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의 역사를 알자
민족적 긍지와 자부심을 갖게 하는
이야기 한국사
인류의 조상
인류가 지구상에 살기 시작한 것은 약 2백만 년 전이었습니다. 원인 또는
유인원이라 불리는 옛 사람들은 오랜 세월 거치면서 점차 문화가 발달하여 지금부터
약 50 만 년 전에는 이미 구석기 시대를 이룩하였습니다.
우리 민족은 황인종에 속하며, 예맥족이 그 중심 세력이었습니다. 언어학상으로는
알타이 어계에 속합니다.
문자의 기록이 없던 시대를 선사 시대라고 합니다. 그 때의 역사는 우리 나라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 유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돌을 깨어 만든 타제 석기 사용하던 시대를 구석기 시대라고 합니다.
기원전 4천 년경 우리 나라에는 이미 신석기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신석기 시대는
돌을 다듬거나 갈아서 만든 석기를 사용한 시대입니다.
신석기 시대의 사람들은 대개 핏줄이 같은 씨족끼리 모여서 씨족장을 중심으로 하여
생활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침략을 막기 위하여 강한 지도자를 뽑읍시다."
"아니오! 외교에 능한 부드러운 지도자를 뽑아 전쟁을 막고 서로 평화롭게 삽시다.!"
씨족 사회 사람들은 누구나 평등한 권리를 갖고 씨족장을 선출하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씨족들과의 싸움에 대한 일이나 그 밖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였습니다.
또한 씨족 사회에서는 사냥과 고기잡이, 농사 등을 공동으로 하였고 생산품은
똑같이 나누어 썼습니다.
그리고 씨족 사회에서는 특정한 동물이나 식물을 자기 씨족을 지켜 주는 수호신으로
섬기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우리 씨족의 수호신은 곰으로 정합시다."
"우리는 말을 수호신으로 삼읍시다."
"우리는 새벽을 알리는 닭이오!"
자기 씨족의 수호신으로 섬기는 동식물을 해치는 일이나 특정한 장소에 접근하는
것을 금지하였습니다. 이러한 신앙을 토템 신앙이라고 합니다.
신석기 시대를 거쳐서 청동기 문화가 발달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의 청동기 문화는 시베리아의 것과 같은 계통입니다. 이는 만주와 한반도
북서부 지방에서 점차 우리 나라 전지역으로 퍼졌습니다.
우리 나라의 청동기 문화는 기원전 10세기경에 북방에서부터 무늬 없는 토기를
사용하던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마침내 청동기 문화를 이룩한 사람들이 새로운 사회를 이룩하면서 우리 민족의
주류를 이룩하였던 것입니다.
인류는 구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를 거치면서 씨족들이 모여 나라를
세우기 시작하였습니다.
각 나라마다에는 건국에 관한 신비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비롯하여
중국, 그리스, 로마 등과 같이 그 민족마다 건국 신화가 있습니다.
우리 겨레의 뿌리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 그림: 묵자책 9쪽
그림설명: 반달형 돌칼(청동기 시대).
* 그림: 묵자책 9쪽
그림설명: 마제 돌칼(청동기 시대).
* 그림: 묵자책 10쪽
그림설명: 청동 칼과 창(청동기 시대).
겨레의 뿌리, 단군 성조
옛날, 옛날, 아득히 먼 옛날, 기원전 2333 년 이전의 일입니다.
하늘나라를 다스리는 환인 임금님은 여러 아들을 모두 불러 놓고 물었습니다.
"내 아들들이 다 모였구나. 너희들 중에서 누가 세상에 내려가 인간 사회를
다스리고 싶은 생각이 없느냐?"
환인 임금님 말씀에 환웅이라는 아들이 선뜻 나서며 대답하였습니다.
"소자는 전부터 세상 사람에게 덕이 되고 복이 되는 하늘나라의 뜻을 펴서 보다
아름답고 깨끗한 세상을 만들고 싶었사옵니다. 이제 아버님께서 허락하신다면 내려가
다스려 보겠나이다."
"오, 땅 위의 어느 곳 사람들을 다스려 보려 하느냐?"
"동방에 사는 사람들이옵니다. 그 곳 사람들은 마음이 어질고 슬기로워 그들을
다스리면 땅 위의 으뜸가는 나라가 될 것이옵니다."
"기특한 생각이로고! 그러면 잘 깨우쳐 맑고 고운 나라가 되도록 힘써 보아라."
"아버님 말씀을 마음 속 깊이 새겨 인간 세상에서 으뜸가는 나라를 이룩하겠나이다."
하늘나라를 다스리는 환인 임금님은 '삼위 태백'이라는 세 신을 불렀습니다. '삼위
태백'이란, 바람을 다스리는 신인 풍백, 비를 다스리는 신인 우사, 구름을 다스리는
신인 운사를 일컫는 말입니다.
"삼위 태백은 동방의 땅에 내려가 내 아들 환웅을 도와 백성들을 돕고 영원히
동방의 나라를 잘 지키도록 하라."
이렇게 해서 환웅은 농경 생활을 다스리는 3신인 삼위 태백을 비롯하여 3천여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하늘나라를 떠나 아득한 구름 속을 헤치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왔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환웅과 그 일행을 보고 동방의 땅에 살던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우러러보았습니다.
"백성들은 듣거라. 나는 그대들을 다스리기 위해 하늘나라에서 내려왔느니라."
"감사하옵나이다. 부디 보살펴 주옵소서!"
환웅이 3천여 명의 하늘나라 무리들을 거느리고 내려온 태백산 신단수 아래에는 큰
저자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곳을 신시라 하였습니다.
"하늘의 뜻이 우리 동방에 내려 훌륭하신 임금님을 받들게 되었으니 잔치를
벌입시다.!"
하늘나라 임금님의 아들을 맞은 동방의 백성들은 기쁨에 넘쳐 잔치를 벌였습니다.
환웅은 바람, 비, 구름을 다스리는 세 신에게는 백성들의 농사를 더욱 잘 짓게 도와
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부하들에게는 병을 다스리고, 죄 지은 사람에게 벌을
주는 일, 악하고 착한 일을 가리는 일들을 비롯하여 인간에게 필요한 360여 가지의
일을 맡겼습니다.
환웅이 신시를 열어 사람들을 덕으로 잘 다스려 사람들 사이에는 나쁜 짓과 싸움이
없어졌습니다.
평화로운 신사에서 얼마 멀지 않는 곳에 곰을 수호신으로 섬기는 씨족이
있었습니다. 그 씨족 중에는 동방에서 가장 아름답고 슬기로운 한 처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곰을 수호신으로 섬기는 씨족에게 으뜸가는 그 처녀의 이름을
'웅녀'라고 불렀습니다.
환웅 천왕은 동방에서 가장 아름답고 슬기로운 웅녀와 결혼하였습니다.
마침내 환웅 천왕과 웅녀 왕비 사이에서 한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이 아기가 바로
우리 겨레의 뿌리이며 시조인 단군 성조이십니다. 단군이란 말은 제사장을 뜻하며,
성조란 거룩한 조상님, 하늘이 아들, 황제를 일컫는 말입니다.
고조선의 부족장은 부족을 다스리는 정치적 군장이면서 제사장을 겸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불렀던 것입니다.
세월은 흘러 태백산과 신시에는 인구가 점점 늘어나고 세력도 커졌습니다. 백성들은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우리 나라의 시조이며 겨레의 뿌리인 단군 성조께서는 기원전 2333 년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고 하였습니다. 아침 조자, 고울 선자를 합친
조선이란, '아름다운 아침의 나라'라는 뜻이 됩니다.
하늘나라 환인 임금님이 손자이신 단군 성조께서 우리 민족의 나라를 세운 참뜻은
'홍익인간'입니다. 이 말은 널리 인간 세계를 이롭게 한다는 뜻입니다.
홍익 인간은 단군의 건국 이념으로 고조선 건국 이래 우리 나라의 최고의
정신입니다.
단군 성조께서 나라를 세운 이야기는 '삼국유사'를 비롯하여 '제왕운기',
'세종실록지리지', '응제시주', '동국여지승람' 등에 기록되어 전해 오고 있습니다.
단군 조선이 세워 거룩한 뜻은 기나긴 역사를 이어 가는 동안 우리 민족이 시련을
겪을 때마다 그 어려움을 극복하는 민족 단결의 힘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늘을 열고 나라를 세워 한겨레가 된 우리는 한마음 한 핏줄로 단군 성조의 뜻을
기리기 위해 오늘날 10월 3일을 국경일로 정하니, 이 날이 바로 개천절인 것입니다.
민족의 고향 고조선
"온 백성들은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제단 앞에 모여 풍년을 내려 주신 하늘에
제사를 올리도록 하라!"
고조선 백성들은 평화롭고 복된 삶을 주신 하늘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리고
착하고 어진 마음씨로 하늘의 뜻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밤에도 문을 열어 놓고
평화롭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국경을 이웃한 중국에서 난이 일어날 때마다 새로운 삶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형편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난을 피해 온 이주민들을 법을 어기는 일이
잦아 엄한 법이 정해지기에 이르렀습니다.
"나라의 질서를 위해 여덟 가지 법을 정하노라!"
마침내 '8조의 법'을 정했습니다.
그 '8조의 법' 중에서 오늘날까지 전해 오고 있는 것은 3조가 있습니다.
1.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한다.
2. 남을 다치게 하는 자는 곡식으로 갚는다.
3. 도둑질한 자는 그 집의 노비로 삼는다. 그러나 용서를 받으려면 50 만 냥의 돈을
내야 한다.
중국의 반고가 지은 '한서지리지'라는 책에서 3 조만이 전해 오는 위의 '8조의 법'을
보면 그 때의 사회 형편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조선 시대는 개인의 생명과
노동력을 존중하였고 개인의 재산을 보장하며 화폐를 사용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조선은 점차 힘을 떨쳐 남만주(요동)와 한반도 북서부에 걸쳐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습니다. 그리고 국경을 이웃한 중국의 연나라와 맞서 힘을 겨루었습니다. 그
무렵 고조선 군대는 청동으로 만든 무기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청동 무기보다
우수한 철로 만든 무기를 갖추고 침략해 오는 적을 막기에는 어려웠습니다. 고조선
군사들은 정신력을 바탕으로 용감하게 싸웠지만 우수한 무기에 밀려 넓은 영토를 차츰
잃어 그 세력이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고조선 군사들이 연나라 세력을 경계하며 싸우던 때였습니다. 국경을 지키던 고조선
군사들은 국경을 넘어오는 무리와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그대들은 뉘시오? 국경을 넘으려는 까닭을 말하시오."
고조선 군사들은 무기를 들고 국경을 넘으려는 무리를 멈추게 하여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맨 앞에 있던 위만이라는 사람이 대답하였습니다.
"우리는 침략자가 아니오. 연나라 땅에서 난을 피해 온 사람들이오. 우리는 임금님께
안내하여 주시기 바라오."
그 무렵, 연나라에는 우리 겨레가 많이 살고 있습니다. 위만이 거느리고 온 사람들의
머리 모양과 의복을 보니 원래 고조선 계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때 고조선은 단군
조선의 뒤를 이어 한씨 조선을 부왕의 아들인 준왕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한씨 조선을 기자 조선이라고 부르는 이도 있습니다. 기자가 우리 나라에
들어왔다는 이야기에서 비롯되었으나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기록과 연구를 통해서 기자 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왕의 성씨가 한(나라이름
한)씨인 것이 분명히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중국 사람이 아니라 우리와
핏줄이 같은 겨레인 한국 사람인 것입니다.
연나라에서 넘어온 위만은 준왕에게 아뢰었습니다.
"한나라가 북쪽에 있는 우리를 괴롭히므로 대왕의 보호를 받으려고 찾아왔나이다.
부디 거두어 주옵소서."
"내 나라에 찾아왔으니 어찌 보살펴 주지 않으랴. 그대의 신분에 맞는 벼슬과 살
만한 땅을 내리겠노라."
"아뢰옵건대, 성은에 보답하기 위해 변방의 수비를 맡겠사옵니다."
"그대의 뜻이 기특하니 윤허(허락)하노라."
이렇게 해서 위만은 그가 이끌고 온 무리를 이끌고 변방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러나 위만은 야심이 큰 인물이었습니다.
'줄어든 우리의 국토를 넓히려면 힘을 길러야 한다.'
이렇게 생각한 위만은 자신의 큰뜻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힘은 이제 매우 강성해졌소. 그러니 영토를 넓히고 문화를
발전시킵시다. 준왕은 지금의 영토만으로 만족하고 있으니 답답한 일이오. 우리 겨레와
나라는 부강시키려면 그를 몰아내고 우리의 국력을 떨쳐야 하오."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힘을 모아 준왕을 몰아내고 겨레의 힘을 떨치옵소서!"
때는 기원전 194 년의 일이었습니다. 마침내 위만은 고조선의 서부를 공격하여
준왕을 몰아내고 왕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 때 그 지역에 있었던 고조선 세력들은
위만에 항거하며 동쪽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어 우리 민족의 고향인 고조선의 변천은 단군조선 ^25,135^ 한씨 조선(기자
조선) ^25,135^ 위만 조선으로 그 줄기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국토를 넓히려면 무엇보다 군사력을 키워야 한다."
왕의 자리에 오른 위만은 먼저 군사들을 훈련시켰습니다.
"무기를 만들고, 아울러 군량을 얻기 위한 농기구를 만들도록 하라."
이리하여 고조선에도 철기 시대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국력을 떨치기 위해 위만은 주위의 여러 부족을 차례로 합쳐 수천 리에 이르는 큰
세력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 때 중국 대륙을 통일한 한나라의 7 대 임금 무제는 큰 영토를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야망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조선의 영토까지 모조리 차지하여 천하통일의 꿈을 이루겠노라!"
이러한 한나라의 야망을 고조선에서 모를 리 없었습니다. 그 때 부강한 나라로
발전한 고조선은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우거왕도 그의
할아버지인 위만에 못지않은 빼어난 슬기와 기상에 넘치는 국왕이었습니다.
우거왕은 한나라와 평화를 이루기 위한 협상을 벌이는 한편, 군사를 훈련시키고 또
무역으로 나라의 이익을 얻는 동 여러 가지 정치를 폈습니다.
그러나 야망에 불타 있던 한나라의 무제는 온갖 트집을 잡아 충돌하니, 마침내 두
나라 사이에는 전쟁이 일어나고야 말았습니다.
한나라는 육군 6 만과 수군 7천으로 고조선을 침략하였습니다. 그러나 용감한
고조선 군사들은 한나라 수군을 모조리 무찌르고 첫 싸움을 큰 승리로 장식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길어지고 싸움이 거듭되면서 군사의 수와 물자가 모자라게
되었습니다. 고조선 군사들은 1 년 이상 버티며 용감하게 싸웠으나 나라 안에서
반란의 무리까지 일어나 왕검성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 때가 기원전 108 년,
세번째 고조선인 위만 조선은 한나라의 그늘 밑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한나라는 고조선 땅에 낙랑, 진번, 임둔, 현도의 한사군을 설치하였습니다. 군에는
태수를 두고, 현에는 영을 두고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요하 서쪽에 있던 토착 세력들이 한나라의 침략에 항거하며
동쪽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이러한 두 차례의 이동으로 요하 서쪽에 있던 고조선 세력들이 요하 동쪽으로
이동하여 여러 지역에 나뉘어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차례의 큰 전쟁을 치르면서 고조선 왕실은 세력이 약해져서 나라를
다스리는 힘을 잃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종래의 제후 나라였던 부여, 고구려, 옥저,
예맥, 낙랑 등이 요하 동쪽에서 독립된 나라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사군의
낙랑군과 최리의 낙랑군같이 요하 서쪽과 동쪽에 같은 이름이 나란히 있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고조선 왕실은 나라를 다스릴 힘을 잃은 뒤에는 서기 3세기까지 청천강 유역에
명맥을 이어갔습니다. 그런데 고조선이 무너짐에 따라 요하 서쪽으로부터 동쪽으로
이동한 거주민들은 요하 동쪽의 거주민을 이동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 일부는
흑룡강성을 거쳐 시베리아 동남부에 이르고, 다른 일부는 한반도 남부를 거쳐 일본에
이르렀습니다.
고조선이 무너짐과 더불어 일어난 거주민의 이동과 열국 시대가 열린 이후에 세워진
고구려, 신라, 백제는 모두 고조선의 뒤를 이은 세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뒷날 고구려, 신라, 백제는 고조선의 뒤를 이은 세력이었기 때문에 비록
삼국으로 나뉘어 세워졌지만 같은 민족이라는 의식은 한반도 남부에까지 퍼졌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한핏줄 한겨레라는 의식을 바탕으로 민족 통일에 대한 강한
의지를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뒷날 고조선의 옛 땅을 되찾기 위하여 고구려와 백제는
계속해서 요동과 요서로 진출을 꾀했던 것입니다. 고조선의 그 넓고 넓은 옛 땅이
우리 민족의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한핏줄 열국 시대
대륙의 넓은 땅으로부터 한반도에 이르기까지 그 웅장한 세력을 떨쳤던 고조선을
제외하고 우리 땅에 제후의 나라로 가장 먼저 세워진 나라는 '부여'입니다.
부여는 만주의 쑹화강 유역에 자리잡은 큰 나라였습니다. 부족이 연합하여 이루어진
나라인 부여는 기원전 1세기경부터 그 이름이 역사에 자주 나타났습니다.
부여를 다스리는 해부루왕은 늙은 임금님이었습니다.
"내 뒤를 이어 이 나라를 다스릴 왕자가 없으니 걱정이 태산 같구나."
해부루왕은 어느 날 신하들을 불러 명을 내렸습니다.
"곤연 못에 나아가 산천에 제사를 지내려 하니 준비를 갖추도록 하여라."
"예, 받들어 거행하겠나이다."
해부루왕은 신하들을 거느리고 곤연 못에 가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부디, 대를 이어 갈 왕자가 있게 하여 주소서!"
해부루왕이 소원을 말하고 돌아오는 길에, 타고 가던 말이 갑자기 멈추었습니다.
"이 말이 길을 멈추고 눈물까지 흘리고 있으니 어인 일이냐?"
"말이 지금 고개를 돌리고 저쪽에 우뚝 서 있는 돌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사옵니다."
"거참, 이상한 일이로다. 그러면 이 말이 보고 있는 저 돌을 밀어 보도록 하여라."
해부루왕의 명을 받은 신하들이 달려가 우뚝 서 있는 돌을 밀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돌 밑에서 '응아!' 하고 우렁찬 사내아이의 울음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아기의 몸은 온통 눈부신 황금빛이었습니다. 툭 불거진 눈과 얼굴 생김은
개구리와 비슷한 모양이었습니다.
"고맙고 고맙도다! 하늘이 왕자를 내려 주셨도다! 왕자의 이름을 금와 태자라고
정하노라."
해부루왕은 아기의 모습이 마치 금개구리와 같이 생겼다 하여 이름을 금와라고 지은
것입니다.
금와 태자는 해부루왕의 뒤를 이어 동부여의 왕위에 올랐습니다.
기원전 37 년에는 압록강 중류 동가강 유역에서 졸본 지방을 중심으로 새로운 나라
고구려가 일어났습니다. 고구려는 주몽이라는 이름의 동명성왕이 이끄는 부여족의 한
갈래가 세운 나라입니다.
고구려와 시조 주몽의 이야기는 삼국 시대 편에서 자세하게 이야기하기로
하겠습니다.
어쨌든 우리 땅에서 일어난 부여나 고구려, 옥저나 동예 등 초기 국가 모두는 한
계통의 부족 국가들이었습니다. 한핏줄의 열국 시대가 이 땅에 열리게 된 것입니다.
옥저는 지금의 함흥과 평양 북쪽의 부족들이 세운 나라입니다.
동예는 지금의 원산 부근 안변 일대를 중심으로 한 지역의 읍락 중심의 부족들이
세운 나라입니다.
동예는 옥저나 고구려와 같이 부여족의 한 갈래로, 언어는 고구려와 같았지만
풍속에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옥저의 인구는 약 5천 호였고, 동예의 인구는 약 2 만 호 였습니다. 그러나 옥저와
동예는 나라 힘이 강한 고구려에 예속되어 해산물과 소금 등을 바쳤습니다.
기원전 2세기경인 위만 조선 때 진국이라는 나라도 역사의 기록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진국은 다른 나라에서 흘러들어온 유민들을 받아들였습니다. 따라서 철기 문화의
혜택을 받아 아주 빠르게 발전하였습니다.
기원전 4, 3세기에서 서기 3세기경에 걸쳐서 남쪽 지방에서는 서서히 부족들의
세력이 커져 가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 세력은 마한, 진한, 변한의 세 나라로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마한은 54개의 작은 나라들로 이루어진 반도의 서쪽 가장 넓은 땅을
차지하였습니다. 전체 인구는 10여만 호였는데, 큰 나라는 1 만여 호, 작은 나라는
수천 호 정도였습니다.
진한은 낙동강 동쪽 또는 한강 유역에 12개의 읍락으로 이루어진 나라로서 신지,
읍차 등의 추장이 있었습니다. 진한 중에서 가장 큰 나라가 사로국이었는데 인구는 큰
나라가 4--5천호, 작은 나라는 6--7백호였습니다.
변한은 낙동강 서쪽의 구야국 등 12개로 이루어진 나라입니다. 특히 철이 많이
생산되어 낙랑과 예, 왜(일본) 등으로 수출까지 하였습니다.
이처럼 읍락 중심의 사회에서는 밭에는 잡곡과 논에는 벼 농사를 지었습니다.
삼한에서는 벼농사를 많이 지었기 때문에 그 때 벌써 저수지가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부여에서는 흉년이 들게 되면 왕이 덕이 없다는 책임을 지고 임금의 자리에서
물러날 뿐만 아니라, 그 벌로 죽음을 당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동예와 옥저에서는 백성들의 생업 중에서 고기잡이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한핏줄 열국 시대에는 나라마다 결혼 풍습과 특징이 있었습니다.
옥저 사람들은 장래에 며느리를 삼기 위해 미리 어린 여자 아이를 데려다
길렀습니다. 이것을 민며느리 제도라고 합니다.
또한 고구려 사람들은 처가에서 젊은 사위를 데리고 살기도 했습니다. 이것을
데릴사위 제도라고 합니다.
이러한 민며느리 제도나 데릴사위 제도는 노동력 때문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
나라의 촌락에는 계급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지도층인 호민과 그 밑에 양인인 일반
백성 농민이 있었고 또 그 아래로 노비가 있었습니다. 농민은 농사를 지어 납세와
부역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나면 군사가 되고 물자 등을 나르는 일도
하였습니다.
삼한에는 3가지 시장이 있었습니다. 가로시, 겅계시, 성읍시가 바로 시장의
형태였습니다.
이 시대의 법은 단순하였으나 매우 엄격하였습니다. 대부분의 고대 국가의 그랬듯이
선과 악은 신의 뜻이라 하여 종교 행사를 할 때 죄인을 다스려 벌을 내렸습니다.
부족을 다스리던 부족장이 죽으면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어 큰 고인돌에 장시를 지내
주었습니다.
농경 시대였던만큼 씨 뿌린 다음인 5월과 추수를 마친 10월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래서 5월에 '단오'명절이 생기고 10월은 '상달'이라고 부르게 된 유래가
되었던 것입니다.
역사의 유적지에서는 으레 그림 따위가 발견되듯이 이 시대에도 그런 미술품이
있습니다. 고령의 양전동에 있는 바위에는 십자형 가면 등이 그려져 있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울주의 반구대 바위에 새겨져 있는 그림은 주로 동물들입니다. 고래,
거북 등 물고기 종류와 사슴, 곰, 멧돼지, 호랑이 등의 육지 동물들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동물을 사냥하는 모습을 그린 것도 발견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나라 역사의 시작은 촌락 중심에서 읍락 사회로 또 고대 왕국으로
이어져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삼국시대)
(세 나라의 발전과 성립)
고구려 시조 주몽
동부여의 금와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우발수라는 강가에 이르렀습니다.
"저 외딴 강가에 웬 아름다운 처녀가 홀로 있는고?"
금와왕은 처녀에게로 다가갔습니다.
그 처녀는 웅심산 아래에 있는 성 북쪽의 청하(압록강)의 물을 다스리는 신인
하백의 딸 유화였습니다. 버들꽃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 이름의 유화는 아버지의
노여움을 사 집에서 쫓겨나 강가를 홀로 떠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대는 어인 일로 이곳에서 홀로 눈물짓고 있는고?"
금와왕의 물음에 유화는 눈물을 닦으며 대답하였습니다.
"지난 일을 자세히 말씀드리겠나이다."
유화가 금와왕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물을 다스리는 수신인 하백에게는 아름다운 세 딸이 있었습니다. 맏딸인 유화,
둘째인 원화, 막내인 위화가 있었습니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그들 세 자매는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산골짜기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하느님의 아들인 해모수가 부여의 옛 도읍으로 내려오다가 목욕하는 세자매를
보게 되었습니다.
"빼어나게 아름다운 여인들이군!"
세 자매는 해모수가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고 놀라며 옷을 얼른 챙겨 입었습니다.
"놀라지들 마시오. 나는 땅을 다스리려고 내려온 하느님의 아들이오. 그런데 낭자의
이름은 무엇이오?"
해모수는 큰언니인 유화에게 물었습니다.
"유화라 하옵니다."
"버들꽃 아씨, 유화! 그대의 자태는 참으로 아름답소. 앞으로 나의 자손들은 대대로
이 땅을 다스리는 왕이 될 것이오. 그러니 유화 낭자, 우리 결혼합시다."
"부모님 허락 없이는 아니 되옵니다."
"그럼 지금 당장 부모님의 허락을 받도록 합시다."
"하오나, 아버님께서는 오랫동안 집에 아니 계십니다."
"그럼 어머니는 계시겠지요?"
"예."
"그럼 어머님의 승낙이라도 먼저 받아 둡시다."
하느님이 아들 해모수와 수신인 하백의 딸 유화는 어머니의 허락을 받고 혼인을
맺었습니다.
그런데 해모수는 유화와 결혼한 뒤 하늘나라에 잠시 다녀온다는 말을 남기고는
소식이 없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뒤에 집으로 돌아온 수신 하백은 크게 노했습니다.
"아비의 허락도 없이 혼인을 한 너를 내 딸이라 할 수 없다. 지금 당장 집에서
나가거라."
유화는 집에서 쫓겨나 우발수강 가를 떠돌아다니다가 사냥 나온 동부여의 금와왕을
만나게 된 것이었습니다.
금와왕은 유화를 동정하여 궁궐로 데리고 갔습니다.
궁궐에 들어간 유화는 어느 날 커다란 알을 낳았습니다. 소문은 금세 퍼져
금와왕에게까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나쁜 일이 날 징조 같구나. 그 알을 돼지우리에 갖다 버리도록 하라."
금와왕의 신하들은 유화 부인의 낳은 알을 돼지우리에 가져다 버렸습니다. 그런데,
돼지들은 그 알을 밟지 않고 피하는 것이었습니다.
"돼지들이 피한다니, 그 알을 길거리에 갖다 버리도록 하라."
알은 길거리에 버려졌는데 이상하게도 지나가는 말, 소, 개 들도 그 알을 피하는
것이었습니다.
"거참, 이상한 일이로다! 그렇다면 그 알을 들판에 내다버리도록 하라."
왕의 명령대로 알은 들판에 버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날아가던 새들이 모여들어
그 알을 깃털로 따뜻하게 감싸주는 것이었습니다.
신하들은 금와왕에게 사실대로 아뢰고 그 알을 몽둥이로 쳐 보았습니다. 그러나
단단한 알은 끄떡도 하지 않았습니다.
보고를 받은 금와왕은 신하들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알의 주인인 어머니에게 되돌려 주도록 하라."
마침내 유화 부인은 자기가 낳은 알을 되돌려 받았습니다. 그런 지 며칠 뒤에 그 알
속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알 속에서 태어난 사내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그런데 아주
어린 나이에 활을 당겨 파리를 잡기도 하였습니다.
"알에서 태어난 저 아이는 예사 인물이 아니로구나!"
어머니, 유화 부인은 어린 아들의 이름을 주몽이라고 지었습니다. 동부여에서는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고 불렀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몽은 어느덧 20세의 늠름한 청년이 되었습니다. 그의 활 솜씨는 백발백중이어서
그 누구도 따를 사람이 없었습니다. 주몽의 재주가 이처럼 뛰어나자 금와왕의 일곱
왕자들은 시샘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몽을 그냥 두면 위험해. 장차 우리 나라를 차지할지도 몰라. 그러니까, 아주 없애
버리도록 하자."
대소 태자를 비롯하여 모든 왕자들이 주몽을 없앨 기회를 노리게 되었습니다.
주몽은 일곱 왕자의 그러한 움직임을 눈치챘습니다. 때마침 주몽을 존경하며 따르는
세청년이 있었습니다. 오이, 아리, 협부였습니다. 주몽은 그들과 다른 사람들 몰래
의논하였습니다.
"대소 태자를 비롯한 일곱 왕자들이 나를 해치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으니 화를
당하기 전에 이곳을 떠나야겠네. 남쪽으로 가서 새로운 나라를 세워 우리들의 큰뜻을
펼쳐 보세!"
주몽의 말에 세 청년은 충성을 다짐했습니다.
주몽은 어머니와 아내에게 작별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갖고 있던 칼을 두
동강을 내어, 아내에게 그 중 하나를 주며 말했습니다.
"뒷날 아기를 낳거든 이것을 갖고 나를 찾아오도록 이르시오."
그 때 주몽의 아내는 아기를 배고 있었습니다.
작별 인사를 마친 주몽은 재빨리 마구간으로 달려갔습니다. 마구간에는 힘찬 말이
주인인 주몽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난날 금와왕은 주몽에게 마구간을 돌보는 일을
맡겼었습니다. 그 때 주몽은 어머니 유화 부인의 가르침에 따라 가장 날쌘 말의
혓바닥에 바늘을 꽂아 두었습니다. 그 말이 너무 여위자 금와왕은 주몽에게 그 말을
주어 버렸습니다. 주몽은 그 말을 받은 날부터 온갖 정성을 다하여 키워서 세상에서
가장 날쌔고 뛰어난 말로 만들어 두었던 것입니다.
주몽은 한밤중에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데리고 궁궐을 몰래 빠져나왔습니다. 그리고
말을 달렸습니다.
"간밤에 주몽이 도망쳤다. 추격하라!"
대소 태자는 군사들에게 명령했습니다. 궁궐을 빠져나온 주몽이 무리를 이끌고 말을
달려 다다른 곳은 엄호수라는 강가였습니다.
"아, 앞에 깊은 강이 가로막혔으니 이를 어찌하랴!"
주몽의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습니다.
그 때, 주몽을 따르던 한 사람이 강물을 가리키며 부르짖듯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저기를 보십시오. 물고기와 자라 들이 강물 위에 뗏목처럼 떠 있습니다."
"주몽 왕자님! 하늘이 도와 주시나 봅니다.!"
주몽을 따르는 무리들은 환성을 터뜨렸습니다.
"어서 건너세!"
주몽을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엄호수강을 아무 탈 없이 건널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몽이 강을 건넌 뒤에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추격해 온 대소 태자의
군사들이 엄호수강 가에 다다랐을 때는 물고기와 자라 들의 모습은 깊은 강물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추격군은 발을 구르며 되돌아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엄호수강을 넘은 주몽은 졸본부여 땅으로 들어섰습니다. 주몽의 일행이 지나가는
곳마다 백성들이 따랐습니다. 계루부족 전체가 주몽의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주몽은 졸본 땅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습니다.
"나라의 이름을 고구려라 정하노라."
고구려와 시조 주몽의 이름은 태양처럼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주몽은 뒷날
동명성왕이라는 이름도 얻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에게서 아버지가 나기고 떠난 부러진 칼을 받은 아들 유리는 고구려의 왕이
된 아버지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동명성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 제 2 대 왕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서기 3 년, 10월에 이르러 유리왕은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겼습니다. 그리고
국내성에다 위나암성을 쌓고 왕궁도 지었습니다.
고구려의 국민성은 무엇보다도 부지런하고 검소한 것이 그 특징이었습니다. 그리고
주위에 있는 강한 적들과 다툼이 계속되면서 굳센 정신이 이어졌습니다. 그러한
정신은 뒷날 무예를 받드는 상무 정신으로 발전하였던 것입니다.
상무 정신으로 튼튼히 무장한 고구려는 한나라의 세력을 내쫓고 동해안의 옥저와
동예를 합병하였습니다. 그리고 한나라 세력인 낙랑군과 대방군도 몰아내고 대동강
유역을 차지하였습니다.
마침내 고구려는 남쪽으로는 백제와 신라에 맞닿은 곳까지 이르는 넓은 왕국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북쪽에 위치한 고구려는 중국의 침략을 막아 백제와 신라를 도와 주는 구실을
하였습니다. 또한 불교를 비롯한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여 전하는 역할도 하였습니다.
* 그림: 묵자책 34쪽
그림설명: 수렵도(고구려 고분벽화).
백제 시조 온조
"어서 왕비님을 맞이하소서!"
주몽(동명성왕)이 졸본 땅에서 나라의 터전을 튼튼히 할 무렵, 모든 신하들이 왕에게
아뢰었습니다.
그 때 주몽왕은 동부여를 떠날 때 헤어진 예씨 부인을 생각하고 다시 결혼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하들은 한 가정에도 부인이 있어야 하듯이 나라에는 국모인 왕비님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아뢰었습니다.
주몽왕은 신하들의 바른말에 따라 새 왕비를 맞아들였습니다. 순노 부족 출신의
아름답고 착한 여인이었습니다.
주몽왕이 새로 맞아들인 왕비에게는 두 왕자가 태어났습니다. 맏이는 비류 왕자였고,
둘째는 온조 왕자였습니다.
그 때, 동부여에 있던 예씨 부인의 몸에서 태어난 유리 왕자가 아버지인 주몽왕을
찾아왔던 것입니다.
첫 부인에게서 태어난 유리 왕자가 고구려의 태자가 되자 새 왕비에게서 태어난
비류와 온조 왕자는 고구려를 떠나 남쪽으로 향했습니다.
"비유 왕자님, 아리수를 끼고 새 나라를 세우심이 좋습니다."
두 왕자를 모시고 따르던 무리들이 말했습니다. 아리수란 한강의 옛 이름입니다.
"아니야. 나는 서쪽 바닷가에 터를 잡아 새 나라를 세우고 싶다."
비류 왕자는 자기의 뜻을 말했습니다.
"형님, 이곳에 나라를 정해 우리 형제가 함께 살도록 합시다."
아우인 온조 왕자가 말했지만 비류 왕자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따르는 부하들만을 거느리고 바다가 있는 미추홀로 내려가 나라를 세웠습니다.
미추홀은 오늘의 인천 지방입니다.
형인 비류 왕자와 헤어진 아우 온조 왕자는 아리수 건너 위례성에 도읍을
정했습니다. 위례성은 오늘의 경기도 광주 지방입니다.
이렇게 하여 온조 왕자는 백제의 시조가 된 것입니다. 유리 왕자가 고구려의 왕이
된 지 2 년 되던 해였습니다.
시조 온조왕에 의해 세워진 백제는 3세기경인 고이왕(234--286) 때 나라의 제도를
정비하고 고대 왕국의 기틀을 다지게 되었습니다.
근초고왕(346--375) 때에는 마한의 나머지 땅과 세력을 완전히 합쳐 국토를
남해안까지 넓혔습니다.
백제는 중국의 남조인 동진과 문물 교류를 하면서 일본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백제의 시조 온조왕은 고구려의 시조 주몽왕의 아들이기 때문에 두 나라는
한핏줄 한겨레의 나라인 것입니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
"우리도 임금님을 모셔야겠는데 어떤 분이 마땅할까요?"
"그야 마음이 어질고 슬기와 덕망과 용기를 두루 갖추신 분이라야지요."
때는 기원전 1세기경이었습니다. 경주 지방에는 6촌의 연합체가 있었습니다. 6촌의
부족 우두머리들의 모여서 임금님을 받들기로 하였습니다.
6촌의 이름과 촌장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양산촌장 알평, 고호촌장 소벌도리, 대수촌장 구례마, 진지촌장 지백호, 가리촌장
지타, 고야촌장 호진이었습니다.
6촌장들이 모여서 임금님을 받들 의논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양산촌에 있는
나정이라는 우물 옆 숲 속에서 눈부신 오색 빛이 하늘로 뻗치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저 오색 빛은 좋은 징조를 알려 주나 보오."
6촌장은 양산촌에 있는 나정 우물가로 달려가 보았습니다.
"히히힝!"
한 필의 말이 우는 소리와 함께 큰 알 속에서 사내아이가 나왔습니다.
"참으로 늠름한 모습이군요! 우리 이 아이를 데려다 키웁시다."
"좋소! 헌데 누가 맡아 키울까요?"
"고호촌장이신 소벌도리님께서 키우심이 좋을 듯싶소."
"그런데 이 아이의 성씨를 무엇이라 지으면 좋겠소?"
"박같이 생긴 알에서 태어났으니 박씨로 정하면 어떻겠소?"
"참으로 그럴 듯한 성씨요. 그럼 박씨라고 정합시다."
"성씨를 정했으니 이름도 정해야지요."
"우리는 동양에 터잡고 있는 민족이오. 그러니 널리 동방을 빛나게 하라는 뜻으로
불구내라고 지으면 어떨까요?"
"좋은 의견이오!"
"모두 찬성이오!"
알에서 태어난 아이의 이름은 불구내로 짓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불구내'란 말이
한자로는 '혁'이 되고 '거세간'이란 말이 한데 모여 '혁거세'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박혁거세는 6촌장들에 의해 임금님으로 모셔지게 되었습니다.
박혁거세가 임금님이 된 뒤 서라벌의 6부는 나라의 기초가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벌판 남산 쪽에 도읍을 정하여 궁궐을 짓고 성을 크게 쌓도록 합시다."
마침내 성을 튼튼하게 쌓으니 쇠울타리 같다는 뜻으로 쇠울이라 하였습니다.
쇠울은 한자로 금성(쇠 금, 성 성)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그 뒤 '서울'이라는 뜻으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박혁거세가 임금의 자리에 오른 뒤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아진개 앞바다에 수많은
까치 떼가 날아들었습니다.
그 때 바닷가에 살던 아진 의선이란 할머니가 배를 저어 까치 떼가 날아든 곳으로
가 보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배 안에는 황금 궤짝이 하나 놓여 있었습니다.
"이 황금 궤짝 속에 무엇이 있을까?"
아진 의선 할머니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그 궤짝을 열어 보니 한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습니다.
"용궁 나라의 왕자일까?"
아진 의선 할머니의 짐작대로 그 아이는 용궁 나라인 용성국 왕자였습니다. 그런데
알로 태어났기 때문에 버려진 것이었습니다. 아진 의선 할머니는 그 아이를 데려다
키웠습니다.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지을까?"
곰곰이 생각하던 아진 의선 할머니는 아기가 바다에서 튀어나왔다고 하여 '토해'라고
정하여 했습니다. 그러나 토해보다는 '탈해'가 부르기도 쉽고 아기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아기의 이름은 탈해로 정했으니, 성씨는 뭐라고 붙일까?"
