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사마천
차례
1. 오직 천명에 따를 뿐이다(강태공)
폭군의 횡포
천하를 낚아올린 강태공
천명에 따를 뿐이다
궁팔십 달팔십
2. 변경의 실력자(진나라 목공)
다섯 마리 양과 바꿔온 오고대부 백리해
은혜를 원수로 갚으면
두 진나라의 경쟁
소 열두 마리로 나라를 구한 현고
들어맞은 예언
유혹과 이간
나의 과오를 분명히 밝힌다
목공이 중원에 진출하지 못한 이유
3. 만약 그가 살아있다면 기꺼이 그의 마부가 되겠다(안영)
음탕한 도둑놈인가, 임금인가
예의가 없으면 친구도 없다
4. 장한 그 이름을 어찌 빛내지 않으리오(섭정)
천리길을 달려와 나란히 이름을 빛내다
5. 천하가 붙잡아도 나의 길을 가련다(노중련, 추양)
1) 지혜로운 자는 때를 잃지 않는다(노중련)
동해에 빠져죽을지언정 굴복할 수는 없다
천하 제1의 현사
한 장의 편지로 성을 함락시키다
2) 여자는 질투받기 쉽고 선비는 모함받기 마련이다(추양)
진실이 의심받는다
여자는 질투받기 쉽고 선비는 모함받기 마련이다
참된 인재를 구하려면
6. 고목나무가 꽃을 피우다(춘신군)
두 마리의 호랑이가 싸우면
죽고자 하는 이는 산다
춘신군의 전성시대
꽃을 나무에 접붙이다
결단하지 못하면 도리어 당한다
7. 하늘이 내린 명의(편작, 창공)
1) 살아날 수 있는 사람을 일으켰을 뿐이다(편작)
비방을 전수받다
사흘 안에 깨어나리라
"건강한 사람을 환자 취급하다니"
살아날 수 있는 사람을 일으켰을 뿐이다
너무 아름답고 좋은 것은 불길함의 징조이다
2) 자연에 상응해야 병이 없다(창공)
정확한 진맥이 치료의 근본이다
완전을 기할 수는 없다
8.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가!(진승, 오광)
참새가 어찌 대붕의 뜻을 알리오!
왕후장사의 씨가 따로 있는가!
한 점 불꽃이 광야를 불사르다
옛 친구를 잃으면 천하를 잃는다
9. 여걸 천하(여후, 진평)
1) 유방이 천하를 얻은 이유는?
창업은 쉽고 수성은 어렵다
2) 도대체 여자의 욕심이란 그 끝이 어디일까?(여후)
사람돼지
단 한번의 사랑으로 태후가 된 여인
천하의 주인은 유씨인가, 여씨인가?
정부와 동성연애자
장례에 마음을 빼앗기면 천히도 빼앗긴다
3) 과연 위기를 어떻게 이겨나갈 것인가?(진평)
다섯 번 과부된 여자에게 장가들다
의심나는 자는 쓰지 말고 일단 쓰면 의심하지 말라
재상과 장군이 힘을 합하면
4) 여인 천하의 종말
왼쪽이냐, 오른쪽이냐?
자리가 다르면 할 일도 다르다
5) 사람의 운명이란 알 수 없는 것이다
이산가족 상봉
밀어 주려면 확실하게 밀어 주어라
여인의 치마폭에 둘러싸인 황제
10. 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 보이는 법이다(숙손통)
호랑이의 입 속에 있을 때는
난세에는 용사가 필요하다
그러나 수성에는 학자가 중요하다
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11. 돌아오지 않은 장군(경포, 팽월, 난포)
1) 고독한 올빼미(경포)
형벌을 받고 왕이 될 관상
경포를 얻어야 천하를 얻는다
여자와 질투
2) 황야의 이리(팽월)
약속을 지키지 않는 자와는 함께 일을 도모할 수 없다
유격전의 명수
여후의 꾀
3) 마치 집에 가듯 죽음을 맞는다(난포)
12. 북방의 정복자(흉노전)
흉노의 영걸
적을 방심케 하라
백등산에서 유방을 크게 혼내다
새가 모여들 듯 거미가 흩어지듯
한나라를 마음껏 농락하다
싸울 것이냐, 화평할 것이냐
우리는 우리 식대로 산다
마읍에서 생긴 일
13. 복은 화가 들어오는 문이다(원앙, 조착)
1) 명예로 일어선 자 명예로 망한다(원앙)
신하를 다스리는 법
원앙의 말이라면
지나치면 해롭다
2) 개혁가는 온전하게 죽기 어렵다(조착)
개혁과 수구세력
개혁가의 최후
3) 명예를 좋아하는 자는 명예 때문에 망한다
14. 해는 중천에 뜨는 그 순간부터 기운다(주아부)
도전은 있으되 응전은 없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
15. 좋은 정치란 도덕에 있을 뿐 혹독한 법에 있지 않다(장석지, 장탕)
1)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장석지)
유창한 말솜씨에 혹한다면
법이 잘못되면 백성들이 믿고 살 데가 없다
어려운 때는 몸을 굽혀라
2) 정치의 올바른 길이란 도덕에 있지 혹독한 법에 있지 않다(장탕)
고기를 훔친 죄로 쥐를 재판하다
법이란 사람에 따라 다르게 적용된다
그런 식으로 용서하면 처벌할 사람이 없다
고개숙인 백면서생
부하를 잘 써라
사면초가
죽어서 무죄를 증명하다
16. 기러기의 큰 날개를 가졌어도 때를 만나지 못한다면(공손홍, 원고생, 동중서)
1) 높아지려거든 먼저 몸을 낮춰라(공손홍)
마흔에야 학문을 시작하다
학문이 성해야 천하가 태평하다
자신을 높이려거든 먼저 낮춰라
2) 곡학아세는 학자의 길이 아니다(원고생)
멧돼지와의 결투
3) 3년 동안 집안 뜰조차 쳐다보지 않다(동중서)
17. 군인은 군인의 임무에 따른 뿐이다(위청, 곽거병)
1) 흉노 토벌의 명자(위청)
어두웠던 소년 시절
대장군 위청
부하를 아끼는 마음
2) 불패의 젊은 영웅(곽거병)
치열한 사막전
패배란 없다
빛과 그림자
18. 서역으로 가는 비단길(장건)
13년 만에 귀국한 장건
해를 따라 서쪽으로
황제의 꿈
장건, 다시 떠나다
요령부득
명마를 좋아하는 황제
견물생심의 건달들
19. 아무도 공을 세운 사람이 없었다(조선 열전)
대패하여 산 속을 헤매는 한나라
무너지지 않는 왕검성
아무도 공신은 없었다
1. 오직 천명에 따를 뿐이다(강태공)
폭군의 횡포
은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은 원래 매우 똑똑한 사람이었다. 머리가 좋고
말재주도 뛰어났으며, 게다가 맹수를 맨손으로 때려잡을 정도로 힘이 장사였다.
그래서 초기에는 대규모로 영토를 확장하는 등 번영을 누렸다.
하지만 갈수록 자기 머리와 재주만 믿고 교만해졌다. 특히 절세의 미녀 달기를
얻고부터는 전형적인 폭군이 되어 갔다. 사치와 향락만을 일삼고 정사를
내팽개쳤으며, 신하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비난하는 사람은 무조건
처형시켜 버렸다.
충신의 운명
당시에 백성들로부터 존경받는 3공이 있었는데, 바로 구후와 악후, 그리고
서백창이라는 충신들이었다.
그런데 폭군 주왕은 구후의 딸을 아내로 맞았으나 그녀가 얼굴이 못생겼다는
이유로 죽였으며, 이에 구후가 맹렬히 항의하자 그를 죽여 소금에 절여버렸다. 또
이를 악후가 비난하자 악후도 죽여 육포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그 육포를 서백창에게 보내,
"너도 눈밖에 나면 이 모양이 될 것이다."
라고 겁을 주었다.
서백창은 그 육포를 보고 기가 막혔다. 그래서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해마지
않았다. 한편 육포를 가져왔던 사자가 주왕에게 돌아와 서백창이 탄식했다는
소식을 전하자, 주왕은 크게 노했다. 그리고는 곧장 서백창을 붙잡아 유리라는
벽지로 유폐시켜 버렸다.
그 후에도 주왕의 폭정은 그치지 않았다. 달기와 함께 죄없는 신하들을
'포락지형'에 처해 그 타죽어 가는 모습을 보며 즐겼고, 또 '주지육림'을 벌여
벌거벗은 남녀들의 집단 정사를 즐기기도 했다.(사기 1권 '경국지색의 여인들' 편
참조) 더구나 자기 말을 안 듣는다고 만삭의 임산부까지 찔러 죽이는 만행을
일삼았다.
이때 은나라에 비간이라는 충직한 왕자가 있었다. 그는 주왕의 계속되는 폭정을
두고만 볼 수 없다고 생각해 주왕을 찾아갔다.
"폐하, 지금이라도 마음을 돌리시고 나라를 지키소서, 지금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있고 민심은 크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통촉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주왕은 들은 척하지도 않았다. 비간이 몇 번에 걸쳐 호소했지만, 듣지도
않고 자리를 떠 버렸던 것이다.
그렇지만 비간은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는 그대로 자리에 꿇어앉아
일주일 동안이나 있으면서, 계속하여 호소하였다.
그러자 주왕은 드디어 크게 화를 냈다.
"네가 나를 이렇게 괴롭힐 수 있느냐.
그럼 좋다. 네가 그렇게 성인이란 말이냐. 내가 알기로 성인의 심장에는 일곱
개의 구멍이 있다는데, 오늘 확인해 보겠다."
그러면서 비간을 죽이고 심장을 도려냈다.
한편 비간 왕자가 주왕에게 간하다가 궁궐 밖으로 쫓겨나 계속 호소한다는
소식이 널리 퍼졌을 때, 현명한 선비로 이름높았던 기자가 비간을 구하기 위해
궁궐로 찾아갔다. 그러나 자기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비간 왕자가 처형된 뒤였다.
기자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했다.
"아! 이 나라는 정녕 끝났는가!"
그러면서 머리를 풀어 헤치고 미친 사람으로 변장한 채 거리를 유랑하였다.
천하를 낚아올린 강태공
강태공은 동해의 어느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학문을 좋아해서 집안일을
돌보지 않고 학문에만 열중했다. 그래서 원래 가난한 집이었지만, 나중에는
끼니조차 이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자 그의 아내조차도 견디지 못하고 몰래 도망쳐 버렸다. 그래도 그는
학문에만 매달렸다.
서백창과의 만남
한편 유폐되어 있던 서백창은 그 와중에서도 오히려 학문에 정진하여 드디어는
고금의 명저 "주역"을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중 서백창의 부하들이 서백창을 구해내기 위해 주왕에게 미녀와
명마들을 뇌물로 바쳤다. 그러자 주왕의 입이 벌어졌다.
"뭘, 이런 선물을 가져오는가. 명마들에 미녀까지. 이제 서백창도 많이 뉘우쳤겠지."
그러면서 서백창의 유폐를 풀어 주었다.
그리하여 서백창은 풀려나 자기 영지인 주나라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 후
서백창은 정치를 훌륭히 펼쳐 주나라의 세력은 날로 커지게 되었다.
또한 서백창은 나라를 더욱 발전시키려면 인재가 무엇보다도 중요함을 알고
천하의 인재를 찾아 나섰다.
어느 날 강태공이 시장에 나갔다가 서백창이 널리 인재를 구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날부터 강태공은 강가에 나가 낚싯대를 드리우기 시작했다. 이때
강태공의 나이는 이미 70세가 넘은 상태였다.
하지만 강태공은 하루 종일 한 마리의 고기도 낚지 못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강태공은 모자도 팽개치고 옷까지 벗어버리며 화를 터뜨렸다. 지나가다
이 모습을 본 어부가 다가오더니,
"서둘지 말고 천천히 해 보시오."
라고 말했다. 이에 강태공이 시키는 대로 하니 과연 잉어가 걸려들었다. 그리고
그 잉어의 배를 갈라보니,
"장차 큰 귀인이 될 것이니라."
라는 글귀가 나왔다.
한편 서백창은 사냥을 즐겼다. 하루는 사냥에 나가기 전에 점을 쳐보니,
"얻은 것은 용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니며, 큰 곰도 아니다. 사냥에서 얻는 것은
천하를 얻는 데 필요한 신하이로다."
라는 점괘를 얻었다.
그날 따라 한 마리의 짐승도 잡지 못했다. 저녁 무렵에 그냥 돌아오려는데, 멀리
강가에서 낚시를 하는 사람이 보였다. 멀리 보기에도 풍채가 범상치 않았다.
서백창이 바로 달려가 그 사람과 몇 마디 얘기해 보니 과연 뛰어난 인물이었다.
"선조들께서 우리 집안에 머지 않아 큰 성인이 나타나 나라를 일으킬 것이라
말씀하셨는데, 당신이 그 성인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면서 그를 궁궐로 모셔서 스승으로 삼았다. 그 사람이 바로 강태공이었다.
서백창은 그에게 태공망이라는 호를 지어 주었는데, 이 말은 서백창의 아버지인
태공이 바라던 인물이라는 뜻이었다.
이후 강태공은 서백창을 도와 주나라를 크게 융성하게 했으며, 특히 군사력을
강화시켰다. 그래서 강태공이 썼다는 병법책은 오늘날까지 전설적인 병법으로
전해지고 있다.
천명에 따를 뿐이다
그 후 서백창은 대업을 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뒤를 이어 무왕이
즉위했는데, 그 역시 강태공을 스승으로 받들었다.
무왕이 즉위한 지 9년 되던 해, 무왕은 서백창의 위패를 수레에 싣고 동쪽으로
원정을 나갔다.
출정할 때 강태공이 전군에게 명령을 내렸다.
"모두 출정하도록 하라. 늦는 자는 목을 베리라."
그러자 전군은 일사분란하게 대오를 갖췄다. 군대가 막 황하를 건너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무왕이 탄 배에 흰 고기가 뛰어 올랐다. 무왕은 이 고기를 잡아
하늘에 제사지냈다. 이윽고 무왕이 강을 건너자, 이번에는 강 상류쪽에서 불길이
일어나더니 쏜살같이 내려왔다. 그러더니 무왕 앞에서 붉은 까마귀로 변했다.
당시에 은나라의 상징색은 흰 색이었고 주나라는 붉은 색을 상징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흰 고기가 무왕에 잡힌 것은 은나라가 무왕에게 멸망당함을
의미했고, 붉은 까마귀가 날아든 것은
주나라가 천하를 잡으리라는 징조였던 셈이다.
더구나 미리 약속이나 한 것처럼 사방에서 제후들이 모여들기 시작해 그 수가
무려 8백 명에 이르렀다. 그들은 입을 모아,
"지금 당장 은나라를 쳐버립시다."
하고 요청했다.
그러나 무왕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오. 아직 천명이 은나라를 떠나지 않았소."
그리고는 군대를 되돌렸다.
2년 후 드디어 무왕은 전국에 포고문을 발표했다.
"백성들에게 고한다.
옛말에 암탉아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은나라 주왕은 달기의
말만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면서 하늘을 공경할 줄 모르고 포악한 정치를 일삼아
백성들은 도탄에 허덕이고 있다.
나는 이제 천명을 받들어 은나라를 토벌하려 한다. 지금 토벌하지 않으면
천하가 더욱 혼란에 빠질 것이다.
호랑이처럼 용감하게 싸워라.
도망하는 적은 죽이지 말고 우리 나라 일꾼으로 만들라.
모두 일어서라!"
그리하여 주나라의 10만 병력은 은나라 공격에 나섰다. 총사령관은
강태공이었다. 강태공은 군대를 이끌고 은나라 서울 근교에 있는 목야에 진을
쳤다.
이 소식을 들은 주왕은 코웃음을 쳤다.
"아니, 제까짓 놈들이 나를 친다고!"
그러면서 70만 대군을 이끌고 목야로 나갔다. 그런데 주왕의 군대는 주로
노예들로 편성되어 있었다.
그래서 싸울 의사가 없었고, 오히려 주나라가 이기면 자기들도 자유롭게 풀려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병사들이 많았다.
강태공은 정예병 백 만으로 선제 공격을 했다. 그러면서 사기를 높인 후
일제히 쳐들어갔다. 이에 은나라 병사들은 모두 무기를 거꾸로 메고 나가 오히려
주나라 군대에게 길을 열어 주었다. 순식간에 승패는 결정되었다.
주왕은 간신히 도망쳐 궁궐에서 달기와 함께 스스로 불에 뛰어 들어 목숨을
끊었다. 이렇게 하여 은나라는 망하고 폭군 주왕도 죽었다.
무왕은 주왕이 죽은 곳으로 가서 먼저 그 시체에 화살 3개를 쏘고 다시 칼로 친
다음 황금으로 만든 도끼로 목을 잘라 흰색 깃대에 걸었다. 그리고 나서 구후,
악후, 비간의 무덤에 제사를 모셨으며 무참하게 죽은 임산부도 잘 거두어 묘소를
만들어 주었다. 또 기자의 아들을 찾아내 벼슬을 주었다.
은나라 백성들은 이러한 무왕의 처사에 크게 감동하게 되었다.
궁팔십 달팔십
'궁팔십 달팔십'은 강태공이 80년을 가난하게 살다가 80년을 영광스럽게
살았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강태공은 주나라가 천하를 평정하는 데 일등공신으로 인정되어, 고향인 상동
지방에 있는 제나라의 제후로 임명되었다.
강태공은 제나라로 가면서 서두르지 않은 채 느릿느릿 가고 있었다. 그러자
어느 길 가던 노인이 말했다.
"때란 얻기는 어려우나 잃기는 쉽습니다. 이렇게 늑장만 부리시다니 큰 일을
하러 나선 분 같지 않소."
이 말을 들은 강태공은 한밤중임에 불구하고 부하들을 당장 깨워 출발 명령을
내려 서둘러
달려가도록 했다.
날이 밝을 무렵 강태공 일행은 제나라 땅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오랑캐 군대가 쳐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양측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간신히 오랑캐들을 격퇴한 강태공은 그 고장의 풍습을 존중하면서 제도를
정비했다. 그리고 특산물인 소금생산과 수산업을 크게 장려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나라에는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들어 번성을 자랑하게 되었다.
엎지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다
어느 날 강태공이 수레를 타고 시찰을 나갔다. 어떤 거리를 지나치고 있는데,
낯이 익은 노파의 초라한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래서 수레를 돌려 살펴보니 옛날
자기를 버리고 도망친 아내가 아닌가! 그녀는 다시 같이 살 수 없겠느냐고
애원했다.
그러자 강태공은 물을 한 그릇 가져오도록 했다. 그리고는 땅바닥에 물을 쏟은
후 그녀에게 그릇에 다시 주워 담으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담을 수가 없었다.
"한번 엎지른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법이오. 마찬가지로 한번 끊어진
인연도 다시 맺을 수 없소."
2. 변경의 실력자(진나라 목공)
다섯 마리 양과 바꿔온 오고대부 백리해
기원전 654년 진나라 헌공은 우리나라를 멸망시키고 우나라의 대부인 백리해를
사로잡았다.
진나라의 속임수에 말려들어 어리석게도 진나라 군대가 자기 나라 땅을
통과하도록 해준 결과 그만 나라를 빼앗겨 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진나라에서는 백리해를 또다른 진나라의 왕 목공에게 시집 보낸 공주의
하인으로 삼아 진나라로 보내게 되었다.
하지만 백리해는 도중에서 도망하여 초나라의 완이라는 마을에 은신했으나
그곳에서 그만 억류당하고 말았다.
한편 진의 군주인 목공은 공주의 일행 중에 오기로 한 백리해가 빠져 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전부터 백리해가 현명하다는 소문을 전해 들어 알고
있었고, 그래서 어떻게든 이 인물을 되찾아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큰 돈을 써서라도 찾으려 했으나, 그렇게 하면 오히려 완 지방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을까 두려웠다. 그래서 사자를 시켜 이렇게 말하도록 했다.
"나의 하인 백리해가 당신들 땅에 억류되어 있다고 하는데, 다섯 마리의 검은
양가죽과 그를 바꿔, 돌려보내 줄 것을 바라는 바이오."
그러자 완 지방 사람들은 그 조건을 받아들이고 백리해를 돌려보내 주었다.
그때부터 검은 양 다섯 마리와 교환해서 그를 차지했기 때문에 진나라에서는
백리해를 오고대부라고 부르게 되었다.
백리해가 오자 목공은 그를 노예의 신분으로부터 해방시킨 다음. 국사를
논의하는 데 기용하고자 했다. 그러자 백리해는 거듭 사양했다.
"저는 망국의 신하로서, 결코 그러한 막중한 자격이 없습니다."
하지만 목공은,
"우나라가 망한 것은 군주가 그대의 의견에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오. 그대의
책임은 아니오."
하고 끝내 마다하는 그를 끈덕지게 설득하며 서로 이야기 나누기를 사흘이나
했다. 그러자 점점 더 그의 사람됨과 능력에 완전히 빠져서 어떻게 하든지 국정을
맡겨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
백리해는 그래도 자기 대신 다른 사람을 천거했다.
"정 그러하시다면 저의 친구 중에 건숙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제가 감히
따르지도 못할 능력을 가진 인물입니다마는,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옛날에 제나라에 갔을 때 저는 매우 궁핍하여 걸식하는 몸이나
다름없었으나 그는 저를 도와주었습니다. 그 후에 제가 제나라 군주를 받들려고
했더니 그가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덕분에 저는 제나라의 내란에 휘말려
들지 않고 목숨을 건지게 되었습니다.
다음에 주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공자인 퇴가 소를 좋아했으므로 소 치는 품을
팔며 그에게 봉사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퇴가 저를 받아들이게 되었는데, 그때
건숙이 또다시 반대했습니다. 그 때도 그 덕분에 저는 주나라를 떠나 퇴의 죄에
휘말려 죽는 것을 면했습니다.
우나라 군주를 받들 때에도 그는 말렸습니다. 하지만 벼슬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저는
벼슬자리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두 번까지는 그의 의견을 따랐기 때문에 화를 면했습니다만, 마지막에 가서
그의 의견을 따르지 않은 탓으로 지금 이렇듯 말려들어 수모를 겪고 만
것이옵니다.
이상 말씀 올린 것으로도 그의 사람됨이 어떤지 잘 아셨을 줄로 믿습니다. '
이에 목공은 당장 사자를 보내, 후한 선물을 주고 건숙을 불러들여 상대부에
임명했다.
며칠 후 목공이 백리해에게 물었다.
"공의 나이가 몇이신지요?"
"벌써 일흔이 되었습니다."
이에 목공은 탄식했다.
"내가 진작에 공을 얻었어야 했는데..."
그러자 백리해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저는 분명히 너무 늙었지요. 더구나 새를 잡거나 맹수와 싸운다면 쓸모가 없을
정도로 늙었지요.
하지만 지혜로운 계획을 세우는 일이라면 아직 젊습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으면
그 해 가을에 목공은 손수 군사를 이끌고 진나라를 침공하였다.
그 즈음 이웃 진나라는 헌공의 애첩인 여희의 음모에 의해서 목공의 처남이
되는 태자 신생이 자살했고,(앞에서 보듯이 헌공의 딸이 목공에게 시집을 갔던
것이다) 또한 공자 중이와 이오 두 사람도 외국으로 망명하는 사건이
일어났다.(사기 2권 '진나라 문공' 편 참조)
그 후 먼저 탈출해 있던 공자 이오의 사자가 진나라로 목공을 찾아왔다.
그리고는 이오가 귀국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청하는 것이었다.
목공은 그 청을 받아들여 백리해에게 군사를 주어 이오가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오는 감사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성공하는 날에는, 하서의 여덟 성을 바치겠습니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이오는 성공하였고 도움을 준 데 대한 감사의 뜻을 전해
왔다.
그러나 영지를 떼어 주겠다던 약속은 완전히 무시했고, 국내에서는 오히려 여희
일파를 쓰러뜨린 공로자인 이극을 죽여 버리고 말았다.
한편 이극을 죽였다고 하는 소식이 미처 귀국하지 못하고 아직 진나라에 머물던
사자의 귀에까지 들렸다. 이에 내일이면 나도 어찌될지 모른다고 겁을 먹은
사자는 목공에게 다음과 같은 방책을 올렸다.
"이오에 대한 여론은 매우 나쁩니다. 인망이 있는 것은 오히려 중이
공자쪽입니다. 군주께 약속을 어긴 것도, 이극을 살해한 것도 두 이오의 심복인
여생과 극예가 획책한 짓입니다.
청컨대 감언이설로써 두 사람을 곧 불러다가 여기에 붙잡아 두고 그 동안에
중이 공자를 군주로 세운다면 만사는 잘 될 것입니다."
목공은 끄덕이면서 귀국하는 사자에게 사람을 딸려 보내 여생과 극예 두 사람을
초청했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은 조심성이 대단했다. 무엇인가 낌새가 이상하다고
느끼자 왕 이오에게 귀엣말을 하고는 오히려 그 사자를 죽여 버렸다.
그러자 사자의 아들인 비표가 진나라로 피신하여 목공에게 이렇게 호소했다.
"이오는 무법자이며 백성들에게 인망이 없습니다. 무찌르셔야 합니다."
그러자 목공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백성들에게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는 군주라면 어떻게 충신을 죽일 수
있겠는가?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곧 인심을 얻고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목공은 이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앞날에 대비해서 비표룰 신하로 등용하였다.
목공 12년, 진나라에서는 가뭄이 들어서 곡식을 수확하지 못하고 진나라에
양식을 도와 달라고 청해 왔다.
그러자 비표가 목공에게 말했다.
"주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 기회를 틈타서 쳐부숴야 할 때라고 봅니다. "
이에 목공은 다른 신하들의 의견을 들어 보았다.
"기근과 풍작이란 번갈아 돌아오는 일이니 지금 여유가 있는 우리가 곡식을
보내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백리해의 의견을 들어 보기로 하였다.
그러자 그는 말하기를,
"이오는 은혜를 원수로 갚은 고약한 놈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라고 했다.
결국 목공은 백리해와 다른 신하들의 의견을 좇아 식량을 주기로 했다.
그 날부터 진나라 도읍인 옹으로부터 진나라 도읍 강에 이르기까지 곡식을
운반하느라고 강에는 배들이, 그리고 육지에는 수레들이 끊임없이 이어져 나갔다.
목공 14년에 이르자 이번에는 거꾸로 진나라에 기근이 심해서 이오에게 식량을
요청하게 되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이오가 신하들과 논의하고
있었는데 어떤 신하가 이렇게 말하고 나섰다.
"지금이야말로 목공을 쳐부술 때라고 생각합니다. 승리할 게 틀림없습니다."
그러자 이오는 이 의견을 따라 이듬해인 목공 15년에 군사를 일으켜 진나라로
쳐들어 갔다.
목공은 이에 맞서 비표를 장군으로 임명하고 군사를 동원하는 한편 목공 자신도
출전했다.
명마를 잡아 먹은 용사들
9월 임술날에, 한원 땅에서 목공은 이오와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이오 또한 단숨에 승부를 가리겠노라 마음먹고 몸소 나섰다.
그러나 싸움터를 달리며 순찰하고 있던 중 그만 진흙땅에 말의 발이 빠져서
몸을 움직이기가 어렵게 되고 말았다. 이때를 놓칠세라 목공은 부하들을 이끌고
육박해 갔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이오를 사로잡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이오의 군대에 포위당함으로써 목공 자신이 상처를 입게 되었다. 이때
목공을 구원하기 위해 용감하게 포위망을 뚫고 달려든 용사들이 있었다.
그 덕분에 목공은 위기를 면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대대적으로 반격을 가하여
이오를 생포했다.
그 전투가 있기 수년 전에 목공의 명마가 도망친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
기산 기슭에 살던 건달 패거리 3백여 명이 그 말을 잡아 먹고 있었다. 명마를
수색하고 있던 관리가 그 사실을 알아내고는 그들을 처벌하려고 했다.
그러나 목공은,
"군자는 짐승을 죽였다고 하여 사람들을 헤치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말고기를 먹으면서 술을 마시지 않으면 오히려 몸에 해롭다고 하지
않나?" 하고는 도리어 그들에게 술을 잔뜩 주었다.
이 3백여 명의 사나이들이 궁지에 빠진 목공을 구하기 위하여 용감하게
포위망을 뚫고 달려온 용사들이었다. 그들은 목공이 이오를 친다는 소식을 듣자
모두 목공을 돕기로 나섰던 것이다. 그리고 목공이 궁지에 빠진 것을 보자 죽음을
무릅쓰고 돌진하여 자기들이 목공의 명마를 잡아 먹었을 때의 그 은혜에 보답한
것이었다.
우는 아내와 천자
결국 목공은 전쟁에서 이겨 이오를 생포하고 자랑스럽게 개선한 후 이렇게
백성들에게 선포했다.
"온 백성은 몸을 깨끗이 하라. 과인은 이오를 제물로 바쳐 상제께 제사를 올릴
것이다."
주나라 천자가 그 소식을 듣자,
"진나라의 근본을 따진다면 우리 주나라와 한 핏줄이다. 그러니 죽이지 말라."
하고 목숨을 살려 주라고 청했다.
또한 목공의 부인은 바로 이오의 누나였기 때문에 그녀 또한 상복에다 산발하고
목공에게 호소했다.
"제가 동생의 잘못을 바로 잡아 주지 못하여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제 동생을 불쌍히 여기시어 한번만 용서해 주소서."
목공은 곰곰이 생각했다.
'모처럼 이오를 사로잡아 기뻐하고 있었는데 천자께선 구명을 청하시고, 아내는
애걸을 하고 있지 않은가? 아무래도 들어줘야 할 것 같다.'
목공은 할 수 없이 이오를 방면해 주기로 했다. 그러면서 숙소와 식사도
군주로서 대우하도록 하였다.
그 해 11월에는 이오를 자기 나라로 귀국시켜 다시 왕의 자리에 앉게 하였다.
그래서 이오는 하서 땅을 목공에게 바치고, 태자를 인질로 보냈다.
이에 목공은 자기 집안의 처녀 하나를 그의 아내로 삼아 주었다.
이렇게 하여 진나라의 세력은 크게 강성해져 동쪽으로는 용문강까지 뻗쳐
나갔다.
두 진나라의 경쟁
목공 22년에 인질이 되어 있던 태자에게 그의 아버지 이오가 병상에 누워
있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그러자 태자는,
'목공은 내 아버님이 돌아가시더라도 나를 고국에 보내 줄 리가 없다.
내게는 형제가 많다. 나는 이대로 무시당한 채 있게 될테고 그러면 진나라는
다른 사람의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자기 나라로 도망쳐 돌아갔다.
이듬 해인 목공 23년에 진나라에서는 이오가 죽고, 도망쳤던 태자가 뒤를 이어
즉위했다.
그런데 목공은 태자가 몰래 도망친 사건 때문에 그를 매우 미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후 이오의 형인 중이를 망명지인 초나라에서 불러다가 태자의 아내였던
여자와 결혼시켰다.
중이는 일단 결혼하기를 거절했으나, 목공이 거듭 간청하기 때문에 마침내
승낙하였다.
중이가 진나라로 오자 목공은 그를 더욱 더 우대했다. 이듬해 봄에는 진나라
중신들에게 몰래 사자를 보내, 중이를 맞이하여 군주로 세우라고 통고했다. 이에
중신들이 그 뜻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목공은 군대를 수행시켜 중이를 고국으로
보냈다.
그 해 2월에 중이는 드디어 군주의 자리에 오르게 되니, 그가 바로
문공이다.(사기 2권 '진나라 문공' 편 참조)
한편 그 해 가을 주나라에서는 양왕의 아우인 대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 때움에
양왕은 피신해서 망명했다. 그리고는 이듬 해에 진과 진, 두 나라에 사자를
파견하여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목공은 손수 군사를 이끌고 문공과 협력하여
양왕을 입국시켰고, 양왕의 아우 대를 없앴다.
목공 28년, 목공은 성복에서 초나라를 격파시키고 드디어 천하의 패자가
되었다.
2년 뒤에는 목공과 문공이 협력해서 정나라를 포위했다.
그러자 정나라는 몰래 사자를 목공에게 보냈다.
"우리 정나라를 치면 득을 보는 것은 진의 문공이며, 귀국에는 아무런 이익도
없습니다. 진나라가 강해진다는 것은 오히려 진나라에 있어서는 화가 미치는
근원이 될 뿐입니다."
이 말을 그럴 듯하게 여긴 목공은 군사를 거두어 귀국해 버렸기 때문에, 문공도
어쩔 수 없이 작전을 중지하고 말았다.
소 열두 마리로 나라를 구한 현고
목공 32년 겨울에 문공이 죽었다.
그런데 정나라 백성 중에 자기 나라를 진나라 목공에게 팔아 넘기려는 자가
나타났다.
"정나라 도읍의 성문은 제가 관리하고 있습니다. 제가 손만 쓴다면 쳐들어가는
것은 간단합니다,"
목공은 곧 건숙과 백리해, 두 신하를 불러 의견을 물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정나라에 가려면 다른 나라 영토를 여러 곳 통과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먼
나라에 쳐들어 가서 승리를 거둔 예는 없습니다. 게다가 정나라에 그런 매국노가
있는 이상, 우리 나라에도 그런 자와 닮은 자가 나타나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그만 두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하며 반대 의견을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공은 초조하게 서둘렀다.
"그것은 모르는 소리요. 나는 이미 결심했소."
이렇게 말한 목공은 백리해의 아들 맹명시와 건숙의 아들 서걸술을 곧 원정군의
장수로 임명했다.
마침내 출진하는 날, 백리해와 건숙은 통곡했다. 그러자 목공이 화를 버럭 내며
비난했다.
"이제 출진을 하는 마당에 물다니 웬일이오? 아들들이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고
여기는 것이오?"
이에 두 신하가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결코 돌아오지 못한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성상의 부르심에 따라
저희 자식들이 출진을 하게 되었으나, 소신들은 이미 늙은 몸이라 원정기간이
길어진다면 이 세상에서 다시 그 애들을 만나 볼 기회는 없습니다. 그것을
생각하고 슬퍼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는 어전에서 물러서서 자식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이 만약 패한다고 하면, 반드시 그곳은 효산 골짜기일 것이다."
목공 33년 봄, 진나라는 드디어 정벌에 나섰다. 애당초의 예정을 바꿔 진나라
영토 안을 통과하지 않고 주나라 도읍의 북문을 통과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제후의 군대가 천자가 다스리는 주나라를 지날 때는 갑옷을 벗고
무기도 거둬 한데 묶어야 했다. 그러나 진나라 군대는 이를 전혀 지키지 않았으며,
줄도 맞지 않고 기율도 엉망이었다. 이 모습을 본 주나라의 대신 왕손만이 이렇게
말했다.
"천자가 계시는 성의 문을 그대로 지나다니 무례하기 짝이 없는 태도이다.
더구나 경솔하기까지 하다. 경솔하면 생각이 얕고, 예의가 없으면 기율이 없는
법이다.
그래 가지고는 싸움에 이길 수 없을 것이 분명한 일이로다."
이윽고 진나라 군대는 약소국인 활나라에 닿게 되었다. 이때 우연히 현고라는
정나라 상인이 소 12마리를 끌고 주나라로 팔러 가던 도중에 진군을 만났다.
그런데 자세히 알아보니 자기 나라를
치러 간다는 것이 아닌가! 즉시 그는 사람을 왕에게 보내 이 사실을 알리고
대비하도록 했다.
그러면서 한 가지 꾀를 냈다. 현고는 자기의 열두 마리 소를 끌고 진나라
장군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진나라가 정나라를 치러 온다는 말을 듣고 정나라 군주는 조심스럽게 방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여기에 소 12마리를 바치는 것은 원정중인 군사를 위로하게 하라는 정나라 군주의
분부이십니다."
그 말을 듣자 두 장군은 이마를 맞대고 의논했다.
"아무래도 정나라가 우리의 계획을 알아차린 모양이오. 지금 공격을 해봤자
실패할 것 같소."
그래서 부리나케 방침을 바꿔 정나라 대신 진나라의 속국이었던 소국, 활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말았다. 꿩 대신 닭을 잡았던 것이다.
들어맞은 예언
이때 진나라는 문공의 상중인데다가 아직 매장도 하지 못한 처지였다. 그런
와중에 진나라의 공격 소식을 듣자 태자 양공은 화를 버럭 냈다.
"그 놈들이 나를 멸시하다니! 상중인 기회를 틈타 내 속국을 공격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는 당장 상복을 검게 물들이고 전군에 출동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는
효산 골짜기에 군대를 매복시키고 진군이 나타나자 모조리 쳐부수었다.
무사히 살아 남은 자는 하나도 없다시피 되었고 두 사람의 장군도 생포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미 이야기했듯이 문공의 부인은 진나라의 공주였기 때문에, 생포된 두
장군의 목숨을 구하려고 양공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왕명을 거역하고 활나라를 공격한 이 장군들을 내 아버님께서는 골수에
맺히도록 원망하고 계실 것이오. 그러니 이 자들을 다시 돌려보내서 아버님께서
처벌하게 해주세요."
그러자 양공은 그 말을 받아들여 두 장군을 돌려보냈다.
목공은 상복을 입고 두 장군을 도읍의 교외에까지 나가 마중하며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백리해와 건숙의 의견에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자손인 그대들에게 수치를
끼치게 되었소.
나에게는 그대들을 처벌할 자격이 없소. 앞으로 수치를 벗어나도록 전념해 주기
바라는 마음 간절할 뿐이오."
그러면서 두 장군에게 전보다도 더 후한 대접을 해 주었다.
그 후에도 목공은 또다시 맹명시 등 두 사람을 장군에 임명하고 진나라를
공격하게 했으나 또다시 패배한 채 철수해야만 했다.
유혹과 이간
어느 대인가 오랑캐족인 융나라 왕이 유여라는 사자를 보내왔다. 본래 유여의
선조는 진나라에서 망명한 자였으므로 유여는 중국의 말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런 관계로 목공의 풍모에 대해 전해 들은 융왕은 유여를 진나라에 보내
시찰토록 한 것이다.
목공은 의기 양양해서 자기의 힘을 과시하려고 궁중에 모아둔 금은 보화를 꺼내
보였다. 그러자 유여는 이렇게 말했다.
"귀신이 이런 것을 만들었다고 하면 틀림없이 귀신도 지쳤을 것입니다. 만약
백성들이 만들었다면 백성들은 반드시 고통을 겪었을 것입니다."
목공은 그 말뜻을 알아차렸기 때문에 이렇게 물었다.
"우리 중원의 모든 나라는 시서, 예악, 법도에 따라서 나라를 다스리고 있소.
하지만 그런데도 소란이 그치지 않소.
그런데 귀국에는 별로 이렇다 할 통치의 기준이 없는 것 같은데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 나라를 다스리고 있소? 그런 기준이 없으면 틀림없이 어려움을
겪을텐데 말이오."
그 말을 듣자 유여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애당초부터 중원이 어지럽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런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악이나 법도의 제정은 고대 성왕이신 황제 이후부터의 일이긴 합니다만,
그 당시는 황제께서 솔선해서 법도를 따르셨기 때문에 이럭저럭 나라를 다스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후세에 이르자 위정자들은 날로 교만해지고 법도가 문란해져서 백성들만
책망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착취 때문에 시달리는 백성은 인의를 방패로 삼아
위정자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위정자와 백성들의 다툼이 왕위를 찬탈하게 하고, 다시금 종족의
멸망으로까지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법도의 위력만을 너무 믿은
결과입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다릅니다. 위정자는 유수한 덕성을 몸속에 깊이 간직하고
있으며 백성들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신뢰로 윗사람을 따르고 있습니다. 나라를 다스린다고 하는
것은 흡사 몸을 키워 나가는 것과 같이 자연스럽게 다스려져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바로 참다운 성인의 정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목공은 내전으로 들어가 신하를 불러 상의했다.
"참으로 저 사람은 현명한 사람이오.
이웃 나라에 성인이 있다는 것은 우리의 두통거리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데,
오늘 유여와 같은 인물을 보니 정말 불안해서 견딜 수 없소.
무슨 좋은 계책이 없겠소?"
그러자 신하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융왕은 벽지에 살고 있으며 아직 중원의 음악에 대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선 미녀 가무단을 보내 유혹함으로써, 정치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도록
만드는 게 좋을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유여가 여기에 머물고 싶어하는 것처럼
꾸며서 그의 귀국을 지연시킬 일입니다. 즉, 유여를 가능한 한 여기에다 잡아
두고 융왕과의 사이를 벌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융왕은 유여에 대해서 크게 의혹을 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군신을 이간하는 일에 성공한 뒤에는 포로로 만드는 것입니다. 게다가 융왕이
가무에 유혹당하면 자연 정사에 태만해질 것은 뻔한 일입니다."
이 말에 목공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그야말로 과연 묘안이오."
그 후 목공은 유여를 위해서 잔치를 베풀었다. 그리고 연회석에서 함께 나란히
자리를 잡는 등 파격적인 대우를 했다.
식사를 할 때에는 손수 요리를 권하면서 매우 친근한 정을 보여줌과 동시에,
융나라의 지형과 군비 등을 질문해서 나라 정세의 대부분을 파악했다.
그런 다음 16인의 미녀로 구성된 가무단을 융왕에게 보내게 했다. 그랬더니
과연 융왕은 완전히 빠져 해가 바뀌어도 가무단을 돌려보내려 하지 않았다.
목공은 그러한 융왕의 사정을 알게 된 후에야 비로소 유여를 귀국시켰다.
유여가 돌아가보니 왕은 매일같이 가무단만 끼고 노는 것이었다.
"폐하. 그만 가무단을 돌려 보내십시오."
이렇게 유여가 거듭 말했지만, 융왕은 이젠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았다.
이 소식을 들은 목공은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어 다시 유여를 초청했다.
이윽고 유여는 조국을 떠나 진나라로 돌아왔다.
목공은 그를 빈객으로 맞이하고, 국정의 고문 노릇을 담당하게 했다.
나의 과오를 분명히 밝힌다
목공이 즉위한 지 36년, 목공은 맹명시 등을 더욱 후대하고 군대를 일으켜
또다시 진나라를 공략하게 했다. 진군은 황하를 건너가자 배들을 불살라 버리고,
결사적인 각오로 공격했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진을 단번에 무찌르고 땅을 빼앗아 버렸다. 이로써 전날
효산 골짜기에서 패전한 복수를 한 셈이 되었다.
그러고 나서 목공은 황하를 건너 그동안 효산 골짜기에 버려진 병사들의 시체를
모다 제사를 지낸 후 매장했다. 또한 모든 병사들로 하여금 사흘 동안에 걸쳐
통곡하게 한 다음 이렇게 선언했다.
"그대들 병사들이여, 나의 맹세를 들으라. 우리들의 조상들은 매사에 있어
노인들의 말씀을 항상 따랐었다. 나는 그 계율을 어기고 건숙과 백리해의 충언을
무시했기 때문에 수많은 충성스러운 병사를 죽음에 이르게 했도다.
실로 통탄할 일이다.
그래서 나는 여기서 새로이 태어나는 후세와 자손들을 위하여 나의 과오를
분명히 밝히는 것이다."
모든 병사들은 목공의 그와 같은 말을 듣고 머리를 숙이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우리 대왕 폐하께서는 참으로 우리 병사들을 소중히 여기시는구나.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승리를 얻은 것이 분명하다."
이듬해에 목공은 유여가 세운 작전 계획에 따라 서쪽의 융족을 토벌했다.
그리하여 융왕 치하의 열두 나라를 모두 차지함으로써 영토를 천 리나 넓히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융나라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에 주나라 천자는 목공에게 금으로 만든 북을 하사하고 그 공적을 찬양했다.
목공이 중원에 진출하지 못한 이유
목공은 재위 39년 만에 사망하여 옹땅에 매장되었다. 그러자 목공을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고 순사(왕이 승하하면 이를 따라 그를 모시던 신하들이 함께
자살하는 것)한 사람이 1백 77명에 달했다. 모두 목공의 유언에 의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황조의 시"를 지어 읊으며 그들의 순사를 슬퍼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목공을 이렇게 평가했다.
'진나라 목공은 영토를 넓혀 나라를 번영시켰다. 동쪽으로는 강국 진을 제압했고
서쪽으로는 융족을 지배했다.
그만한 업적을 이루었으면서도 그는 제후들의 맹주가 되지는 못했다. 그것은
당연한 노릇이라고 하겠다.
자기가 죽으면서 후사를 세우기를 잊고, 또한 신하들을 순사시킨 것으로도
그것을 알 수 있다. 역대의 성왕들은 서거할 때에도 또한 후세를 위하여 은덕을
베풀어서 그 본을 보였다. 하물며 백성들이 애석히 여기지 않을 수 없는 유능한
신하들을 순사시키지는 않았다.
목공이 중원에 진출하지 못했던 것은 그러한 결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3. 만약 그가 살아있다면 기꺼이 그의 마부가 되겠다(안영)
안자의 이름은 영으로, 보통 안영이라 불리웠다. 그는 춘추시대 때 제나라에서
상국이라는 높은 벼슬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근면하고 검소하며 충실해 백성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식사
때 반찬도 두 가지를 넘지 않았고, 부인도 비단옷을 걸치지 못하게 했다. 또한
친구를 오래 사귀어 많은 결점이 보여도 결코 경의를 잃지 않았다.
음탕한 도둑놈인가, 임금인가
당시 제나라 군주는 장공이었는데, 매우 호색한이었다.
한번은 장공이 대신인 최서의 집에 가게 되었는데, 그의 아내가 절세의 미인인
것을 보고 매우 마음이 동했다. 그 후 장공은 기어코 그녀와 정을 통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최서의 관을 벗겨 다른 사람에게 주면서
그를 모욕하기도 했다.
최서는 기필코 복수하기로 결심했다.
어느 날 최서가 병이 들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장공은 이때야말로 그의
아내와 밀통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겼다. 그래서 곧바로 장공은 최서의 집으로 갔다.
그리고는 바로 부인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최서는 일이 이렇게 될 줄 알고 아내와 함께 방 안에서 문을 굳게 닫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있었다. 그러자 장공은 애인이 자기 온 줄을 몰라 가만히
있는 것으로 알고 기둥을 잡고 휘파람 소리를 냈다.
이때 최서와 미리 짜고 대기하고 있던 최서의 친구인 가거가 대문을 닫아 걸고
왕의 호위병을 떼어 놓았다. 그리고 옆방에 숨어 있던 최서의 부하들이 손에 손에
무기를 들고 쏟아져 나왔다.
장공은 속았다는 것을 깨닫고 정원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이내 완전 포위당하고
말았다.
그러자 장공이 소리쳤다.
"나는 너희들의 임금이다. 냉큼 비키거라!"
그러나 부하들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우리가 잡으려는 건 음탕한 도둑놈이다. 임금 같은 것은 우린 모른다."
그러면서 모두 달려들어 장공을 무참하게 죽여 버렸다.
조정 대신들이 이 소식을 듣고 모두 문을 걸어 잠근 채 두문불출했다. 하지만
안영은 서둘러 최서의 집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군주가 나라일로 죽었다면 신하 또한 충성을 다해 죽겠지만, 군주가 사사로운
욕심으로 죽었다면 사랑받던 사람이 아니고서는 장례지낼 수 없지 않은가!"
안영이 이렇게 외치니 최서도 문을 열어줬다. 안영은 바로 달려 들어가 시체
위에 엎어져 통곡했다. 그리고는 일어나 세 번 발을 동동 굴러 애도하고 서둘러
나왔다.
그 때 최서의 부하들은,
"이번 기회에 저 안영이라는 자도 아예 없애버리는 것이 어떻습니까?
명령만 내리십시오."
하고 최서에게 거듭 권했다.
하지만 최서는, "아니 된다.
안영은 지금 세상의 인심을 얻고 있는 사람이다. 그를 없애면 천하도 잃게 될
뿐이다."
하면서 부하들을 말렸다.
그 후 최서는 장공의 동생을 군주의 자리에 앉히니, 그가 바로 경공이었다.
그리고는 최서와 경공은 신하들을 한 명씩 불러내 충성을 서약받았다. 신하들은
모두 벌벌 떨면서 꼼짝 못하고 서약할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안영의 차례가 왔는데, 그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꼿꼿이 서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대답해 나가는 것이었다.
그러자 최서와 경공도 그의 높은 인품과 학식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경공은 안영을 상국으로 등용해 나라를 다시 맡겼다.
예의가 없으면 친구도 없다
그런데 그 나라에 월석보라는 품행이 단정하고 재주가 뛰어난 인물이 있었다.
그가 한번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가 감옥으로 끌려 가던 도중에 마침 안영이 나들이 나왔다가 그를 발견했다.
안영이 월석보와 한참 얘기해 보고는 자기가 타고 온 말을 죄값으로 바치고 그를
풀려나게 했다. 그리고는 월석보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곧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 얼마 뒤 월석보는 안영을 찾아가 절교 선언했다. 이에 안영이 깜짝 놀라
의관을 갖추고 나와 물었다.
"나는 별 것 없는 사람입니다만, 귀하를 곤경에서 벗어나게 한 적이 있었는데
왜 나와 절교하겠다는 것인지요?"
그러자 월석보가 대답했다.
"군자의 가장 따분한 일이 지기가 없는 것이고, 가장 기쁜 일이 지기를 얻는
것이라 합니다.
전에 내가 잡혔던 것은 그들이 오해했기 때문인데, 당신이 나를 바로 보셔서
구해 주셨으니 당신은 지기입니다.
하지만 나를 예의로써 대하지 않았으니 진정한 친구라 할 수 없소. 차라리
구해주지 않고 그냥 둔 것만 일이오."
안영은 그 말을 듣고 나자, 그를 모셔들여 정중하게 예의로 대접했다.
