쪼글쪼글 쪼그라진 그 신중은 아직도 팽팽한 주지에 비
하여 훨씬 더 늙어 보인다. 게다가 표정마저 앙상하다.
「어젯저녁에 이천 환 낸 분인데 아직 서장 댁이 안 오시니 우선 하나라도 먼저 끝내지요」
주지의 말투는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었다.
늙은 중은 대답 대신 진영의 모녀를 훑어보더니 돈의 액수가 심에 차지 않아서 무뚝뚝하게 그냥 가 버
린다.
진영과 어머니는 법당 옆에 서로 등을 보이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바라다 보이는 산마루에 막 해가 솟고 있었다. 그 영롱한 아침을 진영은 벽화(壁畵)처럼 감동 없이 대
한다.
진영은 최저의 돈을 내고 첫째로 하겠다고 새벽부터 온 것이 얼마나 얌통머리 없는 짓이었던가를 생각
한다.
공양을 들고 젊은 중이 온다.
「여보세요, 그 키 큰스님은 안 계시나요?」
어머니는 쌀을 팔러 온 중을 두고 묻는 말이다.
「그이는 절에 잘 붙어 있지 않아요」
젊은 중은 간단히 대답하고 법당으로 들어간다.
곧 시식 불공이 시작되었다. 진영은 늙은 중이 목탁을 두드리며 조는 듯한 염불을 시작하자 적잖게 실
망했다. 몸집도 크고 목소리도 우렁찬 주지중이 아니었던 것이 섭섭했던 것이다. 기왕이면 굿 잘하는 무
당으로 -- 하는 따위의 기분이었다.
중은 염불을 하면서 열심히 절을 하고 있는 어머니 옆에 멍청히 섰는 진영을 흘겨본다.
보라빛깔의 원피이스를 입은 진영의 허리는 말할 수 없이 가느다랗다. 핏기 없는 얼굴에는 눈만 검다.
중은 여전히 마땅치 않게 진영을 흘겨본다. 진영은 중의 눈길을 느낄 적마다 재촉을 당한 듯이 어색하
게 엎드려 절을 했다. 진영은 중의 마음이 염불에 있지 않고, 잿밥에 있다는 속담같이 지금 저 중의 마
음도 염불에 있지 않고 절에 와서 예배를 하지 않는 내 태도에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 진영은 중과 무
슨 대결이라도 한 듯이 점점 몸이 피로해지는 것이었다.
얼마 동안이 지난 것 같았다. 주지중이 씨근벌떡거리며 법당으로 쫓아왔다.
「아우님 빨리 하시오. 지금 막 서장 댁이 오셨구려. 대강대강 하시오」
주지는 법당 구석에 걸어둔 먹물들인 모시 장삼(長衫)을 입으며 서두르는 것이었다. 늙은 중은 불전(佛
前)에서 영전(靈前)으로 자리를 옮긴다. 제대로 불경이나 끝마쳤는지 의심스러웠다. 아까 공양을 나르던
젊은 중이 이번에는 널따란 그릇을 들고 들어온다. 그는 진영의 모녀를 돌아다보며, 영가 앞으로 오라고
손짓한다.
진영은 문수의 사진이 놓인 앞에 가서 엎드렸다. 차가운 마룻바닥에 처음으로 뜨거운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쏟아지는 것이었다. 문수의 손결이 생생하게 마음속에 느껴진 것이다.
「문수야, 많이많이 먹어라. 불쌍한 내 자식아!」
진영은 어머니의 목소리를 이처럼 슬프게 들은 적은 없었다. 어머니는 향을 꽂고 빳빳한 은행에서 갓
나온 듯한 십 환짜리 스무 장을 영전에 놓았다. 진영도 일어서서 향을 꽂았다. 그리고 돌아섰을 때 중이
목을 길게 뽑아 가지고 영전에 놓인 돈을 기웃거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 빳빳한 새 돈은 흡사 백
환권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진영은 송구스런 생각에서 고개를 푹 수그리고 말았다.
그릇을 들고 온 젊은 중이 돈을 옆으로 밀어 놓으면서 시무룩하게,
「영가 노자가 너무 적군요. 이 세상이나 저 세상이나 그저 돈이 있어야지 동무하고 쓰고 놀다가 돌아
가지 않겠어요?」
진영은 머리 속에 피가 꽉 차 오는 것을 느낀다. 돈을 그렇게 밖에 준비하지 못한 어머니의 인색함을
격심히 저주하는 것이었다.
젊은 중은 들고 온 그릇에다 영가 앞에 차린 음식을 조금씩 덜어놓는다. 나물, 떡, 자반, 과실, 그렇게
차례차례 손이 간다. 마침 먹음직스런 약과에 손이 닿자 별안간 목탁을 치던 중이,
「그건 그만두구려!」
바락 소리를 지른다. 젊은 중은 진영을 힐끗 보면서 총총히 바깥 시식들(施食石)로 음식을 버리러 나가
는 것이었다.
진영은 기가 막혔다. 처음부터 거래임에는 이의가 없었다. 그러나 이쯤 되면 어지간한 감정도 폭발 아
니할 수 없었다. 진영은 양손으로 얼굴을 푹 쌌다. 울음이 터진 것이다. 누구에게도 향할 수 없는 역정
을 그는 울음 속에다 내리 퍼부었다. 울음 속에 그 목을 감던 문수의 손결이 느껴진다. 미칠 듯한 고독
과 그리움이 치솟는 것이었다.
음식을 버리고 돌아온 젊은 중은 과실을 모으며,
「이걸 가져가셔야지. 보자기를……」
하며, 어머니를 돌아본다. 진영은 새빨갛게 충혈 된 눈으로 젊은 중을 노리며,
「일없소. 그만두시오.」
진영의 목소리는 악을 쓰는 것 같았다. 일을 다 미치고 법당밖에 나온 늙은 중이,
「왜 가져온 걸 안 가져가슈」
쳐다보지도 않는 진영이 대신 어머니가,
「뭐 그걸……」
진영의 얼굴을 어머니는 숨어 본다. 늙은 중은 침을 꿀꺽 삼키며,
「댁 같으면 중이 먹고 살갔수」
진영의 눈이 번득였다.
「조반을 자셔야 할 턴데 너무 일러서 찬이 제대로 안 됐어요. 좀 기다리실 까요」
젊은 중은 그런 말을 남기고 가 버린다.
진영은 법당 축돌 위에 주저앉았다. <이 세상이나 저 세상이나 그저 돈이 있어야지요> 하던 말이 되
살아온다. 물론 처음부터 거래였다. 그렇다면 화폐(貨幣)의 액수에 따라 문수에 대한 추모의 정이 계산
(計算)된단 말인가. 진영이 그러한 울분에 젖어 있을 때 말쑥하게 차려 입은 그 서장은 부인인 듯싶은
젊은 여인이 주지 중에게 인도되어 법당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잠깐 ;후 불경 읽는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밖으로 흘러 나왔다. 잠들었던 부처님이 처음으로 일어나서 귀를 기울일 만한 뱃속에서 밀어낸 목소리
였다. 진영은 발딱 일어선다.
「어머니, 그냥 갑시다.」
밥을 얻어먹으려 절에 온 것은 분명히 아니다. 그냥 걸어가는 진영을 만류 못할 것을 아는 어머니는
뜰에 서성거리고 있는 늙은 중에게
「그만 갈랍니다, 시님」
「이크, 아침이나 잡수시지…… 갈려오?」
굳이 잡지는 않았다. 그는 절 문까지 전송을 하며,
「당신네들 같으면 중이 먹고 살갔수」
진영은 울화보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내리막길에서 잡풀을 뽑으며 진영은 말없이 울었다. 여비도 떨어진 낯선 여관방에다 문수를 혼자 두고
가는 것만 같은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이었다.
진영은 불덩어리 같은 이마를 짚는다.
한여름 내내 진영은 앓았다. 애당초 극히 경미하게 발생한 폐결핵이 전연 방치되었기 때문에 점점 악
화되어 갔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다른 병까지 연속적으로 병발하는 것이었다. 찬물만 마셔도 배탈이 났
다. 눈병이 나고 입이 부르트고 하는 것은 일쑤였다. 앓다 못해 귀까지 앓았다. 그리고 수년 내로 건드
리지 않고 둔 충치가 일시에 쑤시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욱신거렸다.
진영은 진실로 하나의 육신이 해체(解體)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 몸서리치는 무서움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쨍쨍하게 내리쬐는 햇볕 아래 늘어진 한 마리의 지렁이 같은 생명이었다.
이러한 육신과 더불어 정신도 해체되어 가는 과정 속에 진영은 있었다.
밤마다 귓가에 울려오는 아이의 울음소리, 산이, 언덕이, 집이 무너지는 소리, 산산이 바스러진 유리 조
각이 수없이 날아와서 얼굴 위에 박히는 환각, 눈을 감으면 내장이 터진 소년 병의 얼굴이, 남편의 얼굴
이, 아이의 얼굴이, 분홍빛, 노랑빛, 파랑빛, 마지막에는 시꺼먼 빛, 그런 빛깔로 차례차례 뒤덮여 가면은
드디어 무한정한 공간이 안개처럼 진영의 주변을 꽉 싸는 것이었다.
소리와 감각과 색채 이러한 순서로 진영의 신경은 궤도에서 무너져 나갔다.
진영은 그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내버려두었던 몸을 끌고 H병원으로 갔다. 그러나 그곳에도 일주일이
멀다고 가는 것을 그만 중지하고 말았던 것이다.
얼마 남지 않은 돈을 생활비에나 써야 한다는 이유도 있었다. 그러나 직접의 동기는 외국제 주사약의
빈 병들을 팔아 버리는 장면을 본 때문이다.
Y병원에서는 주사약의 분량을 속였고, S병원은 엉터리였다. 그리고 H병원에서는 빈 약병을 팔았다.
진영은 간호원이 빈 병을 헤아리고 있을 때 직감적으로 가짜 주사약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H병
원만이 빈 약병을 파는 것은 아니다. 또 그 빈 병만 하더라도, 반드시 가짜 약병으로 사용된다고 말할
수도 없다. 잉크병으로, 물감 병으로, 혹은 후춧가루 병으로 흔히 이용되고 있다. 그렇지만 사실 거리에
는 가짜 주사약이 범람하고 있는 것이다. 상인들은 의연히 그런 가짜를 진짜 속의 진짜라고 나팔불었다.
진영은 그것을 생각하니 인술이라는 권위를 지닌 의사가 그런 상인 따위들 같아서 신뢰감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물론 아무리 대수롭잖은 빈 병일지라도 그것은 전연 그 의사의 소유이며, 처분의 자유는 그의
기본권리에 속한다. 그래도 진영은 그의 기본적 권리보다 무수히 마치 페스트처럼 눈에 보이지 않게 만
연(蔓延)되어 가는 가짜 주사약 생각만 하는 것이었다.
해바라기의 꽃이 씨앗을 안았다.
며칠 전에 아주머니가 원금만은 돌려주겠다던 약속대로 마지막 남은 만 환을 가지고 왔다. 이것으로
원금 십만 환은 다 받은 셈인데 조금씩 보내준 돈은 지금 집에 한 푼도 있지 않았다.
아주머니는 돈을 주고 난 다음 가려고 일어서면서 문수의 위패(位牌)를 절에다 모신 데 대한 불만을
했다. 그리고 왜 그런 우상을 숭배하느냐고 나무라는 것이었다. 진영은 어느 것이면 우상이 아니냐고 말
하고 싶었으나, 곧 말하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 버리고, 그저 멍멍히 아주머니를 쳐다보았던 것이다. 자
기 자신이 지닌 모순을 설명할 도리가 없어서 그랬던 것이다.
추석날이었다.
진영은 어머니가 절에 가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도리어 정성을 들여서 사다 놓은 실과를 바구니에 차
곡차곡 넣어 주었다. 배, 사과, 포도, 밤, 대추, 먹음직한 과자도 서너 가지 있었다.
어머니가 바구니를 들고 걸어가는 뒷모습을 문 앞에서 바라보고 섰던 진영은, <당신네 같으면 중이 먹
고 살갔수> 하던 말이 문득 생각났다. 문수가 먹을 것을 중이 먹다니 아깝다. 밉살스럽다. 그러나 진영
은 다음 순간 부끄럼 때문에 얼굴이 붉어졌다. 이러한 파렴치한 생각을 내가 왜 했던고…….
진영은 문을 걸고 뒷산으로 올라갔다. 울고 싶었고, 외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산에는 게딱지만한 천막집이 군데군데 서 있었다. 꽃 한 송이 나무 한 뿌리 볼 수 없는 이곳에는 벌써
하나의 빈민굴이 형성되어 말이 산이지 이미 산은 아니었다.
짜짜하게 괸 샘터에서 물을 긷는 거미같이 가는 소녀(少女)의 팔, 천막집 속에서 내미는 누렇게 뜬 얼
굴들 -- 진영은 울고 싶은 마음에서 집을 나와 산으로 올라온 자기 자신이 여기서는 차라리 하나의 사
치스런 존재였다는 것을 뉘우친다.
진영은 한참 올라와서 어느 커다란 바위에 가서 앉았다.
산등성이에서 바라다 보이는 시가(市街)는 너절했다. 구릉을 지은 곳마다 집들이 마치 진딧물 모양으로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 속에는 절이 있고, 예배당이 있고, 그리고 서양적인 것, 동양적인 것이 과도기
(過渡期)처럼 있고, 조화를 깨뜨린 잡다한 생활이 있었다.
이러한 도시(都市)속에 꿈이 있다면 그것은 가로수(街路樹)라고나 할까! 보랏빛이 서린 먼 산을 스쳐
가는 구름이라고나 할까.
진영은 얄팍한 턱을 괸다.
꿀벌처럼 도시의 소음이 귓가에 울려오는데 고급 승용차가 산장(山莊)이 있는 고개로 미끄러지고 있었
다. 진영은 산등성이에서 그것을 보니 그것은 별것이 아닌 한 마리의 딱정벌레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꼬불꼬불 기어가는 딱정벌레.
진영은 새삼스레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무의미하기 짝이 없는 충동들이다.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진영
은 이유 없이 자기를 다잡아 보았다. 사실 그러했다.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딱정벌레 같아서 어쨌단 말
이가, 진딧물 같고, 가로수, 구름, 그래서……
진영은 머리를 쓸어 올린다.
모든 괴로움은 내 속에 있었다. 모든 모순도 내 속에 있었다. 신도, 문수의 손결도 내 속에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곳에도 실제 있지는 않았다. 나는 창기처럼 절조 없이 두 신전에 참배했다. 그리고
제물과 돈을 바쳤다. 그러나 그것 역시 문수와 나의 중계를 부탁한 신에게 주는 수수료(手數料)였는 지
도 모른다. 그 수수료는 실제에 있어서 중의 몇 끼의 끼니가 되었다. 결국 나는 나를 속이려고 했고, 문
수는 아무 곳에도 있지 않았을 것이다.
진영은 이마 위에 흘러내리는 숱한 머리를 다시 쓸어 올린다. 파르스름한 손이 투명할 지경이다.
신비라고, 예고라고, 꿈, 아니야 그것은 우연의 일치였지, 문수의 죽음,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인위적
인 실수 아니었던가. 인간은 누구나 나이 들면 죽는다고? 물론 죽는 게지, 노쇠해서 죽는 거지……설령
아이가 그대 이미 죽을 목숨이었다고 치자. 그래도 그렇게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도수장의 망아지처럼
…… 사람을, 사람을 좀 미워해야겠다.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르는 신을 왜 생각은 해. 아니 아까는 없다
고 하고선…… 아니야 모르겠어. 사람을, 사람을 좀 미워해야겠다. 반항을 해야겠다. 모든 약탈 적인 살
인자(殺人者)를 저주해야겠다.
진영은 술이라도 마신 사나이처럼 두서도 없는 혼잣말을 언제까지나 중얼거리고 있었다.
진영의 해사한 얼굴에 그늘이 진다. 한없이 높은 가을 하늘에 구름이 지나가는 것이었다. 시가에는 마
치 색종이를 찢어놓은 것같이 추석 치레가 오가고 있었다.
진영의 열에 들뜬 눈이 그것을 쳐다보며 일어선다. 그에게는 이미 반항 정신도, 아무 것도 없었다.
허황한 마음의 미로(迷路)가 끝없이 눈앞에 뻗어 있을 뿐이었다.
진영은 버릇처럼 머리를 쓸어 올리며, 산을 내려온다. 천막집에서 누렇게 뜬 얼굴들, 진영은 또다시 이
곳에 있어서는 내 자신이 차라리 하나의 사치스런 존재라는 아까의 뉘우침을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음력설이 임박해진 추운 날, 갈원동 아주머니가 목도리를 푹 뒤집어쓰고 찾아왔다. 웬일인지 몸가짐이
평소보다 좀 산란해 보였다.
「나 의논할 게 좀 있어서 왔는데…… 참 기가 막혀서……」
「……?」
아주머니는 말을 꺼내기가 거북한 듯이 가만히 앉았다가,
「저, 말이야, 돈을 좀 빌려준 사람이 죽었구나. 어떻게 해?」
진영은 의심스럽게 아주머니를 쳐다본다.
「지난 오월 달에 가져 간 돈을 이자 한푼 못 받고 그만……」
진영의 변해 가는 표정을 보고 아주머니는 입을 다물어 버린다. 오월이면 진영의 곗돈을 찾을 달이다.
그리고 계가 끝나는 달이기도 했다. 그것뿐이 아니다. 벌서 몇 달 전부터 곗돈을 받으려고 몸이 달아서
다니던 사람이 몇 명이 있었던 것이다.
「빌려 준 돈이 얼마나 돼요?」
진영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오십만 환이야.」
진영은 속으로 놀랐다. 계를 해서 빚만 뒤집어 쓴 줄 알았는데 그런 대금의 비밀 거래를 하고 있었다
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진영은 차갑게 아주머니를 쳐다본다.
아주머니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자식도, 남편도 없는 내겐 그것만이 남겨진 것이었어. 낸들 얼마나 돈을 떼었니? 설마 내가 잘되면
빚이야 갚고 살겠지만, 그때 그 돈마저 내주게 되면 난 아주 영영 파멸이지」
진영은 어디 밑천 든 장사였더냐고 오금을 박아 주고 싶었다.
아주머니는 한참만에 눈물을 닦고 일의 경위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 내용인즉 죽은 사람은 돈을 쓴
회사의 전무였으며, 오월 달에 빌어 간 오십만 환의 이자라고는 한푼도 받아본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불안해진 아주머니는 전무에게 원금을 뽑아 달라고 졸랐으나 영 내놓지 않아서 생각다 못해 같은 신자
에게 의논을 했더니 그이의 남편인 김씨가 일을 봐 주겠노라 하기에 일을 맡겼다는 것이다. 그 김씨란
사람이 수단이 비상하여 마침내 사장 명의로 된 약속 어음을 받게 되고, 그 며칠 후에 전무는 교통 사
고로 죽은 것이라 한다. 사장 명의로 된 약속 어음을 받은 것은 무엇보다도 다행한 일었으나, 웬 까닭인
지 심씨란 사람이 약속 어음을 도무지 주지 않고 무슨 협잡을 하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의심한다거나 비위를 거슬러 놓는다면 돈 준 사람도 없는 지금, 여자인 내
가 어떻게 사장이란 사람에게 받아낼 수도 없고, 이렇게 속이 탄다고 하면서 아주머니는 가슴을 치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진영은,
「대관절 그 전무란 사람을 어떻게 알고서 그런 대금을 주었어요?」
「저…… 저 왜 그 상배 있잖아, 그 상배 아버지야」
「뭐예요? 영세 받았다는 상배 학생 말이에요?」
아주머니는 얼굴이 빨개진다. 진영은 기가 딱 막혔다. 그리고 보니 사업 때문에 상배 아버지가 서울로
오게 될 거라고 하던 말이 생각났다.
「사뜻하게 종교를 이용했군요」
아주머니는 진영의 눈길이 부신 듯이 눈을 내려 깐다.
「글세 지금 생각하니 모두가 계획적이었어. 영세 받은 것만 해도……」
「신용 보증으론 종교보다 더 실한 게 있어요?」
아주머니는 비꼬는 진영의 말에 풀이 죽는다. 진영은 풀이 죽는 아주머니로부터 눈을 돌렸다.
영세를 받았기 때문에 믿고 돈을 준 아주머니, 신자이기 때문에 믿고 일을 맡긴 아주머니, 단순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진영은 다시 아주머니를 쳐다보았다. 그의 약점을 추궁할 마음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서 어떡허실 작정이에요?」
「글쎄 말이다. 그래서 의논이지.」
「지 생각 같아서는 김씨가 일은 봐 주되 어음은 아주머니가 가지시는 것이 좋을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어음은 찾아간다고 일을 안 봐주면?」
「그땐 벌써 그이에게 딴 야심이 있었다고 봐야지요」
「그럼 김씨가 일 안 봐 줄 적에 너가 좀 협조해 줄 수 있을까? 여자 혼자니 아무래도 호락호락 보일
것 같아」
「글세……」
그런 일에는 아주 딱 질색이었다. 그러나 진영은 약점을 안 후 거절을 해버리는 것이 무슨 악마(惡魔)
취미 같아서 아무렇지 않는 얼굴로,
「같이 저도 가지요」
그러자 아무 것도 모르는 어머니가 점심을 차려 왔다. 점심을 먹으면서 아주머니는 한결 마음이 후련
해졌는지 여려 가지 잡담을 꺼냈다.
「글세 돈이 있어도 문제야. 이제 당초에 겁이 나서 남 줄 생각이 없어」
진영은 무표정하게 밥을 삼키고,
「아무 말씀 마시고 돈 찾거든 장사허세요. 체면이고 뭐고…… 저도 자본이나 장만해서 장사할래요」
「너야 뭐 취직하면 되지」
「취직이 그리 쉬운가요? 하다 안되면 거리 빵이라도 구워 팔아야지요」
「너야 공부 많이 했으니까 하려면 취직 못할 것 없잖아? 난 정작 장사라도 해야겠어. 그러나 돈벌이
론 계가 제일이야. 힘 안 들고……」
아주머니는 숟갈을 놓고 성냥개비로 이빨을 쑤시면서 말한 것이었다.
진영은 아무렴 그렇겠지. 그런 베짱이면……하다 말고 아주머니의 눈을 들여다본다. 아무런 악(惡)의
그늘도 없는 맑은 눈이었다.
「아무튼 돈을 벌어야 해. 돈이 제일이야. 세상이 그런걸……」
이번의 말투에는 어느 사인지 모르게 저지른 자신의 일에 대한 짜증과 반발 같은 것이 있었다.
「그럼. 옛날 속담 말마따나 자식을 앞세우고 가면 배가 고파도 돈을 지니고 가면 든든하다고 안하던
가」
어머니의 맞장구다.
진영은 가벼운 현기증을 느낀다. 시야 속에서 그들의 얼굴을 지워버리듯이 얼른 고개를 돌린다.
「형님, 이래서 천당 가겠습니까? 돈, 돈 하다가 호호……」
아주머니는 까르르 웃으며 일어서서 장갑을 낀다.
진영은 그 웃음 속에서 또 불안과 저포에 대한 반발을 느낀다. 진영은 고개를 들어 아주머니를 쳐다보
았다. 역시 괴롭고 고독한 사람이고…….
아주머니가 가 버린 뒤 진영은 자리에 쓰러졌다. 솜처럼 몸이 풀어진다.
진영은 방안에 피운 구멍탄 스토우브에서 가스가 분명히 지금 바에 시고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방안
에 가득히 가스가 차면 나는 죽어 버리는 거라고 생각한다.
어느새 진영은 괴로운 잠이 드는 것이었다.
내장이 터진 소년 병이 꿈에 나타났다. 진영은 꿈을 깨려고 무척 애를 썼다.
「모래가 명절인데 절에도 돈 천 환이나 보내야겠는데……」
어렴풋이 들려오는 어머니의 말소리다. 진영은 몸을 들치며 눈을 떴다.
「귀신이나 사람이나 매한가진데…… 남들은 다 저 몫을 먹는데 우리 문수는 손가락을 물고 에미를 기
다릴 거다. 」
잠이 완전히 깬 진영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외투와 목도리를 안고 마루에 나와 그것을 감았
다.
진영은 부엌에서 성냥 한 갑을 외투주머니에다 넣고 집을 나갔다.
오랫동안 마음 곳에서만 벼르던 일을 오늘에서야말로 해치울 작정인 것이다. 진영은 눈이 사복사복 밟
히는 비탈길을 걸어 올라간다. 진영은 고슴도치처럼 바싹 털이 솟은 자신을 느낀다.
목도리와 외투 자락이 바람에 나부낀다. 그러면은 참나뭇가지 위에 앉은 눈이 외투 깃에 날아 내리는
것이었다.
진영은 절로 가는 것이다.
진영이 절 마당에 들어갔을 때, <당신네들 같으면 중이 먹고 살갔수>하던 늙은 중이 막 승방에서 나
오는 도중이었다. 절은 괴괴하니 다른 인적기는 통 없었다.
진영은 얼굴의 근육이 경련하는 것을 의식하며, 중 옆으로 다가선다.
「저말이지요, 저이들이 이번에 시골로 가는데 아이 사진과 위패를 가지고 가고 싶어요」
고개를 푹 숙인 채 진영은 나지막하게 말한다. 허옇게 풀어진 눈으로 진영을 쳐다보던 중이 겨우 생각
이 난 모양으로,
「이사를 하신다고요? 그럼 어떠우. 그냥 두구려. 명절에 우편으로라도 잊어버리지 않으면 되지」
진영은 숙인 고개를 발딱 세우더니 옆으로 홱 돌리며,
「참견할 것 없어요. 사진이나 빨리 주시오!」
쏘아붙인다. 중은 좀 어리둥절해 하더니 무엇인지 모르게 중얼중얼 씨부렁거리며 법당으로 간다.
이윽고 중이 문수의 사진고 위패를 가지고 나오자 진영은 그것을 빼앗듯이 받아들고 인사말 한 마디
없이 절문 밖으로 걸어나간다.
화가 난 중은 진영의 뒷모습을 꼬느어보다가 중얼중얼 씨부렁거리며 뒷산으로 간다.
진영은 중에게 화를 낸 것은 아니었다. 다만 진영으로서는 빨리 사진을 받아 가지고 절문 밖으로 나가
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초조했던 것이다.
진영은 비탈길을 돌아 산으로 올라간다. 올라가면서 진영은 이리저리 기웃거린다. 어느 커다란 바위 뒤
에 눈이 없는 마른 잔디 옆에 이르자 진영은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그리하여 문수의 사진과 위패를 놓
고 물끄러미 한동안 쳐다본다.
한참 만에 그는 호주머니 속에서 성냥을 꺼내어 사진에다 불을 그어댄다. 위패는 이내 사르어졌다. 그
러나 사진은 타다 말고 불꽃이 잦아진다. 진영은 호주머니 속에서 휴지를 꺼내어 타다 마는 사진 위에
찢어서 놓는다. 다시 불이 붙기 시작한다.
사진이 말끔히 타 버렸다. 노르스름한 연기가 차차 가늘어진다.
진영은 연기가 바람에 날려 없어지는 것을 언제까지나 쳐다보고 있었다.
<내게는 다만 쓰라린 추억이 남아 있을 뿐이다. 무참히 죽어 버린 추억이 남아 있을 뿐이다>
진영의 깎은 듯 고요한 얼굴 위에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겨울 하늘은 매몰스럽게도 맑다. 참나무 가지에 얹힌 눈이 바람을 타고 진영의 외투 깃에 날아 내리고
있었다.
<그렇지. 내는 아직 생명이 남아 있었지. 항거할 수 있는 생명이>
진영은 중얼거리며 참나무를 휘어잡고 눈 쌓인 언덕을 내려오는 것이었다.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 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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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 박상우
밤 열시가 가까워질 무렵부터 우리는 조금씩 지쳐 가기 시작했다. 취한 게 아니고 그것은 분명히 지쳐
가는 거였다. 어느 누구도 우리가 비워 낸 생맥주 잔의 개수를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고, 어느 누구도 자
신의 음주량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분명히 취기와는 종류가 다른 것이었다.
취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정신적인 긴장감이 오히려 가중된 것인지도 혹은 모를 일이었다. 마시다 남겨
둔 생맥주잔 언저리에 말라붙은 허연 거품과 재떨이에 수북하게 쌓인 담배 꽁초가 쾌연하지 못한 좌중
의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해 주는 것 같았다. 새로운 연대의 벽두, 그리고 21년 만의 폭설을 빙자해서 만
나자는 전화를 맨 처음 걸어 온 사람이 우리 중 누구였던가. 돌아보고 후회할 때는 언제나 후회해도 소
용이 없는 때였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은 아무것도 새로워질 게 없는 시간. 낮은 조도의 갓등 밑에서,
우리 모두의 의식은 그 갓등의 조도만큼이나 희미하게, 아주 희미하게 가무러져 가고 있을 뿐이었다. 피
곤함과 안온함, 차가운 것과 따뜻한 것, 맑은 것과 탁한 것, 어두운 것과 밝은 것 따위 묘한 감정적 기
류들이 좌중에서 은밀하게 교차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잠시 뒤에는 그 모든 것이 한데 뒤엉켜
대단히 묵중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고, 그때부터 우리는 아무런 뜻도 없는 눈길로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
기 시작했다. 언어 뒤의 허무, 그리고 그것을 분명하게 확인케 해주는 언어 이전의 공감대. 출입문 바깥
쪽에서는 여전히 주먹만한 함박눈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이런 날 페기 리의 노래를 들으면 좋을텐데.... 출입문 바깥쪽의 탐스런 눈송이를 내다보던 우리 중의
하나가 혼잣말처럼 낮게 중얼거렸다. 굵고 탐스런 눈송이가 녹아, 그의 눈빛을 빈틈없이 촉촉히 적시고
있는 것 같았다. 쟈니 기타? 부유스름한 허공을 올려다보며 담배 연기를 피워 올리던 다른 하나가 물었
다. 퇴폐적이야. 페기 리를 생각하고 있던 친구가 고개를 끄덕이자 묵묵히 앉아 있던 다른 하나가 입을
열었다. 그러자 또 다른 하나가 양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끼여들었다. 그럴 수도 있는 거지. 항상 그렇데
단정적이야 할 필요가 어딨어? 그만둬. 맨 구석 자리에 앉아 있던 하나가 듣기 싫다는 듯이 머리를 가
로 저으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러고 나서 그는 신경질적인 동작으로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러자 그
맞은편에 앉아 있던 다른 하나가 안경을 밀어 올리며 놀란 눈으로 그를 건너다보았다. 무엇인가, 얘기가
간신히 맥락을 되찾아갈 듯하다가 또다시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저녁 내내, 우리가 자리를
함께 한 이후 이게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일이었다. 좌중의 하나가 갑작스럽게 고개를 푹 떨구며 한숨
을 길게 내쉬었다. 그 자신이 좌중의 답답한 분위기를 자진해서 시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난감하군....
좌중의 하나가 낮게 중얼거렸지만 아무도 그 말의 주인을 확인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 중얼거림에 우리
모두가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무엇을 난감해 하고 있단 말인가. 우리는 아무것
도 확인하려 하지 않았다.
눈이 밤새도록 이렇게 내리면 내일은 고립되는 곳이 많겠군. 밖을 내다보지도 않은 채 담배를 피워 물
고 있던 하나가 반쯤 비워진 술잔을 들여다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다른 둘이 무심한 어조로 그
말의 뒤를 이었다. 21년만의 폭설이래. 아까 퇴근할 무렵에 주의보가 경보로 바뀌었어. 구석 자리에 앉
아 있던 다른 하나가 근심스런 표정으로 손목을 들어 시계를 보았다. 그러고 나서 바짝 긴장된 눈빛으
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좌중의 어느 누구도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는
지, 그는 문득 앞에 놓여 있는 맥주잔을 들어 올려 기갈들린 사람처럼 그것을 들이켜대기 시작했다. 그
냥 집에나 일찍 들어가는 건데.... 이 나이에 눈이 온다고 굳이 만나야 하는 건가? 길이나 안 막혔는지
모르겠군.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모두 남의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거기서 말이 끊어지고, 다시
한동안의 시간이 흘렀다. 침묵의 그늘에서 가끔씩 술잔이 흔들리고, 시간의 여백에서 모락모락 담배 연
기가 피어 올랐다.
눈(目)을 바늘로 콕 찔러 앞을 못 보게 하면 뭐가 되는 줄 알아? 문득, 좌중의 분위기를 바꿔 보겠다는
표정으로 우리 중의 하나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글자를 묻는 거야? 시큰둥하게 앉아
있던 맞은편의 하나가 되물었다. 그래 글자로 말해봐. 모르겠는걸. 머리를 갸웃거리며 다른 하나가 중얼
거렸다. 배워. 백성 민(民)자야. 제기랄, 난 또..... 얘기의 흐름을 말없이 지켜 보고 앉아 있던 하나가 어
처구니없다는 듯이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넌덜머리가 난다는 표정이었다. 넌덜머리가 날 만도 하다
는 표정으로 나머지도 모두 그와 유사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사소한 농지거리를 통해 그는 무엇을 되
살려 내려 한 것일까. 불행하게도 이제 우리는 정치적인 관심사를 드러내는 그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결코 호의적일 수가 없는 사람들이 되어 있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지난 연
대 내내 우리가 정치적인 관심사로 만날 때마다 침 튀기고 핏대 올렸었다는 사실도 또한 반추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반추하지 않아도 되새겨지고, 되새겨질 때마다 견딜 수 없는 수치감을 느끼게 하는데,
도대체 어떤 반편이 같은 인간이 그런 것을 또다시 입에 담으려 한단 말인가. 상대적인 모멸감 때문이
아니라, 저마다 키워 온 스스로의 환상에 기만당한 것 같다는 자괴감 때문에 우리는 괴로워하고 있었다.
현실과 환상은 도대체 어떤 의미에서 다를 수 있는 것일까. 지난 연대 내내 우리는 형언할 수 없는 환
상에 뜨겁게 사로잡혀 있었고, 이제 그것은 빈틈없이 깨져 버린 것이었다. 그 깨어진 환상 속에 우리들
의 현실, 우리들의 새로운 연대라는게 던져져 있을 뿐이었다. 그게 아니면 새로운 연대라는 또 다른 환
상 속에 우리 모두가 다시 한 번 던져져 있는 건지도 혹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건 아무래도 좋
았다. 새로운 연대라는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이제 우리들에게 있어 정치란 그저 혐오의
대상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취급당하고 있었으니까 --- 혐오의 대상에게 우리가 할 수 있
는 일은 오로지 생각날 때마다 한 번씩 침을 뱉어 주는 그 일밖에 달리 더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었다.
앞으로 내 앞에서 정치의 '정'자도 꺼내지 마. 그런 얘기를 꺼내는 새끼는..... 그런 새끼는 그냥 두지
않겠어. 지난 연대가 막을 내리기 서너 달쯤 전의 어느 날 밤이었다. 그날도 우리는 오늘처럼 모여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회사를 끝내고 늘 모이는 종로 뒷골목의 생맥주집에 모여 앉아, 우리들의 만남이
늘 그래왔다시피, 그날도 역시 정치적인 관심사를 대화의 소재로 삼고 있었다. 그 무렵까지도 우리들의
관심사는 여전히 정치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기울어져 있었으므로 달리 더는 어째 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이미 우리는 깊은 무력감에 사로잡혀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폭발적인 것은 확
실히 순간적이고, 그리고 그 끝이 이를 데 없이 허망한 것이었다. 장마철의 쓰레기 더미처럼 걷잡을 수
없이 밀려 나오던 그 천태만상의 논리와 주의(主義)에 어느 누가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혀
달린 인간이면 누구나 주의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고, 입 달린 인간치고 논리없는 인간이 없는 것 같았
다. 정치에 대한 혐오감이 언제부터 왜 생겨났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우리는 그 무렵의 그 몸서리쳐지
던 정황을 다시 한 번 입에 담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 시절에 횡행하던 그 수다한 주의를 하나로 뭉뚱
그려 '똥통 속의 넝마주의'라고 마냥 비아냥거리며, 그러면서도 참담한 표정으로 때마다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넝마주이에게도 넝마주의가 있는 시대는 행복한가?
그날 밤 우리들의 모임에서 생겨난 그 최초의 불상사도 결국은 그런 심리적 정황이 그대로 반영된 결
과일 것이었다. 모든 것의 연장 선상에서, 그날 우리 중의 한쪽에서는 정치에 대해 '이제는'이라는 회의
론을 폈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래도'라는 명분론을 전개해 나갔다. 회의론을 펼치는 쪽에서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는 여러 가지의 명세를 조목조목 열거했고, 명분론을 펼치는 쪽에서는 도피적 경향과 방관적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는 시대적 당위성을 강력하게 역설했다. 그러나 이 시대의 도처에서 터져 나오는
모든 종류의 정치적 논쟁이 그러하듯이, 그 양분화된 주장 자체는 털끝만큼도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회
의론 쪽의 공격 목표가 전방위적(全方位的)이라는 것도 결코 새로운 것일 수 없었다. 악에 맞서겠다고
나선 인간들이 악에 물들어 가고, 적과 대항하겠다고 나선 인간들이 적을 닮아 가고, 무엇을 염두에 둔
무엇은 결국의 그 무엇과 동질화되어 버리는 세상에 대해 철저하게 회의한다는 것이 어찌 새로운 것일
수 있겠는가. 세상이 어차피 그런 것 아니겠느냐, 그런 말 한마디면 아무런 사족도 더 이상은 필요치 않
을 것이었다. 세상이 어차피 그런 거니까. 그러니까,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 모두가 더욱더 정치적인 관
심을 고양시켜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역설의 가능성은, 그리하여 있는 그대로가 명분론 쪽의 공격 가능
성으로 순식간에 돌변해 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논쟁이 언쟁이 되고, 언쟁이 감정적인 대립으로 바
뀌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리고 감정적인 대립이 육체적인 격돌로 태를 바꾸는 것
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논쟁을 대표하던 우리 중의 둘이 어느 순간부터인가 언쟁의 주체가 되고, 그들이
다시 감정 대립의 선봉이 되고, 그러다가 끝내는 멱살잡이까지 벌이게 된 것인데, 놀랍게도 그 모든 진
행 과정에 소요된 시간이 불과 한 시간도 되질 않았다. 술잔이 떨어져 깨지고, 탁자가 뒤엎어지고, 드디
어 나머지 모두가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우리 중의 둘은 어느새 서로의 멱살을 움켜 쥐고
정신없이 돌아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끝나고 났을 때, 가방을 들고 먼저 자리를 뜨면서 회의
론 쪽의 대표적인 인물이 독오른 목소리로 모두에게 선포했다. 앞으로 내 앞에서 정치의 '정'자도 꺼내
지 마. 그런 얘기를 꺼내는 새끼는.... 그런 새끼는 그냥 두지 않겠어.
그날 그 말을 듣고 어째서 명분론 쪽에서 아무런 반응도 나타내질 않았는지, 그 뒤로도 우리는 오랫동
안 그 이유를 감지할 수 없었다. 명분론 쪽에 서 있던 당사자마저도 그 이유를 설명하지 못했으니까, 나
머지는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다만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거기에 일종의 심리적 동조 의식, 다시 말
해 논쟁을 위한 논쟁으로 어쩔 수 없이 상반되는 견해를 취했지만, 명분론의 이면에도 역시 회의론적인
요소가 다분히 내재돼 있었으리라는 짐작만 어렴풋이 해 나갔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짐작은 당사자들
을 통해서가 아니라 현실을 통해 분명한 사실로 확인되었다.
이제 그만 일어나지? 여전히 함박눈이 퍼부어 대는 밖을 내다보던 우리 중의 하나가 좌중을 둘러보며
어색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안쪽 구석 자리에서 서로 머리를 맞대고 무슨 얘기인가를 은밀하게 주고
받던 둘이 놀란 듯이 머리를 들어 올렸다. 나머지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그저 그럴까 어쩔까 하는 표정
을 지으며 은근히 좌중의 분위기를 살폈다. 그러나 일어나자고 제안한 친구가 가방을 메고 먼저 일어나
자 나머지도 하나씩 둘씩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기 시작했다.
우리가 밖으로 나섰을 때 시간은 어느덧 열한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시간이 늦
었으니까'라는 얘기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생맥주집 출입구 부근에서 한 발짝도 더 내딛지 못한
채, 우리는 한동안 넋나간 사람들처럼 바깥쪽을 내다보며 서 있었다. 아무도 어디로 갈까 라고 묻지 않
았고, 어느 누구도 가자고 먼저 제의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제 그만 헤어져 집으로 가자는 얘기를 꺼
내는 사람도 없었다. 그저 의식의 흐름이 순간적으로 멎어 버린 사람들처럼, 그렇게 몽롱한 표정으로 서
있기만 했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그 의식의 공백으로 주먹만한 눈송이들을 퍽퍽 소리를 내지르며 무수
하게 날아와 박히는 것 같았다.
어디 가서 한잔 더 할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난 뒤에, 앞 쪽에 서 있던 우리 중의 하나가 문득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러나 그 제안에 선뜻 동의하고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때 뒤쪽에 서 있던 하나가 담배를 피워 물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곳에 언제까지 이렇게 서 있겠다
는 거야? 그리고 나서 그는 담배를 입에 문 채 퍼부어 대는 눈밭 속으로 자신이 먼저 발을 내딛었다.
그러고는 그것이 독자적인 결의라는 걸 분명히 하려는 듯 뒤로 돌아보지 않고 골목을 빠져 나가기 시작
했다. 국도로부터 한 블록 뒤쪽, 네온 사인이 즐비한 유흥가 골목은 예상 밖으로 썰렁했다. 초저녁에 물
결을 이루며 넘실거리던 젊은이들이 썰물처럼 빠져 나가고, 이제는 네온 사인의 불빛들만 졸듯이 깜빡
이고 있을 뿐이었다. 쏟아져 내리는 눈발 속에서 그 불빛들이 잘게 부서지고, 그 잘게 부서진 불빛들이
형형색색의 눈꽃이 되어 곳곳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국도를 향해 아주 천천히 우리는 걸음을 옮겨 놓았다. 서로의 보폭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하나는
앞서 가고, 둘은 그 뒤를 따라가고, 나머지 셋은 앞선 자들이 가는 길을 그저 따라가는 듯
한 형국이었다.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걷는 사람도 없었다. 하나같이 묵묵히, 그러면서도 무거운 등짐을
짊어진 사람들 같았다. 얼핏얼핏 내리는 눈발 속으로 어제의 우리들이 다가오고, 다가오다가 순간적으로
등을 보이며 멀어져 가기도 했다. 어제까지 어깨를 겯고 걷던 길이 오늘 갑자기 낯설게 여겨지는 이유
를 우리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아무런 거리감도 느끼지 못
하던 사람들에게서 어느 날 갑자기 숨막히는 단절감을 느껴야 하는 이유를 또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
다. 이미 잃어버린 것과 앞으로 잃어버릴 것. 그리고 다가오는 것과 멀어져 가는 것. 그런 것들 속에 낯
선 우리들이 던져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할까? 맨 앞에 서서 걷던 친구가 전철역 입구에서 걸음
을 멈추고 나머지 사람들을 기다리다가 물었다. 무엇인가, 어쨌거나 이제는 결정을 해야 할 순간이라는
표정을 그는 짓고 있었다. 어쩔까? 어디 가서 한잔 더 할까? 우리 중의 하나가 나머지를 둘러보며 조심
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의 말이 아주 잘게 부서져 눈송이보다 가볍게 허공으로 폴폴 날아오르는 것 같
았다. 그런 물음에 익숙한 사람은 우리 중에 아무도 없을 것이었다. 2차, 3차 신명나는 대로 술을 마시
러 몰려 다니던 그때가 언제였던가. 아무런 결정도 내리질 못한 채, 우리는 허전한 모습으로 한동안 서
로의 눈치만 살피며 서 있었다.
젠장, 어디 가서 한잔 더 하자구! 짜증스럽다는 듯이 우리 중의 하나가 갑작스럽게 언성을 높였다. 그
러나 그의 제안에 나머지가 동의하고 자시고 할 겨를도 없이, 그때 우리 중의 하나가
결연한 목소리로 잘라 말했다. 난 안돼. 안돼? 우리 중의 하나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밝히고 모임에서 과감하게 이탈하려 한다는 게 사뭇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진
모양이었다. 내일 이사해야 돼. 어디로 가는데? 우리 중의 또 다른 하나가 되물었다. 벽제. 이미 마음을
굳힌 듯 그는 표정 없는 얼굴로 지극히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럼 가 봐야겠군.
어쩔 수 없는 표정으로 또 다른 하나가 중얼거렸다. 미안해. 먼저 갈게. 손을 한 번 들어 보이고, 그러고
나서 그는 곧바로 지하 전철역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깊은 충격을 받은 듯 나머지 모
두가 예리한 눈빛으로 그의 뒷모습을 지켜 보았고, 이윽고 그의 뒷모습이 사라져 버린 뒤에는 갑작스럽
게 망연자실한 표정이 되어 서로를 쳐다보았다. 지난 연대에 관한 우리들의 기억 속에 저런 독자적인
이탈이 있었던가. 겨울나무로 가자. 망연함을 일깨우듯 그때 우리 중의 하나가 행선지를 제시했고, 그제
서야 우리는 파란불이 켜진 횡단 보도를 빠른 걸음으로 건너기 시작했다. 국도는 이미 그 노면이 빈틈
없이 얼어붙어 있었고, 그것은 인도로 올라선 뒤에도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궁형으로 휘어진 인도를
따라 잠시 걸은 뒤에 우리는 다시 한 번 횡단 보도를 건넜다. 우리가 종로통에서 만날 때마다 거의 예
외 없이 들르곤 하는 목조 카페가 바로 그 건너편의 이층 건물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옷에 달라붙은 눈을 털어 내며 그 낡은 카페 안으로 들어섰을 때, 그곳은 이미 파장머
리에 이르러 있었다. 두어 테이블에 손님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그들과 아무런 상관도 없이 종업원들은
부산하게 움직이며 실내를 정리하고 있었다. 어쩌죠?? 카운터에 앉아서 계산을 하고 있던 젊은이가 멋
쩍게 웃어 보였다. 그러나 아주 잠깐 동안 차나 한잔씩 마시고 가겠다는 우리들의 요구를 그는 끝끝내
거절하지 못했다.
정말일까. 그게? 커피 다섯 잔이 아주 빠르게 날라져 왔을 때 우리 중의 하나가 입을 열었다. 뭐가? 담
배를 꺼내 물던 다른 하나가 되물었다. 이사한다는 거 말야. 글쎄. 전에 듣긴 들었어. 하지만..... 뭔가가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다른 하나가 말끝을 흐렸다. 그 이탈된 존재 하나가 모두의 마음을 여전히 불편하
게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걸 반영하기라도 하듯 그 얘기는 모두의 입에서 끊이지 않고 한 마디씩 흘
러나왔다. 이렇게 눈이 오는데 어떻게 이사를 한다는 거야? 글쎄..... 개썰매로 하려는 모양이지 뭐. 아무
래도 거짓말 같애. 그럼? 뭘 물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젠장, 이럴 걸 뭐 하러 만나자고 해? 솔직히
말해 난 모든 것에 흥미를 잃었어. 누구는 흥미가 있어서 왔는 줄 알어? 우리들의 만남에 특별한 의미
를 부여할 필요는 없어. 그럼 이게 친목계인가? 빌어먹을, 구역질나게 정치 얘기 안 하면서도 얼마든지
만날 수 있잖아? 구속감을 느끼면서까지 만날 필요는 없어. 먼저 간 그 친구가 차라리 솔직한 건지도
모르지. 골치 아파. 제발 그만둬.....
지난 연대가 막을 내리기 서너 달쯤 전에 생겨난 그 뜻하지 않은 불상사로 인해 우리는 한동안 만나지
못했다. 만나지 못한 이면에, 사실은 만나지 않으려는 묵계적인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
었다. 하지만 그 기간 동안 우리는 우리가 몸담고 사는 이 땅덩어리의 비애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온 세계가 축제의 물결로 떠들썩한데, 어찌된 일인지 우리가 몸담고 사는 이
땅덩어리만 그런 흐름과 아무런 상관도 없이 깊은 무력감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
고 정치적인 관심사로 한 때 내남 없이 침을 튀기고 핏대를 올리던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정치
대신 증권과 부동산, 고스톱과 포커, 그리고 방중술(房中術)과 포르노에 관한 얘기로 시간의 공백을 메
꿔 나가는 걸 목도할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그렇게 정신적으로 도태되어 가는 사람들까지 한동아리로
싸잡아, 세상 전체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도 적잖이 눈에 띄었다. 간혹 정
치를 입에 담는 사람들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얘기가 나오기 무섭게 곳곳에서 야유와 조소와 욕설이
퍼부어져 말한 사람만 면괴스러워지기 일쑤였다. 그러면서 겨울은 깊어가고 있었고, 그러면서 한 연대는
허망하게 막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 연대가 막을 내리던 마지막 날 우리는 다시 만났다. 예기치 못한 불상사가 있던 그날 밤 이후 근
서너 달 만의 만남이었으니 참으로 오랜만의 만남이 아닐 수 없었다. 망년이 아니라 망년대(忘年代)를
빙자한 만남이었지만, 그날 우리가 확인한 것은 다만 한가지, 우리가 대화의 소재를 상실하고 그 상실감
때문에 서로에 대해 깊은 단절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날 우리는 의도적으로 정치 얘기를 회
피했다. 망무두서(茫無頭緖)한 가운데, 그리하여 그날 우리들의 만남은 처음부터 끝까지 밑도 끝도 없는
잡담으로만 일관되었다.
무슨 얘기를 주고 받았던가. 고스톱과 포커, 볼 만한 포르노와 폭력물, 그리고 구천일심(九淺一深)의 테
크닉과 미아리 텍사스....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주고받던 바로 그런 얘기들이었다. 어느 순간인가
우리 중의 하나가 이탈리아의 국회 의원 치치올리나를 입에 담았지만, 그것도 역시 '정치인으로서가 아
니라 포르노 여배우로서'라는 단서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난 다음의 입길이었다. 그렇듯 모든 얘기를 의
식하면서 해야 한다는 바로 그 사실을 우리는 철저하게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것말고 달리 더
는 아무것도 통용되질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의미 없는 말만 통용되는 시간. 그리고 의미 있는 말
이 철저하게 통제당하는 공간. 그러나 그런 시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우
리들의 대화를 통제하는 인위적인 힘의 정체를 우리 모두가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
에 대한 자유로움을 통제하는 적이 과연 우리 중에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 끈질기
게 또아리를 틀고 있는 내부의 적이 분명하리라는 것! 불행하게도 그날 우리가 확인한 것은 그것 한 가
지뿐이었다. 그것이 혐오였건 증오였던 혹은 저주였건,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우리가 우리를 의식하
게 되었다는 그것만이 우리들에게는 분명한 현실일 뿐이었다. 그리하여 막을 내리는 연대와 막을 올리
는 연대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으며, 그 동안 부질없이 부풀려 온 시대에 대한 열정, 정치에 대한 기
대감, 또는 변혁에 대한 설레임 따위들이 이제 더 이상 우리와 무슨 상관 있겠느냐는 합의점에 우리 모
두는 묵시적으로 동의했다. 어제 말하던 것을 오늘 말하지 않는다는게 깨달음의 결과라면, 그렇다면 오
늘 말하지 않는 것을 어제 말했다는건 고스란히 무지망작의 소산인가? 우리는 어제를 기억하려 하지 않
았고, 오늘을 통해 내일을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남겨진 게 있다면 그저 어제의 열정을 수치스러워 하
는 우리들, 그리고 내일에 대한 기대감을 부질없어 하는 우리들이 남겨져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들에게 남겨진 마지막 공감대이기도 했다. 그러면 이제 더 이상 우리가 만나서 무슨 얘기를 주고받
을 수 있는가? 그날 술자리가 거의 끝나 갈 무렵에 우리 중의 하나가 아주 우울한 표정으로 이런 발언
을 했다. 이제 내 가슴에 남겨진 건 극단적인 허무뿐이고, 그리고 그 허무 속에서 끝끝내 되찾고 싶은
건 인간적인 낭만뿐이야. 그리고 나머진 아무것도 없어....
카페에서 서둘러 커피를 마시고 밖으로 나왔을 때, 눈발은 훨씬 가늘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그칠 눈은 결코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눈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우리는 다른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오직 한 가지, 우리 중의 하나가 결별을 하듯이 손을 흔들고 떠났다는 것만이 우리들에게는 폭
설보다 더한 폭거로 받아들여지고 있을 뿐이었다. 관습이 낯설고 혼란스럽게 여겨질 때, 그때 사람들은
떠나는 모양이었다. 익숙해진 것에서 생겨나는 배반감을 견디지 못한 채, 낯선 것을 수용하려는 마음의
여지를 털끝만큼도 마련하질 못한 채, 그렇게 말없이 떠나는 것으로 모든 것을 대신하는 모양이었다.
우리가 횡단 보도로 거의 다가갔을 때 때맞추어 녹색 신호등이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때를 놓치지 않
으려는 사람 몇몇이 연신 좌우를 살피며 빠르게 길을 가로질러 갔다. 그러나 그들이 미처 건너편 인도
로 당도하기도 전에 붉은 신호등이 들어왔다. 붉은 신호등이 들어온 뒤에, 그때 비로소 우리는 앞서 걷
던 우리 중의 하나가 건너편 인도에 서서 우리에게 손을 흔드는 걸 볼 수 있었다. 빨리 건너오라는 시
늉인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시간과 거리로 해결될 문제가 결코 아닌 것 같았다. 아주 먼 곳,
영원히 건너갈 수도 건너올 수도 없는 그런 곳에 그가 서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도 갈래. 그때 우리 중의 하나가 다시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분명한 어조로 이탈을 선언했다. 아무
도 그 이유를 묻지 않았고, 그것이 부담스러웠는지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집에 가서 포르노를 보는 게
낫겠어. 그러면서 그는 길 위쪽으로 조금씩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그에게 향했던 시선을 돌려 다시
길 건너편을 향하자 그쪽에 서 있던 친구가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가겠다는 신호였다.
개자식들..... 갈 테면 가라지. 남겨진 우리 중의 하나가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짓씹어 뱉었다. 셋
중의 하나였다. 여섯 가운데 정확하게 반이 떠나고 반이 남겨진 셈이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남겨진
셋 중에 떠나려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그것이 남겨진 사람들에게 묘한 결속감을 느끼게 했다. 그리
고 그런 결속감으로부터 이미 떠난 자들과 분명하게 구분되려는 새로운 공감대가 은밀하게, 그러면서도
대단히 빠른 속도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셋도 '우리'가 아닌가.
신촌으로 가자. 우리 중의 하나가 전혀 새로운 표정으로 제안을 했다. 거기? 나머지 둘이 합창을 하듯
거의 동시에 되물었다. 그래, 거기 가서 신나게 마시고 기분 풀자구. 좋아! 진작에 이런 식으로 나갔어야
지. 뒤늦게 신바람이 올라서 우리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고는 신촌 방향의 국도에 이르러 택시를 기다
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다리고 자시고 할 건덕지도 없이 그때 검은 승용차 한 대가 우리 앞에서 멎었
다. 어디로 가실 겁니까? 윈도우를 내리면서 운전석에 앉아 있던 젊은 친구가 물었다. 자가용 영업을 하
는 족속인 모양이었다. 신촌! 타고 갈 생각이 있다는 듯이 우리 중의 하나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대
꾸했다. 만 원 주세요. 길이 형편 없어요. 오천 원! 에이, 그렇게야.... 육천 원 주세요. 결국 그 정도를 받
을 요량으로 그는 처음부터 만 원을 부른 것 같았다. 타자 ! 흥정을 하던 친구가 먼저 차에 올랐다. 차
로 달려 봤자 십 분 거리도 안 될 곳을 육천 원씩이나 주고 가면서도 우리는 전혀 부담스러워하지 않았
다. 부담스런 모든 것을 떨쳐 버리고, 그리고 모든 것을 처음부터 새롭게 시작하려는 사람들처럼 우리는
조금씩 들떠 가기 시작했다. 낯선 환상으로 접어드는 길목에서 느끼게 되는 이상야릇한 설레임이 우리
모두를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세 번째 목적지로 정한 카페로 들어서면서 우리는 느닷없이 찬물을 뒤집어쓴 사람들처럼 당황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잘못 왔구나.... 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서면서 우리는 대뜸 그런 느낌에 사로잡
혀 버렸다. 후끈한 열기가 먼저 밀려나오고, 그 다음에 싸늘한 시선들이 날아들었기 때문이었다. 너무나
도 배타적인 눈빛들이 그 어둠침침한 실내로부터 우리가 서 있는 출입구 쪽으로 끊임없이 밀려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적으로 음악이 멎고 숨막히는 정적이 밀려들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극을 향해 치닫
는 순간이었다. 그 잠깐 동안의 정적이 우리에게는 영원인 것처럼 여겨져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지
경이었다. 초대받지 못한 불청객들처럼, 어째서 우리가 그들에게 철저한 배타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
인가. 그러나 입장은 그들도 또한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우리들의 느닷없는 출현이 그들을 놀라게 한
것이 아니고, 자신들의 행동으로 인해 그들은 스스로 놀라고 있는 것 같았던 것이다. 깨고 나서 돌아보
면, 절정이란 언제나 그런 것이 아니던가. 허무를 보지 못하게 하는 이성의 오지. 그러니까 우리는 그들
에게 그것을 볼 수 있는 뜻하지 않는 계기를 마련해 준 셈이었다. 단지 그것일 뿐이었다.
이렇게 늦은 시각에 어쩐 일이에요? 모두들 한동안 안 나타나더니..... 이윽고 주인 여자가 우리가 서
있는 출입구 쪽으로 나타나면서 어설픈 웃음을 지어 보였다. 상당히 취한 얼굴이었다. 이상한 풍경이로
군요. 실내를 휘둘러 보며 우리 중의 하나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생일 파티를 하는 중이에
요. 그래서 아홉시부터 다른 손님을 하나도 안 받았어요. 어색하겠지만 저쪽 구석 자리에서 한잔 하실래
요? 가장 구석진 자리를 그녀는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가 초대받지 못한 손님들 자리로구만. 뜨악한
표정으로 우리 중의 하나가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잠시 여자가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아주 잠시일 뿐이었다. 안 될 건 아무것도 없죠. 하지만 오늘은 오래 마실 수 없어요. 폭설이 내리는 밤
이니까..... 우리들의 의표를 찌르는 듯한 말을 남기고 그녀는 초대받은 사람들에게로 다시 돌아갔다. 그
러나 폭설이 내리니까. 이런 날 만나서 한잔 하자던 우리들의 약속은 이미 어제의 일이 되어 있었다.
오나가나 찬밥 신세로구만..... 우리 중 하나가 피곤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잔을 들어 올렸다. 그때 생일
파티에 초대받은 사람 중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들의 출현으로 그것이
잠시 중단돼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대 아름다운 생일날 종소리 울리는 저녁.... 잔을 비우고 나서 우리는
일제히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케이크가 놓인 테이블을 중심으로 이십여 명 가까운 사람들이 둘러앉
아 있었다. 남자보다 여자가 훨씬 많았다. 그 파티 석상의 한쪽 구석 자리에 팔짱을 끼고 앉아 있던 여
자 하나가 우리 쪽을 건너다보며 고개를 까딱
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안면이 있는 여자였다. 우리가 여섯이었을 때, 이곳에서 술을 마시며 안면을 익
힌 여자였다. 어떤 종류의 기대감도 허용할 수 있었던 시절, 그리고 그 기대감을 위해 뜨거운 열정을 구
사해도 전혀 과하게 여겨지지 않던 시절..... 우리가 여섯이었을 때 이 카페에서 몇 번인가 자리를 함께
한 여자였다. 그 여자를 보고, 또한 그 여자와 함께 어울려 있는 사람들을 건너다보면서, 엉뚱하게도 우
리는 광기로 얼룩진 지난 연대를 반추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모든 것이 참담한 자괴감으로 되돌려진
오늘의 현실을 또한 비감스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섯이었던 우리. 그리고 지금은 셋만 남겨진 우
리. 응집된 환상이 깨어진 뒤에 인간들은 자아를 찾아 뿔뿔이 흩어져 간다고 말한 사람이 우리 중 누구
였던가.
