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영화,리뷰,

홍세화-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by Casey,Riley 2023. 5. 9.
반응형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자

  나의 할머니께
  아내에게 그리고
  작은 새에게, 그리하여 
  이름없는 모든 작은 새들에게 

  "꼬레를 제외한 모든 나라"
  "꼬레를 제외한 모든 나라" 이것은 내가 갖고 있는 여행문서(TITREDE
VOYAGE)의 목적지란에 적혀 있는 말이다. 다시 말해, 주네브협정에 의거 내가
발급받은 여행문서는 나에게 다른 모든 나라에는 갈 수 있으나 꼬레(Coree)에는
갈수 없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런데 이 지구상에서 꼬레만 분단되어 있고 "꼬레를 제외한 모든 나라"는
분단되어 있지 않다. 결국 나는 분단되어 있는 나라인 꼬레에만 못가고
분단되어 있지 않은 모든 나라에 갈 수 있다.

  나는 꼬레 출신 망명자이다. 내가 한국이라는 우리말 대신에 꼬레라고
프랑스말을 계속 사용하는 데에는 나 나름대로 충분한 이유가 있다. 꼬레 출신
망명자인 나에게 꼬레에 여행할 수 없다. 즉 꼬레로 돌아갈 수 없다라는 규정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 아주 당연하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인간 사회의
합리적 법칙이다.

  그러나 내 몸은 그리고 내 마음은 그것이 전혀 당연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꼬레는 나의 땅이며 우리들이 사는 땅이기 때문이다. 그
땅은 불현듯, 그리고 자꾸만 나를 부른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더 부른다. "돌아갈 수 없다"하므로 오히려 더 줄기차게 부른다. 이것은
자연의 혹은 감성의 비합리적 법칙이다.
  따라서 나는 이미 모순이며 모순을 산다. 나는 고향이 있으면서 동시에
없으며, 조국이 있으면서 동시에 없다. 매일 "돌아가야지!"라고 말하며 동시에
"돌아갈 수 없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나의 모순은 내가 꼬레를 떠난 뒤에 불쑥 찾아온 것이 아니다.
그 모순은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아니 태어나기 이전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다음 기록은 그 생존의 조각들과 회상을 엮은 것이다.


      차례
    책머리에 
  서장 "빠리에 오세요"
    제1부 빠리의 어느 이방인
  1. 당신은 어느나라에서 왔소?
  2. 한 사회와 다른 사회의 만남
  3. 이방인
  4. 떠나온 땅
  5. 길을 물어가며
  6. 아듀! 고물택시
  7. 나도 승차거부를 했다.
  8. 씰비와 실비
  9. 망명신청, 갈 수 없는 나라
    제2부 갈수 없는 나라, 꼬레
  10. 회상(1) 잔인한 땅
  11. 택시 손님으로 만난 한국인들
  12. 빠리를 누비며
  13. 한 송이 빨간 장미
  14. 수현과 용빈에게
  15. 회상(2) 방황의 계절
  16. 회상(3) 가슴의 부름으로
  17. 뉴옌과 나
  18. 마지막 눈물

  못다 한 이야기 프랑스 사회의 똘레랑스
  발문 청춘도 사랑도 다 마셔버리고/임진택
  후기



    서장
  "빠리에 오세요"
  빠리에 오세요.
  아! 꿈과 낭만의 도시, 빠리에 오세요.
  내가 갈 수 없으니 당신이 오세요. 
  나를 찾지 않아도 돼요. 아니, 찾지 마세요.

  그러니까 당신이 빠리에 오세요.
  왔다가 그냥 가시더라도 빠리에 오세요.
  대한항공을 타고 오시겠지요. 샤를르 드골 공항 제1터미널로, 그리고 34번 
게이트로 나오시겠지요. 
  혹시 에어프랑스를 타시면 제2터미널이지요. 
  짐을 찾고 나오실 땐 세관원들을 쳐다보지 마세요. 그들은 눈이 마주친 
사람들의 짐만 검사하니까요. 그리고 라면박스 같은 데엔 짐을 넣어 오지 
마세요. 눈이 마주치지 않아도 검사할 수 있어요.
  가짜 루이뷔똥 가방은 뺏길 위험이 있다지요. 
  당신은 환전을 하셔야 되겠지요. 그러나 하지 마세요. 공항 은행은 아주 
엉터리니까요. 프랑스 돈 프랑이 하나도 없으시면 아주 조금만 바꾸시구요.
  아, 참! 공항 로비에서 두리번거리지 마세요. 두리번거리시더러도 작고 중요한 
가방은 꼭 움켜쥐고 계세요. 이딸리아보단 많지 않지만 소매치기 들치기가 
있어요. 
  짐이 많으시면 택시를 타세요. 그리고 10-15프로의 팁을 잊지 마세요. 짐이 
많지 않으시면 고속지역전철(R.E.R.)을 타고 빠리로 들어오세요. 공항에서 
전철역까진 공짜 버스를 이용하세요.
아니면 빠리까지 버스를 타세요. 물론 이건 공짜가 아니지요. 에어프랑스 버스를 
타시면 개선문까지 직행이에요. 다른 버스도 있는데 오페라 앞 평화까페 (Cafe 
de la Paix)가 있는 곳까지 오실 수 있지요. 평화까페에서 알랭 들롱을 봤다는 
사람이 있어요. 그래서 그런지 찻값은 비싸요.

  별 하나, 별 둘, 별 셋, 별 넷, 별 넷에 L로 표시된 호텔에 들어가시겠지요. 
  차례대로 여인숙, 여관, 장, 호텔, 호화호텔이에요. 이제 짐을 푸시겠지요. 
  나를 찾지 마세요. 
  전화번호가 적혀 있는 수첩을 뒤지지 마세요. 
  당신은 빠리를 찾아온 것이에요.
  나는 우연히 그곳에 있는 것뿐이구요, 이제는 이른바 출세를 하여 "드봉 
아티스트 스칼렛 오렌지 260"의 광고가 있는 어느 여성잡지의 명사가 된 나의 
옛 친구처럼.
  빠리에 있는 다른 사람도 찾지 마세요.
  당신은 빠리가 처음이지만 그 사람에게 당신은 아흔아홉번째니까요. 그러니까 
그 사람을 공항에 불러내지 않은 것은 아주 잘한 일이었지요. 아시겠지요? 
전화번호가 적혀 있는 수첩을 뒤지지 마세요.
  대신 한국에 두고 온 가족에게나 전화하세요. 프랑스에서 외국을 부르는 
번호는 00번이 아니라 19번이에요. 최근 소식에 의하면, 95년까지만 19번이고 
96년부턴 다른 나라들처럼 00번이 된다더군요. 그러니까 95년까진 서울을 
부르려면, 19(외국) 82(한국) 2(서울)가 되지요. 그런데 호텔방에선 되도록 
전화하지 마세요. 공중전화보다 아주 많이 비싸니까요.

    아! 꿈과 낭만의 도시.
  빠리에 오신 당신은 그러나 큰 숙제가 있지요. 빠리에 왔는데 남들이 다 본 
것을 당신이 안 봐서는 안된다는 그런 숙제 말예요. 남보다 더 보면 더 
보아야지 덜 보면 큰일나니까요. 그렇지요?
  개선문을, 꽁꼬르드 광장을, 에펠 탑을, 노트르담 대성당을 그리고 몽마르뜨르 
언덕을 찾으셔야지요.
  찾아가보시되 제발, 
  뒤통수로 보시기보단 앞통수로 조금 더 오래 보세요.
  무슨 소리냐고요? 증명사진(?) 얘기지요.
  그 숙제를 단 한 시간 동안에 해결할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드릴가요.
  오신 날 TABAC라고 써 있는 담뱃가게에서 (34번 게이트로 나오시면 바로 
왼편에 있지요. 아니면 시내에도 많구요) 전화카드를 사세요. 그때 빠리의 
사진엽서도 사세요. 마음에 드는 것을 다 고르세요.
  이튿날 (토요일이나 일요일이면 더욱 좋지요) 동이 튼 직후 택시를 잡고 
운전사에게 사진엽서를 보여주시고 그리로 가자고 하시면 되지요.
  그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사진에 나와 있는 배경이 목표가 아니라 그 
배경을 찍은 장소가 목표지점이라는 것이지요.
  그 장소들은 말이에요, 빠리의 화가들과 사진사들이 심혈을 기울려 찾은 
곳들이라구요. 바로 그 자리에서 배경을 뒤통수로 보시고 찰칵하면 되지요. 
아시겠지요? 빠리가 아닌 다른 도시에서도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왜 하필 동튼 직후냐구요?
  그 답은 이 글을 끝까지 다 읽으시면 알 수 있지요.

  이제 당신은 숙제의 반을 마친 셈이지요.
  그 누군가 말했듯이, "여행의 목적이란 다른 게 아니라 환상을 없애는 
것"이라면 그 환상도 어느 정도 지워졌구요.
  아, 그렇군요. 중요한 숙제가 남아 있군요. 박물관과 미술관이지요. 그중에서도 
루브르 박물관을 빼놓으면 안되겠지요. 모나리자와 비너스의 환상도 지워야 
하니까요.
  어느 할 일 없던 사람이 말하길, 루브르의 진열품 하나마다 단 일초씩만 
바라봐도 다 보려면 보름이 걸린다고 했어요. 그것도 하루 종일 쉬지 않고 볼 
때요. 그러니 모나리자와 비너스만 보고 나오셔도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요.
  그래도 모나리자와 비너스를 보실 때, 남들 따라 그냥 좋다 하지 마시고 
그것들이 왜 그렇게 좋고 유명한지 한번쯤 생각해보시는 것도 좋겠지요. 그리고 
결국 찾지 못해 팔이 없는 비너스에게 상상으로 팔의 모양을 복원시켜보는 것도 
재미있을 거구요. 맞는 말인지는 모르나 어느 조각가도 함부로 비너스의 팔 
모양이 원래 이런 것이었다 하고 장담을 못한다지요. 왜냐구요? 그렇게 복원한 
비너스가 팔 없는 지금의 비너스보다 아름답지 못하다는 것이에요. 이 얘기도 
맞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말이에요. 
  다리가 아프시다구요? 그래요. 루브르 박물관은 너무 크지요. 참 많이도 
뺏어왔고 훔쳐왔어요. 그래도 런던의 대영박물관보단 덜하지요. 루브르에는 
그래도 자기들 것도 많은데 대영박물관에는 남의 것밖에 없어요. 정말로 신사의 
나라답더군요. 
  다리가 아프시더라도 이런 생각을 하시면서 한바퀴 둘러보세요. 아놀드 
토인비라는 영국의 역사학자가 말했다는 문명 서진설을 말이에요. 세계 문명의 
중심이 서쪽으로 옮겨갔다는 설이지요. 
  이집트와 바빌로니아, 메소포타미아, 크레타, 그리스, 로마, 유럽, 대서양을 
건너 미국, 그 다음이 태평양을 건너 일본인가요? 그 다음에 그냥 중국으로 
넘어가지 않게 해야겠지요.
  그러기 위하여 한번쯤 이런 생각을 하실 수도 있겠지요.
  '뺏어온 것도 잘 보관하고 또 그 역사를 알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니 자기들 
것에 대한 애착은 말할 나위도 없겠구나. 이미 많이 빼앗긴 우리들은 그나마 
남아 있는 것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지 돌이켜 보아야 
하겠군'하고 말이에요.
  외국 문화 또는 프랑스 문화를 배우고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이 자기들의 
문화를 얼마나 아끼는지 그것부터 배워야 되겠다는 생각 말이지요.
그리하여,
  "드봉 아티스트 스칼렛 오렌지 260"과 같은 언어들의 횡포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해보시게 되겠지요, 당신은.

  아픈 다리를 조금 쉬신 당신은, 
  쎄는 강을 건너 오르쎄 미술관에서 중고등학생 때 미술책에서 많이 보았던 
밀레, 꾸르베, 마네, 모네, 씨슬레, 르누아르, 쎄잔느, 고갱, 고흐를 보시고 또 
레알에 있는 뽕삐두쎈터 4층의 현대미술관에서 삐까소를 ((꼬레아의 학살)은 
그곳에 없지만요) 보시면 아주아주 훌륭한 관광객이 되신 것이지요.
  어떻게 보셨든, 빠리에서 가장 중요한 미술관 세 개를 차례대로 다 보신 
셈이니까요.
  루브르는 고대부터 1848년까지, 오르쎄는 그후 1914년 일차대전까지 그리고 
현대미술관은 그후 지금까지 세 시기로 나누어 진열해 놓았지요.

  아! 꿈과 낭만의 도시.
  빠리에 대한 환상도 지워지기 시작했고 숙제도 끝났을 무렵,
  시간이 남으신 당신은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이 말은 레닌이 했던 말이지요. 레닌이 누구냐고요?

  빠리를 한눈에 내려다보고 싶다구요? 
  그렇군요. 이상했던 이상의 까마귀처럼 말이지요. 
  그러면 에펠 탑에 오르지 마시고 차라리, 
  노트르담 대성당의 탑에 오르세요. 승강기는 없어요. 하지만 당신은, 
  빠리의 정 한가운데의 가장 높은 곳에 오르시는 것이지요. 정 한가운데의 
가장 높은 곳. 아시겠지요? 꼭 오르세요. 저 아래 중생들이 아주 작게 보이지요.

  쎄느 강이 갑자기 둘로 나뉘어 흐르면서 섬을 이룬 곳, 
  그 주위를 상공의 까마귀처럼 한눈에 볼 수 있으니 전망이 참 좋지요. 빠리의 
발생지가 바로 그 섬이기도 하구요. 
  천연 요새인 그 섬엔, 그리고 유럽의 모든 도시의 중심에는 곡 두 개의 큰 
건물이 있지요. 하나는 교권의 상징인 대성당이구요, 다른 하나는 정권을 쥐고 
있던 성주의 성이지요.
  당신의 유럽 관광은 주로 이 두개의 건물을 보려는 것이기도 하구요. 그 
건축물들이 높으면 높을수록 웅장하면 웅장할수록, 당신은 감탄사를 
연발하시겠지요. 아! 저 높은! 아! 저 거대한! 하고 말이에요.
  그리고 대리석 등의 돌로 만들어진 크고 정교한 건축물에 압도된 당신은 우리 
조상들에 대한 불만을 토로할 수도 있겠지요. 오래 견디지 못하고 불에 타는 
목조건물밖에 지을 줄 몰랐다고 말이에요. 글쎄, 그럴까요? 우리한텐 정으로 
쪼아야 하는 화강암뿐이었는데 이들한텐 톱으로 썰 수 있는 석회질의 돌이 
많았던 탓이 아니었을까요?

  빠리의 옛 성주가 살던 곳은 지금은 법원이 자리잡고 있지요.
  그럼 성주는 어디로 갔냐구요? 정치권력이 커지니까 섬 안의 성이 좁아져 강 
건너로 갔죠. 그게 루브르였고 그것도 모자라 빠리꼬ㅁ 때 타서 지금은 없는 
뛸르리 궁 등의 왕궁을 지었고 또 그것도 모자라 베르사유 궁을 지었던 것이죠.
  그래도 빠리의 중심은 역시 노트르담이에요. 빠리의 중심은 곧 프랑스의 
중심이니 프랑스 도로의 영점 포인트가 바로 노트르담 앞에 있지요. 한번 
찾아보세요. 곱추를 찾기는 힘들 거예요.
  그런데 소매치기를 조심하세요. 한국의 어느 똘똘한 신문기자도 빠리에 
도착한 당일로 노트르담에 갔다가 여권이랑 돈을 다 잃어버렸으니까요. 
명심하세요.

  느트르담에서 강을 건너지 마시고 쎄느의 하류 쪽으로 내려오시면 당신이 
보신 영화 (뽕뇌프의 연인들)의 뽕뇌프가 나오지요. 뽕(pont)은 다리이고 
뇌프(neuf)는 '새로운'이란 뜻이니까 결국 '새 다리'죠. 그런데 빠리를 배경으로 
한 어느 한국 소설에서 '새 다리'를 '9번 다리'라고 썼더군요. neuf란 단어에 
아홉이란 뜻도 있기 때문에 나온 실수였어요. 그 실수는 이 '새 다리'가 서기 
1600년경에 돌로 만들어졌고 지금은 빠리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라는 것을 
모르고 이름 그대로 가장 최근에 만든 다리라고 주장하는 실수보단 아주 가벼운 
것이지요. 왜냐하면 앞의 실수는 단순히 단어를 잘못 이해한 것이지만 뒤의 
실수는 역사에 대한 오류니까요.

  그래도 빠리까지 왔는데 에펠 탑을 안 올라갈 수 없으시다구요?
  그럼요. 오르셔야지요. 1889년 프랑스대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만국박람회가 
열렸을 때 그 입구의 아치로 만들어졌던 것, 처음에는 빠리의 다른 석조건물과 
전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고 철거하라는 소리가 빗발쳤던 것, 그런데 지금은 
빠리의 상징처럼 되었지요. 한때 (우울한 일요일)등의 노래가 유행하던 때는 
자살장소로도 애용되었던 곳이기도 하지요.
  에펠 탑엔 2층(한국식으로3층)까지만 오르세요. 꼭대기엔 올라봤자 전망도 
흐리고, 밀납인형으로 만들어놓은 에펠이 에디슨을 초대하여 만나던 모습과 
태극기를 볼 수 있는 것까지는 좋은데 당신이 보시면 안 좋은 뭔가가 바로 옆에 
붙어 있어요. 방향이 같아서 그래요.
  1층에는 식당도 있고 또 우체국도 있으니까 쓰신 엽서를 그곳에서 부치세요. 
다른 사람에게 부쳐달라고 부탁하지 마시고요. 

  조금 지루하시죠?
  여행하시다가 지루함을 느끼게 되면 이제 다 보신 셈이지요. 
  다리도 아프시니까 에펠 탑 1층에 있는 까페에 들어가서 한잔 하세요. 담배도 
한 대 피우시구요.
  이제 제 얘기를 조금 들어보시겠어요? 긴장하지 마세요. 그냥 심심풀이 땅콩 
같은 얘기니까요.
  빠리의 한 노신사가 매일 점심때가 되면 지금 당신이 있는 에펠 탑 1층의 
식당까지 올라와서 식사를 하더래요. 한 일주일 동안은 그럴 수도 있겠거니 
했는데 한 달이 지나도록 매일 찾아오는 그 노신사에게 드디어 식당 주인이 
말을 걸었지요.
  "손님은 우리 식당의 음식이 그렇게 좋으신가요?"
  노신사는 아주 차갑게 "아니오" 했어요 그러니까 다시 식당 주인이, 
  "그러면 손님께선 에펠 탑을 참으로 좋아하시는군요?" 하고 물었지요. 그러자 
노신사는 더 차가운 목소리로 "나는 에펠 탑을 아주 싫어하오" 하지 않겠어요. 
식당 주인은 다시 "그런데 왜?" 하고 물을 수밖에 없었지요. 노신사는 이렇게 
대꾸했대요.
  "에펠 탑이 보이지 않는 식당이 여기뿐이라서 그렇소."
  별로 재미 없다구요?
  그래도 나는 이 얘기에 나오는 노신사에게서 프랑스인들의 특징을 보았지요. 
모든 사람이 다 좋다 해도"나는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개성말이에요. 아마 
드 골이었을 거예요, 치즈의 종류만 3백 가지를 먹는 프랑스인들만큼 통치하기 
힘든 국민도 없을 거라고 술회했던 사람이. 그렇게 개성이 강한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도 그래도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보면 신기할 정도지요. 나는 그것이 
똘레랑스(tolerance)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했지요. 똘레랑스가 뭐냐구요? 글쎄, 
한마디로 정의하긴 어려운데, '나와 다른 남을 허영하고 관용하는 것'이라는 뜻 
정도로 알고 여기선 그냥 넘어가도록 하지요. 나중에 자세히 말씀드릴 기회가 
있을 거예요. 
  심심풀이 땅콩 얘기를 계속하지요.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북쪽으로 쎄느 강을 넘어가면 바로 시청 거물이 있어요. 
이 건물도 빠리꼬뮌 때 타서 없어졌는데 다시 복원한 것이라더군요. 볼 만한 
건물이지요. 시청을 프랑스말로 Hotel de Ville라고 하여 직역하면 '도시의 
호텔'이 되는데, 이 '도시의 호텔'이란 말 때문에 생겨난 우화예요.
  몇년 전에 한국의 금모 장관이 빠리에 왔을 때 시청에 가서 빠리 시장이며 
프랑스 우파의 거두인 자끄 쉬락의 접견을 받은 적이 있어요. 이 사실이 어느 
한국 신문에 났는데 이렇게 적혀 있었지요. 
  "금장관, 묵고 있는 호텔로 찾아온 빠리 시장 자끄 쉬락의 예방을 
받다"라구요. '착각은 자유'겠지만, hotel이 여관이란 뜻도 있지만 원래 큰 집, 
대저택의 뜻이었다는 것을 모른 데서 생긴 우화지요.

  이것도 별로 재미없다구요? 그럼 할 수 없군요. 봉투 얘기를 
해야겠네요.전두환 정권 때, 한국의 한 실력자가 빠리에 오게 되었지요. 
대사관에서 프랑스 경찰측에 특별히 부탁하여 공항에서 대사관가지 오토바이 
경찰 두 대의 호위를 받도록 했었지요. 대사관 가까이 도착한 이 실력자의 
"봉투! 비서, 봉투, 봉투!" 하는 다급한 목소리가 아주 멀리, 아주 멀리까지 
들려왔다는 얘기였어요. 아마 하도 기분이 좋아 미리 준비할 생각을 못했던 
모양이지요. 그런데 그 경찰은 생전 처음 이상한 봉투를 구경하게 되었을 
거예요, 아마.
  별로 재미없는 얘기였어도 많이 해드렸으니까 이제 당신께 한가지 부탁을 
드려도 되겠지요? 무슨 부탁이냐구요?
  지금 앉아 계신 에펠 탑에서 서쪽을 향하면 뜨로까데로의 건물이 보일 
거예요. 그 오른쪽 건물에는 영화박물관이 있고 왼쪽 건물에는 인류박물관과 
해앙박물관이 있지요. 제 부탁은 그 해양박물관에 들어가달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한가지 확인을 해주세요. 몇해 전에 그곳에 거북선 모형이 있었는데 
지금도 잘 있는지 그리고 어디에 진열되어 있는지를 봐주세요. 제가 갔을 때 본 
거북선 모형은 길이가 한5,60센티미터즘 되는 것이었는데, 아 글쎄 그게 일본 
배들 진열대 안에 있는 거예요. 박물관의 맨 끝에 있는 그 진열실엔 '동양의 
이상한 배들'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고, 한쪽에는 중국 배들의 그리고 다른 
쪽엔 일본 배들의 모형이 그 설명과 함께 있었는데, 거북선이 스무 개쯤 되는 
일본 배들의 맨 마지막에 자리잡고 있었던 거지요. 모형 자체도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말과 함께요. 천만다행으로, 꼬레의 이순신 제독이 일본의 
침략을 막았던 배라는 설명은 있었어요. 아무리 꼬레 것으로는 거북선 하나밖에 
진열할 게 없었기로서니 하필이면 일본 배들 틈에 꼽사리껴야 했느냐고 
울화통이 터진 나는 그날로 그 박물관에서 몇백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재불한국문화원에 편지를 보냈지요. 벌서 아주 오래된 일이니까 지금은 거북선 
모형도 한국에서 새로 만들어 가져왔고 또 다른 데에 잘 진열되어 있으리라 
믿어요. 서울올림픽 개막식 때 자랑스럽게 선보였던 거북선이잖아요? 그러니까 
한번 들어가보시고 반가운 소식을 전해주세요. 만약 아직도 그 모양이면 당신이 
힘 좀 써보세요. 그게 내 부탁이에요.
  이윽고 에펠 탑 승강기로 다시 땅으로 내려오신 당신은 에펠의 동상을 
보시겠지요. 에펠이 누구냐구요? 에펠 탑을 설계한 건축가의 이름이지요. 당시의 
왕이나 대통령의 이름이 아니라구요.

  몇가지 얘기가 더 남아 있군요.
  그 하나는 앵발리드에 가시면 나뽈레옹의 묘를 보실 수 있는데 그 건물앞에서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서시면 일차대전 당시 원수였던 어느 프랑스 장군의 
동상이 보일 거예요. 이름이 갈리에니라는 그 장군의 동상은 보실 필요가 
없지만 그 장군상을 받치고 있는 사해의 식민지인상은 꼭 한번 보세요. 사각의 
각 방향에 인종이 다른 네 사람의 식민지인이 그 장군을 떠받치고 있지요. 
20세기에 만들어진 그 동상에서 당신은 프랑스 제국주의의 상징을 한눈으로 
보실 수 있어요. 21세기에 가깝고 식민주의, 제국주의가 끝났다고 하면서 그 
받침대를 그대로 두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없는 노릇이지요. 꼭 보시고 
증명사진도 찍으셔서 한국에 돌아가신 뒤에도 널리 알리세요.
  또 하나의 얘기는 빠리 도시계획에 얽힌 얘기예요. 
  빠리의 길이 지금처럼 결정된 때가 1860년경이라고 하지요. 나뽈레옹 3세 
때였고 도시계획 책임자의 이름이 오스만이었다고 해요. 런던이나 뉴욕처럼 
길을 직각으로 만들면 빠리의 개성이 없을 것이라고 하여 당시까지 있던 길을 
되도록 살리면서 도시계획을 세웠고 또 몇개의 중요한 간선도로의 폭을 대폭 
확장하여 지금과 같은 방사형 도시가 되었다지요.
  그런데 당시 몇개의 간선도로의 폭을 대폭 확장한 숨은 이유가 무엇인지 
아세요?
  그게 실은 바리케이드를 치기 어렵게 하기 위한 것이었대요. 길 양쪽의 
건물이 높고 또 돌로 되어 있으니까 폭이 좁은 길에는 아주 쉽게 바리케이트를 
칠 수 있었고 또 몇군데만 막으면 전 구역이 이른바 해방구가 될 수 
있었거든요. 당신이 '레 미제라블'을 읽었거나 영화를 보셨으면 알 수 있듯이 
바리케이드는 프랑스에서 일어난 사회투쟁의 거점 확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었어요.
  1848년에도 바리케이드로 시작된 사회투쟁은 2월혁명으로 발전하여 당시 
부활되어 있던 군주제를 다시 없애고 공화제를 쟁취했지요. 그래서 
대통령선거가 있었는데, 나뽈레옹 1세의 후광을 입은 그의 조카 루이 
나뽈레옹이 압도적인 표를 얻고 당선되었어요. 프랑스의 이른바 
제2공화정이지요. 그러나 그는 몇년이 지난 뒤에 친위쿠데타를 일으키고 
공화제를 폐지, 스스로 황제가 되어 나뽈레옹 3세라 했고 보불전쟁에서 
비스마르크한테 패할 때가지 장기집권을 했어요. 프랑스의 이른바 
제2제정이지요. 권력자의 욕망은 동서고금을 통하여 큰 차이가 없나 봐요. 
바리케이드에 힘입어 권력을 잡게 된 그가 바리케이드를 못 치게 하려고 애썼던 
것도 의미심장한 여운을 남기지요. 
  당신이 "백여년 전에 벌서 이렇게 길을 넓게 했다니!"하고 감탄한 그 넓은 
길에 얽힌 뒷얘기였어요.
  아. 참! 베르사유 궁전에 가셔야지요. 빠리에서 꽤 멀어져 있어서 내가 잠깐 
잊고 있었네요. 
  그곳에 가셔서 그 규모에 경탄하세요. 뒤통수로도 많이 보시고요.
  그러나 한편 그 궁전을 짓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땀과 피와 눈물을 
흘리면서 '꼬르베'(corvee)를 해야 했는지도 생각해보세요. 꼬르베란 무보수 
노역인데 당시 평민들에겐 일년에 45일씩 강제되었다지요. 
  거울방이라고 불리는 무도장에서 내려다보이는 전망이 좋지요. 멀리 호수도 
내려다보이는데 아직 불도저가 없던 때에 판 그 호수가 십자가형으로 되어 있는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지요. 그 호수를 '작은 베니스'라고도 불렀는데 곤돌라를 
타며 즐겼던 곳이었다고 해요.
  그 화려한 거울방에 얽힌 흥미있는 얘기가 있지요. 
  보불전쟁에서 승리한 프러시아의 비스마르크는 바로 그 방에서 프랑스와 
조약을 맺어 알자스-로렌 지방을 빼앗았고 또 독일제국을 선포하여 프랑스의 
자존심을 마음껏 상하게 하였지요. 그 한을 잊지 못한 프랑스는 일차대전에서 
승리한 뒤 바로 그 방에서 조약을 맺어 복수를 했지요. 당신이 
베르사유조약이라고 알고 있는 바로 그 조약이에요. 얘기는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에요. 이 베르사유조약이 있기 바로 전에 프랑스와 독일사이에 정전협정이 
먼저 있었는데, 그 서명을 했던 장소가 독불 접경의 어느 열차 안이었대요. 
프랑스는 그 열차를 일차대전의 승전 기념물로 박물관에다 잘 모셔다 
놓았다지요. 20여 년이 지난 뒤 이차대전 초기에 프랑스에 승리한 독일의 
히틀러는 굳이 박물관에 있던 그 열차를 끌어내 바로 그 안에서 프랑스와의 
정전협정에 서명을 했어요. 일차대전 때 승리한 프랑스의 원수 포슈(F.Foch)가 
앉았던 바로 그 자리에 앉아서 말이에요.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뿌리깊은 
자존심 경쟁을 볼 수 있는 에피쏘드라고 할 수 있는데. 나에게는 잔인한 
가학증으로 비쳤어요. 그러나 한편, 역사에 대한 한풀이에는 철저한 사람들이란 
생각이 들기도 했지요.

  베르사유에 가셨으면 궁만 보시지 마시고 꼭 정원의 한쪽 구석에 있는 
'왕비의 촌락'에도 가보세요. 당시 장 자끄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의 영향을 
받았다던가 (아마 루쏘의 뜻은 그런 게 아니었을 거예요) 그때의 유행에 따라 
왕비를 위하여 궁의 한쪽에 촌락을 만들었다고 하지요. 갈대지붕으로 만든 
초가집들이 여러 채 있고 풍차도 있고 등대 같은 것도 있고 또 물론 작은 
호수도 있지요. 뒤통수로 보실 만한 게 되지요. 그 정원을 자연 그대로를 살려서 
만든 이른바 영국식 정원이라고 하는데, 한편 궁에서 보신 기하학적으로 꾸민 
정원을 프랑스식 정원이라고 한대요. 인공인 것은 둘 다 마찬가지지요.
  나는 그 정원을 보면서 우리의 선조들은 대자연을 정원으로 가질 수 있었던 
멋쟁이들이었다는 생각을 했지요. 궁 안의 정원이 아무리 커보았자 아닌가요? 
거기에 비하여 정자 하나만 세우면 볼 수 있었던 우리의 정원은 자연 
그대로이면서도 장대했고 또 운치도 있었지요. 그 멋은 사라지고 이제 일본풍의 
정원을 돈 있는 사람들이 유행시키면서 우리의 마음도 왜소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아, 조선식 정원-우리의 자연이 너무나 그립군요, 나는.
  유럽 땅을 아무리 돌아다녀보세요, 우리 자연 같은 데 없지요. 스위스요? 
악산과 오천이지요. 게다가 물가 비싸고 인심 고약한 곳이에요. 눈 덮인 산은 
우리한테도 있어요. 스웨덴 구스타프 왕의 말이 진정 헛말이 아니에요.

  아직도 빠리를 떠날 때까지 시간이 남으셨나요?
  그러면 공동묘지에 한번 가보세요. 몽마르뜨르 공동묘지든지 뻬르 라셰즈 
묘지든지 아니면 몽빠르나쓰 공동묘지든지 다 좋지만 뻬르 라셰즈가 제일 
좋아요. 
  말없는 묘석들을 바라보며 걷는 것도 괜찮은 일이지요. 마음이 꽤 차분 
해지니까요.
  그래도 시간이 있으시면 쇼핑을 조금 하세요. 네? 뭐라구요? 환전을 아직 
못했다구요? 아, 그렇군요. 돈을 바꾸시려면 오페라 근처의 은행에서 바꾸세요. 
오페라 지역은 금융, 증권의 중심지역이기 때문에 은행도 많지요. 아니면 
개선문이 가까운 샹젤리제의 은행도 괜찮아요. 최근에 그 은행에선 한국 돈도 
바꿔주더군요. 환율은 말도 안되게 형편없었지만 그래도 한국의 경제력을 
말해주었지요. 믿지 않으시겠지만 나도 기분이 괜찮았다구요.
    환전하실 땐 항상 미리 환율을 확인하세요. 은행마다 다 다르니까요. 특히 
환전소 중엔 엉터리가 있다는 것을 꼭 알아두세요. 길을 가다가 영어로 "Today 
special, we sell 1US$ 5.65FF(오늘 특별히 1달러를 5.65프랑에 팝니다)"라고 
써서 붙여놓은 환전소를 보실 때가 있을 거예요. 은행에선 겨우 5.20프랑에 
바꿔주었기 때문에 당신이 얼씨구나 하고 창구에 달러를 집어넣었다간 
야단이지요. 그들은 백 달러에 단지 450프랑만을 줄테니까요. 어차피 항의도 
제대로 못할 당신이지만 항의를 한다 해도 이미 때는 늦었지요.
  1달러=5.65프랑이라고 쓴 것은 자기들이 1달러를 5.65프랑에 판다는 것이지 
1달라를 5.65프랑에 산다고 한 것은 아니었고, 또 환전소의 한쪽 구석 잘 안 
보이는 곳에 아주 조그많게 4.50이라고 적혀 있거든요. 프랑스 땅의 환전소니 
당연히 달러를 사고 프랑을 파는 데라고 믿는 허점을 노린 얄팍한 사기행위라고 
할 수 있지요. 이런 사기에 걸리지 않게 조심하세요. 요샌 13구 이브리가에 있는 
중국 거리의 환전소에서 달러를 가장 좋게 바꿔준대요. 단 여행자수표가 아닌 
현찰일 때만요. 화교계 사람들이 현찰 좋아하는 것은 잘 알고 계시지요.

  한가지 또 조심해야 할 일이 있어요.
  길에서 겉포장이 잘된 새 옷을 들고 접근하며 선물하겠다는 사람들이에요. 
그들은 주로 이딸리아계의 사람들인데 멋쟁이처럼 차려입었고, 당신이 
프랑스말을 잘 못 알아들으니까 곧 영어로 이렇게 말할 거예요.
  "이 옷은 이번 빠리의 패션쇼에 가지고 온 것이고 샹젤리제의 최고급 
상점에서 5천 프랑짜리인데 당신에게 선물하고 싶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기름값이 떨어져 이딸리아로 못 돌아가고 있다"라고 말이에요. 얼떨떨한 당신은, 
그리고 외국인에게 약한 당신은, 그리고 백인에게 특히 더 약한 당신은 5백 
프랑쯤 주고 그 옷을 받아 오겠지요. 어떤 한국 사람은 2천 프랑이나 뺏긴 
사람도 있었어요.
  겁나세요? 빠리에 온통 사기꾼들만 있는 것 같으세요? 그렇지 않으니까 걱정 
마세요. 내가 말씀드린 위의 사기행위들과 소매치기만 조심하시면 빠리는 
비교적 평온해요. 밤거리도 안전한 편이고요.
  그러나 여자들이 있는 술집 동네에선 조심하세요.
  아, 여자 얘기가 나오니까 귀가 번쩍 하시는군요.
  몽마르뜨르 언덕 아래쪽의 물랭 루주(Moulin Rouge,빨간 풍차)가 있는 곳부터 
삐갈이라는 곳까지가 특히 조심해야 되는 구역이지요. 발가벗은 백인여자들의 
사진이 요란하게 붙어 있는 그런 술집이나 카바레의 입장료는 단돈 10프랑이나 
20프랑, 당신은 이게 웬일인가 싶어 얼씨구나 하고 들어가시겠지요. 아뿔싸, 
일단 들어갔다 하면 1천 프랑이나 2천 프랑으로도 모자라지요. 당신은 무슨 
내막인지 곧 아셨을 거예요. 당신이 태권도에 자신이 있으면 하번 용기를 내서 
들어가보세요. 그곳에도 이른바 '기도'라는 사람들이 있는데 한판 붙어볼 자신이 
있으시면 말이에요. 삐갈은 원래 조각가의 이름인데 지하에서 슬퍼해야 할 만큼 
동네가 이상해졌지요. 절대로 삐갈에서 빠리의 낭만을 찾지 마세요.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빠리 안내는 거의 끝났어요.
  그러니까 빠리에 오세요.
  한국 식당도 많아요. 스무 개도 더 돼요.
  그래도 한번쯤 프랑스 음식을 드세요. 음식 하면 중국하고 프랑스인데 한끼도 
안 드시면 빠리지앵에게 좀 미안하겠지요. 그런데 식사하시고 게트림은 하지 
마세요. 
  아직도 시간이 남으셨어요?
  그러면 지하철을 한번 타보세요. 서울의 지하철과 비교도 하실 겸.
  그리고 쎄느 강의 유람선도 한번 타보세요. 빠리가 쎄느 강을 중심으로 
발전한 도시라는 것을 곧 이해하실 수 있지요. 
  그래도 시간이 남으셨어요?
  그럼 빠리 14구에 있는 '서울 광장'에 한번 가보세요. 그 바로 옆에 있는 
까달로뉴 광장과 비교하시면 열린 광장과 폐쇄된 광장의 차이를 알 수 있지요. 
나는 빠리에 있는 서울 광장을 보고 '폐쇄된 광장'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몽빠르나쓰 역에서 멀지 않으니 한번 찾아보세요. 남의 아파트 
안마당이라 쉽진 않을 거예요.
  아직도 시간이 남으셨나요?
  그럼 빠리의 길을 걷다가 개똥을 밟으세요. 정말예요. 한번쯤 개똥을 
밟으세요. 그리고 "메르드!"라고 외치세요
  왜냐구요? 프랑스 사람들이 그렇게 외치거든요. 똥이 프랑스말로 
메르드(merde)인데, 똥을 밟고 "똥!(메르드!)"하고 외치니 재미있지요. 
  아아, 화를 내진 마세요. 신경질도 부리지 마시구요.
  이런 말을 한 마드무아젤(아가씨)이 있었어요. 저기 아시아 사람이 온다. 나는 
그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 있다. 부드러운 표정으로 걸어 오는 사람=일본 
사람, 무표정으로 느긋한 걸음=중국 사람, 화난 얼굴에 급한 걸음=한국인, 특히 
바지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사람은 99프로 한국인. 
  아시겠지요. 화를 내지 마세요. 빠리에 오셨잖아요.
  신발에 묻은 개똥을 아침저녁 두 번씩 흘려보내는 청소물에 닦으세요. 깨끗한 
그 물로 빠리의 길도 청소하고 또 먼지도 없애거든요. 상수도 하수도가 잘되어 
있다고 자랑하는 것 같기도 하지요. 개똥을 잘 닦으신 뒤에 벤치에 앉으시고 
잠깐 생각을 해보세요. 예를 들어 이런 생각을 말이에요.

  빠리에 거지가 많다. 그런데 개도 많다. 개의 천국이다. 독일과 달리 개 
주인이 세금을 내지 않는다. 물론 개장국집도 없다. 프랑스에서 개장국을 
해먹다간 추방당할 것을 각오해야 한단다. 하긴 거의 조그만한 강아지들이라 
먹을 것도 없다. 그러나 빠리지앵들도 개고기를 먹어야 했던 때가 있었다. 
보불전쟁과 그 직후 빠리꼬뮌 당시, 외부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빠리지앵들은 
개고기는 물론 쥐고기도 먹었다. 그러나 지금은 큰일난다. 아마 유명한 육체파 
배우였던 B.B. 브리지뜨 바르도가 제일 먼저 아우성칠 것이다. 지금은 빠리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가 개의 천국이 되었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통계에 의하면 
유럽의 개와 고양이 등 동물의 먹이로 태국에서 수출하는 양식은 태국인이 백일 
동안 먹을 수 있는 양이다. 매년 그렇다. 그리하여 먹을 것이 없는 가난한 
태국인들은 입에 풀칠하기 위해 딸을 팔고 그 딸은 몸을 판다. 태국은 ㅆ스의 
천국이 되어 백인 남자들을 비롯 뭇 남자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고 또 
에이즈의 천국이 되었다. 유럽 도시의 슈퍼마켓에는 개와 고양이의 음식이 널려 
있어 유럽에 왔던 한국인들이 처음엔 개표 통조림 또는 고양이표 통조림으로 
알고 먹기도 했는데 맛도 좋았단다. 이런 것이 바로 시장법칙의 결과다. 세계의 
양식은 매년 10프로가 남아도는데 적어도 지구 인구의 20프로가 제때에 끼니를 
못 채운다. 이것도 역시 시장법칙의 결과다. 근래 북한 사람들이 제때에 끼니를 
못 채우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 소문이 실제 맞는 얘기인지 틀린 얘기인지 
잘 모르겠는데 그 소문을 신나게 말한 사람은 다수였고 걱정스럽게 말한 사람은 
소수였다. 한편, 몇년 전에 홍수가 났을 때 북쪽의 쌀을 받았던 적이 있었던 
남쪽에서 물물교환으로 북쪽에 쌀을 팔려고 했는데 미국이 열심히 훼방을 
놓았다. 그 훼방의 근거 역시 시장법칙이었다. 누구를 위한 '시장법칙인지 알 수 
없으나 우리는 지금 '시장법칙이 만능인 시대'에 살고 있다.

  개똥을 밟고 그런 생각을 잠깐 하셨던 당신은, 그러나 곧 그 생각을 잊으셔야 
되겠지요. 그런 골치 아픈 생각 해봐야 당신한테 남는 것은 손해뿐이니까요. 
그것 역시 시장의 법칙이지요.

  자, 이제 빠리에 오셨던 당신은, 
  아듀, 빠리!
  드디어 돌아갈 때가 되었군요. 부디 건강한 몸으로 돌아가세요.

  그래도 미련이 남으셨어요?
  뭐라구요?
  아! 나를 만나고 싶으시다구요? 정말이세요? 진정 정말이죠? 후회 
안하시겠지요? 좋아요. 그럼 만나지요. 어디서 만날까요? 날씨가 괜찮으면 
예술의 다리에서 만나는 것도 괜찮지요. 아니면 오페라 하우스 앞 층계에서 
만나는 것도 좋구요. 오페라 정면에 모짜르트와 베토벤 그리고 로씨니 등 일곱 
음악가의 흉상이 있는데 베토벤 흉상 밑에서 만나면 어떨가요? 아, 그 옆 
평화까페에서 만나자구요? 좋아요. 찾값이 비싸긴 하지만 그래도 괜찮아요. 단 
찻값은 내 차지예요.
  아, 나는 처음부터 당신을 만나고 싶었지요. 날 이해하시겠어요? 그리고 나는 
당신에게 정말로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요. 그 얘긴 바로 내 얘기예요. 시장의 
법칙 같은 그런 골치 아픈 얘기가 아니라 바로 내 얘기요. 들으시겠어요? 
정말이죠? 그럼 조금만 기다리세요. 곧 당신에게 달려갈게요.

      제 1부
  빠리의 어느 이방인
  나는 걸었다. 마냥 걸었다.
  "갈 수 있는 나라 모든 나라, 갈 수 없는 나라 꼬레"
  수없이 뇌고 또 되뇌면서 정처없이 걸었다.
  값싼 포도주 한 병을 사서 병나발을 불었다.
  유유히 흐르는 쎄느 강물에 지나간 순간들이 비쳐 지나갔다.
  갈 수 없는 나라에 내가 있었다.

    1. 당신은 어느 나라에서 왔소?
   바람에 우는 한 그루 마로니에
  3월 하순의 어느 수요일 한낮, 시커먼 구름 사이로 간혹 해가 비쳤으나 
공기는 아직 차가웠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 옷깃을 여미게 하였다간 다시 잠깐 
잠잠해지곤 했다. 이 바람은 곧 비를 몰고 올 것이다. 나는 이곳의 변덕스러운 
날씨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인 오후 1시 반부터, 나는 빠리의 남쪽에 붙어 있는 
한 위성도시인 말라고프의 어느 직업고등학교 앞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며 시간이 흘러가길 기다리고 있었다. 인적이 없는 골목길에 바람만이 
형상없는 손님처럼 왔다 가며 흔적을 남겼다.
  내가 앉아 있는 학교 앞길 모퉁이에 아주 큰 마로니에나무가 있었다. 아직 
어리고 여린 잎새들이 붙어 있는 마로니에가 쉬-익 쉬-익 바람소리를 냈다. 
나는 마로니에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마로니에. 우리나라에 흔치 않은 
마로니에는 동숭동 문리대 교정에서나 볼 수 있었다. 소중 했던 그 의미가 
갑자기 되돌아온 것은, 인적 없는 골목길에서 마로니에 혼자서 바람에 울고 
있다고 느껴진 때문일까?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옛날에 자주 부르던 노래를 
입 속으로 흥얼거리고 있었다. 십팔번이었던 그 노래의 가사를 나는 아직도 
잊지 않았다.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   
  눈물 속에 밤비가 흘러내리듯, 
  임자 잃은 술잔에 어리는 그 얼굴,
  아! 청춘도 사랑도 다 마셔버렸네,
  그 길에 마로니에 잎이 지던 날
  루-루루루 루루루 루-루루루루 루루루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
  얼굴들이 떠올랐다. 마로니에가 두 그루 있던 서울 동숭동 문리대 주위에서 
만났던 얼굴들,그들은 지금 다 무엇을 하고 있을까? 연극회, 탈춤반, 문우회 
그리고 제일 큰 강의실이었기 때문에 농성장으로 잘 이용되었던 본4강의실, 
삐걱거리는 층계 소리가 오히려 정다웠고 피아노 한 대와 모딜리아니의 목이 긴 
여인의 그림이 붙어 있던 학림다방에는 정치학과의 '초여름 버들'(류초하)이 
터줏대감처럼 느긋하게 앉아 있었지. 우리들 주머니사정이 넉넉지 못해 자주 
이용하지 못했던 중국집 진아춘 그리고 명륜동 쪽의 술집들, 술이 약한 나는 
한두 잔 마시고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를 불러댔었다. 잘 부르는 
솜씨는 아니었지만 감정이 풍부해 좋다며 박수를 치던 그 그리운 얼굴들이 
지금도 웃고 있는 듯하다.
  마로니에가 있던 문리대 교정과 바깥세상의 경계에는 개천(이름이 
대학천이었던가)이 흐르고 있었는데, 우리는 그 개천을 쎄느 강이라고 불렀고 또 
매일 넘나들던 조그마한 다리를 미라보 다리라고 했다. 아마 깨끗지 않은 
개천의 이미지를 없애고 싶었던 데에 젊은이들의 낭만적인 생각이 곁들여 
그렇게 불리게 되었을 것이다.
  다시 쉬-익 하는 마로니에의 바람소리에 나의 흥얼거림은 머리 속에 그려졌던 
정겨운 그림들과 함께 허공으로 날아갔다. 진짜 쎄느 강과 미라보 다리가 있는 
빠리의 현실로 돌아온 것이다. 나는 담배연기를 후우 내뿜었다. 담배연기도 
바람을 타고 흔적없이 사라졌다.

    작은 인종시장
  2시가 가까워올 무렵부터, 사람들이 서너 명씩 짝지어 학교 주위로 모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2시가 되었을 땐, 5,60명 가량 되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잡담을 나누었다. 나는 그들의 말소리를 건성으로 듣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프랑스인의 프랑스말과 에뜨랑제'이방인'들이 쓰는 프랑스말이 섞여 있었다. 
에뜨랑제의 프랑스말에는 다시, 알제리 모로코 튀니지 등 북아프리카 출신의 
아랍어 억양이 섞인 프랑스말과 베트남 사람의 강한 억양의 프랑스말, 그리고 
키 큰 흑인들의 프랑스말이 뒤섞여 있었다. 한편 베트남인들이 자기들끼리 
자기들 말로 떠드는 소리도 들렸다.
  나는 각기 떠들고 있는 그들을 둘러보았다. 프랑스인과 에뜨랑제의 비율이 
반반쯤 되어 보였다. 에뜨랑제로는 북아프리카 족의 아랍 문화권 사람들이 
많았고, 베트남 등의 인도차이나 사람도 꽤 되었다. 그리고 상아 해안 부근인 
가봉 쎄네갈 등 서아프리카 출신의 아주 까만 사람이 네댓 섞여 있었고, 또 
흑백혼혈이거나 혹은 남태평양 쪽에서 온 사람도 있었다. 이들 흑배혼혈 또는 
남태평양 출신 사람들의 살결은 곱고 매끄러웠는데 알맞게 그을린 그들의 
피부색깔 때문에, '까페오레'(프랑스인들이 아침식사 때 잘 마시는 커피와 우유를 
반반씩 탄 것)라고도 불린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혼자 빙긋 웃었다.
  전부 5,60명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이 모였지만, 백인 흑인 황인 그리고 
흑백혼혈 등이 함께 어울려 흡사 조그마한 인종시장 같았다. 그런데 거의 모든 
에드랑제가 프랑스의 옛 식민지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나와 두셋 정도의 
스페인이나 뽀르뚜갈의 남유럽이나 동구 출신을 빼놓고는.
  
   이상한 시험
  2시가 조금 지났을 때 학교의 문이 열렸고, 시험관의 인도를 받아 우리들은 
꽤 큰 강의실로 들어갔다. 수요일 오후에는 수업이 없는 프랑스의 거의 모든 
학교처럼 이 학교도 수업이 없었고 그 참을 이용, 우리들의 수험장으로 빌렸을 
것이다. 2인용 책상에 한 사람씩 자리를 잡고 우리들은 시험관의 주의사항을 
들었다. 이제 빠리에서 택시운전을 할 수 있는 임시 면허를 따기 위한 
필기시험이 시작될 참이었다.
  갑자기 묘한 느낌이 스며들었다. 책상을 마주하고 앉아 시험을 본다는게 
이상했다. 실로 이상한 곳에서, 이상한 때에, 이상한 사람들과 또 이상한 시험을 
보게 된 것이다. 그것은 흡사 꾸었다가 곧 잊어버린 아주 이상한 꿈이 갑자기 
생생한 현실로 돌아온 듯한 느낌이었다. 그때, 불현듯 하나의 기억이 갑자기 내 
머리 속에 떠올랐다. 나에겐 이미 택시운전을 하겠다는 생각을 가졌던 때가 
있었다. 빠리가 아닌 서울에서의 일이고, 문리대에 다니던 때의 일이었다.

