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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문 [샬로트 램]

by Casey,Riley 2023. 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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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문
(A Violation)

샬로트 램
 

1장
 
클레어는 이따금, 자기가 끝도 없이 계속되는, 바벨탑 쌓는 일에 얽매여 있는 느낌이 들곤 했다. 더구나 오늘처럼, 이 광고 회사가 새로운 광고를 내놓으려고 회의라도 열 때면 더욱 그러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목청껏 자기 주장만 내세울 뿐 누구 하나 다른 사람의 말을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었다.
래리 사장의 부하 직원들은 초일류급이었다. 작가, 디자이너, 아이디어 맨 등……모두 날카로운 지성의 소유자들이고 저마다의 에고도 고층 빌딩보다 더 높았다. 저마다 이 세계를 자기 어깨에 짊어지고 있다는 듯한 느낌이었다. 큰소리치기 대회장 같은 이곳에서는 도대체 아무것도 나올 것 같지 않은데, 그래도 무엇인가가 생겨나니 신통했다. 그 소란  속에서 두드러지게 요란한 소리가 꽥 울리곤 하는데, 그것은 대개 래리 사장의 목소리인 것이다.
"말을 간결하게들 해요!"
오늘은 그는 아직 회의에 참석하지 않고 있었다.
이반은 될 대로 되라는 얼굴로, <깨끗한 세탁>이란 광고 문안에 퍼부어지는 비판을 듣고 있었다.
"자네는 요점을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어. 도대체 이게 뭔가?"
사람들은 그 그림을 바라보았다. 눈을 빛내는 아이들에 에워싸여 환한 
웃음을 띠고있는 어머니, 그리고 눈처럼 새하얗게 세탁된 의류…… 불찬성의 웅성거림이 일었다.
"너무 평범하고 진부하단 말이야, 낡았어요……"
"우리가 찾는 것은 좀더 짜릿하고 번뜩임이 있는거란 말이야" 젊은 카피라이터까지도 한마디 거들었다.
"마치 '아침 식사를 합시다.'라는 코머셜 같군."
그때 입구에서 쾌활한 목소리가 들렸다.
떠들썩하던 소리가 딱 그치고, 순간 사람들은 웃는 얼굴을 지으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래리가 들어온 것이다. 아니, 들어왔다는 표현은 맞지 않는다. 래리 히리어는 들어오거나 하지 않는다. 언제나 적시 적소에서 시한 폭탄처럼 터지는 것이었다. 클레어는, 래리 사장이 성큼성큼 방안을 가로지를 때면 언제나, 채찍을 옆에 끼고 사자에게 다가가는 조련사를 연상하는 것이었다. 사자들은 저마다의 위치에서 한껏 위엄을 부리며 으르렁거리고 있다. 조련사는 즐거운 듯이, 그러나 충분히 경계를 하면서 둘러보고 채찍을 한번 휘두름으로써 사자들을 마음대로 부리는 것이다.
30대 중반의, 올리브빛의 살갗을 한, 키가 크고 정력이 넘치는 남자 래리 히리어는 인생을 하나의 전장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정열은 고난과 마주 설 때 제일 고조된다. 채찍을 휘둘러 자기가 사로잡은 사자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을 무엇보다도 좋아했다. 클레어는 래리를 어떻게 평가해야 좋을지 모르고 있었다. 다만, 래리를 보면 전기 쇼크를 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만은 사실이었다――눈이 크게 떠지고 가슴의 고동이 빨라지는 것이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소?" 테이블의 상석에 앉으며 래리가 물었다.
"보셨습니까? 이 그림의……."
필이 입을 열려고 하자 이반이 당황하여 끼어들었다.
"가루비누를 파는 데 섹스를 쓸수는 없습니다. 필의 해결법은 언제나 그것이지요. 이 경우의 표적은……."
"지루한 설명이라면 그만두지 않겠나" 필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하자, 이반은 얼굴을 붉히며 입을 다물었다.
다른 사람들이 또 일제히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그때 클레어가 제안했다.
"모두들 커피나 한 잔씩 드시는 게 어때요?"
"좋은 생각이군" 래리가 대답했다. 그는 느긋하게 의자 등에 몸을 기대고, 마치 축구 시합이나 구경하듯이 소리나는 쪽으로 이리저리 눈길을 돌리면서 냉정하게 그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상의도 입지 않았고 넥타이도 없었다. 셔츠의 칼라 단추도 풀어 놓은 간편한 차림이었다. 그러나 신중하게 결단을 내릴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 광고 회사는 최근 급성장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오직, 모든 것을 한 가지에 몽땅 걸리라도 한 듯 흥분과 위기감으로 뭉쳐진 열기 때문이라고 클레어는 생각한다. 
대단한 급성장이었다――본인들조차 생각 못했을 만큼.
2년 전까지만 해도 몇 개의 소기업을 상대하는 소규모 광고 회사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조 히리어 사장이 심장마비로 죽자 뉴욕의 큰 광고 회사에서 일하던 아들 래리가 돌아와 뒤를 이은 지 2,3개월――회사는 온통 뒤집어엎는 것처럼 요란했다. 나이 든 사원은 대부분 퇴직하고, 활력 있는 새로운 팀을 결성하기 위해서 유능한 인재스카웃이 계속되었다. 작은 기업은 거래선 리스트에서 제외되었고 규모가 큰 고객을 확보했다. 이 회사에 광고를 맡기면 매상고가 눈에 띄게 뛰어오르는 것이었다.
래리의 한마디면 고객은 꼼짝을 못하고 일을 맡겼으며, 그 결과 이익률은 더욱 높아지는 것이었다. 이 광고 회사에 입사한 사람들은 날마다 각오를 새롭게 다지며 기량을 닦거나, 아니면 그만두고 나가거나 어느 한쪽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래리는 최상급의 일을 요구했다. 그 이하의 것은 무엇이건 용서가 없었다. 이따금 클레어는, 폭주하는 말잔등에 태워진 것처럼 현기증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거꾸로 떨어질까 무서워 고삐를 당길 수도 없었다.
이것은 클레어뿐 아니라 전직원이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래리는 사람들을 숨도 쉴수 없게 무자비하게 몰아치고 있었다. 참고 따라가기가 무척 힘이 들었다. 하지만 그 결과로서 얻는 풍부하고 빛나는 열매에 도취해서 다시 다음 일을 위한 활력이 솟게 되는 것이었다.
클레어는 비서 제니가 준비해 주는 커피를 가져오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마침 가지고 가려 했는데요." 제니는 핑크빛의 입술을 유감스럽다는 듯이 내밀고 말했다. 제니는 진지하게 일은 잘하지만 주위 사람들을 깔보는 경향이 있었다. 사람에 대한 그녀의 견해에 문제가 있다고 클레어는 보고 있었다. 그 둥글고 커다란 갈색눈과 조금 오똑한 작은 코도 사람들에게 그런 인상을 주는 것 같았다.
"잠깐 바깥 공기를 쐬고 싶어서 나온 거예요." 클레어는 다독거리듯 말하고 웃었다. 제니의 불만이 계속되면 난처하기 때문이다. "격론이 벌어지고 있어요."
"나도 들었어요. 무엇 때문에 저렇게 기를 쓰는지 몰라요. 아귀떼 같아요."
제니는 낡은 쟁반에 잔을 올려 놓았다." 문제를 까다롭게 만드는 것은 바로 자기네들인데!"
"그래요." 클레어는 수긍하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보랏빛에 가까울 만큼 짙푸르고 맑았다. 이 더위가 지나면 폭풍이 닥칠 것 같다. 실크 블라우스가 등에 달라붙는 느낌이 들었다. 땀이 밴 이마에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올리고 "덥군요"하고 중얼거렸으나, 제니는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았다.
제니는 쟁반을 들고 회의실로 향하며 말했다.
"내가 가져가겠어요."
그때 전화 벨이 울려 클레어는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클레어 포레스틉니다."
"아, 나야. 너무 지쳐서 밖에서 식사할 기운도 없어." 일방적으로 지껄이는 말이었다. 톰이었다. "오늘은 정말 지옥이야. 당신 집에 가서 스테이크를 구워 먹으면서 몸을 풀었으면 하는데, 어때?"
클레어는 아무것이나 그에게 던지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고단한 하루 일과를 끝내고 나면 요리만은 정말 만들기 싫다. 오늘은 외식이나 했으면 좋겠다.
"글쎄요……." 클레어의 망설임에 저쪽 전화에서 갑자기 숨결이 거칠어졌다.
"클레어, 난 지금 지쳐 죽을 지경이야. 멋을 부리고 밖에서 만찬 따위를 할 기운도 없다구."
문이 열렸다. 클레어가 눈을 들자, 짜증이 난 듯이 팔목시계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래리가 노려보고 있었다.
"알았어요." 할수없이 수화기에 대고 대답했다. "좋아요. 그럼 거기서 만나요."
몇 시까지 올 것이지 물어 볼 틈도 없이 톰은 전화를 끊어 버렸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래리가 말했다.
"그 녀석의 어디가 그렇게 좋은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군. 당신 같으면 좀더 나은 녀석과 어울릴 수 있을텐데."
"고맙다고 할까요?" 클레어는 내뱉듯이 말하고 걷기 시작했으나, 래리가 그대로 문을 막고 서 있었다.
"무엇에 대해서?" 래리는 찌푸린 눈으로 날카롭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를 칭찬해 준 것이죠?"
순간 래리의 딱딱한 표정이 풀어지고 입꼬리가 우습다는 듯이 치켜올라갔다. 장난꾸러기 같은 이런 표정도 클레어를 당황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이런 때의 래리는 매우 위험했다.
"톰 프레스코트와 어울리는 것은 시간 낭비야." 클레어를 내려다보고 래리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보다도 온몸을 할긋할긋 훑어보는 시선이 더 클레어의 신경에 거슬렸다. 래리의 손이 움직인 순간, 움찔하고 클레어는 몸을 사렸다. 래리의 집게손가락이 클레어의 목에서부터 블라우스의 윗단추로 더듬어 내려갔다. "단추가 빠져 있어요." 클레어의 손이 움직이기도 전에 래리는 사무적인 침착한 손길로 단추를 끼워 주었다. "당신의 매혹적인 가슴을 보고, 필의 머리에 비현실적인 광고 아이디어가 번뜩이면 곤란해. 그녀석은 아내가 보험 모집원과 도망친 뒤로, 광고 아이디어에도 섹스만 생각하게 되었어."
"어마, 그래요." 래리가 바싹 붙어 서 있는 것을 의식하며 겨우 그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그렇지, 하긴 멀지 않아 되살아나겠지만, 그녀석이 날카로움을 되찾을 때까지는 그녀석이 날카로움을 되찾을 때까지는 조금 마음을 써줘야지."
래리가 웃으니 햇볕에 그을은 눈꼬리에 주름이 잡혔다. 클레어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되돌리고 있었다.
그녀는 회의실로 돌아왔다. 안에서는 아직도 필과 이반의 격렬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반의 머리는 자신이 마구 잡아뜯는 바람에 고슴도치처럼 되어 있었다. 주위 사람들도 뒤질세라 큰 소리를 내며, 토론의 즐거움을 오래 맛보는 데 한몫들을 하고 있었다. 제니는 떨떠름한 얼굴로 사람들 앞에 찻잔을 하나하나 갖다 놓았다. 그녀의 표정은 누군가가 손을 뻗어 궁둥이라도 꼬집으면 더욱 새침해지는 것이었다. 그것을 
보고 남자들은 논쟁을 중단하고 즐거운 듯이 킬킬거렸다. 제니는 새침하게 턱을 치켜들고 물러났고, 래리는 자리에 앉았다.
"오우케이, 이제 휴전 타임으로 들어가자구. 모두 이야기를 중단하고 커피를 마셔요. 그리고 입 대신 한동안 머리를 회전시켜 줘요."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클레어는 찻잔에 살며시 입을 대며, 뒷머리에 묵직한 아픔이 계속되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또 논쟁이 시작되어, 그 소리는 아픈 머리에 계속 울렸다. 눈을 가늘게 뜬다고 소리가 약하게 들리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여전히 상대방은 쳐다보지도 않고 지껄여대고 있었다.
결국 아무 결정도 못한 채 회의는 끝났다. 그런뒤 클레어는 래리와 함께 광고주를 만났다. 모처럼 큰돈을 들여 제작한 광고가 별로 효과가 없었다고 화를 내는 고객을 이해시키기에 땀을 뺐다.
러시아워의 교통 체증 속에 집으로 돌아가는 클레어의 몸은 벌써 미이라처럼 지쳐있었다. 집에 도착해서 주방의 의자에 걸터앉자 한동안 움직일 수도 없었다. 냉장고속에 재료가 있는가를 보기 위해 일어서기도 힘이 들었다. 스테이크용 고기 두 장은 돌아오면서 사왔다. 그럭저럭 저녁거리가 될 만한 채소도 있는 것을 확인하고 겨우 안심이 되었다.
냉장고의 문을 닫고 클레어는 팔목시계를 보았다. 벌써 일곱 시가 가까웠다. 아아, 조금 있으면 톰이 도착할 것이다. 아직 목욕도 못 했고 옷도 갈아입지 않았다. 저녁식사를 준비하기 전에 목욕부터 해야겠다. 
먼저 머리를 개운하게 하기 위해서 인스턴트 블랙커피를 만들어 욕실로 들어가 창틀에 잔을 올려놓고 더운물을 틀었다. 그리고 침실로 가서, 언제나 긴장을 풀고 싶을 때 입는 피코크 블루의 카프탄 드레스를 꺼냈다. 보드라운 천이 마음에 드는 것이었다. 거울 앞에 서자 서둘러 머리를 위로 틀어올려 핀으로 고정시켰다. 언제나 이렇게 서둘러 준비하면서 결국 아무데도 갈수가 없다니!
오늘 저녁은 이제부터 무엇을 하고 싶으냐고 누가 묻는다면, 클레어는 더도 말고 그저 잠이나 푹 잤으면 좋겠다고 대답할 것이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어둠 속에서 따뜻한 이불에 폭 싸여 조용히 잠들고 싶다. 누구와 지껄이기도 싫고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클레어는 욕실로 돌아와 더운물의 코크를 잠그고 비단결같이 보드라운 따뜻한 물속으로 천천히 들어가 크림빛 욕조의 가장자리에 머리를 얹으며 커피 잔을 한손에 들었다. 더운물이 온몸에 스며드는 것 같았다.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욕조 저 끝에 핑크빛 발가락이 쏙 올라왔다. 
 
 거울은 수증기로 흐려져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온몸의 피부가 목을 축이려고 더운물을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땀구멍이 한꺼번에 열려, 온종일 들이마신 거리의 매연이나 먼지를 쏟아내고 있었다.
 톰이 언제 들어올지 모른다. 이 감미로운 한때를 언제까지나 맛보고 있을 수도 없는 것이다. 곧 나가서 옷을 입고 주방에 서야지, 하지만 잠깐만 더. 모든 것을 방문 저쪽으로 몰아내고 대양에 떠 다니는 백경의 심정이 되고 싶었다.
 커피를 다 마셨다. 팔을 뻗어 타일 위에 잔을 놓고 눈을 반쯤 감은 채 온몸에 비누칠을 했다――모양 좋은 가슴과 어깨, 쪽 뻗은 긴 다리에. 자신의 몸이 아름답다는 것을 처음 느낀 것도 이 욕실에서였다. 
 닫혀진 문 이쪽에서 비밀의 정원을 가꾸는 정원사처럼, 자기 가슴이 점점 풍만해지며 웨이스트가 죄어져 가는 것을――목에서 정강이까지 판자같이 반반하기만 했던 몸이 차츰 동글동글한 느낌이 더해 가는 것을, 날마다 새로운 경이로 바라보았던 것이다.
 마지못해 욕조에서 나와 어깨에 타월을 걸치고 배수구의 마개를 뽑았다. 타월 밑으로 물이 흐르고 있었으나 클레어는 그대로 침실로 들어갔다. 아직 한여름의 열기가 방안에 가득했다. 그래도 옷을 입은 클레어는 드레싱 테이블앞에 앉아 브러시로 머리칼을 손질했다. 따사로운 황갈색의 머리칼은 어깨에서 부드럽게 감겨 있었다. 조금 짙은 편이었으나 뽑은 일은 없는 눈썹이, 옅은 갈색의 눈 위에서 조금 놀란 듯이 초승달 모양을 하고 있었다. 클레어의 눈빛은 그녀의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초록에서 파랑으로, 다시 옅은 갈색에서 짙은 황갈색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살결도 햇볕에 살짝 그을은 느낌이지만 클레어는 거의 메이크업을 하지 않는다. 눈까풀에 희미하게 초록빛 섀도우를 칠하고 입술에 소프트 핑크의 루즈를 살짝 바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창문은 활짝 열려 있지만 커튼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거리에서 차의 소음이 들렸다. 곧 톰의 자가 요란하게 브레이크 밟는 소리가 들려 올 것이다.
 현관의 열쇠 구멍에서 소리가 들려 클레어는 얼른 나가 보았다. 톰인가 했으나 뛰어든 것은 룸메이트인 파멜라였다.
 "얘, 나 서둘러야 해. 파티가 있어." 숨을 헐떡이며 인사 대신 손을 젓고 자기의 침실로 뛰어 들어갔다.
 클레어는 식사 준비를 시작했다. 먼저 고기를 썰어놓고 그린 샐러드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빨간 포도주를 거실에 갖다 놓았다. 톰이 올 무렵에는 차가운 기가 가셔서 알맞은 온도가 되겠지. 그는 이런 것에 까다롭다. 자기 나름으로는 상당한 포도주 감식가로 자처하고 있었다.
 무척 값비싼 프랑스 향수 내음으로 파멜라가 나온 것을 알았다. 클레어는 돌아다보았다.
 "차리고 나오는 것도 빠르군."
 살에 착 달라붙은 청바지에 가슴이 깊이 팬 티셔츠 차림이었다. 한결 섹시하게 보였다. 파멜라가 입으면, 흔해빠진 평상복도 마치 파리의 의상점에서 직송되어온 드레스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톱 모델로서 파멜라가 손에 넣은 남자는 도대체 몇십 명이나 될까? 그녀는 그런 것을 모두 플레이라고 생각하며 자기를 독점하려는 남자는 즉각 관계를 끊어 버리는 것이었다.
 "오늘 파티는 성장할 필요가 없는 모임이야." 파멜라는 보울에서 레티스 한장을 얼른 집어 입에 넣었다. "너도 가지 않겠니?"
 "톰이 온대."
 "그래서 어쨌다는 거니?" 파멜라는 금빛으로 반짝이는 눈으로 가만히 클레어를 바라보았다. 꼭 사자의 눈 같다고 클레어는 생각했다. "도대체 그의 어디가 좋아서 그러니?"
 "너까지 그런 소리를 하다니!"
 그러자 파멜라는 곧 흥미를 나타냈다.
 "어마, 나말고도 센스 있는 사람이 또 있니" 그게 누군데?"
 "래리야."
 클레어의 쌀쌀한 대답에 파멜라의 눈이 빛났다.
 "이야기가 통할 것 같군. 나 그 사람 좋아."
 "너하고는 잘 맞을 거야." 말해 버리고 나서 자기 목소리가 차가와진 것을 깨달았다. 파멜라는 놀리듯이 미소를 띠며 클레어를 바라보았고, 클레어는 그것을 느끼고 속으로 당황했다. 파멜라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아. 난 래리따위는 좋아하지 않아―― 난 그런 바보가 아니야. 래리 히리어는 같이 있기에는 너무 위험한 남자야.
 "파티는 몇 시부터니?" 클레어는 마음의 동요를 숨기기 위해서 팔목시계에 눈길을 주었다.
 "내가 도착하면 시작하게 돼." 파멜라는 일부러 거드름을 피우며 말하고는 웃기 시작했다. "앤디가 마중오게 되어 있어. 일곱 시 반에 온다고 했지만 그는 언제나 늦어." 그렇게 말하고 파멜라는 또 레티스를 집었다.
 "너 식사 아직 안 했니?"
 "점심은 먹었어." 파멜라는 어깨를 추슬렸다.
 그녀는 다이어트를 위해 늘 배를 곯고 있었다. 웨이스트도 히프도 아주 근사한데, 그래도 언제나 살이 찐다고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1밀리도 더 늘지 않도록 하루 한끼로 지내고 있었다. 파멜라의 보이 헌팅은 만성적 영양실조의 결과가 아닌가 하고 클레어는 생각했다. 욕구불만에서 다른 배출구를 찾고 있는 것이라고.
 집 앞에 차가 멎는 소리가 들렸다.
 "클레어, 바이바이." 하고 말하기가 바쁘게 파멜라의 모습은 어느새 사라졌다.
 파멜라가 차를 타는 것을 클레어는 창밖으로 내려다 보았다. 금발이 저녁 햇살을 받아 빛났다. 운전석의 청년과 얼굴을 마주 보며 웃는 모습을 보고 클레어는 부럽다고 생각했다. 저 활력의 비결은 도대체 무엇일까? 파멜라는 무대의 쇼우가 아니라 주로 사진 모델을 하고 있지만, 상당히 고된 일이니 몹시 피곤할 텐데도 사교적인 모임에 빠지는 일도 별로 없고, 매우 즐거운 마음으로 참석하는 것이었다. 즐거운 저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나도 하려고만 하면 파멜라처럼 할 수 있을까?……클레어는 한숨과 함께 창가를 떠났다. 나도 그녀같이 에너지가 넘친다면 오늘 저녁도 좀더 설레는 마음을 안고 톰을 맞이할 텐데.
 클에어가 기다리는 데 짜증이 날 무렵 톰이 나타났다. 저고리를 벗어 팔에 걸치고 셔츠 소매는 걷어 올렸으며 넥타이는 풀고 있었는데, 단추가 풀린 셔츠의 깃 사이로 땀으로 번들거리는 살이 들여다보이고 있었다.
 "여어!" 톰은 그녀에게 키스했으나 그녀의 얼굴은 주방의 고기 쪽으로 향해 있었다
 . "식사 준비는 아직 안 되었어? 아이고, 배고파 죽겠는데, 제기랄. 서있기도 힘이 들어. 지독한 하루였지. 이른 아침부터 글쎄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느라고 온종일 눈코 뜰 새가 없었어. 내가 체크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진행되는 일이 없어. 정말 지겨워. 내가 등만 돌리면 녀석들은 뭘 하는지 모르겠다니까!" 썰어 놓은 토마토를 주발에서 꺼내어 입에 던져 넣었다. 그러고는 또 거실로 걸어갔다. "아, 뭐 마실거라도 좀 없어? 클레어, 여기서 텔레비젼을 보면서 기다리겠어. 어느 채널에선지 골프중계가 있을 거야."
 클레어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어항 속에서 답답해서 입을 뻐끔거리는 금붕어 같은 심정이었다.
 갑자기 텔레비젼이 크게 울리다가 이내 소리가 낮아졌다.
 "술은 어디 있지?" 톰이 소리치고 있었다.
 클레어는 로봇처럼 장식장으로 걸어가, 반 정도 남은 위스키 병을 꺼냈다. 같은 선반에서 클라스를 집어 위스키를 천천히 따라 거실로 가져갔다.
 톰은 소파에서 벌렁 뒤로 자빠져 두 손을 베개삼아, 내던져진 인형처럼 큰 대자로 다리를 벌리고 텔레비젼을 보고 있었다. 그는 다가가는 클레어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말없이 한 손을 내밀어 글라스를 받아들었다.
 "저것 보라구. 믿을 수 없어! 무시무시한 쇼트야!"
 클레어는 주방으로 돌아가 스테이크를 굽기 시작햇다. 신선한 고기가 구워지는 내음이 코를 자극했다. 나도 배가 고픈 거야. 너무나 지쳐서 
 느끼지 못했을 뿐이었어. 한쪽이 구워진 고기를 뒤집으려 하자,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클레어!" 떼를 쓰는 아이처럼 짜증난 소리가 들렸다. "소다수를 갖다 줘야지! 나는 위스키에 소다수를 타야 마신다는 것을 알면서 그래!" 
 클레어는 다시 거실로 소다
 수를 가져갔다. "고마와, 에인젤." 톰은 클레어를 쳐다보지도 않고 그렇게 말하고 소다수를 글라스에 따랐다.
 5분 뒤에 클레어는 식탁에 접시를 늘어놓았다. 바로 옆을 클레어가 왔다갔다하고 있는데도 톰은 도무지 쳐다볼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마침내 클레어가 쌀쌀하게, "식사 준비가 되었어요." 하고 말하자 톰은 겨우 위스키를 한 손에 들고 눈은 여전히 텔레비젼을 향한 채 일어섰다. 일어서서도 한동안 그대로 보고 있다가, 겨우 스위치를 끄고 식당으로 왔다.
 식사를 하면서도 톰은 자기 일에 대한 이야기만 계속했다. 얼마나 피곤하며 동료들이 얼마나 비협조적인가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았다. 클레어는 고기를 입으로 가져가면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또 식욕을 잃은 것 같았다. 목이 죄어드는 것 같았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지쳐 버렸다.
 클레어가 억지로 견디며 식사 상대를 하고 있는 것도 모르고 톰은 따발총처럼 지껄이면서 사이사이에 부지런히 음식을 입에 넣고 있었다. 그는 야심가여서 지금의 회사에서 출세를 하려고 하고 잇다. 다른 누구보다 능력이 있다고 자신이 만만하다. 그는 처음에는 지방의 소도시 월버햄프턴에서 교육을 받고 그곳 건축회사에 들어갔으나, 지방에 묻혀 있을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이내 런던으로 나와 도로와 학교, 병원 등을 건설하는, 전국적으로 알려진 지금의 대기업에 취직했다. 그는 하늘 높은 줄을 모른다. 언제나 사다리를 더 높이 오르고 싶어 안달이다. 그의 결단력과 에너지, 파워에는 클레어도 탄복하고 있다. 공격력을 얼굴에 드러낸 정력적인 인간이다. 웃음을 보이고 있을 때도 그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펀치를 내밀 준비를 하고 있다. 머리를 망아지의 갈기처럼 짧게 깎은, 건장한 근육질의 체격이다. 그러나 그 골격 속에 놀라울 만큼 어린 소년 같은 면을 간직하고 있었다. 무엇이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을때는 토라지고 짜증내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클레어가 좋아하는 것은 그의 그 소년 같은 면이었다. 톰의 무엇이 클레어의 마음음 움직인 것일까? 만일 톰이 클레어의 따뜻함에 만족하기만 한다면 클레어는 톰을 더욱 사랑했을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톰의 요구는 지나친 것 같았다. 클레어의 코앞에 빈 접시를 들이미는 듯한 짓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보채고 따지며 클레어가 주려는 것 이상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클레어는 차츰 톰이 너무 제멋대로라고 생각하게되었다. 
 그러나 톰은 클레어가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고, 클레어의 마음속으로 흙발을 디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톰이 겨우 식사를 끝내자 클레어는 접시를 포개 들고 주방으로 갔다. 톰은 혼자서 거의 다 마신 포도주를 아직도 아쉬운 듯이 기울여 마지막 한 방울까지 유리잔에 따랐다. 클레어는 그저 입에 대는 시늉만 했을 뿐이고 유리잔만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클레어는 커피포트를 불 위에 얹어 놓고, 물이 끓는 동안 자기가 남긴 음식 찌꺼기를 쓰레기통에 쓸어 넣고 개수대에 접시를 옮겨 뜨거운 물을 틀었다. 톰은 자기 집에서는 인스턴트밖에 마시지 않으면서도 이곳에만 오면 꼭 진짜 커피를 끓이게 하는 것이었다.
 클레어가 커피를 쟁반에 담아 거실로 가자, 방안의 불은 겨우 사이드 테이블만을 비추는 스탠드를 남기고 모두 꺼져 있었다.
 "파멜라는 오늘 저녁 어디 갔지?" 커피를 건네주자, 고맙다는 소리는 하지 않고 톰은 불쑥 물었다.
 "파티에 갔어요."
 톰은 금방 불만스런 표정을 보였다.
 "당신이 어째서 그런 여자와 룸메이트가 되고 있는지 이해하기가 힘드는군. 정말 전혀 다른 타입인데."
 "그렇군요, 파멜라는 당신 같은 타입이에요." 생각도 없이 불쑥 말해 놓고 나서 톰이 놀라는 것을 보자 클레어는 흠칫했다. 톰은 파멜라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대개의 남자들이 그렇듯이?
 "왜 그러지?" 톰은 묻고 나서, 지금까지 보인 일이 없는 표정을 지었다. 자기 만족과 놀림이 뒤섞인 듯한 얼굴이었다. 그는 자기의 커피 잔을 테이블에 놓더니, 클레어의 손에서도 잔을 빼앗아 테이블에 놓았다. "당신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잘 알겠어."
 도대체 신경이 어떻게 되어 있기에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오늘 들어온 뒤로 한번이라도 내 얼굴을 쳐다보았는지 의심스럽다. 하물며 내가 속으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는 짐작도 했을 리가 없으면서. 사람의 마음이란 상대방의 허락 없이 함부로 들어설 수 없는 것인데. 
 톰을 처음 만나던 무렵, 클레어는 마음의 문을 한껏 열고 그를 맞아들였다. 자기 것은 무엇이고 다 톰에게 바치고 싶었다. 톰은, 클레아로서는 생전 처음 자기 세계에 받아들인 사람이었다. 자신과 같은 세계에 사는 인간인 줄 알았는데, 그 기쁨은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모처럼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 버린 지금, 바싹 말라 버린 클레아의 마음은 무척 쓸쓸했다.
 톰은 서둘러 클레아를 소파의 쿠션에 밀어붙이고 키스를 해왔다. 소파가 삐걱거렸다. 장미빛의 수줍은 조그만 입술을 톰의 커다란 입이 억지로 열려고 들었다. 뭔가 따뜻하고 촉촉한 물체가 달라붙어 있다는 감각밖에 없었다. 몸이 굳어지면서 그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톰은 클레아가 마음 내켜 하지 않는 것도 도무지 눈치채지 못하고, 카프탄 드레스의 꼭 죈 진주 버튼을 더듬으며 투덜거렸다.
 "무엇 때문에 이런 옷을 입고 있지?"
 지쳐 버린 클레아는 입씨름을 할 마음도 없었다. 베드인을 거절하면 톰은 난폭해지는 것이었다. 첫 데이트를 한 그날 밤 두 사람은 침대를 같이 했다. 클레아는, 자기는 누구와도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는 지론을 톰에게 말했으나 톰은 비웃을 뿐이었다. 그리고 클레아는 저항하지 않았다. 이왕 톰을 사랑한다면 기다릴 필요가 있을까? 처녀도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18세 때의 그 사건 이후 어떤 달콤한 말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겠다고 마음에 다지고 있었다. 톰도 그녀의 생각에 찬성이었다――단 다른 남자를 대할 때는 그렇게 하고, 자기에 대해서만은 별도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자기의 사랑은 진지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클레어는 행복감으로 가슴이 벅찼다.
 톰의 손길이 카프탄 속으로 파고들며 입술은 그녀의 목에 밀어붙여져 있었다. 클레어는 최면술에 걸린 셈치자고 생각했다. 팔의 힘을 뺐다. 그러나, 그렇게 하자 이번에는 팔이 굳어져 오는 것을 느끼고 그 시도는 단념했다. 등뼈는 콘크리트가 된 것 같았고, 머리가 욱신거렸다. 뱃속까지 느글거리기 시작했다.
 "톰." 클레어는 중얼거리듯 불렀다. "톰." 다시 한번 불렀다. 그러고는 그의 머리를 두 손으로 밀어내면서 몸을 일으켰다. "오늘 저녁은 이만 놓아 달라고 하면 화내겠어요? 머리가 무척 아파요. 유행성 감기에 걸린 것 같아요."
 "왜 그 말을 진작 하지 않았지?" 짜증이 난다는 듯이 입을 일그러뜨리고 클레어를 노려보았다. 숨겨져 있던 소년 티가 드러난 얼굴이었다.
 "미안해요." 조금도 미안할 것이 없는데. 도리어 지금까지도 그가 내 상태를 도무지 알아주려 하지 않는 것이 원망스러운데! 그는 자기의 하루 일에 대한 불평만 들입다 쏟아놓고, 클레어가 어떻게 지냈는지는 한마디도 묻지 않았던 것이다. 저녁 식사의 준비를 거들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클레어가 자기처럼 직장에서 종일 고단하게 일한 것을 알 텐데도.
 "왜 내가 들어올 때 말을 하지 않았지?"
 클레어는 인내의 한계점까지 와 있었다. 그녀의 말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나한테 말할 틈이나 주었어요? 당신은 들어오자마자 텔레비전에 달라붙었고, 지금까지 매번 그랬듯이 자기 일에 대한 이야기만 지껄였어요."
 톰은 새삼 부아가 치미는 듯 클레어를 쳐다보았다. 얼굴에 빨갛고 파란 모세혈관이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톰은 겨울에는 럭비, 여름에는 테니스를 한다. 살이 찌는 것을 무서워하는 것이다. 토요일 오후에는 시합을 보러 오라고 했다. 시합을 마치고 샤워실로 갈 때 클레어를 향해 빙긋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이는 것이었다. 승리의 목격자가 되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톰은 승리자다. 오직 상대방을 이기기 위해 싸운다.
 "도대체 왜 그러지? 달마다 오는 그거야?" 톰은 클레어를 또 여자라는 틀 속에 집어넣으려 하고 있었다――그녀는 지금 정상이 아닌 거야, 여자란 달과 같은 사이클로 기분이 바뀌는 동물이야, 신경 쓸 것은 없어, 하고.
 "지쳤어요, 나도 온종일 뛰어다니며 일한 거예요. 당신은 남의 일을 생각해 주기도 싫겠지만. 오늘은 유난히 심했어요. 게다가 나는 집에 돌아와서 당신을 위해 저녁 식사를 준비했고, 당신이 소파에서 편안하게 텔레비젼을 보는 동안에도 식탁을 차리느라 바빴어요. 술 가져오라고 외치고, 가져가도 고맙다는 말은 없고 소다수를 가져오지 않았다고 화만 냈어요."
 "그렇게 큰 소리 칠 것 없어. 그러는 당신은 보기 싫어. 난 소리치는 여자는 질색이니 귀청 터지게 떠들어대지 말라구." 클레어가 한순간 할말을 잃고 있는 동안 톰은 벌떡 일어섰다. "나도 이젠 기분을 잡쳐 버렸어. 당신이 날 마음 밖으로 몰아낸 거야."
 "그건 피장파장이에요. 나는 벌써부터 당신의 마음 밖으로 쫓겨나 있었어요. 당신은 기계예요. 장난감 전차나 가지고 노는 것이 제격이겠어요. 그건 레일 위만 달리면 되니까요."
 "닥치라구! 옆집에서 들어도 좋아?" 톰의 얼굴을 벽돌처럼 빨개졌다.
 "옆집이 무슨 상관이에요. 당신은 이곳에 와서 나를 기생처럼 계속 시중만 들게 만들고……."
 "바보 같은 소리 집어치워!"
 "술과 음식을 받쳐들고, 게다가 무릎을 꿇고 술을 따르게 하고 싶었지요?"
 "나를 위해 음식을 차리기 싫다면 그만두라구. 난 그러는 걸 당신이 좋아하는 줄 알았어. 당신은 언제나 집에서 식사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잖아. 참 여자답고 좋다고 생각했지."
 "오늘처럼 지쳐 있지만 않다면 그래요."
 "당신이 그렇게 피곤한지 어떤지 내가 어떻게 알아. 말도 하지 않는데 어떻게 알 수 있어?"
 "보면 알지 않아요? 하지만 아까 당신은 소파에서 나를 보기도 전에 불까지 꺼버렸어요."
 톰이 숨을 몰아 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클레어는 두들겨 맞는 것이나 아닌가 싶어 순간 몸을 움츠렸다.
 "당신은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시고 나면 다음에는 커피, 그리고 커피를 마시면 또 잇따라……. 하는 일이 판에 박은 것 같아요."
 "그래 그것이 어쨌다는 거지?"
 "럭비를 한 뒤에 샤워를 하면서 당신은 무엇을 생각하지요?"
 톰은 얼굴이 새빨개져서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당신은 끝맺음은 언제나 섹스더군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난 섹스에 미친 사람이 아니야!"
 "당신은 내가 여자니까 내게 섹스를 요구하는 건 당연한 일로 알고 있어요. 내가 무엇을 바라는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상관도 없이. 당신은 자기 멋대로 노는 짐승이에요."
 "난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몸도 가지고 싶은거야. 그것이 왜 제멋대로지? 섹스는 애정 표현의 하나라고 당신도 말했잖아?'
 "애정 표현과 당신이 지금 하려는 것과는 아무 상관도 없어요. 달리 할 일이 없으니까 강요하려고 들 뿐이에요. 당신은 파멜라를 많이 닮았어요. 마음이 내키면 언제나 침대, 그것도 상대방이 누구건 상관없이."
 "옳은 소린지도 모르겠군. 당신이 아니라 파멜라에게 눈독을 들여야 했어. 충고를 해주어서 고마워."
 얄밉게 돌아서는 톰의 뒷덜미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쫓아가 사과하고 달래야 할까? 그런 말을 쏟아 놓을 생각은 없었는데, 내가 어떻게 된 거야. 하지만 모든 게 사실이야. 톰은 나를 하나의 인간으로서 보려고 하지 않아. 여자――그저 여자, 욕망의 대상, 바깥 세상에 쏟아지는 소나기를 잠깐 그을 수 있는 피난처로만 볼 뿐이야.
 클레어를 붙잡고는 '나를 폭 감싸 줘.' 하고 톰은 말했었다. 그때 클레어의 마음 한편에서는 따뜻하게 문을 열어서 그를 맞아들이고 싶다고 생각했으나, 다른 한편에서는 굳게 문을 닫고 있었다. 그는 날 이용하고 있어. 내 사랑을 악용하고 있어…….         그는 잘난 체하는 얼굴을 하고 언제나 그녀에게는 개성 없는 여자이기를 강요하고 있었다. 클레아는 뒷걸음질 쳤다. 더러는, 내가 식사 준비를 하겠다는 말도 할 수 있지 않은가. 오늘 저녁만 해도, 무드가 없다며 거절했다고 화를 낼 것이 뭐야. 자기 일에 대한 이야기는 끝도 없이 지껄이면서, 왜 클레어의 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묻지 않는 건가. 클레어가 회사에서 돌아오면서 여자들끼리 모임을 가지면 비웃으면서, 자기네 남자들끼리 밤을 새워 마시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건 무슨 논리지?
 톰이 웃는 까닭은 여자가 애인을 동반하지 않고 여자끼리 하룻밤을 즐겁게 지낸다는 것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여자들 사이에는 우정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우정은 남자들끼리만 갖는 것이고, 여자들은 서로 시기와 질투만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클레아는, 여자 친구를 만날 때는 톰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이 여자에게 무슨 볼일이 있어서 만나느냐, 딴 꿍꿍이속이 있는게 아니냐 하고 의심하기 때문이었다.
 현관문이 쾅 닫혔다. 그가 나간 것이다. 클레아는 커피 잔을 치우고 불을 끄고 겨우 침실로 들어갔다. 누가 톰에게 저런 여성관을 심어 준 것인지 클레어는 알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인 것이다. 월버햄프턴의 그의 집에 몇 번 드라이브한 일이 있었다. 그 무렵 클레어는 아직 전격적인 사랑의 몽롱한 기분에 젖어 있었다. 자기 감정의 깊이도 헤아리지 못한 채 어디에 있든지 사랑의 샘물이 넘치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때도 어머니에게 매달리는 그에게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달콤한 찬사로 어머니의 환심을 사는 데 바빴고, 자기가 얼마나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있는지를 클레어에게 보여주려고 했다.
 톰은 자기 어머니의 무릎 위에서 여성관을 배운 것이다. 그가 무엇을 갖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이미 그것이 주어지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 여자는 가정적인 동물이고 남자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있는 존재였다.
 처음 클레아와의 사랑을 나눌 때, 톰은 그 생각을 고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클레아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클레아를 당연히 거기에 있을 존재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이제 톰은 클레아에 대해서 제대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취하건 버리건 멋대로 할 수 있는 카드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클레어는 입고 있던 것을 벗어 던졌다. 잠옷을 입기도 귀찮았다. 한 여름이라 몹시 무더웠다. 그녀는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었다. 불을 끄자, 땀이 밴 살 위에 얇은 시트 한 장을 끌어당겨 덮었다.
 어느 사이에 톰이 찾아오는 것이 습관처럼 되었다. 이따금 그가 일 관계로 오래 출장을 가면 쓸쓸하게 느끼게 되었다. 하긴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자주 쓸쓸함을 느꼈었다. 상당히 바쁜 사교생활을 했지만,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들과 저녁 식사를 같이 하고 붐비는 파티의 분위기 속에 어울리면서도 쓸쓸함은 느끼는 것이었다.
 쓸쓸함도 습관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공원에서 쓰레기통을 들추는 노인만 보아도 그때마다 느껴졌다. 그들의 얼굴에 고독이 주름으로 새겨져 있다. 그렇지, 그 눈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지나칠 때 눈여겨보면, 그들은 늘 무언가 중얼중얼 혼잣말을 하고 있다.
 클레어는 다른 장면을 상상했다. 혹시 그들이 말이라도 걸어온다면……. 눈이 마주칠 거야. 그 눈에는 증오심과 함께 무언가에 매달리고 싶은 빛이 있어. 하지만 뒤따라오기라도 하면 난처하기 때문에 난 웃음을 되돌릴 수가 없다. 만일 그들이 말이라도 걸어오게 되면 어쩔 줄을 모르게 될 거야. 그들은 이단자야. 일이나 집, 가족 같은 정상적인 세계 밖에 있어. 저마다의 이유로 멋대로 방랑하는 나그네처럼 길을 나서서 예전의 세계로 돌아갈 마음이 없어. 하지만 클레어는 그들의 예전의 생활에 생각을 달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도 지난날에는 누군가와 관계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어쩌다가 저렇게 되었을까?
 톰을 만났을 때 클레어는, 아아, 이제 고독과는 작별이다, 하고 생각했다. 난 마침내 행복해지게 되었다, 눈부신 미래가 약속된 거다, 하고 생각했다.
 지금 클레어와 톰은 같은 대지를 밟고 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크게 틈이 벌어져 있으며 그 틈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날에는 탄탄하고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대지에 처음으로 머리카락만한 틈이 생겼을 때, 클레어는 물론 하루하루 벌어져 가는 그 틈을 무시하려 했다. 그녀의 일이 부쩍 바빠지면서 상황은 더욱 나빠져 갔다. 클레어의 주위의 모든 것은 흙투성이가 되고 요란하게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지금까지 겪어 보지 못한 괴로움이 그녀를 덮쳤다. 클레어는 그것을 견디어내기 위한 힘과 정열을 톰에게서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톰은 자기 자신의 문제 이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클레어는 단념하지 않고 돌파구를 찾으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그러나 역시 톰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클레아는 침대 위에서 등을 구부리고 무릎을 껴안아 자궁 속의 태아 같은 자세로 누워 있었다. 이제 생각은 그만 하자. 잠을 자야지, 너무 피곤해. 마음이 갈가리 찢겨진 것 같다. 무엇보다 잠이 필요해.
 
 깊이 잠이 든 클레어는 방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고무창 구두여서 소리도 내지 않고 남자는 침대로 다가왔다. 남자는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면서 옷을 벗어 던졌다.
 클레어는 호텔의 꿈을 꾸고 있었다. 생시에 본 일도 없는 호텔이었다. 넓은 계단은 계속 내려가도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주위의 여기저기에 모여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은 누구도 클레어를 쳐다보지 않았다. 톰은 어디에 있을까? 웬지 모르지만 톰이 거기에 있을 것 같았다. 찾아야지. 못 찾으면……찾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모르겠다, 하지만 급한 일이 있어. 클레아는 모퉁이를 돌았다. 깜깜하고, 그리고 좁았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톰?" 클레아는 속삭이듯 불러 보았다.
 어둠 속에서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누군가의 손길이 클레어의 벗은 가슴을 짓누르고 세게 꼬집었다.
 비명을 지르고 클레어는 눈을 떴다. 무언가 부드럽고 단단한 것이 클레어의 입을 막았다. 클레아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현기증이 났지만 눈의 초점을 모았다. 팔도 다리도 힘을 쓸 수가 없었다.
 "누구……." 하고 말하려 하자, 다시 손이 와 입을 막았고 광대뼈를 죔쇠로 죄는 것 같았다.
 클레아는 엉겹결에 무릎으로 상대를 찼다. 남자는 배를 맞았는지 신음소리를 냈다. 다음 순가 주먹이 올라가는 것을 보고 클레아는 머리를 얼른 옆으로 비켰다. 그러나 펀치는 강했다. 눈에 격심한 통증을 느꼈고, 이내 미지근한 것이 얼굴에 흐르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것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다. 클레아의 머릿속은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정신이 아뜩해지려는 순간, 공포로 광란 상태에 이른 클레아는 맹렬한 저항을 시작했다.
 남자의 엄지손가락이 턱밑으로 깊이 파고들어 목을 죄면서 또 한 손의 주먹이 클레아의 명치끝을 때렸다. 이런 일을 당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어렸을 때 아버지한테 맞은 일이 있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하물며 다른 남자한테, 더구나 아무 이유도 없이 두들겨 맞다니. 알 수가 없었다. 왜 이런 일이……. 잠을 빼앗기고 이런 악몽 같은 일을 당하다니.
 상대방의 얼굴은 아주 새까맸다. 검은 모직물 복면에 입술 위까지만 가려져 있었는데, 그가 히죽 웃자 새하얀 이빨이 보였다. 그 다음의 격심한 일격으로 클레아는 그만 정신을 잃었다.
 의식이 돌아오면서 클레어는 또 무서움과 혐오감으로 구토증을 느꼈다. 온몸이 뜨겁고 끈끈했다. 지문투성이의 글라스 같군. 그러나 클레어는 한기를 느꼈다. 이가 딱딱 마주쳤다. 얼굴에 피가 흐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코가 부어 오른 것 같았다. 이 하나가 흔들려 살며시 혀로 눌러 보았다. 입안에서 찝찔한 맛이 낫다――하나님, 제발 부탁이에요. 누구 좀 도와줘요. 어째서 아무도 도우러 달려와 주지 않는 거예요? 온몸이 욱신거리고 떨리며 조금만 움직여도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상대방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자 클레어는 오싹 소름이 끼쳤다――이 남자는 날 죽일 생각인가?
 클레어는 자신보다 더 강하고 힘이 센 짐승과 마주선 작은 동물처럼, 할퀴고 물어뜯으며 손톱을 세웠다. 남자는 한마디도 소리를 내지 않았으나 그때마다 목 속으로 짓눌린 듯한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렇다, 그것이 무서워――한마디도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이. 소리도 들을 수 없고 얼굴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꼭 한가지 분명한 것은, 남자는 클레어를 줄이고 싶을 만큼 미워하고 있다는 것이다. 난 이토록 큰 증오의 대상이 될 만한 일을 한 적이 없다. 상대는 클레어를 죽도록 아프게 하면서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니, 공포에 버둥거리는 여자를, 아픔에 겨워하는 여자를 그저 즐기면서 바라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클레어는 속으로 외치고 있었다――도와줘요. 부탁이에요. 누구 좀 빨리 와 줘요. 이런 일은 이제 싫어요! 아무 예고도 없이 어둠 속에서――이런 짓은 공정하지 못해요.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까!
 이제 클레어는 아이처럼 속으로 호소하고 있었다――난 아무것도 나쁜 일을 한 적도 없는데, 왜 내가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가?
 남자는 클레어의 두 손목을 움켜잡고 머리 위로 끌어올려 헤드보드에 몇 번이나 세게 부딪쳤다. 피가 흐르고 두 손이 차가워지자 그대로 내팽개쳤다. 다시 한 손으로 누르고 다른 한손으로 클레어의 온몸을 계속 두들겨 댔다. 흐느끼면서 클레어는 또 의식을 잃어 가고 있었다.
 몇 시간이 지났는지 클레아는 알 수가 없었다. 남자는 클레아를 자기 마음대로 다루고 있었다. 클레아는 이제 꼼짝도 할 수 없어 눈을 감은 채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죽일 생각이라면 할 수 없어. 이제 될 대로 되라구,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문에 키를 꽂는 소리가 들렸다. 한순간 두 사람 다 흠칫했다――클레아는 희미한 희망을 걸었고, 남자는 몸을 긴장시키고 귀를 기울였다.
 ――파멜라군, 하고 클레아는 생각했다――파멜라, 조심하라구, 여기에 들어오면 안 돼……. 그러나 클레아가 소리를 내려고 하기도 전에 남자는 겁을 주듯 힘을 가했다. 그 눈에는 살의가 있었다. 나가기 전에 남자가 무엇을 할지 그 눈이 말하고 있었다.