아진 의선 할머니는 또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까치 작자에서, 새(새 조)가
날아갔으니 나머지 글자인 옛 석자로 정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진 의선 할머니는 아기의 성씨와 이름, 즉 성명을 '석탈해'로 정했습니다. 아기
석탈해는 자라 임금님이 되었습니다.
석탈해왕이 임금이 된 지 9 년이 되던 해 봄이었습니다. 밤마다 월성궁 서쪽 숲에서
닭 울음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꼬끼오!"
석탈해왕은 소문을 듣고 그 곳으로 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닭이 울던 곳에 황금
궤짝이 하나가 놓여 있었습니다. 열어 보니 사내아이가 있었습니다.
"하늘이 왕자를 내려 주셨도다!"
왕자가 없어 쓸쓸하게 지내던 석탈해왕는 매우 기뻐하며 아기를 궁궐에 데려다
길렀습니다.
그 아기는 황금 궤짝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을 김씨로 정했습니다. 처음엔 이름은
그냥 아기라고 불렀는데 뒷날 변하여 알지가 되어 김알지(성씨 김, 사람이름 알, 지혜
지)는 경주 김씨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김알지는 왕의 자리를 물려받을 수 있었지만 스스로 사양하였습니다.
김알지의 7 대손이 임금님의 자리에 오르니 그가 미추왕이었습니다.
신라는 고조손으로부터 내려온 이주민들의 경주를 중심으로 세운 나라입니다.
처음에는 나라 이름이 '사로'였습니다.
진한의 읍락 중심의 사회였던 '사로'는 1세기경에 북쪽에서 들어온 철기 기마 문화를
받아들었습니다. 그 힘으로 이웃의 읍락 중심의 사회를 차지하여 큰 세력이
되었습니다.
신라는 지리적으로 동남쪽에 치우쳐 대륙 문화를 받아들인 것이 늦어졌기 때문에
고구려와 백제보다 발전이 늦었습니다.
신라는 내물왕 때부터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왕의 자리를 물려받았습니다. 그 때는
임금님을 부를 때 왕이라 하지 않고 이사금, 마립간 등으로 불렀습니다.
신라는 4세기 중엽인 내물왕 때 고대 국가로서의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 그림: 묵자책 39
그림설명: 금령총 금관(신라), 금귀고리(신라).
대륙의 주인 광개토대왕
고구려의 제 19 대 광개토대왕은 1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바다 건너 왜구가 신라에 침입하여 신라에게 구원병을 요청해 왔나이다."
이런 보고를 받은 광개토대왕은 곧 신하들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신라는 우리 고구려와 핏줄이 같은 동족이니 도와 줌이 마땅하도다. 5 만의
구원병을 신라에 보내어 왜구를 무찌르도록 하라."
광개토대왕이 보낸 고구려의 응원군이 나타나자 신라에 침입한 왜구들은 뿔뿔이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고구려의 용맹스런 군사들은 도망치는 왜구들을 뒤쫓아 모두
무찔렀습니다.
그 무렵, 또 하나의 급보가 광개토대왕에게 날아들었습니다.
"우리 응원군이 남쪽으로 내려간 틈을 엿보고 후연이 서쪽 국경을 침입하였나이다."
광개토대왕은 신라에 보냈던 응원군을 돌려 국내성으로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용맹스런 고구려 군사들은 들으라! 우리는 저 넓고 넓은 대륙의 주인이 되어야
하느니라! 총진격하라!"
서기 402 년, 광개토대왕은 고구려 군사들을 이끌고 랴오허 강을 건너 후연 땅
깊숙이 진격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랴오허 강 동쪽을 차지하였습니다. 그로부터 2 년
뒤에 다시 군사를 이끌고 진격하여 옛 고조선 영토인 만주 대륙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 그림: 묵자책 43쪽
그림설명: 고구려 전성기의 우리나라.
광개토대왕(391--412)은 18세의 젊은 나이로 왕의 자리에 올라 39세의 한창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22 년 동안 무려 64개의 성과 1천 4백 개의 마을을
차지하였습니다.
그래서 국토를 넓힌 왕이라는 뜻으로 광개토대왕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은 왕은 그의 아들인 장수왕이었습니다.
"아버님께서 나라의 힘을 떨쳐 우리 고구려가 대륙의 주인이 되었다! 그러하니 나는
그 위대한 업적을 이어받아 나라를 더욱 발전시켜 고구려의 명예를 빛내려 하노라!"
고구려는 남으로는 아산만에서 죽령까지, 북으로는 랴오허 강 동쪽 땅까지 만주
대륙을 차지하였습니다. 이처럼 고구려는 전성기를 이루고 대제국으로 건설하였습니다.
장수왕(412--491)은 이름 그대로 99세까지 오래 살았으며 왕위에 있은 기간도 79
년이나 되었습니다.
장수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 제21 대 왕위에 오른 분은 손자인 문자왕이었습니다.
문자왕은 491 년부터 519 년까지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 북쪽의 부여를 완전히
병합하여 고구려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습니다. 그것은 증조 할아버지인
광개토대왕의 웅장한 뜻에서 비롯되어 마침내 대륙의 주인이 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일본의 문화는 백제로부터
백제의 제13 대 근초고왕은 중국, 일본과 해상 무역을 하였습니다.
그 무렵, 왜국(일본) 사신은 백제로 건너와 근초고왕에게 엎드려 청하였습니다.
"대왕이시여! 백제의 발달된 문화와 기술, 여러 가지 서적이나 물품 등을 얻고자
예물을 갖고 왔사옵니다."
또한 사신은 말했습니다.
"대왕이시여! 우리 나라는 아직 미개하여 장차 왕이 될 태자에게 글을 가르쳐 줄
스승도 없사옵니다. 부디 백제에서 스승도 보내 주시옵기 바라나이다."
왜국 사신들의 간곡히 아뢰는 말에 근초고왕은 너그럽게 보살펴 주었습니다.
"듣고 보니 왜국의 사정이 매우 딱하도다. 아직기라는 학자를 보내겠으니 왜국
왕자는 스승으로 받들고 유학부터 배워 백성을 다스리는 도리를 다할지어다."
일본은 백제의 근초고왕 때부터 우리 나라의 높은 문화를 받들어 배웠습니다.
백제의 근초고왕은 미개했던 일본을 깨우쳐 준 것입니다.
백제는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 제26 대 성왕 때에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는 중흥
정책을 펴면서 사비(부여)로 도읍을 다시 옮겼습니다.
성왕은 백제의 기틀을 다시 바로잡아 발전시켰으며 백제 문화를 화려하게
꽃피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왕은 일본을 깨우쳐 준 근초고왕처럼 일본에 불교와
우리 문화를 전해주었습니다.
이처럼 일본은 백제 문화를 받아들여 고대 문화의 뿌리를 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 그림: 묵자책 46쪽
그림설명: 그릇받침(백제).
화랑도와 진흥왕
"장차 나라의 훌륭한 재목으로 키우기 위해 화랑도를 국가적 조직으로 개편하노라."
신라 제24 대 진흥왕은 신라의 귀족 출신의 청소년들로 화랑도를 구성하였습니다.
애국 소년단인 화랑도에는 지도자격인 화랑이 있었고, 그 밑에 낭도가 있었습니다.
화랑도들은 이름난 산과 강을 돌아다니며 무술을 닦았습니다.
화랑도가 지켜야 할 '세속 오계'는 원광 법사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첫째, 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길 것.
둘째, 효성으로써 부모님을 섬길 것.
셋째, 믿음으로써 벗을 사귈 것.
넷째, 싸움에 나가서는 물러서지 말 것.
다섯째, 살아 있는 생물은 함부로 죽이지 말 것.
화랑은 평소에 학문과 무술을 닦아 두었다가 나라가 위태로울 때는 자기가 거느리는
낭도들을 이끌고 전쟁터에 나가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화랑도를 일으킨 진흥왕 때 가장 먼저 화랑이 된 인물은 설원랑이었습니다.
태종 무열왕(김춘추) 때의 김유신 장군도 화랑 출신으로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다진
인물이었습니다.
진흥왕 때 신라는 백제의 성왕과 힘을 합쳐 고구려를 쳐서 한강 유역의 땅을
얻었습니다. 진흥왕은 또 다시 백제가 차지한 땅까지 점령하여 영토를 넓혔습니다.
"이번에는 대가야를 치도록 하라."
진흥왕은 낙동강 유역에 있던 대가야를 쳐서 신라에 합치기도 하였습니다. 이 때
가야를 멸망시키는 데 큰 공을 세운 화랑이 있었습니다. 16살의 어린 화랑
사다함이었습니다.
사다함은 왕으로부터 받은 상을 부하 낭도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우정을 맺고 죽음을 함께 하기로 약속한 무관량이 죽은 뒤에는 슬픔에 빠져 17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효공왕 때의 효종랑을 비롯하여 김흠춘, 죽지랑, 원술, 반굴 등도 화랑의 이름을
빛낸 인물들입니다.
서기 660 년, 백제 의자왕 20 년.
신라군과 백제군이 황산벌에서 마주쳤을 때, 계백 장군이 이끄는 5천의 결사대에게
신라군은 네 차례나 졌습니다.
"백제의 결사대를 깨뜨리는 방법이 무엇이오?"
신라 장군들의 회의로 거듭하고 있을 때 나이 어린 화랑 관창이 나서며 용감하게
백제군 진영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백제군에게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아니, 나이 어린 소년이 아닌가? 살려서 되돌려 보내도록 하라!"
백제의 계백 장군은 화랑 관창의 용기에 감탄하여 되돌려 보냈습니다.
"싸움터에서 죽지않고 살아 돌아온 것은 씻지 못할 부끄럼이다."
16세의 나이 어린 화랑 관창은 다시 백제 진영에 뛰어들어 장렬하게
전사하였습니다.
"화랑 관창의 뒤를 따르자!"
"와^5,5,5^."
화랑 관창의 용감한 전사는 전 신라군의 사기를 치솟게 하여 황산벌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진흥왕이 일으킨 화랑도의 힘이 컸기
때문입니다.
진흥왕이 화랑도를 일으킨 것은 삼국 가운데 가장 늦게 일어난 신라를 강한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진흥왕은 나라 이름을 '신라'로 정한 제22 대 지증왕의 손자였습니다. 진흥왕은
7살의 어린 나이로 왕이 되었지만 매우 영특하였습니다.
진흥왕은 백제의 영토와 대가야를 쳐서 영토를 넓힌 다음 북으로 진군하여 고구려를
쳐서 원산만 일대까지 영토를 넓혔습니다.
새로 개척한 영토를 돌아보고 세운 기념비인 '진흥왕 순수비'는 창녕,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에 561 년부터 568 년 사이에 세워졌습니다. 서울 북한산에 있던 진흥왕
순수비를 지금은 세종로에 있는 국립 중앙 박물관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남북으로 영토를 넓혔으니 신라의 역사를 펴내도록 하라."
진흥왕의 명에 따라 거칠부는 신라의 역사를 쓴 '국사'를 편찬하였습니다.
"불교를 장려하여 나라 안 곳곳에 절을 지어 백성들의 정신을 하나로 통일시키려
하노라."
진흥왕은 불교를 장려하여 수많은 절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572 년에는 싸움터에서
전사한 군사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팔관 연회'를 베풀기도 하였습니다.
"가야금의 명인으로 이름높은 우륵을 모셔 오도록 하라."
진흥왕은 대가야 출신인 우륵을 매우 아껴 국원(충주)에서 살도록 보살펴
주었습니다. 그리고 우륵에게 가야금 보급과 악곡을 정리하도록 하였습니다.
화랑도를 일으켜 삼국 통일의 기초를 다진 진흥왕은 540 년부터 576 년까지 신라를
발전시키다 세상을 떠났지만 진흥왕 순수비는 오늘날까지 남아 그의 업적을 빛내고
있습니다.
가야 연맹과 김수로왕
옛날부터 가장 먼저 농업이 발달되었던 곳은 낙동강 하류의 삼각주 지대였습니다.
귀지봉을 중심으로 여러 읍락 사회를 다스리는 족장들이 모여 하늘에 풍년을 비는
제사를 지내고 있었습니다.
"하늘이시여! 올해도 풍년이 들게 하여 주소서!"
족장들이 기도를 올리자 하늘에게 이상한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그 아래 사람이 있느냐?"
족장들이 무릎을 꿇고 엎드려 대답하였습니다.
"예, 귀지봉을 중심으로 읍락 사회를 다스리는 아홉 족장들이 백성을 거느리고
있나이다."
"그러면 너희들은 지금부터 산봉우리에 흙을 파고 거북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도록
하라. 그렇게 하면 너희들을 다스릴 왕자를 만나게 되리라."
족장들과 백성들은 기뻐하며 한데 어울려 노래 부르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무지개 같은 빛이 비치더니 보자기에 싼 궤짝이 내려왔습니다.
"하늘에서 왕자님을 내려 보내셨구나!"
족장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궤짝에 절을 한 다음 뚜껑을 열어 보았습니다.
"오! 눈부신 여섯 개의 황금빛 알이 들어 있네요."
아홉 족장의 우두머리인 아도간이 그 황금빛 알을 집에 가지고 가 정성을 들여
보살폈습니다. 그랬더니 여섯 개의 알에서 여섯 명의 늠름한 아기들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일은 잠시 뒤에 그 여섯 명의 아기들이 어른이 된 것입니다.
"하늘이 우리에게 보내 주신 왕자님들이 분명하군요!"
족장과 백성들은 알에서 맨 먼저 나온 왕자를 '수로'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성씨는
금궤짝에서 나왔다고 하여 김(성씨 김)씨로 정했습니다. 그런 다음 김수로를
금관가야(본가야)의 왕으로 받들어 모셨습니다.
임금의 자리에 오른 김수로왕은 어느 날, 신하들에게 말했습니다.
"오늘 왕비가 될 공주가 바닷가에 닿을 것이니 나가 마중을 하여라."
신하들이 달려가 보니 정말 아름다운 공주가 여러 시종과 보물을 싣고 바닷가에 와
있었습니다. 신하들은 그 공주를 김수로왕에게 모셔 왔습니다.
"소녀의 꿈에 하느님께서 나타나셔서 가야국 수로왕에게 가라고 하여 이곳으로
왔나이다."
공주는 인도 야유타 나라에서 온 허황옥으로 나이는 16세라고 하였습니다. 황옥
공주는 금관가야 김수로왕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김수로왕은 김해 김씨의 시조가
되었고 황옥 왕비의 성을 딴 둘째 왕자의 35세 손인 허영은 김해 허씨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동성 동본은 아니지만 예로부터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김수로왕과 함께 황금빛 알에서 나온 다른 왕자들도 서로 흩어져 왕이 되었습니다.
낙동강 하루에 있던 변한의 12개 나라가 6가야 연맹으로 발전하니, 금관가야 또는
본가야(김해), 대가야(고령), 소가야(성주), 아라가야(상주) 등이었습니다.
가야 연맹은 그 세력을 떨쳐 처음에는 신라를 위협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가야
세력은 일본에 진출하여 문화를 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가야 연맹은 큰 왕국으로 힘을 떨치게 된 백제와 신라의 세력에 눌려 힘을
크게 떨치지 못했습니다.
532 년이 되던 신라 법흥왕 19 년에 김수로왕이 세운 금관가야는 맨 먼저 신라에
항복하였습니다. 그로부터 30 년 뒤인 562 년 신라 진흥왕 23 년에 대가야가 망하자
나머지 가야도 신라에 합쳐지고야 말았습니다.
그러나 왜국(일본)과 오가며 철을 수출하던 가야 연맹은 일찍이 철기 문화가
발달하여 신라 문화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본가야의 왕족이었던 김유신 장군은 뒷날 삼국 통일에 큰 공을 세웠고 우륵은
신라에 가야금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대가야의 강수는 문장이 뛰어나
외교 문서를 능숙하게 다루어 국제간의 교섭에 큰 공을 세우는 등 가야 출신의
인물들은 그들의 문화와 함께 신라의 발전에 이바지하였던 것입니다.
남해의 탐라국과 동해의 우산국
때는 백제의 동성왕 20 년.
"남쪽 바다 건너 섬나라 탐라국이 조공을 바치지 않으니, 정벌을 하리라!"
백제의 동성왕은 탐라국을 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무진주(광주)에 이르렀습니다.
우리 나라의 남쪽에 있는 큰 섬 제주도를 옛날에는 탐라국이라고 불렀습니다.
섬나라 탐라국에는 백제의 동성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정벌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사신을 보내었습니다.
"백제 대왕께 아뢰옵나이다. 우리 탐라국은 백제에 대대로 조공을 바치겠사오니
너그럽게 보살펴 주시옵소서."
"알았도다! 이제부터 탐라국은 백제에 귀속되었음을 잊지말도록 하라."
백제의 동성왕은 탐라국 사신에게 말했습니다.
탐라국은 목축업이 발달하였고 중국과 오가며 무역도 하였다고 전해 옵니다.
우리 나라 역사에서 제주도 다음으로 유명한 섬은 동해에 있는 울릉도입니다.
오늘날의 울릉도를 옛날에는 우산국이라고 불렀습니다.
신라의 이사부 장군은 나무로 만든 사자를 뱃머리에 싣고 우산국으로 건너가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우산국 백성들은 듣거라! 나는 신라의 장군 이사부다. 너희들이 신라에 복종하지
않으면 이 사나운 사자들을 풀어 물어뜯게 하리라!"
이 말에 우산국을 다스리던 우두머리와 백성들은 이사부 장군에게 항복하고야
말았습니다.
"저 무서운 짐승들을 풀지 마옵소서. 저희들은 큰 나라 신라에 맹세코
복종하겠나이다."
마침내 우산국은 신라 지증왕 2 년에 신라에 귀속되었습니다.
우산국이었던 울릉도는 오늘날까지 궁궐터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나라의 제도와 경제 생활
고구려, 신라, 백제의 삼국은 나라를 다스리던 제도에 특징이 있었습니다.
고구려는 태조왕 때부터 계루부에서 왕의 자리를 물려주는 세습 제도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형이 아우에게 왕의 자리를 물려주던 것을 고국천왕 때부터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왕의 자리를 물려주는 세습 제도가 정해졌습니다. 고구려에서는
수상(국무총리)을 '대대로'라고 불렀고 중앙 관직의 등급은 10 등급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관제를 정돈하여 갖춘 백제의 중앙 관직은 16
등급이었습니다. 그리고 수상을 '내신좌평'이라고 불렀습니다.
신라에서는 초기에 박씨, 석씨, 김씨, 세 성씨가 번갈아가며 왕의 자리를
차지하였습니다. 내물왕 이후부터는 김씨가 왕의 자리를 물려받게 되었습니다.
신라에는 골품 제도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성골과 진골이 바로 그것입니다. 성골이란
아버지, 어머니가 모두 왕족인 신분을 말하며, 진골이란 부모님 중에서 한 분만이
왕족인 신분을 말합니다.
신라는 처음에 왕이 성골에서 나왔지만 진덕여왕을 마지막으로 대가 끊겼습니다.
태종 무열왕 때부터 신라의 마지막 임금까지 진골 출신이 왕이 되었습니다.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15세 이상의 평민은 병역의 의무가 있었습니다. 모든 행정
구역에는 군대와 식량과 무기가 갖추어져 있었고 지방 장관은 군사 지휘관을 아울러
맡았습니다.
신라에는 '화백'이라는 공동 회의 제도가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모두가
찬성하는 만장일치라야만 결정하는 제도였습니다.
삼국의 법 제도는 매우 엄격하였는데 세 나라가 거의 비슷하였습니다.
"나라에 반역한 자와 전쟁터에서 진 패전자, 그리고 사람을 죽인 살인자는 모두
사형에 처한다."
"관리로서 뇌물을 받은 자와 도둑질한 자는 3배에서 12배까지 돈을 배상해야 한다.
그러나 죄가 악질적이면 죽을때까지 옥에 가두거나 귀양을 보낸다."
삼국은 나라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었지만 도둑에 대한 벌은 비슷하였습니다.
"말과 소를 죽인 자는 노비로 삼는다. 행실이 나쁜 여자는 남편 집의 종으로
삼는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나라마다 슬기로운 경제 생활을 하였습니다.
삼국에서는 무엇보다 농업과 목축업, 어업과 수공업의 발달로 경제 생활이
향상되었습니다.
고구려에서는 다섯 가지 곡식, 즉 오곡을 농사지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조농사의
수확이 많아졌습니다. 이러한 농사는 소와 말의 힘을 이용하였습니다. 또한 소, 말, 개,
돼지 등의 가축을 길러 목축업도 발달하였습니다.
백제에서는 거친 땅을 개간하여 논을 만들어 벼농사를 지었습니다.
서기 33 년 다루왕 11 년에는 벼농사를 짓도록 하였으며 나라 안 여러 곳에
저수지를 만들어 농사를 장려하였습니다.
신라에서도 논을 개발하여 발전시키며 저수지를 만들었습니다.
특히 지증왕 때 처음으로 소를 이용하여 땅을 갈게 함으로써 벼농사가
발달하였습니다. 눌지왕 때부터는 소가 끄는 수레를 사용하였습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은 어업도 발달하였습니다.
고구려는 직물과 목기, 나물 따위를 담는 그릇인 초구, 그리고 토기와 금속기 등
수공업이 발달하였습니다.
백제는 옷감을 기계로 짜는 직조와 함께 금속기 등 사치품 수공업이
발달하였습니다.
고구려의 호구세는 민호를 3 등급으로 나누어 곡식으로 세금을 내도록 하였습니다.
한 가정의 식구 수에 따라 베나 곡식을 세금으로 내게 한 것을 인두세라고 합니다.
"농사를 짓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백성이나 살림이 매우 가난한 백성들은 3 년에
한 번씩 1 필씩을 내도록 정하노라."
나라에서는 가난한 백성들에게는 세금을 적게 내도록 보살펴 주었습니다.
서기 194 년 고구려 제9 대 고국천왕 16 년, 고구려에는 을파소라는 뛰어난 재상이
있어 진대법을 만들어 발표하였습니다.
"생활이 어려운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나라에서는 봄에 곡식을 빌려
주었다고 가을에 받아들이는 진대법을 시행하겠소."
이것이 을파소의 진대법입니다.
백제에서는 일반 농민들만 내는 세금으로 쌀과 명주와 베 등을 받았습니다.
신라에서는 농산물의 일부를 바치는 세금과 노동으로 세금에 대신하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삼국 시대에는 나라 안의 특산물을 서로 사고 파는 교역을 위해 중앙과 지방에
시장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신라에서는 동시전이라는 관청을 두어 시장을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백제는 중국의 남조와 일본과의 무역이 많았습니다.
신라는 진흥왕 때 수나라, 당나라와 무역을 자유롭게 하였습니다.
삼국에서 수출한 물품들은 마직물, 금은 세공품, 주옥, 모피류, 인삼 등이었습니다.
수입품은 견직물, 장식품, 서적, 무기류 등이었습니다.
삼국 시대에는 여러 가지 학문과 산업 기술을 일본에 수출하기도 하였습니다.
고구려는 초기에 북조의 전진과 무역을 하였습니다. 장수왕 이후에는 북조의 북위와
남조의 송나라, 그리고 북방 민족과도 무역을 하였습니다.
* 그림: 묵자책 59쪽
그림설명: 말탄 무사 쌍영총벽화(고구려), 집 모양 토기(고구려), 화덕(고구려), 배
모양 토기(신라).
사회 풍습과 빛나는 문화
"하늘이시여! 올해도 풍년이 들게 하여 주시니 감사하옵니다."
고구려에서 10월에 '동맹'이라는 추수감사제가 있었습니다.
또한 고구려는 무^36^예를 받들어 3월 3일에는 사냥으로 무술을 겨루었습니다.
고구려의 국민성은 적극적이며 용맹스러웠습니다. 생활은 검소하면서도 깨끗한 것을
좋아하였습니다.
삼국 중에서 맨 북쪽에 위치한 고구려는 온돌 생활을 하여 겨울에도 따뜻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고구려의 남자들은 성인이 되면 상투를 틀었고 여자들은 머리에 두건을 쓰고
주름치마를 입었습니다. 벼슬자리에 있는 귀족들은 모자 양쪽에 깃털을 꽂고 금으로
장식하였습니다.
고구려와 더불어 백제와 신라도 의복과 풍습은 비슷하였습니다.
백제에서는 처녀들의 머리는 땋아 늘어뜨리다가 시집 갈 때에는 머리를 틀어
올렸습니다.
신라에서는 골품 제도가 있어 신분에 따라 집의 크기와 옷차림, 사용하는 그릇의
크기까지 달랐습니다.
특히 신라에서는 8월 보름날을 '가위'라고 하여 일 년 중에 가장 큰 명절로
삼았습니다. 추석날을 '한가위'라고 한 것은 여기에게 비롯된 것입니다.
삼국 시대에는 죽은 사람의 장례를 후하게 지내는 풍속도 있었습니다.
삼국의 문화는 하늘을 우러러 받들던 원시 신앙으로부터 고대 왕국으로 발전하면서
불교, 도교, 유교의 합쳐진 문화 속에서 화려하게 이룩된 것입니다.
고구려 문화의 특징은 정열과 힘이 넘치고 웅장하면서도 건실한 것입니다.
백제 문화의 특징은 온건하고 우아하며 섬세한 개성을 보이는 데 있습니다.
신라 문화의 특징은 전기에는 소박하고, 후기에는 현실적이며 온화하고
섬세하면서도 귀족적인 화려함을 보이는 것입니다.
금속 문화와 함께 전해 온 한자는 삼국 시대에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원효 대사와 요석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설총은 한자의 음을 따서 우리말을 기록한
'이두'라는 새롭고 독특한 글을 정리하였습니다.
삼국 시대에는 유학을 바탕으로 학문과 문화를 크게 발달시켰습니다.
신라에서는 이두로써 시가의 내용을 표현한 '향가'가 있었습니다. 향가는 화랑과
스님 들이 주로 지었습니다.
삼국 시대에는 나라마다 교육 제도와 교육 내용에 특색이 있었습니다.
고구려에는 태학과 경당이라는 교육 제도가 있었습니다.
태학은 372 년에 고구려의 서울에 세워진 국립 대학과 같은 교육 기관으로 귀족의
아들들을 가르쳤습니다. 가르친 교육 내용은 유학, 천문, 지리, 병법 등이었습니다.
경당은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에 생긴 사립 학교와 같은 교육 기관으로서
평민의 아들들을 가르쳤습니다. 교육 과목은 유학과 무술 등이었습니다.
백제는 유교의 내용을 가르치는 오경 박사와 천문과 역법을 가르치는 역박사,
의술을 가르치는 의박사가 있었습니다.
신라에서는 내물왕 때부터 한자를 사용하였습니다. 지증왕 때 대륙의 문물을 들여와
진흥왕 때에는 학문이 크게 발달하였습니다. 682 년 신문왕 때 국학을 두어 최고 교육
기관으로 삼았습니다.
삼국은 나라의 역사인 국사를 편찬하였습니다.
고구려는 영양왕 때인 600 년 이문진에 의해 '신집' 5권을 펴냈습니다.
백제는 근초고왕 때인 375 년 고흥에 의해 '서기'를 펴냈습니다.
신라는 진흥왕 때인 545 년 거칠부에 의해 '국사'를 펴냈습니다.
삼국 시대에는 나라마다 음악도 특색이 있었습니다.
고구려의 음악가이며 국상이기도 한 왕산악은 중국의 악기인 칠현금을 고쳐
거문고를 만들었으며 100여 곡을 지었습니다. 왕산악이 거문고를 연주할 때 학들이
날아와 춤을 추었다고 하니 그 빼어난 솜씨가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왕산악의 악곡을 받아들인 보고는 거문고의 새로운 가락 30곡을 지었습니다.
고구려의 악기는 거문고를 비롯하여 날라리, 오현금 등 17종류가 있었습니다.
악곡으로 전해 오는 황조가 등입니다.
옷을 백 군데나 기워 입었다는 백결 선생은 설날이 다가오자 방아타령을
지었습니다. 떡방아 찧는 기분을 내어 가난한 아내와 백성들을 위로하고 기쁨을
주었다고 합니다.
가야금의 시조인 우륵은 일생 동안 185곡을 지었으며 제자인 계고에게는 가야금을,
법지에게는 노래를,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쳤습니다.
삼국 시대의 미술의 특징은 소박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나타냈으며 불교적인 것이
많았습니다.
삼국의 유명한 그림은 고구려의 사신도, 풍속도, 무용도, 수렵도 등이 있으며 백제의
사신도와 신라의 천마도가 있습니다.
유명한 화가의 작품으로는 고구려의 담징이 그린 일본 호류사의 벽화와 백제의 아좌
태자가 그린 일본 쇼토쿠 태자의 초상, 신라의 솔거가 그린 황룡사의 노송이 있습니다.
솔거가 그린 소나무 그림에 새들이 날아들었다니 그 빼어난 솜씨가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의 고분 중에 돌로 꾸민 석총은 장군총뿐이며 흙으로 꾸민 토총은 각저총,
무용총, 사신총, 쌍영총입니다.
백제의 고분은 벽돌로 안을 쌓은 무령왕릉 등이 있습니다. 연꽃과 구름 등을 그린
벽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신라의 고분은 나무로 관을 짠 목곽분과 관을 두는 현실을 돌로 쌓은 석실분이
있습니다. 내부에는 왕관을 비롯한 많은 유물 등이 있습니다.
삼국 시대에 세운 탑으로는 나무로 만든 목탑과 돌로 만든 석탑이 있는데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것은 석탑뿐입니다.
삼국 시대의 유명한 조각품은 작은 금동불과 커다란 석불, 토불 등 거의가
불상입니다.
삼국 시대의 공예품으로는 금관, 금제 귀고리, 금제 팔찌 등 여러 가지 금으로 만든
장식품이 있고 기미 인형물인 토기도 있습니다.
* 그림: 묵자책 65쪽
그림설명: 기마인물형 토기(신라).
삼국 시대의 신앙은 처음에는 고대의 원시적인 토속 신앙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불교가 들어와 발전하였고 도교가 들어오는 등 신앙 생활의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고구려 소수림왕 때인 372 년에 우리 나라에 처음 불교가 들어왔습니다.
"고구려와 백제가 불교를 받아들여 나날이 발전하고 있으니 우리 신라도 불교를
국교로 정하려 하는데 경들의 의견은 어떠하오?"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이려 할 때 왕은 신하들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되옵니다."
모든 신하들이 반대하였습니다.
"신 이차돈 아뢰옵니다. 불교를 받아들이셔야 하옵니다."
"백성들은 이차돈이 궁궐을 드나들기 때문에 가뭄과 장마가 겹친다고 여기고
있사옵니다. 이차돈을 처형하여 사나워진 백성들의 마음을 가라앉히시옵소서."
"신 이차돈 아뢰옵니다. 대왕께서 불교를 받아들이시려면 이 몸을 처형하여
부처님의 신통한 힘을 보이면 될 것이옵나이다. 소신이 죽으면 반드시 이상한 일이
일어날 것이옵니다."
왕은 불교를 일으키기 위해 할 수 없이 이차돈을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이차돈의 예언처럼 그를 처형하던 날 갑자기 맑게 갠 하늘이 캄캄한 밤처럼
어두워지며 우레와 번개가 쳤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차돈의 목을 베자 젖 같은 흰
피가 솟아 나며 하늘에게 꽃비가 쏟아져 내렸습니다.
"부처님이 노하셨다!"
"하늘의 벌이 두렵구나!"
5세기 신라 눌지왕 때 고구려의 스님 묵호자에 의해 들어온 신라의 불교는 이차돈의
순교로써 이듬해 국교로 정해졌습니다. 이차돈의 성은 박씨이며 왕손이었습니다.
신라에 처음으로 세워진 절은 흥륜사입니다.
신라의 유명한 스님은 진평왕 때의 원광으로 수나라에서 돌아와 '세속 오계'를
지었습니다. 또한 선덕 여왕 때의 자장은 당나라에서 돌아와 계율종을 전했습니다.
삼국 시대에는 불교뿐만 아니라 도교도 들어왔습니다.
고구려 보장왕 2 년인 643 년 대막지리(국무총리) 연개소문의 권유로 당나라에서
도사인 숙달 등 8 명이 노자의 '도덕경'을 들여왔습니다.
연개소문은 도사들이 머무를 도관을 지어 주었으며 불교 세력을 누르고 도교를
일으켰습니다.
백제에서는 산수문전의 벽돌무늬에서 도교 사상을 표시하고 있는 것으로 도교가
들어왔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신라에서도 화랑도의 이름을 국선, 선랑 등으로 불렀던 것과 화랑들이 유명한 산과
강을 찾아다닌 것으로 미루어 도교가 널리 퍼졌음을 헤아려 볼 수 있는 것입니다.
* 그림: 묵자책 67쪽
그림설명: 산수(자연) 무늬의 벽돌(백제).
살수대첩과 안시성 승리
"고구려로 총진군하라!"
중국 대륙을 통일한 수나라의 첫 임금인 문제는 30 만 대군을 거느리고 바다와
육지로 침입하였습니다.
"수나라 군사들은 먼길을 오느라고 지쳐 있소. 또한 장마와 질병에 시달리고 있으니
첫 싸움에서 모조로 무찔러야 하오."
고구려의 총사령관인 을지문덕 장군은 수나라 침략군을 쳐부수기 위해 전군에
명령을 내렸습니다.
"앞으로의 싸움에서 하루에 일곱 번 싸우고 일곱 번을 거듭 지며 후퇴하라!"
처음 고구려 군사들은 하루에 7전 7 패라는 을지문덕 장군의 이상한 전술에 숨어
있는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령관의 명령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군인으로서의 책임감과 함께 을지문덕 장군을 하늘처럼 믿고 작전 명령대로
따랐습니다.
한편 을지문덕 장군은 군사들을 시켜 백성들에게도 명령을 내렸습니다.
"고구려의 모든 백성들은 적군에게 이로운 물건은 모조리 성 안으로 옮겨 오고
마을의 집집마다 곡식 한 톨 남기지 말고 비우도록 하라!"
을지문덕 장군은 먼길을 온 피곤한 적군을 굶주리게 한 다음 반격하여 무찌를
작전을 짠 것입니다. 이 작전을 '청야 전술'이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을지문덕 장군은 혼자서 수나라 진영에 들어가 적군의 형편을 살피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치밀한 작전을 세웠습니다.
마침내 수나라의 30 만 5천 명의 대군은 살수(청천강)를 건넜습니다. 적군을 맞아
싸우는 고구려 군사는 10분의 1밖에 안 되는 3 만 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고구려
군사와 백성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뭉쳤습니다.
"화살과 군량미가 떨어졌습니다."
부하들의 보고를 받은 수나라 장군들은 후퇴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을지문덕 장군의 청야 전술에 걸려든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기다리던 반격의 때는 왔다! 적군을 뒤쫓는 한편, 앞질러 가서 살수
맞은편에 숨어서 기다리라!"
후퇴하던 수나라 군사들의 살수 중간에 이르렀을 때, 을지문덕 장군의 총공격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총반격! 둑을 터라!"
을지문덕 장군은 군사들을 시켜 미리 몰래 막아 놓았던 둑을 터뜨렸습니다. 강물이
사납게 불어나자 미리 만들어 숨겨 두었던 톱니처럼 뾰족한 뗏목이 상어의 이빨처럼
수나라 군사들에게 파고들었습니다.
"으앗!"
수나라 침략군은 을지문덕 장군의 전술과 용맹스러운 고구려 군사들에게 전멸되고야
말았습니다. 30 만 5천 중에서 살아 돌아간 군사의 수는 경우 2천 7백여 명뿐이었다니
이 싸움에서 고구려가 얼마나 큰 승리를 거두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싸움을 '살수대첩'이라고 부릅니다.
수나라는 그 뒤에도 고구려에 앙갚음을 하기 위해 613 년에 제 2차 침입을 하였고,
이듬해인 614 년에 제 3차 침입을 하였으나 용맹스런 고구려 군사에게 번번이 참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거듭된 큰 전쟁으로 수나라와 고구려는 나라 힘이 약해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수나라는 경제가 바닥이 나고 내란까지 일어나 멸망하였습니다. 그 뒤 중국 대륙에는
이연과 이세만 부자가 당나라를 세웠습니다.
당나라는 나라 안의 어지러움을 바로잡고 힘을 기르기 위해서 처음 고조 때에는
고구려와 친선을 맺으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나라의 태종이 임금이 되면서 고구려를 침략하려는 야심을 품었습니다.
고구려의 대막지리(국무총리)인 연개소문은 당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여 천리장성을
쌓는 한편 당나라에 대해서 강한 정책을 펴나갔습니다.
"고구려를 쳐서 항복을 받고야 말리라!"
645 년 당나라 태종은 신무기를 갖춘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 왔습니다.
"요동성이 무너졌다!"
신무기를 앞세우고 요동성을 깨뜨린 당나라 군사들은 물밀듯이 안시성을 향해
밀려왔습니다.
연개소문의 명령을 받은 안시성 성주 양만춘은 성을 굳게 지키며 당나라 침략군과
맞싸웠습니다.
"안시성 성주는 듣거라. 안시성은 독 안에 든 쥐와 같으니 성문을 열고 항복하라!"
당나라 태종이 의기양양하게 외쳤습니다.
"이 화살로 대답해 주리라!"
안시성 성주 양만춘은 큰 활을 들어 쏘아 당나라 태종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습니다.
안시성의 고구려 군사와 백성들의 끈질긴 대항과 기습 작전에 수나라 군사들은
보급의 길마저 끊겨 물러나고야 말았습니다.
"물러가는 적은 뒤쫓아 모조리 무찔러라!"
고구려 군사들은 성문을 열고 나아가 지쳐서 후퇴하는 적군을 날쌔게 쫓아가
무찔렀습니다.
마침내 안시성 싸움도 고구려의 큰 승리로 끝났습니다.
당나라는 안시성에서 패한 뒤에도 고구려를 2차에 걸쳐 침입하였지만 패하고
말았습니다. 당나라 태종이 죽자 고구려에 대한 침입은 중단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북쪽에서 고구려가 수나라, 당나라 같은 대륙의 강한 나라의 침입을 막아 주는 동안
같은 핏줄의 겨레가 세운 백제와 신라는 착실하게 발전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살수대첩과 안시성의 승리는 우리 민족의 슬기와 용기와 끈기가 돋보인 빛나는
승전보인 것입니다.
삼천 궁녀 낙화암에 지다
"상감마마,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밀려오고 있다 하나이다. 잔치를 거두시고 중신
회의를 열어 대책을 의논하소서."
때는 660 년. 백제의 의자왕이 임금의 자리에 오른 지 20 년 되는 해였습니다.
신라의 태종 무열왕은 김유신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소정방이 거느린 당나라 군사와
연합군을 짜서 백제를 공격하였습니다.
백제의 의자왕은 젊었을 때 해동의 증자라고 불려질 만큼 슬기로운 임금이었습니다.
그러나 차츰 교만해지더니 방탕한 생활에 빠졌습니다.
나라를 바로잡으려는 충신들의 바른말을 귀찮게 여겨 귀양을 보내거나 처형을
시키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의자왕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귀양 간 충신들에게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을
막을 방법을 물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간신의 무리들만 세도를 부리던 백제 조정은
귀양 간 충신들의 이야기를 물리치고 나라를 망치게 하고 있었습니다.