마부와 아내
하루는 안영이 외출을 하는데, 마부의 아내가 문틈으로 자기 남편을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남편이 안영의 말을 모는데, 채찍을 휘두르면서 마치 자기가 재상인
양 의기양양해 하는 것이었다.
이윽고 저녁 때 남편이 돌아오자, 그녀는 남편에게 헤어지자고 말했다.
남편이 그 이유를 물으니 그녀는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안영 어른은 키가 6척도 안되건만 재상으로 그 이름을 천하에 떨치고 계신데,
그 분을 보니 생각에 잠겨 겸손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8척이나 되는 몸을 가지고, 기껏 남의 마차나 끄는 처지에 잘난
체는 혼자 다 하고 있으니....
그래서 헤어지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자 마부가 사과하며 말했다.
"당신 말이 옳소. 다시는 안 그럴 것이니 용서하구료."
그 후 마부의 태도는 몰라보게 겸손해졌다.
안영은 마부가 달라진 것을 느끼고 그에게 이유를 물었다. 마부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게 된 안영은 자기 잘못을 반성해 고칠 줄 아는 점을 높이 평가해
군주에게 그를 추천했다.
그리하여 마부는 대부 벼슬에 오르게 되었다.
사마천은 이렇게 말한다.
"안영은 장공이 신하에게 죽음을 당했을 때, 그 시체 앞에 엎드려 곡하고
애도했으나 곧바로 자리를 떠 버리고 모반자를 치지 않았다.
그가 의를 보고도 행하지 않은 비겁자였던가?
그렇지 않다.
그는 임금에게 충간할 적에는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이는 참으로 '나아가서는
충성을 다할 것을 생각하고, 물러와서는 허물을 고칠 것을 생각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만약 안영이 오늘 살아 있다면 나는 기꺼이 그의 마부가 되어도 무방할 만큼
그를 흠모한다."
4. 장한 그 이름을 어찌 빛내지 않으리오(섭정)
섭정은 전국 시대 한나라 사람이다. 그는 일찍이 집안의 원수를 갚기 위해
사람을 죽이고, 어머니, 누나와 함께 몸을 피해 백정 노릇을 하며 살았다.
한편 당시에 엄중자라는 대신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재상인 겹루와 사이가
좋지 않아 항상 불안해 하였다. 그리고는 몇 번이나 그에게 죽음을 당할 뻔했다.
그러자 엄중자는 그 원수를 갚기 위해 협객을 찾아 나섰다.
그런데 어느 동네에 가자 한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이 동네에 섭정이라는 용감한 선비가 살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몸을 피해
백정일을 하면서 살고 있지만 사람이 매우 현명하고 의리 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엄중자는 그의 집으로 찾아가 인사하고, 그 후에도 몇 번 찾아가
사귀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엄중자는 섭정을 찾아가 술자리를 만들었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그는 황금 백 냥을 받들고 섭정의 어머니 앞으로 나아가 오래 사시길 빌었다.
그러자 섭정은 너무나 많은 선물에 깜짝 놀라면서 거듭 사양했다.
"저는 집이 가난해 객지로 떠돌면서 백정 노릇을 합니다만, 아침 저녁으로
부드러운 음식을 얻어 늙으신 어머님을 봉양하고 있습니다.
어머님께 봉양할 음식은 넉넉히 마련했으니, 당신께서 주시는 선물은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에 엄중자가 주위 사람들을 잠시 옆방으로 보낸 다음 이렇게 말했다.
"제게 피 맺힌 원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원수를 갚아 줄 사람을 찾아 천하를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이 곳에 와서 당신의 용기가 매우 높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제가 드린 것은 단지 어머니 봉양에 보태 쓰시라는 뜻에 불과합니다.
서로 친교를 더하자는 것일 뿐 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그러자 섭정은,
"제가 뜻을 굽히고 몸을 욕되게 하면서 시장바닥에서 백정 노릇이나 하는
까닭은 오직 연로하신 어머님을 봉양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님이 계시니
아직 제 몸을 남에게 허락할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하며 엄중자가 한사코 주려는 선물을 끝내 받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섭정의 어머니가 죽었다. 섭정은 정례를 마치고 상복도 벗은 후
이렇게 탄식하는 것이었다.
"아! 나는 시장 바닥에서 칼을 휘둘러 개, 돼지나 잡는 백정일 뿐이다.
그런데 엄중자 그 분은 높은 신분으로 천리길도 마다 않고 찾아와 나를 만났다.
나는 아무것도 그에게 해준 일이 없는데도, 그는 황금 백 냥을 받들어 어머님의
장수를 빌었다. 비록 내가 받지는 않았지만, 그는 진정으로 나를 알아준 분이다.
어찌 내가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는가. 전에 그 분이 부탁했을 때는 나는
어머님이 계셨기 때문에 사양했었다. 이제 어머님께서 천수를 다 누리고
돌아가셨으니, 나는 지금부터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이 목숨 아끼지 않겠다."
그리고는 곧장 길을 떠나 엄중자를 만났다.
"전에 제가 당신의 부탁을 들어드리지 못한 것은 어머님이 살아계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어머님께서 천수를 다 누리시고 돌아가셨습니다.
당신께서 원수를 갚으려는 자는 누구입니까?
제게 알려 주십시오."
이에 엄중자가 자세히 대답했다.
"저의 원수는 이 나라의 재상인 겹루입니다. 이제까지 몇 번이나 사람을 시켜
그 자를 죽이려 했으나 워낙 경비가 심해 매번 실패했습니다. 지금 당신이
다행히도 나를 버리지 않았으니, 당신에게 도움이 될 만한 수레와 말, 그리고
장정들을 붙여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섭정이 말했다.
"이런 일에는 사람이 많으면 오히려 실패합니다. 또 사람이 많으면 반드시
생포되는 경우도 있어 비밀이 누설되고 맙니다."
그러면서 엄중자가 주는 모든 것을 사양하고 혼자 떠났다.
섭정은 칼을 지팡이 삼아 겹루의 집에 도착하였다. 그의 집에는 삼엄한 경비가
펼쳐지고 있었다. 그러나 섭정은 단숨에 담을 뛰어 넘어 집에 있던 겹루를 단칼에
찔러 죽였다. 그러자 주위에서 호위병들이 몰려 들었는데, 섭정은 큰 소리로
꾸짖으며 수십 명이나 쳐죽였다.
이렇게 되니 나라에서도 이 시체가 누구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시체를
시장 바닥에 가져다 놓고는 현상금까지 걸었다.
"재상 겹루를 죽인 이 자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에겐 천 금을 주겠다."
하지만 아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천리길을 달려와 나란히 이름을 빛내다
한편 섭정의 누나인 섭영이 이 소문을 들었다.
예전부터 동생의 성격을 잘 알고 있던 섭영은 '동생이 분명하다.' 생각하고는 그
즉시 길을 떠났다.
섭영은 곧바로 서울로 올라가 시체가 있는 시장 거리로 갔다. 가서보니 과연
동생 섭정이었다. 섭영은 동생의 시체 위에 엎드려 슬픔에 겨워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통곡했다.
"이 사람은 내 동생 섭정입니다."
그러자 모여든 사람들이 말했다.
"이 사람은 재상을 죽인 자로써 나라에서 천 금의 현상금을 거고 그 이름을
알려 하고 있소. 부인은 그 죄가 얼마나 큰 지 알면서 이자의 이름을 밝히는
거요?"
이에 섭영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도 알고 있습니다.
원래 섭정이 온갖 모욕을 무릅쓰고 백정 노릇을 하며 산 것은 늙으신 어머님이
살아 계시고, 내가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후 엄중자는 동생을 알아보고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건만 개의치 않고
사귀었습니다. 선비란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 법입니다.
이제 동생은 누나가 아직 살아있기 때문에 자기 몸을 몰라보게 해쳐서 내가
연루되지 않도록 한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어찌 내 한 몸이 없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동생의 의로운 이름을
그냥 없어지도록 하겠습니까!"
이 말에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더니 그녀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기 세 번, 마침내 섭정의 곁에서 죽었다.
이 소식을 들은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참으로 섭정은 의로운 사람인데, 그 누나 섭영 또한 장한 여인이다.
만약 섭정이 자기 누나가 반드시 천 리 험한 길을 달려와서 이름을 나란히 하여
누나와 동생이 시장 바닥에서 함께 죽게 될 줄 알았다면, 그는 엄중자의 부탁을
들어 주지 못했을 것이다.
엄중자 또한 인물을 잘 알아보고 뛰어난 사람을 얻었다."
5. 천하가 붙잡아도 나의 길을 가련다(노중련, 추양)
1) 지혜로운 자는 때를 잃지 않는다(노중련)
동해에 빠져죽을지언정 굴복할 수는 없다
노중련은 제나라 사람으로 특이하고 탁월한 계획을 짜기 좋아했으나, 벼슬에는
도대체 뜻이 없었다.
당시 조나라는 진나라 백기의 공격을 받아 장평에서 군사가 전멸하여 40여만
명이나 죽었다. 그러고도 진나라는 다시 한단을 포위했기 때문에 조나라 왕은
공포에 질렸다. 그런데도 제후의 원군들은 진나라를 구하려고 했으나, 진나라가
두려워서 진격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장군인 신원연을 한단에 잠입시켜,
조나라의 평원군에게 이렇게 건의했다.
"진나라는 전에 제나라의 민왕과 세력을 다투며 제왕이라 칭했고, 그 우에 이
칭호를 서로 안 쓰기로 했는데, 이제 제나라 왕은 그 세력이 약해지고 진나라만이
천하에서 옹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나라가 갑자기 조나라 도읍을 포위한 것은
꼭 한단을 손에 넣고 싶어서가 아니라 다시 한번 제왕의 칭호를 쓰고
싶어서입니다.
그러므로 사신을 파견해서 진나라왕을 받들고 제왕의 칭호를 써 주게 되면,
진나라는 틀림없이 기뻐하며 포위를 풀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평원군은 주저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포위하고
있는데, 위나라 왕이 진나라 왕을 제왕이라 칭하라고 권유한다는 말을 듣자,
노중련은 평원군을 만나서 물었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이십니까?"
이에 평원군이 대답했다.
"내가 뭐라고 말할 자격이 있겠습니까. 앞서 40만의 대군을 나라 밖에서 잃고
지금 또 나라 안에서 한단을 포위당했건만 격퇴시킬 수조차 없습니다. 위나라는
신원연을 파견하여 진나라 왕을 제왕이라 칭하라고 권하는데, 나로서 뭐라고 말할
자격이 있겠습니까?"
그러자 노중련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까지 나으리를 천하의 현공자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제서야 천하의
현공자가 아니심을 알았습니다. 위나라의 신원연은 어디에 있습니까? 제가
나으리를 위해 그 사람을 만나서 책망하고 쫓아버릴까 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소개하여 선생과 만나게 해드리겠습니다."
평원군은 바로 신원연을 만나서 말했다.
"조중련이란 사람이 지금 이 곳에 와 있습니다. 내가 소개하여 장군과 만나시게
하고 싶습니다."
이에 신원연이 말했다.
"노중련 선생은 제나라의 높은 선비라고 들었는데, 저는 남의 신하로서 사명을
띠고 있는 몸입니다. 직분이 있는 몸인지라 노중련 선생과 만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평원군은 계속 고집했다.
"나는 이미 선생과 약속을 해 두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신원연은 하는 수 없이 만나겠다고 승낙했다.
그런데 노중련은 신원연을 만나고도 입을 열지 아니했다. 신원연이 먼저
노중련에게 말했다.
"내가 이 포위된 성 안에 있는 사람을 보아하니, 모두 평원군에게 의지하려는
사람들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선생의 풍모를 뵈오니, 선생께서는 조금도 평원군에게
의지하려는 사람 같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오랫동안 이 포위된 성 안에
머무르시는 겁니까?"
그러자 노중련이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세상에서는 포초( 주나라의 선비로 세상을 한탄하며 나무를 안은 채
말라죽었다)를 보고 너그럽지 못하고 성질이 까다로워서 죽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 사람의 됨됨이를 모르고 그저 한 몸을 위해
죽었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진나라는 예의를 돌보지 아니하고 적의 목을 많이 베는 것만을 능사로
아는 나라로서, 권모술수로 군사를 부리고, 노예처럼 백성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진나라가 소원대로 제왕이 되어 천하의 정치를 그릇되이 하려고
한다면 나는 동해에 빠져 죽을지언정 그 백성이 되는 것을 참을 수는 없습니다.
내가 장군과 만나자고 한 것도 그러한 진나라를 누르고 조나라를 도와주고
싶어서였습니다."
이에 신원연이 물었다.
"선생께서 도우시겠다니, 대체 어떤 방법으로 도우시겠단 말씀입니까?"
"나는 위나라와 연나라로 하여금 조나라를 도와주도록 하고 싶습니다. 물론
제나라와 초나라로 틀림없이 도울 것입니다."(물론 이 말은 실현성은 약하지만
절대 진나라에 무릎 꿇을 수 없다는, 일종의 호기로운 선언이었다)
그러자 신원연이 다시 물었다.
"연나라는 그렇다치고 위나라 일이라면 저도 위나라 사람이니 조금은 그 사정을
알고 있습니다. 선생께서는 어떤 방법으로 위나라를 설득하여 조나라를 도우시겠다는
말씀이신가요?"
노중련이 이 말을 받았다.
"위나라는 진나라가 제왕의 칭호를 쓰게 되면 어떤 해독이 있는가를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이 해독을 위나라에 알려 주면 반드시 조나라를 도울 것입니다."
"선생, 저 하인들을 보십시오. 열 병의 하인이 한 사람의 주인을 따르는 것은
힘으로 이길 수 없어서가 아니고, 지혜가 미치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단지 주인이
무서워서입니다."
그러자 노중련이,
"아아! 위나라는 진나라와 비교할 때 하인과 같다는 말씀이오?"
라고 탄식하며 말했다.
"그렇소이다."
라고 신원연이 대답했다. 그러자 노중련이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진나라 왕에게 위나라 왕을 삶아서 젓을 담그라고
해야겠소이다."
신원연은 불유쾌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선생의 말씀은 좀 지나치십니다. 선생이 무슨 방법으로 진나라 왕에게 위나라
왕을 삶아서 젓을 담그게끔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노중련이 말을 이었다.
천하 제1의 현사
"노여워하실 것이 아니라 들어 보시오. 그렇지 않아도 그 말을 하려고 했었소.
옛날 구후, 악후, 서백창은 주왕을 섬기던 삼공의 높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오.
그런데 구후에게 미모의 딸이 있어 주왕에게 바쳤던 바, 주왕은 그 딸이
추녀라며 구후를 죽여 젓을 담갔었소. 악후가 이것을 보고 굳이 말리며 간하자,
주왕은 악후도 죽여서 건포를 만들었소. 문왕(서백창)은 이 말을 듣고 탄식했기
때문에 유리 지방에 백 일이나 유폐되었다가 죽을 뻔했었소.
위나라 왕은 지금 똑같은 왕의 처지이면서 무슨 까닭에 갑자기 젓이나 건포가
되려고 하는 것인가요?
지금 진나라가 천하의 대국이면 위나라 역시 대국이오. 똑같이 대국으로서
다같이 왕이라고 부르는데, 한 번 싸워서 진나라가 이겼다하여 진나라 왕을
제왕이라고 부른다면 삼진의 대신들을 종이나 첩만도 못하게 만드는 것이오.
더구나 진나라의 소망이 이루어져서 제왕의 칭호를 받게 되면, 그 즉시로
제후의 대신들을 갈아치울 것이오. 진나라가 못마땅하게 보는 사람의 관직을
빼앗고 진나라에게 잘 보인 사람에게 관직을 줄 것이며, 미운 자의 관직도 빼앗아
아기는 자에게 줄 것이오. 또 자기들의 자녀 또는 천첩을 제후들에게 아내로
삼으라고 하여 위나라 궁중에도 들여 보낼 것인즉, 이렇게 되면 위나라 왕인들
어찌 평안하게 지낼 수 있겠소. 그리고 장군도 어찌 총애를 계속 받을 수 있겠소."
이 말을 들은 신원연은 일어나서 재배하고
"선생을 보통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만, 이제야 선생께서 천하의 현사이심을
알았습니다. 저는 이곳을 떠나면 두 번 다시 진나라 왕을 제왕이라 말하지
않겠습니다."
라며 사과했다. 진나라 장군이 이 말을 전해 듣자 두려워하여 50리쯤 군사를
후퇴시켰다. 또 때마침 신릉군이 조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진비의 군사를 빼앗아서
진나라 군사를 공격했기 때문에, 진나라는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철수하였다.
그 후 평원군은 노중련에게 벼슬을 내리려 했으나, 노중련은 거듭 사양하여
사자가 세 번씩이나 왕래했건만 끝내 받지 아니했다. 그래서 평원군은 잔치를
베풀고 술자리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서 노중련의
건강을 축하하면서 천금을 바쳤다.
그러자 노중련은 웃으며 말했다.
"천하의 선비된 자가 귀한 까닭은 남을 위하여 걱정을 덜어주고 어려움을
없애주며, 어려운 일을 해결해 주고도 보상을 받는 일이 없기 때문이오. 보상을
받는 것은 장사꾼이나 할 일이지, 나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노중련은 평원군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떠난 다음, 평생에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
한 장의 편지로 성을 함락시키다
그 후 20여 년이 지나 연나라의 장군이 제나라를 쳐서 요성을 함락시켰다.
그런데 요성 사람 중 한 사람이 그 장군을 연나라 왕에게 모함했다. 이에 장군은
문책받을 것이 두려워 요성을 지키고 본국에 귀국하지 않았다.
그 뒤 제나라의 전단이 요성을 쳤는데, 1년여 동안 수많은 전사자만 내고
요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노중련이 나서서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서 화살에 매달아 성안으로 쏘아
보냈다.
"'지혜로운 사람은 때를 거역하여 불리한 처지에 빠지지 아니하며, 용감한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여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아니하고, 충성스런 사람은 제
몸만을 생각하여 임금을 저버리지 아니한다'란 말이 있습니다.
지금 장군은 모함을 당한 한때의 노여움 때문에 연나라 왕을 배신하고 임금
밑에 믿을 만한 신하가 없음을 알면서도 조국을 돌보지 않았고 있는데, 그래서는
충신이라 할 수 없소. 또 목숨을 걸고 요성을 함락시켰으면서도 제나라에 그
세력을 뻗치지 못하다면, 용사라고 할 수는 없소.
그리고 명성을 허물어뜨리게 되면 그 이름이 후세에 전해지지 못할 것이니,
지혜로운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소. 이와 같은 사람은 세상 임금들이 신하로 삼지
아니하며, 유세객들도 입에 올리지 않는 법이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때를 잃는 일이 없고, 용감한 사람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법이오.
장군에게는 지금이야말로 생사영욕, 귀천존비의 분수령이니,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도록 하시오.
장군에게 바라건대 깊이 생각하여 세상의 속인들과 행동을 똑같이 하지 않도록
하시오.
지금 장군이 피폐한 요성의 백성을 가지고 제나라의 전군을 막는 것은 마치
묵적의 수비와 비슷하고, 인육을 먹고 인골로 불을 때면서도 병졸들이 두 마음을
갖지 않는 것은 손빈의 군사와 똑같아서 장군의 재능은 천하에 드높으오.
그러나 내가 장군을 위해 생각해 볼 때, 아직 거마와 무기가 완전 할 때 이대로
귀국하여 연나라 왕을 위하여 힘을 다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행동이라고
생각하오.
거미와 무기를 온전히 갖추어서 연나라로 돌아가면 연나라 왕은 틀림없이
기뻐할 것이오. 병사들을 무사하게 데리고 돌아가면 백성들은 귀공을 부모와 같이
볼 것이며, 친구들은 팔을 걷어 붙이고 업적을 밝힐 것이오. 그래서 위로는
고립되어 있는 임금을 도와 뭇 신하를 제어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위하고
유세객을 도와 국정을 바르게 하며 풍속을 고쳐나가면 공명은 자연히 이룩될
것이오.
만약 귀국할 뜻이 없어 연나라와 세상을 버리고 등쪽의 제나라에서 지내려
한다면, 제나라는 장군에게 땅을 떼어 주고 봉지를 정해 줄 것이니, 자손은 제후가
자칭할 것이고 제나라와 함께 오래도록 존속 할 수 있을 것이오. 이것 또한 한
가지 계책이 될 것이오. 이 두 가지 계책은 이름을 드러내고 실속을 채우는
일이오. 바라건대 공은 스스로 깊이 생각하여 그 중 한 가지를 택하시오.
나는 '조그마한 절개를 꾀하는 사람은 큰 이름을 드러낼 수가 없고, 조그마한
부끄러움을 마다하는 사람은 큰 공을 세울 수 없다'는 말을 들었소.
옛날 관중이 환공을 활로 쏘아서 띠의 정면에 붙어 있는 장식을 맞춘 일은 실로
반역 행위였고, 자기가 받들던 공자 규를 버리고 함께 죽지 아니했던 것은 비겁한
일이며, 잡힌 몸이 되어 수갑과 차꼬를 차게 된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소. 대개
이러한 세 가지 행실이 있는 자는 세상의 군주가 신하로 삼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향리의 사람들도 사귀기를 싫어할 것이오.
그러나 당시에 만약 관중이 유폐되어 다시 옥에서 나오지 못하고 그대로
옥사해서 제나라에 돌아오지 못했더라면, 치욕에 가득찬 오명을 뒤집어 써서
노비들도 그 이름을 함께 부르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을 것이오. 그러니
세속인들이야 더 말할 것도 없는 일이 아니겠소.
그런데 관중은 옥중에 있는 몸을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하고 천하를 바로 잡지
못함을 부끄러워 했으며, 공자 구를 위해 죽지 않았음을 부끄럽게 생각지
아니하고 위세가 제후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소. 그러기에
관중은 세 가지 행실의 과오를 겸했으면서도, 환공을 도와서 오패의 으뜸으로
만들었고, 그 이름은 천하에 높아졌으며, 그 위광은 이웃 나라까지 비쳤던 것이오.
조말은 노나라의 장군이 되어 세 번 싸워서 세 번 패하고 땅을 잃기 5백 리에
이르렀었소. 당시에 만약 조말이 뒷일을 생각지 않고 결심한 대로 목을 찔러
죽었다면 패군지장이 되어 그 오명은 영원히 씻을 수 없었을 것이오. 그러나
조말은 세 번 패한 것을 개의치 아니하고 노나라 임금과 계략을 꾸미어, 환공이
천하의 제후를 모아 회합할 때 단지 칼 한 자루를 손에 쥐고 단상에 올라가서
환공의 가슴을 겨누며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말 한 마디 헛되이 하지 않고 끝내는
세 번 싸움에서 잃었던 치욕을 하루 아침에 회복했소.
이 두 사람이 조그마한 부끄러움을 모르고 조그마한 절개를 이룰 수 없었던
것은 아니오. 그들은 다만 자기 몸을 죽이고 집안과 자손의 뒤를 끊고 공명을
세우지 못하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이 취할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오.
그러므로 울분의 원한을 버리고 일생 동안 공명을 세웠으며, 사사로운 감정을
버림으로써 여러 대에 걸친 공을 이룩했던 것이오.
바라건대 장군은 그 중 한 가지를 골라서 실행하시오."
연나라 장군은 노중련의 편지를 읽고 사흘 동안이나 울었다. 그리고 이모저모로
궁리하면서 자신의 나아갈 바를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연나라로 돌아가자니 이미
왕과는 불화한 사이가 되었으므로 죽음을 당할 지도 모르겠고, 제나라에 항복을
하자니 이미 제나라 군사를 수 없이 죽였으므로 욕을 당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탄식하며,
"남의 칼에 죽느니 차라리 내 칼로 죽자."
고 하더니 자살을 하고 말았다. 그러자 성 안이 혼란해졌고 전단은 마침내 요성을
함락시켰다. 전단은 돌아와서 왕에게 노중련에 관한 일을 보고하고 벼슬을 주려고
했지만, 노중련은 몸을 피하여 바닷가에 숨어 살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부귀한 몸이 되어 주인에게 눌려 살기보다는, 오히려 빈천한 몸으로
세상을 가볍게 내 마음대로 살고 싶다."
2) 여자는 질투받기 쉽고 선비는 모함받기 마련이다(추양)
추양은 제나라 사람으로 위나라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그런데 양승이라는
사람이 추양을 시기하여 위나라 효왕에게 모함했다. 그러자 효왕은 노하여 추양을
잡아넣고 죽이려 했다.
추양은 자기 한몸 죽는 것은 그렇다치고 남의 중상을 받아 죽은 후 까지도
오명을 쓰게 될 것이 두려워 옥중에서 왕에게 편지를 올렸다.
진실이 의심받는다
"'충성된 자는 보답을 받지 못하는 일이 없고, 진실한 자는 의심을 받는 일이
없다'라는 말이 있는데, 지금껏 저는 이 말이 진리라고 믿어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니 이것은 헛된 말에 지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옛날 형가는 연나라 태자 단의 신의를 흠모하여 단을 위해 진나라에 들어가
시황제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태자 단은 형가가 진나라에 가지 않을
것이라고 의심했습니다.
옛날 변화는 초나라 왕에게 보물 구슬을 바쳤지만 그것이 돌이라 하여 오히려
발을 잘리었고, 이사는 충성을 다했으나 호해 때문에 극형에 처해졌습니다. 기자가
미치광이를 가장하고 접여가 세상을 피한 것도 이런 일이 있을 것을 두려워 했기
때문입니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는 변화, 이사의 마음을 살피시고 초왕이나
호해와 같이 참언을 받아들이지 마셔서, 제가 기자, 접여와 같은 웃음거리가 되지
않게 해주십시오.
또한 비간이 가슴을 찢기우고 자서가 말가죽 자루에 그 시체가 싸여져 장강에
버려진 일도 그때에는 그들의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그들의 진실이 밝혀진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는 깊이 생각하시어 조금이라도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여자는 질투받기 쉽고 선비는 모함받기 마련이다
속담에 '백발이 되도록 사귀어도 처음 만나는 것처럼 차디찬 교제가 있는가
하면, 거리의 수레 그늘에서 한 마디 나누었건만 옛 친구를 만난 것 같은 교제도
있다'고 했습니다.
무릇 교제의 깊이는 세월의 길고 짧음에 관계치 아니하고 상대방 마음을 아느냐
모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옛날 번어기는 진나라를 피해 연나라로 가서
연나라 태자 단을 위해 자기 목을 형가에게 주어 진나라로 가지고 가라고 할
정도로 정성을 다했습니다. 제나라를 버리고 위나라로 갔던 왕사는 자기를
잡으려고 달려온 제나라 군사의 면전에서 성에 올라가 스스로 목을 찔러 위나라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했습니다.
왕사와 번어기는 원래 고국인 제나라와 진나라를 싫어했고 연나라나 위나라를
좋아했던 것은 아닙니다. 고국을 떠나서 남의 나라 임금을 위해 죽은 것은, 그 두
임금의 처사가 각각 두 사람의 뜻에 맞아서 그의 외로움을 사모하는 마음이
지극했기 때문입니다. 또 소진은 가는 곳마다 신임을 받지 못했었지만 오직
연나라에서만은 미생과 같이 신의를 지켰고, 백규는 중산국의 장수로서 여섯 성을
잃고 도망한 다음 위나라를 위해 중산국을 무찔렀습니다.
이런 일들은 오직 군주와 신하 사이에 서로 이해가 깊었기 때문입니다. 소진이
연나라 재상이 되었을 때, 소진을 왕에게 모함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왕은 칼을
만지며 그 모함하는 자를 혼냈고, 소진에게는 준마를 잡아서 크게 잔치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또 백규가 중산국을 친 공으로 위나라에서 벼슬 자리에 나아갔을 때 위나라
문후에게 모함을 하는 중산국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후는 이 모함을
받아들이지 않고, 백규에게 야광벽을 내렸습니다. 이런 일들은 두 임금, 두 신하가
각각 흉금을 터놓고 서로가 믿고 있었기 때문이니, 어떻게 뜬 말에 마음이
흔들릴 리 있겠습니까.
여자는 미인이건 추한 여자건 궁중에 들어가면 질투를 당하게 마련이고, 선비도
어질건 어리석건 조정에 들어가면 시기를 받게 마련입니다.
옛날 사마회는 송나라에서 다리를 잘렸는데 마침내는 중산국의 재상이
되었으며, 범수는 위나라에서 늑골을 꺾이고 이가 뽑혔지만 마침내는 응후가
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언젠가는 누명이 벗겨지고 자기의 뜻을 펼 날이
돌아올 것을 확신하고 홀로 몸을 세워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질투심이
많은 자들의 미움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은나라의 충신 신도적은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졌고, 서연은 돌을
지고 바다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비록 세상에서 인정은 받지
못했지만 임금의 마음을 혼란하게 하는 짓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백리해 거리에서 걸식을 하고 있었건만 진나라의 목공은 그에게 정사를
맡겼고, 영척은 수레 밑에서 소를 기르고 있었지만 제나라 환공은 그에게 국정을
맡겼습니다. 이 두 사람은 처음부터 조정에서 벼슬을 하면서 주위의 칭송을 받아
목공이나 환공에게 발탁되었던 것이 아닙니다. 임금과 신하가 서로 마음이 통하고
행동이 일치되면 아교나 옻칠보다도 더 굳게 맺어져, 형제간이라 할지라도 그
사이를 갈라 놓을 수는 없습니다. 하물며 뭇 사람들의 말에 현혹이 될 리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한 쪽 말만 들으면 간계가 생기게 되고 한 사람에게만 정사를 맡기게
되면 반란을 불러 오게 되는 것입니다.
뭇 사람의 말은 쇠라도 녹이고, 쌓이는 욕은 뼈라도 녹일 수 있습니다.
진나라는 서융인 유여를 써서 중국의 패자가 되었고 제나라가 월나라 사람 몽을
써서 위왕, 선왕을 강하게 한 것은, 이 두 나라가 속습에 얽매이지 않고 세정에
이끌리지 않았으며 아첨과 편파적인 말에 흔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의견을 공정하게 듣고 모두의 마음에 따라 그 이름을 당세에 떨치려면, 오랑캐나
월나라 사람이라도 마음만 맞으면 형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유여나 몽이 그
좋은 예입니다. 뜻이 맞니 않는다면 골육이더라도 멀리하고 쓰지 않습니다.
임금된 사람이 참으로 도리에 맞는 방법을 쓰면서 편벽된 방법을 물리친다면,
오패나 삼왕에 맞먹는 큰 공을 세우는 것도 쉬운 일입니다.
주 무왕은 가슴을 찢긴 가슴을 찢긴 충신 비간의 아들을 등용하고 배를 찢긴
임산부의 무덤을 가꾸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공적은 천하를 뒤덮었는데,
임금이 선을 구하되 억압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나라의 환공은 원수였던 관중을 등용하여 천하를 바로잡았습니다. 그것은
마음이 인자했고 충심으로 그들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마음에도 없는
반말로써 일시적으로 이용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러나 진나라는 상앙의 법을 써서 동쪽의 한, 위나라를 약하게 만들고 천하의
강국을 만들었는데도 끝내는 상앙을 거열형에 처했습니다. 월나라는 대부 종의
계략을 써서 오나라 왕 부차를 포로로 잡아서 중국의 패자가 되었건만 마침내
종을 주살했습니다. 그러므로 손숙오는 세 번 재상의 자리를 얻었어도 기뻐하지
아니했고, 세 번 그 자리를 물러나도 후회하는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제 임금이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공이 있는 사람에게는 보답할 마음을 가지고
끝까지 신하와 곤궁영달을 함께 하며 선비에게 관작봉록을 아낌없이 준다면, 폭군
걸왕의 개라 하더라도 성왕 요에게 짖을 수가 있고, 더척의 자객일 지라도 허유를
척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물며 성왕의 명령이라면 누가 응하지 않겠습니까. 형가가 자신의 죄에
연좌되어 칠족을 죽게 한 일이라든가, 요리가 자신의 희생으로 자기 처자를 불타
죽게 한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겠습니다.
참된 인재를 구하려면
'명월주라든가 야광벽도 어두운 길을 걷는 사람에게 던지면 칼을 잡고 노려보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아무런 인연도 없는데 눈 앞에 날아왔기 때문이다.
마구 꼬인 나무뿌리가 너무 굽어 있어 아무 소용 없을 것 같지만, 군주 그릇이
되는 것은 좌우에 있는 사람이 우선 그 뿌리를 조각하고 장식을 하여 군주에게
바쳤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 인연도 없는데 눈 앞에 날아오면 야광벽일지라도 원한을 살 뿐, 덕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와 반대로 누군가가 먼저 소개를 해 주면 마른 나무나 석은
등걸을 바치더라도 공로가 있다 하여 잊혀지지 않는 법입니다.
오늘날 포의 곤궁한 선비로서 그 신분이 빈천한 사람은 비록 요, 순의 도를
안고, 비간의 뜻을 가지고 당시의 임금에게 충성을 다 하려고 해도, 마음과 생각을
다하여 임금의 통치를 보필하려고 해도 임금은 칼을 잡고 노려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일은 포의의 선비를 마른 나무나 썩은 등걸만도 못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군이 세상을 거느리고 풍속을 바로잡을 때는 뜻대로 세상을
교화시키고, 비천하고 혼탁한 말에 이끌리거나 근거없는 참언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진나라의 시황은 몽가의 말에 현혹되어 형가의 말만
믿다가 몰래 감춰 둔 비수에 찔려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이와는 달리 주나라의 문왕은 경수, 위수가에서 사냥을 하다가 강태공을 수레에
태우고 돌아와서 그의 도움으로 천하의 왕이 되었습니다. 진시황은 좌우에 있는
사람을 믿다가 죽을 변을 당할 뻔했고, 문왕은 새가 우연히 나무에 날아들 듯이
우연하게도 만난 사람을 써서 왕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문왕이 자신을
견제하는 말에 초연하고 특이한 포부를 세우며, 공명정대한 관점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임금이 된 사람들은 아첨하는 소리에 빠지고 신첩에게 견제되며, 마치
하늘에라도 뛰어오를 수 있는 것 같은 인재들을 소나 말처럼 취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포초가 세상을 원망한 나머지 부귀의 팽개친 이유입니다.
'정장을 하고 조정에 입궐하는 사람은 사사로운 이욕으로 도의를 저버리는 일이
없고, 명예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사욕 때문에 행실을 해치지 않는다'란
말이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현의 이름이 승모란 이유 한 가지 때문에 효자인
증자는 그 땅을 밟지 아니했고, 읍의 이름을 조가라 한다 해서 음악을 싫어하던
묵자는 수레를 되돌렸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임금들은 천하의 식견과 기량이 다 같이 위대한 선비들을 권력
앞에 무릎을 끓게 하여, 세력에 눌려 짐짓 얼굴빛을 부드럽게 하고, 행실을 더럽혀
가면서까지 아첨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섬기게 하며, 좌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친하고 가깝게 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래가지고는 뜻있는 선비는 험악한
바윗굴 속에 엎드려서 죽는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충과 신을 다하여
조정으로 향하려 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이 편지가 위나라의 효왕에게 바쳐지자, 효왕은 사람을 보내어 추양을 옥에서
데려다가 마침내 상객으로 맞았다.
6. 고목나무가 꽃을 피우다(춘신군)
춘신군은 초나라 사람으로서 이름은 헐이요, 성은 황 씨이다. 그는 세상을
돌아다니며 많은 것을 배웠으며, 초나라의 경양왕을 모시고 있었다.
경양왕은 황헐이 변론을 잘한다고 생각하여 그를 진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이 무렵에 진나라는 이미 백기로 하여금 초나라를 공격하게 하여 무와 검중
지방 등을 탈취하였고, 언, 영 지방을 함락시켰으며, 동으로는 경릉까지 제압하여
초나라의 경양왕은 동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황헐(춘신군)은 진나라가 초나라를 없애버릴까 두려워 하였다. 이에 그는 편지를
진나라 소왕에게 보냈다.
두 마리의 호랑이가 싸우면
"지금 천하에서 진나라와 초나라보다 강한 나라는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대왕께서 초나라를 정벌하려 하신다는 소문이 들리니 이는 두 마리의 호랑이가
서로 싸우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두 마리의 호랑이가 싸울 때에는 힘없는
개가 그 해를 입게 되오니 초나라와 친교를 맺는 거이 가장 나은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 까닭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든 일은 극단의 상태에 이르면 다시 처음 상태가 된다고 합니다. 겨울이
다하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다하면 겨울이 옵니다. 위로 쌓은 것이 극단에 이르면
위태롭게 되니 바둑알을 쌓아놓는 경우가 바로 그 일례입니다.
지금 대왕의 영토는 천하에 두루 퍼져 있어서 동서의 변경에까지 걸쳐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생긴 이래로 어느 누구도 이루지 못했던 것입니다.
한편 대왕께서는 성교를 한나라에 보내셨는데, 성교는 그 땅을 가지고 진나라로
들어왔습니다. 이것은 대왕께서 군대를 사용하거나, 위세를 과시하지 아니하고도 백 리의 땅을
얻은 것이니 왕께서는 유능한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왕께서는 또 군사를 일으켜서 위나라를 공격하니 드디어 위나라는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대왕께서는 또 제나라와 진나라의 허리 부분을 끊고, 초나라와 조나라의 등뼈
부분을 자르니 천하의 나라가 모였으나 감히 이를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대왕의 위세 또한 극도에 이르렀다 하겠습니다.
이러한 때 대왕께서 만약에 공적을 보유하시고, 위세를 지키신 채로 남을
공격하여 탈취하려는 욕심을 버리시고, 그 대신 인의 의 땅을 비옥하게 갈아
놓으셔서 후환이 없도록 하신다면 3왕에 다시 대왕을 첨가할 필요가 없을 만큼
대왕께서는 위대하신 것이며, 오패에 다시 대왕의 이름을 첨가할 필요가 없을
만큼 대왕은 위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대왕께서 만약에 자기를 따르는 백성의 많음을 믿고, 병력의 당대함에
의지하여, 위나라에 승리한 위세를 타서 힘으로 천하의 군주를 신하로 삼으려
하신다면 그 후환이 생기리라고 신은 걱정이 됩니다.
"시경"은 이렇게 읊고 있습니다.
시작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어도
끝맺음을 잘하는 사람은 드물도다.
그리고 "역경"에서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우가 물을 건너려 할 때는
그 꼬리를 물 속에 담가 본다.
이러한 글들은 모두 일이란 시작하기는 쉬워도 끝맺기는 어려움을 뜻하고
있습니다.
옛날 지백은 조나라를 정벌하는 것의 이익되는 것만을 알았고, 유차에서 자신이
당할 화는 몰랐으며, 오나라는 제나라를 정벌하는 것의 편리함만 알았고,
월나라에게 패배하리라는 것은 몰랐습니다. 이 두 나라는 큰 공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눈앞에 있는 이익에 빠져서 그 뒤에 있을 환난을 가볍게 여겼던 것입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초나라를 무너뜨릴 것만을 생각하시느라 초나라를 무너뜨리는
것이 한, 위를 강성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잊고 계십니다.
"시경"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큰 세력을 가진 자는
먼 곳은 안정시키고 간섭하지 않는다네.
이러한 입장에서 본다면 초나라는 우방이요, 이웃나라는 적국입니다.
또한 이런 말도 "시경"에는 있습니다.
펄펄 뛰는 교활한 토끼도 사냥개를 만나 사로잡히고,
다른 사람이 먹은 마음을 나는 헤아려 안다네.
지금 대왕께서는 한, 위가 대왕을 잘 대우한다고 믿고 계시니 이는 바로
오나라가 월나라를 믿은 것과 똑같습니다.
신이 듣건대, '적은 틈을 주어서는 안되고, 때는 놓쳐서는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대왕께서는 한, 위에 대하여 오랜 세월에 걸쳐 베푼 덕은 없고, 오랜 세월에 걸쳐
쌓은 원망만 있습니다. 한나라와 위나라의 부자와 형제들이 진나라 때문에
연이어서 죽음을 당한 것이 이미 10대가 될 것입니다. 그들의 조국은 피폐하게
되고, 사직은 기울었고, 종묘는 허물어졌습니다.
그들은 배를 칼에 찔려 창자가 끊어졌고, 목은 잘리고 턱은 꺾어졌으며, 머리와
몸은 분리된 채 풀밭과 진펄에 해골이 나뒹굴고, 두개골은 거꾸로 처박혀
국경선에서 서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자와 노약자가 목과 손목을 묶인
채 포로가 되어서 길에 연이어 있습니다. 귀신들은 외로이 상처받고, 그들을
제사하는 유족도 없습니다. 백성들은 삶을 영위하지 못하고 가족들은 여기저기로
흩어진 채 남의 종이 된 사람이 천하에 가득 차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한, 위가 망하지 않는 것은 진나라의 우환거리입니다. 그런데
지금 대왕께서는 그들의 힘을 빌어 함께 초나라를 공격하니 잘못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대왕께서 초나라를 공격하는 동안 네 나라에서는 반드시 군대를 일으켜서
대왕에게 대응할 것입니다. 진, 초의 군대가 전쟁을 쉬지 않고 하는 동안 위나라는
군대를 출격시켜 공격할 것이니 그러면 옛 송나라의 땅을 모두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제나라 사람들은 남쪽을 향하여 초나라를 공격할 것이니 그러면 사방은 반드시
정복당할 것입니다. 이들 땅은 모두 사방에 통할 수 있는 평원이며, 기름진 땅인데
그들로 하여금 단독으로 공격하여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대왕께서
초나라를 공격함으로써 중원지방에 한, 위를 부유하게 만들어 주고, 제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어 주게 됩니다. 그리하여 한, 위의 강대함이 진나라와 대적할 만한
것입니다. 한편 제나라는 남으로는 사수로 경계선을 삼고, 동으로는 바다를 등지고
있으며, 북으로는 황하를 끼고 있으므로 후환이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천하의 나라 중에 제, 위보다 강한 나라는 없게 될 것입니다. 제,
위가 땅을 얻고 이익을 챙겨서 진나라의 하급관리를 거짓으로 받든다면 1년
뒤에는 비록 자기들이 황제가 되지는 못한다 할 지라도 대왕께서 황제가 되는
것을 막기에는 풍부한 힘을 가질 것입니다.
생각컨대, 대왕과 같이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고, 많은 백성을 가지고 있으며,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는 처지에 전쟁을 하는 것은 대왕의 실책이라
하겠습니다. 신이 대왕을 위하여 깊이 생각하여 보건대, 초나라와 선린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습니다.
만약에 진나라와 초나라가 화합하여 하나가 되어서 한나라에 대처한다면
한나라는 반드시 진나라에 복종을 하게 될 것입니다. 대왕께서 이때에 험준한
산동의 지리로써 옷깃을 삼고, 굽이치는 황하의 이로움으로써 띠를 삼는다면
한나라는 반드시 대왕의 관문을 지키는 제후가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된다면
위나라도 또한 진나라를 위하여 제후를 감시하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대왕께서 일단 초나라와 선린의 관계를 맺음으로써 진나라의 영향력
안에 들에 되는 두 대국 군주들이 제나라와 국경선을 같이하고 견제를 할 것이니
이렇게 된다면 제나라의 오른편에 있는 땅은 팔짱을 낀 채 그대로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영토가 동해와 서해를 가로질러 형성이 된다면 제, 초는 연, 조와
연결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뒤에 연, 조를 위협하고, 바로 제, 초를 뒤흔들어
놓는다면 이 네 나라는 가혹히 공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복종할 것입니다.
황헐의 글을 다 검토한 소왕은
"참으로 좋은 글이로고."
하며 칭찬하고 백기의 공격을 멈추게 한 다음 한나라와 위나라에 사과하였다.
그리고 사신으로 하여금 초나라에 예물을 바치고, 동맹국이 될 것을 약속하였다.
죽고자 하는 이는 산다
황헐이 진나라왕의 약속을 바도 초나라로 돌아왔다. 이에 초나라는 황헐과 태자
완을 진나라에 인질로 보냈다. 진나라는 이들을 여러 해 동안 억류하였다.
그 뒤 초나라의 경양왕이 병이 들었는데도 태자가 귀국을 할 수가 없었다. 원래
태자는 승상인 응후와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는데, 이 사실을 알고 있는 황헐이
응후를 찾아가 설득하였다.
"승상께서는 정말 태자와 친하십니까?"
응후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황헐은 말을 이었다.
"지금 초나라 왕은 병에서 일어나지 못할 것 같으니 태자를 귀국시키는 것이
가장 나을 것입니다. 이 태자가 초나라 왕위에 오르게 된다면 그는 분명히
진나라를 정성스럽게 섬길 것이며, 승상께 대해서도 무궁한 은혜를 베풀 것입니다.
이것은 동맹국과 친교를 두텁게 하는 거이며 신임을 얻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러나 만일에 이 태자가 귀국하지 못한다면 그는 다만 함양에 사는 평범한
선비에 불과할 뿐이니, 초나라는 다른 태자를 세우고는 이 진나라를 섬기지
아니할 것이 분명합니다. 동맹국을 잃어버리고 대국과 평화를 깨뜨리는 것은
잘못된 계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승상께서는 이를 깊이 생각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이에 응후는 이러한 뜻을 진나라 왕에게 말했다. 그러자 왕은 이렇게 말했다.
"태자의 스승으로 하여금 먼저 포나라에 가서 왕의 병이 어떤 상태인가를
알아보고, 그가 돌아온 뒤에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도록 합시다."
이에 황헐은 태자에게 말하였다.
"진나라가 태자를 붙잡아 두는 까닭은 그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태자께서는 그들을 이롭게 할 만한 힘이 없습니다.
이것이 제가 몹시 걱정하는 일입니다.
지금 국내에는 양문군의 두 아들이 있는데 대왕께서 만일에 돌아가신다면
태자께서 초나라에 계시지 않기 때문에 양문군의 아들이 반드시 왕의 자리를
물려받고 태자께서는 종묘에 제사를 받들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하오니 조속히 서두르시어 사신으로 온 사람과 함께 진나라에서 도망하여
국경을 벗어나십시오. 신은 여기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가 죽음을 무릅쓰고 뒷일을
맡겠습니다."
그리하여 태자는 의복을 바꾸어 입고 사자의 마부로 변장하여 진나라의 관문을
벗어났다. 이때 황헐은 집을 지키고 병을 핑계로 손님을 거절한 채 며칠을 보냈다.
태자가 이미 멀리 도망하여 진나라가 추격할 수가 없다고 판단되자 그는 스스로
진나라 소왕에게 나아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초나라의 태자는 이미 귀국을 하여 국경선을 멀리 벗어났습니다. 제가 그
책임을 지고 죽어 마땅하오니 죽음을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소왕은 크게 노하여 그를 죽게 하려고 하였다.
이때 응후가 이렇게 말했다.
"황헐이 신하된 의리로써 자신을 내던져 군주를 위하여 죽고자 하였으니 태자가
왕위에 오른다면 반드시 황헐을 기용할 것입니다. 그러하오니 죄를 주지 마시고
그대로 귀국을 시키시어 초나라와 친교를 맺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진나라는 황헐을 귀국시켰다.
황헐이 귀국한 지 3개월 뒤에 경양왕이 죽고 태자 완이 왕위에 오르니 이
사람이 바로 고열왕이다. 고열왕 원년에 황헐을 재상으로 삼고, 그를 춘신군에
봉하여 회북의 12현을 하사하였다.
그 뒤 15년이 지나서 황헐은 왕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회북의 땅은 제나라와 국경을 접한 곳이므로 정치적으로 긴요한 곳입니다.
그러므로 군으로 만드는 것이 편리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회북의 12현을 헌납하고 강동에 임명해 주기를 청하였다. 고열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춘신군은 그 후 오나라의 옛 폐허에 성을 쌓고 자신의 도읍으로
만들었다.
춘신군의 전성시대
춘신군이 초나라의 재상이 되었을 무렵에 전국 4공자라 하여 제나라에는
맹상군이 있었고, 조나라에는 평원군이 있었으며, 위나라에는 신릉군이 있어서 바야흐로 앞을
다투어 선비들을 예우하여 식객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서로 남을 기울게 하고
자신의 나라를 돕고, 권력을 유지하려고 했던 것이다.
춘신군이 초나라의 재상이 된 지 4년 후에 진나라는 장평싸움에서 조나라 군사
40만을 격파했고, 이듬 해에는 조나라의 한단을 포위한 일이 일어났다. 이때
조나라가 초나라에 위급한 사정을 호소하였으므로 춘신군은 군사를 이끌고 가서
구원하게 되었는데 마침 진나라 군대가 물러났기 때문에 춘신군도 귀국하였다.
춘신군은 재상이 된 지 8년 만에 북벌을 감행하여 노나라를 멸망시켰다. 이때에
초나라는 다시 강성해졌다.
어느 날 평원군이 춘신군에게 사신을 보냈는데 춘신군은 그를 임금의 객사에
머물게 하였다. 그런데 그 사신은 자기를 과시하고 싶어서 대모로 만든 비녀와
주옥으로 장식한 칼집을 가지고 춘신군의 식객들을 불러서 만났다. 그런데
춘신군의 식객은 3천 명으로 그 중의 많은 수가 모두 구슬로 장식한 신을 신고서
사신을 만났으므로 그 사신은 오히려 크게 부끄러워했다.
춘신군이 재상이 된 지 14년이 되었을 때 진나라의 장양왕이 왕위에 오르고
여불위를 재상으로 삼았다.
춘신군이 재상이 된 지 22년 후에는 제후들이 진나라의 공격과 정벌이 그칠
날이 없음을 우려하고 서로 합종을 하여 서쪽으로 진나라를 정벌하기로 하였다.
이때 초나라의 왕이 책임자가 되고 춘신군이 그 실무를 담당하였다. 연합군이
함곡관에 이르렀을 때 진나라가 군대를 보내 공격을 하자 제후의 군대가 모두
패하여 달아났다. 고열왕은 그러한 일을 춘신군의 잘못으로 돌렸다. 이 일로
인하여 춘신군은 왕과 거리가 멀어졌다.
