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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관계

by Casey,Riley 2023.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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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계

안도현
 
  톡,
  하고 소리를 내며 도토리 하나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갈참나무 가지에서 땅으로 떨어진다는 것, 
그것은 도토리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너무 캄캄한데...” 도토리는 혼잣말로 중얼거렸습니다.
  그때 아주 가까운 곳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조금만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
  누구일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것은 봄여름 내내 도토리와 함께  갈참나무에 매달려 있던 나뭇
잎의 목소리였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나뭇가지에서 보이지 않더니 나뭇잎은 어느새 낙엽이 되어 도토리보다 먼저 땅에 
내려와 있었던 것입니다.
  “도토리야, 춥지?”
  “응, 조금.”
  “우리가 이불이 되어줄게.”
  낙엽들이 도토리를 둘러쌌습니다.

  낙엽속에 파묻힌 채 도토리는 얼마를 보냈는지 모릅니다.

  도토리는 문득 눈앞이  환하게 밝아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수없는 낙엽들이 자신을 몇  겹으로 
둘러싸고 있는 것도  보였습니다. 위에도, 밑에도, 옆에도  낙엽이었습니다. 도토리는 마치 강보에 
싸인 귀여운 아기 같았습니다. 참 고마운 낙엽들이었습니다.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을 때에는 사나
운 비와 바람을  막아주더니 땅에 떨어진 뒤에도  도토리를 이렇게 따뜻하게 껴안아주는  낙엽들. 
도토리는 가슴이 찡해져서 그만 눈물이 핑 돌 것만 같았습니다.
  `나는 그 동안 낙엽들에게 신세만 지고 살았어.` 도토리는 몸을 움직여 보았습니다.
  `그래, 나도 낙엽들을 위해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야. 정말 그랬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도토리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아주 단단한 껍질이 도토리를  감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도토리가 말했습니다. “이 껍질을 깨고 어서 밖으로 나가고 싶어.”
  이 말을 들은 낙엽들이 말했습니다. “너무 서두르지 마. 그건  벽이 아니야. 그건 또 하나의 너 
자신일 뿐이야.”
  도토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의 바깥에  또 다른 `나`가 있다니! 도토리는 이 사실
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기분이 상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가벼운 흥분이 그
의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나`와 또 다른 `나`가 힘을 합한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낙엽들을 위해 도토리도...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나도 너희에게 무엇인가를 해주고 싶어.” 도토리는 용기를 내어 말했습니다.
  “괜찮아, 도토리야. 너는 그보다 너 자신을 잘 지켜야 해. 그게 우리를 위하는 길이야.”
  낙엽 하나가 이렇게 말하자, “걱정하지 마. 우리가 너를  지켜줄게.” 하고 다른 낙엽이 도토리 
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러자 또  다른 낙엽이 “너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도토리, 너는 우리들
의 꿈이거든.” 하고 도토리의 등을 감쌌습니다.
  낙엽들이 이렇게 저마다 한 마디씩 말을 할 때는 온 산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습니다.

  톡,
톡톡, 하고 소리를 내며 도토리들이 떨어지더니
톡톡토독,
토토토토토토톡토토토토톡톡토토토토톡톡토토톡
갑자기 소나기 빗방울 쏟아지는 소리를 내며 도토리들이 떨어져내리는 것이었습니다.
  한 노인이 와서 장대를 휘두르며 갈참나무의 도토리를 마구  털어대고 있었습니다. 한바탕 장대
를 휘두른 다음 노인은  가지고 온 자루에다 도토리들을 주워 담았습니다. 낙엽들은  그들이 감싸
고 있는 도토리가 노인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습니다. 낙엽들은  노인이 어
서 산을 내려가기만을 기다렸습니다. 훌쭉한 노인의 자루는 바람을  불어넣은 것처럼 금세 빵빵해
졌고, 노인은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산을 내려갔습니다.
  찍,
  찍찍,
  날이 어두워지자 이번에는 쥐들이 먹이를 찾아 찍찍거리며 돌아다녔습니다.
  찌찌찌찌찌직찍찍찍찌직찍찍찍찍찍찍찍찍찍찍
  낙엽들은 그들이 감싸고 있는 도토리가 쥐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기 위해 또 무진 애를 썼습
니다.
  도토리도 들키지 않으려고  땅으로 고개를 숙인 채 쥐들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온몸에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습니다.

  “굳이 이렇게 숨어서 살아야 하니?” 도토리는 갑갑해서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아니야, 너 자신을 포기해서는 안 돼.” 낙엽들이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 지긋지긋한 삶을 도토리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낙엽들에게
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는 자기의 존재를 되는 대로 내팽개치고 싶었습니다.
  “차라리 인간의 눈에 발견되어 마을로 가거나, 쥐들의 먹이가 되었으면 좋겠어. 그렇게 된다면 
하루하루를 긴장과 불안에 휩싸여 살지 않아도 되잖아.”
  “도토리야, 너는 살아남아야 해. 그래서 이 세상하고 다시 관계를 맺어야 해.”
  “... 관계를 맺는다는 게 뭐지?”
  “그건 마음속에 오래 품고 있던 꿈을 실현한다는 뜻이야. 너는 너 자신의 꿈뿐만이 아니라, 우
리 낙엽들의 꿈까지도 실현시켜야 할 소중한 존재라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나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미안하지만, 나는  꿈 같은 것은 없어. 어서 
이 지루한 시간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밖에는.”
  낙엽들이 아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도토리를 에워쌌습니다. 
  “도토리야, 네 몸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아니?”
  “글쎄.”
  낙엽들이 바스락거리며 말했습니다. “놀라지  마라, 도토리야. 네 몸 속에는 갈참나무  한 그루
가 자라고 있어.”
  그것은 도토리가 꿈에도 생각해보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내 몸 속에 갈참나무가?”
  “그래, 그래.”
  낙엽들이 하는 말을  도토리는 정말 믿기 어려웠습니다. 도토리는 그저  도토리일뿐인데 어떻게 
몸 속에 큰 갈참나무가 자라고 있다는 말인가?

  겨울이 되었습니다.
  앙상한 갈참나무 가지 사이로  흰 눈이 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에 한두 송이  띄엄띄엄 내
리던 눈은 마침내 폭서로  변해 온 세상을 뒤덮으려는 듯이 퍼부어댔습니다. 힘없는  마른 나뭇가
지들이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뚝뚝, 부러지기도 했습니다. 도토리를 감싸고 있는 낙엽 위에도 
눈은 내려 쌓이고, 쌓이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눈이 내려 쌓일수록 도토
리는 몸이 자꾸  아늑해지는 것이었습니다. 달콤한 잠에  빠져 있다가 깨어나면 또다시  달콤하고 
따뜻한 잠이 그를 불러들였습니다.

  도토리는 꿈을 꾸었습니다.
  낙엽 위에 쌓였던 눈이 사르륵사르륵 녹는 소리가 났습니다. 도토리의  몸도 눈 녹은 물에 축축
하게 젖었습니다. 도토리는 거무튀튀해진 낙엽들이 썩는 냄새를 맡고는 마음이 울적해졌습니다.
  “나는 낙엽들을 위해  아무 일도 한 게 없어.  낙엽들이 썩어가는 것을 그저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야. 어서 꿈에서 깨어나야지. 그리고 무엇인가를 해야지.”
  “도토리야, 우리들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네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한걸.”
  낙엽들이 도토리를 꼭 껴안으며  말했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기운이 도토리
의 몸을 감싸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도토리의 작은 몸은 불길에 휩싸인 것처럼  점점 뜨거워
졌고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도토리를 집어삼킬 듯하였습니다. 도토리는 한시 바삐  꿈속에서 벗어
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꿈이라지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견뎌야 해. 이제 우리들의 꿈이 실현되고 있는 거야.” 
  낙엽들이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도토리를 껴안았습니다. 이미 부서져 가루가 다  된 낙엽들까
지도 도토리를 껴안았습니다. 도토리도  이를 악물었습니다. 낙엽들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습니다.

  도토리는 자신의 단단한 껍질을 찢으며 껍질  밖으로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고 있는 또 하나의 
자신을 발견하고는 몸을 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갈참나무 가지에서 땅으로 떨어질  때와는 전
혀 다른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게 꿈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도토리는 생각했습니다.

  며칠이 지났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꿈이  아니었습니다. 생생한 현실이었습니다. 도토리는 햇볕이  내려오는 쪽
으로 힘껏 손을 뻗었습니다.  그랬더니 도토리의 손끝에 연초록 싹들이 보란 듯이  돋아나는 것이
었습니다. 너무나 예쁜 연초록, 그것은 바로 낙엽들의 꿈이었으며, 또한 도토리의 꿈이었습니다.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수없는, 어린 갈참나무들이 숲 속에 출렁거리고 있었습니다.

    구두를 이해하는 법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 양화점 진열대에 나란히 앉아  있던 갖가지 구두들의 반짝이는 눈
빛을, 짐짓 엉뚱한  표정을 짓는 굴무늬 구두의 태연함, 무엇엔가  풀이 죽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자주색 구두의 숙연함, 금방이라도 진열장에서 뛰어내려 따박따박 거리로  걸음을 옮길 듯한 빨간 
구두의 맹랑함... 그 다양한  표정들 뒤에는 부디 자신을 선택해달라는 간절함이  공통적으로 숨어 
있었다.
  그 모든 간절한 눈빛들을 물리치고 내가 이 검은 구두를 선택한 것은 무엇보다 검은 구두의 눈
빛이 비교적 수수했기 때문이다.  나는 검은 구두의 평범한 디자인을 살펴보고는 그가  겉으로 유
별나게 도드라져 보이려는  의도가 거의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요즘  젊은이들의 표현대로라
면 검은 구두는 전혀 `튀지` 않는 구두였고 `끼`가 없는 구두였다.
  그리고 검은 구두를 선택한 또 하나의 이유는 구두를 처음 신어보았을 때 받은 편안한 느낌 때
문이다. 양화점의 젊은 점원은 구두 주걱을 받아 들면서 몇 번이나 되물었다. 어때요, 편안하시죠. 
저희 집 신발은 누가  신어도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제작되었거든요. 그렇다면  난쟁이들의 신
발을 걸리버가 신는다 해도 편안하다는 거요? 나는 이렇게 반문하고 싶었지만 그 점원과 굳이 입
씨름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  나는 오른쪽 구두를 신고 나무 발판 위에 서  있었는데 어찌나 
내 발에 꼭 맞던지 다른 한쪽을 신어보나마나 이 구두는 편안한 구두라고 이미 단정을 지은 뒤였
던 것이다.
  나는 새로 구두를 산 뒤에  지저분한 구둣솔로 대충 한번 문지르는 버릇이 있다. 새  구두의 형
형하다고 해야 할 눈빛을, 그 기세를  미리 꺾고 싶은 것이다. 그야말로 파리가 미끄럼을 탈 정도
로 반짝이는 구두를 신는다는  일은 불편하기 짝이 없다. 구두의 가죽 표면이  너무 반지르르하면 
나는 뻔뻔스러운 졸부를 보는 것  같아 속이 뒤틀리고 마는 것이다. 내가 신발장에서 예의  그 지
저분한 구둣솔을 꺼내자 검은 구두가 울상을 짖는다.
  “주인님을 이해할 수 없군요.”
  나는 못 들은  척하고 구두코에 침을 탁, 뱉고는 우악스럽게  솔을 문지른다. 검은 구두는 금세 
기가 죽었는지 말이 없다.
  “너는 내 방식대로 살아야 해.”
  검은 구두는 아예 눈을 꼭 감는다. 단단히 토라졌다는 뜻이다.
  이튿날 나는 새로 산 검은 구두를 신고 출근을 하다가 지하철역 입구에서 발뒤꿈치가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왼쪽이었다.  집을 나설 때만 해도 괜찮았는데  이놈이 기어이 발뒤꿈치를 물어뜯기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회사에 도착해서 나는  양말을 벗고 쓰라려오는 곳을  살펴보았다. 새 구두가 물어뜯은  부위의 
살갗이 벗겨져 진물이 나오고 있었다.  구두를 살 때 왼쪽 구두를 마저 신어보지 않은  게 불찰이
었다.
  “아직 길들지 않아서 그래요.”
  일회용 반창고를 발뒤꿈치에 붙이고 있을 때 검은 구두가 말했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길들인다는 거냐?” 나는 화가 나서 소리쳤다.
  “발과 구두, 구두와 발, 나아가 저와 주인님... 이 둘은 서로가 길들여져야 해요. 서로를 길들여
야 한다는 뜻이지요.”
  “...”
  검은 구두의 말이 뜻밖으로 진지해서 나는 좀 다소곳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해가 필요해요.”
  “... 좀더 쉽게 이야기해줄 수 있겠니?”
  “이해한다는 것은 서로에게  길들여진다는 것이에요. 구두를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해요. 
그때까지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구요.”
  내가 구두를 이해하기까지는 정말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식  일회용 반창
고를 붙였다 떼었으며,  그때마다 쓰린 발뒤꿈치를 보며  검은 구두를 만든 양화점을  원망하기도 
했으며, 이 구두를 구입할 때의 내  경솔함을 자책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느 때는 아예 구두 뒤
축을 구겨 신고 다니기도 했다.
  검은 구두를 신고 다니면서 나는  구두약을 발라서 광도 한 번 내지 않았다. 구두의  광택에 대
한 나의 혐오는  사실 뿌리가 깊은 것이다. 군대에 있을  때 침으로 군화에 광을 내본  적이 있는 
사람이면 알 것이다. 자기의 군화도 아닌 것을, 오직 계급이 하나 낮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진흙이 
덕지덕지 붙은 선임자의 군화를  닦아야 할 때의 비참함을. 구두약도 구둣솔도 변변치  않은 상황
에서 오직 혓바닥 끝에 묻어 나오는 침과 헝겊 조각으로 `물광`을 내야 하는, 그것도 한겨울 북풍
한설이 몰아치기 직전의 잔뜩 흐린  날, 그것도 막사 처마 아래 쪼그려 앉아 곱은  손으로 군화를 
닦아야 하는 기막힌 운명 앞에서 나는 모든 빛나는 것들을 증오하기 시작했다.
  새로 산 검은 구두도 예외가  아니었다. 구두를 잘 닦지 않는 내 습관을 그가  이해해야만 그도 
마음이 편할 것이었다.
  하루는 회사 직원들의 회식이 있어서 음식점에 갔을 때였다. 소주가  몇 순배 돌고 삼겹살이 익
는 냄새가 느끼해질 즈음,  나는 소변을 보러 가기 위해 구두를 찾았다. 고만고만한  크기의, 비슷
비슷한 색깔의 구두들이 서로 뒤엉키고 흩어져  있어서 내가 벗어놓은 구두가 쉽게 눈에 띄지 않
았다. 나는 급한 김에 서로  짝이 맞지 않더라도 아무 구두나 꿰어 신고 일을  봐야겠다고 생각했
다. 아, 그런데 내가 신은 그 구두는 한 짝이 너무 크고, 나머지 한 짝은 너무 작은 게 아닌가. 우
리들의 삶이란 늘 너무 크거나, 너무  작거나, 너무 무겁거나, 너무 가벼운 것이로구나! 한짝은 항
공모함 같고, 한 짝은 티코  같은 그 서먹서먹한 구두를 신고 화장실을 다녀오면서 나는  내 구두
에 길들여져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때부터 마음속에는 내 검은  구두에 대한 그리움이 혈육에 대
한 사랑처럼 밀물져오는 것이었다. 검은 구두가 나를 기다리며 저  혼자 상심해 있을지도 모를 일
이었다.
  음식점 바닥을 기다시피 하여 나는 내 구두를 겨우 찾아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밟고 갔는
지 웬 낯선 발자국을 몸에  두르고 검은 구두를 잔뜩 짜부라져 있었다. 그리고 구두  뒷굽의 바깥
쪽이 칼로 깎아낸 것처럼 흉하게 닳아 있었다.
  “뒷굽이 이렇게 문드러지도록 나는 모르고 지냈구나.”
  나는 진심으로 말했다.
  “이건 땅바닥에 닳은 자국이 아니에요.”
  “뭐라고?”
  “이건 내가 스스로 나를 깎아낸 자국인걸요.”
  “네가 스스로 네 몸을...”
  “주인님을 이해하기 위해서 내게도 시간이 필요했던 거죠. 나를 깎아내는 시간 말이에요. 주인
님이 나를 이해하기 위해 시간이 필요했던 것처럼요.”
  “그런데 나는 매일 구두를 신으면서도 왜 그것을 가맣게 모르고 있었을까?”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이거든요.”
  나는 부끄러워 구두를  더이상 내려다볼 수가 없었다. 새  구두를 처음 신었을 때 나는  짜증을 
내며 원망하기만 했다. 내  방식대로 구두를 다루면서 내 발에 구두가 하루바삐  길들기를 조급하
게 바라기만 했다. 발뒤꿈치에 물집이 생길  때 구두를 향해 불평할 줄은 알았지만, 그 물집이 굳
은살이 되었을 때는 구두의 존재를 깡그리 잊어버리고 지내왔다.
  그런데 이놈이 아니면 다른 신발을 신기가 께름칙하다고 느끼는 그 순간부터 나는 검은 구두에
게 길들여져 잇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 후로는 내가 구두를 데리고 다닌 게 아니라  구두가 나를 
데리고 다녔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지금, 구두는 신발장 속에 웅크리고 있다. 나를 다시 바깥으로 데리고 갈 때까지 얌전하게 기다
리고 있다. 나이를 먹어 몸이 늙은, 내가 한번도 정성들여 닦아준 적이 없는 구두가.


    내 마음의 자작나무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모밀국수를 삶은 장작도  자작나무다. 그리고 감로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산 너머는 평안도 땅도 뵈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백석의 시 (백화)- 

  내가 새로 입주한 아파트에 자작나무가 심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나는 꽤 들뜬 기분으로 
며칠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남쪽 도시에서 자작나무를, 그것도 아주 가까운 곳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 큰  행운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시절 수학여행 때  한계령을 넘으
면서 처음 보았던 자작나무를 거의 20년만에 다시 만난 것이다.
  느티나무, 사과나무, 측백나무 등속과 함께 아파트 조경 공사의 하나로 심어진 자작나무를 남들
처럼 그저 대수롭지 않게 보아 넘길 수도 있다. 그리고 안 그래도  신경쓸 일이 많은 세상에 나무
를 보고 마음이 들뜬다는 것은  하나의 사치에 속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새로  애인이 생겼을 
때 갖는 설렘 이상으로 자작나무에게로 쏠리는 마음을 어디에다 숨길 수가 없었다.

  나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 아파트에 자작나무가 있어.”
  “뭐라고?”
  “자작나무 껍질이 얼마나 하얀지 눈이 부실 지경이야.”
  “자작나무는 추운 북쪽 지방에 사는 한대성 나무잖아.”
  “그게 놀랍게도 우리 아파트에 조경수로 자라고 있단 말이야.”
  “너 혹시 잘못 본 거 아니니?”
  친구는 내 이야기가 잘 믿어지지가 않는다는 투로 말했다.
  “그러면 이번 일요일에 우리 집에 와서 확인을 해도 좋아.”
  “너 은백양나무나 은사시나무와 자작나무를 구별할 수 있냐?”
  친구는 제 두 눈으로 보기 전에는 여전히 의심이 간다는 것이었다.
  나는 전화를 끊고 속으로 한바탕 욕을 퍼부어주었다. `그렇게 남의 말을 못 믿으니 나이 사십이 
되기도 전에 훌렁 벗어진 대머리가 되지!`

  나는 다른 친구에게 또 전화를 걸었다.
  그 친구는 지난 겨울에 러시아를 다녀왔는데, 다른 것 다  제쳐두고 자작나무 숲을 보는 것만으
로도 멋진 여행이었다고 자랑을  한 적이 있었다. 그 친구라면 자작나무한테로 쏠리는  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해줄 것 같았다.
  “우리 아파트에 자작나무가 몇 주 서 있는데 한번 와서 보렴.”
  “오, 그래? 따뜻한 남쪽 지방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나무인데.”
  “뭔가 품격이 높은 고매한 나무처럼 느껴지더라.”
  나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온  이 말이 친구의 심기를 건드린 것일까. 친구가  목소리를 나직하게 
깔면서 아랫사람에게 한 수 가르치듯이 천천히 말했다.
  “뭐니뭐니해도 자작나무는 러시아에서  보아야 해. 대평원을 기차로 달리면서 그  끝없는 숲을 
바라보아야 제격이지. 영화 (닥터 지바고)에서처럼  그 배경으로 눈이라도 내린다면 더 말할 것도 
없고 말이야. 바로 장엄, 그 자체가 자작나무 숲이지.”
  나는 장엄이라는 말에 금방 기가 죽어버렸다. 아닌게 아니라  우리 아파트의 어린 자작나무들은 
장엄함과는 아주 거리가 먼 왜소한 체구로 곧 쓰러질 듯, 쓰러질 듯 서 있었던 것이다.

  자작나무는 정말 볼품없이 서 있었다.
  쓰러지지 않도록  버팀목으로 받쳐두었는데도 바람이  불적마다 줄기 끝이 불안하게  흔들렸고, 
잎을 피워올리는 모양도 영  신통치가 않았다. 수액을 힘차게 끌어올리지 못한 어떤  곁가지는 푸
른 잎도 한번 피우지 못한 채 말라가고 있었다.
  이 도시의 기온과 토양이  그에게 어울리지 않은 탓일까. 적정하고도 세심한 그런  배려가 없이 
함부로 저를 옮겨 심어놓은 조경업자를 자작나무는 원망하고 있지는  않을까. 자작나무의 그 원망
이 화살이 되어 인간 전체를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도 저도 아니라면 내가  자작나무가 꿈
꾸지 못할 높은 곳에 둥지 틀고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가 화가 난 것은 아닐까.
  자작나무를 만났을 때 나를 휘감던 기쁨은 어느 사이에 조금씩 벌레 먹은 나뭇잎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나는 겨우 몸을  지탱하고 있는 자작나무를 바라볼 때마다 가엾고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를 똑바로 쳐다볼  수조차 없었다. 자작나무도 괴로워하는 빛이  역력했다. 나에게 보이지 않는 
위안을 주던 그가 이제 나의  위안을 받는 처지가 되고 말았으니, 나무인 그도 마음이  아플 것이
었다.
  생명의 마음이란 한없이 연약한  것이다. 이 세상 나무들은 연약한 자기의 마음을  나뭇가지 끝
에 매달아놓고 살아간다. 지금  자작나무의 가지 끝이 파르르파르르 떨리는 것은 그의  마음이 아
프다는 뜻이 분명하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무렵이었다.
  나는 산책길에 자작나무하고 잠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누가 내 이름을 나직이 부르는 것 같아서 뒤를 돌아보았더니 거기에 자작나무가 서 있었다. 아, 
자작나무가 나에게 먼저 말을 걸었던 것이다. 그때 내 마음속에서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나던 흥분
된 감정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나는 너무나 놀라서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자작나무
처럼 그대로 서 있었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았지?”
  “당신이 나에게 관심을 가진 것처럼 나도 당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관심?”
  “그래요. 관심을 가지게 되면 제일 먼저 이름부터 알게 되지요.”
  자작나무는 내 이름뿐만 아니라 내 직업이며 가족들의 이름가지 줄줄이 꿰고 있었다.
  “내가 이 아파트에 처음 실려온 날부터  나에게 줄곧 관심을 보인 사람은 당신 하나밖에 없었
어요. 내 이름이 자작나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도 많고 많은 이들 중에 당신 하나뿐이었고요.