2장

파멜라는 살며시 집안으로 들어왔다. 현관 홀은 어둡고 클레아의 방 문 밑으로도 빛은 새어 나오지 않았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파멜라는 조용히 문을 닫고 불을 켜자 곧장 주방으로 갔다. 스위치를 올리고 바로 주전에 물을 부어 불 위에 얹었다. 차를 마시고 싶었던 것이다. 졸리기는커녕 가슴속은 부글부글 끊고 있었다. 그 남자는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야!
자켓을 벗어서 의자 등받이에 걸쳤다. 다음 순간,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도 없이 벌떡 일어나 티포트와 차잔을 꺼내고 있었다. 머릿속은 노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파멜라는 두 손으로 티포트의 둥근 몸체를 안고 가만히 있었다. 창을 향해 선 채, 밝은 실내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창밖의 어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캄캄한 관람석을 앞에 두고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무대에 서 있는 배우와도 같았다. 무엇 때문에 그 남자는 그런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을까? 신경이 얼마나 무딘 사람이기에? 한대 갈겨 줄 걸 그랬어. 
티포트의 물이 요란하게 끓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자 또 그 남자 생각이 났다. 그 남자를 본 것은 오늘 저녁이 처음이 아니었다.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지만 요즘 자주 주위에서 눈에 띄었다. 이름도 모르고 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몇 번인가의 파티에서 벽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파멜라로서는 쳐다보기도 싫은 못난 얼굴에 속하는 사람이지만, 자기를 바라보는 그의 눈초리가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자기도 모르게 눈길을 향하게 되었었다. 그녀는 그렇게 바라보는 눈길에 익숙하지 못했다.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그냥 바라보는 것도 아니고 동경하거나 부러워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뭘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희미한 미소를 띠고 그저 이따금 파멜라를 보는 것뿐이었다. 처음에는 그의 버릇이라고 생각하려 했으나 차츰 신경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무엇을 보고 있을까
생각하면서 어느덧, 그의 눈길이 딴데로 갔을 때는 이편에서 관찰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때나 특히 여자와 담소하고 있을 때 자세히 바라보았다. 여자라면 누구에게나 그런 눈초리를 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다른 여자를 대할 때는 쾌활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를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그의 눈길이 향할 때 상대방의 표정의 변화를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었다. 남자도 여자도 반가운 듯 그를 맞는 것이었다. 런던 근방의 악센트가 있는 것 같았다. 아부 평범한 사람이었다. 얼굴은 갸름하며 마른 편이고, 좀처럼 일광욕을 하지 않는 도시인의 피부 빛깔이었다. 검고 곧은 머리에는 빗질한 자국이 깨끗이 나있었다. 청결하지만 좀 초라한 낡은 차림이었다. 옷차림으로 보아 부자는 아니라고 파멜라는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인사를 하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파티에 오는 사람은 부자이거나 아니면 부자의 세계와 관련을 맺고 있는 사람뿐이므로 실업가나 모델, 흥행사 등 주요 인물뿐이다. 이런 곳에서 차림이 초라하면 무시를 당하고 마침내는 따돌림을 당하기 일쑤다. 어째서 그 남자가 거기에 있으면, 누구의 소개로 와 있는가, 그리고 그는 어떤 인물인가, 파멜라는 누구에게 묻지 않고는 궁금해 견딜 수 없었다. 
파멜라는 보통 누구에게 흥미를 가지면 그와 자기를 소개시켜 줄 만한 사람을 찾는다. 자기 일은 자기가 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왔고, 붙잡을 줄이 어디 있는지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마음이 끌리는 상대에게 가까이 가려면 먼저 조용하게 면식이 있는 사람을 찾는 것이다. 그렇게 줄을 더듬어 가면서 실패한 일은 한번도 없었다. 파멜라의 미모와 톱 모델로서의 명성이 무엇이나 가능하게 해주고 있었다.
파멜라의 도착은 언제나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녀는 날씬한 다리로 춤추듯이 들어서는 것이었다. 그녀의 금발과 아름다운 얼굴이 남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었다. 남자들은 찬탄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여자들은 쌀쌀하게 눈을 가늘게 뜨는 것이었다.
오늘 저녁 파멜라가 회장으로 들어갔을 때, 예의 남자는 방 저쪽에서 눈이 가늘고 
빨강머리인, 참 예쁜 여자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어느 편이냐 하면 귀여운 타입인데, 남자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는 상대방의 눈을 들여다보듯이 하며 말하고 있었다. 
"어머, 그 청바지 당신이 입으니 참 멋있군요! 그렇게 타이트한데 벗을 수가 있겠어요?"
"어머, 제니."
제니 윌든의 말 속에서 가시를 느꼈으나 정색을 하고 대꾸할 마음은 없었다. 
"앤시아로부터 무슨 소식이 있어요?"하고 제니가 물었다. 
"없어요." 파멜라 의 눈은 방 저쪽의 두 사람에게 못박힌 채였다. 
"어머, 그래요? 그럼……"
"제니, 저 삶은 누구죠?" 파멜라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누구말예요?" 제니가 말을 중단하는 바람에 제니는 언짢은 얼굴을 했으나, 어쩔 수 없이 파멜라의 시선을 쫓았다. 
"자주 보는 얼굴이지만 이름을 알 수 없어요. 저 사람이 누구지요? 낡은 코듀로이 상의를 입고있는 사람말이예요."
"아, 조예요." 그것으로 설명은 충분하다는 얼굴로 제니는 말했다. "그보다 엔시아말인데……"
"조라니, 누구지요? 무엇을 하는 사람이예요?"
제니는 빨간 입술을 벌리고 어떤 태도를 취할까 망설이더니, 느긋하게 나기로 작정한 듯 어른스런 미소를 띠었다. 
"조를 몰라요, 모두들 아는데? 당시도 벌써 그에게 반항 줄 알았어요, 언제나 와있지 않아요!"
"뭐 마실 것을 가져오겠어요." 파멜라는 제니의 말을 듣지 않으려고 그 자리를 떠났다.
"어머, 어쩌면 저런 예의 없는 사람이 있어! 당신도 보았죠?" 등뒤에서 누군가에게 호소하는 말이 들렸다. 
마티니를 받아들자 파멜라는 사람들 사이를 누비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아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차츰 그 키가 크고 마른 남자에게 다가갔다. 갈색의 코듀로이는 팔꿈치와 소매끝이 많이 닳아 있었다. 파멜라는 예의 남자를 에워싸고 있는 몇 명의 미녀 속에서 오랜 친구 한 삶을 발견했다. 파멜라는 칵테일을 입으로 가져가면서, 그가 골프 자랑을 길게 늘어놓는 것을 즐거운 듯이 듣고 있었다. 그러다가 웃으면서 뒤로 한 발짝 물러서는 서슬에 조라는 남자와 부딪쳐 파멜라의 글라스에서 액체가 튀었다.
"어마, 이를 어째." 파멜라는 당황했다. 
남자는 얼른 파멜라의 손에서 글라스를 받아들고 자기 손수건을 내밀었다.
"미안해요, 시끄럽게 해서." 파멜라는 의식적으로, 상대방이 함락되지 않고는 못 배길, 아껴 둔 미소를 띠어 보였다.
그러나 파멜라는, 그것이 이 남자에게는 통하지 않는다고 순간 생각했다. 입맛이 씁쓸했지만 사실이었다. 놀라움으로 머리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막다른 곳으로 몰린 쥐가 되쏘아보는 바람에 겁이 난 고양이 같은 심정이었다. 이 남자는 여자를 싫어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호모? 
그러나 다음 순간, 빨려 들것처럼 파란 그 남자의 눈을 보고 생각을 고쳤다. 그 눈에는 상대방에 대한 불신감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었다. 분명 파멜라에 대해서는 호감을 갖고 있지 않았다. 
다른 때는 파멜라가 어떤 남자를 끌려고 생각만 하면 반드시 끌려들게 마련이었는데. 그리고 두 사람의 관계는 파멜라가 싫증을 낼 때까지 계속할 수 있는데.
파멜라는 새삼 그의 얼굴에 눈길을 향하고 빙긋 웃어보였다. 
"당신이 조죠?"
"그렇습니다만."
파멜라는 상대방이 어떻게 자기 이름을 알았나하고 놀랄 것을 기대했다. 전혀 소개받은 기억이 없을 테니까. 파멜라가 자기 이름을 알고 있는 줄 알면 눈이 빛나겠지. 그러나 그는 태연했다.
"나는 파멜라 로링스예요."
상대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표정한 얼굴로. 파멜라라는 이름이 상대방의 표정에 아무 변화도 주지 못하다니. 그도 한번쯤 들어 본 일이 있을 게 아닌가, 파멜라의 얼굴은 잡지나 간판, 텔레비전의 CM에 늘 등장하고 있었으니까. 이름은 몰라도 얼굴은 널리 알려져 있다. 거리를 걸어도, 슈퍼마켓에 들러도, 레스토랑에서까지도 사람들은 누구나 파멜라를 알아보고 다시 돌아보는 것이었다. 
"무슨 일을 하시죠, 조?" 그가 무시하는 것을 모른체하며 물었다.
"난 의삽니다."
"어느 병원의?"
"성(聖)에이든 병원에 근무하고 있어요." 최소한의 필요한 대답밖에 하지 않았다. 다른 때 같으면 짜증을 낼 파멜라였으나, 왠지 이것 저것 더 물어보고 싶은 마음을 누룰 수가 없었다. 그가 아까까지 상대하고 있던 작은 몸매의 미녀는 어느 사이에 가고 없었다. 그는 한 팔을 벽에 지주목처럼 대고 편한 자세로 파멜라를 조용히 관찰하고 있었다. 
"그것참 멋있군요. 무슨 과 전문의시죠?"
"난 인턴 과정을 밟고 있어요. 1년쨉니다. 작년에 졸업했지요."
"아, 그러세요." 파멜라는 얼른 상대방의 얼굴을 보며 나이를 확인하려 했으나 아무래도 이상했다. 
"난 33세요." 상대방은 피멜라의 생각을 얼른 알아채고 말했다. "딴 길로 갔다가 의사가 된 거요."
"그럼 의과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는 어떤 일을 하셨어요?"
남자란 대부분 자기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법이다. 일단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면 자기도 모르게 자꾸 확대되어 나가고 빛을 더해 가게 마련이다. 파멜라는 가만히 조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대답은 했으나 여전히 입은 무거워서 꼭 필요한 최소한의 일밖에 말해 주지 않았다. 
"시티에서 일했습니다."
"사업을 하셨어요?" 그는 끄덕였다. 파멜라는 기다렸으나 대답은 그것뿐이었다. "무슨 계기로 의과 대학에 들어갔어요?"
"의사가 되기로 결심을 했으니까요."
파멜라는 저도 모르게 웃으면서 그의 볼을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었다. 그는 까딱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히지 않고 냉랭하게 파멜라를 마주 보고 있을 뿐이었다. 파멜라는 할 수없이 손가락을 뗐으나 그의 살의 감촉이 언제가지나 손가락에 남아 있었다. 마음의 동요를 숨기며 파멜라는 질문을 계속했다. 
"그야 그렇겠지만요. 하지만 어째서지요?"
파멜라의 화사한 웃음도, 충분히 호감을 나타내고 있는 까막거리는 속눈썹도, 그에게는 벽을 대하는 것과 같은 효과밖에 주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대 조가 파멜라에게 쓱 다가오더니 몸을 기울여 속삭이듯이 지껄이기 시작했다. 너무나 작은 목소리여서 파멜라는 귀를 세우고 들었다. 그러나 그의 말은 귀를 의심한 만한 내용이었다. 
"당신의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요, 미스 로링스. 난 닥치는 대로 여자를 침대로 끌고 가는 타입이 아니고, 그러기를 기대하는 아가씨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지도 않아요. 그러니 다른 사람을 찾아봐요, 나 때문에 당신이 오늘 밤 혼자 자게 되면 미안하니까요."
파멜라의 입술은 말을 잃은 채 딱 벌어졌다. 너무나 조용한 목소리였지만, 혹시 누가 듣지 않았나 싶어서 겁이 났다. 다음 순간 쇼크와 노여움으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조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히 몸을 세우고 그 자리를 떠났다. 파멜라는 손에 든 빈 글라스를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문득 제정신으로 돌아와 새삼 글라스를 바라보고 또 한잔을 청할까 망설이다가, 가까운 테이블에 글라스를 놓고 입구로 향했다. 방안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군데군데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 사이를, 말을 걸어오면 대답하고 웃음을 돌려주면서 걷고 있었으나, 뭐라고 묻고 뭐라고 대답했는지 전혀 기억이 없었다.
택시를 잡아타고 집의 번지를 말했으나 금방 마음이 바뀌어, 웨스트 엔드를 한바퀴 돌아달라고 했다. 의아스런 눈으로 돌아보는 운전사에게 말했다. 
"좀 머리가 아파서 그래요.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맑은 공기를 마시고 싶어요."
밝은 가로등이 반짝이는 거리를 천천히 나아가면서 운전사가 이따금 백 미러로 흘끔흘끔 쳐다보는 것이 파멜라의 신경에 거슬렸다. 이윽고 차는 체르시에 도착했다. 파멜라는 택시가 떠나는 것을 보고 나서 아파트가 있는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톰과 클레어가 아직도 깨어 있으면 곤란한데, 하고 생각했으나 다행이 방은 어둡고 조용했다.
차를 준비하는 동안 머리 속에 있는 것은 조금 전의 정경과 조의 말뿐이었다. 그 말이 되풀이해서 울리는 동안, 이제 지우려 해도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되고 말았다.
파멜라는 될수록 부모를 생각하지 않으면서 살아왔다. 파멜라의 생활은 그들 곁을 도망쳐서 런던으로 나오면서 시작된 것이다. 벌써 8년도 더 되었다. 가족에의 추억은 이제, 함께 생활했다기보다 어디에서 읽었던 이야기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좁고 어둡고 편협된 세계. 파멜라는 거기에서 결사적으로 빠져 나오려 했다. 주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신의 룰대로 자유롭게 살아가기 위해서였다.
그 인간은 자기가 뭐나 되는 줄 아는 모양이지? 그럼 놈팽이는 정말 참을 수 없어. 누구에게나 그런 말을 지껄이는 것일까? 그런 고약한 소리를 할 권리를 신으로부터 부여받았다고라도 생각하는 것일까? 정말 돼먹지 않았어! 그렇게 사람들이 많지만 않았다면 따귀라도 갈겨 주었을 텐데. 그런데서 멜로드라마를 연출했다가는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될까봐 그만둔 거야. 해주고 싶은 말이 가슴에 꽉 차 있어 질식할 것만 같았어. 하다못해 전화 번호라도 알아 놓았던들 지금 전화로 말해 줄 수 있을 텐데. 그가 잘못 알고 있는 내 행동에 대해서도.
차를 따라 찻잔을 들고 주방으로 나왔다. 앞으로 몇 시간은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음악이라도 듣자. 볼륨을 줄여서 틀어 놓으면 클레아를 깨우지 않을테니까.
거실의 문은 닫혀있었다. 파멜라는 문을 열고 스위치를 올리고 한 발짝 안으로 들어서려고 하다가 우뚝 서버렸다. 흠짓하는 바람에 손에 들었던 차잔에서 뜨거운 차가 손목에 엎질러져 하마터면 차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방안의 참상을 둘러보는 동안에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벽지가 잡아 찢기고, 레코드는 깨지고 우그러져 바닥에 흩어져 있고 벽의 낮은 곳에 입술연지로 또 외설적인 말이 휘갈겨 씌어져 있었다. 텔레비젼과 스테레오는 온데 간데 없었다. 티크의 사이드보드의 가늘고 긴 서랍은 모두 열린 채 비어 있었다.
한눈에 그것들을 본 파멜라는 멍하니 서 있었다.
겨우 머리가 삐걱거리듯이 활동을 시작하자, 파멜라는 어두운 복도를 뛰어서 클레어의 방으로 향했다.
"클레어.... 하느님! 클레어!" 떨면서 클레어의 방문을 열었다. 아직 한 손에는 차잔을 들고 있었다. "클레어!" 부르면서 스위치를 올렸다. 그리고 침대를 본 순간, 파멜라의 손에서 차잔이 떨어져 벽이며 카펫에 갈색의 얼룩이 확 퍼져 나갔다. 
"하느님! 전능하신 하느님! 아아!" 귀가 왱왱 울리기 시작했다. 한숨과도 같고 흐느낌과도 같은 거친 숨을 내쉬며 조심조심 침대로 다가가자 무릎을 꿇고 - 파멜라는 서 있을 수가 없었다 - 떨리는 손으로 클레어의 맥을 짚으려고 하다가 망설였다. 
죽었어......얼굴은 백지장처럼 새햐얗고 눈 주위는 시퍼렇게 멍들고 입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몸은 빳빳하고 차가웠다. 하여튼 파멜라가 알고 있던 클레어가 아니었다......
파멜라는 문득 뒤를 돌아보고 방안을 둘러보았다. 갑자기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누가 되었든 이런 짓을 한 남자가 아직도 이 방 어디엔가 있는 것이 아닐까? 어둠에서 쓱 나타나지나 않을까?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어서 수화기를 들어 경찰을 부르고 구급차를 불러야지, 하고 생각했다.
조그만 소리가 나는 바람에 파멜라는 몸이 얼어붙는 듯했다. 소리난 쪽을 살며시 쳐다보니, 클레어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숨을 쉬고 있어! 눈은 감은 채였지만 입이 조그씩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 한번 희미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파멜라는 클레아 가까이 갔다. 
"클레어! 클레어!"
대답은 없었으나, 다가간 파멜라의 귀애 아까보다 분명하게 숨소리가 들렸다. 파멜라는 벌떡 일어서자 목도를 빠져나가 거실의 전화로 향했다. 수화기를 들고 다이얼을 돌렸으나, 반응이 없는 것을 알자 파멜라는 코드를 눈으로 더듬어 나갔다. 전화는 끊겨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맞은편 집에 전화가 있을 것이다. 문을 열어젖힌 채 뛰어나가 그 집의 벨을 눌렸다. 응답이 없으므로, 벽에 몸을 기댄 채 계속 벨을 눌러댔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파멜라는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물결에 떠돌듯이 흔들리는 의식 속에서 클레아는 자기가 잠에서 깨어나고 있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어둡고 답답한 악몽을 꾸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아니, 꿈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깨어나기 싫었다. 잠이 깨면, 잊어버리고 싶은 악몽으로 끌려갈 것만 느낌이 들었다. 
"움직이지 말아!"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마치 명령하는 것 같았다. "움직이면 안 돼!"
목소리는 자신의 두개골 속에서 들려 왔다. 머리 속에서 종이 울리듯 쾅쾅 울렸다. 
클레아는 그 목소리에 따랐다, 깜짝 놀라 죽은 시늉을 하는 짐승처럼. 무슨 일이 있었나? 내가 지금 어디 있지? 자신이 누군지조차도 생가가나지 않았다 - 머릿속은 극도로 혼란했지만 분명하게 생각하기도 귀찮았다.
클레아는 가만히 있었다. 마치 무슨 재해를 당한 도시에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정보가 먼 관청에까지 닿기를 기다리듯이 - 도와줘요, 도와줘요. 몸 여기저기에서 정보가 전해오는 것을 기다렸다. 신중한 관리가, 모든 정보가 모인 뒤에 종합해서 판단을 내리려고 신중을 기하듯이, 클레아는 오관에 조금씩조금씩 고통이 되살아나기를 그저 기다리고만 있었다. 첫 정보는 단순한 것이었다. 하여튼 아팠다. 한기가 들었다. 공포에 몸이 떨렸다.
"움직이지 말아!"
그말이 밖에서 들려 오는 소리라고 의식함과 동시에 거리의 차 소리며 바람에 커튼이 펄럭이는 소리, 날아다니는 벌레 소리가 한꺼번에 귀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번에는 분명하게 파멜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클레어!"
클레어는 눈을 떴다. 좁은 침대 위에서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했다. 불이 켜져 있었다. 눈이 부시다. 파멜라가 있는 데까지 가야지.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남자는 아직도 있는가? 다리를 움직이려 했다. 두 손을 뻗어 더듬어 보았다. 썰물에 끌려갈 것 같은 몸으로 정신없이 힘없는 모래에 매달리려 하는 것 같았다. 또 정신을 잃으면 큰일이야.
사람이 달리는 소리가 났다. 클레어는 온 힘을 다해서 머리를 들었다. 그리고는 헝클어진 머리 사이로 앞을 보았다.
불쌍한 작은 동물 같군...... 파멜라는 클레아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를 지켜보았다. 두들겨 맞아 녹초가 되고 비참한 일을 당하여 겁을 먹고 떨면서 나를 쳐다보고 있군......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모를 노여움이 머리를 들었다. 파밀라가 클레어의 몸에 팔을 돌리려고 하자, 저도 모르게 놀라 몸을 뒤로 뺐다. 이가 딱딱 마주치는 소리를 내고 있다.
파멜라는 지금까지 여자의 나신을 실제로 본 일이 없었다. 물론 잡지에 실린 섹시한 누드는 보았으며, 아름답기가 거울에서 보는 자신의 몸과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모델 동료와 같은 준비실에서 잇달아 옷을 벗고 입고 하지만 제대로 바라본 일은 한번도 없었다. 하물며 남자가 호기심에 찬 눈길로 바라보는 것처럼 바라보는 일에 있어서랴. 남자라면 여자의 몸을 구석구석 더듬어 보겠지만, 같은 여자로서는 눈여겨 볼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상처받고 멍이 든 전신. 발칵 뒤집혀진 거실이나 마찬가지로 사람이 다루어진 거야 - 이렇게 생각하니 파멜라는 오싹 소름이 끼쳤다. 
"경찰에 전화했어, 바로 올거야., 구급차도."
클레어의 손이 무엇을 찾듯이 움직였다. 파멜라는 그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무엇을 바라지?" 말하고 나자 파멜라는 이해가 갔다. "내가 집어 주겠어." 뭉쳐진 시트를 펼쳐서 살며시 클레어의 몸에 덮었다. 그것을 몸에 돌돌 말듯이 하고 클레어는 침대 위에서 몸을 구부리더니 두 손으로 자기 몸을 꼭 끌어안았다.
"괜찮겠어?" 어리석은 물음이었다. 입에 올린 순간 파멜라는 후회가 되었다. 그러나, 달리 뭐라고 말하면 좋단 말인가. 여기서는 될 수록 조용히 있어야지, 하고 자신을 타이르면서 다시 한번 말을 걸어 보았다. "몸을 똑바로 펴고 자면 어떠니?" 클레아는 세게 고개를 저었다. 파멜라는 또 새로운 후회로 눈을 감았다. "차 좀 마시겠니?" 이런때 어떻게 하면 좋을지 파멜라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한 자신에게 화가 났다. 마음 어디에선가 침착해라 침착해, 하고 말하고 있었다. 만일 입장이 바뀌어 자기가 이런 꼴을 당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스스로 물어보았다. 
옆에 있는 같은 여자가 내게 어떻게 해주었으면 좋을까? 그렇지, 혼자 있게 해주었으면 싶을 거야. 어디로 숨어 버리고 싶을 게 틀림없어. 어떻게 된 거냐고 끈덕지게 묻는 것이 싫을 거야. 이야기도 하고 싶지 않겠지.
하지만 파멜라는 클레아의 곁을 떠나기 싫었다. 살며시 클레아의 등에 팔을 돌렸다.
"일어날 수 있어? 주방에 가서 차를 마시지 않겠어? 여기서 나가자구."
클레아가 이를 세게 마주쳤다. 오한으로 입을 다물 수가 없는 것이다. 
"목욕을 하고 싶어." 상처입은 입에서 속삭이듯이 말이 새어나왔다. 입을 여니까 상한 이가 흔들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입가에서 피가 섞인 점액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것은 경찰서 사람들이 하지 말랬어." 어째서 목욕을 하면 안 되는지 파멜라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파멜라는 곧 납득이 갔다, 경찰관이 말린 이유도, 또 클레어가 그렇게 하고 싶은 이유도.
"목욕해야 해." 클레어가 파멜라의 품안에서 빠져나가려고 약한 입을 쓰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클레어는 몸을 버둥거렸다. "놓아줘." 사람의 손이 닿기만 해도 온몸의 상처가 욱신거리는 것이었다.
"주방으로 가자구. 차를 마셔." 파멜라는 자신이 어렸을 때에 들은 적이 있는, 조용하고 설득력있는 강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마음으로는 울고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자아, 가자구." 그렇게 말해 놓고는 이번에는 갑자기 웃음이 치밀어 오르는 바람에 난처해졌다. 
어머니의 말투가 영락없군, 그런 사람은 절대로 되지 말자고 몇 번이나 다짐했는데도. 그런데 아까부터 나는 영락없는 어머니의 말투를 쓰고 있지 않은가.
아아! 설마! 어머니는, 파멜라가 철이 든 뒤로 줄곧 누워만 있던 할아버지를 간호하고 아버지의 귀가를 기다리고 청소며 요리에 쫓기는 중에도 틈을 내서는, 병원에 다니는 이웃 노인을 차에까지 바래다주고 그 밖의 자원 활동에 힘쓰고 있었다. 파멜라로서는 도저히 흉내도 낼 수 없는 삶이었다. 파멜라는 아버지도, 그리고 동정을 구하며 자신의 몸만 탄식하는 이층의 병자 - 할아버지도 질색이었다. 두 사람 - 중년 남자와 노인은 파멜라 속에서 하나의 이미지가 되어있었다. 두 사람 다 파멜라의 어머니를, 그저 자기네를 돌보기 위한 생물로밖에 보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어머니 미세스 로링스는 그것을 조금도 불만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언제나 두 팔을 벌리고 웃으며 자신의 운명을 맞아들이고 있었다. 파멜라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자신도 같은 운명에 놓일 것을 거부하여 도망쳐 나온 것이다.
파멜라는,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한 잔의 차>라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말을 다시 한 번 생각하며 클레아를 부축하여 일으켜서 주방으로 천천히 이끌고 가서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뜨거운 차를 따라서는, 한 모금 마신 클레어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릴 만큼 듬뿍 설탕을 탔다. 
파멜라는 이제 獰i 하고 미덥지 못한 자신에게 타일렀다. 아, 이런 일은 난생 처음 겪어 보는 일 인걸. 파멜라는 불안한 심정으로 클레아를 지켜보고 있었다. 두 손으로 차잔을 꼬고 잡고 있는 클레어는 아직도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파멜라는 자신의 무능에 화가 났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파멜라는 지금까지 다른 사람과의 생활에 있어서 상호 불간섭을 절대적 룰로 삼아 왔다 - 내 일은 내 스스로 처리하고 있으니 남의 일에는 간섭하지 않겠어, 사람은 저도 모르게 주위의 강한 존재에 매달리고 싶은 거니까. 그리고 남을 발판으로 삼아 하늘 꼭대기 가지 기어오르고 싶어하거든. 파멜라는 어머니를 보고서 그것을 터득하게 되었다. 그리고 요즘은 클레아를 보면서 그녀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고 생각했지만 물론 그런 말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이제 파멜라는 남의 일에 말려들지 않겠다는 룰을 깰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졌다. 상반되는 자신의 감정에 그녀는 완전히 당황하고 있었다. 클레아를 살며시 끌어안고 위로해 주고, 그 얼굴을 굳어지게 하고 있는 공포를 잠깐이라도 잊게 해주고 싶었다. 소리내어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파멜라는 자신이 오랫동안 울어본 일이 없다는 사실을 생각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운 것이 언제였더라? 자기도 소리를 지르며, 거실을 엉망으로 만든 누구처럼 닥치는 대로 무엇이나 내던지고 싶었다. 한순간, 무엇이 원인인지는 모르나 오늘 저녁에 침입했던 남자의 노여움이 아직 이곳에 떠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오싹했다. 그저 파괴할 뿐인 의미 없는 노여움이.
시험삼아 파멜라는 살며시 클레아의 머리에 손을 뻗었다, 위로해 주듯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그러나 클레아가 깜짝 놀란 듯이 몸을 비키는 바람에 파멜라의 손은 허공을 스쳤다.  파멜라는, 그자리에서 어울리지 않는 일을 하지 않도록, 말해선 안 될 말을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언동 하나하나가 못마땅하게 생각되었다. 상처받은 친구의 아픔을 대신 해주고 싶어도, 가까이 가기만 해도 겁을 먹으니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클레아와는 엄격하게 사무적으로 이 아파트를 공유하고 있었다. 저마다 사용법에 대해서도 주고 받은 약정이 있었다. 쓰는 구분에 따라서 집세의 액수를 정했고, 예비 식량이며 밀크, 커피, 계란 등에 대하서도 자기가 먹는 것은 자기가 치렀다. 두 사람 다 바쁜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같은 지붕 밑에 살고 있을 뿐 얼굴을 마주치는 일조차 드물 정도였다. 아침에, "안녕!", "잘 잤니!"하는 인사가 고작이고, 이따금 같이 집을 나설 때는, "바쁘니?"가 추가되고, "어머, 또 비가 오는군!"하는 말을 주고받는 것으로 또 며칠이 지나는 일도 있었다. 두 사람은 친구라기보다 생활의 편의를 위해서 동거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런대로 잘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클레어가 톰과 같이 있는 것을 보게 되면 파멜라는 '자신의 일도 생각하라구. 톰의 하녀 노릇을 할게 뭐니?' 하고 클레어에게 말해 주고 싶어져 입이 근질근질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한두 번 슬쩍 비친 일도 있는데, 그때마다 파멜라는 후회가 되었다. 자신이 정한 룰에 거슬리잖아, 간섭하지 않기야, 파멜라!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두 사람은 동시에 펄쩍 뛰어 일어섰다. 클레아가 흰자위가 드러나게 눈을 크게 떴다. 흰자위에 피가 스며나와 있었다. 파멜라는 조심스레 클레아를 한 손으로 끌어안았다. 
"틀림없이 구급차야. 이젠 걱정 없어." 클레아는 쇼크를 일으킨 것 같았다. 살이 얼음처럼 차갑고 창백했다. 이는 아직도 딱딱 소리를 내고 있었다. 모포로 감싸 줘야지.
파멜라가 현관문을 여니까 거기에는 경찰관 두 사람이 서 있었다. 두 사람 다 젊고 제복을 입고 있으나, 흥분한 탓인지 얼굴이 달기의 브랑망제처럼 핑크빛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미스 로링스지요? 전화한 사람은 바로 당신이었습니까?"
건넛집이 열리고, 파멜라가 전화를 빈 집의 아가씨가 얼굴을 내밀었다. 
"뭐 도와드릴 일이 있으면......"
"고마와요. 청할 일이 있으면 부탁드리겠어요." 파멜라는 야무지게 말했다. 도움은 이미 아까 거절했는데 뭘 그래요!
경관은 그 아가씨를 흘끔 보고는 파멜라의 엎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파멜라가 문을 닫자, 경관은 왠지 의아스런 얼굴로 파멜라를 바라보았다. 파멜라는 몸을 가누고 말했다. 
"우리 전화선이 끊겼기 때문에 그 집 전화를 빈 거예요.'
"뭔가 도와주고 싶어하지 않았습니까?"
키가 큰 경관이 말했으나 파멜라는 그저 살쌀하게 대답했다.
"네, 친절한 분이에요."
또 한 경과이 모자를 벗어 옆구리에 끼었다. 소년처럼 어려 보였다. 제복이 도리어 우습게 보였다. 마치 아버지의 옷을 빌어 입은 것 같았다. 밝은 빛깔의 곱슬거리는 머리카락 밑에서 맑고 깨끗한 푸른 눈을 빛내고 있는 동안(童顔), 그 눈이 파멜라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가씨, 좀 어떻습니까?"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짜증난 목소리에 경관은 난처한 듯이 눈길을 떨구고 자기 구두를 내려다 보았다. 
키가 큰 편은, 나이가 좀 들고 광대뼈가 튀어나온 차분한 얼굴이었다. 그는 동료의 모습을 보고 재미있어하는 것 같았다. 
"이녀석은 금주에 일을 갓 시작했어요."하고 말하고는 서슴없이 거실의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 보았다. 
이윽고 돌아본 그의 표정에는 아무 변화도 없었다. 놀란 기색도 없었다. 파멜라는 그 순간 그가 싫어졌다. 어쩌면 저렇게 태연할 수 있을까?
"뭐 도둑맞은 것은 없습니까, 아가씨?"
"몇 가지.... 몇 가진지는 아직 모르지만 텔레비전과 스테레오가 없어졌어요. 다른 것은 아직 살펴보지 않았어요."
젊은 쪽이 문을 행해 휘파람을 불었다. 파멜라는 또 한 경관의 뒤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갔다. 클레어는 아직도 빈 차잔을 꼭 틀어쥐고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분은 어떻습니까, 아가씨?"
클레아는 말이 없었다.
"쇼크를 받은 거예요." 경관을 나무라듯이 파멜라가 말했다. 
"무슨 말을 했습니까?"
파멜라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못 들었어요. 말을 하고 싶어질 때까지 묻지 않기로 했어요. 보시다시피...."
"네." 경관은 알겠다는 듯이 끄덕이고 조용히 파멜라의 말을 가로막았다. "당신이 이곳으로 돌아온 뒤의 일을 말해 줄 수 있습니까?"
"난 오늘, 아니 어제 파티에 나가 있었어요. 돌아와 보니 이런...."
"돌아온 것이 몇 시경인지 기억이 납니까?"
"모르겠어요, 그런 것은. 시계를 보지 않았으니까요. 약 한 시경이 아닌가 싶지만."
"그때부터 얼마나 시간이 지났습니까?"
"별로 많이 지나진 않았어요.... 하여튼 이 꼴을 보고 바로 전화하러 갔으니까요...."
바로 옆에서 말을 주고받는데도 클레어는 무관심한 듯 차잔 속만을 들여다보고 앉아 있었다. 하얀 차잔은 손잡이에서 가장자리에 걸쳐 금이 가 있었다. 클레어는 그 금을, 가장자리에서 손잡이로, 그리고 그 반대로 눈으로 되풀이해서 쫓고 있었다. 아무것도 듣고 있지 않았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눈앞에 반짝이는 차잔의 금을 그저 가만히 더듬고만 있었다. 금이 간 건지 머리카락이 달라붙어 있는 건지. 클레아는 몹시 추웠다. 이가 달달 떨리는 것이 그쳐주었으면 좋겠는데, 그것을 멈추려고 힘을 쓰면 찌르는 것처럼 턱이 아플 뿐이었다. 공포와 긴장으로 얼굴도 떨고 있었다.
나이 든 쪽 경관이 클레아를 보고 나서 파멜라에게 말했다.
"모포나 이불이 있습니까?"
"네."
파멜라는 당황하여 모포를 가지고 왔다. 경관이 파멜라를 도와 클레아에게 모포를 감아 주었다. 
"구급차는 아직 안 오나요?" 파멜라는 짜증을 누르며 물었다.
경관은 클레어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아래에서 클레어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가씨, 힘이 들기는 하겠지만 우리 조사에 협력해 줄 수 있겠습니까? 범인의 인상은 어떻습니까?.... 당신은 보았지요?" 클레어는 말없이 차잔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경관은 한동안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고는 또 말했다. "조그만 힌트라도 얻을 수 있으면 그 놈을 붙잡을 수 있어요. 네. 찬찬히 생각해 주십시오. 서두를 것은 없으니까요."
클레어는 경관의 말을 듣고 있는지 안 듣고 있는지 아무런 반응도 나타내지 않았다. 
참을성있게 기다리던 경관은 파멜라를 돌아보았다. 
"아가씨, 당신이 물어봐 줄 수 없겠습니까? 범인은 어쩌면 아직 이 근처에 있을지도 몰라요. 얼굴이나 체격이 어떤지 알면 좋겠는데요."
파멜라가 빈 차잔을 빼앗으려 하자 클레어는 깜짝 놀라며 빼앗기지 않으려고 틀어쥐었다. 
"차를 더 마시겠니? 보라구, 클레오. 범인 말인데, 젊은 사람이었니?"
클레어는 한숨과 함께 눈썹을 찌푸리고 아랫입술을 떨었다. 그러고는 또 차잔의 금을 눈으로 더듬기 시작했다. 어째서 이 금은 곧게 뻗어 있지 못했을까? 무슨 모양을 닮은 것 같다. 휘돌아가는 개울 같아. 클레어의 첫 글자 C를 닮았어. 
"그 남자의 인상 착의가 어떤지를 모르고는 붙잡을 수가 없습니다."
경관이 말했다.
젊은 경관이 주방으로 들어왔다.
"또 하나의 침실도 들쑤셔져 있습니다."
파멜라는 자기 침실에 대해서는 잊고 있었다. 자기가 이제부터 거기에서 자야 한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속이 메슥거렸다. 어떻게 되어 있는지 보러갈 마음도 나지 않는다. 목에까지 위액이 올라오는 듯 했다.
"흑인이었습니까," 경관은 가만히 클레아의 반응을 살피면서 물었다. "백인이었습니까? 키는 큽니까, 작습니까?"
조용히 내버려 둬 주었으면 좋겠는데, 모두 어디로 가 줘요. 누군가가 움직일 때마다 클레어의 몸은 공포로 펄쩍 뛰어오를 것 같았다. 온몸의 신경 조직이 타는 불에 드러나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 같았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보지는 않았으나 사람이 있는 것은 알고 있었다. 남잔지 여자인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눈으로 바라볼 필요도 없었다. 냄새가 난다. 남자의 냄새였다. 남자같은 걸음걸이였다. 남자가 같은 방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겁이 났다. 남자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고 조용히 움직이지만 그래도 무섭기는 마찬가지였다. 자꾸 몸이 떨려 왔다.
"왜 말해 주지 않나요, 아가씨?" 경관은 참을성 있게 되풀이했다. 
파멜라는 보다못해 나섰다. 
"말하고 싶지않은 거예요. 왜 가만두지 않지요? 지금 어떤 상탠지 보면 아실텐데요."
경관은 파멜라를 무시하고 클레아 앞에서 일어서서 테이즐에 몸을 기댔다.
"그러면 두세 가지만 더 질문을 하겠으니, 내 말대로만 고개를 끄덕여 줄 수 있습니까? 가볍게 끄덕이기만 하면 됩니다."
자기 말이 클레아 머리에 이를 만한 시간을 기다린 뒤에 그는 또 입을 열었다. 
"아는 사람이었습니까?" 클레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전에 본 일이 있는 사람입니까?" 클레어는 부어오른 눈꺼풀을 내리깐 채 꼼짝도 않고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젊은 남자였습니까? 20대로 보였습니까? 네?" 
클레아는 경관이 찬찬히, 참을성 있게 어떻게든 자기의 입을 열려고 하는 것을 느꼈다. 대답을 하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계속 물을 것이 틀림없다.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보지 못했어요. 자고 있었어요.... 그때." 갈대피리처럼 갸냘픈 목소리는 클레어의 머리 꼭대기에서 나오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얼굴은 보았을텐데요, 아가씨?"
파멜라는 경관을 보고 저도 모르게 주먹을 틀어쥐었다. 떨고 있는 클레아를 보고는, 마치 자기도 같은 질문을 받은 것처럼 노여움에 몸을 떨었다. 
클레아가 중얼거린다.
"검은 것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었어요."
"마스크요?"
"아니.... 복면 모자 같았어요...."
"눈은 보았습니까?" 클레아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무슨 빛깔이었습니까?"
"몰라요. 몰라요.... 이제 날 그냥 놔둬요...."
"젊은 사람 같았습니까?" 클레아는 조금 끄덕였다. "얼마나요? 10대요?" 대답이 없었다. "20대요?" 클레어는 눈썹을 찌푸렸다. "20대라고 생각하지요, 아가씨?" 다짐을 하자 클레어는 끄덕였다. "키는 큽니까, 작습니까?"
"커요." 억지로 대답했다.
"머리카락은? 안 보였어요?"
또 눈썹이 찌푸려졌다.
"나.... 아니.... 아아, 검었던 것 같아요. 밝은 색이 아니라 갈색이라든지...."
"눈은 갈색이 아니었습니까? 아가씨, 기억하고 있습니까?"
"갈색은 아니에요."
"푸른색이요?"
"옅은 색.... 반짝거리고...." 클레아의 목소리가 갑자기 끊어지고, 경련을 일으킨 듯 몸을 
떨더니 엎드려서 토했다.
파멜라는 펄쩍 뛰어 일어나 달려자가 두 팔로 클레아를 안고 등을 살며시 쓰다듬으면서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게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마음을 놓아, 클레아. 괜찮아. 이젠 안전해, 괜찮아...."
젊은 경관은 얼굴이 새빨개져서 또 구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이든 경관은 두 사람을 보고 있더니 이윽고 동료에게 손가락을 신호하고 문으로 향했다. 두 사람이 현관에서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주고 받는 것이 파멜라의 귀에 들렸으나 내용은 알 수가 없었다. 또 벨소리가 들렸다. 
파멜라의 품안에 있던 클레어의 몸이 움찔했다. 현관에서 상쾌한 목소리가 울렸다. 
"여어, 프레드, 아직 휴가중인 줄 알았지. 어때, 즐거웠나?"
"근사했어, 날씨도 좋았고. 아이들은 셋 다 이주 동안 줄곧 바닷물 속에서 살아서 새까매졌지 뭔가."
"자넨 운이 좋군. 난 9월까지 휴가는 연기야. 그런데 오늘 밤은 뭔가? 강간인가?"
야간 근무자끼리의 주고 받는 인사라고 파멜라는 생각했다.
"5분만 더 기다려 주지 않겠나? 겨우 피해자가 입을 열기 시작했어. 좀더 그녀의 입에서 범인의 인상을 알아내야지." 나이 든 쪽 경관의 목소리였다.
"그럴 수 있는 상탠가, 그녀는?
"쇼크를 받아서 지금으로서는 별로 의미가 적지만, 폴만 선생한테는 전화를 넣어 병원에 대기를 부탁했어. 상당히 심하게 당한 모양이야, 그녀는. 지금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알아내야지."
"하지만 입을 열지 않지?"
파멜라는 그 목소리에서 무언가를 느꼈으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잘 몰랐다.
"집안이 발칵 뒤집혀 있어. 강도하러 들어온 김에 이왕이면.... 하는 느낌이 있어."
클레어는 온몸을 떨고 있었다. 머리를 파멜라의 어깨에 얹은 채, 들려 오는 목소리나 말이 어디까지가 현실의 것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시야에 한 무리의 남자들이 들어왔다. 파멜라는 클레아의 머리 너머로 남자들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도 창백했고 태도는 굳어져 있었다.
"지금 바로 이 사람을 병원으로 데려가 주세요." 자신도 놀랄 만큼 청 높은 소리였다. "어서요! 내 말 들려요?"
" 딱 한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어떤 차림을...."
경관이 말을 꺼냈으나 파멜라는 무시했다.
"차림이 다 뭐예요. 이 사람은 정신을 잃고 있어요. 지금 바로 이 사람을 병원으로 데려가 주지 않으면 난 고소하겠어요...."
클레어가 천천히 고개를 들려고 했다. 목에 힘이 없어 머리를 가눌 수가 없었다. 클레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거무스름한 옷.... 모두 검어요.... 스웨터도.... 운동화도요. 벗지 않았어요."
"이제 됐어요." 파멜라가 후려치듯이 말했다. "그것으로 충분해요. 들었지요? 이제 더 묻지 마세요, 이 사람에게도 내게도!"
"이것이 우리의 일이 되어서요. 아가씨, 당신도 범인을 잡고 싶겠지요?"
"지금 해야 할 일은요, 클레어를 가만히 놓아두는 거예요. 그 밖의 일은 기다려야 해요!"
 
 

3장
 
클레어는 좁은 철제 침대 위에, 딱딱한 병원 베개를 높이 베고 누워 있었다. 두 손은 벌집 무늬의 이불 밖으로 나와 축 늘어져 있었다. 풀먹인 시트가 차가 왔다. 위태롭게 침대에 기어오르는 것을 보고 있던 간호원이 가버리고 나자 클레어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목면 커튼이 바닥까지 드리워져 있었다. 바탕은 연한 크림색이지만 보랏빛의 꽃과 초록빛 이파리 무늬는 희미하게 바래 있지만, 클레어의 눈은 칸막이 커튼의 주름을 아래에서부터 더듬어 놋쇠 파이프에 고리로 매단 천장까지 올라갔다.
칸막이 커튼에 에워싸인 조그만 공간 안으로도 주위의 소리는 들려 왔다. 고무 타일의 바닥을 닳아빠진 구두가 스치는 소리. 이웃 환자가 기침을 하고, 저 쪽 사람이 괴로운 듯이 숨을 몰아 쉬고……. 클레어의 등뒤에 창문이 있었다. 
빛은 들어오나 바깥에서 병실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우유빛 유리였다. 그것을 보고 클레아는 안심이 되었다. 간호원이 커튼을 열어 놓으라고 묻자 클레아는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아니요, 그대로 놔둬요."
햇살이 비쳐 커튼의 주름이 바닷가에 밀려오는 물결처럼 흔들리는 것을 클레아는 싫증을 낼 줄도 모르고 바라보고 있었다. 커튼을 쳐 두면 안전해.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있어. 빛이 비쳐드는 동굴 속에서 나는 혼자야. 이곳에 있으면 사람들이 힐긋힐긋 쳐다보는 일도 없고 난처한 질문에 몰릴 염려도 없어.
겨우 목욕을 할 수가 있었다. 그것도 경찰의 지루하고 긴 진찰이 끝난 뒤의 일이었다. 진찰하는 동안 내내 클레아는 막대기처럼 몸이 굳어 있어서 의사는 애를 먹었다.
"신경이 곤두서 있는 것은 알지만 그렇게 긴장하지 말고 몸을 풀어요. 여기에 당신을 해칠 사람은 없어요. 긴장을 풀어요. 그러면 금방 진찰이 끝나게 되요."
클레어는 의사의 얼굴도 보지 않았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흰옷을 입고 손이 차가운, 지쳐 빠진 것 같은 목소리의 의사――이 사람도 하고 싶어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아니야. 할수없이 하는 거야. 클레어의 이성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클레어는 모든 것을 저주하고 있었지만 의사의 질문에는 어떻게든 대답하려고 애썼다.
'남자는……' 질문은 모두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었다. 그러면 무언가가 클레어의 마음에 셔터를 내려 버리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클레어가 대답하지 않으면 대답할 때까지 의사는 계속 물어댈 것이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대답하기만 하면 잊어버리고 싶은 모든 일에서 그만큼 빨리 해방될 것이다.
클레아는 눈을 꼭 감고 모든 기억을 몰아내려고 했다. 이젠 그 일을 생각하지 말자. 눈앞의 일에만 마음을 쓰자. 모처럼 커튼 너머로 햇살이 비쳐드는 밝은 동굴로 도망쳐 온 것이 아닌가. 지금 안심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이 피부에 느껴지는 햇살의 따사로움뿐이었다.

파멜라는 소리가 잘 울리는 돌바닥 복도에서 벽 앞에 놓인 딱딱한 의자에 걸터앉아 있었다. 틀로 찍어낸 플라스틱 의자가 등을 파고 들었다. 누가 이런 의자를 디자인했을까? 틀림없이 자기는 쓸 일이 없다고 생각한 사람일 거야. 그렇지 않으면 특수한 척추 교정용 의자거나. 
지나가는 사람들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파멜라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백의의 의사, 제복의 간호원, 병원 문앞의 매점에서 산 듯한 조그만 꽃다발을 안은 문병객. 애가 타는 듯이 종종걸음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은 아마 진찰 결과를 알러 온 것이겠지. 파멜라는 이따금 손에 든 잡지에서 눈을 들어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눈은 잡지를 보고 있으나 내용은 조금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요리하는 법도, 편물의 그림도, 사랑 이야기도. 파멜라는 한숨도 자지 못했던 것이다. 경찰서에 갔다가 병원에서 기다리는 동안 아침이 되어 버렸다. 그 어느 쪽에서도 파멜라는 그저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경찰서에서는 대합실에서 안절부절 못하며 기다렸다, 벽시계를 쳐다보면서.
"도대체 앞으로 얼마나 여기에 묶여 있어야 하지요?" 룸메이트를 병실로 데리고 간 채 구경도 시켜 주지 않는 여자 경관에게 파멜라는 짜증을 쏟았다.
"홍차 한 잔 더 들지 않겠어요?" 다른 경관이 위로하듯이 말하고는 모습을 감추더니, 이윽고 손에 찻잔을 든 두 사복 경찰관을 데리고 돌아왔다. 두 사람은 벤치에 털썩 앉았다.
"아아, 앉는다는 것이 이렇게 좋은 것이군." 하나가 상대에게 말했다. 짜증이 나 있던 파멜라는 그 경관을 노려보았다.
"여어, 미스 로링스!" 나이 든 쪽 남자가 파멜라를 보고 싱긋 웃었다. 호기심과 찬양의 빛을 드러낸 두 사람의 눈이 자기의 아름다운 블론드며 꼭 달라붙은 티셔츠와 청바지에 싸인 몸매를 훑어보는 것을 본 파멜라는 더욱 화가 났다. 형사는, "이거 기다리게 해서 안됐습니다." 하고 덧붙여 말했으나 파멜라는 얼음처럼 차갑게 경관을 쏘아보았다.
"범인은 잡았어요?"
"아직입니다, 아가씨." 마치, 그런 철없는 말은 하지도 말라는 투였다.
"이제부터 잡는 거예요?" 빈정거림을 다고 말했으나, 개구리 얼굴에 물 뿌리기였다. 두 사람 다 빙그레 웃었다.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나 조금도 서두를 것은 없다는 태도였다. 목소리도 얼굴 표정도 동작도 태평스러웠고, 어디에서 바람이 부느냐는 식이었다. 일은 일이고 기분은 또 다르다는 것인가‥‥‥.
"꼭 그렇게 해주세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른 낮은 목소리로 파멜라는 응수했다. 그리고 그러는 자신에게 놀라고 있었다. 평소에는 이성적이고 침착하고 관대한 편인데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달라져 버리다니. 클레어를 덮친 남자에 대한 노여움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타오르고 있었다. 이제 완전히 혼란해져서 숨까지 막힐 지경이었다.
형사들은 파멜라에게도 끈덕지게 묻는 것이었다. 그 때까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처음 현장을 보았을 때는 어떤 상황이었는지, 그때의 클레어의 상태는 어땠는지 등을.
"아무도 보지 못했습니까?" 파멜라는 고개를 저었다. "뭔가 들은 소리는 없었습니까?"
"아니요, 아무것도요." 파멜라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클레어는 얼마동안이나……그런 일을 당하고 있었는지 말했어요?“
"모르겠군요. 별로 길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 근처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물어 보았는데, 다른 몇 집에도 범인이 들어갔었다는 겁니다. 다행히 사람은 없었지만요. 그리고 제일 위층의 할머니가 그 건물 뒤뜰에 밴이 한 대 세워져 있는 것을 보았다는군요. 한 남자가 텔레비전을 차안으로 옮기는 것을 보고 수리공인가 보다고 생각했답니다. 남자는 아마 물건을 훔쳐낸 후에 돌아와 당신의 친구를 덮친 것 같아요."
"짐승이에요." 파멜라는 두 손을 틀어쥐고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런 놈은 정상이 아니라니까!)
"담배 한 대 어때요, 아가씨?" 형사 하나가 담뱃갑을 내밀었다.
"난 피우지 않아요."
"그거 좋은 일이군요. 나도 끊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말하고 경관은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그러고는 생각에 잠긴 모습으로 연기를 천천히 천장을 향해 뱉고 연기의 고리의 행방을 눈으로 쫓고 있었다. "요즘 수상한 자가 그 근처를 얼씬거리는 것을 못 보았습니까? 이웃 사람이나 단골 장사꾼 말고요."
"아니, 전혀 보지 못했어요. 난 바빠서 언제나 서둘러 드나들기 때문에 주위에 어떤 사람이 있는지 볼 여유가 없거든요."
"친구에게는 보이프렌드가 있습니까?" 
"있어요. 톰 프레스코트예요."
"주소와 전화 번호를 아십니까?"
경관은 파멜라가 말해 주는 숫자를 꼼꼼하게 적었다. 그것을 보니 또 새삼 화가 치밀어 올랐다.
"톰은 이 사건과 아무 관계도 없어요. 어째서 당신은 범인을 찾으려고 하지 않지요, 쓸데없이 지껄이고 차나 마시고 하면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는 식으로 바라보는 두 사람을 보자 파멜라의 속은 더욱 뒤틀렸다. 이 사람들은 감정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는 걸까? 도대체 이쪽 편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
보기에 아무 특색도 없는 두 남자였다. 하나는 주름이 간 스포츠 자켓을 입고, 또 하나는 회색 바지에 검은 상의를 입고 있었다. 두 사람 다 파멜라와의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거리를 두고 마지못해 눈길을 그녀에게 향하고 있었다. 수도가 새는 것을 수리하러 온 연관공이 물이 스며나온 카펫 위를 흙발로 돌아다니고 마루의 판자를 콧노래를 부르며 뜯어내는 그런 느낌이었다. 일을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다음 차 마실 시간을 기다리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고 있다……. 아무래도 좋다는 태도가 무엇보다도 파멜라의 비위에 거슬렸다. 이제 그만 여기서 나가 줘요. 누구 믿을 만한 사람하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경관들도 물을 것은 물어야겠다는 태도였다――그래, 이쪽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묻고는 있다. 그러나 그저 적당히 발라 맞추고 있을 뿐인 것이다. 파멜라가 한 말은 일단 그들에게 청취되고 기록되어 철해질 것이다. 그러나 파멜라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중립적인 무표정한 얼굴을 향할 뿐이었다.
클레어가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이상하게도 파멜라 자신도 어젯저녁 레이프(강간, 폭행)당한 듯한 느낌이 든다. 같은 일이 두 사람 모두에게 일어난 기분인 것이다. 어젯저녁 경관은 파멜라의 방도 점검하고 뭐 없어진 것은 없느냐고 물었었다. 두리번거리며 뒤따라오는 경관 앞에 서서 자기 방에 들어서는 데는 용기가 필요했다. 침실은 절대 사적인 공간이다. 밤마다 잠을 자는 곳이다. 잠잔다는 것은 평안과 안정을 찾아 도피하는 것――그런데 이건 얼마나 얄궂은 일인가. 뒤죽박죽이 되게 들쑤셔진 이 방에서 앞으로 어떻게 평안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파멜라는 자신의 침대에 눈길을 향했다. 하얀 데이지꽃 무늬가 놓인 엷은 레몬 옐로우의 시트. 저도 모르게 눈길을 돌렸다. 혐오감으로 입이 일그러졌다. 경관이 말했다.
"이것은 세탁하는 것이 낫겠군요. 이런 범인은 흔히 하는 짓이지요.“
온 방안에서 남자의 냄새가 났다. 시큼한 것 같은, 속이 느글거리는 냄새. 나머지는 파멜라의 상상에 지나지 않았다. 이곳에 있었던 남자의 이미지. 마치 파멜라의 몸에 손을 대고 파멜라를 범한 것 같은 강렬한 이미지.
경찰에서의 일이 끝나자 파멜라는 바로 병원으로 돌아왔다. 클레아가 입원한 병동의 수간호원은 기회를 보아 클레아를 만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혹시 어쩌면 30분 가량 기다려야 할지도 몰라요. 절대 안전이 필요하니까요. 열 시 반에 과장님의 회진이 있으니까 그때 문병 허락을 받기로 해요.'
"클레어는 좀 어때요?"
"얌전한 환자예요." 그렇게 말하고 수간호원은 바쁜 듯이 가버렸다.
그 뒤로 병실 밖의 복도에 놓인 의자에 앉아 파멜라는 줄곧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답답증이나 참을 수가 없어 나갈까도 생각했으나, 그러는 동안 바쁜 가운데도 이상한 정적을 간직한 병원 특유의 분위기에 동화되었는지 그럭저럭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파멜라는 인기척이 없는 바닷가에 혼자 누워, 갈매기가 날아 내려와 노란 주둥이로 물결을 헤집는 것을, 그리고 젖은 물가의 모래에 세 개의 발톱 자국을 남기면서 먹이를 찾는, 다리가 긴 물새를 바라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병원은, 파멜라로서는 보통의 세계로부터 분리된 것 같은, 어딘가 멀고 전혀 색다른 세계였다. 눈에 보이는 정경도, 귀에 들어오는 소리도 마치 자신이 속해 있는 세계의 것이 아닌 것처럼 생각되었다. 세상에는 전혀 다른 세계가 흔히 있는 법이다.
여기에 있으니 자신의 직업인 모델이 매우 비현실적인 것으로 생각되어서 파멜라는 놀라움을 느꼈다. 이 런던의 어디선가는 지금도 젊은 여자들이 해변의 세트를 뒤로하고 강한 라이트를 받으며 카메라 앞에서 머리를 빗어 펼치기도 하고 몸을 틀기도 하는 것이다. 클레어의 사무실 역시 마찬가지다. 카피라이터와 아트디렉터가 입에 거품을 물고 서로 헐뜯고 있겠지.
경찰에서는, 아무래도 좋다는 태평스런 남자들이 점심 식사에 무엇을 먹을까를 이야기하듯이 태연스럽게 강간 이야기를 하고 있겠지. 사람들은 하나의 세계에 파묻혀 있으면서 바로 자기 옆에 있는 다른 세계의 존재나 그 움직임에 눈길을 향할 줄 모르는 것이다. 자신의 삶이 유일한 것이 아니라고 깨닫는다는 것은 커다란 쇼크가 따르는 대사건인 것이다.
파멜라는 고개를 숙이고 돌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낡은 사각형의 돌이 기둥과 기둥 사이에 몇 장이나 깔려 있는가 세기 시작했다. 그동안에도 사람들은 복도를 오가고 있었다. 그러나 파멜라는 눈도 들지 않았다. 그저 그들의 걸음걸이나 구두 소리로 남잔지 여잔지, 또 서두르는 건지 아닌지를 추측하고 있었다.
검은 구두가 파멜라의 앞에서 문득 멎었기 때문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금세 그 얼굴이 굳어졌다.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그가 물었다.
"기다리고 있어요." 마음속의 동요와 싸우면서 파멜라는 대답했다.
전혀 달라 보인다-----자기 영역 안에서, 흰옷을 입고 있는 그는 자신만만하게 보였다. 그리고 젊어 보였다. 그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인생의 본류를 타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는 소매를 걷어 팔목 시계를 보았다. 팔에 나 있는 검고 부드러운 털이 파멜라의 눈에 들어왔다.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누구 문병을 왔어요?"
파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물음에 클레아가 생각나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파멜라는 고개를 숙였다. 긴 속눈썹이 볼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화장을 하지 않았군요." 놀란 듯한 목소리였다. 그는 갑자기 파멜라의 옆에 걸터앉았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나……." 말을 하려고 한 순간, 누르고 눌렀던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되어 넘쳐 나왔다. 당황하여 손으로 닦으려고 했으나 이미 늦었다. 눈물이 멈추지를 않았다.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꼈다. 지금까지 그녀는 남 앞에서 울어 본 일이 한 번도 없었다. 자기에게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눈물은 나이애가라 폭포처럼 멈출 줄을 모르고 흘러나왔다. 이제는 클레어를 위한 눈물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어젯저녁의 불행 때문도 아니었다. 이유는 파멜라 자신도 분명하게 알 수가 없었다. 온갖 감정이 다 담긴 눈물이었다.
옆에 앉은 조는 파멜라의 어깨에 팔을 돌리고 살며시 끌어당겼다. 파멜라는 몸을 가늘게 떨면서 조의 팔안에 있었다. 약점을 드러낸 채 온몸의 무게를 그의 가슴에 맡기고 있었다. 자기를 받쳐 주는 사람이 있다는 느낌이 처음으로 파멜라에게 뭐라고 말할 수 없는 평온을 주었다.
눈물이 그치자 파멜라는 살며시 몸을 떼고 핸드백을 열어 손수건을 꺼내려 했다.
바로 그 손에 한 장의 손수건이 쥐여졌다. 눈길을 떨군 채 파멜라는 손수건에 콧물을 닦았다. 손수건을 꼭 틀어쥔 채 파멜라는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여러 가지로."
조는 말없이 파멜라의 손가락을 풀고 손수건을 집어, 한 손으로 파멜라의 턱을 받쳐 얼굴을 위로 향하게 하고 꼼꼼하게 눈물을 닦아주었다, 마치 아버지같은 따뜻한 손길로. 
"기분이 좀 가라앉았습니까?"
파멜라는 웃으려고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쇼크로 아직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그런 것 같아요. 차라리 이러기를 잘했는지도 몰라요. 그렇지요?"
"그럼요." 반은 놀리고 있는 것도 같았다.
"어마, 쇼크 탓이에요." 아직도 조의 눈을 보지 않고 파멜라는 말했다.
"진단은 내게 맡겨요." 그 목소리에서 따뜻한 미소를 느끼고 파멜라는 쇼크를 받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즐거운 쇼크였다.
의자가 삐걱거리는 소리에 파멜라는 흠칫했다. 조가 일어서는 소리라는 것을 바로 알았다.
"난 이제 가봐야겠어요." 파멜라는 애써 웃음을 띠고 고개를 끄덕였다. "차를 마셨나요?" 파멜라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먹은 것이 없었다. 지금까지 그것을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럼 차나 무엇을 가져오게 하겠습니다." 조는 걸음을 내디디면서 그렇게 말했다.
병동을 구분하는 스윙 도어가 열리고 기둥을 스치면서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지나자 그는 다시 그 문으로 들어오더니 그대로 복도를 걸어 지나갔다. 파멜라는 겨우 얼굴을 들고,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흰옷의 호주머니에서 청진기 줄이 비어져 나와 걷는데 따라 흔들리고 있었다. 창 앞을 지날 때, 검은머리에 햇살이 비치고 반대쪽 벽에 길게 뻗은 그림자가 그를 따라갔다.
 
"미스 포레스트요?"
몇 번이나 부르는 바람에 클레아는 마지못해 눈을 뜨고, 침대 옆에 선 젊은 여자를 쳐다보았다. 날씬한 몸매에 밝은 차림을 하고 있었으나 어딘지 직업적인 인상이 또 클레아의 마음을 닫게 했다.
"난 형사과 조사계의 루카스예요. 기분은 좀 어때요? 잠깐 앉아도 좋지요? 방금 차를 부탁했으니 바로 가져올 거예요."
그녀가 의자를 끌고 와 앉으며 스커트 자락을 고치는 것을 클레아는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에게는 끔찍한 일이라는 것은 나도 잘 알겠어요. 하지만 좀더 묻고 싶은 일이……."
"지금까지 난 몇 번을 이야기했는지 몰라요‥‥‥."
"네, 우리도 잘 알아요. 지겨운 일이겠지요." 커튼을 열고 간호원이 쟁반을 내밀었기 때문에 그녀는 말을 끊었다. 쟁반에는 두 개의 찻잔과 달콤한 비스켓이 담긴 접시가 얹혀 있었다. "하나는 내가 들지요. 목이 바짝 말랐군요." 여형사는 밝은 웃음을 띠고 쟁반을 받아들었다. 
클레아는 두 손으로 찻잔을 감싸 들었다. 온기가 살을 통해 스며드는 것 같았다. 자기 몸이 완전히 식어 버린 것을 새삼 느꼈다. 한 모금 마셨다. 밀크를 듬뿍 친 옅은 커피. 너무나 달았다. 평소에는 블랙커피를 마시는 클레어였으나, 얼굴을 찌푸리는 일도 없이 거듭 입으로 가져갔다.
형사는 또 입을 열었다.
"어젯저녁 자리에 들기 전의 일말인데, 몇 시경에 잠자리에 들었지요?"
"잘 모르겠지만, 한밤중이었어요."
"저녁때 손님이 왔다고 했지요?"
"네."
"그분이 미스터 톰 프레스코튼가요?" 수첩을 보면서 여형사가 말했다.
"네." 그것이 이 일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개인적인 일까지 물어서 안됐지만 이것은 중요해요. 당신이 저녁을 요리해서 둘이서 먹고, 그러고 나서 어떻게 했지요?"
클레어는 망설였다.
"무엇을 말이에요?"
"그는 당신의 보이 프렌드지요? 혹‥‥‥."
"톰은 아무 관계도 없어요. 그가 돌아간 훨씬 뒤의 일이었으니까‥‥‥."
"어젯저녁 그와 같이 잤어요?"
"그런 일이 무슨‥‥‥."
"이건 대단히 중요한 일이에요." 여형사는 단호하게 고집했다.
"그것이 이 일과 무슨 상관이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군요. 글쎄‥‥‥."
"누구와 관계를 가졌는지가 이 사건에서는 매우 중요한 포인트가 되고 있어요. 범인은 지문을 하나도 남기지 않았어요. 범인이 당신을 레이프했다는 증거가 필요해요. 만약……."
"아아, 그만!" 클레어는 신음하며 눈을 감았다. 두 손으로 깨뜨릴 것처럼 틀어쥔 찻잔을 형사는 살며시 뽑아냈다. 찻잔이 플라스틱의 사이드보드에 놓이는 소리에 클레아는 눈을 떴다. 받침 접시가 물 주전자에 닿아 딸깍 소리를 내고, 형사가 헛기침을 했다.
"이런 일은 말하기 힘들다는 것은 잘 알아요. 하지만 법정에 나가면……."
"제발 부탁이에요……이젠 돌아가 줘요."
"바로 가겠어요, 미스 포레스트. 클레어라고 불러도 좋지요? 언제까지나 미스 포레스트라고 하면 딱딱해져요. 이 질문에 대답해 주기만 하면 나는 바로 가겠어요. 약속해요." 그렇게 말하고는 갈 생각을 않고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클레어가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자, 그녀는 클레어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당신은 어젯밤에 보이 프렌드와 사랑을 나누었어요?" 클레어는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그것이 틀림이 없지요?"
"어젯저녁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어요." 속삭이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럼 알았어요." 조용한 목소리가 울리고, 이어 의자가 삐걱거렸다. "고마워요, 미스 포레스트. 그럼 난 이제 가보겠어요."
클레어는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커튼이 열리고 다시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바깥 복도에서는 파멜라가 커다란 흰 찻잔으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차를 가져온 것은 초록빛 유니폼을 입은 용원이었으며, 상륙한 해병처럼 이상한 위치에 캡을 쓰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맛있는 차예요----뜨거울 때 마셔요. 하버 선생이 설탕 두 스푼을 넣으라고 하셨어요. 오우케이?"
파멜라는 처음에는 멍하니 듣고만 있었다. 누구라고? 하버……그의 이름이 조 하버로군.
"네, 됐어요. 고마와요."
"선생하고 당신은 친구 사이예요? 난 릴리라고 해요. 당신은 어젯밤에 실려 온 불쌍한 여자를 기다리고 있는 거지요? 정말 굉장했어요. 한 눈은 보이지도 않을 만큼 부어올라 타이클전에서 패배한 권투 선수 같던걸요."
파멜라는 너무나 거침없는 말투에 그녀를 노려보았다. 50대 후반의 깡마른 여자였으며 말같이 긴,구김살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캡에서 사방으로 머리카락이 흘러내려와 있고, 유리알 같은 눈에 짙은 호기심의 빛을 띠고 있는 그녀는, 마치 파멜라를 10년이나 사귀어 온 지기처럼 허물없이 대했다. 아마, 오랜 세월을 이 병동에서 일하면서 사람들을 많이 대하다 보니, 누구에게나 허물없이 이야기하는 것이 이 사람의 습관이 되어 버린 걸 거야, 하고 파멜라는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미스 포레스트를 면회하러 와 있어요." 파멜라는 쌀쌀하게 대답했다.
"정말 가여워요. 붙잡으면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어요, 그 남자." 병실 문이 열리고 간호원이 얼굴을 내밀자 여자는 딱 말을 멈췄다. "지금 미스 로링스에게 차를 갖다 드렸어요." 변명하듯 말하는 여자에게 간호원은 언짢은 얼굴을 해보였다. 병원 용원은 바쁜 듯이 떠나갔다.
"따분하시지요, 미스 로링스?"
파멜라는 고개를 끄덕였고, 간호원은 바로 들어갔다.

10분 가량 지나자 톰이 얼굴이 창백해져 가지고 왔다. 그는 깨끗하게 면도를 하고, 공격적인 표정 그대로 뚜벅뚜벅 걸어 파멜라에게 다가왔다.
"클레어는 어떻습니까, 괜찮습니까?"
"지금은 어떤지 몰라요. 하지만 어젯밤엔 지독한 상태였어요." 톰을 보기만 하면 짜증이 나는 자신이 이상했다. 조용하게 이야기하기가 힘이 들었다. 걱정하고 화가 나 있기는 톰이나 자기가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며 그를 격려하듯이 웃음을 보였다. 그러자 톰도 의자에 앉았다.
"여러 시간을 경찰서에 붙잡혀 있었지 뭡니까. 집에까지 와서 사람을 데리고 가더니, 글쎄 몇 시간 동안이나, 내가 살인범이나 되는 것처럼 쥐어짜지 않겠어요. 잇따라 질문 공세를 펴는 겁니다. 경찰은 내가 그랬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에요. 정말 미치광이들이지요. 변호사를 만나고 싶다고 했더니 겨우 풀어주었어요. 세상에 그러는 법이 어디에 있습니까. 날 뭘로 아는 건지 모르겠어요.
노여움이 밀물처럼 파멜라의 가슴속에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금방이라도 쏟아져 나와 톰을 휘몰아 갈 것만 같았다. 파고는 10미터!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짜증, 원망이 그의 입에서 계속 흘러나와 파멜라의 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지나갔다. 톰은 클레어에 대해서는 걱정도 하지 않고 있어. 클레어 걱정이 아니라 자기가 어떤 꼴을 당했는가로 저렇게 펄펄 뛰고 있는 거야.
"처음에는 믿을 수가 없었어요. 경찰은 내가 나간 뒤에 바로 일어난 일이라고 하지만, 난 그 근처에 어정거리는 녀석을 본 일도 없으니 말이오. 그녀석들은 사건을 제대로 파악도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약기는 또 얼마나 약다고요. 수많은 질문을 퍼부으면서도, 이쪽에서 묻는 것에는 거의 아무 대답도 하지 않지 뭡니까."
"클레어는 강간당한데다가 이만저만 두들겨 맞은 것이 아니에요." 파멜라의 목소리가 너무나 컸기 때문에, 지나가는 여자들이 깜짝 놀라 돌아보고 속닥거리며 파멜라를 바라보았다. "방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뒤에 클레아에게 실컷 폭행을 가한 거예요."
"뭐라고요!" 톰은 얼굴이 새빨개졌다. "한데 왜 그렇게 큰 소리를 내지요? 난 잘 들린단 말이요. 온 세상에 방송할 것은 없지 않아요." 일부러 목소리를 죽이고 파멜라의 귀에 속삭였다. 그러고는, 마지못해 떠나는 여자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난 속이 답답하면 언제든지 큰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 없어요!" 파멜라는 이를 갈면서 응수했다.
"당신은 속이 뒤집혀 있군, 지금‥‥‥."
"속이 뒤집혀 있다구요! 천만에요, 난 제정신이에요. 멀쩡한 정신으로 화를 내고 있는 거예요. 닥치는 대로 내던지고 부수고 싶은 정도예요. 당신도, 눈꼽만큼이라도 클레어를 생각한다면 아마 나와 같은 심정일거예요."
"물론이고말고요!.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거요?"
"나한테 물을 게 뭐예요."
"묻기는 뭘 물어요."
"자기 걸 프렌드가 레이프당했는데도, 당신은 경찰의 취조를 받은 것만을 억울하게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취조를 하지 말라고는 안했어요. 다만, 있지도 않은 것을 의심하지 말라고만 했지요. 난 구역질나는 신체검사까지 받았다구요. 어젯저녁 입고 있었던 것을 모두 가져가서 검사받았어요. 그러니 분명 내가 의심을 받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지요. 클레아가, 내가 그랬다고 말했나요?"
톰은 턱을 떨면서 파멜라를 바라보았고, 파멜라는 혐오감을 드러내고 톰을 쏘아보았다.
"클레어가 무엇 때문에 그런 말을 하겠어요…… 경찰도 당신이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틀림없이. 당신의 피해 망상이에요. 물론 자신이 죄의식을 느끼고 있다면 모르지만.“
"그런 무슨 뜻이지요?" 톰은 거칠게 말했다.
"난 당신이, 마음속으로 무엇을 생각하는지 통 알 수가 없어요."
톰은 기세 좋게 일어서자, 벽 앞에 늘어서 있는 빈 의자 하나를 냅다 두들겼다. 커다란 소리가 돌바닥에 울렸고, 간호원 한 사람이, 토끼가 구멍에서 튀어나오듯이 병실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더니,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조용히 하세요, 여기는 병원이란 말이에요! 환자에게 좋지 않아요."
"미안합니다." 톰은 얌전히 간호원에게 사과했다. "미스 포레스트를 만나고 싶은데요."
"아직 회진이 끝나지 않았어요. 조금만 더 기다려줘요, 의자에 앉아서요. 허락을 받으면 바로 알려 드리겠어요. 분명하게 말하자면, 조금 있다가 다시 찾아오는 것이 좋을지도 몰라요. 이곳은 호텔이 아니니까요. 피커딜리 광장처럼 사람들이 몰려오는 건 곤란해요."
말이 끊어질 때마다 콧잔등에 주름을 잡는 간호원의 버릇에 파멜라는 웃음을 참고 있었다. 그러나 톰은 재미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는 톰에게 쌀쌀한 눈길을 던지고 간호원은 병실 안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난 온종일 이런 데서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어요. 이런 곳 사람들은 자기네 편리할 대로만 해나가고, 다른 사람에게도 볼일이 있다는 것은 생각지 않는단 말이요!" 톰은 팔목시계를 보았다. "점심 전에 회의가 있어요, 이제 가봐야지. 클레아를 만나면 내가 오늘 저녁에 다시 오겠다더라고 전해 주겠어요?"
"그러지요." 파멜라는 짐짓 부드럽게 대답했다.
파멜라의 생각이 그에게도 납득이 갔는지 톰은 서둘러 덧붙였다.
"당신도 알 거요. 나도 당신처럼 클레아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오."
"일부러 그런 소리를 할 게 뭐예요. 우습군요."
"이미 경찰에서 우습게 다루어졌어요. 그 녀석들 어서 범인을 붙잡았으면 좋겠는데, 나한테 쓸데없는 질문을 퍼부으면서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요. 세상에 도대체 자기의 걸 프렌드를 강간하는 어리석은 녀석이 어디 있단 말이오!" 아랫입술을 내밀고 톰은 가만히 파멜라의 동정을 살폈다. 그러나 파멜라는 쌀쌀한 눈으로 빤히 톰을 쳐다볼 뿐이었다. "여기서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면 나도 같이 있겠어요. 하지만 클레어는 지금 제일 이상적인 장소에 있고, 저녁때나 돼야 이야기도 더 편하게 할 수 있을 거요." 톰은 또 시계를 보았다. "택시를 잡을 수 있을까?" 그렇게 말하며 톰은 걷기 시작했다.
파멜라는 지겨운 것이라도 보듯이 톰의 뒷모습을 바라보느라 조가 다가오는 것도 몰랐다. 조는 또 파멜라의 옆의자에 앉았다.
"왜 얼굴을 찌푸리고 있지요?"
파멜라는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남자들 때문이지요." 내뱉듯이 말하자, 조는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거리가 되었으면 화가 나야 할텐데, 파멜라는 왠지 노엽지 않았다. 조의 눈은 아직도 웃고 있었다. 그러나 전에 파티에서 본 웃음과는 좀 다른 웃음이었다. 따뜻함과 부드러움과 동정이 담겨 있었다. 그의 웃는 얼굴에 파멜라는 어쩐지 자신의 굳어진 기분까지 풀어지는 것 같았다.
"당신의 친구는 정말 안됐군." 조는 한 손을 들어 의자 등을 붙잡고 윗몸을 틀듯이 하고 파멜라를 바라 보았다. "매크 간호원한테 그녀에 대해서 알아보았어요. 나쁘게 생각하지는 말아요. 나도 걱정이 되는데, 당신한테 꼬치꼬치 캐어물으면 당신이 더 걱정할 것 같아서 그랬어요."
파멜라는 고개를 끄덕이고 긴 한숨을 쉬었다.
"정말 그녀가 걱정스러워요. 어젯밤 처음 발견했을 때의 모습을 보았다면 당신도……난 그녀가 죽은 줄 알았어요, 그때……."
"나도 봤어요." 그는 조용히 말했다.
파멜라는 눈이 휘둥그래져서 조를 쳐다보았다.
"당신이요? 하지만 당신은 어젯밤 당번이 아니었잖아요?"
"불려서 나왔지요." 조는 어깨를 추스리며 희미하게 웃었다. "담당 환자를 보러 병실로 돌아왔을 때 마침 당신의 친구가 옮겨져 왔으니까요. 물론 난 그녀가 당신의 룸메이튼지는 몰랐지요. 매크 간호원----즉, 당신이 면회 허가를 기다리는 그 간호원한테서 듣기 전까지는요. 당신은 그럼 그 파티에서 돌아가자 그녀의 참상을 보았단 말이오?"
파멜라는 한순간 어리둥절해서 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파티 같은 것은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파티에서 있었던 일은 하나도 머리에 없었다. 그녀의 그런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조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 그랬어요." 조용한 목소리로 천천히 대답했다. 모든 것이 눈깜짝할 사이에 일어나 버린 일처럼 생각되었다. '어젯밤의 일은 나중에 다시 찬찬히 생각해 보면 되는 거야.'하고 자신을 타이르며 마음 한구석으로 밀쳐 버렸기 때문이다. 그것이 조의 물음으로 되살아 난 것이다. 조 자신의 그 고약한 마지막 말까지도.
조는 정색하고 말했다.
"아니, 미안합니다. 이런 때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닌데. 한꺼번에 모든 것을 생각할 수야 없지요."
조의 배려는 파멜라도 느낄 수 있었다. 파멜라도 알고 있었다. 조는 사실을 말한 데 지나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파멜라의 행동이 그랬으니 그녀는 무슨 소리를 들어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젯저녁 도둑맞은 일과 클레아가 레이프당한 일이, 사물을 보는 파멜라의 눈을 싹 바꾸어 놓아버렸다.
"아니, 좋아요. 나도 술을 마시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파멜라는 어깨를 추슬렸다.
"난 파티에만 나가면 사람이 고약해져요." 조는 빙긋 웃어 보였다. "위스키 석 잔이면 벌써 누구하고나 싸우려고 들지요."
"새겨 두겠어요."
"하지만 술과 일은 딱 구분하고 있지요. 술기운이 남아 있을 때 병실에 들어가려면, 짙은 커피를 블랙으로 두 잔과 두 컵 반의 물을 마시지요."
"두 컵 반의 물을요?"
파멜라는 되물었고, 조는 싱긋 웃었다.
"그렇게 좋은, 술 깨는 법을 몰랐습니까? 별로 많이 취한 게 아닌데다 물을 많이 마시면 알콜 기운은 날아가 버리지요. 그 이상의 약은 없어요. 거기에 커피 한 잔을 더 마시면 머리가 말끔해져요."
조는 복도 저쪽에서 걸어오는 몇 명의 사람들에게 눈길을 주었다. "아, 왔군요. 대선생님이 몸소‥‥‥선생의 진찰이 끝나면 당신도 친구를 만날 수 있을 거요."
조는 파멜라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고 일어서서 흰옷의 젊은이들 사이에 끼였다. 그룹의 선두에서는,테 없는 안경을 쓰고 입을 한일자로 꼭 다문, 성기어 가는 은발을 한 조그맣고 여윈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안경 속에서 쏘아보는 눈초리에 파멜라는 몸이 움츠러드는 것 같았다. 그 그룹은 병실 문안으로 빨려들 듯이 들어가고, 복도는 다시 조용하게 가라앉았다.
20분 가량 뒤에 파멜라는 클레아를 만났다. 그녀의 얼굴에 든 멍을 보고 쇼크가 다시 파멜라를 덮쳤다.
파멜라는 침대 옆의 나무의자에 앉았다. 의자가 삐걱거리는 바람에 클레어가 꿈틀 몸을 움직이며 하얀 베개 위에서 얼굴을 돌렸다.
"안녕!" 파멜라는 일부러 쾌활하게 말을 걸었다.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큰 소리가 울렸다.
"핼로우, 파멜라."
이불 위에 힘없이 나와 있는 클레아의 팔은 핏기가 없이 차 보였다. 불현듯 그 손을 잡아 비벼 주고 싶은 생각이 났다. 하지만 클레어가 싫어할 것 같았다. 그런 일을 했다간 클레어가 펄쩍 뛰어오를 것 같았다.
"기분은 어때?" 밝은 목소리로 말하면서 파멜라는 또 자신의 몸을 걷어 차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괜찮아." 클레어의 입술이 힘겨운 듯이 움직였다. 입술을 움직이기도 귀찮았다. 파멜라가 와 주지 않아도 좋은데. 이렇게 사람이 와서 보는 것이 싫었다. 그렇기 때문에 커튼도 꼭 닫게 하고 있었다. 파멜라가 돌아가 주면 또 멍하니 아무 생각도 없는 공백의 세계로 가라앉을 수 있을 텐데‥‥‥.
"뭐 갖다 줄 것은 없니, 잡지든 책이든."
클레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좋아. 고마와. 난 이제 괜찮아."
"아까 톰이 왔었어. 하지만 면회할 수 없다는 말에, 저녁에 다시 오겠다며 돌아갔어." 클레어는 커튼을 바라본 채 말이 없었다. 커튼 저쪽에서 고무바퀴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고 왜건이 지나갔다. "과일이나 그런 것은?" 파멜라를 보지도 않고 클레어는 고개를 저었다. 파멜라는 무엇이든 지껄이지 않을 수 없는 기분에 몰렸다. 그러니 이런 때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 
"너의 회사에, 병으로 한동안 쉬겠다고 말해 둘까?"
"아무말도 하지‥‥‥."하고 말하다가 클레어는 말을 끊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경찰은 당연히 회사에 연락을 취했을 것이다. 동료들이 모두 이 일을 알게 된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입을 막아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클레아는 눈을 감고, 그 다음을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클레어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잠든 체하기로 했다. 그러면 파멜라도 말을 걸지 않고 가만히 있어 주겠지.
클레어가 아는 한은 파멜라는 남의 일이나 남의 감정에 개입하지 않는 사람이다. 하얀 달빛을 받으며 차가운 밤에 지붕의 기와 위를 소리없이 걷는 고양이처럼 자기 세계에서만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 파멜라의 사는 방식은 어젯밤에 극적인 대변화를 겪은 것이다.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감각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러나 그대로 살아갈 수 있을지 어떨지 아직 불안감이 남아 있었다. 지금은 클레어와 마찬가지로 조심스럽게 미래와 마주 서있는 상태다. 여전히 잠든 체하며 누워 있는 클레어를 가만히 바라보면서 파멜라는 조용히 옆에 앉아 있었다.



