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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면

by Casey,Riley 2023. 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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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휘
      외면
    1. 전범 수용소
  몬텐루파 --- 일본군 전범 수용소가 있는 이곳에도 어디서 나처럼 하루 종일
내리쪼이던 햇빛이 어느 새 자취를 감추는가 하더니 놀로 곱게 물들인 서녜
하늘만 남겨 놓았다.
  황혼에 감싸여 가는 수용소 건물은 그저 조용하기만 했다. 가끔 미군
보초병의 구령 소리가 들릴 뿐 서글픈 하모니카 소리가 울리는가 하면, 거기
맞추어 전범들의 나직한 합창 소리가 구슬프게 그 뒤를 따랐다.
  똑같이 처형을 기다리는 전범들이었으나 그들은 틈이 나면 되도록 가까이
모여 앉아, 함께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운명의 유대를 느꼈고, 서로의 슬픔을
나누며 스스로의 비운을 달래는 듯싶었다. 그런 축에 끼이지 않고 외로이
떨어져 노래를 따라 부르지 않는 전범들도 역시 그 합차 아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마음속에서는 어떤 공감을 느끼고 있었따. 그런데 그 음향도 공감도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일체를 외면한 상태에서 수용소 복도의 외진 한 구석에
주저앉아 홀로이 깊은 시름에 잠기고 있는 한 사나이가 있었다. 조그만 들창
밖으로 트인 어두워 가는 하늘의 한 조각에 방금 한 점의 구름이 스쳐갔으나
그것조차 그는 눈여겨보려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무엇인가 망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닥쳐올 죽음을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것이
무서워서 떨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니, 죽음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고
있거나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정확히는, 그는 지금
앞으로 닥쳐올 죽음을 놓고 지나간 자기의 삶을 이리저리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짧은 생애를 회한의 정으로 차근차근 되씹어 보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실은 지금 그는 당황하고 있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로 귀가 맞지
않고 이치가 닿지 않는 지나간 날의 자기의 삶을 이리저리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짧은 생애를 회한의 정으로 차근차근 되씹어 보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실은 지금 그는 당황하고 있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귀가 맞지
않고 이치가 닿지 않는 지나간 날의 자기의 삶을 돌이켜가고 그는 몹시도
당황하고 있었다.
  태평양 전쟁이 끝난 뒤 필리핀에서는 전쟁을 도발한 일본군에게 책임을 무든
이른다 전범 재판에 의하여 필리핀 방면 일본군 최고 사령관인 야마시다 대장
이하의 숱한 일본군 장병이 처형되었다.
  그때 필리핀의 미군 포로 수용소장을 지낸 바 있는 홍사익 중장도 미군
포로에 대한 학대의 전 책임을 걸머지고 처형대의 이슬로 사라졌는데 그와
함께 직접적인 하수인으로서 처형된 우리의 동족인 '조센징' 전범은
열여덟이나 된다.
  어두워 가는 수용소의 외진 한 구석에서 혼자 끙끙 앓고 있는 이 사나이도
바로 그 중 한 명이었다. 그의 본 성은 임. 그래서 일본식 개명도 편리하게
임자 그대로엿으나 일본 발음으로는 '하야시'. 금년 스물 네 살.
  그는 덩치가 크고 힘이 세다는 것을 제쳐놓으면 그저 평범한 한낱 조센징에
지나지 않았다.
  다망 여기서는 그가 왜 미군 포로 학대의 잔인 행위를 저지르고 전범으로
지모고디었는지 그가 처형당하기 전에 자기의 짧은 삶을 그 마음 속에서
정리하지 못한 채 죽어 간 것인지 아니면, 그 나름의 어떤 마무리를 짓고 죽어
간 것인지 필자는 그것만을 밝히면 족한 것이다.

    2. 신 없는 하야시
  1차적인 조서를 꾸미고 나서, 하야시 병장을 수용소로 돌려 보내고 난
우드중위는 이제까지와는 또 다른 피로를 느끼고 체스터필드 한 대를 피워
물었다. 그는 좀처럼 기분을 전환시킬 수 없는 데 초조감조차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오늘 몇 시간 동안 싫어도 마주볼 수밖에 없었던 하야시의 이루
형용할 수 없는 완전 무결한 포커 페이스가 좀처럼 그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때문이었다.
  동양인, 특히 황색 인종의 누렇고 평면적인 얼굴이 한결같이 무표정하여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짐작하기 힘들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하야시의 그것은 그런 황색 인종의 보편적인 무표정의 차원을 훨씬 넘어선
것이었다.
  필리핀의 미군 포로 수용소에서도 가장 혹독하게 미군을 다룸으로써 미군
포로들의 공포와 증오를 그 한몸에 집중시켰다는 하야시.
  겉도 속도 인간의 것으로 믿어지지 않는 그의 정신 구조와 읫기은 도대체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그는 검찰관인 우드 중위의 물음에 시종 일관 그저 '상관이 명령에
따랐다.'고만 되풀이했다.
  남태평양의 외진 섬에서 수개월 동안 하루 24시간의 일어 특별 교육을 받은
우드 중위로서 그가 습득한 일어 능력에는 스스로 한계가 지어져 있는
것이었지만 그러한 우드 중위로서도 하야시가 알고 있는 일어의 어휘보다도
훨씬 못한 것이 아닌가 의심될 정도로 그의 말수는 적었다. 아니 적고 뭐고
그저 한 가지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그와 우드 중위 사이에 나눠진 대화가 어떻게나 단조로왔던지 임시 통역으로
언어 보조를 부탁한 학병 출신의 일본군 소위가 한 번도 끼여들 틈조차 주지
않았으니까.
  지리하게 거듭되는 단조로운 문답에 짜증이 난 우드 중위가 병사로서 너무나
당연한 그따위 판에 박은 변명은 집어치우라고 소리쳤을 때에도 하야시는 전혀
표정을 달리하지 않는 그 특이한 포커 페이스로 물끄러미 우드 중위를
건너보고는 또 한 번 '그저 상관의 명령에 따랐을 뿐입니다.'라는 말을
되풀이했을 뿐이다. 순간 우드 중위는 오싹해지는 등어리에 주욱 소름이
스쳐가는 오한을 느꼈던 것이다.
  우드 중위는 하야시의 미군 포로에 대한 학대와 구타가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병사가 상관으로부터 받은 명령을 곧이곧대로 실천하는
의무의 한도를 훨씬 넘긴 잔학 행위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느닷업이 미군 포로들이 먹고 있는 밥그릇을 손으로 쓸어 던진다든가
그래놓고 크게 너털웃음을 웃었다든가, 쇠잔할 대로 쇠잔한 미군 포로를 사정
없이 구타하고 실신하여 쓰러진 몸에 모진 발길질을 가했다는 따위의 행위는
분명히 명령 수행자로서의 한계를 벗어난 그 개인이 지니는 원래적인 야수성
또는 악마성의 소치며 그 발로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군대에 있어서의 상관의 명령도 언제나 절대적인 것은 아니며 경우에 따라
얼마든지 개인의 재량이 가능한 것이라고, 이 자유와 인권을 존중하는
데모크라시의 나라 미국의 젊은 검찰관은 굳게 믿고 있었다. 그는 그 재량의
근거는 신으로부터 인간에게 주어진 양심의 성역에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설혹 신은 안 믿는다 하더라도 무신론자면 무신론자 나름으로, 이교도면
이교도 나름으로 좋은 '사마리탄'으로서의 인간성은 발휘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고 있는 이 비교적 곱게 자라고 큰 고생을 해 본 경험이 없는 젊고 진보적인
검찰관은 미군 포로 감시의 일본군 근무병 가운데서도 잔인, 냉혹함에
있어서의 챔피어능로 정평이 있는 하야시의 비인간적 죄과는 인간 전체를
모독하는 범죄로서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라고 단정했다.
  하야시 같은 자를 엄격히 치죄하는 것은, 뒤늦게 참가함으로써 직접 육탄의
전투장에서 그와 대결한 기회를 갖지 못한 자기 같은 처지의 군인으로서
진지하게 파고들어야 할 당연한 임무라고까지 우드 중위는 생각했다.
  아니 전쟁으로 상시로디거나 상처 입은 인간성의 회복을 위하여 인간의
이름아래 이루어져야 할 귀중한 의식의 하나라고 믿었다.
  그러한 논리의 귀결에 적이 만족한 우드 중위는 그제야 웬만큼 기분을 전환
시킬 수 있었다. 담배를 끄고 일어선 우드 중위는 자기 막사로 가서 잠시
낮잠을 즐기려고 마음먹었다.

    3. 늑대들의 변명
  이쓰키 소위는 낮에 우드 중위에게서 선사받은 깡통 소시지를 좀 과식한
탓인지 몇 번 설사를 하고 나서 몹시 기운이 빠진 느릿한 몸을 야전 침대 위에
누이고 있었다. 어쩌다 우드 중위의 통역을 맡게 되어 다른 일본 포로들보다는
훨씬 편하고 자유롭기도 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렇게 달가운 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다.
  지방의 유서 있는 집안 출신인 그는 일본서도 손꼽히는 대학 문과에서
영문학을 공부하다가 육군 간부 후보생으로 뽑혀 필리핀으로 파견되었던
것인데, 패전 직전 거의 편제가 무너진 부대의 하급 장교로서 십여 명의
부하와 함께 정글 지대에서 굶어 죽어 가던 생각을 하면, 살아 남은 신세가
천만 다행의 기적같이 느껴졌지만 차차 시일이 지나면서 그런 느낌이 사라지자
이번에는 심한 자기 혐오의 끝없는 권태 속에 빠져들어갔다. 그러니까 요즘의
그의 일과는 그저 완전한 타성으로서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데 불과했다.
  이제는 포로 수용소에서나 어디서나 같은 일군 동료들과 얼굴을 마주하는
것조차 역겨웠고 말을 주고받는 것은 더욱 힘에 겨울 정도였다.
  전쟁에 진다는 것이 이처럼 비참한 것일까. 그 영과으섧고 영예롭던
일본인으로서의 긍지는 도대체 어디로 말끔히 사라지고 말았단 말인가.
  영양 좋은 승리자로서 기고 만장한 백인 미군의 얼굴색과 영양 실조로 더욱
누렇게 떠버린 패자로서 기가 죽은 일본군 포로의 얼굴색, 저 입체적인 얼굴과
이 평면적인 얼굴. 장신과 단구.
  감이 좋을 뿐 아니라 디자인도 멋있는 미군복과, 감도 나쁘고 퇴색한 멋없는
일군복. 지금은 잘 어울리지 않는 이 카키색 미군 작업복 그 등에 크게 낙인
찍힌 P자.
  발음은 나쁘고 짧은 자기의 영어 능력과 미군의 발음이 좋고 가락이 유창한
영어라는 너무나 당연한 대조조차 지금의 그에게는 자기 혐오의 한 요소가
되고 있었다.
  게다가 일군 전범들의 생태.
  미군 검찰과네엑 조서를 받는 그네들의 태도는 비겁한 건 말할 것도
없거니와, 태연 자약해도 왜 그렇게도 초라해 보이는 것일까. 그런 것들이
모두 거울속에 비친 아쓰키 자기 자신의 얼굴이요 꼴이었다. 그러한 이쓰키에
있어서 오늘은 더욱 불쾌하고 창피스러웠다. 다름아닌 하야시 병장
때문이었다.
  녀석은 키만 크고 가냘픈 우드 중위와 마주앉아 돌부처처럼 웅크리고는 무슨
말을 물어도 그저,
  "상관의 명령에 따랐습니다."
라는 한 마디만 되풀이했는데 그가 몇 번이고 그 한 마디만을 되뇌이자 우드
중위는 만년필을 던지듯이 책상에 내려놓더니, 두 팔을 벌려 보이며 자기를
향해 어깨를 으쓱해 보였던 것이다.
  순간 이쓰키 소위는 저도 모르게 자기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미국인이 어이가 없다고 느꼈을 때 지어 보이는 그 흔한 제스처가
이쓰키에게는 더할 수 없는 모멸의 시늉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더욱 우드 중위가 순간적으로 힐끗 이쓰키를 쳐다보았을 때 그 모멸의
날카로운 화살촉은 세차게 날아와 그의 가슴을 뚫는 듯싶었다.
  너희들 일본인이 왜 이 모양이냐는 듯이......, 순간 이쓰키는 당황히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이쓰키는 이 조센징이 일본인 망신을 시키는구나 하고
마음 속에서 노여움과 미움의 쌍심지를 돋구었던 것이다. 그 불길은 파랗다.
  '일본이 망조가 들었어도 유분수지 아무리 다급한들 그래, 조센징까지 끼여
넣을 게 뭐였담! 그래도 일본인 전범들은 그런대로 눈치가 있어서 다행이야,
녀석은 원! 도대체 그 작자는 약간의 감정이란 걸 갖고 있는 것일까.'
  이쓰키는 더 심해지는 복통을 참는 데 안간힘을 쓰면서, '빌어먹을!'하고
한마디 내어뱉고는, 내일 기회를 보아 우드 중위에게 하야시는 일본인이
아니라 조센징이라는 사실을 밝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일본인이 조센징 때문에 수치에 창피를 더해서야 되겠는가. 적어도
일본인은 조센징과는 다르단 말이야.'
  이쓰키는 그렇게 스스로의 마음에 노여움의 불길을 태워올리는 것으로서
복통이란 육체적인 고통을 이기려 했다.
  그러나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이쓰키는 우드 중위에게 하야시가
조센징이라는 것을 알릴 기회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이쓰키는 자기의
인텔리로서의 연약성에 일종의 자기 혐오를 느꼈지만, 한편 허양어린 자기
위안도 곁들여 있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이쓰키 소위는 그 정도에서 머문 자기에게 웬만큼 만족을 느꼈다.
  사흘 뒤 우드 중위는 완강할이만큼 '상관의 명령에 따랐다.'고 같은 말을
되풀이할 뿐인 하야시로부터 바로 그 상관이란 것이 모리라는 군조인 것을
알아 내고, 곧 헌병대에 연락하여 일군 포로 수용소로부터 모리 군조를
증인으로 불러 내었다.
  그렇게 될 땐자가 우드 중위는 임시 통역인 이쓰키가 여러 번 하야시의 말을
옮기는 데 있어서 어딘지 망설이는 것을 눈치채었으나 그는 굳이 이쓰키에게
그 까닭을 물으려 하지 않았다.
  일본인 포로들이 여러 경우에 같은 일본인 포로들을 되도록 감싸 보려고
앴는 것을 우드 중위는 알고 있었다. 그는 자기도 그런 경우의 같은 처지라면
그럴 것이려니 짐작했다.
  때로 뻔한 것을 아니라고 우길 때는 지나치다고 마음 속으로 혼자 웃기도
하고 이쓰키 같은 인텔 리가 그럴 때는 좀 한심스럽다고 여겨졌으나 그것은
유식 무식을 논하기 이전의 인간 감정이라고 이해하면서도 일본인의 경우
어쩌면 다른 국민의 경우보다 더 동족을 감싸는 감정이 한결 더 승한 것인지
모른다고도 생각되었다. 하여간 우드 중위는 모리 군조를 불러 낸 것이다.
  나타난 모리를 보자 우드 중위는 대뜸 그에게 유도를 하지 않았느냐곰
가었다. 모리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양어깨가 딱 벌어지고 상체보다는 하체가 짧은 모리의 몸집을 보자, 조서의
기입 사하오가는 관계없이 무심코 물었던 대답이 자기의 예상과 적중한 것에
우드 중위는 적이 만족했다. 그러한 별것도 아닌 우드 중위의 만족감은 그러한
모리에 대한 심문에 있어서 모리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게다가 모리는 우드 중위의 앞에 앉을 때 의자의 모서리에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붙였고 대답하는 말투도 여성적일이만큼 나직하고 공손했던 것이다.
  말할 때마다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는 모리의 시늉도 왠지 오늘은 그렇게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우드 중위는 일부러 엄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모리 군조는 하야시 병장에게 미군 포로를 학대하도록 명령한 사실이
있는가?"