지난 연대의 마지막 날 만났다 헤어진 뒤로 우리는 또다시 소원한 시간을 보냈다. 지난 연대의 마지막
날 우리는 서로에게서 확인했던 그 허망한 단절감 때문에 의도적으로 만남을 회피하고 있었는지도 혹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만남을 의식적으로 기피한다 해도 그것은 어차피 정신적인 짐일 수밖에 없었다.
만나지 않으면서도 서로를 강렬하게 의식한다는 것. 우리는 이제 '우리'라는 그 무형의 집단 의식 자체
를 부담스러워하는 아주 이상스런 존재들이 되어 있었다. 지난 연대 내내 우리의 만남을 지탱시켜 온
버팀목이 정치적 관심사였다는 것이야 재론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지만 그 버팀목이 사라져 버린 현실
속에서의 우리는 과연 어떤 형태로 잔존할 수 있을 것인가 --- 그것이 만나지 않는 동안에도 우리 모
두에게 상당한 중압감으로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런 의미도 없이, 그런 와중에서도 시간은 무시
로 흘렀다. 수은주가 영하로 곤두박질치고, 칼바람이 깊은 밤의 적요를 잔인하게 난자하는 아스스한 날
들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면서도 날이 밝으면 어김없이 '새로운 연대에 거는 기대'라는 활자들이
곳곳에서 쏟아져 나왔고, 아주 짧은 순간 뒤에 그것들은 도처에 길바닥에서 학살당한 시신들처럼 흉칙
스럽게 나뒹굴곤 했다. 그런 나날이 새로운 연대를 더욱 남루하게 만들어 나가던 어느 날..... 느닷없이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하룻밤만에 대설주의보가 대설경보로 바뀌고, 그리고 그 말미에 21년만의 폭설이
라는 새로운 기록이 덧붙여졌다. 그 느닷없는 폭설이 우리 모두에게 그토록 상징적으로 받아들여졌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우리는 서로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자는 제의를 했다. 눈이
내리니까.
눈이 너무나도 신나게 내리니까, 그러니까 이런 날 만나서 부담없이 한잔 하자는 제의였다. 그 제의는
받아들여졌고, 당연한 것처럼 우리는 만나자는 약속을 했다. 새로운 연대가 시작되고도
어느덧 두 달이 지난 오늘, 그렇듯 한심스럽게 우리는 폭설을 빙자해서 만나자는 약속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었다. 무엇인가를 빙자해야만 만날 수 있는 사람들, 무엇인가를 빙
자하지 않고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사람들 --- 우리가 이미 그런 사람들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어
느 누가 모른다고 부정할 수 있었겠는가.
이제 파티는 끝났습니다. 참석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모든 참석자들에게 사회자가 아주 여
러 번 감사를 드리며 오래지 않아 파티는 막을 내렸다. 그들이 웅성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걸 보면
서 우리도 또한 자리를 뜰 준비를 했다. 그들이 그곳에 있었으므로 우리도 또한 그곳에 있을 수 있었다
는 뒤늦은 깨달음보다도, 우리가 아무런 대화도 없이 오로지 그들에게만 정신을 팔고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우리를 놀라게 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의식의 방기 상태를 다시 한 번 방기하면서, 그러
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계산할게. 사람들이 일어나서 짐을
챙기고, 밖으로 나가고, 누군가를 부르고 하는 그 소란스런 와중에 우리 중의 하나가 카운터로 갔다. 그
리고 그가 계산을 하는 동안 나머지 둘은 초대받은 사람들 틈에 뒤섞여 먼저 밖으로 나왔다.
한치 앞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그때까지도 눈은 계속해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아, 미치겠어. 이
눈 좀 봐. 이 눈..... 좁은 골목길을 빠져 나가면서 여자들이 무시로 탄성을 내질렀다. 골목을 벗어나자
요란스런 엔진 소음과 함께 곳곳에서 뽀오얀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초대받은 손님들 중 상당
수가 자가용을 몰고 온 모양이었다. 승용차를 장갑차로 착각하는 건가? 이런 날, 빌어먹을..... 밖에 나와
서 기다리고 있던 둘 중 하나가 어깨를 움츠리며 중얼거렸다. 차가 힘이니까. 카페가 있는 골목을 들여
다보며 나머지 하나가 짧게 말했다. 왜 이렇게 안 나오는거야? 하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아해 하자
나머지 하나가 전혀 다른 상황을 우려했다. 돈이 부족한지도 모르겠군. 그러면서 둘이 다시 골목으로 들
어가려 할 때, 때마침 그곳에서 누군가 걸어 나오는게 보였다. 아직 안 가셨어요? 카페 주인 여자였다.
그녀가 놀라는 눈으로 둘을 쳐다보는 순간, 어디선가 무더기진 눈이 땅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털퍼덕, 느닷없이 어둠을 뒤흔들었다. 계산 끝내고 아까 나가셨어요. 아마 저쪽 블록으로 나가신 모양이
로군요. 하지만 이제는 어차피 헤어질 시간이잖아요? 말을 마치고 그녀가 사라진 한참 뒤까지도 둘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 붙은 듯이 서 있었다. 셋이었던 우리가 둘만의 우리로 변해 가는 데 소요된 시
간 ---어쩌면 그것은 체념을 반영하는 최소한의 시간이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결국은 모두 다 사라져 가는구만....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길이 아닌지도 모를
길을 간신히 빠져 나가면서, 우리 중의 하나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우리는 아직 둘이잖아. 아
니 둘이니까 아직 우리잖아. 안 그래? 나머지 하나가 말을 마치고 나서 다른 하나를 돌아보았다.
우리? 하긴.... 둘도 우리는 우리지.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건...... 빵! 빵! 빠아앙! 뒤통수를 후려치듯,
그때 등뒤에서 느닷없이 클랙슨 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표정으로 우리가 거의 동시에 뒤를 돌아보자 이
번에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할 만큼 엄청나게 밝은 빛살이 밀려들었다. 그 엄청난 광량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거의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손을 홰홰 내저으며 어서 라이트를 끄라는 시늉을 했
다. 그러나 라이트는 꺼지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우리가 옆으로 비켜나 눈살을 한껏 찌푸리며 승용차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얼핏 보니 여자 혼자서 운전석에 않아 있는 것 같았다. 좀더 자세히 확인하기 위
해 우리가 다시 몇 걸음앞으로 나아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여자가 윈도우를 내리며 밖으로 얼굴을 내밀
었다. 바로 얼마전에 카페에서 팔짱을 끼고 앉아 우리를 건너다보던 여자 --- 우리가 여섯이었을 때 카
페에서 술을 마시며 안면을 익힌 바로 그 여자였다. 우리가 다가가자 아주 짧게, 그녀는 이렇게 입을 열
었다. 타요.
우리는 행선지를 묻지도 않고 자신의 행선지를 밝히지도 않은 채, 그녀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운
전에만 신경을 썼다. 조심스럽게 서행을 하고 있어지만, 아주 빈번하게 차체가 엉뚱한 방향으로 미끄러
지고, 그러다가 가끔씩은 헛바퀴질로 심하게 몸부림을 쳐대곤 했다. 어디로 가는 거죠? 즐비한 수은등,
눈덮인 가로수, 인도와 차도가 구분되지 않는 낯선 풍경을 내다보면서 우리 중의 하나가 여자에게 물었
다. 그러나 그녀는 대답대신 질문을 우리에게 보내왔다. 술 한잔 더하고 싶지 않으세요? 난감한 표정으
로 우리 중의 하나가 되물었다. 이 시간에 술을 마실 만한 곳이 있습니까? 그녀는 곧바로 대답했다. 샤
갈의 마을로 가면 돼요. 샤갈의 마을? 거의 동시에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러고 나서 고
개를 돌렸을 때, 한 여자가 백밀러 속에서 독락(獨樂)하는 듯한 표정으로 소리 없이 미소를 머금고 있었
다.
차가 다시 국도로 접어든 뒤에 우리 중에 하나가 느닷없이 다른 하나의 옆구리를 툭 쳤다. 저게 뭐지?
눈발이 춤을 추듯 너울거리는 희붐한 허공에, 마치 떠 있는 것처럼 거대한 굴뚝 하나가 솟아 올라 있었
다. 글쎄, 뭘까? 연기도 나오네...... 우리가 망연한 눈길로 그것을 올려다 보는 사이 차는 좌회전을 했고,
그와 동시에 그 굴뚝은 우리의 시야에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당인리 발전소예요. 좌회전을 하자마
자 곧바로 차를 세우며 그녀가 말했다. 보이죠? 밖을 내다보니 주택가 골목 아귀에 그때까지도 문을 닫
지 않은 수퍼마켓 하나가 있었다. 내려서 술을 사세요. 왜 그곳에다 차를 세웠는지, 그제서야 우리는 그
녀의 의도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 중의 하나가 차에서 내려 술을 사러 가자 그녀도 곧바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수퍼마켓을 지나 어두운 골목 안쪽으로 이내 모습을 감춰 버렸다.
어디 갔어? 술을 사러 갔던 우리 중 하나가 돌아와 그녀의 부재를 의아해했다. 글쎄...... 차 안에서 기
다리고 있던 다른 하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눈 녹이러 갔구만? 오줌? 그래.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풋, 우리는 거의 동시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도망가지 않을 거지? 그러다가 문득 표정을
바꾸며 우리 중에 하나가 입을 열었다. 카페에서 도망간 친구를 떠올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젠 도망갈
길은 정하지 말라는 투로 다른 하나가 말했다. 내일은 교통 두절되는 곳이 많겠어, 눈밭이 되어 버린 국
도를 내다 보며 우리 중에 하나가 입을 열었다. 모든 길이 다 막혀 버렸으면 좋겠어, 차라리...... 다른 하
나가 등받이에다 머리를 기대며 중얼거렸다. 그때 골목 안쪽으로 들어갔던 여자가 모습을 들어냈다. 그
러자 우리 중에 하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래도 싸고 오네, 젠장......
그로부터 거의 십 분 동안 우리는 한 여자가 자신의 승용차를 불도저처럼 몰면서 주택가 골목길의 눈
을 무지막지하게 밀고 들어가는 걸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밀려 나가던 눈이 보닛 위로 올라오고,
드디어는 전면 유리까지 뒤덮어 올 무렵이 되어서야 비로소 차는 멎었지만, 정말이지 그건 놀라운 뱃심
의 소유자가 아니고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람보가 봤으면 여보하자고 하겠구만...... 차에서
내려서자마자 우리 중에 하나가 설레설레 머리를 뒤흔들었다.
차가 정차한 곳은 골목 끄트머리에 있는 어느 연립 주택 옆이었다. 여기가 샤갈의 마을인가? 그 연립
주택에 그녀의 거처가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 우리는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하지만 우리의 예상
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어찌된 셈인지 그녀는 연립 주택의 캄캄한 지하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
고, 그 지하의 어느 철문 앞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곳의 자신의 집이 아니라는 걸 분명히 했다. 제 작
업실이에요.
문을 열고 먼저 들어가 바닥에 떨어져 있던 몇 가지의 허섭쓰레기들을 재빨리 주워 내고 난 뒤에 그녀
는 비로소 우리를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냉기가 가득한 그 실내로 들어 섰을 때,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두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벽에 걸린 여러 개의 그림 액자들이었다. 어디선
가 많이 본 듯한 그림들..... 모두 다 샤갈의 그것들이었다. 그제서야 우리는 그녀가 그림을 그리는 여자
라는 애기를 들었던 아주 희미한 기억을 되살려 낼 수 있었다. 아주 잠시 어설픈 자세로 서서 우리는
그 실내를 둘러보았다. 그리다 만 몇 개의 풍경화가 한쪽 구석에 세워져 있었고, 그 옆으로 침대와 작은
책장, 전축, 탁자, 소형 냉장고 따위들이 올망졸망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 같은 문외
한들의 눈으로 얼핏 보기에도 그곳은 작업에 몰두하는 화가의 전문적인 화실은 결코 아닌 것 같았다.
뭐랄까.
그저 그림을 '그린답시고' 만들어 둔, 일테면 그런 자기과시용 화실이지 싶었던 것이다. 자가용까지 있
는 여자가 난방 시설도 갖추어지지 않은 작업실에서 겨울 내내 호호 입으로 손을 녹여 가며 그림을 그
린다? 침대에는 시트 대신 두꺼운 솜이불이 덮여 있었고, 그 밑으로 전선이 연결돼 있었다. 아마도 이불
밑에 전기장판을 깔아 둔 모양이었다.
추우니까 술을 빨리 마시세요. 탁자를 사이에 두고 우리가 그녀를 마주 않았을 때, 술병을 따면서 그녀
가 말했다. 위스키 한 병과 맥주 다섯 병의 마개를 그녀는 모조리 따 버렸다. 위스키는 우리가 산 것이
고, 다섯 병의 맥주는 그녀의 작업실에 있던 것이었다. 여기가 마지막 기착지인가? 여자가 잔에다 위스
키를 따르는 사이 우리 중에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 물었다. 그냥 이쯤에서 파묻혀 버리고 싶군.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하나가 대답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지금 이 순간 세상에 엄청난 폭설이 쏟아지고
있다는 사실이 남겨진 우리 두 사람의 마음을 오히려 안온하게 해주는 것 같았다. 중요한 건 오로지 그
것뿐인 것 같았다. 그런 정신적인 안정감 이외에, 다른 모든 것은 잊거나 체념하고 싶었다. 설령은 그것
이 한심스런 매몰 욕구라 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 모두가 뿔뿔이 '흩어졌다'는 결과가 아니
라 '흩어져 가고 있다'는 과정이 우리를 끈질기게 괴롭혀 댄 때문이다. 둘이 남겨졌을망정, 이제 더 이
상 그런 고통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우리는 얼마든지 마음의 평정을 회복할 수 있을 것
이었다. 내일은 몰라도 적어도 오늘은 그럴 수 있을 것이었다. '흩어졌다'는 결과가 아니라 '흩어져 가고
있다'는 과정 때문에 수다한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지금은 그런 허망한 연대의 벽두가 아닌가.
추우니까 빨리 마시라는 여자의 얘기 때문이 아니라, 비로소 회복되기 시작한 정신적인 안정감 때문에
우리는 술을 빨리 마셨다. 술이 아니라 정신적인 안정감이 결국은 추위를 잊게 해준 셈이었다. 이른 저
녁부터 상당량의 술을 마셔 온 셈이지만, 그 모든 것이 한데 뒤섞여 그제서야 비로소 후끈거리는 취기
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게 해주었던 것이다. 가끔씩 여자가 지난 연대의 우리 모습을 되새기게 하는 얘
기를 꺼냈지만, 우리는 그저 들어 주기만 했을 뿐, 얘기의 전개를 허용할 만한 어떤 종류의 빌미도 더
이상은 만들어 주질 않았다. 당신들 여섯이 몰려와 노래를 부르던 그날 밤, 지난 연대에 그 카페에서 만
난 당신네들과 비슷했던 사람들, 혹은 당신네들이 정치 문제로 격론을 벌일 때......라는 식으로 여자는
가끔씩 입을 열었지만, 대부분의 얘기가 우리 두 사람의 의도적인 비협조로 인해 막을 올리자마자 곧바
로 다시 내려야 하는 형국이 되기 일쑤였던 것이다. 그런 것이 답답했던지 여자는 자주 담배를 피웠고,
담배 연기를 내뿜는 횟수만큼이나 빈번하게 술잔을 비워 냈다. 주량이 상당한 모양이죠? 건네는 잔을
단 한 번도 마다하지 않는 그녀에게 어느 순간인가 우리 중 하나가 물었다. 첫 남자가 가르쳐 준 거예
요. 그러니까 처음부터 이렇게 주량이 대단했군요? 우리 중에 다른 하나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그때는 마시는 법만 배웠어요. 주량은 그 남자가 떠난 뒤부터 늘어나기 시작한 거니까...... 한숨을
내쉬듯, 그녀는 말을 마치고 나서 아주 길게 담배 연기를 허공에다 내뿜었다. 구체적인 사연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아주 커다란 공동처럼 보이는 그녀의 얼굴에서 우리는 상당한 것을 직
감적으로 시사 받을 수 있었다. 취기가 오를수록 무엇인가가 절실해지는지, 그녀는 생각날 때마다 한 번
씩 오디오에다 테이프를 꽂았고, 또 때로는 그것을 끄고 혼자서 흥얼거리기도 했다. 그녀가 반복적으로
듣는 노래는 단 한곡 뿐이었다. 그게 무슨 노래냐고 우리 중에 하나가 묻자 여자가 한 손으로 이마를
받친 채 탁자를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스콜피온스 그게 제목이요? 우리 중에 하나가 되묻자 그녀는 다
시 덧붙였다. 스틸 러빙 유. 고개를 숙인 채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그때부터 여자는 계속해서 그 말을
되풀이하기 시작했다. 스틸 러빙 유, 스틸 러빙 유......
그림을 그린다는 얘기는 전에 들었지만, 진짜 하는 일은 뭡니까? 여자의 감정이 상승과 하강을 몇 번
인가 반복하고 난 뒤에 우리 중 하나가 물었다. 그러자 여자가 고개를 들고 아주 몽롱한 눈빛으로 우리
를 건너다 보며 피식 웃었다. 하는 일? 글쎄, 하는 일이야 많죠. 하지만 어떤 일을 해도 '한다'는 실감이
안 난다는 게 문제이지..... 우리와 마찬가지로 여자도 많이 취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럭저럭 사
는 거로군요? 우리 중 하나가 비아냥거리듯 되받아쳤다. 그럭저럭? 그럭저럭이지. 그럭저럭 아닌 게 어
딨어? 아주 심드렁한 표정으로 여자는 말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그녀는 표정을 바꾸며 자신의 얘
기에 엉뚱한 단서 조항을 달았다. 나이 사십이 될 때까지만 그렇게 살아 볼 거예요. 그렇게 살아 본 뒤
에는? 상당히 취한 목소리로 우리 중 의 하나가 그녀의 말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치기 어린 감상이나
저열한 의식의 사치쯤으로 그녀의 얘기를 받아들였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건 그때 가서 결정한 일이니
까...... 지금은 대답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듯 그녀는 다시 한 대의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때까지 이런
식으로...... 이렇게 혼자 살겠다 그겁니까? 그녀가 피우는 담배의 필터에 분홍빛 루즈가 묻어나는 걸 유
심히 건너다보던 우리 중 하나가 다시 물었다. 혼자 살지만 사랑을 하죠. 대답을 하고 나서 그녀는 손을
들어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재빨리 뒤쪽으로 쓸어넘겼다. 그 표정이 마치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의 그것 같았다. 혼자 살지 않아도 사랑을 할 수 있을텐데요? 무슨 이유
때문인지 우리 중 하나는 계속해서 그녀의 말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그러자 갑자기 두 눈을 치뜨면서
분노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반말을 했다. 말장난 하지마. 당신들이 지금 둘이라 그건가? 둘이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 셋이나 넷, 혹은 다섯이나 여섯은 또 무슨 의미가 있는데? 난 솔직히 말해 당
신네들이 그 카페에서 떼를 지어 몰려와 떠들어 대는 걸 들으면서 속으로 얼마나 혐오했었는지 몰라.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데? 아주 가증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는 계속해서 무슨 말인가를 더하려
는 기세인 것 같았다. 그 때 우리 중 다른 하나가 재빨리 그것을 제지했다. 그런 쪽으로 얘기가 전개돼
가는 걸 결코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젠 여섯이 아니예요. 보다시피 이렇게 이젠 이렇게 둘만 남
았어요. 그러나 그녀는 더욱더 가증스럽다는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우리를 노려 보았다. 그러면서
아주 낮은 목소리로 그녀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결국은 둘도 안 남는다는 걸 알아야지. 결국은......
당신은 이성보다 감성이 강한 여자로군요...... 한동안 침묵이 흐른 뒤에, 꿈을 꾸듯 몽롱한 목소리로 우
리 중의 하나가 중얼거렸다. 감성이 이성을 지배하는 사람의 생은 언제나 고달픈 법이에요..... 머리를 떨
구고 있던 다른 하나도 중얼거렸다. 그러나 여자는 아무런 반응도 나타내질 않았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
는지, 허공으로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만 망연하게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시간의 흐름에 무게가 더
해지고, 오래지 않아 실내의 모든 것들이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먼 곳에서
휘몰려 오거나 혹은 먼 곳으로 휘몰려 가는 듯한 바람 소리가 가끔 들리고, 그 처연한 웅웅거림에 귀를
세우면 그때는 또다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사방이 적연부동(寂然不動)했다. 짓눌리고 비틀린 기억
의 잔상들마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아득하게 밀려나가고, 오래지 않아 남겨진 우리 둘의 의식에는 드넓
은 여백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세상에는 여전히 폭설이 내리고,
비록 둘이지만 우리는 아직도 '우리'로 잔존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기 위하여, 의식이 지워져 나가
는 그 와중에서도 우리는 마지막 안간힘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따금 여자 혼자서 술을 마시는
소리, 그리고 공허롭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아주 먼 데서 오는 여음처럼 희미하게 귓전으로 밀려 들었다.
그가 보고 싶어요. 누가 그에게 전화를 걸어 줄 수 없나요? 내가 그를 기다린다고......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에서 아직도 그를 기다리고 있다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잘게 부서져, 남겨진 우리들의 등판 위로
눈처럼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아주 잠시 뒤에 우리는 여자가 마지막 신음처럼 이렇게 중얼
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춥고 배고파. 그리고 남자와 자고 싶어......
붉은 태양과 흰 염소, 그리고 한 다발의 꽃과 두 여인, 올망졸망하게 눈 덮인 마을과 헐벗은 겨울나무
의 풍경들이 아득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 모두의 기억 속에서 잠자고 있던 그
런 풍경인 것 같았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여자가 어깨를 두드리는 소리, 머리를 떨군 채 의식을 잃어
가는 둘 중의 하나를 조심스럽게 깨우는 소리가 꿈 속에서인 것처럼 아득하게 들려 오기 시작했다. 몽
중에 그러는 것처럼, 그때 우리 중 하나가 탁자 밑으로 손을 뻗어 나머지 하나의 손을 필사적으로 거머
쥐었다.
유서 ☞ 박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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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유서
- 박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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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원 : 1969년 대구 출생으로 영남대 지역개발학과를 졸업했다.
1994년 [문학과 사회] 가을호에 소설 [유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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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부터 나의 유서를 쓰려고 한다. 어쩌면 이것은 유서가 아닐지도 모른다. 일종의 고백성사일
수도 있으며, 하나의 사티로스극으로 불러도 좋다. 문건, 조서, 넋두리, 낙서, 대본 그 무엇으로 불러도
좋다. 나는 내 개인의 절대성을 여러분에게 절대 강요하지 않겠다.
대신에 나는 여러분의 어떠한 비평이나 평가도 받아들이지 않겠다.
이 얼마나 공평한 일인가? 이에는 신도, 비평가도, 법도 필요치가 않다.
또 나는 내가 하기 싫어하는 일에 대해서는 남에게 절대 시키지 않는다. 또한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남
의 어떠한 부탁에도 절대 응하지 않겠다. 이 얼마나 간편한 일인가? 그러나, 내가 굳이-여러분이 어떤
식으로 부르든-'유서'라는 명칭을 부여하는 것은 '유서'가 갖고 있는 속성 때문이다. 세칭 '유서'라 함은
'죽음을 맞이하여 남기는 글'이 란 뜻이다(모범 국어사전 참조). 나는 이제 이 글로서의 나의 저주를 남
기고, 나는 마지막을 경험하러 떠날 것이다. 죽음, 그것은 완성이며 경이로운 마지막 경험이자 최후의
저항, 완전한 해방, 절대적인 전횡의 길이다.
지금 내가 유서를 적으려는 이 방안에는 무엇이든지 두 개이다. 그 것도 똑같이 생긴 것들이 항상 두
개씩 있다. 그 똑같은 두 개는 서로가 왼쪽, 오른쪽을 점하고 있기에 혼란을 일으킬 만큼 대칭적을 배열
되어 있다. 똑같은 사물들이 두 개씩인 만큼 그 사물들의 주인도 둘이었었다. 분명히 둘이었었지만 지금
은 나 하나이며 그리고 나머지 그 하나도 곧 사라질 것이다.
언제인가 친구들이 놀러 왔을 때 내 방을 보고는 롯데월드에 있는 거울의 집이나 마술의 집과 닮았다
고 말한 적이 있다. 왜 똑같은 것들이 항상 두 개씩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고 나서는 방문을 열고 들어
오는 나와 똑같이 생긴 내 동생을 보고는 모두 다 한번씩 놀란다.
비단 친구들뿐만 아니라 처음 오는 모든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모두가 똑같이 놀란다. 그러다가
내가 하하, 얘는 나보다 9분 차이로 늦게 나온 내 동생이 오라고 하면 모두가 똑같이 고개를 까닥이는
강아지 인형처럼 고개를 까닥이며 아하 한다. 이것은 불문율 같은 일종의 관례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
들은 연신 탄복을 자아내면서 나와 내 동생을 번갈아 본다. 신기해 마지않는다. 우리를 신기하게 보는
것에 대해서는 나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나도 그들을 신기하게 보니깐 말이다. 다만 한 가지 짜증이 나
는 것은 그들은 나의 저주도 모르는 채, 그들 스스로의 생각으로 자신들을 합리화하면서 나와 내 동생
을 번갈아 가면서 바라보는 그 눈길이다.
그 눈길들, 눈길들 난 그 눈길들이 두렵다. 분명 난 동생과는 다른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씩 하
는 한번의 엷은 미소 속에 모든 본 질을 무마하려 든다. 꼭 그러는 그들의 대부분은 세상에 던져진 책
몇 권으로 마치 세상을 주관하려 드는, 결코 나와 여행을 할 수 없는, 야무진 나의 적들이다.
나와 내 동생은 그렇게 9분의 차이로 세상에 태어났다. 죽음을 목전에 둔 지금의 생각에도 나에게는
태어남 자체부터 구속만이 있었을 뿐 자유스러움은 조금도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 세상은 존재해 있었고, 그 주어진 세상에 이미 나도 존재해 있었다. 또 세
상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굴러갔었고 나 또한 세상과는 상관없이 죽어 갈 것이다. 그러나, 태어남은
나의 절대 의지와는 상관없이 진행되었지만 죽음은 분명 나만의 절대 의지로서 진행될 것이다. 이 점만
은 정말이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꿈속에서 가끔씩 생각이 든다. 처음에는 형체를 잘 알 수 없는 두 개의 핏덩어리가 물 속에서 웅
크리고 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다만 이따금씩 꾸르륵꾸르륵 거리는 물 흐르는 소리만이 들려
오고, 그 두 개의 핏덩어리들은 서로 유영하면서 배회한다. 시나브로, 시나브로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하
면 똑같이 생긴 서로 다른 두 개가 웅크린 채 마주보고 있다. 그 둘의 발목에는 반점이라 부르는 낙인
이 찍혀 있다. 그 낙인의 색깔은 코발트색을 닮은 경미한 파란색이다.
그 낙인은 구속의 표시이며 제품의 품질 보증서이다. 그리고 그것은 족쇄 자국이다. 나는 알 수가 있다.
그 둘의 생김새의 구분은 좀처럼 쉽지 않으나, 그 둘의 낙인만은 명확히 구분이 되어 있다. 나의 낙인은
엉덩이가 아닌 왼쪽 발목에 찍혀져 있었고 마주보고 있는 동생의 낙인은 엉덩이가 아닌 오른쪽 발목에
찍혀져 있다. 이것은 거울의 이치와 너무나도 흡사하다. 그렇게 서로 마주보고 있는 동안에는 둘이 다
아무 생각이 없다. 그러다가 머리 위로 강렬한 수술실 조명등이 내리 쪼인다. 본능적으로 그때부터 그
강렬한 수술실 조명등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을 느낀다. 그때부터는 그 본능에 굴복을 하고 만다.
나는 그 강렬한 수술실 조명등을 향해 동생의 머리를 박차고 나간다.
그것이 나의 비극의 시작인지도 모르고 다만 '빛'인 줄로만 여기고 동생의 머리를 나의 발로 박차고 튕
기며 밖으로 나간다.
탄생. 아아, 강렬한 빛 다음의 어둠이여...... 나는 혼절한 상태 마냥 나의 눈과 나의 사고는 매우 혼란스
럽다. 나의 홍채는 갑자기 짙은 안개가 낀 듯이 아주 흐릿해지고, 나의 동공은 어안 렌즈로 돌변하여 사
물이 심하게 왜곡되어 보인다. 왜곡되어 보이는 그 모습들이 본질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나의 사고는
회전 열차를 탄 것처럼 마냥 어지럽고 깊은 계곡의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 같다.
그 혼돈의 상태에서 무언가가 나의 엉덩이에 충격을 가해온다. 철썩 하고 소래 내어 때린다. 나는 참지
못하고 컥 하고 울음을 터뜨린 다. 입 안에서 오물이 떨어지고 나는 정신을 잃는다. 나는 끝이 없는 낭
떠러지로 계속해서 떨어진다. 그리고는 소리 없는 비명 소리에 나는 잠이 깬다.
잠이 깬 채 주위를 둘러보면 나의 홍채는 점점 열리면서 어두운 방 안에서 감각을 찾으려고 확대되고,
동공은 표준 렌즈로 돌아온다. 나의 뇌는 아틀라스처럼 그 무겁고 커다란 꿈을 어깨에 떠받치고 있다.
그때쯤이면 으레 나의 동생은 나의 땀을 닦아준다. 동생의 말없는 행동은 마치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샅
샅이 다 아는 것처럼 나타난다. 동생은 나를 지배하고 주관하려 든다. 나는 그것이 무섭기도 하고, 때로
는 나에게 절망적인 시기심과 함께 패배감을 가져온다.
시기심과 패배감, 이것이 기원전부터 은밀하게 진행되어온 나에게 주어진 저주이다. 그 저주는 지겹도
록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시기심은 적개심으로 치닫고 패배감은 나를 사육하면서 죽게 만들었다.
나에게 쏟아지는 저주를 내가 현세에서 느낀 것은 얼마 되지 않는 다. 그것은 내가 동생 자신이 출연
하고, 자신이 직접 대본을 쓴 사티로스극을 보았을 때였다. 그 사티로스극은 그리스의 비극 중에서 외디
푸스왕에 관한 것이었는데, 동생은 주제를 널리 알려진 외디푸스왕 이나 그의 딸 안티고네의 이야기에
맞춘 것이 아니라 외디푸스왕의 두 아들의 이야기에 중점을 두어 극을 진행하였었다. 그 두 아들의 이
름은 바로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였었다.
극은 외디푸스가 자신의 눈을 찌른 사실로부터 시작되었다. 그후 외디푸스는 방황의 길로 접어들었고,
외디푸스가 떠난 후 두 아들은 1년씩을 번갈아 가면서 테베를 다스리기로 했었다. 그러나 에테오클레스
가 이 1년간의 지배 기간이 다 지난 후에도 왕권을 내놓지 않자, 폴리네이케스는 아르고스로 망명을 가
서 그곳 군사-테베 공략의 일곱 용사들-를 데리고 전쟁을 일으킨다. 결국 두 형제는 서로의 칼에 서로
가 찔린 채 피비린내 나는 9년간의 장기전과 단기전은 끝이 나고 만 다.
--칼로서 서로가 서로를 찌르다.
나의 동생은 너무 환하지 않은 피에로의 분장으로 의자에 앉은 채, 약간의 소도구만을 들고서 그렇게
한 시간을 독백하였다. 무대 위는 전체가 어두웠었고, 동생의 연기하는 의자 위에는 2차 대전 당시의 기
관총 모양의 색광 조명등만이 총신이 돌아가듯 돌면서 비추고 있었다.
색광 조명등의 그 몇 안 되는 원색들이 동생의 이야기의 고저와 흐름 에 따라 번갈아 가면서 바뀌었었
고 그것이 바뀔 때마다 나는 환영을 보 았었다.
풀이 듬성듬성 나 있는 들판이 있다. 햇무리와 달무리가 동시에 드리워져 주위는 온통 붉게 물들여져
있고 천지사방은 조용하다. 간간 이 말들의 작은 교성 소리와 짐승 소리만이 들리어온다. 나는 은색으로
빛나는 철옷을 입은 채 막사 안에 혼자 있다. 어제까지의 대소 전투에서는 양쪽 모두 아홉 번의 승리와
아홉 번의 패배를 주고받았었다. 내일, 내일 동이 트면 이 전투는 끝이 난다. 동이 터옴과 동시에 양쪽
의 군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너와 나는 서로 칼을 겨눌 것이 다. 너와 나는 그렇게 들판에서 서로를
마주볼 것이다. 나는 너를 죽임으로써 나만의 테베 왕국을 건설하리라. 내일이면 너의 피가 묻은 칼을
높이 쳐들고 군사들의 환호 속에서 나는 세상에 등극하리라. 지배자로서 전횡자로서. 오늘은 잠 못 이루
는 소름끼치는 전야제. 모든 내일을 앞둔 전야제.
어두운 극장 안에서 나는 동생의 소리 소리마다에 소름이 끼쳤었고, 그 소름은 이후 나를 며칠씩 이유
도 없는 고열에 쓰러지게 만들었다.
고열이라는 고질병. 동생에 대한 패배감에, 나의 몸에는 고열이 모세 혈관마다 흐르고 동생에 대한 시기
와 질투는 나의 근육과 뼈까지 시리게 했다.
그래, 유서에다 동생과 나의 이야기를 적자. 그리고 내가 왜 동생을 죽였는지에 대해서도 적자. 그것이
나의 저주스러운 삶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한 단서가 될지 모르니까.
실상 나의 동생은 훌륭한 배우였다. 비단 배우뿐 아니라 시인이면서 화가였다. 글쎄, 어떤 식으로 동생
을 소개해야 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동생은 만재능을 가졌었고, 동생의 그 만재능은 나를 병들게 했었
다.
나는 시인이 되고 싶었었다. 그러나 학창 시절 때도 물론이거니와 여태껏 단 한 번도 나는 시를 통해
서 인정받은 적이 없었다. 국민학교 때의 그 흔한 교실의 뒷벽 환경미화란에조차 단 한 번도 오르지 못
했었다--그러나 인정을 못 받았을 뿐 나의 시가 훌륭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정말이지 나는 시인이
되고 싶었었다. 내가 시를 쓰려고 밤을 새울 적이면 동생은 자다 말고 내 곁으로 다가온다. 그러면 나는
자랑스러이 밤새 적은 시를 보여준다. 동생은 괜찮네 하며 씩 하 고 웃는다. 대개의 주관자들은 보통 그
런다. 그리고는 동생은 나도 몇 개 적은 것이 있어 하며 자기 책상에서 종이를 몇 장 들고 온다.
나는 처음에 놀랐다. 미술과 연극만 하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좋은 시를 적다니. 문학 평론에 비록 문외
한이지만 내가 상상할 수 없었던 그런 시다.
동생은 그러면서 흄의 안티 휴머니즘과 엘리엇의 감수성의 시론, 파운드의 고전주의를 막 내깔린다. 주
지적 시론에서 상징적 시론으로 다시 문학 이론에서 기호학, 사회학, 철학까지 치닫는다. 처음에 나는
감동한다. 흥분의 물결이 파도되어 나의 살을 돋게 한다. 짜릿함과 환희. 그 순간의 동생에 대한 신비는
동생에 대한 모든 시기심과 질투를 잊게 만들었고, 나는 동생의 손을 잡으며 나에게 시를 가르쳐 달라
고 말했다. 동생은 순간 하던 말을 멈추고 나를 본다. 안돼. 세상에 시를 가르치는 게 어딨어? 동생은
자기 침대에 가서 눕는다.
자는 동생의 뒷모습. 나는 한참이나 동생의 등을 쳐다본다. 그러면 너 시인으로서 문단에 한번 나서보라
고 말한다. 내보이기 싫어라고 동생이 말한다.
동생은 결코 자신의 재능을 내보이지 않았었다. 아니 오히려 그러한 행위들을 경멸하였다. 동생은 내게
상품화된다는 것이 싫다고 말했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화는 무서운 것이라며 자본주의는 사회주
의까지 상품화시킬 수 있다고 한다. 동생이 다시 일어나 앉았다.
형--동생과 나는 불과 9분의 차이밖에 나지 않지만 동생은 내게 항상 형이란 호칭을 붙였었다--생각
해봐. 훗날 노동절 기획 상품으로 마르크스 인형이나 레닌 인형이 나오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
어? 나는 아무런 답변을 해주지를 않았다. 답을 한다는 것은 저항 그 자 체이다. 하지만 무기력한 나는
동생에게 어떠한 반감도 가질 수가 없다. 동생은 만재능을 지배하지만 나는 시기심과 패배감에 지배를
당하기에 나는 아무런 할 말이 없다.
동생은 내게 계속해서 물었다. 그래,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만든다 해서 무슨 가치가 창조되
나. 시가 쌀로 변하고 그림이 연탄으로 변하고 음악이 시멘트로 변한다면 나는 복종하겠어. 주어진 농간
에 발맞추는 그런 것 나는 싫어. 인간이라는게 광합성 작용을 하면서 스스로 살아갈 수 있다면 시를 적
겠지. 생존을 못하는데 생활을 한다? 시라는 게 원래 사치며 가진 자들의 장난이야. 얼마나 많은 시인이
랑 화가들이 배고파 죽어 갔는지 알아? 단지 당시의 비평가 나 업자들의 눈에 들어오지 못했다는 이유
만으로 얼마나 많은 명작들이 대접도 못 받고 사라져 갔는지를 아냐구? 천재라는 것이 다 우연히 재수
있는 놈들을 말할 뿐이야. 당시 비평가들의 입맛에 맞으면 천재고 맞지 않으면 개수작이야. 모든 것이
상대적이지 절대성이라는 것이 어디 존재할 것 같아? 그렇지만 형은 그렇게 시인이 되고 싶어했으니 잘
해봐. 낭중지추.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언젠가는 형의 시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겠지.
동생의 물음에 나는 아무런 답변도 못 하고 있을 그때, 방바닥에 바퀴벌레 한 마리가 지나갔다. 동생은
순간적으로 놀라서 흠칫 뒤로 물러 앉았지만 나는 손바닥으로 그놈을 눌렀다. 동생이 놀라는 틈을 타서
과감히 그리고 재빠르게 행동을 보여주었다. 비록 순간이었지만 많은 생각이 들었다--그래 시라는게 나
에게는 사치일 수도 있지--.
나도 평상시에는 벌레를 맨손으로는 잡지는 못한다. 그러나 벌레를 맨손으로 잡은 그것은 나의 자위였
으며 동생에게 나의 존재를 나타내기 위한 수단이자 유혹이었다.
순식간이라 벌레를 손바닥으로 꽉 누르지 못하고 덮어 버렸기에, 방향을 잃은 벌레가 손바닥 안에서
살아 꿈틀대며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무척이나 간지러웠고 섬뜩했지만 나는 웃으며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동생에게 말을 했었다. 그래 나는
벌레를 맨손으로 잡을 수 있다. 동생에게 타고난 역할과 재능이 있듯이, 나에게도 살아가는데 있어 역할
과 재능이 있다면 그것은 벌레를 잡는 일이다. 나는 내 손 안에 잡힌 벌레를 볼모로 동생에게 할 말이
생겼다. 그래, 동생아, 나는 시를 쓰고 싶다. 하지만 너의 말대로 아무도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는구나.
그 어느 누구도 나를 인정하거나 알아주지도 않는구나. 시를 쓰면서 나의 삶을 살고 싶다. 내가 살아가
기에는 너의 시가 필요하구나, 너의 시가. 너의 그림으로 학창 시절 미술 시간을 보낸 것처럼 내가 살기
에는 너의 시가 필요하다. 대신에 나는 벌레를 잡겠다..... 벌레를.
동생과 나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마주보았다. 동생은 나의 생각을 모두 알고 있겠지만 나는 그 아무
런 말이 없이 보낸 시간 동안에 동생의 생각을 단 한 번도 간파한 적이 없다.
어쨌든 그때부터 동생은 밤마다 시를 적었고 나는 밤마다 벌레를 잡았다. 나는 동생에게 동생이 적은
시를 요구했지만, 동생은 나에게 내 가 잡은 벌레를 요구하지 않았었다. 구밀복검--겉으론 웃으면서 다
정하게 굴지만 속에는 칼을 감추고 있다--그렇게 나는 동생이 쓴 시로서 문단에 등단을 했었고, 나는
동생의 기생충이 되어 살아왔었다.
나는 그렇게라도 살고 싶었었다. 타인의 눈에는 사이가 좋은 쌍둥이로 보였었고 나의 눈에는...... 눈에
는...... 후우.......
이후로 동생에 대한 시기심보다는 패배감에 시달리기 시작했었다.
시인으로서의 삶이란 게 남들이 보기에 구차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것이었
다. 나는 왜 동생같이 되지 못할까? 나는 지금 다시금 대단한 혼란에 빠져 있다. 유서를 쓰고 있는 이
방을 다시 한번 둘러본다. 386 PC의 칼라 모니터가 나를 비추고 있고, 모니터의 목 아래에는 재떨이가
어렴풋이 보인다. 방안은 불이 꺼진 채 모니터의 불빛만으로 그 윤곽을 조금씩 드러내고 있다. 나는 이
방안에서 지낸 수년간 경험과 감각에 의해 방안 사물들의 정확한 위치와 상태를 판단할 수 있다. 어두
운 주위 속에서 나는 물건들을 하나, 하나씩 연상해본다. 책걸상, 침대, 옷장, 책꽂이, 재떨이, 주전자 그
모든 것들이 빠짐없이 제 위치에 있다. 그러나 나의 눈과 경험과 감각, 그 어디에도 자살을 위한 선택이
보이질 않는다. 칼도 보이지를 않고 수면제도, 끈도 보이지를 않는다. 물론 방안에는 가스도 없으며, 투
신할 충분한 높이도 되지를 않는다. 무거운 바벨도 없으며 불을 붙일 기름도 보이지 않는다. 총은 더더
욱 없으며 한강물도 없다. 약도 약품도 없으며 날카로운 공구도 깨진 유리도 없고, 차도 기차도 지하철
도 벽돌도 양잿물로 나를 죽여줄 그 어느 누구도, 그 어느 것도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명확한 것은 나는
죽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대단한 혼란에 빠져 있다. 무엇이라고 종잡을 수는 없지만, 프랑스 여인
이 내 귓볼에 대고 밀어를 속삭이는 것이 듣고 쉽기도 하고, 자살 할 용기를 가지기 위해서인지 헨델의
'사라방드'를 듣고 싶어지기도 한다. 또 그러나 정확히 그런 것들은 아니다.
무얼까? 두려움? 그래 어쩌면 두려움일지도 모른다. 솔직히 동생의 죽음 이후에도 동생에 대해서는 두
렵다. 나를 어디선가 보고 있는 듯하다. 동생은 나를 보이지 않게 몰래 숨어 숨어 질타한다. 동생은 죽
으면서까지 나를 괴롭힌다. 아니 죽음 이후에 더더욱 나를 숨막히게 한다. 내가 생각한 교묘한 살인을
동생은 역이용하여 나의 목을 조른다. 그리고 추궁한다. 내 죄를....... 어길 수 없는 업보를...... 바로 질시
와 패배로 찬 살인을 말이다.
맞은편 아파트의 몇 집에 아직 불이 켜진 곳이 보인다. 이 야심한 밤에 무엇을 하는 것일까. 살인을 모
의하는 것은 아닌지. 내가 살인을 모의한 것도 이런 야심한 밤이었다. 그때에도 지금과 같이 맞은편 아
파트에서는 몇 집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나는 생각을 해보았었다.
만일 동생이 없다면. 아니 없어진다면. 나는 언제까지나 벌레를 잡으며 동생이 던져주는 시에 만족할 것
인가? 기생충, 기생충, 어-이 기생충, 누군가가 나를 자꾸만 놀려댄다. 잘난 사람들이 자꾸만 나를 놀려
댄다. 나는 기생충이 아니라 시인인데도 자꾸만 나를 기생충이라 한다. 사람들아 나는 시인이다. 대학로,
신촌, 명동 바닥을 거니는 여대생의 팔에 안긴 시집 한 권의 주인공이란 말이다. 그러나 내가 정당히 외
칠 수 없는 이 원죄는 어디서 왔나. 나는 나만의 왕국을 건설하여 다스리고 싶다. 추종자들은 나를 받들
고 나의 절대성은 언제나 관철된다. 왕국. 그래 이제 생각이 난다. 내가 원래 왕이었었지. 내가 다스리고
있던 곳이 보인다. 그러나 백성들에게는 동생이 더 인기가 있었지. 맞아, 내가 왕궁을 거닐다 보면 동생
은 하프를 켜면서 시를 읊고 있었지. 나는 질투심에 사로잡혀 동생을 쫓아 버렸어. 국가의 위협적 인물
이로다. 그를 추방시킬 제도를 만들라. 도편추방제. 이제서야 모든 게 환해진다. 나는 과거의 회상으로보
터 용기를 얻어 현세에 그를 추방시킬 음모를 꾀한다. 동생에 대한 나의 음모는 나를 해방시켜 줄 것이
다. 보아란듯이 그를 제거하리라. 자, 이제 나는 그를 어떤 식으로 추방하여 내가 기생충이 아닌 시인임
을 세상에 고할까.
모함을 할까? 아내야 머리 좋은 그놈은 빠져나올게 틀림없어. 아, 그때처럼 추방시킬 수만 있다면. 그
러나 추방시켰다가 그를 추종하는 놈들과 함께 모반을 하면 어떻게 하지? 가만, 혹시 옛날에 내가 그놈
을 추방시켰을 때도 그놈이 다시 나에게 쳐들어왔었나? 잘 기억이 안 난다. 하여튼 지금은 추방만으로
는 안 된다. 다시 쳐들어올 위험도 있고. 그렇지. 살인이다. 죽음뿐이다. 윤희의 영겁을 벗어버리도록 완
연한 죽음. 아주 깊고 깊은 죽음.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도록 관에 못을 박자. 뼈를 갈고 머리털 하나까
지 모두 태우자. 그를 추종하는 놈들도 아주 철저히 죽이자. 나를 기생충이라 부르는 동생의 추종자들도
모두 죽이자 죽여. 그렇게 해야만 후환이 없다. 그렇게만 되면 완연한 해방이다. 전횡이다. 음,...... 그러나
내가 죽인 것이 탄로나게 하면 안된다. 하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는
보이지 않는 살인이란 아주 흔하디흔한 일이니깐 말이다.
권력으로서도 범인 없이 아주 쉽게 살인을 할 수 있고, 제도로서도 보이지 않게 아주 간단하게 죽일 수
있다. 사회 구조 속에서는 더욱더 교묘히 살인을 즐길 수 있다. 죽은 시신 앞에서 죄송하군요, 유감입니
다, 우연입니다면 그뿐이다. 나는 그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보았다. 지금은 내가 권력을 가진 것이 없다.
구조와 제도 속에서 죽이기에는 언제 죽을지 시간이 불명확하다. 나는 지금 당장에 동생이 죽기를 바란
다. 그렇다면 결론은 간단하다. 우연을 가장한 사고사. 실족사.
화재. 익사. 자동차 사고. 과실치사. 그 중에 나는 산에서의 실족사를 생각한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나와
동생은 이때까지 단 한 번도 산에 간 적이 없다. 처음 가보는 산에서 죽는다는 것이 무언가 신비스럽기
까지 하다. 또 나는 산에 오르는 정복감과 동생을 정복하는 두 가지의 정복감을 동시에 만끽한다. 산에
서의 사고는 태반이니까 누구 하나 의심하지 않는다. 인적이 드문 곳이면 들킬 염려도 없다. 완벽하다.
후후. 게획만은 완벽했었다.
동생.
우리는 여행을 가야겠다. 아주 긴 여행을. 어쩌면 돌아오지도 못하는 그런 긴 여행을.
해남을 지난 813번 국도를 따라가면 송호리가 나와. 그 송호리에서 좀더 남쪽으로 끝까지 내려가면 토
말, 땅 끝이라는 곳이 나오지. 난 그 땅 끝까지 갈 것이야. 이 땅을 살아가면서 땅 끝도 가보지 않고 중
간만 보고 절망하거나 혹은 단정한다면 너무도 서글픈 일이 아니겠는가.
난 지금부터 사공이야. 난 같이 여행을 할 배가 필요해. 강의 기원을 찾아서 같이 갈 배 말이야. 난 아
주 예전부터 매우 궁금했어. 과연 강은 어디서부터 시작인지. 네가 배가 되어 주었으면 좋겠어. 난 갈
거야, 떠날 거야. 우리 같이 가자. 배가 없는 사공은 외롭거든.
힘이 매우 드는 법이거든. 강을 거슬러 근원을 찾아, 길을 찾아.
여행. 여행이라는 것이 항상 그렇지 않나. 어디론가, 그곳에 가면 무슨 일인가 생길 것도 같고. 무언가
해답을 얻을 것만 같은. 사실 나는 여행을 꽤나 좋아하는 편이지만 그렇게 여행을 많이 다녀 봤어도 내
가 항상 생각하던 그런 해답을 구한 적은 없었어. 하지만 또 다시 여행을 가게 되더군. 꼭 어디로 떠나
지 않더라도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여행일 수도 있지 않겠나.
동생을 산으로 끌고 가기 위해 난 여러 날을 준비했었다. 동생은 나의 생각들을 곧잘 간파하기에 모종
의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었다.
바로 화해의 제스처. 나의 이 말에 동생은 그냥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는 한동안 있다가 형, 형은 계속
벌레를 잡을 거야 하고 힘없이 물었다. 물론이지. 나의 사명은 벌레를 잡는 것이거든. 그것이 나의 업원
이거든. 내게 뿌리 박힌 저주이거든. 또 말없는 동생의 초월한 모습. 그 초월한 모습 내면 깊숙한 심연
의 사고. 동생도 역시 그때 이미 나에 대한 모종의 기습적이며 역습적인 파상 공격을 준비했었다.
바보같이 나는 그때 눈치조차 못 채고 마음만 들떠서.
여행을 떠나기 전날 밤 왜 그리 가슴이 설레었는지. 나의 시가 아니라는 그 동안의 악성 루머를 깨고
왕위에 등극하는 내 모습이 보였다. 절대자라는 칭호가 내 마음에 안착된다. 나는 자고 있는 동생을 마
지막으로 보았다. 이제 너는 이 밤이 지나면 죽음의 긴 여행을 가겠지.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지 아니
면 알지만 이미 지쳐 모든 것을 초월했는지 너무나 자연한 모습이었다. 나는 너를 꼭 죽여야만 하나.
진정 이 방법 외에는 나를 구원해 줄 그 무엇도 없단 말이지. 눈물 같은 찝찝한 것이 흐르기는 했지만
벌레만 잡는 씹어 죽일 내 업원을 생각하며...... 사라져 버려라 이놈. 제발 사라져 버려라. 죽어다요. 죽
어다오.
죽음. 죽음 다음에는 무엇이 있을까. 영혼이라는 것이 제발 없었으면 좋겠다. 얼이라는 것도 없었으면
좋겠다. 단지 그냥 뇌가 먼지가 되어 아무런 사고를 가지지 못하면 좋겠다. 다시는 내가 저주를 생각지
못하도록 그냥 마구 썩으면 좋겠다.
오늘로부터 사십구 일 전, 그래서 동생과 나는 그렇게 토말에 있는 산으로 갔었다. 내가 산으로 유인할
필요도 없이 동생은 바다 위로 떠오르는 해를 보자며 산으로 가자고 했다. 우리는 바다가 보이도록 산
으로 올라갔었다. 우리는 산 정상에서, 땅 끝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기다리기로 했었다. 신이 태양을 기
다리듯이, 창조자가 피조물을 기다리듯이, 동생이 나를 기다리듯이.
우리는 말없이 정상까지 올라갔었다. 그러다가 정상에 거의 다가서자 동생은 나에게 사람들이 산을 왜
오르려 하는지를 모르겠다고 했다. 그렇다. 동생은 산을 애써 오를 하등의 이유가 조금도 없었다.
그는 이미 모든 것들을 정복했었고 지배해 보았기 때문에 말이다. 무아와 윤회. 동생은 이제 산을 내려
와야 할 단계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태초의 황금의 종족에서부터 지금의 돌의 종족까
지, 선택한 것도 없었고 지배한 적도 없었다. 나는 이제 이 산에서 영겁의 세월 동안 맺힌 저주를 풀어
야 만했다. 테베에서부터의 지배자인 동생은 이제 윤회를 마쳐야 한다. 나는 문하생에서 지배자로 진보
를 거듭해야 한다. 이젠 나도 전횡의 길로 간다.
산 정상에 도착하니 저녁이 되었었다. 모든 산속 깊은 숲속에는 판 적 공포가 서려져 있다. 나는 이 공
포감에 어떤 신비한 경외감을 가진다. 환상과 환청을 가져오는 무언가 비밀스러운 듯한, 어디에서부터인
지 시작되었는지를 모르는 소리들, 마법들...... 나는 기묘한 판의 정령들을 심호흡으로 들이마셨다. 싸늘
함으로 내 가슴속에 들어와 답하는 정령들. 동생은 어두워서 안 보인다고 텐트를 빨리 치자고 말했다.
동생과 나는 텐트를 치고 산책을 갔었다.
동생은 밤공기가 시원하다고 했다. 그리고는 별이 잘 보인다고 했다. 동생은 무언가 말을 하고픈 모양
이었다. 나는 동생에게 아무 이야기나 해달라고 했다. 형, 내가 이야기를 한 가지 해줄까? 이건 내가 아
는 어느 한 나이 많은 선배 연극 단원의 이야기인데...... 동생의 이야기는 이런 식으로 시작하였었다.
그는 진정한 연기자가 되고 싶었어. 완벽의 연기를 구사하는 배우 말이야. 그는 그가 연기를 하면 관객
은 스토리가 어떻게 전개되는지는 전혀 모르더라도 단지 그가 맡은 배역의 인물에만 집중할 수 있는 그
러한 연기를 한번이라도 하고 싶었지. 내가 보기에는 그는 그러한 연기를 충분히 했다고 생각해. 하지만
나 외의 모든 사람은 그렇게 생각을 안 하더군. 오히려 혹독한 비웃음만을 줄 뿐이었지. 모두가 자기 경
험에 비추어 보고는 그를 무능하다며 일찌감치 다른 일을 해보라고 은근히 권유하는 단원도 있었고, 혹
자는 마치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연기자인 양 착각하고는 그에게 연기 지도를 한답시고 노리개처럼 데리
고 노는 사람도 있었지. 그 빌어먹을 상상력이 빈곤한 경험론자 들이 말이야. 도대체 그를 어떻게 보고
는...... 어쨌든 그는 단역이라도 좋으니 제발 연기를 하게 해달라고 했었지. 하긴 요즘처럼 배곯아가며
연극을 하겠다고 제발로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 마당에 애써 그를 나가라고만은 할 수 없는 노릇이었지.
그뒤로 그는 그에게 주어진 단역들을 소화해내기 위해 경험론자들이 읊조리는 경험을 찾아나서기 시작
했지. 그 노력은 실로 무서울 정도였어. 그 경험론자들에게 단지 칭찬받기 위한 그 노력은 일종의 광신
이었지. 거리를 지나가는 행인의 역할을 맡으면 그는 배역을 맡는 그날부터 공연 전날까지 근 두세 달
을 거리를 활보하면서 행인을 연구하는 정도였으니 말이야. 그러나,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단
역을 맡아야 했어. 벤치에 앉아 있는 노인으로, 부랑자로, 도둑 3으로, 경찰 2로...... 대사가 두세 마디라
도 그에게 배정된다면 그건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을 정도로 그는 정말 단역만을 맡게 되었어. 그것도
우리 극단에서 뿐만이 아니라 행인 9까지 필요한 주위의 모든 극단에서 그는 활동을 했었지. 그는 그
길만이 그가 배우로서 살아남고 타단원들에게 인정을 받는 길이라 생각을 했대. 그렇게 24년을 보냈어.
내가 그 선배를 안 것이 5년전부터 였는데 그가 나에게 작년에 이런 말을 했어.
- 자네는 사티로스극을 했으니 알 수도 있겠군. 그래 자네는 무대 위의 광대가 언제 가장 자신이 불쌍
하다고 느낀다고 생각하나? - 글쎄요, 음, 공연이 끝난 뒤 불이 켜졌을 때가 아닐까요? 불이 꺼졌을 때
는 관객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불이 켜지고 난뒤 관객은 한 명도 없고 오직 무대 위의 광대 자신
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꼈을 때요. 자신을 지켜볼 단 하나의 관중도 없다는 게 가장 슬프죠.
- 허허, 일리는 있네만 아직도 자네는 환상 속에서 살고 있구먼. 나는 말일세, 이렇게 생각한다네. 오히
려 불이 꺼졌을 때라고 생각한다 네. 관객이 있든 없든 간에 해야만 하는 광대의 운명 말일세. 정말이지
이젠 나도 지쳤어......
아마 그 대화가 그 선배의 마지막 자신의 모습이었을 거야.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이상한 것은 그 후
로부터야. 그뒤로 그 선배는 목소리가 변하기 시작하더래. 5년 전 강도 역을 맡았을 적의 강도 목소리가
나기도 했다가 어떨 때는 노인의 목소리, 또 어떨 때는 부인의 목소리, 심지어 아기의 목소리가 나는 거
야. 처음에 우리 단원들은 발성 연습 삼아 말하는 줄로만 여겼었찌. 그런데 자신은 자신이 말을 할 때마
다 괴로워하는 거야. 마치 벙어리가 꼭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데 발성이 안 되어 괴로워하는 것같이 말
이야. 왜 괴로워 하냐고 내가 물어 보았지.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한심한 질문이었지만 말이야. 그는 자
기 자신의 원래 목소리가 어떤 것인지 모르겠다는 거야. 그는 나보고 전에 자신의 목소리를 가르쳐 달
라고 하잖아. 그래서 나는 선배의 목소리는 이러이러한 목소리였었다고 내가 설명해 주었지 않겠어? 그
랬더니 그는 내가 설명한 자신의 목소리를 차츰차츰 내기 시작했는데-마치 아기가 처음 말을 배우는 것
같이-그가 내는 목소리는 예전의 선배의 목소리가 아니었고, 내가 설명한 목소리에서 한치의 오차도 없
는 목소리만 낼 뿐이었어. 나는 그게 아니고 예전의, 고유의 당신의 목소리는 이러이러 했었다고 다시
설명을 해주었지. 이번에도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라 다시 내가 설명한 목소리의 흉내만이 되풀이 될 뿐
이었어. 그는 한참을 울더군. 그는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버린 녹음기가 되었어.
이것으로만 끝나지 않았어. 그런 일이 있은 후 며칠이 지나도 그 모임에 나타나지 않았어. 하루도 빠짐
없이 나타나는 그였는데 말이야.
궁금한 나는 그의 집을 찾아가 보았지. 거울이 깨진 방안에 마치 아이들로부터 피난 온 원숭이같이 그
가 웅크리고 앉아 있더군. 나는 어디가 아프냐고 물어 보았겠지. 대뜸 나를 보고는 한다는 소리가 자신
이 강도였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겠어. 그래서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지.
그러면 자신이 모기업 총무과장인지를 묻는 거야. 나는 웃으면서 역시 아니라고 말을 했었지. 그랬더니
그는 하염없이 울면서 그는 자신이 누구였으며 무엇이었었는지를 모르겠다는 거야. 나이도 모르겠고 이
름은 물론이거니와 성별조차 모르겠다는 거야. 나는 당신은 배우였소라고 말을 했지만 그는 연기를 한
기억이 없다는 거야. 그러면서 마냥 울기만 하는 거야. 후우--, 형, 결코 그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는 거야.