4장 

병실 문이 기세 좋게 열리고 발소리가 울렸다. 저 걸음걸이는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일각도 헛되이 할 수 없다는 듯이 곁눈도 팔지 않는 폴스피드였다.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미래의 한 점에 눈을 박고, 총구멍에서 탄환이 튀어나오는 것 같은 기세의 발소리였다.
클레아는 눈을 감고 사람이 들어서지 않는 안전한 공간에 들어 있었으나, 다가오는 것이 누군지 알자 눈을 떴다. 마침 그때 커튼이 좌우로 열리고 그의 모습이 나타났다. 꽃다발이 그 자신으로부터 돋아난 것처럼 두 팔에 넘쳐 있었다. 꽃가루 투성이의 노란 심을 보이며 자랑스럽게 피어 있는 도도록한 핑크 빛 장미가 왠지 묘하게 요염해 보였다. 하늘거리는 하얀 카네이션, 비연초의 푸른 빛이 비치지 않는 무성한 숲속처럼 어두웠다. 햇빛을 받고 푸드덕 날아오르는 개똥지빠귀의 날개 뒷면을 생각나게 했다. 줄기가 굵고 긴 접시꽃도 핑크 빛이었다. 연보라의 아이리스에 깃털 같은 풀, 왁스를 칠한 것처럼 차갑고 윤기 있는 백합은 뱀처럼 감긴 노란 혀를 내밀고 있었다.
클레어는 그의 얼굴은 보지 않고,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엄청난 꽃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침대 옆으로 다가와 꽃다발을 클레어 위에 내려놓았다. 클레어의 얼굴은 색색의 꽃에 에워 싸여 꽃 사이로 머리가 나와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익숙한 동작으로 침대 가에 걸터앉아 호주머니에서 가는 담배를 꺼냈다.
?여기서 피우면 안 돼요!?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말한 클레어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그는 담배를 입에 물고 성냥을 그었다.
?꽃이 마음에 들어??
?곱군요.? 누가 빼앗기라도 하는 것처럼 클레아는 팔을 뻗어 꽃을 껴안았다. 향기로운 내음이 코를 간질였다. 달콤하고 풍요롭고 어딘지 흙 내음 같은 냄새. 문득 등뒤의 창에서 햇빛이 비쳐 들었다. 빛의 띠 속에서 무수한 금빛 먼지의 작은 알갱이들이 서로 밀치락디치락하고 있었다.
클레아는 푸른 연기를 공중으로 뱉어내는 그에게 눈길을 돌렸다.
?래리, 간호원이 보면…….?
?어떻게 하지? 사람을 때리나?? 히죽 웃는 입술 사이로 하얀 이가 보였다.
?참 곤란한 사람이군요.? 클레아는 불안했다. 래리는 뉴욕에서 불려와 처음으로 출근하는 날, 여러 번 빨아 바랜 청바지에 검은 가죽잠바 차림에 요란한 소리를 내는 오토바이를 타고 옴으로써 문지기를 나자빠지게 만들었었다. <정말 곤란한 사람>이라고 모두들 말하고 있었다.
태연하게 침대가에 걸터앉아 푸른 연기의 고리를 뱉어내는 래리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클레아는 마음이 누그러져 저도 모르게 와아 하고 소리 내어 울고 싶어졌다.
?코를 긁혔군.?
래리의 말에 자신의 얼굴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얼마나 추악한지가 생각나 클레아는 꽃다발을 들어올려 얼굴을 가렸다.
?날 보지 말아요!?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장미 꽃잎이 부드럽게 이마를 스쳤다. 클레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이미 봐 버렸는데.? 클레아의 반응 따위는 아랑곳 없이 태연한 목소리였다. ?나는 유리창에 머리를 박은 녀석을 본 일이 있어. 그보다는 휠씬 낫군.?
?당신은 그걸로 날 위로하고 있는 줄 아세요?? 꽃 그늘에서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클레어가 따졌다. 
?아니 그게 아니지.? 래리는 놀란 것 같았다. 누군가가 냄새를 맡는 것처럼 코를 킁킁거리며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커튼이 확 열리고, 풀을 빳빳하게 먹힌 흰옷에 싸인 노한 천사가 몸을 떨면서 모습을 나타냈다. 
?담배를 피우지 마셔요! 병실에서는 절대 금연이에요! 어서 꺼 주셔요!? 래리는 이상하다는 듯이 수간호원을 쳐다보았다. 긴 손가락에 담배를 끼운 채. 
?그리고, 미안하지만 침대에서 내려와 주셔요. 정말 왜 이러실까! 문병객이 환자의 침대에 앉거나 하면 곤란해요. 여기를 어디로 알고 계시는 거지요? 무슨 파티장도 아니고!?
래리는 얼른 침대를 떠나, 담배를 가진 손을 등뒤로 숨기고 또 한 손의 손가락을 자기 입술에 댔다가 살며시 클레아의 이마에 갖다 얹었다.
?그럼 또 봐.? 하고 말하고는, 서 있는 수간호원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성큼성큼 걸어 나가 버렸다.
?세상에, 저런 사람이 다 있어.? 수간호원은 방금 있었던 일이 클레어의 책임이나 되는 듯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어처구니가 없군요!? 그 눈은 클레어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거대한 꽃다발에 와서 멎었다. ?이번에는 또 뭐지요? 미스 포레스트,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어요? 간호원을 불러서 치우게 해야겠어요. 침대 주위를 꽃 투성이로 만들 수는 없어요. 무슨 해충을 들여왔을지………. 이러다간 개미에 먹히고 말 거예요. 바로 시트를 갈아야겠어요. 정말 생각이라는 것이 없어.? 그러고는 커튼 너머로 간호원을 불렀다. ?랜트씨, 누구 간호원 없어요!?젊고 오동통한 간호원이 바로 얼굴을 내밀었다. 풀을 먹인 에이프런이 풍만한 가슴에 불룩하게 밀려나와 있었다.
?네, 주임님.?
?이것을 바로 치워 줘요.? 그렇게 말하자 수간호원은 가슴을 펴고 나갔다.
랜트 간호원은 키들키들 웃었다.
?아아, 당신의 장례식 같아요.? 그렇게 말하더니 흠칫해서 우뚝 섰다.
클레어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랜트는 더욱 난처한 듯이 클레어에게 다가왔다.
?쉬, 쉬………주임이 들으면 어떻게 해요.? 그 말을 듣자 클레어는 더욱 웃음을 참을 수가 없게 되었다. ?히스테릭하게 되면 안 돼요. 주임이 오면 뺨을 갈길지도 모른다고요……….정말이에요.?
?아, 알았어요.? 클레어는 숨을 몰아 쉬며 겨우 웃음을 그쳤다. ?미안해요.? 가까스로 숨을 가다듬고 새삼 랜트에게 사과했다.
랜트 간호원은 감탄하면서 침대 위에서 꽃을 하나 집어 들기 시작했다.
?누군지 무척 호사스럽군요……보이 프랜드에요, 방금 나간 사람? 그 사람 내 취미에 맞는 타입인 것 같아요. 스마트하고 날 강탈해 갈 것 같은……. 난 말이에요, 산채로 잡아먹히는 게 아닌가 싶은 사람이 좋아요.?
클레아는 재미있다는 듯이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라면 뜯어 먹을 만할 것 같았다. 대식가도 다 먹을 수 없을 테니까.
?이 장미를 좀 보세요.? 랜트는 반한 듯이 한 송이의 장미를 내밀었다. ?샤넬보다도 향기가 좋아요…..나도 이런 꽃을 듬뿍 갖다 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민트 초콜렛 한 상자가 지금까지 내가 받은 최고의 프렌첸트였어요. 
?그는 보이 프랜드가 아니에요, 내 보스예요.?
?아, 그래서 바로 돌아갔군요. 난 또 주임님이 샘이 나서 쫓아 버린 줄 알아지요.?
?래리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여자는 지금까지 본 일이 없어요.?
래리는 바람처럼 들어왔다 바람처럼 나가 버렸지만, 래리가 찾아온 뒤에 클레어의 기분은 미묘하게 호전되고 있었다. 아마 그런 변화가 겉으로도 드러났지만, 간호원의 표정에 안도의 빛이 보였다.
저녁때 톰이 찾아왔다. 조금 얼굴이 붉어져 있었으며, 조그만 카네이션 꽃다발을 가지고 왔다. 그는 클레어의 얼굴을 보지 않고 그녀의 손에 꽃다발을 건넸다. 톰은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둘러보면서도 클레어의 눈에만은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그는 몸을 수그려 클레어의 볼에 키스했다. 톰의 얼굴이 다가들었을 때, 클레어는 그가, 자기 얼굴을 반사적으로 굳어지는 것을 눈치채지 않기를 바랐다.
?좀 어때?? 옆 의자에 걸터앉으면서 톰은 중얼거렸다. 톰은 분명,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으며 침착을 찾지 못해 난처해하고 있었다.
?좋아요.?
카네이션은 활짝 피어 있었으나 생기도 냄새도 없고, 크레이프 페이퍼로 만든 것 같았다.
?그래? 다행이군.? 그의 말은 진정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톰이 움직이니 의자가 삐걱거렸다. ? 정말 야수 같은 녀석이오. 난 정말………?
?그만둬요.? 톰의 목소리가 잔혹하리만큼 거세게 울리는 것을 듣고 클레어는 몸을 움츠렸다. 생생한 남자의 에너지, 그것이 클레어에게 소름끼치는 기억을 되살아나게 했다. 반쯤 감은 눈까풀 사이로, 톰의 손이 무릎 위에서 관절이 하얗게 될 만큼 꼭 틀어쥐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금방이라도 누구를 때릴 것 같았다.
톰은 얼굴을 돌렸으나, 추운 겨울 아침 개가 헐떡이는 것 같은 거친 숨결이 클레아의 귀에 닿았다. 그러더니 그는 불쑥 물었다.
?도대체 누구 이런 것을 가져왔지??
?래리예요, 래리 히리어.?
?도대체 어쩌자는 거지, 꽃가게를 몽땅 사버렸다?? 짜증스런 목소리였다.
?곱잖아요??
?그녀석은 좀 허영꾼이군, 언제나.?
톰이 자기 꽃다발과 견주고 있는 것을 보고 클레아는 그의 꽃을 들어올려 보였다.
?당신의 것도 고와요. 나 이 꽃 좋아해요.? 향기가 없는 카네이션의 딱딱한 꽃잎은 알루미늄 호일 쪼가리처럼 볼을 쿡쿡 찔렀다.
톰은 온종일 얼마나 바빴는지, 병원에 오는 길이 얼마나 붐볐는지를 말하기 시작했다. 배기 가스로 머리가 아프다고도 했다.
?아직 저녁 식사를 안했어요?? 하고 클레어가 물으니, 돌아가다가 어디 햄버거 집이나 꼬치구이 집에서 뭘 먹겠다고 말했다. 톰은 끝없이 지껄이고 있었으나 그동안에 클레아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클레아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있었다. 톰은 시계를 보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있는 것을 클레아는 알고 있었다. 이야기도 차츰 끊어지고, 헛기침을 하고 다리를 꼬고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벨 소리라도 나면 펄쩍 뛰어 일어나 나가겠지.
?톰, 나 고단해요. 미안하지만………?
?이제 돌아가라는 말이오?? 하고 말하면서 톰은 벌써 일어서고 있었다. 미안한 느낌과 안도감이 그 목소리에 담겨 있었다. ?알았어. 지독한 경험이었군, 불쌍한 클레어.? 톰은 몸을 수그려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자 클레어는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려고 했다. 톰은 키스를 하지 않고 그대로 일어섰다. ?몸을 아껴요. 내일 또 오겠소. 뭐 필요한 것은 없어??
?없어요, 일부러 와주지 않아도 좋아요. 바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그때 만나기로 해요. 문병은…….?
?그러지, 당신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좀 불쾌한 듯이 서 있더니, ?그럼 몸조심해요. 그리고 전화해 줘, 혹시…….?
톰이 나간 뒤 클레아는 커튼 저쪽의,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의 움직임에 귀를 세우고 있었다. 
기침 소리, 물건이 스치는 소리, 속닥거리는 소리, 한숨, 문병객의 속삭임, 이중문을 열고 주임이 환자의 친구며 가족을 이끌어들이는 술렁거림. 문병객은 꽃이며 과일이며 때로는곤혹을 가지고 온다. 환자들은 시계를 보면서 그때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막상 오면 별로 하는 이야기도 없는데. 처음에는 이야기가 술술 흘러나오지만, 이윽고 토막토막 끊기다가 곁눈으로 시계를 노려보며 어색한 시간에서 벗어나기를 바라게 되는 것이다.
클레어는 사실, 톰이 와 주지 않았으면 싶었다. 래리도, 그리고 미안하지만 파멜라도. 자신이 마치 이마에 <격리>라고 표를 붙인 천민이 되어 버린 느낌이 드는 것이다. 몸서리쳐지는 시간에 대해서는 이제 이야기하고 싶지가 않았다. 넌더리가 났다.
훔쳐보는 것 같은 톰의 곁눈질은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말해 주고 있었다. 마치 클레아가 레이프를 자청한 것 같은, 그래서 자신을 탓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했다. 톰의 목소리에서는 비난의 울림도 들을 수 있었다. 하여튼 클레아 때문에 톰까지 불쾌한 사건에 휘말려들어 버렸으니. 톰은 추한 것, 더러운 것을 싫어했다. 흙탕물이 조금만 옷에 튀어도 떠들어대는 것이었다. 톰의 눈으로 보면 클레아는 절대로 레이프당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좀더 조심을 했더라면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 아닌가!
클레아의 시선은 또 래리의 호화로운 꽃다발로 갔다. 그렇게 잠깐밖에 앉아 있지 않을 거면서 왜 찾아 왔었을까? 호기심 때문일까?
면회 시간이 끝날 무렵이 되어서, 클레아의 잠옷이며, 화장품, 그밖에 여러가지 일용품을 챙겨 넣은 슈트케이스를 들고 파멜라가 찾아왔다.
?환자는 잠들어 있는 것 같아요.? 하며 수간호원이 슈트케이스를 받아 들었다. ?엄청난 하루였으니까요. 가만 내버려 두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요.?
?나 내일 또 오겠어요. 그저, 쓰던 물건이 가까이 있으면 기분 전환이 될까 싶어서………..?
?자상하게 마음 써 주시는군요.? 수간호원의 찬사는 ?착한 아이군요.? 하고 끄덕여 보이는 국민하교 선생을 생각나게 해서 파멜라는 자기가 갑자기 어린아이로 돌아간 느낌이 들었다. 칭찬을 받으면 절을 해야 했던가?
병원의 출구로 향해 걷고 있을 때 등 뒤에서 뛰어 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잠깐 기다려 줘요!?
그 목소리에 돌아보니 조 하버였다.
?어마, 핼로우.? 병원 안에서 따뜻하게 대해 준 조는 어젯밤 파티에서 그녀에게 던진 가혹한 말을 지워 준 셈이었다. 지금 파멜라는 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 지 모를 형편이었다.
?친구한테 다녀오는군요, 어때요??
?잠들어 있어요. 간단한 일용품들을 갖다 주었을 뿐이에요.?
?어떻게 들어갈 겁니까, 차가 있어요?? 파멜라는 고개를 저었다. ?마침 근무가 끝났으니 내차로 모셔 다 드릴까요??
?고마워요.?
?차는 저쪽에 있어요.? 조는 앞서서 왼쪽으로 꺾어 들었다. 
거기에는 직원용 주차장이라는 푯말이 세워져 있었다. 그의 차는 두 대의 차 사이에 꼭 끼여 있어서 꺼내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파멜라는 아직 종잡을 수 없는 마음으로 말없이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오늘 저녁은 잠을 푹 자야겠군요.? 수위와 친근하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나누면서 조는 말했다.
파멜라는 몸이 으스스 떨렸다.
?먼저 내 침실을 치워야겠어요.?
그 목소리가 이상하게 들린 듯, 조는 파멜라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되어 있는데요??
?범인은 클레아의 방에 들어가기 전에 온 집안을 뒤엎어 놓았어요.?
?오늘 저녁 달리 가서 잘 데가 없습니까? 친구의 집이라든지 호텔이라도 예약을 두었더라면 좋았을걸.?
?언젠가는 치우지 않을 수 없지요.? 파멜라는 어떻게 든 대결해 보려고 마음을 다지고 있었다. 오늘 저녁을 피하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미 일어나 버린 일이다. 도망치는 것은 비겁하다. 그래서는 범인에게 지게 되는 것이다.
조의 눈이 자기에게 쏠리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파멜라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차가 멎었다. 파멜라는 차장으로 자기 방을 쳐다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방에까지 같이 가 드릴까요?? 파멜라의 옆얼굴을 바라보고 조는 말했다.
?그렇게 해주시겠어요? 바보 같다는 건 알지만……?
?알고 있어요. 조금도 바보가 아니오. 그런 일이 있은 뒤니 당연하지요. 누구나 기분이 나쁠 거요.? 이렇게 말하고 조는 차에서 내렸다. 
파멜라도 자기 손으로 차의 문을 열고 떨리는 다리로 내려섰다. 조와 나란히 걷기 시작했으나 백에서 열쇠를 꺼내는 손은 떨고 있었다.
방안은 어둡고 조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조는 스위치를 올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 말 없이 그는 하나하나 꼼꼼하게 점검해 나갔다. 파멜라는 귀를 세우고 거실에 앉아 버렸다. 이윽고 조는 엄숙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안심해도 좋아요. 아무도 없어요. 그러나 정말 너무했군. 그런데, 이렇게까지 들쑤셔 놓았는데 당신 친구는 아무 소리도 못 들었고, 이웃 사람도 몰랐다니, 정말 놀랍군요.?
?이곳은 런던이에요. 사람들은 아무것도 보지 않고 듣지도 않아요. 비록 들렸다 해도 말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고는 숨을 한번 들이쉬고 나서 다시 말했다. ?정말 고마워요. 덕분에 큰 힘이 되었어요.?
?그런 말은 할 필요 없어요. 이제 괜찮아요??
조가 현관으로 향하려고 했을 때, 파멜라는 갑자기 그가 돌아가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불안했던 것이다.
?차라도 한 잔 들고 가겠어요?? 파멜라는 얼른 말했다. 조는 분명 망설이고 있었다. ?그렇게 해요.? 파멜라의 표정에는 매달리는 것 같은 기색이 담겨 있었다. 이제 그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어. 이집은 공포의 그림자로 가득 창 있어. 아직 혼자 있기가 무서웠다.
조는 망설이면서 말했다.
?좋아요. 고마워요.?
파멜라는 주방으로 뛰어갔다. 그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그는 여기에 오래 있기가 싫을 것이다. 
찻잔을 쟁반에 받쳐 들고 돌아와 보니, 조는 바닥 위의 깨진 물건들을 닥치는 대로 주워서 치우고 있었다. 뒤엎어진 의자는 먼저 대로 세워 놓고, 쓰레기통은 이미 파편으로 가득 차 있었다. 흩어진 책도 대충 책장에 꽂혀 있었다.
?어머, 그런 일은 당신이………….. 할 일이 아닌데………..? 파멜라는 놀라는 한편 고마웠고, 그리고 미안하게 생각되었다. 돌아본 조의 얼굴에 코커 스파니엘의 귀처럼 머리가 드리워져 매우 젊게 보였다. 문든 그의 머리카락을 만져 보고 싶어 파멜라는 손각이 근질근질 했다.
전화벨이 올리자 파멜라는 천장까지 뛰어오를 것처럼 놀랐다. 금방 얼굴이 창백해졌다. 조는 그 모습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
?내가 받을까요?? 하고 조가 물었으나 파멜라는 꼼짝도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다가가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조용하게 말하는 조의 옆얼굴을 파말라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조는 수화기를 떼고 돌아보았다. ?클레어의 어머니요.?
?아직 그 일을 모르시는 모양이오…… 클레어를 바꿔 달래요.?
?어머나….?
?당신이 받는 것이 좋겠어요.?
?뭐라고 말하면 좋지요??
?내가 말할까요??
잠깐 그대로 기다리다가 또 수화기로 향하려고 할 때, 파멜라는 아무래도 무슨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싶었다.
?네, 부탁해요.? 하고 말하고 나서 조와 눈이 마주치자, 파멜라는 결심한 듯이 앞으로 나아가 수화기 받아 들었다. ?역시 내가 말하겠어요.? 하는 파멜라에게 조는 따뜻하게 미소했다. 
?여보세요, 미세스 포레스트 세요? 저 파멜라예요.?
?아아, 파멜라? 클레어는 어디 나갔나요? 부인의 목소리는 밝았다. 조의 말처럼, 역시 아직 모르시는 모양이다. 
?네, 지금 없어요. 저어……….?
?아니, 좋아요, 파멜라, 급한 볼일이 있는 건 아니니까요. 그냥 얘기를 하고 싶었을 뿐이었어요. 집에 있는가 싶어서요.?
?여보세요, 만일 제가……….?
?내가 방해가 되었을 거예요, 미안해요. 클레아에게 전화 왔었다고 전해 줘요. 또 걸겠어요.?
끊겨서는 큰일이라 싶어 파멜라는 당황했다.
?미세스 포레스트, 저어………. 클레아는 입원하고 ………?
?네! 뭐라구요??
?알려드려야겠다는 생각을 미처 못해서………?
?어디가 불편해서 입원했나요??
?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하고 파멜라는 머리를 쥐어짠다. 클레어의 어머니는 아직 잘 알지도 못한다. 겨우 몇번, 그것도 잠깐 동안밖에 만난 일이 없었다. 거리에서 스치면 알아볼지 어떻지. 50 안팎의 은회색의 머리를 한, 참으로 어머니다운 느낌의 포근한 여자였다.
?무슨 사고라도 있었나요?? 미세스 포레스트의 목소리에는 놀라움과 걱정이 담겨 있었다. 
파멜라는 먼저 안심을 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것은 아니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바로 회복될 거예요. 그저…… 어제 저녁 우리 집에.. 저어, 강도가 들어와서……….그래서……?
?강도?? 날카로운 물음에 파멜라는 자신의 몸을 걷어차고 싶은 후회에 사로잡혔다. 상황을 어렵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나는 파티에 가 있었고, 클레어는 혼자 있었어요.?
전화 저쪽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전해져 왔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클레아는…… 습격을 받았어요.? 파멜라는 꼼짝없이 대답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그럴 수가……….?
?내가 돌아와 보니 집안이 엉망으로 되어 있고, 클레어는 의식을 잃고 있었어요. 하지만 클레어의 부상은 대단한 것은 아니었고, 오늘도 의사 선생님 이야기를 듣고 왔지만 걱정이 없다는 거예요.? 말을 끊으면 전화통 저쪽에서 화살처럼 질문이 쏟아질까 싶어 파멜라는 빠른 말로 계속 지껄였다. ?다만 여러가지 검사의 결과가 밝혀질 때까지는 병원에 있는 것이 낫다고 해서요. 엑스선 사진으로도 골절은 없대요. 지금으로서는 타박상과 두통이 조금 남아 있을 뿐이지만, 신중을 구하기 위한 거예요. 하루나 이틀 뒤면 퇴원할 수 있을 걸로 알고 있어요.? 마침내 할말이 없어져 버렸다. 저쪽에서는 묻고 싶은 말이 산더미처럼 많겠지.
?당신은 오늘도 그 아이를 만났어요??
?네, 침대에 일어나 앉아 차를 마셨어요.? 미안해요 본 것같이 거짓말을 해서요. 옆에 조의 시선을 느끼면서 속으로 파멜라는 사과했다.
?난 그 아이에게 입이 닳도록 도어 체인을 잊지 말라고 했는데, 어디로 들어왔어요??
?창문으로요.?
?열어 놓은 것은 아니었겠지요??
?어제저녁은 무더워서……….?
?어머나!? 미세스 포레스터는 말이 막혔다.
한참 뒤에, 무엇을 도둑맞았느냐고 물었다. 파멜라는 그제야 안심이 되어, 텔레비전이며 스테레오에 대해 이야기하고 엉망이 된 방안에 대해서 지껄여서, 될수록 클레어로부터 화제를 멀리하려고 했다. 그러나 파멜라가 피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녀의 질문은 더 상세해지는 것이었다.

베아티 포레스트는 수화기를 놓았다. 딸각 하는 조그만 소리가 현관 홀에 울렸다. 남편은 골프 클럽의 이사회에 나가도 집에 없었다. 베아티는 어둠침침한 층계에 눈길을 주며, 지금 이 집에 있는 것은 자기 혼자라고 생각하자 그 고요가 소름이 끼칠 만큼 무서워졌다. 그녀는 서둘러 스위치에 손을 뻗어 복도의 불을 켰다. 
클레어의 신상에 일어난 일을 듣고서부터 몸의 떨림이 멈추지를 않았다. 파멜라는 아직도 무언가를 숨기고 있어---하고 짐작하고 있었다. 클레어의 용태가 더 위중한 것은 아닐까?
베아티는 다시 한번 전화기 앞으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병원에 걸어 클레어의 병실 담당 간호원을 찾았다. 그녀는 예의 바른 응대로,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고 말했다.
?네, 미스 포레스트의 경과는 순조롭고, 지금 자고 있습니다.?
베아티는 수화기를 놓자 새삼 집 안을 둘러보고 낯익은 물건들을 확인하며 안도감을 얻으려 했다. 심장이 가슴을 뚫고 나오는 게 아닐까 싶게 격렬하게 고동치고 있었다. 클레아는 외동딸이었다. 살아 있는 오직 하나뿐인 자식. 살아 있는?----베아티는 눈썹을 찌푸렸다. 산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숨이 끓어진 순간부터 사람은 존재하는 것을 그만두는 것일까? 그렇다면 마음속에 존재하는 사자는 어떻게 해석하면 좋은가? 우리는 언제나 마음속에서 그 사람은 볼 수가 있는데도 그것을 살아 있다고는 하지 않는다. 사람은 심장이나 신장 같은 기능을 대행하는 새로운 기계를 써서 병자를 살려 놓을 수가 있다. 
내가, 누가 죽은 것을 마음속에서 거부하기만 하면 그 사람은 살아 있는 셈이 되는 거야………. 베아티는 자신에게 타이르고 있었다.
계단 아래 커다란 벽시계의 시각을 새기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잘 닦여진 놋쇠의 문자판을 베아티는 들여다보았다. 아버지의 유품 가운데서 남편 테렉의 허락으로 유일하게 남아있는 물건이었다. 나머지 물건들은 모두 경매에 부쳐 버렸다. 옥션룸의 거친 마루 위에 아무렇게나 한 다발씩 끈으로 묶여진 물건들을 보는 것은 슬펐다. 날마다 날마다 바라보며 자란 그리운 물건들이었다. 베아티는 경매가 시작되기 전에 비실비실 밖으로 나와 버렸었다.
상자 하나에는 어머니가 애용하던 오렌지색 티 세트가 들어 있었다. 어머니 메어리 리치는 반짝이는 것 같은 밝은 색을 좋아했다. 햇빛이 넘치는 남국 이탈리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그 빛을 함께 들이마신 것 같은 이름의 이탈리아 인과 결혼한 뒤에, 먼저 많은 잿빛의 런던에 와서 살게 되었지만.
어머니 메어리는 차분하고 따뜻하고, 어느 편이냐 하면 답답할 만큼 말을 천천히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버지 살바토레는 성질이 거센 편이었다. 얼굴이 검고, 키는 크지 않으나 건장한 편으로, 아이를 좋아했기 때문에, 베아토리스 다음에 자식이 없는 것을 매우 서운해했다. 
하지만 집에는 언제나 누군가가 와 있었으며, 밝은 이야기소리와 애정이 넘쳐 있었다. 사람들은 리치 집안을 찾아오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고 있었다. 메어리는 간편한 파스타 요리에 미트 소스를 듬뿍 쳐서 사람들을 대접했고, 살바토레는 어린 베아티를 무릎 위에 앉혀 놓고 사람들과 흥겹게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베아티가 12세 되던 가을, 가족이 비행기로 즐거운 파리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아침 일찍 런던 비행장으로 가려고 셋이서 막 집을 나서는데, 만삭이 된 초라한 차림의 한 여인이 집 앞에 쓰러져 있는 것이었다. 믿음이 깊은 어머니는 이것은 신의 뜻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여행을 중지하고 이 불쌍한 여자를 집안에 들여 돌봐주자고 남편에게 말했다. 마음씨 좋은 아버지는 비행기표까지 사놓았는데도 기꺼이 이에 응했다. 베아티는 울고불고 파리에 가자고 했으나 결국 설득당하고야 말았다.
그 여자는 아일랜드 사람으로, 술고래인 남편이 집을 나간 지 반년이 넘도록, 홀몸도 아닌 몸으로 혼자 고생을 하다가, 풍문에 남편이 런던에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 나섰으나 찾지도 못하고 여비도 떨어져 오도가도 못하고 헤매던 중, 어제저녁부터 산기가 있어 그 베아티의 집 문 앞에 누워 있었다는 것이다. 그 집은 큰길에서 쑥 들어간 곳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 집은 큰길에서 쑥 들어간 곳에 있어서 왕래하는 사람도 거의 없어서 사람들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 
그날 오후, 그 여자는 급히 불러온 의사의 도움으로 계집아이를 낳았다. 메어리는 두 손으로 아기를 안아 베아티에게 보여주었다. 아기는 마치 무엇이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눈을 뜨고 물끄러미 베아티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 신문에, 세 식구가 타고 가려던 비행기가 공중 폭발을 일으켜 도버 해협의 바다 속에 처박히는 참사가 있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승객과 승무원 전원이 죽은 이 참사로 세상은 벌컥 뒤집히다시피 야단이 났다. 베아티네 세 식구가 그 비행기를 탔다면 하나도 살아 남지 못했을 것이다. 어머니 메어리는 몸을 떨면서 두 손을 하늘로 치켜 들고 신께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는 온갖 정성을 다해 산모를 돌봤다.
그러나 일주일 뒤, 원래 몸이 쇠약했던 산모는 산욕열을 일으켜, 의사의 치료도 보람없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산모는 죽을 때, 깊이 간직했던 보석 몇 개를 꺼내어 메어리에게 주면서, 아기를 부탁한다고 말했다. 메어리는 아기는 자기가 꼭 훌륭히 키우겠다고 약속했다. 산모가 숨을 거두는 것을, 베아티는 병실에 살그머니 들어가 사람들 뒤에 숨어서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았다.
그리하여 그 후 그 아기는 베아티의 동생이 되었다. 어머니는 아기의 이름을, 신으로부터 받은 아기라고 해서 돈나라고 지었다. 그러지 않아도 아기가 하나 더 있었으면 하고 바라던 중이었으므로 돈나는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어머니가 저녁 준비를 할 때면 돈나는 아버지의 무릎 위에서 놀았다.
그러나 일년 뒤의 가을, 이 집에는 큰 불행이 닥쳤다. 하루는 돈나를 데리고 가족이 소풍을 갔다 왔는데, 바람을 너무 씐 탓으로 폐렴에 걸린 것이다. 어머니가 밤잠도 안 자고 돌본 보람이 있어 돈나의 병은 얼마 안가서 회복되었다. 그러나 돈나가 회복되자 어머니는 현기증이 난다며 자리에 눕더니 열흘 뒤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평상시에 당뇨 증세로 몸이 약하던 어머니는, 신에게 기도만 할 뿐 병원에는 가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숨을 거두면서 메어리는 남편과 딸에게, 돈나를 다른 데 보내지 말고 유모를 들여서라도 집에서 잘 키우라고 당부했다.
살바토레 리치의 기쁨은 일시에 사라져 버렸다. 하룻밤 사이에 늙어 버려서, 행동도 말하는 것도 느려지고, 교회에도 발길을 뚝 끊어 버렸다. 그리고는 세상에 등을 돌리고 집안에만 혼자 틀어박혀 술만 마시게 되었다. 그러기를 일년, 그 사이 아기를 돌보는 일은 베아티가 도맡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머니의 친구들은 돈나를 고아원에 보내도록 하라고 권했다. 학교에 다니는 14세의 베아티에게는 우유 먹이기, 기저귀 갈기, 목욕시키기 등은 힘에 겨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죽은 아내의 당부를 저버릴 수가 없어 유모를 사서 돌보게 했다. 
그리고 아버지도 차츰 아내를 잃은 슬픔을 잊기 시작했다. 하지만 예전의 쾌활하던 아버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겉으로 나타나는 행동은 전과 다름이 없었으나 마음속으로는 상복을 벗지 않고 있었다. 빛을 잃은 아버지의 눈이 그것을 잘 말해 주고 있었다.
그렇게 일년 가량 지나자, 유모의 보수를 지급하기 어려운 형편이 되어서 베아티가 다시 아기와 아버지의 뒷바라지를 도맡아 하게 되었다. 행복하기만 하던 철부지 소녀가 힘든 주부 일을 떠맡게 된 것이다. 그녀는 돈나가 친동생만 같아서, 고생스럽지만 다른 데로 보낼 생각은 없었다.
베아티는 어려서부터 그림에 남다른 재능을 나타냈으며, 훌륭한 화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나 그런 환경에 처한 베아티로서는 그것은 도저히 이룰 수 없는 희망이어서, 한때는 실의에 빠진 나날이 계속되기도 했다. 실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어린아이를 돌보느라 자신의 꿈마저 버려야 하는 자기의 운명이 한편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하여 돈나가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 남자라고는 그림자조차도 베아티의 마음속에 들어올 수가 없었다. 미혼인 채 30세를 맞이하던 날, 이제 자기에게 있어 결혼의 찬스는 없어졌음을 느낀 베아티는 새삼 자신의 인생을 생각했다.
그로부터 3개월 뒤, 베아티는 우연히 치과 병원의 대합실에서 만난 테렉 포레스트와 결혼하였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가 베아티에게 결혼을 신청한 첫 남자였으며, 베아티는 테렉에게서 아버지가 가졌던 정열 같은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테렉은 매우 상냥한 남자였다. 그때까지 결혼하지 않고 있었던 것도 여자를 너무나 좋아했기 때문이며, 꽃에서 꽃으로 날아다니는 꿀벌처럼 이 여자 저 여자가 잇따라 좋아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베아티의 경우에도, 베아티 쪽에서 그럴 마음이 나지 않았다면 결혼하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테렉도 문득, 자기가 너무 오래 독신으로 지내왔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베아티는 돈나처럼 아름답지는 못했으나, 알맞게 살이 찐, 건강미가 넘치는 몸매였다. 하나 성적으로는 미성숙했기 때문에, 테렉은 도리어 상대방을 눈뜨게 하는 기쁨을 맛볼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결혼 후 일년간은 행복하게 지나갔다. 사막에서 목이 바싹 마른 동물이 맑은 샘물을 발견하고 뛰어든 것처럼 베아티는 갑자기 온갖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예쁜 옷으로 단장하고, 파티에도 가고, 그리고 침실에서는 테렉의 사람을 받는 일까지.그리하여 드디어 베아티는 임신했다. 돈나의 어머니의 죽음을 잊지 못하고 있던 베아티는 고민으로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다. 테렉의 애무에 자기를 잊으면서도 자기가 신생아를 남겨 놓고 죽어가는 꿈에 시달리곤 했던 것이다.
혼자 있을 때는 눈물로 지냈다. 하루하루 몸무게가 줄고 얼굴이 창백해졌으며, 입에는 아무것도 넣을 수 없게 되었다. 갑자기 사는 이유가 알 수 없어져 머리를 갸웃거렸다.
<아기를 갖고 싶지 않습니까?> 하고 묻는 의사에게 저도 모르게, <갖고 싶지 않아요. 정말 갖고 싶지 않아요.> 하고 말해 버렸다. 그러나 의사는, 처음 임신한 여자에게는 흔히 있는 케이스니 걱정할 것은 없으며 차차 괜찮아질 거라면서 가벼운 진정제를 처방했다.
아이는 무사히 태어나고, 베아티는 급속도로 회복되었다. 그러나 베아티는 태어난 클레아를 보기가 괴로웠다. 갖고 싶지 않다고 말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미안한 마음에서 더 열심히 돌보았다. 그러나 클레아의 푸른 눈이, 왜 그렇게 자기와 거리를 두느냐고 따지는 듯 느껴져서 베아티는 괴로웠다.
베아티는 아기에게 어김없이 시간에 맞혀 우유를 먹였고 목욕을 시켰고 예방주사도 게을리하지 않고 맞히는 등 완벽하게 돌보았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자기 몸에 닿은 손길에 사랑이 깃들여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베아티는 다른 어머니들이 자연스럽게 그런 듯이 아이에게 말을 거는 일이 없었다. 보통의 어머니들은 아이가 울지 않도록 늘 껴안고 볼을 비비고 보드라운 피부를 통해 마음에 호소하려고 하지만, 베아티는 그런 일을 일절 하지 않았다.
클레어가 네 살이 되었을 때 베아티는 둘째 번 아이를 임신했다. 두려워하던 첫아이도 무사히 태어났고 해서 이번에는 베아티는 불안을 느끼지 않았고, 또 클레어에 대해서 거리를 두게 되는 것에 죄의식을 느꼈기 때문에 어서 다음 아이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둘째는 사내아이였다. 니니안이라는 이름을 지어졌으나 베아티는 남몰래 니노라고 불렀고, 그 아이를 팔에 안을 때마다 가슴 뿌듯함을 맛보았다.
갓난 니노와 어린 클레아를 끌어 안고 있는 베아티를 거들러 동생 돈나가 와서 같이 살게 되었다. 그러자 클레아는 금세 아름다운 이모를 따르게 되었다. 윤기가 흐르는 검은 머리의 돈나는 쾌활했고 무서움도 몰랐다. 그녀가 등장함으로써 집안은 활기를 되찾았다. 테렉은 돈나가 이야기를 할 때마다 웃었다.
클레어는 엄지손가락을 빨면서 돈나의 무릎 위에 올라앉아 행복해 했다. 돈나가 언제까지나 집에 있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밤에는 돈나의 꿈을 꾸었다. 자면서도 따뜻한 돈나의 무릎의 감촉에 방긋방긋 웃었다. 그런데 꿈속에서, 갑자기 돈나는 클레어에게 등을 돌리고 걷기 시작했다. 클레어는 울기 시작했다. 흐느끼면서 일어나자 어둠이 무서움을 더했다. 침대에서 뛰어내려 맨발로 방을 나가 복도를 달려가 돈나의 방문을 밀어 열었다. 엷은 빛이 카펫과 침대를 비추고 있었다.
클레어는 비명을 질렀다. 우뚝 서서 비명을 되풀이했다. 그 소리를 듣고 베아티가 침실에서 뛰어나왔다. 잠이 덜 깬 눈으로 베아티는 <왜 그러니?> 하고 물으면 무심코 눈을 들자, 돈나의 침대에는 그녀와 함께 남편이 있었다. 베아티는 말없이 클레아의 작은 어깨를 살며시 안고 뒤돌려 세워 방으로 데려가 침대에 뉘고 돌아왔다.
테렉은 바로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돈나가 혼자 서서 무언가 열심히 지껄였다. 베아티는 동생의 움직이는 입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무슨 말을 하는지 한마디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문득 전율을 느끼고, 베아티는 자신도 모를 소리를 지르면서 돈나의 얼굴에 손톱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돈나는 얼른 몸을 비키고 층계를 뛰어내려갔다. 노여움에 몰린 베아티는 돈나의 뒤를 쫓았다. 그러나 산후 며칠 되지 낳는 몸으로는 한 발짝을 옮기는 것도 고통이었다.
테렉은 주방에서 차를 따르고 있었다. 베아티는 증오의 눈으로 남편을 바라보았고, 남편은 만면에 부끄러운 빛을 띠고 아내를 보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베아티. 그저 한때의 충동이었어. 그것 뿐이야.?
남편의 등뒤에 숨듯이 서 있는 돈나의 창백한 얼굴을 보자, 그 애 때문에 병을 얻어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났다. 16년 동안 어머니를 대신 그 애를 기른 것은 베아티 자신이기도 했다. 그애 때문에 자기 자신의 즐거움마저 희생했고, 이제 자기는 40세가 가까워져 있었다. 검은 눈을 크게 뜨고 남편의 뒤에 숨으려고 하는 그 애는 베아티의 청춘을 다 빼앗은 것으로도 모자라 진심으로 사랑하자도 않는 베아티의 남편까지 건드린 것이었다. 그저 한때의 충동이었다구! 
테렉이 쭈뼛쭈뼛 앞으로 나왔다.
베아티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내가 손대지 말아요. 앞으로 내게 손가락 하나도 대지 말아요. 넌 당장 여기서 나가 줘야겠어. 이제 세상이 두 쪽이 난대도 만나지 않겠어.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났다간 죽여 버리겠어, 그때는 둘 다.?
그대로 거기에 있다간 정말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고 베아티는 생각했다. 자신의 몸이 뜨거운 불덩어리가 된 것 같았고 뼈도 살도 머리도, 머리카락까지도 그 열기로 활활 타는 것 같았다. 베아티는 굳어진 다리로, 떨면서 천천히 뒷걸음질을 쳐서, 속까지 빨갛게 물든-자기는 그렇다고 생각되었다-눈으로 두 사람을 가만히 바라본 뒤 주방을 나왔다. 나중에 거울을 보니, 안구에는 정말 빨간 얼룩이 점점이 생겨 있었으며, 의사는 눈의 혈관이 터졌다고 했다. 
이튿날 아침 돈나는 집을 나갔다. 그날 이후 클레아는 그녀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게 되었다. 물론 돈나는 리치 집안에 얼씬 도 하지 않았고, 아버지의 장례식에는 두 사람 다 참석했으나 서로 떨어져 있었다. 돈나는 자기 남편과 두 아들을 데리고 와서는 풍만하고 요염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애도에 싸인 자린데도 많은 남자들을 돌아보게 만들고 있었다.
돈나는 그래도 미안한 얼굴로 베아티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베아티는 마치 돈나가 눈에 들어오지 않은 것처럼 무시했다. 좀 수줍은 17세의 아가씨가 된 클레어도 어머니처럼 이모를 피하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베아티는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클레어의 태도로 보아 그녀도 그때의 광경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베아티는 남편 테렉과의 동침을 계속 거부했다. 그 사건이 있은 뒤로, 같은 지붕 아래 살기는 했으나 서로가 남이었다. 베아티는 남편의 집을 꾸려나갔고 남편을 위해 요리했고 남편을 위해 빨래도 했으나, 말은 꼭 필요한 최소한의 것으로 한정시켰다. 이탈리아계의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은 쾌활하고 개방적인 그녀의 천성은 두꺼운 벽 뒤에 갇히게 되었다.
첫 일년은 눈이 검고 통통하게 살이 찐 조그만 니노를 기르는 데 전념했다. 그녀의 하얀 가슴에 달라붙는 조그만 입은 더욱 관능적이어서, 베아티는 아이의 배가 불렀는데도 젓을 주면서 두 사람만의 조그만 기쁨의 세계를 나누어 가졌다. 통통한 조그만 몸에 비누 거품을 일구고 따뜻한 물을 끼얹으며, 깔깔거리고 웃는 니노의 얼굴에 눈길을 빼앗겼고, 무릎 위에 앉히고 커다 란 타월로 감싸고 물기를 닦아주면서 장난을 치며 시간 가는 것을 몰랐다. 탤컴 파우더를 뿌리고 파자마를 입히고 데운 우유를 먹이는 동안, 베아티는 다정하게 노래를 불러 주는 것이었다.
어느 날 아침, 식사 전에 목욕을 시키려고 아이 방에 들어가 보니, 자고 있어야 할 니노의 몸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베아티는 심장이 멈추는가 싶었다. 아이의 몸을 일으켜 안고 이름을 부르며 볼에 손을 대 보았다. 여린 살에서 냉기가 베아티의 손에 바늘처럼 꽂혔다. 믿을 수가 없었다. 서둘러 전화를 하여 의사를 불렀다. 다시 한번 아이를 일으켜 안고 등을 쓸었다. 눈물이 왈칵 넘쳤다. 키스의 소나기로 아기를 되살리려 했다. 저고리를 벗기고 허파에 조금이라도 공기가 들어가기 쉽게 했다.
그 뒤의 기억은 없었다. 테렉이 뭐라고 말하고 클레어가 울었다. 의사가 와서 뭐라고 말했다. 
하지만 베아티는 바빴다. 니노를 목욕시키고 옷을 갈아 입혀야지, 잠이 깼으니 배가 고플 거야, 하고 중얼거렸다. 사람들이 마침내 베아티의 팔에서 어린아이를 빼앗으려 하자 그녀는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의사는 그녀에게 진통제를 주사했다. 그 동안에도, 자기를 붙잡고 있는 남편의 팔 속에서 그녀는 버둥거렸다. 열 두 시간을 잠에 빠지고 난 뒤에 베아티는 죽은 사람처럼 말이 없어졌다.
이제는 웃는 일도 없겠지. 행복도 맛볼 수가 없겠지. 앞이 깜깜했다. 그러나 세월이 그녀의 마음의 상처를 조금씩 낫게 해주어서, 몇 년이 지나자 눈물 없이도 니노를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여름날 저녁에 공원을 산책하며 사과나무 가지에서 지저귀는 새 소리를 들어도 가슴 아파 하지 않고 지날 수 있게 되었다. 눈도 아름다운 것을 향해서 뜨게 되고, 마음도 그것을 기뻐하고 감동할 수 있게 되었다.
아이의 죽음도 남편에 대한 그녀의 증오를 누그러뜨릴 수는 없었다. 테렉도 자기 못지 않게 비탄에 젖어 있는 것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남편도 생기를 잃고 말이 적어지고 충혈된 눈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베아티는 두 사람 사이의 벽을 조금도 허물려 하지 않았다. 테렉은 외출하여 자주 술을 마시게 되고, 이윽고 배출구를 밖에서 찾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렸다. 그는 이웃에 친구도 많았고, 싹싹한 성격이기 때문에 부인들한테도 인기가 있었다. 옷차림이 산뜻하고 원래 쾌활하며 붙임성이 있는 성질이므로, 남자들도 기꺼이 테니스다 골프다 수영이다 하고 그와 어울렸다. 테렉이 골프 클럽의 바에서 친구들과 즐기고 있는 저녁이면 베아티는 텔레비전을 보거나 책을 읽으며 지냈고, 남편이 귀가할 무렵에는 그녀는 먼저 자리에 들어가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남들 앞에서는 두 사람은 결코 불화를 드러내는 법이 없었으므로 클레어조차도 부모 사이의 틈이 그렇게 깊은 줄은 몰랐다. 클레아가 성장함에 따라서, 부모가 좀처럼 같이 있지를 않는다는 것, 두 사람의 말씨가 기묘하게도 예의 바르고 공손하다는 것을 조금씩 눈치채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테렉 포레스트의 아내라기보다 집주인이나 하우스키퍼와 같았다.
클레어가 10대로 들어서자 그녀는 어머니와 자수 사소한 말다툼을 했다. 순하고 착한 아이 시절을 졸업하기 시작한 클레어는 서서히 자기 세계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어머니가 ?네 알았습니다.?라는 대답을 기대할 때마다 ?왜요??라고 되묻게 되었고, 그것이 거듭될 때마다 모녀의 사이도 이상하게 뒤틀려 갔다.
베아티는 새삼 자신의 피와 살을 나누어 가진 다른 개체를 의식하고, 그리고 자기가 지금까지 얼마나 클레아를 무시해 왔는가를 인식하고 쇼크를 받았다. 그녀의 내부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한 채 그저 한집에 데리고 옷을 입히고 먹여 왔을 뿐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클레아는 집을 나와 런던으로 와버렸다. 그리하여 지리적인 거리가 더욱 두 사람 사이를 멀어지게 만들었다.
베아티는 말도 하지 않는 남자와 한집에서 살고 쇼핑, 세탁, 잡초 뽑기 등의 가사를 묵묵히 계속하면서 자기 혼자의 세계에 갇혀 살아갔다. 자신이 모든 창문을 닫아 버리고 깜깜한 집안에 사는 여자처럼 생각되었다. 고독한 것도 스스로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테렉은 매우 행복해 보였다. 여자도 밖에 만들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꼭 한번 쇼핑 도중에, 테렉이 차를 타고 지나는 것을 본 일이 있었다. 입가에 행복한 듯한 매력적인 미소를 띤 핸섬한 중년 남자…… 하며, 모르는 사람을 보듯 자기 남편을 보았다. 그러나 그러한 자기 자신의 반응이 너무나 쇼킹했기 때문에 조수석에 앉아 있던 여자를 잘 보지 못했을 정도였다.
차가 앞질러 가버리자 베아티는 자신도 모르게 바로 앞의 슈퍼마켓으로 힘없이 들어가 콩 통조림, 쌀, 계란 등을 닥치는 대로 손수레에 집어 싣고 있었다. 베아티는 이미 몇 년 동안이나 남편을 하나의 남자로 본 일이 없었다. 그녀로서는 남편은 인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테렉이라는 증오의 표적이고, 그녀의 공허한 생활의 원인이었다. 그날 베아티는 자신의 마음에 하나의 변화, 뭔지는 모르나 사물을 보는 새로운 눈이 열린 것 같은 묘한 느낌에 사로잡혀 가지고 귀가했었다.

그리고 지금 베아티는 클레아의 건강을 걱정하며 아무 탈이 없기를 기원하고 있다. 그것은 또 다른 쇼크였다. 베아티를 세상으로부터 격리시켜 놓고 있던 벽에 또 하나의 균열이 생긴 것이다.
베아티는 이층 침실로 올라갔다. 그리고 나뭇가지가 애인의 속삭임처럼 소리를 내며 서로 스치는 여름밤의 산들바람에 귀를 기울였다. 파멜라의 보고에 아무래도 무언가 일부러 뺀 것이 있는 것 같은 예감이 베아티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클레어의 용태에 대한 걱정이 점점 더해 갔다. 그것은 또 클레어를 자기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으로 쫓아 버린 원인---그리고 후회, 죄악감으로 이어졌다. 클레아는 내 딸이다. 남이 아니다. 그런데 나는 그 아이를 남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 아닌가. 그렇다. 만나러 가야지, 내일이라도. 나는 너무나 오래 자신을 구름과 안개 속에 가두어 놓고 있었다.



5장

차를 나르는 왜건이 병실 문간에서 덜커덩 소리를 냈고 전등이 켜져 클레아는 눈이 떠졌다. 순간, 이곳이 어딘가... 하고 어리둥절해서, 천장을 바라보면서 배개 위의 머리 위치를 고쳤다. 전날 밤 그녀는, 먹은 약 속에 수면제가 들어 있었는지 깊은 자을 잤고, 생각해 보니 꿈도 꾸지 않은 것 같았다.
야근 간호원이 "잘 주무셨어요?" 하고 말을 걸며 체온계를 혀 밑으로 밀어넣고는, 맥을 짚기 위해서 팔을 잡았다.
"기분이 어때요? 오늘 아침은 비가 와요. 벌써 여름이 다 가버린 것 같아요. 아직 좀더 계속될 줄 알았는데."
"음"
입 속에 체온계가 물려 있어서 대답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자아, 차를 드세요."
간호원은 사이드테이블에 차잔을 놓았다. 그러고는 체온계를 뽑더니, "이제 커튼을 걷을까요?" 하고 가볍게 물었다.
클레어는 간호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젯밤 한밤도 자지 않았다고는 생각되지 해맑은 싱싱한 얼굴이었다. 마치 하이킹을 하고 갓 돌아온 것처럼 상기된 볼엔 윤기가 흐르고 눈도 빛나고 있었다. 간호원은 체온계를 홀더에 되돌려놓자 격려하듯이 미소를 띠어 보였다.
클레어는 갑자기, 자신 만만한 이 간호원을 물어뜯어 주고 싶어졌다. 잘난 체하고 있어! 커튼을 닫고 있는 것은 그렇게 하고 싶기 때문이 아닌가. 사람들의 호기심의 눈에 드러나, 대답하기도 싫은 질문의 소나기를 뒤집어써야 할 이유가 어디 있어.
화가 치밀어 클레아는 대답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대답할 말을 찾으면 떨고 있는 클레아의 입술을 보면서 간호원은 커튼에 손을 댔다.
"아니요, 놔둬요..... " 하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이미 클레어는 자기가 같은 방의 환자 전원의 눈에 드러나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클레어는 병실을 주욱 둘러보았다. 여자들은 침대 위에서 하품을 하기도 하고 차를 마시기도 하고 눈을 감고 있기도 했다. 이불을 젖히고 가운을 걸치며 세면장으로 가는 여자가 있기도 했다. 누군가가 "간호원, 간호원, 변기를 좀 갖다 줄래요?" 하고 갈라지 목소리로 부탁했다. 하지만 누구도 아랑곳하지 않았고, 그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야근 간호원은 다음 침대로 가버렸다. 클레아는 차잔을 손에 들고 차를 마셨다.
병실 안도 어쩐지 잿빛으로 흐려 있고, 밖에서는 홈통에 괸 빗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니 하버 의사가 들어왔다. 그는 간호원을 이끌고 다른 환자를 보러 온 것인데, 지나가며 클레어에게 윙크를 보내더니 돌아오다가 클레어 앞에서 멈추었다.
"아침 식사는 어땠습니까?"
"덕분에 살아난 것 같아요."
"사실을 말하자면, 이곳은 아침 식사가 그래도 제일 나아요."
"사람을 놀라게 하지 마세요."
클레어의 대답에 그는 웃었다.
"어젯밤 나는 파멜라를 집에까지 바래다주었어요."
"파멜라?" 클레아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나를 알고 있다고 말하지 않던가요?"
표정에는 쓴웃음이 섞여 있었다.
"우리는 아는 사이요. 어제 그녀가 당신의 면회 시간을 기다리고 있을 때 딱 마주쳤지요."
"아, 그래요?"
어느 정도로 아는 사이일까 하고 속으로 짐작해 보면서도, 이 조용하고 야윈 청년에게 파멜라가 어째서 흥미를 갖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지적이 용모였다. 그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클레어가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눈치챘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파멜라를 바래다주고 함께 당신네 방을 점검했어요. 당연한 일이지만, 파멜라는 매우 겁을 먹고 있었으니까요."
클레어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숙였다. 그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그런데, 내가 거기에 있을 때 당신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었어요. 파멜라가, 집에 강도가 들었었다고 당신은 상처를 입었다고 말했어요."
클레어는 창백해진 얼굴을 들었다.
"거기까지밖에는 말하지 않았어요." 조는 덧붙였다. "자세한 얘기는 하지 않았지만, 당신의 어머니는 오늘 문병을 올 것 같아요."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클레어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평상시의 목소리를 내기가 힘이 들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넘쳐 나왔다. 이유도 없이 그저 가슴에서 눈물이 솟아 오르는 것이었다.
조는 놀란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뭐라고 묻지도 않았고 그저 고개만 끄덕이며, 풀먹인 깨끗한 흰 가운 호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서 있었다.
"먼길을 찾아오는 겁니다." 조용하게 타이르듯이 그는 말했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아요."
히스테릭해질 것 같은 목소리를 기를 쓰고 누르며 클레어는 말했다. 어머니와 얼굴을 마부 대하다니. 틀림없이, 왜 이런 꼴이 되었느냐고 야단하겠지. 레이프 당하게끔 만들었다고 하겠지..... 어머니는 일단 섹스에 관해서라면 너무나 청교도적이었다. 어떤 얼굴을 할지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입을 꼭 앙다물고 눈썹을 찌푸리고 쌀쌀하게 노려보겠지. 지금까지 클레아는 어머니에게 인생 문제 같은 것을 상의한 일도 없었다. 그런 질문 따위는 할 수 없는 분위기였으니까.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면 기분이 좀 가벼워질 겁니다."
너무나 침울해진 클레아를 바라보면서 조는 말했다.
클레어는 고개를 저었다. 아, 좀더 커튼을 닫아 두었어야 했는데. 그랬으면 지금 울 수 있을 텐데. 이렇게 많은 사람이 보고 있으니 울 수도 없어. 이렇게 프라이버시가 없는 곳은 싫어!
"언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지요? 언제까지 여기에 있어야 해요?"
"내가 결정하는게 아닙니다. 과장님이 회진하러 올때 물어 보십시오. 환자를 퇴원시키고 안 시키고의 일제의 권리는 그에게 있으니까요."
조는 빙긋 웃어 보였다. "여기가 싫습니까? 사귀고 보면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좋은 사람뿐이오. 아는 사이가 되면 식사도 좋아질 테고!"
사람을 놀리고 있어. 바보로 취급해. 일부러 웃음을 지어 주지 않았다. 클레어는 어머니에 대한서 생각했다. 그리고 아버지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그러고는 문득 떠오른 하나의 이미지를 얼른 지워 버렸다. 한순간,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두 개의 몸. 거기에는 문간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자기 자신도 있었다. 그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일까, 아니면 환상일까? 어두운 과거의 기억이 떠오른 것이었다. 무척 오랫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얼마나 놀랐는지 클레어는 분명히 생각이 났다.
어머니가 뛰어왔지만, 화만 냈을 뿐 클레어를 위로해 주지도 않았다. 클레어가 무슨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마구 침대로 몰아넣고는 투덜투덜 노여움과 저주의 말을 퍼부었을 뿐이었다. 다만, 어쩐지 그 일이 부모의 격심한 알력의 원인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은 들었었다.
"당신 어머니한테는 내가 말씀드릴까요?"
조는 클레아가 싫어하는 그 조용한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동정 따위는 필요 없다. 불쌍한 여자 취급을 받는 것도 질색이다. 야단맞는 것도 싫지만 연민은 더욱 싫다. 클레아가 말이 없자 그는 다시 말했다.
"누군가가 이야기해 드려야지요.... 이렇게 된 이상 어머니에게도 설명할 필요가 있으니까요."
"좋을대로 하세요. 뭐라고 말해도 좋아요, 난 어머니를 만나지 않을테니."
클레어가 내뱉듯이 말하자 조에게 등을 돌리고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았다
조가 떠나는 발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가만히 눈을 뜨고 보니 옆 침대의 여자가 물끄러미 클레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커다란 푸는 눈이었다. 클레어가 흠칫하는 것을 보고 그녀의 한쪽 눈이 윙크를 했다.
"당신의 입으로 말해요. 의사들은 거짓말장이니까."
그 여자가 말했다. 20대 후반인 듯했다. 좁은 얼굴에 적동색 머리카락의 숱이 많아 귀여웠다. 이상하게 큰눈은, 얇은 막 속에 물이라고 차 있은가 싶게 부드러운 빛을 띠고 있었다.
클레어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대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과거 8년 동안 받은 여러번의 수술 이야기를 시작했다. 핏기는 없었지만 깨끗한 피부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이야기가 정말이라면 아직도 여기에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조차 이상했다. 아마 살겠다는 의지가 강한 여자인 듯했다.
"내 몸의 대부분은 내 것이 아니에요. 요즘 이따금 거울을 보는데, 이것이 과연 난가 싶어요."
"당신의 눈은 참 고와요."
클레어는 그밖에 할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너무나 상상을 넘어서는 이야기를 들었으므로. 그러나 여자는 마치 슈퍼마켓에서 물건이라도 사는 것 같은 가벼운 기분 로 재미있게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아직 의사들은 내 눈까지는 손을 대지 않은 거예요."
하고 말하고는 그녀는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다. 의치가 국민 건강 보험의 영예를 과시하고 있었다.

파멜라는 전화의 벨 소리에 눈을 떴다. 하품을 하며, "여보세요." 하고 대답했다.
"설마 아직 침대속에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조의 목소리였다. 파멜라는 눈이 번쩍 떠졌다.
"네, 아직 일어나지 못했어요."
어젯밤 늦게까지 그에 대해서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누가 되었든 한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다니..... 파멜라는 여고생처럼 볼이 붉어졌다. 자신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언제나 냉랭한 웃음을 띠고 모든 것을 초월한 체하며 누구에 대해서나 거리를 두고 10대를 보냈으므로, 도대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자기가 숨을 죽이고 있는 것을 알자 자신에게 화가났다.
"잘잤어요?"
물어 보는 조의 목소리에서 미소가 느껴졌다. 따뜻하고 부드럽게 감기는 그의 목소리에 파멜라는 느닷없이 고속 엘리베이터에 탄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위장이 짜르르했고, 수화기를 잡은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주어졌다.
"네 그러저럭 잘 잤어요." 조용하게 들리도록 애쓰면서 대답했다.
"뭐 나쁜 꿈을 꾸진 않았습니까?"
"꿈을 꾼 기억은 없어요." 어젯밤 꿈을 생각하니 목소리가 굳어지려 했다.
조는 열한시까지 있으면서 집안을 많이 치워 주었다. 구석 구석까지 솜씨있게 처리해 주는데 파멜라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무엇이나 척척 능숙하게 해냈다. 벽의 낙서도 식칼로 깨끗이 긁어냈고, 조그만 흔적까지 말끔히 지우면서,
"이녀석은 다른 말은 모르는 모양이군." 하고 꼭 한마디 말하면서 파멜라에게 웃어 보였다.
다 치우고 나자 둘이서 코코아를 마셨다. 코코아를 끓이 것도 물론 조였다. 파멜라는 코코아를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코코아를 안 마신 지도 여러해 됐군요. 이건 틀림없이 클레아가 톰을 위해서 사온 걸 거예요." 파멜라는 코에 주름을 잡고, 스푼으로 탁한 액체를 휘저었다.
"마셔요. 잠이 들 거요. 그런데, 혼자 자도 괜찮겠어요? 내가 소파에서 자는 것이 낫지 않아요?"
파멜라는 저도 모르게 눈을 크레 뜨며 그를 보고 눈썹을 치켜 올렸다.
"침대가 또 하나 있는데 왜 소파에서 자요?"
"클레어가 자기 침대에서 다른 사람이 자는 것을 싫어할 것 같아서요." 조용히 대답했다.
"누가 클레어 침대라고 했어요?"
조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파멜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파멜라의 볼이 붉어졌다. 파멜라는 일어섰다.
"농담이에요. 좋아요. 이젠 무섭지 않아요. 집안도 깨끗해졌고."
맥이 빠질 만큼 그는 냉랭하게 돌아갔다.
"무섭거든 전화해 줘요. 난 긴급 전화에는 익숙해져 있으니까. 내게 폐가 된다고 생각지 말아요." 라고 말하고 그는 자기의 전화 번호를 적어 주었다.
그에게 도움을 청할 바에야 차라리 죽어 버리고 말겠어. 그는 두 번이나 파멜라가 갖다 바치는 상을 걷어차 버린 것이다.--- 나 매저키스튼가? 이렇게 같은 실수를 거듭 저지르다니. 하지만 그가 여기서 묵는게 좋지 않겠느냐고 물었을 때는 꼭....
조는 당연한 말을 했을 뿐이야. 지나친 생각을 한 사람이 나쁘지.
파멜라는 이런저런 일로 불편한 마음으로 자리에 들었기 때문에, 조금 전까지 느끼고 있었던 공포심은 완전히 잊고 있었다.
전화에서 그의 목소리가 계속되었다.
"조금 전에 클레아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녀는 어머니를 만나고 싶지 않다는 군요. 뭐 그럴 만한 일이라도 있었나요?"
파멜라는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런 일은 없는 것 같지만, 클레아와 가족에 대해서 별로 이야기를 나누어 본 일이 없어요. 더구나 클레아는 자기 프라이버시를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거든요. 나도 그녀의 어머니는 몇 번 만난 일이 있었는데, 두 사람이 싸운 것 같지는 않았는데요."
"그러면 아마, 레이프에 관해서 자기 어머니가 너무 놀랄까 싶어 걱정인 게지요?"
"네 그런거 같아요."
"미세스 프레스트가 찾아오면 내가 만나겠소. 대충 이야기해 주지요. 하지만 클레어가 자기 어머니를 만나기 싫다고 하면 우리로서도 어쩔 수가 없어요. 클레어는 아이가 아니니까요. 그러나 클레어의 마음이 바뀔지도 모르니 그녀의 어머니는 한 동안 런던에 있으면 싶어요. 거기에서 묵을 수가 없을까요?"
"물론 묵을 수 있어요. 클레어의 방이 비어 있으니까요.... 그녀의 어머니가 싫다고만 하지 않으면 말이지만요."
조는 좀 망설였다.
"방을 바꾸어 드리면 어때요?"
파멜라는 등줄기에 한기를 느꼈다. 그리고 한숨 섞인 목소리로 "그러죠"라고 대답하자, 전화기 저쪽에서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의 웃는 의미를 파멜라는 알 수 있었다. 좋아요, 별로 당신한테 강요당해서 승낙한 건 아니니까요....
"걱정하지 말아요. 방은 이미 깨끗이 치워져 있고, 당신은 거기에서 일어났던 일을 생각하지만 않으면 되는것 아니겠어요? 오늘 이따가 클레어에게 말해 두겠어요. 당신이 그녀의 방을 쓰고 있다고, 그러면 그녀도 퇴원해서 집에 돌아가기가 쉬울 것 같아요."
파멜라는 수화기를 노려보았다.
"옳은 말씀이세요, 프로이트 박사님. 뭐 내가 또 할 일이 있어요?"'
"그것은 차차 말하지요." 하고 전화는 끊어졌다.
파멜라는 천천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방금 그 말은 무슨 뜻일까?

베아티 프레스트는 병원의 진한 커피에는 손도 대지 않고 작은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눈앞에는 흰옷을 입은 마른 청년이 서 있었다.
"어머, 세상에 그런 일이....." 세번째 부르짖는 소리였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그의 말에 눈을 반쯤 감고 베아티는 소리쳤다. "세상에 그런 일이...."
"차를 드시지요."
차를 마시려고 하니까 차잔과 받침 접시가 부딪쳐 딸각딸각 소리를 냈다. 조는 눈길을 돌려 베아티의 뒤에 있는 게시판을 바라보았다. 근무와 휴가의 예정표가 핀으로 꽂혀 있었다. 방문을 여닫을 때마다 펄럭거렸다.
"어째서 나를 만나려고 하지 않을까요?"
베아티의 물음에 조는 시선을 돌렸다.
"부인한테서 이유를 들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요."
베아티는 멍청한 얼굴이 되었다. 조는 그 모습을 조심스럽게 지켜보았다. 깃과 자락에 하얀 파이핑을 한 청초한 감색 드레스, 하얀 구두---- 센스 있게 선택한 고급품이었다. 핸드백도 빛깔이 잘 어울리고 있었다. 잿빛 머리에 검정 눈, 그리고 그눈 밑에 중년의 주름이 잡혀 있었다. 왠지 조는, 그녀에게서 클레어를 느끼게 하는 것은 찾을 수가 없었다. 모녀는 별로 닮지 않았다. 그러나 표정에는 닮은 데가 있는 것 같았다. 하긴 그는 아직 이것저것 두 사람을 비교할 수 있을 만큼 클레어나 그녀의 어머니와 교제가 깊은 것도 아니었다.
"두 분 사이는 괜찮습니까?"
조가 그렇게 말한 순간 베아티는 외면했다.
"그 아이가 런던으로 온 뒤로 우리는 별로 만나지 않았어요. 아시다시피 그 아이는 바쁜 몸이었으니까요. 집에도 별로 오지 않았어요."
"달리 자녀가 있으십니까?" 베아티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눈에 쓸쓸한  그림자가 스쳤다. 왜 입술을 떨고 있을까, 하고 생각하며 조는 그녀에게 눈길을 못 박았다. 달리 자식을 못 가진 것이 서운한 것일까?
"클레어와 그녀의 아버지 사이는 어떻습니까?"
베아티는 또 멍한 얼굴이 되었다.
"뭐 그렇지요." ---- 뭐 그렇지요라니, 어떻다는 말이지? 대답하고 나서 베아티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딸과 아버지와의 사이는 다정합니까?" 조는 재우쳐 물었다.
베아티는 어깨를 추슬렀다.
"그렇다고는 할 수 없는 것 같아요." 베아티는 마시던 차잔을 책상에 올려놓았다.
"클레어는 우리 내외 어느 편하고도 가깝다고 할 수 없어요." 고백하듯이 단언한 순간, 베아티의 눈에 왈칵 눈물이 넘쳤다.
"내 탓이었어요." 핸드백을 뒤져 손수건을 찾았다.
조는 책상을 돌아 그녀의 옆으로 갔다. 베아티는 어깨를 떨며, 새하얀 손수건을 얼굴에 대고 어린아이처럼 흐느꼈다. 조는 몸을 구부려 베아티의 어깨 위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당신 탓이 아닙니다. 미세스 프레스트. 그렇게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베아티는 눈물을 닦고 얼굴을 들었다. 조는 또 책상 저쪽으로 돌아갔다. 헛기침을 하고 나서 베아티는, "실례했어요." 하고 사과했다.
"그렇게 사과하실 것은 없습니다.. 부인의 마음은 나도 잘 알겠어요."
"잘 알아요?" 베아티는 되물었다. 사뭇 자기의 행동을 지켜보고 당황하게 만든 상대방에 대한 빈정거림이 조금 들어 있었다.
"미세스 포레스트, 오늘 밤은 클레어의 아파트에 가셔서 묵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클레어의 룸메이트와 상의했더니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고 하던데요. 그녀가 클레어의 방에서 자고, 자기 방을 당신한테 제공하겠답니다. 그래도 괜찮겠지요?"
베아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일어섰다.
"여러 가지로 친절히 대해 주셔서 고마와요. 하버 선생님. 시간을 너무나 많이 빼앗아서 정말....."
"아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택시를 불러 드릴까요? 포터에게 연락하면 바로 옵니다."
"아니, 좋아요.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겠어요. 조금 바깥 공기를 마시고 싶어서요."
베아티는 병원을 나왔다. 어디로 간다는 목적도 없이 걷기 시작했으나 머릿속에는 방금 조 하버가 한말들이 파도처럼 되풀이해서 밀려오는 것이었다. 괴로왔다. 클레어가 당했을 공포나 비참한 꼴을 생각하면 그녀가 안쓰럽고 가슴이 아팠다. 어디를 가든 죄의식이 뒤따랐다. 베아티는 요 몇 년 동안의 자신의 행동이 미워졌다. 지금 자기가 괴로워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당연한 댓간지도 모른다. 그런데 클레어는 그런 끔찍한 일을 어떻게 감수하고 있을까? 심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너무나 큰 아픔이 아니겠는가!
고통과 노여움과 죄의식이 베아티의 마음속에 뒤섞여 소용돌이치는 동안, 그녀는 어느덧 템즈강의 둑에 나와 있었다. 잿빛 돌 위에 서서 베아티는 뿌옇게 흐린 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주위는 어둑어둑했고, 양쪽 기슭 사이를 물이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강 건너에는 콘크리트 블럭을 쌓아 올린 하얀 현대식 빌딩들이 늘어서 있었다. 비치는 햇빛도 없어 그 창들은 무표정했다. 물위에 떠서 흘러가는 나무쪽 위에 몇 마리의 갈매기가 앉을 자리를 다투고 있었다. 베아티는 표정이 없는 창들을 쳐다보고 생각했다. ---- 내 살아온 모습과 똑같군. 나 자신 여러해 동안 정말 살아 있는 송장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했어. 마음도 쓰지 않았어.
베아티는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어느 사이에 완전히 퇴하해 버린 자신의 양심을 생각하고. 지끔까지 나는 자신의 감정조차 움직이려 하지 않고 뭉개 없애 버렸다. 인생이 자신이 기대한 대로, 자신이 생각한 대로 완벽하게 돌아가 주지 않는다고 토라져서, 그저 되어가는 대로 방치해 두고 있었던 것이다.
클레어가 날 만나기 싫어하는 것도 당연해! 둘이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두 사람 사이가 친밀했다면 지금이야말로 클레어는 나를 가장 필요로 할 것이다. 만나기 싫다는 말이 나올 리가 없다.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사랑이 있는지 없는지는 아는 법이다. 클레아는 어려서부터 자신은 어머니의 사랑을 못 받고 있다는것, 어머니에게 필요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미소, 어머니의 손길, 달래 주는 어머니의 목소리, 이런 것들을 통해 어린아이는 어머니의 존재감을 깊이 느끼는 것이다.
베아티는 지금까지의 생활을 완전히 새로운 눈으로 돌아보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가 얼마나 용서받지 못할 존재였는가에 생각이 이르고 있었다.---- 죽은 니노에 연연한 나머지 살아 있는 딸에게 등을 돌렸었다. 어쩌면 그렇게도 눈이 멀 수가 있었을까?