이때 춘신군의 빈객 중에 주영이라고 하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춘신군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초나라는 강대한데 나으리께서 나약한 군대로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선왕 시절에 진나라와 친선을
한 기간이 20년이 되는데도 진나라가 우리를 공격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진나라가 요새를 넘어서 공격하는 것이 불편하며, 동주, 서주에게 길을 빌리고, 한,
위를 등지고 우리 나라를 공격한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사정이 다릅니다. 위나라는 아침, 저녁으로 망할 형편이므로
허땅을 할양하여 진나라에게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진나라 군대가 우리 나라의
수도인 진성과 160리 정도의 짧은 거리를 두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제가 보는
바로는 앞으로는 진나라와 초나라가 날마다 전쟁을 하리라는 것입니다."
춘신군은 이 말을 옳다고 여겨 왕에게 말하니, 초나라는 드디어 수춘으로 수도를
옮겼다.
꽃을 나무에 접붙이다
초나라의 고열왕은 아들을 낳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원래 춘신군은 이를 걱정하여 아들을 나을 만한 부인을 구하여 왕에게 바쳤으나
끝내 아들을 낳는 데 실패하였다. 그때 조나라 사람인 이원이 누이동생을 데리고
와서 왕에게 바치려고 하였다. 그런데 왕이 아이들 낳을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오래도록 사랑을 받지 못할까 우려를 하였다.
그리하여 이원은 우선 제도가였던 춘신군을 섬기어 그의 가신이 되었다. 얼마가
지나자 그는 귀국을 하였다가 고의로 돌아오는 기일을 늦추었다. 그리고는
되돌아오니 춘신군이 늦게 된 사정을 물었다. 그러자 이원은 답하였다.
"제나라 왕이 사자를 보내어 신의 누이동생에게 구혼하여 그 사자와 술을
마시느라고 좀 늦게 되었습니다."
이에 춘신군이 물었다.
"누이를 들여보내기로 하였는가?"
"아직 드려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얼마나 미인인가 궁금하여 춘신군이 물었다.
"그럼 내가 한번 누이를 볼 수 있겠는가?"
이에 이원이,
"물론 볼 수는 있지요."
하고 곧 그의 누이동생을 바쳤다.
그의 누이동생은 과연 절세의 미인이었고, 곧 춘신군의 사랑을 받았다. 이원은
누이동생이 임신을 한 사실을 알고 누이동생이 임신을 한 사실을 알고 누이동생과
계략을 짰다. 이원의 누이동생은 한가한 틈을 타서 춘신군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왕이 나으리를 대우하고 사랑하는 정도는 형제라 하더라도 그렇게 깊지는
못할 것입니다. 지금 나으리께서 재상이 되신 지 20여 년이 흘렀습니다마는
왕께서는 아들이 없습니다. 그래서 왕께서 돌아가시고 난 뒤에는 다른 사람을
세울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나으리께서 어떻게 오래도록 사랑을 받으실 수 있겠습니까?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나으리께서는 이제까지 왕의 형제들에 대하여 실례를
범한 것이 많습니다.
그리하여 그 형제들이 만일 왕위에 오른다면 화가 장차 나으리에게 닥칠 것이니,
나으리께서는 무엇으로 재상의 자리와 강동의 땅을 지키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춘신군이 다가오며 물었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도 실은 그것이 걱정이었네."
이에 그녀가 귀엣말로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었다.
"이제 나으리께 처음으로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지금 첩은 나으리의 아이를
가졌어요. 하지만 다른 사람은 전혀 이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말씀드리는 것인데...."
그러자 춘신군이 재촉했다.
"무슨 말이건 두려워 말고 말해 보라."
그녀는 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오해마시고 들어보십시오. 황송스런 말씀이오나 첩을 이제 왕에게 바치면
어떨까요? 나으리의 높은 지위로 첩을 왕에게 바친다면 왕은 반드시 첩을 사랑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첩이 하늘의 도움으로 아들을 얻게 된다면 이는 나으리의
아들이 왕이 되는 것이고, 나라를 모두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헤아릴 수 없는 죄에 걸려 드는 것에 비하면 낫지 않겠습니까?"
춘신군은 처음엔 깜짝 놀랐으나 한참을 생각해 보더니 드디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는 곧바로 이원의 누이동생을 자기 집에서 내보내 근신하게 하고 왕에게
그녀에 대해 이야기를 하였다.
왕은 그녀를 그 아들을 태자로 삼고, 이원의 누이동생을 왕후로 삼았다. 또한
왕은 이원을 가까이 하여 이원이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결단하지 못하면 도리어 당한다
이원은 그의 누이동생을 왕실에 들여보내어 왕후를 만들고, 그 아들을 태자로
세운 뒤 춘신군이 그러한 사실을 누설하고 더욱 교만해질까 두려워하여 은밀하게
암살자를 양성하여 춘신군을 죽임으로써 그의 입을 막고자 하였다. 그러나 사람들
가운데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자가 상당수 있었다.
춘신군이 재상이 된 25년 후에 고열왕이 병이 들었다. 이에 주영이 춘신군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세상에는 뜻밖에 찾아드는 복이 있고, 또 뜻밖에 찾아드는 화도 있습니다. 지금
나으리께서는 뜻밖의 일이 벌어지는 세상에 처하여 뜻밖의 일을 당할 왕을 섬기고
계시니 어찌 뜻밖의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춘신군이 물었다.
"뜻밖에 찾아드는 복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주영이 대답하였다.
"나으리께서 재상이 되신 지 20여 년 동안 나으리의 위치는 실은 초나라의
왕이셨습니다. 지금 왕이 병이 들어서 아침 저녁 나절에 돌아가실 것입니다.
그러할 경우 나으리께서는 어린 군주를 모시게 되어 그의 대리로 왕의 자리에
서서 나라를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이때 만일 이윤, 주공과 같이 하신다면 왕이
장성한 뒤에 국정을 되돌려 주시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나라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뜻밖에 찾아든 복입니다."
춘신군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뜻밖의 화란 무엇인가?"
"이원은 나라를 다스리지도 않은 사람으로서 나으리의 원수입니다. 그는 군대를
맡고 있는 것도 아닌데 암살자를 양성하고 있는 지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만약에 왕이 돌아가신다면 이원은 반드시 먼저 궁궐에 들어가 정권을 잡고
나으리를 죽임으로써 입을 막으려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뜻밖의 화입니다."
이에 춘신군이 물었다.
"그렇다면 뜻밖의 사람이란 무엇인가?"
"나으리께서 신을 낭중의 자리에 임명하시면 왕이 돌아가신 뒤에 이원이 분명히
먼저 궁궐에 들 것인즉 신이 나으리를 위하여 이원을 죽이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뜻밖의 사람입니다."
이 말을 듣고 춘신군은 이렇게 말하였다.
"선생은 이제 그만하시오. 이원은 나약한 사람이고, 또 내가 그를 잘
대우하였는데 어떻게 그가 이러한 일까지 하겠소?"
주영은 자신의 계획이 받아들여지지 않음을 알고 화가 자기 자신에게까지
미칠까 두려워하여 도망하여 초나라를 떠났다.
그리고 이런 일이 있은 뒤 17일 만에 고열왕이 죽었다. 이원은 과연 먼저
궁궐에 들어가 자객을 잠복시켰다. 드디어 춘신군이 문상하기 위해 궁궐로
들어오자 이원의 자객이 춘신군을 곁에서 부여잡고 찌르고는 그의 머리를 베어
궁궐 밖으로 던져 버렸다. 그리고 관리를 시켜 춘신군의 집안을 완전히
멸족시켰다.
한편 이원의 누이동생이 왕궁에 들어가서 낳은 아들이 마침내 왕이 되었으니 이
사람이 바로 유왕이다.
그러나 초나라는 춘신군이 죽고 나서 국력이 급속히 기울었으며, 결국 15년
만에 망하고 말았다.
7. 하늘이 내린 명의(편작, 창공)
1) 살아날 수 있는 사람을 일으켰을 뿐이다(편작)
비방을 전수받다
편작은 발해 지방에서 태어났으며, 성은 진이고 이름은 월인이었다. 편작이라는
이름은 후에 그가 유명해졌을 때 사람들이 지어준 별명이다.
편작은 젊어서 어느 고관의 집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장상군이라는 손님이 그 집에 찾아왔는데, 그냥 보기에도 범상한
사람이 아니었다. 장상군은 그 뒤로도 자주 그 집을 찾아왔으며, 편작은 늘 그를
정성스럽게 모셨다.
그렇게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어느 날 장상군이 찾아 오더니 편작을 불러
나즈막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사람의 만병을 치료하는 비방을 알고 있다네. 그러나 이제 나이가 너무
많아 기력이 없지. 그래서 그대에게 비방을 전수하려 하네. 다만 결코 남에게
알려서는 안되네."
편작은 정중하게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러자 장상군은 품 속에서 약을 꺼내 편작에게 주면서,
"풀잎에 맺힌 이슬을 받아 이 약과 함께 한 달간 먹어 보게, 그러면 무엇이든
볼 수 있을 것일세."
라고 말했다. 또 비방이 씌어 있는 책들을 모두 편작에게 주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자취를 감춰 버렸다.
편작은 그가 일러준 대로 한달간 약을 복용하였다. 그랬더니 담장너머의 사람의
모습까지 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병자들의 내장 속 종기까지 모두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에게 그저 맥을 짚어서 알 수 있노라고 말할 뿐이었다.
편작의 명성은 순식간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사흘 안에 깨어나리라
당시 진나라의 세도가였던 조간자가 어느 날 갑자기 쓰러졌다. 그러더니 5일이
되어도 혼수 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대신들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편작을
부르기로 했다.
이윽고 편작이 도착해 진찰을 해 보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무 걱정할 것이 없소. 옛날 목공도 똑같은 증세가 나타났었는데 일주일 만에
깨어났습니다. 그때 목공이 깨어나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천제가 있는 곳에 갔는데, 매우 즐거웠소. 천제는 이웃 진나라가 머지
않아 큰 혼란에 빠져 5대에 걸쳐 어지러우나 그 뒤에 천하의 패자가 될 인물이
나타난다. 하지만 그는 빨리 죽고 그의 아들이 뒤를 이으면 풍속이 문란해진다고
말씀하셨소.'
과연 목공의 말대로 진나라는 헌공 때 나라가 어지러웠으나 문공이 나타나
패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양공은 한때 목공의 군대를 효산에서
격파했으나, 그 뒤 숱한 난행을 범했지요.
지금 조간자 대감의 증세도 목공과 똑같으므로 사흘 안에 반드시 깨어나실
것이요. 그리고 깨어나시면 무슨 말씀을 하실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후 이틀 반 만에 조간자는 깨어났다 그리고는 대신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천제가 계신 곳에서 즐겁게 지냈소. 약사들이 쭉 늘어 앉아서 흥겨운
음악들을 연주했고 또 여러 가지 진기한 무용도 감상했소.
그런데 갑자기 곰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나에게 덤비지 않겠소. 내가 급히 활을
쏘니 곰은 쓰러졌소. 그러자 더 큰 곰이 또 나타났소. 이번에도 활을 쏘니 그 곰
역시 쓰러졌다오.
그대 문득 천제 계신 쪽을 보니 내 아들이 있는 것이 아니오? 그러면서 천제는,
'이 아들이 크거든 이 개를 주어라'고 말씀하시면서 책 땅의 개를 내게
주시었소.
그리고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소.
'진나라는 머지 않아 쇠약해져서 멸망하지만, 너희 조씨 가문은 점점
번성하리라. 다만 그곳을 언제까지 지킬 수는 없구나.'"
그 말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편작이 예측한 것과 똑같아 매우 놀라워하였다.
이때 조간자는 편작이 자기가 깨어날 것을 진단했다는 얘기를 듣고 편작에게
논밭을 많이 하사하였다.
"건강한 사람을 환자 취급하다니"
그 뒤 편작이 제나라를 방문하는 길에 환공을 만나게 되었다.
환공을 만나자 편작이 신중하게 말했다.
"지금 귀공께서는 병에 걸려 있습니다. 다행히도 아직은 피부에 머물러 있는
정도이니, 쉽게 치료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냥 놔두시면 악화될 뿐입니다."
그러자 환공이 크게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나처럼 건강한 사람을 병자 취급하는 거요?"
그러면서 편작이 물러나가자 신하들에게 이렇게 투덜거렸다.
"의사라는 사람이 자기 돈벌 생각만 하는군."
닷새 후에 편작은 다시 환공을 찾아왔다.
"귀공의 병환이 이제 혈맥까지 진행되고 있습니다. 더 이상 놔두면
곤란해집니다."
그러나 환공은,
"난 별로 이상이 없소. 생사람 잡지 마시오!"
라며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 뒤 닷새 후, 편작이 다시 찾아왔다.
"이제 병환이 위장까지 이르렀습니다. 손을 쓰지 않으면 목숨까지
위태롭습니다."
그러나 환공은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편작이 물러가자 환공은 매우 불쾌하다는
듯이 짜증을 냈다.
또 닷새가 지났다. 이번에도 편작이 찾아왔지만 먼 곳에서 인사만 한 채 그대로
물러갔다. 그랬더니 환공은 이상하다고 느껴 신하를 시켜 그 이유를 묻게 했다.
이에 편작이 말했다.
"병이 피부에 있을 때에는 탕약과 고약으로도 고칠 수 있소. 혈맥까지
진행되어도 침으로 고치지요. 또 위장까지 들어간다면 약을 복용해서 나을 수
있소.
그러나 병이 골수에까지 미치게 되면 생명을 다룬다는 신이 내려와도 손 쓸
수가 없는 것이오.
지금 환공의 병은 이미 골수에 비치고 있소. 그래서 치료를 권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과연 닷새 만에 환공은 병으로 눕게 되었다. 그리고 급히 편작을 불렀으나,
편작은 이미 국외로 떠난 뒤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환공은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
살아날 수 있는 사람을 일으켰을 뿐이다
언젠가 편작은 괵나라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백성들이 통곡을 하고 있었다. 알아보니 태자가 금방 죽었다는 것이었다.
이에 편작이 궁궐 앞에 가서 의관을 만났다.
"태자는 무슨 병이었습니까?"
그러자 의관이 대답했다.
"태자의 병은 피의 순환이 불순했던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정기가 나쁜
기운을 제압하지 못했기 때문에 양기는 완만해지고 음기가 치솟아 죽은
것입니다."
"죽은 시간은 언제입니까?"
"날이 밝을 무렵이었지요."
"입관은 했습니까?"
"아직 죽은 지 얼마 안되어 입관은 하지 않았습니다."
편작이 그 말을 듣고 이렇게 말하였다.
"저는 편작이라는 사람이온데, 지금까지 태자를 뵐 기회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태자를 다시 살릴 수 있을 듯합니다."
이 말에 의관은 웃으며 말했다.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십니까. 이미 죽은 태자를 어떻게 살릴 수 있다는
말입니까.
옛날 유부라는 명의는 아무런 것도 쓰지 않고 잠깐 환부를 보고 그 징후를
살피며 동쪽의 맥을 짚어 보고는 살을 가르며, 힘줄은 잇고, 뇌수를 누르며,
위장을 씻고, 마음을 다스려 병을 고쳤다고 합니다.
선생의 의술이 이와 같다면 혹시 살려낼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렇지 못한데도
살릴 수 있다고 말한다면 삼척동자도 웃을 노릇입니다."
그러자 편작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했다.
"당신의 의술은 대나무통으로 하늘을 보고 틈 사이로 모양을 들여다 보는
것이므로 전체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안색을 보고 소리를 들으면 병이 있는 곳을 알 수 있습니다. 병의
바깥쪽을 듣고 속을 알며, 속을 듣고 바깥쪽을 압니다. 병의 증세는 밖으로
나타나는 거이니 천리 밖까지 가서 진찰하지 않아도 다만 증세를 듣는 것만으로
병을 진단할 수 있습니다. 덮어서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것입니다.
내 말을 정 믿지 못하시면 당신이 들어가서 태자를 살펴 보십시오. 귀가 울고
코가 팽팽한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며, 그 허벅다리는 아직도 따뜻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의관은 한동안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그는 궁궐로 들어가 이 사실을 괵나라 군주에게 보고했다. 군주는 즉시 편작을
불러 들였다.
"선생의 명성은 저도 듣고 있습니다. 이렇게 조그만 나라에 오셔서 태자를
염려해 주시니 참으로 고맙습니다.
정말 제 아들을 살리실 수 있으신지요?"
군주는 그러면서 흐느껴 울었다. 방울방울 흐르는 눈물이 눈썹 가득 고였으며,
급기야 얼굴이 온통 일그러졌다.
편작은 말했다.
"태자의 병은 이른바 시궐이라는 것입니다. 양기가 음기 속으로 흘러 들고
그것이 위를 움직이며 혈맥에 엉겨 붙었다가 다시 갈라져 방광까지 내려갑니다.
말하자면 음기는 위로 올라가고, 체내를 돌아 아래로 내려온 양기는 위로 오를
줄 모릅니다. 이 때문에 음양의 조화가 무너져 얼굴빛이 파리해지고 몸은
움직이지 못해 죽은 것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태자는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양기가 음기 속으로 들어가 오장을 지탱하면 살고, 음기가 양기 속으로
들어가면 죽습니다. 이런 일은 대개 몸 속에서 오장의 기운이 치솟을 때 갑자기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편작은 제자에게 침을 갈게 하고 태자의 몸 바깥쪽에 있는 삼양과
오회에 침을 놓았다. 그랬더니 조금 뒤에 태자가 깨어났다.
그 뒤 편작은 5푼의 고약을 만들고 팔푼의 약을 섞어서 달인 다음, 이것을 양
겨드랑이 밑에 발라 따뜻하게 찜질을 했다. 그러자 태자가 일어나 앉았다.
다시 음양의 기를 조절하고 20일 동안 탕약을 먹이니 태자는 완전히
회복되었다.
그러자 세상 사람들은 모두
"편작은 죽은 사람도 살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편작은,
"내가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낸 것이 아니라, 다만 당연히 살아날 수 있는
사람을 일으켰을 뿐이다."고 말했다.
너무 아름답고 좋은 것은 불길함의 징조이다
편작의 이름은 갈수록 드높아졌다.
그래도 편작은 천하를 돌아다니며 손수 치료에 나서고 있었다. 조나라에서는
주로 부인병 치료를 하게 되었고, 주나라에 가서는 노인병 치료에 주력했다. 또
진나라에서는 주로 어린이들을 치료하였다. 이렇듯 편작은 가는 곳마다 그곳
사정에 따라 치료를 했던 것이다.
편작은 의술을 발전시키고 집대성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이면서, 한편으로는
점쟁이나 주술에 의한 병의 치료에 강력히 반대했다.
"의약을 믿지 않고 점쟁이나 주술만 따른다면 나을 병이 없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무당이나 주술사들의 거센 반발을 받았으며, 재능없는
의관들도 그의 높은 의술을 질투하였다.
그가 진나라에 있을 때 그 명성이 날로 높아지자 왕이 치료를 부탁했다. 이때
진나라의 시종의로 있었던 이혜는 편작을 크게 질투하여 그를 없애려고 하였다.
드디어 이혜는 자객을 보내 편작을 죽였다.
그렇게 편작은 죽었지만 그의 의학 이론과 기술은 중국 의학계의 귀중한 보고가
되었다. 그의 의학 이론은 후세 사람들에 의해 "난경"이라는 책으로
정리되었으며, 사람들은 편작을 추모하여 약왕이라 부르고 중국 의학의 시조로
받들고 있다.
사마천은 이렇게 말했다.
"여자는 얼굴이 곱든 밉든 궁중에 있으면 질투를 받게 되고, 선비는 똑똑하든
그렇지 않든 조정에 있으면 의심을 받는다.
편작은 그 신기 때문에 결국 화를 입어야만 했다.
노자는 '너무 아름답고 좋은 것은 불길함의 징조이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편작과 같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던가!"
2) 자연에 상응해야 병이 없다(창공)
창공은 태창 지방의 장관으로 원래 이름은 순우의였다.
젊었을 때부터 의술을 좋아했으며, 스승인 양경공이 알고 있던 모든 의술을
파기토록 하고 자기의 비방을 전수해 주었으며, 황제와 편작이 남긴 맥서도
전했다.
그리하여 창공은 얼굴에 나타나는 오장의 상태를 진단하여 환자의 병을
알아내고, 의심스러운 질병을 판단하여 그 치료법을 결정하는 방법에 통달했다.
또한 약물에도 정통하게 되었다.
그 후 천하를 돌아다니며 환자를 치료하고 질병의 원인을 구명하는 데 힘썼다.
그리하여 집안일은 돌볼 수도 없었으며 또 그를 부르는 환자가 너무 많아
못가보는 환자들에게 원망도 많이 받게 되었다.
그래서 한나라 문제 4년에, 그는 고발되어 처형될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그때
창공에게는 다섯 명의 딸이 있었는데, 그녀들은 창곡을 붙들고 울었다.
이때 창공이 크게 탄식했다.
"내가 자식을 낳았으되 아들을 낳지 못했더니 이런 일이 생겨도 어쩔 도리가
없구나!"
그러자 막내 딸 제영이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황제에게 상소문을 올렸다.
"소녀의 아버님은 청렴하고 공평하다고 평판이 높았는데, 이제 법에 위반되어
처벌받게 되셨습니다.
이 일을 생각하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소녀를 관의 노비가 되게 해서 소녀의 아버님이 스스로 허물을
벗으시도록 해주옵소서."
이 글을 읽은 황제는 딸을 불쌍히 여기고 창공을 풀어주도록 했다.
정확한 진맥이 치료의 근본이다
그 후 창공은 풀려나 지비에서 휴식하며 의술을 연구하였다.
그 뒤 그의 명성을 듣게 된 황제가 하루는 그에게 이제까지 치료하고 다닌
경험을 글로 써올리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창공은 보고서를 올렸다.
방사로 인한 병
제나라의 관리였던 성이 저에게 두통을 호소했을 때 저는 진맥을 하고 "당신의
병은 이미 치료할 수 없을 만큼 악성입니다." 하며 바로 물러나왔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동생에게,
"이 병은 옹으로서 앞으로 8일 후 고름을 토하며 죽을 것입니다."
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과연 성은 예측한 대로 8일 후에 죽었는데, 그 병은 음주와
방사를 지나치게 한 결과 생긴 것입니다.
제나라 사공의 부인인 출어가 아팠을 때, 인근의 의원들은 모두 풍기가 내부에
들어갔고 주로 폐가 병들어 있다고 판단해 그녀의 다리의 소양맥에 침을
놓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맥을 짚어보니 그 병은 오줌을 참고 방사를 한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저는 곧 발의 궐음맥 좌우 한 군데씩 뜸을 떴습니다. 그러자 그
부인은 오줌 색깔이 맑아졌으며 아랫배의 아픔도 그쳤습니다. 다시 화제탕을
만들어 먹이니 사흘 만에 완쾌되었습니다.
두통
치천왕이 아파서 제가 불려가 맥을 짚어보고,
"이 병은 궐상으로 중병입니다. 머리가 아프고 몸에 열이 나며 환자를 괴롭게
만듭니다."라고 말하고 바로 머리에 냉수를 끼얹으며 어루만진 다음, 발의
양명맥의 좌우에 각각 세 군데씩 침을 놓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이 나았습니다.
그 병은 머리를 감고 아직 마르지 않은 상태로 잠을 잔 것이 원인입니다.
출산 장애
또 치천왕의 첩이 임신하여 만삭이 되었건만 아기를 낳지 못하자 저를
불렀습니다. 저는 낭탕약 한 숟갈을 술에 타서 먹게 했더니 잠시 뒤에 출산을
했습니다. 다시 맥을 짚어보니 맥이 시끄러웠는데, 이는 아직 남은 다른 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곧 초석을 먹였더니 피가 나왔습니다. 그 피는 콩 같은
것으로서 대여섯 개나 되었습니다.
남자를 못만나 생긴 병
제북왕을 모시고 있던 한녀라는 비첩이 허리와 등이 아프고 열이 나며 오한을
느꼈습니다. 의원들은 모두 한열병이라고 진단했지만, 제가 맥을 짚어보고,
"몸이 냉하여 월경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 다음 좌약을 넣으니
곧 월경이 나오고 병이 나았습니다. 그 병은 그녀가 남자를 원하면서도 그것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것이었습니다.
요통
제나라 왕의 형인 황장경의 집에 좋은 술이 있어 손님을 불렀을 때, 저도 가
보았습니다. 아직 음식을 먹기 전에 와 있던 한 사람을 보니 병색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당신은 병이 있습니다. 4__5일 전에 허리가 아파서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아프고 소변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병이 신장까지 깊이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정말입니다. 나는 원래 허리와 등이 좀 아팠었는데, 4__5일 전에 비가 올 때
몇 사람들이 돌을 들어 올리며 놀고 있는 것을 보고 나도 한번 들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저녁 때가 되어 허리와 등쪽이 아프기 시작하여 소변을 볼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것이 낫지 않고 있습니다."
그 사람의 병은 무거운 것을 들다가 생긴 병입니다. 즉시 유탕을 만들어
복용하게 하니 18일 만에 병이 나았습니다.
충치
제나라의 중대부는 충치를 앓고 있었습니다. 내가 가서 그의 왼쪽 대양명맥에
뜸을 뜨고 즉시 고삼탕으로 하루에 석 되씩 양치질을 하게 했더니 5__6일이
지나자 병이 나았습니다.
이 병은 풍이 들고 잠자리에서 입을 벌린 채 누워 자며, 식후에 양치질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발광하다 죽을 병
제나라에 사는 조산부라는 사람이 병에 걸렸을 때 제가 맥을 진찰 한 다음
'이것은 폐의 소단이며, 그 위에 한열병이 발병한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집안 사람에게는 '불치병으로 곧 죽을 것입니다.' 하며 일러 주었습니다.
의서에 의하면 "앞으로 3일이 지나 발광할 것이다. 함부로 일어나 달리려
하지만 5일이 지나면 곧 죽는다."고 했는데, 과연 그 말대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 사람의 병은 화를 크게 낸 후 곧바로 방사를 했던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제가 이 병을 안 것은 그의 맥을 짚었을 때 폐의 기운이 몹시 뜨거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맥법에 이르기를 "맥박이 정상이 아니고 약해서 막히게 되면 몸이
여위고 쇠약해진다"고 했습니다.
정상이 아니면 피는 있어야 할 곳에 없고, 막히게 되면 상하좌우에서 뒤엉켜
뛰며 별안간 시끄러워졌다가 커졌다 합니다. 이는 폐 사이의 두 낙맥이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죽게 되고 고칠 수 없는 것입니다.
3일이 지나 발광한다는 이유는 본래 간의 한 맥락이 젖 아래 양명에 연결되어
있으므로 맥락이 끊어지면 양명의 맥이 열리고, 양명의 맥이 손상되면 곧 열이
올라 옷을 벗고 달리려는 것 때문입니다.
심할 열이 있는 병
한편 제나라 왕의 시종의인 수가 병이 나서 스스로 오석약을 달여 먹었습니다.
제가 그를 찾아가니 그가 말했습니다.
"제게 병이 있습니다. 한번 진찰해 주십시오."
그래서 제가 그를 진찰해 보고,
"당신의 병은 중열입니다. 의서에는 중열에 소변이 나오지 않으면 오석을
복용해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또 얼굴빛을 보니 곧 종기가 생길 것 같습니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편작이 말씀하시길 음석은 양성의 병을 낫게 하며 양석은 음성의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중열이면 음석의 약제를 만들어 치료하고, 중한이면 양석의 약제를
만들어 치료하는 것입니다."
이에 제가 대답했습니다.
"그 말씀은 옳지 않습니다.
편작 선생께서 비록 그와 같이 말씀하셨지만, 반드시 자세히 진찰해야 합니다.
먼저 규격을 정하고 맥의 상태를 살피며 안색과 맥을 아울러 생각해 병을
판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맥의 음양과 기의 소장과 색맥 순역의 이치를 생각하여
병자의 상태 및 호흡의 상호 작용을 참작한 뒤에 비로소 치료 여부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의서에 '양성의 병이 안에 들어 내열이 있으며, 음성의 병이 밖으로 나와
한기를 느끼는 경우에는 강한 약과 침을 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강한 약을
복용하게 되면 사기는 물리칠 수 있지만 음울한 기운은 더 깊어지기 때문입니다.
또 진찰법에는 '한기가 안에서 밖으로 나타나고, 열이 밖에서 들어가 안에서
섞이는 경우에는 강한 약을 써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강한 약이 들어가면 양의 기운을 움직여 그 때문에 음의 병이 약해질수록 양의
병은 더욱 현저하게 나타나고, 사기는 밖으로 돌아 경맥의 수혈에서 더욱 커지고
화가 폭발하듯이 나타나 종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제 말을 듣지 않고 자기의 방법을 고집했습니다. 결국 백 일이
지나지 않아 과연 젖 위에 종기가 생기고 이것이 젖의 윗쪽에 있는 뼈까지 들어가
죽고 말았습니다.
의술의 이론이란 큰 틀을 제시하는 요지에 불과한 것으로, 이것이 실제로
쓰이려면 반드시 자세한 방법이 있어야 합니다.
서툰 의원은 미숙한 점이 적지 않아 이론의 의미를 잘 해석하지 못하며, 또한
실제의 병 치료에 있어서 과실이 있는 것입니다.
심한 설사
제나라의 순우 씨가 아플 때 제가 그 맥을 짚어보고,
"화풍을 앓고 있습니다. 이 증상은 음식물이 목구멍을 넘어 가기만 하면 바로
설사해 버리는 것입니다. 원인은 포식한 다음 심하게 뛰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순우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사실 난 어느 잔치집에서 배불리 먹고 나서 술이 나오는 것을
보고는 재빨리 도망을 쳐 집으로 달려왔습니다. 그리고는 수십 번이나 설사를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즉시,
"화제탕에 쌀즙을 타서 드십시오. 7__8일이면 나으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자리에는 또 한 명의 의관이 있었는데, 그는 제가 떠난 후에,
"저 사람의 말은 잘못입니다. 이 병은 의서에 의하면 9일 안에 죽는다고 되어
있습니다."라고 했답니다.
하지만 9일이 지나도 그는 죽지 않았습니다. 제가 다시 가서 화제 탕에 쌀즙을
타서 복용케 했더니, 과연 7__8일이 지나자 병이 나았습니다.
풍
어느 날 저는 안양 사람인 성개방을 진맥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병이
없다고 했습니다만, 저는
"당신은 풍을 앓고 있습니다. 3년 후 사지를 쓸 수 없게 되고 말을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말을 못하게 되면 곧 죽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얼마 전 그가 사지를 못쓴다는 말을 들었으며, 또 벙어리가 되었는데 아직
죽지는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그의 병은 과음한 후 바람을 쐬었기 때문에 얻어진 것입니다.
신경성 소화불량
언젠가는 어떤 유모가 병이 들어서 제가 가 봤습니다.
진맥을 하고 나서,
"기가 가슴에 모여 앓는 병입니다."고 했습니다.
그 병은 속을 답답하게 하며 먹은 것이 내려가지 못하게 되어 때로 거품을
토하기도 합니다. 병의 원인은 자주 근심하고 신경 쓰면서 음식을 섭취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즉시 하기탕을 지어 마시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루만에 기가 내려가고
이틀이 지나자 먹을 수 있었으며, 사흘이 지나자 완치되었습니다.
원래 제가 맥을 짚어 보니 심기가 혼탁하고 초조해 경맥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맥법에 이르기를,
"맥의 움직임이 매우 불규칙한 것은 대개 마음에 병이 있기 때문이다. 전신에
열이 나고 맥이 마구 뛰는 것을 중양이라 하는데, 이것은 심장을 자극한다.
그러므로 번민하며 음식이 통하지 않으면 낙맥에 고장이 일어난 것이며, 낙맥에
고장이 생기면 피가 치솟고, 피가 치솟으면 죽게 된다.
이것은 마음의 우환 끝에 생기는 병이다."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이 병은 걱정이 많아 생긴 병인 것입니다.
신 순우의는 아룁니다. 이 밖에도 수 없이 많은 진찰과 치료를 통해 병을 고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많고, 또 기억할 수 없는 것은 감히 아뢸 수 없어
이만 줄이옵니다.
완전을 기할 수는 없다
그 후 황제가 친히 창공을 불렀다.
"병을 알아내 예측했는데도 맞지 않을 수 있소?"
"병명은 실로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의술을 완전히 체득한 자는 진단을
정확히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자는 혼동합니다. 저는 스승으로부터 다행히도
비방을 전수받고 맥법을 습득해 어느 정도 완전을 기할 수 있습니다.
병의 예측이 맞지 않는 것은 환자가 음식이라든가 감정 조절에 절도를 잃고, 또
약을 먹지 않아야 하는 데도 먹으며, 침뜸을 놓지 말아야 하는 데도 놓은
까닭입니다."
"그럼 왜 제후들이 그대를 불렀을 때 가지 않았던 것이오?"
"네. 조왕과 교서왕, 제남왕, 그리고 오왕 등이 저를 불렀지만 저는 가지
못했습니다.
저의 집안은 가난했기 때문에 병을 치료해 주고 약간씩의 사례를 받으려
했지만, 관리들이 저를 관직에 묶어둘까봐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호적을 여러
곳으로 옮기고 가업을 돌보지 않으면서 천하를 돌아다니며 의술에 능한 스승에게
공부하며 치료도 했습니다. 특히 양경 어른을 스승으로 모신 후 몇 년 동안
수업을 했기 때문에 다른 환자들을 치료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제나라 문왕이 병에 걸려 다시 일어나지 못한 이유를 아는가?"
그러자 창공이 대답했다.
"문왕의 병세는 진찰하지 못했습니다만, 저는 그것이 병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 하면 너무 살이 비둔해져 몸을 자유로이 움직이지 못하며,
살과 뼈의 균형을 이루지 못해 기침을 하는 것이므로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맥법에 사람은 20세에는 맥의 기세가 강하니 마구 달리는 것이 좋으며,
30세에는 빨리 걷는 것이 좋고, 40세가 되면 편히 쉬는 것이 좋으며, 50세가 되면
편히 눕는 것이 좋고, 60세 이상이 되면 기력을 많이 저축하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문왕은 20세도 못되어 잘 걷지 못할 정도였으므로 자연의 이치에 상응치
못한 것입니다. 제가 그 후에 들으니 의원이 뜸 치료를 했다던데 그 때문에 빨리
죽은 것입니다.
이른바 기라는 것은 음식 조절을 잘 해야 하며, 날씨 좋은 날에 적당히 걸어서
마음을 넓게 하고, 근육, 골격, 혈맥을 쾌적하게 해서 기를 시원스럽게 발산해야
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20세를 심기일전, 혈기교환의 나이라 하는 것이며,
침뜸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를 사용하면 맥이
분주해져서 제지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병의 진단이나 생사의 예측에 실패한 적은 없었소?"
이에 창공이 대답했다.
"저는 치료할 때 반드시 진맥을 하고 나서 시행했습니다. 맥이 좋지 못할
경우에는 치료하지 못하고, 순조로울 경우에는 치료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침착성이 없고 맥을 짚을 때 정확하지 못하면 실패할 수가 있습니다.
저도 완전을 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8.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가!(진승, 오광)
참새가 어찌 대붕의 뜻을 알리오!
진승은 하남 사람으로 진섭으로 불리우기도 했다. 또 오광도 역시 하남
사람으로 진승의 친구였다.
진승은 집안이 가난하여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해야 했지만, 마음 씀씀이가
크고 배짱도 두둑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인가 그는 주인 집 밭에서 일을 하다가
밭두렁에 나와 쉬면서 탄식을 하는 것이었다.
"다음에 출세해서도 옛 친구는 잊지 않도록 해야지..."
이때 옆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사내가 코웃음을 쳤다.
"웃기는 소리 마라. 머슴사는 주제에 출세는 무슨 얼어 죽을 출세냐?"
그러자 진승은 개탄했다.
"슬프도다. 참새가 어찌 대붕의 큰 뜻을 알겠느냐."
반란의 봉화
진나라 2세 황제 원년 7월, 대규모 강제 노역이 개시되었다. 진승이 살던
지방에서도 9백 명이 징발되어 북방의 국경 지대로 끌려갔는데, 진승과 오광은
소대장격의 인솔 책임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가던 도중 야영을 하고 있을 때 큰비가 왔다. 그래서 길이 완전히 물에
잠겼으며, 행군도 중지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시간은 자꾸만 흘러 약속한
기한 내에 국경 지방으로 도착하기란 이미 불가능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기한을
지키지 못하면 인솔 책임자는 반드시 처형되도록 되어 있었다.
이때 진승이 오광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도망쳐봤자 얼마 못 가 잡혀 죽는다. 또 사람들을 끌고 국경으로 가도
죽는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매일반인데, 우리 한번 나라를 발칵 뒤집고 죽는 것이
어떤가?"
그러면서 자기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지금 이 나라는 망조가 들었다. 지금의 2세 황제는 처음부터 황제 자리에 오를
자격도 없는 자였다. 원래 큰아들 부소가 당연히 차지해야 할 자리였거든.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부소가 아주 훌륭한 사람인 것은 알지만, 아직 죽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지.
또 유명한 항연 장군도 마찬가지일세. 그도 백성들의 인기가 대단했었는데,
초나라가 멸망당한 뒤 죽었다고도 하고, 또 어딘가에 숨어있다고 소문이 분분한
형편이다.
그래서 이렇게 하면 어떨까? 우리가 부소와 항연 행세를 하면서 여기 패거리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버리는 거다. 그러면 천하의 백성들이 호응할 것이
아닌가?"
이 말에 오광도 적극 찬성했다.
"좋다. 그럼 우리 한번 해 보는 거다!"
그리고는 두 사람은 점쟁이를 찾아갔다.
그때 점쟁이는 이들의 야심을 눈치채고,
"당신들의 일은 반드시 성공한다. 다만 귀신의 뜻에 잘 따라야 한다."
고 말했다.
이 말에 크게 고무된 두 사람은 그러면서도 그 '귀신이 뜻'이 도대체 무엇일까
곰곰 생각하다가,
"옳지, 귀신의 힘을 빌어 사람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라는 것이겠지."
라고 결론지었다. 그리고는 그들은 '진승왕'이라고 붉게 쓴 헝겊 조각을 어부의
그물에 걸린 물고기의 뱃속에 슬쩍 집어넣었다.
그런데 이 물고기를 한 병사가 사가게 되었다. 그는 고기를 요리하다가 뱃속의
헝겊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는 주변의 친구들에게 이 헝겊을 보여주게 되어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에 고무된 진승과 오광은 또 다른 꾀도 썼다. 야영하는 근처 숲속에 있는
사당에 오광이 들어가 밤에 도깨비불을 피우고 여우 목소리를 흉내내어,
"초나라가 일어난다. 진승이 왕--,
초나라가 일어난다. 진승이 왕--."
하고 소리를 냈다.
이런 일이 있고부터는 일행 중에 진승을 흘끔흘끔 쳐다보는 사람들이 차츰
늘어나게 되었다.
왕후장사의 씨가 따로 있는가!
오광은 평소에도 동료들의 일이라면 두 손을 걷어부치고 돕는 성격으로
병사들이 그를 많이 따랐다. 어느 날 이들 일행을 인솔하는 총책임자인 장교 두
사람이 술에 취했다.
그러자 오광은 갑자기 앞으로 나가 그 장교들에게,
"나는 도망치겠다. 나는 도망치겠다."
하고 몇 번이나 소리쳤다. 일부러 장교의 화를 돋구어 시비를 걸고 사람들을
선동하기 위한 꾀였던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장교 한 사람이 매우 화를 내면서 오광을 채찍으로 때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장교의 칼이 땅에 떨어지게 되었는데, 오광이 잽싸게 그 칼을
주워 들고 단칼에 장교의 목을 베어 버렸다. 이때 진승도 나머지 장교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는 진승이 큰 소리로 외쳤다.
"우리는 비 때문에 길이 막혀 이미 기한 내에 도착하기는 글렀다. 가 봤자 모두
죽을 뿐이다.
사내 대장부로 태어나 개죽음을 당하다니 말이 되는가! 어차피 죽을 바에는
세상을 한번 깜짝 놀라게 해 주자.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가! 모두 다 같은 인간일 뿐인 것이다. 우리라고
되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대찬성이오! 우리 한번 해 봅시다."
하고 소리쳤다.
이렇게 되자 진승과 오광은 스스로 부소와 항연이라 칭하고, 초나라의 관습에
따라 제단을 쌓고 올라가 모두 오른쪽 어깨를 벗음으로써 한 마음임을 맹세한 뒤
국호를 '대초'로 정했다. 그리고 진승은 장군이 되었으며, 오광은 부대장이 되었다.
이들은 우선 부근 지방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무기와 병력을 확보한 후, 차츰 그
세력을 넓혀 갔다. 그런데 그 세력은 급속도로 늘어나 순식간에 전차 6대, 수레
7백 대, 기병 천여 명, 병졸 수만 명을 모을 수 있었다. 그리고 계속 진격해
옛날 초나라의 수도였던 진성까지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그 시절 진나라의 폐해가 극에 달해 백성의 대부분이 이미 등을 돌린 탓이었다.
진승은 진성을 점령한 후 지방 유지들을 모아 놓고 자기의 뜻을 설명하였다.
그랬더니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장군께서 몸소 일어나셔서 천하의 불의를 내몰고 폭정을 벌하셨으며 초나라를
다시 부흥시켰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왕위에 오르셔야 합니다."
라고 떠받드는 것이었다.
사실 초나라 사람들이야말로 진나라에 대한 적개심이 가장 높았다. 천하 통일을
사실상 겨룬 것은 진나라와 초나라였는데, 이 와중에서 초나라 회왕은 속임수에
걸려 진나라에 연금당한 채 죽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세 집만 남아 있어도
진나라를 멸망시킬 것은 역시 초나라다'라는 속담까지 생길 정도였다.
아무튼 진승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곧 왕이 되었으며, 국호는 '장초'라 했다.
좌절된 진격
당시 진나라의 폭정에 시달리고 있던 백성들은 제각기 군수와 현령 등 관리들을
죽이고 진승에게 속속 합류했다. 그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진승의 군대는 무려
수십 만에 이르게 되었다. 당시 초나라의 곳곳에는 수천 명씩 떼지어 다니는 무장
집단이 있었고, 이들이 일제히 진승에게 호응했기 때문이다.
진승은 그 당시 명망높은 인사였던 무신, 장이, 진여를 시켜 옛날 조나라의
영토를 공격케 하였으며, 옛 위나라 땅에는 그곳 출신인 주시를 파견하여
평정하게 하였다. 그러면서 주력부대는 오광을 부왕으로 삼아 진나라로
진격하도록 명령하였다.
하지만 오광은 형양 지방을 포위한 채 쉽게 승리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승상 이사의 아들인 이유가 삼천 군수로 있으면서 방어를 굳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진승은 선비 출신의 참모도 얻게 되었는데 바로 주문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일찍이 유명한 항연 장군의 부하였으며, 또 춘신군을 섬긴 일도 있었던
사람이었다. 원래 진승의 군대에는 선비 출신이 거의 없었던 상태였으므로, 진승은
주문을 얻자 매우 기뻐했으며 그를 크게 신뢰하여 장군으로 삼았다. 그러면서
주문으로 하여금 진나라 공격을 담당하도록 명령하였다.
주문의 군대는 진나라로 진격하는 도중에 병력을 크게 증강하여 함곡관에
이르렀을 때에는 이미 전차 1천 대, 병졸 수십 만으로 불어났다. 그리하여 주문은
단숨에 함곡관을 돌파하고 희 지방에 진을 쳐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이 때 진나라에서는 장군 장항이 죄인들과 노예로 구성한 부대를 이끌고 나와
맞섰다.
그런데 이 전투에서 실전 경험이 부족했던 주문은 적은 군사로 너무 깊숙이
적진으로 들어감으로써 장한 군대의 반격에 말려 3개월을 버티다가 패했으며,
다시금 면지 지방까지 철수하게 되었다. 면지 지방에서도 10여 일간 싸우다가
결국 패배한 주문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 병사들은 흩어져 버렸다.
반란군의 분열
한편 조나라 공격을 명령받았던 무신 일행은 조나라 평정에 성공하자 진승과
상의도 없이 스스로 조나라 왕이라 칭하고 진여를 대장군에, 그리고 장이를
승상에 임명했다.
이 소식을 들은 진승은 크게 노하여 그들의 남아 있던 가족들을 잡아들여
처형하려 했다. 그러자 신하들이 말렸다.
"지금 큰 적인 진나라도 아직 무찌르지 못했는데, 그들의 가족을 죽이는 것은
적을 또 하나 만들뿐입니다. 차라리 기분좋게 승인해 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 말을 들은 진승은 사신을 파견하여 무신의 즉위를 축하하고 그 가족들도 잘
대해 주었다. 그런 후 진승은 무신에게 즉시 진나라 공격에 나설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자 무신은 회의를 소집하여 방법을 논의하였다. 그 자리에서 부하들이
이렇게 말했다.
"지금 폐하께서 즉위하신 일을 진승은 결코 달가워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만약 진나라를 멸망시킨다면 반드시 그 공격의 방향이 우리 나라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차라리 북쪽의 연나라를 평정하여 세력을 확대하는 편이
가장 좋을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비록 진승이 진나라를 멸망시킨다 하여도
우리 나라를 쉽게 공격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 의견에 동조한 무신은 연나라 출신이었던 한광에게 많은 군사를 주어 연나라
평정의 임무를 맡겼다. 그런데 한광이 연나라를 평정하자, 그곳의 유지들이
한광에게 간청하고 나섰다.
"초나라와 조나라에는 이미 왕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 기회에 우리 나라에도
왕이 계셔야 합니다. 바라옵건대 장군께서 우리의 왕이 되어 주십시오."
한광은 몇 번이나 사양했지만, 결국 그 뜻을 받아들여 연나라 왕에 즉위하였다.
그리고 위나라 공략에 나섰던 주시는 위나라 평정에 간신히 성공했는데,
그곳에서도 주시를 왕으로 세우려는 운동이 일어났다. 주시는 한사코 사양하다가
결국 옛날 위나라 왕손이던 구를 대신 왕으로 세우고, 자신은 재상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반란군은 제각기 독립하여 분열되어 버렸다.
한 점 불꽃이 광야를 불사르다
한편 반란군들이 뿔뿔이 흩어져 진승의 군대에 패색의 기운이 감돌자 갖가지
음모가 일어나고 있었다.
특히 형양에서 머뭇거리고 있던 오광의 부하들 중에서는 오광을 없애려는
음모까지 생겨났다.
어느 날 오광의 부하들이 모인 자리에서 전장이라는 장수가 이렇게 제의했다.
"엊그제 주문의 군사도 대패하여, 주문이 자결하였다. 그 주문을 이긴 장한의
군대는 반드시 이쪽으로 쳐들어올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는 이곳 형양에서 한 치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데, 장한의
군대가 나타난다면 우리 패배는 불보듯 뻔하다. 우선 형양을 포위할 병력을
최소화하고, 나머지 정예군은 장한의 공격에 대비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이다. 바로 오광이란 작자이다. 그 작자는 욕심만 태산처럼 많을
뿐, 병법에는 일자무식이다. 도무지 얘기가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우선 오광부터 없애야 한다. 오광이 있는 한,
우리는 개죽음 당할 뿐이다."
이 제의에 나머지 장수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즉시 행동을 개시하여 오광을 죽이고, 그 머리를 진승에게 바쳤다.
진승은 매우 화가 났으나 모든 장수들이 들고 일어난 일인지라 할 수없이
전장에게 장군의 자리를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그 뒤 전장은 정예군을 이끌고 형양성을 빠져 나가 장한의 군대와 일전을
벌였다. 그러나 전장은 여지없이 패하고, 자신도 전사했다.
전장을 격파한 장한은 여세를 몰아 진승의 척후대를 궤멸시켰으며, 계속하여
진승의 본부대까지 공격해 들어왔다.
이에 진승도 손수 출전하여 독려했으나, 기울어진 전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크게 패배한 진승은 후퇴에 후퇴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진승은 자신의 수레를 끌던 마부 장가라는 사람에게 목숨을
빼앗기고 말았다. 장기는 진승을 죽인 후 진승의 시체를 들고 진나라에 항복했다.
그러나 얼마 후 진승의 부하였던 장군 여신이 다시금 군대를 조직하여
점령당했던 영토를 되찾고 장가를 처형시켜 원수를 갚았다.
그리하여 진승은 왕이 된 지 불과 6개월 만에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그는
진나라를 멸망의 길로 빠뜨린 주역이었다. 실제 그가 각 지방에 파견했던
장군들이 곳곳에서 진나라를 격파하고 있었다. 비록 그는 스스로 완성을 시키지는
못했지만 진나라 붕괴의 서막을 열어젖히는 반란의 불꽃을 피워냈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이 불꽃은 유방에 이르러 천하제패의 결과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유방은 천하 통일 이후 진승의 묘를 크게 짓고 제사도 성대히
모시도록 하였다.
옛 친구를 잃으면 천하를 잃는다
진승이 왕으로 있을 때의 이야기이다.
일찍이 머슴살이를 할 때 함께 일했던 옛 친구 하나가 진승이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 그는 궁궐의 문을 두드리며,
"진승을 만나고 싶다."
라고 청했다.
"웬 놈이냐. 냉큼 사라지지 못할까."
수문장의 서릿발 같은 호령이 떨어졌다. 그러자 그 친구는 자기가 진승과 매우
친했다는 등 계속 떠벌렸다. 하지만 수문장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 친구는 계속 문 앞에 있다가 외출하려는 진승을 보았다.
"승! 날세."