동생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났다. 나는 그 배우가 결국 어떻게 되었는지 묻지를 않았다. 또 왜 동생
이 죽기 전에 그 이야기를 나에게 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동생은 이야기를 다했고, 나는 동생과 같
이 단지 끝이 없이 걸을 뿐이었다. 동생이 다시 말을 이었었다.
조금만 더 걸으면 낭떠러지가 나와...... 형, 만약에, 만약에 말이야, 내가 저기 낭떠러지에 발을 헛디뎌
떨어져서 아주 작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다고 쳐, 형은 나를 구해줄까? 나는 동생의 물음에 대답을 하
지 못했고 다만 내 몸이 추워짐을 느낄 뿐이었다. 내가 여기서 죽어 없어지면 앞으로 형은 밤마다 벌레
잡는 일을 하지 않아도 돼. 왜냐하면 내 서랍 안에는 아직도 충분한 양의 내가 적은 시가 들어 있거든.
형은 무엇을 택할 것이야? 벌레야? 시야?.......
나는 형이 나를 구해 줄 것이라 믿어. 내가 아는 형은 그럴 테니까.
나는 또다시 고열에 휩싸일 것 같았다. 정보가 샜는가?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가. 나는 무슨 말을 해
야 하나? 잘못했다고, 살려 달라고 애원을 할까? 무언가를 의지하고 싶어졌다. 어지러워지면서 오히려
내가 끝없는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태어날 때도 이렇게 어지러웠고 끝이 없는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만 같았었지. 그러나 지금은 아무런 빛도 보이질 않는다.
형, 형은 나를 부러워했거나 시기했을 수도 있겠지. 아마, 그럴거야.
하지만 나 또한 무척이나 괴로웠어. 형이 시를 구걸하는 그 비참한 모습. 시기와 탐욕으로 바라보는 피
서린 눈발. 벌레를 찾아 방구석을 돌아다니는 머리통. 불에 지진 팔. 끈으로 묶인 자국이 서려져 있는
시퍼런 목. 수면제가 들어 있는 위. 대못에 박힌 발바닥. 그리고, 헉헉..... 벌레가 들어 있는 심장. 난 형
이 벌인 그 전쟁을 마치고 싶어. 형과 나는 주종 관계, 계약 관계였지. 벌레를 잡아다 주인에게 바치고
곡물을 얻어가는. 혹시 우리가 죽고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까?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이 될 수 없는 거야.
형이 될 수 없는 거야. 형은 형 자신을 찾을 수 있을까. 기원전부터 싸워온 둘만의 전쟁은 이제 끝날 수
있을까. 난 이제 끝내고 싶어.
어떠한 운명이 다시 전쟁을 부채질하더라도 말이야. 자, 형, 가아안- 다아. 너무도 순간. 동생은 나뭇가
지 대신에 벼랑에 손끝을 의지한 채 매달렸다. 주위는 매우 어두웠으나 나는 분명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고요한 산중에 동생의 거친 숨소리가 전해져 왔다. 형, 선택해.
형이나 나나 우리는 세상에 갇힌 거야. 갇혀서 사육되어온 거야. 나는 이제 완전한 선택을 했어. 이제
형이 선택할 차례야. 이런 값진 선택은 다시는 없을 거야. 나는 기억이 나. 형의 시기스런 눈발을 피해
어두운 방안에 혼자 갇혀 있던 그 공포가. 이제 난 탈출이야. 나만의 선택으로.
나는 그 자리에서 어지러워 아무런 것도 할 수 없었다. 선택? 무엇을. 나는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가?
너는 죽으면서까지 무엇을 택한 것이냐?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느냐. 내 자신을 찾으라고? 너에게 곡물
을 얻어 가는, 시를 얻어 가는 그래서 벌레만을 잡는 나를 찾으라고? 나?
세상의 많은 경우의 수가 나를 짓누르며 엄습해온다. 이 세상의 모든 경우의 수가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 무수히 많은 경우의 수 어느 하나도 선택할 수 없었다. 나는 여태껏 '선택'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게 끌려 다니며 살아왔기에 그 뜻조차 쉽게 생각이 나질 않았다. 매달린 동생의 숨소리가 메아리쳐
들려온다.
난 형을 믿어. 형은 나를 시기하고 미워했을 수도 있지만, 형은 알아? 나만이 형을 사랑한 것을? 나만
이 형을 인정하고 알아준 것을.
그렇지만 이건 형도 알아야 돼. 형의 추종자 그 어느 누구보다도 내가 형을 더 추종하는 것을. 그러니
형도 선택해줘, 제발. 형, 그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는 거야. 모든 이가 안 알아주어도 나만
은 형을 사랑해..... 자, 형 선택해.
나, 인정, 패배, 시기, 동생, 죽음, 벌레, 시, 기생충. 동생은 손에 힘이 빠지며 서 있는 나를 점점 멀리하
며 밑으로, 밑으로 떨어져 갔다.
떨어져 갔다. 떨, 어, 졌, 다.
그날 어떻게 산을 내려왔는지 모르겠다. 동생이 떨어진 낭떠러지 위에서 본 산의 높이는 실로 조그마
하였다. 한달음만 치면 낭떠러지 밑으로 내디딜 것만 같았었다. 아...... 그때 나는 그 한달음을 내디뎌 야
만 했었다. 땅 밑의 모든 산초나무들이 가시를 앞세워 낭떠러지 끝에서 위로 치솟아, 그 높이는 낭떠러
지의 어깨와 같았었다. 정말이지 한달음이면 동생의 부스러진 뼈와 살을 안기에 충분할 것 같았었다.
그러나 나는 그 한달음 대신에 수만의 걸음으로 산초나무의 가시를 헤 치며 아래로 아래로 뛰었었다.
중력에 맡기고 그냥 추락하는 기분으로 내 몸을 맡기며 뛰었었다. 내가 산 입구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에는 기다리던 아침해가 동생의 시체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동생이 기다리던 해는 동생과 조우를 하지
못하고 그렇게 떠오르고 있었다.
서울로 오는 기차를 타고 집으로 오는 버스를 탔었다. 버스 안에서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어제 오
후 7시경 공덕동 권모씨의 지하 전세방에서 살던 일가족이 동반 자살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먼저 저 세상에 간다라는 짤막한 유서를 남긴 채 모두 숨져 있는 것을 오늘 아침 이 집주인 권
모씨가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으나 이미 숨져 있었습니다. 이들 일가족은 경북 임하군 보성 2리에서 논
900평에 농사를 짓다가 가난에 못 이겨 작년 서울로 올라왔으며 지난 해 10월, 현재의 지하 방을 전세
4백만 원에 얻어 살아왔습니다. 숨진 일가족의 가장 김씨는 경기도 부천의 공장에서 작업 도중 팔을 잃
어버린 후 새로운 직장을 구하지 못해 평소 세상을 비관하며 지냈었다고 인근 주민들은 전하였습니다.
다음 뉴스......'
라디오를 튼 장본인인 버스 기사는 살인에 대해서 알까? 나는 주위를 둘러다 보았다. 버스의 흔들림에
아무런 저항이나 지탱함도 없이 그냥 몸을 맡긴 채 흔들리는 대로 흔들리면서 앉아 있는 무감각한 승객
들. 그 승객들은 죽음의 의미를 모른다. 동생의 죽음에 대해서도 그리고 공덕동 권모씨가 왜 죽었는지
를. 하다못해 늙은 연극단원이 왜 자기 자신을 잃어갔는지도. 나는 그 승객들이 미워진다. 흔들리는 대
로 흔들리는 그 유연함이 나에게 불현듯 테러를 생각하게 만든다.
그들은 오늘 벌어진 두 가지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을 할까? 자살과 방관. 자살과 타살. 실족사, 살
인. 우연한 사고, 필연적인 살인.
필연적인 사고, 우연한 살인. 그들의 죽음은 누가 보상해 줄 것인가.
동생은 죽었는가 아니면 내가 죽였는가. 권씨의 지하 전세방의 한 식구의 죽음이 자꾸만 교차되어 생각
난다. 미필적 고의, 미필적 고의, 미필적 고의......
산에서 내려온 그날 이후 나는 지금까지 예전에 앓았던 고열에 시달렸었다.
-그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는 거야.
나는 동생이 죽은 지 사십구 일 만인 오늘 아침에 그녀를 만났었다.
동생의 약혼녀이자 나의 첫사랑을. 물론 그녀는 내가 죽은 동생인 줄로만 안다. 동생 죽음 이후 사십구
일간 나는 동생 행세를 했었다.
동생의 책상 서랍 안에는 동생이 적은 시가 가득했었고 어느 누구도 구별하지 못하는 똑같이 생긴 외모
와 체격, 음성 덕택에 나는 그렇게 지낼 수가 있었다. 나는 동생의 죽음 이후, 나의 저주를 풀고 나의
세상을 만드는 듯 싶었었다. 동생의 시로서, 동생의 행세를 하면서, 동생의 추종자들을 만나 나의 존재
를 과시하면서 삶을 즐기려 하였었다.
그러나 편치 않은 안락감과 석연치 않은 고요함. 그것은 마치 해일이 불어닥치기 전의 잔잔한 파고와도
같았다. 어디선가 아직도 지켜보고만 있을 것 같은 동생의 눈길에, 나는 여전히 저주 속에서 갇혀 살고
있었다. 그리고는 나에게 말을 한다. 형, 그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는 거야라고.
나에게 형의 죽음을 묻는 그녀가 가증스러워 보였다. '형의 죽음은 정말 안되었어요. 좋은 분이었는
데...... 장례식에 못 가서 정말 미안해요.' 가증스러움. 그녀에게서 가증스러움을 확인할 수도, 찾아볼 수
도 없었지만 나는 왠지 가증스러움을 자꾸만 느낀다. 나는 그녀를 짓밟고 싶었다. 그녀의 육체와 영혼까
지. 아직도 동생이 지켜본다면 나는 발악을 하고 싶었다. 동생에 대한 단 하나의 성취감이라도 갖고 싶
었다. 동생은 빌어먹을 능력 없는 늙은 연극단원과 나를 비교하여 끝까지 조롱하고 야유하면서 내게 자
신을 영존시켰다. 또 동생은 자신의 예기치 못한 돌변스러운 죽음을 나에게 던짐으로써 나에게 옥죄 같
은 답을 요구하였다. 결코 그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다고? 그래 그렇다면 나를 보여줄까?
최후의 일각까지 너에게 저항을 하고 답을 거부하고 발악을 하는.
그녀와 나는 커피숍을 나와 대낮의 도시의 번화가를 거닐었다. 어젯밤의 후유증이 아직 채 가시기 전
의 번화가는 스산하였다. 미찌고 런던 옷가게 앞의 젊은 여종업원은 빨간색 플라스틱꾸 양동이에다 마
포 걸레를 질퍽질퍽 빨고 있었고, 맞은편 레코오드 가게의 아가씨는 젖통을 열심히 흔들거리며 윈도오
우를 닦고 있었다. 거리에는 캐롤쏭이 신경질이 나도록 큰 소리로 울려퍼지고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내 앞을 걸었다. 그녀의 뒤를 걸으면서 나는 그녀의 흔들거리는 엉덩이를 꿰뚫어본다. 치마에 팬티 자국
이 어렴풋이 보이고 곧 터질 것 같다. 뾰족구두를 신은 그녀의 육체는 한걸음, 한걸음,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흔들렸다. 그녀는 뒤따라오는 나와 걸음을 맞추려는지 가끔 뒤를 힐끔 돌아보면서 천천히 걸었
다. 나는 그녀의 팔을 낚아채며 결혼하자고 했다. 그리고 지금 당장에 너를 갖고 싶다고 말했다. 형의
죽음 이후에 외롭다고, 괴롭다고 말하면서. 그녀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짓고는 다시 이것도 저것도 아닌
표정을 지으며 서 있었다. 넌 역 시...... 사실, 동생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었다. 단지 그녀가 일
방적으로 동생을 좋아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동생의 추종자였다.
추종의 대상이 없어진 추종자. 너 역시 짓밟히기에는 충분한 죄를 갖고 있다. 난 충분히 알고 있었다.
동생이 그녀를 만나준 것은 순전히 나 때문이었다. 나는 그녀를 진정 좋아했었지만 그러나 그녀는 동생
에게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었다. 그뿐이다.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나를 안았었다. 무엇이 그녀를 감
동시켰는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해하며 나의 품에 안기어 울었다.
전야제. 해일이 일고 폭풍 치는 오늘밤. 모든 내일을 앞둔 지금은 전야제. 이 전야제가 다 끝나가는 듯
히다. 몸이 피곤하다. 어깨가 무거워지고 유서를 적는 속도가 차츰 늦어진다. 이제 유서를 마칠 때가 온
것 같다. 동이 터오고 있다. 사물의 색깔들이 검은 색에서 파란색으로 바뀌더니 이제 제 색을 띠기 시작
한다. 방안은 사물들의 제 색 찾기와는 상관없이 여전히 조용하고, 나는 오늘 죽을 것이다. 맞은 편의
아파트 창문에서 불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여러 집이다. 새벽밥 짓는 소리가 몇 군데서 들려 오지만 불
켜진 그 모든 집에서 들려 온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아마도 소리 없이 불만 켜진곳이 몇 집 있을 것
이다. 그들도 전야제를 보낸 것일까?
째깍째깍째깍...... 나는 이 유서 앞에 가만히 있는데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지구가 한 시간 가량 움직
였다. 지구가 한 시간 가량 움직이는 동안 나는 가만히 모니터를 주시하고 있었다. 전야제, 동이 터온다.
언젠가 과거에도 한번 이런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은색 갑옷을 입고 막사에 있었지. 그리곤 마지막 전투
가 있었어. 살인을 계획하던 날의 못다란 기억들이 이제서야 주마등같이 지나간다. 그래, 나와 동생은
서로의 칼에 찔린 채 우린 죽어갔었지. 자기 자신을 못 찾은 채 우리는 서로의 칼에 찔려 죽어 갔었지.
그렇다면 진정 이제는 내가 죽을 차례인가?
먼 곳의 직장으로 출근하려는지 벌써부터 차량에 시동 거는 소리가 아파트 단지를 울린다. 출근길, 학
교길을 배웅하는 가족이 보인다.
아내가 손을 흔든다. 아빠와 국민학교에 올해 갓 입학한 큰아이가 차에 올라탄다. 어미와 아직 학교에
들지 못한 작은아이가 어미따라 빠이빠이 한다. 아이. 아이들. 시간은 역행할 수 있는가. 모든 걸 되돌리
고 새로운 출발을 한다고 한다. 나는 불현듯 아기가 되고싶다.
오늘 죽음을 앞둔 바로 지금 살고 싶어진다.
아포카리포스 apocalypse--죽음. 누군가가 말했었지. 그것이 곧 시작이라고. 죽음의 기인 검은색 철 덩
어리로 된 기차를 타고 역시 기인 터널을 지나 아주 희인 플랫포오옴에 들어서면 아브라카다브라
abracadabra--축복, 즉 탄생이라고. 죽음이 곧 축복이라고. 나는 죽음으로서 과연 이 저주를 풀 것인가.
동생과의 악연도 끝이 나고 진정 축복을 받을 것인가. 그러면 모든 것이 새로워지는 걸까?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닌 다른 나로......
동생은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것일까. 동생이 얘기한 늙은 연극 단원은 어떻게 되었나. 해답을 구한
사람이 있을까...... 차라리 나는 계속해서 벌레를 잡을 것을. 그러나 동생이 곁에 와서 조용히 말한다.
죽어서 속삭인다. 나지막이. 아주 나지막이. 형, 결코 그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는 거야.
모범 경작생 ☞ 박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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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모범 경작생(模範耕作生)
- 박영준
『얘--- 나 한 마디 하마. 』
『얘--- 얘 기억(記憶)이 보구 한 마디 하래라. 아까부터 하겠다구 그러던데---.』
『기억이 성내겠다. 자--- 한 마디 해 보게.』
한참 소리를 하는데 이런 말이 나와 일하던 손들이 쥐었던 벼 포기를 놓았고, 모든 눈이 기억의 얼굴
로 모이었다.
목청이 남보다 곱지 못하다고 해서 한 차례도 소리를 시키지 않은 것이 화가 났던지 기억이는 권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있는 목소리를 다 빼어 소리를 꺼냈다.
온갖 물은 흘러 나려두
오장 썩은 물 솟아만 오른다.
같은 논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기억의 미나리곡에 합세하여 다시 노래를 주고 받고 하였다.
깔기죽 깔기죽 깔보디 말구
속을 두르러 말해 주렴---.
소리를 하면 흥겨워져서 모르는 사이에 일이 빨리 되어감에 일터에서는 웃는 소리가 아니면 노래가 그
치지 않는다.
모시나 전대에 베 전대에
전에나 전대루 놀아나 보자.
성두(成斗)의 논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누구 하나 빼논 사람 없이 단 한 번씩이라도 목청을 뽑고 소리
를 불렀다.
물소리를 출렁출렁 내며 한 움큼씩 쥐인 볏모를 몇 뿌리씩 떼어 꽂는 그들은 서로 뒤떨어지지 않으려
고 입으로 소리를 하면서도 손을 재빠르게 놀리었다.
그러나 열 네 살밖에 안 되는 성두의 동생은 떨어지는 솜씨에 소리를 한 마디 하고 나면 가뜩이나 한
발씩 뒤떨어졌다.
『얘--- 너는 소린 그만두고 모나 잘 꽂아라. 잘못하면 너 때문에 일을 못 맞출라.』
성두가 그의 동생 몫을 꽂아 주며 하는 말이다.
『얘들아, 이번에는 수심가나 한 마디 하자꾸나--- 아마 수심가는 성두가 가장 나을껄.』
다 같이 젊은 사람들만이 모이어 일하는 곳이라 그런지 어떤 이가 이렇게 따라 말했다.
『암--- 수심가야 성두지---.』
『나야 받기나 하지…… 누가 먼저 꺼내 봐.』
『공연히 그러지 말고 빨리 해.』
성두는 처음엔 사양하려 했으나 두 번 권하는 데는 댓자 소리를 꺼냈다.
그럴 때 마침 옆의 논에서 자동차 온다는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그 논에서 일하던 이들이 휘었던 허
리를 펴고 달려 오는 자동차를 보고 있었다.
『저 차에 길서(吉徐)가 온대지.』
『그러더군---.』
이런 말이 나자, 성두 동생은 논에서 밭을 건너 신작로로 뛰어갔다. 옆의 논에서도 몇 사람이 자동차가
머무르는 큰 돌이 놓여 있는 길 가에 모여 서서 수군거리었다.
『팔자 좋다. 어떤 놈은 땀을 흘리며 종일 일만 하는데 어떤 놈은 자동차만 슬슬 굴러누나.』
기억이가 자동차 온다는 말에 길서를 생각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서도 길서가 부러운 듯 자동차에
서 눈을 떼지 않았다.
자동차는 여름 먼지를 뽀얗게 휘날리면서 동네 앞까지 왔으나 기다리던 사람들 앞에서 머물지를 않고
그냥 달아나 버렸다. 동네 서쪽 조그만 산을 돌아 가물가물 사라질 때까지 모여 섰던 사람들은 다시 수
군거리며 제각기 일터로 돌아갔다. 성두 동생이 돌아왔을 때 일꾼들은 남의 일이 아니면 자기들도 신작
로까지 나가 보고야 말았으리라고 수군거리며 다시 모를 꽂기 시작했다.
『오늘 온댔으니 꼭 올텐데…….』
성두가 못단을 왼손에 쥐며 말했다.
『글쎄--- 꼭 올텐데--- 요새 모를 못 내면 금년에는 상을 못 탈 거 아냐.』
기울어지는 햇살을 쳐다보며 진도 아비가 말했다.
『너 원통할 게 무에 있니? 길서가 상을 탄대두 너는 「마꼬」한 개 못 얻어 먹어--- 이 자식아---.』
기억이가 톡 쏘았다.
『그래도 올랴고 한 날에는 올텐데…….』
은근히 기다리던 성두가 다시 말했다.
길서는 그 마을에서 가장 칭찬을 받는 사람이다. 물론 사촌 형 뻘이 되면서도, 기억이 같은 몇 사람은
길서를 시기하고 속으로는 미워까지 했으나, 동네 전체로 보아 소학교 졸업을 혼자 했고, 군청과 면사무
소에 혼자서 출입하고, 공부를 많이 한 사람에게도 지지 않을 이만큼 동네 사람들을 가르치며 지도했다.
나이 젊은 사람으로 일을 부지런히 해서 돈도 해마다 벌며, 저축을 하여 마을의 진흥회니, 조기회니, 회
마다 회장을 도맡고 있는 관계로 무식하고 착한 농부들은 길서를 잘난 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
었다.
더우기 서울서 모이는 농사 강습회에 군에서 보내는 세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 한 주일 전에 그리고
떠난 뒤로 길서를 칭찬하는 소리는 더 커졌다.
평양 구경도 못한 마을 사람들이 서울까지 가사 별한 구경을 다 하고 돌아올 그에게서 서울 이야기를
들을 생각을 하니 그의 돌아옴이 기다려지는 것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점심을 먹은 뒤, 한 번도 쉬지 못한 성두의 논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논두렁으로 올라가 담배를 피우기
로 했다. 다른 동네에서는 점심 뒤 한 번 쉬는 참에는 사이를 먹는 것이었으나 이들은 몇 해 전부터 그
런 것을 잊어버렸다. 그래서 밥은 못 먹어도 그저 몸이나 쉬는 것이었다.
길서네만 내놓고는 전부가 소작으로 사는 그들이 여름철에는 보리밥도 마음대로 먹을 수가 없는 터에
사이쯤은 물론 생각도 못했다.
『나두 돈이 있으면 주기 전에 서울 구경이나 한 번 해 봤으면 좋겠다.』
진도 아비가 드러누워 풍뎅이로 얼굴을 가리우며 말했다.
『나는 평양이라두 구경해 보구 죽었으문 좋갔다.』
신문지 조각으로 회연을 말아 침으로 붙이던 성두가 웃었다.
『하늘에서 돈이나 좀 떨어지지 않나---.』
풀 위에 엎드려 풀을 손으로 뜯던 기억의 말이다.
여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말갛고, 곡식의 싹이 돋은 들판은 물들인 것같이 파랗다.
『그런데 금년엔 나두 길서네처럼 금비를 사다가 한 번 논에 뿌려 보았으면……. 길서는 밭에다 조합
비료래라…… 암모니아를 친대……. 그것을 한 번 해 보았으문 좋겠는데……』
하고 성두가 말할 때, 진도 아비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말 말게, 골메(동네 이름)서는 누가 돈을 빚내다가 그것을 했다는데 본전두 못 빼구 빚만 남었다네
---.』
『그럼! 웃동네 니륵이네두 녹았대더라. 설사 잘 된다 한들 우리가 많이 먹을 듯하나? 소작료가 올라가
면 그뿐이야---.』
기억이가 성난 것처럼 말했다.
『얼마 전에 지주한테 가니까 니특이 칭찬을 하며 우리가 금비 안 쓴다는 말을 하던데.』
『글쎄 말이야--- 금비라는 게 또 못 살게 하는 거거든---. 그것은 어떤 놈이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아
마 돈 있는 놈들이 만들었을 게야. 빚 안 내고 농사를 지어도 굶을 지경인데 빚까지 내래니 살 수 있
나?』
기억이가 큰 소리를 할 때, 진도 아비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다가 말을 꺼내었다.
『길서야, 돈 있고 제 땅이 있으니 무슨 짓인들 못하리---. 또 변(利子)없이 얼마든지 보통학교에서 돈
을 갖다 쓸 수도 있으니까---.』
『나두 보통학교나 다녔으면 모범경작생이나 되어 돈을 가져다 그런 것을 한 번 해 보았으문 좋을텐
데, 보통학교란 물도 못 먹었으니…….』
성두가 절반이나 거의 꽂힌 모를 둘러다 보며 말했다. 그들은 이런 의미에서도 길서를 부러워했다. 물
론 제 땅이 얼마만큼은 있어야 모범생이라도 될 것이나, 보통학교도 다니지 못한 형편에 그런 꿈은 꿀
수도 없고 따라서 길서처럼 서울 구경을 공짜로 할 생각을 못해 보는 것이 억울했다.
『내일은 우리 조밭 세 벌 김매러들 오게.』
기억이가 일어서서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나는 내일 장에 가서 돼지 금새를 보구 와야갔네---. 그것을 팔아다 지세도 바치고 오월 단오에 의
숙이 댕기도 한 감 끊어다 줘야지.』
성두가 이 말을 하고 일어날 때는 앉았던 사람들도 논으로 다시 내려갔다.
성두는 말없이 모를 꽂고 있었으나 모 이파리에서 곧 벼알이 열리어 익어 주었으면 하고 생각해 보았
다. 일년에 벼를 두 번만이라도 거둘 수 있다면 돼지는 안 팔아도 좋을 것이라 생각키웠던 까닭이다.
기나긴 해도 기울어지기 시작하자 어느 새 쑥 내려갔다.
서산에 넘어가려는 붉은 해를 돌아보고 기억이가 타령조로 소리를 높이었다.
『어서 꽂구 저녁 먹자---.』
다른 사람들도 이 소리를 따라 마지막 춤을 추는 무당처럼 소리를 치며 모를 꽂았다.
어둠이 들을 휩싸고 돌 때 물오리들이 소리치며 떼를 지어 날아갔다.
성두의 논에서 큰 개둑을 넘어 김매러 갔던 그의 손아래 누이 의숙이는 국숫집 딸 얌전이와 같이 모
꽂는 논두렁을 지나갔다.
『의숙아! 빨리 가서 저녁 지어라. 원--- 이제야 가니?』
성두의 남동생이 의숙이를 보며 말했다.
『응---.』
하며, 외숙이가 고개를 돌리었을 때 기억이가 말을 붙이었다.
『길서가 안 와서 맥이 풀리겠구나---.』
하며, 다시 얌전이에게 말을 했다.
『오늘 저녁 너의 집에 갈까?』
의숙이와 얌전이는 꼭 같이 눈을 떨구고 길을 걸었으나 의숙이만은 얼굴을 붉히었다.
갯둑에 가리어 자동차를 못 보았으나 그래도 동네에 들어가면 길에서라도 길서가 자기를 불러 줄 것을
은근히 생각하던 의숙이었다.
먼지 묻은 적삼이 등골에 흐른 땀에 뻘개졌고, 장흙을 뭉갠 듯한 치마가 걸을 때마다 너풀거리었다.
『얘, 길서가 안 왔대지?』
얌전이가 말을 꺼냈다.
『글쎄 누가 아니---.』
『공연히 그러지 말아---. 눈물 나오면 울어라. 그런 때 울지 않구 언제 울겠니? 나 같으면 그까짓 거
막 울겠다.』
이름만이 얌전이며, 사실은 동네에서 제일 가는 말괄량이로, 아직 시집도 가기 전에 서방질까지 했다고
하지만 의숙이는 그의 말이 그다지 밉지가 않았다.
하루라도 보지 못하면 가슴이 답답한 듯하여 안타까와하던 길서를 한 주일이나 두고 보지를 못하다가
오늘에야 만나려니 했던 마음을 얌전이만이 알아 주는 듯하기도 했다.
『얘, 사랑이라는 게 무어니? 함께 살지두 않으면서 사랑을 할 수 있니? 나는 그래두 기억이를…….』
무슨 소리나 가릴 줄 모르는 얌전이는 하지 않아도 좋을 말을 하면서도 전에 없던 진정을 보였다.
『누군 사랑이 뭔지 아니?』
『그래두 너는 길서 오래비하구 사랑한대드구나…….』
『몰라 얘---.』
마을은 조용했다.
어슬어슬해 가는 들에서는 낮에 먹은 더위를 식히고 마시었던 먼지를 토하는 듯 벌레들 이 목청을 가
다듬어 울고 있었다.
의숙이와 얌전이는 집에다가 호미를 두고는 꼭 같이 우물로 나왔다.
의숙이는 바가지에 물을 떠서 한 손으로 물을 쏟아 얼굴을 씻고, 머리털에 묻은 물방울을 손으로 튀긴
뒤에 흙에 빨개진 고무신과 발을 씻고 있었다. 마침 그때 등이를 옆에 끼고 오던 마을 여편네가 길서가
이제야 온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얘, 길서 오래비가 온대! 개들이 짖는 데쯤 온게다.』
하며, 얌전이가 만나 보기나 한 것처럼 말했다.
개소리가 커지며 또 가까와 올수록 의숙의 마음은 들먹거리었다.
고무신도 마저 씻지 못하고 물동이를 이고 집으로 돌아갈 때 그는 혹시 길에서나 만나지 않을까 하여
가슴을 더 졸이었다. 집에 가서 아무 정신없이 돼지죽을 바가지에 담아 가지고 돼지우리로 나갈 때는
설마 길서가 자기 옆에 와 있으려니 했으나, 울국거리는 돼지에게 죽을 쏟아 주고 섭섭히 돌아설 때까
지 길서가 자기를 만나러 오지 않음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대문으로 돌아 들어가려 할 때, 귀에 익은 기침 소리가 의숙의 발을 멈추게 했다. 역시 길서의
소리가 틀림없었다.
의숙이는 작년 여름, 설레는 가슴으로 길서를 대하게 된 뒤부터 동네에서도 거의 알게쯤 사이가 친했
건만 아직까지 어른들에게는 눈을 숨기고 있는 사이라 마당 옆 낟가리 밑에 숨어 길서를 만났다.
『잘 있었니?』
『네---.』
『자동차를 타구 올래다가 몇 시간 걸으면 칠십 오전이나 굳는 걸 공연히 타구 오겠든---. 빨리 너를
만나구 싶기는 했지만…….』
의숙이는 아무 대답도 못했다.
울렁거리는 가슴은 그저 널뛰듯 뛰었고, 고개는 들고 있을 수 없게 늘어지기만 했다.
매일같이 만날 때는 어느 틈에라도 웃어 보이었고, 말을 한 마디만 해도 기쁜 생각이 드솟았건만 며칠
떠났다가 만났음인지 공연히 가슴만 떨리었다.
그날 밤, 동네 사람들은 서울 이야기를 들으려고 길서네 마당으로 몰려 들었다.
소 먹으러 갔던 어린애들은 밥술을 놓기 전에 뛰어 와서 멍석을 차지하고 앉았다.
마당에는 빨랫줄에 남포동이 걸리어 금시 꺼질 것처럼 바람에 홀딱홀딱 했다.
윷꾼에게 남포동을 내다 건 것이 길서네로서도 처음인 만큼 마을 사람들도 보통 때의 윷과는 달리 말
들을 적게 했다.
불빛이 희미하게 비치는 한 편 옆에 앉은 부인네들도 각기 길서에게 잘 다녀 왔느냐는 인사를 했다.
『오래비 잘 다녀 왔소---.』
특별히 크게 하는 얌전이의 인사는 웅크리고 앉았던 의숙의 고개를 더 숙이게 했다.
『그래 서울 동네가 얼마나 크던가?』
길서 앞에 앉았던 수염 기른 늙은이가 웃으며 물었다.
『서울에는 우리 동네 터보다 더 넓은 자리를 잡고 있는 집이 수 없읍니다. 총독부 같은 집에는 수만
명이 살겠든데요.』
길서는 서울서 구경한 놀랄 만한 일을 하나도 때지 않고 이야기했다.
전차는 수백 대나 되며, 자동차가 수천 대나 있어 귀가 아파 다닐 수 없었다는 말까지 했다.
혀를 빼고 멍하니 듣던 사람들이 숨을 몰아 쉬려 할 때,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강연조로 말을 꺼냈
다.
『이제는 강습회에서 배운 것을 조금 말하겠읍니다. 농사 짓는 법이란, 제가 보통학교 다니면서 배운
것이며, 지금 내가 채소밭 하는 것과 꼭 같은 것이었으니까 말할 것이 없지요. 하나 새로 배운 것이 있
다면, 닭을 칠 때 서울서 「레그혼」이라는 흰 닭을 사다 기르면 그놈이 알을 굉장히 낳는다는 것입니
다. 그 밖에는 배운 것이라고 별로 없읍니다.』
이 말을 끝맺고 다시 말을 이을 때는 기침을 한 번 하고 목청을 올리었다.
『제가 강습회에서도 가장 많이 물은 일입니다마는, 우리가 제일 깨달아야 할 것이 하나 있읍니다. 그
것은 다름 아니라 가장 어렵고 무서운 시국이라는 것입니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죽을 죄를 짓기 쉽고,
일을 아니 하고 놀랴고만 생각하면 농사도 못 짓게 됩니다. 불경기(不景氣) 불경기 하지만 이것이 얼마
오래 갈 것이 아니며 한 고비만 넘기면 호경기(好景氣)가 온다는 것입니다. 들으니까 요사이에 감옥에
가장 많이 갇힌 죄수들은 일하기가 싫어서 남들까지 일을 못하게 한 놈들이래요. 말하자면 공산주의자
라나요. 공연히 알지도 못하고 그런 놈들의 말을 들었다가는 부치던 땅까지 못 부치게 될 것이니 결국
은 농군들에 손해가 아니겠소---.』
듣고 있던 사람들은 길서의 얼굴만 쳐다보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또 무슨 전쟁이 일어날 것도 같습니다. 하라는 일을 아니 하면 우리가 어떻게 될는지도 모르지요. 그
러나 같은 값이면 마음 놓고 하라는 일을 잘 하며 살아야 하겠어요. 에--- 우리는 일을 부지런히 합시
다. 그러면 굶어 죽는 법이 없으니깐요. 유명하게 된 사람들은 전부 부지런했던 덕택이었다는 것을 우리
는 잘 알지 않습니까!』
이 말을 끝맺고 한참이나 섰다가 앉을 때, 옆에 앉았던 늙은이가 이마를 긁으며 물었다.
『너 서울 가서 그런 말도 배웠니?』
길서는 그저 웃었다. 의숙이도 재미 있게들 듣는 동네 사람들을 볼 때 길서가 더 훌륭한 것같이 생각
했다.
『그런데 호경긴가 그것은 언제 온대든?』
아닌 밤중에 홍두깨 내밀 듯 기억이가 한참 동안 잔잔하던 공기를 깨뜨리고 말했다. 대답에 궁했던 길
서는 한참이나 생각하다가,
『얼마 안 있으면 온대드라…….』
라고 대답했으나 어째서 불경기니, 호경기니 하는 것이 생기느냐고 캐어 물을 때에는 모르겠다는 솔직
한 대답밖에 더 할 수가 없었다. 농민들이 나날이 못 살게 되어가는 것이 불경기 때문만이냐고 묻는다
면 자신 있는 말로 그렇다고 대답했을는지 모른다.
『암만 호경기가 온다 해두 팔아 먹을 것이 있어야 호경기지, 팔 거 없는 놈이 호경기는 무슨 소용이
냐, 호경기가 되면 쌀이 많이 생기기나 하나…….』
이러한 기억의 말은 아무런 생각도 없이 나온 듯했으나 호경기가 쌀을 만히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는 것을 아는 그들은 길서의 말보다도 더 그럴 듯이 생각했다.
아무리 불경기라 해도 십리 밖 읍내에 있는 지주(地主) 서(徐) 재당은 금년에도 맏아들을 분가시키고
고래 같은 기와집을 지어 주었다.
쌀값이 조금 오르면 고무신값이 오르고, 쌀값이 떨어지면 물건값도 떨어지는 것을 잘 아는 그들은 불
경기니 호경기니 해도 그것이 그들에게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같이 생각되으며, 돈 있는 사람들도 불경
기에 땅 팔았다는 말을 못 들었으므로 경기라는 것이 무엇인지 참으로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길서가 힘든 말을 자기들보다 많이 아는 사람같이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서울 갈 때 입었던 누런 양복을 벗고 무명 잠방 적삼을 갈아 입은 뒤, 논에 나가 모를 꽂고
들어온 길서는 컴컴한 저녁때쯤 해서 의숙의 집 뒤 모퉁이로 의숙이를 찾아 갔다.
기쁨을 기쁘다고 말하지 못하던 의숙이도 이날만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솟아 오르며 무슨 말이든 가
슴이 시원하게 털어 놓고 싶었다. 길서가 서울서 사 왔다고 파란 비누를 손에 쥐어 줄 때 의숙은 진정
이 서리운 눈초리로 길서의 손을 듬뿍 잡았다.
비누 세수라고 평생 못해 본 의숙이가 비누 세수를 하면 금시 자기의 탄 얼굴이 희어지며 예뻐질 것
같아 춤을 추고 싶게 기뻤다.
『내 다음 일본 가게 되면 더 좋은 거 사다 주께---.』
『언제 또 가세요?』
『가을에는 도에서 세 사람을 뽑아 일본 시찰을 보낸다는데 뽑히거나 할는지 모르지만.』
『뽑히겠지요 뭐…….』
자신 있는 듯의 의숙이가 말할 때 껌껌한 데서 사람 소리를 들은 강아지가 깡깡 짖으며 뛰어 나왔다.
무서운 호랑이나 본 것처럼 그들은 뒤돌아 볼 새도 없이 굴뚝 뒤로 몸을 움츠리었다.
가슴속에서 뛰는 심장의 고동을 제각기 남의 가슴속에서 들었다.
『그놈의 개새끼가 사람을 놀라게 하눈…….』
하며, 숨을 내쉬고 일어설 때 그들의 손은 꼭 잡히어 있었다.
의숙이는 길서를 떠나서 몰래 집안으로 들어가서 비누를 궤 속 깊이 넣었다가 한 번 다시 꺼내 보고는
마당으로 나와 어머니와 오빠와 동생이 앉아 있는 멍석으로 갔다. 그러나 길서의 품에 안기었던 생각만
이 가슴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래 사원 팔십 전을 받고 팔았단 말인가?』
그의 어머니가 성두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럼 어떡합니까? 그거라두 팔아서 용돈을 써야지요. 우선 지세두 밀리구 아직 보리 필 때까지 먹을
보리두 사야 하지 않어요. 또 단오 명절두 가까와 오는데 돈 쓸 데가 없어서 그러십니까?』
『아아니 그런 줄은 알지만 큰돈을 만들려구 했던 도야지를 너무 일찍 팔았단 말이다.』
『누구는 모르나요. 여름에는 풀을 깎아다 주기만 하면 거름을 잘 만들고, 먹일 것도 겨울보다 흔해서
기르기도 쉽구, 그러다가 가을철에 들어 팔면 큰 돈 된 것두 알기는 하지만 어떻게 합니까?』
성두의 얼굴은 푸르럭푸르럭 했다.
『오빠--- 오빠의 잔치는 어떻게 합니까? 돼지를 팔구…….』
의숙이가 옆에 앉았다가 눈을 흘기는 것 같으면서도 웃는 얼굴로 말을 했다.
『글쎄 말이다. 내 말이 그 말이 아니가?』
어머니는 차마 꺼내지 못했던 말이 나와서 시원한 듯했다.
길서는 새벽에 일어나 감자밭에 나가 벌레를 잡고 뽕나무 묘목(苗木)밭을 한 번 돌아 보고는 서울 갈
때 입었던 누런 양복을 입고 읍내로 들어갔다.
먼저 보통학교 교장에게로 가서 제 손으로 만든 빗자루 다섯 개를 쓰라고 주고, 모를 다냈으니 비료를
사야겠다고 이십 오원을 취해 가지고는 뽕나무 묘목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면사무소로 들어갔다.
『「리상」잘 왔소. 한턱 내야지, 오늘은「리상」의 점심을 얻어 먹어야겠군---.』
세금 못 낸 사람을 잘 치기로 유명한 뚱뚱한 서기가 길서가 들어서자마자 말을 했다.
『한턱은 점심 때 내기루 하구, 묘목은 언제 가져갑니까? 퍽 자랐는데, 이번에는 돈을 좀 실하게 받아
야겠는데요.』
『한턱만 내면야 잘 팔아 주지---. 내게만 곱게 보이란 말이야. 값을 정해서 갖다 맡기면 그만이니까
누가 무슨 소리를 감히 해 내나…….』
면서기는 농담 비슷하게 웃었으나 허리를 구부리고 복종하는 농부들은 절대로 마음대로 할 자신이 있
다는 듯한 호걸 웃음을 웃었다.
『일본으로 보내는 사람을 뽑는 때두 면장을 시켜서 잘 말하도록 할 테니 그저 한턱만 내요.』
『그것은 염려 마십시오. 술 한 병이면 녹초가 될 걸---. 그러면서도 얼마나 먹는 듯이……하하하…….
』
길서는 진정으로 한턱 내고 싶기도 했다. 묘목만 잘 팔아 주면 예산 이외의 돈이 수십원 들어온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때 뚱뚱한 몸에 맵시 없는 의복을 입은 면장이 들어와서 길서 앞에 섰다. 길서
는 인사를 하고 서울 갔던 이야기를 보고했다.
보고를 듣고 수고했다는 말을 한 뒤는 곧장,
『그런데 이번 호세는 자네 동네에서도 조금 많이 부담해야겠네---. 보통학교를 육 학급으로 증축해야
겠으니까---.』
하고 길지도 않은 수염을 쓸며 호세 이야기를 했다.
『거야 제가 압니까?』
『아내야, 자네 동네서야 자네만 승낙하면 되는 게니까. 그렇다구 자네에게 해로운 것은 없을 게고---.
』
『글쎄요.』
길서는 면장의 말에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만약 그에게 조금이라도 재미 업슨 말을 해서 비
위에 거슬리게 하면 자기도 끼니 때를 굶고 지나는 동네 소작인들이나 다름이 없는 생활을 해야 할 것
을 잘 알고 있디 일본은 둘째로 하고라도 묘목도 못 팔아 먹을 것이며 그런 말이 보통학교 교장 귀에
들어가면 돈도 빌어다 쓸 수가 없게 된다.
그러면 묘목 심었던 밭에 조를 심게 되고, 면사무소 사무원과 학교 선생들에게 팔던 감자와 파도 썩어
버리게 된다.
삼백 평밖에 안 되는 논에 비료를 많이 내지 않으면 미곡 품평회(米穀品評會)에 출품도 못해 볼 것이
며, 그러면 상금을 못 탈 뿐 아니라 벼가 겨우 넉섬밖에 소출 못 날 것이다.
그러면 동네 사람들과 꼭 같이 일년 양식도 부족할 것이 아닌가.
『자네 동네 사람들은 얌전하게 근심 없이 사는 모양이던데---.』
면장이 다시 말을 꺼낼 때 길서는 곧 대답했다.
『그러문요. 근심이 조금도 없다고야 할 수 없지마는 무던한 편은 됩니다.』
벼는 누릇누릇해서 이삭들이 뭉친 것이 황금덩이 같았다. 그러나 얼굴의 주름살을 편 사람이라고는 하
나도 없었다.
강충이(벼 줄기를 깎아 먹어 벼를 마르게 하는 벌레)가 먹어 예년에 비해서 절반도 곡식을 거둘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길서만이 평양 가서 북어 기름을 통으로 사다가 쳤기 때문에 그의 논만은 작년보다도 더 잘 되었으나
다른 논들은 털 빠진 황소 가죽같이 민숭민숭해졌다.
이(蝨)새끼만한 작은 벌레까지가 못 살게 하는 것이 가슴 원통했으나 여름내 땀을 빼고도 제 입으로
들어올 것이 없을 것을 생각하니 눈물이 솟아 오를 지경이었다.
그들은 할 수 없으므로 성두의 말대로 길서를 시켜 읍내 지주 서 재당에게 가서 금년만 도지(小作料)
를 조금 감해 달래 보자고 했다.
그러나 길서는 자기와 관계가 없을 뿐 아니라 정해 놓은 도지를 곡식이 안 되었다고 감해 달라는 것은
흔히 일어나는 소작쟁의와 같은 당치 않은 짓이라고 해서 거절했다. 그리고는 며칠 있다가 일본 시찰단
으로 뽑히어 떠나가버렸다.
동네 사람들은 어찌 할 줄을 몰랐다. 더구나 금년 겨울에는 기어이 잔치를 하려고 하던 성두는 가끔
우는 얼굴을 하곤 했다.
그들은 할 수 없이 큰마음을 먹고 떼를 지어 읍내로 들어가 서 재당에게 사정을 말해 보았으나 물론
들어 주질 않았다. 오히려 아들을 분가시킨 관계로 돈이 몰린다는 근심까지를 들었다.
『너희들 마음대로 그렇게 하려거든 명년부터는 논을 내놓아라.』
하는 말에는 더 할 말이 없이, 갈 때보다도 더 기운 없이 돌아왔다. 그들은 돌아가는 길에 길서의 논
앞에 서서「모범경작」이라고 쓴 말뚝을 부럽게 내려다 보았다.
볏대가 훨씬 큰데 이싹이 한 길만치 늘어선 것이 여간 부럽지 않았다. 그러나 말도 잘 하고 신망도 있
다고 해서 대신 교섭을 해 달라고 부탁했음에도 불구하고 못 들은 척 들어 주지 않은 길서가 미웠다.
『나도 내 땅이 있어 비료만 많이 하면 이삼곱을 내겠다. 그까짓거---.』
기억이가 침을 탁 뱉으며 말했다. 며칠 뒤 그들이 다시 놀란 것은 값도 모르는 뽕나무값이 엄청나게
비싸진 것과, 십삼 등 하던 호세가 십일 등으로 올라간 것이다.
그것보다도 십 등이던 길서네만은 그대로 십등에 있는 것이 너무도 이상했다. 길서네는 그래도 작년에
돈을 모아 빚을 주었으나, 다른 사람들은 흉년까지 만나 먹고 살 수도 없는데 호세만 올랐다는 것이 우
스우면서도 기막힌 일이었다.
무엇을 보고 호세를 정하는지 알 수 없었다.
흉년, 그러면서도 도지를 그대로 바쳐야 하는 데다가 호세까지 오른 그들의 세상은 캄캄했다.
「아마 북간도나 만주로 바가지를 차고 떠나야 하는가보다.」
성두는 혼자 생각했다. 그들은 마을에 대한 애착심도 잊었고, 제 고장이라는 것도 생각하기 싫었다. 다
만 못 살 놈의 땅만 같았다.
마을 사람들은 길서의 장난으로 호세까지 올랐다는 것을 다음에야 알고 누구 하나 그를 곱게 이야기하
는 이가 없게 되었다. 길서 때문에 동네를 떠나야겠다는 오빠의 말을 들은 의숙이도 눈물을 흘리며 길
서가 그렇지 않기를 속으로 바랐다.
길서는 일본서 돌아올 때 우선 자기 논두렁에서 가슴이 서늘함을 느겼다.
논에 박은,「김 길서」라고 쓴 말패는 간 곳도 없고,「모범경작생」이라고 쓴 말뚝은 쪼개져서 흐트러
져 있었다.
심술궂은 애들이 장난을 했는가 하고 생각하려 했으나 그 한 짓으로 보아서 반드시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동네에 들어섰을 때 동네에는 어른이라고 한 사람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읍내 서 재당 집엘 가서 저녁 때가 되도록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말을 듣자, 서울 갔다 돌아왔을 때
보다도 더 의기 양양해 온 길서의 마음은 쪼박쪼박 깨어지고 말았다.
보지도 못했고, 이름조차 들어 보지 못하던 바나나를 가지고 밤이 이슥했을 무렵 의숙이를 찾아 갔건
만 그를 본 의숙이도 얼굴을 돌리고 울기만 했다. 길서의 마음은 터지는 듯 했다.
뒤에서 몽둥이를 들고 따라오던 사람의 숨소리를 듣는 듯 가슴이 떨리었다. 불길한 징조가 눈에 보이
는 듯했다.
성두가 충혈된 얼굴로 아랫무으로 뛰어 들었을 때 길서는 들고왔던 바나나를 들고 뒷문으로 도망쳤다.
겨울 나들이 ☞ 박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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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겨울 나들이
- 박완서(朴婉緖)
나는 온천물에 몸을 담그고 기분 좋아하기 전에, 이 온천물이 진짜일까 가짜일까, 고작 이런 주접스러
운 생각부터 했다. 2류여관 특실의 평범한 타일 욕조에 달린 냉수· 온수 두 개의 수도꼭지와 샤워는
여느 허름한 목욕탕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빨간 동그라미 표시가 있는 수도꼭지에서 쏟아지는 더운
물이 수도물 데운 게 아니고 땅에서 솟은 진짜 온천물이란 증거가 어디 있냐 말이다.
꼭 온천물에 몸을 담가야 할 만한 특별한 지병(持病)이 있는 것도 아니요, 또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대
는 대로의 온천물의 효험 따위를 믿어온 바도 없거늘 나는 그런 트집이라도 잡아 나를 더더욱 처량하게
만들고 싶었다. 처음부터 재미있으려고 시작한 여행은 아니었다. 무엇인가 어긋난 데서 시작된 여행이고
보니 끝내 어긋나 종당엔 엉망진창이 돼 버려라, 뭐 이런 심뽀였다.
상업적으로 날리는 화가는 아니었지만 꽤 개성있는 특이한 자기 세계를 고집하고 있어 그런대로 알려
지고 평가도 받고 있는 중견화가인 남편은 요즈음 세번째 개인전을 앞두고 그 준비 때문에 집에 들어오
지 않고 시내에 있는 아틀리에에 묵는 일이 많았다. 남편의 건강이 염려돼 나는 가끔 먹을 것을 해 가
지고 나가 보고, 남편은 옷을 갈아입으러 집에 들르고 하는 정도였다. 어제도 나는 시내에 나갔다가 로
스 고기를 좀 사가지고 아틀리에에 들렀다. 출가한 딸이 와 있었다. 남편은 출가한 딸을 모델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극도로 단순화, 동화화한 풍경이나 동물을 즐겨 그릴 뿐, 인물이 남편의 그림에 등장하
는 걸 거의 본 적이 없는 나는 적이 놀랐다. 그리고 그 인물화는 남편의 종래의 화풍과는 전연 다른 끔
찍하도록 섬세하고 생생하고 사실적인 그림이었다. 그렇게 똑같이 닮게 그린 그림이 좋은가 나쁜가는
둘째고 나는 울컥 혐오감부터 느꼈다. 혼(魂)까지 옮아붙은 영정(影幀)을 보는 느낌이었다. 더욱 질린 건
모델인 딸과 화가인 남편이 이루고 있는 미묘한 분위기였다. 부드럽고 따습고 만족한 교감은 사랑하는
부녀 사이의 그것으로 이해할 수 있었으나 부녀 이상의 비밀스러운 무엇인가가 있었다. 둘이만 친하고
싶은 눈치가 역력했다. 둘은 나를 예의 바르게 반겼는데도 나는 밀려난 것처럼 느꼈다.
출가해서 삼년째, 갓 돐 지난 첫 애를 두고 있는 딸은 처녀 때와는 또 다른 윤택하고 기품있는 아름다
움으로 소파에 단정히 앉아 있었다. 한창 때구나 하는 찬탄과 동시에 섬광처럼 눈부시게 어떤 깨달음이
왔다. 그렇지 꼭 저맘 때였겠구나! 남편이 난리통에 첫번째 아내와 생이별한 게 꼭 첫번째 아내가 지금
딸만한 나이 때였겠구나 하는 깨달음은 나에게 얼마나 충격적이었던가. 더군다나 딸은 내 친딸이 아니
고 남편과 첫번째 아내와의 사이에서 난 딸이었다. 딸은 엄마를 닮는 법이다. 남편은 딸을 통해 이북에
두고 온 당시의 아내의 모습을 되살렸음에 틀림없다. 나는 그 여자보다 훨씬 손 아래지만 지금 남편 옆
에서 볼품없는 꼴로 늙어 가는데 그 여자는 남편의 가슴속에 지금의 딸의 모습처럼 빛나는 젊음과 아름
다움으로 간직돼 있었구나 싶자 질투가 독사 대가리처럼 고개를 드는 걸 느꼈다. 여자의 질투를 위해선
휘어잡을 머리채가 마련돼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누구의 머리채를 휘어잡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점잖게 예사롭게 굴 수밖에 없었고, 그건 여간만 고통스러운 게 아니었다. 발산시키지 못
한 질투심은 서서히 여지껏 산 게 온통 헛산 것 같은 허탈감으로 이어졌다.
사느라고 열심히 살았건만-----. 이북에 노부모와 아내를 남겨 두고 어린 딸 하나만 업고 내려온 빈털
터리, 게다가 나이는 나보다 열 두 살이나 더 많고 직업도 불안정한 무명화가를 불쌍해하다가 그만 사
랑하게 돼서 결혼까지 하고 홀아비와 어미 없는 어린 것의 궁기를 닦아내고, 사랑하고, 섬기며 살아온
게 큰 허탕을 친 것처럼 억울하게 여겨졌다. 속아 산 것 같은, 헛산 것 같은 기분은 씹으면 씹을수록 고
약해서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어디가 아프냐고 남편과 딸이 근심스러운 듯이 물었다. 나는 속상하는 일
이 좀 있는데 어디로 훨훨 혼자 여행이나 떠나고 싶다고 했다.
하필 이 겨울에 혼자서 여행을? 남편이 놀라다 못해 신기해했다. 요 며칠 혹독한 추위가 계속되고 있
었다. 문득 아틀리에의 창을 통해 해골 같은 가로수와 인적이 드뭇한 얼어붙은 보도가 내려와 보였다.
나는 이런 을씨년스러운 도시의 겨울 풍경에 느닷없이 뭉클한 감동을 맛보았다. 그리고 그냥 투정처럼
해본 여행 소리가 비로소 현실감을 갖고 다가왔다. 정말 당장 떠나리라 마음먹었다. 서울을 떠나 보고
싶다거나 남편 곁을 떠나 보고 싶다거나 하느니보다는 여지껏 악착같이 집착했던 내가 이룩한 생활을
헌신짝처럼 차 버리고 훨훨 자유로와지고 싶었다. 여지껏 산 게 말짱 헛것이었다는 진실을 가르쳐 준
게 바깥의 황량한 겨울날씨였던 것처럼 나는 무턱대고 어느 먼 곳의 겨울풍경에 그리움을 느꼈다. 나는
남편과 딸이 의아해하건 놀라와하건 상관하지 않고 당장 떠나겠다고 보챘다.
당신이 히스테리 부릴 때가 다 있으니 원
남편은 그 정도로 날 이해하고 제법 두둑한 여비를 주면서 겨울이니 온천장으로 가는 게 좋을 거라는
조언을 했다. 소중하게 움켜쥐었던 보물이 가짜였다는 걸 알았을 때 소중해했던 것만큼이나 정나미가
떨어지면서 우선 내던져 놓고 보는 심리로 나는 남편 곁을 떠났다. 교통이 편한 대로 온양으로 왔다. 고
속버스에서 낯선 거리에 내리자마자 추위와 고독감이 엄습했다. 눈앞의 풍경에 울먹울먹 낯가림을 했다.
훨훨 자유롭다는 기분조차 이 온천장 거리만큼이나 생소하고 싫었다. 그런 기분에 도저히 익숙해질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 중에도 몸만 떠나왔다 뿐 마음은 오랫동안 몸에 밴 내 나름의 생활의 관습에 얽매
인 나를 발견하고 고소를 머금었다. 두둑한 여비를 갖고도 관광호텔 앞까지 갔다간 돌아서서 허름한 2
류여관을 찾고 참기름을 살 때의 버릇으로 온천물이 진짠가 가짠가를 심각하게 의심하고, 여관비에서
목욕값이라도 뺄 양으로 피곤을 무릅쓰고 목욕을 또 하고 또 했다. 다음날 반찬이 열 다섯 가지쯤 되는
여관의 아침상을 받자 두번째 받는 상인데도 허구한 날 약비나게 그것만 먹었던 것처럼 울컥 비위에 거
슬려 왔다. 집을 떠난 지가 오래 된 것 같은데도 실상은 하룻밤밖에 안 잤다는 게 서러워서 눈물이 핑
돌았다.
여관에서 일하는 소년이 오늘 떠날 거냐 하루 더 묵을 거냐를 물어왔다. 하루 더 묵겠다면 소년이 나
를 불쌍해 할 것 같아 곧 떠나겠다고 했다. 조그만 여행백을 챙겨 가지고 거리고 나온 나는 여관에선
소년에게, 집에선 남편과 딸에게 쫓겨난 것처럼 느꼈다. 이 고장도 혹독한 추위는 서울과 마찬가지였다.
낮고 어둡게 흐린 하늘과 매운 바람은 여지껏 산 게 말짱 헛 산 것 같은 허망감을 쓰디쓰게 되새김질하
기에 아주 알맞았다.
온천장 거리는 소바닥만했다. 열 번을 넘어 돌아도 한 시간도 안 걸렸다. 관광호텔 코피숍에 들러 코피
도 한 잔 마셨다. 남편에게 관광호텔에서 묵은 척하려면 그곳 내부사정을 좀 알아두어야겠기에 그렇게
했다. 호텔 건너편에 차부가 보였다. 생소한 이름의 행선지를 써붙인 고물버스들이 지친 듯이 부르릉대
며 손님을 부르고 있었다. 나는 뭔가 좀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아무나 붙들고 이 근처에 어디 구경
할 만한 명승고적이 없냐고 물었다. 막 움직이기 시작하던 버스에서 차장이 뛰어 내리더니 미처 내가
뭐랄 새도 없이 나를 자기 버스에 짐짝처럼 쓸어 넣었다. 나는 앞으로 고꾸라지면서 버스에 탔다. 내부
는 손님이 여남은도 안 돼서 휘했다. 비닐 시트가 빙판처럼 찼다.
이게 어디 가는 건데?
버스가 속력을 내자 나는 겁먹은 소리로 물었다.
가다가 호수(湖水)에서 내려드리면 되잖아요
내가 언제 저더러 호수까지 데려다 달랬던 것처럼 차장은 당당했다.
호수?
네, 호수요. 이 근처에서 경치 좋은 곳은 거기밖에 없어요. 겨울만 아니면 거기까지 가는 손님이 얼마
나 많다구요
5분도 안돼서 차장은 나에게 버스값을 재촉하더니 호수 다 왔다고 나를 밀어냈다. 과연 호수는 있었다.
낮고 헐벗은 산에 둘러싸인 얼어붙은 호수는 찌푸린 하늘이 그대로 내려앉은 듯 암울하고 불투명해 보
였다. 별안간 호수의 빙판을 핥으며 휘몰아쳐 온 암상스러운 바람이 모진 채찍처럼 뺨을 때렸다. 나는
황급히 버스에 다시 올라타려 했다. 그러나 이미 다음 정거장을 향해 흙먼지만 남기고 떠난 뒤였다. 심
한 낭패감으로 울상이 된 채 우선 모진 바람을 피해서 호숫가의 상지대(商地帶)로 뛰어들었다. 겨울이
아닌 철엔 호경기를 누렸던 듯 무슨 무슨 유원지란 간판이 상지대의 입구 아취형의 문 위에 제법 크고
높게 달려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식당도 다방도 잡화상도 선물가게도 빈지문을 굳게 닫아 인기척이라
곤 없는데, 퇴색한 간판들만 바람이 불 때마다 을씨년스럽게 덜컹대 황량한 느낌을 한층 더했다. 노천
탁구장의 탁구대엔 언제적 내린 눈인지 녹지도 않고 먼지만 첩첩이 뒤집어 쓰고 있어 흡사 더러운 홑이
불을 펼쳐놓은 것처럼 궁상스러워 보였다. 인기척이 있는 집은 한 집도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너무 막막
해 이게 꿈이었으면 했다. 상지대를 한 바퀴 돌자 다시 눈앞에 얼어붙은 호수가 펼쳐졌다. 꽁꽁 얼어붙
은 호수엔 배를 띄울 수도 없지만 몸을 던져 빠져 죽을 수도 없겠거니 싶자 그게 조금도 다행스럽지 않
고 두렵게 여겨졌다.