백제의 기둥으로 남은 충신은 계백 장군밖에 없었습니다.
"듣거라! 우리 5천 명의 결사대는 최후의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나라를 지키자!"
계백 장군은 결사대를 이끌고 황산벌로 나아가 처음 싸움에는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신라의 김유신 장군이 이끄는 5 만 명의 신라군에게 5천 명의 백제 결사대는
네 차례의 싸움 끝에 전멸하고 말았습니다. 계백 장군은 싸움터에 나가기에 앞서 이미
나라의 운명이 다한 것을 알고 자기의 가족을 모두 죽게 하고 자신도 장렬한 전사를
하였습니다.
마침내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이 백제의 서울 사비성을 무너뜨리고 의자왕은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이 때 백제왕의 3천 궁녀가 낙화암에서 백마강으로 꽃잎처럼 떨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습니다.
백제가 멸망하자 당나라는 백제 땅에 웅진 도독부 등 5 도독부를 설치하였습니다.
그리고 의자왕을 비롯한 왕족과 대신 들을 포로로 데려갔습니다.
"당나라가 연합군으로 도움을 주었다고 하나 우리 땅을 지배하려는 것은 당치 않은
일이로다! 백제의 옛 땅은 우리의 것이니 당나라 세력을 이 땅에서 몰아내야
하느니라^5,5,5^."
크게 노하며 부르짖는 신라의 태종 무열왕은 삼국 통일의 터전을 닦다가 통일이
되기 7 년 전인 661 년에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뒤를 이어 임금의 자리에 오른 신라 제 30 대 문무왕은 삼국 통일을 이룩하기
위해 계속 노력하였습니다.
나라를 잃은 백제의 왕족 복신과 스님 도침은 일본에 가 있던 풍을 왕으로 추대하고
백제 부흥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주류성(황산)과 임존성(대흥)을 근거지로 삼아 백제의 장군 흑치상지와 함께 3 만
명의 군사를 모아 백제 부흥 운동을 펴나갔습니다. 그러나 지도자들의 의견이 엇갈려
4 년 만에 백제 부흥 운동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백제의 역사는 마침내 그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나라를 망친 형제 싸움
"맏아들이 아버지의 뒤를 잇는 것은 당연한 일이야. 그러니까 이 나라를 다스리는
막리지 자리는 내가 차지해야겠어."
"아무리 형이라 해도 권력을 독차지할 수는 없어."
고구려의 대막리지로 사실상 나라를 다스리던 연개소문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남생이 막리지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동생 남건은 군사를 일으켜 형인 남생과 싸움을
벌였습니다. 남생은 동생 남건의 세력에 밀려 국내성으로 도망치게 되었습니다.
"어디 두고 보자. 당나라의 힘을 빌어 권력을 되찾고 말겠다."
형 남생은 당나라에 항복하여 기회를 노리려고 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조카들의 자리 싸움으로 나라의 힘이 다했으니 차라리 신라로나 가야겠군."
연개소문의 동생인 연정토는 신라에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대륙을 지배하던 고구려는 외적의 침략을 물리치는 잦은 전쟁으로 나라의 힘이
약해진 것과 아울러 연개소문 아들들의 형제 싸움으로 국력은 돌이킬 수 없이
기울어졌습니다.
이러한 때에 이적과 설인귀 등이 거느리고 온 당나라군과 김인문이 이끌고 온
신라군이 함께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였습니다.
고구려 군사들은 마지막 힘을 다해 싸웠지만 평양성을 빼앗겨 이미 기울어진 나라를
일으킬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대륙을 지배하던 영광된 고구려의 역사는 668 년에 그
막을 내리고야 말았습니다.
(통일 신라와 발해 시대)
(민족 통일과 겨레의 기상)
삼국의 통일
"한겨레가 세운 세 나라를 통일하려는 우리 신라에 대해 당나라는 연합군으로 도와
주었다는 구실을 내세워 우리 땅을 지배하고 자주성을 빼앗으려 하니 결코 용납할 수
없다!"
신라가 당나라의 힘을 빌어 삼국을 통일했는데, 당나라는 돌아갈 생각을 않고 우리
땅을 지배하고 자주성을 빼앗으려 하였습니다. 이에 신라의 김유신 장군은 우리
땅에서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10여 년 동안이나 그들과 맞싸우며 승리를
거듭하였습니다. 그러한 끈질긴 항쟁으로 당나라의 안동 도호부를 만주 지방으로
쫓아낼 수 있었습니다.
삼국 통일을 위해 한평생 싸움터에 몸과 마음을 바친 김유신 장군은 그 공으로
태대각간이라는 벼슬을 받았습니다. 김유신 장군은 태대각간이 된 지 얼마 안 되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라에서는 그를 흥무대왕으로 봉하여 그 공을 기렸습니다.
김유신 장군이 세상을 떠나기 전 장군의 아들인 원술랑은 비장으로 싸움터에 나가
당나라군과 싸웠습니다. 그런데 효천, 의문 등 장군이 연이어 전사하자 죽기를
결심하고 싸웠으나 담릉의 만류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들 원술랑이 후퇴한
것에 대해 아버지인 김유신 장군은 크게 꾸짖었습니다.
"세속 오계도 잊었느냐? 화랑으로서 싸움터에서 물러섰고 왕명을 어기며 우리
가문의 명예를 욕되게 하였으니 너는 이제 내 아들이 아니다."
아버지인 김유신 장군의 꾸지람을 듣고 원술랑은 태백산 속으로 들어가 숨어
살았습니다. 뒤늦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집으로 찾아갔지만
어머니조차 받아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어미로서는 내가 낳은 아들 원술랑을 용서해 주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지만
아버지의 용서를 받지 못하였으니 받아들일 수 없구나."
원술의 어머니이며 김유신 장군의 아내인 지소 부인은 태종 무열왕의 셋째
딸이었습니다.
"아! 어머니마저 나를^5,5,5^."
원술랑은 아버지 김유신 장군의 무덤으로 찾아가 눈물을 뿌리며 굳게
다짐하였습니다.
"아버님, 불효가 원술이 여기 왔나이다. 살아 생전에 나라에 공을 세워 아픈 마음을
위로하려 하였더니 이제 이 슬픔, 가슴 쳐도 풀릴 길 없나이다 앞으로 소자는 태종
무열대왕과 아버님의 소원이셨던 통일의 유업을 이룩하는 일에 목숨을 바치겠나이다."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다짐한 원술은 싸움터로 나갔습니다.
675 년 신라 문무왕 15 년, 왕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지금의 양주에 있던 매초성의
당나라 별동대인 이근행의 대군을 공격하였습니다.
신라의 매초성을 되찾기 위해 진격하자 원술 장군은 목숨을 걸고 앞장 서서 전투에
뛰어들었습니다.
"신라 장군 원술의 기세가 너무나 사나우니 뒤로 물러서라!"
당나라 장군 이근행은 신라의 원술 장군에게 쫓겨 전차와 군마와 병기를 버리고
후퇴 명령을 내리며 허둥지둥 도망치고야 말았습니다.
이번 싸움에 가장 공이 큰 원술 장군에게 큰 벼슬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원술은 그
큰 벼슬을 사양하였습니다.
"불효자가 어찌 벼슬을 받으리까^5,5,5^."
원술 장군은 이 말을 남긴 채 깊은 산 속에 들어가 일생 숨어 살았다고 합니다.
"삼국은 한겨레가 세웠던 나라이니 이제 그 힘을 하나로 뭉쳐야만 합니다."
신라는 민족의 자주성을 지키고 삼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멸망한 고구려와 백제
사람들의 힘을 모아 문무왕 16 년 676 년에 당나라 세력을 이 땅에서 완전히 몰아내니
마침내 국토 통일의 성업을 이루고야 말았습니다.
한반도에 자리잡은 신라에 의해 삼국 통일은 이루어졌지만 만일 대륙을 지배하던
고구려에 의해 삼국이 통일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발전하는 통일 신라
신라의 삼국 통일로 우리 민족은 하나의 단일 국가를 이룩하여 약 100여 년 동안
전성 시대를 맞이하였습니다.
신라는 통일 이전에는 귀족의 세력이 강했지만 통일 이후에는 왕의 권한이
강화되었습니다.
"지난날 백제와 고구려의 백성들은 차별하지 말고 과거 신분에 따라 벼슬을
내리노라."
통일 신라 왕은 백제의 옛 관리에게는 과거의 신분에 따라 10관등 이하의 관직을
주었고, 고구려의 옛 관리들에게는 7관등 이하의 관직을 주었습니다.
신라 신문왕 때 전국을 9주로 나누고 5소경을 설치하였습니다.
9주란, 옛 삼국 땅에 3주씩 둔 지방 정치제도입니다. 백제의 옛 땅에는 웅주(지금의
공주), 전주, 무주(지금의 전라도 광주)의 3주를 두었고, 고구려의 옛 땅에는
한주(지금의 경기도 광주), 삭주(지금의 춘천), 명주(지금의 강릉)의 3주를 두었습니다.
5소경이란 수도 금성(경주)의 위치가 나라의 중심에서 동남쪽으로 치우쳐 있었기
때문에 통일된 나라를 보다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설치한 지방 조직입니다.
통일 신라의 군사 조직인 9서당은 왕의 직속 군대로서 수도에 두었습니다. 신라
사람을 비롯하여 고구려, 백제, 말갈 사람들도 포함하여 조직한 군대입니다.
군대의 계급은 장군을 비롯하여 28계급의 장교가 있었습니다.
통일 신라는 경제 생활도 발전하였습니다.
"귀족과 나라에 공이 큰 신하에게는 식읍과 사전을 내리노라."
왕이 내린 식읍이란 한 지역의 세금을 귀족이나 공이 큰 신하가 받아서 쓰는 고을을
말하며, 사전이란 왕이 준 토기를 일컫는 말입니다.
통일 신라의 왕은 백성에게도 토지를 주어 생활 안전을 시켜 주었습니다. 이것을
정전이라고 하는데 18세부터 60세까지의 남자에게 나라에서 나누어 주던 토지입니다.
""15세 이상의 군인 유가족과 효자에게 구분전을 내리노라."
722 년 성덕왕 21 년에 왕은 백성들에게 구분전을 주었습니다. 구분전이란, 자손이
없는 관원이나 전사한 군인의 아내에게 등분에 따라 나라에서 주던 논밭입니다.
통일 신라 시대의 왕들은 농업을 장려하여 생산을 늘렸습니다. 또한 농가의
부업으로 누에를 치는 양잠과 옷감을 짜는 직조가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가축도 많이
길렀고 인삼도 재배하였습니다.
828 년 흥덕왕 때에는 김대렴이라는 사람이 당나라에 가서 마시는 차씨를 가져와 차
재배도 이루어졌습니다.
통일 신라 때에는 금은 세공품, 자개를 붙이고 옻칠한 공예품인 나전 칠기, 도자기와
오지 그릇 등의 수공업이 발달하였습니다.
통일 신라의 수도인 금성(경주)에는 통일되기 이전의 시장 이름인 동시 외에도 서시,
남시가 새로 생겨 상업도 발달하였습니다.
통일 신라의 수도인 금성은 한때 17 만 8천 9백 36 호나 되는 큰 도시를 이루었을
뿐 아니라 기와집도 많았습니다.
숯으로 밥을 지어 먹기 시작한 때오 통일 신라 시대부터였습니다.
통일 신라 시대는 다른 나라와의 무역도 발달하였습니다.
신라가 당나라 세력을 우리 땅에서 내쫓은 뒤 얼마 동안은 두 나라 사이에 국교가
끊겼지만 다시 좋은가 이루어져 무역을 활발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신라에서 당나라에 수출한 물건들은 저포(모시), 견직물(비단의 일종), 마직물(베),
명주, 물표범 가죽, 인삼, 약재, 금은 세공품, 수공예품 등이었습니다.
신라가 당나라로부터 수입한 물건은 비단, 책, 관복, 차, 약재 등이었습니다.
특히 828 년 흥덕왕 3 년에 장보고 장군을 청해진 대사로 임명하면서 신라의 해상
활동은 눈부시게 발전하였습니다.
장보고는 궁복이라고 불리우던 어린 시절의 친구 정연과 함께 큰뜻을 품고 당나라에
들어가 온갖 고생을 하며 무^36^예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당나라 서주 지방에서 무령군
소장으로서 장군이 되었습니다.
그 무렵 신라 해안 지방에 사는 백성들은 해적들에게 재산을 빼앗기고 잡혀가
당나라에 노^36^예로 팔리고 있었습니다.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 무역이 발달하였고, 멀리 남양의 무역 상인과 아라비아 무역
상인들까지 출입이 잦아지자 바다에는 상선을 노리며 약탈하는 해적들이
들끓었습니다.
"해적들에게 잡혀 노^36^예로 팔려 온 내 동포들을 하루빨리 구해야겠다."
장보고는 우선 산등성에 법화원이라는 절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노^36^예로 팔려 온
신라 사람들을 몰래 빼내어 신라방 마을에 숨긴 다음 법화원으로 옮기는 일부터
시작하였습니다.
"이제 신라에 돌아가 해적들을 소탕하고 조국 신라를 해상의 왕국으로
번영시켜야겠다."
828 년, 장보고는 당나라의 벼슬을 버리고 노^36^예로 잡혀 있던 수많은 동포들을
데리고 신라로 돌아왔습니다.
흥덕왕으로부터 청해진 대사로 임명받은 장보고는 곧 지금의 완도 가리포에 성을
튼튼히 쌓고, 배가 닿을 수 있는 부두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곳을 군사 기지와
무역의 중심지로 삼았습니다.
그런 다음 배를 만들고 군사 훈련을 시켰습니다. 엄격한 군사 훈련으로 단련된
장보고 장군의 군대는 강철같이 강했습니다.
"해적선이 나타났다. 돌격!"
장보고의 전함들은 나타나는 해적선마다 모조리 쳐부쉈습니다.
장보고 장군은 바다를 주름잡은 바다의 왕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눈부신 활약으로
신라 사람들은 마음놓고 해상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어 무역이 크게 발달하였습니다.
청해진 대사 장보고는 전함으로 해적을 소탕하며 상선에는 물품을 가득 싣고
당나라와 일본 세 나라 사이의 국제 무역을 한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라
왕족들의 싸움으로 장보고 장군은 왕족의 일파가 보낸 염장이라는 자객에게
암살당했습니다. 뛰어난 애국심과 용기로 동양의 해상권을 한손에 잡고 흔들던 청해진
대사 장보고의 원통한 죽음과 함께, 우리 역사의 자랑으로 꼽던 청해진은 남해의 파도
속에 묻히고야 말았습니다. 그의 위대한 뜻은 이어지지 못했지만, 우리 겨레에서 큰
자신감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이후 통일의 터전을 닦았던 태종 무열왕의 직계 자손들로
왕위가 순조롭게 이어졌습니다. 그러다가 약 1세기가 지나면서 다른 귀족들의 왕위
다툼으로 왕실에는 걷잡을 수 없는 회오리바람이 휘몰아쳤습니다.
"권력을 잡으려면 군대를 키워야 한다."
신라 말기인 하대에 이르러 155 년 동안에 무려 20 명의 왕이 바뀌고 그들 대부분의
내란으로 희생이 되니, 신라 왕실에 휘몰아친 회오리바람이 얼마만큼 거세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통일 신라는 발전과 변화를 거듭하면서도 향기 높은 문화 예술의 꽃을
피우기도 하였습니다.
* 그림: 묵자책 85쪽
그림 설명: 나무로 만든 배(신라), 차형 토기(신라).
큰스님들과 이름난 학자들
"오늘 밤은 어디서 자고 갈까요?"
"저기 있는 동굴에서 지냅시다."
길을 가던 두 스님이 날이 저물자 하룻밤 잘 곳을 찾고 있었습니다.
때는 650 년, 두 해 전에 황룡사에서 스님이 된 원효는 의상 스님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의 길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당황성 근처에 이르러 동굴 속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원효 스님은 깊은 밤에 목이 말라 머리맡에 있는 바가지에 담긴 물을 마시고
다시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 보니 두 스님이 잠자던 곳은 동굴이 아니라 무덤
속이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밤에 달게 마신 물이 해골에 괸 썩은 물인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원효 스님은 구역질이 나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이제야 알았다. 모든 것은 사람의 마음에 달렸구나! 간밤에 마신 물은 달고도
시원했는데 해골에 괸 썩은 물이라는 것을 알고는 구역질이 나오다니,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 그리고 착한 것과 악한 것 등의 구별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온다는 것이다."
평범한 일을 통해서 새로운 것을 깨달은 원효 스님은 당나라로 유학을 가려던
발걸음을 돌려 신라로 되돌아왔습니다.
원효 스님은 그 뒤 분황사에 머물면서 법성종을 처음 일으켜 불교 보급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법성종은 해동종, 통불교, 원효종, 분황종이라고도 일컫습니다.
신라는 삼국 통일 이후 여러 갈래의 불교 사상이 정리되었습니다. 귀족들의 주로
믿던 불교가 백성들에게까지 널리 퍼졌습니다.
신라 시대의 불교의 종파는 통일 전의 교종 외에 새로운 선종이 들어와 퍼졌습니다.
교종이란 경전을 연구하여 불교의 진리를 깨닫는 종파이며 통일 전부터 들어와
있었습니다.
통일 후의 화엄종, 법성종, 법상종이 들어와 5교가 성립되었습니다.
교종 5교의 종파 이름과 창설자와 중심이 되었던 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열반종-보덕-경복사. 계율종-자장-통도사, 법성종-원효-분황사, 화엄종-의상-부석사,
법상종-진표-금산사.
선종이란 경전을 연구하는 것보다 정신 수양인 참선으로 진리를 깨닫는
종파였습니다. 아홉 분의 스님이 아홉 산에서 참선을 하였다 하여 선종 9산이라
불렀습니다.
통일 신라 시대에는 유명한 큰스님들이 많았습니다.
"극락 세계는 먼 곳에 있으나 마음가짐에 따라 내가 사는 곳이 극락이 될 수도 있는
것이라오."
2백 40여 권이나 되는 책을 펴내고 우리 나라 불교에 큰 업적을 남긴 원효 대사는
일본의 불교 발전에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원효 대사가 해골에 괸 물을 마실 때 함께 있었던 의상 대사는 혼자 당나라에
유학을 다녀와 신라의 귀족들에게 화엄종을 널리 퍼뜨리고 많은 절도 세웠습니다.
676 년에 왕명을 받아 부석사를 세우고 나라 안 여러 곳에 화엄종의 절 10개를
세웠습니다.
의상 대사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고 10 대덕이라 불리운 훌륭한 스님들이 나왔으니,
오진, 지통, 표훈, 진정, 진장, 도융, 양원, 상원, 능인, 의적 등이 의상 대사의
제자들입니다.
신라의 왕손으로 세 살에 스님이 된 원측 큰스님은 중국어와 범어 등의 어학에
뛰어났습니다.
분황사 주지 스님으로 이름 높던 자장 스님은 왕에게 아뢰어 황룡사 9층탑을
완성시켰습니다.
'왕오천축국전'하면 생각나는 스님이 있으니 바로 혜초 스님입니다. 그는 해로로
인도에 들어가 순례하고 간다라 지방과 서역을 거쳐 돌아오니, 그 때 지은 기행문이
바로 유명한 '왕오천축국전'인 것입니다.
이 외에도 석장을 끌고 다니며, 시주를 받아 석장사라는 절을 지은 양지 스님 등
통일 신라 시대에는 큰스님들이 많았습니다.
한편 통일 신라 시대에는 유학을 깊이 연구하여 유학 발전에 크게 공헌한 이름난
학자들도 많았습니다.
"어려운 학문을 쉽게 배울 글을 만들어 백성들이 문화 생활을 하도록
해야겠구나^5,5,5^."
원효 대사와 진평왕의 막내 따님인 요석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설총은 한자의 음과
뜻을 따서 우리말을 적은 '이두 문자'를 연구, 정리하여 발전시키는 데 공헌하였습니다.
설총이 지은 화왕계(화왕설)가 삼국사기에 전해지고 있는 데, 이 이야기는 장미꽃과
할미꽃을 비유하여 충신과 간신을 풍자한 이야기입니다. 신문왕에게 이 꽃 이야기를
들려주어 감동시켰다고 합니다.
김대문은 성덕왕 때 진골 출신의 학자로서 많은 책을 남겼습니다. '계림잡전',
'화랑세기' 등은 뒷날 김부식의 삼국사기 편찬에 귀중한 자료가 되었지만 전해 오지는
않습니다.
신라의 이름난 학자라면 최치원을 먼저 꼽아야 할 것입니다. 최치원은 857 년에
태어나 12세의 어린 나이로 당나라에 유학하여 17세 때 당나라의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오른 인물입니다. 그의 아호는 고운이라고 불렀습니다.
"남의 나라의 벼슬을 하였으니 조국 신라의 이름을 빛내야겠다."
고운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황소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토 황소 격문'이라는 글을
지어 난을 일으킨 황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습니다. 최치원은 이 글에서 역적
황소의 죄를 서릿발같이 꾸짖어 당나라에 이름을 드날렸고 '토 황소 격문'은 지금까지
중국 문장의 유명한 고전으로 남아 있습니다.
최치원은 28세 때 당나라의 높은 벼슬도 버리고 조국인 신라에 돌아와 나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왕에게 아뢰었습니다.
"신 최치원은 나라를 바로잡을 수 있는 시무책 10조를 올리나이다."
그가 올린 시무책은 나라를 개혁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라를 바로잡으려는
최치원의 큰뜻은 아미 어지러워진 신라 조정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최치원은 벼슬을 내놓고 어지러운 세상을 비관하여 깊은 산 속에 들어가 시와 글을
지으며 남은 생을 마쳤다고 합니다.
삼국사기에는 최치원이 30권의 문집을 남겼다고 적혀 있으나, 오늘날까지 가장
오래된 문집으로 '계원필경'만이 전해지고 있을 뿐입니다.
통일 신라 시대의 으뜸 가는 유학자로는 강수, 설총, 김대문, 최치원 등이며 6 두품
출신의 학자로는 김운경, 김자기, 최신지, 최승우 등이 유명합니다.
특히 삼국 통일 전후의 문장가인 강수는 당나라와의 외교 문서를 정확히 풀이하고
잘 쓰기도 하여 태종 무열왕의 신임을 받은 인물입니다. 그는 아주 가난하였지만
재물을 탐내지 않아 청빈하게 산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찬란한 예술과 과학 기술
신라의 석굴암은 중국의 원강 석굴, 일본의 호류사 사원과 함께 동양의 3 대 예술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 현생의 부모님을 위해 불국사를 세우고, 태어나기 전인 전생의 부모님을
위하여 석불사(석굴암)를 세워야겠다."
법흥왕 때 세운 불국사는 김대성이 아뢰어 경덕왕 때 다시 세운 것으로 석굴암과
같이 지어진 것입니다. 원래 2천칸이 넘는 큰 절이었습니다.
나무로 지은 불국사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서 없어졌다가 조선 시대 후기에 다시
일으켜 최근에 복원한 것입니다.
신라 효소왕 9 년인 700 년에 15세의 나이로 모량리의 가난한 집에서 죽은 김대성은
재상 벼슬에 있던 김문량의 아들로 다시 태어났다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이런 일을 환생이라고 일컫습니다.
청년이 된 김대성은 어느 날 토함산에 사냥을 갔다고 곰 한 마리를 잡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밤 김대성의 꿈에 죽은 곰이 나타나 원수를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김대성은 용서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네가 나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절을 세워 주면 용서하리라."
이런 꿈을 꾼 뒤로 김대성은 사냥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곰을 잡았던 자리에
장수라는 절을 지어 주었습니다.
재주가 뛰어난 김대성은 벼슬로 나아가 차츰 승진하더니 조정에서 으뜸 가는 재상의
벼슬을 지내다가, 나이 52세 때 벼슬 자리에서 물러나 불국사와 석불사(석굴암)를 짓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습니다.
신라에는 석굴암과 불국사 외에도 많은 건축물이 있습니다.
또한 많은 석탑 중에서 구례에 있는 화엄사에 4사자 3층 석탑과 김포에 있는 감은사
터의 3층 석탑도 걸작품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불국사 앞쪽에 있는 청운교와 백운교의 돌층계, 그 옆에 있는 연화교와 칠보교도
아름답습니다. 특히 대웅전 앞뜰에 마주서 있는 석가탑과 다보탑은 신라 최고의
걸작품인 것입니다.
석가탑은 우아하고 소박하여 남성적이며 다보탑은 화려하고 정교하여 여성적인 멋을
풍기고 있습니다.
이러한 신라 예술품은 백제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삼국 문화가 하나로 통일되는
조화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대웅전 앞뜰에 서 있는 우아하고 소박한 석가탑에는 아주 애달픈 전설이 서려
있습니다.
백제의 서울 사비성에 아사달이라는 이름난 석공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사녀라는 처녀를 아내로 맞아 결혼한지 얼마 안 되어 불국사의 3층 석탑을 만들기
위해 신라로 떠났습니다.
서라벌에 도착한 아사달은 3 천 동안 석탑을 만드는 일에만 마음과 힘을 쏟고
있었습니다.
고향을 떠난 아사달이 3 년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자 그의 아내 아사녀는 서라벌로
아사달을 찾아왔습니다. 스님에게 아사달을 만나게 해 달라고 애원했지만 탑이 완성될
때까지는 만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 연못은 그림자가 비치는 영지라 하오. 탑이 완성되면 이 연못에 탑이 비칠
것이오. 그 때까지 기다리시오."
아사녀는 날마다 영지라는 못가를 서성거리며 탑 그림자가 비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 때 신라의 처녀들은 석탑을 만드는 아사달을 짝사랑하는 이가 많았습니다.
"석탑이 완성되는 날, 나는 아사달님을 따라 사비성으로 함께 갈 테야."
아사녀는 영지로 가는 길에서 처녀들이 하는 말을 듣고 절망에 빠졌습니다.
"3 년 동안 아사달 서방님은 저 아가씨와 사랑하고 있었구나."
아사녀는 그토록 기다리던 아사달로부터 버림받은 몸이라고 스스로 잘못 생각하고
슬피 울면서 연못에 몸을 던졌습니다.
한편 석탑을 완성한 아사달은 꿈 속에서도 그리던 아내 아사녀를 만나 보고 싶어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서둘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사녀의 죽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사녀! 아사녀^5,5,5^."
아사달은 울부짖으며 영지로 가 아사녀를 찾다가 아내의 뒤를 따라 연못에 몸을
던졌습니다.
그 뒤 불국사 대웅전 앞뜰에 다보탑과 마주 보며 서 있는 석가탑은 연못에 그림자가
비치지 않았다는 슬픈 이야기 때문에 무영탑이라고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경주 안압지에 있는 임해전과 포석정은 신라 귀족들의 사치한 생활 모습의
자취이기도 합니다.
신라의 여러 절에는 불상이 많은데, 석굴암 중앙에 있는 본존 불상과 벽에 새긴
보살 입상, 십일면 관음상, 나한상 등은 걸작품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괘릉과 왕릉의 부속물, 김유신 장군의 무덤 둘레에 세워 놓은 호석에 새겨진 말,
토끼, 용 등 12가지의 신상과 무열왕릉 비석 밑둥의 거북 조각도 훌륭한 미술품입니다.
연꽃 무늬를 넣은 와당(기와)과 사천왕성을 새긴 벽돌에서도 신라인의 훌륭한 예술
솜씨가 나타납니다.
유명한 스님의 유해에서 나온 사리를 모신 그릇들의 여러 탑 속에서 발견되었는데,
불국사 3층 석탑 사리기 은제합과 송림사 5층 전탑 사리기도 뛰어난 예술품입니다.
신라는 공예 기술도 발달하여 장신구의 아름다움과 세공품도 눈부십니다.
신라의 명필 김생은 고려 시대의 유신, 최우, 탄연과 함께 신품 4 현으로 불립니다.
그래서 김생은 해동의 서성이라 칭찬하였고 송나라에서도 왕희지를 앞서는 명필로
알려졌습니다. 이 외에도 김인문, 최치원, 요극일도 서^36^예가로서 이름이 높았습니다.
신라의 예술품 중에는 상원사의 범종과 성덕 대왕 신종도 있습니다. 성덕대왕
신종은 에밀레 종이라고도 불려지는데, 거기에는 슬픈 전설이 서려 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의 마음을 가라앉히려면 신성한 종 소리로 감화시켜야 하옵니다."
신라의 효성왕이 선왕인 성덕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구리 20 만 근을 들여 만들기
시작한 종은, 다음 왕인 경덕왕 때에도 완성하지 못하여 혜공왕 때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종을 만드는 재료가 모자라니 백성들에게 시주하도록 하라!"
나라의 명에 따라 스님들은 마을과 집집마다 시주를 다녔습니다.
봉덕사의 스님이 어느 가난한 집에 들렀습니다.
"저의 집은 너무 가난하여 아무것도 시주할 것이 없으니 이를 어찌합니까? 부처님을
깊이 믿는 마음 같아서는 이 아이라도 시주하고 싶습니다만^5,5,5^."
그 날 밤 봉덕사의 주지 스님은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봉석사의 종은, 깨끗한 시주를 얻어 정성을 다하여 신성한 종을 만들어야 소리가
나느니라. 그 깨끗한 시주는 아기이니라."
웬 노인이 꿈 속에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봉덕사의 주지 스님은 그 길로 아기를 시주하겠다고 말했던 가난한
집 어머니를 찾아갔습니다. 아기의 어머니는 부처님과의 약속을 어길 수 없이 슬피
울면서 이야기를 시주하였습니다.
"아, 가엾기도 하지^5,5,5^."
사람들도 모두 눈물지었습니다.
마침내 아기를 넣고 만든 종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종을 칠 때마다 어머니를
부르는 구슬픈 소리처럼,
"에밀레, 에밀레^5,5,5^."
하고 멀리까지 울려 퍼졌습니다.
"아, 저 소리는 에미 때문에, 에미 때문에 하는 소리처럼 들리는구나^5,5,5^."
성덕 대왕 신종에는 이러한 전설이 서려 있어 에밀레 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신라는 수준 높은 미술의 향기와 더불어 음악도 뛰어났습니다.
신라의 귀족 사회에서 한문학이 발달하졌지만 민간에서는 설화를 중심으로 한 불교
문학과 향가가 발전하였습니다.
신라의 대표적인 향가의 지은이와 작품은 다음과 같습니다. 월명 대사의 도솔가와
제망매가, 충담사의 안민가와 찬기파랑가, 득오곡의 모죽지랑가, 영재의 우적가
등입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전해 오는 향가는 삼국유사에 24수, 균여전에 11수, 모두
25수뿐입니다.
진성 여왕때의 스님인 대구 화상과 각간 위홍은 삼대목이라는 향가집을
편찬하였으나 전해 오지 않습니다.
신라의 음악은 고구려와 백제의 음악을 합치고 당나라 음악을 흡수하여 크게
발달하였습니다.
옥보고는 거문고 연주에 뛰어난 악사로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신라에는 범패라는 불교 음악도 있었는데 진감 대사에 의해 이루어져 전해 오고
있습니다.
신라는 찬란한 예술과 함께 과학 기술도 발달하였습니다.
유학과 한문학 외에 의학, 병학, 역학, 신학, 윤학 등 과학 기술이 발달하여 학문의
폭이 크게 넓어졌던 것입니다.
신라의 과학 기술 중에서 첫손에 꼽을 수 있는 것은 인쇄술의 발달입니다.
704 년부터 751 년까지 임금의 자리에 있던 경덕왕 때 다라니경이 만들어졌습니다.
다라니경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인쇄물로서 우리의 자랑입니다. 다라니경의
발견으로 목판 인쇄술의 발달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삼국 시대 이래의 중국의 한의학이 통일 신라 시대에는 당나라 의학과 인도 계통의
불교 의학의 영향을 받아 더욱 발전하였습니다.
김유신 장군의 고손자인 천문학자 김암은 혜공왕 때 당나라에 유학하여 음양,
병법을 배워 병학과 천문학을 발전시켰습니다.
신라 말의 스님 도선은 지리도참설이라는 지리학을 들여와 인문 지리와 도참 신앙을
결부하여 '도선비기'라는 책을 지었습니다. 도선 스님은 경주를 중심으로 짜여졌던
신라의 행정 조직을 다시 바꿔 짤 것을 주장하면서 신라 조정의 권위를
약화시켰습니다. 그러나 땅의 모양에 따라 좋은 일과 나쁜 일이 결정된다는
풍수지리에 뛰어나 뒷날 고려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습니다.
통일 신라 시대의 향기 높은 예술의 발달은 나라가 안정되고 경제 생활이
풍족한데다 불교가 발달한 까닭이었습니다.
절에 세운 탑과 불상, 종 등 미술품의 거의 모두가 불교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 그림: 묵자책 98, 99쪽
그림설명: 석가탑(신라)과 다보탑(신라).
* 그림: 묵자책 100쪽
그림설명: 왕이 연회를 즐기던 포석정(신라). 이 곳에 술잔을 띄우고 돌아가며
마셨다.
* 그림: 묵자책 100쪽
그림설명: 여름에도 쓸 수 있도록 얼음을 보관하던 창고인 석빙고(신라).
* 그림: 묵자책 101쪽
그림설명: 정교함이 뛰어난 송림사 사리함(사리).
* 그림: 묵자책 101쪽
그림설명: 김유신 장군 무덤 앞에 세워진 12지신상 중 토끼와 소(통일신라).
* 그림: 묵자책 102쪽
그림설명: 사천왕의 무늬를 새긴 벽돌들(신라).
* 그림: 묵자책 104쪽
그림설명: 성덕대왕신종(통일신라).
* 그림: 묵자책 104쪽
그림설명: 사람 얼굴 모양의 기와(신라)와 연꽃 무늬의 기와(통일신라).
대륙을 차지한 해동 성국 발해
"우리는 대륙의 주인 고구려의 후예들이다. 잃어버린 옛 영토를 다시 찾자!"
고구려가 역사의 막을 내린 뒤에도 만주 지방에서는 고구려의 유민들이 당나라에
항복하지 않고 끈질기게 독립 운동을 펼쳤습니다.
부여 계통의 고구려 장군 대조영은 고구려가 멸망하자 당나라에 의해 강제로
영주(조양) 지방으로 이주하였습니다.
거란 사람 이진층이 696 년에 영주를 점령하고 당나라에 반기를 들자, 대조영은 698
년에 고구려 유민을 이끌고 지린성 둔화현 동모산에 와서 진국이라는 나라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 년 뒤의
일이었습니다.
"이제 당나라 군사를 몰아내고 옛 고구려의 영토를 되찾아 우리 겨레의 나라를
세웠으니, 나라 이름을 발해로 정하노라!"
발해의 영토는 동쪽으로 연해주, 남쪽으로는 대동강, 원산만 이북의 넓은 땅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발해는 당나라의 세력을 몰아낸 뒤에 가까이는 당나라와 멀리는 돌궐, 일본과도
외교 관계를 맺었습니다.
발해는 처음 고구려를 계승하는 의식이 뚜렷하여 일본과의 외교 문서에서는 발해
왕을 고구려 왕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당나라는 우리 발해의 국력이 날로 커지는 것이 두려워 신라와 말갈족을 이용하여
우리의 힘을 꺾으려 하고 있소. 그러하니 우리는 돌궐과 일본과 손을 잡고 당나라를
공격해야 하오."
마침내 발해의 무왕은 공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먼저 수군을 출전시켜 당나라의 더저우를 함락하라!"
발해의 장군 장문휴는 왕명에 따라 수군을 이끌고 먼 거리에 있는 산둥반도의
더저우까지 함락하고 돌아왔습니다.
발해 초기에는 당나라와의 사이가 나빴지만 문왕 이후에는 좋은 사이가 되어 사신이
오가는 등 평화적인 외교 관계를 맺었습니다.
발해에서는 당나라에 모피류와 삼과 말 등을 수출하였고 당나라로부터 직물류, 책,
공예품 등을 수입하였습니다.
발해와 신라가 같은 민족이면서도 넓은 대륙과 반도를 하나로 통일하지 못하였던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여기에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습니다.
발해는 적은 수의 고구려 유민들이 세운 나라로 지도층은 거의 고구려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문화 수준이 낮은 말갈족을 다스리며 연합 국가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신라에 먼저 손을 내밀고 능동적으로 외교를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한편 신라는 골품 제도에 얽매인 귀족들이 새로운 외교를 펼치거나 변화를 원치
않는 보수성 때문에 넓고 넓은 국토를 통일하려는 높은 이상이 부족하였던 것입니다.
선덕왕 20 년인 721 년에 신라는 발해와 국경 문제로 다툼이 잦아지자 북쪽에 긴
성을 쌓기도 하였습니다.
게다가 대륙에서 발해의 힘이 나날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당나라는 신라와 손을
잡고 발해를 견제하였기 때문에, 넓은 대륙까지 이어지는 넓고 넓은 우리 국토는
하나로 통일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발해는 문왕(737--793) 때에 당나라와 평화적인 외교 관계를 맺으며 문화를
받아들여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데 힘을 기울였습니다.
발해의 전성기는 선왕(818--830) 때에 이르러 연해주 지역을 비롯하여 만주의
대부분을 차지하였습니다. 당나라에서는 솟아오르는 아침 해와 같은 발해의 기상과
문화를 찬양하여 동쪽의 문화국이라는 뜻으로 '해동 성국'이라 불렀습니다.
해동 성국 발해는 대륙에 우리 민족의 기상을 떨치고 문화를 발전시켰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백성인 말갈족은 수가 적은 고구려의 유민들의 세운 발해의 지도층
밑에서 다스림을 받는 데 불만을 품었습니다.
"우리 말갈족 사람들이 수가 적은 고구려 사람 밑에서 굽실거리며 명령에 따를 수는
없소!"
"그렇소! 지도층끼리 다투는 틈을 노려 우리 말갈족도 독립을 합시다!"
발해를 다스리던 고구려 유민들과 그들의 다스림을 받던 말갈족과의 사이는 차츰
틈이 벌어져 화합이 깨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게다가 발해의 선왕 이후 왕의 대를 잇는 다툼이 일어나 북쪽의 말갈족이 떨어져
나가기에 이르렀습니다.
애왕 때에는 몽고 지방에서 큰 세력이 떨치며 일어난 거란족의 침입을 받아 해동
성국이라 불리우던 발해는 227 년만에 요나라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대륙을 차지하여 민족의 기상을 떨치던 해동 성국 발해의 멸망으로 우리 민족의
화려했던 활동 무대는 한반도로 국한되었으니 참으로 애통하고 뼈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통일 신라와 더불어 우리의 역사를 이어 온 큰 줄기였던 해동 성국
발해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발해가 멸망한 뒤 말갈족은 만주 땅에 금나라를 세웠습니다.
고구려의 장군으로 대륙에 해동 성국 발해를 세운 대조영 장군이 있었다면, 또
고구려의 유민으로 위대한 업적을 세운 고선지 장군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고선지 장군은 발해의 장군이 아닙니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 아버지를 따라
당나라에 가서 20세 때 장군이 된 인물입니다.