진승도 그를 금방 알아보았다. 그리고는 자기 수레에 그를 태워 궁궐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궁궐을 처음 본 그 친구는 이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야! 기막힌 곳이구나. 승이도 정말 출세했군.
도대체 이 집은 어디까지 계속되는 거야?"
진승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그날부터 그 친구는 마음대로 궁궐을 출입하며 멋대로 행동했다. 또 아무에게나
진승과 같이 머슴살이 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떠벌리고 다녔다.
이윽고,
"그 시골 사람은 곤란합니다. 할 말 못할 말 가리지 않고 마구 지껄이고 다녀
대왕의 위엄을 땅에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진승은 결국 그 친구를 잡아 처형시켜 버렸다.
그러자 진승의 옛 친구들은 모두 궁궐에서 자취를 감추고, 진승은 외로운
처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진승은 주방과 호무라는 두 사람에게 감찰업무를 맡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은 무슨 일이든 엄격하게 문초하는 것이 충성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장군이 승리하고 돌아올 때에도 왕의 명령을 완전히 따르지 못했다고
죄인으로 취급하여 포박하려고 덤빌 정도였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을 진승은 무조건 신뢰하였다. 그래서 모든 장군들이
진승을 가까이 하지 못했다.
이것이 진승의 패인이었던 것이다.
실로 가까운 친구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한다면 천하를 얻을 수 없다는 옛말은
진실인 것이다.
9. 여걸 천하(여후, 진평)
1) 유방이 천하를 얻은 이유는?
큰 바람 일어나 구름 날아오른다
천하를 덮는 위세와 더불어 고향에 돌아오니
어찌 용맹한 자와 더불어 이 땅을 지키지 않을 것인가!
유방은 천하 통일을 이룬 지 8년 만에 처음으로 고향인 패에 돌아와 잔치를
벌이고 이 노래를 불렀다. 유방은 노래를 부르며 일어나 춤을 추었고 감개무량해
눈물까지 흘렸다. 이름하여 대풍가이다.
난세에 큰 뜻을 품고 일어나 여러 영웅들의 도움을 받으며 천하를 평정하고
금의환향한 기쁨을 나타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용맹스러운 부하들의
도움으로 천하를 지키겠다는 희망도 드러내고 있다.
일찍이 유방은 신하들 앞에서,
"그대들은 왜 항우가 천하를 잃고 내가 천하를 얻었다고 생각하는가?"
하고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이때 왕릉이 이렇게 대답했다.
"폐하께서는 부하들을 가볍게 생각하시는데 반해 항우는 솔직하며 부하를
사랑합니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부하에게 성을 공략케 한 후 항복해 오는 자를 부하가
부리게 하고 땅과 재물을 똑같이 나누십니다.
이에 비해 항우는 현명하고 재주있는 부하를 시샘하고 공이 있는 부하를
의심합니다. 그래서 싸움에서 이기더라도 부하에게 공을 돌리지 않고 재물을
얻어도 부하에게 나누어 주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항우는 비록 70번에 걸쳐 계속
승리했지만 결국 이 때문에 천하를 잃은 것입니다."
그러자 유방이 말했다.
"좋은 말이오. 그러나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말이오.
장막 안에서 계략을 짜서 천 리 밖의 승리를 이끌어 내는 면에서 내가 장량을
따르지 얻게 된 것이오.
그런데 나는 이렇게 훌륭한 이들을 잘 활용하였소. 그렇기 때문에 내가 천하를
얻게 된 것이오.
하지만 항우는 천하의 재사인 범증이 있었지만 활용하지 못했소. 그것이 나에게
사로잡힌 이유인 셈이오."
창업은 쉽고 수성은 어렵다
유방이 '대풍가'를 부른 것은 반란을 일으켰던 경포를 토벌하고 돌아오던 길에
고향을 들었을 때였다. 더구나 그는 그 토벌전에서 화살을 맞아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일찍이 장량이 해하 전투에 앞서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장군들이
필요하다'고 했던 한신, 팽월, 그리고 경포! 그 세 용맹한 부하들을 자기 손으로
죽여야 했던, 그리하여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잡아먹는다'는 기막힌
탄식을 들어야 했던 유방이었다. 그라고 사무친 감회가 없었겠는가?
그래서 '창업은 쉽고 수성은 어렵다'고 했는지 모른다.
어쨌던 이제 유씨 왕족이 아닌 왕으로는 오직 연나라의 왕인 노관 한 사람밖에
없었다.
원래 노관은 유방과 같은 동네에서 태어난 죽마고우였다. 그들은 공교롭게도
같은 날 태어났으며, 아버지끼리도 친구였다. 그래서 친구끼리 같은 날에 사내
아기를 낳자 동네 사람들이 모두 양고기와 술을 가지고 몰려들어 축하하기도
했었다.
그 때문에 노관은 태어날 적부터 계속 유방과 함께 다녔으며, 항우와 천하
결전을 벌일 때도 언제나 함께 있었다. 심지어 침실까지도 출입할 만큼 친한
사이였다.
천하 통일 후에도 기꺼이 유방은 노관에게 연나라의 왕을 내 주었다. 그러니
모든 사람들이 '결코 노관만은 배반하지 않겠지'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진희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노관은 진희가 망하면 바로 자기가
다음으로 당할 차례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래서 부하를 진희에게
보내 최대한 오랫동안 전쟁을 계속해 승패를 결정하지 말라고 요청했다.
그 후 진희가 죽고 반란이 진압되자, 진희의 부하가 이렇게 폭로해 버렸다.
"연나라 왕 노관이 부하를 진희에게 보내 공모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유방이 진상을 알아보려고 노관을 불렀으나, 노관은 두려워 한 나머지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 이에 유방의 의심은 짙어갔다.
이에 노관은 더욱 무서워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살면서 탄식했다.
'유씨가 아닌 왕은 나뿐이다.
그런데 지난해 한신이 죽었고 또 팽월도 죽었다. 이 모두 여후의 음모였다.
지금 폐하께서 병이 들어 나라 일은 여후가 틀어쥐고 있으면서, 공이 있는
신하들을 모두 죽이고 있구나!'
그런데 이 탄식소리를 누군가가 듣고 유방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자
유방은 크게 노했다.
설상가상으로 흉노에서 항복해 온 자 하나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장승이라는 자가 흉노에 와 있는데, 알고보니 연왕 노관이 보낸
사람이었습니다."
장승은 원래 노관이 흉노에 정탐하기 위해 보낸 밀사였다.
그러나 유방은 그 말을 듣고,
"과연 노관이 배반했구나!"
하고 판단해 번쾌를 시켜 토벌을 명령했다.
이때 노관은 가족들과 수천의 병사들을 데리고 성 밖으로 나와 상황을 살피다가
자기가 직접 유방을 만나 사죄하려고 했다.
그러나 때마침 유방이 죽자, 그는 할 수 없이 부하들을 데리고 흉노 땅에
들어가 언제나 한나라에 다시 돌아갈 날만 생각하다가 1년 만에 그곳에서 죽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한나라는 유방의 친족과 여후의 친족만이 권세를 잡게 되었다.
유방이 죽기 전 앓아 누웠을 때였다.
여후가 다가와 유방에게 물었다.
"폐하께 일이 생기면 누구에게 재상을 맡겨야 합니까? 지금 소하 대신도 너무
연로하셨는데...."
"소하 뒤는 조참에게 맡기시오."
"그 다음은 누가 맡아야 하는지요?"
"왕을이 적임자이지만, 조금 우직하니 진평이 그를 돕도록 하시오. 진평도 비록
지략이 뛰어나지만 단독으로 국사를 맡기 어렵소. 그러니 정치는 왕릉과 진평 두
사람에게 맡기고, 군사는 중후하고 소박한 주발에게 맡기시오. 유씨를 안정시킬
사람은 반드시 주발뿐이니, 그에게 총사령관을 맡기시오."
여후가 다시 물었다.
"그 후는 누가 좋습니까?"
유방은 아내의 욕심에 기가 막혔다.
"아니, 당신은 얼마나 오래 살려고 그러시오?"
유방은 드디어 기원 전, 195년, 그러니까 천하통일을 이룬 지 8년이 되던 해
4월 장락궁에서 숨을 거두었다.
2) 도대체 여자의 욕심이란 그 끝이 어디일까?(여후)
여후는 유방이 아직 이름도 없던 때에 결혼했던 부인으로, 유방과의 사이에 1남
1녀를 두었는데, 바로 뒷날의 효혜제와 노원 공주였다.
천하 통일 후, 여후의 억센 성격은 드디어 드러나기 시작했다. 한신을 처형하고
팽월을 죽이는 등 공신들을 숙청하는데 큰 기여를 했으며, 차츰 정치에까지 손을
뻗치게 되었다.
한편 유방은 한나라 황제가 된 뒤, 척희라는 미인을 얻어 매우 사랑하게 되었다.
그래서 척희는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바로 여의였다.
그런데 여후가 낳은 아들, 그러니까 효혜는 워낙 천성이 착하고 나약했다.
그래서 유방은 효혜가 부모의 성격을 닮지 않은 점에 매우 서운해 했으며, 효혜
대신 척희의 아들인 여의를 태자로 세울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더구나 여의는
유방을 똑같이 닮아 유방도 그를 매우 아끼고 있었다.
그 당시 척희는 유방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을 때라, 유방이 궁궐을 떠나
여행을 하는 데에도 항상 곁에 있었다. 그러면서 척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기
아들 여의를 태자로 삼아 달라고 눈물로 호소했던 것이다.
이에 반해 여후는 완전히 버림받고 있는 조강지처였다. '색이 시들면 사랑도
식는다'는 말이 역시 정확했다. 여후는 유방의 사랑을 받기는커녕 제대로 얼굴을
맞댈 기회조차 없을 정도였던 것이다.
화살이 있어도 쏠 수가 없으니
여의를 태자로 삼아야겠다는 유방의 마음은 더욱 굳어져 가고 있었다.
초조해진 여후는 장량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이에 정량은 궁궐에 들어가 유방에게 몇 번이나 태자를 바꾸지 말라고
간청했지만, 유방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장량은 생각을 바꿔 다른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어느 날 궁중에서 잔치가 벌어지고 있을 때였다. 효혜 태자도 와 있었는데, 그
뒤에는 네 명의 노인들이 앉아 있었다. 모두 80을 넘은 노인들로서 수염이나
눈썹까지 하얗게 새어 있었다. 그들은 차려입은 옷매무새가 마치 신선과 같았다.
그러자 유방이 물었다.
"저 사람들은 누구냐?"
이에 네 노인이 유방 앞에 나아가 각자 이름을 밝혔다. 다름아닌 동원공, 녹리
선생, 가리계, 하황공의 상산사호였다. 이들은 실로 유방이 천하 통일 전부터
가르침을 받고자 그렇게 찾아다녔던 도인들이었던 것이다.
유방은 깜짝 놀라면서 말했다.
"아니, 이제까지 내가 얼마나 찾았었는데.... 그간 어디 계셨소? 일부러 나를
피하는 것 같던데...."
이에 노인들이 말했다.
"황공합니다만, 폐하께서 인물을 못 알아보시고 곧잘 바보 취급하시는데 어떻게
나타날 수 있었겠습니까?
다만 태자는 부모를 공경하고 형제를 우애로 감싸며, 남에게도 겸허한 태도로
대해 주시기에 모든 사람들이 태자를 따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나타난 것입니다."
"그랬던가...."
유방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러면 앞으로도 태자를 잘 부탁하오."
네 노인들은 이렇게 말하면서 유방의 장수를 기원하는 술잔을 들고 물러나갔다.
한참 후 유방은 척희를 불렀다.
"나는 정말 여의를 태자로 삼고자 했으나, 태자는 네 도인이 보필하고 있네.
태자에게도 날개가 돋아난 셈이지. 내 힘으로도 어쩔 수 없다네. 그대는 내가
죽은 후 여후를 도와 섬기지 않으면 안 된다."
척희는 흐느껴 울었다.
그러자 유방은 노래를 읊기 시작했다.
새는 하늘 높이 천 리를 날으네
날개 어느새 굳세어 사해를 건너네
사해를 나는 날개를 어지 막으리오
화살이 있어도 쏠 수가 없으니
척희의 뺨에는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그 뒤 효혜 태자는 태자 자리를 굳게 지킬 수 있었다. 이 모두 장량의 도움
덕택이었다.
사람돼지
그 후 유방이 죽었다. 효혜 태자가 황제로 즉위하고, 여후는 태후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런데 여후에겐 눈엣가시가 있었으니, 바로 척희였다. 유방의 사랑을 모조리
빼앗아가고, 아들 효혜의 태자 자리도 거의 빼앗길 뻔했을 정도로 항상 여후
옥죄어 왔던 척희! 실로 여후는 유방이 살아 있을 때부터 척희에 대한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유방이 죽자마자, 여후는 척희를 곧장 잡아다가 궁중에서 죄지은 자만
가두는 영항이라는 토굴 감옥에 처넣어 버렸다. 그러면서 척희의 아들 여의도
즉각 입궐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몇 번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여의는 오지 않았다. 대신 주창이라는
신하거 편지를 올렸다.
"선제께서 '여의가 아직 어리니 네가 지켜주어라'는 분부를 내리셨었습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태후께서 척희 부인을 미워하셔서 여의 왕자님까지 함께
죽이시려고 한다니, 어떻게 보낼 수 있겠습니까?"
편지를 일고 난 여후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라,
"무슨 말이냐, 두말 말고 그 놈을 끌어와라!" 하고 호통을 쳤다.
드디어 여의는 궁궐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이때 원래부터 우애가 깊었던
효혜제는 여후의 속셈을 알아채고 여의가 궁궐에 도착하기 전에 손수 궁궐밖에
나가 궁궐로 돌아왔다. 그러면서 잠시도 여의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여의를
죽일 기회만 노리던 여후도 할 수없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효혜제가 사냥을 나가게 되었는데, 아직 어렸던 여의는 일찍 일어나지
못해 궁궐에 홀로 남게 되었다. 이때를 놓칠세라 여후는 사람을 보내 여의에게
독을 탄 술을 먹이도록 했다.
효혜제가 사냥에서 돌아와 보니, 이미 여의는 차디찬 시체로 변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여후의 복수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던 것이다.
여후는 영항에 갇혀 있던 척희에게 처참하게 복수했던 것이다.
여후는 우선 척희의 수족을 잘라 버렸다. 그리고는 눈을 도려내고 귀를 찢어
태웠으며, 벙어리가 되게 하는 약을 먹였다. 그것도 모자라 변소 밑바닥에 버리고
'사람돼지'라 부르게 했다.
며칠 후 여후는 효혜제에게 그 '사람돼지'를 보여 주었다. 효혜제는 처음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그것이 척희라는 말을 듣자 통곡하다가
그대로 앓아 누웠다. 그리고는 사람을 보내어 여후에게 애원했다.
"사람으로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이제부터 나를 아들로 여기지
마십시오. 나는 이런 식으로 천하를 다스리지 못하겠습니다."
그 후 효혜제는 정치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가뜩이나 쇠약한
몸으로 매일같이 술과 여자에 파묻혀 지내다가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이때 그의 나이 겨우 23세였다.
단 한번의 사랑으로 태후가 된 여인
유방의 총애를 받던 여인들은 여후의 복수의 칼날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런데
유방의 사랑을 덜 받았기 때문에 오히려 살아남아 끝내 황제의 어머니가 된
여인이 있었다. 바로 박희라는 여인이었다.
박희는 유방과 항우가 천하를 놓고 겨룰 때, 아버지가 항우 진영에 있었다. 그
후 전쟁에서 패하자 그 가족들은 포로가 되어 아버지는 처형당하고, 박희는
노예로 되어 베 짜는 여인이 되었다.
그 뒤 우연히 베 짜는 방에 들른 유방은 박희의 미모에 반해 박희를 후궁으로
불러들였다. 그러나 박희의 미모도 사실은 별 뛰어난 것이 없었기 때문에 유방의
머리에서 까맣게 잊혀지게 되었다.
그런데 박희는 관부인과 조자아라는 두 명의 후궁과 매우 친했다. 그래서 세
친구는 언제나,
"우린 나중에 누가 먼저 귀인이 되더라도, 서로 잊지 말자. 꼭...."하고
약속했었다.
그 후 관부인과 조자아는 유방의 총애를 받는 몸이 되었다. 어느 날 유방과
같이 나들이하던 두 후궁은 잠시 쉬고 있을 때, 박희와의 약속을 말하며 서로
웃었다. 그러자 유방이 꾸중을 하며 왜 웃냐고 물었다. 두 후궁이 그 이유를
말하니 유방은 갑자기 박희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즉시 박희를 불러내 잠자리를 같이 했다. 그때 박희가 조용히
속삭였다.
"지난 밤 제 배에 푸른 용이 들어오는 꿈을 꾸었답니다."
"그래, 그건 길조구나. 그 꿈을 이뤄 주마."
이렇게 해서 박희는 단 한번의 정을 받고 아들을 잉태했다. 그러나 그 뒤
박희는 유방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었다.
유방이 죽고 나자 유방의 사랑을 받던 후궁들은 모조리 여후에게 앙갚음을
당해야 했다. 그러나 박희는 유방과 거의 관계도 없던 '불쌍한 여인'으로 취급되어
살아 남았던 것이다.
더구나 여후가 죽은 후, 여씨의 전횡에 넌더리가 나 있던 중신들이 박희를 불러
들였고 그래서 그 아들을 황제로 세웠던 것이다.
참으로 불행이 행운으로 바뀐 경우라 할 것이다.
외아들을 잃고도 눈물이 없는 까닭은?
한편 효혜제가 세상을 뜨자 국상이 발표되어 모든 신하가 관 앞에서 곡을 했다.
그러나 여후는 겉으로 곡하는 소리만 낼 뿐,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이때 장량의 아들인 벽강은 아직 나이 열 다섯밖에 되지 않았으나 매우
똑똑했다. 그는 바로 승상이던 진평을 찾아갔다.
"태후께서 지금 외아들을 잃고도 조금도 슬픔이 없는 것은 무슨 이유인지
아시겠습니까?"
"왜 그럴까?..."
"효혜제에게 성장한 아들이 없기 때문에 태후가 중신들에게 위협을 느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승상 어른께서 이 기회에 태후의 조카분들을 장군으로 임명하고, 여씨
가문에게 요직을 주도록 하십시오.
그래야 태후의 두려움도 풀릴 것이며, 중신들도 화를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진평이 즉시 그 말대로 하니, 과연 여후는 매우 기뻐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목놓아 울며 눈물을 비오듯이 흘렸다.
그 후 여후는 노골적으로 정사를 자기 마음대로 주물렀다.
여후는 효혜제의 상이 끝나자 태자를 왕위에 앉혔다. 그런데 그 태자 역시
나이가 너무 어려서 할머니인 여후가 완전히 황제의 권한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 나이 어린 황제는 소제라 불리웠는데, 사실 그는 효혜제의 정실 부인에게서
난 아들이 아니었다. 정실 부인에게 아들이 없자, 여후가 자기 집안의 미인 한
명을 후궁으로 들여서 낳은 아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그 생모를 죽이고 정실 부인이 낳은 태자로 꾸몄다.
그 뒤 소제가 4, 5세쯤 되었을 때, 누군가가 이 사실을 그에게 얘기했다.
화가 난 소제는 주먹을 꼬옥 쥐고,
"다음에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고 말 테다."하며 분개하였다.
이 말이 그대로 여후의 귀에 들어갔다. 그를 그대로 두어서는 앞날이
불안하다고 여긴 여후는 소제를 전에 척희를 잡아 가뒀던 영항에 유폐시켜
버렸다. 그리고는 소제가 병이 깊어 제 정신이 아니라고 하면서 아무도 접근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 얼마 후 소제는 원인 모르게 죽었다.
천하의 주인은 유씨인가, 여씨인가?
이어 여후는 다음 황제로 유홍을 내세웠는데, 그 역시 아직 나이가 어려 소제라
불렀다. 그리고는 여전히 여후가 황제의 권한을 휘둘렀다.
어느 날 여후가 자기 친정 식구를 제후로 삼을 생각으로 우승상 왕릉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왕릉은,
"선제께서 '유씨가 아닌 사람이 제후로 되는 것을 목숨을 걸고 막으라'
하셨습니다. 선제의 유지를 받들어야 합니다."라고 반대했다.
이에 크게 화가 난 여후는 이번엔 좌승상 진평과 대신인 주발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그들은 여후의 의견에 동조하는 것이었다.
조정에서 물러나온 왕릉은 진평과 주발을 비난하였다.
"어찌 선제와의 약속을 어긴다는 말입니까. 그리고서 무슨 낯으로 선제를
뵙겠소?"
그러자 그들은 담담하게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용기있게 태후에게 맞서는 면에서는 우리가 당신보다 부족합니다. 그러나
나라의 안정을 도모하고 유씨 권력을 지키는 데에는 당신이 우리만 못할
것이외다."
그 후 여씨 일족은 계속해서 제후로 임명되었고, 여후의 여동생인 여수 역시
제후로 임명되었다.
여수는 이로써 중국 역사상 최초로 제후 자리에 오른 여성이 되었다.
유씨 남편들을 감시하는 여씨 아내들
여후는 황실인 유씨와 자기 친정인 여씨 간에 권력 다툼이 격화되자, 한 가지
꾀를 냈다. 즉 여씨의 딸들을 유씨의 제후들에게 시집을 보내 아예 가정에서부터
유씨를 꽉 잡아 버리자는 심산이었다.
이때 조나라 왕으로 봉해져 있던 유우가 있었다. 그런데 그는 유씨 문중에서
시집온 본처에게 정이 가지 않아 다른 첩에게 사랑을 쏟았다. 그러자 질투심
많았던 여씨 성의 본처는 이 사실을 여후에게 고하고, 또 있지도 않은 사실을
거짓으로 꾸며 남편에게 뒤집어 씌었다.
'여씨 성에게 제후 자리를 주는 것은 말이 안된다. 여후가 죽는 날이면 내
반드시 여씨 일족을 멸하리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여후는 분기탱천했다. 곧바로 유우를 잡아들이고는 그를 연금시킨
채 일체의 음식을 못 먹게 만들었다. 그에게 음식을 갖다 주는 사람은 무조건
처벌되었다.
유우는 굶주림 속에서 원한에 사무친 시를 읊었다.
여씨가 권세를 잡으니 유씨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
제후라는 건 이름 뿐, 아내까지 강요당했다.
아내가 질투 끝에 나를 팔아넘기니
계집의 밀고가 나라를 어지럽히는데
황제는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아! 이 나라 충신들은 어디로 갔는가!
차라리 자결할 것을, 어찌 미리 깨닫지 못했던고,
이렇게 굶어 죽는데도 인정을 베푸는 자조차 없구나.
하지만 여씨의 무도함을 하늘의 힘을 빌어 기필코 보복하리라.
유우는 이렇게 시를 읊고 드디어 굶어 죽었다.
정부와 동성연애자
벽양후 심이기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원래 유방과 같은 동네에서 태어나
항상 유방의 부하 노릇을 했으며, 이 후에도 이른바 '가신'이었다.
특히 그는 일찍이 유방이 항우에게 일방적으로 수세에 몰리고 있을 때, 항우가
유방의 가족을 체포하려 하자 여후 및 유방의 아버지와 함께 도망가다가 같이
포로가 된 적도 있었다.
천하 통일 후 유방이 죽고 나자, 여후는 심이기를 가까이 하였다. 그리고 이내
두 사람은 깊은 관계에 빠졌다. 이 소문은 소리도 없이 퍼져 나갔으며, 마침내
어떤 자가 여후의 아들인 황제 효혜제에게 이 사실을 일러바쳤다. 그러자
효혜제는 크게 화를 내고 당장 심이기를 체포하여 감옥에 처넣고는 처형시키려
했다. 여후는 그토록 세도가 하늘을 찌를 듯했지만, 이 사실만은 부끄러워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이때 주건이라는 현명한 선비가 있었는데, 그는 말재주가 좋고 변론을 잘 하며,
청렴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일찍부터 장안에 그 명성이 높았으며, 심이기도 그와
사귀려고 몇 번이나 해 봤지만 주건은 만나 주지 않았었다. 그 후 그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 그의 집은 너무 가난해 장례 비용조차 마련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에
심이기가 그의 집을 찾아가 열심히 일을 거들고 부의금도 후하게 내며 성의를
보였다. 그러자 주건도 차츰 심이기를 좋게 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런 인연으로 감옥에 갇혀 위기에 몰린 심이기는 주건에게 사람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주건은 냉정히 거절했다.
"사사로이 도와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는 주건은 효혜제가 사랑하고 있던 남자인 굉적유를 찾아갔다. 굉적유는
미소년으로서 효혜제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효혜제는 동성 연애를 하고 있었던
셈이다. 아마 사나운 어머니 여후의 영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굉적유를 찾아간 주건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황제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천하가 다 아는 것이오. 그런데
지금 벽양후 심이기가 태후의 사랑을 받았다는 이유로 옥에 갇혀 있소. 세상
사람들은 모두 당신이 모함해서 그를 죽이려 한 것이라 믿고 있소.
지금 만일 심이기가 죽게 된다면, 바로 다음날 여후께서 당신을 죽이려 할
것이요.
그런데 왜 당신은 심이기를 구해 줄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오?
황제께 말씀드려 심이기를 풀려나게 한다면 태후께서 크게 기뻐할 것이오.
그렇게 되면 당신은 황제와 태후 두 분의 사랑을 몽땅 차지하게 될 터인데
말이오."
이 말을 들은 굉적유는 크게 두려워하여, 황제에게 심이기를 풀어 달라고
애원했다. 그러자 황제도 할 수없이 풀어 주었다.
한편 심이기는 주건이 자기 부탁을 거절하자 매우 원망을 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사실을 알고는 주건을 찾아가 후한 선물을 주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 후 여후가 죽고 여씨 천하가 몰락하자 심이기도 당연히 처벌 대상이었다.
그러나 역시 주건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후에 결국 회남왕에게 철퇴로 맞아 죽었다. 회남왕의 어머니는 반란의
혐의를 받고 자살했었는데, 그때 여후와 심이기가 도와 주었으면 살 수 있었던
것을 전혀 손을 써 주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 그 때문에 회남왕은 언제나
심이기를 벼르고 있었던 것이다.
장례에 마음을 빼앗기면 천히도 빼앗긴다
소제 유흥 8년 3월에 여후는 패수 기슭에서 제사를 모시고 돌아오던 중이었다.
그때 갑자기 파란 개 같은 것이 나타나서 여후의 옆구리를 물고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도 괴이하여 점을 쳐 보니 죽은 척희의 아들 여의가 복수를 하고
있다는 점괘가 나왔다. 그날 이후 여후는 옆구리의 통증 때문에 무척 시달려야
했다.
7월에 접어들면서 여후의 병세는 더욱 깊어만 갔다. 다시 일어날 수 없음을 안
여후는 자기 조카인 여록과 여산을 불렀다.
"선제는 천하를 통일한 다음, 모든 대신들을 모아놓고 '유씨 아닌 자가 왕이
되었을 때는 모두 힘을 합해 이를 무찌르라'고 서약을 시켰다.
때문에 우리 여씨 문중이 권세를 잡았다 해도 중신들이 마음 속으로 복종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더욱이 내가 죽으면 그들은 반드시 반격을 해 올 것이다.
정신 차리고 우선 군사를 모아 궁궐을 지켜야 한다. 장례에 정신을 빼앗기면
천하를 빼앗길 것이다. 명심하도록."
드디어 8월 초하루에 여후는 세상을 떠났다. 여후의 유언에 따라 여산이
상국으로 임명되었으며, 여록의 딸이 황후가 되었다.
3) 과연 위기를 어떻게 이겨나갈 것인가?(진평)
다섯 번 과부된 여자에게 장가들다
진평은 젊을 적에 형인 진백의 집에 살았다. 그런데 형은 진평의 재주를 알아
보고, 자기는 힘든 농사일을 하면서도 진평에게는 큰 도회지에서 공부하도록 해
줬다.
이런 형의 태도를 그의 아내는 늘 못마땅해 하며, 어느 날 이렇게 투덜거렸다.
"저렇게 밥이나 축내는 시동생이라면 차라리 없는 게 낫겠어요."
그러자 진백은 크게 화를 냈다. 그리고는 곧장 이혼해 버리고 아내를 친정으로
내쫓았다.
그때 근처의 동네에 장부라는 부자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손녀는 시집만
가면 남편이 곧 죽어 자그만치 다섯 번이나 과부가 된 처지였다.
평소 그 손녀에게 마음을 두고 있던 진평은 장부에게 찾아가,
"손녀를 제게 주십시오."하고 청혼했다.
장부는 아무 대답도 없이 그저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어느 날 이웃 동네에 초상이 나서, 진평이 그 집에 가 일을 돕고 있었다. 그때
마침 장부도 조문객으로 왔다가 진평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진평은 이를 눈치채고
핑계를 대어 상가를 나와서 집으로 돌아왔다. 장부는 몰래 진평의 뒤를 밟았다.
진평이 들어간 곳은 허름한 초가집이었고 문이라야 고작 거적대기로 가린 것이었다.
하지만 집앞에는 귀한 손님들이 다녀갔음인지 수레 자국이 많이 나 있었다. 장부는
그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장부는 그 길로 집에 돌아가 큰아들을 불러 말했다.
"네 딸을 진평에게 주었으면 하는데, 어떻겠느냐?"
그러자 아들은,
"진평이라면 가난한 주제에 생업에 힘쓰지 않아 모두 비난하는 자이온데, 하필
그런 사람에게 딸을 준다는 말씀인지요?"하며 반대하였다.
하지만 장부는 끝내 우겨서 진평을 손녀 사위로 삼았다. 결혼 비용도 모두
장부가 지불해 혼사도 무사히 치뤘다. 그러면서 그는 손녀를 불러,
"시댁이 가난하다고 조금이라도 무시해서는 안된다."하고 단단히 훈계하였다.
그 후 진평은 마을 일을 도맡아 했는데, 그는 항상 공평하고 매끄럽게 일을
처리했기 때문에 모두 그의 재주를 칭찬하였다.
의심나는 자는 쓰지 말고 일단 쓰면 의심하지 말라
그 후 진승이 반란을 일으켜 천하가 진동할 때 진평은 형 진백과 작별하고
위나라에 찾아가 위왕 구를 만났다. 위왕은 그에게 벼슬 자리를 주어 등용했다.
진평은 이제야 자기의 큰 뜻을 펼 기회라 생각하여 위왕에게 여러 계책을 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헐뜯는 자들이 많아 결국 진평은 몰래 떠나야
했다.
몇 년이 지나자 이번에는 항우의 군대가 황하까지 진출하였다. 진평은 청년
수백 명을 이끌고 항우의 군대에 합류하여 커다란 공로를 세웠다. 드디어 항우가
진나라를 격파하고 함양을 점령한 후, 진평은 높은 벼슬에 임명되게 되었다.
그 뒤 항우가 팽성에 도읍을 정한 자 오래지 않아 유방이 관중을 차지하고
동쪽으로 진출할 때, 항우의 부하였던 앙이라는 사람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항우는 진평에게 반란 진압을 명령, 진평이 나아가 쉽게 반란을 진압하였다.
반란을 진압한 공로로 진평은 벼슬이 한층 높아졌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유방이 황하를 건너와 앙을 공격하니 앙은 항복해
버렸다. 이에 항우는 진평이 그들과 무슨 묵계를 하지 않았는가 의심하고 진평을
불러 추궁하려 했다.
진평은 변명해 봤자 통하지도 않을 것을 알고 오직 칼 한 자루만 지닌 채 몰래
도망을 쳤다. 진평은 가까스로 강까지 도망해서 나룻배를 간신히 타게 되었다.
그런데 사공은 첫눈에 그가 망명하는 장군임을 알아보았다.
준수한 외모와 깨끗한 옷차림, 그리고 혼자 몸으로 강을 건너는 것이 영락없는
망명 장군의 그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진평이 분명 많은 보물을 몸에 지니고
있겠거니 생각하고, 기회를 봐서 진평을 없애고 재물을 빼앗을 궁리만 하고
있었다.
진평은 그러한 사공의 마음을 알아보고 일부러 옷을 모두 벗은 후 같이 노를
저었다. 그렇게 하니 못된 뱃사공도 비로소 그가 몸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음을
알고 딴 마음을 품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탈출에 성공한 진평은 드디어 수무 지방에서 유방을 만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유방은 그에게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평은 자리를 뜨지 않고 유방 앞에 버티고 앉아 자신의 큰 뜻을 일장
연설하였다. 유방은 처음엔 건성으로 듣다가 어느새 진평이 말에 푹 빠지게 되었다.
"과연 천하의 모사일세."
그러더니 그날로 진평에게 왕의 신변을 보호하고 여러 장수들을 감찰하는
역할을 주었다.
그러자 여러 장수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진평이라는 자는 한낱 떠돌이에 불과한 한량입니다. 위나라에서도 쫓겨난
신세인 것입니다. 더구나 그런 자에게 장수들의 감찰을 맡기다니요? 말도
안됩니다."
더구나 진평이 여러 장수들에게 재물을 내놓으라고 강요하고 다닌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반간계의 명수
말이 하도 많아지자, 유방은 장량을 불렀다.
"요즈음 진평에 대해 불만이 많은데, 그대 생각은 어떻소?"
이에 장량이 대답했다.
"진평은 항우에게 개죽음을 당하느니 사람을 쓸 줄 아시는 폐하께 찾아온
사람입니다.
지금 천하는 먹느냐 먹히느냐의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전쟁을 이길 수 있는 '재능'이 필요한 것입니다.
또한 그가 장군들에게 재물을 요구한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그것은 앞으로
항우 진영을 이간 공작하려는 반간계를 위한 자금의 조성 때문입니다."
유방은 이 말을 듣고 무릎을 탁 치며,
"그럼 그렇지. 내 눈이 틀릴 리가 있나."하며 좋아했다.
실제 진평은 그 후 항우 진영의 제일 가는 참모인 범증을 반간계로 실각시키는
등 항우 진영을 이간질하고 스파이를 심어놓아 정보를 빼내는 반간계를 훌륭히
수행했다. 그것은 항우 진영을 약화시키는 큰 이유가 되었다. 또한 진평은 유방을
호위하여 항우에게 완전 포위되었을 때 거짓 항복 사건으로 유방을 탈출케 하는
등 그 공로가 무척 컸다.
그리하여 진평은 유방을 도와 천하를 재패하게 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것이다.
진평이 주색에 빠져 있는 이유는?
유방이 천하를 통일한 이후 진평은 여전히 '꾀주머니'로서 그 역할을 다하며
유방을 보좌했다. 특히 유방이 흉노를 공격했으나 오히려 백등산에서 포위되어
매우 위태로웠을 때 진평의 계교가 빛을 발했다.
진평은 그때 화공에게 절세의 미녀도를 그리게 하고 사신을 시켜 선물과 함께
그 미녀도를 묵특선우의 부인에게 보내게 했다.
그러면서,
"지금 한나라 황제께서는 어려움에 처해 이 절세의 미녀를 선우께 몰래
바치고자 하십니다."
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자 선우의 부인은 그 미녀를 선우에게 바칠 경우 그 미녀에게 사랑을
빼앗길까 두려워했다. 그래서 선우에게 졸랐다.
"지금 우리가 한나라 땅을 얻는다고 해도 거기에서 살 수는 없잖아요. 서로
괴롭히면서 살 필요도 없지 않을까요?"
이에 묵특선우는 드디어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그리하여 유방은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진평은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위기에 빠진 유방을
신출귀몰한 꾀를 써서 구해 냈다. 그래서 그 공로를 인정받아 큰 벼슬을 받았으며,
승상의 자리까지 올랐다.
그런데 유방이 죽고 난 후 천하는 여씨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진평은
밤낮으로 주색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자 평소부터 진평을 좋지 않게 보던 여후의 여동생인 여수가 여후를
찾아왔다. 옛날 유방이 여수의 남편인 번쾌를 사로잡은 일이 있었는데, 그 일에
진평이 개입되어 있었던 것이다.
"진평이라는 자가 승상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정치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매일같이 주색에만 빠져 있답니다. 그 자를 처벌하세요."
이 소식을 들은 진평은 그 뒤 더욱 주색에 빠지는 것이었다. 여후는 이 사실을
보고 받고 얼굴에 웃음을 띄었다. 그리고는 진평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예로부터 아녀자의 말은 듣지 말라는 속담이 있지요. 그대는 어떻게 하면
나하고 잘해 나갈 수 있는가에 대해서만 생각하기 바라오.
여수의 말 따위는 신경 쓸 필요가 없소."
그 후 여후는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여씨 일족을 등용시켰고, 진평도 아무런
불평을 말하지 않았다.
재상과 장군이 힘을 합하면
그러나 진평이 주색에 빠진 것은 미래를 내다보는 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여씨 권세가 하늘을 찌를 듯 강성하지만, 그 권세는 오래 가지 못한다.
다만 지금은 납짝 엎드릴 때다.'
진평은 집에 틀어박혀 여씨의 권세를 물리칠 방안을 짜내기에 골몰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유방의 정치 고문격이었던 육가라는 대신이 찾아왔다. 진평은
누가 온 사실조차 모른 채 생각에 골똘하고 있었다.
"승상 어른, 무슨 생각을 그렇게 열심히 하고 계십니까?"
"아! 육가 선생이 오셨구료.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어른께서는 승상의 자리에 계시면서 신하로서는 더 이상의 바램이 없을
처지이십니다.
다만 한 가지 걱정이 계시다면 역시 여씨 일족의 전횡이 아니겠습니까?"
"정말로 선생의 눈은 정확하시군요. 무슨 방도가 없겠는지요?"
"선비란 원래 태평 시대에는 재상에게 기대하고, 난세를 당하면 장군에게
기대하는 법입니다. 그러니 재상과 장군이 힘을 합친다면 선비는 모두 따라가기
마련입니다.
나는 이것을 항상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지금 이 나라로 말할 것 같으면 재상으로는 당연히 승상 어른이 계시고,
장군으로는 역시 주발장군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발 장군은 저와 항상 농담을
주고 받는 사이인지라, 내가 속 마음을 드러낼 때도 그저 농담을 받아들이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승상 어른께 말씀드리는 것이니, 어른께서는 무엇보다도 주발 장군과
친교를 맺어 여시 일족에 대한 견제를 해내셔야 합니다."
그렇게 말을 마치자 육가는 여씨를 제압하기 위한 여러 방안을 얘기하였다.
원래 진평은 주발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옛날 진평이 유방에게 등용되어
장수들의 감찰을 수행할 때, 주발이 특히 불만을 터뜨린 장군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진평은 여씨 일족을 누르기 위해 옛날의 감정을 털어 버리기로 하고, 즉시
육가의 말대로 주발을 초대하여 성대한 잔치를 벌였다. 또한 그의
생일에는 가무단까지 보내어 축하하였다.
주발 역시 진평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면서 매우 가까운 사이가 되어갔다.
이렇게 하여 여씨 일족의 권세는 차츰 힘을 잃어갔다. 그러면서 진평은
육가에게 경비를 주어 조정 신하들을 끌어들이도록 했다.
4) 여인 천하의 종말
왼쪽이냐, 오른쪽이냐?
여후가 죽은 후, 하늘을 찌를 듯했던 여씨 일족의 권세도 차츰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하지만 여후가 죽었어도 여씨 일족이 완전히 조정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반란을 일으켜 유씨네 한나라를 엎어 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기도 했다. 다만
유방이 생존했을 때 뒷일을 부탁했던 주발이나 관영 등의 용맹스런 장군들이
아직도 상당한 힘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반란을 선뜻 일으키지 못하는 처지였다.
그때 유장이라는 제후가 있었는데, 20세밖에 안되었으나 매우 용기있는
사람이었다. 여후는 그에게도 역시 여씨네 집안의 딸을 시집 보냈으나, 그 딸이
유장에게 여씨 일족의 음모를 낱낱이 폭로해 버렸다.
그러자 격분한 유장은 자기 형인 유양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이번 기회에 여씨
일족을 몰아내기 위해 군대를 일으키자고 제안했다. 이 소식을 전해받은 유양은
즉시 군대를 일으키는 한편, 모든 제후들에게 여씨 토벌의 격문을 띄웠다.
한편 조정에서는 유씨 제후들이 군대를 일으켰다는 급보를 접하고 상국이던
여산은 관영 장군으로 하여금 그들을 물리치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관영은 군대를 이끌고 궁궐 밖으로 나와서 병사들에게 이렇게 선포했다.
"지금 여시 일족은 방자하게도 천하의 권세를 쥐고 흔들고 있다.
이제 나는 역적 여씨 일족을 토벌하려고 하니, 그대들은 나를 따르라."
이에 병사들은 일제히 창과 칼을 높이 들고 환호하였다. 관영은 즉시 유양에게
사자를 보내 연합군을 만들자고 제안하였다.
이때 진평과 주발도 행동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여록이 장군으로서 군대 지휘관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진평과 주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대신인 역상의 아들 역기가 여록과 친했었다. 그래서 주발은 역상을 통해
역기에게 여록을 유인하도록 꾀를 냈다. 여록은 역기를 믿고 군대 본부를 나와
밖에서 놀았다. 이 틈에 주발이 군대 안으로 들어가 지휘권을 행사했던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여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호통을 쳤다.
"장군이 군대를 버리다니, 이제 우리 집안은 망했구나."
그리고는 집안에 있는 모든 패물들을 마당에 내팽개쳤다.
"어차피 빼앗길텐데 이렇게 버리는 게 낫지."
과연 주발은 여록으로부터 지휘권을 넘겨받자마자 전군을 소집했다. 그리고 큰
소리로 명령하였다.
"여씨에게 편들 자는 오른쪽 어깨를 벗고, 유씨에게 편들 자는 왼쪽 어깨를
벗어라!"
그러자 병사들은 모두 왼쪽 어깨를 벗어 유씨를 지지한다는 표시를 하였다.(이
일로부터 한쪽을 편드는 것을 좌단이라 부르게 되었다.)
진평과 주발은 군사 지휘권을 장악하자 유장에게 병사를 주어 궁궐을
공격하도록 했다. 그때 상국 여산은 뜰을 거닐고 있다가 갑자기 기습을 받고
변소로 피했으나, 그곳까지 추격한 유장에게 목이 베어졌다. 유장은 계속 궁궐을
수식해 장락궁의 경호 책임자였던 여경시를 베었다. 이렇게 하여 여씨 일족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군사 지휘권을 주발에게 넘겨 주었던 여록도 칼에 맞아
죽었으며, 여수는 매를 맞고 죽었다. 그리고 여수가 낳은 번쾌의 아들 번항까지
살해되었다.
자리가 다르면 할 일도 다르다
여씨 일족이 멸망한 후 중신들이 모여 비밀회의를 열었다. 가장 중요한 후계자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중신들은 모두 여씨 외척에 염증을 내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거사에
공훈이 컸던 유장과 유양도 추천되었지만, 그들 역시 회가가 매우 음흉하다고
소문난 집안이었으므로 기각되었다.
결국 옛날 박희의 아들이 추천되었다.
"그분은 현재 살아 있는 유방 폐하의 친자식 중에서 최연장자이며, 외가인
박씨는 조촐한 집안일 뿐이다."
이렇게 해서 중신들의 의견은 일치되었고, 급히 사자를 보냈다. 박희의 아들은
거듭 사양했지만, 중신 일동은 두 차례나 권유했다.
드디어 박희의 아들이 할 수 없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니, 바로 문제이다.
승상이라는 자리
새로 즉위한 문제는 주발 장군이 여씨 토벌에 가장 큰 공로가 있었으므로 그를
제1의 공로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진평은 그것을 알고 우승상 자리를 주발에게 양보하기로 생각했다. 그래서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사직을 청원했다.
"그대는 이제까지 건강하더니, 갑자기 아프다며 사임하겠다니 무슨 이유요?"
문제가 진평에게 물었다.
"예, 황공스러운 말씀이오나 옛날 고조 때는 저의 공적이 주발을 앞섰었습니다.
그러나 여씨 토벌에는 주발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문제는 주발을 우승상에 임명하고, 진평은 좌승상으로 임명해 제2위의
서열로 내려놓았다.
그 뒤 문제가 어느 날 주발에게 물었다.
"우승상, 재판은 전국적으로 몇 건쯤 있는가?"
그러자 주발의 얼굴빛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제가 미처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럼 국고는 연간 얼마나 되는가?"
"그것도 모르겠나이다. 죄송합니다."
주발은 온몸에 식은 땀이 흘렀다.
그러자 문제는 이번엔 진평에게 물었다. 하지만 진평의 대답은 단호했다.
"그 문제라면 각각 담당자에게 물어 주시기 바랍니다."
"담당자라니 누굴 말하는가?"
"재판은 정위가 있사오며, 국고에 대해서는 치속내사가 있사옵니다."
"만사에 담당자가 있다면, 그대는 대체 무엇을 담당하고 있는가?"
"삼가 말씀드리옵니다. 모름지기 재상이라는 자리는 위로는 황제를 보좌하며
아래로는 모든 만물을 잘살게 할 임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바깥으로는 사방의 오랑캐와 제후들을 다스리고, 안으로는 만민을 다스리며
뭇 관리들에게 그 직책을 완수시키는 자리입니다."
문제가 그 말을 듣고는,
"정말 훌륭한 답변이오."
하면서 진평을 칭찬했다. 이에 주발을 더욱 부끄러워졌다. 이윽고 밖으로 나오자
주발이 진평에게 불평을 했다.
그러자 진평이 웃으며 말했다.
"자네는 우승상 자리에 있으면서도 그 직책이 뭔지 몰랐단 말인가. 만일 폐하가
장안의 도난 건수를 물으시면, 그것까지 대답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주발은 자신이 진평을 따르지 못함을 재삼 깨달았다.
그 후 진평은 승상으로 재임용되어 2년을 더 살다가 죽었다.
옥리에게 목숨을 구걸한 장군
진평이 죽은 후 주발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10개월이 채 못 되어
권고 사직을 당했다.
"지금 제후들에게 각자 임명 지역으로 돌아가도록 명령했는데, 잘 지켜지지
않고 있소.
그러니 그대가 먼저 임명 지역으로 돌아가 모범을 보여줄 수 없겠소?"
주발은 할 수 없이 승상직을 사임하고 그의 임명 지역으로 돌아갔다. 그때부터
주발은 극도의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누가 자기를 주살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여 스스로 갑옷과 투구로
무장하였으며, 손님들도 그런 상태로 맞았다.
이런 일이 되풀이되자, 주발은 급기야 반역 혐의로 고발되었다.
그래서 주발은 옥리에게 넘겨져 취조받기 시작했다. 주발은 두려운 나머지
변명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러나 취조가 심해졌을 때 옥리에게 천금의
뇌물을 준 것이 효과를 보았다.
옥리가 조서 뒤에 '공주에게 증언을 시키라'고 써 준 것이다. 공주란 문제의
딸로서 주발의 큰며느리였다. 옥리가 주발에게 그 공주를 증인으로 세우라고 알려
준 것이었다.
마침내 공주가 증인으로 섰고, 그리하여 재판은 단번에 주발에게 유리하게
되었다.
그때는 이미 문제도 주발의 조서를 읽고 무죄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주발을
즉시 풀어 주었다.
감옥에서 나온 주발은 한탄하였다.
"일찍이 백만 대군을 이끌던 나였지만, 옥리 하나가 이렇게 대단할 줄은 미처
몰랐었구나!"
5) 사람의 운명이란 알 수 없는 것이다
두희는 문제의 황후로 조나라의 관진 사람이었다. 그녀는 원래 명문 집안
출신이었으나, 집이 가난하여 일찍부터 궁중에 시녀로 뽑혀 들어가 여후를 섬기고
있었다.
얼마 후 여후는 궁중에 있는 여인들을 제후들에게 후궁으로 보냈는데, 두희도
거기에 포함되었다. 두희는 조나라 출신이기 때문에 조나라로 가고 싶었다. 그래서
담당자에게 간곡하게 부탁했다.
"저를 꼭 조나라에 보내 주시는 거죠?"
담당자는 그렇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 담당자는 막상 그 약속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녀를 대나라로 가는
일행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그 보고서가 그대로 여후에게 승인되었다. 그래서
두희는 할 수 없이 대나라로 가게 되었다.
그녀는 울며 불며 담당자를 원망했지만, 이미 결정된 일이었다. 대나라는 북쪽의
오지로서 흉노와 국경을 맞댄 위험한 곳이기도 했다. 그녀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대나라로 향했다.
대나라로 간 두희는 다행스럽게도 왕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았다.
그런데 대나라 왕에게는 왕비가 있었고 그 사이에 4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왕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왕비가 난 아들들도 이상스럽게 차례로 병이
들어 모두 죽고 말았다.
그 후 여후가 죽고 여씨 일족이 몰락하자, 중신들은 여씨를 싫어해 박희의
아들이었던 대나라 왕을 천자로 모시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대나라
왕이 황제로 즉위하여 몇 달 뒤에 태자를 정하게 되자 아들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두희의 장남(후의 경제)이 태자로 뽑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두희는 황후의 지위에 올랐다. 그렇게도 가기 싫어했던 곳으로 가서,
결국 황후가 된 것이었다.
이산가족 상봉
두희에게는 소군이라는 남동생이 있었다. 그러나 집안이 워낙 가난했었기
때문에 소군은 너댓 살 때 장사꾼에게 팔려 가야 했다. 소군은 그 뒤 10여 차례나
주인이 바뀌면 팔렸다. 그래서 나중에는 의양 땅에서 숯을 구으며 살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해가 져서 어두워지자, 그는 동려 백여 명과 함께 낭떠러지
밑에서 쉬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벼랑이 무너졌다. 그래서 모두 압사당했으나,
오직 소군만이 요행히도 목숨을 건졌다.
소군이 무사히 살아간 뒤, 점을 쳐 보니 며칠 후에 제후가 된다는 점괘를 얻었다.