나는 다시 허둥지둥 딴 골목을 찾아들었다. 역시 인기척이라곤 없는 골목 저만치 대문이 열리고 문전
이 정갈한 <여인숙>이란 간판이 붙은 집이 보였다. 대문간엔 연탄재가 쌓여 있고 안마당 빨랫줄엔 흰
빨래가 이상한 모양으로 비틀어진 채 얼어붙어 있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주인을 찾았다. 오십대의
정갈한 아주머니가 안채에서 반색을 하며 나타났다. 나는 그 아주머니를 보자 내 집에 온 것처럼 마음
이 놓이고 어리광이라도 부리고 싶어졌다. 참 묘한 분위기를 지닌 아주머니였다. 솜옷처럼 너그럽고 착
하고 따뜻하게 사람을 감싸는 무엇이 있었다. 나는 마치 오랫동안 잊고 있던 무엇인가가 다시 나에게
찾아드는 것처럼 느꼈다.
좀 녹여 가고 싶은데 따뜻한 온돌방 있어요?
아주머니는 얼른 줄행랑처럼 붙은 손님방 중 한 방으로 먼저 들어가 아랫목에 깔아 놓은 다후다 포대
기 밑에 손을 넣어 보더니 따뜻하긴 한데 외풍이 세어서 어쩌나 하면서 어쩔줄을 몰라했다. 내가 되려
안돼서 내가 그렇게 추워 보여요? 하면서 웃으려고 했지만 뺨이 얼어붙어서 제대로 웃어지지가 않았다.
네, 꼭 고드름 같아 보여요. 참 안방으로 들어가십시다. 구들도 따뜻하고 난로도 있어요
그러더니 친동기처럼 스스럼없이 나를 안채로 잡아 끌었다. 난로가 있는데도 삥 둘러 방장을 쳐놔서
안방은 마치 동굴 속처럼 침침하고 아늑했다. 처음엔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차츰 어둠에 눈이 익자
아랫목에 단정히 앉았는 한 노파를 볼 수 있었다. 미이라에다 옷을 입혀 놓은 것처럼 바싹 마른 노파는
무표정하게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나를 거부하는 몸짓 같아서 나는 어색하게 멈칫댔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한사코 나를 아랫목으로 끌어다 앉히고 손을 노파가 깔고 앉은 포대기 밑에 넣어 주
었다. 노파의 입이 조금 웃었다. 그러나 고개를 저어 도리질을 하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아주머니는 나
에게 우리 시어머니예요, 하고는 노파에게 손님이예요, 하도 추워하시길래 안방으로 모셨어요 했다. 그
것으로 노파와 나와의 인사는 끝났으나, 노파는 여전히 도리질을 해쌓았다. 아주머니는 노파의 도리질에
대해 나에게 아무런 설명도 하지않았다.
노파는 수척했으나 흰머리를 단정히 빗어 쪽찌고, 동정이 정갈한 비단 저고리에 푹신한 모직 스웨터를
걸치고 꼿꼿이 앉았는 모습에 특이한 우아함이 있었다. 그것은 지극히 비현실적인 우아함이기도 했다.
도리질도 처음 내가 봤을 때보다 훨씬 유연해져 꼭 미풍에 살랑이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 저러다가 멎
으려니 했으나 아무리 기다려도 멎지는 않았다. 몸이 녹자 잠이 오기 시작했다. 누가 죽인대도 우선 한
잠 자놓고 볼 일이다 싶게 꿀 같은 잠이 덮쳐왔다.
이제 어지간히 몸도 녹았으니 아까 그 방에서 한잠 잘까 봐요. 참 온천장으로 나가는 버스는 몇분만큼
씩이나 있나요?
몇분은요. 겨울엔 아침나절에 두 차례, 저녁나절에 두 차례밖에 안 다니는데, 타고 들어오신 게 아침나
절 막차니까 이따 네 시 반에나 있을 걸요. 그리고 저어 점심은 어떡허시겠어요. 준비할 테니 드시고 가
셨으면---
오로지 졸리다는 생각뿐 밥 생각 같은 건 전연 없었으나 그렇게 하라고 했다. 아주머니는 몇번이나 고
맙다고 했다. 나는 그까짓 밥 한 상 팔아서 얼마나 남겠다고 저렇게 굽신대나 싶어 속으로 측은했다. 손
님방으로 내려온 나는 따근한 맨바닥에 다후다 포대지만 하나 덮고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깨어나자마자 웬일이지 도리질하던 노파 생각이 먼저 났다. 꿈에서 봤던가 현실에서 봤던가 그것조차
아리숭한 채 메마른 노파가 고개를 젓던 모습만 선명히 떠올랐다. 졸음 때문에 미루었던 궁금증이 서서
히 고개를 들었다. 시계를 보니 아직 두 시도 채 안 된 시간이었다.
손님, 아직도 주무세요? 시장하실텐데
미닫이 밖에서 아주머니의 나직한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인기척을 내며 미닫이를 열었다. 행주치마를 두
른 아주머니가 내가 이 집에 찾아 들었을 때 반가와했던 것과 똑같은 모습으로 내가 잠에서 깬 걸 반가
와해 주는 것이었다. 너무 반가와해 저 아주머니 혹시 나를 약이라도 먹고 영영 잠들려는 손님으로 오
해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곧 점심상이 들어왔다. 장에 삭힌 깻잎이니 풋고추, 더덕 등 짭짤한 솜씨의 밑반찬과 김치 깍두기, 무
우국 등은 조금도 영업집 밥상 같지 않고 시골 친척집에 들러서 받는 밥상 같아서 흐뭇했다. 그러나 입
속은 칼칼하고 식욕도 일지 않았다. 무우국만 훌쩍대는 걸 보고 아주머니는 더운 무우국을 또 한 대접
갖고 들어왔다. 나는 같이 좀 들자고 아주머니를 내 옆에 붙들어 앉혔다.
원 별 말씀을요. 저는 어머님 모시고 벌써 먹은 걸요
아주머니가 먼저 노파 얘기를 꺼냈기 때문에 나는 자연스럽게 노파의 이상한 도리질에 대해 물을 수가
있었다.
할머니께서 제가 몹시 못마땅하셨나 보죠. 말씀은 안 하셨지만 제가 안방에 있는 내내 고개를 젓고 계
셨어요
벌써 이십 오 년 동안이나 그리고 계신 걸요
이십 오년 동안이나!
나는 기가 막혀서 벌린 입을 못 다물었다.
네, 이십 오년 동안이나 허구한 날 자는 시간만 빼놓고---
나는 아주머니의 눈이 젖어오는 것처럼 느꼈으나 말씨는 침착하고 고즈넉했다.
그녀의 시어머니는 이십 오 년 동안을 자는 시간만 빼고는 허구한 날 도리질을 하는 게 일이란다. 건
강과 기분이 좋을 때는 미풍에 살랑이는 것처럼 보일듯 말듯 유연하게 건강이 나쁠 때는 동작이 크고
힘들게 마음이 불안하거나 집안이 뒤숭숭할 때는 동작이 좀더 크고 단호하게 마치 몰라 몰라. 정말 모
른다니까 하고 발악이라도 하듯이 죽자구나 도리머리를 어지럽게 흔든다. 그것 때문에 없는 돈, 있는
돈 긁어모아 한 약도 많이 써 보았고 용하다는 침도 많이 맞아 봤지만 허사였다. 먼저 지친 것은 그녀
쪽이었고 시어머니는 마치 죽는 날까지 놓여날 수 없는 업보처럼 그짓을 고통스럽게, 그러나 엄숙하게
감당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육이오 동란통에 발작한 증세였다. 동란 당시 젊은 면장이던 그녀의 남편은 미처 피난을 못가
서 숨어 살아야 했다. 처음엔 집에 숨어 있었지만 새로 득세한 패들의 기세에 심상치 않은 살기가 돌기
시작하고부터는 집에 숨겨 놓는다는 게 암만해도 불안했다.
어느 야밤을 타 그녀는 남편을 집에서 이십 리쯤 떨어진 광덕산 기슭의 산촌인 그녀의 친정으로 피신
을 시켰다. 시어머니와 그녀만이 알게 감쪽같이 그 일은 이루어졌다. 어떻게 된 게 세상은 점점 더 못되
게만 돌아가 이웃끼리도 친척끼리도 아무게도 반동이라고 서로 고자질하는 것이 성행해 피비린내 나는
끔찍한 일이 이 마을 저 마을에 하루도 안 일어나는 날이 없었다. 끔찍한 나날이었다. 이렇게 되자 그녀
는 시어머니까지도 못 미더워지기 시작했다. 어리숙하고 고지식하기만 해 생전 남을 의심할 줄 모르는
시어머니가 행여 누구 꼬임에 빠져 남편이 가 있는 곳을 실토하면 어쩌나 싶어서였다. 시어머니 같은
사람이 살 세상이 아니었다.
그녀는 공부 못하는 아이에게 구구셈을 익혀 주듯이 끈질기게 허구한 날 시어머니에게 <모른다>를 가
르쳤다.
어머님은 그저 모른다고만 그러세요. 세상 없는 사람이 물어도 아범 있는 곳은 그저 모른다고 그러셔
야 돼요. 난리 나던 날 집 나가고 나선 어떻게 됐는지 모른다고 딱 잡아떼셔야 돼요. 입 한 번 잘못 놀
려 사람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세상이예요. 큰댁 식구들이나 작은댁 식구들이 물어도 그저 모른다고 그
러셔야 돼요. 이쁜이 할머니가 물어도, 개똥이 할머니가 물어도 그저 모른다고 그러셔야 돼요. 아무도
믿으시면 안 된다구요. 네, 아셨죠? 어머님
그녀는 힘차게 도리질까지 곁들여 가며 거듭거듭 이 <모른다>를 교습했다. 시어머니는 늘상 겁먹고
외로운 얼굴을 해가지고 혼자 있을 때도 몰라요, 난 몰라요 하며, 역시 도리질까지 헤가며 열심히 연
습을 하는 것이었다.
난리가 났다고는 하지만 순박하던 마을 사람들이 무슨 도척의 영신이라도 씐 것처럼 서로 죽이고 죽는
것 외에는 대포소리 한 번 제대로 난적이 없던 마을에 별안간 비행기가 날아와 기총소사와 폭탄을 쉴새
없이 퍼붓고 앞산 뒷산에서 총소리가 며칠 계속해 콩볶듯이 나더니만 이어서 죽은 듯한 정적이 왔다.
집 속에 쥐 죽은 듯이 처박혔던 마을 사람들이 하나 둘 조심조심 고개를 내밀었다간 재빨리 움츠러들었
다. 아직은 서로의 대화를 꺼리고 있었다. 그쪽에 붙어서 세도 부리던 패거리들의 모습은 안 보였지만
인민위원회가 쓰던 이장집 마당 깃대꽂이엔 아직도 그쪽 기가 펄럭대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런 어중간하고 모호한 때에 벌써 성질이 급한 남편은 야밤을 타서 집에 돌아와 있었다. 서울이 이미
수복됐는데 제까짓 것들이 여기서 버텨 봤됐자 며칠을 더 버티겠냐는 거였다.
텃밭엔 이미 김장 배추를 간 뒤였지만 울타리엔 기름이 잘잘 흐르는 애호박이 한창 잘 열 찬바람내기
였다. 아침 이슬을 헤치며 뒤란으로 애호박을 따러 나갔던 시어머니가 별안간 찢어지는 소리를 냈다.
몰라요, 몰라요. 정말 난 모른다 말예요
소름이 쪽 끼치고 간담이 서늘해지는 처참한 비명이었다. 그녀도 뛰어나가고 그녀의 남편까지도 엉겁
결에 뛰어나갔다. 잠깐 아무도 분별력이 없었다. 저만치 뒷간 모퉁이에 패잔병인 듯싶은 지치고 남루한
인민군이 서너 명이 일제히 총뿌리를 시어머니에게 겨누고 있었다. 그들도 놀란 것 같았다. 그들은 처음
부터 누굴 해치려고 나타났다기보다는 그냥 시어머니와 마주쳤거나 마주친 김에 옷이나 먹을 것을 달랄
작정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들이 무슨 말을 걸기도 전에 시어머니는 그 자리에 꼼짝도 못하고 못
박힌 채 고개만 미친 듯이 저으며 몰라요, 난 몰라요 를 딴사람같이 드높고 쇳된 소리로 되풀이했다.
패잔병 중 한 사람의 눈에 살기가 번뜩이는가 하는 순간 총이 그녀의 남편을 향해 난사됐다. 그녀의 남
편은 처참한 모습으로 나동그라지고 그들도 어디론지 도망쳤다. 이런 일은 일순에 일어났다.
그 후 거의 실성하다시피 한 시어머니를 오랜동안 극진히 봉양한 끝에 어느 만큼 회복은 됐지만 그때
뒷간 모퉁이에서 죽길 기를 쓰고 흔들어대던 도리질만은 그때 같은 박력만 가셨다뿐 멈출 줄 모르는 고
질병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도리도리 할머니라는 이 동네 명물 할머니가 됐다.
아주머니는 이런 얘기를 조금도 수다스럽지 않고 담담하고 고즈넉하게 했다.
이젠 고쳐 드려야겠다는 생각보단 도와 드려야겠다는 생각뿐이에요
도와 드리다니요? 어떻게요?
당신 임의로는 못하시는 일이고, 얼마나 힘이 드시겠어요. 삼시 잡숫는 거라도 정성껏 잡숫게 해드리
고 몸 편케 보살펴 드리고, 뭐, 그런거죠. 대사업을 완수하시고 돌아가시는 날까지 그거야 못해 드리겠
어요
치매(癡 )가 된 채 허구한 날 도리질이나 해대는 걸 <대사업>이라고 하는 아주머니의 농담에 웃으려
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아주머니의 태도가 조금도 농담 같지 않아서였다. 정말 대사업을 힘껏 보필하는
이의 사명감과 긍지로 아주머니의 얼굴이 은은히 빛나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어쩌면 이 아주머니야말
로 대사업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등골에 전율이 지나갔다.
점심값과 방값이 도합 팔백 원이라고 했다. 나는 천원을 내주면서 그냥 넣어 두세요 했다. 아주머니는
내가 불쾌할 만큼 굽실굽실 고마와했다. 아까 점심을 시킬 때도 그랬지만 통틀어 천 원인데 몇 푼 떨어
지겠다고 저렇게 비굴하게 구나 싶었다. 아주머니의 비굴한 태도가 싫은건 그만큼 내가 아주머니를 아
끼고 좋아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리고도 그 아주머니의 비굴한 태도는 몸에 배지 않고 어색하게 겉
돌아 더보기 흉했다.
아주머니는 내가 준 돈 천 원을 소중하게 스웨터 주머니에 넣고 나더니 지극히 안심스럽고 감사한 얼
굴을 하고는 또 한 번 이상스러운 소리를 했다.
이걸로 노자 해가지고 서울 갈 겁니다. 오늘요
서울을요? 왜요? 하필이면 이 추운 날
나는 나중 이 추운 날 소리를 하고는 내가 여행을 떠난다고 할 때 남편이 놀라면서 나에게 하던 말과
똑같은 말을 내가 했구나 생각했다. 문득 남편이 서럽도록 보고 싶어졌다.
우리 아들이, 외아들이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어요. 그때 즈이 아버지가 그 지경 당하는 걸 내 등에
업혀서 무심히 보던 녀석이 벌써 그렇게 자랐거던요. 군대도 갔다오고 3학년인데 아주 착실하고 좋은 애죠
그렇지만, 지금은 겨울 방학중일 텐데요
네. 그렇지만 학비라도 보탠다고 아이들을 맡아 가르치고 있어 못 내러오죠. 여기서 내가 제 학비 쯤
은 실컷 벌 수 있는데 글쎄 그 녀석이 그런답니다. 겨울 동안만 여기가 이렇게 쓸쓸하지 봄부터 가을까
지는 여기 장사도 꽤 괜찮거던요. 관광철에 공일이라도 낀 날은 방이 모자라 법석인걸요. 새학기 등록금
이랑 하숙비까지 다 해서 꽁꽁 뭉쳐 놓았답니다. 겨울날 양식이랑 밑반찬도 넉넉하구요. 딴 영업집들은
이렇게 벌어 놓으면 겨울엔 문을 닫고 집에 가서들 쉬죠. 우린 여인숙이고 또 여기가 살림집이기도 해
서지만 늘 한두 방쯤 불을 떼놓고 손님을 기다리죠. 돈 벌자고가 아녜요. 가끔 손님처럼 멋모르고 호숫
가를 찾는 이예게 더운 방을 내 드리는 게 그저 좋아서죠. 정말이예요. 그럴 땐 돈 생각 같은 건 정말
안 한다니까요. 그야 몇 푼 주시고 가면 어머님 고기라도 사다 드리면 좋긴 하지만요. 근데 오늘은 그게
아니었어요. 돈 계산부터 츱츱하게 하면서 손님을 기다렸답니다. 정말이지 손님이 안 드셨으면 어쩔 뻔
했을가 모르겠어요. 손님, 고마와요
이번에는 굽실대는 대신 내 손을 꼬옥 잡았다. 굽실대는 것보다 훨씬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영문을 모
르긴 마찬가지였다.
어제 글쎄 서울서 이상한 편지가 왔답니다
아드님한테서요?
아뇨. 아들이 하숙하고 있는 주인집 아주머니한테서요. 벌써 일 주일이 넘도록 아들이 하숙집에 들어
오지를 않는다군요. 평소 품행이 허랑한 학생 같으면 이만 일로 고자질 같은 건 않겠는데 하도 착실한
학생이었던지라 만의 하더라도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알리는 거니 어머니가 한 번 올라와 수
소문을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사연이었어요. 허랑한 학생 아니더라도 제 집도 아니고 하숙집이겠다
나가서 친구집 같은 데서 며칠 자고 들어올 수도 있는 일 아니겠어요? 그만 일로 편지질을 해서 사람을
놀라게 하는 하숙집 주인도 주인이지만 나도 나죠, 괜히 온갖 방정맞은 생각이 다 나지 뭡니까. 어젯밤
에 한잠도 못자고 뒤척이면서 온갖 주접을 다 떨다 미신을 하나 만들어 냈는데, 글쎄 그게……
미신이라뇨?
네, 주책이죠. 오늘 우리 여인숙에 손님이 들어 그 돈으로 노자를 해갖고 서울 가면 아들의 신상에 아
무 일이 없을 게고, 꽁꽁 뭉쳐 논 돈을 헐어서 노자로 쓰게 되면 아들의 신상에 좋지 않은 일이 있을
게고, 뭐 이런 거랍니다. 이렇게 정해 놓고 손님을 기다리려니 어찌나 초조하고 애가 타는지 혼났어요.
그런데 손님이 내가 만든 미신의 좋은 쪽 점괘(占卦)가 돼 주신 거죠. 정말 고마와요
아주머니는 또 한 번 고마와했다. 나는 그런 기묘한 방법으로 외아들의 신상에 대한 크나큰 근심을 달래려
들었던 이 과부 아주머니에 대한 연민으로 가슴이 찐했다. 내가 점괘가 됐다는 게 조금도 언짢지 않았다
그럼 곧 떠나시겠네요
네 준빈 다 됐어요. 이웃사람에게 어머님 부탁도 해놨구요. 이제 곧 온천장으로 나가는 네시 반 버스
만 오면 돼요
동행하게 됐군요
참 그렇군요. 네시 반 버스로 온천장으로 나가신댔지……
아뇨. 서울까지 동행할 거예요
나도 오늘 안으로 서울로 가리라는 결정을 나는 순식간에 내렸고, 그러자 마음이 그렇게 편안해질 수
가 없었다. 아주머니가 시어머니에게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하러 들어갈 때 나도 따라 들어갔다. 고부(姑
婦)간의 비슷하게 늙은 손이 서로 꼭 맞잡았다.
어머님, 저 서울 좀 다녀오겠어요. 물건 살 것도 좀 있고 방학인데도 공부 핑계로 안 내려오는 태식이
녀석도 보고 싶고 해서요. 어머님은 뒷집 삼순이가 잘 보살펴 드릴 거예요. 아무 걱정 마시고 진지 많이
잡수셔야 돼요
알아 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노파는 여전히 고개만 살래살래 흔들었다. 나에겐 그 도리질이 <몰라
요 몰라요>가 아니라 <며늘아, 태식이 녀석에겐 아무 일도 없어, 글쎄 아무 일도 없다니까. 우리가 무슨
죄가 많아서 그 녀석에게까지 무슨 일이 있겠니> 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불현듯 아직도 마주 잡고 있는 고부의 손 위에 내 손을 포개 보고 싶어졌다. 남남끼리이면서 가
장 친한 두 손, 대사업의 동업자끼리이기도 한 이 두 손 사이를 맥맥히 흐르는 그 무엇을 직접 내 손으
로 맥짚어 보고, 느끼고, 오래 기억해 두고 싶었다. 마치 이 세상 온갖 것 중 허망하지 않은 단 하나의
것에 닿아 볼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라도 되는 듯이 나는 감지덕지 그 일을 했다. 거칠지만 푸
근한 두 손 위에 유약한 한 손이 경건하게 보태졌다.
할머니, 안녕히 계세요
노파는 고개만 살래살래 흔들었지만 나는 노파가
너는 결코 헛 살지만은 않았어, 암, 헛 살지 않았고 말고 하는 것처럼 느꼈다.
31. 꿈꾸는 인큐베이터
- 박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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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 1931년 경기도 개풍군에서 출생했으며 서울대 문리대 국문과 재학 중 6.25를 맞게
되어 학교를 중퇴했다. 우리 나이로 마흔살이던 1970 년 <여성동아>장편소설 공모에 <나
목>이 당선되면서 뒤늦게 소설을 쓰기 시작한 박완서는 이후 정력적인 창작 활동을 하면
서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엄마의 뚝>, <미망>등의 주옥과 같은 작품들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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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의 전화 목소리는 속사포처럼 빨랐다. 충분히 상냥했고 응석이 깔려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답할
틈을 전혀 주지 않았기 때문인지 명령조로 들렸다.
"그럼 언니 부탁해, 어머머 큰일 났다. 오늘 직원조횐데 또 교장 눈총 맞으면서 들어가게 생겼네. 언니
지금 통탄통탄 하고 있지? 날 옆으로 끌어들인 거 말야. 그렇지만 때는 이미 늦었구. 우리 언니의 요 꿀
맛을 안 이상 악착같이 붙어다닐테니까. 약올르지롱." 제 할 소리 다하고 농지거리까지 하고 나서 가타
부타 이쪽의 사정 따위는 들을 척도 안하고 전화는 찰카닥 끊겼다. 동생의 용건은 제 자식 슬기 유치원
에서 재롱잔치가 오늘 오후에 있는데 학기 말 성적처리 때문에 도저히 그 시간에 빠져나올 수가 없으니
나더러 대신 가달라는 거였다.
동생은 여자고등학교 가정선생이었다. 가정이 살림솜씨를 가르치는 과목은 아니라고 해도 동생이 가정
선생이라는건 웃기는 일이었다. 살림에는 솜씨도 뜻도 없이 다만 최소한으로 하는 거 하나가 주특기였
다. 잘 기르기 위해 하나만 낳겠다고 공언하고 외아들 슬기를 놓은 후에도 학교를 안 그만두었다. 산전
산후 휴가 동안에 비로소 전업주부가 되는 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았는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
는 걸 알고 깜작 놀랐다고 했다. 그때부터 내가 동생의 가정선생 노릇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파출부
를 고용할 때 면접하는 일로부터 임금 협상, 길들이기 등을 뒤에서 코치했고, 우리 장볼 때 동생네 것도
같이 봐가지고가 파출부에게 요리실습까지 해보였고, 아기 옷이나 기저귀 빨래에 비누기가 남아 있지
않나 의혹의 눈초리를 번득이기도 했다. 같은 강남이긴 해도 그닥 가깝다고는 할 수 없는 두 집 사이를
오가며 일 주일에 적어도 한두 번씩은 그 짓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손수 운전할 수 있는 내 차 덕도 컸
다. 그러나 파출부한테 아무리 공을 들여봤댔자 직업의식을 기대하기는 어려워서 예고없이 안 올 적이
종종 있었다.
그런 날은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어린것을 포대기에 싸갖고 달려들어 짐 부리듯이 현관에다 동댕이를
치고 총총히 출근을 했다. 동생도 동생의 남편도 각각 제 차를 가지고 있어서 기동성은 그만이었고, 동
생의 남편이 혼자서 어린것을 싣고 올 적도 있었다. 그럴 때는 내 쪽에서 되레 동생 남편의 눈치가 보
여 싫은 내색은 커녕 보물단지처럼 반색을 하며 안아들여야 했다. 더욱 난처한 것은 워낙 칠칠치 못한
동생인지라 젖먹이가 이동하려면 반드시 안동해야 할 잡다한 물품 중 한두 가지는 으레 빠져있는 거였
다. 그럴 때는 참을 수 없도록 울화가 치밀어 다시는 받자를 안할 것처럼 푸념을 하다가도 짐짝처럼 끌
려다니는 어린것이 안쓰러워 마음을 풀곤 했다. 잔손 갈 나이는 지났다고 해도 내 자식도 셋이나 되었
다. 남편이나 아이들이 나의 이런 동생네 치다꺼리를, 유별나게 아기를 좋아해서 사서 하는 고생쯤으로
밉지 않게 봐주는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동생은 우리 식구들한테 얌체라는 별명으로 통할만큼 나한테
신세진 것에 대해 미안해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온종일 뼛골 빠지게 애를 봐주고 나서도 좋은 소
리 듣기를 기대하긴 어려 웠다. 맡겼던 보물단지를 찾아가기 전에 혹시라도 없어진 거나 달라진 게 없
나 점검하듯이 아이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안아보고, 냄새까지 맡아보고나서 하루 동안에 훌쭉하고 꾀죄
죄해졌다는 소리나 하기 십상이었다. 어쩜 저럴 수가 있을까? 나는 기가 막혔지만 드러내놓고 탄한 적
은 없었다. 세대차에서 오는 이질감이 흔히 그렇듯이 단지 내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동생이 하는 짓을 미워해지지가 않았다. 숫제 우리 아파트 단지로 이사를 오면 어떻겠느냐는 말을 먼저
꺼낸 것도 나였다. 그렇게 되면 동생이 나한테 더 기대게 될 건 뻔했지만 이사가 그렇게 쉬울 줄은 몰
랐기 때문에 그냥 해본 소리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동생은 내 쪽에서 먼저 그런 말이 나온 걸 기회로
마치 나를 위해서 이사를 하는 것처럼 생색까지 내가며 제까닥 제 집을 팔아 버렸고, 우리 동네에 새
집을 구하는 건 나만 믿고 걱정도 안했다. 집값이 뛸 때라 어물어물하다가 동생네 집 날리는 꼴 보게
될까봐 나 혼자 후끈 달아서 옆동에 마땅한 집이 나는 즉시 계약을 했다. 동생은 잔신경 쓰는 일은 질
색인 반면 되레 이사처럼 큰일은 힘 안 들이고 휘딱 잘도 해치웠다. 한 단지 내에 붙어 살게 되고 동생
네가 편해진 건 말할 것도 없지만, 나는 더 자주 불려 가거나 아이를 떠맡게 되어, 내가 자초한 일에 비
명을 올린 적도 부지기수였다.
첫돌을 바라볼 때 이사온 녀석이 내년이면 학교 갈 나이가 되었으니 다 기른 셈이었다. 동생은 얌체답
게 그동안 나한테 진 태산 같은 신세를 고작 우리 언니 맛이 꿀맛 따위 식의 경박한 표현밖에 못했지만
그 정도라도 생각해주는 건 그래도 양호한 편이었다. 언니 곁으로 이사오고 나서 팔자가 늘어지다 보니
허리 치수가 해마다 일인치씩 늘어난다는 투정을 더 자주 들었다. 내가 단지 어린애를 좋아해서 그 낯
안 나는 치다꺼리를 하고 있다고 여기는 우리 식구들의 생각은 실은 맞지 않았다. 한 치 건너 두 치라
고 조카보다는 얌체 짓까지도 감싸주고 싶은 동생에 대한 애정 때문일 것이다. 아니다. 그것도 아니다.
애정 따위하곤 다르다. 동생이 때때로 내 생활을 훼방놀아주기를 나는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사뭇
열정적으로.
그런 생각 때문에 유치원 문턱까지 와서야 중요한 걸 빠뜨리고 온 생각이 났다. 동생은 슬기가 출연하
는 연극을 포함해서 중요한 장면들을 비디오로 찍어 달라고 했다. 엄마가 안 와서 섭섭했을 아이에게
엄마하고 다시 한번 재롱 잔치를 볼 수 있다는 건 크나큰 위로가 될 터였다. 비디오 카메라는 우리 집
밖에 없었지만 그것을 요 긴하게 쓰는 건 주로 동생네였다. 일본 갔다 올 때 그걸 사온 남편도 남이 가
진 것은 일단은 다 갖추고봐야 한다는 소유욕 때문이지 그 방면에 취미가 있어서 장만한 건 아니었다.
놀러도 잘 다니고 아이 하는 짓도 한창 예쁠 때라 그렇겠지만, 그걸 쓸 일은 우리보다 동생네한테 더
자주 생겼다. 그러나 툭하면 빌려다가 뭘 그렇게 찍어 대는지는 알 바가 아니었다. 찍은 걸 동생도 보여
주려들지 않았고 나도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렇게 제 뒷바라지를 시켜 먹고도 동생은 이런 내 성격
을 차갑다고 비난했지만 옆에서 신물이 나게 보는 사람의 일상적인 행동을 화면에서 다시 보는 일이 뭐
그리 재미있을까. 자기 자신이나 가족의 모습이라 해도 크게 다를 바 가 없었다. 나 보기엔 그걸 재미있
어 하는 사람이 되레 이상했다.
영화나 텔레비젼 연속극 따위를 좋아하는 건 나도 보통사람과 다를 바 없지만 그건 하늘의 별처럼 아
득하게 빛나는 사람들이 내가 이룰 수 없는 세계를 펼쳐 보여주기 때문이다. 즉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
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서 아무리 찾아도 비디오 카메라는 온데간데가 없었다. 동생의 신신당부가 아니
더라도 이번만은 나도 비디오로 찍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가 없었다. 슬기는 연극의 주연이라지
않나. 주연이 아니더라도 연극에 출연하다는 것은 자기가 자기 아닌 남이 돼보는 일이다. 빨리 찾아야
한다는 조바심은 이상하게도 절대로 못찾을 것 같은 절망감하고 붙어다녔다. 종종 있는 일이었다. 뭘 찾
다찾다 안 나오면 어느 순간 뭘 찾고 있 었는지조차 생각나지않게 되면서 모든 생각이 정지되는 일종의
치매현상이 올적도 있었다. 남편은 나의 그런 상태를 갱년기현상이 라고 별명짓고 즐거워하는 것 같았
다. 나는 군더더기 없는 갓 마흔이었다. 동갑내기 동창 중엔 늦동이를 임신중이어서 우리 모두를 기대에
부풀게 하는 친구도 있는데 갱년기현상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러나 지금도 그 증상이 올까봐
미리 두려워하는 마음때문에 손끝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비디오카메라를 귀중품 취급해서가 아니었다.
외출하려는데 열쇠가 없다든가, 한참 바쁜 등교시간에 빨아서 챙겨놓은 중학생 딸의 덧신이 안 보일 때
도 그런 증상이 왔다. 마치 이 세상이 끝장나버릴 것처럼 눈앞의 사물 뿐 아니라 머릿속의 생각까지 가
물가물 무화(無化)돼가는 느낌은 아주 고약했다. 이 세상 마지막 느낌이 고작 공포와 절망이라니.
이렇게 내가 뭘 못 찾아 우두망찰을 하고 있는걸 남편한테 들키면 사정은 더 나빠졌다. 그는 매우 부
드럽고 침착하게 굴었다.
"여봐 그렇게 덮어놓고 서둘지만 말고 차근차근 생각을 정리하라고. 자아 차근차근. 그래 그렇게 심호
흡을 하고 나서 지금 현재 그게 어디 있을가 하는 생각은 일단 잊어버려요. 그까짓건 당신 털끝 하나만
도 못한 거니까. 그리고나서 편안한 마음으로 그 물건을 마지막보았을 때나 마지막 사용했을 때 상황을
떠올리는 거야.
옳지 옳지 그렇게."
남편의 친절한 인도로 나는 어제 딸의 덧신을 누가 빨았나부터 생각하기 시작한다. 어제는 파출부 아
줌마가 오늘날이니까, 그녀가 빨았겠구나. 그녀는 장독 언저리에다 신발 빤 걸 너는 버릇이 있지. 아 참,
저녁때 화초에 물을 주다가 덧신이 덜마른걸 보고 욕실 스팀 위로 옮겨 놓았었지, 하는 데까지 더듬어
올라가면 현관 신장과 딸의 방 책상 언저리만 뱅뱅 돌던 행동반경을 비로소 벗어난다. 물론 바삭하게
마른 덧신은 스팀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 이렇게 남편의 도움으로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남편이 사정을 더욱 악화시켰다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럴 때의 남편은 꼭 즈이
어머니한테 하듯이 나에게 대했다. 그가 어머니를 대할 때 가면처럼 뒤집어쓰는, 과장되고 위선적인 친
절과 공손을 나한테까지 써먹으려드는데 내가 어떻게 구역질이 안 나겠는가. 그래도 결국은 남편한테
배운 방법으로 카메라의 행방을 소급해 올라가 동생네가 빌려간 걸 아직 돌려받지 못했다는 데까지 생
각이 미치게 되었다. 동생네로 뛰어가서 좀 모자라는 듯하여 붙박이로 오래 붙어 있는 아줌마하고 한동
안 온 집안을 들쑤성거려 그놈의 카메라를 찾아낼 수가 있었다.
그럭저럭 반시간은 넘어 지체를 한 모양이다. 재롱 잔치가 시작된지도 아마 그쯤은 되었으리라. 슬기가
다니는 유치원은 이 동네 뿐 아니라 강남 일대에서도 시설좋고 잘 가르치기로 소문난 데였다. 원아를
끌려고 전단을 돌리고 가정방문까지 하는 군소 유치원하곤 달라서 선착순으로 뽑는 정원 안에 들기 위
해 새벽부터 줄을 서야 하는게 그 유치원의 자랑스러운 전통이었다. 무얼 어떻게 잘 가르친다는 건지
그 실속보다는 줄을 서야 한다는 소문 때문에 자꾸만 더 유명해져서, 내년에는 필경 그 전날 밤부터 유
치원 문간에서 오리털 이불을 뒤집어쓰고 새지 않으면 뽑히기 어려울 거라고들 했다. 이 년 전 슬기가
들어갈 때만 해도 새벽 네신가 다섯신가에 지금 있는 아줌마를 대신 내보내 줄을 서게 함으로써 겨우
선착순에 들 수가 있었는데 이 년 전이 옛날이지 뭐유, 하며 동생이 다행스러워 하는 소리를 몇번인가
들은 적이 있다. 시간에도 가속이 붙는 걸까. 스쳐 지나간 시간들이 너무 빨리 옛날이 된다.
이름난 유치원답게 마당의 정원수 중 추위를 타는 나무들이 벌써 짚으로 맵시있게 월동 준비를 하고
칙칙한 상록수와 늠름한 낙엽수 사이에 서 있는 게 밍크코트를 입은 귀부인처럼 품위가 있다.
양지바른 곳을 차지한 놀이터의 놀이기구들도 목제로 돼 있어서 친밀감을 주면서도 어느 한군데 허술
한 데 없이 견고해 보였다. 나는 서울대학 학부모라도 된 것처럼 한껏 으스대는 마음으로 거만하게 마
당을 가로질러 아담한 단층건물로 다가갔다. 투명한 유리창을 가린 커튼의 동화적인 무늬가 문득 병원
신생아실을 연상시켜 나는 문득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러나 어물어물하진 않았다. 학교로 치면 대강당에
해당하는 넓은 홀엔 학부모들이 발 디딜 틈 없이 꽉 들어차 있었고, 무대에선 여자아이하고 남자아이가
짝을 지어 포크댄스를 추고 있었다. 무대 옆 벽에 재롱 잔치 순서가 붙어 있었다. 슬기가 주인공으로 출
연하다는 동극이 그 다음 차례인걸 확인하고 나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비디오카메라 때문에 늦으면서
도 그걸 가져오는 게 유난스러워 보일까봐 쭈뼛쭈뼛하는 마음 이었는데 적어도 이런 유치원에 자식 보
내는 집치고 그거 안 가진 집은 없는 것 같았다. 무대 앞은 포크댄스를 찍으려는 엄마들이 출연하는 아
이들 수효보다 더 여럿이 붐비고 있었다. 손잡고 춤추 던 아이들 중 한 쌍이 별안간 싸우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멱살을 잡더니 엎치락뒤치락 레슬링으로 변했다. 음악은 그대로 이어졌지만 춤
판은 그냥 추는 아이와 레슬링을 구경하는 아이들로 갈라졌다. 그냥 춤을 추는 아이들도 마음은 싸움구
경에 가 있다는 게 눈에 보였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선생님이 무대로 뛰 어오르고, 싸우는 애의 가족인
듯싶은 사람들도 가세해서 아이들을 뜯어말렸다. 관람석이 시끌시끌한 웃음판이 되었다. 안 되겠다 싶었
는지 음악이 멎고 아이들도 깔깔대며 무대 뒤로 사라졌다.
"사내 녀석끼리 짝을 지어 놓으면 저렇다니까."
"그럼 어떡해요? 여자애가 모자라는걸."
"하필 포크댄스를 할 게 뭐람. 짝이 안 맞는 걸 번연히 알면서."
이런 수군댐으로 미루어 남자끼리 짝이 된 아이들이 춤을 추다 말고 싸움이 붙은 모양이었다. 선생님
들이 무대 뒤에서 뭘 어떻게 수습했는지 포크댄스는 다시 계속됐다. 싸움이 붙은 쌍만 아니라 남자끼리
짝지어진 쌍은 다 제외시킨 듯했다. 아이들이 허룩하게 줄었다는 걸 알 수가 있었다. 포크댄스보다는 싸
움 구경이 훨씬 재미있었기 때문에 무대나 관람석이나 다같이 시큰둥 열없어졌다.
다음이 슬기가 출연하는 연극 차례였다. 일곱 마리의 새끼 염소와 늑대 이야기 였다. 동생이 주연이라
고 뽐낸 슬기의 배역은 늑대였다. 올해 졸업하는 세 반 중 한 반이 총 출연하는지라 억지로 만든 배역
도 많았다. 토끼나 다람쥐, 오리나 황새로 분장하고 염소 일가가 겪는 수난을 구경만 하는 배역도 여럿
되었으니까 늑대쯤 되면 중요한 배역이었다. 슬기가 몸이 큰 것도 늑대 역할에 맞았다. 털이 북실북실한
천을 두르고 갈고리처럼 험악하게 생긴 발톱이 달린 커다란 신을 신은 슬기는 다른 아이들보다 곱절은
더 큰 것 같았다. 험악하게 꾸몄는데도 내 조카라 그런지 엉성하고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나는 얼른 케
이스에서 비디오 카메라를 꺼내면서 찍기 좋은 자리를 찾으려고 이리저리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앞으로
나갔다. 그러나 막상 카메라를 들이대고 보니 눈앞이 깜깜했다.
렌즈가 닫혀 있다는 건 알겠는데 어디를 어떻게 돌려야 되는지 눌러야 되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
았다. 처음 찍어 보는 건 아니라 해도 동생네하고 한자리에 있거나 어디 놀러 갔을 때 동생이 찍다 말
고 저도 찍히고 싶으면 나한테 넘겨주었고 그럴 때 잠깐 잠깐씩 찍어 본 게 고작이었다. 마치 관광지에
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셔터 좀 눌러 주세요, 하고 카메라를 넘겨줄 때 위치나 거리뿐 아니라 어 떤 것
이 셔터라는 것까지 가르쳐 주어, 카메라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도 찍을 수 있듯이, 주인 의식
없이 시키는 대로 만져 보았을 뿐이었다.
염소 엄마가 새끼들을 돌아다보고 또 돌아다보면서 무대 뒤로 사라져 갔다. 바위 뒤에서 웅크리고 망
을 보던 늑대가 나타날 차례 였다. 나는 초조하게 요기 조기 돌리고 눌러보면서 다시 들여다 봤지만 역
시 아무것도 안 보였다. 급하게 뭘 찾다가 안 찾아질 때나 다름없이 정신이 지리멸렬해지면서 손끝이
떨려왔다. 여러 사람 앞에 나의 쓸모 없음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는 마음의 떨림을 보는 것 같았다.
"도와 드릴까요."
아주 듣기 좋은 저음이었다. 키가 훌쩍 큰 남자였다. 남자는 웃고 있었지만 비웃는 웃음은 아니었다.
그는 엉거주춤 허리를 굽혀 나하고 같은 눈 높이가 되면서 빨간 단추를 살짝 만지고나서 카메라를 내
눈에다 대주었다.
"이제 보이지요?"
그러나 나는 뭐가 보이나를 확인하기 전에 그를 다시 한번 쳐다 보았다. 선량하고 친절한 인상이 마음
에 들었다. 바위 뒤에 숨어 있던 늑대가 사방을 휘둘러보면서 걸어나왔다. 나는 카메라로 늑대를 쫓다
말고 키 큰 남자를 돌아다보면서 물었다.
"그냥 이러고 있으면 찍힙니까?"
남자가 다시 허리를 굽혀 들여다보더니 또한 군데를 만졌다. 화면의 영문 글자가 스탠바이에서 카메라
로 바뀌었다. 바뀌는 걸 보기 전에는 거기 자막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럼 여지껏 건성으로 들고 있었단 말예요?"
나는 그에게 따지듯 물었다. 그러나 곧 그의 위로하는 듯한 웃음을 따라 웃고 말았다. 그는 나하고 카
메라를 번갈아 들여다보면서 이것저것 설명을 하려고 했다. 나는 듣는 척하다가 알아들을 자신이 없다
는 표시로 한숨을 쉬면서 어깨를 한번 으쓱했다가 축 늘어뜨려 보였다.
"제가 찍어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는 내 손에서 스르르 카메라를 넘겨받으면서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나에게 들고 있던
서류봉투를 넘겨주었다.
"잘 찍으세요. 늑대가 우리 아이예요. 조카지요." 그가 남의 아이들까지 골고루 찍을까 봐 나는 이렇게
영악한 소리로 못을 박았다. 그는 엄마들이 붐비는 앞자리에서 되레 뒤쪽으로 물러나 적당한 자리를 잡
았다. 그렇게 하는게 그의 큰 키에 어울렸지만 나는 혹시나 그가 카메라를 노리는 좀도둑일지도 모른다
고 의심하는 마음이 생겨 자꾸 고개를 비틀고 돌아다 봐야만 했다.
또한 아이들의 연기가 웃음을 자아낼 때도 저런 장면을 잘 찍어야 된다는 뜻으로 그를 돌아다 보았다.
그럴 땐 그도 나를 흘긋 보았다. 그렇게 눈길이 마주칠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공감 때문이었다. 아이들
의 재롱을 같이 귀여워하고 있다는 단순한 공감의 즐거움이 군중 속에서 고개를 뒤로 튼다는, 다분히
피곤한 일을 조금도 힘 안들게했다. 재롱 잔치가 끝난 후 그와 나는 자연스럽게 같이 나왔다. 아니, 그
건 자연스럽지 않았다. 대부분의 엄마들은 아이 하고 같이가기 위해 또는 선생님의 노고도 치하하며 제
자식 똑똑하단 자랑도 늘어놓기 위해 남아 있었다. 동생도 내가 마땅히 그런 뒤풀이까지 해주려니 하고
있을 터였다. 끝나자마자 나오는 학부모는 거의 없어서 그와 나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겨울해가 아쉽게
엷어지는 마당을 거닐 듯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유치원 정문에서 길 건너가 바로 우리 아파트 단지 후
문이었다. 그가 같은 단지에 살지 않는 한 헤어지게 돼 있었다. 그가 어디로 가나 해서 흘긋 쳐다봤을
때 그가 황급히 말했다.
"추워 보이시는군요. 어디 가서 차 한잔 할까요?" 뜻밖의 제안이기도 했지만, 놀란 것처럼 붕 뜬 목소
리 때문에 나는 나의 순간적인 눈빛이 갈고리가 되어 그를 낚아챈 것처럼 느꼈다. 내가 내 눈빛에 그렇
게 자신이 있었다기보다는 그와 헤어지는걸 아쉬워하는 마음을 나도 모르게 진하게 드러내 생각이 나서
였다. 짐짓 못 이기는 채 그가 가는 대로 상가 쪽으로 따라갔다.
그러나 꽤 분위기 있는 찻집으로 안내한 건 나였다. 조명과 음향을 은은하게 줄인 찻집에 마주앉자 비
로소 이건 내가 안하던 짓일 뿐 아니라 나에게 너무도 안 어울리는 짓이라는 떨떠름한 낭패감이 왔다.
나는 교활하게도 이렇게 된 건 전적으로 네 책임이라는 듯이, 그러나 네가 어떤 개뼉다귀이든 관심없다
는 듯이, 쌀쌀하고 고상한 표정을 꾸몄다.
"조카라고 그러셨던가요? 그 늑대가."
나의 지어먹은 마음에 개의치 않고 그가 소탈하게 말했다.
"예, 동생의 아들이죠. 이웃에 살기도 하지만 동생이 선생이라 제가 가끔 엄마 노릇을 대신할 적이 있
답니다."
"우리하고 사정이 비슷하군요. 아직 맞벌이를 하다보니 아이들한테 오늘같은 일이 생길 때는 장모님이
학부모 노릇을 해주시곤 했는데 요새 마침 효도관광을 떠나신 후라서. 집사람은 내가 유치원에 들른 거
모를 겁니다. 오늘 아침에 즈이 엄마 몰래 아이하고 손가락 걸고 약속을 했거든요. 아빠가 꼭 가봐 줄
테니 열심히 하라구요. 아주머니 조카만 주연을 한 줄 아세요? 우리 아이도 주연이었답니다. 딸내미가
여주인공으로 나오는데 아비가 어떻게 안 가보냐고 회사에다가도 큰소리치고 나온걸요."
"직장 가진 엄마들보다 낫네요. 같은 직장 내에서도 확실히 남자가 여자보다 융통성이 있는 것 같아
요."
"직장 나름이죠. 잡지사니까 밖에 나올 구실을 만들기가 비교적 쉽다뿐이죠. 어떻게 맨으로 땡땡이를
칩니까."
나는 아까 잠시 맡아 가지고 있던 서류봉투에서 눈여겨본 꽤 괜찮은 종합지 이름이 생각나 신분이 불
확실한 사람을 따라온 건 아니로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주연이면 엄마 염소였겠군요?"
"아니죠. 그 극의 주연이 어떻게 엄마염솝니까? 시계 속에 숨어서 혼자 살아남았다가 해피엔드를 만들
어 내는 막내염소죠." "아아, 고 꼬마. 참 예쁘고 당차던데요."
"뭘요, 역할이 역할이니까 그래 보였던 거죠."
칭찬 한마디에 제 딸이 주연이라고 핏대를 올릴 때와는 딴판으로 겸손해지는 그가 보기 좋았다.
"그건 그래요. 제 조카도 덩치만 컸지 계집애한테도 맞기만 하 는 허풍선이랍니다. 그런 주제에 그 역
할을 그렇게 좋아하고 으스댄대요. 나중에야 어찌 됐건 당장 여자 애들한테 위협적인 존재가 되는 게
신나나 봐요. 사내 코빼기가 뭔지. 참 몇 남매나 두셨습니까?"
"남매가 아니라 자매를 두었습니다. 국민학교 일학년짜리하고 오늘 꼬마 염소 노릇한 녀석하고 딸만 둘
입니다."
"어머, 그럼 또 낳으셔야겠네요."
"아뇨, 둘이면 족합니다. 아이들도 건강하고 우리 능력도 그렇고, 지구 환경한테도 미안하고."
"말씀은 그렇게 하셔도 속마음은 아니실걸요. 남 다 있는 아들 자기만 없어보세요. 얼마나 비참하고 섭
섭한가. 물건이면 당장 훔치고 싶다는 옛말이 조금도 그르지 않죠. 하긴 요새처럼 편리한 세상에서야 훔
칠 것까지야 있나요, 뭐. 수단 방법 안 가리게 되는 거죠, 그가아짓 거."
나는 걷잡을 수없이 수다스러워지다가 무엇에 놀란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수다가 걷잡을 수 없었던
것보다 더 지독하게 수치심을 걷잡을 수가 없었다. 마치 실수로 중환자리에서 속바지를 까내렸다가 치
켜올린 것처럼 황당하고 망신스러웠다. 다행히 그가 내 치부를 본 것 같진 않았다. 그래도 나는 속으로
그럴리가 없어, 저 자식은 시방 능청을 떨고 있는 거야, 라고 은근히 겁을 먹고 있었다.
"섭섭하지 않다고는 않했습니다. 아내가 둘째 애를 뱄을 때는 아들이길 바란 것도 사실이고요. 이왕이
면 아들 딸 섞어서 색색아지로 갖고 싶은 게 인지상정 아닙니까?"
"그거하곤 다르지요. 첫아들 낳은 사람이 둘째는 딸이었으면 하는건 괜히 그래보는 배부른 수작이라구
요. 그 사람들 조금도 절실하지 않아요. 두번째도 아들이면 즈네는 특별한 기술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으
스대면 으스댔지 손톱만큼도 섭섭해 할 줄 아세요.
아시겠어요?"
나는 다시 열오른 목소리가 되었다. 그제서야 남자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바보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모르겠는데요. 왜 내가 그걸 알아야 하는지는 더욱 모르겠구요."
"지금 행복하지 않으시죠? 내 말이 맞죠? 아들이 없다는 건 결혼생활의 행복의 중대한 결격사유라는
걸 인정하셔야 돼요." "왜 그걸 강요하십니까? 본인이 조금도 그렇게 안 느끼는 걸 가지고."
그는 여간 곤혹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엄만 그래도 나보다는 덜 곤혹스러우리라. 나는 이 세상에 아들
이 있고 없고 하고 인생의 행, 불행하고를 연관지어서 생각해 본 적이 한번도 없는 것 같은 남자를 만
난 게 대단히 곤혹스럽고도 기분이 나빴다. 뭐 저런 족속이 다 있나 재수 옴붙었다 싶으면서도 그 남자
를 행복한 채로 놓아주기가 싫었다. 그것은 분명히 거짓 행복이고, 거짓은 깨부숴야 한다는 사명감이 대
단한 정의감처럼 치뻗쳤다.
"야구구경 좋아하지 않으세요?"
나는 화제를 바꾼 것처럼 전혀 딴소리를 했지만 어림없었다.
속으로는 점점 더 집요해지고 있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운동은 다 좋아하지만 야구엔 특히 광이죠."
떨떠름하던 그의 표정이 반짝 환해졌다. 나도 속으로 옳지 너 잘 걸렸다 싶었지만 애써 무표정을 꾸미
고 말했다.
"야구장에도 가끔 가시겠네요?"
"그럼요 고교야구 시즌에는 못 참죠. 지금은 그렇지도 않지만 나다닐 때만 해도 우리 모교가 야구 명문
이었거든요. 선수는 아니었지만 그때 버릇이 남아서 그런지 일 년에 한두 차례라도 구장에서 직접 목이
터져라 열광을 해야 살맛이 난달까, 스트레스가 풀린답니다."
"혼자서만 즐기세요?"
"어디가요, 나갈 땐 혼자라도 자연히 동문들과 만나게 되니까, 끝나면 이겼다고 한잔, 졌다고 한잔, 오
래간만에 만났다고 한잔 하다보면 돌아올 땐 엉망으로 취해서 꼬리까지 달고 들어와 마누라 머리에 뿔
을 돋게 하는걸요."
"아들하고 야구구경 다니고 싶단 생각 없으세요?" 나는 너 약 좀 올라봐라 하는 듯이 눈을 가느스름히
뜨고 조롱하는 투로 말했다.
"또 아들 타령입니까. 내참, 솔직히 말해서 아들하고 같이 와서 부전자전으로 열광하는 친구를 보면 부
럽지 않은 것도 아니라니까요. 여북해야 큰딸을 길들이려고 했겠어요. 실패했어요. 커갈수록 야구장 따
라가는 걸 고역스러워하길래 놓아주었어요. 그렇지만 작은애가 또 있으니까 희망이 아주 없는 건 아니
지요. 남자보다 비율이 낮다뿐이지 여자라고 야구를 즐기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요."
"구차스럽게 그럴 것 없이, 부인한테 솔직히 아들데리고 야구장 다니는 친구가 부러워서 죽겠다는 시늉
을 자꾸만 하세요." "부부간에 뭣하러 그런 상처를 줍니까? 그 사람이 무슨 죄가 있다고."
"상처뿐이겠어요. 모욕이고 모독이죠. 그래야 부인도 별수 없이 아들 낳을 방도를 강구하게 될 거라, 이
거죠."
나는 앞에 있는 그를 의식하지 않고도 괜히 자신감이 넘쳤다.
그러나 그게 얼마나 허망한 자신감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곧 꺼지게 될 게 두려웠다.
"글쎄요. 만일 나에게 아들만 있는데 아내가 옆에서 콩나물 다듬어 줄 딸 하나 없다고 아무리 구시렁거
려도 단지 콩나물을 다듬게 할 목적으로 내가 딸을 만들고 싶어할 것 같진 않네요. 혹시 내가 그 정도
로 싹수머리 없는 인간이라 해도 아들딸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마지막 장치가 남아 있으니 얼마나 다행
입니까? 음양의 조화만은 아직도 신의 영역인 게 감사할 따름이죠."
그러면서 그는 팔운동을 하듯이 큰 동작으로 손목시계를 보았다. 나하고 상대하기 싫다는 걸 적나라하
게 드러내 보이기 위한 몸짓이리라. 그 마지막 장치인지, 음양의 조화인지가 신의 영역을 벗어난지 오래
라는 것도 모르는 주제에 잘난 척하긴. 순진한 탓일 거야. 몇 살이나 되었을까. 나하고 동갑 아니면 기
껏해야 서너 살 아래일 것이다. 저런 남자하고 자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다 말
았는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나른한 기분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아마 말문이 막힌 줄 알고 이때다 싶었나 보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실은 인터뷰 약속을 해놓고 그 사이에 잠깐 틈을 낸 거라서."
"요령이 좋으신가 봐요."
"요령은요. 남 보기엔 시간의 구애를 덜 받는 직장처럼 보이지만 남들이 잠자는 시간에도 일해야 하는
게 이놈의 팔자랍니다.
차값은 제가 계산하겠습니다. 그럼."
그는 필요 이상 서둘고 있었다. 누가 잡아먹나. 순진하긴. 그가 그럴수록 나는 그를 놓치고 싶지가 않
았다. 구체적으로 어째보겠다는 건 아니었다. 마음속으로 갖고 놀고 싶었다. 조그만 더.
나는 따라 일어서서 그를 뒤따랐다. 그러나 차값을 내가 내겠다고 날치진 않았다. 나는 남들이 그런 일
로 투사처럼 열렬하게 다투는 걸 보는 것조차 질색이었다. 그 대신 나는 그가 돈을 내고 거스름돈을 받
는 걸 지켜보는 동안 기막힌 생각을 해낼 수가 있었다.
"명함 있으면 한 장 주세요."
"왜요? 참 명함이 어디 있더라."
그는 양복 주머니엔 손도 넣지 않고, 겉으로만 위아래를 양 손바닥으로 탁탁 쳐 보이면서 찾는 시늉만
했다. 명함을 줄까말까 결정할 시간을 벌려는 그의 이런 어색한 동작을 나는 속이 근질근질하도록 귀엽
게 바라보았다.
"아까 찍으신 필름 잘 됐으면 하나 복사해서 드릴려구요. 남자 주인공 찍는데 여주인공을 빼놓았을 리
없잖아요."
나는 짐짓 사무적으로 말했다. 예상대로 그가 반색을 했다.
"아, 그러문요, 그러문요. 보시면 아시겠지만 초점을 우리 애한테 맞췄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팔이 안으
로 굽는다고 무의식적인 행동이었으니까 용서하세요."
그의 얼굴이 바보스러울 정도로 헤벌어졌고 손엔 이미 명함을 꺼내들고 있었다. 나는 관심없다는 듯이
명함을 자세히 보지도 않고 핸드백 속에 집어넣으면서 고개만 약간 까딱해 보이고는 먼저 획 등을 돌렸
다.
"그림이 잘 안 나왔어도 보내주셔야 돼요.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그가 내 등뒤에서 소리치는 걸 들으며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저음이지만 멀리 퍼지는 기
분 좋은 목소리를 천천히 음미했다.
저녁을 먹고나서 텔레비젼을 보고 있는데 동생한테서 전화가 왔다. 두 딸은 과외공부 가고 아들은 숙
제를 하고 있는 호젓한 시간이었다. 남편은 중국으로 출장 중이었다.
"언니, 우리 집에 차 마시러 오지 않을래. 언니 언제 그렇게 기술이 늘었수? 너무너무 잘 찍었어. 슬기
재롱잔치 찍은거 말야. 근사해. 볼만해."
오는 길에 동생네다 카메라를 놓고 왔더니 지금 식구가 모여 그걸 보고 있는 모양이다.
"그까짓거 찍는데 기술이고 뭐고가 어딨냐? 제 새끼 재롱이니까 근사해 보이는 거지."
"아냐, 언니. 전에 언니한테 잠깐잠깐 찍어 달랜 거 얼마나 못 찍었는지 알아? 나도 잘은 못 찍어도 그
냥 눈에 안 거슬릴 정도는 찍는데 언니 찍은 건 한 카트만 끼어들어도 아아 저건 언니 솜씨라는 걸 알
만큼 못 봐주게 튀었다구. 그런 언니가 웬일이유? 오늘 찍은 건 이건 작품이야, 작품. 카메라는 줄창 우
리 집에다 내꼰자 놨으면서 언제 그런 장족의 발전을 했을까?"
동생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나는 아들의 방문을 열고 이모네 마실 갔다오마고 말했다. 아들은 하던
숙제에서 눈도 떼지 않고 알았다고 했다.
"같이 가지 않을래? 엄마가 찍은 비디오 보러 가는데." 나는 현관에서 안해도 될 소리를 던지고 대답을
기다렸다.
"흥미없어요."
아들의 시큰둥한 대답이 들렸다. 열한 살짜리가 저렇게 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일까. 싫어, 라든지 바빠,
라고 했더라면 좋았을 걸. 열한살, 만 십 년하고 일곱 달짜리가 흥미있어하는 건 뭘까.
나는 아들의 멱살을 잡고 내가 널 어떻게 낳아 기른 자식인 줄 아느냐고 한바탕 악다구니를 치고 싶은
욕망을 억제하느라 현관 신장을 잡고 심호흡을 했다. 나는 떨고 있었다. 손끝이나 가슴이 아닌 더 내밀
한 곳이 분심으로 떨고 있었다.
동생네는 마침 일가단란의 시간이었다. 오붓한 세 식구 곁에 주책없이 아줌마까지 끼어들어 빨래를 개
키면서 시시덕대고 있었다. 나도 기분을 바꾸려고 아줌마 점점 고와진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형님은 경기 좋으신가 봐요. 일 년이면 반 이상은 해외에서 보내시니. 이웃에 살면서도 까딱하단 형님
얼굴 잊어버리겠어요 ." 다탁에 들러앉아 차를 마시면서 동생의 남편이 말했다.
"해외에 자주 나간다고 경기가 좋겠어요. 중소기업들이 다 어려워하는 것만큼 그이도 어렵겠죠, 뭐."
"언니는 또 죽는 소리, 누가 사업가의 아내 아니랄까봐. 형부가 왜 중소기업이유?"
"얘는 그럼 우리가 재벌이냐?"
"부동산 재벌 아니우? 뒤가 그만큼 든든하면 맨날 윗돌빼 아랫돌 고였다, 아랫돌빼 윗돌 고이다 마는
중소기업하곤 다르지. 남은 죽기살기로 하는 사업을 형부는 취미로 하니까 돈이 벌릴 수밖에."