  1970년, 전태일의 죽음은 당시의 학생운동에 대단한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그 
영향으로 많은 학생들이 노동운동에 뜻을 두게 되었고, 70년대 초부터는 
선반이나 용접 기술 등을 직접 배워 현장에 띄어든 학생들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 나중에 서울 지하철노조의 위원장을 지내게 되었던 정윤광씨도 
그와같은 문리대생 중의 하나였다. 그때, 나는 택시운전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내가 특히 택시운전을 하겠다는 뜻을 가졌던 것은, 당시 나에게 
택시운전을 하던 가까운 친구가 있었던 것이 그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나는 
그를 통하여 열악한 상황에 있던 택시운전사들의 처지를 가까이서 볼 수 
있었으며, 한편 그들을 결속시킬 수 있는 민주적이고 자율적인 노동조합이 
없다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 스스로 택시운전을 하며 
노동조합을 결성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는 꿈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몇몇 벗들에게 나의 뜻을 비치고 그들의 견해를 묻기도 했었다. 그들 중 
대부분이 나의 계획에 찬성의 뜻을 표시했는데 그렇지 않았던 벗도 있었다. 
그중의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문제는, 우리들이 노동현장에 들어갈 때, 일생을 두고 그 현장에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에 있다고 봐. 죽을 때까지 말이야. 바로 그것이 일반 노동자들의 
실제 삶이거든, 우리는 현자에 들어가더라도 되돌아올 수 있는 길이 항상 열려 
있지만 일반 노동자들은 그렇지 않아. 그들에겐 노동현장이 바로 생존이지만 
우리들에겐 그게 생존이 아니라 의식일 뿐이거든. 그런데 그 의식은 변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차라리 이런 생각을 해보는게 어때? 예를 들면, 앞으로 
10년 20년 이후의 우리들의 모습을 상상해보는 것 말이야. 확실한 것은 그때의 
세화의 모습은 택시운전사가 아니라는사실이야. 차라리 세화는 문화운동 쪽에 
더 관심을 갖고 열심히 해보는게 좋지 않을까? 그쪽에서 활동하는 세화의 
모습은 상상이 되거든."
  결국 나는 택시운전사가 되겠다는 나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꼭 그 
벗의 충고를 다른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택시운전을 하더라도 단지 얼마 동안만 할 생각이었음은 
자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지금 돌이켜보니, 그의 말은 틀렸지만 결국 옳았다. 
내가 문화운동 쪽에서 활동하지 못하고 결국 택시운전을 시도하게 되리란 것을 
상상하지 못한 것은 틀렸다. 그러나 노동현장은 의식이 아니라 생존이라고 했던 
그 말은 너무나 옳았다.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이 그대로 
증명하고 있었다. 

    묘한 우연
  나는 내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의 오른쪽 옆에는 프랑스 사람인 듯한 20대의 
젊은 여자가 앉아 있었는데 택시운전을 할 만큼 단단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우리들과 함께 시험을 치르는 두 명의 여자 중 하나였다. 나의 왼쪽에는 30대의 
남자가 낮아 있었는데 백인이었으나 프랑스인 같지는 않았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첫번째 관문인 운전 실기시험을 통과한 사람들이었다. 
나도2주일쯤 전에 실시된 실기시험을 통과했다. 시험관 세 사람을 태우고 약 
15분 동안 바리 15구에 있는 모리용 거리 주위를 돌아오는 것이었다. 나는 
운전석에 오르자 바로 안전벨트를 착용했었는데, 시험관이 풀어도 된다고 
말해주어 약간의 긴장감을 풀 수 있었다 시험관들이 주로 보는 것은 부드러운 
가속과 감속, 적당한 속도 등이 주는 안정된 승차감과, 건널목에서 우선 차량에 
대한 양보 따위를 잘 지키는가 등 안전운행에 관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천천히 운행을 하여도 감점이 된다고 했다. 15분 동안의 운행시간이 
위의 주안점을 살피는 데 짧을 것 같으나 실은 충분하다는 것을 운전을 해본 
사람이면 수긍을 할 것이다. 
  나는 프랑스에 도착한 후 7,8년 동안 빠리에서 운전을 해보았기 때문에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내가 운행해야 하는 모리용 거리 부근을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프랑스에 도착하여 처음 살기 시작한 
곳이 바로 모리용가와 바로 이웃해 있는 끄론슈다뜨가였기 때문이다.
  그때는 에펠 탑이 바라보이는 꽤 큰 아파트에서 매달 집세 낼 걱정 없이 
살았었다. 새로운 사회를 만나 자신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었으며 또 소시민의 
편안한 삶의 유혹에 빠져들고 있었다. 나는 해외지사원이 되어 갑자기 
계층상승을 한 것이다. 뜨거운물 찬물이 나오는 아파트에 전화가 있었고 또 
자가용이 있었다. 그것도 빠리에. 실로 갑작스런 상승이었고 그대로 빠져들기만 
했다. 그러나 그 기간은 아주 짧았다. 그 기간이 잠깐 동안으로 끝난 것을 
오히려 다행이라고 주장한 것은 나의 의식이었고 또 불행이라고 주장한 것은 
나의 현실이었다. 이 두 개의 상반되는 주장은 항상 나를 붙어다니며 괴롭혔다. 
그것은 내 위장의 벽을 갉았고 두통에 시달리게 했다. 
  나는 운전 실기시험을 보는 중에, 내가 살았던 끄론슈따드가의 24번지 앞을 
지나며 잠깐 동안 딴생각을 하는 여유(?)를 갖기도 하였다. 그것은 참으로 묘한 
우연이었다. 어쨌든 나는 첫번째 관문인 실기시험을 무사히 통과하였고, 이제 
두번째 관문인 필기시험장에 앉아 있는 참이었다. 그리고 이 관문을 통과하면 
6개월 동안 유효한 빠리의 임시 택시운전면허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제일 어려운 받아쓰기
  드디어 시험지가 나누어졌고 우리들은 다시 시험관의 낭랑한 목소리를 열심히 
들어야 했다. 첫 시험은 이른바 프랑스어 '받아쓰기'(dictee)였기 때문이다. 
프랑스어를 이해하는가를 알고자 함이다.
  원래 빠리의 택시운전면허 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으로 요구된 것은 두 
가지뿐이었다. 하나는 1년 이상 빠리 지역에서 살고 있어야 한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역시 일반 소형 자동차 이상의 운전면허를 1년 이상 소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자격조건은 프랑스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으며, 
외국인에게만 특별히 요구되는조건은 없었다. 다만 외국인의 경우, 프랑스의 
체류허가증과 노동허가증이 요구되고 이 조건만 충족되면 프랑스인과 똑같은 
조건에서 면허시험을 치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의 서비스업에 
종사하게 될 택시운전사에게, 그가 영업하는 곳인 프랑스 땅의 말에 대한 기초 
이해능력을 묻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외국인에게만 따로 '받아쓰기' 시험을 치르게 하지 않고, 프랑스인에게도 
똑같이 적용하는 그들에게 약간의 고마움과 함께 매료된 게 사실이다. 왜냐하면 
프랑스 사람들 중에 택시운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프랑스말을 이해 못할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흡사, 서울의 택시운전사 
면허시험이 있다고 할 때, 우리나라 사람에게도 우리말 시험을 치르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열심히 시험관의 말을 받아썼다. 다른 어느 문제보다도 '받아쓰기'가 
가장 중요하였다. 점수 배당은 그리 많지 않으나, 15개 이상 틀리면 '받아쓰기 
낙제'가 적용되어, 다른 점수에 관계없이 낙방하기 때문이다. 프랑스어는 동사의 
어미 변화가 심하고 또 묵음이 많기 때문에 문법은 물론 문맥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제대로 받아쓴다는 게 쉽지 않다. 빠리 택시운전면허 시험에서 
'받아쓰기'를 잘못하여 떨어지는 비율이 제일 많은데, 외국인뿐만 아니라 
프랑스인도 마찬가지라고 들었다. 
  나는 처음에 시험관이 무엇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지 알아차릴 수가 없어서 
당황하였으나, 조금 후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게 되자 자신이 생겨 볼펜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우리가 받아쓰는 글은 '필요한 때는 찾기 힘들과 필요하지 
않을 때는 잘 보이는 것 두가지가 있는데, 바로 경찰과 택시'라는 내용을 유머를 
곁들어 쓴 공뜨의 한 부분이었다. 나는 '받아쓰기 낙제'는 면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을 갖게 되었다. 나 역시 '외국어를 잘 말하지는 못해도 문법에는 강하다'는 
일반적인 우리나라 사람들을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시험문제들 
  '받아쓰기'가 끝나자, 우리들은 이미 나눠진 문제지에 답안을 작성하기 
시작하였다. 문제는 크게 네 부분으로 되어 있었다. 
  첫번째 문제는 주어진 출발지에서 목적지까지의 지름길을 묻는 문제였다. 이 
문제는 두 개였는데, 바링의 북역에서 남쪽에 있는 몽빠르나쓰 역가지 갈 때와, 
빠리 남서쪽에 있는 뽀르드 드 베르사유에서 동족인 뽀르뜨 드 몽드뢰이까지 
가장 짧은 길로 갈 때, 그 길 이름을 차례대로 쓰라는 문제였다.
  이 문제는 암기에 익숙해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겐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위의 두 지름길은, 이미 수험생들이 다 알고 있는 40개의 지름길 중 
두 개였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40개의 갈 길'의 정답 리스트를 갖고 있었으며, 
이들 중 두 문제가 나온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으므로 그 정답 리스트만 
열심히 외면 그만이었다. 무슨 그런 문제가 있느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으나, 이는 이 '40개의 길'을 외게 되면 빠리 시내의 가장 중요한 
간선도로와 그 위치 및 방향을 자연 알 수 있게 되는 이점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이 문제는 시험문제로서보다는 '40개의 길'을 가르치게 
되는 효과를 노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 문제는 택시요금 요율 문제였다. 빠리 택시의 요율은 A, B, C세가지로 
되어 있다. 킬로미터 거리당 요율이 가장 낮은 A와, 그 다음의 B, 그리고 제일 
높은 C요율이 있는데, C요율은 A요율에 비하여 두 배가 넘게 책정되어 있어서 
요율당 차이가 꽤 많은 편이다. 
  A, B, C 세 가지 요율의 적용은, 손님을 태운 택시의 현위치와 시각에 의하여 
결정된다. 예를 들어, 빠리 시내에서 낮에는 (빠리 택시에서의 낮시간이란 오전 
7시부터 다음날 오전 7시까지를 말한다.) A요율이 적용되며, 밤에는 (오후 
7시부터 다음날 오전7시까지) B요율이 적용된다. 낮시간보다는 밤시간이, 그리고 
빠리 시내보다는 교외가 더 비싸게 책정된 것인데,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고 할 만하다. 왜냐하면 낮보다는 밤에 운전하는 것이 힘들고, 또 빠리 
시내에서는 곧 다음 손님을 태울 수가 있으나 교외로 빠져나갔을 경우 빈 차로 
돌아와야 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문제에 제시된 "오전 7시 5분 전에 낭떼르(빠리 서쪽에 있는 
위성도시)에서 출발, 빠리 시내를 횡단하고 동족 교외를 지나 낭시(빠리 동족 
3백 킬로미터 지점의 지방도시)까지 갈 때"를 상정한 요율을 차례로 적었다. 
나는 내가 쓴 답을 다시 한번 확인하였다. 맨 처음에 C(밤시간, 빠리 교외), 그 
다음 5분 후에는 B(낮시간, 교외), 그 다음에는 A(밤시간, 빠리 교외), 그후 
빠리를 벗어나면 다시 B(낮시간 교외), 그리고 마지막으로 C(낮시간이라도 교외 
지역 바깥 지방으로 빠져나갈 때)가 되었다.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 빠리에 와서 바가지 택시요금을 물지 않겠다고 
열심히 이 요율을 알아 두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필요없는 수고라고말해주고 
싶다. 왜냐하면 빠리의 택시운전사들은 요율을 속이는 일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특별히 정직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와같은 속임수를 막을 수 있는 
장치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빠리 택시는 다른 나라의 택시와 마찬가지로 
차체의 지붕에 아크릴로 '택시'표시를 하고 있는데, 다른 것은 그 바로 밑에 세 
개의 조그마한 등이 달려 있는 것이다. 흰색, 오렌지색 그리고 파란색의 등은 
각각 요율 A, B, C를 표시하여, 택시운전사가 택시 안에서 적용하는 요율에 
따라 그 등이 켜지게 되어 있다. 따라서 밖에 이는 사람들도 충분히 그 택시가 
어떤 요율로 가고 있는지 알게 되므로, 아무리 부정직한 택시운전사라도 감히 
부러 요율을 속이는 일은 하지 못한다. 만약 그런 짓을 했다가는 같은 
택시운전사들이게 지적되어 눈총을 받게 됨은 물론 경찰의 제재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국제도시이고 관광도시이기 때문에, 이같이 철저하게 요율 통제 
장치를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빠리에 처음 오는 관광객들도 요율을 속인 
바가지 요금을 지불할 위험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요율에 관한 문제 다음에, 우리들은 단답식의 문제에 답안을 작성하였다. 
개인택시 운전사는 하루에 열한 시간, 그리고 봉급운전자와 임차운전자는 
하루에 열 시간까지 일할 수 있다는 규정에 관한 문제와, 또 박물관이나 
행정부처의 주소를 묻는 문제 등이었다. 그리고 손님을 태울 수 없는 
위성도시에 대한 문제도 있었다. 예를 들어 빠리 남서쪽에 있는 쌩 끌루 같은 
위성도시는, 빠리 택시운전사에게 별로 기분 좋은 곳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곳까지 손님을 태워다줄 의무는 있지만, 그곳에서 손님을 태울 수 있는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위성도시들은 대개 부유층이 많이 사는 도시인데, 
  빠리 택시체제에 편입되어 있지0 않고 자체로 택시를 운영하고 있어서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빠리 택시는 손님을 태우지 못하게 되어 있다. 
마지막 문제는 추가요금에 관한 것이었다. 개나 고양이 등 동물을 태울 때는 
3프랑, 그리고 네 사람을 태울 때와 여행가방 등 큰 짐을 실을 때, 그리고 
기차역이나 공항 버스터미널 등에서 손님을 태울 때에 각각 5프랑식의 
추가요금이 붙는다는 것을 쓰면 되는 것이었다. 여행가방을 실을 때, 그 개수에 
따라 추가요금이 붙는다는 것을 답안에 쓰며, 나는 특별히 생각나는 일이 
있어서 혼자 배시시 웃었다.

    빠리에도 택시 합승이 있다?
  몇년 전의 일이었다. 나는 세 명의 남자 한국인 관광객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들은 나를 보자마자, 빠리에도 택시 합승이 있느냐고 물었다. 없다고 
대답하자, 그들은 빠리 택시운전사에게 당했다며 흥분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당했냐고 물으니, 공항에서 시내가지 왔는데 450프랑이나 지불했다고 했다. 보통 
150프랑 정도이고 많아야 200프랑 정도로 알고 있었기에 그렇게 나올 수 없다고 
하자, 실제로 미터요금은 144프랑밖에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150프랑을 주었더니, 택시운전사는 더 달라고 손을 벌리더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기분 나쁜 표정을 짓고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이며 마냥 떠들어대는데 
프랑스말을 알아들을 수도없어 무척 당황하게 되었고, 결국 손가락 세 개가 세 
사람분을 요구하는 것으로 이해하여, 450프랑을 지불하고 내렸다고 했다. 그러니 
빠리에도 택시 합승이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나는 450프랑을 지불할 때의 
상황이 이해도 되면서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택시운전사가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인 것은 가방이 세 개니까 추가요금을 내라는 것이었는데, 
한국인들은 택시 합승으로 이해하여 요금의 세 배를 지불한 것이 틀림없었기 
대문이었다. 오히려 450프랑을 건네받은 운전사가 순간적으로 더 당황했을 
터이었고, '에라 모르겠다'하고 챙겨ㄴ었을 터이었다. 그 운전사가 정직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의 택시 합승이 빠리에서까지 그 위력을 
발휘했다는 쪽이 더 정확한 얘기가 될 것이다. 그런데 여행가방에 대한 
추가요금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고 해도, 처음 택시 미터기에 144프랑이 나왔을 
때, 10-15프로의 팁을 주는 관행을 알아서 미리 160-170프랑을 지불했었다면 
아무 일 없이 지나갈 수 있는 일이었다. 가방의 추가요금을 합해도 160프랑이 
안되기 때문에 손가락 세 개를 펴보일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리고 팁이라는 
것은 '절대로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은 어느 나라에서 왔소?
  드디어 우리들은 답안지를 시험관에게 제출하고 우르르 바깥으로 몰려 
나왔다. 밖에는 비바람이 치고있었다. 비를 맞으며 나서는데, 나의 왼쪽에 
앉았던 30대의 백인이 나에게 알은척을 하였다. 그도 나처럼 혼자 시험 보러 온 
사람이었다. 자연히 우리는 지하철 정류장가지 함께 걸었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프랑스말을 했지만 프랑스 사람은 아니었다. 
  "시험은 어땠소?"
  "그런대로." 나는 묵묵히 대답했다.
  "나도 다른 문제는 괜찮았는데 받아쓰기가 좀 어려웠소." 
  나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은 어느 나라에서 왔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런 만남에서 항상 던져지는 질문, "당신은 어느나라 
사람이오?" 이것은 아마도 이 프랑스 땅에서 내가 제일 많이 들어야 했던 
질문일 것이다. 길에서, 학교에서, 병원에서, 까페에서 나는 수없이 이 질문을 
들어왔다. 그리고 이 질문에 바로 대답을 안하면 즉시 이어서 따라오는 질문도 
또한 거의 한결같은 것이었다. "중국사람? 베트남 사람? 아니면 라오스 사람? 
혹은 캄보디아 사람? 그것도 아니면 일본사람?" 이와같은 아시아 사람의 나열에 
"꼬레앵?'한국인?"이 처음에 등장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 질문을 받으면서, 나의 내면에 간사스러운 일면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스스로 놀란 적이 있었다. 그것은 상대방이 나에게 캄보디아나 베트남 
사람이냐고 물을 때보다 중국인이냐고 물을 때 덜 싫고, 또 중국인이냐고 물을 
때보다 일본인이냐고 물을 때 더 속이 편하다는 시실 때문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묘한 사실이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에게 그와 같은 반응이 
일어나는 것은, 내가 인도차이나 사람보다 중국인을, 그리고 중국인보다 
일본인이 더 낫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나의 반응은, 상대방이 
그와같은 질문을 하면서 내면에 품고 있을 것 같은 선입관에 대한 반항심에서 
온 것이었다. 즉 인도차이나 사람이냐고 물을 때는 (특히 프랑스 사람들이) 
자기들의 옛 식민지 사람에 대하여 식민 모국인이 가질 수 있는 일종의 
우월감에 대한 반항심리에서였고, 또 중국인이냐고 물을 때는 일본인이냐고 
물으면서는 품을 수 없는 가난한 나라 사람들에 대한 제1세계인들의 우월감이 
싫어서였던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일본인이냐고 묻는 질문에 더 열심히 
"꼬레앵"이라고 대꾸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고, 그보다 더 후에는 이런 질문에 
무감각하게 되었다.
  "나는 폴란드 사람이오."
  내가 대답을 않고 꾸물거리자, 그가 먼저 출신을 밝혔다. 폴란드인, 유럽에서 
가장 파란이 많았던 민족. 역시 그랬구나. 조금 전에 시험 볼 때 나는 그의 
눈빛으로 프랑스인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프랑스인들처럼 눈빛이 
또렷또렷하지 않았고 힘없이 허공을 바라보는 듯했다. 그도 나를 보고 비슷한 
느낌을 가졌을지 모른다.
  "아 그래요 나는 꼬레에서 왔소."
  "꼬레?" 당연히 프랑스의 옛 식민지인, 인도차이나에 있는 나라 출신으로 
생각했을 그는 아주 의외라는 표정으로 나를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그리고 
예상했던 질문이 이어졌다. "노르 우 쉬드? (북쪽 아니면 남쪽?)"
  "허허" 하고 나는 웃었다. 그가 바로 이어서 '이렇게 물을 것이다'하고 내가 입 
속으로 뇌고 있던 말을 한 음절의 차이도 없이 아주 똑같은 순간에 입 밖으로 
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웃자 그는 약간 민망했던지 따라서 미소지었다. 나는 
계속 미소지으면서 나의 대답을 반복하였다. 
  "꼬레, 꼬레 두 꾸르(꼬레, 그냥 꼬레요)."
  이 대답은 나의 아집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 대답에 대한 상대방의 
계속되는 질문을 피하기 위하여, 바로 화제를 바꾸는 것도 나의 습관처럼 되어 
있었다. 
  "그런데 오늘 시험 본 결과를 언제 발표하는지 알고 계시오?"
  그는 더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다음 주 월요일이오."
  "아 그래요, 고맙소."
  비바람이 거세졌다. 편서풍의 영향일까? 이곳의 비는 항상 바람과 함께 온다. 
굵은 빗방울은 머리에 떨어지지 않고 얼굴을 때린다. 우리는 옷깃을 올려 
여미고 말없이 걸음을 재촉했다. 지하철역에 도착하자, 갈 길이 다른 우리는 
시험에 통과하는 행운을 갖기를 기원한다고 서로 말하고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그 뒤 나는 그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가 걱정 했던 대로 받아쓰기에 
실패했는지 모르겠다.

      2. 한 사회와 다른 사회의 만남
   꾸르브부아 시의 한구석
빠리 서쪽의 한 위성도시인 꾸르브부아 시 쌩 드니가의 33번지에 있는 방 
두칸짜리 아파트에 우리 다섯 식구가 살고 있었다. 80여세로 연로하신 장모님이 
함께 계셨고 두 아이가 점점 커가면서 원래 좁은 집은 더욱 좁아졌다. 
좁은 집이었지만 나는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 집에서 오랫동안 살 수 
있었던 것에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 이유는 한국에서 경험한 바 있었던 
남의 집살이의 서글픔을, 남의 땅인 이곳에선 거의 느끼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월셋방에 살면서도 집주인이 누군지도 모르고 살 수 있으며, 집세를 집주인 
마음대로 올리지 못하며 또 집주인 스스로 들어와 살거나 집을 팔기 전에는 
세입자에게 퇴거 요구도 할 수 없는 등, 집 없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프랑스의 
법적 장치의 덕을 아주 톡톡히 보고 있는 셈이었다. 이 법적보호장치는 
세입자에게 아이가 딸린 경우에는 더욱 탄탄해져서 집세를 못 내도 그 세입자를 
쫓아내려면 적어도 3년이 걸린다고 할 정도였다. 나도 여차하여 집세를 못 내게 
되면 이에 해당하겠지만 그 지경가지 이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그게 
쉽지 않았다.
  우리 아파트는 13층에 있었다. 주위의 아파트 건물들이 높지 않아, 앉은 채로 
넓은 창문을 통하여 내다보이는 전망이 확 틔어 시원했다. 아주 멀리, 검은색을 
띤 구릉지대가 보였는데 맑은 날에는 굽이치는 능선이 되어 선명히 보였다가 
흐린 날에는 그 지대가 온통 숲처럼 보이기도 했다. 처음엔 집이 빠리 쪽이 
아닌 서향이어서 에펠 탑을 바라볼 수 없는 것을 아쉬워했었는데 지금은 반대로 
빠리 쪽이 아닌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창문 밑으로 작은 
공동묘지가 바라보여, 빠리 15구의 아파트를 떠나야 했던 우리들을 더욱 
침울하게 했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그 반대가 되었다. 그들은 말이 없었고 
누구에게도 해코지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묘지는 정원처럼 가꾸어져 포근함을 
더해주었다. 
  아파트 창문을 나서면 발코니가 길게 이어져 있어서, 우리는 화분에 유도화나 
개나리를 키우며 '우리들의 정원'이라고 했다. 개나리의 노란 꽃잎은 이미 한달 
전에 만발했었다. 이곳의 봄은 2월에 벌써 찾아오지만 한편 겨울도 4월까지 
떠나지 않고 되돌아오곤 했다.

   빠리 제 7대학의 어는 교수
  면허시험을 치르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우리들의 정원'너머로 검은 
구름지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다시 또 그의 말이 생각났다. 
  "당신과 나의 만남은 한 사회와 다른 사회의 만남입니다. 이 만남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이 말을 나에게 했던 그 교수의 이름은 다니엘 에므리였다. 나이는 50대 
후반으로 지긋했다. 내가 빠리 제7대학 역사학부 석사과정 등록을 위해 만났던 
그는 의외로 친절했고 교수들이면 응당 가지고 있으리라 알고 있던 권위의식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이미 학사등록 때가 지났는데 나의 등록을 받아들일 수 
있게 몇군데에 직접 전화도 걸어주고 또 내가 프랑스말 공부를 더 할 수 있도록 
다른 교수에게 연락도 해주었다. 내가 찾아다니며 해야 할 일을 그가 대신 다 
해준 것이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서무과에서 입학절차를 치르는데 그곳에서 나는 프랑스 
대학의 유별난 규정을 발견하고 더욱 얼떨떨하게 되었다. 그것은 놀라운 
일이었는데, 나 같은 망명자들에겐 그 구비서류 중에 프랑스의 대학 입학 
자격시험(바갈로레아) 합격에 준하는 증빙서류가 필요없었다. 뿐만 아니라, 등록 
수수료도 면제되었다. 그들은 망명자를 프랑스 공무원이나 군경 유자녀와 같이 
수수로 면제자 리스트에 함께 올려놓고 있었다. 5백프랑 정도로 큰돈은 
아니었지만 그 상징적인 배려에 뜻이 있었다. 원래 대학 등록금도 면제되었기 
때문에 나는 단돈 1프랑도 내지 않고 학생증을 받았다. 그렇게 나는 갑자기 
이른바 유학생이 될 수 있었다.
  나는 유학생이 되어 공부를 더 해보겠다는 생각을 감히 하지 못했었다. 
어쩌면 초의식으로 학업에 대한 욕구를 갖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의식에도 
현실에도 그런 가능성은 없었다. 그런데 나의 초의식을 건드려 학위를 하라고 
강하게 권한 분이 있었다. 그분의 강권에 힘입어 나는 욕심을 내보기로 했고 
드디어 몇가지 서류를 준비하여 그 교수를 만났던 것이다. 만나러 가면서도 
나의 입학이 받아들여지리라고 기대하진 않았었는데, 그를 만나자마자 모든 
절차가 금방 그리고 한꺼번에 해결되었던 것이다. 학생증을 손에 쥔 내가 
감동하여 그에게 "당신은 참으로 친절하십니다."라고 말했을 때 그가 나에게 
대구한 말이 바로 '한 사회와 다른 사회의 만남과 그 중요성'이었다. 
그는 이미 '다른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내가 그때까지 알고 있던 
'교수들의 사회'에 속해 있지 않았다. 
  그는 "나는 맑스주의자이다"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그 대신에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은 맑스주의자가 되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하여 또 나에게 '다른 
사회'에 와 있음을 확인시켰다. 몇차례의 만남을 통하여, 그가 프랑스 북부에 
있는 릴르 대학 출신이라는 것과 그의 대학시절에 한국전쟁에 반대하는 학생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스무살 안팎이던 당시부터 
이미 '한 사회와 다른 사회의 만남의 중요성'을 확인하고 몸으로 뛰었다. 그는 
나에게 "그때 우리는 미군이 저질렀다고 알려진 세균전을 규탄했었는데 그것이 
실제 있었던 일이었는지 지금은 잘 모르겠다"며 젊을 때보다 신중해진 자신을 
말하였다. 그것은 특히 확인되지 않은 사실에 기초한 데마고기의 위험에 대한 
강한 반대의지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프랑스 공산당원이기도 했던 그는 끝내 당에서 축출되었고 지금은 주로 
지구의 환경 문제에 더 관심을 쏟아 동료들과 함께 '에너지의 속박'이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이른바 루주(빨강)에서 루주-베르(빨강-녹색)로 옮겨간 것이다. 
  그는 나를 만난 지 2주일쯤 후에, 내가 쓰게 될 프랑스어 논문을 교정해줄 
프랑스 여학생을 소개시켜주는 자상함을 보이기도 했다. 그의 요구에 응했던 
학생은 끌레르와 씰비였는데, 나는 주로 씰비의 도움을 받았다.

    한 사회와 다른 사회의 만남
  프랑스 사회가 우리와 많이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같은 사람이 
대학교수라는 게 신기하기도 했다. 그가 남한 출신 망명자인 나를 신기하게 
보았던 것처럼. 이 신기함끼리의 만남 때문에 그가 말한 '한 사회와 다른 사회의 
만남'이 더 큰 의미가 되어 다가왔는지 모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말이 내 
가슴에 와닿았던 이유는 바로 내가 그 말을 그 이전에 나스스로에게 그리고 
동료에게 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나의 출국을 
합리화시켰었다. 
  "나는 다른 사회를 보고 싶어."
  그후, 동료들이 치르고 있는 그 엄청난 곤욕을 나 혼자 피하게 된 것이 바로 
그 핑계의 결과였기 때문에, 나 혼자만 일탈했다는 자의식과 함께 그 핑계였던 
'다른 사회를 만난다는 것' 또한 고정관념처럼 내 가슴을 계속 짓누르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영원히 갚을 수 없는 빚과 같았다. 바로 그것을 그 교수가 
헤집었던 것이다. 물론 내 속을 들여다보고 한 말은 아니었겠지만 그의 말은 
나의 폐부를 찌르고도 남았다.
  '한 사회와 다른 사회의 만남', 그것이 나에게 처음 가져다 준 것은 
눈물이었다. 
  프랑스에 온 지 얼마 되지 않던 어느 토요일이었다. 대부분의 프랑스인들이 
휴무하는 날이었는데 우리는 서울의 본사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오전 근무를 
했었다. 퇴근길이 빠리 7구에 있었던 회사 사무실 근처인 몽빠르나쓰 대로에서 
일련의 데모대를 만나게 되었다. 데모대는 커다란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유유히 
걷고 있었다. CGT(노동총동맹)나 CFDT(프랑스 민주노동동맹) 등 노동 
조합연맹을 줄인 말이 붙어 있는 플래카드의 내용은 나에겐 이미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바라본 것은 거대한 데모대의 여유있는 움직임이었는데 
그것은 한마디로 내가 알지 못한 사회의 모습이었고 꿈틀거림이었다. 그것은 
너무나 평화로웠다. 갑자기 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며 눈시울이 붉어지게 된 
것은 그 데모대 중에서 다섯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를 목격한 순간이었다. 
그 아이의 아버지인 듯한 이의 무동을 타고 있었는데 데모에 참가하게 된 것이 
마냥 즐겁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아이의 무구한 표정이 서울 
데모현장의 모습과 겹쳐지면서 나의 콧등은 강한 충격을 받았다. 그 충격이 그 
아이의 표정에서 온 것인지 아니면 갑자기 독한 최루탄 가스가 상기되었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 데모대가 나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내가 빠리에 와서 처음으로 느낀 '다른 사회와 만남'이고 또 눈물이었다. 
나는 눈물이 흔한 것일까? 나는 서울에서도 그처럼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 문리대의 교정을 지나 쎄느 강을 끼고 이화동 
쪽으로 그리고 종로5가까지 걸어가며 나는 바보처럼 울고 있었다. 70년 11월 
중순, 전태일의 죽음은 당시의 나에게 또 하나의 '한 사회와 다른 사회의 
만남'이었고, 그것은 역시 눈물로 나타났었다. 
  그러나 '한 사회와 다른 사회의 만남'은 그 만남으로 또는 눈물로 그쳐선 안될 
일이었다. 만남도 눈물도 반드시 앙가주망(참여)을 요구한다. 그러나 나에게 
그것은 다만 '나 자신과 끝없는 싸움'으로 나타났을 뿐이었다. 나는 우리 사회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사랑을 알기 전에 증오부터 배웠다. 다니엘 에므리 
교수의 사회에서 사라의 앙가주망이 그 출발부터 가능 했다면 우리 사회에선 
우선 증오의 벽을 깨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했다. 그런데 우리에게 가용된 
증오의 벽은 워낙 두꺼웠기 때문에 그 벽을 깨려는 몸부림은 흡사 달걀로 
바위를 치는 행위와 같았다. 또 바로 그 증오의 그물에 걸릴 위험을 항상 안고 
있었다. 
  어느 날 빠리 7대학의 교정을 함께 걷던 다니엘 에므리 교수는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무슈 옹그(프랑스인들은 나의 성시를 이렇게 발음했다)는 어떻게 망명자가 
되었소? 내 질문이 분별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하면 대답하지 않아도 되오."
  처음에 나는 그의 직설적인 질문에 조금 당황했지만 곧 이렇게 대답했다.
  "이상하게 들으시겠지만 별로 한 일도 없어요. 다만 저항했을 뿐이지요, 
남한의 국시는 반공이랍니다. 프랑스의 '자유, 평등, 박애'처럼 적극적인 가치를 
이루자는 것이 아니라 다만 반대의 이데올로기였지요. 내 나이 스무살 때, 나는 
이 반대이념이 인간의 인간에 대한 증오심을 살찌운다는 것을 알아야 했어요. 
나도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모르면서 벌서 공산주의자를 철저히 증오하고 
있었으니까요 그것은 무서운 발견이었지요. 인간을 알기도 전에 이미 인간을 
증오하고 있었다니. 인간에 대한 사랑을 알기 전에 증오부터 배웠다니. 그 
충격이 있은 뒤에 남한의 권력이 모두 이 증오의 이데올로기만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것이 보였지요. 나는 저항하여 나에게 강요된 증오를 거부했지요. 그 
결과가 이렇게 된셈이지요."
  교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스무살 때 어떤 계기로 그 
발견을 하게 되었는지 묻지 않았다. 그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런 계기가 꼭 필요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교수에게 말했던 바와 같이 나의 행동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국내에서 대단한 행동을 하고 있다고 믿었었는데 프랑스에 와서 곰곰이 
돌이켜보니 단지 저항했던 것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대단한 행동을 하고 
있다고 믿었던 것은 다만 나 자신과 치열하게 싸움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지 
행동 자체가 대단했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다니엘 에므리 교수가 말한 '다른 
사회'의 눈으로 보면 더욱 그러했다. 나의 행동이 별게 아니었다는 것은 내가 
망명을 신청했을 때, 프랑스 외무부 관리를 만났을 때에도 확인되었다. 그 
경험은 역으로 한국 사회가 얼마나 증오에 차 있는가를 다시금 돌이키게 했을 
뿐이었다.
  택시운전을 하기로 결심하였을 때, 이미 논문쓰기는 포기하기로 했었다. 아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생존의 문턱에서 논문을 쓴다는 것 자체가 워낙 
무리였다. 학교를, 그리고 다니엘 에므리 교수를 떠나는 것이 서글펐다. 교수는 
나에게 '르 몽뜨'지에서 월간으로 펴내는 국제정치 논평집인'르 몽드 
디쁠로마디끄'에 기고할 수 있도록 주선해주겠다면서 많이 격려해주었었는데 그 
기대에도 이르지 못한 채 떠나게 된것이다. 씰비에게는 미리 말도 못했다. 
끝내지도 못할 논문으로 그녀를 귀찮게 했다는 게 여간 미안하지 않았다. 
지금쯤 무척 궁금해하고 있을 터였다.
  '할 수 없지. 이제 생활인이 되어 '다른 사회'를 보는 거야. 택시운전을 하면서 
보는 사회는 또다른 의미가 있겠지.'
  나는 이렇게 자위하며 서운함을 지우려고 애썼다.

    3. 이방인
  유일한 꼬레 출신 택시운전사
  다음 주 월요일, 나는 모리용가에 있는 빠리 시경찰구 산하 택시운전사 
관리사무실 벽보에 붙은 합격자 명단에서 나의 이름을 확인하였다. 합격자는 약 
20명 가량이었는데, 며칠 후에 신체검사장에서 보니 프랑스인과 에뜨랑제가 
거의 반반씩 섞여 있었다. 여자는 못 보았는데 여자들의 신체검사장은 다른 
곳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간단한 신체검사를 거쳐 6개월짜리 임시 택시운전 
자격증을 받았다.
  이렇게나는, 우선 임시지만 빠리의 택시운전사가 될 수 있었다. 빠리에서 
택시운전을 하게 될 유일한 한국인일 것이었다. 나는, 빠리에서 오래전에 
택시운전을 한 한국 사람이 한 사람 있었는데 얼마 후 다시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는 얘기를 들었을 뿐, 택시운전을 한다는 한국 사람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
  자격증을 손에 쥐었지만, 앞으로 할 일이 막막하였다. 우선 내가 탈 택시를 
찾아야 했는데 어떤 길을 통하여 구할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택시운전학원으로 갔다. 
  내가 그 학원에 처음 찾아간 것은 두달쯤 전의 일이었다. 누구의 소개를 받은 
것이 아니라, 신문을 보다가 조그맣게 난 광고를 통하여 택시운전학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와같은 학원이 있다는 것으로 , 나도 택시운전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를 갖고 그 학원을 찾아었다. 1500프랑이라는, 나에게는 
적지않은 학원비를 지불하면서, "택시운전을 시작하는 데 자본이 들지 
않느냐?"고, 그리고 "나 같은 사람도 시험 볼 자격이 있는냐?"고 두 차례나 
물었었다. 자본이 들지 않느냐는 내 질문에, 상대는 의아한 표정으로 "처음부터 
개인택시 운전사가 되지는 않는다"고 대꾸했다. 나의 어리석은 질문은, 전에 
빠리에서 택시운전을 한 한국 사람의 택시가 벤츠 자동차였다는 것을 들었던 
일로, 택시운전에도 모두 자본이 들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고 있었던 데서 나온 
것이었다. 다음 질문인 "나 같은 사람도 시험 볼 자격이 있는냐"에, "아니, 당신 
같은 사람이 자격이 없다며 누가 자격이 있겠는가?"고 반문하였다. 내가 
망명증명서를 제시했을 때 나온 말이었다. 이런 어리석은 질문을 던져야 했던 
것은, 내가 워낙 정보에 어둡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이 땅에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라는 무력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삼중의 이방인 
  에뜨랑제라는 말이 멋있게 들렸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주인공이 아니라 
엑스트라일 때의 이방인은 다만 덧없는 외로움의 대명사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내가 한때 멋모르고 따라 읊어대기도 했던, "저 구름, 저기 저 흘러가는 
저 구름을 사랑하는", 보들레르 시에 나오는 여유만만한 이방인이 아니었다. 
그리고 "강렬한 햇빛의 충동 때문에 한 아랍인을 쏘아 죽인" 알베르 
까뮈의이방인도 아니었다. 나는 그 주인공 뫼르소가 아니라 그의 총에 맞아 
죽는 이름도 없는 아랍인의 처지에 가까ㅇ다. 
  '처지가 달라지면 의식도 그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나 스스로 확인하고 
있었다. 과거의 내 의식은, 문학작품을 읽거나 영화등을 볼 때, 아주 자연스럽게 
나 자신을 그 주인공과만 일치시키곤 했었는데, 지금의 나의 의식은 스스로 
'주인공'쪽보다는 '엑스트라'쪽으로 일치시키고 있었다. 까뮈의 '이방인'에서 
주인공 뫼르소에게 총 맞아 죽는 아랍인이 "이름조차 없이 죽어갔다"는 것은, 그 
책을 정독했던 옛날에는 모르고 지나갔었다. 근래 내 처지가 그 아랍인에 
가깝다고 느껴지게 되니 언뜻 그 아랍인이 혹시 '이름도 없이 즉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부리나케 다시 '이방인'을 들춰보았더니 역시 그 
아랍인에게는 이름조차 없었다. 
  나는 이방인이되 엑스트라 이방인이었고 또 삼중의 이방인이었다. 
  우선 나는 프랑스 땅에 사는 외국인인 문자 그대로의 이방인이었다. 
그리고 한국인이면서 빠리의 한국인 사회에 길 수 없는 이방인들 중의 
이방인이었다. 나의 상황에 대하여 내 앞에선 동정적(?)인 말을 건네던 빠리의 
한국 사람들 중엔,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람 위험한 사람이니 접촉하지 마라"고 
권고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일주일에 하루 수요일마다 이이들을 한국 
학교에 보냈는데 같은 학부형 중에 반가이 인사하던 사람이 갑자기 모르는 
척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사이에 내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누군가에게 들어 
알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었다.
  한번은 빠리의 한국 식당에서 회사 동료와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나와 서로 
안면이 없던 식당 주인이 다른 좌석에 있던 어느 손님에게 "빠리에 대단히 
위험한 인물이 나타났다"고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무심코 들어보니 
바로 내 얘기를 하는 중이었다. 나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내가 위험한 
빨갱이이며 간첩이라는 그의 주장에는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호기심이 차 
있었다. 그의 말을 경청하는 손님의 표정도 자못 심각했다. 나는 그들에게 "내가 
바로 그 사람이요!" 하고 말하지 않았는데 대신 그날 먹은 음식은 여지없이 
체했다.
  그래도 이런 일들은 나를 모르는 사람들의 반응이었으므로 그런대로 넘겨버릴 
수도 있었다. 나는 아직도  그 부인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그녀의 남편과 나는 
매우 오랜 동창 관계였는데 아주 오랜만에 빠리에서 만났다. 한 사람은 
한국에서 대학교수가 되었고 한 사람은 망명자가 되어서였다. 나는 그날 동창의 
부인이 된 그녀를 처음 만났고 그녀의 표정을 읽어야만 했다. 바보가 아닌 나는 
그녀의 시선과 표정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곧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나와 
만남이 그녀의 남편에게 무슨 화라도 가져오지 않을까 하는 불안과 초조였다. 
나는 그녀의 불안감을 이해해야 한다고 스스로 다독거렸지만 그래도 그녀의 
표정은 그 이후 지금가지 내 가슴속에 남아 떠나지 않는다. 나는 헤어지고 나서 
이런 질문을 해야 했다. 그녀는 왜 그 자리에 나왔을까? 남편의 오랜 친구인 
나에게 그런 표정을 남기기 위해선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혹시 무슨 
얘기를 할지 불안해서 스스로 확인하고자 나왔던 것일까? 나는 그 만남을 
후회했다. 그리고 그 부인에게 보다 친구였던 동창에게 더 화가 치밀었다. 그 
만남은 다만 우리들이 어렸을 때부터 간직하고 있었던 정겨운 그림에 먹칠 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빠리의 한국인 사회에서 스스로 멀어져야 했다. 빠리의 한국인 중에, 
특히 유학생 중에는 나와 진정 친하게 지내려는 사람도 있었는데, 나와 가까운 
사람일수록 내가 스스로 멀리해야 했다. 나와 친하다는 것이 알려지는 게 
그들에게 좋을 리 없었기 때문이다. 친한 사람일수록, 그 어떤 의혹의 눈길이 
닿지 않도록 보호해야 했는데, 그럴 위험이 있는 사람들만 진정으로 나하고 
친하려 했다는 아이러니가 있었다. 나는 이 사람들과 만나는 것에 자연 
수동적이어야 했고 내 쪽에서 찾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들 중에 몇사람이 
갑자기 소식을 뚝 끊을 때도 있었는데, 나는 그 이유도 묻지 못하고 넘어갔다. 
어떤 학생은 "대사관측으로부터 압력을 받았다"며 이해해달라고 솔직히 
말하기도 했다. 
  그래도 한국 출신인 나와 나의 가족이 빠리의 일반 한국인들과 접촉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겉만의 접촉이었는데 그 관계가 이어졌던 것은 
역설적으로 나와 나의 아내가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외국생활도 군대생활과 마찬가지로 오래 산 사람이 처음 시작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지 그 반대는 성립되기 어렵다. 비록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해도 우리는 도움을 주었는데 그들 중 거의 모든 사람들이 빠리 생활에 
어느정도 익숙해진 뒤 우리로부터 멀어졌다. 이용가치가 없어진 탓이다. 그리고 
나의 문제는 그들에게 아무때나 스스럼없이 멀리해도 된다는 권리를 부여하고 
있었다. 그중에 어떤 사람은 우리 같은 사람을 그동안 만나준 것만도 큰 
배려였다는 듯이 말하기도 했는데 그 말은 한편 맞는 말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기부의 끄나풀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의 전사였던 나에게 이런 일들이 
일어났던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다른 쪽에서 나를 '안기부의 끄나풀'이라고 모함하는 사람이 생긴 
것이다. 인간 세상이 워낙 요지경 속 같기 때문인지 아니면 극과 극은 서로 
통하기 때문인지 안 수 없으나 나는 '빨갱이, 간첩'에서 끝나지 않고 급기야 
'안기부의 끄나풀'이 되었던 것이다.
  나에게 그 누명을씌운 사람은 해외에서 이른바 통일운동을 한다는 
사람이었는데 유럽에 온 지도 오래되었고 또 생활기반도 어느정도 갖고 있었다. 
한동안 그와 나는 서로 피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가끔 만났다. 그는 자주 
"게는 게끼리, 가재는 가재끼리 살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같은 처지에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드디어 그는 나에게 그가 하는 통일운동의 '참모'가 되어줄 것을 
요구했는데, 그것은 나의 생존에 도움이 되어줄 것의 조건과 같은 것이다. 나는 
결국 그가 말하는 '게'가 되기를 거부하였다. 그것은 방향은 반대쪽이었지만, 
내가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었던 것을 팔라고 요구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설사 내가 그 사람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고 해도 그의 제의를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게'가 되기를 거부하자, 나는 바로 '가재'가 
되었는데 그가 말했던 가재란 바로 안기부의 끄나풀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그야말로 아닌밤중에 홍두깨였다. 왜냐하면 나는 그와 논쟁을 한 적도 
없었고, 그를 비방한 적도, 욕한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의 '게'가 되기를 
거부했던 것 뿐이었다. 
  불행하게도 나는 그를 통하여, 냉전논리의 골이 이젠 너무 깊어져 뒤집어도 
날카로운 날이 서 있다는 것을 보아야 했다. 냉전의 이에올로기인 반공이 
실제로 인간에 대한 증오로 나타난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이 반공논리의 
극복을 위한 통일운동이 반공논리와 똑같이 인간을 이분법으로 나누고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모두 반대하고 비방하려는, 바로 반공논리가 파놓은 함정에 
빠지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하여 특히 해외에서 간첩이 아주 쉽게 만들어지듯이, 
안기부의 끄나풀 또한 쉽게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유만으로 그 모함을 다 설명할 수 없다. 거기에는 사람들이 갖기 
쉬운 속물적인 속성이 더 중요하게 작용했을 터였다. 통일운동을 한다는 그가 
나와 통일하지 못하게 된 연유를 주위 사람들에게 말해야 될 때, 간단히 "그사람 
수상한 데가 있어서..." 하면 되었다. 간단한 말 한마디지만 효과는 대단하다. 
그렇게 하면 그로서는 자신의 입장도 세울 수 있고 동시에 수상한 사람, 즉 
안기부의 끄나풀이 접근하여 동정을 살펴야 할 만큼 대단한 활동가가 되는 
것이다. 이와같은 자기과시 욕구는 이른바 운동가들이 제일 먼저 벗어던져야 
하는 껍데기였는데, 실제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국내에서도 보았지만 해외의 
일부 인사들은 아주 심하게 보여 주었다.
  그리고 이들 해외의 일부 인사들은 탄압의 위험이 거의 없기 때문인지 
자기반추 없이 목소리만 드높이면서 이른바 운동을 한다고 믿고 있었고 또 
항거할 대상이 가까이 없어서인지 내부에서 적을 만드는 작풍도 갖고 있었다. 
그들에게 비판은 없는 대신 비방은 많았고, 대중은 없는데 감투는 많았다. 내가 
보기에 해외 운동은 그들의 몫이 아니었다. 큰소리 내지 않고 묵묵히 일하여 
눈에 잘 안 띄는 일꾼들의 몫이었다.
  나는 그 어처구니없는 모함을 씹어삼켰다. 아무도 비판의 소리를 하지 않는 
것에 놀라기도 했지만 서글픔이 앞섰다. 드디어 나의 분노가 폭발했던 것은, 
만약 내가 돈이 많거나 혹은 학위라도 갖고 있었다면 그렇게 쉽게 모함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였다. 나의 처지는 나의 의식만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대하는 다른 사람의 의식도 규정하였다. 내가 돈도 
없고 힘도 없으니 함부로 해도 된다는 의식이 있었기에 그런 모함을 할 수 
있었을 터였다. 이런 것이 우리가 사는 사회의 실제 모습이었다. 이른바 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의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이렇게 나는 삼중의 이방인이었다.
  빠리에서 나에겐 경계와 불신과 무관심의 시선밖에 없었다. 그중에 
프랑스인들이 보내는 무관심의 시선이 가장 따뜻한 것이었다. 내가 이른바 
프랑꼬필르(프랑스를 좋아하는 사람)가 되었다면 그것은 한편 당연한 귀결인지 
모른다. 그리고 빠리에서 나의 처지를 마음속으로부터 이해해주고 꾸준하게 
친하게 지낸 이들이 있었다면 그들은 오꾸나까 세이죠와 이즈미라는 이름의 
일본인 부부였다.
  빠리의 꼬레앵으로서 외톨이인 나는 남의 땅에서 헤치며 살아가기 위한 비빌 
언덕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라는 무력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습관처럼 하곤 했던 것은 퀭한 눈을 뜨고 허공을 응시하는 일이었다. 
가까이엔 공동묘지가 있고 멀리는 지평선이 보이는 꾸르브부아 시의 
한구석에서, 그래도 내가 응시하는 방향은 묘지 쪽보다는 지평선 쪽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실로 처절하게 묘지만을 바라보았다. 눈물도 흘리지 않은 
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관광안내라는 일거리
  빨갱이 간첩이며 또 안기부의 끄나풀이 되기도 했던 내가 돈벌이로 할 수 
있었던 일은 우습게도 관광안내뿐이었다. 빠리에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걸려든 일거리였다. 처음엔 고등하교 선배 중에 몇분이 관광객을 소개해주어 
시작하게 되었는데 얼마 후 그분들이 빠리에서의 임기가 끝나 귀국하게 되었을 
무렵에는 주로 여행사의 소개를 받아 손님을 안내하고 수고비를 받았다. 
여행사에게 소개하는 경우에는 소개료를 너무 많이 떼여 착취당한다는 생각도 
들었으나, 그 생각은 일시적인 부질없는 유희에 지나지 않았다. 현실은 일거리를 
준 것에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갖고 있던 중고차에 손님을 태워 빠리 시내의 요소요소와 베르사유 궁전 
등을 안내하고 또 증명사진을 찍어주는 일이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거의 
똑같은 일의 반복이고 또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나는 꽤 
오랫동안 이 일을 했다. 
  그날 아침에 나는, 오페라 옆에 있는 '평화까페'의층의 르 그랑 호텔에 묵고 
있다는 김사장 부부를 안내하라는 여행사의 연락을 받았다. 나는 차를 호텔 
근처에 세우고, 호텔 로비에서 그들이 묵고 있는 방으로 전화를 걸어 
관광안내할 사람이 왔노라고 신고하였다. 잠시 후, 로비의 층계를 내려오는 한 
쌍의 동양인이 눈에 띄었다. 여자는 스물을 갓 넘었을 것 같았는데 남자는 30대 
후반이었다. 그 남자를 쳐다본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후닥닥 호텔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그는 내 쪽에 신경을 쓰지 않아 나를 알아볼 새가 없었지만 나는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한 반에 있지는 않았고 또 그가 고등학교 입시에 
실패하여 3년 동안으로 그쳤으나 틀림없는 중학 동창이었다. 아직 나에게 
자존심이라는 것이 남아 있었던 탓이었을까? 호텔 밖으로 뛰쳐나온 나의 얼굴은 
더욱 벌게지고 있었고 그냥 그 자리에서 달아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담배 세 대를 연거푸 피운 나는 결국 다시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그냥 돌아가면 그 순간은 모면할 수 있다. 그러나 나의 현실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6백 프랑이라는 그날의 벌이가 눈앞에 어른거렸고 더욱이 
달아났다간 여행사로부터 욕을 먹게 되어 다시는 일거리를 얻지 못하리란 
걱정도 내 앞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연극을 하자, 연극을. 원래 연극을 했었잖아.'
  나는 속으로 나 자신에게 이렇게 외치고 심호흡을 한 뒤 그들 앞으로 
돌진했다. 
  "아니, 너는?..."
  그도 나를 알아보았고 반가움보단 놀라움을 표시했다.
  "그래 나야, 그렇게 되었어."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표정을 짓고 넉살좋은 사람처럼 큰소리로 
떠들었다. 그도 넉살좋게 나왔다.
  "그래? 인사하지. 내 와이프야."
  그가 스물을 갓 넘긴 듯한 동행 여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와 그의 와이프는 
내 중고차의 뒷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자리에 앉으면서 젊은 여자가 한마디했다.
  "차가 그렇고 그렇네."
  관광안내라는 일은 워낙 넉살도 좋고 말도 잘하는 사람에게 어울리는 
일이었다. 내 성격에 전혀 안 맞는 일이었는데 그날 나는 정말 넉살좋은 사람인 
양 행동했고 또 떠들어댔다. 그날 내가 연기를 잘했다면 내가 문리대 시절 
연극을 했었기 때문이 아니라 나의 대역인 그 동창이 실로 넉살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젊은 와이프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세 넉살이 함께 어울렸던 
셈이다. 하나는 돈이 준 넉살이었고 두번째는 애교 섞인 당돌함이 주는 넉살,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는 연기가 주는 과장된 넉살이었다. 그들은 흡사 
신혼여행을 온것처럼 행동했는데 나는 그들에게 열심히 포즈를 취하라고 권하며 
필름 세 통을 갈아끼우도록 사진사 노릇도 톡톡히 했다.
  드디어 일이 끝났다. 그는 원래 약속되었던 금액에다 2백 프랑을 얹어 주었다. 
그 돈을 받아쥐고 집에 돌아온 나는 공동묘지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던 것이다. 
눈물도 흘리지 않은채.