  “나는 그저 너의 이름만 알고 있었을 뿐일걸.”
  “서로 이름을 안다는 것, 그것은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지요. 그렇게 관계를 맺고 나면 
서로 함부로 대하지 못한답니다. 마치 집에서 기르는 개가 자기  이름 붙여준 주인을 함부로 물지 
않는 것과 같지요. 주인도 자기를 따르는 개를 함부로 잡아먹지는 않지요.”
  나는 가슴이 메어왔다.
  하지만 자작나무가 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격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무엇
보다 그의 약한 몸이 걱정스러웠다.  그가 쓰러진다면 다시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지 못할 것이고, 
나에 대한 기억조차도 까많게  지워져 버리고 말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자작나무가  없는 아파
트에서 나는 얼마나 삭막한 인간이 되어갈 것인가.
  “견딜 수 있겠니?”
  자작나무가 괜찮다는 듯  살며시 몸을 흔들어 보였다.  그러자 어둑해진 밤하늘에 총총  돋아난 
별들이 자작나무 가지에 하나둘식 나뭇잎처럼 날아와 붙었다.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은 없겠니?”
  자작나무가 말했다.
  “인간의 영혼하고 관계를 맺은  나무는 쉽게 죽지 않아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저를 오
래오래 바라봐주세요. 저를 자작나무로 여기는 동안은 언제까지나 저는 자작나무인걸요.”
  나는 자작나무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 자작나무야. 내 마음의 깊은 곳에 너를 심을게. 내가 오래오래 바라보고 있을게.”

  비행기와 잠자리

  늙은 비행기가 활주로에 내려앉아 잠시 쉬고 있었다.
  지구를 반 바퀴 돌아온 비행기는 피곤한지 하품을 크게 한 번 하더니 이내 잠에 곯아떨어진 듯 
하다. 그때 잠자리 한  마리가 비행기 날개 끝에 살짝 날아와 앉았다. 고추잠자리였다.  온몸이 빨
갛게 달아오른 잠자리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멀리서 보면 덩치 큰 어미  비행기가 
새끼 비행기를 날개 위에 얹고 있는 것처럼 착각할 정도로  둘은 생김새가 닮았다. 혹자는 잠자리
의 입장에서 비행기를 보고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저렇게 엄청나게 큰 잠자리는 생
전 처음 본다고.
  누군가 날개 끝을 살살 간질이는  것 같아서 비행기는 슬며시 눈을 떴다. 몸 속에  누적된 피로
가 눈까풀을 자꾸 끌어내렸으나  달콤한 잠을 건드리는 훼방꾼을 먼저 쫓아내는 일이  급했다. 이
럴 때는 낮잠을 실컷 자두는 게 최고라는  것을 늙은 비행기는 오랜 경험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
다.
  “비행기 안에는 무엇을 싣고 다니는가요...?“
  오른쪽 날개 끝에 앉아 잠을  깨우며 말을 걸어오는 주인공은 고추잠자리였다. 참, 별스런 놈도 
다 보겠네. 대수롭지 않다는 듯 비행기는 다시 눈을 감았다.
  “...비행기 안에 무엇을 싣고 다니는가요? 그리고 당신은 어디로 갈 거예요?”
  다시 잠자리가 귀찮게 말을 걸어왔다. 비행중이라면 날개를 흔들어  쫓아버릴 수도 있으련만 지
금은 쉬는 중이어서 몸을  털끝만큼도 움직일 수도 없다. 비행기는 불현듯 화가  치밀어올라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넌 그런 거 몰라도 돼! 저쪽으로 가!”
  그러자 잠자리는 배춧잎 위에 소금을 뿌린 듯 이내 기가  죽어 잠잠해졌지만, 비행기는 화를 낸 
것을 금방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휑하니 날아가버릴  줄 알았던 잠자리가 여전히 날
개 끝에 훌쩍거리며 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자리는 비행기의 감작스런 반응에 꽤  충격을 받
은 듯 했다.
  그렇다고 잠자리의 물음에 꼬박꼬박 대답을 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잠자리가 모르는, 그리
고 알아서는 안되는 비밀들을  비행기는 너무 많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늙은  비행기가 평생동안 
해온 일은 대륙과 대륙을  오가며 무기들을 실어 나르는 일이었다. 걸프전이 터졌을  때도 아프리
카의 어떤 나라에서  내전이 일어났을 때도 죽음을 무릅쓰고 비행기는  총과 대포들을 실어 날랐
다. 자신이 실어 나르는 무기가 사람을  죽이는 데 쓰인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러나 자
신의 존재 이유는 오직 날아다니는 일밖에 없다고 생각했으므로 비행기는 별다른 죄의식 같은 것
을 느끼지 못했다. 언젠가는 정지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날아다니는 삶, 그게 비행기의 운명이라면 
운명일 터였다.
  그럼에도 비행기가 두려워하는 게 딱 하나 있었다. 그것은  지상에서 쏘아올리는 미사일도 아니
고, 모든  것을 한꺼번에 빨아올리는  회오리바람도 아니었다. 그를  하늘에서 언젠가 떨어뜨리고 
말, 가장 두려운 적은 바로 시간이었다. 비행기는 몸의 어느 한쪽이 녹슬어갈 때마다 언젠가는 시
간에 격추당하고 말 자신의  삶을 떠올리고는 진저리를 쳤다. 비행기를 조종하는 인간은  비행 시
간이 길어질수록 대접을 받지만,  계기판에 비행 거리가 늘어날수록 그 비행기에 대한  불신의 깊
이는 점점 깊어지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날지 않으면 조재할 이유가 없는 삶이라면 자신의 삶은 잠자리의 삶과 다를 게 없
었다. 비행기나 잠자리는  일생을 공중에서 보낸다. 그러다가 지상에  잠시 내려앉는 것은 휴식을 
취할 때뿐이다. 이런 생각이 들자  잠자리가 전혀 모르는 남처럼 여겨지지 않는 것이었다. 잠자리
는 아주 작은 비행기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비행기가 아주 큰 잠자리이든가.
  “잠자리야... 미안하구나.”
  잠자리가 눈알을 또르륵또르륵 굴렸다.
  “저는 비행기 안에 무엇을 싣고 다니는지 정말 궁금해요.”
  “왜 그게 그렇게도 궁금할까?”
  “창문을 열고 있는 비행기를 본  적이 없거든요. 하늘을 날 때나 쉬고 있을 때나  비행기의 문
은 꼭꼭 닫혀 있잖아요?”
  “...”
  “당신도 문을 꼭꼭 닫고 있군요.”
  이말이 비행기의 마음을 찔렀다.
  “당신의 내부로 한 번 들어가보고 싶어요.”
  “그건 곤란한걸.”
  “보고 싶은 것을 보여주지 않는 것을 보면 당신도 어른을 닮았군요.”
  잠자리의 어른들도 날이면 날마다 그랬다. 숲 가까이 가지  마라. 그곳에는 새가 있단다. 그래서 
새를 잘 모르는 어린 잠자리들이 무슨 새가 있는데요, 하고 물으면 어른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넌 그런 거 몰라도 돼! 저쪽으로 가!”
  그때 궁금한 게 많은 어린 잠자리가,  그럼 새를 한 번 보여주세요, 하고 말하면 어른들은 고개
를 설레설레 저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건 곤란한걸.”
  사실 잠자리들이 활주로 가까이  나와 노는 일도 일찍이 금지되어 있었다. 비행기가  몰고 다니
는 바람에 휩쓸리면 쥐도 새도 모르게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말 거라도 어른들은 수없이 주의를 
주곤 했다.
  “잠자리야, 너는 날개 끝에 무엇을 싣고 다니니?”
  이번에는 비행기가 잠자리에게 물었다.
  “저는요, 구름, 바람, 무지개, 노을 같은 것을 싣고 다니지요.”
  잠자리는 얇디얇은 날개를 들어올려 보였다.
  비행기는 잠자리가 부러웠다.  비행기 자신은 이름조차 입에 올리기 거북살스러운  무기 수송기
였던 것이다. 비행기 안에 가득  실려 있는 무기들을 싣고 저녁이 되면 이 활주로를  날아올라 또 
전쟁터로 날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그를 괴롭했다.
  “여기서 쉬다가 어디로 갈 거예요?”
  늙은 비행기의 속마음을 모르는 잠자리가 물었다.
  “한국이라는 곳이야.”
  “그럼 저도 그곳으로 따라가면 안 될까요?”
  “거긴 밤이 새도록 날아가야 하는 곳인걸.”
  “아무리 멀어도 날아갈 수 있어요. 자, 보세요.”
  잠자리는 날개를 파르르 흔들며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보세요. 저는 연료가 없어도 이렇게 잘 날 수 있는걸요.”
  “그렇지만 안 돼.”
  늙은 비행기는 단호했다.
  “왜요?”
  “나는 이미 늙었단다. 이렇게 날아다니다가 엔진이 완전히 고장났을  때 조용히 녹슬어가면 되
지면, 너는 언제까지나 영원히 날아야 하기 때문이야.”
  “영원히 난다구요?”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점에서 잠자리와 비행기는 닮은데가 많지. 하지만  비행기가 날 수 있는 
하늘은 너희 같은 잠자리가 날아다닐 수 있는 하늘보다 좁단다.”
  “비행기가 잠자리보다 덩치가 훨씬 큰데도요?”
  “잠자리야...”
  늙은 비행기가 잠자리를 불렀다.
  “너는 나하고 달라. 너는 영원히 녹슬지 않는 잠자리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해.”

    갈매기 학교

  태양이 어디에서 뜨는지를 다지는 일이 시작되면서 어린 갈매기들은  큰 혼란에 빠져버렸다. 동
해안의 어느 비탈진 벼랑  사이로 위치한 갈매기 학교는 이 문제  때문에 뜨거운 날로 위의 냄비 
뚜껑처럼 들썩거렸다.
  지구의 자전으로 인해 낮과 밤이 생긴다는 사실, 그 때문에  낮에는 태양이 보이고 밤에는 보이
지 않게 된다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에  맨 처음 흠집을 낸 것은 1학년 1반의 한  갈매기였다. 그
는 복학생이었다. 그는 이 학급의 보통 갈매기들보다 나이가 두  살이나 많았으며 덩치도 다른 학
생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컸다. 이 학생이 수업 시간에 교실 뒤쪽에 앉아  있다가 하품을 
하느라고 양 날개를 펼치면 마치 어른 갈매기가 나른하게 기지개를  켜는 것처럼 보였다. 그럴 때
마다 어른들은 주의를 주었다. 바른  자세로 앉아 있으라고, 그려면 그는 어깨를 움츠리고 단정하
게 앉아 고개를 숙였다. 그가 잠시 순종하는 기미를 보이면  어른들은 칠판에다 다시 능숙하게 문
제를 풀어나갔고, 대다수 얌전한 학생들은 그것을 공책에다 빽빽하게 옮겨 적는 데 열중했다.
  2년 만에 다시  학교로 돌아온 그는 처음에는  후배뻘인 급우들 속에서 겉돌기만 했다.  그러나 
차츰 학교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그는 그만이  알고 있는 비밀 하나를 옆에 앉은 갈매기에게 알려
주게 되었다. 그는 의자 등받이에 거만하게 기대어 말했다.
  “나는 태양이 뜨는 곳을 알고 있어.”
  이 말을 들은 갈매기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실이야?”
  “사실이 아닌 이야기를 내가 왜 하겠니?  내가 전에 가출을 했던 이유는 태양이 뜨는 곳이 어
디인지를 알기 위해서였어. 나는  그 동안 수많은 곳을 날아다녀보았는데 그처럼 눈부신  곳을 본 
적이 없어. 태양이 밤새 숨어 있다가 뜨는 곳, 그곳은 정말 대단한 곳이야.”
  “그렇다면 너는 수평선 너머에까지 가보았다는 말이니?”
  “물론이지.”
  그는 교실 창밖으로 펼쳐진 바다의 끝, 수평선을 바라보며 자신있게 말했다.
  어린 갈매기들에게 수평선이란 `넘어서는 안 될 선`이라는 뜻이었다. 아직까지 그 선을 넘은 어
린 갈매기는 한마리도 없었다.  설혹 수평선을 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선 가까이  날아간 사실
이 적발되면 어김없이 퇴학을  맞고 학교에서 쫓겨나야 한다는 게 갈매기 학교의  교칙이었다. 심
한 경우 학교뿐만 아니라 갈매기 사회에서 따돌림을 받는 일도  감수해야 했다. 물론 그런 관습과 
법률은 어른들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니까 태양이 뜨는 곳을 알고  있다는 복학생 갈매기는 어른이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
넘어서는 안 될 선`을 최초로 넘은 갈매기였다.
  이 이야기는 순식간에 학교  안에 퍼져나갔다. 어린 갈매기들은 그의 이야기를 하나라도  더 자
세하게 주워듣기 위해 쉬는 시간이면 1학년 1반 교실 부근을  기웃거렸다. 도대체 수평선 너머 태
양이 뜨는 곳은 어떤 곳일까. 호기심 많은 아이들은 수업  시간에도 수평선 너머를 상상하느라 창
문 쪽으로 자주 눈길을 던졌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나이 많은 복학생이 어린 갈매기들을 현혹하기 위해 만들어낸 허무맹랑한 
이야기라는 비판도 만만치 않게  일었다. 그런 비판은 주로 학교에서 어른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
고 있는 모범적인 상급생들 속에서 제기되었다.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을 생각을 하지 마라.”
  그들은 마치 어른들처럼 말하곤 했다. 아닌게 아니라 그들은 어른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들은 
몇 달 후면 졸업을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넘지 못할 선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들도 수평선 너머 
해 뜨는 곳이 궁금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다만 그것을 그 동안 실제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용기
가 없었을 뿐이었다.
  그러자 급기야는 이  문제가 학생들의 관심을 넘어 교직원회의 석상에서  거론되기에 이르렀다. 
교사들은 작금의 상황이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아니라는 데 생각을 같이했지만 문제의 처방에 대
한 의견은 둘로 갈라졌다.  이 세상의 절대적인 이론을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혼란을  조장하는 학
생을 처벌해야 한다는 쪽과 그것은 학생들의  자유로운 상상에 맡길 수도 있는 대수롭지 않은 문
제이므로 그냥 지켜보자는 쪽이 서로 맞섰다.
  교사들이 뾰족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이야기는 태양의 크기에 대한 논란으로 번
져갔다. 복학생 갈매기의 주장에 의하면, 태양은 이 세상을 비출 만큼 눈부시기는 하지만 그 크기
는 갈매기의 날개보다 작다는 것이었다.
  “내 말을 믿지 못하겠거든 내일 새벽에 일찍 벼랑 끝으로 나와보렴.”
  이튿날 새벽 벼랑 끝에는 어린 갈매기들이 수십 마리 나와  앉아 있었다. 이윽고 수평선 너머에
서 붉은 불덩이 같은 게 꿈틀대기 시작하더니 바다 위로  불끈 치올라왔다. 어린 갈매기들 앞에서 
복학생 갈매기는 날개를  펴고 힘차게 날아올랐다. 그러고는 어린 갈매기들의  눈앞으로 쏜살같이 
내려와서는 양 날개를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공중에 한참을 그대로 떠 있었다.  공중에서 정지하
는 비행술은 아무나 흉내내기 힘든 것이었다.
  그때 어린 갈매기들은  분명히 보았다. 그의 날개  속으로 숨어버린 태양을. 아니,  그의 날개는 
먼 수평선에서 금방 떠오른  태양을 확실하게 가리고 있었다. 태양은 정말 갈매기의  날개보다 작
은 것이로구나. 이렇게 해서 그에 대한 어린 갈매기들의 믿음은 점점 깊어갔다.
  “쳇, 손가락으로 태양을 가리려는 어리석은 녀석일 뿐이야.”
  어린 갈매기들은 이렇게 말하는 어른들을 믿지 않았으며,
  “언젠가는 태양이 숨어사는 수평선  너머에 데리고 갈게.” 라고 말하는 그를 더  따르고 좋아
했다.
  그는 이제 어린 갈매기들의 우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이웃 학교에 다
니는 갈매기들이 떼를 지어 그의 주위를 둘러싸곤 했으며, 그 중에는 수평선  너머로 꼭 한 번 데
려가달라고 은밀한 눈빛을 보내오는 친구들도 적지 않았다. 그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
솟았다.
  하루는 어린 갈매기 몇 마리가 한밤중에 그를 찾아왔다. 수평선 너머에 있다는 태양과 `그분`이 
과연 같은지 다른지를 묻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어린 갈매기들이 오랫동안 풀지 못했던  숙제 중
의 하나였다. 어린 갈매기들은 `그분`을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으나, 어른들은 `그분`에 대해 기
회 있을 때마다 이야기했다. 갈매기 무리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움직이는 분, `그분`이 바로 태양
이다, 라고.
  어린 갈매기들에게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태양은 하나밖에 없어.”
  어린 갈매기들은 답답했다. 그들에게 태양이 하나인지 둘인지는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정
작 그들은 수평선 너머의 태양과 `그분`중 누가 진짜 태양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언젠가 어른들에
게 그 질문을 던졌을 때 어른들은 대답 대신에 대체로 두어 가지 반응을 보이곤 했다. 쉿, 하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거나 아니면,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말고 공부나 해라!
  하지만 그런 어른들은 하나같이 태양을 두려워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기는 해도 어른들
이 두려워하는 대상이 수평선 너머의 태양인지 `그분`인지 어린 갈매기들은  도대체 알 수가 없었
다.
  “우리의 `그분`은 태양이 아니야.”
  그가 이 말을 내뱉어버린 게 화근이었다.

  그 다음날부터 갈매기 학교에서 그를  보았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어디로 갔는지, 살
았는지 죽었는지 누구에게 묻기만 하면 그  갈매기도 이튿날부터 무리 속에서 눈에 띄지 않게 되
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그가 사라진 뒤에 수평선 뒤에 태양이  숨어 산
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점이었다.
  만약에 그가 우리 곁에 다시 나타난다면 이런 말을 할지도 모른다.
  “지금 바다 위에 갈매기가 저렇게 어지러이  떠다니는 것은 바다 속에 숨어 있는 태양을 찾기 
위해서야.”
  그러면 어른들은 또 비아냥거리겠지.
  “쓸데없는 말은 삼가는 게  좋아. 갈매기는 물고기를 잡아먹기 위해 바다 위를  날아다닐 뿐이
야.”