시집이 대대로 살던 서대문 밖 구옥 앞으로 길이 나면서 번화가가 되어 그 자리에 빌딩을 올린걸, 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는 전적으로 시어머니 관리하에 있지만 장차 남현이 상속하게 되리라는 것 때문에
동생은 툭하면 이렇게 시샘이 섞인 소리를 했다.
"나도 따분한 은행 때려치우고 형님 밑에 들어가서 사업이나 배울까?"
"듣기 싫어요. 누가 붙여주기나 한다구. 난 사장 마누라는 안 바랄테니 지점장 마누라라도 한번 돼봅시
다."
그러면서 동생이 비디오 세트의 리와인드를 누르자 동생의 남편은 주섬주섬 담뱃갑을 챙겨가지고 안방
으로 들어가고 아줌마도 제 방으로 가버렸다.
"이번이 네번째야, 언니. 다들 질렸나봐. 요녀석은 그래도 지가 나오니까 또 보고 싶은가보네."
기대에 부푼 얼굴로 화면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슬기를 보며 동생이 눈을 흘겼다. 곧 화면이 나오고 나
는 슬기보다 더 열심히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내가 낮에 본 어설픈 동극하고는 전혀 다른 것을
보는 것처럼 화면은 아름답고도 생동감이 넘쳤다. 아, 저런 장면도 있었던가 싶은 귀여운 실수, 깜찍한
연기, 지엽적인데 숨어서 등극을 동극답게 하는 천진난만, 그런 것들을 어쩌면 저렇게 낱낱이 끄집어내
어 저다지도 귀엽게 살려놓은 걸까. 그 삼십분도채 안 되는 아마추어의 기록 필름이 나에게 걸작품일
수 있는 것은, 그러니까 무엇보다도 우리끼리만 통한 귀여운 것에 대한 공감 때문이었다. 나는 지금 비
디오를 보고 있는 게 아니라 그 남자와 눈을 맞추고 있는 거였다. 출연한 아이들이 모두 손에 손을 잡
고 무대를 한 바퀴 돌고는 손을 흔들면서 퇴장을 했다. 슬기는 소파에서 잠이 들었고 동생도 하품을 했
다. 네 번씩이나 보고나니 시들한 모양이었다. 내 기술에 대한 칭찬도 안했다. 나도 약간은 지루했던 양
기지개를 켜면서 지나가는 말처럼 덤덤하게 그 테이프 한 통 더 복사해 달라고 말했다. 서로 잘 자라는
간단한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저만치 아파트의 각진 모서리에 반달이 걸려 있었다. 어머, 자연이
라는게 있긴 있었구나. 나는 무료하게 걸려 있는 달을 향해 까닭없는 능멸의 시선을 보내고는 종종걸음
을 쳤다.
아들은 그새 잠들어 있고, 딸들이 과외공부에서 돌아올 시간은 아직 멀었다. 고2짜리와 중3짜리의 과외
학원은 꽤 멀었지만 이웃끼리 서로 조를 짜서 돌아가며 데리러 가기 때문에 내 차례가 아닌 달은 문만
열어주면 된다. 그 조에 끼려면 차가 있어야 되기 때문에 나처럼 기계 무서움증이 심한 사람도 운전을
배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딸애들이 올 때까지 텔레비젼이나 볼까 하다가 비디오를 틀었다. 남편이 출장
가고나서 빌려온 [장미의 전쟁]이라는 영환데 그동안 서너 번은 본 것 같다. 나는 연속극도 비디오도 영
화도 보긴 보지만 결코 즐기는 편은 아니다. 재미로나 감동으로나 푹 빠진 적이 없으니까. 아주 정신차
리고 보지 않으면 스토리도 제대로 못 따라갈 적이 많다. 본 것을 연거푸 또 보고 싶어하긴 처음이다.
그런게 좋은 영화인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다. 그 영화를 연거푸 보고 있다는 걸 누가 알고있는 것도 아
니건만, 나는 묘하게 떳떳지 못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남편이 출장에서 돌아오기 전에 그만 보고
돌려주리라 혼자서 다짐까지 한다. 그까짓게 무슨 금지된 쾌락이나 되는 것처럼. 실은 별것도 아닌 얘기
다.
부부가 싸우는 얘기다. 그러나 예사 부부싸움은 아니다. 어찌나 격렬하게 싸우는지 제목 그대로 전쟁이
다. 정력적이고도 지능적으로, 잔혹하고도 줄기차게, 물불 안 가리고도 교활하게, 상대방을 해치고 골탕
먹인다. 나치하고 유태인하고 전쟁이 붙었대도, 왕년의 우리 국군이 인민군과 싸울 때도 이 부부의 전쟁
보다는 그래도 감미(甘味)나 감상이 끼어들 여지가 있었으리라. 참 기막힌 증오 였다. 더욱 기막힌 것은
그들이 왜 그렇게 싸우고 미워하게 됐는지를 도무지 모르겠는 거였다. 제대로 된 영화라면 그걸 안 밝
혔을 리가 없다. 내가 같은 필름을 반복해 보는 것은 혹시 내 영화 보는 법의 미숙 때문에 그걸 못 읽
어낸 게 아닌가 하는 조바심 때문도 있었다. 그러나 일단 보기 시작하면 그 까닭이야 아무래도 좋다는
식으로 놓쳐 버리고는 격렬한 증오만이 고스란히 옮아 붙는다. 그야말로 남부러울 거 없는 부부였다. 지
성과 미모와 건강 을 겸비한 남녀가 첫눈에 반해 열렬하게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들 딸 낳고 출세하고
고급 주택 고급 가구 미술품을 모으며 살아간다.
너무 아쉬울 게 없으니 권태로울 수도 있으리라. 아니다. 이건 권태 따위 나른한 것하곤 다르다. 아내
가 먼저 이혼하자고 한다.
그 전에 남편이 아내가 하는 일을 경멸하는 태도를 한두 번 취한 것 같긴 하다. 그것이 빌미가 됐든
어쨌든 아내는 부부생활의 의미 상실을 선언한다. 그러나 집이나 소유물에 대해선 서로 한치도 양보를
안한다. 상대방을 내쫓고 자기 소유로 하기 위해 지혜와 체력을 다해 가열한 투쟁을 벌인다. 병적일 정
도로 무서운 집착과 증오가 화면을 폭풍처럼 휘몰아친다. 아내의 고양이를 남편이 실수로 치어 죽이자
아내는 남편이 사랑하는 개를 일부러 치어 죽여 그걸로 요리를 만들어 남편에게 먹이는 식으로 구원의
여지가 바늘구멍만큼도 없는 증오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일사불란하게 치닫는다. 증오의 클라이맥스는
죽음밖에 더 있겠는가. 용서니 화해니 하는 거짓된 정서는 양념으로 쓰려도 찾아지지 않는다. 나는 마치
자웅을 붙은 짐승이 이유도 체면도 없이 다만 어쩔 수 없이 클라이맥스로 치닫듯이 참담하게 헐떡이며
그들의 파국을 쫓는다. 쫓고 쫓기던 부부가 마침내 천장의 휘황한 샹들리에에 같이 매달렸다가 밑으로
떨어지면서 박살이 나서 죽는 장면까지 봐야만 비로소 열병처럼 옮아 붙은 증오로부터 놓여나게 된다.
다시는 꾸고 싶지 않은 악몽 같은 영화를 나는 왜 또 보고 또 보는 걸까. 더 기분 나쁜 것은, 증오 때문
인지 소유의 공평한 분배 때문인지 남자가 핏발선 눈을 하고 아내의 구두 나부랭이를 톱으로 자르는 장
면이 나오는데, 나는 그때마다 그 구두가 내 아들의 몸뚱이가 되는 엉뚱한 환상 때문에 진땀을 흘린다
는 사실이다.
초인종 소리가 나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두 딸이 돌아왔다. 엄마 어디 아프냐고 물었다. 마치 골속에 공
기돌이 잔뜩 든 것처럼 무거운 통증이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것 같았다.
"너희들 기다리다가 잠깐 졸았나보다. 그새 무서운 꿈을 꿨더니 골치가 좀 아프구나."
나는 이렇게 둘러대고는 남편이 돌아올 날을 달력으로 짚어보았다. 사흘 남았다. 어른도 무서운 꿈을
꾸냐고 작은딸이 물었다.
그 아이에게 어른이 된다는 것은 두려움이 없어진다는 것하고 같은 뜻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대답
대신 등을 토닥거려주었다.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 더는 [장미의 전쟁]을 보지 않았다. 꼭 해달라는 투로
말한 것은 아니었는데도 동생은 재롱잔치 테이프를 복사 해왔다. 형부 보여주라, 좋아할 거야. 동생은
모든 사람이 저처럼 제 아들을 예뻐하길 바란다. 남편도 슬기를 좋아하긴 하지만 제 자식 사진도 찍을
때는 신나게 찍다가도 현상해온 사진을 관심있게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나는 식구가 다 모
인 자리에서 그걸 한 번 틀어 보여주었다. 길지 않으니까 다들 의무적으로 봐주었고, 아무도 누가 찍었
나 따위는 묻지도 않았다. 내 속셈도 그 필름으로 식구들의 관심을 끌 생각이 아니라, 복사를 부탁하면
서 품었던 야릇한 조바심이 안심할 정도로 희석되었다는 걸 확인하고 싶은 거였다. 그러나 외간남자에
대한 매혹과 거기 따른 죄책감이 충분히 사그라진 후까지도 찌꺼기처럼 남아 있는게 문제였다.
실상 나처럼 심심한 여자에게 그런 유의 감정적인 외도는 번번이 처음 같으면서 처음이 아닌, 차라리
진부한 거였고, 지나놓고보면 무엇에 씌었던 것처럼 황당한 거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그 남자에겐 그렇
게 가볍게 흘려보낼 수만은 없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아들이 없이도 불행하기는커녕 쓸쓸하지도 허전하
지도 않은 인간이 이 한국땅에 있다는게 참을 수 없이 께름칙했다. 만약 그 께름칙한 걸 떨쳐 버리지
않고는 생전 아무 재미도 못 느끼고 살아야 할 것 같은 예감마저 들었다. 그걸 떨쳐 버리기는 간단할
수도 있으리라.
그 남자의 그런 생각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만 알아내면 된다. 아마도, 아니 틀림없이 그것은 거짓일 것
이다. 나는 그의 잡지사로 전화를 걸어 비디오 테이프를 복사해 놓았는데 만나서 전해 주고 싶다고 했
다. 나를 반가워하는 그의 기분 좋은 저음을 듣자 나는 갑자기 새처럼 지저귀고 싶었다.
"솜씨가 여간 아니시던데요. 잘 나왔어요. 슬기편에 댁의 따님한테 전할까 하다가 그냥 내주긴 아까운
필름이더라구요. 차라도 한잔 더 얻어먹고 싶어서요."
"허허, 그렇습니까, 그렇게 잘 나왔어요? 그럼 제가 솜씨 턱을 받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치가."
"그렇게 되나요? 좋아요. 이번 차는 제가 사고, 테이프 턱은 그 다음에 받을게요."
나는 무턱대고 즐거워서 들뜬 목소리를 냈다. 사춘기로 퇴화한것처럼 필름이나 솜씨 따위 사소한걸 핑
계삼아 낯간지러운 즐거움을 줄줄이 창출할 작정이었다. 날짜와 시간과 장소를 약속하고 난 후였다. 저
녁때 집으로 참기름을 꾸러 온 동생이 나를 자꾸만 쳐다 보는 것 같았다.
"왜 그러니? 내 얼굴에 뭐가 묻었냐?"
"아냐. 언니가 달라진 것 같아서. 더 젊어진 것 같기 도하고 더 예뻐진 것 같기도 하고, 뭐랄까 생기가
넘쳐 보여. 늘 늘쩍지근하더니만. 언니 혹시 연애하는 거 아뉴?"
"망할 거, 참기름 갚으란 소리 안할 테니 객쩍은 소리 작작하고 어서 가봐라. 콩나물 무치다 왔다면서."
"내가 언제 갚는 것 봤수? 하긴 집구석에서 누굴 만날 기회가 있어야 연애도 하지."
동생을 돌려보내고 나서 나는 동생이 말한 걸 확인하기 위해 거울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정말 달라
진 것 같았다. 젊고 예쁘고 싱싱한 것, 그건 얼마나 좋은 건가. 그 후 나는 거울 앞에서 그런 것들을 나
한테서 찾아내려고도 애썼지만 그렇게 꾸미려고 더 많이 노력했다. 아들이 없는 걸 조금도 고민스러워
하지 않는 괴짜가 한국땅에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께름칙하게 여기고 있는 걸까, 신나는 일로 여기고
있는 걸까, 그것조차 왔다갔다 했다. 내 아들을 바라보면서도 그 남자 생각을 하곤 했다. 나는 아들하고
키를 대보는 걸 좋아했다. 나는 키가 백육십이센티나 되었다. 체중은 이 킬로 정도는 들쭉날쭉했지만 오
십 킬로를 넘은 적이 없어 늘씬해 보였다. 그런 내 키를 열한 살밖에 안된 녀석이 육박하고 있었다. 어
려서는 기둥에다 아들의 키가 커가는걸 눈금으로 표시하는게 낙이었지만 국민학교 들어가고부터는 어깨
동무를 해보는걸 더 좋아했다. 어깨동무를 하는 척 아들의 볼을 애무하면서 앞으로 끌어당기면 아들은
고분고분 내 가슴에 귀를 대고 엄마 심장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자연스럽게 가슴으로 끌어당길 수 없을
만큼 키가 자라면서 아들은 고개도 뻣뻣해져서 좀처럼 나에게 안겨오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아들하고
육체적 접촉을 하는 게 좋았다. 그 뿌듯한 느낌을 갈망할 적도 많았다. 아들은 건강한 나무처럼 잘자랐
다. 근육은 유연하고도 단단했다. 긴 바지를 입었을 때도 아들의 정강이가 얼마나 곧고 강하다는 걸 느
낄 수가 있었다. 아들이 그냥 집 안을 왔다갔다 하는 것만 봐도 좋았다. 아들을 가슴에 안으 면 온몸이
뿌듯하듯이 아들이 집 안에 있으면 온 집안이 가득해졌 다. 그애가 눈에 안 보일 때도 그애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떳 떳하고 자랑스러울 수가 있었다. 그애가 있다는 것은 나의 최고의 성취감이고 그애
를 바라보는 즐거움은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행복감이었다. 두 딸도 물론 사랑했다. 큰딸은 첫정이라
애틋하고 둘째는 딸로 막내라 예쁘다. 한번도 사랑으로 딸 아들을 층하하지 않았다. 그러나 딸은 둘을
다 합쳐도 아들 하나만큼 나를 충만하게하지 못한다.
그 남자를 만나러 가기 위해 나는 공들여 화장하고 거울 앞에서 이것저것 많은 옷을 입어 보았다. 젊
고 싱싱하다는 동생의 말을 다시 음미하며 미소지었다. 동생도 가끔 가다 그런 쓸모있는 말을 할 때가
다 있다니. 시간을 넉넉하게 잡고 나와 세차까지 했다.
그 남자하고 장소를 의논할 때 아무렇게나 정한 것 같아도 실은 분위기는 물론, 운전에 자신있는 지점
이라는 것과 주차하기 편한 것까지 계산하고 정한 거였다. 칠전팔기도 더 되게 고전하고나서 면허를 딴
운전은 좀처럼 늘지 않았다. 밤길에 딸들을 태워다 주는 일 외에 다닐 수 있는 코스가 한정돼있고 그
이상의 발전이 없었다. 그 정해진 코스는 곧 나의 옹색한 사교범위를 의미했다. 남편은 그 정도 밖에 차
를 이용할 줄 모르는 나를 무시하면서도 다행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남들한테도 나의 차운전을 [우리 집
사람의 딸 효도.]라고 말하곤 했다. 남편 말대로 딸들을 위해 쓰는 것외엔 그닥 탐탁한 이용가치를 못
느껴본 차였다. 그러나 오늘은 차도 비싼 옷과 공들인 화장처럼 나를 빛내주길 바랐다. 술이 달린 모자
를 쓰고 옆솔기에 진홍색 줄이 쳐진 제복을 입고 공손히 허리를 굽히는 웨이터에게 생긋 웃으면서 차
키를 맡기고 또박또박 걸어가 호텔의 회전문을 미는 맛이 그럴듯했다. 남들이 그러는걸 볼 때는 아니꼽
기도 하고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더니만 해보니까 썩 잘 어울린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 남자는 먼저 와 있었다. 강이 보이는 자리를 차지하기가 쉽지 않은데 그가 먼저 잡아 놓고 있었다.
나는 젊고 싱싱하다, 이렇게 최면을 걸듯이 타이르면서 그에게로 걸어갔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이렇게
말하면서 남자 앞에 앉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나는 속으로 여간 실망스럽지가 않았다.
그는 지치고 후줄근해 보였다. 잔뜩 기대에 부풀었던 스스로가 무안했다. 아뇨, 방금이오. 그러면서 하
품을 늘어지게 하는 그의 턱에서 삐죽대는 수염이 땟국물처럼 꾀죄죄했다. 무안한 정도가 아니라 모욕
감을 느꼈다.
"미안합니다. 어젯밤 야근을 했더니."
그는 또 한번 하품을 하려다 우물우물 씹어 삼키면서 말했다.
나는 커피를 시키고나서 시선을 창 밖으로 돌렸다. 따뜻한 커피를 음미하며 마시는 사이에 어지러운
망상이 조금씩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내가 뭘 원하고 있는지 모르긴 마찬가지였다. 내가 원하고있
는게 설사 마주앉은 저 남자와 바람을 피우는 게 아니라 해도 내 속에 있는 께름칙한 것이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나는 차를 마시는 동안도 마시고 나서도 골똘히 바깥만 내다보았다. 창 밖으론 물을 뺀 겨울
수영장과 호텔을 휘감고 동북으로 뻗은 아스팔트 길이 보이고 길과 평행으로 겨울 강이 고여 있는 것처
럼 나른히 있었다. 여름엔 요트가 한유로히 떠 있는 게 평화롭고도 이국적으로 보이던 강이 지금은 텅
비어 있는 것 같았지만 자세히 보니 새떼가 무리지어 떠다니고 있었다. 여름에 못 보던 새니 물오리나
천둥오리 따위 겨울새일 것이다. 강이 얼면 저 오리떼들은 어떻게 될까. <한 큰 연못이 있었는데, 가을
날 많은 오리떼들이 날아왔다. 밤새 추위가 닥쳐 연못이 꽁꽁 얼어붙었다. 오리떼들은 어찌 되었을까?
연못을 물고 날아가 연못은 더 이상 거기 있지 않았다.>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영화를 본 생각이 났다.
산다는 것의 덧없음에 가슴이 저리면서 내가 보고 있는 풍경도 실제로 저기 존재하는게 아니라, 나에게
만 있는 것처럼 보이는 환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뺨에 시선을 느끼고 얼굴을 돌렸다. 그
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틈에 졸음이 걷힌 부드럽고도 그윽한 시선이었다.
"쓸쓸해 보이십니다."
내가 너무 갑자기 돌아다보았기 때문인지 그가 좀 놀란 듯이 말했다. 이번엔 그가 내 시선을 부신 듯
이 피했다. 나는 그가 나에게 매혹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쓸쓸한 걸 눈부셔 할 까닭
이 없다. 내 표정은 아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렇다면 그가 쓸쓸해 보인다는 건 그의 발견일 터였
다. 그가 쓸쓸해 보인다니, 아마도 내가 쓸쓸한 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중
요한 건 내 비싼 옷과 공들인 화장을 뚫고 그가 내 내부를 정확하게 들여다보았다는 사실이다. 그게 매
혹된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랴. 나는 마음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헤프게 그에게 경도되는 자신을 걷
잡을 수가 없다. 곧 체면이니 예의니 하는 심리적 균형이 깨질 것 같은 예감에 사로잡힌다. 뇌졸중이나
간질의 전조(前兆)가 이런게 아닐까 싶게 그런 느낌은 막연하면서도 기분 나쁘다. 어서 사무적이고 온당
한 대화의 꼬투리를 찾지 않으면 무슨 실수를 저지르고 말 것 같다.
"그림이 괜찮게 나왔다면서요?"
그가 나의 용건을 일깨워 주었다. 아 네, 나는 핸드백에서 누런 봉투에 든 테이프를 꺼내 그에게 건넸
다. 그리고 슬기네 식구와 우리 식구가 번갈아 가며 그걸 보며 얼마나 즐거워했다는 얘기를 과장되게
했다. 나는 말을 한번 부풀리기 시작하면 풍선을 터질 때까지 불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처럼 조정을
못하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 보통 수다쟁이하곤 달랐다. 말문이 열리려면 시간도 걸리고 말상대도 가리
는 편이었으니까. 그의 앞에서도 말문이 일단 터지자 계속해서 나만 일방적으로 지껄였다. 그 유치원이
홍보전략에 능해서 장사가 잘 된다는 얘기로부터 유아교육의 전반적인 문제점에 이르기까지 한바탕 아
는 척을 하고 나서 요즈음 아이들 다루기 힘든 얘기며, 교사의 자질에 대한 의구심과 우려등 할 얘기는
무궁무진했다. 별안간 봇물처럼 터지는 내 수다를 남편도 병이라고 까지 말한 적이 있다. 그가 외국에서
전화를 걸어왔을 적이었는데 식구들 안부에 예, 아뇨라는 말밖에 안하자 전화값 걱정 말고 뭐라고 말
좀 해보라고 신경질을 냈다. 그때부터 말문이 터져 큰애가 어쩌구저꺼구, 둘째가 이만저만, 셋째가 여차
저차 미주알고주알 고해바쳤다. 그가 정말로 전화값이 겁나 끊어버린 것도 모르고 지껄여댔던 것이다.
병이라는 소리까지 들어도 싸다.
"집사람이 좋아할 겁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가 내 수다 사이를 용케 비집고 들어와 인사치레를 하면서 손목시계를 보았다. 우리 동네 다방에서
차를 마신 날처럼 팔운동이라도 하듯이 과장된 동작이었다.
"아직도 딸이 더 좋다고 우기실 작정인가요?"
그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으로 들어가리라고는 나도 미처 예상 못한 일이었다. 나는 자신의 마음이
어떻게 돌아갈 지에 대해 무책임한 편이다.
"또 그 얘기가 하고 싶은가요?"
그래 난 당신처럼 딸만 있는 주제에 천연덕스럽게 행복한 체할 수 있는 남자가 이 땅에 있다는 게 께
름칙해. 그 께름칙한 걸 떨쳐 버리지 않으면 미치겠단 말야, 이런 눈빛으로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뭐 이런 여자가 다 있나 진저리가 난 티를 감추지 않다가 용케 자제하고 냉정한 얼굴이 됐다. 나는 그
가 억지로 가다듬은 냉정 뒤에 지친 듯 희미한 연민이 번득이는 걸 본 것처럼 느꼈지만 어째 볼 수 있
는 건 아니었다.
"저는 딸이 더 좋다고 말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건 아들이 더 좋다는 것과 같은 척도를 가진 발상이기
때문이죠. 장차는 딸이 더 좋을 거라느니, 딸 가진 부모는 비행기 타고 아들 가진 부모는 고속버스 탄다
는 식의 위로나 발상이 제일 싫습니다. 마치 내년엔 무슨 농사를 지으면 수지를 맞을 거라든가, 앞으로
무슨 장사를 하면 떼돈을 벌 거라는 식의 상업적인 전망과 무엇이 다릅니까? 그런 발상은 남녀의 올바
른 인간관계를 더욱 해칠 뿐 조금도 도움이 못 될 겁니다. 그야 딸 가진 부모가 경제적 이득을 더 많이
볼 날이 의외로 빨리 올지도 모르죠. 남녀의 성비율이 이런 속도로 허물어져가면 말입니다. 재롱잔치날
도 보셨죠? 춤출 때 여자 짝이 차례가 안 간 사내애들이 싸우는 거 말예요. 어렸을 적이니까 순전히 완
력으로 결판내려는 원시적인 싸움을 했지만 어른이 돼 보세요. 어른도 역시 힘이 있어야 여자를 차지하
게 되리라는 건 틀림없지만 어른의 힘이란 뭐겠습니까. 금력 권력 그런거 아니겠어요. 의사나 판사 사위
얻는답시고 바리바리 싣고 지참금까지 안동을 시켜 시집보내던 딸을 앞으로는 가만히 앉아서 그 몇 배
를 받아 내면서 보내게 될지도 모르죠. 아니, 보낼 건 또 뭡니까. 데릴사위로 들어가지 않으려면 결혼
못할 세상이 올지도 모르죠. 그렇다고 달라진 게 뭡니까. 손해나던 장사가 수지맞는 장사로 변했을 뿐
여성을 상품 취급하긴 마찬가지지요. 수지가 맞을수록 상품화는 더 심화될 겁니다. 더욱 더 어떡하면 비
싸게 팔리나 하는 쪽으로 길러지고 교육될 테니까요. 남자는 또 어떻구요. 물욕과 성욕은 서로 상승작용
을 일으켜 예쁜 여자는 재산목록이 되고 권력의 상징이 되겠죠. 여자가 인간이 아니게 된다는 건 곧 남
자도 인간이 아니게 된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내가 첫눈에 이끌렸을 때의 꽤 괜찮은 남자하고도, 아까 실망했을 때의 지치고 꾀죄죄한 인상하
고도 달라 보였다. 어느새 지난 시대의 일이 되고 말았지만 자유를 위해 외치던 운동권의 거친 열정의
그루터기 같은 걸 얼핏 본 것처럼 느꼈다.
"그러니까 여자는 수적으로 흔해도 천하고 귀하면 더 천해진다는 전망 아닌가요? 그럴 줄 알면서도 딸
로 만족한다면 그건 허세 부리는 거지 본심은 아닐 겁니다."
그를 설득하는 것보다는 약을 올리는 게 더 재미있을 것 같았다.
"참 집요한 분이군요. 두 번째도 딸이었을 때 섭섭했단 실토를 한 것 같은데 왜 저를 자꾸만 그쪽으로
몰아붙이려고 하십니까. 저는 제 자식의 성이 여자라는게 그 아이 잘못도 아니고 더구나 인간으로서의
하자도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딸이기 때문에 섭섭해할 수 밖에 없었던 악조건을 걷어 주고 싶을
뿐입니다. 얼마짜리 성적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주인이 되길 바랄 뿐입니다. 그건 아들 기르는 것보다 훨
씬 값진 보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향수로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대학시절 운동권에 몸담았던 적
이 있죠. 덕택에 대학을 칠년만에 졸업하고 어머니 애간장도 많이 태워드렸죠. 그 시절의 이상은 비록
좌절됐습니다만 나는 그때의 내가 좋고 자랑스럽습니다. 그때의 나하고 청탁(淸濁) 안 가리고 타협의 타
협을 거듭하면서 일용할 양식을 벌어들이는데 급급한 현재의 나하고 동일인이라는 확신을 주는 것도 딸
의 아버지 노릇을 통해서라면 이해가 되시겠습니까?"
나는 역시 그랬었구나, 나의 혜안에 적이 놀랐지만 그의 말뜻을 다 알아들은건 아니기 때문에 고개를
저었다.
"못 알아들으셔도 좋습니다. 아무튼 저는 남을 찍어 누르고 억울하게 만들고 우뚝 선 자보다는 억울하
게 짓눌리고 소외된 자의 편이 될 수 밖에 없는, 양심이랄까 정의감을 타고났고, 거기 대해 자부심을 느
끼고 있습니다. 여북해야 나보다 출세하고 돈도 더 잘 버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기가 죽기는 커녕 자신
을 군계일학처럼 느낄 적이 있는 걸요. 그런 정의감이 사회적으로 좌절됐다고 해서 내 가정 속에서 내
식구 사랑 속에 구현시키려는 노력까지 그만둘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운동할 때 가장 큰 고민이 생각
과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기가 어려운 거였고, 동지들의 같은 모습에 실망하고 불화하는 경우도 많았는
데, 비록 독불장군으로나마 내 가정 안에서라도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고 식구들에게 영향을 끼치면
결국에 가선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작은 힘이 되지 않겠습니까?" "따님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커도
부담 줄텐데요."
"아들 노릇하도록 키운다는 뜻이 절대로 아니라니까요. 남자와 여자는 혼자서는 부족함으로써 저소 평
등한 거 아닙니까. 자연이 완전하게 아름다운 것도 개개의 종의 완전함 때문이 아니라 서로의 조화 때
문이듯이. 우리 나라의 남녀 불평등구조가 마침내 자연의 조화 중에도 가장 오묘한 조화인 성비율의 균
형을 깨뜨리기 시작했다는데 대해 저는 거의 공포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 실상은 생각하기도 싫습니
다만."
나는 무엇에 찔린 것처럼 뜨끔했다. 앉은 자리를 고쳐 앉으면서 잔기침을 했다. 싸고 싼 비밀을 찔린
기분이었다. 나는 내 비밀을 누구한테 들킬가봐 늘 전전긍긍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걸 들키기를 갈망
해왔다. 그 두 가지 상반된 갈망은 나를 늘 혼란스럽게 했다. 나는 수습할 수 없이 헝클어지려는 자신에
게 위기의식을 느끼며 가냘프게 말했다.
"인간은 짐승과 달리 대를 잇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런 해결책도 생겨난 거 아니겠어요. 만일 남자와
여자가 생활 감정으로나 제도적으로나 완전히 평등한 세상이 온다고 해도 마지막까지 평등해 질 수 없
는 문제로 남아 있을 게 바로 아들에 의해서만 대가 이어진다는 문제 아닐까요?"
"딸만 있는 집이 주위에서 동정받는 것도 바로 그 점이라는 것 쯤 저도 알고 있습니다. 우리 어머님처
럼 트인 분도 우리를 딱하게 여기시는 걸요. 느이 집에 아들 하나만 있으면 무슨 걱정이겠느냐 고요. 그
말씀도 그런 뜻이겠죠. 우리 부부도 그런 고정관념이나 주위의 동정을 저절로 극복한 건 아니랍니다. 대
(代)란 무엇인가? 대가 후손이면 족하지 왜 반드시 성(姓)이여야 되나? 그렇게 자문도 하고 자위도 했
죠. 거꾸로 생각해서 아버지성만 잇도록 돼있는게 현행 제도고 인류의 거의 공통된 문화라고 해서 그럼
인간을 만드는 데 남자가 더 많이 기여하고 더 많이 자신의 특징을 유전시키냐 하면 그것도 아니거든
요. 사람의 최소단위를 만드는데 있어서의 남녀의 기여도야말로 완전히 평등한거 아니겠어요. 결국 아들
에 의해서나 딸에 의해서나 자기 핏줄은 면면이 이어진다고 봐야죠. 후손을 통해 아주 죽지 않고 자기
생명이 영속되기를 바라는 게 본능이고 실속이라면 성은 껍데기고 문화 아니겠어요." "성이 완전히 빈
껍데기라고 해도 그렇죠. 처음부터 여자는 제 속으로 낳은 자식에게 제 성을 따르게 하지 않고 남자 성
을 따르도록 한 것은 여자가 그만큼 못났다는 증거 아녜요?"
"사람이 이름 외에 성을 갖게 된 역사는 인류의 역사에 비하면 아주 짧은 거니까, 성은 굉장히 문화적
인 거고 확실히 여자의 경제적 열등과 관계가 있겠지요. 그렇지만 남자가 잘나서 그 권리를 차지했다기
보다는 여자는 처음부터 자식에게 자기 성을 따르게 하고 싶은 욕심을 부릴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하는
데요. 여자에겐 자기 자식이라는 게 너무도 분명하니까요. 애를 배고 낳는 여자의 수고를 남자는 동정도
하지만 질투하는 마음도 있거든요. 에미는 제 자식이라는 걸 의심할 필요가 없으니 얼마나 좋을까 하고
요.
그만큼 아비의 의식의 저 밑바닥엔 과연 내 자식일까 하는 의구심이 도사리고 있다는 얘기가 되겠지
요. 그걸 꿰뚫어 본 여자는 아이가 아빠 닮은 걸 강조하고 한편 부계의 성으로 네 자식이 틀림없다는
걸 문서화까지 해주고 대신 부양의 의무를 씌운 게 아닐까요." "그럴듯하군요. 그렇지만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게 뭔데 문화적인걸 무시할 수가 있습니까?"
"무시하자는게 아니라 더욱 문화적이 돼야죠. 후손의식을 확대시키는 것입니다. 딸도 아들과 마찬가지
로 혈통을 이어간다 정도로도 사실은 부족합니다. 딸도 못 가진 사람에게도 후손의식은 있고 제도적으
로 자식을 가질 수 없는 성직자라도 제대로 된 성직자라면 반드시 후손의식이 있을 겁니다. 내가 죽은
후에도 세상은 이어져야 한다는 믿음이 오늘을 함부로 살 수 없게 하는 후손의식이고, 민족애 더 나아
가서는 인류애가 되는 거 아니겠어요."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에 대해 말할 수 없는 연민을 느꼈다.
"그렇게까지 치밀하게 딸을 안 섭섭해할 구실을 준비해 가지고 있는걸 보니까, 도대체 얼마나 섭섭했으
면 저 정도가 된 걸까 되레 동정이 갑니다."
약을 올리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솔직한 내 심정이었고 이제 그만 듣고 싶다는 표시이기도 했다.
"어느 정도는 맞는 지적입니다. 그러나 결코 나 개인을 위로하려는 구실은 아니었습니다. 우리 공동체
가 너무도 아닌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대한 위기의식에서 해본 고민의 일단을 피력했을 뿐이죠."
그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는 가당치 않게도 내가 그에게 보낸 연민을 몇 배로 진하게 되돌려
보내고 있었다. 제가 감히 나를 불쌍히 여기다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당혹스러웠다. 그가 잠
시 머뭇거리는 듯하더니만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벌써 작년의 일입니다만 우리 잡지사에서 아들을 낳고 싶어하는 부부의 고민을 해결해 주는 산부인과
병원 몇 군데를 취재한 적이 있죠."
이 남자가 시방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걸까? 나는 겁에 질려 무슨 핑계든지 대고 어서 이 자리를
떠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남자의 듣기 좋은, 그러나 우울한 저 음은 이어졌
다.
"그런 계획안을 처음 낸 건 저였죠. 아주머니 같으면 그것도 아마 딸만 가진 콤플렉스라고 비웃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하여튼 유치원 유아원 등 꼬마들 사회의 남녀 비율이 심각할 정도로 정상을 일탈하고
있다면 그 까닭을 한번 심층 취재해서 규명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긴 거죠. 남들은 무슨 재주로 저
렇게 아들을 잘 낳을까 하는 호기심도 아마 없지 않아 있었을 겝니다. 옛날서부터 내려오는 아들 낳는
비법이야 좀 많습니까. 그래도 인간의 성비율에 털끝만한 영향도 끼치지를 못한 걸 보면 다 엉터리였던
건 분명한데, 도대체 현대의학은 어느 만큼 와있길래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걸까? 궁금도 하려니와 그
일이 설사 마음대로 된다고 해도 인류 의 미래를 위협한다면 의학의 개가로 봐야 할 게 아니라 지양되
야 마땅하다는 사회적 공감을 끌어내고 싶은 야심도 있었구요. 정말 기막힌 현장을 목격해야 했지요. 아
주 확실한, 거의 백 퍼센트의 방법이 있긴 있었습니다. 그게 뭔 줄 아십니까?"
그가 나에게 추궁하듯이 물었다. 나는 그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노려본다고 생각했다. 나는 오금이 저려
옴짝달싹도 할 수가 없었다. 이런 취급을 당할 까닭이 없으므로 뭐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하늘 무서운 일이었습니다. 실패할 리 없는 방법이라는게 여아(女兒) 살해를 전제로 했으니까요. 치밀
하고 계획적이고 과학적이고 감쪽같이 태아가 단지 여아라는 이유만으로 없애버리는 겁니다. 의학은 그
게 틀림없이 여아라는걸 보증할 뿐 아니라 살해까지를 책임지지요. 남자애를 밸 때까지 몇 번이고 그
짓을 하는 겁니다. 그게 소위 과학의 발달이라는 거구요."
"그만, 제발 그만 좀 해두세요. 중절수술이 어제 오늘 비롯된 게 아니잖아요. 우리 어머니 시대만 해도
일곱 번 여덟 번씩이나 애 긁어내는 수술을 경험한 사람도 있다던데요, 뭐. 그때 그렇게 라도 하지 않았
으면 이 땅이 그 인구를 이루 다 어떻게 먹여 살렸겠어요."
"우리가 다같이 먹고 살기가 어려워서 식구 느는게 살아 있는 식구들의 생존권까지 위협할 지경이었던
시절에 대해선 저도 압니다. 그때는 피임하는 방법도 불확실했을 테구요. 그러니까 그건 여아를 교묘하
게 선택적으로 살해하는 데다 대면 엉겁결에 저지른 정당방위 정도밖에 안 되죠. 그 시절엔 아들 낳고
싶은 사람은 아마 득남한 집 대문 밖의 인줄에서 고추나 훔쳐서 달여 먹었겠죠.
얼마나 귀엽습니까. 인간은 원래 다만 얼마라도 귀여운 점이 있는 법 아닙니까. 그러나 여아 살해범들
은 그게 아니었어요. 귀여운 점이 조금도 없는 사람, 숨이 차게 정 떨어지는 사람을 취재한다는 게 얼마
나 고통스럽다는 걸 그때처럼 절감한 적도 없었죠. 여북해야 내가 내놓은 계획안을 내가 없었던 걸로
하자고 했겠어요. 기사를 쓸 신명이 안 나서였지만 데스크한테는 딴 핑계를 댔죠. 남아 선호 사상과 현
대 의학이 합작을 해서 성비율을 조작하는게 장차 환경에 미칠 영향을 경고하고자 기획한건데 역기능이
우려된다고요. 모르고 있던 사람들까지 흉내내게 될까봐 고민이 된 것도 사실이구요. 우리 잡지가 환경
문제를 다루는 비교적 점잖은 잡지라 그 정도로 없었던 일이 될 수가 있었죠."
"여자만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그 여자들도 오죽해야 그 짓을 했겠어요."
"남편 몰래 했다고는 안했어요. 하나같이 남편이 호흡이 아주 잘 맞는 공범자던데요. 너무 장시간 떠들
었습니다." 그가 도망치듯이 먼저 가버렸다. 머릿속에서 공범자란 말이 벌떼처럼 잉잉댄다. 뭔가 이치에
닿는 말을 찾아내려고 안간힘쓴다.
가까스로 나를 줄창 괴롭혀온 그 께름칙한 느낌, 그걸 떨쳐 버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 느끼게 될 것
같은 몸에 철갑을 친 느낌은 바로 공범자와 같이 사는 느낌이었구나, 라고 생각한다. 나른하게 누워 있
던 강에 잔물결이 이는 게 보인다. 올 겨울에도 강물이 안 얼려나. 이상난동 때문에 안 얼든 오염 때문
에 안 얼든 오리떼가 강물을 물고 날아가는 일도 생기지 않겠구나. 오리떼가 강물을 물어가는 일이 생
기지 않는 한 그를 다시 만나는 일도 없으리라, 이렇게 철저히 단념을 하니 그렇게 허전할 수가 없다.
그가 그 일을 취재 한 건 작년이라고 했던가. 내가 아랫배에서 양수를 빼내기 위해 이를 악물고 누워
있던 침대머리엔 친절하게도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벌써 십여년 전 일이다. 그 남
자가 보았을리가 없다. 그러나 나는 그 남자한테 내 가장 추하고 비참한 모습을 들켜버린 것처럼 느꼈
다. 미안하지만 합석을 좀 해달라고 웨이터가 정중하게 양해를 구해왔다. 그걸 기화로 나도 자리를 떴
다. 밖으로 나오니 춥고 정처없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제복 입은 청년이 차를 내 앞까지 가져다주었
을 때 나는 가볍고 우아하 게 미소 지으며 천원짜리를 쥐어주는 걸 잊지 않았다. 그리고 눈 여겨 봐준
대로 썩 잘했다고 생각했다. 내리막길로 빠져나와 곧장 가면 집 방향인데 나는 굳이 좌회전을 해서 시
내와는 반대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내 차로 교외에 나가보긴 처음이다. 마땅히 가고 싶은 데가 있는 것
도 아니었다. 그냥 집과 멀어지고 싶었다. 그래도 한강 줄기를 놓쳐서는 안 될 것 같다. 나는 길눈이 어
둡다.
사실은 기계 무서움증보다는 그게 더 운전에 결격사유다. 되돌아 나오기 위해 긴 끄나풀을 풀며 미로
에 들듯이 악착같이 한강 줄기만은 안 놓친다. 왕복 사차선은 그러나 가끔 강을 버리고 능청스레 산모
롱이로 접어들다가 다시 강을 옆구리에 낀다. 그러면 안심이 되고 반갑다. 어떻든 강이 오른쪽에 있으므
로 갈림길에서도 어느 쪽으로 갈까 망설일 필요가 없다. 강을 끼고 갈 때도 차가 강에 바싹 붙어 가는
것은 아니다. 강과 찻길 사이에는 축구장도 있고, 비닐하우스 단지도 있고, 강촌도 있다. 찻길과 강 사이
가 이렇게 넉넉하니 잘못해서 강으로 추락할 걱정은 안해도 된다. 그래도 나는 추락을 꿈꾸며 달린다.
이쪽의 교통량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흐름은 도심보다 쾌적하다. 흐름을 잘 타고 있다는 쾌감 때문에
운전을 잘하고 있다는 자부심까지 맛본다. 또 갈림길이 나타난다.
나는 어느 쪽으로 갈까 망설일 필요가 없는데도 비스듬히 가지를 친 왼쪽 길의 전방을 흘긋 곁눈질한
다. 그 길은 아마 새로 난 길 인가보다. 앞에 봉긋한 야산이 보이고 길은 그 한가운데를 뚫고 있다. 길
양쪽에 잘린 동산의 시뻘건 단애가 보인다. 지질이 진흙인가보다. 흙빛이 섬뜩하도록 싱싱하다. 단애라
고 하지만 급한 낭떠러지는 아니고 길을 향해 비스듬히 깎아 내렸기 때문에 멀리서 보니 꼭 두 무릎을
세우고 가랑이를 벌리고 누워 있는 여자의 사타구니를 보는 것 같다. 머리도 동체도 생략하고 허벅지와
사타구니만 강조된 여자, 그리고 그 사타구니는 온통 피로 범벅이 돼 있다.
그 가운데로 빨리듯이 흘러들어가는 차 차 차들, 흘러나오는 또 차 차 차들, 나는 그 차선이 아닌데도
전방의 그 거대한 사타구니로 빨려들게 될 것 같아 무섭다. 무섭고 구역질이 난다. 저 꼴이 뭐람, 창피
한 건 또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길을 뚫기 위해 잘린 산의 단면이 벌린 가랑이처럼 보이자 나는 뒤죽박
죽이 되고 만다.
내가 거기 옮아붙은건지 그게 나한테 옮아붙은건지 그 끔찍한 꼴과 나 자신을 분간할 수가 없다. 이
뒤죽박죽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은 희미하지만 유일한 구원이다. 오른쪽으로 평화로운 강마을이
보이고 포장은 안 됐지만 널찍한 진입로도 보인다. 나는 달리고 있던 일차선에서 무작정 직각으로 차를
꺾어 아슬아슬하게 그 길로 차를 꼬나박는데 성공한다. 내 차 옆구리를 이차선을 달려오던 차머리가 들
이받을 듯이 급정거하는걸 환각처럼 보았을 뿐 차의 이상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뭐라고 한마디쯤 사
과를 해야 할 것 같아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왔다. 공기가 맵사하게 차다.
우선 심호흡부터 하려는데 욕지거리가 들린다. 나 때문에 사고를 당할 뻔한 차들이 서너 대 붙어서서
어떤 남자는 내려서서, 어떤 승객은 차유리만 내리고 삿대질을 하면서 욕들을 한다. 미친년, 쌍년, 미칠
려면 집 안에서 곱게 미쳐라, 뭐 그런 소리일 것이다.
폭포수처럼 솔아지는 그들의 욕이 나에겐 강바람보다 더 상쾌하다.
질식할 듯한 실내에서 뒤쳐나와 마시는 신선한 바깥공기처럼 나는 그들의 욕을 달게 호흡한다. 그들은
나에겐 말할 기회를 안 주었기 때문에 나는 바람 쐬는 자세로 머리를 나부끼며 그냥 서 있다.
기분이 상쾌하니 아마 미소까지 짓고 있을 것이다. 내가 정말 미쳤다고 생각한 것 같다. 당장 내 멱살
을 쥐러 올 것처럼 흥분했던 남자가 황황히 올라타고 뒤차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던 얼굴들도 일제히 안
으로 들어가 버린다. 그 차들이 차례로 움직이자 강을 낀 도로의 차의 흐름은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유연해졌다.
나는 그들이 마치 나를 악의로 따돌리고 저희끼리만 좋은 데로 가고 있는 것처럼 막막하고 외로웠다.
차들의 소음 저 밑바닥을 강 바람소리가 계면조의 퉁소 소리처럼 구슬프게 깔려 있는 게 느껴졌다. 나
는 깊이 모를 나락으로 투신하듯이 곧장 그 소리를 향해 침잠한다. 울음이 복받칠 것 같다. 실컷 울리
라. 나는 아무렇게나 꼬나박은 차를 마을 어귀까지 찬찬히 끌고 갔다가 돌려서 길섶으로 비켜 세우고
운전대에 이마를 대고 엎드렸다. 울기 좋은 자세를 취하고 나니 되레 울고 싶은 마음도 눈물도 싹 가셔
버렸다. 나는 정말 공범자하고 같이 살고 있는 걸까. 또 그 생각이다. 남편이 공범이라는 증거는 아무것
도 없다. 남편이 내 앞에서 아들 상성을 한 적이 한번이라도 있던가. 남편은 아들놈하고 티격태격하면서
야구 구경 가는 친구가 제일 부럽다는 얘기밖에 한 적이 없다. 자주 그런 것도 아니고 어쩌다 그랬다.
나는 고작 그 소리에 왜 그렇게 깊은 상처를 받았을까. 남편도 그렇지, 야구 구경을 그닥 좋아하는 편도
아니면서 그 말을 할 때는 마치 아들놈을 대동하지 않았다고 입장이 금지당해 야구장에 못 들어간 경험
이라도 있는 것처럼 처량한 시늉을 하곤했다. 나는 그때 딸도 야구를 즐기게 될 수도, 아들이 그걸 좋아
하지 않을 수도 있단 소리를 왜 못했을까? 그까짓 야구구경이 뭐관대, 아니다. 그가짓 야구구경이 아니
다.
나는 남편에게 야구 구경을 같이 갈 아들을 낳아주기위해 딸을 죽이기까지 한 것이다. 태중의 생명이
딸이라는게 밝혀지고나서 그 아이에게로 집중되던 집안내의 살의(殺意)와 남편은 과연 무관했을까. 그가
정말로 초연한 입장이었다고 해도 절대로 용서할 수가 없을 것 같은 노여움이 치받친다. 그는 나의 남
편일 뿐 아니라 살의가 집중된 생명의 아버지이면서 어떻게 초연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건 말도 안 되
는 소리다. 그럼 그는 공범자인가. 나를 줄창 괴롭히는 께름칙한 느낌은 공범자하고 같이 사는 느낌이란
말인가.
방금 헤어지고 온 외간남자를 우연히 만났다 헤어진 옛날 애인처럼 그립고 정감있게 회상한다. 다시는
못 만나리라는게 여간 섭섭하지 않다. 그 남자의 아내는 어떤 여자일까. 막연히 궁금하고 부러운 것도
옛 애인을 남편과 비교하는 느낌과 비슷하다. 그가 무슨 얘기를 했더라. 들으면서는 충격도 받고 공감도
했건만 다시 생각해보니가 내가 그동안 뭘 너무 모르고 살아서 그렇지 하나도 새로울게 없는 소리였다.
열심히 준비하느라고 하긴 했는데 아직 소화가 안된 논문 발표를 듣고난 후처럼 알아들은 것도 같고 못
알아들은 것도 같다. 쉬운 것도 같고 어려운 것 같고, 어려운 소리를 쉽게 푼 것도 같고, 뻔하게 쉬운
소리를 어렵게 포장한 것도 같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않나. 중요한 건 그가 자기 딸을
섭섭해하지 않기 위해 그만큼이나 다양한 근거를 모아들였다는 데 있다. 비록 그게 난삽하다 하더라도
성실하고 꾸준한 노력의 결과라는 것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는 자기가 모아들인 걸 근거로 하여
자기 딸뿐 아니라 남의 딸까지도 껴안을 태세다. 그의 사랑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남편이 그런 노력이
나 고민을 한 적이 있을까. 두 번밖에 안 만난 외간남자가 남편감으로 부러운 것도 그런 까닭이다. 그렇
지만 남편을 대뜸 공범자 취급한다는 것은 내가 너무 쉽게 그 남자에게 설득당한 결과가 아닐 까. 남편
을 최초로 공범자로 바라보게 된 것은 그 남자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 소리는 그에게서 처음 들은게 아
니라 내 속에 늘 있었지만 내가 항상 피해 다니던거였는지도 모르겠다. 딴사람은 몰라도 남편이 공범자
여서는 안 된다. 공범자끼리는 언제고 반드시 해치게 돼 있기 때문이다. 공범자하고는 같이 사는 게 아
니다.
영화를 봐도 알 수 있듯이 범행은 단독범행일수록 안전하고 뒤끝도 깨끗하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할
얘기도 없고 재미도 없기 때문에 범죄영화는 반드시 공범이나 목격자가 있게 마련이다. 공범자끼리 서
로 쫓고 쫓기면서 싸우고 해치는게 기둥줄거리가 된다.
나는 공범자끼리는 해칠 수밖에 없는 심리를 너무도 잘안다.
나는 그 일을 성공적으로 저지른 후 공손한 며느리, 착한 올케에서 쌀쌀하고 무도한 여자로 표변했다.
나는 그들과 사사건건 불화했다. 그들과의 불화는 나의 삶의 유일한 활력소가 됐다. 나는 정기적으로 시
댁을 방문할 때 가면을 쓴 것처럼 무표정하고 뻣뻣하게 굴었고, 시어머니가 오는 것을 노골적으로 싫어
했다. 남편이 좋아한다고 시어머니가 해나르는 갓김치나 청국장 따위를 절대로 남편상에 올리지 않았다.
골마지가 낄 때까지 내버려뒀다가 일부러 시어머니 눈에 띄도록 했다. 시누이하고는 대학 동창이었다.
결혼하고도 시어머니의 양해 아래 서로 이름을 부르고 지냈다. 학교 때는 과가 달라 서로 얼굴이나 아
는 정도였는데 시누이 올케가 되고부터는 단짝이 됐다. 피차 어렵게 살다가 처음 집 장만할 무렵은 청
약예금만 들면 아파트 신청권이 생기고 써넣는 채권 액수에 따라 당첨이 결정될 때였다. 우리는 늘 붙
어다니면서 당첨권에 들 채권액 정보를 수집하고 의논해서 같은 단지에 같은 액수를 쓰곤 했다. 시뉘
올케끼리는 조금 떨어져 사는 게 좋다는 어른이나 친구들의 충고도 우리에겐 먹혀들지 않았다. 우리는
시뉘올케끼리가 아니라 단짝 친구였으므로 이웃에 살면서 누릴 수 있는 여러 가지 편의만 생각했다. 같
은 액수를 써넣다보니 같이 떨어지기만 하다가 같이 당첨이 되었다. 이웃해 살면서 반찬거리도 같이 사
고 애도 서로 봐주고 남편을 꼬셔서 두 집이 어울려 놀러 가는 일도 꾸미느라 우애는 더욱 돈독해졌다.
내가 태중의 여아를 지우고 아들을 낳게 되기까지도 시누이의 도움이 컸다. 그러나 아들을 낳고나서 나
는 시뉘가 꼴도 보기 싫어 이사를 했다. 그렇게 의가 좋던 처남 매부지간도 교묘하게 이간질을 해서 뜨
악한 사이로 만들어놓고 말았다. 그렇다고 서로 초대하거나 방문하는 일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나는
시누이 집을 방문할 때는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음식은 조금 먹고 말도 조금밖에 안한다. 그리고 시누이
이름은 실수로도 안 부른다. 깍듯이 아가씨라고 부르고 집에 와서 남편한테는 누구 엄마라고 부른다. 시
누이가 우리 집에 올 때 마지못해 사오는 과자 나부랭이를 거들떠도 안 보다가 나중에 남편 보란듯이
쓰레기통에다 처넣는다. 내가 이러다 죄받지 싶을 적이 없는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도 사람에 대한 회
한 따위가 아니라 음식에 대한 일말의 미안감이었다.
그 착하고 유순한 며느리가 이렇게 달라지기 시작한게 천신만고 끝에 아들을 낳고나서부터라는 걸 그
들이 모를 리 없었다. 너 아들 낳더니 눈에 보이는 게 없냐? 라고 맞대 놓고 비아냥거릴 적도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겁날거 하나도 없었다. 내가 안하무인으로 굴수록 그들도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
했다. 장손을 낳아준 맏며느리가 아닌가. 아들을 낳음으로써 나는 내가 남자가 된 것처럼 당당해졌다.
정말이지 나는 그들 앞에서 더는 여자 노릇을 할 필요가 없었다. 아들 생각만 하면 나는 겁날게 없었다.
아들은 나에게 있어서 후천적인 남성 성기였다. 그러나 남자가 된 느낌이 고작 남을 해치고 싶은 충동
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유난히 시어머니하고 시누이를 보는 게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공범 의식 때문
이 아니었을까. 그들만 보면 병원 침대 머리에서 나를 지켜보던 두 얼굴이 떠올라 저절로 진저리가 쳐
진다. 양수를 빼려고 들어간 방은 수술실이 아니라 주사실이라고 써 있는 장방형의 방이었다.
한쪽 벽으로 소독장이 붙어 있고, 차가운 비닐커버를 씌운 바퀴 달린 침대가 다른 한쪽 벽에 붙어 있
었다. 시누이의 친구의 남편이라는 그 의사는 무슨 대단한 신기라도 뵈줄 것처럼 시어머니와 시누이를
다 들어오게 했다. 팬티를 아주 벗게 하지는 않았지만 불두덩까지 까내리게 했다. 시누이가 애처로운 얼
굴로 얼른 자기 머플러로 그쪽을 가려주었다. 의사의 찬 손이 나의 제왕절개 수술자리를 만졌다. 의사의
그런 행동은 시어머니의 입에 붙은 탄식을 유발했다. 나는 귀를 막을 수가 없었으므로 눈을 감았다.
"글쎄 우리 아가가 남들처럼 쑥쑥 아래로 순산만 할 수 있어도 내가 선생님한테 이런 부탁 안합니다.
딸도 못 낳는 사람도 있는 데 마냥 낳다 보면 아들 낳는 날도 있으려니 기다리죠. 그러나 방 금 선생님
도 보시다시피 마냥 낳을 수 없는 몸이니 시에미가 어떻게 성화를 안합니까. 이번이 마지막인데 또 딸
이면 어쩌나 생각만 하면 자다가도 소스라쳐 눈이 말똥말똥해지는걸요. 의학이 이렇게까지 발달한것도
모르고 괜한 걱정을 한 생각을 하면......" 눈은 감았지만 귀를 막은건 아니어서 말을 마친 시어머니가 휴
우, 하고 안도의 숨을 쉬는 소리까지 명료하게 들렸다. 시어머니가 나를 우리 아가라고 부르는게 벌레가
기는 것처럼 스멀거렸다.
의사의 젊은 나이답지 않게 기름진 목소리가 들렸다.
"뭘 너무 모르고 계셨군요. 요새 누가 둘씩이나 딸을 납니까? 두 번째는 다들 검사를 해보고 조치를 취
하는걸요. 하나만 낳기로 작정한 부부 중에는 첫애부터 해보는 사람도 있는데 그건 우리가 말리지만요
막무가내예요."
그러면서 의사는 아랫배를 약냄새나는 솜으로 이리저리 문질렀다. 나는 의사의 얼굴을 똑똑히 봐주려
고 눈을 떴다. 의사는 잘 안보이고 바로 눈 위에 시어머니와 시누이의 긴장하고 기대에 찬 얼굴이 둥실
떠 보였다. 마취를 하거나 그런 것도 아닌데 두 얼굴은 마치 동체를 떠나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기괴
해 보였다. 내가 어찌 그 얼굴을 잊어버릴 수 있을까. 천장은 하얗고 부연 갓을 쓴 백열등도 거의 얼굴
높이와 같이 떠 있었다. 의사의 찬 손이 뱃속의 작은 덩어리를 자꾸 한쪽으로 몰아붙이려 하고, 작은 덩
어리는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다는게 선연하게 느껴졌다. 정신을 가다듬어 그쪽으로만 신경을 집중하
고 있는데 느닷없이 따끔한 통증이 왔다.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나려는 나를 시어머니와 시
누이가 황황히 양쪽에서 찍어눌렀다. 못 참을 만큼 아파서가 아니라 뱃속의 것이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위기의식 때문이었다. 참아라 아가, 아무것도 아냐. 그냥 주사바늘이야. 시어머니가 애원하는 소
리를 냈다. 그래 참아야해.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모성본능까지 참아야 한다는게 서러워서 눈귀로
주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못나긴, 얘가 나이를 헛먹었다니까. 시어머니의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그날
의사는 양수를 뽑아내지 못했다. 보름쯤 있다가 다시 오라고 했다. 아직 자궁 내에 뽑아낼 만큼 양수가
생성되지 않은 것 같다는 것이었다. 나는 진땀을 흘리며 의사가 손에 들고 있는 빈 주사기를 쳐다보았
다. 바늘도 몸퉁도 엄청나게 커 보이는 주사기였다. 세상에 맙소사. 아직도 콩꼬투리만밖에 안할 연약한
생명을 저렇게 무지막지한 걸로 공격을 하 다니.
그날은 그래도 그 정도로 놓여날 수가 있었다. 보름을 기다리는 동안 그런 무서운 자극을 외부로부터
받은 태아가 어딜 다쳤으면 어떡하나 하는 근심으로 살이 마르고,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았다. 그 태
아가 아들인지 딸인지 아직 모를 때였다. 그렇다고 아들이면 무사하고 딸이면 다쳐도 그만이라는 생각
같은 건 한번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내 핏줄, 아니 생명 그 자체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애련이었다.
그 전에 첫애를 뱄을 때도 그 후에 아들을 뱄을 때도 뱃속의 것을 그렇게 귀애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름 후에 나는 또 병원으로 끌려갔다. 이번에는 양수를 뽑는데 성공이었고, 그 결과
는 다음날이나 나온다고 해서 우리는 그냥 돌아왔다. 입시 결과를 기다리는 것처럼 초조해하며 시어머
니는 집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우리 집에 머물렀다. 시누이를 통해 태아가 딸이라는 결과를 알려 왔고
우리 세사람은 다시 작당을 해서 같은 병원으로 아이를 떼러갔다. 그 의사가 소파수술에는 도사라고 했
다.
"세상 참 좋아졌지 뭐냐? 옛날 같으면 꼼짝없이 또 딸을 낳을뻔 했구나."
시어머니는 그게 그렇게 신기한 모양이었다. 몇 번이고 같은 소리를 했다. 그리고 소파 수술하러 가는
데 시집 식구가 둘씩 따라가는걸 고마워하라는 투의 소리도 했다.
"소파수술 그거 별것도 아니다. 나도 세 번씩이나 했어도 시어머니가 알지도 못했으니까. 낮에 하고 멀
쩡하게 걸어와 저녁 해먹었는걸 뭐. 만만한 영감한테야 밤에 몇 마디 징징거렸지만 들은 척 할 양반도
아니고, 어려운 세상이었으니까. 딴 낙이 없어서 그랬는지 두 내외가 쳐다만 봐도 애는 들어서고."