  이쓰키의 통역을 듣는 모리의 표정은 황색 인종의 표정이 어쩌면 이렇게도
간절할이만큼 풍부할까 싶도록 그 변화에는 직선적으로 우드 중위의 가슴을
건드리는 힘이 있었다. 눈길을 이쓰키에게서 우드 중위에게로 돌린 모리는
애달픈 표정이 되면서 호소하듯이 우드 중위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저는 어려서 소학교에서 워싱턴의
벚꽃나무에 얽힌 이야기도 들었고, 링컨의 정직한 얘기도 배웠어요. 그리고,
저의 가계는 명예를 존중하는 사무라이 계급의 후손입니다. 저는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일로 전쟁 때 얘기를 들었는데, 그때 우리 고장에서는 러시아의
포로들을 아주 융숭하게 대우했다고 합니다. 저는 부하들에게 미군 포로를 잘
대우해야 한다고 입술이 닳도록 타일렀어요. 절대로 학대해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하야시 병장만은 왠지 그러한 저의 지시를 들으려 하지
않았지요."
  그리고 한 번 이쓰키 소위를 힐끔 쳐다보고 나서,
  "참! 지금이야 생각납니다, 소위님. 언젠가 저는 하야시 병장이 지나치게
미군 포로를 구타하는 것을 보다 못해 그에게 달려들어 그에게서 가죽 혁대를
뺏은 적이 있어요. 그것은 다 아는 사실이지요. 당시의 수용소 근무병들은
물론 미군 포로들까지 말입니다. 정말입니다. 누구한테나 물어 봐 주세요."
  그렇게 말하고 난 모리의 두 눈에는 이상한 일종의 환희 같은 생기마저
감도는 듯싶었다. 그리고 그는 이쓰키를 보고 애원하듯이 덧붙였다.
  "소위님! 그 말을 분명히 전해 주십시오. 제발 부탁입니다."
  이쓰키의 더듬거리는 통역으로 모리의 주장을 듣고 난 우드 중위는 하야시가
포로인 미병을 구타하다가 상관인 모리의 제지를 받았다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였으나 한편, 이제까지 서로 감싸주려는 일본인 포로나 전범들의 일종의
미덕을 보아 온 그에게는 모리가 그 부하인 하야시에게 눈을 빛내 가면서까지
책임의 일체를 뒤집어씌우려는 태도는 적이 의아스러웠다. 왬까? 그래서 그는
물었다.
  "모리 군조는 혹시 하야시에게 어떤 개인적 감정이라도 갖고 있지 않은가?"
  그러자 주춤한 듯이 모리는 그러나 뚜렷이 대답했다.
  "전혀 안 그렇습니다."
  "그러면 하야시는 그대의 부하 가운데서도 가장 잔인한 성품을 가진
병사라고 생각하는가?"
  "물론입니다."
  우드 중위의 물음고 가모리의 그 대답 사이에는 거의 1초의 시간적 간격도
없었다. 모리의 대답이 너무나 서슴없는 데 불만을 남긴 채 거기서 우드
중위는 모리에 대한 심문을 일단 끝내려고 만년필을 내려놓았는데 모리가
퉁스럽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는 조센징이니까요."
  그 한 마디에 미처 그 뜻을 알아차리지 못한 우드 중위가 언뜻 고개를 들어
모리를 보고 다음으로 이쓰키를 쳐다보았다. 이쓰키의 얼굴 표정에 순간적으로
야릇한 변화의 빛이 스쳐가는 것을 우드 중위는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우드
중위는 재빨리 으쓰키에게 물었다.
  "방금 그는 뭐라고 했소?"
  이쓰키가 잠깐 뜸을 들인 뒤 대답했다.
  "하야시는 조센징이라고요."
  "조센징?"
  "일본인이 아니란 말입니다."
  "일본인이 아니라고? 하야시가?"
  "그렇소."
  우드 중위는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인가 싶어 양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그가 일본인이 아니라면 도대체 뭐란 말이오? 말이란 말이오 소란
말이오? 아니면 개구리란 말이오?"
  이쓰키는 황급히 대답했다.
  "코리안! 그렇소, 그는 코리안이오."
  "코리안?"
  우드 중위는 말꼬리를 치올렸다.
  태평양 전쟁이 끝난 싯점에서 미군의 한 중우의 아시아에 관한 지식은
코리안이 어떤 인종인지를 얼른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쓰키가 그의 등 뒤에
걸린 아시아 지역의 지도에 가까이 다가가서 어느 작은 한 점을 가리키자
그제야 우드 중위는 미 8군이 그 남쪽의 반을 점령하고 있는 반도가
코리아이며 거기 사는 주민이 코리안인 것을 새삼스럽게 깨우쳤다.
  우드 중위는 한참 동안 이쓰키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코리안이 일본군에게
편입되어 전쟁에 참가하게 된 내력을 알게 되었지만 일본인과 코리안의 관계와
그 인종적인 차이점을 분명히 실감하기는 힘들었다.
  "가령...... 일본인이 미군인이라면 코리안은 무슨 종족과 비교할 수 있소?'
  그러한 우드 중위의 물음에 이쓰키는 처음에는 아메리카 인디언이라고
했다가 푸에르토리칸이 아닌가 하고 말했다. 그래도 우드 중위는 석연치가
않아 이쓰키에게 말했다.
  "미국인에 대한 필리피너는 어떻소?"
  이쓰키는 대답 대신 신통치 않게 그저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그는 영국인에
대한 아이리시라고 할까 하고 망설이다가 말았다.
  이런 경황 속에서 일본인도 조센징도 영국인이나 아이리시에 비길 꼴이
못된다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이쓰키의 망설이는 시늉을 보고 우드 중위는 마음 속에서 뇌까렸다.
  '얼굴 생김새나 피부색으로 보아 미국 백인과 필리핀 인과의 차이라고도
하기는 힘들군.'
  우드 중위는 그렇게 생각하고 이쓰키를 건너다보며, 그저 빙그레 웃었을
뿐이다.
  이튿날 하야시와 모리를 대질시키고 나서야 우드 중위는 비로소 일본인과
코리안, 즉 조센징의 성격적인 차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대질시키기 위하여 모리와 하야시를 마주앉혔을 때 우드 중위는 한눈에
일본인과 조센징, 즉 코리안의 차이를 깨달은 듯싶었다.
  모리의 태도는 침착했으나 하야시의 태도는 침착하지 못했다. 모리의 말투는
나직하고 예의바르게 느껴졌으나 하야시의 말투는 거치고 무례하게 느껴졌다.
  모리와 하야시의 두 사람 사이에 말이 오갈수록 모리는 더욱더 냉정해졌고
하야시는 더욱더 흥분해 갔다.
  이윽고 하야시의 노기 띤 음성이 고함으로 변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하야시는 확 모리에게 달려들었다. 누구도 예상 못 한 뜻밖의 급습이었다.
그런데 하야시에게 멱살을 쥐어잡혀 숨을 할딱거리면서도 모리는 전혀
대항하려 하지 않고 이쓰키 소위와 우도 중위만 번갈아 보았다. 그 눈동자는
무슨 까닭인지 과녁을 노리는 화살촉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찢어진
목소리로 그러나 힘겨운 듯이 호소했다.
  "말려 주세요, 이쓰키 소위님!"
  그러나 완전이 이성을 잃은 듯싶은 하야시는 모리의 쥐엊바은 멱살을 놓지
않고 울부짖었다.
  "이놈의 자식 네가 시켰쟎아? 응, 그래 이제 와서 안 시켰다고? 이
거짓말장이! 너 전에 뭐라고 했지? 다같이 옥쇄하자고 했지? 그런데 이제 와서
너만 살아 보겠다고? 이 비겁한 자식같으니, 자! 여기서 너 죽고 나 죽자!"
  물론 우드 중위는 그 하야시의 노호의 뜻을 알 수가 없었다. 그의 일어
능력으로는 그 울부짖는 일본말의 뜻을 알아차릴 까닭이 없었다.
  그는 황급히 문 밖의 대기 헌병을 부를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하야시는 계속 황야의 사나운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헌병의 제지로 모리의
멱살을 놓자 하야시의 얼굴과 몸뚱어리는 이쓰키를 향했고 그러고는 우드
중위에게로 돌아왔다.
  그러한 하야시의 두 눈은 불을 뿜는 듯이 빛나고 있었고, 노호는 상처 입은
맹수의 그것처럼, 때로는 높게 때론 낮게, 고함은 신음으로 변하고 신음은
다시 고함으로 변했다.
  그러한 하야시의 두 눈은 불을 뿜는 듯이 빛나고 있었고, 노호는 상처 입은
맹수의 그것처럼, 때로는 높게 때론 낮게, 고함은 신음으로 변하고 신음은
다시 고함으로 변했다.
  그러나 그러한 하야시의 기승도 차차 맥이 풀리며 음성은 누그러져 갔다.
눈에는 슬픔의 빛조차 어리는 듯싶었고 신음은 애원처럼 가냘프게 떨려
나왔다.
  그러나 우드 중위는 뜻하지 않게 갑작스레 일으킨 하야시의 광태에 놀라
그의 거동에 나타난 그 미묘한 기색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다만 그는 하야시의 천성이 예상했던 그대로 짐승처럼 포악하다는 것을 확인
했다고 생각했다. 재량의 여지는 물론 더 이상 하야시의 포로 학대 여부에
관한 조사조차 할 필요가 없다고 단정했다.
  하야시가 헌병에게 끌려 나가자, 우드 중위는 '쯧쯧' 혀를 찼다.
  그러나 그가 광란을 일으킨 동안 소리소리 지른 내용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만약 그 중 한 마디에서라도 그의 학대 행위에 관련하여 그의 인간성의
관련이라도 발견된다면 자기 의견으로서 한 줄 기록해 둘 필요는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승리한 쪽의 검찰관이면서 공정을 잃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쓰키의 대답은 그에게 전혀 그런
자료를 제공하지 못했다. 이쓰키도 그 고함 소리의 뜨승띵 알아차릴 수
없었다는 것이다.
  우드 중위나 다름없이 갑작스레 당한 하야시 광란의 봉변으로 말미암아
얼굴이 하얗게 질린 이쓰키는 뜻밖에도 하야시가 소리소리 지른 말은 일본말이
아니었다고 알려 주었다.
  "일본말이 아니라고? 그럼 그가 무슨 말로 소리쳤다는 거요?"
  "코리아말이오."
  "코리안, 그럼 코리아의 토어였단 말이오?"
  "그런가 보오."
  모리도 가고 이쓰키도 떠난 뒤, 우드 중위는 체스터필드 한 대를 피워 물자
잔뜩 몸을 의자에 누이고 무연히 중얼거렸다.
  "나도 인디언의 방언이나 필리핀의 타갈로그 어를 알아들을 까닭이 없지,
더욱 저런 짐승 같은 고함이어서야......"
  그리고 마음 속에서 이렇게 뇌까렸다.
  '역시 같은 황색 인종이지만 일본인과 코리안은 다르군. 그건 교육과 문화
수준의 차이 때문일까, 종족이 갖는 특이한 성격 때문일까, 어쩌면 후자인지도
모른다. 하야시...... 그 고릴라 같은 코리안. 모리에게 달겨들 때의 하야시의
일그러진 얼굴은 정녕 인간의 얼굴이 아니었어. 인간 가운데도 어쩌면 생래의
타고난 악인이란 있는지도 모르지.'
  그러한 우드 중위의 뇌리에 셰익스피어의 극작을 위시하여 숱한 문학 작품
속에 등장하는 악한 성격으로 규정되는 인물들이, 그리고 <신약 성경>과 <구약
성경>의 바람직하지 않은 갖가지 유형의 인물들이 연이어 떠오르고 그리고
사라져 갔다.
  그러다가 그의 뇌리에 마지막까지 남아난 하나의 인간형은 다름아닌 마크
트웨인 작 <톰 소여의 모험>에 나타나는 '인디언 조'였다. 그 어린 톰 소여와
허클베리핀을 지긋지긋하게도 못 살게 굴던 그 인디언 조......
  그제야 우드 중위는 자기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다가 의자에 기댄 체 곤히
잠들고 말았다. 필리핀은 몹시나 더웠다.

    4. 아픔과 분노
  한편 이쓰키 소위의 충격은 우드 중위의 그것과 달랐다.
  그는 하야시가 모리를 보고 울부짖은 소리, 자기를 향해 던져진 저주의
소리, 우드 주위에게 한 넋두리 같은 애달픈 원망의 소리를 너무나 똑똑히 두
귀로 들었던 것이다. 실은 하야시는 조선말로 소리지른 것이 아니라 분명한
일본말로 고함쳤던 것이다. 다만 극도의 흥분으로 찢어진 그의 일본말은 우드
중위의 일어 이해의 한계를 훨씬 너어섰을 뿐이다.
  이쓰키는 우드 중위에게 하야시가 한 말을 차마 옮길 수 없어서 그가 일본말
아닌 조선말을 했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하야시는 모리의 멱살을 잡고 함께
죽자고 소리친 다음 이렇게 다그쳤던 것이다.
  "이자식아, 네가 배워 준 그대로 한 것이야. 네가 소총의 개머리판으로
때리면서 똥 묻은 구둣바닥을 핥으라고 하면서 그렇게 안 하면 죽여 버린다고
위협을 주면서 알으켜 준 그대로 한 거란 말이야. 안 그러냐? 그렇다고 해!
그렇다고 하란 말이야! 미군 포로들을 사람도 아닌 도깨비나 짐승이나처럼
그렇게 때리라고 일러 놓고 멀찌감치에서 술 마시고 담배 피고 낄낄대며
바라본 것은 어느 누구였지? 응! 말해 봐! 입이 있으면 말해 보란 말이다!"
  그리고 이쓰키 소위를 쳐다보고는 이렇게 퍼부었던 것이다.
  "소위님, 장교님들은 일시동인이나 같은 폐하의 적자니 하셨지요. 일본인과
조센징은 하나의 같은 뿌리에서 나온 잎새 같은 것이라고요. 그런데 역시
그렇지 않았군요. 소위님, 이 조센징이 뭐 잘못한 게 있었나요? 소위님,
일본인이 말 잘 들었다는 게 잘못이었떤가요. 공부 많이 해서 세상 치리를 잘
아실 소위님. 역시 일본인은 일본인이고 조센징은 조센징이란 말이지요? 그
밖에는 다 치레뿐의 거짓말이었지요. 좋아요. 죽죠. 내가 죽죠. 당신네 들은
사세요. 이것 참 재미있군요. 그렇게 깨끗이 주겠다던 당신들이 산다고
발버둥치니."
  왜 하야시는 갑작스레 조센징으로서의 원한을 털어놓았던 것일까?
  이쓰키는 그 까닭을 안다. 숨이 막히고 눈알이 튀어나도록 멱살을 붙잡힌
모리가 그 억센 하야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는 안간힘의 얼떨결에 그만,
  "더러운 조선놈의 새끼!"라고 하고는 이쓰키를 보면서,
  "소위님, 조센징 때문에 이 일본인이 죽습니다. 이쓰키 소위님, 좀 구해
줘요."
라고 소리쳤을 때, 어찌 된 까닭인지 하야시는 모리의 틀어잡았던 멱살을 놓고
시선을 이쓰키에게로 돌렸던 것이다.
  그이 눈에는 경악과 증오의 빛이 교차하면서 불꽃을 튕기는 듯싶었다.
  하야시는 모리의 그 한 마디에 순간적으로 모리건 이쓰키건 일본인이란
일본인은 모두 조센징인 자기와는 거리가 먼, 전혀 딴 패라는 것을
느꼈으리라.
  다음으로 하야시의 눈길은 우드 중위에게로 옮겨 갔던 것이다.
  "야 이 양키야, 어째 이길라면 빨리 이기지 않구서 질질 끌어 갖구 날 요
모양 요 꼴로 만들었지? 눙이 파래 못 보느냐, 귀가 막혀 못 듣느냐, 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야단이지. 이 재수 없는 조센징 죽으면 시원하겠어? 그렇다면
죽어 주마. 얼마든지 죽어 주마. 날 잡아먹어라, 이 양키야."
  그러나 거의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는 우드 중위는 울부지즌 나우리 속의
짐승을 보듯이 지그시 양미간을 찌푸리고 하야시의 일거수 일투족을 쳐다볼
뿐으로 그가 하야시를 인간 취급했다면 그것은 헌병을 불러 그르르 밖으로
끌어 내게 한 일일 뿐이었다.