    끝없는 길을 가라

  한 노스님이 인적 드문 산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노스님은 작은  바랑 하나를 등에 지고 손
에는 염주를 들고 있었습니다. 걸음을 옮기는 게 힘에 부치는지  노스님은 자주 길가에 앉아 쉬곤 
하였습니다. 노스님이 앉은 자리  둘레에는 조팝나무 꽃이 한창이어서 스님은 그 하얀  꽃들을 하
염없이 바라보기도 하였습니다.  노스님이 꽃을 바라보느라고 허리를 숙일때면 따스한  햇볕이 스
님의 등줄기에 하얗게  부서져 내렸습니다. 그러면 햇볕을  받은 노스님의 마른 몸이  금방이라도 
부서져 날아가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스님은 바랑과 염주를 다시 챙겨 다시 일어났습니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았지. 노스님은 부서질 것 같은 몸을  추스려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
작하였습니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노스님은 몇 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무엇인가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스님이 걷던 길 앞에 뱀이라도 한마리 스르륵, 지나간 것일까요.
  “아, 스님...”
  노스님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노스님의 앞에는 사람은 커녕 개미 한  마리도 보
이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잘못 본 것일가요? 스님은 그 자리에 굳은 듯이  서 있다가 꿇어앉아 두 
손을 모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엎드려 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세히 보니 스님은  눈앞에 돋아난 한 무더기의 파란 염줏대를  향하며 절을 하는 것이었습니
다. 이제 막 줄기 끝에  이삭이 맺히기 시작하는 염주는 스님의 절을 받고 살랑살랑  몸을 흔들었
습니다.
  그게 언제였던가요? 머리를 깎은  지 얼마 되지 않던 동자승 시절, 하룻밤을 묵어간  어떤 스님
에게서 염주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던 때가.
  동자승의 이름은 재연이었습니다. 저녁 공양을 마치고 나자 재연은  절 바깥마을 소식이 궁금해
서 오후 늦게 절에 들어온 연세 지긋한 객승 곁으로  바투 다가앉았습니다. 낡은 누더기를 설기설
기 이어 꿰맨 승복을 입은 객승은 좀처럼 말이 없었습니다.  괜히 바깥소식을 물었다가는 된통 불
호령이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으나 재연은 용기를 내어 늙은 객승에게 말을 걸었
습니다.
  “스님은 내일 해가 뜨면 어디로 가실 거예요?”
  객승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재연을 지그시 내려다보기만 했습니다.  재연은 답답해서 객승이 혹시 
귀머거리가 아닌가 싶어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다시 물었습니다.
  “스님, 스님은 귀가 어두우세요?”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느냐?”
   뜻밖에도 늙은 객승의 목소리는  위엄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재연은 그 한 마디에  금방 기
가 죽어버릴 정도였습니다.
  “네, 이름이 재연이라고 했던가?”
  “네.”
  “재연아, 나는 이렇게 나이를 먹었어도 모르는 게 너무나 많단다. 가보지 않은 길이 얼마나 많
은지 몰라.”
  “길을 잘 모른다구요?”
  “그래. 나는 길을 알기 위해 매일 떠난단다. 한 곳에 머무를 틈이 없어.”
  “도대체 어디로 가는 길인데 모르신다는 거죠?”
  “허허, 그걸 알면 굳이 길을 떠날 필요가 있겠느냐?”
  “저도 산에 들어오기 전에는 길을 잘 아는 아이라고 어른들이 늘 칭찬을 하곤 했는걸요.”
  “그래? 네가 얼마만큼 길을 아는지 나에게 이야기해줄수 있겠니?”
  “저는 집에서 방앗간까지 가는 길을 물론이고 재 너머 외갓집 가는 길을 혼자서 몇 번이나 다
녔거든요.”
  “아무렴. 그것도 중요하지. 그러면 너희 외갓집을 지나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아느냐?”
  재연은 잠시 머리를 긁적이며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어린 재연이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었으니까요.
  재연은 외갓집에 갈 때 큰 고개를  하나 넘곤 했는데 그 고갯마루에서 바라보던 기차가 생각났
습니다. 그 기차를 타면 아주 먼 곳까지 갈 수 있을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절에 들어온 뒤에는 그 
꿈이 저절로 없어져버렸습니다.
  “기차는 먼 데까지 가니까 많은 길을 알고 있겠군요.”
  늙은 객승은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기차는 정해진 길밖에 갈 줄 모른단다.  어떻게 보면 너보다 모르는 게 더 많을지도 몰라. 아
침마다 풀잎 끝에 매달리는  이슬이 얼마나 영롱한지, 그리고 뽕나무에 열리는 오디의  빛깔이 얼
마나 검고 윤이 나는지 기차는  알 수가 없단다. 그건 정해진 길만 달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
차는 너무 빨라서...”
  “천천히 가야 한다는 뜻인가요?”
  객승은 대답 대신 절 마당에 수북하게 쌓인 은행나무 잎에다 눈길을 주었습니다.
  재연은 가을 내내  속이 상했습니다. 은행나무가 떨어뜨리는  노란 나뭇잎을 쓸어 치우는  일이 
늘 재연의 몫으로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어쩌다 절에 들르는 젊은 보살들이 그  은행나무를 배경
으로 사진을 찍을 때면  재연은 어서 가을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비록 
겨울날 얼음이 둥둥 뜬 찬물에 걸레를 빠는 일이 또 그를 기다린다고 해도 말입니다.
  겨울을 향해 가는 사계절의 변화처럼 늙은 객승도 언젠가는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재연
은 갑자기 무서워졌습니다. 길을 알기 위해 늘 떠난다는 이  객승은 어쩌면 길에서 죽을지도 모릅
니다.
  “스님도 죽나요?”
  재연의 난데없는 질문을  받고 객승은 염주를 만지작거렸습니다. 객승의 손가락  끝이 가을바람
처럼 쓸쓸해 보였습니다.
  “그럼, 언젠가는 죽어서 저 바람 같은 게 되겠지.”
  “...”
  “재연아, 나는 길가에서 죽고 싶단다.”
  객승의 목소리가 너무나 비장해서 재연은 그저 멍하게 듣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길을 가다가 양지바른 곳이 있으면 거기서 볕을 쬐면서 앉아  졸다가 그저 바람이 되는 거지.

  “그렇다면 스님께서는 길을 다 알지도 못하고 돌아가시는 거잖아요?”
  “그렇지 않아... 내가 길가에 앉아 졸다가 죽으면 내살은 썩고  뼈는 삭아 흙이 되고 바람이 되
겠지만, 내가 들고 있는 염주는 땅에 묻혀  다시 싹을 틔울 거야. 그 염주가 자라 열매를 맺게 되
면 또 누군가가 새로 염주를 만들어 들고 길을 떠나게 될 거야.  그러니까 나는 죽어도 죽지 않는 
거지. 재연아, 길을 가다가 누가 심지도  않았는데 거기 염주 싹이 무더기로 돋아 있거든 그 자리
는 어떤 스님이 길을 가다가  볕을 쬐면서 앉아 졸다가 입적하신 곳인줄을 알아라. 그  자리를 보
거든 꼭 절을 드리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이튿날 재연이 잠자리에서  일어나 보니 늙은 객승은  이미 떠나고 없었습니다. 스님이  가시는 
길을 빗자루로 쓸어드리고 싶었는데 재연이 어리고 게으른 탓이었습니다.

  동자승 시절에 만난 늙은 객승처럼 재연도 나이를 먹은 노스님이 되었습니다.
  노스님은 인적 드문 산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노스님은 작은 바랑 하나를 등에  지고 손에
는 염주를 들고  있었습니다. 걸음을 옮기는 게 힘에  부치는지 노스님은 자주 길가에 앉아  쉬곤 
하였습니다. 노스님이 앉은 자리  둘레에는 조팝나무 꽃이 한창이어서 스님은 그 하얀  꽃들을 하
염없이 바라보기도 하였습니다. 노스님이 꽃을 바라보느라고 허리를 숙일  대면 따스한 햇볕이 스
님의 등줄기에 하얗게 부서져내렸습니다. 그러면 햇볕을 받은 노스님의  마른 몸이 금방이라도 부
서져 날아가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스님은 바랑과 염주를  챙겨 다시 일어났습니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았지.  노스님은 부서질 것 같은 몸을 추슬러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
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

  그는 길을 떠났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것을 찾지 못하면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작정으로  그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발이 부르트도록 걸었으나  정작 그
가 찾는 중요한 것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주 추운 겨울날,  그는 거지를 만났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고  물었더니, 거지는 
배불리 먹고 따뜻한  방에서 잠자는 거라고 애절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는 거지가 한심스러웠다. 
당신은 일을 하지 않고 게으르기 때문에 평생 구걸이나 하며  살아가겠군. 그는 거지의 몸에서 나
는 역한 냄새 대문에 코를 싸쥐고 다시 길을 떠났다.
  어느 마을 정자나무 밑에서 그는 병든 노인을 만났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고 물었
더니, 노인은 아프지 않고 오래 사는 거라고 천천히 말했다. 그는 노인이 욕심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늙고 병들면  당연히 죽어야 하는 것  아니요? 그는 노인의 구부러진 허리를  외면하고 
다시 길을 떠났다.
  왁자지껄한 시장 복판에서 그는  장사꾼을 만났다. 역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고 물
었더니, 장사꾼은 돈을  많이 버는 거라고 서슴없이 말했다.  그는 웃고 말았다. 당신은 속물이군. 
그는, 손가락에다 퉤퉤 침을 발라 돈을 헤아리는 장사꾼을 비웃으며 다시 길을 떠났다.
  거지도, 병든 노인도, 장사꾼도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구나. 그는 
답답했다. 하지만 한번 마음먹은  일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리라고 몇 번이나 다짐을  하며 그는 
걸었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물어보았으나 결론은 뻔했다. 대체로  인간들이란 별로 중요하지 않
은 일에 아동바동 매달려 살아가는  게 아닐까 싶었다. 이를테면 먹고, 마시고, 입고, 잠자는 일에 
너무 많은 시간과 욕망을 쏟아붓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하루는 어느 마을에서 집을 짓고 있는 광경을 구경할  기회가 있었다. 때마침 상량 고
사를 지내는 날이어서 거기에는  이런저런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그는 술이나 한잔  얻어 먹
으면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이 사람들에게 물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집을 짓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먼저 풍수장이가 말했다. “뭐니뭐니해도 집터를 잘 고르는 일이 중요하지요.”
  그 다음에는 목수가  말했다. “집터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집을 부실하게 지으면  사상누각이 
되고 맙니다. 설계와 시공이 무엇보다 중요하지요.”
  이 말을 이어 미장이가  말했다. “내가 벽을 단단하게 바르지 않으면 바람이  들락거리는 집이 
되고 말지요. 벽 공사를 잘 마무리하는 게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지요.”
  너도나도 한 마디씩 거드는  통에 경건해야 할 상량 고사가 점점 난장판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는 뒤늦게서야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어서 자리를 뜨고 싶었
다. 그러나 그는 서로 뒤엉킨 사람들  사이에 갇혀 오도가도 못하고 있었다. 그 동안 팔짱을 끼고 
소란을 지켜보고 있던  집주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아시
오?”
  “그게 뭡니까?”
  그는 눈이 번쩍 뜨였다. 집주인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
었다. 한시바삐 그 대답을 듣고 싶어 그는 집주인에게 바싹 다가갔다.
  “어서 빨리 저쪽으로 가는 것이오.”
  그는 집주인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그가 또다시 걸어가야 할 길이 가물가무 보였다.

    따뜻한 손

  뒷다리 한쪽이 부서진 나무 의자가 있었다.
  쓰레기 분리 수거함에다 삐딱하게 몸을 기댄  채 나무 의자는 고약한 냄새 때문에 며칠째 코를 
싸쥐고 있는 참이었다. 뒷다리가 부서질 때 생긴 상처가 자꾸 욱신거려왔다. 나무 의자는 몸을 가
누기가 힘들었다. 금방이라도 주저앉아버릴 것만 같았다.
  옛날에 나무 의자는  어린 소나무였다. 숲 속으로  비쳐들던 맑은 햇빛과 산새들의  노랫소리를 
받아먹으며 크던 시절이  있었다. 그의 몸집이 제법 크낙한  그늘을 만들 줄 아는 나이가  되었을 
때였다.
  “이놈을 베어 아들녀석의 의자를 만들어주어야겠군.”
  산으로 늘 나무하러 오던 젊은 나무꾼이 어느 날 자신의  몸에 날카로운 톱을 들이댔다. 소나무
는 허리가 끊어지는 통증을 느꼇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슬픈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이었다. 오히려 
마음 한쪽에서 뿌듯한 기운이 샘물처럼 새록새록 스며나왔다. 몸은  비록 잘리지만 그는 나무의자
로 다시 태어날 것이었다. `내가 의자가 되면 평생 그 의자의 주인을 기다리면서 살 거야.`
  정말 그랬다. 소나무는 작고 예쁜  의자가 되었다. 그의 주인은 중학생이 된 나무꾼의 아들이었
고, 의자는 그 주인을 기다리는  재미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의자는 주인이 책가방을 메고 학교에
서 돌아올 때를 기다렸고, 그가 먼 도시에 나가 공부를 할 때는  방학이 되어 돌아올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주인을 기다리는 동안, 자기 몸을 반질반질하게 윤이 나도록 닦아놓는 일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런  즐거운 기다림의 시간은 끝이 났다.  부서진 나무 의자는 무덤 같은  쓰레기 
하치장으로 실려갈것이고, 거기서 잡스런 오물들과 뒤섞여 치욕스럽게 생을 마감할 것이었다.
  게다가 옛날의 주인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나무 의자는 소리내어 울고 싶을 정도로 비
참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아파트 입구 쪽에서 노인 한 분이 천천히 걸어나오고  있었다. 그 노인은 옛날에 소나무를 
베어 아들에게 의자를 만들어준 나무꾼이었다. 노인은 나무 의자  가까이 다가와서는 의자를 쓰다
듬으며 말했다.
  “고쳐서 쓰자고 했더니 결국은 여기에다 갖다 버리고 말았구나.”  노인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
다.
  “손을 좀 보면 얼마든지 쓸 수가 있는데...”
  노인은 나무 의자의 부서진 뒷다리를 쓰다듬었다. 노인의 손은 거칠었으나 참 따듯하였다.

    지구를 움직이는 소년

  소년의 마을에는 오래 전부터 내려온 저울이 하나 있었다.
  그 저울의 주인은 한약방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약을 지을 때면  언제나 약초를 그 저울 위
에 올려서 달곤 했다.  왼쪽의 저울과 오른쪽의 저울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팽팽하게 
균형을 이룬 뒤에야 할아버지는 흡족해하시며 약초를 종이에 정성들여 쌌다.
  한약방 할아버지의 저울을 생각하다가 어느 날, 소년은 엉뚱하고도 즐거운 고민에 빠졌다.
  `만약에 내가 땅  위에 있는 돌멩이를 하나  집어든다면, 지구가 잠깐 동안  기우뚱거리지 않을
까?`
  땅 위에 있던 돌멩이 하나만큼의 무게가 소년의 손아귀안으로 이동을 하게 되면 지구의 균형이 
깨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내 손으로 지구를 약간만이라도 움직이게 할 수만 있다면!...`
  소년은 마당가에 단단하게 박힌 돌덩이 하나를 가깍스로 빼내는  데 성공했다. 요강만한 돌덩이
였다. 그러고는 있는 힘을 다해 그 돌덩이를 안아 들어올렸다. 그런데 정작 기우뚱거릴 줄 알았던 
지구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소년의 몸이 큰 돌덩이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서  소년은 비척거리다
가는 그만 땅바닥에 털썩 힘없이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소년은 한약방 할아버지에게 달려가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왜 지구가 꿈쩍도 않는 거죠?”
  할아버지는 빙그레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지구를 움직여보겠다는 네 생각이 참으로 기특하구나. 그런데 애야, 이런 생각을 해보지는 않
았니? 네가 지구를 움직이겠다고  돌멩이를 하나 집어들었을 때, 지구 반대편에서는  누군가 손에 
들었던 돌멩이를 하나 땅에 내려놓고 있었을지도 모르잖니?”

    보이지 않는 것

  눈알이 부리부리한 푸른 용 한 마리가 말했다.
  “나는 이제까지 바위를 한번도 본  적이 없어. 그래서 바위가 어떻게 생겼는지, 얼마나 단단한
지 알지 못한단 말이야.”
  “참으로 한심한 녀석! 바위에 머리를 부딪히면 금방 피투성이가 되어 나자빠지는데 그걸  모르
다니, 쯧쯧.”
  옆에 있던 호랑이가 혀를 찼다.
  푸른 용은 길다란 몸을 뒤틀더니 강 건너 앞산으로 날아가버렸다.
  그러자 용이 지나간 자리에 용의 몸통만큼 커다란 동굴이 뻥 뚫렸다.
  호랑이는 강가에 앉아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나는 바위를 볼 수는 있지만  도대체 창호지를 볼 수가 없단 말이야. 듣자면 이  세상에서 가
장 얇디얇은 게 창호지라는데...”
  호랑이의 말을 듣고 있던 강물 속의 황금잉어가 말했다.
  “그래서 너는 옛날부터 방안에서 잠자는 어린아이를 스스럼없이 물어갔구나.”
  호랑이는 부끄러워 온몸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 후로 호랑이는  절대로 마을 가까이 내려오지 
않았다.

  황금잉어가 꼬리지느러미를 흔들며 눈을 크게 떴다. “나도 고민은 있어. 나는 물을 볼 수 없거
든.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아.”

  그때 강가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던 인간이 나섰다.
  “쳇,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말은 말짱 거짓말이야.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아
무것도 없어. 집채만한 바위,  백설 같은 창호지, 시원한 물, 이 모든  것을 똑똑히 볼 수 있는 두 
눈이 있거든. 게다가 나는  돈을 보는 데 얼마나 눈이 밝다구! 그건 이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중요한 것이잖아?”

    반달가슴곰에게

  옛날 옛적에 밤이 찾아오면 반달가슴곰, 너는 네 몸에 검은 비단을 둘렀지. 거기에다 촘촘히 상
추씨 같은 별들을  뿌리고 밤이 깊어지면 별들이 심심해할까봐 네  가슴에다 반달을 하나 만들어 
붙였지. 반달가슴곰, 너는 끝도 없는 밤하늘, 너는 우주의 지붕이었지.

  네가 하늘에서 지리산 피아골 쪽으로 처음 내려왔을 무렵일 게다.
  너는 몰랐겠지만, 그때 나라 안이 무척 시끄러웠단다. 슈퍼마켓에서 총을 팔아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고 있었지.
  “그놈의 두더지가 고구마 밭을 몽땅 뒤집어놓았어.”
  “까치들이 잘 익은 사과만 골라서 부리로 콕콕 쪼아버렸다니까.”
  “요즈음 참새들은 도통 허수아비를 무서워하지 않는단 말이야.”
  수확기를 앞둔 농민들은 분개했다. 그들은 두더지가 다니는 길목에 쥐덫을 놓았고, 까치와 참새
가 내려앉을 만한 자리에 독약을 묻힌 곡식을 뿌렸다. 그러나 그것도 말짱 도루묵이었다.
  도시도 예외가 아니었다.
  “비둘기 똥 때문에 공원에 승용차를 추차해놓을 수가 없어.”
  “새 아파트에 무슨 개미가 이렇게 우글거리는 거야.”
  여론은 펄펄 끓는 팥죽 솥이었다.
  “슈퍼마켓에서 총을 팔면 문제가 씻은 듯이 해결될 거야.”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금방 폭동이라도 일어날 것만 같았다.
  정부는 끙끙댔다.
  하루에 한 차례씩 국무회의가 열렸다.  덩달아 한나절에 한 번씩 임시 국회가 소집되었다. 이에 
질세라 사법부도 대책 마련에  나섰다. 전국 법원장들은 묘안을 짜내느라 전화 수화기를  아예 손
에서 놓질 않았다. 그러자 여론 조사 기관은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재빠르게 조사 결과를 공
표하였다. 슈퍼마켓에서 총을 팔아야 한다-48%, 슈퍼마켓에서 총을  팔면 안 된다-13%, 모르겠다
-39%.
  이 여론 조사  결과 때문에 정부는 더욱 곤혹스러웠다. 정부의  한 고위관리는 `모르겠다`가 왜 
39%나 나왔는지 모르겠다면 한숨을 쉬었다.
  반달가슴곰, 너는 그때 무엇을  하고 있었나. 그때는 가을이었고, 네가 겨울잠을  자러 들어가기 
전이었고, 너는 느릅나무 뿌리를  우물우물 씹고 있었고, 가족들하고 한가롭게 어슬렁거리고 있었
다. 어슬렁거리면서 반달가슴곰, 너는 너대로 행복해서 먼 산을 자주 바라보았다.
  너는 행복하였지만, 두더지와 가치와  참새와 비둘기와 개미들은 행복하지 못했다. 그들은 정부
가 없었으므로 정부가 있는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인간은 슈퍼마켓에서 총을 팔지는 않았다. 그러나 살충제를 만들어 팔았고, 한꺼번에 수
많은 참새를 포획할 수 있는 그물을 개발해 팔았고, 감쪽같이  눈을 속이는 최신형 덫을 제작해서 
팔았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새들이  날아다니지 못하게 하려고 하늘에다 시커먼 연기를  잔뜩 뿜어올렸
다. 물고기들이 사는 하천에는 고름 같은 누런 기름을 흘려놓았다. 인간이 제초제를 만든 것도 이 
무렵이었다. 제초제를 몸에 맞은 풀들은 금세 하얗게 질린 얼굴로 숨져갔다.
  반달가슴곰, 너는 그런 것을 까맣게 모르고 살았다. 너는  무식했다. 너는 무식했기 때문에 하루
종일 다래 열매만 따먹었다. 너는 입술이 벌겋게 물이 들도록. 그러다가 목이 마르면 계곡의 맑고 
찬 물을 들이켰다. 너는 가슴이 싸해지도록, 반달가슴곰.
  “최저생계를 보장하라.”
  “인간은 각성하라.”
  어는 날부터 두더지와 까치와 참새와 비둘기와 개미들은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부가 없는 그들에게는 방송국이 없었다. 그들의 소리는 멀리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그
들은 목이 쉬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외치는 소리는 대부분의 인간들이 듣지 못했다. 인간의 귀는 
인간의 목소리 이외의 소리를 듣는데 매우 인색하거든.
  반달가슴곰, 너는 안전보장정보부를 아느냐. 두더지와 까치와 참새와 비둘기와 개미들의 소리를 
제일 먼저 포착한  게 그들이었다. 그들은 대단히  새로운 정보를 만들어 비밀리에  유포시키기로 
하였다.
  두더지와 까치는 만병통치약이라고!
  참새와 비둘기는 정력제라고!
  개미는 미용에 좋다고!
  이 소문을 들은 인간들은 눈에  불을 켜고 그들을 잡아들였다. 소문은 또 다른 소문을  낳아 퍼
뜨렸다. 까옥거리던 까마귀, 지지리도 못난 지네, 뱀굴 속에  사는 뱀, 굼뜬 굼벵이, 지저분한 지렁
이도 그 난리통에 수난을 겪게 된 것이다. 일 년 삼백육십오 일 처참한 살육이 끊이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반달가슴곰, 너는 모르고 있었다.
  반달가슴곰, 총 때문이었다. 반달가슴곰, 너는  그 총이 네 누이를, 네 부모를 겨누는 것을 보고 
있었다. 반달가슴곰, 너는 하늘을 두  쪽으로 갈라놓는 총소리를 들었다. 반달가슴곰, 너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반달가슴곰, 너는 뛰었다.  반달가슴곰, 너는 찔레 덤불 속으로 찔레 덤불이 되어 
잡목 숲 속으로 잡목 숲이 되어 뛰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벼랑 아래로 허공이 되어, 너는.
  네가 벼랑 아래에서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을 때, 바람이 다가와 낮게 낮게 말해주었다. 네 누이
는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죽었다고, 네 부모는 총을 빼앗으려고 대들다가 올가미에 걸린  채 어
디론가 끌려갔다고, 꼼짝 못 하고 트럭에 실려갔다고.
  아아, 너는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반달가슴곰. 가슴을 치며 울고 싶었으나, 울음소리도 한 줄기 
새어나오지 않았다. 반달가슴곰, 네가 섬진강 가에 혼자 앉아  있을 때였다. 너는 더이상 행복하지 
않았고, 그리하여 너는 하염없이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강물 속에서  시커멓게 생긴, 몸매가 늘씬한 짐승 한  마리가 강물 위로 쑤욱 올라왔
다. 수달이었다. 수달은 매우  화가 난 표정이었다. 주둥이 부근에 난 수염을 꼿꼿하게  치켜든 채 
수달이 말했다.
  “이대로 있을 수가 없어요. 이러다가는  우리 모두 동물원으로 가고 말 거예요. 아니면 하나도 
남김없이 죽음을 당하거나.”
  반달가슴곰, 너는 두 눈을 끔벅거리고 있었다.
  너는 하늘을 빙빙 돌던 솔개 한 마리가 네 옆에 사뿐히 내려앉는  것을 보았다. 멋진 날개를 안
으로 접으며 솔개가 말했다.
  “수달의 말이 옳아. 나는 죽었으면 죽었지, 박제가 되기는  정말 싫어. 날지도 못하면서 날개를 
펴고 있는 꼴은 상상하기도 싫어. 우리끼리라도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해.”
  반달가슴곰, 너도 가슴이 답답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고로쇠나무가 입을 열었다.
  “내 몸 좀 봐, 이렇게  구멍이 숭숭 뚫린 것은 인간들이 지난봄에 내 몸의  수액을 뽑아내느라 
살갗을 찢고 빨대를 갖다 끼웠기 때문이야. 용서할 수가 없어. 인간들의 허리에다 빨대를 꽂고 싶
은 심정이야.”
  반달가슴곰, 너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눈에 전에 없던 핏발이 서렸다.
  “두 발로 걷는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그 동안 나는 기어다녔어. 손으로 도구를 만들고, 불을 
사용하면서 인간들은 타락하기 시작한 거야.”
  반달가슴곰, 너는 처음으로 깜짝 놀랄 만한 발언을 했다.
  “그래, 땅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나도 하늘을 날아다녔어.”
  “그래서 나는 물 속에서 살았고.”
  “나는 내가 뿌리 내릴 수 있는 한 뼘의 땅만 소유하려고 발목을 땅에 대고 있었어.”
  솔개도, 수달도 고로쇠나무도 반달가슴곰, 너와 뜻을 함께하겠다고 나섰다.
  그런데 겨울이 코앞에 바짝  다가와 눈발을 뿌리고 있었다. 나무와 짐승들에게 겨울은  매우 불
리한 계절이었다. 반달가슴곰, 너도 잠을 자야 했다. 적어도 내년 봄까지는.
  반달가슴곰, 너는 나무와 짐승들의 시위에 맨 앞장을 섰다. 힘이  센 너는, 덩치가 큰 너는 머리
띠를 매고 시위대를 이끌었다. 머리띠에는 `인간은 자폭하라`는 구호가  쓰여 있었다. 모든 산짐승
과 야생 나무들, 심지어 물고기들까지 스크럼을 짜고 구름떼처럼 거리로 몰려갔다.
  “인간은 자폭하라. 자폭하라. 자폭하라.”
  경찰은 스피커를 통해 해산을 종용했다.
  “여러분은 지금 불법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과  도로교통법을 위반
하고 있습니다. 지금 즉시 해산하여 사회의 안전과 질서를 지켜주기 바랍니다.”
  그러나 시위대는 물러설 기미를 전혀 내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던 시위대를 향해 결찰이 최루탄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다연발 최
루탄이 시위대의 머리위에서 펑펑  터졌다. 시위대는 일순간 전열이 흐트러지는 듯했다. 반달가슴
곰, 너는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얼굴을 팔뚝으로 닦으며 주먹을 치켜들었다.
  “반달가슴곰에게도 총을 달라.”
  이 소리를 들은 시위 군중들이 힘을 얻어 외쳤다.
  “수달에게도 총을 달라.”
  “솔개에게도 총을 달라.”
  “고로쇠나무에게도 총을 달라.”
  “산천어에게도 총을 달라.”
  “노루에게도 총을 달라.”
  ...
  반달가슴곰, 안전보장정보부가 가만 있을  리가 있겠느냐, 그들은 이번 시위를 정부를 전복하려
는 극좌 세력의 음모로 규정짓고 그 배후를 가리겠다고 팔을 걷어붙였다.
  며칠 후.
  안전보장정보부는 건국 이후 최초의 무장 봉기를 통해 선량한 다수 국민을 선동하는 세력을 일
망타진했다고 발표했다.
  “이번 무장 봉기의  주모자는 진달래꽃과 자작나무임. 진달래는 철쭉과에 딸린  갈잎 떨기나무
로 키는 30CM부터 3M정도 되며, 4월에 꽃이 3-5개씩 가지 끝에 피는데 연분홍 색임. 스스로 `참
꽃`이라고 이름을 지어 퍼뜨리고  다니며, 음지에서 자라 양지를 지향하는 척하는데, 꽃의 방향이 
늘 북쪽을 향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좌경 사상에 심각하게  오염된 자가 분명함. 또다른 공모자인 
자작나무는 자작나무과에 딸린 한대성의 큰키나무로 키는 20-30M  정도이며, 잎은 어긋맞게 나는
데 잎가에 톱니가 있음. 우리나라 평북, 함남북 및 중국  만주, 러시아에 많이 분포하며 신분을 위
장하기 위해 `백화`라는  이름을 쓰고 다니기도 함.  이 밖에 반달가슴곰, 수달,  솔개, 고로쇠나무 
등은 이들의 선전, 선동에 따라 부화뇌동한 자들로 판명됨.”
  반달가슴곰, 너는 눈을 번쩍 떴다. 겨울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계속에 눈이 녹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외로웠다. 반달가슴곰. 너는 앞발로  가슴을 쓸어내렸
다. 그 가슴에 반달이 여태껏 떠 있었다. 밤이 오면 가슴에 새겨진 반달과 하늘에 뜬 반달을 맞추
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이 세상에 보름달이 둥실, 떠오를지도 모를 일이었다.