나도 시어머니 몰래 그 짓을 한 적이 있었다. 첫애 낳고 백 날 겨우 지나 또 아이가 들어섰을 때는 남
편이 대책없이 회사를 그만 두어 앞날이 막막할 때였다. 다행히 친정 연줄로 기업체에 신설한 부설 학
교에 일자리를 얻을 수가 있었다. 노동자들이 의식화되면서 노조결성이 기업체마다 확산될 때여서 그
무마책으로 부설학교를 만들어 소년소녀공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는 게 유행처럼 돼 있을 때였다. 봉
급은 되레 정규 교사보다 후한 편이었지만 신분 보장은 안 됐다. 산전 산후 휴가제도는 정규 학교에서
도 정립이 안 돼 있을 때였다. 설사 그게 가능하다해도 딸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어린것을 맡아 준 친
정어머니에게 한 아이를 더 덮어씌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남편에게 이번 아이는 지우자고 상의하
고 행여나 남편이 기죽을까봐 대단찮을 일처럼 명랑하게 굴었다. 그래도 그 수술을 받을 때 남편은 동
행해 주었고, 집에 와서는 극진히 간호해 주었고 밤엔 몰래 흐느끼기까지 했다. 그 남자의 해석대로 정
당방위였기 때문인지, 혹은 남편하고 그 고통을 나눌 수 있었기 때문인지 그 첫 번째 중절수술 생각을
하면 죄의식보다는 가난은 참 무섭다는 궁핍에 대한 공포감이 먼저 떠오른다.
단지 딸이기 때문에 없애러 가는 길을 남편이 정말 눈치 못 챘는지, 왜 의논이라도 한마디 해볼 생각
을 안했는지, 그 언저리는 나도 정확하게 기억해 낼 수가 없다. 확실한 건 그땐 나도 시어머니와 시누이
의 살의가 옮아붙은 것처럼, 양수검사에서 딸로 판명되면 없앨 수밖에 없으리라고 일찌거니 각오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순순히 양수검사를 당했을 리가 없다. 내가 그렇게 다른 선택의 여지를 전혀
생각하지 못할 만큼 무력해지기까지는 시누이의 공이 컸다. 시누이는 가장 친한 친구인 척 소곤소곤 아
들 낳고 먹는 미역국과 딸 낳고 먹는 미역국 맛이 얼마나 다르더라는 얘기를 내 귀에 독처럼 불어넣었
다. 그녀는 아들 딸 남매를 두고 있었다. 그보다 더 충격적인 소식도 시누이는 어디서 알아내 왔다. 우
리를 직접 가르치지는 않았지만 멋쟁이에다 덕망이 있는 인사로 세상에 알려진 교수 한 분이 상처를 했
다. 덕망있는 멋쟁이가 흔히 그렇듯이 소문난 애처가였다. 나도 여성지 컬러면에서 곱게 늙은 부부의 다
정한 모습을 한두번 본 게 아니어서 친척의 죽음보다 더 애도하는 마음일 애틋했더랬다. 그분이라면 아
마 생전 재혼도 안하고 오직 부인의 추억 속에서만 살겠지, 그런 기대는 감미롭기조차 했다. 그러나 그
후 몇달도 안 돼 시누이가 오도방정을 떨며 전해준 소식통에 의하면 교수님은 벌써 재혼을 해서 깨가
쏟아지게 사는데 놀랍게도 사모님 생전부터 십여 년이나 그늘에 살던 여자라는 것이었다. 두 분 사이엔
딸만 둘이었는데 그 여자가 낳은 아들은 벌써 중학생인데 교수님을 빼닮아 준수하더라는 대목에서 시누
이의 눈빛은 비수처럼 나를 가르고 지나갔다.
나는 그날 밤잠을 못 잤다. 그 후에도 시누이는 그 댁 이야기라면 왜 그렇게 자세히 아는 것도 많고
신이나 하는지. 사모님은 그걸 모르고 돌아가신게 아니라 실은 감춰놓은 아들이 있다는 걸 알고나서 그
충격을 시름시름 앓다가 마침내 암으로 발전해 죽음에 이르렀다고도 했다. 들을수록 소름끼치는 얘기였
다.
시어머니가 부쩍 아들 손자타령을 하게 된 것은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갑자기 재산가가 되고나
서 부터였다. 내가 시집갔을 때 시아버지는 중풍으로 누워 계셨다. 살림은 오래되고 불편한 구 옥을 방
방이 세를 놓아 근근이 꾸려가는 형편이어서 장남을 데리고 살 엄두도 안 냈다. 낡았지만 대지는 넓은
서대문 밖 집 앞으로 시아버님의 사후 갑자기 큰길이 나면서부터 시어머니한테는 재복이 붙기 시작했
다. 빚을 내고, 미리 전세돈을 받아내가며 빌딩을 올릴 때만해도 위태위태해 보이더니만 시절을 잘타 전
세금이 이태도 안돼 사글세 보증금 정도밖에 안되게 화폐가치가 떨어졌다. 혼자가 된 후, 집 하나 가지
면 너희들 신세 안 지겠느라고 집을 자기 명의로 해가진 시어머니는 그때부터 호기있고 당당해지면서
거침없이 아들 손자 욕심을 부리기 시작했다. 기회만 있으면 아들을 붙들고, 내 딸이나 네 딸이나 딸은
소용없는 출가외인이니 그까짓 것들은 칠 것도 없고, 맏이 너한테서 영 아들 손자를 못보면 양놈 다 된
둘째네라도 불러들여야 할까보다는 소리를 의논처럼 한탄처럼 하곤했다. 남편 밑의 시동생은 집안이 한
참 어려울 때 미국으로 이민가 영주권도 얻고 그럭저럭 거기서 발붙이고 사는 모양이지만 보고 온 남편
말에 의하면 온 식구가 나서서 벌어야 사는 영세한 장사꾼인 모양이었다. 그들이라도 불러들이겠다는
말이 남편에게 얼마나 위협적이고 모욕적이라는걸 나는 옆에서 안 느낄 수가 없었다.
욕심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만 남편의 물욕도 만만치가 않았다.
시어머니는 빌딩이 무슨 왕권이나 되는 것처럼 대를 이을 든든한 아들 손자가 없는 집엔 지고 갈지언
정 물려주지 않을 뜻을 거듭거듭 강조했다. 대를 잇는다는 건 핏줄도 성도 아니고 결국은 상속권이었다.
딸을 지우기 위해 가랑이를 벌리고 수술대에 누울 때도 시어머니와 시누이는 곁에 붙어 있었다. 지극
정성이었다. 나는 그들이 확인 사살을 위해 지키고 있는 사람들처럼 무서웠다. 그들은 양쪽에서 내 손을
잡고 뭐라고 위로의 말을 했다. 내가 그들을 미워하기로 작정한 건 아들을 낳고나서가 아니라 아마 그
때부터였을 것이다. 곧 스러질 생명에 대한 에미가 바칠 수 있는 애도는 그것밖에 없었다. 마취가 듣고
하나둘을 세면서 의식이 멀어져가는 중에도 나는 시어머니와 시누이의 얼굴을 망막에 새겨 두려고 똑바
로 바라보았다.
인큐베이터 속에서 내 아기가 꼼실대고 있었다. 손가락만한 아가였다. 너는 엄지아가씨로구나. 가엾어
라. 불면 날아가게 생겼네. 인큐베이터를 지키고 있지 않으면 누가 훔쳐 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졸음이 와서 허벅지를 꼬집었다. 아프지 않아서 이상했다. 그때였다. 검은 옷을 입은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투실투실한 아기를 안고 들어왔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흰 옷 입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방안이
가득해졌다. 시어머니가 그들에게 그 큰애를 넣기 위해 우리 엄지아가씨를 내보내라고 요구하는 듯했다.
안 돼요. 그애는 그 안에서 나오면 당장 스러지고 말 거예요. 나는 소리치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검은 옷 입은 사람하고 흰 옷 입은 사람하고 저희들끼리 흥정을 했다. 얼마 주면 엄지아가씨를
내쫓고 그 아이를 넣어 주겠느냐는 흥정 같았다. 사람들은 악마처럼 웃으며 액수를 자꾸 올리고 나는
그 짓을 말려야겠다고 아무리 몸부림쳐도 몸도 안 움직여지고 말도 안 나왔다. 그러다보니 인큐베이터
속의 엄지 아가씨는 자취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이슬처럼 사라졌구나. 나의 슬픔엔 아랑곳없이 방 안이
사람들의 무례한 홍소로 가득 찼다. 나는 내 몸이 그 거친 웃음소리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들들들 진동
하는 걸 느꼈다. 뛰어내릴 수 있는 거라면 뛰어내리고 싶었다. 속이 온통 메슥거렸다.
그 기분 나쁜 웃음소리는 점점 사람의 소리 아닌 걸로 변하더니 자갈밭 위를 지나가는 쇠바퀴 소리가
됐다. 그런 소리는 정말로 참을 수가 없었다. 쇠바퀴소리가 뇌수로 파고드는 것 같아 나는 귀를 틀어막
으려고 몸부림쳤다.
미는 침대에 실려 회복실로 가고 있었다. 아가 괜찮냐?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근심스러운 얼굴로 굽어
보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이 또 동체를 떠나 공중에 둥실 떠 있는 것처럼 아득하고 기괴해 보였다. 나는
눈을 감았다. 요다음 임신에 지장이 없겠느냐고 시어머니가 의사한테 묻는 소리가 들렸다. 내 귀에는 그
소리가 고장난 음반에서 나오는 소리처럼 일그러진 채 마냥 반복해서 들렸다. 태아는 소파수술로 제거
하기에 적당한 날짜가 지나 좀 어려운 수술이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됐다. 그래서 그렇게 다음 임신을
걱정했구나. 나는 하염없는 마음으로 내가 인큐베이터에 지나지 않았다는걸 수락했다.
시어머니가 달여 바친 보약의 효험이었던지 다음 임신이 빨리 되고 다시 양수 검사를 받았다. 또 딸이
더라도 소파수술을 거부해서 그들에게 나의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리라는 뜨겁고 야무진 각오로 그 지겨
운 검사에 다시 임했던 건데 아들이라고 했다. 낳기도 전에 축하를 받고 위함을 받았다. 아들을 낳았지
만 그들에게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정열은 식지않고 계속됐다.
차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드니 학교 갔다 오는 듯한 소년들이 네댓 명이나 차 안
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꼼짝 않고 운전대에 엎드려 있는 여자를 이상하게 여긴 듯했다. 나 는 걱정말라
는 뜻으로 빙그레 웃어 보였다. 볼이 이글이글 붉은 소년들도 괜한 걱정을 했다는 듯 씩 웃고 멀어져갔
다. 저만치서 머리에 임을 인 아낙이 걸어오고 있었다. 요즈음 도시에선 머리에 다 뭘 이고 다니는 풍경
을 좀처럼 보기 힘들다. 달랑무 줄거리 같은게 몇 가닥 늘어진 커다란 광주리를 인 여자가 차 옆을 지
나갔다. 여성지에서 본 매력적으로 걷는 법에 의하면 정수리와 양쪽 귀를 위에서 수직으로 땡기는 것처
럼 머리를 곧바로 치켜들고 걸으라고 돼 있다. 지금 임을 인 여인의 자세가 바로 그렇지 않은가.
머리에서 무거운게 찍어누름으로써 도리어 빳빳이 세울 수밖에 없는 여인의 모습을 나는 신기한 듯이
바라보았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직선이 관통하고 있는 것처럼 당당하다 못해 존엄한 걸음걸이였다.
친정어머니 생각이 났다. 친정어머니는 남편이란 머리에 인 임과 같은 것이라는 소리를 자주 했었다.
나는 내가 본 어머니 아버지의 부부관계로 미루어 그 소리를 남편은 아내를 어떡하든 찍어 누르고 머리
위에 군림하려는 존재라는 뜻으로만 받아들였었다.
그런 뜻도 있겠지만 거기 덧붙여 그 찍어 누르는 존재에 의해서만 꿀리지 않고 당당하게 처신할 수 있
는 여자 팔자를 빗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비로소 들었다. 어머니다운 발상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생전 어려워만 하며 살았다. 당신도 집 안에서 눈코 뜰 새없이 일하면서도 어머니는 아버지가 벌어 오
는 넉넉지 않은 생활비를 황송해했고 자기는 거저 얻어먹는 것처럼 비하했다. 아들 둘, 딸 둘, 사남매한
테도 아버지는 손님처럼 어렵게 굴었지만 아들 딸을 축하해서 대하는 것 같진 않았다. 공평하게 무심했
다고나 할까. 어머니가 되레 아버지 앞에서 딸들은 오금을 못 펴도록 가르쳤다. 상에서 반찬도 못 집어
먹게 했고, 아버지한테 아들 등록금을 타낼 때는 그리도 떳떳하게 굴던 어머니가 딸들 등록금을 탈 때
는 그지없이 비굴하고 조마조마한 표정을 했다. 타낸 걸 건네줄 때도 아버지한테 미안해서 혼났다는 소
리를 꼭 덧붙였다. 아들 장가 보낼 때는 사돈한테 점잖고 품위있게 굴던 어머니가 딸 시집보낼 때는 꼭
무슨 흠이라도 있는 자식을 남의 집에 속여서 들여보내는 것처럼 위축되고 조마조마하게 굴어서 나를
속상하게 했다. 더 속 상한 건 내가 딸을 낳을 때마다 어머니는 기껏 해산 구완 다하고나서도 사위나
사돈한테 꼭 죄인처럼 구는 거였다. 제발 그러지 말라고 해도 그게 어디 시켜서 되냐, 저절로 그렇게 되
는 걸 어떻게 하느냐고 했다. 내가 동생이 첫아들을 낳았을 때 너무도 좋았던 것은 어머니가 그런 억울
한 해산 구완을 안해도 되겠기 때문이었다. 내가 첫딸을 낳았을 때 시어머니는 어떠했는지 모르지만 남
편하고 나하고는 정말이지 손톱만큼도 섭섭한 마음이 없었다. 세상에 우리만 자식 낳아 본 것처럼 자랑
스럽고 신기한 것 천지였다.
친정에서 산후 조리를 하는 동안 남편도 아기가 보고 싶어 처가에서 출퇴근을 했다. 남편 앞에서 아기
기저귀를 가는 건 예사였고 남편에게 기저귀를 갈아달랠적도 있었다. 어느 날 그걸 본 어머니는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질색을 하더니 나중에 사위 못 듣는데서 야단야단 치시는 것이었다.
"아니 이 철딱서니없는 것아. 남편한테 어떻게 계집애 아랫도리, 그 흉한 걸 보이냐, 보이길."
"아들은 괜찮구요?"
"여부가 있냐? 고추 달린 아랫도리야 남편 앞에 여봐란 듯이 풀어놔야지."
우리 기를 때도 어머니는 그랬었겠구나. 그건 물어보나마나였다. 그건 아무도 못 말린 어머니의 버릇,
아니 도덕관념이었다.
내가 나의 인큐베이터 됨을 참아 낼 수밖에 없었던 소인은 그러니까 기저귀 찰 대부터 비롯됐던 것이
다. 그러나 앞으로는 달라져야 한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 어떡하든지 달라져야
한다. 남편도 나도. 이건 사는 게 아니다. 그렇게 간악한 짓을 저지르고도 죄책감을 못 느끼는 그 께름
칙함을 떨쳐 버리지 않는 한 생전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을 것 같다. 우선 차에서 내려 다시 한번 강바
람을 들이마시고 운전대를 잡았다.
차도로 나왔으나 좌회전을 하지 못해 돌아가야 할 도시를 뒤로 하고 달릴 수밖에 없었다. 어딘가 유턴
지점이 있겠지, 유턴 지점을 열심히 찾는 것도 아니면서 막연히 그렇게 믿으며 상쾌한 속도를 냈다.
도시와 더불어 내 집 또한 뒤로 뒤로 멀어져 가는 기분 또한 상쾌했다.
32. 옥상의 민들레꽃
- 박완서
우리 아파트 칠 층 베란다에서 할머니가 떨어져서 돌아가셨습니다. 실수로 떨어지신 게 아니라 일부러
떨어지셨다니까 할머니는 자살을 하신 것입니다. 이런 일이 두 번째입니다..
그것을 제일 먼저 발견한 할머니의 며느리가 놀라서 악을 쓰는 소리를 듣고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베란다로 뛰어나갔습니다. 나도 뛰어나갔습니다. 다만 엄마가 뒤에서 내 눈을 가렸기 때문에 칠 층
에서 떨어진 할머니가 어떻게 망그러졌는지 보지는 못했습니다.
오오, 끔찍한 일이다.
딴 어른들도 끔찍한 일이야, 오오, 끔찍한 일이야 하면서 아이들의 눈을 가려서 얼른 안으로 데리고 들
어갔습니다.
우리 궁전 아파트는 살기가 편하고 시설이 고급이고 환경이 이름답기로 이름이 난 아파트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나는 물건은 물론 외국에서 들어온 물건까지 없는 거 없이 갖추어 놓은 슈퍼마켓도 있고, 어
린이를 위한 널찍한 놀이터로 있고 아름다운 공원도 있고, 노인들을 위한 정자도 있고, 사람의 힘으로
만든 푸른 연못도 있습니다.
누가 너 어디 사냐? 하고 물었을 때 궁전 아파트에 산다고 하면 물은 사람의 얼굴에 담빡 부러워하는
빛이 역력해집니다. 그리고 한숨을 쉬며 말합니다.
참 좋겠다. 우린 언제 그런데 살아 보누.
그러니까 궁전 아파트에 살지 않는 사람들은 궁전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걸 아무도 의심하
지 않나 봅니다.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도 궁전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모두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벌써 두 사람 째나 살기가 싫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얼마나 사는 게
행복하지 않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어지나 궁전 아파트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궁전 아
파트 사람이 알 수 있는 건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선 안된다는 겁니다. 이런 일이 자꾸 일어
나 소문이 퍼져 보십시오. 사람들은 궁전 아파트 사람들의 행복이 가짜일거라고 의심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큰일입니다. 그런 생각만으로도 궁전 아파트 사람들은 담빡 불행해지고 맙니다.
궁전 아파트 사람들이 여태껏 행복했던 것은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알아 줬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엄마의 보석반지가 엄마를 행복하게 하는 게 보석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보석이 진짜라
는 보석 장수의 보증 때문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여태껏 굳게 믿고 있던 행복이 흔들리자 궁전 아파트 사람들은 그 불안을 견디다 못해 한자리에 모여
의논을 하기로 했습니다. 모이는 장소는 칠십 평짜리를 두 개 터서 쓰는 사장님 댁으로 정해졌습니다.
나는 엄마의 치마꼬리에 바싹 다가붙었습니다. 나는 막내입니다. 그래서 엄마는 나를 마냥 어린앤줄 압
니다. 대개의 어리광은 오냐오냐하고 잘 들어줍니다.
넓은 사장님 댁은 벌써 사람들로 꽉 들어차 있었습니다. 반상회 날보다 더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습니
다. 반상회 날은 더러 아이들도 섞여 있었는데 오늘은 한 명도 아이들은 안 보입니다. 어른들만 모여 있
으니까 회의의 분위기가 한층 엄숙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엄마도 그제야 내가 따라간 게 창피한 지 눈짓을 하며 나를 등뒤로 숨기려 들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엄마 등뒤에 숨을 수 있을 만큼 작은 아이가 아닙니다. 나는 나타나 있고 싶고 참견도 하고 싶었습니다.
딴 일이라면 모를까 이번 일은 내가 꼭 참견을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 할머니가 왜 살고 싶지 않았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전의 그 할머니와 사귄
적도, 본 적도 없었지만 그것만은 자신 있게 알고 있었습니다.
에에또 이렇게 여러 귀빈들을 한자리에 모셔서 영광입니다. 오늘은 저희 집에 모신 만큼 제가 임시
회장이 돼서 이 회의를 진행하겠습니다. 아참, 회장이 있으려면 회 이름도 있어야겠군요. 명함에 박히려
면 무슨 무슨 회 회장이라고 해야지 그냥 회장이라고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
옳습니다.
여러 사람이 다 찬성을 했습니다.
서로 돕기회가 어떻겠습니까?
어떤 젊은 아저씨가 말했습니다.
안 됩니다,그건. 서로 돕다니요? 우리가 뭐가 부족해서 서로 돕습니까? 이웃 돕기는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끼리 하는 겁니다.
옳소, 옳소.
여러 사람이 찬성했기 때문에 서로 돕기회는 부결이 됐습니다.
그, 그렇지만 우리가 여기 이렇게 모인 건 서로 돕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서로 돕기회를 주장한 아저씨가 외롭게 대들었습니다.
아닙니다. 이번 사고를 수습할 대책을 마련하려고 모인 겁니다.
아, 됐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수습 대책 협의회가 좋겠군요. 궁전 아파트 사고 수습 대책 협의회.....
적당히 어렵고 적당히 길고....그걸로 정할까요?
사장님, 아니 회장님, 그럼 그 명의로 명함을 박으실 건가요?
그러문요. 썩 마음에 드는 명칭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안 그렇습니다. 그건 마치 우리 궁전 아파트가 사고만 나는 아파트란 인상을 퍼뜨리는 것과 같습니다.
아파트 값이 뚝 떨어질지도 모릅니다.
아파트 값이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소리에 일제히 와글와글 들고일어나 그 이름도 부결이 됐습니다.
여러분, 지금 급한 건 회의 이름 짓기가 아닙니다. 어떡하면 그런 사고가 다시는 안 일어나게 하나 하
는 겁니다. 이번이 벌써 두 번째입니다. 이 소문이 퍼져 보십시오. 제일 먼저 영향을 받는 건 우리 아파
트 값일 겁니다. 아마 한 번만 더 사고가 나면 우리 아파트 값은 당장 똥값이 될걸요.
회 이름을 서로 돕기회로 하자던 아저씨가 이렇게 말하자 장내는 조용해지고 사람들의 얼굴을 사색이
됐습니다.
여러분, 우리 아파트 값을 똥값을 만들지 않기 위해 머리를 짭시다. 좋은 의견이 있으신 분은 기탄 없
이 말씀해 주십시오.
젊은 사람, 그것은 회장의 권한입니다. 좋은 의견이 있으신 분 기탄 없이 말씀해 주십시오.
회장이 젊은 아저씨로부터 말끝을 빼앗았습니다.
저요, 저요.
나는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시켜 달라고 조를 때처럼 손 먼저 들면서 벌떡 일어서려는데 엄마한테 세차
게 붙잡혔습니다.
아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네가 나서려고 해, 아이 창피해.
엄마의 얼굴이 홍당무가 됩니다. 아니, 여기가 어디라고 아이를 끌고다녀? 쯧쯧,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
리도 들립니다. 엄마는 얼굴이 더 빨개지면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제가 한마디 하겠습니다.
뚱뚱한 아줌마가 몸을 일으키는 데 하도 오래 걸리니까 뒤에 앉은 사람이 영치기 하고 큰 소리로 외치
며 엉덩이를 들어주었습니다. 모인 사람들이 처음으로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여러분, 이건 웃을 일이 아닙니다.
뚱뚱한 아줌마가 엄숙한 얼굴로 말을 시작했습니다.
나도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지금처럼 심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집엔 노인네가 안 계시니까요. 그러나
지금은 누구 못지 않게 심각합니다. 다들 그래야만 됩니다. 노인네를 지키는 것은 노인네를 모신 집만의
골칫거리지만 아파트 값의 최고 자리를 지키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일입니다. 아시겠어요?
장내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습니다.
제일 처음 우리가 할 일은 절대로 이번 사고를 입밖에 내지 않는 겁니다. 소문만 안 나면 그런 일은
없었던 거나 마찬가집니다. 다음은 그런 일이 다시는 안 일어나게 하는 겁니다. 감쪽같이 감추는 것도
한두 번이지 자주 계속되면 소문이 안 날 수가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사 가는 사람이 생기거든요. 나
부터도 그런 사고가 한번만 더 나면 아파트 값이 뚝 떨어지기 전에 제일 먼저 팔고 이사를 갈 테니까
요. 이사만 가 보세요. 뭐가 무서워 소문을 안 냅니까? 아시겠죠? 소문을 안 내는 것보다는 그런 사고
가 또 다시 안 일어나게 하는 게 더 중요한 까닭을....
모두들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뚱뚱한 여자는 더욱 의기양양해서 연설을 계속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연구한 사고 방지책을 지금부터 말씀드리겠어요. 조용히 하세요. 조용히....우리 아파트
베란다는 너무 허술해요. 노인네 아니라도 아이들이 장난치다 떨어지지 말란 법도 없잖아요.
아유 끔찍해라.
엄마가 나를 꼭 껴안았습니다. 딴 엄마들도 아이들도 떨어질 수 있다는 새로운 근심에 안절부절을 못
합니다. 아이들한테만 집을 맡기고 온 엄마는 뒤로 몰래 빠져나갈 눈치를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베란다에서 일제히 쇠창살을 달면 어떨까 하는 의견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바람은 통하되 사
람은 빠져나갈 수는 없는 쇠창살 말입니다.
옳소. 옳소.
옳은 말씀이에요. 왜 진작 그 생각을 못했을까? 이제부터 발뻗고 자게 됐지 뭐예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근심이 걷히면서 뚱뚱한 여자의 의견에 대한 칭찬의 소리가 자자했습니다.
옳은 일은 서두르는 게 좋아요. 곧 쇠창살을 해 달도록 하세요. 회장의 권한으로 명령합니다.
회장님이 주먹으로 탁탁 응접 탁자를 치면서 말했습니다.
쇠창살 주문은 내가 받겠어요. 우리 아기 아빠가 쇠붙이 회사 사장이니까요. 누구보다도 값싸게, 누구
보다도 빨리 해 드릴 수가 있어요. 품질은 보증하겠느냐고요? 여부가 있나요.
뚱뚱한 여자가 신이 나서 소리쳤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먼저 쇠창살 신청을 하려고 밀치고 아우성 쳤
습니다.
여러분 침착하세요. 이런 때일수록 흥분을 가라앉히고 이성을 되찾아 침착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과
연 쇠창살이 가장 좋은 방법일까요?
젊은 아저씨가 아우성 치는 사람들을 향해 팔을 휘두르며 외쳤습니다. 사람들은 젊은 아저씨의 다음
말을 기다리느라 잠깐 조용해졌습니다. 그 때 나는 내가 다시 나서야 할 것처럼 느꼈습니다.
나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란다에서 떨어져서 그만 살고 싶은 마음을 돌이킬 수 있는 건 쇠창살이
아니라 민들레꽃이라는 걸 나만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건 어른들처럼 갑자기 떠오른
날림 생각이 아니라 겪어서 알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자신이 있습니다.
베란다에 있어야 할 것은 쇠창살이 아니라 민들레꽃이에요. 정말이에요.
그 소리를 소리 높이 외치고 싶어 목구멍이 간질간질하고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오줌을 쌀 것처럼 아
랫도리가 뿌듯하기도 합니다. 나는 참을 수가 없어서 몸부림을 치면서 엄마의 품을 벗어나려고 했습니
다.
얘가, 누구 망신을 시키려고 또 이러지?
엄마는 입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쇠사슬처럼 꽁꽁 나를 껴안았습니다. 젊은 아저씨가 말을 계속했습니
다.
여러분, 우리 아파트가 가장 값이 비싼 것은 내부의 시설과 부대 시설이 잘된 때문만은 아니란 걸 알
아야 합니다. 우리 아파트는 겉모양이 아름답기로 소문 난 아파트입니다. 지나가던 사람도 우리 아파트
를 보면 담빡 살고 싶은 생각이 들만큼 아름다운 겉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옛 궁전이나 성을 연상하고
그 속에 들어가 살면 왕족이나 귀족이 될 것 같은 희망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런 아파트의 베란다마다
쇠창살을 달아보세요? 사람들이 뭘 연상하겠습니까?
감옥소요, 감옥소.
세상에 끔찍해라. 감옥소라니.
아파트 값이 똥값이 되고 말 거예요.
나라면 거저 줘도 안 살 거예요.
이렇게 해서 베란다에 쇠창살을 달자는 의견은 흐지부지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뚱뚱한 여자는 기가
꺾이지 않고 새로운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젊은 양반이 좋은 얘기해 줘서 고마워요. 그 생각을 못한 건 큰 실수였어요. 그럼 이렇게 하는 게 어
떻겠어요. 베란다 쪽으로 난 유리창에 새로운 자물쇠를 달면요. 우리 쇠붙이 회사에서 요새 발명해서 특
허를 낸 자물쇤데 한번 잠갔다 열려면 열쇠 가지고도 반나절은 넘게 걸리고 그 동안에는 시끄러운 소리
가 계속된다니 노인네나 아이들이 몰래 열고 나갈 가망은 절대 없잖아요.
그렇지만 엄마들이 집을 비우는 시간이 어디 반나절만 되나요
구석에 앉은 젊은 엄마가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시끄러운 소리를 나게 한 거 아닙니까?? 시끄러운 소리가 반나절이나 나면 이웃끼리 서로
연락을 해서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수가 있으니까.
참 그렇겠군요.
젊은 엄마가 고개를 움츠렸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여태껏 잠자코 있던 노교수님이 반백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일어섰습니다.
창을 열기가 너무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우리 궁전 아파트의 특징은 여름엔 창문을 꼭꼭
닫고 살다가 겨울엔 활짝 열어 놓고 사는 건데 겨울에 창이 닫혀 있어 보세요?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
요? 이건 우리 아파트의 품위에 관계되는 중대한 문젭니다. 물론 아파트 값과도 상관이 있는 문제입니
다만.....
노교수님이 품위 있게 슬쩍 말끝을 흐렸습니다. 그러나 아파트 값을 들먹였다는 걸로 노교수님의 말씀
은 담빡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뚱뚱한 여자는 두 가지 쇠붙이를 다 팔아먹을 수 없게 되자 풀이 죽어 제자리에 앉아 버렸습니다.
노교수님이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사람들의 눈길이 노교수님의 우물거리는 입가로 모였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할머니가 두 분씩이나 왜 갑자기 살고 싶지 않아졌나, 그걸 먼저 우리는 알아야 된다
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건 그 분들이 목숨을 끊고 싶어서 끊었지, 베란다가 있기 때문에 끊은 것은 아니
라는 겁니다. 목숨을 꼭 끊고 싶으면 베란다 아니라도 끊을 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옳소, 옳소.
젊은 아저씨가 눈을 빛내면서 큰 소리로 동의했습니다.
그 분이 왜 목숨을 끊고 싶었을까 아는 대로 대답해 주십시오. 먼저 돌아간 할머니의 따님과 며느
님.
교수님은 교수님답게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지적을 합니다. 저번에 돌아간 할머니는 따님하고 같이 사
셨고, 이번에 돌아간 할머니는 아드님하고 같이 사셨답니다. 할머니의 따님과 며느리는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닦을 뿐 대답을 못합니다.
무엇을 부족하게 해 드리지 않았습니까?
교수님은 울고 있는 아주머니들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따지듯이 말했습니다.
아니오, 그런 일 없습니다. 저의 어머니의 방 냉장고는 늘 그 분이 즐기시는 음식으로 가득 채워 드
렸고, 옷장엔 사시장철 충분히 갈아입을 수 있는 비단옷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분이 돌아가신 후
그걸 다 양로원에 기부했는데 열 사람의 노인네가 돌아갈 때까지 입을 수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필요
하시다면 그 분들을 증거인으로 부를 수도 있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이번엔 며느님에게 변명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그 분의 방이 그대로 증거로 보존돼 있습니다만 부족한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제 방과 똑같은 크기의 방에 제 방에 있는 건 그 분의 방에도 다 있습니다. 그 분이 한번도
듣지 않은 전축이나 녹음기도 제 방에 있는 거기 때문에 그 분 방에도 들여놓았습니다. 그랬건만 그 분
은 늘 불만이셨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그걸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교수님이 마침내 유도 신문에 성공한 형사처럼 좋아하며 그 아주머니 앞으로 한 발 다가갔습니다.
그 분은 손자를 업어서 기르고 싶어하셨습니다.
그건 안 되죠. 안짱다리가 되니까.
그 분은 바느질을 좋아해서 뭐든지 깁고 싶어하셨어요. 특히 버선을 깁고 싶어하셨죠.
점점 더 어렵군요. 요새 버선이라니? 더군다나 기워서 신는 버선을 어데 가서 구하겠소?
그 분은 또 흙에다 뭘 심고, 거름을 주고 김을 매고 싶어하셨어요. 그 분은 시골에서 자란 분이거든
요.
참으로 참으로 어려운 분이셨군요.
교수님이 낙담을 합니다. 이 때 젊은 아저씨가 또 나섭니다.
이제야 알겠습니다. 그 분은 고향이 그리워서 돌아가셨군요.
저희 어머니는 이 도시가 고향인데도 어느 날 베란다에서 떨어지셨어요.
먼저 돌아가신 할머니의 딸이 젊은 아저씨에게 대들었습니다.
고향이 시골이 아니어도 마찬가질 겁니다. 도시에서도 사람 사는 모습이 그리워서 더 이상 살고 싶
지가 않았을 겁니다. 그렇지만 제 아무리 효자라도 세월을 거꾸로 흐르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문
명된 세상에 돈 가지고 안되는 일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건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젊은 아저씨가 이렇게 결론을 내리자 장내가 숙연해졌습니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내가 나설 차례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목구멍이 간질간질하고 가슴이 울렁거리고
오줌이 마려웠습니다.
나는 베란다에서 떨어져 목숨을 끊고 싶은 생각을 맨 마지막으로 막아 줄 수 있는 게 쇠창살이 아니라
민들레꽃이라는 걸 알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할머니가 살고 싶지 않아진 게 세월을 거꾸로 흐르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란 걸 알고 있습니다. 둘 다 상상이나 남에게 들어서 알고 있는 게 아니라 스스
로 겪어서 알고 있는 거기 때문에 확실합니다. 나는 어른이 되려면 아직 먼 어린 사람인데도 살고 싶지
않았던 적이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나는 그것을 말하고 싶은 걸 참을 수가 없어서 쇠사슬처럼 단단하게 나를 껴안은 엄마의 팔에서 드디
어 벗어났습니다. 그리고 회장석이 있는 앞으로 나가려고 했습니다. 꼭꼭 끼어 낮은 어른들을 헤치려니
어떤 아저씨는 어깨를 짚었다고 눈을 부라리고 어떤 아줌마는 발가락을 밟았다고 비명을 지릅니다. 그
러건 말건 나는 반장도 모르는 어려운 문제의 답을 나만이 알고 있을 때처럼 의기양양 신이 나서 사람
들을 마구 밀치고 드디어 앞으로 나섰습니다.
그러나 내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회장이 탁자를 탁 치며 호령을 했습니다.
누굽니까? 도대체 누굽니까? 이런 중대한 모임에 어린이를 데리고 온 분이 누굽니까?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얘가 막내라서 버릇이 없어서.
어느 틈에 엄마가 따라 나와 나를 치마폭에 싸면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그 아이를 데리고 먼저 퇴장할 것을 회장의 권한으로 허락합니다. 여러분 이의가 없으시겠죠?
회장이 말했습니다. 모두 이의 없다고, 엄마와 나의 퇴장을 찬성했습니다.
이 회의에서 앞으로 결정된 일은 서면으로 통지할 테니 빨리 그 애를 데리고 돌아가시오.
저도요, 저도요, 딴 엄마들도 퇴장할 것을 회장한테 허락맞고자 손을 들었습니다. 이유는 집에 놓고 온
아이가 베란다에서 떨어질까 봐 불안해서 더 이상 회의를 지켜 볼 수 없다는 거였습니다. 회장은 그런
엄마에게도 퇴장을 허락했습니다.
엄마와 나를 선두로 여러 엄마들이 회의장을 물러났습니다. 집에 돌아온 나는 엄마에게 호된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나는 꾸지람을 들은 것보다도 내가 알고 있는 걸 발표하지 못한 것이 억울하고 슬펐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걸 어른들이 귀담아 들어만 주었어도 베란다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은 일을 미리 막는 데 적지 않
은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내가 지금보다 더 어렸을 적입니다. 학교에도 가기 전이었으니까요. 어느 날 누나와 형이 학교에서 만
든 꽃을 한 송이씩 들고 왔습니다. 내일이 어버이날이라나요. 누나와 형은 또 조그만 선물 꾸러미도 마
련해 놓고 있었습니다. 내일 아침 꽃과 함께 엄마 아빠께 드릴 거라고 했습니다.
그날 밤, 나도 꽃을 만들었습니다. 누나가 쓰던 색종이를 오려서 만든 꽃은 보기에도 누나나 형 것만
훨씬 못해 보였습니다만 힘들이고 정성 들여 만든 거기 때문에 엄마 아빠가 신통해 하실 것을 믿고 가
슴이 잔뜩 부풀어 있었습니다. 선물은 장만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학교를 들어가기 전이라 용돈이 없으
니까 그걸로 엄마 아빠가 섭섭해 할 리는 없었습니다.
어버이날 아침이 됐습니다. 아침상에서 누나가 먼저 선물과 꽃을 아빠 앞에 내놓았습니다. 아빠는 누나
에게 뽀뽀하고 선물을 끌렀습니다. 넥타이핀이 나왔습니다. 아빠는 입이 귀까지 가 닿게 크게 웃으시면
서 그 자리에서 넥타이핀을 넥타이에 꽂고, 꽃은 양복 깃에 달았습니다. 아빠의 얼굴이 예식장의 신랑처
럼 행복하고 젊어 보였습니다.
다음엔 형이 꽃과 선물을 엄마한테 드렸습니다. 엄마가 형한테 뽀뽀하고 선물을 끌렀습니다. 오색 찬란
한 브로치가 나왔습니다. 엄마는 꺄악 소리를 내면서 좋아하시더니 브로치를 당장 블라우스에 달고 꽃
은 단추 구멍에 끼우셨습니다.
다음은 내 꽃을 드릴 차례입니다. 그러나 형과 누나는 내 차례는 주지도 않고 어버이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그 노래를 모르기 때문에 따라 하지 못했습니다.
형과 누나의 노래를 들으며 부끄러워하고 좋아하시는 엄마 아빠가 아무쪼록 오래오래 아름답고 젊기를
마음속으로부터 바랐습니다. 그런 마음속의 바람을 전하는 마음으로 점잖고 조용히 내 꽃을 엄마와 아
빠 사이에 놓았습니다. 꽃을 두 송이 준비할 걸 하고 후회도 했습니다만 어느 분이 가져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두 분이 함께 쓰는 물건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두 분께 꽃을 드리고 나자 나
는 뽐내고 싶은 마음보다는 부끄러운 마음이 더해서 고개를 숙이고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 했습니다.
누나와 형은 학교에 갔습니다. 아빠는 꽃을 단 채 출근했습니다. 엄마도 꽃을 단 채 노래를 부르면서
집안 일을 했습니다. 나는 놀이터에 나가 놀았습니다.
놀이에 싫증도 나고 배도 고프기도 해 집에 들어와 냉장고를 열려다 말고 나는 내 꽃을 보았습니다.
내 꽃은 식당 구석에 있는 쓰레기통 속에 과일 껍질과 밥 찌꺼기와 함께 버려져 있었습니다.
그 때 엄마는 거실에서 전화를 걸고 있었습니다. 오래간만에 소식을 알게 된 친구로부터 온 전화인가
봅니다. 아이는 몇이나 되나 친구가 물어 본 모양입니다. 엄마는 한숨을 쉬면서 대답했습니다.
글쎄 셋이란다. 창피해 죽겠지 뭐니, 우리 동창이나 우리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을 아무리 살펴봐도 하
나 아니면 둘이지 셋씩 낳은 사람은 하나도 없더구나. 창피해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단다. 어쩌다 군
더더기로 막내를 하나 더 낳아 가지고 이 고생인지, 막내만 아니면 내가 지금쯤 얼마나 홀가분하겠니?
막내만 아니면 내가 남부러울 게 뭐가 있니?
그 때 나는 처음으로 엄마에게 내가 필요하지 않다는 걸 알았습니다. 나에겐 내 가족이 필요한데 내
가족은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건 나에겐 견디기 어려운 슬픔이었습니다.
엄마는 늘 나를 막내, 우리 귀여운 막내 하면서 끼고 돌았기 때문에 나는 한번도 엄마가 나를 사랑한
다는 걸 의심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엄마의 사랑은 거짓이었습니다. 나는 엄마를 진짜로 사랑했
는데 엄마는 나를 거짓으로 사랑했던 것입니다.
나는 말없이 집을 나왔습니다. 계단을 오르고 또 올랐습니다. 마침내 옥상까지 올랐습니다. 옥상에서
내려다보니까 사람들이 개미처럼 작게 보였습니다. 나는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확실히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이나를 없어져 줬으면 하고 바라고 있는데 무슨 재미로 살아가겠습
니까.
나는 옥상에서 떨어지기 위해 밤이 되길 기다렸습니다. 낮에 떨어지면 사람들이 금방 보게 되고 병원
에 데리고 가서 살려 놀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나는 정말로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밤까지 기다려
야 했습니다.
밤을 기다리는 동안 춥지도 않았고 배고프지도 않았습니다.
아파트 광장에 차와 사람의 움직임이 멎자 둥근 달이 하늘 한가운데 와서 옥상을 대낮같이 비춰 주었
습니다. 마치 세상에 달하고 나하고만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 때 나는 민들레꽃을 보았습
니다. 옥상은 시멘트로 빤빤하게 발라 놓아 흙이라곤 없습니다. 그런데도 한 송이의 민들레꽃이 노랗게
피어 있었습니다. 봄에 엄마 아빠와 함께 야외로 소풍 가서 본 민들레꽃보다 훨씬 작아 꼭 내 양복의
단추만 했습니다. 그것은 틀림없는 민들레꽃이었습니다.
나는 하도 이상해서 톱니 같은 이파리를 들치고 밑동을 살펴보았습니다. 옥상의 시멘트 바닥이 조금
패인곳에 한 숟갈도 안 되게 흙이 조금 모여 있었습니다. 그건 어쩌면 흙이 아니라 먼지일지도 모릅니
다. 하늘을 날던 먼지가 축축한 날, 몸이 무거워 옥상에 내려앉았다가 비를 맞고 떠내려가면서 움푹한
그 곳에 모이게 된 것입니다. 그 먼지 중에 민들레 씨앗이 있었나 봅니다. 싹이 나고 잎이 돋고 꽃이 피
게 하기에는 너무 적은 흙이어서 잎은 시들시들하고 꽃은 작은 단추만 했습니다. 그러나 흙을 찾아 공
중을 날던 수많은 씨앗 중에서 그래도 뿌릴 내릴 수 있는 한줌의 흙을 만난게 고맙다는 듯이 꽃은 샛노
랗게 피어서 달빛 속에서 곱게 웃고 있었습니다.
도시로 부는 바람을 탄 민들레 씨앗들은 모두 시멘트로 포장한 딱딱한 땅을 만나 싹 트지 못하고 죽어
버렸으련만 단 하나의 민들레 씨앗은 옹색하나마 흙을 만난 것입니다. 흙이랄 것도 없는 한 줌의 먼지
에 허겁지겁 뿌리 내리고 눈물겹도록 노랗게 핀 민들레꽃을 보자 나는 갑자기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습
니다. 살고 싶지 않아 하던 게 큰 잘못같이 생각되었습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온 가족이 나를 찾아 헤매다 돌아와서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나를
껴안고 엉엉 울면서 말했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구나, 막내야. 만일 너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나도 살아 있지 않으려고 했다.
엄마는 내가 무사히 돌아온 것만 반가워서 말없이 집을 나간 잘못에 대해선 나무라지도 않았습니다.
나 역시 엄마의 잘못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엄마가 나를 사랑하고 나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안
것만으로 충분했습니다. 그 일도 그렇게 끝났습니다.
그러나 그 일을 통해 사람은 어제 살고 싶지 않아지나를 알게 된 것입니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를 없어져 줬으면 할 때 살고 싶지가 않아집니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가족들도 말이나 눈치로 할머
니가 안 계셨으면 하고 바랐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살고 싶지 않아 베란다나 옥상에서 떨어지려고 할 때 막아 주는 게 쇠창살이 아니라 민들레꽃
이라는 것도 틀림없습니다. 그것도 내가 겪어서 이미 알고 있는 일이니까요.
그러나 어른들은 끝내 나에게 그 말을 할 기회를 안 주었습니다.
33. 우황청심환
- 박완서
가까스로 잠이 좀 오려는데 또 그놈의 소리가 났다. 주우지 니집뿐, 주우지니집뿐……
"몇 시라는 소리유?"
노파는 물었다. 남궁씨는 되는 대로 대답했다. 기계로 합성 한 음향이면서도 일본말 특유의 교성이 알
려주는 시간은 어차피 지금 이 지점의 시간과는 무관할 터였다. 노파의 시계가 친절을 다해 가르쳐 주
는 시간이 노파가 떠나 온 여행지의 시간인지도 그는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 나는 비행기 속이었다. 노
파는 태엽을 누르면 현재의 시간을 말로 알려 주는 손목시계를 차고 있었다. 백내장 수술 후 시력이 밤
낮이나 가릴 정도로 떨어지고 나서 아들이 일본에서 사다 준거라고 했다. 시간을 알려 주는 소리도 물
론 일본말이었다. 못봄을 못알아들음으로 바꿔 가지고 으스대는 노파가 남궁씨는 지겨웠다. 말하는 시계
에 관심을 보이기가 잘못이었다. 남궁 씨는 판촉물(販促物)을 개발도 하고 납품도 하는 회사의 고용사장
이었다. 아이디어가 기발하다 싶은 상품에 대한 유별난 관심은, 그러니까 그의 직업의식이었다. 남궁 씨
가 시계의 목소리를 처음 듣고 불현듯 호기심이 동해 노파의 흐물흐물한 손을 끌어당겨 자세히 들여다
보려고 했을 때, 노파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앙칼진 힘으로 손목을 빼내면서 말했었 다.
"괜히 만지지 말아요, 고장나면 우리 나라에선 고칠 수도 없는 귀한 물건이라우. 일본에서도 엄청 비싼
거라던데," 그제서야 비로소 남궁씨는 자신의 직업의식에 대해 참을 수 없는 배반감과 싫증을 느꼈다.
그의 유럽 여행은 명색이 포상여행이었다. 그러나 속내는 퇴직을 부드럽고 명예롭게 하기 위한 위로 여
행이란걸 그는 알고 있었다. 밀려난다는 것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억울한 일이었다. 은행에서 밀려난
때도 그랬었다. 부하 행원의 부정을 책임질 상급자가 차장선이었다. 신문에 날 만한 큰 부정이었으면 아
마 좀더 높은 상급자가 책임을 졌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 때 남궁 씨는 겨우 차장이었다. 하필 자식들
학비부담이 피크에 달했을 때라 아내와 더불어 장삿길로 들어섰다. 돈벌이가 여의치 않아 몇 번씩 업종
을 바꿀 때마다 그는 밀려난다는 서글픔과 억울함을 맛보아야 했다. 막내까지 대학을 졸업시키자 문방
구와 비디오테이프 대여를 겸한 구멍가게 하나가 달랑 남았다. 아내는 야간상고 다니는 소녀 하나를 거
느리고 주인노릇을 하고 싶어 했다. 그는 서글픈 내색 한번 제대로 못해 보고 또다시 스르르 밀려났다.
마침 그 무렵 절친하게 지내던 친구의 상을 당했다. 그 친구는 생전에 조그만 회사 사장이었는데, 남궁
씨는 그의 상속자인 외아들로부터 선친의 회사경영을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회사는 친구의 생전의 씀씀이와 사무실 규모로 미루어 짐작하던 것보다 훨씬 취약했다. 판촉물이나 기
념품, 답례품을 납품하는 사업은 사무실이나 공장 없이 발과 입심만으로도 가능한 영세한 장사였다. 가
내공업 규모의 공장이 있다고 해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수금과 재고를 합쳐도 기천만원에 불
과했다.
다행히 빚은 없었고 건물을 임대하면 훨씬 편하게 수입을 올릴 수 있지만 아버지가 하시던 사업이니
살려 보고 싶다고 했다.
그렇다고 과감한 투자로 회생시켜 보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그랬더라면 남궁씨가 그렇게 쉽게 그 일을
승낙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거기서 이익금을 챙길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현재의 미수금과 재고를 밑
천으로 한번 일어나 보든지 다 들어먹든지 마음대로 해 보라는 조건이 되레 그의 소심한 마음을 사로잡
았다.
아내는 남궁씨가 고용 사장이 된다니까 처음엔 재벌급 회사인줄 알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다가 실상을
알고 나서는 한심해 하다 못해 차라리 경멸했다.
"이 철없는 양반아, 창피한 줄도 좀 아슈. 그렇게 사장 소리가 듣고 싶으면요, 우리 가계에서 비디오든
지 문방구든지 하나 뚝 떼어 드리리다."
그러나 연때가 맞았달까, 세상 풍조가 마침 조그만 가게 하나를 개업해도 고사떡을 돌리는 대신 기념
품을 돌리게 변하면서 매상을 급신장시킬 수가 있었다. 외판 조직과 손발도 잘 맞았거니와 문방구점을
하면서 생긴 눈썰미를 가미해서 인기를 끈 제품도 적지 않았다. 그의 아이디어가 히트를 친 판촉물들은
거의가 다 상품으로도 살아 남아 꾸준히 주문이 오고 있었다. 오년만에 연간 순이익을 억단위로 셈할
만한 알토란 같은 회사로 키워 놓자 친구의 아들은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내고, 남궁씨의 그간의 노고
를 치하한다며 해외 여행을 시켜 주었다. 그는 지난 날의 거 물 정객처럼 자의반 타의반으로 이 땅을
벗어나는 비행기를 탔다. 처음 삼주는 관광팀에 끼여서 돌고 나서 파리에 처졌다. 출가한 딸이 해외 근
무하는 남편을 따라 파리에 살고 있었다. 딸네 집에서의 한 달간은 참으로 지루하고 힘들었다. 딸은 아
마 더했을 것이다. 아버지 산책이라도 좀 하세요, 제 소녀적 소원이 뭔 줄 아세요? 파리에 가서 더도 말
고 한 달만 시내를 정처없이 어슬렁거리며 지내보는 거였다구요, 그런 짜증스러운 말투에서 남궁씨는
딸이 노골적인 구박을 참을 수 있는 맥시멈을 한 달쯤으로 잡고 있었다. 그가 견딜 수 있는 한계 역시
그 근처였다. 하루에 여삼추로 징역살이와 진배없는 딸네집살이를 견디면서까지 남궁씨가 해외 여행을
한 달씩이나 더 연장한 것은 젊은 회사주인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경영에 재미를 붙이든
곤란을 겪든 해 볼 만큼 해본 연후에 나타나야 피차 후회없는 결정을 내릴 수가 있을 것 같았다. 남궁
씨가 정말 바라는 것은 물론 그가 객지에서 하루하루 지루함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동안 젊은 주인 역
시 그가 아쉽고도 아쉬워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비명을 겨우겨우 참으며 그를 기다려 주는 거였다.
"자매님, 마리아 자매님이 또 가슴이 울렁거리고 손발이 비틀린대요, 말도 더듬거리구."
노파의 일행 중 빨간 잠바를 입은 중노인이 통로에서 창가에 앉은 노파쪽으로 윗몸을 휘면서 미안한
듯이 말했다. 남궁씨는 중노인의 물렁물렁한 젖가슴의 부피를 이마에 느끼기가 싫어서 고개를 잔뜩 뒤
로 제쳤다. 노파의 일행은 성지순례단이었다. 근 삼십명은 돼 보이는 일행의 좌석은 일련번호로 불어 있
었는데 노파가 창가에 앉고 싶어한다고 가이드인 듯싶은 청년이 창가 손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바꿔앉혔
기 때문에 노파만 일행으로부터 떨어져 있었다. 시력이 형편없다면서 남의 신세를 져 가면서까지 창가
에 앉고 싶어한 만큼 노파는 응석이 심한 편이었다.
"아, 직효약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유."
노파가 발밑을 고이고 있던 배낭을 한 손으로 들썩거리면서 남궁씨를 빤히 쳐다보았다. 시력과는 상관
없이 말똥말똥한 눈동자는 명령조였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몰랐다. 그래서 남궁씨는 그 배낭이 얼마나 무
거운지 알고 있었다. 배낭에 어이없게도 반 말들이 물통이 들어 있었다. 성지 루우르드에서 길어오는 기
적수라고 했다. 젊은 사람도 들기엔 힘겨운 무게여서 순례단은 거의 그런 배낭을 메고 있었다. 물은 화
물칸에 실어 주지 않아 서 들고 탈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남궁씨는 낑낑대며 노파의 배낭을 그의
무릎 위로 들어올려 익숙하게 지퍼를 열고 물통 옆에 든 약주머니를 꺼내 노파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
리고 해본 장단의 능숙함에 혼자 쓴웃음을 지었다. 배낭 속엔 그 동안 기내식에 곁들여 나오는 포도주
까지 추가가 되어 더욱 무거워져 있었다.
"그 동안에 인이 백혔나, 이게 벌써 몇 번째래요? 그 귀한 걸." "걱정 말라니까, 우리 아들이 이럴 줄
알고 넉넉히 챙겨 주었으니까 아픈 자매님 있으면 참지 말고 지딱지딱 갖다 먹으라고 해요."
노파가 주머니 끈을 풀고 그 안에서 우황청심환을 꺼냈다. 노파는 그걸 꼭 정육각형의 갑째 건네 주지
않고 밀랍으로 포장된 동그란 내용물을 꺼내 손바닥으로 한번 궁글려 보고 나서 내놓았다.
"우황청심환은 뭐니뭐니해도 중국 본바닥 거라야지 요새 나온 국산은 믿을게 못 돼요."
노파의 말투로 보아 그게 국산이 아니란걸 스스로 확인해 보면서 대견스러워 하고 싶어 그러는 것 같
았다. 노파가 차곡차곡 배낭 속에 챙겨 넣은 것만큼의 포도주를 마셔댔기 때문일까, 남궁씨는 수치감 같
기도하고 쓸쓸함이나 슬픔 같기도 한 참을 수 없는 느낌으로 까딱하면 울 것 같았다. 그건 어쩌면 뿌리
깊은 열등감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남궁씨에게도 비로소 우황청심환을 선물로 받아보는 일이 생겼다. 역시 은행에
다닐 적이었는데 큰 돈을 대부받은 고객으로부터였다. 사무적인 절차의 심부름 외에 는 그가 대부를 위
해 힘쓴 바는 전혀 없었다. 그때도 그럴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고, 사직할 때까지도 그럴 만한 지위에 있
어 본 적이 없는 남궁 씨였다. 그만한 액수의 대부라면 대개 어느 선에서 결정이 나게 된다는 걸 알고
있는 정도가 고작 그의 관록이었다. 그런데도 그 고객은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중국산 우황 청심환 열
개들이를 한상자 선물로 놓고 갔다. 사무적인 수고에 대한 가벼운 인사치레로 적당한 물건이라고 여긴
듯했다. 그때만 해도 국산 청심환에 대한 신뢰도도 높고, 외국나들이 외국 나들이 다녀오는 사람도 부쩍
늘어나 중국산이 별로 귀물이 아닐 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궁씨는 거액의 뇌물을 받은 것처럼 음
흉하게 가슴을 울렁거렸다. 그 후에도 그 고객만 나타나면 뭔가 편의를 봐 주어야 할 것 같은 강박관념
으로 비굴하게 웃으며 허둥대던 생각을 하면 아직도 남궁씨는 진저리가 쳐지면서 닭살이 돋곤 했다.
방콕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비행기도 쉬면서 승무원을 교체하고 급유를 받을 모양이고, 탑승객도 두어
시간 땅을 밟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기내 방송은 연착을 했으므로 방콕까지의 손님만 내리고 계
속 여행할 손님은 기내에 머물러 있으리라고 했다. 남은 여비를 물건값이 싸다는 방콕 면세점에서 털어
버리려고 잔돈까지 샅샅이 뒤져내 갖고 벼르던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웅성대며 불평을 터뜨렸다. 방콕에
서 내린 탑승객들이 거의 외국인이었으므로 서울행 에어프랑스에 남은 손님은 한국인이 대부분이었다
청소원들이 들어와 닫힌 공간에 여럿이 십여시간을 붙어 앉아 먹고 마시고 잔 어수선한 자국을 신속하
게 지워갔다. 자리가 많이 비어 남궁씨는 노파의 옆자리를 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몇 시간이나 남았수?"
노파가 고개를 빼고 두리번대는 남궁씨의 소매를 당기면서 물었다. 남궁씨는 못된 짓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괜히 움찔했다.
"글쎄올시다. 두세 시간이면 땅을 밟게 되겠죠. 지루하셨죠?" "아이구, 아녜요. 하나두 안 지루해요. 연
착할거 없이 이왕이면 무슨 사고가 나서 오던 길을 되짚어 간다구 해도 끄떡없다우."
노파가 고른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남궁씨는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비행기에서 뛰어내리기라도 할
것처럼 무턱대고 땅이 밟고 싶었다. 비행기 바퀴가 땅에 닿아 있다는 것과는 상관없이 갈증처럼 다급하
게 발바닥에 땅을 느끼고 싶었다. 남궁씨는 방 콕에서 내릴 수 없다는 것을 자기 혼자서 너무 견딜 수
없어한다고 생각하면 막막한 외로움을 느꼈다.
노파의 옆자리를 면하긴 틀린 것 같았다. 탑승한 승객이 꾸역 꾸역 빈 자리를 메우기 시작했다. 승무원
도 교체가 되어 한국인 스튜어디스가 이제부터 여러분을 서울까지 편안히 모시겠다고 인사를 했다.
"저 계집앤 틀렸어."
노파가 표독하게 말했다. 남궁씨는 노파의 그런 말투가 싫었지만 그 새로운 스튜어디스가 마음에 안
들기는 마찬가지였다.
특별한 밉상도 아닌데 이상한 일이었다. 평균치의 우리 나라 여자들보다 오히려 정돈된 이목구비와 아
담한 몸매를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승객을 귀찮아하는 마음이 여실히 드러난 표정을 보자 울컥 짜
증이 치밀었다. 다들 그렇게 느끼고 있다는 것을 남궁씨는 파리로부터 일행과 자리를 가까이하면서 은
연중 생긴 공감대를 통해 감지하고 있었다. 스튜어디스가 칸막이 뒤로 사라지자 누군가가 하품하는 소
리로 말했다.
"저 여자 보니까 한국 다 온 실감나네, 제기랄." 다들 옳소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노파에게 우
황청심환을 가지러 왔던 빨간 잠바가 다시 통로 쪽에서 남궁씨의 어깨를 짓누르면서 노파에게 속삭였
다.
"아까 그 서양 남자는 인물도 좋고 인심도 좋더니만 어쩌면 수인사 한마디 없이 없어져 버렸을까요?
서운하네요, 자매님." "한국땅 다 왔으니 슬슬 구박맞을 준비를 해야지 어쩌겠수." 귀국할 날을 앞두고
딸이 비행기를 에어프랑스로 예약했다고 했을 때 남궁씨는 암말 안 했지만 속으로는 여간 괘씸하지가
않았다. 그 동안 주리 참듯 참던, 빨리 내 나라 땅을 밟고 내 식으로 퍼지고 싶은 욕망은 우선 내 나라
비행기만 타도 반은 충족될 것 같았다. 타기만 하면 당장 내 나라 같을 우리 비행기 놔두고 에어프랑스
라니, 같잖은 것 같으니라구. 그는 별것도 아닌걸 가지고 딸을 고깝고 아니꼽게 여기면서도 촌스러워 보
일 것 같아 애써 내색하진 않았다.