이에 용기를 얻은 소군은 이튿날 장안으로 무작정 올라갔다. 그곳을 떠돌다
소문을 들으니 이번에 새로 즉위한 왕의 황후가 관진 출신으로 두시라는 것이
아닌가. 그는 혹시 어릴 적 헤어졌던 누나가 아닐까 생각도 해보았다. 그는 어려서
고향을 떠났지만 고향 이름과 자기 성씨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옛날 누나와 뽕잎을 따다가 나무에서 떨어져 생긴 상처도 있었다. 이렇게
생각한 그는 황제에게 상소를 올렸다.
두희로부터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 황제는 곧 소군을 불러 들였다. 여러 가지
확인해 보니 그의 대답은 상소문과 똑같았다.
황제가 물었다.
"혹시 다른 증거는 없는가?"
그러자 소군이 대답했다.
"누나가 나를 두고 장안으로 올라갈 때 주막에서 헤어졌습니다. 그때 누나는 쌀
뜨물을 얻어다 제 머리를 감겨 주고 밥을 얻어 먹여 주었습니다. 그러고나서
누나는 떠나갔습니다."
이 말을 듣자 두희는 자기 동생이 틀림없다는 것을 알고는 바로 뛰어가 동생을
얼싸안고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도 눈물을 흘렸다.
황제는 소군에게 집과 밭을 주고 또 후한 선물을 내려 주었다. 그리고 덕망있는
학자들을 그와 사귀게 하였다. 하지만 소군은 결코 자랑하지도 않고 뽐내는 일
없이 겸손한 자세로 살아갔다. 그 후 소군은 제후로 임명되었다.
또한 두희의 사촌 형제인 두영은 용기있는 사람이었으며, 오초 7국의 난 때
진압에 큰 공을 세워 벼슬을 받고 승상의 자리까지 올라 갔다.
한편 두희는 황제와 노자의 가르침을 좋아했다. 그래서 아들인 경제를 비롯해
궁중의 모든 사람들이 황제나 노자의 글을 즐겨 읽게 되었다.
밀어 주려면 확실하게 밀어 주어라
두희는 두 아들과 한 명의 딸을 두었다. 바로 경제와 양왕, 그리고 큰 딸이라는
의미의 장공주였다.
그런데 장공주는 출가한 후에도 자주 궁궐에 나타나 어머니 두희(두태후)와
함께 힘을 발휘하였다. 이때 경제는 할머니인 박희의 집안에서 박씨 여인을 맞아
황후로 삼고 있었지만, 사이가 좋지 않아 박희가 죽자 바로 폐위시켜 버렸다.
그러므로 황후 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 당시 경제에겐 모두 6명의 여자가 낳은
14명의 아들이 있었다. 나이로 보면 율희가 낳은 유영이 가장 큰 아들이었다.
그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유영은 태자가 되었다.
한편 경제의 누나인 장공주는 자기 딸을 외조카인 태자와 결혼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태자의 어머니인 율희는 시누이인 장공주를 좋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장공주가 경제에게 많은 미녀들을 추천해 붙여 주었고 그 미녀들은 율희와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율희는 장공주의 제의를 한 마디로 거절했다.
그 뒤부터 장공주는 올케인 율희에게 복수할 날만을 기다렸다. 그녀는 경제에게,
"율희는 후궁들을 만날 때마다 내시를 시켜 뒤에서 침을 뱉게 하고 괴상한
주문을 외우는 것 같소."
라고 율희를 비방하는 등 기회만 있으면 율희를 헐뜯었다. 이에 경제도 점점
율희를 멀리 하게 되었다.
언젠가는 경제가 몸이 아파 앞날이 걱정되던 끝에 율희에게 상의했다.
"만약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자식들을 잘 부탁하오."
그러나 율희는 차가운 목소리로,
"다른 여자가 낳은 자식들까지 돌볼 수는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고 경제는 매우 속이 상했다.
이때 장공주는 자기 딸을 왕부인의 외아들(뒤의 한무제)에게 시집보냈으며,
그래서 그녀는 왕부인과 짜고 율희를 어떻게든 쫓아내려 했다.
그 무렵 율희는 자기가 황후가 되는 것이 어떠냐고 경제에게 자주 말해 봤지만,
경제는 계속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왕부인은 공작을 꾸몄다. 즉, 시종관을 시켜 황제에게 율희를
황후로 맞아야 한다고 진언하도록 했던 것이다.
이에 시종관이 경제를 찾아 뵙고 말했다.
"아들이 귀하면 어머니도 귀한 법입니다. 지금 태자의 어머니가 아무런 작위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마땅히 황후로 맞는 것이 옳을 줄 압니다."
이 말을 들은 경제는 완전히 격노했다. 그리고는 바로 시종관을 투옥시키고
처형시켜 버렸다. 또한 태자까지 폐위시켜 버렸다.
이렇게 되자 분을 참지 못한 율희는 마침내 자살해 버렸다.
그 뒤 왕부인이 황후가 되었고, 그 아들 철이 태자에 올랐다. 그리고 태자는
경제의 뒤를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니, 그가 바로 한나라를 전성시대로
이끈 무제였다.
여인의 치마폭에 둘러싸인 황제
한무제는 영걸스러운 황제였지만, 초기에는 주위의 여인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16세에 즉위한 무제에게는 우선 할머니인 두태후가 있었고 어머니 왕태후가
있었으며, 그리고 장모이면서 고모이기도 한 장공주도 있었다. 이들 모두 무제를
황제로 만든 일등 공신들이었다.
두태후는 노자에 심취해 유교를 선호하는 무제와 그를 둘러싼 신흥세력을
결사적으로 견제했다. 또한 두태후의 친족인 두영과 왕태후의 이복동생인 전분은
인척 관계를 이용해 마음대로 권세를 휘둘러 방자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한편 무제의 부인은 진황후였는데 바로 장공주의 딸로서 사촌간이었다. 그런데
진황후는 자기 어머니인 장공주가 무제의 즉위에 결정적인 도움을 줬다는 점을
항상 과시하고 있었다. 더구나 그녀는 아기를 낳지 못하는 이른바 석녀였다.
설상가상으로 무제의 형제는 1남 3녀로 모두 여자 형제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자 무제는 온통 여자들에게만 포위되어 있는 셈이었다. 나이도 어린데.
이러한 무제를 가엾게 여긴 사람이 다름아닌 누나, 평양공주였다. 그녀는
출가했으면서도 무제와 잘 통했고 그래서 무제는 자주 그녀의 집에 놀러갔다.
평양공주도 그러한 무제를 위해 성대한 잔치도 베풀고 미녀들로 하여금 시중까지
들게 하였다.
어느 날 무제가 평양공주의 집에 들러 잔치를 벌였다. 그때도 역시 미녀들이
나왔는데, 무제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윽고 노래를 부르는
기회가 나왔는데, 무제는 첫눈에 그녀에게 반했다.
당시에는 귀인이 용변을 본 후에는 옷을 모두 갈아입어야 했다. 그래서 하인 한
명이 언제나 수행하도록 했다.
그 날 무제가 가희를 마음에 두고 있음을 안 평양공주는 그녀에게 그 시중을
들게 한 것이다. 변소라 하지만 공주의 집인지라 옷 갈아 입는 곳도 매우 넓었다.
어쨌든 그녀는 평양공주의 하녀로 위청의 누나였다.
그 뒤 위자부는 궁중에 들어가 아들을 낳고 드디어 아기를 못 낳는 진황후 대신
황후가 되었다.
진황후는 그 후 미도를 했다는 죄로 유폐되었다. 미도란 나무로 만든 인형을 땅
속에 묻어 특정 인물을 저주하는 것을 말한다.
이 사건은 엄격한 법 적용으로 혹리로서 유명한 장탕이 심리했는데, 무제는
처형하는 대신 그녀를 유폐시켰다.
10. 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 보이는 법이다(숙손통)
호랑이의 입 속에 있을 때는
숙손통은 원래 진나라 2세 황제 때에 학식을 인정받아 등용되었다.
몇 년 뒤 진승이 산동 지방에서 군사를 일으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2세
황제는 즉시 신하들을 불러 모았다.
"지금 초나라 지방에서 진승의 무리가 군사를 일으켜 소란이 일어났다는데,
여러분들은 어떻게 해야 좋다고 생각하는가?"
그러자 30여 명의 신하들이 일제히 말했다.
"신하된 자로써 반역을 하다니, 천부당 만부당한 일입니다. 마음속으로만 그런
생각을 품어도 반역죄인 것입니다.
단호하게 사형에 처해야 합니다. 당장 군대를 파견해 진압하십시오."
2세 황제는 반역이라는 말을 듣자 매우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이때 숙손통이
나서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여러분들의 의견은 잘못입니다. 지금 온 천하가 한 가족이나 다름없습니다.
성벽은 허물어졌고, 무기는 모두 녹였으니 이제 전쟁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자애로우신 황제 폐하의 은총으로 무든 법령이 충실히 지켜지고, 모든
백성들은 각기 맡은 직분에 충실합니다.
이와 같은 태평성대에 어떻게 반역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진승이란 작자는
한낱 도적떼에 지나지 않을 뿐이므로, 폐하께서는 신경쓰실 필요조차 없는
일입니다.
금방 관리들이 모조리 일망타진해 처벌할 것입니다."
그러자 2세 황제는 금새 얼굴이 밝아졌다. 그리고는 신하를 한사람 한사람씩
불러 의견을 물었다. 의견은 반역설과 도적설로 나뉘었다.
다 듣고난 2세 황제는 반역설 이야기한 신하들을 모두 옥리에게 넘겨 취조하게
했다. 반면 도적설을 말한 신하들은 위로했고, 특히 숙손통에게는 비단 20필과
의복을 내림과 아울러 박사로 승진시켰다.
숙손통이 궁궐에서 나오자 동료들이 비꼬았다.
"아니, 어떻게 그 정도로 아부를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자 숙손통은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우리는 지금 호랑이의 입 안에 있지 않소? 내가 그렇게 아부하지
않았다면 우리 모두 무사하기 어려웠을 것이오."
그리고는 바로 고향인 설 땅으로 도망쳤다.
난세에는 용사가 필요하다
숙손통이 설 땅에 가 보니 그곳은 이미 초나라의 지배 아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항우를 모시게 되었다.
그 뒤 유방이 항우의 본거지인 팽성에 들어오자, 숙손통은 유방에게 가담하였다.
숙손통은 원래부터 유학자로서 선비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유방이 선비옷을
싫어하자 곧 그 옷을 벗어 버리고 짧은 옷으로 갈아 입었다. 유방이 그 사실을
알고 기분이 좋아졌다.
또 숙손통이 유방에 가담했을 때 제자 백여 명을 데리고 있었는데, 그들중
누구도 유방에게 천거하지 않았다. 대신 도적질을 했던 자나 건달들만 자꾸
추천했다. 이에 제자들이 불평불만을 터뜨렸다.
"저희는 선생님께 여러 해 가르침을 받아 왔습니다. 당연히 저희들의 앞길을
열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선생님께서는 건달, 깡패만 계속 추천하고 계시니 정말 그 이유룰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숙손통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대답했다.
"지금 대왕께서는 싸움터를 전전하며 화살과 칼을 무릅쓰고 다니신다.
학자들이란 전투엔 별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너희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나는 우선 적의 머리를 베어 올 수 있는 용감무쌍한 자들을 추천하는
것이다.
너희는 좀 기다리도록 해라. 반드시 기회가 올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숙손통은 용사들을 추천한 공로로 벼슬이 더욱 높아졌다.
그러나 수성에는 학자가 중요하다
그 후 드디어 천하 통일 이 이루어졌다.
숙손통은 황제 즉우식의 책임을 맡아 잘 처리했다.
원래 유방은 진나라의 번거로운 의식을 모두 없애 버리고 대폭 간소화했었다.
의식과 규율이 간소화되자 신하들은 제 멋대로 술을 마시고 서로 공적을
다투었으며, 싸움을 벌이고, 심지어 칼을 빼어 들고 궁궐 기둥을 치는 자도
있었다.
사태가 이쯤되자 유방도 걱정하기 시작했다. 이때 숙손통이 유방에게 아뢰었다.
"학자란 건국 사업에는 별 소용이 없지만, 나라를 유지시켜 가는 수성에는 매우
쓸모가 있는 법입니다.
바라옵건대 학식이 높은 노나라 학자들을 초청하여 제 제자들과 함께 조정의
의식을 제정했으면 합니다."
"괜찮은 생각인데, 너무 어려운 일 아니오?"
그러자 숙손통이 말을 이었다.
"의식이란 시대에 따라서, 그리고 풍속에 따라서 간단할 수도 있고 복잡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 은 , 주의 의식은 각각 이전의 의식을 따르면서 취사선택했다.'는 공자의
말씀도 어느 나라에나 똑같은 의식이 없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저는 예로부터 전해온 의식에 진나라의 의식을 가미해 우리 나라의 새로운
의식을 만들 생각입니다."
"좋소, 한번 만들어 보오. 하지만 알기 쉽게 만드시오."
그 뒤 숙손통은 노나라에 가서 30명의 학자를 초청하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거절하면서 이렇게 숙손통을 비난했다.
"당신은 벌써 열 명도 넘는 주군을 섬기면서, 그때마다 면전에서 아부하며
중용되었소.
이제야 비로소 천하가 평정되었지만, 아직 전사자의 장례도 끝나지 않았고
부상자들은 완치되지 못했소.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예악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이오?
본래 예악이라는 것은 황제가 백 년 이상 덕을 쌓아야 비로소 일어나는 법이오.
그러니 당신이 하는 일에 찬성할 수 없소. 당신이 하고자 하는 일은 옛날의
법에 맞지 않는 일이오.
그냥 돌아가시오. 더이상 우리를 욕되게 하지 마시오."
그러자 숙손통은 웃으며 말했다.
"당신들은 정말 세상물정 모르는 고루한 선비들이오. 시대가 얼마나 변했는데."
황제의 자리가 이렇게 귀할 줄이야
숙손통은 노나라 학자 30여 명을 대동하고 궁궐로 돌아왔다. 그래서 궁주의
학자들과 제자 백여 명과 함께 야외에서 한 달에 걸쳐 의식을 만들고 실제 모의
훈련도 했다.
그런 뒤 숙손통은 황제에게,
"폐하, 한번 구경하십시오."
라고 청했다.
유방이 실제로 그 의식 절차를 보더니,
"잘 만들었소. 그 정도면 나도 황제 노릇 잘할 수 있겠소."
하는 것이었다.
그 뒤 장락궁이 준공되자, 만조 백관들이 그 의식에 따라 입조했다.
뜰 가운데에는 경비병들이 무기를 갖추고 줄을 지어 서 있고, 궁전 밑에는
계단마다 수백 명의 호의 군사가 늘어서 있었다. 공신, 제후, 장군 들이 서열에
따라 서쪽에 줄을 지었으며, 문관은 승상 이하 서열대로 동쪽에 줄을 지어 섰다.
이때 드디어 황제가 탄 수레가 나오자, 백관들이 깃발을 흔들어 환영했다.
황제가 자리에 앉자 6백 명 이상되는 고관들이 차례로 어전에 나가 축하했는데
모두 엄숙한 표정이었다.
하례가 끝나자 모든 사람들이 다시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고, 서열에 따라
일어나며 축배의 술잔을 올렸다.
의식이 끝나고 다시 주연이 베풀어졌으나 시끄럽게 하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
그러자 유방은,
"오늘에야 비로소 황제의 자리가 고귀함을 알았노라."
하며 숙손통을 의전 장관으로 임명하고 황금 5백 근을 하사하였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숙손통이 말했다.
"저의 제자들은 오랫동안 저를 따르며 함께 의식을 만들었습니다. 바라옵건대
그들에게도 관직을 내려 주십시오."
유방은 즉시 그들을 모두 시종에 임명했다. 숙손통은 궁궐에서 나오자 하사받은
황금 5백 근을 모두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자 제자들은 모두 감동하며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은 참으로 성인이시다. 세상사를 한눈에 꿰뚫어보신다."
그 후 숙손통은 태자의 교육담당으로 옮겨졌다. 그런데 유방은 그때 사랑하는
척희의 아들인 여의를 태자로 다시 세우려 하였다.
그러자 숙손통이 유방을 찾아가 비판하였다.
"옛날 진시황은 큰아들 부소를 태자로 세우지 않아 결국 조고 등이 호해를
내세워 음모를 꾸몄고, 그 때문에 나라까지 망했습니다.
지금 태자의 인덕은 모두가 칭송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황후께서는 페하와 온갖
고난을 함께 겪어 온 조강지처이옵니다. 이것을 절대 배신할 수 없습니다.
폐하께서 그래도 태자를 바꾸셔야 한다고 생각하시면 저를 죽이시고 그 피로
궁전의 땅을 더럽힌 후에 하십시오."
그러자 유방이 적당히 무마하려고 했다.
"알았소. 그만 두시오. 내가 농담으로 그래 본 것인데...."
그러자 숙손통은 더욱 정색을 하며 말했다.
"태자를 세우는 문제는 천하의 근본인데 어찌 천하 대사를 농담으로 하실 수
있습니까?
근본이 흔들이면 모든 것이 흔들이는 법입니다."
"이제 됐소. 그대의 말이 맞소."
그 후 궁중의 주연이 열렸을 때 장량이 초대한 도사 네 명이 태자와 함께
나타나자, 유방이 태자를 바꾸겠다는 생각을 깨끗이 단념하게 되었다.
실로 숙손통은 항상 아첨만 한 것이 아니었다. 이 일처럼 목숨을 걸고 비판할
때도 있었던 것이다. 그는 나갈 때와 들어올 때를 잘 알았으며, 시대의 흐름을 잘
파악해 적응을 나갔던 것이다.
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그 후 유방이 죽자, 태자가 즉위하니 혜제의 시대가 되었다.
어느 날 혜제가 숙손통을 불렀다.
"이 나라에 의식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구료. 아무래도 선생께서 다시 의전
장관을 맡으셔야 하겠소."
그리하여 숙손통은 의전 장관으로 복귀했다. 결국 그에 의해 종묘 사직의
의식들이 모두 완성되었으며, 한나라의 모든 예법이 이때 정해졌다.
그런데 혜제는 장락궁에 있던 어머니 여후에게 아침마다 문안드리고 있었다.
그때마다 교통이 통제되어 백성들의 피해도 컸다. 그래서 생각 끝에 이층으로
길을 내어 궁궐 담 위로 쉽게 다닐 수 있도록 했다.
하루는 숙손통이 혜제에게 말했다.
"폐하, 무슨 연유로 이층 길을 내셨습니까?
그리하여 선제의 묘 위로 지나다니도록 되었지 않습니까? 나라의 시조를 모시는
종묘를 그렇게 대접해서는 안됩니다."
그러자 혜제는 크게 두려워해,
"그럼 빨리 허물어 버리도록 하시오."
라고 말했다.
그러나 숙손통은 또다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안됩니다. 황제께서는 잘못이 없는 법입니다. 이제 와서 허물어 버리면
폐하께서 잘못이 있다는 것을 천하에 알리는 결과가 됩니다.
이번 기회에 종묘를 위수 북쪽에 새로 모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종묘를
넓히고 많이 짓는 일은 큰 효도라 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혜제는 숙손통의 지혜에 감탄하며 즉시 새 종묘를 만들도록 했다.
결과적으로 이층 길은 새 종묘를 짓기 위한 꼬투리가 되었던 것이다.
사마천은 이렇게 말한다.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천금의 값이 나가는 가죽 옷은 여우 한 마리의 털로 만들 수 없고, 높은 누대의
서까래는 나무 한 그루로 만들 수 없다.'
하, 은 , 주의 성대함도 한두 사람의 지혜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유방이 미천한 신분으로 몸을 일으켜 천하를 평정했는데, 그것은 여러 사람의
지혜가 합해진 결과이다.
숙손통은 세상에서 보기 드문 사람으로서 사물을 잘 판단하였다.
그는 학문을 연구하고 의식을 제정하여 한나라 유학의 거장이 되었다. 그의
처세 또한 진퇴의 절도를 잘 지켰으며, 시대의 흐름에 적절해 대처하였다.
'참으로 돋은 길은 굽어보이며, 길은 원래 꾸불꾸불한 것이다'라는 말은 바로
숙손통의 경우를 가리킨다고 하겠다"
11. 돌아오지 않은 장군(경포, 팽월, 난포)
1) 고독한 올빼미(경포)
형벌을 받고 왕이 될 관상
경포의 원래 성은 영씨였다.
젊을 때 어떤 사람이 그를 보더니,
"당신은 형벌을 받고 나서 왕이 될 관상이오."
라고 말했다.
그 뒤 그가 남의 죄에 연루되어 얼굴에 문신형(경형:경포라는 이름도 경형을
받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을 받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껄껄 웃으며,
"전에 어떤 사람이 내 관상을 보고 형벌을 받은 다음에 왕이 된다고 하더니
정말인가 보구나."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주위 사람들은 어이가 없어 웃을
뿐이었다.
경포는 판결을 받은 다음 다른 죄수들과 함께 여산으로 보내졌다. 그곳에는
수십만 명의 죄수가 와 있었는데, 경포는 그 중 쓸 만한 사람들과 사귀었다. 얼마
뒤 경포는 친한 사람들을 이끌고 도망쳐 양자강 유역에서 도적이 되었으며, 물론
경포는 그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 후 진승이 반란을 일으키자, 경포도 군대를 일으켜 수천 명을 모았다. 그래서
진승이 패한 후에도, 경포는 진나라 군대를 계속 격파하였다. 경포는 때마침
항량이 군사룰 일으켜 양자강을 건너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항량의 군대에
가담했다. 항량의 군대는 계속 북상하여 진나라를 쳤는데, 경포의 공적이 항상
으뜸이었다.
그 뒤 항량이 죽자 항우의 지휘 아래에 들어간 경포는 선봉장 역할을 하면서
뛰어난 공을 세웠다. 특히 경포의 군대는 용맹스러워 적은 수로 많은 병력을
깨뜨렸기 때문에 항우의 큰 신임을 받았다. 경포는 진나라 주력 부대였던 장한의
군대까지 격파했으며, 항우가 천하를 호령하는 대장군이 되자, 경포는 구강
자방의 제후로 임명되었다.
경포를 얻어야 천하를 얻는다
그 뒤 제나라 왕 전영이 항우를 배반한 사건이 일어났다. 항우는 가장 신임하는
경포에게 출동 명령을 내렸으나, 경포는 부하에게 적은 수의 군사만 주어 보냈을
뿐이었다. 또 유방이 초나라의 팽성을 공격했을 때도 경포는 병을 핑계삼아
출동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항우는 경포를 몹시 원망하면서 서울로 자주
올라오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경포는 점점 두려워져 가지 않았다. 항우는 마음
같아서는 경포를 토벌해 혼내고 싶었으나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있었고, 또
경포의 재주를 아껴 참고 있었다.
그러나 2년 후 계속 수세에 몰린 유방은 경포를 어떻게든 끌어들이기로 하고
수하를 보내 경포를 설득하기로 했다. 수하의 능란한 설득과 공작에 넘어간
경포는 드디어 항우를 배반하고 유방 편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그 뒤 경포는 항우의 오른팔 격인 주은을 설득해 항우를 배반하게 했으며,
전쟁에 나가 자주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하여 천하 통일이 된 후 경포는 회남왕에 임명되었다. 어느 날 잔치가
벌어졌는데, 유방이 수하를 가리키면서,
"수하는 쓸모없는 선비에 불과하지, 저런 친구를 어떻게 써먹을 수 있는가!"
라고 말했다.
그러자 수하가 말했다.
"그렇다면 폐하께서는 아직 경포 장군이 초나라에 있을 때, 그를 보병 5만, 기병
5천으로 공격할 수 있으셨겠습니까?"
"그 정도면 할 수 있었겠지."
"폐하께서는 그 때 저를 보내셔서 전쟁을 안하고도 경포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보병 5만, 기병 5천의 일을 해낸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찌
폐하께서는 신을 쓸모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이에 유방은 할 말이 없었다.
"좋소, 그대의 말이 맞소."
그러면서 수하에게 벼슬을 주었다.
여자와 질투
한 고조 11년에 한신이 처형되자 경포는 불안해졌다. 또 그해 여름에는 팽월이
처형되어 그 시체가 소금에 절여져 그릇에 담긴 채 모든 제후들에게 보내졌다. 그
인육자반을 본 경포는 두려움에 몸을 떨고는 차라리 반란을 일으킬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당시 경포에게는 아끼는 미희가 하나 있었다. 그런데 미희가 몸이 아파
의원에게 치료를 받게 되었다. 한편 비혁이라는 관리도 그 의원의 맞은편 집에
살고 있었는데 예전에 경포의 부하였던 관계로 미희와도 안면이 있었다. 하루는
비혁이 의원 집에 놀러가서 미희에게 선물도 바치고 술도 마시게 되었다.
그 뒤 미희가 경포와 이야기 하던 중에 비혁이 괜찮은 사람이더라고 칭찬했다.
그러자 경포가 놀라면서 물었다.
"아니, 언제 그 자를 만난 적이 있었는가?"
미희는 아무 생각없이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경포는 두 사람이 수상한 관계가 아닌가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 사실을 눈치챈 비혁이 두려워해 몸이 아프다며 바깥 출입을 삼가자 경포는
더욱 그를 의심하게 되었다. 그래서 드디어 비혁을 잡아 죽이려고 하니 비혁은
도망쳤다.
도망친 비혁은 자기가 살기 위해서는 경포를 반역죄로 죽게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말을 달려 장안에 들어가 유방에게 투서했다.
"경포가 반란을 일으키려고 합니다. 빨리 그를 잡아들이십시오."
유방이 이 글을 읽고 소하에게 의견을 물었다.
이에 소하는 놀라는 표정으로 말을 하였다.
"경포가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아마 무슨 원한 때문에 무고했을 게 틀림없으니,
우선 비혁을 잡아들여 조사하고 은밀히 사람을 경포에게 보내 살펴보도록
하시지요."
한편 경포는 비혁이 투서한 사실을 알고 불안해하고 있는데, 또 사람이 은밀히
내려와 조사하는 것을 알고는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유방이 신하들을 모아 놓고 물었다.
"경포가 반란을 일으켰으니 어떻게 해야 하겠소?"
그러자 등공이 대답하였다.
"저의 식객들 중에 설공이라는 자가 있는데, 매우 지혜있는 사람입니다. 한번
만나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유방이 설공을 불러 물었다.
그러자 설공이 한참 생각에 잠겼다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경포는 한신, 팽월과 함께 용맹스런 장군이었습니다. 이제 한신과 팽월이
처형되자 자기도 머지 않아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런데 경포가 상책을 들고 나오면 회남 땅은 한나라 땅으로 돌아올 수
없습니다. 중책으로 나오면 승패는 알 수 없으며, 다만 하책을 들고 나오면
폐하께서는 베개를 높이 베고 주무실 수 있습니다."
"그럼 경포가 어떤 계책을 쓸 것 같소?"
"그는 하책을 쓸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오?"
그러자 설공이 대답했다.
"경포는 원래 여산의 도적떼였습니다. 지금 그는 왕이 되었지만, 모든 일이 자기
일신을 위함이었지 후세의 백성 만대를 위해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까닭에 이번에도 하책을 쓸 것입니다."
한편 경포는 반란을 일으키며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지금 유방은 나이가 많아 싸움을 싫어하기 때문에 반드시 친정하지 않고
부하들을 내보낼 것이다.
나는 이제껏 한신과 팽월만을 두려워했는데, 그 두 사람 모두 죽었으니 두려울
게 없다."
그 당시 유방은 건강이 안 좋은 상태였다. 그래서 자기는 경포의 토벌에 나서고
싶지 않았다. 그 대신 태자를 내보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태자를 염려한
여후는 눈물을 흘리며 호소했다.
"경포는 천하의 맹장입니다. 그 자를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폐하밖에
없습니다.
비록 몸이 불편하시더라도 나라의 운명을 건 이 싸움에 친히 출정하시옵소서."
이에 유방은 하는 수 없이 출정에 나섰다.
경포는 과연 설공의 예측대로 하책을 썼다. 즉 크게 제나라, 한나라, 연나라까지
생각을 못하고 겨우 자기의 땅만 지키려 했던 것이다.
유방이 가서 경포의 군대를 보니, 그 배치가 항우의 전법과 똑같았다.
유방이 경포에게,
"왜 반란을 일으켰는가?"
하고 물으니 경포는,
"황제가 되고 싶소."
하고 대답했다.
그때까지도 경포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던 유방이었지만 그 말에는 크게 노하여
공격에 나섰고 격전이 벌어졌다. 이 싸움에서 경포는 크게 패해 겨우 백여 명의
부하만을 이끌고 강남으로 달아났다. 유방도 누가 쏘았는지 모르는 유시를 맞아
부상을 당했다.
경포는 그 후 번양 지방으로 달아났으나, 한 농가에서 농민에게 붙잡혀 죽고
말았다.
2) 황야의 이리(팽월)
약속을 지키지 않는 자와는 함께 일을 도모할 수 없다
팽월은 호숫가에서 고기잡이를 하는 사람이었으나, 실제로는 청년들을 작당해
도적질을 일삼고 있었다.
진승과 항량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 소식을 들은 젊은이들이 팽월을
찾아왔다.
"지금 천하의 호걸들이 모두 일어서고 있소. 우리도 이 기회에 일을 벌입시다."
그러나 팽월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은 두 마리 용이 싸우는 셈이네. 좀더 두고 봐야지. 아직은 때가 안됐어."
1년쯤 지나자 이번에는 백여 명이 찾아와서,
"제발 두목이 되어 주십시오."
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팽월은,
"안돼, 자네들과는 일할 수 없네."
라며 거절했다. 그렇지만 청년들이 한사코 권유하자, 팽월은 마지 못해 승낙했다.
그래서 다음날 해뜨는 시간에 모여 거사하기로 하고 늦는 자는 목을 베기로
약속했다.
다음날 막상 모여 보니 지각하는 자가 10여 명도 넘고, 심지어 어떤 자는 점심
때가 되어서야 나타나는 것이었다.
팽월이 호통을 쳤다.
"나는 나이가 많아 거절했는데, 너희들이 하도 권하는 바람에 두목이 되었다.
그런데 지금 약속을 하고도 어기는 자가 이렇게 많으니 무얼 한단 말인가!
할 수 없다. 제일 마지막에 온 자만 처형시키겠다."
팽월은 맨 나중에 온 자를 목 베라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모두들 피식피식
웃으며,
"아니, 그렇게까지 안하셔도 되는데.... 다음부터는 절대 안 그럴께요."
라며 슬슬 피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팽월은 자기가 나서서 맨 나중에 온 자를 끌어내고는 단칼에 목을 베어
버렸다. 그리고 나서 제단을 쌓고 제사를 지냈다.
그 후 모두 간담이 서늘해져 팽월을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 뒤 팽월은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면서 천여 명의 병력을 이끌게 되었다.
유격전의 명수
유방이 북상하여 창읍을 공격할 때, 팽월도 유방을 도왔다. 그러나 유방이
공격에 실패하고 서쪽으로 군사를 돌리자, 팽월도 고향으로 돌아가 세력을 키웠다.
그 뒤 유방은 팽월에게 장군의 벼슬을 내리고 초나라를 공격하도록 요청했다.
그래서 팽월은 초나라의 소공각이 이끄는 토벌 군대와 마주쳐 크게 이겼다. 이듬
해에 팽월은 3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유방 밑으로 들어갔으며, 유방은 그를
위나라 재상으로 임명하였다.
그때부터 팽월은 각지에 신출귀몰하게 출몰하면서 유격전을 벌여 항우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유방이 형양에서 항우와 싸울 때도 팽월은 항우의 배후에서
유격전을 펼쳐 위기에 몰렸던 유방이 간신히 탈출할 수 있도록 했다. 화가 난
항우가 팽월을 대대적으로 추격해 팽월의 부대를 크게 격파했지만, 팽월은 재빨리
후퇴해 버렸고 또다시 인근의 20개 성을 빼앗고 곡물 10여만 섬을 노획해 유방
군대의 군량미로 쓰게 했다.
여후의 꾀
천하 통일 후 팽월은 공로를 인정받아 양나라 왕으로 임명되었다.
그 뒤 10년이 지나 진희가 반란을 일으키자 유방은 팽월에게 출동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팽월은 아프다는 핑계를 대며 부하 장군에게 군사를 내 주어
나서도록 했다. 이에 유방이 노해서 사자를 파견해 팽월을 문책하자 팽월은 몸소
사과하러 낙양으로 가려 했다.
이때 장군 호첩이 말했다.
"대왕께서 처음부터 가시지 않고 문책을 받고서야 가시면 포로가 될 뿐입니다.
이렇게 된 마당에 반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팽월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여전히 칭병하며 누워 있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팽월이 한 부하를 크게 꾸짖고 처형하려 하자, 그는 도망쳐
장안으로 갔다. 그리고 팽월이 반란을 꾸미고 있다고 고발했다.
유방은 몰래 군사들을 보내 팽월을 체포했다. 팽월은 장안에 끌려와 취조를
받았는데, 취조관은 이렇게 보고했다.
"반란 혐의가 분명합니다."
하지만 팽월의 과거 공적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유방은 그의 목숨만은 살려주고
서민으로 격하시켜 유배보내도록 했다. 팽월이 유배지로 가던 도중 마침 장안에서
낙양으로 행차하던 여후 일행을 만나게 되었다.
팽월은 여후 앞에 끓어 엎드려 눈물로 호소하면서 자기 고향에서 살게 해
달라고 탄원했다.
여후는 그의 호소를 받아들여 그를 데리고 낙양으로 가더니 유방에게 말했다.
"팽월은 명장인데 지금 귀양 보내 살려 주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입니다.
차라리 죽이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래서 팽월을 데리고 온 것입니다."
한편 여후는 또 다른 사람을 시켜 팽월이 아직도 반란을 꾸미고 있다고
상소하도록 했다.
드디어 유방도 죽이기로 결심했다.
결국 팽월은 그렇게 죽었다.
3) 마치 집에 가듯 죽음을 맞는다(난포)
난포는 팽월과 어릴 적부터 친구였다. 두 사람 모두 가난해 술집 심부름꾼 일을
하다가, 팽월은 도둑이 되었고 난포는 노예로 연나라에 팔려갔다. 그런데 거기서
능력을 인정받아 벼슬을 얻게 되었고 마침내 장군까지 되었다.
그 후 난포는 유방에게 포로가 되었는데, 팽월이 이 소식을 듣고 유방에게
부탁해 그를 풀려나게 한 후 자기 나라 대부로 삼았다.
난포가 사신으로 다른 지방에 나가 있을 때 팽월이 반란 혐의로 붙잡혀 죽었다.
그리고 팽월의 목을 낙양 성문에 걸고,
"이 목을 건드리는 자는 처벌한다."
고 포고했다.
그러나 난포는 낙양으로 가서 팽월의 목 앞에서 사신으로서의 보고를 마친 뒤
그 자리에서 제사를 지내고 곡을 했다. 이에 관리가 그를 체포해 유방에게 끌고
갔다.
유방이 꾸짖었다.
"너도 팽월과 함께 반란을 모의했는가? 내가 팽월의 목을 거두지 못하도록
명령했는데, 네 놈이 와서 제사를 지내고 울었다니 함께 모의한 것이 분명하다.
여봐라. 저 놈을 당장 삶아 죽여라!"
관리가 난포를 끌고 끓는 가마솥으로 갔다. 한동안 태연히 걷던 난포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죽기 전에 한 말씀 올리고 싶습니다."
"무슨 말인가?"
"전에 폐하께서는 항우와 싸워 형양에서 패하였을 때, 항우의 추격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무슨 이유였습니까? 바로 팽왕(팽월)이 항우의 뒤에서 끊임없이
괴롭혔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해하의 싸움에서도 만일 팽왕이 합류하지 않았다면 쉽게 이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아무 증거도 없이 반란 혐의를 씌워 팽왕을 죽이셨습니다.
이래서는 모든 공신들이 불안에 떨 수밖에 없음을 걱정합니다.
저는 팽왕이 이미 죽고 없는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습니다.
삶아 죽이십시오."
이 말을 들은 유방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난포를 풀어 주도록 했다. 그리고
도위라는 벼슬도 내렸다.
그 뒤 문제 때에 난포는 장군의 자리까지 올랐다.
난포는 이렇게 말했다.
"곤궁해졌을 때 몸을 낮추고 뜻도 낮추지 못하면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부귀할
때 뜻을 펴지 못하면 현명하지 못하다."
그러면서 자기에게 은혜를 베풀었던 사람에게 후하게 보답했고, 원한이 있던
사람은 법에 따라 엄하게 처벌했다.
후세 사람들은 그를 위해 '난포사'라는 사당을 지어 그를 기렸다.
사마천은 이렇게 말했다.
"난포가 팽월에게 곡을 하고 죽으러 갈 때 마치 자기 집으로 가는 듯했다. 그는
진실로 자기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알고 있었으므로 죽음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 어떤 열사가 그를 능가하겠는가!"
12. 북방의 정복자(흉노전)
흉노의 영걸
흉노는 북방의 이민족이다.(흉노족은 오늘날 핀란드와 헝가리 민족의 선조로서
원래 유럽인종에 가까운 편이었다--역자 주) 목축과 수렵을 생업으로 삼으며,
가축을 따라 물과 풀이 있는 곳을 찾아 이동하며 살고 있었다. 흉노의 사나이는
모두 활을 잘 쏘고, 전시에는 모두 갑옷과 투구를 걸치고 싸움터로 나갔다.
두만선우(선우는 흉노의 군주 칭호)에게는 묵특이라는 태자가 있었다.
그러나 선우는 그 후 애첩이 낳은 아들을 귀여워 해 묵특 대신 애첩의 아들을
태자로 세우려고 생각했다.
한편, 그 당시 이웃의 월지족은 매우 강성하여 흉노에게 인질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래서 선우는 우선 묵특을 인질로 삼아서 월지로 보냈다. 그리고 그가 갇힌
몸이 되었음을 확인하자 갑자기 월지로 토벌군을 보냈다. 누가 보아도 이는
묵특을 죽이려는 음모였다.
흉노의 침입을 받은 월지는 예상대로 인질인 묵특을 살해하려 하였다. 그러나
묵특은 뛰어난 말 한 마리를 훔쳐서 본국으로 도망쳐 왔다.
두만선우는 자기의 의도는 실패했으나, 아들 묵특의 용기를 높이 평가하게 되어
제거하려던 계획을 철회하고 오히려 1만 기를 주어 장군에 임명했다.
그런데 장군이 된 묵특은 소리나는 화살을 만들게 하는 한편 부하에게는 말을
타고 달리며 활을 쏘는 훈련을 매우 강하게 시켰다.
그런던 어느 날,
"모두 듣거라. 내가 소리나는 화살을 쏘거든 너희들은 계속 내가 쏜 표적에
활을 쏘아라. 따르지 않는 자는 베겠다."
이렇게 명령하고는 전군을 이끌고 사냥을 나갔다. 묵특은 소리나는 화살로 새나
짐승을 쏘아 맞히고는 자기의 명에 따르지 않는 자는 그 자리에서 목을 베었다.
그러더니 묵특은 이번에는 자기의 애마를 향해 화살을 날렸다. 그러자 부하
가운데는 멈칫 하면서 화살을 날리기를 망설이는 자가 있었다. 그때도 묵특은
즉석에서 그들을 베어 버렸다.
그리고 어느 날은 훈련 끝에 자기의 애첩을 쏘았다. 이때도 부하 가운데는
당황하면서 활을 쏘지 못하는 자가 있었다. 묵특은 역시 사정없이 그들을 베었다.
이렇게 엄격한 훈련을 치른 후 묵특은 또 다시 사냥을 나갔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버지 두만의 애마를 쏘았다.
그러자 이제 부하들은 하나도 빠지지 않고 그를 따랐다. 묵특은 이로써 부하
전원이 자신의 명령대로 움직인다는 확신을 얻었다.
얼마 후 그는 아버지 두만을 따라 사냥을 나가게 되었다. 사냥이 한참
진행중이었는데 갑자기 그가 아버지 두만을 향해 소리나는 화살을 날리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그의 곁에 머무르고 있던 그의 부하들도 묵특의 화살 소리를 따라
일제히 화살을 날려 보냈다. 두만은 이렇게 하여 훌륭한 아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묵특은 이어서 계모와 이복 형제 및 복종하지 않는 중신들을 모조리 죽였다.
이렇게 하여 묵특은 스스로 선우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적을 방심케 하라
묵특이 선우 자리에 올랐을 당시, 동방에서는 동호족이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묵특이 아버지 두만을 죽이고 선우 자리를 빼앗았다는 소식은 바로 동호왕의
귀에 들어 갔다. 그러자 동호왕은 사자를 보내어 죽은 두만이 애지중지하던
천리마(하루에 천 리를 뛴다는 명마)를 양도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묵특은 측근과 의논했다. 그러자 그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천리마는 우리 흉노의 보배이오니 거절해야 합니다."
그러나 묵특은,
"한 마리 말을 아끼기 위해 이웃 나라와의 우의를 저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하며 신하들의 의견을 누르고 동호의 요구에 응했다.
묵특이 자기네를 두려워한다고 판단한 동호는 얼마 후 다시 사자를 보내 왔다.
이번에는 미녀를 달라는 요구였다. 묵특이 측근에게 의논하자 이번에도 그들은
모두 성을 냈다.
"미녀를 요구하다니 이런 무례한 짓이 어디 있겠습니까? 동호의 무도함에는
이제 참을 수가 없습니다. 부디 공격 명령을 내려 주소서."
그러자 그때도 묵특은,
"계집 하나를 아낌으로 해서 이웃과의 두터운 우의를 저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하며 격분하는 신하들을 누르고 사랑하는 애첩 한 명을 동호에게 보냈다.
그러자 동호는 더욱 더 교만해지더니, 이윽고 흉노의 국경을 마구 침범하기
시작했다.
당시에 흉노와 동호의 중간에는 천여 리에 걸쳐 삶이 사는 집 하나 없는 불모의
황무지가 펼쳐져 있었다.
동호는 이 황무지에 눈독을 잔뜩 들이고 묵특에게 다음과 같이 통고해 왔다.
"귀국과 우리 나라의 경계가 되어 있는 황무지는 귀국에 있어서는
무용지물이다. 따라서 이 황무지는 우리가 소유하기로 한다."
이에 묵특은 또다시 측근들과 의논했다. 그러자 몇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땅입니다. 주어 버려도 지장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을 듣자 예전과는 달리 묵특이 격노했다.
"땅이란 나라의 근본이다. 한 줌의 흙도 동호에게 줄 수는 없다."
그리고는 주어도 좋다고 말한 자들을 모조리 베어 버렸다. 그러더니 당장 말에
오르면서,
"지금부터 동호를 토벌하기 위해 출진한다. 늦게 오는 자는 베어 버리겠다."
하며 즉각 동쪽으로 군대를 진격시켜 동호를 습격했다.
그런데 동호는 이전의 예로 보아서 완전히 묵특을 업신여기고 있었으므로,
방비를 소홀히 하고 있었다.
철저하게 무장하고 피나는 훈련으로 준비한 묵특의 군대는 순식간에 동호를
격파하고 왕을 죽여 없앴다.
묵특은 동호를 격파하자 곧바로 서쪽으로 진격하여 월지를 패주시켰다. 또한
남쪽으로 오르도스의 누번왕, 백양왕의 영지를 병합하고, 일찍이 진나라 장군
몽염에게 빼앗겼던 영토까지 모두 수복했다.
백등산에서 유방을 크게 혼내다
묵특은 그 후 북방의 여러 나라들을 차례로 정복했다. 이 시기에 이르러 흉노의
백성들은 모두가 묵특에 감복하여 그를 현군으로 우러러 보게 되었다.
유방이 중국 천하를 평정하여 천하 통일을 이룩한 것이 그 무렵의 일이었다.
유방은 천하를 평정하자 한왕 신(유명한 한신 장군과는 동명이인이다)을
흉노와의 경계 지방으로 파견하여 마읍에 도읍을 정하게 했다.
그러나 한왕 신은 얼마 후 흉노의 맹공격을 받고 수도인 마읍을 포위당하자
여러 차례 흉노에 사자를 보내 협상하려고 했다. 이때 유방은 구원병을
파견했으나 한왕 신이 자주 흉노에게 사자를 왕래시켰다는 사실을 알고 혹시
모반하지 않을까 의심하였다. 그래서 사신을 보내 엄중히 문책하였다.
이에 대해 한왕 신은 아무리 변명해도 들어주지 않자 처형될 것이 두려워졌다.
그래서 흉노에 항복하고는 오히려 한나라를 공격하였다. 이에 한나라는 반격에
나서 한왕 신의 군대를 격파하니 그는 그대로 흉노로 도망쳤다.
그 후 한왕 신을 제 편으로 만든 흉노는 그의 휘하 부대를 포함하여 정예
부대를 투입, 맹렬한 기세로 남하하여 진양성까지 육박하여 왔다.
드디어 한나라와 흉노의 격돌이 시작되었다.
유방은 먼저 사람을 보내 정탐하도록 했다. 그러나 묵특은 이미 한 나라의
정탐꾼이 올 줄 알고 군대와 살찐 말들은 모두 숨겨 놓고 노약자와 빼빼 마른
말만을 보이게 하였다. 이에 정탐꾼이 돌아가 유방에게,
"묵특을 치는 게 좋겠습니다."
라고 보고했다.
유방은 한번 더 확인하기 위해 유경을 보내 살피도록 했다. 그러자 유경이
돌아와서 이렇게 보고하는 것이었다.
"무릇 전쟁을 하는 두 나라는 서로 자기들의 강한 점을 자랑하는 것이
상례입니다. 그런데도 노약자와 초라한 말들만 보이는 것은 필시 무슨 음모가
있는 듯합니다.
공격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보고를 받은 유방은 크게 화를 냈다.
"저 놈이 망령된 말을 해 병사들의 사기를 꺾으려 드는구나."
그러면서 당장 유경을 크게 화를 냈다.
유방은 곧바로 흉노 토벌군을 편성해서 스스로 전선으로 향했다.
때는 바야흐로 겨울, 전장에는 혹한이 내습하고 눈이 내렸다. 한나라 군대는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병사들은 잇달아 동상에 걸려 10명 중 2, 3명은 손가락을
잃었다.
묵특은 이를 틈타 패주를 가장하여 한군을 북방으로 유인하는 작전으로 나왔다.
과연 한군은 영문을 모르는 채 추격해 왔다. 이에 묵특은 정예군을 뒤에 감추고
약병을 방패로 세웠다.
완전히 흉노를 얕보게 된 한나라는 전군을 동원하고, 또 유방은 전군의 선두에
서서 평성 지방까지 들어갔다. 그러나 추격을 너무 서둘렀기 때문에 대열이 길게
늘어져 후속 보병 부대는 아득한 후방에 처져 있었다.
묵특은 그 기회를 이용해서 정예 40만 기를 내보내 유방이 이끄는 선두 부대를
백등산 위에서 완전히 포위했다.
한군은 7일 동안 분단된 채 속수무책으로 포위되었다. 하지만 후속 부대는 구출
작전에 나서지도 못하였고, 설상가상으로 군량조차 보급되지 않았다.
이때 흉노의 기마대는 서쪽은 모두 백마요, 동쪽은 모두 청방마(흰바탕에 푸른
색이 섞인 말), 북쪽은 모두 흑마, 남쪽은 모두 성마(적황색 말)로 위용을 자랑하면서
물샐 틈없이 포위하고 있었다.
정상적인 작전으로는 탈출할 수 없는 위기일발의 상황이었다. 이때 항우와의
전쟁 때부터 기발한 꾀로 번번이 유방을 살려낸 바 있던 예의 모사꾼 진평이
또다시 꾀를 냈다.
진평은 묵특의 부인에게 밀사를 통해서 정중히 선물을 보내며, 한편으로는 곧
빼어난 미녀들을 선우에게 바칠 계획이라고 전했다.
효과는 즉각 나타났다.
그녀는 혹시 한나라의 뛰어난 미녀들에게 사랑을 빼앗길까봐 불안해 묵특에게
이렇게 호소한 것이다.
"이웃한 나라의 군주와는 서로 고난을 주고 받지 마십시오. 설혹 이 싸움에
이겨서 한나라 영토를 모두 얻는다 하더라도 당신이 계실 곳이 못 됩니다.
게다가 유방에게는 하늘의 가호가 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부디 깊이
생각하시어 결정하십시오."
때마침 묵특은 자기와 합류하기로 되어 있던 한왕 신의 장군들이 약속 날짜가
되어도 나타나지 않자, 그들이 유방과 짜고 있는지 의심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결국 부인의 호소를 받아들여 포위망의 일부를 풀었다.
유방은 그것을 보고 전군에게,
"활에 화살을 재어 힘껏 당겨라."
하고 명령하며 화살 끝을 흉노에게 향하면서 포위가 풀린 곳으로 단숨에 달려나가
간신히 후방의 대부대와 합류할 수 있었다.
그러자 묵특은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철수하였으며, 유방도 지친 몸을 이끌고
본국으로 철수하였다.
유방은 돌아오자 마자 묵특의 음모를 경고했던 유경을 석방하면서,
"그대 말을 듣지 않아 백등산에서 큰 곤욕을 치뤘소.
그때 거짓을 아뢴 자는 엄벌하겠소."
하면서 맨 먼저 정탐했던 부하를 처형시켰으며, 한편 유경의 벼슬을 올려 주었다.
이때 유경이 유방에게 아뢰었다.
"지금 무력으로는 도저히 흉노를 제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황공스러운 말씀입니다만, 큰 공주님을 선우에게 시집보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렇게 되면 저들도 공주님을 정실 부인으로 맞을 것이며, 그래서
아들을 낳게 되면 분명히 태자로 삼을 것입니다.