고선지 장군은 여러 차례의 큰 공을 세우고 마침내 대장군이 되어 파미르 고원을
넘어 사라센 제국으로 원정을 떠났습니다. 제 1 차 원정에서 무려 72개 나라의 항복을
받고 승리하여 더욱 높은 벼슬을 받았습니다. 세계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초인적인
승리를 거둔 장군이었습니다. 그의 위대한 전적은 프랑스의 샤반느 교수와 영국의
스타인 경의 연구와 답사에 의해 밝혀졌습니다.
고선지 장군의 머나먼 원정으로 동방의 제지 문명이 서방 세계로 전해지니 그의
이름이 세계 역사 속에 빛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해동 성국 발해의 문화
해동 성국이라 불리던 발해의 문화는 상경의 발굴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만주 지린성에 있었던 발해의 수도 상경(동경성)은 당나라 창안성을 본따, 도시
계획이 잘 정리된 큰 도읍지입니다. 상경에서 발굴된 불상, 석등, 온돌 시설, 연꽃 무늬
와당(기와) 등은 세련된 발해의 문화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상경 성지 복원도를 보면 큰길이 시원스럽게 뻗어 있고 성 안이 바둑판처럼 잘
정리된 아름다운 도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상경의 구조는 동서가 4,650 미터, 남북이 3,530 미터의 길이로 높이 4 미터의
토성을 두른 큰 도시였습니다. 중앙 북쪽에 네모난 궁성을 쌓고 궁성으로부터
남문까지 주작로라는 큰길을 내었고 성 안을 바둑판처럼 깨끗이 정리하였던 것입니다.
발해의 학문에 대해서 살펴보면 주자감이라는 국립 대학을 세워 학문을
장려하였습니다.
발해의 유학생들 중에는 당나라의 과거에 급제한 인물도 많았습니다.
"과연 발해는 해동 성국이로군!"
당나라 사람들은 동쪽의 문화국 발해를 찬양하였습니다. 또한 발해 사람들은 일본에
가서 이름을 날리기도 하였습니다.
발해는 국립 도서관인 문적원을 두어 책을 출판하고 보관하였습니다.
발해의 종교는, 상류 계급에서는 불교와 유교를 믿었고 일반 평민은 원시 종교를
믿었습니다.
발해의 유적지에서 발견되는 석불과 토불로 미루어 보아 불교가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발해 시대의 미술과 공예는 상경성 옛터에서 발굴된 불상, 와당, 돌사자, 석등, 벽돌
등이 있는데, 상당히 발달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발해의 자기는 가볍고 투명한
빛깔이 있어 당나라에 수출되기도 하였습니다.
상경성 옛터에서 발굴된 석등, 와당, 벽돌 등을 보면 직선적이고 패기가 넘치던
고구려 미술이 어느 정도 부드러워지면서도 웅장한 기품을 나타내고 아울러 독특한
소박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발해 문화의 성격을 종합해 보면 발해 문화는 고구려 문화를 이어받은 것입니다.
아울러 당나라 문화를 흡수하여 발전시켰기 때문에 고구려 문화의 성격을 띠면서도
한층 부드럽고 세련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울어진 신라, 갈라진 후삼국
"살기가 어려운 백성들아! 내게로 오라.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며 보호해 주리라!"
통일 신라의 귀족 사회가 세력 다툼으로 분열과 혼란이 거듭되는 동안 지방의 호족
세력이 커졌습니다.
"지방의 호족들의 세금을 가로채어 나라의 금고가 바닥났소. 관리들을 각 지방에
보내어 세금을 독촉하여 거두어 들이시오."
나라에서 세금을 독촉하자 무거운 세금을 낼 수 없어 고향을 떠나는 사람, 불만을
품은 6 두품 이하의 사람들은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기도 하고, 새로운 종교인 선종에
들어가 새 사회를 건설하려는 야심을 가진 사람들로 통일 신라의 말기는 매우
어지러웠습니다.
"썩어 빠진 세상을 바로잡자!"
"백성들이 잘 살 수 있는 새 나라를 건설하자!"
억눌렸던 농민들의 울분이 활화산처럼 터졌습니다. 농민들은 반란군으로 변해
무기를 들었습니다.
진성 여왕 3 년인 899 년, 원종과 애노가 사벌주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을 비롯하여
북원(원주)에서는 양길과 궁예, 죽주(죽산)에서는 기훤, 완산(전주)서는 견훤 등이 각
지방에서 농민들의 호응을 받으며 일어났습니다.
통일 신라는 겨우 이름뿐인 나라로 반란군을 진압하여 나라를 다스릴 힘을 잃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후삼국으로 갈라지는 내리막길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신라 귀족들의 횡포와 무거운 세금에서 벗어나 후백제의 깃발 아래로 모이시오!"
완산(전주)에서 일어난 견훤은 그 곳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세웠습니다. 때는
신라 효공왕 4 년인 900 년의 일이었습니다. 후백제의 왕 견훤의 나이는 34세였습니다.
견훤은 어릴 때 밭두렁에서 호랑이 젖을 먹고 자랐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는
인물입니다.
견훤이 세운 후백제에 이어 후고구려를 세우려는 움직임도 일어났습니다.
신라 헌안왕 때의 어느 중오절(단오날)에 한 후궁이 친정집에서 사내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아기가 태어나던 날 무지개와 같은 빛이 지붕 위에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이 괴상한 일이 왕에게 알려졌습니다.
"무슨 징조인가?"
"장차 나라에 이롭지 않은 일이 일어날 징조이옵니다. 이 아기를 없애야만
하나이다!"
왕의 사자가 후궁의 친정집으로 달려가 아기를 빼앗아 다락 위에서 아래로
던졌습니다. 때마침 아기의 유모가 다락 밑에 숨어 있다가 떨어져 내려오는 아기를
얼른 부둥켜안았습니다. 그런데 너무 당황하여 손가락이 아기의 눈을 찔러 아기는
애꾸눈이가 되었습니다.
유모는 이 길로 애꾸눈이가 된 아기를 안고 멀리 도망쳤습니다.
유모의 손에서 자란 애꾸눈이 아기는 어려서부터 성질이 너무 거칠어 마을 사람들의
미움을 샀습니다. 보다못한 유모는 애꾸눈이 소년을 깨우쳐 훌륭한 사람을 만들기
위해 지난 일을 자세히 말해주었습니다.
"저는 도련님의 어머니가 아니라 유모입니다. 도련님은 임금님의 핏줄을 받고
태어난 귀한 분이십니다.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바로하고 훌륭한 인물이 되셔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신분이 밝혀지면 도련님과 저는 잡혀 죽게 됩니다."
애꾸눈이 소년은 유모의 근심을 덜어 드리고 야망을 불태우기 위하여 집을 떠나
세달사로 들어가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습니다. 애꾸눈이 소년은 궁예라 하였습니다.
궁예는 스님들의 심부름을 하면서 신라의 왕과 귀족들에 대한 원한을 품고 무술을
익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궁예가 법당에 잿밥을 올리고 빈 그릇을 가지고 오는데 까마귀가
입에 물고 있던 상아 조각을 빈 그릇에 떨어뜨렸습니다. 상아 조각에는 왕(임금
왕)이라는 글자가 씌어져 있었습니다.
궁예는 큰 스님에게 그 상아 조각을 보이며 뜻을 물었습니다.
"상아 조각에 임금 왕자가 씌어 있으니 장차 왕이 될 사람임을 알려 주는 것
같구먼^5,5,5^."
이 말을 들은 궁예는 불경 공부보다 산 속으로 뛰어다니며 무술을 닦는 일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어느 날 궁예는 주막에서 기훤이 두목인 도둑의 무리들과 시비가 벌어져 멋진
무^36^예 솜씨를 보여 준 것이 인연이 되어 기훤의 부하들에게 무^36^예를 가르치며
불경을 외우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궁예는 마음이 좁은 기훤을 떠나 무리를 이끌고 북원(원주) 지방으로
떠났습니다. 그 때 북원에는 불교를 믿으며 의적으로 불리우던 양길이라는 장군이
백성들을 보호하며 왕 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북원의 양길을 궁예를 맞이하여 스승 겸 참모가 되어 달라고 말하며 극진히 대우해
주었습니다.
"이 곳 북원은 옛 고구려의 땅이었소. 우리도 장차 고구려와 같은 새나라를
세웁시다."
궁예는 양길의 부하들에게 무술과 군사 훈련을 시켜 북원 지방 일대를 쳐서
자기들이 세력 안에 넣기 시작하였습니다.
892 년 궁예는 치악산 석남사에 나가 전투 대열을 갖추고 주천, 내성 등 10성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 해에는 명주를 점령하였습니다. 부하들을 아끼며
백성들의 마음을 얻은 궁예는 양길로부터 독립된 장군이 되었습니다.
"신라의 운명은 기울어진 저녁 해와 같도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고 세상을
바로잡자!"
궁예는 저족(인제), 성천(양구), 부약(금성), 철원 등 10여 군을 점령하였습니다.
궁예의 세력이 날로 커지자 패서(평안도) 지방에서 날뛰던 도둑의 무리까지 항복해
왔습니다.
"옛 고구려를 다시 일으키려는 뜻으로 나라 이름을 후고구려로 정하노라!"
궁예는 세력이 커지자 후고구려를 세우니 때는 901 년의 일이었습니다.
이미 떨어지는 저녁 해처럼 기울어진 통일 신라의 운명은 그 말기에 신라, 후백제,
후고구려로 갈라져 후삼국이 되고 말았습니다.
* 그림: 묵자책 118쪽
그림설명: 후삼국 시대의 우리 나라.
(고려 시대)
(다시 통일된 민족 국가의 발전)
고려 태조 왕건
때는 신라 말엽.
4월의 바람은 송악산에서 부드럽게 불어 왔습니다. 들녘의 종달새가 청보리밭 위로
날아오르고 지평선 위에선 아지랑이 속으로 뭉게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송악산을 마주한 벌판, 금돼지터(금돈허)에서는 그 지방의 호족인 왕융이란 사람의
집을 짓는 공사가 한창이었습니다.
그 때, 한 스님이 집터 닦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섰더니,
"어허, 기장을 심을 땅에 어찌 삼을 심을까?"
하고, 그 곳을 지나쳐 갔습니다.
아까부터 스님을 눈여겨 살펴보던 집 주인 왕융은 스님을 따라가며 물었습니다.
"대사께서 방금 말씀하신 뜻이 무엇입니까?"
"남쪽을 향하여 집터를 잡고 서른여섯 채의 큰 집을 지으면 큰 인물이 태어날
것이오."
"대사, 저의 집에 드시어 더 자세한 가르침을 내려 주십시오."
왕융은 도가 높아 보이는 그 스님을 집 안으로 모셨습니다. 그 스님은 신라 말에
이름을 떨친, 풍수지리에 밝았던 도선 대사였습니다.
도선 대사는 손을 깨끗이 씻고 향을 피운 뒤에 말했습니다.
"저 송악산의 형세를 보니 장차 이 곳에서 왕이 태어날 것이오. 주인장은 덕을
쌓으시고 앞으로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건이라고 지으시오."
송악 지방의 호적인 왕융은 도선 대사의 가르침대로 36채의 큰 집을 지었습니다.
신라 헌강왕 3 년인 877 년, 왕융의 집에서는 한 사내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왕융은
도선 대사가 일러 준 대로 아들의 이름을 건이라고 지었습니다.
왕건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인 왕융으로부터 여러 가지 무^36^예를 배워
익혔습니다.
왕건이 태어날 것을 미리 알고 이름까지 지어 준 도선 대사가 17 년 만에 다시
왕건의 집에 나타났습니다. 도선 대사는 왕건을 데리고 송악산에 있는 절로 올라가
천문, 지리, 병법 등의 공부와 18가지의 무^36^예를 가르쳤습니다.
왕건의 나이 18세가 되던 해에 도선 대사는 왕융에게 한마디 말을 남기도
떠났습니다.
"이제 왕건에게는 더 가르칠 것이 없소이다. 북쪽 지방으로 가서 궁예를 만나
세력을 키우노라면 때가 올 것이오."
왕융은 아들 왕건을 데리고 많은 물건과 군량미를 바리바리 싣고 궁예를 만나러
갔습니다.
"아들 왕건을 거두어 주십사 하고 찾아왔나이다."
"왕 공의 청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겠소."
궁예는 왕융이 가져온 예물과 군량미를 보고 기쁘기고 했지만, 왕건의 궁술과
검술을 시험해 본 뒤에 뛰어난 솜씨에 놀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898 년, 왕건은 22세의 젊은 나이로 궁예가 세운 후고구려의 정기대감이 되었습니다.
왕건은 군사를 거느리고 고양으로 진격하여 오늘의 서울 일대를 차지하였습니다.
800 년에는 한강 이남으로 세력을 밀고 내려갔고, 803 년에는 수군을 이끌고 전라도
지방으로 진격하여 후고구려 영토를 더욱 넓혔습니다.
"후백제의 배들을 모조리 붙들어 중국과의 외교길을 끊도록 하라."
후고구려와 후백제가 서로 다툰 것은 기울어져 가는 신라를 차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904 년, 후고구려는 나라 이름을 미진이라고 고쳤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에 도읍을
송악에서 철원으로 옮겼습니다. 911 년에는 나라 이름을 태봉이라고 다시 고쳤습니다.
913 년, 왕건은 거듭 세운 큰 공으로 시중(국무총리)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궁예왕은 2 년 동안 지은 새 궁궐에서 사치한 생활에 빠져 백성들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하 장군들이 반란을 일으키지나 않을까 의심하였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까지 환히 들여다볼 수 있는 미륵불이다! 그러니 누구든
나를 속일 수는 없도다."
궁예왕은 왕비를 관음 보살이라 하였고, 두 왕자를 청광 보살과 신광 보살이라고
불렀습니다.
궁예왕은 나들이할 때엔 금은으로 장식한 백마를 타고, 5백여 명의 스님들을
뒤따르게 하여 자기를 찬미하는 주문을 외게 하였습니다.
"대왕마마, 사치스러운 생활은 버리시고 옛날과 같이 백성들을 돌보셔야 하옵니다
지금 백성들의 마음은 대왕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나이다."
보다못한 왕비가 충고를 하자 궁예왕은 미친 듯 칼을 빼들고 왕비를 쳐죽이고
말았습니다.
"내 뜻을 거역하는 자는 왕비라도 용서치 않는다."
"아바마마, 바른 말씀을 올린 어마마마를 해치시다니, 이럴 수 있사옵니까?"
"뭐라고, 네놈들까지 내 뜻을 거역하려 하느냐? 귀찮은 놈들, 없어져라. 에잇!"
궁예왕은 두 왕자까지 베어 죽였습니다.
백성들은 두려워 떨면서 미친 왕에게 하늘에서 큰 벌이 내리기를 바랐습니다.
어느 날 궁예왕은 왕건을 불러 느닷없이 물었습니다.
"요즘 왕건 시중은 나를 배반하려는 역적 모의를 했지? 신통력을 가진 나는 그대의
마음을 환히 들여다보고 다 알고 있노라."
왕건은 궁예왕의 터무니없는 말에 말문이 막혔습니다.
그 때 궁예왕의 주서관으로 있던 최응이 왕건에게 가만히 속삭였습니다.
"왕 시중님, 역적 모의를 했다고 거짓으로 대답하셔야 살아나실 수 있습니다. 어서
거짓을 아뢰십시오."
왕건은 위험을 벗어나기 위해 최응이 일러 준 대로 대답했습니다.
"그럼 그렇지! 으하하^5,5,5^, 내 신통력이 틀림없이 맞았지! 왕 시중은 정직하게
대답하였으니 이번 한 번만은 너그럽게 용서해 주리라."
한 나라의 으뜸 가는 시중까지도 이런 꼴을 당하게 되었으니 모든 대신과 장군 들은
미치광이 궁예왕에게 언제 죽음을 당할지 몰라 불안하였습니다. 또한 미치광이 왕이
다스리는 나라의 앞날도 크게 걱정되었습니다.
918 년 6월, 홍유, 배현경, 신승겸, 복지겸 등 네 장군은 깊은 밤에 비밀스럽게
모였습니다.
"미치광이가 된 왕을 더 이상 받들어 모실 수는 없는 일이오."
"그렇소! 백성들과 나라의 앞날을 위해서 새로운 왕을 정해 받들어 모셔야 합니다."
"새로 받들 왕은 누가 마땅하오?"
"만백성에게 덕망이 높은 왕건 시중밖에 또 누가 있겠소."
"옳소! 궁예왕의 횡포가 하늘에 사무쳤으니 이제 왕건 시중을 왕으로 받들기로
합시다. 이는 만백성의 바람이기도 하니까요."
그러고 나서 얼마 후,
"폭군을 몰아내자!"
"와."
궁예왕은 군사들의 함성에 쫓겨 궁궐담을 뛰어넘어 평강 쪽으로 도망치다가
화전민들에게 붙잡혀 비참하게 죽음을 당하고야 말았습니다.
918 년 6월 15일, 마침내 왕건은 고려 태조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나라 이름은 고려로 정하노라!"
"태조 대왕 만세!"
고려의 도읍은 태조 왕건의 고향인 송악으로 정해져 백성과 군사들은 철원에서
송악으로 옮겨갔습니다.
태조 왕건이 나라 이름을 고려라고 정한 것은 대륙을 지배하던 고구려의 영광을
계승한다는 뜻에서였습니다.
민족을 재통일한 고려의 발전
"같은 겨레끼리 의좋게 지내고자 하는 것이 고려의 뜻이라고 신라 왕에게 전하도록
하오."
고려의 태조 왕건은 민족의 재통일을 이룩하는 방법으로 우선 신라와 우호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 무렵 신라의 귀족들은 새 나라, 고려가 일어나고 후백제가 침략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건만 사치스러운 생활에 빠져 있었습니다.
"신라로 진격하라!"
920 년, 후백제는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하여 빼앗았습니다.
신라에서는 고려에 사신을 보내어 구원을 청했습니다.
"사치와 허영으로 병든 신라보다 먼저 후백제를 쳐서 쓰러뜨리면 신라는 스스로
망할 것이로다."
고려의 태조 왕건은 신라를 도와 후백제를 치려고 하였습니다.
"고구려군을 돕고 있는 나라부터 치기로 하겠다. 군사들을 여러 부대로 나누어
비밀스럽게 서라벌까지 숨어 들어가 한 곳에 모이도록 하라!"
927 년 11월, 후백제의 견훤왕은 고려와의 싸움을 뒤로 미룬 채 신라를 향해
쳐들어갔습니다.
이런 사실도 까맣게 모른 채, 신라의 경애왕은 궁녀와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포석정에서 놀이에 빠져 있었습니다.
"습격!"
별안간 후백제 군사들이 벌 떼처럼 달려들어 왕과 왕비를 사로잡고 신하와 군사들을
들이쳤습니다.
"라의 경애왕은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하라."
신라의 경애왕이 죽자 후백제의 견훤왕은 신라의 왕족인 김부에게 왕관을 주니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인 것입니다.
후백제의 견훤왕은 신라 백성들의 민심을 얻기 위해서 경순왕을 임금으로 앉히고
뒤에서 신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후백제의 군사들은 신라에서 많은
재물을 거두어 갔습니다.
신라의 사신은 고려 태조에게 달려와 불안에 떠는 신라 백성들을 보호해 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930 년 1월, 고려 태조 왕건은 군사를 거느리고 후백제로 진격하였습니다. 고려군은
안동 싸움에서 크게 승리하여 동해안의 10여 성을 항복받고 경상도 지방에 세력을
굳혔습니다.
931 년, 왕건은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초청을 받고 신라로 갔습니다. 그 때
왕건은 군사를 거느리지 않고 갔기 때문에 신라 백성들에게 따뜻한 보호자와 같은
인상을 깊이 심어 주었습니다.
태조 왕건은 안동 싸움의 승리에 이어 홍성에서도 후백제군을 크게 무찔러 공주
이북의 40여 성을 항복받았습니다. 고려와 후백제는 금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맞서게
되었습니다.
후백제의 견훤왕은 그 때 70세 가까운 나이가 되어
"왕위를 금강에게 물려주려 하노라."
하고, 둘째 부인에게서 태어난 넷째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불만을 품은 맏아들인 신검이 반란을 일으켜 늙은 아버지 견훤왕을
금산사라는 절에 가두었습니다.
그러나 금산사에서 3개월 동안 갇혀 있던 견훤왕은 그 곳에 탈출하여 나주로 도망쳐
고려의 태조에게 항복할 뜻을 알렸습니다.
"나이가 저보다 10여 년이나 위시니 상보로 모시겠습니다. 마음 편히 지내십시오."
태조는 항복해 온 견훤을 예를 다해 대접하고 큰 집과 세금을 받을 수 있는
식읍까지 주었습니다.
"대왕이시여! 이처럼 따뜻하게 맞아 주시니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겠나이다."
견훤은 태조 왕건에게 충성을 다짐하였습니다.
이 소식은 곧 신라에도 알려져, 경순왕은 조정 대신들과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회의를 열었습니다.
"과인은 경들과 더불어 나라를 더 이상 다스릴 수가 없소. 고려는 떠오르는 아침
해와 같고 태조는 인품이 너그러워 후히 대접하여 줄 것이니 나라를 들어 겨레의 통일
성업에 이바지하려 하오."
모든 대신들을 경순왕과 뜻을 함께하였습니다. 그 때 태자만은 몸부림치며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기울어진 나라의 운명을 혼자의 몸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 신라의 화랑의 굳센 기개는 어디로 사라지고, 천 년 사직이 허무하게
무너지다니^5,5,5^."
태자는 망국의 한을 품은 채 개골산(겨울의 금강산 이름)으로 들어가 다시는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삼베옷을 입고 칡뿌리를 먹으며 산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마의 태자라고 불렸습니다.
태조는 항복한 경순왕을 정중하게 모셨습니다. 그리고 공주를 아내로 삼게
하였습니다. 또한 신라의 도읍지인 서라벌의 이름을 경주로 고치고, 식읍으로 주어
편히 살도록 보살펴 주었습니다.
신라는 나라를 세운 지 992 년 만인 935 년에 고려에 합쳐져서 역사의 막을
내렸습니다.
936 년, 고려의 태조 왕건은 8 만 7천여 명의 대군을 이끌고 후백제를 향해
진격하였습니다.
견훤에 이어 스스로 후백제의 왕이 된 신검은 1 만의 군사로 고려의 9 만 대군을
이겨 낼 수 없음을 느끼고 동생인 양검, 용검과 함께 고려에 항복하였습니다.
후백제는 나라를 세운 지 45 년 만인 936 년 9월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후삼국은 통일되었습니다. 고려 왕국의 찬란한 깃발 아래 우리 민족은 다시
하나로 뭉치게 되었습니다.
왕건의 나이 60세 때였습니다.
"한핏줄의 겨레가 서로 의좋게 지내도록 민족 융화 정책을 펴리라. 통일된 나라를
세 가지 큰 원칙에 따라 다스리겠노라."
고려 태조는 3가지 정책을 폈습니다.
첫째는 호족의 세력을 통합하여 중앙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정책입니다.
둘째는 북진 정책을 펴서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는 일입니다.
셋째는 불교를 존중하는 정책입니다.
고려 태조는 조정의 신하들에게 자기의 성씨를 따서 왕씨의 성을 내리고, 지방
호족의 딸들을 부인으로 맞아 호족 세력들과의 화합에 힘썼습니다. 또 발해가 멸망한
뒤 고려에 귀화한 왕족들에게도 자기의 성씨를 딴 이름을 지어 주기도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쓸 만한 인재이면 신분을 가리지 않고 어떤 사람에게도 벼슬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불교를 소중히 여겨 많은 절을 세워 나라의 번영을 비는 호국 불교 정책을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태조의 북진 정책으로 청천강 하루에서 영흥 지방에 이르는 영토를 차지해 고려의
국토를 넓히고 압록강까지 진출하는 터전을 닦았습니다.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을
서경이라 부르고 중하게 여기며 북으로 영토를 개척하였던 것입니다.
삼국으로 나누어졌던 민족을 다시 통일한 태조 왕건은 943 년 5월, 왕위에 오른 지
25 년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태조 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제 3 대 혜종과 제 3 대 정종은 나라 안에서
일어난 반란을 누르는 일 때문에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하다가, 제 4 대 왕위에 오른
광종 때부터 새로운 정책을 펴나가게 되었습니다.
"호족들이 법을 어기고 거느리고 있는 많은 노비들을 해방하노라!"
광종은 노비를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대왕, 나라가 안정되었사오니 과거를 보아 인재를 뽑으시옵소서!"
광종은 신하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호족의 아들들만이 관리가 되던 특권을 제한하고
과거를 실시하여 학문의 실력에 따라 관리를 뽑았습니다.
마침내 고려는 호족들의 힘이 약해지고 왕권이 안정되었습니다. 제 6 대
성종(982--997) 때에 이르러 나라의 체제가 정비되기 시작하여 제 11 대 왕인 문종 30
년에 완성되었습니다.
고려의 토지 제도는 제 5 대 경종 때 정비되었습니다.
"벼슬에 따라 땅을 주고, 농토가 없는 백성들에게 공평하게 땅을 주려 하니 나라
땅을 모두 거두어들이도록 하오!"
고려의 토지 제도는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켰습니다.
고려의 교육 기관으로는 태조 때 개경과 서경에 학교를 세웠으나 본격적인 교육
제도는 성종 때부터 인종 때에 걸쳐 정비되었습니다.
거란의 침입과 귀주대첩
"요나라에서 낙타 50 마리를 보내어 외교관계를 맺으려고 청하나이다."
"거란족은 우리 겨레가 세운 발해를 멸망시켰으니 용서치 않으리라."
몽고의 한 모퉁이에서 세력을 키워 오던 거란족은 916 년에 요나라를 세웠습니다.
그들은 고려에 사신을 보내어 국교를 청했으나 고려 태조는 942 년, 30 명의 거란
사신을 섬으로 귀양보내고 예물로 보낸 낙타 50마리를 개경 만부교 다리 밑에 매어
두어 굶어 죽게 하는 등 거란족을 심하게 배척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다 건너
송나라와는 좋은 외교 관계를 맺으며 발달된 문화를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를 배척하는 고려를 더 두고만 볼 수 없다. 고려를 향해 총진격하라!"
거란의 소손녕이 거느린 80 만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 고려에 침입하였습니다.
거란이 요구는 고려의 영토를 떼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조정 중신들 중에는 북서쪽 땅을 거란에게 떼어 주고 전쟁을 피해 사직을 지켜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그 때 서희가 왕에서 아뢰었습니다.
"거란의 요구를 받아들여서는 아니 되옵니다. 신이 적전에 들어가 말로써 그들을
물리치겠나이다."
서희는 적진으로 들어가 소손녕과 담판을 벌였습니다.
"우리 고려를 침입한 까닭은 무엇이오?"
"고구려의 옛 땅은 우리의 것이었고, 고려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소. 그런데 고려는
우리가 차지해야 할 고구려의 옛 땅을 조금씩 차지하였소."
"그건 잘못 아셨소. 우리 나라는 고구려를 계승하여 나라 이름도 고려라 하였소.
그러니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오. 뿐만 아니라 거란의 도읍인
동경도 고구려의 옛 땅이었음은 아시겠지요?"
서희의 웅변에 소손녕은 대답을 못 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문제를 꺼내어 트집을
잡았습니다.
"그러면 고려는 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우리 거란보다 바다 건너 송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고 있소?"
"그야 여진이 두 나라 사이의 길을 막고 있기 때문이오. 여진을 쫓고 길을 열면
우리 고려와 거란은 외교 관계를 맺을 수 있소."
서희는 거란으로 하여금 여진을 치게 하려는 지혜를 보였습니다.
'듣고 보니 서희의 말이 정당하군!'
소손녕은 청천강에서 압록강에 이르는 2백 80여 리의 땅을 고려의 영토로 인정하고
80 만 대군을 돌려 물러가고야 말았습니다.
우리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외교관이었던 서희는 세 치밖에 안 되는 혀로 80 만
대군을 물리친 것입니다.
고려는 여진족을 몰아내고 동 6주를 설치하여 압록강까지 영토를 넓혔습니다.
거란군은 일단 물러갔지만 틈만 있으면 고려를 침략할 구실을 찾았습니다. 그러던
때에 고려에서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 왕까지 멋대로 바꾼 것을 따진다는 구실을
앞세워 1010 년, 40 만 대군을 몰아 고려를 향해 제 2 차 침입을 하였습니다.
고려에서는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잡은 강조가 거란군을 맞아 싸웠지만 패하고
개경을 빼앗겼습니다. 왕은 나주로 피난길을 떠났습니다.
그 때 나라 운명을 걱정한 충신 하공진은 고영기와 함께 왕족과 자신이 볼모로 가는
조건을 내세워 거란군을 돌아가게 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하공진은 요나라에 잡혀가 대우를 받았지만, 고려로 탈출할 계획을 세우며 충절을
지키다가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 뒤 거란은 또 고려를 침략할 구실을 찾았습니다.
"고려의 왕은 우리 나라에 인사를 하러 오게 되어 있사오나 병을 핑계 삼아 오지
않고 있나이다."
요나라 신하들은 그들이 왕에게 또 고려를 침략할 구실을 아뢰었습니다.
"장군 소배압은 10 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치도록 하라!"
1018 년, 거란의 침략군이 압록강을 또 넘으니 거란의 제 3차 침입이 시작된
것입니다.
거란이 침입해 올 것을 미리 짐작한 고려에서는 이에 맞서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강감찬 장군을 상원수로 임명하여 강민첨 장군을 부원수로 임명하노라."
강감찬 장군은 1 만 2천 명의 날쌘 군사를 뽑아 깊은 산골짜기에 매복시키는 한편,
쇠가죽을 밧줄에 묶어 동쪽으로 흐르는 물을 막게 하고 적군이 나타나기를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오나라 깃발을 앞세운 거란군이 강을 건너기 시작하였습니다. 적군이 강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 강감찬 장군은 명령을 내렸습니다.
"둑을 터뜨려라!"
쏴^5,5,5^, 터진 강물은 사나운 기세로 거란군을 휘감았습니다.
"아차! 적의 계교에 걸려들었구나!"
거란군이 허둥거릴 때 산골짜기에 숨어 있던 고려군이 바람처럼 내달아 적을
무찔렀습니다.
첫 싸움에 패한 거란군은 작전 회의를 열어 강감찬 장군을 피해 개경으로 쳐들어가
고려 왕을 사로잡아 전쟁을 끝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강감찬 장군은 이들의 작전을 환히 꿰뚫어보고 이미 개경 쪽으로 군대를
이동시켰습니다.
"고려에 강감찬 같은 영웅이 있을 줄이야! 군사를 돌려라!"
싸움에서마다 패한 거란군은 군사를 돌리고야 말았습니다.
그것을 미리 짐작하고 있던 강감찬 장군은 전군에 작전 명령을 내렸습니다.
"싸움에 패한 적군이 되돌아갈 때 반드시 귀주 지방을 지날 것이니 그 곳에서 적을
섬멸해야 한다!"
마침내 강감찬 장군은 귀주에서 거란군을 모조리 무찔렀습니다.
거란군의 시체는 땅을 뒤덮었고 강물은 피로 뒤덮였습니다. 10 만 거란군 중에서
살아 도망친 수는 겨우 수천 명뿐이었습니다. 귀주에서 오랑캐를 크게 무찔러 승리한
이 싸움을 '귀주대첩'이라고 합니다.
귀주대첩의 영웅 강감찬 장군은 문장에도 뛰어나 '낙도교거집'과 '구선집'을 지었으나
이 책들은 전해 오지 않고 있습니다.
강감찬 장군이 태어나던 날, 문장과 지혜의 정기를 품고 있는 별인 문곡성이 떨어져
내렸던 곳이 있습니다.
그 곳에 지금은 낙성대라는 성역을 만들어 강감찬 장군의 위대한 업적과 애국에
불타던 충혼을 기리고 있습니다.
여진과 거듭되는 내란
"여진의 좀도둑 무리가 우리 국경을 침범하였다 하니 장군 임간을 보내어 국경
밖으로 쫓아내도록 하오."
1104 년 숙종 9 년, 왕은 이런 명령을 내렸습니다.
고려의 임간 장군은 여진족을 단칼에 없애 버릴 수 있으리라 여겼다가 날쌘 말을
타고 공격해 오는 여진족 기병들에게 어이없이 패하고 말았습니다.
숙종은 여진족의 세력이 만만치 않음을 깨닫고 슬기와 용기라 뛰어난 윤관 장군을
국경으로 보냈습니다.
"장군이 나아가 여진족을 무찌르도록 하오."
윤관 장군은 여진족 추장 우야소에게 사신을 보내어 위엄을 갖추어 꾸짖었습니다.
그러자,
"고려가 우리 여진을 업신여기지 않고 이웃 나라로 대접하여 준다면 물러가겠소."
라는 답이 왔습니다.
여진족 추장 우야소와 화친을 맺어 여진군을 돌려보낸 윤관 장군은 개경으로 돌아와
왕에게 아뢰었습니다.
"여진의 무리들은 날쌘 말을 탄 기병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들을 대비해서 특별
부대를 길러야 하옵니다."
왕의 허락을 받은 윤관 장군은 별무반이라는 특수 부대를 창설하였습니다. 기병대인
신기군과 보병 부대인 신보군 그리고 스님들로 이루어진 진항마군이었습니다.
윤관 장군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별무반을 훈련시키는 한편 군량미를 비축하는 등
전쟁 대비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던 1107 년 예종 2 년, 여진족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급보가
날아들었습니다.
도원수가 된 윤관 장군은 부원수인 오연총 장군, 척준경 장군 등과 함께 훈련시켜
두었던 17 만 대군을 이끌고 나아가 여진족을 무찔렀습니다.
여진족의 전략 진지 1백 35 곳을 무찔러 약 5천 명의 목을 베었으며 수많은 적군을
사로잡는 등 큰 전과를 올렸습니다.
윤관 장군은 왕에게 아뢰어 여진족을 몰아낸 땅에 9성을 쌓고 남쪽 지방의 주민들을
옮겨 와 살게 하였습니다.
윤관 장군은 9성의 하나인 공험진에다 국경을 표시하는 큰 비석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근거지를 잃고 굶주린 여진족은 끈질기게 9성을 쳐들어왔습니다.
여진족의 추장 우야소는 고려 왕에게 사신을 보내어 아뢰었습니다.
"우리 여진은 일찍부터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겨 왔나이다. 하오나 터전을 잃고
굶주려 도둑질을 하는 것이오니 우리 땅을 돌려주시오면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기고
조공을 바치겠나이다."
왕은 여진의 사신을 물리고 대신들과 회의를 열었습니다.
9성을 내어 주고 편안함을 택하자는 중신들의 주장에 박승중은 맹렬히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종은 다수의 의견에 따르고야 말았습니다.
"나라의 평안을 위해 9성을 여진에게 돌려주노라."
9성을 쌓은 윤관 장군은 문신들의 모함을 받아 벼슬마저 잃고 예종 6 년인 1111 년
5월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9성을 되돌려받은 여진족은 그 곳을 발판으로 세력을 키워 나갔습니다. 추장
우야소의 뒤를 이은 그의 아우 아쿠타가 금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태조가 되었습니다.
때는 예종 10 년인 1115 년의 일이었습니다.
"고려는 예를 갖추어 우리 금나라를 섬겨야겠소."
요나라 영토를 반이나 차지하고 대륙에서 힘을 떨치게 된 금나라 태조 아쿠타가
사신을 보내어 협박하였습니다.
그제야 조정 중신들은 윤관 장군이 이룩한 9성을 내준 것을 뼈저리게 뉘우쳤습니다.
금나라와의 사대 외교에 대해서 반대가 많았으나 이자겸 등 문신 일파는 자기들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와 화친하고 말았습니다.
이자겸은 둘째 딸을 왕비로 들여보내고 벼슬이 높아졌습니다. 이자겸의 할아버지인
이자연도 세 딸을 문종의 왕비로 들여보낸 뒤 수십 년 동안 권세를 누렸습니다.
이자겸은 외손자인 15세의 어린 태자를 왕위에 오르게 하니 이가 곧 인종입니다.
왕의 외할아버지가 된 이자겸은 자기 눈 밖에 나는 사람이면 왕족이건 중신이건
모조리 귀양보내거나 숙청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권세에 눈이 뒤집혀 셋째와 넷째
딸을 외손자인 인종의 왕비로 막무가내로 들여보내기까지 하였습니다.
"이자겸은 과인의 외할아버지이건만 도가 너무 지나치구나!"
인종은 나라일이 걱정되어 가까운 신하와 의논하였습니다.
"소신들이 이자겸 일당의 세력을 꺾고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겠나이다."
김찬, 안보린은 상장군 오탁과 최택, 대장군 권수 등과 뜻을 모아 인종 4 년인 1126
년 2월에 거사를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거사군은 이자겸이 대궐 밖에 있었던 것을
몰랐습니다.
"대궐에서 우리를 해치려는 무리들의 거사를 일으켰다고?"
때마침 대궐 밖에 있던 이자겸과 장군 척준경은 군사를 이끌고 대궐로 쳐들어가
불을 질렀습니다. 그리고 거사를 주모한 기찬, 안보린, 상장군 오탁과 최택, 대장군
권수 등을 마구 죽였습니다.
"이제 외손자고 뭐고 없다. 내가 왕이 되겠다."
이자겸은 왕을 몰래 죽일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 때 최사전이라는 충신이 이자겸의 부하인 척준경의 집으로 찾아가 그들 사이를
이간질시켰습니다.
""이자겸은 장군과 임금님을 없애고 권세를 한손에 잡으려 하고 있습니다. 지난 번
궁궐에서 죽은 장군의 아드님과 아우님도 사실은 이자겸의 군사들이 해친 것입니다.
지금 임금께서는 오로지 이 나라의 기둥으로 장군만을 믿고 있습니다."
최사전은 왕이 내린 백마와 수십 개의 은병을 척준경에게 바쳤습니다.
"이자겸을 잡아 없애자!"
한때 이자겸의 꾐에 빠졌던 장군 척준경은 제 정신을 되찾고 이자겸의 무리를
사로잡거나 죽였습니다.
이자겸은 벼슬과 재산을 잃고 부인 최씨와 아들 7형제와 함께 멀리 귀양을 가 그
곳에서 죽었습니다.
이자겸의 난으로 궁궐은 불타고 백성들의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했습니다.
왕의 신임을 받고 있던 스님 묘청과 백수한, 정지상 등이 서경으로 도읍을 옮길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서경으로 도읍을 옮기시옵고 황제의 칭호를 쓰시오면 북쪽의 금나라를 비롯하여
30여 나라가 대왕 앞에 공물을 바치게 되어 나라의 운이 트일 것이옵니다."
스님 묘청은 자주 정신과 북진 정책을 주장하였지만, 태조 이후 대대로 이어받는
도읍을 옮겨서는 안 된다는 중신들의 주장과 엇갈려 이 문제는 뒤로 미루고 우선
궁궐을 짓기로 하였습니다.
""묘청과 백수한은 터무니없는 말을 꾸며 임금님의 마음과 나라를 어지럽히고
있사오니 마땅히 처형하여야 하옵니다."