타고 보니 기내 서비스를 맡은 승무원이 아주 잘생긴 백인 미남이었다. 성지 순례단을 비롯해서 함께
무리를 지어 모여 앉은 한국 사람들의 대부분은 외국여행에 익숙지 않아 뵈는 노년층이었다. 기내 방송
도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 비행기를 탄 긴장감이랄까, 조심성 같은 걸 남궁씨도 이심전심으로 느낄 수
가 있었다. 남궁씨는 혹시 우리 동포가 무시당하는 꼴을 보게 될까 봐 조마조마했지만 미남 승무원의
친절은 참으로 완벽했다. 처음 기내식이 나왔을 때, 마실 것을 월로 하겠느냐를 물을 적에도 일일이 적
포도주 백포도주 맥주 생수 등을 들어서 보여 주면서 환한 미소로 의견을 물었다. 할머니들이 알콜음료
를 천부당만부당 하다는듯이 도리질을 하며 거부하고 맹물을 청하는 모습은 남자들의 술자리에 낀 새침
데기 처녀가 맥주 한 잔도 못 마시는척 질겁을 할 때처럼 귀엽기조차 해서 남궁 씨는 백포도주를 즐기
며 비죽비죽 미소짓곤 했다. 그럴 것 없다고 제일 먼저 아는 척을 한 것은 바로 남궁 씨 옆자리의 노파
였다. 노파는 기회 있을때마다 해외 나들이가 처음이 아니라는걸 비치고 싶어했는데 그때도 혼자만 포
도주를 청해 마시지 않고 뒀다가 배낭 속에 챙기면서 그렇게 해도 상관없다는 시범을 보였다. 다음 식
사때부터 는 너도나도 그대로 했다. 병마개를 따지 말고 그냥 달라고 청할 수 있을만큼 할머니들은 미
남 승무원과 쉽게 친해졌다. 포도주를 챙기는 김에 잼이나 버터, 심지어는 일회용 식사도구까지 가방에
쑤셔넣은 이도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처음엔 황송해 하던 백인 미남의 서비스를 마음껏 즐겨보려는
분위기까지 감돌기 시작했다. 자주 물을 청하기도하고 베개나 담요를 더 달라기도 했다. 뭐가 없어졌다
고 손짓 발짓으로 흉내를 내어 그로 하여금 발밑을 더듬게 하기도 했다. 남궁 씨가 아슬아슬해 하는 것
과는 상관없이, 그 미남 백인의 태도는 한결같이 귀부인에 봉사하는 기사처럼 우러나는 기쁨과 공손함
으로 일관했다. 부르지 않아도 잠든 할머니만 보면 흘러 내린 고개를 바로잡아 주고 담요를 양어깨 밑
으로 꼭꼭 여며 주는 모습은 아기를 돌보는 어머니처럼 거짓없이 자애롭고도 완벽하게 아름다워서 남궁
씨는 제발, 그만 그만하라니까 하는 비명을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되곤 했다. 남궁 씨는 자신이 참을 수
없는게 동포들이 주책없는 주접스러움인지 백인의 지고지순한 봉사정신인지도 잘 분간이 안 되었다. 다
만 죽자구나 엉겨붙고 싶어하면서도 밥의 뉘처럼 단호하게 고립된 자신을 느낄 뿐이었다.
그렇게 안 오던 잠이 문득 남궁씨를 엄습했다. 자신의 코고는 소리에 놀러 고쳐 앉길 거듭하면서 그
사이사이에 악몽을 꾸었다. 악몽은 집요하게 연결이 되었다. 노파가 그를 흔들어 깨웠다. 좌석벨트를 매
라는 기내 방송이 들려 오고 있었다. 노파가 기창 밖을 내려다 보면서 다 왔다고 환성을 질렀다. 남궁씨
도 우리의 산천을 눈으로 확인했다. 그러나 곧 산천은 바다로 변했다. 노파도 정말 산천을 본 것일까.
같이 오면서 쭉 궁금해하던 생각이 또 있다. 노파의 시력이 겨우 밤낮이나 가릴 수 있을 정도라는 말과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자주 했다. 뒤에서 웅성웅성 짐을 챙기면서 스튜어디스를 욕하는 소리가 들렸다.
방콕에서 써 버리지 못한 돈을 기내 쇼핑으로 쓸 요량으로 그녀에게 도움을 청한 듯했다. 기다리라고만
해 놓고 코빼기도 안 비치다가 나중에서야 물건이 거의 다 팔렸다고 한 모양이었다. 그녀의 잘못도 아
니련만은 모두를 동족에게 무시당했다고 분개하는걸 들으며 남궁씨는 그간의 부질없는 긴장과 날들이
풍선처럼 쭈그러드는걸 느꼈다.
"그러게 내 뭐랍니까? 내 관상은 못 속인다니까." 노파가 일행 쪽을 돌아다보면서 의기양양하게 외쳤
다. 남궁씨는 속이 근질근질하면서 내 관상도 한번 봐 달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할머니, 하고 부르자
마자 그런 충동은 열없어졌지만 할머니는 의아한 듯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순례단 중에서도 최고령자
답게 백발에 쪼그라든 얼굴이었지만 눈만은 의안처럼 부조화스럽게 홀로 말똥말똥했다. 사물을 제대로
분간 못하기 때문에 더 그럴 수도 있겠고, 사물을 제대로 분간 못한다는게 거짓말일 수도 있으리라. 아
무려면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남궁씨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자기 얼굴을 뚫을 듯이 바라
보는 노파의 눈길이 섬칫했다. 만약 시력이 형편없다는 게 정 말이라면 지금 노파의 눈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어떤 모습일까.
애매한 윤곽 속에 이목구비가 두루뭉수리하게 함몰된 괴물의 형상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악몽 속에서
도 그렇게 생긴 괴물에게 쫓기느라 소리나지 않는 절규로 목구멍을 짐승처럼 헐떡인 생각 이 났다.
공항엔 아내와 맏아들 내외가 마중나와 있었다. 남궁씨는 곁눈질로 열심히 출영객들을 살폈다. 뭘 꾸물
대냐고 아내가 핀잔을 주었다. 회사에선 아무도 마중나와 있지 않았다. 하긴 제멋대로 연장한 여행이니
귀국 날짜를 알 리가 없지. 그러나 그건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만약 회사에서 그 동안 그가 아쉬웠으면
집으로 얼마든지 연락을 취해 볼 수 있는 일이었다. 남궁씨는 울 것처럼 그게 허전하고 쓸쓸했다. 빨리
회사에 들어가 봐야 한다면서 아들도 남궁씨가 머뭇대지 못하게 재촉을 했다. 그놈의 자가용 좀 얻어
타려고 아내가 억지로 아들을 마중 나오게 했으리라고 남궁씨는 짐작했다. 아들의 운전 솜씨는 신경질
적이었다. 전에도 자주 느낀 일이었지만 꼭 푸대접만 같아서 고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그는 막연히
뭔가를 기다리며 차창 밖을 감회 없이 내다보았다. 비행기에선 뛰어내려도 좋다고까지 여길 만큼 밟고
싶어했던 땅이었다. 마침내 돌아왔다는 느낌은 상상한 것과는 딴판으로 삭막했다. 가슴이 울렁거리기는
커녕 무겁게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식구들하고도 아무런 교감이 어루어지지 않은 채 붙
어 앉아 있다는 것은 숨이 답답한 일이었다. 남궁씨는 차창 유리를 조금 내렸다. 바람이 뜻밖에 찼다.
입고 있는 엷은 베이지색 잠바가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이 땅은 옷이 여러 가지 필요한 고장이었다. 사람들마다 따뜻하고 짙은 색깔 옷을 입고 있었다. 같은
기온에서도 봄과 가을 옷이 사뭇 달랐다. 지금은 가을이 깊어 가는 중이로구나. 남궁 씨 는 낯선 나라에
처음 발을 디딘 것처럼 그렇게 생각했다.
"참, 당신 안계신 동안에 큰손님들이 왔다우." 아내는 갑자기 생각난 듯이 말했지만 참고 있다가 내뱉
는 말투였다.
"나한테?"
앞자리의 며느리가 짧게 웃는 소리가 남궁 씨 귀에 거슬렸다.
"그럼 당신한테지 누구한테겠수. 당신이 초청했다면서요. 왜 있잖아요? 재작년인가부터 연락이 닿기 시
작한 당신하고는 육촌인가 팔촌인가 된다는 그 연변 동포 말예요. 초청을 하시려거든 저하고 의논이라
도 한마디하시든지, 갑자기 들이닥치게 하면 어떡해요. 당신도 안 계신 사이에."
남궁씨는 할아버지를 뵌 적이 없다. 그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고, 할아버지에겐 형님이 한 분 계시
다는 것도 아버지로부터 들어 알고 있는 정도지 뵌 적은 없다. 그래도 친할아버지보다 는 종조부에 대
해서 더 궁금해하기도 하고 의미 부여를 하고 싶어한 것은, 청년 시절 나라를 빼앗기는 걸보고 울분을
참지 못해 독립운동을 하러 중국으로 갔다고 전해들은 그 분의 이색적 인 생애 때문이었다. 남궁씨의
아버지가 그 일을 그닥 좋게 말 한 건 아니었다. 당대의 풍습대로 조혼을 한 종조부에겐 그 때 이미 처
자식이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에겐 사촌형뻘이 되는 그 아이가 장성하지 못하고 일찍 죽자, 집나간 남편
을 원망하기보다는 남기고 간 혈육을 제대로 키우지 못한 죄 많은 팔자만을 심히 부끄러워하며 시들시
들 말라가던 그 애 어머니도 삼십을 넘기지 못하고 아들 뒤를 따라간 모양이었다. 어린 나이지만 큰집
이 그렇게 흔적도 없이 무후(無後)해지는 걸 지켜본 아버지는 그 분이 원망스럽기도 했을 것이고 경외
스럽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 분에 대한 아버지의 평가는 들쭉날쭉했다. 해방후 한때는 아버지도
선대에나 당대에 별로 이렇다할 인물을 배출하지 못한 가문을 그 분 덕으로 빛내 볼 생각이 없지 않았
던 듯하다. 툭하면 그 분을 대단한 독립운동가인양 자랑을 하고 싶어했지만, 남궁씨는 어려서부터 솔직
히 말해 그 양반이 독립운동을 하러 갖는 지, 아편 장사를 하러 갔다가 얼어죽었는지 알 게 뭐냐는 식
의 아버지의 폭언을 들어 왔기 때문에 그 닥 믿어지지 않았다. 그나마 남궁씨의 어렸을 적 기억이고 남
궁 씨 역시 소년 시절에 아버지를 여의어서 종조부의 생사나 정체까지 궁금해할 만큼 편안한 세 월을
보내지 못했다. 그러나 자식을 낳아 기르면서 가족사 속에 한두 사람의 의인이나 지사쯤 있는 게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으로 더러 자식들 앞에서 그 어른을 적당히 각색해 울궈먹은 적도 있지만 다 지난
일이었다. 귀담아 듣지 않는 얘기를 무슨 재미로 각색을 하겠는가. 남궁 씨 또한 자신이 각색한 예기는
물론 아버지의 엇갈린 주장이 다 종조부의 진짜 모습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허상이란걸 알고 있었다.
그런 종조부가 만주에 정착해 살면서 퍼뜨린 자손들이 고국의 친척을 찾아 여러 갈래의 통로로 수소문
한 끝에 마침내 당도한게 남궁 씨였다. 당초의 뜻은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나중에 종조부는 독립운동가
도 아편장수도 아니었나보다. 만주에서 만난 조선 처녀와 혼인해서 아들 딸 낳고 농사 짓고 고희의 수
까지 누렸다고 한다. 그러나 고향에 남긴 일점혈육에 대해선 죽는 날까지 잊지 못한 듯 임종할 때도 자
식들에게 언제고 고국땅과 왕래할 수 있는 날이 오거든 제일 먼저 큰형을 찾아가 우의를 나누도록 신신
당부했다고 한다. 그러나 유언을 받든 자식들은 다들 늙어 죽고, 손자들이 늙어갈 무렵에나 겨우 고향땅
과 소식을 주고받고 더러 왕래도 할 수 있을 만큼 길이 트였다.
그들이 바로 종조부의 직계인 남궁씨의 육촌들이었다. 그러니까 그들이 애타게 찾은 국내 친척은 그들
의 큰아버지나 그 후손이었으나 그 집안이 절손 상태이고 보니 마침내 남궁씨한테까지 이른 것이었다.
국내에선 누가 수고를 하고 수소문을 해서 육촌까지 찾아내게 되었는지 그 경로까지는 알 길이 없었으
나, 아무튼 삼대까지 거슬러 올라간 자세한 자기소개와 함께 친척을 찾은 벅찬 감격으로 다소 흥분한
육촌의 편지를 받은 게 재작년이었다. 연변으로부터였고 한문을 섞어 쓴 한글은 유려한 달필이었다. 직
업이 의사라고 했다. 한의사인지 양의인지는 밝히고 있지 않았지만 괜히 한의사일 것 같았다. 최초의 편
지에는 남궁씨도 만감이 교차하여 즉각 회신을 보냈으나 다음부터 피차 할 말도 없어지고 하여 일 년에
두세 번씩 안부나 주고받았었다.
그 쪽 역시 할 말이 없어서 였겠지만 편지 사연은 죽기 전에 고국땅 한번 밟아 보고 싶다는 절절한 소
원으로 일관했다. 남궁씨도 자연히 언제든지 오기만 하면 환영한다는 의례적인 답장을 쓴 적은 있어도
정식으로 초청장을 보낸 적은 없었다.
그 쪽에선 그 정도의 편지가 초청장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일까, 남궁씨는 속으로 의아했지만 초청한 일
이 없다고 말하기도 싫었다. 발뺌 같아서였고 연변 친척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은 식구들의 냉
담한 태도가 울컥 밉살스럽기도 해서였다.
"언제 왔는데?"
"한 달포는 됐을 걸요."
"그럼 왜 나한테 연락을 안 했소. 내가 영애네 가 있을 적인데."
"연락했으면요? 연락했으면 생전 처음 나간 외국 여행 걷어치고 달려오실려구요? 정성이 하늘에 닿았
구랴."
아내의 말투는 비꼬는 투였고, 또 몹시 공격적이었다. 남궁씨는 자기가 없는 동안 식구들이 마음껏 친
척들을 푸대접한게 눈에 보이는 듯해 와락 역정이 치밀었다.
"무슨 말을 그렇게 고약하게 하는 거요? 생전 시집식구 치다꺼리라고는 모르고 살더니만 버르장머리하
고는……." 남궁씨는 며느리하고 함께 라는 것도 잊고 언성을 높였다. 아들과 나란히 앞에 앉은 며느리
가 어깨가 흔들릴 정도로 킬킬댔다.
"내가 시집 식구 치다꺼리를 안 했다구? 아이구 기가 막혀." 할말이 너무 많아 되레 말문이 막혀 입술
만 떠는 아내를 바라보면서 남궁씨는 비로소 아차, 싶었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아내야 사년 동
안이나 노모의 뒤를 받아 낸 시집살이를 생각하고 분개하고 있다는게 뻔했지만, 남궁씨는 우황청심환으
로 하여 겪은 모멸감마저 떠올랐다.
"아버님, 우리도 하느라고 했어요. 어머님은 저녁 초대도 하고 여관에 김치도 나르시고, 아범도요 바쁜
사람이 일요일도 못 쉬고 롯데월드랑 육삼빌딩이랑 모시고 다닌 걸요. 차가 있으니 어쩌겠어요."
단지 차 때문이라는 말투였다. 이까짓 똥차 하나 굴린다고 유세하는 말투가 마뜩찮아 남궁씨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나 화살은 만만한 아내 쪽으로 돌렸다.
"아니 그럼 그 먼데서 온 친척을 여관에서 묵게 내버려뒀단 말이오?"
"그래요. 그러니 어쩔 테요. 당신이 이렇게 공 모르는 사람이란걸 모르고 나도 처음엔 집으로 모실려고
했다우. 그 쪽에서 마답니다. 한두 식구라야죠. 당신 육촌이 달고 온 식구가 도대체 몇인 줄이나 아슈?"
"그럼 육촌 혼자가 아니란 말이요?"
남궁씨의 언성이 슬그머니 누그러졌다.
"마나님하고 동부인을 한데다가 처제에다 처조카까지 안동을 하고 왔습니다. 무슨 살판이 난 줄 아는
지, 자그만치 네 식구예요."
몽매에도 그리던 조국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어떻게 저런 말투를 쓸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남궁씨
가 뭐라고 하기 전에 며느리가 먼저 참견을 하고 나섰다.
"어머님, 지금 그 식구들이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래 네 말이 맞다. 이 양반이 하도 남의 화를 돋우니
까 초점이 흐리게 되지 뭐냐? 그 사람들이 여럿인건 문제도 아니라구요. 그 여럿이 제가끔 얼마나 큰
한약 보따리를 들고 왔는지 알아요? 우황청심환만 해도 네 사람걸 한데 모아 논게 이불 보따리만합니
다."
남궁씨는 우황청심환 소리에 정신이 번쩍났다. 중국을 찾는 한국 관광객이 그걸 몽땅 쓸어 사는 바람
에 지방에 따라서는 품귀 현상까지 빚고 있다 는걸 신문에서 읽은 생각이 났다. 그 좋은 게 저절로 굴
러 들어왔는데 모두들 귀찮아 하는 걸 남궁씨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우황청심환이라면 현금과 마찬가질텐데 무슨 걱정이란 말이요?"
"그랬으면 오죽이나 좋겠수, 이 답답한 양반아. 글쎄 중국산 우황청심환이 함량미달의 가짜라는 게 밝
혀졌지 뭐유. 우리 기술로 분석한 결과 그렇게 밝혀졌다고 신문에서 떠들고 나자 청심환 인기가 뚝 떨
어질밖에요. 하필 고때를 맞추어 그 사람들이 들이닥칠게 뭐람."
아내의 말에 추연한 동정심이 어렸다. 요는 우황청심환이 문제지, 아내가 그 사람들을 특별히 귀찮아하
는 것은 아닌 듯했다.
그 사이에 그런 변화가 있었던가? 겨우 두달 상간이었다. 용궁의 사흘이 이 세상에선 삼십 년이더라는
옛날이야기 속을 들어갔다 나왔으면 모를까, 남궁씨는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현실에 적
응하려고 애썼다.
"안 팔리면 도루 가져가면 될 거 아뉴? 절대로 가짜일 리는 없으니 우리라도 좀 팔아 주든지."
"좀 팔아 줘서 될 일이 아니라니까요. 이 기회에 생전 살걸 벌어 보자고 작정을 한 사람들 같더라구
요."
"그럴리가 있겠소. 의사라던데. 사회주의 나라니 노후 걱정은 안 해도 될테고."
"사회주의가 물욕에 눈뜬건 더 못 봐 주겠더라구요. 어머니 말씀이 맞아요. 약장사 한탕 잘하면 팔자를
고치는 걸로 소문이 나 있고, 실제로 초기에 다녀간 동포들은 생전 벌어도 못 만져 볼 큰 돈을 번 것도
사실이고요. 그러니 너도나도 올려고 안 하겠어요? 그 쪽 정부에서도 나가서 요령껏 딸라 좀 벌어 오라
고 부추기는 인상이거든요. 여행은 허락하면 여비는 한푼도 못 갖고 나가게 하고 물건은 얼마든지 괜찮
다니 음성적인 수출장려지 뭐예요. 거의가 다 빚을 얻어서 그렇게들 약재를 사 온다니 정부나 개인이나
그런 식으로 딸라에 환장을 해서 어쩌겠다는 건지, 참 그 사람들 큰일이에요."
처음으로 운전석의 아들이 참견을 했다. 냉정한 말투였다. 결혼 날짜를 받아 놓고, 너는 맏이니까 그런
생각이 없을 줄 안다만 우린 아직 젊고 앞으로 결혼시킬 애들도 남아 있으니 일년만 같이 살고 내보내
주겠다고 크게 인심쓰듯 말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아들은 망설이지 않고 딱 잘라 말했었다. 우린 처음부
터 나가 살겠습니다. 그 때도 그렇게 냉정한 말투였다. 남궁씨는 그 때 오만정이 떨어지던 걸 어제 일처
럼 떠올리면서 일부러 입을 꽉 다물고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나 속으로는 뭐가 큰일이냐? 이까짓 똥차
하나 유지하려고 삭신을 혹사하는 너는 뭐가 좀 낫냐? 하고 비꼬고 있었다.
"아버님도 이제 만나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 사람들 어쩌면 그렇게 후진지요, 꼭 우리의 오십년대말 같
은 궁상이라니까요." 며느리의 이런 말에도 남궁씨는 속으로만, 본데없는 것 같으니라고, 시집 어른들한
테 그 사람들이 뭐냐? 그래도 들은 풍월은 있어서 뭐 오십년대말? 넌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어. 너 따위
가 그 시절의 의미를 뭘 안다구. 이러면서 자기만이 오십년대를, 그 신산한 세월을 부둥켜안은 것처럼
느꼈다.
아들 내외는 문지방도 안 넘고 집앞까지만 데려다 주고 돌아갔다. 아들은 회사로 급히 들어가야 한다
고 했고, 며느리는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라고 했다. 남궁씨는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트렁크를
메다꽂으면서 아내에게 신경질을 부렸다.
"걔들은 왜 불렀소? 그까짓 자가용 얻어 타자고? 공항엔 버스도 택시도 동났답디까? 도대체 영감을 어
떻게 보고, 외국 한번 나가는걸 무슨 벼슬인 줄 알고 공항엔 꼭 자가용으로 들락거리고 싶어하는 족속
취급을 하는게요? 남도 아니고 자식한테 그까짓 똥차 한번 얻어타고 이런 수모를 겪게 하니."
"걔들이 뭘 어쨌다고 그러세요? 그리구 똥차 아녜요. 이번에 새로 뺐어요. 쏘나타루다. 보태 준 거 없이
그만큼 사는걸 대견해 해야지 어쩌겠수."
아내가 불붙는데 키질을 삼가고 심란한 목소리로 다둑거렸다.
그 때 전화벨이 울렸다. 아이구, 얼마나 기다렸으면 때도 잘 맞추네. 보나마나 연변동폴걸. 이렇게 중얼
거리며 수화기를 들었다.
"예, 예, 방금 들어오셨어요. 예, 예, 바꿔드릴게요." 얼떨결에 수화기를 받아든 남궁씨는 여봅쇼, 아, 성
님이요? 나요 나, 령이가 왔소, 날래 보십시다. 하는 소리가 하도 우렁차서 수화기를 약간 떼면서 자기
도 모르게 피곤한 목소리가 나왔다.
장장 스무 시간을 비행기만 탔다는 얘기와 그 동안에 거의 눈을 붙이지 못했으니 지금 누우면 내일까
지 못 깨어날 것 같다는 변명을 두서없이 하면서 아내를 행해 곱지 않은 눈을 떴다. 도착할 시간을 그
렇게 정확하게 가르쳐 줄게 뭐였을까 싶어서였다. 남궁씨는 자기도 연변 동포를 귀찮아하고 있다는걸
상대방이 눈치 챌까봐보다는 아내가 알까봐 더 신경이 써졌다. 래일이요? 래일 두 일없구말구요. 육촌아
우뻘 되는 영의 못소리는 여전히 명랑 하고 씩씩했다. 건강하고 감정이 섬세하지 않을 것 같은 목소리
에 남궁 씨는 친화감을 느꼈다. 아내가 밥상을 차리는것 같았다. 구뜰한 된장국 냄새가 났다. 딸네 집에
서도 우리 식으로 먹었지만 아내의 된장국 맛은 그의 집에서만 볼 수 있는 맛이었다.
만 하루를 기내식으로만 견딘 속은 그득한데도 식욕이 동했다.
그러나 남궁씨는 토라진 마음 때문에 꾹 참고 오로지 잠이 급한 것처럼 자리 먼저 깔고 길게 누웠다.
허리와 사지를 마음껏 뻗는 쾌감이 에구구, 소리가 절로 나게 황홀했지만 잠은 생각처럼 쉽게 오지 않
았다.
"주무시우? 아마 못 주무실 거유. 시차라는 게 그렇답니다." 아내가 머리맡에서 이렇게 운을 떼고 나서
계속에서 구시렁거렸다. 또 연변 동포들 얘기였다. 남궁 씨는 못 듣는 척했지만, 수면을 갈망하면서도
잠들지 못할 때의 불유쾌한 각성 상태를 아내의 목소리는 마냥 끌고갔다. 차내에서 못다한, 연변동포들
이 얼마나 못살고 조야하고 억척스럽다는 얘기를 아내는 지치지도 않고 하고 싶어했다. 가짜로 판명이
난 청심환을 진짜라고 우기면서 연줄을 통해 억지로 떠맡기는 것도 한계에 달한 동포들이 직접 거리로
나앉아서 덕수궁 돌담길이 중국산 약종상 길로 변했 다는 얘기도 했다. 설마 그럴리가. 남궁 씨는 두 달
도 안 되는 사이에 세상이 그렇게 변했다는게 믿어지지가 않아 제 집, 제 잠자리로 돌아왔다는 실감까
지 잡치는 걸 느꼈다. 아내도 이상했다. 남궁 씨의 친척을 꼭 집어 지칭하지 않고 일반론처럼 말하면서
도 아내의 말투엔 지나친 관심과 혐오감이 배어 있었다.
다음 날 아내가 가르쳐 준대로 찾아간 여관은 광화문 근처의 중심가였지만 재개발 지역이라 환경이 구
질구질했다. 그 금싸라기 땅에 빈집도 더러 눈에 띄었다. 여관은 버젓한 오층 건물이었지만 마지막날까
지 제 몸 안 아끼고 돈만 버느라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있었다.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김치찌개 냄새
가 진동을 했다. 접수창구가 달린 현관방에 여러 식구들이 모여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접객업소의
무신경이 못마땅하여 남궁씨는 적당히 거만하게 삼백오호실 손님에게 인터폰을 넣어 달라고 부탁을 했
다.
"아, 그 연변서 온 사람들 말이죠. 올라가 보슈. 그냥 올라가 봐요."
꾸역꾸역 밥을 먹고 있던 주인이 퍼질러앉은채 턱주걱으로 이층으로 난 계단을 가리키며 말했다. 남궁
씨는 그런 불손한 태도에서도 주인이 연변 동포를 얼마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는 지 짐작할수가 있
었다. 우중충하고 눅눅한 복도 구석방이었다.
노크를 하면서 문을 밀어 봤더니 쉽게 열렸다. 남궁씨보다 훨씬 늙어 보이면서도 낙천적인 동안의 남
자가 누구냐고 확인도 하지 않고 아이고, 성님 하면서 와락 달겨들더니 남궁씨를 껴안고 볼을 부볐다.
완전 서양식이었다. 그의 힘찬 가슴의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면서 남궁씨는 비로소 감동이 벅차 오르는
걸 느꼈다.
한편 그가 울까 봐 겁이 나기도 했다. 그 때 하필 친척 아니라도 동포만 만났다 하면 눈물을 철철 흘
린다는 이북 사람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남궁씨는 그것만은 따라 할 자신이 없었다. 남궁씨를 풀어 준
연변 아우는 그러나 활짝 웃고 있었다. 우리 친척 중에 저런 웃음을 웃을 수 있는 이가 있다니, 싶을 만
큼 눈부시고 너그럽고 대륙적인 웃음이었다. 하긴 의인 아니면 기인이었을 종조부의 직계 후손이니까.
그는 소년처럼 종조부의 혈통이 자랑스러워지면서 아직도 속에서 보깨던 소인스러운 오만가지 잡념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걸 느꼈다. 늙은 여자 중 한 사람이 아이고 아지바니, 하면서 그의 손을 잡았다. 그
리고 정식으로 뵙기요, 하면서 남편에게 눈짓을 했다. 남궁씨더러 먼저 자리에 앉길 권했지만 엉거주춤
하고서 있다가 그들의 절에 맞절로 답했다. 육촌 계수하고 생긴 거나 연령이 비슷해 보이는 부인이 처
제라고 했다. 식구들한테 들은 처조카는 보이지 않았다.
"한 분 더 계시다고 들었습니다만."
남궁씨는 그이들과 금세 친밀감을 느낄 수 있어서 마음이 놓였으나 역시 할말은 없어서 그것부터 물었
다.
"련희 말인갑다. 글씨 갸아가 어제 남대문시장 귀경갔다가 기름튀기가 먹음직하다고 한 보따리를 사다
가 밤새 쉬엄쉬엄 다 처먹드니만 리질을 만났나, 저리 뒷간을 들락날락해싸니." 처제라는 노부인이 말했
다. 물 내리는 소리가 나고 화장실 문이 열리면서 한창 나이에 활짝 핀 아가씨가 상냥하게 인사를 하면
서 나타났다. 방에 화장실이 딸렸다는게 여간 다행스럽게 여겨지지 않았다. 젊다는건 좋은 일이었다. 아
가씨는 얼굴도 곱고 아무렇게나 입은 평상복도 세련돼 보였다. 남궁씨는 비로소 긴장을 풀고 방안을 살
펴보았다. 장판 비닐이 주글주글 낡은 방은 부모 자식간이라 해도 네 식구씩이나 기거하기엔 협소한 방
이었다. 게다가 한쪽 벽엔 우황청심환을 비롯한 각종 약재가 장롱 하나 부피는 되게 쌓여 있었고 그 위
에는 녹용이 한대 통째로 우아하고도 신비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궁 씨 눈엔 우황청심환
만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가족사 속의 한 기인이 만들어 낸 불가사의한 거리를 뛰어넘어 간신히 상봉
한 후손들의 감회를, 우황청심환의 값어치가 떨어진 것만큼의 무게가 짓누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처량하
고도 고약한 느낌이었다. 만약 저 아우가 한낱 환약 따위의 값어치에 따라 인격까지 격하시키는 이 땅
의 인심을 안다면 어떤 마음일까 자괴하면서도 그런 느낌을 극복할 수는 없었다.
아니나다를까, 서로 기억의 족보를 대조도 하고 오르락내리락 하기도 하면서 남궁가의 틀림없는 후손
이고 육촌간이라는 걸 확 인하는 절차를 끝내자마자 육촌은 약 얘기를 꺼냈다.
"운수가 나빴든기라요. 집 떠난 건 구월인데 남들은 일 주일 만에 받는 비자를 우리는 미운 털이 박혔
는지 차일피일하는 바람에 홍콩에서 한 달이나 지체를 했으니. 하필 그 동안 여기서 그 가짜 소동이 나
지 않았겠소. 날은 자꾸 추워지고 반값에라도 후딱후딱 파는 게 수라고 어찌나 성화들을 하는 지, 래일
부터라도 당장 거리로 나앉아 딴 동포들처럼 좌판을 벌이고 싶은데 그 전 에 성님하고 의논을 하게 됐
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오." "내가 무슨 힘이 있어야 말이지."
"도와달라는 게 아니야요. 성님한테도 리가 될 것 같아 하는 소리지요. 정말 반값이라니까요. 우린 그저
본전치기나 하자는 게지요. 금세 오를테니 두고보시라우요. 앞으로 들어오는 량이 줄 건 뻔한 리치구요."
육촌이 돈 아쉬운 사람다운 궁기나 조바심을 전혀 나타내지 않고 느긋하고 명랑하게 그런 말을 하는
게 남궁 씨 보기엔 매우 신기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쉽게 달고 쉽게 식는 이 쪽 풍토를 충분히 알고
있다는 태도도 조금도 냉소적이거나 업수이 여기는 투가 아니고 마냥 너그러워 보였다.
"사회주의 나라에서 온 자네가 더 장삿속에 밝으니 놀랍구만.
여기서 눌러 살아도 한밑천 잡고 살겠어."
남궁씨는 그런 말로 완곡한 거절을 대신했다.
"아이구 성님, 누가 죽을 때까지 호강을 시켜 준대도 못살 뎁디다."
"왜요? 왜 못살아요?"
여기가 마음에 들었음이 역력한 계수가 쳐닿듯이 물었다.
"왠 왜야 그 소리를 어케 믿고 살아, 살긴" 이렇게 핀잔을 주고나서 여편네들은 시장으로 백화점으로
쏘다니는 재미에 세월 가는 줄 모른다고 남궁씨에게 설명을 했다.
남궁씨도 그 기회에 여자들에게 말로 수인사를 치렀다.
"어렵고 먼 길을 오셨는데 이런 누추한데 계시게 해서 면목이 없습니다. 식구들 불찰도 있지만 제힘이
워낙 딸려서요." "성님도, 이 호텔이 어드래서요. 우린 여행사 잘 만나서 얼마나 호강인지 몰라요. 몰아
다가 짐짝처럼 부려만놓고 나 몰라라 해서 당장 잠자리 때문에 고생하는 동포가 얼마나 숱하다구요." 듣
고 보니 여행사가 초청장은 물론 어떤 약재를 들여오면 가장 수지가 맞는다는 정보까지 제공해 주면서
적극적으로 여행 알선을 한만큼 여관비등 최소한의 경비는 조달할 수 있도록 약재 판매에도 어느 정도
관여하고 있는 듯했다. 그럴 리야 없지만 자기가 정식 초청자가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남궁씨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못 말릴 소심증이었다. 방값만 내면 되고 식사는 방에서 지어먹는다고 했
다. 현관서부터 여관 전체에 음식 냄새가 배어 있었다. 여인숙과 민박을 혼합한 것 같은 더러운 여관방
을 꼬박꼬박 호텔이라 부르는 아우에게 남궁씨는 연민을 느꼈다. 개운치 않은 연민이었지만 아무튼 그
런 느낌의 연장선상에서 돌연 생겨난 우월감 때문에 남궁씨는 적지 않은 양의 우황청심환을 팔아 보겠
다고 떠맡았다.
거리에 나선 남궁씨는 촌스러운 보자기 사이로 비죽비죽 비져 나오는 청심환갑을 내려다보이면서 왜
하필 허구많은 약재 중에서 우황청심환이었을까? 하고 자신의 미련한 선택에 쓴웃음을 지었다. 갈 데가
없었다. 집에 가긴 싫었다. 연변 친척에 대한 아내의 혐오감만 돋울 일은 피하고 싶었다. 그는 용기를
내서 회사로 향했다. 그까짓거 이판사판이다 싶었다. 그 동안 회사에선 집으로 아무 연락이 없었다고 한
다. 출근해 봤댔자 자신의 입지가 남아 있으리라는 희망은 없었다. 그러나 오백만원도 안되는 포상여행
비만 받고 떨어질 순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공로를 그렇게 과소평가 당할 수 없다는 생각은 소심한
그로서는 파격적인 생각이었고, 전엔 감히 꿈도 못 꿔 보던 생각이었다.
그 동안 사장실을 어찌나 잘 꾸며 놨는지 한때 자신이 몸담고 있었던 데라는 느낌이 조금도 안 났다.
다행이었다. 그 대신 뒤쪽으로 조그맣게 회장실이란 구석방이 하나 새로 생겨난 게 눈에 띄었지만 안은
집기 하나 없이 텅 비어 있었다. 그가 거기라도 붙어 있으려는 눈치면 그 때 가서 책상 하나 걸상 하나
놔주려는 속셈이 뻔했다. 그는 보따리를 놓고 사장실에 버티고 앉아 출타중인 젊은 주인을 기다렸다. 돌
아온 사장은 그를 깍듯이 대접했고 그는 덕택에 좋은 구경 많이 한 사례와 앞으로는 슬슬 여행이나 하
면서 지낼 생각이라는 사의를 동시에 표현했다.
"회장님으로 모실 생각이었습니다만 ……"
젊은 사장이 말끝을 흐렸다. 자네 호의는 받은 셈치겠네, 하면서 남궁씨는 약보따리를 끌렀다. 자초지
종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나서 덧붙였다.
"하필 가짜라고 소문난 물건을 가져와서 안 됐네만 속내 아는 자네가 갈아줘야지 어쩌겠나?"
"가짜는요. 그건 사회주의 나라의 경제체제를 모르는 무식한 사람들이 하는 소리지요. 공장이 다 국영
인데 어떻게 가짜를 만듭니까. 함량 기준이 우리하고 좀 다르다고 가짜라고 단정을 해 버리니, 국교를
목말라하면서 그런다는건 암만 생각해도 경솔한 짓이에요."
이렇게 적극 청심환을 두둔하면서 그걸 몽땅 인수해 주었다.
"고맙긴 하네만 그걸 다 얻다 쓰려구?"
"두고두고 해외에 나갔다 올 적마다 선물로 쓰죠 뭐. 나갈 때마다 선물 챙기기도 보통 일이 아니거든
요."
"내친 김에 하나 더 청을 하겠네. 꼭 들어 줘야 하네. 안 들어주면 퇴직금 달라고 데모할지도 모르니
알아서 하게." "설마 제가 퇴직금 안 드릴까봐 이리 엄포를 놓으십니까? 말씀해 보세요."
남궁씨는 녹용을 사 달라는 부탁을 했고, 그는 가져와 보라고 반승낙을 했다. 남궁씨에겐 연변 아우에
게 여기선 보통 부자가 어느 만큼 사나 보여주고 싶다는 허영심이 있었고, 젊은 사장에겐 골치 아픈 공
로자를 몰인정하지 않게 제거하고 싶다는 아량이 있었다. 만사가 그들의 뜻대로 형통하여, 아우는 녹용
을 통째로 삼백만원에 팔고, 돈으로 쳐 바른 육십평짜리 아파트 속도 샅샅이 구경할 수가 있었다.
이제 그만큼 해줬으면 흡족한 마음으로 남은 약보따리를 걸머지고 돌아갈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덕수궁 돌담길에서 시청앞 지하도로 쫓겨 들어간 거리의 약방을 따라 남궁씨의 친척 네 식구도 좌판을
벌였다. 날은 하루하루 추워지고 있었다. 그들의 얇은 초가을 옷과 아무리 도와줘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
는 그들의 욕심이 보기 싫어 모르는 척하려도 갈 데가 없어진 남궁씨의 발길은 매일 그 곳으로 출근을
하다시피 했다. 평화 시장에서 싸고 보기 좋은 두툼한 겨울옷을 사다가 그들의 어깨에 슬그머니 걸쳐
주기도 하고, 유행 지난 옷을 아내와 며느리에게 구걸을 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아내는 눈에 쌍심지
를 돋우고 그들의 궁상에 욕지거리를 퍼붓곤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친척들 곁에 우두커니 앉아서
흥정에 끼여들기도 하고 말동무도 하면서 소일을 했다. 자연히 점심이나 저녁을 같이 할 적도 많았다.
아우도 계수도 소주를 좋아했다. 화장품이랑 꽤 괜찮은 옷이랑 잔뜩 갖다 준 날이었다. 마누라가 아무리
좋은걸 줘도 감지덕지할 줄 모르고 넙죽넙죽 받기만 하는 게 미안 했던지 아우가 거나한 술김에 이렇게
말했다.
"성님도 자식 길러 봤으니 부모 맘이 어드렇다는걸 알죠. 북조선도 가보고 여기도 와 보니까 부모 맘을
닮아갑디다. 자식 중에 못사는 자식이 있으믄 그저 개져다 보태 주고 싶구, 잘사는 자식한테는 조금이라
도 덕을 보고 싶은 리기심이 생기구. 성님이 리해하시라우요."
그러고 나서 그들이 북조선에 처가 친척을 만나러 갔을 때 얘기를 했다. 마누라는 준비해 가지고 간
것을 다 털어 주고도 신고간 신, 입고간 옷까지 동생의 헌 것하고 바꿔입고 왔다고 했다. 그럼 그들의
기죽을 줄 모르는 뻔뻔스러움은 부모 의식의 당당함이었단 말인가. 남궁씨는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그
들이 싫어지거나 미워지지 않았다. 체류 기간을 연장하면서까지 그들은 가져온 걸 다 처분하고서야 떠
났다. 아내는 앓던 이가 빠진 것보다 더 시원하다고 했다. 그러나 남궁씨는 이제부터 혼자 월로 소일을
하나, 끈 떨어진 뒤웅박처럼 막막했다.
그날 밤 잠자리에서였다. 아내가 조용히 눈물로 베개를 적시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내는 자주 그
랬고 또 왜 그런 다는걸 남궁씨는 알고 있었지만 근래에 그런 눈치를 보인 건 처음이었다. 아내가 그
버릇을 고친 게 아니라 그 동안 연변 친척한테 정신이 빠져 아내의 설움에 너무 소홀했었나 보다. 그는
하던 버릇대로 아내를 돌아 눕혀 조용히 안아 주려고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아내가 기다렸다는 듯이 와
락 돌아누우며 그의 가슴을 마구 두드렸다. 격렬한 오열 사이사이로 아내가 울부짖었다.
"현이 자식 나쁜 자식. 망할 놈의 새끼야, 그 새낀 정말. 아 아, 당신 말짝으로 그 새낀 망종이야. 고작
그게 사회주의라니? 그 거렁뱅이 근성이. 그 자식은 그게 뭐가 좋다고 신세를 망치고. 엉, 엉, 엉."
아내는 막무가내로 울부짖었다. 남궁씨는 비로소 그 동안 그들 부부가 사이에 끼고 엇갈린 게 연변 동
포가 아니라 둘째아들 현이였다는걸 깨달았다. 연변동포에 대한 미움도 호의도 실은 그들의 실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낯선 친척을 보는 시각의 차이는 현이로부터 비롯되고 있었다. 현이는 대
학 일학년 때부터 운동권이었다. 아무리 타일러도 소용이 없었다. 남궁 씨는 자신의 소년 시절을 엉망으
로 밟고 지나간 육이오의 기억으로 운동권은 다 좌익으로 보았고, 좌경의 소지라면 이를 갈았다. 집안
망칠 망종 취급을 했다. 아내는 그가 말끝마다 아들을 망종이라 부르는 것을 제일 듣기 싫어했다. 아들
의 말에도 일리가 있을 테니 들어 보고 이해해 주자고 아무리 애걸을해도 남궁 씨한테는 먹혀들지 않았
다. 아들 또한 아버지하고는 한자리에서 입을 어울리기도 싫어했다. 부자지간은 점점 원수처럼 돼갔고,
현이는 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때려치우고 노동의 현장에 직접 뛰어들겠다며 아주 집을 나가 버렸다. 가
끔 옷도 가지러 오고 전화로 안부도 묻고, 즈이 애미하곤 그런대로 연락이 되고 있는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가. 남궁 씨도 가슴이 덜컹 내려앉 았다. 아내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올 겨울엔 어떻게 된게 옷도 안 가지러 오고 전화도 없구, 엉 엉 엉, 어디 가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엉 엉 엉." 어떻게 아내를 위로할 것인가. 남궁씨는 첫 포옹처럼 가만가만 아내를 안았다. 그리고 가슴을
열고 서로의 상처를 조심스럽게 맞댔다. 나에게도 같은 상처가 있다오. 그걸 확인시켜 주는 것밖에 위로
의 방법이 없었다.
34. 아랑의 정조
- 박종화
1
아랑― 아랑은 백제의 새악시다. 아랑의 어여쁜 소문은 서울 북한 및 천호 장안에 자자하게 퍼졌다. 아
랑의 남편인 도미는 솜씨 있는 목수로 그의 이름이 백제 서울에 유명했지마는, 그보다는 어여쁜 아내
아랑을 가진 복성스런(복 있어 보이는) 청년 도미로 이름이 더 높았다.
‘저 사람이 유명한 목수 도미야.’ 할 때보다도, ‘저 사람의 아내 아랑은 여간 어여쁜 것이 아니야.
왜 그 아내를 잘 두었다는 목수 도미란 사람 있지 않어? 바로 그 도미야.’ 듣는 데서나 아니 듣는 데
서나 사람들은 이렇게 도미를 소개했다.
자기의 천직인 목수보다도 반드시 어여쁜 아내를 잘 두었다는……, 그것을 먼저 입초수(입)에 올렸다.
자기의 재주가 인정되어 세상에 유명해졌다는 것보다도 자기 아내의 아름다운 것 때문으로 해서 자기의
이름이 세상에 인정된다는 것은, 장인(손으로 물건 만드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으로서의 그다지 마음
즐길 일이 아닌 것이 보통 심경일 것이지마는 도미는 여기에 대해서 조금도 불복(불만)이 없었다. 불복
이 없을 뿐만이 아니라 이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도미는 오히려 빙긋 웃어 입이 슬그머니 벌려지고 말
았다. 무척 사람이 좋은 때문도 되지마는 나라에 제일 가는 아름다운 여자를 아내로 두었다는 행복스런
느낌이 도미의 가슴에 뻐근히 찼음이리라.
아닌게아니라 아랑은 무척 잘생긴 여자였다. 어여쁘다 해도 그대로 아기자기하게 어여쁜 편만이 아니다.
맑은 눈매하며 빚어 붙인 듯한 결곡(얼굴 생김새나 마음씨가 깨끗하고 여무져서 빈틈이 없음)하고도 구
멍이 드러나지 않는 폭 싸인 아름답고 고운 코는 백제 여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수한 매력을 풍
기는 미(美)지마는, 비둘기 알을 오뚝이 세워 놓은 듯한 동글 갸름한 얼굴판에 숱이 적지도 않고 많지도
않은 알맞은 눈썹과, 방긋이 웃을 때마다 반짝하고 드러나는 고르고 흰 이빨은 두껍지도 않고 얕지도
않은 하얀 귓불과 함께 홀로 아랑만이 가지고 있을 수 있는, 사람을 넋 잃게 할 매력이었다.
여기다가 아랑의 옷거리(옷을 입은 맵시)는 더욱 좋았다. 외로 여민 저고리 위의 날아갈 듯한 어깨판하
며 거듬거듬 주름 잡은 눈빛 같은 흰 치맛자락엔 여위지도 않고 살찌지도 않은, 건강하고 젊음을 풍기
는 탄력 있는 살결이 도마뱀처럼 물결쳐 흘렀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해서 아랑이 백제 서울에 제일 가
는 미인이 될 수는 없었다. 아랑의 반듯한 이맛전 아래 고르게 벌여진 눈썹과 호수같이 맑은 눈매 근처
에는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부드러우면서도 서릿발같은, 사람이 감히 호락호락히 범하지 못할 맑고 맑
은 기쁨이 떠돌았다.
여자란 흔히 아름다우면 음기를 품기가 쉬운 것이다. 그렇지 않고 처절하게 어여쁘다면 독기를 품기 쉬
운 것이다. 그러나 부드러우면서도 기품이 드러나고, 어여쁘면서도 결곡하기는 가장 드문 일이다. 억지
로 우리가 구해 본다면 성스러운 관음 보살의 얼굴에서나 적이 이 고결한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아랑을 한 번 본 사람은 백제 서울에 제일 가는 미인이라 떠들었고, 아랑을 한 번도 못
본 사람이라도 떠도는 소문만 듣고 도미의 아내 아랑은 나라의 첫손을 꼽을 미인이라고 덩달아서 칭찬
했다.
도미는 사실 행복스러웠다. 아내 아랑이 백제 서울 안에서 제일 가는 미인이 된다는 것도 사나이로 앉
아서 즐거움의 하나지마는, 사실 아랑은 얼굴뿐만이 아니라 마음씨도 착하고 집안 일도 잘 보살폈다. 도
미가 솜씨있는 목수로 나날이 예간다, 제간다 하고 으리으리한 대궐 이룩하는 일이나 대갓집 고래등 같
은 기와집 짓기에 비두(첫째)로 뽑혀가는 동안은, 아랑은 길쌈을 짠다, 빨래한다, 온종일 부지런히 집안
일을 보살피기에 분주했다. 이리하다가 해가 설핏해서 서산에 걸릴라치면 또다시 부엌 속으로 뛰어들어
가서 저녁밥을 잦히고(밥이 끓은 뒤에 불을 약하게 하여 물이 졸아들게 하고) 된장찌개를 끓여서 돌아
오는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해가 땅거미가 질 무렵, 도미가 일터에서 일을 마치고 아랑이 혼자서 기다릴 생각을 하고는 걸음을 빨
리하여 휘파람을 불면서 동구 앞으로 들어서면, 아랑은 물묻은 손을 행주치마에 씻으면서 부리나케 삽
짝문(잡목의 가지로 엮어 만든 문짝) 밖까지 쫓아 나가서 쌍긋 흰 이빨을 드러내 웃으며,
“도미! 어서 와요.”
하고 반갑게 도미의 팔뚝을 끌어안는다. 이럴라치면 도미는 온종일 그립던 아랑이 반가워서,
“아랑! 퍽 기다렸지?”
하고 마주 아랑을 껴안으며 아랑의 그 맑은 눈을 정열이 타오르는 도미의 눈으로 쓰다듬어 위로해 준
다. 이럴 때마다 아랑의 길고 검은 속눈썹에는 반가움과 행복감에 넘치는 안개같은 눈물이 촉촉히 서리
곤 한다. 도미가 먼지를 털고 세수를 하고 일터 옷을 벗어서 고운 옷과 바꾸어 입은 뒤에 밥상을 받고
앉을라치면, 아랑은 상머리 맡에서 배추김치를 찢어 주고 식어 가는 된장찌개를 다시 데워다 준다.
“밥 가지구 와, 우리 같이 먹어.”
도미가 이렇게 말할라치면 아랑은 새색시같이 부끄러워했다.
“이따 임자 상이 나거들랑.”
“이거 왜 밤낮 저 모양이야. 아랑이 밥 안 가지구 오면 나두 안 먹을 테야.”
도미는 머슴애처럼 골을 내고 숟가락을 내던졌다. 흘기는 눈에는 담뿍 정열을 싣고. 아랑은 못 이겨서
봉당(안방과 건넌방 사이에 마루를 놓을 자리를 흙바닥 그대로 둔 곳)에 내려가 숟갈 하나와 밥 한 사
발을 들고 왔다. 오기는 왔으나 밥사발을 도미의 소반 위에는 올려놓지 않는다. 방바닥에 놓고 조심조심
숟가락을 옮긴다. 아무리 남편의 앞일지언정 행여 입안의 밥알이 보일까 하고. 날마다 하루 한 때 이때
부터가 도미와 아랑이 가장 행복을 느끼는 때였다. 밥상을 물리고 나서 도미와 아랑은 마주 앉아서 온
종일 지낸 일을 서로 이야기했다.
“도미, 오늘도 대궐 일 했소?”
“그럼, 대궐 짓기가 그렇게 쉬운가. 오늘은 전각(대궐)에 들보를 올렸지. 참 재목 좋드라. 바루 유주목
인데, 천년은 묵었을 거야. 내 아람으로 네 아람은 되거든. 바루 아차산 꼭대기에서 벤 나문데, 소 사람
얼러서(합해서) 오백 명 품(어떤 일을 하는 데 드는 힘)이나 먹여서 끌어왔어. 나뭇결이 어떻게 좋은지
대패가 힘 안 들이고 잘 나가거든. 아무리 장인의 솜씨가 좋다손 치더라도 재목이 나쁘면 신이 나지 않
거든!”
“아유, 천 년 묵은 나무! 그 나무, 구경 좀 했으면.”
“대궐을 다 지어 놓거든 내 솜씨도 보일 겸 한번 구경시켜 줄게, 아랑…….”
“이런 여염집(일반 백성의 살림집) 여자를 무어 함부로 들어가게 할 리가 있나…….”
“도편수(목수의 우두머리)한테 말하면 우리 아랑이야 못 구경시켜!”
“그럼 꼭 임자가 지은 대궐을 구경시켜 주어요. 도미!”
“염려 말어, 그까짓 거. 아랑! 오늘은 무어 했어?
“맞춰 보아.”
아랑은 상긋이 웃으며 도미를 쳐다본다.
“글쎄……, 오늘은 전부터 짜던 삼승(올이 굵은) 무명(솜에서 자아낸 실로 짠 옷감)을 끝마쳤을 게다.”
“아니야 틀렸어, 명주(누에고치에서 뽑은 실로 짠 옷감)를 시작했어. 설날 입을 도미의 저고리 바지를
할 양으루.”
“명주! 명주 옷은 난생 처음이로구나, 아랑 덕에 명주 옷을 다 입는다! 참 설날두 앞으로 서너 달밖에
안 남았지.”
도미는 사실 정말로 즐거웠다. 도미는 아내의 손을 이끌어 쓰다듬는다.
“우리가 혼인을 한 지도 벌써 이태(2년)째가 되지?”
아랑은 방싯 웃음을 머금고 소리 없이 고개만 까딱거린다.
“그런데 아랑! 인제 어린애를 하나 낳아야지.”
“듣기 싫어요.”
아랑은 부끄러워 도미의 무릎을 주먹으로 탁 치고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손을 뿌리치고 벌떡 일어서려
한다.
“못난이, 무에 부끄러워. 누가 있나베. 그런데 아랑, 가만 있어. 내 얘기 한번 듣고 일어나.”
도미는 아랑의 뿌리치는 손을 꽉 쥐고 놓아 주지 않았다.
“아이 아파…….”
아랑은 벌떡 다시 도미 앞에 주저앉아 버렸다.
“이거 봐, 아랑! 나는 암만해도 아랑 때문에 큰일 났어. 목수 도미보다도 아내 아랑을 잘 둔 도미로 이
름이 더 났단 말야. 누구든지 나를 보기만 하면 ‘오, 그 백제서 제일 가는 미인이라는 아랑의 남편 도
미란 말야!’ 하구 이렇게 내 얼굴을 뚫어지도록 보군 하거든.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내 어깨는 막 으
쓱해지지! 그런데 이거 봐요. 어떻게 아랑이 잘생겼다는 소문이 백제 서울에 자자한지, 하루는 대궐서
전각 들보 대패를 메기랴니까 역사(토목· 건축 등의 공사)를 간역하는(토목· 건축 따위의 공사를 돌보
는) 대신이 지나가다가 대패질하구 있는 나를 유심히 딜여다보더니, ‘네 이름이 도미냐?’ 하구 묻기에
‘네, 그렇습니다.’ 했드니, ‘오, 저 백제서 제일 가는 미인 아내를 두었다는 도미로구나.’ 하구 한동
안 내 곁에 서서 대패질하는 모양을 바라보다가, ‘어 참, 대패질 잘한다, 너는 백제서 제일 가는 팔자
좋은 사람이다.’ 하구 한참 칭찬을 허구 가겠지. 내 코가 막 세 발이나 더 솟았지, 하하하.”
“아이 어쩌면, 부끄러워라…….”
아랑은 두 손으로 얼굴을 푹 가리었다.
2
도미와 아랑의 깨가 쏟아질 듯한 재미있는 살림은 나날이 더 깊어 갔다. 이와 정비례해서 목수 도미의
아내 아랑의 아름답다는 소문도 날이 갈수록 서울에 더 자자했다. 도미는 행복스런 중에도 요사이 와서
는 차츰차츰 형언해 말할 수 없는 한 조각 엷은 불안을 가슴속에 느끼게 되었다.
그것은 아랑의 아름답다는 소문이 너무도 지나치게 널리 퍼지는 때문이다.
신라 사람 입에도 올랐다. 고구려 사람 입에도 올랐다. 도미는 오히려 조금씩 괴롭고 무서움을 느꼈다.
도미가 가지고 있는 불안과 공포는, 마치 보배로운 구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너무 소문이 지나치게
자자하기 때문에, 행여 모르는 사이에 구슬을 빼앗겨서 도적 맞을까 하는 근심과 비슷했다.
도미는 전과 같이 일터에서 돌아와서 저녁밥을 물린 뒤에 아랑과 함께 뜰을 거닐었다.
달이 환하게 중천에 높이 솟았다. 가을이나 낙엽 구르는 소리조차 없었다. 기왓골에는 싸늘한 서리가 유
리같이 깔리기 시작한다. 도미와 아랑은 손을 잡고 거닐다가,
“아랑, 춥지 않어?”
하며 도미는 달빛 아래 아랑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아니, 당신의 곁이면…….”
“당신의 곁이면?”
도미가 되받아 물었다.
“언제든지 춥지 않어요.”
이 순간 달빛 아래 해죽이 웃는 아랑의 얼굴은 정말 보배로운 구슬보다도 더 곱고 귀여웠다.
도미는 한 손으론 아랑의 손을 잡고 한 손으론 달빛 비치는 아랑의 웃는 뺨을 쓰다듬어 주었다. 도미는
이 고운 아내 아랑을 어떻게 주체해야 좋을지 몰랐다.
“아랑! 당신은 너무 이뻐.”
도미는 한숨을 쉬고 고개를 뚝 떨어뜨린다. 아랑은 남편 도미의 심경을 알 리가 없다. 잠깐 동안 말없는
침묵이 흘렀다. 두 사람은 또다시 천천히 뜰을 거닐었다.
“아랑, 당신은 더 호강하구 싶지 않어?”
도미가 다시 말을 꺼낸다.
“당신의 곁이면.”
아랑은 말을 마치고 고래를 살래살래 흔든다.
“이거 봐, 이 목수 도미의 아내가 되기에는 당신이 너무 이쁘단 말야. 저 고래등 같은 기와집의 재상의
아내가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장잣집(큰 부잣집) 맏며느리가 되든지 해야 할 감이란 말야. 이 목수놈 도
미의 아내가 되기는 너무도 아깝단 말야.”
“도미! 별안간 그것은 다 무슨 소리요. 나는 재상도 싫어. 장잣집 며느리도 소원이 아니야. 마음 편한
당신의 아내가 제일 좋아.”
아랑의 얼굴엔 반듯한 기품이 서리었다.
“이거 봐, 아랑! 나는 겁이 나.”
“도미, 무엇이!”
“아랑이 너무 이뻐서 세도 좋은 재상이나 장잣집 아들에게 뺏길까 봐서.”
말을 마친 도미의 고개는 기운 없이 수그러진다.
“뺏으면 뺏겼지우? 개돼지요!”
아랑은 싸늘하게 노했다. 도미의 잡은 손을 뿌리친 채 마루를 향하고 올라선다. 달빛 속에 새침히 돌아
서는 아랑의 뒷태도(뒷모습)는 부어 내리는 서릿발보다도 더 차갑다.
3
목수 도미의 아내, 아랑의 어여쁘다는 소문은 이 나라 왕 개루의 귀까지 들어갔다. 개루는 나라를 잘 다
스리고 정사(정치에 관계되는 일)를 잘 베풀었다. 백성의 부세(세금을 매겨서 부과함)를 가볍게 하고 성
과 연못을 잘 가꾸어 바깥 근심을 덜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영특한 임금이면서도 그에게는 한 가지 큰 병통(해가 되는 점)이 있었다. 그것은 다른 것
이 아니라 색을 좋아해서 어여쁜 여자를 가까이 하는 일이었다. 한 사람 두 사람뿐만에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왕 자신은 조금도 이것을 뉘우치지 않는다. ‘영웅은 색을 좋아한다.’ 하는 옛말은 개루에게 있
어서는 여간 아름다운 방패막이 거리가 아니다. 한 개의 말막음 거리가 될 뿐만이 아니라, 개루는 자기
자신이 색을 좋아함으로써 한 사람의 훌륭한 영웅인 것 같은 착각을 꿈꾸고 있었다.
어느 날 개루는 편전(임금이 평소에 거처하는 궁전)에서 신하와 더불어 정사 일을 의논하다가 일이 끝
난 다음에, 이야기가 한가로운 여염의 적은 일에 미쳤다. 개루가 색을 좋아하는지라 신하는 백제 서울
미인의 이야기를 하다가 말이 목수 도미의 아내 아랑에게 떨어졌다.
“백제의 첫 손가락을 꼽을 미인은 목수 도미의 아내 아랑일 겝니다.”
하고 아뢰었다.
“목수로 어떻게 백제의 제일 가는 미인을 얻었소?”
개루는 기괴하게 생각했다.
“그게 다 연분입지요.”
“연분? 아니야, 우연이지!”
강한 성격을 가진 개루는 운명을 부정했다.
“내 후궁에 그래 아랑만한 미인이 없을까.”
색을 좋아하는지라 개루는 한번 아랑의 말을 듣고 좀처럼 생각을 끊을 수 없었다.
“어찌 대왕 후궁에 아랑만한 미인이 없사오리까마는 세상에서 이르기는 아랑은 신라에도 없고 고구려
에도 짝을 구할 수 없는 미인이라 하옵니다.”
개루의 마음은 바짝 움직였다.
“한번 불러 보게 하오.”
우연한 이야기 한 마디가 일이 컸는지라 신하는 어찌할 줄을 몰랐다.
“부르시기야 어려운 노릇이 아니오이다마는 아랑이 올는지 의심스럽소이다.”
“내가 부르는 마당에, 일개 목수의 계집이 아니 와?”
개루의 성미는 부풀어올랐다.