    그것은 필연
  나의 아내는 가게의 점원이 되어 일할 수 있었다. 주로 일본인과 한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화장품 등의 선물용품을 면세하여 파는 가게인데 이런 
가게의 주인은 거의 유태인들이었다. 아내의 일이 주로 한국 관광객을 상대하야 
하는 일이었으므로 주인이 나의 문제를 알면 좋아할 것 같지 않았다. 나의 
문제를 감추어야 했고 우리의 특이한 노동허가증을 보일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한참 동안 정식채용이 될 수 없어 봉급도 박했고 사회보장 혜택도 받을 
수 없었다. 아내의 벌이만으론 생활이 아니라 생존도 어려웠다. 아직 철없던 때, 
맏딸 수현이의 "왜 우유 안 사?" 하고 묻던 일이 지금도 뇌리에 생생하다. 
우리는 그때 우유를 안 산 게 아니었다. 그런 때였었다, 김지하 선배가 인편에 
난초 그림 열 점을 보내주었던 것은. 나는 한 점도 간직하지 못하고 모두 
팔았다. 
  이런 상황에 있던 내가 결국 택시운전을 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것은 필연이었다. 다만 그 필연이 늦게 왔을 뿐이다. 그리고 그 필연이 늦게 
왔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몸을 움직여 일하는 것보다 머리를 써서 살아보려는 
이른바 인텔리의 타성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앞에 닥친 
현실을 회피하고 있었다. 아니 회피할 수 없는 현실을 외면하고 몸부림만 
쳐댔었다. 그러면서 빠리 7대학의 교정에 들어 설 때는 자못 즐거워했고 '르 
몽드'신문을  사보는 것을 별로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씰비와 토론을 
나누며 데이트를 즐기기도 했다. 나에게 인텔리라는 병은 천형과 같은 
것이었는데, 끝내 사라지지 않았다.

   나 같은 초보자도?
  나는 오랫동안 기다려, 택시 규정에 관한 강의를 끝내고 나온 학원강사와 
마주앉았다. 그는 내가 그 학원의 원생이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나는 학원에 
등록하고 단지 이틀밖에 강의를 듣지 않았고 학원에서 내준 교재로 집에서 그 
내용을 익혔기 때문에, 내 얼굴이 그에겐 낯설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학원비로 낸 
1500프랑이 아까울 정도로 학원에 안 갔지만, 시험이 어떻게 치러지는지 알 수 
있었다는 것과 또 응시지원 절차를 학원에서 대신 해준다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그만한 가치가 된다고 자위했었다. 그만큼 나에게는 정보가 
중요하였다.
  영세한 학원이므로 원장이면서 동시에 하나뿐인 강사인 그는 나에게 '택시'를 
찾는 길을 가르쳐주었다.
  "초보자의 경우는 다 똑같아요. 우선 로까떼르(임시운전자)로 시작하는 
것이지요. 물론 쌀라리에(봉급운전자)도 될 수는 있지만 초보자는 자리를 얻는 
게 쉽지 않아요."
  그는 이어서 임시운전자와 봉급운전자의 차이점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우선 봉급운전자란, 문자 그대로 택시회사에 고용되어 봉급을 받는 사람을 
말하는데, 그가 일한 택시의 미터기에 나오는 요금을 합산하여, 그사분의 일을 
봉급으로 가져간다고 했다. 따라서 봉급은 얼마 안되지만, 빠리에서 일반적인 
관행으로 되어 있는 팁과 또 여행가방을 실을 때 등의 추가요금이 순수입이 
되기 때문에, 모두 합치면 한 달에 6,7천 프랑 정도는 벌어들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봉급운전자는 다른 봉급 생활자와 마찬가지로, 법정의 
유급휴가 및 제반 사회보장을 받을 수 있고, 또 일주일마다 하루의 휴일이 
있어서 몸에도 큰 무리가 가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택시운전사들이 
봉급운전자를 선호하는데, 일자리가 많지 않아서 구하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또 
설사 자리가 있다 하여도, 나 같은 초보자에게 자리를 줄 리는 만무한 일이었다. 
결국 나에게는 임차운전자의 가능성만 남아 있었다. 임차운전이란 일주일 
단위로 임차료를 지불하고 택시를 빌려서 영업하는 것을 말했다. 이때의 
택시회사와 운전사의 관계는 단순한 택시 임대차 계약관계일 뿐이어서, 매주 
지불하는 임차료에서 운전사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의료보험만 들어줄 뿐 다른 
혜택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임차운전자는 매주 지불해야 하는 임차료를 
넘게 수입을 올릴 수 있도록 열심히 일해야 된다고 했다. 그것은 아주 당연한 
말이었다. 임차료 이하로 벌 때, 그것은 그야말로 노동하고 손해보는, 
헛수고에도 못 미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나는 걱정이 되어 임차료가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요새는 아마 3천 프랑이 조금 넘을 거요. 하지만 하루에 보통 6,8백프랑의 
수입은 올릴 수 있으니까, 임차료와 기름값을 빼고도 일주일에 1500프랑 정도의 
순수입은 올릴 수 있을 거요."
  "나 같은 초보자도 하루에 7,8백 프랑의 수입을 올릴 수 있을까요?"
  "물론 처음에는 어려울지 모르지만, 조금 익숙해지고 열심히 뛰면 천프랑도 
올릴 수 있어요."
  그는 나의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우려는 듯,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나는 당신 
같은 아시아 사람들이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잘 알아요."
  그의 말은 맞는 말이었다. 나는 그때 벌써, 일주일에 7일을 계속 일해야 
되겠다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그가 건네준 두 개의 택시임대회사 
주소를 소중히 받아들고 학원문을 나섰다. 그가 나의 등에 대고 외쳤다. 
본느 샹스! (행운을!) 걱정이 앞서서 나는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못했다.

    "데뷔땅이로군!"
  나는 첫번째 주소인 빠리 남쪽의 위성도시인 방브에 있는 택시임대회사를 
찾아갔다. 겉에서 보기에 그곳은 아주 허름한 자동차정비소 같았다. 주차되어 
있는 택시가 두 대 보였는데, 둘 다 뾔조 505구형 모델이었고 곳곳에 녹이 슬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7,8년을 사용하여, 택시로는 이미 수명을 다해 
폐차시켜야 마땅할 것 같았다. 
  나를 맞은 주인은 대머리의 50대 남자였다. 눈빛은 어진 빛이 없이 
날카로웠고 머리칼이 하나도 없는데다 백색의 얼굴이 뺑뺑하고 동글동글하여 
바늘로 찌르면 하얀 피가 튀어나올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나의 얼굴과 나의 
임시면허증을 살펴본 후, "데뷔땅(초보자)이로군" 하고 차갑게 말했다. 나는 이미 
주눅이 들어 있었다. 나의 목소리가 기어들었다. 
  "빌려줄 택시가 있습니까?"
  "택시가 있긴 하지. 주당 임대료 3150프랑, 보증금 3천 프랑, 합해서 
6150프랑을 현찰로 지불하면 택시를 내줄 수 있소. 꼭 현찰이어야 하오. 그리고 
당신이 잘못해서 접촉사고를 내면, 첫번째는 벌금을 1500프랑, 두번째는 3천 
프랑을 내야 하고, 택시는 즉시 반납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
  나는 6150프랑을 준비해 오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문을 나서며 용기를내, 
빌려줄 택시가 어떤 것이냐고 물었다. 그는 초보자인 주제에 별것을 다 
묻는다는 표정으로 "저기 있지 않소" 하고 폐차되어 마땅할 것 같은 택시들을 
가리켰다.
  그를 뒤로 하면서 나는 다시 이곳에 오지 않을 수 있기를 속으로 빌었다. 
이제 나에게는 하나의 주소가 남아 있었다. 이미 날이 어둑어둑해왔기 때문에, 
두번째 주소를 찾아가는 것은 다음날로 미루고 타박타박 집으로 돌아왔다.

    현찰 도는 곳에 유태인 있다.
  두번째 택시임대회사는 역시 빠리 남쪽 교외인 말라꼬프에 있었는데, 그곳은 
내가 필기시험을 본 도시이기도 했다. 나는 그곳을 그 다음 주 월요일에나 
찾아갈 수 있었다. 우선 돈을 구해야 했고 또 매주 월요일마다 택시의 임대차가 
이루어진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거기는 첫번째 찾아간 곳보다는 조금 큰 정비소였고, 정비를 마친 택시와 
차례를 기다리는 택시, 그리고 임차료를 지불하려고 들락날락하는 
택시운전사들로 부산스러웠다. 운전사가 붙어 있지 않은 빈 택시들도 눈에 많이 
띄어 내 몫도 있을 것 같아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그런데 일하는 사람들이 워낙 바쁘게 움직이고 있어서 (월요일에 제일 
바쁘다는 것을 곧 이해할 수 있었다.) 택시 차량 임대를 담당한다는 알랭이라는 
사람에게 말을 붙일 수 있었던 것은 두 시간 이상을 기다린 후였다. 그는 
정비책임도 맡고 있었는데 40세쯤 되어 보이고 혈색이 좋은 데다 머리를 
스포츠형으로 짧게 깎아 꽤 정력적인 인상을 풍겼다.
  그는 처음 보는 나에게도 '꾸쟁(사촌, 친한 사람)'이라는 호칭을 연발하면서 
한참 동안 말을 늘어놓았는데, 그 내용은 일주일에 1500킬로미터 이상 택시를 
굴리지 말라는 것과, 사고를 내면 보험료가 뛰니까 절대로 사고를 내지 말라는 
것, 그리고 초보자이니까 우선은 중고 택시를 주지만 쉬지 않고 (일주일 단위로 
임대차 계약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몇주쯤 일하고 중간에 일주일씩 쉬는 것을 
말함) 열심히 일하고 또 사고를 내지 않으면 새 차를 줄 수도 있다는 얘기 
등이었다. 그는 내가 끼여들 새도 없이 혼자 자기 할 얘기를 끝낸 뒤, 돈 내고 
오라고 명령하듯이 말하곤 내 앞에서 사라졌다.
  나는 누구한테나 꾸쟁 소리를 하는 그가 삐에 누아르(알제리 독립 후에 
프랑스 본토로 돌아온 프랑스인)가 아닐까 짐작했었는데, 나중에 유태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프랑스의 공휴일이 아닌 어느 월요일, 그 택시회사가 
휴무하였는데, 그날이 유태교의 종교행사일이라는 사실로써 알게 되었다. 동료 
운전사인 한 프랑스인은, 그 택시회사뿐만아니라 거의 모든 택시임대회사를 
유태인이 소유하고 있으며 회사의 직원도 거의 모두 유태인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그는 꾸쟁 소리를 연발하는 알랭도 유태인이라고 눈을 끔벅거리면서 
덧붙였던 것이다. 나의 아내도 주인이 유태인인 가게에서 일하고 있었으니 결국 
부부가 함께 유태인의 자본 밑에서 일하게 된 셈이었다.
  나는 쇠창살 너머에 앉아 있는 여자 수금원에게, 일주일 임차료 3150프랑과 
보증금 3천 프랑, 합하여 6150프랑을 현찰로 지불하고, 조그만 쪽지로 된 
영수증을 받았다. 내가 임대차 계약서를 요구하자, 그녀는 한달 후에 오라고 
하였는데, 석 달이 지난 후에도 받지 못했다. 모리용가의 시경찰국 산하 
택시운전사 관리사무실에서 임시면허 합격자들에게 나누어준 안내문에는 
임대택시의 경우 꼭 임대차 계약서를 요구하라고 씌여 있었는데, 이 택시회사는 
그 규정을 기피하고 있었다. 지불도 현찰을 고집하는 것 등으로 보아 탈세의 
여지가 충분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현찰이 돌아 탈세가 가능한 곳에 
유태인이 있다"라고 쓴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아내가 일하는 가게도 관광객을 
주로 상대하기 때문에 현찰이 도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낡았어도 깨끗한 택시?
  내가 쪽지로 된 영수증을 보인 뒤에, 알랭이 생색을 내면서 나에게 넘겨준 
택시는 25만 킬로미터를 넘게 달린 뾔조505구형이었다. 그들이 갖고 있는 택시 
중에서 가장 낡은 것 중의 하나일 것이다. 초보자인 나에게 가장 오래된 낡은 
택시를 주는 것은 이해했지만, 그래도 정도를 지나쳤다는 느낌이 들었다. 
겉모양도 상처만 남은 노병처럼 군데군데 땜질을 하여 보기 안 좋았고, 내부의 
시트도 다 찢어져 있었고 특히 뒷좌석의 시트는 구멍이 크게 뚫려 속의 
스펀지가 튕겨져나와 있었다. 
  나는 당황하여 알랭을 찾았으나, 그는 이미 나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순간적으로 택시를 돌려주고 돈을 되돌려받아 돌아갈까 생각했다. 그러나 또 
어디를 찾아가야 할지 앞이 막막했고, 또 설사 찾는다 해도 선뜻 내 마음에 
드는 택시를 빌려준다는 보장도 없었기에, 나는 울고 싶은 심정으로 택시를 
몰고 나왔다.
  나는 택시를 정성들여 청소하고 열심히 닦았다. 그리고 큰 슈퍼마켓에서 
시트덮개를 사서 덮어씌었다. 튕겨져나온 스펀지는 안 보이게 해야 했다. 그래도 
손님을 태우기에 미안하다는 느낌을 지워버릴 수 없었지만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가 없었다. 택시라는 것이 손님을 원하는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태워주면 
되는 것이지 보기 좋으라는 것은 아니며, 또 먼지 낀 새 차보단 낡았어도 
깨끗한 차가 더 나은 게 아니냐고 스스로 주장하며 여유를 가지려고 
노력하였다.
  실제로 나는 마음의 여유가 필요하였다. 하루를 그냥 넘기고 이튿날부터 
일하고도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랬다간 하루당 빌리는 값 
450프랑이 그대로 날아가기 때문이다. 벌써 오후 5시가 지나 있었다. 나는 오후 
6시부터 일하기로 하고 외르다뙤르(날짜시각표)에 04딱지를 집어넣었다. 그것은 
오후 6시부터 열시간 동안 일하여 새벽4시까지 일한다고 신고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 날짜시각표는 날짜와 시각을 표시하는 장치인데, 조그마한 열쇠로 
여닫게 되어 있고 열 때 날짜가 스스로 돌아가며 그날의 일 끝내는 시각을 
딱지를 집어넣어 표시한 뒤 도로 닫게 되어 있었다. 빠리 택시의 특수한 이 
날짜시각표는 운전사들의 무리한 연장노동을 막기 위한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봉주르, 오를리 웨스뜨 실 부 쁠레!"
  4월 중순의 늦은 오후, 아직 해가 조금 남아 있었다. 
  나는 내 인생의 새로운, 그리고 유별난 출발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택시를 몰아 1번 지하철 종점인 뇌이 다리 가까이 있는 택시정류장에 
갖다대었다. 빠리 서쪽에 붙어 있는 위성도시인 뇌이는 쎄느 강과 불로뉴 숲을 
끼고 있어서, 주거지로는 빠리의 16구와 함께 제일 비싼 곳으로 알려진 
도시이다. 이곳에 사는 스노브들은 '뇌이에 살고 있다'는 것을 제일 먼저 밝히고 
싶어 안달한다고 한다. 그런 도시라 그런지 택시 손님이 많았다. 정류장에는 열 
대 가까운 택시가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개인택시들뿐 아니라 
회사택시들도 전부 새 차들로 보여, 나는 또다시 기가 숙어들었다. 개인택시 
중에는 벤츠도 있고 다른 택시들도 새 차들이어서 그런지 모두 깨끗해 보였다. 
그때처럼 빠리의 택시들이 깨끗하고 새 차들이라고 느낀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 고충은 차라리 별게 아니었다.
  내 차례가 가까워지자 큰 걱정거리가 머리를 들면서 내 가슴을 더욱 졸이게 
하였다. 그것은, 내가 과연 손님이 원하는 목적지까지 길을 잘 알 수 
있겠는가였다.
  처음 택시운전학원에 갔을 때 나는 확정면허를 따기까지 실기를 포함하여 세 
차례의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놀랐었는데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이유는 빠리의 특수한 도로망 때문이었다. 거미줄처럼 
방사형으로 되어 있는 빠리의 길은 도로마다 각도가 제멋대로이고 게다가 
일방통행이 많아서 가야 할 길을 정확히 밟지 않고 대충 방향만 보고 가다가는 
영락없이 엉뚱한 길로 들어서기 십상인 것이다.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을 
알아차리고 돌아가려 해도 일방통행에 걸려 결국 길을 헤매게 되는 경험을 나는 
자주 겪었었다. 내가 빠리에서 운전을 하며 다닌 길이라고 해야, 꽁고르드 
광장을 중심으로 개선문, 에펠 탑, 루브르 박물관 근처와 노트르담 사원 및 
학교들이 많이 있는 까르띠에 라땡 부근의 길들뿐이었고, 자주 다니던 길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낯이 설었다. 
  그리고 나는 빠리지앵들의 주거지역의 길에 대하여는 거의 모르고 있었다. 
빠리 16구나 18구의 주거지역은 10년 이상 택시운전을 한 고참들도 잘못 갈 
때가 있다고 할 정도로 그 길은 미로처럼 얽혀 있다. 뿐만 아니라 빠리 교외의 
위성도시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면허시험을 위하여 빠리와 교외의 
지도를 보고 열심히 도상훈련을 했지만, 실제로 길을 안다는 것과는 다른 일일 
터이었다.자신이 없다는 생각이 스며들자, 점점 더 자신이 없어졌다. 길도 
모르면서 택시운전을 한다고 첫 손님에게부터 지청구를 듣게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가슴을 옥죄었다. 그런데다 고물택시가 아닌가.
  나는 가슴을 졸이며 내 차례가 되기를 기다렸다. 그것은 흡사 매맞을 차례를 
기다리는 어린애의 심정이었다. 나는 연신 담배를 피워물었다. 앞의 택시들이 
금방금방 없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다시 또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쪽 택시를 바라보며 다가오는 한 여자가 눈에 뛰었다. 나는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흡사 꿈속에서 꼼짝못하고 있는 나에게 미지의 여인이 
다가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주 잠깐 동안, 저 여자가 내 택시가 너무 낡아서 
내 다음 택시를 탈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택시운전사는 손님을 골라잡을 
수 없지만, 손님은 택시를 골라탈 수 있다고 택시 규정에 있었다. 나는 또 아주 
잠깐 동안, 오히려 저 여자가 내 다음 택시에 올라타 나로 하여금 이 자리를 
모면할 수 있게 해주길 바라기도 했다. 그때, 뒷문 열리는 소리가나며 여자가 
올라탔다. 나는 인사하는 것도 잊고, 그녀가 행선지를 말할 때까지 숨을 
들이켰다. 
  "봉주르, 오를리 웨스뜨 실 부 쁠레(안녕하세요. 오를리 공항 서쪽 터미널로 
가주세요)."
  나의 "봉주르"라는 인사말은 "휴"하는 안도의 숨소리에 이어서 나왔다.
  오를리 공항의 서쪽 터미널. 프랑스 국내선의 빠리 터미널. 아마도 가장 쉬운 
목적지 중 하나일 것이다. 지금 있는 곳에서 똑바로 직진, 뽀르뜨 마이요(마이요 
문)에서 뻬리 페리끄(순환도로)-빠리의 순환도로는 빠리와 교외 위성도시를 
구분하며, 왕복 8차선(일부6차선)으로 되어 있다. 빠리의 제일 중요한 자동차 
도로이다-를 타고 뽀르뜨 도를레아(오를레앙 문)까지 간 다음, 남쪽으로 뚫린 
태양고속도로를 올라타면 바로 오를리 공항과 연결된다. 가까운 거리는 
아니지만, 가는 길은 아주 간단했다. 그리고 오를리 공항은 내가 자주 가던 
곳이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첫 손님이 여자면 싫어한다고 들었지만, 나는 그 
여자에게 고마운 느낌마저 들었다.

    서울과 빠리의 유행
  내가 순환도로에 들어서서 택시 요율을 B에서 A로 바꾸었을 때, 그녀가 입을 
열었다.
  "담배 피워도 되나요?"
  "위, 마담(예, 부인)." 나는 대답하면서 그녀를 흘깃 쳐다보았다. 나이가 35살쯤 
되었을까, 그녀는 전형적인 빠리지엔느이 모습이었고 꽤 미인이었다. 
빠리지엔느의 특징 중 하나는, 나이를 불문하고 살찌는 것을 거부한다는 데에 
있다. 남자들보다 젊은 여자들이 더 담배를 많이 피우는 것 같은데, 그 이유가 
담배를 피우지 않음으로써 살이 찌게 되는 것보다, 담배를 피어 건강에는 
해롭더라도 살이 찌지 않을 수 있는 이점을 더 높이 사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될 
정도였다.
  또한 빠리지엔느의 특징은 자기의 개성을 중요시한다는 데에 있다. 유행의 
도시라는 빠리의 여성들인데, 새로 유행되는 옷이나 머리 스타일이 자기와 맞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절대로 그 유행을 따르지 않는다. 반면에, 이미 지나간 
유행이라도 자기와 맞는다면 옛날의 유행을 고집한다. 거의 모든 
빠리지엔느들이 이와같이 자기의 개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자기 나름의 유행을 
갖고 있기 때문에, 빠리에서는 과거의 유행에서부터 최첨단의 최신 유행까지 
모두가 항시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 점이 서울의 유행에 대한 
감각과 제일 중요한 차이점이 될 것 같다.
  여자의 옷맵시나 머리모양에 대해 둔감한 나에게도 이같은 차이를 느끼게 
해준 우스운 일이 있었다. 내가 빠리에 올 즈음에 서울에서는 달달 볶은 머리가 
유행하고 있었는데, 실제 빠리에서는 그와같은 머리모양을 찾아보기가 
힘들었었다. 그런 때에 지사원들의 부인 여럿이 한꺼번에 오를리 공항에 
내렸는데,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달달 볶은 머리를 하고 있어, 마중 나간 
남편들이 민망한 얼굴로 서로 쳐다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요새는 앞이마에 
몇가닥의 머리칼을 내려뜨리는 머리모양이 서울에서 유행이라고 하는데, 이것도 
빠리지엔느들에게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유행이다.
  빠리에서는 각자가 자기에게 맞는 유행을 찾는 데 비하여, 서울에서는 모든 
사람이 한꺼번에 한 유행을 따르고 있다. 다른 말로, 빠리에서는 유행이 
사람에게 종속되어 있는 데에 비하여 서울에서는 사람들이 유행에 종속되어 
있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러한 경향도 결국 한국 사회의 획일성과 
프랑스 사회의 다양성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겠다.
  내 첫 손님에 대한 고마운 느낌이 앞서서였을까, 언뜻 본 그녀의 스타일이 
멋져 보였다. 우리가 오를리 공항의 서쪽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택시의 요금은 
89프랑이 나왔다. 그녀는 백 프랑을 지불하고, "잔돈은 그냥두세요" 라고 한 뒤, 
" 메르씨 (감사합니다)"와 " 오 르부아! (안녕히!)" 소리를 남기고 바쁜 걸음으로 
공항 청사 쪽으로 사라졌다. 나는 제대로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멀어져가는 
그녀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렇게 나의 첫 손님은 나로부터 멀어져 갔다. 그녀는, 그녀가 나의 
첫손님이라는 것도, 또 내 첫 손님이었기에 내가 아주 오랫동안 그녀를 
기억하게 되리란 것도 모른 체, 저 멀리로 사라져 갔던 것이다. 나는 그녀가 
지불한 백 프랑 짜리 지폐를 한참 들여다본 뒤 소중히 집어넣었다.

    내가 처음 밞았던 외국땅
  잠시 후, 나는 택시를 천천히 몰아 오를리 공항 남쪽 터미널의 택시 
정류장으로 갔다. 그곳에는 이미 수십 대의 택시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택시가 너무 많이 있어서 의아했다. 공항에는 으레 손님이 많으리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시내에 손님이 없으면, 빈차로라도 공항에 가서 
손님을 태우리라고 생각하기도 했었는데, 실제는 전혀 예상 밖이었다. 나는 
차차, 공항에 손님이 많지 않은 것은, 대부분의 여행객들이 공항버스와 고속 
전철 등의 대중 교통 수단을 이용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만큼 
대중 교통 수단이 잘되어 있는데 빠리 택시 운전사의 처지에서 보면 전혀 
고마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내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며 담배를 피워 물었다. 오를리 공항 남쪽 
터미널은 지금은 스페인이나 뽀르뚜갈 및 중, 근동 방향의 일부 국제선이 닿을 
뿐이지만, 빠리 북쪽의 샤를르 드 골 공항이 개설되기 전에는 거의 모든 
국제선이 닿았던 곳이다. 내가 빠리에 도착한 해인 79년에도, 나를 태운 대한 
항공은 바로 이 오를리 공항 남쪽 터미널로 도착하였었다. 외국 여행은 
처음이었는데 그때 처음 밞은 외국땅이 바로 이곳이었다. 그때의 나는, 몇 년 
뒤에 그 앞 택시 정류장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나 자신의 모습은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담배 연기를 후 하고 내뿜었다. 나는 잠시 회상에 잠겼다.




  나는 보고 싶어, 다른 사회를 내가 한국을 떠나 오를리 공항에 도착한 것은
79년 3월 하순이었다. 
  김포 공항을 이륙한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서울의 등불은 별처럼 명멸하였다
간 아스라히 사라졌다. 착잡했다. 해방감과 허전함이 교차했다. 그리고 그 땅을
떠나고 있다는 것이 현실이 아닌 것 같았다. 벗어나고 싶었지만 또한 떠나서
살기 어려운 나의 땅, 우리들의 땅이었다.
  입사한 지 10개월도 안된 회사에서 유럽의 지사원 요원으로 인사 발령이
떨어진 곳은 79년 1월 1일의 일이었다.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었기 때문에
처음엔 그저 얼떨떨했다. 아내는 무척 반가워했다. 특히 가는 곳이 유럽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나도 내심 반가우면서도 내색을 할 수 없었다. 우선
여권이 나오리라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학생시절 선언문 사건 등으로 몇
차례 정보기관의 신세를 지고 학교에서도 제적 처분을 받았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그 정도의 전력으로도 여권이 거부될 수 있는 충분한 빌미가 되었다.
나는 떠날 것이냐 아니냐를 나 스스로 결정하지 않고 여권이 나올 것이냐
아니냐에 맡기고 있었다. 나의 주거지와 회사가 있는 지역의 중앙정보부 요원의
방문과 함께 이른바 '3급 갑' 이상의 공무원 두 사람의 신원보증을 받아야 했다.
도장을 찍어 주었던 그분들한테 무슨 불이익이 생기지 않았기를 바라고 또
미안함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여권을 받기 위하여 노력하면서 또 시간이 지나가면서 나는 더욱 떠나고 싶어
안달하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일단 떠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지자, 또 그
가능성이 보이자, 이 땅이 더욱 견디기 힘든 땅이 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네가 떠나면 어떻게 하니?"
  석률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내가 떠나지 않기를 바랬다.
  "나는 보고 싶어, 다른 사회를. 그리고  3년이면 다시 돌아올 텐데 뭐."
다른 사회를 보고 싶다는 내 말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좋은 핑계이기도
했다. 나의 내면에는 '떠나고 싶다'는 욕구로 가득 차 있었다. '떠나고 싶다'는
욕구는 바로 '숨쉬고 싶다'는 욕구였다. 그만큼 유신 말기의 긴급 조치 시대에
나는 숨이 막혔다. 그곳에서 해방되고 싶고 또 자신과 싸움에서도 해방되고
싶었다. '나는 저항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실존의 정언명령이 있었고
조직에도 가담하였지만 출국이 주는 해방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만큼
철저한 활동가가 되지 못했음에 틀림없다.
  조직은 나의 의사를 배반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내가 제시한 이유, 즉
나중에 다니엘 에므리교수가 말하게 되는 '다른 사회와 만나'고 오겠다는 나의
희망을 인정해 주었다. 그리고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의 조직이 곧 와해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들, 이재문 선생과 이해경 선배와 석률이
그리고 광원이와 나는 청량리  밖에 있는 어느 조촐한 술집에서 이별의 술잔을
나누었다. 우리는 3년이 지난 뒤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였다.

    그 삐라 뭉치는?
  조직 안에서 내가 했던 일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는데 당시의 상황에서는
대단한 일이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 애드벌룬을 이용하여 서울 시내에 10만
장의 삐라를 뿌려, 서울 거리를, 그 무거웠던 침묵의 거리를 삐라의 바다로 만들
계획에 참여했던 것은 잊을 수 없다.

  1978년의 어느 여름날, 대낮에 나는 동대문 시장에서 이해경 선배로부터
거대한 애드벌룬을 인계 받았다. 그 애드벌룬은 당시 광고용 문구를
공중으로부터 늘어뜨리기 위해 사용되었는데 부력이 10킬로그램이었다. 한편,
우리들이 '민주투위(한국 민주 투쟁 국민 위원회)'의 이름으로 작성한 박정희의
유신독제에 항거하자는 내용이 담긴 32절의 삐라 10만 자의 무게는
8킬로그램이었으므로 줄에 걸어 띄워 올릴 수 있는 최대량에 가까웠다. 나는
애드벌룬의 부력을 양팔에 느끼며 한걸음 한걸음 시장 인파를 헤쳐 나갔다.
애드벌룬을 들고 가는 나의 묘한 모습은 시장 인파의 뭇 시선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나의 가슴은 뛰었다. 아직 삐라는 애드벌룬에 걸리지 않은 상태였지만
공포감이 계속 나를 짓눌었다. 나는 그 공포감을 없애기 위한 작위로
흥얼거리며 노래를 부르기 사직했다. 그래도 울렁거리는 가슴은 진정되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곧 소나기가 되어 떨어졌다.
그러자 우산을 쓴 것과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났다. 거대한 애드벌룬에 떨어진
빗물이 모두 내위로 쏟아져내리는 것이었다. 나는 곧 온통 젖었다. 속옷까지
흠뻑 젖었는데 빗물은 계속 내위로 떨어졌다. 바로 그때였다. 조금 전까지
진하게 남아 있던 공포감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나 자신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희열감이 가슴 가득히 충만해 오는 것을 느꼈다. 젖은
몸이 날아갈 듯 가볍고 축복으로 젖는 것 같았다. 나는 그야말로 신명이 났다.
  나는 10년전에 비슷한 경험을 했었다. 그때는 빗물이 아니라 바닷물이었다.
온통 바닷물을 뒤집어쓰고 신이 나서 이리 뛰고 저리 띈 적이 있었는데 (
독자들은 그때의 얘기를 곧 알게 된다 ) 그때처럼 신이 났던 것이다. 나는
늠름하게 걸으며 노래를 불렀다. 거대한 애드벌룬을 들고 온통 빗물을
받아들이며 신이 나서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우리가 계획한 일이 성공하기 위해선 비가 멈춰 주어야 했다.
애드벌룬이 한참 동안 서울의 상공으로 올라갈 동안, 삐라 뭉치를 묶은 말린
쑥줄이 담뱃불에 타 들어가야 했는데 비가 오면 꺼질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애드벌룬을 든 채 비가 멈출 때까지 신설동까지 갔다가 다시
숭인동으로 되돌아와야 했다. 그 길지 않은 동안이 참으로 길었다. 연도의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쳐다보았고 그 중에는 의심의 눈초리도 있을 수
있었다. 드디어 비가 멈추었다. 삐라 뭉치를 들고 줄담배를 피우면서 내 주위를
맴돌던 석률이가 담뱃불로 말린 쑥줄에 불씨를 옮긴 다음 삐라 뭉치를
애드벌룬의 줄에 연결했을 즈음 "놓아!"하는 소리가 들렸다. 계속 주위에서
우리들을 지켜보고 계셨던 이재문 선생의 목소리였다. 나는 그의 말을 따라
애드벌룬을 놓았다. 애드벌룬은 잠깐 전선줄에 걸리는 듯싶더니 상공으로
솟구쳐 올라갔다. 나는 잠시 멀어져가는 애드벌룬을 물끄러미 올려 본 뒤 곧 그
자리를 떴다. 그리고 비에 젖었던지 타들어 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삐라
뭉치는 묶인 채로 애드벌룬과 함께 한없이 올라가다 어디에 떨어졌을까?

    독일 뒤셀도르프의 40일
  나는 유신 체제와 긴급 조치로 재갈 물린 사회를 뒤로하고 다른 사회를
향하여 오를리 공항에 발을 디뎠다. 가족은 그대로 놔둔 채 우선 나 혼자였다.
여권을 받는 데 거의 석 달이 걸린 나는 함께 발령을 받은 사람들 중에 제일
마지막으로 떠나고 곧 문을 닫게 된 회사는 더 이상 해외 지사 근무 발령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최후로 해외로 떠난 직원이 되었다.
  유럽에 도착한 나의 첫 번째 근무지는 프랑스가 아니라 독일의
뒤쎌도르프였다. 뒤셀도르프에 40일간 있는 동안 내가 했던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팔아야 할 품목은 양식기 종류였는데 재고도 없고 본사 제품도
아니었다. 유럽의 각 항구와 지사의 창고에는 앨범, 가방을 비롯한 잡제품 등
본지사간에 D/A로 실어 낸 물품들이 잔뜩 쌓여 있었지만 그 품목들에는
담당자들이 따로 있었다. 나는 우리 회사 제품도 아닌 양식기를 사줄 새로운
바이어를 찾아내야 했는데, 경험도 없는데다가 처음 도착한 독일 땅에서 그
일은 한마디로 불가능이었다. 지사에는 융과 발체란 이름의 두 독일인
세일즈맨이 있었지만 그들은 재고품을 팔기 위한 영업 활동에도 시간이
부족했다. 나는 지사의 잉여 인물이었다. 내가 왜 왔는지, 회사는 나를 왜
내보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내가 나오게 된 것이 무슨 운명의 장난 같다고
느꼈고 이상한 예감이 들기도 했다.
  나는 음료수만 마셨다. 왜 그렇게 목이 말랐던지. 그러던 어느 날 베를린서
공부하고 있던 외교학과 동기생 박호성이 찾아왔다. 반가웠다. 그는 독일 대학
사회의 영향을 받아선지 많이 달라져 옛날보다 훨씬 많은 문제의식을 갖고
있어다. 나는 그를 만난 것이 더욱 반가웠다. 우리는 독일 맥주를 마시고 아쉽게
헤어졌다. 
  우리 홀아비들은 (아직 가족들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뒤쎌도르프의 교외에
있는 집을 한 채 빌려 동거하고 있었다. 어느 날 우리는 이상한 편지를
받았는데, 그 편지에는 "남자들만 밤늦게까지 떠들어대고, 이상한 냄새 피우고,
집 앞의 정원을 손질하지 않는다."는 등의 지적과 함께 "곧 시정하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독일 사회가 우리에게 보낸 경고장이었다. 나는 그 경고를 뒤에
남겨 두고 빠리 지사로 옮겼다.

    우리라면 벌써 통일을 이루고도 남았지
  빠리에 온 나는 바빠졌다. 빠리 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교외의 소도시인
뷔수에 있었던 지사 창고에는 별의별 상품이 잔뜩 쌓여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마르세유, 르 아브르, 로테르담 등의 항구와 빠리 근교의 가로노 보세 창고에도
D/A로 실어낸 상품들이 잠자고 있었다. 70년대 후반, 수출 드라이브 정책의
막차를 타게 된 회사가, 현지에서 팔릴 물건을 수출한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생산되는 물건을 팔리리라는 기대만으로 실어 냈다는 것을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어느 물건이 어디에 있다는 것의 리스트를 작성하여
프랑스인 세일즈맨에게 전달해 주는 일이었다.
  빠리에 와서 처음 맞은 휴일에 나는 바스띠유를 찾았다. 실망스럽게 광장이
된 바스띠유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광장 한가운데 1830년의 미완의 7월혁명
기념탑만 우뚝 솟아 있을 뿐, 나중에 감옥을 헐고 그 석재로 당시 '혁명의
다리(지금의 꽁꼬르드 다리)'를 지었다는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또 미라보 다리를 찾았다. 그 다리는 그냥 쎄느 강의 평범한 다리였다.
나처럼 부러 미라보 다리를 찾아온 사람은 없어 보였다. 약간 실망스러웠지만
다리 위에서 에펠 탑 쪽을 바라보는 경관은 좋았다. 아뽈리네르의 "미라보 다리
아래 쎄느 강은 흐르고 우리들 사랑도 흐르네"라는 시의 한 구절 때문에 미라보
다리가 한국인에게도 유명해졌다면 그것은 식민지 문화의 일면을 보여주는 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 한국전쟁 후 염세주의적인 낭만에 젖을 수밖에
없던 당시 젊은이들에겐 다른 출구가 없었을 수도 있다. 바로 그것이 문리대
앞의 개천을 쎄느라 했고 또 다리를 마리보 다리라고 부르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여향이 남아 있어서 나도 이렇게 미라보 다리를 찾아온 것이 아닌가.
나의 노래 십팔번 "지금도 마로니에는...."도 만찬가지였다. 나에게 낭만주의가
살아 있는 것은 사실이기도 했다. 

  지사에는 프랑스인들도 많이 근무했다. 나는 조금씩 이곳 사람들이 이름에
익슥해지기 시작했다. 삐레르, 마르땡, 브리지뜨, 끄리스띤느, 베르뜨랑 등의
프랑스인과 창고에 근무했던 뽀르뚜갈 사람 주제와 스페인 사람 가르시아 등.
그들과 나눈 짧은 대화를 통하여 조금씩 그들 사회의 겉모습을 보고 있었다.
대화는 주로 영어로 했다. 나의 영어는 짧았지만 당시의 내 프랑스 말보다는
훨씬 나았다. 나는 이들 현지 근무자 중에 경리를 담당한 삐에르 구띠에 씨와
그의 여비서인 끄리스딘느 그리고 창고장 주제와 자주 대화를 나누었다.
  어느 날 까페에 마주 앉은 삐에르에게 나는 이런 질문을 하였다.
  -너희 나라에 쿠데타는 일어나지 않니?
나의 갑작스럽고 엉뚱한 질문에 그는 어리둥절해 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글쎄, 일어날 수도 있겠지. 알제리를 포기하려는 드 골에 반대하여 그를
죽이려는 기도도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나려면 미친 장군이 있어야
하고, 또 일이 벌어져도 바로 시민들이 모두 들고 있어날테니 몇 시간이나
지탱할 수 있을까?
  이렇게 대답하던 삐에르가 다른 대화 중에 한 말은 특히 나의 관심을 끌었다.
독일이 침략국이었기 때문에 분단된 반면에 한반도는 피해국이면서
분단되었다는 등의 말이 오간 뒤에 나온 말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프랑스인들이 철저한 개인 주의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지. 특히
독일인과 비교하여 그들에 비하여 단결력이 없다고 말하지. 그 말은 한편 맞는
말이고 다른 한편 틀린 말이야. 평화 시기에는 맞는 말이지만 프랑스에 위기가
오면 달라지거든. 예를 들어, 프랑스가 독일이나 너희 나라처럼 분단되었다고
가정해보자구. 그것은 위기가 되는데 이 때 프랑스인들은 똘똘 뭉치게 되지. 그
분단의 연유가 어떻든 그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고 합치니까 지금은 이미 통일을
이루고도 남았겠지.
  은근히 프랑스인임을 자랑하는 그가 얄밉기는 했지만 반박할 힘이 없었다.
나는 입을 봉한 채 잠시 김구 선생을 돌이켜 생각했다.

    운명의 2개월
  혼자 떠나 온 지 4개월 여가 지난 8월에 나의 아내와 만 다섯 살이던
수현이와 두 살 반이던 용빈이가 오를리 공항에 도착했다. 아내의 표정은 마냥
즐거웠고 그녀의 머리칼도 역시 달달 볶아져 있었다.
  그 밝던 표정이 단 2개월 만에 눈물로 얼룩지게 될 줄을 그녀도 몰랐겠지만
나 역시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2개월은 운명의 2개월이기도 했다. 만약 가족이
2개월 더 늦게 나오게 되었다면, 혹은 사건이 2개월 먼저 터졌다면 우리는
이산가족으로 남아 있게 되었을 그런 2개월이었다.
  사람은 살다 보면 누구나 일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일을 겪게 마련이다.
그런데 기쁘고 즐거웠던 일보다 고통스럽고 견디기 어려웠던 일이 더 잊혀지지
않는 것이 인지상정일까? 그 2개월 이후에 겪어야 했던 일은 지금도 한 장면 한
장면이 생생히 살아 있다. 밤에 도망갈 짐을 싸면서, 그리고 그 짐을 길바닥에
버리면서, 그리고 기차가 빠리에서 스트라스부르까지 닿을 동안 소리 죽여
울기만하던 아내와 아무 말도 할 수 없던 나, 그리고 뜻하지 않은 여행에
멋모르고 즐거워하면서 슬금슬금 우리의 눈치를 살피던 철모르던 아이들.
빠리에서 도망친 우리는, 그러나 갈 곳이 없었다.

    "어디로 가나?"
  열차 창 밖으로 하염없이 바라보던 동부 프랑스의 끝없는 벌판, 그리고 독일
프랑트푸르트의 어느 값싼 호텔에서 보낸 밤....
외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같은 사람을 맞이할 곳은 그 아무데도 없었다.
그때 내가 독일로 향했던 것은 베를린에 가면 혹시 무슨 길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 때문이었다. 당시 유학생이 나의 한 가닥 희망이었다. 결국 우리는
빠리로 되돌아왔다.
  나는 여기서 그 자세한 얘기를 하지 않으려 한다. 그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와 똑같은 시기에 서울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난을 치렀을 동료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때문이다.
  서울에서 급히 빠리로 온 김병만 사장이 나에게 건네준 신문을 보는 순간에,
그리고 그가 같이 서울로 가자고 요구했을 때, 앞이 캄캄해진 뒤 제일 먼저
보인 것은  바로 그 암울한 방이었다. 그 방이 어떤 곳이라는 것을 나는 짧은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곳에 있었고 그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은
내가 알고 있었던 정도가 아니라는 것도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들에 비하면
나는 사치스런 행각을 했던 것에 지나지 않았다.
  다만 여기서 밝히고 싶은 것이 있다면, 김병만 사장을 비롯한 회사 상사와
동료들이 나에게 보여주었던 일에 대해서다. 김병만 사장은 대범한 사람이어서
나 같은 졸장부는 근접도 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는 서울에서 며칠 동안
밤마다 중앙정보부에 불려 다녔어야 했음에도 내 앞에선 그런 말을 비치지
않았고 또 불평도 하지 않았다. 회사가 몹시 어려운 때였고 또 망하게 되었지만
그때까지 그를 피하고 도망쳤던 나를 끝까지 회사에 머물게 해주었다. 사건
직후 박정희가 죽고 서울의 봄이 왔던 탓도 있었겠지만 그가 내게 베푼 일은
보통 사람은 할 수 없는 대단한 배려였고 또 용기였다. 다른 상사와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회사가 문을 닫게 되었을 때는 나의 뒷걱정까지 해주었다. 잠시
한 배를 탔다고 모두 그렇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회사에는 주로 경복고
출신이 많았는데 처음 입사했을 때부터 분위기가 여느 회사와는 확실히 달랐고
동아와 조선 투위에 있던 분들도 일하고 있었다. 내가 그 회사에 다녔던 것은
우연만은 아니었다. 나는 대한 항공에 입사한 지 20일 만에 뛰쳐나온 적이
있는데 그 회사는 그렇지 않았다.

    씁쓸한 기억들
  그러나 사람의 처지가 갑자기 달라졌을 때 주위 사람들의 본모습을 더 잘 볼
수 있다고 했던 중국 노신의 말은 헛말이 아니었다. 회사원이 모두 경복고
출신이 아니었듯이 회사원이 모두 나를 이해하고 격려했던 것은 물론 아니었다.
내가 없어지자, 북한으로 간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한 동료 사원도 있고, 러시아
음악을 좋아하는 것으로 이미 수상한 점이 보였다고 말한 동료 사원도 있었다.
내가 소련의 적군 합창단이 부른 '스ㅉ까라찐'이나 '은방울꽃의
계절(일명'모스끄바의 저녁')'을 자주 듣던 것을 두고 한 말이었다. 특히
"'은방울꽃의 계절'의 은방울꽃은 5월 1일 노동절경에 길섶이나 낮은 야산에
피는 꽃으로 가난한 노동자들끼리 자신들의 생일인 '노동자의 말'을 기념하여
서로 주고받는 꽃"이라는 나의 설명이 그에겐 아주 수상한 점으로 비쳤다.
그런데 나와 함께 그 노래를 들을 땐 그도 노래가 아주 좋다고 했었다.
  그러나 그 사람들보다 더 나를 놀라게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빠리
지사장으로 있던 사람이었고 서울 상대 출신이었다. 나보다 두세 살 위로 당시
아직 ㅈ었던 그는 나에게 사람이 돈에 눈이 어두워지면 어떻게 변하는지를
가까이에서 똑똑히 불 수 있게 한 첫 번째 사람이기도 했다. 본사가 문을 닫게
되자, 그는 그것을 한몫 잡을 기회로 삼았다. 
  서울 본사는 문을 닫고 없어졌는데, 빠리 지사에는 아직 재고가 많이 남아
있었다. 본사가 없는 지사에 그와 나 두사람만 남게 되었고 외환은행 빠리
지점의 관리를 받았다. 그는 나의 상사였고, 큰 하자가 있는 나는 그 누구한테도
발언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되었다. 그는 지사에 나왔다가 회사가 망해서
들어가게 되었는데 빈손으로 돌아갈 수 없다며 드러내 놓고 한몫 잡겠다고
선언했고 실천에 옮겼다. 나는 그의 눈에 가시가 되었다. 그런데 그 가시가 아주
힘없는 가시에 불과하다는 것이 곧 드러나자 나에 대한 그의 태도는 돌변했다.
본사가 아직 살아 있을 때는 그는 나에게 비교적 친절했었고 또 나의 '하자'를
이해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본사가 없어지고 내가 방해물이 되자 나를
범죄자라고 불렀고 급기야 간첩이라고 했다. 냉전 논리의 수법은 정권을 쥔
자들만이 사용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의 이익 추구를 위해 간첩이 돼
주어야 했다. 나중에 어떤 사람을 위해 안기부의 끄나풀이 돼 주어야 했던
것처럼.
  나는 그 같은 사람이 예외적인게 아니라는 주장을 들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오히려 예외적이고 또 바보 취급을 받는다고 했다. 그 주장을 했던
사람은 대기업의 하청을 받아 납품하는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요새는 젊은 사람들이 더 바랍니다."
  세월이 지나가면서 그의 말이 틀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나는 결국 그 회사를 떠나 프랑스 회사에 다녔다. 프랑스 회사에 다니게 된
것은 본사가 문을 닫기 직전 거래처인 그들에게 미리 부탁하여 가능했다. 그
만큼 회사는 나를 위하여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이미 본사가 없어진 뒤에는
나르 고용하겠다는 그 회사의 약속이 큰 구속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프랑스 회사는 나 같은 한국인이 필요없었다. 그들에게 한국인이 필요하다면,
프랑스말을 잘하고 한국과 관계가 좋고 또 한국을 왕래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는데 나는 그 어느 경우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나는 그 회사에서 제 발로
걸어 나왔다. 아무리 앞이 막막했다 해도 나를 별로 필요로 하지 않는 자리에
눌러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생존잇기'의 쓴 맛을 보기
전의 일이었다.