인종이 새로 맞이한 왕비의 아버지인 임원애가 아뢰었습니다.
한편, 서경으로 도읍을 옮기자고 주장하다가 자기 계획이 중지되자 묘청 등은 1135
년에 난을 일으켰습니다.
"이 곳 서경에는 새로운 왕의 기운이 뻗치니 대위국을 세우노라! 북쪽 오랑캐를
무찔러 천하를 통일하려 하니 백성들은 대위국에 충성을 다할지니라."
묘청을 중심으로 한 서경파들은 자비령 이북을 차지하여 다스렸습니다.
조정에서는 회의를 열어 서경파의 정지상, 김안, 백수한 등을 죽인 다음 김부식을
평원수로 삼아 묘청을 무찌르자고 하였습니다.
그 때 반란군 안에서 또 반란이 일어나 묘청과 유담 등의 목이 잘려 관군에서
바쳐졌습니다.
끝까지 버티며 1 년 가까이 반란군을 지휘하던 조광은 식량 부족으로 더 버틸 수
없게 되자 자기 집에 스스로 불을 질러 함께 타 죽었습니다. 이로써 묘청의 난은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고려의 내란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거듭되었습니다.
때는 인종 20 년인 1142 년의 섣달(2월) 그믐날 밤이었습니다.
대궐에서 악귀를 내쫓기 위한 나례라는 행사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신하들이 여러
가지 동물의 탈을 쓰고 재주를 자랑하는 놀이가 한창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세도를 잡고 있던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 불이 꺼진 어둠 속에서
무신인 정중부의 수염에 불을 붙였습니다.
"앗, 뜨거워! 어느 놈이 마의 수염을 태우느냐?"
화가 치민 정중부는 김돈중의 뺨을 때렸습니다.
"무신 따위가 감히 문신의 뺨을 치다니!"
김부식을 비롯한 문신들의 들고 일어났습니다.
국왕 인종이 정중부를 잘 타일러 정중부는 무사했습니다. 그러나 정중부의
가슴속에는 무신을 업신여기는 문신들에 대한 증오의 불길이 타올랐습니다.
의종 24 년인 1170 년 8월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문신들을 증오하던 무신들은 국왕
의종이 경치 좋은 보현원으로 행차하자 기습하여 문신들을 모조리 죽였습니다.
정중부는 국왕 의종과 태자를 거제도로 귀양보내고 의종의 아우인 익양공을 왕위에
앉혔습니다. 그가 곧 명종인 것입니다.
그러나 난을 일으켜 권력을 잡은 정중부, 이고, 이의방은 서로 권력을 독차지하기
위해 죽이고 죽는 다툼을 벌였습니다.
뿐만 아니라,1173 년 문신들이 일으킨 난을 비롯하여 1174 년 조위총의 난, 같은 해
개경 귀법사의 스님 2천여 명이 일으킨 난, 1175 년 한강 남쪽에서 일어난 석영사의
난, 1176 년 공주 명학소에서 천민 망이, 망소이 등이 일으킨 난, 1182 년 기두, 죽동이
관노와 불만이 많은 무리를 이끌고 전주에서 일으킨 난 등으로 나라 안은 몹시
어지러웠습니다.
또 1193 년에는 경상 남북도 지방의 농민의 반란, 1198 년에는 개경에서 노비
만적이 노^36^예들을 모아 일으킨 난, 1217 년 고구려 부흥을 꾀하려고 깃발을 든
최강수의 난 등 수많은 내란이 거듭되었습니다.
9 년 동안 권세를 누리던 정중부를 죽이고 권력을 받은 경대승은 4 년 만에 병들어
죽고, 천민 출신으로 권력을 잡아 마구 횡포를 부리던 이의민도 13 년 만에 무신
최충헌 형제에게 죽음을 당했습니다.
최충헌은 1196에서 1219 년까지 두 왕을 내쫓고 네 왕을 세웠습니다.
최씨 무신 정권은 최충헌의 아들 최우에 이르러 사뭇 달라졌습니다. 교양을 갖춘
인물이었던 최우는 정방이라는 정무 집행 기관을 설치하여 나라를 다스렸는데, 문신을
우대한 기구인 서방을 설치하여 그들의 의견을 듣고 협조를 구하기도 하였습니다.
최우는 다음 장에 나오는 삼별초를 조직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몽고의 침략과 삼별초
1206 년, 몽고에서는 테무진이 부족을 통일하고 나라를 세워 스스로 칭기즈 칸이라
칭했습니다.
"고려와 몽고는 협약을 맺었으니 고려의 토산품들을 보내주기 바라오."
몽고는 고려가 원치도 않은 협약을 강제로 맺고 물건을 요구하였습니다.
때는 1219 년 9월, 고려의 정권을 잡고 있던 최충헌이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자
그의 아들 최우가 아버지의 권력을 이어받아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려 조정으로부터 물건을 받아 싣고 가던 몽고 사신 일행이 압록강
근처에서 한 떼의 무장한 무리를 만났습니다.
""걸음을 멈추고 칼을 받아라!"
몽고 사신을 습격한 무리들은 고려 사람의 옷으로 변장한 금나라 유민이었습니다.
그들은 고려와 몽고를 이간질시키기 위해서 몽고의 사신을 죽였던 것입니다.
"고려인이 우리 사신을 죽였다고? 괘씸한지고! 당장 복수하고 싶으나 많은 군사가
서역에 원정중이니 고려와 국교부터 끊도록 하라."
몽고의 태조 칭기즈 칸은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그의 셋째 아들 오고타이가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칭기즈 칸의 뜻을 받들어 금나라를 무너뜨린 다음 고려를 향해
진격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우리의 사신을 죽인 것을 트집잡아 고려도 쳐야겠노라."
고려 고종 18 년인 1231 년 8월. 몽고군 원수 살리타이는 대군은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왔습니다.
몽고군은 귀중성 수비가 철통같이 튼튼하자 길을 돌려 개경성을 포위하고
위협하면서 양주(서울), 광주, 충주, 청주까지 쳐들어왔습니다.
고려 조정에서는 몽고군 원수 살리타이에게 왕족인 회안공을 사신으로 보냈습니다.
"지난날 몽고 사신을 죽인 범인은 고려 사람이 아니오. 몽고와 고려를 이간질하려는
여진족의 짓이오."
결국 사실이 밝혀지고 오해가 풀렸지만 몽고군 원수 살리타이는 화친의 조건으로
몽고군이 점령했던 고려의 여러 지방에 몽고의 관리인 다루가치 72 명을 두고
갔습니다. 고려의 움직임을 감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군사를 돌려 물러갔던 몽고는 사신을 보내어 고려의 왕자와 왕손과 공주, 그리고
대신의 아들딸과 더불어 기술자를 보내 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고려 조정은 이 요구를 들어 주지 않았습니다.
몽고 사신을 달래어 돌려보낸 초우는 중신 회의를 열고 단호하게 선언했습니다.
"몽고의 계속될 침입에 대비하여 도읍을 강화도로 옮겨 장기전으로 항쟁하는 것만이
자주 국가를 보존하는 길이오."
최우의 주장에 대부분의 대신들이 반대하였습니다.
"오랑캐와 더 이상 타협할 수는 없는 일! 반대하는 사람은 처단하고 도읍을
강화도로 옮길 것을 결정하겠소."
최우는 반대하던 사람 중에서 야별초의 지휘자이던 김세충을 처단하고 도읍을
옮긴다는 천도 명령을 내렸습니다.
최우는 이미 야간 경비와 치안을 맡을 야별초를 설치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수가
늘자 좌, 우별초로 나누었습니다.
고종 19 년인 1232 년 6월 16일, 고려는 도읍을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겼습니다.
"장기전을 펴기 위해 도읍을 옮긴 고려를 정벌하자!"
몽고는 제 2 차 침입을 하였습니다.
"적장만 쓰러뜨리면 적군을 흩어질 것이다."
애국심이 강한 스님 김윤후는 목숨을 걸고 몽고군 원수인 살리타이를 찾아다니다가
그를 발견하고 화살을 쏘아 명중시켰습니다.
"적장이 죽었다!"
"오랑캐를 무찌르자!"
힘을 얻은 나라 안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나 몽고군을 무찌르니 대장을 잃은 그들은
허둥지둥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고종 22 년인 1235 연, 몽고 태종은 장군 당을태에게 군사를 주어 고려에 제
3 차 침입을 하였습니다.
이 때 경주의 황룡사 9층 석탑과 해인사의 대장경판도 불탔습니다.
"부처님의 힘을 빌려 몽고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팔만 대장경을 간행합시다."
고려 조정은 팔만 대장경을 무려 16 년에 걸쳐 완성하면서 계략과 항쟁으로 맞서
싸웠습니다.
그러나 몽고 태종의 뒤를 이은 정종은 1247 년에 아모간을 사령관으로 삼아 연안
지방인 염주에 진을 치고 고려를 위협하였습니다. 1253 년에는 야고를 사령관으로
하여 몽고 대군이 또 쳐들어왔습니다.
수없는 몽고군의 침입에 무신 정권의 항쟁도 굳세었지만, 노비와 천민 들까지
의병으로 일어나 끈질기게 싸워 나라를 지켰습니다. 결국 몽고는 화친을 맺고
돌아갔으나 그로부터 고려는 몽고의 간섭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1258 년, 무신 김준과 문신 유경 등은 최씨 정권의 마지막 집권자인 최의를
죽였습니다.
최씨 독재 정권이 쓰러지자 고려는 다시 국왕이 직접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고려 고종이 세상을 떠나자 볼모로 가 있던 태자 전이 몽고에서 돌아와 왕위를 이어
원종이 되었습니다.
"강화도에 있는 조정 대신들과 백성들은 개경으로 돌아올 것을 명하노라."
원종이 어명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임연의 뒤를 이어 권세를 잡은 임유무는 군사를
모아 강화도를 끝까지 지키려고 하였습니다.
1270 년 6월, 몽고와의 화친에 반대하는 배중손 등의 지휘 아래 삼별초는 반란을
일으켜 강화도에 새로운 반몽 조정을 세우고 왕족 승화후 온을 왕으로 받들었습니다.
최우가 야간 경비와 치안을 맡아 야별초를 설치하여 그 수가 늘어나 좌, 우별초로
나누었음은 이미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여기에다가 다시 몽고군과의 싸움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온 사람들로 짜여진 신의군을 합쳐 삼별초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삼별초의 지도자인 배중손, 노영희, 김통정 장군 등은 1천여 척의 배를 모아 2 만이
넘는 군사와 백성, 그리고 무기와 양식과 재물 등을 싣고 강화도를 떠났습니다.
삼별초는 진도에 새 나라의 터전을 잡고 용장성을 쌓아 궁궐을 세우고 진도를
비롯한 30여 섬을 차지하였습니다. 해안 여러 지방과 나주, 전주에까지 세력을 뻗쳐
해상 왕국을 건설하였습니다.
그러나 고려 정부군과 몽고 연합군의 거센 공격을 받고 지도자 배중손이
전사하였습니다. 게다가 왕으로 받들던 승화후 온과 그의 아들 환도 목숨을
잃었습니다.
삼별초 군사들은 80여 척의 배를 몰고 탐라(제주도)로 가서 성을 쌓고 군사를
훈련시켰습니다.
1271 년, 몽고는 북경으로 도읍을 옮기고 나라 이름을 원이라 고쳤습니다.
쿠빌라이는 세조가 되어 고려에 대한 간섭을 더욱 심하게 했고 삼별초를
총공격하였습니다.
"고려인의 꺾일 줄 모르는 자주 정신을 지켜 최후의 한 사람까지 명예롭게 싸우다
죽으리라!"
삼별초는 약 4 년 동안이나 항쟁하다가 힘이 부족하여 고려와 원나라 연합군에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원나라는 삼별초를 쓰러뜨린 뒤에 탐라 총관부를 두고 목장을 만들었습니다.
그 후 1301 년 고려 충렬왕 27 년에야 그것을 돌려받을 수 있었습니다.
고려 사회는 귀족, 중류, 상민, 천민의 네 계급으로 나뉘어 귀족과 중류는 백성을
다스리고 상민과 천민은 다스림을 받았습니다.
고려에는 일반 백성들을 위한 여러 기관이 있었습니다. 태조 때의 흑창과 성종 때의
의창에서는 양곡 대여를 하였고 광종 때의 제위보에서는 빈민 구제를 하였습니다.
성종 때의 상평창은 물가 조절 기구, 예종 때의 혜민국은 무료 약국, 정종 때의
대비원은 무료 병원이었습니다.
고려에는 71조의 법률이 있었지만 일상 생활과 관계되는 것은 대개 관습에
따랐습니다. 재판은 단심이었으나 사형만은 오늘날의 대법원까지 올라가는 3심제도와
같은 절차를 밟아 진행하였습니다.
고려에는 연등회와 팔관회라는 모임이 있었습니다.
연등회는 불교 행사로 2월 보름에 온 나라에서 열렸습니다. 등불을 눈부시게 밝히고
귀신을 물리치며 백성들이 춤과 노래를 즐기며 나라의 평안을 빌었습니다.
팔관회는 산천의 신에 대한 제전이었습니다. 개경과 서경에서 10월 보름과 11월
보름에 행하여졌는데, 천지 신명에게 나라의 안녕을 빌던 국가 행사였습니다.
한식날은 성묘를 하고 묘의 잡풀을 베는 등 조상의 묘를 보살피는 날로 삼았습니다.
5월 단오날이면, 남자들은 씨름 대회, 여자들은 그네를 뛰며 놀았습니다. 또 말을
달리면서 땅의 공을 막대기로 쳐서 상대편 문에 넣는 격구라는 경기도 하였습니다.
6월 유두날에는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으며 '더위를 갖고 가라'던가
'액운을 때워 달라'고 비는 풍속도 있었습니다.
백중날인 7월 보름에는 일반 남자와 여자가 절에 가서 우란분이라는 제를 올리며
세상 떠난 사람의 넋을 위로하였습니다.
그 밖에도 설날인 1월 1일은 원정이라 불렀고, 정 대보름날인 1월 15일을 상원,
삼짇날인 3월 3일을 상사라고 부르며 명절로 삼았습니다. 또한 부처님이 태어나신 4월
8일을 불탄일로, 9월 9일을 중구라고 하며 명절로 삼았습니다.
정월 대보름날인 상원에는 다리밟기를 하였고, 삼짇날에는 쑥떡을 만들어 먹었으며
불탄일에는 집집마다 등불을 달고 부처님의 탄일을 축하하였습니다.
고려 시대 전기에는 상공업과 돈을 만드는 화폐의 주조 등도 발달하였습니다.
상업의 발달로 외국과의 무역도 매우 활발하였습니다. 예성강 하류에 있는
벽란도에는 고려의 무역항으로서 송나라와 왜국(일본), 아라비아 상인들의 배까지
드나들었습니다. 그 밖에도 요나라(거란)와 여진과도 무역을 하였으며, 수입품보다
수출품이 더 많았습니다. 그리고 아라비아 상인들에 의해 고려라는 이름이 코리아로
서방 세계에 알려지게 된 것도 이 때입니다.
불교는 고려 전기의 문화 성장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고려의 역대 왕들은 이름 높은 스님은 왕과 나라의 스승이라는 뜻으로 왕사 또는
국사라 불렀습니다. 광종 때부터는 스님도 과거를 볼 수 있는 승과 제도가 생겼습니다.
고려의 이름 높은 스님으로는 문종의 넷째 왕자 대각 국사 의천을 비롯하여 다섯째
왕자 승통 스님, 숙종의 넷째 왕자 증신 스님이 있습니다. 특히 의천 스님은 송나라,
일본, 요나라에까지 사람을 보내어 4천 7백 40권의 책을 모아 1096 년에 '속장경'을
간행하였습니다.
불교가 고려 사람들의 신앙 생활을 이끌어 갔다면 유교는 사람들의 실제 생활인
나라를 다스리는 데 으뜸이 되는 이치로 높이고 중하게 여겼습니다.
문종 때에는 나라에서 세운 교육 기관인 국자감을 중심으로 관학보다는 유명한
학자들이 세운 사학이 더 발달하였습니다.
고려 전기에는 문학과 역사도 발달하였습니다. 문장으로 유명한 이로 김부식과 최충
등이 있고, 시로 유명한 이는 정지상 등이 있습니다.
고려 초까지 향가가 성행하여 광종 때의 균여 대사가 지은 보현십원가 11수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1145 년,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는 가장 오래 된 역사책입니다.
고려 전기에는 예술도 발전하였습니다. 고려 청자는 우리 나라의 가을 하늘을
나타내는 비취색과 인물, 새, 짐승, 식물 등의 모양을 상감법으로 새겨 넣은 독특한
도자기 예술품입니다. 상감법이란 우리 나라 독특한 기법으로 도자기 표면에 무늬를
파고 그 속에 금과 은, 석돌 등을 채워 넣고 유약을 발라 구워 만드는 방법입니다.
고려의 건축물, 불상 등은 통일 신라에 비하면 예술적 솜씨는 떨어집니다.
고려 초기부터 궁중에 도화원을 두어 화원(화가)을 양성하였고, 대표적인 화가로는
예성강도를 그린 이영과 그의 아들 이광필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 시대의 글씨로 유명한 유신, 탄연, 최우가 신라의 김생과 더불어 신품 4 현으로
불려집니다.
고려 후기의 귀족 사회는 무신과 원나라의 영향을 받은 세력가들이 권력을
잡았습니다.
고려 후기에는 성리학이 들어오고 그 영향도 컸는데 1290 년 충렬왕 16 년에 안향이
처음 소개하였고, 충성왕 때에는 백이정이 원나라에 가서 직접 배워 왔습니다.
성리학은 유교 철학으로 송학 또는 주자학이라고 부릅니다. 글귀 해석 등에 치우친
종래의 유학(훈고학)과는 달리 우주의 이치와 인간의 심성 문제를 탐구하는 철학적인
면을 강조한 학문입니다.
충렬왕은 안향의 도움으로 국학을 성균관이라고 이름을 고치고 장학 재단인
양현고를 넓혔습니다.
고려 말기의 성리학의 대가로 손꼽히는 사람은 정몽주, 이색, 길재 등이었습니다.
정도전, 조준 등은 성리학을 받들고 사회 개혁을 주장하였습니다.
고려 후기의 불교는 조계종이 융성하는 등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보조 국가 시눌,
지공 법사, 태고 화상 보우, 무학 대사 좌초는 대표적인 큰스님들이었습니다.
지금까지 합천 해인사의 판고에 보관중인 팔만 대장경은 세계에서 가장 방대하고
가장 오래 된 판목입니다. 그 경문 또한 정확하여 학술적 가치가 높고 내용도 가장
완비되었으며 글자의 모양도 아름답고 정교하여 세계적인 자랑거리입니다.
고려 후기 문하 예술은 기술학과 인쇄술의 발달을 먼저 들 수 있습니다.
가장 오래 된 금속 활자로는 서양보다 2백 년 앞선 1234 년에 만든 상정고금예문이
있으나 전해지지 않습니다.
1377 년에 만든 직지심경은 1972 년 5월, 프랑스 파리의 국립 도서관에서
유네스코가 개최한 '책의 역사 종합전'에 전시되어 최고의 금속 활자로서 세계적인
인정을 받았습니다.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본으로 알려진 구텐베르크의 42 행 성경이
1450 년에 간행되었으니 고려의 직지심경은 그보다 70여 년이 앞섭니다.
고려는 원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아 원나라와 그 주변에 있는 서역의 이슬람 나라의
우수한 자연과학을 받아들여 달력(수시력)이 보급되고 천문학과 산수도
발달하였습니다.
고려 후기의 문화에서 목화와 화약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공민왕 12 년인 1363 년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문익점이 붓두껑 속에 목화씨를
넣어 가지고 왔습니다. 또한 그의 장인 정천익은 목화 재배에 성공하여 씨 빼는
기구인 씨아와 물레를 만들어 전국에 보급하였습니다. 목화의 보급은 명주, 모시,
삼베를 주로 입던 우리 나라 의복 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최무선은 원나라 상인에게 화약 만드는 법을 배워 조정에 건의하여 1377 년 화통
도감을 설치하고 각종 화약을 만들어 사용케 하였습니다.
고려 후기에는 무신 정권과 몽고 간섭의 영향으로 민족의 주체성을 찾기 위한 역사
저술이 이루어졌으며 문학에서는 패관 문학이 유행하였습니다.
무신 정권을 피해 산으로 들어간 문신들은 신화, 전설, 설화 등을 모아 책으로 엮어
펴냈습니다. 이것이 패관 문학입니다. 대표적인 것은 이제현의 '역옹패설', 최자의
'보한집', 이인로의 '파한집', 이규보의 '백운소설', '국선생전', 임춘의 '국순전', 이곡의
'죽부인전'과 개인 문집으로는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이색의 '목은집', 정몽주의
'포은집'을 꼽을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문인으로는 박인량, 이규보, 이제현, 이인로, 진화, 이색 등이 있습니다.
박인량은 설화 문학의 선구자였고, 이규보는 민족 의식을 높이고자 장편 서사시
'동명왕편'을 썼습니다.
고려의 서민들은 향가 대신 '가시리', '청산별곡', '정과정곡', '쌍화점', '처용가' 등
전통적인 정서를 노래한 장가체의 가요를 즐겨 불렀습니다.
공민왕 때의 이제현은 '고려 국사'를 편찬하다가 중단하였으나 이는 뒷날 조선
시대의 역사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고려 후기의 대표적인 목조 건물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 봉정사의 극락전,
부석사의 무량수전과 조사당, 수덕사의 대웅전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림으로는 이영, 이광필 부자와 고유방이 유명하였고 공민왕도 그림 솜씨가 뛰어나
사냥하는 모습을 그린 '천산대렵도'를 남겼습니다.
글씨는 신품 4 현의 한 사람인 최우가 뛰어났고 대표적인 서^36^예가로 이암과
이강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음악은 중국 음악인 당악이 있었지만 송나라의 대성악이 들어와 궁중 음악이
되었습니다. 향악도 즐겼는데 '동동 대동강' '한림별곡' 등이 있습니다.
고려 후기에는 각본에 따라 춤과 노래를 연출하는 산대놀이라는 가면극이
유행하였으며 조선 시대에 들어와 더욱 널리 행해졌습니다.
고려와 원나라의 빈번한 왕래로 풍습도 변화되었습니다. 처녀들이 시집갈 때
족두리와 뺨에 연지 찍는 신부 화장과 도투락댕기와 귀고리하는 풍습이 이 때부터
고려에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원나라에서는 고려 두루마기와 비슷한 옷을 입고
상추쌈을 먹는 등 고려의 풍습이 유행하였는데 이를 고려양이라고 하였습니다.
* 그림: 묵자책 153쪽
그림설명: 부석사 무량수전(고려)과 고려상감청자들.
저물어 가는 5백년 고려 왕조
"간신의 무리들이 들끓는 나라에서 왕이 되면 무엇 하리^5,5,5^."
충렬왕과 원나라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충선왕은 1313 년 정치에 뜻을 잃고 왕관을
벗었습니다. 임금자리에서 물러난 것입니다. 그러나 충선왕은 몽고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한 개혁 정치를 실시하여 고려 역사에 중요한 갈림길을 이루어
놓았습니다. 고려 후기의 역사는 새로운 바람을 타게 되었으며 자주 정신도
가다듬어졌던 것입니다.
1351 년, 원나라에서 노국 공주를 왕비로 맞이하여 돌아온 공민왕이 역사의
새바람을 일으켰습니다.
1368 년, 중국 대륙의 강남에서 반란을 일으킨 주원장은 원나라를 북쪽으로
몰아내고 명나라를 세웠습니다.
중국 대륙이 혼란해진 틈을 타서 공민왕은 자주성 회복 운동과 개혁 운동을
과감하게 펴나갔습니다.
"역대 선왕들의 숙원이던 북진 정책을 실현하리라."
공민왕은 이성계 장군에게 군사를 주어 압록강을 건너 요동에 밀려가 있던 동녕부를
공격하게 하였습니다.
"몽고식 관제를 폐지하고 문종 이전의 3성 6부 제도로 관제를 다시 환원토록 하오."
공민왕은 원나라 연호를 폐지하고 변발을 금지시키며 몽고 옷을 벗게 하고 몽고말을
하지 못하게 하는 등 몽고의 풍습을 몰아냈습니다.
"저는 비록 원나라의 공주이지만 고려 왕비가 되었으니 마땅히 고려의 풍습을
따르려고 합니다."
왕비인 노국 공주도 솔선하여 고려의 풍습을 따랐습니다.
공민왕은 원나라를 배척하면서 새로 일어난 명나라와 국교를 맺어 서로 사신을
오가게 하였습니다.
이에 원나라에서는 2 만 명의 군사를 보내어 고려를 침입했지만, 최영 장군과
이성계 장군이 이끄는 고려군은 원나라군을 무찔러 쫓아내고야 말았습니다.
공민왕은 노국 공주를 맞이한 지 10여 년이 지나도 아기가 없자 근심에 싸여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렵게 생긴 아기를 낳던 노국 공주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왕비를 잃은 공민왕은 나라일을 돌보지 않고 노국 공주만을 생각하여
초상화를 그리고 대궐을 짓는 등 미친 사람과도 같이 세월을 보냈습니다.
"임금님의 슬픔을 덜어 드리고 나라일을 다스리게 하려면^5,5,5^."
신하 김원명이 스님인 신돈(편조 어사)을 추천하니 공민왕은 원나라와 친한 귀족을
누르고 왕권을 튼튼하게 하기 위하여 신돈에게 나라일을 맡습니다.
신돈은 처음에는 실력 있는 선비들을 조정에 불러들이는 등 나라일을 잘
보살폈습니다. 그러나 차츰 자기에게 아첨 잘 하는 사람들에게 벼슬을 주어 자기
세력을 키워 갔습니다.
조정 대신들과 세도가들은 신돈의 잘못을 왕에서 아뢰어 그를 귀양보내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궁궐에는 왕을 업신여기는 자들이 많았고 기강도 흐트러져
있었습니다.
1374 년, 공민왕은 궁궐 안의 흐트러진 생활 모습이 밖으로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
이를 발설한 최만생과 홍윤 등을 없애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도리어 그들에게
살해당하고 말았습니다.
공민왕의 죽음과 더불어 나라는 기울어지기 시작하여 고려는 내리막길로
접어들었습니다.
홍건적이 압록강을 넘어 의주와 선주를 거쳐 서경을 함락하는 제 1 차 침입에 이어
개경을 함락한 제 2 차 침입도 하였습니다.
한때 왕이 안동 지방까지 피난을 가기고 하였으나, 이성계 장군을 비롯한 고려
장병들은 10 만여 명의 홍건적을 모조리 무찔렀습니다.
홍건적의 침입은 일시적이었으나 왜구의 침입은 끈질기게 되풀이되어 살인과 방화와
약탈을 일삼았고, 고려의 도읍인 개경을 위협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려군은 왜구가 침입할 때마다 이를 물리쳤고, 1389 년에는 박위가 군사를
이끌고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 섬을 정벌하여 그들의 세력을 크게 꺾었습니다. 한편
정몽주는 일본에 가서 외교를 펴는 일도 겸하였습니다.
1388 년, 명나라는 쌍성총관부 관할 밑에 있던 고려 땅을 명나라의 땅으로
만들겠다고 통보해 왔습니다.
"요동을 정벌해야 하옵니다."
"그럴 때가 아니옵니다."
요동을 정벌해야 한다거니, 시기 상조라거니 의견이 대립되었습니다.
이성계 장군과 그의 추종 세력은 요동 정벌을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정권을 잡고
있던 최영 장군과 우왕은 뜻을 같이하여 요동 정벌을 강행하였습니다.
1388 년 4월 18일, 우왕은 서경에서 고려군에 출동 명령을 내렸습니다.
"팔도 도통사 최영은 이 곳에 남아 군사를 지휘하고, 우군 도통사 이성계와 좌군
도통사 조민수는 서경을 출발하여 요동으로 진격하라!"
압록강에 배와 뗏목을 이어 만든 부교가 띄워졌습니다. 때는 5월 7일, 압록강
한가운데 있는 섬 위화도에는 장대같은 비가 쏟아졌습니다.
"아무리 어명이라지만 수많은 군사를 죽음의 구렁텅이로 밀어넣을 수는 없는
일이오. 군사를 돌립시다."
이성계 장군의 의견에 배극렴 등이 선뜻 찬성하였습니다. 좌군 도통사 조민수도
어쩔 수 없이 이성계와 뜻을 같이하기로 하였습니다.
위화도에서 회군한 군사들은 성난 파도처럼 개경성을 공격하였습니다. 최영은
이성계 군사에 사로잡혀 고봉현(고양군)으로 귀양갔다가 1388 년 12월 그 곳에서
처형되었습니다. 그의 나이 73세 때였습니다.
이성계 장군은 우왕을 왕손이 아닌 요승(도를 어지럽히는 간악한 중) 신돈의
아들이라 하여 패하고, 9살의 어린 왕자 창을 임금의 자리에 앉히니 이가 고려 제 33
대 창왕입니다.
이성계 장군은 다시 창왕을 패하고 고려 제 20 대 임금이었던 신종의 7 대손인
정창군 왕요를 임금의 자리에 앉히니 이가 곧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인
것입니다.
이성계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조민수 등 반대파를 몰아내고 조준의 개혁안에 따라
전국의 토지를 측량하고, 토지 문서를 불사르며 옛 귀족과 사원의 농장을
거두어들였습니다.
고려의 충신이며 이성계에 반대하던 포은 정몽주는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 고여 등에게 선죽교에서 죽음을 당했습니다. 때는 1392 년 그의 나이
56세였습니다.
배극렴은 여러 신하들과 함께 왕대비를 찾아가 옥새를 이성계에서 넘겨 주라는
교서를 받아 냈습니다.
태조 왕건이 고려를 세운 지 475 년 만인 1392 년 제 34 대 공양왕 4 년에, 고려
왕조는 역사의 막을 내리고야 말았습니다.
(조선 시대)
(문화의 발달과 민족의 수난)
새 나라 조선, 태조 이성계
"이 사슴은 내가 쏘아 잡은 것이오."
"아니오. 내 화살이 먼저 맞았소."
어느 해, 신궁이라는 소문을 듣던 이성계는 백두산 호랑이라는 별명이 붙은
퉁두란(이지란)과 사냥터에서 서로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거의 같은 순간에
숲 속을 달리는 수사슴을 활로 쏘아 쓰러뜨렸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활 솜씨에 놀라며 인사를 하였습니다.
"나는 본래 여진 사람으로 금패전호 아라부하의 아들인데 고려에 귀화하였소.
그런데 귀신같이 활을 잘 쏘는 그대는 뉘시오?"
"나는 천호장 벼슬에 계시는 이자춘의 아들 이성계요!"
두 사람은 활 솜씨를 겨루어 이성계가 형, 퉁두란은 아우로 의형제를 맺었습니다.
이성계와 의형제를 맺은 퉁두란은 뒷날 이성계가 지어 준 이지란이라는 이름으로
이성계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습니다.
이성계는 고려 충숙왕 4 년인 1335 년, 함길도 영흥군 흑석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무렵 그 곳은 원나라 땅이었습니다.
이성계의 아버지인 이자춘은 원나라의 천호장 벼슬을 지내고 있었지만 그의
조상들은 전주에 뿌리박고 살던 호족이었습니다. 이성계의 조상이 흑석 마을로 옮겨
와 산 것은 그의 4 대조였던 이안사 때부터였습니다.
이자춘은 어린 아들 이성계에게 언제나 우리 민족을 위한 일꾼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성계는 어려서부터 슬기롭고 용기가 뛰어났습니다. 특히 활 솜씨는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명궁이었습니다.
이자춘은 이성계를 비롯한 아들 형제들을 불러 놓고 비밀 회의를 열었습니다.
"이 아비의 평생 소원은 조국을 찾는 일이다. 오늘 밤 고려군을 맞아들이자."
이자춘과 이성계 부자는 고려군과 내응하여 쌍성총관부를 함락시키고, 함주(함흥)
이북을 고려 쪽으로 끌어들이는 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장하도다! 이자춘을 삭방도 만호 겸 병마사로 봉하노라."
그 해, 46세의 나이로 이자춘이 세상을 뜨자, 왕명에 의해 이성계는 상장군으로
동북면 상만호가 되었습니다.
"반란군을 일으킨 무리들을 무찌르자!"
이성계는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반란군을 무찔렀습니다.
"홍건적과 왜구를 이 땅에서 몰아내자!"
장군 이성계는 눈부시게 활약하였습니다.
그러던 이성계는 어느 해 함경도 안변의 어느 절에 머무르며 백일 동안 기도를
드리다가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자기가 서까래 셋을 등에 졌는데 닭이 '꼬끼오' 하고 우는 꿈이었습니다.
이성계는 도가 높은 스님을 찾아가 꿈풀이를 부탁하였습니다.
"서까래 셋을 등에 졌으니 한자로 왕 자가 됩니다. 장군이 장차 왕이 되실
꿈입니다."
"닭이 우는 '꼬끼오' 소리는 어떻게 풀이됩니까?"
"글자로 '꼬끼오'를 풀면 고귀위(높을 고, 귀할 귀, 자리 위), 즉 가장 높고 귀한
자리를 하는 것이니 왕의 자리가 틀림없습니다."
"대사께서 저의 스승이 되어주십시오."
"아니올시다. 장차 왕이 될 분의 스승으로는 삼인봉에 있는 무학이라는 저의 제자가
마땅하니 그를 찾아가 보십시오."
장군으로 이름을 떨치던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 이후 세력을 잡더니, 마침내 1392 년
7월 17일 수창궁에서 새 왕조의 태조로 즉위하였습니다. 그의 나이 58 세 때였습니다.
"전하, 새 나라의 이름을 고치옵소서."
신하들이 아뢰었습니다.
"무엇이라 지으면 좋겠소?"
"단군 성조께서 이 땅에 처음 나라를 세우실 때 지었다는 조선으로 하는 것이
어떠하올는지요?"
"전하께서 탄생하신 곳을 따서 화령(영흥)이라 함이 어떠하실는지요?"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 지 2 년이 되는 1393 년 2월 15일부터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고 하였습니다.
"전하, 무학 대사님을 모셔왔나이다."
"무학 대사! 과인의 스승이 되어 주오."
무학 대사는 5백여 년 동안 고려의 도읍이었던 개경을 떠나 새 도읍을 정하라고
하였습니다.
1393 년 3월부터 계룡산을 도읍으로 정하고 큰 공사가 시작되었으나 그 해 12월
공사가 중단되고, 한양이 도읍지로 새로 결정되었습니다. 1394 년 9월에 '신궁궐 조성
도감'이라는 새 도읍의 대궐을 짓는 일을 맡는 관청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종묘와
경복궁 등을 지었습니다.
1394 년 10월, 태조는 궁궐에 완성하기도 전에 개경의 각 관청에 2 명의 관원만
남겨 놓고, 조정을 새 도읍으로 옮겼습니다. 태조는 정도전에게 새 대궐과 각 전각들,
그리고 8 대문과 도성의 마을 이름을 지으라고 하였습니다. 정도전은 경복궁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이름을 지어 바쳤습니다.
태조는 유교를 받들게 하고 불교를 억제하는 숭유억불 정책과 농업을 적극 장려하는
농본 정책, 그리고 명나라를 받들어 섬기고 야인(여진)과 왜국(일본)과는 화평을
도모하는 사대교린 정책을 펼쳤습니다.
태조에게는 여덟 명의 왕자가 있었습니다. 신의 왕후 한씨에게서 태어난 여서 명의
왕자와 계비인 신덕 왕후 강씨에게서 태어난 두 왕자가 있었습니다.
"막내 왕자 방석을 왕세자로 정하노라."
태조는 계비에게서 태어난 막내 왕자 방석을 제일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방석을
왕의 뒤를 이을 왕세자로 정한 것입니다.
"왕자들은 여러 지방으로 보내어 세력이 한 곳에 모이지 못하게 함이 안전하옵니다.
또한 왕자들이 거느리고 있는 군대도 거두어들이심이 안전하옵니다."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은 태조가 가장 사랑하는 막내 왕자 방석을 받들고 세력을
잡으려고 왕에게 아뢰었습니다.
거느리고 있던 군대를 잃게 된 다섯째 왕자 정안 대군 이방원은 불같이 노하며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막내를 왕세자로 정하는 것도 못마땅하거늘 왕자들을 꼼짝 못 하게 군대까지
빼앗게 하다니^5,5,5^. 내 이놈들을 모조리 없애 버리겠다."
정안 대군 이방원은 머리가 뛰어난 하륜의 슬기를 빌려 정릉 수릉군을 교대하려
올라온 지안산 군수 이숙번의 군사를 거느리고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을 습격하여
죽였습니다.
방석은 이에 대항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왕세자의 자리에서 쫓겨났습니다.
이것을 방석의 난 또는 제 1 차 왕자의 난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순서대로 왕세자를 책봉하기로 하고 둘째 아들인 영안 대군
이방과를 왕세자로 정했습니다. 그것은 맏아들인 방우가 고려가 망할 무렵,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해주 지방의 깊은 산 속에 숨어 버린 뒤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둘째 형이 왕세자로 정해지자 다섯째 왕자인 이방원은 형을 도와주려고 하였습니다.
"형님께서 왕세자가 되었으니 왕세자의 자리에서 물러난 방석과 방번 형제는 대궐
밖으로 내보야야 합니다."
이방원은 후환을 없애기 위해 동생인 방석과 방번,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을
없애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야 이방원은 안심할 수 있었습니다.
태조는 두 왕자를 잃고 슬픔을 못 이겨 왕의 자리를 세자에게 물려주고 상왕이 되어
한성을 떠났습니다.
태조의 뒤를 이어 왕이 된 방과, 즉 정종은
"개경에서 한성으로 도읍을 옮긴 지 여러 해가 되었으나 불편한 점이 않으니 천도를
해야겠소." 하고 한성에서 다시 개경으로 도읍을 옮겼습니다.
"도읍을 옮겼으니 세자를 정해야 하거늘 경들도 알다시피 왕비에게서 태어난 아들이
없소. 그러니 아우들 중에서 책봉해야 되겠는데 누가 마땅하겠소?"
정종 바로 아래 동생인 익안 대군 방의는 정치에 뜻이 없었고, 또 세상에
알려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왕세자로는 회안 대군 방간과 정안 대군 방원 중에서
정해야 했습니다.
마침내 회안 대군 방간과 정안 대군 방원 사이에서 왕세자의 자리를 놓고 무서운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정안 대군 방원에게는 싸움에 경험이 많은 이숙번과
처남인 민무구 등이 있어 회한 대군 방간의 군사는 모조리 죽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싸움에 진 회한 대군 방간은 아우를 없애려고 사사로이 군사를 일으켰다는 죄로
황해도로 귀양을 갔습니다. 이것을 제 2 차 왕자의 난이라고 합니다.
1400 년 11월 11일, 정종은 아우인 정안 대군 이방원에게 왕의 자리를
물려주었습니다. 그가 바로 조선 제 3 대 임금인 태종인 것입니다.
태종은 먼저 개인이 거느린 사병을 없애고 병권을 국왕 아래로 모아 왕권을
강화하였습니다.