“세상의 전하는 말을 들으면 아랑의 고운 점은 관음 보살의 고운 것과 같다 하옵니다. 고결하고 품위
있고…….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호락호락 넘보지 못한다 하옵니다.”
“관음 보살!”
개루의 호색(여자를 좋아함)하는 마음은 더욱 부채질 쳐진 셈이 되었다.
“관음 보살은 왕의 신하가 아닌가!”
개루는 호기롭게 배앝았다.
“잔말 말고 부르게 하오.”
급한 사자(명령을 받고 심부름하는 사람)가 도미의 집으로 띄워졌다. 도미는 전과 같이 대궐에서 일할
때다. 홀로 아랑이 집에서 이 광경을 당했다. 사자를 대한 아랑은 차가울 대로 차가웠다. 단정히 벼루에
먹을 갈고 간지(얇은 종이)를 펼쳐 글월을 썼다.
왕은 백성의 부모라, 어찌 부르시는 명을 거역하오리까 마는 사나이 몸이 아니옵고 남편 있는 계집의
몸이라 남편의 허락이 없이는 까닭 없이 왕명을 받을 수 없소이다.
아랑은 쓰기를 마친 다음 간지를 봉하여 공손히 사자에게 전했다. 사자를 보내고 초조하게 하회(회답)를
기다리고 있던 개루는 아랑의 정정당당한 구슬 같은 필적을 대하고 보니, 보지 못한 아랑이 더욱 그립
고 잊을 수 없었다. 호화로운 왕의 위력으로 여태껏 수많은 여자를 다뤄 본 개루는 어디까지든 여자의
정조를 부인했다. 아랑― 관음 보살같이 결곡하고 아름답다는 도미의 처 아랑을 기어코 한번 손아귀에
넣고 싶었다.
땅에 떨어진 뒤에 처음으로 개루는 고민의 맛을 느꼈다. 위력으로 군사를 풀어 연약한 여자 아랑 하나
를 잡아들이기에는 개루의 체모(체면)가 너무 깎여진다고밖에 뵈지 않는 때문에, 또한 백성들의 웃음을
사기도 쉽다. 어떻게 가만히 드러내 놓지 않고 아랑을 손 속에 넣을 것을 궁리했다. 정조― 여자의 정조
란 다 닥쳐 보면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개루는 잘 아는 때문이다.
두어 시간 뒤에 목수 도미는 개루의 편전 아래 불려졌다.
“이애, 네가 목수 도미냐?”
“네, 소인이 목수 도미올시다.”
도미는 부들부들 떨며 대답했다. 도미는 대궐 짓는 데 무슨 잘못이 있었나 하고 마음속으로 지난 일을
곰곰이 생각해 본다.
“네 아내가 백제의 제일 가는 미인이라지?”
도미의 가슴은 아뿔싸 하고 선뜻 내려앉았다. 그러나 대답은 아니할 수도 없었다.
“남들이 그렇게 말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비로소 도미는 개루의 얼굴을 잠깐 쳐다봤다.
“범절이 있고 지조가 높다지?”
도미는 어떻게 대답해야 옳은지 몰랐다. 멍하니 다시 힐끗 개루를 쳐다본다.
“여자 쳐놓고 지조가 있다는 계집을 내 여태 보지 못했다. 네 아내도 그러할 게다. 더욱이 이쁜 계집일
수록!”
말을 마치고 개루는 빙글빙글 웃으며 도미를 내려다본다. 마치 아랑의 정조를 비웃는 듯이…….
도미의 순되고 젊은 기운이 우쩍 일어났다. 옥보다도 더 깨끗한 아랑의 몸에 애매한 누명을 얹는 것이
분했다.
“다른 여자는 모르겠소이다마는 소인의 계집은 죽을지언정 두 마음이 없을 게올시다.”
도미의 머리에는, 지나간 달 밝은 가을밤에 아랑과 같이 뜰에 거닐던 생각이 번갯불같이 휙 지나갔다.
“그럼 내 시험해 보랴?”
개루는 여전히 능갈치게(교묘하게) 소리 없는 웃음을 웃으며 도미를 내려다본다.
“시험해 봅시오.”
결연히 말을 마치고 도미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도미의 몸은 처음과 같이 떨리지도 않았다.
4
뜻밖에 왕의 부름을 받았던 도미의 아내 아랑은 일단 거절하는 글월을 사자 편에 돌려보냈지마는 초조
하고 불안하여 오히려 하회가 궁금했다. 어찌 된 일인지 까닭을 알 수 없었다.
혹시 남편 도미가 죄를 짓지나 아니했나? 만일 죄를 지었다면 법소가 따로 있으니 법소에서 채근(어떤
일의 내용을 캐어 밝히거나 따지어 독촉함)하고 다스릴 일이지 왕이 친히 부를 까닭도 없는 일이다, 하
고 이렇게 생각해 봤다.
남편이 하도 대궐 일을 잘하니까 그이에게 상을 내리고 나까지 대궐로 들어오라 한 것인가? 하고 이렇
게도 생각해 보았다. 쭬쭬쭬쭬
어떻든 조마조마 마음을 졸여 가며 어서어서 남편 도미가 돌아오기를 일각이 삼추(기다리는 시간이 매
우 길고 지루함을 나타냄)처럼 고대했다.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갈가마귀가 뒷산 밖에 어지럽게 날랐다. 귀는 울타리 밖으로만 쏠려진다. 행여나
남편 도미가 돌아오는 씩씩하고 기운찬 발자취 소리가 들릴까 하고.
가을 해가 서산에 넘기는 토깽이(토끼)보다도 재빨랐다. 그러나 아랑의, 남편을 기다리는 초조한 마음은
하루보다도 길었다. 땅거미가 완전히 동구를 어둡게 했다. 그러나 남편 도미의 돌아오는 휘파람소리는
아직껏 들리지 않았다. 다른 날 같으면 벌써 도미와 밥상을 대하고 재미있게 술질(숟가락질)을 할 때다.
아랑은 배고픈 줄도 몰랐다.
유경(놋쇠로 만든 등잔 받침)을 꺼내 놓고 심지에 불을 다렸다. 방 속에 환하게 불이 켜지니, 벽에 비치
는 아랑 제 그림자에 남편 ‘도미가……’ 하고 소스라쳐 놀래도 보았다. 한 식경(한 끼의 밥을 먹을 만
한 시간) 두 식경 밤은 점점 깊어 갔다. 달도 없는 깊은 가을, 짙은 밤 앙상한 나뭇가지에 울고 남은 싸
늘한 바람이 가끔가끔 쏴 하고 문풍지(문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막기 위해 문짝 가에 붙인 종이)를 울
렸다. 불똥을 튀기던 유경엔 심지조차 타 들어가서 불빛까지 희미했다. 아랑은 옥귀개(옥으로 만든 귀이
개)를 뽑아 심지를 돋우었다. 잠깐 불빛은 밝았으나 초조한 마음속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내 아랑은 방문을 열고 뜰로 내려서서 삽짝문을 열고 여남은 걸음 떨어져 있는 이웃집 부전이를 찾았
다. 부전이는 지난해 남편을 잃은 홀어미다. 아랑의 부르는 소리에 부전이는 들창문을 열고 자던 눈을
쓱쓱 비비며,
“웬일요?”
하고 물었다.
“좀 나와요. 저, 도미가 여태 안 돌아왔어. 쓸쓸해 혼자 배길 수가 있어야지. 나하고 둘이 있어 응, 부
전이!”
“그게 웬일유, 밤이 꽤 이슥했는데.”
부전이는 일변(한편) 말하고 일변으론 부스럭거리며 치마를 두른 다음 문을 열고 아랑을 따라 섰다.
지척을 분간하지 못할 어둠 속에 하늘에는 별빛만이 총총했다. 아랑과 부전이가 마악 아랑의 집 방 속
에 들어앉았을 때다. 동구 밖에 사람 소리가 두런두런하며 두서너 사람의 발자취 소리가 버적버적 들렸
다.
“사람 소리가 나지?”
아랑은 부전의 얼굴을 쳐다본다.
“도미가 인제야 돌아오는 게지.”
두 사람은 일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뜰 아래로 내려섰다. 울타리 밖에는 횃불이 환하게 비치고 삽짝문이
스르르 열려졌다. 들어서는 사람은 도미가 아니요, 금관에 홍포(붉은 빛깔의 옷)를 찬란히 입은 왕 개루
였다. 뒤에는 두어 사람의 시종이 따랐다. 아랑은 가슴이 출렁 떨어지고 부전이는 영문을 몰랐다.
횃불과 왕과 시종은 뜰 안으로 들어섰다.
“여기가 목수 도미의 집인가?”
시종 한 사람이 이렇게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아랑은 설레는 가슴을 진정하며 이렇게 대답했다.
“도미의 아내 아랑이 누구인가?”
“제올시다.”
아랑은 손을 마주 잡고 공손히 허리를 구부렸다. 횃불이 더욱 가까이 비쳐졌다. 불 아래 비치는 아랑의
고운 때깔은 과연 월궁의 항아(달나라에 산다는 선녀. 절세의 미인을 비유한 말)가 아니면 그림에 보는
관음 보살이었다. 이윽이 아랑을 건너다보는 개루의 호화로운 얼굴에는 소리 없는 만족의 미소가 물결
쳐 흘렀다.
“올라가자! 나는 이 나라의 왕 개루다.”
처음으로 개루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아랑의 가슴은 더욱 설레었다. 그러나 왕을 아니 인도할 수도 없었다. 아랑은 모든 설레는 마음을 누르
고 태연히, 참으로 태연히 공손하게 왕을 방 안으로 인도하고는,
“누추한 천민의 집에 옥가(임금이 타는 가마)를 멈추시니 황감(황송하고 감격스러움)하오.”
하고 문 밖에 고요히 서 있다.
“아랑아.”
개루는 자리에 앉아 홀린 듯 아랑을 쳐다보다가 이렇게 아랑을 부른다. 아랑은 해사한 얼굴을 더욱이
단정히 가지고 허리를 굽혀 소리 없는 대답을 보낸다.
“아까 낮에 너를 불러도 오지 않기에, 네 남편의 허락을 맡아 내가 온 길이다. 너는 오늘 밤부터 내 후
궁이 돼야 한다. 내일 아침엔 일찍이 대궐로 데려갈 것이고…….”
모든 일을 아랑은 비로소 알았다. 그러나 아랑은 조금도 황겁하지(두렵고 겁나지) 않았다. 맑고 맑은 눈
에는 광채가 반짝하고 빛났다. 잠깐 동안 아랑은 새촘히 서 있다.
“싫으냐?”
“…….”
“싫으면 군사를 풀어 잡아갈 것이고…….”
“…….”
“네가 후궁으로 들어오기만 하는 날이면 호강이야 말할 거 있느냐, 백제 것이 모두 다 네 것이지.”
오뚝이 그림처럼 섰던 아랑은 깜짝하고 다시 눈동자를 굴리었다. 치맛자락이 가늘게 움직였다. 입에선
가벼운 한숨조차 나는 듯했다.
“정말이십니까?”
아랑의 말소리가 비로소 떨어졌다. 그러나 아랑의 눈은 차마 개루를 쳐다보지 못했다.
“그럼 내가 실없는 말을 할 리가 있느냐?”
아랑의 목소리를 듣자 개루의 입은 빙글빙글 벌려진다.
“시키시는 대로 거행하겠습니다. 횃불을 끄고 시종을 물리쳐 줍시오. 목욕을 하고 단장을 하겠습니다.
”
횃불은 꺼지고 시종은 물러갔다. 삽짝문이 소리 없이 닫혀졌다.
한 시각 뒤, 칠보 단장을 꾸민 아랑이, 어서 들어오기를 고대하고 있는 개루가 앉은 방문 앞에서,
“유경의 불을 꺼 주옵시오. 남편 있는 몸이라 부끄럽사옵니다.”
옥방울을 굴리는 듯한 아랑의 목소리가 닫혀진 방문 밖에 떨어졌다. 개루는 미칠 듯이 좋았다. 용포 자
락으로 유경 불을 후리쳐 껐다.
이튿날 동이 환해서 흐벅진 졸음에서 눈을 떠 보니, 자리 옆에 코를 골고 누운 것은 관음 보살 같은 아
랑이 아니라 개기름이 얼굴에 지르르 흐르는 부전이었다. 개루는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나 이미 소용이
없다. 아랑을 찾으니 간 곳이 없다. 건넛방은 덩그렇게 비었다. 증(화)이 열화(뜨거운 불길)같이 일어난
개루는 모든 것이 목수 도미란 놈이 있는 탓이라 인정했다. 팔분 이상의 도미를 시새는(공연히 미워하고
싫어하는) 마음도 섞였으리라.
대궐로 돌아오는 길로 개루는 도미를 역사를 잘못했다고 죄 주었다. 두 눈알을 뽑고 광나루 강으로 끌
어다가 배에 태워 내쫓았다. 앞 못 보는 도미는 무슨 죄를 진지도 모르고 하늘을 우러러 호곡(소리 내어
슬피 욺)해 울면서 바람 부는 대로 정처 없이 배에 실려 떠내려갔다.
한편으로 아랑은 부전이를 달래서 개루의 침실로 들여보낸 뒤에 집을 벗어나 동리 집 처마 끝에서 밤을
지새우고, 날이 훤하기 전에 도미의 소식을 듣기 위하여 대궐 도편수를 찾았다. 도미는 아직 대궐 안에
무사히 있다는 소식을 듣자 적이 가슴을 가라앉힌 지 반나절이 못 돼서, 대궐에 들어갔던 도편수에게서
아랑에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기별을 전해 왔다.
도미를 두 눈알을 뽑아 광나루 강물 위에 내쫓았다고…….
그리고 아랑이 자기 집에 있으면 자기 도편수까지 벌을 당할 테니, 속히 다른 데로 피신을 해 달라는
부탁까지 있었다. 아랑은 정신이 아찔했다. 그러나 한시를 지체할 때가 아니었다. 앞뒤를 헤아려 보지
않고 눈물을 머금어 광나루 강가로 쫓아갔다. 젊은 여자, 더욱이 아랑같이 뛰어나게 예쁜 여자가 사람의
눈에 유표하게(두드러지게) 띄기는 쉬운 일이었다. 아랑은 강가에서 뱃사공 한 사람을 붙들고 도미의 소
식을 다 캐어묻기도 전에 먼저 미리 배치해 두었던 개루의 군사에게 붙잡혀 버렸다. 앙탈도 소용없었다.
뿌리치고 달아나자니 힘이 모자랐다. 아랑은 이내 대궐로 끌려갔다.
으리으리한 대궐, 화려한 전각 안에 아랑은 개루를 다시 대하게 되었다.
“네가 네 죄를 알겠니?”
개루의 목소리는 위엄스러웠다. 아랑은 똑바로 개루를 쳐다봤다. 눈에는 잠깐 살기가 떠돌았다. 남편 도
미의 눈알을 뽑힌 생각을 하니 아무리 단단한 마음씨언만 다리 팔이 가늘게 부들부들 떨린다. 순간 아
랑은 얼른 분한 생각을 물리쳤다. 입 언저리에는 강잉히(어쩔 수 없이) 미소를 띠었다.
“죽을 때라 잘못했사옵니다.”
가늘게 가늘게 떨리는 듯이 들렸다. 개루는 다시 아랑을 대하고 보니 지난밤에 속았던 분한 생각도 봄
눈 슬듯 스러졌다. 오히려 속았기 때문에 아랑이 더 귀여웠다.
“네 남편은 대궐 역사를 잘못 거행했기 때문에 나라 죄를 얻고 형벌을 당해서 바다 밖으로 내쫓겼다.
앞 못 보는 장님이 산다면 며칠이나 살겠니? 아마 오래지 않어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게다. 아랑아, 그래
도 내 후궁이 되기 싫으냐?”
“인제는 남편도 없고 의지할래야 의지할 곳도 없습니다! 간밤 모시지 못하였지만, 오늘 이 모양이 된
뒤에야 어찌 다시 대왕의 말씀을 거역하오리까.”
소근소근 하소연하는 듯 대답하는 아랑은 방울방울 눈물까지 흘렸다. 개루의 넋은 아랑의 탯거리(태, 맵
시)에 그대로 녹아 사라질 듯하다.
“물러가 있거라!”
궁녀 한 사람에게 호위되어 기운 없이 초연히 돌아서는 아랑의 뒷태도에는 만 가지 수심이 안개 끼듯
어리었다.
5
향기로운 젖물에 목욕하고 은마구리한(은으로 양쪽 끝을 덮은) 장도칼로 손톱 발톱을 곱게 다스린 아랑
은, 이 날 밤에 무명 옷을 벗어 버리고 칠보 화관 족두리에 궁녀의 복색(옷의 꾸밈새와 빛깔) 화려한 당
의(저고리 위에 덧입는 여자 예복)를 입고 나인(궁녀)에게 인도되어 궁중 깊고 깊은 복도를 거쳐 개루의
침실로 들어갔다. 화려한 연둣빛 당의, 찬란한 붉은 치마에 금나비가 바르르 떠는 화관을 쓴 아랑의 때
깔은 과연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이 어여쁘다. 관음 보살보다도 더 고왔고, 옥계(옥같이 맑은 물이 흐
르는 계곡)의 선녀보다도 더 예뻤다. 대혼(임금이나 황태자의 혼인) 촛불을 밝히고 비스듬히 안석(방석)
에 의지해 있던 개루는 자기도 모르는 김에 몸을 일어(일으켜) 아랑을 맞았다.
궁녀는 물러가고 인적은 고요했다. 홍공단(붉은 빛깔의 공단) 두 채 이불이 화려한 봉베개(봉황이 수놓
여져 있는 베개)를 얹고 서리서리 펼쳐졌다. 개루는 벌떡 일어나 그림같이 서 있는 아랑의 손길을 탁 쥐
었다.
“앉어라!”
아랑은 개루에게 손을 맡긴 채 보시시 앉는다.
“아직도 도미의 생각이 나니?”
“오늘 밤부터는 대왕의 사람이온데, 그까짓 눈먼 천한 백성을 생각하면 무얼 합니까?”
아랑의 볼이 바시시 기어지며 방싯 웃음을 머금었다. 하얀 이빨이 꽃판 같은 입술 밑에 쫙 드러난다.
이튿날 개루와 아랑은 느직하게 침실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개루는 아랑과 사이에 한 금을 넘지 못했다.
마침 수라(임금에게 올리는 진지)가 들어왔다. 아랑은 빈이 된 듯 모든 거행을 정성껏 받들었다. 밖에
있는 궁녀들이 아랑을 정말 빈으로 받들었다.
해가 기울고 다시 밤이 되었다. 아랑은 침실에서 여전히 개루를 곰살궂게 받들었다. 정말 아내가 남편을
대하듯이……. 그러나 몸때는 여전히 맑지 않았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이 지났다. 다만 아직 한 금을
넘지 않았을 뿐, 모든 것을 다 개루에게 맡긴 아랑의 다른 뜻 없는 진선 진미한 태도는 개루의 온갖 경
계하는 마음을 차츰차츰 풀어지게 하고야 말았다. 개루는 손가락을 꼽아 다만 아랑의 몸 맑을 날을 그
날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아랑이 개루의 침실에서 묵은 지 이레째 되는 날 밤. 아랑은 개루의 이불 속에서 미끄러져 나왔다. 벗어
놓은 치마와 저고리 대신 개루의 옷과 바지를 입었다. 머리에는 화관 대신 꿩털 꽂힌 관을 얹었다. 개루
가 나다닐 때 군사에게 보이는 병부(왕과 병권을 맡은 지방관 사이에 미리 나누어 가지는 신표)까지 단
단히 주머니 속에 넣었다.
아랑은 몇 번인지 개루의 코 고는 소리를 시험해 보고 방문을 연 뒤에 토깽이처럼 바시시 빠져 나갔다.
이레를 두고 보살펴 익혀 둔 길이라 막힐 것이 없었다. 지밀문(임금이 거처하는 곳의 문)을 벗어난 아랑
은 마지막 대도문(큰길로 나가는 문)에 이르자 파수지기 군사에게 말없이 병부를 내보였다. 대궐 문이
열려졌다가 스르르 닫혔다. 마침내 아랑은 세상 구경을 다시 하게 되었다. 아랑은 두 주먹을 쥐고 광나
루로 달음질친다.
나룻가에서 아랑은 또다시 병부를 보이고 사공을 재촉해서 배 한 척을 얻었다. 아랑은 이레 전에 남편
도미가 떠내려간 곳을 따라 물결이 흐르는 대로 배를 저어 흘러간다.
6
해가 훤히 동천 하늘에 떠오르기 시작할 때 아랑의 배는 양화도를 지났고, 한낮이 겨워서는 강화도 갑
고지물에 닿았다. 군데군데 갯가 사람들에게 이레 전에 지나간 눈먼 도미의 종적을 물으니 도미는 강화
쪽을 향하여 흘러간 것이 분명했다. 아랑은 뭍에 올라 또다시 사공들을 붙들고 눈먼 도미의 지나간 방
향을 물으니 한 사람의 사공이 며칠 전에 눈먼 거지 장님을 보았다 한다.
아랑의 가슴은 탈 듯이 조여졌다. 뒤에는 개루의 쫓는 군사가 반드시 있을 것이 무서웠다. 앞으로는 얼
른 도미를 못 만나는 것에 마음 졸였다.
아랑은 또다시 배를 저어 승천포로 흘러갔다. 해는 다시 강 너머 사산으로 꺼지고 첫 가을 바람은 우거
진 갈대 잎을 휘날릴 때, 승천포 포구 앞에는 갈대 피리를 불고 앉은 거러지 장님이 있었다. 아랑은 가
슴이 출렁 떨어졌다. 배를 버리고 단숨에 땅 위로 뛰어올랐다. 구슬피 해 떨어지는 서풍에 갈대 피리를
불고 앉았는 장님 거러지는 갈 데 없는 자가 남편 도미였다.
“도미…….”
아랑은 도미를 껴안았다. 구슬피 피리를 불고 앉았던 도미는 귀 익은 목소리에 놀라 알맹이 없는 눈을
휘번득거렸다.
“도미…… 나야. 아랑이야!”
아랑의 두 뺨엔 더운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무어 아랑!”
도미는 더듬더듬 아랑의 몸을 찾았다. 도미가 아직도 촉각의 기억이 새로운 아랑의 손을 잡았을 때,
“어떻게 찾아왔소! 그래도 나를 안 버렸구려!”
도미는 겨우 한 마디를 마치고, 동자 없는 눈으로 눈물을 하염없이 쏟았다.
몇 달 뒤에 백제 서울에는 아랑의 소문이 자자하게 퍼졌다. 아랑이 눈먼 도미의 손을 이끌고 원수의
백제 땅을 영영 버린 뒤에 거러지가 되어 고구려 땅으로 들어갔다는 구슬픈 이야기가 떠돌았다.
35. 강(江)
- 서정인(徐廷仁)
「눈이 내리는 군요」
버스 안. 창쪽으로 앉은 사나이는 얼굴빛이 창백하다. 실팍한 검정외투 속에 고개를 웅크리고 있다. 긴
머리칼은 귀 뒤로 고개 위에 덩굴 줄기처럼 달라붙었는데 가마 부근에서는 몇 낱이 하늘을 향해 꼿꼿이
섰다.
「예. 진눈깨빈데요」
그의 머리칼 위에 얹힌 큼직큼직한 비듬들을 바라보고 있던 옆엣 사람이 역시 창밖으로 시선을 던진
다. 목소리가 굵다. 그는 멋내는 것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하얀 목도리가 밤색 잠바 속으로 그의 목을
감싸 넣어 주고 있다. 귀앞머리 끝에는 면도 자국이 신선하다. 그는 눈발 빗발 섞여 내리는 창밖에 차츰
관심을 모으기 시작한다. 버스는 이미 떠날 시간이 지났는데도 태연하기만 하다.
「뭐? 아, 진눈깨비! 참 그렇군」
그들 등 뒤에서 털실로 짠 감색 고깔 모자를 귀밑에까지 푹 눌러쓴 대단히 실용적인 사람이 창문 쪽에
앉은 살찐 젊은 여자에게 몸을 기댄다. 그녀는 검은 얼굴에 분을 허옇게 바르고 있다. 그는 창문 유리에
이마라도 대야 되겠다는 듯이 목을 쑥 뽑고 창밖을 내다본다. 여자는 가슴이 답답하다. 남자의 왼쪽 어
깨쭉지가 그녀의 앞가슴께를 짓누르고 있다. 그러나 남자는 별로 불편한 기색이 없다. 여자도 잘 참는
다. 그녀는 머리를 의자 뒤에 기대 버린다. 윤이 나는 탐스러운 머리채가 의자의 밋밋한 비닐 위로 나신
처럼 곡선을 그린다. 잠바를 입은 앞자리의 사내가 뒤를 돌아본다. 그는 그의 행운이 부럽다. 그러나 뒤
에 앉은 사내는 「정말이지 이건 진눈깨빈데!」라고 중얼거리면서 열심히 창밖을 내다볼 뿐, 누가 뒤를
돌아보는 것 따위에는 흥미가 없다. 「정말이지 진눈깨비야.」
「형은 어디서 입대허셨오?」
외투 속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은 진눈깨비에 원한이 있다. 그는 신용산에서 입대했었는데 그때도 이렇
게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진눈깨비가 내리는데도 <입대>를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염색한 헌 작업복을 입고, 헌 구두를 신고 손에는 비닐로 만든 회색 세면 <부구로>를 들고, 그
리고 여자 친구란 이럴 때 써먹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면서, 단아한 여자가 슬픔을 머금
고 저만치 서있는 것을 그려 보면서……그러나 물론 그런 건 없었다. 그 대신 어디나 역 근처에는 흔히
있는 매춘부들 중의 하나가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역전 광장에 있는 더러운 공중변소에서 나와 게처럼
엉금엉금 걸어서 판자집들 사이로 사라져 갔었다. 입대할 사람들은 약 이십 명이었다. 환송나온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악대도 단 한 장의 태극기도 없었다. 진눈깨비만이 내리고 있었다. 역 청사 저쪽에서 누
런 석탄 연기가 뭉클뭉클 솟아오르는 허공으로 기적소리가 길게 울려퍼질 때마다 그는 「아, 이제는 서
울을 떠나는구나!」라고 탄식하면서 조금 전에 병든 창부가 사라졌던 판자집 쪽을 돌아보곤 했었다. 미
구에 날이 저물고 미련이나 아쉬움 같은 화사한 감정들이 지루함 속으로 파묻혀 버렸을 때 병사구 사령
부에서 상사가 하나 나와 그들을 인솔하고 논산으로 갔었다.
「나는 시골에서 입대를 했었단 말이오.」
잠바를 입은 사람은 조금 볼멘 소리다. 그는 뒤돌아보던 자세 그대로 고개만 약간 돌려서 옆엣 사람을
쳐다본다. 그는 불만인 모양이다. 그러나 진눈깨비가 내린다고 해서 옛날 입대하던 때의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는 훨씬 누그러진 목소리로 계속한다.
「술을 엉망으로 마시고 뭐가 어떻게 된지도 모르게 입대를 했었지요. 누구하고나 악수를 하고, 같은
사람과 두 번도 좋고 세 번도 좋고, 그저 아무 손목이나 잡히는 대로 무릎에서 이마께까지 마구 흔들면
서 고함을 지르고, 탄식을 하고, 머리를 끄덕거리고, 상대방이 누구인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랑곳
없이 벌써 백 번도 더 말했을 작별 인사를 하고 노래를 하고 그러다가 차를 탄 다음에는 발을 구르고…
…그리고는 얼마 후에 정신을 차려 보니 글세 그게 화물칸이지 뮙니까!」
고깔 모자의 사나이는 기분이 언짢다. 그는 기피자다. 도대체 논산이라든가 입대라든가 하는 말만 들으
면 그는 어떤 콤플렉스에 사로잡힌다. 그는 창문 쪽으로 기울였던 몸의 중심을 다시 꼬리뼈께로 옮겨서
반듯이 앉는다. 여자는 그의 비스듬한 몸무게로부터 해방되어, 뒤로 기댔던 머리를 들고 몸을 추스린 다
음 창밖을 내다본다. 논산 이야기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을 너무 많이 들어 왔다. 도대체
만나는 놈마다 논산 이야기다. 일등병에게 워카 구두발로 채여서 어떻게 머리로 문짝을 들이받았다든가,
훈련장에서 화랑 담배 한 까치씩을 걷어 상납했더니 사격 자세가 어떻게 갑자기 편안해졌다든가, 모두
가 중대 향도 아니면 기타 간부가 되어서 동료 훈련병들로부터 갹출한 성금을 어떻게 배임 횡령하여 재
미를 보았다던가, <조교>와 <기간 사병>들의 음담패설이 어떻게 노골적이었다던가……. 그는 그곳에
관해서 거기에 갔다온 사람보다 더 잘 알고 있음에 틀림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도대체 논산이라면 손에
잡히는 것이 없다. 이것은 대단히 불유쾌한 노릇이다.
「어디까지 가세요?」
불쾌한 일을 오래 천착할 필요는 없다. 홧김에 서방질한다는 속담이 있다.
「군하리까지 가요」
여자는 의외에도 부끄럼을 타는 눈치다. 제법 이마를 붉히기까지 한다. 실핏줄이 가느다랗게 두드러진
다.
「미스타 김은 어디서 입대를 하셨오?」
잠바를 입은 사나이는 옆엣 사람이 무감동하게 창밖만 내다보고 있는 것이 마음에 꺼림칙하다. 그가
질문을 한 것은 이쪽의 대답을 듣고 싶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논산 판(版)―또는 입대판―을 내어
놓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나? 아, 나! 나, 난……」
그는, 외투 속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 김씨는 입대하던 날의 광경을, 그것이 조금 전에 문뜩 떠올랐을
때완 달리, 말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그래요? 그건 참 재미있게 되었는데! 우리도 거기까지 가거든요」
모자를 쓴 사람이 모자 밑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여자 쪽으로 조금 다가 앉는
다. 여자는 행복한 표정이다. 그 여자는 바라는 것이 지극히 작음에 틀림없다. 아마 그 여자를 행복하게
해주는 일은 쉬울 것이다.
「아, 이 눔의 버스는 떠날 줄을 모르나!」
잠바를 입은 사나이는 울적하다. 그는 승강구 쪽을 흘겨본다. 차장은 아마 점심이라도 먹고 있는 모양
이다.
「이 차, 어디로 가나?」
검은 색안경을 쓴 사람이 고개를 뒤로 발딱 젖히고 차안을 두리번거린다. 그러나 아무도 대답해 주는
사람이 없다. 그는 제풀이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해 보이고 차의 문이 만들어 주는 좁은 시야
밖으로 사라져 버린다. 잠바를 입은 사나이는 저으기 마음이 풀린다. 색안경은 사치품일까, 필수품일까.
대부분의 경우, 필수품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뻔뻔스럽게 길거리에서 파는 백원짜리로 사치를 하려고
하다니! 그는 이천원짜리를 사려다가 너무 비싸서 천원을 주고 중고를 산바 있다. 그것은 지금 그의 호
주머니 속에 들어 있다. 눈만 하얗게 쌓인다면 언제든지 꺼내서 코위에 걸칠 수 있다.
김씨는 색안경을 낀 사람을 보면 장님을 생각한다. 그는 한때 자기가 검은 안경을 쓰고 장님이 되어
안마쟁이 노릇을 하는 상상에 사로잡힌 적이 있다. 전투에서 눈을 부상당한다. 육군병원에 입원한다. 눈
에는 붕대가 감겨져 있다. 애인이 찾아온다. 그러나 지극히 작은 차이로 인해서 만나지 못한다. 장님이
되어 색안경을 낀다. 지팡이로 밤의 아스팔트 위를 더듬으며 퉁소를 분다. 창문 여는 소리가 들려온다.
여자가 그를 부른다. 귀에 익은 목소리다.
「집이 거기쇼?」
고깔 모자를 쓴 사람은 색안경이라면 질색이다. 그에겐 색안경을 쓴 사람은 형사다. 그리고 형사는 기
피자를 단속한다. 그는 직장에서 쫓겨났을 때까지 매달 월급 날이면 정기적으로 형사의 <예방>을 받은
적이 있다.
「예? 예, 선생님은요?」
「나요? 난 거긴 배꼽따고 처음이요」
「호 호 호」
여자의 웃음 소리는 김씨의 상상을 망쳐 버린다. 그는 장님이 되는 생각을 비장한 마음 없이는 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 생각이 바야흐로 절정에 도달하고 있을 때 갑자기 킬킬거리는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
려온다. 살찐 여자. 그리고 그는 안마쟁이. 그러나 그는 별로 서운치 않다. 포동포동한 여인을 안마한다
는 생각도 그렇게 나쁘진 않다. 원래는 이렇게 되어 있다. 그를 부르는 여자는 그의 애인이고 킬킬거리
며 웃는 사람은 그녀의 남편이다. 그는 그녀의 남편을 안마한다. 그녀는 바로 곁에서 시중 들고 있지만
안경을 낀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는 안마를 끝마친다. 그녀는 그에게 몇 푼의 돈을 쥐여 준다. 그는
그것을 받아넣고 다시 길거리로 나온다. 그리고 퉁소를 꺼내 불기 시작한다.
「아, 인제 떠날래나?」
창문인 줄만 알았던 앞쪽의 유리창 일부가 밑에까지 움푹 패이면서 열리자 장갑낀 손이 쑥 들어오더니
턱과 뺨 위로 수염이 검실검실 돋은 운전수의 머리를 차 안으로 끌어들인다. 머리가 들어오자 잠바가
따라 들어오고 그 뒤로 호주머니께가 허옇게 닳은 낡은 고리뗑 바지가 딸려 들어온다. 운전수는 자리에
앉자 한 손으로 운전륜을 잡고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본다. 손님 머릿수가 작은 것이 눈에 안 차는 모
양이다. 끙하고 돌아앉아서 한쪽 어깨를 기울이고 스위치를 넣더니 부르릉 발동을 건다. 삼십 분 동안이
나 기다린 손님들이 오히려 미안해 해야 할 모양이다. 우리들은 왜 이렇게 수가 작은가! 정원 48명에 한
백 명쯤 타가지고 숨도 못 쉬고 북적거리고 있었더라면 운전수가 조금은 미안해 했을는지도 모를 텐데.
「얘, 이제 슬슬 떠나 볼련?」
잠바를 입은 사나이는 엉덩이부터 차에 오르고 있는 여차장을 쳐다보고 있다.
「네, 곧 가요」
차장은 질문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볼 생각이 전혀 없다.
「아직 안 가?」
「곧 가요」
「여기가 중국집인 줄 아니?」
「왜 내가 중국집에 있어요?」
차장은 비로소 뒤를 돌아본다.
「너 곰이로구나?」
「내가 왜 곰이어요? 아저씬 뭔데요?」
「나? 난 네 할베다」
차가 달리기 시작하자 고깔모자는 자연스럽게 좌우로 움직일 수 있다. 특히 왼쪽으로 여자는 그럴 때
마다 창문 쪽으로 피하는 척한다. 그리고 미안한 생각에서 그를 쳐다보아 준다.
「군하리엔 뭣하러 가세요?」
「놀러요」
「일행이세요?」
「예」그는 목소리를 낮춘다. 「저 사람은 늙은 대학생 김씨. 이쪽은 세무서 직원 이씨. 그리고 난 얼
마전까진 국민학교 선생. 성은 박씨. 대개 이렇소」
「정말 묘하게 어울리셨어요. 친구분들이세요?」
「우린 한집에 살고 있지요.」
「어머, 그러세요?」
「그럼은요. 우리집에 저 두 사람이 하숙하고 있지요」
김씨는 차창 유리에 이마를 댄다. 차체의 진동이 그대로 전달되어 온다. 그는 이마를 뗀다.
「이 차도 달릴 줄 아는군. 난 세워 둘려고 만든 줄 알았더니.」
「그게 다 우리 차장이 <오라이>한 덕분이지. 얘, 안 그래?」
잠바를 입은 이씨는 나이론 천의 윤이 나는 검은빛 바지를 입은 여차장의 엉덩이가 크다고 생각한다.
차장은 화가 나 있다. 이씨는 잠바 호주머니에서 껌을 한 통 꺼낸다. 김씨는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달
리는 버스는 유쾌하다. 속이 훅 트이는 것이 만사가 술술 풀릴 것 같다.
「너 이거 먹을 줄 아니?」
이씨가 껌을 하나 쑥 뽑아서 차장의 등뒤로 들이민다. 차장은 뒤를 돌아보고 피식 웃는다.
「곰이 어떻게 껌을 먹어요?」
「뭐? 하 하. 제법이구나. 됐어. 곰은 원래 재주를 잘 부리지. 먹어둬. 손해될 거 있니?」
차장은 껌을 받는다. 이씨는 옆에 있는 김씨이게 그리고 뒤에 앉은 박씨와 그 옆의 여자에게까지 고루
껌을 하나씩 권한다. 그리고 남은 하나를 끄집어 내서 껍질을 벗긴다.
박씨는 여자와 급속도로 친해지고 있다.
「집이 원래 군하리요?」
「아뇨. 인천예요」
「아, 이사허셨군」
「아뇨, 그냥 거기서 살아요. 엄마하고 언니하고…….그렇게 그냥 셋이 살어요」
「인천서요?」
「아뇨. 군하리서요」
「인천엔 아무도 없구요?」
「아뇨. 거기두……. 아이, 뭘 그렇게 꼬치꼬치 물으세요?」
「참, 그렇군」
참 그렇다니. 김씨는 실소한다. 그는 창밖을 내다보고 있지만 등 뒤에서 하는 이야기를 죄다 듣고 있
다. 그는 항상 시치미를 뚝 떼고 있기를 좋아한다. 알고도 모른 척, 모르고도 모른 척. 그것은 대단히 즐
거운 일이다. 「당신 아무래도 수상한데?」뭐가? 「어제 두시에서 다섯 시까지 사이에 어디에 있었우?
」건 왜 물우? 「안 되지. 난 못 속이우. 박형은 속여두 난 못 속인단 말이우.」허 허 허 허. 그는 슬쩍
이씨를 옆눈질해 본다. 제 비록 약다 하나 이 쪽에서 가가대소만 하고 있는 한 어떻게 결론을 내릴 수
있으리요.
「앉어, 응? 서 있으면 몸에 해롭지」
「괜찮아요」
「아, 지금이야 괜찮지. 이댐에 커서 시집갈 때 해롭단 이야기야」
차장은 얼굴을 붉히고 중간쯤에 있는 빈 자리에 가서 앉는다. 이씨는 빙그레 웃는다. 실속이 없는 알면
서도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면 그는 기분이 좋다. 그는 잠바 목 속에서 하얀 목도리를 조금 꺼내 올려
귓부리를 포근히 감싸 주고 의자에 등을 기대면서 담배를 뽑아 문다. 불을 붙일 생각을 하지 않고 창밖
을 내다본다. 뿌틋이 흐린 하늘에는 눈발이 이따금씩 희끗거리고 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생각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뒤에 앉은 박씨만이 낮은 목소리로 여자와 소근거린다. 멋적은 몇낱의 웃음소리만 가끔
엔진소리 위로 솟아오를 뿐, 대체로 무슨 이야긴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차가 군하리에서 멎는다. 세 시가 겨웠다. 그들은, 그리고 또 몇 사람들이, 차에서 내린다. 촉촉히 젖은
황토길은 얼마든지 더 계속되는 모양이다. 차는 이내 떠난다.
「왜 저 사람들은 여기서 안 내릴까?」
「여기에 볼 일이 없는 모양이지」
「그게 아니고 다음 정거장에 볼 일이 있는 모양이지」
「그렇겠군. 우리가 율평인가 밤평인가에 볼 일이 없었던 것처럼」
김씨는 나머지 두 사람의 지혜에 감탄한다. 조금 전까진 내리는 사람들이 낯설어 보였는데 이젠 내리
지 않는 사람들이 이상해 보인다. 아마도 이씨와 박씨의 추리가 옳을 것이다.
그 여자가 저만치 달아나고 있다. 박씨가 쫓아간다. 둘 다 키가 작다.
<농협이 잘 되어야 농민이 잘 살 수 있다>가 하얗게 그들의 배경에 깔린다. 여자는 킬킬거리면서 길가
로 비켜 선다. 그들은 잠시 말을 주고 받는다. 그러다가 여자는 게처럼 옆걸음질을 해서 거기서부터 열
걸음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길갓집의 대문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그들은 박씨와 함께 거기까지 가 본
다. <서울집>이라는 옥호가 엷은 송판에 아무렇게나 씌여져서 걸려 있다. 길 위에는 사람들이 별로 보
이지 않는다. 아마 그들은 집안에서 닷새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장날을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다. 농협지
소는 창고 같다. 면사무소와 경찰관 파출소는 사이좋게 붙어 있다. 납작한 이발소안에서 트림없이 한 달
전에 제대를 했을 촌스럽게 생긴 젊은이가 고개를 쑥 뽑고 내다본다. 약포도 있고 미장원도 있다. 신부
화장도 하는 모양이다. 격에 맞지 않게 널찍한 구멍가게에서는 트랜지스터가 연송방송극을 재탕해 주고
있다. 그 옆은 빈 터이고 그 뒤로 창고 같은 건물이 있는데 아마도 공회당인 모양이다. 두어 장단에 한
번씩 삼천리 방방곡곡을 돌다돌다 갈 데가 없어진 필름이 들어오면 원근의 사람들이 이리로 모여들 것
이다.
세 사람은 그 건물 모퉁이로 돌아간다. 적당한 간격을 두고 나란히 서더니 일제히 오줌을 누기 시작한
다. 오랫동안 참았던지라 줄기가 사뭇 세차다. 물론 그곳이 그들에 의해서 처음으로 그렇게 사용된 것
같지는 않다. 맨 가에 서 있던 김씨가 갑자기 허허허허 하고 웃는다. 나머지 두 사람은 골마리를 훔치고
김씨 곁으로 다가선다. 그리고 김씨의 시선을 따라 건물의 벽을 본다. 가위가 하나 그려져 있다.
세 사람은 다시 길위로 나온다. 마침 그 부근 일대에서 일어난 일이면 무엇이나 모를 것이 없을 듯싶
은 중년 남자 하나가 마주 오고 있다. 박씨가 나선다.
「아씨, 혹시 이 근처 혼사 치루는 집 모르세요, 성씨가 김씬데?」
「행, 돌촌 김자방이 말이로군」
「예. 예. 맞습니다. 석촌이라든가 뭐 그럽디다」
「글세, 그렇다니까, 이리로 곧장 내려가슈. 반 마장도 못 가서 왼편으로 오십여 호 부락이 있우다. 그
게 바로 석촌이오」
남자는 말을 마치자 걸음을 떼어 놓으면서 엄지 손가락 단 하나로 보기좋게 이쪽 저쪽 코를 푼다. 그
들은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그가 가리켜 준 대로 걷기 시작한다. 본정통은 열 걸음도 못 가서
갑자기 끝나 버린다.
그날 밤 열 시께.
그들은 술에 크게 취해서 돌마을을 빠져나오고 있다.
「아, 신부가 안 이쁘더라」
「그렇지만 육덕은 있겠더라」
「그런 건 걱정 안해도 좋다더라」
그들은 각자 하늘을 쳐다보고 고함을 지른다. 두 팔과 두 손들이 제멋대로 놀고 있다. 이씨, 박씨, 김씨
의 순서다. 걷는다기보다 발들을 아무렇게나 움직이고 있다. 소리를 지르는 것도 그 순서다. 버스가 다
니는 큰길로 나오자 그들의 걸음걸이는 한결더 자유로와진다. 좌우 진폭이 자못 심하다.
「아, 우리는 인제 어떻게 할 것이냐?」
「서울 집으로 가자」
「버스가 끊어졌다」
「서울집은 군하리에도 있다」
「그건 나두 안다」
「그럼 그리로 가자」
「돈이 없다」
「아까 받은 것은 쇠붙이냐?」
「나두 보았다」
「보았으니 어떻단 말이냐? 여비조로 천 원 받았다」
「잘 했다. 그놈 가지고 마시자」
「세무서 주사는 공술 좋아하기냐?」
「선생보다 덜 좋아한다」
「학생도 술 마시기냐?」
「마시기 시작하면 선생보다 더 잘 마신다」
「좋다. 가자」
그들은 두 걸은 나아가고 한 걸은 물러서면서 서울집으로 향한다. 서울집은 그날따라 조용하다. 술 마
실 사람들이 아마 딴곳으로 몰린 모양이다. 대문을 활짝 열어 놓고 맞아 주지 않는 것이 그들에게는 불
만이다. 전깃불이 들어오지 않는 촌락의 밤은 한결더 어둡다. 그들은 고함을 지르면서 주먹으로 문짝을
친다.
「술 파시오」
「돈 버시오」
「손님이요」
그러자 대문짝 비슷하게 생긴 여러 개의 문짝들 중에서 맨 가엣 것이 삐걱소리를 내면서 열리더니 사
람의 머리가 하나 쑥 나타난다.
「웬 사람들이슈?」
「돈 주께 술 파시오」
「하하, 여기선 술을 아 파는데요. 이 다음 집에 가 보슈.」
「여기선 뭘 파우?」
「여긴 여인숙이요」
「정말 그렇군. 간판이 없는데. 낮에 본 간판말야」
「여인숙 간판은 있을 거 아냐?」
「아, 간판 없이 손님을 받죠」
「그럼 대문이라도 따 놔야지」
「아홉 시 막버시가 지나가면 손님이 없읍죠」
「우린 손님 아니우?」
「우린 이 집 손님이 아니지. 이 다음 집 손님 아냐」
「난 이 집 손님이 됐으면 좋겠어. 한 숨 자고 싶은데」
김씨는 벌써 집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두 사람은 어이가 없는 모양이다.
「학생, 하, 학생」
그러나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마당이 어둠 속에서 희므끄레하게 빛나고 있다. 그리고 그 저편에
시커먼 마루가 있고 불빛이 비친 방문이 있다. 그 방문이 열리고 남포불이 쑥 나온다. 그는 그리로성큼
성큼 다가가서 마루에 걸터앉는다. 소년이 남포를 기둥에 걸고 방을 치운다.
「들어가두 괜찮으니?」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마루 위로 오른다. 걷기보다는 몸을 위로 올리기가 더 힘들다. 바깥이 조용
해진다. 아마 주사와 선생은 술집으로 간 모양이다. 소년이 책 나부랭이를 챙겨가지고 나온다. 부러진
연필 토막이 희미한 남포 불빛을 받아 눈에 띈다. 그는 비틀거리면서 허리를 굽히고 방안으로 들어선다.
어둡고 냄새가 고약하다. 소년이 불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와 벽 중간께에 있는 못에다가 건다. 호야가
양철에 부딪치면서 소리를 낸다. 소년이 나간다. 그는 불 건너편 벽에 기대앉아서 담배를 피워 문다. 연
기를 내뿜는다. 불꽃이 한참 있다가 흔들린다. 소년이 침구를 안고 다시 들어온다. 그리고 그것을 편다.
일어설 때 보니 가슴에 훈장이 달려 있다. 그는 그를 가까이 불러서 그 훈장을 들여다본다. 둥근 바탕에
가로로 5년 2반이라 씌어 있고 그것을 가로질러서 세로로 반장이라 씌어 있다. 조잡한 비닐 제품이다.
「너 공부 잘 하는구나」
「예. 접때두 일등했어요」
아, 이건 뻔뻔스럽구나, 못생기고 남루한 옷을 입을 주제에.
「여기가 너의 집이니?」
「아녜요. 여긴 이모부댁이예요. 저이 집은요, 월출리예요, 여기서 삼십 리나 들어가요」
가난한 대학생. 덜커덩거리는 밤의 전차. 피곤한 승객들. 목쉰 경적 소리. 종점에 닿으면 전차는 앞뒤아
가리를 벌리고 사람들을 뱉어낸다. 사람들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초라한 길가 상점들으 희미한
불빛들이 그들을 건져낸다. 그들은 고개들을 가슴에 묻고 조금씩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져간다. 그리고
은밀히 하나씩 둘씩 골목들 속으로 자취를 감춘다. 가난한 대학생 앞에 대문이 나타난다. 그는 그 앞에
선다.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망설인다. 아, 이럴 때 꽝꽝 두드릴 수 있는 대문이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는 주먹을 편다. 편 손바닥으로 대문을 어루만지듯 흔든다. 또 흔든다. 고무신짝 끄는 소리가 들려온
다. 식모의 고무신짝은 겸손하게 소리를 낸다. 그는 안심한다. 안심이 배 속으로 쑥 가라앉는다.
「학굔 여기서 다니니?」
그는 눈을 게슴치레하게 뜬다. 심지를 줄인 남포불이 눈 앞에서 가물 거리고 있을 뿐 소년은 보이지
않는다. 방바닥이 뜨뜻한다. 술이 점점 더 취해 오른다. 그는 옷을 입은 채 허리를 굽히고 손발을 이부
자리 밑으로 쑤셔 넣는다. 넥타이를 풀어야지. 그러면서 그는 눈을 감는다.
「일등을 했다구? 좋은 일이다. 열심히 공부해라.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미국, 영국, 불란서, 어디든지
갈 수 있다. 내 돈 한푼 안 들이고 나랏돈이나 남의 돈으로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다. 돈 없는 건 걱정
할 필요가 없다. 흔한 것이 장학금이다. 머리와 노력만 있으면 된다. 부지런히 공부해라, 부지런히. 자신
을 가지고」
그러나 그의 말을 듣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 알아들을 수도 없다. 그는 입을 다물고 흥얼거렸
다. 그 말이 끝나자 그의 머리속에는 몽롱한 가운데에 하나의 천재가 열등생으로 변모해 가는 과정들이
하나씩 떠오른다. 너는 아마도 너희 학교의 천재일 테지. 중학교에 가선 수재가 되고, 고등학교에 가선
우등생이 된다. 대학에 가선 보통이다가 차츰 열등생이 되어서 세상으로 나온다. 결국 이 열등생이 되기
위해서 꾸준히 고생해 온 셈이다. 차라리 천재이었을 때 삼십 리 산골짝으로 들어가서 땔나무꾼이 되었
던 것이 훨씬더 나았다. 천재라고 하는 화려한 단어가 결국 촌놈들의 무식한 소견에서 나온 허사였음이
드러나는 것을 보는 것은 결코 즐거운 일이 못 된다. 그들은 천재가 가난과 끈질긴 싸움을 하다가 어느
날 문득 열등생이 되어 버린다는 사실을 몰랐다. 누구나가 다 템즈강에 불을 쳐지를 수야 없는 일이다.
허옇게 색이 바랜 짧은 바지를 입고 읍내까지 몇십 리를 걸어서 통학하는 중학생. 많은 동정과 약간의
찬탄. 이모집이나 고모집이 아니면 삼촌이나 사촌네 집을 전전하면서 고픈 배를 졸라매고 낡고 무거운
구식의 커다란 가죽 가방을 옆구리에다 끼고 다가오는 학기의 등록금을 골똘히 생각하며 밤늦게 도서관
으로부터 돌아오는 핏기없는 대학생. 그러다 보면 천재는 간 곳이 없고, 비굴하고 피곤하고 오만한 낙오
자가 남는다. 그는 출세할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준비가 되어있다. 어떠한 것도 주임교수의 인정을 받
는 일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 외국에 가는 기회는 단 하나도 그의 시도를 받지 않고 지나치는 법이 없
다. 따라서 그가 성공할 확률은 대단히 높다. 많은 것들 중에서 어느 하나만 적중하면 된다. 그런데 문
제는 적중하느냐 않느냐가 아니라 적중하건 안하건간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데에 있다. 적중하건 안
하건간에 그는 그가 처음 출발할 때에 도달하게 되리라고 생각했던 곳으로 부터 사뭇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와 있음을 깨닫는다. 아―, 되찾을 수 없는 것의 상실임이여!
그는 꿈틀인다. 눈을 감은 채 일어나 앉더니 외투와 저고리로부터 동시에 빠져나온다. 아까보단 편한
자세로 다시 눕는다. 그리고 잠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이내 코를 골기 시작한다.
「네가 잘나 일색이냐」
「내가 못나 박색이냐」
「돈이 좋아 일색이고, 돈이 없어 박색이지」
「옳고!」
술상을 가운데 두고 선생은 누워 있고 주사는 앉아 있다. 여자는 그 사이에 있다. 선생이 천정을 향해
서 소릴 지른다. 옳고!
여자가 하품을 한다. 주사가 여자의 손목을 잡아 끈다. 여자가 킬킬 거린다. 주사는 힘이 세다.
「아까 올 땐 박씨와 재밀 봤으니 이젠 나허구 재미 좀 보자.」
이씨가 여자를 끌어안는다. 여자가 버둥대면서 남자의 품으로부터 빠져나온다. 남자가 여자의 허벅지를
꼬집는다. 여자가 소리를 지르면서 치마를 걷어올리면서 허연 허벅지를 들여다본다. 심지를 돋운 남포불
이 벽에서 펄럭인다.
박씨는 누워서 말똥말똥 천정을 쳐다보고 있다. 그는 주사가 밉다. 주사는 멋쟁이이고 또 춤을 잘 춘
다. 헌젠가 그가 그의 아내에게 춤을 가르쳐 주겠다고 팔을 내밀며 허리를 붙잡았을 때 옆에 있던 그는
그녀가 발칵 화를 낼 것을 기대했었지만 그녀는 킬킬거리면서 방 밖으로 달아났을 뿐 결코 노여워하지
않은 적이 있다. 슬쩍 떠 보느라고「이 주사는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야」라고 그가 말했을 때, 그녀가「
정말 그래요」라고 대답했으므로 그는 대단히 실망을 했다. 늙은 대학생 김씨라면 그는 안심한다. 우선
그는 몸치장을 할 줄 모르고 사람 사귀기를 좋아하지 않고 말수가 적다. 하루 종일 방구석에서 딩굴 수
있는 것은 그들 셋 중에서 대학생뿐이다. 가만 놔 두면 그는 하룬커녕 일주일이라도 엎치락뒤치락하면
서 혼자 지낸다.
「학생은 진짜 잠자는 모양이지?」
박씨가 술상 너머로 넌지시 이씨를 건너다본다. 이씨는 쉐타 밑으로 여자의 가슴을 더듬는 중이다.
「정말! 또 한 분은 어딜 가셨어요?」
정말 있는 뻔뻔스럽다. 자기가 아주 잘났다고 생각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것을 거침없이 남에게 드러
낸다. 여자만 보면 그는 매력적이리라고 생각되어지는 미소를 자신만만하게 띄운다. 그것이 여자에게는
매력적일는지 몰라도 옆에 있는 남자에게는 구역질나고 그렇게 천격일수가 없다. 이것은 질투와는 다른
감정이다. 그는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한시도 집에 붙어 있지 않는다. 오후에는 느지막하게 퇴근을 하
는데 대개「아, 한 큐 잡았더니 몸이 가쁜하다」라든가「오늘은 장씨 부인을 만나서 한바탕돌았지」와
같은 말들과 함께 들어온다. 유부녀를 껴안고 빙빙 도는 것이 그에게는 자랑인 모양이다. 그러면 김씨는
눈을 껌벅거리면서 벽이나 천정만 바라보고 있다. 남의 행동의 옳고 그름을 따지고 싶은 생각이 그에게
는 없다. 그들은 그를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부른다. 그는 그를 좋아한다. 아무도 그를 싫어할 수 없
다.
「너 가서 대학생 데리고 온」
「어머, 대학생!」
「아까 버스에서 나허구 나란히 앉아 있던 양반말야. 창밖만 내다보구 있었지만 속은 엉큼허다. 옆집에
있는데 지금쯤 늘어지게 한숨 잤겠지. 가서 깨워도 싫어하지 않을 거다. 오늘 밤 밤샘 한 번 해보자」
여자는 주의깊게 듣는다. 박씨도 듣고만 있다. 박씨는 눈꺼풀이 무겁다. 여자가 살며시 일어서자 기대
고 있던 이씨는 비스듬이 모로 쓰러져서 방 바닥에 녹아떨어진다. 여자가 조용히 방문을 여닫고 밖으로
나간다. 남포불이 펄럭인다.
밖으로 나온 여자는 놀란다. 그녀는 신발을 끌고 마당 가운데로 나선다. 눈이 하얗게 쌓였고 또 소리없
이 내리고 있다. 고개를 뒤로 잦히고 하늘을 쳐다본다. 점점이 검게 눈송이들이 하늘에 꽉 차 있다. 얼
굴 위에 와서 닿는 그것들의 감촉은 상쾌하다. 그녀는 입을 떡 벌린다.
「아, 신부는 좋겠네. 첫날밤에 눈이 쌓이면 부자가 된다는데. 복두많지」
그녀는 두 눈을 껌벅인다. 수많은 눈송이들이 눈 앞에서 명멸한다. 그녀는 신부의 얼굴을 모른다. 그러
나 모든 신부들은 똑 같은 하나의 얼굴을 가지고 있을 것 같다. 그것은 행복, 기대, 불안. 또는 그 전부
……. 그녀는 고개를 떨어뜨린다. 무릎을 굽히지 않고 다리를 쭉 편 채 신발을 질질 끌어서 쌓인 눈 위
에 두 갈래 길을 낸다. 그녀는 그렇게 마당을 빙빙 돈다. 눈송이가 금새금새 머리 위에 얹힌다. 그녀는
문득 신발 끄는 일을 그만둔다. 문간으로 간다. 그리고 고양이처럼 소리없이 대문을 비집고 밖으로 나간
다.
눈은 길 위에도 쌓이고 있다. 쌓인 눈 위에 떨어지는 제 발끝을 내려다보면서 마치 백리라도 걸을 듯
이 그녀는 걷는다. 방금 쌓인 눈은 밟혀도 소리를 내지 않는다. 세상은 참으로 조용하다. 그녀는 옆집
여인숙의 샛문께로 간다. 비사리 사이로 손을 비집어 넣어 손쉽게 사립문을 연다. 솜 같은 눈덩이들이
부실부실 떨어진다. 그녀는 집안으로 들어선다. 손님을 받는 방은 둘인데 그 중의 하나에 불이 켜져 있
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리로 간다. 마루 위로 기어 올라가서 뚫어진 창호지 틈으로 방안을 들여
다본다. 한 사내가 희미한 불 밑에 웅크리고 누워 있다. 그녀는 흠칠 뒤로 물러난다. 그리고 불이 꺼진
그 옆방 앞으로 간다. 문에다가 입을 댄다.
「꼬마야, 꼬마야」
아무 대답이 없다. 문을 흔들어 본다. 역시 반응이 없다. 그녀는 다시 불 켜진 방 앞으로 간다. 그리고
방문을 연다.
김씨는 네 다리를 이불 밑에 쑤셔 넣은 채 새우처럼 등을 굽히고 옆으로 누워 곤히 자고 있다. 여자는
그 얼굴을 들여다본다. 낮에 본 사람이 분명하다. 대학생! 그녀는 살풋이 김씨의 어깨를 밀어서 바로 눕
힌다. 넥타이가 목에 켕기는지 턱을 좌우로 흔든다. 츳, 츳, 옷두 벗지 않구. 가엾어라. 그녀는 누나가 되
고 어머니가 된다. 넥타이를 풀고, 이불을 젖혀서 바지를 벗기고 와이샤츠를 벗기고 요를 바로펴고 김씨
가 꿈틀하더니 일어날 듯하다가 다시 요 밑으로 파고든다. 여자는 화가난다. 그의 팔다리를 요 밑에서
빼어내고 그를 안아서 간신히 요 위에 눕힌다. 그리고 이불을 끌어다가 덮어준다. 베개를바로 베 주고
그대로 엎드려서 그 얼굴을 들여다본다. 대학생!
남포불이 피시식 소리를 낸다. 그녀는 일어나서 방바닥에 널려 있는 옷들을 주섬주섬 벽에다 건다. 남
포는 호야가 시커멓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위에서부터 남포 호야 속으로 살며시 바람을 불어넣는다.
밖에서는 눈이 소복소복 쌓이고 있다. 그녀가 남겨 논 발자국을 하얗게 지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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