  어떻든 하야시의 광란은 이쓰키 소위에 있어서 분명 하나의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쓰키는 그 충격이 없었던 것처럼 자기 마음 속에 자국을
남기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태웠다. 그래서 이쓰키는 모리에게로 그 생각을
돌렸다. 그는 모리 군조가 그렇게도 비겁하고 간악할 줄은 미처 몰랐다.
  일본 제국 육군에서의 전형적인 하사관, 병졸들보다는 물론 웬만한 하급
장교보다도 이른바 군대 가마솥의 밥그릇을 더 먹었다는 연공과 경험과
요령으로 은영중 군조직의 밑바닥을 지배하던 노련한 직업 군인 중의 한 분자.
  병졸들을 곯리는 데 갖가지 고문 방법을 교묘히 악용한 이론 군대의 대표적
사디스트들. 마음 약한 하급 장교는 그들을 무시하고는 부대를 지휘하기가
힘들었고, 그래서 경험이 적은 인텔리 하급 장교에 대한 출신 가정의 계급적
시기와 인간적인 반감은 그들의 검은 원한 속에 깊숙이 간직되어 있었다고
할까.
  요령만 부리며 군대의 저변에서 포악해질 대로 포악해진 그네들의 성품
속에는 어쩌면 목숨을 거는 결정적인 위기에 처했을 때, 이른바 군인답지 않게
비겁해질 대로 비겁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모리도 그러한 하사관 가운데의 한 분자로서 대학 출신의 하급 장교인
이쓰키로서는 생리적인 거역 반응을 일으키는 대상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쓰키 소위로서는 이 싯점, 이 마당에서 모리의 비겁성을 새삼스럽게
드러낼 수도 없는 일이었고, 또 그럴 입장에도 있지 못했다. 그로서는
누구든지 한 사람이라도 더 동포인 일본인 포로가 전범 재판의 대산에서
벗어나기를 바래야 했고, 힘이 미치는 데까지 그렇게 되도록 애써야 했다.
  전쟁이란 이상 상황에서 그토록 숱한 피아의 생명이 상실되었는데 전쟁
종결로 이제 평화란 정상 상태로 돌아간 상황에서 이상 상황과 관련된 점죄를
재구성하여 그로 말미암아 더 이상 인명을 상실케 할 필요가 어디 있을
것인가.
  그러나 그러한 문제를 골똘히 생각하기에는 이쓰키 소위의 심신은 너무나
지쳐 있었다. 사고의 정지를 가져온 그의 뇌리에 또 한 번 하야시의 노기로
일그러진 얼굴이 떠올랐다.
  하야시는 머지 않아 처형될 것이다. 모리는 전범 명단에서 제외될 것이다.
하나는 죽고 하난느 살아 남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그런 일들은 너무나
흔했다. 그러니까 그 하나의 죽음과 그 하나의 사태도 그 숱한 운명의 희롱
중의 것이지만 과연 거기 어떤 상관 관계가 성립되는 것일까? 어차피 죽어야
하는 조센징, 그렇다고 그와 관련된 일본인도 따라 죽어야 할 필연적인 까닭은
없었다. 역의 경우라도 그 이치는 매일반이었다. 일본인 하나가 죽는다고
조센징 하나가 따라 죽어야 할 까닭도 없는 것이라는......
  이쓰키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으로서 뇌리에 찌꺼기처럼 달라붙어 좀처럼
밀어지지 않는 하야시의 영상을 말끔히 지워 보려고 애썼따.
  그러나, 한때 자기가 마음먹고도 감히 밝히지 못한, 하야시가 조센징이라는
것을 모리가 서슴지 않고 털어놓은 데 대하여 갖게 되느 이상야릇한 감정.
  모리가 비겁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면 나는 과연 비겁하지 않았다고
자위할 수 있을까.

  광란을 일으켰다고하여 중영창에 갇힌 하야시는 들창 너머로 검은 하늘에
깔린 별밭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이미 당황하고 있지 않았다. 지나간
자기의 짧은 생애가 이치에 닿지 않거나 귀가 맞지 않는다고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닥쳐올 죽음을 앞에 하고 당황하기만 하던 그로 하여금
오늘 이토록 마음의 갈피를 잡게 한 것은 무슨 까닭이었을까.
  낮게 내려앉아 머리 위에 깔린 먹구름 탓으로 도무지 방향을 잡지 못하고
당황하던 나그네가 어느 일순 그 머구름을 뚫은 그 틈새로 내려쏟는 한 줄기
눈부신 빛에 방향의 갈피를 잡듯이 하늘의 계시인 양 활짝 그 마음의 문을
열게 한 것은 공교롭게도 그 비열한 모리가 얼결에 내어뱉은 하야시에 대한
증오에 찬 한 마디였던 것이다.
  모리가 하야시를 향하여,
  "이 더러운 조센징 녀석."
이라고 한 그 한 마디가 하야시의 귓전을 울리는 순간 하야시는 이제까지
안타깝기만 하던 것 --- 그 모든 것의 부채눈 같은 구심점의 참뜻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제까지 흐리터분하던 마음의 시야는 화닥닥 밝아지면서 시계는
거울을 들여다보듯이 선명해졌다. 실로 눈부시게 선명해진 것이다. 그래서
하야시, 아니 조센징 임은 그 선명한 시계 속에 그의 지나간 24년간의 짧은
생애를 돌이켜보았다.
  '그때 아버지의 분부에 따랐더면? 그랬으면 어머니를 서럽게 하지도 않았을
텐데...... 멋모르고 날뛴 혈기 넘치는 나에게 그때의 아버지의 분부와
어머니의 말없는 만류는 너무나 미약했었지...... 어찌하여 그때 우리
고장에는 한 고삐 끊은 들판의 송아지 같은 나더러 너는 조선 사람이다. 조선
사람이 그래서는 안된다고 한 마디 호통만 쳐 주었던들......'

    5. 고향의 풀밭에는
  그는 임재수. 1921년 평북 구성군의 면소재지에서 자작 겸 소작인 아버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작이라야 밭 한 정보에 집 둘레의 채마밭이 5백여
평, 그리고 닷 마지기의 논을 소작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와 형제는, 농한기에는 가까운 그모강에 가서 품팔이를 해야 했다.
삼형제가 모두 보통 학교(당시의 국민 학교)만을 나오고 말았지만, 지능
정도는 한결 같이 보통이어서 특지가의 도움으로 더 이상의 학교를 갈 수 있는
재능이 발휘 된 적도 없었다. 다행히 삼형제가 모두 건장했지만, 특히 재수는
유달리 골격이 장대하여 열 여덟 살 때 벌써 단오절의 씨름 대회에 나가
송아지마리나 광목필을 타 오곤 했다. 그것은 적지않이 집안 살림에 도움을
주었다.
 열 아홉이 넘어부터는 구성군내만이 아니라, 인근 군에까지 원정을 갔다.
  당시 평북에서 그런 정도의 집안 형편일 때 그 자제들의 소망이요 꿈은 대저
두 가지로 집약되었다.
  그 하나는 순사가 되는 일이며, 다른 하나는 트럭 운전수가 되는 일이었다.
  그럴 듯한 정보 정복에다 긴 칼을 허리에 의젓이 찬 순사란 어린 소년들의
눈에 그지없이 위풍 당당하게 비쳤던 것이며, 오지의 유일 무이한 현대적 교통
수단인 트럭의 운전수도 역시 그럴 듯한 운전모를 눌러 쓰고 목에는 비단
머플러르 두른다는 것은 멋 중의 멋으로 병싶고, 가다가 차를 세우고 길 가는
사람들을 태워 준다는 것은 수입도 수입이려니와 훌륭한 선행의 실처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순사가 되기 위해서는 시험을 치르기 위한 어려운 공부를 해야
했고, 운전수가 되기 위해서도 오랜 조수 생활과 역시 면허를 얻기 위한
공부를 해야 했는데 그러한 준비의 여유나 공부에 필요한 재간이 재수에게는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재수는 씨름에서 소를 탈 수 있는 자기의 힘을 믿었고, 그러한
믿음에서 오는 자부는 그로 하여금 남몰래 이대로 오직 농촌에서 썩을 수
없다는 은근한 기대를 갖게 했다. 그에게 그토록 막연하나마 어떤 기대에 살게
한 다른 이유의 하나는 그렇게 집일을 도우며 지내 봐야 넉넉지 못한 농가의
셋째 아들로서 제 고장에서는 뾰죽한 것을 바랄 수 있는 아무런 실마리도
찾아지지 않았다는 데도 있었다. 그러한 처지의 그에게 일본군이 침략전의
전역을 넓히면서 필연적으로 병력이 달리게 되자 궁여지책으로 제정한 제 1차
반도인 지원병 모집은 그의 팔자에 일대 전환을 가져올 수 있는 하늘의
소리처럼 받아졌던 것이다.
  며칠 동안 밤잠을 안 자며 그려 본 일본 제국군 제복을 입은 스스로의
용자에 도취할 대로 도취한 재수가 지원병 모집에 응할 결심을 피력하자
어머니는 질색을 했고, 아버지 역시 못마땅한 듯이,
  "너 일하기 싫어진 모양이구나."라고 말했으나 위의 두 형은,
  '해 볼 만한 일.'
이라고 찬성의 뜻을 보였다. 그는 두 형의 찬성에 힘을 얻어,
  "아바지 오마니 안심하시라우요. 사나이새끼레 이 촌구석에서 이러구만
앉았가시오. 집에는 형님들이 둘이나 있구, 나 하나쯤 한 번 나서 봐두
좋다구요. 잘하면 조장까지 된대디 않가시오."
하고 잔뜩 가슴을 펴 보였다. 그래도 아버지는,
  "그래야 왜놈 앞잽이디 거 뭐갔니?"
라고 했으나, 재수는 혀를 차듯이 하면서,
  "글세, 아바지 세상 그르케 생각디 말라구요. 대학교 나온 것들이 그런 거
몰라서 군수를 함메, 재판소에 취직함메 하갔소. 이제 세상 달라뎄다구요.
왜놈 세상이라구 가만히 죽티구 앉았다구 뭐가 됩네까. 안 그래요 아바지."
라고 당당한 주장을 폈던 것이다. 두 형이 그에게 합세한 것은 물론이다.
  그래서 재수는 지원병 모집에 응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여전히 얼굴을
펴지 않았으나, 재수의 걱정은 그러한 부모의 반응에 있었던 게 아니라 시험의
합격 여부에 있었다. 합격 통지를 기다리는 그는 몹시도 조바심쳤다.
  한 가족이 모두 밭에 나가 김을 매고 있던 어느 날 백여 년 묵은 노송의
우거진 그늘 밑에 깔개를 깔고 둘러앉아 물에 만 조밥과 된장 찍은 마늘종으로
점심을 먹고 있었다. 그렇게 한 가족이 꿀맛 같은 점심 먹기에 몰두하고
있는데, 어느 새 거기 다가온 순경을 먼저 발견한 것은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본능적으로 양미간에 어두운 그늘을 흘렸으나 그러한 어머니의 변한 안색을
보고 모든 가족의 시선이 일제히 순경에게로 쏠리자 순경은 일가족을 주욱
내리훑더니,
  "하야시 유시로가 누군가?"
라고 물었다. 순간 재수는 입으로 가져가던 조밥 뜬 숟갈을 도로 밥그릇에
내려놓았다. 그러한 그의 손이 잔 가락으로 떨렸다. 그는 황급히,
  "나, 나요."
하고 더듬었다. 그러자 순경은 호주머니에서 쪽지 하나를 꺼내 펴 보이며,
  "임씨 집안의 영광이외다. 지원병에 합격했다는 통지요. 축하하오."
하고 그 쪽지를 든 팔을 쑥 재수에게로 내어밀었다. 순간 재수는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두 팔을 번쩍 들며,
  "덴노오 헤이까 반자이."
하고 거푸 세 번을 외쳤다. 그 바람에 풀밭 위에 펴놓은 깔개 위의 불안전하게
놓여졌던 밥과 찬그릇이 한꺼번에 나뒹굴어 서로 맞부딪치며 순시에 조밥과
된장과 마늘종의 범벅을 만들어 놓았다. 정신 없이 앉아 있던 가족이 기겁을
하며 일제히 자리를 일어난 것은 물론이다.
  순경은 만세를 삼창하고 난 임재수 --- 하야시 유시로에게 통지서를
건네주더니 씁쓸히 웃고는 허리의 칼을 절걱거리며 등을 돌리고는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 갔다. 그렇게 해서 하야시 유시로는 며칠 후 군민 환송리에
여덟 명의 다른 합격자와 함께 용약 평양의 일본군 연대를 향해 떠났다.
  그의 의기는 자못 충천했다.
  두 형은 그를 환송하기 위해서 하루의 일을 쉬고 읍까지 나갔으나, 아버지는
집에 남아 말엇밑이 혼자 도랑을 팠고, 어머니는 부엌에서 눈물을 흘리다가
남편에게 들킬까 싶어 집에서 가장 먼 산기슭의 메밀밭으로 가서 김을 매는 둥
마는 둥 하염없이 울었다.
  입영한 하야시 유시로는 훈련 과정에서 발군의 성적을 나타냈다. 출세의
유일 무이한 터전으로 알고 오로지 정진하는 그에게는 힘에 겨운 것도 거북한
것도 싫은 것도 없었다. 매조차 아플 것이 없었다. 그러한 그의 정진을 도운
것은 그의 빠져난 체구와 무류의 강한 체력이었다.
  그는 특히 총검술에 있어서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했다. 20관이 넘는 체력이
총끝 한 점에 집중된 그의 목총검이 날쌔게 내려칠 때 그 일격을 목덜미에
맞은 자는 누구 하나 예외 없이 공처럼 튕겨서 네댓 걸음 뒤로 나자빠졌다.
그래서,
  "저 하야시라는 녀석!"
할 때 거기에는 일종의 외경의 뜻이 깃들게 되었다. 중대 대항의 총다검술
시합에서 그가 속하는 중대는 그가 있음으로써 언제나 시합에 이겼다.
  씨름 시합에서도 그것이 일본식이어서 처음에는 좀 서툴렀으나, 요령을
얻고부터는 그는 단연 무적이었다.
  중기관총을 수저처럼 다루는 그가 만주 벌판에서 싸우고 다음으로
필리핀으로 파견되어 싸우다가 미군 포로 수용소로 옮겨진 것도 그가 총검술에
그토록 강하고 시합에서 무적이었던 탓이다.
  인사계하사관이 수용소 요원을 추릴 때 그가 있어서는 중대 대항 시합이
멀쑥해져서 재미가 없다는 평소의 생각을 얼피 삥전보에 작용시킨 우연이 그를
포로 수용소로 가게 했던 것이니까.
  그래서 결국 그는 전범으로 낙인 찌기는 신세가 되고 말았는데, 그가 마냥
가평범한 병사였던들 그는 일반 부대에서 싸운 일개 보병으로서 전사하지
않았다면 포로가 됨으로써 전범으로 처단받지는 않았을는지 모른다.

    6. 증인 조서의 문자들
  우드 중위는 논고를 앞두고 하야시에 관한 증인 조서를 다시 한 번
훑어보았다. 그의 학대를 받은 미병들의 진술이었다.
  --- 그는 나더러 개처럼 마룻바닥을 기도록 일렀소. 그것을 내가 거절하자
그는 자기 다리를 나의 다리에 걸어 밀어 쓰러뜨리고는 몽둥이로 수없이
어깨와 허리와 허벅다리르 후려쳤소. 그리고 개처럼 세 바퀴 방 안을 돌게
하더니 개처럼 짖으라는 시늉으로 자기 자신이 왕왕왕왕 하고 기묘한 소리를
내어보이더군요. 그래서 내가 서너 번 왕, 왕, 왕, 왕, 왕 하고 소리를 내자
그는 크게 한 번 너털웃음을 웃고는 방 안 한 구석에 둘러앉아 있는 동료들을
쳐다보면서 또 한 번 회심의 웃음을 지었어요. 그는 일어서려는 나의 눈앞에
자기의 한 발을 쓰윽 내밀더군요. 그리고 혀를 내어 저어 보이는 것이 자기
구놔의 바닥을 핥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어 보이자
그는 몽둥이로 정신이 아찔하도록 나의 머리통을 후려갈겼습니다.