1402 년, 태종은 전국의 인구 동태를 파악하기 위하여 신분증인 호패를
발급하였습니다. 그리고 관제도 개혁하고 유학 교육을 위한 5부 학당을 세우는 반면
불교 사찰을 24개로 정리하였습니다. 또한 태종은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들이 북을
쳐서 고발할 수 있는 신문고를 설치하였습니다.
한편 왕위에서 물러나 함흥 별궁에 가 있던 태상왕(태조) 이성계는 바둑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태종은 상왕을 한성으로 모셔오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문안 차사를 보내어 안부를 여쭙고 화를 풀어 보려 하였는데, 어찌 된
일인지 한 번 간 차사들은 소식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상왕 이성계가 태종이 보낸 차사들마다 목을 베었기 때문입니다. 이성계는,
태종 이방원이 왕권을 놓고 무참하게 형제들을 죽인 일에 대하여 풀지 못할 노여움을
안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때부터 심부름을 보낸 사람이 돌아오지 않는 것을 일컬어 '함흥 차사'라고 하는
말이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 태조 이성계는, 스승이었던 무학 대사의 권고에 의해 함흥을 떠나게
되었는데, 자기를 마중나온 태종 이방원을 활로 쏘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태종은 슬기가 뛰어난 신하 하륜의 말을 따라 그 화를 면했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자신을 마중나온 태종을 향해 활을 날렸지만, 그 화살이 태종의 앞에
세워진 굵은 기둥에 박히자 옥새를 던지며 말했습니다.
"여기 옥새가 있다. 모든 것은 하늘의 뜻이로구나. 나는 무학 대사와 더불어
한성에서 가까운 풍양에서 살겠다."
태조 이성계는 끝내 한양성 궁궐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태종이 왕위에 오른
지 8 년이 되는 1408 년에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쳤습니다.
성군 세종대왕의 업적
세종대왕의 아버지인 태종은 왕자의 난으로 희생된 형제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척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그의 자식 대에서만은 그런 일이 다시는 없어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형과 아우가 서로 돕고 사랑하는 일은 부모님께 효도하는 일이기도 하느니라.
너희들은 언제나 형제의 우애를 잊지 말도록 하라."
태종은 양녕 대군, 효녕 대군, 충녕 대군 세 왕자에게 말했습니다.
1397 년 태어난 셋째 왕자 충녕 대군은 경사, 초사, 제자 백가에 이르기까지 많은
책을 고루 읽고 공부하였습니다. 깊은 밤에도 충녕 대군의 방에는 등불이 꺼지지
않았습니다.
이를 본 아버지 태종은 생각하였습니다.
'충녕이 맏아들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5,5,5^.'
태종의 맏아들인 양녕 대군이 세자가 되었지만 왕 되기를 싫어했고, 나이가
들면서는 점잖지 못한 행동도 하여 세자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1418 년 6월 셋째 왕자인 충녕 대군이 마침내 왕세자로 정해졌습니다.
둘째 왕자인 효녕 대군은 불경에 열중하여 스님들에게 강론하는 일을 하여, 아우
충녕 대군으로 세자를 삼게 하였습니다.
1418 년 8월, 태종은 충녕 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니 조선 제 4 대 임금인 세종이
되었습니다.
"나라가 부강하려면 덕망이 높고 학식이 많은 인재를 길러야 하오."
왕위에 오른 세종은 인재를 길러 내는 슬기의 집이라 일컫는 집현전을 크게
늘렸습니다.
세종은 민생과 문화 발전에 관심이 컸습니다. 인품이 원만하고 생활이 청렴한
명신으로 꼽히는 황희, 맹사성 등의 보필을 받으며, 집현전 학자들의 노력과 뛰어난
학문이 어우러져 유교 정치를 발전시켰습니다.
"오늘 밤 집현전에서 숙직하는 학자는 누구이며 무엇을 하고 있는지 가만히
살펴보고 오도록 하오!"
세종은 내관을 시켜, 신숙주가 밤이 깊도록 책을 읽다가 새벽 닭이 울 때에야 잠든
것을 알았습니다. 대왕은 그 때까지 자지도 않고 책을 읽다가 입고 있던 옷을 벗어
그에게 덮어 주도록 하여 신숙주는 물론 모든 집현전 학사들을 감동시켰습니다.
"백성들을 위하여 쉽고 아름다운 나라글을 만들어야겠구나."
세종은 궁중에 정음청을 두어 나라글을 만드는 데 필요한 학자들을 뽑았습니다.
세종은 정음청에서 최항, 박팽년, 신숙주, 정인지, 성삼문, 이개, 이선로 등의 학자들과
나라글을 만들어 내는 일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나라글이 태어나야 한다! 온 백성이 쉽게 쓸 수 있는 아름다운 나라글이^5,5,5^."
세종은 나라글을 만드는 일에 밤낮을 가리지 않다가 눈병까지 앓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세종 25 년인 1443 년에 피나는 노력의 결과인 훈민정음이 창제되었습니다.
"왕실 조상의 덕을 노래한 용비어천가를 나라글로 지어 보도록하라."
세종은 정인지와 권제에게 명하여 1445 년 4월 한글로 지은 '용비어천가' 1백 25장을
완성시키도록 하였습니다.
한글로 지은 '용비어천가' 등 여러 가지 시험을 거친 3 년 뒤에 자신을 얻은 세종은
1446 년 음력 초순에 나라글이 세상에 태어났음을 알리니, 이를 '훈민정음 반포'라고
합니다. 그 때를 양력으로 셈해 보면 10월 9일 무렵이 되므로 뒷날 10월 9일을
한글날로 정하게 된 것입니다.
세종은 훈민 정음 창제를 비롯한 문화의 꽃을 피우고 과학 기술 발달에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세종의 명에 따라 경상도 동래현에서 종으로 있던 장영실이 불려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장영실은 기계 다루는 재주가 뛰어나 세종을 도와 과학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세종은 문화와 과학뿐만 아니라 국방에도 힘쓰는 등 우리 역사를 빛내 주는 일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래서 대왕이라고 높여 부르는 것입니다.
세종대왕의 업적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국민 복지 향상을 위하여 전제와 세제의 개혁, 의창 제도를 만들었으며 노비의
지위를 개선하였습니다.
둘째, 집현전 설치, 훈민 정음(한글) 창제, 서적 편찬(고려사, 농사직설, 삼강행실도),
한글 서적의 간행 보급(용비어천가, 석보상절, 동국정운, 월인천강지곡), 활자 인쇄술의
개량, 아악의 정리, 교육정도의 정비, 역법 제정(칠정산 내외편), 과학 기구의
발명(해시계, 물시계, 혼천의, 측우기) 등에 힘을 써 민족 문화의 발달에
이바지하였습니다.
셋째, 4군 설치(여진 정벌), 6진 개척(국경선 확정), 대마도(쓰시마 섬) 정벌, 삼포
개항 등으로 국토를 정비하고 외교를 넓혔습니다.
조선의 문화는 세종, 세조, 성종 때에 걸쳐 크게 융성하였습니다. 이 시대에 꽃피운
민족 문화는 오늘날 우리 민족 문화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 그림: 묵자책 174쪽
그림설명: 훈민정음(조선).
사육신과 어지러운 세상
문종이 세종대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지 3 년 만인 1452 년 5월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 뒤를 이어 12세의 어린 왕자가 임금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조선 제 6 대
임금, 단종인 것입니다.
"나이 어리신 상감을 둘러싸고 정승들이 나라일을 마음대로 처리하고 있으니 나라의
근본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상감의 자리에는 역시^5,5,5^."
수양 대군 집에서 수양 대군과 권남, 한명회가 왕의 자리를 바꿔야한다는 모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수양대군은 세종대왕의 둘째 아들로 무^36^예가 뛰어나고 포부가 큰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집 넓은 뒤뜰에서는 지방에서 올라온 무사들의 모여 무술 대회를 자주
열었습니다.
수양 대군은 먼저 6진 개척에 공이 큰, 호랑이 장군이라는 별명을 듣던 김종서를
없앴습니다. 그리고 영의정 황보인 병조판서 민신 등을 대궐로 불러들여 죽였습니다.
이 사건을 계유정난이라고 합니다.
1455 년, 수양 대군은 어린 조카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습니다. 수양 대군은
조선 제 7 대 임금 세조가 되었습니다.
"왕위를 빼앗은 무리들을 없애고 다시 상감을 모셔야 하오."
세종대왕의 은혜를 많이 입은 집현전 학사로 있던 성삼문, 박팽년, 유성원, 이개
등은 비밀리에 모여 세조를 내쫓고 단종을 다시 왕위에 앉히기 위한 준비를
하였습니다.
"명나라 사신을 환영하는 연회가 있을 6월 초이튿날을 거사일로 정합시다."
성삼문의 아버지인 무장 성승과 호랑이같이 용맹한 유응부를 비롯한 충신들은 뜻을
함께 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그런데 집현전 수찬으로 이 거사에 가담했던 김질은 겁이 나서 우찬성 벼슬에 있던
장인 정창손에게 달려가 모든 일을 털어놓았습니다. 정창손은 곧 이 엄청난 사실을
세조에게 알렸습니다.
이 결과, 거사를 일으키려던 사람들이 모조리 잡히게 되었습니다.
"수양 대군 나리! 우리는 옛 임금을 다시 모시고자 했을 뿐이오."
세조는 그들의 재주가 아까워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달래 보았습니다.
"수양 대군 나리! 하늘에 해가 하나이듯이 우리의 임금은 한 분뿐이오."
거사를 일으키려던 충신들은 온갖 끔찍한 고문에도 굽히지 않다가 마침내 형장으로
끌려갔습니다.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 등은 만고에 빛나는 충절로 의로운
횃불이 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니, 후세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사육신이라고
부릅니다.
왕위에 오른 세조는 왕권을 강화하고 부국 강병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함길도 도절제사 이징옥을 계유정난에 대한 반발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나를 대금 황제라고 칭하겠노라!"
그러나 새로운 왕권에 반기를 들었던 이징옥의 난은 곧 진압되고 말았습니다.
세조는 관료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나라의 수입을 늘렸습니다.
이러한 중앙 집권 정책에 대한 반항으로 함길도의 회령 부사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우리도 일어나자!"
이시애의 반란군은 한때 여러 곳에서 세력을 떨쳤지만 정부군에 진압되고
말았습니다.
세조는 호적 사업과 호패제를 강화하여 인력 자원을 확보하고 국방력을 키웠습니다.
"국경을 침범하는 오랑캐들을 남김없이 정벌하라!"
세조는 군사를 보내 변방을 침입하는 여진족 무리들을 크게 무찔렀습니다.
"경국대전 편찬을 위하여 우선 호전과 형전을 완성하도록 하오."
세조는 양성지, 권남 등의 도움을 받아 자주 의식을 높이는 문화 정책을 펴서
나라의 위신을 드높였습니다.
경국대전이 완성되어 반포됨으로써 조선 사회의 정치와 법제 등 나라를 다스리는
규범이 한데 모아지게 되었습니다.
"왕위를 빼앗은 세상에서 벼슬을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일세!"
"암, 의리와 도덕에 어긋나는 일이지!"
하며 사람과 학자들은 벼슬을 버리고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사림파(사학파)는 지방에 내려가 학문과 교육에 힘썼습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
왕실에 절개를 지켰던 정몽주, 길재, 김숙자 계통(주로 영남파)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관학파(훈구파)는 과학에도 관심이 깊고 집현전에서 배운 학자들로
정치에 참여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은 태종 때의 정도전, 권근, 세종^5,23^세조때의
정인지, 신숙주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고려 말에 전래된 성리학은 조선 시대의 지배적인 학문이 되어 정치, 사회, 교육과
도덕 생활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새 나라 조선의 건국을 둘러싸고 온건파 사대부와 혁명파 사대부가 대립되면서
성리학은 두 개의 흐름으로 나누어지고 있었습니다.
"시골에서 자란 김종직은 그 실력이 뛰어나거늘 한성에서 자란 경들은 어찌 학문에
힘쓰지 않고 시기하는 마음만 가지고 있소? 경들은 앞으로 더욱 학문에 힘쓰도록
하오."
성종 때 교서관 교리라는 낮은 벼슬에 있던 김종직이 높은 벼슬에 등용되면서부터
지방의 학자들은 그 수가 부쩍 늘어나 차츰 중앙 조정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니, 이들을
신진 사대부라 합니다.
나라와 개인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던 불교는 태조 때부터 유교를 받들고 불교를
억누르는 정책에 밀리게 되어 태종, 세종, 세조, 성종, 연산군, 중종을 거치면서 제한을
받거나 억눌림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불교 중심과 귀족 중심의 사회는 유교 중심, 양반 관료 중심의 사회로 변해 갔고
불교 문화는 쇠퇴하여 갔습니다.
"전하, 도덕과 의리를 받들고 학술과 언론을 바탕으로 하는 이상적인 왕도 정치를
펼치셔야 하옵니다."
학문을 숭상하던 성종은 사림파를 많이 등용하였습니다. 훈구파가 다스리던
조정에서 그들의 권력을 독차지하는 것을 막으려고 사림파와 맞서게 되니 자연히
대립과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은 마침내 성종의 뒤를 이은 연산군 때 사화라는
몸서리쳐지는 무서운 불길로 번지기 시작하여, 명종에 이르는 약 50 년 동안 무려 네
차례의 사화가 일어났습니다.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가 바로 그것입니다. 사화란 선비들의
모함으로 인하여 큰 화를 입는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연산군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장록수는 임사홍 등에게서 들은 비밀을 연산군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그 비밀이란, 지난날 연산군의 친어머니 윤씨가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나 사약을 마시고 죽은 사건이었습니다.
연산군은 외할머니로부터 사약을 마실 때 남긴 어머니의 피 묻은 옷을 받고, 폐비
윤씨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이미 죽은 윤필상, 김굉필, 한명회 등은
시체를 무덤에서 파내어 목을 자르기도 하였습니다.
연산군의 잔인한 보복으로 피비린내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연산군은 유생들의
교육 기관인 성균관과 스님들이 불도를 닦는 절인 원각사를 놀이터로 만들어 날마다
술에 취해 울분을 터뜨렸습니다.
1506 년 9월, 박원종 등이 중심이 된 반정군은 연산군을 폐하여 강화도 교동으로
쫓아내고 중종을 왕으로 만드니 이를 중종 반정이라고 합니다.
중종 때에도 당파 싸움이 벌어져 1519 년(기묘년) 12월 20일, 개혁 정치의 기수로
이름 높던 조광조는 훈구 세력의 모함을 받아 38세의 나이로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여기에 관련된 사건을 기묘사화라고 합니다.
조광조 등 사림 세력이 쫓겨난 뒤 권신들의 세력 다툼이 계속되자 신사무옥이라는
또 한 차례 옥사가 일어났습니다.
이어서 왕세자의 외삼촌인 윤임의 대윤파와 왕의 어머니인 문정 왕후의 동생
윤원형의 소윤파가 서로 죽이고 죽은 을사사화가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선조가 왕위에
오른 지 8 년이 되는 1575 년, 이조정랑 벼슬을 둘러싸고 시작된 심의겸과 김효원의
대립은 당파(노론, 소론, 남인, 북인)를 만든 시초가 되었습니다.
선조 24 년인 1591 년 임진왜란 전해에 이르러 동인의 온건파와 강경파가 만인,
북인으로 나뉘고, 숙종 때에는 서인이 노론, 소론으로 나뉘었습니다. 이들을 가리켜
사색이라고 하였습니다. 왜군의 침략을 한 해 앞두고 사색 당파로 국론이 분열된 것은
참으로 안타깝고 통분할 일이었습니다.
조선 사회와 가족 제도, 예절
우리는 조선 사회를 보통 양반 사회라고도 합니다. 조선 사회를 잘 알기 위해서는
정치,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중심을 이루었던 양반에 대해서 먼저 알아두어야 합니다.
양반이란 문반과 무반, 문무의 관직을 가진 사람을 일컬었던 말입니다. 양반만이
벼슬을 할 수 있었고 모든 것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조선 사회는 양반을 지배 계급으로 하는 사회였습니다. 따라서 16세기 이후 신분
계급이 양반, 중인, 상민, 천민 계급으로 엄격히 구분되었습니다.
조선의 교육 제도는 인문 교육 기관과 기술 교육 기관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조선의 병역 제도는 태종의 사병 폐지로 군제의 기초가 마련되었습니다.
조선 시대의 정치는 성종 때 반포된 경국대전에 의하여 시행함으로써 수준 높은
법치 국가로 발전하였습니다.
경제 정책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방향으로 경제
구조를 개편하였습니다.
태종 때 도읍지인 한성부에 시가를 건설할 때 운종가(종로)의 길가에 긴 행랑으로
된 가게를 지었습니다. 관에서 세운 이 점포를 시전이라 불렀는데, 상인들에게
임대하여 지정된 물품을 팔게 하였습니다. 가장 장사가 잘되는 곳은 비단, 무명, 명주,
종이, 어물, 모시를 파는 가게였습니다. 이 여섯 곳을 육의전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외에도 소규모의 판매는 자유롭게 하였습니다.
또 작은 도시에는 5일마다 정기적으로 시장이 열리는 것을 장시라고 하였는데,
전국에 1천여 개소의 장시가 열렸습니다.
보부상은 상품을 등에 지고 각 지방이나 장시를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는
사림이었습니다.
역대의 임금님이 농업을 장려하고, 토지 개간과 수리 시설을 넓히는 일에 힘을
기울인 결과 농토가 늘어났습니다. 또 종자 개량과 달력 반포, 농업 서적의 편찬,
그리고 새로운 시비법과 모내기법의 보급, 측우기의 제작 등으로 영농기술이 발달되어
수확량도 늘어났습니다.
특수 작물로는 목화, 과수, 채소, 약초, 원예 작물 등이 재배되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벌을 치는 양봉도 이미 있었습니다.
나라에서는 농민들의 경작권을 적극 보호하는 한편, 생활이 어려운 백성들을
구제하는 기관인 의창과 물가 조절 기관인 상평창을 설치하여 농민들의 생활을
도왔습니다.
조선 중기 사회는 교육 활동과 양반 신분의 수가 늘어난 것을 특징으로 들 수
있습니다.
"서원은 학문 연구와 교육 활동에 큰 구실을 하고 있으니 토지와 노비와 서적 등을
주며 면세와 면역의 특권을 주노라!"
1543 년 중종 때, 풍기 군수 주세붕이 성리학을 들여온 안향을 모시는 백운동
서원을 세웠습니다. 이것이 서원의 시초입니다.
서원은 대개 옛 유학자들과 인연이 있는 곳에 세워졌으며 그들은 선현을 받들어
제사를 지냈습니다. 서원에는 지방 유생들이 모여 학문을 연구하고 토론하였으며
후진을 교육하여 그들의 학문을 잇게 하였습니다.
향약은 중종 때 조광조가 실시한 혁신 정치의 하나로 도덕을 강조한 규약이지만
조광조가 사화로 죽게 되자 실패하였습니다. 이황(퇴계)과 이이(율곡)가 만든 향약은
그 중 대표적인 것입니다.
향약의 발달로 지방에서는 양반 유학자의 정치적인 기반이 더욱 굳어졌고, 유교의
예의와 풍속과 도덕이 지방 상민의 사회에까지 강요되었습니다.
조선 시대의 가족 제도는 부부, 부자와 그를 중심으로 가까운 핏줄이 모인 대가족
제도였습니다. 집안의 여러 모임을 통하여 친목을 두텁게 하였습니다.
유교의 가문을 중히 여기는 정신에 따라 장손이 대를 이었으며 그 가장의 권한은
절대적인 것이었습니다. 한 집안의 가장은 가족을 대표하고 다스리며 조상에 제사
드리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여필종부라고 하여 여자는 남편에 대하여 절대 복종해야 했습니다. 정절을
지킨 열녀는 효자, 충신과 함께 높이 기렸습니다.
본부인에게서 태어난 아들을 적자라 했고, 첩에게서 난 아들을 서자라 하였습니다.
적자와 서자의 차별은 매우 엄격하였습니다. 서자는 여러 가지 사회 활동에 제한을
받았습니다.
조선 시대의 예의범절은 '삼강 오륜'을 따르고 있습니다.
삼강이란 임금과 신하(군위신강), 아버지와 아들(부위자강), 남편과 아내(부위부강)
사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오륜이란, 신하는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는 '군신유의', 자녀는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부자유친', 부부는 서로 예의를 대하는 '부부유별', 젊은이는 어른을 정성껏 모시는
'장유유서', 친구 사이에는 믿음이 있어야 하는 '붕우유신'입니다.
이들 엄격한 유교 정신은 아직도 우리 나라의 여러 풍습에 남아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10세부터 20세 사이의 소년에게 어른이 되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의식이 있었는데 이것을 관례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 손님 중에서 본 이름과 다른
새로운 이름인 '자'를 지어 주었습니다.
나이 어린 사람을 결혼시키는 조혼이 성행하여 세종 6 년에 12세 이하의 처녀의
결혼을 금지하였습니다. 혼례식을 올린 뒤 신부는 신랑 집에 와서 시부모와
친척들에게 폐백을 드리고 다시 돌아와 신랑과 함께 3일을 친정에서 지낸 뒤에 비로소
시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양반은 반드시 종조를 모신 사당인 가묘를 모시고 조상에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신분에 따라 차이가 있었지만 뒤에는 4 대까지 제사를 올리는 것이
일반화되었습니다.
부모의 상을 당하면 유족들은 각기 다른 5가지 상복을 입었으며 3 년상을 치러야
했습니다.
향기 높은 예술과 사림의 문화
조선 시대의 예술은 고려 시대와는 달리 유교 생활에 바탕을 두고 전개되었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설화 문학의 발달하였는데, 서민 사회에서 입으로 전해 오던 역사와
풍습, 신앙 등을 주제로 하였습니다.
단종을 물리치고 수양 대군이 즉위하자 이것을 비판하는 내용의 책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수양 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았다고?"
매월당 김시습은 분노하여 세상을 비판하며 방랑을 길을 떠났습니다.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불리우는 매월당 김시습은 '금오신화'를 비롯한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성종 2 년인 1471 년에는 신숙주가 일본 여행기 '해동제국기'를 펴냈습니다.
이 외에도 서거정의 '필원잡기', '동인시화', 성현의 '용재총화', 이육의 '청파극담',
어숙권의 '패관잡기', 남효온의 '추강냉화' 등이 '대동야승'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중앙의
'신도가', '용비어천가'를 비롯하여 정인지, 김종서, 남이 등의 시가 전해 옵니다.
유교를 받드는 나라인 조선은 음악도 장려하여 건국 초부터 전악서와 아악서를 두어
제례 음악을 맡아 보게 하였습니다.
세종때 음악의 천재라 불리우는 박연은 65종의 악기를 제작하였는데, 그 가운데
9가지는 새로 발명한 것이었습니다. 박연은 맹사성 등과 함께 악보를 정리하여 아악의
체계를 세웠습니다. 성종 24 년인 1493 년에 유자광, 신말평 등이 만든 '악학궤범'은
조선 최고의 악전입니다.
음악과 더불어 무용은 궁중 예악의 필요에서 발달하였습니다. 처용무라는 가극은
뛰어난 작품으로 전해 오고 있습니다. 민간에서는 농악무, 무당춤 등의 민속 무용을
즐겼습니다. 그리고 민간의 오락으로는 산대놀이(가면극)와 꼭두각시 놀음(인형극)
등이 유행하였습니다.
미술은 화원(화가)에 의하여 인물화와 기록화가 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양반 취미에
맞는 산수화도 발달하였습니다.
화원 출신의 대표적인 화가로는 안견, 최경, 이상좌 등인데 '몽유도원도'라는 그림은
안견이 세종대왕의 셋째 왕자인 안평 대군의 꿈을 화폭에 옮긴 조선 전기의 최고
걸작품입니다. 대표적인 문인 화가로는 강희안, 강희맹, 이암 등입니다.
조선 전기 서도의 4 대가로는 안평 대군, 김구, 양사언, 한호(석봉)를 꼽을 수
있습니다. 모든 서체에 뛰어나게 능했던 한호(석봉)는 독창적인 글씨체를 이루어
호쾌하고 강건한 서풍을 창시하여 명필로 이름이 드높았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사원(절)의 건축보다 도시의 궁궐, 성곽, 성문, 서원 건축이
발달하였습니다. 태조 때의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불타서 뒷날 대원군이 다시 세웠고,
태종 때 세운 창덕궁의 돈화문, 성종 때 세운 청경궁의 홍화문과 명정전, 그리고
명정문만 남아 있습니다.
서울의 숭례문(남대문)과 홍인지문(동대문), 평양의 보통문과 개성의 남대문 등이
대표적인 성문입니다.
조선 공예의 특징은 사치품으로서가 아니고 사대부의 필수품이나 문방구 등을
만드는 실용적인 것입니다. 조선 자기의 소박하면서 서민적인 특징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초기에는 고려 자기의 기법을 계승한 회청색의 분청사기가 유행하였지만
뒤에는 세련된 백자가 유행하였습니다.
* 그림: 묵자책 188쪽.
그림설명: 청화 백자 항아리(조선).
* 그림: 묵자책 189쪽.
그림설명: 청화 백자 나비무늬 대접(조선).
목공예품으로는 장롱, 궤, 문갑, 벼루 상자인 연상, 탁자, 그림을 넣은 화장품 그릇,
실패 그릇, 칠그릇, 자개 그릇 등이 있는데 고상하고 기품이 흐르는 아름다운 예술
작품들입니다.
조선 중기의 성리학은 두 줄기로 나뉘어집니다. 도덕과 정신 세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주리파(영남학파)와 현실과 경험 세계를 중시하는 주기파(기호학파)가 성리학의
큰 흐름을 이루었습니다.
주리파는 퇴계 이황을 선구자로 하여 김성일, 유성룡 등이 발전시켰고, 주기파는
서경덕을 선구자로 하여 율곡 이이가 완성시켰습니다.
김장생은 '가례집람'을 지었고, 윤두수의 '기자지', 이이의 '기자실기', 권근, 이철,
하륜의 '동국사략' 오운의 '동사찬요'와 같은 역사 서적들이 저술되었습니다.
사림의 양반들은 사학과 예학과 함께 특히 보학을 중요하게 여겨 족보를
발전시켰습니다.
16세기의 문학 형식은 시조, 시가, 가사, 패설(패관) 소설 등 다양하게
발달하였습니다.
시조 문학에서 황진이의 '만월대 회고시'와 '박연폭포', 윤선도의 '산중신곡'과
'어부사시사'가 있습니다.
가사 문학으로는 정극인의 '상춘곡', 송순의 '기촌집'과 '면양정가', 정철의
'관동별곡'과 '사미인곡', 그리고 '속미인곡'을 들 수 있습니다.
패관 문학으로는 어숙권의 '패관잡기'와 '고사촬용', 임제의 '화사', '수성시', '백호집'
등이 있습니다.
사대부들은 사군자를 즐겨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대표적인 작가와 주요 작품들을
들면, 이암의 '묘구도', 이정의 '풍중도'와 '우죽도'와 '설죽도', 황집중의 '포도도',
어몽룡의 '흑매도', 신사임당의 '자리도', '수박도' 등이 있습니다.
16세기의 건축은 서원 건축이 중심을 이루었습니다. 이언적은 모신 옥산
서원(경주)과 율곡 이이를 모신 문회 서원(백천)과 퇴계 이황을 모신 도산
서원(안동)은 16세기의 대표적인 서원 건축물입니다.
17세기의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금산사 미륵전(김제)과 화엄사 각황전(구례), 법주사
팔상전(보은)이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서원을 중심으로 사학이 발달하였습니다.
퇴계 이황도 도산 서원을 만들어 후진을 길러 내는 데 온갖 정성을 쏟았습니다.
김성일, 유성룡을 비롯한 여러 훌륭한 인재들을 길러 내어 영남 학파의 스승으로
받들어졌습니다. 퇴계 이황의 학문은 일본에까지 건너가 일본 성리학의 발달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어 일본 유학의 근본 정신이 되었습니다.
율곡 이이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인 신사임당으로부터 글을 배워 진사 초시에
해당하는 과거 시험 소과에 장원 급제하여 13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가 된 신동입니다.
그 뒤에도 무려 아홉 번이나 장원 급제하여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인물이었습니다.
율곡 이이는 조정에 들어가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10 만 군대를 양성할 것과 공물
납부법의 개혁을 주장하였으며 교육 발전에 많은 힘을 썼습니다.
율곡 이이는 주기 철학을 완성하여 '율곡전서', '성학집요', '동호문답'등 여러 편의
저술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김장생 등 여러 훌륭한 학자를 길러 내어 경기도와
충청도를 중심으로 하는 기호학파의 스승(조종)이 되었습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신 황윤길 아뢰옵니다. 왜국은 많은 병선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멀지
않아 우리 조선을 침략할 것으로 여겨지옵니다."
"신 김성일 아뢰옵니다. 소신이 보기에는 왜국은 감히 우리 조선을 넘볼 힘이
없다고 여겨지옵니다."
그 무렵 조선 조정은 동인과 서인의 양파로 갈리어 서로 자기 편 주장이 옳다고
했습니다. 결국 정권을 잡고 있던 동인들은 민심이 흔들릴 것을 두려워하여 전쟁이
없을 것이라는 김성일의 보고를 받아들였습니다.
마침내 전란의 먹구름은 바다 건너에서 밀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선조 25 년인
1592 년 3월 12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20 만 대군에게 명나라를 치겠다는 구실을
내세우며 출전 명령을 내렸습니다.
"명나라를 치기 위하여 조선의 힘을 빌리고 길을 트라고 하였거늘 응하지 않았으니
조선부터 치도록 하라!"
1592 년(임진년) 4월 13일, 왜군의 선봉 함대가 부산 앞바다에 나타났습니다.
왜군들은 4월 14일 새벽에 상륙하여 부산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습니다.
"공격!"
"탕! 탕탕^5,5,5^."
부산진 첨사 정발 장군은 언제나 검은 옷을 즐겨 입어 흑의 장군이라고 불리던
용감한 장수였습니다. 그러나 활로써는 왜구의 신무기 조총을 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으윽, 나라의 관문을 지키지 못하고 죽다니 원통하도다!"
정발 장군은 임진왜란 때 맨 먼저 순국한 장수입니다.
부산성이 무너지자 왜군들은 동래성으로 밀려갔습니다. 그러나 동래성 방비가
뜻밖에 튼튼한 것을 보고 놀라며 희생을 줄이기 위해 나무판에 글을 써서 성 앞에
꽂았습니다.
'싸우려면 곧 나와서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비켜라.'
동래 부사 송상현은 선비 출신으로 남달리 담차고 애국심이 강한 인물이었습니다.
곧 나무판에 답장을 써서 성 밑으로 던졌습니다.
'죽기는 쉽다. 그러나 길을 비켜 주기는 어렵다.'
"총공격하라!"
왜군들은 신무기 조총을 앞세우고 벌 떼처럼 달려드니 송상현이 지휘하는 동래
군사들은 용감하게 싸웠으나 왜군의 병력을 당할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백병전이
벌어지고 송상현은 동래성과 운명을 같이하였습니다.
"부산성과 동래성을 차례로 무너뜨린 왜군은 양산, 김해를 휩쓸고 북으로 진격하여
밀양, 경주, 창원 등지를 짓밟았나이다."
임진왜란 소식은 4월 17일 새벽에 조정에 알려졌습니다.
신립 장군은 선조 임금으로부터 보검을 받고 4월 21일 남쪽으로 향했습니다. 신립
장군은 지난날 국경을 넘어온 여진족 장수 이탕개를 물리치고 그들의 소굴을 소탕하여
용맹을 떨친 장군이었습니다. 신립 장군은 강을 뒤에 두는 배수의 진을 써서, 전군이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상주를 빼앗기고 청주까지 밀려갔습니다.
"적에게 사로잡혀 굴욕을 당하느니 스스로 목숨을 끊자."
신립 장군이 강물에 뛰어들어 자결하니 가장 용감하게 싸웠던 신립 장군의 부하
김여물도 장군의 뒤를 따라 자결하였습니다.
"사태가 매우 위급하오니 잠시 한성을 떠나 평양으로 행차하시는 한편 명나라에
구원병을 청하심이 좋을 듯싶사옵니다."
"세자로 정한 광해군은 과인을 따르게 하고 다른 왕자와 종친 들은 강화도와
함경도로 피난을 가도록 해 주오."
선조 임금은 신하들과 의논하였습니다. 임해군과 순화군에게 각기 함경도와
강원도에 가서 의병을 모으도록 하였습니다.
"임금이 백성을 버리고 서울을 떠났단다."
"장례원과 형조를 습격하여 노비 문서를 불살라 버리자!"
"대궐에 들어가 재물을 끌어 내자!"
백성들은 극도로 흥분하여 관청을 습격하고 궁궐에 불을 질렀습니다.
"이미 한성이 함락되고 개성이 공격을 당하여 곧 떨어질듯하니 평양성도
위태롭사옵니다."
임금 일행은 다시 의주로 떠났습니다.
"이제 더 갈 길도 없구려. 8 도가 다 떨이지면 명나라로 가야 한단 말이오?"
"신 유성룡 아뢰옵니다. 상감마마께서는 한 걸음도 이 나라를 떠나시면 아니
되옵니다. 임금이 없는 조선은 이미 남의 나라나 다름없기 때문이옵니다.!"
"이덕형을 청원사로 임명하노니 곧 명나라로 가서 원군을 청하도록 하오."
임진왜란의 불길은 대대로 지켜 온 반도 삼천리, 아름다운 팔도 강산을 불태우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나라가 위태로울 때, 바다 싸움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무찌르기
시작했습니다.
"둥둥둥."
전라 좌수사 이순신 장군은 거북선을 만들고 수군 훈련을 지휘하였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군관 나대용을 감독으로 삼아 거북선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나대용은
거북선을 만드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입니다. 거북선이 실전용으로 완성된 것은
왜군이 부산포에 상륙하기 이틀 전이었습니다. 참으로 아슬아슬하고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왜적이 부산포를 함락시키고 북상하고 있다 합니다."
전라 좌수사 이순신 장군은 보고를 받고 곧 출전 명령을 내렸습니다.
"왜적의 무리를 한 놈도 남김없이 무찌르자!"
옥포(통영)에서 이순신의 함대는 적선 42척을 가라앉히고 첫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거북선을 앞세운 이순신의 함대는 사천 해전에서 도적선을 모조리 불태웠습니다.
이어 당포 싸움에서 적장의 머리를 베고 적선 70여 척을 무찌르는 큰 전과를
올렸습니다.
"이순신의 함대를 단 한 번의 해전으로 박살내기 위해 연합 함대를 총출동시켜라!
명령을 어기는 자는 목을 벨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기 나라 수군이 이순신의 함대에 계속 패하고 있다는 보고를
듣고 분통을 터뜨리며 총공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번 싸움은 한산도 넓은 바다로 적을 꾀어 내어 모조리 무찔러야 하오."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 해전에서 함대를 학이 날개를 편 것과 같은 학인진 전법을
썼습니다.
"거북선 돌격!"
"탕! 콰르릉."
이 싸움에서 왜선 73 척 중 10여 척은 싸우기도 전에 도망쳤고 59 척은 바닷속에
가라앉았거나 우리 수군에게 빼앗겼습니다. 왜군의 전사자는 무려 9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1592 년 7월의 해전을 일컬어 '한산도대첩'이라고 합니다.
이어서 왜군의 소굴이 된 부산을 기습하여 100여 척을 침몰시키는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한산도로 진을 옮긴 이순신 장군은 1593 년 8월, 전라, 충청, 경상 3 도의
총사령관인 삼도 수군 통제사의 직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한편 육지에서도 왜군을 무찌르기 위해, 관리를 지냈던 사람, 선비들, 스님들이
중심이 되어 농민들과 더불어 전국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군에 대항하였습니다.
경상도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는 김시민과 더불어 진주대첩 때 왜군을
물리치는 큰공을 세웠습니다.
충청도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조헌은 승병장 영규와 함께 청주를 수복한 후 금산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습니다.
전라도 장흥에서 의병을 일으킨 고경명은 그의 아들 인후와 함께 장렬한 전사를
하였습니다.
전라도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김천일은 나주와 수원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였으며
진주성을 사수하다가 성이 무너지자 김상건과 절도사 최경희, 의병장 고종후 등과
함께 남강에 투신 자결하였습니다.
호익 장군의 호를 받은 김덕령은 전라도 광주에서, 정문부는 함경도 길주에서
왜적을 무찔렀고 서산 대사(휴정)는 제자인 사명당과 함께 승병을 이끌고 평양성
탈환에 큰공을 세웠습니다. 호남의 처영, 호서의 영구도 승병을 일으켰습니다.
이 외에도 의병을 일으켜 나라에 목숨을 바친 인물이 많았습니다.
명나라에서 1차로 5천 명의 원군이 왔으나 첫 싸움에 무참히 패하자, 이여송이 5 만
명을 이끌고 왔습니다.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은 평양성을 공격하여 되찾고 개경성까지
되찾아 전세를 역전시켰습니다.
1593 년 2월 12일.
"왜군은 3 만에 이르는 대군단을 편성하여 행주산성을 향해 양민으로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행주산성을 지키던 권율 장군과 장병들은 백성들과 한 덩어리로 뭉쳐 목숨을 걸고
왜군을 물리쳤습니다.
이 싸움에는 부녀자들까지 동원되어 치마 위에다 치마 하나를 더 입고 돌을
날랐습니다.
일을 할 때 옷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그 위에 덧입는 옷인 행주 치마라는 말은
행주산성 싸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행주대첩을 이룩한 권율 장군은 육군과 수군을 총지휘하는 도원수가 되었습니다.
1592 년 10월에 진주 목사 김시민은 왜군 3 만을 맞아 용감하게 싸우다 흉탄에 맞아
장렬한 전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진주성 군사와 백성들은 용감히 싸워 왜군 1 만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함안 쪽으로 물러가게 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바다에서 크게 승리한 한산대첩, 육지에서 크게 이긴 행주대첩과 진주대첩을 일컬어
임진왜란의 3 대첩이라고 합니다.
그 해 10월 10일, 선조 임금은 잿더미가 된 한성으로 돌아와 월산 대군의 옛 집을
고쳐 임시 대궐로 사용하였습니다.
"조선을 마음대로 치려면 수군을 이끌고 있는 이순신을 모함하여 없애야 하오."
왜적은 간첩을 시켜 이순신을 없앨 흉계를 새웠습니다. 왜군이 다시 쳐들어온다는
거짓 정보를 조선 조정에 제공하자 조정에서 이순신을 바다에 나가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적의 계략을 알아차린 이순신은 그 흉계에 말려들지
않았습니다.
"이순신은 명령을 어겼나이다."
원균, 김응남, 윤두수 등 서인파의 부추김으로 이순신은 억울하게 죄인의 누명을
쓰고 삼도 수군 통제사의 직책을 빼앗기고 한성으로 잡혀가고 되었습니다. 백성들은
한숨지며 간신들과 조정을 원망하였습니다.
선조 30 년인 1597 년(정유년)에 일본은 휴전 기간 동안 명나라와 3 년간에 걸친
회담이 깨어지자 다시 15 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입하였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정유재란이라고 합니다.