"실례해요." 하고는, 루카스 여형사는 코를 풀었다. 코를 푼 티슈에 페이퍼를 꼼꼼하게 접고 또 말했다.
"감기가 들었어요. 왠지 난 여름만 되면 감기가 들지 뭐예요. 남편은 글쎄, 내가 무엇이나 다른 사람의 반대로는 거예요. 맞는 말인거 같아요." 그러고는, 침대 뒤 쓰레기통에 휴지를 넣었다. 쓰레기통은 이미 아침부터 클레어가 버린 축축한 티슈 페이퍼로 가득 차 있었던 것다.
아침부터 클레어는 소리없이 흐느끼고 있었다. 자신도 이유를 알 수 없이 잇달아 넘치는 눈물에 스스로도 화를 내고 있었다. 운다고 하는 말은 맞지 않는 말인지도 모른다. 문득 깨닫고 보면 눈물이 뺨 위로 흘러내리고 있곤 한 것이었다.
루카스 여형사는 말했다.
"내일은 퇴원할 수 있겠군요."
"어마!" 처음 듣는 말이라 클레어는 놀랐다.
"그러니 함께 경찰서에 가 주셔야겠어요. 범인의 체크를 부탁하고 싶어요."
"아....." 클레어는 몸이 굳어져 침대에 일어나 앉았다.
"당신이 설명한 것과 비슷한 인상의 사람들을 데려다 놓았어요."
내가 어떻게 설명했지? 클레어는 망설였다. 루카스는 어깨를 추슬렸다. 마치 클레어의 마음속을 안다는 듯이.
"차를 보내지요. 오래 걸리지는 않아요."
"그러.... 꼭 .... 필요한 일이예요? 글쎄 난 얼굴을 보지 못해서....."
"창문 너머에 몇 사람이 늘어서 있을 테니까 봐 달라는 거예요. 그것뿐이예요. 당신한테 폐를 끼치지는 않을 거예요. 저쪽에서는 당신을 볼 수도 없어요."
"하지만...."
"그리고 두세 가지만 더 묻고 싶은 일이 있어요. 정말로 범인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나요? 목소리를 한번도 듣지 못했어요?" 클레아는 고개를 저었다. 루카스는 한숨을 쉬었다.
"그럼.... 그 사람은 장갑을 끼고 있었어요?"
클레어는 얼굴이 증오로 일그러졌다.
"그때.... 아니요, 끼고 있지 않았어요."
"당신이 다투었다고 했지요....?"
클레아는 끄덕였다.
"당신이 상대방을 때렸어요, 아니면 할퀴었어요?"
"그렇게 하려고는 했어요."
"상대방의 어디를요? 목?"
클레어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끄덕였다. 입은 꼭 다문 채였다. 루카스가 일어서자 의자가 삐걱 거렸다.
"고마와요. 미스 프레스트. 당신에게 괴로운 일을 부탁한다는 것은 우리도 잘 알아요. 하지만 이것이 우리 일이니까요."
그녀가 돌아가자 간호원이 들어와 커튼을 열었다. 클레어는 또 병실의 일부가 되었다.----- 안전하 은신처는 없어졌다. 버터와 잼을 바른 검은 빵이며 나무열매가 든 페어리케이크를 먹으면서 차를 마시는 여자들의 눈에 드러나게 되었다.
"이제 차를 마실 기분이 되었어요?" 하고 간호원이 물었다.
아니요, 라고 말하려고 했을 때 옆 침대의 여자가 큰 한숨을 쉬었다. 클레어는 엉겁결에, "네, 부탁해요." 라고 말했다. 자기도 왠지 몰랐다.
차가 날라져 오자, 별로 목이 마른 것도 아닌데 속이 타기라도 하듯 쭉 들이켜 버렸다. 이윽고 간호원이 차잔을 가지러 돌아와, "어머나, 굉장하군요. 내게 조금 남겨줄 줄 알았는데." 하고 말하고는, 그것이 농담이라는 것을 강조하듯이 웃음소리를 냈다.

면회 시간이 됨과 동시에 문이 열리고 파멜라가 들어왔다. 잡지며 페이퍼백을 여러권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얼굴을 보자마자, "너의 어머니가 지금 우리집에 묵고 계셔." 하고 가볍게 말했다.
클레어는 두꺼운 월간잡지를 한 권 집어 책장을 들추면서 눈도 들지 않고, "그래?"하고 중얼거렸다.
"내 방을 쓰시라고 했어. 조금 넓으니까. 난 네 방에서 자고 있어.... 상관없지?"
"응, 그래." 클레어는 표정도 바꾸지 않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클레어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파멜라는 알 수가 없었다. 얼굴엔 여기저기 시퍼런 멍이 들어 있고 손톱에 긁힌 빨간 자국디 여러 줄 목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아직 얼굴의 부기도 가시지 않고 있었다. 눈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내 느낌으로는 내일쯤 퇴원시켜 줄 것 같아." 하고 클레어가 말했다.
"그거 잘됐구나." 파멜라는 방긋 웃었다.
클레어는 눈을 들고 파멜라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거 새 옷이니?"
"그래."
차분한 실크 드레스의 크림빛 은연이 호박색의 눈에 빛을 더해 주고 있었다.
"데이트 있니?" 클레어는 물었다.
"아니, 없어. 너의 어머니에게 저녁 식사를 지어 드릴거야."
"정말 여러 가지로 폐가 많구나." 클레어는 불안한 기분이 되었다. 물론 파멜라는 자신이 어머니의 문병을 거절한 것을 알고 있을 것이며, 틀림없이 까닭을 알고 싶어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비록 그 이유를 자신이 분명히 알고 있다 해도 말할 생각은 없었다.
"아니야. 누가 같이 있어 주기만 해도 난 반가와." 파멜라는 사람이 드나드는 병실 문을 보면서 말했다.
그러나 파멜라를 보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클레어는 말했다.
"난 너의 하번 선생이 참 좋아. 참 좋은 분이더군."
왠지 파멜라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하번 선생은 <나의> 선생이 아니야. 그저 우연히 알게 되었을 뿐이야."
클레어는 깜짝 놀랐다.
"미안해." 파멜라는 그에 대해서 신경이 과민해져 있군. 클레어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 선생님은 병자를 위로하는 법을 잘 알고 있어." 하고 덧붙였는데, 그 말은 더욱 역효과를 냈다.
"그 사람이 그런 것을 어떻게 알아?" 하고 파멜라는 쌀쌀하게 말했다.
그때 입구로 들어온 남자가 클레어의 침대 옆에 와 섰다. 클레어는 지친 표정을 바꾸지도 않고 희미하게 미소를 띠었다.
"헬로우, 레리."
"많이 좋아졌구." 갈색의 봉지를 사이드테이블 위에 놓았다.
"버찌야. 간호원이라는 이름의 히틀러에게 시를 뱉어 줄 수 있을 거야."
"고마와요." 클레어는 배게 위에서 머리를 들었다.
"파멜라. 레리 히리어를 아니?"
"우린 만난 일이 있는 것 같군요." 조금 빈정거리면 파멜라는 레리를 보았다.
미소를 되돌리는 레리의 검은 머리에 한 올의 흰 머리카락이 반짝이는 것을 보고 클레어는, '왜 저런 것이 생겼을까?' 하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한 올도 본 일이 없었다.
하긴 은빛 머리가 되면 멋이 있을 거야. 관록도 있어 보이고.
"헬로우." 레리는 파멜라에게 인사했다.
파멜라는 두꺼운 마스카라 그늘에서 바라보며 그를 수컷으로 단정했다.
파멜라에게 향해지는 래리의 웃음에 좀 빈정거리는 빛이 있는 것을 클레어는 눈치챘다. 둘이 주고 받는 눈길에는 자기네는 서로 동류라는 것을 인정하는 빛이 있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의 그럴 자신감이랄까 확신 같은 것을 클레어는 부럽다고 생각했다.
무엇이 그렇게 생각하게 만드는가, 하고 두 사람의 평상시의 생활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그렇다, 두 사람 다 사냥꾼인 것이다. 위험도 돌보지 않고 기세 좋게 정글에--자기보다 약한 짐승이 우글거리는 정글에 뛰어들어 자기 만족에 취하는 종족인 것이다.
"분명 모델이셨지요?" 하고 래리가 묻자, 파멜라가 끄덕였다.
클레어는 자기 침대에 몸을 슬쩍 기대고 선, 허리가 꽉 죄고 다리가 길고 어깨와 가슴이 떡벌어진 키 큰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지껄이면 전기의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전류는 손가락 끝에서 순식간에눈으로 흐른다. 그는 한자리에 오래 앉아 있을 수 있는 남자가 아니었다. 늘 움직이고 있었다. 어렸을 때는 무척 개구장이였겠지. 가만히 좀 있어라, 하고 학교나 집에서 그가 야단맞는 모습을 눈앞에 떠올렸다. 클레어는 말이 없는 얌전하 아이였다. 늘 커튼 그늘에서 가만히 세상을 지켜보고 있는 소녀였다. 그리고 위험에 대해서 언제나 몸을 사리고 있었다. 래리 히리어나 파멜라는 사물에 대해서 언제나 습격하는 태세로 부딪친다, 필요하면 상대방의 목줄이라도 물어 뜯을 것처럼...
"사장님의 회사는 번창하고 있다지요?" 하고 말하는 파멜에게, 래리는 느긋하게 자신감 있는 미소를 띠어 보였다.
"그렇게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시작한지 얼마 안 되지만, 두고 보십시오, 숨이 막힐 정도일 테니."
"사장님 하시는 일이니 어련하겠어요. 무척 억지도 많겠지요?"
파멜라는 놀려 줄 생각으로 말했으나 래리는 끄떡도 하지 않고 빙그레 웃었다.
"이런 속담을 아십니까? 물건을 만들고 나서 자랑하는 거요?" 이번에는 래리의 얼굴에 놀리는 표정이 떠올랐다.
클레어는 따분해져서 기지개를 켰다. 래리는 파멜라에게 밑밥을 던지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어, 대게의 남자는 한눈에 파멜라에게 끌리게 되거든.
더구나 이 두 사람 같으면 아주 어울리는 한 쌍이 될 거야. 두 사람이 어떻게 놀든 클레어는 상관이 없다 싶었으나,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눈길을 주고받는 데는 아무래도 유쾌할 수가 없었다.
래리는 몸을 구부려 클레어의 입에 버찌를 한 개 넣어 주었다. 꼭지를 잡고, "먹어봐요, 맛있어." 하고 말했다. 클레어는 마지못해 달콤한 과육을 깨물었다. 래리는 꼭지를 옆에 있는 주발에 버리고 자기도 먹기 시작했다.
"<깨끗한 빨래>의 광고인데, 겨우 근사한 카피와 그림이 완선됐어. 이제 돌대가리를 몇개 두드리고 다닐 일이 남았지만."
"그것이 당신의 즐거움이 아니예요?" 클레어는 중얼거렸다.
래리는 웃었다.
"무슨 소리야, 지금까지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실현하지 못했을거야"
"당신이 전처도 당신이 생각하는 시간에 달리게 만들 수 있지요?" 파멜라가 놀렸다.
두 사람 다 가버렸으면 좋겠어. 특히 래리는 더. 너무나 생기에 넘쳐 있고 활기찬 모습이기 때문에 빛나는 그 얼굴들을 보고 있기만 해도 피곤해져. 생기있고 자신에 차 있고, 방금 한 바탕 헤엄을 치고 나온 것 같아. 그들과의 차이에 주눅이 들어 버려.
얼마 뒤 두 사람이 돌아가고 나자 클레어는 겨우 살아난 느낌이 들었다.

이틀날 파멜라가 클레어의 슈트케이스를 들고 나타났다. 클레어는 커튼 뒤에서 옷을 갈아 입었다. 이상하게 다리에 힘이 없었다.
"이 호화로운 꽃을 놓아두고 가기가 아까워." 파멜라가 그 속의 백합을 살며시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꽃가루로 노래진 손가락을 닦으려고 파멜라는 머리맡의 박스에서 티슈 페이퍼를 한 장 뽑아냈다. "간호원한테 큰 종이를 얻어 오겠어. 싸들고 돌아가자구."
두 사람은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클레어는 래리의 꽃다발을 아기처럼 팔에 안고 있었다. 마치 산부인과 병원에서 퇴원하는 어머니 같군. 하고 클레아는 생각했다. 차에 아기가 없고 대신 꽃을 품에 안고 있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병원의 침체된 공기 속에서는 향기를 잃고 있던 꽃들이, 겨우 숨을 돌린 것처럼 클레어의 코를 향기로 간질이기 시작했다. 문득 그녀는 눈을 감고, 백합 꽃밭 속에서 꽃내음에 파묻혀 있는 사람처럼 깊이 깊이 숨을 들이 마셨다.
"자아, 도착했어요."
파멜라의 채촉을 받고 얼굴을 숙이고 택시에서 내렸다. 누가 볼까 싶어 무서웠다. 현장 검증에 끌려나온 범인 같은 기분이었다. 머리에 뒤집어쓸 모포라도 있으면 싶었다.
현관문 앞에 서자, 바로 안에서 문일 열리고 어머니가 마중 나왔다. 클레어는 어머니와 얼굴을 마주하기가 싫었다. 어머니는 무엇 때문에 여기에 있는 걸까? 그녀는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기 싫었다. 더구나 이번 사건에 대해서는 입에 올리기도 싫었다.
그 일이 생각날 때마다 클레어는 새로이 레이프당하는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이제 그것은 터부인 것이다.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조차 생각하기 싫은 것이다. 구역질나는 말, 입에 올리면 자신이 더러워지는 말.
"지금 주전자를 얹어 놓았다. 바로 차가 끓을거야." 베아티는, 지나치게 밝다 싶은 목소리로 미소를 띠고 말했다. "어머나, 꽃도 곱기도 해라. 이렇게 많은 꽃은 본 일이 없구나. 누가 갖다 주었니? 톰?"
"네, 어머니."
클레어는 목욕을 하고 싶었다. 어머니 앞을 지나 자기 방문 앞에 왔다. 문이 닫혀 있었다. 방안에는 잊고 싶은 그 일을 생각나게 하는 것들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대 파멜라가 돌아오지 않았던들, 그리고 경찰을 부르지 않았던들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자기만 가만히 있었다면....
클레어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맥없이 거실의 긴 의자에 앉았다. 아직도 커다란 꽃다발을 품에 안고 있었다. 벽지는 완전히 벗겨지고 크림빛 회벽칠이 드러나 있었다. 방안의 느낌은 달라졌지만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파멜라는 아마 무척 바빴겠지.
"벽지도 곧 새로 바르게 될 거야." 하고 말하며 파멜라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몸에 딱 붙은 청바지에 실크 블라우스를 입을 파멜라는 아름다웠다. 몇 시간 동안이나 벽지를 뜯어내는 작업을 한 사람같이는 보이지 않았다. 고무장갑이라도 끼고 한 것일까, 진주 같은 손톱도 그대로였다. 클레어는 저도 모르게 파멜라의 손만 바라보고 있었다. 파멜라가 손을 매우 아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아, 차를 마시려." 베아티는 쟁반을 들고 거실로 들어왔다.
파멜라는 차잔을 하나 집어들더니, 편지를 한 통 써야겠다면 슬쩍 자리를 피했다.
파멜라가 가버리자 클레어와 베아티는 말없이 앉아 있었다. 주위에는 두 사람이 입 밖에 내지 않는 말이 날아다니고 있었으며, 공기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거워져 갔다. 늦었어, 너무나 늦었어, 하고 베아티는 차잔을 두손으로 감싸 들고 가슴속으로 되뇌고 있었다. 하지만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지금 여기서는 거꾸로 장벽이 되고 있다. 말이라는 것은 보통 사람과 사람을 이어 주는 역활을 하는 것인데, 지금 여기서는 거꾸로 장벽이 되고 있었다. 여기에서 무슨 말을 한다는 것은 쇠고랑으로 머리를 빗으려고 하는 것보다 어려워. 지금 눈앞의 클레어에게 무슨 말을 하면 좋단 말인가?
'미안하다, 클레어. 난 사실 너의 어머니 노릇을 제대로 못했다. 그동안 어린 너에게 마음을 닫고 살아온 것을 용서해 주겠니? 그동안 난 너를 정말 낯선 사람처럼 대했어. 그래서 너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 하지만 난 지금 그것이 알고 싶어 못 견디겠어. 겨우 이제야... 난 너에게 가까이 가고 싶어. 그럴 찬스를 나에게 주겠니? 지금까지 널 팽겨쳐 두고 있었던 것을 용서해 주겠니? 그리고 앞으로 다신 한번 내게 그런 노력을 해주겠니? '하고? 베아티는 말했다.
"날씨가 좋구나."
"그렇군요.. 나 목욕을 해야겠어요." 하고 클레어는 일어섰다.
클레어가 문으로 걸어가자, 잔을 든 채 베아티는 입을 열었다.
"클레어......"
"오래 걸리지 않아요. 금방 끝나요." 클레어는 중얼거리고 거실을 나왔다. 어머니의 목소리에 매달리는 것 같은 울림이 있는 것을 클레어는 알았지만, 차마 정면으로 어머니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방금 화상을 입은 피부처럼 클레어는 신경은 상처받기 쉽게 되어 있었다. 깃털로 스치기만 해도 비명을 지를 만큼 아팠다. 혼자 있고 싶었다. 지금은 그것이 제일 좋았다.
욕실로 들어가자 델 만큼 뜨거운 샤워를 이를 악물고 뒤집어썼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브러시를 가지고 살갖이 벗겨질 만큼 문질러 댔다. 어제 병원에서도 목욕을 했지만 그래도 클레어는 자기의 몸이 더러운 것만 같았다.
목욕을 하고 있으려니 전화 벨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욕실 밖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클레어?" 동시에 똑똑 노크 소리가 났다.
클레어는 로우브를 입으면서 대답했다. "지금 나가요."
"경찰에서 전화가 왔다. 차를 보낼 테니 곧 와 달라는구나. 누구 이물 감정을 한다는 거야."


 
6장
 
루카스 형사와 나란히 서서 클레어는 창밖의 중정에 늘어서 있는 남자들을 보고 있었다. 제복을 입은 경관이 종이 끼우개를 옆구리에 끼고 그 줄 앞을 왔다갔다하면서 뭔가 지껄이고 있었다. 루카스 형사가 말했다. 
"서두를 것은 하나도 없어요. 천천히 시간을 들여 한 사람 한 사람 잘 보세요. 키라든지 전체의 느낌을 생각하면서, 마음에 짚이는 사람이 있으면 벨을 울려요. 얼굴은 볼 것이 없어요, 어차피 못 보았으니까요. 눈을 잘 보세요...."
"알고 있어요." 이미 여러번 들었기 때문에 클레어는 그녀의 말을 막았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여기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구토증이 날 것 같았다. 앞으로 몇 분이나 참아낼 수 있을까. 지금 바라는 것은 자신의 몸에 일어났던 일들을 모두 기억의 밑바닥에 가두어 버리는 것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하고 싶어. 생각하기만 해도 상처가 들쑤셔지는 것 같은데 사람들은 그것을 잊어버리게 해주지를 않아. 내가 어떤 심정인지 짐작할 수 없단 말인가? 그들의 말처럼, 뭔가를 생각해 내려고 할 때마다 클레어의 마음은 거부 반응을 일으키며 비명을 지르는 것이었다.
"모두 나온 것 같아요." 형사는 말하고 문을 열었다.
이미 미러글라스 뒤에서 그들에게 눈치채이지 않게 전원을 둘러보고 났으나, 이렇다  하게 짚이는 얼굴은 없었다. 그런데도 형사는 좀 안타까운 듯이, 가까이 가서 다시 한번 보자고 했다.
"이것은 중요한 일이에요, 미스 포레스트, 잘 아시겠지만요." 하고 말하는 형사에게  클레아의 어머니는 노여움을 드러냈다.
"이것이 얼마나 쓰라린 일인지 당신은 모르세요? 하다못해 2,3일이라도 좀 기다려 줄 수 없어요?"
"미안하지만 그럴 수가 없어요." 형사는 야무지게 대답했다. 두 사람의 입씨름이  계속되었다.
클레어는 지친 표정으로 말했다.
"좋아요, 하겠어요." 어차피 해야 할 일이다. 그렇다면 지금 끝내 버리자. 어서 이 사건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난생 처음으로 몸서리쳐지는 무서운 일을 당했다. 그리고 아직도 밤낮으로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이 쇼크를 잊지 못하고는 마음 편할 날이 없을 것이다. 어두운 거리에서 느닷없이 뛰어나오지 않을까 하고 늘 몸을 사리게 될 것이다. 누구든 갑자기 움직이기만 해도 그때마다 클레아의 온 신경은 바싹 긴장되는 것이다.
"클레어, 정말 할 수 있니?" 어머니가 옆에서 걱정스럽게 물었다.
클레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비틀거리는 다리를 가누며 걷기 시작하자, 그녀는 각오를 다지고 한 사람 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키도 몸매도 어쩐지 모두가 엇비슷했다. 어떤 사람은 살이 찐데다 여드름투성이고, 어떤 사람은 술 냄새가 났고, 또 어떤 사람은 마늘 냄새를 풍기고 있어서 클레아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엷은 빛깔로 번들거리던 그 눈을 김장감으로 가슴을 죄며 찾고 있었다, 스스로 자신의 몸을 채찍질하듯이 격려하면서.
형사 있는 데로 돌아온 클레어의 이마에는 구슬 같은 땀이 배어 있었다.
"없어요." 하고 말하고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없어요?"
클레어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런 사람은 전혀...." 엄격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거짓말이었다---전원이 범인으로 보였던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앞을 지날 때마다 공포와 혐오감으로 소름이 돋았다.
고난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형사는 클레아를 사무실로 데리고 가더니 또 느리고 지루한 신문을 시작했다. 같은 일을 묻고 또 물으며 파고드는 것이었다.
"이런 질문을 되풀이하는 것은, 그러는 동안에 혹시 당신이 중요한 포인트를 생각해 낼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요...."
클레어는 그저 잊고 싶을 뿐이었다. 어머니는 사무실 밖의 벤치에서 딸을 기다리고 있었다. 왕파리 한 마리가 밖으로 나가고 싶어 창유리에서 왱왱거리며 기어다니고 있었다. 창문에서는 햇빛이 쏟아져 들어와서, 다른계의 사무원이 분주하게 일하는 책상에 줄무늬를 그려내고 있었다.
클레어는 바깥의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소리며 차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런던의 거리는 오늘도 움직이고 있었다. 서류를 수북하게 쌓아올린 책상 너머로 공손하게 물어 오는 여자 형사와 마주 앉아 하루를 지내다니, 정말 진절머리 나는 일이야. 아아, 모든 것을 상자 속에 처넣고 딱 봉해 버릴 수 있다면!
돌아가게 되었을 때 형사가, "틀림없이 붙잡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미스 포레스트. 범인은 꼭 체포되고 맙니다." 하고 단언했다.
클레어는 할 수 없이 미소를 띠었다. 차마 `잡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법정에서 또 이 이야기를 처음부터 되풀이해야 할 것을 생각하니 무서워요. 상대방의 변호사가 징그러운 질문을 할 것이고, 사람들 앞에서 구경거리가 될 거예요.'하고 말할 수는 없었다.
돌아가는 길에 베아티가 말했다.
"일주일이나 10일 가량 집에 돌아가 쉬면 어떻겠니, 클레아? 한동안 일도 못할 형편이 아니니."
"모르겠어요." 클레어는 불쑥 대답했다. 집에도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의 집을 집이라고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바닷바람을 쐬는 것도 좋을 거야. 지금의 네게는 런던에 있는 것보다 좋은 휴식처가 될 거야."
"래리에게 말해 보겠어요."
"내가 말할까?"
"아니, 괜찮아요. 내일 제가 전화하겠어요."
"내가 런던에 있으면 좋겠니? 나는 있고 싶은데, 너의 아버지도 혼자 있을 수 있으니까." 베아티는 말하면서 얄궂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이미 여러해를 두고 테렉은 그녀를 필요로 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무엇 때문에 그와 같이 살고 있을까? 습관 때문에? 그는 나와 헤어질 생각을 해본 일이 없을까?
"내 걱정은 하지 마세요, 어머니." 하고 말하고 새삼 어머니의 얼굴을 보았다. "아버지는 알고 있어요? 아버지한테 말했어요?"
"아직 안 했다. 런던에 가서 너와 2,3일 같이 있겠다고 쪽지를 남기고 왔을 뿐이야."
"아버지한테는 말하지 말아요! 이 사건은 그냥 덮어두세요."
베아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럴 수는 없지 않니, 클레어!"
"아버지가 아는 것이 싫어요!"
"어차피 알게 될 것 아니니. 그때 가서, 왜 말하지 않았느냐고 화를 낼 것이 틀림없어. 사람을 우습게 알고 있다고 말이야."
"그 이야기를 하게 되면 난 참을 수가 없어요. 모두 그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어요. 모두 알고 있으면 아무리 내가 잊고 싶어도 잊을 수가 없잖아요."
베아티는 딸의 말과 목소리에서 깊은 상처가 아픔이 있음을 느끼고 한숨을 쉬었다.
"알았다. 네가 정 그렇다면 말하지 않겠다."
베아티는 클레어의 마음을 잘 알 수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다른 의미에서도, 테렉한테 이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니 안심이 되었다. 그가 알면 어떻게 생각할지 잘 짐작을 할 수가 없었다. 
남편하고는 25년 동안이나 같이 살고 잇으면서도, 완전히라고 할 만큼 속을 알 수가 없었다.
"난 소파에서 자겠다, 클레어. 퍽 아늑해 보이더구나." 클레아가 자기가 묵는 것에 동의해 줄 것을 바라면서 베아티는 말했으나, 클레어는 눈썹을 찌푸리고 얼굴을 돌렸을 뿐이었다.
"그런 데서 잘 수는 없어요. 스프링이 등에 받쳐서 아플 거예요.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일 좋은 것은...." 클레어는 너무나 자기 혼자의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상태로 있는 것이 제일 마음 편했다. 어서 먼저의 생활로 돌아가고 싶었다. 어머니가 옆에 있으면 그럴 수가 없었다. "멀지 않아 집으로... 어머니를 만나러 가겠어요. 아마 바닷가에서 일주일 가량 지내면 많이 좋아질 거예요." 좀더 기운이 회복되면 그때는 아마, 하고 생각하면서 클레어는 말했다. 
 좀더 시간이 지나 마음의 상처가 나아지면 어머니와도 담담한 심경으로 말할 수 있을 테니까--- 지금은 다른일은 생각할 수도 없어, 생각할 일이 너무나 많아서.
베아티는 서둘러 채비를 하고 떠났다. 애써 지은 미소가 사라지기 전에. 나는 기적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금방이라도 클레어의 마음에 들어설 수 있어서, 어머니로서의 사랑을 주고 딸인 클레어의 사랑까지도 받을 수 있다고? 딸의 눈은, 어머니가 너무나 낙관적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인생이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야. 겨우 한두 마디 또는 한두 가지 몸짓으로, 그 오랜 무시와 무관심의 세월을 지워 없앤다는 것은 불가능해.
침묵의 내 집으로 향하는 차 속에서 베아티는 딱딱한 시트에 꼿꼿이 앉아, 어둠이 다가드는 잉글랜드 지방의 풍경에 눈길을 주고 있었다. 검푸르게 우거진 느릅나무 밑에서 풀을 뜯는 소떼, 싱싱한 연초록의 목초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마을과 마을.
현관에 들어서자 테렉이 집에 있어서 베아티는 놀랐다. 신문을 한 손에 들고 눈썹을 찌푸리며 마중을 나왔다.
"아, 돌아왔소?" 자켓을 벗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베아티의 곁을 떠나지 않고 테렉은 물어 왔다. "클레어는 어떻소, 오랫동안 집에 다녀간 일이 없는데?"
"입원하고 있었어요." 베아티는 대답했다.
"입원? 무슨 일이 있었나? 왜 알려 주지 않았소? 병이오?"
"그 아이의 방에 강도가 들어와 덮쳤대요. 의식을 잃었었는데, 이젠 괜찮아요. 퇴원했어요. 병원에는 2,3일 동안 있었어요. 별일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거 다행이군, 다행이야. 런던은 요즘 어때? 정말로 클레어는... 그럼 경찰이 범인을 잡았소? 방이 엉망이 되지는 않았소?"
베아티는 이야기하면서 차를 끓이고, 남편은 아직 신문을 손에 든 채 노여움의 감탄사를 뱉으며 듣고 있었다.
"거리에 나가면 달리는 차들로 위협을 받고 집에 있으면 강도를 만난대서야 어디에 있어도 안심을 못하겠군. 어째서 클레어를 데리고 돌아오지 않았소? 그런 일을 당한 뒨데 혼자 런던에 두어서야 쓰겠소."
"함께 돌아오자고 했지만 그 아이가 싫다고 했어요, 테렉. 클레아도 이제 다 컸어요. 지금 그 아이의 집은 그 아파트예요."
"이곳은 이제 집이라고는 할 수 없을 테지. 그렇지? 우리는 그 아이가 어렸을 때 잘 해주지를 못했으니 그 아이가 오지 않겠다고 해도 탓할 수는 없어...."
베아티는 자기(磁器)차잔을 들고 식탁 앞 의자에 앉았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내가 나빴어요... 나는 그 아이에게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하나도 해주지 못했어요."
"아내로서의 역할도 못했지." 테렉은 아내를 보고 크게 말했다.
베아티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완전히 늙어 버린 기분으로 말없이 찻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말이 맞아. 만약 일년 전에 이런 말을 남편의 입에서 들었다면 펄펄 뛰면서 부정했을 것이다. 나쁜 것은 당신이지 누구란 말이에요, 하고 불처럼 화를 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남편의 말을 도저히 부정할 수가 없었다.
"왜 내가 이 집에서 나가지 않고 있는지 나 자신도 모르겠어. 여러해 동안을 두고... 이 집은 가정이 아니야." 테렉은 두 손을 틀어쥐고 있었다.
베아티는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를 몰랐다. 자기가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지조차 몰랐다. 
그저 짓눌린 기분으로 의자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테렉은 등을 돌리고 쾅 소리가 나게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클레어는 텔레비전의 영화를 보고 있었다. 도둑맞은 세트 대신 래리가 한 대 갖다 준 것이다. 고맙다고 하니까 그는 어깨를 추슬렀다.
"천만에. 전에 텔레비전 광고 하나를 내주었더니 그 회사 사람이 준 거야. 거저란 말이야. 마침 당신이 쓰게 됐으니 잘됐지 뭐."
정말인지 거짓말인지 알 수 없었다. 래리는 누구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할 때는 언제나 그랬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그런 것은 자기 이미지에 맞지 않는 걸로 아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클레어도 방긋 웃고 말했다.
"그래요? 아뭏튼 고마워요, 마음을 써줘서요."
그러자 래리는 화가 난 체하며 화제를 바꾸었다.
전화벨이 요란스럽게 울려 클레어는 펄쩍 듯이 놀랐다. 파멜라는 일하러 나갔고 클레어 혼자였다. 환한 대낮인데도 갑작스런 소리에 클레어의 신경은 움츠러드는 것이었다. 일어서서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손바닥에 끈적끈적하니 땀이 배어나오고 숨이 가빴다.
"여보세요."
"클레어? 나 톰이야. 좀 어떤가 싶어서요. 병원에 전화했더니 퇴원했다고 그러더군. 어째서 알려주지 않았지."
"이제 막 돌아온걸요."
"그래 좀 어때?"
어쩐지 딱딱한 목소리였다. 클레어는 언젠가도 이런 어색함을 느낀 적이 있었던 것 같았다.
"많이 좋아졌어요, 당신은요?"
"귀밑까지 일에 파묻혀 있어. 당신이 퇴원한 줄 알았으면 오늘 저녁은 일찍 나갔을 텐데. 외국인 바이어에게 저녁 식사를 대접하라고 해서 오우케이했지. 이제 와서 거절할 수는 없고, 나가기 전에 잠깐 거기에 들를까?"
"오늘 저녁에요?"
"여섯 시경에."
"글세, 톰, 다음으로 미루어 달라고 하면 언짢겠어요? 나 아직 몸이 다 낫지 않아서 일찍 잘까 해요."
"그거 서운하게 됐군." 그는 쾌활하게 대답하고, 자기 일에 관한 자랑을 몇 가지 늘어놓은 뒤 전화를 끊었다.
끊어짐과 동시에 클레아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쉬었다. 톰은 판에 박은 듯한 인간이다. 정해진 대로 해나가지 않으면 속이 편해질 수가 없다. 이번 사건은 그를 크게 당황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누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로서 우선 앞서는 것은 자기를 지키는 일이었다.
톰은 클레아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귀여워하는 것이다. 클레아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는 좋아하나 그것은 감정과는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이번 사건이 나기 조금 전부터 클레어는 그것을 눈치채기 시작하고 있었다. 누구든 좋아, 사랑이 필요해. 클레아는 그런 절실한 바람으로, 톰이 자기를 도어매트처럼 다루는 것을 허용하고 있었다. 톰은 떠받들어 주지 않으면 기분이 나빠지는 어리광장이다. 세상은 모두 자기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름답지 못한 것이 자기 영역을 침입해 오면 안 되는 것이다.
클레어는 주방으로 가서 차를 따라 쟁반에 얹어 가지고 거실로 돌아왔다. 그때 현관 벨이 울렸다. 
클레어는 또 소스라치게 놀랐다. 갑자기 소리가 나거나 무엇이 움직일 때마다 몸에 끈끈하게 땀이 배어나오는 것이었다. 다른 때 같으면 즐거운 놀라움이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요즘의 클레어에게는 충격적인 쇼크가 된다.
클레어는 천천히 문으로 다가가, 체인을 걸어놓은 채 문을 열었다. 조금 열린 문을 통해 조심조심 밖을 내다보았다.
"네, 누구지요?"
"래리야."
클레어는 체인을 벗기고 문을 열었다.
"어마, 어서 들어오세요. 어쩐 일로 이렇게 오셨지요?" 자기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래리가 눈치채지 못할 턱이 없다고 생각하자 안도감과 함께 낭패감으로 얼굴이 붉어졌다.
"잠깐 들르는 데도 이유가 있어야 해?" 그는 언제나의 날렵한 동작으로 금방 클레어의 앞을 지나 안으로 들어섰다. 문을 닫고 클레어는 그를 뒤따라 거실로 돌아왔다. 그는 두 손을 호주머니에 찌른 채 텔레비전을 바라보고 있었다.
"심심풀이야?"
"안 좋아요? 난 전부터 영화를 좋아해요. 요즘 사람들은 저런 것을 만들지를 않아요."
래리는 몸을 구부려 스위치에 손을 대서 험프리 보가트의 영화를 꺼버렸다. 보가트가 짜증난 듯이 일그러진 입술을 하고 화면에서 사라져 갔다.
"혼자 있었소?"
클레어는 눈길이 마주치지 않도록 하면서 끄덕였다.
"파멜라는 일하러 나갔어요. 지금 막 차를 마시려고... 아, 한잔 어때요?"
"차?" 못 듣던 말을 들은 것처럼 래리는 되물었다.
"차 말이에요, 조그만 봉지에 들어 있는 그거."
"조그만 봉지에서 나와 당신의 내장을 갈색으로 물들이는 그거라. 한잔 마시고 싶군."
클레어는 주방으로 돌아가 다른 찻잔과 받침 접시를 쟁반에 놓고 마침 눈에 띈 비스켓과 과자도 곁들였다. 아마 어머니가 사온 것이겠지. 이런 위험한 유혹물을 파멜라가 놓아둘 턱이 없어. 이 집에서는 비스켓 따위는 좀처럼 볼 수가 없다.
거실로 돌아오니, 래리는 책장 앞에서 긴 손가락으로 책등을 두드리고 있었다. 거의 클레어의 것이었다. 파멜라는 초 베스트셀러의 페이퍼백말고는 책이라는 것에는 흥미가 없었다. 그것도, 사람들의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고 첫장만 넘겨 볼 뿐이었다.
"시를 좋아하는군." 래리는 돌아보고 말했다. 클레어는 차를 따르면서 끄덕였다. 
"앞으로 얼마나 쉬면 일하러 나올 수 있을 것 같아?" 클레어가 찻잔을 건네자 래리가 물었다.
"이것은 정식 방문이 아니지요? 저어, 나 편지를 보내려고 했어요, 래리. 나 그만두었으면 해요."
래리는 클레어 앞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앉아 주었으면 좋겠다. 덮칠 듯이 앞을 가로막고 서면 클레아의 신경은 또 움츠려드는 것이었다. 
래리는 클레어를 신경질적으로 만든다. 피로를 모르는 그의 에너지가 클레아를 지치게 하고 겁을 준다. 하는 말, 하는 일, 움직임, 말투에 깊은 확신과 힘이 넘치고 있으며, 그것이 또 다음 일의 원동력이 된다. 래리 히리어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대개의 사람은 몇번 만나보면 그의 능력이나 가능성을 짐작하게 된다. 그러나 래리의 경우는 무한이었다. 클레어가 아는 한 그 자신 자기의 한계를 모른다. 어디까지 올라갈지, 그의 앞길은 시야 밖에 있는 것이다.
"왜?" 래리의 물음은 짧았다. 클레아는 가만히 자기의 찻잔을 들여다본 채 어깨를 추슬렀다.
"왜라니요, 난 지금 일할 상태가 아니잖아요? 당분간 난 자신의 껍데기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단 말예요.. 누구 다른사람을 찾아보세요."
"내가?.... 알았어."
말없이 차를 마시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나 자리에 앉으려고는 하지 않았다.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그는 서 있어야 좋은 생각이 잘 떠오른다는 것을 클레어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니까. 
사무실에서도, 찾는 답이 생각날 때까지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이 끝에서 저 끝으로 왔다갔다하기가 일쑤였다.
"이것도 저것도 모두가, 이곳에 누가 밀고 들어와 당신을 레이프한 것이 원인인가?" 
래리는 내뱉듯 말하자 그다음 말을 삼키듯이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요! 그것과는 아무 관계도 없어요." 클레어는 창백해진 얼굴로 래리를 노려보았다. 
래리라면 금지되어 있는 벨트 아래의 펀치도 서슴없이 먹이는 사람이라는 것을 각오해 두었어야 했어!
그는 돌려서 말할 줄을 모른다. 자신의 솔직성이 상대방에게 어떤 느낌을 줄지 일일이 생각하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덩치 큰 고객을 상대할 때는 그도 충분히 매력을 뿌리곤 하는데, 그런 때의 래리에게는 클레어도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회사내의 직원들은 래리의 매력있는 표정 같은 것은 구경해 본 일이 없었다. 그렇게 항상 손톱을 날카롭게 갈고 있는 맹수 래리에게 고객--특히 여자들은 꼼짝없이 무릎을 꿇게 된다.
"아니라구?" 의아스럽다는 듯이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아니에요. 요즘 나는 일하는 게 너무나 힘이 들었어요. 그동안 당신을 따라가자면 죽을 지경이었어요. 당신에게는 알맞은 일이겠지만, 난 무쇠가 아니에요. 이젠 지쳤어요...."
"지치지 않은 녀석이 있는 줄 알아? 이 나도?"
"그렇게는 보이지 않던데요. 일이 늘면 늘수록 당신은 더 생기가 나던걸요."
"난 당신도 그런 줄 알았지."
클레어는 망설였다. 그는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저 익숙해졌을 뿐이에요. 처음에는 분명히 재미있었어요."
"그럼 지금은 재미가 없단 말이야?" 클레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래리는 다시 주저앉았다. "당신은 지금까지 그만두겠다고 한 일이 없었어. 그러니 이번 사건의 후유증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겠군. 당신은 지금 쇼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그것뿐이야. 당신은 일을 좋아해.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줄 아는데?" 래리는 빙긋 웃었다.
클레어는 한숨을 쉬었다.
"래리, 당신은 피곤해지기 위해서 일하는 것 같아요. 내가 다시 사무실로 돌아간다 해도 당신을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요. 질주하는 차에 끌려가는 것 같아요. 당신은 절대로 멈출 줄을 모르는 사람이에요. 하루 여덟 시간의 노동에는 나도 익숙해져 있지만, 요즘은 늘 열두 시간씩 일해 왔어요. 난 당신의 페이스를 따라갈 수가 없다구요."
래리는 한동안 클레어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은 지금 휴가가 필요해, 안 그래? 2,3일 어디 좀 갔다오면 어때?"
"난 그럴 기분이 아니에요." 또 자기 의견을 상대방에게 밀어붙이는군. 이런 때에도 펄펄 뛰는 래리의 에너지가 지금까지보다 더 짜증스러웠다. 날 가만 좀 내버려 둬요, 내 생활 방식에까지 간섭하지 말구요!
"롬니 마시에서 우리 어머니가 조그만 집에 살고 계셔. 참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이지, 외떨어진 곳이니까. 어머니는 손님을 좋아해. 2,3일 거기에 갔다오지 않겠어?"
"당신의 어머니에게 신세지기는 싫어요! 어머니는 나에 대해서 전혀 모르시잖아요!"
"당신은 잊고 있군. 어머니는 우리 회사 주주란 말이야. 당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당신에 대해서 소상해. 어머니는 회사일이라면 하나에서 열까지 흥미가 있으니까."
"하지만 난 싫어요."
클레어의 무뚝뚝한 얼굴을 보면서도 래리는 그녀의 마음을 바꾸려고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았으나, 결국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다.
 
저녁 식사의 샐러드를 만들려고 클레아가 오이를 썰고 있는데 전화 벨이 울렸다. 식칼을 놓고 에이프런에 손을 닦고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대답이 없었다. 한동안 기다리고 나서 또, "여보세요."하고 말해 보았다.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그것은 숨소리였다. 희미한 숨소리.
"여보세요, 누구시지요?"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상대방은 수화기에 바싹 입을 대고 있는 것 같았다. 클레어는 머리털이 곤두서고 오한이 났다. 떨리기 시작한 손으로 클레어는 수화기를 가만히 내려놓았다. 
무릎이 후들후들 떨렸다. 전화 벨은 또 울리기 시작했다. 온몸의 신경이 금방 팽팽해졌다. 클레어는 다시 살며시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겁먹은 아이처럼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또 그 거친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클레어는 내던지듯이 수화기를 내려놓자 거실에서 뛰쳐나갔다.
이제 오이 같은 것을 썰고 있을 수가 없을 만큼 손이 떨렸다. 수도꼭지를 틀어 놓은 채 레티스를 집어들어 잎을 벗기기 시작했다. 도대체 누굴까? 우연일까, 아니면 예의... 그 남자?
몸서리쳐지는 기억을 얼른 머리에서 떨어버렸다. 이젠 생각하고 싶지 않아. 머리가 쿵쿵 울렸다. 
그때의 상처는 거의 나은 것 같았는데, 그 하나하나의 아픔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무서웠다. 아아, 어서 파멜라가 돌아왔으면 좋겠는데.
또 전화 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클레아는 굳어진 몸으로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벨 소리를 세면서, 수화기는 들지 않고 그저 그치기를 기다렸다. 겨우 벨 소리가 그치자, 클레어는 비로소 어깨의 힘을 빼고 두손에 젖은 레티스를 든 채 의자에 주저앉아 울었다.
거리에는 천천히 어스름이 깔리고, 불 켜진 창문에 벌레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방이 부딪히면 유리에 보기 싫은 자국이 남는다. 절정에 이른 런던의 저녁 교통 러시의 소리가 한창이었다. 소라 껍데기를 귀에 대고 듣는 물결 소리와도 같았다.
실컷 울고 나니 눈물은 이제 말라 있었다. 일어서다가, 손안에서 짜부라진 레티스를 보았다. 쓰레기통에 잎을 버리고 손을 떨었다. 그리고 얼굴과 손을 씻으러 욕실로 들어갔다.
누가 걸어 온 전화일까? 무슨 목적으로? 날 협박할 생각인가? 그렇다면 충분히 목적을 달성했다. 난 이처럼 무서워하고 있는걸. 혈액 순환이 나빠진 차가운 손을 흐르는 물에 적셨다. 손가락은 퍼렇게 굳어 있었다. 오늘 하루는 좋은 날씨였는데.
그 손을 타월로 닦을 무렵, 클레아의 공포는 노여움으로 바뀌어 있었다. 누가 걸어 온 건지 알기만 하면 그때는... 거기서 생각이 중단되었다. 또 전화 벨이 울리기 시작한 것이다.
"싫어...이젠 싫어!" 공포와 노여움에 떨면서 클레어는 소리쳤다. 거실로 뛰어들
어가 전화기를 박살을 내고 싶었다. 누군지 모르지만 두들겨 패 주고 싶었다. 방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싶었다. 눈에 눈물이 글썽한 채 떨리는 손을 겨우 수화기에 얹자 순간 벨 소리가 그쳤다.
어깨를 굳힌 채 클레아는 욕실로 돌아왔다. 걸어 놓은 타월을 벗겨 얼굴을 문질렀다. 자꾸 자기가 더럽게만 생각되었다. 이마에는 끈끈한 땀이 배어나와 있었다. 물소리 때문에 바깥 소리가 클레어에게 들리지 않았다. 수도꼭지를 잠근 순간, 누군가가 돌아다니느 소리가 나서 클레어의 온몸은 경직되었다. 귀를 세우고 막대기처럼 우뚝 서 있었다. 잘못 들은 걸까? 아니야, 발소리야. 누군가가 있어. 방에 들어와 있어.
 
카메라맨이 렌즈를 조작하는 동안, 인조 모피를 두른 파멜라는 무너져 가는 둑 위에 오도카니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풍속 20미터에 가까운 강풍이 불어와 파멜라의 블론드는 잡아흔들리고, 추위로 이가 딱딱 마주치고 있었다. 파란 얼굴로 몸을 떨고 있는 파멜라는 그저 어서 토일렛에 가고 싶을 뿐이었다.
"부탁이니 빨리 좀 해줘요." 노출기를 가지고 다가온 크리스에게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조수는 어질러진 가방 사이를 어정거리며 필름을 찾고 있었다.
크리스는 구름이 낮게 드리워진 하늘을 보고 혀를 찼다.
"무슨 날씨가 이래! 광량(光量)이 고양이 눈알처럼 바뀌는군. 또 올라 버렸어. 여보게, 앤드류, 폴라로이드를 내주게. 잠깐 보구 나서 하자구."
"난 토일렛에 가고 싶단 말이에요."
"곧 끝나요." 건성으로 대답하고 크리스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나 파멜라를 바라보았다. "머리가 엉망이군. 고쳐 주지 않겠나, 모리?"
메이크업 담당이 브러시를 한 손에 들고 뛰어오는 것을 보고 파멜라는 저도 모르게 말했다.
"바람이 이렇게 부니 어쩔 수 없어요. 어디 다른 데는 안 돼요?"
"상품은 어디 있나?" 크리스는 무시하며 일을 계속했다. "모리, 그것을 파멜라에게 건네 주라구. 아니야, 왼손이야. 코우트를 벗고, 파멜라. 모리, 벗겨줘."
파멜라는 할수없이 코우트를 모리에게 건네 주었다. 잠자리 날개 같은 얇은 드레스를 통해 차가운 바닷바람이 온몸에 꽂혔다. 도대체 난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해야 한단 말인가? 렌즈를 바라보면서 파멜라는 생각했다. 이게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할 짓인가? 바보스럽고 공허해. 아침 열 시부터 내리 파멜라는 이것저것 상품을 바꾸어 들고 이런저런 포우즈를 잡고 있었다. 피곤이 머리 심까지 스며들었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오늘 클레어를 혼자 두고 나왔는데 괜찮을까? 파멜라는 오늘 집을 나오기를 망설였다. 그러나 클레어가 자꾸 괜찮다고 하는 바람에 겨나듯이 집을 나선 것이다. 역시 클레어의 말을 듣지 말고 집에 버티고 있을걸 그랬어. 앤드류가 찍은 폴라로이드의 화상을 크리스가 점검하는 동안 파멜라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크리스가 얼굴을 들었다.
"오우케이, 이것으로 하자구. 생각대로 되었어." 그리고 팬더를 들여다본 채 핀트를 파멜라에게 맞추어 자기의 이미지를 만들어 나갔다. "그 손은 올린 채, 그렇지. 상품을 잘 보이게. 턱을 올리고.  더, 그렇지. 좋아요, 좋아."
몇 분 뒤 조수가 필름을 갈아 끼우는 것을 보고 파멜라는 말했다.
"잠깐 전화를 하고 오겠어요.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크리스는 빙그레 웃었다.
"사실은 토일렛에 가고 싶은 거지?"
"양쪽 다예요." 말하면서 거친 바위 벽을 미끄러져 내리다가 스타킹이 바위 모서리에 걸렸다. "어머나, 이를 어째, 바꿔 신을 것이 없는데!" 스타킹에 들어가는 비용은 상당했다. 모델로서는 최고품을 써야 하는데, 그런 것일수록 수명이 짧았다. 평상시에 될수록 청바지로 지내는 것도 절약을 위해서였다.
길가의 전화 박스에 들어가 다이얼을 돌렸다. 계속 신호가 가는데도 아무도 나오지를 않았다. 전화기 위의 조그만 거울에 비치는 자기의 의아스러워하는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기다렸다.
왜 클레어가 나오지를 않을까? 외출했나? 혹시 어쩌면 래리 히리어가 기분 전환을 위해서 점심을 먹으러 나갔는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고 파멜라는 수화기를 놓았다. 그러나, 가까이에 있는 매우 더러운 공중 변소를 사용하고 나오다가 또 걱정이 되었다. 생각이 또 예의 사건에 이어지는 것이었다. 파멜라도 그 사건 이후로 신경이 날카로와져 있었다---하여튼 끝나면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자.
 
이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를 듣고 클레어는 공포에 얼어붙는 듯한 마음으로 정신없이 욕실의 문을 닫고 안에서 잠가 버렸다. 그리고 문에 귀를 대고,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고 기다렸다. 그러나 귀에 울리는 자신의 맥박 소리가 너무나 커서 밖의 소리가 잘 들리지를 않았다.
"클레어?"
저도 모르게 문에서 몸을 떼었다. 밖에서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클레어는 펄쩍 뛰어오를 듯이 놀랐다.
"클레어? 도대체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지요? 몸은 좀 어때?"
"톰?" 안도감을 느끼자 온몸의 힘이 쑥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왜 그래? 몇 번을 전화해도 받아야 말이지. 또 무슨 일이 일어났나 싶어 차를 달려 온 거야. 사람 좀 놀라게 하지 말아."
"어떻게 들어왔어요?" 자물시에 손을 대면서 겨우 클레어는 말했다.
"어떻게 들어왔느냐고? 내 열쇠로 열고 들어왔지." 짜증 난 목소리였다. 
"나오지 않을 생각이야? 도대체 왜 그런 데 숨어 있지? 아무것도 입지 않았어? 나는 전에도 옷을 입지 않은 당신을 보았을 텐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군."
"왜 들어오기 전에 현관 벨을 누르지 않았지요? 들어온 사람이 당신인지 누군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난 모르는 사람이 몰래 들어온 줄 알고..."
살며시 문을 열자 톰은 클레어를 아래위로 찬찬히 훑어보았다.
"아니, 혹시 잠들어 있는 거라면 깨우면 안 된다 싶어서 그랬지."
이제 무서워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 순간 벌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어느 사이에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무서운 쇼크가 아니었던가. 클레어는 톰을 노려보았다.
그 악몽의 날의 기억 한끝에는 그가 있는 것이다. 클레아는 아직 정상적인 심리 상태가 아닌 것이다. 
톰은 미간을 찌푸리고 클레아를 바라보았다.
"당신 정말로 괜찮아? 얼굴을 보니 괜찮은 것 같지 않은데."
"사람을 놀라게 하니까 그렇죠."
"미안, 사실 그럴 생각은 없었어." 불만스런 목소리였다. 톰은 자기의 행동을 누가 나무라거나 비판하는 것을 제일 싫어했다. "걱정이 되었던 거야. 그래서 어떤가 하고 보러 왔지. 왜 전화를 받지 않았어?"
한 손을 머리에 올려 헝클어진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클레아는 비틀비틀 욕실에서 나왔다. 머리가 젖어 있었다. 세수할 때 물이 튄 모양이었다.
"기분 나쁜 전화가 걸려 왔기 때문이에요."
"뭐라구? 누구한테서?" 톰은 깜짝 놀랐다. "무슨 소리를 했지? 외설 전화야?"
"거친 숨을 내쉴 뿐이었어요."
"빌어먹을! 경찰에 연락했어?"
"아직요. 하지만 말해 봤자 무슨 소용이에요, 어디서나 걸 수 있을 텐데. 경찰에 해 봤자 별수없을 거예요."
"그녀석이 틀림없어." 톰은 이를 갈았다.
그만한 것쯤 나라고 생각 못하는 줄 아나, 바보스러워. 그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커피나 들겠어요?"
"내가 경찰에 전화해야겠어."
"그만둬요!" 저도 모르게 비명 같은 소리를 지르고는 클레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기분을 가라앉혀 다시 말했다. "괜찮아요. 이대로 날 가만히 좀 놓아둬요, 톰."
"하지만...."
"이제 경찰의 얼굴은 보기도 싫단 말이에요. 그것을 몰라요?"
"어차피 경찰에 보고는 해야 된단 말이오. 잘 생각해 보라구." 클레아를 뒤따라 주방으로 들어오더니, 그녀가 커피 포트를 그릇장에서 꺼내는 것을 보면서 톰이 말했다.
"내버려 둬요." 콘센트에 커피 포트의 플러그를 꽂고 두 개의 머그에 인스턴트 커피를 떠 넣었다.
"경찰은 화를 낼 거요, 당신의 연락이 늦어지면. 만일 그것이 그 남자고...."
"그 이야기는 그만둬요!"
톰은 클레어의 뒤로 다가와 두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껴안았다.
"보라구. 당신은 금방 화를 내는군. 그야 몸서리쳐지는 사건이었던 것은 나도 알아요. 하지만 바로 경찰에 연락해야 한다는 것을 왜 모르지? 그 전화의 배경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단 말이오. 당신을 혼자 여기에 두면 안 되겠군."
톰은 디에서 그녀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어깨에 그의 턱이 얹어졌다. 옷과 살갗 사이에서 벌레가 꿈틀거리는 것 같은 느낌에 클레아는 오싹했다. 비명을 지르지 않는 것이 고역이었다.
"난 괜찮아요. 물이 끓었어요." 클레어는 톰의 팔에서 벗어나려고 했으나 톰은 그녀를 꼭 붙잡고 목덜미에 키스했다. 촉촉한 입술의 감촉과 셰이빙 로우션의 희미한 솔 향기가 났다. 
“놓아줘요, 톰. 커피를 따라야지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이렇게 하고 싶었어... 당신도 그렇지? 클레아, 어서 잊어버리라구. 우리에게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이 아니겠어? 당신이 그런 일을 당했었다고는 난 도저히...."
참다못해 클레어는 팔꿈치로 톰의 옆구리를 콱 지르고는 몸을 뺐다.
"내게 손대지 말아요. 저리 비키란 말이에요!"
느닷없이 쥐어박히는 바람에 톰은 개수대에 부딪힐 뻔했다.
"이게 무슨 짓이야?"
"미안해요. 하지만 내게 손대지 말아요. 누가 손대는 것이 견딜 수가 없어요."
톰은 한번이라도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 본 일이 있을까? 마치 어린아이를 상대하듯이 하나에서 열까지 설명을 해주어야 한단 말인가? 톰은 상대방이 어떤 느낌인지 생각해 본 일이라도 있을까?
"당신을 위로해 주려고 했는데," 야단맞고 토라진 소년처럼 아랫입술을 내밀었다. "날 이렇게 떠다밀기야? 내가 비난받을 게 뭐 있어? 난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데, 왜 꼭 원수를 대하는 것처럼 그러지?"
"당신이 날 사랑한다구요? 사랑한다면 내가 지금 어떤 심정인지 이해할 수 있을 거 아니에요.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생각해 봤을 거예요. 그렇다면, 아직 이 몸을 누가 만지면 속이 뒤집힐 것처럼 기분이 나쁠 거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거 아니에요...."
"난 남이 아니야. 난 당신이 사랑하는...적어도 당신이 그렇게 말했던 남자야. 하긴 요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는지도 모르지만."
"아아, 제발 부탁이에요, 돌아가 주세요. 무엇이 어떻게 되었든 바로 나가 줘요."
"그런 말이 어디 있어! 정말 너무하군. 당신이 걱정되어 뛰어왔는데. 내 마음이 어떤지 몰라? 나는 걱정이 돼서 견딜 수가 없단 말이야."
"미안해요, 당신한테 걱정을 끼쳐서. 그리고 실례가 되었으면 용서해 줘요. 하지만 지금은 나 혼자 있고 싶어요. 혼자 있게 해줘요." 더 이상 말할 수가 없었다, 톰이 더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고집스럽게도 태도를 바꾸려 하지 않았다. 그는 모를 거야, 앞으로도.
"알았어, 돌아가겠어. 혹시 내게 볼일이 생기면 내 전화 번호는 알지?"
현관문이 조용히 닫히고 그는 나갔다. 순간 클레아는 히스테릭하게 웃기 시작했다. 
전화 번호말이에요? 알고말고요. 당신이 알려 주는 데 무척 시간이 걸렸지만, 겨우 알고 나니 이미 필요가 없게 되었군요.
클레어는 다시 머그에 더운물을 따르고 커피를 타서 한모금 마셨다. 맛이 썼다. 클레어는 얼굴을 찌푸렸다. 거실에서 또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순간 클레어의 손이 크게 떨렸다. 머그가 떨어져 뜨거운 커피가 무릎 위에 튀었다.