    중고차 한 대로 빠리에 남은 사내 
  전두환 정권이 날이 시퍼런 때였다. 빠리의 한국인 사회가 오히려 한국의
상황 변화에 국내보다 더 예민하게 반응한다고 느끼게 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서울의 봄' 동안에 잠깐 부드러워졌던 사람들의 시선이, 광주 항쟁 이후 전두환
정권이 단단해지자 차갑게 바뀌는 것을 보았다. 이렇게 차갑게 바뀐 시선은
다시, 프랑스에 사회당 정권이 들어서자 날카로운 의혹의 시선으로 발전하였다.
당장 무슨 위기라도 만난 듯이 야단법석이던 당시의 한국 신문들처럼, 빠리의
한국인 사회도 분위기가 날카로워졌는데 그 영향이 나에게까지 미쳤던 것이다.
빠리의 한국인들 중에는 이러한 반응을 애국심의 발로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실은 경제적으로 한국에 매여 있어 그 눈밖에 나선 안되기 때문에
자기 이익을 위한 이기심이 냉전 논리의 관성을 타고 나타났던 것뿐이다.
  프랑스의 교포 사회와 독일의 교포 사회 사이의 중요한 차이는 경제적으로
한국에 매여 있고 없고에 있다. 해외 운동이 불모지 프랑스에 비해 독일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그 가장 중요한 이유도 바로 이런 차이에 있었다.
  프랑스에 사회당 정권이 들어섰다고 하여 프랑스의 한국인들에게 불이익을
가져다 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체류 허가증이나 노동 허가증을 훨씬
더 쉽게 받을 수 있게 된 게 변화라면 변화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믿었고 따라서 더욱 조심하고 경계의 빛을 띠었다. 지금은
전두환 정권을 욕하기도 하는 사람들이지만 당시에는 박수를 보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혼자가 되었다.
  한국의 어느 소설에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라는 작품이 있는데 나는
'중고차 한 대로 빠리에 남은 사내'가 되었다. 회사를 그만둘 때, 결국
이루어지지 못할 귀국에 드는 이사 비용과 비행기표 값이 식구 수대로
지불되었는데 그 돈의 일부로 중고차를 샀기 때문이다. (그 중고차가 바로 내
관광 안내 사업(?)의 밑천이 되었다.)

     5. 길을 물어 가며
    빨라스가 어디요?
  오를리 공항에서 먼 상념에 잠겨 있던 나는 한 시간 정도를 기다린 후에 나의
두 번째 손님을 태웠다. 빠리 시내로 들어가는 여행 가방을 든 40대의 남자
손님이었다. 그가 말한 행선지는 오말로 8번지였는데 전혀 생소한 길이었다.
그는 빠리 9구에 있는 쌩 조르주로를 지나서 갈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런데 쌩
조르주로도 아는 길이 아니었다. 도상 훈련을 할 때 본 것 같기도 했는데
어디였는지 가물가물하였다.
  나는 "저는 초보자입니다. 길을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하고 솔직히 말할
수밖에 없었다. 손님은 무능한 택시 운전사에게 불만을 표시하지 않고 길을
가르쳐 주었다. 그가 지시하는 방향대로 택시를 몰면서 나는 주객이 약간
전도되었다는 느낌이 들어 미안했다. 왜냐하면 손님은 도착할 때까지 편안히
앉아 있을 수 없었고 계속 방향 지시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손님 이후에도 그날의 일을 끝낼 때까지 거의 모든 손님에게, "저는
초보자입니다. 길을 가르쳐 주시겠습니까?"라는 말을 반복해야 했다. 다행스럽게
어느 손님도 크게 불만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리고 저녁 이후의 밤손님이었기
때문에 주소만 갖고 찾아가야 할 손님들이 아니고 주로 집으로 돌아가는
손님들이어서 길을 다 알고 있었다. 나는 택시 운전사로서 일을 한다기 보다
손님들에게서 길을 배우고 있는 중이었다. 손님들이 요금을 지불하는 것이
이상했고 또 그 요금을 받는 게 미안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첫날, 나는 손님에게서 한 번 가벼운 핀잔을 들었다. 한밤중에 젊은 손님 둘이
올라타고는 '빨라스'에 가자고 했다, 주소를 말하지 않고 이 말 한마디만 했는데
들어본 적이 없었다. '빨라스'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은 즉, "빠리에서 제일
유명한 디스코장도 모르냐"고 한마디 들었던 것이다.
  마침내 택시 운전사로 일한 첫날, 저녁 6시부터 새벽 4시까지 열 시간의 일을
끝냈다. 주로 손님에게 길을 물어 가며 실어 나른 하루였다. 열시간동안
일했다고 하지만 그 중 거의 반 정도는 택시 정류장에서 손님을 기다리며 보낸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이날 저녁식사를 거를 만큼 정신이 없었다.

    칠백육십팔 프랑
  나는 집에 돌아와 첫날의 수입을 찬찬히 세 보았다. 다시 한 번 더 세 보았다.
역시 768프랑이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나은 편이었다. 계산을 맞춰 보니
일주일에 7일을 계속 일한다면 1500프랑 정도, 그리고 한 달에 6, 7천 프랑의
순수입을 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은 초보자라 손님이 별로 없는 
택시 정류장에서 손님을 기다린다든지 하는 착오도 있을 테니, 조금 시간이
지나 경험을 쌓게 되면 더 나아질 수 있으리라는 자신도 생겼다. 그러나
일주일에 7일을 계속 일하게끔 몸이 견뎌 줄 수 있을지 하는 걱정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피로한 몸으로 새벽 5시가 넘어 잠자리에 들었으나 쉽게 잠 못 이루고 온갖
상념에 젖었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자문하고 있었다. "과연 책을 읽을 시간이
있을까? 논문 쓰는 것은 포기했다고 해도 책은 읽어야 할 텐데...."
잠을 청했다. 날이 벌써 훤하게 밝아 있었다.

    현대판 노예?
  이렇게 나의 빠리 택시운전사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몸과 싸움이었고 또
시간과 끝없는 싸움이었다. 일주일에 7일을 계속 일한다는 것이 욕심에 지나지
않고, 적어도 하루의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몸은 끝없이 요구했다.
  그러나 임차 택시 운전사는 일주일에 하루를 휴식할 때와 쉬지 않고 일할 때,
그 수입의 차이가 너무 많았다. 일주일에 하루를 쉬면 당연히 칠 분의 일
정도만 그 수입이 줄어들어야 마땅한데, 실제로는 삼분의 일에서 이분의 일의
수입이 줄어드는 것이다.
  택시를 빌리는 임차료와 디젤 기름 값을 합쳐서 일주일에 지불해야 하는
경비가 3600프랑 정도인데, 우선 이 돈을 벌어들이는 데만 보통 4일 반에서
5일이 걸렸다. 즉, 월요일에 시작하여 금요일까지 일해야 입금할 돈과 기름 값이
나오고, 순수 입으로 손에 쥘 수 있는 몫은 다만 주말인 토요일과 일요일에
일해서 벌어들여야 했다. 그러므로 하루를 쉬면 순수 입이 거의 반으로 줄고
이틀을 쉬면 순수 입이 거의 없어져 나모지 5일 일한 것이 완전한 헛수고가
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임차 택시 운전사들 중에는 이와 같은 자신들의 처지를 '현대판 노예'라고
자학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많고, 실제 택시 정류장의 안내판에 붙여 있는
택시 운전사 노동조합의 팸플랫에도 같은 표현을 쓰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라, 몸이 불편하여 하루를 쉰다 해도 편한 마음으로 쉬지도
못했다. 쉬지 않고 매일 일을 하다 보니 피로가 겹치고 책을 들여다볼 시간은
커녕 늘 마음껏 자 봤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시간에 쫓겼다. 끝없이 시간에 쫓겼다. 일을 시작하는 시각이 점점 늦어지는게
불가피했다. 오후 5시에 시작하여 밤 3시에 끝낸 날이면, 그 이튿날도 오후
5시에 시작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한두 시간씩
늦어지는 것은 보통의 일이고, 어떤 날은 그날 일의 시작으로는 마지막인 밤
11시 30분에 시작하여 이튿날 오전 9시 30분까지 일했던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은 잠시 눈 붙이고 다시 일을 나가야 했다.
  거의 매일 "오늘은 하루 쉬어야지" 하면서도 일주일 동안 고생한 것이 아까워
다시 핸들을 붙잡았다. 나는 이렇게 피로한 몸으로 시간에 쫓기며 힘들다고
느낄 때, 서울에서 나보다 더 어려운 조건에서 일하는 택시 운전사들을
생각하였다. 특히 친구 이종만이를.

    대학생과 택시 운전사 
  벌써 20년 가까이 지난 일이다. 내가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을 때, 나와
동갑내기로 택시 운전을 하던 종만이와 한 지붕 아래서 살았다. 그는 지금도
서울에서 택시 운전을 하고 있다. 그때 종만이는 태식이라는 우리보다 더
나이가 어린 친구와 한 조가 되어 일했다. 통행금지 시간이 있던 당시에 그는
새벽에 일을 시작하여 밤 12시까지 거의 스무 시간을 일하고 이튿날은 태식이와
교대하고 쉬었는데, 하루를 쉬고도 그 이튿날 일을 나가려면 몹시 힘들어하던
것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나는 그 때, 늦도록 일 나가지 않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던 종만이에게 면박을 준 적도 있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미안한
생각이 든다.
  당시 나는 편하게 대학에 다니면서, 사회문제에 조금 눈을 떴다고 어쭙잖게
종만이에게 노동조합에 대하여 말하고 또 택시 운전사 노조를 만들어 보라고
권유하기도 했었다. 종만이는 내 말에 관심을 기울여 열심히 들었다. 나 자신
택시 운전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때였다. 그렇지만
당시 내가 서울의 택시 운전사들이 겪어야 했던 어려운 실정에 대하여 깊이
있게 파고들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종만이를 통하여 그들의 실정을 겉으로
보고 있었고 또 종만이에게 노동조합에 관한 얘기를 하면서 당시 대학생들이
가질 수 있었던 노동자들에 대한 낭만적인 연대감을 확인하며 스스로 만족하려
했다는 것이 더 솔직한 얘기가 될 것이다. 
  종만이는 당시 아직 젊은 나이에 그 팍팍한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꽤
낙천적이었다. 한번은 내가 그의 머리를 깎아 주었는데 너무 엉터리로 깎아
결국은 이발소에 가서 ㅉ은 스포츠 머리로 다시 깎았어야 했다. 그런데도 그는
나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고 오히려 낄낄거리며 웃어댔다.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으면 틀림없이 신경질을 부렸을 것이다. 그는 나보다 생일이 조금
이르다고 스스로 형이라고 주장하곤 했는데 그러면서도 내말을 잘 따르고 술도
마시고 또 내가 좋아하는 클래식 음악을 같이 듣기도 했었다.

  직접 택시 운전을 하다 보니 자연히 더 자주 종만이가 떠올랐다. 함께 보냈던
날들의 추억과 또 그의 낙천적이며 강인한 생활관을 돌이키며 나의 어려움을
극복하기도 하였다. 종만이는 나에게 서울의 택시 운전사와 나를 연결시켜 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 셈이다. 어떤 때는 그만한 일에 힘들어하느냐고 꾸짖기도
하였고 또 어떤 때는 잘 견뎌 내라고 격려도 해주었다. 나는 빠리에서 혼자
서울의 택시 운전사들과 무언의 연대감을 느끼고 있었다.
  나의 매일 열 시간씩 일하는 것보다 서울의 택시 운전사들처럼 하루에 이틀
치인 스무 시간을 한꺼번에 일하고 하루를 쉬는 게 어떨까 나는 생각을 갖기도
했는데 빠리의 날짜시각표 규정에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날짜시각표 규정에 맞추려면 낮에 일을 시작하여 다음날 낮까지
계속일 을 해야 하는데, 지금까지 살아온 생태에 맞지도 않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더 중요한 이유는 낮에는 손님이 많지 않아 수입이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한편, 나의 이 생각은 이틀에 하루지만 스무 시간을 계속 일해야 하는 한국의
택시 운전사들의 고충을 모르는 탓일 수도 있었다. 그들은 오히려 매일 하루에
열 시간씩 일하고 또 하루 중 아무때나 일을 시작할 수 있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들을 부러워할지도 모른다. 실제 서울 택시의 2교대 제도는 택시
운전사들의 요망보다 택시를 최대한으로 운영하여 최대의 이익을 뽑겠다는 택시
회사 사주들의 요구에서 온 것일 게다.
  
    서울과 파리의 택시 운전사
  하루에 열 시간씩 일하는 파리의 택시 운전사와 이틀에 하루 스무 시간을
일하는 서울 택시 운전사의 일하는 총 시간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내용에는 몇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어서 서울 택시 운전사들이 훨씬 더 열악한
환경에서 일한다는 것을 나는 곧 알 수 있었다.
  우선 첫째는 실제로 주행하는 시간의 차이다.
  빠리의 경우는 손님이 많고 적고에 따라 조금 달라지지만 보통 하루에 다섯
시간에서 일곱 시간이 실제로 주행하는 시간이 되고, 나머지 시간은 택시
정류장에서 차례를 기다리면서 쉬거나 신문을 보거나 또는 동료 운전사와
잡담을 나누곤 한다. 이에 비하여 서울의 택시 운전사들은 쉴 짬이 거의 없다.
내 친구 종만이의 말에 의하면 식사시간 이외에는 쉴 사이가 전혀 없다고
했는데, 그것은 그만큼 택시를 이용하는 손님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손님이
많다는 얘기를 빠리의 택시 운전사들이 들으면 아마 "어디에?"하고 귀가 번쩍
띄어 반가워하겠지만, 실은 같은, 아니 오히려 더 못한 벌이를 위하여 서울의
택시 운전사들이 실제로 더 오랫동안 일하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을 뿐이다.
  둘째의 차이점은 서울의 택시 운전사들이 빠리보다 더 힘들게 주행한다는
점이다.
  교통지옥이라는 말로 알 수 있듯이, 서울의 교통 상황의 열악함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알려진 일인데 근래 길에 비하여 자가용이 급증하면서 더욱 그 정도가
심해졌으리라는 것은 안 보고도 알 수 있다. 그러니 벌이를 위해 곡예 운전을
하는 것은 할 수 없는 일인데 욕만 얻어먹고 스트레스는 더욱더 쌓이게 되는
서울 택시 운전사들의 고충에 비하면 빠리 택시 운전사들의 그것은 여유 있는
짜증에 지나지 않는다. 빠리의 택시는 시내의 요로 마다 있는 버스 전용 도로를
이용할 수 있어서 출퇴근 시간에도 덜 밀리고 또 출퇴근 시간을 제외하면
짜증이 날 정도로 밀리는 때는 거의 없다.
  셋째의 차이점은 교통경찰로 대변되는 공권력과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빠리의 지상 교통에서 택시는 시내버스 다음으로 대우를 받는다. 이는 이른바
공익 우선의 원칙의 적용이다. 그리고 경찰은 의식할 필요가 없다. 교통경찰은
차량들이 잘 소통되도록 도와줄 뿐이지 딱지를 떼는 일을 만능으로 삼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일반 자가용을 운전하는 사람에 비하여
택시 운전사들에 대하여는 '지금 일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이해해 준다는 데에
있다. 내가 경찰로부터 딱지를 떼기는커녕 단 한 번도 맞부딪친 적도 없었다면
그 차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노련한 베떼랑이 아닌 평범한 운전사이고
게다가 외국인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차이점은 빠리의 택시 운전사는 임차인 경우에도 택시를 자기
차처럼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빠리의 택시는 거의 교대제가 아니기 때문에 매일 인수 인계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없고 매주 월요일마다 임대료를 지불하면 운전사의 차나
다름없었다. 일주일에 주행 거리를 1500킬로미터 이상 넘기지 말라고 하지만,
실제 넘겼다고 말을 들은 적은 없었다. 정비가 필요할 땐 임대료를 지불하는
월요일에 함께 하면 되었다.
  그리고 시내에 볼일이 있을 때, 택시를 갖고 나가면 중심지에서도 주차의
걱정이 없고 주차료를 내지 않아도 되는 큰 이점이 있다. 주차가 어려운
중심지일수록 택시 정류장은 꼭 있게 마련이므로, 그 정류장의 뒤쪽에
주차시키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시내 주차의 이점은 빠리지앵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빠리 택시 운전사들의 특권과 같은 것이다.
  이상과 같이, 나는 서울의 택시 운전사들에 비해 좋은 조건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려움을 느끼거나 짜증이 생가다가도 종만이 얼굴이
떠오르면 그런 감정이 슬그머니 사라지는 것이었다. 빠리의 택시 운전사가
'현대판 노예'라면 서울의 택시 운전사는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서울의 택시 운전사를 부러워한 점
  그런데 나는 꼭 한가지 서울의 택시 운전사가 부러운 점이 있다. 그것은
나처럼 길을 몰라 애를 태우지는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나는 손님들이 행선지를
말할 때마다 애가 탔다. 길을 몰라 손님에게서 '길도 모르면서 택시 운전을
한다'는 지청구를 듣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항상 앞서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처음에는 이 걱정이 돈을 얼마나 벌 수 있겠는가 하는 것보다 더 나를
짓눌렀는데 거기에는 남에게 싫은 소리 듣는 것을 못 견뎌 하는 나의 성격 탓이
컸다.
  빠리의 택시 운전사는 두 권의 지도책을 필수적으로 갖고 있어야 한다.
하나는 빠리 시내의 지도책이고 다른 하나는 빠리의 위성도시들의 지도책이다.
지도가 정확하고 자세하여 주소만 있으면 어디든지 찾아갈 수 있는데 이것은
실제 거리 상에 길 이름과 번지수가 차례대로 잘 표시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빠리는 또 서울과 달리 자동차가 들어갈 수 없는 좁은 골목길이
없으므로 손님들은 모두 자기가 원하는 곳의 바로 앞까지 가자고 요구한다.
이들은 행선지를 말할 때, '어느 길의 몇 번지'라고 아주 정확히 말하여 나 같은
초보자들의 애를 먹인다. 서울에서 그렀듯이 그냥 '오페라 앞'이라든지 '에펠 탑
근처'라고 말한다면 그래도 조금은 더 쉬웠을 것이다.

    어느 프랑스 청년
  아직 빠리의 길에 자신이 없어 애를 태우던, 일을 시작한지 열흘쯤 지났을
때의 일이었다. 나는 그 젊은 프랑스 청년을 만나 큰 용기를 얻게 되었다.
  택시에 올라탄 그 청년은 몽마르뜨르로에 가지고 했다. 나는 몽마르뜨르로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몰랐는데 당연히 몽마르뜨르 언덕 쪽에 있으려니 믿고
그쪽으로 가다가 신호등에 걸려 멈추었을 때 지도를 볼 생각이었다. 그게
잘못이었다. 정확히 모르면 모른다고 실토를 하고 길을 가르쳐 달라고 양해를
구했어야 옳았다. 운 나쁘게(?) 신호등에도 걸리지 않고 한참을 갔을 때였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거예요?" 그의 말에 나는 움찔했다.
  "몽라르뜨르..." 나의 대답은 기어들었다.
  "나는 몽마르뜨르 언덕(butte)에 가는 게 아니라, 몽마르뜨르로(rue)에 간다고
했는데요."
  나에게 순간적으로 뤼(rue, 로)를 뷔뜨(butte, 언덕)로 잘못 들은 척할까 하는
얄팍한 생각이 스쳤다. 그러나 솔직히 말했다.
  "죄송합니다. 손님. 나는 초보자라고 몽마르뜨르로가 어딘지 모릅니다. 길을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그리고 택시 미터기를 처음 위치로 돌렸다. 
  그가 길을 가르쳐 주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요금이 27프랑이 나왔다. 그는
45프랑을 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오늘 온 길을 자주 택시를 이용하는데 요금이 보통 40프랑 나오지요."
내가 그에게 고맙다고 하고 다시 초보자라 미안하게 되었다고 말했을 때, 그는
이렇게 대꾸했다.
  "초보자라고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요. 모든 직업에 데뷔 시기는 있어야 하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몽마르뜨르로는 꽤 중요한 길이니까 알아두세요."
  그는 웃으면서 멀어졌다. 몽마르뜨르로느 몽마르뜨르 언덕과 전혀 동떨어진
시내 한복판인 레알에서 몽마르뜨르 언덕 쪽인 북쪽으로 뚫린 길이었고 그의
말대로 택시 운전사가 몰라서는 안되는 중요한 길이었다. 나는 사라져가는
그에게 끝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서른 살이 될까말까 한 그가 다시 만나지 않을
이방인에게 베푼 관대함과 친절에서 나는 많은 것을 느꼈다. 그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나의 본보기가 되었다.
  일을 시작한 지 드디어 한 달이 지나갔다. 나는 첫 한달 동안에 7500프랑의
순수 입을 올렸다. 물론 단 하루밖에 쉬지 않았기 때문에 올릴 수 있었던
금액이었다.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 저 깊은 곳에서 뿌듯한 만족감이 솟아오르는
것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것은 한편으로 내 몸을 움직여 솔직하게 돈을
벌었다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 나도 무언가 해낼 수 있었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월초마다 겪어야 하는 집세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더 중요했던 것은 생활난으로 결국 나
자신을 지키지 못하고 허물어질지도 모른다는 오래된 압박감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데에 있었다. 나는 혼자 술 한잔을 마시며 그 해방감을
만끽하였다.

    6 아듀! 고물 택시
    구두 시험장에서
  택시 운전을 시작한 지 석달이 지났다. 위성도시에선 간혹 헤매기도 했지만
빠리 시내에서는 손님에게 거의 길을 물어 보지 않아도 되었다. 십시일반이라고
이 손님 저 손님에게 길을 배워 빠리 시내의 길을 대체적으로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확정면허증을 따기 위한 도전을 할 때가 되었다.
  임시 면허증은 6개월 동안만 유효하기 때문에, 그 기간이 끝나기 전에
본면허시험에 통과해야 하고, 또 한두 차례의 실패를 각오해야 했기 때문에
미리 시험을 볼 필요가 있었다. 나는 운전 학원에 들러 본시험 원서 접수를
요청하고, 일을 하는 중간 중간 택시 정류장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시간을
이용하여 지도를 보고 6백 개의 길을 익히려고 노력하였다.
  본시험은 필기시험이 아니라 구두시험이어서 약간의 두려움이 있었다. 시험은
6백 개에 달하는 빠리의 중요한 길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는가를 보는
것이었는데, 그날의 운이 90프로 이상 좌우한다고 했다.
  시험날이되어 빠리 15구 모리용가에 있는 택시 운전사 면허 관리실로 갔다.
구두시험은 부속 사무실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사무실 밖에서 내 차례를
기다리며 처음 치르게 되는 구두시험에 가슴을 설레고 있었다. 첫 번 시도에는
잘 통과시켜 주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실패하리라는 걱정이 떠나지
않았다. 나는, 이번 시도는 시험이 어떻게 치러지는지 한 번 알아보는 경험으로
삼아 실패하더라고 크게 실망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진정하려고
노력하였다.
  잠시 후 내 바로 앞의 수험생이 시험을 치르고 나왔는데, 화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실패한 것 같았다. 나는 다시 떨리는 기분이 되어 나의
이름이 불리는 것을 듣고 시험장 안으로 들어갔는데 그 순간 아득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흡사 피고석 앞에 심판관들이 배석한 것처럼, 그것도 7, 8명이 일렬로
내 쪽을 향해 앉아 있는 석이었다. 그들의 집중되는 시선에 내 얼굴은 벌게
졌고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흡사 죄지은 사람처럼
시선을 내리깔고 자리에 앉았다.
  나의 바로 정면에 앉은 주심 같은 사람이 나에게 간단한 인정신문을 하였다.
나는 나의 이름과 주소를 말할 때 목소리가 기어 들어가 주심에게 "큰소리로
말하시오!"하고 야단부터 맞았다. 나는 더 기가 죽었다. 숫기 없는 자신에
스스로 화가 날 지경이었다.
  그들과 나 사이에는 길다란 책상이 있었는데, 그 한가운데에 바둑알 만한
크기의 나무 단추들이 수북히 들어 있는 상자가 놓여 있었다. 나무 단추는 총
6백 개일 것이고 각 단추의 안쪽에는 1번부터 6백 번까지 번호가 적혀 있을
것이었다.
  시험은 네 개의 길을 임의로 택하여 그 길이 각각 어디에서 시작하고
어디에서 끝나는지를 교차로의 이름을 말해 밝힌 다음, 첫 번째 길에서 두 번째
길을 갈 때와 세 번째 길에서 네 번째 길을 갈 때 각각 그 지름길을 차례대로
말해야 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주심은 나에게 네 개의 단추를 꺼내라고 요구하였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네
개의 나무 단추를 꺼내 그에게 넘겨주었다. 심판관들은 모두 내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내가 건네준 나무 단추 중에서 먼저 두 단추의 번호를
옆사람에게 불러 주었고, 옆사람은 그 번호와 그가 갖고 있던 길의 리스트를
대조하여 길의 이름을 불렀다.
  나는 지나치게 운이 좋았다. 첫 번째 번호가 가리키는 길 이름은 꽁꼬르드
광장이었고 두 번째 번호는 에뚜아르 광장(개선문 광장)이었다. 이 두광장의
이름이 나오자, 배심원들 사이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쉬운 정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두 광장을 연결하는 길은 너무나 유명한 샹젤리제 대로
하나만 말하면 되는 것이었으므로 이 문제는 택시 운전사는 물론이고 빠리에
처음 온 관광객도 모두 대답할 수 있는 문제였다. 주심이 반발한 것은 아주
당연했다.
  "두 광장 사이의 거리가 2킬로미터가 안되기 때문에 이 두 번호는 무효이니
다시 꺼내시오"라고, 그는 나에게 요구했다.
  두 길 사이의 거리가 2킬로미터가 안되면 문제가 너무 쉬우니까, 그 이상이
되어야만 문제로 인정한다는 내규 같은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운이 좋을
뻔하다가 너무 지나쳐 낭패를 본 셈이었다. 다시 꺼내면 틀림없이 어려운 길이
나올 것 같은 불길한 예감도 스쳤다. 내가 눈을 껌벅대며 두 개의 나무 단추를
꺼내려고 상자에 손을 집어넣는 순간이었다. 아주 걸걸하고 큰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두 광장 사이는 2킬로미터를 넘어 3킬로미터 가까이 되오. 나는 그것을
확신하오!"
  나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았다. 그는 나의 맞은편 왼쪽 끝, 그러니까 주심의
오른쪽 끝에 앉아 있던 배심원이었는데, 나이가 오십은 넘어 보였고 얼굴이
퉁퉁하고 마음씨 좋은 아저씨 같은 인상이었다.
  그 배심원의 이의 제기로, 마흔 살쯤 되어 보이는 주심과 그 사람 사이에
두어 마디씩 말이 오갔다. 나는 그 동안 이러 지도 저러 지도 못하고 두사람의
눈치만 살폈다. 잠시 후에 나는 얼굴 퉁퉁한 사람이 큰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이 깡디다 (candidat, 수험자)의 행운을 행운 그대로 인정합시다!" 
  이미 꺼낸 두 개의 번호를 유효로 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듯 말했다. 그의
말에는 거역하기 어려운 힘이 들어 있었다. 나는 주심이 어떻게 응수할지
갑자기 재미있는 게임을 바라보는 구경꾼처럼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옆의 부심에게 세 번째와 네 번째 번호가 어느 길이냐고
묻는 것이었다. 얼굴 퉁퉁한 사람의 승리였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제
50프로는 넘어간 셈이었다. 그러나 긴장을 풀 수 없었다. 한 번 수그러들었던
주심이 더 까다롭게 괴롭힐 수도 있었다. 나는 세 번째와 네 번째 길의 이름에
신경을 집중시켰다.

    "부알라!"
  세 번째 길은 셰르슈 미디로였고 네 번째 길은 뜨로까데로 광장이었다. 이
문제는 거리도 꽤 멀었고 또 그 지름길에 몇 개의 함정이 있었다. 그 첫부분에
일방통행의 지름길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했고 또 시내버스 길인데 택시도
이용할 수 있는 꽁뜨르 쌍스(contre-sens, 반대방향. 길폭이넓은 일방 통행로의
한쪽 차선을 분리하여 반대 방향으로 다니게 만든 길. 이 길은 시내버스를 위한
길인데 그 중 대부분을 택시도 이용할 수 있다)도 알아야 한다.
  나는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반대 방향의 길 이름은 알겠는데 첫부분에 있는
일방 통행로의 길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다. 평소 자주 다니던 길인데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자 당황스러웠고 그러자 더욱더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나는 궁지에 몰렸다. 나는 할 수 없이 그 길의 이름은 생각나지
않지만 두 길 사이에 있는 일방 통행로로 가면 된다고 궁여지책을 댔고 그 길
다음부터 목적지인 뜨로까데로 광장에 이르는 길 이름을 모두 말하였다. 나는
대답을 마치고 주심의 표정을 살폈다. 역시 불만족스러운 빛을 띠었다. 그는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면서 그 길의 이름만 말하면 통과시켜 주겠다는 듯 뜸을
들이고 있었다. 나는 다시 기억해 내려고 얼굴만 더욱 벌게 지고 길 이름은
아득할 뿐이었다. 나는 원군을 구하듯 얼굴 퉁퉁한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는
고개만 주억거리며 말이 없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잊었던 길 이름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나는 큰 소리로 외쳤다.
  "바빌론도, 그 길은 바빌론도입니다!"
  그러자 신이 나서 지른 내 목소리보다 다섯 배나 더 큰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부알라!(Voila! 그렇지!)
외침 소리의 주인공은 역시 그 얼굴 퉁퉁한 사람이었다. 그는 내가 길 이름을
대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을 때 안타깝게 자신의 입 속으로 뇌고 있다가 내가
말하자 "그렇지!"하고 소리친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렇게 큰소리가
되어 나올 수 없었다. 나는 그를 향하여 환하게 웃었다. 그도 나를 보고
미소지었다.
  본시험도 통과하였다. 나는 상기된 얼굴로 구두 시험장을 나서며 다시한번 그
얼굴 퉁퉁한 사함을 쳐다보았다. 그도 나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메르씨"하고 입으로 더듬었는데 소리가 되어 나오진 않았다.
  나는 나중에 개선문과 꽁꼬르드 광장 사이의 거리가 2킬로미터가 넘는다는
것을 확인하였고 또 구두 시험장에 택시 운전사 노동조합의 파견자가
배석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틀림없이 택시 노조의 파견자로 그 자신 택시
운전사였을 그가 질렀던 "부알라!" 소리가 지금까지도 내 귀에 쟁쟁하게 남아
있다. 특히 바빌론로를 지날 때면 그 사람 생각이 나면서 내 친구 종만이
얼굴이 더불어 떠올랐다. 서울에서 그와 택시 노조에 관하여 얘기를 나누었기
때문일 것이다.
  "종만아, 우리가 그때 같이 얘기했던 택시 운전사 노조가 여기서 바로 나를
도와주었구나."
  나는 이렇게 혼자말을 했다.

    고물 택시여, 아듀!
  며칠 후 나는 확정면허증을 받았다. 우선 3년간 유효였는데 3년이 지난 뒤에
그 중 1년 6개월 이상 일했다는 증빙을 제출하고 신체검사에 이상이 없으면
자동 연장이 되었다.
  임시면허증을 가졌을 때에 비하여 확정면허를 따게 되니 더욱 직업의식이
생겨 일에 충실하게 되고 또한 택시임대회사에 대한 나의 위치가 나아졌다.
나는 3개월 동안 타고 다니던 고물 택시를 알랭에게 돌려주고 다른 임대회사를
찾기로 했다. 몇차례에 걸쳐 택시를 바꾸어줄 것을 요구했었지만 알랭은 다른
택시가 없다는 등의 이유로 거절하였었다. 나는 보증금으로 맡긴 3천 프랑을
되돌려받고 알랭의 임대회사를 떠나면서 알랭보다 두고 나온 택시에게
'아듀!'하는 기분이었다. 하도 고물이라 손님들로부터 퇴박맞는 일이 없을까
걱정했었는데 실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손님들은 차례를 지키는 데
철저했다.

    나딸리가 해준 반가운 얘기
  내가 새로 찾아간 택시임대회사는 술로따라는 이름의 회사였는데 빠리 시내
13구에 있었다. 나는 알제리인 동료를 통하여 그 임대회사를 알게 되었다.
그곳은 수백대의 택시를 임대하는 꽤 큰 회사였고 알랭의 회사보다 훨씬
짜임새를 갖추고 있었다. 그 회사도 유태인이 경영한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나는 조그만 사무실에서 이름이 나딸리인 여자와 짧은 회견을 하였다. 그
젊은 여자는 얼굴이 사자상이어서 남자로 태어났으면 멋진 호남아가 되었을 것
같았고 목소리도 걸걸했다. 그녀는 책임 사고를 내지 말고 또 중간에 쉬지 말고
일해달라고 알랭이 말한 내용을 반복하더니 새로운 얘기를 덧붙였다. 그것은
6개월간 사고 없이 꾸준히 일하면 일주일씩의 휴가를 준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휴가란 어딜 보내준다는 것이 아니라 택시를 일주일간 임대료 없이 빌려준는
것을 말한다. 그 일주일 동안 일을 해서 돈을 더 벌든지 아니면 택시를 타고
여행을 떠나든지 마음대로 하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나에게 실로 반가운
얘기였다. 6개월마다 일주일의 임차료 3200프랑을 절약하게 되므로 결국 매월
5백프랑 이상의 수입이 늘어난다는 것을 뜻했다. 결국 나는 이 혜택을 보기
위해 그후 2년간을 쉬지 않고 일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었다.
이 혜택은 사실상 임차운전사들이 일주일 단위로 일하다 쉬다 하며
들쭉날쭉하는 것을 막기 위한 사탕과 같은 것이었다. 
  나딸리는 또 다른 반가운 얘기를 했다. 그것은 택시운전사들이 지불하는 디젤
기름값에 포함되어 있는 세금의 일부를 환불해준다느 것이었다. 이 환불은
연말이 지난 후에 주게 되어 있는데 각 택시운전사들이 지난 일년중 일한
기간을 계산하여 일년 동안 계속 일한 경우에는 6천 프랑, 6개월을 일하면 3천
프랑을 지불한다고 했다. 이 환불제도는 결국 한 달에 5백프랑씩의 추가 수입이
생긴다는 것을 뜻했다.
  따라서 나딸리와 나눈 짧은 대화를 통하여 나는 매월 천 프랑씩의 추가
수입에 관한 정보를 얻게 된 셈이다. 먼저 회사의 알랭은 이런 말을 비친 적이
없었다. 나는 그가 괘심한 생각도 들어 다음해 연초에 그의 회사에 찾아가
기름값 환불을 요구했다. 그 환불제도가 나딸리네 회사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택시운전사에게 주는 혜택이라는 것을 동료들과 나눈 대화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래의 회사에서 석달 치인 1500프랑을 아주
흡족한 기분으로 받아냈음은 물론이다.

    택시운전사가 지켜야 할 원칙
  내가 새로 받은 택시는 역시 뾔조 505구형이었지만, 차체도 멀쩡했고
8만킬로미터밖에 뛰지 않은 차였다. 나는 기분이 좋았다. 정식면허도 받고,
새로운 택시도 빌리고 또 이젠 빠리의 길에 대해 어느정도 자신도 붙었기에
'떳떳한' 택시운전사의 자격을 갖춘 셈이었다. 나는 새로운 마음으로 앞으로
일하면서 지켜야 할 원칙을 다음과 같이 정했다.

  1. 손님에게 무조건 친절히 대한다.
  2. 일 시작하는 시각이 늦어지지 않도록 노력한다.
  3. '르 몽드' 신문을 매일 사서 본다.
  4. 2주일에 하루 월요일에 쉰다. (월요일에 손님이 제일 적으므로)

  이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원칙은, 무조건 손님에게 친절하자는 것이었다.
일종의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직업인에게 당연히 요구되는 원칙이었다. 하지만
이 원칙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일의 짜증스러움, 겹친 피로 등으로
만사에 귀찮아지는 것을 수시로 느꼈다. 그래도 나는 이 다짐을 지키려고
애썼다. 서울의 택시운전사들에 비하여 훨씬 나은 조건에서 일하면서 불만을
가질 수 없다고 스스로 다독겨렸고 또한 나에게 몽마르뜨르로를 가르쳐준 젊은
프랑스인에 대하여 부끄러운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내가 이 원칙을 지킬 수 있었다면, 그것은 내가 그같은 다짐을 했기
때문이기보다는 바로 나의 손님들이 나로 하여금 이 원칙을 지킬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편이 훨씬 더 정확하다.

    사회의 눈과 택시운전사의 곤조 
  인간관계란 무릇 상대적이다. 사람은 상대방이 자기에게 사람 대접을 해줄 때,
또한 상대를 사람 대접 해줄 수 있다. 아무리 품성이 고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상대로부터 사람 취급을 못 받거나 무시당한다고 느낄 때에는 화를 내게 되거
상대에 대하여 적대감정까지 품게 된다. 특히 우리들은 '일보다 사람이 더
사람을 괴롭게 하고 피로하게 하는 현대'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택시운전사와
같이, 별의별 사람을 손님으로 맞아야 하는 직업인은 일의 어려움보다 사람들이
주는 괴로움으로 더 피로를 느끼게 될 때가 많다. 그리고 그 대부분의 경우는
바로 그 직업인의 직업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인식, 주로 편견 때문에
일어난다. 즉 그 직업을 바라보는 '사회의 눈'이 작용하는데, 이 '사회의 눈'은 곧
사회환경이 규정한다. 그러므로 내가 택시운전사의 이른바 '곤조'가 없고
손님에게 친절할 수 있었다면 그 가장 중요한 이유는 프랑스 사회의
택시운전사들을 보는 눈, 즉 프랑스의 사회환경이 그럴 수 있도록 허락했기
때문이다.
  나의 손님들은 택시운전사를 하나의 떳떳한 직업인으로 인정하였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말들을 하지만 그 말은 곧 '직업에 귀천이 있는 사회'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왜냐하면 '직업에 귀천이 없는 사회'에서는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이 강조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직업에 귀천이 없다'라고
말하는 사회와 '직업에 귀천이 없다'라는 말을 잘 하지 않는 사회가 어떻게
만났는지 볼 수 있는 극단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자.

    어느 창녀의 외침
  내가 빠리 관광안내를 할 때의 일이었다. 여행사의 소개를 받아 한국인 두
사람을 안내하게 되었다. 처음에 소개를 받을 때는 무슨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사람들이라고 했는데, 하루를 같이 지내는 동안에 이른바 정보 계통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말투도 그랬고, 특히 눈매가 여느
사람들과 확실히 다른 느낌을 주었다. 이런 느낌은 나중에, 그들이 대한항공
빠리 지점에 무슨 보안감사를 하기 위하여 나온 사람들이라는 사실로
확인되었다. 나에 대한 수고비는 물론, 식사비까지 대한항공 빠리 지점에서
대불하기로 했다. 그들은 내가 누군지 몰랐고 나 또한 같이 지내는 동안에는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라는 것을 확실히 몰랐는데 돌이켜보니 그날의 동행은
참으로 묘한 것이었다. 
  포도주가 곁들여진 저녁식사를 마친 후, 이들은 빠리의 사창가를 구경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이들을 레알 가까이 잇는 쌩 드니 거리로 데리고 갔는데,
그곳에는 여자들이 줄줄이 서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고, 우리들은 그 여자들을
쳐다보면서 길을 따라 어슬렁거리며 걸어갔다. 그러던 중 내가 잠깐 딴청을
하는 사이에 일이 벌어졌다. 두 사람 중에 30대 중반의 젊은 쪽이 한 여자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고 또 볼을 어루만진 것이다. 여자가 뿌리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이 남자는 "왜 그래애?"하면서 다시 엉덩이를 어루만졌다.
아마 한국에서 하던 버릇에, 술기운과 관광객의 (관광이 아니라 보안감사차
왔지만) 들뜬 기분이 합쳐졌을 것이다. 또는 말이 통하지 않으니 행동으로
귀엽다고 쓰다듬었을 수도 있다. 그래도 보통 남의 나라에서는 조심을 하게
되는데, 역시 한국의 정보계통에 있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눈에 보이는 게 없는
특별한 사람들인지 모르겠다. 빠리에서는 있을 수 없고 또 있지도 않은 행위를
저질렀던 것이다.
  비록 돈을 받고 몸을 내주는 여자들이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더욱 희롱의
대상이 되는 것을 못 참는 그녀들이었다. 그녀의 외마디소리와 함께, 우리
주위로 다른 여자들은 물론 남자들까지 몰려왔다. 그 여자가 흥분하여 몰려온
사람들에게 자기가 당한 얘기를 떠들어대자, 분위기가 점점 심상치 않게
전개되어 자칫하면 몰매를 맞아야 할 단계에 이르고 있었다. 당사자는 아무
말도 못하고 얼굴만 벌게져서 쩔쩔맸고, 나이가 조금 더 많은 동행은 겁난
얼굴로(그들도 겁낼 줄 알았다) 돈을 주고 해결하면 어떻게느냐고 나의 의사를
몰어왔다. 그러나 이미 돈으로 해결할 계제가 아니었다. 그랬다간 불나 데에
석유를 뿌리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내가 빌고 또
빌어서야 겨우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겨우 수습이 되어 그 자리를
빠져나오는데, 그녀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더러운 손으로 네 에미의
오망고나 만져라, 이 냄새나는 일본놈아!"
  그녀는 '오망고'라는 일본말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단어를 특히 힘주어
말했다. 다른 말은 알아듣지 못할 수도 있으니 그 말만이라도 알아들으라는
오기였들 터였다. 한편, 얼굴이 벌게져 "나 원 더러워서..." 소리만 하던 그가
멀리 빠져나온 뒤에 그 여자가 뭐라고 소리쳤느냐고 물었지만 나는 못 알아
들었다고 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만약 내가 그녀와 그녀의 주위
사람들에게 빌면서 핑계를 댔던 얘기를 그가 알아들었다면 놀라 자빠졌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말했었다. "우리는 일본 관광객들인데 이 사람은 머리가 좀
돌았다."
  일본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달리 어쩔 수 없었다. '꼬레앵'을 밝히고
싶지 않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 그렇게 말했다간 "꼬레가 어디에 붙어 있는
나라냐?"등의 질문이 이어질 수도 있어(아직 서울 올림픽을 하기
이전이었으므로 일반 사람들은 꼬레에 대하여 잘 모르고 있었다) 말이
길어지기를 피하기 위하여 순간적으로 나온 말이었다.
  이 웃고 넘길 수 없는 우화도 결국 사회환경의 차이에서 온것이라고 하겠다.
한국의 사회환경은 몸 파는 여자에게는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편견을 가질 수
있게 하는 데 반하여 프랑스의 사회환경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이 사회환경의 차이를 택시운전을 하면서 자주 느낄 수 있었다. 주로
밤에 일하기 때문에 취객을 태우게 되는 일이 많았다. 원래 술을 자주 마시되
과음을 하지 않는 프랑스인들이지만, 그 어느 취객도 추근거리는 사람은 없었다.
택시에 올라타면 오히려 더 얌전해지는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처럼,
취객들이 길에서 비틀거리며 걷는다거나 고성방가하는 사람을 보기가 힘들었다.
이것도 이들이 자라면서 그와같은 모습을 볼 수 없었던 사회환경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나의 택시 안에서, 술 마시고 견디지 못해 토한 사람이 꼭 세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아일랜드의 선원이었고, 한 사람은 영국 남자,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은 미국에서 온 젊은 여자였다. 모두 관광객으로 와서 들뜬 기분에 과음을
한 이유도 있겠지만 나의 주손님인 프랑스인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을 단순히
우연이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설득하는 사회와 강요하는 사회의 차이
  우리와 사회환경이 다르다는 것은 프랑스인들의 성격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의 성격 중에서 두드리진 특징의 하나는 뻔뻔스러울 정도로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는데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멈춘다는 데에 있다. 언뜻들으면 이율배반 같은 이들의 성격은 프랑스 사회의
똘레랑스를 이해해야 납득할 수 있다. 나는 다음과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다.

  프랑스에 온 지 얼마 안되고 아직 회사에 다니던 때의 일이었다. 영업사원인
베르뜨랑하고 몹시 다툰 적이 있었는데, 한국인 정서의 잣대로 보아 그가 너무
뻔뻔하게 자기 이익을 챙긴다고 느끼던 내가 참지 못하고 터뜨려 일어났다.
그는 보급 이외에 판매액에 따른 일정 퍼센트의 커미션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판단하기에 그의 몫이 될 수 없는 커미션을 집요하게 요구하는 것이었다.
한참을 다툰 뒤에 나는 속으로 '요 쥐새끼 같은 놈하고는 다시는 말도 나누지
않으리라'고 마음 먹었다. 이튿날 출근길에 이 친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인사를 하고 말을 거는 것이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할 수
없이 응수를 한 내 얼굴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있었고 또 속으로 '참으로
뻔뻔해도 너무 뻔뻔하고나'하는 생각을 했었다.

  사람들은 이 얘기를 듣고 동서양 사람들의 음적인 성격과 양적인 성격의
차이를 설명하려 할 것이다. 즉 서양사람들은 열려 있어 자기 주장과 권리를
그대로 밝히는 데 비하여 동양사람들은 겉으로는 잘 나타내지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 ㅇ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동양사람들이 자기 주장을 잘 못 펴는 것은
염치라는 것 때문에 프랑스에서 손해를 보기도 했다. '알아서 해주겠지'생각하고
나의 권리 주장을 않고 기다렸더니 프랑스인은 이를 '요구사항 없음'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서양인을 상대할 때는 분명하게 자기의
의사를 밝혀야지 그러지 않으면 손해보기 십상이다.
  그러나 여기까지의 설명으로 뻬르뜨랑과 내가 다툰 에피쏘드를 다 이해했다고
할 수 없다. 한가지 아주 중요한 점이 빠져 있다. 그것은 베르뜨랑은 그의
권리를 주장한 데 반해 나는 그의 주장을 반박한 것이 아니라, 그런 주장을
하는 그를 미워한 점이다. 그의 주장이 틀렸으면 그 주장을 반박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를 미워했다. 그는 나를 미워할 이유가 없었다.
그에게는 단지 그와 나의 생각이 서로 달랐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싸운 이튼날
그는 나에게 자연스럽게 평소처럼 대했고 나는 계속 앙심을 품고 있었다. 이
차이는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프랑스에선 이 주장과 저 주장이
싸우고 이 사상과 저 사상이 논쟁하는 데 비하여 한국에선 사람과 싸우고 또
서로 미워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프랑스인들은 다른 사람의 의견, 주의
주장 또는 사상을 알단 그의 것으로 존중하여 받아들인 다음, 논쟁을 통하여
설득하려고 노력하는데 비하여 우리는 나의 잣대로 상대를 보고 그 잣대에
상대를 보고 그 잣대에 어긋나면 바로 미워하고 증오한다. 이 글을 끝까지 읽는
독자는 곧 이해하게 되겠지만 그와 같은 독선적인 논리가 얼마나 위험한가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던 나 자신조차 그 함정에 빠져 베르뜨랑을 미워했던
것이다.
  우리에게 설득이란 단어는 있지만 우리 사회는 '설득하는 사회'가 아니다.
'강요하는 사회'다. 베르뜨랑과 나의 차이는 바로 여기서 온 것이다.
프아스인들은 이 차이를, '똘레랑스'가 있는 사회인가, 없는 사회인간의 차이로
구분하였다.
이렇게 또레랑스가 있는 사회에선, 즉 설듣하는 사회에선 남을 미워하지 않으며
축출하지 않으며 깔보지 않았다. 서로 치고받고 싸우지 않고 대신 까페에서
열심히 떠들었다. 말이 많고 말의 수사법을 중요시했다.
  또 강요가 통하지 않으므로 편견이 설 자리가 없었다. 택시운전사를
택시운전사로, 즉 그대로 인정했다. 이 말은 택시운전사인 내가 택시운전을
잘못할 때는 손님의 지청구를 들을 수 있으나 택시운전사라는 이유 때문에
업신여김을 당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내가 혹간 건방을 떠는 손님에게 오히려
공손하고 친절하게 대하면 그는 곧 수그러들었다. 더욱 기고 만장하여 나를
깔아뭉개려고 하지 않았다. 건방을 떨거나 추근대는 손님을 만난 한국의 택시
운전사가 오히려 속으로 '좋은게 좋다'하고 곱게 받아주거나 혹은 참고 넘어갈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한국의 택시운전사들은 아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다른 사회환경에 있었기에, 이방인인 나는 택시운전사의 이른바
'곤조'를 갖지 않을 수 있었고 손님에게 친절하자는 나의 다짐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손님에게 친절히한다고 하지만, 잠깐 동안 스칠 뿐이기에 대단한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손님이 불안하지 않도록 차를 부드럽게 몰고 승차거부를 하지
않으며, 나이든 사람이 타고 내릴 때 문을 열어주고 또 무거운 짐을 차도에서
집문 앞까지 옮겨주는 정도일 뿐이다. 그렇지만 이 조그마한 친절에도 손님들은
꽤 고마워하였다. 내가 나이든 사람이 타고 내릴 때 문을 열어주는 습관을 들인
것은, 한편 항상 앉아서 일해야 하는 자세에서 허리를 펼 수 있는 기회를 갖기
위한 까닭도 있었다. 특히 나이든 할머니가 타고 내릴 때는 서울에 계신 나의
할머니를 생각하여 더 신경을 썼다.