    토끼를 잡는 여섯가지 방법

  이병천이라는 작가의 작품 중에 (사냥)이라는 제목을 가진 뛰어난 단편소설이 하나 있다. 이 소
설은 가물치, 은어, 민물게, 잠자리, 산비둘기, 여우,  곰, 멧돼지, 족제비, 꿩, 토끼, 노루 등을 사냥
하는 방법을 자세하고도 재미있게  나열하고 있는데, 그 중에 토끼를 잡는 대목을  작가의 양해를 
얻어 잠깐 소개할까 한다.

  꿩에 비하면 토끼는 구걸하지 않는다.  제 줄 것은 있어도 받을 것이란 세상에 없음을  알기 때
문이다. 이 점은 사람 중의 백성과도 닮아 있다. 그들은 굴 속에만 칩거하다가 참으로 먹을 게 없
고 배가 고프면  저 푸르른 날의 도토리나무  새순이며 쑥부쟁이며 칡넝쿨을 생각한다.  그리고는 
그때 배불리 먹고 함부로 쏟은 자기의 배설물 속에 조금은 자양분이 남아 있다고 믿으며 이미 굳
어 있는 제 똥을  먹는다. 오랜 세월의 경험을 통해 삶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토끼굴 
앞의 똥들을 모아 그 안에  극약을 넣고 시래기 국물로 터진 틈을 발라놓는다. 머지않아  눈이 내
릴 것이며 머지않아 토끼는 그  약, 그 똥, 그 음식을 먹을 것이다. 그리고  토끼는 뱃속이 아파오
므로 울면서 집을 나서고 울면서  눈밭을 어지럽게 뒹군다. 그러나 토끼는 죽는 날까지 자위한다. 
자기로서는 구걸하지 않는다는 그 뼈아픈 자존을.

  이게 토끼를 잡는 첫번째 방법이다.  마치 환약처럼 생긴 토끼 똥 속에다 극약을 넣는  이 방법
은 콩알 속에 청산가리를 넣어 만든 `싸이나`로 꿩을 잡는 법과 유사하다. 이렇게 해서 잡은 토끼
는 그 극약의  독성 때문에 내장이 거의 녹아버릴  지경에 이른다. 눈밭에서 이미 뻣뻣하게  굳은 
토끼를 들고 와 배를 가르고 요리를 준비할 때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토끼의 내장 속에 
혹시라도 남아 있을지 모르는 극약의 흔적을 말끔히 들어내고 몇 차례 씻어 낸 뒤에도 그 찜찜함
은 마음속에 여전히 남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찜찜함을 가장 적게 느끼는 사람, 그리고 가장 
먼저 잊어버리는 용기있는 사람만이 바글바글 끓는 얼큰한 토끼탕을 가장 먼저 맛보는 영광을 누
리게 된다.

  두번째 토끼 잡는 법으로 덫을 놓는 일을 빼놓을 수 없다. 이  방법은 전국의 각 지방에서 보편
적으로 두루 쓰이는데, 이것은 지방에 따라 `목매` 혹은 `목로`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눈이 발목까
지 푹푹 빠지도록  내린 날이면 마을의 젊은이들은 가는  철사를 엮어 덫을 만들기 시작한다.  이 
덫을 평소 토끼가 잘 다니는 길목에 놓아두고는 낮잠을 퍼들어지게 자거나 묵내기 화투판을 벌이
기도 한다. 토끼가  걸려들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릴 줄  안다는 것은 사냥의 과정 속에서  그래도 
미덕에 속하지만, 그 덫에 걸려든다는 것은 토끼들에게는 치욕스러운 일에 속한다. 토끼는 경계심
이 유별나게 강해서 자기가 다녀보지 않은 낯선 길로는 누가 뭐라 해도 가지 않는 습성이 있다.
  눈을 감고도 갈 수 있는 길, 그곳에 하필이면 덫이 놓여 있을 게 뭐냐, 발목이나 모가지가 덫에 
덜컥 걸리는 순간 토끼는 그 치욕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친다. 그러나 몸부림이 거세질수
록 덫은 더욱 몸을 죄어온다. 그게 치욕스러워 토끼는 죽는다. 그렇게 땅바닥에 얌전하게 놓은 덫
은 하늘코에 비하면 신사적이다.
  하늘코는 `챌목매`라고도 하고 `후리채`라고도 하는데, 토끼가 잘 다니는  길목에 참나무나 물푸
레나무 같은 생나무를 부러지지 않을 정도로  둥글게 휘어서 그 끝에다 철사로 만든 덫을 건드리
는 순간 휘어진  나무가 펴지면서 토끼의 발목이나 목을  옭아 공중에 달아 올린다. 그때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린 토끼의 입장을 한번 상상해보라. 아, 길이 있었으되 길이 아니었구나.
  묵내기 화투가 끝나고 어두워지기  전에 마을의 젊은이들은 산을 오른다. 오랜만에 남의  살 맛
이나 좀 보자고 군침을 꿀꺽 삼키면서. 그런데 아침에 놓아둔  덫에 토끼는커녕 다람쥐 새끼 하나 
걸려들지 않은 것을 발견했을 때는 머리끝까지 분통이 터지는 것이다.
  씨발 것, 이놈의 토깨이들이 장난치고 있네.
  자신들의 장난에 토끼가 요행히 걸려들지 않은 탓에 이 인간들의 눈에는 파란 불꽃이 튄다.
  이때부터 토끼몰이가 조직적으로 계획, 진행이 되는데 이게 토끼를 잡는 세번째 방법이다. 마을 
뒷산에 은신해 있는 빨치산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잡아야 겠다는 토벌대라도 된 듯 청년들은 기
민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직 초등학교에도 들어가지 않은 코흘리개와 사나운  고양이 앞에서
도 벌벌 떠는 똥개들까지 이 대규모 토벌 작전에 동원된다.  토끼가 나타나면 잽싸게 내리칠 기세
로 손에 손ㅇ 몽둥이를 하나씩 꼬나잡은 이들이 마을 뒷산을  포위한다. 공격 목표는 너럭바위 밑 
토끼굴. 뒷다리가 긴  토끼를 산 아래서부터 모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이들은 모두  잘 
알고 있다. 내리막길 달리기에  약한 토끼를 잡으려면 능선 쪽에서부터 아래로 몰아  내려와야 한
다. 포위망은 점점 좁혀진다. 이때 눈  쌓인 풀숲에 숨어 있던 토끼가 위기 의식을 느끼고 뒷발에
다 힘을 주고 땅을 박차고 냅다 뛰어간다. 토끼몰이에 나선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한거번
에 짧은 비명 소리를 내지르는 것도 이때다. 물샐틈 없는  삼엄한 포위망을 뚫고 토기가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 비로소 내부 분열이  시작된다. 적을 눈앞에 두고도 놓친 데 대한 책망과  그에 따른 
변명이 시끄럽게 오가게  된다. 그 사이에 토끼는 유유히 토끼굴  속으로 은신한다. 그 비록 한낱 
미울일지언정 아무리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낯선 길이나 낯선 집으로 염치없이 들어가는 법은 없
다. 밤늦게 술에 취해 남의  집 초인종을 누르고는 남의 계집을 제 계집으로 착각하여  껴안는 시
늉을 하다가 쇠고랑을 찬 철없는 인간들은 토끼로부터 배우는 바 적지 않을 것이다.
  토끼의 그 자존심의  구멍 한가운데에다 인간들은 드디어  모닥불을 지피고 청솔가지를 태우며 
연기를 불어넣는 만행을 저지르기까지  한다. 매운 연기를 참지 못해 토끼가 눈물을  글썽이며 뛰
쳐나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이렇게  난리 법석을 피우는 인간들은 많이 보았어도 토기가  두 손
을 들고 항복하며 굴 밖으로 걸어나오는 것을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토끼굴에다  청솔가지 
타는 연기 대신에 시위 진압용 최루탄 가스를 집어넣는다면 몰라도.
  토끼를 잡는 네번째 방법으로 뭐니뭐니해도 총보다 더  확실한 무기는 없다. 총이란 `개인이 들
고 다니며 사용할 수 있는 총포 가운데 일반적으로 구경이 작은 무기`라는 사전식 풀이의 소박함
을 비웃고 말  가공할 파괴력을 지닌 물건이다. 어떤  사냥꾼이 함께 사냥을 간 동료를  짐승으로 
오인해 쏴 죽이고 말았다는 슬픈 신문기사를 우리는 더러 읽기도  하거니와, 전방 근무중에 M-16
을 자동으로 놓고 드르륵드르륵 갈겨 죄없는  토끼와 그 동무들인 노루 등속을 잡기도 했다는 의
기양양한 전승담을 우리는 그 동안 또 얼마나 많이 들어왔던가.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총
으로 양민을 학살하지도 않았으며, 자동소총으로 토끼 한마리 쏘아본  적 없는 방위병 출신이라는 
것이 얼마나 떳떳하고 자랑스러웠던가. 어쨌든 우리나라 산천에 살고  있는 메토끼의 숫자보다 훨
씬 많은 총이 무기고에 가득히  쟁여져 있는 한 토끼들은 마음놓고 생활을 영위할 수가  없다. 그
래서 산 좋고 물  맑은 이 나라 구석구석마다 토끼들은 이런 입간판을  세워놓았는지도 모르겠다. 
철통 같은 안보 태세, 좌경폭력 설 곳 없다.
  토끼를 잡는 다섯번째 방법은 산간 벽지 학교에 교사로 근무하는 내 친구로부터 들은 이야기이
다. 친구의 말인즉 토끼를 잡을 의사가 전혀 없음에도 토끼가 저절로 잡혀들 때가 있다는 것이다. 
눈이 많이 내린  날 밤, 가능하면 눈길에 잘  미끄러지지 않는 4륜 구동의 지프차를 타고  산길을 
넘다가 보면 배가 고파서 인가 근처로  내려왔던 토끼란 놈이 자동차 불빛을 보고는 멋모르고 달
려들곤 한다는 것이다. 차바퀴 밑에 두 눈을 꼭 감고 누운 놈을  트렁크에 싣기만 하면 손쉽게 사
냥이 끝난다는 이야기인데,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지금까지 기분이 영 개운치가 않다. 불빛을 쫓
다가 끝내 죽음을 맞이하고 마는 오징어나  여름날 불나비의 운명보다 토끼의 죽음이 훨씬 더 비
극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길 잘못 든 나그네가 먼  불빛이 있어 겨우 찾아가봤더니 백 
년 묵은 여우가 소복을 입고 여인으로  변장해 있더라는 옛날 옛적의 이야기는 허구라는 걸 알면
서도 듣는 이를 긴장하게 하는 요소가 있다. 그러나 자동차에  받혀 죽은 토끼 이야기에는 우연을 
빙자한 살육의 처참함만이 있을 뿐이다. 친구여, 우리는 정말 인간도 아니다.
  이제 토끼를 잡는 여섯번째 방법, 이건 수백 년이 넘도록  전해져 내려오는 토끼 사냥의 고전이
라 할 만하다. 먼저 토끼의 화상이 그려진 종이를 들고  숲으로 가서 토끼를 찾아야 한다. 토끼님, 
토끼님. 저는  용궁에 사는 별주부랍니다. 당신같이  훌륭한 분이 사나운  짐승들에게 쫓겨다니며, 
풀이나 뜯어먹고 살아야  한다니 참 딱한 일입니다.  내가 사는 용궁에서라면 당신께서는  벼슬을 
하고도 남을 텐데요. 이렇게 유혹한다면  넘어가지 않을 토끼는 한 마리도 없을 것이다. 거기에다
가 용궁의 어여쁜 공주와 혼인할 수도 있다고 덧붙이면 토끼는 꼼짝 못 하고 속아넘어가리라.
  예나 지금이나 명예와 출세, 그리고 여색을 위해서라면 하나밖에  없는 간까지 꺼내주는 토끼가 
수없이 많이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버들치를 기르는 시인

  버들치라는 물고기가 있다네.
  강버들 밑에서 노는  것을 좋아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네. 이 밖에도 버들치에게는  많은 
이름이 있네. 지방에  따라서는 버드랑치, 버들피리, 버들챙이, 중고기, 중치,  중태기, 중피리 등으
로 부르기도 한다네. 산골짜기의 맑고 찬 1급수에 사는 대표적인 어종 중의 하나라네.
  버들치를 기르는 시인이 하나 있다네.
  시를 쓰는 것을 좋아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네. 이 밖에도 시인에게는 많은 이름이 있네. 
어떤 사람은 시인을 글쟁이,  문인, 문사, 작가, 철 덜 든 인간, 속없는  인간, 현실 부적응자, 주정
뱅이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네.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에 사는 가난한 인간 중의 하나라에.
  시인은 지난 여름 지리산 달궁 계곡에 갔었네. 이 세상의  우글거리는 인간을 피해 산을 찾아갔
건만, 거기에는 더 많은 인간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네. 시인은  기분이 언짢았지만, 물 맑은 계곡에
서 바짓가랑이를 걷어올리고 오랜만에 시심을 가다듬고 있었네. 그때  계곡 건너편에 자리를 잡고 
텐트를 친 청춘 남녀 한 쌍이 소리를 질렀네. 그들은 물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네.
  “와아, 여기에 물고기들 많구나.”
  “저게 무슨 고기야, 자기?”
  “피라미들이지 뭐.“
  “자기, 우리 오늘 저녁에 저것들 잡아서 매운탕 끓여 먹자.”
  “그거 참 좋은 생각인걸.”
  갑자기 시인은 슬퍼지기 시작했네. 젊은 청춘들이 너무 한심스러웠네. 살아 꿈틀거리는 것은 무
엇이든지 잡아 잡수려는 그  욕식 동물적 본능도 한심스러웠지만, 물 속에서 떼지어  노는 것들을 
무조건 피라미로만 부르는  그 무식함이 더 한심스러웠네.  그 한심한 친구가 무심코  피라미라고 
부르는 그 물고기는 버들치였네.
  `까짓것, 한낱  자잘한 민물고기에 불과한 것들이  버들치면 어떻게 피라미면 어때?  그게 무슨 
대순가?`
  이렇게 함부로 말을 내뱉으면 곤란하다네. 그러면 시인은 더욱  슬퍼져서 소리내어 울지도 모른
다네.
  풀에 대하여, 들꽃에 대하여,  나무에 대하여, 새에 대하여, 곤충에 대하여,  물고기에 대하여 가
장 많이 아는 사람이 진정한 시인이라고, 시인은 생각한다네. 그리하여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 가
장 많이 느낄 수 있다고, 시인은  생각한다네. 어떤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이름을 정
확하게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시인은 생각한다네. 시라는  것은 무엇인가? 시란, 존재의  본질을 
실감나게 드러내는 이름을 붙이는 일이라고, 시인은 생각하다네. 삶의 이유와 방식이 제각기 다른 
존재들을 시인은 구별할 줄 안다네. 버들치와 피라미를, 진달래와 철쭉을, 산수유와 생강나무꽃을, 
쑥부쟁이와 구철초를, 장수하늘소와 딱정벌레를, 그래서 시인은 버릇처럼 말한다네.
  - 영희와 영자를 구별하지 못해서야, 쯧쯧.
  - 철수와 민수를 구별하지 못해서야, 쯧쯧.
  시인이 버들치를 기르겠다고 했을 때 가족들은 이구동성으로 말렸다네.  그렇지 않아도 개 콧구
멍같이 좁은 집안에 대형 수족관을 들여오겠다고 하니 기를 쓰고  아내가 반대를 할 법도 하였네. 
몸 빛깔이 아름답고 현란한 열대어라면  몰라도 흔한 민물고기 중의 하나인 버들치를 기르겠다고 
하니 아이들이 반대를 할  법도 하였네. 시인은 아내와 아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어류도감을 펼쳐 
보여주었네. 버들치는 정말 못생겼다네. 누르스름한  것 같기도 하고 거무튀튀한 것 같기도 한 등
짝의 빛깔부터 가족들에게 점수를 따지 못했네. 아주 뾰족한 못  끄트머리로 콕 찍어놓은 듯한 새
카만 눈도 쉽게 정이 가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네. 시인은 마지막으로, 버들치가 1급수에 산다는 것
을 특히 힘을  주면서,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말했네. 시큰둥해  있던 아내가 그제야 즉각 반응을 
나타냈네.
  “그렇다면 아주 깨끗한 물고기네요.”
  평소에 1등과 1등석과 1류를 선호하는 아내 덕분에 시인은 버들치를 기르게 되었다네.
  가까운 교외의 계곡을  훑어 겨우 버들치 몇 마리를  잡아온 날, 버들치들은 수족관 바닥  한쪽 
구석에 대가리를 처박고 사시나무  떨듯 발발 떨었네. 아무리 들여다보며 눈을 맞추려고  해도 떨
기만 했네. 먹이를 주어도 먹지 않았네.  한 시간이 지나도, 두 시간이 지나도 버들치들은 떨었네. 
시인은 밥 먹는것도 잊어버리고 버들치를 바라보았네. 식은 밥이 굳어갔네. 시인은 불안해지기 시
작했네. 하루가 지나도, 이틀이 지나도 버들치들은 떨었네. 시인이  넣어준 먹이가 물에 적신 건빵
처럼 퉁퉁 불어터진 채 떠다녔네. 시인은 시를 쓰는 것도 잊어버리고 버들치를 보라보았네.
  원고 독촉 전화가 자구  걸려왔네. 시인은 전화 받는 것도 아예 잊어버리고  버들치를 바라보았
네. 바라보고,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네.
  그러자 시인의 아내와  아이들도 수족관 속을 바라다보며 버들치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네. 
관심, 그것이 사랑의  시작이었네. 버들치들이 미끈한 몸을 보여주며  헤엄치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네.
  한 달이 지났네.
  시인이 먹이를 넣어주려고  가까이 가면 버들치들이 미리 알아보고 시인  가까이로 몰려들었네. 
시인은 버들치를  기르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네.  재빨리 꼬리지느러미를 흔들며 수면으로  떠올라 
먹이를 채어 먹는 활달한  몸짓도 보기 좋았네. 짝짓기를 하려는지 저희끼리 수초  사이를 오가며 
장난을 치는 모습도 사랑스러웠네.
  일 년이 지났네.
  버들치를 기르는 시인은 여전히 행복했네. 버들치가 들어 있는 수족관은  깊은 산 계곡 물을 한 
토막 뚝 떼어 집안에다  옮겨놓은 느낌이었네. 시인은 자연과 함께 어울리는 자기  자신이 은근히 
자랑스러웠네.
  하루는 시인이 수족관에 눈을  바짝 갖다붙이고 바라보고 잇을 때였네. 한 버들치가  입을 오물
거리며 시인에게 말했네.
  “이 수족관은 길이가 116센티미터, 높이가 45센티미터, 그리고 폭이 25센티미터군요.”
  아아, 시인은 가슴이 아팠네.  도둑질을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네. 버들
치라는 이름의 자연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것이 결과적으로 자연을 울타리속에 가둔 꼴이 되고 말
았기 때문이라네. 시간이 흐를수록 버들치 뱃속의 부레는  길이 116센티미터, 높이 45센티미터, 폭 
25센티미터의 공간에 길들여질 것이었네. 당장 버들치들을 원래 살던  곳에 다시 풀어놓는다 해도 
이들은 물 속에서  수족관 크기의 공간에서만 헤엄을  칠지도 모르는 일이라네. 시인은  버들치를 
길러온 일이 후회가 되었네. 아니, 그 동안 버들치를 길러온 게 아니라 가두어왔다는 죄책감이 시
인의 가슴에 따가운 회초리를 갖다대고 있었네.
  `내가 너희를 감옥 속에 가두었구나.`
  시인은 진심으로 말하고 싶었네.
  버들치가 다시 말했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갇혀 있는 건 우리들뿐만이 아니잖아요?”
  “뭐라고?”
  “우리가 보기에는 수족관 바깥도 감옥처럼 보이는걸요.”
  “그래도 나는 너희보다 자유로운 몸이야.”
  “그러면 가고 싶은 곳을 어디든지 갈 수가 있나요?”
  “글쎄, 그건 좀...”
  “그래요. 사람들은 발길이 닿는 대로  갈 수가 있다고 착각을 하지요. 사람들의 발걸음이 시작
되는 곳에서 끝나는 곳까지가 감옥의 내부라는 걸 모르고 있다구요.  가고 싶은 곳을 지금 막바로 
갈 수가 없다면 그건 감옥 속에 있다는 뜻이지요.”
  시인이 버들치를 기르는 게 아니었네.
  수족관의 버들치가 세상이라는 감옥 속의 시인을 기르고 있었네.