7장

 밤이 깊어갔다. 또 시계에 눈길을 주며 클레아는, 파멜라는 도데체 어떻게 된 것인가, 하고 혼자 속을 끓이고 있었다. 일이 끝났는데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것인까? 곧장 예의의 파티에라도 가버린 것일까? 지금까지  클레아는 이런 일에 신경을 써 본 일이 없었다. 파멜라는 나가고 싶을 때 나가고 돌아오고 싶을 때 돌아오는 것이다. 규칙 같은 것도 없었다. 클레아는 그것을 마땅치 않게 생각해 본 일조차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혼자서 집을 보는 것이 불안해 견딜 수가 없었다.
 경찰에 전화를 하는 것이 나을까?
 전화를 보면서 클레아는 망설였다. 차가운 경찰서의 대합실을 생각하고, 또 거기에서 지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니 전화에 손이 가지를 않았다. 전화를 받지만 않으면 상대방도 단념하지 않을 수 없을  거야.
 전화 벨이 울렸다. 클레아는 막대기처럼 몸이 굳어져 움직일 수가 없었다. 벨은 계속 울렸다. 겨우 그친뒤에도 클레아는 어둠 속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클레아는 온 집안의 불을 다 켰다. 난생 처음으로 어둠에 공포를 느꼈다. 주방의 라디오를 켜 팝송에 귀를 기울이고 커피를 마시면서 공포와 싸우고 있었다. 
 그것은 여기에 침입했던 남잘까? 그렇게 생각하자 클레아의 손은 저도 모르게 입으로 갔다. 아직 부기가 조금 남아 있는 입가의 감촉에 얼굴을 찌푸렸다.
 그 남자라면, 전화를 받은 것이 나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무엇 때문에 전화를 하는 걸까? 그러자 생각이 어떤 일에 미쳐 클레아는 깜짝 놀랐다. 혹시 어쩌면 그 사람은 이 가까이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사람의 집에서 여기가 보이는 것일까? 클레아는 머뭇머뭇 창밖을 내다보았다. 지금도 어디에서 날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클레아는 이번에는 부리나케 온 집안의 불을 끄고 다녔다. 스포트라이크를 받고 무대 위에 서 잇는 자기를 어두운 객석 어딘가에서 증오심을 품은 눈이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 것이다. 
 어두워진 방의 창가에 서서 바깥 건물들을 바라보았다. 몇 동의 아파트와 에드워드 조(調) 스타일의 테라스를 둘러친 주택들이 있고, 처마가 맞닿을 듯이 들어찬 소수주택, 그리고 오피스 빌딩......
 도대체 몇 채나 되는 집들인가.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저마다의 창문안에, 이곳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셈이다. 그런 일은 지금까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여기에만 들어오면 이제 사람의 눈을 피해 안전하고 프라이빗한 시간을 가질 수가 있다고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도 범인은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파트나 사무실의 한 방에서 망원경으로, 아니면 길가에 주차한 차의 그늘에서?
 맥박이 빨라졌다.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손을 대보니 손바박에 쿵쿵 하고 리듬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자기의 신체구조나 기능에 관심을 가져 본 일이 없었다. 혈관에는 피가 흐르고, 허파에는 공기가 느나들고, 뇌의 중추에는 암호 해독을 할 수 있도록 신경이 정보를 전한다. 그 신체가 지금 패닉 상태에 있는 것이다!
 클레아는 또, 자기가 <살아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의식해 본 일도 없었다. 죽는다는 것은 무섭다. 어둡고 쓸쓸하다. 클레아는 지금 얼굴이 없는 누군가를 무서워하고 있다. 그의 증오심에는 동기도 아무것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무서운 것이다. 만일 범인이 아는 사람이고 왜 클레아를 죽이고 싶어하는지 안다면, 아니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라도 안다면 이렇게까지 겁을 먹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 더 무서웠다. 
 현관문 열쇠 구멍에 열쇠가 끼워지는 소리가 났다. 그 희미한 소리에 클레아는 숨을 죽였다. 문이 안으로 열리고 불이 켜지자 클레아는 눈이 부셨다. 
 "클레아?" 파멜라가 주방에 다가와 스위치를 눌렀다. 걱정스런 파멜라의 눈이 얼른 클레아에게 쏠렸다. "왜 그러고 있니? 무슨 일이 있었니? 어째서 이런 어두운 데 서 있지?"
 클레아는 아직도 쇼크로 몸을 떨고 있었다. 이가 딱딱 소리를 냈다. 겨우 말을 했다.
 "저,저...전화......"
 "전화? 누구한테서? 무슨 말이지? 누구한테 전화해 달라는 거니?"
 파멜라는 식탁에 핸드백을 놓자 클레아 옆으로 다가갔다. 살며시 어깨를 안아 클레아를 의자에 앉혔다. 어깨에 손을 얹은 채 찬찬히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니?"
 "저......전화가 걸려 왔어. 범인이야, 틀림없어. 틀림없어......" 클레아의 목소리가 날카로와졌다.
 "뭐라고 했는데?" 창백해진 클레아를 바라보는 동안 파멜라는 또 노여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 클레아는 거의 평상시 상태로 돌아와 있었는데, 지금은 또 눈가풀이며 입꼬리가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신경이 완전히 지쳐 버린 것 같았다.
 클레아는 공허한 눈을 하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말도 없었어. 그저 거친 숨을 쉬면서 이쪽 소리만 듣고 있을 뿐이었어. 내게 겁을 주려 하고 있어. 틀림없이 나를 죽이러 올 거야. 동태를 살피고 있는거야. 네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난 틀림없이 살해되었을 거야."
 히스테릭해졌군, 하고 파멜라는 생각했다. 끝없이 계속될 것 같은 비명과도 같은 지껄임을, 살며시 그녀를 안음으로써 막으려 했다.
 "알았어, 이제 그만 해 둬!"
 "난 살해될 거야. 그는 내가 미운 거야......"
 "클레아! 알았다니까!" 파멜라는 클레아의 어끼를 세게 흔들었다. 
 클레아의 머리가 싸구려 인형의 망가진 목처럼 힘없이 앞뒤로 덜렁덜렁 흔들렸다. 얼굴에는 핏기가 가시고 눈은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파멜라는 몸을 구부려 그녀의 볼을 만져보고 그 차가움에 몸을 떨었다. 그래서 다시, 이번에는 천천히 따뜻하게 속삭였다.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내가 옆에 있으니까. 아무도 네게 손대지 못하게 하겠어."
 클레아는 소리도 내지 않고 울기 시작했다. 우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맞닿은 볼이 젖어서  파멜라는 그녀가 우는 것을 알았다.
 "가만히 좀 있어봐, 경찰에 전화하고 오겠어."
 그 말에 클레아가 몸을 움직였으나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파멜라는 조금 기다려 본 뒤에 주방을 나왔다. 
 클레아는 우두커니 바닥만 내려다보며, 거실에서 들려 오는 파멜라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밖에서 차가 스피드를 내며 달리는 소리가 윙윙 울려 왔다. 난 이곳에 있을 수 없어.....범인이 죽이러 오기 전에 여기를 나가야지..... 이곳에 있다간 언제까지나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가 없을 거야.
 마침 클레아가 일어서려고 할 때 파멜라가 돌아왔다. 파멜라의 시선에 클레아는 힘없이 웃었다.
 "래리한테 전화할까 해."
 파멜라는 놀란 듯이 또 클레아를 보았다.
 "래리? 히리어말이지? 왜......?"
 클레아는 대답하지 않고 거실로 가서 천천히 래리의 전화번호를 돌렸다. 래리는 바로 나왔다.
 "네."
 내키지 않는 듯한 목소리였다. 수화기에서 모짜르트의 맑은 선율이 흘러나왔다. 지금의 클레아의 상황과는 거리가 먼 세계였다. 한숨을 쉬고 클레아는 한동안 귀를 기울였다. 래리의 짜증난 목소리가 울렸다.
 "여보세요, 누굽니까?"
 "래리, 나 클레아에요. 혹시 아까의 초대가 아직도 유효하다면 당신의 어머니한테 가고 싶은데요."
 "물론 좋고 말고. 한데, 어디 불편하지는 않아? 왜 마음이 바뀌었지?" 뒤의 질문에는 걱정스런 울림이 있었다.
 "그것은 나중에 이야기하겠어요. 바로 떠나도 돼요, 내일이라도?"
 "그럼 내가 차로 데려다 주겠어."
 "아니, 좋아요. 나도......"
 "데리러 가겠소."
 반론을 허락하지 않는 언제나 그의 단호한 목소리였다. 전에는 역겨울 만큼 듣기 싫은 말투였는데 지금은 왠지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녀는 승락했다.
 "지장이 없다면 부탁해요."
 "아홉시에 가겠소. 수영복이 필요하니 그것도 챙겨요. 거기 가면 헤엄을 치거나 일광욕을 하는 것 밖에는 할 일이 없으니까."
 "천국이군요. 고마와요. 정말 나......"
 "그럼 또." 하고 래리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10분 뒤에 경찰관이 찾아왔다. 전혀 모르는 두 사람이었다. 두 사람 다 별 흥미가 없는 듯이, 그러나 질문만큼은 많이 했다. 클레아와 파멜라는 바로 눈치를 챘다. 이 두 사람은 우연히 당직이기 때문에 찾아왔을 뿐이고, 지금 바로 무슨 조치를 취할 마음은 없는 것이다. 내일 아침 상급자에게 보고할 뿐이겠지.
 "댁의 천화기에, 걸려 오는 전화를 추적할 수 있는 장치를 달면 좋겠는데요. 그러자면 조금 날짜가 걸리니까, 그동안에 수화기를 내려놓는게 좋을 겁니다. 내일누구를 보내겠읍니다." 하고 하나가 말했고, 두 사람은 커피를 마시고 돌아갔다.
 파멜라는 문을 소리나게 닫았다.
 "참 미더운 사람들이군!"
 "두 사람은 일이 너무 많은 거야. 어차피 난 내일 여기에 없을 거야, 롬니 마시에 사는 래리의 어머니한테 가기로 했으니까."
 "어마, 네가?"
 놀랍다는 얼굴로 물끄러미 바라보는 파멜라에게 설명할 기운은 없었다.
 "이제 자야겠어." 밀려드는 물결에 뼛속까지 씻긴 기분이었다. 허전하고 피곤했다. 아까 느꼈던 히스테리 증상과도 같은 패닉은 이제 지나간 것 같았다. 문 앞에서 문득 마음에 걸려 클레아는 발을 멈췄다.
 "내가 없어도......괜찮겠지?"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니?"
 "넌 여기에 혼자 있게 되는 거야."
 파멜라는 얼굴을 찌푸렸다.
 "괜찮아. 설마 괴한이 또 찾아오지는 않겠지." 클레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미안해, 또 생각나게 해서. 신경 쓰지 마, 난 걱정없어. 무서워서 잠을 못 자는 일도 없으니까." 파멜라는 방긋 웃어 보였다. "그렇게 된다고 해도 자러 와 줄 사람은 얼마든지 있어."
 클레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파멜라를 좀 부러워하면서 침실로 들어갔다. 자립적이고 모든 면에서 충족되어 있군. 래리와 많이 닮았어. 인생이나 이성 교제에 심각해지는 일이 없어. 래리가 사귀는 여자는 볼 때마다 다른 사람이었다. 한 사람과 오래 계속되는 일은 절대로 없었다. 결혼과는 인연이 없는 사람. 일부 일처제 같은 것은 따분해서 견디지 못할 거야. 원시적이고 시대에 뒤떨어진 제도라고 생각하는 거야 . 필(pill)의 발견이 결혼 제도를 파괴했다고 하는 사람이니까.
 래리는 인생을 마음 편한 여행으로 알고 있었다. 처자를 거느리고 길을 걸을 사람이 아니다. 처자라는 것은 여행의 방해꾼이고 하고 싶은 일을 못하게 하는 존재라는 소리를 그로부터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른다. 래리는 늘 그렇게 서슴지 않고 큰소리를 쳤다. 
 클레아는 지금까지의 자신의 행동을 다시 생각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새로운 인식, 새로운 생각이 마음을 자극했다. 그것은 예의 레이프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건 전 부터 그런 싹이 돋고 있었다. 예의 사건은 그저 그것을 활성화하는 역할을 한 데 지나지 않았다. 
 파멜라는 사랑을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녀는 섹스만으로 충분했다. 자기에게 신경을 써주는 사람의 존재 같은 것은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클레아는 그러한 자유를 갖고 싶지 않을 뿐 아니라 무서움조차 느끼지 않는 것이었다. 클레아에게는 그것이 자유로 생각되지 않았다---그것은 고독이었다. 클레아 자신은 그런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톰의 품안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클레아는 그 톰에게서 사랑도 평안도 찾아낼 수가 없었다. 애초에 클레아가 벗어나려고 기를 쓰던 쓸쓸함만이 다시 주어졌을 뿐이다. 톰이 클레아에게 마음을 써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톰은 클레아가 주는 사랑을 얼씨구나 하고 받아들였지만, 클레아에게는 무엇 하나 주려고 하지 않았다. 아마 지금까지 톰의 주위에 있었던 사람들은 누구나 그런 일을 겪었겠지.그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것은 당연히 자기에게 향해진 일방 통행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연인 사이에는 평등이란것이 존재할 수가 없지 않을까?
 클레아는 자신을 폭행한 괴한에 대해서 생각했다. 어떻게든 머릿속에서 몰아내려고 애쓰던 남자에 대해서. 잊어버리려고 아무리 기를 써도 의식의 밑바닥에 꼭달라붙어서 구토증을 느끼게 한다.......생각이 날 때마다 클레아는 비명을 지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런 일그러진 모습으로 그는 늘 클레아이 신변에 있다. 지금까지 어떤 남자도 그러지 못했을 만큼 가깝게---그런 생각이 또 클레아의 위장을 뒤틀어놓았다. 
 하여튼 그 남자는 클레아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것이 이상하게 리얼했다. 남자는 클레아에게 증오심을 안고 있다.---지금까지 클레아에게 타인이 보인 가장 강한 감정이었다. 지금도 그 남자의 증오의 불길을 피부에 느끼고 있다. 몸이 움츠러드는 것 같다. 자신의 강렬한 증오 때문에 그가 클레아에게 잔혹한 짓을 하는 동안, 두 사람은 어둠 속에서 단둘이 있었으며 남자의 몸과 마음은 온통 클레아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일까? 알지도 못하는 타인에게 그런 행동을 하게 한 원인은 무엇일까?
 아니면 그 남자는 클레아를 알고 있는 것일까? 클레아는 그의 얼굴도 볼 수 없었고 목소리도 듣지 못했지만, 혹시 어쩌면 거리에서 자주 만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어디에서 서로 알게 된 사람일지도 모른다. 일 관계로 교제가 있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본 것은 눈뿐이고 안 것은 강렬한 증오뿐이니 클레아로서도 어쩔 수가 없다. 
 클레아로서는, 처음으로 강렬한 감정을 가지고 자기에게 다가든 남자가 자기를 저주하는 인간이었다는 것은 유감스런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클레아를 증오하고 아프게 하고 공포에 떨게 한 그날 밤, 클레아의 내부에 무언가 벼놔가 생긴 것만은 분명했다. 오랫동안 클레아를 가두고 있던 차가운 껍데기가 깨부숴진 것이다. 클레아는 갑자기 밝은 데 벌거벗은 몸으로 끌려나왔고, 이제 자기는 예전의 자기가 아닌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괴한에게 침입을 허락해 버렸기 때문에 지금 자기가 빼뚤어져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일생 동안 주위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고 마는 것에 비하면, 비록 증오일지라도 자기에게 관심을 보인 인간이 한 사람이라고 있었다는 사실은...... 남편에게 구타를 당하면서까지도 그 곁을 떠나지 앟고 있는 여자의 기분이 이런 것일까? 친절하지만 무시당하며 지내는 것 보다는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 주는 폭력적인 남자와 사는 것이 낫다는 것일까? 지금까지는 신문 같은 데서 이런 폭력을 견디어 내고 있는 아내의 기사를 읽으면 놀랐지만, 남의 마음속 프로세스---무엇을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것은 다른 사람으로는 알 길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생각이 아니다. 느낌인 것이다.
 클레아의 머리는, 이번 사건은 잔인하고 병적이고 공포 그 차제였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감정은 뭐라고 말하고 있을까?? 클레아는 마음이 무거워져서 더이상 생각하기를 그만두기로 하고 방안을 둘러보았다. 
 파멜라는 짐을 챙기는 것을 거들어 주었으나, 래래가 오기 전에 일하러 나가 버렸다. 클레아는 혼자 거실에 앉아서, 창피해서 어떻게 차를 타러 나갈까, 하고 생각했다. 얼굴에는 아직 멍이 남아 있엇다. 사람들은 클림없이 나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겠지. 
 래리가 현관문의 벨을 눌렀을 때 클레아는 또 펄쩍 뛸 만큼 놀랐다. 그리고 마지못해 일어서서 그를 맞이했다. 래리는 검은 가죽 자켓의 깃을 세우고 비에 젖은 머리를 하고 서 있었다.
 "소나기야. 피라슈트는 있어?" 농담을 하고는 슈트케이스를 집어든 래리는 성큼성큼 걸어가 짐을 차에 실었다.
 클레아는 현관문을 열쇠로 잠그로 우산으로 얼굴을 가리며 그의 뒤를 따랐다. 거리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클레아는 차 안으로 들어가자 겨우 마음이 놓였다. 생각한 것보다는 큰 일이 아니었다.
 래리의 운전은 마치 굴레 벗은 말과도 같았다. 자기의 차 앞에 공간이 나면 얼른 들어가지 않고는 못 배겼다. 앞을 막는 차는 날쌔게 따라잡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것이었다. 운전하는 래리를 바라보는 것이 직접 운전하는 것보다 더 피곤한 것 같았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서두르지요?"
 클레아의 물음에 래리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띠었다.
 "응, 이래야 재미가 있거든."
 생각보다 훨씬 빨리 런던 시내를 빠져나왔다. 창밖에는 켄트의 전원 풍경이 펼쳐졌다. 길은 비가 갠 뒤라 검게 젖어 있었다. 그리고 메드웨이에 들어설 무렵에는 구름이 갈라져서 해가 드러났다. 잿빛으로 흐려 보이던 강물도 푸른 하늘을 비치며 파랗게 맑아져 있었다.
 "잠깐 차를 세우고 커피라도 마시겠소?"
 래리가 물었으나 클레아는 고개를 저었다. 사람이 많이 있는 카페테리아에 보기 흉한 얼굴을 나타내기가 싫었다. 사건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는 이 얼굴을.
 래리는 찌르는 것 같은 시선을 클레아에게 던졌다.
 "좋을 대로." 하고 말하고 몸을 조금 앞으로 그부려 조그만 콤파트먼트에서 선글라스를 꺼내어 클레아의 무릎위에 던졌다. "그것을 써 보라구."
 클레아는 볼을 물들이며 그의 말에 따랐다. 백 미러에 잠깐 비쳐보니 인상이 많이 좋아졌다. 어째서 지금까지 이것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입 주위에는 많이 나아있었다. 볼에 남아있는 노랗고 시퍼런 타박상은 메이크업으로 가렸다. 그리고 나머지는 선글라스로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다. 앞머리를 빗어내려 이마를 가리니 거의 보통의 얼굴에 가까와졌다.
 "지껄여 버리면 기분이 많이 좋아질꺼야." 래니는 눈앞으 도로에 눈길을 쏱으 채 말했다. "가슴속에 쟁여 두면 언제까지나 빠져나올 수가 없어, 당신 자신이 태연해 질 수 없는 한은."
 "누구든지 그 이야기는 싫어해요. 톰은 내가 그 일을 생각한다고 느끼기만 해도 얼굴이 빨개져 가지고 화를 내는 걸요."
 "톰이라!" 차는 갑자기 스피드를 냈고, 타이어가 젖은 아스팔트를 긁으며 소리를 질렀다. 
 "여기는 경주용 주행선이 아니란 말이에요!"
 차는 다시 스피드르 떨어뜨렸다.
 "톰 프레스코트의 어디가 좋은 건지 알 수가 없군. 혹시 어쩌면 당신에겐, 도어메트처럼 다루어지는 것을 좋아하는 매저키스틱한 취미가 있는게 아닐까?"
 "톰을 좋아했었던 거예요!"
 "좋아했었다?" 래리는 클레아를 흘끔 쳐다보았다. 클레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눈도 선글라스에 가려져 있었다.
 "어째서 과거형이지?" 래리의 눈길은 또 앞쪽으로 향해졌다. "이미 끝났단 말인가? 끝이 없을 줄 알았던 로맨스도 마침내 끝장이 났다 그거야?"
 "반가운 듯이 말하지 말아요. 당신은 사랑 따위는 믿지도 않겠지만 나는 다르니까요. 전근대적이라고 당신은 말하지만......"
 "전근대적이 아니야. 들척지근하단 말이야, 산타클로스를 믿는 것처럼...... 어릴 적에는 모두 믿지만 어른이 되면서 사실을 알게 되지."
 "그래요, 난 아직 사랑을 믿고 있는 아이에요." 이렇게 말하면서도 클레아는 자신의 목소리에 별로 힘이 들어있지 않은 것이 분했다, 사랑의 존재를 래리의 어조처럼 확신을 가지고 말하려 했는데.
 "그건 그 말을 해석하는 방식이 문제라고 생각해." 래리는 깊이 갱각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화학 반응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있어...... 어떤 남자가 어떤 여자에게 한 눈에 반한다, 그러면 홀몬 분비가 왕성해지지. 한번 보고 난자는, 저 여자를 침대로 데리고 가자면 얼마나 품이 들까를 생각하지."
 "훌륭하시군요. 아마 남자들은 그렇겠지요. 하지만 여자는 달라요."
 "또 당신의 정의가 시작되는군. 파멜라 같으면 즉석에서 동의할 거야. 나는 보았단 말이야. 남자를 한 번 쑥 훑어보고는 그녀는 생각했지----어마, 저 사람 멋있어. 그런지 한 시간도 안 되어 두 사람은 파티장을 빠져나가 침대로 직행한거야." 래리는 클레아를 보고 한쪽 눈썹을 치켜올려 보였다. "그녀는 그런 여자지?"
 "파멜라에게는 파멜라의 방식이 있는 거에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보기에 파멜라는 현대 여성의 하나야, 여자의 인생은 결혼으로 시작되어 아이 기르기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현대 여성이란 말이야. 파멜라도 언젠가는 결혼하겠지. 아이도 만들겠지. 그러나 그것만이 여자의 생활의 전부라는 따위의 그릇된 생각은 하지 않을 거야. 그 귀여운 얼굴에는 지적인 고민이 딱 나타나 있어. 그녀가 모델로서의 전성기를 지나면 우리 회사의 일을 시켜도 좋을 거야. 그녀는 영리하고 야심도  있어. 머리도 빨리 돌아가. 우리 일에도 곧 익숙해질 거야."
 "아마 당신의 추측이 맞을 거에여." 클레아는 멍한 얼굴로 대답했다. 래리는 파멜라와 데이트를 하고 있는 것일까? 그녀에 대해서 무척 잘 알고 있군. 파멜라를위한 생각도 많이 하고 있어.
 "필이 여성을 해방시켜 주었지.여자들에게도 이제 섹스는 위험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것이 되었어. 남자나 마찬가지로, 결과를 무서워할 것 없이 ㅈ기 마음대로 즐길 수 있게 된 거야."
 "하지만 여자는 남자가 아니에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그리고 여자는 육체적으로 맺어지는 상대와 정신적으로도 맺어지고 싶어해요. 당신의 용감한 신세계에서는 어때요?"
 "난 규칙을 만들 생각은 없어. 요즘 내 눈에 비친 대로 말했을 뿐이야. 내가 20세때에는 여자는 두 가지 유형이 있었지. 방금 말한 그런 형과, 일단 그런 사이과 되어 임신하게 되면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형이 있었지. 하지만 지금은 통용되지 못해."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여자가 해방되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해방된 것은 남자들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섹스의 댓가로 돈을......돈이나 결혼으로 보상할 필요가 없어졌으니까요."
 래리는 웃었다.
 "평들이네 자유네 하는 것을 요구한 것은 여자 편이야......그것을 손에 넣은 순간 벌써 불평을 하지."
 "그것을 위해서 치러야 할 댓가를 이제 겨우 알았기 때문이에요. 물론 좋은 일자리르 가진 여자, 이틑테면 대회사의 부장아니 중역, 혹은 파멜라와 같은 모델, 그리고 여배우, 그런 여자들은 그게 좋을 거에요. 하지만 공장이나 회사에서 힘겹고 따분한 일에 시달리는 여자들은 어떨까요. 가정에서 요리나 하고 청소나 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우리 어머니는 직장 같은 것을 가져 본 일이 없어요. 어머니 세대의 여자들은 꼭 일해야 할 사정이 없는 한 밖에서 일하는 법이 없었어요. 하지만 난......나의 경우는, 겨우 일을 긑내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톰의저녁을 짓는것은 나란 말이에요. 그는 앉아서 신문이나 읽고 있어요, 내가 얼마나 지쳐 있는지 아랑곳하지 않고......"
 "그것은 저마다 하기 나름이야. 톰이 당신을 보수없는 하녀로 부린다고 해서 날 책망하지는 말라구, 당신이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닐까? 그에게 분명하게 싫다고 말하면 되는거야. 그가 당신과 가사를 분담하기가 싫다면 서슴없이 나갈 것 아니겠어?"
 클레아는 순간 말이 없었다.
 "난 그렇게 말했어요, 마침내 말했어요.: 그러고는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그는 어쩔 줄을 모라하지 뭐에요."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는 듯이 비참한 표정을 짓는 톰을 틀레아는 떠올렸다. 
 래리는 클레아를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랬어? 당신은 겨우 제정신으로 돌아왔군. 반가와. 난 당신이 그와 결혼해서 교외에 조그만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손바닥만한 뜰에 인형의 집을 세워 놓고 2.5명의 아이와 두대의 차를 가지고 살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려는 줄 알았지."
 "멋없는 소리 하닞 마세요."하고 말하면서소, 자기가 톰과 결환생활에 그리고 있던 꿈을 영락없이 알아맞힌 래리의 심술궂은 목소리에 얼굴을 찌푸렸다.
 차는 고속도로를 벗어나 꼬불꼬불한 시골길로 들어섰다. 늧지대였기 때문에 길은 높직한 뚝 같았다. 가로수이 잎이 너무나 우거져서 저편에 펼쳐진 초록의 비옥한 들은 전혀 볼수가 없었다. 모퉁이를 돌다가 겨우 보인 곳에는 핑크의 풀꽃이며 조그만 뱀딸기 등이 보석을 뿌려 놓은 듯이 가득 흩어져 있었다. 소금기 있는 습기찬 바닷바람이 불어 왔다. 바람은 상쾌하게 얼굴에 와 닿고 머리카락을 흩날리게 했다. 
 해안에 가까와질수록 길은 차츰 반반해져 갔다. 풀을 띁는 양떼도 보였고, 마을에는 높은 뽀족탑의 낡은 교회도 있었다. 그러나 길은 여전히 뱀처럼 꼬불꼬불해서, 동그라미만 그릴 뿐 앞으로는 못 나가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얼마나 더 가야 해요?"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정말 길을 알고 있어요?"
 "걱정돼? 몇만 번을 지났는지 모르는 길이야. 배고픈가?"
 "네." 대답하고 나서 깜짝 놀랐다. 그가 물을 때까지는 전혀 몰랐는데, 공복감이 느껴졌다.
 "바닷바람 탓이지."
 "내가 이렇게 찾아가도 당신의 어머니는 정말 귀찮게 생각하지 않으실까요?"
 "귀찮으면 오지 말라고 하셨을 꺼야. 어머니는 당신이 하기 싫은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 분이니까."
 "그래요? 당신도 그런 면을 이어받았군요!"
 "이거 대단한 펀친데. 나는 당신의 고용주란 말이야. 좀 더 존경심을 가져야 마땅해." 래리는 조금 사이를 두더니 진지한 얼굴로 덧붙였다. "특히 어머니 앞에서는 더 그래야 해, 나에 대한 어머니의 평가는 상당히 낮으니까."
 "그래요? 어쩐지 난 당신의 어머니를 좋아하게 될 것 같군요. 



8장

  첫 쇼크가 물러가자 회복은 빨랐다. 파멜라는 손을 더듬어 스위치를 넣었다. 현관의 불이 켜졌다. 얼른 둘러보았다. 방문은 모두 닫혀 있었다. 내가 오늘 아침 모두 닫고 나갔던가?
  그래. 클레아가 떠난 지 2일이 지났다. 파멜라는 잠을 잘 잘 수가 없었고, 작은 소리에도 깜짝 놀라 잠을 깨는 것이었다. 아침에 나갈 때는 문이란 문은 모두 꼼꼼하게 닫았다. 누구든 들어가려고 생각만 하면 실내의 문이 열려 있건 닫혀 있건 마찬가지라고는 생각하지만, 무기가 있으면 좋겠어…… 그런 생각도 들었다. 분명 호신용의 무기가 필요해.
  벽을 따라 옆걸음을 쳐서 주방문을 열자 재빠르게 스위치를 넣고 얼른 둘러보았다. 과도는 어디 있지? 아니, 그건 너무 위험해. 파멜라는 서랍을 열고 대리석으로 만든 국수 방망이를 찾아냈다. 그것은 이탈리아로 로케 갔을 때 토스카나에서 산 것이다. 묵직했다. 파멜라는 그것을 꼭 틀어쥐고 집안을 살피기 시작했다. 
  만일의 경우 자기가 지르는 소리가 밖에 들리도록 현관문을 활짝 열어 놓았다. 어느 방에도 사람의 그림자는 없었다. 잇따라 확인한 방의 불을 켜 놓았다.
  자기 침실로 가까이 가자 문 저쪽에서 분명히 무슨 소리가 났다. 파멜라는 멈추어 서서 메마른 입술을 축이고 귀를 기울였다. 다음 소리를 기다리기에 지쳐 파멜라는, 여차하면 내리칠 양으로 국수방망이를 치켜들고 문을 벌컥 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불을 켰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무언가가 스치는 소리와 종이가 펄럭이는 소리가 났다. 보니, 커튼이 바람에 나부끼며 벽지를 때리고 있었다. 밖에는 바람이 세게 불어, 닫혀 있는 창문 틈새로 스며드는 모양이었다.
  파멜라는 숨을 내쉬고 어깨의 힘을 뺐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스며나와 있었다. 현관으로 돌아와 문을 닫았다. 주방의 라디오 스위치를 넣자 심야 방송의 재즈가 흘러나왔다. 도저히 잘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어차피 못 잘 바에야, 하고 짙은 커피를 따랐다.
대리석의 국수방망이를 손에 든 채 커피 잔을 입에 대려고 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저도 모르게 손이 떨려 커피가 테이블 저쪽까지 튀었다.
  떨리는 다리로 국수방망이를 꼭 틀어쥔 채 거실로 갔다. 심야의 정적 속에서 전화벨은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이런 시간에 도대체 누굴까? 뭔가 좋지 않은 일일 거야. 파멜라는 갑자기 걱정이 되었다. 클레어에게 무슨 일이 있나?
  "여보세요?" 파멜라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대답은 없고 그저 거친 숨소리가 크게 들려 올 뿐이었다.
  엉겁결에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파멜라는 다시 수화기를 집어들자 경찰에 전화를 걸었다.
  "또 걸려 왔어요!"
  "이번에는 뭐라고 했어요?" 하고 형사가 물었다.
  "한 마디도 없었어요. 이번에도 숨소리만 들리지 뭐예요. 미치광이예요. 틀림없이 구속해야 해요." 파멜라는 떨고 있었다. 그것이 약이 올랐다. 자기가 무서워하고 있다는 증거기 때문이었다.
  "협박 전화는 탐지할 수 있지요? 이번에도 추적하지 못했어요?"
  "또 걸려오면 어떻게든 그로 하여금 지껄이게 해줘요." 형사는 파멜라의 따지는 말은 무시하고 조용히 말했다. "아무 것도 지껄이지 않는 걸요. 그저 숨소리만 낼 뿐이에요."
  "뭐라고 말을 시켜봐요. 당신이 먼저 말을 걸란 말입니다. 무슨 말이든지 좋아요. 될수록 오래 끌어요. 아마 자기 집에서 거는 거겠지요. 만일 국내 전화라면 별로 시간을 끌지 않고 탐지를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장거리라면 좀 문제군요. 하지만, 또 걸어오면 될수록 통화 시간을 끌도록 해줘요.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이 먼저 끊어서는 안 됩니다."
  "그 소리는 당신도 듣고 있을 수 없을 거예요. 정말 소름이 끼쳐서………."
  "상상할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싱거운 대답이었다.
  "같은 남잘까요?" 제일 궁금한 일이었다. 
  "그렇기 쉽지요."
  "혹시라도………또 밀로 들어오지는 않을까요?"
  "자물쇠말고도 체인을 꼭 걸어 놓고, 아는 사람이 아니면 절대로 문을 열어 주지 말아요."
  "열지 않겠어요." 파멜라는 강한 어조로 대답했다. 수화기를 놓고 시계를 보았다. 이제 이 무시무시한 방에는 더 있을 수가 없었다. 
  밖에 나가자. 모델 하나가 오늘 저녁 파티를 열고 있다. 파니에 갈 기분도 아니고 갈 예정도 없었으나, 갑자기 마음이 동하자 택시를 불러 헤렌의 아파트로 향했다. 말상대를 갖고 싶었다.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 기분을 바꾸고 싶었다.
  헤렌의 집 벨을 누른 손간, 조 하버도 와 있을지 모른다 싶은 생각에 가슴이 설레었다. 클레어가 퇴원한 뒤로 그를 만난 일이 한번도 없었다. 그를 자기 마음에서 몰아내려고까지 했다. 그쪽에서는 파멜라에게 흥미가 없다고 그토록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는가.              파멜라에게는 싫어하는 남자를 뒤쫒아다니는 취미는 없었고, 또 바다에는 물고기가 얼마든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저도 모르게 조가 생각나는 것이다.
  헤렌으로부터 마실 것을 받아들면서 파멜라는 얼른 방안을 둘러보았다.
  "와 주어서 반가와. 소개가 필요한 사람은 없겠지?" 헤렌은 키가 큰 흑인계 모델이다.  뼈대가 가는 갸름한 얼굴 생김새로 잡지 표지에 자주 등장한다. 물론 패션 사진에서도 여기저기서 서로 끌고 가려고 한다. 아무리 기발한 옷차림을 하더라도 멋있게 어울리는 것이었다.
  "누구하고 수다나 떨고 오겠어." 파멜라가 미소를 돌렸다.
  "그렇게 해줘."하고 헤렌이 윙크를 보이고, 새로 온 손님을 맞으러 갔다.
  파멜라는 사람들 사이를 누비며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잠시 후, 어깨가 떡 벌어지고 핑크빛 셔츠를 입은 청년이 파멜라의 어깨에 팔을 감으며 빰에 키스를 해 왔다.
  "여어, 팸. 몇 년 동안을 어디에 가서 숨어 있었지? 결혼을 했거나 비슷한 형편에 있는 줄 알았지."
  "일이 바빴어요. 그뿐이에요." 대답하면서 파멜라는 그의 팔에서 빠져나왔다.
  "날 기죽이려고 하네. 내 정신 위생에 치명적인 말이야. 우리 아버지는 늘 나보고 뭘 좀 하라고 하시는데, 그런 때 난 정말 답답해."
  "무엇을 하라는 겁니까?" 가까이에 있던,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이 끼어들며 물었다.
  "일말이에요." 파멜라는 빈정거리며 대답했다. "마크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일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어요."
  마트 힐튼은 일을 할 필요가 없었다. 몸집 작고 부지런한 그의 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막대한 재산을 이어받기로 되어 있었으므로.
  "일할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어." 마트는 우쭐해서 만족스럽게 사실을 인정했다.
  "아무쪼록 그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 처지가 되지 않기를 빌겠어요." 파멜라는 그런 말을 남기고 그 자리를 뒤로했다.
  마크 힐튼 --- 사람을 약오르게 하는 남자. 목적도 없이 빈들거리면서 인생을 살고 있는 남자. 얼굴을 찌푸리고, 파멜라는 새로 마실 것을 집어들었다. 한 2년쯤 전에 파멜라는 한동안 마크와 자주 데이트를 하며 그의 아바저의 돈을 축내는 데 한몫 거들었다. 그의 말에는 위트가 있고 함께 놀기에 즐거운 상대였다. 그는 변함이 없었으나 파멜라는 많이 변했다. 그것을 그녀는 지금까지 몰랐었다.
  글라스를 손에 든 채 파멜라는 한동안 가만히 서서 실내를 둘러 보았다. 조가 있는 낌새는 없었다. 갑자기 힘이 빠졌다. 오븐에서 너무 일찍 꺼낸 수플레처럼, 파멜라는 기분이 금방 짜부라져 버리는 것 같았다. 파티가 따분하게 생각되었다. 시간 낭비야. 사람들은 왜 저렇게 시끄럽고 바보스럽고 어린아이 같을까.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이곳을 나가게 되면 또 그 어둡고 쓸쓸한 아파트에 혼자 있게 될텐데...
  "파멜라, 드레스가 참 멋있군!" 뒤에서 말을 걸어 왔다. 파멜라는 안 좋은 기분을 떨어버리고 빛나는 웃음을 지으며 뒤돌아보았다.
  집으로 돌아간 것은 그럭저럭 동이 틀 무렵이었다. 또 옷을 갈아입고 일하러 나가기까지, 잘 시간은 조금 밖에 없었다.

  "여전히 눈코 뜰 새가 없는 모양이군." 파멜라의 안색이 안 좋은 것을 보고 디렉터가 빈정거린다. 파멜라는 그를 노려보았다.
  "뭐가 어떻다는 거예요?"
  "얼굴색이 말이 아닌데"
  "난 기운이 팔팔해요."
  "그렇다면 괜찮지만." 코방귀를 뀌며 나가는 디렉터의 등뒤에 대고 파멜라는 혀를 날름했다. 그러나 일을 시작하면 새심한 주의를 기울여 완벽하게 해냈다. 디렉터도 파멜라에게 잔소리를 할 건덕지는 찾아내지 못했다!
  여섯시에 잠깐 휴게 시간을 내 사람들은 바로 무얼 마시러 나갔다. 파멜라는 무기력 상태로 끌리듯이 그들을 따라가 바의 의자에 축 늘어져 앉았다. 그러고는 이따금 생각난 듯이 글라스를 입으로 가져갔다. 눈군가가 뒤에서 커다란 기구를 떨어뜨리는 바람에, 파멜라의 팽팽한 신경은 끊어질 것처럼 당겨졌다. 저도 모르게 내두른 손이 글라스를 넘어뜨렸다. 엉겹결에, 넘어진 글라스를 붙잡으려고 하다가 깨진 유리 조각에 손바닥을 찔려 버렸다. 여기저기에서 비명이 날아왔다.
  "파멜라 ………."
  "저걸 어째! 만지면 안돼, 유리가 더 속으로 파고 드니까 ………."
  "병원에 가야겠어, 먼저 의사에게 보여야지."
  꼭두각시 인형처럼 파멜라는 천천히 손을 들고 검붉은 피가 흘러나오는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내가 성(聖) 에이든 병원까지 차로 데려다 주겠소. 구급실에서 유리를 빼내고 꿰매면 될 거요." 누군가가 제의했으나, 파멜라는 초점이 없는 눈으로 중얼거렸다.
  "나 손을 베었어."
  주위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누군가가 문득 말했다.
  "쇼크 상태군."
  "이리 와요, 파멜라. 자아, 병원에 가자구."
  손바닥을 위로하여 손을 무릎위에 놓고 피가 괴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며 파멜라는 차에 흔들리고 있었다. 예전에 어떤 잡지에서 읽은, 허리에 창날이 꽂힌 기사 이야기가 생각났다. 유리를 꺼내는 데 마취를 하게 될까? 마취하지 않으면 아플꺼야, 지금도 아픈데. 한데 왠지 남의 일 같군. 흥분되지도 않았고 무섭지도 않았다. 창백한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그 상처가, 자기가 아닌 다른 여자의 손에 난 것처럼 담담한 표정이었다
  외과의 외래는 혼잡했다. 간호원이 와서 카드를 써넣으라고 했다.
  "쓸 수가 없어요, 손을 다쳤어요." 간호원은 짜증난 듯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 써 드리겠어요. " 그러고는 질문의 소나기를 퍼부었다. 그런 끝에, 앉아서 기다리라고 했다. 벤치에는 차례를 기다리는 환자가 넘쳐 있었고, 모두 지친 얼굴이었다. 한 사람이 부려서 자기라 비면 바로 다른 사람이 메우는 것이었다. 
  파멜라는 차례가 오기까지 한 시간 반이 걸렸다. 유리 조각을 뽑아낸 뒤에 상처를 세 바늘 꿰맸다.
  천천히 병원을 나오자 파멜라는 택시를 찾았다. 데려다 준 친구는, 파멜라는 병원에 내려놓고는 바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벌써 아홉시가 가까웠다. 환자의 줄도 이제 조금밖에 남지 않았으며, 병원은 조용해졌다. 파멜라는 불이 켜진 병원의 창문들을 올려다보았다. 저 어디에 조가 있을까. 자신으로서도 놀라운 일로, 조가 생각난 순간 이상하게 마음이 약해지고 눈에 눈물이 솟아났다.
  파멜라는 평소에, 한 남자에게 자기 일생을 맡기려는 여자는 바보라고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었다. 남자가 시키는 대로 따르고 그에게 이용당하는 것을 좋아하다니, 전근대적인 센티멘털리즘이야. 그렇기 때문에, 클레아가 자신도 온종일 일에 쫒기면서 톰의 시중을 드는 것에 짜증이 나서 파멜라는 차마 보고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로맨틱한 사랑 같은 것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 거야. 파멜라는 그것을 보고 웃는 것이었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있는 것은 성적 충동뿐이야. 인간도 성적 에너지를 발산할 필요가 있는 동물이야.   
  파멜라도 특정의 한 남자가 유별나게 마음에 드는 일이 있고, 그 남자와 자주 만나고 때로는 침대를 같이 하며 즐겁게 어울렸다. 그러나 로맨틱한 시인들이 읊는 싯귀와 자신의 행동을 혼동하지는 않았다.
  지금 불현듯 조 하버를 떠올리고 눈물이 나온 이유를 파멜라는 자신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혹시 내가 어떻게 된 것이 아닐까? 아마 피곤하기 때문일 거야.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새 일을 시작한 뒤로 며칠 동안 긴장이 계속된 탓일 거야. 어쨌거나 파멜라 답지 않군.
  마음을 돌리고 걷기 시작하는데 등뒤에서 차 소리가 났다. 차는 스피드를 떨어뜨리고 파멜라 옆으로 바싹 다가왔기 때문에 반사적으로 얼른 비켜섰다. 그녀의 눈이 경계심으로 크게 떠졌다.
  "파멜라가 아니오." 놀란 것 같은, 설마 하는 망설임의 목소리였다.
  상대방이 누군지를 알자 파멜라는 또 놀랐다. 파멜라는 모르는 사람이 희롱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자 안심이 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복잡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당신일 거라 싶었지. 병원에는 뭣 하러 왔소?" 조가 물었다.
  "다쳤어요. 이제 돌아가는 길이에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자, 조가 팔을 뻗어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타고 가지 않겠소?"
  예의바르고 침착한 조에 비하여 파멜라는 사모하는 선생을 만난 여학생처럼 떨고 있었다. 어색하게 차에 오르기는 했으나, 당황했기 때문인지 스커트가 허벅지까지 당겨 올라가 버렸다. 파멜라의 날씬한 다리를 보아도 조는 표정하나 바꾸지 않았다. 파멜라는 다치지 않은 손으로 차의 문을 닫았다.
  "그 손은 도대체 어떻게 다친 거요?" 파멜라는 붕대를 감은 손을 살며시 들어올렸다.
  "베였어요. 몇 바늘 꿰맸어요."
  차내등의 스위치를 넣고 조는 살며시 두 손으로 파멜라의 붕대 감은 손을 받쳐들고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붕대를 만지는 그의 손가락의 감촉이 느껴져 파멜라는 또 가늘게 몸을 떨었다. 소녀처럼 볼이 뜨거워졌다.
  조의 엄지손가락이 따뜻하게 파멜라의 손가락을 쓰다듬었다. 파멜라의 가슴이 저리듯이 아팠다.
  "어쩌다 베였지요?"
  "유리잔을 떨어뜨렸어요."
  "그래요?"
  갑자기 돌아온 쌀쌀한 대답에 파멜라는 노여운 눈초리를 그에게 향했다.
  "취했던 게 아니에요, 사고였어요."
  조는 이상하다는 듯이 파멜라는 바라보았다.
  "알았어요, 침착해요." 파멜라의 손을 무릎에 돌려놓고 조는 시동을 걸었다. "오래 기다렸지요?"
  "몇 시간이나요, 환자들이 입구의 문까지 늘어 앉아 있었어요 표를 팔면 병원은 벌이가 잘 될거예요."
  "돈을 벌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오." 차는 병원문을 나와 밀리는 차의 흐름 속에 끼어들었다.
  "저녁은 먹었소?"
  "아니요."
  "속이 출출해요?"
  "네."
  "우리 집은 여기서 가까워요. 들러서 스파게티 같은 거라도 들지 않겠소?"
  "그거 좋겠군요." 파멜라는 반가운 마음을 숨기며 대답했다.
  "난 스파게트 솜씨가 대단해요. 요령은 삶는 방법에 있지요. 질기거나 무르지 않게 알맞게 삶아야 해요. 이렇게 늦은 시간엔 소스가 너무 진하지 않은 것이 좋지. 베이컨과 버섯이 어떻겠소? 뱃속의 상태는 괜찮지요?" 
  "무척 먹음직스러울 것 같군요."
  그의 아파트는 파멜라와 클레아가 같이 사는 집보다는 좀 작았다. 쓰러질 듯한 낡은 건물의 두 방은 세내어 살고 있었다. 건물 안은 어느 방이나 마치 토끼집 같았다. 저마다의 방문에는 누렇게 바랜 종이가 문패대신 붙어 있었다. 조는 들어가기 전에 우유병을 집어 들었다.
  방안에 들어선 파멜라는 신기한 듯이 둘러 보았다. 책 ---- 책투성이었다. 벽을 메우고 있는 책장에서 넘쳐나와 테이블 위에도 방바닥에도 책이었다. 시트가 낡은 긴의자며 테이블, 식탁, 의자가 있고, 간이 주방과의 사이에 쳐져 있는 진초록의 커튼이 반쯤 열려 있었다. 조는 한쪽 문을 가르켰다.
  "저기가 침실이오. 욕실은 그 저쪽에 있소. 당신이 욕실을 쓰는 동안 난 식사 준비를 해놓겠소."
  그의 침실 --- 흥미가 솟았다. 들어가서 등뒤로 문을 닫았다. 수도원 같군. 침대, 사이드 테이블, 그 위에 시계와 전화, 한쪽 벽에는 옷장, 또 한 벽에는 서랍장. 카펫은 잿빛이었고 벽은 옅은 크림빛이었다. 욕실은 옷장만한 스페이스밖에 되지 않았다. 욕조는 벽 사이에 억지로 밀어넣어진 것 같았고 아동용의 크기였다. 그래도 변기와 세면기가 달려 있었다. 나무의 타월 걸이에는 깨끗한 하얀 타월이 걸려 있었다. 파멜라는 조의 면도기며 칫솔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칫솔을 써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을 깨닫지 그녀는 얼굴이 붉어졌다. 
  내가 어떻게 된 거야. 자신이 생각한 이상으로 클레아의 사건에 쇼크를 받은 거야. 그 반동이야. 그렇지 않으면 이런 생각을 할 리가 없어.
  파멜라는 간이 주방이 있는 방으로 돌아왔다. 베이컨에 구워지는 구수한 내음이 났다. 커튼 저쪽에서 조가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거들 일이라도 있어요?" 하는 파멜라에게 조는, "앉아서 책이라도 읽어요, 혼자 할 수 있으니까." 하고 대답했다.
  책장 앞을 서성거렸다. 의학 서적, 해부도해의 두꺼운 책, 미실 서적, 시, 소설 --- 그녀는 조의 사람됨을 알아내려고 꼼꼼하게 보아 나갔다. 그러고는 라파엘 전파의 화가들의 작품을 모은 두꺼운 화집을 꺼내어 자리에 앉아 찬찬히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먼 곳을 멍하는 바라보는 핏기 없는 얼굴 주위에 숱 많은 금발이 물결치고 있는 젊은 여자 --- 그것을 보니 파멜라는 클레아가 생각났다. 클레아는 이따금 이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세상 사람의 얼굴 같지가 않았다.
  "다 됐습니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스파게티를 수북하게 담은 커다란 자기 접시를 들고 조가 말했다. 파멜라는 책을 덮고 일어섰다. 그 책을 보고 조는 빙긋 웃었다.
  "라파엘 전파를 좋아합니까?"
  "학교에서 배울 때는 싫었어요, 숨이 막힐 것 같아서요. 왠지 모르지만 지금은 좋아요."
  "매우 로맨틱하기 때무일 것이오." 조는 의자를 끌어내고 파멜라를 기다리면서 말했다.
  등뒤에서 조가 살며시 끌어 준 의자에 앉으면서 파멜라는 자기가 그림 속의 기력없는 여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조, 당신은 로맨티스트에요?" 그가 자리에 앉는 것을 보고 파멜라가 물었다. 조금 놀려 주고 싶어서 한 말이었는데 진지한 대답이 돌아오는 바람에 파멜라는 놀랐다.
  "그렇습니다, 안됐지만."
  "왜 안됐지요?" 파멜라는 정색을 했다.
  "당신은 로맨스 따위는 전근대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지요? 당신뿐이 아니오. 내가 아는 녀석들은 대부분이 당신하고 같은 생각이요. 나도 10년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 무렵에는 섹스만이 관심의 표적이었어요. 충분히 만족했다고는 할 수 없으나 24시간 내내 그것만 생각했고, 화려한 꿈도 꾸었었어요."
  "그런데 마음이 바뀌었어요?"
   조는 크림은 탄 소스를 친 스프게티를 서버(server)로 떠서 파멜라의 접시에 담기 시작했다. 얇게 썬 양파와 버섯, 그리고 베이컨의 맛있는 내음이 코에 스며들었다.
이 세상에는 오르가즘보다 중요한 일이 얼마든지 있어요." 파멜라에게 파르마 치즈의 병을 건네 주며 조는 말했다.
  "예를 들면요?" 스파게티 위에 노란 가루를 듬뿍 치면서 파멜라는 물었다.
  "아마 나도 나이를 먹은 게지요." 조는 조금 장난스런 표정으로 파멜라에게 웃어 보였다.
  "말 상대가 되어 줄 사람이 아쉬우니 말이오. 한두 시간 침대를 같이한 뒤에 안녕을 말하는 관계가 아니라 일생을 같이해 줄 사람이 있었으면 싶어요."
  "하지만 당신은 결혼할 생각은 없는 것 아니에요?"
  "그것은 내가 말한 로맨티시즘이란 말이오." 일단 입을 다물고 포크에 스파게티를 감았다.    "결혼은, 나 자신부터 썰렁하게 식어 있어서는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누구 특별한 사람…… 그런 것은 꿈이겠지만, 특별한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난도 로맨틱한 사랑이 오래 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꿈을 쫓는 것은 바보스럽다고 생각하면서도 꿈이 없으면 인생은 잿빛이 아니겠소? 그러니 나는 꿈을 쫓고 싶은 거요." 하고 나서 조는 스파게티를 입에 넣었다.
  파멜라는 그에게 마음을 빼앗겨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동작 하나하나는 어쩌면 저렇게도 아름다울까! 아무리 바라보고 있어도 싫증나지 않았다.
  입에 가득 음식을 넣은 채 조는 파멜라는 보았다. 그 눈에 웃음이 넘쳤다. 그리고 손을 뻗더니 파멜라의 포크에 스파게티를 감아서 그녀의 입에 넣어 주었다.
그의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맛있지요?" 조는 물었다.
  "최고예요." 하고 파메라가 대답하자, 조는 웃었다.
  "의사가 되기 전에는 무슨 일을 하고 있었어요?"
  "시티에서 가업을 돕고 있었지요. 아버지는 주식 중개인이었어요. 대학을 졸업하고서도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몰랐기 때문에 할수 없이 아버지가 날 당신 회사에 밀어넣었던 거지요. 몇 년을 근무했지만 어두운 날이었어요. 돈을 움직이는 것에 흥미가 있었다면 그렇지는 않았을 테지만 …… 나는 흥미가 없었거든. 먹고 살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는 것은 알지만 금융업계에는 아무래도 재미를 붙일 수가 없었어요. 그런 때 마침 자동차 사고를 당해서 6개월간 입원하게 되었지요. 그때야 난 겨우, 의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지요. 식구들은, 내가 입원했기 때문에 갖게 된 일시적이 열기라고 생각한 것 같았지만, 마침내 국가 시험에 합격했을 때는 모두 깜짝 놀랐어요."
  "형제분은요? 누나라든지 누이동생 ……"
  "하나씩 있어요. 당신은?"
  파멜라는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나 혼자예요."
  "부모님은?"
  파멜라는 망설이면서 입을 다물었다. 어머니나 아버지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우리는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아요."
  조는 그러한 파멜라는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쪽을 싫어하지요? 아버지? 어머니?"
  쓴웃음이 떠올랐다.
  "어느 쪽도 별로 높이 평가하지 않아요. 아버지는 난폭하고 어머니는 도어매트예요. 아버지는 어미니에게 한마디도 말을 하지 않을때도 있어요. 저녁때 돌아오면 신문을 가지고 자기 의자에 앉는 거예요. 5분이 지나면 저녁 식사가 되었느냐고 소리를 지르지요. 그리고 식탁에 앉아서 저녁을 먹고 나면 또 거실의 그 의자에 돌아가, 잘 때까지 거기에 있어요. 아버지는 나한테도 소리를 잘 질렀어요. 학교에 다니는 동안은 참았지만 자립할 수 있다 싶자 바로 집을 뛰쳐나왔어요. 가정이라고 할 만한 것이 못 되었어요."
  조는 아무 의견도 말하지 않고 식사를 마쳤다.
  "과일도 좀 있는데, 사과와 오렌지 중 어느 것을 먹겠소?"
  파멜라는 고개를 저었다.
  "고마와요, 배가 불러요. 스파게티 참 잘 먹었어요."
  "커피는 어때요?"
  "그건 마시겠어요." 하고 일어서자 파멜라는 테이블 위를 치우기 시작했다.
  조는 눈짓으로 말렸다. "아니, 당신은 손님이란 말이오……… 앉아서 아까 그 화집이나 봐요, 바로 커피를 가져갈 테니."
  커피를 마시면서 미술 이야기에서 일 관계의 이야기로 옮겨갔다. 그가 묻는 대로, 모델업이 얼마나 고되고 가혹한가를 파멜라는 이야기했다. 열 네 시간 동안을 쉬지 않고 계속 서 있는 일도 있고, 그런가 하면 몇 주 동안이나 일의 예약이 끊어져 불안할 때도 있으며, 모델 따위는 싸구려 여자라고 생각하고 꾀려고 드는 남자가 있고, 거절하면 보복을 당하는 예도 있음을 털어놓았다.
  "난 처음부터 결심을 하고 있었어요. 누구와 침대를 같이하는 일이 있다면 주도권은 나에게 있어야 한다고요. 그저 유혹한다고 따라가서는 안된다고요." 거기서 파멜라는 조의 눈에서 또 비난의 빛을 예기했으나 그는 담담하게 파멜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에 용기를 얻어 사실을 또 한가지 털어놓았다.
  "당신한테서 단호하게 퇴짜를 맞았을 때는 난 큰 쇼크를 받았어요. 나로서는 처음 겪는 일이었으니까요."
  두 사람은 여러해 사귀어 온 친구처럼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었고, 파멜라는 희망을 갖기 시작했다. 이따금 조의 눈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희망이란 참 끈덕진 생물이어서 잘라내도 잘라내도 또 금방 싹이 돋아 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파멜라로서는 참으로 신선한 체험이었다. 머리에서는 조를 잊어버리라고 명령하는데도, 눈곱만한 핑계라도 찾아내서는 그 희망에 매달리려 하는 것이었다.
  "내가 당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무리할 것은 없어요." 파멜라는 불안한 마음으로 말했다.
  조는 긴의자에 파멜라와 나란히 앉아 불룩한 쿠션에 팔꿈치를 짚고 있었는데, 그 말에 파멜라에게 윗몸을 돌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누가 말했지요?" 중얼거리듯이 말한 조의 말에 파멜라는 한순간 숨이 멎었다.
  황홀한 듯이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조는 말을 계속했다. "당신은 아름다워요. 하지만 난 벌써 옛날에, 눈에 드는 아름다운 아가씨를 붙집으려는 노력은 포기했어요, 그녀를 누구하고 공유하는 것도 말이오. 난 내 상대는 순수하게 나만의 것으로 만들고 싶은 거요. 질투형이지요. 다른 남자가 주위에 얼씬거리는 것은 질색이오. 1대 1의 관계에 집착하고 있단 말이오. 전에도 말했지만 난 전근대적이오"
  파멜라는 조의 입을 바라보고 있었다. 크게 떠진 눈은 어둡고 흐려 있었다. 파멜라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그녀의 손이 자연스럽게 뻗어서 조의 볼을 만졌다. 남자다운 윤곽을, 광대뼈에서 턱에 걸쳐 파멜라의 손이 미끄러져 내려갔다. 손가락 끝이, 면도한 까슬까슬한 수염 끝을 느꼈다. 파멜라는 몸을 기울여 가만히 그에게 키스했다.
  꼭 다물어진 차가운 그의 입술은 까딱도 하지 않았다. 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서도 파멜라는 꼭 다물어진 그의 입술을 자기 입으로 덮었다. 한 손으로 그의 머리를 꼭 받치고, 애타게 바라던 그의 입술에 겨우 자기 입술을 댄 것이다. 불타는 격렬한 욕망이 파멜라의 몸 안을 달렸다. 저도 모르게 두 팔을 조의 목에 감고 매달리듯이 거센 키스를 계속했다. 어떻게든 그가 응해 주기를 바랬다.
  조는 파멜라의 팔을 풀고 그녀의 몸을 밀어냈다. 실망해서 파멜라는 눈을 떴다.
  "아무 소용도 없소. 우리는 타입이 다른 인간이오. 끝이 빤한 헛된 일은 난 처음부터 하지 않는 주의요. 나를 소심한 인간이라고 생각해도 좋아요. 그런 것으로 나는 상처받지 않아요. 파멜라, 난 당신과 말썽을 일으키고 싶지 않단 말이오." 조는 일어섰다.
"바래다 드리겠소, 당신의 집까지."



9장

  늪지대의 조금만 집에 온지 벌써 일주일이 넘었지만, 클레아가 히리어 부인과 이야기를 나눈 일은 두세번 밖에 없었다. 노부인의 모습을 보기조차 힘들었다. 클레아가 아침에 잠을 깼을때는 그녀는 이미 밖에 나가 있었다. 그리고 밤에는 일찍 자리에 드는 것이었다. 
  클레아도 생활의 패턴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 같은 일상생활이라고 해도 얼마 전까지의 그것과는 얼마나 다른 것이냐. 하루도 전날과 같은 날은 없었다. 날마다 다른 느낌으로 시작되었으며, 끝나는 것도 달랐다. 그리고 새벽에서 해가 지기까지의 한시각 한시각이 지금까지 몰랐던 전혀 새로운 경험의 연속이었다.
  먼저 온종일 혼자 있는데도 클레아는 쓸쓸하다고 느껴 본 일이 없었다. 가는 곳 어디나 벗이 있었다. - 커다란 흰 날개를 펼친 갈매기는 마치 바다위를 헤엄치는 것 처럼 아주 편안한 모습으로 따뜻한 공중에 떠 있는 것이다. 
  자연은 한시도 가만히 있는 법이 없었다. 집 주위에 들어찬 나무그늘에서 쉬고 있으면, 나뭇가지를 스치는 바람소리, 가지의 흔들리는 소리에 섞여 새의 지저귀는 소리, 날카로운 경계의 외침소리가 우거진 잎사이에서 울려왔다. 햊빛이나 그늘에 따라 나무나 풀이 그 빛깔을 바꾸는 것이었다. 어떤때는 검푸르게 되고 어떤때는 은빛이 되었다. 또 달이 없는 어두운 밤에는 숨이 멎을 것 같은 아름다움이 있었다.
  클레아는 지금까지 이렇게 상쾌하고 풍부한 세계를 본 일이 없었다. 레이프 이후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어둡고 끈적거리고 차가운 안개 같은 것이 달라붙듯이 에워싸고 짓누르는 바람에 그녀는 짜부라질것 같았다. 클레아는 그저 때가 와서 바람이 불어 그 안개를 걷어가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먹어도 아무 맛도 느낄 수 없었고 기분은 잿빛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그것이 이 곳에 오자 어느 사이 사라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무언가 새로운 감각이 찾아와 생기를 되찾게 했고 행복이 어떤 거이었는 지를 다시 생각하게 하고 있었다. 사람이 아쉽지는 않았다. 히리어부인이 별로 집에 있지도 않고과묵하고 한 것이 서운하지도 않았다. 주위의 자연에 관심을 돌리는 것이 즐거웠다. 자연은 클에아에게 아무 요구도 해오지 않았다. 그년느 별세계에 와서 자유롭게 만족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 자신의 미래를 직시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에 풍경 속의 늘 달라지는 조그만 움직임에 눈길을 향하고 있었다. 
  클레아는 풀위에 주저앉아 갈길을 서두르는 개미며 깜찍 놀란 듯이 이 풍에서 저 풀로 뛰는 메뚜기를 관찰했다. 그리고 메뚜기를 공중에서 붙잡았다가 손안에서 공포로 날개를 떠는 곤충을 다시 놓아주고는 정신없이 풀 속으로 사라져 가는 날갯소리에 귀를 귀울였다. 털이 돋은 애벌레가 기어가는 길 앞에 잔가지를 놓고는 벌레가 힘겹게 넘어가는 것을 구경하기도 했다. 장애물을 넘어갈때의 벌레의 마디마디의 움직임은 중국인의 신년제에 나오는 용의 춤과 비슷했다. 뜰에는 나비가 떼지어 날고 있었다. 순백색, 크림색, 갈색,그리고 연보라.. 날개의 비늘이 햇빛에 반짝거리고 얼룰이나 무늬를 드러낸 채 저마다 춤을 추다가 잠깐 이파리 위에서 날개를 접고 사람의 기에 닿지 않은 신호를 서로 주고받고 있었다. 
  해가 지면 어디에선지 날 벌레들이 몰려왔다. 빛을 찾아 창유리에 덤벼들어서 애타는 눈으로 들어갈 구멍을 찾았다. 클레아는 밤에 뜰에 나갔다가 얼굴에 부딪치는 잔벌레들을 마주쳤다. 볼이며 눈썹이며 할 것 없이 마구 덤벼들다가 살며시 떨어내는 손길에 벌써 상처받으면 그들은 다시는 날 수가 없게 된다.
  이들 곤충이며 히리어 부인이 나뭇가지에 매달아 노츠은 열매로 새들은 포동포동해졌다. 코코넛을 껍데기 속에 베이컨 쪼가리며 기름을 넣고 곡식이나 씨를 넣어 섞어놓은 것이다. 그리고 과일 쪽이나 빵부스러기도 많이 곁들여 놓았다. 
  클레아는 부인이 고양이가 오르지 못할 높은 의자에 모이그릇을 여러개 달아 놓은 것을 보았다. 그로고 또, 모여든 새들이 모이를 한번쪼을때 마다 주위를 둘러보며 침략자를 경계하는 모습도 자세히 관찰하고 있었다. 때로는 맛있는 한쪽의 모이를 둘러싸고 저희끼리 싸움도 벌이는 것이었다. 공중에서 채가는 큰 새도 있었다. 커다란 검은 까마귀는 목이 잔뜩 쉰 개구쟁이었다. 개똥지빠귀는 당당했다. 찌르레기는 뒷골목을 깡패처럼 어느 새에게나 덤벼들어 싸움을 걸며 조금이라도 더 많이 먹으려고 기를 쓰는 것이었다. 제비는 이따금 밖에 볼 수 없었으나 끝이 갈라진 꼬리를 쭉 뻗고 바람을 가르며 날아다녔다. 
  모든 것이 한창 여름을 즐기고 있었다. 새끼가 태어나서 자라고 꽃이 피어 흐드러지고 열매가 맺고 주위 공기는 향긋한 내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일년중을 취송기로서 나무도 풀도 모두 저마다의 삶을 즐기고 있었다. 
  얼마가 지나자 클레아는 먼곳까지 발길을 옮기게 되고 바다로 통하는 오솔길을 찾아냈다. 희푸른 모래밭이 완만하게 휘어돌아간 바닷가로 나가자 바람으로 조그만 사구가 수도없이 생겨나 있었으며 사하라 사막에서 흔히 목 수 있듯 생명력이 강한 잡초가 여기저기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바닷가에는 아침일찍 나오는 사람은 좀처럼 없으나 한낮에는 헤엄치는 사람들이나 일광욕하는 사람들로 붐볐다.
  클레아는 아침일찍 일어나 아무도 없는 바닷가로 나와 잿빛 하늘에 먼저 한가닥의 및이 비치면서 오렌지색으로 물들고 해가 떠오름과 동시에 핑크빛에서 파랑으로 바뀌어가는 광경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파란하늘을 보고있으면 기분도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바닷가에는 나무로 지은 카페가 한채 있었으나 언제나 열시경까지는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 이따금 클레아는 비교적 높직한 사구 그늘에서 젖은 수영복을 벗고 목면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카페에서 커피를 한잔 마시고 돌아오는 
일도 있었다. 
  그 시간에는 좀처럼 사람을 만나는 일이 없었다. 카페의 여주인은 쌀쌀맞기는 하나 예의바라고 클레아의 얼굴에 든 멍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커피를 내 와서 돈을 주면 자기자리로 돌아가 여성잡지만을 들여다 보았다. 라디오의 팝뮤직을 트는 일도 있지만 손님인 클레아의 귀를 시끄럽게 할 만큼 볼륨을 높이지는 않았다. 클레아는 창문으로 바다를 내다보며 기분이 맑아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짠 바닷물의 세례를 받아 온 몸이 깨끗해지는 기분이었다.
  몸에서 멍이 사라지고 건강을 되찾기 시작하자 마음을 짓누르던 것도 조금씩 물러나는 기분이었다. 병이 나가갈때의 묘한 초조감을 클레아도 느끼고 있었다. 나무의 방사제 위를 곧장 걷지 못하고 밸런스가 깨지거나 목표로 세웠던 몇분간의 헤엄 도중이 지쳐서 그만두지 않을 수 없게 되거나 하면 클레아는 스스로에게 화를 냈다. 그리고 자기 혼자인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누가 모습을 나타내면 그 사람에게 노여움을 느꼈다. "안녕!" 하고 말이라도 걸어오면 때려주고 싶었다. 
지나는 길가에 의자가 나와 있으면 걷어차 버리고 베개 모서리가 어쩌다 목에 닿으면 마치 칼에라도 닿은 것 처럼 흠칫 하며 내던져 버리는 것이었다. 말이 없는 물건에 화를 쏟았다. 샌들의 버클이 죄어도 욕을 퍼부었다. 또 헤엄친 뒤 모래가 머리털 속이나 가슴의 골짜기나 발가락 사이에 남아 있으면 신경에 거슬려 자기전에 오랫동안 샤워를 뒤집어 쓰기도 했다.
  걸음걸이도 빨라졌다. 머리를 alt고 있으면 온몸에 에너지가 충만해 등에서 시퍼런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이제는 풀 위에 앉아 벌레를 보고 있어도 만족할 수가 없었다. 전속력으로 달리거나 헤엄치거나 해서 노여움을 쏟아내고 싶었다. 몸을 움직이는 것 말고는 대상이 없는 노여움을 지울 방법이 없는 것 같았다.
  어느날 아침 클레아가 막 커피를 마시고 나니까 세명의 젊은이가 밖에 오토바이를 세워 놓고 카페로 들어왔다. 10대 후반인 듯 했다. 똑같은 검은가족 잠바의 등에는 독수리 그림이 디자인되어 있었다. 세사람다 무릎까지 오는 검은 가죽 부츠를 신고 있었다. 저마다 검은 헬멧을 옆구리에 끼고 카운터쪽의 여자에게 "커피줘요, 인형아가씨" 하고 소리쳤다. 여자는 잡지를 놓고 커피를 따르러 일어섰다.
  카운터 위에 신문이 얹혀 있었다. 한 사람이 그것을 클레아 옆의 테이블에 가져와 펼쳐놓고 들여다 보았다. 
  "아, 그건 내것이에요" 하고 여자가 소리를 지르자 그중 하나가 카운터에 몸을 기대고 겁을 주듯이 말했다. 
  "자기 할 일이나 하라구, 이따가 돌려줄테니"
  "자요" 하고 여자는 커피 잔을 카운터에 난폭하게 놓더니 손을 내밀어 차값을 요구했다.
  클레아는 창밖을 보고 있었으나 등이 오싹오싹 했다. 젊은이들은 옆테이블에 앉아 클레아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으나 물론 클레아는 모른체 하고 있었다.
  "보라구, 귀여운 아가씨." 하나가 클레아 쪽으로 몸을 내밀었다.
  클레아는 물새를 보고 있었다. 빨간다리에 검고 흰 얼룩털이 난 물새가 물가에서 먹이를 찾고 있었다. 젖은 모래에 잽싸게 부리를 막기 직전에 쪼르르 뛰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걸어간 뒤에는 꽃잎같은 혹은 고대의 화살촉 같은 날카로운 세 개의 발톱자국이 또렷이 줄을 이루고 있었다.
  두 세시간만 지나면 밀물로 모두 지워져 없어질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살고 먹고 재생산 하고는 시간의 흐름에 씻겨 삼켜져 버린다. 
  "새침때기 게집애군." 하나가 슬쩍 건드렸다.
  "뭘 바라는지 알고 있지." 또 하나가 말하자 모두 웄었다.
  "이 사제의 이야기 읽어봤나?" 신문을 보고 있던 젊은이가 손가락으로 글자를 짚으면서 소리내어 읽기 시작했다.
  "더러운 할아비군. 어이 뚱뚱보, 설탕좀 다오. 이 커피, 그릇 행군물이군. 보라구, 이렇게 기름방울이 떠 있어." 
  "비서를 덮친 그녀석은 마침내 따먹었다는 거야."
  신문을 보고 있던 젊은이의 말에 클레아의 몸은 쇼크로 굳어졌다. 
  "그야 따먹고 말고. 여자가 부탁한 거야. 주말에 함께 따라가서 말이야. 그래 놓고 일관계의 출장이네 .. 싫어했네 라고 한들 누가 믿어?"
  "그녀석의 지불이 적었던 게 틀림없어. 그래서 경찰에 고해바친거야. 내기를 해도 좋아. 여자는 봉을 잡았다고 생각한거야. 제 스스로 당하기를 바랐으면서 레이프 당했다고 주장한단 말이야. 그게 싫다면 당할만한 곳에 있기는 왜 있었어. 안그래?"  클레아는 몸을 떨면서 일어섰다. 눈앞에 새빨간 안개가 들어찼고 분노로 목을 죄는 것 같았다. 
젊은이들을 죽이고 싶었다. 치미는 노여움을 쏟을 곳이 없었다.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젊은이들이 눈에 들어왔으나, 불타오르는 노여움으로 마치 먼 곳에 있는 거처엄 보였다. 잠깐 동안이지만 클레아는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젊은이들으 테이블 앞에 서 있었다. 꽥 소리를 지르며 그들의 눈을 도려내고 때려높히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노여움은 썰물처럼 물러나기 시작하고 동시에 젊은이들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도시인 다운 하얀 얼굴들은 선이 가늘었으며 말투처럼 난폭해 보이지도 않았다. 클레아가 보고 있으니까 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클레아의 험악한 형상에 무서움을 느낀 모양이었다. 너무도 어리고 예민해서 아까의 기세는 어디로 갔는가 싶었다. 
  클레아는 설탕그릇을 집어들어 신문을 보고있는 젋은이의 찻잔에 쏟아부었다. 여자는 언제나 범해지기를 주장한 아이였다. 나머지 젋은이들이 옴쭉달싹도 하지 않고 멍하니 입을 벌리고 그것을 보고 있었다. 
  클레아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왔다. 카운터 저쪽의 여자가 입이 귀에까지 찢어지게 웃으며 클레아에게 윙크를 보냈다. 그녀가 문을 닫을 때야 겨우 제정신으로 돌아온 젊은이들이 한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이거 마실 수 없게 해놓았잖아.. 도대체 왜 이런 미친 짓을 한거지? "  
  "저거 미쳤는지도 몰라"
  "그보다, 나 커피 못마시게 됐어."
  아침햇살을 받으며 뜰을 가로질러 발밑에 탄력있는 잔디를 느끼면서 클레아는 천천히 집으로 향했다. 모래가 묻은 정강이의 맨살에 닿는 바람이 기분좋게 느껴졌다. 
  클레아는 젊은이들이 뒤쫒아오는 것이나 아닌가 하고 내심 걱정했으나 사유지의 판자문있는데서 돌아보니 그들은 헬멧을 쓰고 오토바이에 오르는 중이었다. 옷 색이 유난히 짙은 때문인지 무서운 우주인으로 보였다. 그들은 일제히 굉음을 내며 떠나갔다. 집으로 통하는 오솔길을 더듬는 클레아의 마음은 묘한 승리감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날 저녁 찬을 만들려고 계란을 삶고 있으려니, 히리어 부인이 맨발로 주방에 들어왔다. 목면 원피스는 겨자꽃 무늬를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색이 바래있었다. 잿빛의 머리는 좀 뾰족한 귀 뒤에서 간단하게 묶여있을 뿐이었다. 팔은 가늘지만 해에 탔고 근육질이었다. 부인은 개수대에서 손을 씻고는, 나무로 만든 손톱 브러시를 써서 손톱 사이를 문지르고 있었다. 개수대에 괴어서 흐르는 물이 흙빛이었다.
  "즐거운 하루였어요? " 커다란 스푼으로 조심스럽게 계란을 꺼내면서 물었다. 당닭은 마당에서 하루종일 뛰어다니고 있었다. 밤에는 나무로 지은 닭장에 이어진 철망 우리에 몰아넣어지지만 낮에는 온 마당을 자유롭게 헤집고 다니고 때로는 나뭇가지에 오르고 사람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알을 낳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히리어 부인은 그들이 좋아하는 장소를 영락없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부인은 꾐알로서 일부러 하나를 닭장안에 남겨놓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클레아는 이 작은 닭들이 좀 무서웠다. 날카로운 눈초리를 하고, 클레아가 가까이 가면 쪼으려 드는 것이었다. 그래도 더 가까이 가면 요란사럽게 울면서 도망을 쳤다. 하지만 무척 고운 닭이었으므로 어느덧 클레아도 싫증을 모르고 바라보게 되었다. 날개는 매우 보드랍고 반점이 있으며 부채처럼 펼치면 거기에는 또다른 빛깔에 검정과 흰색이 섞여 나타나는 것이었다. 당닭의 알은 독특한 맛이 나고 노른자의 노란빛이 아주 짙었으며 흰자는 투명했다. 
  "바쁜 하루였어요. 당신은?" 히리어 부인은 노란 타월로 손을 닦으며 대답했다. 
  클레아는 달걀을 들고 테이블에 앉았다.
  "모험을 했어요." 그리고 오늘 아침 카페에서 만난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아이들의 얼굴을 못 본 것이 서운하군." 부인은 웃었다.
  "무척 무서워하고 있었어요."
  "겁쟁이들이군."
  "그래요. 틀림없이 나에게 얻어맞는 줄 알았을 거에요. 순간적으로 나도 그렇게 할 뻔 했으니까요. 그런 일은 지금까지 생각해 본 일도 없었는데.. 그렇게 화를 낸 일도.. 아마 처음인 것 같아요."
   어떤 기분이었어요?" 부인은 이상한 듯 물었다.
  클레아는 한손에 버터를 바른 빵을 든 채 잠깐 생각했다. 
  "앞뒤를 분간 할 수가 없었어요. " 웃음을 터트리면서 대답했다.
  "화를 내면 에너지 소비가 많아져요. 레리도 늘 화를 내고 있지만." 하고 부인은 말했다. 
  "그렇지요? 래리는 언제든지 그래요?"
  "노여움장이로 태어난 것 같아요. 하지만 그는 때와 장소는 가릴줄 아는 것 같아요. 화를 내서 해결을 보는 일도 있는 것 같고. 언젠가 뿌리가 굵고 끈덕진 잡초를 뽑아달라고 부탁한 일이 있었어요. 나는 도저히 힘이 모자라서요. 래리도 애를 먹다가 마침내는 불처럼 화를 내고는 뽑았지 뭐에요. 얼굴이 보랏빛이 되도록 화를 냈지만 덕분에 잡초가 뽑혔어요"    "어마, 사무실에서 그런 일이 가끔 있어요! 래리는 지진 같아요.. 일단 흔들리기 시작하면 땅위의 모든 것이 떠니까요. 하지만 다음지진이 언제 일어날지는 아무도 몰라요. 래리는 웃었다.
  "무척 무서워하고 있었어요."
  "겁쟁이들이군."
  "그래요. 틀림없이 나에게 얻어맞는 줄 알았을 거예요. 순간적으로 나도 그렇게 할 뻔했으니까요. 그런 일은 지금까지 생각해 본 일도 없었는데.... 그렇게 화를 낸 일도.... 아마 처음인 것 같아요."
  "어떤 기분이었어요?" 부인은 이상한 듯이 물었다. 
  클레아는 한 손에 버터를 바른 빵을 든 채 잠깐 생각했다.
  "화를 내면 에너지 소비가 많아져요. 래리도 늘 화를 내고 있지만." 하고 부인은 말했다.
  "그렇지요? 래리는 언제든지 그래요? "
  "노여움장이로 태어난 것 같아요. 하지만 그는 때와 장소를 가릴 줄 아는 것 같아요. 화를 내서 해결을 보는 일도 가릴 줄 아는 것 같아요. 화를 내서 해결을 보는 일도 있는 것 같고. 언젠가 뿌리가 굵고 끈덕진 잡초를 뽑아 달라고 부탁한 일이 있었어요, 나는 도저히 힘이 모자라서요. 래리도 애를 먹다가 마침내는 불처럼 화를 내고 뽑았지 뭐예요. 얼굴이 보랏빛이 되도록 화를 냈지만, 덕분에 잡초가 뽑혔어요." 
  "어마, 사무실에서도 그런 일이 가끔 있어요! 래리는 지진 같아요.... 일단 흔들리기 시작하면 땅 위의 모든 것이 떠니까요. 하지만 다음 지진이 언제 일어날지는 누구도 몰라요. 래리는 일이 까다로워질수록 기운이 나서 일을 더 잘 밀고 나가요. 나는 도저히 따라 갈 수가 없어요. 쉴 겨를도 없는 걸요. 전속력으로 달리는 스피드보우트 속에서 굴러 다니는 콜트 같은 느낌 이예요....  체념을 하고 뛰어다닐 뿐이지요. 어째서 내 목이 잘리지 않는지 이상해요.... 래리가 바라는 것만큼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은 분명한데 말이예요." 
  히리어 부인은 가만히 클레아를 바라보았다. 당닭이나 마찬가지로 호기심에 찬 눈이었다. 
  "래리가 만일 당신이 일을 못한다고 생각했다면, 불러서 변명을 듣기도 전에 이미 해고했을 거예요. 걱정 할 것 없어요."
  "어쨌든 내 시간의 반은, 래리한테 두들겨 맞고 늘어진 사람들을 위로하는 데 다 소비해 버려요."
  "당신은 눈치가 있군요. 래리는 당신의 그 점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게 아닐까요? 래리는 사람을 쓰는데 천재적이예요. 내 느낌으로는, 당신은 지금의 역할에 딱 맞아요!" 
  "글쎄, 어떤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젠 래리가 불러일으킨 폭풍과 혼란의 뒤처리에도 지쳐 버렸어요."
  "래리한테 그렇다고 말했어요?"
  "말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래리는 바로 말머리를 돌려버리고, 차차 생각이 정해질 때까지 기다리라는 거예요."
  "그럼 그렇게 하면 되지 않아요, 아마 당신의 상태는 아직 회복이 안 되었을 것이니? 래리의 입장에 한번 서 보면 어때요? 래리는 당신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당신의 말을 듣고 보니, 그의 뒤를 따라다니며 상처받는 사람들을 치료해 주는.... 하지만 앞으로는 그 일을 하고 싶지 않다면 사표를 내고 다른곳에 가면 돼요. 당신은 유능해 보여요. 다른 무엇을 해도 잘 할 거예요. 중요한 것은, 당신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것을 찾아내어 그것에 전념하는 일이예요. 당신의 인생이 아니겠어요? 당신이 무엇을 하는게 좋을지 다른 사람을 결정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당신이 하던 일로 돌아가는 것이 그렇게 무섭다면 일단 래리한테 물어 보세요. 사표를 내던지기 전에."
  그 뒤 며칠 동안을 클레아는 일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었다. 다시 그 생활로 돌아가고 싶은가 어떤가. 전처럼 힘을 내어 할 수 있는가 어떤가. 지금의 걱정은 지나친 생각인가 아닌가. 
  바닷바람이 부는 들을 계속 돌아다녔다. 아침마다 한바탕 헤엄을 즐기고는 젖은 물가의 반짝이는 모래의 감촉을 즐겼다. 해가 비치나 구름이 끼나 그 나름의 아름다움이 바닷가에는 차 있었다. 때로는 마당의 잔디 위에서 책을 읽었다. 클레아는 래리의 장서를 닥치는 대로 독파했다. 이따금 어린 글씨로 자신의 소유권을 과시하는 글귀가 적힌 페이지를 보면 미소가 떠올랐다----어렸을 때부터 이랬었군.
  클레아는 지금까지 자신의 몸에 일어난 일들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스스로를 재평가했다. 마치 꼬불꼬불한 산길을 오랜시간 걸어서 정상에 이르러, 눈아래 펼쳐진 풍경과 함께 지나온 길을 내려다 보는 비관적인 겨지에서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부모의 사랑을 받을 수 없었던 것을 자기탓이라 괴로워했고, 그 고민의 그늘에서 원망하고 있었다. 
  부모에 대한 노여움, 톰에 대한 노여움, 래리에 다한 노여움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자기에게 되돌아오는 것이었다. 자기의 패배가 되고 자기의 공허감만 남는 것이었다. 
  자신을 탓해서 무엇할까. 아니, 다른 사람을 탓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산이 자기를 뜯어먹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노여움이나 증오는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것이다. 클레아는 문득 생각했다. --자기는 생명조차 저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부모도 나를 일부러 싫어한 것은 아닐 것이다. 바빴던 것이다, 생활 때문에. 클레아에게 자기네가 어떻게 보일는지 생각이 미치지 못할 만큼 바빴던 것이다. 모두 인간인 것이다. 어머니는 가족에게 배신당했다. 어머니의 일생은 비참한 실패가 되었다.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클레아는 어머니와 연결된 끈을 자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았으면 어른이 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면에서는 영원히 부모를 탓하는 어린아이였다. 더 늦어지기 전에 이 어린아이를 매장해야지. 
  클레아는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격려해주는 부모의 손길 없이 자기 혼자 서는 법을 익히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행동의 정당 을 인식하기 위해서 한눈을 팔지 않는 소녀가 되었다. 세상의 테두리라는 것에 얽매이지 않았다.
  톰은 줄곧 자기를 이용하고 있었다. 톰은 제멋대로고 자기위주다. -- 그리고 클레아 이상으로 어린아이인 것이다. 하지만 어떤면으로 보면 클레아도 톰을 이용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연약한 덩굴풀이 굵은 줄기에 감기듯이 클레아는 그에게 의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단 낮은 하등동물처럼 다루지 말고 대등하게 대해줘요, 하고 고집을 피우다가 그의 비위을 상하게 하여 그를 읽어버리지나 않을까 무서워 하고 있었다. 그가 자기 어머니로부터 배운 가치관을 클레아에게 적용하는 것을 허용해버렸다. 자기일도 지친 몸으로 돌아와서 톰을 기다리거나 그를 위해서 요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 어쩌다가 그를 그토록 우위에 서게 해버린 것일까? 나쁜 것은 톰이 아니라 바로 자기였다. 애당초 처음에 분명하게 해놓았어야 하는건데. 톰이 자기 가치를 인정해주기를 바랐다면 먼저 자기가 자기의 가치를 아껴야 하지 않았던가.
  거기까지 생각하던 클레아는 그제야 겨우 자기의 하는 일에 대하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난 래리한테 아직 실망을 느끼지 않고 있어. 그와는 앞으로도 잘 해나갈 수 있을꺼야.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유머와 확고한 인격이야. 래리에게라면, 부당한 말을 들으면 쏘아붙일 수도 있다, 지금까지도 그렇게 해서 철회시킨 일이 있으니까. 내가 기운이 있을때는 래리에게 무슨 말을 듣든 별로 신경에 거슬리지 않는다.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처럼 받아넘기며 상대방을 이길 수도 있다. 그와 함께 해나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내가 피곤하거나 개인적으로 낙담하고 있을 때뿐이다. 
  물가를 계속 걸어다녔다. 밀려왔다가는 감기면서 밀려가는 물결이 맨발의 발가락을 씻어주었고, 발은 어느덧 익어 가는 살구 같은 빛깔이 되어있었다. 
  클레아는 힘이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나는 불사신이 아닐까? 바람에 머리칼이 얼굴을 때리고 나면 목면스커트가 다리에 휘감겼다. 인생이란 바람에 날리게 마련이야-- 가을 낙엽처럼 사람은 가지에서 떨어져 나가 바람에 밀려 고행에서 멀리 실려가버린다. 하지만 땅을 단단히 딛고 어깨를 펴고 정면으로 맞선다면 사람에게서는 충분히 싸울 만한 힘이 생겨날 것이 틀림없어.