    7. 나도 승차거부를 했다.
    네 사람은 두 대의 택시를 타세요
  빠리의 택시운전사들도 승차거부를 한다. 그런데 그 양상은 서울 택시의
승차거부와 판이하게 다르다.
  빠리의 택시 규정에는 날짜시각표를 부착하고 있는 것 이외에 아주 특이한
것이 있다. 그것은 운전사의 옆자리, 즉 앞자리에는 운전사의 재량으로 손님을
안 태울 수 있다는 것이다. 손님이 네 명일 때 할 수 없이 옆자리에 태워주는
운전사도 있지만 아주 드문 경우이다. 이 규정은 흡사 빠리 택시운전사의 특권
같은 것이어서, 개인택시 운전사들은 거의 옆에 손님을 태우지 않고 아예
자기의 강아지를 태우고 다니는 사람이 있고, 젊은 운전사 중에는 저녁때나
밤에 자기 애인을 옆에 태워 데이트를 하면서 손님을 태우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한다. 즉 연애도 하면서 돈도 버는, 우리의 "임도 보고 뽕도 딴다."는
말에 그대로 맞아떨어지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운전사 옆자리에 안 태울 수 있다는 규정은 빠리의 택시 규정에 명문화되어
있고, 빠리지앵들은 이 관행을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이것은 유럽의
다른 도시는 물론 프랑스의 지방도시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빠리만의 아주
특이한 규정이고 관행이다. 나는 그 연유가 궁금하여 베떼랑 운전사에게
물어보았던.,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60년을 전후하여 택시강도 사건이 자주 일어나자,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아예
앞자리와 뒷자리를 막아버리고 앞자리에 손님을 태우지 않게 되었는데 지금의
관행은 그때의 전통이 남아 있기 때문일거요."
  그러나 그의 이 설명도 부족한 점이 있었다. 택시강도가 빠리에만 심하게
일어났다고 할 수 없을 것이며, 또 지금은 그와같은 사건이 거의 없어졌는데, 왜
유독 빠리에만 그 전통이 남아 있는가에 대하여는 충분한 대답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이 관행이, 네 사람의 일행에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또 세 사람의 손님을
뒷자리에 끼여앉게 함으로써(덩치 큰 손님들이 앞자리를 비워둔 채, 뒷자리에
셋이 비좁게 앉아야 하는 모습은 확실히 부자연스러웠다) 은근한 자기만족이나
심리적인 계층상승감을 느끼고 싶어하는, 택시운전사들의 집단의지로 표현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았었다.
그러나 이와같이 속물적인 이유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동료택시운전사들간의 연대감 때문이었다.
  빠리에는 서울과 달리 택시 손님이 많지 않다. 물론 출퇴근 시간이나 주말의
저녁때 이후에는 손님이 많고, 특히 금요일과 토요일의 밤 12시부터 3시까지는
시내에서 택시 잡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지하철 등의 대중교통수단이, 일부
야간 노선버스를 제외하곤 모두 끊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같은 시간대
이외에는 택시들이 남아돌아 택시정류장마다 빈 택시들로 메워진다. 공항이나
기차역의 택시정류장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샤를르 드 골 공항의
택시정류장에는 수백대의 택시들이 줄을 서, 원래 넓게 자리잡은 정류장이
모자라 도로까지 침범할 정도이다.
  이같은 빠리의 택시 상황을 이해하면, 네 사람의 일행에게 두 대의 택시를
이용하도록 유도하는 빠리 택시운전사들 사이의 집단적 연대감을 이해하게
된다. 네 사람을 태우면 5프랑의 추가요금이 있는데도 마다하는 것이다.
  손님이 많지 않은 시각에 에펠 탑 앞 같은 곳의 택시정류장에 7,8대의 빈
택시가 서 있을 때의 예를 들어보자. 흥미있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는데, 손님이
네 개의 손가락을 펼치는 모습과, 택시운전사가 두 개의 손가락을 펼치는
모습이 교차한다. 관광객들이 많은 곳이라 말이 통하지 않으므로 수화를 하는
것인데, 손님의 손짓은 일행이 넷이라는 말이고, 택시 운전사들의 두 개의
손가락 표시는 한국에서처럼 '따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택시 두 대를 타라는
말이다. 그래도 이 관광객들은, 네 사람이 타려면 운전사의 허락이 필요하다는
것을 미리 알았기 때문에 덜 민망한 편이다. 이 규정을 모르고 무턱대고 네
명이 올라탔다가는, 말도 잘 알아듣지 못한 채 쫓겨나게 되어 즐거운 관광
기분을 잡치게 된다. 나는 올라탔다가 그 이유도 모른 채 쫓겨나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일본인들을 가끔 볼 수 있었다. 퇴짜를 맞는 일행이 다음 택시에
접근해보았자, 또 손가락 두 개나 다음 택시에 가보라는 손짓을 할 것은 거의
확실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손님들에게는 안됐지만 동료들간의 연대가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택시정류장에 빈 택시가 많지 않건, 또 길을 가다
손님들이 세웠을 때는, 네 사람의 일행을 거부할 이유가 없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분 중에 빠리에 와서 일행이 네 분이 되고 택시를
이용해야 할 때, 앞의 일본인들과 같은 민망함을 피할 수 있는 요령을 알고
싶은 분이 있겠다. 물론 두 대를 타면 간단하지만, 남의 나라에서 공연히 돈을
허비할 필요는 없다. 그 요령은 택시정류장에 택시가 많을 경우, 절대로 앞차를
타려 하지 말고 아예 맨 뒤차부터 시도하라는 것이다. 훨씬 쉽게 탈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맨 앞 택시는 당신들이 아니라도 곧 손님을 태울 수 있기
때문에 거부할 여유가 있지만, 맨 뒤의 택시는 자기 차례까지 어라나 기다려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자기 욕심이 연대감을 이겨 못 이기는 체하고 태울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개인택시(날짜시각표가 파란 바탕)보다
임차택시(날짜시각표가 빨간 바탕)이면 더욱 쉽다. 개인택시보다 임차택시
운전사들이 연대감을 생각할 만큼 여유가 없기 때문이며, 이것은 개인택시
운전사들도 이미 겪은 일이기에 잘 알고 있어서 이해를 해주기도 한다.
  어쨌든 네 사람에 대한 승차거부가 빠리에서는 허용되는 일이지만,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관광객들이 이 때문에 기분을 잡치게 되고 또 빠리에 대한 인상을
흐리게 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다.

    수표 지불은 사절합니다
  승차 거부의 또다른 유형은, 요금을 현찰로 내지 않고 수표로 내겠다고 할
때인데, 대부분의 택시 운전사들은 이런 손님들을 태우지 않는다. 어떤 택시들은
아예 창문에 "이 택시는 수표를 받지 않습니다"라고 써붙여놓기도 한다. 그
이유는 많은 택시 운전사들이 수표를 받았다가 구좌에 잔금이 없어 되돌려 받은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받은 수표 중에서도 두 장이 되돌아왔다. 그
수표들의 액수는 택시 요금으로는 큰 액수였기 때문에 뒷맛이 아주 씁씁했다.
두 차례 손해를 보았지만, 수표를 내겠다는 손님을 물리칠 수 는 없었다. 특히
한밤중에 택시 정류장에서, 앞의 택시들한테 계속 딱지를 맞고 나한테까지
찾아온 손님들을 물리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얼마 동안이 지난
후에는, 수표로 지불하겠다고 미리 신고하는 손님들을 편한 마음으로 태울 수
있었는데, 그 까닭은 미리 신고한 손님들의 수표는 되돌아오지 않았고, 되돌아온
위의 수표 두 장은 아무 말 없이 올라탔다가 내릴 때 지불한 수표들이었기
때문이다.

    택시 타고 다른 나라에 간다
  또, 빠리 택시에서 규정상으로 승차 거부를 할 수 있는 경우로는, 손님이 빠리
교외의 바깥인 먼 교외나 지방으로 태워다 주길 요구할 때이다. 그러나 이때도
손님이 샤를르 드 골 공항에서 탔을 때는 거부할 수 없다. 샤를르 드 골 공항은
빠리에 속한다기보다는 프랑스의 관문이라는 의미로 파악하여, 손님이 원하는
곳이 빠리 지역이 아니라도 데려다 주어야 한다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먼 주행은 거부되지 않고 오히려 환영받는다. 왜냐하면 먼 주행일수록 한
번 주행에 요금이 많이 나오므로 싫어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어느 동료
운전사는, 빠리 공항 관제탑 요원의 파업으로 비행기가 뜨지 못했을 때,
벨기에의 브뤼셀까지 손님을 태웠다고 기뻐하였다. 택시 타고 딴 나라에 간다는
말이 한국 사람들에겐 기이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유럽에서는 가능한 일이다.
독일의 한 젊은이는 복권에 당첨되자, 바로 프랑스의 남쪽, 지중해 해안까지
택시를 타고 갔다는 얘기도 들은 적이 있다.

    맨 뒤의 택시를 타시오
  규정에도 어긋나며 자주 있는 승차 거부는 손님이 아주 가까운 곳에 가자고
할 때에 일어난다. 정류장엔 빈 택시가 많아 자기 차례가 오기까지 3, 40분을
기다렸는데, 손님이 20프랑 정도의 요금이 나올 짧은 거리를 가자고 할 때보다
더 괴로운 일은 없다. 이런 때, 거의 모든 운전사들이 맨 뒤의 택시를 타라고
하면서 승차 거부를 한다. 물론 규정 위반이지만 운전사들 사이에서는 서로
허용되고 있다. 나는 이와 같은 때는 운으로 돌리고 규정을 지키기로 했지만
어려운 일이었다.

    공항 택시 정류장의 정경
  그러나 나도 승차 거부를 했다. 샤를르 드 공항 같은 데서는 손님을 태우기
위하여 두세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게 보통이다. 그래서 손님을 태우고 공항에
갔다 가도 미련 없이 빈차로 빠리 시내로 돌아오는 때가 허다했다. 하지만 마침
출퇴근 시간이라 빠리로 돌아가는 길이 밀릴 때는 쉬기도 할 겸 공항 택시
정류장으로 들어가게 된다. 오래 기다려야 하지만, 그래도 손님을 태워 빠리
시내로 돌아오면 150-2백 프랑을 벌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개 운전사들은 기다리면서 신문을 보거나 환담을 나누는데, 일부
운전사들은 이 시간을 이용하여 노름을 하기도 한다. 카드로 놀이하는데 우리
나라의 갑오 잡기처럼 합계가 9나 19가 나오면 이기는 놀이였다. 주로 베트남
등의 인도차이나 쪽 사람들이 많았었고 젊은 프랑스인과 북아프리카인도 소수
끼여 있었다. 한 번 승부에 판돈을 백 프랑씩 놓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나도 잡기를 좋아한 편이어서 고스톱을 쳐보기도 했지만 그들은 정도가 너무
지나쳤다. 택시 운전을 하면서 어렵게 버는 돈을 저렇게 쉽게 잃거나 따게 되면,
결국 마약과 같이 되어 사람을 망치게 될 게 틀림없었다. 이미 그들은 제
차례가 되어도 손님을 태울 생각을 하지 않고 노름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이것은 공항에서 너무 오래 손님을 기다려야 하는 것 때문에 생겨난 병폐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두세 시간이나 기다려야 하는 택시 운전사의 사정을 알 리 없는
손님이 공항 바로 옆에 붙어 있는 호텔에 가자고 할 때는 나도 정말 당황했고
할 수 없이 승차 거부를 해야 했다. 내가 규정을 어기며 승차 거부를 한 유일
한 경우였는데 이런 손님에겐 모든 택시 운전사들이 승차 거부를 했다. 한 번은
흥미 있는 광경을 목격한 적이 있다. 승차 거부를 당한 손님과 택시 운전사
사이에 시비가 붙었는데 마침 지나가던 공항 경찰이 그들의 얘기를 듣더니
오히려 손님에게 "그 호텔에는 공항을 자주 왕복하는 호텔 버스가 있으니 그걸
이용하시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택시 운전사가 규정을 어긴 것은 사실이지만
손님을 태우기 위해 오랫동안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똘레랑스를 보였던 것이다.

    택시 손님이 경기의 척도
  빠리에는 실로 택시 손님이 많지 않았다. 고참 운전자들에 의하면, 옛날에
비하여 손님이 훨씬 줄었고, 따라서 수입도 훨씬 줄어들었다고 아우성이었다.
대중 교통 수단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잘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중 교통 수단이
잘된 탓이라고만 할 수도 없었다. 고참들은 불경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떤 이는
택시의 손님이 많고 적고가 경기가 좋은지 나쁜지를 알 수 있는 척도인데
손님이 없는 것을 보니 불경기가 틀림없다고 했다. 그만큼 손님이 적다는
말이었다. 택시 정류장에서 서로 만나면, 첫인사가 손님이 없다는 뜻인
"깔므"(calme, 조용하다)로 시작되곤 하였다.
  특히 7월 하순에서 8월말까지 바캉스 철이 되면 손님은 더 줄어든다. 택시를
이용할 만한 손님들이 모두 바캉스를 떠나 빠리를 비웠기 때문이나. 그 대신에
관광객들이 빠리를 채우지만 버스 등을 이용하는 단체 여행객이 많고, 또
개인별로 온 사람들도 일본 사람을 제외하곤 택시를 이용하는 율이 많지
않았다. 남들이 즐거워하는 바캉스 철이 나 같은 임차 운전자들에게는 가장
넘기기 어려운 시기였다. 일을 시작한 지 두세 시간이 지나도록 손님을 겨우
한두 번 태워 50프랑도 올리지 못했을 때는 정말 울고 싶을 때도 있었다. 이럴
때는 급한 마음에 샌님을 찾아 온 시내를 헤매 다니기도 하는데, 그것은 한편
택시 정류장마다 온통 빈 택시로 꽉차 있어 마땅히 기다릴 정류장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렇게 돌아다니다가 결국 찾아가게 되는 곳은 기차역의 택시
정류장이다. 아무리 앞에 빈 택시가 많이 있어도 기차 한 대만 들어오면 태울
수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다만 기차가 언제 들어오느냐가 문제다. 그래서
어떤 택시 운전사들은 기차 시간표를 갖고 다니기도 한다. 나도 그럴까 했지만,
연착하는 기차가 많이 있어서 별로 신통할 것 같지 않아 그만두었다. 그 대신
기차역 택시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기차의 도착 예정 시간 안내판을
쳐다보곤 했다. 공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공항의 택시 정류장에 도착하여
택시를 세운 뒤, 모든 운전사들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공항 청사로 뛰어들어가
비행기 도착 시간표를 보는 일이다. 시간표에 나와 있는 도착 비행기의 숫자와,
자기 앞의 빈 택시를 비교하여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를 가늠한다. 우연히
도착 비행기가 많고, 또 우연히 앞에 빈 택시가 많지 않아서, 한 30분 정도를
기다려 손님을 태우면 대단히 운이 좋은 경우이다. 나에게는 공항에서 바로
손님을 태울 수 있었던 행운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 경험은 빠리 택시
운전사에게는 대단한 쎈세이션이다. 반면에 기차역에서는 바로 손님을 태울
ㄸ가 적지 않았다.

    여섯 개의 기차역: 임차 택시 운전사의 목숨줄
  빠리에는 기차역이 여섯 개가 있는데 모두 종착역이다. 이 말은 기차를 탄 채
그대로 빠리를 지나갈 수 없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각 방향별로 종착역이 각기
따로 있어서, 노르망디 지방으로 가려면 쌩 라자르 역에서 타야 하고, 브르따뉴
지방으로 가려면 몽빠르나쓰 역에서, 또 보르도 지방과 스페인 쪽으로 가려면
오스떼를리츠 역에서, 그리고 영국이나 독일 중부 이북은 북역에서 타야 하며,
독일 중부 이남은 동역에서 탄다. 작은 나라 스위스를 가려 해도 쮜리히는
동역에서, 주네브는 리용 역에서 타야 한다. 이딸리아도 리용 역이다.
  이처럼 각 방향별로 타는 역이 다르기 때문에, 빠리에 처음 온 사람들이
당황하게 되는 일이 자주 있다. 빠리가 프랑스의 중심이며, 유럽의 중심이라는
주장을 대변하는 듯한 이러한 기차역의 구조는, 택시 운전사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손님의 원천이 되며 특히 바캉스 철에는 임차 택시 운전사들의 목숨
줄과도 같다. 왜냐하면 기차로 여행하는 사람들은 거의 여행 가방을 갖고
있어서 택시를 이용하는 율이 많으며 기차를 갈아타야 할 사람들도 적지 않은데
내린 역에서 탈 역으로 갈 때 여행짐 때문에 지하철을 타지 못하고 택시를
이용하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바캉스 철이 거의 끝나는 8월 하순의 어느
토요일 두 시간 동안을 계속 역에서 역으로만 다닌 적이 있었다. 그만큼 빠리의
택시 운전사에게 가장 많은 손님 층을 제공하는 곳이 기차역이다. 
  이 기차역에서 나는 프랑스 인들이 얼마나 차례를 잘 지키는지 볼 수 있었다.
손님도 많고 택시도 많은 때가 있다. 그런데 택시 승차구역은 넓지 않아서 겨우
서너 대가 설 수 있을 뿐이다. 손님들은 모두 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일일이
짐을 트렁크에 집어넣어야 하니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리고 일행이 네 사람인
손님이 제 차례에 타지 못하고 택시마다 물어보니, 좁은 승차장은 혼잡을
이루게 되고, 택시도 손님도 꽤 오래 기다리게 되는 불편함이 있다. 어떤 손님은
택시가 계속 있었는데도 30분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고 푸념하기도 했다. 그래도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데 철저하여, 줄에서 튀어나오는 사람도 있을 터였다.
어찌 보면 융통성이 전혀 없는 바보들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인데, 실은
여유있는 생활의 습관에서 온 것이었고 또 혼잡 속에서 더 큰 혼잡을
방지하여는 공중의 지혜에서 온 것이었다. 이런 때에 필요한 사람이 바로
경찰관이다. 경찰은 택시의 승차구역을 넒혀주고 차례에 따라 손님에게 탈
택시를 지정해주어 승차에 걸리는 시간을 훨씬 줄여주어 손님도 좋아하고
택시운전사도 좋아한다. 어떤때는 경찰관이 손님대신에 네 사람의 일행을
태워줄 택시운전사가 없느냐고 큰 소리로 찾기도 한다. 이때에도 경찰관은 아무
운전사에게 네 사람을 태우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나는 열심히 그들 네 사람의
일행을 태웠다.

    빠리 택시운전사의 소견
  이렇게, 빠리 택시의 양상은 서울의 그것과 여러 가지로 다르다. 각 도시의
택시의 양상은, 결국 그 도시 각각의 손님과 택시 사이의 수여공급관계 그리고
택시운전사가 그 사회에서 갖는 사회경제적 조건에 의해서 규정된다고 할 수
이싸. 그중에서 대중교통수단이 어떤가에 따라 많은 차이를 나타내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의 택시운전사들의 합승을 한다고 욕을 먹어야 하는 것도 운전사의
자질이 모자라기보다는 합승을 가능하게 만든 손님들의 요구 때문이며,
따블이나 따따블의 요금을 요구하게 되고 도는 무리하게 운전을 해야 하는 것도
실은 그만큼 수요가 많다는 것과 함께 그렇게 일해 벌지 않으면 운전사들이
기본적인 생활을 할 수 없게 되어 있는 사회경제적 조건 때문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택시운전사들이 처한 사회경제적 조건은 무시하고, 흔히 그러듯 그들을
자질론이나 도의론으로 매도하는 것은 앞과 뒤를 가리지 못한 온당하지 않은
주장이다. 그리고 이런 주장은 한편, 택시운전사들의 열악한 사회경제적 조건을
감추려는 노력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빠리 택시운전사들의 자질이 높아서가
아니라 그만큼 수요가 없기 때문이다. 무리한 운전을 할 필요도 없다. 쉬어가며
일해도 기본 생활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빠리 택시는 총 만 5천 대를 넘지 않는다. 그중에 60프로 정도가 개인
택시이고 나머지가 회사 택시이다. 빠리 택시가 일하는 구역은 빠리와 가까운
위성도시인데, 이 구역의 인구는 모두 5백만이 넘는다. 따라서 택시손님이 될 수
있는 가능 인구는 이 5백만에 관광객을 합쳐야 한다. 따라서 이들의 택시
수요는 만 5천 대로 소화하고도 남는 실정이다. 뿐만아니라 만 5천 대의 숫자도
하루에 열 시간이나 열한 시간을 운행하기 때문에 하루에 스무 시간씩 뛰는
서울의 교대 택시로 환산하면 총 8천 대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로써 서울과
빠리의 택시 수요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있다. 이 차이를
다만 '마이 카'로만 설명할 수 없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편하고 또 느리지도
않은' 대중교통수단에서 찾아야 한다. 빠리의 멋쟁이들도 랑데부(만날 약속)에
정확히 닿기 위하여 '마이 카'를 타지않고 지하철을 자주 이용한다.
  빠리에서 택시운전을 해본 사람의 소견이겠지만, 서울의 택시운행의 난맥상을
시정하기 위하여는 우선 대중교통수단을 확충하고, 그리고 택시요금을 대폭
인상하여 운전사의 처우를 개선시켜야 한다고 믿는다.
  
    8 씰비와 실비
    파란 눈의 씰비와 실비
  "무슈 옹그,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내가 전화했을 때, 씰비는 무척 반가워했다. 나는 그녀를 쌩 미셸 광장 옆에
있는 쌩 땅드레 까페로 불러냈다. 그녀는 바캉스에 다녀와 검붉게 그을린
얼굴로 환하게 웃으며 나타났다. 약간 금발인 머리칼을 헝겊고무줄로 하나로
묶고 목 뒤로 늘어뜨렸다. 가느다란 목이 아주 싱그러웠다.
  "정말 어떻게 된 거예요? 나는 무슈 옹그가 프랑스 땅에서 영영 사라진 줄
알았잖아요."
  인사를 마치자, 그녀는 조그마한 얼굴에 비해 커다랗고 파란 눈을 더크게
뜨고 전화 받을 때와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에는 오랫동안 연락을 하지
않은 나에 대한 힐난의 뉘앙스도 들어 있었다.
  그녀를 만난 지 반년도 더 지났다. 궁금해할 그녀에게 연락을 한다면서
시간도 없었고 또 초보운전사의 긴장도 풀리지 않아 미적미적 미루다가
그녀에게 연락했을 땐, 그녀는 바캉스를 떠나 빠리에 없었다.
  나는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그녀에게 더 일찍 연락하지 않았던
진정한 이유는 다른 데에 있었다. 나의 실제의 모습을 그녀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그 동안 그녀를 만나 사귀면서 그녀가 망명자인 나에
대하여 호기심 이상의 어떤 환상을 갖고 있지 않은가 하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공부도 계속하지 못하고 결국 택시운전을 하게 되었다는 적나라한 내
모습을 그녀에게 보인다면 그 환상을 깨뜨린 것 같아, 그것이 싫었던 것이다.
그것은 틀림없는 허위의식이어다. 나는 그 허위의식을 벗어던져야 한다고 나
자신에게 명령하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택시운전을 막 시작했을 때는 그
실행이 어려웠는데, 확정면허를 받고 택시운전에 어느정도 자신이 붙게 되자
떳떳하게 밝힐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결국 택시운전은 나에게 또 하나의
허물을 벗을 수 있도록 해준 셈이었다.
  "그래 바캉스는 잘 보냈소?"
  "위, 아주 잘 보냈어요, 오뜨 싸부아에 계신 부모님한테도 갔었고 친구들하고
스페인에 다녀왔는데 재미있었어요, 어때요, 잘 태웠지요?"
  그녀의 즐거운 표정으로 나는 해야 할 얘기를 바로 꺼낼 수가 없었다. 내가
꾸물거리자, 그녀가 다시 스페인에 다녀온 얘기를 열심히 떠들었는데 내 귀엔
잘 들어오지 않았다.
  알프스 밑 구릉지대에서 낙농을 하는 부모 밑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그녀는
대학 진학을 위해 빠리로 올라왔다. 그녀는 키가 크지 않았고 몸도 마른
편이어서 다니엘 에므르 교수가 처음 소개시켜주었던 끌레르(끌레르에겐 이미
체격으로 압도당한다는 느낌이 들었었다)와 정반대였고 또 무뚝뚝한 끌레르와
달리 항상 밝고 쾌활했다. 특히 나이에 비해 티가 없고 붙임성이 있었다. 나의
성격과 대조적이었는데 오히려 그래서 대화가 가능했을 것이다.
  나는 그녀의 젊음을 부러워했다. 특히 그 젊음이 의식의 나래를 마음껏 펼 수
있다는 것이 한껏 부러웠다. 이들에겐 의식에도 행동반경에도 그 어떤 제약이
없었다.
  나는 그녀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녀의 나이는 내 나이 보다 열세살이나
어렸다. 내가 그 얘기를 했을 때, 그녀는 믿으려 하지 않았다. 우리가
유럽인들의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인들도
아시아인들의 나이를 잘 알아맞히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프랑스인들은
아시아인들의 나이를 실제보다 적게 보았는데 프랑스인들의 나이는 실제보다 더
들어 보였다. 다니엘 애므르 교수는 10년이나 더 적게 보았을 정도였고,
쎄미나실에서 만난 다른 젊은 프랑스 학생들도 나를 나이 많은 노장으로 보지
않았는데,. 나는 그것이 싫지 않았다.
씰비느 다니엘 에므리 교수를 통해 소개를 받은 후 까페에서 처음으로
마주앉았을 때, 내가 꼬레엥 망명자라고 하자, 약간 긴장하는 표정을 지었었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어느쪽에서 왔느냐고 물었다. "남쪽에서 왔다고 하자, 잠깐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곧 흔쾌히 말을 붙여왔다. 그날의 대화에서 이미 그녀는
나에 대하여 일종의 동류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했다.
  씰비와 나는 이미 많은 대화를 가졌다. 그녀와의 대화는 내가 그녀에게
교정을 부탁했던 논문 요약서를 그녀가 잘 이해할 수 없어 나의 설명이 필요한
데서 시작되었다. 나의 프랑스말은 엉터리고, 특히 문장의 형식과 논리의 전개가
순우리말 식이어서 그녀가 정확하게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았다. 그녀는 나의
엉터리문장을 불만없이 고쳐주고 또 다듬어 주었다.
  내가 준비하려던 논문 제목이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1980년 광주'였으므로
우리들이 나눈 주제도 자연 한국의 현대정치사에 관한 것이었다. 따라서
중국현대사를 전공하고 박사준비과정(DEA)에 있었던 그녀는 한국의 현대사에
대하여도 꽤 알게 된 셈이었다.
  대화 도중에 씰비는 한국의 인권상황, 특히 20대에 시작하여 60대 노인이
되도록 감옥에 남아 있는 장기수에 대한 얘기를 듣고는 압쉬르드(absurde,
부조리한, 터무니없는)와 에뿌방따블(epouvantable, 무시무시한)이란 말을 거듭
반복하면서 흥분하였다. 프랑스에선 살인범도 실제 수형기는 15년을 넘기지
않는다고 하면서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우질 못했다. 그녀는 거의 화를 낼
듯이 나에게 덤벼들면서 이렇게 항변하였었다.
  "당신들은 사람들도 아니네요... 당신 나라의 야당은 그럼 무엇을 하나요?
교회는? 노동조합은? 그리고 지식인들과 학생들은 그럼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나요?"
  그녀는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는 밀리땅( militant, 활동가)은 적은데 디리장(
dirigeant, 지도자)은 많은 것이 아닌가요?"
  그녀는 "한국의 터무니없는 정치현실에 대항하는 민주화운동은 기초는 아직
약한 데 비하여, 운동노선에 대한 이론투쟁은 활발한 것 같다"고 지적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나의 논문 요약서를 읽고 난 그녀의 첫 코멘트였다.
  우리는 한국의 정치현실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사상과 전통, 특히 불교, 도교
그리고 유교의 전통 등에 대하서도 대화를 나누었다. 이른바 네 마리의 용(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에 대한 얘기가 나왔을 때였다. 씰비가 이런 질문을
했었다.
  "남미의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가 성장정책을 먼저 시작했고 또 어느정도
궤도에 진입했다가 빚더미에 올라앉아 곤두박질했던 것에 비하여 네 마리의
용이 경제적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잖아요? 무슈 옹그도 그것마저
부정할 수 없을 거예요. 나는 어떤 교수에게서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남미엔 들어간 자본도 많았지만 바깥으로 특히 미국으로 역수출된 자본이 더
많았던 데 반해, 네 마리의 용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었어요. 네 마리의 용은
축적된 자본이 그대로 머물러 있었기에 도약이 가능했다는 주장이었지요.
그런데 그 이유를 그 교수는 유교전통에서 찾고 있었어요. 그런데 나도 더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네 마리의 용이 모두 유교문화권인 것은 사실이잖아요,
무슈 옹그는 어떻게 생각해요?"
  중국현대사를 전공하는 그녀가 유교전통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나는 이미 다른 프랑스인이 그녀와 비슷한 얘기를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나는 그 프랑스인에게 했던 말을 반복했다.
  "글쎄, 그렇게 이해하는 것은 한편은 맞지만 다른 한편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네 마리의 용이 경제적인 도약을 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사실이오.
그런데  그 이유를 아시아인들의 근면성과 높은 교육열에서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나 유고적 전통과 관련시켜 자본의 유출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하는데는 나는 동의하지 않소. 축적된 자본이 남미와 달리 흘러나가지 않은
것은 맞아요. 그런데 그 이유는 다른 데에 있을 거요. 특히 한국의 경우, 우선
부동산 투기라는 최대의 이익을 주는 투자처가 있었다는 거지요. 그 때문에
빈부의 격차는 더 심화되었고,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외국에 자본을
유출시키기엔 아직 문화적 구속력이 컸던 탓이오."
  "그 문화적 구속력이 유교의 전통과 관계없나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한국에서 유고의 전통적 가치는 그 껍데기는
남아 있을지 몰라도 그 내용은 이미 허물어졌다고 봐야 하니까. 내가 말한
문화적 구속력은 삶의 방식과 언어의 차이를 말하는 거요. 남미의 자본과 부는
삶의 방식과 언어의 차이가 크지 않아 큰 장벽이 없는 미국 같은 나라에
투자하고 또 부를 즐길수 있지만 한국의 자본과 부는 아직 그럴 능력도 또
의사도 없었던 거요. 그렇지 않다면 분단된 나라에서 항상 위기의식을 강조하는
그들의 이율배반을 이해하기 힘들어요. 앞으로 그 문화적 구속력이 엷어지면
자본과 부가 열심히 밖으로 빠져나가게 되겠지만 아직은 이른 것 같소. 그리고
그들한테 아직 그럴 의사가 없다고 말한 것은 한국처럼 돈이 숭상되는 나라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돈을 숭상하는 건 프랑스인도 마찬가지예요. 로또(LOTO)같은 복권이나
경마를 많이 하는 것도 그 때문이지요."
  씰비가 배시시 웃었다.
  "그래요. 프랑인도 돈을 무척 숭상해요. 그런데 우리는 돈도 숭상하고 돈 많은
사람도 숭상해요. 그게 바로 우리의 옛 전통하고 크게 달라진 것이지요."
  "그것도 마찬가지예요. 프랑스인들도 겉으론 태연한 척하지만 실은 돈 많은
사람들을 무척 부러워하거든요."
  "그래도 프랑스엔 사회적 연대라는 가치가 있기 때문에 한국과 다르오. 한국은
가족간의 우애라든가 이웃간의 정, 윗세대에 대한 존경 등의 전통가치는
허물어지고 있는데 사회연대라는 가치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어요. 그 비어 있는
가치관에 돈이 자리를 차지했고 또 헤게모니를 쥐게 된 거라고 나는 생각해요."
"..."
  씰비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내가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에게는 넓은 마음들 그리고 큰 그릇들이 있었던 것 같소. 멋과 운치가
있었고 또 여유와 유머도 있었소. 가난해도 마음까지 가난하진 않았고 그리고
깨끗했소. 지금은 그런 것들이 거의 사라졌고 또 어딘가 남아있다 해도 대세에
밀려 보이지 않게 도었지요. 사람들은 항상 손해보고 있다는 의심과 불안에
사로잡히기 시작했어요."
  "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해요? 혹시 자본주의를 말하고 싶은 건가요?"
  "그보다는 우선 분단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분단은 우리들에게 섬보다도 더
지독한 섬을 강요했소. 반쪽의 이념으로 사고의 영역이 제한되었을 뿐만아니라
실제 땅덩어리도 섬보다도 더 폐쇠되었기 때문에 대륙적인 기질을 잃어버리고
왜소해진게 아닌가 싶소. 우리는 섬나라 일본 사람들에게 섬나라 사람 근성이니
하며 왜소함을 지적하기도 했는데 지금의 한국은 일본보다 더 심한 섬나라라고
해야 할 거요. 사고의 영역으로도 또 실제 움직일 수 있는 땅의 영역으로도
말이오. 그러니 우리의 인성이 자연 왜소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 거지요. 그 위에 지금 씰비가 지적한 자본주의의 영향도 있었을
거요. 씰비는 제로썸( zero sum )이론에 대하여 들은 적이 있어요?" 
  "제로썸요? 잘 모르겠는데요."
  "미국의 어느 경제학자의 주장인데 경제의 합계는 항상 제로(영)이기 때문에
부자가 있으면 가난한 사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소. 그래서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선 구조적으로 가난을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가 봐요."
  "그건 당연한 얘기인 것같이 들리네요. 하지만 너무 단순한 논리가 아닌가요?"
  "글세, 나도 잘은 모르오. 그런데 내가 이 제로법 이론에 주목했던 이유는
다른 데에 있소. 자본의 논리 또는 소유의 논리의 매커니즘에 길들여진
인간들이 이젠 마음 씀씀이조차 그렇게 되었다는 거지요. 우리들은 이제
인간관계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마움을 주는 것조차 아주 인색해졌다는 얘기요.
주는 것은 곧 마이나스이니까 손해보는 것, 더 나아가 패배하는 것이라고
인식하여 되도록 주진 않고 마냥 받으려고만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원래
인간의 마음이란 샘과 같아서 주면 줄수록 더욱 충만해지고 깊어지고 또
넓어지는 것이라고 믿소."
  씰비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내 말을 들었다. 씰비와 만나면 나는 평소와
달리 말이 많아졌다. 말친구로 시작된 우리는 대화를 통하여 점점 가까워졌고
이윽고 말친구로 멈출 수 없는 단계에 이르고 있었다.

  나는 드리어 내가 해야 할 첫 번째 말을 꺼냈다.
  그녀는 우선 내가 교정할 논문을 가지고 나오지 않은 것에 무척 안심하는
눈치였다. 내가 불러냈을 때 그 일을 부탁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걱정했었는데,
그녀 자신의 논문 때문에 바쁜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가 완전히
포기한 것이라고 말하자, 서운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후회하지 않겠느냐는
그녀의 질문에 나는 이렇게 품고 있었던 생각을 전했다.
  "난 능력도 부족하겠지만 처음부터 꼭 학위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갖고 있진
않았어요. 물론 아쉬움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후회는 하지 않을 거요. 내가
학위를 받는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나 자신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일 뿐이니까. 그리고 또 그 아쉬움조차 날려버릴 수 있는 것은 프랑스의
대학사회를 조금이라도 볼 수 있었다는 데에 있어요. 나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소. 나는 다니엘 에므리 교수를, 그리고 당신들을 만나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을 큰 축복이었다고 생각해요. 나는 한국에 있을 때 그리고 여기에
있으면서도 외국 대학에서 공부한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 하는 일종의 환상을
가지고 있었소. 그 환상을 지워버릴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나의 짧은 경험은
충분한 가치가 있었는데, 그뿐만 아니라 당신들은 나에게 충격을 주었어요. 아주
즐거운 말이오."
  내 말은 진실이었다.
  나는 프랑스의 '대학사회'를 잠깐 보고도 확인한 것이 있다. 그것은 내가 이
대학사회를 동숭동 문리대 시절에 이미 경험했었다는 사실이다. 강의실에서
교수들의 강의를 통해서가 아니라 학생 총회가 있던 교정에서, 농성장이던
본4강의실에서 연극회에서 탈춤반에서 그리고 써클활동을 통하여 이미 경험한
일이었다. 그 경험들은 사회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이었는데 그와같은
문제의식이 프랑스에선 바로 대학의 출발점이었고 또 본질이라는 것을 확인했던
것이다. 물론 모든 대학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내가 직접 본 빠리
제7대학 역사학부의 동남아시아과에선 그랬다. 이 빌견은 나에게 아주 즐거운
확인이었고 또 적어도 즐거운 충격이었다.
  서울의 대학시절, 이른바 국제정치학을 전공한다는 외교학과 학생이던 내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하여, 현대 중국과 모택동에 대하여, 필리핀의 후크에
대하여 그리고 베트남전쟁에 대하여 또는 제3세계의 종속에 대하여 알게 된
것은 교수들의 강의를 통해서가 아니다. 문제의식을 갖고 선후배 학생들과 나눈
대화에서, 써클활동을 통해서 그리고 책을 읽어 알게 된 것이다. 내가 당시
리영희 선생의 글을 대하고 충격을 받고 또 빠져들었던 사실은, 내가
외교학과에선 무슨 강의를 들었어야 했는지를 거꾸로 분명하게 말해준다 할 수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문제의식이 있고 없고의 차이였다. 그런데 빠리
제7대학의 쎄미나에선 바로 그 문제의식의 불꽃이 튀고 있었다.
  그중에서 필리핀 공산당의 지도자인 호세 미리아 시손을 보게 되었던 것은
특이한 일이기도 했다. 그는 필리핀에서 아키노가 대통령이 된 뒤에 긴 영어의
몸에서 풀려나 유럽에도 오게 되었고, 바로 우리 쎄미나에 초청되어 주제발표를
했다. 영어로 말한 주제발표 후에 그는 쎄미나 참석자들로부터 질문공세와 함께
가차없는 비판을 받았다. 주된 비판은 그가 제시한 대안이 모택동 이론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데에 있었다.
  그가 우리 쎄미나에 참석하여 발표하고 또 비판받았다는 것에 내가 각별히
관심을 갖게 된 데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었다. 나는 동숭동 문리대의 한
써클룸에서 밤을 세워 김지하 시인과 대화를 가진 적이 있었다. 그때 김지하
선배는 필리핀의 후크와 막사이사이에 관계된, 나중에 내가 모택동의 이른바
'물과 물고기론'으로 알게 되는 에피쏘드를 얘기했었다. 그 얘기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필리핀이 이차대전중에 일본에 점령되었던 동안 가장 중요한 항일무장 투쟁
세력이던 후크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다시 밀림의 게릴라가 되어야했다.
왜냐하면 전후 필리핀에는 미국의 영향 아래 부일 세력과 연합한 우파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고, 특히 중국에 공산당 정권이 들어선 뒤엔 반공노선을 강화하여
후크를 불법화시켰기 때문이다. 당시의 후크가 모택동의 사상을 따르고 있었던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마을사람들로부터 양식을 제공받는
등의 도움을 받으면 그 대가를 꼭 지불했고 그것이 불가능할 땐 마을에
공동우물을 파주든지 하는 등의 노력봉사를 하고 나서야 마을을 떠나곤 했다.
필리핀의 경찰이나 정부군의 이 마을 사람들을 후크에 부역한 자들이라하여
박해했는데 그 박해가 심해질수록 후크의 영향력은 더 커질 뿐이었다. 그럴
즈음에 막사이사이가 국방장관이 되었다. 그는 나중에 대통령이 되었으나
불의의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 그는 후크가 파주었던 공동우물을 부수거나
마을사람들을 박해하는 대신에 그 공동우물이 비를 맞지 않게 우물지붕을
만들어주는 등의 정책을 폈다. 모택동의 '물과 물고기 이론'을 역으로 적용했던
막사아사이에 의하여 후크는 약화되었고 드디어 1954년에 투항하였다.

  이 얘기는 당시의 나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고 지금까지도 잊지않고
있는데 바로 그 후크의 다음 세대의 대표자를 빠리의 쎄미나에서 보게 되었던
것이다. 필리핀의 역사도 그대로 반복되는지 그 뒤 마르코스 등의 부패 및
장기집권이 있게 되자, 과거의 후크는 신인민군으로 되살아났는데, 그 이념적
배경인 필리핀 공산당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이 바로 호제 마리아 사손이었다.
나는 그 쎄미나가 끝난 뒤에 학교 앞 까페에서 씰비와 마주앉아 이렇게
물었었다.
  "씰비, 당신들은 왜 그렇게 잔인했소? 그렇게까지 호세 마리아 시손을
몰아세워야 했을까?"
  "그건 잔인한 게 아니에요. 그건 프랑스 좌익 지식인들의 자아비판의
연장이었지요. 프랑스의 지식인들은 68년 5월의 실패와 또 중국의 문화혁명이
부정적인 여파만 남기고 실패로 끝났을 때 그리고 캄보디아에서 폴 포트의
대학살이 있은 뒤 모택동에게서 등을 돌렸어요. 그런데 호세 마리아 시손은
아직도 모택동 이론에 머물러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지요."
  "그렇게까지 모택동 이론이 대안이 될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소?"
  "연구자들이, 특히 68세대들이 나중에 열심히 분석한 바에 따르면 중국에는
유럽에선 볼 수 없는 관료주의의 뿌리가 아주 깊다는 것이었어요. 무슈 옹그는
연안에 이미 삼색 오식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삼색 오식?"
  "그래요. 세 가지 복장과 다섯 가지 식사의 구분이에요. '너는 이 복장을 하고
너는 이 식사를 해라'하고 정한 것이었지요. 이미 연안에서 말이에요. 그리고
장정도 마찬가지였어요. 장정에 참여했던 사람과 참여하지 않았던 사람들
사이엔 이미 계급이 달랐지요. 당시 그와같은 관료주의를 비판한 글을 쓴
사람이 이미 계급이 달랐지요. 당시 그와같은 관료주의를 비판한 글을 쓴
사람이 있었는데 곧 쫓겨났어요. 그는 당시 '해방'지의 편집장으로 철저한
맑스주의자였대요. 연안 정권에 이미 관료주의의 뿌리는 깊었고 그 관료주의에
편승한 쁘로피뙤르(profiteur, 이익 profit을 취하는 사람)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것에 반대하면 숙청되었구요."
  나는 그녀의 얘기를 들으며 님 웨일즈의 '아리랑'에 나오는 김산을 떠올렸다.
그는 왜 처형되었을까? 나중에 복권이 되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씰비가
말을 계속했다. 그녀는 자기 전공과 관계되는 주제에 신이 났다.
  "중국의 농업 문제도 그렇지요. 중국처럼 농토에 비해 인구가 많은 나라에서
농업생산을 집단화한다는 것도 관료주의적 발상이었어요. 적은 농토에서 최대의
생산량을 얻기 위해선 농민들의 자발성과 창조성이 가장 중요한데 집단화는
오히려 그것을 막았지요."
  씰비의 말을 듣다 보니 내가 읽은 글 중에서 기억나는 것이 있었다.
  농업은 우주적인 것이다. 땅과 사람과 하늘이 삼위일체가 되어야한다. 농부는
건 듯 부는 바람 한자락도 예사로 보지 않는다.
  나는 씰비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날 씰비는 현대 중국에 대하여 많은 얘기를 했다. 오랫동안 대화르 나눈 뒤,
씰비가 배고프다고하여 우리는 13구에 있는 중국 거리의 식당으로
넴(월남춘권)과 국수 한 그릇씩 먹으러 갔다.
  이곳에서 '넴'이라고 불리는 월남 춘권은 야채와 고기를 잘게 저민 것을
쌀가루로 얇게 만든 피로 돌돌 말아 기름에 튀긴, 우리의 만두 비슷한 음식인데
거의 모든 프랑스인들이 좋아하였다. 프랑스인들이 중국집에서
전식(에피타이저)으로 찾는 것이 으레 이 월남 춘권이기 때문에 빠리에 있는
중국집치고 이 월남 춘권을 취급하지 않는 집이 거의 없었다. 씰비도 예외가
아니어서 월남 춘권을 몹시 좋아했는데 그날 갑자기 그녀를 곯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이런 말을 꺼냈다.
  "씰비도 옛 식민지에 대한 향수를 즐기는군."
  "그게 무슨 말이에요?"
  "지금 씰비가 넴을 맛있게 먹고 있는 모습이 나에겐 식민 모국인들이
식민지를 즐기는 것처럼 보이는데."
  "뭐라구요?"
  그녀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그녀가 가장 듣기 싫어할 소리 중의 하나였다.
나는 짓궂게 밀고 나갔다.
  "예를 들어서 말이오, 프랑스가 식민지 베트남을 착취하던 모습을 한컷의
그림으로 표현한다고 할 때, 씰비가 그 넴을 먹고 있는 모습을 그려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 넴을 베트남 지도처럼 조금 더 길고 틀어지게 그리고 말이오."
  역시 내 말은 너무 지나쳤다. 결국 그녀는 넴을 다 먹지 못하고 포크를
내려놓았고 나는 거듭 사과해야만 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은 그 넴
사건이 있은 뒤 우리 사이가 오히려 더 가까워졌다는 사실이었다. 그 며칠 뒤
우산을 같이 쓰고 걷게 되었을 때, 그녀가 자연스럽게 내 팔짱을 끼었다. 나는
흠칫했으나 맥박이 뛰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리는 듯했다.
  그러나 그 뒤로 나는 그녀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다. 그녀를 좋아하고 또
그녀도 나를 좋아하길 꿈속처럼 기대하였는데 실제로 그 상황에 이르렀다고
느낀 순간, 가슴엔 꽉차오르는 기쁨이 있었지만 다른 한편 그녀의 당돌함에
당황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그녀의 애정을 받을 처지도 아니었고 또 감당할
자신도 없었다. 나를 쳐다보는 그녀의 파란 눈이 더욱 반짝거릴 때, 나는 그
눈길을 피했다. 그리고 우리가 채워선 안되는 그 빈곳을 지적인 대화와
토론으로 채울 수 있고 또 채워야 한다는 듯이 행동했고 떠들었다. 내가
그녀에게 끝내 뛰뚜아예(친하고 가까운 사이에 쓰인다)를 하지 않고
부주아예(존칭이며 가깝지 않은 사이에 쓰인다)르 써야 했던 까닭도 거기에
있었다. 어느 날 얘기를 나누다가 자연스럽게 뛰뚜아예를 하게 되었는데 그
다음에 만나선 일부러 부주아예로 시작하였다. 그녀도 그 의미를 받아들이고
같이 부주아예르 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만날 땐 서먹서먹하고 헤어질 땐 서로
아쉬워했다. 그러다가 택시운전을 하게 되었고, 갑자기 오랫동안 못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드디어 나는 내가 해야 할 두 번째 말을 꺼냈다. 논문을 못 쓰게 된 실질적인
사연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처음에 조금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곧
어두운 표정으로 바뀌었다.
  "택시운전사는 몹시 고되다고 하던데 힘들지 않아요?"
  "힘들지. 하지만 살아남아야 하니까. 그리고 처음에는 좀 힘들었느데 이젠
그런대로 견딜 만해요." 
  역시 그녀는 나에 대하여 어떤 환상을 갖고 있었던가? 나를 빤히 쳐다보녀
하는 말투가 점차 격앙되고 있었다.
  "그렇지만 무슈 옹그는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에요. 부르스(bourse,
장학금)를 받을 수는 없었나요? 다니엘 에므리 교수와 상의해보셨어요?"
  그녀는 내가 생존잇기의 어려움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낌새를 한 번도 보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내가
조금 전에 논문 포기를 선언했을 때도, '어떤 다른 계획이 있어서겠지'라고
짐작했지 그 정도로 막다른 골목에 있기 때문이라곤 상상하지 못했을 터였다.
바로 그것이 그녀를 화나게 했던 게 분명했다. 나는 그녀의 안쓰러워하는
그리고 화난 표정에 맞장구를 칠 수 없었다. 나는 작위의 말을 꺼냈다.
  "혹시 주말 밤에 남자친구하고 시내에 나ㅇ다가 택시가 없어 쩔쩔매게 되면
나를 찾아요. 택시에 수신라디오가 없으니까 텔레파시로 부르는 수밖에 없지만."
  "그래요. 남자친구가 없어도 부를께요."
  우리는 잠시 웃었다. 그리곤 한참 동안 서로 말이 없었다.
  드디어 우리는 까페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또 연락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 내
마음이 바뀌어 프랑스말 교정이 필요해지면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다시금
강조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빙그레 웃었다. 그렇지만 속으로 그럴 일은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봉 꾸라주! (용기를 가지세요!)"
  이 말을 남기고 그녀가 뒤돌아섰다. 그녀와 헤어지는 나의 마음은 몹시
허전했다. 그녀와 만남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말할 수 없는 공허감이
스며들었다. 지하철 입구로 향하던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그녀가 돌아서더니 내 앞으로 다가왔다. 꼼짝못하고 있던 나에게 다가온 씰비가
이렇게 말했다.
  "실비를 맞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어요? 그래도 당신의 나라예요. 지금
돌아가면 안되나요? 돌아가면 무슈 옹그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잖아요."

  실비를 맞으러 돌아가라. 그래, 가야지. 물론 돌아가야지.
  씰비와 나는 이런 말을 나누었었다. 그날이었다. 씰비가 처음 내 팔짱을
끼었던 그 비 오던 날.
  "씰비."
  "위?"
  "실비는 아주 순수한 우리말인데 아주아주 가느다란 비라오. 그 비는
파랑스에는 오지 않소. 그 비를 맞으면 온몸이 촉촉이 젖고 마음까지 촉촉이
젖어들어온다오. 나는 그 실비를 맞고 싶소. 그 실비를 맞으며 마냥 걷고
싶다오."
  그날 내 말을 들으면서 씰비는 잠시 그 파랗고 큰 눈을 깜빡거렸었다.
그 말을 돌이켰던 것이다. 이렇게 고생하며 학업도 계속 못하느니 차라리
돌아가라. 실비를 맞으러 돌아가라. 돌아가라.
  그 순간, 내 귀에, "돌아가라! 돌아가라! 돌아가라!..."라는 울림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고 나는 갑자기 어지럼증을 느꼈다. 나는 드디어 허물어졌다. 씰비의
어께에 고개를 떨구었고 그녀가 나를 받아 안았다.
  "미안해요, 무슈 옹그. 하지만 당신을 아프게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어요."
  나는 그녀의 말에 대꾸하는 대신 혼자말하듯 떠들어댔다.
  "그래, 돌아갈 거야. 꼭 돌아갈 거야. 나는 오래전부터 같은 말을 했지. 내일도
또 하겠지. 그 다음날도 또 하겠지 돌아갈 거야. 돌아갈 거야, 라고 그러나..."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가 내 입을 막아버렸다.