  --- 그닷없이 식사하고 있는 나의 뒤통수를 눌러서 찌꺼기 속에 얼굴을
처박았습니다.
  --- 그는 한밤에 나를 방 한 구석에 세워 놓고 잠을 자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하야시 자신은 자면서?"
라는 우드 중위의 물음에 이 증인은,
  "그도 한밤새 자지 않고 내 앞에서 먹고 마시고 담배를 피웠어요."
라고 대답했다.
  --- 그는 우리들 여섯 명을 벌준다고 하루 종일 한 끼도 먹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우리들 스무 명을 두 줄로 마주 세워 놓고 서로 따귀를 후려치라고
호통을 쳤어요. 하는 수 없이 서로 때리는 시늉을 하자, 그느 자기 가까이 서
있는 한 명의 따귀를, 때리는 소리가 나도록 힘껏 후려치고는 그렇게 하라고
소리쳤습니다.
  --- 그는 윌리 일등병을 주먹으로 쓰러뜨리고는 한 발로 그를 짓누르더니
끝내는 두 발 다 그의 몸뚱어리에 올려 놓고 전신의 힘으로 그를 뭉개
버렸습니다. ......윌리 일등병이 죽은 것은 한 달쯤 뒤의 일입니다.
  --- 그는 나의 옆구리와 허리를 쥐어틀어 날름 들어올리더니 열려진 창문
밖으로 던져 버렸습니다. 그때 나의 체중은 40킬로로 줄어 있었지요.
  --- 그는 나의 밥그릇에 탁 침을 뱉더니 먹기를 강요했습니다. 내가 먹기를
거절하자 그는 나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폭행을 가하고 사흘간이나 영창 속에
집어 처넣었습니다.
  --- 한 마디로 그는 악마의 상징이었지요. 누구나 그를 보기만 해도
육체적인 고통을 느꼈으니까요.
  우드 중위는 새삼스럽게 양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하야시와 함께
근무한 일본군 감시원들의 진술을 훑어보았다.
  --- 그는 내가 맡은 미군 포로를 자기가 곯려 준다고 가로맡아 나선 일이
있었습니다.
  --- 그는 일본군 동료들에게도 난폭했습니다. 타고난 성품 탓이
아니었던가싶소.
  --- 미근 포로가 나를 조롱하는 듯싶어 화가 나서 들고 있던 삽으로 한 번
그 미병의 엉덩이를 후려쳤는데, 때마침 내 옆에 있던 그가 나에게서 삽을
나꿔채더니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삽의 날카로운 모서리로 그
미병의 정강이를 후려치더군요.
  --- 물론 그 미병의 정강이에서는 피가 나면서 검붉게 바지를 물들였습니다.
  --- 흥분한 그는 동료들이 붙들고 말리는데도 한사코 뿌리치며 미병들을
몽둥이로 쳐서 그 거인을 땅바닥에 쓰러뜨려 놓고야 말았습니다.
  --- 저는 그더러 포로라고 그렇게 잔인하게 다루는 게 아니라고 일렀어요.
그러나 그후도 그는 그 태도를 고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토록 거의가 하야시의 태도에 부정적인 증언이었으나, 단 한 건의 예외는
있었다. 그렇다고, 그것은 하야시의 태도르 긍정하는 것은 아니었고, 따라서
그에게 결코 유리한 증언이랄 수는 없었으나 한 마디로 걷잡을 수 없이 애매
모호했다고나 할까.
  "그가 잘했다는 것은 아니지만요."
  "그러면 잘못했단 말이군."
  "아니지요, 그 당시는 누구나 그럴 수도 있었다는 거지요."
  "너도 하야시 같은 행동을 했다는 말인가."
  "아니지요. 내가 그자라면 그랬을는지 모른다는 거지요. 그가 나라면 안
그랬을 거라고도요."
  "그게 무슨 소린가? 혹시 그가 코리안이고 네가 일본인이라는 그런 차이를
말하려는 거냐?"
  "아니지요."
  "그럼 무슨 말을 하는 거냐."
  "그는 몹시 힘이 세었다는 거지요."
  "그러면 네가 하야시만큼 힘이 세었다면 그처럼 미병을 학대했을 것인가."
  "그건 모르지요. 나는 그처럼 힘이 세지 않은 것이 사실이니까요."
  그때 우드 중위는 동양인이란 한 묶음으로 쳐서 그 사고와 행동을 전적으로
이해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왜 그럴까, 그것은 크리스차니티의 결여 탓일까. 아니면 인간성의 근저가
근본적으로 이질적인 탓일가."
  우드 중위는 그렇게 성격이 다른 두 가지 조서를 훑어보고 나서 안막에 한
번 하야시의 차디차고 그늘진 얼굴을 그려 보고는 하루빨리 이 직무에서
해제되어 미국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몹시나
간절했다.

    7. 선교사의 딸
  그러면, 필리핀의 미군 포로 수용소에서 근무한 병사도 많았는데, 그 중
전범으로 지목된 가운데서도 유독 손꼽히는 학대의 원흉으로서 그가 견주어진
까닭은 어디 있었을까. 그가 가장 혹독하게 미군 포로를 다루었다는 점에는
전혀 이의가 없었다. 미군 포로는 물론, 수용소 근무의 일본군 전체의 중론이
그랬고, 그것은 그 자신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의 선척적인 체격과 체력이 남들처럼 미군 포로를 다루었어도 남달리
혹독히 다룬 것으로 보이게끔 작용했고 표현되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가 남달리 미군 포로를 혹독히 다루어야 할 그만의 지닌 어떤
사정이라도 있었다는 것일까.
  처음부터 그런 사정이 있었다기보다 점차 생기게 된 것이며, 그럼으로써
그의 포로를 다룬 행위에는 그의 체력 탓만이 아닌 인위적인 작용이 혹독히
표현되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 같다.
  그럼녀 그 사정이란 어떻게 생긴 것이며, 그래서 그는 남달리 어떻게 미군
포로를 혹독히 다루게 되었던 것일까? 처음 포로 수용소에서 근무하게 되었을
때 하야시 병장이 그는 백인인 미군 병사드를 보고 자기가 어렸을 적에 본
적이 있는 미국 사람들을 상기했다.
  그것은 아버지와 형들이 농한기에 가서 품팔이를 하던 운산 광산 주인 백인
가족이며 또한 어려서 선천의 외갓집에 갔을 때 본 백인 선교사의 가족들이다.
  미국인 광산주는 그후 곧 조선 사람에게 광사늘 팔아 넘기고 본국으로
돌아가 버렸지만, 외갓집이 있는 선천의 선교사는 재수가 꽤 성장할 때까지도
남아 있어서 연필 자루를 받는 재미로 나간 주일 학교에서 먼발치로 여러 번
그 미국인 선교사의 가족을 보았엇다.
  내외가 다 쭉 빼어진 후리후리한 키에, 밤색 머리와 금발 --- 더욱 열 두세
살 나 보이는 선교사 딸의 기다랗게 늘인 금발은 눈부셨고 희뿌열 대로 희뿌연
얼굴에 박힌 파란 눈은 이승의 인간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재수는 주일
학교에서 주는 카드 속에 그려진 천사가 바로 이 소녀가 아닌가조차 생각했다.
  그 무렵 재수는 엉뚱한 승강이를 한 일이 있다. 그것은 선교사 가족은
무엇을 먹고 사는가 --- 고기와 빵을 먹고 채소도 먹는데, 허연 거품 같은
것도 즐겨 먹고 타버린 가마솥에 부어 끓인 숭늉 같은 것에 설탕을 타
먹는다는 말도 나왔다. 그러나 재수 또래의 승강이의 초점은 과연 그들도
변소에 가서 주저앉느냐는 데 있었다.
  결국 그들도 사람인 이상 변소에 갈 것이라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지만,
그때 재수는 그들의 그러한 광경을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백인에 대한 먼발치의 그토록 아련한 인상뿐인 재수에 있어서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 일본군이 백인들과 싸우게 되었다는 소식도 그 백인 선교사 일가족에
대한 인상을 손상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원병으로 일본군에 들어가서도 시골 청년이 남달리 잘나 보려는 개인적인
작은 모험으로 근무에 열중한 그에게 귀축미영이라는 추상적인 구호는 백인에
대한 증오를 실감케 하는 힘은 갖지 못했다.
  그는 필리핀의 미군 포로 수용소에 근무하게 되어 거기서 오랜만에 백인들을
본 것인데, 거기서 비로소 백인들도 자기와 다름없이 먹고 배설하고 울고 웃고
다소 경박하고 웬만큼 겁도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선교사
일가족의 인상이 백인에 대한 유일한 인상이었던 그에게 그러한 인간 백인을
느끼게 된 것은 일종의 경미한 실망이기도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실망이 그로 하여금 미군 포로들을 잔인하게 다루게 한
요인은 아니었다. 포로 감시병 하야시 병장은 결코 처음부터 그들에게 잔인
냉혹하지 않았다. 모리 군조가 유별나게 덩치가 큰 하야시로 하여금 그에
버금가는 큰 덩치의 미군 포로들을 주로 다루게 한 데서부터 하야시와 미군
포로들과의 바람직하지 못한 관계가 생기기에 이른 것이다.
  그것은 언젠가 모리가 하야시를 시켜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키 큰 미군
포로를 구타케 한 데서 비롯한다.
  모리가 하라는 대로 하야시가 그자의 따귀를 그렇게 세차게는 치지
않았는데, 그 한 대에 그 미병은 맥없이 푹 거꾸러졌던 것이다. 어이가 없어진
하야시는 피식 웃고 그것으로 몸을 돌리려 했다.
  그때 모리가 꽥 소리를 지르며, 쏜살같이 하야시에게로 달려와 느닷없이
하야시의 뺨을 연거푸 후려쳤다. 뜻밖의 일이라 하야시는 뭐가 잘못되었는지는
도무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까닭은 곧 판명되었다. 그 정도로 때리고 그만둔 하야시가
잘못이라는 것이었다. 한 대에 쓰러진 미군 포로가 죽는 시늉을 하는 것은 더
이상의 매를 피하기 위한 간교한 엄살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알았어? 이렇게 때려 보란 말이야."
하고 모리는 하야시에게 하나의 시범으로서 있는 힘을 다하여 하야시를 때려
보인 것이었다. 그래서 그 미군 포로가 거의 반이나 죽도록 하야시에게
얻어맞고, 그 슬픈 비명은 수용소의 공기를 가른 것이다.
  그런데 모리가 이르는 대로 그렇게 호되게 미병을 쳐놓고 나서 하야시가
모리가 서 있을 곳에 눈을 주었을 때 모리는 언제 어디로 사라졌는지 그는
거기 없었다.
  미병이 미워서가 아니라 모리가 보고 있을 시선을 의식하고 한 짓이었는데,
모리가 지켜보고 있으리라고만 믿었던 그곳에 모리가 없음을 깨달았을 때
하야시는 철렁 가슴이 내려앉는 허한 가슴 속에 불지도 않는 차가운 바람이
스쳐 가는 듯싶었다. 그러자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땀이 그의 전신을 철벅
소리가 나도록 적시며 흘렀다.
  한 번은 애띤 얼굴의 한 미병을 보고 그 눈부신 금발과 푸른 눈에 얼핏
어렸을 적에 본 선교사의 어린 딸을 연상한 일이 있었다.
  얻어맞고 주눅이 들려도 그에게서는 치사하다는 것을 느낄 수 없었고,
생리적인 배설으 띵상상해도 그렇게 더러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언젠가 하야시는 그와 마주쳤을 때 자기로서는 선교사의 딸을
연상하는 데서 느끼는 일종의 친근감을 가지고 그에게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런데 그는 갑자기 얼굴 표정을 굳히면서 슬금슬금 뒷걸음 치는
듯하더니저만큼에 이르러 휙 몸을 돌려 날쌔게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
  하야시는 그만 아연했다. 다음 그는 마음이 섬뜩해짐을 느꼈다. 그가 자기를
향해 욕지거리 하든가 아니면 대어들어 자기의 따귀를 갈겼어도 자기의 마음은
그처럼 섬뜩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별로 생각이 깊지 않고 신경이 둔한 편인
그에게도 그것은 분명 하나의 충격이었던 것이다.
  다른 미병들이면 몰라도, 자기가 어렸을 적에 본 선교사의 딸을 연상한 애띤
그가 자기에게 그런 태도를 보였다는 것은, 하야시로서는 미처 생각해 보지
못한 허를 찔린 느낌이 들었다.
  그들이 보잘 것 없는 식사를 걸신들린 드싱 먹고 있는 것을 눈여겨보면
어렸을 적에 금광주와 선교사의 이승의 것 같지 않은 생활을 보아 온
하야시에게는 신기롭기 짝이 없었다.
  어쩌다 저들이 저런 꼴이 되었는가. 저들도 저런 꼴이 될 수 있는가. 결국
저들도 나와 조금도 다름엇는 인간이려니 느껴지면서 상관들이 입이 닳도록
말하듯이, 정녕 전쟁에 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앞설 뿐, 포로 수용소의
감시원으로서 모리 같은 상관이 이르는 데 따라 미군 포로들을 호되게
다룰지언정, 상관들이 아무리 그들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일으켜도 처음
하야시의 가슴에는그들을 미워할 마음이 좀처럼 생겨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하야시로 하여금 그들에게 미움의 감정을 돋우게 한 것은 미군
포로들이 그에게 보낸 증오어린 시선이었다. 아니 그러한 시선으 순간적으로
하야시에게 부어질 뿐 그들은 곧 그 시선을 딴 데로 돌렸다. 아예 미군
포로들은 하야시와 시선을 섞으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한 그들의 거동이
하야시로서는 차차 견딜 수 없게 되어 갔다.
  '이녀석들이 날 뭘로 보는 거야. 그래, 그래서 나를 어쩔 테야 전쟁에 지고
포로가 된 주제에......'
  그러나 그의 그러한 고까운 생각은 노여움의 심지에 불길을 당기기는 했으나
좀처럼 증오의 폭발에 이르지는 못했다. 어렸을 적에 어렴풋이 지닌 백인데
대한 외경과 기대가 잠재적으로 작용한 것이라고 할까.
  그러나 차차 모리의 명령을 행동화하는 데 있어서 보다 더 적극성을 띠게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그것은 모리에 대한 심복과는 달랐다.
  어떻게 보면 미련할이만큼 순수한 하야시는 일본 군대에 있어서 일본인
병사의 어느 누구보다도 더 순수 배양된 일본군 병사였는지 모른다.
  그는 명령을 수령하는 데 있어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상하의 위계를
지키는 데 있어서 사적인 자의조차 절대적인 명령으로 간주할이만큼 군대 내의
질서를 지키는 데 투철한 병사로 훈련됐던 것이다. 그는 그에게 가해진 어떤
부당한 사적 제재도 오로지 자기가 잘못한 데 대한 당연한 처벌로 생각하거나,
아니면 그를 훌륭한 병사로서 키워 주는 고마운 수련으로 받아들였다.
  그러기에 그는 계급이 오르며서 그 직위가 높아질수록 그보다 처진 계급의
직위가 낮은 병사들에게 자기의 명령에 순종할 것을 가차 없이 요구했다.
거기에 일본인이고 조센징이고의 구별이 없었던 것은 물론이다. 아니, 그는
자기가 일본 제국의 자랑스러운 병사임에 한 번도 의심을 품어 본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자기가 일본 천황의 이른바 적자임을 잠시나마 회의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모리를 한 번도 인격적으로 따져 본 적이 없고 따라서
자기 자신을 인격적으로 평가해 본 적도 없었음은 물론이다.
  모리는 군조로서 자기의 상관이었고, 하야시 자신은 병장으로서 그의
부하였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가 자기 자신에게 불만을 느꼈다면 그것은
모리가 하라는 대로 하지 못한 탓으로 모리의 비위를 상하게 한 경우뿐이다.
  모리가 자기에게 화를 내면, 하야시는 자기에게 화를 내는 모리에게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모리로 하여금 화를 내게 한 자기 자신의 결함이나 미숙에
대하여 화를 내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하야시는 완전 무결한 모리의
꼭두각시였던 것이다.
  간교한 모리는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하야시를 교묘히 조종했다.