  전화벨이 울렸을 때 파멜라는 마침 머리를 감고 있었다. 욕실에서 몸을 일으켜 등에 물이 흘러내기는 채 귀를 기울였다. 손에 타월을 들었으나 닦을 마음도 나지 않았다. 전화는 요즘 거의 날마다 걸려왔다. 벨소리가 그치기를 기다리자면 신경이 저릿저릿했다. 속이 느글거리고 소리를 지르고 싶어졌다. 경찰이 역탐지에 성공할 때 까지 범인이 전화를 끊지 않다록 빌 뿐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일요일이다. 경찰의 역탐지 담당자는 일요일에도 일하고 있을까? 파멜라는 혼자였다. 
조라도 함께 있어주면 얼마나 든든할까. 하지만 전화로 부를 수도 없었다. 전화를 해도 와줄지 어떨지 몰랐다. 그런 의무는 조에게 없으므로.
  마침내 파멜라는 결심을 하고 욕실에서 나와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목소리만 공허하게 울렸다. 순간 온몸이 소름이 끼쳤다. 어디 밖에 있는 상대에 의해 자기가 이 방에 갖혀있는 느낌이 든 것이다. 이쪽에서는 상대방의 모습을 못 수 없으나 왠지 범인이 어딘가에 숨어서 자기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숨, 숨, 숨소리.. 파멜라는 눈을 감았다. 털구멍 하나하나에 소름이 돋고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파멜라는 갑자기 화가 났다. 무엇 때문에 내가 이런 꼴을 다해야 하는가? 무엇 때문에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인간을 상대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파멜라는 흥분해서 내리 지껄이기 시작했다.
  "당당히 이리로 오면 어때요? 마주보고 이야기할 담력도 없어요? 이 겁쟁이 같으니.. 비겁해요. 날 미치게 할 작정이에요? 이런 비열한 짓을 하는 작자는 어떤 낯짝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5분마다 벨을 울려대니 성가시군요.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구요, 어서요. 여기에 와서 그 낯짝 좀 보여줘요. 용기 있는 사람이라면 당당히 올 수 있을 거에요. 어차피 당신은 못 오겠지만. 안그래요?" 
  빨라진 맥박을 가라앉히고 호흡을 고르기 위해서 잠깐 말을 끊었다가 곧 뒤를 이어서 말하기 시작했다. 지껄임에 따라서 노여움이 커지고 목소리도 커졌다. 
  "당신은 여자에게 인기가 없지요? 그렇지요? 여자에게 가까이 가봤자, 너무 추악한 꼴을 하고 있어서 웃음거리만 되는 거지요? 그래서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이처럼 징그러운 전화를 거는 거 아니에요? 한번 여기에 와서 당신이 얼마나 추하게 생겼는지 보여줘요. 실컷 웃어줄 테니까요. 하지만 내기를 해도 좋아요. 당신은 그런 짓은 못할 꺼에요. 그건 뻔해요..." 
  거기서 문득 파멜라는 입을 다물고 저쪽이 벌컥 해서 소리를 질러오기를 기다렸다. 더러운 말을 퍼붓거나 전화를 끊거나 할거야. 하나 들려오는 것은 그저 똑같은 숨소리 뿐이었다. 
  파멜라는 마침내 퍼부을 말도 없어지고 지쳐버렸다. 상대방은 끊지도 않고 이쪽 말을 듣고 있었다. 서로 떠보는 것 같이 한동안 침묵이 흐른 뒤에 딸깍하고 소리가 나며 상대방은 사라졌다. 
  파멜라는 무너지듯이 바닥에 주저앉아 울기 사작했다. 얼굴을 가린 양손의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다.

  바닷가를 따라 걸으면서 클레아와 래리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젖은 모래위의 두 사람의 그림자가 끈덕지게 따라오고 있었다. 두사람 다, 오솔길에서 바다로 나왔을 때 구두를 벗어 던졌으므로 사뭇 맨발의 발자국이 계속 되고 있었으나 밀려오기 시작한 바닷물이 그 발자국을 씻어내고 있었다. 클레아는 뒤를 돌아보고, 물결이 밀려갈 때 래리의 깊은 발자국에 괸 바닷물이 밀려가지 못하고 거품을 일구는 것을 보고 웃었다. 
   "나 이제 언제든지 일할 돌아갈 수 있어요." 아침의 바닷바람이 머리를 모두 뒤쪽으로 날려서 또렷한 얼굴 윤곽을 드러내 주고 있었다. 
  래리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띄었다. 래리의 표정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지 클레아는 망설였다.
  "거보라구, 내 말이 맞지, 하는 얼굴을 하지 말아요!" 클레아는 그를 쏘아보았다.
  "그렇게 되도록 만든 것이 난데." 래리는 클레아의 손을 잡았다. "저쪽 끝까지 우리 경주할까?" 하고 말하기가 바쁘게 그는 뛰기 시작했다. 출발이 늦은 클레아는 그를 따라잡는데 힘이 들었다. 두 사람은 물을 사방에 튀기면서 달렸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이 지평선까지 이어지는, 온화하고 아름다운 날씨였다. 개 한 마리가 두 사람에 끌려 짖으면서 쫓아왔다. 곶처럼 바위가 바다로 내민 근처에서 갑자기 래리가 멈추어 섰기 때문에 클레아는 하마터면 그에게 부딪칠 뻔 했다. 운동으로 클레아의 볼이 붉게 물들고 숨이 가빴다. 그것을 가라앉히려고 래리는 클레아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순간 그녀의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끼고 래리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클레아도 흠칫 놀라 어깨에 힘을 빼면서 미안 한 듯한 얼굴로 래리를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긴장하고 있군."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그렇게 되어버리는 것 같아요.. 다만.."
  "남자가 손을 대기만 해도?" 
  클레아가 끄덕였다. "놀랄일이 아니야. 신경쓰지 말아요. 나는 잘 알고 있으니까. "
  하지만 래리는 그녀의 어깨에 두른 팔을 그대로 둔 채 몸을 구부리자 또 한 손으로 단단한 돌을 주워 물결을 가르듯이 전져 보였다. 개는 자기를 위해서 그러는 줄 알고, 돌이 떨어진 근처를 향해 짖으면서 물을 헤치고 헤엄치기 시작했다. 
  "저녀석 실망 할거야."
  래리의 말에 끌려 클레아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별로 우습지도 않은 일인데 웃음이 나오고 멈출 수가 없는 것이었다. 클레아는 래리에게 몸을 기대고 숨을 헐떡이며 계속 웃었다.
  래리는 클레아의 어깨를 두 팔로 껴안았다.
  "오우케이, 이제 그만해. 별로 우습지도 않아. " 마치 어린아이를 타이르듯이 따뜻하게, 그러나 야무지게 말했다. 
  “미안해요.. " 눈물을 닦았으나 아직도 웃고 있었다. 클레아는 자기 몸을 받쳐주는 래리의 품안에서 몸을 뒤로 젖히고 그를 보았다. 
  "난 글쎄.." 래리는 바람에 나부끼어 클레아의 얼굴을 뒤덮는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쓸어 넘겨주며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알고 있어. 신경쓰지 않아도 좋아."
  "신경쓰지 않아야 할 일도 많군요." 하고 말하자 클레아는 또 히스테릭한 웃음에 사로잡혔다. 
  "나에 대해서도 그렇지." 래리는 클레아에게 키스했다. 그의 입술을 따뜻하고, 결코 억지가 없으면서도 자신에 차 있었다. 그리고 클레아가 채 무서워하기도 전에 래리는 떨어졌으며, 붉어진 클레아의 얼굴을 조용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알았지? 아무렇지도 않지 않아? 우리 집에 있는거나 마찬가지로 안전하지?"
  천천히 팔을 놓았다. "슬슬 돌아갈 시간이군." 래리는 어깨너머로 클레아를 보았다.  
  자기 기분도 아직 가라앉히지 못한 채 클레아는 래리의 뒤를 따랐다. 무엇 때문에 래리는 그런 짓을 했을까?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선가? 그렇게 하고싶었던 것일까? 경고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무슨 이유가 있을거야 -- 래리 히리어는 이유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야.
  뜰을 지나 집안에 들어가 보니 히리어 부인이 치즈를 꺼내놓고 있었다. 식탁위에는 커다란 보울에 샐러드가 수북히 담겨 있었다. 두 사람을 보고 부인은 방긋 웃었다. 그리고 클레아에게 말했다.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었어요. 바로 전화해 달라는 거에요. 급한 일이라는군."   
  어쩐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바로 파멜라에게 전화했다. 
  "어때, 괜찮니?" 하고 파멜라가 말했다.
  "응. 너는?"
  "괜찮아." 그러나 괜찮은 목소리가 아니었다. 매우 짓눌린 울림이 있었다.  "클레아, 너 언제 런던으로 돌아오니? "
  "마침 그 일을 래리와 이야기하고 있었어. 곧 돌아갈꺼야. 왜?"
  "응... " 망설이던 파멜라는 빠른 말로 대답했다. "범인이 붙잡혔어, 클레아.. " 
  "붙잡혀...?" 클레아의 목소리는 중도에서 끊어졌다. 핏기가 싹 가셨다. 
  "경찰에서 역탐지에 성공할 때까지 나보고 이야기를 계속해서 전화를 끊지 않게 하라고 했어. 처음에는 바로 끊어버리지 뭐니. 무서워서 내가 지껄일 수가 없었기 때문에.. 하지만.. 나 해냈어.. 힘이 들었지만.."
  "전화를 건 사람이 범인과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니?"
  "범인의 집에 우리 물건이 있었어."
  클레아는 벽에 몸을 기댔다. 속이 느글거렸다. 믿을 수가 없어. 또 그 확인작업인가 하는 것이 되풀이되는 거야. 야수처럼 나를 때리고 상처를 주고 범했던 남자와 대면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어. 이제 끝난 줄 알고, 무엇보다 대결해도 태연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약한 마음이, 무서움이, 그리고 그날 밤의 전율과 쇼크가 되살아났다. 다시 한번 그 아픔을 되살리기에는 아직 힘이 부족하다. 앞으로 일어날 일이 한꺼번에 눈앞에 다가들었다. 재판, 신문, 법정에서 자기에게 쏠리는 눈, 낯선 사람들 앞에서 논의될 자기의 신상에 일어난 일들.. 그것은 새로운 래이프나 똑 같아. 이번에는 상처받은 그녀를 흥미진진한 눈으로 바라보는 여러 사람의 면전에서 행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클레아는 그 일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아무리 거슬러 보아도, 버둥거려보아도 도망칠 수는 없는 것이다.



10장

  "정말 틀림이 없어요?" 루카스 형사가 다짐을 했다.
  "그런 것 같아요. 아시다시피 그때 난 얼굴을 보지 못했어요. 어두웠고 머리에 무엇을 뒤집어쓰고 있었으니까요. 이미 말했잖아요." 클레아는 갑자기 화가 나기 시작했다.  파멜라의 전화를 받은 뒤로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어서 지쳐 있었다. "몇 번을 같은 말을 해야 하지요? 난 그자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다고 내 입으로 말한 일이 없어요.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어요? 생각해 내고 싶지도 않다구요."
  "침착해요, 미스 포레스트." 다른 여자가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물이라도 가져올까요, 아니면 차가 좋겠어요?"
  무표정한 목소리에 클레아는, 화낸 자신이 바보스럽게 느껴졌다. 어깨를 떨구고, 내가 어린아이 같았나, 하고 반성했다.
  "미안해요. 늘어서 있던 사람들이 모두 범인처럼 보여서...." 그러나 어떻게 보였는지 이미 생각이 나지 않았다. 머리의 움직임이 둔해진 것 같았다. "어느 것도 잘 기억나지 않아요, 어느 것도."
  "그래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어차피 기소했으니까요. 당신이 분명하게 인정해 주면 유리하지만요."
  "남자는 인정했어요?" 클레아의 목소리는 떨렸다.
  형사가 가만히 클레아를 보고 있었다. 
  대답할 마음이 없나 보다고 생각했을 때 다른 여자가 말했다. "취조에 협력하겠다고는 했어요."
  클레아는 잘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게 무슨 말이지요? 우리 집에 들어온 것이... 자기라는 것은 인정했어요?"
  "네." 형사는 볼펜을 잡고 책상 위에 굴리면서, 재미있다는 듯이 그것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증거가 몇 가지 있는 것을 알자 할 수 없이 지껄이기 시작했어요. 협조적으로 나와야 법정에서의 심증이 좋아질 테니까요."
  클레아는 숨을 삼켰다.
  "그렇다면... 나도 나가서 증언을 해야 하나요?"
  "그렇게 될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말아요, 사건과 관련해서 당신의 이름을 밝히지는 않으니까요. 레이프 희생자의 이름을 공표하는 것은 법적으로 허용되어 있지 않아요."
  그러나 빨라진 클레아의 호흡은 쉽게 가라앉지를 않았다. 가까스로 평정을 되찾자 말했다.
  "하지만 신문에는 대답해야 하는 거지요? 무슨 말을 묻지요, 예를 들면...?"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엄청난 것은 아니에요. 걱정하지 말아요. 우선은 잊어버리고 계세요. 분명하게 말해서, 재판에 회부되기까지는 앞으로 몇 달이나 걸려요. 이런 사건들이 잔뜩 밀려 있으니까 아마 반년은 있어야 할 거예요." 형사는 쓰게 웃고 있었다. "이 나라의 재판은 건강 보험이나 마찬가지로 시간이 많이 걸려요, 차례를 기다려야 하니까요.  시작하고도 여러 날이 걸리지요. 그 동안은 다른 할 일도 엄청나게 많아 우리 형사들도 모두 거기에 매이게 되지요."
  클레아도 할 수 없이 웃었다.
  "그러면, 내가 증언하는 것은 앞으로 반년 후의 일이라는 이야기예요?"
  "빨라야 그렇지요... 아직 범인에게 심문할 일이 많아요. 전과가 얼마나 있었는지도 이번 사건의 참고가 되지요."
  자리를 뜨려다가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서 클레아는 물어 보았다. "어째서 계속 전화를 걸어 왔을까요?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요..."
  "나도요." 형사는 어깨를 추슬렀다. "우리는 벌써 옛날에, 이런 사람들의 범행 동기를 알아내려는 노력을 포기해 버렸어요."
  경찰서 건너편에 주차하고 있던 래리의 차 속으로 클레아는 뛰어들었다. 래리는 클레아의 좌석 등에 팔을 뻗고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기분은 괜찮아?"
  클레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가 이렇게 얼굴을 들여다보지 말아 줬으면 싶었다. 경찰서 특유의 냄새가 아직도 몸에 달라붙어 있는 것만 같았다. 어서 목욕을 하여 깨끗이 씻어낼 때까지는 누구도 자기를 보지 말아 줬으면 싶었다.
  "범인을 알아볼 수 있어?" 클레아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붙잡혔잖아?" 클레아는 끄덕였다. "자기 죄를 인정했대?"
  "네." 꼭 다문 클레아의 입에서 겨우 한 마디가 새어나왔다.
  래리는 차를 몰았다. 열려진 창으로, 햇빛에 빛나는 냇물에서 나는 썩은 냄새가 흘러 들어왔다. 이어 둑을 따라서 뻗어 있는 하단의 장미 향기, 그리고 배기 가스---혼탁한 도시의 선물이 클레아의 머리를 아프게 했다. 교통이 혼잡해 차들은 범퍼를 잇대고 늘어서서 경적을 계속 울렸다.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버스는 만원이었고, 차창을 통해 남자의 셔츠 소매와 옅은 빛깔의 즈봉, 여자의 섬머 드레스가 꼭 밀어붙여져 있는 것이 보였다. 클레아는 그 조용한 늪지대의 집이 그리워져서 눈을 감았다.
  "무엇 때문에 계속 전화를 걸어 댔는지 이해하기가 힘들어..." 속으로 중얼거릴 참이었는데 저도 모르게 소리가 되어서 나왔다.
  "더러는 그런 놈도 있지, 사람에게 겁을 주고 상처를 주며 즐기는 녀석이..." 하고 래리가 대답했기 때문에 클레아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자기가 소리를 내어 말한 것을 알았다.
  "어째서요?"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으면서 저절로 말이 나왔다. 물음이라기보다 항의의 외침에 가까운 말이었다.
  "녀석은 그렇게 하면서 자기의 성욕도 자극하고 있었던 거지."
  클레아는 얼굴이 확 붉어졌다가 이어 창백해졌다. 만일 어젯밤의 꿈을 래리에게 이야기하면 그는 뭐라고 할까. 자신의 절규에 눈이 떠진 뒤 악몽이 생각나서 클레아는 몸을 떨었다. 잠이 깬 순간 그 꿈이 너무나 생생한 것에 놀랐지만, 그것은 꿈이라고 할 수만도 없었다. 클레아는 그날 밤의 자기 방에 있었다. 그 남자와 함께---저항하고 버둥거리고 소리치면서.
  이윽고 그녀는 저항을 멈추었다. 남자가 자기에게 하고 있는 행위에 대해서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절규와 함께 꿈에서 깨어난 클레아는, 몸을 떨면서 침대에서 나와 비틀거리며 욕실로 들어가 차가운 물을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썼다. 자기가 더럽게 생각되고 저주스러웠다.
  다시 침대로 돌아와서도, 지금까지 생각지도 못한 욕망이라는 괴물이 다시 몸 속에 나타날까 무서워 잠들 수가 없었다. 몇 시간 동안이나 어둠 속에서 눈을 뜨고 괴로워했다.
  이윽고 동쪽 하늘이 뿌옇게 밝아올 무렵에는 그 무서움도 밤의 어둠과 함께 사라지고 평정을 되찾고 있었다.
  지금 클레아는 다시 범해지는 느낌이 들고 있었다---자기 자신의 생각에 의해서.  자신의 잠재 의식 속에서 이렇게 굴절된 꿈을 빚어내게 하고 있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누구한테 묻고 싶었다---왜? 왜지요?
  그러나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런 꿈을 꾸었다는 것 자체부터 누구에게 말할 수가 없는 일인 것이다. 누가 들으면 그것은 죄의식 때문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당한 것을 클레아가 좋아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 꿈은, 그녀가 또 레이프를 바라고 있기 때문에 꾼 것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누구에게 말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클레아의 죄의식은 커져만 갈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만일 절대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자신만 있다면, 남이 뭐라고 하든 무서워할 것이 없지 않겠는가.
  그런 바보 같은! 난 피해자가 아닌가, 뭐 내가 원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잖은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현대의 심리학은 그런 생각은 언제나 뒤엎어 버릴 수가 있는 것이다. 심리학자라면 클레아의 꿈에 어떤 해석을 내릴 것인가? 결국은 자기에게 죄가 있다는 해석을 할 것이다---남자를 자극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게끔 했기 때문에.
  무너져 가는 모래 위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어느 쪽을 향해도 발은 미끄러져 내린다.  클레아는 재앙을 무서워하고 있었다. 이제 그녀로서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자기 자신의 마음조차도---마음조차 자기를 향해 심술을 부렸다. 자기 자신을 깎아내리려고 들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 자신이, 거리끼는 것 없이 자신 만만하게 여름의 햇살를 받으며 모래밭을 돌아다녔다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끈질긴 힘은 어떻게 되었는가? 어디로 가버렸는가? 클레아는 다시 두려움과 후회와 의혹의 덫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지?" 흘끔 곁눈으로 클레아를 보고 래리가 물었다.
  볕에 탄 그의 살이 강한 햇살을 받고 빛났다. 긴 속눈썹의 그림자가 눈밑까지 닿아 있었다. 어쩌면 저렇게 멋있는 옆얼굴일까. 마음을 안심시켜 주는 남자다움과 힘을 클레아는 느꼈다. 톰도 강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으나, 요즘은 자기의 공격적인 자기방어의 힘을 따라가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그것에 비하여 래리는 끈질기고 결단력이 있으면서 결코 남을 공격하거나 하지 않는다. 결과만 알면 다른 사람이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나아가는 것에 충분히 만족하는 것이다. 여유가 있는 거야. 사람들을 저마다 자기의 생각과 기분을 가진 하나의 어른으로 대하고 마음대로 헤엄치게 할 줄을 아
는 거야. 톰은 그렇지가 못해. 래리는 상대방의 기분을 존중한다. 사소한 일이라도 그 인격을 인정하고 있다, 저마다의 사는 방식이 있다는 것도.
  아마 그것은, 래리의 어머니가 아들의 자주성을 어려서부터 그렇게 존중해 주었기 때문이겠지. 그러나 톰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여자는 물건이고 궁둥이에 까는 방석이며 필요한 물건을 가져다주는 하녀고 비위를 맞추는 간호원이라고 가르쳤을 것이다. 여자는 자기 세계를 가진 하나의 인간이 아니다, 남자를 위해서 존재하는 물건이다, 라고.  클레아는 이미 제대로 보답받지도 못하면서 그가 청하는 것을 주었었다.
  "쓸데없는 생각은 왜 쓸데없는 생각이에요! 나름대로 생각하는 건데."
  래리는 클레아의 아파트 앞에 차를 세웠다.
  "아니, 당신은 지금 우울증에 빠져 있어. 그러니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아.  우울증에 빠져 있을 때 무얼 생각하면 모든 것이 잿빛으로밖에 보이지 않으니까."
  "그러면 어떡하라는 거지요?"
  클레아가 무뚝뚝하게 말했기 때문에 래리는 웃었다.
  "정상의 생활로 돌아가려고 너무 서두를 것은 없다는 거요. 그런 것은 차차 오게 돼요.  되어가는 대로 두면 되는 거요.  봐요 클레아,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말고, 불쾌한 기억이 자연히 당신으로부터 물러가기를 기다리는 게 좋아요."
  "그러면, 나보고 일로 돌아가라는 말이에요?"  가볍게 빈정거릴 생각이었다.
  래리는 가만히 클레아를 쳐다보더니 싱긋 웃었다.
  "싫지 않다면.... 그러나 어디까지나 자유 의사에 맡기겠어."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클레아는 생각했다.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래리는 클레아를 내려 주고 떠나갔다. 클레아는 안으로 들어갔다. 파멜라가 소파에 길게 몸을 뻗고 누워 있었다. 오렌지 주스의 글라스를 한 손에 들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화면에서는 3인조의 여성 보컬이 멜로디도 확실하지 않은 노래를 소리 높여 외쳐대고 있었다.
  클레아가 뒤로 다가가자, 파멜라의 손안에서 글라스가 놀란 듯이 흔들리고 얼음이 소리를 냈다. 파멜라는 글라스를 내려놓고 벌떡 일어섰다. 너무나 반갑게 맞이해 주는 바람에 클레아는 도리어 어안이 벙벙했다.
  "클레아! 언제 돌아왔니?"
  "오늘 아침." 클레아는 왠지 무안했다. 파멜라와 몇 년이나 만나지 못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따뜻하게 맞이해 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파멜라답지 않군. 벌써 2년이나 같이 지내고 있는, 자기 본위의 드라이한 그 파멜라가...
  "쓸쓸했지 뭐니. 집이 꼭 묘지 같았어."
  "미안해. 전화가 널 괴롭혔지?" 마치 예의 말없는 전화가 자기 탓이라는 듯이 클레아는 사과했다. 사과하면서 클레아는 새삼 느꼈다. 그렇지, 모두 내 탓이야. 그 남자를 내 잠재의식 속으로, 3차원의 세계로 끌어들이고 다른 사람에게까지 해를 끼치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나야.
  "당치도 않은 소리 하지도 말아. 네 탓은 어째서 네 탓이니... 안 그래? 배가 고프니? 뭘 만들어 줄까? 마침 샐러드나 만들어 먹을까 하고 있었어. 커티지 치즈(cottage cheese, 희고 부드러운 치즈)도 있어."  하고 파멜라는 말했다.
  "배는 고프지 않아."
  그러나 클레아는 파멜라를 따라 주방으로 가서 파멜라를 거들어 토마토며 오이를 썰고 레티스를 씻고 하면서 그녀와의 수다를 계속했다.
  "예의 전화가 줄곧 걸려 왔었다니... 진작 얘기해 주었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어.  잊어버리고 있었어."
  "이젠 끝났는걸 뭐. 너까지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았어. 잊어버리고 있기를 잘했어."  파멜라는 후춧가루에서 조심스럽게 먼지를 집어냈다. "그는 머리가 좀 이상한 거야.  그래서 경찰은 범인을 수감도 하지 않는 거야. 안 그렇니?  정신 요법에 돌려서 그에게, 넌 병이야, 라고 말할 작정이야."
  "틀림없이 병이야."  클레아는 어깨를 떨었다.
  그것을 보고 파멜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미안해. 이 이야기 꺼내지 말 걸 그랬어. 신경쓰지 마. 아, 난 정말 생각이 모자라.  혀를 끼물고 싶어."
  "내가 먼저 꺼냈잖니. 언제까지나 눈을 감고 있을 수는 없어. 얘, 톰이 나보고 뭐라고 했는지 아니? 이번 일로 날 책망하지 않겠다는 거야."
  숨을 들이마시는 파멜라는 노여움으로 얼굴이 뻘개졌다.
  "뭐라구? 세상에... 정말로 그런 말을 했니? 아아! 톰을 발길로 걷어차 주고 싶어."  그러고는 걱정스럽게 클레아를 보았다. "너 지금까지 몰랐니? 톰 포레스코트란 남자는 자기 위주고 머리가 굳어 버린, 요컨대...."
  "이미 그에게, 펄쩍 뛰며 달아날 만한 말을 해주었어."
  클레아가 담담하게 말하자 파멜라는 겨우 웃었다.
  "벌써 옛날에 그런 말을 해주었어야 했어."
  샐러드 접시를 앞에 놓고 파멜라는 다시 먼저의 화제로 돌아왔다. 경찰은 그 남자의 집에서, 여기서 훔쳐간 물건을 여러 개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클레아는 역겨운 느낌이 들었다. 그는 이미 클레아의 생활을 침범했다. 그 남자가 다시 자기 물건을 만지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도 불쾌해지는 것이었다. 새로운 폭행이었다. 마치 물결이 밀려올 때마다 바닷가의 모래를 깎아서 쓸어가는 것처럼. 클레아는 이미 자신의 일부가 깎여 나가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레이프당한 일뿐만 아니라 그 뒤에도 꿈속에서 범인과 접하는 일에 의해서도.
  침범당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인 것이다. 육체적인 것은 차라리 대수롭지 않은 일로 생각되었다. 몸보다 마음의 상처가 더 크게 남는다. 여기서 단단히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일생 동안 그의 이미지를 짊어지고 살게 될 것이다. 이미 그날 밤 이후 클레아의 생활은 혼란에 빠져 있었다. 무겁고 답답한 상태에서 일어나는 모든 성가신 일들을 체험하고 있었다.  같은 일을 얼마나 되풀이하고 또 되풀이해서 생각하고 있는가. 망설임, 고민... 극단에서 극단으로 마음은 계속 흔들리고 있었다.  어서 마음의 안정을 되찾고 싶다고 생각했다.
  "래리의 어머니는 어떤 분이니?"  파멜라가 물었다.
  "나 좋아해."  맞는 대답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나, 클레아는 히리어 부인을 뭐라고 형용하면 좋을지 적당한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새는 어떤 새니?  하고 물어 오면 대답이 곤란해지는 것과도 같았다.  빛깔, 모양, 크기 정도는 말해 줄 수 있으나 질문자가 그것으로 만족할까?  그러나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래리와 닮았니?"  파멜라가 거듭 물었다.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 할 수도 있어."  파멜라는 웃음을 터뜨렸다.
  "넌 무척, 정확한 정보를 좋아하는구나!"
  "하지만 이건 표현하기가 어려운 일인걸.  내가 알고 잇는 누구와도 닮지 않았어.  괴짜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아.  분명 색다른 면도 있지만, 어떻게 다르냐고 하면 그런 말하기가 좀... 하여튼 내가 아는 누구보다도 자아가 확립되어 있는 것만은 확실해.  무엇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만 분명하게 말하는 사람이야.  지껄이고 싶지 않을 때는 절대로 입을 열지 않아.  우리는 며칠이나 말을 나누지 않은 때도 있었어."
  "이상한 사람이구나.  너무 자기 멋대로가 아니니.  더구나 넌 손님인데..."  파멜라는 입을 다물었다.  클레아가 래리의 어머니한테 가서 묵은 것이 과연 클레아를 위해서 도움이 되었는지 어떤지 의심스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래리의 어머니는 클레아를 환영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자기 멋대로 지내고 있었던 것 같으니.  파멜라는 걱정스런 눈으로 물끄러미 클레아를 바라보았다.  기대했던 만큼 건강도 기분도 좋아지지 않은 것 같았다.  야위고 혈색이 안 좋았다.  떠나기 전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어마, 결코 자기 멋대로가 아니야."  클레아는 단언했다.  "함께 지내고 오기를 무척 잘했어. 여러 가지 일을 배웠어."
  파멜라는 아직도 믿을 수는 없었으나, 클레아와 입씨름을 할 마음도 없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요전에 너의 어머니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었어.  연락이 있었느냐고.  늪지대의 집으로 간 뒤로 너한테서 아무 소식도 없다고 걱정하고 계셨어."
  "전화라도 하는 것이 낫겠군."
  마지못해 중얼거리고 일어서자 클레아는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네 번째의 벨 소리로 전화가 이어졌다.  번호를 말하고 대답하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긴장하고 있었다.
  "클레아예요, 어머니.  어떠세요?"
  "클레아!  너 아직도 켄트 주에 있니?  좀 괜찮아졌니?"  베아티의 목소리는 묘하게 떨리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걱정하고 있었단다."
  "미안해요, 그 집에 전화가 없었어요.  오늘 런던으로 돌아왔는데, 괜찮아요."  한껏 기운좋게 들리라고 목청을 돋우었다.
  "즐거웠니?"
  "그곳은 참 조용했어요.  산책과 수영말고는 할 일도 없었어요.  어머니도 아버지도 괜찮으세요?"
  "둘 다 잘 있다."  모녀 사이의 울타리를 어떻게든 부숴 버릴 수가 있다면...하고 바라면서 베아티는 대답했다.  세상의 어머니들 중에 자기 딸과 전화로 이렇게 남남 같은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또 있을까, 하고 자문했다.  클레아는 이제 아이가 아니야.  어엿한 한 사람의 여자야.  하지만 모두 내 탓이야. 내가 나빴어. "여기는 좋은 날씨가 계속되는데, 롬니에서는 어땠니?"
  "거기도 날씨가 좋았어요."  간단하게 대답하고 클레아는 그런 자신에게 노여움을 느꼈다.  전화 저쪽에서 예의바르게 대답하고 있는 여자는 도대체 누군가?  나는 어머니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리고 어머니는 나에 대해서....  숨이 막힐 것 같았다.  클레아는 애써 자신의 생각과 싸웠다. 무서웠던 것이다.  잊어버림으로써 치유하려 했고 기억의 밑바닥에 밀어 넣어 숨기려 하는 사실과 정면으로 대결하기가 괴로웠다.  자시 자신의 배신을 인정하고 싶지가 않았다.  다른 일은 잊어버릴 수가 잇어도 어릴 때의 슬픔은 다시금 머리를 들고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었다.  예의바르고 말씨도 침착한 젊은 클레아의 내면은, 어머니의 사랑을 까맣게 모르는 아이며, 이유를 모른 채 일생을 죄의식을 짊어지고 살며 그 때문에 자신을 소외하고 있었다.  톰으로부터 사랑을 받았을 때는 정말 기뻤다.  어떻게든 그 사랑을 지켜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랬기 때문에 그를 잃게 된 것이다.
  "1,2일 여기에 와서 쉬면 어떻겠니?"  베아티는 별로 기대도 하지 않고 물었다.  내가 낳은 딸인데도 어떻게 말을 해야 좋을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니.  그랬어, 지금까지 나는 정말 제멋대로였어.  자신의 원망밖에는 머리에 없었어.  클레아에 대해서 자신이 어떤 처사를 했는지 한번도 생각해 본 일이 없었어.  내가 어떤 어머니였던가? 그렇다고 딸에게 물어 볼 수도 없었다.  그것은 나 자신에 대한 벌일까?
  "나 또 일하기로 했어요."
  클레아가 대답하자 곧 어머니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클레아, 너한테 말하고 싶은 일이 많단다. 우리는 통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잖니.  이제부터라도 시작할 수 없겠니?  너에 대해서 알고 싶어. 내가 이렇게 말하니 이상하지....? 나도 이상할 거라고는 생각하지만, 달리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모르겠구나.  난 너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다.  내 딸인걸, 넌.  그리고 어려서 지독한 경험을 했어.  무엇인가 해주고 싶지만, 뭐라고 해야 네가 승낙할지...."
거기서 베아티는 말이 막혔다.  목소리가 떨렸다.  할말이 한꺼번에 생각났다, 지금 말하지 않으면 영영 기회가 없기라도 한 것처럼.  말을 끊어 버리면 거기서 끝장이 날 것 같아 무서웠다.
  클레아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지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한참이 지나자 입을 열었다.
  "멀지 않아 거기에 가겠어요.  갈 수 있게 되면 바로요.  가게 되면 알려드리겠어요."  어머니가 자기와의 접촉점을 찾고 잇는 것은 잘 알 수 있었으나, 어떻게 응하면 좋을지 몰라 우선 평정한 체하며 넘기려고 했다.  자신도 닿지 못하는 마음 밑바닥은 아직도 얼어붙어 있었다.  클레아의 인생은 유아 시절의 체험에 의해서 형성되고 있었다.  이제 와서 클레아도 그것을 알 수가 있었다.  인생이라는 것은 흐르는 대로 밀려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물가에 서 있는 사람의 눈으로는 그 운명의 비뚤어짐도 또 그 결과도 내다볼 수가 있는 것이다. 클레아는 어렸을 때의 일이 어떻게 지금의 자기 성격에 영향을 주었는지 이제 분명하게 볼 수가 있었다.  사랑받지 못했기 때문에 가졌던 콤플렉스, 미움, 슬픔, 죄악감, 아픔.  이들이 얽힌 응어리는 철이 든 참다운 어른이 되어야 비로소 풀 수가 있는 것이다. 클레아는 바로 그 한 발짝 앞에까지 와 있는 것이다.
  또 베아티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바로 가겠어요."  클레아는 얼른 되풀이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뜻을 따르겠다는 것을 강조하듯이 덧붙였다.  "그때 가서 이야기해요.  그럼 되지요?"
  "그럼 몸조심해라.  이따금 소식을 알려다오."
 
  베아티가 수화기를 내려놓는데 마침 테렉 포레스트가 거실에서 나왔다.  한 손에 신문을 움켜쥔 채 그는 아내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클레아였소?"
  "네, 런던으로 돌아왔대요."
  "왜 나를 바꿔 주지 않았지?  벌써 여러 달 동안 그애와 말해 본 일이 없어.  클레아는 내 딸이기도 하니 나도 그애와 이야기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째서 당신 혼자 클레아를 독차지하려고 드는 거야?"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그럴 생각은 조금도 없어요."
  "당신은 날 따돌리려 해.  내가 이 집 사람이 아닌 것처럼 만들려고 들어.  난 이 집에 묵으면서 지불만 하고 있어.  참 어처구니가 없어.  제정신이라면 벌써 나가 버렸을 거야."  지껄이는 동안 테렉의 얼굴은 점점 붉어졌다.  손은 신문을 틀어쥐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지요?"  베아티는 조용하게 되물었다.
  "그렇게 하기를 바라나?  방금 그 말은 그런 뜻이야?  긁어 부스럼은 만들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도대체 당신은 걸핏하면 꽉 입을 다물어 버려.  왜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솔직하게 말해 버리지 않지?  당신의 무표정과 얼어붙은 입에는 정말 진절머리가 나."  테렉은 완전히 흥분해서 지껄여 댔다.
  그는 화를 내면 턱이 부르르 떨리지, 하고 베아티는 남편을 보면서 생각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아이와 영락없이 닮았어.
  "난 클레아가 걱정이에요.  강도 사건은 그 아이에게 엄청난 쇼크를 주었던 거예요."  베아티는 될수록 태연하게 대답했다.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요 며칠 동안을 우유 배달부하고밖에는 말을 한 일이 없었다.  테렉과 얼굴을 마주 보면 꼭 싸움이 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무시하고 지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어느 사이에 쌍방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마치 상대방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며 살아가고 있다.
  "당신 탓이야.  당신이 그 아이를 그렇게 차갑게 대하지만 않았어도 클레아가 이 집을 나가지는 않았을 거야.  당신은 여자가 아니야!  인간이 아니야!"
  베아티는 차라리 울고 싶었다.  틀림이 없는 말이었다.  남편의 말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자기가 인간이라는 것, 남편도 클레아도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 괴로움을 겪게 된 것이다.  테렉의 불성실을, 그에게 변명의 기회조차 주지 않고 여러해 동안 미워해 왔다.  그를 자기에게 얽어매고 감옥의 괴로움을 맛보게 함으로써 값을 치르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녀 자신이 가옥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테렉은 날마다 스트레스를 해소하러 다녔다.  일에, 골프에, 다른 여자에게.  완전히 벽에 둘러싸여 살아 있는 송장 같은 생활을 강요당한 것은 오히려 베아티 편이었다.  테렉과 헤어져 재혼을 했어야 했던 것이다.  그랬으면 아마 또 아이를 낳고 행복한 여자로서 지낼 수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테렉도 새로운 행복을 맛볼 기회를 가질 수가 있었을 것이다.
  지금 돌아보니, 그 어린 클레아가 목격한 그날 밤의 일에 자기는 마음도 쓰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새사 그것이 어쨌다는 것이냐?  그런 어처구니없는 단 한 번의 사건 때문에 베아티는 일생을 망쳐 버렸다--그날 밤 이후로 세 사람은 가족이기를 포기해 버렸다.  베아티와 클레아는 남남 같은 사이가 되었다.  니노는 죽고 돈나는 떠났다.  베아티는 모든 죄를 테렉과 돈나에게 뒤집어씌웠다. 
  지금 베아티는, 그날 밤의 두 사람의 불성실과 그 뒤의 자신의 행동을 냉정하게 비교하며 자기의 죄가 너무나 크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불쌍한 테렉, 단 한 번의 실수로 영겁의 벌을 받고 있군.  베아티는 생각했다.  그 뒤로 테렉이 다른 여자에게서 위안을 찾은 것을 이제 베아티는 탓하지 않았다.
그도 남자다.  하지만 더 큰 잘못은 클레아를, 그녀의 탄생은 물론 그녀의 존재 자체마저 부정했던 일이다.
  "내가 자신을 탓한 일이 없는 줄 아세요?  나는 자시이 나빴던 것을 알고 있어요.  내가 낳은 자식하고도 제대로 대화를 나눌 수 없었던 것은 모두 내 잘못이었어요, 당신이 다른 여자와 어울려 다닌 것이 내 책임인 것과 마찬가지로요."
  테렉은 또 노여움으로 얼굴이 벌개졌다.
  "이번에는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그는 사실 베아티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 당황했다.
  "당신을 나무라고 있는 게 아니에요."
  베아티의 이 말에도 테렉의 노여움은 가라앉지를 않았다.
  "그렇다면 당신이 엄청나게 너그러운 여자란 말이야?  그렇다면 감지덕지해야겠군.  마치 부모가 자식에게 말하듯이 용서해 주네 어쩌네, 잘도 그런 소리를 하는군...."
  "난 부모가 될 생각은 없어요."
  "내게는 그렇게 들리는데.  다른 여자 때문에 당신한테 용서를 바랄 생각은 없어.  당신이 스스로 내 아내 역할을 그만둔 지 벌써 몇 년이 됐지?  이러쿵저러쿵 말할 권리가 없어."
  "그러니까 내가 뭐라고 했어요? 당신이 행복해지기를 바랄 뿐이에요."
  베아티가 말하자 테렉의 얼굴은 머리 속까지 새빨개졌다.
  "뭐라구?  내 귀가 의심스러운데.  이건 또 무슨 흉내야?"
  "당신이 이혼하고 싶으시다면 난 반대하지 않겠어요."  이 말은 지금이 아니라 몇 년이나 전에 햇어야 할 말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남편이 나가 주지 않기를 바랐다.  자기 눈에 닿는 곳에 놓아두고 벌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제 그것을 생각하면 스스로 정나미가 떨어지는 것이었다.
  테렉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한동안 아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은 이혼하고 싶은 거야?  그렇단 말이지?  누구 남자가 생겼나?"
  "아니에요, 물론.  그렇지 않아요."  이번에는 베아티가 나자빠질 차례였다.  그녀는 남편이 자신의 제안에 도리어 좋아라고 덤벼들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하지만 괜찮아요.  그럭저럭 해 나갈 수 있을 거예요.  내가 걱정이 되어 못한다면 미안하니까요."
  "그럼 당신은 혼자 살아가겠다는 말이야?  그래 어떻게 살아간단 말이지?  직업을 갖는 거야?  당신은 지금까지 밖에서 일해 본 일도 없는 주제에.  언제나 누군가가 당신을 돌봐주고 있었어.  먼저 당신의 아머지고 다음이 나였지.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가사뿐이고, 새로 무엇을 배우기에는 늦었어.  바로 정년이 되는 거야.  그걸 알아?  나는...2,3년이 지나면 연금을 받고 은퇴하는 거야.  이제 우리는 새 인생을 이룩할 나이가 못 돼.  당신이 그 말을 20년 전에 해주었다면 나는 다른 반려자를 찾을 기회가 있었을 거야.  그러나 당신은 돈나 때문에 나에게 죄의식을 느끼게 하고 당신 곁을 떠나지 못
하게 만들어 버렸어.  그리고 내가 무슨 일을 하건 일체 무시하고 세월만 보냈어.  이제 나도 노년이 되었어.  너무 나이를 먹은 것 같아.  이미 늦었어.  그런데 당신은 이제야 거기에 버티고 서서 `이혼하고 싶어요, 테렉.  내 집에서 나가고 싶지 않아요?  내겐 이제 당신이 필요 없어요.' 라는 거야?"
  테렉은 스스로 자신의 노여움에 휘말려 있었다.  몸을 떨며 얼굴은 검붉은 색이 되어 있었다.  베아티에게 바싹 다가들더니, 금방이라도 두 손으로 그녀의 목을 죄는 게 아닌가 싶은 형상을 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 마녀같으니.  제멋대로 놀아나는 마녀야, 죽여 주고 싶어.  내 말 들려?  널 죽여 주고 싶어.  넌 나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고 말했지?  빌어먹을, 웃기지 마.  너 때문에 나는 20년 동안이나 불행했단 말이야.  너를 팽개칠 수도 없엇고 가까이 갈 수도 없었어.  이 마녀...."  테렉은 거의 우는 소리로 정신없이 지껄이고 있었다.  무거운 감정에 몰려 체면도 돌보지 않고 흐느끼며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베아티는 살며시 남편의 몸에 팔을 감았다.  테렉은 거세게 몸을 떨면서 우뚝 서 있었다.  그의 등줄기를 베아티는 손으로 따뜻하게 쓰다듬으며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다정하게 속삭였다.
  "테렉...너무 그러지 말아요...미안해요...."
  "내겐 아무도 없단 말이야."  테렉은 아내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전에는 있었지만 이젠 헤어졌어.  내가 당신에게서 풀려나지 못했기 때문이야."
  "미안해요, 테렉."  그녀는 결코 빈정거리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남편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했다.
  "난 어디로 가면 좋지?  알 수가 없군...정년 퇴직까지 하고 나면 할 일도 없어져 버려.  지금도 여간 외로운 게 아닌데... 더 고독해지겠지."
  "가지 말아요."  베아티는 남편의 등을 따뜻하게 쓰다듬으면서 그이 몸의 온기에 마음이 아늑해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데도 가지 말아요.  당신이 없으면 난 쓸쓸해요.  난 그저 당신이 행복해지기를 바라고 말했을 뿐이에요... 만일 나가는 것이 행복하다면 말이에요.  하지만 나는 당신이 있어 주면 좋겠어요."
  "다시 한번 처음부터 시작할 수 없을까?"  테렉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 다시 한번 시작해 보지 않겠어요?"  베아티는 힘있게 단언하고, 남편의 등에 대었던 손을 은발 위에 올렸다.
  테렉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몸을 조금 아내 쪽으로 기울였다.  더 이상 떨지 않았고, 숨결도 가라앉아 있었다.
  
  클레아는 뭔지 모를 갑작스런 쇼크에 눈이 떠졌다.  깜깜한 방안에서 그녀는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문이 기세좋게 열리고 파멜라가 뛰어들어왔다.  불이 켜졌다.
  "왜 그러니, 클레아?  무슨 일이 있었니, 죽는 것처럼 비명을 지르게?"
  클레아는 울음을 터뜨리며 엎드렸다.  파멜라는 침대가에 앉아 살며시클레아의 몸에 팔을 둘렀다. 그러고는 아기를 달래듯이 천천히 흔들었다.  클레아는 울먹이며,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지껄이기 시작했다.  말은 폭포수처럼 입에서 쏟아져 나오면서 멈추지를 않았다.  모든 것을 파멜라에게 말해 버리고 싶었다, 상처에서 반창고를 떼어내고 괸 고름을 단숨에 짜내 버리듯이.  파멜라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클레아는 지껄이고 또 지껄였다.  파멜라는 클레아를 꼭 끌어안고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클레아는 겨우 말을 마치고, 가슴에 막혔던 응어리를 뱉어내듯이 크게 숨을 쉬었다.
  "미안해.  내가 왜 이러는지...."
  "무슨 소리야.  그대로 속에 묻어 두는 것보다 말해버리는 것이 훨씬 나아.  자아, 이리 와서 차를 마시지 않겠니?  한 모금은 마실 수 있겠지?"
  클레아는 불안한 기분이 되었다.  너무 지껄여 버린 것 같았다.  이렇게 툭툭 털어놓고 지껄이는 것이 아니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일까지 파멜라에게 말해 버린 것 같았다.  그녀 앞에서 발가벗고 서 있는 기분이었다.  파멜라의 눈을 보기가 쑥스러웠다.
  "그렇게 무안한 얼굴을 할 게 뭐 있니."  파멜라는 클레아의 가운을 집어들고 펼쳤다.  "이것을 입어.  떨고 있지 않니.  자기 마음속에서 생각하는 일이 자기만의 특별한 일이라고 생각하니?  우리 모두 누구나 그렇다는 것을 몰라?  폭한의 꿈을 꾸었다고 그렇게 놀랄 것이 뭐가 있니?  사건 때 공포가 너무나 컸기 때문에 계속 달라붙어 있을 뿐이야.  네가 사건 그 자체를 잊으려고 노력만 하면 기억은 차츰 네 잠재 의식에서 빠져나가게 돼.  그때까지만 참으면 되는 거야."
  클레아는 파멜라를 따라 복도를 지나 주방으로 드러가, 파멜라가 주전자를 불에 얹고 찻잔을 준비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하지만 나는 왜... 당하고 말았지?  어째서지, 파멜라?"  겨우 알아들을 만한 가냘픈 목소리로 클레아는 또 끈덕지게 물었다.
  "그것은 그저 무서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없니?  너는 지금까지 그것말고큰 무서움을 겪어 본 일은 없었니?  내가 말하는 것은, 정말 겁나는...그것만 생각하고 있는다면 몸을 지탱하지 못할 것 같은, 그래서 어떻게든 극복해야 할 그런 경험말이야.  내 친구 중에 지독한 고소공포증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었어.  벼랑 끝에 서거나 10층 창문에서 밖을 내다보기만 하면 균형을 잃고 떨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든대.  그는 밤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꿈에 시달리고 있었어.  그는 마침내 결심하고, 다만 고소공포증을 고치기 위해서 웨일즈의 높은 산에 올랐어.  그러나 그 뒤로 등산은 그의 취미가 되어 버렸어."
  "그것과는 달라.  글쎄... 산은 특성이 없고 사람을 위협하고나 하지 않아.  비교할 수가 없어."
  "어째서 다르니?  공포란 특별한 감정이 아니잖니.  너에게 꿈을 꾸게 만든 것은 공포심이야, 너를 덮친 폭한이 아니라.  폭한은 너의 머릿속까지 자기 마음대로 할 수는 없어.  꿈을 꾸는 것은 너니까 말이야.  꿈 자체가 아니라 꿈을 꾸는 마음이 문제인 거야.  가슴에 손을 대고 생각해 보렴, 꿈을 꾼 날 어떤 기분으로 있었는가를, 꿈의 내용이 아니랴."
  "같은 일이야."  클레아는 식탁에 팔꿈치를 짚고 손으로 턱을 받쳤다.  아까부터 다리가 떨리고 있었다.  "똑같은 꿈만 꾸는걸.  그때마다 속이 메슥거려.  지금도 그래.  그것을 생각할 때마다 느글느글해."
  주전자가 기세좋게 수증기를 뿜었다.  파멜라는 바로 불을 끄고, 먼저 포트를 데우고 이어 차를 따랐다.  클레아는 마치 차를 따르는 것을 처음 보는 듯이 가만히 파멜라의 손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넌 그것을 가슴속에 꼭꼭 쟁여 두고 누구에게도 이야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꿈을 꾸게 되었던 거야.  그러니 이젠 괜찮을 거야, 클레아."  어깨 너머로 클레아를 바라보며 파멜라는 조용히 말했다.
  "아니야, 이미 여러번 이야기했어... 경찰에게."
  "그런 사건에 대해서가 아니니.  그게 아니라 네 가슴속에 담아 둔 일말이야.  노상 혼자 생각하고 있으니까 잊을 수가 없었던 거야.  하지만 이제 이야기해 버렸으니까 괜찮을 거야."
  파멜라가 눈앞에 찻잔을 놓을 때까지 클레아는 가만히 테이블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무나 창피하게 생각되어서 말을 못한 거야, 어째서 내가 이런 꿈을 꾸는가 하고?  안 그래?"  파멜라는 한 팔로 살며시 클레아의 어깨를 끌어안아 주었다.  "자신을 나무라는 일은 이제 그만둬.  부끄러워할 게 뭐가 있니.  애당초 자신에게 그런 사건이 일어났었다는 것을 마음이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자꾸 꿈을 꾸게 되는 거야.  너의 머리는 일어난 일도 알고 있고 폭한의 존재도 인정하고 있지만 말이야.  무아해 할 것 없어.  화를 내라구.  폭한을 미워하고 쫓아내는 거야, 너의 마음에서."
  클레아는 힘없이 웃었다.  파멜라는 그것을 보고 얼른 말했다.
  "그렇지, 그러면 되는 거야.  나 토우스트가 먹고 싶어지는군.  너도 하나 들겠니?  난 이제 다이어트 같은 건 개에게나 줘야겠어.  우리 한밤중의 잔치를 벌이지 않을래?  너 어렸을 때 읽었지, 한밤중에 사람들이 모두 잠든 뒤에 시작되는 잔치 이야기?  스쿨 스토리에서 말이야.  난 그것을 동경했지, 바보처럼."
  "기억이 없어."  키들거리며 빵을 토우스트에 던져넣고 마말레이드의 병을 찾는 파멜라를 무심히 바라보면서 클레아는 대답했다.
  "그래?  다들 홀딱 빠져 정신이 없었는데.  기묘한 이야기였어.  좀 멋진 퍼블릭 스쿨에서 일어난 일이었어.  신비로운 프랑스인 여교사가 레스비언으로 위장한 스파이가 되기도 하고, 그 선생을 진심으로 경애하던 여주인공이---무릎까지밖에 내려오지 않는 스포츠 웨어 같은 것을 입은 귀여운 아인데---울며불며 그 가면을 벗기는 마음 아픈 신도 있었어.  요즘은 그런 순진한 내용의 책을 내는 출판사는 없을 것 같아.  문학의 한 장르를 프로이트가 파괴해 버렸어."
  클레아는 웃기 시작했다.
  "나도 자주 에니드 브라이언의 소설을 읽지만...그녀의 것은 아무래도 아가사 크리스티의 주니어판 같은 느낌이야."
  "네 말의 뜻을 알겠어.  난 고교 때부터 이미 어떤 형태의 성적인 내용을 소설에서 찾고 있었던 것 같아."  파멜라는 하품을 했다.
  "어마, 넌 무척 조숙했구나?"
  "그럼.  섹스란 참 멋있는 테마가 아니니?"  빙그레 웃어 보이더니 그 웃음을 갑자기 거두었다.
  "왜 그러니?"  클레아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그저 좀 혼란해졌을 뿐이야."  파멜라는 잠시 말을 끊고 생각에 잠겨 있더니 이윽고 불쑥 말했다.  "클레아...."
  "응?"
  "나...나 말이야...아아, 바보 같아."
  "무슨 일이니?"  파멜라가 보기 드물게 초조한 듯이 망설이는 것을 보자 클레아는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사랑을 하고 있는 것 같아."  결심을 한 듯이 말했다.
  클레아는 파멜라의 너무나 뜻밖의 말에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뭐가 그렇게 우습니!"  파멜라가 노려보았다.
  "미안해.  마치 불치의 병을 선고받은 것 같은 네 표정이 우스웠어."
  "사실 그렇게 느끼는걸.  남들이 사랑이나 애정 이야기를 하는 것을 난 신물이 나도록 들었어.  한번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면 끝이 없으니 말이야.  노래도 소설도 여성 잡지도 영화도 테마는 모두 사랑이지 뭐니.  성서나 셰익스피어까지 그 이야기였어.  심지어 콘프레이크스의 상자에까지 씌어 있지 않겠니.  마치 사랑이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거나 되는 것처럼 말이야.  그것으로 사람이 상처받기도 하고 죽고 싶어지기까지도 한다는 것은 가르쳐 주지 않고 말이야."  파멜라는 거기에서 문득 입을 다물었다.  자기가 한 말에 자신이 깜짝 놀란 것 같았다.  파멜라의 말은 공중을 떠돌며, 크레스마스 트리에 장식된 꼬마 전등처럼 반짝반짝 빛을 내면서 떨고 있었다.
  클레아는 믿을수 없다는 듯한 눈으로 파멜라를 바라보았다.
  "상대가 도대체 누구니?"
  파멜라의 얼굴이 금방 붉어졌다.
  "이제 잊어버렸어."
  그녀가 일어서려고 하는 것을 클레아는 팔을 붙잡아 도로 앉혔다.
  "보라구, 넌 내 하찮은 짜증을 끝까지 들어주었잖니?  이번에는 내 차례야.  이야기해 버리면 마음이 편해질 거야."
  "그럴까?...그렇겠군.  하지 않을 거면 차라리 처음부터 얘기를 꺼내지 않았어야 했어."
  "래리는 아니야, 그렇지?"  자신도 이상할 만큼 무거운 기분으로 확인했다.  래리와 파멜라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어.  어쩌다 육체적으로 맺어질 수 있을지는 모르나, 그 두 사람이 서로에게 빠져 있는 그림은 아무래도 그릴 수가 없어.  래리는 그런 타입이 아니야.  파멜라도 그렇지 않은 줄 알았는데, 고쳐 생각해야 할 것 같군.
  "래리 히리러알구?  웃기지 말라구.  천만의 말씀이야."  거기서 파멜라는 조금 망설였다.  "내 상대는 조야, 조 하버라구."  얼굴이 빨개진 채 파멜라는 빵에 버터를 발라서 클레아에게 건네 주고 마말레이드의 병을 밀어 주었다.  "한밤중의 수다란 위험한 것이구나, 비밀로 간직해 두자고 마음에 다진 일까지도 네 앞에서 줄줄 지껄여 버렸으니.  방금 내가 한 말은 모두 잊어버려 줘."
  "조 하버와 네가 그렇게 자주 만나고 있는 줄은 까맣게 몰랐구나.  무척 조심스러운 모양이지?"  클레아는 토우스트에 마말레이드를 바르고, 파멜라가 버터도 바르지 않고 마말레이드를 빵에 가만히 문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주 만나지는 않았어.  만나면 참 따뜻하고 친절하게 대해 줘, 마치 누이동생을 대하듯.  난 남자의 속을 알 수 없어."  파멜라는 자신에 대해서 화를 좀 내고 있는 것 같았다.  "아아, 난 정말 바보야.  자기가 사랑을 하고 있는 것조차 믿을 수가 없으니.  나를 마치 마마 환자처럼 다루는 사람이 좋아지다니.  할 짓이 못돼, 도대체."
  "그는 알고 있니....?"  네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하고 말하려다가 클레아는 입을 다불었다.  파멜라의 얼굴을 보니, 그거은 어리석은 질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에게 눈치채이기 싫어."  거친 목소리였다.  "내가 그런 말을 조에게 할 것 같니?  나 자신이 그런 일이 없도록 조심해 왔는데.  바보스런 일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나에 대한 그의 평가는 제로야.  그런 그를 어째서 좋아하게 됐는지 알 수 없지만, 마음을 고쳐 먹을 수가 없어."  파멜라는 거기서 잠깐 말을 끊었다.  "하지만 그도 어렴풋이 눈치는 채고 있을 거야.  요전날 밤 그와 키스했어.  그랬더니 그는 나와 관계를 가지고 싶지 않다고 말하지 뭐니...내게 친절하게 대해 주기는 하지만 그 문제에 대해서는 태도가 분명해.  마치 돈을 꾸어 달라는 것을 거절하는 것 같았어.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지."
  클레아는 파멜라에게 진심으로 동정을 느꼈다.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하여튼 두 사람의 세계는 전혀 달라서, 두 사람이 장차 행복해진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조 하버는 진지하고 온화하고 헌신적인 의사여서, 파멜라가 살고 있는 화려한 생활은 성미체 맞지 않을 것이다.  어째서 파멜라는 좀더 자신과 비슷한 세계의 사람을 상대로 고르지 않았을까.  하지만 누구나 사람을 골라서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불러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야, 문득 깨닫고 보니 거기에 있는 그런 것이야.
 