    9 망명신청, 갈수 없는 나라
    망명자와 무국적자 보호를 위한 프랑스 사무국
  나는 그날, 빠리 북쪽에 붙어 있는 위성동시인 오베르빌리에의 한 빌딩안에
있었다. 그빌딩의 이름은 빠리페리끄였는데, 그 이름은 빠리와 프랑스말로
주변을 뜻하는 뻐리페리끄의 합성어일 것이었다. 빼리페리끄는 빠리의
순환도로를 지칭하기도 하는데 빌딩은 순환도로 바로 바깥쪽에 있었다. 나는 그
빌딩의 10층에 있는 한 사무실에 딸린 대기실에 앉아있었다. 그 대기실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창 밖을 멍하니 내려보며 기다리고 있는데 불현 듯 아주 먼
옛일이 생각났다.

  고등학교 다닐 때였다. 우리가 배운 과목 중에 '공민' 시간이 있었다. 우리는
장모 선생님으로부터 공민을 배웠는데, 원래 재미없는 공민 과목을 그분은
유머를 곁들여 꽤 재미있게 가르쳤었다. 그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정당방위'와
'긴급피난'의 차이점에 대하여 실제 예를 들어가며 설명해주기도 하였다.
그로부터 20년 가까이 지난 뒤, 빠리 교외의 한 빌딩속에서 갑작스럽게 그
선생님 생각이 났던 것은, 그분에게서 '망명' 특히 '정치적 망명'에 대하여
배웠는데, 내가 바로 그 목적, 즉 '정치적 망명권'을 얻기 위한 절차를 밟으려고
그 대기실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82년 6월의 어느 날, 프랑스 외무부 산하의 한 사무국(더 정확히 말하면,
'망명자와 무국적자 보호를 위한 프랑스 사무국(OFPRA))의 대기실, 창밖에는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곧 '사무국'의 관리가 나에게 요구한 인터뷰(프랑스말로
앙뜨르띠엥(emtretien))가 있을 참이었다. 여기서 인터뷰란 나의 망명신청에 대한
프랑스 관계당국의 접견심사를 말하는 것이었다. 망명 신청자에 대한 심사는
1951년 스위스의 주네브에서 조인된 이른바 '망명 규약' 서명 국인 프랑스의
의무이기도 했다.

    망명 신청 서류
  나는 이미 그 석달 전에 망명 신청을 하였었다. 신청은 서류로 우송하게 되어
있었다. 서류는 망명 사무국의 소정 신청 양식과 신청자가 따로 준비하는 서류,
두 부분으로 되어 있었다. 신창자는 특히, 왜 망명을 요청하는지에 대한 정당한
사유, 즉 본국에서 '박해받는 사람'(persecute)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빙을
제출해야 한다. 이른바 '박해'의 사유는 대체로 정치적 박해, 종교적 신념이 다른
데서 오는 박해, 그리고 소수 민족이 겪는 박해 등으로 나누어졌다. 한편,
망명을 신청할 때, 본국에서 받는 여권(여권을 갖고 있을 때)을 제출해야 한다.
내가 망명을 신청한 날은 나의 3년짜리 여권 기간이 만료되는 날이기도 했다.
나는 내 여권 기간의 마지막 날까지 망명 신청을 기피하고 있었다.
  나는 망명 신청 서류를 작성하는 일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79년 10월
남민전사건 발표 당시의 한국 신문을 그대로 복사하는 일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관계기사를 그대로 복사한 뒤에, 제목만 프랑스말로 옮겨 놓았었다. 내가 복사한
신문은 '동아 일보'와 '중앙 일보'였는데, "적색 집단, 국가 전복 기도" "자생적
공산주의자 집단" 등의 제목이 큼직큼직하게 써 있었고, 부제로는 "조직원을
구라파에도 보내"라는 것도 있어 바로 나를 지칭하여 발표되기도 하였다. 내가
유럽에 온 것은 다만 무역 회사의 현지 직원으로 왔을 뿐이기 때문에 나는 차마
스스로 '조직원으로 유럽에 파견된 인물'임을 말하여 망명 신청 사유를 더욱
빛나게(?)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당시 한국에서 발행된 어느 주간지에서, 나는 파견된 조직원이 되어
나도 모르는 사람을 만나고 있었고 또 나도 모르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필요에 따라 나를 주인공으로 혹은 조연으로 논픽션을 쓴 셈인데,
그것은 문자 그대로 픽션이었다. 나는 나의 망명을 위하여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그 주간지의 내용을 복사하여 제출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우선 거짓을
보이고 싶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런 거짓된 '소설'을 쓰거나 또는 쓰게 하는
나라의 본보기로 '한국'을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만큼 그런
글은 당사자인 나 자신에게조차 '분노'보다는 '창피함'으로 느껴졌다. 나는 나중에
이런 종류들의 '소설'을 쓰는 '소설가'들이 제법 있고, 그 발표의 장으로 몇 가지
주간지와 월간지가 애용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잡지들에서 그런
소설가들은 실제 소설가로 소개되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대학교수라고 소개된
것을 보기도 했다.

    어느 나이 많은 프랑스인 변호사
  나는 망명을 신청하기로 결정한 뒤에, 한 프랑스인 변호사와 만나 상의한
적이 있다. 그는 60세가 넘은 사람이었는데,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이른바 인권
변호사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어려운 상황에 처한 외국인들에게 도움말을
해주는 일을 즐겁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 '사회주의자'이며 '국제
주의자'라고 말하기도 했다.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하여 경청한 그는, 나에게 망명
신청을 권유하였고 또 나의 망명 신청은 별문제 없이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다만 프랑스의 행정 처리가 워낙 느리기 때문에 때문에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될 수 있다고 했다. 헤어질 때, 그는 내가 준비한 약소한 사례금도
끝내 사양했다. 대신 용기를 잃지 말라며 나에게 악수를 청하며 덧붙인 말은
이러했다.
  "프랑스 사회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
그도 '사회'를 말하였다.
  스스로 국제 주의자, 사회주의자라고 스스럼없이 말하던 어느 나이 많은
벽안의 인권 변호사의 손은 따뜻했다.

    사회당 집권과 외국인
  망명 신청 서류를 준비하여 제출한 지 며칠 뒤에 나는 '접수증'을 받았다. 이
접수증은 신청자에게 대단히 중요하였다. 왜냐하면 망명을 신청했다는
사실만으로, 프랑스 안에서는 이미 망명 신청이 받아들여진 것과 다를 바가
없을 정도로 효력을 발휘하기 때문이었다. 즉 프랑스 안에서 체류할 수가 있는
권리와 또 노동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다. 망명 신청이 이미 통과한 사람과
다른 점은, 최종 결정이 날 때까지 프랑스를 떠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내가 잠깐 만났던 변호사가 말한 대로 프랑스의 행정 처리가 느리고 심사
기간이 길어진다는 것은, 나에게 프랑스를 떠날 수 없는 기간이 길어진다는
뜻할 뿐이었다.
  나는 접수증을 나의 거주지 도청인 낭떼르의 외국인 규정 사무실에 제시했다.
그들은 내가 이미 갖고 있던 체류증과 교체하여 새로이 3개월 유효인
임시체류증을 발급해 주었다. 여자 담당자는 나에게 3개월 안에 나의 망명 신청
심사가 끝나지 않을 때는 연장하라고 말했다. 심사기간중에는 자동으로
연장된다고 일러준 그녀는 내가 망명 사무국에서 받은 접수증을 되돌려
주었는데, 그 접수증은 그대로 노동 허가증이기도 했다. 40대로 보이는 그녀가
상냥하기도 했지만 사회당 집권 후 도청의 외국인 규정 사무실의 분위기가 꽤
부드러워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국제 주의, 인류애, 연대' 등의 기치를 표방한 사회당의 집권 초기에, 그
변화를 가장 피부로 느낄 수 있던 사람들은 프랑스인들보다 오히려 프랑스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특히 제 3세계 출신)이었다. 도청에 있는 외국인 규정
사무실의 구조부터 달라져 있었고, 체류 허가증을 받거나 체류 기간을
연장하려는 외국인들의 표정도 사뭇 밝아져 있었다. 우파 집권 때보다 훨씬
사람 대접을 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사회와 다른 사회의 만남
  '무슈 옹그?'
  창 밖으로 지붕 위에 떨어지는 빗줄기를 멍하니 바라보며 상념에 잠겨 있던
나는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30대 후반쯤 되었을 남자, 프랑스의 외무부
관리가 나를 향해 가볍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그의 안내로 그의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 그의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그는 하얀 색 티셔츠에 타이도 매지 않았다. 관리가 정장을 하지 않는 반면에,
망명 신청자(다른 말로 '도망자')는 정장을 하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이런
젠장!'하고 외쳤다. 당장 넥타이라도 풀어 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마음의 여유도
숫기도 나에게는 없었다. 그와 나는 옷차림새도 다르고 피부 빛깔도 눈동자의
색깔도 달랐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표정은 30여 년을 전혀 다른 사회에서
살아온 사람의 궤적으로 나에게 비쳤다.
  그의 유유한 표정은 내가 아는 관리들의 근엄한 표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고 저 서울의 어느 암울한 취조실에서 맨몸뚱이의 먹이를 느긋이
바라보며 어떻게 요리할까 하고 쳐다보는 그런 여유 있는 표정도 물론
아니었다. 나는 속으로 다시 '이런 젠장!'하고 외쳤다. 내가 이 순간에 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그것은 서울에서 다른 모든 동료들이 겪었을
저 엄중한 시련을 혼자 일탈하여 동참하지 않은 자의 얄팍한 양심의
콤플렉스에서 오는 것일까? 아무리 노력해도 나의 굳어진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나의 긴장을 풀어 주려 했을까, 그가 나에게 담배를 권했다. 우리는 함께
담배를 피워 물었다. 나는 기다렸다. 그는 나에게 질문할 것이고 나는 대답하면
된다. 그뿐이다. 여유를 갖자. 거기는 취조실이 아니다. 나는 담배를 힘차게
빨아들였다. 그는 잠시 동안 말없이 서류를 들여다보았다. 나에 관한 서류철일
것이었다.
  그를 바라보면서 나에게도 외무부의 관리가 되겠다는 생각을 가진 적이
있었음을 상기했다. 비록 짧고 허망한 생각이었지만 외교 학과를 다니며
'외교'라는 두 글자가 주는 이상한 매력에 애초부터 초연했었다면 그것은 순전한
거짓말이다. 문리대 외교 학과에 나와 함께 입학한 과원은 20명이었는데 그중
대부분이 장래 희망을 외교관이라고 적었었다. 그만큼 외교 학과는 국제
정치학과에 가까운 것이 아니라 외교관 준비과에 가까웠다. 실제로 그중 반
정도는 후에 그 희망을 성취하였고 은행원이나 기자등 다른 길을 택한 사람은
소수였다. 특히 소리꾼이 된 임진택의 경우는 아주 특이했는데 그는 나를
연극회로 이끈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리고 당시에 장래 희망을 '봉급쟁이'라고
적었다는 박호성은 베를린에서 공부한 뒤 나중에 교수라는 봉급쟁이가 되어
희망을 성취했는데 그가 그것으로 만족할 것인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한편,
'정치 학사'라고 적었던 나는 우여곡절 끝에 졸업장을 취득하여 희망을
달성하였다. 내가 당시 정치 학사, 즉 졸업장 희망란에 적었던 것은 어떤
장난기가 아니고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 사연도 이 글을 통하여
차차 밝혀질 것이다.
  "무슈 옹그, 프랑스말이 편하십니까? 아니면 영어가 편하십니까?" 
  드디어 내 앞의 외무부 관리가 입을 열었다. 프랑스 말이었다.
  나는 영어로 대답했다.
  "미안하지만 나는 영어도 프랑스말도 잘 못합니다. 그래도 영어가 조금
낫습니다."
  지금은 그래도 프랑스말이 영어보다 더 낫지만 당시의 프랑스말은 아주
서툴렀다. 우리는 영어로 대화로 나누게 되었다.
  대화를 시작하자마자, 나는 묘한 착각과 동시에 지극한 모순된 상황에 빠진
자신을 발견했다. 그가 나의 인적 사항, 가족 사항, 프랑스에 들어온 날짜 등을
하나하나 확인해갈 때, 그 시작의 유사성 때문에(한국에서 이른바 조서라는 것을
써 본 사람은 이해할 수 있으리라, 저들의 마음에 들 때까지 끊임없이 다시
써야 하고 다시 쓸 때마다 반복하고 또 반복해야 하는 인적 사항(성명, 본적,
주소, 생년월일)) 나는 다시 저 암울한 방을 상기해야 했다. 그와 동시에 나는
나의 귀를 의심해야 했다. 그는 말끝마다 나에게 써(sir)라고 호칭하는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그가 영어에 서툴기 때문에 써라는 칭호를 함부로 쓰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영어는 알아듣기 쉬웠지만 서툰 영어는 아니었다. 이른바
제1세계에 속하는 나라의 한 관리는 먼 아시아 땅에서 온 한 도망자를 계속
써라고 불러 대는 것이었다. 이 진풍경(?)도 사회당 정권 초기였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과거의 기억과 망명 신청인 오늘의 나, 그리고 그런
나 자신에 전혀 걸맞지 않은 상대방의 태도로 혼란해지고 있었다.
  30분간에 걸친 그와의 대화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는 그이 질문에
만족스러운 답변을 하지 못했다. 아니 만족스러운 답변을 할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나 자신 혼란스러웠던 탓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의 표정에서
이미 읽을 수 있듯이 그와 내가 살아온 사회 상황이 너무 다른 데서 오는
것이었다. '한 사회'와 '다른 사회'는 서로 만나 '느껴야'되는 것이지 설명한다고
전달될 일이 아니었다.
  그에게 한국의 정치^5,23^사회 상황을 이해시키려는 노력은 거의 도로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가 나에게 남민전에 대해서 묻거나 나의 활동에 대해
물었을 때 당연히 우리가 처해 있던 상황과 또 그 역사적인 맥락까지 설명해야
했다. 그가 "당신이 속했던 조직이 무엇이냐?"을 영어로 옮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남조선', 즉 '남조선 민족 해방 전선'을 영어로 옮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남조선'을 영어로 옮겨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싸우스
코리아'였다. 남조선이라는 말 한마디가 한국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한국인은
알 수 있다. 나 자신, 분단이래 정치사에서 '한국'이란 말이 긍정보다는 부정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확신했지만 실제 내가 조직의 전사가 되어 처음 조직의
이름을 알게 되었을 때 '남조선'이라는 단어 자체가 큰 두려움의 무게가 되어
다가온 게 사실이다. 그 말은 '민족 해방 전선'이란 말보다 더 혁명적인 의미를
품고 있었는데 영어로 옮기면 단지 '싸우스 코리아'일 뿐이었다. 나의 설명은
그를 별로 납득시키지 못한 채 넘어가야 했다. 
  그가 다음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당신은 그 조직 안에서 구체적으로 무슨 행동을 했습니까?"
  그로서는 아주 당연한 질문이었다. 그런데 이 당연한, 그리고 아주 명료한
질문에 대하여 나는 대답에 궁한 자신을 발견해야 했다. 곰곰이 돌이켜보아도
크게 내세울 것이 없었던 것이다. 특히 망명을 신청한 자로서는 더욱 그러했다.
한국 내에 있었으면 실로 엄청난 일을 당했을 테고 또 실제 다른 동료들이
겪었고 또 겪고 있는데도 말이다. 몇 차례에 걸쳐 박정희 군사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자는 삐라를 뿌렸다는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말의 전부였는데, 그
정도의 행위는 프랑스에서는 경범죄에도 해당되지 않는 일이었다!
어처구니없지만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 행위가 한국의 유신 체제하에서는
취조실에서 고문을 당해야 하며 적어도 수년간의 옥살이를 각오해야 하는
행위라고 설명하고 있는 나에게 허탈감이 스며들고 있었다.
  "우리 조직은 미제국주의에도 반대하였다."
  맥이 빠진 내가 이렇게 저항하였을 때, 그는 즉시 이렇게 대꾸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무슨 행동을 했는가?"라고.

  '미제국주의'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이면 이미 그에 반대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데 구체적인 행동이 없었다면 그게 무슨 대수냐고 말하는 것 같았다.
실제로 그랬다. 나의 상대는 사회당이 집권하고 있는 나라의 관리이고 그 자신
미제국주의에 반대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의 질문은, 미제국주의에 반대할 수
있는 구체적 방안이 있으면 자기에게도 가르쳐 달라는 뜻으로 들리기까지 했다.
그가 사회당 정권에 관계없이 단순한 관리라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프랑스
사람들이 미제국주의라는 표현을 쓰는 것을 자주 보았다. 빠리 지사에서 나와
같이 일하던 베르뜨랑도 삐에르도 미제국주의라는 표현을 썼었다. 평범한
사무원들이 스스럼없이 '미제'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나는 아주 놀랐었다.
왜냐하면 유럽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당시에 나는 주로 북한 사람들만 그
표현을 쓰는 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행동이 따르지 않은
'미제국주의에 대한 반대'는 별 의미가 없었다. 나는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나는 한국의 유신 체제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그리고 긴급 조치라는
것에 대하여 설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들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하여는 나의 영어는 짧았다. 설사 내가 유창한 영어를 구사한다 해도, 유신
독재나 긴급 조치나 혹은 군사파쇼라는 몇 마디 말로 어떻게 그 절망스런
숨막히는 상황을 이해시킬 수 있단 말인가? 광주의 비극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였다. 그 비극적 상황을 어떻게 단 몇 마디 말로 전달할 수 있단
말인가?
  답답했다. 그는 나에게 나의 귀를 계속 간지럽히는 써라는 호칭을 붙이면서
동시에 그 격조(?)와는 전혀 동떨어진 한국의 정치적 상황을 설명하도록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원래 그의 요구가 아니라 한국에 돌아가기를
거부하고 망명을 신청한 나의 요구로 시작된 일이었다. 나는 모순의 늪 속에
깊이 빠져들어 갔다.
  나는 한국을 내가 돌아갈 수 없는 나라로 설명해야 했다. 통통 마쿠트의
아이티라는 나라나 혹은 아프리카의 몇몇 나라에서나 있을 법한 일들이 한국의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 아래 저질러졌고 도 저질러지고 있다고 말해야
했다. 비록 그것이 사실이었지만 그 말을 전달하고 있는 나 자신이 싫었다. 나는
허우적거렸다. 급기야 나는 울고 싶은 충동에 몸부림쳤다. 나의 망명 신청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하여 짧은 영어로 더듬고 있는 나 자신이 너무 초라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나의 가슴 한구석에 항상 자리잡고 있는, 혼자만 화를 모면하였고 또
계속 모면하려 한다는 죄의식까지 겹쳐졌다. 그 위에 상대방의 벽창호 같은
표정은 나를 질리게 하고 있었다. 차라리 나에게 익숙한 근엄한 표정이나 혹은
뱀눈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면 나의 마음은 훨씬 편했을 것이다. 그가 얄미웠다.
그가 한국의 정치적 상황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전혀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면서 약올리고 있다는 생각도 스쳤다. 설사 프랑스에 한국 출신 망명 신청이
거의 없어 내가 특이한 경우라 하더라도 이미 제3세계 출신의 신청자들을 많이
접해 그 나라들의 정치 사회적 상황에 대하여는 잘 알고 있을 터였다. 또 그는
직책상 알고 있어야 마땅했다. 한국은 그 외에 분단이 겹쳐 더 어려운
상황이리란 것만 이해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어린아이의 표정이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그는 오히려 노련한
관리가 아니었던가 싶지만 당시의 나에게는 넘을 수 없는 벽으로 느껴졌다.
  드디어 나는 갑자기 입을 봉해 버렸다. 내가 허우적거리며 더듬고 있는
얘기들이 우리에겐 엄청난 비극이었지만 그에겐 그렇지 않았다.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이 벌인 그 비극적인 사건들이 그에게는 오히려 희극으로 비칠 수
있었다. 우리도 아이티의 통통 마쿠트의 얘기를 듣고 또는 중앙 아프리카의
황제의 얘기를 듣고 그 민중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을 함께 느끼기보다는 "뭐,
그런 나라가 다 있어"하고 웃어넘기기도 하지 않는가. 그 나라들과, 동족을 마구
학살하는 나라, 40년의 감옥을 사는 세계 최장기수가 있는 나라 그리고 야당
지도자를 남의 나라에서 백주에 납치하여 수장하려 하던 나라와 어떻게 다른가?
삼청교육대가 있는, 법을 능가하는 긴급 조치와 지명되는 국회의원이 있는,
그리고 일상적으로 고문이 행해지는 나라와 무슨 차이가 있는가. 나는 한
사람의 관객을 앞에 놓고 어릿광대 노릇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아픔을 다른 그 누구에게도 전달할 수 없으며 또 그
누구도 알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껴야 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한참 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상대도 나를 물끄러미 쳐다볼 뿐 입을 열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나는 다시 다시 입을 열어야 했다. 망명을 신청한 사람은
그가 아니고 나였으므로, 나는 간신히 자신을 추스르고 이렇게 말했다.
  "프랑스의 국시가 '자유, 평등, 박애'라고 알고 있다. 한국의 국시는 반공이며,
국가보안법, 반공법이라는 것이 있다. 한국 신문에 의하면 내가 공산주의자의
일원이라고 발표되었다. 한국은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힌이상 살 수 없는 곳이다.
이상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의 전부이다."
  나의 말소리가 무거워지고 태도도 바뀐 것에 상대는 약간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잠시 사이를 두고 그는 이렇게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공산주의자입니까?"
  이 질문은 내가 악몽에서 만나게 되는 "너 빨갱이지?"라는 질문과 아주
똑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이 질문에도 '써'하는 칭호를 덧붙이고 있었다.
엄청난 차이가 있으면서도 똑같은 질문에 나는 꿈속의 나와 마찬가지로
조건반사의 대답을 했다. 꿈속에서는 "아니오! 아니오!"하고 울부짖음 같은
소리로 대답했음에 비하여, 그에게는 아주 간단히 영어로 "노"하고 답변했다는
게 차이라면 차이였다.
  나의 대답은 너무 간단했다. 만약에 상대방이 사회당 정부의 관리가 아니라
우파 정권의 관리였다면 나는 거리낌없이 한마디를 덧붙였을는지 모른다. 즉
사회주의자나 사회 민주 주의자에는 가까울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 앞에서 그 말을 한다는 것은 나의 성격에 대한
배반이었다. 하긴 나는 애당초 스스로 무슨 무슨 주의자라고 말할 만한 사람도
못 되었다.
  그런데 나의 간단한 대답은 다시 나를 함정에 빠뜨릴 수 있었다. 왜냐하면
스스로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공언하는 이상, 한국에 돌아가서 그렇게
주장하면 되는 것이 아니냐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당신은 공산주의자다" 또는 "너는
빨갱이다"하고 주장한다는 것은, 나의 상대방에겐 도저히 이해 될 수 없는,
우스꽝스러운 일이었다. 나의 기우는 그대로 들어맞았다. 그는 이렇게 추궁했다.
  "그렇다면 한국 신문의 내용은 틀린 것이 아니오? 당신이 우리에게 보낸
서류는 한국 신문을 복사한 것으로만 되어 있는데..."
  그도 역시 관리였다. 그가 나를 만나고 있는 목적은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망명 신청 요구의 근거에 의문을 제기하고, 나의 요구를 거부할 수
있는 근거를 찾자는 데에 있었다. 그가 추궁하고 싶은 내용은, 이미 밝혀진 대로
구체적으로 한 행동도 별개 아닌데다 허위 또는 과장된 사실을 바탕으로 신청한
망명 요구가 아니냐는 뜻이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듯했다. 숨겨져 있던 나의 자의식까지 튀어나오면서 나의 목소리는
커지고 있었다.

  "그렇다. 우리는 행동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별로 한 일도 없다. 그런데도
말이다, 아니 바로 그 때문에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형 선고를, 무기형을
그리고 15년, 10년 등의 중형을 받아야 하고, 또 나는 이렇게 구차하게 망명처를
요구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흥분하고 있었다. 나는 이어서 이런 말을 지껄여 댔다.
  "당신은 이른바 매카시즘에 대하여 알고 있는가? 설사 잘 알고 있다 해도
당신은 한반도 분단의 비극을 알 수 없다. 한국에서는 공산주의자를 빨갱이라고
부른다. 공산주의자도 빨갱이지만 사회주의자도 빨갱이며, 진보주의자도
빨갱이며, 미국에 비판적이어도 또한 빨갱이다. 그리고 이상주의자도
휴머니스트도 또한 빨갱이가 될 수 있는 곳이 바로 한국이다. 당신도
한국에서는 빨갱이가 될 수 있다. 아니다. 당신은 프랑스인이기 때문에 빨갱이가
될 수 없다. 설사 당신이 공산주의자라고 하더라고 말이다. 한국인만 빨갱이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있으니까... 당신은 사회주의자인가? 좌익인가? 좌익이나
우익이란 말은 상대적이다. 극우에겐 극우가 아닌 모든 자가 좌익이다.
한국에서는 이 모든 좌익이 빨갱이가 될 수 있다. 침묵하지 않을 때 말이다.
그러므로 극우가 아닌 실존주의자는 모두 빨갱이가 되어야 하는 곳이 바로
한국이다. 그런데 나는 당신네 나라의 싸르트르와 까뮈의 영향을 꽤 받았던 것
같다. 불행하게도 말이다. 당신은 내 말을 이해할 수 있는가? 내가 빨갱이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내가 공산주의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당신네 나라의
'앙가주망'이라는 말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습지 않은가?... 나는 또 이렇게
말하겠다. 당신이 바라는 것처럼 나도 돌아가고 싶다, 코리아로. 노스도
싸우스도 아닌 코리아라는 나라로 말이다. 당신은 내 말을 이해할 수 있는가?
나는 돌아갈 것이다. 나는 꼭 돌아갈 것이다. 나는 꼭 돌아갈 것이다."
  나의 지껄임을 상대방은 의외로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나는 말을 마치고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부슬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그
빗줄기에 흥분되어 있는 나를 흠뻑 적시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나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상대방은 말없이 무언가 열심히 기록하였다.

  "당신이 요청한 망명이 받아들여진다면 생활은 어떻게 해 나갈 예정입니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나온 그의 질문은 엉뚱했다. 대화가 끝나 가고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글쎄, 아직 별다른 아이디어가 없소."
  "프랑스에 있는 다른 한국 회사에서 일할 생각은 없습니까?"
  그는 역시 순진한 것인가. 나는 허허롭게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한국인에게 빨갱이란 낙인은 카인의 표적과 같은
것이지요."
  그는 처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굿바이 써."
  그는 마지막까지 '써'를 붙였다.
  "굿바이."
  나는 마지막까지 '써'를 붙이지 않았다. 우리는 악수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날
나는 빠리의 거리를 정처 없이 걸었다. 흠뻑 비를 맞으며. 그날의 비는 한
사회와 다른 사회가 만날 때 하늘이 준 눈물이었다. 나에게는.

  그후 석달이 지난 뒤에 나의 호적, 아이드르이 출생증명서 등을 보내라는
통지가 왔다. 나의 망명 신청이 통과되리라는 것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리고
다시 다섯 달이 지난 뒤에 이른바 '하얀 카드'가 우편으로 날아왔다. 망명
증명서가 하얗게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나와 나의 처에겐 하얀 카드,
그리고 미성년인 아이들을 위해선 일종의 행정 증명서를 보내 왔다.
  나는 도청의 외국인 규정 사무실에 하얀 카드를 보이고 정식체류증을 받았다.
그리고 또 '여행 문서'라는 것을 받았다. 이 '여행 문서'는 주네브협정에 의거,
망명자들에게 발급하는 여권과 같은 것이었다. 매 2년마다 연기하게 되어 있는
이 여행 문서의 표지 안쪽에는 이렇게 표기되어 있었다.
  
  1793년 6월 24일의 프랑스 공화국 헌법, 제120조: 프랑스 국민은, 자유의
이름으로, 그들의 조국으로부터 망명한 외국인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한다.
압제자들에게는 이를 거부한다.

  이렇게 시작되고 있는 여행 문서에는 사진이 있고 이름, 생년월일, 주소 등과
만료 기간이 적혀 있어 다른 여권과 별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여행 목적지'
항목을 보는 순간, 나는 갑자기 깊은 심연 속으로 자지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여행 목적지: 꼬레를 제외한 모든 나라(pour tous pays sauf Coree)

    이상하게 이 여행 목적지는 나에게 "노르? 우 쉬드?"라고 묻지 않았다. 내가
"꼬레 뚜 꾸르"라고 대답한다는 것을 알았을까? 제외한 여행 목적지도 그냥
꼬레였다.

  갈 수 있는 나라: 모든 나라
  갈 수 없는 나라: 꼬레

  실제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라지만 이렇게 아주 명확하게 적혀 있는 여행
문서를 본 순간, 나의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고 있었다. 나는 또 걸었다. 마냥
걸었다. 속으로 '갈 수 있는 나라 모든 나라, 갈 수 없는 나라 꼬레'라고 수없이
뇌고 또 되뇌면서 나는 정처 없이 걸었다. 그리고 길가에서 값싼 포도주 한
병을 사선 병나발을 불었다. 노트르담 대성당 옆에 있는 작은 다리 밑에서였다.
세느 강이 바로 옆에 있었다. 술이 약한 나는 금방 취했다. 흐르는 쎄느 강물을
초점 없이 바라보면서 나는 이렇게 외쳤댔다.
  "나는 배반하지 않았어. 내가 배반한 게 아니야. 네가 배반했어. 배반한 건
바로 너란 말이야! 따져보자구. 하나하나 따져보자구! 정말로 누가 배반한
것인지 하나하나 따져보자구!"
  나는 끝없이 떠들어댔다. 가끔 데이트를 즐기는 청춘 남녀들이 지나가며
흘끔흘끔 나를 쳐다보았다. 그 중엔 "싸 바?(Ca va? 괜찮소?)"하고 묻는
젊은이도 있었다. 드디어 나는 잠잠해졌다. 유유히 흐르는 쎄느 강물에 지나간
순간들이 하나하나 비치기 시작하더니 주마등처럼 휙휙 지나갔다. 갈 수 없는
나라에 내가 있었다.



    제2부 갈 수 없는 나라, 꼬레
     회상(1) 잔인한 땅
    쁠레장스의 여인
  밤 2시 빠리 남서부인 제 14구의 쁠레장스 지하철역 네거리. 지하철은 끊어진
지 이미 오래. 인적도 끊어진 지 이미 오래. 움직이는 것은 다만 이따금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가 멀어지면서 다시 고요가 스며든다.
택시정류장에는 나 혼자뿐이다. 
  이 택시정류장에는 전화기가 있다. 발신은 할 수 없고 수신만 된다. 나는
전화기에서 눈을 때면 안된다. 손님이 택시를 부르기 위하여 전화를 걸면 저
전화기는 벨소리를 내는 대신에 깜빡깜빡 불빛을 낸다. 주거지역이기 때문에
밤에 소리가 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일 게다. 빠리의 주거지역 곳곳에 그리고
교외의 중심 지역에 잇는 택시정류장의 전화기의 전화기들은 벨소리를 내지
않고 깜빡깜빡거린다. 최근에 설치한 전화기는 낮에는 벨소리를 내고 밤에는
깜빡거린다.
조금 더 빠리 시내에서 손님을 태워 이 부근까지 왔다. 손님을 내려주고 다시
시내 중심지로 돌아갈까 하는데 이 택시정류장이 비어 있었다. 손님이 없는
시간이지만 간혹 동네 친지네집에 놀러 왔다가 돌아갈 사람이 택시를 부를수
있다.
  나는 택시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워문다. 밤공기가 차다. 낮엔 그래도 더운
편인데 기온차가 꽤 심하다. 텅 빈거리. 하늘을 쳐다본다. 별이 보이면 좋으련만.
6층 높이로 가지런한 고풍의 아파트들을 둘러본다. 잠자는 아파트. 창문으로
불빛이 새어나오는 데가 몇개인지 세본다. 하늘에서 못 찾은 별을 세듯. 하나,
둘, 셋, 넷. 아, 그중에 하나가 꺼진다. 다시 셋. 시계를 본다. 밤 2시 10분, 일할
시간이 50분 남아 있다. 아직 집으로 돌아갈 때가 아니다. 가끔 전화기로 시선을
보낸다.
  불현듯 내가 지금 왜 여기 있지? 하는 생각이 든다. 한밤중에 낯선 땅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갑자기 텅 빈 거리가 더욱 낯설고 외로움이 스며든다.
부러 도리질을 하며 상념을 쫓아버린다. 할머니가 보고 싶다. 지금 서울은 오전
10시 10분, 할머니가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실까?
  아, 드디어 깜빡깜빡 신호가 온다. 나는 전화기로 달려가 수신단추를 누른다.
  "알로? (여보세요?)"
  "알로? 딱씨?(택시?)"
  전화로 목소리가 귀에 익다. 또 그 여자다. 잠 못 이루는 여인. 이 택시
정류장에서 밤에 손님을 기다려본 운전사들은 거의 모두 이 여인을 안다.
목소리뿐이지만. 쁠레장스의 여인. 나도 이번이 세번째다. 그래도 그녀는
상스럽지 않다. '뽀르뜨 도를레앙의 남자'는 택시운전사들을 불쾌하게 한다. 그는
이른바 호모인데 아주 상스러운 얘기를 떠든다. 나는 그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오히려 다행이다. 그에 비해 쁠레장스의 여인은 외로워할 뿐이다. 자기의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한 것뿐이다. 나는 수신 단추를 누른 채 그녀의
얘기를 듣는다. 오늘은 왠지 오랫동안 들어주고 싶다. 듣기만 하다가 가끔 위,
위 하고 대꾸하면 된다. 그녀는 그녀의 고양이가 없어졌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지난번과 똑같은 얘기다. 그녀는 고양이가 없어져 외로움을
느끼게 되었고 또 실제 너무 외롭다고 말한다. 다시 같은 말을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 고양이의 이름이 미누라고 말한다. 미누의 털색깔을 말한다. 눈색깔을
말한다. 미누가 얼마나 자기를 따랐는지 말한다. 미누와 나누었던 즐거운 추억을
말한다. 미누가 '셰바' 상표의 먹이도 못 먹고 어디를 헤매고 있는지 불쌍해서
못 견디겠다고 말한다. 고양이는 그녀의 모든 것이었다. 나는 시계를 쳐다본다.
2시 29분. 이 정도면 많이 들어주었다. 나는 "내일 밤에 다시 계속하라"고
말하고 수신단추에서 손을 뗀다. 그녀는 뽀르뜨 도를레앙의 남자처럼 고집을
부리지 않는다. 뽀르뜨 도를레앙의 남자는 수신전화를 끊으면 다시 걸어
택시운전사들을 약올리지만 쁠레장스의 여인은 그렇지 않다. 그 대신 내일
밤에는 또 어는 택시운전사가 틀림없이 그 여인의 고양이 얘기를 듣게 될
것이다.
  착잡하다. 다시 나는 왜 여기 있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여인의 고양이처럼
헤매고 있는 걸까? 한밤중의 이방인. 내가 있을 땅이 아니다. 할머니가 보고
싶다. 할머니한테 달려가고 싶다. 그 즐거웠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그리
달려가 마냥 할머니에게 안기고 싶다.

    리용 역에서 태웠던 어느 할머니
  나는 네시간 전쯤에 그 할머니를 태웠다. 일흔살쯤 되어 보이는 그 할머니를
태운 곳은 리용 역이었다. 여행을 다녀오는지 가방이 꽤 무거웠다. 그 할머니의
집은 레ㅃ블리끄(Republique, 공화국) 광장 가까운 곳에 있는 아주 오래된
아파트였다. 할머니의 짐을 집 앞에 내려놓고 돌아서려는데 그 할머니가 무언가
말을 할 듯 말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먼저 말했다.
  "혹시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습니까?"
  "무슈, 대단히 미안하지만 짐을 좀 올려다줄 수 있겠소"
  곧 알게 되었다. 그 할머니는 혼자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아파트는
4층(한국의 5층)에 있었고 승강기도 가르디앵(gardien, 경비원)도 없는
아파트였다. 층계가 비좁아 여행가방을 들고 올라가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녀가
사는 아파트 앞에 도착했을 땐 나도 숨을 몰아쉬어야 했고 온통 땀에 젖었다.
숨차 하며 앞장서서 올라가던 그 할머니는 연신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을
되풀이하였는데 그 사이에 "이번에 리용에 사는 아들이 초대해 주어서 여름
바캉스를 아주 즐겁게 보냈다"는 얘기와 "아들이 이곳까지 바래다주겠다는 것을
내가 말렸다"고 하면서 아들자랑과 함께 나이든 자신을 혼자 보낸 아들을
변명해 주었다. 나는 리용에 산다는 그 아들이 그 할머니를 빠리까지 모셔다
주겠다고 했다는 말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세상 어디나 문화의
차이가 있다. 해도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사랑에는 큰 차이가 없는가 보다.
사랑이 없다면 처음 보는 나에게 아들 자랑 겸 변명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나의 할머니도, 어렸을 적부터 나를 길러주신 나의 할머니도 거짓말을
하시면서 이렇게 불효하고 있는 나를 변명하고 계시겠지. 나는 왜 여기 있나?
할머니를 남겨두고 나는 여기서 무얼 하고 있나? 행복했던 나의 꿈을 어디로
날려보냈던가?

    기억의 저편
  "얘 세화야, 네가 처음에는 그걸 다 건져 먹었단다."
  아주 어렸던 내가 콩나물국에서 단물이 다 빠진 멸치를 밥상 위에 건져 놓는
것을 보고 할머니가 하시던 말씀이다. 할머니의 이 말씀은 나의 가장 오래된
기억 중의 하나이다. 할머니의 이 말씀으로 상상할 수 있는 나의 모습, 즉
단물이 다 빠진 멸치를 나의 콩나물국에서 그리고 할아버지의 국에서도
할머니의 국에서도 걸귀처럼 건져 먹었던 나의 모습을 나는 기억하고 잇지
못하다. 할머니의 말씀으로 내가 굶주린 적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나의
기억에 없고 또 그 이후에 굶주린 적이 없기 때문에 내가 굶주렸던 때와 그
상황에 대하여 자세히 알고자 하지 않았고 그 생각조차 별로 없었다. 간혹
생각키워져도 '전쟁 때 누구나 겪었던 일이었겠지...'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지나쳤다. 적어도 내 나이 스무 살이 될 때까지는 그랬다. 66년
경기고를 졸업하고 서울 공대에 입학한 그해, 남이 부러워하는 이른바 KS마크가
되어 남 보란 듯이 교복을 입고 충남 아산군 염치면 대동리, 일명 '황골'이라고
부르는 그곳, 바로 현충사에서 고개를 하나 넘으면 되는 그곳에 갔던 날까지는
그랬다. 아버지와 함께 갔던 그곳에서 나는 그 대부를 만났다. 그리고 작은
아버지의 말씀도 듣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알게 되었다. 내가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고 또 내 기억 속에도 없는 그 굶주림의 실체를 똑똑히 알 수 있었다. 내
기억에 없는 나 자신이 그 현장에 있었다. 그 현장에 있었던 나와, 그 현장에
내가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된 스무살의 나 사이에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고 있었다. 그 강은 붉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붉은 피로.

    창경국민학교 시절
  기억 속의 나는 유복하게 자랐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와 나, 우리는 단 세
식구였다. 나의 외할머니는 종종 나의 종아리를 때린 엄한 어머니이기도 했다.
  나의 아버지의 부모님, 즉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는 내가 태어나기 오래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나의 기억 속에 없으며 그분들이 어떤 분들이었는지 들은
기억도 나는 별로 갖고 있지 못하다. 나는 나의 외할머니를 할머니라고 또
외할아버지를 할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자랐다. 이 글에 나오는 나의 할머니, 나의
할아버지는 실제 나의 외할아버지를 말한다. '외'자를 앞에 쓰지 않는 것은
'외'자를 붙인 호칭이 나에게 낯설기 때문이라는 것을 독자들은 이해해주기
바란다.
  우리 집의 주소는 종로구 연건동 298-9였다. 우리 집의 북쪽 담은 대학병원과
경계였고 서쪽 담은 원남동과 경계였다. 서쪽 담 바로 안쪽에는 살구나무가
있었는데, 그 열매는 다 익기도 전에 나의 시달림을 받아야했고, 또 동쪽 담의
쪽문으로 나가서 대학병원의 철망 사이를 기어들어가 따먹던 까까중도
별미였다. 우리 집은 오르막길의 끝에 있었고 왼쪽으로 여섯개의 층계와 다시
오른쪽으로 세 개의 층계를 올라서야 대문에 닿았다. 집에서 대문을 나서면
바로 낙산의 능선이 보였다. 나는 동네골목에서 동무들과 구슬치기와 딱지치기
그리고 말타기, 말까기, 자치기, 굴렁쇠 굴리기, 제기차기, 술래잡기 등을 하며
놀았다. 그리고 땅속을 헤집어 땅강아지를 찾아내 괴롭히며 히죽거리면서
좋아하기도 했다. 
할아버님은 무척 인자하셨다. 집에 있다가 할아버님이 외출할 색을 보이면 나는
슬그머니 먼저 나가 대문가에서 기다렸다. 손바닥을 삐죽 내밀고 서 있으면 곧
그 손에 동전 한 닢이 주어졌다. 냅다 가게로 뛰어 왕사탕을 사서 한쪽 볼이
불거져나오도록 입 안에 물고 돌아오면 할아버님은 그때까지도 골목길을
내려오고 계셨다.
  나는 창경국민학교를 다녔다.
  그 학교를 다니며 혹은 다니기 전부터 배운 노래에 이런 것이 있었다.

  창경, 창경, 거지떼들아! 깡통을 옆에 차고 혜화학교로!
  창경, 창경, 거지떼들아! 깡통을 옆에 차고 효제학교로!

  혜화동에 있었던 혜화국민학교나 효제동에 있었던 효제국민학교에 비하여
창경국민학교에는 가난한 학생들이 많았다. 우리 집을 나설 때 보이는 낙산의
능선 밑에는 휴전 직후부터 이미 판자촌이 이루어져 있었고 그곳의 아이들은
대부분 창경국민학교에 다녔기 때문이다. 나는 윗학년 학생들을 따라 이 노래를
불렀지만 어린 치기가 있었을 뿐 실제로 가난을 느끼면서 불렀던 노래는
아니었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공부를 잘하는 동급생 중엔 부모가 힘을 써서 다른 학교,
즉 혜화학교나 효제학교로 옮긴 애들도 있었는데 나는 그들이 부럽다는 생각은
없었다. 어린 나이에도 '부모가 힘을 써서'하는 학군 이동이 왠지 떳떳하지 않게
느껴졌다. 당시에는 비참한 가난도 있었지만 그 가난 오히려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많이 나왔다. 내가 아직 어린 나이에 '부모가 힘을 써서'학교를 옮기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게 된 데에는 나의 할아버님의 영향이 컸다.

    빛바랜 사진첩
  우리 집 다락 속에는 나의 보물단지가 있었다. 그것은 나무상자 속에 들어
있던 옛날 동전인데 그중에는 제기를 만들기에 아주 좋은 구멍 뚫린 동전도
많았다. 당시에 무게도 묵직하고 구멍 뚫린 동전을 찾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습자지와 함께 그 동전으로 만든 제기는 골목에서 자랑거리가 되었다. 또
나는 제기차기 선수이기도 했다. 제기를 누가 더 잘 차는가는 대개 삼세 가지라
하여 세 가지 방식으로 찬 숫자를 합한 것으로 결정되었다. 한 발로 땅을
짚어가며 계속 차는 '땅짚기'와 땅을 짚지 않고 차는 '헐렁이' 그리고 오른발과
왼발 교대로 차는 '우지좌지'의 세 가지 방식이었다. 지금 내 기억으로 삼세
가지에 2, 3백은 능히 찼던 것 같은데 '헐렁이'가 제일 어렸웠다.
  살금살금 기어들어가곤 했던 다락 안에는 내가 무엇인지 알 수 없어서 근접할
수 없었던 물건들이 많이 있었다. 옛날 서책과 붓통, 벼루 등과 항아리들도
있었는데 처음에는 단지 아득한 옛날 것으로만 보였으나 차츰 그것들이
할아버지 선대의 유품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당신의
할아버지께서, 이씨 조선이 망하고 한일합방이 있은 후에 일본왕이 주었다는
작위를 물리친 몇 안되는 분 중에 하나라는 것을 몇번이고 반복하여
말씀하셨다. 국민학교에 다니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하는 노래를 배우고
있던 때, 할아버님의 그 말씀이 큰 무게가 되어 내 마음속에 각인되었음이
틀림없다.
  나는 설날이 되면 세배를 꼭 가야 할 곳이 한 군데 있었다. 동네 친구들하고
놀고 싶은 마음에 찾아뵙고 싶지 않은 때도 있었지만 인자하시던 할아버님의
분부를 거역할 수 없던 많지 않은 경우의 하나였다. 나는 주로 혼자 가야
했는데 그곳은 이화동에 있는 상해할머니댁이었다. 서울 법대 담길이 끝나고
이화장으로 들어서는 길의 모퉁이에 상해할머니댁이 있었다. 상해할머니는
이회영 선생(이승만 정권때 부통령을 지냈던 이시영 선생의 형님)의 며느리이고
나의 할아버님의 고모님이셨다. 그 댁에서 나는 그 할머님을 비롯하여 그분의
자제분들께도 차례차례 세배를 드렸었다. 그분들 중에 그때, 당시
육군사관학교에 있거나 군에 있어서 자주 볼 수 없었던 이가 한 분 있었는데
그이가 이종찬이었다. 그가 경기고를 졸업하고 집안이 넉넉지 못해 육사를 가게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고 또 그 상해할머님이 댁에서 담뱃가게를 하셨던 것도
기억하고 있다. 결국 가난 때문에 택하게 된 길이 그에겐 오히려 권력 추구의
지름길이 되었던 셈이다. 나는 아직 어린 나이에도 그 댁의 빛바랜 사진첩을
보면서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분의 유가족이 해방된 후에 제대로 대우를 못
받고 있다고 느꼈었는데 어쨌던 이종찬씨는 나주에 그 후광의 덕을 입었다.
나는 지금도 그때를 돌이켜보면 묘한 감정에 빠지게 된다. 나에게 외가로
할아버지뻘이 되는 이종찬씨의 오늘의 모습은 당시 내가 그 댁에서 느껴야 했던
착잡한 심정과 중첩되면서 풀기 어려운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내가 지금
망명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더 그런 느낌이 드는지 모르겠다.
  나는 공부를 잘했다. 특히 산수를 잘했다. 국민학교 때는 수우미양가로 평가를
주었는데 나의 성적표는 '우수수수수'하여 낙엽 떨어지는 소리 였는데 불행히도
'미'가 하나 있었다. 미술이 '미'였다. 나는 끝내 미술에 전혀 소질이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는데, 그 못하는 솜씨에도 6^5,23^25날이 오면 '무찌르자 공산군'의
그림을 신나게 그렸다. 용감하게 생기고 수류탄을 멋지게 던지며 철모를 쓴
국군들 옆에는 탱크도 있었다. 한편 그 반대편에는 전투모를 쓴 인민군들이
있었는데 전투모 사이에 뿔도 불거져나왔고 온몸에는 검은 털이 숭숭 나와
있었으며 손톱은 붉게 칠해졌다. 내 손놀림에 인민군들은 여지없이 "으악!"하고
쓰러졌다. 나는 나주에 김지하 시인의 글에서 그가 어릴 때 생각했던
'공산주의자'의 모습이 내가 어렸을 때 그렸던 인민군의 모습과 하도 비슷하여
놀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조금 생각해보니 당연한 결과였다. 어릴 때의 나는
그렇게 그렸고 신나게 죽였다.

    사춘기의 '악의 꽃'
  나는 시험운이 좋아 경기중학교에 입학했는데 그해에 4^5,23^19를 만났다.
4월에 학년이 시작하던 때였으므로 입학식이 있은 지 2주도 지나지 않았었다.
생활지도를 담당하시던 우바보(성이 우씨인 그분의 별명이었다) 선생으로부터
국민학생의 티를 벗으라는 교육을 받고 있을 때였다. 총소리가 교실에까지
들려왔다. 학교는 곧 비상이 걸렸고 학생 하나하나에게 집이 어딘지 물어보고
시내를 통하지 않고 하교하도록 지침을 주었다. 나는 그날 삼청동 쪽으로
올라간 다음 비원 북쪽 너머 산길을 통해 명륜동으로 내려와 집으로 돌아왔다.
경기고 재학생과 졸업생 중에서도 네 명이 희생되었었다.
  당시의 기억 중에는,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에 비판적이어서 폐간당한
'경향신문'이 4^5,23^19후에 복간되었는데 그 구독 요청을 할아버지가 흔쾌히
받아들였을 때, 나는 멋도 모르고 흥분하기도 했고 처음으로 최루탄 냄새도
맡았다. 우리 집에서 가까운 이화동 로터리엔 최루탄 냄새가 항상 배어 있었다.
당시 맡았던 최루탄 냄새는 꽤 지독했는데 나중에 돌이켜보니 그때의 냄새는
아주 순덕이였다.
  이듬해 5^5,23^16이 일어났다. 처음엔 단지 박정희는 이름이 여자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곧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 의로하고..."하는 이른바
'혁명공약'을 외우라는 숙제가 우리들에게 떨어졌다. 우리는 그것을 열심히
외워야 했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에게 열심히 외우게 했던 그 '혁명공약'의
약속을 어겼다. 그들이 싫었던 것은 그들이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 의"로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했던 "군 본연의 임무로 복귀한다."는 약속을 어겼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가 어렸을 때 그렸던 국군들이 아니었다. 스스로 한 약속을
계속 어기는 그들이 싫었지만 그것은 나하곤 큰 관계가 없었다. 나는 다시
고등학교에 시험을 보고 들어가야 했고 또 사춘기를 맞고 있었다.
  영세한 출판사를 경영하시던 할아버님의 사업은 기울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집에
돌아오니 아주 많은 책이 쌓여 있었다. 왜 집에 책들이 쌓이게 되었는지 그
연유를 묻지도 않고 나는 그 책들 속에 파묻혔다. 그중에는 보들레르의 '악의
꽃'이 있었는데 그 시집 제목이 나를 사로잡았다. 박남수 역이었고, 질이 안
좋고 두꺼운 종이에 인쇄한 것이라 책도 무척 두꺼웠으며 표지도 검은
색깔이었는데 시집의 제목과 아주 걸맞았다. 나는 음울한 보들레르의 시어에
젖어 들었다.
  행복스러움도 불행스럽게 생각하고 싶어하는 사춘기에 나는 불행한 소녀를
찾고 있었다. 나는 '악의 꽃'중의 하나인 '빨강머리의 걸녀'라는 시를 읽고 또
읽었다. 그런 때였다. 내가 처음으로 '사회의 인식'에 대하여 되씹으며 생각하게
된 것은. 독자들은 기억하고 있으리라. 내가 '사회의 눈'그리고 '사회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했었다는 것을.