묵특은 폐하의 사위가 되고 그가 죽으면 폐하의 외손자가 선우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흉노는 점차 신하의 나라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자 유방은,
"참 좋은 생각이오."
라며 찬성하였다.
하지만 여후는 이 말을 듣고 밤낮으로 울면서 사정했다.
"제게는 오직 딸이 하나 있을 뿐인데, 그 딸을 어떻게 흉노에게 보낸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유방은 할 수없이 양가집 딸을 큰 공주로 속여서 유경과 함께 흉노로
보냈다.
그리하여 한나라와 흉노는 드디어 평화조약을 맺게 되었다.
그러나 흉노와의 평화조약은 유명무실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새가 모여들 듯 거미가 흩어지듯
당시의 중국은 유방이 항우와 격렬한 공방전을 전개하고 있어서 싸움에 지쳐
있었다. 묵특이 세력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 즈음 흉노측에서는 활을 쏠 줄 아는 병사가 실로 30여만 명에 달하고
있었다.
흉노는 전쟁을 할 때 반드시 달의 상태를 보았다. 달이 차면 공세로 나가고
달이 기울면 철군한다. 또한 고을 세운 자, 적을 포로로 한 자들에게는 상으로 큰
잔의 술이 주어졌다.
포획물은 포획한 당사자의 소유물이 되며, 포로도 사로잡은 군인의 노예가
되었다. 그러므로 누구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용감히 싸우며, 특히 적을 유인해서
일망 타진하는 전법에 능했다.
적이라고 생각되면 새가 모이듯 일제히 무리져 오며, 패색이 짙어지면 거미가
흩어지듯 도망쳤다. 전사자의 시체를 추스려 돌아온 자에게는 죽은 자의 재산이
그대로 부여되었다.
한나라를 마음껏 농락하다
이전부터 한왕 신은 흉노의 장군이 되어 자리가 잡히자 때때로 협정을 무시하고
한나라에 침입하여 약탈을 일삼았다.
더구나 얼마 후에는 한나라의 장군 진희가 흉노에 넘어가 한왕 신과 공모하여
침공해 오기도 했다.
한나라는 장군 번쾌를 보내 여러 군, 현을 간신히 탈환하기는 했지만 국경선
밖까지 토벌하려 나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 후에도 변경의 요새로 파견된 한나라 장군이 부하들을 이끌고 흉노에게
투항하는 사건이 연달아 발생했다. 그 때문에 묵특은 국경의 지방을 마음대로
침략하여 한나라를 괴롭혔다.
이에 유방은 할 수없이 방침을 바꾸어 회유책으로 나갔다. 그래서 유경의
제안대로 사자를 보내 황족의 딸을 공주라고 속여서 선우에 시집 보내면서 매년
일정량의 솜, 비단, 술 쌀, 양식을 헌납하기로 하고 형제국이 되는 조약을 맺어
화친을 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자 얼마 동안은 묵특도 한나라에 대해 침략 행위를 삼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 뒤에도 한을 배반한 연왕 노관이 부하 수천 명을 이끌고 흉노에
투항, 상곡군 동쪽에 출몰하여 주민을 괴롭혔다.
세월이 흘러 유방이 죽고 혜제, 여후의 시대가 되자, 한나라는 가까스로 안정을
되찾는 듯 했으나, 흉노가 한나라를 멸시하는 것은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묵특으로부터 여후에게 한 통의 편지가 보내졌다. 그것은 희롱을
늘어놓은 편지였다. (사기 2권 '계포' 편 참조)
'장맥분홍'이라는 말이 있다. 혈기가 터질 듯이 넘쳐 도저히 욕정을 견딜 수
없다는 뜻이다. 즉 자기도 홀아비이고 당신도 과부이니 우리 한번 어울려 정분을
풀어 보자는 노골적인 언사로 가득 찼던 것이다.
톡톡히 망신을 당한 여태후는 당장에 흉노 토벌군을 내보내려 하였다. 그러나
신하들이 입을 모아 말렸다.
"선제께서도 평성에서 고역을 치르셨습니다."
여후는 하는 수없이 출병을 중지하고 회유책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싸울 것이냐, 화평할 것이냐
세월이 흘러 문제가 즉위하자 다시 흉노와 화친 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문제 3년(기원전 177년) 5월에는 흉노의 유현왕이 오르도스에 침입하여
상군의 요새를 공격해 왔다.
그러면서 한나라에 귀속해서 변경 방위를 맡고 있던 하나라 소속의 오랑캐족을
살해하고, 나아가 부근의 주민을 죽이고 약탈을 일삼았다.
그러자 문제는 승상 관영에게 토벌을 명령했다.
이에 관영은 전차대와 기마대 8만 5천을 이끌고 우현왕을 공격하여 그 군대를
요새 밖으로 몰아 냈다.
그런데 문제가 태원에 행차한 틈에 제북왕 흥거가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문제는
급히 서울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관영의 흉노 토벌도
중지되었다.
그 다음해에 묵특 선우로부터 다음과 같은 서한이 한나라에 도착했다.
"천제가 세우신 흉노의 대선우, 정중히 황제에게 문안하노니, 편안하신가.
일찍이 황제께서 나에게 화친을 요청했을 때 나는 그 취지를 양해하여 화친을
받아 들였소.
그럼에도 귀국의 국경 수비대가 우리 우현왕의 영지에 침범하고, 또한 우리
쪽의 현왕도 나에게 무엇 하나 상의함이 없이 귀국의 수비대와 일을 벌였소.
이들은 모두 양국 군주의 약속을 어기고 형제국의 우의를 저버리는 행위였소.
이 사건에 관해서 황제로부터 매번 책망의 편지를 받았으므로, 나는 사자를
통하여 회답을 보냈소.
그런데 나의 사자는 귀국에 간 채 돌아오지 않고, 또한 귀국에서도 그 후 한
사람의 사자도 오지 않았소. 그 이래 양국은 화친 관계를 끊은 채 오늘에
이르렀소.
원래 귀국의 수비대가 약조를 깨뜨렸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긴 하지만 나는
이번에 우현왕에게 벌로써 서방 월지 토벌을 명령했소.
우리 군대는 하늘의 가호와, 단련된 병정과 강건한 말로써 월지를 항복시키거나
혹은 참살로 토벌했고 아울러 그 인접 26개국을 평정하여 모조리 우리 흉노에
병합했소.
이로써 활을 무기로 삼는 모든 민족은 완전히 통합되어 북방은 평정된 것이오.
현재 나의 희망은 무기를 거두고, 병사와 말에 휴식을 주며, 이제까지의 원한은
씻어 버리고 화친 조약을 부활시키는 것이며, 이로써 옛날처럼 변경 백성을
안심시키고 어린 아이들이 건강하게 성장하고 늙은 자가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천하를 이룩하여 이를 자손에게 물려주는 일이라오.
나는 이와 같은 희망에 대해서 황제의 동의를 얻고자 사신을 보내어 이 서한을
드림과 동시에 낙타 1두, 승마 2두, 마차 8두를 헌상하는 바이오.
만일 황제께서 우리 흉노가 한나라 국경에 근접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면
명령을 내리시어 수비대나 주민을 국경에서 멀리 보내기 바라오.
또한 나의 사자가 무사히 도착했을 경우에는 6월중에 귀국할 수 있도록
배려하시기 바라오."
서한을 보자 한나라 조정에서는 화친이냐 싸움이냐를 놓고 그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에 대해 논의했다.
이때 중신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선우는 월지를 쳐부수고 지금 승운을 타고 있습니다. 이쪽에서 공격을 가할
필요는 없습니다.
게다가 설령 흉노의 영토를 빼앗았다 하여도 그 불모의 땅에 우리나라 백성을
이주시킬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번 기회에 선우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게
최상의 방책인 듯합니다."
이렇게 하여 선우의 요청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우리는 우리 식대로 산다
그 얼마 후에 묵특이 죽자, 그 아들 계육이 즉위하여 노상선우라고 칭했다.
노상선우가 즉위하자, 문제는 고조의 전례의 따라 황족의 딸을 공주로 꾸며서
선우에게 짝지우기로 하고, 그 후견인으로서 연나라 출신의 환관 중행열을
동행시켰다.
중행열은 흉노로 가는 것이 꺼림칙하여 그 임무를 사양했으나, 끝내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자 중행열은 흉노로 가는 길에 다짐을 하였다.
"두고 보자. 강제로 보낸다면 내게도 생각이 있다. 나는 반드시 한나라의
화근이 될 것이다."
그리고 흉노 측에 도착하자마자 곧 선우에게 귀순하더니 곧바로 선우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런데 흉노들은 전부터 한나라의 비단이나 면, 음식 등을 애용하고 있었다.
중행열은 우선 그 점을 지적하여 선우에게 진언했다.
"흉노는 인구로 본다면 한나라의 일개 군보다도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한나라에
필적하는 힘을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의식과 풍습이 한나라와 달라서 한나라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선우께서 지금 흉노 본래의 관습을 버리고 한나라의 물건을 즐기시는데 이처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이렇게 가서는 한나라가 자기 나라 물자의 2할만 흉노에게 소비하게 하면
흉노는 완전히 한에게 종속되고 말 것입니다.
미리 대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라도 한나라의 비단이나 면을 입은 자에게는 그것을 입혀서
가시밭 속을 달리게 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면은 곧 여지없이 찢어지고, 모피,
수피가 얼마나 뛰어난 물건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또한 한나라의 음식을 입수하시면 즉각 버리시고, 흉노의 유제품이 얼마나
편리하고 맛이 좋은가를 알려주어야 합니다."
중행열은 이렇게 진언함과 동시에 선우의 측근에게 흉노의 인구 및 가축 수를
상세히 조사하여, 그 통계를 제출하도록 했다.
이어서 중행열은 한나라에 보내는 서한의 양식을 고치도록 했다.
지금까지 한나라에서 흉노에게 보내오는 서한은 한 자 한 치의 두루마리가
사용되었으며,
"황제, 삼가 흉노의 대선우에게 문안하노니, 편안하신가."라고 시작되어 헌납한
물건과 용건을 적는 것이 통례였다.
그래서 중행열은 선우가 한나라에 보내는 서한에는 한 자 두 치의 두루마리를
사용하게 했으며, 봉인을 크게 하고는,
"천지가 낳으시고 일월이 세우신 흉노의 대선우, 삼가 한의 황제에 문안하노라.
편안하신가."라고 오만한 태도로 물건과 용건을 기록하게 했다.
또한 중행열은 한나라 사신의 언동에 눈을 크게 뜨고 부라렸다. 어느 때인가
사신이,
"흉노의 풍속은 노인을 천대한다."라고 비난했다.
중행열은 때는 이때라고 생각하여 사신을 크게 꾸짖으며 이렇게 물었다.
"그렇다면 묻겠는데, 너희들 한나라 풍습으로는 젊은이가 변경 수비병으로
종군할 때 늙은 부모가 자기를 희생하고 따뜻한 의복을 주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이지도 않는단 말인가."
그러자 사신이 되물었다.
"아니, 그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이에 중행열이 말했다.
"그것이 당연하다면 흉노가 노인을 천대한다는 말이 어떻게 나오는가. 말할
것도 없이 흉노는 싸움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다.
싸우지 못하는 노약한 자가 맛있는 것을 강건한 젊은이에게 양보하는 것은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함이다. 그럼으로써 부자가 서로 오래도록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흉노는 부자가 한 천막 속에 거주하며, 아비가 죽으면 아들이 계모를
아내로 삼거나, 형제가 죽으면 나머지 형제가 미망인을 자기 아내로 삼거나 하지
않는가. 게다가 흉노는 의관도 없으며 예절도 없다."
그러자 중행열이 사신을 비난했다.
"한나라의 사자여, 흉노의 풍습을 모른다면 가르쳐 주지. 흉노의 생계는 모두
축산으로써 이룩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가축의 고기를 먹으며 그 젖을 마시고 모피를 입는다. 그리고
가축에게 필요한 풀과 물을 구해서 계절 따라 이동한다.
그러므로 언제 전쟁이 터지더라도 말타고 활을 쏘는 훈련이 되어 있으며,
평상시에는 편안하고 온화한 생활을 즐길 수가 있다.
법은 간단하여 실행하기 쉽고 군신 관계도 단순하여 한 인간의 몸처럼 움직이기
좋게 되어 있다.
부자, 형제가 죽으면 남아 있는 자가 미망인을 자기 처로 하는 것은 가계의
단절, 종족의 절멸을 막기 위함이다.
때문에 흉노는 언뜻 보기에는 문란한 것 같지만 혈통이 끊기지 않고 존속해가는
것이다.
분명히 중국에서는 계모와 형제의 아내를 맞아들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때문에 친척끼리 점점 사이가 멀어져 나중에는 서로 다투고 죽이기까지 하게
된다. 혁명이 일어나면 황제의 성이 바뀌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또한 예의라고 해도 오늘날에 와서는 나쁜 풍습만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상하가 서로 원한을 품거나 시기를 하면서 사치만을 좇고, 그것을 위해서는
생계조차 돌보지 않는 판국이 아닌가.
그리고 의식을 농경, 양잠에 의지하고 자위를 위해서는 성벽을 의지하는데,
그렇게 때문에 만일의 경우가 생기더라도 백성들은 충분히 싸우지도 못하고
평시에도 생산에 쫓길 뿐 잠시도 여유없는 것이다.
흙집에 사는 가련한 한인이여, 자기 나라의 실정을 알았다면 이제부터는 공연히
아는 척 안 하는 게 좋겠다. 또 관을 써봤자 뾰족한 수도 없지 않은가."
이런 말이 오고 간 후부터 한나라 사신이 무슨 말을 꺼내면 중행열은 듣기도
싫다는 듯이 이렇게 일축해 버렸다.
"한나라 사자여, 쓸데없는 수다는 떨지 말게. 너는 한나라가 흉노에게 보내오는
비단, 면, 쌀, 누룩을 정량대로, 또 좋은 것을 가져오기만 하면 돼.
양과 질이 두루 완전하면 그것으로 족해. 만약 수량이 모자라거나 품질이
조잡할 경우에는 가을 수확때에 기마대를 몰아 너희를 노작물을 짓밟을 테니 그쯤
알게."
그리고 한편으로는 쉴새없이 선우를 부추켜 한나라의 틈을 엿보게 했다.
그 후 문제 14년, 드디어 흉노의 선우가 14만 기를 이끌고 침입하여 다수의
주민을 포로로 잡고, 많은 가축을 빼앗았다. 그리고는 기습부대를 풀어 옹 지방의
감천궁까지 점령하였다.
문제는 급히 전차 1천 대, 기병 10만을 출동시켜 장안 부근 일대에 방위선을
구축하여 흉노의 침략에 대비하는 한편, 계속 전차, 기마의 대군을 내보내 반격을
가해 나갔다.
그러자 선우는 한나라 영토에 머물기 한 달 남짓해서 깨끗이 요새밖으로 철수해
버렸다. 한나라 군사가 이를 추격했으나 아무런 전과도 없이 곧 철수해 버렸다.
흉노는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더욱 더 한나라를 멸시하여 매년 국경을
침범해서는 다수의 주민을 사로잡고 손에 닿는 대로 약탈해 갔다.
이렇게 하여 중행열은 한, 흉노의 화친 관계를 단절시키고, 자신이 예언한 대로
'한나라의 화근'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노상선우가 죽은 후에도 그 아들 군신선우를 섬겼다. 그 사이 양국은
전투와 화해를
되풀이했으나 한나라는 항상 수세의 입장에 몰려 있었다.
마읍에서 생긴 일
그 뒤 한무제는 즉위하자 흉노와의 화친책을 선명히 내걸고 흉노를 정중히
대접했다.
흉노와의 교역에도 힘을 들이고, 한나라 물자를 충분히 흉노에게 공급했다.
그러므로 흉노도 선우 이하 한나라와 친하지 않은 자주 왕래하게 되었다.
그러나 화친책 뒤에서 한나라는 은밀히 흉노 토벌의 책략을 꾸며 마읍의 한
노인을 흉노 땅에 들여보냈다. 그는 밀수를 하면서 흉노와 친교를 맺고 교묘히
선우에게 근접하여 마읍을 넘기겠다고 제안했다.
이 말을 믿은 선우는 마읍의 풍부한 물자를 손에 넣고자 10만 기를 이끌고
침입했다.
이에 대해서 한나라는 마읍 근처에 30여 만의 대군을 미리 매복시켜 충분히
사전 준비를 갖추고 선우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이를 알 턱이 없는 선우는 마읍을 향해 단숨에 진군해 왔다. 그런데
마읍까지 백여 리를 남겨 놓았을 때였다.
평원 일대에 가축이 떼지어 있는데 그것을 망 보는 사람의 모습이 하나도 안
보였다. 수상히 여긴 선우는 방향을 돌려 근처의 경비초소를 급습했다.
때마침 변경의 요새에서는 보초병 하나가 선우의 부대 움직임을 정찰하고
있었다. 한나라 군사의 책략을 알고 있었던 그는 선우에게 붙잡혀 칼로 위협을
받자 한나라의 잠복 사실을 모조리 불로 말았다.
"어쩐지 처음부터 이상했었지."
선우는 놀라면서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즉각 군사를 요새 밖으로
퇴진시키면서 경비병에게 말했다.
"너를 잡은 것은 천운이라 할 것이다. 하늘이 네 입을 통해 알려 주신 것이다."
그리고는 그를 왕으로 등용하여, '천왕'이란 칭호를 부여했다.
한편 한나라 군대는 선우가 마읍에 들어서자 각 군이 일제히 습격 할
작정이었으나 선우가 철수해 버렸으므로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배신감을 느낀 흉노는 한나라와의 우호 관계를 끊고
닥치는 대로 한나라 변형을 하기에 이르렀다. 변경에 침입하여 약탈 행위를
일삼는 사건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역만은 계속되었다. 흉노는 여전히 한나라의 물자를
탐냈으며 한나라 또한 교역을 통해서 흉노를 회유하려 했던 것이다.
공격은 했지만
마읍 사건이 일어난 지 5년 후의 가을이다. 한나라는 위청, 공손하 , 공손오,
이광의 네 장군에게 각기 1만 기의 군사를 주어 교역장 주변의 흉노를 공격케
했다. 그러나 손실에 비해 전과는 미미한 것이었다.
다만 전과라 할 수 있는 것은 위청 장군이 상곡에서 출격하여 겨우 7백 명의
사상자를 내게 하는 정도였다.
공손하는 운중에서 출격하여 아무런 전과 없이 철수하고, 대 지방에서 출격한
공손오는 대패하여 7천여 명을 잃었으며, 안문으로 출격했던 이광도 흉노의
대군을 만나 참패를 당했다.
이광의 경우는 뒤에 탈출했다고는 하나 한때는 흉노에게 생포되기조차 했던
것이다. 그 결과 공손오와 이광은 옥에 갇혀 속쇠금을 물고 평민으로 격하되었다.
같은 해 겨울, 흉노는 줄곧 한나라의 변경에 침입하여 약탈을 일삼았다. 이에
대해 한나라는 가장 큰 피해를 받은 지방에 장군 한안국을 주둔시켜서 흉노에
대비했다.
그 후 얼마 동안은 흉노도 잠잠했다.
그러나 다음해 가을에는 2만 기가 침입, 요서의 태수를 살해하고 2천 명을
포로로 데려갔다.
또한 어양 태수의 수비군 천여 명을 쳐부수고 장군 한안국의 군대도 포위했다.
한안국의 군대는 그때 천여 기에 불과하여 전멸의 위기에 봉착했다. 그러나
위기 일발에 연나라에서 구원군이 도착하여 흉노를 쫓음으로써 위기를 면했다.
그 후 흉노는 또다시 안문에 침입하여 천여 명을 살해, 약탈했다.
그리하여 한나라는 위청에게 3만 기를 주어 안문에서 출격하게 했다.
이때 머리를 벤 자와 포로를 합쳐서 수천의 전과를 올렸다.
위청 장군은 다음해에도 운중에서 흉노 토벌에 나섰다. 그는 서진하여 농서에
이르러서 오르도스에 진을 친 흉노의 누번왕, 백양왕을 공격하여 수급과 포로를
합쳐 수천, 소와 양을 백여만 마리나 사로잡는 전과를 올렸다.
이리하여 한나라는 오르도스를 탈취하여 그곳에 삭방군을 설치하고 진나라
시대에 몽염이 구축했던 요새를 수복하고 황하를 따라 방비를 굳혔다.
13. 복은 화가 들어오는 문이다(원앙, 조착)
1) 명예로 일어선 자 명예로 망한다(원앙)
여후의 시대가 끝나고 천하는 점차 평온을 되찾았다. 그리고 유방과 더불어
한나라를 세운 공신들은 거의 죽고 없었다. 이제 전쟁터에서 용맹스럽던 장군의
시대는 가고 나라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가 제일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었다.
그래서 이른바 '관료 체제'가 탄생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세대교체를
동반하였다. 이러한 시대를 대표하는 한 사람이 바로 원앙이었다.
원앙은 어릴 적에 여씨 문중의 세력가였던 여록의 식객이었다. 그러다가 여씨
세도가 끝나자 형의 도움으로 황제를 모시는 비서관이 되었다.
신하를 다스리는 법
당시 승상은 주발 장군이었다. 그런데 그는 자기의 공로를 지나치게 과신하여
황제인 문제조차 얕보고 있었다. 오히려 황제가 그를 정중하게 대접하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주발이 끝내고 돌아갈 때 황제가 따라가서 배웅을 할
정도였다.
어느 날 황제가 역시 주발을 배웅하는 모습을 지켜본 원앙은 따로 황제에게
진언했다.
"폐하께서는 승상을 어떤 인물로 생각하십니까?"
"그야 나라의 중심 기둥이겠지."
그러자 원앙은 이렇게 말했다.
"승상께서는 고작 공신일 뿐 나라의 중심 기둥이 아닙니다.
나라의 중심 기둥이란 오직 황제뿐인 것입니다. 사실 승상 주발은 여후가
천하를 쥐고 흔들 때 그저 방관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 뒤 여후가 세상을 뜨고
각지에서 제후들이 들고 일어나자, 우연히도 병권을 쥐고 있던 주발 장군이 고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즈음 주발 대감은 걸핏하면 폐하를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으며, 폐하 역시 그것을 묵인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군신의 도리에 맞지 않게 되고, 폐하께서도 좋지 않게 됩니다."
그 뒤로 황제는 주발에 대해 위엄있게 대하였고, 이에 따라 주발도 기세가 꺾일
수밖에 없었다.
주발이 나중에 이 사실을 알아내고 원앙을 크게 꾸짖었다.
"젊은 놈이 나를 짓밟으려 하다니!"
하지만 원앙은 한 마디 사과의 말도 하지 않았다.
그 후 주발이 반역 혐의로 감옥에 갇힌 적이 있었다. 이때 주위에서 아무도
주발을 변호하지 않았으나, 오직 원앙만이 그의 무죄를 주장했다. 그리고 원앙의
주장은 크게 영향을 끼쳐 주발이 풀려나오는데 중요한 도움이 되었다. 이후부터
주발과 원앙은 가깝게 지냈다.
원앙의 말이라면
문제 3년에 문제의 동생인 회남왕이 벽양후 심이기를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뿐 아니라 당시 회남왕의 오만방자함은 눈뜨고 못 볼 지경이었다.
보다 못한 원앙이 문제에게 아뢰었다.
"교만한 제후를 처벌하지 않으면 반드시 화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번 기회에
회남왕을 처벌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뒤 회남왕의 횡포는 더욱 극심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모반 사건이 발각되었는데, 취조하는 과정에서 회남왕의
관련 사실이 밝혀졌다.
그때서야 비로소 문제는 회남왕을 직접 취조하고, 그를 귀양보냈다.
이때 원앙이 다시 아뢰었다.
"폐하께서 평소에 감독을 소홀히 하셔서 이러한 사태까지 빚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귀양을 보내시면 그 멀고 먼 귀양길을 회남왕이 견딜 수 있을까
걱정됩니다.
만약 도중에 회남왕의 신변에 일이 생기는 날이면, 폐하께서는 광대한 천하를
다스리면서 동생 하나 포용하지 못하고 죽였다는 오명을 벗기 어렵습니다.
아무쪼록 재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문제는 또 그 의견을 묵살하고 귀양을 강행시켰다.
그런데 원앙의 예언대로 회남왕은 귀양길에서 그만 병이 들어 죽고 말았다. 그
소식을 들은 문제는 식사를 하다가 젓가락을 떨어뜨리며 통곡했다. 원앙은 문제
앞에 엎드려 자기가 좀더 강력히 요청하지 못했던 점에 대해 사죄하였다.
"무슨 말을 하는 거요. 나야말로 당연히 그대의 의견을 들었어야 했소."
"폐하, 이미 지나간 일이오니 너무 자책하시지 마옵소서. 이 정도로 폐하의 높은
명예가 더럽혀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폐하께서는 세상에 비길 수 없는 세 가지의 훌륭한 공적을 남기셨기
때문입니다."
"세 가지 공적이라니, 무슨 공적이오?"
그러자 원앙은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첫째, 폐하의 높으신 효도이옵니다. 폐하께서는 모후이신 박태후께서 3년
동안이나 병석에 누워계실 때 잠도 제대로 주무시지 않은 채 간호하셨고, 약은
반드시 먼저 맛본 후에 드리셨습니다. 이는 효자로 이름난 증삼을 능가하는
효도이옵니다.
둘째, 폐하께서는 여시 일족의 횡포가 끝난 직후 변경 지방에서 장안까지 고작
6대의 수레로 달려 오셨습니다. 당시 장안은 그야말로 무엇이 숨어 있는지 알 수
없는 복마전과 같은 불안한 곳이었습니다. 그런 곳에 맨몸으로 달려오신 페하의
용기에는 용기의 화신이라 하는 맹분이라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셋째, 폐하께서는 천자의 자리를 다섯 번이나 사양하셨습니다. 고결한 선비로
추앙받는 허유조차도 한 번밖에 사양하지 않았는데, 폐하께서는 그보다 네 번이나
더 사양하는 미덕을 보이신 것입니다.
이번 일도 단지 회남왕의 과오를 깨우치려 한 목적이었는데, 병사하신 것은
전적으로 호위 관리의 잘못이었던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문제는 기분이 풀리는 듯했다.
문제는 다시 원앙에게 물었다.
"그러면 뒷수습을 어떻게 해야 좋을까?"
"회남왕의 세 아드님을 잘 대우하십시오."
그리하여 문제는 회남왕의 세 아들에게 각각 왕위를 주었다.
그 뒤 원앙의 명성은 천하에 드날리게 되었다.
한편 어느 날인가 문제가 황후와 신부인을 데리고 상림원에 나들이를 나갈
때였다. 그때까지 신부인은 황후와 똑같은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상림원을 지키던 관리들도 예전처럼 두 사람의 자리를 나란히 준비해 놓고
있었다. 그런데 원앙이 그것을 보고는 신부인의 자리를 한칸 내려놓았다. 그러자
신부인은 화가 나서 궁궐로 돌아가 버렸다.
문제도 기분이 잡쳐 그대로 궁궐로 되돌아가 버렸다. 그런데도 원앙은 태연한
표정으로 궁궐로 들어와 문제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신분의 상하를 엄격히 구분해야만 상하의 관계가 원만해지는 법입니다.
폐하께 황후가 계시는 이상 신부인은 측실입니다. 정실과 동렬의 지위에
있어서는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좋으라고 하신 일이 도리어 해를 입힐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옛날 여태후와 척부인의 '사람돼지' 사건을 설마 잊고 계시지는 않겠지요."
이 말을 들은 문제는,
"듣고 보니 정말 맞는 말이오."
하며 즉시 신부인을 불러 원앙의 깊은 뜻을 설명해 주었다.
그랬더니 신부인은 원앙에게 고맙다며 금 50근을 선물로 주었다.
지나치면 해롭다
그런데 원앙은 매번 너무 직접적으로 황제에게 의견을 말했으므로 황제도 차츰
그를 멀리 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지방으로 좌천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곳에서 원앙은 부하들을 아끼고 뒤치닥거리를 도맡아 해주었기 때문에
부하들이 그를 존경하고 따랐다.
그 뒤 원앙은 오나라의 재상으로 가게 되었는데, 출발하기 전에 조카가 말했다.
"오나라 왕은 자만심이 많다고 소문나 있습니다. 그리고 주위에는 간신배들이
우글대고 있지요. 그렇다고 그들을 비판해 바로잡을 생각은 마십시오.
그렇게 되면 모함을 당하시든가 칼을 맞으실 것이 분명합니다.
그저 하루 종일 술이나 마시는 게 제일 좋을 듯합니다. 이따금씩 오나라 왕에게
반란을 일으키지 말라고 하시면 충분하겠지요. 그 이외의 말은 전혀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
원앙은 그 말대로 하였다. 그러자 오왕은 그를 융숭하게 대우했다.
2) 개혁가는 온전하게 죽기 어렵다(조착)
조착은 일찍부터 법가의 학설을 배운 수재였다. 당시 천하에는 "서경"에 통달한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진나라 시절의 박사였던 복생이라는 사람이
"서경"에 통달하고 있었지만, 그는 이미 90세를 넘긴 노인이었으므로 조정에
불러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문제는 적당한 인물을 복생에게 파견하여 자기도 배울 수 있도록 그
인물을 천거하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천거된 사람이 바로 조착이었다.
조착은 복생에게 "서경"을 배우고 와서 정치를 논할 때마다 " 서경"을 인용하여
조목조목 정리해 말했다. 문제는 그를 매우 아껴 높은 자리에 등용했으며, 특히
태자의 신뢰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태자는 늘 그를 '지혜
주머니'로 부르며 곁에 있게 했다.
조착의 주장은 제후의 영지를 삭감할 것, 법령을 엄격히 적용시킬 것, 농민의
권익을 보호할 것 등이었다.
하지만 그의 견해에 찬성한 사람은 태자뿐이고, 원앙을 비롯한 고급 권리들은
모두 조착을 싫어했다.
개혁과 수구세력
이윽고 문제가 죽고 태자가 즉위하니 바로 경제였다. 경제는 즉시 조착을
중용하여 그의 말에 언제나 따랐다. 이제 모든 실권은 조착의 손에 쥐어져 있었고,
그런 가운데 법령들이 잇달아 바뀌었다.
이때 승상 신도가도 조착을 매우 못마땅해 했으나 손을 쓸 수 없었다.
당시 조착의 근무처는 유방의 아버지를 모시는 묘의 경내에 있었는데, 문이
동쪽으로만 나 있어서 출입이 매우 불편했다. 이에 조착은 남쪽으로도 출입할 수
있도록 묘의 바깥 담에 구멍을 뚫어 출입문을 만들었다.
이 소식을 들은 승상은,
'옳지, 이번 기회에 내 조착이라는 놈을 없애 버려야지.'
하고 결심하였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조착은 즉시 경제를 만나 자초지종을 말하면서 설득했다.
이러한 사실을 알 리 없는 승상은 다음 날 어전 회의에서 조착이 방자하게 묘의
구멍을 뚫은 죄를 들어 조착을 처형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미 조착에게 설득된 경제는 그 의견을 묵살해 버렸다.
"그것은 묘의 담이 아니라 경내의 바깥쪽 담에 불과한 것이니 문제가 되지
않소."
승상은 도리어 사죄를 할 수밖에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탄식해마지
않았다.
'풋나기 놈을 내가 미리 죽이고 뒤에 폐하께 보고할 것을 그랬나. 황제의 허락을
받고 죽이려다가 내가 당했구나.
이 분함을 어떻게 풀어야 한다는 말인가!'
승상은 끝내 그것이 병으로 도져 쓰러진 후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그 후 조착의 위세는 더욱 강해만 갔다. 그는 죄과가 있는 고관들의 땅을
삭감했고, 심한 죄가 있을 경우에는 몰수했다.
그리고 계속하여 법령을 개정해 자그만치 30항목의 법령이 바뀌었다. 그러자
고관들 사이에 조착을 원망하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두 적수
특히 원앙은 조착은 견원지간의 적수였다. 조착이 나타나면
원앙이 자리를 떴고, 원앙이 나타나면 조착이 자리를 뜰 정도였다. 서로 말 한번
주고 받지도 않았다.
어느 날 조착은 원앙이 예전에 오나라 재상으로 있을 때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를 씌어 취조하게 하였다. 그러나 원앙은 형 집행은 보류되고 다만 파면으로
그쳤다.
그 후 오나라 반란을 일으키자 조착은 이를 갈며 분개했다.
'역시 원앙이라는 자가 관련되게 분명해.
반란의 가능성이 없다고 하더니 이렇게 반란이 일어나지 않는가. 다시 취조를
해 반드시 놈을 처벌하고 말리라.'
그러나 부하들이 일제히 반대했다.
"이미 반란군이 몰려오고 있는데, 이제 원앙을 취조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에 조착은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망설이고 있었다.
그 사이에 이 사실을 원앙에게 알려 준 사람이 있었다. 깜짝 놀란 원앙은 즉시
두영을 찾아갔다. 두영 역시 조착에 의해 토지를 몰수당하고 복수만을 노려오던
터였다.
원앙은 두영에게,
"이 사건을 직접 황제께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대감께서 만나게 주선해
주십시오."
라고 부탁했다.
다음 날 두영은 황제와의 만남을 주선하였고, 드디어 원앙은 황제를 마나
오나라가 반란을 일으킨 경위를 자세히 설명하였다.
그리고는,
"이 난을 피흘리지 않고 평정시킬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자 황제가 귀가 번쩍 뜨이는 듯이 물었다.
"아니, 어떤 방법이 있소?"
"지금 반란의 기치는 황제 주변의 간신을 제거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니 간신으로 저들이 지목하고 있는 조착을 제거하면 난은 자연히 평정될
것입니다."
개혁가의 최후
그런데 이미 며칠 전에 조착의 아버지가 조착이 염려되어 서울로 찾아왔었다.
"지금 네가 하는 일이 뭐냐? 고관들의 땅을 빼앗고 법을 고치는 것 외에 무엇이
있느냐?
모든 사람들이 네 욕을 하고 있으니 도대체 어찌된 일이냐?"
그러자 조착은 정색하며 이렇게 대답했다.
"아버님의 말씀은 다 옳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나라를 지키기
어렵습니다."
"아니, 나라라고? 나라가 태평하면 우리 조씨는 망해도 좋다는 것이냐?
이제 어쩔 도리가 없구나!"
그리고는 이튿날 아버지는 약을 먹고 자살했다.
한편 원앙의 말을 들은 경제는 고민에 빠졌다.
'조착은 나라의 보배요, 나의 둘도 없는 충신인데.... 아니지, 난을 평정하려면,
그래서 나라를 지키려면 어쩔 도리가 없지."
드디어 경제는 결심했다.
며칠 후 조착은 경제의 부름을 받고 의관을 갖춰 수레에 올라탔다. 그러나
수레는 궁궐로 가지 않고 형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목이 베어졌다.
하지만 조착을 처형시킨 후에도 반란은 평정되지 않았다. 원래 간신 제거란
명분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경제는 반란군 진압의 책임을 맡고 있는
등공을 불렀다.
"과연 반란군들이 조착의 처형 사실을 알고 전투를 중지하던가?"
그러자 등공이 대답했다.
"반란을 주도한 오왕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영지를
삭감당하자 분개하여 조착 제거의 명분을 내세웠을 뿐이었던 것입니다.
신은 이제 천하의 선비들이 입을 다물고 폐하께 직언을 하지 않을까
염려스럽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뜻인가?"
"원래 조착은 제후들이 비대해지고 강성해져서 어떻게 하면 그들의 세력을
통제할 수 있을까를 걱정했던 것입니다. 영지 삭감은 그 과정에서 나온 좋은
방안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개혁이 시행되자 그 자신이 화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안으로는 충신들의 입을 막고, 밖으로는 제후들을 위해 원수를 갚은 결과가
되었습니다. 황공하오나 조착은 죽이지 말았어야 좋았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경제는 한참을 아무 소리도 없이 생각에 잠겨있다가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귀공이 잘 얘기했소. 나도 애석하게 생각하고 있었소."
3) 명예를 좋아하는 자는 명예 때문에 망한다
앞날이란 장담할 수 없다
조착이 죽은 후 원앙은 반란이 일어난 오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오왕은
자기 밑에서 일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원앙은 거절했다. 그러자 오왕은 군대 안에
원앙을 가둬놓고 죽이고자 했다.
그런데 전에 원앙이 오나라에서 벼슬하고 있을 때 어떤 호위병이 하녀와 통정한
적이 있었다. 그때 원앙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내색하지 않은 채 그 호위병을
평상시와 똑같이 대우해 주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그 호위병에게, '나으리께서
너의 통정 사실을 알고 계신다'고 귀뜸해 주자, 그는 곧바로 도망쳐 버렸다.
그러자 원앙은 말을 타고 쫓아가 하녀를 그에게 주고 다시 호위병으로 일하도록
했다.
그런데 바로 그 호위병이 이제 원앙을 감시하는 책임을 맡은 지위에 있게
되었다. 그는 옷가지 등을 팔아 2천 말의 독한 술을 사놓았다. 그때 날씨는 매우
추웠고, 병사들은 목이 말라 하고 있었다. 그는 병사들에게 술을 먹이고, 모두
술에 취해 잠이 들자 원앙을 깨웠다.
"나으리께서는 지금 탈출하셔야 합니다. 오왕은 내일 아침에 나으리를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원앙이 이 말을 믿지 못하며 물었다.
"염려해 주셔서 고맙습니다만, 당신은 누구인가요?"
"예, 바로 옛날 나으리의 하녀를 가로챘던 호위병입니다. 기억이 나십니까?"
이에 원앙이 놀라 일어나 인사하였다.
"기억이 나오. 그런데 당신께는 부모와 처자가 있는데 이런 일로 피해를
당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저는 이미 망명하려고 부모와 처자를 피신시켜 놓았습니다. 안심하시고 얼른
저를 따르십시오."
그리고는 원앙을 인도하여 잠든 병사들 사이를 헤치며 도망쳤다.
반란이 진압된 후 원앙은 병을 얻어 고향에 머물렀다. 그는 마을 사람들과
어울려 살았고, 닭싸움이나 개달리기 등의 놀이를 즐겼다.
그러던 어느 날 극맹이라는 협객이 원앙을 방문했는데, 원앙은 그를 극진히
대접했다. 그러자 어떤 부자가 원앙을 비난했다.
"극맹이란 자는 도박꾼이라는데, 왜 그런 자를 대우하는 것입니까?"
이에 원앙이 대답했다.
"극맹이 도박꾼인 것은 사실이오. 하지만 그의 모친이 죽었을 때 장례에 참석한
사람들이 타고 왔던 수레만도 천 대가 넘었소.
그는 다른 사람이 급하게 그이 대문을 두드리면 그 부탁을 거절하거나,
있으면서도 없다면서 되돌아가도록 만든 적이 없었소. 그래서 천하 사람들이 지금
우러러보고 있는 사람은 의리있는 협객으로 소문난 계심(계포의 동생으로
용감하고 의협심이 강해 선비들이 앞을 다투어 그와 사귀기를 원했다)과
극맹뿐이오.
지금 당신은 항상 몇 명의 호위병을 데리고 다니지만, 만약 위급한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그들만 믿을 수 있겠소?
사람이란 언제 위급한 일이 터질지 모르는 법이오."
이렇게 말하면서 그를 크게 꾸짖고는 절교해 버렸다.
사람들은 이 말을 전해 듣고 모두 원앙을 칭송하였다.
명예를 좋아하는 자는 명예 때문에 망한다
원앙은 비록 고향에 내려와 묻혀 살았지만, 황제는 자주 사자를 보내 국정에
관하여 그의 자문을 구하곤 했다.
한편 전에 경제의 아우인 양왕이 자기에게 제위를 물려달라고 요구한 적이
있었다. 이때 원앙이 반대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는데, 이후 양왕은 원앙에 양심을
품게 되었다.
그래서 자객을 원앙에게 보냈다. 자객이 서울에 들어가보니 많은 사람들이
원앙을 칭찬하고 있었다.
자객은 원앙을 찾아갔다.
"저는 나으리를 죽이기 위해 양왕이 보낸 자객입니다. 하지만 저는 나으리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겠습니다. 나으리만한 인물을 죽일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방심하지 마십시오. 아직 10여 명의 자객들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부디 몸조심 하십시오."
그 뒤 원앙은 불안하기 짝이 없는 생활을 해야만 했다.
어느 날 원앙은 유명한 점쟁이를 찾아갔는데, 돌아오는 길에 미행하던 자객에게
칼을 맞고 숨을 거두었다.
사마천은 이렇게 말했다.
"원앙은 학문을 좋아하지는 않았으나, 뛰어난 생각에 의해 여러 가지를
종합함으로써 체계적인 이론을 세웠다. 그는 어진 마음을 바탕으로 정의감에
비추어 세상을 개탄했다. 하지만 효문제가 즉위하자, 그의 재능은 때를 만났다.
그 후 시대는 변하고 바뀌어 오, 초의 반란이 일어나고 효경제를 한번
설득시킴으로써 그의 주장이 관철되었으나, 반란을 평정시키지는 못하였다.
그는 명예를 중시하고 재주를 뽐냈으나 결국 그 때문에 죽었다.
한편 조착은 젊을 때 자주 조정에 건의했지만 채택되지 않았다. 그러나 뒤에
드디어 권력을 얻어 마음대로 행사하면서 법령을 많이 뜯어 고쳤다.
그는 반란이 일어났을 때 당연히 나라의 위급함을 구하는 데 힘써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사로운 원한을 갚는 데에 몰두하다가 오히려 스스로 망치고 말았다.
옛말에 '옛부터 내려오던 법을 바꾸고 상식을 어지럽히는 자는 죽거나 망한다'고
했는데, 이는 바로 조착의 경우를 가리키던 말이던가!"
14. 해는 중천에 뜨는 그 순간부터 기운다(주아부)
주아부는 주발의 아들로서 군사 작전에 뛰어나고 군율이 엄하기로 유명했다.
기원 전 158년 흉노가 대규모로 한나라에 쳐들어 왔다.
이에 문제는 주아부를 비롯한 세 장군을 파견해 패상과 극문, 그리고 세류
지방을 지키도록 했는데, 이때 주아부는 세류의 방어를 맡게 되었다.
세 장군을 파견한 후 문제는 친히 일선으로 가서 병사들을 위문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먼저 패상과 극문 지방에 갔는데 황제가 탄 수레가 곧장 성문으로
달려들어 갔지만 누구 하나 막아서는 자가 없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장군 이하
모든 병사들이 말을 타고 달려나와 환영하는 것이었다.
황제는 다음으로 세류의 주아부 군대를 찾아갔다. 그런데 그곳은 모든 병사들이
갑옷을 입고 손에는 서릿발 같은 칼과 창을 들었으며, 성벽 위에는 화살이 겨냥된
채 삼엄한 경비가 이뤄지고 있었다.
이윽고 문제 일행의 선발대가 성문에 도착했는데, 성문의 경비병은 그들을
막아서며 결코 들여 보내지 않았다. 그러자 선발대의 한 사람이 엄숙한 목소리로,
"폐하께서 곧 도착하시오."
라고 말했다.
하지만 경비병은,
"장군의 명령이 '군중에서는 장군의 말만 들을 것이며, 설령 폐하의 명령이
있더라도 듣지 말라'고 하셨소."
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 뒤 바로 문제의 행차가 도착했는데, 역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제서야
문제는 정식으로 사자를 장군에게 보내,
"짐이 오늘 병사들을 위로하고자 하노라."
하고 전하도록 하였다.
이에 주아부는 비로소 성문을 열어 황제 일행이 통과하도록 허락했다. 행렬이
군영으로 들어서려는데 수문장이 호위 군관에게 이렇게 귀뜀해 주는 것이었다.
"장군이 정한 규정에 의하면 군영 안에서는 말을 달리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에 호위 군관이 황제에게 이 사정을 말하니 황제는 말이 천천히 걷도록
말고삐를 느슨히 하였다.
드디어 황제가 본부에 도착해 보니 주아부 이하 모두가 갑옷을 입고 위풍당당히
늘어서 있었다. 주아부는 황제를 보자 두 손을 모아 눈 높이로 들며 절을 하는
것이었다.
"몸에 군장을 차렸을 때에는 절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이렇게 뵙는 것을 양해해
주소서."
이에 황제는 크게 감동하여 정중하게 답례를 했다.
나중에 황제가 성문을 나서자 황제의 수행원들이 모두 주아부가 한 행위를
비판하였다. 하지만 황제는 오히려 그를 칭찬하였다.
"그 정도라야 비로소 장군이라 할 수 있다. 패상이나 극문이야 아이들 장난이지
그게 어디 군대 꼴인가?"
이런 일이 있고 나서 사람들은 군기가 엄한 군대를 세류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황제는 주아부를 크게 신뢰하여 태자의 앞날을 부탁하며 말했다.
"나라에 위급한 일이 생겨도 주아부라면 군대를 통솔하여 막중한 임무를 다할
수 있을 것이오."
그러면서 그를 거기장군에 임명하였다.
도전은 있으되 응전은 없다
그 후 오, 초 등 7개 제후국이 연합해 반란을 일으켰다. 황제는 주아부를
총사령관으로 삼아 반란을 진압하도록 했다. 이때 주아부가 황제에게 말했다.
"지금 반란군은 사납고 빨라서 정면으로 맞선다면 승패를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별 수 없이 양나라 땅을 잠시 내 준 다음 저들의 보급로를 끊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황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아부는 병사들을 형양 땅으로 집결시켰다. 당시 반란군은 양나라 땅을
공격하고 있었는데, 양나라는 위기에 빠지자 주아부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주아부는 못 들은 척하며 군대를 양나라에 못 미친 곳에 머물게 하면서
튼튼하게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양나라 지방에서는 날마다 사자를 보내 구원병을 요청했지만, 주아부는 들어
주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황제에게 직접 글을 올려 호소하였고, 이에 황제도
양나라 지방에 구원병을 파견하라고 주아부에게 명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아부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주아부는 믿을 만한 부하를 시켜 날랜 기습 부대로 반란군의 보급로를
차단해 버렸다. 그 후 보급로가 끊겨 굶주림에 시달린 반란군은 사력을 다해
싸움을 걸어 왔다. 하지만 주아부는 맞서 싸우기는커녕 쳐다보지도 않았다.
어느 날인가는 병사들 중 일부가 크게 소란을 피우며 떠들어 댔지만, 주아부는
장막 안 침상에 누워 잠을 자면서 내다보지도 않았다. 그 소란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연 잠잠해졌다.
그 뒤로도 반란군은 매일같이 공격해 들어왔지만, 주아부는 명령을 내려 절대
응전하지 말도록 했다. 반란군은 정예 부대를 투입해 성벽을 허물어뜨리려 했지만,
철통같은 방어벽을 결코 뚫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해 봐도 성과가 없자
반란군은 이제 제 풀에 지쳐 철수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때였다.
이제까지 그토록 맞서 싸울 생각도 하지 않던 주아부가 전군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모든 병사들이 굳게 닫혔던 성문을 열고 한꺼번에 몰려나가며
반란군을 포위해 들어갔다. 삽시간에 반란군은 싸워 보지도 못하고 대패당했다.
주아부는 그 여세를 몰아 반란군을 끝까지 추적해 궤멸시켰다. 이때 반란군의
총소이던 오나라 왕비는 간신히 목숨을 건져 양자강 남쪽의 단도현까지 도망쳤다.
그러나 그는 그 지방 사람들에게 죽음을 당했고, 그렇게 하여 반란은 3개월 만에
진압되었다.
실로 오, 초 7국 반란의 진압에 있어 주아부는 일등 공신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주아부는 그 공로로 승상의 자리까지 올라갔다.
그 후 황제가 세상을 뜨고, 태자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니 바로 경제였다.
그러나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법, 정상에 올라간 주아부의 내리막길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
주아부는 자신을 과신하는 성격이었다. 특히 오, 초 7국의 반란을 진압하고 난
후 그 성격은 더욱 강해졌다.
한나라 초기에 왕조를 흔든 2대 사건으로 여씨의 전횡과 오, 초 7국의 난이
있었는데, 주아부와 그의 아버지 주발이 각각 이 위기를 해결했던 것이다. 그래서
주아부는 자기들 부자가 아니었으면 한나라가 망했으리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 결과 주아부가 황제에게 간섭하는 일이 차츰 많아졌다. 율희의 아들을
태자에서 폐위시키려는 경제의 생각에 주아부는 강력하게 반대했으며, 경제의
부인인 왕부인의 오빠를 제후로 임명하려 할 때도 격렬히 반대했다.
"고조(유방)의 말씀에 유씨가 아니면 왕이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공적이 없는 사람은 제후가 될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자 경제는 매우 기분이 상했다. 그렇지만 결국 그를 제후로 임명하지
못했다. 그 뒤 흉노에서 상당한 지위에 있던 여섯 명이 한나라에 투항해온 적이
있었다. 경제는 흉노에 대한 회유책의 일환으로 그들을 제후로 임명하고자 했다.
이때 주아부가 나서서 말했다.
"그 자들은 자기 군주를 배신하고 투항했습니다. 지금 그들을 제후로
우대한다면, 폐하께서는 장차 신하들이 배신할 때 어떻게 비난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경제는 주아부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자기 생각을
고집했다.
이에 주아부는 심기가 불편해져서 병을 핑계삼으며 조정 회의에 나가지 않았고
결국 해임되었다.
그 뒤 주아부는 아버지 주발의 장례를 미리 준비하기 위해 상방이라는 곳에서
갑옷과 방패 5백 개씩을 사들였다. 무덤에 묻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원래 상방은 궁궐에서 쓰는 물건만 만들던
곳인데, 주아부가 이를 어긴 것이었다.
그래서 주아부는 조사를 받게 되었고 그는 계속해서 묵비권을 행사했다. 경제가
이 소식을 듣더니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며 바로 정위에게 넘기도록 명령했다.