  그때는 이미 태평양 전쟁의 전세가 일본군에게 불리하게 기가띵어지고 있던
때이다. 물론 군의 통제에 의하여 그것이 필리핀 주둔 일본군 전체에 악영향을
끼치기에 이르지는 못했으나 풍문이 쑥덕공론으로 번지면서 어두운 그늘을
드리우기 시작할 무렵이다.
  "하야시 병장!"
  "네."
  모리는 담배 연기를 뿜어 내면서 아무렇지 않은 듯한 어조로 잡담처럼
말했다.
  "서글픈 일이야."
  "네."
  "근성이 썩어빠진 놈도 있단 말이야."
  "무슨 말씀입니까."
  "하야시 병장."
  "네?"
  "미드웨이에서 일대 해전이 있었는데 말이지."
  "네, 우리 해군이 미군 함정을 대거 격파했다는 그 싸움 말씀이지요."
  "그렇다네."
  "그런데요?"
  "그만한 해전이니 우리측에도 약간의 손실은 있을 수밖에."
  "그야...... 뭐 놈들에게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쟎습니까?"
  "그러기에 말일세." 모리는 한 번 힐끔 하야시를 쳐다보고 나서,
  "그런데 겁 많은 것들이 있어서 말일세."
  "누굽니까, 그런 자들이."
  "이다네. 그런 자들이."
  "못쓰겠군요."
  "하야시 병장."
  "네."
  "요즘 느끼는 게 없어?"
  "네?"
  하야시는 도무지 모리의 말에 담긴 뜻을 걷잡을 수 없어 어리둥절했다.
  "자넨 순진하니까 모르고 있군."
  "뭡니까 모리 군조님.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자 모리는 잔뜩 입에 품었던 담배 연기를 한 번 크게 가슴에 넣었다가
다시 코와 입으로 뿜어 내고 나서,
  "요즈음 이 수용소도 푸욱 늘어졌단 말이야. 늘어질 대로 늘어졌어."
  "네......"
  "겁먹은 탓이야. 겁 집어먹고 떠는 탓이란 말이야."
  그리고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용서할 수 없어...... 일본 제국의 군인으로서 수치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야. 하야시 병장......"
  "네?"
  "요즈음 미군 포로들 다루는 꼴을 자세히 봐!"
  "네......"
  "가감하는 놈이 있단 말이야. 왠지 아나?"
  "모르겠습니다."
  "양키들이 몰려올 것을 생각하고 그때 가서 살아 남아 보려고 더러운 색을
쓰고 있는 거란 말이야."
  "그게 말이 됩니까?"
  "말이 안 되구말구. 하야시 병장."
  "네?"
  "만약 그렇게 될 때 그대는 어떻게 할 텐가."
  "두말할 나위가 없습지요. 최후의 일각까지 싸워서 옥쇄함으로써 저승에
가서도 천황 폐하의 방패가 되어야 합니다."
  "좋다. 하야시 병장!"
  "네!"
  "내일부터 모두에게 활력을 넣어 줘야겠어."
  "옳은 말씀입니다."
  "양키 포로놈들도 은근히 바라고 있는 모양인데 괘씸하기 짝이 없어."
  "말이 됩니까."
  "따끔히 맛을 보여 줘야겠어. 알았나, 하야시 병장."
  "네, 여부가 있습니까."
  그처럼 모리와 하야시 사이에 오고간 대화는 곧 이튿날부터 실천으로
옮김으로써 수용소 안에 일종의 지옥도가 벌어진 것이다.
  자세가 나쁜 미병의 뒤꼭대기를 느닷없이 밀어서 식기 속에 처박고,
잡담한다고 자는 놈 일으켜 몽둥이로 두들겨 패기, 제대로 일하지 않고 꾀를
부린다고 두 줄로 마주 세워 놓고 서로 때리게 하기, 투덜거리는 놈 끌어 내어
발로 걸어 땅바닥에 쓰러뜨리고 구둣발로 짓밟아 버리기, 식당 마루에 떨어진
담배 꽁초를 트집잡아 한두 끼 굶기기, 찌꺼기를 흘렸다고 구둣바닥 핥기기
등등......
  당시 일본 군대 안에서 자행된 못된 제재의 악습이란 악습은 모두 동원하여
그것을 인간의 간지로 생각할 수 있는 극한까지 확대시켜 그것을 쇠잔할 대로
쇠잔한 미군 포로들에게 응용한 것이다. 견디지 못한 미근 포로들은 연이어
푹푹 쓰러져 갔다.
  그러한 악형에 가까운 미군 포로의 제재에 하야시가 앞장을 섰던 것은
물론이다. 미군 포로들은 간악한 모리의 모습은 좀처럼 볼 수 없었다.
하야시에게 세밀한 부분까지 지시한 그는 언제나 손수 자기가 나서지는 않고,
막사 안이나 어느 그늘 밑 미군 포로들의 시선의 사작에서 담배를 피거나
야릇한 미소를 품은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단 한 번 그는 그런 제재의 구도 속에 뛰어든 일이 있었다.
  미군들 십여 명을 운동장에 세워 놓고 하야시가 군용 혁대로 후려치고 있는
것을 막사의 우리창 너머로 즐기듯이 내다보고 있던 그는 예고도 없이
갑작스레 홍사익 소장이 나타난다는 전화 전갈을 전해 듣자 기겁을하여 밖으로
뛰어 나갔다. 그는 하야시에게로 다가가면서,
  "하야시 병장, 그만 해, 그만!"
하고 거푸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하야시는 그 모리의 고함 소리를 그 담긴
뜻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여전히 미군 포로들에게 혁대를 휘둘로 대었다.
  "그만, 그만."
하며 여전히 거동하고 있는 하야시에게로 황급히 다가선 모리는 조급한 나머지
매어달리듯이 하야시의 팔을 붙들더니,
  "그만두라니까!" 라고 소리치며 하야시의 손에 든 혁대를 낚아채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하야시는 뜻하지 않은 모리의 행동과 노기에 그저 아연했다.
  "이 바보 같은 것. 내 말이 안 들려어."
  멍청한 하야시의 표정에 순간적으로 화가 치미 모리는 낚아챈 혁대로 한 번
하야시의 뒷 등을 갈기고는,
  "소장 각하께서 오신단 말이야. 빨리해산시켜."
하고 휙 몸을 돌려 황급히 막사를 향해 뛰어갔다.
  얼빠진 얼굴로 멍청히 서서 잠시 모리가 멀어져 가는 뒷모습에 눈을 주고
있다가 언뜻 정신을 되찾은 하야시는 고개를 돌려 미군 포로를 건너다보고
그들의 눈 언저리와 입가에 엷게 서린 의미 심장한 비웃음의 빛을 발견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용케 홍 소장의 눈을 가리고 무사히 넘기고 난 그날 저녁 모리는 하야시에게
타이르는 가락으로 일렀다.
  "사람이 눈치가 있어야지. 그렇게 둔해 가지고 어떡허나. 안 그래, 하야시
병장."
  모리의 그 말헤 하야시는 맥없이,
  "죄송합니다.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라고 미안하다는 표정을 얼굴 가득히 지어 보였다. 그러자 모리는,
  "좋아, 앞으로 조심하면 돼."
하고 생색을 내었고, 하야시는 모리의 그 한 마디에 두 눈을 비챈면서 생기
있는 목소리로,
  "고맙습니다." 하고 대꾸했다.
  그때 하야시로서는 참으로 미안했고, 정말 고마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얼마 후의 어느 날 저녁 하야시는 같은 조센징인 감시 원 동료들
가운데서, 모리가 말한 '용서할 수 없는 겁먹은 괘씸한 자'를 막사 앞에서
발견하고 적이놀랐다. 김씨가 이른바 창씨 개명으로 고친 가네무라 병장이
바로 그였다. 당황한 하야시는 가네무라 병장더러,
  "너 그런 소리 해서 되느냐." 고 타일렀다.
  "안 되긴 뭐가 안 돼. 이제 끝장날 판이야."
  가네무라는 속삭이는 음성이었으나 분명한 말투로 그렇게 잘라 말했다.
  "끝장?"
  "끝장이구말구, 곧 미군이 필리핀에 상륙하게 된단 말이야. 그러니 자네두
괜히 앞장써 서둘지 마."
  "가네무라, 너 제 정신이야?
  "원! 자네야말로 속 차리게. 이것두 같은 반도 출신이니까 귀띔하고 일러
주는 거야."
  "가네무라, 그런 말을 해서 쓰나, 반도 출신이 다 뭐야."
  하야시는 제법 위엄 있게 오히려 가네무라를 핀잔했다. 그러자 가네무라도
어이가 없어졌는지, 기가 질렸는지 대꾸를 않고 조심성 잇게 하야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하야시는 한 번 둘레를 돌아보고 나서,
  "가네무라, 나한테 한 것 같은 말 다시는 누구에게도 하지 말게, 알았나?"
하고 속삭이듯이 말했다. 멀쑥해진 가네무라는 그만,
  "너무 답답하니까 그러는 거야. 난들 이편이 지는 게 좋을 까닭이야
있을라구." 하고 얼버무리더니,
  "어떻든 빨리 끝장이 나야지,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하고 혼잣말로 가네무라가 멋적게 자기에게서 떠나 저만치 어둠 속에 사라진
뒤 미군들이 몰려오고 있음직한 동쪽을 노려보고 있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이
총검술의 자세를 취하더니 한 번 우람한 고함을 지르면서 한 번, 두 번, 세 번
앞으로 뒤로 성큼성큼 뛰었다.
  그러한 하야시의 가슴에서는 미군에 대한 적개심이 활활 불길처럼 타올랐다.
전신을 뒤흔드는 어떤 감동에 못이겨 그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는 언제
죽어도 한이 없었다

    8. 훈장은 별이 아니다.
  그것은 모두 지나가 버린 일. 아제 생각하니 맹랑하기 짝이 없는
24년간이었다.
  압록강 가까운 구성역에서 군수와 결찰서장과 많은 군민과 어린이들의
환송리에 떠난 자랑스러웠던 출정, 인내와 노력으로 획득하고 진급한
하사관으로서의 지위, 총검술 시합에서 발휘한 용력과 승리의 쾌감과 영광,
중기관총 사수의 공적으로 받은 가슴에 빛났던 훈장.
  그러나 이제 그토록 삶의 보람이요 기쁨이더 나자랑도 빛도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면 그것들은 어떻게 그렇게도 일순에 사라지고 만 것일까. 그
일순...... 계시 같은 모리의 그 한 마디, 그 한 마디로 내가 더러운
조센징임을 깨닫느 순간, 이제까지의 자랑스러움은 수치로 변하고 빛은 새까만
어둠으로 변한 것이다.
  자랑도 빛도 '에뉘'없는 나의 착각이었던 것이다. 그 착각은 조센징인 내가
일본인이라고 착각함으로써 자랑이요 빛으로 착각하게 된 착각이었다.
  왜 그랬을까. 분명한 조센징이면서 나는 어째서 그렇게도 완전 무결하게
나자신을 착각할 수 있었떤가. 이제 뉘우치니 거짓말만 같았따.
  나는 무엇에 홀렸던 것인가. 구성 내 고장의 산 속 같으면 여우에 홀렸다고
할 터이지만, 도대체 그 동안 나는 무엇에? 조센징이면서 일본인으로 착각하고
일본인으로 행세한 나를 보고 일본인들은 얼마나 나를 우습게 여겼을까,
그러니 더욱......
  그렇게 생가가자, 임재수는 혼자 얼굴을 붉혔다. 실로 어이가 없었다.

  우드 중위의 일종의 예심 조서 작성을 협력하는 데 언어 보조로서
차출되었던 이쓰키 소위는 얼마 후 그 일에서 풀려나 원래 자기가 수용되어
있던 일군포로 수용소로 돌아왔다. 그 동안 건강도 웬만큼 회복한 이쓰키는
무엇보다 같은 수용소에 수요오디고 있는 고등 학교의 선배인 아베씨를 만날
수 있어서 기뻤다. 아베 선배는 이쓰키를 보자,
  "아주 건강색인걸." 하고 반겨 주면서,
  "어디, 고되지 않았는가?" 하고 물었다.
  "왜요." 하고 이쓰키는,
  "영어 공부는 좀 한 셈이지요. 그런데 스스로 자신의 어학력에는
놀랐습니다."하고 멋적게 대꾸했다. 선배는 선선히 웃는 낯으로,
  "형편 없다는 것에 말이지."
하고 되물었다. 그래서 둘은 소리를 내어 웃었다. 선배는 한 마디 덧붙였다.
  "외국말이란 잘 하는 놈일수록 모자란 거라네."
  잠시 후 두 사람은 이쓰키가 얻어 갖고 온 레이션 통조림을 빠개 놓고
환담을 나누게 되었다.
  이쓰키는 그 동안에 경험한 일을 주욱 보고하듯이 늘어놓고 나서,
  "그 조센징 전범에는 무진 애를 먹었습니다."
라고 설레설레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
  "흐음." 하고 선배는
  "특수한 인간형이구면." 하고 고개를 주억거려 보였다.
  "특수한 인간형이고 뭐고, 일종의 악령이 아닌가 여겨져요."
  "아냐, 악령은 그런 게 아니지."
  "그런 게 아니라구요? 그럼 모리가 악령일까요?"
  "아냐, 그도 악령 자격이 없어."
  "그럼요?"
  "악령은 그런 데는 있지 안항. 그런 데서는 악령도 악령 구실을 못 하지."
  "그럼 악령이 있다면, 그건 어떤 데서 제구실을 합니까?"
  "좀더 즐거운 곳, 조용한 곳, 좀더 눈에 뜨이지 않는 은밀한 곳 아니면 그런
조직체의 아주 높은 곳이 아닐까."
  "그럼 그들을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글세, 말하자면 선이건 악이건 그런 영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이른바 인연
없는 중생인지 모르지, 오히려 우드 중위나 자네 쪽이 어쩌면 더 악령과
가까운지 모르지."
  "놀래게 하지 마세요, 선배님. 그런데 그 하야시란 조센징 말입니다."
  "왜 그가 마음게 걸리나."
  "솔직이 말씀드려 다소 마음에 걸리는데요. 그보다 어떻게 보십니까. 그가
조센징이라는 것을."
  "그러니까 자네 생각은 그가 조센징이라는 본질이 그의 그러한 행동의
가능성을 형성했다는 말인가."
  "어쩐지 자꾸 그런 생각이 듭니다만."
  "글세, 그것이 전혀 고려 밖일수는 없겠지만, 그의 성격 탓이 아닐까."
  "그럴까요."
  "글세, 나도 단정은 할 수 없지만, 성격의 운명이란 말도 있으니까,
그런그런 행동의 가능성은 일본인의 성격에서도 미국인의 성격에서도 모든
종족의 인간성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거 아닐까? 물론 환경 조건이 거기에
박차를 가할수야 있겠지만."
  "성격에도 이른바 국민성이라는 게 있쟎습니까."
  그러자, 아베 선배는 의미 있게 빙그레 웃었다.
  그래서 이쓰키는 일종의 경계 태세를 취하여 조심스레 물었다.
  "또 무슨 다른 말씀을 하시려는군요."
  "아니 그런 건 아니야, 다만." 하고 선배는 또 한 번 히뭇이 웃으며,
  "이제 분명히 건강을 회복한 것이 틀림없군."
  "가만 있자, 정신 바짝 차리가 들어야겠는걸요. 무슨 말씀을 하려는
겁니까."
  "별건 아니야. 이제 자네게 극도의 좌절감과 허무 의식에서 헤어나 무엇인가
뜻을 찾으려는 듯싶어서."
  "어째서요."
  "국민성이란 용어를 쓰니 말일세. 진창에 처박혔던 일본인의 긍지를
되찾으려는 기운이 비로소 솟는가 보군."
  "익살은 마세요."
  "아니야, 그건 나쁘지 아낳아. 그렇지만 성급히 뜻을 찾으려 들지는 말게."
  "왜요. 선배님과는 달리 대학에서 어영부영 배우다가 끌려 나와 전쟁판에
내어팽개쳐져서 그 동안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는데, 적어도 지나온
상황부터 가려 보기는 해야 하겠는데요."
  "그렇지 않고는 앞으로 살아갈 것이 불안하다 그 말이군."