    "야! 거스름돈 줘!"
  나는 학교가 있는 화동까지 주로 걸어서 다녔다. 나의 통학길은 원남동
네거리, 창경원 돌담길, 돈화문 앞, 창덕여고 뒷담길을 통하여 되어 있었다. 나의
할머니께선 6년 동안 단 하루도 빼지 않고 도시락을 싸주셨다. 도시락 반찬은
주로 김이었는데 매일 새벽에 일어나 할머니께서 하신 일은 김을 재는
일이었다. 김이 아니면 날 멸치였다. 나는 왠지 볶은 멸치를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6년 동안 도시락이 들어 있는 무거운 가방을 들고 이른 아침의 상쾌한
공기를 가르며 신바람나게 걸었다. 시내버스는 탈 엄두를 못 낼 정도로 사람이
많고 이용한다고 해도 집에서 멀리 떨어진 원남동에서 타서 또 학교에서 떨어져
있는 안국동에서 내려야 하기 때문에 실제로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학교 갈 때는 거의 버스를 타지 않았지만 집으로 돌아올 때는 가끔 이용하였다.
그것은 학교가 끝나 집으로 돌아오면서 안국동까지 급우들과 재미있게 떠들며
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안국동까지 내려가려면 덕성여중고를 지나야 했는데
중학생 때 한번은 한 여고생이 내 모자를 들고 학교 안으로 들어가버려
난감했던 적도 있었다. 이유는 내가 "너무 귀여워서"였다. 모자를 도로 찾기는
했지만 그 일 후에는 조금 조심하며 그 앞을 지났다. 물론 고등학생이 된
뒤에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날은 도서관에서 늦게까지 소설책을 읽고 밤 10시가 다 된 뒤에 학교를
나왔다. 이런 날은 혼자라도 버스를 이용했다. 밤길을 혼자 타박타박 걷기도
뭐했고 버스에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안국동에서 버스를 탔다. 그때
그 소리를 들었다.
  "야! 거스름돈 줘!"
  당시 학생의 버스값은 회수권으로 사면 한 장에 2원 50전이었지만 돈으로
내면 3원을 내야 했다. 대학생 교복을 입은 학생이 10원짜리를 냈는데 버스
차장이 거스름돈 줄 것을 잊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처음에 그 소리를
무심코 들었다. 그리고 또 무심코 보았다. 버스 차장이 "여기 있어요"하고
거스름돈을 주고 피곤한지 차문에 기대 눈을 감고 있었다. 바로 그때,
'빨강머리의 걸녀'를 자주 읽고 간직하고 있던 "진열창 너머 이십구 쑤우짜리
값싼 보석을 들여다보는 빨강머리의 걸녀와 그녀에게 마냥 짖어대는 잔망스런
강아지"의 이미지가 돌이켜지면서 갑자기 그 버스 차장이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바로 대학생이 했던 "야! 거스름돈 줘!"하던 소리가 다시
살아났고 귓속에서 점점 커졌다. 원남동에서 버스를 내린 나는 이런 질문을
하며 걸었다
  그 대학생은 반말을 했다. 그녀는 반말을 듣고도 잠자코 있었을뿐 아니라
존대말로 대꾸했다. 그 두 사람의 나이는 비슷했다. 그 대학생은 그 차장과 같은
나이 또래의 여대생에게 반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여자가
버스차장인 줄 알았다 하더라도 버스차장의 유니폼을 입지 않았고 길에서
만났다면 반말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설사 버스차장의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하더라도 버스 안에서 손님과 차장으로 만난 것이 아니라 길에서
만나 길을 묻게 되었을 때라면 반말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대학생은 어떻게 스스럼없이 반말을 할 수 있었을까? 또 그 버스차장은 그
반말을 듣고도 왜 당연한 듯 받아들인 것일까? 그리고 나 또한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왜 무심코 듣고 지나쳤을까?
나는 그때 사회를 지배하는 집단적인 무의식과 그 편견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당시의 나에게는 그 생각을 더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은
없었고, 다만 무의식적인 편견은 의식적인 편견에 비하여 무의식이기 때문에
더욱 수정하기 어려우리라는 것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후에 다는
누구에게도 반말을 쓰기 어려워했고 또 이 경험을 자주 돌이켜 생각하였다.
스무살 때 이 경험을 돌이켰을 때 나는 어지럼증과 아득함을 느껴야 했다.

    경찰서 신세 지다
  64년과 65년의 두 해 동안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박정희 정권의 대일 굴욕
외교에 반대하는 시위가 있었다. 그때 경기고도 시위에 참가하였는데 64년에는
그 플래카드에 "이것이 민족적 민주주의이더냐?"라고 써서 당시 정권측, 특히
김종필이 주장한 바 있는 '민족적 민주주의'를 꼬집었던 기억이 나고 또 시위의
주동 멤버 중에는 나보다 일년 위이고 당시 3학년이던 신동수 선배와 지금은
고인이 된 조영래 선배가 기억난다. 나는 3학년 때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처음으로 경찰서 신세를 지게 되었다. 종로경찰서였는데 몇시간 잡혀 있다가
이른바 훈계 방면으로 나왔다.
  결국 '민족적 민주주의'를 주장했던 그들은 3억 달러에 민족의 한을
팔아버렸다. 점령기간이 채 4년도 안되었던 필리핀에게 일본은 5억 5천만
달러를 배상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물론 그 한을 돈으로 계산 할 수
없다 하더라도 팔아먹는 데에 급급한 것은 사실이다.
  당시의 나는 이른바 '한일 국교 정상화'의 의미를 깊이 있게 알지 못했다.
다만 일본에 대하여 굴욕적인 자세를 취했다는 것에, 그리고 박정희가 만주군
장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에 울분이 터졌을 뿐이다. 설사 내가 그 역사적
의미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해도 천착할 여유가 없었다. 고3으로 대학입시가
바로 코앞에 있었다. 그리고 나는 문과 지망생이 아니라 이과를 지망하여
공대를 목표로 삼고 있었다. 그때의 유행은 문과는 상법대 그리고 이과는
의대나 공대가 목표였는데, 영어보다 수학을 더 잘했던 나는 별 생각 없이
이과를 지망했다.
나는 또 시험운이 좋아 서울 공대 금속공학과에 합격했고 자랑스럽게 그곳에
갔던 것이다. 서울 공대 배지가 달린 새 교복을 입은 어깨엔 힘이 들어 있었다.
적어도 갈 때까진 그랬다.

    그곳, 비극의 만남
  그곳, 15대조 만전 할아버지 이래의 선산이 있으며 홍, 윤, 채의 세 성씨가
마을 이루어 대대로 살아온 크지 않은 마을, 어려서 서너 번 찾아갔을 때
포근한 정감마저 주었던 곳, 대동리라는 이름보다 '황골'이라는 이름이 훨씬 더
잘 어울리는 동네, 그곳에서 나는 나의 기억 속에 없었던 자신을 발견했다.
단물이 다 빠진 멸치를 허겁지겁 먹어치우도록 허기지고 아주 어렸던 나
자신을.

그해 전쟁이 일어났다.
  서울에서 먹을 것을 찾기 힘들었던 나의 아버지는 나의 어머니와 나와 나의
동생 세 식구를 그곳에 있던 작은아버지에게 맡기고 딴 곳으로 떠났다.
무정부주의의 경향을 갖고 있었던 나의 아버지는 마땅히 갈 곳도 없었지만 머물
곳도 없었다. 열아홉 나이에 시집와 바로 나를 가졌던 나의 어머니는 당시 20대
초의 아주 젊은 엄마였다. 혼자서 만 두살 반인 나와 돌도 차지 않은 내 동생을
데리고 그곳에 있었다.
  인민군 치하의 그곳에서 이른바 인민재판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런저런
죄명으로 몇명이 처형되었다. 마을의 인심은 흉흉했다. 먹을 것도 없었다.
이윽고 찌는 듯한 더위가 가시고 인민군이 밀려올라갔다. 즉시 보복이
시작되었다. 우선 일곱 명이 몽둥이로 타살되었다. 그외에도 이른바 반공
청년들에게 맞아 죽은 사람들 중에는 우리 일가의 종손인 나의 오촌 당숙이
있었다. 그는 마을의 인민위원장이었다. 피를 본 마을사람들은 더욱더 피에
굶주리게 되었다. 그리고 복수의 피였기에 또다른 복수의 씨앗을 아예
없애버려야 했다. 오촌 당숙의 가족은 물론 먼저 처치한 일곱 사람의 가족도
하나하나 없앴다. 어린애도 예외가 없었고 남자 여자 할 것없이 할머니
할아버지까지도 죽였다. 그리하여 그 크지 않은 마을에서 80명 가까운
마을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나의 오촌 당숙과 가까웠던 그 대부는 그 일 직전에 인민군으로 나가 있어서
화를 면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 어머니, 그의 아내, 그리고 어린아들까지 모두
죽었다.
  큰 광 속에 갇힌 채, 마을사람들에 의해 죽이느냐 살리느냐의 심사의 대상에
들어 있던 나의 작은아버지는 간신히 화를 면했다.
  나는 그곳에 있었다. 나의 동생은 그곳에서 제대로 못 먹고 병들어 죽었다.
죽는 병이 아닌 병에 걸려 죽었다. 바로 옆에 있었던 나의 기억에도 남지 못한
채. 사내아이인데도 너무 예쁘게 생겨 옥토끼라고 불렸다는 아이. 그 모습은
나에게 없고 다만 '민화'라는 이름만 남았다.
  옥토끼를 잃은 젊은 나의 어머니는 혼을 뺏겼고 나를 키울 자신도 잃었다.
나의 아버지는 이쪽저쪽으로 피해다니고 있었다. 전쟁은 우리 네 식구를
갈래갈래 갈라놓았다. 그리하여 결국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맡겨진 나는 단물이
다 빠진 멸치를 허겁지겁 집어먹었다. 한편 마을 사람들은 그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곳에 계속 살았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대부도
그곳에 살았고 작은아버지도 그곳에 살았다. 내가 그곳에 갔던 날도 살고
있었고 그 뒤에도 계속 살았다. 마을 사람 모두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옛날처럼 살았다. 죽은 사람만 죽어 있었다. 아무도 그들의 죽음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다. 아무도.

    건널 수 없는 강
  사람은 잔인했다. 사람은 원래 잔인했다. 증오의 이데올로기로 부추기는
것으로 충분했다.
  사람은 죽이는 데 잔인했고 또 사는 데도 악착같았다.

  작은 아버지댁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아버지와 나는 그 대부의 초가집으로
마실을 갔다. 한눈에도 몹시 가난해 보이는 살림살이였다. 그 대부는 반색하며
우리를 맞았다.
  "딸만 셋이여."
  탁주 두어 잔이 오간 뒤에 그 대부가 말했다. 졸지에 혼자가 된 그는 다시
그곳에서 새 장가를 들었다. 그리고 딸 셋을 얻었다. 아들이 없는 것이 여간
섭섭지 않다는 듯 웃는 표정이 오히려 허허로웠다.
"얘가 바로 그때 그애란 말인가?"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 죽은 그의 아들의 모습이 비쳤던 것일까? 그의
눈가에 잠깐 이슬이 스치는 듯하기도 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농사짓던 놈이 갈 데가 어디 있는가? 그리고 그 넋들이라도 기키고 있어야지
내가 떠나면 그 누가 지켜주겠나?"
  나의 작은아버지도 "하루에도 열두 번씩 떠나고 싶었지만" 떠날 수
없었노라고 했다.

  그리하여 나는 본 것이다. 돌쟁이 동생의 손을 잡고 이쪽을 향해 손짓하는
바로 나 자신을 본 것이다. 그러나 그 나와 그 나를 바라보는 나 사이엔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그 강을 건널 수 없었다. 나는 사랑을 배우기
전에 증오를 배웠다. 강의 저쪽은 증오의 대상일 뿐이라고 배웠고 또 그렇게
철석같이 믿어왔는데, 바로 거기에도 내가 있었다. 나는 분열되었다.
  나는 새로 발견한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없었다.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해체되었다.
  그곳을 떠나 서울에 도착하기도 전에 나는 이미 빈 껍데기가 되어 있었다.
그때까지 간직하고 있었던 그 모든 꿈도 가치관도 그리고 KS마크도 다
허물어졌다. 자존심도 또 이른바 엘리트 의식도 그 모든 것과 함께 사라졌다.
자신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자존심은 커녕 자존심도 갖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나의 방황은 시작되었다.

  나는 가끔 동생의 이름과 나의 이름을 돌이켜 생각한다. 이름이 사람의
운명을 결정한다고는 믿지 않지만 동생과 나의 이름이 잔인한 장난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우리 항렬의 돌림자는 화자였다. 틀림없이
평화주의자였을 젊은 나의 아버지는 첫째인 내 이름을 세계평화라 하여 세화라
지었고 둘째의 이름을 민족평화라 하여 민화라 지었다. 한국전쟁에 민족평화는
죽었고 또 세계평화는 방황하다 끝내 이렇게 온 빠리의 길을 누비고 있지
않은가. 아버지는 우리들의 이름을 잘못 지었다는 생각을 하신 적이 있을까?
나는 감히 여쭈워보지 못했는데, 틀림없이 허허롭게 웃기만 하실 것이다.

    11 택시 손님으로 만난 한국인들
    그래도 역시 빠리
  그렇다. 빠리는 관광도시이다.
  빠리지앵에게 프랑스에서 볼 만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금방 "그건
빠리지"하고 대꾸한다. 어떤 사람은 빠리와 베르사유와 몽 쌩 미셸의 세가지를
꼽기도 한다.
  빠리 서남서쪽으로 약 20킬로미터쯤 떨어진 베르사유 궁은 루이 13세때
사냥을 위한 간이궁으로 시작된 것을 절대주의의 상징인 태양왕 루이 14세가
일생을 걸고 건설하였고 1789년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백여 년간
프랑스의 수도가 되었던 곳이다. 화려한 궁으로 유명하고 정원의 규모 또한
대단하여 관광객들의 경탄을 자아내게 하는데 다른 한편 프랑스대혁명이 왜
일어났는가를 알고 싶으면 제일 먼저 베르사유에 가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몽 쌩 미셸은 빠리에서 4백 킬로미터 서쪽, 브르따뉴와 노르망디 경계의
육지 가까이 있는 대서양상의 섬이었던 곳인데 지금은 길을 놓아 육지와 연결이
되었다. 섬 꼭대기에 있는 수도원과 주위의 성벽과 돌로 된 건축물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특히 해질녘에 보면 장관이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첫번에 꼽히는 것은 역시 빠리다. 도시 전체가
하나의 예술품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이고 누구나 와보고 싶어하는
곳이다. 프랑스인들도 샹젤리제 거리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 중의
하나라고 자랑하는데 이 샹젤리제 거리에는 실제 프랑스인들보다 관광객들이
항상 더 많은 것 같다.
  빠리는 또한 국제도시이다.
  유럽의 다른 나라들은 물론 아프리카와 중동 나라들의 외교 로비활동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곳 중의 하나가 빠리이고 다른 나라들도
국제무대에서 빠리가 차지하는 비중을 무시 못한다. 빠리의 한국대사관도
유럽과 아프리카를 통틀어 제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국제 연대활동을 하는 비정부기구도 많이 있고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유네스코)도 빠리에 있다.

    영어와 미국의 대중문화
  이렇게 관광도시이며 국제도시인 빠리의 택시운전사는 당연히 세계의
5대양 6대주에서 온 손님과 만난다. 프랑스인 외의 외국인 손님은 유럽
사람이 많지만, 나라별로 치면 일본 사람이 단연 압도적이다. 특히
택시승객은 다른 외국인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은 것 같다. 그만큼
일본인이 쏟아져들어오고 또 택시를 많이 이용한다. 여기에 미국, 캐나다의
북미 사람들, 항상 시끄러워 곧 알아차릴수 있는 남미인들 그리고
아프리카인, 호주인 등 거의 모든 나라 사람을 만날 수 있다. 그중에는 처를
서넛 거느린 중동 사람도 있는데 이들은 택시를 두 대 타야 하는 불편이
있다. 
  나의 영어가 일반 대화는 통할 정도가 되기 때문에, 영어를 할 줄 아는
외국 손님들의 질문공세를 많이 받았다. 그들은 빠리에서 느낀 불만을 나에게
퍼붓기도 했다. 특히 미국이나 영국, 아일랜드 등 영어군에서 온 사람들의
불만은 한결같았는데, 프랑스에서 영어가 거의 통하지 않기 때문에 나온
것들이었다. 이 불만은 북구 사람들이나 일부 독일인처럼 영어를 할 줄 아는
거의 모든 사람에게서도 나왔고 하다못해 나보다도 짧은 영어를 구사하는
어는 일본인도 영어가 안 통한다고 아우성을 쳤다. 
  실제로 프랑스인들은 영어를 잘할 줄 모르고, 또 할 줄 알아도 말하지
않으려 한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영어로 길을 물어보면, 그 말을
알아들었으면서도 대답은 프랑스말로 한다. 이렇게 영어와 프랑스말이
교차하는 것을 자주 볼 수가 잇는데, 그 이유는 프랑스인들이 일반적으로
영어가 서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들은 "국제도시인 빠리에서 영어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빠리지앵의 수치가 아니냐"고 힐난하는 말에 대뜸, "빠리에
오려면 기초적인 프랑스말은 해독하고 와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받아친다.
  프랑스인들의 자기 나라 말에 대한 사랑과 집념은 대단하여, 최근에 테니스
경기의 용어이며 그동안 영어를 그대로 썼던, '타이 - 브레이크'를 '죄
데시지프'로, '타임!'을 '르쁘리즈'로 고쳤을 정도이다. 이들의 이와같은 나라말
사랑은, 영어에 대산 경쟁심리가 자존심 높은 그들을 자극한 탓도 있고, 다른
한편 지식인들의 끈질긴 노력의 결과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지식인들과 특히 문화인들은 미국의 질 낮은 대중문화에 대한
강한 경각심을 갖고 있다. 이들에게 질 낮은 미국 문화의 대변자는 "람보"와
"로키"의 실버스타 스탤론이다. 프랑스 텔레비전의 허수아비나 인형 풍자극
프로그램에서 제일 자주 등장하는 미국인이 바로 실버스타 스탤론인데, 그
프로를 통하여 프랑스의 문화인들이 미국 문화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충분히 감지랄 수 있다. 그 프로그램은 특히 돈을 많이 들여
눈요깃거리로 일반 관객을 끌고 있는 저질의 미국 영화의 범람을 막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강하게 담고 있다.
  이러한 프랑스 문화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자존심은 최근에 빠리 근교에
새로 만들어진 '유러 디즈니랜드'를 별로 찾지 않는 것으로도 확인이 되었다.
"독일어를 듣고 싶으면 유러 디즈니에 가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프랑스인들이 많지 않다. 문을 열 때의 요란했던 기대와 달리 계속 적자를
보고 있어, 처음 150프랑 정도이던 주식값이 최근 단돈 10프랑으로 떨어졌고
곧 문을 닫게 될 것이라는 말이 돌고 잇는데 유러 디즈니랜드측에선 근래
불어닥친 불경기와 함께 "프랑스인들이 이렇게까지 미국 문화를 무시하고
배척할 줄은 몰랐다."고 한탄하고 있고, 급기야 디즈니랜드의 백설공주 등이
원래 유럽 문화에서 온 것이지, 미국 문화에서 온게 아니라고 선전하고, 또
빠리지앵들에게만 입장료 특별 할인기간을 설정하는등 프랑스인들의 관심을
끌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형편이다.
  프랑스인들의 자기 나라 말 사랑과 자기 문화에 대한 긍지가 프랑스를
프랑스답게, 이른바 '문화국가'에 가장 가까운 나라로 만들었을 것이다. 이점을
우리는 시급히 그리고 그 몇배로 배워야 할 것 같다.
  이런 곳이니 영어를 좀 한다고 의사소통이 되거나 혹은 대우 받기를
기대했다가는 큰코다치기 십상이다. 따라서 서툰 영어를 할 줄 아는
택시운전사를 만났다고 외국 손님들은 반가워했고 프랑스인들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았던 것이다.
  나의 부족한 영어가 택시운전 수입에 도움이 되기도 하였다. 의사소통이 되기
때문에 나에게 두세 시간 동안 택시 대절을 요구하는 손님들이 종종 있었다.
그중에서 일본인이 제일 많았고 북구인도 있었다. 이들은 시간이 많지 않아
빨리 빠리의 겉이라도 보고 가려는 사람들인데, 시간당 160-180프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아주 괜찮은 일이었다. 특히 손님이 없을 때, 이런 사람을 만나게
되면 행운이었다. 그런가 하면 어느 일본 여자와 덴마크 여자에게서 은근한
유혹(?)을 받았던 우스운 일도 있었는데 빠리에 온 그녀들이 들떠 있었기도
했겠고 한편 말이 통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기도 했다.

    한잔 마시라는 팁
  한편, 빠리의 택시운전사들에게 미터기에 나온 요금의 10-15프로의 팁을 주는
관행이 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특히 임차운전자나 봉급운전자는
실수입에서 팁이 차지하는 비율이 30프로 이상도 될 수 있기 때문에 무시할 수
없다. 나도 차마 팁에 신경을 쓰겠는가 했는데, 자연 신경이 쓰이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이런 처지에 세계 각 나라 사람들을 손님으로 맞게 되니 자연스럽게 각나라
사람별로 팁에 대한 관행의 차이를 알게 되었다. 우선 가장 정확하게 팁을 주는
사람들은 프랑스인들인데 나이가 지긋할수록 15프로에 가깝다. 그리고
비즈니스맨들은 15프로를 넘는 경우도 흔한데 이들은 반드시 영수증을
요구한다. 그 다음이 영미와 북구 사람들로 대략 10-15프로 선이다. 독일인은 안
주는 경우가 많고 줄 때도 짠 편이다. 그리고 국적에 관계없이 일반적으로
남자가 여자보다 후한 편이다. 또한 이딸리아나 스페인의 남유럽 사람과 남미
사람들은 거의 주지 않는다. 어떤 동료는 손님이 많을 때, 시끄러워 곧 알 수
있는 남유럽이나 남미 사람들을 태우지 않기로 작정할 정도로 그들에게서는
팁을 기대하지 못한다. 이런 차이는 결국 각각 그 나라의 팁에 대한 관행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한편 프랑스인들도 젊은 층은 팁을 거의 주지 않는 게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이들은 대개 지하철이 끊어진 뒤, 할수 없이 택시를 탔을
뿐으로 택시값도 아까운데 필요없는 허세를 부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한편 10-15프로의 비율에 관계없이 아주 특이한 사람들이 하나 있는데, 바로
일본 사람들이다. 이들이 주는 팁은 10프랑으로 균일하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는
20-30프로가 될 때도 있다. 하나의 예로 미터기에 34프랑이 나왔을 때, 아주
후한 프랑스인도 40프랑을 내는데, 일본인은 우선 40프랑을 내고 6프랑을
거슬러 받은 다음, 다시 10프랑을 팁으로 준다. 나는 이들의 10프랑 팁의 철칙이
그들의 빠리 관광안내서 때문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거기에는
호텔방에 10프랑을 놓고, 택시운전사에게 10프랑 정도를 팁으로 주어야 한다고
씌어 있었다.
나에게 예상외로 많은 팁을 주었던 사람이 셋 있었다. 한 사람은 처를 셋씩이나
데리고 있어서 일행이 하나의 택시에 같이 못 타 쩔쩔매던 중동 사람이었고,
두번째는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택시운전을 한다는 사람이었다. 국경이 달라도
또 인종이 달라도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끼리는 자연 동료의식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서로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인식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 세번째는 일본 사람이었는데 많은 팁을 받게 된 사연이 아주
특이하다. 가까운 주행거리에서 요금이 23프랑이 나왔는데, 250프랑을 지불하고
잔돈은 가지라는 시늉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잠깐 당황했는데 알고 보니,
미터기에 23.00프랑으로 되어 있는 것을 230.0프랑으로 잘못 본 탓이었다. 그는
프랑스말도 영어도 못하는 사람이었는데, 내가 일본어의 숫자는 겨우 알고
있어서, "니쥬산 프랑"이라고 하자,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그의 떠드는 소리와
표정으로 그때까지 계속 열 배로 택시요금을 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백 프랑을 내 손에 쥐여주었다. 나는 나중에 일본 동경의 택시요금이 무척
비싸다는 것을 알고, 그가 잘못 본 이유를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빠리 택시운전사들에게 중요한 관행인 팁은 프랑스말로는 '뿌르부아르'로, 즉
'마시기 위한'의 뜻인데, 팁이라는 말보다는 솔직하고 재미있다.
  이처럼 외국인에게 뜻밖의 팁을 받은 적도 있었지만, 외국인 때문에 큰
손해를 본 적도 한번 있었다. 꽁꼬르드 라파예뜨 호텔에서, 한 인도 상인을
태우고 샤를르 드 골 공항으로 갔을 때의 일이다. 거의 도착할 즈음에 갑자기
돌아가자고 했다. 가방 하나를 호텔에 그대로 놓고 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비행기를 놓치겠다고 울상을 지었다. 급하게 호텔로 돌아와 가방을 찾고 다시
순환도로를 달렸는데 갑자기 바로 앞에서 번쩍했다. 나는 아차 싶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속도위반 레이더 장치에 걸린 것이다. 순환도로의 속도제한은
80킬로미터인데 나는 110킬로미터 정도로 달렸었다. 그 손님은 못 본체
시치미를 뗐지만 그리고 비행기를 탈 수 있었지만, 나는 한달 뒤에 1350프랑의
벌금을 내야 했다. 그것이 내가 택시를 하면서 낸 처음이자 마지막 벌금이
되었다. 그때도 만약에 경찰에 붙잡혔으면 똘레레될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는데 기계는 몰인정할 뿐이다. 나는 그때와 같은 상황이 또 있을 경우, 또
속도위반을 해서라도 손님을 위해 달릴 것인지를 스스로 정하지 못했다. 그것은
그때 그 인도 사람이 1프랑의 팁도 주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워낙
왔다갔다하느라 요금이 많이 나왔으므로, 그러나 모른체 시치미를 땐 것이 내
기분을 언짢게 한 것은 사실이다. 다행스럽게 그 사람 다음으로는 그렇게 바쁜
사람이 없었다.

    한국인 손님들
  이렇게 별의 별 나라의 사람들을 다 태웠는데, 한국 사람을 태우지 말라는
법이 있을 수 없다. 나는 꼭 두번, 아니 세 번 한국 사람을 태웠다. 내가 태운
동양인 중에 한국인이 더 있을 수 있었겠지만 분명히 한국 사람인 것을 알게 된
것은 세 번이었다. 한번은 내가 물어보아 알게 되었던 경우였고, 두 번은
손님끼리 우리말을 함으로써 자연 알게 되었다.
  내가 물어보아 한국인이라고... 한국인의 뿌리를 갖고 있다고... 알게 된
사람들은, 법적으로는 프랑스 사람들이었고 또 우리말을 하나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에게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었던 경위는 이러했다.
  밤늦게 택시에 올라탄 동양인 청년 둘이 뒷자리에서 계속 프랑스말을 떠들어
나의 귀를 거슬리게 하였다. 동양인들이 그처럼 프랑스말을 유창하게 하는 것은
자기 나라 말을 잘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었고, 자연 우리말보다 프랑스말을
몇배나 잘하는 나의 아이들에 대한 걱정도 겹쳐서, 그들에게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었던 것이다.
  그들은 18년 전 각각 두살과 여섯살 때 프랑스로 입양되어 온 한국인
형제였다. 결국 한국 사람끼리 프랑스말로 주고받아야 하는데, 그래도 내가
한국인이라고 하니까 몹시 반가워하며, 열심히 그리고 거침없이 자기들의
얘기를 했다. 지금까지 양부모 밑에서 잘 자랐고 교육도 잘 받아 둘 다 장래가
열려 있는 건축공부를 하고 있고, 또 형은 이미 일을 시작했다고 했다. 잠깐
동안의 얘기로도 그들이 자신에 넘쳐 있다는 것과 또 그늘 없이 자랐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에겐 한국에 남아 있었던 것 보다 차라리 떠난 것이 잘된
일이었다고 나 스스로 인정해야 했다. 내가 한국에 대하여 알고 싶거나
우리말을 배울 생각이 없느냐고 물으니, 자기들도 자기들의 뿌리에 대하여 알고
싶고 또 한국말도 하고 싶지만 그 방법이 마땅한 것이 없다고 했다. 형은 큰
뒤에 완전히 잊어버린 한국말은 다시 배울 생각을 스스로 가져보기도 했지만
쉽지 않았다고 하며, 혹시 빠리에서 한국말을 배울 길이 없느냐고 묻기도 했다.
빠리에 한국인 학교가 있지만 그들처럼 이미 컸고, 또 한국말을 한마디도
못하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곳은 없었다. 그래 내가 한국에 가서 배울 기회를
가져보라고 했을때, 형의 말은 나의 가슴을 찔러 아프게 하였다. 그의 말은
이러했다. 
  "한국이 우리의 뿌리인 것도 알고, 또 가보고 싶기도 하지만, 한국인들이
우리들에게 어떻게 했는지 아세요? 우리가 입양되어 올 때, 우리가 형제인데도
그들은 우리를 따로따로 다른 양부모에게 입양을 시켰던 거예요. 나는 그때
여섯살이었는데 그 사실을 빠리 공항에 내려서야 알 수 있었어요. 내가
울고불고 내 동생을 붙들고 놓지 않자, 내 동생을 입양하려던 양부모가 양보를
해서 우리는 같이 살 수 있었어요. 어떻게 한국에선 우리 둘을 떼어놓을 생각을
할 수 있지요?"
  나는 할말이 없었다. 프랑스인들은 당연히 함께 살게 해야 한다고 믿는
형제를, 정말 그들은 어떻게 떼어놓을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같이 프랑스에
보내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고아들이니까, 그래도 된다는 뜻이었을 까.
우리들은 갑자기 모두 프랑스에만 수천명의 한국 출신 입양아들이 그 뿌리를
잃어버린 채 자라고 있다는 말도 필요없겠다.
  나의 두번째 한국인 손님은 독일에 유학중인 학생부부였는데, 스페인에
갔다가 돌아가는 길에 기차를 갈아타기 위하여 택시를 탔던 것이 나와 만나게
된 인연이 되었다. 우리는 별말없이 헤어졌다. 빠리에서 유일하게 택시운전을
하는 한국 사람에 대하여 궁금증도 있을 만한데 그들은 나에게 말을 붙이기를
꺼려 했다. 한국 사람 사이에 서로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의 분위기가 작용하지
않았기를 발랐다.
  세번째 한국인 손님들에겐 끝내 내가 한국인이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
사연이 재미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이들에게서 한국인의
벌거벗은 일면을 볼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거침없이 말을 했고 나는 한마디도 빠뜨리지 않고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상황은 나에게 아주 묘한 느낌을 주었다. 하긴 빠리에서 단
하나뿐인 한국인 택시운전사를 만나 그들이 재수 없었다고 할 만하다. 그들은
잠깐 동안이지만 나에게 발가벗긴 꼴이 외었는데 그 사실조차 모르고 내렸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나는 이 세 사람이 하던 말을 되도록 그대로 옮겨놓으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말이 보여주는 그림은,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 많은 한국인의 모습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 사람이었는데, 그중 두 사람은 40여세쯤으로 무슨
회사의 간부들 같았고 한 사람은 30여세로, 그들의 하급 직원이었다. 편의상
나이 많은 사람 순으로 각각 A, B, C라고 붙여보겠다. 그들은 라 데팡스 근처에
있는 빵따 호텔에서 리도 쇼를 보러 샹젤리제로 가는 사람들이었다. 시간은 밤
12시가 가까웠다. 택시의 문이 열렸다.

  A: 아니, 세 사람이 이렇게 꼭 끼여앉아야 하는 거야? (나는 이때 움찔했다.
우리말이 생생하게 들려왔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그의 불평
섞인 말투는 나로 하여금 한국 사람이라는 말을 하지 못하게 했다. )
  C: 네, 여기선 택시 앞자리에 사람은 안 태운대요. (나에게) 리도! 리도! (그는
이렇게 행선지를 말했다. )
  A: 아니 그러려면 차체가 좀 큰 차로 택시를 하든지, 이 차 쏘나타보다도
작지 않아. (B에게) 어때? 더 작지?
  B: 글쎄, 내가 뭐 뒷자리에 앉아봤어야지. 내 차보다 작아 보이기도 하고.
(아마 B의 자가용이 쏘나타인 모양이었다. 그때 나의 택시는 뾔조 405였다.)
  A: 원 이거 좁아서... 그러니까 돈을 벌어야 해. 돈을 벌어서 이럴 때 리무진을
타야지 이거 원 창피해서. (사이) 근데 이 친구 월남애지? (분명 나를 두고 하는
말이다.)
  C: 글쎄요. 여기에 인도지나 사람이 많으니까요. 옛날에 식민지였으니까요...
  A: 아냐, 내 말이 맞아. 월남애가 틀림없어. 깡마른게 월남애가 틀림없다구.
  B: 보트 피플 아냐?
  (나는 이때 일부러 휙 뒤돌아보았다. 아주 잠깐 동안. '보트 피플'이라는 말은
영어니까 그 말만은 알아들었다는 듯이.)
  B: (작게) 내 말이 맞아. 보트... 이 친구가 내 말을 알아들은 것 같지?
  A: (크게) 뭘 뒤돌아봐, 임마. 운전이나 잘할 것이지. (나는 그가 왜 큰소리로
말했는지 잘 안다. 알아들었으면 어쩌겠느냐는 뜻이 들어 있을 터이다. )
  C: 히히.
  B: 그래도 이 자식들 출세했어. 빠리에서 택시운전을 다 하고.
  A: 그러게 말야. 용 됐지, 용 됐어. (사이) 근데, 리도 쇼 말야. 아래는 안
벗지?
  C: 그래도 위는 다 벗는대요.
  A: 위는 봐서 뭘 해. 아무래도 우리 잘못한 것 같아. 차라리 라이브 쇼를 보러
가는 건데.
  B: 아, 그렇게 가고 싶으면 가지 뭐, 내일도 있잖아.
  A: 근데 말야, 여기도 에이즈가 심하지?
  C: 그런가 봐요.
  B: 왜, 백마 생각이 나서 그래?
  (이하 몇마디 생략)
  A: 이 자식 왜 이렇게 천천히 가. (내가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느라고
천천히 달렸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내가 천천히 가고 있다는 말을
알아들은 체할 수 없었다. 나는 오히려 더 천천히 갔다. 나에게 악동의 취미가
되살아났는지 모르겠다. )
  이 자식 이거, 여기 시간병산제라더니 시간 끌어서 돈 벌려고 하잖아. (빠리의
택시가 시간병산제이긴 하지만 시속 25킬로미터 미만일 때만 시간이 계산된다.
나는 그때 시속 40-50킬로미터로 달리고 있었다.) 야, 이놈한테 팁 한푼도 주지
마. 이런 놈에게는 한푼도 줄 필요가 없어.
  B: 이놈이 지금 돌아가고 있는 건 아냐?
  C: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저기 개선문이 빤히 보이잖아요.
  이렇게 우리는 리도 쇼 앞까지 동행하였다. 요금이 48프랑이 나왔다. C가
50프랑짜리를 내고 2프랑을 거슬러받더니 1프랑을 팁으로 주었다.
  내가 이렇게 자세히 그들의 말을 그대로 옮겨놓는 까닭은, 이를 통하여 나와
당신의, 우리 한국 남자의 솔직한 일면을 거울로 들여다보고, 한번쯤은 곰곰이
생각해보자는 뜻에서였다. 어찌 보면 별로 잘못된 것이 있지도 않다. 그렇지만,
내가 미리 한국인이라고 밝히지 않은 탓으로 돌리려 해도 씁쓸한 뒷맛이 남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12 빠리를 누비며
    빠리지엔느의 속임수
  나는 초보 택시운전사 때 두 차례나 빠리지엔느의 속임수에 넘어간 적이
있다. 두 경우 다 혼자 탔는데 이 묘령의 여자들은 얼마쯤 가다가 어느 건물
앞에서 잠깐 볼일을 보고 나올 테니 기다리라고 하곤 뒷문 등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녀들은 볼일이 있었던 게 아니라 이미 도착했던 것이다.
순진한(?) 나는 그것도 모르고 "왜 이렇게 안 나오지?"하고 한참 기다리다 속은
것을 알게 되었는데 기분이 몹시 언짢았다. 둘 다 멀쩡하게 차려입었는데 돈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어리숭해(?) 보이는 에뜨랑제 택시운전사를 보니까
자기들의 잔꾀가 통할 것으로 믿었음에 틀림없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더
분한 생각이 들었다. 원래 이런 경우를 위해 택시 규정에는 "그때까지의 택시
미터요금과 기다리는 요금 약간을 합한 금액을 미리 요구할 수 있다"고 되어
있었다. 나는 그같은 요구를 하지 못했는데, 미리 돈을 내라고 요구하는 것은
결국 손님을 믿지 못하겠다는 뜻이 되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두
차례나 분하게 당하고 나니 '다음부턴 꼭 미리 받아내야지'하고 스스로
다짐했다. 그러나 그후에도 미리 요금을 내라고 말이 입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스스로 바보 같다고 느꼈지만, 하편 1프로가 될까말까 한 사람 때문에 99프로에
이르는 선의의 사람들을 모두 의심할 수 없는 일이 아니냐며 자신의
바보스러움(?)을 위로하였다. 다행히 그후에는 그 1프로에 해당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아마 내가 덜 어리숭해 보였던가 보다.

    프랑스 젊은이들의 치기
  또 요금을 못 받게 되었던 일은 지하철이 끊어진 한밤중에 젊은 남녀 두
사람을 태웠을 때 일어났다. 가까운 주행이었는데 이들은 도착하자마자 냅다 백
미터 달리기로 도망쳤다. 나는 잠시 멍했지만 쫓아가진 않았다. 돈이 없었거나
아니면 '인습 반대주의자'의 치기였을 것이다. 나도 어렸을 때 그런 치기를
부려보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그래도 도망치는 것보다는 차라리 돈이 없는데
태워줄 수 없냐고 하는 쪽이 훨씬 나을 것 같았다.
  실제로 돈이 없다고 하면서 그래도 좀 태워줄 수 없느냐고 물어오는
젊은이들이 간혹 있었다. 이들은 대개 스무살도 채 안된 젊은 층이었는데
이들의 시도는 그야말로 장난 같은 것이었다. 지하철이 끊어진 시간에 젊은
청년들의 랑데부 장소인 쌩 미셸 광장의 택시정류장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노라면 앞 택시부터 똑같은 질문을 하면서 좀 태워달라고 한다. 그들이
가고자 하는 행선지는 대체로 걷기에는 좀 멀고 차를 타면 곧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곳이다. 하긴 먼 곳이 아니니까 태워달라는 말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곧 손님을 받을 수 있는 앞의 택시들이 그들을 태워줄 리가 없다.
나도 앞에 있을 때는 태워주지 않는다. 한참 기다린 내 순서를 놓치게 되기
때문이다. 택시운전사들에게 계속 딱지를 맞으면서도 그들은 전혀 심각한
표정이 아니고 낄낄거리며 재미있어한다. 어차피 맨 끝쪽에 있어서 이들을
태워주고 돌아와도 별 손해가 없었던 내가 올라타라고 하면 오히려 움찔하면서
"돈이 없는데요"한다. 내가 에뜨랑제니까 혹시 돈이 없다는 말을 못 알아들은 줄
알았던 것이다. 어떤 친구는 빈주머니를 내보이고 가진 게 아무것도 없다는
몸짓을 한다. 그래도 올라타라고 하면 신나게 올라타선 무슨 대단한 모험을
즐긴 사람들처럼 웃고 떠든다. 그리고 목적지에 도착해선 동전 몇푼이라도 탁탁
털어주겠다고 귀여움을 보이기도 한다. 내가 만류하며 "아침에 바게뜨(길다란
빵) 사먹으라"고 하고 "앞으로 나 같은 에뜨랑제에게 똘레랑스를 보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그들은 잘 알았다고 하면서 자기들도 극우파인 '국민전선'과
인종주의자들을 옳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한다.

    인종주의자
  비록 자주 있는 일이 아니지만, 인종주의자들이 에뜨랑제가 운전하는 택시를
되도록 타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을 볼때가 있다. 빈 택시가 없을 땐 할 수 없이
타지만 빈 택시가 많을 때는 앞의 택시부터 차례대로 운전사가 에뜨랑제가
아닌지 확인하고 올라타는 데 택시의 유리창 너머 빼꼼이 쳐다보는 모습은 영
기분을 상하게 한다. 오직 그들만이 순서대로 탑승하지 않는 부류였는데,
그들에겐 왜 보기 싫은 에뜨랑제에게 돈을 벌게 해주겠느냐는 생각이 있을
터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앞에 있던 에뜨랑제 택시운전사를 기피하고 자기
택시에 올라탄 그들에게 "차례대로 앞의 택시를 타라"고 하면서 그들을
쫓아내는 프랑스인 택시운전사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나는 쫓겨난
인종주의자들의 벌개진 얼굴을 바라보며 낄낄거리며 좋아했었다. 그들은 결국
다른 택시정류장을 향해 멀어졌다. 빠리의 택시운전사들 사이에는 경쟁심리도
없지 않지만 인종의 차이를 덮을 수 있을 만큼 연대감도 있었다. 어쨌든 이런
인종주의자들이 많지 않아서 다행이고 그런 사람들이 에뜨랑제인 내 택시를
타지 않으려 하는 것 또한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진짜 인종주의자를 태웠을 때
  나는 꼭 한번, 아니 두 번 인종주의자를 태운 적이 있었다. 하나는 백인
우월주의자인 진짜 인종주의자고 다른 하나는 가짜 인종주의자였다.
인종주의자에도 진짜와 가짜가 있냐고 물을 분도 있겠는데 다음 사연으로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우선 진짜 인종주의자를 태운 사연은 다음과 같았다. 
  평일의 한밤중이었다. 샹젤리제 거리의 롱 뿌앵 택시정류장에 있었는데
손님이 많지 않아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내 차레가 되었다. 택시정류장 바로
앞에 있는 식당에서 나온 두 사람이 내 택시에 접근하였다. 그 식당은 해산물도
파는 꽤 비싼 집이었는데 밤늦게까지 영업을 했다. 그들은 다가와서 빼꼼이
나를 쳐다보더니 내 뒤의 택시로 갔다. 나는 뒷거울을 통해 그들이 접근하는
뒤의 택시운전사를 쳐다보고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운전사는
흑인이었다. 택시정류장에는 세 대의 택시가 대기 중이었는데 마지막
택시운전사는 북아프리카의 아랍인이었다. 프랑스의 극우 인종주의자들은
백인이 아닌 모든 인종을 없신여기고 싫어하지만 그중에도 북아프리카의
아랍인을 제일 혐오한다. 그 다음이 흑인이고 아시아인은 맨 마지막이다.
프랑스의 인종주의자들이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등 북아프리카 아랍인을 가장
경멸하고 싫어하는 이유는 옛날 식민지인들이라는 멸시감정이 있는데다 중동의
아랍국과 달리 석유부국 출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아랍인들은 프랑스인들이
일하기 싫어하는 힘들고 어려운 노동을 하며 외국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프랑스의 크리스천 문화에 흡수되지 않고 자기들의 아랍 문화와 종교를
고집하고 있는데 바로 그 때문에 더욱 미움을 받는다. 실제 프랑스에서
일어나는 인종간의 말썽과 갈등은 주로 이들 북아프리카 출신의 아랍인과
프랑스의 인종주의자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그들은 할 수 없이 내 택시에 올랐다. 나는 긴장해야
했다. 그들은 곧 시비를 걸어왔다. "왜 남의 나라에 와서 사는냐?"고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표시하더니 "외국인에게 택시운전을 할 수 있게 하는 당국도
잘못"이고 "그래서 프랑스 실업자가 늘어난다"고 술냄새를 풍기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들은 나에게 양해도 구하지 않고 담배를 피워물었다. 택시 안에서
담배를 피우고자 할 때는 담배를 안 피우던 나도 그때는 아무 말 없이 담배를
피워물었다. 나는 그때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묵묵히 내 갈 길만 가고
있는데 또 시비를 걸어왔다. 내가 가고 있는 길이 지름길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외국인이 길도 잘 모르면서 손님의 돈을 빼앗으려 한다"고 심하게 나왔다. 내가
선택한 길은 빠리의 모든 택시운전사들이 가는 길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내가
가는 길이 지름길이라고 말해봤자 쓸데없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또
이런 손님에겐 대꾸를 하는 것보다 쇠귀신처럼 아무 말 않는 쪽이 오히려
그들을 약 올리게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나는 그야말로 쇠귀신처럼 입을
봉했다. 그들은 나보고 벙어리냐, 귀머거리냐 하고 실컷 떠들더니 제풀에
조용해졌다. 결국 나는 도착할 때까지 단 한마디도 안했는데 도착하자마자 나의
목소리는 나도 놀랄 정도로 크게 나왔다.
  "뜨랑뜨위뜨 프랑! (삼십팔 프랑! )"
  나는 처음으로 씰 부 쁠레소리를 덧붙이지 않았다. 그들도 요금을 내지
않겠다고 하진 못했다. 물론 팁은 없었지만.
  나는 어느 글에서 "인종주의란 자기를 낳게 한 종자 이외엔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들의 열등감의 표현"이라고 쓴 것을 읽은 적이있다. 무의식의 그 열등감이
깊으면 깊을수록 그 열등감을 감추기 위하여 더욱더 인종을 내세우게 된다고도
씌어 있었다. 프랑스인 중에는 이런 속물적인 우월심리를 부추기고 외국인에
대한 적대감정을 불러일으켜 그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고 이는 극우파
'국민전선'과 같은 정당이 프랑스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있었다. 예를 들면, 다음 에피쏘드에 나오는 손님 같은 사람들이다.

    "가짜 인종주의자?"
  다음에 가짜 인종주의자를 만난 사연은 이런 것이다. 혼자 올라탄 오십쯤 돼
보이는 백인이었는데, 나에게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었고 "꼬레앵"이라는 내
대답에 다시 "노르 우 쉬드?"라는 되물음에 결국 나의 아집인 "꼬레 뚜 꾸르"를
듣곤 "아, 봉!"하며 약간 흥미를 표시하던 손님이었다. 몇마디 대화가 이어진 뒤
그가 갑자기, "나는 인종주의자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아, 봉!"하고
그의 조금 전 말투를 그대로 흉내내 대꾸했는데, 그와 나눈 대화와
그의말투에서 이미 그가 인종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나는 아주 철저한 인종주의자요. 그런데 나는 이세상에서 하나의 인종밖에
보이지 않소. 인류라는 인종 말이요."
  우리는 잠시 소년처럼 웃었다. 그는 말하자면 인종과 인류를 하나로 본
휴머니스트였던 것이다. 진짜 인종주의자와 가짜 인종주의자는 그렇게 다른
것이었다.

  의심하는 습관을 버리시라
  한편, 진짜 인종주의자는 나에게 지름길이 아닌 길을 간다고 시비를 건
처음이자 마지막 손님이기도 했다. 그런데, 통틀어 세 번밖에 되지 않았던
한국인 손님들 중에 그런 의심을 했던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독자는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의심하기 좋아하는 한국인의 표상 같은 그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그때 못했던 얘기를 빠리 택시운전사들의 대표 자격으로 말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당신은 나에게 그런 의심을 표현한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물론
당신말고도 그런 의심을 가졌던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들이 표현을 안했기
때문에 모르고 지나갔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그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다.
  우선 프랑스인을 비롯한 다른 나라 사람들은 길을 모르면 가만히 있지
당신처럼 "이놈이 돌아가고 있는 거 아냐"하는 의심은 커녕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당신은 별로 속아 살지 않았을 만큼 영악한 사람인데도 다른 사람이
항상 당신을 속일 수 있다는 피해망상을 갖고 잇다.
  길을 알고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자기가 아는 길과 다른 길을 선택한
택시운전사에게 이곳 사람들은 당신처럼 불쾌한 표정을 짓지 않으며 또 속으로
"이놈이 돌아가네"하고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 "이러이러한 길이 더 빠른 길이
아니요?"하고 떳떳이 말한다. 어감에서 불쾌함을 찾기 힘들다. 택시운전사는
이에 대해 자기가 왜 그 길을 선택했는지 설명한다. 역시 불쾌한 어감이 아니다.
대개 택시운전사의 선택이 더 빠른 길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큰 차이가 없다.
여러 길의 선택이 가능한 행선지에 대해서는 손님과 미리 상의하기도 하고 또
많은 택시운전사들이 아예 "당신이 원하는 길이 있으며 미리 알려주시요"라는
팻말을 택시 안에 붙이고다니기도 한다.

  빠리 택시 영수증 앞면: 금액, 날짜, 출발지점, 도착지점, 출발시각, 도착시각
등을 적게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금액만을 적는 게 보통이다. '2323 PW 93'은
택시의 차량번호이며 그 밑에 시각과 장소에 따른 요율이 명기되어 있다.

  빠리 택시 영수증 뒷면: 추가요금을 내야 하는 경우를 밝히고 잇다.
"택시운전사에게 팁을 주는 것이 관례이다. 그러나 강요될 수 없다"라는 문구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택시운전사와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신고할 주소가 적혀
있다. 모리용가에 있는 빠리 시경찰국 산하 택시운전사 관리사무실의 주소이다.