    눈사람

  소년은 눈보라 속을 걸어갔네.  소년이 걸음을 뗄 때마다 눈길 위에 소년의  발자국이 하나둘씩 
찍혔네. 그 발자국도 소년을 따라갔네. 소년은 그것도 모르고  계속 걸어갔네. 소년을 따라가는 작
은 발자국 위로도 눈은 그치지 않고 내렸네. 눈발이 발자국을 하나하나 지우고 있었네. 소년은 그
것도 모르고 계속 걸어갔네.
  소년은 빨간 털모자를  쓰고 있었네. 그래서 멀리 보이는  소년의 모습은 잘 익은 앵두  하나를 
백지 위에 톡, 떨구어 놓은 듯했네. 정말 버스는 눈  내리는 벌판 한가운데에다 소년을 톡, 떨구어
놓고 떠나버렸네.  눈보라가 얼굴을 세차게 때렸네.  이렇게 매서운 눈보라는 처음이라네.  버스가 
데려다준 이 낯선 고장도 생전 처음이라네.
  소년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곧게 뻗은 들길로 무작정 접어들었네.  벌판이 끝나는 곳까지 걸어
갈 거야.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면 어디든지 갈 거야. 소년은 어금니를 악물었네.  빨간 털모
자 위로 눈이 쌓였네. 눈을 털어낼 생각도 하지 않고 소년은 걸어갔네.
  아버지와 어머니는 또 싸웠네. 돌아앉아 연신 담배를 피워대는  아버지의 등뒤로 어머니의 악다
구니 소리가 들렸네. 아버지는 어머니의  긴 머리채를 잡고 잡초를 뽑듯이 흔들었네. 소년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혼자  울었네. 죽여라, 죽여. 어머니의 눈에 파란 불똥이 튀었네.  그래, 다 죽
이고 말겠어. 어머니를 주먹으로 때리는  것으로도 화가 풀리지 않는지, 아버지는 집안에 있는 물
건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던지기 시작했네. 전화기,  꽃병, 커피잔, 사진틀, 비디오, 흔들의자... 
그 지독한 파괴의 흔적들로부터 떠나고 싶었네, 소년은.
  소년은 오줌이 마려워 잠시  길가에 멈추어 섰네. 추위 때문에 바짝 쪼그라든  고추에서 참았던 
오줌 줄기가 터져 나와 쌓인  눈 위로 떨어졌네. 오줌 방울 닿은 자리가 노랗게  물들더니 오목하
게 패인 눈구덩이를 만들었네. 검은  땅바닥이 드러났네. 순결한 눈밭 위에 그것은 흉한 상처처럼 
보였네.
  어머니의 이마에 피가 번지고 있었네. 피를 본 어머니는 어디론가  다급히 전화를 한 뒤에 싱크
대로 달려가 칼을 잡았네. 아버지의 눈에 탁탁, 소리를 내며  붉은 불똥이 튀었네. 소년은 아무 소
리도 내지 못하고  혼자 울었네. 아, 그때 아버지는 내  컴퓨터를 치켜들더니 거실 바닥에 그대로 
내리꽂았네. 자판기가 산산조각이 났네.  모니터가 유리 조각을 뱉어냈네. 깨진 마우스는  쥐약 먹
은 쥐처럼 찍찍거렸네. 컴퓨터만 박살나지 않았어도 소년은 집을 나오지 않았을 것이네. 어른들이 
서로 싸우는 것을  숱하게 보아온 소년이었기에 한  며칠 지나면 잠잠해지겠거니 했었네.  하지만 
이번에는 사정이 달랐네. 소년의 컴퓨터가 박살이 나고 말았다네. 아버지가 컴퓨터만 내던지지 않
았어도... 소년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혼자 울었네.
  금세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네. 오가는  사람 하나 없는 길 위에서 소년은 먼 마을에서  한 등씩 
켜지는 불빛을 바라보았네. 따뜻한 밥처럼 느껴지는 불빛이었네. 그렇지만 마을 쪽으로는 가지 않
으리라 마음먹었네. 마을  사람들이 소년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면 대답하기가  싫기 때문이라
네.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다 해도 대답을 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네. 소년은 자신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로 갈 것인지 스스로도 모른다네.
  마을로 가지 않으려고 소년은 좁은 논길을 택해서 걸었네.
  눈발이 설익은 라면의  면발처럼 가늘어지고 있었네. 바람도 잠잠해져서 사나운  눈보라를 얼굴
에 받지 않아도 되었네. 하지만 겨울  저녁 해가 산 너머로 꼴깍 넘어가버리자, 더이상 계속 걸어
갈 수가 없었네.
  마침 시골 학교 하나가 순한 짐승처럼 산 밑에 엎드려 있는 것이  보였네. 학교는 오래 된 플라
타너스들로 둘러싸여 있었네. 2층으로 된 학교의 건물은 자그마했지만 운동장은 참으로 넓었네.
  소년이 다니던 도시의  학교는 건물은 크지만 운동장이  좁은 곳이었다네. 야구공이 곧잘  담장 
너머 큰길로 굴러가곤 했네.
  눈 쌓인 운동장을 가로질러 갔네. 주위가 얼마나 고요한지 눈을  밟는 발자국 소리가 유난히 크
게 들렸다네. 조회대를 지나,  눈을 하얗게 뒤집어쓰고 책을 읽는 소녀 석고상을 지나,  국기 게양
대를 지나, 학교 현관 쪽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섰네.
  이 넓은 학교 안에 혼자 있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더럭 겁이  났네. 하기는 지베서 가족과 함
께 지낼 때에도 소년은 혼자였네. 아버지는 늘 바깥에서 바빴고, 어머니는 늘 안에서 이불을 뒤집
어쓰고 있었으니까. 혼자 지내는  시간이 없었다면 컴퓨터 속의 그 많은 오락  게임을 터득하지도 
못했을 것이고, 그것을 친구들에게 삐기며 자랑하지도 못했을 것이네. 혼자 지내는 시간이 없었다
면, 아버지와 어머니의 두 손바닥  위에서 재롱만 피우고 있었다면, 소년은 지금처럼 강해지지 못
했을 거라고 생각하네. 나는 혼자 있을 때 더욱 강해져. 지금이 바로 혼자 있는 시간이야.
  그때 소년은 깜짝 놀라 그만 소리를 지를 뻔했네. 화단앞에  심어진 측백나무 뒤에서 누군가 소
리 없이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네. 어둠  속을 향해 소년은 눈을 크게 떴네. 거기에는 소년의 키만
한 하얀 눈사람이 턱 버티고 서  있었네. 아마 낮에 학교에서 놀던 아이들이 만들어놓고 갔을. 눈
사람이 소년은 조심스럽게 다가갔네. 네가 나를 놀라게 했군.  분풀이라도 하듯 발로 툭 차보았네. 
눈사람은 꿈쩍도 하지 않았네.
  실내로 들어가는 출입문은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었네. 현관 입구 한쪽에 소년은  쪼그리고 앉
았네. 바람이 불지 않아서 하룻밤을 지내기는 그런 대로 괜찮은 곳이었네. 집을 나왔으니 집 밖에
서 자는 것은 당연한 일. 눈사람도 밤새 집 밖에 서서 잠을 잘 텐데, 뭘.
  “너도 먼길을 걸어 여기까지 왔니?”
  소년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네.
  눈사람이 소년의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었네. 눈사람은 묵묵히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네. 소년도 
눈사람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네. 자세히 보니 눈사람의 표정이 마구 구겨져 있었네. 어디 몸 한쪽
이 불편한 듯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네.
  “내가 뭘 좀 도와줄까?”
  눈사람이 소년의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었네. 하지만 소년은 실망하지 않았네. 눈사람의 얼굴을 
요모조모 살펴보았네. 솔방울을 붙여놓은 코가 우스꽝스러웠네. 게다가 눈썹은 나무 막대기였네.
  그런데 그 눈썹의 꼬리가 위로 치켜올라가 있었네. 그래서 눈사람이 잔뜩 화가 난 표정이었나?
  소년은 치켜올려진 눈썹을 반듯하게 바로 고쳐주었네. 눈사람의 얼굴이 밝아졌네.
  “그런데 넌 입이 없구나!”
  소년은 자기가 내뱉은 말을 금방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네.
  “넌 입도 없니?”
  어머니도 소년에게 그렇게 쏘아붙였었네. 집을 나오기 며칠 전부터  소년은 집안에서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았었네. 아버지와 어머니 때문이었네. 아버지와 어머니는 소년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
었네. 아버지와 어머니는  소년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었네.  먹기 싫은 영양제에 대해,  가기 싫은 
학원에 대해, 듣기 싫은  영어회화에 대해 소년은 수없이 많은 말을 했으나  어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네. 아니, 어른들은 아이의  말을 들을 줄 아는 귀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네. 들어줄  귀가 없으
면 말도 필요 없는 거라네. 소년은 입이 없는 아이였네.
  동백나무 잎사귀가 하나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네. 그것은 눈사람의 입이었네. 그 입을 주워 코
밑에다 갖다붙였네. 그랬더니 놀랍게도 눈사람의 입이 조금씩 오물거리는 것이었네.
  “고마워.”
  들릴락말락한 작은 소리였지만, 그것은  분명히 눈사람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네. 소년은 눈사람
의 입 가까이로 귀를 갖다 대보았네. 눈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네.
  “네가 입을 달아주었기 때문에 말을 할 수 있게 된 거야. 나도  얼마나 말을 하고 싶었는지 몰
라, 정말 고마워.”
  눈사람의 눈이 반짝, 하고 빛났네.
  소년이 눈사람에게 물었네.
  “춥지 않니?”
  “배가 고프지 않니?”
  눈사람에게 건넨 말은 사실은 자기 자신에게 한 말이었네. 집을  나오고 나서부터 소년은 물 한 
모금을 먹지 않았네. 오직  집으로부터 먼 곳을 가야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으므로  허기를 느낄 
틈도 없었는지 모르네. 갑자기 몸 구석구석으로 추위가 파고들었네. 배도 고팠네.
  어두워질 무렵에 그쳤던 눈이 다시 쏟아지기 시작했네. 운동장을  지키고 선 플라타너스들이 흐
릿하게 보일 정도로 눈이 내렸네.  소년이 혼자 울 때 눈물 글썽이며 바라보던 세상처럼  모든 풍
경이 뿌옇게 보였네.
  학교 현관 쪽으로 잠시 몸을 피한 소년은 눈사람이 걱정스러웠네.  눈사람은 그냥 선 채로 눈을 
맞고 있었네. 소년은 자리에서 벌덕  일어나 눈사람에게 다가갔네. 그리고 자기가 쓰고 있던 빨간 
털모자를 눈사람의 맨송맨송한 머리위에 얹었네. 털모자에 비해 눈사람의  머리가 훨씬 커서 쏟아
지는 눈발을 가려줄 수는 없었네.
  “미안해.”
  소년이 말했네.
  “너무 걱정하지 마. 나는 눈이 내리면 더 따뜻해지는걸. 눈사람은 추위를 타지 않아.”
  눈사람의 말을 소년은 이해할 수 없었네.
  “온몸이 이렇게 차가운 눈으로 꼭꼭 덮여 있는데도?”
  “눈이 우리들의 생명이야. 눈으로 뭉쳐져 있는 동안 우리는 눈사람이지만, 햇볕에 녹아 없어지
면 물이 되어 흘러가고 말지. 그렇지만...”
  자신에게 언젠가 다가올 운명을 ㅎ아리는 듯 눈사람은 말을 잊지 못했네.
  소년이 물었네.
  “녹아 없어질 줄 알면서 왜 눈은 내리는 거지?”
  “그것은 겨울 동안 대지의 이불이 되어주기 위해서야. 그리고 눈은  내려서 땅만 덮는 게 아니
거든. 땅 속에 뻗어 있는 나무와 풀들의 뿌리며, 나뭇가지의 꽃눈들이 속으로 품고 있는 꽃망울들
한테 이불이 되어주기 위해 눈은 내리는 거야.”
  “꽃망울들이 오히려 추워서 돌돌 떨지는 않을까?”
  눈사람이 소년의 눈을 깊숙이 들여다보며 천천히 말했네.
  “겨울 동안 눈을 덮고 자지 않으면, 봄이 와도 나무와 풀들은 꽃을 피우지 못해.”
  소년은 뭔가 아주 조금 알 것도 같았네.
  소년이 떠나온 집. 아파트의 배란다에는 몇 그루의 꽃나무 화분이 있었네. 그 중에는 꽃을 피우
지 못하는 꽃나무가 있었네. 이사올 대 누군가 선물로 가져다준 영산홍이라는 꽃나무였네. 소년의 
집에 온 첫해 봄에는 진홍빛 꽃을 무더기로 피워올리더니, 그  다음해부터는 아예 꽃 피울 생각을 
하지 않았네. 그  영산홍은 아파트 베란다에 살면서 눈으로 이불을  덮지 못한 채 겨울을 보냈고, 
그래서 꽃을 피우지 못하는 나무가 되었을 것이었네.
  소년이 다시 물었네.
  “물이 되어 녹아 없어지는 게 두렵지 않니?”
  “그게 자연의 흐름인걸.”
  눈사람이 별로 대수롭지 않은  듯이 말했네. 그러나 마음 속으로는 심한 동요가  일어나고 있는 
게 분명하네. 그의 눈썹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소년은 보고 있었네.
  “햇빛보다 더 무서운 것은 어른들이야.”
  “어른?”
  어른, 이라는 말을 듣고 소년은 가슴이 아팠네.
  눈사람이 말했네.
  “어른들은 눈사람을 만들 줄도 몰라. 그들은 눈사람을 발로 찰 줄만 알 뿐이지.”
  아침이 되었네. 쪼그리고 새우잠을 자고  난 소년은 눈을 뜨자마자 눈사람을 찾았네. 그러나 눈
사람은 보이지 않았네. 솔방울과 나무 막대기와 동백나무 이파리만이  눈무더기와 함께 흩어져 있
을 뿐이었네. 눈사람은 떠나고 말았네.
  눈사람이 있던 자리에는 학교 시설 공사를  하러 나온 인부들이 머리에 쌓인 눈을 털며 서성거
렸네. 그들은 잠에서 막 깬 소년을 발견하자 소리를 질렀네.
  “웬 거지 새끼야? 여기서 썩 꺼지지 못해!”
  소년은 눈보라 속을 걸어갔네.  소년이 걸음을 땔 때마다 눈길 위에 소년의  발자국이 하나둘씩 
찍혔네. 그 발자국도 소년을 따라갔네. 소년은 그것도 모르고  계속 걸어갔네. 소년을 따라가는 작
은 발자국 위로도 눈은 그치지 않고 내렸네. 눈발이 발작국을 하나하나 지우고 있었네. 소년은 그
것도 모르고 계속 걸어갔네.

    돌탑이야기

  전라북도 진안의 마이산 탑사 주위에는 80여 기의 돌탑이 서  있다. 높이나 모양이 일정하지 않
은 이 돌탑들은 흩어져 있으면서도 제각기 어떤 신비를 하늘로 뿜어올리는 듯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어 관광객들의 눈길을 오랫동안 붙잡아둔다.
  기록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약  90여 년 전에 이갑룡이라는 처사가 마이산에 들러  솔잎을 먹
으면서 이 돌탑들을 쌓아올렸다고 한다. 그는 전국의 이름난 산에서  돌을 날라와 10년 동안 천지 
음약 이치와 팔진  도법으로 공을 들여 이 돌탑들을  쌓았다. 이 처사는 돌탑을 축조하면서  용화 
세계 억조 창생의 구제를 위해 생을 마감할 때까지 만인들이 지은 죄를 대신 속죄하는 기도를 올
렸다고 한다.
  마이산의 돌탑뿐만 아니라, 우리는 가끔 한적한 시골 마을 입구에서도  돌로 쌓은 작은 탑을 만
날 때가 있다. 언제부터, 누가, 무슨 생각을 하며 쌓았는지도  모르는 그런 돌탑을 보게 되면 누구
나 그 돌탑의 맨 꼭대기에다 작은  돌멩이라도 한 개 얹어놓고 싶어진다. 그런 마음들이, 아마 어
떤 간절한 기도로 가득 차 있었을 마음들이 쌓이고 쌓여,  더이상 돌멩이를 올려놓을 자리가 없을 
때가 되어서야 돌탑은 비로소 완전한 돌탑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돌탑을 이룬 하나하나의  돌멩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문득 우리 자신도 제각기  이 세상
을 이루고 있는 크고 작은 돌멩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가 제일 높은 곳에 다다랐어!”
  금방 돌무더기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앉은 돌멩이가 소리쳤다.
  아직은 돌탑이라고 이름 부를  수조차 없는 그저 밋밋한 돌무더기였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높
은 곳을 차지했다는 생각으로 돌멩이는 마음이 들떠 있었다. 그의  눈에는 발 아래 깔린 돌멩이들
이 너무나도 우습게 보였다.
  “나를 깔보는 존재는 이제 없어. 모든 돌멩이들이 지금부터 나를 우러러볼 거야. 내가 이 세상
에서 가장 높은 곳을 차지하였으니, 내가 이 세상의 주인이 된 거야.”
  이렇게 큰소리를 치며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바로 옆에는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오랜  옛날부터 마을을 지켜온 늙은 느티나무
의 밑동 부근에는 커다란 구멍이 하나  뚫려 있었다. 그것은 `거대한 시간이 통과한 자리`라는 뜻
이었다. 느티나무는 비록 늙었지만 가지 끝마다 푸른 잎들을 무성하게 달고 있었고, 그 잎들은 땅
바닥에다 넉넉하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돌무더기의 맨 위에 올라앉은 돌멩이는 금세 기가 죽지 않을  수 없었다. 늙은 느티나무에 비해 
그가 올라선 자리가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의 경솔함을 알아차린  그 순간, 또 하나의 돌멩이가 돌무더기의 맨  꼭대기에 올라앉
았다. 느티나무 그늘에서 늘어지게  한숨을 자고 난 나그네가 길을 떠나기 전에  올려놓은 돌멩이
였다. 비명 한  마디 내지를 틈도 없이 상황이 바뀌어버린  것이다. 이 세상의 주인은커녕 또다른 
주인을 머리에 이고 살아갈 처지가  된 돌멩이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땀을 뻘뻘  흘렸다. 그가 
생애에 행복했던 시간은 아주 짧았다. 이제는 치욕이 그의 생을 지배할 것이었다.
  그 치욕스런 시간을  견디고 있는 사이에, 새로  돌무더기의 끝에 올라앉은 돌멩이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내가 제일 높은 곳에 다다랐어! 이제 저  느티나무와 똑같은 키가 되는 건 시간 문제야. 내가 
느티나무만큼 자라게 되면 저 나무 꼭대기의 부드러운 이파리들을 만질 수 있을 거야.”
  그는 감격에 겨운 듯 주먹을 쥐어 흔들었다.
  “앗!”
  갑자기 그의 몸이  한쪽으로 기우뚱 쏠리는 것이었다.  하마터면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뻔한 
돌멩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움직일 수 없었다. 가장 높은 곳에 올라앉는 일이 이렇게 불편한 
일이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어느덧 계절이 가을로 바뀌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쑥쑥 자랄 줄 알았던 돌무더기의 키는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렇지만 느티나무는 변하고 있었다. 무성한 이파리들이 발갛게 물이  드는가 싶더니 어느 사이
에 낙엽이 되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돌무더기 꼭대기에 앉은 돌멩이가 그렇게  만져보고 싶었
던, 푸르고 부드럽던 이파리들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또 하나의 새로운 돌멩이가 돌무더기의 맨 꼭대기에 올라앉았다.
  “내가 제일 높은 곳에 다다랐어!”
  그 돌멩이도 똑같은 말을 되풀이해서  소리쳤다. 그의 발 바로 밑에 깔린 돌멩이는 눈을  꼭 감
고 입을 굳게 다물고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이 보였다.
  “이제 세상에서 제일 높다는 하늘에 닿는 건 시간 문제야.  내가 뭉게구름을 타고 세계 일주를 
떠날 날도 분명 멀지 않았다구.”
  새로운 돌멩이는 느티나무 가지 사이로 드러난 하늘에다 의기양양하게 삿대질을 해댔다.
  이렇게 큰소리치는 돌멩이를  보고 하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수많은 돌멩이들이 정상을 차지한 기쁨으로  소리를 칠 때마다 느티나무는 자신의 이파리 하나
를 떨구어 돌멩이의 입을  막아주곤 했다. 그것은 돌멩이들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한순간의 기쁨에 도취되면 안된다는 말없는 가르침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제일 높은 곳에 올랐다  싶으면 그 기쁨은 잠시뿐, 돌멩이드은 어김없이 자신을  짓누르는 고통
의 쓴 약 맛을 보아야 했다. 그렇다고 자신의 머리꼭지를 내리밟는 돌멩이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은,  남을 밟고 올라섰을 때의  기쁨이 언젠가는 고통으로 변하여  자신에게 
되돌아온다는 것을 조금씩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뾰족한 돌무더기를 이룬 돌멩이들은 정작 중요한 사실을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어다. 그
것이 무엇이냐 하면, 돌무더기의 높이가 높아갈수록, 고통 위에 또다른 고통이 쌓여갈수록 그들의 
몸뚱이가 점점 가늘어져간다는  것이었다. 사나운 바람 한  줄기만 불어와도 와르르 무너지고  말 
것 같은 연약한 몸뚱이를 뒤늦게 바라보며 돌멩이들은 스스로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은 무너지기 위해 이렇게 높은 곳까지 올라왔다는 말인가?”
  시름에 잠긴 돌멩이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것을 여태 지켜보고 있던 느티나무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남을 밟고 올라섰던 것이 지금도 즐겁니?”
  돌멩이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느티나무가 자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는 혼자가 아니야.”
  “혼자가 아니라구요?”
  돌멩이들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너희는 이제부터 작은 돌멩이로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야. 엉성한 돌무더기도 아니
고 돌탑, 그렇지, 비로소 돌탑이라는 완전한 존재를 이룬  거야. 아니, 새로운 존재로 태어난 거지.