  "한 차례지나간 일을 정리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 뭐 좀 생각해 봤나?"
  "겨우 실마리죠. 무엇보다 지나간 전쟁, 그것이 일어난 까닭은 무엇이었던가
하는 것......"
  "거창한 과제로군."
  "그렇게 놀리지 마세요. 그러나 철이 들자마자 전쟁의 도가니 속에
내어팽개쳐진 저의 세대는 그것을 따지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기를 쓰는군. 그럼 제국주의, 과잉 생산품의 시장 획득, 식민지 쟁탈, 뭐
그런 연구부터 시작하려나."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그것도 괜찮겠지. 그렇지만 맥빠진 선배로서 한 가지 충고할 게 있다면,
그건 너무 기를 쓰거나 단정하지는 말라는 것일세. 무엇에 그렇게 들릴 것까진
없어."
  "그 동안 공백이 많았으니 이제 무엇에든지 몰두해야쟎습니까?"
  "그야 성격 나름이지."
  "선배님은 모두를 성격 탓으로 돌리려는군요. 그러나, 어떻든 다시는 전쟁이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창한 과제로군. 그야 전쟁이란 없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그런 신통한
묘책이 있을까?"
  "찾아야죠."
  "그러나 인류사에 전쟁을 없이한다는 명제하에 일으킨 전쟁은 얼마든지
있다네."
  "그럼 선배님은 평화에 대한 비판론자인가요."
  "천만에, 전쟁을 말끔히 없이한다는 명제에 속임수가 있을 것 같아 하는
말이지. 나는 착 귀가 맞고 딱 맞아떨어지는 이론이 가장 무서워."
  "어디까지나 선배다운 말씀이시군요."
  "그리고 무서운 것은 그놈의 사명감이란 고상하고 권위 있는 신념이란 거야.
일본도 그래서 싸웠고, 독일, 이태리도 그래서 싸웠고,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도 별로 다를 것이 없었지."
  "도대체 나쁜 것은 누굽니까."
  "전쟁을 먼저 시작한 쪽이 나쁘지, 그건 분명해."
  "그야 물론이죠."
  "다음으론 이긴 쪽이 나빠, 대개의 경우가 그래."
  "그럼 어쩌란 겁니까."
  "어쩌긴?"
  "누구나 다 나쁜게 아닙니까."
  "아니, 난 그런 말은 안 했어. 이 세상엔 틀림없이 옳은 놈이 있고,
나쁜놈이 있어, 가려 내기는 몹시 힘들지만 말일세. 분명한 건 전쟁은
나쁘다는 거야."
  "그러니까 다시는 전쟁을 하지 않기 위한 지혜롭고 철저한 조처가......"
  "그러다가 더 큰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지."
  "그럼 선배님은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겁니까."
  "먼저 건방진 인간들부터 없어져야 해."
  "예에?"
  "잘났다는 것들이 없어져야 해." 
  "이건 옛날부터 나의 지론이야. 남보다 완력이 세다든가에서 시작해서 전혀
겁이 없다든가, 비상하게 재간이 뛰어난다든가, 자기는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다든가, 자기는 언제나 절대로 옳다든가, 진리를 위해서 산다든가,
오로지 남을 위해 산다든가, 죽기를 무서워하지 않는다든가, 그런 인물들이
말썽을 일으키기 쉬워. 마지막 두 경우가 가장 위험하지. 왜냐 하면 그렇게
내세우면서 대개 남보다 자기를 위하고, 자기는 죽는 일 없이 남을 죽게 하는
수가 많거든."
  "차차 선배님 특기인 익살로 나가는군요."
  "익살이 좋지. 난 오히려 앞으로 우리 일본인들이 예전과는 또 달리
진지해질까 봐 걱정이네."
  "그게 나쁩니까?"
  "그러다가 또 큰 실수를 저지를까 해서 그러네."
  "그건 어떤 실수일까요?"
  "글세...... 어쩌면, 자네가 아까 말한 타입의 조센징, 또 다른 타입의
하야시를 만들어 낼는지도 모르니까."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군요."
  "나도 잘 모르는 말이었으니까."
  거기서 두 사람은 또 한 번 소리를 내어 웃고 말았다.
  잠시 후 인사로 이쓰키는 선배에게 물었다.
  "돌아가시면 뭘 하실 생각입니까?"
  "나?"
  "네."
  "타락해 보려네."
  아베 선배의 그 한 마디는 거의 일언지하였다. 이쓰키는 너무나 뜻밖의
대답에 놀라기보다는 어리둥절했다.
  "타락이오?"
  "음, 마음껏 타라갸 볼 생각이야."
  그러나 이쓰키는 더 이상 따져 물으려 하지 않았다. 아베 선배의 어투가
너무 단호했기 때문이다.

    9. 내 손으로 복수를
  하야시가 전범 수용소에 갇히고부터 우드 중위의 조서를 받는 과정에서
당황하기도 하고, 노여워하기도 하고, 무너가 새로 느끼기도 하고, 놀라기도
하고, 어이없어하기도 하가면서, 그러한 여러 갈래의 감정이 얽히고 설키고
굽이친 끝에 결국 머문 것은 살의였다.
  자기는 죽고 많은 사람은 살아 남겠지만, 모리만은 절대로 살아 남는 쪽에
끼여들 수 없다는 강한 의지였다.
  그 하야시의 모리에 대한 살의는 하나의 정열로서 변하면서 모리를 죽일
생각을 하면 할수록 그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쾌감에 사로잡혔다.
  물귀신이 한 번 노린 놈을 언젠가는 끌고 들어가듯이 하야시는 모리를 끄록
지옥으로 가리라 마음먹었다. 아니, 끌고 갈 수는 없으니, 앞장 세우고 몰고
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저승에 가면, 이번에는 자기가 모리를 부려먹을
수 있을 듯싶었다.
  '네놈이 시켜서 한 짓인데, 혼자 살짝 빠져 보겠다니. 어떻게 죽일 것인가?'
  모리에게 살의를 품고부터 하야시가 생각한 것은 그르 죽일 수 있느냐
없느냐의 살인의 가능 여부가 아니라 그 방법이었다. 단 한 대로 때려 죽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토록 간교하여 죽지 않고 비겁하게 살아
남으려는 모리에게 절대로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 주고 그가 그 몸에
간직하는 진땀이란 진땀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게 하고 나서 죽이리라고
마음먹은 하야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잔인해지려고 자기 마음 속의 가시를
돋구려고 애태웠다. 녀석은 갖은 추태를 떨면서 나더러 제발 살려 달라고
애원할 것이다.
  그 광경을 상상할 때 하야시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업슨 충족감을 느낄 수
있었고, 가슴 밑바닥에서 끓어오르는 기쁨을 억누리기 힘들었다.
  '그리고 디가도록 천천히 녀석이 공포와 고통을 1초라도 더 느끼도록 나는
천천히 그의 목을 눌로 죽일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의 마음에 다짐한 하야시는 손가락을 편 자기의 두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다가 두 개의 엄지손가락을 놀려 보았다.
  '어느 정도의 힘으로 녀석의 모가지를 누르면 오래 갈까.'
  모리가 죽을 때까지 되도록 오래 시간을 끌 것에 하야시는 여념이 없었다.
  그렇게 하야시가 죽일 방법을 골똘히 생각하면서 때를 기다리고 있는데 며칠
뒤 수용소 안에서 전혀 뜻하지 않은 소동이 벌어졌다.
  어느 날 새벽, 변소 있는 쪽에서 승강이하는 여러 명의 고함 소리가 들려
왔다. 이사을 느낀 전범들은 반사적으로 모두 우르르 그쪽으로 달려갔다.
하야시도 그 뒤를 따랐다.
  소동은 다름아닌 전범끼리의 싸움인데, 예닐곱 명이 어느 한 명에게
들어붙어 거의 일방적인 뭇매를 치고 있었다. 수없이 얻어맞고 채서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간신히 변소 벽에 기대서 있는 피해자는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타승로 그가 누구인 줄을 얼른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몰려든 전범들 가운데서 '모리 군조다.', '모리가 맞고 있다.'라는
말이 들려 왔다. 그 말을 듣자 하야시는 놀랐다. 아니 당황했다.
  '그처럼 내가 벼르던 모리를 누가......'
  순간적으로, 하야시는 모리를 다른 누구에게도 맡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모리를 다른 누가 죽이면 자기는 어떡할 것인가 싶었다. 아찔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더 이상 따질 겨를이 없었다. 하야시는 치고 맞는 뭇매 속에
뛰어들었다.
  그렇게 되자, 모두의 눈에는 하야시가 얻어맞고 있는 모리를 가해자들로붜
감싸는 듯이 비쳤다. 실제 그렇기도 했다. 하야시는 모리를 더 이상 얻어맞지
않도록 저지한 것이니까. 다만 다른 것은 모두가 느끼듯이 하야시는 모리를
편든 것이 아니라, 남의 손을 빌지 않고 자기 손으로 죽이려고 그에게의
매질을 남겨 두게 한 점이다. 가해자들이 그와 같은 하야시의 심사와 의도를
이해할 까닭이 없어다. 그러자 가해자들은,
  "넌 뭐야."
하고, 소리치면서 모리는 내어팽개치고 모두 하야시에게 달려들었다.
  그래서 잠시 하야시와 가해자들 사이에 난투가 벌어져다. 하는 수 없이
가해자들과 주먹질을 구조받은 하야시는 가해자들이 멈칫 물러선 틈을 타서
거의 녹초가 되어 정신 없이 벽에 기대서 있는 모리의 뒷덜미를
낚아채듯이하여 끌다시피 그를 데리고 가해자들 틈을 헤치고 빠져 나갔다.
  갑자기 행방을 잡지 못한 하야시는 모리를 끌고 막사 쪽으로 돌입하여
복도를 거쳐 취사장 쪽으로 달려갔다.
  하야시는 취사장 옆의 계단을 통해 2층인 다락으로 올라가는 길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모리는 휘청거리면서 하야시에 끌려 그 다락까지 따라
올라갔다.
  가해자들과 소동을 지켜보던 전범들도 밑의 계단까지 따라왔으나 소리소리
지르고 떠들썩할 뿐 그 이상은 더 다가오려 하지 않았다. 게다가 하야시는,
  "더 이상 다가오면 그대로 안 둔다."
고 호통쳤던 것이다. 피로 범벅이 된 얼굴의 모리를 잡다한 기물이 널려 있는
다락의 한 귀퉁이에 뉘여 놓고,
  '자! 이제부터.'
하고 마음먹으며, 자기도 한 구석에 가서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렇게 심신을 불태워 가며 별러 온 살의가 얼른 발동되지
않았다. 이 절호의 기호가 주어졌는데 말이다. 그래서 그는,
  '천천히...... 한숨 돌리고...... 아직 시간은 있어......'
  그렇게 스스로를 타일렀다. 맥없이 축 늘어져 잡다한 기물 속에 파묻히듯이
누워 있는 모리의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녀석이 잘 당했지.'
하고 고소한 생각이 들면서도 하야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물 속에서
헝겊을 주워 내어 모리에게로 다가가 그 얼굴의 피를 닦아 주고 있었다.
  그러자 어렴풋이 두 눈을 뜬 모리는 하야시의 얼굴을 올려다보더니 다시
맥없이 지그시 감으며,
  "고맙네, 하야시 병장." 하고 모기 소리로 말했다.
  '녀석 얻어터지더니 이제야......' 그렇게 생각하면서 하야시는 저도
모르게,
  "아프지요, 모리 군조님."
하고는, 앝기 경어를 쓰며 상관 대접을 하고 있는 스스로에 깜짝 놀랐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질타했다.
  '왜 이러지 내가.' 그리고,
  '자, 이제 계획했던 대로 해야지.'
하고 스스로의 마음을 일으켜 세우려 했다.
  그런데 역시 이상했다. 그토록 어둠 속에서조차 바드득 이를 갈려 벼르고
벼르던 모리에의 살의는 발동되자 않을 뿐 아니라 좀처럼 실감이 가지 않았다.
  '이거 어떻게 된 거야.'
  그때 모리가 몸을 움직거리며 한 번 신음 소리를 틀어 내었다. 그러더니
입을 열었다.
  "하야시."
  그렇게 모리가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듣자, 하야시는 또 반사적으로,
  "네!" 하고 충실한 부하로서의 대답을 했다.
  "미안하이, 하야시 병장."
  "뭘요."
  "용서해 주게."
  그러나 하야시는 이번엔나 대꾸를 하지 않았다. 아니, '천만에요.' 하고
대꾸하려다 안간힘을 써서 그것을 삭여 버린 것이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녀석이 제법......' 하고 반발하려 했다. 또 모리가 입을 열었다.
  "하야시."
  "......"
  "난 그실은...... 자네를 결코...... 미워하지는 않았다네."
  '이녀석이......' 그제야 하야시의 마음에 가시가 돋치려 했다.
  '이놈이 또 나를 속이려고 드는구나.'
  그러자 벼르고 별렀던 살의의 심지에 불이 글어당기는 듯싶었다.
  '됐어, 이제 됐어.'
  그렇게 스스로의 마음 속에 살의를 불러일으키려는 하야시의 귀에
갑작스럽게 사이렌의 경보가 들려 왔다. 그 날카로은 소리는 급속히 이쪽으로
다가오면서 하야시의 귀청을 난타했다. 그만 하야시는 당황했다.
  '이 주어진 절호의 기회를 놓쳐서야......'
  하야시는 황급히 모리의 목덜미에 자기의 두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벼르고
별렀던 계획과는 달리 전신의 힘을 오로지 열 손가라에 모아 세차게 눌러
대었다. 빠끔히 뜬 모리의 두 눈에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당혹과 공포의 빛이
자욱이 어리었다.
  "모리, 피차 살아서 쓸모 없는 인간이야. 자, 너 죽고 나 죽자."
  하야시는 더욱더 열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모리의 목에서는 끼륵끼륵하는
소리가 들리고, 무섭도록 빠끔히 뜨여진 두 눈에는 차차 흰자위가 승해 갔다.
  그런 시간의 연속 속에서 햐야시는 미군 헌병의 지프차가 막사 앞에
급정거하고 소리도, 다락까지의 계단을 뛰어올라오는 미군 헌병의 군화 소리도
듣지 못하고 미군 헌병이 다락에 뛰어들었을 때에도 여전히 그의 열 손가락은
모리의 목을 세차게 누르며 파고들고 있었던 것이다.

    10. 그린 군목은 말했다
  자기가 담당한 마지막 사건의 논고를 며칠 앞둔 어느 화창한 일요일, 우드
중위는 오랜만에 차를 달려 가까운 큰 부대의 군인 교회를 찾았다.
  기독교도로서의 읫기에 참석하기보다 그 교회의 예배를 주도하는 같은
고향의 목사 그린 군목을 찾아간 것이었다. 그는 태평양을 건너 필리핀으로
오는 항공기에 동승했었고, 그때 좀처럼 마음의 안정을 얻지 못하고 있는
자기를 부드러운 말투와 설득력 있는 조언으로 위로해 주었었다.
  그는 오늘도 시원스레 바닷가 내려다보이는 자기의 숙소에서 자기를 찾아온
우드 중위를 진정으로 반가와했다. 둘은 커피를 나누었다.
  "머지 안항 우드 중위는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는 게 아닐까."
  그린 군목은 활짝 웃는 낯으로 그렇게 물었다.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우드 중위도 웃는 낯으로 그렇게 대답했다.
  "가면 무엇부터 하려나."
  "글쎄요, 어머님이 만들어 주는 파이부터 실컷 먹고요."
  "하하하, 파이라......"
  "그리고는 릴리와 만나 당장 약혼하렵니다."
  "거 축하해야겠군."
  "그리고 목장을 돌보다가 릴리와 결혼하면 뉴욕으로 갈까 합니다."
  "뉴욕으로?"
  "네, 거기서 저의 부친의 친구가 내고 있는 법률 사무소에서 당분간 변호사
수업을 할까 해서요."
  "좋은 계획일세."
  "참, 그만 제 얘기만 하고 말았습니다만 목사님은 언제 본국으로 돌아가시게
됩니까?"