  아무리 빠리에 오래 산 빠리지앵도 택시운전사보다 길을 더 잘 알기는
어렵다. 어떤 손님은 자신이 잘 모르는 길을 에뜨랑제인 내가 알고 있는것에,
"어, 이런 길도 있었네"하고 놀라기도 했다. 나에게 돌아간다고 시비를 걸었던
인종주의자도 나에게 시비를 걸기 위한 핑계로 그렇게 말했던 것이지 실제로
그렇게 의심했던 것은 아니다. 그래서 또 나는 더 해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
것이기도 하다.
  빠리의 택시운전사들이 일부러 돌아가는 경우는 두 가지가 있다. 한 가지는
그야말로 요금을 올리기 위해 정직하지 않은 택시운전사들이 돌아가는 경우인데
아주 드문 일이다. 왜냐하면 함부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우선 빠리에 외국인이 하도 많이 살고 있기 때문에 외국인이라도
빠리에 처음 온 사람인지 나처럼 오래 산 사람인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설사
처음 온 사람이라 하여도 에펠 탑이나 개선문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특히 에펠
탑은 빠리 어디서든 잘 보인다. 당신의 호텔이 에펠 탑 근처인데 그 방향과
어긋난 길로 갈 수 있는 뻔뻔한 택시운전사는 찾기 힘들 것이다. 당신이
공항에서 빠리 시내로 들어올 때도 마찬가지다. 빠리 표시와 그리고 중심지
표시가 계속 보이는데 어느 길로 돌아가겠는가?
  빠리의 택시운전사들이 일부러 돌아가는 두번째 경우는 당신을 위하고
택시운전사 스스로를 위한 것이다. 지름길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 길이 잘
밀리는 길이기 때문에 돌아간다. 예를 들어 주말에 밤의 여자들이 나와 있는 쌩
드니 기이나 유흥가인 삐갈 앞길은 택시운전사들이 일부러 피하는 길이다. 아마
당신은 그 길을 가고 싶어할 것이다. 의심이 많은 당신은 또 이렇게 말할
것이다. "시간병산제니까 일부러 밀리는 길을 갈 것이다"라고. 천만의 말씀이다.
빠리의 택시운전사는 밀리는 것을 당신보다 더 싫어한다. 시간병산제라 하나
시간에 붙는 금액은 큰 부분을 차지 하지 않으며 역시 많이 달려야 요금이
제대로 오른다. 밀릴 때는 요금은 별로 오르지 않는데 시간을 허비하기 때문에
전혀 이익이 되지 않는다. 설사 손님이 없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빨리 손님을
데려다주고 다음 손님을 맞기 위해 택시정류장에 갖다 대는 게 훨씬 유익하다.
나를 비롯한 임차택시 운전사들이 꼭 밤에 일해야 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밤의
요율이 올라가는 까닭도 있지만 밀리지 않는 시간이므로 한 주행당 걸리는
시간이 많지 않아 곧 다음 손님을 기다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한국인의
그 의심하는 버  릇을 빠리에 오면 버리시라. 그리고 한국에 돌아가서도
버리시라. 만약 당신이 아주 못된 택시운전사를 만나 많이 돌아 터무니없는
요금이 나왔다고 확신할 때는 '영수증'을 요구하시라. 그는 움찔할 것이다. 그는
영수증을 요구하는 손님에게 거부할 수 없고 또 그 영수증에는 당신이 탄
택시의 번호가 있기 때문이다. 빠리에 못된 택시운전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의 의심은 대개 근거가 없는 것이다. 근거 없이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고 미리 의심부터 하는 습관을 버리시라. 이것이 내가 하고 싶었던 얘기다.

  "메르드!"와 "잘먹고 잘살아라"
  프랑스인들이 아주 잘 쓰는 말에 "메르드!"라는 것이 있다. 문자 그대로 길을
걷다가 똥을 밟으면 한결같이 나오는 소리가 바로 "메르드!"다. 우리말로 하면
"이런 젠장!"하고, 비슷한데, 기대하던 일이 잘 안될 때도 "메르드!"하고,
응원하던 축구팀이 골을 먹어도 "메르드!"며, 접촉사고가 나도 제일 먼저 나오는
소리가 "메르드!"다. 이젠 나도 똥을 밟으면 튀어나오는 소리가 "메르드!"가
되었을 정도로 아주 흔히 듣는 소리다. 독일인도 마찬가지여서 "샤이쎄!"라는
말을 아주 잘 쓴다고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중요한 시험을 보러 가는
사람 등에게 "성공을 빈다!"할 때에도 "메르드!"한다는 것이다. 액땜을 미리
하라는 뜻일 것 이다. 독일말의 "샤이쎄"는 이런 의미로는 쓰이지 않는다.
  내가 점잖지 못하게 '똥'소리를 길게 하고 있는 까닭은 우선 다음 이야기를
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 얘기 다음에도 독자들의 개똥 세 개의 얘기를 또
들어야 한다는 것을 미리 알려둔다.
  나는 한밤중에 빠리의 한적한 골목길에서 "샤이쎄!"하고 골목이 떠나가라고
큰소리로 외친 적이 있다.
  "샤이쎄!"는 내가 아는 몇개의 독일어 단어 중 하나였는데 이를 사용하게 된
경위는 이러했다. 이상한 우연인지 그 나이 많은 독일 여자 관광객 둘을 태운
곳도 바로 인종주의자 둘을 태운 샹젤리제의 롱 뿌앵이었다. 그녀들이 호텔
주소를 보고 내 깐에는 질러간다는 것이 호텔이 뒤쪽에 보이는 일방로에
걸렸다. 후진할 수도 없고 또 거리도 4, 50미터밖에 되지 않아 그냥 내리라고
했더니 호텔문까지 왔는데 팁은커녕 미터 요금에서 4프랑을 깍고 주는
것이었다. 내가 "바룸?(독일어로 왜?)"하니까 뭐라고 떠드는데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한 구역을 돌게 된 것이 나의 잘못이니 그 요금은 못 주겠다는 말을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녀들은 끝내 4프랑을 깎은 채 내렸고, 호텔에 들어가기
전에 나의 "샤이쎄!" 소리를 들어야 했던 것이다. 만약 내가 우리말의 "잘먹고
잘살아라!"라는 뜻의 독일말을 알고 있었다면 틀림없이 그 말을 했을 텐데 그걸
몰랐던 게 못내 아쉬웠다.

    라 데팡스에서 탔던 그로노블 아가씨
  이렇게 불쾌한 일도 있지만 유쾌한 일도 적지 않았다. 택시운전사라는 직업이
하루하루 벌이에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손님의 태도에 따라 돈에
아등바등하지 않을 수 있다.
  그 마드모아젤은 라 데팡스에서 탔다. 빠리 서쪽 교외에 있는 라 데팡스
지구에는 빠리 시내에 못 짓게 하는 거대한 빌딩이 많은데 그 안에는 이 지역을
유럽에서 제일 큰 비즈니스 쎈터라고 말한다. 이곳에는 또 사람들이 유럽에서
제일 큰 쇼핑쎈터라고 말하는 상가도 잇다. 우리 집에서도 가까워 나도 가끔 이
상가에 있는 슈퍼마켓에서 장을 본다.
  프랑스혁명 200주년을 기념하여 이 지역에 초현대식 건축물을 지었는데
시내의 꽁꼬르드 광장의 중앙에 있는 오벨리스끄 탑에서 개선문을 향한 그
일직선상에 있고 또 개선문의 아치처럼 밑부분이 뚫려 있어서 '그랑드
다르슈'라고 부른다. 그 아치는 노트르담 대성당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크다고 한다. 볼 만한 건축물이어서 관광객들이 꽤 많이 찾아온다.
  그 아가씨는 프랑스의 알프스 쪽 지방도시인 그르노블에서 라 데팡스지역의
사무실에 출장을 왔다가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오를리 공항으로 가는
길에 내 택시에 올랐다. 그날은 금요일이었는데 퇴근시간에 길이 유독 몹시
밀려 순환도로에서 자동차들이 엉금엉금 기었다. 자연 시간이 오래 걸려 요금이
예상보다 많이 나오게 되었다. 그 아가씨는 울상을 지었다. 택시비를 빠듯하게
준비했고 수표책도 가져오지 않았다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렇다고 중간에
내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또 순환도로에선 내릴 수도 없었다. 공항에
도착하자, 그녀는 가진 돈을 다 털어 놓고는 모자라는 35프랑을 수표로
우송해주겠다고 내 주소를 적어달라고 했다. 나는 주소를 적어주고 돈은 도로
돌려주었다. 그로노블에 내린 그녀가 한푼도 없어선 안될 것 같았고, 어차피
수표를 보내줄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몹시 고마워했고 며칠 후 짤막한
감사의 편지와 함께 팁이 충분히 포함된 금액을 수표로 보내왔다. 만약에 길이
밀려 택시요금이 자꾸 올라갈 때, 그녀가 한마디라도 불평을 했더라면 나는
그렇게까지 친절하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상대적이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다른 경험이 있다.

    한밤중에 백 미터 달리기
  나는 한밤중에 백 미터 경주를 했다. 빠리에서 멀리 떨어진 교외의
벌판에서였다. 빠리 레ㅃ블리끄 광장에서 가까운 어느 디스코장 앞에서 서른살
정도의 남자 손님 둘을 태웠다. 그들의 행선지는 동쪽 고속도로를 타고 꽤 멀리
가는 곳이었는데 담배가 떨어졌다며 끌리시 광장에 들러 가자고 했다. 끌리시
광장에는 24시간 담배를 파는 가게가 있었는데 그 방향은 그들이 갈 곳과
반대였다. 이들은 담배를 산 뒤에 먼 위성도시에 있는 외진 벌판에 세우더니
요금을 안 내고 후닥닥 튀는 것이었다. 나도 이번에는 참을 수가 없었다. 애당초
돈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담배를 사러 반대방향으로 가자고 했던 그들이
아니었나. 나는 숨이 차도록 그들을 쫓아갔다. 한밤중에 한적한 교외 아파트
단지의 어두컴컴한 벌판에서 세 사람의 달리기 경주가 있었다. 나는 기를 쓰고
달려 드디어 한 놈을 붙잡았다. 그것은 내가 잘 달린 탓이아니라 그들이 술을
마셨기 때문이었다. 요금을 받아내는 내 손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나는
분개해 있었다. 택시로 돌아와선 맥이 탁 풀렸고 그날은 더이상 일할 기분이
아니라 곧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들이 담배 사러 가자고 하자만 않았어도
그렇게까지 화가 나진 않았을 것이다.
  그 이튿날 택시정류장에서 만난 프랑스인 동료에게 내가 겪은 해프닝을
얘기했더니 그는 깜짝 놀라면서 오히려 나보고 미쳤느냐고 하면서 오히려 운이
좋았다고 말하곤 다음부턴 아주 조심하라고 충고를 해주었다.

    엽기적인 여자 택시운전사 살인사건
  그렇지 않아도 그 얼마 전에 무서운 사건이 일어났었다. 여자 택시운전사가
택시와 함께 새까맣게 불에 타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불에 타기 전에 이미
목 졸려 숨이 끊어진 것으로 알려진 엽기적인 살인사건이었다. 끝내 범인을
잡지 못했는데 성도착증 환자의 소행이 틀림없다고 했다. 빠리에는 천 명
가까운 여자 택시운전사들이 있고 거의 낮에 일을 한다. 그 불운의 여자
택시운전사는 어쩌다 밤에 일을 하다가 끔찍한 변을 당한 것이다. 그 사건이
발생한 며칠 후 시내 중심 빨레 루아얄 광장에서는 택시 노조 주최의 추모 겸
항의 집회가 있었다. 집회에서 노조의 대표는 택시 운전사들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개선시켜야 하며(이때도 임차택시 운전사들이 노예상태에 있다는
말이 나왔다) 당국은 택시운전사들의 안전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네 시간 동안의 파업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그 파업은 별
효과가 없었다. 그 파업에 대하여 모르고 있던 운전사들도 많았고 파업시간이
평소 빈 택시가 많은 오후 1시부터 5시까지였기 때문이었다. 빠리에서도 가끔
택시강도 사건이 일어났다. 주로 밤에 일하는 나도 신경을 써야 했는데 운이
좋았는지 한번도 겪지 않았다.

    섣달 그믐날 밤의 택시운전
  밤에 일하는 나는 자연 날짜가 바뀌는 밤 0시를 매일 택시 안에서 보냈다.
그러므로 섣달 그믐날 밤 24시, 즉 1월 1일 0시에도 나는 택시 안에 있었다.
  프랑스인들은 크리스마스 이브는 가족과 함께 조용히 보내는데 세모에는 주로
친지와 애인들이 함께 모여 먹고 마시고 춤추며 즐기면서 밤을 새워 논다. 새해
1월 1일 0시가 되면 온 교회의 종소리가 울려퍼지고 여기 저기서 폭죽 터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사람들은 서로 껴안고 비주(볼에 입을 맞추는 행위)를
하며 "본느 아네!"를 외친다. 특히 샹젤리제 거리에 사람들이 쏟아져나와
차도까지 인파가 밀리게 되고, 폭죽소리에 놀라는 여성들과 그들을 보고
깔깔대는 사람 웃음소리 "본느 아네!" 소리 등으로 시끌벅적하다. 사람들은 모두
즐거울 뿐이다. 이때에는 전혀 모르는 사람과 '비주'를 해도 허용되는데 특히
아시아 여성과 비주를 하면 새해 운이 좋다는 낭설(?)이 있기 때문이지,
멋모르고 샹젤리제 거리에 나와 본 아시아 여성들은 뭇 남성의 비주 세례를
받아야 하는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이렇게 사람들이 거리고 쏟아져나오고 시내에서 밤을 새워 즐기니 자연 택시
손님은 평소에 비해 엄청나게 불어난다. 반면에 택시운전사들은 이날이 대목인
줄 뻔히 알지만 "이런 날까지 일해야 한다면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지"하는
여유가 있기 때문에 거의 일을 하지 않는다. 개인택시 운전사는 물론이고
임차택시 운전사도 아주 일부만 일을 한다. 그중 대부분은 아시아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로 구정에 놀기 때문이다.
  나는 이날 일이 끝나는 시간까지 거의 쉴세없이 손님을 태웠고 특히 새벽 3,
4시경엔 빠리 거리의 총아가 되었다. 손님이 내릴 기색이 보이면 내리기도 전에
다음 손님이 달려왔다. 나는 계속 뺑뺑이를 돌았다. 틀림없이 서울의
택시운전사들은 매일 그렇게 일을 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이날 그야말로 최대의
수입을 올렸다. 손님들이 이날까지 일한다고 가엾이(?)여겨 팁을 후하게 주기도
하여 1800프랑을 넘게 올린 것이다. 이는 평소의 두 배가 되는 금액이었고
하루당 임차료와 기름값을 뺀 순수입은 평소의 서너 배에 달했다. 매일 그렇게
손님이 많다면 한 달에 3만-3만 5천프랑을 벌 수 있다는 꿈같은 계산이 나왔다.
그럴 수만 있다면 한 달 일하고 두 달은 책을 볼 수 있을 터였다. 그것은 물론
꿈에 지나지 않았다. 다만 그런 계산을 해본 이유는 이미 강조한 바 있지만
항상 강도 높게 일하고 있는 한국의 택시운전사들이 힘든 일에 비해 수입이
너무 적은 게 아니냐 하는 뜻과, 또 그 적은 수입을 보충하기 위해 합승이나
'따블 따따블'을 하게 되는데(실제로 하루 종일 뺑뺑이를 도는 그들에게 다른
방법은 하나도 없다) 그들만 희생양이 되어 욕을 먹고 있는게 아니냐는
뜻에서였다.

    13 한 송이 빨간 장미
    5월의 뻬르라셰즈
  5월이었다. 햇살이 눈부셨다. 그날 나는 오후 3시에 일을 시작했다. 그녀는
나의 첫 손님이었다. 혼자 서서 빠리 17구의 빌리에 거리에서 내 택시를 잡을
때부터 인상적이었다. 크고 날씬한 몸매와 헐렁한 흰색 원피스가 잘 어울렸다.
그러나 무엇보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그녀의 손에 들린 한 송이의 빨간
장미였다. 흰옷을 입고 있어서 빨간 장미가 금방 눈에 띄었던 것이다.
그녀는 뻬르라셰즈에 가자고 했다. 프랑스말로 했지만 프랑스인의 발음은
아니었다. 뻬르라셰즈는 빠리 동쪽 20구에 있는 씨므띠에르이다.
몰리에르와(실제 몰리에르의 묘지는 비어 있다는 설이 지배적이지만) 라 퐁떼느
등의 묘지가 있으며 60만의 영혼이 숨쉬고 있는 빠리 최대의 공동묘지이다.
근래에는 샹송가수이며 불운의 여인이었던 에디뜨 삐아프도 묻혔다. 한 송이
빨간 장미의 손님은 뻬르 라셰즈의 정문에 내렸다.
  그녀를 내려주고 나는 뻬르 라셰즈의 담을 끼고 돌아 20구의 구청이 있는
강베따광장에 있는 택시정류장으로 갔다. 정류장에는 이미 빈 택시가 다섯 대나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택시를 정류장 뒤쪽에 세우고 뻬르 라셰즈의
뒷문을 통해 묘지 안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꼬ㅁ 전사들의 벽'을 다시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조금 전에 인상적인 젊은 여자를 뻬르 라셰즈 앞에
내려주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또는 그녀의 '빨간 장미 한
송이'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아니면 눈부신 5월의 햇살 때문인지도.
  '꼬ㅁ 전사들의 벽'은 뻬르 라셰즈의 동쪽 끝 모서리 가까이 있는데 정문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뒷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훨씬 더 가깝다. 나는 '꼬ㅁ 전사들의
벽'이 그곳에 있다는 것을 고등학교 선배를 통하여 알게 되었고 그 뒤 여러번
찾았었다. 
  나는 5월의 햇살을 받으며, 그리고 말없는 묘석들을 바라보며 묘지의 담길을
따라 '꼬ㅁ 전사들의 벽'앞에 닿았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초라한 비석이다. 벽
앞에는 순례자가 없었다. 그래도 벽 밑에는 빨간 장미꽃 다발이 많이 쌓여
있었고 벽 틈에도 장미꽃이 꽂혀 있었다. 그 꽃다발들은 프랑스 사회당 및 다른
좌익정당의 지구당이나 노동조합과 시민단체 등에서 갖다놓은 것들이었다. 나는
그렇게 장미꽃 다발이 놓여 있는 것을 그날 처음 보았는데 마침 5월 하순이었기
때문이다.

    '꼬ㅁ 전사들의 벽'
  지금으로부터 백년도 더 전인 1871년 5월 28일 빼르 라셰즈에서 최후까지
항전을 했던 147명의 '꼬ㅁ 전사'들이 바로 그 벽 앞에서 총살당했다. 베르사유
정부군에게 밀려 빠리의 동쪽 끝인 이곳까지 왔고 끝내 완전 포위당했던 그들은
묘석들을 엄호물 삼아 밤새워 항전했으나 실탄이 떨어져 사로잡혔던 것이다.
그날로 총살당한 그들의 주검은 벽 밑에 판구덩이에 묻혔다. 이로써 '역사적
대희망'이었다고들 하는 '빠리꼬ㅁ'은 막을 내렸다.
  꼬뮈나르들은 두 달 동안의 해방기간 동안 극심한 식량난으로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도 낮에는 토론으로, 밤에는 축제로 보냈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국제
노동자 연대를 상징하는 노래로 애창되고 있는 '인터내셔널'도 그때 만들어져
불렸던 노래다. 어느 역사가는 그들이 해방 초기의 기세로 정부군을 공격했다면
꼬ㅁ 실패의 파장은 엄청났고 세계의 역사도 바뀌었다.
  최후의 꼬ㅁ 전사들이 뻬르 라셰즈의 벽에서 총살당한 그날까지 일주일
동안을 '피의 일주일'이라고 말할 정도로 꼬뮈나르들은 무참히 학살되었다. 2만
명이 학살되어 쌔느 강은 붉게 물들었다고 하는데, 어느 평자는 아직 기관총이
없던 당시 일주일 동안 2만 명을 총살할 수 있었던 정부군의 놀라운 능력을
꼬집어 말하기도 했다. 그 숫자는 바로 그 전해에 있었던 보불전쟁의 희생자를
능가했다. 어떤 사람의 손바닥에 굳은 살이 박여 있었기 때문에 총살당했다고
전해진다. 수만명이 재판에 회부되었고 그중 수많은 사람이 식민지인 고도로
추방되었다. 그들은 10년이 지나서야 돌아올 수 있었는데, 그 10년 동안의
반동기에 사회운동은 거의 잠들었고 그 대신에 제국주의가 그 독니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후 1914년 일차대전이 일어날 때까지 시기를 이른바 '벨르 에뽀끄'라고
하는데 그것은 제국주의의 팽창으로 식민지로부터 '경제잉여'가
흘러들어옴으로써 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잉여의 일부분을
노동자계급에게도 흘려주어 그들의 불만을 희석 혹은 개량화했을 것이다.
식민지인들의 희생으로 제1세계는 이른바 '아름다운 시기'를 구가할 수 있었고,
이 식민지들은 나중에 제3세계라고 바뀌어 불려지게 되었으며, 그 희생과
종속은 계속되어 '남북문제'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아름다운 시기'는 '세기말'의 시기이기도 했다. 또 블랑끼슴과 같은
극좌노선이 일어난 시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아름다운 시기'는 일차 세계대전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제국주의 팽창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역사는 우연인가?
빠리꼬ㅁ의 '피의 일주일'과 '광주항쟁의 일주일'은 그대로 포개졌다.

    '한 송이 빨간 장미'와 함께
  '꼬ㅁ 전사들의 벽'바로 앞에 꼬ㅁ 부대를 지휘했다는 폴란드인 장군의 묘지가
있고(맑스의 딸의 묘지도 근처에 있다고 하는데 찾지 못했다) 나는 그 묘지
옆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꼬ㅁ 전사들을 엄호해주었던 말없는
묘석들을 바라보면서.
  바로 그때였다. 내 쪽을 향하여 걸어오는 젊은 여자가 있었다. 조금 전에
묘지의 정문 앞에서 내린 바로 '한 송이 빨간 장미'의 여자였다.
  그녀는 햇살을 받아 얼굴에 '홍조를 띠고 있었다. 나를 보고 긴가민가하는
표정을 잠깐 짓더니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혹시 꼬뮌 전사들의 벽이 어디 있는지 아세요?"
  정문에서 올라오는 길에서는 벽을 잘 볼 수 없다. 벽은 경사진 언덕 밑에
있기 대문이다. 나는 웃으면서 바로 아래쪽을 가리켰다. 그녀는 벽을 일별한 뒤
나를 향해 웃으며 고맙다고 했고 바로 그 벽 앞으로 갔다. 나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들고 온 장미 한 송이를 공손히 벽 밑에 내려놓는 그녀의
모습은 실로 아름다웠다. 잠시 후 그녀가 나에게 다가왔다.
  "당신은 혹시?..."
  내가 그녀를 태웠던 택시운전사가 아니냐는 뜻이었다. 나는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내가 그녀보다 먼저 와 있을 수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나는 뒷문
얘기를 했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는 왜? "
  우리는 함께 웃었다. 택시운전사와 손님이었던 우리는 갑자기 오랜 친구
사이처럼 되었고 또 오랜 친구 사이처럼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는 나보다
프랑스말을 잘 못했지만 그 대신 영어를 유창하게 했다. 우리는 영어와
프랑스말을 뒤섞어 말했고 나는 주로 듣는 쪽이었다.
  그녀는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서 왔으며 사회학을 공부하고 있다고 말했고,
잠깐 빠리에 온 길에 그동안 보고 싶어하던 '벽'을 찾게 되었다고 했다. 그녀는
공부를 미치고 비정부기구에서 일할 수 있기를, 특히 제3세계를 지원, 연대하는
기구에서 일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우리는 묘석들의 사잇길을 나란히 걸어 근처에 있는 에디뜨 삐아프의 묘지도
찾았다. 나는 프랑스의 샹송에 관하여 그녀는 록과 랩음악에 대하여 말했다.
그녀는 특히 랩의 팬이었는데 나는 랩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녀에
의하면, 랩은 말과 리듬과 춤으로 되어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이라 했다. 원래 랩은 인종차별, 사회적 불평등 등을 고발하기 위하여
흑인들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근래에는 그 형식만 좇고 내용이 없는, 즉 '말'이
없는 가짜 랩이 판을 치고 있다는 얘기도 했다. 그녀는 열심히 설명했고 또
나는 귀담아들었지만 그것은 한편세대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우리는 흡사 연인 사이인 양 묘석 사잇길을 같이 걸었다. 나는 잠시 시간에
쫓기는 택시운전사의 신분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이윽고 묘지의 문이 닫힐
때까지 묘지 안을 더 둘러보겠다는 그녀와 헤어졌다. 그날 우연히 만났듯이
또다시 우연히 만날 수 있기를 기약하면서. 5월의 늦은 오후, 햇살은 아직
눈부셨다. 흔쾌한 기분이었다. 그녀와 다시 '벽' 앞에서 만난 것이 나를 마냥
즐겁게 했고 한편 그녀와의 만남은 나의 옛시절, 특히 문리대 시절을
돌이키게도 했다.
  나에겐 문리대 선배중에 아주 가까운 분이 하나 있었다. 그는 정치학과를
나왔는데 학창시절에 "그대는 나의 한 떨기..."로 시작되는 노래를 작사작곡하여
부르기도 했었다. 나는 아직도 그 노래를 기억하고 있는데 한송이 빨간 장미가
그걸 돌이키게 해준 것이었다. 그 선배는 몇해 전 외국에 잠깐 나올 수 있었다.
그는 빠리를 보러 온 길에 나를 찾은 것이 아니라 나를 보기 위하여 빠리에 온
많지 않은 사람 중 하나였다. 그때의 나는 아직 '꼬ㅁ 전사의 벽'이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때 함께 찾아오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옛날에는 '벽'을 찾는 순례자가 많았다고 한다. 많은 진보사들은 죽을 때 꼭
뻬르 라셰즈에 묻어달라고 요청했다 한다. 일생을 검은 옷만 입었다는 에디뜨
삐아프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정문에서 '벽'에 이르는 길 옆에는 프랑스
공산당의 역대 서기장들의 묘지도 있다.
  세태의 반영일까? 근래에는 '벽'을 찾는 순례지가 많지 않다고 한다. 실제로
점점 잊혀지고 있다. 내가 그런 결과를 가져온 그 이유의 일단을 바로
'벽'가까이 있는 프랑스 역대 공산당 서기장들의 묘지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면
너무 지나친 말일까? '꼬ㅁ 전사의 벽'과 '비석'이 아주 초라함에 비하여 그들의
묘는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인권 회복을 위한 노력들
  나는 나중에 에디뜨 삐아프의 묘지 앞에서 빨간 장미 한 송이가 열심히
설명해주었다. 진짜 랩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 앰네스티
인터내셔널(국제사면위원회)의 프랑스 지부는 그 30주년을 기념하여 특별
기획을 하였다. 프랑스의 유선텔레비전 방송국등의 협찬을 받아 '망각에
반대하여'라는 제목으로 된 90분짜리 특별 필름을 제작한 것이었는데, '인권'
상황을 각각 3분씩 보여주면서 그 희생자들을 '잊지 말자'고 호소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필름은 텔레비전에서 방영했을 뿐만 아니라 극장에서도
상영하여 당시 고등학생이던 내 딸 수현이도 역사 지리 선생님의 인솔하에
단체관람을 하여, 그날 저녁 부녀 사이에 인권 문제의 관하여 많은 대화를 가질
수 있게 해주었다.
  이 특별 기획에는 까뜨리느 드뇌브, 에마뉘엘 베아르, 미셸 삐꼴리, 이자벨
위뻬르, 까롤 부께 등 유명한 배우, 알랭 수숑, 제인 버킨 등의 가수, 브뤼노
마쥐로, 뿔 아마르 등의 아나운서, 40년째 집 없는 사람들을 위한 연대운동을
하고 있는 유명한 삐에를 신부, 끌로드 셰이송 전 외무장관과 로베르 바댕떼 전
법무장관 등의 정치인 그리고 유명한 영화감독인 코스타 가브라스와 장뤽
고다르 등 문화인 지식인 등이 대거 참여하였다. 이들은 세계 각국의
양심수들에 대한 연대와 인권 향상을 위한 참여였기 때문에 모두 무료로
출연하였고 스태프들도 모두 무료로 봉사하였다.  
  나는 이들이 어떤 기준에 의해 그리고 어떤 근거로 30개국을 선정했는지 특히
관심있게 살펴보았다. 30개국의 대부분이 남미, 아프리카, 중동 및 아시아 등 제
3세계 나라들인데 그 이외에 소련과 중국, 꾸바가 들어 있었고 제 1세계 중엔
미국과 영국이 포함되는 영예(?)를 차지하였다. 결국 세계인권선언을 했던
유엔의 가장 중요한 기구인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 5개국 중에서 4개국이
들어 있는 셈이었는데, 그 안전보장이 사회가 무엇의 또는 누구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적어도 인권, 즉 인간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의 본부가 있는 영국이 그 안에 들어가게 된 이유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자국에 망명을 신청한 스리랑카인을 본국으로 송환하여
인권 스캔들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한편 그리스는 종교적 신념에 의해 병역의무를 거부한 어느 젊은이에게 4년
징역을 선고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필름에서, 여배우 까롤 부께는 그런
젊은이에게 민간 봉사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라고 그리스 당국을 꾸짖었다.
실제 프랑스나 독일 등 유럽의 다른 나라에선 병원 등에서 일을 시킨다든지
혹은 종교 봉사활동을 통해 신념에 의한 병역의무 기피자들을 용인하고 있다.
  미국은 범죄 당시 미성년인 범죄자를 사형집행하는 세계 7개국 중의 하나라는
오점이 부각되었다. 필름은 그 실제 집행현장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전기의자에
앉혀져 끔찍하게 죽어간 사형수는 물론(?)흑인이었다. 사형제도를 없앤
프랑스인들이 보기에 미국은 아직 미개한 인권 상황을 보여주는 나라에 지나지
않았다. 미떼랑 프랑스 대통령은, 자신의 철학은 "인간이 인간을 합법적으로
죽일 수 있다는 것을 도저히 용납하지 않는다"고 피력하기도 했다.  
프랑스에서도 유독 극우파들은 사형제도를 다시 부활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나는 아주 흥미있는 발견을 하였다. 즉 '인간을
합법적으로 죽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유아의 낙태수술에는 결사코
반대한다는 사실이었다. 반대로, '인간을 합법적으로 죽일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낙태수술에는 찬동하고 있었는데, 이 겹모순의 해답은 결국
'개인과 사회의 관계'그리고 '사회의 책임'등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에서 찾아질
것 같았다.
극우파를 제외한 대부분의 프랑스인들이 보는 미국 사회는 한마디로 똘레랑스가
없는 사회였다. 인종차별이 심하고 건강보험 등 사회보장이 제 1세계에서 가장
낙후한 나라이며, 특히 사회 주변계급에 대한 처벌과 축출이 가장 심한
나라이다. 필름에서 삐에르 신부는, 사형집행은 바로 사회 주변계급 축출이 가장
심각한 본보기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렇게 힐난한다. "청소년 범죄는 과연 그
개인의 책임인가? 아니면 사회의 책임인가?" 사형집행은 그 사회의 책임을
외면한다는 것을 보일 뿐이라는 주장이었다.
  미국이 사회 주변계급을 어떻게 추방했는지 알 수 있는, 근래 새로 알려진
다음과 같은 사실도 있다.
  우리들은 나찌 독일이 사회 주변계급이나 유태인들에게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하는 수술을 강제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비인간적인
수술을 강제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비인간적인 수술을
제일 먼저 시행하는 나찌의 전범이 되었던 나라가 바로 미국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와같은 강제수술행위에 미 연방법원이 '적법' 판정을 내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강제시술을 받아야 했던 청소년들의 대부분은
범죄자도 아니었고 다만 가난한 집안 태생이거나 혹은 범죄자를 부모로 둔 죄가
있었을 뿐이었다. 미국은 이차대전 이후에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 법이 폐기된 것은 7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우리들은 가끔 한국 신문지상을 통하여 세계에서 제일 살기 좋은 나라순으로
또는 민주주의가 잘되어 있는 나라 순으로 또는 인권 상황이 좋은 나라 순으로
나열되어 있는 기사를 볼 때가 있다. 대개 스위스나 스웨덴 같은 나라가 선두를
차지하고 그 다음쯤에 미국이 차지하는데 프랑스의 지식인이나 문화인들이
보기에는 한마디로 "그게 아니올시다"이다. 한국신문들은 미국의 '무슨 재단'
같은 데서 그들의 기준에 의해 제멋대로 발표한 것을 무슨 대단한 발견이나 한
양 떠들어댈 뿐이라는 것을 여기서는 알수 있다. 미국의 '무슨재단'이란 것이
대부분이 미 국무성이나 국방성 또는 미 CIA의 앵무새들인데 한국의 신문들이
또 그 앵무새 역할을 하고 잇는 것이다. 이런 것도 말하자면 문화적 제국주의
혹은 언론 제국주의의 한 단면이라고 하겠는데 미국이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살기 좋고 민주주의도 인권도 잘되어 있는 나라라면 그것은 링컨의 표현을 빌려
"백인의 백인에 의한 백인을 위한 미국"일 때만 다소 유효할지 모르겠다. 그것이
프랑스인들의 눈에는 잘 보이는데 한국인들의 눈에는 잘 안 보이는 모양이다.
  필름의 다른 내용 중에서, 프랑스의 거리의 거리의 가수 자끄 이즐랭은
아프리카의 어느 '종신' 대통령에게 '종신' 징역을 사는 어느 양심수를
풀어주라고 야유 겸 호소하기도 했고, 익살꾼 기 베도스는 소련의
고르바쵸프에게 "당신을 위하여도 그를 풀어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며 익살을
부리기도 했는데 고르바초프가 그의 말을 들어주었던지 필름이 발표되었을
때에는 이미 석방된 상태였다. 베트남도 마찬가지였다.
  한편, 복수정당제 및 인권 향상을 위한 활동을 벌이다가 이른바 반혁명죄로
기소되어 7년 징역형을 선고받은 꾸바의 어느 수학교수를 위한 탄원문에서,
빠리 과학아카데미의 원장은 피델 까스뜨로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던졌는데,
나에게도 의미심장하게 와닿았다. 그내용을 그대로 옮겨 본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권력을 잡았을 때 그 많은 사람들이
품었던 찬란했던 희망을. 당신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자유롭고자 하는
사람을 제거함으로써 '자유'를 없앨 수 없다는 것을. 인간의 역사란 다름아니라
'자유'를 쟁취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인류가 나타나기까지 수억년의 시간이 필요했으며 또 하나의 인간이
탄생하기 위하여 아홉 달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인간을 죽이는 데는 단
한순간으로 족하며 또한 아주 간단한 족쇄로 인간의 존엄성을 빼앗을 수
있습니다."
  "인간이 모두 똑같이 태어나지 않기 때문에 평등 개념이 창안되어야 했던
것이며, 인간이 모두 같은 이데올로기를 갖지 않기 때문에 인권 개념이
창안되었어야 했던 것입니다."
  "21세기의 벽두에, 단지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을 감옥에
집어넣는 행위는 완전히 사라져야 할 것입니다. 그 행위는 인간의 가장 나쁜
재앙 중의 하나입니다."

  86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였던 엘리 비젤은, "단 한 사람이라도 자유롭지 않은
사람이 있는 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다"라는 말을 했었다. 이 말은 모든
사회에 적용될 수 있는 진리가 아닐까?
  같이 출발했으면서도 결국 엄청나게 다른 운명을 갖게 된 체 게바라와
까스뜨로를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느끼게 되는가? 씰비는, "인류 역사를 위하여
필요한 사람은 일찍 역사에서 사라졌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녀는 뜨로쯔끼와
게바라의 열렬한 팬이었고 레닌이 너무 일찍 죽었다고 아쉬워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한때, 특히 제3세계인들을 열광시켰던 알제리의 민족해방전선이
독립전쟁에 승리하고 권력을 잡은 뒤엔 일당독재를 계속하여 오히려 민주화에
역행했던 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씰비가 강조했던 바와
같이, 어느 체제도 굳어지면 '쁘로피뙤르'들이 날뛰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문화혁명은?
까스뜨로의 사진과 반혁명분자로 몰려 감옥에 갇힌 곤잘레스라는 이름의
수학교수의 사진이 교차되는 화면을 보면서 나는 끝없는 의문부호를 찍고
있었다.

    리베레 김성만!
  불행스럽게도 한국도 그 30개국 안에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선택한
한국의 양심수는 이른바 '재미 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은 김성만군이었다. 우연(?)인지 똑같은 시기에 '독일 유학생 간첩단
사건'도 있었고 우리는 안상근군을 잃었다. 그가 감옥에서 자살했다는 당국의
발표를 그대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나는 독일에서 그의 어머니를 본 적이
있는데 그분은 눈물로 얼룩진 시를 쓰고 계셨다.
  김성만군을 위해 역시 3분 동안 짜여진 그 필름은 바로 뻬르 라셰즈에서 잠깐
내 애인이 되었던 '한 송이 빨간 장미'가 좋아한다던 진짜 랩으로 되어 있었다.
거리를 배경으로 근 백 명의 청소년들이 리듬에 맞추어 춤을 추며 '김성만'을
'말'하였다. 그 '말'을 쓴 사람은 로베르 바댕떼였다. 그는 프랑스 법무장관을
지냈고 지금은 프랑스 헌법 자문위원장으로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3분짜리 랩을 감독하고 필름에 담은 사람은 '미씽?' '고백' 등의
영화감독으로 유명한 코스타 가브라스였다. 흑인 백인 황인 등 모든 인종으로
뒤섞인 근 백 명의 청소년들이 김성만의 사진을 보이며 자기들처럼 젊은 그를
말하였다.
  나는 그들이 외친 '말'을 이 자리에 그대로 옮겨놓고자 하는데, 그 이유중의
하나는 이 '말'을 쓴 사람이 법무장관을 지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법무장관은
잘 알다시피 검찰기관의 최상급자로서 범죄용의자를 기소하려 재판을 받게 하는
사람이다. 변호사도 아니며 판사도 아니며 오히려 검사 쪽에 가까운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김성만군을 어떻게 '말'했는가를 보는 것은 한국의 독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믿어졌기 때문이다. '말'은 바댕떼가 썼는데 필름에서의
화자는 청소년들이었다.

  대통령 각하. 나는 김성만군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도
나처럼 젊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그를 사랑하는 어머니, 형제자매 그리고 벗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부당하게 감옥에 있기 때문입니다.
  대통령 각하, 그의 운명은 당신에게 달려 있는데, 당신은 그를 한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는 폭력속에서 또는
증오 속에서 크지 않았습니다. 김성만은 인류 형제들에 대한 사랑 속에서
자랐고 또 정의를 추구하면서 성장했습니다. 그는 기독학생들과 함께
활동했습니다. 그는 미국의 대학에서 민주주의를 발견하였고, 그 자신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신념을 피력했습니다.
  나는 우리나라에 자주와 민주주의가 이룩되길 바라고 있다. 나는 이러한 나의
이상이 사회주의 체제를 통하여 이룩되길 바라고 있다. 나는 이러한 나의
이상이 사회주의 체제를 통하여 이룩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그의 소신이었습니다. 그 소신은 그를 반대자를 만들었을 뿐입니다.
범죄자가 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간첩이 되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단지
의견수(양심수)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대통령 각하, 나는 당신에게 그를
석방하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다 함께)김성만, 김성만의 이름으로, 김성만의 이름으로.
  한국에는 표현의 자유가 없어요.
  그것은, 그것은 안 좋아요. 그것은 안 좋아요.
  생각한 것을 그대로 말했다고 감옥에 쳐넣는다면,
  그것은, 그것은 안 좋아요. 그것은 안 좋아요.
  김성만, 김성만의 이름으로, 김성만의 이름으로,
  우리는 김성만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말합니다, 대통령 각하.
  내가 당신에게 김성만을 석방하라고 말하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단 하나의 잘못은 의견이 달랐던 것뿐인데, 고문에 못 이겨
끝내 간첩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내가 묻고자 하는 것은
육체적인 고통을 가하여 끄집어낸 자백이 부조리의 연속으로, 수백일 동안
단말마의 고통을 겪게 하고 사형까지 말하더니 종신징역을 살리고 있습니다.
  부당하게 겪고 있는 그의 괴로움에, 고문에, 그리고 그의 가족과 벗들이 겪는
끝없는 기다림의 고통에... 나는 인류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요구합니다. 김성만을
석방하라고.
  대통령 각하, 나는 당신에게 김성만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갇힌 지 벌써
5년(현재 만 8년째 복역중임--필자), 그의 죄는 다만 당신의 체제와 반대되는
체제를 바란다는 의견을 가졌고 또 그 의견을 말한 죄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갇혔고 고문당했고 사형언도도 받았고 드디어 종신징역을
선고받았습니다. 신념으로 민주주의자가 되는 것과 자신의 의견을 위하여
싸우는 것은 인권을 존중하는 나라에선 당연히 합법인 것입니다.
  자기의 나라에서 양심수가 되어, 부모형제와 떨어져서, 벗들로부터도
떨어져서, 어느 누구에게도 행복을 주지 못한 채 끝도 없이 기다려야 하는 계절,
지금 그의 나이 한창인 서른네살... 그는 그의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봉사할 수
있는 신념의 인간이며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의 어머니의 이름으로, 그의 누이의 이름으로, 그리고
전세계에 있는 그의 벗의 이름으로 대통령 각하 당신에게 김성만을 석방하라고
요구하는 바입니다. (다 함께) 석방하라!

  나는 앰네스티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를 찾아갔다. 김성만군의 어머님께 그
필름을 보내드리고 싶었는데 한국과 유럽의 텔레비젼 방식이 달라 NTSC
방식으로 된 필름을 시중에선 구할 수 없었다. 그들은 나의 방문 목적을 듣더니
150프랑씩 팔고 있던 그 필름을 그냥 내주었다. 다만 이렇게 당부했다. "꼭
전해질 수 있도록 노력해달라"고. 그들이 당부했던 대로 그 필름은 전해졌다.
한국의 장기수들을 후원하는 독일의 한 작은 모임에 참여하는 교포를
통해서였다.
  독자들은 내가 이렇게 앰내스티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의 특별 기획 필름인
'망각에 반대하여'에 대하여 길게 쓴 것을 이해해주기 바란다. 한국에서 쉽게 볼
볼 있는 필름이라면 그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바리에 올 기회가 있는 분
중에 그 필름을 보고 싶은 분이 있으면 나에게 연락하시라. 그 기회를 마련할
것을 약속한다.

  한편, 우리들이 양심수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사람들을 이곳 사람들은
'의견수'라고 표현한다. '양심수'라는 말을 전혀 쓰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만나 보았던 앰네스티 인터내셔널 관계자들을 비롯하여 신문기사 등에서도 주로
'의견수'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나는 나 나름대로 그 차이를 생각해보았는데, 우리의 '양심수'란 '고문 받은,
그리고 고문에 의한 의견수'가 될 것 같았다. 이곳 사람들이 '의견수'라고 말할때,
그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의견수들이 그렇게까지 지독한 고문을 받았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하고 사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양심수들이 일상화되어
있는 고문행위의 피해자라는 것은 '양심수'에 이르지도 않았던 박종철군이
고문치사를 당했던 것만으로도 그 정도를 충분히 알 수 있다. 최근에 고문을
없애겠다고 말은 하고 있지만, 고문 기술자 이근안을 붙잡을 생각이 별로 없는
것과 또 지금도 계속 고문행위 사실이 드러나고 잇는 것으로 그 실체를 알 수
있다. 특히 그런 얘기가 석방은 커녕 재심조차 하려 하지 않은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김성만군뿐만 아니라 모든 양심수가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고문에 의한 자백으로 처형까지 당했던 사람들이 그 한을 못 풀고 있지 않은가?
일반사범의 경우도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들 중에도 고문에 의해 형을
살거나 처형된 사람이 왜 없었겠는가?
  얘기가 이 문제 쪽으로 많이 흘러간 김에 조금 더 가보기로 하겠다.
  나는 우리들의 '옛이야기' 전통 중에 일본의 '오오까의 밀감' 이야기 같은 게
없다는 것을 무척 아쉬워한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수입해 들여올 것 중에 꼭
한가지만 말하라면, 나는 주저없이 '오오까의 밀감'을 선택할 것이다. 프랑스에서
제일 먼저 '똘레랑스'를 수입하고 싶듯이. 나는 '오오까의 밀감'이야기를
독자들에게 꼭 전하고 싶다. 그리고 독자들은 이 '오오까의 밀감' 이야기만은
잊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오오까의 밀감
  옛날 일본의 에도에 오오까라는 판관이 있었다.
  이른바 쇼군이 할거하던 시대였다. 내란이 빈번했고 민중들의 삶은 어려웠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은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게 일상사였다. 재판관의 판결은
뇌물을 얼마나 바치는가에 따라서 결정되었다. 죄가 없어도 가난한 사람은
감옥에 들어갔고 심지어는 처형되기도 했던 반면에 돈만 있어면 아무리
몰염치하고 뻔뻔스런 죄를 짓고도 풀려났던 그런시대였다.
  오오까는 판관이 되어 에도에 부임하자, 당시의 관습에 따라 큰 만찬을
베풀었다. 에도의 귀족 명사들과 관리와 그리고 다른 판관들을 합쳐 모두 3백
명을 초대하였다. 식사가 끝난 뒤 그들은 정종을 마시며 이 얘기 저 얘기를
나누었다. 얘기중에 판관들은 재판을 심리할 때 그 진실을 알기 위한 제일 빠른
길이 고문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판관들은 아무리 거짓말을 잘하고 뻔뻔스런
자들도 고문만 하면 다 불게 되어 있다는 의견에 입을 모았다. 오오까는 아무
말 없이 그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의 표정은 침울했다. 그들이
술마시기를 거의 끝마쳤을 즈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
  "모든 식사의 마지막에 과일이 빠질 수 없고 또 지금은 밀감이 아주 잘 익는
계절인데 내가 그것을 소홀히했으니 제빈들은 이 나의 불찰을 용서하시기
바라오. 즉시 조처하겠소."
  그리곤 그의 충복인 나오수까에게 3백 개의 밀감을 급히 가져오라고
지시하였고 나오수까가 급히 달려가 밀감이 든 푸대를 오오까에게 갖다
대령하였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나오수까에게 그 밀감을 헤아려 보라고
지시하였다. 주인의 지시에 따라 밀감의 숫자를 헤아린 나오수까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나으리, 3백 개에서 한 개가 부족하옵니다."
  "너에게 3백 개를 가져오라고 하지 않았더냐! 빈객 중에 한 분이 못 잡숫게
되었단 말이냐!"
  "나으리, 틀림없이 3백 개였사옵니다. 소인이 직접 세면서 집어넣었사옵니다.
정말이옵니... "
  울상이 된 나오수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오오까의 엄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러니까, 네놈이 한 개를 먹었구나. 그렇지 않느냐?"
  "아니옵니다. 아니에요. 감히 어찌 소인이 그런 일을... "
  "그렇지 않다면 네놈은 지금 밀감한테 날개가 있어 날아갔다는 말을 하려느냐,
아니면 발이 있어서 도망쳤다고 말하려는 게냐, 이 발칙한 놈!"
"아니옵니다. 감히 소인이 어찌... 하오나 소인이 손을 대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옵니다."
  나오수까는 어찌할 바를 몰라 목을 조아렸으나 주인의 목소리는 더욱
냉랭해졌다.
  "진실은 밝혀지게 마련인즉... 게다가 명색이 판관인 내가 바로 가내에서
벌어진 일의 진실을 밝혀내지 못한다고 해서야 어디 판관 자격이 있겠느냐!"
  오오까는 형리에게 화로와 끓는 물 등 고문할 채비를 차리라고 명령하였다.
형리가 곧 화로와 끓는 물 그리고 인두 등을 준비하여 대령하자 오오까가
형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실직고하지 않을 때 어떤 일이 있을 것인지 저 못된 놈에게 하나하나
설명해주렷다!"
  오오까의 지시를 받은 형리가 말을 붙일 사이도 없이 새파랗게 질린
나오수까는 오오까를 향해 꿇어엎드려 목을 조아리고 이렇게 울부짖었다.
  "제발, 나으리! 소인이, 소인이 자백하겠나이다. 그러하오니 제발, 제발... 
  "좋다. 그럼 어서 이실직고하여라. 네놈이 어떻게 밀감 한 개를 훔쳤는지
세세히 자백하렷다!"
  "소인이 처음에는 그 밀감에 손댈 생각이 추호도 없었사옵니다. 하오나 밀감이
하도 잘 익었고 때깔도 좋고 먹음직스럽고 또 향내도 그윽하여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사와 한 개를, 딱 한개를 꺼내 먹었사옵니다. 어떻게 맛이
있었사옵던지 지금까지도 입 안에 군침이 돌고 있나이다. 이렇게 자백하오니
제발 나으리! 제발, 나으리!"
  자백을 마친 나오수까는 계속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초대객을은 진실이 곧
밝혀진 것에 입을 모아 탄복했다. 그중에는 "역시 고문이야말로 진실을 밝혀낼
수 있는 첩경이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더냐"고 떠드는 사람도 있었고 또 충복에
의해 도둑질당한 오오까를 비웃는 사람도 있었다. 이말들을 조용히 다 듣고 난
오오까가 다시 나오수까에게 이렇게 다짐하듯 하였다.
  "그러니까 네놈이 진정 이 모든 빈객들 앞에서 밀감 한 개를 훔쳐먹었다는
것을 자백한다는 것이렸다!"
  "예, 예. 자백하옵니다. 도둑질을 했사오니 어떠한 처벌도 달게 받겠사옵니다.
하오나 나으리, 처음 저지른 일이었사오니 나으리의 넓은 아량으로... 한번만
그저 단 한번만 ...
  나오수까는 울면서 대답했고 또 그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오오까는 침울한 표정으로 나오수까를 그리고 빈객들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오오까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오수까에게 다가가 그 앞에 함께
엎드려 그를 안으며 이렇게 말했다.
  "부디 나를 용서하라. 너에게 참으로 못된 짓을 했구나. 이 모든 빈객들
앞에서 이렇게 사죄하노니. 그리고 이 불행한 일을 잊을 수 있도록 내 진정
갑절로 너를 돌볼 것을 약속하겠노라."
  그리고 그는 그의 넓은 소맷자락에서 밀감 한 개를 꺼내 빈객들을 향해
던지고 이렇게 외쳤다.
  "밀감을 훔친 자는 바로 나였소. 내 하인은 훔치지도 않았으면서도 훔쳤다고
자백했소. 그것도 그럴듯하게 꾸며서 말이오. 먹지도 않은 밀감의 맛으로 입
안에 아직도 군침이 돌고 있다고 한 말을 잊지 마시라! 고문이 있기도 전에
고문의 공포가 그렇게 했던 것이었소! 그리하여 제빈들은 돌이켜보시라.
당신들의 감옥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억울하게 썩어가고
있는가를! 그리고 제발 이 밀감을 잊지 마시라. 진실을 밝힌다는 미명 아래
고문을 하겠다는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바로 이 밀감을 생각하시라!"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