  느티나무는 전혀 뜻밖의 사실을 돌멩이들에게 말해주고 있었다.
  “지금부터는 서로 손목에 힘을 주어야 해. 그래야 무너지지 않는단다.”
  돌멩이들은 서로를 얼싸안았다. 따뜻한  온기가 서로의 몸을 적시고 있었다. 새로운  존재, 낱낱
의 돌멩이들은 이제 폭풍우가  몰아쳐도 끄떡없는 아름다운 조재가 된 것이다. 완전한  하나의 돌
탑이.

  돌탑 이야기는 여기쯤서 마무리하자.
  이 이야기를 듣지 못한  사람들은 돌탑을 보면 위태로움을 느낀다. 돌멩이와 돌멩이  사이에 시
멘트를 이겨 바르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그들은 마음이 불안해서 빨리 그 자리를 뜨고 싶을지도 
모른다. 자기들이 사는 고층 아파트의 안전도는 신뢰하면서 돌탑을 믿지 못하는 그들은 
  ‘돌탑이란 연기 기둥과 같아.’
라고 말할 게 뻔하다.
  그런 사람들은 대체로 잊어버리는  데 아주 익숙하다. 시멘트 속에다 철근까지 넣어  만든 삼풍
백화점과 성수대교가 엊그저께  폭삭 주저앉았다는 사실을 그들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또다른 부
실공사를 시작하는 것이다. 잊어버린게 아니라면 그들은 짐짓 모른 체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대형 붕괴 사고는  겉으로 완벽한 것을 좋아하는 그들의 위신을  무참하게 깎아내리는 일일 테니
까.

    시인이 되는 법

  여기, 간절히 시인이 되고 싶은 사내가 하나 있다.
  그 시인 지망생은 아침에도 시를 썼고, 낮에도 시를 썼고,  그리고 밤에도 시를 섰다. 그는 밥을 
먹으면서 시를 썼고, 이쑤시개를 쑤시면서 시를 썼고, 화장실  변기 위에 걸터앉아서도 시를 섰고, 
잠자리에서 꿈을 꾸다가 난데없이  벌떡 일어나서 시를 썼고, 술에 취해 골목길에서  구타를 당하
면서도 시를 썼고, 전봇대를 부여안고 뱃속에  든 오물을 토해낼 때도 시를 썼다. 그에게 있어 시
는 밥이었고, 똥이었고, 꿈이었고,  술이었고, 그 모든 것이 아니었다가, 때로는  그 모든 것이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그를 시인으로 불러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느 날 그는  결심하였다. 그 동안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시인이 되는 일에 몰두하기로  한 
것이다. 옆에서 그를  지켜보던 그의 아내는 한심하다는 듯  코웃음을 치다가, 나중에는 친정으로 
짐을 싸서 돌아가겠다고 으름장도 놓아보았지만, 그것은 쇠귀에 경 읽기일 뿐이었다.
  회사에 사직서를 던지고 돌아선 직후, 그는 시인이 되기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노트에 깨알같이 
적어 그것을 실천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시인이 되기만 한다면!

  쥐꼬리만한 퇴직금의 일부를  떼어내어 그는 먼저 근사한 바바리코트와 안경을  하나 장만했다. 
시인은 우선 겉모습부터 시인다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군인과 경찰이 정해진 제복을 
입는 일에서부터 그들의 존재를 스스로 규정하듯이 말이다. 
  쌀자루처럼 넉넉한 베이지색 코트를 입고 그는 산책에 나섰다.  근엄하고도 진지해 보이는 검은 
테의 안경을 쓰는 일도 잊지 않았다.

  - 시인은 세상을 정확하게 제대로 보는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해.
  하지만 그의 앞에 펼쳐진 세상은 길을  더듬거리며 걸어야 할 정도로 짙은 안개가 자욱하게 끼
어 있었다. 보고 싶은 것을  볼 수 없는 안개의 나라에서는 안개가 숨기고 있는 게 너무  많기 때
문에 안경이 아무 필요가 없었다. 그는 안경을 벗었다.
  - 안개 때문이야.
  그가 시인이 되는 일을 막는 첫번째 훼방꾼이 안개였다.

  그는 코트 주머니에 두 손을  깊숙이 찔러 넣고 시선을 땅바닥으로 향한 채 천천히  걸었다. 담
배꽁초 하나 없는 깨끗한 보도블럭 위를 걷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낙엽이 우북하게 쌓인 가을
의 산길을 걷는 것만 같았다. 
  -시인이란 ‘사유하는 인간’이라는 뜻이지.
  그는 두리번거리지 않았다.그는  시상을 떠올리기 위해 땅을 내려다보며 얼마  동안을 걸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애타게 기다리는 시상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고, 이상하게도 등줄기에 조금
씩 땀이 흐르는게 느껴졌다.
  그는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때는  늦은 봄날이었다. 봄날의 햇볕이 이미 사람들의 두꺼운 옷을 
일찌감치 벗겨버린 오후였다. 거리의 사람들이 그를 힐끗힐끗 쳐다보고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지
나쳤다. 잠자리 날개처럼 가벼워진 그들의 옷차림 속에 시인 지망생은  철갑 옷을 입은 무디고 능
력 없는 장수처럼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햇볕 때문이야.
  그는 투덜거리며 말했다.

  다음날, 그는 바바리코트와 안경을 벗어두고 멋진 베레모를 쓰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처음 써보
는 모자라서 어색하기는 했지만, 장차 시인이 될 예술가의 풍모로는 손색이 없었다. 뭔가 좋은 일
이 생길 것만 같은 기대감이 성급하게 그를 산책길로 잡아 이끌었다.
  그는 이번에는 파리떼같이 와글거리는 군중이 없는 한적한 시골길을  택했다. 들녘의 푸른 보리
밭 속에서 날아오른 종달새가 하늘  속으로 빨려들어갔다가 저희끼리 희롱을 하며 시인 지망생의 
머리 위에서 놀고 있었다. 논에는 모내기를 하기 위해 미리  가두어둔 논물이 햇빛하고 어울려 반
짝이는 것이 보였다.
  -시는 역시 자연 속에 존재하는 거야.
  모든 시는 자연으로부터 나오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들녘  끝에 아른
거리는 아지랑이를 그윽이 바라보고 있는다, 갑자기 회오리바람 한 줄기가 불어닥쳤고, 그가 손쓸 
틈도없이 머리에 얹혀 있던  베레모가 논 가운데로 날려가 떨어지고 말았다. 이  난데없음 앞에서 
그는 화가 치밀었지만, 바지를 걷어붙이고 진흙 속으로 모자를 주우러 가기도 난처한 일이었다.
  -바람 때문이야.
 
  그는 분을 삭일  요량으로 주머니에서 파이프를 꺼내 담배를  한 대 피워 물었다. 베레모  없는 
파이프 담배는 정말  고무줄 없는 팬티요, 구두 없는 양복이  아니던가. 담배 파이프를 두어 모금 
빨았을까. 아닌게 아니라  회오리바람이 지나간 후에 하늘에서 개머루만한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
고 있었다. 그는 황급히 담뱃불을  끄며 오늘도 뜻하지 않은 일로 시를 쓰기는 다  망쳤다고 생각
했다. 세상은 그가 멋진 시상을 떠올리는 것을 시기하고 있는게 분명했다.
  - 비 때문이야.
  시인 지망생은 고장난 자동차처럼 식식거리며 후줄근하게 비에 젖어 집으로 돌아왔다.

  속옷까지 모두 비에 젖어  빨랫감이 한아름이나 되었다. 마당에 쪼그려 앉아 빨래를  하고 있는 
아내에게 여간 민망한 일이 아니었다.  그 흔한 세탁기 한 대 사서 들여놓지 못한  주제에 쓸데없
이 빨랫감만 쌓아놓으니 아내의 지청구를 들을 만도 했다. 그런데  아내는 쓰다 달다는 말 한마디 
없이 하고 있던 빨래를 계속하고  있었다. 이제 막 보름을 넘긴 아이의 기저귀를 대야에  넣고 흔
드는 참이었다. 아기의 노란 똥이 계란  노른자처럼 뭉글뭉글 물 위에 뜨기도 하고, 아예 물에 섞
이어 대야 속은 노란 물감을 풀어놓은 것처럼 보였다.
  -저 손으로 매일 반찬을 준비하고 밥상을 차린다는 말인가?

  속이 메슥거리는 통에  그는 책상 앞에 한참을 앉아  있어야 했다.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들을 
잊어버리려면 시를 생각하자, 시를!  그리고 시를 쓰자! 바바리코트와 안경과 베레모와 파이프 담
배가 시인을 만들어주지 못한다면, 이제  남은 것은 손으로 직접 시를 쓰고 또 쓰는  일밖에 없다
고 그는 생각했다. 만년필에다 새로 잉크를 가득 채워  책상머리에 기왓장처럼 쌓아놓은 원고지에 
시를 쓰자!

  사실 만년필로 원고지에다 글을 쓰는 일이 20세기 후반을 살고 있는 시인 지망생으로서는 너무 
소박한 작업 행태라는 것을  그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간혹 텔레비젼에 나오는  시인이나 작가
들이 만년필 대신에 노트북인가 뭔가를 열심히 두드리는 장면을 그도  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어
떤 작가가 말하기를, 현대의 작가들은 글을 ‘쓴다’라고 하지 않고 ‘친다’라고 했던가. 아닌게 
아니라 시인이 되면 그도 제일 먼저 노트북 컴퓨터를 장만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는 터이기는 
했다.

  서너 시간이 흘렀을까.
  시인 지망생은 단 한 줄의 시도 쓰지 못했다. 시를  쓰려고 원고지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원고지
의 빈칸이 그렇게 넓어 보일 수가  없었다. 원고지가 대로는 벌판 같고, 때로는 바다 같아서 자신
은 그 넓은 곳에서 마냥 허우적거리고만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가 직장을 그만두기 전에는 그
래도 몇 줄의 시라도 쓰여졌었다. 그런데 시인이 되기로 작정하고  사직서를 내 이후에 그는 한편
의 시도 쓰지 못했다. 시를 써야지, 라고 생각하면 할수록 시는 그에게서 저만치 달아나버리는 것
이었다.

  -시는 심장의 뉴스다.
  -시는 영혼의 기록이다.
  -시는 가슴으로 쓰는 것이다.
  -시는 온몸으로 쓰는 것이다.
  책에서 읽었던 시에 관한 오만 가지 화두들이 그를 오히려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거리에서 쓰레기를 쓸고 있던  환경미화원의 빗자루 끝에, 들판에서 밭을 갈던 농부의  생기 끝
에, 어린아기의 똥기저귀를  빨던 아내의 손끝에 시가 묻어 있는  것을 그는 보지 못하고 있었다. 
환경미화원과 농부와 아내, 그들이 바로 시인이라는 것을 애석하게도  우리의 시인 지망생을 까맣
게 모르고 있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

  어미제비는 
  저녁이 되어도
  새끼들이 돌아오지 않자
  점점 불안해졌습니다.
  해가 지기 전에 꼭 돌아온다고 한 새끼들이었습니다.
  ‘아아, 네 마리의 새끼들이 혹시
  한꺼번에 무슨사고라도......‘
  어미제비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방정맞은 생각을 떨쳐버리고 싶었습니다.
  한 달 전에 남편은
  날개를 힘없이 꺾어 접으면서 말했습니다.
  미안하다고,
  부디 아이들 넷을 잘 보살펴달라고,
  스스로 날개를 펴고 날 수 있을 때까지 도와줘야 한다고.
  그게 남편의 마지막 유언이었습니다.
  남편이 세상을 뜬 뒤에 어미제비는
  아이들을 위해 남편 몫의 사랑까지 쏟아부었습니다..
  하루에도 수백 번씩 벌레들을 물어다 날랐으며,
  밤에는 제비집 근처에 나다니는 쥐들을 쫓기 위해 
  밤잠을 설쳤습니다.
  어쩌다 큰 장수잠자리라도 한 마리 잡는 날이면
  입으로 잘게 찢어 새끼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먹였습니다/.
  자신은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습니다.
  살아 있을 때 남편도 누구보다 부지런한 제비였습니다.
  다른 제비들은 날이 훤하게 밝아올 때가 되어서야
  둥지에서 일어나 깃털을 손질하기 시작했지만,
  남편은 그대 이미 차가운 허공을 가르는 
  한 점의 까만 점이 되어 있곤 했습니다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남편의 그 멋진 배행은 눈이 부실 지경이었습니다.
  부지런한 부모를 둔 덕분에 새끼들은
  누에 뜨게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알을 깨고 나왔을때
  어찌 보면 징그럽기도 하던 새끼들의 빨간 살갗이
  어느 때에 보면 보슬보슬한 털로 덮여 있었고,
  또 어느 때에 보면 검푸른 깃털을 몇 날 몸에 두르고 
  제법 의젓하게 제비의 모습을 갖춰가고 있었습니다.
  “아비 없는 후레자식이라는 말을 듣지 않아야 한다.”
  어미 제비는 새끼들에게 입버릇처럼 말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죽은 남편에게 보여주며 자랑하고 싶을 만큼
  새끼들은 예쁘고 건강하게 성장했습니다.
  “고맙구나.”
  남편 생각이 날 때마다
  어미제비는 새끼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결코 연약한 눈물 따위는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새끼들을 강하게 키우고 싶었습니다.
  남편처럼 눈부신 비행을 할 줄 아는 
  그런 제비로 키우고 싶었습니다.

  그날,
  새끼들을 지키기 위한 남편의 구렁이와의 싸움은 
  다시는 회상하기 싫을 정도로 처절했습니다.
  누군가 마당에 서 있던 바지랑대를 들고 와서
  구렁이를 쫓을 때까지
  남편은 피투성이가 된 채 온몸으로 맞서 싸웠습니다.
  구렁이의 이빨에 물린 남편의 다리는 
  금방이라도 몸에서 떨어져나갈 듯 달랑거렸습니다.
  부러진 날갯죽지는 
  남편을 더이상 날지 못하는 제비로 만들어 버렸 습니다.
  온몸에 피를 두른 채 땅바닥에 떨어진 남편은
  간신히 날개를 퍼덕거려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땅 위로 한 뼘도 채 날지 못했습니다.
  야속하게도
  푸른 허공은 남편의 날개를 펼쳐주지 않았고,
  남편의 몸을 일으켜 세우지도 않았습니다.
  끝없이 펼쳐진, 아무 죄 없는 하늘이 
  야속하게 여겨졌습니다.
  어미제비에게 남은 것은
  눈빛이 초롱초롱한 네 마리의 어린 새끼들과
  구렁이와 싸우다가 다친
  양쪽 눈의 흉한 상처뿐이었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어머니를 잘 모실 거예요.
  아무 걱정 하지 마세요.“
  아이들은 입 모아 그렇게 말했습니다.
  눈알이 금방이라도 빠질 것처럼 쓰리다가도
  아이들이 계속 옆에서 돌봐주기만 한다면
  아이들과 함께 강남으로 떠나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어미제비의 날개와 꽁지깃은 아직 
  수만 킬로미터를 거뜬히 날 수 있을 정도로
  튼튼했으니까요.

  그런데
  며칠 전부터 어미제비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끝내 눈이 멀어버린 것입니다.
  그 동안 새끼들을 먹여 살리느라고
  자기 몸의 상처를 돌볼 겨를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라도 더, 한 마리라도 더 많은 먹이를 찾아
  새끼들의 입에 넣어주는 것,
  그게 남편이 죽은 뒤에
  그녀가 살아갈 유일한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된 뒤부터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먹이를 찾으러 먼 곳까지 날아갈 수도,
  또 많은 먹이를 물어올 수도 없었습니다.
  평소에 감각으로 익힌 제비집 주변에서 
  운좋게 파리나 모기 몇 마리를 사냥하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어린 새기 네 마리가 공중으로 날아다닐 수 있게 된 것은 
  그나마 천만다행이었습니다.
  새끼들이 날개를 활짝 펴고 허공을 가르는 모습을
  두 눈으로 볼 수 없었지만
  어미제비의 머릿속에는 
  그 상쾌하고 힘찬 광경이 선명하게 그려졌습니다.
  그때부터
  어미제비와 새끼들의 입장이 서로 바뀌었습니다.
  전에는 새끼들이 노란 부리를 벌리고 어미를 기다렸는데,
  이제 눈먼 어미가 새끼들을 기다리는 처지가 된것입니다.

  나란히 한 줄로 서서
  노랗게 입을 벌리고 있던 새끼들이
  말을 처음 배웠을 때였습니다.
  “엄마는 매일 어디까지 날아갔다가 오는거죠?”
  “저기 높고 푸른 하늘 끝닿는 데까지 날아갔다가 오지.”
  “그러면 그렇게 먼 곳에서 어떻게 집을 찾아올 수 있나요?”
  어미제비는 새끼들의 눈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말했습니다.
  “이 엄마와 너희들 사이에는
  아무도 끊을 수 없는 실이 하나 연결되어 있거든.“
  “엄마와 저희 사이에는 깃털밖에 없는걸요.”
  “엄마와 너희들 사이에 연결된 실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 거야.
  아무도 그 실을 볼 수 있는 제비는 없어.
  그건 너희들이 알 속에 들어 있던 시절부터
  엄마가 보이지 않게 이어둔 거란다.
  너희들이 알을 깨고 세상 바깥으로 나오면서
  그 실은 더욱 질겨졌지.
  그러니까 엄마가 먹이를 구하러
  아무리 먼 곳까지 날아간다고 해도
  그 실을 따라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거야.“
  “아하, 그렇군요.”
  새끼제비 네 마리가 똑같이 고개를 까딱거렸습니다.

  아침에 새끼들이 사냥을 가기 위해
  둥지에서 포르릉 날아오르면서 말했었습니다.
  “오늘은 강남으로 떠날 제비들이
  한꺼번에 모이는 장소를 알아올게요.
  그 사이 어머니는 떠날 채비를 갖추고 계세요.
  먼길을 가야 하니까요.“
  새끼들은 대견스럽게도 이제 무슨 일이든지
  척척 알아서 처리할 줄 알았습니다.
  날이 더 추워지기 전에 제비 무리는
  남쪽으로 떠나야 합니다.
  올해 새로 낳아 기른 새끼들을 데리고
  강변의 갈대밭에 모이는 날이 가까워오고 있는 것입니다.
  어미제비의 맏이가 그 무리의 맨 앞에 서서
  제비떼를 인도하는 길잡이로 뽑혔다고 했습니다.
  비록 남편을 잃었지만 어미제비는 떳떳하게
  제비 무리의 앞에 나설 수 있을 것이었습니다.