  그러자, 그린 군목은 밑으로 눈을 떨구어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곧 얼굴을
들어 창 너머로 바다를 바라보며,
  "난 돌아가지 않고 남을까 하네."
하고는 미소지으며 우드 중위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필리핀에요?"
  "반드시 필리핀이랄 건 없지만, 얼마 전 나는 교단 본부에다 나를 아시아
지역의 어디든지 좋으니 남겨 줄 것을 부탁했어. 그러니까 차이나에 갈는지
코리아에 갈는지 또 동남아 지역의 어느 다른 나라에 가게 될는지, 그때 가
봐야 알겠네."
 "꼭 그리셔야 합니까?"
  "왜, 찬성하지 않나?"
  "아니오." 하고 우드 중위는 조심성 있게,
  "이건 목사님한테 꾸중을 들을 발언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이제 전쟁도 끝난
마당에 믹구이 더 이상 아시아와 관련을 가질 필요가 있을까요?"
  그린 군목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며,
  "그 까닭은?"
하는 한 마디가 그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우드 중위는 그러한 그린 군목의
표정의 변화를 보고 잠시 망설이다가 얼마 전 자기가 직접 경험한 하야시라는
일본군 전범, 그실은 종족적으로 일본인이 아닌 한 명의 코리안 전범을
둘러싸고 일어난 사건을 비교적 상세하게 들려 주었다.
  우드 중위가 그렇게 얘기하는 동안 그린 목사는 상체를 까딱도 하지 않고
단정히 앉아 귀를 기울이는 것이었다.
  "일본인도 코리안도 동양인은 저희들과 근본적으로 어딘가 모르게 다른 게
아닌가 여겨집니다만."
  그러나 그린 목사는 상체를 앞으로 굽히며,
  "가만 있게. 좀 정리하고 넘어가 보세." 하더니,
  "우리들이란 백인을 두고 한 말로 알면 되나?"
  "그렇다고 할 수 있죠."
  "그리고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은 인간성이 그렇다는 말로 알면 되구?"
  "바꿔 말하면 그렇게 되겠죠?"
  "그러면 자네가 느끼기로 어떤 점이 다르다고 보나?"
  "그러니까 뭐랄까요. 고도의 정서적 차원에서 아무리 해도 서로 이해할 수
없는 이질적인 것을 갖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니 무리하게 동질화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 또 해 봐야 안 될 테니까요 --- 미국인들은 미국 안에서 자기
자신들만 지키고 살면 되지 않을까 합니다만!"
  듣고 나자, 그린 군목은 다시 얼굴에 웃음의 빛을 되살리며,
  "우드 중위의 의견이 자기부터 옳게 다스려야 한다는 겸허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건 귀한 생각이야. 다른 나라나 다른 종족과의 관련에서 미국이
갖는 힘이 칼로 인한 강요로만 나타나면 그것은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정신에
위배되는 일이니까, 그렇게 될 위험성이 없는 것도 아니지. 그러나 일단
이만큼 세계와 관련하게 된 이상, 이질적인 것에만 민감한 나머지 염증을
느끼고 사고와 행동의 영역을 미국 영토 자체에 한정시킨다는 무책임은 보다
더 위험한 것인지도 몰라. 미국을 위해서도 말일세. 그런 배타적 에고이즘
또한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기도 하구."
  "제가 아까 말씀드린 일본인 모리나, 코리안 하야시 같은 인간에게서 과연
우리가 바라는 인간성이나 인간의 영성이 찾아질까요? 그들 같은 평면적인
얼굴에 박힌 검은 눈도아작 과녁을 겨냥한 화살촉처럼 흔들릴 때 저는 일종의
악령을 보는 듯싶어 오싹 오한을 느꼈읍니다만."
  "몹시 감각적인 의견이군. 우드 중위는 어렸을 적부터 여기저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초사와를 본 일이 있지?"
  "그야 수없이 보아 왔습니다만......"
  "그런데 우리가 흔히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으로 보고 있는 그 얼굴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유럽의 화가들이 그렇게 그려서 만들어 놓았다는 사실도 알고
있겠지."
  "네."
  "그야 유럽의 화가들은 푸른 눈에 금발의 예수 그리스도를 그릴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렇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심미적으로 백인화하였다는 것은
결코 잘한 일이 못 돼."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렇게 생각됩니다만."
  "나는 사람의 용모나 색깔의 차이와 인간성과는 관계가 없다고 보네.
영성과는 더욱 그렇구. 오히려 악령은 단정한 외모와 상냥한 거동과 아름다운
말씨를 가지고 나타날는지 모르지. 이건 오늘날 이미 납득된 지 오랜 상식에
속해. 악마의 얼굴을 무섭고 보기 흉하게 그려 보이는 것은 어린이들이나
상대해서 할 일이라네. 그들의 이름이 뭐라고 했지?"
  "모리, 그리고 하야시오."
  "그 모리나 하야시니 하는 우리의 귀에 생소한 이름만 하드라도 무슨 별다른
뜻이 있겠나. 우리들 이름 가운데도 구두쟁이가 있고 목수가 있고 대장쟁이가
있지만, 어디 그렇다고 그 이름대로 목수질을 하거나 대장쟁이를 하든가.
자네도 우드라는 성을 가졌다고 재목상이나 산림지기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
  "그야 그렇죠."
  "나는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사실상 매미라는 흑인 식모 아주머니 손에서
자랐어. 그녀는 내가 클수록 나를 두려워하는 눈치더군. 그건 내가 크면서
백인이란 자각에서 자기를 보는 눈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것에 겁을
먹었던 거야. 그러나 그녀의 가엾은 심사가 나를 애달프게 했지. 내가 매미
아주머니에게 격의 없이 친근한 감정을 나타내면 나타낼수록 매미 아주머니는
나를 어렵게 대하고 정성을 다하는 눈치였어. 그래서 두 사람 사이는 되레
거북한 때도 있었지만, 그녀와 나는 계속 인간다운 품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거야. 그 매미 아주머니는 병으로 눕게 되자 나더러 자기에게서는 고약한
냄새가 나니 가까이 오지 말라고 끔적도 못 하게 하더니, 임종 때가 돼서야
머리맡에 선 나의 손을 꼬옥 쥐어서 자기 가슴에다 갖다 대면서 그저
고마웠다는 말만 수없이 되풀이 하더군. 오히려 고마웠다는 말은 내가 해야 할
터인데 말일세. 나는 그녀더러 아들이라고 부르라고 했지만 그녀는 나를 차마
아들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그저 눈물만 흘리더군. 그 매미 아주머니야말로
보기 드문 진정한 크리스찬이었던 거야."
  우드 중위는 그저 묵묵히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나는 아내와 결혼할 때 꼭 한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네. 그것은 백인 아닌
종족의 어린이를 양자로 삼자는 것이었는데, 착한 아내는 그 조건을 쾌히
받아들이드군. 매미 아주머니를 잃고 난 지 얼마 안 되는 당시의 나의심정은
내가 내 자식이 아닌데다 색깔이 다른 어린이를 데려다 제대로 키우지
못한다면 앞으로 태어날 어떤 제 자식도 제대로 못 키울 것만 같았어. 그래서
멕시코 계의 머슴아이를 얻어다 양자로 삼았지. 그 뒤 아내가 딸을 둘 내리
나았지만, 다른 집 남애 이상으로 오순도순 사이좋게 성장했다네."
  "조가 그렇군요."
  "조 그린은 육군 일등병으로 이태리에 가 있지."
  거기서 그린 군목은 우드 중위더러,
  "이거 또 내가 너무 말을 많이 했군. 고쳐야 할 텐데 나쁜 버릇이야."
하고, 좀 멋적은 듯이 웃어 보였다.
  "아니오, 목사님 말씀은 언제 들어도 좋아요."
  우드 중위는 그렇게 그린 군목에게 더 말하기를 재촉했다. 그것은
진정이었다. 잠시 후 그린 군목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주께서는 인간에게 너무 어려운 말씀을 남기고 가셨어. 어떻게 보면
인간이 지키지 못할 말씀만 골라서 하시고 가신 것 같아. 그래서 인간들은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감당해 내기 힘들면, 신을 부르다가 지치게 되면
곧잘 등을 돌리는 수가 있어. 차라리 신이 없었으면하는 생각에서 신은
죽었다곡지 공언하지. 간신히 신의 존재를 가정한다는 것의 경우 --- 인간이
인식해 주지 않으면 존재하지 안흔 나신이라는 인식 정도에 그쳐. 그래서
비로소 인간은 자유로워졌다고 하지만, 신이 엇는 세계에 대해서 전적으로
책임지기에는 인간은 너무나 부족하고 약한 존재야. 인간이 인식해 주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신이라든가, 신은 죽었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애초부터
신은 존재도 하지 않았던 거야. 신을 인식해 준다는 인간의 읫기은 누가 준
것이며 신은 죽었다니, 신이 노쇠해서 죽었다는 말인가. 누가 어떻게 신을
죽였다는 말인가. 어디까지나 인간 위주인 그와 같은 사고가 가공스러운 것은
인간이 오만을 드러냈다는데 있어. 죄악의 극에 이르렀다는 느낌이야. 물론
기독교도 2천 년에 가까운 역사 속에서 많은 죄악을 저질렀어. 산앙의 이름
아래 이단으로 규정한 사람을 처형하고 신의 영광을 빛낸다는 명분 아래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그것은 절대로 주의 책임에 돌릴 수 없는
인간들이 저지른 죄악이야. 주께서 그것을 원했을까. 주께서 바로 그런 짓을
하지 마라고 가르치신 그 짓을 신의 이름 아래 인간드리 저지른 짓이야. 그와
같은 인간이 저지른 죄악을 신에게 뒤집어씌우려고 신을 부정해 봐야 그것이
될 일도 아니려니와, 신을 부정한 인간들이 그 전적 책임하에 저질러 놓은
꼴은 시롤 가관이란 말일세. 신은 존재한다. 주께서는 인간들이 튕긴 더러운
구정물을 전신에 뒤집어쓰신 채 하염없이 슬픈 눈으로 인간들이 하는 꼴을
굽어복 계시다. 주께 영광을!"
  거기서 그린 군목은 치올렸던 음성을 떨구었다.
  "이제 세계와 관련을 갖게 된 기독교가 할 일은 신을 긍정하라고 강요하는
것도, 더욱 교회 안에 어거지로 사람을 모아 놓고 신의 영광을 찬미하기를
권장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네. 신 앞에 머리 숙이고 교회의 권능에 굴복케
함으로써 곧 인간의 세계에 하늘 나라의 질서가 이룩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야. 오늘날 진정한 크리스찬이 할 일은 거창한 정의의 기치를
내어흔들며 절규할 것이 아니라, 조용한 어조로 설득력 있게 인간은 누구나가
다 예외 없이 모자라고 약한 존재이며, 비록 신이 없다손치더라도 인간이
오만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일이야. 그리고 그 뜻이 이룩될
때까지는 부단히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수밖에......, 성급히 서둘 필요는
없어. 2천 년 가까이 걸려도 제대로 안 된 일이 뒤처리를 마무리한다고,
패전국에서 책임 있다는 사람들을 골라 내어 전쟁 범죄자로 처단한느 데는
찬성할 수가 없어. 명백히 반대하네. 이른바 전범 재판을, 앞으로 전쟁을
없이하기 위한 새로운 아이디어로 생각하는 것은 넌센스야. 전범 재판은
예전에도 얼마든지 있었던 일이니까. 옛날에 있은 동서의 전범 처단은 으레 그
후예들에게 복수의 칼을 갖게 하고, 다음에 오는 전범 처단을 더 가혹하게
했을 뿐이지. 게다가 전쟁이란 그 성격상, 패자에게도 승자에게도 잔인한
행동을 강요하는만큼 잔인 그 자체의 죄악에는 별로 다를 것이 없어. 그러니
보편적인 인간의 양심으로 가름하면 승자에게도 패자를 재판할 자격이 없는
걸세. 그러니까 따지고 보면 이른바 전범 재판이란 전투의 계속에 지나지
않지. 그것도 상대방의 행동 자유를 박탈한 상황에서의 일방적인 공격이고
보면 전투치고도 가장 비인간적인 잔인한 처사야. 크리스찬의 관용의 정신은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전범 재판은 앞으로 두고두고 인간의 역사에 나쁜
영향을 줄 걸세. 용서해서는 안 된다! 가혹하게 죽여라!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자네가 아까 나에게 말한 코리안의 전범만 하더라도 그렇지. 그
소행이야 밉겠지만, 크리스찬으로서는 그를 죽이지 않고 살려 주어야 한다고
보네. 용서한다는 것은 결코 그의 죄를 없던 것으로 하고 그를 정화하는 것은
아니라네. 용서란 그로 하여금 스스로 그 죄를 느끼게 하고 오뇌케 함으로써
그에게 스스로 속죄하고 스스로 구제되는 기회를 주는 일이지. 그렇게 해서
그가 구원될 때 용서한 축도 비로소 똑같이 구원되는 게 아닐까. 나는 거기서
몇 년 동안 선교 사업에 종사한 일이 있는 신학교 선배한테 들어서 웬만큼
알고 있지만 코리안은 이스라엘 사람들처러 몹시 불행한 역사를 살아 온
사람들 같더군. 서러운 운명 때문에 유독 눈물이 많다고 들었어. 그러한 민족
중의 한사람인 그 전범이 어떻게 포악해서 무슨 악행을 저질렀는지 모르지만,
이 대전쟁을 마무리짓는 그 페스티벌에 유독 그가 제물의 챔피언이 돼야
한다니,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네. 많은 일본군들을 젖혀놓고......,
그렇다고 나는 결코 자네에게 책임을 묻고 있는 것은 아닐세. 다만 한 차례
크리스찬으로서의 관심을 기울여 보면 어떨까 싶어하는 것뿐이지."

    11. 바람은 고향 쪽으로
  그린 군목을 따라 군인 교회로 가서 예배를 보고 돌아온 날 저녁, 우드
중위는 한밤새 골똘히 생각했다. 법률 공부를 한 그에게 그날 아침 그린
군목이 한말은 잘 이해되지 않았다.
  일찍이 법적 논리로 단련받은 그에게는 그린 군목의 종교적 이치가 제대로
귀가 맞아떨어지는 것 같지 않았고, 논리의 비약도 이만저만이 아닌 듯싶었다.
또한 젊은 그에게 있어서 그린 군목이 보여 준 격정은, 시대가 변첨함에 따라
눈부실 정도로 변해 가는 현대 의식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중년의
초조감의 반영으로조차 여겨지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린 군목이 보여 준
진지한 정열에는 어떻든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힘이 있었다.
  게다가 하야시에 대하여 한 번 크리스찬으로서의 관심을 보여 주는 것이
어떠냐는 것은 크리스찬을 자부하는 우드 중위로서 그대로 지나쳐 버릴 수
없는 권유였다. 내킨 김에 하야시를 한 번 만나려니 마음먹자, 우즈 중위는
이쓰키 소위가 생각났다. 아무리 하여도 하야시를 만나려면 자기 혼자보다는
이쓰키가 있어 주는 것이 더 편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제야 우드 중위는 새삼스럽게 며칠 전, 그를 원래 있던 수용소로 돌려
보냈다는 사실을 깨우쳤다. 그래서 그가 하야시를 만나 보려는 관심은
반감했다.
  게다가 다시 생각하니 오늘 저녁은 오랜만에 릴리에게 긴 편지를 쓰려고
작정한 그로서는 모처럼 잡아 둔 시간이었다. 그는 그 감미로운 시간을 다른
일로 희생할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나머지 반의 관심마저 무산되고
말았다. 더욱 하야시를 만나면, 십중 구는 불쾌할 것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생각되었을 때 우드 중위는 그를 만나 보려고 마음먹었던 것조차 후회했다.
  훨씬 뒤, 어쩌다 생각이 나서 하야시를 만나 보려고 그를 부른 우드 중위는,
그가 며칠 전부터 계속 40도 이상의 고열을 내어 수용소 병실로 옮겨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말을 듣고 순간적으로 우드 중위의 뇌리를 스쳐간 생각은
하야시 같은 인간도 앓는 수가 있는가 하는 의외의 느낌이었다.