  이튿날부터 클레아는 직장으로 돌아갔다.  파멜라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그것이 좋다는 것으로 낙착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마음을 잡을 수가 없었다.  예전처럼 냉정하게 자신을 가지고 행동하려고 무척 애를 썼다.  래리는, 동료들에게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강도에게 폭행당한 후유증으로 쉬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레이프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재판이 열리고 신문에 실리게 되면, 기사와 맞추어 보고 진상을 알게 되는 사람이 생겨나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회사를 그만두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무실은 밝고 현대적이었다.  커다란 오피스 빌딩의 3층을 반쯤 차지하고 있었다.  클레아에게 방 하나가 주어지고, 그녀의 비서는 다른 타이피스트들과 함께 그 바깥쪽의 큰 방에 있었다.  클레아의 방은 커서 데스크와 책장 두세 개와 파일용의 스틸 캐비넷을 들여놓고도 스페이스는 많았다.  하지만 래리의 방은 그 배나 되는 크기였으며, 그 저쪽에는 아트 디렉터의 방이 인접해 있었다.  그러나 제일 큰 것은 계리사의 방이었다.  돈을 다루는 사람의 방이니 그럴 수밖에 없겟지.
  클레아는 출근하면 큰 방을 지나 자기 방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큰방의 여자들은 클레아를 보더니 깜짝 놀라 호기심의 눈초리를 향했다.
  "좀 어때요?  이제 괜찮아요?", 
  "머리의 상처는 어때요?", 
  "큰일이었군요.  도둑맞은 물건이 많아?"
  "네.", "아니오.", "네."  어느 물음에도 클레아는 미소를 띠고 대답했다.
  래리가 클레아의 모습을 보았다.
  "여어, 어서 와요."  나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맞이했으나, 사실은 클레아는 래리에게 오늘부터 온다는 것을 알리지 않았었다.
  "나와 상의 좀 해요."  하고 래리는 성큼성큼 자기 방으로 향했다.
  큰방의 여자들의 눈길이 래리의 뒷모습을 쫓았다.  그의 숭배자가 많은 것 같았다.  남성적인 매력을 듬뿍 지니고 있으면서도,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떼를 쓰는 아이 같은 표정을 보이기도 하는 점이 그녀들의 마음을 끄는 모양이었다.  클레아는 잠깐 얼굴을 찌푸렸다.
  "책상 위에 처리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어요.  먼저 그것부터 정리해야지요."  클레아는 항의했다.
  "이리 좀 와요."  항의에도 아랑곳없이 래리는 명령했다.
  "클레아는 할 수 없이 어깨를 추스르고, 우편물의 봉투를 뜯어 간종그리고 있는 비서에게 말을 걸었다.
  "그럼 이따가 봐요."
  "네, 그러세요."  비서 제니는 쾌활하게 응했다.  그녀는, 클레아가 쉬고 있는 동안은 혼자 다 처리했으니 걱정 말라는 투였다.  클레아는 어쩐지 좀 마음에 걸렸다--제니에게서 자신감이 느껴졌다.
  래리는 창문 앞에 서 있었다.  검은 딧머리와 옆얼굴의 수염을 깎은 자리가 빛을 받아 푸르스름한 윤기를 띠고 있었다.  이쪽으로 등을 돌리고 호주머니의 동전을 쩔렁거리고 있었다.
  "좀 기다려 줄 수 없어요, 래리?"
  클레아가 초조해 하며 말을 걸자 래리는 돌아보았다.
  "상의할 일이 산처럼 많아."
  "서류를 훑어보지 않고는 상의에 응할 수가 없어요.  우선 일에 다시 익숙해질 때까지 시간을 좀 줄 줄 알았는데."
  "오늘 아침은 왜 그렇게 잔소리가 많지?"
  "잔소리가 아니에요.  어서 평상시의 페이스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에요.  여기에 서서 이야기하고 있으면 그만큼 늦어질 뿐이에요."
  "당신이 다시 일할 마음이 되어 주어서 기뻐.  그러나 나를 그렇게 야단치지 말라구."
  "야단을 누가 쳐요?  사람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사람이 당신말고 이 근처에 또 누가 있겠어요."
  "오늘 아침 일어날 때 방향이 안 좋았나?"
  래리는 말을 슬쩍 돌려서 클레아를 나무랐지만, 그것이 도리어 클레아의 울화를 터뜨리게 하는 결과가 되었다.  오늘 아침 잠이 깨었을 때부터 클레아의 신경은 날카로와져 있었다.  그런 뒤로는, 모든 것이 자기에게 거스르고 있다고만 생각되는 것이었다.  버스는 뭍에 올라온 고래처럼 느릿느릿하게 달렸고, 차표를 내주는 기계가 메워졌는데도 차장은 그것을 볼펜 끝으로 건드려 더욱 나오기 어렵게 만들고, 게다가 구두의 왼쪽 뒷굽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오피스로 향해 뛰기 시작하자 느닷없이 한 남자가 가까이에서 휘파람을 휙 불어서 그를 붙잡아 따귀라도 갈겨 주고 싶었다.  오늘 아침은 상대가 남자라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났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러지요?"  클레아는 래리에게는 도전적인 투로 나왔다.
  래리는 말없이 책상 저쪽 자리에 앉더니 맞은쪽 의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앉으라구!"
  나가려고 하던 클레아는, 뒷머리가 곤두서는 것 같은 울림이 느껴지는 래리의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발을 멈추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큰 소리로 대들고 싶은 기분과 애써 싸우고 있었다.  그 눈은 클레아의 마음 밑바닥에서 지금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꿰뚫어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내 앞에서 여자 같은 짓은 하지 말라구, 클레아."
  "그게 무슨 뜻이지요?"  퉁명스런 목소리였다.
  "내가 지금 마이크 프래튼을 여기에 불러 앉으라고 한다면 놀란 햄스터(쥐의 일종)처럼 도망치려고는 하지 않겠지."
  래리의 표현에 클레아는 화를 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를 마음으로 할 수 없이 의자에 앉았다.  래리는 빙긋 웃었다.
  "좋았어.  우선 남녀 차별의 건은 일시적인 휴전으로 돌릴까, 당신은 여자고 나는 남자라는 것은 인정하기로 하고.  그럼 일을 시작해도 좋겠어?"
  마침내 클레아는 참을 수 없어 웃음을 터뜨렸다.
  "네.  당신은 정말 당해낼 수가 없어요, 마치 내 머릿속에 살고 있는 것처럼 나를 마음대로 부리는 걸요.  내 마음을 읽으려는 노력을 그만두어 줄 수 없어요?"
  "난 노력 같은 건 안 해, 당신의 속마음을 읽는 것은 너무나 쉬우니까.  얼굴에 딱 씌어 있지.  당신은 생각하고 있는 것을 금방 얼굴에 나타내는걸.  전에는 당신을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 통 알 수가 없었어, 뚜껑을 꼭 덮어두고 있었으니까 말이야.  그러나 요 몇주 동안 당신은 모든 것을 다 드러내고 있어.  당신 생각을 나에게 눈치채이기 싫으면 드러내지 않으면 될 거 아니야?"
  "충고 말씀 고마워요."
  "당연한 일이겠지만, 여자는 레이프의 후유증으로서 남성 전체를 미워하는 수가 흔히 있지."
  순간 클레아는 래리의 머리 위의 일점을 바라보며 몸이 굳어졌다.  또 노여움이 몸 속에 넘쳤다.
  "당신은 그 방면의 권위자인 것 같군요."
  "천만에, 어디서 읽었을 뿐이야.  난 레이프당한 여자는 당신말고는 아무도 몰라...."
  "그 이야기는 이제 그만둘 수 없어요?  마치 교통 사고의 피해자에 불과한 것처럼 아무렇게나...."  
  "보기에 따라서는 당신의 경우도 그런 것이지."  충분히 생각하고 한 말이라는 듯이 침착한 목소리였다.  느낌 탓인지 래리는 미소까지 띠고 가만히 클레아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이 건에 대해서 학술적으로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느냐고 클레아에게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에게 가해진, 극단적으로 잔혹하고 비인간적인 행위를 어른답게 냉정하게 되새겨 보지 않겠느냐고.
  자신의 거세어진 감정에 몸을 떨면서 클레아는 자리를 차고 일어서려고 했다.  이대로 있다간 무엇을 던지거나 욕설을 퍼붓거나, 나중에 자기도 생각이 잘 안 날 행동을 해버릴 것 같아서 무서웠다.
  "앉으라구, 부탁이야."  래리는 느긋하게 의자 등에 몸을 맡겼다.
  클레아는 마지못해 래리를 마주 보았다.  거기에는, 신으로부터 내려진 자신의 힘과 깊은 사려와 고귀한 남자다움을 잘 아는데다가, 다른 사람이 들여다볼 수 없는 세계조차 뚫어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게다가 그런 것을 모른 체 하는 여유까지 가진 남자가 앉아 있었다.  어떤 사회에서도 남자가 지배하고 있다.  입으로 아무리 남녀 평등을 소리 높이 외쳐 봤자 별수가 없다. 남녀 평등도 남자가 생색을 내며 주는 것인 한 진짜가 될 수 없다.  남녀 평등이란 어느 쪽으로부터도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같은 레벨에 나란히 서 있어야 하는 것이다.
  "당신이 길을 가로지르다가 차에 치인 거나 같은 거란 말이오."  래리는 말했다.
  "교통 사고와는 달라요!"
  "우연히 안 좋은 시간에 안 좋은 곳에 있엇던 것뿐이야.  운이 나빴어."
  "그런 이야기는 듣기 싫어요!"
  "당신이 길을 가로지를 때마다 스피드광 운전수와 마주치는 일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당신이 만나는 남자마다 모두 레이프하려고 드는 것은 아니야.  당신은 아직, 특수한 케이스와 일반적인 경우를 혼동하고 있어.  그날의 운이 나빴을 뿐이야.  아무튼 비인간적인 새디스트와 부딪쳐 버렸으니까 말이야.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껍데기 속에만 틀어박혀 있거나 반대로 눈앞에 나타나는 남자에게는 닥치는 대로 공격을 퍼붓거나 할 것은 없어.  당시이 원해서 레이프당한 것도 아니고...."
  "그렇게 이해해 주시니 다행이군요!"
  "그러나 톰 프레스코트를 택한 것은 당신이야.  세상에 흔하고 흔한 남자들 속에서 당신은 당신의 감정을 잔인하게 짓밟고 가버리는 그런 녀석을 일부러 택했어.  그것은 사로라고는 할 수 없어.  당신에겐 매저키스트적인 면이 있는 것은 아닐까, 클레아?  그렇지 않다면 당신이 이처럼 언제까지나 쓸데없는 생각에 빠져 있을 턱이 없어."
  클레아는 이제 어처구니가 없어서 래리를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런 클레아를 래리는 가만히 마주 쳐다보았다.  순간 래리는 눈썹을 슬쩍 치켜올리며 무언의 도전을 했다.
  클레아는 도전은 고사하고 아무말도 할 수 없고 아무 대답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말없이 앉아 있으니까 래리가 또 입을 열었다.
  "자아, 우리 이제 서로 당기고 밀고 하며 신경전을 벌일 것 없이 정상적인 두 성인으로서 일을 시작하지 않겠어?  나를 공격하기 위해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은 당신으로서는 시간의 낭비일 뿐이니까, 앞으로의 더 건설적인 목적을 위해서 이젠 아껴 두는 것이 좋을 거야."  거기서 래리는 클레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내말 알아듣겠지?"
  "이제 그런 이야기는 그만두세요."  클레아는 아까보다 훨씬 가라앉은 마음으로 대답했다.  "당신은 정말 제멋대로고 억지스런 분이니까요."
  래리는 웃었다.
  "그럼 됐어요."  그러고는 두툼한 서류 뭉치를 집어들었다.  "자아, 그러면 우선 당면한 문제로 이야기를 옮기자구....  먼저 라이드의 계약 건인데, 그래픽부에서 어디까지 나아가고 있는가의 설명부터 시작하겠어."



11장
          
  클레아는 날마다 경찰로부터 전화가 걸려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재판 일정은 이미 정해져 있을 것이다. 아침마다 침실을 나오면 먼저 현관의 매트 위를 보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우편물을 집어드는 것이 불발탄을 손에 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도무지 통지가 오지를 않았다. 이제 여름도 다 가고 있는데, 도리어 더위가 하루하루 더해가고 있었다. 불쾌지수가 높아 사람들은 하찮은 일에도 짜증을 냈다. 
  멈추어 서서 하는 이야기가, "왜  이렇게 날이 더울까."에서 시작해서, "언제나 가야 비가 한바탕 쏟아질까."로 이어진다. 일을 할 수 있는 기온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모두 한숨을 쉬며 주저앉는 것이었다. 도시 위의 하늘은 활짝 개고 구름 한 점 없었다. 바라보고 있으면 눈이 아파지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클레아와 파멜라는 헤엄을 치러 갔으나, 풀은 너무나 혼잡해서 팔을 한 번 들면 내릴 자리도 없을 지경이었다.
  래리도 화를 잘 내게 되었다. 사람들의 머리가 자기처럼 잘 돌아가지를 않는다고 화를 터뜨리는 것이었다. 그러면 클레아는 뒤를 따라다니며 그의 신경질의 희생자의 치료와 위로에 바빴기 때문에 그녀의 일도 그만큼 늘었다. 
  "당신이 없으면 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를 거야."하고 래리는 말했다.
  "내가 없으면 화도 덜 내게 되겠죠, 뒤처리해 줄 사람이 없으니까." 하고 클레아는 대답했다. 불끈하길 잘하고 쉬 뜨거워지는 것이 그의 성질이었다. 그의 기분은 지중해의 기후 같았다―올리브색의 살갗은 건강하게 반짝이고 성질은 쾌활하고 에너지는 넘치고.
  "이제 해는 꼴도 보기 싫어." 어느 날 아침 파멜라는 말했다. "9월에 들어섰는데도 더위가 물러날 줄을 모르다니!"
  "그런 소리하지 말아. 추워지면 이 더위가 그리워질 텐데." 클레아는 어머니한테서 온 편지를 읽고 있었다. "우리 부모님은 이 달 말부터 바다 여행을 떠나시는 모양이야, 이집트로……. 이해할 수가 없어, 고르고 골라 이집트라니."
  "이집트가 뭐 나쁘니? 나도 가고 싶은데." 파멜라는 눈길을 창 밖으로 옮겨, 끝없이 이어져 있는 푸른 하늘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불평을 해봤자 더위는 까딱도 않는군. 나 말이야, 어제 점심 시간에는 식사는 않고 이리로 돌아와서 샤워를 했어. 더워서 미칠 지경이지 뭐니."
  "이집트라." 편지를 봉투에 넣으면서 클레아는 고개를 저었다. 성스런 악어 이야기 같은 것을 주고받으며 루크솔의 신전을 거니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을 그려보려고 했으나 아무래도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보고, 너와 함께 주말에 집에 돌아오지 않겠느냐는 거야. 너 가겠니?" 일단 권유는 해보았다. 파멜라가 응하리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너무나 조용해서 너는 따분할 거야."
  "나 브라이튼을 좋아해. 가겠어. 언제 가게 되니?"
  "내주 말에 갈까 해." 클레아는 속으로, 파멜라가 응하는 데 놀랐다.
  "마침 잘 됐구나." 파멜라는 일어섰다. "아, 이제  나가 봐야지. 라이트 밑은 지옥이야. 무더운 바깥보다 더 덥다구. 얼마 안 가 난 틀림없이 녹아 버릴 거야, 내가 있었던 곳에는 거품만 조금 남고……."
  그날 오후 클레아는, 금요일에 조퇴하겠다고 래리에게 신청했다.
  "브라이튼에 부모님을 뵈러 가고 싶은데, 기차 시간에 대야 하니까요."
  "그날은 네 시에 코린을 만나기로 되어  있어." 래리는 얼굴을 찌푸렸다.
  "나도 동석해야 해요?"
  "그렇지."
  "래리, 나도 좀 쉬고 싶어요……무더운 날씨가 계속되니……."
  "토요일 아침, 내가 차로 데려다 주면 안 될까?" 그렇게 말하고 래리는 빙긋 웃었다. 
  "그거 좋은 생각이지?" 그는 클레아가 대답도 하기 전에 자기 착상에 취해 있었다. 
  "그렇지, 그렇게 하자구." 그러고는 자기의 예정표를 펼쳤다. "모린에 좋은 호텔을 예약해야겠군. 해변의 주말이라, 그거 좋군." 
  "파멜라도 같이 가는 거예요." 클레아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했다. 
  무엇 때문에 래리는 또 브라이튼까지 갈 마음이 생겼을까? 즉석에서 결정하는 것이 래리의 장기지만. 그것으로 사람을 놀라게 하는 수가 많아. 손가락 하나로 사람을 뛰게 만들며 좋아하는 것은 아닐까?
  "내 차는 몇 명이고 탈 수 있어." 의자에 등을 대고 손가락으로 데스크 끝을 두드리며 말했다. 
  "내 아이디어가 마음에 안 들어? 내가 당신의 부모님 마음에 안 들까 싶어 걱정인가? 그렇게 내 인  "나도 알겠어. 물론이지, 너무나 괴로웠는걸. 하지만 너는 용기가……."
  "그건 기대하지 말아요, 너무……."
  "알고있어. 니노 때도 너무나 갑작스러웠지."
  어느 사이에 피하고 있던 화제에 다가서고 있었다. 순간 클레아의 표정이 흐려지는 것을 보고 어머니는 흠칫했다.
  "미안하구나, 나……."
  "아니, 괜찮아요." 따뜻한 눈으로 어머니를 보았다. 문득 보니 파멜라가 아버지와 뜰을 거닐고 있었다. 클레아는 화제를 바꾸었다. 
  "이집트가 덥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예방주사는 맞았어요?" 베아티도 바로 기분을 바꾸어 그 화제로 따라왔다. 
  "너의 아빠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른단다. 가져가야 할 물건의 리스트까지 만들고 야단이야, 무엇이든지 깔끔하게 하는 사람이니까."
  "두 분 이제 사이가 좋아진 것 같아요."  클레아는 감히 그 말을 입에 올렸다.
  어머니는 방긋 웃었다.
  "그렇단다. 둘이 다 노력하고 있어. 그 동안 나는 너의 아버지한테 너무 심하게 했어. 사람을 그렇게 언제까지나 용서하지 않을 권리란 없는 거야. 인생은 짧은데 계속 그런 상태로 있어 봤자 무엇하겠니?"
           
  한참 지나자 부모는 장미 시렁 밑에서 파멜라와 한가하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클레아와 래리는 뜰로 나왔다.
  "난 당신의 어미니가 참 좋아." 나뭇잎을 하나 따서 그것으로 슬쩍 클레아의 볼을 쓰다듬으면서 래리는 말했다. 연초록의 잎이 도톰하고 얼음처럼 차가와 클레아는 희미하게 몸을 떨었다. 
  "난 이 나무 처음보는데, 무슨 나무지?"
  "아빠한테 물어봐요, 난 몰라요."
  뜰의 울타리에서 작은 새들이 날개를 쉬고 앉아 꼬리를 부채처럼 펼치고 대가리를 깃털 속에 파묻으며 털을 간종그리고 있었다.
  "무엇을 생각하지?" 물어 오는 래리를 클레아는 원망스럽게 쳐다봤다.
  "아무것도요."사실 클레아는 레이프 때 받은 몸의 상처, 출혈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몸도 마음도 자연스럽게 노력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실로 저마다의 상처를 꿰매고 막아서 지금은 흔적도 없었다. 클레아가 어렸을 때였다. 집에서 기르던 고양이가 밖에서 상처를 입고 돌아왔는데, 붕대를 감아 주었더니 고양이는 그것을 물어뜯고는 몇 시간 동안이나 그대로 앉아서 피가 스며 나오는 다리의 상처를 줄곧 혀로 핥고 있었다. 참을성 있게, 때로는 위엄까지 풍기며, 싫증도 낼 줄 모르고, 마치 임무처럼 상처가 나을 때까지 같은 행위를 계속하고 있었다. 클레아도 이처럼, 다시금 그때의 아픔을 느끼고 이리저리 사실을 되 생각하고 새로운 빛으로 사건을 다시 보는 것도 일종의 자연치료의 일환이 되는 것일까? 일을 할 때 클레아는 다른 사람이 자기를 보는 것이 싫었다. 자기의 재생을 위해서는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곳에 혼자있고 싶었다. 지금은 일이 그 캄플라지의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바쁘게 일하는 가운데 클레아는 늘 상처를 자신의 혀로 핥고 있었다. 꼬리를 늘어뜨리고 귀를 뒤로 눕히고는 한결같이 발의 상처를 쓰다듬기에 몰두하고 있던 고양이처럼. 그런 때 래리의 눈길을 느끼는 것이 제일 싫었다.
  "이따금 당신이 취한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어." 
  래리의 말에 클레아는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당신 어떻게 된 거 아니에요?"
  "내가? 왜 그렇게 까슬까슬하게 나오지? 당신하고 이야기하고 있으면 조심조심 엉겅퀴를 만지는 기분이 들어." 
  클레아는 웃었다. "그러면 답은 '만지지 않으면 돼요' 예요."
  "그것 참 명답이군." 좀 난폭하게 말하고 래리는 걷기 시작했다. 클레아는 당황하여 뒤를 쫓았다. 래리는 도대체 왜 저러는 것일까? 
  아버지와 어머니가 매우 당연한 것처럼 가벼운 기분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고 클레아는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두 사람 다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갑자기 나이를 먹은 것 같았다. 차분해지기도 했다. 무언가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 같은……아마 나이에 어울리는 분별력을 갖게 된 것이겠지.
  두 사람은 여행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신전이며 종려나무며 번쩍거리는 신상 같은 것이 컬러 사진으로 실려 있는 이집트의 책을 펼쳐 놓고 봄의 히아신스 같은 푸른색이나 라피스라즈리로 채색된 누비아의 얼굴이나 머리 부분의 상을 앞에 놓고 서로의 주의를 끌고 있었다. 
  "어마, 이것 좀 보세요. 이 피라미드도 구경할 수 있어요……."
  그런 두 사람을 보며 클레아는 부러움과 연민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마치 거친 바다에서 무사히 상륙하고 싶은 마음과 슬픈 여로의 끝을 맞이하는 깨달음 사이에서 흔들리는 마음처럼.



12장

비바람이 몰려와서, 온통 도시를 뒤덮고 있는 이 더위를 날려보내 줬으면 하고 클레아는 애타게 바랐다. 그러나 그런 기미는 없고 더위는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그러던 9월초의 어느 날 밤이었다. 땀이 밴 몸으로 자리에 든 클레아는 새벽녘의 냉기에 눈을 떴다. 밖에서는 빗방울이 포도를 때리는 소리가 났다.
오피스 빌딩으로 뛰어들어가다가 래리를 만났다. 그는, "이제 여름도 끝났군."하고 말했다. 새끼사슴 색의 바바리를 입고 검은 머리는 비에 젖어 해에 그을은 얼굴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 비지니스 거리의 수완가다운 품격은 조금도 상하지 않고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잠을 깨라구. 몽유병자 같군."
"그렇게 보여요? 미안해요." 클레아는 우산을 접어 흔들어서 물을 뿌렸다. "오늘은 비스켓 광고의 촬영이 있는데, 스튜디오에 오지 않겠어요?"
"아, 그렇지, 잊고 있었군. 하지만 오늘은 안 되겠어. 그럴 시간이 없어요. 스미드와 점심 약속이 있고 오후 내내 회의에 참석해야 해. 당신도 혹시…."
"안돼요." 클레아는 래리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야무지게 거절했다. "오늘은 일이 산처럼 쌓였어요. 누구 다른 사람한테 물어 봐 줘요."
엘리베이터까지 나란히 걸어가던 래리는 멈추어 서더니 클레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누구 다른 사람이 어디 있어야지. 잠깐이라도 좋으니 와서 봐줄 수 없겠소? 그랜삼이 지나치지 않도록 체크해 주었으면 해. 당신도 알잖아. 그녀석은 60초의 코머셜을 <폭풍의 언덕>으로 만들어 놓거든."
"난 고무로 만들어진 인형이 아니에요. 그렇게 이것저것 다 할 수는 없어요."
"아니, 거의 다 하면서 그래. 슈퍼우먼이야, 당신은." 넘치는 미소까지 띠며 그답지 않게 사람을 추어 올렸다.
"그렇게 비행기를 태워도 소용없어요." 하고 말했으나 클레아의 볼은 빙그레 웃음을 띠고 있었다. "어떻게 시간을 만들어 보겠어요." 클레아가 겨우 승낙했을 때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고마와. 당신은 내 생명의 은인이야." 하고 말하고 래리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매번 하는 일인데요. 뭘." 클레아는 돌아보지도 않고 중얼거렸다. 말하자면 이것이 클레아가 맡은 일인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불평을 할 수 있으랴. 클레아는 래리의 안전 장치였다. 그의 오른팔이었다. 래리는 그 때문에 클레아에게 급료를 지불하는 것이다. 그리고 톰과의 분주한 생활을 걷어치운 뒤로는 전보다 훨씬 일하기가 쉬워졌다.
이제는 피곤해서 집으로 돌아가면 바로 목욕을 하고 잠을 잘 수도 있고 말없이 혼자 텔레비전을 보아도 된다. 때로는 파멜라도 그녀와 같은 상태로 집에 있는 일이 있으며, 둘 다 잠옷 차림으로 소파에 몸을 파묻고 더 이상 볼 것이 없을 때까지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기도 한다. 남자로서의 톰의 요구에 회사 일에 대한 긴장감이나 마찬가지로 신경을 쓸 것도 없게 되었다. 톰은, 여자는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클레아에게 덮어씌우고는, 그대로 하지 못할 때는 클레아를 여자로서 실격자라고 나무라기를 서슴치 않았었다. 이제는 여자의 자격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 노력은 이제 그만두어 버렸다. 우선 지금은 래리의 조력에만 전념하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나는 클레아 포레스트고, 지켜야 할 규준은 나 자신이 정하면 되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사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생각해 본 일도 없었던 자신의 장래에 대해서 모색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각도에서 사물을 봄으로써 자기에게 일어난 일에서 교훈을 끌어내는 법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클레아는 야심이라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언젠가는 직장을 그만두고 결혼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것은 진지하게 생각한 결과 결정한 것이 아니라, 철이 들 무렵부터 자연히 그렇게 작정된 것이다. 날마다 주위 여자들의 삶을 눈으로 보고 배운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뜻하게 달래듯이, 여자라면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들어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청소, 세탁, 요리, 출산, 육아 등 눈에 보이는, 여자들의 일상생활이 그것을 가르쳐 주었고, 집안 같으면 주방, 오피스나 가게 같으면 눈에 띄지 않는 구석 등, 여자들이 있어야 할 장소도 무언으로 가르쳐 주고 있었다. <여자가 있어야 할 곳은 집안, 여자는 남자를 필요로 한다….> 이세상에 존재하게 되어 눈을 뜬 순간부터 잠재 의식은 주형에 끼워지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클레아는 지금 자기는 왜, 또 누구의 목적을 위해서 그동안 틀에 끼워져 있어야 했던가 하고 묻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제는, 자신의 생활은 자신을 위해서 있는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자기는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자기가 어떤 역할을 했다면 그것은 자기는 마땅히 그런 조재여야 한다고 하는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톰이 클레아에게 틀에 박힌 역할을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도 그것을 클레아가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클레아는 힘든 일을 불평 한마디 없이 해왔다. 지금 새로운 방향에서 재조명해 보니 여러 가지 의문이 머리를 드는 것이었다. 회사에서의 자신의 입장에 대해서도 클레아는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래리도, 말하자면 그런 비슷한 역할 - 여자로서의 역할에 클레아를 혹사하고 있었다. 자기가 휘저어 놓은 분위기의 뒤처리, 상처받은 직원의 위로, 일, 거래선을 미인계를 써서 매료하는 일, 심지어 휘파람 한번에 잔심부름을 하는 하녀의 일까지 맡아 왔다. 그리고 중요한 결정을 할 때는 자기는 문 밖에 있는 것이다.
"이것도 어떻게 수술을 해야겠어!" 식사를 마치고 파멜라와 둘이 텔레비전 앞에서 한가하게 앉아 있던 날 밤 클레아는 그렇게 말했다.
"성공을 빌겠어. 힘을 내." 파멜라는 빙그레 웃었다. "난 파리가 되어 벽에 붙어서 구경하고 싶어. 금년 제일 가는 구경거리가 될 거야. 표를 팔면 어때?" 
"이번에야말로 래리에게 내 의사를 밀고 나가겠어."
"먼저 옷을 벗는 거야. 그의 주목을 끌자면 그 방법밖에 없어." 하고 파멜라가 부채질을 했다.
"그것은 낡은 수법이야. 난 그렇게는 하지 않겠어." 파멜라는 가만히 클레아를 바라보았다.
"넌 요즘 많이 달라졌구나. 방금 한 말을 농담이야. 벗으라느니 어쩌라느니 한 것은 다른 문제야. 넌 전보다 에너지가 넘치는 것처럼 보여." 거기서 파멜라는, 자기가 지금까지 클레아를 조용하고 조심스런 여자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에너지는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리고 무엇에 부어지고 있을까? 일? 아니면 그녀 앞을 막아서는 남자들의 퇴치? 그렇게 생각되는 구석이 많았다. 요즘 클레아는 남자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해도 성을 벌컥 내곤 하는 것이었다.
"전보다 에너지가 더 많아졌는지 어떤지는 나도 모르겠어. 지금은 일에만 힘을 쏟으면 되는 걸. 전에는 일과 사생활, 양쪽으로 갈라야 했었어."
"그럼 이따금 따분해지지 않니?" 파멜라는 한숨과 함께 시계를 보았다. "남자와 교제를 끊었으니 외로울텐데."
"톰에 대해서라면 조금도 외롭지 않아. 넌 외롭니?" 클레아는 파멜라를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그러자 파멜라가 웃기 시작했다.
"내가 톰을 어떻게 할까봐 그러니? 사람 웃기지 마."
"톰을? 아니, 다른 남자말이야. 넌 요즘 통 밖에 나가지를 않지 않니?" 아직도 조 하버를 못잊고 있는 걸까? 클레아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도무지 특징이 없는 사람이다. 외모도 눈길을 끌 정도가 못되고 매력이라고 할 만한 것이라곤 없었다. 그저 인상이 좋을 뿐인 청년이었다. 파멜라가 전에 교제했던 멋진 남자들을 몇 명이나 떠올릴 수 있었다. 사랑을 하면 눈이 먼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이상해.
"응, 별로 나다니지 않아. 일이 워낙 많고…."
어쩐지 핑계 같았다. 파멜라는 희미하게 볼을 물들이고 있었다. 분명 클레아의 시선을 피하는 것이다. 조 하버에 대한 자기 마음을 저도 모르게 클레아에게 고백해 버린 뒤로 파멜라는 그의 이야기는 피하고 있었다. 파멜라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나 분명 파멜라는 달라졌다.
<사랑>이라는 말을 떠올리며 클레아는 얼굴을 찌푸렸다. 자기는 톰을 사랑하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생각하니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사랑은 환상이다. 사람들은 스스로 환상에 뛰어든다. 속고 싶은 것이다. 낭만적인 꿈으로 물들지 않은 생활에는 대결할 수 없는 중독환자가 된 것이다. 세상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어둡고 쓸쓸한 곳이다. 이런 세상에 사는 사람들에게 사랑은 마치 밤의 어둠 속에 반짝이는 반딧불처럼 자신감을 주고 이끌어 주고 위안을 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이젠 그렇게 되지 않는다. 나는 다시는 환상에 끌려다니지 않는다. 사랑 같은 것은 애당초 있지를 않은걸. 있는 것은 섹스뿐이야. 래리의 말이 맞아. 파멜라도 전에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 그런데 왜 파멜라는 생각이 달라졌을까? 무서워진 걸까? 내가…. 거기서 클레아는 흠칫해서 생각을 중단했다. 그러나 굳이 계속하기로 했다. 내가…레이프 당한 뒤로…. 그 무렵부터 파멜라의 변화는 시작되었다. 둘의 생활, 둘의 주거에 폭력의 마수가 뻗어 옴으로써 둘 다 바뀌어 버렸다. 변화의 방향은 제각기 달랐지만. 이전의 파멜라는 한 남자만을 생각하고 오직 그가 접근해 오기만을 기다리는 여자가 아니었다. 이전의 파멜라 같으면 어깨를 추스리고 곧 다른 상대를 찾았을 것이다. 지금은 특정의 연인도 없고, 일이 끝나면 곧장 집으로 돌아와 외출도 하지 않고 조용하게 지낸다. 그 사건 탓으로 섹스라는 것을 달갑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게 된 것일까?
파멜라와 함께 텔레비전 앞에 앉아서 클레아는 그저 눈길만 브라운관에 향하고 있을 뿐 내용은 보지도 않고 이리저리 생각을 굴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녀에게 잘하네 못하네 말할 수도 없다. 나도 남자가 가까이 오기만 하면 오싹 소름이 끼치는 몸이 아닌가. 클레아는 어금니를 꼭 깨물고 있었다. 오싹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클레아는 턱이 아파졌다.
그렇기 때문에 파멜라는 조 하버에게 끌린 것일까? 그 남자 같으면 정서적으로도 안정되어 있고 안전하기 때문에? 그는 파멜라에게 성가시게 달라붙지 않으며 섹스의 요구도 별로 많지 않을 것 같은 조용한 남자다. 결코 파멜라에게 치근거리며 무리한 요구를 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는 지금 파멜라에게 변화의 과정을 커버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음속에 느끼고 있는 남자에 대한 두려움을 파멜라는 아직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조금은 나 다니는 것이 좋지 않겠니?"
클레아의 말에 파멜라는 놀란 모양이다.
"뭐라고 했지?"
"넌 요새 너무 집에만 틀어박혀 있어."
"무슨 뜻이니?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보라구, 난 지금 이 영화를 보고 있어. 너도 보고 있잖니?" 영화에 열중해 있는 파멜라는 다른 이야기 같은 것은 하고 싶지도 않은 것 같았다.
며칠뒤면 클레아는 예비심에 나가 증언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을 될수록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고 있었다. 생각해 봐야 별수가 없었다. 하지만, 클레아가 증언을 하지 않으면 범인은 자유의 몸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클레아는 사람들의 호기심에 찬 눈길을 받으며 증언하는 자신을 상상하기만 해도 몸이 움츠러드는 것 같았다.

재판소에 들어서자 클레아는 사람들의 시선을 따가울 만큼 의식했다. 그러나 클레아가 가장 무서운 것은 범인과 얼굴을 마주하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얼굴이 없던 의식하(意識下)의 괴물이 눈도 코도 있는 보통의 얼굴로 나타나는 것이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렸다. 어떤 얼굴인지 모르는 동안에는 마음에서 밀어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 얼굴을 보아 버리고 나면…어떻게 잊을 수가 있으랴!
그러나 사람들은 건물 안을 바쁜 듯이 오가며, 누구도 클레아를 눈여겨 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경관들은 한 자리에 가만히 서서, 지나가는 사람을 의심스런 눈초리로 관찰하고 있었다. 클레아는 접수에서 법정으로 가는 길을 묻고 돌바닥의 로비로 나왔다. 사람들은 서거나 앉아서 열심히 속닥거리며 상담에 여념이 없었다.
클레아가 들어서자 한 경관이 가만히 바라보았다. 클레아는 흠칫했으나, 그가 자신의 모습에 눈을 빼앗기고 있다는 것을 알자 마음이 놓였다. 그의 눈길은 클레아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얼굴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가볍게 윙크를 하며 싱긋 웃어 보였다. 클레아가 노려보자 그는 놀란 듯이 눈길을 거두고 몸을 돌렸다.
기둥시계가 큰 소리를 내며 시각을 새기고 있었다. 주위에는 이상한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먼지가 낀 시큼한 냄새였다. 클레아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마늘을 먹고 있었다. 저쪽에 있는 한 여자가 그 사람을 노려보면서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빈자리는 바로 다른 사람이 와서 메웠다. 후줄근한 레인코트를 입은 노인이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경관이 옆에 와서 중지 시켰다. 겨우 몇분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그 늙은이는 또 조그만 소리로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주전자에서 김이 새는 것 같은 소리였다. 한 여자는 하얀 실로 무언가를 부지런히 짜고 있었다. 분명 몸이 무거워 보였다. 불룩한 배가 보랏빛 스커트를 밀어 올리고 있었다. 스커트 단이 조금 튿어져 있었다. 그녀가 입은 오랜지색 스모크를 보고 클레아는 그 사람이 색맹이 아니가 하고 의심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곳에서 밝은 미소를 띠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뭔지 행복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행복한 모습은 이 자리에 어울리지가 않았다. 
클레아가 호출을 받기까지는 한 시간 가까이 기다려야 했다. 사람들은 들어왔다가는 다시 나갔다. 앉아서 기다리다가 자기 이름이 불리면, 안도와 불안이 뒤섞인 한숨을 쉬면서 일어서서 나가는 것이었다.
졸음이 밀려왔다. 걱정과 두려움이 어느 사이에 따분함으로 바뀌고 있었다. 가지고 갔던 잡지를 펼쳐서 읽으려 했으나 글자가 한 자도 들어오지 않았다. 아이처럼 사진만을 들여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비현실적인 장면이고 이 자리와는 너무나 먼 세계였기 때문에 클레아는 마침내 잡지를 덮어 버리고는 그것을 벽에 달아 놓은 양철 쓰레기통에 던져 넣어 버렸다. 경관이 그 소리를 듣고 번개같은 눈초리로 클레아를 쳐다보았다. 그는 버린 잡지가 마치 폭탄이나 비밀의 통신물이라도 되는 줄 아는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걸어와서 검열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클레아는 반쯤 기대하고 있었으나 그는 다시 발을 가지런히 놓고는 눈길을 천정으로 향했다.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클레아는 펄쩍 뛸 만큼 놀랐다. 1,2초 동안 그대로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이윽고 크게 숨을 쉬고 일어서서 법정으로 들어갔다. 무릎이 후들후들 떨렸다. 몸은 썰렁하게 식었고 가슴은 방망이질을 쳤다.
"이쪽입니다, 아가씨." 안내인이 속삭이며 좁은 문을 가리켰다. "층계를 올라가십시오."
나무계단이 발밑에서 삐걱거렸다. 멍하니 법정 안을 둘러보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좁았다. 그리고 밝았다. 창문에서 비쳐드는 금빛먼지가 떠올랐다. 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이름을 분명하게 말해 주실까요?"
"클레아 포레스트."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였다.
"좀더 큰 소리로 말해 주시오, 미스 포레스트. 여기까지 잘 들리지 않습니다."
말하는 남자를 클레아는 쳐다보았다. 그는 몇 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배심원들이야, 모두 매우 평범한 사람들로 보였다. 회색의 가는 줄무늬 슈트에 프릴이 달린 흰 블라우스를 입은 여자도 한 사람 있었다. 그녀는 격려하듯이 클레아에게 미소를 보냈다. 학교 선생인 것 같다.
클레아는 침을 삼키고 헛기침을 했다. 다시 말했을 때는 분명하고 잘 울리는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건네 준 카드에 눈길을 주었다. 거기에는 서약의 말이 인쇄되어 있었다. 한 손을 검은 성서 위에 얹어 놓고 그것을 읽어 가는 동안 차츰 목소리가 힘을 되찾았다. 
계원이 성서와 카드를 가지고 물러나자 클레아는 눈을 들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는 한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클레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 눈이 마주쳤다. 순간 날카로운 아픔이 몸을 꿰뚫고 지나가는 것 같아서 클레아는 눈길을 돌렸다. 그가 틀림없어. 이 사람이 설마, 하고 생각될 만큼 아무렇지도 않은 느낌의 남자였으며, 그 옆을 두 번이나 지났으면서도 눈치를 못 챌 만큼 평범한 남자였다. 생각한 것보다 젊고 몸매가 가늘었다. 22세 가량 될까? 혹시 어쩌면 더 나이가 적은지도 몰랐다. 건강이 안 좋은 듯 혈색이 나쁜 얼굴에 머리는 짧게 깍고 날카로운 묘한 눈매를 하고 있었다. 분명 인상 확인을 위해 호출되었을 때 본 기억이 있는 얼굴이었다.
"미스 포레스트, 대답해 주실까요…."
검사의 목소리로 정신을 차렸다. 가해자가 물끄러미 클레아를 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클레아는 다시는 그쪽을 바라볼 마음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저쪽은, 이상한 것이라도 보듯이 가만히 이쪽을 보고 있었다. 클레아는, 그 방향으로 시선을 보내지 않았는데도 자꾸 그 남자가 웃고 있는 듯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웃음은, 이 자리의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비밀을 자기와 클레아가 공유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의 존재가 클레아에게 진정제와 같은 효과를 주어, 조심스럽게 말을 골라 가며 여러 질문에 매우 침착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남자에 대한 증오심에 마음을 빼앗기고 당황할 여유조차 잃어버리고 있었다.
검사의 질문이 끝나자, 클레아가 제일 무서워하고 있던 장면이 기다리고 있었다 - 변호사측의 질문이었다. 변호사가 일어서는 것을 배심원들이 호기심 깃들인 눈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변호사의 질문은 딱 한 가지뿐이었다.
"미스 포레스트, 여기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기억이 있습니까?"
클레아는 허를 찔렸다.
"기, 기억…."
"여기에 있는 사람이 당신을 덮친 인간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까?"
클레아는 망설였다. 그리고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나는 얼굴을 못 보았어요… 어떻게 알 수가 있겠어요?"
"당신은 얼굴을 못 보았습니다. 당신은 댁에 침입하여 당신을 덮친 인간을 확인할 방법이 없으시지요?"
변호사는 클레아는 쳐다보지 않고 배심원들을 향하여 말했다. "이것으로 질문을 마칩니다." 그리고는 변호사는 의자에 앉았다.
클레아는 마음이 놓이면서도 어두운 기분으로 그곳을 나왔다. 이것으로 끝났다 - 우선은. 또 한가지가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생각한 것처럼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예비심이 끝난 인상은, 우선 화가 나는 기분이었다. 부끄럼없이, 뉘우치는 빛조차 보이지 않고 자리에 앉아 있던 젊은 남자가 생각났다. 이유도 없이 남의 집을 뒤엎어 놓고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으면서도 전혀 미안한 기색도 없었다. 도리어 재미있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부끄러움과 죄악감을 느끼며 법정에 선 것은 도리어 클레아 편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려고 택시를 향해 손을 들자 푸른 미니 카가 쓰윽 다가와 멈추었다. 운전하고 있던 남자가 창문으로 얼굴을 내밀고 "타겠나? 이쁜이?" 하고 말을 걸었다.
"썪 꺼져!" 클레아는 마침 스피드를 떨어뜨리며 다가오는 택시 쪽으로 쪼르르 뛰어가 올라탔다. 
클레아는 예비심의 결과를 기다리지 않고 나왔으나, 이튿날 루카스 형사가 전화로 알려주었다.
"기소로 결정되었어요. 범인이 또 무죄를 주장하면 본재판에서 당신의 증언이 요구될 거예요. 만일 유죄를 인정하면, 아직 분명한 예상은 못하지만, 증언은 불필요하게 될 거예요. 그렇게 되면 물론 바로 통지하겠어요. 어떻게 결정될지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변호사는 한가지 밖에 질문하지 않았어요." 클레아는 보고했다.
"그들은 당연히 확인 불능을 들고 나왔겠지요. 오인이라는 선에서 도망을 치려고 하는 거예요. 우리 쪽은 상황 증거밖에 갖지 못했으니까요. 유능한 변호사 같으면 죄를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우리는 그가 범인이 틀림없다는 강한 증거를 가지고 있지만 모르지요, 도망갈 구멍은 여기저기에 있으니까…."
"난 그가 자기 죄상을 인정한 줄 알았어요. 당신은 분명 자백했다고 했잖아요?" 
루카스 형사는 한숨을 쉬었다. 
"그랬어요. 변호사가 잔꾀를 부리게 한 거예요. 경찰의 압력이다, 강제다 하구요…."
"하지만 우리 집에서 훔쳐간 물건을 자기 집에 가지고 있었잖아요?"
"술집에서 만난 친구한테서 샀다는 거예요. 그에게는 전과가 없고, 걸 프렌드를 시켜서 알리바이를 조작하고 있어요. 거짓말이 분명하지만 별수가 없어요, 그것이 그들의 일이니까." 루카스 형사도 바쁜 사람이었다. "지금부터 또 서류 작성을 해야 해요. 다시 연락하겠어요."
다음주는 눈이 팽팽 돌만큼 바빴다. 클레아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으므로 다른 일은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대로 침대에 쓰러질 것 같은 나날이 계속되었다. 지쳐빠지기는 했으나 도리어 정신 건강을 위해서는 좋았다.
금요일 저녁에 래리와 클레아는 거래선을 만찬에 초대했다. 밖에서 식사를 한 뒤에 일행은 같이 래리의 집에 가서 한잔하면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손님을 배웅하고 나니 이미 한밤중이 지나 있었다. 래리가 건물 뒤에 있는 주차장까지 손님들을 바래다주는 동안 클레아는 래리의 거실 소파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함께 배웅을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피로와 졸음으로 몸을 움직이기가 싫었다. 너무나 지쳐 까딱도 하기가 싫었다.
"기분좋게 자는 것 같군."
돌아온 래리가 옆에 앉아 말을 걸었다. 애써 가늘게 눈을 뜨자 클레아는 방긋 웃었다. 그러나 뜻밖에 아주 가까이에 래리의 얼굴이 있었다. 클레아는 마침내 그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최면술에 걸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색은 당신에게 잘 어울리는군." 그렇게 말하고 래리는 클레아의 다리를 덮고 있는 아콰마린 빛깔의 실크 스카프를 쓰다듬었다. 
클레아의 맥박이 빨라졌다. 내부에 패닉이 생기고 있었다. 래리의 존재가 너무나 가깝게 느껴졌다. 그의 눈길에 신경에 거슬렸다. 저 표정은… 곧 키스를 하려고 들거야. 다음 순간 클레아는 그를 밀쳐내고 일어서려고 했다. 그러나 동시에 클레아의 뇌리에는, 파멜라와 둘이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장면이 떠올랐다. 고독에 익숙해져 버린다는 것은 위험해. 어차피 클레아도 남자와의 교제를 재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남자라면 누구든 도매금으로 넘겨 쫓아 버리기만 할 생각이야? 래리 같으면 속도 알고, 클레아에게 겁을 주는 일도 없을 거야, 상처를 주는 일도 없고. 다시 남자의 키스를 받으면 어떤 느낌일까?
클레아는 래리의 입술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날마다 몇 번이고 보는 얼굴이지만 이런 기분으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어는 구석이나 남자답게 생겼다. 강단이 있어 보이고 또렷하고 정열적이었다. 저도 모르게 클레아가 그로부터 몸을 피하려고 했을 때 래리가 몸을 구부려 키스를 해 왔다. 클레아는 몸이 굳어졌다. 소파 등에 몸을 젖혔다. 래리의 입술은 담담하게 살며시 클레아의 입술에 닿아 있을 뿐이었다. 힘으로 밀어내는 기색도 없었다. 
클레아는 눈을 떴다. 해에 그을은 래리의 피부가, 길고 검은 속눈썹이 눈에 들어왔다. 래리의 손이 클레아의 얼굴을 살며시 감싸듯이 하며 들어올려졌다. 그러고는 입술로 찬찬히 클레아의 입술을 밀어 열더니 키스가 차츰 깊어졌다. 그동안 그의 손길은 클레아의 몸의 선을 더듬고 있었다.
불쾌하지는 않았다. 클레아는 놀라지도 않았다. 따듯한 안도감을 느꼈다. 클레아는 눈을 감고 두 팔을 그의 목에 돌려 키스에 응하기 시작했다. 래리의 손은 클레아의 머리카락을, 목을 따뜻하게 쓰다듬고 있었다. 키스가 차츰 격렬해져 갔다. 
래리의 손은 이제 클레아의 등을 애무하고 있었다. 그의 입술은 클레아의 목으로 옮겨갔다. 클레아는 머리를 뒤로 젖히고 입을 반쯤 벌리고 있었다. 갑자기 클레아의 몸이 굳어졌다. 이건 좀 지나쳐. 아직 일러! 클레아는 갑자기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내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안돼.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그는 어째서 내게 생각할 겨를도 주지 않고 여기까지 와버린 것일까?
클레아는 눈을 떴다. 래리는 클레아를 소파 위에 밀어 쓰러뜨리려고 했다. 그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고 속순썹 그늘에서 눈이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안돼요, 래리! 안돼요!" 클레아가 항의하자 래리의 입이 다가와 클레아의 입술을 덮어 버렸다. 
래리의 손이 클레아의 등을, 허리를 애무했다. 래리가 입술을 떼자 클레아는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래리를 치며 버둥거렸다. 그녀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리고 식은땀이 구슬처럼 스며나왔다. 
공포가 밀물처럼 클레아를 덮치고 있었다.
"부탁이니..." 래리는 일어나 두 손으로 클레아의 어깨를 떠받쳤다. 클레아는 몸을 버둥거리며 말도 되지 않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클레아, 부탁이야. 부탁이니 침착하라구."
클레아는 증오의 눈으로 래리를 보았다.
"그만둬요. 나를 만지지 말아요... 이제 다시는 내게 손을 대지 말아요."
래리는 클레아로부터 손을 떼고 일어섰다. 클레아는 떨면서 소파에 쓰러졌다. 래리가 거실을 나간 뒤 클레아는 어떻게든 침착을 되찾으려고 애썼다. 잠시 후 래리가 다시 들어왔다.
"집까지 바래다주겠어." 침착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래리의 얼굴은 창백하고, 눈도 마주 보려고 하지 않았다.
차 속에서 클레아는 내내, 무슨 말이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언짢은 짓을 해 버렸으니 사과를 해야지, 처음에는 나도 그를 받아들여 그의 욕망에 불을 질러 버린 것이다. 뭐라고 해야지. 하지만 그도 이해해 줄 거야, 내가 어떤 심정이 되었었는가를.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이제 오늘 저녁의 일은 잊어버리고 싶었다. 불행한 일이었다.
차를 멈추고서도 래리는 클레아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핸들에 두 손을 얹고 앞만 가만히 노려보고 있었다. 클레아는 잠시 망설인 뒤에 래리를 보았다.
"잘 가세요." 하고 말했다.
그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클레아는 자기 손으로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차에서 두 발짝도 떨어지지 않았는데 차는 맹 스피드로 달려가 버렸다.



13장

 그 이튿날이 주말이었기 때문에 클레아는 좀 안심이 되었다. 래리도 생각할 시간을 가질 수 있겠지. 그러나 월요일의 래리는 그렇게 싱경질일 수가 없었으므로 클레아는 온종일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면서도 래리와 얼굴이 마주치면 금방 거스르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어느 쪽이 나쁘다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래리도 어떻게든 성자의 인내력을 가지려고 애쓰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클레아가 제일 싫어하는 전제군주의 얼굴을 드러내곤 하는 것이었다. 
 비오는 날이 계속되고, 가을이구나 하고 생각하는 동안 어느새 차가운 안개가 들어차는 겨울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제 겨우 10월인데 찬바람에 나뭇잎이 떨어지고, 겨우 며칠 건조한 날씨가 계속되는가 싶자 겨울이 바로 가까이에 와 있었다. 이따금 래리가 며칠씩 미국으로 건너가 회사를 비우게 되면 클레아는 두 사람 몫의 일을 해내야 했다. 일에 쫓기고 있으면 생각이 정지하고 대신 까다로워지는 것이었다.
 "조심하라구. 당신은 래리의 여성판이 되어가고 있어."  이반의 도안에 트집을 잡았더니 그는 농담이 아니라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지금 농담할 때가 아니에요. 다시 그려요. 이건 솔즈베리의 언덕처럼 평범하기만 해요. 생기를 느낄 수가 없어요. 당신 왜 그러지요? 노력할 마음이 없어진 건가요?"
 그 말에 이반의 얼굴이 검붉어졌다. 화가 나 목에 힘줄이 솟고 있었다.
 "여자한테 이런 말까지 듣고 그대로 물러날 수는 없군. 당신은 도대체 그래픽을 알기나 하오. 직선 하나 제대로 긋지 못하는 주제에. 나는 래리의 비평 같으면 들어주겠지만 여자의 트집은 사절이오 알았소?"
 "여자는 어떻게 다르다는 거지요?"  이반에 지지 않고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클레아도 노여움에 몸을 떨었다.  "래리가 없는 동안은 내가 모든 책임을 지고 있어요. 그러니 내 말을 들을 수가 없다면......"
 "들을 수가 없다면 어떡하겠다는 거요?"
 "그렇다면 나가 줘요."  클레아는 소리를 꽥 질러 버렸다.
 "그거 진심이오? 나보고 사표를 내라고? 오우케이, 베이비. 바로 나가겠어. 래리가 돌아오면 디자이너가 하나 모자라는 데 대한 변명은 할 수 있겠지?"
 클레아는 결연히 나가는 이반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기분이 나빠졌다. 래리가 뭐라고 할까? 래리로부터 주의는 받고있었다. 아내가 집을 나간 뒤로 이반은 정서 불안정 상태에 있다고 했다. 이반은 지금 여성 불신 상태에 빠져 있다. 클레아도 마찬가지로 남성 불신 상태에 있는 것이 탈이 되었다. 충돌은 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반은 그런 기분파 같은 데가 있는 것말고는 우수한 인재였다. 전부라고는 하 수 없으나 이따금 걸작을 내놓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잃는 것을 래리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고는 할 수 없었다.
 3일 뒤 래리는 돌아왔다. 클레아는 쭈뼛쭈뼛하며 이반의 사직원을 건네주었다. 래리는 몸을 천천히 의자 등에 기대자 표정을 바꾸지 않고 가만히 클레아를 바라보았다. 
 "내가 그와 이야기하겠소."  그렇게만 말했다.
 클레아는 자신의 사려 부족을 탓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래리는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요즘 래리는 변했어, 하고 클레아는 생각하면서 사무실을 나왔다. 조금이기는 하나 그녀에게 거리를 두고 있었다. 클레아와 눈이 마주치면 그는 짜증난 듯이 험악한 얼굴을 하거나, 때로는 과감하게 무시해 버리는 것이었다. 그날 밤 그의 집에서 그를 거부한 것이 그의 에고에 상처를 준 것일까? 남자의 에고는 델리키트하다. 금방 상처를 입는다. 래리의 에고는 누구보다도 강하기 때문에 상처가 쉽게 없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바로 다음 일자리를 찾을 수가 있어서 일개월 뒤 이반은 회사를 떠났다. 래리가 아무리 설득을 해도 소용이 없는 것 같았다. 클레아는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새 그래픽 디자이너가 들어왔다. 래리가 라이벌 회사에서 빼내 온 사람이다. 상당히 많은 급료를 주어야 하지만, 그만큼 일을 잘 하는, 뛰어난 창조성과 독창성을 가진 인재였다.
 체격이 좋고, 웃으면 입술 양끝이 치켜올라가는 고수머리의 그 청년은 테리 벤슨이라고 했으며, 입사하자마자 클레아에게 호의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2, 3일 동안을 계속 그는 클레아가 가는 곳마다 모습을 나타내서 클레아는 주체를 못했다. 쌀쌀한 무시도, 너무나 노골적인 표현을 하는 것도 클레아는 괴로웠다.
 "당신은 노우라는 말을 몰라요?"  클레아는 어느 날 아침 그에게 물었다.  "사전을 좀 들
여다봐요. 거절을 의미하는 부정적인 대답이라고 씌어 있어요. 노우라고 하면 노우예요. 안달이 나게 하며 즐기고 있는 게 아니라구요. 형태를 바꾼 예스도 아니에요. 노우예요. NO예요, 노우. 이제 알았지요?"
 테리는 즐거운 듯이 웃었다. 
 "이번 주말에 시간을 내줄 수 있어요?"  그는 데스크에 기대어 몸을 앞으로 내밀고 클레아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묻는 것이었다.
 "인내에도 한도가 있어요!"
 "그렇겠지요. 나는 토요일이 좋겠는데. 어디서 점심을 먹고...... 그렇지, 밤에는 영화를 볼까요, 아니면 쇼우가 더 좋겠어요?"
 "나는 말이에요...... 이 밤에서 나가는 당신의 뒷모습이 보고 싶어요."
 "토요일에는 내가 마중을 갈까요?" 하고 말한 테리는, 클레아가 닥치는 대로 던져 대는 책의 소나기를 맞으며 도망쳐 나갔다. 그가 나가고 나자 클레아는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서 책을 줍기 시작했다. 
 또 문이 열렸다. 클레아는 마침 오른손에 집어들었던 사전을 다시 던지려고 했으나, 들어온 것은 래리였다. 그는 입구에 서서, 바닥에 흩어져 있는 책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소?"
 "아무것도 아니에요."  클레아는 볼을 물들였다. 래리는 몸을 구부려 책 줍는 것을 거들기 
시작했다.  "고마와요."  책을 책상에 돌려놓고 서류 파일을 데스크에 늘어놓았다.
 래리는 팔장을 끼고 벽에 기대 섰다.
 "방금 테리가 이 방에서 뛰어나가는 것을 보았는데, 싸우기라도 했소?"
 "어떤 의미에서는요."
 "어떤 의미요, 구체적으로?"
 "그가 너무 찐득거려요."
 "끈기는 직원에게 권장해야 할 일이오."
 "이것은 일과 곤계가 없어요."
 래리는 눈치를 보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
 "무슨 일이지요?"  표정을 고치고 클레아는 물었다.
 "내일 아이자크 리오프 경과의 점심 약속을 확인하러 왔소."
 래리는 그렇게 말하고 자연스럽게, 참으로 우아한 동작으로 몸을 쭉 폈다. 클레아도, 지금처럼 남자를 신변에서 멀리하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면 지금의 래리 히리어에게 끌리지 않고는 못 배겼을 것이다. 그는 가깝게 접하기에는 너무나 위험한 존재였다. 그러나 클레아는, 적어도 현재의 클레아는 그런 위험엔 관심이 없었다.
 "예정표에 적혀 있어요."
 "그래? 그럼 됐소."
 래리는 나가기 전에 놀리는 눈으로 클레아를 바라보았다. 뒤에 남은 클레아는, 래리가 도대체 무슨 일로 찾아왔었을까, 하고 어리둥절했다. 큰 소리가 난데다가 테리가 뛰어나가는 바람에 흥미를 느낀 것일까?
 이튿날 점심 식탁에서 아이자크 경의 관심은 클레아에게 집중되었다. 그는 머리가 벗어져 
가는 작은 몸집의 남자로, 눈매가 나이프처럼 날카로왔다. 과거 몇 년 동안의 거래선이었으며, 클레아는 그의 광고에 줄곧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광고는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을 망라하는 대규모의 것이었다. 그는 상세한 질문 공세를 폈고, 클레아는 경을 만족시킬 만큼 위트에찬 대답을 하느라 진땀을 뺐다.
 커피가 나오자 경은 래리에게 사카린처럼 달콤한 얼굴을 보였다.
 "이 아가씨는 당신에게 많은 도움을 주는 것 같소. 정말 영리해요. 우리 광고부를 송두리째 맡겨도 잘 해나갈 것 같군. 우리 병아리들은 교회의 바자 하나 제대로 못하거든."
 "경의 회사를 위해서 우리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영광이겠습니다."  래리는 슬쩍 말머리
를 돌렸다.  "아이자크 경, 브랜디 한 잔 더 어떻습니까?"
 사무실로 돌아오자 래리는 내뱉듯이 말했다.
 "그 작자를 조심하라구! 당신을 뽑아갈지도 몰라...... 광고부 놈들은 그 작자의 말처럼 멍텅구리들뿐이니까. 리오프가 와달라는 말을 하도록 틈을 보여서는 안 돼. 당신이 거절하면 작자는 토라져서 우리와는 계약을 한 건도 하지 않을지 모르니까."
 "나는 거절하지 않을지도 몰라요. 그렇게 큰 회사의 광고부를 주무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테니까. 월급도 뒤로 나자빠질 만큼 주겠지요. 생각해 봐야지."
 래리는 클레아를 노려보았다.
 "설마 그 작자한테서 제의가 들어오면 받을 생각으로 있는 것은 아니겠지?"
 "그러면 안 되나요?"
 "안 되느냐구?"  되받아묻자 얼굴에 핏기가 올랐다. 이글이글 노여움에 불타는 눈이 노려
보고 있는데도 클레아는 태연했다.
 "난 남의 말을 들어 보려고조차 하지 않는 바보가 아니에요. 제의를 받아들이겠다고는 아
직 말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런 일이 있다면 조건이나 설명을 들어본다고 나쁠 것은 없잖아요? 난 앞으로의 내 일생을 줄곧 당신만 따라다니며, 당신에게 다친 사람에게 붕대나 감아 주는 역할만 할 생각은 없으니까. 나도 내 책임하에 움직일 수 있는 부문을 맡고 싶고, 봉급도 많은 것이 좋아요. 나라고 남처럼 출세욕을 갖지 말라는 법은 없잖아요."
 "당신은 내가 길렀단 말이야."  래리는 겨우 화를 누르고 입을 열 수 있게 되자 말했다.  
"오늘의 당신은 내가 만들었단 말이야."
 클레아는 웃기 시작했다. 래리는 어처구니없어했다. 
 "뭐가 그렇게 우습지?"
 "당신이 날 만들어요? 당신이 해준 것이 뭐예요? 난 스스로 성장했단 말이에요. 재능과 국가의 도움을 빌어서요. 당신 같은 독선가는 처음 보겠군요. 방금 하신 말에 내가 수긍할 줄알아요?"
 "난 당신의 목을 자를 수도 있어!"
 "그건 당신의 자유예요."
 "무척 뻔뻔스런 여자가 되어 버렸군."
 "고맙군요."
 "당신의 성실성과 충성심은 어디로 갔지?"
 "래리, 사람의 감정에 호소해서 겁을 주려고 하지 말아요. 우린 같은 일을 해 왔어요. 나라고 남의 기분을 조종하는 법을 모르는 줄 아세요?"
 래리는 눈썹을 찌푸리고 클레아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자기가 무척 영리하다고 생각하고 있군!"
 "두 개의 자막대기로 사람을 재려는 것을 거절하는 것이 영리하다면 그래요."  클레아는 
거기서 입을 다물었다.  
 "무슨 뜻이지? 두 개의 자막대기라니, 그게 무슨 자막대기지?"
 "당신은 내가 여자니 관리직에 맞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날 종속적인 위치에 놓고 싶다고......."
 "바보 같은! 나 같은 진보파에게 여성 해방론을 쳐들지 말라구!"
 "그럼 회사의 요직에 여자를 승진시키는 것을 반대하는 건 아니지요?"
 래리는 의아스럽다는 듯이 한동안 그녀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만일 그 역할을 충분히 잘 해낼 수만 있다면 난 성별 때문에 반대할 생각은 없어. 내 관심은 오직 일을 잘하느냐 못하느냐에 있으니까."
 "그 말을 들으니 일단은 안심이군요."
 "오우케이. 그런데 또 무슨 일이 남았지?"
 "아직 이 문제에 충분히 납득할 만한 대답을 못 들었어요. 당신은 진심이 아닌걸요."
 "그럼 좋아. 내주에 점심을 같이 들자구. 그때, 만족할 때까지 당신의 야심을 피력해 보라구."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은 싫어요."
 순간 래리는 재미있어하는 표정이 되었다.
 "미안, 그러지 않겠소. 그러니 당신도 너무 신경을 곤두세우지 말라구, 클레아. 당신을 대신할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니까."
 클레아는 방긋 웃었다.
 "교체할 수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래리도 끌려서 웃었다.
 "내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천만에요. 당신 없이는 이 회사는 해나갈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어요."
 "난 또 당신이 내 사장 자리를 노리는 줄 알았지."
 클레아는 또 방긋 웃었다.
 "그것도 괜찮겠군요?"  래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클레아를 쳐다보았다. 호기심과 의심이 뒤섞인 마음으로.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인 것처럼 바라보았다.
 "지금도 당신이 없을 때는 내가 해나가고 있어요. 요구되는 것은 결단력이에요. 사람들의 창조력을 불러일으키는 것과요. 그리고 각 부가 상대방 예산으로 자기네 일을 하려고 들거나 할 때 그것을 조종하는 일도 필요해요. <닥쳐!>라고 말할 타이밍을 맞추는 것도 필요 조건이고요."
 "아니, 그러십니까? 앞으로 솜씨 좀 많이 구경시켜 주십시오. 당신이 내 등뒤에서 실을 조종하고 있는 줄은 몰랐군."
 "연극조로 말하지 마세요."
 "마치 거미 같군...... 거미줄에 걸려드는 파리를 기다리고 있어."
 "당신의 표현은 겨냥이 어긋났어요. 실제는 그 반대예요. 거미는 당신이지 내가 아니에요."
 래리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럼 조심하라구. 나는 인정사정 없으니까."
 클레아는 문득 등줄기에 한기를 느꼈다. 
 "네, 알아모시겠습니다. 조심하겠어요."
 래리는 약속을 잊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일주일 동안 토론을 되풀이한 끝에 겨우 합의점에 
이르러, 클레아에게는 새로운 직명이 주어지고 승진되었다. 클레아가 부지배인이 된 것이다. 클레아의 방문에 승진 통지가 붙여지고, 중역회의에 그녀의 자리가 마련되었다. 경리 관계의 의제에는 발언권이 없었으나, 적어도 직원들의 의견을 대표하여 회사 업무 방침에 관해서 중역회의에 조언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차츰 알게 된 것은, 중역 회의에 관한 한 진지하게 발언하면 할수록 회의에서의 그녀의 역할이 커진다는 것이었다. 명목이나 명예만의 존재로 앉아 있는 게 편했지만, 클레아는 자기 생각과 의견을 적극적으로 밀고 나가려고 했다. 의장은 물론 래리지만, 출석자는 클레아말고는 전원이 남자로, 여자로서는 클레아가 첫 멤버였다. 클레아는 매우 기뻤다. 그녀의 기쁨은 래리에게도 자연 전해졌다.
 "당신이 만족해 주었으면 좋겠어. 우선 갖고 싶은 것을 손에 넣었으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협박과 억지가 좀 필요했지만."
 "네, 만족해요..... 우선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같이 래리는 얼굴을 찌푸리고 자기 머리를 쥐어 뜯었다. 그것을 보고 클레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화나셨어요?"
 갑자기 래리가 움직였기 때문에 클레아는 펄쩍 물러섰다. 불을 들이대면 놀라 도망치는 새끼고양이처럼. 
 래리는 눈썹을 찌푸리고 클레아를 보았다.
 "그러지 말라구!"
 "무엇을 그러지 말라는 거예요?"  몸을 사리고 되물었으나, 클레아는 래리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 건지 금방 알아차렸다.
 "사람이 움직일 때마다 그렇게 깜짝깜짝 놀라지 말라는 거야. 내가 도대체 어떻게 할 줄 
알고 그러지?"  거기서 숨을 한 번 쉬고는 겁먹은 클레아의 눈을 들여다보고 말했다.  "클
레아, 당신이 무엇을 무서워하는지 나도 알겠어. 하지만 당신도 이제 슬슬 사람들 사이로 돌아와도 좋은 때가 아닐까? 벌써 몇 달이 지났어. 그 뒤로......."
 "그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클레아는 그의 말을 막았다.
 "알고 있어. 그 이유도 알고 있어. 당신은 정면으로 대결할 용기가 없는 거야. 단 한 명의 
못된 남자가 당신에게 한 일을 가지고 당신은 모든 남자를 비난하고 있어. 무척 바보스런 
처신이라고 생각되지 않나? 날 강간 예비범으로 다루지 말라구. 그리고 요전처럼 날 더러운 놈으로 모는 것은 질색이다. 나는 그때, 당신이 내게 모든 것을 내맡기는 줄 알았어. 너무나 기뻐서 몸이 공중에 붕 떠오르는 느낌이었어. 한순간 당신과 함께 달콤한 곡조를 읊는 줄 알았는데, 느닷없이 당신은 습격이나 받은 것처럼 비명을 지르고 나를 두들겨 패지 뭐야. 그리고 마치 날 병균 덩어리처럼 다루었어. 당신이 지독한 일을 당했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어. 그 때문에 나도 무척 참고......."
 "무슨 이야기예요?"  클레아는 볼을 물들이며 따져 물었다.  "참았다니...... 무엇을요?"
 래리는 클레아를 돌아보았다.
 "이보라구. 좀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어.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 줄 알면서 왜 그래. 지금까
지 숨긴 일은 아무 것도 없잖아!"
 클레아는 놀라서 말이 잘 안 나왔다.  "어마!" 라고 밖에 말할 수가 없었다.
 래리는 멋적은 웃음을 보였다.
 "무척 놀라는 것 같군."
 "놀랐어요."
 "아니, 정말 몰랐단 말이야?"
 클레아는 얼굴이 새빨개지면서 고개를 돌렸다. 
 "네."
 "그럼 내가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마음을 겉으로 나타내지 못했나?"  반은 자신에게 말하듯이 래리는 중얼거렸다.
 그러나 정말 몰랐단 말인가? 무척 오래 전에 문득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는가? 지금 거리낌없이 그 일을 다시 생각해 보니, 어쩐지 마음속에 질러 놓았던 것 같은 빗장이 벗겨지고 여러 가지 일들이 넘치듯 한꺼번에 생각나는 것이었다. 저 눈길, 저 미소, 저 몸짓. 그때도 문득문득 클레아의 마음을 뒤흔들었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고 무리하게 자기를 눌렀던 것이다. 레이프가 있기 훨씬 전부터 그런 래리의 태도를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클레아 편에서 래리를 의식한 것은 그보다 전일지도 모른다. 다만 그런 생각이 자기 마음속에 자리잡지 않도록 저도 모르게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래리는 참으로 매력적이고 남자다웠다. 선대 사장이었던 그의 아버지의 죽음으로 미국에서 불려왔을 때도 그 매력을 모든 여자에게 뿌리고 있었는지 어떤지는 모른다. 그가 지금까지 고독을 끌어안고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클레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든 그것이 그의 진심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래리는 가만히 클레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지?" 가벼운 놀림의 빛이 그 눈에 떠올랐다. "클레아......."  그는 한 손을 올려 살며시 클레아의 볼을 쓰다듬었다.
 클레아는 머리를 뒤로 확 비켰다. 래리의 웃음이 굳어졌다.
 "미안해요...... 안 되겠어요. 난 도저히...... 미안해요, 래리. 어쩔 수가 없어요. 아직 일러요......."  래리는 꼼짝도 하지 않고 클레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저 만지기만 해도 참을 수가 없어요."
 조금 있더니 래리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걱정스런 얼굴을 하지 말아. 그럴 만하지. 난 기다리겠어."  그러고는 다시 웃는 얼굴로 돌아가 방을 나갔다.
 그가 나가자 클레아는 방금 떠올렸던 래리의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눈치를 보는 것 같은 눈매였고 예의 맹수를 길들이는 얼굴이었던 것이 생각났다. 래리의 관찰의 눈은 날카롭다. 상대방의 상황을 살피고 냉정하게 찬스를 기다리는 사람이다.
 클레아는 그날 종일 그의 표정에 대해서 이리저리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래리를 만날 때마다 꼬리가 떨어지도록 흔들면서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개처럼 생각되었다. 그는 그게 우스웠던 게지.
 그날 밤 부모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크리스마스에 돌아오라는 것이었다. 그들의 생기있는 근황 보고에 클레아는 놀랐다. 어머니는 그림을 배우러 야간학원에 다니고 있다고 했고, 아버지는 베아티가 자기 초상화를 이미 여러 장이나 크레용으로 그려 주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잘 그려, 클레아. 정말이야." 아버지는 자랑스럽게 흥분해서 말했다.
 "어마, 곧이듣지 말아라." 어머니는 기쁜 듯이 말했다. "아직 초급반이야. 하지만 즐거워. 다음 주가 기다려지는 구나. 취미를 가진 다는 것은 좋은 일이야."
 "누드도 그려요?" 클레아는 어머니를 놀렸다.
 "물론 그리지. 아마 그것은 내년이 될 거야. 지금은 정물만 그려. 금주에는 매우 멋있는 우유병을 그렸어. 유리란 그리기가 참 어렵더구나."
 어머니의 대답에 클레아는 혀를 내둘렀다.
 "그렇겠지요." 대답하면서 클레아는 젊은 남자의 누드를 앞에 놓고 콘테를 달리는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런 때는 얇은 옷이라도 입히는 것일까? 클레아는 잘 몰랐다. 그러나 어쨌든 구경거리는 좀 되겠군. 사람을 그리기가 어려운 것은 우선 가만히 있지를 않기 때문인걸. 뜻밖의 일도 있을 수 있어.
 클레아가 수화기를 놓자, 읽고 있던 잡지에서 눈을 들고 파멜라가 물었다.
 "부모님은 건강하시대?"
 "응. 네게도 안부를 전해 달래. 아버지는 네가 무척 마음에 드신 것 같아. 지금까지 모델을 만나 본 일이 없으신 걸. 너에 대해서만 말씀하셨어."
 파멜라는 방긋 웃었다.
 "멋있는 아버지시구나."
 "너 크리스마스는 어디서 보낼 거니? 나 집에 돌아가는데, 괜찮으면 같이 가지 않겠니? 우리 집에서는 대환영이야. 방금도 그렇게 말씀하셨어."
 "어마, 친절하기도 하셔라." 파멜라는 잡지에 눈을 떨구고 한동안 손가락으로 페이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고마와. 그럼 그렇게 할까?"
 "너는 집에 돌아간 일이 없었지?"  지금까지는 파멜라가 피하고 있는 것 같아서 클레아는 자기 가족의 이야기도 될수록 삼가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을 때까지는 안 갈 거야."  파멜라는 씁쓸한 표정으로 얼굴을 들었다.
 "너 야위었구나. 좀더 무얼 먹어야지. 볼이 쏙 들어갔어. 일은 너무 많고, 놀러 다니지도 않고."
 "내가 방해가 되니?"
 "왜 그런 말을 하니? 저......."
 "넌 요즘 자주 나가는 것 같더구나."  파멜라는 조금 빈정거리며 말했다.  "나와 교대한 것 같아."  파멜라는 잡지를 내던지고 일어섰다. "아...... 아, 소리를 지르고 싶을 만큼 따분해. 네 말이 맞아. 코코아라도 마시고 자야겠어. 피곤해."
 클레아는 그녀의 뒷모습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요즘은 조 하버에 대해서 얘기하는 일도 없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은 그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다고 클레아는 보고 있었다. 그에 대해서, 아니 누군가에 대해서 마음을 앓고 있는 얼굴이 틀림없었다. 요즘은 미간에 주름을 잡는 일도 많고, 눈에도 피부에도, 그리고 몸매에도 피로한 기색이 나타나 있는 것이다. 그녀에게 있어 몸은 밑천이 아닌가. 몸매가 망가지면 곤란할 텐데. 
 다음주에 파멜라는 몇 번인가 외출했다. 모델들에게는 파티의 초대장이 쏟아지듯이 많이 날라든다. 그럴 생각만 있으면 일년 내 밤마다 어느 파티든 나다닐 수가 있는 것이다. 물론 밤샘을 하면 몸에 좋을 턱이 없고, 게다가 낮에 일을 하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지만.
 파티에 나갈 때마다 파멜라는, 오늘 저녁이야말로 혼자 집에 돌아가지 말자, 독수공방은 싫어, 또 만나고 싶어지지 않을 만한 남자와 어울리자, 하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번번이 어디로 같이 가자는 남자의 가벼운 권유에 따르지 못하고 돌아와 버리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첫 대면의 남자와 뒤가 깨끗한 교제를 할 기분이 되지 않았다. 자기의 지난날의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남자가 몸을 꼭 붙여 와도, 얼굴을 숙이고 눈을 들여다보아도 아무 자극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짜증스러울 뿐이었다.
 어느 주말, 파멜라는 채소며 식료품을 쟁여 넣은 바구니를 들고 킹즈로우드를 걷다가 조를 만났다. 순간 머리가 아찔해서 비틀거리는 바람에 토마토가 길바닥에 굴러 떨어지고 그레이프 프루츠는 마침 옆에 서 있던 유모차 속으로 뛰어들었다. 깜짝 놀란 아기가 자지러지게 울었고, 그 소리를 듣고 가게에서 뛰어나온 그 아기의 어머니가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파멜라는 조와 아기 어머니에게 그저 사과할 뿐이었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어!"  아기 어머니는 얄밉다는 표정으로 그레이프 프루츠를 파멜라에게 건넸다.  "겨우 잠들었는데."
 조가 말없이 떨어진 토마토를 주워 주었으나, 이미 몇 개는 유모차 바퀴에 깔려 버렸다.
 "안됐지만 깨진 것도 있어요."  토마토를 바구니에 담아 주면서 조는 말했다.
 "내가 앞을 잘 보고 걷지 않아서 그래요."  일부러 수선스럽게 아기를 유모차에서 안아들어 달래고 있는 아기 어머니를 바라보지 않으려 하면서 파멜라는 대답했다. 하얀 레이스의 베개에 다시 내려놓았을 때, 아기까지 자기를 노려보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 어머니의 강한 시선을 가리듯이 조는 파멜라의 팔을 잡고 다시 가게로 이끌고 갔다.
 "짜부라진 토마토만큼 내가 사드리겠소."
 "어마, 더는 필요 없어요."
 "그러면 커피나 한잔합시다."  조는 싱긋 웃었다.
 파멜라는 창자가 꼬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고마와요."  겨우 그렇게 말했다. 조를 만날 줄 알았더라면 이렇게 낡은 노란색 코듀로이 팬츠에 티셔츠 바람으로 나오지 않았을 텐데. 그뿐이 아니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밤늦게까지 일을 한 피로가 엿보이는 얼굴은 거의 화장도 하지 않았다. 조를 따라 카페로 가면서, '이것도 운이군.' 하고 생각했다.
 "요즘 어때요? 바빠요?"  자리에 앉자 조는 물었다.
 "그런 셈이에요. 당신은?"
 "전쟁이오, 언제나 그렇지만. 그런데 내가 내주에 파티를 여는데 괜찮으면 당신도......."
 "파티요? 기꺼이." 하고 말하다가 흠칫했다. "무슨 특별한 저 파티말인데, 생일이나 뭐......."
 "작별의 파티요." 가볍게 조가 대답했다.
 "정말이에요?"  쾌활한 표정을 짓느라 무척 애쓰면서 파멜라는 겨우 말했다. 말 한 마디를 하기가 이렇게 어려운 줄은 미처 몰랐다.
 "커피를 주시오, 아가씨!"  지나가던 웨이트레스에게 조가 말을 걸었다.
 "햄버거? 도너츠? 케이크?"  웨이트레스는 껌을 짝짝 씹으며 곁들여 권했다.
 "아니, 좋아요. 커피 두잔이면."
 조의 대답에 웨이트레스는 입을 뿌루퉁하게 내밀며 떠났다.
 조는 또 파멜라에게 웃는 얼굴을 향했다. 혈색은 여전히 좋지 못하고 검은머리는 딱 빗어 붙이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파멜라는 견딜 수가 없었다. 가슴이 꽉 죄어들었다. 그러한 자기가 비참했고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다. 오랫동안 이런 느낌을 갖지 않고 속 편하게 지낼 수 있었는데, 이게 뭐야! 어쩌다가 나는, 나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남자를 죽을 것처럼 사랑하게 된 것일까? 요 몇 년 동안 모든 면에서 초연하게 살아온 내가, 멀리 떠나 온 줄 알았던 벼랑에 마침내 떨어지는 꼴이 되어 버렸어. 한꺼번에 너무나 많은 생각이 머리에 밀려와, 겨우 5분 가량의 시간이 일생인가 싶을 만큼 길게 느껴졌다. 조를 만났다는 처음의 단순한 기쁨이 결국 이 지경으로 되다니 - 그와 헤어져야 한다는 무거운 어둠. 마음속에 쟁여 놓고 또 쟁여 놓았던 감정이 한꺼번에 조를 향해 넘쳐흐르는 것 같았다.
 "정말이오." 조는 쾌활하게 응했다. "아파트도 떠나요, 병원도 그만두고...... 새 일자라 때문이오. 난 가슴이 몹시 설레고 있어요. 내게 이런 찬스가 돌아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거든. 대단한 전진이오."
 "그거 다행이군요. 그래서 어디로 가는 거지요?"  파멜라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애쓰며 물었다.
 "별로 멀지 않아요. 런던 반대쪽이오. 필톤의 성(聖) 앤 알지요? 커다란 빅토리아 조의 수도원, 아니 건물이지요. 물론 내부는 최근 철저하게 현대화되었지만. 산부인과도 있고 다른 과들도 있지요. 새로운 시설에 많은 돈을 투자했어요. 수술실도 구경할 만해요. 난 지금은 아직 거기와 관계가 없지만. 여러 자기 훌륭한 기계나 설비를 생각하면 어서 빨리 일이 시작되었으면 해요."
 "당신은 내과 의사로 알았는데요."
 웨이트레스가 커피를 날라와 난폭하게 놓는 바람에 커피가 엎질러졌다.
 "지독하군." 하고 조가 말했으나 웨이트레스는 모른 체하고 가버렸다.
 "내가 닦겠어요."  파멜라는 페이퍼 냅킨으로 살며시 테이블을 닦았다. 가죽 잠바의 소년이 구속 쪽에 놓인 뮤직박스에 동전을 넣자 최신 히트곡 한 곡이 요란스럽게 흘러나왔다. 고막을 찢는 듯한 이런 비트를 파멜라는 싫어했다. 조와 단둘이 조용히 있고 싶었다. 아무도 없는 새벽 바닷가를 조와 나란히 걸으며 조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었다. 커피로 젖어 얼룩진 냅킨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구겼다. 한숨이 새어나왔다. 문득 파멜라는 같은 말을 다시 한번 중얼거리고 있었다.  "내과 의사로 알았는데요."
 "그래요. 하지만 병은 각 과가 겹쳐 있으니까요, 서로."  조는 카페 안을 둘러보고는 창밖에 밀리고 있는 차들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일주일이라. 그때는 이런 모든 것에 안녕이오...... 조금도 슬프지 않아요. 필톤은 농장이나 목장과의 경계니까, 휴일에는 언제나 산책을 할 수 있어요."
 "즐거우시겠군요."  자기의 커피 잔을 바라본 채 맞장구를 쳐주었다. 조금밖에 마실 수가 없었다. 문득 팔목시계에 눈이 갔다.  "어마,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다니, 이제 가야겠어요. 오늘은 앞으로 무척 바빠요. 오래간만에 만나서 반가왔어요. 새로운 일에서 성공하기를 빌겠어요. 틀림없이 잘 될 거예요."
 파멜라가 일어서자 조도 일어서서 빙긋 미소했다.
 "당신도 몸조심해요. 그리고 클레아에게 안부 전해줘요."
 "그러겠어요. 안녕!"
 괴로움으로 얼굴이 일그러지고 이미 괴어 있는 눈물이 흘러내리기 전에 조의 앞을 떠야지. 이토록 가슴이 아프리라고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집에 클레아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이런 상태는 누구에게도 보이기 싫었다. 자기 침실에 들어가 마음을 놓은 순간 긴장이 풀려 그만 침대에 퍽 엎어져 와앙하고 울기 시작했다. 한없는 슬픔에 자기를 내맡기며 파멜라는 무척 오랫동안 울었다. 눈물이 마르기 시작했을 때 파멜라는, 어쩐지 자기가 울고 있었던 것은 조를 잃었기 때문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의 울음과는 전혀 달랐다. 지금까지 운 일이 없는 모든 것을 위해서 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지금까지 사뭇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 한꺼번에 표면화해서, 몇 세기 동안이나 지하에서 압축되어 있던 원유가 하늘을 향해 분출되듯이, 깊은 슬픔이 되어 쏟아져 나온 것이다.
 자기가 가족과의 인연을 끊어 버리려고 기를 쓰고 있었던 것도 생각하면 무의식적인 일이었다. 아버지를 원망하고 미워하며, 그 아버지와의 회색의 생활에 파묻혀 파멜라에게까지 어두운 어린 시절을 덮어씌우던 어머니도 생각했다.
 침대 위에서 파멜라는 견딜 수 없는 외로움에 몸부림을 쳤다. 쓸쓸했다. 누구도 자기를 돌보아 주지 않는다. 누구도 마음을 써주지 않는다. 조에게 열중해 버린 것도 그러한 기분에서 빠져나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파멜라를 비난했다. 그러나 그 남자야말로 파멜라를 제대로 보아주었던 것이다. 다른 남자들처럼 겉모습이나 생김새로 파멜라를 보지 않았다. 그리하여 파멜라는 결국 조의 상대가 되지 못하고 밀려나 버렸다. 소외되고 무시당한 기분에 파멜라는 어쩔 줄을 몰랐다. 조는 다른 남자와 전혀 다르게 보인 첫 남자였다. 파멜라의 열기는 그를 향해 일방통행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속절없이. 조는 파멜라의 몸도 애정도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그는 떠나간 것이다. 파멜라는 지금까지 그녀가 밑바닥까지 알고 있던 공허한 세계로 다시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며 파멜라는 가슴의 아픔을 참고 있었다. 손을 배 위에 얹고 어머니의 태내에 있을 때처럼 몸을 구부리고 옴쭉달싹도 하지 않고.
 어느덧 방은 저녁 어스름에 싸여 가고 있었다.
 