  애타게 기다리던 새끼들이 집으로 돌아온 것은
  가로등이 이마에다
  불을 하나씩 달기 시작할 무렵이었습니다.
  “너희들이 나 때문에 고생이 심하구나.”
  어미제비는 진심으로 새끼들에게 말했습니다.
  “괜찮아요. 저희보다 엄마가 더 걱정스러워요.”
  이렇게 말하는 새끼들의 목소리가 
  왠지 무겁게 들렸습니다.
  “엄마, 오늘 밤에 이 둥지를 떠나야 해요.
  원래 강변의 갈대밭에 모이기로 한 계획이 
  취소되었거든요.
  갈대밭이 얼마 전에 몽땅 불에 타버려서
  도저히 그 곳에 모일 수가 없다는군요.
  그래서 저 큰산 너머 도시에 있는
  고층 아파트 1705동 옥상 위에
  내일 아침까지 모이라는 명령이 떨어졌어요.
  거기까지 가려면 지금부터 서둘러야 해요.“
  “고층 아파트 1705동 옥상이라고?”
  이것은 전에 없던 일이었습니다.
  제비들에게 도시는 
  ‘생명이 살지 못하는 곳’의 이름이었거든요.
  사람이 좋아서 사람 사는 마을에 깃들여 살기는 해도
  제비들은 결코 도시 한복판에는 가지 않았습니다.
  어미제비는 도시의 고층 아파트 옥상으로 모이라는 
  명령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까딱하면 강남으로 떠날 제비들이
  도시에서 떼죽음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어미제비를 덮쳐왔습니다.
  게다가 한밤중에 제비집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 앞에서
  어미제비는 머리가 어지러웠습니다.
  뭔가 잘못된 게 아닐까 싶어
  어미제비는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하지만 현명하고 착실한
  네 마리 새끼들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넷이서 엄마를 둘러싸고 이동할 거예요.”
  “엄마는 저희들의 날갯짓 소리를 듣고 따라오시면 돼요.”
  “마음을 차분하게 가지세요”
  “아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어미제비와 네 마리의 새끼들이
  정든 제비집을 떠날 시간이 가까워오고 있었습니다.
  봄날, 남편과 함께 진흙과 마른 풀잎을 물어나르며
  며칠 동안이나 정성들여 지은 집이
  내년 봄까지 혼자 외로움을 견디며 남게 될 것이었습니다.
  어둠 속으로 날아오르면서 새끼들이 말했습니다.
  “엄마, 지나간 시절은 빨리 잊어버리세요.
  이제 먼 곳으로 가야 하니까요.
  그곳에는 아픔도 슬픔도 없으니까
  엄마는 둥지에서 지낼 때보다 행복하실 거예요.“
어미제비가 날갯죽지를 흔들며 말했습니다.
  “그래, 너희들이 내 옆에 있기만 하면
  나는 어디라도 날아갈 수가 있단다.“
 
  생전 처음이었습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어둠 속으로 비행했는지 모릅니다.
  새끼 네 마리의 날갯짓 소리를 따라 어미제비는 
  날개를 흔들고, 도 흔들었습니다.
  그 날갯짓 소리는 새끼들과 그녀 사이에 보이지 않게 연결된 실이었습니다.
  맞바람이 더러 진로를 방해하기도 했고
  한번도 쉬지 않고 날았기 때문에 목구멍이 칼칼하고
  날개 끝이 짖어질 듯이 저려왔습니다.
  하지만 자식들에게 나약한 모습을 내비칠
  어미제비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여기예요, 엄마,”
  “천천히 내려앉으세요, 천천히.”
  새끼들이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어미에게 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막상 그녀가 내려앉은 곳 주위에서 
  장터처럼 시끌벅적하게 들려와야 할 제비떼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고요한, 너무나도 고요한 정적이
  눈먼 어미제비의 주변을 감싸고 돌았습니다.
  발가락에 닿는 콘크리트의 감촉이 
  얼음장처럼 차갑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자식들 중 맏이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엄마와 저희 사이에 연결된 실을
  이제 끊어야 할 시간이 되었네요.“
  둘째가 말했습니다.
  “어쩔 수 없었어요.”
  셋째가 말했습니다.
  “엄마와 함께 있다가는 우리들 중 누구도
  따뜻한 강남으로 돌아가지 못해요.“
  넷째가 말했습니다.
  “엄마는 이해심이 많은 분이니까......”
  어미제비는 절대로 울어서는 안 된다고,
  소리쳐서도 안 된다고,
  자기 자신한테 몇 번이나 다짐을 받고 있었습니다.
  눈먼 어미제비를 혼자 남겨두고 새끼들은
  서둘러 왔던 곳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사흘 후, 강변 갈대밭에는
  예정대로 근방의 제비 무리가 모두 모였습니다.
  강남으로 가는 기나긴 여행에 대비하느라
  제비들은 저마다 바쁘게 움직였습니다.
  마지막으로 깃털을 다듬는 제비,
  조그마한 보퉁이를 꼭꼭 묶는 제비,
  장꾼들 같은 제비떼 속에서 가족을 찾느라 허둥대는 제비,
  비행술이 서투르다고 꾸중을 듣는 제비......
  네마리의 새끼제비들도 분주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도시의 아파트 옥상 위에 버리고 온 
  눈먼 어미제비를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제비떼가 일제히 
  남쪽을 향해 출발하려고
  양 날개를 펼쳐든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어디선가 가만 물체 하나가 제비떼 속으로
  마치 폭탄처럼 날아와서는 
  툭,
  소리를 내며 떨어졌습니다.
  제비들이 웅성거리며 그 주위를 둘러쌌습니다.
  까만 물체는 새끼들이 내다버린
  눈먼 어미제비였습니다.
  네 마리의 새끼제비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습니다.
  “...어떻게 여기를 엄마가! 도대체 어떻게?”
  어미제비는
  가까스로 숨을 고르며 나직하게 말했습니다.
  겨우 들릴락말락한 목소리로....
  “엄마와 너희들 사이에는
  끊을 수 없는 실이 있단다.
  그 질긴 실이 차마 눈에 보이지는 않지.“
  그 말을 마치자마자
  어미제비는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겨울이 되었습니다.

  날이 추워지자 
  제비떼가 차지하던 하늘은
  이제 크고 작은 눈송이들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흰 눈송이들은 저마다 날개를 달고
  제비 흉내를 내며 땅으로 내려앉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이미 강남으로 다 떠난 줄 알았던 제비 몇 마리가
  공중으로 날아오를 생각도 하지 않고
  아직까지 차가운 땅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게 아닙니까.
  눈발을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바들바들 떨지도 않고
  시간이 갈수록 바람은 더 사나워지고 기온은 떨어지는데.
  눈발도 점점 굵어져가는데,
  부리를 서로의 날개깃 속에 묻고
  제비 다섯 마리가 깊은 잠 속에 빠져 있는 게 아닙니까.
  하늘에서 내려와 지상에 막 내려앉던 눈송이들은
  금방 알아차렸습니다.
  그들의 깊은 잠을 절대로 깨워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적에도 내년 봄이 올 때까지는
  눈송이들이 그들에게 
  따뜻한 담요가 되고 
  이불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청자상감운학문매병

  해, 산, 물, 돌 구름, 소나무, 불로초, 거북, 학, 사슴.

  예로부터 장생 불사를 상징하는  이 열 가지를 십장생이라 일컬어왔다. 줄지않고 오래  사는 일
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인간이 십장생에  들지 못해 스스로 가슴을 쳤으리라는 것은 보지 않
아도 짐작이 가는 일이다.
  인간이 가진 고약한 심성중에 질투라는 게 있다. 남이 잘 되는 것을 보고 참지 못하는 성미, 그
게 장생 불사에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하는 중요한  이유라는 것을 인간은 알지 못한다.  인간의 
질투는 십장생에 대한  공격으로 가시화도기 시작하였는데, 가소롭게도 인간은 자신들의  그런 행
위를 역사라고 불렀다. 좀더 구체적으로  문명의 발달, 혹은 과학의 진보라고 부르는 자들도 있었
다.
  십장생에 대한 인간들의  야수적인 파괴 행위는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가령 
집을 짓는 일 하나만 해도 인간은 염치없이 신세를 져야 한다. 크고 평평한 주춧돌을 놓는 일, 그 
위에 소나무를 잘라 기둥을 세우는  일, 그리고는 흙을 물로 반죽해서 벽을 바르는 일  등이 모두 
돌과 소나무와 물을  괴롭혀야만 이룰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런 집의구들장 위에 등을 대고  누워 
인간이 무엇을 꿈꾸었겠는가.  생로병사를 걱정하며 한 포기  불로초와 사슴의 더운 피를  꿈꾸지 
않았겠는가. 거북의 등에 올라타거나  학의 날개 위에 앉아 산천을 주유하는 신선을  머릿속에 그
리지 않았겠는가.

  십 년을 경여하여 초려삼간 지여내니
  나 한 간 달 한 간에 청풍 한 간 맛져두고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

  이 정도의 ‘초려삼간’을 꿈꾸던 시절은 그래도 나았다.
  세 칸 방 중에 달과 바람에게 한 칸씩을 맡겨 두고 싶다는 발상은 그 여유와 더불어 자연과 한 
몸이 되려는 인간의 뜻이 결코 천박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게다가  강산을 집안에 들일 수 없으니 
집 주위에 둘러두고 보겠다는 결구는 기상 높은 선비의 낭만적이면서도 대범한 풍모를 엿보게 만
든다.
  이런 기상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인간은 자연에 대한 공격의  강도를 갈수록 높여갔으니, 제
아무리 장생 불사한다는 십장생인들 견뎌낼 재간이 있었겠는가.
  그래서 십장생 중에 맨 먼저 산과 물이 보호막을 자청하고  나섰다. 산은 돌과 소나무와 불로초
아 사슴을 맡겠다고 했다. 그러자 물은  거북을 제 몸 속에 숨겨주겠다고 했다. 그때부터 돌과 소
나무와 불로초와 사슴은 인간의 눈에 쉽게 띄지 않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갔고, 거북은 바닷속에 
숨어 뭍으로 나올 줄을 몰랐다.
  그런데 하늘의 해와 구름과 학은 마땅히 숨을 곳이 없었다.  하늘이란 모든 것을 훤히 내보이는 
곳이어서 해와 구름과 학은 고민에 빠졌다.
  “이미 돌과 소나무와 불로초와 사슴이  들어가 있어서 좀 복잡하기는 해도 산에게 부탁해보면 
어떨까?”
  “해가 하루종일 산 속에 파묻혀 있으면 이 세상이 온통 칠흑 같은 밤이될 거야.”
  “구름도 마찬가지야. 산에만 비를 내리게 할 수는 없잖아?” 
  “학에게는 큰 날개를 펼 수 있는 너른 들판이 필요하고.”
  “그러면 물은 어때?”
  “학한테 물로 가라는 것은 기름을 안고 불 속으로 뛰어 들라는 것과 마찬가지지.”
  “해나 구름이 물  속으로 들어가 숨는다면 환한 얼굴을 비춰볼  거울을 잃어버리게 된단 말이
야.”
  “거울이야 보지 않아도 살 수 있잖아? 더 중요한 건 목숨인데....”
  “자기 자신을 어디에다 비춰보지 못하고 사는 것은 죽은 것과 다를 바 없어.”
  몇날 며칠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어보았으나 뾰족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았다.
  해는 찬란하게 빛나던 얼굴이 일그러졌고, 구름은 구름대로 시커멓게 물이 들어갔다. 학도 예외
는 아니었다. 날이  갈수록 사냥꾼의 덫에 걸리거나 총에 맞아  죽는 학들의 수가 늘어갔다. 산과 
물 속으로 몸을 피한 나머지 십장생들로 이들을 도와줄 묘책을 차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겨울이 되었다.
  학들은 떼를 지어 좀더 따뜻한 곳을 찾아 남하를 계속하고 있었다.
  하루는 도자기를 굽는  마을을 지나는 참이었는데, 학들은  자신의 무리를 유심히 바라보는  한 
인간을 발견하였다. 그는 학들이  부리로 물고기를 낚아채는 모습이며 깃털 끝이 까만  날개를 펴
고 유유히 날아오르는 장면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바라보고 있었다.
  넋을 놓고 학들을 바라보는 그의 손에는 붓이 하나 들려져  있었다. 그는 도자기를 만드는 도공
이었다.
  그가 사냥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난 학들은 안심하고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한쪽 다리를 날
개 속에 접고 잠을 자는 시늉에서부터  창공을 차고 오르는 어려운 연기까지 그에게 자신있게 펼
쳐 보였다.
  “그래, 바로 그거야!”
  그때 나이 많은 학 한마리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우리가 가장 오래 살 수 있는 방법을 드디어 알아냈어!”
  나이 많은 학 주위로 다른 학들이 웅성웅성 모여들었다.
  “정말이에요? 도대체 그게 뭔가요? 그 방법을 어서 말씀해보세요.”
  “바로 저 도공의 도자기 속으로 들어가는 거야.”
  “뭐라고요? 도자기 속으로?”
  다른 학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자기는 비록 깨질  위험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저 도공의  붓끝을 통해 도자기의 문양이 
된다면 수백, 수천년이 흐른 다음에도 학들은 변치 않고 살아남을 수 있을거야.”
  “정말 그게 가능할까요?”
  “암, 그렇고 말고, 이제부터  우리가 할 일은 좀더 우아하고 멋진 춤을 그에게  보여주는 일야. 
자, 이렇게 우두커니모여 서 있을 시간이 없다구.”
  “그래, 날자, 날아야 죽지 않는다.”
  학들은 저마다 날개를 활짝 펴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이광경을 지켜보던 해와 구름도 뭔가를 깨달은 모양이었다. 
  “옥빛 하늘에 학만 외롭게 날아다니게 해서는 안 되지.”
 “나는 둥그런 원이 되어 학들을 비출거야.”
  해가 이렇게 말하자 구름도 맞장구를 쳤다.
  “학은 구름하고 어울려야 제격이지, 나도 도자기 속으로 가서  학들의 날개를 감싸는 흰구름이 
될게.”
  도자기를 만들다가 문양으로 무엇을 그려 넣을까 고심하던 도공은 드디어 붓을 들었다.
  그러자 늘씬한 모매로 서 있던 상감청자 표면으로 한 마리,  두 마리 학들이 날아들기 시작하였
다. 뒤이어 해와 구름도 하늘에서 속속 날아와 학들을 감싸고 돌아쌌다.
  
  먼 훗날.
  
  사람들이 이 도공이 만든 도자기 한 점을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이라  이름 붙였다. 그리고 지
금가지 나라에서 가장 큰 박물관에다 정성을 다해 보관해 오고 있다.

    단풍이 남하하는 이유

  9월25일
  저 백두산 꼭대기에서부터 묘향산,  금강산을 거쳐 단숨에 설악산까지 단풍이 내려오는 이유는, 
단풍에게는 휴전선이 없다. 적어도  휴전선이 없으므로 너와 내가 따로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서다.
  
  10월 10일
  치악산, 소백산을 빨갛게 달군  뒤에 월악산과 속리산 그리고 주왕산 쪽으로 남하한  단풍이 산
에서 내려와 사람 사는 마을 안쪽가지 온통 물들이는 이유는, 곧 겨울이 닥친 다고, 비어 있는 연
탄 창고에 연탄을 채우고, 때 절은 이불 홑청은 빨아 하늘에 내다 널고, 아직도 사랑에 빠지지 않
은 자들은 어서 뜨거운 사랑의 국물을 끓이라고 귀띔해 주기 위해서다.

  10월20일
  대둔산, 내장산, 지리산을 다 태우고  나서 단풍은 무등산 쪽으로 새처럼 날개를 펴고 내려가기 
시작하는데, 그날개 끝에 반작이는 가을  햇빛을 달고 있는 이유는, 얼마후에 뒤따라 내려올 기러
기, 기러기떼들 혹은 청둥오리떼 들이 하늘의 길을 잃지 말라고  지상에서 신호를 보내고 있기 때
문이다.

  10월 30일 
  드디어 한반도의 땅끝 해남 두륜산에 당도하여 단풍이 쪽빛 남해 앞에서 온몸으로 타오르는 이
유는, 완전히 타올라야만  내년 봄, 남쪽 바다 건너오는 초록  잎새들을 데리고 북상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푸른 목숨
  
  도대체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일까?
  벌써 한 시간 가까이 청년은 혼자서 허둥대고 있었다. 낡은  헛간이며 부엌의 횃대까지 다 뒤진 
뒤에 청년은 어둠침침한 마르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의 엉덩이가  잘 익은 호박 두개를 맞붙여
놓은 것처럼 둥글넓적해진 게 보였다. 나는 속에서 쿡쿡 터져나오려는  웃을 을 참느라 한동안 짐
짓 딴 곳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이 마을을  누구보다 속속들이 잘 안다. 어떤 집에서  아침부터 부부 싸움을 하는지, 어느 
집에서 밥 먹을  때 밥상에 숟가락을 몇 개나 놓는지도  알고 있다. 내가 이 마을의  나무들 중에 
키가 제일 큰 미루나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지만 키가 작은 나무들, 가령 감나무나 대추나무와  같은 과일나
무들은 내 얼굴을  보려면 한껏 고개를 치켜올려야 했다.  수십 그루나 되는 그들이 나를  일제히 
올려다볼 때면 나는 사열식에 참가한 장군이 된 기분이었다.
  “너는 구름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도 훤히 알고 있겠구나.”
  키 작은 나무들은 늘 내가 부럽다는 눈치였다. 그렇지만 사실  나는 하늘에 구름이 떠가는 곳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키가 크지는  않다. 키 작은 나무들이 내 허리쯤에서 나를 쳐다보면  마치 내
가 구름 속에 머리를  들이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이제 겨우 5년생  미루나무인 나
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그들에게 말해주곤 했다.
  “구름 속에는 말이야,천둥하고 번개가  숨어살고 있지. 나는 그들을 몰고 다니는 소나기하고도 
자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데 소나기는 화가 나면 참지 못하는  성미를 가지고 있단 말이야. 평소
에는 솜털구름처럼 얌전하다가도 화가 나기만 하면....”
  “아아-”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늙은 과일나무들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감이며 대추가 주
렁주렁 달린 몸을  잔뜩 움츠렸다. 그러나 정작 천둥  번개를 동반한 소나기를 가장 겁내는  것은 
미루나무인 나였다. 모난 돌이 정 맞는 다고 했던가. 폭우가 쏟아질 때 벼락으로부터 가장 자유롭
지 못한 것은 키 큰 미루나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루 밑으로 기어들어간지 한참 후에 청년은 거미줄과 먼지를 머리에 잔뜩 뒤집어쓰고 나와 웃
옷을 툭툭털었다. 분장을 마무리하지 못한 피에로 같은 그 모습 역시 우스꽝 스러운 것이었다. 그
런데도 나는 이번에는 웃을 수가 없었다.  아니, 웃을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갑자기 등골이 오싹
해졌다.
  아닌게 아니라 청년의 손에는 길다란 톱이 하나들려져 이었다.  톱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서 
온몸에 검붉게 녹이 슬어 있었다.  하지만 톱날은 사나운 짐승의 이빨처럼 여전히 날카로웠다. 마
음만 먹으면 무엇이든지 베어 넘어뜨릴 수 있다는 듯이.
  나무들은 안다. 나무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두려운 존재는  총이나 칼이 아니라 바로 톱
이라는 것을. 나무들은 몸에 총알이 날아와 박히면 그저 티눈이몇  개 생겼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
게 여긴다. 이따금 나무 껍질을 슬쩍 벗기기도 하는 칼도 마찬가지다. 살갗에 생긴 사소한 생채기
는 세월이 좋은 약이 되어주곤 하는 것이다.
  그러나 톱은 다르다. 처음에는 나무의 표피를 슬쩍 문지르는  척하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나무의 
몸 깊숙이 끈질기게 들어오는 톱날은  잘려지는 나무에게 고통의 최극점이 무엇인가를 억지로 가
르쳐주는 것 같다. 나무를 베는 사람의 톱질이 서툴수록 나무의 고통은 증가한다. 그 고통의 파편
인 톱밥을 뱉어내며 죽음을 눈앞에 둔 나무는 참다 못해  소리를 내지른다. 차라리 죽는지도 모르
게 죽을 수 있도록 벼락이나 맞았으면!
  청년의 손에 들린 톱을 보자, 아침나절에 그가 그의 어머니와 나누었던 말이 떠올랐다.
  “올해는 감나무에 감이 복스럽게도 참 많이 열렸네.”
  “어머니, 그냥 놔뒀다가는 나뭇가지가 무게를 이기지 못할 것 같아요.”
  “그래, 오늘은 야문 나무를 찾아서 가지 끝을 좀 든든하게 받쳐 놓도록 해라.”
  나는 점점 불안해졌다. 내가 알기로 이 집안에는 감나무 가지의  받침대로 쓸 마땅한 나무가 없
었다. 수확을 눈앞에 둔 감나무와  대추나무를 베어낼 일은 만무였다. 게다가 이집 식구들은 평소
에 미루나무인 나를 만만하게 여겼다. 
  “저건 키만 멀쑥하게 컸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나무야.”
  저 과일나무처럼  해마다 탐스러운 열매를 낳아주지도  못하고,느티나무처럼 큰 그늘을, 만들어 
지친 사람을 쉬게 할 수도 없을 뿐더러, 여염집 안방에  으스대고 들어앉을 가구목도 되지 못하는 
나무였다, 나는.
  기껏해야 젓가락이나 성냥개비, 아니면 이쑤시개로 쓰일 수밖에 없는게 미루나무의 운명이었다. 
그런게 운명이라면 나는 언제든지 그것을 달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해왔다.
  저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나무야. 그렇지만 이 한 마디 말을  들을 때마다 내가 얼마나 가슴이 
아프고 쓰렸는지 남들은 모른다. 아무 쓸모 없는 나무는 이 세상에 단 한그루도 없는 것이다.
  청년이 나를 향해 걸어오는 게 보인다.
  나는 눈을 곡 감아쌌다.
  그는 내 몸에다. 톱을 갖다댈 것이다. 처음에는 나의 표피를 슬썩 문지르는 척하다가 시간이 지
날수록 내 몸  깊숙이 톱날이 끈질기게 들어올  것이다.톱날은 잘려지는 나에게 고통의  최극점이 
무엇인가를 억지로 가르쳐주려고 할 것이다. 청년의 톱질이 서툴수록  나의 고통은 증가할 것이다 
그 고통의 파편인 톱밥을 뱉어내며 죽음을 눈앞에 둔 나는 참다 못해 소리를 내지를 것이다.
  “기꺼이 감나무의 받침대가 되겠어?”
  나는 스스로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히 내 입으로 외친  그 소리는 고통의 최극점에 다다른 자의 비명이  아니라,떳떳하고 자랑
스러운 승리자의 환호 같은  거시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옆구리로 꾸역꾸역톱밥을 뱉어내며 나는 
나에게 다짐을 하고 있었다.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나무라는 말을  듣지 않아도 될 시간이 가까워
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진정으로 무엇이 되고 싶었다.  실개천에 놓이는 외나무다리가 된다고 해도, 하다 못해 무
거운 빨랫줄을 받치는 바지랑대가  된다고 해도 어쨌든 나는 무엇이 되기는 되는  것이다. 무엇인
가 된다는 것, 그것은 내가 키만 큰 미루나무로 서 있을 때는 전혀 상상해보지 못한 것이었다. 
  저녁때가 되어 돌아온 청년의 어머니는 깜짝 놀랐다.
  “쯧쯧. 결국 미루나무를 베었구나!”
  그대 나는 마당에 가로누워  있었고, 청년은 휘파람을 불며 낫으로 내 몸뚱아리를  다듬고 있었
다.
  “어쩔거나, 얼마나 아플까, 얼마나....”
  그의 어머니는 뜻모를 말을 연신 중얼거리며 마당에 앉은 채 손으로 새끼를 꼬기 시작했다.
  새끼줄을 서너 발쯤 꼬아서는 새끼의  끝을 내 밑둥치가 잘려나간 그루터기에다 정성스럽게 감
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 끝은 옆에 서 있는 어린 미루나무에다 감아 묶는 것이었다.
  “어머니 지금 뭣 하세요.?”
  청년이 낫을 놓고 물었다.
  “이렇게 다 큰 나무가 밑동을 잘렸으니  얼마나 아프겠니? 이렇게 새끼로 이어주면 살아 있는 
나무든 죽은 나무든 모두 덜 서운해할 거야. 이것들이 서로목숨을 건너가게 해주는 게야.”
  “목숨을요? 어머니도 참, 나무가 뭘 안다구요.”
  청년은 대수롭지 않은 듯 하던 일을 계속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분명히 보고 있었다.
  가는 새끼줄을 타고 죽은 나무와 살아  있는 나무 사이를 은밀히 오가는 미루나무의 푸른 목숨
을. 내가 서 있던 자리, 나의 그루터기에 만들어진 다섯  개의 선명한 나이테가 눈에 들어왔다. 그
것이 내 눈에는 영원히 마르지 않을 맑은 물줄기처럼 보였다.  