"삼도 수군 통제사 원균은 함대를 모조리 잃고 육지로 도망치다 왜군에 잡혀 목숨을
잃고 바다에는 왜적의 수군만이 들끓고 있나이다."
"아,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소?"
선조 임금에게 이조판서 이항복과 형조판서 김명원이 아뢰었습니다. 이순신은 다시
삼도 수군 통제사가 되었습니다.
"죽기를 각오하면 살 것이요, 한 군사가 길목을 지키면 1천 명의 적군도 당해 낼 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라!"
이순신 장군은 배 12척을 이끌고 명량 해전에 나아가 왜선 130여 척과 싸워 그 중
36 척을 깨뜨리고 다시 바다의 세력을 잡았습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일으킨 도요토미가 병으로 죽자 왜군들은 물러가기
시작했습니다.
"왜적을 살려 보내서는 아니 된다. 모조리 무찔러라!"
이순신 장군은 노량 앞바다에서 왜적의 무리를 모조리 무찌르다가, 발악하며
도망치던 왜적이 쏜 총알에 겨드랑이를 맞았습니다.
"내 앞을 가려라. 그리고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 왜적을 모조리 무찔러야
한다."
노량 해전에서도 이순신 장군의 수군은 승리하였습니다. 뒤늦게 이순신 장군의
전사를 알게 장병들은 통곡하며 명복을 빌었습니다. 때는 선조 31 년인 1598 년 11월
11일, 이순신 장군의 나이는 54세였습니다.
이순신 장군과 함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해전에서 공을 세운 장군으로는 정운,
이억기, 배홍립, 신호, 어영담, 이순신(충무공과는 다른 장수), 김득광, 나대용, 김인영,
최대성 등이 있습니다.
마침내 왜군은 이 땅에서 물러가니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조선군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선조 37 년인 1604 년 8월 20일, 사명당은 수신사로 임명받아 120 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일본 본토에 들어가 왜란 때 끌려간 우리 나라 사람들을 3천 5백여 명이나
되돌아오게 하였습니다.
왜란 후 송환 교섭이 이루어진 것을 시작으로 선조 40년 1607 년부터 조선과 일본은
국교를 다시 트고 교류를 시작하였습니다.
왜란의 영향으로 훈련도감을 두는 등 병제가 개편되었고 여러 가지 새로운 무기가
발명되었습니다.
왜란으로 경복궁과 불국사, 사고 등 문화재가 불타 없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이 무렵 허준은 의학서인 '동의보감'을 펴내어, 중국과 일본에까지 널리
알려졌습니다.
일본은 납치해 간 조선 유학자에 의해 퇴계 이황의 주리설이 전해져 유학아
발달하였고, 빼앗아 간 금속 활자를 본떠 많은 활자를 만들어 책을 간행하였습니다.
그리고 납치해 간 조선의 도공들에 의하여 도자기 기술이 전해져 일본 도자기 발달에
새로운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왜란은, 명나라와 조선이 전쟁에 지친 틈을 이용하여 북방의 여진족이 큰 나라를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왜란은 명나라가 청나라로 바뀌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1616 년, 명나라 세력이 약해지자 여진족의 추장 누루하치는 여러 부족을 통일하여
후금(뒤에 청나라)을 세웠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펼쳤습니다. 이것에 서인들은
불만을 품었습니다.
"광해군의 중립 외교는 임진왜란 때 우리 나라를 도와 준 명나라에 대한 배신
행위요."
"반정을 일으킵시다."
"광해군을 몰아내자!"
인조 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은 기울어져 가는 명나라와 가깝게 지내고 새롭게
기세를 떨치고 일어나는 후금과의 외교 관계를 끊어 버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불러들일 결과를 빚었습니다.
그 때 우리 나라 안 사정은 매우 복잡하게 돌아갔습니다. 인조 반정에 큰 공을 세운
이괄이 2 등 공신에 봉해지고 평안 병사로 나가게 된 것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켰습니다.
이괄의 반란군은 한때 한성을 점령하였고, 인조 임금은 공주까지 피난을 갔습니다.
장만과 정충신 등이 거느린 관군에 의하여 이괄의 난은 가라앉았으나 그 무리들 중에
후금으로 도망쳐 간 자들이, 인조가 왕위에 오른 것은 부당하니 후금이 조선을 쳐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명나라를 쳐서 중원을 통일하려면 먼저 조선부터 치자!"
인조 5 년인 1672 년 1월 14일, 후금 태종의 왕자인 패룩과 아민은 군사 3 만을
거느리고 조선에 침입하여 의주, 정주, 선천, 곽산을 거쳐 황해도 평산까지 밀고
들어왔습니다.
"강화도로 잠시 피하시옵소서."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하게 되었습니다.
"오랑캐를 이 땅에서 몰아내자!"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습니다. 용골산에서 싸운 정봉수와 지방에서 싸운 이입 등의
활약은 눈부셨습니다.
그러나 조선 조정에서는 화친을 주장하는 주화파와 전쟁을 주장하는 주전파로
의견이 엇갈리다가 최명길이 주장한 화친이 이루어져 '정묘조약'이 맺어졌습니다.
"조선은 우리와 명나라 싸움에 중립을 지킬 것과 국경에 무역 시장을 열기로 하고
두 나라가 형제 관계를 맺어 사이좋게 지냅시다."
스스로 불러들인 정묘호란은 이렇게 마무리되었습니다.
"우리의 세력이 커졌으니 나라 이름을 청이라 고치고 왕을 황제라 부르노라!"
"황제 폐하, 명나라를 치기 위한 군량과 병선이 모자라오니 조선에 요구하옵소서."
"뿐만 아니라 조선에게 우리 청나라에 신하로서의 예의를 지키라고 요구하옵소서."
청나라가 사신을 보내 오자 인조 임금은 불같이 노했습니다.
홍익환, 윤집, 오달제, 김상헌 등이 주장한 전쟁을 하자는 주전론이 우세하여 인조는
전쟁을 한다는 선전의 교서를 내렸습니다.
"전국에 선전의 교서를 내리노라!"
인조 14 년인 1636 년 12월 2일, 심양을 떠난 청나라 태종은 장군 용골대와
마부대를 선봉장으로 삼아 12월 9일 10 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침입하였습니다.
임경업 장군이 지키고 있던 백마산성에는 군사와 백성 들을 합쳐 8백 명밖에
없었습니다. 10 만의 청나라 대군을 막기 위하여 임경업 장군은 수백 개의 창검과
깃발을 성 둘레에 꽂고 수천 개의 허수아비를 성벽 뒤에 세운 뒤 모든 백성들에게는
두 개의 횃불을 들고 함성을 지르게 하며, 군사들에게 화포를 계속 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백마산성에 많은 군사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함이었습니다.
"저 성을 지키는 장수는 누구냐?"
청나라의 선봉장 마부대의 물음에 그의 부하가 대답하였습니다.
"전략이 뛰어나고 범같이 용맹한 임경업 장군입니다."
"그렇다면, 첫 싸움에 자칫 잘못해 패하여 군사의 사기가 꺾이면 큰일이니 임경업을
피해 남쪽으로 진군하라!"
청나라 10 만 대군이 사나운 기세로 쳐들어오니 봉림 대군 등 왕족과 비빈 들은
강화도로 피난갔고, 인조 임금과 소현 세자는 길이 막혀 남한산성으로 피했습니다.
적군은 남한산성을 포위하였습니다.
각 도에서 모인 군사들은 남한산성에까지 오기도 전에 청나라 군사에게 모두
패하였습니다.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도 모두 패하고 강화도마저 적군에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또한 명나라에서도 자기 나라 안 사정 때문에 응원군을 보내지 못한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이제 방법은 하나뿐이옵니다. 강화 조약을 재어 뒷날을 기약하옵소서."
"최명길을 강화 교섭 사신으로 보내도록 하오."
남한산성에서 45일 동안 버티며 싸우다가, 조선은 마침내 인조 15 년인 1637 년 1월
30일, 경기도 광주군의 한강 동쪽 기슭의 삼전도에서 부끄럽고 욕된 강화 조약을
맺고야 말았습니다.
실학과 예술과 신앙
17세기에는 실학이 싹터 농업 중심의 개혁 사상과 상공업 중심의 개혁 사상이
나왔습니다. 역사학, 지리학, 국어학 등의 국학이 발달하였습니다. 자연 과학
분야에서도 의학, 농학 등이 발달하였습니다. 특히 서양의 과학 기술 문화도
수입되었습니다.
일부 선각적인 유학자들은 지난날의 성리학이 형식에만 치우쳐 실제 생활과 너무
떨어진다는 문화는 한계성을 깨닫고 정신 문화와 물질 문화를 고르게 발전시키는
합리적인 방법을 세우고 우리 것을 알아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이것을
실학이라 합니다.
실학의 선구자는 16세기 중엽부터 17세기 중엽까지 활동한 백겸, 허준, 정작, 권문해,
이수광 등입니다.
실학이 싹이 트던 시기인 17세기 중엽부터 18세기 중엽까지 활동한 인물로는 먼저
유형원, 박세당, 이익, 안정복, 이긍익, 한치윤 등이 있으며, 지리에 정상기, 신경준,
국어에 정동유, 유희, 정치와 경제에 정약용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또, 실학의 전성기인 18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중엽까지 활동한 대표적인 인물들은
정약용,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 김정희, 이규경, 최한기 등입니다.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애국심이 높아지고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국학이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서양 사람들과 접촉하고 문물이 들어옴으로써 서양의 존재를 알게 되고,
서양의 지리, 풍토, 천문, 의학, 철학, 미술, 기하학 등 서양 문화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왜란과 호란을 겪은 직후인 17세기에는 애국 사상과 사회 비판을 담은 문학 작품이
많이 창작되었습니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과 이순신 장군의 활약을 소설로 쓴
'임진록'을 비롯하여 임진왜란에 종군했던 박인로의 '선상탄', 호란 때 북벌 운동을
계획했던 임경업 장군의 행적을 그린 '임경업전' 등이 널리 읽혔습니다.
이 시대의 사회 소설로는 허균의 '홍길동전', 김만중의 '사씨남정기'와 '구운몽',
그리고 지은이를 알 수 없는 '전우치전' 등을 들 수 있습니다.
18세기 문학으로는 양반을 풍자한 박지원의 한문 소설 '양반전'과 한글로 씌어진
'춘향전', '장화홍련전'과 '콩쥐팥쥐' 등이 가정 소설로 널리 애독되었습니다.
이 시대의 시조집으로는 김천택의 '청구영언'과 김수장의 '해동가요'를 꼽을 수
있습니다.
평민들 사이에는 시조나 가사보다 타령, 육자배기, 사랑가, 수심가 등 잡가들의
애창되었습니다.
19세기 문학은 국문학의 중심이 되니 판소리와 가곡이 성행되면서 서민 예술의
전성기를 이루었습니다. 판소리 사설은 춘향가, 심청가, 흥부가, 박타령, 토끼타령,
적벽가(화용도), 가루지기타령 등이 가장 인기가 있었습니다. 19세기 후반 순조 때
사람인 신재효는 판소리 창작과 정리에 공이 컸습니다.
조선 후기의 여류 문인들 중에는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사대부 부인들인
신사임당(시문서화),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의 누님인 허난설헌(한시), 송덕봉(시문),
이옥봉(한시) 등이 유명하였습니다.
그림과 글씨에도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16세기부터 17세기에는 중국 화보를
모방한 이상향의 묘사와 양반의 초상화, 산수화가 유행하였습니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화가로는 이정, 황질중, 어몽룡 등입니다.
18세기에는 실제의 경치를 보고 우리 나라 자연을 그린 진경 산수화와 서민의
애환을 그린 풍속화가 유행하였습니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화가로는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을 들 수 있습니다.
* 그림: 묵자책 209쪽.
그림설명: 김홍도의 그림. 씨름(조선).
19세기에는 옛것을 모방한 복고적인 문인 화풍이 유행하였는데, 대표적인 화가로는
오원 장승업, 추사 김정희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추사 김정희는 고대의 금석문에서 원류를 찾아 그것을 개성에 맞게 발전시켰습니다.
추사체는 패기에 넘치는 글씨체입니다.
* 그림: 묵자책 210쪽.
그림설명: 김 정희의 글씨. 추사체(조선).
조선 시대의 3 대 화가는 현동자 안견, 단원 김홍도, 오원 장승업을 꼽을 수
있습니다.
도장 예술로 여러 종류, 여러 모양이 인각이 이루어졌고, 공예와 건축에도 새로운
종류와 특징이 나타났습니다. 조선 후기의 공예는 실용성과 예술성의 조화를 그
특색으로 하였습니다.
건축으로는,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 세자(장조)를 추모하여 능을 수원으로 옮겨 쌓은
수원성과, 고종 4 년인 1867 년에 대원군에 의하여 재건된 경복궁 근정전과 경회루는
조선 말기의 건축을 대표합니다.
"천주교를 사교(사악한 종교)로 규정하여 법으로 금하노라."
정치에서 밀려난 남인들과 피지배 계급에 있는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천주교가 몰래
몰래 퍼져 나가게 되자, 조정에서는 사교로 규정하여 천주교를 탄압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천주교를 서양에서 들어왔다 하여 서학이라 불렀습니다.
천주교 3 대 박해인 신유 박해, 기해 박해, 병인 박해 때에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끌려가 처형당했습니다.
신유 박해 때 우 나라 최초의 세례 교인인 이승훈이 순교하였으며, 기해 박해
때에는 프랑스 신부 등 80여 명이 처형당했습니다.
대원군 때 박해가 가장 심했는데, 병인 박해 때 8천여 명이나 되는 신자가
순교하였습니다.
우리 나라 최초의 신부가 된 김대건은 마카오의 신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에 들어와
포교 활동을 하다가 1846 년에 순교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주교는 끊임없이
퍼져 나갔고 신학교까지 생겼습니다.
"어지러운 세상이 불안하기만 하니 어딘가 의지할 데를 찾아야겠소."
"사람은 평등해야 합니다. 외국에서 들어온 천주교인 서학은 우리의 것이 아니니,
우리 스스로를 지켜야 할 동학을 일으켜야 합니다."
수운 최제우는 유, 불, 선(도) 3교를 합하고 인간의 평등을 내세워 서학인 천주교에
반대되는 동학을 세웠습니다.
동학은 농민에 기반을 둔 대중적인 종교로 사회를 개혁하려는 현실적이며 외세를
반대하는 민족적인 종교였습니다.
"여러분! 오랜 세도 정치로 나라는 어지러워졌고 관서(평안도) 지방 사람을 차별
대우하니 들고일어나 세상을 바로잡읍시다!"
1811 년 평안도 가산에서 홍경래가 이끄는 농민의 민란이 일어났고, 1862 년에는
진주 우병사 백낙신의 혹독한 탄압과 착취에 농민들이 반항하여 진주 민란이
일어났지만 관군에 의해 진압되었습니다.
민란은 북쪽 함흥 지방으로부터 남쪽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번져 매우
소란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민중은 더욱 신앙을 찾게 되었고, 동학은 농민들을 중심으로
백성들 사이에 급속도로 퍼져 나갔습니다.
쇄국 정책과 개화의 물결
쇄국 정책이란 외국과의 통상과 교역(무역)을 금하는 정책으로 조선 말에 흥선
대원군 이하응이 실시했던 정책입니다. 이 쇄국 정책으로 인하여 한국의 근대화가
늦어지게 되고 외국의 많은 도전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하응은 영조 대왕의 증손자인 남연군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당시 안동 김씨들의
세도 정치가 극심하여, 왕족이지만 기를 펴지 못하고 자랐습니다.
23 세 때 흥선군에 봉하여졌지만 왕족으로서 잘난 체하다가는 언제 역적의 누명을
쓰고 죽음을 당할지 모를 판국이었으므로 언제나 부랑아, 건달처럼 행세하였습니다.
그래서 세도가들로부터 상갓집 개니, 궁도령이니 하는 별명을 듣고 업신여김을
받았습니다.
1863 년, 조선 제 25 대 철종이 대를 이을 왕자가 없어 세상을 떠나자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조대비와 이하응은 뜻이 맞아 그의 둘째 아들
재면으로 하여금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게 하였습니다. 그가 조선 26 대
고종입니다. 왕의 아버지인 이하응은 흥선 대원군으로 봉하여져 나이 어린 고정의
섭정을 하였습니다.
대원군은 정권을 잦자 먼저 안동 김씨의 세력을 몰아내고, 부패한 관리들을 처벌한
뒤, 사색 당파와 양반, 평민의 신분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뽑아 중요한 자리를
맡겼습니다.
또 그 동안 병폐가 심했던 서원을 철폐하고 '대동회통', '육조조례' 등의 서적을
펴내어 법률 제도를 바로잡고, 나쁜 풍습은 물론 사치와 낭비를 금하는 등 백성의
생활을 개선하는 데 힘썼습니다.
대원군은 또 왕실의 권위를 드높이기 위하여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경복궁을
중건하였는데, 이 때 원납전, 당백전 등의 기부금을 강제로 징수하여 백성들로부터
원성을 샀습니다.
또한, 천주교를 탄압하여 수많은 천주교도들을 죽여 프랑스 군과 충돌하는
병인양요를 일으켰으며, 1871 년에는 미국의 통상 요구를 거절하다가 신미양요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대원군의 개혁 정치와 쇄국 정책은 일부 백성들의 지지를 받기는 하였으나 조선
사회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데에는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고종 10 년인 1873 년 11월 5일, 고종은 대원군의 섭정에서 벗어나 친정을
선포하였습니다.
대원군은 집권 10 년 만에 며느리 민비(명성 왕후)에게 정권을 빼앗겼습니다.
한편 이웃인 일본은 1854 년 미국의 위협에 눌려 미^5,23^일 화친 조약을 맺어
문화를 일찍이 개방하였습니다.
또한 일본은 1868 년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메이지 유신이라는 변혁을 이루어
근대적 통일 국가로 발전하자. 우리 나라로 야심의 눈길을 돌렸습니다.
고종의 비인 민비에 의해 대원군이 물러나고 민씨 일파의 세력들이 정권을 잡자,
개화파들은 개화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습니다. 또 한편에서는 유림 세력을 중심으로
한 척사파들이 상소를 올리는 등 개화 운동을 반대하였습니다. 이리하여 개화파와
척사파의 대립으로 나라 안은 더욱 어지럽게 되었습니다.
일본은 이때를 틈타 무력으로라도 조선의 문호를 열게 하여 자기들의 이익을
취하려는 야심을 품었습니다.
일본은 1875 년부터 영흥만, 강화도 동남쪽 난지도 앞바다, 부산항 등에 군함을
보내어 포를 쏘아 위협하고 그들의 운요 호를 몰아 우리의 영종진에 포격을 퍼붓고
상륙하여 약탈과 방화 등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마침내 고종 13 년인 1876 년 2월 3일,
난감해진 조정에서는 개화파들의 주장에 따라 강화도 연무당에서 전문 12개조의
강화도 조약(병자수호 조약)을 맺게 되었습니다.
강화도 조약은 우리 나라가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 조약입니다. 이 조약에 따라
양국간에 수신사를 교환하게 되었는데, 조선에서는 김기수를, 일본에서는 하나부사
공사를 상대국에 파견하였습니다.
그리고 조선은 1876 년에 부산, 1880 년에 원산, 1883 년에 인천을 차례로
개항하였습니다.
1882 년에는 인천에서 미국과의 조약이 맺어졌고, 이어서 같은 해에 영국과 독일,
1884 년에는 러시아와 이탈리아, 1886 년에는 프랑스와도 조약을 맺었습니다.
"발전하는 세계에 뒤지지 않으려면 새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입시다."
급진 개화파(개화당)는 일본에 다녀온 신진 청년 지식인들이 주가 되었는데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등이 그 중심 인물입니다. 이들의 정치 이념은 개화
독립주의였으나, 일본의 세력에 힘입은 친일 정책을 펴기도 했습니다.
"급히 먹는 음식은 체하는 법이오. 서양 문물을 천천히 받아들여야 하오."
온건 개화파는 민씨 일파와 서학에 관심이 많았던 유학자들이 주를 이루었는데
민영익, 김윤식, 어윤중, 김홍집 등이 그 중심 인물입니다. 이들은 옛 관습을 지키자는
주장을 하며 청나라와 손을 잡고 급진 개화파와 대립하였습니다.
"일본은 서양과 다를 바 없는 오랑캐다! 일본과의 통상은 망국의 길이오!"
개항 전의 척사 운동은 유교 정신에 젖은 이항로, 기정진 등 유학생들의 개항
반대로 시작되었습니다.
척사 운동은 재래의 전통 질서를 그대로 지키고 서양 세력을 배척하며, 적극적으로
외세에 의존하는 개화주의를 크게 견제하면서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였습니다.
전통적인 우리 문화 중에서 그릇된 것을 배척하고 옳은 것은 지키자는 주장을 민족
주체 의식으로 여기는 위정척사 운동은 뒷날 의병 운동과 독립 운동으로 이어져
발전하게 됩니다.
조정에서는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만들어 일본 사람으로 하여금 신식 군사 훈련을
맡게 했습니다. 별기군과 전부터 있었던 군대의 차별이 심해지자, 임오군란이
일어났습니다.
"신식 훈련을 받는 별기군 놈들만 대우를 잘 해 주고 우리는 13개월 동안이나
봉급도 못 탔으니^5,5,5^."
1882 년 6월 5일 아침, 한숨만 쉬던 구식 군인들은 봉급을 준다는 기별을 받고 쌀과
포목을 내주는 관청인 선혜청의 곳간, 도봉소로 몰려갔습니다.
"아니, 이게 뭐야? 모래가 반이나 섞인 쌀을 주다니! 게다가 쌀이 물에 젖어
썩었잖아!"
성난 구식 군대는 선혜청 관리를 폭행하고 세도가 민겸호의 집을 박살내고 곡식
창고를 털었습니다.
또한 무기고를 습격하고 포도청에 갇혀 있는 동료들을 구한 다음 별기군이 있는
하도감을 습격하여 신식 군사 훈련을 시키고 있는 일본인 몇 사람을 죽였습니다.
이로 인해 1882 년 6월 27일, 일본의 육, 해군 1천 5백 명이 인천항에 들어왔습니다.
한편, 민비의 요청에 따라 청나라군 4천 5백은 일본군보다 이틀 앞서 남양만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우리 일본의 공사관 습격 사건에 대하여 손해 배상이 있어야 하오."
7월 7일 일본 공사는 호위병을 이끌고 창덕궁으로 들어갔습니다.
7월 12일에는 청나라 군사들이 서울에 들어와 진을 쳤습니다.
일본과 청나라는 먼저 대원군을 없애 버리고 서로 충돌하지 않기로 약속하였습니다.
"두 나라의 평화를 위해 대원군을 데려가야겠소. 대원군은 청나라에 들어와 황제
폐하에게 사죄하시오."
청나라는 대원군을 임오 군사 항쟁(임오군란)의 책임자라하여 강제로 텐진으로
납치해 갔습니다.
청나라는 외교 고문의 파견과 청나라 상인의 거주, 상업, 여행의 자유를 규정한
조약을 조선과 맺고 상권을 넓혔습니다.
임오군란 때 쫓겨났던 일본 공사 하나부사는 조선의 정권 대신 이유원과 1882 년
7월 17일에 제물포 조약을 맺었습니다. 조약 내용은 일본 공사관을 습격한 데 대한
손해 배상과 앞으로 일본 공사관에 경기병을 주둔시킨다는 등 전문 6조였습니다.
수신사로 뽑힌 박영효를 비롯하여 김옥균, 홍영식, 서재필 등은 일본의 개화된
문명을 살펴보고 오라는 고종 임금의 명을 받고 일본으로 떠나는 배 안에서 태극기를
그려, 조선 사신이 머무는 일본 땅 객관에 처음 태극기를 휘날렸습니다.
이 때부터 박영효 등 일본을 다녀온 청년들을 가리켜 개화당 또는 개화
독립당이라고 불렀습니다. 그와 반대로 청나라 세력을 등에 업은 민씨 쪽 사람들은
수구당이라고 불렀습니다.
1883 년 6월, 수구당의 민영익이 전권 대신으로 임명되어 홍영식, 민태호, 유길준
등이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미국을 시찰하였습니다. 민영익 일행은 뉴욕을 거쳐
대서양을 건너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이집트. 인디아, 홍콩 등을 다녀오는 사이에 새
문물에 대해 잘 알게 되었습니다.
한편,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 개화당은 급속한 근대화 개혁을 위하여 정변을
일으킬 것을 결의하였습니다.
1884 년 10월 17일,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체신 사무를 보는 우정국이 지어져,
낙성식 연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개화당은 이것을 기회로 하여 정변을 일으켰는데, 이
정변을 갑신정변이라 합니다.
개화당은 내각을 조직하고 신정부를 수립했으나 백성들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청나라 군대에 의해 3일 만에 무너져 주동 인물들은 일본으로 망명하였습니다. 그 중
김옥균은 1894 년 상하이로 갔다가 자객 홍종우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수구당과 개화당은 나라를 개화하려는 뜻은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방법에 있어서
수구당은 청나라처럼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개화당은 일본처럼 급진적으로
정치 체제의 개혁을 시도하려고 하였는데, 결국 갑신정변의 결과는 청나라 세력만
강화시켰고 일본에게 이용만 당하고 말았습니다.
1860 년 러시아는 남하 정책을 펴 블라디보스톡에 군항을 건설한 뒤, 우리 나라를
넘보았습니다.
1885 년 4월, 영국은 러시아 진출에 대항하려고 우리의 거문도를 점령하고 2 년
동안이나 머물러 있었습니다.
갑신정변 이후 청나라와 러시아 세력에 눌려 정치적으로 후퇴한 일본은 그 대신
경제 침투를 꾀하였습니다.
"왜놈들은 물러가라!"
몰려오는 열강 세력의 소용돌이 속에서 백성들의 불만은 조정에 대한 반감과 일본을
물리치자는 사상으로 가득 차 건드리면 터질 듯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동학의 횃불과 갑오경장
"동학으로 새 세상을 만듭시다!"
마침내 동학의 횃불은 타올랐습니다.
"거사의 대의를 선포하노라! 첫째, 관리의 횡포로부터 민중을 구합시다! 둘째, 충효를
다하여 세상을 바로잡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합시다! 셋째, 이 땅에서 왜놈들과 서양
오랑캐들을 몰아냅시다! 넷째, 서울로 올라가 부정과 부패를 일삼는 무리를 없애
버립시다!"
처음 동학을 일으킨 최제우는 사악한 종교를 퍼뜨려 백성들의 마음을 어지럽게
한다는 죄를 뒤집어쓰고 1864 년에 처형당했습니다.
그 뒤를 이은 새 교주 최시형은 경상도와 전라도, 충청도를 숨어다니며 몰래 동학을
퍼뜨려 엄청난 세력으로 키워 갔습니다.
동학은 마침내 고부 지방의 탐관 오리를 몰아내기 위해 모인 전봉준 등의 거사로 그
혁명의 불이 타오르기 시작하여 곳곳으로 번져 갔습니다.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군의 황토현과 장성에서 관군을 물리치고 정읍, 태인, 금주를
거쳐 진주를 점령하였습니다.
동학군은 기세가 올라 외국 세력을 몰아내고 계급과 남녀 차별을 없애며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펴라고 외쳤습니다.
동학군을 진압해 달라는 조선 조정의 요청에 의하여 청나라 군대가 아산만에
상륙하자, 뒤이어 텐진 조약에 따라 일본군과 군대를 이끌고 조선에 상륙하였습니다.
동학군은 이에 맞서 용감히 싸웠지만 일본군과 관군에게 무너져 녹두 장군이라
불려지던 전봉준은 순창에서 체포되고 뒤이어 김재남, 손화중 등 간부들도 체포되어
모두 처형되었습니다. 이로써 불붙던 혁명은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동학군 진압을 구실로 군대를 파견한 청나라와 일본은 돌아갈 생각을 않고 서로
조선을 삼키려고 혀를 날름댔습니다.
이것은 급기야 청^5,23^일 전쟁을 불러일으키니 한반도는 그대로 그들의 싸움터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싸움은 결국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두 나라는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었습니다.
청나라가 랴오둥과 타이완 섬을 일본에게 떼어 준다는 조문이 있었지만 랴오둥은
러시아, 프랑스, 도이칠란트의 삼국 간섭으로 다시 반환하였습니다.
청^5,23^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만주에까지 침략의 야심을 뻗치게 되었습니다.
또한 일본은 본격적으로 우리 나라 정치에 대한 간섭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일찍부터 개혁을 주장하던 사람들은 일본과 손잡고 내정 개혁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중국 연호를 폐지하고 독자적인 기원(조선 건국을 1 년으로 함. 1894
년은 개국 504 년)을 쓰게 하였습니다.
이 갑오경장으로 의정부는 내각이 되었습니다. 또 과거 제도를 없애고 새로운 관리
임용법을 제정하였으며 세금도 돈으로만 내게 하고 인재를 뽑는 데 문벌을 가리지
않기로 하는 등 우리 역사에 없었던 대 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1894 년 12월, 갑오경장 정치의 요강이며 최초의 헌법과 같은 성격을 지닌 홍범
14조를 제정하여 고종 황제는 친히 종묘에 나아가 온 백성에게 선포하니 김홍집
내각의 개혁은 우리 나라 근대화의 중요한 발걸음이 되었습니다.
대한 제국과 근대화의 노력
청^5,23^일 전쟁의 결과로 한때 랴오둥 반도를 차지하게 된 일본은 만주 침략의
발판을 굳히며 조선과 만주를 침략하려던 야심을 갖고 있던 러시아와 맞서게
되었습니다.
1895 년 10월 8일,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암살 지령을 받은 일본군과 모리배들은
궁궐로 습격하여 내시와 궁녀 등을 닥치는 대로 베어 죽이고 러시아와 가까운
민비까지 시해하였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을미사변이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 일어나 국모의 원수를 갚읍시다!"
강원, 경기에서 일어난 의병은 곧 삼남 일대로 번져 반일 운동의 불길이 전국적으로
번졌습니다.
1896 년 2월, 러시아의 베베르 공사는 러시아 수병들을 한성으로 불러들인 다음,
조선 대신들과 함께 고종 임금께 아뢰었습니다.
전국이 매우 어지러우니 저희 러시아 공관으로 옮기니, 임금이 궁궐을 떠나 난을
피한다는 뜻인 파천을 붙여 '아관파천'이라고 하였습니다.
"나 알렉세^36^예프는 조선 탁지부의 고문으로서 조선 군대의 훈련과 재정의
감독권을 맡고 있음을 잊지 마시오."
알렉세^36^예프는 서울에 조선 러시아 은행을 설립하는 등 우리 나라 금융을 완전히
손아귀에 쥐고 많은 이권을 러시아에 넘겨 주었습니다. 경원과 중성의 관산 채굴권을
빼앗고, 압록강 유역과 울릉도의 삼림 채벌권도 차지하였습니다. 그러자 다른 열강들도
우리 나라에 이권을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이후 조선은 외국의 이권 쟁탈의 싸움터가 되고 정치는 외국
세력에 의해 좌우되었습니다.
나라의 형편이 이처럼 어지럽게 되자, 애국적인 선각자들은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고
자주 독립과 민권 신장 운동을 펴 나라에 이바지하고 백성들을 계몽시키고자
하였습니다.
"독립 협회를 조직해야만 하오."
"그렇소! 국민을 일깨워 자유 민권 사상을 선양하고 민족의 자주 독립을 목적으로
조직합시다."
갑신정변 이후 미국에 망명했다가 돌아온 서재필이 외교 고문이 되면서 이상재,
윤치호, 이승만, 남궁억 등이 1896 년 독립 협회를 조직하였습니다.
"먼저 독립문과 독립관부터 세웁시다."
독립 협회는 청나라 의존의 상징이던 영은문과 모화관 자리에 독립문과 독립관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독립관에서 정치 집회를 자주 열어 민중을 계몽시키고 독립
의식을 높였습니다.
"대궐을 떠나신 지 1 년이나 되오니 이제 환궁하옵소서!"
1897 년 독립 협회는 러시아 공관에 머물러 있던 고종으로 하여금
경운궁(덕수궁)으로 옮겨 오게 하였습니다.
1889 년 10월 29일 오후 2시, 종로 네거리 광장에서 우리 나라 최초의 민중 대회인
만민 공동회가 개최되었습니다.
"독립 협회 본부와 만민 공동회를 습격하여 부숴 버려라."
일본 제국주의와 손잡은 군부 대신 민영기는 보부상을 끌어들여 황국 협회를
조직하고 독립 협회의 활동을 폭력으로 방해하였습니다.
"조선이 독립국임을 온 세계에 알리셔야 하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호를 고치고 황제의 보위에 오르셔야 합니다. 이는 만백성의
뜻이옵니다."
고종은 대신들의 아뢰는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짐은 만백성의 뜻에 따라 대한 제국 황제의 보위에 올랐음을 내외에 선포하노라."
1897 년 10월 12일, 고종은 국호를 대한 제국, 연호를 광무라 고치고,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여 대한 제국이 자주 독립국임을 나라 안팎에 선포하였습니다.
우리 나라는 개항 이후 외세의 침투와 정치적 혼란을 겪으면서 개화 문명을
받아들여 자주적인 근대 국가를 이룩해야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먼저 교통과 통신이 새롭게 발달하였습니다. 우정국이 세워지고 전신선이 가설되고,
경부선과 경인선 철도가 부설되었으며 서울에 전차가 등장하였습니다.
산업 활동이 활발해져 도시의 발달도 이루어졌습니다. 해운 회사가 설립되고 개항을
중심으로 나타난 도매 상인들은 일본 상인의 침투에 대항하였습니다.
근대적 공업 시설로는 근대 무기를 제조하는 기기국, 화폐를 찍어 내는 전화국,
출판물을 인쇄하는 박문국, 옷감을 짜는 직조국, 광산 개발을 위한 공무국 등이 정부가
운영하는 시설로 설치되었습니다.
개항 이후 근대적인 상공업 도시와 인천, 군산, 목포 등의 항구 도시가 생겨나기도
하였습니다.
근대적 의료 시설과 건축물로 나타났습니다. 광혜원을 세워 미국 의사 알렌으로
하여금 근대식 의술을 가르치게 하였고, 영국에서 성공을 거둔 종두법이 지석영에
의해 실시되었습니다. 그리고 대한 의원은 국립 병원으로 의료원도 양성하였고, 도립
병원에 해당하는 자혜 의원이 진주, 청주 등 10여 곳에 세워져 의료 시설도
많아졌습니다.
민족의 수난 시대
(일제의 침략과 민족 수호 투쟁.)
러일 전쟁과 민족의 저항
러시아는 동천 철도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병력을 만주로 이동시키는 한편, 해군
기지를 얻기 위하여 우리 나라에 침입하여 군사 기지를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일본도 러시아의 남하 정책에 대항하여 우리 나라의 군산, 마산, 성진의 3
항을 개항하였습니다. 대한 제국을 놓고 나누어 차지하자느니, 독자치하겠다느니
하다가 협상이 깨어지자 1904 년 일본군이 뤼순 항을 공격함으로써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일본의 육군은 봉천 전투에서 러시아 군에 크게 승리하였으며, 일본 해군은 대한
해협에서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크게 깨뜨렸습니다.
1905 년 9월, 러^5,23^일 전쟁에서 일본이 우세하자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가운데에 나서서 포츠머스 조약이 맺어졌습니다. 이 강화 조약으로 일본은 대한
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국제적으로 묵인받았고, 랴오둥 반도와 사할린 남부를 차지하여
대륙 진출의 발판을 만들었습니다.
"대한 제국은 국외 중립을 선언하노라!"
대한 제국의 고종 황제는 국외 중립을 선언하였으나, 일본은 이를 무시하고 군대를
앞세워 강제로 한일 의정서를 맺었습니다.
일본은 제멋대로 독도는 다케시마(죽도)라 하여 자기 나라 것으로 삼고, 경부선
철도를 부설하기 시작하였으며, 우리 나라 어업권도 빼앗아 갔습니다.
"강력한 식민지 정책이 필요하다. 군대를 보내어 궁궐을 포위하고 보호정치를
한다는 구실을 붙여 을사 보호 조약을 강제로 체결하라."
이토의 지휘 아래 1905 년 11월 17일, 일본군이 궁궐을 완전히 포위한 가운데
회의가 열렸습니다.
"무장한 헌병들을 회의장에 데리고 들어가 반대하는 자들을 끌어내라!"
을사 조약에 대해 참정 대신 한규설, 탁지부 대신 민영기가 반대하다가 끌려
나갔습니다.
"조약의 내용은 뒤에 읽고 도장부터 찍으시오."
일본의 이토는 이완용, 박제순 등의 5적 대신을 위협하여 보호 조약이라는 이름
아래 침략하여 빼앗는 침탈 조약을 맺고야 말았습니다.
"이 조약을 허락하는 것은 곧 나라를 망치는 것이니 짐은 나라와 운명을
같이하리라."
을사 조약의 체결은 고종 황제를 비롯하여 온 국민의 분노와 맹렬한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일제는 1907 년, 뒤에 자세히 이야기할 헤이그 밀사 사건을 구실로 고종 황제를
퇴위시키고 같은 해 7월, 이토히로부미 초대 통감과 이완용 총리대신 사이에
한^5,23^일 신협약(정미 7조약)이라는 새 조약을 맺음으로써 정치 전반에 걸쳐 간섭
아닌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1910 년 8월 29일, 이완용 매국 내각과 강압적으로 '한일 합방 조약' 이라는
자기들 멋대로 정한 이름으로 조약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대등하게 합친다는 합방이라는 말은 얼토당토않습니다. 이는 강제로 남의
물건을 차지한다는 뜻인 강점 또는 삼켜 버린다는 뜻인 병탄으로 표현해야 맞는
것입니다.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를 없애 버리자!"
애국 청년들은 외부 참사관 구완희의 집에 폭탄을 던졌습니다.
이상설, 민영환, 최익현 등의 출신들은 상소를 올려 을사 5적이라고 불리우는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등을 처단하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나라의 부끄러움과 백성의 욕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5,5,5^. 동포 형제들의
한마음으로 뭉쳐 우리의 자주 독립을 회복한다면 죽은 몸도 저 세상에서 기뻐 웃으리.
우리 2천만 동포에게 이별을 고하노라!"
시종무관장 민영환은 분함을 참을 길 없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공의 나이
45세 때였습니다. 나라에서는 민영환에게 충정공이란 시호를 내리고, 그의 의전을
가리는 정문을 세웠습니다.
민영환 외에도 조병세, 이상설, 이한응 등 여러분이 의분을 못 이겨 잇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어 순국하였습니다.
을사 조약 체결 소식이 퍼지자, 서울의 상인들은 상점 문을 닫고, 학교도 문을 닫고
휴교를 하였습니다.
"매국노를 없앱시다! 먼저 5적부터 죽여야 하오."
"일본의 앞잡이인 일진회 사무실을 박살 냅시다!"
오기오, 나철 등은 5적 암살단을 조직하여 매국노의 숙청과 일본의 앞잡이가 된
일진회 사무실을 습격하였습니다.
애국 청년들은 을사 5적의 집에 불을 질렀습니다.