  그러자 우드 중위는 일종의 궁금증을 느꼈다. 하야시가 어떻게 앓는가가
보고 싶어졌던 것이다. 병실로 하야시를 찾아들기 전 우드 중위는
군의관으로부터 그가 말라리아에 걸렸다는 것을 확인했다.
  찌는 듯한 병실 한 구석에 하야시는 누워 있었다. 우즈 중위임을 알아차리자
기겁하듯이 재빨리 자기의 두 눈을 감아 버린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하야시의
얼굴은 우드 중위가 서 있는 반대쪽인 벽으로 기울었다.
  우드 중위는 하야시의 그런 시늉의 좀 우스웠으나, 잠시 물끄러미 서서 누워
있는 그를 굽어보았다. 다시는 미동도 않는 그의 몸뚱어리는 시체나 다를 것이
없었다.  까딱도 않는 그의 얼굴은 누렇게 뜰 대로 떠 있었다.
  다만 그가 죽은 시체가 아니라 아직 살아 있는 인간이라는 것은, 얼굴에서
배어 나와 그것이 흘러서 구슬처럼 떨어지는 땀방울만이 증명하고 있었다.
  1분, 2분, 3분...... 우드 중위는 그러한 하야시를 지켜보고 서서 그린
군목이 하던 말을 뇌리에 되살리며, 어거지로 자기의 마음을 저차원의
감정으로 흔들어 보려고 애썼다.
  4분, 5분...... 그러나 그것은 허사였다. 어떠한 종류의 감정도 우즈 중위의
마음에 떠오르지 않았다. 잠시 후 우즈 중위는 그에게 주었던 얼굴을 들어
싱겁게 그의 옆을 떠났다. 다시는 그를 보지 않으려니 마음먹었다.
  우드 중위가 자기 옆을 떠난 뒤에도 하야시는 좀처럼 눈을 뜨려고 하지
않았고, 열로 흐려진 눈을 뜨기도 거북했지만, 혹시나 자기를 말끔히 쏘아보던
우드 중위의 눈과 자기 눈이 마주친다는 것은 그러지 않아도 오싹한 전신에
오한이 스칠 것 같았따.
  우드 중위의 그 파라디파란 눈동자. 이제까지 하야시는 그 눈동자를 수없이
보아 왔지만 그에게는 그 눈이 사람의 눈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 파라디파란
눈동자는 얼음처럼 차디차게 느껴졌고, 그 냉엄한 눈은 자기의 가슴 속 깊숙이
마음의 핵심을 꿰뚫는 듯싶었따.
  파란 눈동자를 본 것이 우즈 중위의 그것이 처음일 까닭이 없는데, 유독
그의 눈동자가 하야시에게 그토록 차게 느껴졌던 것이다. 생각하니 이제까지
자기와 마주친 어느 미군의 눈동자도 우드 중위의 그것처럼 오래도록 자기를
건너보지는 않아서, 자기는 이제까지 미처 파란 눈이 그렇게 차디차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 분명했다. 그 많은 미군 포로들의 그 배나 많은 눈동자는
언제나 하야시를 보기가 바쁘게 재빨리 딴 데로 옮겨졌던 것이니까.
  그러나 그의 감겨진 안막에서 파란 눈의 잔영은 금시 사라졌다. 그는
며칠동안 너무나 높은 열을 낸 탓으로 무쇠처럼 강인하던 그의 육체도 기진
맥진해졌고, 하루에 두세 번씩은 의식을 잃었었다.
  그런데 하야시는 생전 처음이다시피 특이한 경험을 했다. 모질도로 깡하게
태어난 그는 어렸을 적은 몰라도 철들고붜는 한 번도 앓아 누워 본 일이
없었다. 이번 말라리아로 고열을 내고 드러누운 것은 그로서는 처음의 일이며
따라서 특이한 경험이었던 것이다.
  고열로 인한 육체적인 고통은 강건한 가닭에 굳어 버린 그의 육체를
부드럽게 풀어 주는 안마의 작용을 했다. 그 감각은 아주 감미로왔다. 고통을
이기는 그에게 고열로 인하여 의식을 잃는 순간은 노곤히 잠에 떨어지는
듯싶었고, 의식을 되찾는 순간에는 의례 일종의 해방감이 따랐다. 그러한
병세의 굴곡 속에서 그는 예전에 미처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차분히 자기를
생각하는 정서적인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것도 그에 있어서의 특이한
경험의 하나였다.
  물론 그로서 그러한 정서적인 사고는 단락적인 것이었다.
  그러다가 그는 곧잘 꿈을 꾸었다. 이것도 그로서는 특이한 경험이었다. 그는
이제까지 별로 꿈을 꾸어 본 적이 없었으니까.
  우드 중위가 떠나가고 잠시 열이 오른 뒤 잠이 든 그는 그 사이에 하나의
꿈을 꾸었다. 그 꿈에서 깨어나자 그는 자기의 육체가 뜰 듯싶고 마음조차
새처럼 가벼워짐을 느꼈다.
  꾸고 난 꿈은 분명치 않았다. 그러나 꿈 속의 세계가 지금 자기가 앓아 누워
있는 이 덥고 생소한 필리핀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물론 일본도 만주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고향인 모양이었다. 그가 몸을 담았던 꿈의 세계에는 그리
크지 않은 산이 보였고, 그리 넓지 않은 들이 퍼져 있었고, 냇가가 있었고,
나무들이 서 이썽싶다. 그 푸른 나무들은 포플러인 듯싶었다.
  그리고 소도 보였다. 그가 생각키는 꿈 속으 가세계는 겨우 그것뿐이었다.
그런데도 그의 마음은 왠지 부드러웠고 가벼웠다.
  '내가 꿈에 고향엘 갔었구나.'
  하야시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자 고향을 떠나 평양과 만주와 일본을 거쳐
필리핀에 와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제대로 느껴 본 적이 없는 그리움의
감정이 밀물처럼 한꺼번에 그의 가슴 속으로 흘러들었다.
  그 그리움의 파도 속에 먼저 떠오른 것은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 그리고
두형이었다. 그렇게 네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자, 그의 안막에 펼쳐진 것은
자기까지 끼여들어 들판에서 일손을 쉬고 점심을 먹던 광경이었다.
  찬물에 놓은 조밥, 그리고 고추장에 찍은 마늘종.
  그는 그서을 먹고 싶은 식욕의 충동을 느꼈따.
  멀리서 들려 오는 새 쫓는 소리, 송아지가 어미소를 찾아 매매 우는 소리,
개소리, 닭 소리, 까치 소리, 고향에서 들었던 모든 음향이 한꺼번에 그의
귀청으로 들이닥치는 듯싶었다. 긴 칼을 찬 순경이 다가와 지원병 합격
통지서를 내어밀었다. 그만 기쁨의 격정에 못이겨 밥 먹던 숟갈을 내어던지고
벌떡 일어서며 저도 모르게,
  "천황 폐하 만세!"를 불렀던 그 일순.
  '그때부터 나는 빗나갔었구나.'
  그래서 이제 죽는다. 한스럽고 어이가 없었다.
  고향 산천의 고향 사람들 --- 그렇게 그가 생각하는 고향은 그가 떠날 때와
전혀 다름없는 그 산천 그 사람들이었다. 고즈넉한 고장에서 고스란히 살고
있을 가족과 친지들, 그런데 나만은......
  단오 명절에 황소 한 마리를 타 가지고 그 등에 탄 채 마을로 들어서던 그날
그때.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몰려 나와 자기를 환영한 것이 바로 어제 같았다.
그런데 지금 나는......
  그러자 갑자기 어떤 깨우침이 그의 뇌리를 세차게 후려쳤다.
  같은 조센징이면서, 고향에 남은 사람과 고향을 떠난 사람, 죄짓고 죽어야
할 사람과 죄 안 짓고 살아 남은 사람들.
  '내가 죽게 된 것은 내가 조센징이기 때문만은 아니었구나.'
  방금 그의 뇌리를 후려친 것은 그러한 깨우침이었던 것이다.
  이제까지 그는 자기가 죽는 것은 오로지 자기가 조센징이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하고 억울해했던 것이다.
  일본인인 모리의 간계에 빠진 조센징으로서 그는 모리에 대한 원한의 불길을
활활 태우고 그의 목을 졸라 죽여서 저승까지 끌고 가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조센징이라고하여 누구나가 다 억울하고 조센징이면 누구나가
일본인의 간계에 빠져 죽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그는 또 한 번 크게
당황했다.
  그는 비로소 인간으로의 죄를 느낀 것이다. 그러나 그 당황은 곧
가라앉았다. 그것은 그의 육체가 말라리아로 말미암은 고열로 몹시나
쇠약해졌기 때문이라고나 할까. 긴 시간 당황한다는 것은 현재의 그로서는
무엇보다 힘이 들었다.
  '그렇게 고향을 떠난 것이 잘못이었어.'
  자기가 죽을 것은 가을에 밤알 쏟아지듯이 틀림없이 닥쳐올 너무나 분명한
일이었다.
  누구나 다 한 번은 죽는다지만 그러나 스물 네 살은 너무 짧았다. 하지만
이제 어쩔 도리도 없었다. 죽으면 어떻게 될까, 아주 없어져 버리겠지......
  그런데 웬일인지 자기가 아주 어렸을 적에 세상을 떠난 할아버지의 얼굴이
뇌리에 떠올랐다. 그러자 갑자기 어느 누구보다도 더 그 할아버지가 가까이
느껴졌다.
  '어쩌면 할아버지를 만날는지도 모르겠군.'
  죽으면 어떻게 될는지 그로서는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지만, 이제 고향에
살아 있는 어머님을 만날 가능성은 전혀 없어도 죽은 할아버지를 만날
가능성은 없지 않은 듯싶었다.
  물론 내세를 믿는 것도 아닌 그로서 전혀 확신은 없었고, 그저 그렇게
어렴풋이 느껴졌을 뿐이다. 만나면 할아버지는 꾸중을 하실까, 아니면 위로해
주실까. 하옇든 지금 가장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이 까마득한 옛적에 죽은
할아버지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상했다. 그러자 그것은 차차 생생한 실감으로
변해 갔다. 그러나 살 수만 있다면 죽지 않고 더 살고 싶었다.
  갑자기 세상이 변해 누가 나타나서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고향을 찾아가 다시 삶을 시작하게 된다면 이번에는 예전처럼
멋몰라 서둘지 않고 완력을 믿어 건방지게 뽐내지도 않고 누구에게나 부드럽게
조심성 있게 인사성 있게 대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장가도 들고......, 그러자 그가 고향에 있을 때는 별다른 관심 없이
보아넘긴 이웃의 처녀 순분이를 생각했다. 어느 해 단오 명절의 씨름판에 나가
자기가 소를 타 왔을 때, 그네 대회에 나가 놋대야를 타 온 순분이.
  그녀의 길게 뒤로 땋아늘인 탐스러운 머리채와 그 끝에 매어져서 펄렁거리던
빨간 댕기, 치마 저고리에 배어 느껴진 그 건강한 몸매.
  왜 나는 그때 그녀에게 좀더 관심을 가지고 마음을 쓰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제, 그런 생각은 덧없기 짝이 없는 회한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 자기는 그 고향과 그 고향 사람들과 너무나 먼 거리에 떨어져 있었고,
다시는 고향과 고향 사람들을 볼 수 없는 신세에서 바로 눈앞에 닥쳐온 죽음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기가 죽어도 고향의 산천과 그리운 사람들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만 죽는 것이었다. 자기 홀로 죽는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그는 또 한 가지 예전에 미처 느껴 보지 못한 이상한
감정이 가슴 밑바닥에서 솟아오름을 경험했다.
  울컥 치민 그 뜨거운 그의 볼을 흘러내린 것이다. 눈물은 뒤이어 뒤이어
솟아나며, 그리고 얼굴을 적시고 그리고 흘러내렸다.

    12. 마지막 악수
  한 소나기가 내린 뒤 필리핀의 들길을 두 사람의 젊은이가 걷고 있었다.
우드 중위와 이쓰키 소위였다. 필리핀을 떠나 본국으로 돌아가게 된 우드
중위가 이쓰키 소위를 그 수용소에서 불러 내어 점심을 나누고는 들로 산책을
나온 것이었다.
  승자 편인 우드 중위와 패자 편인 이쓰키 소위가 지금 그 마음 속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은 물론 달랐다.
  우드는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을 만나고 사랑하던 아가씨와 약혼하고는
뉴욕으로 가서 변호사가 될 확실한 미래의 계획에 가슴이 부풀어 있었지만,
이쓰키는 가족의 안부도 분명치 않았고 마음을 남기고 떠나온 아가씨가 고향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야 하리라고 생각하지만 패전의
일본으로 도랑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부터 막연했다.
  그러나 용케 살아 남은 젊은 그로서 조국 일본의 재건을 위하여 앞으로
무엇인가 뜻있는 일을 하리라는 의지는 그의 가슴 속에서 웬만큼은 굳어져
있었다.
  우드 중위와 이쓰키는 영어와 일어를 적당히 섞어 가면서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우드 중위, 고향에서 가질 약혼을 축하하오."
  "고맙소, 당신도 아직 독신이오?"
  "그렇소."
  "애인은?"
  "아직 없소."
  "일본으로 돌아가면 갖게 되기를 바라오."
  그런 싱거운 인사를 주고받다가 두 사람의 화제는 자연히 얼마 전에 처형된
하야시의 죽음으로 낙착되었다. 이쓰키가 먼저 물었다.
  "그는 죽을 때 난폭하지 않았소?"
  "아니오." 하고 우드 중위는,
  "아주 조용했소." 하고 대답했다.
  우드 중위의 말에 따르면 그가 형장에 끌려갈 때까지 혹시나 그가 어떤
난동을 피우지 않을까 염려한 헌병들은 엄하게 그를 감시하고 만일에 대비한
충분한 대책을 세웠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뜻밖에도 조용했다는 것이다. 한
가지 이상이 있었다면, 그것은 모든 절차에 시종 눈을 밑으로 깔고 순종하던
그가 마지막 확인의 호명으로,
  "하야시 유시로." 라고 불리자, 번쩍 얼굴을 들고 퉁명스럽게,
  "노오 ---" 하고 영어로 부인했다는 일이다.
  '하이.'
라는 소리에 익숙해졌던 호명한 헌병이 뜻밖의 대답에 역시 번쩍 얼굴을 들어
그를 쳐다보자 그는,
  "마이 네임 이즈......"
하고는 알아들을 수 없는 한 마디를 뱉듯이 덧붙였다고 한다. 물론 헌병은
호명이 하나의 요식 행위에 지나지 않았던만큼 더 이상 따지지 않고 그를 다음
절차로 넘겨 버렸던 것이다.
  우드 중위의 그 말을 듣자, 이쓰키는 말없이 고개를 아래위로 주억거렸다.
그리고 처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는 코리안으로서의 원래의 자기 이름을 발음했을 거요. 틀림없이."
  우드 중위가 물었다.
  "그에게 하야시가 아닌 다른 이름이 있었단 말이오?"
  "그렇소."
  우드 중위는 잘 납득이 가지 않은 탓도 있어서 하야시가 처형 직전의
호명에서 하야시가 아닌 원래의 이름을 말했다는 데 별다른 감명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이쓰키의 반응은 우드와 달랐다. 마음이 좋을 수가 없었다. 이쓰키의
착잡한 심정을 알 까닭이 없는 우드 중위는 화제를 바꾸는 것이었다.
  "당신의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이오?"
  이쓰키는 얼결에,
  "없소." 했다가 멋적은 표정을 지어 보이고,
  "학교로 돌아갈 거요." 라고 대답했다.
  "교수가 되려오?"
  "글쎄요." 그러자,
  "나는......"
하고 우드 중위는 자기의 계획을 자랑스럽게 이쓰키에게 늘어놓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이별의 산책을 끝내자 우드 중위는 이쓰키를 자기의 지프차에
태워 그의 수용소까지 데려다 주었다.
  수용소 영문에서 마지막 이별의 악수를 나누는 두 사람은 그런 경우에 살아
남은 사람이면 누구나 그렇듯이 약간의 감동과 경미한 감상에 젖었다.
  물론 승자와 패자의 입장은 다르고 축구 시합을 끝낸 팀과 팀의 선수가 의례
적으로 나누는 악수에서 느낄 수 있는 그런 정도의 감동과 감상 이상의 것은
아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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