    외딴집

  외딴집이 한 채 있습니다.
  사람의 발길이 한번도 닿지  않은 듯한 산기슭에 지은 집입니다. 오랫동안 손을  보지 않아서인
지 지붕이 왼쪽으로 약간 내려앉았습니다.
  두어 시간 동안 반대편 산기슭에서 나는 외딴집을 관찰했습니다.  하지만 외롭고 쓸쓸해 보이는 
외딴집은 내내 혼자였습니다. 주인이 없는  집인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울타리에 빨래가 
널려 있는 것으로 봐서 누군가 살기는 사는 모양입니다.
  날이 어둑어둑해져오고 있습니다. 이른 봄바람이 잡목 숲을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갑니다. 바람이 
찢어진 바지 틈으로도 잊지 않고 스며드는 통에 온몸에 소름이 오돌오돌 돋아납니다.
  라디오 뉴스를 들어보면 나는  포위망을 완전히 벗어난게 분명합니다. 내가 와 있는  곳보다 훨
씬 남쪽에서 그들의 대규모 작전이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안심할 상황은 아닙니
다. 나는 여전히 쫓기는 모인데다가 오른쪽 허벅지에 총알이 박힌 큰 상처가 있습니다. 살을 파내
는 듯한 통증이 다시 시작되고 있습니다. 배고픔도 더이상 참기가 힘듭니다.
  하는 수 업습니다. 나는 어금니를 꽉 물고 외딴집을 향해 걸음을 옮깁니다. 
  외딴집에는 둘 다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 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부엌에서 저녁밥 지
을 준비를 하고 있는 풍경이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사람 냄새입니다.
  “실례합니다.”
  할아버지는 마른 솔잎을 한아름 안고 부엌으로 들어서고 있었고,  할머니는 솥에다 쌀을 안치는 
중이었습니다. 두 노인은 내가 마당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지 못하고 하던 일을 계속합니다.
  “여기서 하룻밤 묵어갈 수 없을까요?”
  내가 좀더 목소리를 높여  말하자 할머니가 나를 돌아다 봅니다. 할아버지는 여전히  아궁이 앞
에 앉아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불을 지필 채비를 하고 있습니다. 나를 본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어깨를 툭 칩니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내가 서 있는 쪽을 가리킵니다.
  사실 쫓기는 몸으로 민간인의 집에 찾아든다는  것은 호랑이 굴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가까운 마을에다 신고라도  하게 되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고 맙니다.  탈출도, 임무
도, 사상도, 인생도 모든게 끝나버리기 때문입니다. 나는 주머니 속에 든 권총을 만져봅니다. 차가
운 총열이 손에 잡힙니다. 여차하면....  여차하면 최후의 수단으로 권총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적
어도 나 혼자만이라도 살아남으려면 말입니다.
  두 노인이 하던 일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내가 서 있는 쪽으로 다가옵니다.  볼썽사납게 찢어진 
옷이며 피가 흐르다 굳은 다리를  찬찬히 살핍니다. 깜짝 놀란 할머니가 얼굴을 찌푸립니다. 나의 
정체를 알아차렸다는 뜻이  아닐까. 그렇지만 그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매우  안쓰러워하는 표정이
라는 것을 나는 희미한  어둠 속에서나마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쏟
아낼 것 같은 얼굴입니다.
  “쯧쯧, 이걸 어쩌나, 어쩌나.”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혀를 차며 나를 방안으로 안내했습니다.
  “영감, 오늘 아침에 까치가 유난스럽게 울어대더니만 손님이 오셨나 보오.”
  하지만 할아버지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습니다. 나는 덜컥 불안해졌습니다. 무슨 꿍꿍이속이 있
어서 노인이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게 틀림없습니다.  마당에서부터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
던 그 눈빛이 심상치 않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  여차하면..... 나는 경계심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오랜만에 먹는 쌀밥인지 모릅니다.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내가 밥그릇을 비우자,  자신
의 밥그릇에서 밥을  덜어내주는 사람은 놀랍게도 할아버지였습니다. 나는 할아버지의  얼굴을 찬
찬히 들여다보았습니다. 할아버지도 눈을 멀뚱거리면서 나를 보았습니다.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이 양반은 말을 하지도, 듣지도 못해서....”
  나는 잠시 동안이라도 할아버지를 의심했다는 것을 후회했습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수?”
  할머니가 예의 그 걱정스러운 말투로 나에게 물었습니다. 
  “사흘 전에 저는 동료 세사람을 잃고 지금은 쫓기는 모입니다.  이 다리의 상처는 그때 총격전
에서 총을 맞은 자리입니다. 이틀 동안 밤낮 없이 산을 탔습니다. 믿으시기 힘들겠지만 상처의 통
증도 잊어버리고 산을 탔습니다. 살아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던 거죠. 만약에 두 분이 저를 신고
하시면....”
  내가 더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던 것은 할아버지가 갑자기 거칠게 손을 내저었기 때문이었습니
다. 그렇다면 말을 하지도, 듣지도 못한다는 노인이 내 말을 알아들었다는 뜻인가? 나는 주머니께
로 손을 가져가려다 말고 할머니의 눈을 따지듯이 바라봅니다.
  “이 양반은 상대방의 입술 모양을 보고, 그리고 눈빛을 보고  어느 정도는 말을 알아들을 수가 
있답니다.”
  “아, 그랬군요.”
  나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여태껏 나는 입으로만 말을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눈빛으로도 
얼마든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을 이 순간 깨우쳤습니다.  눈빛으로 나누는 대화는 입으로 하
는 말보다 더 진실된 마음을 닮고 있겠구나. 두 노인의 눈빛이 그렇지 않은가.
  내가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제가 무섭지 않으세요?”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같은 사람끼리인데 뭘....”
  나는 금세 잠 속으로 곯아떨어졌습니다. 이 첩첩산중에서 두 노인이  나를 신고할 수도 없을 뿐
더러, 설혹 산중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신고를 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노인
들이 베푸는 친절 때문이기도 하지만,  며칠째 누적된 피곤 때문에 나는 눈을 붙이지 않을  수 없
었습니다.
  얼마나 잠을 잤을까. 소변이 마려워 잠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창호지가 훤하게 
밝아오고 있었는데 옆에 나란히  누워 자던 두 노인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본능적으
로 권총을 빼  들고 소리나지 않게 살며시 방문을  열었습니다. 그러자 툇마루 끝에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할아버지가 보입니다.
  노인은 내가 벗어놓은 전투화를  들고 만지작거리고 있습니다. 산을 타고 쫓길 때  헝겊처럼 너
덜너덜해진 신발입니다. 노인은 전투화 밑창을 접착제로 붙인 다음  나뭇가지에 찢어진 부분을 한 
땀 한 땀 바늘로 꿰메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노인은 신기료 장수처럼 능숙하게, 그리고 정성을 다
해 신발을 매만지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내 가슴은 찌르르 감전된 것처럼 메어왔습니다. 노인은 
날이 새면 내가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문득 이 외딴 집에서  노인들하고 오
래오래 살고 싶다는 생각이 스쳐갑니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세수를 마치고 대야에 남은 뜨거운 물을 마당가로 버리려 하자 할아버지가 손을 내저으며 달려
왔습니다. 노인은 입을 꾹 다물고 네댓 번 고개를 아래로 끄덕입니다. 대야를 마당에 그대로 내려
놓으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마당 한쪽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싸리빗자
루가 하나 비스듬히 서 있을 뿐입니다. 다른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 광경을 죽 지켜보던 할머니가 부엌에서 말했습니다.  
  “땅을 자세히 봐야지.”
  나는 쪼그리고 앉아 할아버지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을 자세히  살펴봅니다. 거기에는 굳은 땅
을 뚫고 이름 모를 작은 풀들이 인제 막 푸른 떡잎을 내밀고 있었습니다.
  “풀밖에 없는데요.”
  “바로 고것들 때문이지.”
  “이게 무슨 귀한 약초나 채소라도 된다는 말씀입니까?”
  내 입술을 유심히 바라다보던 할아버지가 고개를 흔들자, 할머니가 대신 말합니다.
  “뜨거운 물을 부으면 고것들이 다 죽거든. 봄날이라고 살아보겠다고 돋아나오는 것들인데... 아
무리 쓸데없는 풀이라지만 목숨 붙은 것들인데...”
  이름 모를 작은 풀에게도 생명이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내가 외딴집을 떠나려 하자, 미루나무 위에서 까치가 깍깍 울기 시작합니다. 내 귀에는 까치 소
리가 생명의 소리로 들립니다.
  
    어른이 되지 않기 위하여

  어린 시절부터 나에게는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꿈이 하나 있었다.
  학교에서 장래 희망을 쪽지에  적어내라고 할 떼에도 나는 그것을 한번도 내비친  적이 없었다. 
내 또래 아이들은 곧잘 대통령이나 과학자나 국가대표 축구선수가 되고 싶다는 허황된 꿈을 제멋
대로 펼쳐 보였는데, 나는 그것을 보며  좀 우습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점심 시간에 젓가락만 하
나 달랑 들고 와서는 남의 도시락을 빼앗아 먹는 아이들은  대체로 대통령이 되고 싶어했고, 안경
을 쓰고 책을 많이 읽던 핼쑥한 아이들은 주로 과학자가 되고 싶어했던  것 같다. 또 국가대표 축
구선수가 되고 싶다던  아이들은 으슥한 학교 변소 뒤에서 돈  따먹기 놀이를 즐기던 녀석들이었
지. 아마?
  “꿈을 위로만 꾸지 말고, 옆이나 아래로도 꿀줄 알아야 해요.”
  어린 나의 마음을 꿰뚫을  것처럼 강렬한 느낌을 주었던 이 말  한 마디를 나는 생생히 기억한
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던가. 아이들이 적어낸  장래 희망을 죽 훑어본 뒤에 담임 선생님이 하신 
말씀인데, 나는 그때 별빛처럼 빛나던 그이의 눈빛도 또렷이 기억한다. 그이는 바스콘셀로스의 ‘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책의  노란 표지를 보여주면서, 위로만 오르려고 하던  애벌레가 상승의 
허망함을 깨닫고 나비가 되어 날개를 달게 되는 과정을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날 이후, 나는 적어도 천박한 꿈의 노예가 되고 싶지 는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위를 향해  꿈을 꾸는게 아니라, 아래로 꾼다는 것을 누구에게  자랑하듯이 떠벌
릴 분위기도 아니었다. 내가 꿈을 아래로 꾼다는 말을 발설하면  나는 그때부터 엉뚱한 아이 취급
을 받을 게 뻔했다. 나는 학교에서나 집에서 이른바 문제아로 낙인 찍히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시험 성적이 학교 전체에서 늘  일등이던 나에게 장래에 판사나 검사가 되라고 어깨를 두
드려준 어른들은 또 얼마나 많았는가.
  어른들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어른들이 가소로워 나는 내 꿈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 어른들이란 
자신이 못다 이룬 것을  굼이라는 이름으로 그럴 듯하게 포장하는 존재, 그리하여  아이들이 살아
갈 시간 속에 그것을 막무가내 우겨넣은 존재이니까. 마치 깨끗하게  비어 있는 뱃속에다 물기 없
는 마른 빵을 집어넣듯이 말이다.
  그런데 어느 사이에 나도 어른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나를 아빠, 라고 부르는 내 딸과아들에게 내가 이루지  못한 꿈을 뒤집어씌우고 싶은 생
각은 추호도 없다.  어른들의 꿈을 대신 뒤집어쓰고  살아가는 아이들만큼 불행한 아이가  없다는 
것을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다.
  말이 나온 김에 우리집의  일곱 살바기 아들의 꿈 이야기를 여기서 잠깐  덧붙여야겠다. 요즈음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의 장래 희망 중에 가장 인기  있는 직종은 ‘119 긴급구조대’라고 한다. 
텔레비젼을 통해 맹활약하는  구조대원의 모습이 아이들의 숨겨진  정의감과 의협심에 불을 댕긴 
결과일 터이다. 유치원 아이들의 재롱을 보여주는 발표회 때 일이다. 다른 아이들이 하나같이 119 
긴급 구조대원이 되겠다고 큰소리로 발표를 하고 제자리로 들어간 뒤에 우리 아들녀석 차례가 되
었다고 한다.
  “저는 우체부 아저씨가 되고 싶어요.”
  겨우 들릴락말락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푹 떨구더라는 것이다.  일순간 시끌시끌
하던 교실 안이 조용해졌는데, 선생님께서 왜 우체부 아저씨가 되고 싶냐고 묻자,
  “편지를 전해주니까요.”
  하고는 그만 으앙,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사내녀석이 배짱이 두둑해야 하는데...”
  아내는 못내 아쉽다는  눈치였지만 나는 아들녀석이 그렇게 대견스러울 수가  없었다.남들의 꿈
을 쫓는게 아니라 자기 식대로 꿈을 꿀 줄 안다는 것, 그것도  꿈을 옆이나 아래로 꾸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아이들이란 어른을 감동시키기 위해 존재하는구나 싶기도 하였다.
  “아빠는 어릴 때 무엇이 되고 싶었어요.?
  이렇게 묻는 아이들에게
  “ 어른이 되고 싶었지.”
  라고 뻔뻔스러울  정도로 건방지게 말하는  어른들을 아이들은 싫어한다. 어른들은  아이들보다 
나이를 더 먹었다는 것 배고는 내세울 게 없는 것이다.
  이제 내 꿈을 털어놓을 때가 되었다.
  내 아들녀석도 웃어버릴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내 꿈은 눈사람이 한번 되어보는 것이다.
  내가 눈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나의 아버지 때문이었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렸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밤새 눈이  어떻게나 퍼부어댔던
지 장독대에 가지런 히  서있는 항아리들의 허리게까지 눈이 차오른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부엌에서 아침밥을 준비하는 동안 아버지는  늘 대문 앞가지 쌓인 눈을 치우고 길을 내
는게 하루 일과의 시작이었다.  얼마나 눈이 많이 쌓였는지 빗자루나 당그래로는 엄두도  내지 못
하고 아버지는 삽으로눈을 퍼냈다. 삽자루를 쥔 아버지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는 것을 
보면서 나는 문득 아버지와 함께 눈사람을 한번 만들어봤으면, 하고 생각했다.
  나는 주먹만한 눈덩이를  한자서 굴리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관심을 가져주기를  은근히 바라면
서, 그때 등뒤에서 아버지가 혀를 끌끌 차면서 뭐라고 중얼거리시는 것이었다. 
  “쓸데없는 짓 하고 있구나.”
  나는 무안해서 얼굴이 벌게졌다.
  ‘내가 아버지라면 이제까지 한번도 만들어보지 못한 큰 눈사람을 함께 만들텐데....’
  나는 눈을 무쳐  대추나무 가지 위로 힘껏 던졌다.  대추나무 가지에 얹혀 있던 눈이  아버지의 
어깨위로 우수수 쏟아져내리자, 아버지가 얼굴을 찌푸렸다.
  “또 쓸데없는 짓을!”
  대체 그때 아버지에게 쓸모 있는 일은 무었이었을까.
  훗날 내가 주위의 권유와 기대를 뿌리치고 법대 대신에 기어이 미대를 지원하겠다고 하자,
  “너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놈이구나.”
  소리를 버럭 지르며 역정을 내시다가 몸져누우신 아버지.
  그날 밤 나는 집을 뛰쳐나왔다. 그리고는 혼자서 생전처음 많은 술을 마셨다.
  카페 창 밖으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어둠 속으로 눈을  맞으며 걸어가는 사람들이 다 눈사람으로  보였다. 빨간코트를 입은 눈사람, 
가죽 점퍼를 입은 눈사람, 뒷굽이 높은 부츠를 신은 눈사람, 고등계 형사처럼 도리우찌를 눌러 쓴 
눈사람, 서로 팔짱을 끼고걷는 눈사람, 고래고래 악을 쓰며  노래를 부른 눈사람, 군고구마를 파는 
눈사람, 좌판에 귤 몇 알 올려놓고  쪼그리고 앉은 눈사람, 버스 창문 밖을 물끄러미 내다보는 눈
사람, 택시를 잡느라고 발을 동동 구르는 눈사람, 담배 심부름을 나왔다가 조를 달려가는 어린 눈
사람, 입술에 립스틱을 빨갛게 칠한 여자 눈사람.....
 나도 눈사람이 되고 싶었다.
  눈사람들이 사는 세상 속으로 나는 비틀거리며 걸어나갔다.
  끼익. 하는 소리와 동시에 갑자기 자동차 불빛이 내 눈을 찔렀다. 대형 트럭이었다.
  “개새끼야, 뒈지고 싶냐?”
  하지만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 그도 한심한 어른에 불과했으니까.
  트럭 운전사의 삿대질을  뒤로 하고 나는 걸었다.  오래오래 눈을 맞으며 눈길을  걸어가다보면 
나도 눈사람이 될것 같았다. 그날 밤  나는 걷고 걷고 또 걸었다. 입으로 차가운 눈송이를 받아먹
으며, 머리에 쌓이는 눈을 털지도 않고  걸었다. 눈사람 한번 같이 만들어주지 않는 이 세상의 무
뚝뚝한 아버지들을 원망하며 거였다. 그러나  걸을 수록 눈발은 자구 희미해지고, 정신은 더욱 또
렷해지는 것이었다. 눈사람이 되기는커녕 나는 점점 어른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눈사람이 되는 꿈을 포기했을 거라고 속단하지는 말아주기 바란다.
  살다보면 눈보라 휘몰아치는 날,  눈을 뒤집어쓰고 끝없이 걸어가는 이들을 만날 때가  있을 것
이다. 그 중에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늙어버린 내가 섞여 있을지 모른다. 눈사람이 될 때까지 나는 
걸어갈 것이다.
  혹시 당신도 눈사람이 되고 싶다면 그 대열에 합류해주기 바란다.

    작가의 말
  
  여기에 묶은 글들은 
  소설과 동화와 에세이와 시의 중간 어디쯤을 
  들락거리고 있는,
  그러나 그 어디에도 소속되기 싫어하는 욕심의 산물입니다.
  혹여나 이 가운데 어떤 글이
  소설과 동화와 에세이와 시의 어느 한쪽에 
  몸을 기대고 있다면
  그 미세한 한복판을 적중시키지 못한 나의 불찰 때문입니다.
  ‘어른을 위한’동화의 요점은 그 상하 좌우가 한복판인데, 
  내가 쏜 화살은 때로
  과녁과 동떨어진 곳에 당도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부끄러움이 잘 썩은 거름이 될 때까지 나는 또 부끄러워해야겠지요.

  그래도 책 제목을 ‘관계’로 정하고 나니 기분이 참 좋습니다.
  너와나 
  인간과인간,
  인간과 자연,
  자연과 기계.....
  이들이 서로서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상상하는 일은 
  무엇보다 즐겁습니다.
   그물코같이 촘촘한 관계 때문에 이 세상은 따뜻하고, 
  그 관계에 대한 탐구가 곧 글쓰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 글쓰기는 결국 
  따뜻함의 편에 서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강철같이 쉽게 뜨거워지는
  사랑의 매혹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천천히,
  오래오래 달군 구들장이 찬 새벽을 견디는 데
  더 훌륭한 법입니다.

  돌아보면 
  지금, 이곳까지 너무 빨리 달려왔습니다.
  이겨울이 지나면 자전거를 한 대 사야겠습니다.
  운전면허증이 필요없는 자전거를 타고 
  비포장도로에서 좀 덜컹거리기도 하고,
  느티나무 그늘에서 한참 동안 식히기도 하겠습니다.
  만약에 자전거를 타고 바다에 간다면
  집으로 돌아올 때는
  푸른 바다를 몇 평이라도 실어오겠습니다.
  그 바닷속에는 아마도
  고래가 한 마리 쌕쌕 숨을 쉬고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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