전국 곳곳에서 유생과 전직 관리, 농민 들이 뭉쳐서 항일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민종식, 최익현, 임병찬, 신돌석, 유익선은 대표적인 항일 의병장이었습니다.
일본은 통감부를 설치한 뒤 차관이라는 이름으로 1907 년까지 1천 3백만 원이나
되는 돈을 들여와 우리 나라에 빚을 걸머지게 하였습니다.
이에 남자들은 술과 담배를 끊고 여자들은 가락지와 비녀까지 바치며 나라의 빚을
갚기 위한 운동을 벌이고 언론 기관이 모금 운동에 앞장서자 일제는 이 운동을
방해하였습니다.
고종 황제는 자주 독립을 위해 항일 운동을 벌이던 이준 등을 비밀리에 불렀습니다.
"경들을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 2 차 만국 평화 회의에 파견코자 하오.
을사 조약의 부당성과 일제의 무력적 침략 행위를 폭로하고 우리의 처지를 호소하여
국제적인 압력으로 이를 깨뜨리도록 힘써 주오."
이준, 한규설은 먼저 러시아에 들러 주 러시아 공사 이병진과 함께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러나 고종 황제의 밀사들이 도착한 것을 안 일본 대표들의 방해로 대한 제국
대표는 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이준 등의 밀사는 만국 기자 협회를 통하여 대한 제국의 주장을 전세계에
알렸습니다.
"회의에 참석 못 한 채 어찌 황제 폐하를 뵐 수 있단 말인가. 나라를 위한 임무를
다하지 못하여 원통하구나. 대한의 혼이여, 너는 독립의 혼이 되고 노^36^예의 혼이
되지 말라^5,5,5^."
이준은 치밀어 오르는 울분을 이기지 못하여 헤이그에서 분사하였습니다.
일본 외무 대신과 이토는 헤이그 밀사 사건을 계기로 우리 나라를 더욱 탄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애국 계몽 운동과 의병의 항쟁
"우리 민족은 실력을 키워서 주권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애국 계몽
운동을 펼칩시다!"
우리 나라는 근대화를 이루지 못한 채 일제의 침략을 받아 주권이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구미의 근대 사상과 학문을 받아들인 선각자들은 정치, 언론, 종교, 문학
등의 분야에서 계몽 운동을 활발히 폈습니다.
통감부는 정치, 사회 단체를 진압하기 위한 보안법, 신문법, 출판법 등의 수많은
악법을 만들었습니다. 송병준, 이용구 등의 앞잡이를 내세워 일진회를 만들어 애국
계몽 단체들의 활동을 방해하게 하였습니다.
이 무렵 우리 나라에서는 한성순보, 독립신문, 황성신문, 제국신문, 매일신문,
대한민보, 코리어 리뷰 등의 신문이 간행되었습니다. 일반 국민의 정치와 사회 의식을
높이고 독립 정신을 불러일으키고자 근대적인 신문들이 발행되어 우리 나라의 근대
언론이 발달하였습니다.
특히, 순 한글로 발간되는 독립신문은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어서 일반 국민들은
독립 정신과 민권 의식을 높이게 되었습니다. 또한 민주 정치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도 늘어났습니다.
근대적인 교육도 발달하였습니다.
1895 년 고종 황제는 교육 입국 조서를 발표하여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신식
학교가 들어서고 신학문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민족 운동가들은 근대 교육이 민족 운동의 출발이며 알맹이라고 생각하여 많은 사립
학교를 세웠습니다. 사립 학교는 학생들의 민족 의식과 문화 지식의 향상에 많은 힘을
기울여 민족 운동의 온상이 되었습니다.
선교사들의 세운 배재학당, 이화학당을 비롯하여 민족 운동가들의 세운 오산학교,
대성학교 등은 근대 학문의 발달지이기도 하며, 많은 민족 운동가들을 길러 낸
곳이기도 합니다.
근대 의식이 싹트고 민족 의식이 높아짐에 따라 국어에 대한 관심이 새로워지고
주체적인 역사 의식이 일어나기 시작하여 국학 연구와 역사 연구가 발달하였습니다.
이 때의 국어 학자로는 전생애를 한글 연구에 바친 주시경을 비롯하여 유길준, 지석영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국사 연구와 고전 간행을 통해 우리 민족의 훌륭함을 널리 알려 자주적이며
주체적인 역사 의식을 전파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일제하의 우리 민족의 주체성, 우수성을 강조하려는 민족주의 사관에 의한
우리 역사책이 많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특히 신채호의 역사 연구는 민족 주체성을 확립시키는 데 귀중한 도움이
되었습니다.
한글 보급과 서양 문학의 소개에 따라 신소설이 등장하였습니다. 신소설의 특징은
순 한글로 되어 있고, 자주 독립, 신교육, 남녀 평등, 미신 타파, 과학 문명 등 주로
계몽적인 내용으로 이루어진 데 있습니다.
최초의 신소설은 이인직의 '혈의 누'입니다. 그 밖에 '금수회의록', '자유종' 등의 여러
신소설이 발표되었습니다.
육당 최남선은 새 시대의 주인공을 위하여 자신의 만든 잡지 (소년)에 '해에게서
소년에게'라는 종전의 시조 형식에서 벗어난 신체시를 발표하였습니다. 신체시는 얼마
후 현대 자유시로 발전하였습니다.
이 무렵 애국가와 독립가 등이 나왔습니다. 애국가는 국민들 사이에 애창되어 독립
의식을 높이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1909 년, 우리 나라 최초의 국장인 원각사가 세워져 신극이 상연되었습니다.
새로운 종교 활동이 이루어지게 되니, 박해를 받아 오던 천주교도 개국 이후
자유로이 선교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03 년 황성 기독교 청년회(Y.M.C.A.의 전신)가 창립되어 청년 단체의 선구가
되었습니다.
동학의 3 대 교주인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로 이름을 바꾸고 민족의식을 강조하는
종교로 발전시켰습니다.
불교는 불교 학원을 설립하고 불교 신문을 발간하는 등 근대화 운동에 앞장 섰으며,
한용운은 항일 운동을 펴는 한편 불교 유신론을 주장하였습니다.
우리 민족은 애국 계몽 운동을 벌이는 한편, 1907 년 고종 황제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을 계기로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 일본군과 맞서 싸우는 항쟁을 벌였습니다.
"이 땅에서 왜적을 몰아내자!"
민긍호, 유인석, 이강년, 허위, 김수민, 홍범도, 신돌석 등은 전국 곳곳에 의병을
일으켜 일본 군대와 싸웠으며, 이범윤과 최재형 부대는 북간도와 연해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며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들어오는 작전을
폈습니다.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1908 년 서울 진공 작전을 벌여 군사장 허위가 이끄는
결사대가 동대문 밖 30리까지 육박했으나 실패하였습니다.
잔악한 일본군은 곳곳에서 마을을 불사르고 양민들을 학살하였습니다.
대규모 의병 작전이 실패하자, 의병들은 산간 벽지를 근거로 하는 게릴라 작전으로
항쟁하였고, 1910 년 이후부터는 만주와 연해주를 대일 항쟁의 무대로 삼았습니다.
안중근은 1908 년, 대한 의군 참모장 겸 독립군 대장이 되어 의용군을 이끌고 일본
군대와 싸웠습니다.
1909 년 10월 오전 7시, 안중근은 만주 하얼빈 역에서 침략의 원흉 이토가 탄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탕!"
안중근 의사가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자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던 이토는 가슴을
움켜쥐고 휘청거렸습니다.
"탕!"
두번째 총알이 가슴을 꿰뚫자, 이토는 힘없이 고꾸라지고 말았습니다.
"대한 독립 만세!"
안중근 의사는 원수를 쓰러뜨리자, 태극기를 펴 들고 만세를 불렀습니다. 우리
민족의 울분을 풀어 준 것입니다.
이토를 처단한 안중근 의사는 1910 년 뤼순 감옥에서 한창 젊은 32세의 나이로
사형을 당했습니다.
사형당하기 며칠 전까지 '동양평화론'을 쓴 안중근 의사는 캄캄한 밤에 타오르는
횃불처럼 우리 민족의 길잡이가 되었고, 그의 구국 정신은 영원히 우리들 가슴에 남게
되었으며 거룩한 정신은 세계 평화에 큰 빛이 되었습니다.
을사 조약 5적의 우두머리인 이완용은 애국 청년 이재명의 칼을 받았으나, 배와
어깨에 중상을 입었을 뿐 죽지는 않았습니다.
미국에서 장인환, 전명우 두 의사는 일본의 한국 침략을 찬양한 한국 외교 고문
스티븐스를 권총으로 쏘았습니다.
* 그림: 묵자책 239쪽.
그림설명: 안중근 의사와 손가락을 끊어서 독립 투쟁을 맹세한 안의사의 손도장.
일제 식민지 정책과 3^3456,1^ 독립 운동
일제는 조선 총독부를 우리 나라에 두고 무력으로 탄압 통치를 해 나갔습니다.
조선 총독은 한국의 입법, 행정, 사법 및 군대의 통수권을 집행할 수 있는 강력한
'헌병 경찰 통치'를 하였습니다.
일제는 농업, 상업, 어업, 광업, 임업 등 모든 산업을 식민지 경제로 바꾸어 철저한
착취를 하였습니다.
1912 년 일제는 토지 조사령을 공포하고 신고를 하지 않은 토지를 총독부가
빼앗았습니다. 불법적으로 빼앗은 토지는 전국 농토의 약 40%나 되었습니다.
일제는 우리 민족에게 국어 대신 일본어를 가르치는 등 철저한 식민지
교육시켰습니다.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헐뜯으며 일본 문화의 우월성을 강조하였고, 교과서도 일본에
충성하는 노^36^예적 인간을 키워내는데 목표를 두었습니다.
일제는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마구 잡아다 옥에 가두었는데, 그
수가 무려 1921 년까지 5 만 명 이상, 1928 년에는 10 만 명 가까이 늘어났습니다.
우리 민족의 주권 회복 운동은 의병 활동에 의한 무력 투쟁과 애국 계몽 운동에
의한 문화 운동으로 전개되다가 1919 년 2월 1일 거국적 독립 운동인 3^3456,1^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보다 앞선 1919 년 1월 6일 일본 도쿄의 조선 기독 청년 회관에서 조선 청년
독립단을 조직하고, 2월 8일 재일 유학생 400 명은 최팔용 등이 중심이 되어 독립을
요구하는 선언서와 결의문을 선포하고, 이를 일본 정부에 통고하고 시위를 벌였습니다.
2^3456,125^ 독립 선언은 국내외에 자극을 주어 거국적인 독립 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1919 년 1월 22일, 고종 황제가 승하하자 일본인이 고종 황제를 독살하였다고 하여
한국인의 배일 사상은 더욱 높아졌고, 인산일인 3월 3일을 앞두고 전국 곳곳에서
군중이 서울로 모여들었습니다.
한편 그 해 2월.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 제창에 세계의 약소 민족들이 독립을 꾀하였소.
우리 민족도 독립을 열망하고 있다는 것을 세계에 알립시다."
상하이에서 조직된 신한 청년단에서는 파리 평화 회의에 김규식을 민족 대표로
파견하였습니다.
마침내 1919 년 3월 1일, 손병희 등 33인이 민족 대표의 이름으로 대한 독립을
선언하였습니다. 이어 시위 행진에 들어감으로써 3^3456,1^ 운동의 횃불을 높이
올렸습니다.
"대한 독립 만세!"
"만세, 만세! 만세!"
"탕! 탕탕^5,5,5^."
우리의 만세 소리와 이를 제지하는 일본 헌병들의 총 소리가 하늘을 흔들었습니다.
독립 만세 시위는 서울뿐 아니라 전국 방방곡곡에서 함께 일어났으며 만주, 하얼빈,
하와이 등지의 해외동포들에게까지 번져 갔습니다.
일제는 헌병을 경찰을 동원하여 무차별 총격을 가하며 야만적인 방법으로
탄압하였습니다.
일본 군대는 수원 제암리 부락의 예배당의 출입문을 막고 불을 질러 많은 사람들이
불타 죽었습니다.
17세의 애국 소녀 유관순은 천안, 연기, 충주 등에서 마을마다 찾아다니며 독립
만세의 뜻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장날인 3월 1일 아오내(병천) 장터에서 태극기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마침내 아오내 장터는 만세를 외치는 태극기의 물결로 휩싸였습니다.
유관순은 앞장을 섰습니다. 놀란 일본 헌병들이 마구잡이로 총을 쏘고 칼을
휘둘렀습니다.
이 만세 시위에서 유관순은 왜병의 총칼에 부모님을 잃고 자신도 잡혀가 온갖
고문을 당하다 숨졌습니다.
그러나 유관순 열사의 애국의 얼은 우리 겨레와 함께 영원히 살아 있습니다.
3^3456,1^ 운동은 민족의 슬기와 독립의 의지를 전세계에 드러내어 밝혔고, 그
영향은 컸습니다. 조선 교육회가 설립되어 민족주의 교육의 기둥이 되었으며, 언론
기관이 커져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의 신문이 발행되었습니다.
3^3456,1^ 운동은 민족사상 가장 큰 사건이며 민족 의식을 세계에 과시한 민족
운동이었습니다.
* 그림 : 묵자책 243쪽.
그림설명: 만세운동 직전의 사람들 사진과 만세운동을 구실로 일제가 제암교회에
30 명을 몰아 넣고 불태워 죽인 것을 목격한 전동례 할머니 사진. 교회 자리를 파자
뼈가 나오고 있다.
대한 민국 임시 정부와 민족의 수호
3^3456,1^ 운동이 일어난 이후 국제 여론이 일본에게 나쁘게 돌아가자, 일제는 신문
검열의 횡포와 우리 민족에 대한 차별 교육을 더욱 강화하였습니다.
또 우리 민족은 기름진 쌀을 일제에게 빼앗기고 만주에서 들여온 잡곡으로 허기를
채워야만 했습니다.
일제의 식민지 통치가 더욱 잔혹해지자 1919 년 4월 10일 중국 상하이에서 독립
운동을 보다 조직적이고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임시 의정원을 구성하고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하는 국무원 내각을 발표하였습니다.
4월 13일에 임시 헌장을 공포하였습니다.
"국호를 대한 민국이라 하고 1919 년을 대한 민국 원년으로 정합니다. 오늘은
국무원 내각을 발표하고 3일 후에는 임시 헌장을 공포하겠습니다."
국무총리 이승만, 국무원 비서장 조소앙,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의정원 의장에는 이동녕이 뽑혔습니다.
"대한 민국 임시 정부를 이 곳 상하이에 두기로 하고, 한성 정부를 정통으로 하여
정부 조직을 개편합시다."
대한 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에는 국내외의 민족 지도자들이 모여 임시 정부
통합 문제를 의논하였습니다.
"통합이 이루어졌으니 새 헌법을 공포하고 대통령을 선출하여 새로운 통합 정부를
수립해야 합니다."
1919 년 9월 11일, 새 헌법을 공포하고 이승만을 집정관 총재로 하고 새로운 통합
정부를 세웠습니다.
"대한 민국이 자주 독립국임을 선언한다. 전세계 인류는 우리의 자주 독립을
승인하여 줄 것을 요구하는 바이다."
1926 년 12월에는 김구가 국무령(주석)이 되니 대한 민국 임시 정부는 삼권을
분리하였고, 정부 형태는 대통령 중심제와 내각 책임제를 절충하였습니다.
서^5,23^북 간도와 만주 연해주에서는 그 지역에 살고 있는 100 만의 한민족을
기반으로 무장 독립군을 가진 항일 운동 단체가 많았습니다. 이들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와 일제 군경과 항쟁을 계속하였습니다.
1920 년 10월 20일부터 23 일까지 김좌진 장군과 이범석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은
만주의 지린성 청산리 계곡에서 일본군 연대 병력과 4일 동안 격전 끝에 독립군의
활동 중 가장 큰 전과를 올렸습니다. 청산리 싸움에서 일본군은 3천 3백여 명이
사살되고 우리 독립군은 겨우 60 명이 전사했을 뿐이었으니 얼마나 큰 승리였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국내에서는 농촌 계몽 운동과 물산 장려회 등 민족 운동이 불처럼 일어났고, 수많은
사람들이 잇따라 의거하여 나라와 겨레를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강우규, 김상옥, 김지섭, 나석주, 이봉창, 백정기, 윤봉길 의사 등의 거룩한 희생은
민족 독립의 횃불이 되었습니다.
"우리 중국의 4억 인구가 해내지 못한 일을 한국 청년 한 사람이 해내다니!"
1923 년 9월 1일, 일본에는 대지진이 일어나 60 여 만 호의 집이 불타고 24 만 명이
죽는 참변이 일어났습니다.
"조선 사람들이 방화와 살인을 저질렀다. 조선 놈들을 모조리 죽이자!"
일본 정부의 이 얼토당토않는 흉계로 우리 동포 6천 6백명이 일본인들에게 무참히
학살을 당했습니다.
국내에서는 항일 투쟁으로 6^3456,1,245^ 만세 운동, 광주 학생 운동 등이 불길처럼
일어났습니다.
중국 본토에 들어간 독립군은 1940 년에 임시 정부 산하에 한국 광복군이 창설되자
이에 편입되어 제 2 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일본군과 싸웠습니다.
"한민족을 아주 없애 버리자!"
일제는 우리 민족의 생존과 문화, 전통을 말살시키려는 정책을 썼습니다.
"한글로 된 신문과 잡지를 없애라!"
"한국어와 한국사 연구 단체를 해산시켜라!"
"매달 1일을 애국일로 정하니 이 날 신사 참배를 해야 한다!"
"한국인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치게 하라!"
신문과 잡지는 폐간되고, 조선어학회 간부들은 감옥에 갇히고, 신사 참배를 거부한
목사들은 순교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이에 굴하지 않고 일본의 부당한 행위에 반대하여 곳곳에서
일어나 일제에 대항하였습니다.
일제는 전쟁 물자 보급을 위한 식량 공출과 총기를 만들기 위한 놋그릇, 수저 등
금속 물건을 약탈해 가는 등 물자를 빼앗고 식량 배급제를 실시하여 우리 민족을
굶주리게 하였습니다.
제 2 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일제는 징병 제도와 학병제를 강제로 실시하여 약 40
만 명의 우리 나라 청년을 강제로 전쟁터에 보냈습니다. 이 중 약 15 만 명이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또한 일제는 침략 전쟁의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한국인 4백 85 만 명을 강제로
징용에 동원하였는데, 노^36^예와 같은 생활 속에서 약 6 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일제의 탄압과 민족 문화 말살 정책에 대항하여 민족 문화를 지키기 위한 투쟁은
줄기차게 전개되었습니다.
최현배, 이희승, 이윤재, 장지연 등은 한글 연구에 힘쓰며 한글날을 제정하고 '우리말
큰사전'을 펴냈습니다.
신채호, 최남선, 정인보, 문일평, 안재홍 등은 우리 역사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한국사
연구와 고전 개발에 힘써 민족 문화 수호에 이바지하였습니다.
우리의 문화재가 일본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전형필, 오세창은 문화재를
수집하였습니다.
최남선, 이광수, 한용운, 김소월, 염상섭 등은 전통적인 문학 체질을 현대 문학으로
발전시켰습니다.
3^3456,1^ 운동을 전후하여 처음으로 문예 동인지가 발간되어 문학상의 여러 유파가
생겼습니다.
동아^5,23^조선 일보에 실린 소설들의 영향으로 농촌 계몽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상화를 비롯한 문인들은 작품을 통해 우리의 전통을 살리고 민족 의식을
불어넣었습니다.
소파 방정환을 중심으로 조직된 색동회는 1923 년 잡지 '어린이'를 발간하여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꿈을 심어 주기 위한 아동문학 활동을 벌였습니다.
그 해 5월 1일을 첫 어린이날로 제정하여 민족의 장래를 위한 어린이 운동을
펼쳤습니다.
민족 예술의 음악 분야에서는 홍난파가 '봉선화', '성불사의 밤' 등을 작곡하였고,
안익태는 애국가를 작곡하여 일제에 억눌려 시달리던 민중의 눈시울을 뜨겁게
하였습니다.
민족 예술의 연극 분야에서는 1910 년부터 신극 운동이 시작되었으나 1922 년에
조직된 토월회에 의해 본격적인 근대극이 시작되었습니다.
영화 분야에서는 나운규의 활동이 컸으며, 특히 그는 '아리랑'이라는 작품에서
민족의 저항 의식과 한국적 정서를 담아 관객을 감동시켰습니다.
1936 년에는 베를린 올림픽 대회에서 우리 나라 손기정 선수가 우승하였는데,
동아일보가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달린 일본기를 지우고 보도하였다가 정간을
당했습니다.
언론을 탄압하던 일제는 1940 년경에는 모든 신문을 없애고 말았습니다. 그 후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으로 우리 나라는 문화의 암흑기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광복을 위해 줄기차게 투쟁한 우리 민족은 유구한 역사를 영원히 이어나가게
되었습니다.
(대한 민국 시대)
(세계로 뻗어 가는 영광의 대한 민국)
8^3456,1,15^ 광복과 대한 민국 정부 수립
"지금 목표 지점 히로시마 상공에 와 있다."
"폭탄을 투하하라!"
1945 년 8월 6일 미국 공군 비(B) 29기 3 대가 일본 하늘을 향해 날아가 원자
폭탄을 떨어뜨려 전인류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래도 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항복하지 않고 발악하자, 미국은 8월 9일 두번째
원자탄을 일본의 나가사키에 떨어뜨려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1945 년 8월 15일 정오, 일본 국왕(천황)은 연합군에서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습니다.
"만세! 대한 독립 만세!"
1945 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과 더불어 한민족은 광복을 맞이하였습니다. 한민족의
해방을 연합군의 승리와 줄기차게 계속된 우리 민족의 투쟁의 결과로 얻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에 앞서 2월, 미국의 루스벨트, 영국의 처칠, 소련의 스탈린 사이에서
맺어진 얄타 밀약에 따라 우리 나라의 38 도 선을 경계로 남북한에 미군과 소련이
각기 들어와 군정을 실시하였습니다.
그 해 12월, 미국, 영국, 소련 3국의 외상들이 모스크바에 모여 한국을
신탁통치한다고 결정하였습니다.
"신탁 통치 반대!"
"한국은 자주 독립 국가다!"
임시 정부 요인을 비롯한 각 정당과 사회 단체 들이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벌였습니다. 북한 공산주의자들도 처음에는 반탁 운동을 하다가 소련의 명령으로 자기
나라의 주권을 다른 나라에 맡기는 신탁 통치에 찬성하는 운동을 벌여 꼭두각시, 즉
공산당의 괴뢰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1948 년 5월 10일,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총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5월 31일에 최초의 국회가 열리니 이를 제헌 의회라고 일컫습니다. 제헌 의회는
헌법을 만들어 7월 17일에 공포하였습니다.
"나는 국헌을 준수하고^5,5,5^. 대통령 직무를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국회의 간접 선거에 의하여 초대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시영이
당선되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행정부를 구성하고 1948 년 8월 15일, 대한 민국의 수립을 내외에
선포하였습니다.
"대한 민국이 한국에서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선포합니다."
1948 년 12월, 파리에서 열린 유엔 총회에서 대한 민국은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공인받기에 이르렀습니다.
1948 년 10월, 이승만 대통령은 곳곳에서 일어나는 공산당의 폭동을 진압할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1948 년 9월 10일, 북한 공산당은 김일성을 주석으로 한 정권을 세우고, 북한 땅에
공산 독재를 폈습니다.
북한 공산당은 대한 민국까지도 적화시키려는 야욕으로 남로당을 시켜 제주도 폭동
사건, 여수^5,23^순천 반란 사건 등을 일으켜 자유 민주주의를 받드는 사람들을 마구
학살하였습니다.
정부는 국가 보안법을 만들어 공산당 활동을 금지시키고 날뛰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1949 년 6월, 제 1 공화국은 농지 개혁법을 공포하여 일제에게 빼앗겼던 농지를
거두어들여 국유화하고, 3정보 이상의 농지를 가진 지주의 농지를 국가에서
사들였습니다.
대한 민국 국민들의 자유와 평화를 누리며 열심히 일할 때 북한 공산당은
6^3456,12,15^ 남침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 그림: 묵자책 252쪽.
그림설명: 해방 당시의 서울.
* 그림: 묵자책 253쪽.
그림설명: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 폭탄의 버섯 구름 사진. 대한 민국 정부 수립
기념 경축 행사를 거행하고 있는 광경의 사진.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취임선서를
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사진.
6^3456,12,15^ 사변과 시련의 극복
"따르릉^5,5,5^."
"쾅! 콰르릉^5,5,5^."
1950 년 6월 25일, 새벽 4시 반, 비 내리는 일요일 새벽, 어둠을 뚫고 북한 공산군은
중공과 소련의 뒷받침으로 탱크를 앞세우고 불법 남침을 해 왔습니다.
병력과 장비에 너무나 뒤졌던 국군은 맨주먹으로 맞서다 후퇴를 거듭하여 6월
28일에는 수도 서울을 공산군으로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피를 흘리며 후퇴를 거듭하던 국군은 8월에 대구 북방에 저항선을 구축하였습니다.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북한 공산군을 침략군으로 규정하고 유엔 군 파견을
결의하였습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 16개국이 유엔의 이름으로 참전하여 우리 국군과 합동
작전으로 공산군과 싸웠습니다.
1950 년 9월 15일, 유엔 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역사적인 인천 상륙 작전을
성공시켜 해병대가 선봉이 된 국군과 합세하여 9월 28일 서울을 되찾았습니다.
국군과 유엔 군은 월 19일 평양을 점령하고 북진을 계속하여 국군 선발대는
압록강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1950 년 10월 27일, 중공군이 불법으로 국경을 넘어 인해전술을 펴며
침략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국군과 유엔 군은 한때 한강 이남까지 후퇴하였고, 흥남 부두는
자유를 찾아 고향을 떠나는 피난민들로 가득 찼습니다.
작전상 후퇴하던 국군과 유엔 군은 다시 반격하여 중공군과 북한 공산군을 38 도 선
이북으로 물리쳤습니다.
소련의 유엔 대표가 휴전을 제의해 1953 년 7월 27일 오전 10시 판문점(본래
널문리)에서 휴전 협정이 이뤄졌습니다.
1950 년 6월 25일 새벽 4시 반부터 1953 년 7월 27일 오전 10시까지 만 3 년 1개월
2일 5시간 5시간 만에 북괴 침략으로 시작된 전쟁은 막을 내렸습니다.
이 전쟁에서 33 만 명에 달하는 유엔 군과 190 만 명에 이르는 공산군 사상자를
내었고, 제 1 차 세계 대전의 전쟁 비용과 맞먹는 150억 달러가 아름다운 이 강산을
파괴시켰습니다. 이 엄청난 전쟁으로 부모, 형제, 처자, 부부 등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과 생이별에 온 민족이 울었고 생활 터전은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휴정 협정 결사 반대!"
"통일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휴전 협정 소식을 듣고 한국민은 통일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반대를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통일에 대한 겨레의 소원은 멀어지고 휴전선엔 동족 상잔의
비애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정부와 국민은 실의를 딛고 일어나 6^3456,12,15^ 남침으로 파괴된 도시와
농촌의 재건과 부흥에 노력하였습니다.
* 그림: 묵자책 256쪽.
그림설명: 자유를 찾아 부서진 대동강 철교를 타넘어 월남하는 주민들.
* 그림: 묵자책 257쪽.
그림설명: 상륙작전을 지휘하는 맥아더 원수. 인천상륙작전. 6^3456,12,15^ 사변 때
양민을 학살하는 공산군.
민주주의와 경제 성장
유엔은 경제 사회 이사회의 결의로 유엔 한국 재건위원단(UNKRA)을 설치하고
전란을 겪은 우리 나라에 원조를 시작하였습니다.
1953 년, 한국과 미국간에 외국의 침략을 받았을 때는 서로 군사적으로 원조한다는
한^5,23^미 상호 방위 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당은 독재 정치를 하고, 정권 연장을 위해 몇
차례 불법적으로 헌법을 고쳤습니다.
1960 년 3월 15일, 제 4 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은 부정 선거를 하여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기우을 당선시켰습니다.
"부정 선거 다시 하라!"
"독재 정권 물러가라!"
"못살겠다 갈아 보자!"
1960 년 3월 15일 마산에서 시작된 부정 선거 규탄 데모는 4월 19일 서울 시내
전학생의 의거로 이어졌습니다.
4^3456,1,24^ 의거에서 사망한 사람의 수는 185 명(서울 145 명) 부상당한 사람은 6천
59 명에 이르렀습니다.
4월 25일에는 대학 교수단의 시국 선언이 있었습니다.
4^3456,1.24^ 의거로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나게 되어 부정 부패와 부정 선거로
국민의 생활을 어렵게 만든 자유당 정권은 무너지고 허정 과도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1960 년 7월 29일,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민의원과 참의원 양원제 총선거가 공명
정대하게 실시되었습니다.
총선거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한 민주당은 대통령에 윤보선, 국무총리에 장면을
선출하여 내각책임제의 제 2 공화국을 탄생시켰습니다.
그러나 정권을 잡은 민주당의 신파와 구파의 대립이 심했고, 매일같이 일어나는
별의별 데모로 사회가 혼란하자 민심을 잘 이끌어 가지 못한 민주당은 민주주의를
꽃피워 보기도 전에 5^3456,1,124^ 군사 혁명으로 정권을 내놓아야만 했습니다.
1961 년 5월 16일, 박정희 육군 소장 등 군인을 주축으로 하는 세력이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정권을 잡은 혁명군은 국가 재건 최고회의를 구성하고 혁명 공약을
발표하였습니다.
1963 년 국민 투표에 의하여 대통령 책임제와 단원제 의회 정치를 골자로 하는 새
헌법을 제정하고 선거를 실시하였습니다. 군사 혁명을 이끈 박정희 장군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새 정부를 조직하니 제 3 공화국이 성립되었습니다.
1963 년부터 시작된 경제 개발을 제 1 차 5개년 계획으로 전력, 석탄, 제철 등 기간
산업을 육성하였고, 제 2 차 5개년 계획으로 식량의 자급화와 기간 산업을
발전시켰으며, 제 3 차 5개년 계획으로 수출 증대와 농촌 근대화를 이룩하였습니다.
제 3 공화국에서 제 5 공화국으로 이어지는 제 4 차 5개년 계획으로 중화학 공업
발전과 수출 증대를 가져와 우리 나라는 200억 달러를 웃도는 수출국으로
성장하였습니다.
특히 농촌의 근대화를 이루기 위하여 근면, 자조, 협동의 국민 의식 혁명과 소득
증대를 위한 새마을 운동이 1970 년 초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측의 제안으로 남북으로 흩어진 이산 가족을 찾기 위한 남북 적십자 회담이
1972 년부터 열렸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1972 년 7월 4일 민족 상잔의 비극을 막고, 평화 통일의 기반을
마련하고자 7^3456,145^ 공동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러 남북의 대화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남북 대화에 응하던 북한은 일방적으로 대화를 중단시키고
말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적화 통일의 야욕을 가지고 남침의 기회만 노렸습니다.
남북 대화를 통한 평화 통일의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도중인 1972 년 10월, 정부는
10월 유신 헌법을 선포하고 제 4 공화국을 수립하였습니다.
그러나 제 4 공화국은 유신 헌법으로 대통령의 장기 집권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어 국민들 사이에서는 이에 대한 비판이 일어났습니다.
그리하여 헌법을 개정하자는 논의와 함께 정치적으로 불안해지자 정부에서는 여러
가지 강경 정책을 실시하였으며, 이러한 가운데 1979 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을 당함으로써 사실상 제 4 공화국은 그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부록)
(역대왕실계보)
* 고구려(BC. 37--AD668: 28 대 705 년)
#1 동명왕 #2 유리명왕
#3 대무신왕 #4 민중왕
#5 모본왕 #6 태조왕
#7 차대왕 #8 신대왕
#9 고국천왕 #10 산상왕
#11 동천왕 #12 중천왕
#13서천왕 #14 봉상왕
#15 미천왕 #16 고국원왕
#17 소수림왕 #18 고국양
#19 공개토왕 #20 장수왕
#21 문자명왕 #22 안장왕
#23 안원왕 #24 양원왕
#25 평원왕 #26 영양왕
#27 영유왕 #28 보장왕
* 백제(B.C. 18--AD660: 31 대 678)
#1 온조왕 #2 다루왕
#3 기루왕 #4 개루왕
#5 초고왕 #6 구수왕
#7 사반왕 #8 고이왕
#9 책계왕 #10 분서왕
#11 비류왕 #12 계왕
#13 근초고왕 #14 근구왕
#15 침류왕 #16 진사왕
#17 아화왕 #18 전지왕
#19 고이신왕 #20 비유왕
#21 개로왕 #22 문주왕
#23 삼근왕 #24 동성왕
#25 무령왕 #26 성왕
#27 위덕왕 #28 혜왕
#29 법왕 #30 무왕
#31 의자왕
* 신라(B.C 57--AD935: 56 대 992 년)
#1 혁거세거서간
#2 남해차차웅
#3 유리이사금 #4 탈해이사금
#5 파사이사금 #6 지마이사금
#7 일성이사금 #8 아달라이사
#9 벌휴이사금 #10 나해이사금
#11 조분이사금 #12 첨해이사금
#13 미추이사금 #14 유례이사금
#15 기임이사금 #16 내물마립간
#17 내물마립간 #18 실성마립간
#19 눌지마립간 #20 자비마립간
#21 소지마립간 #22 지증왕
#23 법흥왕 #24 진흥왕
#25 진지왕 #26 진평왕
#27 선덕여왕 #28 진덕여왕
#29 태종무열왕 #30 문무왕
#31 신문왕 #32 효소왕
#33 성덕왕 #34 효성왕
#35 경덕왕 #36 혜공왕
#37 선덕왕 #38 원성왕
#39 소성왕 #40 애장왕
#41 헌덕왕 #42 흥덕왕
#43 희강왕 #44 민애왕
#45 신무왕 #46 헌안왕
#47 문성왕 #48 경문왕
#49 헌강왕 #50 정강왕
#51 진성여왕 #52 효공왕
#53 신덕왕 #54 경명왕
#55 경애왕 #56 경순왕
* 고려(918--1392: 34 대 475 년)
#1 태조 #2 혜종태
#3 정종 #4 광종
#5 경종 #7 목종
#6 성종 #8 현종
#9 덕종 #10 정종
#11 문종 #12 순종
#13 선종 #14 헌종
#15 숙종 #16 예종
#17 인종 #18 의종
#19 명종 #20 신종
#21 희종 #22 강종
#23 고종 #24 원종
#25 충렬왕 #26 충선왕
#27 충숙왕 #28 충혜왕
#29 충목왕 #30 공민왕
#31 충정왕 #32 우왕
#33 창왕 #34 공양왕
* 조선 (1392--1910: 27 대 519 년)
#1 태조 #2 정종(방과)
#3 태종(방원) #4 세종
#5 문종 #6 단종
#7 세조 #8 예종
#9 성종 #10 연산군
#11 중종 #12 인종
#13 명종 #14 선조
#15 광해군 #16 인조
#17 효종 #18 현종
#19 숙종 #20 경종
#21 영조 #22 정조
#23 순조 #24 헌종
#25 철종 #26 고종
#27 순종
연중행사 및 명절 일람표(음력)
1월 1일: 설날
내용 및 풍습: 새해가 시작되는 날로서 설빔을 입고 조상에게 차례를 올린다.
웃어른께 세배를 드리며 떡국을 마련하여 먹고 널뛰기, 윷놀이, 연날리기를 즐긴다.
1월 15일: 정월 대보름
내용 및 풍습: 액운을 쫓고 소원을 비는 뜻으로 오곡밥을 나물과 함께 먹고, 귀밝이
술이나 약밥도 먹으며 달맞이, 다리밟기, 잣불 밝히기 등의 풍습이 전하고 횃불쌈,
차전놀이도 즐긴다.
2월 15일: 연등회
내용 및 풍습: 불교적인 행사로서 고려 시대 크게 성하였으며 집집마다 찬란한
등불을 달고 부처님에게 정성을 바치고 나라와 개인의 행복을 빌었으며 노래와 춤으로
즐겁게 지냈다.
3월 3일: 삼짇날
내용 및 풍습: 신라 때부터 전하며 만물이 활기를 띠고 겨울 동안에 묵은 때를
씻는다 하여 동쪽으로 흐르는 시내에서 몸을 씩고 쑥개피떡, 진달래꽃떡을 먹으며
제비가 돌아오는 날이다.
4월 8일: 초파일
내용 및 풍습: 석가의 탄신일로서 가장 큰 불교 행사이며 상을 여러 가지 꽃으로
장식하고 향수를 뿌리며 등을 달고 설법을 하며 석가의 탄신을 축하한다.
5월 5일: 단오
내용 및 풍습: 수릿날, 천중일이라고도 하며 삼한의 오월제에서 비롯되었고,
단오차례를 올리고 수리치로 떡을 빚으며 여자들을 창포물에 머리를 감고 그네뛰기,
씨름, 농악을 즐긴다.
6월 15일: 유둣날
내용 및 풍습: 신라 때의 풍속으로 나쁜 일을 덜어 버리기 위해 음식을 장만하여
동쪽으로 흐르는 시내에서 몸을 씻고 사당에 제사도 지냈으며 농가에선 풍년을 비는
제사도 지냈다.
7월 7일: 칠석
내용 및 풍습: 견우와 직녀가 만난다 하며 떡을 빚어 장독에 놓고 가정의 평안을
비는 날. 책을 꺼내어 말리는 풍습이 있으며 저녁에 처녀들은 바느질 솜씨 늘기를
빌고 소년들은 시를 짓는다.
7월 15일: 백중날
내용 및 풍습: 농사와 관계가 깊으며 백종날, 중원이라고도 한다. 충청북도와 전라도
지방에서는 농사꾼들이 하루를 편안히 즐기며 절에서는 백 가지 음식을 공양하였다.
8월 15일: 추석
내용 및 풍습: 한가위, 중추절이라고 하며 신라 때부터 전해 오는데 추수를 감사하는
뜻으로 햇곡식과 햇과일로 조상에게 제사를 지냈고, 성묘를 하며 강강술래, 소놀이,
거북놀이, 농악 등을 즐겼다.
9월 9일: 중앙절
내용 및 풍습: 제비가 강남으로 돌아간다고 하며 국화꽃으로 전부침을 만들어 먹고
교외에서 선비들의 국화로 빚은 술을 들며 단풍을 즐기면서 작시, 음시, 그리기 등을
하였다.
10월 15일: 상달
내용 및 풍습: 연중 가장 높은 달로 쳤으며 햇곡식으로 떡을 빚어 고사를 지냈고
16일을 전후하여 시제를 지냈으며 대종교에서는 3일을 기하여 단군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12월 22일: 동짓날
내용 및 풍습: 붉은 팥으로 팥죽을 쑤어 액운을 쫓는 뜻으로 죽물을 문이나 문간,
담벽 등에 뿌리고 먹었다. 동지 팥죽을 먹으면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고 한다.
12월 30일: 섣달 그믐날
내용 및 풍습: 마지막 가는 섣달 그믐날로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웃어른께 묵은
세배를 드린다. 신을 들여놓고 밤을 세우며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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