이에 주아부는 자살하려고 했지만, 아내가 극구 말렸다. 주아부는 그 뒤
정위에게 끌려가 5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단식하다 굶어 죽었다.
15. 좋은 정치란 도덕에 있을 뿐 혹독한 법에 있지 않다(장석지, 장탕)
공자는 '정치로써 이끌고 형벌로써 바로 잡는다면, 백성들이 비록 죄를 면할
수는 있지만 부끄러운 줄 모르게 된다.'고 하였고, 노자는 '큰 덕이 있는 사람은
덕을 내세우지 않으므로 덕을 지닌다. 그러나 덕이 적은 사람은 덕을 잃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덕이 없어진다. 그래서 법이 많을수록 도둑이 많아진다.'고 하였다.
사마천은 이렇게 말한다.
"법이 정치의 도구이기는 하지만, 백성들의 선악을 다스릴 수 있는 근본적인
방법은 아니다. 옛날 진나라는 법망이 그렇게 치밀했건만 온갖 간사함과 거짓이
싹텄다. 그래서 관리들은 책임을 피라고 백성들은 교묘하게 법망을 뚫고 나가
마침내 돌이킬 수 없는 망국의 길로 치달았던 것이다.
당시의 관리들은 불은 그대로 둔 채 끓는 물만 식히려는 식의 정치를 했다.
도덕을 말하는 사람들 역시 자기 직무에만 빠져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기에 공자는,
'송사를 처리하는 것은 나도 남과 다를 게 없다. 다만 나는 송사가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한나라는 모난 진나라의 형법을 고쳐서 둥글게 만들었으며, 수식을 버리고
소박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배를 통째로 삼키는 고기라도 빠져나갈 수 있을 만큼
법망이 너그러워졌다.
그런데도 관리들은 순수하여 간악한 데로 흐르지 않고, 백성들은 편안하기만
했다.
그러므로 정치하는 방법은 도덕에 있는 것이지 혹독한 법령에 있는 것이
아니다."
1)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장석지)
유창한 말솜씨에 혹한다면
장석지는 원래 호위 장교로 일했다. 그러나 10년이 되도록 승진도 되지 않고
공을 세우지도 못했다.
그러자 장석지는 한탄해 마지 않았다.
"오랫동안 벼슬하면서도 집안 재산만 축냈을 뿐 이뤄 놓은 것이 하나도
없구나!"
그러면서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으로 내려가려 했다. 그때 평소 그의 현명함을
알고 있었던 원앙이 그가 벼슬을 떠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황제에게 부탁하여
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기도록 하였다.
장석지는 황제를 면담한 자리에서 정치에 대한 의견을 말하려 했다. 그러자
황제는,
"추상적인 문제보다는 구체적인 일을 말해 보라."
고 지시했다.
이에 장석지는 진나라가 왜 천하를 잃었으며, 한나라는 어떻게 천하를 얻을 수
있었는가를 구체적으로 차근차근 장시간에 걸쳐 설명해 나갔다. 황제는 그 이야기에
흠뻑 빠져 들었고, 이튿날 그를 의전 장관에 임명하였다.
하루는 장석지가 황제를 수행하여 동물원에 갔다. 황제가 관리들에게 동물에
관해 여러 가지를 물었다. 하지만 10여 명이나 되는 관리들 중에서 대답을 확실히
하는 자가 없었다. 그때 그곳을 마침 지나가던 동물원 잡역부가 황제의 질문을
듣더니 막힘없이 대답을 하였다. 마치 메아리가 울려퍼지듯 그의 답변은
청산유수였다.
황제가 칭찬하며 이렇게 말했다.
"관리란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면서 장석지를 시켜 그 잡역부를 동물원 책임자로 임명하려 했다. 잠시
생각해 보던 장석지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폐하께서는 주발 대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야 물론 덕이 있는 사람이지."
그러자 장석지는 다시 물었다.
"그럼 동양후 장상여는 어떤 사람이라고 보십니까?"
"그도 역시 덕이 있지."
"폐하께서는 주발 대감과 동양후를 덕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셨는데, 그 두 분은
말을 할 때면 구변이 없어서 조리있게 이야기 하지 못하십니다. 그 잡역부처럼
수다스럽고 척척 대답하는 것은 그 분들은 결코 하실 수 없습니다.
또 진나라는 하급 서기관에게 정치를 맡긴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세밀한 점을
파헤쳐 내는 것을 자랑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겉으로만 형식을
보기 좋게 갖췄을 뿐 백성을 위한 바가 전혀 없었습니다. 따라서 황제는 스스로의
잘못을 들을 기회를 가지지 못한 채 나라가 날로 기울어 2세 황제에 드디어
무너진 것입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잡역부의 영리한 대답을 높이 평가하시고 그를 중용하려
하십니다. 그렇게 된다면 천하는 바람에 휩쓸리듯 앞을 다투어 말재주만 일삼으며
실질이 없어지지 않을까 염려되옵니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영향을 받는 것은 그림자가 주인 모양을 따르고 메아리가
소리에 대답하는 것보다 빠른 법입니다.
인사 문제는 신중히 다루지 않으면 안됩니다."
황제는 이 말을 듣고,
"과연 맞는 말이오."
하면서 자기 생각을 바꾸었다.
법이 잘못되면 백성들이 믿고 살 데가 없다
어느 날 태자가 동생과 함께 수레를 타고 어전 회의에 나가면서 궁궐 문에서
내리지 않고 그냥 지나갔다. 이에 장석지는 뒤쫓아가서 수레를 멈추게 한 다음,
"대궐문에서 내리지 않는 것은 불경죄에 해당됩니다."
라고 말하고 그것을 황제에게 고발했다. 이 소식이 태후에게 알려지자 황제는
태후에게 찾아가 관을 벗고 정중히 사과했다.
"자식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태후는 사람을 시켜 황제의 명령에 의해 태자를 용서받도록 시켰다.
태자와 동생은 그런 다음에야 대궐을 들어갈 수 있었다.
언젠가는 만조백관들이 황제를 수행하여 나들이를 간 적이 있었다. 황제는 북쪽
절벽 위에 올라가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옆에 있던 신 부인에게 가야금을
타게 하고 황제가 노래를 불렀는데, 그 곡조가 매우 처량하였다.
이윽고 황제가 신하들에게 말했다.
"슬프다. 나 역시 죽게 될텐데...."
저 암산의 아름답고 단단한 돌로 바깥 널을 만들고 모시와 솜을 썰어 틈을 막아
그 위를 옻으로 칠해 두면, 누구도 관을 열어 보지 못 할 것이다."
그러자 좌우에 있던 신하들이 일제히,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하고 말했다.
하지만 장석지만은 앞으로 나가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 관 안에 값나가는 보물을 넣어 둔다면 저 앞산 그대로를 바깥 널로 하고
쇠를 녹여 이를 굳혀 두더라도 꺼낼 틈이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 욕심낼 물건이 없다면 비록 돌로 만든 광이 없더라도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황제는 이 말을 듣더니,
"과연 그대의 말이 옳소."
라고 칭찬하는 것이었다.
그 얼마 후 황제가 나들이 행차를 나가며 다리에 이르렀을 때였다. 갑자기 한
사나이가 다리 밑에서 급히 나와 황제가 탄 수레를 끄는 말이 놀라 껑충 뛰었다.
호위병들이 즉시 그 사나이를 잡아 장석지에게 넘겼다.
장석지가 그를 취조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저는 장안에 살고 있사온데, 오늘 이 거리를 지나다가 행차소리가 들리기에
얼른 다리 밑에 숨었습니다. 얼마나 지나 이제는 지나가셨겠거니 하고 나왔는데,
아직 수레와 말이 보여 급히 달아났던 것입니다."
잠시 후 장석지는 판결을 내렸다. 그것은 혼자 행차를 범한 것이므로 벌금형에
해당된다는 판결이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황제는 매우 화가 났다.
"그 놈은 내 말을 크게 놀라게 했던 놈이다. 다행히 내 말이 순했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나까지 부상당할 뻔했다.
그런 놈을 겨우 벌금형에 그치다니 말이 되는가!"
이에 장석지는 황제를 찾아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법이란 황제께서 천하의 백성들과 함께 평등하게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법을
적용하는 데 지나치게 되면, 그 법은 백성들의 신뢰를 잃게 됩니다.
이번 사건만 해도 폐하께서 그 자리에서 즉시 죽이셨다면, 모르되, 법을
적용시키려 신에게 넘기셨으면 법에만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법 적용이 한번 잘못되면 법을 다스리는 관리들 모두가 제 멋대로 가볍고
무거운 것을 결정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백성들은 편안하게 믿고 살 곳이
없어집니다. 깊이 살피옵소서."
황제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그대 말이 옳소."
하는 것이었다.
그 뒤 종묘 제각에 있는 옥가락지를 훔친 자가 잡혔다. 황제는 크게 노하여 그
자를 장석지에게 넘겨 엄히 다스리도록 명령했다. 장석지는 '종묘에 차려 놓은
물건을 훔친 자'에 관한 법 조항을 적용시켜 '처형시킨 다음 시체를 시장 바닥에
버리는 형'에 처하도록 했다. 그러자 황제는 펄쩍 뛰었다.
"그 놈은 무도하게도 선제(유방)의 사당에 있는 물건을 훔친 놈이다. 나는
그대가 그 놈의 삼족까지 멸해 주길 바랬다. 그런데 법률대로만 적용시키겠다니."
이에 장석지는 관을 벗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였다.
"황공하오나 법률로서는 이 이상 더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죄상이 같더라도 그
죄질에 따라 차등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가령 고조의 묘에 있는 흙을 한 줌 파가는 어리석은 백성이 있다면 폐하께서는
그 자도 삼족을 멸하시겠습니까?"
황제는 한참 생각하더니 태후와 상의한 뒤 장석지의 견해를 승인하기로 했다.
이 일로 장석지의 명성은 천하에 드날리게 되었다.
어려운 때는 몸을 굽혀라
그 뒤 황제가 죽고 태자가 뒤를 이었다. 그런데 장석지는 태자를 예전에 '대궐문
통행 사건'으로 탄핵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장석지는 처벌받지 않을까 두려웠다.
그래서 병을 핑계삼아 사직할까, 아니면 황제를 찾아 뵙고 사죄를 할까 하며
이생각 저생각 다 했으나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그러다가 결국 왕생이라는 현명한 선비의 의견을 듣고 황제를 찾아가
사죄하였다. 이때 황제는 조금도 그를 문책하지 않았다.
왕생은 노자의 학문에 정통한 처사였다. 하루는 나라의 부름을 받고 궁궐로
들어갔는데 그는 '내 버선이 풀어졌군'하고 중얼거리더니 장석지를 돌아다보고
말했다.
"내 버선 좀 매어주게."
이에 장석지는 바로 다가와 무릎을 꿇고 버선끈을 매어주었다. 궁궐을 나와서
누군가 왕생에게 물었다.
"왜 조정에서 장석지에게 욕을 보이셨습니까."
그러자 왕생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나이도 늙고 재주도 없는 사람이오. 그래서 그런 방법으로 장석지를 도울
수밖에 없었소."
그 사람은 지금 천하의 쟁쟁한 대신이요. 그래서 내가 그를 욕보여 무릎을 꿇고
버선끈을 매게 함으로써 그가 겸허하고 덕이 높은 선비라는 사실을 보여 주려
했던 것이오."
나라 안의 지사들은 이 사실을 알고 왕생을 칭찬하였고 또 장석지를
존경하였다.
2) 정치의 올바른 길이란 도덕에 있지 혹독한 법에 있지 않다(장탕)
고기를 훔친 죄로 쥐를 재판하다
장탕의 부친은 재판을 담당하던 한나라의 하급 관리였다.
어느 날인가 부친이 외출하게 되어 어린 장탕에게 집을 보라고 맡겼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와 보니 쥐가 고기를 물어가 버렸지 않은가.
부친은 화가 나서 장탕을 회초리로 쳤다.
그러자 장탕은 쥐구멍을 찾아 먹다 남은 고기와 함께 쥐를 끌어냈다. 그리고 몇
대 내려친 다음 쥐를 묶어 놓고 재판을 열었다.
우선 영장을 만들고 이어서 공술서를 작성하여 논고하더니 이어 구형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마당 끝에 쥐와 증거물인 고기를 내놓고 판결문을 읽더니
찢어 죽이는 벌에 처하는 것이었다.
그 광경을 낱낱이 보고 있던 부친은 크게 놀랐다. 그리고 그 판결문을 읽어
보고는 다시 한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마치 숙달된 사법관이 한 것처럼 나무랄
데가 한 곳도 없는 게 아닌가.
그 이후 부친은 장탕에게 자기가 쓰던 관청의 판결문을 대신 쓰도록 했다.
법이란 사람에 따라 다르게 적용된다
장탕은 커서도 법률에 밝아 정위 벼슬을 했다. 그런데 그는 원래 자신의 본심을
겉에 드러내지 않는 사나이로 사람을 교묘히 움직이는 재능이 있었다.
그가 아직 하급 관리였을 무렵 장사를 한 적도 있었는데, 그때 장안의
부호들과도 폭넓게 사귈 기회가 있었다.
그 뒤 대신으로 승진하자 이름 있는 사대부를 가까이 했고, 자기 비위에 맞지
않는 자에 대해서도 겉으로는 정중한 태도로 대해 주었다.
당시 무제는 유학에 관심이 높았다. 그리하여 장탕은 재판의 기본 원리를
유교경전에 두었다. 그러기 위해서 장탕은 "상서"나 "춘추"에 정통한 자를
부관으로 임명하여 도움을 받았다.
또한 이제껏 판례가 없는 안건의 재가를 왕에게 구할 때는 미리 근거가 되는
자료를 함께 제출했다. 그리고 무제가 뜻에 따랐으며, 그럴 때는 언제나 자신의
부하 가운데서 유능한 인물의 이름을 들면서 이렇게 대답하곤 하였다.
"방금 꾸중하셨던 조항에 관해서 이 부하가 꼭 같은 취지의 반대를 했던
것입니다. 하오나 어리석은 저는, 그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저의 책임이옵니다."
그럴 때마다 장탕의 책임은 용서되었다.
또한 판결문을 올려서 칭찬을 들을 때에도 역시 부하 이름을 들면서,
"이것은 저의 판단이 아니옵니다. 이런 부하가 저에게 제안한 의견을 그대로
채용한 것이옵니다."
이같이 장탕은 항상 자기를 위하여 일하는 부하를 먼저 생각하고 추천했던
것이다.
또한 그는 무제가 중죄에 처하려는 안건에 대해서는 평소에 엄격한 판결을
내리는 자에게 맡기고, 죄를 사면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안건에 대해서는 가벼운
판결을 내리는 자에게 맡겼다.
그리고 재판에 회부된 자가 권세를 떨치고 있는 유력자인 경우에는 법이
허용하는 범위내에서 최대한으로 그 죄상을 높게 만들었다.
반대로 돈도 없고 지위도 없는 자라면,
"법에는 저촉되지만 아무쪼록 배려 있으시기를 바라옵니다."
하고 무제에게 아뢰어 번번이 풀려나게 만들었다.
그런 식으로 용서하면 처벌할 사람이 없다
정탕이 고관이 되고 나서부터는 부쩍 인품이 좋아졌다. 손님을 정중히 대접하고
친구의 자제 중 관리로 채용된 자나 가난한 형제의 일을 자기 일처럼 돌보았다.
또한 춥거나 덥거나 항상 중신들을 방문하여 문안을 드렸다.
이 때문에 적발은 가혹하고 법 적용이 반드시 공평하지는 않았어도 장탕에 대한
평판은 좋은 편이었다.
더구나 장탕의 수족이 되어 엄격히 법을 집행한 하급 관리 가운데는 학문을
숭상하는 자가 많았다. 그리하여 승상 공손홍도 장탕의 훌륭한 점을 자주
칭찬하곤 하였다.
그 무렵 회남왕과 형산왕 등의 모반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에 장탕은
사건의 관계자를 철저히 파헤쳤다.
무제는 이 사건에 대해 장탕이 매우 엄격하게 임하고 있는 줄 알면서도 관련자
가운데 엄조와 오피만을 사면시키려 했다. 그러나 장탕은 단호하게 반대를 하였다.
"오피는 원래 이 반역 음모를 계획한 인간입니다. 또한 엄조는 폐하의 신뢰가
두텁고 측근에서 폐하를 보좌할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제후와 은밀히 내통한
인간입니다.
만일 이 두 사람을 용서하신다면 앞으로 처벌한 만한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무제는 장타의 의견이 옳다고 여기고 그의 판결을 승인했다.
이처럼 특히 재판에 관한 일이라면 장탕은 중신의 간섭도 물리치고 자신의
책임으로 처리했다.
그러므로 그 공적은 거의 모두 장탕의 것이 되었다.
그리하여 장탕에 대한 무제의 신임은 더욱 두터워지더니 드디어 어사대부로
승진하기에 이르렀다.
고개숙인 백면서생
그 뒤 장탕이 회의에 참석해 발언하거나 국가의 재정 문제를 언급하면, 무제는
날이 저물도록 식사하는 것까지 잊어가며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승상은 이름뿐인 존재가 되었고 중요 사항은 거의 다 장탕의 의견에 따라
결정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난국을 헤쳐 나가기 위해 정부가 계획을 세워 지시를 하여도 그
성과가 오르기 전에 각 지방의 악덕 관리가 백성을 착취하여 모처럼의 계획도
엉망이 되어 버렸다.
그러한 관리에 대해서는 엄벌로 다스렸지만 그 역시 별 효과가 없었다. 그 결과,
위로는 정부 고관으로부터 아래로는 서만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일들이 모두
장탕의 책임이라고 비난하고 나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탕이 앓아 누우면 무제가 손수 병 문안을 갈 만큼 무제의
신뢰는 절대적이었다.
그 무렵, 흉노가 화평을 청해 왔다. 그것을 수락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신하들을
소집해서 어전 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이때 박사인 적산이 입을 열었다.
"수락함이 마땅할까 아뢰옵니다."
무제가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적산은,
"예로부터 무기는 불길한 도구라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함부로 사용해선
안됩니다.
일찍이 고조(유방)께서는 흉노 토벌을 위해 군대를 일으키셨지만 평성에서
고전에 빠져 결국은 협정을 맺고 철수했습니다. 하지만 혜제, 여태후의 시대에는
싸움이 없었으므로 백성들은 평화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의 시대에는 흉노와 자주 싸움을 벌여 그 때문에 북방의 땅은
또다시 황폐해졌던 것입니다.
또한 경제의 시대에는 오, 초 7국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경제는 그 대책에 부심하여 황태후의 지시를 받기 위해 수개월 동안이나
황태후가 살고 계신 곳으로 매일 왕래해야만 했습니다.
가까스로 오, 초 7국의 난을 진압하자 지쳐 버리신 경제는 그 후 두 번 다시
전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은 풍요로운 생활을 영위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는 어떻습니까?
폐하께서는 흉노 토벌군을 일으키고 계시지만 그 결과 나라의 재원은 바닥이
드러나고 변경의 백성들은 몹시 빈궁해졌습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화평을 수락하시는 것이 상책인가 하옵니다."
무제는 다음으로 장탕의 의견을 구했다. 그러자 장탕은,
"적산은 학문을 겉핥기로 배웠기 때문에 세상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하며 적산을 반박했다.
이 말에 발끈한 적산은,
"말씀대로 저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장탕은 어떻습니까.
그의 충성심이야말로 겉치레가 아닙니까?
가령 전에 회남왕의 반란 사건을 취급했을 때 장탕은 어떻게 했습니까?
법을 뒤흔들어서 무리하게 제후들 다스린 결과 육친 사이에도 의심하게 되었고
중신들은 불안에 휩싸여 소신껏 정치를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장탕이야말로 거짓 충신입니다."
하며 장탕을 몰아부쳤다.
이 말에 무제는 기분이 나빠져서 적산에게 물었다.
"정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대를 태수로 임명할 테니 흉노의 침략을 철저하게
저지할 수 있겠는가?"
그러자 적산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것은 못하옵니다."
현령이라면 어떤가?"
"그것도 무리하옵니다."
"그럼 요새의 수비대장이라면 어떤가?"
여기서 적산은 생각하였다.
'이 이상 피하다간 옥리의 손에 인계될 지도 모른다.'
그래서,
"할 수 있겠습니다...."
라고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제는 그 말을 듣고 난 다음 적산을 어느 요새의 수비대장으로 전출해 버렸다.
이렇게 한 달쯤이 지났을 때 흉노는 그 요새에 침입하여 적산을 살해해 버렸다.
이 사건 이후 모든 신하들이 장탕의 권세에 겁을 먹게 되었다.
부하를 잘 써라
하동 사람 이문은 옛날에 장탕과 옥신각신하며 다툰 일이 있었다.
그리하여 후에 그의 벼슬이 높아지자 옛 원한을 갚기 위해 장탕을 탄핵하는 데
활용할 수 있는 자료를 모두 모아 계속 장탕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런데 장탕에게는 평소부터 아끼던 노알거라는 부하가 있었다.
알거는 장탕이 이문에 대해 심상치 않은 감정을 품고 있음을 알고 이문의
약점을 잡아 이문을 고발하게 했다. 그러자 장탕은 죄상을 심리하여 사형 판결을
내렸다.
물론 장탕은 그 고발 사건이 알거의 공작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무제가 장탕에게 물었다.
"이 사건이 어떻게 드러나게 되었는가."
그러자 장탕은 이렇게 시치미를 뗐다.
"이문의 패거리가 개인적인 원한을 풀려고 한 짓이겠지요."
그후 얼마 지나서였다. 알거가 여행 도중에 앓아 눕게 되어 어느 시골 여관에
묵게 되었다. 그러자 장탕은 일부러 그곳에 내려가 문병을 하고 다리까지 주물러
주었다.
사면초가
당시 한나라의 제후국인 조나라에서는 제철업이 번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나라 왕은 중앙에서 파견되어 온 감독관의 행동에 대해 몇 차례나
고소했으나, 그때마다 장탕에 의해 기각되고 말았다.
그 때문에 조왕은 장탕에게 원한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래서 그의 부정을
캐내고 있었다. 또한 조왕은 알거에 의해 취조받은 일도 있어서 알거에게도
원한을 품고 있었다.
조왕은 장탕이 알거의 문병을 하러 간 사실이 있다는 걸 알자 때를 놓치지 않고
무제에게 일러 바쳤다.
"장탕은 중신의 몸으로 일개 말단 관리에 불과한 알거를 문병했을 뿐 아니라
다리까지 주물러 주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 두 사람이 공모하여 도리에 벗어난 나쁜 짓을 저지르고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리하여 이 사건은 정위 앞으로 회부되었다. 그때 알거는 병사하였기 때문에,
그 아우가 공범자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나 장탕은 그 권세가
너무 컸기 때문에 무사할 수 있었다. 그 후 얼마가 지나 장탕이 어떤 사건의 범인
취조 때문에 감옥으로 왔다가 여기서 알거의 아우를 만나게 되었다.
깜짝 놀란 장탕은 어떻게든 그를 풀어 주려고 생각했지만, 일단 그 자리에서는
일부러 모르는 척했다.
하지만 알거의 아우는 장탕이 자기를 버린 것이라 착각하고 성이 나서 사람을
시켜 장탕을 고발했다.
"장탕은 형과 공모하여 이문을 끌어넣은 장본인입니다."
그리하여 이 문제가 비화되었고, 이 사건은 감선이라는 자가 담당하게 되었다.
그런데 감선은 전에 장탕과 충돌한 적이 있는 대신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
기회에 사건의 배후 관계를 철저하게 조사하여 장탕을 얽어 넣으려 했다.
그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이번에는 효문제의 능에서 도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에 대해서 승상 청책은 장탕과 같이 입궐하여 두 사람의 연대 책임으로
감독이 불충분한 데 대한 사과를 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장탕은 그렇게 하기로 약속하고도 막상 어전에 들어가 고하게 되자 능을
경호하는 것은 승상의 책임이므로 자기는 관계가 없다고 발뺌을 하면서 사죄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승상이 혼자서 사죄했고 이에 무제는 어사대부 장탕에게 사건의
조사를 명했다.
장탕은 이 명령을 기화로 책임자인 승상을 옭아 넣으려 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승상은 안절부절을 못했다.
그러자 승상의 부관들은 장탕을 원망하면서 어떻게든 장탕을 실각시킬 기회를
노리게 되었다.
그 가운데 하나인 주매신은 "춘추"에 정통해 있었다.
일찍이 엄조가 그 점을 높이 사서 무제에게 추천했던 것이다.
원래 주매신은 "초사"에도 조예가 깊었으므로, 엄조와 함께 무제의 주목을
끌어 무제를 측근에서 섬기게 되었다.
그 무렵에 장탕은 아직 하급 관리였는데 주매신 등의 앞에 나오면 엎드려서
명령을 받는 처지였다.
그러나 장탕이 정위로 승진하면서 회남왕 사건을 담당하여 엄조를 실각시켰을
때 엄조의 은혜를 입고 있던 주매신은 마음속으로 장탕의 처사를 원망하고
있었다.
그 뒤 장탕이 어사대부가 되었을 때 주매신도 회계군 태수에 발탁되었다가 몇
년 후 주매신은 법에 저촉되어 부관으로 좌천되었다.
그 무렵에 어떤 일 때문에 주매신이 장탕을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장탕은
의자에 몸을 뒤로 젖히고 앉은 채 부하를 대하는 것과 같은 태도로 주매신을
맞이하는 것이 아닌가.
주매신은 혈기 왕성한 초나라 사람으로 이런 대접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때는 어쩔 수가 없었다. 이러한 연유로 기회가 오면 장탕을 혼내 주려 벼르게
되었다.
또한 같은 부관 중 한 사람인 왕조는 법에 정통하고 우내사까지 지낸
인물이었다.
또 한 명의 부관인 변통도 유세술을 배웠고 남에게 자기 싫어했다.
이 세 사람은 모두가 전에는 장탕보다 높은 지위에 있었던 사람들인데, 지금은
부관으로 좌천되어 장탕 밑에 있었던 것이다.
장탕은 이 세 사람의 부관이 일찍이 자기보다 높은 지위에 있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언제나 보란 듯이 모욕을 주었던 것이다.
원한이 골수에 사무쳐 있던 세 사람은 상의 끝에 승상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장탕은 승상 어른과 같이 무제에게 사죄할 것을 약속했으면서도 어전에서
승상을 배반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요즘에는 승상 어른께 죄를 씌우려 벼르고 있습니다. 이는 반드시
어른 대신 승상 지위에 오르려는 음모로 보입니다.
지금 그를 실각시키지 않으면 다시 돌이킬 수가 없어집니다. 실은 저희가
장탕을 실각시킬 만한 자료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에 승상은 즉각 관리에게 명하여 장탕의 죄를 알고 있는 전신 등을 잡아들여
취조했다.
그러자 전신은 이렇게 증언했다.
"장탕은 재정 문제에 대해 보고할 때는 미리 그 정보를 저희들에게 알려
주시었습니다.
그리하여 저희들은 물건을 매점해 놓았다가 값이 뛸 때 팔아서 이윤을 올리고는
그것을 장탕 대감과 반씩 나누었던 것입니다."
취조가 계속되는 동안 전신 등의 증언이 하나도 남김 없이 무제의 귀에
들어갔다.
궁금하던 무제가 직접 장탕에게 하문했다.
"재정 정책이 실시되기도 전에 상인들 귀에 들어가 물건을 매점한다 하니
계획을 밖에다 누설하는 자가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장탕은 직책상의 해명은 할 생각도 하지 않고 오히려 놀라는 시늉을 하면서
대답했다.
"그럴 수 있을 듯합니다."
죽어서 무죄를 증명하다
그 후 감선이 한술 더 떠서 알거에 관한 일을 무제에게 소상히 주상했다.
무제는 장탕이 이제껏 자기를 속였다고 생각해 차례로 8명씩이나 검찰관을
보내어 죄상을 추궁했다.
그런데 장탕은 그때마다 증거를 제시하면 반론하면서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자 무제는 장탕의 옛 동료였던 조우에게 취조를 명했다.
조우는 장탕을 나무랐다.
"너무도 최후가 더럽지 않은가. 자네가 일가 몰살의 판결을 내린 자가 얼마나
많은 지 생각이나 해 보게.
증거도 이미 충분할 만큼 갖춰져 있지만 폐하는 자네를 차마 처형하지 못하고
자결하기를 원하고 계시네.
이제는 더 이상 변명하지 않는 게 좋겠네."
이에 장탕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황제에게 보내는 상주문을 썼다.
"장탕은 아무런 공도 없이 하급 관리의 몸으로 폐하의 은총을 입고 삼공에
이르렀습니다만,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한 채 지내 왔습니다. 그러나 저의 죄는
억울하옵게도 세 명의 부관들이 날조한 것이옵니다.
그리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무제가 장탕이 죽고 나서 유산을 조사시켜 보니 고작 5백 금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것도 모두 봉록이나 하사품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장탕의 형제와 자식들은 의논 끝에 장례만은 성대히 치르자고 했으나
모친이 반대했다.
"그 아이는 중신의 몸으로 불명예스러운 죄록으로 죽은 것이다. 성대한
장례라니 당치도 않은 일이다."
그리하여 그 시체는 서민과 같이 허름한 관에 넣어 손수레로 운반되었다.
무제는 이 말을 듣고 감동했다.
"그런 어머니가 있었기에 장탕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무제는 다시금 철저한 조사를 한 끝에 세 사람의 부관이
무고했음을 밝혀내고 그들을 벌하여 주살했다. 승상 정책도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살하였다.
무제는 장탕을 잃은 것을 크게 후회하고는, 그의 아들 안세를 높은 자리에
앉혔다.
사마천은 이렇게 말한다.
"장탕은 지혜를 다해 황제의 뜻을 살피며 자신의 말과 행동을 맞추는 한편,
옳고 그른 것을 따져 옳은 것을 굳게 지켰다. 그래서 그로 인해 나라도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장탕이 죽은 후 법망은 더욱 치밀해져서 관리들은 억지로 법을 냉혹하게
적용시켰기 때문에 정사가 차츰 쇠퇴해 갔다. 그리하여 신하들은 다만 실수없이
자리 지키기에 급급할 뿐 일체의 창조적인 논의를 할 겨를조차 없었다."
16. 기러기의 큰 날개를 가졌어도 때를 만나지 못한다면(공손홍, 원고생, 동중서)
1) 높아지려거든 먼저 몸을 낮춰라(공손홍)
마흔에야 학문을 시작하다
공손홍은 젊어서 옥리로 있다가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파면되었다. 그 후 그는
바닷가에서 돼지를 키우며 가난하게 살았다. 마흔이 넘어서야 그는 비로소
"춘추"등 학문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무제가 즉위하고부터 학문을 장려하고 학자를 우대하게 되었다. 무제는
전국에 유능한 선비를 추천하게 했는데, 이때 공손홍도 추천될 수 있었다. 그때
공손홍의 나이는 이미 예순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흉농에 사신으로 다녀와서 올린 보고서가 무제의 마음을
거슬렸으므로 무능자로 간주되어야 했다. 그러자 그는 병을 핑계삼아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후 5년이 지나 나라에서는 다시 선비를 추천하게 했는데, 공손홍은 또다시
추천되었다.
이에 공손홍은 거듭 사양했다.
"저는 전에 벼슬을 받은 적이 있었지만 무능한 탓으로 벼슬을 그만 두었습니다.
그러니 부디 다른 유능한 사람을 추천해 주십시오."
하지만 그 지방 유지들은 기어코 그를 추천했다. 그래서 그는 서울에
올라갔는데, 각지에서 추천되어 올라온 선비들은 백여 명 쯤 되었다.
나라에서는 문제를 내어 답안을 써 보게 했는데, 공손홍의 성적은 그 중
하위였다. 그러나 그 답안들을 보던 황제는 공손홍의 답안을 으뜸이라 말하고
그를 불러 들였다. 그리고 황제는 공손홍의 의젓한 풍모가 매우 마음에 들어
박사에 임명하였다.
공손홍은 대인의 풍포를 지녔으며, 견문이 넓었다.
또 그는 언제나,
"임금의 병은 마음이 넓지 못한 데 있고, 신하의 병은 검소하고 절약할 줄
모르는 데 있다."
하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실제로 항상 베로 이불을 만들었으며, 상에는 한 접시
이상의 고기를 올려놓지 않았다. 그리고 계모가 죽었을 때도 3년상을 치렀다.
조정에서의 회의 때에는 어떤 문제에 대해 찬성할 수 있는 점과 찬성할 수 없는
점을 함께 말해 황제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이끌어 갔다. 또 언제나
상대방의 잘못을 정면으로 지적하여 공개적으로 논쟁을 벌이는 일을 하지 않았다.
황제는 공손홍의 언행이 중후하고 여유 있으며 법률과 사무에 정통할 뿐 아니라
거기에 유학의 이념을 세련되게 가미하는 점을 매우 높이 평가해 그를 총애했다.
그는 또 자기의 제안이 황제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아도 조정에서 캐고 따지는
일이 없었다. 그럴 때는 급암이라는 대신과 함께 황제가 한가한 틈에 찾아가 따로
만났다. 그때도 급암이 먼저 말을 꺼내고 자신은 뒤에 동의하는 식으로 했다.
그렇게 되면 황제는 언제나 기분 좋게 그것을 받아들이곤 했다.
학문이 성해야 천하가 태평하다
그 후 공손홍은 학문이 침체되어 있음을 걱정하여 황제에게 상소문을 올렸다.
"폐하께서는 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짐이 듣건대 백성을 이끄는 데 예절로 하고 풍속을 교화하는 데는 음악으로써
한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예절은 무너지고 음악은 쓰이지 않아 짐은 매우
슬퍼한다.
그래서 천하의 현명한 선비들을 빠짐없이 등용시키고자 한다. 이로써 학문을
권장하되 강론과 토의로 널리 가르치고, 예절을 일으켜 천하에 모범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니 그대들은 박사나 제자들과 협의해서 학문을 널리 권장하여 현명한
인재를 배출시키라.'
원래 하, 은, 주 3대 때는 마을마다 학교가 있었습니다. 이를 하에서는 교,
은에서는 서, 주에서는 상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선은 천하에 널리 알리고, 반면
악은 엄격히 처벌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높은 덕을 밝히고 큰 지혜를 열어서 학문을 권장하고 예를
닦으며 어진 선비를 격려하시고 계십니다. 이야말로 태평성대의 근원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옛날의 제도를 바탕으로 하여 학문을 부흥시킬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백성 가운데 예의와 품행이 단정한 자를 뽑아 박사를 보좌하는 제자로
삼게 해 주시고, 어른을 공경하며 언행이 일치하는 젊은이들에게는 학업의 기회를
주십시오. 그리하여 1년이 지나면 모두 시험을 치르게 하여 뛰어난 자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도록 해 주십시오.
그러나 학업을 게을리하거나 재주가 모자라는 자는 즉시 돌려보내십시오.
아울러 예를 다스리는 관리에게도 뛰어난 경우에는 승진과 연전의 기회를
주시기 바랍니다. 이를테면 경서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사람부터 채용하도록 해
주십시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폐하의 가르침과 베푸심이 아래 백성들에게까지
분명히 퍼지게 될 것입니다."
이 글을 읽고 난 무제는,
"정말 좋은 제안이오."
라고 승인하였다.
이때부터 천하의 뜻있는 사람들이 학문에 정진하게 되었다.
자신을 높이려거든 먼저 낮춰라
언젠가 공손홍은 모든 대신들과 어떤 문제를 논의하다가 이렇게 황제에게
얘기하자고 합의해 놓고는 정작 황제 앞에 가서는 다른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급암이 황제에게 공손홍을 비난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공손홍은 처음에 신 등과 함께 이 계획을 세워놓고는 이제 와서 다른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불충스런 행동입니다."
이에 황제가 공손홍에게 물었다.
"이 말이 사실이오?"
그러자 공손홍은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신을 아는 사람은 신을 충성되다고 생각합니다만, 신을 모르는 사람은
불충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황제는 공손홍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 뒤부터 주위의 대신들이 공손홍을 헐뜯어도 황제는 더욱 그를 총애할
뿐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승상 다음으로 높은 자리인 어사대부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 무렵 한나라는 북쪽 국경 지방의 삭방군에 성을 쌓고 있었다. 이때
공손홍은 그것이 별 필요없는 일에 국력을 소모하게 만들어 결국 나라를 피폐하게
만들 뿐이라며 몇 번에 걸쳐 황제에게 중지하자고 간언했다.
그러자 황제는 주매신 등에게 명령하여 공손홍을 비판케 하고 삭방군을
방어해서 얻는 이점 10가지를 제시하도록 했다.
이쯤되자 공손홍은 한마디 변명조차 않고 이렇게 사죄했다.
"신은 산동의 촌사람이라 그 이익이 그토록 클 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삭방군을 튼튼히 다스리는 일에 주력하는 것이 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급암이 또다시 공손홍을 비난했다.
"공손홍은 지위가 삼공에 있으며, 그 봉록도 매우 많습니다. 그런데도 베를 이불
삼아 덮고 있으니, 이는 거짓된 행동입니다."
이 말에 황제가 과연 사실이냐고 공손홍에게 묻자, 그는 사죄하며 대답했다.
"급암의 비판은 옳습니다. 지금 조정 대신 중 급암처럼 신과 친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 그가 오늘 조정에서 신을 비판했는데, 그것은 참으로 신의 결점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신이 3공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베 이불을 덮고 있는 것은 참으로 마음에도 없는
일을 하여 겉치레를 하며, 이름을 날려 보고자 하는 생각에서 한 행동이었습니다.
하오나 관중은 재상이 되어 세 부인에게 살림을 차려 주며, 그 사치한 생활이
임금과 맞먹었다고 합니다. 이는 임금에 대해 잘못된 행동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에 비해 안영은 재상이 되었지만 밥상에 두 가지 고기 반찬을 놓지 않았으며,
부인에게 비단 옷을 입히지 않았습니다. 이는 아래로 백성들의 생활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지금 신은 어사대부의 지위에 있으면서 베 이불을 덮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니
3공에서 말단 관리까지 차별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급암의 말과 같은
죄를 짓게 된 것입니다.
만약 급암의 충성이 아니었던들 폐하께서 어떻게 이런 말을 들으실 수
있었겠습니까?"
이 말에 황제는 그의 겸손함을 더욱 높이 평가하여 후대하더니 마침내 그를
승상에 임명하였다. 그 당시 승상은 제후가 아니고서는 임명되지 않았던 것인데,
공손홍이 승상으로 된 것은 파격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공손홍은 이렇듯 겸손하고 또 겉으로 너그러워 보였지만, 실제로는
음흉하고 시기심이 많았다. 자기와 사이가 안 좋은 사람에게도 겉으로는 친한
척했지만, 반드시 그를 보복했다. 그래서 주보언을 죽이고 동중서를 귀양가게 만든
것도 모두 공손홍이 한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밥상에는 고기를 한 가지 밖에 놓지 않았고 현미로 밥을 지어
먹었으며, 한편 옛 친구나 친한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하면 있는 재산을 모두 털어
도와 주었다. 그래서 그의 집에는 재산이라곤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2) 곡학아세는 학자의 길이 아니다(원고생)
원고생은 "시경"에 능통하여 경제 때에 박사가 되었다.
언젠가는 조정 회의석상에서 황생이라는 선비와 논쟁이 벌어졌다.
황생이 먼저 말했다.
"은나라 탕왕과 주나라 무왕은 천명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 군주를 시해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자 원고생이 반박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폭군 걸왕과 주왕이 포악하고 난폭해서, 천하의 민심이 모두
탕왕과 무왕에게 쏠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탕왕과 무왕은 천하의 민심에 따라
걸과 주를 쳤던 것입니다.
또한 걸과 주의 백성들은 폭군의 치하에 있기 싫어해 탕왕과 무왕에게 찾아왔기
때문에, 그들은 어쩔 수없이 천자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천명을 받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에 다시 황생이 말을 받았다.
"관은 아무리 낡아도 반드시 머리에 쓰고, 신은 아무리 새 것이라도 반드시
발에 신습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위에 있을 것과 아래에 있을 것이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걸과 주가 비록 천자의 도리를 잃었다고는 하지만, 분명히 위에 있어야 할
임금입니다. 이에 반해 탕왕과 무왕은 아무리 성인이라 해도 결국 아래에 있어야
할 신하입니다.
그런데 임금이 잘못했을 때 신하가 바른 말로써 허물을 바로잡아 줌으로써
임금을 받들지 않고,
도리어 임금의 허물을 핑계로 삼아 이를 무찌르고 스스로 임금의 자리에 오른
것입니다.
이것이 시해와 반역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에 원고생이 다시 반박했다.
"그렇다면 고조 황제가 진나라를 대신하여 천자의 자리에 오른 것도
잘못이겠습니까?"
그러자 그때까지 가만히 듣고 있던 경제가 말했다.
"고기를 먹으면서 말의 간을 먹지 않는다고 해서 (말의 간은 독성이 있어서
먹으면 죽는다고 한다) 고기 맛을 모른다고 말할 수 없다.
또 학문을 하는 사람이 '탕왕과 무왕이 천명을 받았는가'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어리석다고 말할 수 없다."
이렇게 해서 논쟁은 중단되었다. 그 뒤로 어느 학자도 천명과 시해에 대해 감히
논쟁하려는 자가 없었다
멧돼지와의 결투
그 무렵 경제의 어머니인 두태후는 "노자"의 글을 좋아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원고생을 불러 "노자"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원고생은 즉시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무식한 하인들의 말과 같아 취할 바가 없습니다."
이에 태후가 화를 내며 말했다.
"내가 그럼 그대에게 강제 노역형에 처하도록 해 줄까."
그러면서 원고행을 멧돼지 우리에 집어넣고 멧돼지와 싸우도록 시켰다. 이때
경제는 원고생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아는지라, 그가 돼지 우리로 들어갈 때 몰래
잘 드는 비수를 주었다. 그래서 원고생은 우리에 들어가자마자 정확히 멧돼지의
염통을 찔러 돼지를 쓰러뜨렸다.
이렇게 되자 태후도 다시 처벌할 수도 없게 되어 용서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무제가 즉위한 후, 무제는 원고생을 다시 조정에 기용하고자 했다. 그러자
평소 원고생의 꼼꼼한 성격을 싫어하던 신하들이,
"원고생은 이미 너무 늙었습니다. 그를 이제 기용해 봤자 별로 할 일이
없습니다."
하며 헐뜯었다.
그래서 무제도 그를 등용시키지 못했다. 이때 원고생의 나이는 이미 아흔 살이
넘고 있었다. 원고행이 무제의 부름을 받고 조정에 들어갔을 때, 소장학자로
유명한 공손홍도 그 자리에 와 있었다. 공손홍은 못마땅한 눈초리로 원고생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원고생은 그런 공손홍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 자리가 파하자, 원고생이 공손홍을 불러 말했다.
"내가 듣건대 조정에 온갖 아첨배들이 날뛰고 그대가 그들과 가까이 한다는
소문도 있으나 나는 믿지 않소.
그대는 상당한 학문을 닦았고 아직도 젊으니 굳건한 신념을 가지고 더욱 노력해
올바른 학문을 세워 주기 바라오.
결코 학문을 굽혀서 권세에 아첨하는 그런 무리가 되어서는 안 되오."
공손홍도 원고생의 깊은 뜻에 고개 숙일 수밖에 없었다.
3) 3년 동안 집안 뜰조차 쳐다보지 않다(동중서)
동중서는 "춘추"에 정통하여 경제 때 박사에 임명되었다. 그는 장막을 치고
그 장막 속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강의했다.
제자를 가르칠 때는 선배가 새로 들어온 학생을 가르치는 식으로 학습했기
때문에, 어떤 학생들은 동중서의 얼굴을 알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동중서는 3년 동안이나 장막 속에 들어앉아 자기 집 정원조차 못 볼 정도로
학문에 열중하였다. 그는 모든 행동거지에 있어 예의에 맞지 않는 일은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학문을 하는 선비들은 모두 그를 스승으로 존경했다.
그 후 무제가 즉위하자, 동중서는 강도 지방의 재상이 되었다. 이때 그는
천재지변에 관심이 많아 "춘추"의 원리에 따라 음과 양, 두 기운이 서로
운행하는 이치를 추구했다. 그리하여 비를 오게 하기 위해서는 모든 양기를 닫아
버리고 음기를 발산시켰으며, 비를 그치게 하는 데는 그 반대로 하였다.
이런 식으로 강도 지방 전역에서 시행해 한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무렵 우연히 요동 지방에 있는 고조의 사당이 불탄 적이 있었다.
이때 동중서를 평소 미워하고 있던 주보언이 그의 책을 훔쳐 황제에게 올렸다.
이에 황제는 여러 학자들을 불러 검토하게 하였는데 맹렬히 비난하는 자가
있었다. 그는 다름아닌 동중서의 제자였다. 그는 그 책이 스승이 쓴 것인 줄도
모르고 저속하고 어리석은 내용으로 가득 찼다고 비난했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황제는 동중서를 옥리의 손에 넘겨 처형시키려 했지만, 얼마 후 그를
용서해 주었다.
그 뒤부터 동중서는 다시는 천재지변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동중서는 사람됨이 청렴하고 정직했다. 그리고 학문에 뛰어났다.
공손홍조차도 "춘추"의 연구에 있어 동중서를 따르지 못했다. 그런데
공손홍은 세상의 흐름에 맞춰 처신함으로써 벼슬이 승상까지 올랐다. 그래서
동중서는 공손홍을 아첨배라고 생각했으며, 공손홍 역시 동중서를 미워했다.
어느 날 공손홍은,
"동중서만이 교서왕의 재상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황제에게 아뢰었다. 교서왕은 포악하기로 이름난 제후로 많은 신하를 죽였다.
즉 공손홍은 동중서를 교서왕에게 보내 죽게 만들 생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교서왕은 평소부터 동중서가 덕행이 높은 학자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오히려 그를 잘 대접하였다. 동중서는 몇 년간 교서왕 밑에서 일하다가 무사히
그만두고 나올 수 있었다.
그 후 동중서는 죽는 날까지 집에서 오직 글쓰는 작업에만 몰두했다.
실로 동중서만이 "춘추"에 정통했던 학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의 학문은
"공양전"에 전해오고 있다.
사마천은 이렇게 말했다.
"한나라가 일어난 지 80여 년, 천자의 마음은 바야흐로 학문에 쏠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훌륭한 인재를 모아 유가의 학문을 넓히려 하였다.
그 인재들은 모두 기러기와 같은 큰 날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참새나 제비
따위에게 시달림을 받아 돼지나 양을 치면서 살아야 했다.
만약 그들이 때를 만나지 못했다면, 어떻게 높은 지위에 오르며 그 이름을
만세에 드날릴 수 있었겠는가.
공손홍도 "춘추" 하나를 가지고 한낱 돼지 치는 평민에서 제후가 되었던
것이며, 이를 계기로 한나라에는 커다란 학문의 바람이 불게 되었던 것이다."
17. 군인은 군인의 임무에 따른 뿐이다(위청, 곽거병)
1) 흉노 토벌의 명자(위청)
어두웠던 소년 시절
위청의 어린 시절은 참으로 기구했다.
그의 아버지는 정계라는 사람인데 한무제의 동생이던 평양공주의 집사로
지내다가 그 집의 첩인 위오와 눈이 맞아 아들을 낳았으니, 바로 청이었다.(그의
동복 누이는 후에 무제의 총애를 받게 되었던 위자부였다)
청은 그 집에서 자랐는데, 종살이를 해야만 했다. 나이가 들어서야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가 양치는 소년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청이 다른 사람을 따라
감천궁의 감옥에 간 적이 있었다.
그때 죄수 중에 한 사람이 청의 관상을 보더니,
"너는 귀인의 상을 가지고 있다. 벼슬은 제후에 이르리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청이 크게 웃으며 대답했다.
"종놈으로 태어나 매나 맞지 않고 욕이나 듣지 않으면 다행이지요. 제후가
되다니 말도 안됩니다."
청은 장년이 되자 자기가 태어났던 평양공주의 집에 호위병으로 들어갔다.
당시 무제는 장모나 부인 등 주위에 온통 드센 여자들만 있었다. 마음이 맞는
사람은 오직 누이 평양공주밖에 없었다. 평양공주는 무제를 자기 집에 불러 자주
잔치를 벌여주었는데, 어느 날 위자부로 하여금 술시중을 들게 했다. 무제는
그녀를 몹시 마음에 들어했다. 이를 눈치챈 평양공주는 그녀를 궁으로 보내
후궁으로 삼게 하였다. 이때부터 청도 위자부의 성을 따라 위청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편 그때 황후는 아기를 갖지 못하고 있었다.
대신 위자부가 무제의 사랑을 받고 그 뒤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황후가 그
사실을 알고 매우 질투하였다. 화가 몹시 난 황후는 보복하기 위해 위청을
잡아들이라고 명령했다. 그래6서 위청이 잡혀 들어가 목숨이 위태로울 때 위처의
친구인 공손오가 청년들을 이끌고 달려와 그를 구원해줬다.
대장군 위청
이 소식을 들은 황제는 위청을 보호해주기 위해 그를 불러들여 벼슬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위씨의 동복 형제 모두에게 벼슬과 상금을 내렸다. 공손오도 위청을
도와준 공로로 벼슬을 얻었다.
몇 년 후 위청은 드디어 장군이 되어 흉노 정벌에 나서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위청은 유일하게 승리를 거둔 장군이었다. 그 이듬해에 위청의 누이 위자부는
아들을 낳고 정식으로 황후가 되었다.
이후에도 위청은 흉노 토벌에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이에 황제는 위청에게
엄청난 땅을 주고 거기장군으로 삼았다.