14장
 
  크리스마스 전주 토요일, 클레아는 옥스퍼드 스트리트에서 밀린 쇼핑을 했다. 그러다가 마침 셀프리지 앞에서 뜻밖에도 톰을 만났다. 그는 백설공주와 난쟁이들을 장식해 놓은 커다란 쇼우윈도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클레아는 모른체하고 지나가려 했는데 그가 갑자기 돌아보고 걷기 시작하는 바람에 두 사람의 몸이 부딪혀 버렸다. 
  "미안합니다."하고 얼굴을 든 톰이 또 깜짝 놀랐다. "여어, 클레아!"
  "어마, 톰." 그는 새로 마춘 듯한 고급스런 낙타 코우트를 입고 있었다. 재단이 잘 되었으며 몸에 딱 맞았다. "경기가 좋은 것 같아요."
  "응, 막 승진했어..... 월급도 오르고, 좋은 사무실까지 받았어. 잘 되어가고 있어, 고마워." 자랑스런 웃음을 띠고 있었다.  득의 만면했다.  그는 얼어붙을 것 같은 약한 아침 햇살 속에서 여전히 자기의 새로운 직위에 대해서 지껄여댔다. 그리고 한번 숨을 쉬고는 겨우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당신은 어때?"
  "여전해요."하고 대답한 클레아의 눈은 미소짓고 있었다. 백설공주를 들여다보는 한 소녀의,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뻥하니 벌린 순진한 모습에 끌렸던 것이다.
  웃음을 띤 채 클레아는 톰을 쳐다보았다. 그는 클레아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물론 괜찮아요, 톰. 고마워요." 그러고는 시계를 보았다. "어마, 서둘러야지. 아직 아버지의 선물을 사지 못했어요. 무얼로 할까 망설이는 중이에요. 그럼....." 하고 다시 한번 방긋 웃자 클레아는 사람들이 붐비는 백화점 입구로 들어가 버렸다.
  클레아는 점심 시간에 파멜라와 만났다. 식사가 끝나자 둘이서 또 조금 물건을 사러 다녔고, 산더미 같은 꾸러미를 안고 돌아왔다. 클레아는 지쳐 버렸다. 파멜라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얼마 전에 텔레비젼 코머셜의 일에서 만나게 된 카메라맨과 데이트 약속이 있는 것이다.
  "오늘 파티는 노퍽 어디 깊숙한 곳인 것 같아. 어쩌다가 내가 가겠다고 말했을까? 나 언제 한번 정신과에 가서 진찰을 받아 봐야겠어."
  최근 파멜라는 모든 파티 초대에 예스라고 대답하고 있는 것 같았다. 클레아는 주전자의 물이 끓기를 기다리며 의자에 깊숙이 앉아 생각하고 있었다. 어디에 놓고 온 줄 알았던 예전의 생활에 파멜라는 다시 몸을 푹 담그고 있었다. 하지만 어딘지 좀 다른 것 같았다. 불량 전구처럼 반짝이는가 하면 바로 꺼져 버리고, 빛과 빛의 사이는 어둡고 피곤한 암흑이었다. 파멜라의 눈은 언제나 슬퍼 보였다.
  30분 가량 지나자 카메라맨이 나타났다. 클레아가 안으로 맞아들이니, 파멜라가 쪽 뻗은 긴 다리를 보이며 뛰어나왔다. 양 옆에 깊은 슬릿이 든 실크 드레스가 펄럭였다. 머리칼 빛깔과 대조적인 강한 빛깔이었으나 진홍의 드레스를 자신있게 입은 파멜라의 모습은 당당하게 보였다.
  "여어, 정말 멋있어." 청년은 탄성을 질렀다.
  "고마와요, 당신도 근사해요." 파멜라는 쏟아질 것 같은 웃음을 띠었다--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야, 하고 생각하며 클레아는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웃지 않는걸. "클레아를 알아요? 내 룸메이트예요. 이쪽은 제리."
  "반갑습니다." 서로 중얼거렸다. 제리는 30세 가까운, 마르고 키가 큰 남자로, 생기있는 지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클레아는 그에게 호감이 갔다. 파멜라의 언제나의 상대 중에서는 괜찮은 편이군.
  "떠나기 전에 무얼 한잔 안 들겠어요?"
  클레아가 권하자 제리는 고개를 저었다.
  "고마와요. 하지만 길이 얼어붙어 있으니까요. 저쪽에 도착할 때까지 내 몸이 둘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지요."
  "그는 신중해." 파멜라는 코에 주름을 약간 잡아 보였다. 
  이윽고 두 사람은 나갔다. 파멜라는 흰 인조 모피코우트로 몸을 싸고 값비싼 향수 내음을 구름처럼 풍기면서.
  이번에는 또 얼마나 계속될지? 두 사람을 내보내고 문을 닫으면서 클레아는 생각했다. 제리는 파멜라가 평상시 교제하는 타입이 아니야. 그러나 제리는 완전히 파멜라에게 반한 것 같았다. 파멜라를 바라보는 눈빛으로 알 수 있었다. 불쌍한 제리. 클레아는 욕실로 들어갔다.
  온몸이 뻐근했다, 온종일 걸어다녔으니 그럴 만했다. 욕조에 향유를 떨어뜨리고 더운물을 휘저었다. 그리고 클레아는 세일에서 사온 스페인 기타 뮤직의 레코드를 틀어 놓고 팔을 베개삼아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마음은 정처없이 떠돌았다. 부모를 위해서 산 선물--무엇을 사야 할까 하고 무척 망설였다. 그들이 크리스마스를 즐거운 마음으로 기대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았다. 지금까지는 집에 돌아가도 냉랭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부모도 이젠 완전히 달라졌다. 둘이 서로 이야기도 잘 하고 클레아에게도 말을 잘 걸었다. 이미 두 번이나 보여주었던 이집트 관광용 8밀리 영화를 또 보여주겠다고 해 클레아를 놀라게 했다. 내년에는 지중해를 돌자고 둘이 열심히 계획을 짜고 있었다.
  물이 식을 때까지 클레아는 욕조 속에 앉아 있었다. 물이 식자 할 수 없이 나와서 가볍게 몸을 닦았다. 타월지의 로우브를 걸치고 거울 앞에 서서 머리를 드라이했다.
  맨발로 주방에 가서 버섯을 넣은 스크램블 에그와 토우스트에 커피의 가벼운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계란에 거품을 일굴 무렵 현관의 벨이 울렸다. 이런 시간에 누굴까? 그러자 클레아는 생각이 났다. 래리가 크리스마스에 자기 어머니를 찾아 롬니 마시에 가기 때문에 그전에 클레아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갖다 주겠다고 말했던 것이다.
  현관문을 연 클레아는 깜짝 놀랐다.
  "톰!"
  "오늘 아침에는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야기할 시간이 없었으니 잠깐 들러 본 거야." 하고 말하며 로우브에 싸인 클레아의 몸을 할긋할긋 바라보았다. "우리 어디로 나갈까?"
  "아니, 난 오늘 일찍 자려고 해요." 어떻게 하면 그를 돌려 보낼 수 있을까 생각하며 클레아는 버티고 서서 문을 막고 있었다.
  톰은 만족스런 얼굴로 벙글거리고 있었다.
  "무척 오래간만이군. 당신에 대해서 모두 말해줘." 그러고는 클레아의 몸에 팔을 돌리는가 싶자 쓱 안으로 들어서서는 등으로 문을 닫아 버렸다.
  클레아는 노여움으로 얼굴이 빨개졌다.
  "톰, 나 피곤해요."
  톰은 아직도 벙글거리며, 등뒤에 숨겨 가지고 있던 샴페인의 병을 불쑥 내보였다. 
  "이것을 마시면 금방 잠이 깰꺼야." 톰의 한 손은 아직도 클레아의 몸을 안고 있었으나 클레아는 옆으로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서 톰의 입술이 클레아의 입을 막았다. "당신은 언제 봐도 무척 매력적이야."
  가슴이 깊이 팬 로우브의 V자형의 깃 가에 눈길을 주었다. 피부는 더운물에서 막 나와 핑크빛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톰의 살갗도 입술도 바깥의 냉기 그대로 차가왔다. 그는 건강하고 적극적인 남자다. 클레아는 냅다 그를 걷어차 주고 싶었다. 요 몇 달간 그는 클레아 생각은 하지도 않았을 텐데, 오늘 아침 우연히 만나자 생각이 나서, 당연히 자기를 환영해 줄 줄 알고 서둘러 찾아온 것이다. 믿을 수가 없어! 클레아는 뒷걸음질을 쳤다.
  "마침 옷을 갈아입으려고 하던 참이에요."
  "난 조금도 상관할 것 없어." 샴페인의 병을 내두르며 톰은 난처해하는 클레아를 보고 웃어젖혔다. "글라스를 가져와요, 찰 때 따자구."
  "안돼요, 톰. 정말 나...."
  톰은 익히 알고 있는 주방으로 서슴없이 들어갔다.
  "어디 있는지 알고 있어. 여어, 이거 오믈렛 아니야? 스그램블인가?"
  뒤따라간 클레아는, 저녁 준비를 하던 조리대를 내려다보는 톰을 보았다. 씼어서 저민 버섯과, 계란 거품이 일고 있는 보울.
  "두 사람 몫이 돼?" 거침없이 코우트를 벗어 의자에 내던지며 말했다.
  "옷을 갈아입고 오겠어요." 클레아는 야무지게 말했다. 그를 쫒아 내자면 보통으로 대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언제나 그의 얼굴 가죽은 코끼리 가죽보다 두꺼웠던 것이다. 그런 얼굴로 바라보는 톰 앞에서 갓 목욕하고 나온 모습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저것은 옛날을 그리워하는 눈매다. 클레아가 잊어버리고 싶어 하는 옛날을 생각해 내고 있는 눈이다.
  "그럴 필요가 없다니까!"
  클레아는 대답도 하지 않고 서둘러 침실로 들어갔다. 문을 잠그고 진즈와 스웨터를 입었다. 마침 스웨터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을 때 또 현관의 벨이 울렸다. 당황하여 스웨터를 끌어내리고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고는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톰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클레아는 옷을 갈아입고 있어요. 바로 나올겁니다. 들어오겠소?"
  클레아는 현관에서 말뚝처럼 우뚝 섰다. 나란히 서 있는 두 남자를 앞에 놓고 피가 얼굴로 올라왔다. 래리는 모피 깃이 달린 회색의 수에드 코우트를 입고 있었다. 굳어진 차가운 표정으로 빤히 클레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클레아는 천천히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아니오, 바로 가봐야겠습니다." 얼음덩이가 소리를 내는 것처럼 래리는 한마디 한마디를 끊어 말했다. 그러고는, 가까이 온 클레아에게 금빛 포장지로 싸서 새빨간 리본을 매고 매듭에 진홍의 장미 한송이를 꽂은 꾸러미를 내밀었다. "이것 받아요."
  "고마와요." 클레아는 몸의 균형을 잃고 넘어질 것 같았다. 그의 시선은 클레아의 온몸을 아찔아찔해질 것 같은 아픔으로 꿰뚫었다. 래리가 이런 눈으로 클레아를 본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그 차가운 눈길에 클레아는 몸을 떨었다.
  "즐거운 크리스마스가 되기를." 그 말조차 모욕적으로 들렸다. 래리는 홱 등을 돌리더니 나가 버렸다.
  톰은 문을 닫았다.
  "저녀석은 주는 것 없이 보기 싫어. 자아, 샴페인을 땄으니 글라스를 이리 가져오라구."
  클레아는 멍멍한 얼굴로 톰을 바라보았다. 저고리도 벗고 넥타이도 풀고 있었다. 마치 완전히 자기 집이나 되는 것처럼 활개를 치고 있었다. 이런 모습을 보고 래리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난 샴페인 같은거 필요 없어요." 목소리가 떨렸다.
  "돌아가 줘요, 톰. 나가줘요."
  "아니, 도대체 왜...." 톰은 믿을 수가 없다는 듯이 잆을 뻥하니 벌리고 말을 더듬었다.
  "말했잖아요, 나가 달라구! 뭐라고 해야 알아듣지요? 이제 끝났어요. 당신을 더 만나고 싶지 않단 말이에요. 나가줘요....그 샴페인도 가지고 돌아가서 누구 다른 사람하고 마셔요."
  "벌써 땄단 말이야!" 톰은 화가 난 듯이 말했다.
  "왜 그러지? 내가 무엇을 어쨌다는 거야?" 톰은 문을 바라보고는 클레아에게 눈길을 돌렸다. "아아, 알았어... 히리어군. 요즘 그녀석하고 그렇고 그런 사이야? 난....."
  "나가라구요!" 클레아는 주방으로 뛰어가 샴페인의 병을 움켜쥐고 와서 톰의 손에 밀어붙였다. "자요!" 현관문을 열고 톰의 등을 밀었다.
  "내 코우트."하고 소리치며 톰은 주방으로 돌아갔다. 저고리를 주워 입는 옷자락 스치는 소리를 클레아는 등뒤로 들었다. 그는 코우트의 소매에 팔을 꿰고 한 손에는 넥타이, 한 손에는 병을 쥐고 나왔다.
  클레아는 그의 눈을 보지 않고 현관문을 잡고 서 있었다.
  톰이 멈추어 섰다. 무슨 말을 하려고 숨을 들이마시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톰은 발소리도 요란하게 그대로 나가 버렸다. 클레아는 소리가 나게 문을 닫고 주방에 들어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랫입술을 깨물며, 아직도 꼭 끌어안고 있는 래리의 금빛 선물 꾸러미를 내려다 보았다. 리본은 자기 손으로 맸을까? 긴 줄기 끝에 달린 한 송이 장미를 보았다. 막 봉오리가 터지려고 하는 완벽한 모양이었다.
  진홍의 장미, 벨벳 같은 꽃잎, 조심스런 향기. 살며시 코에 대고 냄새를 맡으려고 하자 왈칵 눈물이 솟아났다. 래리의 그 차가운 눈길이 생각났다. 괴로웠다.
  갑자기 일어서자 거실로 뛰어가 그의 집 전화번호를 돌렸다. 신호는 계속 가는데 아무도 나오지를 않았다.
  할수없이 수화기를 놓았다. 좀 이따가 걸어 보자. 그에게 꼭 연락을 해야지. 설명을 해줘야지. 톰과의 옛정을 되찾은 줄 알게 해서는 안돼.
  클레아는 식욕도 느끼지 못한 채 저녁을 반쯤 먹고는 또 래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역시 받지를 않았다. 그에게 말해 줘야지. 미칠 것만 같았다. 어째서 톰이 와 있었는지에 대해 그에게 이야기 하지 않고는 잠들 수가 없다. 그러나 어쩌면 그대로 롬니 마시에 가버린 건지도 모른다. 마침내 클레아는 단념했다. 크리스마스 휴가가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어. 아마 그때는 래리도 마음의 여유가 생겨 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줄거야.
  이틀 뒤, 끊임없이 눈이 내리는 가운데 파멜라와 클레아는 브라이튼의 집에 당도했다. 집안에 들어서서 옷에 쌓인 눈을 떨자 발밑이 미끈거렸다. 베아티가 문을 열자 향긋한 민스 파이의 냄새가 밀려와 코를 간질였다. 두사람과 함께 들어온 바람이 크리스마스 트리의 장식을 흔들어 귀여운 소리를 내게 했다. 커다란 은색의 별이 반짝이고 금종이로 만든 고리가 천장에서부터 늘어져 있었다. 썰렁하게 얼어붙은 두 사람의 얼굴을 보고 베아티가 밝은 웃음소리를 냈다.
  “자아, 어서 들어와요. 몹시 추워 보이는군. 오느라고 수고가 많았지? 코우트를 이리 다오. 거실에는 불이 있으니 우선 가서 몸을 녹여라. 마침 목욕물도 데워 놓았다."
  "이 눈이 어서 그치면 좋겠어요." 클레아는 의자에 털썩 앉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별로 춥지도 않은데 뭐." 파멜라는 두손을 펴들고 벽난로의 불을 보았다.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되어 좋지 않니?"
  "밖에도 나갈 수 없지 않아!"
  파멜라는 어깨 너머로 클레아를 돌아보았다.
  "너 어디 불편하니?"
  "아니, 괜찮아. 왜?
  "어쩐지 무슨 걱정이 있는 것 같아 보여."
  클레아는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쓰게 웃었다. 파멜라에게는 아직 톰과 래리가 맞닥뜨려 래리가 오해한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클레아는 그 일이 한시도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었다. 래리가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것이 왜 이렇게 마음에 걸리는지 알 수가 없없다.
  테렉 포레스트가 차 세트를 실은 트롤리를 밀고 들어왔다. 그는 두 사람에게 따뜻하게 키스하고 날씨를 화제에 올렸다. 그리고 베아티가 따른 차를 테렉이 두 사람에게 건넸다. 네 사람은 불을 에워싸고 반원형으로 둘러앉아 푸르스름한 불티을 탁탁 튀기며 타는 장작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차를 맛보았다. 서두르지도 떠들지도 않고 한가롭게 대화를 나누었다. 아늑한 크리스마스 분위기였다. 앞으로 며칠 동안은 이중의 누구도 어디에 가지 않고, 이렇다 할 일도 없다. 세계가 한동안 걸음을 멈추는 것이다. 가게도 닫히고 도로에도 사람의 왕래가 거의 없게 된다. 
  얼마쯤 지나자 클레아는 베아티를 거들어 저녁 식사준비를 시작했다. 스테이크를 주로 하고 치즈와 과일이 나오는 메뉴였다. 베아티는 이 날의 요리를 위해서 정성을 기울여 온 것이다. 클레아가 커다란 칠면조를 보고 탄성을 지르자 베아티는 말했다.
  "너무 큰 것 같지 않니? 아버지가 사오셨단다." 딸과 어머니는 얼굴을 마주 보고 소리를 내어 웃었다.
  클레아는 문득, 어느 사이에 자기가 어머니와 매우 자연스럽게 가벼운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클레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두 사람은 같은 땅에 발을 딛고 서 있게 된 것이다.
  "그 멋있는 히리어씨는 요즘 어떠니?"
  어머니의 이 물음에 클레아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크리스마스에는 자기 어머니한테 간대요."
  베아티는 참새처럼 고개를 꼬고서 클레아를 돌아보았다. 
  "어마, 그래?" 신중한 물음이었다. 억지스럽지 않으면서 분명 무언가를 물어 오는 것이었다. 클레아의 목소리에서 불안을 느낀 것이다.
  그러나 클레아는 자신의 마음을 입 밖에 내어 말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자기만의 가슴속에 쟁여 두던 버릇을 그렇게 쉽게 바꿀 수는 없었다. 
  "스테이크가 다 된 것 같군요." 클레아는 기분을 바꾸고 말했다. "이 토마토는 어떻게 하지요?"
  크리스마스 이튿날, 얼음같이 차가운 바람도 아랑곳 하지 않고 모두가 산책을 나섰다. 옷을 든든하게 껴입고, 크리스마스 날에 듬뿍 쟁여 넣은 칼로리-칠면조, 감자, 크리스마스 푸딩, 민스파이등을 소화시기키 위해서.
  테렉과 베아티는 아이들이 돌을 던지며 물결을 가르는 것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클레아는 파멜라와 나란히 걸으면서 말했다.
  "제리는 좋은 사람 같던데?"
  파멜라는 어깨를 추스렀다.
  "그저 그래."
  또 엤날의 생홀 패턴으로 돌아갈 생각인가? 클레아는 걱정이 되었다.
  "좋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면 불쌍해. 내가 보기에 그는 널 정말 좋아하는 것 같더라."
  파멜라는 쓰게 웃었다.
  "설교는 그만두라구,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안그래?"
  "설교할 마음은 없어. 그저....아, 좋아. 너의 생활 방식이 그런걸."
  "그럼, 이제 알았니?" 좀 빈정거리며 말했다. 그러나 파멜라는 옆구리에 낀 클레아의 팔을 꼭 죄었다.
  "너무 걱정하지마. 나도 제리를 좋아해...상당히. 하지만 만난지도 얼마 안되고, 그는 무슨 사람이 드라큘라가 다시 태어났는가 싶을 정도지 뭐니."
  "조 하버는 만나고 있니?" 말해 버리고 나서 클레아는 입술을 깨물며 후회했다. 그 순간 파멜라의 팔이 굳어진 것이었다.
  "그는 이사해 버렸어." 그렇게만 말하고 입을 다문 파멜라는, 한참 있다가 갑자기 바다 저쪽을 가리켰다.
  "어마, 저것 좀 봐. 저 큰 배는 무엇이지? 크리스마스 이튿날인데 무엇을 하고 있을까ㅣ?"
  진주빛으로 반짝이는, 잿빛 안개 저쪽 수평선으로 두 사람은 가만히 눈길을 주었다. 커다란 검은 화물선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클레아는 문득, 자기도 저배를 타고 어디 먼 곳으로 가고 싶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뒤돌아서서 조용한 거리를 보고는, 안전한 대지에 서 있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앞으로 며칠이 지나면 또 런던으로 돌아간다. 그러면 래리와도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을 것이다. 그의 화난 얼굴이 머리에 떠올랐다. 어서 해결을 보지 않고는 불안해서 한시도 못 견딜 지경이었다.
  크리스마스 날에 클레아는 래리의 선물 꾸러미를 풀어 보았다. 레이스가 달린 하얀 실크 네글리제가 나오가 모두가 일제히 탄성을 질렀다.
  "이것은 한밑천 들였을 거야."
  부러운 듯한 얼굴로 말하는 파멜라에게 클레아는 왠지 화가 났다. 문제는 값이 아니다. 꿈같은 옷의 아름다움을 알아주었으면 싶었다. 첫눈에 클레아는 이 네글리제가 마음에 들었다. 래리가 이 자리에 있다면 먼저 그렇게 말해 주고 싶었다. 아낌없이 사람에게 물건을 주는 것은 그의 천성이었다. 입원했을 때 갖다 준 꽃다발도 그랬다. 래리는 배포가 큰 사람이었다. 그러한 래리에게 자신이 멸시를 받는구나 싶으니 견딜 수가 없었다.
  파멜라와 함께 런던에 도착하기가 바쁘게 클레아는 래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누구도 나오지를 않았다. 아직도 롬니 마시에 묵고 있는것일까? 아무래도 사무실에 나갈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일자리로 돌아와 이틀은 매우 조용하게 지나갔다. 그러나 수용일 아침, 래리가 뚜벅뚜벅 클레아의 방으로 들어오더니 한 묶음의 서류를 데스크 위에 던졌다. 준비해 두었던 형식적인 미소를 띠고 쳐다본 클레아는 래리의 얼굴을 보고 볼을 붉혔다.
  "이것을 분류해 놓아요. 어떻게 했는지 이따가 보겠소. 오늘 낮까지 메모를 붙여 내게 돌려줘요." 그렇게만 말하고 클레아의 대답도 듣지 않고 소리가 나게 문을 닫고는 횡하게 나가버렸다.
  한동안 클레아는 망연히 앉아 있었다. 울고 싶었다. 어떻게 내게 그런 목소리로 말할 수 있을까, 차갑고 가시돋친--정말 래리답지 않아. 빰을 찰싹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그런 뒤 한동안,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가 마침내 클레아는 그의 방을 찾아갔다. 래리는 전화중이었다. 클레아는 그의 데스크에 몸을 기댔다. 래리의 눈에 자기 모습이 잡히기를 바랐으나, 그는 그녀를 무시한 채 그대로 말을 계속했다. 전화를 끊자 래리는 회전의자를 삐걱거리며 두 손을 데스크 위에 얹었다. 
  "뭐요?"
  환영하는 말투가 아니었다. 그러나 클레아는 그런 것은 모른체하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고운 네글리제를 주셔서 고마워요... 정말 마음에 들었어요. 내 몸에 딱 맞아요."
  클레아가 말을 마치자 래리는 또 전화에 손을 뻗어 다이얼을 돌리면서 클레아의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고, "그거 다행이군."하고 말했다. 그것도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내뱉듯이 하는 소리였다.
  "래리, 설명하게 해줘요... 톰에 대해서..."
  "설명할 필요 같은 거 없어." 하고 말하지 바로 수화기를 향했다. "여보세요. 클레근가? 나 히리어야. 크리스마스는 잘 지냈나?"
  클레아는 그래도 한동안 멈칫거리다가 방을 나왔다.살며시 문을 닫으며, 아마 나중에 이야기할 기회가있겠지, 2,3일 지나면 그의 기분도 조금은 나아지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를 않았다. 그를 만날 때마다 클레아는 북극의 기류에 휘말리는 느낌이 들었다. 말을 걸어도 먼 곳을 바라보듯이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편에서는 필요한 최소한의 말 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그에게 도저히 가까이 갈 수가 없다 싶자, 클레아도 차츰 화가 나기 시작했다. 자기에게, 내게 무슨 심판을 내릴 권리라도 있단 말인가? 사람이 뭐 그래. 멋대로 내린 결론에 한사코 달라붙어 있어. 자기가 뭐나 되는 줄 아나? 공정하지 못해. 설명할 기회쯤은 주어도 좋지 않은가. 봉건시대의 영주처럼 도도해! 빰이라도 갈겨 주고 싶어. 설령 내가 톰과 다시 교제를 시작했다해도 자기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자기가 톰을 싫어한다고 해서, 그와 데이트한다는 이유로 날 원수처럼 대할 것은 없지 않은가!
  자기와 나 사이에 이미 무슨 약속이라도 주고받은 것이 있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그러나 그런 비슷한 이야기를 한번 나누었다는 것만으로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아직 단순한 친구가 아니가. 그런데도 질투하는 연인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 더구나 일터에서 주위 사람들도 무슨 낌새를 채기 시작하고 있었다. 클레아는 사람들이 주고받는 속닥거림이 신경에 걸렸다. 클레아가 들어가면 갑자기 이야기를 그쳤다가, 나가면 다시 등뒤에서 얘기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이런 나날이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해가 바뀐 지 얼마 안되는 어느 날 밤, 클레아가 귀가하려고 엘리베이터에 오르고 문이 닫히기 직전에 래리가 뛰어들어왔다. 클레아는 어색한 기분을 꾹 참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의 표정이 금방 굳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눈인사 대신 고개만 끄덕일 뿐, 입은 다문 채였다. 어서 일층에 닿았으면 좋겠어, 하고 클레아는 열심히 바랐다. 노여움으로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래리는 바로 앞에서, 브리프케이스를 옆구리에 끼고 코트 앞을 터놓은 채, 엘리베이터의 철문을 노려보고 서 있었다. 문에 그의 힘찬 모습이 비쳤다. 클레아는 조금 물러서서 뒤에서 곁눈으로 흘끔 매력있는 그의 옆얼굴을 훔쳐보았다. 그때 마침 그도 클레아를 보았으므로 두 사람의 시선이 럭혔으나 클레아는 얼른 눈을 돌렸다. 클레아는 래리의 숨소리를 들었다. 조깅이라도 하고 온 것처럼 가쁜 숨이었다. 클레아는 자신의 심장의 고동소리가 이상하게 크게 울리는 것처럼 생각되어 몸을 움츠렸다.
  엘리베이터가 멈추었다. 문이 열리자 래리는 탄환같이 뛰어나갔다. 한시라도 빨리 클레아로부터 도망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아픈 마음으로 클레아는 천천히 걸어나왔다.
  지하철을 탔을 때 클레아는 흠칫했다. 위험하게도 클레아는 래리에게 사랑을 느끼게 된 것이다. 래리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말을 걸어 주지 않는 것이 이처럼 고통스러운 것이다. 
  전에는 무슨 일로 래리와 의견이 달라지면 클레아는 별로 군소리를 하지 않고 그에게 양보하고 있었다. 그것으로 하루하루의 일이 표면적으로는 잘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클레아는 그러는 데 지쳐 버렸다. 좌절감이, 긴장감이, 게다가 자기를 과소평가하는 데 대한 원망이 쌓여갔다. 그러던 것이, 요 몇 달 동안은 사정이 바뀌어 가고 있었다. 논쟁이 벌어지면 클레아는 자기 입장을 고수하고 분명하게 발언하게 되었다. 래리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하여튼 들어주는 귀를 가졌으며, 포인트를 딱딱 짚은 자기 의견을 말해 주었다. 그러나 최근 그의 태도는 극단적으로 변했다 회의 석상에서도, 클레아가 반론을 시작하면 뒤로 쓱 물러남으로써 무시해 버리는 것이었다. 모욕을 주어서 복종시키려고 하는 것이었다. 어떻게든 클레아에게 상처를 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만일 그것이 그의 의도라면 그는 벌써 성공하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그가 화를 폭발시킨다면 클레아로서는 차라리 참기가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래리는 온몸이 얼음처럼 냉랭해져 버리기만 하니 어쩔 수가 없었다. 갑자기 그는 낯선 사람이 되어 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클레아는 그가 얼마나 매력적이고 자기가 얼마나 그를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는가를 알았던 것이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클레아는 가만히 전화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는 것이 나을까? 파멜라는 오늘 저녁에도 밖에 나갔다. 아마 제리하고 어울리는 거겠지. 어디로 간다고도, 누구를 만난다고도 말하지 않고 나갔다. 집안의 정적이 클레아의 머리를 무겁게 짓눌렀다. 외로웠다. 나도 나갈 걸 그랬다 싶었다. 회사 여직원들이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하는 것을 클레아는 거절해 버렸던 것이다. 사람들과 어울려야 한다고는 생각하나 요즘은 나다닐 기력마저 없었다.
  래리는 집에 있을까, 아니면 최근 자주 데이트하고 있는 예쁜 여자와 외출했을까? 클레아는 에라, 하고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그의 번호를 돌렸다. 그가 나왔다. 
  "네."
  쌀쌀한 목소리에 클레아는 멈칫했다. 다음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아무말도 하지 않은 채 수화기를 놓았다. 한동안 클레아는 우리 속에 갇힌 맹수처럼 방안을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 차가운 샤워같은 래리의 시선을 받고만 있을 것이나, 아니면 어떻게든 한번 이야기를 해볼 것이냐, 결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마침내 결심을 하고 나자 클레아는 코우트를 집어들고 집을 나섰다. 도로 건너에서 버스에 올라 좌석에 앉았다. 자기가 왜 이렇게 바보 같은 짓을 하는가 싶었다. 이미 래리가 외출하고 없다면 어떡하지? 문전에서 쫓겨나면? 만일 이야기를 듣고도 믿어 주지 않으면? 면전에서 문을 쾅 닫고 웃어젖치면?  클레아가 자란 사회에서는 소녀들은 결코 사내아이의 뒤를 쫓아다니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클레아는 그렇게 하려 하고 있다. 클레아는 래리한테 가는 것이다. 래리가 클레아한테 와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 마음에 걸렸다. 
일년전 같으면 자기가 남자의 뒤를 쫓아다닐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말없이 앉아서 저쪽에서 오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만일 오지 않으면 할 수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클레아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이것도 어머니의 영향 때문일까?
  크리스마스 이브에 클레아는 어머니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부지런히 칠면조 요리를 만들면서 였다. 테렉과 파멜라는 트리에 프레젠트를 잡아매거나 장식용 전구를 다는 데 바빴다. 새로 사온 물건이었기 때문에 접촉이 잘 안되는 것 같았다. 라디오에서는 크리스마스 캐롤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그런 소리가 주방에는 희미하게 들려 올 뿐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완전히 화해가 되어 있었다. 두 사람을 갈라 놓고 있던 끈덕진 노여움이나 복잡한 감정적 대립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어 버린 것 같았다. 이제 서로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고 따뜻하게 위로의 말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있는 그대로를 서로 나누어 가지고 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행복하신 것 같군요." 하고 말하는 클레아에게 어머니는 방긋 웃어 보였다. 
  "그렇단다. 꼭 한가지 유감스런 것은, 내가 여러해를 헛되이 보내 버린 일이야. 난 너의 아빠에게 완전한 것을 바라고 있었던 것 같아, 자신도 불완전한 주제에... 바보 같은 일이었지, 남편에게만 완벽을 바랄 권리가 어디에 있겠니. 너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말아라, 클레아. 상대방을 완전히 용서해 버리거나 아니면 그 일을 아주 잊어버리는 거야. 몇 년이나 게속 탓만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어, 내가 했던 것처럼 말이야. 그런 짓을 하면 양쪽 다 일생을 망치게 돼. 인생은 한번밖엥 없는 거야. 아껴야지."
  클레아는 귀를 기울이고는 있었으나 그때는 별로 절실히 느끼지는 못했었다. 부모가 행복해져서 다행이다 싶은 생각만 앞섰기 때문이었다. 
  베아티는 행복한 듯이 한숨을 쉬었다. 
  "올해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좋은 한해였어."
  "나로서는 무서운 해였어요." 갓 구운 민스 파이에 설탕을 뿌리면서 클레아는 말했다 "일생에서 최악의 해였어요."
  어머니는 딸을 안쓰러운 듯이 바라보았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되겠지. 하지만 일년이나 이년쯤 지나면 또 다르게 생각될 수도 있어. 때로는, 수렁처럼 생각되는 일도 더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견디어 내지 않으면 안 되는 수도 있어. 사람은 고민을 통해서 여러 가지 일을 배우게 된다 생각하지 않니? 사람도 식물이나 마찬가지야.... 자라기 위해서는 비오는 날도 있어야해. 금년은 너로서는 성장의 해인지도 몰라, 세월이 가면 알게 되겠지만. 너뿐 아니라 사람은 누가나 자기가 모르는 동안에 자라게 되는 거야. 나중에 가서야 그것을 알게 되지."
  "그럴지도 몰라요. 하지만 내 경우는 너무나 억울해요. 무엇 때문에 내가 그런 꼴을 당해야 했지요? 내가 스스로 불러들인 결과라면 모르지만 전혀 이유가 없는 일인걸요. 그저 마침 안좋을 때 안좋은 곳에 내가 있었다는 것뿐이에요. 운이 나빴다고 할 수밖에 없어요."
  "사고란 그런 의미에서는 모두 부당한 것이지. 컵을 너무 많이 가지고 가다가 떨어뜨려 깨뜨리면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만, 길을 걷고 있는데 위에서 돌이 떨어져 깨졌으면 화를 낼 이유가 된다 이거지?"
  "그래요." 클레아는 메마른 목소리로 웃었다 어머니에게 걸려들면 무엇이나 마르크스 형제의 희극처럼 들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클레아는 조금도 우습지가 않았다. 
  "한데, 이제 문제는 네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해서 그것을 극복해 나가느냐에 있는 거란다."
  클레아는 베아티를 바라보았다.
  "그럼 제가 아직 충분히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군요.?"
  "네가 애를 쓰고 있다고는 생각한다. 아직 완전히 일어서지는 못했으나 얼마 안있어 일어설 거야. 시간이 걸리겠지. 그러니 더 마음을 편하게 가져야 하지 않겠니? 이제 다른 사람의 책임을 따지는 것은 그만두는 것이 좋겠어. 너를 보고 있으면, 네게는 모슨 것이 원망의 대상이고 문이란 문은 보는 족족 닫는 것처럼 보이는구나."
  "어마, 하지만 나쁜 것이 누군지는 너무나 분명해요. 이제 곧 결말이 날 거예요. 그런데 범인이 보석으로 나와 있는 것을 아세요?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런일? 루카스 형사한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난 귀를 의심했어요. 루카스씨는 글쎄, 또 전화를 걸어 오면 바로 알려달라는 거예요. 그런 위험 인물을 멋대로 돌아다니게 하다니, 이 세상이 어떻게 된 것이 아닐까요? 크리스마스에 파멜라를 같이 데리고 온 이유의 하나도 그거예요. 거기에 혼자 남겨 두기가 싫었어요. 이것은 파멜라에게는 비밀이에요, 괜히 겁을 먹게 되니까요.
지난번에도 그녀는 무서운 꼴을 당했었거든요."
  "말해 주는 것이 좋을 거야." 베아티는 걱정스럽게 말했다. "도대체 왜 그런 사람을 보석으로 풀어 주었는지 모르겠구나."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 형사의 말로는, 그는 전과도 없고 재판까지는 아직 여러 달이 남았기 때문이래요. 우선은 큰아버지라는 사람이 돈을 내놓고 감시하겠다고 약속했대요. 그리고 심리요법을 한 대요."
  "무척 물러터진 당국이구나, 치료가 필요하다고 하면 내주고."
  “본재판에서 무죄가 된다면 침을 뱉어도 마음이 풀리지 않을 거예요. 난 별로 집념이 강한 편이 아닌데도 그 일만 생각하면..." 클레아는 말을 끊었다. 더 이상 생각하기도 싫었다. 여러달이 지나는 동안, 무서웠던 밤의 기억은 조금씩 희미해져 가고 있는 것이다. 어쩌다가 생각이 나면 클레아는 얼른 다른 일로 머리를 돌리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비심이 있은 뒤로 또 생각할 거리가 늘었다. 그 밝은 법정에서 오간 더럽고 지저분하고 비참한 말들. 클레아는 좀더 긴장감 있는 드라마를 예상하고 있었으나, 끝난 뒤의 인상은 혐오감 그것이었다. 법정의 기록계는 한 마디도 빠짐없이 묵묵히 기록했고, 늘어앉은 사람들은 썩은 고기라도 씹고 있는 기분인 듯했다. 배심원들은 예의바르고 쌀쌀한 태도로 앉아 있었고, 먼지 낀 모닝으로 몸을 감싼 검사는 클레아가 흥분하지 않고 대답할 수 있더록 마음을 쓰며 이런저런 질문을 담담하고 억양없는 목소리로 하고 있었다.
  법정에서 클레아는 그날 밤의 공포나 쇼크를 그대로 전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응어리가 남아 클레아는 그 뒤 더욱 화가 났고 마음이 괴로웠다. 그러나 그 덕분에 클레아는 평상시의 생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할 수도 있다. 법정 관계자는 이미 사건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말하는 사실에 별로 놀라지도 않고 예의바르게 청취하고 기록하고 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사건도 통계숫자의 하나로 처리될 것이다. 런던에서는 일년면 도대체 몇 명의 여자가 레이프당하는 것일까? 공표되는 것은 숫자뿐이었다. 레이프도 강도도 절도도. 숫자의 그늘에 가려진 많은 사람들의 감정은 콘크리트 건물의 저쪽에서 댐에 갇힌 물처럼 넘쳐 있으나, 그것은 재판과는 관계가 
없었다. 그저 사실이 청취되고 그 무게가 측량될 뿐이었다. 그경과도 피해자의 희생의 정도도 모두 불문에 붙여져 버린다. 
  "그것에만 매여 있으면 안되는 거란다." 베아티는 클레아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물론 말하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어서 바비 떨어버려야 해, 그러지 않으면 사물은 자꾸 나쁜쪽으로만 흘러가 버리거든. 돈나와 너의 아버지가 같이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너의 아버지를 그 자리에서 쫒아 내 버렸거나 아니면 깨끗이 용서해 주고 잊어버렸어야 했어. 한데 나는 언제까지나 그 사실에만 매여 있었어. 내가 저지른 최대의 잘못이었어."
  "내가 아직도 그 일에 매여 있는 것처럼 보여요?" 클레아는 자기도 잘 알 수가 없었다. 사건 전의 자기가 어떠했는지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무척 오래 된 일처럼 생각되었다. 그날 밤 자리에 든 것은 사건을 당한 자기와는 다른 여자였던가? 
  "그렇지 않기를 빈다." 하고 베아티는 말했다.
  래리의 집에서 가까운 정류장에서 버스를 내려 걷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이야기로 머리가 꽉 차 있었다. 래리가 지금의 상태에서 빠져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는 늦어질 것이다. 후회하면서 살기는 싫아. 어머니와 같은 꼴이 되기는 싫다.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벨을 눌렀다. 짙은 곤색의 캐주얼한 스웨터에 청바지 차림으로 래리가 문을 열었다. 클레아를 보고 좀 놀란 듯했다.
  "안녕하게요. 들어가도 좋아요?" 태연스런 체하며 인사했다. 
  "무엇하러 왔지, 이런 데?" 래리는 문을 막아 선 채 날카로운 눈으로 내려다 보았다.
  "할 이야기가 있어요."
  "무슨 이야기? 내일까지 기다릴 수 없어?" 금방이라도 닫을 것처럼 문을 잡고 있었다.
  눈앞에서 닫아 버리면 큰일이다 싶어 클레아는 래리의 팔 밑을 빠져 집안으로 들어갔다. 래리는 소리가 나게 문을 닫고 화가 난 듯이 돌아보았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알고나 있는 거요?"
  "혼자 계시지요?" 래리는 갑자기 쭈뻣거렸다. 혹시 여자라도 와 있으면 큰일이다 싶어 열려진 거실 문 저쪽을 슬쩍 기웃거렸다. 볼륨을 낮춘 음악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그래. 무엇을 어쩌자는 거지?" 래리는 손을 허리에 대고 공격적인 태세를 취했다. 그러나 이것은 눈에 익은 모습이어서, 클레아는 도리어 침착해질 수가 있었다. 클레아가 거실로 들어가자 래리가 뒤따라왔다. 클레아는 쿠우트 깃을 꼭 여미고 돌아보았다. 래리를 정면으로 보면서, 결심이 흔들리기 전에 어서 말해버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난 톰과 데이트하거나 하지 않았어요. 그날, 몇 달만에 아무 예고도 없이 불쑥 톰이 찾아왔던 거예요. 내가 마침 목욕을 마치고 났을 때 벨이 울려서 나가봤더니 톰이었어요. 깜짝 놀라서 멍해 있는데 그가 서슴없이 들어왔기 때문에 당황해서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있었어요. 옷을 갈아입으면서도, 뭐라고 해서 쫓아 버리까만 생각하고 있었어요. 당신이 돌아간 뒤에 난 바로 톰을 밖으로 몰아냈어요. 하여튼 이제 끝난 일이에요. 이제 톰과 만날 생각은 없어요."
  말을 마치고 나서 클레아는 겨우 숨을 들이마셨다. 래리는 꼼짝도 하지 않고 클레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로 봐서는, 그녀가 한 이야기를 믿고 있는지 어떤지 알 수가 없었다. 조금 사이를 두고 클레아는 다시 말문을 열었다. 이번에는 아까 같은 기세는 사라지고 목소리도 갈라져 있었다. 
  "크리스마스 휴가를 마친 뒤에 어떻게든 당신한테 말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들어줘야 말이지요." 지껄이는 동안에 또 화가 나기 시작했다. "당신은 제멋대로 구는 짐승같은 사람이에요. 무슨 권리로..."
  래리는 크게 두 발짝을 다가서더니 클레아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머리를 수그리는 가 싶자 거센 키스를 퍼부었다. 클레아는 뭍에 끌러나온 물고기처럼 허파속이 텅빈 것 같고 숨이 답답해졌다. 두손으로 래리의 목을 끌어안고 그에게 몸을 붙였다. 입술을 벌리고 그의 혀가 밀고 들어오는 대로 내맡겼다. 래리의 머리칼에 손가락을 쑤셔넣고 뒷덜미를 쓰다듬었다. 크게 혈관이 맥박치고 있었다. 래리의 두손은 클레아의 등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의 손의 움직임에 따라 클레아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래리는 살며시 머리를 들고 입술을 뗐다. 
  클레아는 마지못해 눈을 떴다. 불빝에 눈이 부셨다. 래리는 반짝이는 눈으로 클레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요 엉터리 같으니. 그날 밤 당신하고 톰이 같이 있는 것을 보고 내 심정이 어땠는지 알기나 해? 머리를 걷어챈 것 같았어. 그 녀석은 나를 보고 히죽거리고 있었지, 자랑스럽게 말이야. 마치 방금까지 당신하고 침대에 같이 있었던 같은 표정이었어. 난 녀석을 후려치고 싶은 것을 참느라고 무진 애를 썼어. 질투였지."
  "이제 톰 같은 사람 친구로도 생각하지 않아요! 한데 왜 내 설명을 들어 주려고 하지 않았지요?"
  "그런 건 생각하지도 않았어. 감정적으로 저항하고 있었던 거야. 하긴 여자는 언제나 그러다가 말썽을 일으키지."
  "나한테 또 그렇게 쌀쌀하게 할 거예요? 해볼 테면 해봐요."
  클레아의 도전을 우습다는 듯이 래리는 받았다. 클레아는 래리의 허리에 팔을 감고 몸을 기대며 그의 심장의 고동소리를 듣고 있었다.
  "난 이제 당신이 없으면 외로워서 못 견디겠어." 입술로 클레아의 머리카락을 헤치며 속삭였다. "벌써 오래 전부터 그랬던 것 같아. 하지만 그것을 분명하게 깨달은 것은 에의 그 사건 때였어. 소식을 들었을 때 난 어쩔 줄을 몰랐어. 그저, 어서 빨리 당신곁으로 달려가서, 마음의 상처가 깊어지지 않도록 위로해 줘야지, 하는 생각뿐이었어." 래리는 두손을 클레아의 등에 돌려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클레아, 사랑해. 아, 클레아.' 래리는 클레아의 머리카락 속에 얼굴을 묻고 중얼거렸다. "당신이 롬니 마시에서 돌아온 뒤 조금이라도 나를 좋아해 주었으면 하고 얼마나 바랐는지 몰라. 그러나 일은 제대로 되어 나가지를 않았어. 안그래? 당신이 무서워하지 않도록 나는, 서두르는 자신을 누르고 있었어. 당신은 남자 얘기만 해도 몸서리를 치는 것 같았으니 말이야. 나는 두발짝 앞으로 나아간 줄 알았으나 한 발짝 뒤로 물러가오 있었던 거야."
  클레아는 미안한 듯이 웃었다. 
  "뱀의 사다리오르기군요. 아슬아슬한 한 발짝이기는커녕 자칫 도로 아래로 떨어질 뻔했군요."
  "요즘 당신은 아무래도 사람을 복종시키고 싶어하는 것 같아." 래리는 놀리듯이 말했다.' "앞으로는 조심해서 당신한테 아첨을 해야지. 그러지 않았다가는, 어느 날 아침 출근해서 보니 내 의자에 당신이 앉아있게 될지도 모르겠는걸."
  "그렇게 생각해요?" 클레아는 즐거운 듯이 웃었다.
  래리는 그녀의 턱을 손가락으로 치켜들고 가만히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아직 이르단 말이야." 래리도 즐거운 것 같았다. "그 의자는 내 무릎 위에 앉아 보고 나서야...." 래리는 클레아를 꼭 안은채 소파에 몸을 묻었다. 클레아는 머리를 그의 어깨에 맡긴 채 그의 무릎 위에 앉아 있었다. 
  "당신은 정말 의심 많고 심술궂은 사람이에요." 클레아가 따졌다.
  래리는 클레아의 코에 가볍게 키스했다.
  "미안해요, 아가씨."
  "정말 지독해요. 난 정말 비참했어요." 
  "당신이? 정말로?" 래리는 진지한 눈길로 클레아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나도 그랬어."
  "그것은 단신이 자청한 거 아니에요? 하지만 난 달라요. 이유가 없었는걸요. 질투한 바보같은 짓이에요. 이제 절대로 그러지 말아요. 조금이라도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으면 나한테 물어 봐 줘요, 자기 멋대로 결론을 내리지 말고요."
  "상대가 톰이 아니었다면 나도 그랬을 거야. 도대체 그녀석의 어디가 좋아서 당신이 어울리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어. 당신네는 벌써 몇 년 동안이나 어울려 왔잖아? 이미 장래의 약속까지 한 줄 알았지. 여자란 정말 비논리적이고 속을 알 수 없는...."
  "남자는 그렇지 않단 말이에요? 당신은 어땠지요? 당신은 나한테 설명을 요구할 수도 있었는데 귀를 기울이려고도 하지 않았어요. 그게 논리적인 일이에요?"
  "당신의 얘기는 듣기도 싫었어.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았어. 당신이 톰을 사랑한다고 말할 줄만 알았지. 난 아직까지 누구에게 그런 일을 당해 본 일이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좋을지 통 알 수가 없었어."
  래리는 또 팔에 힘을 주어 클레아를 끌어않았다. 클레아는 온몸이 녹아 버리는 것 같았다. 얼굴을 든 클레아에게 래리는 정열적인 키스를 했다. 래리의 키스에서 클레아는 그의 불타는 욕구를 느꼈다. 클레아의 내부에서도 그것에 호응하듯이 불길이 타올랐다. 숨이 막혀 답답해질 때까지 키스는 계속되었다. 이윽고 래리는 팔의 힘을 좀 늦추고 뜨거운 눈길로 클레아를 바라보았다. 
  "사랑하고 있어. 내가 10대 때, 세아이가 있는 어느 부인을 사랑했던 뒤로는 이만큼 누가 좋아진 일은 없었어." 벙글거리며 이야기하던 래리는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클레아는 어때?"
  "잘 모르겠어요, 나도 그렇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래서 여기까지 찾아왔지만. 글쎄 마음이 불안해서 안절부절 못하겠지 뭐예요. 당신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너무나 괴로웠어요. 하지만 난 모르겠어요. 래리, 이것은 꿈이 아니지요? 요즘 모든 것이 현실을 떠난 일뿐이라 난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요..."
  래리는 복잡한 표정으로 가만히 클레아를 바라보고 있더니 이윽고 일어서서 클레아를 두팔로 안아들었다.
  "그럼 우리 그것을 한번 밝혀 보기로 합시다, 당신의 사랑을."
  클레아는 몸이 굳어졌다. 그러나 래리는 그것을 무시했다. 래리는 클레아를 가슴에 꼭 안아들고 거실을 나와 침실로 들어가자 침대 위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안돼..아직. 래리, 너무 일러요... 아직 모르겠어요, 할 수 있을지 어떨지...." 
클레아는 신경질이 되고 있었다. 래리는 폭약같은 사람이라 언제 클레아 앞에서 폭발할지 모른다. 여기서 거절하면 그는 쇼크를 받겠지. 그러나 클레아는 자기가 아직 사랑의 교환을 할 수 있는 상태인지 어떤지 자신이 없었다. 
  클레아는 자신의 몸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하고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안돼요." 래리의 손이 살며시 스웨터를 잡아당겼을 때 클레아는 저도 모르게 말했다. "부탁이에요. 무리하지 말아요, 래리. 차츰 익숙해질 거예요. 참아줘요."
  "난 오래 참아왔어. 마음을 편하게 가져요, 절대로 무리하게 강요하지 않을테니. 싫다고 하면 얼른 중지하겠소. 다만 난 당신을 보고 싶어서 그래. 만져보고 싶어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같이 즐거워질 수 있다는 것을 당신에게 증명해 보이고 싶어."
  클레아는 몸을 떨었다. 온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클레아는 래리의 갈색 피부를 보았다. 근육질이고 스마트했다. 바로 눈앞에 있었다. 클레아는 입속이 바싹 마르고 귀속에 자신의 혈관이 맥박치는 소리가 쾅쾅 울리고 있었다.
  "클레아, 당신은 정말 눈부셔." 래리는 속삭였다. 래리의 손은 아름다운 대리석 조각품 위를 헤매었다. 대리석의 조각품은 페닉 상태에 바져 반사적으로 몸으 틀었다.
  "안돼요, 싫어요, 그러지 말아요." 어둠의 심연에 빠져들 것 같은 공포감으로 클레아는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겠어. 약속해. 그렇게 무서워할 것 없어." 래리는 따뜻하게 클레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가 포근하게 안아 주자 클레아는 차츰 마음이 누그러졌다. 따뜻한 체온 속에 감싸여 있으려니까 안도감이 느껴졌다. 래리의 한 손이 비너스의 등줄기를 찬찬히 오르내렸고, 또 한손은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래리는 비너스의 볼에 키스했다, 그리고 귀에도. 클레아는 어쩐지 포근하니 졸리고 머리가 무거워졌다. 래리는 클레아의 입술에 따뜻하게 키스했다. 그의 익숙한 애무에 까닭 모르게 몸이 떨렸다. 아직도 조각품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날 만져 줘." 래리는 따뜻하게 속삭였다. "무서워 하지 말아.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그저 만져 줘."
  그의 등에 팔을 돌려 쓰다듬자 키스의 소나기가 퍼부어졌다. 그 손은 끊임없이 조각품을 감상하고 있었다. 끔속에서처럼 두 개의 조각품은 서로의 거리를 차츰 좁혀갔다. 둘은 화려하게 불타올랐다. 
  이윽고 환희의 바닷물은 조용히 밀려갔다. 두 개의 조각품은 그 속에 잠겨 나른한 피로의 여운을 느끼며 누워 있었다. 
  "어땠어?"
  "좋지 않았다고 하면?" 클레아는 놀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건 사실이 아닐 거야. 당신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걸."
  "그렇게 잘 알아맞힌다면, 지금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말해 보세요."
  "우리는 결혼해야 해요, 겠지? 클레아, 우리 결혼해, 내일이라도 당장."
  "래리, 그건..." 하고 말하다가 말을 멈추었다. 자기 입으로 말할 수가 없었다. "너무 크게 기대하지 말아요. 나 자신도 내 마음의 빠른 회복에 어리둥절해 하고 있어요. 나에 대한 당신의 마음에도 놀랐고요. 서로 좀 찬찬히 생각해 보기로 해요."
  래리는 클레아를 한참 바라보고 있더니 침대에 일어나 앉았다. 그러고는 눈앞에 두 손을 내밀었다.
  "이 손을 좀 보라구. 당신이 싫다고 할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어. 당신이 좋은 대로, 좋을 때만 쓰도록 하겠어.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말라구."
  그는 알아주었군. 클레아는 래리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두 사람은 동시에 방긋 웃었다. 래리는 또 옆으로 누웠다. 두 사람은 조용히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서로가 서로의 품에 안겨 평화로운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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