한무제 5년 봄, 무제는 다시 대규모의 흉노 토벌을 결심하고 거기장군 위청에게
기병 3만을 이끌고 출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위청의 목표는 흉노의 우현황이었다. 그런데 우현왕은 한나라 군사가 어차피
여기까지는 오지 못하리라 업신여기고 본영에서 술에 만취되어 있었다. 그러나
한나라 군사는 전격적으로 야습하여 우현왕을 일거에 포위했다.
그러자 우현왕은 당황하여 애첩 하나와 수백의 정예만을 데리고 야음을 틈타
포위망을 돌파하여 간신히 북방으로 도주했다.
한나라 병사들은 수백 리나 추적했으나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한군은 우현왕의 부왕 10여 명, 흉노의 남녀 1만 5천여
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가축 수십만 두를 포획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위청이 국경의 요새까지 철거해 버리자 무제는 즉각 위청을 대장군으로
승격시켰다.
이렇게 하여 모든 장군의 군대는 위청의 지휘하에 들어오게 되어 그는 대장군의
격식을 갖추고 늠름하게 장안으로 개선했다. 실로 오랜만에 흉노를 대파한
것이었다.
이때 무제는 친밀하게 말을 건넸다.
"대장군 위청, 그대는 스스로 병사의 선두에 서서 크게 승리하고, 흉노의 왕
10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에 그대에게 6천 호를 더 하사함과 아울러 그대의 아들 모두에게 제후의
직위를 주겠노라."
그러나 위청은 굳이 사양했다.
"신은 황송스럽게도 장군으로 등용되어 폐하의 위광에 힘입어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하오나 이는 오로지 장수들의 분전의 결과이옵니다.
지금 폐하께오서는 저에게 영지를 늘려주시온 데다가 아직 나이도 어리고
아무런 공도 없는 변변찮은 자식놈들에게까지 황송하게도 제후로 봉하시겠다
하시었습니다.
하오나 이는 저를 장군으로 임용하시어 장병의 사기를 돋구시려는 의도에
어긋나는 처사가
아니시옵니까. 어찌 이러한 은혜를 받자올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무제가 대답했다.
"아니, 나도 장수들의 전공을 잊은 것은 아니오.
당장이라도 조처할 작정이오."
하고는 바로 다음과 같은 조서를 어사에게 내렸다.
"호도군위 공손오는 세 차례 대장군을 따라 흉노를 쳤고, 본대를 잘 원호하여
부대장과 함께 적을 생포했다. 이로써 1천 5백 호의 영지를 주고 합기후에
임명한다.
도위 한열은 대장군을 따라 흉노 우현황의 본영을 습격하여 백병전을 결행했다.
이로써 1천 3백 호위 영지를 주고, 용액후에 임명한다.
기장군 공손하는 대장군을 따라 적의 부왕을 잡았다. 이로써 1천 3백 호의
여지를 주고 남교후에 임명한다.
경거장군 이채는 두 번 대장군을 따라 적의 부왕을 잡았다.
이로써 1천 6백 호의 영지를 주고, 낙안후에 임명한다."
이렇게 하여 모든 장수에게도 영지와 제후의 직위가 내려졌다.
부하를 아끼는 마음
이듬해 봄, 대장군 위청은 또다시 흉노 토벌에 출격하여 수천 명을 목베었다.
또다시 한 달 후, 토벌에 나선 위청은 수급과 포로를 합해 1만여의 전과를
올렸다.
그런데 이 무렵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다. 우장군 소건과 전장군 조신의 군사
3천여 기가 단독으로 선우의 주력군을 만나 하루 동안의 격전 끝에 전멸의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조신은 원래 흉노 출신으로 한나라에 귀순해서 부장이 된 사람이었다.
그는 고전의 틈바구니에서 흉노로부터 끈질긴 투항 권유를 받은 끝에 드디어
나머지 병사 8백을 데리고 선우에게 항복했다. 또한 우장군 소건은 전 병사를
잃고 제 몸 하나만 도망쳐 대장군에게 돌아왔다.
당연히 소건은 책임이 문제되었다. 위청은 부하들을 모아 놓고 그 처리에 대해
의논했다.
한 부하가 입을 열었다.
"대장군께서는 출진한 이래 부장을 벤 적이 없습니다. 지금 소건은 군을 버린
것입니다. 이 기회에 그를 베어서 장군의 위광을 보이셔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부하들은 반대했다.
"그것은 안됩니다. 소군이 아무리 견고해도 대군에게는 대적하지 않는다는 것이
병법의 상식입니다.
소건은 겨우 수천의 병력으로 선우의 수만 대군과 대적하여 분전하기를 하루
남짓, 병사를 모조리 잃으면서도 항복치 않고 스스로 귀대한 것입니다.
만일 이를 문제삼아 처형시킨다면 금후 이같은 경우에 돌아오지 말라는 것을
뜻합니다. 절대 베어서는 안 됩니다."
결국 위청이 결단을 내렸다.
"나는 폐하의 친척이기 때문에 장군직을 명령받고 있는 자이다. 내 위엄 따위를
문제삼지 말라. 위엄을 보이라는 의견은 말도 안된다.
그야 부장을 베는 것도 내 직권에는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폐하의 은총을
받들고 있을수록 요새 밖의 땅에서 멋대로 주벌을 행하기는 싫다. 폐하께 이러한
사정을 상세히 보고 드린 연후에 재가를 받도록 해야겠다.
그렇게 하는 것이 신하로서 권한을 조심하는 것이 될 줄 아는데 어떻게들
생각하는가?"
그러자 모두 찬성했다.
그리하여 소건은 목숨을 건지게 되어 황제에게 보내어졌고, 전투를 중단한 채
국경 안으로 철수했다.
서울로 송환된 우장군 소건은 관직을 박탈당하고 평민이 되었다.
베풀 줄 알아야 한다
위청은 흉노 토벌에서 귀환하여 천금을 하사 받았다. 그리고 당시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되어 있던 평양공주를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옛날 위청은 평양공주의 집에
노예의 신세나, 혹은 기껏 호위병에 지나지 않았었는데, 이제 주인 마님을
차지하게 된 것이었다.
한편 그 무렵, 무제의 마음은 위청의 누이인 위황후를 떠나 왕부인을 총애하고
있었다. 이때 영승이라는 자가 위청에게 이렇게 말했다.
"장군은 뛰어난 공훈도 없이 1만 호의 녹을 먹고 자제들은 셋이 모두 제후가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다만 한 가지, 귀공이 황후의 집안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폐하는
지금 왕부인을 총애하시지만 왕부인의 일족은 아직 불우한 채로 있습니다.
하사금 천금으로 왕부인의 부모를 위해 장수를 축수하는 잔치를 베푸심이
어떠하시겠습니까?"
위청은 그 말을 따라 5백 금을 들여서 잔치를 베풀었다.
그 소문을 들은 무제는 기뻐하면서 위청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위청은 영승의
진언을 그대로 왕에게 아뢰었다. 그러자 무제는 영승을 동해군의 도위에
임명하였다.
2) 불패의 젊은 영웅(곽거병)
곽거병은 위청의 여동생인 소아의 아들로서, 그녀가 무제의 귀여움을 받아
후궁이 되자 일찍부터 궁궐에서 살았다. 그리고 무제 7년의 정벌 때에는 18세로
종군하여 유격대를 지휘하고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이때의 공로로 관군후로 임명되고 또 3년 후에는 표기 장군에 임명되었다.
고난 속에서 자람 숙부 위청에 비해,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귀족 장군으로서
유달리 눈을 끄는 화려한 존재였다.
곽거병의 부대는 언제나 정선된 정예들만으로 구성되어 있어, 고참 부장의
부대의 병졸, 군마, 병기 등과는 비교가 안되었다.
그리고 곽거병은 그 강력한 기병과 함께 언제나 본대보다 앞장서서 대담하게
적진 깊숙이 진공해 들어갔다.
게다가 그의 부대는 행운도 따라 한번도 곤경에 빠진 적이 없었다. 그와 반대로
다른 장군들은 언제나 불운에 휘말려 어쩔 줄을 몰랐다.
그 때문에 곽거병에 대한 무제의 신임이 나날이 두터워지더니, 드디어 대장군
위청도 능가할 기세가 되었다.
흉노의 혼야왕도 서부 지역에서 번번이 한군에게 패하여 수만의 병졸을
잃었는데, 모두 곽거병의 군대에게 패배한 것이었다. 흉노의 선우는 격노하여 그
해 가을, 혼야왕을 처벌하기 위해 출두를 명했다.
이에 대해 혼야왕은 휴도왕 등과 공모하여 한나라에 항복할 결심을 하고 사자를
보내어 우선 변경의 수비를 맡고 있던 한군에게 그 뜻을 전했다.
때마침 한나라의 이식 장군이 황하 유역에 성채를 쌓고 있었다. 장군은
혼야왕의 사자를 맞이하자 즉각 무제에게 보고했다.
그러자 무제로서는 섣불리 믿을 수 없었다. 항복을 가장하고 들어와 변경을
습격할 우려는 충분했다. 그리하여 무제는 곽거병을 불러 군사를 이끌고
맞이하라고 했다.
곽거병의 군사는 황하를 건너 흔야황의 부대로 다가갔다. 그러자 혼야왕의
부장들이 등을 보이며 도망갈 기색을 보았다.
그것을 보자 곽거병은 혼야왕 진영에 뛰어들어 도망가려는 자 8천여 명을
순식간에 베어 버렸다.
이어 혼야왕만을 말에 태워서 무제에게 먼저 보내고, 자기는 항복한 군을
통솔하고 황하를 건너 귀로에 올랐다. 이때에 항복한 흉노는 수만을 헤아렸다.
장안에 도착한 곽거병에게 무제는 거액의 상금을 하사하고, 혼야왕에게는 1만
호의 봉지를 주어 탑음후에 임명하였다.
이어서 무제는 곽거병의 공을 칭송하면서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표기 장군 곽거병은 군사를 이끌고 흉노를 공격하여 서역왕 혼야왕과 그
부하를 모조리 우리 한나라에 귀순시켰다.
군량은 적의 양식을 빼앗아 충당하고 병졸을 강궁 1만여 명을 편입했다.
포악하고 강한 자는 죽여서 수급과 포로를 합쳐 8천여를 얻었고 더구나 우리
장병에는 전혀 손상이 없었다.
우리 장병은 거듭되는 토벌전을 잘도 견디어 주었다. 이리하여 황하
연안으로부터 요새밖에 이르는 땅에서 백성의 고초는 사라지고 영원한 평화가
찾아오려 하고 있다.
이로써 표기 장군 곽거병에게 1천 7백 호를 하사함과 동시에 주둔군을
반감하고, 백성들의 노역을 경감하노라.
그로부터 얼마 후 한나라는 귀순해 온 흉노를 변경의 옛 요새 바깥 땅에 분산
이주시켰다.
그들은 모두 오르도스의 땅에 있으면서 옛날 풍습을 유지한 채 한나라에 귀속해
살았다.
치열한 사막전
기원전 119년 봄, 무제는 대장군 위청, 표기장군 곽거병 2명을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대규모의 흉노 토벌 작전을 개시했다. 기병은 각각 5만, 여기에 보병,
수십만이 후속부대로 뒤따르고 있었다.
이때에도 정선된 정예 부대는 모두 곽거병 군에 배속되어 있었다.
원래 곽거병은 정양을 근거지로 삼고 선우와 대전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막 출정하려 할 때 포로를 잡아 문초하여 선우가 동쪽으로 이동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무제는 급히 작전을 변경하여 곽거병에게는 더욱 동쪽에서 출격하라고
명령했다.
대신 정양에는 위청의 군대를 보냈다.
이리하여 위청은 곽거병과 협력하여 흉노에 공격을 가하려고 사막 깊숙이
진격을 개시했다. 그 병력은 5만 명이었다.
이때 전에 흉노에 투항했던 조신이 선우에게 말했다.
"사막을 건너온다면 한나라 군사는 지쳐 있기 마련이니 작전을 잘 쓰면 무난히
적을 생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우는 정예군을 골라서 사막의 북쪽 기슭에 포진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우연히도 한군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위청 휘하의 군대는 국경에서 천여 리 진격한 지점에서 선우를 발견하여 즉각
진형을 정비했다.
위청은 무강거(판자로 에워싸고 포장을 씌운 차량)를 고리 모양으로 늘어놓아
본영으로 하고 5천 기를 적진으로 돌격시켰다. 흉노군도 약 1만 기를 내보내 이에
맞섰다.
마침 해가 저물 무렵이었는데 질풍이 모래를 휘말아 올리며 사정없이 얼굴을
때렸다. 양군이 모두 거의 상대방의 움직임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군은 좌우 양 날개의 병력을 투입해서 차츰 포위의 태세를 갖추어
갔다.
선우는 한군이 병력으로도 우세할 뿐 아니라, 투지도 왕성하여 이대로는 자기네
전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황혼 속을 노새 6마리가 끄는 수레를 타고
부하 수백 기와 함께 단숨에 한군의 포위망을 돌파하여 도주했다.
양군이 뒤섞인 혼란된 격전은 날이 저물어도 계속되어 양군이 거의 같은 숫자의
사상자를 냈다.
그러다가 사로잡은 포로의 입에서 선우가 이미 탈출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에 지체 없이 가볍게 무장한 기병이 어둠을 뚫고 선우를 추적했다. 대장군
위청도 직속 부대를 이끌고 추적했다.
그리하여 흉노는 대열이 흩어지며 도주하였고 새벽녘까지 2백 리 쯤 진격했으나
선우를 찾을 수는 없었다.
위청은 여세를 몰아 계속 흉노를 몰아붙이면서 전군에게 넉넉하게 음식을
제공하였다. 그리고 나서 이곳에서 하루를 머문 후 철수했는데 이때 성을 다시
쓰지 못하도록 완전히 불태우고 나머지 군량은 모두 가져왔다.
한편 대장군 위청이 선우와 대전하고 있을 때, 전장군인 이광과 우장군
조이기가 이끄는 부대는 본대와 떨어져 동쪽으로 진로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길을 잃고 전투에 참가하지 못했었다.
두 장군이 본대에 합류한 것은 본대가 사막의 남쪽까지 철수해 왔을 때였다.
위청은 보고서 작성을 위해 부관을 보내어 해명을 요구했다.
이때 이광은 보고서 작성을 거부하고 스스로 자결했으며, 조이기는 속죄금을
내고 평민으로 되었다.
이 전쟁에서 위청 휘하의 군대가 귀환하기까지 올린 전과는 포로, 수급을 합해
1만 9천에 이르렀다.
한편 흉노측에서는 선우가 열흘씩이나 행방불명이었기 때문에, 우욕여왕이
자립하여 선우를 자칭하고 있었다.
그러나 본래의 선우가 나타나자 우욕여왕은 깨끗이 본래의 지위로 돌아갔다.
패배란 없다
표기장군 곽거병의 군대는 위청군과 같은 규모였다.
다른 점은 휘하에 부사령급 막료가 없다는 것뿐이었다. 그런데도 흉노를 크게
격파하여 천리도 넘게 진격하는 전과를 올려 그 성과가 대장군 위청을 훨씬
상회하고 있었다.
개선한 후 무제는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표기장군 곽거병은 군을 통솔함에 있어 포로의 정예를 더하여 얼마 안 되는
장비를 가지고 대사막을 넘었다.
그리하여 획장거(강 이름)를 건너 흉노의 왕 비차기를 참살하고 좌대장의 군과
싸워서 그 깃발과 북을 빼앗았으며, 둔두왕, 한왕 등 3인과 장군, 대신을 비롯하여
83명을 사로잡았다.
아울러 낭거서산에서는 하늘에 제사지내고 고연산에서는 땅에 제사지냈으며,
한해(고비사막이라고도 하고, 바이칼호라고도 함)를 굽어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포로의 총수는 7만 4백 43명, 적군의 3할을 격멸시켰다. 더구나 군량은
적에게 뺏어 오지 깊숙이 침공하면서도 보급에 구애를 받지 않았다.
이로써 표기 장군에게 5천 8백 호를 하사한다."
빛과 그림자
표기장군 곽거병의 부하들은 부장에서 병졸에 이르기까지 상금을 받거나 승진한
자가 수없이 많았다. 이에 반하여 대장군 위청에게는 아무런 상금도 없고
부하에게도 영광을 얻은 자가 없었다.
이때부터 위청의 권위는 나날이 쇠퇴하고, 곽거병의 명망은 높아만 갔다. 위청은
친구나 식객들까지 썰물처럼 사라져 곽거병 주위로 모여들었다. 그의 추천만
있으면 쉽사리 관직, 작위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임안만은 그것을 옳게
생각지 않고 위청 밑에 머물러 있었다.
곽거병은 과묵하고 기골에 넘친 인물이었다. 무제가 그에게 손자와 오자의
병법을 배우라고 권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쟁은 이론이 아닙니다. 그 순간순간에 어떻게 결단을 내려야 하는가가
문제일 뿐입니다."
또한 그에게 커다란 저택을 하사하며 무제가 한번 가서 보고 오라고 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흉노가 망할 때까지는 저렇게 호화로운 저택에서 살겠다는 것을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무제는 더욱 더 그를 존중하게 되었다.
하지만 곽거병은 젊었을 때부터 무제의 측근에서 고위직에 있었기 때문에
부하를 위로할 줄을 몰랐다.
그가 출진할 때에는 무제가 친히 수레 10대 분의 좋은 음식을 내렸다.
그 식량은 개선할 때까지 남아돌아서 버리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으나,
그럼에도 사졸들은 굶주림에 허덕여야 했다.
또한 요새 바깥 땅에서 병사들이 굶주림 때문에 걸을 기력조차 잃고 있을
때에도 그는 장수들과 함께 공차기를 즐겼다.
곽거병은 언제나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미인박명이라고 이 출중한 장군은
불과 2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야 했다.
한편 위청은 인품이 인정스럽고 겸허하여 부하들의 인심을 사로잡는 정다움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망은 곽거병을 따르지 못했다.
언젠가 위청에게 그의 부하 소건이 물었다.
"왜 장군께서는 천하의 인물들과 교유하면서 그 이름을 빛내시지 않습니까?"
그러자 위청은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전에 몇몇 대신들이 서로 다투어 천하 인물들을 초빙하자, 황제께서는 이들을
매우 미워해 그들을 결국 극형에 처하셨다.
사대부를 가까이 하거나 어진 사람을 불러들이고 착하지 않은 사람을 물리치는
것은 처자께서 하실 일이다. 신하된 사람은 오직 법을 따르고 직책을 지키면
그것으로 족한 것 아닌가."
18. 서역으로 가는 비단길(장건)
흉노 공략을 발단으로 한나라와 서방 제국과의 교섭이 시작되었다. 이 때
서방의 길을 개척한 것이 장건이다.
한나라의 하급 관리에 불과했던 장건은 흉노족에게 사로잡혀 있던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귀중한 자료를 모아 후에 본국으로 들고 왔다. 이 보고 자료에 의해서
무제의 세계를 향한 꿈은 피어났고, 그 꿈은 차례차례로 장건의 후계자를 낳았다.
그러나 이 후계자들의 실태는 어떠했는가?
13년 만에 귀국한 장건
서방에 관한 지식은 장건에 의해 처음으로 전해졌다.
장건은 한중 지방 출신으로 낭(하급 관리)이 된 인물이다.
당시 무제는 흉노의 투항자들에게서 여러 가지 정보를 캐내고 있었다. 이를테면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 보면, 흉노는 월지의 왕을 쳐부수고 그 왕의 두 개골로
술잔을 삼았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월지는 서쪽으로 도주했으며, 흉노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적개심과
복수심을 불태우고 있었으나, 협력해서 흉노를 공격할 나라가 없다는 것이다.
때마침 흉노를 격멸하고자 기도하고 있던 한나라 조정에서도 이 정보를
바탕으로 월지와 손을 잡기 위해서 사자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한나라와 월지 중간에는 흉노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한나라의 사자는
흉노의 세력권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그 중임을
완수할 인물을 모집하기로 했다. 이때 스스로 응모해 월지로 가는 사자로
발탁되었던 사람이 바로 장건이었다.
사자가 된 장건은 흉노인 감보라는 사람을 데리고 출발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일행은 영내를 통과하다 잡혀서, 선우에게 압송되게 되었다.
선우는 장건을 구속하고 이렇게 문책했다.
"월지국이라면 우리 나라보다도 북쪽에 있지 않은가. 네가 월지에 도착할 길은
없다. 가령 내가 월나라로 사자를 보냈다면 한나라에서 잠자코 보내 주겠는가."
이리하여 장건은 흉노에 의해 10여 년간 갇혀 살면서, 거기에서 아내도 얻고
아이도 키우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한나라 사자임을 나타내는 황제는 부절을 언제나 몸에 지니고
있었다.
흉노에서 오래 살게 됨에 따라 장건은 서서히 행동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나 드디어는 야음을 틈타서 일행을 데리고 월지로 도망칠
수 있었다.
일행은 서쪽으로 서쪽으로 길을 걸어서 수십 일 후에 대원 지역(중앙 아시아)에
도착했다.
그런데 대원은 한나라의 강력한 힘과 풍부한 물자 소식을 전해 듣고 전부터
한나라와의 통상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대원에서는 장건 일동의
도착을 환영했다. 그리고는 대원의 왕이 장건에게 물었다.
"우리 나라에 잘 와 주셨소. 그래, 일행은 대체 어디까지 가실 예정이오."
이에 장건은 말했다.
"우리들은 한나라를 받들고 월지로 가는 길입니다. 불행히도 흉노에게 잡히어
뜻하지 않게 세월을 허송하다가 겨우 도망쳐 오는 길입니다.
왕이시여, 저를 월지까지 보내 주실 분이 계시다면 오로지 당신뿐입니다. 제가
월지로 갔다가 무사히 귀환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 나라는 대왕에게 엄청난
예물을 보낼 것입니다.
그러자 왕은 이에 동의했다.
그리하여 장건 일행에게 안내와 통역을 붙여서 보내 주었다.
일행은 우선 강거(키르키즈 지방)에 도착했고, 이어서 강거 지방 주민의
도움으로 대월지 (우즈베크 지방)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더구나 그들에게 있어 한나라는 너무도 멀었다. 그러므로 협력해서 흉노를
보복할 생각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일행은 이 나라에서 1년 남짓 머문 끝에 귀로에 올라 강족의 영토를 통과할
무렵 또다시 흉노에게 잡혔다.
그런데 이 땅에서 거의 1년 동안 머무는 중에 선우가 죽고 좌곡려 왕이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왕이 되었다.
이 혼란을 틈타서 장건과 흉노인 아내는 한나라로 도망칠 수 있었다.
드디어 조국을 떠난 지 십 년이 넘어 장건은 귀국할 수 있었다.
한나라 왕은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장건 일행을 환영하고 장건은 태중대부로
승진하였다.
장건은 체력이 좋고 관대하여 신의가 두터운 인물이었다. 그 인품의 덕으로
그는 이국 사람에게도 호감을 샀다. 또한 감보는 흉노 출신으로 궁술에 능하여
식량이 떨어졌을 때에는 짐승을 잡아서 굶주림을 면했다.
한나라를 출발할 때, 장건 일행은 백 명 이상이나 되는 부대였으나 13년이
지나서 귀환한 자는 이 두 사람뿐이었다.
해를 따라 서쪽으로
장건이 실제로 발을 들여놓은 나라는 대원, 대월지, 대하, 강거의 네 나라이고,
정보를 가져온 주변국들만도 5, 6개국이나 된다. 그들은 이런 나라에 대해서
황제에게 상세한 보고서를 올렸다.
"대원은 흉노의 서남방, 한의 서쪽에 위치하며 거리는 1만 리쯤이나 됩니다.
그 땅에 인간이 정주하여 농경에 종사하며 벼와 보리를 재배하고 포도주를
만듭니다. 또한 품종이 좋은 말을 대량으로 사육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피땀을 흘리므로 선조는 천마의 아들이라 합니다. 도시마다 성곽을
쌓고 가옥에서 삽니다.
지배하는 도시는 대소 합쳐 70여 성, 인구는 넉넉히 수십 만을 헤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무기로는 활이나 창을 사용하며 기마전에 능합니다. 대원의 북쪽은 강거, 서쪽은
대월지, 서남쪽은 대하, 동북쪽은 오손, 동쪽은 한미, 우전입니다.
우전 서쪽 지대에서는 강은 모두 서쪽으로 흘러 서해(아랄해)로 가고
동쪽으로는 동류하여 염택으로 갑니다.
오손은 대원에서 동북으로 2천 리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 생활
풍습은 흉노와 같으며 사람들은 일정한 곳에 정착하여 살지 않고 가축을 따라
이동합니다.
활을 쏘는 전사는 수만 명으로 모두 용감히 싸웁니다. 이전에는 흉노에
예속되어 있었지만 그 후 세력이 왕성해지더니 현재는 명목상으로만 흉노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있을 뿐 흉노에 바치는 조공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대월지는 대원에서 서쪽으로 2, 3천 리 떨어진 북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남쪽으로는 대하, 서쪽으로는 안식, 북쪽으로는 강거가 있습니다. 그들은 가축을
따라 이동하는 유목 민족으로 생활 양식은 흉노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활을 쏘는 전사는 대충 20만 가량 될 것입니다. 이전에 강력했던 시기에는
흉노마저도 우습게 볼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흉노에서 묵특선우가 나타나서 월지를 격파하고, 또한 그 다음에 즉위한
노상선우는 월지왕을 죽여서 그 두 개골을 술잔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처음에,
월지의 생활권은 돈황, 기련산 일대였으나,
흉노와의 일련의 항쟁에서 패했기 때문에 그곳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대원 땅을 통과하여 서방의 대하를 공격, 그곳을 점령하고
규수 북쪽에다 도읍을 정했습니다. 그곳에 살던 원주민 중에서 채 도망가지 못한
나머지 무리들은 기련산에 있는 강족의 거주지로 들어가 소월지라 칭하고
있습니다.
안식국은 대월지에서 서쪽으로 수천 리쯤 떨어진 데 있습니다. 안식 사람들은
정착해서 농경을 영위하며 벼, 보리를 재배하고 포도주를 생산합니다.
성벽을 둘러쌓아 도시를 갖춘 것은 대원의 경우와 같습니다. 지배하는 도시는
대소 아울러 수백 성에 달하고 면적은 수천 리 사방에 이르는 가장 큰
나라입니다.
규수라는 강에 접하고 있으며, 교역 시장이 서고, 사람들은 수레와 배를 함께
활용하여 인근 제국뿐 아니라 때로는 수천 리 먼 나라와도 흥정을 합니다.
은으로 화폐를 주조하여 사용하고 있고, 화폐 문양으로는 그때그때 왕의 초상을
사용합니다. 왕이 죽을 때마다 화폐를 다시 찍고 왕의 초상도 바꿉니다. 글을 쓰는
데는 약간 딱딱한 가죽을 사용하며 거기에다 문자는 옆으로 늘어놓습니다.
대하는 대원에서 서남쪽으로 2천여 리, 규수의 남쪽에 위치합니다. 이 나라
사람들은 정착해서 성곽, 가옥을 갖추는 것이 대원의 경우와 거의 같습니다.
왕 한 사람이 전권을 쥐고 있는 게 아니고 각 도시별로 영주가 분립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전투력은 약하며 전쟁을 두려워하지만 그 반면에 상업이
발달되어 있습니다.
서쪽으로 이동해 온 대월지에게 격파되어 완전히 예속되어 있지만 백여만이라는
풍부한 인구의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중심 도시는 남시성이며 교역 시장에서는 가지각색의 물자들이 거래되고
있습니다. 대하 동남쪽에는 신독국(인도)이 있습니다."
황제의 꿈
장건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제가 대하에 있을 무렵, 공나라의 죽장과 촉나라의 직물을 본 적이 있습니다.
당장 그 고장 사람들에게 물어 본 즉,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우리네 상인들이 신독국(인도)에 가서 그곳 시장에서 사온 것입니다.
신독은 대하에서 동남으로 수천 리 떨어진 곳에 있는 나라로, 정착 생활을
영위하는 점은 대하와 거의 차이가 없지만 습기가 많고 덥다 합니다. 이 나라는
큰 강에 임하고 있으며 코끼리가 있어 사람들은 그것을 타고 싸움을 합니다....'
제가 추측하건대 대하는 한나라에서 1만 2천 리요, 방향은 서남쪽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신독국은 대하에서 동남방 수천 리 밖에 위치하고 촉나라 산물이
유통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촉땅에서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대하로 가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면 강족땅을 통과하기는 길도 험할 뿐
아니라 주민의 환영도 못 받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약간 북쪽 길을 택하면
흉노에게 잡히게 됩니다.
이상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대하로 가기 위해서는 촉땅에서 출발하는 것이
거리도 짧고 방해받을 염려도 없을까 싶습니다."
이 보고서를 보고 무제는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폈다.
'대원, 대하, 인식 등의 여러 나라는 모두 진귀한 산물도 많으며 정착해서
농사짓는 것도 중국 본토와 비슷하다.
그런데 군사력을 약하고 한나라 물자에 대한 욕구는 강하다. 더구나 이런
나라들의 북쪽에 위치한 대월지나 강거 같은 나라들은 군사력은 강하지만
자기들에게 이익이 된다면 얼마든지 협상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니 만약에 한나라가 힘으로서가 아니라 계통을 밟아 이들 여러 나라들을
복종시킬 수만 있다면 한나라 영토는 만 리 밖의 저쪽 끝까지 확대되고, 한나라
언어는 아홉 번이나 통역을 겪으면서 풍속이 다른 민족을 통일시킨다. 그렇게
되면 나의 권위는 이 세상 미치지 않는 곳이 없으리라....'
이렇게 생각을 한 무제는 장건의 보고를 듣고 매우 기뻐했다. 그리하여
장건에게 새로운 명령을 내려 대하고 가는 4개의 통로를 정하여 밀사를
내보내도록 하였다.
밀사는 모두가 천 리에서 2천 리쯤 전진했으나 그 가운데서 북쪽으로 향해 간
자는 저족, 작족에게 길이 막히고, 남쪽으로 간 자는 쉬주, 곤명 일대에서 앞길이
막혔다.
그러나 이 지방에서 서방으로 1천 리 남짓 떨어진 곳에 코끼리를 사용하는
나라가 있는데 전월국이라 불리운다는 것과 이곳에는 촉나라 밀무역상들이
왕래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한나라는 이렇게 대하국과의 통로를 탐색하는 동안 처음으로 전월국과 통상하게
되었다.
한나라는 그 이전에도 서남 방면의 이민족과 통상을 시도했으나 막대한 비용을
들이면서도 통로가 발견되지 않아 체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장건의 '대하국과의 통상은 가능하다'는 보고를 받고 한나라는 다시
서남쪽 이민족과의 교섭을 모색하게 되었던 것이다.
장건, 다시 떠나다
한때 장건은 교위로서 대장군 위청의 흉노 토벌에 참가했다. 그때 토벌군은
장건의 안내로 물과 풀이 있는 장소를 따라 전진했으므로 물과 말 사료의 공급에
곤란을 받지 않았다.
장건은 이 공으로 박망후의 칭호를 받았다. 기원전 123년의 일이었다.
그 다음해 장건은 이광 장군과 더불어 흉노 토벌을 위해 또다시 출격했다. 이
토벌에서 이광 장군은 흉노의 포위망에 갇히어 크게 패배했다.
그런데, 그때 장건이 이광 장군과 합류할 날짜에 도착하지를 못한 것이 패배의
한 요인이 되었다. 그 때문에 그는 처형에 처해질 뻔했으나 속죄금을 물고 평민이
되었다.
그러나 이 해에 한나라는 표기 장군 곽거병을 파견하여 서역 지대에서 수만
명의 흉노군을 격파하고 기련산까지 진출했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는 혼야왕이 부족민을 거느리고 한으로 하옥해 왔기 때문에
금성과 하서의 서쪽으로 남산을 따라 염택에 이르는 일대에서는 흉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흉노측은 이따금씩 척후병을 내보냈으나 그것도 흔한 일은
아니었다.
2년 후 한나라는 또다시 선우를 공격하여 사막의 북쪽으로 쫓아 버렸다.
무제는 그 후에도 대하 등의 외국 사정에 대해 장건에게 묻는 때가 종종
있었다.
"제가 흉노 땅에 있었을 때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오손에는 현재
곤막이라고 하는 왕이 있습니다. 곤막의 아버지 때에는 작은 왕국이었습니다.
그때에 흉노가 이 땅을 침략하여 그 부친을 죽이고, 낳은 지 얼마 안 되는
곤막을 들판에다 버렸습니다.
그러자 새들이 고기를 물어 아기에게 날라 주며 늑대가 찾아와서 젖을 물리는
것이었습니다. 선우는,
'신기한 일도 다 있구나, 필경 신의 아들일 것이다'
하고 아기를 주워다 길렀습니다.
성장한 곤막은 군대를 잘 다루고 번번이 공을 세웠으므로 선우는 오손의 옛
부족민을 곤막의 지휘하에 넣고 서역을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곤막은 부족의 경제력 향상에 힘을 기울이며 주변 부락을 습격하고 수만의
병사를 양성해서 거의 매일 침략전을 전개했습니다.
선우가 죽은 것을 기화로 곤막은 수하 부족을 이끌고 멀리 딴 곳으로 이동하여
독립을 선포하고 흉노에 대한 조공을 거절했습니다. 흉노측에서는 유격대를 자주
내보냈으나 결국 제압하지 못했습니다.
그 때문에 곤막은 역시 신의 아들이라고 공격을 중단하여 명목상의 속국으로
방치하였으나 내심으로 흉노는 대대적인 공격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의 정세로 보건대, 선우는 한나라의 새로운 사족을 못쓰는
형편이니, 지금이야말로 오손에게 마음껏 선물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오손족을 혼야왕의 옛 땅에 거주시켜 우리 나라와 동맹 관계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오손을 이를 환영할 것입니다.
그렇데 되면 흉노의 바른 팔을 떼어 버리는 결과가 되며, 게다가 한번 오손과의
연합이 성립된다면 오손의 서쪽에서 대하에 이르는 일련의 국가들을 모조리
길들여 속국으로 삼을 수가 있습니다."
무제는 이 진언을 받아들여 장건을 중랑장에 임명하고 3백의 인원을 주었다.
말은 한 사람에 두 마리씩, 소와 양은 만 단위의 숫자였다.
여기에 수천만 금에 해당하는 폐백을 들려 황제의 친서를 지닌 부사를 다수
수행시켰다.
요령부득
그 뒤 장건은 드디어 오손에 닿았다. 그런데 오손왕 곤막은 한나라 사자를
거만한 태도로 맞았다.
장건은 불끈 화가 났으나 그들이 한나라 물건에 대해서는 사족을 못 쓴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지체없이 말했다.
"이것은 황공하옵게도 천자께서 보내신 물자이니 만일 왕께서 즐겁게 받아들일
수 없으시다면 도로 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곤막은 일어나서 사물을 경건히 받아 들였다. 그러나 그 밖의 경우에는
여전히 오만한 태도였다.
장건은 곤막을 설득하였다.
"지금이야말로 오손이 동방으로 이동하여 혼야왕의 옛 영토를 소유 할
때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시면 우리 한나라는 옹주(제왕의 딸)를 왕의 부인으로
내드릴 것입니다."
그러나 오손의 내부는 이미 분열 상태에 있었고 왕도 노경에 이르고 있었다.
게다가 한나라에 대해서는 너무나 멀었기 때문에 아무런 지식도 갖지 못한
상태였다.
그리고 흉노에 대해서는 너무 오랫동안 속국으로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공포심이 발동하여 한에 접근하는 일에 대해서는 중신들이 모조리 반대했다.
그리하여 왕도 이를 반대하여 단독으로 처리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장건은
어떻게 해야 할 지 그 요령을 알 수 없었다.(요령부득)
당시 곤막에게는 10명 안팎의 아들이 있고 가운데 아들이 대록이었다. 그는
강건하고 통솔력이 있으며 1만여 기를 거느리고 다른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 대록의 형이 오손의 태자였는데, 태자에게는 잠취라는 대를 이을 아들이
있으나 태자 자신은 젊어서 죽었다. 태자는 죽을 때 아버지 곤막에게 뒷일을
맡겼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잠취를 태자로 삼아 주십시오. 절대로 딴 사람을 태자로
삼지 마시옵소서."
곤막은 아들의 심정을 이해하여 잠취를 태자에 봉했다.
그러나 대록은 노했다. 그 자리는 자기 몫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아우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기도하고 조카인 잠취와 아버지 곤막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곤막은 늙기도 했으려니와 평소부터 대록이 잠취를 죽이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었기 때문에 잠취에게도 1만여 기를 주어 거주지를 이동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곤막 자신도 1만여 기를 가지고 스스로 방위대를 조직하여 가지고 있었다.
이리하여 국민은 세 갈래로 분열하게 되었고, 곤막은 그저 명목상으로만
통솔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곤막으로서도 이런 배경이 있었으므로 장건과의 약정을 혼자서 결정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 뒤 할 수 없이 장건은 같이 온 부사를 주변의 여러 나라에 나누어 파견하고
자신은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곤막은 길잡이와 통역을 딸려 장건의 귀로를 전송했다. 장건은 오손의 사자
수십 명과 답례로 받은 말 수십 두를 대동하고 돌아와서 그들에게 한나라의
국력을 과시했다.
장건은 이번의 큰 일을 완수한 공으로 9경에 끼었다.
그리고는 1년쯤 후에 장건은 죽었다.
장건을 따라 한나라에 왔던 오손의 사자는 한나라 인구의 풍부함과 왕성한 경제
활동을 상세히 관찰하고 돌아가 그 사실을 보고했다. 오손에선 그 말을 듣고
한나라를 중시하게 되었다.
다시 1년쯤 지나자 대하를 위시한 여러 나라에 사자로 갔던 장건의 부하들이
모두가 원지인을 데리고 돌아왔다.
이로써 서북 여러 나라들과 한나라와의 교통이 열리게 되었다.
장건 이후의 사자들은 모두 박망후 장건의 이름을 인용하면서 상대국에 대한
성의를 증명했고, 상대국 또한 이로써 한의 사절을 신용했던 것이다.
명마를 좋아하는 황제
박망후 장건이 죽은 뒤, 오손이 한과 교통하기 시작했음을 안 흉노는 화를 내며
오손 공격을 계획했다.
때마침 오손에 파견된 한나라 사자 가운데는 남쪽으로 진출하여 대원,
대월지까지 간 사람도 있었다. 그런 후부터는 이 통로를 왕래하는 자가 잇따르게
되었다.
그 때문에 흉노의 보복을 두려워한 오손은 사자를 한나라에 파견해서 말을
헌상했다. 그리고 한나라의 옹주를 부인으로 삼고 동맹국의 우의를 맺겠다고
청원했다.
무제가 여러 신하들에게 이 문제에 대해서 의논하니 신하들은 말했다.
"우선 약혼 예물을 받으신 다음에 옹주를 보내시도록 하시는 게 좋은 줄로
압니다."
그리하여 무제는 주역을 풀어 점을 치니,
"신마가 서북방으로부터 찾아올 것이다."
하는 괘를 얻었다. 그러는 중에 오손의 말을 받게 되었는데 그 말이 대단히 좋은
말이었으므로 '천마'라고 이름 붙였다. 그러나 나중에 피땀을 흘리는 대원의
말(한혈마)을 얻고 또 그것이 한층 더 좋은 말이었으므로 오손의 말은 '서극'이라
개명하고 대원 말을 '천마'라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한은 서쪽에 처음으로 성을 쌓고 또한 주천군을 새로이 설치하여
서북 제국과의 무역 근거지로 삼았다.
이로써 한나라는 안식, 엄채, 여헌, 조지, 신독국으로 빈번이 사자를 내보내게
되었다. 더구나 무제가 대원의 말을 좋아하여 사신을 자주 왕래시키는 바람에
선발대와 후발대의 간격이 좁혀져 도중에서 서로 만날 수 있게까지 되었다.
외국으로 향하는 여러 가지 사자는 큰 부대는 수백 명, 작은 부대라도 백여
명이며, 휴대하는 물자는 박망후가 갈 때와 똑같았다. 그러나 그 후 행사가
관례화함에 따라 인원은 줄어 갔다.
한나라가 1년간에 내보내는 사자는 대강 10여 차례, 적을 때에도 5, 6차례는
되었으며 그들은 먼 나라인 경우는 7, 8년씩 걸렸고 가까운 경우에는 수년 만에
귀국했다.
견물생심의 건달들
장건이 외국과의 통로를 개발한 공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자 그를 수행했던
관리들은 서로 다투어 외국의 진귀한 산물이나 무역 통상의 이익을 들먹이며
사자로 갈 것을 지원하고 나섰다.
무제는 이런 나라들이 보통 사람들이 가고자 원하는 곳이 아니므로 그들의
청원을 적극적으로 허락하고 이들에게 부절을 주었다.
그뿐 아니라, 관리와 민간인 가운데서 강력을 불문하고 지원자를 모집했다.
사절의 인원을 채우기 위해서 사자의 자격 기준을 넓힌 것이다.
그 결과 원래의 사명을 완수하기는커녕 도중에서 답례품을 착복하고 사라지는
자가 속출했다.
그러나 무제는 이 무리들이 외국 사정에 정통해 있다는 점을 평가해 행적을
상세히 조사하고는 중죄에 처한 후, 속죄할 기회를 준다는 이유로 다시 사자를
지원하도록 했다.
주변국과의 교통이 활발해질수록 사자가 해야 할 일은 점점 더 늘고, 한편
태연히 위법 행위를 행하는 자도 늘었다.
수행하던 하급 관리들도 타국의 산물과 풍습을 자꾸 선전했다. 이에 대해서
조정은 허풍을 떠는 자는 정사로 임명하고 소극적인 자는 부사로 발탁했으니,
허풍 떠는 자나 건달들이 모두 사자를 지원하였다.
이렇게 사자가 된 자들은 예의 없이 빈곤한 계층이었다. 그들은 정부의 물건을
횡령하고 이것을 싸게 팔아서 외국 무역의 이익을 얻는 것밖에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상대국들도 한나라의 사자들이 하는 말이 각각 다른 것을 싫어하기도
하고 여기까지 군대가 오지는 못하리라 판단하여, 식량의 공급을 하지 않아
사자를 곤경에 빠뜨리기도 하였다. 심지어 한나라 사신끼리 식량에 궁한 나머지
서로 공격하는 추대를 벌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19. 아무도 공을 세운 사람이 없었다(조선 열전)
조선의 왕 위만은 원래 연나라 사람이었다. 연나라는 전성시대에 조선을
공격하여 복속시킨 다음 관리를 두는 한편, 국경 지대인 요동 지방에 요새를 쌓게
했다.
한나라 때 조선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요동의 요새를 다시 쌓고
패수(중국에서는 압록강이라 주장하는 반면 우리 나라에서는 송화강이라
주장해왔다.)를 경계로 연나라에 소속시켰다.
그 뒤 연나라 왕 노관이 반란을 일으켜 흉노로 도망갔을 때 위만도 망명했다.
그는 천여 명을 이끌고 머리를 상투 모양으로 틀고 동쪽으로 요새를 나가 조선에
자리잡았다. 그리고는 자주 한나라 요새 부근을 침범했다. 그 후 위만은 조선의
왕이 되었고, 왕검(평양)에 도읍을 정하였다.
혜제 시대 때 천하가 평정을 되찾자, 요동군 태수는 위만과 이렇게 약속했다.
"조선왕은 한나라의 외신이 되어 밖의 오랑캐를 다스리고 변방에서 그들이
약탈하는 일이 없도록 하며, 또 오랑캐의 족장들이 한나라 황제를 알현하려 할 때
저지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이것을 황제에게 올려 승인을 받았다. 이때 위만은 한나라로부터 많은
무기와 재물을 받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주위의 작은 부족들을 복속시켰다. 그래서
나라가 수천 리에 이르게 되었다.
그의 손자 우거가 왕이 되었을 때 많은 한나라 사람들이 도망쳐 나와 세력이
더욱 커졌다. 하지만 조선의 왕은 한번도 한나라에 입조한 적이 없었고, 주위
소국들이 황제에 알현하기 위해 올리는 글도 중간에서 가로막았다.
그러자 한무제 2년에 한나라는 섭하를 사신으로 보내 우거를 설득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아무 성과도 이루지 못한 섭하는 무언가 면목이 서야 했으므로
돌아오는 기에 패수까지 전송나온 조선의 관리를 죽여 버렸다.
그리고는 황제에게,
"조선의 장군이 말을 듣지 않길래 단칼에 죽이고 왔습니다."
하고 보고했다. 황제는 그를 칭찬하고는 요동의 수비대장에 임명했다.
그러나 조선은 섭하에게 복수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끝내 섭하를 죽였다.
대패하여 산 속을 헤매는 한나라
이 소식을 들은 황제는 조선을 공격하기로 결심하고 죄수들을 모아 군대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전에 남월을 정복했던 누선장군 양복에게 군사 5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산동 지방에서 해로로 쳐들어가게 했고, 또 좌장군 순체는 요동으로부터
출정케 하여 우거를 토벌하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좌장군의 부장인 다는 요동의 군사를 이끌고 공격하다가 오히려
대패하였다. 그래서 다는 군법에 의해 처형되었다.
한편 누선장군 양복은 바다를 건너 대동강을 통해 왕검성을 쳤으나, 우거왕의
맹렬한 반격에 밀려 크게 패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양복은 10여 일 동안이나
산 속을 도망다녀야 했다.
또한 좌장군 순체는 패수 서쪽의 조선 군대를 공격했지만 이렇다 할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이 소식을 들은 황제는 위산을 사신으로 보내 우거왕을 설득하였다. 그리하여
평화 조약이 맺어졌고 우거왕은 태자를 보내 사과하도록 했다. 이윽고 태자가
패수를 건널 때 무장한 군대 1만 명도 따라 건너려고 했다.
이를 본 위산은 순체와 상의하더니 혹시 속임수가 아닌가 해서,
"무기를 모두 버리라고 명령을 내리시오."
라고 태자에게 말했다.
그러나 태자 역시 한나라가 자기를 속여 죽이지 않을까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에
패수를 건너다 말고 되돌아가 버렸다.
위산이 이 사실을 황제에게 보고하자, 황제는 크게 노하여 위산을 처형시켜
버렸다. 그리고 재차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이에 순체 장군과 양복 장군은 함께 왕검성을 포위하고 공격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도록 함락시키지 못했다.
무너지지 않는 왕검성
그런데 원래 좌장군 순체는 궁중에서 황제를 모시고 그 총애를 받고 있었으며,
그의 군사들 중에는 날쌔고 용감한 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교만했다.
하지만 양복은 처음부터 공격에 실패해 병사를 많이 잃었기 때문에 싸우기를
겁냈다. 그래서 그는 우거왕을 포위하면서도 화친을 맺기 위해 자주 사자를
파견했다.
그래서 순체의 기습공격 계획은 번번이 무산되었고, 조선은 은밀히 정탐꾼을
파견하는 한편, 양복과 화친을 교섭하였다.
순체는 몇 번이나 양복과 함께 공격하기로 약속했지만, 그때마다 양복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싸움을 회피했다. 그래서 순체는 급한 나머지 자주 사자를
보내 항복을 요구해 봤지만, 조선은 단호히 거절한 채 양복과의 교섭에만
신경썼다.
그러자 순체는 양복을 의심했다.
'양복이 조선과 합세해서 나를 공격하려는 것이 아닐까.'
아무도 공신은 없었다
이 때 황제는 탄식했다.
'지난 번엔 위산이 일을 그르치더니, 이번에는 두 장군이 서로 반목하고 있어
일을 망치고 있구나!'
그리고는 공손수를 사신으로 보내면서 사태를 바로잡고 경우에 따라서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라고 명령했다.
공손수가 도착하자 순체는,
"조선이 벌써 항복했을 텐데, 양복 때문에 어지러워졌습니다."
라며 양복이 자주 공격하겠다고 하면서도 회피하고 있음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냥 놔두면 양복은 조선과 짜고 우리를 공격할지 모릅니다. 어서 손을
쓰십시오."
라고 부추켰다.
이에 공손수는 양복을 감금하고 순체로 하여금 군사의 지휘권을 통솔하도록
하였다.
한편 순체는 양복의 군사를 흡수하고는 더욱 맹렬히 공격했다. 이때 조선의
대신들이 몰래 모여 상의했다.
"우리는 양복에 항복하려 했는데, 이제 양복이 체포되었으니 싸움이 급해졌소.
우리가 이기기는 어려운데, 우거왕은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이오."
그러면서 그들은 도망쳐 한나라에 항복했다. 그해 여름에 우거왕이 부하에게
암살당했으나, 대신이던 성이가 성을 또다시 굳게 지켰다. 그러나 한나라는 이윽고
왕검성을 함락시켰으며, 그곳에 진번, 임둔, 낙랑, 현도의 사군을 설치하였다.
그 뒤 순체는 황제에게 소환되어 공적을 다투고 질투하며 모략했다는 죄로
처형되어 그의 목은 시장에 걸렸다. 양복도 그 군대가 좌장군의 도착을 기다려
같이 공격해야 하는데도 멋대로 진격하여 결국 많은 군사를 잃은 죄로 처형되어야
했으나, 속죄금을 내고 서민으로 강등되었다. 또한 부하 장군 중에서도 상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로써 한나라의 조선 공량으로 상을 받은 자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사마천은 이렇게 말했다.
"우거왕은 험난한 요새의 지형을 과신하여 나라를 망쳤고, 섭하는 공을 속여
전쟁의 빌미를 제공했다.
또한 누선은 적은 군사로 무리한 작전을 벌여 10여 일 동안이나 산속을 헤매야
했고, 이 때문에 분열의 씨앗이 뿌려졌다. 그리고 순체는 공로를 다투다가 결국
공손수와 함께 처형되었다.
이 전쟁에서 양측 모두 치욕을 당했으므로 누구도 공적이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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